【대무당파】야설록 ▣ 서문 ― 作家의 辯 파아란……. 만지면 물이 들듯한 파란 잉크 한 병을 이 계절에는 가지고 싶다. 못다 쓴 얘기들, 가슴속에 웅크린 회색(灰色)의 언어(言語)를 파란색으로 채색해 보고 싶다. 이 계절엔 그 파아란 마음의 언어를 읽는다. 이미 낡을 대로 낡았지만 받침 한 구절(句節)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우리의 오랜 옛날의…… 마음이 아니면 읽을 수 없고, 단 한 자도 엮을 수 없는 그런 좋은 얘기……. 마음이 동심(童心)이 되어 이백 칸의 공간을 채우고 나면 아스팔트 위에라도 뛰어나가 웃을 수 있는 여유와 풍요의 글을 반드시 쓰고 싶다. 이 작품은 소림(少林)과 더불어 <武風頓盛 南北爭輝>라 하였던 무당도가(武當道家)를 소재로 잡았다. 무당파(武當派)는 유불선(儒佛仙) 중원삼성도(中原三聖道)의 하나인 선도(仙道)를 수련하는 일종의 도가집합체(道家集合體)이다. 노자(老子)를 그 시조(始祖)로 하는 선도(仙道)란, 신선의 열락을 깨닫기 위해 인간의 정기(精氣)를 고도로 단련하고, 끊임없는 정신의 수련으로 지념(止念), 공심(空心)에 이르는 고행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도가의 도사(道士)들은 무형(無形)이 유형(有形)에 이르고 유(有)가 다시 무(無)가 되는 운기내공에 절통하여 수없이 많은 내가기공을 창안해내었고 그러한 현문내공을 집대성해낸 이가 바로 무당파의 시조요, 소림의 달마와 더불어 무도이성(武道二聖)으로 불리는 장삼풍(張三豊) 진인(眞人)이다. 장삼풍은 거의 전설적인 인물로서 북원(北元)의 황제와 상견례하고 중원열후(中原列侯)의 거처를 허락없이 통관할 수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그가 누리던 지위는 막대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한 장삼풍의 명망(名望)을 쫓아 무당은 세워진 지 백 년(百年)이 채 못 되어 무가제일문(武家第一門)으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고 만천하 무가(武家)의 종주(宗主)요, 소림과 더불어 중원무림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대번성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85년에 냈던 작품을 여러 이유로 붙잡고 있다가 이번에 여러 가지를 다듬어 다시 선을 보이게 되었다. 삼가 강호제현의 건승(健勝)을 빌어본다. 夜 雪 綠 ▣ 서장(序章)―신화(神話) 신비(神秘). 세상에는 참으로 신비롭고 기이한 얘기들이 많다. 하지만 이제부터 얘기하고자 하는 이야기만큼 기이하고 신비로운 얘기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 혹자(或者)는 달마 이전(達摩以前)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요순시대(堯舜時代) 이전이라고도 했다. 그 천 년도 더 거슬러 오른 아득한 옛날에 이 땅의 지배자가 된 뛰어난 영웅이 한 사람 있었다. 만룡무군왕(萬龍武君王). 그는 자그마치 십팔만리(十八萬里)나 되는 광활한 광토(廣土)를 송두리째 다스렸던 일대(一代)의 신인(神人)이었다. 사실, 땅은 그 주인이 없고, 이미 수억의 협성효웅(俠聖梟雄)들이 제각기 땅의 주인임을 자처하다 명멸해 갔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으나 만룡무군왕은 자타가 공인한 대륙의 패자(覇者)였던 것이다. 북(北)으로는 새북(塞北), 북해(北海)에 이르고, 서(西)로는 서장(西藏), 성숙해(星宿海)에 이르는 만파(萬派)의 거성(巨星)들이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신하 되기를 자청했다고 한다. 만룡무군왕. 그에게는 세 가지 무기(武器)가 있었다. 첫번째 무기. 오룡신주(五龍神珠)!각기 취주(翠珠), 묵주(墨珠), 혈주(血珠), 백옥주(白玉珠), 혼원주(混元珠)라 불리는 이 오룡신주는 말 그대로 다섯 개의 비밀병기였다. 취주취검(翠珠翠劍). 묵주묵도(墨珠墨刀). 혈주혈부(血珠血斧). 혼원주혼원기(混元珠混元旗). 백옥주백옥창(白玉珠白玉槍). 환우오병( 宇五兵). 구슬이 병기로 변하는 순간, 그 힘은 천번지복(天飜地覆) 단산절해(斷山絶海)의 신위를 떨친다고 한다. 인간을 어버이로 가진 자는 아무도 그 힘을 막아낼 수 없다고 했다. 만룡무군왕은 그 오룡신주(五龍神珠)로 대륙의 절반을 굴복시켰다. 두 번째 무기. 신역사계(神域四界)! 신성천(神聖天) 천계(天界). 구유곡(九幽谷) 지계(地界). 삼라평(森羅坪) 인계(人界). 단혼애(斷魂崖) 마계(魔界). 네 개의 신비로운 세계. 어디에 있는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 신역사계의 사람들은 오직 만룡무군왕 한 사람에게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한다. 얼굴에 울긋불긋한 귀면탈을 쓰고 나타난 단혼마계(斷魂魔界)의 이십사귀혼(二十四鬼魂)만으로도 만룡무군왕은 대륙의 나머지 반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세 번째 무기. 한우월잔영(寒雨月殘影)! 혹자는 신비로운 기진이학(奇珍異學)을 일컬음이라 했고, 혹자는 또 인세에 드문 광세기보(廣世奇寶)라고도 했다. 만룡무군왕이 지닌 마지막 세 번째 무기. 오룡신주와 신역사계를 모조리 합친 것보다 더 강하고 신비롭다는 이것! 하나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세 번째 무기가 나올 필요도 없이 만룡무군왕은 이미 천하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우월잔영은 영원한 신비로 묻혔다. 그리고 만룡무군왕의 신화(神話)와 더불어 세인들의 입에서 오랫동안 회자(膾炙)되었을 뿐이다. 천하의 패자, 만룡무군왕! 하나 그는 고독했다. 정상에 홀로 우뚝 선 자에게 닥쳐드는 것은 겨울 삭풍보다 더 시린 고독과 허무였다. 고독은 이 외로운 영웅의 천적이었기에, 결국 영웅은 그 고독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져 갔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 나의 만룡무학은 이 시대에서 적수를 만나지 못했구나. 나는 나의 시대에서 치우천인(蚩尤天人)과 고대십삼대무학(古代十三大武學)을 만나기를 고대했으나 결국 그들은 탄생하지 않았다. 어떤 시대, 그 어떤 날에 이르러서야 만룡무학과 치우무학(蚩尤武學)은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일천 성상(星霜)의 아득한 세월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 1. 사나이들 괴사(怪事)! 백년이대괴사(百年二大怪事)! 백 년의 세월동안 풍운무림(風雲武林)에는 가히 미증유(未曾有)의 이대괴사가 벌어졌다. 인간을 죽이는 살상용 무기를 지니도록 허락된 무림의 세계에서 그 숱한 세월동안 어찌 한두 가지의 일만이 벌어졌으랴마는 사실 백년이대괴사라 불리는 이 두 개의 일만큼 크고 엄청난 일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첫번째, 도가혈사(道家血事)! 도(道). 학문적으로는 대륙을 풍미하는 유(儒), 음양(陰陽), 법(法), 명(名), 묵(墨), 종횡(縱橫), 잡(雜), 농(農)과 더불어 구류(九流)의 하나로 꼽히는 도(道)는 유불선(儒佛仙)이라 하여 삼성도(三聖道)로 불리기도 한다. 수양과 고행으로 선인(仙人)의 경지를 지향하는 세외(世外)의 대학(大學)이기도 한 도가(道家). 백 년 전, 그 도가에 때아닌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영락일년(永樂一年). 남부 도가대파(道家大派)의 하나인 공래파( 崍派)의 장문인 침소에서부터 이 끔찍한 일은 비롯되었다. 선풍대구식(旋風大九式)으로 도가 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무림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절공우사(絶空羽士)가 자신의 침소에서 목없는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것을 필두로 하여 수심암심(樹深岩深)의 수양대파 청성파(靑城派)의 대장문(大掌門) 천혜진인(天慧眞人)이 그의 연공실(練功室)에서 처절하게 피살되었고, 남부 동정호(洞庭湖)로 집단고행을 떠났던 공동파( 派)의 도사 백여덟 명이 한꺼번에 호수 수면으로 시체가 되어 둥둥 떠오르게 되니……. 경악! 분노! 홍진(紅塵)이 싫어 세외(世外)로 나간 이들 도인들을 이토록 무참히 척살하는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소림(少林)을 태두(泰斗)로 한 무림맹에선 연일 회의가 소집되었고, 무림오대도가(武林五大道家)로 불리던 무당(武當), (靑城), 공래( 崍), 공동( ), 전진(全進)의 다섯 문파에선 정예고수 일천을 모아 도가추적대를 결성하여 무림에 급파해 그 흉수를 찾고자 했다. 하나 흉수는 거의 완벽했다. 그는 운중신룡(雲中神龍)인 양, 비단 티끌만한 흔적도 내비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을 추적하는 도가의 고수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동서를 종횡하며 계속 도인들을 죽여 나갔다. 최초의 절공우사 이래, 삼 년 동안 이 엽기적 살인마의 손에 죽어간 도인의 수는 무려 일천. 뿐인가? 그해 겨울에는 흉수를 추적하던 도가추적대가 오히려 역습을 당해 다시 일천의 목숨을 눈덮인 설원에 흩뿌렸다. 도마(道魔). 누군가 그 흉수를 도마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신경(神境)에 이른 무예로 휘하문인 삼만을 헤아리던 오대도가의 정예들을 거의 몰살시키다시피 했고 급기야는 무당을 제외한 청성, 공동, 공래, 전진의 사대도가를 무림에서 영원히 제명시켜 버렸다. 소림과 더불어 무림양대산맥으로 그 명성을 떨치던 대무당파도 그 이후 세력이 격감, 유능한 인재는 문파를 떠나고 남아 있던 인재는 화병으로 죽거나 스스로 자결하게 되니……. 그 어마어마했던 도가혈사 이후 무림에선 도가의 위풍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무림맹이 소집하는 무림회의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영화롭던 도가의 건물들은 이끼와 잡초로 뒤덮여 갔다. 도가에 입문(入門)하려는 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도가혈사. 아무도 그 수수께끼의 비밀을 풀어내지 못했고, 또 알고자 하는 사람도 없는 채 백 년의 세월은 그렇게 지나갔다. 두 번째, 영웅패사(英雄覇事)! 오십 년 전, 기련산(祁連山) 장천봉정(長天峯頂)에는 거대한 석비(石碑) 하나가 우뚝 세워졌다. 일천오백여 사파(邪派)의 서명이 있는, 핏빛으로 얼룩진 검은 흑옥(黑玉)의 패. 일명, 만사패(萬邪牌). ―잊지 않으리라. 이 사무치는 혈한(血恨)을! 진천우도(震天雨道)여……. 오십 년의 세월을 기다려라! 우리의 후예가 반드시 잃어버린 사파의 영광을 재현하리라! 패의 주위에는 일천열한 개의 석상(石像)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것들은 제각기 울고 찡그리고 분노하고 탄식하는 백팔번뇌의 표정으로 서 있다고 한다. 천하의 사파는 그 패 하나만을 남기고 이 땅에서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한 사람! 단 한 사람 때문에! 벽력뇌군(霹靂雷君) 진천우도(震天雨道). 그가 처음 무림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웃었다. 그의 반 토막난 취검(翠劍)과 병약한 몰골을 비웃었다. 하나 그 웃음은 이내 놀람으로, 또 놀람은 믿을 수 없는 경악으로 변해야만 했다. 벽력뇌군 진천우도는 무림에 등장하자마자 가히 경천동지의 패업(覇業)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단신필마(單身匹馬)로 그 당시 무림을 횡행하던 사마(邪魔)의 무리들을 깨끗이 쓸어버렸다. 흑마궁(黑魔宮), 혈혈마성(血血魔城), 신도사해맹(神刀四海盟), 마마교(魔魔敎) 등 무림을 날뛰던 육방칠회사맹일채(六 七會四盟一寨)가 그의 정검(正劍) 아래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다. 뿐인가? 또한 그는 말을 남북으로 짓쳐 당시 중원을 은근히 엿보고 있던 새외의 이파(異派)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천축(天竺)의 마라혈궁(魔羅血宮), 북해(北海)의 설교(雪敎), 성숙해(星宿海)의 탑륵대성(塔勒大城) 등의 새외 거효마파들로 하여금 스스로 중원불침(中原不侵)의 약서(約書)를 쓰도록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기다가 진천우도가 바로 천 년 전, 신화의 영웅 만룡무군왕의 후예임이 밝혀졌을 때는 사람들은 아예 입에 거품을 물고 실신해 버렸다. 그렇다! 전설의 만룡무학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토록 가공한 패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 천 년의 세월을 이은 두 번째 신화의 탄생! 진천우도! 그는 만룡무군왕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무학과 명망은 가히 하늘에 높이 떠 있는 태양과 견줄 만큼 높았다. 무림인들은 그를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보았으며, 무림과는 관계없는 시정(市井)의 서민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진천우도의 거처를 대봉황천(大鳳凰天)이라 이름짓고 그곳을 일대 금역(禁域)으로 여겼다. 대봉황천의 진천우도. 그는 영원히 허물 수 없는 거인(巨人)이었다. 아무도 이 이름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신인(神人)이었으며, 무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수(高手)였기 때문이다. 영웅패사. 정도(正道)로부턴 신망(信望)을, 사도(邪道)로부턴 굴복을 받아내어 무림의 역사상 두 번째로 이 땅의 주인이라 일컬음받게 된 자. 이 일대거인의 협의, 슬기, 무예를 일컬어 사람들은 백 년 내의 두 번째 괴사라 하였다. 덕분에 무림천하는 오랫동안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무림사(武林史)에 일찍이 없던 현상이었다. 하나 시기와 음모와 피비린내나는 투쟁으로 날이 새고 저무는 험악한 무림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평화가 사실 오래갈 수 없음을 내심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최초의 징조는 남부 괄창산(括蒼山)의 너른 벌판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 * * 징징! 삐이익―삐익! 꽹과리소리, 징소리, 그리고 귓청을 찢는 듯한 호각소리. 제각기의 소리는 정신없이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너른 들판. 일망무제(一望無際)라 해도 좋고, 광활무공(廣闊無空)이라 해도 좋다. 저 멀리 괄창(括蒼), 천태(天台), 안탕(雁蕩)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봉들이 병풍처럼 초원의 끝에 서 있고, 그 위로는 건드리면 금방 푸른 물이라도 묻어날 듯한 짙푸른 하늘이었다. 그 가을의 들판 사이로 여기저기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약 일이백 명쯤 될까? 손에 손에 몽둥이와 꽹과리를 든 채 거대한 타원형을 형성하며 그들은 천천히 벌판을 압축해 오고 있었다. 손에는 사슴가죽장갑을 끼고 허리에는 살촉을 꿰어찬 그들은 일견해 보기에도 사냥을 돕는 몰이꾼의 행색이었다. 몰이꾼들이 무려 이백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사냥터에 나온 자들은 황제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세력을 지닌 배부른 위인들인 듯했다. 초원의 이쪽 끝에 있는 한 개의 야트막한 둔덕 위로 두 사람이 말을 탄 채, 몰이가 진행중인 사냥터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좌측의 위인은 사십대의 장년인이었다. 그는 검은 흑의무복(黑衣武服)에 같은 색의 비단 피풍(被風)을 쓰고 있었으며, 교룡가죽으로 만든 듯한 번들거리는 장갑을 낀 우수로 당차 보이는 한 자루의 탄궁(彈弓)을 들고 있었다. 그에겐 마치 부처의 후광처럼 빛나는 일종의 위엄이 뿜어지고 있었다. 늘 명령만 하고 살아온 자 특유의 오만도 엿보였다. 그가 탄 말이 먹물처럼 검은 오추마(烏 馬)인데 비해 우측의 말은 붉디붉은 혈홍마(血紅馬)였다. 우측의 사람은 승인(僧人)이었다. 노란 승포에 붉은 선삼(禪衫)을 걸친 노승(老僧). 흑황교(黑黃敎) 계열의 라마승(喇 僧)인 듯했다. 우뚝한 코와 장대한 신형은 그를 마치 하나의 산(山)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는 거의 눈을 감고 있다시피 했다. 하나 이따금씩 주름진 눈꺼풀이 열릴 때마다 그 사이로 소름끼칠 만큼 섬뜩한 안광이 스며나오곤 했다. 한눈에도 고귀한 기품이 역력한 이들의 뒤로는 열두 명의 현의무복 고수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와와……." 삐익―삑! 징―지잉― 그때 돌연 허리까지 덮일 듯한 무성한 풀숲 속에서 느닷없이 한 마리의 멧돼지가 불쑥 튀어나왔다. 멧돼지는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맹렬히 땅을 박차며 장년인 일행을 향해 짓쳐들기 시작했다. 우두두― 푸르르― 흑포장년인은 말없이 수중의 탄궁을 치켜들었다. 시위가 팽팽히 당겨지고 그의 우측 뺨 근육이 가볍게 경련한다 싶은 순간, 타앙! 빛줄기인가? 츠츠츳― 공작깃털이 달린 화살은 정확하게 달려오는 멧돼지의 앞이마를 꿰뚫었다. 꾸에엑! 멧돼지의 몸이 펄쩍 튀어 올랐다. 파아란 하늘에 꽃잎처럼 흩뿌려지는 붉은 선혈! 핏물을 투과해 오는 햇살은 무지개빛이었다. 문득 장년인의 얄팍한 입술 사이로 한소리 중얼거림 같은 말이 새어나왔다. "우리는…… 그를 살려야 하오." 무슨 뜻일까? 노라마승의 백미(白眉)가 꿈틀했다. 장년인은 침중한 어조로 말을 흘려냈다. "둘째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뿐이기 때문이오." 노라마승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둘째 이황야(李皇爺)께서 나리께 반역(反逆)의 기(旗)를 쳐든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뜻밖의 일……." "둘째는 거인(巨人)이오. 그는 어려서부터 우리 네 형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존재였소." "대봉황(大鳳凰)의 십팔절기예(十八絶技藝)는 물론 금기서화(琴棋書畵) 및 기문방학(奇門傍學)에도 모조리 달통했다고 들었소만……." 장년인은 침중한 탄식을 터뜨렸다. "부친께서 천하의 사마(邪魔)를 모조리 멸하시어 그들을 새외로 몰아낸 지 어언 삼십 년…… 솔직히 둘째의 성취는 우리 세 명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나오. 또한 가친께서도 그를 가장 총애하셨소." 노라마승의 두 눈에 예리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런 그가 왜……?" "아무도 이유를 모르오. 하나 분명한 것은 둘째는 이미 대봉황을 뛰쳐나가 가친에게 정면으로 반기(反旗)를 들었으며, 그런 그를 제압할 사람은 가친을 제외하고는 오직 위지중걸(慰遲中傑), 그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오." 커흥! 크르르― 이번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사냥터로부터 날듯 뛰쳐나왔다. 흑포장년인과 노라마승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손을 쳐들었다. 퍽! 좌측 호랑이의 목에 사발만한 구멍이 뚫리며 핏물이 뒤쪽으로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황교(黃敎)의 전설적인 무예, 서천불수인(西天佛手印)이었다. 팍! 우측 호랑이의 몸은 공중에 뜬 자세 그대로 반으로 쫙 갈라져 나갔다. 슈욱! 육안으로는 거의 분간할 수도 없는 붉은빛 한 줄기가 빨리듯 흑포장년인의 소맷자락 안으로 스며들었다. 노라마승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월신아(一月神牙)는 대봉황 암기십절(暗器十絶)의 하나…… 과연 훌륭하도다. 아미타불……." 나직한 불호를 외우고 난 노라마승은 다음말을 이었다. "하나 위지중걸은 나리에 대한 불경죄(不敬罪)로 지하 십 리의 지옥뢰(地獄牢)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死刑囚)가 아니오이까?" 장년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욱 그를 살리자는 것이오." "나리를 뒷받침했던 대봉황 제이의 고수…… 그의 한 자루 도(刀)는 하늘의 벽뢰를 벤다 하였으니…… 그런 그를 다시 풀어놓는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일 텐데……." "그는 정대(正大)한 사내요. 비록 감옥에 갇혀 있기는 하나 그는 아직도 가친을 존경하고 있소." 흑포장년인의 건조한 시선이 고요한 하늘을 우러렀다. "설사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 해도 이미 어쩔 수 없소. 상처입은 두 마리 호랑이를 같이 놔둘 순 없는 것이오." "죽음을 기다리는 호랑이로 하여금 도망간 호랑이를 쫓게 한다?" "그것이 최선책이오. 설사 내가 가친이라 해도 이 방법을 택했을 것이오." * * * 어둠, 자욱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 한 사내가 웅크리고 있었다. 당당한 체구요, 건장한 몸이었다. 앉아 있을 뿐인데도 그는 마치 산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사면은 벽. 아득한 높이의 창살로 흐린 구월의 햇살이 스며든다. 그때 돌연, 둔중한 금속의 마찰음과 함께 소름끼치는 철문의 개음(開音)이 주위의 정적을 찢었다. 철컹! 삐이걱― 역광을 안고 한 그림자가 성큼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일신에 붉은 무복(武服)을 걸친 무사였다. 홍의무사는 극히 공손한 태도로 철문 안의 장대한 사내를 향해 허리를 굽혀 보였다. "나오십시오." 사내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아니, 그저 밝음을 향해 무심히 돌려졌다는 표현이 옳을까? 비로소 희미한 빛 아래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이는 사십 세 가량으로 보였으며, 송충이처럼 굵은 눈썹과 흑백이 뚜렷한 한 쌍의 호안(虎眼), 시커먼 구레나룻, 그리고 굳게 다물린 입술 등이 그의 완강한 고집을 능히 짐작케 했다. 사내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오라는 데 대한 질문도 거부도 없이 그는 몸을 일으켰고, 철문조차 왜소해 보이는 그 거대한 신형을 밖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연무장(練武場)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무예를 연마하는 고수들과 제각기의 일들로 분주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걷거나 몸을 움직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흰 대리석을 깐 연무장 위로 한 사내의 모습이 나타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동작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그리고 일제히 멈추어졌다. 사내는 건장한 체구를 매우 천천히, 느릿하게 옮겨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모습은 일시에 수만 평의 연무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사내를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떠오르고 있는 것은 극경(極敬)의 념(念). 사내는 오연히 햇살 속을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의 몸은 이내 고루거각의 숲 사이로 파묻혀 갔다. 한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옆 사람을 향해 물었다. "누군가?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군가?" 질문을 받은 사람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실소를 흘렸다. "쯧쯧…… 아무리 늦게 입문했다고는 하나 저 영웅을 모른단 말인가? 그는 과거 이곳 대봉황천의 십만교두(十萬敎頭)이자 천하제이인자라고 불리던 대고수일세. 염왕시상면(閻王是相面) 마도불시상면(魔刀不是相面)도 모른단 말인가?" "염왕시상면…… 마도불시상면? 맙소사! 설마하니 무적마도(無敵魔刀) 위지중걸?" 벽력뇌군 진천우도의 네 아들은 각기 다른 성을 쓴다. 그들은 모두 동부이모(同父異母)의 이복형제들로서 진천도우는 괴이하게도 이들에게 각기 모친의 성을 따르도록 하였다. 첫째 남강(南江)이 도씨(屠氏)요, 둘째 천상(天上)이 화씨(華氏)이다. 셋째 헌위(軒葦)가 용씨(龍氏)요, 넷째 경경(瓊瓊)이 위씨(韋氏)였다. 도남강(屠南江)은 창을 향해 뒷짐을 진 채 우뚝 서 있었다. 위지중걸(慰遲中傑)이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도 그는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위지중걸은 그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방 중앙에 놓인 탁자로 천천히 걸어가 털썩 주저앉으며 한 잔의 차를 따라 입술로 가져갔다. 차(茶). 참으로 오랜만에 마시는 것이다. 영원히 마실 수 없을지도 몰랐던 그것을 그는 매우 아끼며 천천히 마셨다. 문득 등진 자세 그대로 흑포장년인 도남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군요. 대교두(大敎頭)!" 위지중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남강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 땅을 지배하는 거인(巨人)의 첫째 아들이며, 천하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십만이나 모여 있는 대봉황천의 제이인자(第二人者)이기도 한 그는 색깔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둘째 천상(天上)이 성을 나갔소. 그는 아버님을 배신했소." 위지중걸의 손에 들린 찻잔에 미미한 떨림이 일었다. 하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은 아직 극비에 붙여져 있소. 둘째의 행동을 이해하실 수 있겠소?" 위지중걸은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이 무림에 알려진다는 것은 신성화되어 있는 아버님의 명예에 흙칠을 하는 것이오. 그래서 우리는 위지대교두에게 기대를 걸고 있소." 위지중걸은 호안에 가벼운 의아함을 안고 도남강을 향했다. 도남강의 우수가 느릿하게 한쪽을 향해 쳐들렸다. 순간 우측 방벽이 밀려 올라가더니 두 가지 물건이 자단(紫壇) 위에 놓여져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그긍― 첫번째 물건, 형틀. 죄수들이 유배갈 때 목에 차고 가는 목형틀. 두 번째 물건, 도(刀). 전신에 황금빛이 도는 영롱한 교룡금수(蛟龍錦繡)의 신도(神刀). 도는 바로 위지중걸의 애도(愛刀)였다. 그리고 육각형의 창문 틈으로 다시 하나의 섬세한 인영이 쏘아져 들어왔다. 이쪽에서는 볼 수 있지만 저쪽에선 이쪽을 볼 수 없는 구조. 창 저쪽에서 서성이고 있는 교영(嬌影)은 한 명의 소녀였다. 나이는 십오륙 세 정도. 반달처럼 흰 아미(蛾眉)에 주사빛 입술이 새하얀 옥부(玉膚)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미소녀. 위지중걸의 두 눈에 가벼운 흔들림이 일었다. 그의 미간 사이로 한줄기 고뇌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도남강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다시 원래의 위치로 벽을 환원시켰다. "따님은…… 그 동안 우리가 정중히 모시고 있었소." "……." "지금 대교두의 앞에는 형틀과 보도 두 가지 물건이 놓여 있소. 그 어떤 것을 택하든 그것은 대교두의 자유이오. 다만 보도를 택하시게 된다면 대교두의 죄는 모두 사면되오. 총명한 따님과 다시 행복한 삶을 이어가실 수도 있게 될 것이오." 위지중걸의 얼굴에 한줄기 씁쓸한 고소(苦笑)가 스쳐 지났다. "내게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순간 도남강의 눈에 차가운 한광이 피어올랐다. 그의 얄팍한 입술이 완강한 어조로 음성을 토해냈다. "둘째의 목을 이리로 갖다 주시오." "크큭……." 위지중걸은 툴툴 낙엽처럼 황량한 웃음을 흘려냈다. 순간, 자단 위에 놓여져 있던 금도(金刀)가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그의 손 안으로 스르르 빨려드는 것이 아닌가? 챙! 맑은 금속성과 함께 투명한 도신(刀身)이 자청(紫靑)의 광채를 흩뿌려냈다. 도신의 감촉. 좋았다. 위지중걸은 문득 한줄기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전신혈도를 치달려 가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홀린 듯 도신을 바라보던 그의 입이 이윽고 침중한 어조를 토해냈다. "하겠네." 도남강의 얼굴에 씩 웃음이 번졌다. 그는 위지중걸을 향해 깊게 포권의 예를 취해 보였다. "십만 봉황문인을 대신하여 먼저 감사드리오." "그러나……." 그가 예의를 올려오건 말건 위지중걸은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는 내 삶을 위해서도…… 나의 딸을 위해서도 아니네. 다만 주군(主君)의 명예를 지켜드리려는 마지막 충성으로 알게!" * * * 휘이잉― 휘잉― 산봉(山峯)을 뒤흔드는 바람은 놀랍도록 거세었다. 중양절(重陽節)의 달이 그 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산정의 한 그루 고송 아래 비단 차일(遮日) 하나가 쳐져 있고, 그 아래 한 명의 귀공자가 홀로 정좌해 있었다. 그가 정좌한 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장기판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장기의 수를 연구하고 있었다. 몰아지경이라고 할까? 장기의 수를 연구하는 것 외엔 그 어떤 것도 그의 관심을 끌 수 없다는 듯한 태도. 일견하기에도 귀티가 물씬 풍기는 그 귀공자로부터 십여 장쯤 떨어진 바위 위엔 다시 한 사람의 무사가 우뚝 서 있었다. 냉막했다. 만년빙굴에서 살다 튀어나온 듯한 냉염한 얼굴을 지닌 무사는 산 아래를 꼿꼿이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런 그의 품에는 이제 돌이나 갓 지났을까 싶은 아기 하나가 안겨 있었다. 노란 솜옷에 감싸여 곤히 잠든 아기. 혈관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아기의 피부 위로 달빛이 소리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신비스럽도록 아름답고 귀여운 아기였다. 냉면무사는 행여나 아기가 깰세라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품안의 아기를 부드러운 눈길로 슬쩍 내려다본 후 다시 산정의 귀공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 속으로 문득 한줄기 초조한 빛이 언뜻 스쳐 지났다. '한 달 전부터 우리 일행은 누군가에 의해 소리없이 죽어가고 있다. 화살…… 무려 이백여 장을 나는 화살…… 주군을 모시던 무장 십오 명이 그 화살에 꿰뚫렸고…… 바로 오늘 낮엔 주모(主母)마저 그 공포의 화살을 맞고 돌아가셨다.' 휘이잉― 삭풍(朔風)이 스쳐가자 볼이 얼얼했다. 냉면무사는 한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주군…… 다 죽고 이제는 당신과 저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지만 사실 당신과 저는 지금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토록 멀리 화살을 쏠 수 있고…… 이토록 완벽하게 우리를 조여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몸으로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벌써 우리의 옆에 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데 지금…… 그토록 사랑하시던 주모를 잃고도 다만 장기의 수를 풀고 계신단 말입니까…….' 그때 돌연, 귀청을 찢는 파공음이 심산의 유적(幽寂)을 가른다 싶더니 느닷없이 한 자루의 강전(剛箭)이 귀풍스런 귀공자가 보고 있는 장기판 앞에 꽂혔다. 슈웅! 퍽! 화살의 길이는 아무리 못 잡아도 다섯 자. 전미(箭尾)에 달린 공작의 깃털이 달빛 아래 차라리 요사스럽다. 귀공자는 막 한마(漢馬)를 들고 옮기던 참이었다. 화살이 꽂히는 순간, 잠시 멈칫했던 그의 손은 이내 물처럼 고요하게 행마(行馬)를 끝냈다. 연후, 그의 시선이 흘낏 건너편 산봉을 향했다. 있다! 어두운 밤구름을 발 아래 두고 한 자루 거대한 탄궁을 움켜잡은 채 소나기 같은 달빛 속에 우뚝 선 백의거한(白衣巨漢)이……. 딛고 선 산(山)보다 더욱 커 보이는 거풍(巨風)을 지닌 사내였다. "왔군……." 한소리 중얼거림과 더불어 귀공자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냉혼(冷魂)! 용아(龍兒)를 이리 데리고 오라." 냉혼이라 불린 냉면무사는 황급히 달려가 품속의 아기를 건네주었다. 사내는 한줄기 연민이 깃든 눈으로 아기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품속으로 깊이 끌어안았다. "불쌍한 놈……." 아기의 가냘픈 심장고동이 그의 가슴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내는 말없이 옷섶 한 자락을 길게 찢어내더니 좌수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빠르게 무어라고 써갈겼다. <一爲武林替死 무림을 위해 죽노라!> "아비는 이제까지 사랑해 오던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무림에서 태어난 목숨이 무림을 위해 바쳐지는 것이 뭐 그리 아쉬우랴마는…… 네 가냘픈 어깨에 지워질 무거운 삶이 나의 가슴을 찢는구나." 아기는 백포자락을 앙증맞은 손에 꽉 쥐고 잠들어 있었다. 잠든 얼굴이 마냥 평온하다. 사내는 그런 아기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한 줄기 언뜻 비치다 만 것은 영웅의 눈물인가? 그는 이윽고 아기를 다시 냉혼에게 넘겨주고는 건너편 산의 백의거한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던졌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은 이미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고, 떠오른다 싶자 무릎 관절 하나 굽힘없이 앞으로 쭈욱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부풍어영(浮風御影)과 대능공허보(大凌空虛步)! 순간 건너편 산정에 우뚝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백의거한의 검미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아무 탄력 없이 공중에 떠서, 그것도 백여 장을 무반동으로 날아온단 말인가?' 평생 모시고 있던 주군 진천우도 외에 처음으로 마주쳐 보는 대고수였다. "나의 화살에 그대의 아내가 맞은 것도 뜻밖이었지만…… 아내를 잃은 고통을 장기의 수로 달랠 수 있는 그 침착한 풍도는 더욱 뜻밖이다. 주군의 아들된 자로서 부친을 거역하여 나를 놀라게 하더니…… 또다시 그 무예로 나를 놀라게 하는가?" 휘이잉―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사내, 화천상(華天上)은 백의거한의 십 장 밖에서 유삼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얽힌 시선 사이로 달빛이 은조각처럼 반짝인다. 한쪽은 주군의 명예를 위해 녹슨 애도를 움켜잡은 일대의 고수요, 다른 한쪽은 무엇인가 깊은 사연을 끌어안고 반부(反父)의 대역(大逆)을 저지른 젊은 영웅.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고 무슨 행동이 더 있으랴! 일진의 한풍이 얽힌 두 사람의 시선 사이로 무심히 날아든다 싶은 순간, 두 사람의 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맹렬히 부딪쳐 갔다. "하앗!" "타앗!" * * * 인간 세상에는 싸움이란 것이 수없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무림(武林)이란 특수상황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단 두 개의 논리(論理)가 지배하는 비정하고 잔혹한 무림. 그렇기에 지금도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달빛 아래서 시작된 이 고독하고 외로운 승부는, 그러나 지금까지 이 땅에 있어 왔던 그 어떤 싸움이나 대결보다도 더 험악하고 치열했다. 쿠쾅! 콰앙― 쌍방간에 펼쳐진 초식의 수는 이미 만여 초(招)! 하루인 양 흘러가 버린 칠주야(七晝夜)! 뿐인가?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막대한 경력으로 인하여 그들이 딛고 선 산정은 거의 반이나 균열이 가 있었고, 그 아득한 나락 사이로는 시뻘건 용암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피와 땀과 용암의 대혈투! 꽈꽝!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한차례의 접장(接掌) 이후, 두 사람의 몸은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그들의 몰골은 이미 거의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위지중걸(慰遲中傑)이 걸치고 있던 백의장포는 갈기갈기 찢어진 데다가, 헝클어진 머리는 퍼붓는 빗물 때문에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찢어진 장포 사이로는 꿈틀대는 듯한 혈선(血線), 혈흔(血痕)이 수도 없이 그어져 있었고, 그곳에선 잠시도 쉬지 않고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온전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얼굴에 박힌 두 눈뿐이었다. 이 싸움에서 이기고 말겠다는 처절한 집념이 서린 그의 두 눈은 신선한 열기(熱氣)와 별빛처럼 해맑은 광채를 줄기줄기 내뿜고 있었다. 위지중걸은 흙탕물과 피, 그리고 땀으로 범벅이 된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화천상의 몰골 또한 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장포는 갈가리 찢겨져 걸레 조각처럼 이리저리 나부꼈고, 온몸은 그대로 핏빛 일색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동작 역시 몹시 힘들어 보였다. 또한 그의 두 눈은 처절한 승부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피가 터져나오도록 입술을 짓깨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가누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좋은 공력이오." 위지중걸의 창백한 얼굴에도 흐릿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대도……." 기이한 일이었다. 이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더할 수 없이 친밀하고 따뜻했다. 필사의 일장을 맞대고 난 후 서로에게 느끼게 된 짙은 호감. 정과 사, 또는 모든 은원과 미움을 초월하여 진정한 적수로서 서로를 아끼게 된 것일까? "왜……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슈파팟! 파악! 제일만구백오십초째, 한 줄기 현란한 백색기류와 더불어 화천상의 입에선 승부에 목숨을 건 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꽈르릉―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장! 위지중걸은 한 줄기 괴이한 역도를 쳐내어 화천상의 장력을 엉뚱한 곳으로 흐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이어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빙글 맴도는가 싶더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화천상의 옆으로 다가와선 백팔십금강수(百八十金剛手)를 한꺼번에 쳐냈다. 쐐액―쌕! 파파팟! 순간 백팔십 개의 담청빛 장영이 화천상의 요혈(要穴)을 노리고 사나운 속도로 휘몰아쳐 들었다. 화천상은 그의 말이 뜻밖이라는 듯 몸을 둥실 허공으로 한 자 정도 떠올리며 보결(步訣)을 짚어갔다. "부친의 일을 알고 계시단 말씀이오?" 유령이 흐느적거리듯, 바람이 허공에 일렁이듯, 무게없는 한 점 먼지처럼 소나기 같은 장영 속을 팔랑팔랑 누비는 신형. "나리께선 패도지학(覇道之學)을 연마하고 계시다. 인세에 없는 가공할 패학이자 금지된 금단(禁斷)의 마공(魔功)…… 만약 그 수위가 구성(九成)에 이르면 마인(魔人)이 되고 마는 절대마공(絶代魔功)이다." "당신은 그것을 아는구려." "나리께선 당신의 굳건한 의지력으로 그 무공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계신다. 다만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나리께서 왜 그런 무예를 배우겠다고 결심하셨는가 하는 것……." 말과 함께 위지중걸의 손은 박룡십절해(縛龍十絶解)의 금나수법(擒拿手法)으로 바뀌었다. 화천상은 허공에서 황망히 몸을 돌려 그의 천외래운식(天外來雲式)을 피한 후 한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 안의 이유는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여 다 헤아릴 수가 없으나…… 당신은 만약 부친이 그 일에 실패하셨을 경우를 상상해 보았소?" "……." "부친은 대마인(大魔人)이 될 것이고 세상은 대혼란에 빠질 것이오. 거기다가 신비에 가려진 부친의 휘하세력, 아니 만룡의 숨겨진 세력 신역사계(神域四界)가 그 마성(魔性)에 합류한다면 무림은 그로써 끝장이오." 순간 위지중걸의 쇄비장공(碎碑掌功)이 화천상의 가슴 앞 삼대사혈(三大死穴)을 노렸다. 쐐액! 화천상은 황급히 그 장력을 한 자 정도의 간격을 두고 피해냈다. 그런데도 장력이 스쳐 지나간 부분으로부터 은은한 통증이 전달되어 왔다. 위지중걸은 그 장력만큼이나 무거운 음성을 토해냈다. "그러나 나의 주군이시다. 신하된 자는 제왕지도(帝王之道)를 논할 수 없다. 주군의 명은 곧 법(法)이 아닌가?" 꽈꽝! 또 한차례의 접장으로 하여 일어난 해일 같은 먼지와 함께 두 사람은 주춤 물러났다. 시선과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위지중걸, 그는 강직한 영웅이었다. 화천상은 탄식을 터뜨렸다. "나는 부친이 그 무공을 익히기 시작할 때부터 그 대비책을 연구해 왔소. 그리고 드디어 만룡무학, 즉 내 가문의 천적을 알아낼 수 있었소." 위지중걸은 문득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흥미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화천상은 말없이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은 냉면무사 냉혼에게 안겨져 있는 자신의 아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냉혼은 화천상의 손끝이 이르자 자고 있는 아이의 앞 옷섶을 묵묵히 벌려 보였다. 순간 태산이 무너져도 끄떡없을 것처럼 보이던 위지중걸의 몸이 부르르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보라! 달빛 아래 드러난 아기의 투명한 옥부(玉膚)와 그 가슴 한복판에 은은히 드러난 핏빛 용(龍), 혈룡(血龍)의 그림자를! "혈룡지문신(血龍支紋身)…… 치우적후인(蚩尤的後人)……." 그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치우천인(蚩尤天人)?" 치우천인! 혈룡의 문신이 있는 곳에 치우의 후인이 나타난다는 십자전설(十字傳說)의 치우천인. "전설의 치우무학(蚩尤武學)…… 그렇소. 저 아이는 내 아들이기 전에 천 년 전의 만룡대사조(萬龍大師祖)가 말씀하셨던 치우천인이오이다. 또한 저 아이가 바로 부친의 마공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요, 천적(天敵)인 것이오." 위지중걸은 침묵을 지켰다. 강철같이 굳강한 그의 가슴도 지금만큼은 마구 흐트러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하늘이 사람을 시험하는가, 아니면 운명이 인간을 희롱하는가! 만룡의 가문에서 어찌 천적인 치우의 후예가 탄생했단 말인가? 화천상은 명월교교한 창공을 한차례 우러러보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후후…… 내 아내는 늘 우리가 촌부(村夫)였으면 했소. 무림의 일과는 아무 상관 없이 살기를 원했던 것이오. 그녀는 늘 우리의 행복이 왜 무림의 대세로 인해 깨져야 하는가를 섭섭해 했소. 하나 나는 아녀자의 좁은 소견이라 여겼소." "……." "나는 아내가 당신의 화살에 죽은 뒤 오랫동안 장기의 수를 연구했지요. 그제서야 나는 아내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소. 인간의 행복이 결코 명예와 권력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장기를 두며 그때서야 나는 왜 그녀에게 그 동안 다정한 말 한마디 못해 주었는가를 후회하였소." 위지중걸은 말없이 건너편 산봉 위, 냉혼에게 안겨져 있는 아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쇠처럼 완고한 그의 얼굴로 바로 발 아래 균열에서 이글거리는 용암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화천상은 돌연, 수중의 검을 천천히 들어 한쪽의 석벽을 향해 맹렬히 내던졌다. 깡! 검은 섬뜩한 불똥을 튕기며 자루까지 석벽 속으로 박혀들었다. "대교두, 저 검자루 안에는 이 모든 일의 전후 원인이 기록되어 있소. 당신이 오고 있음을 알고…… 오직 당신만이 읽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어 쓴 글이오." 위지중걸은 무심히 화천상쪽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한소리 놀람에 찬 외침을 터뜨려냈다. "그대……!" 화천상, 그의 몸은 이미 용암 속으로 반이나 가라앉고 있었다. 치지직― 극열(極熱)에 살과 의복이 타고 매캐한 몽연이 피어오르는 데도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어쨌든 부친을 거역한 천역(天逆)의 죄인…… 살아도 마음이 편치 않으니…… 대교두, 당신은 내 목을 가져감으로써 임무를 완성한 것이 되오. 대신 만룡의 손자이며, 나의 아들인 운룡(雲龍)을 당신에게 맡기오." 그것뿐이었다. 말이 끝났을 땐 이미 화천상의 몸 또한 지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부글부글― 거품이 되었다 터지는 극열의 용암수만이 말없이 태고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을 뿐! * * * 천하는 넓소. 세상 사람들은 만룡가(萬龍家)의 무학만이 홀로 완전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이 땅에는 그에 버금가는 무예가 십삼종(十三種)이나 있다오. 중원에 삼종(三種), 새외(塞外)에 십종(十種), 이것이 바로 만룡대사조께서 말씀하셨던 고대십삼대무학(古代十三大武學)이오. 오랜 옛날, 아득한 그날. 이 땅에는 무예의 대혼란기가 있었소. 천외십사종(天外十四宗)! 당시의 천하를 지배하던 열네 개의 무예계파(武藝系派)들. 화북(華北)의 만룡가(萬龍家). 한북(漢北)의 용권풍(龍卷風). 화남(華南)의 광무천(廣武天). 중주(中州)의 신선도(神仙道). 이렇게 중원(中原)에는 사종의 계파가 있었고, 새외(塞外)에는 도합 십종(十宗)이 있었소. 서장(西藏)의 밀종(密宗). 새북(塞北)의 관산장(關山場). 열하(熱河)의 철혈문(鐵血門). 천축(天竺)의 유가법종(瑜伽法宗). 남해(南海)의 십검지(十劍地). 요동(遼東)의 음자촌(陰者村). 남만(南蠻)의 만독성(萬毒城). 동영(東瀛)의 일월이도류(日月二刀流). 대막(大漠)의 광풍사(狂風砂). 서촉(西蜀)의 파산파(巴山派). 그들 중원사종과 새외십종을 더하여 천외십사종(天外十四宗)이라 불려진 이 십사국(十四國) 십사계파(十四系派)의 재화절대신공들이 각기 한 시대의 최고무예라 자부하여 천하를 혼란케 했던 것이오. 그 중 화북(華北)의 무예 계파가 바로 본 만룡가문의 선조격인 것이며, 비록 당시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진이학(奇珍異學)들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들 천외십사종의 무예와는 애초에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소. 극도의 혼란기요, 한편으로는 무예의 대번성 시대이기도 했던 그때, 끊임없이 싸움과 도발이 그치지 않게 되자 결국 십사가(十四家)의 십사종주(十四宗主)들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소. 그들은 무려 칠십주야를 거듭한 회동 끝에 한 가지의 대원칙을 제정하게 되었소. 천 년 후, 정식으로 십사연방천하검회(十四聯邦天下劍會)를 개최한다는 것. 하여, 검회의 최종승자를 영원한 종주(宗主)로 받들며 그 전까지는 모든 싸움을 종결짓도록 한다는 것. 십사계파가 즉시 천 년 후를 대비하여 천외로 묻혀가게 될 즈음, 본 가(本家)의 제사대조사(第四代祖師)께서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힘을 만방에 시험해 보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천하제패! 즉, 그 어른이 바로 만룡무군왕(萬龍武君王)이었던 것이오. 십사계파의 무예는 서로가 아니면 견제할 수 없으리만큼 강대하오. 하여, 만룡가 또한 즉시 새외로 묻혀 그들과의 천 년 후 약속에 대비하여 천하검회에서 펼쳐보일 한 가지 무예를 연구하기 시작했소. 공령지예(空靈之藝)! 공령! 그것은 실존무예의 최고 단계이오. 무림인들의 최대염원이며, 그들이 꿈으로 여기는 삼화취정(三花聚頂) 오기조원(五氣朝元)의 화경(化境)보다도 세 단계는 높은 단계로써, 화경으로부터 공령(空靈)까지 이르는 단계는 다음과 같소이다. 그 첫번째는 조화경(造化境). 이는 전신의 공력이 끊이지 않고 재생되는 경지로써 일생을 통틀어 싸운다 해도 지치지 않는 신비의 경지이오. 그 둘째는 지념경(止念境). 이것은 마음을 자유자재로 억제하여 얼음보다 정결하고 자연처럼 무심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써 일종의 득도(得道)의 무예라 할 수 있소. 그 셋째는 공심경(空心境).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鍾鍾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卽鍾鍾法滅)이라 하였으니 마음이 일고 죽음에 따라 신정(神精)이 자연 동화되어 움직이는, 이른 바 천인지경(天人之境)의 단계인 것이오. 이러한 모든 것을 거쳐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것이 공령(空靈)의 공부이니 그 과정의 험난함이야 어찌 다 필설로 형용하겠소? 천외십사종의 무예는 적어도 첫번째 단계인 조화경(造化境)의 경지까지 이르러 있는 것으로 짐작되오. 부친이 익히고 계시는 성심마공(聖心魔功) 또한 두 번째 단계 지념경(止念境)으로 올라서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 부친이 그러한 마공을 익히고 계신 것도 사실 십사연방천하검회(十四聯邦天下劍會)를 대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인 것이오. 이제, 십사연방천하검회는 불과 십팔 년 후로 다가왔소. 만룡가뿐 아니라 중원의 무예가라면 그 누구라도 이방(異邦)의 고수들에게 종주의 자리를 넘기려 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 중, 치우천인은 천외십사종의 무예 모두의 극성(極性)으로써 어떤 무예든 새로운 아류를 만들어 치우무학(蚩尤武學)이라는 희대의 절공으로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하였으니……. 위지형! 이와 같은 하늘의 조화를 도대체 뉘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겠소?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부친의 고육지계를 나는 이해하오. 하나 네 명의 아들 중에 하나쯤은 만에 하나 벌어질지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할 수도 있는 법이 아니리까. 이제 화천상은 가거니와 이 하늘 아래 오직 위지형만이 천하의 대세를 똑바로 꿰뚫어보고, 또한 치우천인을 이 혼란시대의 선한 힘으로 키워낼 수 있으리라 믿소. 필부의 일방적인 결정을 마음껏 비웃어 주시오. * * * 신(神)으로 받들어 온 만룡가의 무학에 버금가는 무예가 이 하늘 아래 십삼종이나 더 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런 그들이 천 년의 세월을 이어오는 대검회(大劍會)의 맹약(盟約)을 했다는 것은 더욱 큰 충격이었다. 공령(空靈)! 무예의 끝이라 할 수 있는 단계. 신비로운 경지가 주는 충격은 차라리 신선하기까지 했다. 하나 전설의 치우천인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차라리 평온함을 가져다 주었다. 위지중걸, 태평대에 태어나 천하제이인자로까지 불렸던 이 칠척거구의 사내는 자신이 지금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한가운데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신이 자신에게 아주 중대한 역할을 맡겼음을 느낀 것이다. 한 발짝이라도 잘못 내딛는다면 그로써 무림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때 문득, 딸 소혜(小慧)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미없이 키워왔기에 보석처럼 아껴온 딸이었다. 그러나 위지중걸은 묵묵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어깨 저만큼 위로 시월의 스물아홉 번째 여명이 부챗살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말. "용서해라……." ―딸아, 나를 용서해라……. 2. 두 명의 방문객(訪問客) 여인은 나른한 기지개를 켜며 긴 하품을 했다. 하품을 하고 나자 별 뜻 없는 눈물이 아물아물 시야를 가렸다. "아……겨울이야. 겨울…… 십일월의 날씨가 이렇게 추워질 수 있다니……." 창틈엔 뽀얀 성에가 끼었다. 들판을 휘몰아가던 삭풍이 그 들판 끝부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초라한 주막의 창을 마구 두드려댔다. 휘이잉― 쌔앵― 여인은 손에 든 부젓가락으로 꺼져가는 화로의 불씨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제길, 이놈을 그냥 꺼버려? 손님도 없는데 아까운 숯덩이만 자꾸 들어가네." 그때 돌연, 여인은 한 따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옆을 향해 시선을 돌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도대체 언제 어디로 어떻게 들어온 것일까? 문가에는 어느새 두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어깨와 머리 위로 수북이 쌓인 눈이 차라리 소담스럽다. 그들은 각기 백의와 흑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흑의사내는 머리에 인 눈처럼 차고 냉막해 보였고, 흑의사내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백의사내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찌르르 떨려오는 장대한 위엄의 구레나룻 사내였다. 여인은 일순, 놀란 눈을 껌벅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호…… 어서 오세요. 저희 집엔 강남(江南)의 명주(名酒)인 옥호춘(玉壺春)이 있답니다. 손님들께선 만족하실 수 있을 거예요." 장대한 백의사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가에 위치한 탁자로 걸어가 털썩 몸을 앉혔다. "옥호춘 한 병과 적당한 안주" 그는 품에 비단포대기를 하나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무척 소중한 물건인 듯했다. 흑의사내는 백의사내의 어깨에 쌓인 눈을 공손하게 털어주고는 자신은 그의 뒤에 우뚝 시립해 섰다. 여인은 이 기이한 일행과 포대기를 힐끗 일견한 후,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녀는 쟁반에다 술과 안주를 담아 들고와 그것을 탁자에다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백의사내가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도 보고 있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의 젖가슴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의 앞 옷섶은 반쯤 풀어헤쳐져 있었으며 그곳으로 풍만한 유방이 살짝 내비치고 있었다. 여인은 얼굴을 노을빛으로 물들이며 자신의 가슴을 싸안고 다급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소…… 손님은……." 그녀의 놀란 외침에 백의사내는 나직한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이가 배고플 것이오. 부인은……." 여인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사내의 옆으로 다가와 그가 안고 있던 포대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포대기를 들쳐보다가 그녀는 끌끌 혀를 찼다. "쯧쯧…… 가엾기도 해라. 이토록 예쁜 아기가 새파랗게 얼었군요. 염려 마세요. 저도 아기 젖뗀 지 얼마 안 된지라 젖을 그냥 버리고 있는 형편이랍니다. 부인께선 어디 먼 곳으로 출타라도 하셨나요?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예쁜 아기를 두고……." 단숨에 여기까지 말하고 난 여인은 화롯가로 다가가더니 백의사내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했다. 백의사내는 우울한 시선으로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술을 병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타닥―탁탁! 화로의 숯불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기름때 묻은 반질반질한 탁자 몇 개와 천장에 매달린 유등(油燈)이 흐릿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실내. 그곳은 숯불이 타는 소리와 이따금씩 백의사내가 따르는 술병이 잔에 부딪히는 미미한 파음(破音)이 고요한 실내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돌연, 여인의 청아한 음성이 실내의 나른한 정적을 깨뜨렸다. "그런데…… 이 아이의 이름이 뭔가요?" "그건……." 백의사내는 여인의 말에 대답하려다가 문득, 두 눈에 특이한 광채를 발하며 창가를 주시했다. 뒤에 서 있던 흑의사내 또한 귀를 쫑긋하더니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리! 두두두두― 무슨 소리인가? 마치 거센 바람에 대숲이 흔들리는 듯한 이 소리는 아득한 황야 저편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추적대입니다. 벌써 이곳까지 왔군요." 흑의사내가 냉막한 표정으로 검자루에 손을 대자 백의사내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자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어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에게서 아기를 받아 가슴 앞 옷섶에 포대기째 감싸 넣었다. "고맙소. 이 은혜 잊지 않으리다." 그의 시선이 흑의사내를 향했다. "일 장 간격을 두고 바짝 따라오게. 뽑으라고 할 때까진 무기를 손에 들지 말게." 짤막한 한 마디를 던지듯이 말하고 난 백의사내는 이내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나갔다. * * * 일만(一萬). 아니, 이만은 족히 되겠다. 하늘도 땅도, 그 사이의 공간도 온통 흰빛 일색인 백야(白夜)에 한여름 폭풍구름처럼 모여든 무리. 빛나는 금창에 붉은 수실의 은검(銀劍)을 허리에 두른 수천의 백의무사(白衣武士)들은 바로 대봉황천(大鳳凰天)의 정예인 역수라군단(逆修羅軍團)이요, 철갑(鐵甲)을 두른 흑마(黑馬) 위에 앉은 은방패에 동철갑의(銅鐵甲衣)를 걸친 늠름한 수천의 기사는 염라도 울고 간다는 철기대군단(鐵騎大軍團)이다. 뿐만 아니라 주의녹대(朱衣綠帶)에 금수교검(金穗嬌劍)을 양 어깨에 멘 일만의 고수들은 특수공격, 대외첩보의 검군단(劍軍團)이었다. 휘하 구개군단(九個軍團) 중 삼개군단을 한꺼번에 풀어놓은 대봉황천의 이러한 위용이야말로 실로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장관이 아닌가! 황야에 아득히 펼쳐진 검은 띠 같은 대군(大軍)과 삼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위지중걸(慰遲中傑)은 우뚝 몸을 세웠다. 사위에는 솜 같은 함박눈이 괴괴한 유적(幽寂)과 함께 소리없이 쌓이고 있었다. 위지중걸은 오연히 그 하늘을 마주 올려다본다. 조용하다. 만장(萬丈)의 해일이 몰아쳐 오다 갑자기 멈춰선 듯, 일대거인(一代巨人)은 그대로 산(山)이 되고 이만대군은 그 산을 우러르는 삼라만상이 되어 차례로 숨을 죽인 듯……. 허공을 날던 바람조차 깃을 접고 도사린 듯한 숨막히는 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돌연 시선은 그대로 하늘에 둔 채 위지중걸의 굳게 다물려져 있던 입이 조용히 열렸다. "천종(天鍾)인가?" 순간 한소리 장탄식이 무리 속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이만대군의 가운데 부분이 물결 갈라지듯 쫙 갈라지고, 그 사이로 네 명의 홍의무장(紅衣武將)의 호위를 받으며 금포중년인 하나가 조용히 모습을 나타냈다. 나이는 사십대 초반. 하나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백발. 마치 서릿발을 한 겹 드리운 맹호를 연상케 하는 백발호안(白髮虎眼)의 위인이었다. 그는 한 필의 백마를 타고 있었으나 이내 그 말에서 내렸고, 내리자마자 의관을 정제한 후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학천종( 天鍾)이 삼가 대교두를 뵈오! 이런 모습으로 뵙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위지중걸은 묵묵히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노성주(老城主)께선 무슨 말씀이 계시던가?" 순간 학천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추살(追殺)! 그가 받은 명령은 추살, 그것이다. 하나, 바로 삼 년 전까지 모시던 윗사람이요, 평생을 통해 존경하고 있는 진정한 대무인(大武人)을 향해 어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 그는 대답 대신 한줄기 가슴을 저미는 탄식을 터뜨렸다. "이제라도 발길을 거두시면…… 그리하여 봉황천의 형제들을 이끌어 주시면……." 위지중걸의 입가로 한줄기 씁쓸한 고소(苦笑)가 스쳐 지나갔다. '어찌 모르랴…… 알면서도 묻는 이 마음은 아직도 속세에 미련이 있기 때문인가?' 하나 그 웃음이 채 다 입가로 번지기도 전에 그의 얼굴은 다시 서릿발처럼 냉혹해졌다.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계율이 하나 있다. 너는 그것을 기억하는가?" 학천종은 태연히 내뱉었다. "주군(主君)의 명(命)을 받으매 목숨을 바쳐 행한다." "되었다." 순간 위지중걸은 좌수(左手)를 칼끝같이 세우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자신의 우측 어깨를 맹렬히 내려쳤다. 파악! 피[血]. 그리고 어깻죽지부터 칼로 벤 듯 잘려나간 우수(右手). 학천종은 흰 눈밭 위로 떨어져 꿈틀거리는 팔을 바라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대교두……." "명을 받았으니 네 어찌 그것을 지키지 않으랴? 다만 위지중걸은 평생 무예를 닦은 오른손과 이 품에 안긴 아기의 목숨을 바꾸고자 하니 그대는 이것을 이해해 주겠는가?" 팔! 무인에게 있어 무예를 익힌 팔이란 목숨과도 같다. 그 팔을 바라보는 학천종의 안색이 거듭 변하고 있었다. 아아…… 도대체 언제이던가. 갓 입문(入門)하여 모든 것이 어리벙벙하고 눈부셨던 입문무사(入門武士) 시절, 거대한 연무장 한복판에 우뚝 서서 십만 무인을 호령하던 당신의 모습은 그저 눈부신 경이(驚異)였고 놀람이었으며……. 서투른 초식으로 검을 놓친 애송이 무사의 등을 토닥이며 씩 웃던 그 웃음은 그때부터 애송이 무사의 마음속에서 우상이 되었건만……. 이제 그 빛나던 당신은 도망자! 나는 또 서투른 추적자……. "서툰 추적을 토닥여야 할 그 손을 당신께선 어찌 스스로 버리시는가? 그 빛나던 명망, 무예, 그 전부를…… 도대체 그 어떤 것이 당신을 그토록 잡아끌고 있는가?" 학천종은 고개를 떨구었다. 한 줄기 젖은 눈물이 엎드린 그의 손등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한 시대(時代)가 간다. 영웅은 늙고 꽃잎은 진다. 그러나 몇천 번의 시대가 흐르고 또 흘러도 눈앞에 선 이 거인(巨人)처럼 완벽한 대교두를 우리는 다시는 모시지 못할 것……. 학천종은 품속에서 하나의 패(牌)를 꺼내어 정중히 눈밭에 놓았다. 그것은 사면패(赦免牌)였다. 대봉황천의 초일류고수만이 지닐 수 있는 이것은 그 어떤 순간, 그 어떤 경우에라도 한 번 죄를 사면받을 수 있는 구명패(救命牌)였다. 패를 가만히 눈밭에 올려놓고 난 학천종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위지중걸과 시선이 마주친 것도 잠깐. 그는 위지중걸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이내 빙글 몸을 돌렸다. "퇴군한다." 두두두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한 폭의 비장한 상면도(相面圖)를 보고 있던 무사들은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고삐를 돌렸다. 두두두두― 뽀얀 설진(雪塵)……. 내리는 눈……. 그리고 바람……. 휘이잉― 휘이― * * * 흑의사내 냉혼(冷魂)은 이 모든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학천종이 내려놓고 간 사면패의 뜻을 그는 모른다. 하나 그는 그 패로 하여 위지중걸과 자신의 소주인(小主人)이 한 줄기 구명(救命)의 끈을 잡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패의 주인인 학천종은 어찌 되나?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사면패를 남에게 준 그는 돌아가 무사할 수 있을까? 냉혼의 냉막한 얼굴에 흐릿한 한줄기 웃음이 번졌다. 남을 위해 팔 하나를 선뜻 내던질 수 있는 사람과, 또 남을 위해 목숨을 던져줄 수 있는 사람들. 그는 이런 것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단 하나라도 눈앞에 있는 한, 그는 무인(武人)의 길로 들어선 자신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묵묵히 위지중걸의 옆으로 다가섰다. 이어 자신의 옷 안자락을 찢어내어 위지중걸의 어깻죽지 부분을 싸매기 시작했다. 피는 이미 멎었으나 혈관과 속살 등은 시퍼렇게 얼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퍽! 무얼까? 냉혼은 한 줄기 피의 막(幕)이 눈앞으로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 냉막한 사내의 얼굴을 경악으로 홱 돌변시켰으며, 그의 몸을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파르르 떨도록 만들었다. 보라! 막 천으로 싸맨 위지중걸의 어깻죽지에 박힌 한 자루의 호접표(蝴蝶 )를……. 나비 모양의 이 비수는 끝부분까지 위지중걸의 어깨로 박혀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부모가 죽고 형제가 살상당했다 해도 이토록 놀랄까. 냉혼은 놀랐으며, 그 놀람은 이내 무서운 분노로 돌변했다. 발작적으로 몸을 돌린 그의 시선 속으로 일단의 무리들이 빠르게 쏘아져 들어왔다. 혈의(血衣). 설원에 붉은 꽃이 피어난 것 같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핏빛 일색인 괴인(怪人)들. 한둘도 아니다. 어림잡아도 그 수는 일흔두셋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들은 십 장 밖에서 숨결이나 호흡의 기척도 없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냉혼은 검자루에 화급히 손을 갖다댔다. 순간 그는 엉뚱하게도 손등 어림으로 발작적인 통증이 스미는 것을 느꼈다. "억!" 그의 회의에 찬 시선 속으로 한 자루의 영롱한 호접표가 검을 잡으려는 자신의 손등에 박혀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위지중걸의 어깨에 박힌 것과 똑같은 모양의 것! 그러고 보니, 혈의인들의 머리 위 허공에는 수없이 많은 호접표들이 춤추듯 나부끼고 있었다. 내리는 눈과 같은 색이어서 언뜻 구분이 가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들은 먹이를 노리는 금수처럼 천천히 나부끼다가 조종자가 마음먹은 곳으로 자유자재로 날아가 박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냉혼은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이들은 도대체 누군가? 무형무음(無形無音)의 절대암기…… 나는 이런 것을 들어보기는커녕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이때 위지중걸의 부리부리한 음성이 설원을 메아리쳤다. "도남강(屠南江)의 휘하인가?" 순간 혈의인들의 선두에 서 있는, 가슴에 한 송이 국화 문양이 수놓여 있는 자가 냉혹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대황야(大皇爺) 휘하 칠십이마령비인(七十二魔靈匕人)이오. 황야의 명을 받들어 대교두를 모시고자 왔소." 칠십이마령비인! 이는 바로 대봉황천의 제이인자인 도남강이 비밀리에 키운다는 희대의 살수(殺手)들이 아닌가? 이름도 없고, 성(姓)도 없으며, 명(命)을 받으면 염라의 목이라도 따온다는 저주(咀呪)의 살수들. 도남강의 휘하에는 이러한 살수집단이 칠십이마령비인 외에도 네 무리나 더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봉황무색오살(鳳凰無色五殺)! 하나 그것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는지, 그들의 지닌 바 무예가 어떤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는 공포의 집단들. 하나 위지중걸은 송충이 같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을 뿐,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로 말했다. "들은 적이 있다. 도남강이 비밀리에 키운 오살(五殺)의 하나로군. 그럼 긴말은 필요없지 않은가?" 수뇌혈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정중히 맞잡아 보였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대교두." 이어 그의 손이 뒤쪽을 향해 한차례 휘저어진 것과 위지중걸의 몸이 땅을 박찬 것은 거의 동시였다. 슈파팍! 일순 눈송이처럼 허공을 나부끼던 수백의 호접표들이 벌떼처럼 위지중걸을 향해 쏘아져 오기 시작했다. 좌로, 우로, 또는 위, 아래로! 방향도, 속도도 틀리며 일체의 소리조차 없는 공포의 암기! 팍! 위지중걸의 목덜미 아래 기사혈(氣舍穴)에 하나의 호접표가 박혔다. 찰나의 틈도 없이 다시 두 자루의 호접표가 양구(梁丘), 비관(卑關)의 양혈로 모습을 감추었다. 파팍! 그런데도 비등하는 위지중걸의 속도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또다시 세 자루의 호접표가 그의 삼대혈(三大穴)로 파고들었을 때, 그의 좌수는 한 혈의인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있었다. 우두둑― "끄윽……." 그는 연이어 다섯 자루의 호접표를 몸에 맞고도 우람한 다리를 또 다른 혈의인의 복부에 쇠몽둥이처럼 박아버렸다. 번갯불이 휘몰아치듯 뻗어나간 이 이수삼퇴(二手三腿)에 네 명의 혈의인이 손써 볼 사이도 없이 나뒹굴었다. 실로 목숨을 돌보지 않는 저돌적인 공격이었다. 순간 냉혼의 두 눈에 한줄기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지나치게 서둔다. 몸에 이상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것은 수뇌혈의인도 마찬가지인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개의 주맥(主脈)이 단숨에 끊어졌고…… 대거(大巨), 충양(衝陽), 기호(氣戶)의 삼중혈(三重穴)이 꿰뚫려 진기가 이어지지 않을 텐데도 저런 위력인가? 그러나, 상, 중, 하완(下脘)의 삼연혈(三連穴)이 끊어져 공력이 흩어지고 나면 아무리 용맹스런 호랑이라도 어쩔 수 없겠지.' 팍! 팍! 팍! 위지중걸이 여섯 번째 혈의인의 머리를 수박처럼 으스러뜨렸을 때, 그의 몸에 미미한 떨림이 일었다. 그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복부 어림에 나란히 꽂힌 세 자루의 호접표가 떨리는 걸음을 쫓아 파르르 도미(刀尾)를 떨고 있었다. 하나 그의 손이 움켜잡고 있는 것은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 옷섶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포대기 하나. 수뇌혈의인은 두 눈으로 냉혹한 광망을 토해냈다. '좌삼변(左三變) 후에 우오변(右五變)…… 호접표의 서른두 번째 변화는 하늘의 대라신선이라 해도 피할 수 없다. 아까운 사람이 가는구나…… 최후!' 슈슈슉! 십여 자루의 호접표가 일제히 위지중걸의 이마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아니, 날아든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그것들은 이미 위지중걸의 이마 표피(表皮)를 거의 뚫어가고 있었다. 실로 필사절명의 순간, 바로 그때였다! "멈추시오!" 냉혼의 입에서 날벼락 같은 대갈이 터져나왔다.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던 수뇌혈의인의 몸이 순간 부르르 떨렸다. 패(牌)! 냉혼이 두 손으로 움켜잡고 내민 하나의 붉은 혈옥패! 수뇌혈의인은 수하들을 향해 고개를 돌릴 시간도 없다는 듯 날카로운 어조로 외쳤다. "그만!" 순간 놀랍게도 허공을 날던 수백의 호접표들이 일시에 그 동작을 멈추는 것이 아닌가? 막 위지중걸의 이마를 꿰뚫으려던 열두 자루의 호접표 또한 뚝 멈추어지더니 이내 힘을 잃고 그의 발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위지중걸의 충혈된 두 눈에 처음으로 한줄기 놀람이 스쳐 지났다. 공력이란 뻗기는 쉬워도 거두기는 어려운 법! 장중(掌中)의 무기도 아니고 손을 떠난 암기는 더더욱 그렇다. 한데 말 한마디가 터지는 찰나 공력이 거두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이 칠십이마령비인의 무예수준을 능히 짐작케 하는 것이 아닌가? '도남강은 좋은 수하들을 키웠구나.' 그때 수뇌혈의인의 색깔없는 음성이 위지중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왜 진작 사면패가 있음을 말하지 않았소?" 하나 대답 대신 터져나온 것은 한 줌의 시뻘건 핏덩이였다. "욱!" 위지중걸은 피묻은 수염을 쓰윽 문지르며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마지막 가는 마당에 대황야가 주는 선물을 어찌 받지 않고 가랴! 또한 그 패는 나의 지인(知人)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준 소중한 것이니, 그런 것을 어찌 나를 위해 쓰겠는가!" 한마디 한마디에 서려 있는 힘찬 영웅의 풍도! 그 몸이 멀쩡하든, 부상을 당했든,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이러한 위엄일색의 기풍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하늘 아래 위지중걸, 오직 이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수뇌혈의인의 두 눈에 한줄기 이채가 스쳐 지났다. 그는 마치 이 세상에 없는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는 듯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오랫동안 위지중걸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 줄기 미미한 탄식을 터뜨렸다. "대교두…… 당신은 바보구려……." 그는 주위에 흩어진 여섯 수하의 시신을 빙 둘러본 후, 빙글 몸을 돌렸다. "사면패는 성주께서 직접 만드신 구명(救命)의 패…… 우리는 그 패를 가진 사람을 어쩔 수 없다. 퇴각한다!" 슈슈슉! 구름이 흩어지듯 일흔 명의 붉은 옷자락이 일시에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위지중걸은 꼿꼿이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칠십이마령비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 자리에 고목이 무너지듯 쓰러져 내렸다. "대교두!" 냉혼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위지중걸은 핏기없는 얼굴에 담담한 웃음을 떠올리며, 한쪽밖에 없는 손으로 품속의 아기를 눈 어림까지 받쳐 올렸다. 아기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치우천인의 신비스러운 맥(脈)을 이어받은 그 얼굴은 비록 잠들었지만 마치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위지중걸은 껄껄 웃었다. "네놈의 아비는 과연 평생의 호적수였다. 나는 네 아비와 싸울 당시 이미 내장이 흔들렸다. 그 몸으로 마령비인을 여섯이나 때려 죽였으니 고맙다는 말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잠을 자? 이놈!" 냉혼이 물었다. "왜 진작 사면패를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랬을 것 같나?"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도남강은 이 아이가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야 할 상대야. 하지만 그가 지닌 힘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 나는 마령비인으로써 그가 지닌 힘을 조금 시험해 본 걸세." "이미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당신은 또 팔까지 잘라 원기가 상했습니다. 그 몸으로 마령비인과 무모한 대결을 하셨소.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을 안 하십니까?" 위지중걸은 냉혼을 힐끗 바라보더니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괜찮아, 괜찮아. 내 나이 이미 지천명(至天命)에 이르렀다. 우리의 시대는 갔어……." 문득 그의 두 눈에서 중상을 입은 이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밝은 혜광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 시간을 두고 맹세하겠네. 나 위지중걸은 진천우도의 손자요, 화천상의 아들인 화운룡(華雲龍)에게 다음 대(代)의 무림을 주고 말 테다! 이제부터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여겨 주게." 절대자 진천우도. 그의 네 아들 중 둘째 아들이 일으킨 역부(逆父)의 소용돌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치우천인의 맥(脈). 하나 눈보라치는 설원에서 벌어진 이 한 토막의 비사(秘事)를 세상은 알지 못했다. 내일도 해는 무사히 떠오를 것이고, 강은 그저 그렇게 억겁의 세월을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흐를 것이다. 또한 남자들은 일어나 하루의 일터로 나갈 것이고, 여인들은 공들여 화장을 할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가는 것이다. 이제 불과 십팔 년 후로 성큼 다가선 천 년 전의 약속. 십사연방천하검회(十四聯邦天下劍會). 제기랄! 인세(人世)에는 또다시 무슨 일이고 벌어지려나 보다. * * * 桃花流水香然去 別有天地非人間 問余何事碧楢山 笑而不答心自閑 복숭아꽃은 물에 흘러 사라져 가고, 여기는 천지 밖 인간 세상이 아닐세. 그대는 내게 묻는가, 왜 푸른 산에 깃들어 사느냐고……. 고요히 웃을 뿐 대답하지 않는 내 마음은 그저 한가로울 뿐일세. 세월은 유수(流水)라 했던가? 꽃이 피는 화춘(花春)인가 싶더니 태양의 열하(熱夏), 낙엽의 풍추(風秋)에 이어 흰빛 일색의 설동(雪冬)이 수십 차례 지나갔다. 태고의 자연에 다시 열여섯 개의 빗금을 더한 십육 년의 세월동안 대륙은 몹시 어수선했다. 십사연방천하검회(十四聯邦天下劍會). 그것이 불과 이 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오오…… 천 년 전의 약속이라네! 검회의 승자가 바로 천하무림의 영원한 종주(宗主)가 된다네. 대봉황천은 바로 그 십사연방의 하나인 만룡가의 후예라는 거야! 그렇다면 중원의 다른 세 계파인 화남(華南) 광무천(廣武天), 한북(漢北) 용권풍(龍卷風), 중주(中州) 신선도(神仙道)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만룡가와 버금가는 무학이 과연 열세 개나 더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새외(塞外)에서 이동하는 대군의 행렬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남해의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천사 같은 소녀를 보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천축(天竺)의 수만 법승(法僧)들이 서천을 망라한 대집회를 벌였다고도 하고, 대사막에 미증유의 모래바람이 벌써 삼 년째 불고 있다고도 했다.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그런 와중에서 사람들을 또 한차례 경악 속으로 휘몰아넣은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었다. ―대봉황천에서 사해대검회(四海大劍會)라는 미증유의 비무대회를 개최한다. 이는 바로 이 년 후에 있을 십사연방천하검회를 대비한 자체검회이다. 또한 어쩌면 만룡무학의 마땅한 후계자를 찾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십 인 이상의 문파라면 어디에라도 초청장이 발송된, 전무후무한 큰 대회이다. 사해대검회(四海大劍會). 무림에 적(籍)을 둔 무사라면 누구든 참가할 수 있고 참관할 수 있다는 일대의 대검회. 아무튼 대륙은 이 대회로 인해 떠들썩했다. 벌써부터 대봉황천으로 향하는 서른두 개의 관도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초청장을 발송하기 위해 성을 떠난 대봉황천의 무사들만 해도 무려 오천여 명이 넘었다. 가을바람도 소슬한 영락십이년(永樂十二年) 추시월(秋十月)의 일이었다. * * * 대륙의 중앙, 호북(湖北)땅. 남으로는 동정호(洞庭湖), 동으론 파양호( 陽湖)를 끼고 복우(伏牛), 대홍(大洪), 형산(衡山) 등의 명승지가 가득한 곳. 무릉지도원(武陵之桃源)이 따로 있을까 싶은 방원 오만 리의 수려지지(秀麗之地). 이 호북에는 세칭 무릉칠절(武陵七絶)이라 불리는 절세경승(絶世景勝) 일곱 곳이 있다. 백만 그루의 배꽃이 일제히 그 꽃잎을 떨구는 형산이화(荊山梨花)가 그 첫째요, 이수낙조(二水落照), 삼상거루(三湘巨樓), 대홍혈택(大洪血澤), 민산만위(悶山滿葦), 조북천마(朝北天馬)의 육경이 제각기 여섯 번째까지의 서열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산(山). 그 하나의 산은 도화유수향연거(桃花流水香然去)요,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는 두 절 시구에 말할 수 없이 합당하게 무릉칠절의 마지막 경승을 뽐내고 있었다. 이것을 이름하여 청연무당(靑然武當)이라 한다. 무당산(武當山). 가히 뉘라서 이 이름을 모른다 할까? 호북 악성(鄂城) 서북 방향의 균현(均縣)에 해발 일만육천오백 척(尺)의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산. 웅휘한 자태는 이루 말할 것도 없고, 그 수려한 경치 위로 예순세 개의 봉우리에 걸쳐 팔궁구원이십사당칠십이관(八宮九院二十四當七十二關)이 있으며, 하남의 소림사(少林寺)와 더불어 남북쟁휘(南北爭輝)라 일컬어지던 대무당파(大武當派)가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 아닌가! 하나 일백 성상(星霜) 전에 이 땅 위의 도가(道家)에 휘몰아쳤던 대혈풍. 도가혈사(道家血死)! 전 중원의 도가가 아예 뿌리 뽑히다시피 했던 그 엄청난 혈풍이 지나간 후, 오 보(五步)에 일각(一閣)이요, 십 보에 일루(一樓)를 자랑하던 무당도가(武當道家)의 영화 또한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삼청(三淸)의 영화도, 삼원(三元)의 괘효(卦爻)도 한낱 희망없이 벽천 뜬구름처럼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저 멀리, 무당산 육십삼봉 잔그늘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낡은 도관(道觀)의 처마가 햇살 아래 무심히 빛나는 어느 가을날 오후. 해량평(解亮坪)에서부터 휘몰아온 한 줄기 바람을 안고 두 사람의 무사(武士)가 양지바른 무당산 산마루를 오르고 있었다. "쯧쯧…… 천하도가의 성지(聖地)였던 무당성산(武當聖山)이 이게 무슨 꼴인고? 황혼에 까마귀 날아들고 처마 위엔 푸른 이끼만 가득하다는 이백(李白)의 시(詩) 구절 그대로구먼." "연화(煙火)를 끊고 솔잎만 먹으며 벽곡(酸穀)하는 도행(道行)에 피바람이라니…… 백 년 전의 그 도마(道魔)란 작자는 십팔층에 십팔층을 더한 삼십육층 지옥에 떨어질 놈이 아닌가?" 무성한 수풀뿐인 이리저리 갈라진 산길에는 오랫동안 손길이 가지 않아 거의 썩어가는 푯말들만이 황량하게 서 있었다. 전진도관(全進道關)과 무량도장(無亮道場) 등의, 일견해 보기에도 과거에는 천하에 그 이름을 쩌렁하게 드날렸을 듯 싶은 명문도장(名門道場)들의 이름이 적힌 푯말들. 그것들을 스쳐 지나가는 삼십대 중반의 두 사람. 일신에는 현의무복(玄衣武服)을 걸쳤으며 어깨에 휘두른 청강장검 위로 금색 수실이 드날렸다. 일견하기에도 명문의 무사들이 분명한 이들은 문득 한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곳부터 길은 거의 관도(官道)에 버금갈 정도로 넓혀져 있었다. 길의 우측에는 넓은 분지가 있었고, 그 분지의 가운데에는 미풍에 찰랑이는 벽수가 가득한 사방 백여 장의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또한 연못의 북쪽 끝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절벽 중턱에는 그 하나의 크기가 사람 열을 포개 놓은 것만큼 커다란 세 자의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해검지(解劍池)> "해검지? 오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해검지로군." 해검지(解劍池). 숭산 소림의 백 리 밖에서는 모든 무림인들이 말에서 내리고 칼을 감춘다. 이것은 무림의 최고문파에 대한 백리하마은검(百里下馬隱劍)의 예의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림과 더불어 무림 양대거목인 무당파에도 해검지란 곳이 있다. 어떤 신분의 무림인이건 무당파를 방문할 때에는 이 해검지에서 지니고 있던 무기를 풀어 놓아야만 한다. 만약 쇠붙이 한 조각이라도 숨겨 들어가는 날엔 무당파에 대한 불경죄로 크게 곤욕을 치르는 것이 상례인 것이다. 한 줄기 미풍이 연못 옆에 놓여진 거대한 철궤를 무심히 휩쓸어 갔다. 문파의 영욕을 그대로 말해주듯……. 과거에는 푸른 도복을 입은 수십 명의 도사들이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주위에 서 있고, 수백 수천 자루의 무기들이 놓여졌을 이 철궤도 이제는 녹슬어 바람에 무심히 휩쓸리고 있을 뿐이었다. 두 무사는 녹슨 철궤를 어루만지며 잠시 가슴을 적시는 우울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문득 좌측무사가 손을 들어 연못의 우측으로 난 길을 가리켜 보았다. "저쪽이 아마도 무당파 삼청관(三淸關)으로 통하는 길인 듯한데……." 우측무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해할 수 없군. 무당파가 백 년 전 혈겁 이래 인재는 뿔뿔이 흩어지고 명성이 쇠락하여 사실상 멸문(滅門)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렇구 말구…… 요 백 년째 어떤 무림의 중요한 행사에서도 무당파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네." "한데 이번에 본 천(本天)에서 여는 사해대검회(四海大劍會)에 이들을 부르기 위해 초청장을 띄우는 이유가 뭘까? 듣자 하니 이 초청장은 외빈당주(外賓當主)의 직인도 아니고 사황야(四皇爺)의 직인이라는데……." 좌측무사의 얼굴에 크게 놀란 빛이 떠올랐다. "서열로는 사위(四位)이나 사실 백 년 이래 제일 큰 행사라는 이번 대회를 총주관하고 있는 사황야의 직인이란 말인가? 그럴 수가……." "내성(內城)의 정산(鄭産)이 전해준 말이니 틀림없네. 하지만 이 길을 보아하니 인적조차 없는 것 같으니…… 우리는 지금 유령을 향해 초청장을 보내러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그때 돌연, 한쪽의 나무 그늘에서 느닷없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나무꾼 차림의 노인 하나가 무심히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검자루에 손을 갖다댔던 두 무사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렸다. 좌측무사가 거만한 어투로 말했다. "귀하는 이 산에 사는가?" 십 년을 가도 사람 하나 마주치기 어려운 벽산에서 살아온 나무꾼. 온통 휘황한 차림의 두 무사를 보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 물러났다. "그, 그렇소만……." "흐음…… 그렇다면 무당파에 대해 좀 아는 것이 있는가?" "무…… 당파요?" "도사들 말이다!" 우측무사의 신경질적인 어투에 나무꾼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산너머 삼청관의 도사님들을 말씀하시는구려." "그곳에 사람이 있긴 있는가?" "있다마다요." "그곳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보아라." 나무꾼은 지고 있던 나뭇단을 땅에 내려놓더니 땀을 훔치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지만…… 제일 높은 도사님 한 분과 그의 세 제자가 있지요." "세 제자라……?" "현청(玄淸)이라는 도명의 장문도사(掌門道師)는 그 윗대의 가람도인(伽藍道人)으로부터 오십 년 전 홀로 문파를 이어받았다 하더이다. 그 현청도인이 지금은 각각 운룡(雲龍), 벽뢰(霹雷), 여의(如意)라는 세 제자를 데리고 있지요." 두 무사는 힐끗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가람이건 현청이건 간에 도무지 생소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 가람의 내력은 무엇이고 현청은 어떻게 문파를 이어 받았는가?" "그, 그것이……." 그의 머리로는 더 이상 말해줄 것이 없었던 것일까? 늙은 나무꾼은 머리만 긁적였다. 바로 그때, 저 아랫길로 사냥꾼 차림을 한 소년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늙은 나무꾼은 얼굴에 온통 희색을 띠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무당파에 대해서라면 저 소궁(少穹)놈보다 더 잘 아는 놈은 없지요. 저놈은 바로 현청의 세 제자 중 여의도인과 친구입죠." 어린 사냥꾼 소궁은 늙은 나무꾼의 말을 듣자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도사는 무슨 도삽니까? 그 사람들은 한마디로 웃겨요. 솔잎에 돼지고기를 말아먹고 도경(道經)의 이치는커녕 선(仙)자도 모르는 돌팔이 도사들이지요. 현청도인이란 늙은이는 본래 거지였어요. 그러다 가람도인을 만나 도복을 입었죠. 그 가람도인은 또 누군고 하니 옛날 이 산에 진짜 도사님들이 계실 때, 마당을 쓸고 낙엽을 치우던 청지기 영감이랍니다. 그러다 도사님들이 모조리 산을 떠나자 텅 빈 도관을 지킨 것에 불과해요. 자칭 장문인(掌門人)이었던 그 직위를 현청 늙은이가 물려받은 것이지요. 상청하청(上靑下靑)이라 하듯 청지기에서 거지로 이어 내려온 사부를 모시는 제자들은 또 어떻겠어요? 벽뢰(霹雷)는 천하의 바보예요. 그는 자기의 도명을 외우는 데만 꼬박 일 년이 걸렸어요. 여의(如意)는 천하의 얼뜨기지요. 나는 그가 빗자루를 똑바로 들고 마당을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이들은 모두 똥을 누면 밑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그 손으로 또 음식을 먹는, 멍청하고 무지막지한 자들이에요.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과연 저런 것들도 사내랍시고 내질러 놓고 그 어미가 아랫목에 앉아 횃대잡고 미역국을 처먹었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지요. 그래도 그들 무리 중에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면 첫째 제자인 운룡도인(雲龍道人)이에요. 그는 비단 고기를 먹지 않는 진짜 채식도인(菜食道人)일 뿐 아니라 멍청하지도, 얼뜨기 같지도, 지저분하지도 않지요. 그는 아침에 채석장(採石場)에 나가 하루종일 일해 번 돈으로 자신의 사부와 두 명의 사제를 먹여 살려요.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십 년째 시주라곤 쌀 한 톨도 없었던 무당파의 도사 아닌 도사들은 모조리 굶어죽고 말았을 거예요. 뿐인가요? 그는 무당파의 모든 식사와 빨래를 혼자서 도맡아 하며, 심지어는 측간의 똥까지 스스로 내다푸죠. 나는 운룡도인을 존경해요. 왜냐하면 그는 그런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단 한마디의 변명도 없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이라면 세상 어디에 가도 대우받고 살 수 있을 거예요. 그가 왜 도복을 벗지 않고 그곳에 눌러있는가 하는 것은 무당산의 가장 큰 불가사의(不可思議)랍니다." * * * 상(像). 그것은 실물의 두 배 크기쯤 되는 하나의 목각상(木刻像)이었다. 상은 도사(道師)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목각도인상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픔과 분노, 애통과 회한이 한데 어우러진……. 꾸부정한 등에 박힌 부러진 칼, 그리고 피묻은 도복의 형상을 한 이 목각상은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목각도인상은 넓은 도관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워져 있었고, 상의 앞에 세워진 하나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잊지 말라, 이 한(恨)을! 도가(道家)의 혈한(血恨)을……. 무당의 일편지혼(一片之魂)은 영원히 남아 이 사무친 한을 풀고야 말리라.> 네 줄도 안 되는 문구 속에 들어간 한(恨)이라는 글자는 무려 세 개. 피흘리는 목각도인상과 더불어 섬뜩한 전율을 안겨다 주는 글귀였다. "조각도, 글도…… 모두 다 명가(名家)의 솜씨로군." "백 년 전 멸문 당시의 최후 생존자들이 세워 놓은 것일 게다. 과연 그들은 다 죽고만 것일까?" 도관의 산문(山門)에는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무당파라는 세 글자가 장엄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나 그것이 금색이라는 것조차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낡디낡은 현판이었다. 본래 무당파는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삼청관(三淸關)과 상원(上元), 중원(中元), 하원(下元)의 삼원관(三元關) 등 도합 삼청삼원(三淸三元)의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방파였다. 각 원과 청에는 최소한 오십여 개의 부속 전각, 대전, 사당 등이 딸려 있었고, 전성기 때는 그 소속인원이 도합 일만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두 무사의 시선으로 들어온 무당파라는 것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산문 안으로 한 채의 조그만 전각(殿閣)이 있었는데 그곳이 사람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의 전부였다. 안쪽으로 수십 채의 건물들이 보이긴 했으나 모두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썼고, 일 장도 넘는 잡초로 가려져 있었다. 전각의 앞에는 이제 막 싹이 돋은 채소류가 심어진 밭과 네 개의 푯말이 서 있었다. 그 푯말로 무심히 시선을 던진 두 무사는 순간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거창한 문구(文句)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大武當派 第三十六代掌門眞人玄淸之處所> 대무당파 제삼십육대장문진인 현청의 처소. <擅入本居者餓> 함부로 본 거에 들어오는 자는 굶는다. <無香錢者不入居> 향전(香錢：시주돈)이 없는 자는 들어오지 못한다. <不逆守本居一切規定則時行不祥事責無> 본 거의 모든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불상사는 일체 책임지지 않는다. 협박인지, 공갈인지 푯말의 옆에는 높이 두 자의 도인상과 함께 시주함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두 무사는 서로 마주보고 한차례 쓴웃음을 흘린 뒤 제각기 몇 냥의 동전을 시주함에 넣었다. 이어 주위를 한차례 휘둘러본 후,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고 있는 뒷마당 어림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3. 기이한 사제(師弟)들 "삼재검법(三才劍法)…… 으험! 잘 들어두어야 하느니라. 삼재 검법은 모두 세 초의 초수로써…… 험험! 말이 좀 어렵느냐?" 투명한 가을햇살을 받으며 한 그루 계수(桂樹)나무 아래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푸른 도복 차림인 것으로 보아 그들이 도사임을 알 수 있다. 조그만 평상(平床)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육십대의 노도인 하나와 헐렁한 도포 차림의 마르고 뚱뚱한 두 소년도인이 좌중의 전부였다. 이들의 생김새는 하나같이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육십대의 노도인은 깡말라 해골 같은 몸매에 세 가닥의 수염을 길렀으며, 시궁창의 쥐처럼 반짝이는 서안(鼠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낡은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너무 낡아 그려진 그림조차 희미하여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그것을 거의 쉴새없이 얼굴에다 부쳐대고 있었다. 사실, 별로 덥다고 볼 수 없는 가을날인지라 그의 몸은 부채바람 탓으로 가련하게도 가벼운 오한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이 십오륙 세쯤 되어 보이는 두 소년도인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좌측의 녀석은 그 덩치가 어찌나 큰지 앉은키가 평상 위의 노도인보다도 두 자는 더 컸고, 주위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마치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쉴새없이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뿐인가? 바람난 송충이처럼 듬성듬성한 눈썹에 온 얼굴을 무차별 얽은 곰보자국. 실로 백 년에 한 번 볼까말까 한 추남(醜男)이요, 박용(薄容)이었다. 우측의 소년도인 또한 그와 비교하여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해괴한 몰골이었다. 그는 어찌나 말랐는지 마치 여러 개의 나뭇가지가 불균형하게 짝을 맞추어 선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또 거기다가 그의 입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두툼하여 멀리서 보면 그 입은 하나의 독립된 기관으로써 갈대가지에 두 장의 벌레먹은 단풍잎이 걸린 듯한 해괴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 노도인은 거푸 말이 어렵냐고 몸과 입이 큰 소년에게 물었고, 두 소년도인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뭇가지 같은 소년도인의 두툼한 입술이 아래위로 마주치며 인간의 소리를 냈다. "사부는 생각이 안 날 때마다 어렵냐고 묻고 있소. 나는 조금도 어렵지 않으니 말을 계속해 보시오." 존대인가, 하대인가? 노도인은 한차례 사나운 눈길로 마른 소년을 흘겨보았다. 하나 그는 그런 어투에 익숙해져 있다는 듯 이내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으험…… 좀 어렵겠지만 삼재검법은 모두 세 초식으로 나뉘어진다. 첫번째 초식은 춘풍화우(春風花雨)로써…… 험험……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춘풍화우다. 두 번째는 횡소천군(橫掃千軍)이고, 세 번째는 선인…… 흠흠…… 지나치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만…… 선인……." 거대한 소년이 무엇인가를 우물거리던 입으로 불투명한 어조를 뱉어냈다. "지로." 갑자기 노도인의 부채질이 빨라졌다. "험험…… 지로라…… 그렇지. 선인지로(仙人指路)가 아니겠느냐? 사부가 말할 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다. 으험험! 여하간 이렇듯 절세의 검법을 너희들이 배우고 있다는 것은…… 대무당파의 최고비전(最高秘傳)임과 동시에…… 험험…… 나는 이 비장의 검술을 무려 이십 년간 연마한 끝에 터득을 해냈으니……."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두 무사는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마주봤다. 그들이 알기로 삼재검법은 결코 절세의 검법도, 무당파의 비전도 아니었다. 하다 못해 강호의 떠돌이 약장수도 이 검법을 알고 있으며, 무림세가의 자제들은 나이 사오 세쯤에 통달해내는 것이 이 삼재검법이다. 그런 하류 중의 극하류 검법이 무슨 절세 어쩌구며 이십 년 연마 어쩌구란 말인가? "벽뢰(霹雷)야, 너는 이 가공할 신기(神技)를 어디까지 익혔느냐?" 거대한 뚱보 벽뢰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일초." "대단한 성취가 아니겠는가! 입문(入門) 팔 년 만에 일초를 연마해냈다는 것은 너의 재질이 백 년에 하나 볼까말까 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 말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사실 두 무사는 도저히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좌측의 무사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저…… 실례하오만……." 순간 세 사제의 놀란 시선이 화들짝 그를 향했다. "누…… 누군가?" 뚱보 벽뢰와 여의는 용수철처럼 퉁겨 일어나 노도인의 등뒤로 바람같이 숨어들었고, 노도인은 머리끝이 쭈뼛 솟아오른 채 떨리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노부의 이목을 속이고 이곳까지 스며들 수 있다니…… 무서운 고수들이로구나." 노도인은 생사대적(生死大敵)이라도 마주친 양, 우수를 가슴 앞에 곤두세웠지만 손끝이 마냥 달달 떨리고 있었다. 무사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심정이 되어 고소를 머금은 채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수업을 방해하여 외람되오만, 소생 등은 대봉황천(大鳳凰天) 순조당(巡照當) 산하 전령무사(傳令武士)인 호해(胡劾)와 당위(唐偉)이오." 노도인의 눈이 거슴츠레해졌다. "봉황이 어쨌다고?" "대봉황천이오." "허어…… 대(對) 봉황이라…… 왜 봉황과 싸우나?" 대저, 고대중국의 사투리 중 동북방의 것을 상어(相語)라 하거니와, 이 상어는 특별히 딱딱한 발음이어서 대(大)와 대(對) 같은 경우는 혼동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래서 대봉황(對鳳凰)이라 발음할 경우에는 봉황을 상대로 싸운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무림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 대(大)든, 대(對)든 대봉황(大鳳凰)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될까? 대봉황, 도합 육십칠 년의 세월동안 무림의 지배자가 되어 이제는 도저히 그 명성의 고하조차 측정할 수 없는 무림 내의 최고방파가 아닌가 말이다.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이던 무사 호해는 드디어 부아가 치밀었다. "대봉황천이란 문파에서 나온 전령이란 말이오." "흐음…… 그럼 방문객이신가?" "그렇소!" 노도인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힐끗 마른 소년 여의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의는 벌떡 일어나 앞마당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며 외쳤다. "시주함에는 동전 네 닢이 들어 있었소, 사부!" "갑을병정(甲乙丙丁)의 정급(丁級)이로군." 노도인은 세 가닥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자리에 그냥 앉도록 하시오. 정급의 방문객에겐 의자를 주지 않고 차를 대접하지 않으니 그렇게 아시오." 호해와 당위, 두 무사는 서로를 힐끗 바라본 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용건은?" 무사 호해가 품속에서 한 장의 배첩(拜牒)을 꺼냈다. 붉은 바탕에 금색의 봉황수를 놓은, 극히 귀해 보이는 지편(紙片)이었다. "금번 대봉황천에서는 사해대검회(四海大劍會)라는 고금미증유의 방대한 규모의 비무대회를 실시하오. 이에 귀 문(貴門)이 대회에 참가하여 자리를 빛내주기를 바라는 뜻으로……." 노도인은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배첩을 받아들었다. 그는 그것을 읽는 둥 마는 둥 쓱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험험…… 이게 무엇인고?" "전 중원의 문파를 모두 망라한 최고의 대회이오이다. 민북(悶北)이나 귀주(貴州)의 제소문파(諸小門派)까지 참가할 것으로 보여 이미 무림전체는 이 일로 떠들썩하오." 노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알겠소. 무당파 제삼십육대장문인 현청은 가히 그대들의 견해를 거래(去來)하며 접(接)하였으니…… 으험, 말이 좀 어렵겠지만 그렇게들 아시오." 두 무사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예를 올리기 무섭게 달음박질치듯 문 밖으로 사라져 갔다. 그들로선 이 도깨비소굴 같은 곳에 단 한시도 더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의도인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물었다. "사부, 거기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소?" 현청도사는 사납게 눈을 흘겼다. "이놈! 너는 사부가 이 속의 내용 따위를 알아보지 못할 줄 아느냐?" "나는 단지 그곳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냐고 물었을 뿐이오." "험험…… 노부로 말하자면 나이 사십에 천자(千字)를 달통한 기재이니 물론 이런 내용쯤은 쉽게 알 수 있다." "뭐라고 적혀 있냐니까요?" "몰라도 돼!" 그후 현청도사가 마렵지도 않은 똥을 누려고 측간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아랫도리를 까내린 채 배첩을 위로 아래로, 거꾸로 옆으로 수십 번을 돌리고 또 돌려 보였다. 하나 불행하게도 배첩에는 그가 알고 있는 글자가 단 한 자도 없었다. * * * <삼가 무당파 장문진인(掌門眞人) 귀전. 금번 시월 스무아흐렛날, 본 천은 중원제협(中原諸俠)의 친선을 돈독히 하는 뜻으로써 만천하의 문파를 망라한 사해대검회(四海大劍會)를 주최하고자 하오. 아울러 본 대검회의 우승자 및 팔위(八位)까지의 고등자(高等者)에게는 본 천의 만룡무계(萬龍武系)의 정식후계자 자격을 부여하니 반드시 귀 파의 정예를 엄선하여 주시길……. 대봉황천 천룡방(天龍 ), 대방주(大 主) 위경경(韋瓊瓊) 배상(拜上)> "사해대검회라는 비무대회에 참석하라는 얘기로군요. 그리고 반드시 정예를 선발하여 달라는 부탁도 있습니다." 치지직― 쇠판 위에서 구워지는 것은 돼지고기다. 빨간 돈육이 기름과 엉겨 알맞게 익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현청, 벽뢰, 여의, 세 도인의 입가에 군침이 맺히고 있었다. "그럼, 우리도 선발대회를 열어야겠구나. 그쪽 고기가 좀 탄다. 운룡(雲龍)!" 여의도인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선발이나마나…… 우리 파의 제일고수라면 당연히 대사형(大師兄)이 아니오?" 현청도사의 사나운 눈길이 그를 향했다. "연습과 실전은 또 달라!" 치지직― 잘 구워진 돼지고기 한 접시를 들고 한 사람이 화덕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소년. 이제 나이는 십육 세쯤 되었을까? 일신에 걸친 낡은 청색도포(靑色道袍)는 몇 군데 기운 흔적이 있긴 하지만 이를 데 없이 깨끗했다. 그의 용모는 그리 준수하다곤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맑고 윤기 흐르는 피부와 드넓은 이마, 완강한 턱이며 얇고 붉은 입술은 그를 매우 사내답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십육 세의 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장대하게 발육한 골격과 체격이 그랬고, 굳게 다물어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이 그랬다.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현청 등은 고기가 앞에 놓이자마자 걸신들린 걸귀들처럼 달려들어 입 속으로 처넣기 시작했다. "최고다!" "사형의 음식은 언제 먹어도 최고야!" 단아한 윤곽의 소년도인은 씩 웃으며 자신은 한쪽에 따로 마련해둔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이래야 푸성귀 몇 조각과 솔방울을 튀긴 것과 검은 보리밥 한 공기가 전부였다. 그는 그것을 매우 천천히, 그리고 꼭꼭 씹어 오랫동안 먹었다. "그런데 운룡, 너는 대봉황천이란 문파를 알고 있느냐?" 소년도인 운룡은 고기를 한 웅큼 입에 문 채 우물거리고 있는 현청노도사를 힐끗 바라본 후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무량수불…… 이 사부도 금시초문이니…… 어쨌든 고기깨나 먹는 문파임은 틀림없나 보더라. 그 초청장 종이는 비싼 거야." 벽뢰가 히죽 웃었다. "그렇게 고기가 많다면 우리 무당파에선 내가 선발돼야겠소." 여의가 냉큼 혀를 내밀었다. "어림없는 소리, 그곳에는 각 문파의 처녀고수들도 많이 올 것이다. 나 정도의 우아한 기품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야 문파 망신이나 시킬 뿐이지." 현청노도사가 두 눈을 부릅떴다. "너희 두 놈은 꿈도 꾸지 마라! 비록 삼재검법이 절세의 검법이기는 하나 일초 정도로는 대회에 참석할 수 없다. 이번 일은 삼초를 모두 터득하고 있는 운룡이나 나, 둘 중 한 사람이 가야 돼!" 고기는 어느새 딱 한 점만이 남아 있었다. 현청노도사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벽뢰와 여의가 재빨리 손을 뻗었다. 순간 현청노도사는 왼쪽 발로 벽뢰의 복부를 힘껏 내지름과 동시에 우수를 칼끝처럼 세워 여의의 팔을 맹렬히 내리쳤다. "악!" "윽!" "험험…… 선발고수란 아무래도 육질을 많이 섭취해야 하는 법이니……." 현청노도사는 고기를 혀끝으로 몇 번이고 핥다가 입 안으로 쑥 집어넣으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일 새벽에는 대망의 선발대회를 열 것이니, 일찍들 자두도록 해라. 물론 이 사부도 참가한다." * * * 운룡은 잠이 없었다. 그는 늘 미명이 돋기도 전인 새벽에 눈을 떴다. 눈을 뜨고난 후의 그의 일과는 언제나 일정하다. 먼저 약수터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물로 냉수목욕을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것이 여름이든 겨울이든, 약수터가 흰 눈 속에 파묻혀 있어도 그는 십육 년 동안 단 하루도 이 냉수목욕을 거른 적이 없었다. 젖은 몸을 마른 수건으로 깨끗이 훔치고 난 다음 그는 쌀을 일군다. 대륙의 동북인(東北人)들은 대개 아침을 거른다. 아침이래야 우유나, 겨를 섞은 죽 정도이고 정오의 점심을 오찬(午餐)이라 하여 가장 풍성하게 먹는 것이다. 하지만 무당파의 게으른 도사들이 일어나는 시각은 대략 정오 무렵이므로 운룡은 그들을 위해 미리 밥을 짓는 것이다. 쌀을 일구면서 그는 반찬할 재료들을 간단하게 점검했다. '사부께선 어류(魚類)를 좋아하시니까 오늘은 특별히 서호(西湖)의 초어( 魚)요리를 해드려야겠다. 벽뢰는 돈육(豚肉)지짐 정도로 하고 여의는 벽뢰의 것을 함께 먹게 하자. 이번 달은 생활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갔으니…….' 불을 지펴 쌀을 안치고 나면 반찬을 만든다. 운룡의 요리솜씨는 인근 백 리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가뭄에 콩나듯 시주라는 것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기실 그의 음식솜씨 때문이었다. 누구에게 특별히 배운 것도 아닌데 그는 간을 맞추는 것과 양념의 배합 등을 기가 막히도록 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더 멋진 음식솜씨를 발휘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이 무당파의 비무대회 참가고수를 뽑는 날이니까. 서호의 초어라는 것은 상해요리(上海料理)의 일종으로써 소주(蘇州) 일대에서도 유명요리로 꼽히는 것이다. 어패류(魚貝類)를 위주로 하되 씹는 맛이 부드럽고 질긴 맛이 없는 나물을 곁들인다는 것이 초어요리의 전통비법이다. 색깔과 모양을 감안하여 생선의 은빛 비늘은 되도록이면 건드리지 않고, 식초를 섞은 간장에 잠깐 담갔다가 생선의 비린내를 뺀다. 연후, 밑가죽을 건드리지 않도록 여러 토막을 내어 우유를 섞은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알맞게 익은 생선의 속살에 생굴을 버무린 양념을 넣으면 대충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반찬과 밥이 식지 않도록 조금 물을 부운 솥 속에 잘 갈무리를 하고난 다음 운룡은 마당으로 나섰다. 어젯밤 바람이 불 때 상수리나무, 자작나무, 단풍나무, 옻나무가 밤새 서걱서걱 마른 잎 부빔을 하더니 또 한아름의 낙엽을 지워버렸다. 보료를 깐 듯 마당을 덮고 있는 낙엽에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익을 대로 익은 가을, 운룡의 열여섯 나이도 저물어 간다. 아침 저녁 나절, 도포의 넓은 소매 사이로 싸하게 밀려드는 한기가 낮 햇살을 삭혀 엷게 만든다. 그러나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정갈한 물빛보다 투명해져 자꾸만 높이높이 달아난다. 영겁이나 영원의 참뜻이 그 하늘 속에 있다는 듯……. 그는 아침일과 중 마지막 과정인 마당 쓸기를 시작했다. 내당 신방돌에서부터 한 개의 티끌도 빠뜨리지 않고……. 시작된 그 일은 반각도 채 지나기 전에 끝났다. 여느 때 같으면 숙주나물 등으로 가볍게 조반을 때우고 채석장으로 나갈 시간이리라. 하지만 오늘은 어젯밤 사부의 분부가 있었으니 선발대회 준비를 해야 했다. "비무대회라……." 운룡은 가볍게 중얼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한 자루의 목검(木劍)을 들고 나왔다. 십육 세의 나이가 되도록 그는 무당산 백 리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었다. '드넓은 바깥 세상…… 그곳에서 벌어지는 비무대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올까?’ 운룡은 목검을 가슴에 안고 마당 한 구석에 정좌하여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한줄기 환상이 떠올랐다. 수많은 협성괴걸(俠聖怪傑)들의 함성 속에 우뚝 선 자신의 모습. 그리고 사문의 비전(秘傳)인 삼재검법으로 당대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하나씩 무릎꿇게 하는 자랑스러운 모습. 운룡의 싱긋 웃는 입가로 설익은 아침햇살이 매달려 오고 있었다. * * * "누가 이길까?" "그걸 말이라고 하니? 당연히 운룡사형이 이긴다." "나도 알아. 우리 내기할까?" "둘 다 운룡사형쪽인데 무슨 내길 하냐?" "이기긴 이기되 그 시간으로 승부를 내는 거야. 나는 운룡사형이 반각 이내에 이길 거리고 생각해." "반각? 좋아. 나는 일각이다." 그러나 장문인실의 문을 벌컥 열리며 나타난 현청노도사의 모습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이미 선발고수전을 포기한 채 한쪽 나무그늘 아래 나란히 앉아 있던 벽뢰와 여의는 놀랐다. 그리고 목검을 안은 채 사부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운룡도 이 느닷없는 모습에 두 눈을 부릅떴다. 해는 이미 천중(天中)에 걸려 정오임을 알리는 시각.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현청노도사는 눈부시리만큼 멋있는 전통적인 도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보라! 칠보쌍봉안(七寶雙鳳眼)이 박힌 학우(鶴羽)의 도관(道冠)을 쓰고 연환표대(連還顆帶)의 당건(唐巾)을 늠름히 머리에 둘렀다. 짙푸른 청색의 도포(道袍)에다 발에는 천경결(千莖結)의 초리(草履)를 신고, 우수에는 마괴사요(魔怪邪妖)를 경번영멸(輕蒜永滅)시키는 종선(棕扇), 좌수에는 건곤(乾坤)의 골채(骨體)로 이루어진 편괴( 拐)를 들었다. 뿐만 아니라 턱 하니 마당에 내려서서 놓은 삼척능대(三尺凌袋) 안에선 소위 도가삼재(道家三財)라 일컫는 세 가지 물건, 즉 천가(千家)의 반(飯)을 담아 고신(孤身)을 만리(萬里)에 유(遊)하여 불노계(不老計)를 구한다는 표발(瓢鉢)과 구천등상(九天登上)하여 타좌(打座)해 앉는 자연포단(紫然蒲團), 그리고 봉래산상(蓬萊山上)에 그 근원을 두고 오호사해(五湖四海)에 창강(滄江)을 담는 삼촌호로(三寸葫蘆)가 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도가의 칠의삼재(七衣三財)를 친친 몸에 두르고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하고 나타난 저 사람이 과연 현청노도사의 진신(眞身)이란 말인가? 놀라서 입을 떠억 벌린 세 제자의 망연한 시선을 안고 현청노도사는 운룡과 삼 장의 거리를 둔 채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가을 일광을 천천히 우러러본 후, 일신에 걸치고 있던 칠의삼재를 모조리 벗어 한쪽에 놓았다. 이어 한 자루 박달나무 목검을 들어 그 무게를 가늠해 보는가 싶더니 운룡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추풍(秋風) 소슬하고 일광만건곤(日光滿乾坤)하야 바야흐로 추색(秋色)이 도도한 오늘…… 너와 나는 운명처럼 이곳에 마주섰다." 무슨 말일까? 어쨌든 거창한 문구라고 느껴졌다. "찰나의 승부에 촌각의 목숨을 거는 무림의 검객으로서 어찌 마주친 운명을 피할 수 있겠는가……." 세 가닥 수염 사이로 새어나오는 한줄기 한숨. "오호…… 애재(哀哉)라! 스승과 제자가 문파의 중흥을 위해 서로를 향해 검을 들다니…… 사부는 눈물을 머금고 제자를 베고, 제자는 한숨으로 그 검을 맞는 이 일장의 슬픈 승부는 무림사에 영원히 남아 모든 중생의 손수건을 눈물로 적실지니…… 아아…… 후세인들은 말할 것이다. 사부의 횡소천군 일식을 조금도 거역치 않고 일초 만에 맞고 쓰러진 제자의 가련한 효심(孝心)을…… 사부는 눈물로 쓰러진 제자를 부축해 일으킨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제자여, 너는 진정으로 용감했노라고." 운룡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 말을 듣고도 자기가 그의 횡소천군 일식을 피해낸다면 자신은 천고의 불효제자가 될 것이 아닌가? 그때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여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 순간 현청노도사의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만약 네놈의 입에서 단 한 마디라도 허튼 소리가 나온다면 네놈의 십구대 조상묘까지 파헤치고 말 테다!" "아아…… 그런 말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오." 여의는 싱글벙글 웃으며 장내로 걸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샌가 한 자루의 빗자루가 들려져 있었다. "사부의 말은 매우 훌륭했지만 그렇게 되면 나와 벽뢰는 내기에 지게 된단 말이오.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점이거든." 쓰윽―쓱― 그는 느닷없이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몇 조각의 낙엽과 하다 못해 조그만 돌멩이 조각까지 모조리 다 골라낸 후에야 여의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맨날 비무하다 지면 돌멩이를 밟아 미끄러져서 그렇다느니, 지는 낙엽이 시야를 가렸다느니 운운하며 자기의 실력은 인정치 않는 사람이 있거든. 오늘이야말로 그런 불상사가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벽뢰가 킬킬 웃었다. "기왕이면 사부의 그 목검도 조사해 봐라. 미리 부러뜨려 놓고선 시비를 걸지도 모르거든." 현청노도사의 얼굴이 칼을 목에 댄 칠면조 얼굴처럼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는 그것으로 성이 안 차는지 앙상한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현청노도사는 느닷없이 운룡의 어깨를 향해 맹렬히 일검을 쳐냈다. 막 자리로 가 앉던 여의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비겁하다!" 팍! 목검은 정확히 운룡의 좌측 어깨 위에 작렬했다. 하나 운룡의 장대한 체구는 요지부동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검을 이리저리 허공에다 비춰보고 있다가 만족스러웠던지 현청노도사를 향해 싱긋 웃었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요, 사부?" 도대체가 파리 한 마리라도 앉았던가 싶을 만큼 태연한 어조. 현청노도사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마치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시작을……." '큰일났구나. 저 우직한 놈이 정면승부를 낼 모양이다. 아아…… 내 미리 언질을 주었는데도 고지식한 저 성품 때문에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것이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내 필살의 일검이 실패를 하다니…….' 위잉―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맙소사! 그 소리는 운룡의 목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였다. 춘풍화우의 단순한 일식! 하지만 그 속에 숨은 힘은 아예 바위라도 부서뜨릴 듯 강맹한 것이었다. "히악!" 현청노도사는 기겁하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자, 사부님! 제이초이오." 춘풍화우에 이른 횡소천군의 제이식! 운룡의 검이 재차 허공을 갈랐다. 그가 삼재검법을 펼치는 순서는 언제나 똑같았다. 춘풍화우에 이어 횡소천군, 그리고 선인지로(仙人指路). 그는 절대 초식의 순서를 바꾸지 않았고, 그것은 속임수라고는 털끝만큼도 모르는 그의 성격을 대신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현청노도사는 그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이 순간 그는 절망에 빠졌다. 힘[力]. 운룡의 몸 속에 숨어있다가 목검을 통해 뻗어나오는 그 힘을 그는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무슨 조화인지 운룡은 나이 십 세에 내당 앞의 무거운 철향로를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나이 십이 세에 지고 온 나뭇짐으론 겨울 내내 땔감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산사태가 일어나 굴러오는 천근(千斤)의 바위를 그는 십사 세인 나이로 받아낼 수 있었다. 지금 십육 세의 그는 오백 년 수령의 거목을 뽑아낸다. 비단, 뽑아낼 뿐 아니라 그는 그 거목을 장난감처럼 휘돌리며 놀 수도 있다. 와지끈― 팍! 도대체 어찌된 걸까? 벽뢰와 여의는 벌떡 일어났다. 마당의 자작나무 한 그루가 반 토막으로 쪼개져 있었다. 또한 현청노도사는 내당 아래의 디딤돌 앞에 거꾸로 처박혀 있었고, 그의 검은 아예 가루가 되어 그의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운룡은 검을 내던지고 그를 향해 황망히 달려갔다. "사부님!" "에구구, 에구구……." 현청노도사는 뼈마디마다 오도독 오도독 소리를 내며 부축을 받고서야 간신히 디딤돌 위로 올라앉았다. "사부님!" "좋아, 좋아. 네놈의 힘은 초(楚)의 항우(項羽)를 능가하고, 촉(蜀)의 황충(黃忠)을 아래에 두는도다. 좋아, 좋아…… 여의!" 네가 이겼느니 내가 이겼느니 벽뢰와 히히덕거리던 여의의 시선이 힐끗 이쪽을 향했다. "칠의삼재를 이리 가져 오너라." 도관, 당건, 도포, 초리, 종선, 표발, 포단, 편괴, 호로, 능대의 열 종류 물건들. 운룡에게 무릎꿇고 앉으라 한 현청노도사는 한동안 산아래 계곡을 바라다볼 뿐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해(四海)를 한눈에 넣듯 시선을 풀어놓고 가을햇살이 빛나는 홍황색의 자연을 저토록 오랫동안 보고 있음은……. 현청노도사의 퀭한 두 눈 아래 주름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느닷없는 좌중의 숙연함에 압도되어 한쪽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여의가 벽뢰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사부도 몹시 늙으셨군." 이윽고 현청노도사는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운룡을 지그시 정시했다. "가람사부로부터 문파를 승계한 지 어언 삼십 년…… 인연이 그리 되어 변변한 상좌 하나 거느리지 못하고 있으나 본 무당파는 과거 무림의 양대태두(兩大泰斗)로 불리던 명문대파(名門大派)였느니라. 내 비록 배운 바 없고 덕망이 부족하여 문파를 크게 부흥시키지는 못하였으되 지금 이 순간까지 무당출신이라는 긍지를 잊어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느니라." "제자도 그러하옵니다." "집중삼매의 오랜 고행을 거쳐, 나고 죽음을 초월한 상태에서 오직 지계(持戒)를 청정하는 것이 도인의 근본이듯, 이제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다 물려주었다. 나 또한 무림을 수행한 적이 없어 다른 문파의 무예는 잘 알지 못하나 가람사부님께서도 그 정화를 다 깨닫지 못하신 삼재검법을 너는 이토록 깊이 달통하였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닐까. 그만한 무예라면 강호에 나가서도 능히 업신여김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모두 사부의 은공이옵니다." "이 모든 것을 미루어 생각해 본 바, 이제 나 현청은 운룡을 무당 제삼십칠대 장령(第三十七代掌令)으로 봉하노라." 순간 운룡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사부님!" "장령으로 봉해지는 자가 능히 지켜야 할 두 개의 맹세가 있느니라. 그 첫째는 무당도가의 백 년 한(恨)이 서린 대적(大敵)인 도마(道魔)를 찾아내 추살함이요, 둘째는 무당의 위엄을 사해만방에 능히 떨치게 함이로다. 나는 이 무거운 짐을 분명 그대에게 내린다." 툭! 하나의 물체가 운룡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금빛! 그것은 바로 금색수실로 소나무와 학(鶴)이 정교하게 수놓인 불진(佛塵)이었다. 무당장령에게만 대대로 계승되어 온 송학천불진(松鶴天佛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운룡은 경황의 시선으로 다급히 이마를 땅에 박았다. "사부님! 제자는 미거하오니……." 현청노도사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빙글 몸을 돌려 앉았다. "지금 즉시 하산(下山)하라, 운룡! 이 넓은 세상을 네 맘대로 날아 보거라." 현청노도사는 눈을 허공에 둔 채 몸을 일으켰다.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깊이 숨겨진 허탈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낡은 봉황문을 열고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 벽에 어지럽게 걸린 난해한 괘효(卦爻)들. 가람사부의 초상 옆으로 가물거리는 촛불이 문득 한줄기 과거지사를 불러일으켰다. 언제던가……. 산길도 끊겨 인적도 없던 그 늦은 겨울. 온통 위엄일색으로 가득찬 외팔이 사내의 손을 잡고 도관 마당으로 들어서던 아이 하나.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하얀 솜옷에 푹 파묻혀 해맑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신기한 듯 굴리던 그 모습이 마치 어린 토끼 같았다. 사내는 하나밖에 없는 손을 합장하며 말했다. "이 아이를 진인(眞人)의 밑에 두고자 하오." 그 해맑은 눈동자며 청수한 모습이 자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 생각했으나 그 아이는 곧잘 자신을 따라주었다. 그 외팔이 사내는 산아래 움막을 짓고 살았고, 이따금씩 아이가 그를 만나는 모양이었지만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지도, 굳이 캐물어 볼 생각도 없었다. 그러던 세월이 벌써 십 년 하고도 다시 한 해. "그래……." 현청노도사는 중얼거렸다. "그 해맑은 눈으로 늘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놈이었지. 애초부터 우리와는 다른 세상의 녀석이었어." 마당쪽이 어수선해졌다. 벽뢰와 여의가 떠들고 있었다. "사형, 비무하는 곳에 먹을 것이 많이 있거든 좀 싸가지고 오시오." "사형이 없으면 그 맛있는 반찬은 누구에게 얻어먹지?" 운룡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삼가 운룡은 명을 받자와 무림으로 출도(出道)하오! 부디 사부님의 만수무강을 비옵니다!" 언제부터 맺혀 있었는지 눈물 한 방울이 현청노도사의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넌 우리와는 틀린 놈이거든…… 그 넓은 세상을 네 마음대로 날아 보아라…….' 한데 참으로 뜻밖이었던 일은……. 운룡이 무당파의 산문을 나서던 바로 그 시각, 현청노도사의 초옥에선 평생 읊지 않던 한소리 계송(溪誦)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삼라만상이 손바닥 위에 놓인 것 같은 무한한 도의 경지를 뱃속에 가득 채워서 읊어내는, 벽계수 약수물보다도 더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계송이었다. 4. 강호초행(江湖初行) 초옥(草屋). 그것은 한 채의 매우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초옥이었다. 마당에는 짐승가죽과 고기를 널어 말리는 나무대가 놓여 있었고, 몇 그루의 야생매화(野生梅花)가 정갈하게 심어져 있었다. 초옥은 무성한 송림(松林)을 뒤로 둔 야트막한 둔덕에 서 있었고, 그 풀잎지붕이 이고 있는 하늘은 베면 피라도 배일 듯한 푸른빛이었다. 운룡이 초옥의 싸리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마당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묵묵히 앉아 대나무로 만든 활을 다듬고 있었다. 그의 인상은 매우 냉막했다. 혈관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냉연한 그 얼굴은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운룡을 보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소주(少主)님을 뵈오." 운룡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냉아저씨는 나를 또 그렇게 부르시는군요. 의부(義父)님께선 안에 계시오?" "계십니다." 그의 시선이 운룡의 차림새를 한차례 가볍게 훑었다. 먼길을 떠나는 행색이었으며, 큰 예식에 준해서야 입는 칠의삼재의 요란한 행색이었다. 하나 그는 먼길을 가느냐는 말도, 옷에 대한 의문도 단 한마디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묵묵히 앉아 자신이 하던 일을 조용히 이어갈 뿐이었다. 삐이걱― 먼지가 쌓여 있는 문이 조금 둔탁하게 열렸다. "이음목 부분에 기름칠을 해야겠군." 운룡은 가볍게 중얼거리며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매큼한 약 냄새가 자욱하게 코끝을 찔러왔다. 방안은 사방 네 평 정도로 구석쪽에 작은 문갑이 놓여 있는 것 외에는 매우 간결한 구조였다. 한 자 크기의 다탁(茶卓)을 앞에 두고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방안은 창문이 높게 달린 탓으로 매우 어두웠으므로 그 사람의 모습은 그저 윤곽 정도나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둠 속의 빛기둥 같은 가는 햇살이 먼지 한올 한올까지 투영해내는 속에서 그는 죽음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등을 지고 앉아 있다는 것과 한쪽 팔이 어깻죽지부터 잘려나간 탓에 빈 소매가 허리춤에 묶여 있다는 것뿐. 운룡은 장대한 위엄이 뒷등에 서린 이 거한을 향해 공손히 무릎을 꿇고 대례를 올렸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의부님?" 가슴속 오장육부까지 쿵쿵 두들겨대는 듯한 목소리가 거한에게서 흘러나왔다. "오늘은 오는 날이 아니잖느냐?" "소자는 사문의 명을 받들어 사해대검회라는 비무대회에 참가하러 갑니다. 비무날이 이달 스무아흐렛날이고, 장소가 태산(泰山)이니 왕복 한 달쯤 걸릴 것 같습니다." 거한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봉황천?" 운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거한에게 물었다. "그곳을 알고 계십니까?" "대회에 대한…… 지편(紙片)을 보내온 것이 있느냐?" 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무당파 앞으로 된 초청장을 꺼냈다. 거한은 등을 돌린 자세로 홍색의 초청장을 오랫동안 바라보더니 문득 한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의 시선이 높은 창문을 향했다. 그렇게 반각쯤의 시간이 흘렀다 싶을 때, 거한의 입에서 무거운 어조가 흘러나왔다. "냉혼, 게 있으냐?" 즉시 짤막한 대답이 뒤를 이었다. "분부 기다립니다." "술상을 봐 오너라." 운룡의 얼굴에 순간 크게 놀란 빛이 떠올랐다. 그는 이 근엄하고 무서운 의부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차려온 술상은 단출했다. 호로병에 담긴 화주(火酒) 한 병과 밀떡 서너 장, 그리고 사과, 배 등의 과일 약간 뿐이었다. 냉혼이 한쪽에 좌정하여 앉자 운룡은 즉시 상 위에 놓인 과일을 깎기 시작했다. 그가 과일을 보기 좋은 모양으로 다 정돈해 놓았을 때에야 거한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비로소 그의 윤곽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드문드문 새치가 섞인 무성한 구레나룻. 송충이처럼 굵은 눈썹에 호안주순(虎眼朱脣)의 장년인. 부처를 수호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이런 위엄을 지니고 있을까? 장판교(長板橋)에서 홀로 조조(曹操)의 십만대군을 맞은 촉(蜀)의 장비가 이런 용맹을 지니고 있었을까? 거한은 마치 인간이 아니라 산이 웅크린 듯한 위엄의 소유자였다. 사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운룡은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거한은 단숨에 삼배(三杯)를 들이켰다. 안주 한점없이 물을 퍼붓듯 술을 삼키고 난 그는 문득 한 쌍의 호안으로 운룡을 정시해 왔다. "받아라." 운룡은 얼떨떨하여 급히 잔을 받았다. 쪼르르― "마셔라." 운룡은 한쪽의 냉혼을 힐끗 바라본 후, 두 눈을 딱 감고 술잔을 입 속에다 부었다. "쿨룩쿨룩……." 순간 격렬한 기침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속이 탔다. 과실이나 곡식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란 것을 머리털 나고 처음 마셔보는 그가 아닌가? 더구나 술을 붓고 불을 놓으면 그대로 화염이 되는 독한 화주. "끄윽…… 끅……." 운룡은 활활 타오르는 듯한 내장이 일으키는 기침을 참느라고 목구멍을 부여잡고 켁켁 소리를 냈다. 거한의 고요한 음성이 빈 술잔에 떨어졌다. "내가 너에게 가르친 것이 있다. 인생을 살되 어찌 살라 하였느냐?" "끄윽…… 사람을 대하매 속임이 없고 일을 대하매 정당하며, 자신의 마음에 물어 부끄러움이 없고 하늘을 우러러 깨끗한, 그런 삶이라야 한다 하셨습니다." "옳다. 이제부터의 삶은 바로 너의 것이다. 너에게 배당된 한 잔의 술을 마시듯…… 이제 다시 너의 잔에 술을 채워주는 사람은 없다. 네 스스로 채워야 한다. 자신의 삶을 남이 대신 살아줄 순 없는 것이다." 운룡의 몸이 흠칫했다. '의부께서는 오늘 지나치게 많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구나. 그리고 그 뜻 또한 심오한 것이 아닌가. 내가 비무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그토록 큰일인 것일까?' "냉혼, 그 상자를 가져 오너라." 냉혼은 힐끗 거한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방의 한쪽에 있는 문갑을 열어 사방 두 자 남짓의 상자를 하나 꺼내 왔다. "그것을 열어보라, 운룡." 탕! 뚜껑이 열리자마자 삼엄하게 솟구치는 보광(寶光)! 운룡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안에는 하나의 신비롭도록 영롱한 구슬 하나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세 가닥으로 접혀진 활이 자주색 비단 위에 놓여 있었다. 거한은 묵묵히 세 가닥으로 접힌 활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펴들자 파팍!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하나의 훌륭한 탄궁(彈弓)으로 변했다. 거한은 거의 운룡의 키만한 그것을 천천히 쓰다듬는가 싶더니 운룡을 향해 내밀었다. "이것은 과거 내가 쓰던 헌원탄궁(軒轅彈弓)이니라. 그리고 이 탄궁은 백 년의 내력이 없으면 시위조차 당길 수 없는 것이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도록 하라." 활 전체가 거무스름한 묵광(墨光)으로 신비롭게 빛났다. 활의 위쪽에는 정교한 용의 조각과 함께 헌원(軒轅)이란 두 글자가 전자체(篆字體)로 새겨져 있었다. "향후, 네 스스로 백 년의 내력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될 때 음산(陰山)의 만년냉소(萬年冷沼)를 찾아라. 그 안에는 천 년을 묵은 독각교룡(毒角蛟龍)이 살고 있으니 그놈을 잡아 힘줄은 시위를 만들고 뼈로 화살촉을 만들어라. 독각교룡의 힘줄이 아니면 헌원신궁은 당겨지지 않는다. 알겠느냐?" "예." 운룡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백 년의 내력이라는 것은 어찌 알 수 있나요?" "너는 내가 가르쳐 준 천기대나인신공(天機大那引神功)을 기억하고 있느냐?" 운룡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말고요." 천기대나인신공! 운룡의 의부는 십육 년의 세월동안 그에게 이 하나의 신공만을 가르쳤을 뿐이다. 방법은 보통의 좌식법(坐息法)과 대동소이하되 다만 늘 발밑의 용천혈(勇泉穴)에서 진기가 끝나는 것이 틀렸다. 운룡은 이것을 처음 배운 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연마해 왔으나 별 신통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을 지금 연무해 보아라." 운룡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무릎을 꿇고 있던 자세에서 정좌의 자세로 급히 바꾸어 앉았다. 연후, 천천히 몸 속의 진기를 끌어올려 천기대나인신공의 구결(句訣)대로 움직여 가니, 일각의 시간이 흐른 후 그의 머리 위로는 희미한 백색의 원이 피어올랐다. 그때 거한이 날카롭게 외쳤다. "눈을 뜨라!" 운룡은 번쩍 눈을 떴다. "무엇이 보이느냐?" "백색의…… 음…… 희미한 원이 머리 위에 떠 있군요." 거한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지금까지 연마한 네 공력의 실체(實體)이다. 나이 삼 세부터 십육 세까지 도합 십삼 년 내력의 결정(結晶)이라 할 수 있다." "후유…… 그러면 아직도 팔십칠 년의 내력이 더 있어야 헌원신궁을 쓸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때면 늙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리석은 놈!" 거한은 한 쌍의 호안을 부릅뜨며 꾸짖듯 말했다. "연후 강호에 나가 적과 대적함에 있어 무기가 아닌 권장(拳掌)으로 해오는 공격은 되도록이면 몸으로 받도록 해라!" "받으라고요? 그럼 얻어맞으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단, 받을 때 반드시 천기대나인신공을 운기해야 한다. 그리고 매달 대보름 때마다 운공하여 머리 위의 형체를 확인하라. 그 형체가 다섯 송이의 연화(蓮花) 모양이 되었을 때가 바로 백년내공(百年內功)이 이루어지는 때다." "다섯 송이 연화라……." 거한은 운룡이 말을 이을 여유도 주지 않고 다시 상자 속에서 영롱한 광채의 구슬을 꺼냈다. 현란한 백색의 광채. 크기는 엄지손가락만한 것이 햇살보다도 더 밝은 빛으로 이글거렸다. "이것은 백옥주(白玉珠)라는 것으로써 인세에 드문 희귀한 보병(寶兵)이다." "보병? 그렇다면 그것이 무기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 묘용(妙用) 또한 백 년의 내력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니 백년내공이 이루어진 후에 이것을 시험해 보도록 하라. 이것은 네 친부(親父)의 유물이다." 순간 운룡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 버지……?" 아버지! 황혼이 되면 자신의 굴로 돌아가는 들짐승들이 있었다. 이슬을 피해 어미의 날개깃 속으로 파고드는 어린 날짐승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쓸쓸히 웃음짓던 날들이 운룡이라고 왜 없었으랴? 아니, 어릴 때 의부에게 그 의문을 물어보았다가 호통을 당한 후, 입 밖으로 감히 낼 수 없어서 더욱더 응어리진 그리움인지도 모른다. "아…… 버지……." 운룡은 구슬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어 보았다.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해 오히려 낯선 아버지라는 세 글자가 목을 메여오고 있었다. 거한은 침통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앉았다. "가거라." 짤막한 한 마디. 그것은 할말을 다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운룡은 헌원신궁과 백옥주를 품속에 갈무리한 후 거한의 뒷모습을 향해 공손히 대례를 올렸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의부님." 냉혼이 문 밖까지 따라나왔다. 운룡은 마당을 천천히 둘러본 후 싸리문을 밀었다. 하나 싸리문을 밀다 말고 그의 시선이 힐끗 냉혼을 향했다. "냉아저씨, 아버지의…… 이름을 당신은 알고 있겠지요?" 냉혼의 냉막한 얼굴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초옥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일성 장탄식을 터뜨렸다. "화천상(華天上), 화천상대공이십니다." "화천상…… 그럼 내 속세의 성도 화씨라는 얘기로군." 운룡의 얼굴에 문득 우울한 웃음이 번졌다. "대공이라 불릴 정도로 훌륭한 분이셨소?" 냉혼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더니 느릿하게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말할 수 없이 훌륭한…… 소주님의 의부께서 이 세상의 단 하나의 영웅이라 칭할 정도로……." "됐소. 고마워요." 운룡은 냉혼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나서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터벅터벅― 산길을 걸어 내려가는 그의 등뒤로 한 줄기 가을햇살이 우울하게 밀려들고 있었다. 냉혼은 그 모습을 장승처럼 선 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이 냉철한 사나이의 두 눈에 고이는 것은 뜨거운 장부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한소리 탄식이 빈 산속에 울려 퍼졌다. "닮으셨군…… 슬픔을 참는 방법까지도 주공을 닮으셨어……." * * * "대봉황천에서 비무대회를 연다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무거운 어조였다. 냉혼은 거한 위지중걸이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신다고 생각했다. 위지중걸, 그는 벌써 다섯 병째의 화주를 비우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약(藥)으로 지탱하시는 몸인데…… 지나치시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나는 비무에 대해 물었다." 냉혼은 한소리 탄식과 함께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세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겠군요. 첫째는 이 년 앞으로 다가온 십사연방천하검회에 대비하여 자체의 능력을 재평가해 본다는 것이고, 둘째는 해외의 십대세력에 대한 견재를 위해 잠자고 있는 중원의 세 세력, 즉 화남 광무천, 한북 용권풍, 중주 신선도를 자극한다는 의미가 있겠습니다. 세 번째는…… 이것은 인재가 많은 대봉황천으로써는 극히 희박한 이야기겠지만…… 이번 비무를 통해 십사연방천하검회에 참가할 화북 만룡가의 대표를 선발하려는 것이 아닐지……." 막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위지중걸의 손이 멈칫했다. "바로 그것이다. 앞의 두 이유도 타당성이 있긴 하지만 세 번째 이유가 가장 그럴듯해." 냉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대봉황천은 기라성 같은 노장, 소장고수들이 어우러진 인재의 총본산이라 할 만한데요……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 위지중걸은 흔쾌히 잔을 넘겼다.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을 것이다. 무예에는 우리가 모르는 신비로운 세 단계가 있다고." "공령(空靈)…… 무예의 마지막 계열인 공령에 이르기 위한 조화(造化), 지념(止念), 공심(空心)의 세 단계 말씀입니까?" "그렇지. 만룡가 대황봉천을 포함해서 십사연방 수뇌부의 무예수준은 공령의 첫번째 단계인 조화경(造化境)까지 이르러 있다. 천하검회에 참가하자면 최소한 두 번째 단계인 지념경(止念境)까지 끌어올려야 겨우 안심할 수 있다. 대봉황천의 노성주께서는 그러기 위해 성심마공(聖心魔功)이란 일종의 교량역할을 하는 무예를 연마하고 계셨지." "……." "가정이지만, 만약 노천주의 무예연마에 중대한 결함이 발견되었다면…… 그리하여 천하검회의 시일은 촉박하게 다가오고 그것에 대한 대안(代案)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면……." 냉혼은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실패란 말입니까?" "없다고 할 순 없는 일이지." "설마……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진천우도 노천주 같은 절대의 고수가 연마해내지 못한 무예를 누가 대체 연마할 수 있겠습니까? 시일도 이 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위지중걸은 참으로 오랫만에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무예는 시간으로 연마하는 것이 아니야. 재질이 무예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는 말과 함께 술상 위에 놓여 있는 사과를 들어 보였다. "이 사과를 보라. 운룡이 깎은 것이지만 깎인 모양이 어딘가 다르지 않은가?" 냉혼은 사과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보통 사과는 횡(橫)으로 깎는 법인데 이 사과는 드물게도 종(縱)으로 깎여 있군요." "자네는 사과를 밑으로 깎아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나도 없네. 즉 운룡은 스스로 그렇게 깎는 법을 터득한 거야. 그런데도 깎는 시간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네. 그놈은 두 개의 사과를 깎는 데에 술 한 잔 마시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어." "그렇다면……?" 위지중걸은 피식 웃었다. "그놈은 치우천인이야. 즉, 그놈은 어떤 것을 보고 배우면 그 즉시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어낸다." "흐음……." "현청이 비록 기초가 없고 삼재검법이 하류검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현청은 그 검법 하나만을 수십 년 동안 수련해 왔지.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현청의 삼재검법은 나름대로 달통의 경지에 이른 것이네. 그런데도 운룡은 그를 이겼지. 이유는 치우천인이란 괴상한 재질이 그렇게 만든 것일세." "그렇군요……." 위지중걸은 다시 한 잔의 술을 천천히 따라 마셨다. "대봉황천은 바로 그런 인재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아는, 즉 화북 만룡가의 운명을 걸머질 희대의 기재(奇才)를!" "운룡을 그곳으로 보내신 것은 바로 그들의 무예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 위지중걸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것 보게, 냉혼. 자네와 내가 운룡, 그놈을 가르치는 문제를 놓고 얼마나 고민을 했는가. 나이 두 살 때, 천자문을 가르치자 그것을 술술 외던 그놈을 말이야." 냉혼도 따라 웃었다.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지요." "하지만 결국 우리는 천기대나인신공 외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네. 그 뛰어난 재질에는 보통 무예는 오히려 흠이 될 뿐이었으니까. 고민 끝에 우리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그에게 튼튼한 밑천을 준다는 것이었지. 즉, 어떤 난해한 무예라도 능히 소화해낼 수 있는 강인한 체력 말일세." "소주의 나이 오 세까지 일천여 종의 약초를 밥 대신 먹이고, 물 대신 쓰게 했지요." "세상의 귀한 영단(靈丹), 영물(靈物)을 다 먹였고 천기대나인신공의 바탕을 심었지." "……." "천기대나인신공은 상대의 내력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묘용이 있다. 창검으로 몸이 잘리지 않는 한 어떤 공격이든 다 자기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흠이라면 나이 삼 세 때부터 반드시 익혀야 하고, 또한 백 가지 양성신초(陽性神草)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운룡은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지 않았는가? 그는 한마디로 완벽한 체력을 갖추었다." 냉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한줄기 이채를 번뜩였다. "그렇다곤 하지만…… 소주가 일신에 지닌 무예가 너무 빈약한 것이 좀……." "무예?" 위지중걸의 얼굴에 담담한 웃음이 번졌다. "난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해보지. 그 녀석이 지나칠 정도로 우직하지 않은가. 정직하고 충직하다는 것은 좋긴 하지만 총명을 가리게 된다네." "확실히…… 그렇지요." "하지만 그놈은 과거 무예의 천재였던 진천우도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어떠한 경우라도 핏줄이란 건 속일 수 없지. 그렇다고 볼 때 치우천인의 기이한 근골이 그렇게 시키고 있는 건지도 몰라. 즉, 겉으로 총명이 그 드러나지 않도록 가리고 있는 거란 말일세." 냉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해하기 어렵군요." "벌레가 자신의 몸을 나무와 땅의 색으로 위장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사실 치우천인이란 건 너무 뛰어나다. 그 뛰어남을 위장함으로써 외부의 적을 막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 "오오……." "언젠가 그 껍질이 벗겨지고 나면 우리는 이제까지 인세에서 보지 못했던 일대기재의 탄생을 보게 될지도 모르네." 위지중걸의 시선이 창쪽을 향했다. 텅 빈 시선으로 그가 말했다. "쇠는 달구어져야 한다. 알도 껍질을 깨는 아픔이 있지 않고서는 하나의 생명으로 탄생할 수 없지. 앞으로 그에게 닥칠 고난이란 건 껍질을 벗기 위한 아픔인 것으로 생각하면 될 거네." 말을 잇던 위지중걸은 돌연 몸 속에서 짧은 피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그것을 힘껏 불었다. 삐이익― 귓청을 찢을 듯한 소음. 그로부터 반각 가량이 지났을까? 돌연 한줄기 기음과 함께 장내로 두 줄기의 뿌연 인영이 나타났다. 스스스스― 놀랍게도 이들은 나타났으면서도 흐릿한 모습이었기에 어떤 얼굴이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하나의 인영은 믿을 수 없이 말랐고, 또 하나의 인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뚱뚱하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위지사부." 두 인영 중 한 인영이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하산하여 소주인의 뒤를 따른다." "하산입니까?" "단, 어떤 경우에도 그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기 전까지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말도록." "존명!" 커다란 고함과 함께 두 개의 흐릿한 그림자는 번쩍하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河水蒼山路向來 東南山祖大河通 寒樹希微遠天外 夕陽明滅亂流中 강물 좌우에는 푸른 산이 서 있구나. 배 위에 몸을 싣고 동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넓은 황하 동남쪽이 보이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아득한 하늘 끝에 희미하게 서 있는 나무 차가운 맛 풍겨주고, 지는 해 물과 더불어 흘러가고 있구나. 찰랑찰랑― 물이 흔들리니 배도 더불어 흔들린다. 맑디맑은 물 속으로 가을햇살 한 줄기가 덧없이 흐르고, 그 물 속에 손을 담그면 손마저 푸르게 물들세라. 이곳은 용주(龍州)에서 협성(陜城)으로 이르는 수로(水路)였다. 너비 십여 장의 거룻배에는 행상(行商) 차림의 거상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약간의 부녀자와 승복 차림의 승인들도 보였다. 그 한쪽, 굵은 타목(舵木)을 이리저리 힘주어 미는 조타수(操舵手)의 아래 뱃전에 홀로 기대앉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도사(道師)인데 그 모양이 가히 가관이다. 붉고 푸르고 희고 누런 옷에, 울긋불긋하며 휘황찬란한 장식과 도패(道牌)들, 양 어깨로는 한 자루 청강장검과 불진(佛塵)을 번갈아 메었고, 허리춤에는 종선(棕扇)을 매달았으며 우수에는 한 자루 편괴( 拐)를 들고 있었다. 어찌 보면 생사람 잡으러 나선 선무당의 몰골을 한, 이 현란한 차림새의 주인공은 불과 십오륙 세의 소년이었다. 호기심섞인 부녀자들의 시선이 쉴새없이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는데도 소년도인은 매우 태연자약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뱃전에 기댄 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그의 동공은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도인은 사문의 명예회복과 천하양명(天下揚名)의 중차대한 임무를 끌어안고 산을 떠나온 운룡이었기에 지금 매우 많은 생각과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진인도성(眞人道聖)의 일대기를 보면 자고로 행도(行道)의 길에 나선즉, 무슨무슨 도적떼와 마주치고 악당들을 만나 협의의 검을 뽑아 그들을 징계했다는 대목이 숱하게 많다. 그런데 나는 산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나도록 쌀알을 훔치는 쥐새끼조차 만나지 못했으니…… 아아…… 협행(俠行)의 길은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던가, 아니면 내 도력이 부족함인가…… 그것도 아니면 요즘 도적떼들은 모조리 개과천선이라도 한 것일까? 답답하기 이를 데 없구나.' 돌연 찢어지는 듯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조용한 선상에 울려 퍼졌다. "앙앙……." 동시에 삼십 세 가량의 아낙네 하나가 다급히 일어서며 울먹이는 것이 보였다. "이 아이 좀 봐주세요! 누가, 누가 빨리 좀……." 옷고름도 채 여미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던 듯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이삼 세 가량의 아기는 찢어질 듯이 울고 있었다. 우는 아기의 입가로 허연 수액이 질질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허어…… 저게 무슨 변괴인가?" "급체인가? 저런, 저런…… 수액 속에 피도 섞여 있다." 운룡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때 사십대의 거상꾼 하나가 느닷없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도사님, 어서 저 아이를 좀 봐주시구려!" 사람들의 시선이 힐끗 이쪽을 향하는가 싶더니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도사님이 계셨군. 어서 이쪽으로!" "도사님!" 대저, 이 시대의 도사들은 태반이 약간의 의술(醫術)을 지녔던 터, 개중에는 도력(道力)과 의술을 혼합하여 죽은 자도 살린다는 명인도 있었다. 하지만 강제로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여 아기의 앞으로 다가선 운룡은 일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지경에 빠져 버렸다. 도대체 자신이 의술에 대해서 무엇을 안단 말인가? 부글부글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아기의 맥(脈)을 엉겹결에 짚긴 했지만 들리느니 맥박소리요, 짚이느니 병은 틀림없는 병이라는 것뿐! "병…… 병이군요." 소년도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기랄! 나타나라는 도적떼는 안 나타나고 이게 무슨 경천동지할 괴변인가?' 바로 그때였다. 홀연 이를 데 없이 희고 고운 손 하나가 스르르 아이의 맥문을 짚어왔다. 손을 덮고 있는 장포는 쳐다보기조차 눈부신 백의(白衣)였고, 옷자락을 살며시 더듬어 올라가자니 빼어난 자연석처럼 차갑고 섬세한 목덜미가 시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 송이 꽃잎인 양 붉디붉은 입술이 나풀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 궐음병(蹶陰病)이라는 것이오." 귀공자(貴公子). 이제 나이 십육칠 세 가량 되었을까? 마치 인형처럼 빼어나고 수려한 이목의 귀공자였다. 그는 수중의 무릉선(武陵扇)을 한가롭게 저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양기(陽氣)가 위로 올라가고 음기(陰氣)가 아래에 남아 음양의 기가 제각기 떨어져서 교역되지 않을 때 수족(手足)이 궐냉(蹶冷)되는 것을 궐음병이라 하오." "오오……." "이는 상열하한(上熱下寒)의 상(狀)이 있고, 복부에 작열한 통증이 있으며 배가 고픈 것 같으면서도 먹을 수 없소. 먹게 되면 바로 토하오. 토물(吐物) 속에 피가 섞이는 것은 과거에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오." 말과 함께 귀공자는 수중의 섭선을 아기를 향해 가볍게 부쳤다. 그러자 자지러질 듯이 울어대던 아기가 울음을 뚝 그치며 이내 쌔근쌔근 잠드는 것이 아닌가? 귀공자는 아이의 모친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읍내로 들어가거든 곧장 대황(大黃)을 섞은 순기제(順氣劑)를 먹이도록 하시오. 사군자탕(四君子湯)이나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이 좋을 것이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자님." 운룡을 비롯한 중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실로 신묘한 의술이요, 비범한 풍도가 아닌가? 귀공자는 운룡의 옆을 스쳐 지날 때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웃음[笑]. 마치 봄볕에 송화(松花)가루 터지듯 밝고 천진한 웃음이었다. 게다가 입술 사이로 드러난 치아는 박속처럼 희고 깨끗했다. 운룡은 제자리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사내의 웃음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귀공자의 모습은 가슴이 아리도록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운룡의 시선이 쉴새없이 가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쪽 뱃전에 기대어 선 귀공자는 다시는 운룡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배는 쉬임없이 물길을 따라 흘러갔다. 용주와 협성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기수(淇水)는 말미에서 황하(黃河)의 한 강줄기로 이어지는 큰 강이었다. 배가 강심쯤에 이르자 주위의 경색은 가히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변했다.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것은 종남삼십육봉(終南三十六峯)의 자태요, 강의 양안에는 붉은 화강절벽이 우뚝 치솟아 있었다. 절벽의 사이사이 휘늘어진 천 년 덩굴 새로는 원숭이떼들이 무리지어 뛰어넘으니, 양쪽 강 언덕의 원숭이 소리는 끊임없고[兩崖猿聲啼不佳], 가볍게 이 몸 실은 배는 산과 산을 지난다[輕舟己過萬重山]라고 읊은 이백(李白)의 시구에 정녕 합당한 모습이었다. 이때 문득, 저 멀리 강의 하류쪽으로부터 느닷없이 한 척의 배가 나타났다. 조타수가 손으로 이마에 그늘을 만들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이 시간에 상류로 배를 저어오다니…… 무슨 미친 짓일까?" 배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그것은 순식간에 거룻배와 삼십여 장의 간격을 두었는데, 배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조타수의 입에선 한소리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맙소사! 저것은 생사선(生死船)이다!" 한가로이 졸거나 앉아 있던 거상꾼들은 이 한소리에 자지러질 듯 놀라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생, 생사선?" 다가오고 있는 배의 돛대에 꽂힌 두 개의 기(旗). 하나는 먹물 같은 검은 바탕에 섬뜩하도록 흰 해골 문양과 생사(生死)라고 쓰여진 두 글자가 양각(陽刻)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핏빛처럼 붉은 바탕에 줄 수(授)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배는 몹시 컸다. 가까이서 보니 배는 거룻배의 열 배는 족히 되어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아래에서 보자니 위쪽의 선창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배의 양편으로는 오십여 개의 긴 노(櫓)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거상꾼 중의 한 사람이 다급히 외쳤다. "붉은 깃발에 쓰인 글자가 줄 수(授)인가 받을 수(受)인가 빨리 확인해 봐라." 한 사람이 말을 받았다. "줄 수요." 순간 거룻배의 거상꾼들은 일제히 머리 위로 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외쳤다. "만세!" "만세!" 이렇게 되자, 어리둥절해진 운룡은 다급히 옆에 있는 거상꾼을 붙잡고 물었다. "왜 만세를 부르시오? 저 배가 당신의 친척이라도 되오?" 거상꾼은 운룡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피식 실소를 흘렸다. "보아하니 칼 찬 양반이…… 그래, 생사선을 모르시오?" "생사선?" "생사선은 황하 일대에서 가장 큰 악명을 날리는 수적(水賊)떼요. 그 세력은 강호의 일개 문파를 능가하고, 그 힘은 천하의 으뜸일 것이오." 운룡의 두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수적? 그렇다면 도적이 아니오?" "그렇소." '오오…… 기회는 왔다!' 운룡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당신은 왜 만세를 부르시오? 도적이라면 당신의 돈을 강탈해 갈 것이 아니오? 돈을 잃는 것이 그리도 좋소?" "그것은……." 거상꾼이 막 말을 이으려 할 때, 돌연 멀리서 징소리가 들렸다. 징― 일성 거대한 징소리가 수상의 정적을 자욱이 찢었다. 동시에 생사선의 선창으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한데 최선두에는 엉뚱하게도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수레 하나가 나타났다. 마치 삼국시대의 공명(孔明)이 탔던 일여평교자(一與平橋子)와 유사한 모양을 한 그 수레에는 한 명의 혈의청년(血衣靑年)이 도도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매우 깨끗하고 단아해 보였다. 옷에는 티끌 하나 묻지 않았고, 일신에 걸친 모든 장식은 최고의 호화로운 것이면서도 격조높은 우아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사람이라면 천만인 속에 섞여 있어도 능히 눈에 띄리라. 혈의청년의 좌측에는 표범가죽으로 만든 피의(皮衣)를 걸친, 날렵하게 생긴 미소녀 한 명이 서 있었다. 별빛 같은 두 눈과 허리 아래까지 찰랑찰랑한 긴 흑발이 야생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그녀는 대리석처럼 흰 두 다리를 내놓은 보기 드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이 수려한 일남일녀의 좌우로는 일률적으로 혈의(血衣)에 혈건(血巾)을 두른 대한들이 일렬로 쭉 서 있었다. 생사선과 거룻배의 거리는 십여 장 정도. 이때 피의미소녀가 백옥 같은 우수를 높이 쳐들었다. 순간 우측에 서 있던 혈건인(血巾人)들이 일제히 허리춤의 대감도(大坎刀)를 빼들었다. 챙― 창― 이어 그들은 십여 장의 허공을 비조처럼 날아 내려와선 뱃전에 몸을 세웠다. 삼엄한 도광(刀光)이 일순 거룻배 위의 허공을 자욱이 뒤덮었다. 피의미소녀의 붉은 입술이 나풀거렸다. "긴말하지 않겠다! 황하 일대를 지나는 자들은 본 생사선의 주머니를 한 번씩 견식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거상꾼들은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여 일제히 소리쳤다. "마땅히 알고 있소!" 그때 뱃전에 쭉 둘러서 있던 혈건인들이 느닷없이 한 개씩의 가죽주머니를 배 위에 내던졌다. 찰그랑! 철컹! 묵직한 둔음으로 미루어 보아 돈이 가득 든 주머니인 것 같았다. 피의미소녀가 다시 외쳤다. "목숨이 아깝거든 그 돈을 가져가라! 그렇잖으면 이렇게 만들어 준다!" 휘이잉! 한소리 파공음과 붉은 광채가 이는가 싶더니 돛대 하나가 와지끈 부러져 나갔다. 일개 아녀자의 손속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지막지한 장풍이었다. 거상꾼들은 희색이 만연하여 급히 가죽주머니를 주우려 했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일성과 더불어 번쩍 나타난 이가 있었다. "잠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했다. 그곳엔 한 명의 소년도사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운룡! 그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는 수중의 편괴를 쿵쿵 찍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실로 요망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로다! 어찌 백주대로에서……." 하나 이때 그의 말은 채 다 이어지지 못했다. "백주…… 대로에서……." 원래는 도적질이냐고 말하려 했던 것이다. 한데 언뜻 떠오르는 생각! 저들은 돈을 뺏기는커녕 오히려 가져가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백주대로에서 돈을 주느냐고 하기도 이상하고, 남이 주는 돈을 왜 주느냐고 따지고 들기도 이상했다. '아아…… 빌어먹을, 도대체 되는 일이 없구나. 하늘은 하고많은 도적떼를 다 놔두고 왜 하필 저런 괴상한 도적떼를 만나게 했단 말인가?' 그때, 피의미소녀의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해 화살처럼 꽂혀왔다. "후랑말코도사, 할말이라도 있는가?" "그것이…… 저…… 백주의 대로인데…… 대로는 큰길을 말하고…… 사실 이곳은 강인데……." "무슨 소리야?" 운룡이 궁색한 답변을 이리저리 더듬자 피의미소녀는 싸늘한 냉소를 터뜨렸다. "흥! 본 생사선은 일수일수(一授一受)의 법규가 있다. 즉, 한 번은 주고 한 번은 뺏는 것이다. 개코도사, 너는 이 일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가?" "그, 그것이……." "할말없으면 죽엇!"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운룡은 눈앞에서 한 줄기 시뻘건 화염이 불꽃처럼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휘잉! 피할 겨를도 없었다. 쾅! "으악!" 가슴팍에 한 줄기 화염을 안고 운룡의 몸이 퉁기듯 거룻배의 저쪽 끝으로 나뒹굴었다. 쿠당탕! 피의미소녀는 붉은 입술을 삐죽이며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흥! 실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것이 설치고 다녔군." 그녀는 거상꾼들이 주춤주춤 돈주머니를 줍는 것을 보고는 또다시 좌수를 번쩍 쳐들었다. 휘휘휙! 순간 혈건인들이 생사선 위로 날렵하게 뛰어오름과 동시에 생사선의 거대한 몸체가 반대쪽을 향해 스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촤아악! 그것은 이내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아득히 사라져 갔다. 생사선이 사라지기 무섭게 사람들은 우르르 운룡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의 몰골은 비참했다. 도관은 깨어져 나뒹굴었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데다 입가에는 한 줄기 검붉은 선혈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죽은 것 같았다. "쯧쯧…… 그러게 왜 느닷없이 나서누……." "글쎄 말이야.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사람이 객지횡사로군." 이윽고 배가 저편 강가에 닿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내렸다. 누구 하나 운룡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이런 일은 누구보다도 빨리 잊어버리는 쪽이 좋았다. 거룻배의 조타수는 사람들이 다 내리고 나자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에잉…… 팔자에 없는 시체 하나 치우게 생겼군." 그가 막 운룡의 시체를 안아 들려고 할 때, 홀연 담담한 목소리 하나가 그의 뒷덜미에 부딪혀 왔다. "그냥 놔두시오. 건드리면 큰일나오." 조타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언제 온 것이지?' 그의 옆에는 아까 신묘로운 의술을 보여주었던 백의귀공자가 의혹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큰일나다니요?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일이 사람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쉬잇……." 백의귀공자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는 운룡의 맥문을 짚었다. 그의 얼굴에 서려 있던 의혹의 표정이 더욱 짙어졌다. "심후한 내력도 아닌데…… 팔성(八成)의 혈사기공(血邪 功)을 맞고도 살아 있다니, 괴사(怪事)로다." "살아…… 있어요?" "맥이 뛰고 있소. 보시오. 얼굴에 점차 화색이 돌지 않소?" 그렇다. 운룡의 창백한 얼굴로 어느새 붉은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반각쯤 지났을 때 운룡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끄응……." 운룡은 처음엔 좀 얼떨떨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탄식을 터뜨렸다. "무림엔 과연 기인고사(奇人高士)가 많구나. 내 생전 그런 무서운 장풍은 처음 본다." 그의 도포자락의 앞가슴 부분이 누렇게 그을려 있었다. 아깝다는 말을 수십 번도 더 되뇌이며 부스스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를 향해 백의귀공자는 씨익 웃어 보였다. "생사선 생사이독(生死二毒)의 혈사기공을 정면으로 맞고 살아난 사람도 아마 처음일 거요." 운룡은 그제야 그를 알아본 듯 어! 하는 외침을 터뜨린 후 겸연쩍은 어조로 말했다. "아까 그 여자가 생사…… 이독이오?" "화독(花毒) 혜혜(慧慧)이오. 그 옆의 혈의청년은 혈독(血毒) 혜공(慧拱)으로서 그들은 근자에 호북일대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신진기수들이오. 그 수법은 백 년 전 중원제일독문(中原第一毒門)이었던 만사문(萬邪門)의 것이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들을 일컬어 의도(義盜)라고도 하오." "호오……." "흥!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들은 단지 천한 도둑떼일 뿐이오. 줄 수(授)자의 깃발을 달 땐 그들은 일부러 작은 배를 고르오. 대신 큰 배를 발견하면 받을 수(受)를 다는 것이오. 명성을 높여 보겠다는 얕은 수작이오." "그렇구려." "아까 나는 잠시 딴 생각을 하다 그만 당신을 독수(毒手)로부터 구하지 못했소. 어디 특별히 불편한 곳은 없소?" 박속처럼 고운 치아에 또다시 웃음이 맺혔다. 운룡은 그의 모습에 눈이 부셔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은 것 같은데…… 맞는 그 순간 의부의 말씀을 떠올렸기 때문이오." "의부가 무슨 말씀을 해주셨소?" 호기심에 질문을 하고는 백의귀공자는 내심 아차 싶었다. 타문(他門)의 무예나 가전(家傳)에 대해 묻는 것은 무림의 금기(禁忌)였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애초에 묻지도 않고 또 대답하지도 않는 법. 하나 운룡은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활달하게 웃으며 말했다. "천기대나인신공이지요. 의부께선 사람과 겨룰 때 되도록이면 맞으라고 하셨소. 나는 그 말씀대로 했을 뿐이오." 백의귀공자의 두 눈에 한줄기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났다. '천진한 표정과 가식없는 태도, 세속의 물이라고는 조금도 들지 않은 사람이로구나. 어떤 내력을 지녔을까? 천기대나인신공이란 것도 처음 들어보는 무공이다.' 그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 보니 명문(名門)의 도제인 듯…… 소생은 남해(南海)의 옥수(玉秀)라 하오. 귀공은?" "핫하…… 빈도는 무당파 제삼십칠대장령인 운룡이오. 금번 사문의 명을 받아 대봉황천의 사해대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중이오." "무당파?" '갈수록 의혹투성이로군. 그리고 무당파는 망했다. 백 년간이나 제자를 맞지 않아 모든 무예는 절전되고 인재는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런 무당파가 언제 이런 기이한 인재를 키워낸 것일까?' 하나 백의귀공자 옥수는 이내 흉중에 이는 의문을 털어버리고 싱긋 웃었다. "운형, 소제도 실은 사해대검회에 가는 길이오만 중간에 잠깐 들를 데가 있어……." 그는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곧 말을 꺼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비무대회까지는 앞으로 보름이 남았소. 외람되오만 운형이 소제를 마다 않는다면 우리 십삼 일 후에 제남부(齊南府)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운룡이 마다할 리 있겠는가? 그는 내심 크게 기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본 옥수는 낭랑하게 웃으며 몸을 날렸다. "그럼 십삼 일 후 그곳에서……." 슈욱― 크게 몸을 움직인 것 같지도 않은데 이미 옥수의 신형은 수십 장 밖을 날아갔다. 그 뒤로 문득 한 장의 낙엽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5. 숲속의 유혹(誘惑)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이 틀림없었다. 예정대로라면 운룡은 지금쯤 낙양성부(洛陽城府)에 도착했거나 그 근처에 이르러 있어야 했다. 하나 밟히느니 태고의 낙엽이요, 들리느니 이름모를 산새가 인기척에 놀라 날아오르는 소리뿐이었다. 사박사박― 흐드득―푸득― 기수를 건너 협상현(協常縣)을 지난 지 이틀째 날이었다. "이상하군. 갈수록 깊은 산속이다. 아까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었나?"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게 뻗어오른 원시림 사이로 가는 정오의 햇살이 실낱처럼 스미고 있었다. 운룡은 가다보면 길이 안 나오겠는가 싶은 마음으로 느닷없이 낭랑한 소리로 시구를 읊었다. 안문관(雁門關) 열어놓고 적진으로 떠나는데, 북부땅 찬바람은 눈보라 휘날리고, 마른 풀 뿌리 뽑히어 사막 속을 나는구나. 사로잡은 적장(敵將) 수효 몇몇인가 세어가며, 공명을 세워본들 그것이 무엇인가? 지난 날 날카로운 칼날은 무심히 간데없구나. 의부 위지중걸이 이따금씩 부르곤 하던 노래였다. 무심히 따라부르던 것이 입에 배여 버렸다. 한 구절 시구에 사뭇 흥취가 오른 운룡은 다시 다른 시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매화(梅花) 찬서리에 의연한……." 그때 돌연 가슴이 진탕되도록 아름다운 웃음소리 하나가 짤랑짤랑 울려 퍼졌다. "호호호……." 화들짝 놀라 노래를 뚝 멈춘 운룡의 귓전으로 그 웃음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매우 흥취있는 분이라 아니할 수 없구나. 계화(桂花)야, 냉큼 가서 저 운취있는 귀인을 이리 모시고 오너라." 사르락―사르락― 풀잎 스치는 소리에 이어, 우측의 수림에서 섬세한 인영 하나가 폴짝 뛰어나왔다. 소슬한 가을바람인데도 얇은 나삼(羅衫) 하나만 달랑 걸친 십칠팔 세 가량의 미소녀였다. 그녀는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다가 운룡에게 시선이 닿자 가벼운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젊은 도사님……."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날아갈 듯 허리를 굽혀 보였다. "소저께서 진인을 청하십니다. 청컨대 잠시의 면대를 허락해 주세요." 운룡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남녀칠세 부동석의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그는 이런 발랄한 행동과 차림의 소녀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뒤를 따르기는 했지만, 앞서 걸어가는 소녀의 살랑대는 엉덩이로 자주 시선이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한 꺼풀의 나삼은 들어가고 나온 몸의 굴곡까지 남김없이 내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몇 걸음을 내딛자 뜻밖에도 주위는 환해졌다. 이곳은 산의 아래위를 관통하는 큰 산길이었다. 운룡은 이러한 길을 지척에 두고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馬車). 양현에는 수정등(水晶燈)이요, 발은 수정주렴이다.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네 마리의 백마(白馬)와 남홍(藍紅)의 훌륭한 조화를 이룬 덮개와 골격. 황족이나 탈 법한 이 화려한 마차는 길의 좌측 열 평 남짓한 초지에 세워져 있었다. 운룡이 나타나자 마부석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소녀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안내해온 소녀와 같은 복장인 것으로 보아 그들도 시녀(侍女)의 신분인 듯했다. 운룡의 얼굴이 가볍게 붉어졌다. 심산에서 십육 년을 틀어박혀 살아온 그로선 소녀들의 이런 시선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를 힐끗 보고난 미소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마차의 문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아씨, 진인을 모셔왔어요." 순간 마차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수정주렴이 조용히 걷혀 올라갔다. 운룡은 무심히 안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순간, 다급히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운룡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붉어졌다. 빌어먹을 가슴까지 쿵쿵 뛰고 있었다. 여인. 농염한 자세로 미루어 이십육칠 세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차 안에 놓인 화려한 침상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머리에는 한 개의 찬란한 보관(寶冠)을 쓰고 목, 다리, 팔, 어디고 할 것 없이 수십 개의 황금팔찌, 목걸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여자가 보관을 쓰고 장신구를 단 것이 뭐 그리 이상하랴마는 문제는 그녀가 거의 옷을 벗고 있다시피 한 데에 있었다. 한 벌의 얇은 나삼. 그것도 윗부분은 아래로 말려 젖가슴이 살짝 비치고 있었고, 아랫부분은 위로 말려 대리석 같은 두 다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거기다가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신비롭게 빛나는 두 개의 동공이며, 물기오른 풋풋한 입술은 쳐다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찌르르 저리고 말듯했다. 그가 일평생 본 여자라곤 산아래에서 일하던 채석장의 밥집 아줌마와 먼발치를 지나는 아낙네 한둘에 불과했다. 이따금씩 밥집 아줌마가 허가(許哥)와 어울려 으슥한 돌무더기 아래에서 끙끙대다가 올라오곤 할 때, 흐트러진 머리칼과 가슴 앞 옷섶 사이로 언뜻 비치던 뿌연 젖가슴 정도가 그가 아는 여자의 전부였다. 한데 이토록 잘 다듬어진 정교하고 섬연한 몸매의 여인이 이 세상에는 있었던 것이다. 반라미녀(半裸美女)는 시선 둘 곳을 몰라 쩔쩔매는 운룡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배시시 입가에 웃음을 물었다. 그녀는 태연히 앞에 놓인 포도알 하나를 오물오물 씹다가 입을 동그랗게 오므려 씨 하나를 내뱉었다. 슉! "읍!" 포도씨는 정확하게 운룡의 옆이마에 격중했다. 반라미녀의 입술 사이로 까르르 흐드러진 웃음이 새어나왔다. "잘생긴 도사양반, 뭘 그리 어리벙벙하게 서 있지요?" 그때 그의 시선으로 여인의 탄력있는 허벅지가 쏘아져 들어왔다. 운룡은 진저리를 치며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 그거……." "뭐가 그거고 저거죠? 어디로 시주 가는 길이었나요?" 운룡은 황망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빈도는 무당파 삼십칠대장령이오. 금번 사해대검회에 참가하고자 하산했소." "무당파……." 반라미녀는 그의 말을 새기듯 음미하더니 다시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무림동도로군요. 소녀도 사해대검회를 견식하기 위해 가려던 참이었지요." 운룡은 이 말에 놀란 시선을 던졌다. '이틀 전, 생사선의 젊은 계집도 손속이 그렇게 맵더니 이 여인도 무림의 여걸인가?' "후훗…… 잘됐군요. 어차피 방향도 같고 갈 길도 먼데 이리 들어와 차라도 한 잔 나누는 게 어떻겠어요? 이 해량산(解梁山)의 경치는 매우 좋군요." 말과 함께 그녀의 흰 옥수가 나삼자락에 살포시 가 닿았다. 옷자락이 다시 한 겹 더 말려 올라갔다. 최후의 비소(秘所)를 가린 헝겊조각이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운룡은 눈앞이 아찔하여 황급히 도포자락을 내저었다. "아, 아니오. 무량수불…… 빈도는 갈 길이 급하여……." "잠깐!" 황망히 몸을 돌리려는 운룡의 뒷덜미를 미녀의 교갈이 움켜잡았다. "나를 봐요. 자…… 내 눈을 봐요." 가지런한 속눈썹 아래에서 검은 우단처럼 부드럽게 빛나고 있는 별빛 동공. 운룡은 얼떨결에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처음에는 눈을 보고 있어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한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운룡은 그녀의 눈이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는 기이한 흡력으로 일렁이는 것을 깨달았다. 신비롭게 빛나는 두 눈 속으로 자신이 송두리째 빨려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의식이 몽롱하니 흐려지고 있었다. '이상하군. 온몸의 힘이 빠지다니…….' 그의 얼굴에서 의지가 사라졌다. 손에 들린 편괴와 종선이 툭 하고 밑으로 떨어졌다. 이어 그는 기름칠 잘된 인형처럼 멍한 표정으로 주춤주춤 미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순간 주위에 서 있던 소녀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는 운도 좋으셔. 보아하니 총각이 틀림없어요." "호호호……." 미녀는 혼을 빼앗을 듯한 뇌쇄적인 웃음과 함께 사르르 몸을 일으켰다. 막 마차의 문턱을 오른 운룡을 향해 그녀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잔뜩 물오른 뽀얀 젖가슴과 은밀한 부분의 체향이 왈칵 마차 안으로 번졌다. 그때 돌연 이게 무슨 일인가? 슈욱! 녹영(綠影). 그것은 마치 허공에 그어지는 한 줄기 녹색 물감인 양 희뿌연 녹영이었다. 녹영은 마차 안으로 막 한 발을 디디려던 운룡의 뒷덜미를 독수리처럼 잡아챘다. 그리고 잡아챘다 싶은 다음 순간, 이미 삼십 장 밖의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미녀의 몸은 앉은 자세 그대로 폭풍처럼 솟구쳐 올랐다. 미녀는 몸을 다섯 번이나 뒤집어 빙글 착지한 후 분노로 파르르 몸을 떨며 사라져 가는 녹영을 노려보았다. '잘 구워서 양념까지 된 음식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저건 도대체 어떤 놈이란 말인가?' 계화가 놀란 눈빛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저렇게 빠른 신법은 처음 봐요. 누굴까요?" 그녀는 초생달처럼 흰 아미를 살풋 찡그리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곤륜파(崑崙派), 저건 서천(西天) 북곤륜(北崑崙)의 운룡삼현(雲龍三現)이다!" "곤륜파? 그럴 수가……." "진천 늙은이의 위명은 과연 대단하군. 그 오만하고 당당한 무림의 다섯 개 큰 문파인 오대문파(五大門派)까지도 그의 사해대검회를 위해 나왔단 말인가." 오대문파(五大門派). 무림에는 사실 수만 개에 달하는 대소문파가 있다. 그 중에서도 무림의 종주격인 다섯 개 큰 문파가 있다. 이름하여 오대문파라 일컬어지는 바로 이들. 숭산(嵩山) 소림파(少林派). 금정(金頂) 아미파(峨嵋派). 태을(太乙) 화산파(華山派). 천산(天山) 곤륜파(崑崙派). 운남(雲南) 점창파(點蒼派). 백 년 전만 해도 이들은 도가(道家)의 무당(武當), 공동( ), 청성(靑城), 공래( 崍)와 더불어 구대문파(九大門派)라 불렸다. 하지만 도가의 사대문파가 일제히 멸문하고 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들 오대문파는 오히려 과거의 구대문파 때보다 더한 성세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백 년 전 사대도가의 멸문이 준 충격과 경각심으로 하여 이들 오대문파가 자체의 무예를 새롭게 개발하고 어렵다고 내팽개쳤던 정종비예(正宗秘藝)를 인내심을 가지고 수련한 결과였다. 즉, 숭산 소림사는 전래되어 오던 반야(般若), 대승(大乘), 범천(凡天) 등의 신공을 극점까지 캐내서 신공내력(神功內力)의 새로운 차원을 이루었고, 금정 아미는 난피풍검법(亂皮風劍法), 천불계도(天佛戒刀) 등을 정리하여 불문무병(佛門武兵)의 높은 경지를 개척했다. 또한 태을 화산은 매화(梅花)를 바탕으로 한 이형(移形), 비형(秘形), 화형(花形)의 초절정 권각법(拳脚法)을 만들어냈으며, 천산 곤륜은 마법(魔法)의 경신술(輕身術)이라는 운룡삼현(雲龍三現),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을 치밀하게 추적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신법(身法)의 황금기를 맞았다. 그리고 운남 점창은 회풍무류사십팔검(廻風無柳四十八劍)과 삼절검법(三絶劍法)을 융합하여 쾌(快), 변(變), 역(力)의 삼검종(三劍宗)을 이루었으니……. 천 년을 이어온 전통에 현대적인 노력이 가미되어 정통무예의 새로운 차원을 이루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이러한 자체의 노력으로 하여 당금에 이르러 오대문파는 무림종주다운 경지에 올랐으며 무림인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이들이 세운 오파무림맹(五派武林盟)은 태산의 대봉황천과 더불어 무림의 양대세력으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오대문파와 대봉황천의 문하인들을 일컬어 무림귀족(武林貴族)이라 칭하는 새로운 유행어까지 만들어졌던 것이다. * * * 콰당탕! 하필이면 단단한 암반 위에다 내리꽂을 게 뭔지……. 운룡은 개구리처럼 패대기쳐져 등줄기로 전해지는 섬뜩한 충격에 언뜻 정신이 들었다. 먼저, 울창한 수림 사이로 번져오르는 햇살이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어지럽게 흩어진 주위의 낙엽이며, 억겁에 걸쳐 쌓여진 장독( 毒)의 냄새, 그리고 소녀. 일신에는 짙은 녹색유의(綠色儒衣)와 치마를 걸쳤다. 붉은 허리띠를 질끈 동여맨 허리는 마치 버들가지인 양 요요로웠고, 바람에 날릴 듯 교태로운 몸은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궁형의 머리칼이 사르르 흘러내린 그녀의 옆얼굴은 매우 아름다웠다. 화장기없는 소녀의 얼굴이 매우 싸늘하다는 것도 느껴졌다. 운룡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의 기억은 아까 마차 안의 미녀를 본 데서부터 끊어졌다. '그녀의 눈빛은 매우 신비로웠는데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저 소녀는 또 누굴까?' 그때 돌연 동짓달 얼음물처럼 차가운 음성이 그의 귓전으로 부어져 왔다. "멍청이 같은 새끼!" '새끼, 새끼라고?' 운룡은 의혹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방엔 아무도 없었다. '설마하니 저 소녀가 나에게 욕을 했단 말인가?' "소, 소저는 날보고……." 운룡의 말이 채 다 이어지기도 전에 녹의소녀의 싸늘한 음성이 다시 튀어나왔다. "그럼…… 이곳에 멍청이 같은 너 말고 다른 새끼라도 있단 말이냐?" 또 새끼다. 운룡은 불끈 울화가 치밀었다. "말조심하시오, 소저!" 순간 녹의소녀의 시선이 힐끗 운룡을 향했다. 얼음조각이 날아와 박히듯 냉연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사내라고 자존심이 있다는 건가? 네가 그런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줄까?" "어디 한번 말해 보시오." "흥!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는 그따위 한심한 무공으로 무림에 나와서 무당파 운운하는 꼴이 돼먹지 않았음이고……" "……!" "둘째는 파리새끼 한 마리 건드리지 못할 같잖은 무공을 지니고도 감히 옥정부인(玉鼎婦人)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한 무지함이다." 녹의소녀는 잔뜩 조소어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셋째는 돼먹지 않게 생명의 은인을 보고서도 인사치레 한마디없는 그 짐승 같은 몰상식함이다. 네가 만약 과거의 동도인 무당파 출신이 아니었다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겠느냐? 이 후랑말코 같은 새끼야!" 점입가경이라더니! 이런 욕을 먹고도 발악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하나 운룡은 터지려는 노화를 안간힘을 다해 안으로 꾹꾹 눌러 참았다. 위지중걸은 늘 이렇게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여겨질 때 한 번 더 참는다. "끄응……." 그의 이빨 사이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녹의소녀는 그가 화를 참건 말건 아랑곳없다는 듯 옷을 툭툭 털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녀의 태도는 운룡을 거지 발싸개쯤으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듯했다. 마치 지나가다 물에 빠진 생쥐 한 마리를 구해준 것처럼……. "잠깐!" 그때 운룡이 걸어가는 그녀를 다급히 불러 세웠다. 녹의소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운룡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까 말한 옥정부인(玉鼎婦人)이란 누구를 일컬음이오?" 녹의소녀는 냉랭한 코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흥! 그녀의 치맛자락 속까지 기어 들어가고도 모른다는 거냐?" "그럼, 아까 그 여인이 바로……."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한심한 작자로군. 도대체 어떤 사부가 너를 하산시켰는지…… 차라리 삼척동자에게 검을 쥐어주는 것이 낫겠다." "……!" "그녀를 염라소혼(閻羅消魂) 탕녀지혼(蕩女之魂)이라고도 한다. 이미 일백이 넘는 무림의 남아들을 치마 아래 고혼으로 만들어 버린 여마(女魔)지. 그녀의 염백소향대법(艶魄素香大法)은 그녀보다 공력이 더 높지 않는 한 상대할 수 없다." "……." "겉으로는 이십오륙 세의 나이로 보여도 그녀는 이미 사십이 가까운 할망구다. 너도 그녀의 치마 속에 얼굴을 처박았다면 지금쯤 한 줌 뼈다귀로 변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는 쪽이 좋았겠지만……." 운룡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룡은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등을 향해 정중히 합장지례를 올렸다. "빈도는 분명히 여시주께 무례를 저질렀소. 삼가 귀인의 성명 삼 자를 듣고자 청하오." "곤륜의 운연(雲燕)이라고나 알아둬." 그녀는 말을 끝맺기 무섭게 성큼성큼 앞을 향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은 하나의 빈 공지였다. 길로 나가자면 숲 하나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운룡이 막 숲으로 발길을 돌리기 전, 녹의소녀 운연이 힐끗 뒤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순간 그녀의 한 쌍의 서늘한 봉목에 가벼운 놀람의 빛이 번뜩 스쳐 지났다. "이봐! 그쪽은 옥정부인이 있는 쪽이야." 그녀의 반대쪽 숲으로 들어서던 운룡의 몸이 멈칫했다. "나는 지금 바로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이오." 다음 순간 그는 녹의소녀 운연의 몸이 저쪽에서부터 이쪽까지 고무줄처럼 쭉 늘어난다고 느꼈다. 아니, 늘어난다 싶자 그녀는 이미 그의 코아래 있었다. 짝! 순간 한소리 거센 파음과 더불어 운룡의 얼굴이 빙글 돌아갔다. 신음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섬뜩한 따귀였다.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녹의소녀 운연의 냉랭한 목소리가 그를 덮쳤다. "개 같은 새끼가 보자보자하니깐…… 야, 임마! 다시 죽으라고 내가 널 구한 줄 알아?" 운룡은 주르르 핏물이 흐르는 입가를 쓰윽 문지르며 말했다. "옥정부인은 말 그대로 무림의 화근이오. 그런 여마를 어찌 그냥 두겠소?" "그냥 두지 않으면?" "내가 봉변당할 뻔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또 다른 사람의 피해를 막기 위해 그녀를 제거해야겠소." "제거?" 녹의소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실소를 흘렸다. "놀라운 대협(大俠)의 탄생이로군. 묻겠다. 네 무공이 삼상칠괴(三喪七怪)나 중주쌍걸(中州雙傑)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운룡은 아직도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들을 모르오." "모른다고?" 녹의소녀 운연은 기가 막혔다. '뭐 이런 한심하고 무지막지한 자가 다 있어?' "그럼 도대체 네가 아는 것은 뭐지? 네가 배운 무공이란 게 뭐냐?" 운룡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삼재검법(三才劍法)이오." "삼…… 뭐라고?" "춘풍화우(春風花雨), 횡소천군(橫掃千軍) 선인지로(仙人指路) 로 이루어진 삼재검법이란 말이오." 그녀는 이제 기가 막히다 못해 아예 말도 안 나왔다. 그녀는 원래 그저 해량산을 지나가고 있었다. 우연히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에 살짝 엿보다 자칭 무당파의 장령이라는 이 엉성한 친구를 보게 되었다. 과거 구대문파의 일원이었기에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죽치고 앉아 일이 되어가는 꼴을 보았고, 그러다 옥정부인의 염백소향대법에 허위적대는 그를 날벼락처럼 구해낸 것이다. 그때 들었던 말 중에 의하면 이 친구는 분명이 사해대검회를 간다고 했다. 검회에 참석할 정도라면 최소한 자신의 몸쯤은 보호할 만한 무예를 익히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고작 삼재검법이라니! 그것도, 지나가는 개도 알고 있을 법한 그 최하류검법을 초식의 명칭까지 들추어내며 자랑스럽게 말하다니! 녹의소녀 운연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운룡을 훑어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는 분명히 멀쩡했다. 아니, 비단 멀쩡할 뿐 아니라 자세히 보자니 썩 잘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자의 내심을 자극하는 사내다운 매력도 있었다. '정기어린 눈빛이며 단정한 행동으로 보아 필시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음이 분명한데, 이자는 마치 삼재검법을 무슨 절세의 신공쯤으로 알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이것 봐, 나하고 내기를 할까?" "무슨 내기 말이오?" 녹의소녀 운연은 서너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는 여기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겠다. 그리고 너는 검으로 너의 절세검법인 삼재검법을 펼치는 거다. 내가 한 걸음이라도 물러난다면 네가 이기는 거다." 운룡은 우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소. 그것은 너무 일방적이오." "흐음, 네가 이기면 너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원한다면 옥정부인의 앞까지 데려다 주지. 하지만 내가 이기면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해." "싫다니까 그러오." "물론 싫겠지. 삼재검법 따위로는 내 옷자락은커녕 그림자도 베지 못할 테니까." 순간 운룡의 검미가 거꾸로 곤두섰다. "사문을 모욕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소!" 녹의소녀 운연은 노골적인 조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까짓 무당파? 삼재검법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도 상대할 수 있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다. "으헝!" 고함인지 울부짖음인지 모를 한소리 괴성과 더불어 운룡의 몸이 번쩍 허공을 갈랐다. 챙! 그는 등뒤의 청강장검을 뽑아들기 무섭게 삼재검법의 춘풍화우 일식으로 녹의소녀 운연을 후려쳤다. 하나 검식이 반쯤 펼쳐졌을 때 그는 공력을 태반이나 거두어 들였다. 여차하면 초식을 거둘 생각이었으므로……. 하지만 녹의소녀 운연은 어디까지나 태연자약한 기세였다. 그녀는 검이 어깨를 파고들 때까지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더니 한순간 몸을 쓰윽 비틀어 가볍게 초식을 피해냈다. 위잉― 운룡은 자신의 힘을 못이겨 주춤 한 걸음 앞으로 퉁겨져 나와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피하는군." 놀란 것은 운연도 마찬가지였다. 칼바람이 스치고 지나갈 때 어깨로 은은한 통증이 스미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힘 하나는 장사로구나.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도끼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 운룡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휙! 몸을 돌리며 삼재검법 제이초 횡소천군을 날벼락치듯 펼쳤다. 횡소천군이란 검을 수평으로 뉘어 상대의 허리 아래를 노리는 초식이다. 이번엔 운연도 별수없이 물러나리라는 운룡의 생각도 잠깐, 등을 거의 땅에 붙이다시피 누워버린 그녀의 배 위로 검초는 헛되이 스쳐 지났다. 그녀는 검이 스치기 무섭게 오뚝이처럼 되퉁겨 일어났다. 운룡은 무거운 표정으로 검을 꽈악 세게 움켜잡았다. 이마로 식은땀이 촉촉이 배어들었다. 귓전으로 운연이 한 말이 빙빙 맴돌고 있었다. ―삼재검법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도 상대할 수 있어. '그럴 리가…….' 한순간 운룡의 검이 또다시 숲속의 고요한 공간을 묵살하듯 베어 나갔다. "그럴 리가 없어!" 선인지로! 운룡은 검을 밑에서부터 위로 비스듬히 그어올리는 자세를 취했다. 운룡은 이 일검에 평생의 힘을 다 기울이고 있었다. 상대는 반드시 베어져야 한다. 그렇잖으면 현청노사부와 자신은 십육 년 세월동안 어릿광대 짓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위잉! 운연의 몸이 비스듬히 눕혀지는 것이 보였다. 눕혀졌다 싶은 순간 그녀의 한쪽 발이 차올려졌다. 그 뾰족한 신발 끝은 운룡의 손목을 사정없이 차냈다. "욱!" 휘익― 검이 덧없이 십여 장 허공으로 떠올랐다 맥없이 땅에 나뒹굴었다. 챙그랑! 운룡은 망연히 그 검을 바라보았다. 무릎에 힘이 풀려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비무대회도, 사문의 명예도, 그 빛나는 이름도, 모두 다……. 운연은 그런 그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녀의 꼭 움켜쥔 손엔 땀이 맺혀 있었다. 마지막 선인지로의 일식이 쳐올려졌을 때 그녀는 까무러칠 듯 놀랐다. 선인지로! 그것은 천번 만번도 더 본 초식이었다. 눈을 감고도 그 검로(劍路)를 외울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운룡이 쳐온 검초는 분명히 선인지로의 형태였으나 선인지로가 아니었다. 그 속엔 괴이한 변화가 수도 없이 숨어 있었다. 만약 운룡이 한 박자만 초식을 늦추었어도 그녀는 다급히 뒤로 물러났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평범한 삼재검법 따위로 나를 놀라게 했다. 이 사람은 겉으로는 우직해 보여도 매우 뛰어난 오성(悟性)을 지녔다. 주인을 만나지 못한 보석이다!' 운연은 하늘을 한차례 올려다본 후, 옥수를 가볍게 뻗어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수법으로 떨어진 운룡의 검을 빨아들였다. 그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삼재검법은 무림의 하류검법이다. 삼척동자도 아는 검법이지. 사해대검회는 무리야. 웃음거리만 된다. 아직도 이 사실을 승복하지 못하겠나?" 운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사부를 믿소. 그분은 이 검법을 사십 년이나 연마해 오셨소." "사십 년이라구?" 운연은 피식 웃으며 휙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지금 네가 어떤 위치에 있는 건지 똑똑히 가르쳐 주지. 나원, 별 꼴같잖은 게 다 시간을 뺏게 만드네." * * * "자아, 오시오. 와요! 오줌빛깔이 연하고 수족이 냉(冷)하며 맥(脈)이 침(沈), 지(遲), 세(細), 미(微)한 사람! 안색이 창백하고 생기가 적으며, 툭하면 숨이 가쁘다, 입으로 쓴물이 올라온다, 묽은 군침이 입 안에 괴인다 하시는 분, 당장 이리로 와보시구려." 사내는 쥐눈에 염소수염, 듬성듬성한 눈썹, 매부리코에 얼기설기 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사내는 지금 입 밖으로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리 와요, 이리 와!" 사내는 점잖게는 유약객(遊藥客), 속된 말로는 돌팔이 약장수라 일컬어지는 떠돌이 상인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만가지 병, 천가지 증상을 가진 사람은 다 오라는 셈이니, 자연 그의 주위로는 수십 명의 구경꾼들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인 눈치이자 사내는 옆에 서 있는 계집아이를 툭툭 쳤다. 열서너 살 남짓한 계집애는 어색한 웃음을 안면 가득 짓고 앞으로 나섰다. 사내가 외쳤다. "자, 우선 구경들 해보시라! 설산(雪山)에서 십년수도를 마친 원공(猿公)의 묘기, 원숭이의 검법을 구경하시오!" 계집애는 한쪽에 놓인 상자 뚜껑을 툭툭 쳤다. 순간 그 안에서 조그만 원숭이 한 마리가 휙 솟구쳐 나왔다.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묘기올시다! 원숭이가 검법을 펼칩니다." 계집애는 단검 하나를 꺼내 그것으로 끈 하나를 툭 끊어 그것이 진검(眞劍)임을 입증해 보였다. 이어 계집애는 검을 원숭이에게 휙 던져 주었다. 원숭이는 날렵하게 검을 낚아채고는 지그시 전방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사내가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자, 원공! 그대가 십 년간 입산수도 끝에 연마한 삼재검법 제일초를 펼쳐 주시구려. 춘풍화우!" 순간 원숭이는 엉성하게 보결을 밟는가 싶더니 검을 휘익 휘둘러댔다. 과연 놀랍게도 그것은 춘풍화우의 일식이었다. 숨죽여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환호를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제이초 횡소천군!" 휘익―휙! 엉성하나마 검결(劍訣), 보결의 제규칙에 의거해 두 번째 초식이 펼쳐지자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큰 박수가 우레같이 터져나왔다. "잘하는군." "우리 아들놈보다 나은데?" 왁자지껄! 떠들썩한 좌중들은 빨리 그 다음 초식인 선인지로를 펼치라고 했고, 약장수 사내는 그 전에 잠깐 할말이 있다고 했다. 이어 그의 입에서는 세상의 온갖 병명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고, 그는 그러한 병을 고칠 약이 변변하게 없음을 땅이 꺼지도록 개탄했다. 그러나 좌중의 이런 소란과도 아무 상관 없이 한쪽에 쭈그려 앉아 있는 한 사람. 운룡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똥을 누는 자세로 엉덩이를 들고 앉아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무심히 장내를 바라보고 있는 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원숭이의 삼재검법 묘기에 박수를 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무심했다. 멍하니 넋을 잃고 장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녹의소녀 운연은 저만치 거리의 담벽에 기대어 서서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려하게 뻗어내린 콧날이며 완강한 턱그늘의 옆얼굴. "그는 옆얼굴이 더 보기 좋군." 참으로 기이한 사내라고 느껴졌다. 처음 볼 때는 골격이 조금 크다는 것 외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얼굴이 조금 준수한 편이긴 했지만 그 정도의 남자는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두 번 볼 때는 어딘가 달랐다. 이어 어디가 다른지 유심히 볼 때는 이미 그에게선 의아할 정도로 많은 매력이 발견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계곡의 야생화처럼 소리없이 잔잔하게 마음을 끄는 그런 매력이었으며, 그 언행 하나하나가 사실은 눈부신 감동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하긴, 옥정부인은 비록 탕녀(蕩女)지만 그 눈이 매우 높다고 하였다. 그래서 비범한 자가 아니면 유혹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도 저 사람의 숨겨진 매력을 눈치챈 것일까? 저 몸 어디에 그런 신비로운 매력들이 숨겨져 있단 말인가?" 무심히 중얼거리던 운연은 문득 피식 실소를 흘렸다. 도대체 무슨 심사일까? 남자라면 거지 발싸개만큼도 여기지 않던 그녀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재요, 수재인 사문(師門) 곤륜파의 그 숱한 미장부들도, 무림의 귀족이며 천지를 경동하는 무예를 지닌 오파무림맹의 수많은 미검객들도, 어느 누구 하나 그녀의 눈에 들었던 사람이 없었다. 한데 저토록 괴상한 복장을 하고, 원숭이도 펼치는 삼재검법을 절세의 것인 양 신봉하는, 엉성한 무예를 지닌 사람. 게다가 속인(俗人)도 아닌 도사를 위해 이렇게 많은 심력을 자신이 소비하고 있다니……. 낙양성(洛陽城)의 낮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많았다. 거리를 오가는 그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운연은 이윽고 천천히 담벽에서 몸을 떼었다. 그녀는 아직도 넋을 잃고 원숭이를 바라보고 있는 운룡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따라오라는 시늉으로 손가락을 까딱까딱해 보였다. 운룡은 군소리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뒷등으로 약장수 사내의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왠지 숨이 답답하고 조금만 신경을 써도 머리가 아프다 하시는 분이 계시면……." 6. 백패진인(百敗眞人) "금창묘인(金槍妙人) 가태(柯泰), 그는 금창관(金槍?)이란 이 름의 무술도장을 경영하고 있으며, 그 수준은 호북성(湖北省) 서열 오십위쯤 되는 자다. 남북십삼성(南北十三省)을 통튼다면 육백오십위, 그것도 대봉황천의 일천 수뇌부, 그리고 오대문파의 오백 정예를 빼고 하는 얘기이니 전 무림 서열로 보자면 이천백위쯤 되는 자라 할 수 있어. 내가 알기론 그도 이번 사해대검회에 초청을 받긴 했지만 자신의 실력을 감안해서 참가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이제 너는 그와 겨루어 봐. 네 실력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을 거다. 이것은 내가 베푸는 마지막 호의라고 생각해 둬." 늦가을치고는 매서운 날씨였다. 운룡은 무거운 표정으로 검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녹의소녀 운연이 씩 웃으며 그의 옷을 툭툭 쳤다. "이런 차림새로? 옷이 무거우면 행동도 둔해질 텐데?" 툭! 말과 함께 운룡의 앞으로 떨어져 내린 것은 한 벌의 검은 무복(武服)이었다. 운룡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도포와 도관을 벗고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청강장검을 한 손에 빗겨들고 운연을 힐끗 바라본 후, 성큼성큼 정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가는 곳은 한 채의 커다란 무관이었다. <금창관(金槍?)> 휘잉― 아득한 북쪽 사막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운룡의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운룡은 검은 옻칠을 한 대문 앞에 우뚝 걸음을 멈춘 후 대문의 문고리를 두들겼다. 쿵쿵!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대문의 우측, 조그만 통풍구로 한 쌍의 눈이 나타났다. "누구요?" "가태, 가관주께 정식으로 비무를 신청하러 온 사람이오." 눈동자는 운룡을 아래위로 쓱 훑어보았다. "신분 내력은?" "무당파." "무당파? 무당파는 망하지 않았소?" "그렇소이다." "흐흠, 요 근래에 어떤 비무대회에 참가해 본 적이 있소?" "없소." 눈동자는 노골적인 경멸의 표정을 떠올렸다. "안됐소만 무명(無名)은 접수하지 않소. 나중에 오도록 하시오." 탕! 문이 닫혔다. 실로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고작 서열 이천위 정도의 인물이 이러니 그 위는 또 어떠하랴. 운룡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때 돌연 한소리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공을 찢는다 싶더니, 둔탁한 폭음과 더불어 대문이 박살났다. 휘잉― 콰쾅! 운룡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서 운연이 그를 향해 눈을 찡긋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운룡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화르륵― 얇은 판자조각들이 아직도 뿌옇게 허공을 날고 있는 가운데, 아까 통풍구 틈으로 나타났던 눈동자의 주인으로 보이는 황의무사 하나가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채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운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룡이 두세 걸음 나아가자 그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어 그는 몸을 돌리기 무섭게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안으로 달려갔다. 휙! "침입자다! 난동을 부린다!" 안은 넓은 연무장이었다. 연무장 저편으로 몇 채의 건물들이 보였다. 운룡이 그 연무장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일단의 무리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대개가 황색 연무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운룡과 오 장여의 간격을 두고 우르르 멈춰 섰다. 선두에 선 자가 그 중 가장 눈에 띄었다. 그는 머리를 묶어 상투를 틀었으며 그 위로 금관 하나를 올려쓴 사십대 중반의 사내였다. 중년인은 운룡을 아래위로 쭉 훑어보더니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소생은 금창묘인 가태요. 귀공은 누구시기에 함부로 본 관의 기물을 파손하시는가?" 운룡은 정중히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귀 파의 문인이 방문을 거절하기에 본의 아니게 저지른 일이니 용서를…… 빈도는 무당파의 운룡이라 하며 귀공께 정식비무를 청하고자 들렀소이다." "비무를?" 금창묘인 가태의 두 눈에 한줄기 이채가 피어올랐다. 정문은 두께 한 자의 침목(枕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육십 년 이상의 내력이 아니라면 부수기는커녕 금이 가게 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눈앞의 이 소년은 지나치게 어릴 뿐 아니라 아무리 뜯어보아도 무슨 상승내공을 연마한 듯한 흔적이 없질 않은가? '문이 오래되어 녹이 슬었나 보군…… 보아하니 어린 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행색이다. 흥, 무당파? 버릇을 고쳐 주리라!' 이리저리 열심히 염두를 굴리고 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가모는 비무를 허락하오." 그들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연무장이라 따로 장소를 옮길 필요는 없었다. 가태는 문하생들이 들고온 오 척 길이의 금창을 받아들고 중앙으로 나섰다. 운룡도 침중히 장검을 뽑아 들었다. "먼저……." "귀 공이 먼저……." 운룡은 동자배불(童子拜佛)의 예식에 이어, 한소리 쩌렁한 고함과 함께 맹렬히 검을 휘둘러갔다. "춘풍화우!" 가태는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가볍게 떠올렸다. "저런 하류의 초식을……?" 그는 엉겹결에 금창을 휘둘러 운룡의 초식을 맞받았다. 째앵! 찌르르― 손목이 저려 온다. 가태는 하마터면 창을 놓칠 뻔했다. 다급히 헛바람을 몰아쉬며 물러나는 그의 허리춤으로 다시 횡소천군의 제이식이 뻗어왔다. 가태의 얼굴에 한줄기 악독한 웃음이 스쳐 지났다. "흐흥! 이제 보니 삼재검법……?" 그는 허리를 젖혀 가볍게 초식을 피해낸 후 그의 장기인 선풍이십팔창(旋風二十八槍)을 맹렬히 쳐갔다. 슈욱! 슉! 위, 아래, 또는 전후좌우. 마치 독사의 혓바닥처럼 좌충우돌 금선(金線)을 흩뿌리는 창날! 순간 운룡은 크게 당황했다. 가태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눈부신 금창의 그림자만이 시선을 어지럽힐 뿐. 파악! 그때 운룡의 어깨 어림으로 분수처럼 핏물이 솟구쳤다.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쐐액! ! '도저히…… 막을 수 없다!' 이리저리 미친 듯 검을 휘저어 봐도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또다시 가태의 제이창과 제삼창이 그의 양 옆구리를 맹수의 발톱처럼 핥고 지나갔다. 푸욱! 피[血]와 태양. 이마를 타고 눈 속으로 굴러 내려온 땀방울에 햇살이 투과되고 있었다. 눈이 멀 것 같다. 숨이 가빠온다. 무엇보다도 절망! 온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절망이 운룡의 전신을 사납게 할퀴고 있었다. 현청노도사가 말했다. 삼재검법은 절세의 검법이라고. 꾸부정한 허리의 그가 말했다. 이것은 무당파의 비전이라고. 주름살 투성이인 그가 말했다. 날아라, 운룡. 날아라! 운룡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불쌍한 양반." 헛수고였어요…… 당신과 나는……. * * * 쿠당탕! 걸레쪽? 아니, 장마의 흙탕 속을 뒹굴고 온 걸레라도 지금 운룡의 모습보다는 나을 것이다. 금창관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운룡의 몸은 도대체 성한 곳이라곤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버러지 같은 놈, 신법 하나 모르는 주제에 비무를 하겠다고 찾아와?" 쾅! 싸늘하게 닫히는 금창관의 문을 보며 운룡은 벌레가 꿈틀거리듯 몸을 일으키려 했다. 피[血]. 전신으로 번진 피. 온몸은 난자당한 듯 핏물로 얼룩졌는데 찢겨져 나간 옷 사이로 살점이 파헤쳐져 뼈가 드러나 있는 상처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얼굴과 양손은 피와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틀어막으며 빙 돌아서들 갔다. 운룡은 후들거리는 몸을 몇 번이나 일으키려다 문득, 한 모금의 핏물을 울컥 토해냈다. "왁!" 그리고는 그 자리에 사지 벌린 개구리처럼 퍽 엎어져 버렸다. 그런 그의 시선 속으로 청홍의 예쁜 꽃신이 쏘아져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꽃신이 시선 바로 앞에 멈춰 서자 운룡은 돌연 신들린 사람처럼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맞았소, 당신의 말이 맞았소. 과연 삼재검법은 하류의 검법에 불과했소." 꽃신의 임자가 말했다. "술 마실 줄 알아?" 개울가였다. 북망산(北邙山)이라 했던가. 오던 길에는 과연 수십 수백의 분묘가 보였지만, 지금 이곳은 여느 산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한적한 심산의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운연은 고기를 구웠다. 그녀는 낙양성 푸줏간에서 산 돼지고지를 뭉턱뭉턱 잘라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 모닥불 위에 얹어놓고 있었다. 운룡은 얼굴을 씻었다. 핏자국을 말끔히 씻어내고도 그는 오랫동안 엎드린 채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쪽 눈이 좀 부었군. 문지기가 내지른 발길이었나? 그 친구는 발이 주특기인 모양이야. 문이 부수어졌을 때도 그렇게 잘 달아나더니…… 내가 쓰러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댔지." 운연은 고기를 이리저리 돌려서 굽다가 힐끗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른 데도 몹시 아플 텐데?" "의부의 말씀을 거역한 탓이오. 의부께선 말씀하셨지. 되도록이면 권장을 쓰는 자한테 맞으라고. 무기를 쓰는 자와 싸우란 얘기는 안 하셨소." 운연은 피식 웃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와서 술이나 마셔." 고기는 조금 탔다. 술은 사천의 죽엽청(竹葉淸)이었다. 운룡은 단숨에 세 잔이나 비워냈다. 이어 구운 고기 대신 뜯어온 솔잎을 입 안에 마구마구 쑤셔 넣었다. "고기…… 안 먹어?" "도사니까." "괜히 구웠군." "나는 상관 말고 당신이나 드시오. 남 먹는 것은 참견치 않소." "나도 고기 안 먹어." "왜 안 먹소?" "살찌니까." 우적우적 솔잎을 씹어대던 운룡의 입이 뚝 멈췄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운연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이 사람은 여자였다. 그는 그 동안 이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풋……." 누구의 입에서 먼저 나온 웃음일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마주보고는 낄낄대고 웃었다. 운룡이 거푸 다섯 잔째의 술을 비웠을 때,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던 운연이 다시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 운룡은 힐끗 그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싫소." "그 실력으로 사해대검회를 가봐야 창피만 당할 뿐이야. 달리 방도를 구할 시간도 없어. 대회는 불과 열흘 뒤야. 돌아가서 무예를 연마해." "난 참가해야 하오." "망신을 당해도?" "그렇소." "모욕을 당해도?" "그렇소." 봄빛처럼 부드러운가 싶던 운연의 얼굴이 문득 싸늘해졌다. "얼간이!" "뭐라 해도 좋소. 비무날엔 사부께서도 오실 것이오. 실망을 시켜드릴 순 없소." 순간 그의 얼굴에 수편(手片)이 작렬했다. 짝! 적잖이 힘이 들어간 듯 운룡의 몸은 팽글 돌아 쿵 하고 엎어졌다. "멍청이 같은 새끼!" 운연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찬바람이 일도록 홱 돌아서 갔다. "가서 칵 죽어버려! 옥정부인한테 가서 양기나 빨려 뒈져!" 운룡은 씁쓸하게 웃으며 입가의 피를 쓰윽 문질러 닦았다. "운연 소저." 운연은 멈칫했으나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동안……고마웠소." 그래도 운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발끝에 밟히는 나무조각 따위를 신경질적으로 밟으며 걸어갔다. 우두둑! "개새끼……." 남자에게 그렇게 오래 시선을 주어본 것도, 그렇게 많은 관심과 말을 해본 것도 생애 처음이었다. 나는 네가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소를 받는 건 싫어! 집으로 돌아가. 비무날 나타나면 내 손으로 죽여버릴 테야! 타는 듯한 노을이었다. 저만큼 가물가물한 점으로 사라져 가는 운연의 머리 위에도 노을은 타고 있었다. 그 노을빛을 받으며 운룡은 그 자리에서 못박힌 듯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는 지난 하룻동안 매우 많은 것을 경험했고, 또 알았다. 그것은 사실 십육 세의 소년으로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돌이켜 보니 강호를 나와 만난 사람들 중에 자신보다 무공이 약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의귀공자 옥수가 그랬고, 생사선의 생사이독이 그랬으며, 옥정부인이 그랬고, 운연이 그랬다. 하다 못해 무림서열 이천위 안에도 못 드는 금창묘인 가태의 문하제자들도 자신보다 강했다. 강하지 못하다는 것!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처절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하고 굴욕적이며 천박한 일인가? 운룡은 마음이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흐르는 시냇물 위로, 먹물처럼 풀려오는 주위의 어두움보다 더욱 짙은 어둠으로 부서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쇠하는 자기 육신의 내면을 보듯 문득 운룡은 두려움을 느낀다. 끝없는 번뇌가 얼음으로 식어내려 끝내는 죽음의 잔잔한 고체로 뭉쳐진다면……. 운룡은 눈을 감는다. 생각을 흩어버린다. 어깨에 멘 검자루가 갑자기 업고(業苦)처럼 그의 마음을 번뇌쪽으로 당겨 누르고 있었다. 멀리서 야생 늑대의 울음이 자욱이 번져왔다. 서리 같은 달빛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 나는 가고야 만다." * * * 열흘. 열흘이라는 시간은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리 긴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사랑하는 여인과 둘이서 여행길이라도 떠난 사람이라면 그 열흘을 찰나처럼 지나갔다 할 것이고, 지옥 같은 중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열흘을 억겁(億劫)처럼 길게 느낄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로부터 크게 시선을 끌거나 주목을 받은 일은 아니었지만, 하남 낙양에서 산동(山東) 태산(泰山)에 이르는 이천 리 여정에서는 매우 재미있는 일 한 가지가 벌어졌다. 백패진인(百敗眞人)! 누구는 그를 일컬어 몰락한 무당파 출신이라고도 했고, 혹자는 또 다른 신흥도가의 사람이라고도 했다. 하나 그가 무당파 출신이든 아니든 이 백패진인은 매우 재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즉, 시월 십구일부터 시월 이십팔일의 열흘 동안 낙양에서 태산 아래 제남부(齊南府)까지 오며 그는 아흔여덟 번을 싸워 아흔여덟 번을 모조리 다 진 것이다. 구십팔연패(九十八連敗). 그 가운데는 한담수(寒潭 ), 최심사자(催心使者) 같은 무림의 내노라 하는 절정고수급도 있었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인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가 이토록 찬란한 패배의 전적을 남긴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백패진인은 상대가 누구든 반드시 먼저 비무를 청했다. 그리고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그것도 참으로 기이한 것이 그는 도대체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사람처럼 내내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기만 한 것이다. 무명인들은 그냥 맞으려 드는 그를 웬 떡이냐 싶어 두들겨 팼고, 점잖은 고수들은 굳이 비무를 사양하다가 그가 미친 듯이 약점을 찌르며 약을 올리는 바람에 결국 주먹을 휘두르곤 했다. 오늘은 여기서, 내일은 저기서 이루어진 무려 아흔여덟 번의 패배! 백패진인, 그가 왜 이렇게 상대도 안 되는 비무를 청하여 미친 듯이 얻어맞고 다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시시껄렁한 얘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누군가 심심풀이로 얘기할 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가볍게 흘릴 뿐이었다. "그런 일도 있나? 미친놈이로군." 백패진인! 그는 과연 누굴까? 휙! 파팍! "욱!" 소년의 입에서 솟구치는 것은 보기만 해도 섬뜩한 한 줄기 핏물이었다.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는 그의 얼굴로 또다시 한차례의 매서운 발길질이 내질러졌다. 호랑이도 때려잡는다는 원앙각(鴛鴦脚)의 비술이었다. "억!" 등을 구부리던 소년은 얼굴이 팩 돌아갈 정도로 강력한 충격으로 인해 삼 장 밖으로 날려갔다. 분수처럼 허공으로 번지는 핏물! 이어 소년의 몸은 말린 무우조각처럼 맥없이 한쪽의 고송에 거꾸로 틀어박히고 말았다. 콰당탕! 흑의인(黑衣人). 삼십 중반의 나이에, 검은 흑포유삼(黑袍儒衫)을 걸친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툭툭 손을 털었다. "제기랄! 그러잖아도 바쁜 길인데 별 괴상한 놈이 다 설치고 있네. 이 정도로 해두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라, 후랑말코도사!" 그러나 고송에 처박힌 소년은 의식을 잃었는지 아무 대답도 없었다. 흑의인은 연신 투덜거리며 한쪽에 세워두었던 말로 휙 뛰어올랐다. 그는 하늘을 힐끗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관도로 뛰어들어 앞길을 가로막고 비무를 요청한 저 미친 도사놈만 아니었어도 벌써 제남부로 들어가 여장을 풀고 느긋하게 쉴 시간이었다. 흑의인은 다시 한 번 고송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맹렬히 말배를 박찼다. "이럇!" 두두두― 그의 모습은 이내 아득한 한 점 흑점으로 변해 관도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햇살. 정오를 조금 넘긴 미시(未時)의 햇살은 한가로웠다. 그렇게 반다경(半茶更)쯤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한소리 둔탁한 신음과 더불어 나무 아래 죽은 듯 엎어져 있던 소년의 몸이 꿈틀했다. "끄응……." 그가 걸친 빛바랜 낡은 도복이 일광 아래 가벼운 물결을 그렸다. 도사 차림의 소년은 매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기다렸다는 듯이 입가로 한 줄기의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소년의 얼굴에는 고통스럽다거나 그 고통을 이기겠다는 의지의 표정마저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미미한 웃음이었다. "아흔아홉 번째의 패배인가? 나는 오늘 정확히 삼십칠권(三十七拳)과 십이퇴(十二腿)를 맞았구나." 괴이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위인은 맞는 순간에도 그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소년도사는 휘적휘적 몸을 일으키더니 관도 옆의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한 곳의 으슥한 바위그늘을 발견하자 묵묵히 그 아래 몸을 앉혔다. 이어 두 발로 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두 손을 단전(丹田)에 모아 운기호흡의 자세를 취했다. 잠시 후, 그의 비공(鼻孔)으로부터 한 줄기 기이한 백연(白煙)이 스멀스멀 스며 나왔다. 그 백연은 소년의 얼굴 전체를 뒤덮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의 머리 위에서 선명한 두 송이의 화형(花形)을 만들어냈다. 숲의 정적과 유연한 기운, 그리고 정좌한 소년의 머리 위로 구름처럼 피어오른 꽃 모양의 백색 연기. 그 모든 것들은 한순간 주위의 정경을 유현하고 신비롭게 물들였다. 그때 소년이 앉은 곳으로부터 십여 장쯤 떨어진 나무그늘 뒤에서 가벼운 한소리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탄식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것이었다. 순간 뒤를 이어 그 탄식보다도 더욱 낮은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왜 한숨을 쉬지?" 탄식을 터뜨린 사람이 말을 받았다. "도대체 저게 무슨 꼴이냔 말이야." "무엇이?" "제기랄, 아까 그놈은 흑군자(黑君子)야. 산서(山西) 일대에서 낭인으로 떠도는 놈이다. 그놈의 원앙퇴(鴛鴦腿)와 연쌍수(燕雙手)는 괜찮긴 하지만 결코 일류는 아니란 말야." "그래서?" 약간 분노가 스민 음성이 뒤를 이었다. "그럼 넌 분하지도 않단 말이냐? 주인(主人)이 저처럼 형편없이 얻어맞았는데도? 으휴, 시간만 있다면 흑군자의 목을 비틀어 버리는 건데." "만약 네가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면 흑군자가 네 손에 목을 비틀리는 것이 아니라 주인님의 손에 네 목이 비틀렸을 거다." "이 형편없이 비쩍 마른 놈아!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네 돌대가리로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당연하지. 물론 나도 처음에는 아흔여덟 번, 아니 이젠 아흔아홉 번이지. 아흔아홉 번을 싸워, 싸울 때마다 녹신하게 두들겨 맞는 주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한데 자세히 검토해 보자니 그 안에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괴상한 일이 세 가지나 있더란 말이야." "괴상한 일? 그게 뭔데?" "첫째, 주인님의 불가사의한 체력이다." "……!" "무명인이야 그렇다 쳐도 그 동안 주인님이 마주친 사람들 가운데는 최심사자(催心使者) 같은 고수도 있었단 말이야." "최심사자? 그래, 그 해골 같은 위인을 주인님은 그저께 만났지." "생각해 봐라. 최심사자는 화골신권(化骨神拳)이란 비기로 무림을 종횡하는 흑도의 거물급 고수야. 그의 화골신권은 말 그대로 뼈를 녹이는 위력이 있어. 보통 사람은 한 대만 맞아도 즉시 한 줌 혈수(血水)가 되는가 하면, 설사 무림의 고수라 해도 정통으로 맞으면 중상을 입게 되는 무서운 무공이다." "그렇지. 그 화골신권은 백 구의 시신에서 부독(腐毒)을 뽑아 독기를 갈무리한 사공(邪功)이니까." "한데 주인님은 그 화골신권을 정확하게, 그것도 연달아 세 대나 맞았다. 그런데도 주인님은 다음 날 아침 또다시 멀쩡히 다음 상대를 찾아나서는 기적적인 체력을 보였단 말이야." 무거운 음성이 뒤를 이었다. "듣고 보니 그렇군. 그건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뿐인가? 주인님이 맞아 기절한 다음 회복하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맨 처음에 삼수서생(三手書生)에게 맞았을 땐 꼬박 세 시진이나 걸렸던 것이 이번 흑군자 때는 차 반 잔 마실 시간밖에는 걸리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 "세 번째, 주인님이 비무를 신청한 고수들은 하나같이 권장(拳掌)의 고수들이었다. 아흔아홉 명이나 되는 사람 중에 무기를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거야.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봐야 할까?" "도대체 네놈이 얘기하고자 하는 게 뭐야?" "결론은 하나지. 저기 주인님을 봐라. 그 머리 위에 떠 있는 두 개의 화형을…… 내 기억으로 저것은 처음엔 분명히 희미한 원이었어. 한데 불과 열흘 새에 두 개의 화형으로 변했다. 즉, 주인님은 지금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신공을 연마하고 있는 거다." "신공이라고? 매를 맞아가면서? 나는 머리털 나고 그런 신공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를 대봐." 음성 하나가 다그치자, 다른 음성은 말문이 막히는지 침묵을 지켰다. 그 또한 이 놀라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같았다. "운연 소저와의 만남 이후, 주인님은 중대한 결심을 하신 것이다. 어떻게 하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지금 단시일 내에 무림의 고수대열에 끼어들려는 엄청난 작업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어." 그때 홀연, 소년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백색 화형이 스르르 그의 콧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소년은 번쩍 눈을 떴다. 분명히 몸조차 가누기 어려워 휘청거리던 그였건만 지금 놀랍게도 그의 두 눈에서 솟구치는 것은 눈부신 정광이었다. 그리고 중얼거림! "이제 겨우 두 개의 화형…… 의부께서 말씀하신 백 년 내력의 다섯 개 화형까지는 아직도 요원하구나." 소년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수림 사이로 펼쳐진 하늘을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숲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 줄기 연기 같은 회영(灰影)이 그 뒤를 스르르 따랐다. * * * 제남부(齊南府). 북으로는 요동(遼東), 흑룡강(黑龍江)을 잇고, 남으로는 안휘(安徽), 강소(江蘇)를 잇는 산동 제일의 거성(巨城). 문물은 화려하고 사람들은 유복하다. 이층, 삼층의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즐비하며, 밤이 되어도 불이 꺼지지 않는 극화(極華)의 유흥가가 다섯 곳이나 있다. 거기다가 요즘은 또 사해대검회라는 미증유의 큰 행사를 맞아 가히 제남부가 생긴 이래 최고의 많은 인파가 몰려 북적대고 있었다. 사해대검회! 온 무림의 사람들이 모조리 다 몰려온 듯했다. 대회가 열리는 날이 이제 겨우 하루 남은 오늘은 아예 발들여 놓을 만한 곳이 성내에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고급객잔, 객점은 말할 것도 없고 빈민가의 싸구려 여관까지 모조리 병장기를 찬 무림인들이 꽉꽉 들어찼고, 성내의 반점이나 주루 등도 임시로 객잔을 겸업하여 의외의 수입을 올리는가 하면, 일반백성의 민가까지도 비싼 값으로 민박을 칠 정도였다. 일설에 의하면 대봉황천이 산아래 임시로 가설한 군웅들의 숙소촌에는 오천 명 수용능력에 오만 명이 몰려 막사가 다섯 개나 무너져 버린 일도 있었다 한다. 어쨌거나 하루아침에 군웅들의 대할거장이 되어버린 이 제남부로 시월 이십팔일 신시(申時)를 알리는 타종(打鍾)과 함께 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 손엔 편괴, 또 다른 손에는 종선이 들려져 있고, 칠의삼재의 도의(道衣)를 차분히 갖춰 입은 소년도사.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이 운룡이라 이름지은 그는 제남부의 편액이 걸린 성루(城樓)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기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편액이 아니었다. 성루의 뒤, 저쪽 아득한 곳에 펼쳐진 태산(泰山)의 장엄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태산. 동악(東嶽)이라고도 한다. 중원오악(中原五嶽)의 하나이며, 예로부터 숱한 시인묵객(詩人墨客)의 시구 속에 무수히 읊어졌던 천고의 명산. 정상에는 벌써 흰눈이 소담스럽게 얹혀 있었고, 그 아래 산 중턱은 팔십이연봉(八十二連峯)이 모조리 타는 듯한 단풍일색이었다. 그 모습을 못박힌 듯 바라보던 운룡은 문득 중얼거렸다. "나는 마침내 이곳까지 왔군." 지나가던 무림인들은 어깨에 한 자루 장검을 두른 그를 기이한 시선으로 힐끗힐끗 바라보곤 했다. 백 년 전의 도가혈사 이후 무림에서 검을 멘 도인이란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반각 후, 운룡이 이른 곳은 하나의 커다란 대장간이었다. <천일주조(天一鑄造)>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캉캉거리는 금속의 연마질 소리와 왁자한 소음이 귀청을 들쑤셔 왔다. 일견해 보기에도 대단히 큰 규모였다. 중앙에는 거대한 화로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달군 쇠를 꺼내는 사람과 사방으로 동굴처럼 뚫린 십여 개의 연마방(硏磨房)에서 담금질에 여념이 없는 장인(匠人)들의 모습이 보였다. 운룡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이십대의 장한 하나가 웃으며 다가왔다. "진인(眞人)께선 무엇을 주문하시렵니까? 헤헤…… 저희 집은 제남부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전통과 신용의 대장간이지요. 무엇이든지 만들어 드립니다." 운룡은 주위를 천천히 휘둘러보았다. 저쪽 벽에 음식점의 차림표처럼 각종 주물제품의 가격을 써놓은 가격표가 보였다. <석 자 청강장검(靑剛長劍) 다섯 냥(兩). 석 자 대근도(大 刀) 일곱 냥. 삼 척 부도(斧刀) 열다섯 냥. 기타 일절 주문주물의 값은 철의 무게에 따라 규정합니다. 천일주조.> 운룡은 주머니에 든 은자 한 냥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한 냥짜리 검은 없소이까?" 그의 입에서 한 냥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점원의 안색이싸늘해졌다. 그는 지극히 퉁명스런 어조로 물었다. "무슨 검인데요?" "크기는 석 자이되 무게는 팔십 근(斤) 정도……." "맙소사! 팔십 근이라면 그게 검이요? 도(刀)지." "검처럼 얇아야 하오. 한철(寒鐵) 종류를 쓰면 그런 무게를 낼 수 있다고 들었소만." 점원은 냉랭히 코웃음을 터뜨렸다. "이보시오, 도사양반. 한철의 값이 얼마나 하는지 알기나 하시오? 한철로 팔십 근 무게의 검을 만들자면 은자 백 냥은 족히 있어야 할 것이오." "백 냥?" 점원은 해연히 놀라는 표정의 운룡을 곁눈질하며 미련없이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빈털터리 손님은 오래 상대해 봐야 피곤하기만 한 법이므로……. 쨍강! 쨍―치이익― 철물을 담금질하는 무거운 금속성만이 운룡의 귓전을 희롱하듯 넘나들고 있었다. 7. 억지 배짱 백 냥. 은자 백 냥이란 금액은 배에 기름기가 낀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발목까지 파묻히는 융단이 깔린 호화주루에서 먹고 마시는, 요리 몇 가지와 술 몇 병에 알맞은 돈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르는 애완용 강아지 먹이로나 쓰이는 하찮은 액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운룡은 머리털 나고 생전 그런 돈을 만져보기는커녕 구경해 본 적도 없다. 은자 열 냥으로 다섯 식구가 한 달을 사는 시대였다. 무당산 시절, 운룡이 산아래 채석장에서 한 달 내내 돌을 쪼고 받은 돈이 은자 다섯 냥이었다. "백 냥……." 어깨와 어깨를 맞부딪치다시피 걷는 인파 속을 발길 닿는 대로 옮겨가며 운룡은 중얼거렸다. "백 냥이라……." 팔십 근 무게의 검을 생각해낸 것이 애초에 잘못이었을까? 녹의소녀 운연을 떠나보낸 그날 밤, 운룡은 밤새도록 북망산 기슭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밤이 으슥해지자 처량하게도 궂은비까지 내렸다. 만약 새벽의 여명이 무지개를 피어올리지 않았더라면 심야의 유적과 밤비의 고독에 휩싸여 운룡은 그대로 비무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무지개. 그렇게 아름답고 영롱한 무지개를 운룡은 일찍이 어디서고 본 적이 없었다. 의부 위지중걸의 말이 떠오른 것은 영롱한 무지개에 흠뻑 취해 넋을 잃고 있던 그때였다. ―이제부터의 삶은 바로 너의 것이다. 이제 다시 너의 잔에 술을 채워주는 사람은 없다. 네 스스로 채워야 한다. 아아! 그 한마디 말이 그토록 사무치는 말이었을 줄이야……. 그렇다. 누가 자기 대신 삶을 살아 주겠는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그때까지의 그것이 나일 수밖에 없듯, 있고 없음을 한탄하기 전에 굳은 의지를 가져야 할 일이었다. 운룡은 웃었다. 그는 무지개를 바라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한다! 나의 의지로 해내고야 만다." 마음을 굳히고 나니 여러 가지 것들이 떠올라 주었다. 천기대나인신공(天機大那引神功). 의부는 남과 싸울 때 반드시 맞되 대신 이 신공을 운용하라 했다. 그것은 바로 내공을 증진시키는 방법의 암시였다. 다섯 송이의 화형이 이루어지면 백년내공(百年內功)이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운룡은 우선 이 백년내공 성취를 첫번째 목표로 삼았다. 이어 촉박하게 다가온 비무대회를 대비하여 그는 자신이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장점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골똘히 연구했다. "무거운 무기를 만들자. 부족한 초식을 힘의 운용으로 보충하는 거다." 그에게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힘이었다. 채석장에서는 운룡을 힘으로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팔십 근의 거검(巨劍)을 떠올렸던 것인데……. 백 냥! 백 냥이라니……. 도둑질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그런 거액을 도대체 어디서 마련하겠는가? 그때 문득 운룡은 걷던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의 앞에는 마치 황궁인 양 어마어마한 거장(巨莊)이 하나 서 있었다. <와운거(臥雲居)> 분명 일반백성의 집일 텐데도 높이 삼 장의 거대한 대문 앞에는 네 명의 호위무사들이 우락부락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거기다가 수백 장을 뻗어나간 녹와주문(綠瓦朱紋)의 으리으리한 장식. "제길! 저 기왓장만 뜯어도 은자 백 냥은 실히 되겠군." 운룡은 중얼거리다가 말고 문득 한 번 더 장원의 거대한 담벼락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좋아!"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운룡은 도복을 한차례 추스르고는 성큼성큼 장원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장원의 호위무사들은 저 만치서 다가오는 운룡을 힐끗 바라보고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또 어떤 돌팔이 도사일까?' '하여간 이놈의 집엔 어중이떠중이 할 것 없이 온 천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돌팔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몰려온다니깐?' "정지!" 운룡이 채 장원의 돌계단을 다 올라서기도 전에 무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날카롭게 외쳤다. 한데 운룡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돌계단을 다 올라서고 난 후, 옷의 먼지를 툭툭 털고는 느닷없이 수중의 편괴로 장문(莊門)을 소리나도록 두들겨댔다. 탕탕탕! "이리 오너라!" 이리 오라니? 그의 눈엔 버젓이 눈앞에 버티고 선 네 명의 무사가 보이지도 않는단 말인가? 무사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운룡은 거푸 다섯 번이나 문을 찍어댔다. "아무도 없느냐?" 쾅쾅! 이번에는 공력을 주입시킨 듯 그 소리가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 쳐다볼 정도로 컸다. 쾅쾅쾅! 순간 우두머리 무사가 기겁을 하며 운룡의 앞을 막아섰다. "미쳤소? 지금은 노야(老爺)께서 낮잠 주무시는 시간이란 말이오." 운룡은 짐짓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오?" "무슨 상관이라니? 당신은 이노야(李老爺)가 어떤 분인지 모른단 말이오? 이 나라의 전 재상(宰相)이셨으며 세 딸 중 두 명을 왕대비(王大妃)로 보내신 한북 제일의 부호로 이름난 이결(李潔), 이노야의 오수를 방해하려 하다니!" "호오! 실로 대단한 양반이시구려." "그걸 말이라고 하오?" "하지만 난 들어가야겠는걸?" "이노야께선 오수 시간엔 아무도 접견치 않소." "난 달라." "왜?" "만나러 왔으니까." 무사의 눈에 싸늘한 한광이 서렸다. "경고하오. 물러서시오!" 말과 함께 그는 수중의 장검을 뽑아 서슬 퍼렇게 겨누었다. 그때 한소리 노갈과 더불어 한 사람이 나타났다. "왜 이리 시끄러운가?" 순간 무사들은 다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웬 자가 감히 노야를 뵙고자 하기에……." 금의인(錦衣人). 중년의 나이인 그는 일견해 보기에도 예리한 선비의 기(氣)가 엿보였다. 그는 문가에 우뚝 선 운룡을 힐끗 바라보더니 침중한 어조를 토했다. "소생은 와운거의 집사인 여운(余 )이라 하오. 실례오만 진인은 어느 도관에서 오시는 길인지?" 운룡은 싱긋 웃었다. 일단 안 사람의 주목을 끌어보려던 그의 목적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무량수불…… 빈도는 무당 삼청관의 운룡이라 하오." "삼청관…… 하온데……." "빈도는 급히 좀 만나달라는 이노야의 전갈을 받고 달려오는 길이오." "노야께서?" 집사 여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저 와운거의 모든 초청, 빈객은 그가 맡아서 하기 때문이다. 그가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고 운룡이 재차 말을 이었다. "급한 일이라 하셨소. 여집사는 속히 이 사실을 노야께 아뢰어 주시오." 집사 여운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운룡을 한차례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운룡은 즉각 대문 안쪽에 있는 임시 빈청으로 안내되었다. 화각(花刻)과 용각(龍刻) 등으로 멋을 낸 정교한 누각이었다. 누각에 올라 내려다보니 와운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밖에서 볼 때와는 달리 안의 규모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의 배치가 매우 정교하고, 군데군데 심어진 화초와 인공연못의 배합이 집주인의 높은 안목을 느끼게 했다. 특히, 화원마다 지천으로 심어진 추국(秋菊)이 한결 운치를 돋우어 멋진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돈 많은 사람치곤 멋을 아는 눈치로군." 누각 안을 왔다갔다 하기를 일각 가량 지났을까? 돌연 저쪽 안채로부터 시녀 차림의 소녀 하나가 나오더니 누각의 아래에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안으로 듭시라는 분부이옵니다." * * * 단향(丹香). 세 개의 문을 거쳐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를 확 찔러오는 것은 단향의 내음이었다. 그리고 투명한 벽옥(碧玉)의 광채로 빛나는 옥불상(玉佛像) 하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한 갈색의 융단과 오래 묵은 침엽수를 잘라 만든 가구 등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는 방이었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사방으로 놓인 문갑 위로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돌들이 정교하게 놓여져 있다는 것이었다. 물이 담긴 옥쟁반에 담긴 그것들은 큰 것은 한 자(尺)만한 것부터 작은 것은 조약돌만한 것까지, 또한 붉고 푸르고 검은 매우 다양한 색을 갖추고 있었다. 이노야(李老爺)는 주둥이에 철망을 친 옥주전자로 그 중 붉은 빛을 띤 산 모양의 돌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매우 고요했다. 물을 줄 때 그는 마치 생명이 있는 물체를 다루듯 조심스런 모습이었다. 운룡이 방 안으로 들어선 기척을 알 텐데도 그는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괴괴한 정적 속에 물이 따라지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쪼르르― 이윽고 마른 백포로 수석(壽石)을 받친 옥쟁반을 말끔히 훔치고 난 다음에야 이노야는 입을 열었다. "무당파의 운룡 도인이시라고?" "그렇습니다." "흐흠!" 이노야는 천천히 보료를 깐 자신의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귀도인을 만나고자 한 일이 없는 것으로 기억하오만?"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만나고자 하였소?" 보료 위로 몸을 앉히고 나자 비로소 이노야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서리 같은 백발이었으며, 나이는 육십을 갓 넘긴 듯했지만 혈색은 어린아이처럼 불그스름했다. 그 얼굴엔 일국의 재상을 지낸 자다운 위엄과 적당한 관용이 어우러져 있었다. 운룡은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받으며 정좌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노시주께 돈을 빌리고자 합니다." 이 느닷없는 말에 이노야는 흥미롭다는 듯 가벼운 탄성을 터뜨렸다. "돈이라고요? 속세를 떠난 도인께서 무슨 돈이 필요하시오?" "검을 만들기 위해서지요." "검?" "팔십 근 무게의 한철강검이오." "검은 만들어서 무엇하오?" 운룡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낭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오." 이노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그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돈을 빌려주고 나면 나는 어디에 가서 그 돈을 청구해야 하오?" "빈도입니다." "그대는 낭인의 차림이 아니신가?" "빈도는 돈을 빌렸으면 갚습니다. 대인은 돈을 빌려줬으면 받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이노야는 가볍게 웃었다. "내가 반드시 돈을 빌려주리라 생각하오?" "그렇습니다." "그건 왜 그렇소?"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흐흠! 그러나 나는 일국의 재상이었소이다. 나라의 돈은 한 푼도 헛되이 쓴 적이 없소. 내 개인의 돈도 마찬가지요. 헛된 곳에 쓸 수 없소." 이노야는 담담한 웃음과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평생 지켜온 이 수칙을 오늘에 이르러 깰 수가 없구려. 이렇게 진인을 만난 것은 내가 거절했을 때 진인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 같아서였소. 안됐소만 진인의 모든 요청을 정식으로 거절하오." 담담함 속에 송곳이 솟은 말. 또한 간단함 속에 굳음이 깃든, 어느 것 하나 꼬투리를 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운룡은 씩 웃었다. 웃으면서 그는 엉뚱하게도 한쪽의 수석을 가리켰다. "저 돌들은 어떤 것입니까?" "수석이오. 돌이지만 생명이 있지. 내 아들과 같소." 순간 운룡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성큼성큼 수석을 향해 다가가더니 그 중 하나를 성큼 들어 이마 위로 번쩍 쳐들었다. 이노야의 얼굴에 한줄기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게 무슨 짓이오?" "운룡은 감히 대인이 일생을 지켜오신 수칙을 깨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생의 사문은 은자 백 냥에 그 명예가 걸려 있소. 둘 다 중요하니 운룡은 할 수 없이 이것을 들었소." "그걸 들어 무얼 어쩌려고……?" "나는 이제 이 돌을 깨려 합니다. 이것은 협박이오. 대인은 이 협박에 못이겨 돈을 주시면 되오. 즉, 대인은 돌을 살리기 위해 돈을 내놓으니 지켜온 수칙을 어기지 않는 것이 되고, 운룡은 그 돈으로 문파의 명예를 지키오. 둘 다 합당합니다." 무엇이 합당인가? 순 억지였다. 이노야는 어이없다는 듯 운룡과 그가 들고 있는 돌을 한참이나 번갈아 보았다. 참으로 당돌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다. 무례히 거짓말로 침범하여 남의 오수를 방해하더니 이제는 또 협박인가? 무거운 침묵 속에 시선과 시선이 얽혔다. 이노야는 새삼 운룡의 몰골을 뜯어보았다. 이마가 넓고 밝으니 그것은 천생이 귀함을 나타내는 것이요, 두 눈은 흑백이 분명한 가운데 정기가 서려 있으니 마음에 거짓이 없음이다. 입술은 붉고 단아하니 사내의 기개가 충만한 것이고, 두툼한 귀는 심성이 관대하고 넓음을 뜻한다. '허어…… 처음엔 모르겠더니 자세히 뜯어보자니 저 상(相)은 그야말로 대부대귀(大富大貴)의 용상(龍相)이 아닌가? 게다가 저 배짱을 보라. 황제의 앞이라 해도 할말을 다하고 말 두둑함이 넘치는구나.' 문득 노재상의 얼굴에 한줄기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미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것은 점점 밝고 투명해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방안이 떠나갈 정도의 파안대소(破顔大笑)로 바뀌었다. "핫핫핫…… 좋군, 좋아." 그는 거의 반다경 동안이나 웃고 나더니 그 웃음이 채 다 지워지지 않은 얼굴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이리로 앉으시오, 진인. 그리고 나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그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너털웃음을 머금었다. "여집사는 밖에 있는가?" 즉시 집사 여운의 음성이 들려왔다. "분부 기다립니다." "명하노니 오늘 이 시간부터 와운거의 모든 재산에 대해 무당의 운룡도인은 그 권리가 있다. 그가 무엇을 원하든 이유없이 대주도록 하라!" 실로 파격적인 말이었다. 다시 말이 이어졌다. "대문을 크게 열고 잔치준비를 하라! 실로 오랜만에 현인(賢人)을 만났으니 크게 먹고 마시어 취하고자 함이다." * * * 돈[錢]. 돈으로 안 되는 일이란 이 세상에 거의 없을 것이다. 은자 백 냥이 내밀어지기 무섭게 땅까지 머리가 닿던 그 오만한 점원의 모습이 그렇고, 아무리 빨리 잡아도 하루는 족히 걸릴 검의 제련작업이 단 세 시진 안에 끝났다는 것이 그렇다. 그것도 천일주조의 이십여 명이나 되는 장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달구고 때리고 부순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백 냥짜리 일 때문에 다섯 냥이나 열 냥짜리 일들이 뒤로 젖혀져 본의 아니게 세 시진이나 늦춰지는 피해를 입은 것이다. 가장 귀히 여겨야 할 인간의 심성이 한낱 차가운 은덩이로 인해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검은 만들어졌다. 그것은 운룡이 보기에 매우 흡족한 검이었다. 가장 깊은 땅 속에서 난다는 한철의 약간 붉은 기가 도는 색깔이 좋았고, 어지간한 귀인이 아니면 붙여드리지 않는 것이란 사족과 함께 달려진 용각쌍주(龍刻雙珠)의 두툼한 검자루도 좋았다. 특히 그 무게! 정확하게 팔십 근 하고 반여 근이 넘는다. 사람 하나 무게가 실히 되어 장인 두 사람이 겨우 들던 무게였지만 운룡의 손에는 신기할 정도로 꼭 맞았다. 붕! 붕! 검을 두어 차례 휘저어 본 운룡은 씩 웃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어 그는 검과 함께 얻어온 곤봉(棍 ：검의 강도, 습도를 시험해 보는 작은 솜방망이)과 밀포(密布)로 공들여 검을 닦아 나가기 시작했다. 캥캥! 멀리서 들리는 늑대의 울부짖는 소리. 쏴아아― 대숲을 휘몰아오는 가을바람, 그리고 달빛. 태산(泰山)의 한 자락쯤 될 이곳은 야트막한 능선이었고, 운룡은 대숲이 우거진 바위 아래 낙엽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한 겹 서리가 내려앉는다. 달빛을 받은 풀잎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검을 닦아 나가는 과정은 매우 섬세한 주의가 필요했다. 약간의 습기라도 배어 있으면 곤봉의 소리가 틀려졌고, 검을 기름 묻힌 밀포로 정성들여 닦아 나가자면 이마에 저절로 땀이 맺히기 십상이었다. 서천의 달이 밤하늘 한가운데로 올랐을 때에야 비로소 운룡은 이마의 땀을 씻으며 곤봉과 밀포를 놓았다. 그는 검을 검집 속에 잘 장전해 둔 후, 심기를 모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두 개의 화형(花形). 무형의 기운이 유형으로 변해 나타난 이것은 여지없이 두 개였다. 다섯 개가 백 년의 수위를 나타내니 두 개라면 약 삼사십 년의 수위. 이것이 아흔아홉 명에게 피멍이 들도록 얻어맞아 생긴 노력의 결과라고 말한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후르륵― 두 개의 화형을 콧구멍 속으로 흡입한 운룡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소나기 같은 달빛이 퍼부어지고 있는 창공을 한차례 우러러보고 난 후, 느릿하게 팔십 근 무게의 한철검(寒鐵劍)을 뽑아 들었다. 천주부동(天柱不動)! 무아정심(無我靜心)! 한순간 한철검이 둔중한 바람소리를 휘날리며 싸늘하게 허공을 갈랐다. 춘풍화우. 삼재검법의 제일식. 한데 분명히 춘풍화우는 춘풍화우였지만 어딘가 틀렸다. 겉에서 보고 있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춘풍화우의 초식이구나 하고 느끼겠지만, 만약 한 고수가 있어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 초식의 앞에 서 있는다면 그는 매우 당황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강호의 하류검법이 놀랍게도 그 속에 많은 변화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춘풍화우는 기(起), 사오횡사(四五橫斜), 말(末)로 끝나는 매우 단순한 초식이다. 즉, 검을 세워 들어 사십오 도의 각도로 비스듬히 긋고 나면 그만인 것이다. 한데 운룡의 춘풍화우는 비스듬히 그어진 데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서부터 검끝이 심하게 흔들려 도저히 그 이후의 변화를 짐작해낼 수가 없었다. 만약 정면으로 뻗어 나온다면 나부(羅浮)의 난향암송(蘭香暗送) 초식이 될 것이고, 우측 사각(斜角)이라면 점창(點蒼)의 천하도괘(天下道卦), 좌측 사각이라면 운남(雲南)의 획분음양(劃分陰陽)이 될 것이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이러한 세 초식에 대한 대응책은 각기 판이하게 틀리기 때문에 상대가 놀라게 되는 것이다. 운룡은 춘풍화우를 반쯤 펼치다 말고 동작을 뚝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무엇인가를 땅에다 어지럽게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 운남의 운남검객(雲南劍客)이라는 그 친구의 검초는 분명히 이렇게 뻗어 나왔어. 춘풍화우의 네 번째 변화로 응용하면 되겠구나. 그 다음 변화에는 흑군자의 원앙각을 응용한 세변(細變)의 초식이 어떨까?" 운남검객에다 흑군자, 이어 최심사자며 등운객(登雲客) 같은 무림의 고수 이름들이 그의 입으로부터 즐비하게 흘러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과거에 운룡이 백패진인으로 행세하며 한 번씩 겨루어 본 고수들. 오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설마하니 이 괴상한 친구는 그들의 초식 속에 숨은 정화(精華)를 연구하여 어느새 자신의 삼재검법에 갈무리하고 있었단 말인가? 열흘에 아흔아홉 명이니 하루에 근 열 명과 싸운 꼴. 그것도 싸움이 아니라 거의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꼴인데 그 사이에 무슨 초식을 어떻게 뇌리에 집어넣었단 말인가? 의문은 곧 풀렸다. 운룡은 이내 벌떡 일어나 다시 춘풍화우의 초식을 이어갔으며, 놀랍게도 그 안에선 무려 십오 개 파의 초식의 정화가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휘이익! 휘잉! 칼바람에서 솟구쳐 나온 매서운 경기에 주위의 풀들이 이리저리 누웠다. 달빛이 운룡의 이마에 맺힌 땀을 은빛으로 투과해 가고 있었다. 그때 돌연, 우측 숲속으로부터 나직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짝짝짝! 춘풍화우에 이어 삼재검법의 제이식인 횡소천군의 변화를 어떻게 이어갈까 골몰하던 운룡은 놀라 시선을 돌렸다. 저쪽 십여 장 밖의 어스름한 나무그늘 아래 두 사람이 있었다. 나이는 이십오륙 세쯤 되었을까? 두 사람은 똑같이 무복(武服)에 검을 차고 있었다. 한데 그 두 사내의 기질만은 서로 판이하게 틀렸다. 좌측의 사내는 흰 백의(白衣), 우측의 사내는 먹물 같은 흑의(黑衣)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백의는 비단이요, 흑의는 거친 마의(麻衣)였다. 비단백의의 사내는 멀리서 보기에도 한눈에 뜨일 만한 준미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비록 허리춤에 검을 찼으나 무인이라기보다는 선비의 인상이 더 짙었다.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에 두 눈은 마치 횃불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반면에 흑의사내는 백의사내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에 석고처럼 무심한 표정. 그의 눈은 감정없는 회색의 빛을 띤 채 공간에 그저 붙박혀 있었고, 허리춤에는 검인지, 쇠꼬챙이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길고 가는 무기만이 매달려 창백하게 번들거렸다. 온화하고 맑으며, 차고 혼탁한 이 인(二人). 그 두 사람은 보는 이에게 몹시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 도저히 융화될 수 없는 기질을 지녔는데도 나란히 있기 때문이다. 박수를 친 사람은 백의청년이었다. 그는 운룡이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자 담담하게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공연히 연마를 방해하였소. 하나 우연히 지나던 길에 본 그 초식의 운용이 너무나 절묘하여 절로 흥취가 일고 말았소이다." 칭찬하는데 싫다는 사람은 없다. 운룡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빈도의 초식을 알아보셨습니까? 사실 여러 개를 이 안에 집어넣긴 했지만 몹시 어색하고 거북하여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지요. 그 안에서 혹시 결점이라도 발견하셨습니까?" 상대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많은 말. 거기다가 조금의 숨김도 없는 소탈한 태도가 아닌가? 백의청년의 두 눈에 한줄기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났다. '천진난만할 정도로 솔직하군. 차림으로 보아 도가의 제자인 듯한데…… 아직도 무공을 쓰는 도가가 중원무림에 있었던가?' 그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점이라니요. 춘풍화우 같은 단순한 초식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여겨질 뿐이오이다." "핫하…… 시주께서도 사해대검회에 참가를……." "아니오. 그저 구경차 왔소이다. 저쪽에는 너무 사람이 많아서 적당히 유숙할 곳을 찾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지요. 소생은 두자상(杜子湘)이오. 옆의 이분은 연비(燕飛), 연형이오이다. 한데 진인의 도호는?" "운룡이오. 금번 사해대검회에는 무당파 제삼십칠대 장령의 신분으로 참가하러 왔소." 순간 무슨 영문인지 백의청년 두자상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무당파?" 이제까지 줄곧 침묵을 지킨 채 허공만 올려다보고 있던 연비라는 흑포마의인도 힐끗 운룡을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 동공에선 괴이한 광채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운룡은 이들이 지나치게 놀라자 적이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본 파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오?" 백의청년 두자상이 다급히 물었다. "백 년 전 도마(道魔)에 의해 멸문당한 그 무당파 말이오?" "그럼…… 무당파가 둘이나 셋이 있소이까?" 두자상의 시선이 힐끗 연비라는 사람을 향했다. 연비는 어느새 본래의 무표정함으로 돌아와 밤하늘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아직도 상기된 흔적이 역력함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심중 격동은 뜻밖에도 대단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두자상 또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이윽고 담담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을 그냥 운형이라 부르겠소. 실례오만 소생 등도 이곳에서 유숙을 하면 아니 될는지…… 사사롭게 드릴 말씀도 있소만……." 운룡은 밝게 웃으며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이곳은 천자님의 산이니 아무나 묵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빈도 또한 적적하던 차이니 잘되었군요." 즉시 한적한 산의 공터에선 유숙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마른 낙엽이 수북이 날라져와 깔리고 한아름씩 지고온 장작으로 모닥불이 활활 피워졌다. 세 사람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연비는 쇠꼬챙이 같은 검을 가슴에 품은 채, 나무등걸에 기대었고 두자상과 운룡은 서로를 건너다보는 위치에 앉았다. 가벼운 침묵. 탁탁! 서늘한 밤바람이 불빛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두 사람의 얼굴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뭇가지 하나로 불길을 다독거리고 있던 두자상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럼 운형은 무당파의 직전제자이시오? 그곳에는 아직도 도인들이 있소?" 운룡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빈도는 나이 오 세 때 무당파에 입문했지요." 이어 그는 본래의 무당도사들이 사라진 후, 청지기로 있다가 문파를 이어받은 가람사조(伽藍師祖)와 현청노도사의 얘기, 그리고 그의 두 사제인 벽뢰와 여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사부와 함께 가재를 잡으러 다니던 일이며, 무공을 연마하던 얘기, 채석장과 무당산의 아름다운 풍경 등에 대해서도……. 묵묵히 귀를 기울여 듣던 두자상은 이윽고 운룡의 긴 얘기가 끝나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려……." 돌연 그의 명석해 보이는 시선이 운룡을 똑바로 정시해 왔다. "운형은 지금부터 이곳에서 듣는 얘기를 그 어디에서도 발설치 않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겠소?" 운룡은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자상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침통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소생은 사실 무림인이 아니라 대내(大內) 어전소속 금의위대(錦衣衛隊) 통령(統令)의 신분이오. 지금은 감찰사(監察使)의 어명을 받아 강호에 나왔소." 감찰사! 이는 지방관제의 장(長)과 맞먹는 직위로, 지방의 제후라 해도 괄시할 수 없는 무거운 중앙요직이 아닌가? 두자상은 운룡의 놀란 표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백 년 전, 이 땅에 벌어졌던 도가혈사(道家血事)는 황제마저 놀라게 했고, 온 조정을 경악에 휩싸이게 했소. 일만오백 명의 비명횡사, 오만에 달하는 도가의 멸문, 이것은 결코 간단히 좌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오." "……!" "당시의 선(先) 황제께서는 즉시 엄명을 내리시어 두 명의 감찰사를 무림에 파견하셨소. 하나 진인도 알다시피 도마는 하늘로 올라갔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종내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소. 하지만 이 일은 워낙 조정을 경동시켰기에 선황이 돌아가시고 지금의 황제께서 그 대(代)를 잇고난 후에도 도마색출의 엄명은 거두어지지 않았소. 소생은 최초의 감찰사 이래 다섯 번째로 선임된 오대 감찰사이오. 강호에 나온 지는 정확히 이 년 되었소." 두자상은 연비를 힐끗 바라보았다. "저분 연형은 무림동도로서 우연히 소생과 만나 소생의 뜻을 안 후, 스스로 돕겠다고 자청해 나서주신 분이오. 검법이 신비로운 지경에 이르러 있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소." 운룡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마라는 이 일대의 흉마는 그로서는 잊을 수 없는 사문의 대적(大敵)이 아니던가? 이 일을 황궁에서까지 이토록 중시하고 오대째의 감찰사가 연이어 무림에 나왔을 줄이야! "그럼 도마에 대한 단서는 잡으셨소, 대인(大人)?" "대인이란 칭호는 어색하니 그냥 두형이라 불러 주시오. 도마에 대한 것은 앞선 네 분의 감찰사께서도 거의 그 단서를 잡지 못하셨소. 다만 그 무예가 신비로울 정도로 높고 살인수법이 잔인하여 사고를 가진 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도가의 푸른 도복에 대해 특이한 살의(殺意)를 가지고 있는 자란 정도이오." "살의……?" "그렇소. 도인들은 일반적으로 푸른 도복을 입소. 아주 드물게 회색이나 황색을 입는 경우가 있으나 도마에게 살해당한 도인들은 단 하나도 어김없이 푸른 도복을 입고 있던 사람들이오." "무량수불……." "선배 감찰사의 제기록에 의거, 이 년의 유행(遊行)을 한 결과 소생은 몇 가지의 심중을 굳혔소." "그게 어떤 것이오이까?" 두자상은 지혜가 어린 두 눈에 신광을 뿜어올리며 말했다. "도마의 무예는 일반무림의 차원을 벗어났다는 것이 그 첫째요, 둘째는 그의 흔적이 이토록 오랫동안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이름난 문파가 아니라 은둔하고 있는 문파의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이오. 그 결과, 나는 요즘 한창 소문이 되고 있는 십사계파에 강력한 혐의를 두고 있소." 운룡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십사계파……?" "이번 사해대검회에는 그래서 온 것이오. 만룡가 대봉황천 또한 혐의대상 중의 하나이오. 오랫동안 은둔하고 있었다는 것…… 일반차원을 벗어난 무예수준…… 모두 합당하오." 두자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뒷짐을 지고 느릿하게 장내를 거닐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소생이 볼 때 운형의 재질은 매우 놀랍소. 삼재검법 하나를 가지고 사해대검회에 참가한다는 배짱도 놀랍거니와 아까 보았던 그 초식도 놀랍소. 이번 대회에서 운형은 분명히 태풍의 눈이 될 것이오." "과찬의 말씀." "하나 이번 대회는 만천하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모두 모이는 터…… 일설에 의하면 일만의 고수가 참가를 한다고 하오. 즉, 우승을 하기 위해선 열네 번을 전승(全勝)해야 하오. 이 일은 사실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오." 두자상의 시선이 힐끗 운룡을 향했다. "각 문파는 이번 일이 문파의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여 그 문파의 최고정예를 출전시키는 한편 문파의 중진고수를 선발하여 사오 명씩 특수조련인을 붙였다고 하오. 이 조련인들은 선발고수의 체력안배나 음식조절 같은, 선발고수가 최고의 임전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반을 기하는 그런 사람들이라 하오." "……." "어떻소, 운형? 마침 운형은 혼자이니 우리 두 사람이 운형의 특수조련인이 되겠소. 모든 일은 우리에게 맡겨 주시오. 단, 운형은 검회의 승자가 되어 대봉황천의 깊은 곳까지 접근해 주시는 것이오." 즉, 운룡의 힘을 빌어 대봉황천의 내막을 파헤쳐 보겠다는 얘기다. 이것은 두자상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자신이나 연비가 출전하고 싶지만 자신들은 고정된 문파가 없다. 대봉황천이 이 일에 의혹을 갖게 되면 결국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편 운룡은 또 어떠한가? 운룡, 그는 천생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도마의 일은 어차피 그가 언젠가는 풀어야 할 숙제였다. 하니 그가 이 일을 마다할 까닭이 있겠는가? 운룡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성큼 고개를 끄덕였다. "무량수불…… 그렇게 해주신다면 오히려 빈도가 더 감사드릴 일이지요. 운룡은 쾌히 이 일을 승낙하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모닥불이 그들의 얼굴 위로 달빛처럼 얼룩지고 있었다. 8. 몰려드는 군웅(群雄)들 시월(十月) 이십구일(二十九日). 태산 관일봉(貫日峯) 능선 너머로 뽀얗게 여명이 스미는 것으로 시월 이십구일의 아침은 시작되었다. 하나 이 아침을 태고의 유적(幽寂)과 새소리, 서리앉은 풀잎 위를 다람쥐가 스쳐 뛰노는 아침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아직 여명이 트기도 전인 새벽 묘시(卯時) 경부터 태산 관일봉을 오르는 길은 인파로 꽉꽉 메워지고 있었으며, 그런 그들이 내쏟는 소음은 중원의 모든 시장바닥을 다 합쳐놓은 것보다도 더 시끄러웠던 것이다. 사해대검회. 사상 최고의 규모와 그 비중에 미루어 대회는 시작되기도 전부터 갖은 소문이 난무했다. 우선, 비공식적인 것이긴 하나 대회참가자, 즉 직접 비무를 하는 사람만 해도 무려 일만에 다다른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대회의 진행시간은 아무리 못 걸려도 두 달이 넘게 걸릴 것이며, 최후의 우승자를 가리는 날은 내년 원단(元旦) 정초가 될 거라는 얘기였다. 참가자 일만에 그들에게 딸린 특수조련인이며, 시종들을 감안해 약 오만의 사람들을 수용할 대막사촌이 태산의 한 계곡에 이미 지어져 있다고 했다. 당시 대도(大都) 장안(長安)의 집 수가 일만 호(戶)라 하였으니 오만의 사람이라면 그대로 도시 하나의 규모. 사실 대봉황천은 이 막사촌을 건립하기 위해 하나의 산봉을 아예 평지로 만들고 두 개의 계곡을 다져야만 했다. 막사촌의 이름은 단계촌(丹桂村)이었다. 워낙 참가하는 사람이 많아 대회는 모두 십여 곳에서 나누어 진행된다. 약 한 달에 걸쳐 진행되는 이 예선비무에선 구천구백이십 명이 탈락하고 팔십 명의 고수들만 남게 되는데, 이 팔십 명이 다시 대봉황천의 중앙무대로 장소를 옮겨 소위 본선을 치르는 것이다. 각 예선장소의 공증인(公證人)은 대봉황천 고수 일인, 오대문파 명숙(名宿) 일인, 기타문파 명숙 일인, 모두 세 명으로 구성된다.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군웅들은 제각기 우승후보를 점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무림에서 열리는 대소 비무대회에는 대게 각 문파의 젊은 고수들이 참여할 뿐, 노장고수들은 참여치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들로선 나와서 이겨 봐야 그렇고, 만약 진다면 망신이니 자연 그런 대회를 기피해 왔던 것이다. 하나 이번 대회에 대봉황천이 내건 우승자에 대한 조건이 무림에 상세히 알려지자 그런 사실들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초청장에서는 단순히 비무의 우승자 및 서열 팔위까지의 고수자들에게 대봉황천의 적통을 이어받을 권리를 부여한다고만 밝히고 있으나, 대회에 임박하여 나타난 조건은 더더욱 엄청난 것이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산(山). 즉, 금악(金嶽)! 어디에 있는 것인지, 정말로 산 전체가 황금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이 금악이 바로 대봉황천 만룡가의 발원지(發源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천 년의 신비! 당금 무림 최고의 무예수준을 자랑하는 만룡가의 발원지 금악이 서열 팔위까지의 고수자에게 전면 개방된다는 것이 바로 대회에 임박해 흘러나온 소문이었다. 그러자 무림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젊은 신진고수층은 말할 것도 없고, 심산에 은거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있던 대기인(大奇人)들까지 속속들이 무림에 나타났다. 나이 백 세부터 나이 십오 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망라된 전무후무한 참가진용이 갖추어진 것이다. 군웅들은 풍문으로, 또는 근거에 의하여 소위 검회이십강(劍會二十强)을 점치기에 바빴다. 그들이 뽑은 검회이십강이란 다음과 같았다. 개화십강(開花十强).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이 개화이니, 즉 소장, 청년, 소년층의 고수를 말하는 것이다. 사천당가(四川唐家)의 차대장령(次代掌令)이며, 백이십수열화폭(百二十手熱火暴)으로 사천 일대에서 젊은 사자로 불리는 사자여래(獅子如來) 당인(唐仁).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의 공동전인이자 연북(燕北) 일대 암흑가의 총수인 묵비향(墨飛香). 무림북두 소림(少林)이 백 년 이래로 키워낸 최고의 기재라는 초우법승(草羽法僧). 한 자루 서벽신검(瑞碧神劍)으로 중주(中州)를 진동시킨 점창(點蒼)의 수일평(首一平). 한 번 몸을 띄우매 그 종적이 없고 용모는 깎아놓은 상아를 방불케 한다는 곤륜(崑崙)의 운연(雲燕). 화산(華山)이 심혈을 기울여 배출한 권장(拳掌)의 젊은 달인, 권왕지왕(拳王指王) 목철우(木鐵羽). 대연승허(大然昇虛)의 보타암 청조각(靑操閣) 최고의 가인(佳人), 능파선녀( 罷仙女) 예소벽(芮小碧). 신비의 도적떼 생사선주(生死船主) 혈독(血毒) 혜공(慧拱). 만해창파(萬海蒼波) 숭명제도(嵩明諸島)의 고독도주(孤獨島主) 불인기(不仁奇). 온몸이 불인 듯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펼쳐지는 마도지한(魔道之漢) 혈영신공(血影神功)의 전인, 혈영문주(血影門主) 화월후(火月吼). 이상이 젊은 후기지수 십 인, 개화십강들의 이름이다. 낙화십강(落花十强). 꽃이 떨어지는 것이 낙화이니 인생의 황혼기인 노년, 장년의 고수층을 일컫는 말. 만독귀수(萬毒鬼手) 준남(準南) 응조왕(鷹鳥王). 유랑개방(流浪 )의 벽력신개(霹靂神 ). 백근철괴(百斤鐵槐)의 대살성, 구혈모모(求血 ). 안남(安南) 신기방주(神旗 主) 무량신군(無亮神君). 남악형산(南嶽衡山)의 신비문파 귀곡(鬼谷), 혈기자(血機子). 패문(覇門)의 패문마황(覇門魔皇). 인마(人魔) 담동(潭洞). 무정곡(無情谷)의 살검광생(殺劍狂生). 만천하 표국의 연합체인 중원표련(中原 聯)의 총국주(總局主) 환우진신검( 宇眞神劍) 미량(彌良). 그리고 백 년 전, 흑백쌍마(黑白雙魔)의 하나였던 백마(白魔) 위걸(魏傑) 등이 낙화십강에 꼽힌 이름이었다. 그저 앉아서 이름만 듣고 있어도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 일대의 거물이요, 효웅들! 어쨌든 태산은 시끄러웠다. 말할 수 없이 시끄러웠다. 그 태산의 중턱쯤 되는 곳을 운룡 일행이 오르고 있었다. * * * 가파른 산길인데도 어느새 소문을 들은 것인지 각종의 음식과 주류를 파는 노점(路店)들이 산길 양쪽으로 즐비했다. 그들이 호객하는 소리, 사람들의 잡담소리, 병장기 찰캉이는 소리 등이 번잡하게 어우러진 속에서 문득, 운룡의 옆에서 걷던 두자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운형의 그 검법변화는 어디서 익힌 것이오?" 운룡은 주위의 번잡한 풍물을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몇 사람과 겨루어 얻은 바를 적당히 갈무리한 것이지요. 아직 춘풍화우 일식밖에 못했어요. 오늘부터는 횡소천군, 선인지로의 초식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두자상의 얼굴에 언뜻 한줄기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났다. "스스로……?" '이 사람은 나이는 어려도 거짓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스스로 만든 것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로구나. 나조차도 그 검법 앞에 섰다면 어찌 막을지 몰랐을 것인데…… 나머지 두 초식의 연구에 심력을 기울어야겠군.' 그러나 두자상의 마음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는 길에 주워들은 비무참가 고수들의 수준이 너무 뛰어났다. 개화십강은 그야말로 중천에 떠오르는 해처럼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후기지수들이요, 낙화십강은 대봉황천의 제고수와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희대의 거물들. '열 곳에서 나누어 한다 해도 최종 팔십 인이 하는 본선비무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여덟 번을 전승해야 한다. 이십강의 고수들은 고사하고라도 일만의 비무참가자들마저 하나같이 각 문파의 정예로 선발된 자들이니 단 한 시합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어려운 일이로구나…….' 두자상이 생각을 잇는 동안에 일행은 한 곳의 너른 공지에 이르렀다. 사방의 너비는 반 마장 정도. 거대한 공간은 인공으로 숲과 산을 깎아 고운 모래를 깔아 놓은 것이고, 공간 저편으로는 어디까지 뻗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화강석 돌계단이 아득히 위로 뻗어 있었다. 계단이 뻗어오른 저 위. 거대한 원시림 위로 하나의 성(城)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침햇살을 받아 마치 이제 막 나래를 떨치고 오르려는 봉황과도 같은 모습의 아름다운 성. 그렇다. 바로 저 성이야말로 천하 제일의 명망을 떨치고 있는 대봉황천의 총본산인 봉황성(鳳凰城)이 아니겠는가? 이 공지는 본래 성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입당(入堂)으로 쓰이던 곳으로써 공지를 빙 둘러 이십여 채의 아름다운 전각들이 세워져 있었다. 지금, 공지는 거의 발디딜 틈조차 없이 빽빽이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고, 공지의 한쪽에는 거대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一, 비무에 참가하고자 하는 사람은 각 입당에 접수를 할 一, 천지현황우주홍황일월(天地玄黃宇宙洪荒日月)의 열 개 비무장소에 대한 구분을 받은 사람은 안내를 받아 단계촌(丹桂村)의 숙소로 입소할 것. 一, 숙소에 입소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비무참가자 및 그의 수행원 오 인(五人)에 한함. 一, 비무는 각 비무처의 대주(臺主)의 권한에 의해 임의로 조정되며 예선비무의 기한은 십일월 말일까지임.> 두자상이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진 전각을 가리켰다. "저곳으로 가지요." 전각의 안에는 다섯 개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각 탁자마다 두 명의 백의인이 앉아 접수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탁자의 앞에는 무게가 약 이백 근은 실히 될 무거운 쇠향로 하나가 놓여 있었다. 향로의 앞에는 은색검수(銀色劍穗)의 백의무사가 우뚝 서 있었다. 운룡 일행이 다가서자 향로 앞의 백의무사가 웃으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접수하시기 전에 가벼운 관문통과를 바랍니다." 그는 말과 함께 향로를 가리켜 보였다. 두자상이 물었다. "그것은 무슨 관문이오?" "대회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우선 일차 참가자들은 이십 년 이상의 내력을 지닌 사람으로 규제하고 있지요. 이는 대회의 형평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백 근 정도의 향로를 들자면 최소한 이십 년의 내력이 있어야 한다. 그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는 어중이떠중이 무사들을 규제하기 위한 조치가 틀림없었다. 두자상은 내심 은근히 염려가 되었다. '운형의 나이 이제 십육 세이니…… 그에게 과연 이십 년 이상의 공력이 있을까?' 하나 그의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운룡은 씩씩하게 앞으로 나서더니, 그것도 두 손도 아닌 한 손으로 향로를 번쩍 들었다. 그는 향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한참을 바라보더니 자리에 탁 내려놓고 백의무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구경 잘했소." 두자상은 만족한 표정으로 연비를 힐끗 바라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탁자에 앉아 있던 백의인은 운룡의 도사복장을 의외라는 듯 가볍게 훑어보더니 한 개의 두꺼운 책자를 내밀었다. "이곳에 본인과 수행인의 출신성명을 기록하시오." 운룡이 먼저 썼다. 그 아랫줄에다 두자상이 익수(益手) 두자상이라 적었고, 연비는 그냥 자신의 이름만 썼다. 백의인은 책자를 쭉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개의 붉은 홍패(紅牌)를 내밀었다. 앞면에 천(天)자가 새겨진 홍옥의 패였다. "천대(天臺)의 팔백일흔두 번째 접수인이 되셨소. 동쪽 숲으로 가면 안내인이 있을 것이오. 귀 진인의 무운을 비오." 그때 돌연 한소리 낭랑한 웃음과 더불어 한 사람이 불쑥 그의 옆으로 나타났다. "핫하…… 운형은 도대체 그럴 수 있소? 소제를 하루종일 기다리도록 만들다니 말이오." 운룡은 무심히 그를 바라보다 순간, 만면에 활짝 웃음을 피워 올렸다. "옥시주!" 백의인. 한 자루 섭선을 든 채 빙글빙글 웃고 있는 준수한 용모의 그는 바로 기수의 배 위에서 만났던 귀공자 옥수(玉秀)가 아닌가? 그의 뒤에는 두 사람이 호위하듯 서 있었는데, 좌측의 위인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초의피혜(草衣皮鞋)의 백발노인이었고, 우측의 인물은 곱게 늙은 흔적이 역력한 화의노파(華衣老婆)였다. 옥수가 말했다. "소제는 어제 제남부에서 운형을 기다리느라 눈이 빠질 뻔했소. 운형은 약속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이오?" 약속? 그렇다. 운룡은 비무 하루 전날 제남부에서 그와 만나기로 하지 않았던가? 운룡은 약속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한철검으로 초식을 연구하고 싶은 일념이 더 강했을 뿐……. 운룡이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자 옥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됐소." 그는 탁자의 백의인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그 앞에 놓인 명부를 자신쪽으로 쓰윽 끌어당겼다. 허공섭물의 수법! 스르르 손 안으로 딸려 들어온 명부의 수행인 란에 그는 옥수라 적었다. 이어 뒤에 서 있던 노인들도 각기 남해쌍기(南海雙奇)라 적었다. 한 명의 비무참가자가 오 인의 수행인을 거느릴 수 있으니 빽빽하게 들어찬 셈. 두자상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가볍게 검미를 찌푸렸다. '저들은 누구인가? 그 수법으로 보아 범상한 위인들이 아닌 것 같은데 왜 비무에 참가하지 않고 수행인임을 자처할까?' 그때 운룡이 옥수를 그에게 소개시켜 왔으므로 두자상은 담담히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두자상이오." "옥수이오." 그들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불꽃튀듯 얽혔다가 떼어졌다. 옥수는 옥수대로 두자상과 연비가 범연한 인물이 아니라고 본 듯 유심히 살펴보는 눈치였다. 어쨌든 단숨에 여섯 명으로 불어난 운룡의 일행은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동쪽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아직도 꾸역꾸역 몰려 올라오고 있었다. * * * 단계촌(丹桂村). 대봉황천의 입당으로부터 산 하나를 가로넘어 있는 이곳은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도시였다. "관일봉을 휘감은 연일(連日)과 충일(庶日), 두 봉우리 사이에 있는 계곡 두 개를 아예 깎아냈지요. 산아래 임시숙소와 더불어 연 공정비 황금 십만 냥에, 연 인원 오천의 인부가 동원되어 도합 삼 년에 걸쳐 만든 도시이오. 이번 비무가 끝나고 나면 대봉황천에 속한 무사들의 모든 식솔들을 이주해 살도록 하게 할 계획이오이다." 안내무사의 말마따나 어스름 땅거미가 깔려오는 계곡 아래 단계촌은 그대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는 도합 총 일만 호의 집이 있으며, 기타 주루나 반점(飯店), 일용품점과 상점, 심지어는 도박장과 기루까지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번 대회에 대비하여 산동성 일대의 상인(商人)들이 일백여 명이나 이곳으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집과 건물들은 바닥에 청석을 깐 넓은 도로의 양쪽으로 지어져 있었다. 주거지와 상권(商圈)은 엄격하게 구분이 되어 있었으며, 군데군데 수목이 심어져 있어 매우 정결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운룡 일행이 안내를 받는 가옥은 천(天), 팔백칠십이라고 쓰여진 푯말이 붙은 아담한 목옥(木屋)이었다. 목옥에는 네 개의 방과 주방 하나, 그리고 욕실 등이 딸려 있었으며, 백의를 걸친 한 명의 시녀가 앞에 서 있다가 일행이 이르자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추련(秋蓮)이에요. 앞으로 고인들을 모시게 되었어요." 안내무사는 이곳까지 일행을 안내한 후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향후 모든 연락은 추련을 통해서 하게 되오이다. 천대(天臺)에는 약 일천의 고수들이 배정되었소. 예선비무 진행의 모든 권한은 대주(臺主)에게 일임되어 있으며, 오늘밤 대주의 간단한 인사말씀이 있을 예정이오니 그렇게 알고 계시오." 안내무사가 몸을 돌려 나가자마자 미공자 옥수가 앞으로 나서더니 멋대로 방 배정을 하기 시작했다. "운형은 비무참가자이니 제일 안쪽의 방을 쓰도록 하시오. 그 옆방은 소제가 쓰겠고, 건넛방은 모모( )와 연노(燕奴)가 쓰시오. 그리고 입구쪽의 방은 두형과 연형이 쓰면 되겠구려." 도대체가 일방적인 결정이며, 행동이었다. 두자상은 가볍게 검미를 찌푸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옥은 매우 정결한 구조였다. 각 방의 침상은 최고급의 원목을 썼고, 기타 모든 시설도 장시간의 유숙생활에 조금의 불편함도 없도록 치밀하게 고려하여 설계된 것이었다. 추련이 내온 간단한 저녁요기 후 일행은 밖으로 나섰다. 술시(戌時) 정각에 천대 대주의 개촌의식(開村儀式)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단계촌은 모두 열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천지현황우주홍황일월(天地玄黃宇宙洪荒日月)의 열 구역으로써 각 구역에는 제각기 일천 호의 집과 오십 호의 상가, 그리고 하나의 연무장 및 광장이 있었다. 천대 광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편안한 자세로 초지에 앉거나 서서 담소하고 있었다. 옥수는 광장에 이르러 주위를 쭉 휘둘러보더니 붉은 입술을 삐죽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모조리 쓸모없는 작자들만 모였군." 입술을 삐죽이는 모양이 마치 소녀 같았다. 하나 두자상과 연비의 얼굴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은 장내의 중앙을 향하고 있었다. 한 그루 노송(老松) 아래서 뭇무리들에게 둘러싸인 한 사람. 일신에는 엷은색의 비단 남의(藍衣)를 걸쳤고, 이마에는 주옥(朱玉)을 박은 영웅건(英雄巾)을 둘렀다. 밝게 웃을 때 드러나는 치아가 건강하고 탄력있어 보이는 이십대의 청년.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나 할까. 우측 가슴에 새겨진 사자의 문양이 그의 헌걸찬 풍채에 위풍을 더해주고 있었다. 두자상은 그 사자문양을 찢어버릴 듯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재수도 없군. 저자는 바로 개화십강(開花十强)의 하나인 사자여래(獅子如來) 당인이 아닌가!" 사자여래 당인. 사천당가가 낳은 백 년 래의 가장 걸출한 인재이며, 신기(神技)에 이른 암기비법으로써 미래의 무림을 영도해 나갈 젊은 지도자로 자타의 공인을 받고 있는 자. 예상 못한 일은 아니나 검회이십강의 모습을 보게 되자 두자상은 적잖이 마음이 꺼림직해진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오랫동안 사자여래로부터 떠나지 못했다. 반면에 운룡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태연자약했다. 그는 시종 떠들썩하게 웃으며 옥수와 말을 주고받는가 하면 주위를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었다. 달이 떠올랐으나 사방에 밝혀진 횃불 탓으로 그 빛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저 멀리로 몇 개의 횃불무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개촌의식이라는 것이 각 대별로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때 돌연 주위의 왁자한 소음을 일시에 압도하는 커다란 북소리가 장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둥둥둥! 이어 장중한 외침이 뒤를 이었다. "천대의 삼대주(三臺主) 왕림이오!" 그러자 주위는 즉시 고요해졌다. 저편 어둠으로부터 일단의 무리가 광장 중앙에 위치한 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각기 향로(香爐), 검(劍), 그리고 봉황이 새겨진 금기(金旗)와 천(天)자가 새겨진 황기(黃旗)를 든 네 명의 동자(童子)가 섰고, 그 뒤로 금환(金環)이 달린 백색무복을 날렵하게 차려입은 십이 명의 백의무사들이 두 줄로 걷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삼 인(三人)이 천천히 담소하며 따라 나왔다. 그들의 모습이 나타나자 좌중엔 즉시 가벼운 소요가 일었다. "저기 가운데 선 이는 바로 숭산 소림의 장경각주(藏經閣主)인 심인노선사(心印老禪師)가 아닌가! 청설헌(聽雪軒)에 은거하여 근 삼십 년간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던 고매한 신승이 웬일이신가?" "허어…… 그 뒤의 노객(老客)은 오십 년 전 한 자루 운액보검(雲腋寶劍)으로 무림을 풍미하던 성숙해(星宿海)의 이대선생(李大先生)이시다!" "한데 선두의 저 라마승(喇 僧)은 누굴까? 일신에 풍기는 위엄이 마치 칼끝 같아 오히려 심인노선사와 이대선생을 압도하는 듯하구나." 소림의 심인노선사는 주의선삼(朱衣禪衫)에 한 자루 난은방편산(爛銀方鞭 )을 든 채 자애롭게 웃고 있었고, 성숙해 이대선생은 백색수풍(白色隨風)의 차림에 갈대꽃 같은 수염을 휘날리고 있어 마치 심산을 유보하는 신선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 사람, 라마(喇 ). 일신에는 불타듯 짙은 혈가사(血袈裟)를 입고 있었다. 귀밑까지 늘어진 백미(白眉) 아래서 실처럼 가는 안광을 쏟아내는 동공을 마주보고 있자면 현기증이 일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노라마승이었다. 그가 손에 든 한 자루 법장(法杖)을 주시하며 두자상이 입을 열었다. "저 노라마가 누군지 아시오?" 연비에게 한 말이었다. 연비라는 이 냉혹한 흑의무객은 인상만큼 싸늘한 어조로 씹어뱉듯 말을 내뱉었다. "천룡대라마(天龍大喇 )." "그렇소, 천룡대라마이오. 천축인으로서 중원에 귀의하였고, 지금은 진천우도 대천주의 첫째 아들인 도남강(屠南江)의 심복으로 있는 자이오. 그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하더니 천대 대주로서 나타났군." 천룡대라마는 심인노선사와 이대선생을 좌우에 거느린 채 중앙단상에 우뚝 몸을 세웠다. 이어 어두운 밤하늘을 힐끗 올려다보고 난 그의 입에서 유창한 한어(漢語)가 흘러나왔다. "다망한 중에도 본 검회에 참석코자 천리길을 달려오신 강호제위께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리오. 노납은 대봉황천의 법교공봉(法敎供奉)을 맡고 있는 천룡이며, 금번 심인노선사와 이대선생과 더불어 감히 천대 검회예선의 공증인을 자처하게 되었소."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중인들의 귀에서 마치 벽력처럼 쾅쾅 울리고 있었다. "이미 강호제위께서 알고 계신 바와 같이 열 곳의 검회예선에서 팔십 인의 고수가 도태전(淘汰戰)으로 선발되어 최종본선을 겨루는 것이 본 대회의 규정이오. 본 예선의 기한은 삼십 일, 내일 아침 사시(巳時)부터 비무를 시작하오. 기타 본 검회예선의 대진표는 각계 일백여 고수가 모여 엄정한 추첨을 거친 후 오늘 내로 제위의 처소로 보내 드리겠소. 부디 각 제위의 건승(健勝)을 비오!" * * * "어렵군……." 촛불, 어린아이 팔뚝만한 촛불이 타오르는 방이었다. 연비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두자상은 탁자에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 장의 지편(紙片)이 놓여져 있었다. "이 대진표를 좀 보게. 놀랍게도 검회이십강의 고수 중 네 명이 이 천대에 있네. 사자여래 당인, 생사선주(生死船主) 혈독(血毒) 혜공(慧拱), 보타암 청조각의 능파선녀( 罷仙女) 예소벽(芮小碧), 그리고 백마(白魔) 위걸(魏傑), 이렇게 개화십강이 셋, 낙화십강의 노괴물이 하나,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연비의 시선이 힐끗 두자상을 향했다. "첫번째 상대 안에 그들이 포함되어 있소?" 그로선 보기 드물게 정중하며 진지한 어조였다. 두자상은 고개를 저었다. "첫번째 상대는 흑군자(黑君子)라는 자이오. 만약 이자를 이기게 되면 곧장 백마 위걸이 다음 적수이오." "그럼 됐군." 두자상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가 됐단 말이오?" "그를 믿으란 말이외다. 어차피 애초의 목표에 다다르자면 언젠가는 싸워야 할 상대들, 빠르다는 건 늦는 것보다 확실히 좋은 것이오." 연비는 창밖을 힐끗 바라보더니 옆에 놓아두었던 검을 집어들고는 휙 침상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잠깐 볼일이 있으니……." 성큼성큼 건장한 뒷등이 문 밖으로 사라져 갔다. 두자상은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처음 황명을 받고 떠날 때 승상이 특별히 천거한 자였다. ―도마색출에 큰 도움이 되리라. 어떤 일이 있어도 연비, 그를 신임하시오. 하나 이 년을 같이 다녔어도 그 내력조차 알 수 없는 입이 무거운 사내. 검법의 일대고수라는 것만 알 뿐, 그 검법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두자상은 오랫동안 그가 나간 문을 주시하다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는 다시 머리를 감싸안고 대진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첫번째 상대, 흑군자…… 이자는 또 어떤 자인가……."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연비는 목옥의 앞에 서서 주위를 한차례 휘둘러본 후, 한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무그늘 아래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 석상처럼 선 채 저 멀리 대봉황천의 봉황성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자. 그는 바로 귀공자 옥수였다. 그때 돌연 옥수의 몸이 흠칫했다. 그는 수중의 섭선을 바짝 움켜쥐며 몸을 돌리려 했다. 순간 한소리! 냉막한 목소리가 그의 몸을 뚝 얼어붙게 만들었다. "움직이지 말도록……." 전신으로 거미줄처럼 끈적하게 밀려오는 살기. 옥수의 이마에 언뜻 한 방울의 땀방울이 맺혔다. 이런 거대한 살기는 그 생애 처음 당해 보는 것이었다. '중원에…… 내가 알지 못하는 이런 고수가 있었던가?' 그는 짐짓 태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심야에 웬 살기인가? 나에게 볼일이 있소?" 냉막한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지금부터 묻는다. 한 마디라도 허튼 대답일 때는 용서하지 않는다." "나를 벨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백 년 전, 이 땅에서 사라졌던 일대의 두 살성(殺星), 연산일괴(燕山一怪)와 구양신모(歐陽神母)를 휘하로 거느리고 다니는 당신의 무예는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신은 과연 내 일검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나는 그 어떤 순간에도 당신의 사지(四肢) 중 하나는 자를 수 있어." 식은땀이 흐르는 대답. 그의 말은 옳았다. 기선을 제압당한다는 것은 고수들에게 있어선 생명을 이미 남에게 맡기는 것과 같았다. 옥수는 문득 한줄기 탄식을 터뜨렸다. "내가 졌군. 멋지게 졌는걸. 당신은 무엇을 묻고 싶소?" "첫째, 왜 운룡에게 접근하고 있는가?" 순간 옥수는 놀람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당신은 연비구려?"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 "좋아. 단순히 그가 좋아서이오." "확실한가?" "그렇소." "검회에는 왜 참가하지 않나?" "이따위 시시한 검회에는 흥미도 없소." "인정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사문내력은?" 옥수는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는지 싱긋 웃었다. "말할 수 없소." "내 검은 말을 잘 듣는다. 나는 두 번 경고하지 않아." "이것 보시오, 연비. 그대나 나나 피차 마찬가지 입장이 아니오? 나는 절대 운룡을 해칠 사람이 아니오.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를 돕고 싶소. 내가 보건데 당신도 그런 것 같으니, 우리가 굳이 사문 따위를 두고 얼굴을 붉힐 것이 뭐 있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옥수는 자신의 몸을 옥죄고 있던 살기가 느슨히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 옥수의 몸이 그 자리에서 퍽 하고 꺼졌다. 아니, 꺼졌다 싶은 순간 그는 이미 연비의 턱 아래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창! 연비의 쇠꼬챙이 같은 검이 날카롭게 솟구쳐 나왔다. 하나 다음 순간, 옥수는 이미 십여 장 밖의 공중을 날고 있었다. 파팟! 그는 낭랑하게 웃으며 유연한 몸놀림으로 스르르 내려섰다. "하하핫! 그 한 칼은 심야에 허락도 없이 문초를 한 값이오." 연비의 시선이 힐끗 자신의 옷자락을 향했다. 한 치 가량 좌우로 잘려나간 십자 모양의 검흔. 순간 연비의 회색 동공에 가벼운 흔들림이 일었다. 옥수가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자신의 가슴은 두 토막으로 잘려나가 버렸을 것이 아닌가? '날으는 제비의 눈을 반 토막으로 가르는 내 검을 그 짧은 시간에 피해냈다. 그리고 나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른 쾌검(快劍)…… 틀림없군. 그녀는 바로 그곳의 고수야.' 그녀? 그녀라니……. 연비는 왜 옥수를 그녀라 칭한 것일까? 설마하니 옥수가 여인의 몸이란 말인가? 또한, 그가 말한 그곳이란 어디일까? 그때 막 목옥의 안으로 발을 들여놓던 옥수가 이쪽을 돌아보며 외치는 것이 보였다. "어서 들어오시오, 연형. 우리는 특수조련인답게 운형이 싸울 흑군자인지, 흑망아지인지 하는 자에 대해 두형과 더불어 연구를 해야 하지 않겠소?" 대전전야(大戰前夜). 자욱한 긴장과 예기 속에 밤은 말없이 깊어갔다. 그리고 십일월 초하루의 날이 밝았다. 9. 최초의 勝利 "와아…… 와……!" "와……!" 사해대검회. 사상 최고의 규모로, 사상 최대의 인원이 동원되어 벌어진 이 거대 잔치는 그 벽두부터 이변의 연속이요,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문하생 이십 명 미만의 작은 문파에서 선발된 고수가 문하생 일천모 苡틘 잔대문파의 선발고수를 무너뜨리는가 하면, 그 동안 무림에 선보일 기회가 없었던 비장의 신공들이 대회 첫날부터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천번지복(天飜地覆)! 경천동지(驚天動地)! 열 곳의 장소에서 일제히 비무가 벌어진 대회 첫날. 모두 백예순두 명이 검회예선 이회에 진출했으며, 백예순두 명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대회 둘째 날. "다음은 음산파(陰山派)의 흑군자(黑君子)와 무당파 운룡진인의 대결이오." 드높은 외침이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울려 퍼졌다. 모래땅 위에 정좌하고 있던 운룡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두자상이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빠른 어조로 말했다. "긴장하지 마시오, 운형! 상대는 그리 강한 자가 아니오." 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대(臺). 사방 십여 장, 높이 삼 장 정도의 비무대와 그 비무대 사방으로 쳐 동서남북의 차일 속에 꽉꽉 들어찬 군웅들, 그리고 아득한 태산 연봉 위로 베면 피라도 뚝뚝 떨어질 듯 짙푸른 하늘 등이 시선 속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운룡은 가벼운 현기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시작! 이제 드디어 시작인가?' "와아……!" "와아……!"'저 군웅들의 환호, 하늘, 그리고 손에 쥔 검자루의 묵직한 감촉, 그래…… 나는 정말 이 검이 좋아.'"흑군자는 원앙퇴(鴛鴦腿)와 연쌍수(燕雙手)라는 권각법에 뛰어나모 ∮牡活멎가급적 피하고 특히 그의 우측 발을 조심하시오." 작전지시에 여념이 없는 두자상을 향해 운룡은 싱긋 웃어 보였다. "염려 말아요, 두형. 나는 저 사람을 잘 알고 있소." 상대는 이미 대 위에 우뚝 선 채 운룡을 기다리고 있었다. 먹물 같은 흑의에 한 자루 묵검(墨劍)을 허리춤에 두른 삼십대 초반의 장한. 그는 대를 올라오는 운룡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내 보이며 싱긋 웃었다. "흐흣! 누군가 했더니 바로 당신이었군, 도사. " 운룡도 싱긋 웃었다. "무량수불…… 우리는 두 번째 만나는구려, 시주!" 그러고 보니 흑군자는 운룡이 백패진인 행세를 하면서 만난 아흔아 명의 상대 중 하나였다. "흐흐…… 많은 가르침 바라오." 흑군자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백의를 걸친 비무진행인이 두 사람 마주 세울 때까지도 연신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는 사실 기분이 매우 흐뭇했다. 며칠 전의 일이긴 했지만 상대는 자신의 권장에 단 한 번도 반격을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던 자가 아닌가!"살상(殺傷)은 일체 금지한다. 고의로 상대를 살상했다고 판정될 점 噴▒鈞涇간주한다." 비무진행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흑군자는 운룡을 향해 짓쳐들었煉炘 '수비 따위는 할 필요도 없다. 이런 돌팔이 도사놈은 단숨에 대 아래로 떨어뜨려야 돼. 흐흐…… 나를 원망하지 마라, 도사놈!' 슈욱! 퍽! 흑군자의 일권이 둔음과 함께 작렬했다. 그곳은 운룡의 가슴 부위였다. 운룡은 휘청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을 가르며 한 수의 원앙퇴(鴛鴦腿)가 또다시 그의 좌측 어깨를 강타했다. 퍽! 비틀― 우측으로 운룡의 몸이 기울었다. 몸이 기우는 방향으로 우아하게 회전한 흑군자의 발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퍽! 운룡은 이번엔 또 반대방향으로 쓰러질 듯 기울었고, 흑군자는 질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연신 운룡의 좌우 가슴, 어깨로 번찼 거凋各堅토六腿十二拳)을 강타했다. 팍! 팍! 팍! 퍽! 아예 세워둔 채로 상대를 박살내겠다는 악독한 심보가 틀림없었다. 군웅들 중 한 사람이 어이없다는 듯 끌끌 혀를 찼다. "쯧쯧…… 그래도 난 무당파라 하기에 왕년의 그 날고기던 무당도인인 줄 알았더니, 저거야 어디 기초도 없는 하류도사가 아닌벙炘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글쎄 말이네. 저야말로 문파 망신시키기에 꼭 알맞은 짓이로군. 개망신이네, 개망신이야." 팍! 팍! 파파파팍! 서른 걸음을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동안 운룡의 몸에 작렬한 공격은 무려 백팔십퇴이백삼십권(百八十腿二百三十拳)! 이제 운룡은 더 이상 물러날 곳조차 없었다. 한 발짝만 더 디딘다면 그는 대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대 아래의 두자상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도대체 왜 저래? 검을 뽑아 반격을 해야 할 게 아닌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대를 주시하던 옥수가 말을 받았다. "이상한 일이로군. 지금 운형은 일부러 맞고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소, 연형?" 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그런 것 같소." 두자상이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일부러 맞는다고? 모르긴 몰라도 지금 운형의 몸은 갈빗대가 서너 대는 나갔을 것이오." 그때 옥수가 다급히 외쳤다. "저것 봐요!" 팍! 최후의 일권이었다. 운룡의 몸이 대 바깥으로 퉁겨져 나가고 있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한쪽 발끝이 대(臺) 끝에 걸린 채 느닷없이 그벙 痔멎등을 바닥에 붙이다시피 하여 휘리릭 돌아 들어왔다. 돌아온다 싶자 그 몸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흑군자의 놀란 얼굴이 망막 속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운룡은 씩 웃었다. '나는 공력을 키워야 하오. 그렇잖으면 거듭되는 고수들과의 싸움모 堅巖수 없소. 당신의 초식은 시작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었소. 무량수불…… 미안하오. 흑군자!'룡의 좌수가 칼끝처럼 흑군자의 거궐혈(巨闕穴)에 처박히고, 우늑골 부위로 틀어박혔다. 퍼퍽!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쑤셔박힌 이초이권(二招二拳)! "욱!" 흑군자의 눈에서 검은 동자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파르르 몸을 떨더니 고목이 쓰러지듯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풀썩! 발등으로 쓰러진 상대의 무게도, 태산을 허물 듯한 함성도 운룡은 느끼지 못했다. "와아아……!" "와……!" 다만 그는 하늘을 우러러 조용히 중얼거렸을 뿐이다. "아흔아홉 번의 패배 이후 첫승리…… 그러나 이젠 지지 않는다. 결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 * *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다니…… 더구나 엉뚱하게도 장기인 검 쓰다니…… 허어, 참! 그건 그렇고 그 초식은 정말 절묘했 춘풍화우에 깃들어 있던 변화가 그대로 응용되었어." 꿀꺽! 잔을 들이킨 두자상은 힐끗 연비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소, 연형?" 연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소." "흐흠, 이제 한 고비는 넘겼지만 문제는 이제 다음 상대인 백마 위걸이오! 마침 오늘 그의 시합이 있어 눈여겨보긴 했지만 그는 과연 이었소. 섬전추혼(閃電追魂) 교전(橋田)이라면 절강(浙江) 일대모 模맑卵《縝안에 드는 고수요. 그의 섬전장법(閃電掌法)은 서천목산(西天目山)의 백오십 비적떼를 단 삼초로 때려죽인 적도 있었소." 말을 잇던 두자상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한데 그런 섬전추혼을 단 일초에…… 그것도 한 번 손을 드는 사이에 새까맣게 탄 물고기로 만들어 버리다니…… 공증인들조차 고의살상이 아니냐 할 정도로 그의 백옥강(白玉 )은 패도적인 무예란 말이오. 도대체 그걸 무슨 수로 막아내는가?" 탁자에 둘러앉아 호박색 술잔을 이리저리 돌리고만 있던 옥수가 문 입을 열었다. "백마 위걸도 위걸이지만, 운형은 비무가 끝난 뒤 대에서 내려오기 전에 엉뚱하게도 그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했어. 그의 머리 위로는 선명한 두 송이의 화형(花形)과 희미한 화형 하나가 피어올랐지. 그 행동을 어찌 생각하오?" "그래,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독문공부(獨門功夫)의 연마라면 그렇게 만천하에 노출시키며 할 필요가 있을까?" 연비가 침중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바로 그 시간이 아니면 안 될 그 어떤 사정이 있겠지." "그렇군. 어쨌든 우리는 그의 특수조련인을 자처하고 있기는 하지모 榴잔너무 신비로운 점이 많아." 두자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매우 솔직하고 다정하지만 그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깊은 대해(大海)의 심연을 보고 있는 것 같단 말이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던 것이다. 그때 옥수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운형은 지금 어딜 갔을까?" 연무장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 멀리 불타는 태산의 숲이 끓는 몸을 노을 아래 부끄럽게 드러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소년도 있으며 노인도 있다. 그들은 모두 각기 한 자루씩의 무기를 들고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 무복 차림의 청년은 검식(劍式)이 잘 안 풀리는지 검을 한차례 휘젓고는 한줄기 탄식을 터뜨렸고, 붉은 연홍의 띠를 두른 소녀는 땀 뻘뻘 흘리면서도 채대무예(彩帶武藝) 연마에 여념이 없었다. 늙든, 젊든, 남자든, 여자든 간에 그 모습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운룡은 연무장 한쪽의 노송 그루터기에 앉아 쪼그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손이다. 손[手]. 그 손은 쭈글쭈글하며 퍼런 힘줄이 돋아난 별 볼일 없는 손이었다. 늙은 농부나 막일꾼의 손으로 생각될 그런 평범한 손. 한데 그 손이 뻗어나오는 순간, 일섬 눈부신 흰 광채와 함께 핏덩이로 변해 버린 상대! "백마 위걸……." 운룡은 그렇게 무서운 신공을 보기는커녕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운룡의 천기대나인신공도 그 마공(魔功)의 위력 앞에선 바람 앞의 촛불과 같다. 내력이 세 배 이상 차이가 나는 상대에겐 천기대나인신공의 창시자라도 당해낼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운룡은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두 번째 상대는 지나칠 정도로 강한 자였다. 그때 돌연, 한소리 싸늘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두렵나?" 연비. 언제 어디로 온 것일까? 그는 쇠꼬챙이 같은 검을 가슴에 품은 특유의 자세 그대로 운룡의 뒤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운룡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글쎄요……." 연비는 느릿하게 운룡의 옆에 앉았다. 한줄기 칼끝 같은 예기(銳氣)가 운룡의 전신으로 훅 끼쳐왔다. 언제나 그랬다. 연비는 한 자루 검 같은 사내였다. 두 사람은 묵묵히 연무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제 연무장에는 먹물 풀리듯 어둠이 스며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리를 뜨는 자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늘어난 것 같았다. 문득 연비가 앞을 주시한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사문(師門)의 명예? 그런 것은 안 돼. 자신을 위해서라는 이유라한다." 느닷없는 말에 운룡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그 눈빛은 가벼운 의문을 담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요?""자네 말이야. 바로 자네에게 하는 얘기다. 사문의 명예 같은 것은 절박한 생존의 이유가 될 수 없어."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로 목숨을 걸지 않소?""흐흠! 저기를 봐라. 모두들 말없이 자신의 꿈을 향해 땀을 흘리고 다. 유명(有名), 무명(無名)도 관계없이 한데 어울려…… 묵묵히… 좀처럼 말을 않는 사내이기 때문일까? 연비의 어조에는 듣는 이의 마음을 사정없이 잡아끄는 기이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저것이 바로 무림이다. 검 하나로 돈과 명예를 얻고자 하는 사나이들의 싸움터! 때로는 인생의 모든 꿈이 단절되기도 하지만…… 오직 한 자루 검에 마지막 꿈을 실은 사나이들이 몰려드는 곳, 야생덧 예걘낮긁서로 먹고 먹히는 양육강식의 피비린내나는 결전장이 무림 痼甄裏" "……!""너 자신을 위해서 검을 쓰라.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목표 세워라. 두자상은 네 춘풍화우를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그 정도 수업자는 무림에 모래알처럼 많아." 돌연 연비의 몸이 스르르 일 장 밖의 공지에 내려섰다. 슛! 그는 수중의 쇠꼬챙이 같은 검을 조용히 가로세웠다. 일순 폭풍 같은 검기가 그의 주변으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둥실 떠오르는 몸! 이어 그의 검이 느리게, 또는 빠르게 공중에 층층히 원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순간 운룡은 자신도 모르게 땅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헛?"라! 저 멀리 흐릿한 초생달이 걸린 그 허공에 끊어질 듯 이어지괌 母줌이어지다 끊어지는 한 줄기 선(線)의 예술을…….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일개 술(術)이 아니라 능히 예(藝)라 이를 만했다. 냉막함 대신 한줄기 열기가 이글거리는 연비의 시선이 그렇고, 서리서리 음률을 밟아 피어오르는 듯한 검빛이 그렇다. 마치 연비는 조물주이며, 그 조물주의 손끝에서 요술 같은 빛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하나 그 순간은 매우 짧았다. 운룡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연비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짐없이 고요히 서 있었으니까. 그의 무심한 회색동공이 똑바로 운룡을 향하고 있었다. "검에도 나이가 있다면…… 내 나이는 이제 거의 칠팔 세요, 너는 난 아이와도 같다. 검의 수업은 그토록 어렵다. 네 마음의 오만깹 仲 그리고 목표를 정해라. 가까이로는 사자여래, 백마 위걸도 멀리로는 대봉황천의 지배자 진천우도도 좋다. 바로 너를 위해서! 너 그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던져야 한다. 사문의 명예나 복수 따위는 버려! 그렇잖으면 너는 이레 후 백마 위걸에게 반드시 질 것이다." 말을 끝내자마자 연비는 찬바람이 일도록 휙 몸을 돌렸다. 운룡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사라져 가는 연비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한쪽의 어둠 속에서 두 쌍의 눈동자가 스르르 나타났다. 그들은 운룡의 뒷모습을 잠시 눈여겨보는가 싶더니, 한 사람이 말했다. "어때, 주인님은 매우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아?" "글쎄…… 요 근래 그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보는 것 같군. 그게 화가 될지, 복이 될지……."祁 말이야, 저 연비란 친구의 검법이 매우 낯익은 것 같지 않아 "글쎄?"逗 옛날에 위지사부님이 각 문파의 검법을 설명하실 때 백 년 전 무당파의 오대검법(五大劍法)에 대해선 특별한 강론이 있지 않으셨는 기억 안 나?" "오호라…… 태극혜(太極慧), 양의문(兩意紋), 삼절황(三絶荒), 사상류(四像流), 구궁영(九宮影)의 오대검법?" 지금 연비의 검법은 그 중의 하나인 구궁영을 매우 닮았어. 즉시 알 수 있었지." "쳇, 그러나 세상에는 닮은 검법도 매우 많아. 속단은 금물이다, 뚱보야. 게다가 무당파는 망한 지 백 년이 넘었어. 그럼 저 친구가 유령에게 검법을 배웠단 말이냐?" "이 말라빠진 뼈다귀 같은 놈아! 사부께서도 말씀하셨다. 무당파의 도사들 중 소수는 살아 은거했을 거라고. 너는 연비가 그들의 후예가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니?" "좋아, 좋아. 그건 그렇고 이레 후, 백마 위걸과 겨룰 때 만약 주인님이 생사위기에 처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사부님은 그럴 때 구하라고 하셨잖아. 그렇다고 비무 도중에 끼어들 수도 없고……." "흐흠! 그것도 문제로군. 되도록이면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오도혤 灸箚殷하셨지만." "이것 저것 가리다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만사 도로아미타불이야." "빌어먹을! 하지만 꼭 진다는 보장도 없다!" * * * 일초! 백마 위걸과의 승부는 단 일초에 있다. 이것은 기(技)로 결정되는 승부가 아니다. 한 조각 정신(精神)에 승부가 달려 있다! 군웅들은 이레 전, 극적으로 승부를 낸 운룡을 기억하는 모양이었퉤炘 한 자루 두터운 철검을 품에 안고 대를 천천히 오르는 운룡을 향해 그들은 가히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잘해라, 도사!" "오늘도 기대해 보마!" 운룡은 한 걸음 한 걸음 침착하게 계단을 올라선 후, 한차례 긴 심호흡을 했다. 그의 특수조련인인 두자상, 연비, 옥수 등은 웃음이라곤 한 올도 혤 茶섭涇침중하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운룡은 검의 고리를 가볍게 푼 후, 변함없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사기로(生死岐路). 오늘 진다는 것은 곧 죽음과 통했다. 그런데도 마음은 마치 물처럼 고요했다. 그는 지난 이레 동안 최선을 다했다. 그 한 가지 사실만이 그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때 돌연, 한소리 귀청을 찢는 기이한 파공음이 울린다 싶더니 희미한 몽영 하나가 구름 같은 백연(白煙)에 휩싸여 나타났다. 휘리릭― 스르르― 이어 귀청이 찢어질 듯한 광소와 더불어 연기 속에서 한 사람이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크핫핫하……!"처럼 흰 백발에 붉은 동안(童顔), 그리고 엷은 혈광이 이글거리섬뜩한 혈안(血眼). 바로 백마 위걸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는 혈광을 번뜩이며 운룡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목쉰 개가 짖는 듯한 듣기 거북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꼬마야! 네가 무당의 제자인가?" 운룡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렇다면 오음진인(五音眞人)과는 어떻게 되는가?" 순간 운룡은 흠칫했다. 그는 오음진인이라는 이름을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룡이 설레설레 고개를 젓자 백마 위걸은 괴소를 흘리며 우측 팔소매를 둥둥 걷어부쳤다. "흐흐…… 돌파리 도사놈 같으니…… 오음도 모르면서 감히 무당파 사칭해? 오음은 백 년 전 나의 유일한 맞수였다. 그때는 적이었으나 지금은 그를 위해 그의 사문을 정리해 주리라." 운룡의 가슴속을 느닷없이 휘돌기 시작한 이 선선한 감정은 두려움인가? 운룡은 천천히 내밀어지는 백마 위걸의 우수를 바라보며 입술을 질 깨물었다. '일초! 단 일초!' 백마 위걸의 우수가 점점 더 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은은한 옥광(玉光)이었으나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마주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혜광을 띠었다. 딸깍! 검자루가 가볍게 퉁겨 나왔다. 숨죽여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자상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전력을 다해 피해야 한다. 그리고 일초에 승부를 걸어라……."는 긴장한 나머지 비무대와 관람석을 구분해 놓은 목책(木柵)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의 열 손가락은 목책의 나무를 파고 들어가 있었다. 연비는 여전히 무표정했고, 옥수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일진의 한풍이 대 위에 마주 선 두 사람의 사이로 무심히 날아든다 싶은 순간, 백마 위걸의 장심 한가운데에서 마치 번 같은 백광 한 줄기가 번쩍 솟구쳐 나왔다. 쐐애액! 파파팟! 온 천지가 일시에 흰빛으로 뒤덮여 버리고 마는가! 년 전에도 그 적수가 없었으며, 바로 이레 전에는 고수 한 명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저주(咀呪)의 신공 백옥강(白玉 ). 바로 그 순간, 운룡의 몸도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맹렬히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한데 엉뚱하게도 그가 뛰어든 방향은 백옥강 정면이 아닌가? 순간 두자상은 비명 같은 외침을 터뜨렸고, 옥수는 벌떡 뛰어 일어났다. "미쳤구나!" 파파파팟! 꽝!빨랫줄 같은 광채가 운룡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백 장 밖에서도 수 있었다. 운룡은 일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활활 타오르는 인두가 가슴을 정면으로 지지는 듯한 무서운 통증이 일었고, 이어 귀가 멍멍할 정도로 날뛰는 혈관의 울림이 있었다. 지지직― 자신의 살이 타는 매캐한 노린내가 그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으윽!" 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입 밖까지 솟구치는 핏물을 삼킨 그는 다음 순간 필생의 사력을 다 수중의 팔십 근 한철검을 휘둘렀다. 부웅! "춘풍화우!" 외침과 함께 핏물도 뿜어져 나왔다. 천기대나인신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탓인지 온몸의 도복이 부드득 부드득 찢겨 나가고 있었다. 슈슈슉! 꽈꽝! 귀청을 찢는 파공음, 그리고 폭음! 무엇이 어찌된 것일까? 장내의 모든 군웅들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시선 속으로 자리를 바꾸어 우뚝 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 운룡은 분명히 잿더미가 아니었고, 백마 위걸도 멀쩡했다. 그들은 서로를 등지고 선 채 먼 허공을 핏발선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운룡의 몸이 돌연 휘청하더니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치炘 "운형!" 부르짖음과 함께 대 위로 솟구쳐 오르려는 두자상의 소맷자락을 연비가 홱 휘어잡았다. "조금 더 두고 보시오."바로 그때, 백마 위걸의 이마에 홀연 한 개의 혈점(血點)이 나타났 그 점은 곧 가느다란 혈선으로 느릿하게 번지는가 싶더니, 그의 이마와 콧등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한 줄기의 가는 핏물 흐르는 것처럼……. 그리고 입과 턱을 가로질러 가슴섶 옷자락 안까지 흘러내렸다. "믿을…… 수…… 없다." 한소리 허무한 중얼거림이 백마 위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놀랍게도 그의 몸은 두 조각으로 퍽 하고 갈라졌다. 후두두두! 피[血]! 그리고 잘려진 몸과 내장 부스러기가 더운 김을 흩뿌리며 너저분하 비무대 바닥을 뒹굴었다. 군웅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백마 위걸. 이번 대회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이며, 흑도(黑道)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자인 그가 일개 무명무사의 검에 반 토막이 났단 말인가? 하나 그러한 침묵도 잠깐, 느닷없이 터진 누군가의 선창에 의해 장내는 폭발하는 듯한 환호로 뒤덮이고 말았다. "와아!" "와…… 최고다!" 운룡은 검으로 간신히 몸을 가눈 채, 후들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엇이 어찌 되었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텅 빈 듯한 뇌리와 동물적인 본능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 그의 옆을 흐르고 지나는 한 줄기의 핏물이 문득 시선 속으로 쏘아져 왔다. 쪼르르― 아직도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선연한 핏물. 운룡은 순간 자신의 몸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몸은 멀쩡했다. 상처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순간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이겼구나……." 그것뿐이었다. 한소리 중얼거림의 여운이 채 바닥에 내려앉기도 전에 그의 이마는 쿵 하고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 * * "괴이한 일이 아닌가? 뚜렷한 상처도 없고 큰 내상(內傷)을 입은 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단 말인가?" 방(房). 커다란 침상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침상에는 운룡이 누워 있었다. 핏기라곤 한 올도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과 말라터진 입술. 언뜻 보기에도 완연한 중병(重病)의 형색이었다. 침상 주위로는 두자상, 연비, 옥수, 그리고 옥수의 수행인인 연산일괴와 구양신모가 근심어린 얼굴로 서 있었다. 묵묵히 운룡의 삼촌혈(三寸穴)을 진맥하고 있던 옥수가 이윽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나직한 한소리 탄식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운형은 온몸의 혈도가 모조리 막혀 있소. 단 한 군데도 통하 없는 것이오. 본시 운형의 몸에는 알 수 없는 괴이한 역도(力度 운기되고 있었는데 백마 위걸의 백옥강이 몸 속으로 침습해 들어오자 서로 격렬히 맞부딪쳐 이와 같은 봉혈(封穴) 현상이 벌어진 것이오." 두자상이 급히 물었다. "그럼 치료할 수가 없단 말이오?" "현재 운형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한 줌의 순양진기(純陽眞氣)가 간신히 그의 명(命)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오 하나 이 순양진기도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이내 소멸하고 말지요. 적어도 다섯 시진 내에 순음(純陰)의 기운을 지닌 영물이나 힘을 이용해서 순양진기를 살리고, 그 합한 힘으로 혈도를 뚫어야 하오. 그렇잖으면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게 되고 말 것이오."模뜀시진? 맙소사! 그 안에 도대체 어딜 가서 순음의 영물을 구온단 말인가?" 두자상은 초조해진 듯 방안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세 번째 대전이 바로 내일이다. 운룡은 벌써 나흘째 이렇듯 의식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때 연비의 시선이 힐끗 옥수에게로 향해졌다. "나는 그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오. 그렇않소?" 순간 옥수의 얼굴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침상 위의 운룡을 힐끗 바라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있소." 두자상이 희색이 만연해진 얼굴로 황급히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왜 옥형은 망설이고 있소? 어서 치료를 해주시구 하나 뜻밖에도 옥수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소." 두자상은 어리둥절해졌다. 금방 할 수 있다더니, 또 이제 와서 할 수 없다는 것은 뭔가? 그는 황급히 무엇인가를 물으려 했으나 이내 연비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연비는 말없이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두자상은 거의 끌려나가다시피 주춤주춤 밖으로 나갔다. 탕! 문이 닫히고 나자 옥수는 한줄기 탄식과 더불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어두운 허공으로 암울한 시선을 던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음일까? 한 쌍의 영롱한 눈빛 속에 일진 야성(夜星)이 우울하게 담겨 찰랑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옥수는 무엇인가 결심을 굳혔음인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빙 몸을 돌렸다. "연노(燕奴), 모모( ), 나가서 호법을 서세요." 순간 연산일괴와 구양신모의 노구(老軀)가 부르르 떨렸다. "검주(劍主), 설마 생사음양대법(生死陰陽大法)을……?" 오오…… 생사음양대법이라니? 복희씨(伏羲氏)와 신농씨(神農氏)가 이 땅에 최초로 의법(醫法)을 설파한 이래로 한 줄기 전설처럼 내려오는 신비로운 의법이 있었다. 이름하여 생사음양대법! <생사음양대법은 모든 의학의 초정수(超精髓)이다. 이것은 우주의 근본이치인 음양(陰陽)의 도리를 저변에 깐 심오한 현음의술(玄陰醫術)로써, 만약 피시술자가 이 생사음양대법의 혜택을 입게 된다면 그것은 새로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생사음양은 능히 죽어가는 자를 살리고 만병을 통치한다. 단, 시술자가 순결한 몸이라면 그 효력은 능히 배가(倍加)되고, 더불어 피시술자가 동정의 몸일 때는 천지회합의 조화까지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니……. 생사음양의 시술자는 반드시 피시술자를 살피어 그 마음됨이 정대벙 悶“毒뜀의법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감히 명을 거역할 생각이오?" 옥수의 싸늘한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해 날카롭게 날아가 박혔다. 연산일괴와 구양신모는 무슨 말인가를 할 듯 입술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이내 한줄기 장탄식을 터뜨리며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옥수는 그들이 나가고 나자 문의 개폐여부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난 후, 천천히 침상을 향해 다가섰다. 옥수의 눈빛이 오랫동안 운룡을 향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며, 거뭇한 구레나룻과 입술로 한동안 시선을 주었다. 이어 옥수는 느닷없이 머리에 쓰고 있던 문사건(文士巾)을 휙 벗어 들었다. 오오…… 보라! 찰랑찰랑 순식간에 허리 아래까지 드리워지는 구름 같은 수발(秀髮), 빛나는 이마, 정결한 시선과 해맑은 피부를……. 뿐인가, 한 겹 옷고름이 풀린 후 적삼 속곳 사이로 살포시 드러난 것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젖무덤이요, 흘러내린 장삼 안에서 나점 痼멎만지면 분가루라도 묻어날 듯 뽀얀 두 다리이니……. 두말할 것도 없이 여자! 때로는 어머니요, 때로는 딸이며, 때로는 아내라고 불리는 여자의 모습이 아닌가? 순식간에 어두운 방안이 환해졌다. 공간엔 기이한 향기가 떠돌고 적빛 같은 어스름 광휘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듯했다. 옥수, 그녀는 아름다웠다. 설부화모(雪膚花貌)에 운발주용(雲髮珠容)의 천향국색이란 바로이 여인을 두고 한 말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으로 변한 그녀는 자리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은어(銀魚)처럼 가늘고 긴 손에 살포시 들린 것은 한 자루의 예리비수. 사르르 두 눈을 내려감은 그녀의 입에서 구슬처럼 은은하고 영롱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삼가 십검(十劍)의 조사들께 엎드려 비오니…… 제자 수령(秀玲) 윱줌한낱 정연(情緣)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문파의 계율을 저버리나이다. 평생 검의 주인이 되어 깊은 검업(劍業)을 쌓고자 했것도 이젠 다만 흩어지는 파도 끝의 작은 물거품에 불과한 것…… 우매한 소녀의 부탁을 굽어살피소서…… 부디 살피어 주옵소서……." 긴 눈썹 끝에 매달리는 것은 눈물이었다. 옥수는 비수를 들어 자신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거의 반이나 싹뚝 베어냈다. 나풀나풀 바닥에 흩어져 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비수의 섬뜩한 광찼 ス 그리고 정적. 옥수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어 잠든 듯한, 한 올의 미동도 없는 운룡의 옆에 그녀는 꿀 같은 교구를 사르르 앉혔다. 사내의 옷을 벗긴다는 것. 그것도 평생 남자의 몸이라곤 상상도 해보지 못한 처녀가 사내의 을 벗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비록 나흘 전의 비무에서 各肝상당히 찢겨져 나가 거의 반라로 누워있는 운룡이라곤 하지만… 그가 걸친 두 개의 속옷을 벗기고 났을 땐 마치 생사대적을 만나 한바탕 악전고투를 치르고 난 것처럼 옥수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혤 羚駭裏 이윽고 벌거벗은 사내의 건강한 동체가 완연히 드러나자 옥수는 그 와중에도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수줍음이 농밀하게 배인 교구를 그의 몸 위로 완만하게 굽혔다. 사내의 몸과 맞대어지자 피부세포가 일제히 아우성치고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옥수의 입가로 한줄기 우울한 웃음이 걸렸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최초에 눈여겨본 나의 잘못이다." 휘르릉― 돌연 옥수의 전신 모공(毛孔)으로부터 한줄기 몽연이 스르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한줄기 그윽한 단향이 사방으로 번졌다. 옥수는 자신의 하반신을 사내의 하반신에 바짝 밀착시켰다. 온유로운 가을햇살의 배 위에서……. 그녀 자신이 운룡을 향해 봄날 송화가루 터지듯 밝게 웃고 있었다. 운룡이 우직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수령(秀玲), 옥수령(玉秀玲)……." 느닷없이 하복부로 짜릿하게 번져 오르는 통증. 옥수의 두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스르르 굴러 떨어진 것과 어디선 낯선 이의 노랫소리가 아련히 귓전으로 들려온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옛터에 풀은 시들어 지나는 나그네 더 애달파라. 나의 사랑아, 그대는 지금 어딘가. 강물만 소리없이 흘러가는구나. 선 다리에 연기가 멀리 흐르고, 해문(海門)에 흩뿌리는 가을비 어지러워, 노래도 끝난 뒤 혼자 돌아가노라면, 하늘에도 시름은 사무치는 듯……. 10. 絶代者의 悔恨 <용형마검(龍形魔劍) 고인걸(高人傑). 화악(華嶽) 용형문(龍形門) 제십일대 장문인. 나이：이십칠 세. 특기：용형진구식(龍形震九式). 주의사항：우수의 용형검과 더불어 숨겨진 채 뻗어 나오는 마형검(魔形劍). 기타：용형진구식은 한 번 시작되면 장강의 물결처럼 막을 수 없음 선기(先機)를 제압하여 몰아부칠 것. 용형의 그림자에 현혹되지 말 것. 마형의 살수가 숨어 있음. 예선 첫회에서 비주신익(飛珠神翼)을 오초 만에 제압. 예선 이회에서 민남(閔南)의 고수, 민남신타(閔南神陀)를 삼초 만y 제압. 요주의 인물.> 슈슉! 휘휙! 검(劍). 두 자 세 치의 크기. 짧을수록 흉악하고, 얇을수록 예리하다. 붉고 푸른 검수(劍綬)를 나부끼며 이 용형검은 신비로운 용의 그림자를 사위로 흩뿌려내고 있었다. 제일초 박룡진해(撲龍鎭海). 제이초 수룡입천(守龍入天). 제삼초 교룡토설(蛟龍吐舌). 슈슉! 파아앗! 제삼초 교룡토설이 펼쳐졌을 때 운룡의 몸엔 이미 다섯 개의 검흔(劍痕)이 붉은 물을 자욱이 드리우고 있었다. 운룡은 씩 웃었다. 전후좌우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용의 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슬프도록 짙푸르다. ―운랑(雲郞). 이렇게 부르는 소녀를 용서하세요. 하나 고의든 타의든 그대에게 십칠 년 동안 고이 간직한 몸을 바친 소녀의 심정도 이해하셔야 해요. 저는 십사연방 십사계파를 지칭하는 천외십사종(天外十四宗)의 하나인 남해(南海) 십검지(十劍地)의 제육십육대 검주(劍主), 옥수령이에요. 이 년 앞으로 다가온 십사연방천하검회를 앞두고 중원에 나왔다가 우연히 그대를 만나게 되었던 것……. 하늘이 사람을 희롱하나……. 운명이 삶을 시험하나……. 첫만남에서 그대의 웃음이 그토록 희어 보였던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면……. ―중략(中略)― 슈파파팍! 무수한 검영 속에서 세 번째 상대 용형마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승리를 확신하는 자신에 찬 웃음이었며, 더불어 상대에 대한 경멸뇟 퓜隔 깃든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운이 좋았던 놈이 아니냐. 네가 백마 위걸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소가 뒷걸음질치다 쥐를 잡은 격이다. 핫하…… 오검이 휘둘러퐈 개의 검흔을 상처로 받은 자여, 천천히 쓰러져라. 그리큄 陋 운좋게 가질 수 있었던 명성을 나에게 달라!" 운룡은 피식 웃었다. '웃기지 마. 웃기지 마라, 친구…….' 슈파악! 가슴 부위로 스치는 검날이 겨울고드름 같다. ―어찌 됐든 생사음양대법으로 그대를 치료하는 동안 소녀는 매우 기이한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대의 몸 속에는 본신진력 외에 다른 힘이 깃들어 있었어요. 어찌된 까닭인지 그것은 본신진력과 합류하지 못하고 단독으로 혈사이를 좌충우돌하고 있었어요. 막혔던 봉혈(封穴)을 뚫고난 후, 소녀는 그 기이한 힘을 사로잡는 대법의 전력을 투여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것은 자칫하면 둘 다 죽음으로 몰고갈 상황이었으나 운랑의 기이하도록 강한 체력 탓으로 간신히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지요. 운랑에게는 본시 이십 년 가량의 내력이 있고, 그 기이한 힘은 이십오 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어요. 또한 백마 위걸의 백옥강에 깃든 이십 년 내력이 가세하여 도합 일갑자의 힘을 이룬 데다 생사음양의 조화는 그 모든 것을 배가(倍加)시킨 것이니……. 백 년! 그대는 하루 아침에 능히 백년지공(百年之功)의 일류고수 대열에 들었다 할 수 있어요. 하나 이 모든 것은 당신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에요. 마음이 없는 자는 대성할 수 없고,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아니 예(藝)와 도(道)를 전하지 않듯……. 당신의 마음이 인도하지 않았다면 생사음양의 조화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러한 대성취를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에요. ―중략(中略)― 제구초 땐가 보다. 끝장을 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용형마검은 무서운 기세로 짓쳐들고 있었다. 운룡은 선뜻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손아귀로 묵직한 한철검의 감촉이 스며 들어왔다. '옥수, 너는 내게 이런 큰 빚을 지우고 사라졌는가?' 위잉― 이게 무슨 소릴까? 막 구초째의 검식을 이어가던 용형마검의 안색이 대변했다. 부웅! 그는 검이 아니라 거대한 도끼날이 자신을 찍어온다고 생각했다. 주춤 한 걸음 물러나는 사이 용형검이 종잇장처럼 두 토막으로 갈라져 나갔다. 쨍그랑! 이어 황망히 내뻗은 비전의 마형검은 아예 가루가 되어 그 중량조덧 윰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쨍!형마검은 넋을 잃은 자세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고, 그의 목 반 앞에서 검을 거둔 운룡은 빙글 몸을 돌렸다. "와아…… 와!" "와아……." 폭발하는 듯한 함성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저 멀리 태산의 연봉이 이고 선 하늘 한 켠으로 슬프도록 아름답게 웃는 옥수령의 얼굴이 문득 떠오르고 있었다. ―소녀는 이제 가거니와……. 한 장의 지편(紙片)을 남겨 그대와의 연분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란 기약은 없으되……. 사랑했다는 한줄기 마음은 이 가슴에 영원히 새겨 둡니다. 운랑의 무운(武運)을 빌어요. 분홍빛 비단에 빽빽이 써내려 간 사연의 맨 끝에는 두 줄의 시구가 있었다. 天長地久有時盡 比恨綿綿無期絶 하늘과 땅은 그 끝이 있으되……. 이내 한은 영영 다할 길이 없구나. * * * 비무 이십구 일째. 폭풍이 휘몰아치듯 숨가쁘게 달려온 날들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영웅들이 탄생했다. 검회예선을 하루 남겨둔 날에 이르자 그 동안 일곱 차례의 비무를 전승해온 팔십대고수(八十大高手)의 윤곽이 거의 드러났다. 최초의 예측대로 검회이십강의 위력은 역시 막강했다. 개화십강 전원이 검회본선에 진출했고, 낙화십강만이 두 명 도태했 나 그 도태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패문(覇門)의 패문마황은 같 낙화십강인 인마(人魔) 담동에게 패한 것이니 결과적으로 검회이십강 백마 위걸, 단 한 사람만이 탈락한 셈이었다. 그밖에도 천 년을 이어온 명문(名門)의 후예들이 문파의 관록을 업 대거 검회본선에 진출하였다. 그 중 참으로 기이한 네 사람이 있어 중인들은 이들을 사해사기(四海四奇)라 칭하게 되니……. <사해사기(四海四奇)> 그 첫번째, 무애공자(無崖公子) 이환명(李環明). 그는 참으로 엄청난 신분내력을 지녔다. 아마 이 땅의 젊은이들 중에서 그보다 더 빛나는 신분내력의 청년찼 틜サ넵없을 것이다. 그는 우선 대명황가(大明皇家)의 후예였다. 그는 당금 황제의 둘째 아우인 충의왕(忠義王)의 사남일녀 중 막내 태어났다. 연후 호환(虎患)을 지녔다 하여 어릴 때 소림사에 맡겨진 그는 십세의 나이로 일만 소림제자 중 가장 뛰어난 인재로 그 두각을 나타냈으며, 삼 년 전 전격적으로 대봉황천에 발탁되어 놀랍게도 노진천우도의 기명제자(記名弟子)로 입신하였다. 노천주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노천주가 천하를 제패할 사용했던 환우오병( 宇五兵)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혤炘 환상의 무기, 환우오병. 그 첫째인 혼원주혼원기(混元珠混元旗)는 진천우도의 장남인 도남강이 지니고 있고, 둘째 백옥주백옥창(白玉珠白玉槍)은 차남 화천상이 가졌었다. 셋째 혈주혈부(血珠血斧)는 삼남 용헌위가, 그리고 넷째 취주취검(翠珠翠劍)은 사녀 위경경이 각기 가졌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서열인 묵주묵도(墨珠墨刀)를 바로 이환명이 이어받은 것이다. 올해 나이 십팔 세인 그의 신분은 대봉황천 남당(南堂)의 당주이자 대교두(大敎頭) 학천종의 뒤를 잇는 십만부교두(十萬副敎頭)였다. 십만부교두의 직위도 놀랍지만 남당 당주의 직위는 더 놀랍다. 남당이란 일종의 종합첩보기관으로써, 가슴에 남색 독수리의 문양뇟 超肅이 남당인(南堂人)들은 대봉황천 내에서도 일종의 귀족행세를 수 있었으며, 독립된 단체로써 노천주의 신변호위까지 맡아서 하는 엄청난 권력의 집단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휘황찬란한 신분의 무애공자 이환명은 대봉황천 출신으로서는 유일하게 검회에 참가했다. 그는 황대(皇臺) 검회예선에 출전했는데 놀랍게도 일곱 번 모두를 기권승으로 이겨 본선까지 진출했다. 그를 일컬어 사람들은 사해사기의 동기(東奇)라 하였다. 두 번째, 초검(草劍) 백리천(百里天). 신분도, 내력도 없다. 있는 것이라곤 풀로 만든 초립(草笠) 하나, 풀로 만든 초혜(草鞋) 켤레, 그리고 풀로 만든 초검(草劍) 한 자루가 고작이었다. 초검. 야생풀을 면밀히 엮어서 만든, 수천 수만 가닥으로 이어진 기이한 처음에 사람들은 철검(鐵劍), 목검(木劍)은 있어도 초검이 뭐냐고 웃었다. 하나 그 웃음은 이내 놀람으로, 놀람은 회의로 변해야만 했다. 이 한 자루 초검이 무려 다섯 자루의 청강장검과 한 자루의 도끼, 리고 한 쌍의 철추(鐵鎚)를 무자비하게 두 동강냈기 때문이다. 그단 일초에……. 초검 백리천은 어떤 상대이든 일초를 넘기지 않았다. 일섬 녹영(綠影)이 번뜩이는가 싶으면 상대는 반드시 부러진 무기찼 途겨걸레쪽처럼 뒹굴고 있었다. 초립 속에서 야수처럼 번뜩이는 한 쌍의 눈, 그리고 한 자루 초검모 謳첸湮사람들은 사해사기의 서기(西奇)라 하였다. 세 번째, 빙인(氷人) 엽상의(葉霜依). 웃음[笑]. 그녀는 결코 웃음이 없다. 얼음처럼 투명한 얼굴이며, 내장 속까지 얼려버리는 듯한 시선뿐. 그래서인가? 그녀의 검 또한 무정(無情)했다. 서리 같은 일점 백광이 순간을 가르고 나면 상대의 우측 어깨에는 송이 혈화(血花)가 피어오른다. 콩알만한 크기로 다섯 가닥으로 번지는 혈흔이었다. 하나 이 혈흔은 곧 어깨의 내맥(內脈)을 잘라버린 흔적이었으니… 공포! 전율! 그녀를 상대한 고수들은 반드시 오른쪽 팔을 못 쓰게 되고야 말았모炘 만약 검이 이마를 향했다면 그 상대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불가사의한 쾌검의 소유자. 북풍한설의 냉혹가인 그녀를 가리켜 사람들은 남기(南奇), 또는 혈기(血奇)라 칭했다. 마지막으로 사해사기 중 북기(北奇)라 불리는 위인. 무불검(無不劍) 운룡(雲龍). 기이하다 기이하다 해도 이처럼 기이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가 아는 것은 오직 삼재검법이라는 최하류무공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춘풍화우 이외의 초식은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늘 이겼다. 또한 비무가 거듭될수록 그는 강해졌다. 처음 그가 흑군자를 이겼을 때, 사람들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 백마 위걸이 나가떨어졌을 때도 세상에는 기적도 있을 수 있는 법이려니 싶었다. 하지만 용형마검에 이어 초부존자(焦斧尊者), 대력천존(大力天尊) 등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차례대로 나가떨어지고, 흑도의 거물 운남독인(雲南毒人)과 비록 검화이십강에는 끼지 못했다곤 하지만 그들과 비교해 조금의 떨어짐도 없는 초거물급 고수 혈부귀(血斧鬼)쐴 舶이초 만에 독문무기를 떨어뜨린 채 나뒹굴었을 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이 괴상한 소년도사가 지닌 팔십 근 한철거검(寒鐵巨劍)의 위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미친 듯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유명인이 더 유명해지는 것보다는 무명인이 유명해지는 것에 더 흥미를 가진다. 멸문당하다시피 하여 백 년 동안 숨어있던 초라한 문파 출신으로 무림서열 이천위에도 끼지 못하던 약자가 초강자들을 차례대로 거꾸러뜨리며 나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운룡의 시합이 있을 때마혤�i뎬遊잔사람들로 입추의 여지도 없이 꽉꽉 메워지곤 했다. 무불검.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만들어 나가는 이 한 자루 검은 불과 삼십 일 만에,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자들의 빛나는 우상이 되었다. 또한 새삼 무당파와 도가(道家)에 대한 이야기를 거론하는 사람들모 뭬팁낫裏 사실 이 북기 무불검의 일이야말로 이 대회 최대의 이변이라 할 수 있었기에……. 어쨌든 아직 우대(宇臺)의 한 시합이 남아 있긴 했지만 사실상 검회예선은 거의 끝났다. 이제 닷새 후부터는 대봉황천 중앙연무장에서 검회본선이 웅장하게 벌어지게 될 것이며, 팔십대고수와 그 수행인들은 이미 봉황성 안의 호화숙소로 정중히 초빙되어 갔다고 한다. * * * 호화로운, 이를 데 없이 호화로운 하나의 방. 여인의 규방(閨房)이 틀림없으리라. 만약 그 누구든 이 방으로 들어서면 오색의 무지개 속으로 들어서기라도 한 듯 영롱한 여심(女心)의 조화를 느끼지 않을 수 없 痼甄裏 보라! 흰 모기장이 살포시 드리워진 상아침상(象牙寢床)에 붉은 능라이불을……. 벽을 수놓은 담채화(淡彩畵)와 바닥의 자줏빛 자단피(紫壇皮)는 한 우아함을 더하고, 용봉 촛대 위의 홍촉(紅燭)이 빚어내는 그윽한 빛괌 똑┑ 무슨 말로 다 설명하랴. 그리고 세 사람. 첫번째 사람은 여인이었다. 나이는 이제 사십 가량 되었을까. 일견해 보기에도 그 미모가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할 정도로 범상치 않은 중년부인. 특히 여인답지 않게 일신에 자욱이 둘린 삼엄한 위엄이 그녀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성스럽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두 번째 사람은 소녀다. 이제 나이 십육칠 세나 되었을까 싶다. 그녀는 일신에 엷은 연남빛 치마저고리를 걸쳤는데, 가슴 속에 여우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닌 한 마리 하얀 영물을 안고서 그 털을 쓰다듬는 모습이 이를 데 없이 사랑스럽다. 옆에 앉은 중년부인과 소녀는 모녀지간인 듯 얼굴모습이 판에 박은 듯 닮았다. 다만 앳되어 보이는 소녀의 웃음이 한결 더 청초해 보일 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남의소녀는 매우 특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신비로움이랄까, 유현(幽玄)함이랄까? 그 크고 영롱한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끝을 알 수 없는 무저의 세계로 빨려드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은 한 마리의 영물과 조용히 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 썩 잘 어울려 보였다. 이들 두 모녀가 앉은 탁자의 건너편엔 한 명의 위맹스러워 보이는 금포노인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빠져들듯 고혹스런 시선으로 모락모락 김이 흐르는 찻잔을 바라보棨 獵針중년부인의 붉은 입술이 문득 나풀거렸다. "그렇다면…… 그다지 큰 인재라 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는 건가요?" 금포노인은 상전을 대하는 듯한 태도로 말을 받았다. "지적하신 그대로입니다, 방주( 主). 이번 검회에 출전한 고수 중 사해사기가 특출한 재간을 보이긴 했으나, 오대문파라든가, 그 밖의 명문대파의 정예와 비교하면 재질면에선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오이다." 중년부인은 섬연한 아미를 살풋 찡그렸다. "만천하의 인재를 다 모아도 그렇다니…… 그렇다면 처음의 예상대 이환명, 그 아이를 본 가의 후계자로 선정해야 하는 걸까?"肝대내외의 인식이 그러하고, 사실 이부교두(李副敎頭)의 재질 따를 만한 자는 극소수인지라……." 그때 말없이 앉아 하얀 영물과 장난치기에 여념이 없던 남의소녀가 돌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이환명 오빠와 비교할 만한 사람이 한 사람 있어요." 순간 중년부인과 금포노인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를 향했다. "그게 누군가?" "무당의 운룡도인." "운룡……?" 중년부인이 금포노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가 누구요?" "흐흠…… 바로 사해사기의 북기(北奇)로 칭해지는 소년고수이지요 비록 백마 위걸 등의 거물을 격파시키긴 했지만 그리 뛰어나게 보이래 刻年쨉ⅰ─ " 금포노인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러나 난난(蘭蘭) 소저로 말하자면 나이 삼 세에 사서오경을 줄퉤 餠湮희대의 기녀(奇女)…… 이제는 기문역학(奇門易學), 천문지리(天門地理), 병법술서(兵法術書)에도 정통하여 노천주께서도 난난 소저는 대봉황천의 보물이라고 누차 칭찬하시지 않으셨던가. 또 난난 소저는 말을 시켜도 대답을 않지만 한 번 말한 것은 절대 틀린 적이 없었다. 이 일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 중년부인도 같은 심정인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남의소녀 난난을 향해 물었다. "얘야, 상세히 좀 말해다오." 하나 남의소녀 난난은 어느새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영물의 배를 살살 간지럽히고 있을 뿐. 이럴 때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중년부인은 다시 금포노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에 관한 명부를 줘 보시오." <무불검(無不劍) 운룡. 나이：십육 세. 출신：호북 무당파. 자칭 제삼십칠대 장령(掌令). 삼재검법 능통. 그가 일곱 번의 승리를 거둔 상대는 흑군자, 백마 위걸 등.> 찬찬히 명부를 읽어나가던 중년부인의 옥용에 돌연 한줄기 놀란 빛 떠올랐다. "가만 있어봐요. 십 년 전 노천주의 명령으로 조사대를 파견했던 둘째 오라버니의 혈육에 관한 보고가…… 그때 어땠지요?" "화대공 말씀입니까?" "그래요. 위지대교두와 그 아이가 호북 일대에서 실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 그렇군요. 기억이 납니다." 문득 금포노인의 뇌리로 아득한 옛일이 망막의 표피를 헤집고 스멀스멀 스며 올랐다. 눈보라치던 설원. 그리고 평생을 통해 존경해온 일대거인(一大巨人)의 종탑 같던 목소리. ―이 아이 대신 내 팔을 주겠네. 순간 금포노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분이라면 반드시 화대공의 아이를 경세고수(警世高手)로 키워내셨을 것이다.' 중년부인의 목소리가 다시 귓전을 찔러왔다. "이것 봐요. 나이도 똑같아. 그 아이도 살아 있으면 지금 십육 세혤 痢 난난보다 두 달이 빠르니 틀림없어요." 말을 이어가던 중년부인의 얼굴이 흥분으로 하여 발갛게 상기되었모炘 "거기다가 호북 무당파 출신이 아닌가……." 그녀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학대교두( 大敎頭), 즉시 조사대를 호북으로 급파하시오. 무당산 일대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운룡도인에 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해 오시 지금 당장!" "하명 받듭니다!" 금포노인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고 나자 중년부인은 탁자를 짚은 채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운명이 위경경(韋瓊瓊)이라 이름지은, 이 땅의 지배자 진천우도의 사녀(四女)로 태어난 그녀.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중원협객들의 선망의 표적이 되었던 그녀도 이제는 눈꼬리의 잔주름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섰다. 창밖은 호수였다. 거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호수의 수평선을 묵묵히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두 눈에 이채를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둘째 오라버니의 아들의 이름도 룡아(龍兒)였다. 설마 이름까지 같은 것도 우연일까?" 가슴이 설레어 온다. 화천상(華天上). 과거 대봉황천의 사람들 중에 이 이름을 싫어했던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그 수려한 용모와 온화한 언행, 그리고 그 빼어난 무예를 모든 이들은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그로부터 십육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화천상 일가가 살았던 난화정사(蘭花精舍)가 매일같이 깨끗이 치워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 있다는 것만으로 그 사실은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당시의 천역(天逆)이 사실은 대효(大孝)의 뜻이었음이 대명 천지에 밝혀진 지금이련만…… 그 수려한 사람은 간데없고 나는 그의 혈육을 찾아 사람을 보내었구나.' 한동안 감개에 젖어 석상처럼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위경경은 문득 무엇이 생각나기라도 한 듯 한쪽의 딸에게 급히 시선을 던졌다. "얘, 난아(蘭兒), 할아버지께 약(藥) 드릴 시간이 지난 것 같구나. * * * 찰랑찰랑! 가는 물살을 일으키며 저어져 가는 한 채의 아름다운 소목선(小木船)의 주위로 녹색 비단 같은 부평초가 무리 지어져 있었 호수. 대봉황천의 안에 있으니 사실상 산정호수(山頂湖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하나 산의 호수치고는 그 규모가 가히 엄청날 정도로 크다. 거기다가, 그 옛날 화산의 폭발 때 분지로 용암이 넘치고 그 위를 다시 물이 뒤덮어 호수의 중간중간엔 말라죽은 천년괴목(千年魁木)들 수천 그루나 빽빽이 상반신을 물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그 가지가 사이로는 또다시 수상덩쿨이 뒤엉키고 설키어 있어 마치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기경(奇景)을 자아냈다. 삐이걱―삐걱― 배를 젓는 사공은 소경이었다. 만약 그가 눈이 보이는 정상인이었다면 아마도 이 호수 위에선 단 번도 노를 젓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원시괴목의 사이는 너무 비좁아 도저히 육안으로는 그것들을 헤치고 나갈 엄두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소경노인은 다만 노를 젓는 순서를 외우고 있었다. 처음 출발 때부터 좌, 또는 우, 앞뒤로 노를 어떻게 뻗고 뒤집으며 가야 하는가를 외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공포의 사호(死湖)를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난난(蘭蘭)은 뱃전에서 여전히 영물 백아(白兒)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신비로운 광경들엔 별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돌연, 주위의 경관이 느닷없이 확 좁아드는가 싶더니 배는 하나의 거대한 동혈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인공으로 만든 것인 듯 군데군데 송유(松油) 심지가 박힌 유등이 수면 위로 음산한 황광(黃光)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윽고 배는 한쪽에서 뚝 멈추었다. 정면. 호수는 이미 끝났고 십여 평 가량의 작은 공간이 거대한 하나의 석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또한 석벽의 한쪽에는 열두 가지의 각기 다른 색을 한 풍등(風燈)걸려 있었다. 난난은 배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후, 그 중 붉은 혈등(血燈)을 집들었다. "맹노(盲奴), 이따가 봐." 삐걱거리며 배가 다시 물러가자 난난은 혈등을 벽 한쪽의 문고리에 살짝 갖다댔다. 그그긍! 순간 거대한 석벽이 느닷없이 양쪽으로 갈라져 나가더니 스산한 목소리 하나가 메아리쳤다. "누군가?" 이어 창백한 얼굴 하나가 먹물 같은 어둠 속에서 둥둥 떠왔다. 온통 우글쭈글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노안(老顔). 한 쌍의 눈은 얼마나 깊은지 마치 무저의 동굴을 바라보는 것 같고 얼굴에선 혈색이라곤 단 한 올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바로 일신에 검은 장포를 걸친 한 명의 노파였다. 옷과 어둠의 색이 같았던 탓으로 마치 얼굴이 둥둥 떠오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흑의노파는 수중의 귀명등(鬼命燈)을 들어 난난의 얼굴을 확인하더 히죽 웃어 보였다. "난 또 누구라고. 난난 아씨였구려. 왜 오신다는 전갈을 보내시지 않구선……." "아휴, 냄새! 귀모(鬼 ), 좀 떨어져요." 흑의노파는 켈켈 웃으며 어둠의 한쪽으로 스르르 사라져 갔다. "용서하시우, 아씨……." 난난은 입술을 삐죽여 보이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이곳의 지리에 매우 익숙한 것 같았다. 안은 조금 들어가자 이내 무수히 많은 동혈로 갈라졌는데 그녀는 棚열세 번째 동혈로 서슴없이 들어섰다. 길은 몹시 구불구불했고 그 끝에 갈림길 하나와 석실이 있었다. 석실의 문을 밀자 먼저 자욱한 약냄새가 왈칵 끼쳐 왔다. 석실의 넓이는 백여 장쯤 될까. 거대한 석실의 중간에는 무수히 많은 약재들이 자색 상자 속에 수개나 분류되어 담겨져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커다란 무쇠솥이 열 개 걸린 화로(火爐)와 약을 제조하는 데에 필요한 도구인 작두 등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넌 여기서 놀고 있어." 난난은 영물인 백아를 놓아주고는 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약재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초하루니까…… 수(水)의 기운이 왕성하구나. 그렇다면…괌 宋龍膽), 아출(莪朮), 백창(白菖), 부자(附子) 같은 희귀한 약 뭘杳손에 의해 차곡차곡 분류되었다. 순식간에 칠십여 종의 약재를 갈무리한 그녀는 한쪽의 단약(丹藥)혤 ゴ超綏涇꺼낸 후, 그것들을 모조리 무쇠솥 안에다 쓸어 넣었다. 이어 이리저리 휘젓고 내쳐 뿌연 빛이 도는 농밀한 탕약(湯藥)으로 제련했다. 이윽고 보글보글 거품이 일 만큼 제련된 액체를 커다란 은그릇에 가득 부어담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좀 쓰겠는데? 할아버지께선 또 딴 소리를 하시겠구나." 그녀가 석실 우측으로 난 길을 조금 따라 가자 느닷없이 광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소리! 철커덩― 철컹! 이게 무슨 소리일까? 쇠사슬이 딱딱한 물체에 마찰되는 듯한 둔탁한 소음이 공간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난난이 막 문간에 한 발을 내딛자 장중한 목소리 하나가 윙윙 메아리치며 울려왔다. "난아인가?" 공간의 정면. 우선 작은 산 하나 크기는 족히 될 만한 거대한 바위가 공간 가득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 설사 백만인 속에 섞여 있다 해도 가장 먼저 눈에 뜨이고 단숨에 알아낼 수 있을 듯한 한 사람. 일신엔 평범한 청의를 걸쳤다. 팔 척(尺)의 거구(巨軀)에 농염한 백염(白髥). 백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붉고, 흰 눈썹에 파묻히다시피 한 한 쌍의 눈은 물같이 잔잔한 가운데 독수리의 것처뇟 シ恝湮광채가 번뜩인다. 입가에 번진 미소가 그대로 온 천하를 포용할 듯한 장중한 기품의 노인이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이 노인은 지금 온몸의 사지를 벌린 자세로 바위벙 壕鵠붙어 있었다. 그것도 그냥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굵기가 어른 팔뚝만한 쇠사슬이 의 몸은 말할 것도 없고, 거대한 바위 전체를 친친 동여 감고 있 것이다. 실로 기이한 일! 이 노인이 누구이기에 저렇듯 괴이한 자세로 쇠사슬에 묶여 있단 말인가? 난난은 생글생글 웃으며 노인의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훗훗…… 오늘은 할아버지의 얼굴이 몹시 밝군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노인의 장엄한 얼굴에 한줄기 자애한 웃음이 번졌다. "나는 늘 이렇다. 난난, 너는 무엇을 보고 할아버지의 얼굴이 밝다 하느냐?"匠 자고로 의수(醫手)는 환자의 병을 보매 망(望), 문(聞), 문(절(切)의 사대요건에 입각하는 법이에요.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만 봐 능히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어요." 말과 함께 난난은 수중의 은그릇을 앞으로 내밀었다. "식기 전에 드세요. 식으면 효험이 없어요." 노인은 짐짓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만들어 주는 약은 너무 쓰다, 난아……." 즉시 난난의 섬세한 눈썹이 거꾸로 치솟아 올라갔다. "쓰다고요? 지금 이 약탕은 속세인들이 꿈에서도 구하길 갈구하는 희대의 보약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쓰다구요?" "헛허…… 알겠다, 알겠어……." 홀연 난난의 손에 들려 있던 약그릇이 스르르 노인에게로 딸려 올라갔다. 그것은 노인의 입 바로 앞에서 뚝 멈춰지는가 싶더니, 이내 비스듬 기울어져 그의 입 속으로 탕약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마치 은그릇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난난은 투명한 청광(靑光)이 일렁이는 한쪽의 반석에 올라앉아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 문득 붉은 입술을 나풀거렸다. "만약…… 화백부(華伯父)의 아들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퉤 勞틜痴憔" 느닷없는 말. 순간 막 탕약을 다 삼킨 노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천상의 아들이……?" "그래요. 살아 있다면 난난의 나이겠죠." 심중의 격동이 유형으로 변해 밖으로 발산되고 있는 것인가? 철커덩―철컹― 쇠사슬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문득 노인은 한줄기 공허한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그 입으로부터 느닷없이 창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생 한 올의 부끄러움도 없이 살아온 이 삶이련만…… 나 진천우도는 유일하게 한 사람에게 죄를 지었도다. 그는 바로 나의 둘 아들이니…… 만약 그의 혼이 살아온다면 나는 능히 그의 앞에 무릎혤 腑微泣 그의 시신이 남아 있다면 그 시신에 입을 맞추리라. 그의 혈육이 이 땅 위에 있다면 나는 그에게 이 천하를 주리라!" 아아…… 진천우도! 십팔만리 광토 대륙의 지배자. 천 년 유사이래 가장 강하다는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인 그! 도대체 그런 그가 이렇듯 심산 유동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을 줄이샥 독撰 짐작하였으랴? 진천우도의 횃불 같은 시선이 손녀 난난을 향했다. "네 말은 무슨 말이냐? 이번 검회에 그가 나타나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난난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요. 하지만 매우 뛰어난 사람이 하나 있어요. 나는 무황 진천우도의 피를 이어받고, 영웅 화천상의 기질을 이은 자가 아니라그런 훌륭한 재질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해 보았을 뿐이지요." "그가 누구냐?" "무당파의 운룡이에요." "운룡? 이환명과 비교하면 누가 더 낫느냐?" "흐음……." 난난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언젠가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요. 후천적(後天的) 재질에 있어이환명보다 더 뛰어난 재질은 이 땅 위에 있을 수 없다고요. 그 말은 옳아요. 내가 보기에도 운룡이란 사람은 이환명보다 재질이 떨어져요 하지만……." "하지만?" "뭐랄까. 그에겐 선천적인 잠재력이 있어 보여요. 아주 무섭고 큰 무엇인가가 말이에요. 난난은 그의 세 번째 비무부터 눈여겨보았는데 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어요. 만약 그 껍그가 깨고 나올 수 있다면 이환명은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거예요." 순간 진천우도의 두 눈에 한줄기 섬전 같은 광채가 스치고 지나갔"난난, 반드시 틈을 만들어 그의 가슴을 보도록 하라. 그 가슴에 煉 湯狎血龍)의 문양이 있다면……." 말을 잇던 그의 입에서 느닷없이 석벽이 허물어져 내릴 듯한 광소괌 皐 た都裏 "크핫하하…… 그가 바로 나 진천우도의 손자요, 만룡가의 천년염원을 이룰 대영웅이다!" "혈룡……?" 난난은 무심히 진천우도를 향해 시선을 들다가 돌연 옥용이 가볍게 변했다. "할아버지……." 보라! 느닷없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하는 진천우도의 두 눈을……. 뿐인가, 그의 모발이 산산이 곤두서는가 싶더니 온몸으로부터 붉은 기운이 자욱이 뻗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붉은 광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음산하고 기분나빴다. 다음 순간 폭렬하는 듯한 광소! "크핫하하……." 이어 진천우도는 쇠사슬을 끊기 위해 미친 듯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철커덩―철컹― "나를……."처음에는 조그마한, 그러나 이내 믿을 수 없을 만큼 굉렬하고 음산 외침이 그 입술을 뚫었다. "나를 풀어라!" 꽝꽝! 쿠쿵! 그가 요동을 치자 놀랍게도 산만한 바위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후두두두― 사방으로 비산하는 먼지와 폭음. 하나 쇠사슬은 만년교룡삭(萬年蛟龍索)을 섞은 현음한철(玄陰寒鐵)이요, 바위의 무게는 무려 오십만 근이다. 이 땅을 만든 창조주라 해도 이 쇠사슬과 바위의 금제를 푼다는 것 불가능할 것이다. 난난은 축축한 연민이 서린 시선으로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불쌍하신 분……." 마공(魔功). 할아버지가 익히신 성심마공(聖心魔功)은 희대의 마공이다. 그것이 할아버지를 저렇게 만들었다. 무예의 최고단계 공령(空靈)으로 이르기 위한 속성마공이라 했다. 하지만 결국 할아버지는 마공의 마기(魔氣)를 이기지 못해 마인(魔 되고 말았다. 당신이 정상적인 의식을 찾는 시간은 하루에 두 시진뿐. 현음한철과 오십만 근의 바위로 스스로를 묶고는 저렇게 애태워 당 뒤를 이을 후계자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마공의 마기는 한 번씩 발작할 때마다 생명을 단축시킨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당신의 생명은 이제 겨우 두 달 남짓이 남았을 뿐이다. 불쌍하신 분……. 나는 무당의 운룡도인이 나의 고종사촌 오라비였으면 좋겠다는 생이미 여러 번 했다. 만약 그마저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할아버지가 어찌 눈 감고 돌아가시겠는가! 하늘이여……. "크아아아악!" 마공의 노예가 된 자의 절규는 오랫동안 석실 안을 외로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11. 變의 道理 봉황성(鳳凰城). 봉황성은 크게 외(外), 중(中), 내성(內城)의 세 곳으로 나누어진 외성은 작은 무림이라 불릴 만큼 잡다한 봉황성의 중, 하류 계급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은 대봉황천이 생긴 이후 입문(入門)한 고수들의 거처로, 대봉황천 전체 인원의 삼분지 일 가량의 인원이 이곳에 있다. 총 오당육전십이단(五堂六殿十二團)의 규모에다, 금검(金劍), 銀劍), 동검(銅劍), 옥검(玉劍), 철검(鐵劍), 목검무사(木劍武육등급으로 계급을 표기하고 있다. 이 중 금검무사는 단주(檀主) 이상의 서열을 말하는 것이다. 검회본선이 열리는 곳도 이 외성이며 비무참가고수들의 거처가 있혤 酋또한 이 외성이다. 외성의 성주는 노천주의 넷째 딸인 위경경이다. 참고 삼아 중성, 내성의 구조에 대해서도 잠깐 짚고 넘어가면……. 중성은 대봉황천의 핵심세력이 모여 있는 곳이다. 즉, 대부분의 무사들이 대봉황천 창립 당시의 고수들이거나 그 이세(二世)이다. 간혹 외성 육등급 고수 중에서 여러모로 그 전공(戰功)이 인정된 자에 한해 중성으로 발탁되는 경우도 있다. 이곳에는 전체 인원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구대군단(九大軍團) 끝 읜껸セ熾을兪鳳凰無色五殺) 등의 특수공격조가 상주하고 있다. 중성의 성주는 노천주의 셋째 아들인 용헌위(龍軒葦)다. 마지막으로 내성(內城). 이곳은 알다시피 대봉황천의 수뇌부와 그 호신고수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 너비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혈호(血湖)를 중심으로 하여 천주의 일가가 자기의 영지(領地)를 가지고 거주하고 있는 것이니……. 천주의 첫째 아들인 도남강(屠南江) 일가가 있는 곳을 천유탄(天遊灘)이라 하고, 셋째 용헌위의 일가가 있는 곳은 麗 軒龍閣), 그리고 둘째 화천상의 텅 빈 난화정사와 넷째 위경점 杵倫념雲腋天)이 각기 동서남북의 사방에 위치하고 있다. 때는 황혼녘. 소녀 난난이 진천우도의 연공부(練功府)를 걸어나오는 바로 그 시끝炘 혈호의 동쪽 호변, 갈대가 수도 없이 우거진 천유탄의 한 수상누각에서는 조촐한 주연(酒宴)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중을 드는 시비도 하인도 없이 십여 가지의 주효(酒肴)가 놓인 술상을 마주하고 앉은 세 사람. 가장 상석에 앉은 사람은 장년의 나이에 검은 수염이 단아한 멋을 더하는 위인. 일견하기에도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위가 햇살처럼 사위로 스며 나온다. 도남강. 노천주의 첫째 아들이자 대봉황천의 실질적 제일인자(第一人者)라 수 있는 그가 아니고서야 누가 또 이러한 위엄을 지닐 수 있으랴. 그의 좌측에는 천대 대주이자 도남강의 한쪽 팔이라 할 수 있는 천룡대라마, 그리고 우측에는 한 명의 중년유생(中年儒生)이 자리하u 있었다. 언뜻 보기에 별 특징이 없어 보이는 중년유생. 그의 두 눈에는 특별한 신광(神光)도 없었으며, 체격도 호리호리하 왜소했다. 하나 이 사람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은 비단 큰 오해가 일 뿐 아니라 무서운 오해다. 그가 바로 도남강과 더불어 대봉황천의 대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는 셋째 용헌위이기 때문이다. 도남강과 용헌위. 이들은 한 형제이지만 이렇듯 한가로이 마주앉아 있는 때는 극히 드물다. 한데 지금의 이 모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호수는 불타는 듯한 노을에 물들어 이름 그대로 혈호의 장관을 빚어내고 있었다. 멀리, 태산 연봉을 넘어온 한 줄기 추풍이 호수를 가로질러 세 사람의 옷깃을 스친다. "그렇다면……."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도남강이었다. "부친은 이번 검회에서 팔대고수를 선발한 후 그들을 한꺼번에 금악(金嶽)으로 보낸다는 얘기인가?" 용헌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형님. 그들로 하여금 금악의 비밀을 풀게 하려 하심이 틀림없소."흐흠! 가문의 사람도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가문의 비밀을 맡긴다 도남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호수를 마주한 난간에 우뚝 몸을 세웠다. "과연 부친다운 일이군. 부친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로선 매우 유감스러워. 이번 검회를 너나 내가 아닌 넷째에 맡긴 것만 봐도 이미 부친께선 우리를 신임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혤 渚럿瘀일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군." 그는 수면을 스쳐 나는 새떼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이윽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팔대고수 외에 또 금악으로 출발하는 사람이 있는가?" "듣기로는 난난과 화검십이혈(花劍十二血)이 따른다 합니다." "흐음…… 과연 용의주도하시군. 난난의 지혜와 호신고수인 화검십이혈의 무예로써 그들을 보호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 "그들이 출발하는 일시는?"검회본선은 예정이 앞당겨져 이제 이십 일 후면 끝나게 됩니다. 괌 節줌출발할 것이니 아마도 스무사나흘 경이 아닐까요?" "스무사나흘이라……." 도남강의 시선이 힐끗 용헌위를 향했다. "그간 우리가 해오던 조직정리는 어떻게 되었나?" 용헌위의 얼굴에 씩 웃음이 번졌다. "구할 정도가 완료되었소. 일백구 개 분타 중 구십구 개 분타에게찼 오퓬┑ 받았으며, 성내의 칠대군단과 금은동철옥목(金銀銅鐵玉木) 육등급 수뇌의 언약을 모두 접수했지요." "걸리는 것은 없는가?"역시 넷째쪽이지요. 넷째의 환녀군단(幻女軍團)과 학천종이 거느철기군단(鐵騎軍團)도 여전히 껄끄럽소." 도남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한 잔의 술을 쭈욱 들이킨 후 瞼 騈밗용헌위에게 불쑥 내밀었다. "한 잔 받게나." 쪼르르― 호박색 주액(酒液)이 잔에 거의 채워질 즈음, 도남강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하나 입술은 꼼지락거리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이는 필시 무형의 기(氣)로써 상대에게 언어를 전달해 보내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수법일 것이다. 한데 순간, 귀기울이고 있던 용헌위의 몸이 독충이라도 만난 듯 부르르 떨렸다. "진정…… 결심하신 것이오?" 그에 반해 도남강의 표정은 별로 변함이 없었다. 그는 본래 표정이 없다. 사람들 앞에 잘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을 뿐더러, 어떤 일에 관심을 표현하는 일은 전무(全無)하다시피 했다. 산(山) 같은 사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도남강이라는 이 하나의 산 앞에 서면 질식할 듯한 위압감에 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시일이 너무 촉박하오. 큰 혼란이 있을 것이오." "너는 조직정리가 구할 이상 진전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긴 하오만…….""그것이면 돼. 육할만 되도 나는 했을 것이다. 기회는 구하는 것이 냥 오는 기회는 기회라 할 수 없다. 너는 그 술잔을 들고 즉시 준혤 覃溝돈鵠하라." 용헌위는 손에 들린 술잔을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꿀꺽 삼켰다. 이어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몸을 일으켜 누각 아래로 사라져 갔다. 도남강은 조용히 웃으며 자작(自酌)으로 한 잔의 술을 비웠다. 문득 천룡대라마가 한소리 불호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큰 결심을 하셨구려." "그렇게 생각하시오, 대사?" "하지만 역시 좋은 기회올시다." 도남강의 무표정한 시선이 어스름 땅거미가 스산히 덮여오는 수면뇟 銖杉裏 "만룡가 내에 만룡가를 이을 만한 인재가 없다고 부친이 생각하셨쐴 ㎈壙棨─ 그리하여 만룡가를 남에게 주기 위해 사해대검회라는 것모 曼舟究缺밗때부터 부친과 나의 관계는 끊어졌소. 나는 엄연한 만룡제일계승자이오. 어릴 때부터 그렇게 키워져 왔소. 그래서 이 일을 방해하는 자는 그것이 설사 부친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오." 와작! 술잔이 그의 손 안에서 깨어져 박살나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운룡은 달빛을 밟으며 태산의 한 자락을 오르고 있었다. 대봉황천이 있는 관일봉이 마주보이는 쌍검봉(雙劍峯)이었다. 그는 이런 야심한 시각에 이곳까지 오라고 한 연비의 처사를 알 수 없었다. 검회본선은 이제 나흘이 남았고, 그 동안 운룡은 자신의 처소에 처박혀 삼재검법을 좀더 정밀히 다듬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의 삼재검법은 이제 대충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안에는 그 동안 보고 들은 백팔십여 개 문파의 초식이 한꺼번에 갈무리되어 있었고, 이번 검회에서 대적한 사람들의 초식 또한 가미찼 羚駭裏 다만 각개 초식의 운용순서가 틀려 아직 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흠이긴 했지만 일곱 번의 비무를 해오는 동안 운룡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진 터였다. 산정(山頂)이 가까워지자 바람이 거세졌고, 밤구름이 시야를 가렸혤炘 연비는 산정의 끝, 한쪽 벼랑가에 우뚝 서서 발 아래 무한공간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찢어질 듯 펄럭이는 옷자락, 근육질로 단단하게 뭉쳐진 뒷등, 바늘 찔러도 들어갈 틈 하나 없어 보이는 신변의 예기(銳氣). 그는 언제 보아도 무인(武人)으로 보였다. 사실 그처럼 무인의 기질을 완벽하게 지닌 사람이란 몹시 드물 것이다. 운룡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두 눈으로 한줄기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났다. 저 단단한 무인의 뒷모습을 꼭 어디에선가 본 것 같았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하던 운룡은 이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렇군…… 저 사람은 위지의부를 몹시 닮았구나. 그러고 보니 그 성격도 비슷하다. 위지의부의 젊은 날도 저 사람 같았을까?'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운룡은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빈도를 부르셨소, 연형?" 운룡은 입을 열자 왈칵 끼쳐드는 바람의 압력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연비의 시선이 천천히 이쪽을 향했다. "본선의 조(組)가 결정되었다. 알고 있는가, 운룡?" "알고 있소." 연비는 한쪽의 바위 위에 걸터앉으며 운룡에게 앞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본선의 대진형식이 많이 바뀌었다. 본래는 사 개 조(組)로 나누어 조에 속한 모든 고수와 한 번씩 겨루어 보는 연형전(連衡戰)이었으나 輪構鍍넵팔 개 조에 도태전(淘汰戰)으로 바뀌었다. 네 번을 연승조의 우승자로서 팔대고수에 끼게 된다. 그 이상의 승부는 가리지 않는다. 너는 제팔조다." "……." "이것은 대봉황천 내에서 모종의 일이 급박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킴裏 즉, 애초에 우승자 한 명만을 보낸다던 금악에 팔대고수 모퉤 립뺨잔것이지. 비무시일이 크게 단축된 것으로 보아 시간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생긴 것 같다." "……!" "결국 이 모든 것은 기(技)보다는 체력으로 버티는 네게 불리한 것이다. 대진표는 그날에 가야 정해지겠지만 팔조에 어떤 고수들이 있는지 아는가?" "글쎄……." "매우 재수가 없게 되었다. 살검광생(殺劍狂生)이라고 아는가?" "그는 강하오?"흐흠! 물론이다. 그가 검회이십강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도 끝 堞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미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운룡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미친 사람?" "그는 무예에 미쳤다. 그는 자신의 무예증진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뼁居두 아들을 토막내어 묻었고, 그런 그의 성품을 우려하여 더 무예를 가르치지 않으려던 사부를 돌로 쳐죽였다. 또한 무예의 고수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비무를 청하여 죽기 살기로 덤벼든 裏 이번 검회만 해도 그는 우승 따위는 애초에 관심도 없을 것이찼 恝梨泄위해 그는 참가했다. 어떻게 보자면 전 참가고수를 통틀어 가 무서운 자다." 운룡은 무거운 신음을 터뜨렸다. "그럼 도대체 그의 무예수준은 어느 정도이오?" "지금의 자네 실력으로는 한 올의 승산도 없다." "그럼 그가 백마 위걸보다도 강하단 말이오?" 순간 연비의 시선이 발끈 그를 향했다. 무심할 정도로 싸늘하고 차가운 시선이었다. "너는 지금 무인이 가장 무서워해야 할 만족이라는 병에 빠져 있구 검회예선을 통과한 것이 네 실력인 줄 아느냐? 너는 단지 운이 좋았끝 湛甄李" "하지만……."흐흠! 게다가 또 너는 무인으로서도 흠투성이이다. 네가 알고 있뭅잔오직 검법뿐이지 않느냐? 신법(身法), 보법(步法), 권장법(拳 같은 기초무예조차 하나도 모르고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팔 하나만 기형적으로 큰 어린애다. 네가 그 동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구할 구푼의 행운과 일푼의 실력 때문이었다." 얼굴이 절로 붉어질 만큼 신랄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살검광생은 지금까지 네가 운좋게 싸워온 상대와는 차원이 왹 내공, 기교, 경험, 그 어느 것을 봐도 모조리 네가 한수 아래벙 各텝엉성한 삼재검법 따위는 채 일초도 펼쳐지기 전에 허점이 간파되고 말 것이다. 그는 수천 번에 이르는 죽음의 비무를 해온 맹수다!" 운룡은 할말을 잃었다. 사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연비의 말엔 하나도 틀린 곳이 없었다. 또한 그의 눈은 마치 칼끝처럼 예리했으므로 그가 지적한 사실들은 십중팔구 틀림없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운룡은 그 동안 검회예선을 통해 부풀어올랐던 마음이 일시에 싸늘 식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오?" 연비는 그런 그를 일순 바라보고는 무표정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이제부터 나는 자네의 특수조련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겠다. 나를 믿고 따라오겠는가?" 순간 운룡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 잠깐 보았던 연비의 무예에 흠뻑 매혹되어 있에 佇堧肝아닌가? "따르고 말고요!" 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좋아, 그럼 따라와!" * * * 졸졸― 물[水]. 물은 흐르는 것이다. 깊은 계곡을 흐르는 물은 얼음처럼 희고 겨울처럼 정결했다. 시린 달빛이 물 속에 가라앉은 암갈색 낙엽을 투영해내고 있었다. 운룡은 시냇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흐르는 물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한 시진쯤 지난 것일까? 쭈그리고 있는 무릎에 은은한 통증이 스며오고 있었다. 연비는 시내 건너편 바위에 자리하고 앉아 묵묵히 운룡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그가 말했다. "무엇이 좀 보이느냐?" 느닷없는 말. 운룡은 힐끗 그를 쳐다보고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흐르는 물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그건 보이오."살검광생의 검은 바로 그 흐르는 물과 같다. 그에겐 수비가 없다. 공격이 곧 수비를 대신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검(劍)도 곧 무적은 아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둑을 쌓아 물길을 막듯 흐르는 물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만이 살검광생을 이길 수 있다. 그러한 단수(斷水)의 요결(要訣)을 연구해 보라." '물! 물을 끊으라고?' 운룡은 다시 두 눈에 힘을 주어 물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하나 물은 물이다. 그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것에 무슨 끊어지고 말고가 있단 말인가?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봐도, 골백번 시선의 위치를 바꾸고 난리를 쳐봐도 도저히 물은 끊어질 것 같지 않았다. 일천 일을 가물어 물이 아예 바닥이 난다면 모를까. 다시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연비가 다시 물어왔다. "알겠느냐?" 운룡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 순간 연비의 얼굴에 흰 선이 하나 그어졌다. 그것은 그로선 드문 가벼운 웃음이었다. "비록 무인의 틀을 갖추려면 아직 멀긴 했지만 운룡, 너는 다 좋다 淪構渼募잔집념,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끈기, 집요한 인내, 그퐈 재질, 소위 성공에 필요한 요소를 다 갖춘 것이 바로 너다. 그하나가 부족해." 운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게 뭐요?" "변화(變化), 변화이다." * * * 검회본선 사흘 전. 하룻밤을 꼬박 세우고 마시는 이른 아침의 장국은 매우 맛이 있었벙炘 태산 주변의 오대성읍 중 하나인 진천현(秦川縣). 그곳은 남북으로 오고가자면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요지(要地)인 傷 해발 일천 척(尺)의 고지(高地)에 위치했는데도 매우 그 문물 풍요번성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열흘마다 한 번씩 서는 십일장(十日場)에는 인근 오십여 개 고을의 주민들이 대거 물건을 사고 팔러 나오는지라 파시장이 되면 마치 축제일처럼 북적대었다. 오늘은 마침 파시날. 그래서인지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성읍의 중앙 시장터는 수많은 인파로 우글거리고 있었다. 운룡과 연비는 그 혼잡한 와중에서도 노점식당에 앉아 장국을 마시 있었다. 장국이란 이른 바 막일을 하는 하류계층의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으로써 말린 채소류와 소의 선지피 등을 한데 넣고 끓인 탕류(湯類)를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 만두나 백반 또는 말린 오리고기를 곁들이기도 하지만 대개 동전 한두 푼에 훌훌 국물을 마시고 만다. "산동(山東)의 흑엽소채(黑葉素菜)가 유명하다더니 과연 이 국은 대단히 맛있군요. 양념도 아주 잘 되었소." 뿌연 입김을 뿜으며 운룡이 말하자 연비는 무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요리를 할 줄 아는가?""알고 말고. 무당파의 요리는 모조리 내가 했소. 사부님은 내가 만 음식이 아니면 아예 드시질 않곤 하셨소." "흐음, 잘됐군." 뭐가 잘됐다는 걸까? 국 한 그릇을 비우기 무섭게 연비가 앞장서서 들어선 곳은 그곳에서부터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호화반점(豪華飯店)이었다. "어서 옵쇼!" 장국집을 모조리 판 것보다 더 비싸 보이는 옷을 걸친 점소이의 환대를 받아 이층 계단을 오르며 운룡은 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배가 안 찼소? 나는 배 불러요." "배가 부른 것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연비는 점소이가 내미는 차림표를 받아들고 쭉 훑어보더니 그 중 하나를 손으로 짚었다. "소압육(燒鴨肉)을 곁들인 선와탕(仙過湯)으로." 한 그릇에 무려 은자 반 냥이나 하는 호화판 음식. 연비는 음식을 시키고 나자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그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한 눈치였으므로 운룡도 아무 말도 하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킨 음식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일다경(一茶頃)쯤 후였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접시가 모두 열두 개. 그밖에 주음식으로 보이는 탕그릇 하나가 은쟁반에 담겨져 나왔다. "먹어 보라." "나는 글쎄……." "먹어 보라니까." 운룡은 할 수 없이 수저를 들고 탕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여러 번 그릇에 수저를 떠넣어 먹어본 그의 두 눈에 한줄기 놀람의 빛이 번뜻 스쳐 지났다. "응? 이것은?" 연비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가?" "이것은 방금 먹었던 그 장국과 같은 것이 아니오?" "바로 그렇다. 양념은 어떤 것 같은가?" "같소. 하나도 틀릴 게 없소.""잘 보았군. 물론 반상의 그릇이 틀리긴 하지만 한쪽은 동전 한 닢 그리고 한쪽은 은자 반 냥이다. 자, 그럼 또 다른 걸 보자." 주문한 선와탕은 먹지도 않고 연비가 간 곳은 허름한 칼가게였다. 그곳에선 노점에 칼을 벌려 놓고 있었는데 주방용 식칼을 비롯하여 무사가 쓰는 검까지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연비는 그 중에서 석자의 길이에 삼십 근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장 한 자루를 골랐다. "따라와 보게." 무엇을 하려는 걸까? 연비는 십여 걸음 앞쪽의 고급 골동품가게로 들어갔다. 이어 주위를 가볍게 휘둘러보는가 싶더니 검을 진열해 놓은 곳으로 다가가 거기다 불쑥 노점에서 산 검을 내려놓았다. "보라." 순간 운룡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검(劍). 진열되어 있는 검들은 하나같이 고색창연하고 귀해 보였다. 한데 아까는 그토록 초라해 보이던 검이 그것들과 섞이자 무엇 하징 껴 것이 없지 않은가? 그 초라한 검은 거지가 단숨에 왕족으로 변하듯 다른 검들과 똑같벙 自稚♧�하倂ㅓㅇ� 빛나고 있는 것이다. 운룡의 얼떨떨한 얼굴을 주시하며 연비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이 안의 도리를 알겠는가?" * * *너는 오랫동안 선도(仙道)의 금욕(禁慾)생활을 해 욕망을 참는 것 몸에 배였다. 물론 금욕이란 것은 일정수준까지는 훌륭한 성장요인이 되지만 어느 정도 경지를 넘고 나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 즉, 사물을 보는 눈이 한쪽으로만 고정되는 것이다." 쌍검봉으로 오르는 산길이었다. 연비는 길을 걷다 말고 문득 하나의 돌을 주워들더니 말을 이었다. "이 돌을 보라. 이것은 네가 보다시피 좌측 하단에 흙이 묻은 돌멩이이다. 안 그런가?" 운룡은 돌을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연비는 돌의 반대편을 가리켜 보였다. "하나 돌의 이쪽에서 보는 사람은 그 흙을 볼 수가 없다. 즉, 그에 있어 이 돌은 흙이 묻지 않은 돌멩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네쪽에잔사람에겐 이 돌은 분명히 흙이 묻은 돌멩이이다. 그러나 그 둘 앳것도 옳지 않아. 이 돌의 정확한 정의는 좌측 하단에 약간의 흙 묻은 돌멩이인 것이다." 휙! 돌은 연비의 힘에 의해 저쪽 숲그늘로 사라져 갔다. "이와 같이 사물을 한쪽 방향으로만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堀사고가 굳은 사람은 결코 대성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고수 너를 향해 이와 같은 초식을 쳐왔다고 하자." 연비는 말과 함께 우수를 곧추세워 내뻗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것은 점창검파(點蒼劍派)의 흐름 중 하나인 수휘오현(手輝五弦)퐈 峙萱潔駭裏 "이 수법 속에는 다시 난향암송(蘭香暗送)의 일식이 숨어 있다. 시장의 장국과 반점의 선와탕, 시장의 검과 골동품가게의 검이 틀려 보이는 것은 고수자가 초식 속에 또 다른 초식을 숨기는 것과 같은 상술(商術)의 일종이다. 좋은 장소에 있는 물건은 좋아 보이는 맹점퉤 結淪杉裏 무예도 마찬가지다. 눈을 현혹시키는 초식이란 수도 없이 많다. 고수자끼리의 대결에서 이런 것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무엇을 보는 시각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운룡은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간단하지만 사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생존(生存)의 도리가 아닌가?변화하는 것…… 장소, 시간, 또는 위치에 따라 쉴새없이 변화하것이 무예의 가장 기본적인 정석이다. 고정된 초식만으로 싸울 수 있는가? 네가 선인지로의 일식을 펼칠 때 상대가 천외내운(天外來雲) 막涇막으라는 법이 있는가? 천만에, 너는 바로 이런 변화가 부족륫 돛括繭遮잔한정된 틀 속에서 한정된 생활을 해온 탓이다." 말을 잇는 동안에 그들은 한 곳의 동혈(洞穴) 앞에 도착했다. 연비는 서슴없이 동혈의 입구로 들어섰다. 동혈은 음습했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만이 괴괴한 정적을 깨뜨렸다. "새는 그 어미가 나는 모습을 보고 난다. 맹수는 그 어미를 따라 사냥을 한다.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해본 사람을 뛰어넘을 수 없다." 목소리가 동혈의 안을 메아리쳐 왔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뼈속까지 전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네 검법은 상승의 무술이다. 하나 검법은 초식만으로 되는 것이 求裏 기(氣)와 변화가 중요하다. 그럼 기(氣)란 무엇인가? 그것은 怏 네가 도인의 탈을 벗을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벗어야 모 躍좇肝시키는 대로 달려가 보라! 검을 뻗어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의 일종이다. 그 욕망의 명령대로 검을 뻗어주는 것만큼 훌륭한 초식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연비의 말이 끝났을 때 동혈도 끝나고 있었다. 무심히 앞을 향해 시선을 던진 운룡은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보라! 동혈의 끝. 마른 짚더미가 수북이 쌓인 그 위에는 놀랍게도 얇은 망사 하나만혤 牝割걸친 미녀가 하나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미녀는 두 사람을 보자 배시시 웃으며 사르르 몸을 일으켰다. 순간 운룡은 기이하게도 그녀에게서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성욕(性慾)을 느꼈다. 하늘하늘한 흑발(黑髮)에 조그마한 동작 하나하나에도 파도치듯 출렁이는 미묘한 육체의 굴곡. 손을 들어 가볍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가만히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하나만으로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여인을 어디 상상인들 해보았으랴? 이 여인은 아마도 남자를 즐겁게 하기 위한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그런 여인일 것이다. 연비는 조용히 운룡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여인은 서비인(西秘人)이라 한다. 낙양 제일의 기녀(妓女)이자 요화(妖花)이지. 너를 위해 특별히 불러왔다. 금욕(禁慾)을 깨뜨리는 도구로써!" 운룡은 얼떨떨한 어조로 물었다. "왜…… 왜 하필이면……." "성욕이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그러니 만큼 그 결과도 빠르다. 도인이라는 네 알량한 위선을 벗는 데는 최고의 도구가 될 것이다." 연비는 싱긋 웃으며 빙글 신형을 돌렸다. "앞으로 너는 사흘 동안 서비인과 있도록 하라. 여체(女體)를 어떻 堰 그것은 네 자유다. 욕망을 거부하진 말아라. 단, 이따금씩 물끝 멎돌과 장국을 생각해 보도록 해라. 그 안에 숨은 도리를 알고 못 알고는 네 노력에 달렸다, 운룡." 말소리는 점점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다음 순간 크고 무거운 물체가 입구를 막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운룡은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소스라치듯 서비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새하얗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연비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탈을 벗어라! 욕망이 시키는 대로 달려가 보라! 검을 뻗어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는 것도 욕망의 일종이다. 그 욕망의 명령대로 검을 뻗어주는 것만큼 훌륭한 초식이 또 어디科 斂渼째 12. 情事血鬪 비단 권장(拳掌)이 난무하고 검날에 피가 적셔져야지만 혈투 (血鬪)일 순 없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싸움이 얼마나 많은가? 반찬을 짜게 만든 며느리와 속곳을 적신 시엄마가 서로를 노려보는 것도 싸움이요,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반점이 서로 음식값을 폭락시키며 망해가는 것도 싸움의 일종이다. 운룡도 따져 보자면 사실 백 번도 넘는 싸움을 해보았다. 하나 그는 이토록 힘겨운 싸움은 난생 처음이었다. 사투(死鬪)! 사르르― 여인이 옆에 와 서면 그 향기가 코끝을 흥건히 적신다. 신경을 안 쓸려 해도 그 목소리는 어떤 소리보다도 빨리 귓전을 쑤시고 들어왔다. 마주 서면 물러나고, 덮치면 뒹굴어 피하고……. 그러다 서로 지쳐 무엇인가를 좀 생각해 보려 하면 온통 뇌리를 스치는 것은 여자, 여자, 또 여자. 사실 운룡은 요 이틀 동안 서비인과 함께 지내면서 그가 일생동안 알아온 것보다도 더 많은 여자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서비인은 밤낮없이 홀라당 벗고 지냈다. 그러다 보니, 보기 싫어도 그는 여자의 젖꼭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치부(恥部)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샅샅이 알게 되었으며, 여자덧 檳瀏외오줌을 눈다는 것과 그 살에선 늘 향기가 난다는 것도 처음으 알았다. 어쨌든 힘들다! 운룡은 그녀를 통해서 욕정의 실체를 깨닫고 검도(劍道)의 새로운 경지를 터득하긴 했지만, 그것은 비단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사고로써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자를 품는 것이 죄악시되는 도가의 가르침도 가르침이지만, 도대 그는 여자라는 생물과 더불어 생활해 본 적이 십육 년, 사천육백 일 동안 단 이틀도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서비인의 알몸이 다가오면 기를 쓰고 물러났다. 그녀가 살을 문대오면 두 눈을 꼭 감았으며, 향긋한 입김을 토해오 아예 숨을 쉬지 않곤 했다. * * * 꿈을 꾸었다. 운룡은 여인을 보고 있었다.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십검지의 옥수령 같기도 하고, 곤륜의 운연인가 하면 또 느닷없이 채석장의 음탕한 밥집아줌마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얼굴이 누구이든지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고, 또한 그 아름다운 여인은 그의 앞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 먼저 연남빛 유의가 흘러내리며 망사에 가리운 뽀얀 우유빛 육체가 드러났다. 사르르― 보일 듯 말듯한 것이기에 이토록 안타까운가? 그 은밀한 속살은 아예 피를 말린다. 동시에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달콤한 속삭임이 운룡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한 몸이 되어야 해요. 그대와 나는 영혼과 영혼, 육체와 육체,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벙 萬盾 스르륵― 유의에 이어 치맛자락이 사르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망사, 그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와 발목이 슬프도록 아름답다. 이어 희디흰 손이 망사의 어깨끈을 밑으로 풀어 내렸다. 매미가 껍질을 벗듯 백옥처럼 윤기 흐르는 나신(裸身)을 타고 망사 춤추듯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조금 부끄러워진 것일까? 여인의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대리석 같은 두 다리를 붙여 오므린 모습 앙증맞기조차 하다. 다시 분홍빛 젖가리개가 아쉬운 듯 따뜻한 체온이 숨쉬고 있는 육체를 떠났다. 그리고 최후의 한 조각 헝겊이 쌓인 옷 위로 슬픈 모습을 한 채 내려앉았다. 여인은 입술을 오므려 촛불을 껐다. 그리고는 어둠이 몸에 닿을세라 붉은 능라이불 속으로 요정(妖精)처럼 스며드는 것이었다. 이불은 호화롭고, 여인의 웃음은 더 호화롭다. 달빛인지 뭔지 모를 광채가 그녀의 웃는 입가로 신비롭게 번지고 있었다. 저를 가져야 해요. 그대는 스스로 여유와 행복을 가져야 한답니다. 어서요. 달빛이 너무 슬퍼요. 운룡은 한줄기 계시에 이끌린 듯 몸을 일으켜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어 욕망의 언덕을 달리듯 그는 능라이불의 자락을 들추고 침상으 올랐다. "하아…… 으음……." 운룡의 입김이 목덜미를 핥고 지나자 여인은 한줄기 달뜬 신음을 입술 새로 흘려냈다. 조금만 세게 움켜잡으며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고, 손길이 닿으면 때가 묻어날 듯 티 하나없이 정결한 육체. 그 육체엔 향기가 있었다. 운룡은 향기의 근원을 찾기라도 하듯 여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투박하게 들이댔다. 이어 그의 입술이 바람처럼 젖가슴 위로 내려앉자 여인은 몸을 활처럼 휘었다. 섬섬옥수는 그의 우람한 등을 살포시 끌어안았고, 교구(嬌軀)는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운룡은 대지를 할퀴고 지나는 바람이 되었다. 바람이 살랑이고, 혹은 휘몰아칠 때마다 대지는 닫힌 문을 활짝 열 생(生)의 열락을 노래하고 춤추니……. "아음……." 문득 운룡은 자신의 몸이 무엇인가 부드럽고 수축력있는 곳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힘이 그곳으로 빠져나갈 듯 솟구치고 있었다. 그는 힐끗 충혈된 시선을 들었다. 순간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아…… 이것은 꿈이 아니다.' 현실이었다. 보라! 검은 수발(秀髮)은 짚더미 위에 흩어져 하늘거리고, 사르르 내리감은 속눈썹은 열정으로 몸을 떨고 있다. 우유빛 목덜미 아래 둥근 어깨로 흘러내린 호선의 아름다움은 또 어떠한가? 그렇다. 그가 안고 있는 것은 분명히 서비인이었다. 그것을 분명히 깨닫는 순간, 운룡은 불현듯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 炘 그는 원래 피곤을 모른다. 피곤이란 무인에게 있어 최대의 적이다. 그런데 이렇듯 아름다운 여체를 앞에 놓고 갑자기 피곤을 느끼다니 물론 맨살 위로 부딪쳐 오는 신선한 여체의 체온이 싫다는 것은 아니다. 좋다. 아니 좋은 것 같다. 하지만 무엇을 보아야 하나? 단지 피곤을 푸는 도구로 여체를 느껴야 한단 말인가?연비…… 당신은 쓸데없는 짓을 했소. 나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모炘 * * * 쿠쿠쿵! 드디어 사해대검회의 막장인 검회본선의 날이 밝았다. "와아아!" "와아……." 대회장인 봉황성 외성 숭무광장(嵩武廣場)엔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 없었다. 모든 무인들. 중원 삼산오악(三山五嶽)의 무인이란 무인은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누가 팔대고수에 뽑힐 것 같은가?" "글쎄…… 나는……." "자네는 어떤가?" "자네는?" 검회의 최종승자인 팔대고수에 대한 별별 억측이 다 떠돌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후보로는 다음의 인물들이 꼽히고 있었다 무애공자(無崖公子) 이환명(李環明). 초검(草劍) 백리천(百里天). 빙인(氷人) 엽상의(葉霜依). 녹림총수(綠林總帥) 묵비향(墨飛香) 등. 그리고 이들 후보를 위협하는 풍운의 인물들은 아래와 같이 거론되 있었다. 무정곡주(無情谷主) 살검광생(殺劍狂生). 곤륜(崑崙)의 운연(雲燕). 생사선주(生死船主) 혈독(血毒) 혜공(慧拱) 등. 일익에서는 풍운아 무불검 운룡을 후보의 하나로 점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이날은 이번 검회의 주관자인 위경경과 그녀의 딸 난난, 그리고 대봉황성의 구대군단(九大軍團) 단주 등의 핵심고수들이 빠짐없이 참석한 가운데 소림장경각주 심인노선사의 사회로 대회가 시작되었다. "아미타불……." 심인노선사의 장중한 불호가 장내에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럼 먼저 검회본선의 공증인 제현의 소개가 있겠소이다. 먼저 본 검회의 주최자이신 위경경 위방주(韋 主)를 소개하오!"킴淪堀비무대의 정면, 오색의 차일을 댄 상석에 우아하게 앉아 있 위경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십 년 전의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은의(銀衣) 비단옷에 주홍빛 옥대를 두른 모습이 성스럽게 빛났다. 즉시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위경경은 박수소리가 그칠 때까지 선 채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느릿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비무대 동쪽에 있는, 참가고수들이 앉은 차일덧 酋훑고 지났음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다음은 오대문파의 장문인과 고수님들을……." 위경경의 한 칸 아래쪽에 앉아 있던 신선 같은 풍도의 노고수들이 일어났다 앉는 사이, 위경경은 옆 자리의 난난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 말했다. "얘야, 그 운룡인가 하는 도인은 보이지 않는구나." 난난은 여전히 품속의 영물인 백아를 쓰다듬는 자세로 입을 가볍게 삐죽였다. "늦잠을 자나 보죠, 뭐." "그럴 리가 있겠니? 사람을 보내 좀 알아볼까 보다……." 하나 위경경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의 뇌리로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느닷없이 방문을 박차다시피 뛰어 들어온 대교두 학천종의 모습과 입으로부터 튀어나온 한소리 놀라운 외침. ―조사대의 급보가 왔습니다! 운룡은 틀림없는 이황야의 아드님이오! 학천종에게 수십, 수백 가지의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한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했으나 밤새 단 한잠도 못 잤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운룡의 숙소로 뛰어가 확인해 보고 싶었으 그녀는 사력을 다해 꾹꾹 참았다. 그렇잖아도 못내 불만족스러운 기색이 완연한 첫째 도남강인데 자신보다 계승서열이 더 분명한 제일계승자 운룡이 나타났다는 사실괌 江農된다면 가만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유난히 빨리 일어났고 수행인들을 독촉해서 서둘러 이곳까지 나왔다. 한데 그 아이 운룡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때 수십 명에 달하는 공증인의 소개가 다 끝났는지 심인노선사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 먼저 비무자를 가리는 선표가 있겠소이다. 이 본선은 팔개 涇나뉘어 거행되오. 각조마다 네 번의 도태전(淘汰戰)이 있게 되b 각조의 우승자가 곧 팔대고수가 되는 것이오. 조에 대한 선표는 이미 일백 인의 공증인에 의해 끝났고, 이제 각조 단위로 대진선표가 있겠소이다." "와아……!" "아울러 검회본선은 일조부터 팔조까지 매일 거행되오. 오늘은 각퐈 (一號)부터 십호(十號)까지의, 도합 사십 쌍의 비무가 있겠소이에炘 그 즉시 붉고 푸른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은 한 쌍의 금동옥녀(金童玉女)가 대 위로 올라왔다. 그들은 한 통에 열 개씩 도합 팔십 개의 죽저(竹箸)가 꽂힌 여덟 개의 황금통 앞에 마주보고 있었다. 여덟 개의 통은 팔 개 조를 나타내고 죽저의 맨 밑부분에는 각 고수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 이것을 두 개씩 뽑아 각기 상대자를 정하는 것이다. 금동옥녀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한 개씩의 죽저를 뽑아 심인노선사에게 정중히 바쳤다. 심인노선사는 받아든 죽저를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우렁찬 목소리퐈 報틈裏 "먼저 제일조, 용조(龍組)의 순서이오. 용조의 첫번째 비무쌍은 떡暠貼萬毒鬼手) 준남(準南) 응조왕(鷹鳥王)과 곤륜의 쌍비연(雙벙 楮 소저의 대결이오."╂舊단용조의 다섯 쌍 비무자에 이어, 각기 호(虎), 표(豹), 학( 齧, 낭(狼), 응(鷹)의 제칠조까지 다섯 쌍씩의 비무자가 선포되혤炘 마지막으로 제팔조, 마조(馬祖)에 뽑힌 다섯 쌍 십대고수는 다음과 같았다. 생사선주(生死船主) 혈독(血毒) 혜공(慧拱) 대(對) 구혈모모(求血 초검(草劍) 백리천(百里天) 대 환우진신검( 宇眞神劍) 미량(彌良). 권왕지왕(拳王指王) 목철우(木鐵羽) 대 벽력신개(霹靂神 ). 고독도주(孤獨島主) 불인기(不仁奇) 대 인마(人魔) 담동(潭洞). 무정곡주(無情谷主) 살검광생(殺劍狂生) 대 무불검(無不劍) 운룡(雲龍). 동쪽 차일 밑에 앉아 있던 두자상은 대검순서가 다 밝혀지자 초조얼굴로 옆의 연비를 바라보았다. "연형, 도대체 운형을 어디다 처박아 두고 왔소? 이제 조금 후면 시합이 있을 텐데…… 왜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는 거요?" 연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오. 그냥 오느니 차라리 안 오는 것이 낫겠소. 어찌된 이놈의 팔조에는 검회이십강이 모조리 모였군." "모였다 뿐이오? 그것도 강자(强者)뿐이오이다. 빨리 와서 대책을 강구해야 할 텐데……." "대책은 없소. 유일한 대책은 운(運)이오." 그때 대 위에서는 이미 처음 비무 상대인 제일조 용조의 준남 응조왕과 곤륜의 운연이 옷깃을 휘날리고 있었다. 운연은 일신에 눈처럼 흰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허리에 찬 한 자루 보검이 그녀의 빛나는 미모를 더해 주었다. 반면에 그녀의 앞에 선 상대는 일신에 회색 짐승털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탓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생명없이 무미건조한 회색의 동공뿐인 준남 응조왕!이 죽음의 냄새가 물씬한 위인이 바로 한 쌍의 철갈고리 같은 손으 준남 일대에서 사십 년간 제왕 노릇을 해온 준남 응조왕인 것이다. 심인노선사가 간단한 주의말을 한 후 대 아래로 내려가자, 두 사람 즉시 무기를 뽑아 들었다. 운연은 한 자루 벽인보검(碧刃寶劍)이, 준남 응조왕은 새까맣고 윤 반질반질 나는 한 쌍의 손이 무기였다. 팽팽한 긴장. 한 줄기 바람이 멋모르고 두 사람의 사이로 팔랑팔랑 나부껴 지나륫 羈彭 두 사람은 서 있던 자리에서 희뿌연 잔영(殘影)을 날리며 서로를 향해 맹렬히 짓쳐들었다. "타앗!" "하아!" 카캉! 팍! 운연의 검에선 곤륜의 절학인 태허도룡검식(太虛屠龍劍式)이 불을 뿜듯 검편(劍片)을 솟구쳐냈다. 뻗는 초식 하나하나가 과거 수십 년 동안 곤륜파가 꾸준히 무예증진에 노력해 왔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준남 응조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이리저리 맞받아내었다. 차창! 그의 손톱은 마치 무쇠처럼 단단해서 날카로운 검식을 무리없이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때 운연의 몸이 돌연 휙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승천하는 용처럼 꿈틀꿈틀 호선을 그리는 멋진 신법! 이는 바로 곤륜의 전설적인 신법인 운룡삼현(雲龍三現)이 아닌가! 공중에서는 백색의 호선이 난무했고, 지상으로는 근 백 년의 내력실린 검기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순간 장내에선 엄청난 환호가 터져나왔다. "와……." "잘한다!" 두자상이 얼른 연비를 바라보았다. "저 운연이란 소녀는 뜻밖에 강하군. 오대문파(五大門派)의 위명이 과연 허언이 아닌걸?" 연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조에선 저 두 사람의 대전이 사실상의 결승이나 다름없소. 그러 운연은 지나치게 공력을 많이 소모하는군. 아직 나이가 어려서 결함있다." 과연 일백초 가량이 지나자 운연의 공격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반면에 준남 응조왕의 공격은 매서워지고 있었다. 슈슉! 파팟!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응조공은 독수리의 발톱을 보고 창안해냈다모 暉隙潔駭裏 거기다가 손톱의 크기가 일정치 않아 긴 것이 나오는가 하면 짧은 것이 뒤를 잇고, 짧은 것이라 싶으면 긴 것이 불쑥불쑥 솟구쳐 나오큄 杉裏 백팔천환조(百八千幻爪)! 이는 바로 준남 응조왕의 최고절학이라는 백팔천환조가 아닌가? "오오……." 장내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보라! 순식간에 수천 개로 늘어나 온 하늘을 가득 뒤덮은 손톱의 그림자들을……. 정밀하던 운연의 검법이 즉시 흐트러졌다. 그녀는 잠깐 사이에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퍽! 돌연 비무대의 맨 끝 가장자리가 그녀의 한쪽 발을 미끄러뜨렸다. 휘청! 쐐액! 기회를 놓칠세라 두 개의 긴 손톱이 그녀의 목을 찔러오고 있었다. 운연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즉시 몸을 날려 대의 면과 나란히 하여 선회함과 동시에 온힘을 다해 상대의 손톱을 휘둘러쳤다. 펑! 그 힘이 너무 강했으므로 준남 응조왕은 자신도 모르게 휘청 앞으벙 痔肝굽고 말았다. 그 복부로 앙증맞은 주먹이 날카롭게 틀어 박혔다. 퍽! 이어 회연각(回蓮脚)의 멋진 한 수 발길질. 팍! "욱!" 준남 응조왕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이어 그는 개구리처럼 네 활개를 쭉 편 채 털썩 하고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사방의 좌대에서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와아……!" 운연의 첫승리였다. * * * 정오(正午)가 지나고 나자 비무는 한층 더 뜨거운 열기로 휩싸였다 팔십 인의 고수들. 하나같이 한 지방의 영웅패주(英雄覇主)가 아니면 욱일승천한다는 후기지수들이었다. 거기다가 이 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크건 작건 간에 소속문파의 명예를 짊어진 사람들이었다. 더불어 금악(金嶽)을 개방한다는 지상 최대의 호기(好機)에 목숨을 불나비들이 아닌가? 혈투, 혈투, 또 혈투!┙Α단응조(鷹組)까지의 서른다섯 쌍의 비무가 끝났을 때는 대개 조의 우승자에 대한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용조의 운연이라든가 호조(虎組)의 무애공자 이환명, 그리고 표조(豹組)의 묵비향, 사조(獅組)의 빙인 엽상의 등. 이들은 각기 조에서 가히 군계일학격인 발군의 솜씨를 보이고 있었으며, 그밖의 조에서도 대개 한두 명으로 우승 예상자가 압축되었다. 한데 유독 혼미스러운 곳이 바로 제팔조 마조(馬組)였으니……. 도대체가 이 팔조는 십대고수가 모조리 다 우승후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개화십강이 셋, 낙화십강이 다섯이나 있었고, 또한 사해사기의 서기(西奇)와 북기(北奇)가 버티고 있는 것이니 그 누구모 蘆┍酋할 수 있으랴? 어쨌든 시작하기도 전부터 사람들의 분주한 예상평이 난무하는 가운데 드디어 제팔조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첫번째 쌍은 혈독 혜공과 구혈모모. 이 싸움은 마공(魔功) 대 마공의 대결이었다. 한쪽은 생사선이라는 신비도적떼를 이끌고 다니는 백 년 전 혈사기공(血邪 功)의 달인이요, 다른 한쪽은 백근철괴(百斤鐵槐)를 휘저으며 구유음공(九幽陰功)을 뿜어내는 오십 년 전의 대살성. 최초 시작부터 비무대의 기(旗)가 부러져 나갈 정도였던 이 대결은 결국 이백여초 만에 혈독 혜공의 승리로 끝났다. 그의 혈사기공은 구혈모모의 가슴 한복판을 격중해 그녀를 단숨에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어 벌어진 두 번째 대결은 초립, 초혜, 초검의 백리천의 승리. 그는 중원표국의 연합체인 중원표련(中原 聯)의 총국주를 단 일초모 ┥槿求잔신위를 떨쳤다. 이로써 초검 백리천은 여덟 사람을 모조리 일초에 끝내는 엄청난 신화를 이룩하였다. 세 번째 대결은 욱일승천의 후기지수, 화산파(華山派)의 권왕지왕 목철우가 개방의 벽력신개를 대 아래로 차 굴림으로써 오대문파의 명예를 지켜냈다. 그리고 네 번째 대결. 슈파악! 퍼펑! 불을 뿜는 혈전이었다. 고독도주 불인기와 인마 담동의 대결. 지금까지의 검회본선을 비추어볼 때 매우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속담 그대로 늙은 노고수들의 대거탈락이었다. 실제로 낙화십강 중에서 남은 고수자는 이 인마 담동과 그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살검광생, 그리고 귀곡(鬼谷) 혈기자(血機子)밖에 없었다. 자연 인마 담동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모든 절학을 혼신의 힘을 다 펼쳐내고 있었고, 검은 피풍의 고독도주 불인기는 수비에 열중하는 듯했다. 이들의 대결은 이미 오백초, 두 시진째를 넘기고 있는 참이었다. 슈파악! 파팍! 한편 그때, 대 아래의 두자상은 그야말로 끓는 솥 안의 개미 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지를 못하고 쉴새없이 일어났다 앉았다 하고 있었으며, 열화처럼 연비를 들들 볶아대고 있었다. "이것이 다 연형의 탓이오! 무슨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지금까지도 오지 않을 리가 있소?" 연비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하나 무표정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마음도 기실 서서히 초조해지 있던 참이었다. '운룡…… 역시 안 되는가?' 그밖에 또 하나, 이 냉혈인의 시선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곤륜의 운연과 저쪽 대 위의 위경경이라는 두 여자가 아까부터 끊임없이 자신들의 쪽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조심은 하고 있으나 어디 연비가 그것을 모를 사람인가? 그는 내심 적이 의아했다. 눈치로 보아 저들이 이쪽을 보는 것은 자신이나 두자상을 보고 있혤 痼肝아님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저들도 설마 운룡의 행방을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곤륜의 운연은 그렇다 쳐도, 만인지상의 신분인 위경경이 운룡에게 관심을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때 돌연 사방의 좌대로부터 천지를 허물듯한 굉렬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 급히 시선을 돌리는 연비의 망막 속으로 가슴을 부여안고 주춤 웅크리고 있는 인마 담동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을 싸안은 손가락 새로 섬뜩한 핏물이 비치고 있었다. 고독도주 불인기는 어느새 한 자루의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검은 얇은 연검(軟劍)이다. 팍! 팍! 이 종잇장 같은 검은 뒤로 물러나는 인마 담동의 요혈을 쉴새없이 노리고 있었다. "완전한 역전이로군. 일초도 더 버티기 힘들겠다." 한소리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둔탁한 신음과 함께 인마 담동의 목은 이미 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윽!" 천하도괘(天下到卦)의 절묘한 검법이었다. "와아!" "멋지다!" 고독도주 불인기는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없이 천천히 연검을 거두 넣더니 느릿하게 대를 내려왔다. 그 즉시 소림의 심인노선사가 대 위로 뛰어올랐다. "이로써 서른아홉 쌍의 승부가 가려졌소. 다음에는 오늘의 마지막 순서인 살검광생과 무불검 운룡의 대결이오!" 순간 중인들의 두 눈에 흥미의 빛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한쪽은 무예에 미친 일대의 광검수(狂劍手)요, 다른 한쪽은 이 대벙�i獵育텝돌풍이라 할 수 있는 신비의 검객 무불검. 중인들의 기대에 찬 시선을 끌어안고 서쪽 차일로부터 느릿하게 걸어나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일신에는 허름한 폐포(弊袍). 머리는 온통 봉두난발인 데다 검집도 없는 청강장검 한 자루를 굳움켜쥐고 있는 위인. 그의 두 눈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인해 가려져 있었지만 정면으 주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몸 주위로는 기이한 사기(邪氣)가 둥둥 무리지어 떠다니 것 같았다. 하지만 별호와는 달리 그의 걸음은 매우 침착하고 고요했다. 그는 다른 고수들처럼 휙 몸을 날려 대를 오르지 않고 한 계단 한 계단 차분히 밟아 대 위까지 이르러선 한쪽에 고요히 시립해 섰다. 문득 연비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더 무서운 자로군. 낙화십강 중에서도 최고의 고수다." 그때 심인노선사가 주위를 휘둘러보며 외쳤다. "무불검 운룡 대협은 안 계시오?" 거푸 세 번을 외쳐도 대답이 없다. 두자상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위경경은 살풋 아미를 찌푸렸다. "사흘간이나 모습을 안 보였다는 보고가 아닌가…… 도대체 그 아이는 어디를 간 걸까?" 서쪽 차일의 운연도 잔뜩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버러지 같은 자식! 지금까지 잘하구선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 어리숙한 천성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모양이군!' 그때 심인노선사의 외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회규정에 따라 다섯 번의 징이 울릴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는다괌 품鳧막涇간주하겠소!" 그의 시선이 힐끗 저쪽 망루를 향했다. 순간 거대한 징 옆에 우뚝 서 있던 장한 하나가 힘차게 징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잉― 한 번. 징― 두 번. 시종 무표정하던 연비도 이때만은 어쩔 수 없이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그토록 어려웠던가…… 안 되고 마는 것인가? 하긴 남들은 평생을 캔넵있을까 말까 한 검의 요결(要訣)을 단 사흘 내에 깨달으라고 것이 애초에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너만은 할 수 있으믿었거늘…….' 징― 세 번. 징― 네 번. 다섯 번째의 징을 울리기 위해 장한이 채를 들어올리는 것을 보며 연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끝났다…….' 지잉― 다섯 번째. 심인노선사는 무슨 말인가를 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바로 그때였다. 한소리 날카로운 외침이 느닷없이 들려온 것은…… "잠깐만요!" 다급히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사람들은 돌연 두 눈혤 엽溜 農뜨고 말았다. 여자. 일견해 보기에도 성적(性的) 매력이 철철 넘치는 기이한 미녀. 옷도 아예 반은 벗은 채였다. 한데 사람들이 놀란 것은 그녀가 미녀라거나 옷을 벗고 있기 때문숯 틈耉駭裏 그 미녀의 곁에 매달려 십 장 밖까지 술냄새를 풍풍 풍기고 있는 사내 하나 때문이었다. 맙소사! 그는 바로 무불검 운룡이 아닌가? "저게 도대체……." 두자상은 입을 쩌억 벌렸다. 어이가 없기는 위경경, 운연, 그리고 연비도 마찬가지였다. '저 아이가 저게 무슨 꼴이야? 저 여자는 행색이 기녀 같구나.' '흥! 어디 기루를 가서 퍼마시고 왔군. 그렇게 안 보았는데 뒤로 호박씨 까는 놈이란 말인가?' 연비도 검미를 좁혔다. 술[酒]. 운룡이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는 것은 연비 그로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 기녀 서비인은 대의 계단 아래까지 다가온 후 운룡의 뺨을 두 대 연거푸 찰싹찰싹 때렸다. "일어나요, 일어나!" "으음…… 음……." 운룡의 눈꺼풀이 게슴츠레 말아 올려졌다. "여기가…… 어디냐?" 서비인은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당신이 말하던 비무대예요. 어쨌든 오긴 왔어요. 아휴, 힘들어 죽겠네." 그녀는 망사옷을 덥썩 걷으며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뽀얀 허벅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멍청이 같으니, 어서 올라가요. 당신의 검법을 구경이나 해보게." 실로 방약무인한 태도였다. 중인들은 어이가 없다 못해 아예 기가 막혔다. 천하군웅이 모조리 모인 이 신성한 자리에서 한낱 기녀가 설치고 있다니? 어쨌든 운룡은 휘청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으음…… 좋아, 보여주지." 이어 그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몇 개 안 되는 계단을 오르는 중에도 세 번이나 곤두박질쳤다 기녀 서비인은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며 웃었고, 대 위의 심인노선사 백미를 깊게 찌푸렸다. "아미타불…… 저런 몸으로 어디 검이나 들 수 있겠는가." 대 위에 올라와서도 운룡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심인노선사는 코를 찌르는 술냄새에 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운룡시주…… 힘들면 기권을 해도 무방하오." "기권…… 이라구요?" 운룡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노선사 같으면 기권을 할 수 있겠소?" "아미타불…… 그러나……." "좋아, 내가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느닷없이 뽑아드는 검. 이어 운룡은 그 검으로 어쩌구 저쩌구 할 새도 없이 자신의 왼쪽 팔을 푹 찌르는 것이 아닌가? 순간 한 줄기 혈수가 푹 하고 솟구쳐 올랐다. 피[血]! 순식간에 자욱이 왼쪽 팔소매를 적셔가는 피를 바라보던 연비가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왜 술을 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멸 저 행동은 술을 깨기 위한 필사적인 방편이다. 이제 조금 마음 든다." 운룡은 또한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자신의 피를 바라보았다. 비릿한 피내음, 온몸으로 쏘아져 오는 수천 수만 개의 따가운 시선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 그리고 섬뜩한 통증……. '술…… 마시기도 많이 마셨다. 제길, 이제야 좀 깨는 것 같군.' 발작적인 통증이 온몸으로 번지고, 그 서늘한 느낌을 그대로 둔 채 운룡은 천천히 검을 고쳐 잡았다. "대사, 좀 비켜 주시오. 벌써 노을이 지고 있소." 비록 눈빛은 여전히 충혈되어 있지만 그 속에 한줄기 정기가 번뜩이기 시작하는 것을 심인노선사는 놓치지 않았다. 이 늙은 사회자는 공증인석을 힐끗 바라보았다. 지금의 운룡이 검회참가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인가 하는 의문을 그들에게 물은 것이리라. 수석공증인인 소림방장(少林方丈) 심료노선사(心了老禪師)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심인노선사는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그럼 비무를 시작하시도록……." 13. 心劍 이윽고 심인노선사가 대 아래로 내려가고 나자 운룡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살검광생을 바라보다가 그 위의 노을 지는 하늘로 시선을 바꾸었다. 비무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런 속에서 함부로 시선을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행동이다. 하나 이때 살검광생은 두 눈에 보일 듯 말듯 미미한 의혹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운룡의 자세. 검은 비스듬한 사각(斜角)이요, 발은 정(丁)자도 아니고 팔(八)자아닌 기묘한 각도로 벌려져 있다. 일견해 보기에도 그 몸에는 너무 허점이 많았다. 백만분지 일 정도의 허점 하나를 포착하여 싸워왔던 살검광생으로서는 너무도 뜻밖의 자세가 아닌가? '미친 자…….' 그의 우측 발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앞으로 옮겨졌 특유의 공격자세다. 앞무릎이 가볍게 낮춰지니 이는 또한 맹수가 먹이를 덮치기 전의 형상이 아닌가! 한데 그때, 한 가지 문제가 일어났다. 도대체가 운룡의 몸에 나타난 허점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살검광생은 선뜻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수에 검이 들려져 있으니 나는 마땅히 좌측을 공격해야 한다. 아…… 그러나 그의 우측도 참으로 좋은 지점이 아닌가? 그곳을 ４摸芮그는 절대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좌측 옆구리 좋은 지점…….' 이렇게 되자 놀랍게도 허점처럼 보이던 것이 오히려 가장 완벽한 방어의 자세가 되어 버렸다. 운룡의 몸 어느 구석에도 공격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살검광생은 이미 자신감을 잃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고수가 공격을 성공할 때는 그 지닌 바 무공은 오할 나머지 오할은 자신감인 것이다. 살검광생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오늘처럼 망설인 적이 없었다. 노을. 노을이 탄다. 장내에는 지금 질식할 듯한 침묵이 자욱이 깔려 있었다. 중인들은 무엇인가 숨조차 쉬기 힘든 가공할 압력이 자신들을 짓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돌연 운룡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술을 마셨는지 아시오?" 실로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말이었다. 살검광생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대답 대신 그는 수중의 검을 느릿하게 치켜들었다. 순간 질식할 듯한 살기가 대 위로 자욱하게 번졌다. 그리고 말! "이유는 나중에 듣기로 하지." 소름이 오싹 끼치는 말이었다. 하나 운룡은 태연하게 웃었다. "나는 지금 말해야겠소. 왜냐하면 술은 기뻐서 마신 것이기 때문이오." 그때 돌연, 아무 소리도 없이 살검광생의 몸에서 눈부신 검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검빛이 허공을 가르는 것은 그야말로 번개와 같았다. 그러나 그때, 다시 한 가닥의 광망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먼저 출수 살검광생의 검빛보다 더욱 빨랐다. 그것은 무엇일까? 다음 순간, 번쩍이던 빛들이 일시에 싹 거두어졌다. 동시에 모든 동작이 멈추어졌다. 살검광생의 검은 운룡의 목과 아직도 반 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운룡의 검은 어느새 살검광생의 어깨를 찌르고 있었다. 때문에 살검광생의 어깨에선 시뻘건 피가 흘러내려 폐포를 빨갛게 물들였다. 살검광생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멋진 검이군." "별것 아니오. 아마도 내가 당신보다 조금 운이 좋았던 것 같소." "나는 허점이 없었을 텐데……." "때로는 완벽하다고 믿고 있는 것을 검토할 줄도 알아야 하오. 당신의 허점은 바로 자만이었소." "이…… 초식의 이름이 무엇이냐?" 운룡은 휙 검을 거두었다. 순간 분수 같은 핏물이 허공을 뿌옇게 물들였다. 폭발하는 듯한 군웅의 환호가 일어난 것과 운룡의 담담한 말이 그 사이로 터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와아!" "와아……!" "변화! 이 초식은 바로 변화라 하는 것이오." 두자상이 대소를 터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튀어 일어났다. "최고다, 최고다! 운룡!" 연비의 얼굴에도 드물게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입 밖까지 새어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실없이 웃었다. "헛허……." 운연은 열광하는 군웅들 속에 뒤섞여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맑으나 형용하기 어려운 기이한 광채가 떠올라 있었다. 위경경은 온 얼굴에 함박 같은 웃음을 띤 채 손바닥이 부서져라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얘야, 저 살검광생의 방금 그 일검을 막아낼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너는 운룡이 어떤 초식을 펼쳤다고 생각하느냐?" 난난은 더 이상 백아를 쓰다듬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동그랗게 뜬 두 눈을 장내의 운룡에게 고정시킨 채 말을 받았다.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그가 매우 빠른 검을 펼쳤다고 생각한다."그렇지 않아요, 엄마. 단지 검이 빠른 것만으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어요. 누구든 연습하면 빨라질 수 있어요. 게다가 검의 빠르기로 말한다면 살검광생이 오히려 더 빨랐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 그는 지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저것은 빠름의 대결이 아니었어요. 흐르는 물과 그 물의 흐름을 끊는 검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위경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의 몸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딸은 때때로 자신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것이다. "네 말은 무슨 뜻이냐?"엄마두 참, 초식과 초식의 사이에는 공간이 있어요. 아무리 치밀퐈�i駕컥繭捉넵최소의 공간이 있는 것이에요. 물의 흐름이 미세한 분자이어짐이듯…… 그것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아요. 하나 만약 어떤 汰肝있어 그 공간을 파악해내 그 허점을 찌른다면 그는 무적(無敵 될 수 있어요." "……." "어려운 것은 그 공간을 파악했을 때 그곳에다 어떤 초식을 찔러 넣는가 하는 것이지요. 너무 빠른 초식도 안 되고 너무 긴 초식도 안 돼요. 가장 적절한 속도의 초식을 그 짧은 순간에 골라 넣어야 하는 거예요. 운룡은 변했어요. 그는 한마디로 닷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서워졌어요. 아직 초식의 숙달이 덜 되었을 뿐…… 그것마웩 暠颱蠻愎摸窈─ " 난난은 백아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지금 같은 경우, 살검광생은 채 다 검을 뻗지도 못했을 거예요." * * * "훌륭했소, 훌륭해. 핫하……." 신나는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운룡에겐 해장술의 의미가 있었고, 두자상은 기분이 좋아 이미 두병을 마셔 얼굴이 벌게졌으며,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연비도 이때만은 서너 잔을 마셨다. 서비인은 운룡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꿀처럼 달콤하게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글쎄…… 꼬박 이틀을 날 못살게 하더니 느닷없이 술을 마셔야겠다지 않아요? 진천현의 술을 아마 모조리 바닥냈을 거예요. 그래도 그 와중에도 정신은 있었던지 비무대로 가야 한다고 중얼거리기에 할 수 없이 들쳐업고 온 거죠 뭐." 두자상이 껄껄 웃으며 운룡을 바라보았다. "그래, 운형은 무슨 심사로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그렇게 퍼마셨혤炘 운룡은 계면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이…… 그러니까 비인과 그것을 계속하다 보니 이상한, 참으이상한 감각이 일더란 말이오. 뭐랄까, 전혀 다른 세상이 가슴속에 생기고 있는 듯한…… 어쨌든 비인과의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 점점 더 순수해지더군요." "흐음……."내친 김에 술도 마셔보고 싶었소. 취한다는 것이 뭔지, 그런 감각 말이오. 어쨌든 그런 것들은 나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소."그럼 그 검식은 도대체 어찌된 거요? 나는 그토록 빠른 검법은 처 봤는데……." 운룡은 씩 웃으며 말했다. "빠른 것이 아니지요. 다만 상대의 모습에서 어떤 초식이 나올 것이다 하는 것이 느껴졌을 뿐이오. 그리고 그 초식이 펼쳐지는 공간 마음이 내키는 대로 검을 찔러 넣었소. 사실 나는 그것이 성공할지에 대해 확신 같은 것은 없었소." 두자상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심검(心劍), 즉 심검합일(心劍合一)이나 蓚載 以氣馭劍)으로 들어가는 검도(劍道)의 첫번째 단계이다. 이 심검들은 초식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 특징이지." 두자상이 반박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초식이란 것은 아무 쓸모도 없다는 얘기이오?" 어전황궁(御前皇宮)의 화려하고 장중한 검법에 숙달된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연비는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소. 심검의 단계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게 되면 다시 초식이 필요해지오. 그것은 마치 나무가 다음 봄을 위해 지니고 있던 나뭇잎을 모조리 떨군 것이나 마찬가지이오. 즉, 운룡은 지금 겨울나무와 같은 상태라 할 수 있소. 조금 더 경지에 이르면 그 봄의 새싹처럼 다시 초식의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오." 그때 서비인이 긴 하품을 했다. "아함, 지루하군요. 지루해. 당신네 남자들은 마주 앉기만 하면 무 재미없는 얘기들만 그렇게 하지요?" 두자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얘기를 빠뜨렸군. 오늘 오후 대진전표일자가 나왔소." 운룡이 힐끗 시선을 던졌다. "다음 상대는 누구이오?" "고독도주 불인기가 인마 담동과의 겨룸에서 심한 내상을 입은 관계로 불참을 선언했소. 그래서 대상은 넷의 대결로 압축되었는데 퉤 遮遊잔혈독 혜공이오. 그리고 초검 백리천과 권왕지왕 목철우가 대하오." 운룡의 두 눈에 번뜩 이채가 서렸다. 생사선주. 그와는 안면이 있는 처지다. 갓 무림에 출도하여 기수를 건널 때, 자신은 혈독 혜공의 누이동생 화독(花毒) 혜혜(慧慧)에게 멋진 일검을 선물 받지 않았던가? 연비가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도 까다로운 상대야. 운룡이 비록 천기대나인신공을 익히긴 했지만 혈사기공 같은 열공(熱功)은 천기대나인신공의 극성(極性)이모 褥秀뻔쩜밗지닌 구혈모모도 그 일장을 맞고는 결국 오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 누이동생의 혈사기공을 맞아본 적이 있소." "누이와 오라비의 공력을 어찌 같이 비교하겠는가? 특히 보법(步法)이 부족한 너로서는 크게 불리한 싸움이 될 것이다. 하루시간 여유가 있으니 보법을 좀 연구해야 할 텐데…… 나도 그 방면에 거의 백치야." 두자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렇소." 서비인이 두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당신들은 하늘을 마음대로 날지 않나요? 그것은 보법이 아닌가요? 그렇소. 그런 것을 통틀어 경신술(輕身術)이라 하는데 경신술은 煉 (身法), 보법(步法), 축지(縮地)의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소." 그 중 신법(身法)이란 말 그대로 몸을 쓰는 경신술로써 逆쩠념飛龍乘天), 창응하산(蒼鷹下山), 해연략파(海燕掠波)처럼 m 날고, 내려앉고, 먼 공간을 이동하는 몸놀림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보법(步法)이란 적과 마주 서서 겨룰 때 좁은 공간을 치밀하혤 О巢퍽걸음의 순서로 이어감으로써 적을 혼란시키거나 이쪽의 무술혤 洸건構農사용할 수 있는 보조수단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법에는 천기보(天機步), 구궁음양정반보(九宮陰陽正反步) 칠성보(七星步) 등처럼 음양오행(陰陽五行) 육합구궁(六合九宮)의 역리(易理)를 이용한 것이 많다. 끝으로 축지(縮地)란 무예가 거의 조화경에 이르러 자유롭게 몸을 둔신은형(遁身隱形)할 수 있고, 기운의 흐름을 줄이고 늘리어 백 리지척처럼 갈 수 있는 전설적인 무예를 말한다. 어기비행(御氣飛行), 능공허보(凌空虛步), 복지추풍(伏地追風) 등蘿�i旋熾 속하는 신공들이다. "일반적으로 도검을 쓰는 사람보다도 권장을 쓰는 사람이 경신술에 뛰어나오. 강남무가(江南武家)보다 강북권가(江北拳家) 계열의 경신뛰어난 것도 그 이유이오. 또한 자고로 경신술의 대가(大家)로 알려온 곳은 서북곤륜파(西北崑崙派)라 할 수 있소. 그곳은 산의 지형이 험하여 자연적으로 경신술의 연구가 성행했던 것이오. 그밖에 북(關北), 막북(漠北)에도 뛰어난 경신술의 가문이 있긴 하지만 사 검법이나 도법 등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경신공부에는 소홀해지기 마련인 법이외다." 서비인은 말이 끝나고 나자 우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났군요. 운공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때 돌연 한소리 냉막한 음성이 느닷없이 중인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 대임을 내가 맡으면 안 될까요?" 동시에 방안으로 유령처럼 나타난 섬세한 인영 하나. 스르르― 도대체 언제 어디로 어떻게 들어온 것일까? 인영은 마치 땅 속에서 불쑥 솟아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놀랍게도 그 인영은 바로 곤륜의 운연이었다. 순간 운룡이 얼떨떨한 어조로 외쳤다. "당신은 운연…… 소저!" 운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왜,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두자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자 연비가 급히 나섰다. 그는 운연을 향해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곤륜은 자고로 지상 최강의 경신술파(輕身術派)이오. 소저께서 운형제의 공부를 맡아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소이다." 운연도 급히 연비에게 허리를 굽혔다. "대가의 칭찬을 감당하지 못하겠어요. 귀 공은 방금 전 소녀가 밖모 聆습밗알고 고의로 곤륜을 칭찬하셨지요?" 연비는 드물게도 껄껄 웃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부인하지는 않겠소. 하나 이 둔한 몸보다야 소저의 공부가 백 배나 뛰어나다는 것을 이 자리에 있는 사 전부가 알 것이오. 그럼……." 그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두자상과 서비인의 어깨를 감싸안다시피 하여 부랴부랴 밖으로 걸어나갔다. 쿵! 문이 닫히고 나자 운룡은 특유의 습관대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것이…… 나는 소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은 솥뚜껑을 보고도 놀란다던가? ―만약 네가 검회에 나타난다면 내가 우선 너를 죽이고 말 테다! 과거 삼류무사 시절, 얼굴이 돌아가도록 뺨을 맞았던 그로서는 자뇟 楮Э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운연은 그런 그를 마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성큼성큼 탁자로 다가가서는 방금 서비인이 앉았던 자리를 툭툭 털어내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이어 가타부타 한 마디 말도 없이 느닷없이 술을 병째 들고는 나발 불기 시작했다. 운룡은 뒤룩뒤룩 눈알을 굴리며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쿨룩쿨룩……." 도대체 술을 마셔본 여자인지 아닌지, 처음엔 술이 들어가기 무섭기침을 내뿜더니, 그 기침 속으로 연달아 술을 부어넣자 기침마저 놀 잦아드는 것 같았다. 운룡은 어이가 없었다. 운연은 순식간에 혼자서 두 병의 술을 비워냈던 것이다. 세 병째의 술을 집어들며 문득 운연이 중얼거렸다. "날 속였지……." 운룡은 다급히 물었다. "무엇을 말이오?"네 무공 말이야. 삼재검법이나 아는 척하던 그 하류의 무공 말이煉炘 "아…… 아니오." 운룡은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나는 그제 연비, 연형의 도움과 노력으로 약간의 도결을 터득했을 뿐이오." "그래서 백마 위걸, 살검광생 같은 거물급 고수들을 단칼에 쓰러뜨렸단 말인가!" 그녀의 모습은 여차하면 술병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일신에 불타듯 짙은 홍의를 걸친 이 성질급한 아가씨를 향해 운룡퉤 껴좨酋말을 이었다. "내 말을 좀 들어 보시오, 운연 소저." 이어 그는 운연과 헤어진 뒤 백패서생을 가장하여 무예와 내력을 훔쳤던 얘기부터 시작해서 연비의 도움으로 승부의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여자와의 정사(情事)를 통해 검도의 요체를 깨닫게 퐈 嫄竪湧밗두서없이 나열했다. 긴 얘기가 끝나자 기대와는 달리 운연은 코웃음을 쳤다. "상대의 무예를 한 번 보고 그 장점을 검법에 갈무리하고, 정사를 통해서 심검의 요체를 깨달았다고? 그따위 황당한 얘기를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운연은 까르르 교소를 터뜨리며 다시 술병을 입에 갖다댔다. 순간 운룡이 재빨리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술을 그렇게 많이 먹는 여자를 남자들은 좋아하지 않소." 운연이 눈썹을 역팔자로 곤두세웠다. "누가 좋아해 달랬나? 이 손 안 놔? 망할 자식아!" "술병을 놓기 전엔 안 놓겠소." 그때 술병을 들지 않은 운연의 한 손이 운룡의 얼굴에 날카로운 수편(手片)을 작렬시켰다. 짝! 볼이 얼얼할 정도의 날카로운 가격이었다. 바로 그때 운룡의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순간 오른손을 무지막지하게 휘둘렀다. 짝! "악!" 운연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그녀는 마셨던 술이 번쩍 깨는 것을 느꼈다. "네가…… 나를 쳐?"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번쩍 허공을 갈랐다. 하나 그녀의 몸은 채 의자 위로 다 떠오르지도 못했다. 운룡은 우악스럽게 큰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아 누르며 또다퉤 堀대의 수편을 그녀의 얼굴에 작렬시켰다. 짝! 운연의 몸은 의자와 함께 홱 돌아갔다. 쿠당탕! 이어 그녀는 벽 한쪽에 사납게 처박히고 말았다. '얼굴에 바늘이 꽂힌다면 이런 아픔일까?' 그때 운룡의 침중한 어조가 이어졌다. "나는 애초에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없소. 나를 도와달라고 한 적뇟 彭殷내 얘기를 믿어달라고 한 적도 없소. 한데도 당신은 사사건건 시비조이며 거친 욕을 입에 담고 있소. 나는 비록 남보다 잘난 바는 없으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는 장부요. 이렇게 엉뚱한 욕을 먹으며 당신과 마주 앉아 있을 필요가 없소." 한데 한 번 쓰러진 운연은 종무소식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숨도 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운룡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저……."堀번, 두 번, 세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자 그는 주춤 그녀를 향 다가섰다. 운연은 그를 등진 자세로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치마가 반쯤 걷어져 올라가 알맞게 살찐 허벅지까지 드러나 있었다 운룡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다. "소……." 하나 시선을 돌린 것이 잘못일까? 슈욱― 앙증맞은 주먹 하나가 복부를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쇠뭉치가 틀어박히는 것 같았다. "흐윽!" 운룡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운연은 발딱 몸을 일으켰다. "흥!"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한차례 사납게 흘겨보더니 한소리 냉랭한 코웃음과 더불어 번쩍 밖으로 몸을 날렸다. 운룡은 복부를 움켜잡은 채 오만상을 찡그리며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돌연 그때 실낱 같은 연비의 음성이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이 멍청이 같은 친구야, 여자의 속마음을 그렇게도 헤아릴 줄 모른단 말인가? 그녀는 너를 축하해 주려고 왔다가 어색하니까 괜히 밗부린 거다. 그런 여자를 북어 패듯 두들겨 패? 빨리 쫓아가 성벽 뜰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응석, 응석이라고?' 운룡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응석 두 번 부리다간 화병(火病)으로 죽고 말 것이다.' 그는 연비가 오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운연은 지금 성벽에서 기다리고 있기는커녕 십 리 밖을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아는 운연이었다. * * * 여자(女子). 여자란 이런 것이다 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혹자는 말할 것이다. "좋은 것은 싫다고 하고, 사랑을 위해서 살며 향기가 나고 허리가 가늘고 손발이 적은, 때로는 예뻐지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거는…… 뇟 瀏 종류 아니겠소?" 혹자는 또 말할 것이다. "남자와 똑같은 밥과 똑같은 잠을 자고도 그녀들은 늘 풋풋한 향기 시낮긁매끄러운 살결을 지니고 있소. 어두운 곳을 밝게, 더러운 숯�i뺐簫構漏 퀴퀴한 곳을 향기롭게…… 어떻게 보자면 남자는 정신없이 세상을 어질러 놓고 다니고, 여자는 모성애란 이름으로 그것을 가지정돈하며, 그리고 토닥거리는 작은 행복 속에서 살아가라고 조물주가 명령했는지도 모르오. 그것이 여자이오." 나름대로들 박식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얘기들이다. 營텝여자란, 도대체 정말로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혤 愎잔그런 사람을 말하는 걸 게다. 적어도 운연은 그랬다. 정말로 그를 기다리느라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운연은 정말로 성벽 아래에 서 있었던 것이다. 운룡이 쭈뼛거리며 다가서자 운연은 콧날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크 코방귀를 뀌고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돌렸다 싶자 그 몸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운룡이 아무 자세도 취하지 않고 멍청히 그 자리에 서 있자 운연의 날아가던 몸이 다시 이쪽으로 쭉 뻗어와 섰다. 그녀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뭐하고 있어? 배울 거야, 안 배울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다시 홀연히 앞으로 뻗어 나갔으므로 운룡은 숨을 헐떡이며 그녀의 뒤를 헐레벌떡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 시진 정도를 헐떡이며 따라간 곳은 태산 자락의 중턱쯤 되는 평지였다. 운룡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서자 먼저 와서 우뚝 서 있던 운연은 옆에 있는 한 그루 큰 나무를 가리켰다. "여기에 구결이 써 있으니까 그대로 해봐." 나무는 표피가 벗겨져 있었고, 그곳에는 빽빽이 글자가 쓰여 있었혤炘 "몸을 움직이는 기본요령이니까 읽고 그대로 움직여 보면 돼. 숲 뒤쪽에 동굴이 하나 있으니까 기본요령을 익히고 나면 그리로 오도록 말이 끝나자 그녀는 또 번쩍 사라졌다. 운룡은 그녀가 사라진 쪽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나무 앞으로 다가섰다. "흐음…… 진기를 끌어올려 각기 세맥으로 분산시키고, 상진하허(上眞下虛)…… 아래는 허한 것이며 위쪽에 진기를 고정시킨다." 구결이 시키는 대로 진기를 운용하며 한 발을 뻗자 그의 몸이 불쑥 앞으로 달려나갔다. "흐음…… 되는데?" 앞으로 갔다가 옆으로 갔다가 이리저리 달리기를 몇 차례 했다. 진기를 삼성 정도 끌어올린 채 조금씩 움직여 보던 운룡은 나무의 구결과 자신의 움직임을 번갈아 비교하다가 마침내 최대한으로 진기煉 騙楮첨홱裏 "좋아! 한번 해보자!" 십성의 진기가 폭포수가 흐르듯 온몸을 휘돌기 시작하자 운룡은 구결의 가르침대로 앞으로 쭉 몸을 날렸다. 간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간다 몇 그루의 나무가 순식간에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났으며 주변 풍경들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됐다! 야호!"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다음 순간 운룡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나무의 구결에는 가는 방법만 쓰여 있었지, 멈추거나 몸을 비트는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하나 고민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그의 시선 속으로 한 그루 거목이 발작적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운룡은 두 아름은 족히 되는 거목을 정면으로 들이박고 말았다. "어이쿠!" 그때부터 태산 쌍검봉의 한쪽 기슭에선 야밤에 느닷없이 쿵쿵 거리 소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쿵 하는가 싶으면 어느새 저쪽에서 쿵 하고, 아래에서 쿵 하면 또 위에서 쿵쾅거렸다. 그날 밤, 태산기슭에서 노숙했던 사냥꾼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분명히 미친 귀신이었소. 몸이 어찌나 빠른지 바람처럼 휙휙 떠다니는데 계속해서 근처의 나무들에 사정없이 머리를 들이박더란 말이오. 아마도 전생에 나무에 깔려 죽었거나 나무에 무슨 원한이 있 귀신이 틀림없을 것이오." 휘익― 한 줄기 포물선을 그리고 뿌연 잔영을 남기며 운룡은 동굴 앞에 스르르 내려섰다. 제법 익숙한 신법이다. 그러나 그의 이마는 눈에 뜨일 정도로 부어올라 있었다. 운연은 동굴의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희뿌연 여명을 바라보 있다가 그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운룡이 말없이 서 있자 그녀는 느릿하게 교구를 일으켰다. "동굴 안에 발자국이 있어요. 그것을 따라 연마하고 있도록 해요. 나는 비무에 참가하고 오겠어요." 그녀의 느닷없는 말투에 운룡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운연에게서 존댓말을 처음 들어본 것이다. 거기다가 또 저렇듯 조용한 태도라니……. 눈앞에 있는 것이 여우인지 사람인지 싶어 두 눈을 껌벅거리는 운룡을 아랑곳 않고 운연은 선뜻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섰다 싶은 순간 그녀는 이미 이십 장 밖의 허공을 자욱이 날아가 있었다. 운룡은 그 모습이 아득히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선 채 바라보았다. 운연의 예쁜 말투가 종내 귓전을 윙윙거리고 있었다. 동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모습은 또 얼마나 여자답고 귀여웠던가? 그렇게 일각이나 지나도록 넋을 잃고 있던 운룡은 이윽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동굴은 곧장 막다른 벽이 나타나는 좁은 곳이었다. 다만 높이 뛰어도 닿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 동굴의 담벽 앞에는 운연의 말대로 과연 열두 개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어지럽다고 말한 것은 그것은 단지 발자국뿐이었지만 몹시 난해하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운룡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한동안 들여다보아도 도저히 그 이치를 알 수 없자 직접 실습하기로 결심하고 몸을 일으켰다. 발자국 하나하나에는 친절하게도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최초의 발자국을 천천히 딛어 봤다. 이어 두 번째 발자국으로 건너뛰고 연이어 세 번째 발자국으로…… 하나 무심히 뛰다보니 발은 그만 열십자 형으로 꼬여 버리는 것이퉤炘 다리가 꼬였는데 넘어지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쿠당탕! "어이쿠!" 무심코 넘어지다 보니 코가 깨지고 있었다. 운룡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렵구나…… 신법보다 더 어렵다." 그로부터 다시 동굴 안에서는 무거운 물체가 쉴새없이 나뒹구는 둔음과 비명이 그칠 사이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쿠당탕! "어이쿠!" 쿠당! "에고!" * * * 운연의 두 번째 상대는 낭심마왕(狼心魔王) 호해(胡海)인지 하는 작자였다. 낭심곡(狼心谷)이란 계곡에서 수백 마리의 늑대들 틈에 섞여 산다는……. 그래서인지 그는 마치 늑대처럼 생겼다. 쭉 째져 인광(燐光)이 번뜩이는 눈이 그렇고, 입술 새로 삐죽 새어나온 송곳니가 그랬다. 또한 그는 이미 여덟 명의 고수를 박살낸 천랑이십계(天狼二十計)모 릴泄드문 절학을 지닌 자이기도 했다. 하나 오늘 그가 운연을 만났다는 것은 비단 매우 운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의 박복한 운명이라 할 수 있었다. 운연은 비무가 시작되자마자 빠른 신법을 이용하여 무차별 그를 난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東)쪽인가 싶으면 서쪽이요, 앞인가 싶으면 어느새 뒤다. 주먹이 날아와서 막으려고 하면 발이고, 발인가 싶으면 홱 뒤집어 발등이니……. 퍽! 팍! 팍! 팍!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친다면 이런 소리가 날까? 운연은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새처럼 이 대회에서 가장 빛나는 그녀의 경신술에 대해 환호하는 군웅들의 소리도 그녀의 귓전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보이느니 운룡이요, 들리느니 그의 목소리였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태어나서부터 한 올의 부족함도 없이 유복하게 자라온 그녀다. 그녀의 집은 주황과 연청의 청와홍장에 이국(異國)의 기수(奇樹)가 즐비한 정원을 가진 그런 초호화판의 저택이었고, 온통 우유빛과 황금빛의 대리석 기둥과 화려한 부조를 입힌 업벽 아래에서 그녀는 발목까지 파묻히는 융단이 깔린 서장향목(西藏香木)의 다탁에 앉아 끝 燦沮測윷 結 다섯 가지의 고기를 볶아 과일을 얹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왔다. 자라서는 명문대파의 출신이라는 거대한 자부심으로 도대체가 꺼릴 것이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키만 껑충 큰, 도사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놈에게 두 번이손찌검을 당하고 나더니 느닷없이 그놈이 사내답고 매력있게 보이는 이유가 뭘까? 가까이 다가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의 모습이 멀리서 비칠 때에 얼굴이 붉어지더니 입을 비집고 나오는 소리가 존댓말이었다. 운연은 그런 자신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놈도 밉고 나도 밉다. 눈앞에 걸리적거리는 이 작자는 더 미워! 애꿎은 것은 낭심마왕! 그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있다면 삐죽한 송곳니를 으르렁거리며 인상을 좀 썼다는 것뿐인데……. 하나 그 대가로 그는 정확하게 삼백육십 대의 권격을 두들겨 맞았으며 서른다섯 번이나 발길질을 당했다. 평생의 자랑인 송곳니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는 아예 떡반죽이 되 말았다. 그리하여 운연이 손을 툭툭 털고 대를 태연히 내려섰을 때 그는 대 한쪽에 처박혀 네 활개를 쫙 편 채 게거품을 물고 있었던 것이다. 운연은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서둘러 사람들 사이를 지나 숲 그늘로 들어서면서 배를 움켜잡고 웃은 후, 휘파람을 불며 성 밖으로 나왔다. 가는 길에 그녀는 진천현의 장에 들렸다. 그곳에서 구운 오리고기도 사고 소채도 샀으며 약간의 떡과 만두, 그리고 한 병에 은자 두 냥이나 하는 최고급 술도 한 병 샀다. 이것저것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그녀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집에 있는 남편을 위해 찬거리를 장만하는 아내가 된 것 같은 달콤한 기분이 온몸을 포근히 적셔왔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보나마나 얼굴이 또다시 퉁퉁 부어 있거나 아예 익히기를 포기하고 드러누워 잠이라도 자고 있겠지." 천기신보(天機神步). 그녀가 동굴에 찍어놓은 것은 보법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고 어렵다 천기신보였다. 허다한 곤륜의 동문들도 이 보법만은 어렵다고 포기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것은 음양오행 속에 현천구궁(玄千九宮)의 정화가 담겨져 있어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익혀낼 수 없는 것이었다. 운연도 이 보법을 연마해내기 위해 꼬박 칠 년을 허비했던 것이다. 동굴이 보이자 운연은 걸음에 속도를 가했다. 그리하여 사뿐히 동굴 앞에 내려선 후 웃으며 안을 향해 시선을 던지던 그녀는 순간 부르르 손을 떨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앞을 바라보며……. 무엇일까?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14. 情人을 위하여 슈슈슉― 신형(身形)이 보이지 않는다. 동굴 안에 난무하고 있는 것은 한 줄기 희뿌연 청광(靑光)의 덩어리였다. 원(圓). 마치 커다랗고 둥근 원 하나가 그곳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그 청광의 덩어리가 운룡이라는 것과 그가 그렇게 보이는 까닭이 날고 있는 몸의 잔영이 채 다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방위로 움직여갈 만큼 그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운연끝 倖 〈잔그녀의 사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기신보는 천고(千古)의 절학이다. 그것은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 커다란 힘 조성되어 상대에게 압박을 가하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천기신보를 십성까지 통달하면 그때는 신형은 보이지 않고 희뿌연 빛의 덩어리만이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질식할 듯한 압력 때문에 손가락조차 쳐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 아직까지 천기신보를 그 정도의 경지까지 연마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의 재질은 한정되어 있고 수명은 짧다. 보통 사람이 천기신보의 그러한 묘용을 깨닫자면 적어도 백 년은 걸릴 것이다. 너 같으면 모든 일을 다 젖혀두고 백 년간 이 신법만을 익히겠느냐 그래서 천기신보는 백년절학(百年絶學)이라고도 불린다……. 백년절학. 오대문파의 최고위치에 있는 그녀의 사부조차 그 묘용을 다 익히지 못했다는 그 절학을 운룡, 그는 불과 여섯 시진 동안에 극성까지 연마해낸 것이다. '미친놈!' 운연은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 실감하는 느낌이었고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 택한 정인(情人)이 바로 그 넓은 세상의 기린아라는 것에 한줄기 기이한 감동을 느꼈다. 맑고 정결한 그녀의 피조차 숨가쁘게 혈관을 뛰노는 것 같았다. 파파팟! 그때 공기의 마찰이 일으키는 한줄기 소성(嘯聲)과 더불어 난무하청광이 흔적없이 안개 걷히듯 싹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어 그 사이로 운룡의 늠름한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선 채 다시 이리저리 몇 번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한줄기 향긋한 장향(粧香)이 코끝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눈길을 든 그의 시선 속으로 운연의 모습이 빠르게 쏘아져 들어왔다. "운소저……." 운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동굴 안으로 들어와선 한쪽에 털썩 앉아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몹시 둔한 재질이로군요. 하루 밤낮이 지나도록 그 정도밖에 안 되다니……." 운룡은 엉거주춤 선 채 머쓱하게 웃었다. "과연 어려운 보법이오. 나는 경신공부(輕身功夫)란 것이 이토록 어려운 줄은 몰랐소." "잔소리 그만두고 이리 와서 이것이나 먹어요." 오리고기는 잘게 썰려 담겨져 있었다. 운연은 익숙한 솜씨로 소채에 고기를 싸서는 둘둘 말아 운룡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나, 나는 고기는…… 잘 안 먹소." 운연의 눈꼬리가 즉시 샐쭉해졌다. "술도 자시고 여자도 품으면서 이제 와서 청수한 도인인 척할 예요? 육질을 섭취하지 않으면 원기(元氣)가 상해요. 이제부터 당그 식생활습관부터 좀 고쳐야 해요." 운룡은 강권에 못이겨 소채에 싼 오리고기 한 점을 우물우물 먹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는 역시 맛있군. 이 오리고기는 광동압(廣東鴨)이라 몹시 비 痼結얘 내 형편으로는 한 조각 정도 먹는 것도 과분하오." "누가 돈걱정을 하래요?""그것은 내게 있어서 습관이오. 산에 있을 때는 돈걱정을 하지 않뇟 ㎞ 단 하루도 없었소. 또 우리 식구들은 식성도 제각각이라 늘 먹는다는 한 가지 사실에 버는 돈의 전부가 투여되어야 했지요." 운룡은 맛있는지 단숨에 두세 점의 고기를 입 안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봄, 여름, 가을은 좀 나은 편이었소. 그나마 채석장의 일거리도 없는 겨울엔 나무를 해다 팔거나 부잣집의 품을 팔아 끼니혤 潔駭쩝侈樽사부와 우리 세 사제는 늘 굶주리는 형편이었소. 어떤 겨울은 너무 추워서 도끼자루와 내 손이 맞닿은 부분이 얼어 버렸지무리해서 자루를 떼냈더니 손가죽이 통째로 벗겨져 버렸었소. 그렇게 해봐야 버는 돈은 동전 열 닢 정도…… 그렇게 돈을 버는 날은 모두 보리와 풀을 맑게 쑨 보리풀죽을 먹어야 했소." "……!"난 요즘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오. 좋아하는 무예를 마음 연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푹신한 침상에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으니 말이오. 이런 줄 알았으면 늘 배고픈 벽뢰와 여의, 그리고 사부도 모시고 올 걸 그랬소. 그들이 이곳의 음식을 보면 얼마나 기뻐할까……." 운룡은 히죽 웃으며 운연을 바라보다 순간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 눈물[淚]. 쭈그려 앉아 있는 운연의 눈망울에 찰랑찰랑 고인 것은 눈물이 아닌가? "운소저, 왜 우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하기라도 했소?" 운연은 급히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찍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보석 같은 재질이 보리풀죽을 먹고 있는 시각에 나는 식전에 여자들을 위한 조전주(朝前酒)로써 만들어진 백도주를 손가락 새에 끼우고는 광동식의 십이요리와 홍도, 은행열매를 먹고 있었지요. 그혤 毒응肝없다고 개에게 던진 것이 대부분이었고…… 당신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그 음식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게 되었을지…….' 발딱 고개를 쳐든 운연의 얼굴에는 어느새 봄바람 같은 웃음이 피어올라 있었다. 이어 그녀는 운룡의 옆에 바싹 붙어 앉는가 싶더니 떡이며, 만두, 그리고 고기를 직접 그의 입에다 넣어주기 시작했다. "어어…… 내, 내가 먹겠소." "어서 들어요. 꼭꼭 씹으면서……." 뿐이랴? 향기로운 흰 손이 음식기름을 묻혀가며 먹여주는 것만도 황송스러운데 목이 메이냐며 술을 따라주고 입가에 묻은 기름을 흰 손수건으로 훔쳐주는 등, 사근사근한 시중이 줄을 이으니 운룡은 도대체가 여우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그는 사람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일종의 신비로움까지 느꼈다. 과연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바짝 붙어 앉아 봄날 송화가루 터지 挽섟農웃는 이 소녀가 한 달 전의 망나니 같던 그 무서운 소녀란 말인가? 콧속으로 스며드는 그윽한 여인의 체향. 운발(雲髮)에 꽂힌 화차(花 ) 아래 동그스름한 어깨와 가느다란 그녀의 목덜미가 빼어난 자연석처럼 차갑고 명석하게 느껴졌다.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던 달콤한 감정이 심중깊은 곳에 촉촉이 고여들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가 아는 여인이라고는 십검지의 옥수령이며, 서비인 등이 고작이었고, 게다가 옥수령과는 그녀가 여인임을 알기 무섭게 헤어진 탓으로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또한 서비인과는 비록 수차례에 걸친 정사가 있긴 했지만 무예연구 골몰하느라 여인으로서의 감정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 차례에 걸친 만남이 자연스럽게 정감을 유도해낸 운연은 그녀들과는 어느 모로 보나 틀렸다. 그 성격이 오만한 것만 뺀다면 무예, 지혜, 신분이 어우러진 최고혤 ㈏括潔駭裏 거기다 자신을 버린 듯한 이런 헌신적인 시중이 뒤따르니 우직하고 단순한 운룡이 어찌 감격하지 않으랴! 음식도 달고 여인도 달다. 운연이 따라준 한 잔의 술을 기분좋게 마시는 찰나 문득 그녀의 말 이어졌다. "참, 아까 오는 길에 허름한 차림의 늙은 도사 한 분을 보았어요." 술을 마시던 운룡의 동작이 순간 뚝 멈춰졌다. "도사?" "그래요. 비무대 근처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우연히 봤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도사의 입에서 당신의 이름이 운운되었던 것 같기도 하군요. 급히 오느라고 돌아볼 겨를이 없긴 했지만……." "그분의 용모가 어땠소?" "글쎄요…… 얼핏 보기에도 몹시 말랐고 턱에는 세 가닥의 수염이 늘어져 있었으며, 뺨에 큰 사마귀가 하나 있었던 것 같아요." 순간 운룡의 손에 들려져 있던 술잔이 쨍그랑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자리를 박차듯 뛰어 일어났다. "사부님이오. 사부님이 오신 것이오." 이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갈 태세를 취했다. 운연이 배시시 웃으며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 "비무대엔 당신의 특수조련인인 연비와 두자상도 있었어요. 그분이 정말 당신의 사부님이라면 그들이 어련히 알아서 모셨을까…… 먹던 음식이나 마저 들고 가요. 이런 것은 이제부터 습관을 들여야 해요……." * * * 왈칵! 우당탕―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굴러 들어온다는 쪽이 맞을 것이匣炘 운룡은 너무나 빨리 쏘아져 들어왔으므로 이내 대청의 벽과 맞 부딪칠 위험에 직면하고 말았다. 순간 그의 몸이 연기처럼 훅 꺼지는가 싶더니 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빙글 큰 원을 그리며 대청 바닥에 턱하니 내려섰다. 누가 보았다면 입이 쩍 벌어졌을 정도로 절묘한 신법이었다. 대청에서는 세 사람이 탁자를 중심으로 앉아 있다가 그를 향해 해연히 놀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두자상과 연비, 그리고 추운 날씨임에도 한 겹 홑옷을 달랑 걸친 꾀죄죄한 몰골의 늙은 도인 한 명이 있었다. 한순간, 운룡과 늙은 도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듯 얽혔다. "사부!" 다음 순간 운룡은 무너져 내리듯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삼가 운룡이 사부님을 뵈오." 그렇다. 늙은 도인은 바로 운룡의 스승인 현청노도사였다. 저 남루한 모습의 늙은 도사가 바로 청지기에 이어 거지의 신분으무당파를 승계받았던 현청노도사인 것이다. 현청노도사는 껄껄 웃으며 급히 그의 어깨를 부축해 왔다. "운룡, 네가 정녕 운룡이냐? 너무도 늠름한 모습이로구나." 운룡은 눈물이 글썽한 시선으로 자신의 늙은 사부를 바라보았다. 불과 사십여 일 못 본 것인데도 현청노도사의 얼굴엔 눈에 뜨일 정도로 주름이 파여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받쳐든 이 나뭇가지 같은 손목이요, 손가락이라니……. "사부…… 그 동안 진지는 거르지 않으셨습니까?"아암, 좀 굶긴 했지만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늘 찾아 먹었다. 채석 사람들이 이따금씩 와주더구나." "이 먼길을 어찌 혼자 오셨소? 벽뢰와 여의는요?" 현청노도사는 이 말에 한줄기 긴 탄식을 터뜨리더니 말을 이었다. "글쎄…… 그놈들이 네가 출산(出山)하던 날 더불어 어디로 사라졌 뭐냐.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기에 갑갑하여 나와본 참이니라." 그는 말을 잇다 말고 뒤쪽의 두자상과 연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야, 어서 이분들께 인사를 드리거라. 얼마나 고맙게 대해 주던지…… 이렇게 맛있는 음식과 술은 난생 처음 먹어 보는구나. 듣자하니 너는 이분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하더라." 순간 두자상 등은 급히 포권의 예를 취하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노장문인께선 말씀을 거두소서. 신세를 지고 있는 쪽은 오히려 우리이옵니다." 운룡의 사부니 감히 마주 대할 수 없다. 과연 그들의 태도는 이를 데 없이 정중한 예의를 보이고 있었다. 이때 운연이 무심히 안으로 들어섰다. 운룡이 웃으며 현청노도사를 가리켜 보였다. "운소저, 사부님이시오. 인사드리시오." 말을 해놓고 보니 아차 싶었다. 저 오만한 소녀가 자신의 말을 따라 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하나 운연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그 자리에서 날아갈 듯한 대례(大禮)를 올렸다. "곤륜의 후진말학(後進末學), 운연이 삼가 사부님께 인사올려요." 현청노도사는 웬 선녀 같은 미녀가 자신을 향해 사부라 부르니 혼쐴 만뜀리 밖으로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소, 소저…… 예의를 거두시오." 그가 황급히 그녀를 향해 맞절을 올렸다. 웃고 있던 운룡이 그것을 말렸고, 운연은 급히 한쪽으로 피하며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두자상은 싱긋 웃으며 연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까 운형의 신법을 보았소?" 연비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찍이 그렇게 절묘한 신법은 평생 본 적이 없소. 한데 보아하니 운형은 신법과 미녀를 동시에 얻은 것 같구려. 돈을 다 지불했는데도 안 돌아가겠다고 떼를 쓰던 기녀 서비인의 태도로 미루 보아 저 운형에게는 아마도 미녀들의 눈을 멀게 하는 그 어떤 신비로 매력이라도 있는 모양이오." 그날 밤. 운룡의 일행은 대봉황천의 주방에서 특별히 주문한 푸짐한 음식을 놓고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즐겼다. 일백 명의 일류요리사들이 만들어낸 맛있는 음식에 현청노도사는 아예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익살과 한바탕 어우러진 곱사춤에 사람들은 배꼽을 잡 웃었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현청노도사가 운룡을 위해 특별묀�iㅓ淪鷺왔다는 후아주( 兒酒)의 등장이었다. 후아주는 심산의 원숭이들이 이슬과 과일을 이용하여 만들어낸다는 신비의 술이다. 보통 사람들은 백 년을 가도 마주하기 어려운 그 희귀한 술이 반홉들이 사기병에 곱게 담겨진 채 현청노도사의 보따리 속에서 나왔 운룡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는 마음껏 마셨고, 이윽고 취했다. 얼마나 취했던지 그는 운연이 자신을 부축하여 침상에 눕히고 이마 달콤한 입술을 맞추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 * * "이상하군." 연비가 중얼거렸다. "운형이 이렇게 늦게 일어난 적이 없는데……." 날이 밝았다. 십이월 초아흐레 아침. 생사전주 혈독 혜공과의 결전날이었다. 본격적인 겨울을 느끼게 하는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대청에서는 연비, 두자상, 운연이 둘러앉아 따끈히 데운 아침 차(茶)를 마시고 있던 참이었다. 두자상이 진시(辰時：아침 일곱 時) 경에 이른 창밖의 하늘을 힐끗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운룡은 아무리 추워도 늘 묘시(卯時 : 새벽 다섯 時)만 되면 일어나 무예를 연마하곤 했소.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시긴 했지혤 タ뭍涇단련된 몸이 그 정도 술도 못이길까……."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던 운연이 발딱 몸을 일으켰다. "제가 가보고 오죠." 대봉황천에서 비무참가고수를 위해 내놓은 영빈관(迎賓館)엔 한 채마다 다섯 개의 호화로운 방이 있었다. 운룡의 방은 그 중 맨 끝방이었다. 운연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보았다. 삐이걱― 침상에 놓인 구화장(九華帳) 망사 새로 곤하게 잠든 운룡의 모습이 힐끗 보였다. 코고는 소리까지 들렸다. "잠꾸러기 같으니……." 운연은 배시시 웃으며 활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어나요. 해가 중천에 떴단 말예요." 하나 몇 번을 연거푸 외쳐도 대답이 없었다. 운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의 몸을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이 정도라면 놀라 벌떡 일어날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을 힘차게 흔들어도 그는 깨어나기는커녕 더욱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운연의 몸이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이상해……." 그녀의 자지러지는 듯한 외침에 놀라 달려온 연비와 두자상은 단숨 침상 곁으로 다가섰다. 연비가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맥을 짚었다. "이상은 없군……." 이어 심장의 박동과 눈까풀을 걷어올려 봐도 별다른 징후가 없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 이상이 없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는 무심히 운룡의 입을 벌려 보았다. "헉!" 순간 냉막한 그의 동공이 부르르 떨렸다. 오오…… 보라! 운룡의 혀를……. 운룡의 혓바닥이 기이하게도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칠일취(七日醉) 취심약(醉心藥)!" 운연이 놀란 어조로 물었다. "취심약이 뭔가요?." 연비는 침통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것은 일종의 마취성분이 있는 강력한 주정(酒精)이오. 인체에 치명적인 해(害)는 없으나 아무리 내공이 높은 고수라도 이것을 마시 되면 며칠 동안은 인사불성이 되어 일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오." "그럴 수가……."그러나 이상한 일이로구나. 이 취심약은 천 리 밖 대리국(大理國) 아니면 구경하기 힘든 것인데…… 어찌 이것이 느닷없이 중원에 나타났을까?" 순간 두자상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날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개새끼들……." 그는 즉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왈칵! 주방문을 밀치자마자 그는 대봉황천이 특파한 시비 계향(桂香)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어제 먹었던 술병이 다 어디 있지?" 계향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떠듬떠듬 한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 저기……." 술은 정확히 열두 병을 마셨다. "취심약이 섞인 술은 눈으론 알 수 없소. 그 찌꺼기가 바닥에 있다 연한 계피향이 날 것이오." 뒤쫓아온 연비의 말대로 두자상은 하나하나의 병을 들어 모조리 냄새를 맡았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열두 병의 술병 어디에서도 계피향은 나지 않았다. "취심약은 술 아닌 다른 곳에도 섞을 수 있소?" "아니오. 술 아닌 음식에 섞으면 녹색이 나타남으로 해서 불가능하오." 그때 운연이 한쪽에서 사기병 하나를 들고 냄새를 맡다가 돌연 안색이 싹 변했다. "계피향이에요!" 사기병! 오오…… 그것은 바로 어제 현청노도사가 내놓은 후아주가 담겨 있 병이 아닌가? 중인들은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서로를 마주보다가 급히 현청노도사의 방으로 달려갔다. 하나 그는 없었다. 썰렁한 방의 공기로 미루어 보아 현청노도사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듯했다. 퍼억! 두자상의 주먹이 한쪽 벽을 두 치나 파고들었다. "이럴 수가! 스승의 몸으로서 어찌 제자를……."Ш奏잔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뽀얀 성에가 낀 한쪽의 창가 다가섰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어 보았다. 후아주, 귀한 술이라 하여 운룡만 마시게 하였으니 그 속에 취심약 들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현청노도사는 왜 자신의 애제자(愛弟子)에게 그런 악독한 흉수를 쓴 것일까? '위인됨으로 미루어 보아 혼자서는 절대 이러한 음모를 꾸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얘기다.' ―사주…… 사주라…… 그렇다면 누가 이런 사주를 그에게 한 걸까 痼肝되는 자, 운룡이 칠 일 동안 취해 있음으로써 가장 이익을 보 자다. 그런 자가 누가 있을까? 칠 일 만에 가장 이득을 보는 자를 ▤鷺보자. 첫째는 혈독 혜공이요, 둘째는 초검 백리천이다. 누가 품 있는가? 혈독 혜공일 것이다. 첫째, 그는 방대한 조직이 있다 그의 조직이라면 취심약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초검 돛繭箚殷하여 구할 수 없는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혈 혜공과 운룡의 대전일자가 정해진 것은 불과 사흘 전이다. 그전에 幣杉悧해도 오 일의 시각이다. 그 오 일 동안 운룡의 가장 큰 약묀 瀛罐 파악해내어 그를 이곳까지 운송해올 정도의 놀라운 기동력이 초검 백리천에겐 없다. 단, 혈독 혜공의 생사선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그는 사파의 인물이 아닌가? 그의 누이인 화독 혜혜는 악명 멎여마두다. 이런 일을 꾸미는 것쯤은 그들에게 있어 식은 죽 먹퉤 뗏弼≠痔鵠것이다.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나? 운연이 흥분된 어조로 외쳤다. "일단 쳐들어가서 그들 남매를 족쳐요." 하나 연비는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오. 설사 족친다 해도 그들이 자신의 비행을 인정할 리 없소. 뿐만 아니라 취심약의 해약은 취심약보다 더 구하기 어려운 것이오. 그것이 그들에게 꼭 있다는 보장도 없소." "그게 뭔가요?"한현지(寒玄脂), 천 년 묵은 학(鶴)의 가슴근육에 붙은 지방질이혤炘 순간 장내는 절망적인 분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비무시각이 신시(申時：오후 세 時)이니 이제 불과 다섯 시진이 남았을 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디 가서 천 년 묵은 학을 구해 가슴근육의 지방질을 떼어 온단 말인가? 그때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운연이 발딱 고개를 쳐들었다. "학(鶴)! 학이라고 했나요?" * * *湛멎두 눈, 눈이 부시도록 선명한 황색의 부리, 깃털은 흰 눈 같쭉 뻗어내린 몸매가 큰 독수리 십여 마리는 합쳐놓은 듯 거대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아름답고 신령스럽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이 거학(巨鶴)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마구에 가득 담긴 콩을 쪼아먹고 있었다. 콩을 이리저리 뒤적여 주는 것은 하나의 손이다. 설부(雪膚)라고나 할까? 학털보다 더 희고 매끄러운 손을 뒤덮고 있는 것은 역시 하얀 털옷 흰 모피털옷에 감싸여 마치 한 마리 토끼처럼 보이는 백의소녀는 쭈그리고 앉아 백학에게 먹이를 주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운연이 삼 장 밖으로 다가서도록 그녀는 시선조차 들지 않았다. 운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상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 좀 봐요……." 소녀의 시선이 힐끗 이쪽을 향했다. 마주하기 어려울 정도로 맑고 투명한 눈빛이었다. 하나 이 눈빛에는 이내 가벼운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당신은…… 쌍비연 운연……?" 운연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타암(普陀庵) 청조각(靑操閣)의 예소벽(芮小碧), 예소저가 맞지 백의소녀 예소벽은 생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검회의 풍운여걸께서 하찮은 이름 따위를 다 기억해 주시니 영광이로군요." 말과 함께 그녀는 소녀 특유의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운연의 차림새 이리저리 살폈다. 불타듯 짙은 홍의를 걸친, 햇살 아래 영롱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용모는 같은 여인이 봐도 부러울 정도로 탄력있고 매혹적인 것이었다 예소벽은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도 강호의 대고수들을 연파해 나가는 그 솜씨를 흠모하고 있었지요. 거기다가 운언니는 또 매우 아름답군요." "고마워요." "한데 소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운연은 잠시 망설이는 듯 싶다가 입을 열었다. "저 아름다운 학의 이름은 무엇인지요?" 예소벽은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학을 힐끗 바라보더니 까르르 웃으 손뼉을 쳤다. "소백(小白) 말인가요? 학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관심이라기보다는…… 저 학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죠?" "흐음…… 본 파의 개파조사(開派祖師)이신 보타성니(普陀聖尼)께끝 湧決쵱거라고 해요. 그러니 못 되도 천 년은 족히 될 거예요. 후저것 좀 봐.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요." 과연 거학은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사람의 말까지 알아듣는 영물(靈物)임이 틀림없었다. '천 년…….'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저 학의 가슴근육을 떼어내 달라는 끔찍한 주문을 도대체 어찌할 것인가? 운연은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이윽고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예소저에게 매우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해요." "어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도와드리죠." 운연은 한쪽의 학을 힐끗 바라본 후 어색하게 웃으며 전음입밀의 수법을 펼쳐 말했다. 의아한 표정을 한 채 묵묵히 귀를 기울이던 예소벽은 운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얼굴을 싸늘히 굳혔다. "한현지……? 흐흥! 운언니는 지금 제정신인가요? 소백은 본 파의 보물이에요. 한현지는커녕 그 터럭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문인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백팔십도로 돌변하는 태도였다. "제발…… 그렇다고 해서 학의 생명이 상하지는 않잖아요." "가슴의 털이 한 치 자라는 데는 백 년이 걸려요. 언니의 말대로 한다면 소백은 아름다움을 잃고 말아요." 두말할 것도 없다는 듯 찬바람이 일도록 예소벽은 빙글 몸을 돌렸에炘 이는 바로 무언(無言)의 축객령(逐客令). 하나 운연이 이대로 물러날 수 있을까? 애초부터 쉽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목숨보다 소중한 정인의 일이었다. 순간 운연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발…… 한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이에요." 예소벽은 아랑곳없이 한쪽의 화원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가볍게 허리를 굽혀 흐드러지게 피어난 겨울매화의 향기퐈 첸年裏 여전히 무심하고 냉랭한 태도였지만 기실 그녀의 속마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운연, 그녀가 도대체 누군가? 무림의 후기지수 중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여중제일수(女中第一手)가 아닌가? 거기다가 또 오대문파가 주축이 된 오대무림맹의 십단총순찰(十檀總巡察)이라는 놀라운 신분을 지닌 그녀다. 뿐이랴! 그 오만하고 도도한 성품은 강호에서도 소문에 자자하여 도저히 꺾을 수 없는 꽃, 부단화(不斷花)라는 소문에 귀가 따가운 그녀가 아닌가?祁 그런 운연이 놀랍게도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로 인하여……. 문득 예소벽은 이 일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느꼈다. '한 사람, 그녀가 말하는 한 사람이 누굴까?' 예소벽은 매화가지 하나를 꺾어 들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세요, 언니. 예소벽은 그런 예의를 감당 못해요. 도대체 운 같은 분이 이렇게 심혈을 기울이는 그 사람이란 누구죠?" 순간 운연의 얼굴이 가볍게 붉어졌다. 하나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무불검 운룡!" "운룡? 아아…… 백마 위걸을 이기고 살검광생을 일초에 꺾은 그 사람 말인가요?" "그래요." "그가 어떻게 되었나요?" "누군가의 암계에 빠져 취심약에 중독되었어요." 예소벽의 얼굴에 해연히 놀란 빛이 떠올랐다. "칠일취 취심약?" 운연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때 예소벽이 느닷없이 손뼉을 치더니 급히 운연을 부축해 왔다. "그런 일이라면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어요?" 운연은 한줄기 놀람의 빛을 봉목에 피워 올렸다. "그럼……?" 예소벽은 웃었다. 그녀는 웃으며 운연에게 말했다. "소녀에겐 적룡환(赤龍丸)이 있어요. 이것은 소백이 백 년에 한 번 털갈이를 할 때 그 몸에서 한현지를 체취하여 다른 약초와 배합해서 만든 것이에요. 비록 극소량이긴 하지만 틀림없이 한현지가 섞였으니 어쩌면 효험이 있을지도 몰라요." * * * "적룡환…… 들은 적이 있소. 소림의 대환단(大還丹), 신녀궁(神女宮)의 수모단(水母丹)과 더불어 무림삼대기약(武林三大奇藥)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오? 듣건대 적룡환 장령제자(掌令弟子)에게만 대대로 한 알씩 내려온다 하였는데, 그토퐈 膏堀것을 운룡이 섭취했으니 이는 그의 복연(福緣)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를 두고 하늘은 선한 자를 돕는다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약을 투여한 지 반 시진이 지나도록 운룡은 깨어나지 못했 방안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에 한줄기 초조함이 어리기 시작했다. '비무시각이 이제 불과 네 시진 뒤다…….' '이 적룡환은 분명히 효력이 있는 걸까?' 운연과 예소벽은 매우 긴장하여 서로의 손을 꼬옥 쥐고 있었다. 운연의 손에 땀이 흥건히 묻어남을 예소벽은 느꼈다. 예소벽, 그녀는 한줄기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뚫어질 듯 운룡래 茶셈밗바라보았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크게 뛰어남은 없는 사람…… 비록 검회의 杵틋箚仗하나 사실 이환명, 묵비향, 점창의 수일평 등과 비교하여 기품이나 용모가 많이 떨어진다. 운언니는 그의 어디에 반한 걸까?' 비무시각 세 시진 전. 그때 돌연,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운룡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어 운룡은 번쩍 눈을 떴다.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던 중인들은 환호를 터뜨렸다. "깨어났다!" "성공이다!" 운룡은 얼떨떨하여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아직도 잠이 덜 깬 표정으로 그는 멍청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오? 아침들은 자셨소?" 15. 憤怒 검(劍). 검은 팔십 근 한철장검이었다. 그 검을 가슴에 품은 자세 그대로 운룡은 모래땅 위에 단정히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드물게도 무표정했다. 동공은 눈앞의 땅에 맞춰져 있으되 땅을 보고 있는 건지, 그와 땅 사이의 공간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무심한 눈빛이었다 연비 등은 그의 뒤에서 걱정어린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너무 과묵해졌다.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처럼…… 대전을 앞 그의 사부 얘기를 한 것이 실수였던가?' 취심약과 사부의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운룡은 변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으며 죽음처럼 고요한 침묵 지키고 있었다. 지금, 대 위에선 제칠조 응조(鷹組)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조각의 예소벽과 개화십강의 하나인 혈영문주(血影門主) 화월후(火月吼)의 대결이었다. 오늘은 모든 조가 이른 바 사강전(四强戰)을 치루었고, 그 결과가 나타났다. 제일조 용조(龍組)에선 곤륜의 운연과 구지마황(九指魔皇) 대해(大海)가 최우승자전에 올랐고, 제이조 호조(虎組)에서는 무애공 이환명과 선풍표리(旋風飄狸) 이개(李蓋)가 올랐다. 그리고 제삼조 표조(豹組)에서는 녹림총수 묵비향과 대도십팔채(大道十八寨)의 무적군자(無敵君子)가 올랐으며, 제사조 학조(鶴組)는 점창의 수일평(首一平)과 조북신마(朝北神魔)가 올랐다 ┸읒단사조(獅組)는 빙인 엽상의와 안남(安南) 무량신군(無亮神君 제육조 낭조(狼組)는 유일한 낙화십강 고수인 귀곡(鬼谷) 혈기자(血機子)와 대천신부(大天神斧) 종선(鍾旋) 등이 팔대고수의 보좌를 놓고 한판 승부를 겨루게 되었다. 또한, 제칠조 응조에서는 사천당문의 사자여래 당인이 이미 승리를 거두어, 지금 대 위에서 겨루고 있는 예소벽과 화월후 전의 승자와 마지막 보좌를 다투게 된 것이다. 대 위의 승부는 거의 막상막하였다. 예소벽은 한 자루의 종이처럼 얇은 연검(軟劍)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예는 남해 특유의 빠른 검법에다가, 수없이 흩어진 남해열도(南海列島)의 수십 종 기학들을 한데 모은 장대한 검공(劍功)이었다. 반면에 화월후는 마치 불길이 치솟는 듯한 열화공(熱火功), 혈영신공(血影神功)을 서리서리 내뿜고 있었다. 대 위의 포목이 누렇게 눌어붙을 정도의 강렬한 화기(火氣)! 차가운 검공과 뜨거운 장공의 일대접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마치 가을날씨처럼 포근했던 기온이 어젯밤부터 급강하한 탓으로 사람들은 대부분 겉옷 위에 두터운 털옷들을 껴입고는 하얀 입김들을 내뿜고 있었다. 하나 워낙 대 위의 대결이 치열한 탓으로 사람들은 마치 넋을 잃은 듯했다. 조금 전에 막 열해마존(熱海魔尊)이란 사내를 묵사발내고 최우승자전에 오른 운연조차 절로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남해의 무예는 과연 뛰어나구나. 예매의 검법은 오대문파에 비해퐈 塤瑀하수(下手)가 아니다." 온 장내를 통틀어 비무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면 오직 운룡뿐이었다. 문득 그의 무심한 동공이 서쪽 차일을 파고들었다. 무엇인가가 보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고 있는 두 남녀. 바로 혈독 혜공과 화독 혜혜였다. 운룡의 두 눈 깊숙이에서 한줄기 섬뜩한 인화(燐火)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나의 사부, 일생을 통틀어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 불쌍한 양반을…… 때로는 너무 연민스러워 가슴이 아픈 적도 여러 번이었던 그 순수한 양반을…… 감히 너희들이 그 더러운 음모 속에, 그 시궁징 淡 끌어들였다는 말이냐?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어도 풀 한 泄밟지 않던 양반이다. 갖은 천대 속에서도 우리 세 사형제를 이징 걀痴笭쵱천진한 영혼이다. 다른 것은 다 용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차라리 내 살을 베었다면 실력이 모자람으로 여겨 웃고 말았을 것이그런데 너희들이 그 사악한 손으로 내 사부를 더렵혔단 말이냐? 세상 조롱과 멸시 속에 내던졌단 말이냐…….' "혈독 혜공, 절대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슈파팍― 슈욱! 다섯 줄기의 화염이었다. 그것은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사방의 퇴로를 차단하며 무서운 기세로 솟구쳐 오고 있었다. 순간 예소벽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한 자루 혜연보검(慧然寶劍)을 옥녀투사(玉女投梭)의 자세Y 곧추세우는가 싶더니, 이어 튀어오르는 용수철처럼 화염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치지직― 뜨거운 쇠가 찬물에 급속히 냉각되는 듯한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일순 보랏빛 용이 불바다를 꿰뚫고 치솟는 듯한 눈부신 검기(劍氣)가 섬전처럼 피어올랐다. "저것은 어기분여전(馭氣奔如電)!" 연비가 놀란 외침을 터뜨렸다. "신검합일(身劍合一)!" "아아악!" 한소리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팔 하나가 피보라를 튀기며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운룡의 앞에 툭 떨어졌다. 혈영문주 화월후가 한쪽 손으로 잘려져 나간 팔을 감싸며 주춤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예소벽은 검을 비스듬히 늘어뜨린 자세로 창백하게 서 있었다. 진기를 과도하게 소모한 것일까? 그녀의 입가에는 한 줄기 가는 선혈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문득 누군가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신검합일의 신기(神技)를 보모 珏 세 소녀를 향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짝짝짝―그 소리는 이내 전 군웅의 손과 손으로 번져 갔으며, 하늘이 무너빨 뻗 듯한 열광적인 환호로 변했다. 우르르― "최고다!" 무뚝뚝한 연비마저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운연이 황급히 예소벽을 마중해 나왔고, 무사 하나가 대 위의 혈흔 지우고 나자 사회인 심인노선사의 우렁찬 외침이 뒤를 이었다. "청조각의 예여협(芮女俠)이 응조 차선(次選)에 진출하였소! 다음 뗍뗌텝순서이오! 먼저 생사선주 혈독 혜공과 무당파의 무불검 운룡 대협의 대결이오." "핫하하……."순간 한소리 낭랑한 대소와 더불어 일점 혈영(血影)이 번쩍 대 위나타났다. 붉은 혈의와 바람막이 피풍(被風)을 멋들어지게 걸치고 허리에는 냅텝패옥(佩玉)을 두른 혈의미장부, 혈독 혜공. 다음 순간 생사선의 무리로 보이는 일단의 혈의인들이 장내가 떠내려갈 듯한 환호를 터뜨렸다. "선주의 승리를!" "무불검을 지옥으로!" 혈독 혜공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혤炘 반면에 운룡은 몹시 완만하게 몸을 일으켰다. 시선은 수중의 철검혤 銖堀채……. 온몸에서 폭사되는 자욱한 살기! 우연인지 그의 발이 싸움에서 패한 화월후의 팔을 짓밟고 있었다. 우두두둑― 뼈와 살이 뭉개지는 듯한 섬뜩한 둔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연은 가벼운 비명을 터뜨렸고 연비는 검미를 짙게 찌푸렸다. '무서운 살기로군…… 괜찮을까?' 이때 두자상이 근심어린 어조로 물어왔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그의 걸음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소. 아무래도 아직 원기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게 아니겠소?" 연비는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취심약의 기운이 완전히 킵퓸駭鳴煮잔볼 수 없지…… 그의 중추기능이 덜 풀린 상태 같소. 싸움은 운룡에게는 몹시 불리한 싸움이 될 것이오. 저래서야 어찌 신법인들 펼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 신법을 펼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중추의 기능이다. 그 기능이 마비된다면 비단 자유자재로 몸을 날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몸을 비틀거나 하는 간단한 동작에도 많은 장애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때 중인들의 이러한 우려를 입증이라도 하겠다는 듯 막 대 위로 발을 디디던 운룡의 몸이 미미하게 휘청거렸다. 그는 급히 신형을 가눔으로써 그것을 감추려 했다. 순간 연비, 두자상, 운연, 그리고 운연의 품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 예소벽 등의 얼굴이 일제히 창백하게 변하고 말았다. '큰일났구나! 저렇게 되면 이번 싸움에 대비하여 익혔던 신법이란 것은 아예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운룡이 대체 마도제일열공(魔道第一熱功)이라는 혈독 혜공의 혈사기공(血邪 功)을 무슨 수로 견디겠는가?' * * * 휘이잉― 휘이― 그렇잖아도 잔뜩 흐린 하늘이었다. 산봉으로부터 휘몰아쳐 오는 섣달의 찬바람이 운룡의 한 겹 베옷 사이로 스산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운룡은 묵묵히 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흔한 눈도 한 번 내리지 않았군.'榴잔거의 감각이 없는 등허리 부분을 한차례 주무르고 난 후, 검벙 洲볕潤酋고쳐 잡았다. 한편, 혈독 혜공은 바람막이 피풍을 천천히 벗으며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취심약의 효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그인지라……. '운 좋게 해독은 했다만…… 네가 어디까지 나의 혈사기공을 피하는지 보겠다. 흐흐…… 아예 통구이로 만들어 주지.' 심인노선사의 간단한 주의말에 이어 그의 몸이 대 아래로 후르르 날아 내려가고 나자 장내엔 일시 자욱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혈독 혜공은 우수는 비스듬히 치켜들고, 좌수는 우수의 손등에 바밀착시킨 상태였다. 그러자 문득 그의 장심(掌心) 어림으로 한 줄기 밝고 투명한 홍점(紅點) 하나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그것은 혈사기공의 특유한 현상이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무심히 그것을 지켜보던 운룡이 천천히 혈독 혜공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은 아예 밑으로 축 늘어뜨린 상태였다. 혈독 혜공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미친놈! 사정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혈사기공이다. 네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느냐?' 그는 우선 운룡의 움직임을 측정해 보는 의미에서 혈사기공을 갈무리하지 않은 좌장을 슬쩍 흩날려 보았다. 슈욱― 팍! 슬쩍이라곤 했으나 그 속에 실린 힘은 못 되어도 이삼백 근(斤)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러나 운룡은 비단 그의 장력을 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대로 맞았다. 그리고 그의 몸은 여전히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뿐인가? 느닷없이 그의 발 밑이 퍽퍽 꺼지며 청석(靑石) 가루들이 자욱하게 날렸다. 얼마나 발에 힘을 주고 있는지 대 전체가 우르르 우르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운룡의 시선은 곧장 혈독 혜공을 향하고 있었고, 혈독 혜공은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의 무심한 눈길에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공포스럽기조차 했다. 인적없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죽음 같은 정적 같기도 하고, 흑청 대해(大海)의 질식할 듯한 고요 같기도 한 운룡의 무심한 눈빛. 그 눈길은 소리없는 위압이 되어 혈독 혜공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혈독 혜공은 한줄기 서늘한 감정이 가슴속을 휩쓸고 지나는 것 같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기분 나쁜 놈!' 돌연 그러한 감정을 떨치기라도 하듯 혈독 혜공은 발작적으로 우장 쭉 뻗었다. "혈사기공!" 순간 한 줄기 자색기류가 번쩍 하고 운룡에게 쏘아졌다. 하나 운룡은 치명적인 살수가 덮쳐드는데도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펑! 치지직― 혈사기공은 정확히 그의 가슴팍 한복판에 작렬했다. 의복이 타는 매캐한 내음이 장내에 자욱이 번졌다. 그런데 보라! 티끌만한 미동도 없이 여전히 걸어나오고 있는 운룡퐈 凋응빨─ 그에게 변한 것이 있다면 더욱더 무표정해진 얼굴과 팔십 근 한철검이 머리 위로 들려졌다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혈독 혜공 또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방금 펼친 무공은 팔성(八成)의 혈사기공이었다. 집채만한 호랑이라 해도 새까만 숯덩이로 변했을 것이다. 혈독 혜공은 기광을 서리서리 뿜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좋아……." 순간 한소리 광소와 더불어 쭈욱 뻗어나가는 우장. 쌔애액― 이번에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이것은 십성(十成)의 전 공력이 담긴 혈사기공이었다. 푸학! 화르르― 순식간에 대 위로 수백 개의 불꽃들이 불똥튀듯 번졌다. 그 불꽃의 일부는 이미 대 위의 포목을 화르륵 화르륵 태우고 있었다. 주위의 물건들이 순식간에 타오르는데 사람은 또 어떠하랴! 운룡의 가슴팍은 마치 인두로 지진 듯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피와 고름과 그을린 재의 자국! 살이 익어 들어가는 노린내가 대 아래까지 번졌다. 운연과 예소벽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두자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연비의 안색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예 수비가 없군. 도대체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놈이야." 하나 운룡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고 걸음 또한 멈추지 않았다. 저벅저벅― 이 발자국 소리는 비단 혈독 혜공뿐 아니라 대 아래 군웅들의 가슴까지도 무자비하게 짓밟아 오는 것 같았다. 죽음 같은 정적과 공포가 안개처럼 사위로 피어올랐다. "어…… 어……." 혈독 혜공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완연했다. 그는 이 하늘 아래 혈사기공을 맨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지는 혈독 혜공의 발길. 그러다 말고 돌연 그는 연거푸 십오장이나 혈사기공을 후려쳐댔다. 퍽! 푸학― 파팍! 퍽― 하지만 마지막 십오장째의 혈사기공을 후려치고 났을 때, 그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발은 대의 끝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운룡의 무표정한 얼굴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검(劍). 머리 위로 들어 올려진 운룡의 검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것은 이제 금방이라도 혈독 혜공의 머리를 향해 휘몰아쳐 올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피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는 것이다. 그때 문득 운룡이 고요하게 중얼거렸다. "잘 가라, 혜공!" 슈악― 한 줄기 매서운 칼바람과 더불어 휙 내려쳐지는 한철검! 바로 그 순간,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 대 아래에서 터졌다. "안 돼요!" 동시에 불타는 듯한 혈영 하나가 운룡과 혜공이 있는 대 위로 달려와선 털썩 엎어졌다. "제발……!" 혈영은 놀랍게도 혜공의 누이인 화독 혜혜였다. 옥 같은 얼굴은 흥건한 눈물로 온통 뒤범벅이었다. 운룡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를 향했다. 그의 검은 혜공의 머리와 반 치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있었다. 화독 혜혜가 이마를 땅에 처박으며 울부짖듯 외쳤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운대협! 제발 오라비를 살려 주세요!" 운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마리 벌레를 보듯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나이 오 세에 부모를 잃고 세상의 온갖 설움과 박대 속에서 자란 남매예요! 추운 겨울날 만두 한 조각이 먹고 싶어 점소이 앞에 두 시진이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얼음 조각 같은 찬물만 머리끝부샥 參”沮堞뒤집어쓰기도 했던 남매예요! 그 어린 마음으로 설움과 한(恨)을 밥처럼 씹으며 살아왔어요! 이제…… 이제 겨우 오빠와 나모 ４娥農살려 합니다. 이제 겨우 굶주리지 않고 있어요. 대협…… 퐈 玲셀菽 제발…… 혜혜가 이렇게 두 손 모아 빌겠어요!" 말은 채 다 이어지지도 못했다. 그녀는 마침내 바닥에 엎어져 서러운 통곡을 터뜨렸다. 숙연한 장내. 일수일수(一授一受)의 괴상한 법규아래 신비의 유랑 도적떼로 알려 생사선주 남매에게 이처럼 우울한 과거가 있으리라고 누가 짐작인들 하였으랴?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대 위의 운룡을 향했다. 운룡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아득한 태산 연봉을 향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술이 침중하게 열렸다. "살고 싶으냐, 혜공?" 혜공은 씁쓸하게 웃으며 한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죽여 주시오……." "너는 좋은 누이를 두었다." 마지막 말의 여운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운룡은 몸을 빙글 돌렸다 순간 장내에 있던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을 힐끗 마주보더니 우레와 같은 환호를 터뜨렸다. "와아!" "와……!" 연비와 두자상은 서로를 마주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운연징 걔 웃으며 그를 향해 뛰어나갔다. 예소벽의 중얼거림이 그 뒤를 잇고 있었다. "이제 알겠다…… 그의 매력은 바로 저 돌발성이다. 몸의 어느 구석에 숨어있다가 폭발적으로 나오곤 하는 힘과 정신! 저것이 사람슬프게 하고 여인들을 정신없이 열중시키는 것이다. 운룡…… 그는 묀 ┑珦멎사람이다……." * * * 돈 열 냥. 현청노도사는 이 열 냥에 제자를 팔아먹었다. 제기랄! 산아래 주막에서 쓸쓸함을 달래느라고 마구 외상술을 들이켰던 것이 죄라면 죄일까……. 그렇잖아도 무당파의 건물들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일대의 황부자(黃富者) 놈이 이 일에 끼어든 것이다. 그는 주모로부터 열 냥에 대한 인수증서를 양도받아서는 그것을 들 산으로 올라와 열흘 내로 돈을 갚든지, 아니면 무당파의 건물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던 것이다. 아무리 일자무식이요, 배움이 없는 현청노도사라 해도 그런 일만은 할 수 없었다. 돌아가신 가람노사부를 봐서라도 그분의 영령이 있는 도장을 어찌 내놓을 수 있겠는가? 한데, 밤을 세워 몸부림치며 고민하던 현청노도사의 앞에 어느 날 문득 내밀어진 은자 열 냥……. 그 묵직한 감촉에 정신을 잃은 것일까? "정말이야…… 그 돈이 욕심났던 것도, 탐났던 것도 아니야. 그저 그것으로 빚을 갚으면 도관 하나는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어. 旅─ 현청아, 현청…… 네가 미쳤지. 그렇다고 앞길이 구만 리 모 粱훌륭한 놈을 네 손으로 매장시켰단 말이냐……." 잔뜩 흐린 하늘이더니 이윽고 눈이 내린다. 올해 들어 내리는 첫눈이었다. 현청노도사는 심산의 한 그루 고목 아래 옹색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차가운 냉기가 온몸을 파고드는 것도, 눈이 몸 위로 마구 덮이는 것도 그는 느끼지 못했다. 흐르던 눈물은 이미 볼 어림에서 얼어붙어 살갗을 조여오고 있었다 힘없이 눈이 감겨오고 있었다. 졸음과 번뇌가 노도사의 움츠린 어깨를 말없이 내리누르듯……. 같은 시각. 고목이 저만큼으로 바라다보이는 언덕빼기에서는 여러 사람이 묵묵 선 채 내리는 눈을 맞고 있었다. 운룡, 연비, 두자상, 운연, 그리고 예소벽이었다. 운룡은 오랫동안 자신의 사부를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득 연비가 말했다. "자네를 버린 사부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산아래까지 모셔점 躍 渼裏" 운룡의 몸이 그 자리에 멈칫 섰다. 그는 히죽 웃으며 말을 꺼냈다. "원하지 않느냐고요? 남들이 먹다 남은 밥 한 술을 주며 못난 사부 욕할 때 그 사부는 제자의 잠자리에 짚 한 올이라도 더 깔아주려고 겨울산을 헤매고 계셨소. 아무리 술이 취해도 술이 깨면 밥 먹었느냐 물어봐 주었고, 사십 평생을 무당파 일흔두 개 도관의 기왓장 하나까 지켜오신 분이오. 헐벗은 새끼를 지키듯 온몸으로 삶을 살아오셨소. 당신이 오늘 하루 잘못하셨다 해도…… 그것은 당신이 평생 동안 해오신 것에 비하자면 바다 속의 물 한 방울과 같은 것이오." 죽겠느니, 말겠느니 눈물을 펑펑 쏟으며 태산 연봉을 떠들썩하게 瘀두 사제의 얘기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오는 겨울날 무슨 먼모 獵鳴殷눈가를 찍어내린 사람들의 얘기는 생략하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그날 밤 운룡이 쓰러졌다는 것이다. 현청노도사의 버둥대는 몸을 방안에 밀어넣고 난 직후, 그는 썩은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렇다. 혈사기공을 열일곱 차례나 정면으로 맞고도 멀쩡할 수 있사람이란 이 하늘 아래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운룡은 신(神)이 아니라 다만 참을성이 강한 한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다. * * * "이젠 정말 어찌해 볼 도리가 없소. 심맥(心脈)이 크게 상했소. 콴主脈)이 두 개나 끊어졌을 뿐 아니라 대맥(大脈) 일곱 개가 크손상되었소. 도대체가 저런 몸으로 비무가 끝난 후 지금까지 어떻게 버티어 왔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오." 두자상의 말에 좌중은 괴괴한 침묵을 지켰다. 연비, 운연, 예소벽, 혈독 혜공, 현청노도사 등이 장내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생사이독(生死二毒) 남매는 어젯밤 느닷없이 운룡의 처소를 찾아들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문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운룡의 하인이 되기를 간청했고, 그것을 말리다 못한 연비 일행이 의식을 잃고 있는 운룡의 상태를 가르쳐주자, 주춤걸음으로 운룡이 누워있는 침소까지 기어와모 球堧岵막涇종복(從僕)의 맹세를 했던 것이다. "자고로 섬서인(陝西人)들은 그 마음 씀씀이가 불 같다더니, 이제나는 그 말뜻을 알았다." 두자상의 말마따나 생사이독 남매는 대단한 고집의 소유자들이었다 지금도 화독 혜혜는 의식을 잃고 있는 운룡의 옆에 꿇어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고, 혈독 혜공은 모든 사람들이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복의 신분임을 내세워 혼자 저만큼 한쪽 구석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운룡의 상태는 이를 데 없이 심각했다. 불과 이틀 앞으로 다가온 검회결선은 고사하고라도 그 목숨마저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지경인 것이다. "사람이란 그 태어난 특성대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한계란 것이 있는 것인데 운룡은 수시로 그 한계를 넘나들었소. 오늘의 일만 해도 그는 자신이 신법을 펼칠 수 없는 몸임을 알고 그런 무리한 작전을 펴나간 것이오." "……." "사람의 인내를 초월하는 이러한 제반 일로 미루어 볼 때 지금과 같은 결과는 오히려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오." 연비의 탄식어린 말에 운연이 충혈된 눈을 한 채 물었다. "그럼 그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요?"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청조각의 적룡환, 소림의 대환단, 그리고 무림의 신비문파인 신녀궁의 수모단(水母丹), 그 모두를 합쳐도 지금의 그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이오." 연비는 말을 맺고 나자 드물게도 허공을 바라보며 일성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런 그의 두 눈으로 한 줄기 뿌연 이슬이 차오르고 있었다. '불쌍한 녀석…… 이렇게 되기 위해 너는 온 정열을 바쳐 여기까지 올라왔단 말이냐?' 바로 정상 그 자체라고 해도 좋았다. 아직 초검 백리천이라는 한 계단이 남아 있기는 했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운룡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그 동안 그가 보여왔던 불가사의한 집념과 강철 같은 의지, 그리고 초인적인 재질, 그 모두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혤 ㏏ 甄裏 운룡, 그는 패배를 모르는 불패(不敗)의 승부사라 해도 좋았다. 한데 그런 그가 지금에 이르러 이제까지 쌓아왔던 모든 공(功)을 한꺼번에 허물지도 모르는 중대한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으니……. 사내들은 탄식을 터뜨렸고 여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사그라져 가는 거성(巨星)의 마지막 광채에 대한 안타까움이랄까? 이때 돌연 왈칵! 하며 방문이 거세게 열리는가 싶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순간 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해연히 놀란 빛을 떠올렸다. 낡은 초립(草笠), 초혜(草鞋), 그리고 허리춤에 한 개의 기이한 초검(草劍)을 매단 한 사내. 그는 바로 초검 백리천이었던 것이다. 혈독 혜공이 즉시 앞으로 나섰다. "귀 공은 무슨 일로 오셨소?" 초검 백리천은 사람들을 쭉 둘러보더니 그 중 연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운대협의 상태는 어떻소? 그를 나에게 보여줄 수 있소?" 느닷없는 말. 그가 왜 운룡을 찾을까? 사람들의 의심에 찬 시선에도 불구하고 연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쪽으로……." 덜컥― 문이 열리자 침상 옆에 쪼그리고 있던 화독 혜혜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가는 퉁퉁 부어 있었다. 초검 백리천은 곧장 운룡이 누워있는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운룡은 반듯한 자세로 고요히 누워 있었다. 얼굴이 유달리 창백한 것을 제외한다면 잠든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하나 그의 맥박과 심장은 몹시 느리게 뛰고 있었다. "더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악화되지도 않는 상태이오." 연비의 말에 주의 깊게 운룡을 살피던 초검 백리천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두면 이레를 못 넘기고 죽소이다. 당신들은 어떤 유효한 방도라도 있소이까?" "아무것도……."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었소. 나도 오늘 하루종일 성내를 돌아다니징 役돋 모색해 보았소이다. 그러다가 귀에 박히는 말 하나를 들었소. "어떤 말이오?""난난(蘭蘭), 바로 본 검회를 주최한 위경경의 딸인 그녀가 희대의 신녀(神女)라는 사실이오. 태산 일대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그녀는 비단 의학에 뛰어난 조예가 있을 뿐 아니라 세의 어떤 학문이든 달통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오. 그녀에게 이 의뢰해 보면 어떤 방도가 나올지도 모르겠소. 나는 이 말을 해주러 것이오." 일순 말을 맺기 무섭게 초검 백리천은 몸을 돌려 나갔다. 그때 연비가 급히 외쳤다. "잠깐!" "……." "귀 공이 이 일에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까닭이 무엇이오?" 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궁금히 여기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초검 백리천의 초립 아래로 문득 눈처럼 흰 치아가 드러났다. 기이하도록 친밀한 그 웃음에 이어 백리천이 말했다. "그가 좋기 때문이오. 투박하지만 잘 정제된 기품…… 불가사의한 흡인력…… 강한 승부의식…… 그 모두가……." * * * 난난은 늘 백아와 어울려 논다. 그녀가 백아와 어울려 놀지 않는 시각이란 잠잘 때와 밥 먹을 때 정도일까?한데 연비 등이 운룡을 업고 그녀의 처소로 찾아왔을 때 그녀는 안 있던 백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운룡……!" 뿐인가? 그녀는 덮치듯 운룡을 향해 달려들었으며, 이어 그를 덥썩 안아 자신의 침상까지 운반하여 세밀하게 그의 증세를 진맥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생 백아를 떨어뜨릴 정도로 다급해 하는 난난을 본 적이 없던 그녀의 시녀들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연비 등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벼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소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려 서른두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매 관문마다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신분내력을 대고, 똑같은 대답한 끝에야 간신히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자상은 이렇게 해서 난난을 만난다 해도 그 지체높은 소녀가 과연 순순히 운룡을 진맥해 주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던 참이다. 비록 난난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운룡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긴 했지만,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정도로 다급했던 연비 등 그 사실을 이미 잊고 말았다. 어쨌든 난난은 거의 반 시진에 이르도록 오래 진맥한 후에야 탈진煉 Αㅐ막涇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시기에 당신이 이렇게 되다니……." 무슨 말인지……. 연비는 다급히 물었다. "치료가 가능하오이까?" 난난은 그런 그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도대체 당신은 이 사람의 특수조련인이라면서 이 사람이 이렇게 점 沮堞무엇을 하고 있었죠? 지금 이게 산 사람인가요? 죽은 사람이"무슨 질책을 하여도 달게 받겠소. 다만 치료가 가능한지 알고 싶모炘 난난은 냉막한 얼굴로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이윽고 연비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나에게 하루의 시간을 줘요. 그때 가서 이 사람을 치료할지 안할지를 결정하겠어요. 내일 아침에 당신은 이곳으로 오세요. 그리퐈 》搔 보좌할 여자 한 사람이 필요해요." 순간 운연, 예소벽, 혜혜가 한꺼번에 나섰다. "제가 하죠." 난난은 그녀들을 냉랭하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운연과 예소벽을 가리키며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아직 검회가 남았으니 안 돼요." 그러자니 남은 것은 혜혜뿐. 난난은 혜혜를 아래위로 유심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만하면 되겠군요. 당신이 오도록 해요." 연비 일행은 얼떨결에 난난의 처소를 나오긴 했지만, 마치 여우에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운연은 내내 의혹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로군요. 난난, 그녀는 마치 우리 일행을 오래 전부터 殷있었던 것 같아요. 운룡을 대하는 태도도 낯선 사람을 대하는 점 틈耉解立─ 무엇보다도 그녀가 운룡에게 그토록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연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홀린 기분이기는 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문득, 며칠 전 비무대에서 자신들쪽을 향해 자주 눈길을 주던 위경경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작 신비로운 것은 바로 운룡 본인이오. 도대체 나이가 많건 적간에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여자란 아무도 없단 말이야……." "내 잘못이다……." 어두운 방(房). 한쪽 침상에 운룡을 눕혀둔 채 난난은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탁자에는 일견해 보기에도 수백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서류 뭉치, 두루마리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무리 이 일이 중요하다 해도 운룡 오라버니부터 돌보았어야 했천룡금침요해(天龍金針要解)가 아니고서는 살릴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고 말았다니…… 난난, 큰 실수를 했구나……." 한소리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이 흘렀다. 오랜 침묵이 흐른 후에야 난난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창 틈으로 스산한 겨울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의 해맑은 옥용(玉容)으로도 달빛은 은가루처럼 묻어오고 있었 재녀(才女)!柳錫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일컬어 천 년에 하나 날까말까 재녀라고 했다. 적어도 대봉황천의 문인이나 태산 일대의 사람들 중에는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실 매우 많은 일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첫번째 것은 대백부(大伯父) 도남강에 관한 일이었다. 도남강. 그의 거동은 요 근래 들어 눈에 뜨일 정도로 점잖아졌다. 평소 성내의 모든 일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관여해온 그였모 데 그런 그가 대봉황천 개성(開城) 이후 최고의 행사라 할 수 있 사해대검회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 사실이 난난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대백부가 무엇인가 불만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을 풀어 은밀히 그에 대한 조사를 해온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탁자 위에 쌓여 있는 두루마리 뭉치인 것이다 "그의 의도는 거의 확연해……." 천역(天逆). 부친을 거역하는 천역의 대음모(大陰謀)! 두루마리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의 휘하인 칠대군단(七大軍團)의 미묘한 움직임과 특수공격조 봉황무색오살(鳳凰無色五殺)의 기이한 행동을…….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외투 안에는 일급전시(一級戰時)가 아니면 쓰지 않는 중무기(重武器)들을 갈무리있었다. 그리고 거의 실시되지 않던 군단의 훈련도 요즘 들어 부쩍 강화되었다. 그래서 난난이 검회관람을 중지하고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혔던 것이다. 그녀는 우선, 노천주와 위경경에게 충성하고 있는 학천종과 그의 철기군단을 혈호 주위에 은밀하게 배치했다. 혈호의 안으로는 신녀군단을 갈무리했다. 연후 도남강 등이 꾸미고 있는 천역에 대한 치밀한 대응작전을 구상해 보았다. 하나 한마디로 마땅한 대응작전이 없었다. 저쪽의 힘은 너무 강대했고, 모든 음모는 도저히 손을 써볼 수도 없을 정도로 깊고 완벽하게 문인들의 속으로 침투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노천주는 자신의 몸도 돌볼 수 없는 마인인 상태. 그렇다면 도남강 등은 어떤 방법으로 이쪽을 죄어올 것인가? 첫째 목표는 노천주와 위경경, 학천종 등의 기존세력을 장악하는 것일 것이다. 둘째로는 검회에서 선발된 팔대고수를 제거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꼭두각시를 금악(金嶽)에 보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검회가 끝나고 모든 방계 고수들이 흩어져간 다혤 즈음이 될 것이다. 난난은 고민했다. 그리하여 우선, 노천주와 위경경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검회팔대고수를 재빨리 수렴하여 금악으로 보낸다는 기본전략을 수립한 것이 바로 오늘 낮의 일이었다. 한데 그 기본전략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운룡이 저런 꼴이 되어 그녀의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다니……. 노천주를 만나고 그를 통하여 만룡가의 대임(大任)을 걸머져야 할 주역이 무대에서 쓰러진 것이다. '어찌하나,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사해대검회는 바로 만룡가의 적통후계자를 뽑기 위해서 행해진 것이다. 노천주는 이 일에 있어 자신의 혈육을 배제하고 만천하인에게 균등 기회를 주었다. 피아를 막론하여 가장 재질이 뛰어난 자가 만룡가를 이어받고 나아가서 십사연방천하검회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 그 어른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만큼 반드시 운룡도 팔대고수의 대열에 끼어야만 했다. 비록 그가 친손자이긴 하나 팔대고수의 대열에서조차 탈락한 고수라면 그 어른은 얼굴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그 막중한 검회결선이 바로 내일…… 그 안에 운룡 오라버니를 치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날 밤, 난난은 밤새도록 단 한잠도 자지 않았다. 친혈육이기 이전에 그녀가 본 가장 훌륭한 재질의 무인(武人)에 대 심려였다. 그러나 무심한 시간은 번뇌로 뜬눈을 새는 그녀의 창에다 어김없이 아침햇살을 보내고 말았다. 16. 또 하나의 道家 "저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딱! 딱! 꺾여 나가는 것은 꽃가지다. 매화(梅花). 한설(寒雪)을 이기고 냉풍(冷風)을 업(業)으로 하여 꽃을 피우는 煉 프痔텝꽃은 지금 잘 정돈되어 화병에 꽂히고 있었다. 꽂힌 꽃으로부터 일종의 기(氣)가 느껴지는 것은 꽂는 이의 수양 탓일까! 연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꽃가지를 쳐나가는 난난의 희고 가는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들리는 그녀의 말은 마치 꽃에서 풍기는 향기 같았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물론 저 사람이란 침상에 누운 운룡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연비는 힐끗 그를 바라본 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안다고 생각했으나 그 말을 들으니 또 모르겠소." 난난은 담담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이 꽂은 꽃이 잘 꽂혀졌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시선을 요리조리 갸우뚱해 보고는 흡족하게 웃었다. 미처 다 못 꽂은 매화가지 하나를 들고 그녀는 천천히 창가로 가 섰다. 창밖은 분주했다. 검회결선의 최종일을 위해 주객(主客) 모두가 서두르는 모습이 완연했다. "그는 바로 대봉황천, 아니 화북(華北) 만룡가(萬龍家)의 적통후계자예요 ." 느닷없는 말에 연비는 잠시 얼떨떨해졌다. 그녀의 말은 느닷없긴 했으나 실로 엄청난 말이었다. 하지만 난난의 어조는 그런 엄청난 말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담담했 것이다. 그녀는 그런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말이 실감이 안 나나요? 운룡, 그는 바로 진천우도의 이자(二子)인 화천상의 몸에서 태어난 화운룡(華雲龍)이에요. 즉, 만룡가의 장손(長孫)이며 소녀의 사촌 오라비입니다." 비로소 연비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나 곧 급격한 경악지색으로 변했다. 그것은 그와 함께 난난의 소취거(素翠居)를 방문한 화독 혜혜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부릅뜨고 난난과 운룡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잠시, 억겁처럼 무거운 침묵이 좌중을 자욱이 감돌았다. 그리고 연비의 일성 장탄식이 그 침묵을 깨뜨렸다. "그랬었나……?" "뜻밖인가요?" "확실히." "그럼 이제 당신의 신분을 설명해 주실 차례로군요." 난난은 불꽃처럼 화사한 웃음을 만면에 띤 채 말을 이었다. "하류급 삼류무사에 불과한 운룡 오라버니를 단숨에 일류급 검도고인(劍道高人)으로 끌어올리고, 사실상 단 한 번의 승리도 불가능했던 그를 불패의 승부사로 조련해낸 당신이에요. 그 몸에서 풍기는 기질과 숨은 무예, 그리고 초연한 기풍을 보고 오래 전부터 당신의 신분이 궁금했어요." 연비는 또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설마 이 괴상한 소녀가 이런 질문까지 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직접 말을 안하시겠다면 제가 하겠어요. 그건 원치 않겠지요?" 연비의 시선이 무거운 암갈빛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난난의 물처럼 고요한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연비는 침중한 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봉황천이 오십 년 동안 이 무림을 영도해온 것은 과연 우연한 이 아니오. 소저 한 사람만 가지고도 그 신화는 계속 이어질 수 있 것이오." "과찬의 말씀." "나는 그전에 하나 물어볼 것이 있소." "그게 뭔가요?" 연비는 힐끗 침상의 운룡을 바라보았다. "소저는 운룡에 대한 안배를 가지고 계시오?" "어느 정도까지를 말하나요?" "최소한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명예와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는 범위이오." 난난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안심해도 좋아요." "소저라면 믿을 수 있소." 연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듯하더니 이윽고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중주(中州) 신선도(神仙道)에서 파유된 사람이오." 오오…… 중주 신선도라니? 이는 바로 십사계파 중 중원사계(中原四系)의 하나가 아닌가? 화독 혜혜는 얼마나 놀랐던지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난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엄청난 밀계(密戒)가 이루어져 있는 탓으로 신선도의 내력은 말할 없소. 나도 신선도의 후계자는 아니오. 바로 그 후계자를 찾기 위 무림에 나왔소." 그렇다면 중주 신선도도 아직 그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난난이 말했다. "그렇다면 귀 공이 택한 후계자가 바로 운룡 오라버니인가요?" "그렇소." "단순히 그 재질 때문에?" "재질도 재질이려니와 그의 사문(師門)은 본 계파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소. 즉,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는 중주 신선도의 제일서열 후계자인 것이오." 난난은 피식 웃었다. "세상에, 운룡 오라버니는 정말 운도 좋군요. 세상 사람들은 평생점 〉넵그 이름조차 듣기 힘든 십사계파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그후계자로 정해 놓았을 줄이야……." 그렇다. 그것은 확실히 보기 힘든 기연(奇緣)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귀 공은 어찌하실 생각인가요? 보다시피 운룡 오라버니는 이미 만룡가의 후계자예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오." "그렇다고는 해도…… 설마 귀 공은 이번 검회참가자 중 운룡 오라버니를 능가할 만한 재질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 연비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곧 긍정의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침묵을 이어가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벙 ┙駭裏 "그건 그렇다고 합시다." "그럼 어떡하실 생각인가요?" "기다리겠소." "두 계파의 공동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제일서열의 후계자를 젖혀 두고 다른 후계자를 옹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또한 십사연방천하검회가 두 계파의 한 후계자 인정하지 않는다는 규약은 없소." 연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난난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요. 이제 말이 좀 통하는 것 같군요. 그럼 우선 눈앞에 닥친 만룡가의 일부터 얘기하도록 해요." "그러시오." "연대협은 이미 이번 사해대검회의 목적을 알고 계시리라고 믿어요 "바로 지금까지 얘기한 이유가 아니오?"그래요. 후계자의 옹립, 그것이죠. 그러나 저희 할아버지는 그 기 모든 이에게 균등하게 부여했어요. 즉, 검회에서 선발되는 팔대고수 누구나가 만룡가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진천노웅(震天老雄)다운 생각이오." "그래서 비록 운룡 오라버니가 제일의 적통후계자이긴 하지만 그 역시 팔대고수에 들어야 해요. 그리고 그러자면 오늘의 결선비무에 반드시 참가해야 해요." 연비가 가장 묻고 싶은 것 또한, 바로 그 점이었다. 그는 운룡이 반드시 팔대고수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난난의 견해와는 또 다른 의미로써, 뻗어나는 성장기의 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감(自信感)이라고 그는 생각하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자면 이 자신감이 무예나 초식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굶고 있는 자에게 물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하루를 살지만,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면 일생을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도대체 이 괴상한 소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운룡은 지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의식도 없는 상태가 아닌가…….' 그의 궁금증에 답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난난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 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본 건데…… 오늘의 비무에는 운룡 오라버니 대신 제가 참가하는 거예요. 물론 그와 똑같이 역용(易容)을 하구요." 무슨 천지개벽의 요술이라도 있는가 기대했던 연비는 순간 입을 쩍 벌렸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똑같이 역용을 한다고 해도 우선 그 체격부터가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 조금만 관찰력이 있는 고수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운룡의 무예는 특이하오. 그것은 어떤 형식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요인들을 스스로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낸 것이오. 그무예는 도저히 흉내낼 수조차 없소." 난난은 그의 놀란 외침에 생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저에게 다 생각이 있어요." * * * 결선비무 최종일! 드디어 대륙 전체로부터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일만의 정예 중에서 팔대고수를 선발해내는 날이었다. 이 하루를 위해 영욕의 땀과 분루(憤淚)를 삼켜온 이는 그 얼마이팔대고수라는 제한된 보좌에 앉기 위해 부나방처럼 명멸해 갔던 고수 또 얼마인가? 사해대검회는 방대한 규모에 어울리게 무수한 화제와 숱한 진기록남겼다. 최하급의 고수라 해도 최소한 이십 년 이상의 내력을 지닌 고수들혤 活霑沽눼쩝侈樽사실상 단 한 시합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시합이 없었고, 매 시합마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묘기가 속출되어 오래간만 군웅들이 중원무학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었던 대회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대회 최종일의 막은 올랐다. "와아……!" "와……!" 아침부터 싸락눈이 안개처럼 흩날리는 속에서 시작된 여덟 쌍의 군朱ゴ잔오후 신시(申時) 현재, 일곱 쌍의 우승자를 가려놓고 마벙 堀쌍의 대결을 남기고 있는 참이었다. 이때까지 선발된 영광의 우승자들은 다음과 같았다. 제일조 용조, 곤륜의 운연. 제이조 호조, 무애공자 이환명. 제삼조 표조, 녹림총수 묵비향. 제사조 학조, 점창의 수일평(首一平). 제오조 사조, 빙인 엽상의. 제육조 낭조, 귀곡 혈기자. 제칠조 응조, 능파선녀 예소벽. 이들은 모두 공작이 화려한 깃을 활짝 펴듯 지니고 있는 무예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뭇 군웅들을 감탄하게 만든 희대의 기남아들이었모炘 그리고 이 중에는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었다. 우선, 제육조 낭조의 귀곡 혈기자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십대나이십대의 청년고수라는 점이다. 둘째, 빙인 엽상의, 쌍비연 운연, 능파선녀 예소벽 등 소녀고수들숯 諛탕萍銖臼 여성무예의 새로운 차원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셋째, 오대문파의 고수자 중 소림, 화산, 아미의 삼대문파 정예들모조리 탈락하여 비(非)명문계열 고수들이 우세를 보였다는 점이다. 分 칠대고수의 무예가 나이를 막론하고 거의 신검합일(身劍合一 이기어검(以氣馭劍)의 경지에 이르러 전반적인 무예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 등이었다. 특히, 무애공자 이환명의 일종의 예(藝)와도 같은 무술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감탄을 그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제팔조 마조(馬組)의 대결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초검 백리천 대(對) 무불검 운룡의 대결! 이 시합이야말로 단연 오늘의 화제이며, 초점이라 할 수 있었다. 한쪽은 전 시합 내내 일초를 넘기지 않았던 불세출의 검도고수요, 다른 한쪽은 파란만장한 승부를 펼쳐내서 불패의 승부사라는 아호(雅號)를 지니게 된 젊은 기인이었다. 무불검 운룡의 모습이 먼저 대 위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천지가 떠나갈 듯한 환호를 터뜨리며 그를 성원했다. "이번 대회에선 오직 당신만을 응원하고 있소! 멋지게 하시오! 무 淪頹" "무당파의 이름이 다시 빛나고 있소. 최후까지 멋진 승부를!" "와아……!" "와……!" 아무것도 모르는 현청노도사는 그저 벙글벙글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대 위의 늠름한 애제자가 못내 자랑스러웠다. 나이 십육 세의 몸으로 패망한 문파의 이름을 이토록 드날리는 그묀 틈璣 말이다. 물론 가람노사부가 살아 계셔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더욱 좋아하셨 테지만……. "좋아, 좋아…… 최고다. 우리 제자 최고다……." 반면에 대회 최강의 특수조련인 조(組)라는 별칭을 얻게 된 연비 은 종내 심각한 표정이었고, 두자상, 운연, 예소벽, 혜공 등은 이연비로부터 이 기상천외한 역용술에 대해 귀띔으로 들었는지라 얼굴끝�i恪또纛밗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저 난난이란 소녀가 운룡의 무예를 제대로 펼쳐낼 수 있을까 '그녀가 원래 늘씬한 키였는지라 높이는 그런대로 속일 수 있다고 도, 옷에다 솜뭉치 등을 적당히 쑤셔 넣어 애써 비슷하게 꾸민 체찼 諍薺沮堞군웅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까?' 그들의 이러한 우려와는 달리 대 위의 운룡, 아니 난난은 자못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그녀는 대 위에 올라 심인노선사와 가벼운 인사말을 능청스럽게 주고받은 후, 턱하니 팔짱을 끼고는 태연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묀炘 "가슴이 다 조마조마하군.""아닐 말이오? 나는 저 소녀가 과연 팔십 근 한철검을 제대로 들 棨 聆뼉痴뗏酋의문스럽소이다." 이때다. 돌연 서쪽 차일 부근으로부터 하늘이 허물어져 내릴 듯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 "백리천이다!" "드디어 등장이신가?" 무심히 그쪽을 바라보던 연비 등은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특유의 조용한 걸음걸이로 걸어나오고 있는 그는 분명 백리천은 백리천이었는데……. 보라! 늘 입던 초의, 초혜, 초립은 어디다 팽개치고 엉뚱하게도 도복(道服) 차림이 아닌가? 당건도관(唐巾道冠)에 초리종선(草履棕扇). 우수에는 건곤편괴(乾坤 拐)요, 좌수에는 고신표발(孤身飄鉢)이니, 이는 두 눈을 뜨고 봐도 어김없는 도사(道士)의 복장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또, 그는 매우 준수했다. 이제 겨우 십칠팔 세 정도로 보이는 그는 한 쌍의 호목(虎目)과 관 같은 피부에 붉은 입술 등을 갖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소년이었벙炘 그는 군웅들의 의아한 표정엔 아랑곳없이 고요하게 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이어, 저 멀리 공증인석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인 후 사방遼 銖鷺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본인은 오늘 결선비무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표할까 하오."그는 수중의 표발, 편괴를 번쩍 들어 보이더니 우렁찬 소리로 말했 "빈도는 일백 년 전 이 땅에서 사라졌던 청성(靑城), 공동( ), 공래( 崍), 전진(全進), 이들 사대도가(四大道家)의 공동전인으로서 오늘의 이 일전을 삼가 사대도가의 조사(祖師)들께 바치고자 하오이區炘 목소리는 우렁찼지만 그 눈에는 찰랑찰랑 눈물이 고여들었다. 일만의 경쟁자를 한 자루 초검으로 물리치는 신위를 사해에 떨쳤던 초검 백리천. 아아…… 그랬던가? 그 또한 무당의 운룡처럼 사라진 도가의 후예였단 말인가? 공증인석에 앉아 있던 노고수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으며, 그 박수는 이내 전 군웅을 잇는 대환호성으로 번져갔다. 와르르― 도가(道家)! 백 년의 긴 세월을 이어 이 한 자리에 다시 구현된 위대한 도가의 혼(魂)! 그들은 만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조리 모인 자리에서, 그것도 단징 ㈃玄명만을 뽑는 바늘귀 같은 구멍을 뚫고 두 명이나 최후 결선에 올랐던 것이다. 이후로 누가 감히 도가가 멸망했다고 말하랴……. 백리천은 난난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할 듯 감개에 찬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리다가는 이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정중히 손을 모아 보였다. "무량수불……." 멋진 승부를 바란다는 뜻이었겠지만 감정이 벅차오르는 듯 그의 도호(道號)는 채 다 이어지지도 못한 채 끝구절을 가늘게 떨고 있었끝炘 * * * 쿠쿵! 최후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심인노선사가 대 아래로 내려가고 초검 백리천이 칠의삼재(七衣三財)를 정돈한 후 느릿하게 초검을 빼들자 군웅들의 시선은 대 위로 집중되었다. 초검 백리천은 고수자답게 이미 특유의 정세(靜勢)를 완연하게 회복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 대의 중앙에 우뚝 몸을 세웠으며, 그런 그의 일신에서는 칼끝처럼 예리한 예기(銳氣)가 폭사되어 나왔다. "반드시 회복되기를 빌었소. 이렇게 도우(道友)의 건강한 모습을 되니 다행이오." 난난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는 영락없는 운룡 그대로였다. "반갑소, 백리도우. 한데 나는 비무에 앞서 한 가지 청할 것이 있소이다." "그게 무엇이오?" "논검(論劍), 우리 논검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논검?" 논검이란 입으로 구술(口述)하여 대결하는 비무의 형식을 말한다. 백리천은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난난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핫하…… 백리도우의 검이나 나의 검이나 예리하기는 마찬가지요. 어느 누가 피를 보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있겠소? 나는 도가중흥의 막대한 책임을 어깨에 진 우리가 그렇듯 유혈대결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문득 해보았을 뿐이오." "……!" "하나 백리도우께서 마다하신다면 기꺼이 진검(眞劍)의 승부를 하겠소이다." 한쪽으론 어르면서 한쪽으론 뺨을 친다. 도저히 상대로 하여금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드는 교묘한 화술(話術)이었다. 대 아래의 연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 '머리, 미모, 말…… 그 모두가 뛰어나군. 어느 누구든 저 소녀를 敵)으로 삼게 된다면 그는 평생 두 다리 뻗고 잠잘 생각을 말아야 것이다. 보아하니 백리천은 승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군. 도가중흥 어쩌고 했으니 말이야…….' 과연 백리천은 자신의 초검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인가를 하는 눈치이더니, 이윽고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빈도는 운도우의 말씀을 따르기로 하겠소이다." 두 사람은 즉시 서로를 마주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회규정에도 비무를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법규는 없었다. 합법적인 대결인 것이다. 고요한 침묵 속으로 난난의 낭랑한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 "자, 나는 우선 자오(子午)의 보법을 밟고 낭당추암(狼撞槌岩)의 일식으로 백리도우의 화개혈(華蓋穴)을 노리겠소!" 백리천은 깊게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빈도는 홍궁(洪宮)을 밟아 피하는 동시에 천뢰신지(天雷迅至)의 일식으로 역습을 하오." "좋은 수법…… 하오면 분수박룡(分水搏龍)의 신법으로 몸을 띄우혤 致嶺綢쭝手輝琵琶)의 공격을 가하오!" "피하지 않소! 쌍봉관이(雙峯貫耳)의 일식으로 쳐올림과 동시에 비발(飛鉢)의 수법을 배가하오." "그렇다면……." 군웅들은 논검이라 하기에 처음에는 대결이 싱거워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들로서는 천금을 주고도 보지 못하는 황금대결이 무산된다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두 사람의 논검은 검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실제 시합보다 더욱 박진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수십여 초나 솟구쳐 나오는 기식절초(奇式絶招)의 행렬! 군웅들은 한쪽이 초식을 토할 때마다 자신 같으면 어떻게 막을지를 궁리해 봤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멋진 수비식이 나오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절초가 이어지면 탄식어린 감탄사를 내불기도 했다. 공증인석에 앉은 노고수들도 귀를 쫑긋 기울이는 눈치였고, 이미 보좌에 오른 칠대고수들도 신중히 경청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것은 연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난난의 무예가 어떤 것인지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초식을 귀기울여 듣자니 이는 자신조차 망설여지는 치밀하고 짜임새있는 수법들이 아닌가! 그는 내심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운연 등도 이미 초조 같은 것은 잊고 두 사람의 입에서 비롯되는 논검에 흠뻑 빠져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수파축류(隨波逐流)의 보법으로 일 장을 솟아 나가오! 동시에 사주칠성(斜走七星)의 검식에다 봉황삼점두(鳳凰三點頭)의 수법으로 양쪽 눈을 노리오!" "좋구나! 대력천근추(大力千斤鎚)로 급히 몸을 기울이오! 활분음양(劃分陰陽)이 허리를 베어 가오이다!" 두 사람의 초식은 이미 백여 초를 넘기고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대결이었다. "이보 후퇴 연후 금강서벽(金剛舒壁)!" "맞받아치고! 만성만화(滿城萬花)!" "타앗! 중궁(中宮)으로 정면대결이오. 천하도괘(天河倒卦)!" "여전히 피할 수 없다. 개창망월(開窓望月)! 안에는 구소오악(九掃五嶽)이 갈무리되어 있소!" 순간 백리천의 몸이 흠칫했다. '개창망월?' 자신의 천하도괘가 상대의 가슴 기문혈(奇門穴)을 노려가고 있으니 상대에게서는 응당 맞받아치는 수나 피하는 수가 나와야 했다. 한데 엉뚱하게도 달을 우러러 창을 연다는, 즉 하늘을 향해 두 팔끝 릿잔개창망월의 초식이 나온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가슴이 텅 비어 자신의 천하도괘는 그의 기문혈을 강타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개를 갸우뚱하던 백리천의 얼굴이 급변했다. '오오……!' 그들은 지금 논검을 하고 있지만 진검승부라면 검에는 길이가 있다 그 검이 가슴 위를 향해 뻗어나가면 필시 자신의 천하도괘는 위세棨 謀舊堞못하고 주춤하게 된다. 그때 개창망월 속에 숨은 구소오악의 수법이 자신의 머리를 쓸어오 된다면……? '피할 수 없다! 멈칫하는 순간, 내 몸은 기울게 되고 기운 몸을 회복하는 동안 상대의 검은 이미 내 머리를 가르고 있을 것이다.' 백분지 일의 승부가 나는 것이 고수의 겨룸일진저, 비록 그것이 찰나를 스쳐 가는 수유(須臾)의 짧은 순간이라 해도 목숨과 결부되는 것이 아닌가. 거듭 안색이 변해가던 백리천은 다음 순간 땅이 꺼질 듯한 장탄식 尻芟홱裏 "훌륭한 수였소. 졌소……." 순간 장내의 한쪽에서 터질 듯한 일성이 쏟아져 나왔다. "해냈다!" 연비 등이 일제히 터뜨린 함성이었다. 하나 군웅들은 아직도 백리천이 왜 졌는지 그 영문을 모르는 사람 태반이었다. 그러나 귀에서 귀로, 패인(敗因)이 전해지고 전해져 한두 사람씩 고개가 끄덕여지는가 싶더니, 그 이후로는 장내가 떠내려갈 듯한 환호성이 전 군웅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훌륭하다!" "최고다!" "와아……!" 난난은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사방을 향해 가벼운 포권지례를 취해 보이고는 웅크려 앉은 백리천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백리도우가 양보해 주신 덕이오." 백리천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심오한 검학(劍學)이었소. 정말 탄복했소, 운도우." "헛허……." 눈[雪]이 내린다. 이로써 사십오 일간 화려하게 벌어졌던 대검회의 막도 내려지는가? 팔대고수의 선포식에 이어 화려하게 벌어진 소림승의 군무(群舞)와 색 무희(舞姬)들의 쌍검무(雙劍舞)에 이어, 연무장에서는 종회(終퉤 旻璿求잔대연회가 푸짐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핫하……." "으핫하……." 내리는 눈도 멈추었고 연무장에 앉아 술잔을 부딪치는 군웅들의 호기가 자욱이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 * *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요, 난난 소저?" 깊고깊은 계곡. 벌거벗은 괴목(魅木)은 하늘을 덮었고 땅에는 허리까지 빠져드는 눈이 잔뜩 쌓인 오지(奧地)였다. 삭풍의 계절이라 나뭇잎 하나 찾아볼 수 없건만 얼키고 설킨 덩쿨만으로도 이미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일신에 각각 백의와 홍의를 걸친 두 명의 미소녀. 백의소녀는 태연히 뒷짐을 진 자세로 구름 위를 걷기라도 하듯 미끄러져 나갔지만, 홍의소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홍의소녀의 등에는 축 늘어진 사람 하나가 단단히 동여매어진 채 업혀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난난과 화독 혜혜였다. 한데 무슨 일인가? 이들은 무슨 일로 이 오지까지 함께 온 것이란 말인가? "힘들어요, 혜혜? 그러게 내가 그분을 업겠다고 했잖아요?"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는 난난의 태도에 혜혜는 말없이 웃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업겠어요. 저는 이분의 시녀입니다. 마땅히 제 업어야 해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우리는 운룡 오라버니를 반드시 사흘 후까지 다시 원래 자리에 데려다 놓아야만 해요. 그것도 멀쩡한 몸으로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아니라면 이 하늘 아래 그런 능력을 지닌 곳이란 아무 데도 없어요." "도대체 그곳이 어딘가요, 소저?" "신녀궁(神女宮)." 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길이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가지를 치고 나가는 곳이 곧 길이었으며, 난난이 한 번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나뭇가지들은 누가 쳐주기라도 한 듯 저절로 부러져 나가곤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눈앞이 뻥 뚫리는가 싶더니 지금까지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방대한 숲이 사라지고 아득한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 속의 또 계곡. 혜혜는 계곡 밑을 힐끗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놀란 빛을 떠올렸다. 아스라한 운무(雲霧)만이 용트림하듯 감돌고 있을 뿐, 계곡의 끝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다 왔어요. 바로 이 아래예요. 워낙 사람을 싫어하는 괴팍한 여자들이라 이런 외딴 곳에 살아요." 난난의 입에서 웃음띤 목소리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돌연 혜혜는 자신의 몸이 무엇인가에 이끌려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급히 시선을 들어 바라보니 난난은 담담한 웃음을 띤 채 우수(右手)을 약간 높이 들었을 뿐인데, 그녀와 자신은 어느새 허공혤 蘭垈떠서 서서히 밑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이었다. '십사계파의 무예는 정말 끝이 없구나. 내 무예를 이 소녀에게 비한다면 그야말로 보름달에 반딧불을 비교하는 격이 될 것이다.' 혜혜의 가슴이 감탄으로 범벅이 되는 사이 자욱한 운무가 그녀의 몸을 휘감아 왔다. 찬바람은 섬세한 몸을 얼릴 듯 불어왔고, 계곡 밑바닥에서는 모골숯 謗�컸洑求� 괴음(怪音)이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웅―웅― 위에서 짐작했던 대로 과연 계곡은 깊고도 깊었다. 마치 이대로 계속가면 염왕의 유부(幽府)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일각, 또 일각. 그때 돌연, 혜혜의 귓전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굉음이 파고 들어왔다. 콰콰콰― 처음엔 미세하게 들렸으나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해지고 분명해지는 소리는……. '물소리!' 그렇다. 그것은 놀랍게도 물소리였다. 아니, 거대한 물줄기가 무엇인가에 부딪히는 소리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 되리라. 혜혜는 돌연 섬뜩한 물방울들이 자신의 얼굴에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바로 눈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했던 운무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언뜻 시야에 들어온 광경! 콰콰콰― 쿠쿠쿵! 오오…… 거대한 폭포. 그렇다. 아득한 곳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그 물줄기는 바로 폭포모 틈璣 혜혜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지하로 삼백여 장(丈)은 충분히 내려왔으리라 짐작했더니, 그 아혤 肩링殷장엄한 폭포가 있을 줄이야…….' 계곡의 밑바닥은 그 색깔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무튀튀한 연못이었다. '거대한 폭포가 이렇듯 쉴새없이 퍼부어 내리고 있는데도 수면의 양은 조금도 불어나지 않고 있으니…… 저 많은 물들이 다 어디로 가 것일까?' 혜혜의 의문이 채 다 가시기도 전에, 돌연 난난의 입에서 한소리 청아한 교갈이 터져나왔다. "하앗!" 순간 혜혜는 자신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기라도 한 듯 정신없이 앞으로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으로는 장엄한 폭포 줄기가 화살처럼 쏘아져 다가왔다. 혜혜는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등의 운룡을 추스려 업었다. 촤악― 쿠당탕! 도대체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신법을 펼친다고 펼쳤는데도 워낙 폭포의 압력이 거세어 혜혜는 나뒹굴고 말았다. 그녀는 엉덩이에 둔한 통증을 느끼고는 부르르 몸을 떨며 눈을 떴 폭포의 뒤, 그곳은 놀랍게도 하나의 거대한 동굴이었다. 혜혜는 이 신기한 일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다가 어느새 저만큼 걸어가고 있는 난난을 발견하고는 급히 그 뒤를 따라 줄달음질쳤다. 바로 그때, 돌연 한소리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정지!" 외침과 더불어 두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동굴의 아득한 천장으로부 바람처럼 날아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17. 風雲前初 푸드덕― 새인가? 아니, 새라고 보기에는 너무 크다. 거기다가 이 괴상한 물건은 분명히 정지라고 말을 하지 않았던가? 어둑한 주위였는지라 시선을 돋구어 그들을 올려다보던 혜혜는 순뇟 『　湮경악성을 입 밖으로 흘리고 말았다. "저건……?" 그들은 분명 사람이었다. 그것도 탄력있는 몸매를 두 장의 천조각으로만 슬쩍 가린 미모의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은 양쪽 팔에 거대한 학우(鶴羽)를 달고 있었는데, 그것을 휘저어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고 있었던 것이다. 잘록한 허리에는 한 자루 단검을 찼고, 어깨 너머로는 검은 오목(烏木)의 탄궁(彈弓)이 걸려 있었다. 푸드덕― 쉴새없이 저어지는 날개 너머로 아득한 동굴 천장에 새겨진 거대한 전자체(篆字體)의 글씨가 빠르게 혜혜의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치炘 <神女宮―擅入本宮者死 신녀궁―함부로 본 궁에 들어오는 자는 죽는다.> 독(毒)을 묻혔는지 파릇한 남색광채로 빛나는 화살이 난난과 혜혜혤 銖鷺겨누어지고 있었다. "당신들은 누군가? 더 이상 움직이면 쏘겠다." 이때 앞서 걷던 난난이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웃으며 말했다. "대대(垈垈), 연연(燕燕), 몇 달 못 봤다고 이러기야?" 조녀(鳥女)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 중 한 조녀가 우수에 들고 있던 투명한 구슬을 밑을 향해 비추었다. 이어 아래에 서 있던 난난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자 그녀들은 놀람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난난 소저! 난난 소저로군요!" "후훗…… 잘들 있었어?" "오오…… 어서 오세요. 급히 궁주님께 전갈하겠어요!" 대화로 보아 이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푸드덕― 조녀들이 급히 동굴 저편으로 사라지자 난난은 혜혜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동굴은 매우 방대하고 큰 규모였지만 이내 끝났다. 하나의 모퉁이를 돌고 나자 찬란한 광채가 눈부시게 쏘아져 들어왔다. 어느새 동굴은 끝나 있었고, 그 밖은 놀랍게도 믿을 수 없을 정도혤 틘㎢牟湮별유천지(別有天地)가 아닌가? 보라! 분명히 겨울인데도 이곳의 날씨는 봄날처럼 훈훈했다. 사방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단애로 둘러싸여 있으나 햇살은 마냥 따사롭기만 했다. 사방 일 마장 정도의 거대한 분지는 온통 향기 만발하는 기화요초(奇花妖草)로 뒤덮여 있었다. 뿐인가? 정결하고 아름다운 수목 사이로는 드문드문 그림 같은 누각들이 서 있었고, 그 사이로는 맑은 벽수 시냇물이요, 수백 그루퐈 女すグ 더불어 만들어내는 음영(陰影)이 그야말로 황홀한 조화를 빚어내는 것이었다. 도화유수향연거(桃花流水香然去)에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시구는 정녕 이곳을 위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앞서 걷던 난난이 한 곳을 가리켜 보이며 배시시 웃었다. "바로 저곳이에요." 그녀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정교한 조각과 문양이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전각(展閣) 한 채가 우뚝 서 있었다. * * * "이게 도대체 누구냐? 나는 또 난난이 네가 이곳을 아주 잊어버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 중년미부(中年美婦). 혜혜는 이토록 아름다운 중년미부는 처음 보는 듯했다. 일신에 귀금속이며 보석류를 하나도 달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마치 황금처럼 빛나 보였고, 마치 백옥(白玉)을 다듬어 만든 듯 투명한 얼굴에는 일종의 성스러움마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일신에 은의(銀衣) 치마저고리를 걸친 그녀는 앞에 서 있는 난난을 매우 다정스럽게 포옹해 왔다. 하나 난난은 몸을 가볍게 비틀어 그녀의 품을 벗어나며 혀를 날름괌 맙눼裏 "지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런 오지를 누가 자주 와요?" 앙증맞도록 귀여운 그 모습에 중년미부는 싱긋 웃었다. "그런 소리 마라, 얘. 극락쪽이 아무래도 기후는 좋을 것 같지만 지옥에는 친구가 많이 있단 말이야. 호호호……." 흐드러지게 웃는 웃음 뒤로, 마치 의수(醫手)의 방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많은 약합이며 약탕, 그리고 의학서적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방을 거의 메우다시피 하고 있었으며, 한줄기 그윽한 단향이 온 방안을 자욱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한 것들을 혜혜가 유심히 살피고 있을 때, 그제서야 혜혜와 그 등에 업힌 사람의 존재를 의식한 중년미부가 의아한 표정과 함께 난난에게 물었다. "저 등에 업힌 아름다운 소년은 누구인가?" 마치 그런 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난난은 웃으며 고개혤 隻熾눼裏 "그렇잖아도 아줌마와 의논할 것이 있어서 왔어요. 저 사람을 좀 봐주세요." 그녀의 눈짓에 따라 혜혜는 얼른 등에 업고 있던 운룡을 풀어 안았다. 이어 푹신한 융단이 깔린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중년미부는 의아한 표정으로 운룡의 옆으로 다가와 쭈그리고 앉았瞼 柳石잔우선 그의 눈까풀을 가볍게 밀어젖혀 본 후, 흰 손으로 그맥을 조용히 짚었다. 그렇게 일다경(一茶頃)쯤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중년미부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 생애에 이렇게 완벽하게 다친 사람은 처음 보는구나. 강한 열양장공(熱陽掌功)에 의해 온몸의 맥이 사분오열되고 내장이 그 자괌 侮毛駭裏 대라신선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난난은 생긋 웃으며 애교스런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어쩌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보기엔 대라신선보 아줌마가 서너 수 위니까요." 중년미부는 피식 웃으며 그런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보아하니 네가 또 무슨 부탁이 있구나?" "후훗……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수모단(水母丹) 두 알과 벽옥척(碧玉尺), 그리고 옥오공(玉蜈蚣)과 성수지(聖水池)예요." 오오…… 수모단! 이는 바로 소림의 대환단, 청조각의 적룡환과 더불어 무림삼대기약(武林三大奇藥)으로 불리는 희대의 신약이 아닌가! 그제서야 혜혜는 눈앞의 이 아름답고 우아한 중년미부가 누구인가쐴 鱇年裏 강호 제일의 신비문파! 그 내력은 수십 겹의 장막에 가려져 있고, 단지 고대(古代)의 화타(華陀)나 편작(扁鵲)을 능가한다는 희대의 의술만이 한줄기 전설처럼 살짝 노출되어 있는 신녀궁(神女宮)이 아니던가. 그녀는 바로 소림의 약왕상인(藥王上人)과 더불어 무림이대신의(武林二大神醫)로 불리는 신비의 신녀궁주 수모(水母) 마야(摩那)였던 것이다. 한편, 수모 마야는 난난의 말에 무척이나 놀란 것 같았다. "수모단에 벽옥척과 성수지라고……? 얘야, 너는 그것이 본 궁이 가지고 있는 밑천의 전부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좀 과장된 말씀이긴 하지만 거의 비슷하다곤 생각해요." "그런데도 그것을 한꺼번에……? 너는 나의 불의육규(不醫六規)를 알고 있지 않느냐?" 이번에는 혜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모 마야의 불의육규! ―의(義)롭지 않은 자는 고치지 않는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자는 고치지 않는다. 무례한 자는 고치지 않는다. 남자는 고치지 않는다. 무인(武人)은 고치지 않는다. 신녀오보(神女五寶)의 한 가지 이상은 사용하지 않는다. 신녀오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수모단, 벽옥척, 옥오공, 성수지에 그녀가 소장하고 있는 십만구천 종(種)의 약초(藥草)를 종합한 이름이다. 또한 그녀는 이 엉뚱한 불의육규에 의하여 오묘한 의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단 두 차례의 진료만 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라. 무인도 고치지 않고 남자도 고치지 않으며 그것이 설 여자라 해도 무례하거나 의롭지 않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고치지 않는다니, 이런 괴이한 규칙에 합당한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있겠는퉤炘 그런데도 난난은 또다시 배시시 웃었다. "물론 불의육규를 제가 모를 리 없지요. 그러나 아줌마도 모르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저기 누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나요?" 난난이 가리키는 운룡을 힐끗 바라보고 난 수모 마야는 아미를 살퉤 脊琉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대체 그가 누구냐? 네 정인(情人)이냐? 아니지. 너처럼 괴팍한 아이가 남자를 사귈 리도 없고…… 어쨌든 네 남편이라 해도 안 된다 황제의 아들이라고 해도 안 돼. 너라면 몰라도." 난난의 얼굴에 한줄기 신비로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물론 제 정인이 아니에요. 다만 그는 만룡가의 적통후계자예요." 그러자 수모 마야는 옥용에 한줄기 의아한 표정을 피워 올렸다. "적통후계자……? 그럴 리가. 도남강, 용헌위에게는 후대(後代)가 없다. 위경경에게도 네가 태어났을 뿐, 그런데 무슨……?" "아줌마! 왜 한 사람은 빼지요?" 한 사람. 순간 잔잔하던 수모 마야의 얼굴에 한줄기 격렬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얼마나 놀랐던지 섬연한 교구를 부르르 떨며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설마……?" "후훗…… 그는 바로 화천상, 화백부의 아들이에요." * * * 혜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화천상. 그녀는 이 말 한 마디가 그렇게 큰 위력을 발휘하리라곤 비단 생각 못했을 뿐 아니라 상상해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 화천상이라는 한 마디 말은 아예 신녀궁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땡땡땡― 수모 마야 휘하의 십대의수(十大醫手)를 긴급소집하는 타종(打鍾)끝 瑛㎎涇자욱하게 울려 퍼졌다., "성수지 주변을 깨끗이 정돈하라!" "물, 물을 데워라!" "약전시녀(藥殿侍女)들은 모조리 긴급대기하라!" 그리고 크고 작은 통을 들고 이리저리 부산하게 뛰어다니는 시녀들 모습이며,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조녀(鳥女)들의 모습도 보였다. 어쨌거나, 그로부터 채 반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운룡의 몸은 분지 서쪽의 아득한 절벽 중턱에 위치한, 신비로운 광채가 일렁이는 한 개 연못 앞으로 옮겨졌다. 성수지(聖水池). 이곳의 지형은 참으로 기이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있는 화강함으로 만든 돌계단을 일천 개나 올라온 위치에, 밑에서 볼 때는 보이지 않는 너비 십여 평의 연못이 있었다. 좌우에는 기이한 빛으로 이글거리는 연록(軟綠)의 옥석(玉石)이 매끈한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연못의 깊이는 겨우 무릎에서 찰랑이는 정도였다. 한데 한가지 놀라운 것은 물의 색깔이 마치 타오르는 듯한 붉은빛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손이라도 담그면 붉은 물이라도 묻어날 듯, 이 혈수(血水)주위의 녹옥(綠玉)과 매우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성수지(聖水池)…… 계곡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연못…… 곤옥지정(崑玉之精)의 영향을 받아 천하에서 가장 깨끗하고 신령한 甄裏 이 물은 그냥 볼 땐 온도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온도사람의 살이 델 정도로 높다. 범인이라면 일신에 난 부스럼 정도는 쐴 걀 닿기만 해도 없어지고 만다. 혜혜 소저, 견딜 만한가?" 혜혜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일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이었다. 연못 속에 정좌하고 앉은 자세인지라 물은 그녀의 허리 어림까지 차오르고 있었는데, 물 속의 살은 뜨거운 열기로 벌써 벌겋게 익어 오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무릎 위에는 역시 벌거벗은 알몸의 운룡이 꼿꼿이 안묀 羚駭裏 두 곳의 마혈을 짚인 그의 몸은 마치 뻣뻣한 통나무처럼 굳어 있었다. 또한, 이 두 사람의 주위로는 다시 열두 사람이 연못을 빙 둘러앉퉤 羚駭裏 혜혜와 운룡의 정면으로는 수모 마야와 난난이 앉았다. 그리고 그 주위로 둥근 원을 그린 사람은 하나같이 흰 백의에 녹색 띠를 두른 열 명의 미소녀였다. 맨몸으로 알몸인 사내를 안고 있는다는 것은 순결한 소녀에게는 일 수치스럽기도 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여 혜혜는 그런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 수모 마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일수(一水), 천룡금침요해(天龍金針要解)의 준비를 하라." 열 명의 백의미소녀 중 가장 좌측의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한쪽에 놓인 높이 두 자 가량의 금합을 열었다. 이어 그 속에서 열두 개의 작은 금낭을 꺼내어 성수지 주위로 둘러앉은 십이 인(十二人)의 앞에 일일이 돌린 후, 다시 세 종류의 물건을 더 꺼내어 들었다. 밝은 서벽(瑞碧)의 광채가 일렁이는 막대기 하나와 투명한 백광을 爭뺨잔오공(蜈蚣)의 모습을 한 옥돌 하나, 그리고 검고 붉은 밀랍 환단이 두 개였다. 일수라 불린 미소녀는 그 중 벽옥척과 옥오공을 성수지 속에 담갔찼炘 순간 치치직! 하는 기음과 함께 벽옥척은 물을 가르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또한 옥오공은 둥둥 뜬 채 입으로 뿌연 백연(白煙)을 뿜기 시작했 검고 붉은 두 개의 환단은 밀랍이 풀리자마자 그윽한 초향(草香)을 사방으로 풍겨냈다. 크기는 어른 엄지손가락 정도였고 맑은 묵혈(墨血)의 광채 속에 사람의 눈동자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수모단(水母丹). 붉은 것은 양단(陽丹)이니 운룡의 입에 물리고, 검은 것은 음단(陰丹)이니 혜혜가 입술 사이에 물었다. 청결한 기운이 금방 온몸으로 싸하니 번지는 것 같았다. "천하에서 가장 신령하고 성음(聖陰)한 물에 은밀한 처녀의 슷ㅁ雪純陰精氣)가 번진다. 음단은 그러한 기운을 북돋우고, 벽옥 물에 데인 살을 보호하며 옥오공은 체내의 불순물을 연기로써 씻어내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음(陰)의 성분을 지닌 물질이니 운룡의 뷰陽體)는 하늘 아래 가장 완벽한 음체(陰體) 소에 잠겼다 할 것퉤 訣 금침요해를 시술한다!" 순간 연못 주위의 십이 인(十二人)은 일제히 앞에 놓인 금낭을 풀었다. 그 안에선 길이 두 치 가량의, 백흑황홍주자취녹남청회비(白黑黃紅朱紫翠綠藍靑灰翡) 등의 각기 다열두 색으로 빛나는 금침(金針)이 나왔다. 한 사람 앞에 백오십 개씩이니 도합 일천팔백 개의 숫자였다. 부글부글― 옥오공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연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연못 속의 운룡과 혜혜는 이제 간신히 그 신형만이 보일락말락할 뿐이었다. 수모 마야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자신의 앞에 놓인 백색침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눈가로 한줄기 긴장된 빛이 피어올랐다. 신녀궁이 생긴 이래로 이것은 최대의 시술이었고, 희미하게 보일 뿐인 운룡의 몸에다 이제 일천팔백 개의 금침을 꽂아야 했다. 제각기 꽂는 부위도 틀릴 뿐 아니라 그 깊이도 틀려야만 했다. 공력이 딸리는 의수(醫手)를 위해 절벽 아래에는 팔십 명의 예비의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수모 마야는 천천히 우수를 치켜들었다. '일천팔백 개의 침 중 단 하나라도 잘못 꽂힌다면 시술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반드시 너를 고쳐 주마……." 휘익! 돌연 그녀의 손끝으로부터 예리한 파공음을 일으키며 하나의 금침운무 속의 운룡을 향해 솟구쳐 날아갔다. 늙은 나에게도 빛나는 보랏빛 계절이 있었다. 한 남자를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이 그토록 황홀한 것임을 알게 었으며, 신(神)께서 그 남자를 통해 내게 얘기하고 당부하고 타이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내 심장은 그로 인하여 갈기갈기 찢겨졌으나……. 그가 다른 여자의 품에 안겨 떠났을 때에도, 그가 스스로 삶을 포영원히 다른 세상을 택했을 때에도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아니했다. 내 삶 중에 진실로 환하고 아름다운 날은 그때 그날 하루가 아니었 이제 그는 가고, 그의 분신(分身)이 나의 앞에 나타났구나. 아이야……. 내 삶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너를 구하고야 말겠다. 반드시 고쳐 주겠다. * * * 운룡은 눈을 떴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이곳이 어딜까? 그래, 나는…… 사부님을 방으로 넣어드리고…… 그리고 갑자기 힘이 빠졌는데…….' 제일 먼저 천장의 예쁜 화각(花刻)이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누운 곳은 매우 편안하고 푹신한 침상이었고, 그윽한 향기와 더불煉 ㎉樽주위의 부용장(芙蓉帳)이 눈에 낯설었다. 이곳은 분명히 그의 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운연이나 예소벽의 방도 아니었다. 운룡은 누운 채 천천히 팔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몸이 가뿐하고 힘이 솟구쳤다. 기이하리만큼 쾌적한 기분이었다. 운룡은 무심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돌연 그의 입에서 한소리 놀람에 찬 외침이 터져나왔다. "악!" 보라! 그는 단순히 그저 몸을 일으킨다는 기분이었는데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몸이 허공으로 슈욱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쿠당탕! 천장의 화각에 정면으로 머리를 부딪힌 것이다. 운룡은 부딪힌 머리가 아프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밑으로 내려서는 그의 몸은 마치 새털인 양 가볍고 가뿐했다. 신법을 일으키지 않은 상태인데도 먼지가 내려앉듯 미음(微音)조차 일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제서야 그는 몸 속에 용솟음치는 엄청난 진력(眞力)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것으로써 그저 손만 뻗어도 장력이 솟구쳐 나갈 듯했다. 필시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내력진보가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얼떨떨했다. 촤르르― 돌연 방 한쪽의 주박(珠箔)이 걷혀 오르는가 싶더니 한 명의 백의소녀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약탕관을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무심히 방을 둘러보다가 한쪽의 운룡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 표정을 지었다. "깨어나셨군요." 소녀는 뒷말을 이을 겨를도 없다는 듯 황급히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나갔다. "깨어나셨어요! 운대협이 깨어나셨어요." '제기랄! 그럼 뭐 언제는 정신을 잃고 있기라도 했던가?' 운룡은 쩝쩝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방주인의 높은 안목을 여실히 나타내는 수준높은 구조였다. 그 중에서도 정면의 벽에 걸린 사람키만한 화폭 하나가 가장 시선숯 騙駭裏 단아한 인상의 중년수사 한 사람이 뒷짐을 진 채 먼 산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발 아래는 구름이 감도는 낭떠러지였다. 중년수사는 그냥 서 있을 뿐인데도 일신에서 뿜어져 오르는 기개가 능히 산악을 삼킬 듯했다. "잘 그린 그림이로군." 왠지 낯익어 보이는 그림이기도 했다. 수사의 얼굴은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지만 운룡은 그가 매우 친밀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림의 옆에는 한 수의 장시(長詩)가 날아갈 듯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태산(泰山) 산마루에, 남루한 삶을 걸치고, 구도(求道)의 일념(一念)으로 꿈을 캐는 사나이가 있었소. 비탈진 구릉을 넘고, 가시밭 험한 길 헤치며, 오르는 하루 영겁(永劫) 길…… 주문처럼 외는 간절한 소망의 비애(悲哀)여…… 한 자루 보검, 옆에 차고, 비바람 천둥 속을…… 찢긴 살결 드러내 놓고, 전생(全生)을 하늘에 거는, 이 집념(執念)의 의지여, 삼업(三業)을 물에 갉아…… 청천장공(靑天長空)에 남아의 혼(魂)을 실으니…… 아아…… 이 구도의 일념이 정녕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차마 못다 걸어 산마루에 망천석(望天石)되어 남아도, 그 사나이 혼(魂)은, 가시밭 정기(精氣) 속을…… 그렇게 걷게 하소서……. 무엇일까? 시를 읽어 나가는 동안 운룡은 문득 한줄기 더운 피가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빨을 악다물고 있었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후훗……." 돌연 나직한 웃음소리 하나가 운룡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운룡은 소스라칠 듯 놀라 빙글 몸을 돌렸다. 세 사람. 화독 혜혜 외엔 모두 낯설었다. 백의를 걸친 아름답고 우아한 미부 한 사람과 작은 선녀(仙女)처럼 귀엽고 늘씬한 미소녀 하나. 그러나 운룡은 화독 혜혜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운룡이 얼떨떨하여 서 있자 중년미부가 우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핏줄은 속일 수가 없구나. 그가 쓴 장천시(長天詩)에 저렇듯 넋을 잃고 있으니……." 운룡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나는 왜 여기에 있소? 이곳은 어디요?"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질문들. 중년미부는 얼굴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귀 공은 우선 자리에 앉으세요. 차근차근 얘기해 드리겠소." 일행이 방 한쪽의 탁자에 둘러앉자 두 명의 백의소녀가 약간의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백반을 쑤어만든 죽과 미음처럼 흐물흐물하게 흐트러뜨린 생선죽이었다. "귀 공은 몹시 오랫동안 굶고 있었으니 그것으로 일단 요기를 하도 하시오." "하지만 나는 궁금증을 풀지 않고는 이것들을 먹을 수 없소이다." 세 미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더니 중년미부의 눈짓 따라 화독 혜혜가 입을 열었다. "일의 순서는 이렇게 된 것이지요." 그녀는 이어 운룡이 쓰러지고 난 다음 주종관계를 자처하여 찾아온 자신과 오빠의 얘기부터 시작해서 소녀 난난에게 구원을 청했던 얘기 난난이 대신 비무에 참가하여 팔대고수의 대열을 따냈으며, 이곳 신녀궁으로 와 신녀오보를 써서 그를 구한 얘기 등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그 와중에 과다한 진기소모로 쓰러진 소녀의 수가 열일곱 명이며 궁주와 난난 등도 탈진직전에 이르렀다가 이제야 간신히 기력을 회복 얘기 등을 차근차근 풀어 나갔다. 하나 그녀는 자신이 알몸으로 그를 안고 있었다는 얘기는 빼놓았다 "이제 주인님은 빨리 성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곳에선 지금쯤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거예요." 긴 얘기가 끝나고 나자 운룡은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도저히 정상인의 사고로선 생각조차 미치기 어려운 꿈 같은 얘기들 아닌가? 그러나 자신의 몸에 갑자기 생긴 놀라운 진력이며 혜혜의 표정으로 보아 그는 이 일이 꾸며낸 것이 아님을 짐작했다. 순간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세 미녀를 향해 일일이 정중煉 뭏 올렸다. "하찮은 필부를 위해 이토록 애정을 아끼지 않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오. 한데…… 난난 소저와 궁주께서는 왜 소생징 肩링殷각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수모 마야와 난난은 서로를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수모 마야가 인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귀 공은 저 장천시의 아래에 새겨진 낙관(落款)을 보시었소?" 낙관은 보통 작은 글씨로 하는 것이다. 운룡은 자신이 미처 그것을 염두에 두지 못했음을 상기하고는 급히 화폭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붉은 낙관. "화천…… 상……." 마지막 한 글자를 입에 담고 난 운룡은 순간 온몸의 세포가 일시에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화천상(華天上)……." 다음 순간, 그는 폭풍 속의 나무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용수철이 튀어 일어나듯 번쩍 몸을 일으켰다. 그의 뇌리로 한줄기 대화가 섬전처럼 관통해 가고 있었다. ―냉아저씨, 당신은 내 부친을 알고 계시겠지요? ―화천상, 소주의 부친은 화천상이시오. 운룡은 주춤 한 걸음 화폭을 향해 다가섰다. 그의 발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 아아…… 그랬다. 분명히 그랬다. 아버지! 그리고 그분은 이 땅의 영웅이었노라고……. 운룡의 떨리는 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화폭의 중년수사에게로 조심스럽게 뻗어갔다. 마치 세게 만지면 그 그림이 눈앞에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당신…… 바로 당신이십니까?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해 더욱 그리운 그 이름…… 내 아버지가 바로 당신이십니까?' 무엇인가 한줄기 위대한 감정의 광채가 온몸의 혈관을 치달아 가고 있었다. 다음 순간 운룡은 미친 듯이 화폭을 떼어내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 "아버지……." 처음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미세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내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 처절한 한소리 외침이 그의 메마른 입술을 뚫고 터져나왔다. "아버지!" 그 얼마나 사무치는 이름이었으랴. 난난의 동그랗고 초롱한 두 눈엔 어느새 이슬 같은 눈물이 그렁그차 있었고, 혜혜는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수모 마야는 흰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가볍게 찍었다. '대견하게 컸지요. 당신의 아들이에요. 비록 생사의 다른 세계에서 만났다고는 하나 이제 당신도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을 거예요.' 18. 神威 찰랑찰랑― 흐린 파랑이 호변의 갈대밭에 가볍게 부딪히고 있었다. 연비는 묵묵히 그 파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이환명, 엽상의, 묵비향, 수일평, 귀곡 혈기자, 운연, 예소벽 등의 검회칠대고수가 눈에 띄었고, 두자상과 백리천, 혈독 혜공도 있었다. 그들은 갈대가 우거진 호숫가에 제각기 앉거나 선 채로 건너편의 거대한 성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때 문득 한쪽의 초지(草地)에 비스듬히 몸을 눕히고 있던 녹림총수 묵비향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연비쪽으로 시선을 던져왔다. "이보시오, 연대협.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요?" "……." "성(城)에선 도남강 등이 군사를 일으켜 이미 완전히 대권(大權)을 장악했소. 이번 검회를 주최한 위경경 방주마저 그들에게 잡혀 있소. 이건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인지라 우리가 왜 도망을 쳐서 이곳까지 왔어야 하는 건지 최소한 그에 대한 합당한 설명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니오?" 연비는 힐끗 그를 바라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오. 나도 난난 소저가 준 두 개의 두루마리대로 행동했을 뿐이오. 그 하나에는 이곳 혈호를 건너오는 법이 적혀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이곳에 계신 분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소. 그것이 내가 아는 전부이오." "그렇다면 그 난난이라 하는 소녀는 자신의 큰 백부가 이런 일을 벌리리란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소." 묵비향은 가벼운 코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왜 사전에 방어를 못했겠소? 거기다가 또, 이 대봉황천의 최고고수이신 진천노천주께선 어디에 틀어박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오? 나는 그가 아들들의 천역(天逆)보다 더 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스럽소." 그렇다. 이것은 사실 모든 사람들이 가장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는 일이었다. 대봉황천, 무림의 하늘이라 해도 마땅한 이곳에서 감히 반역이 일어나리라고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것은 무림황제 진천우도의 권위에 대한 정식도전이요, 그를 모욕하는 행위였다. 그런데도 대봉황천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그 아들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하루 전까지만 해도 성내 최고의 귀빈이었던 이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이렇게 궁상스럽게 혈호 밖으로 나와 앉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했다. 물론 혈호에는 수없이 많은 매복과 기관이 깔려 있다고 했다. 하나 도남강 등이 언제까지나 그것을 뚫지 못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운명은 어찌되는 걸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요, 풀리지 않는 난제들이 아닐 수 없었다. "제기랄! 이런 걸 두고 날벼락이라는 거지…… 똥줄이 빠져라 팔대고수의 대열에 끼었더니 반역이 일어나 그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어 버린단 말인가?" 그때 돌연 혈호 건너편으로부터 느닷없이 이십여 척의 대선단(大船團)이 나타났다. 호수를 까맣게 덮어버릴 듯한 장엄한 위용이 넘쳐 흘렀다. 순간 두자상이 부르르 몸을 떨며 외쳤다. "아뿔싸! 도남강의 군사다! 드디어 배를 띄우고 말았구나!" * * *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화백부님이 오빠의 친어머니를 만나기 전에 두 사람은 사랑을 했대요." 험한 산길이었는데도 운룡, 난난, 혜혜의 몸은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미끄러지듯 달려나가고 있었다. 운룡과 난난이 나란히 앞서 달리고 있었고 혜혜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한데 운룡의 복장이 매우 특이하다. 그는 이전까지는 도복을 입든 평복을 입든 언제나 촌스럽고 어리숙했다. 그 모습은 언제나 장바닥에 내팽개쳐진 촌닭처럼 어정쩡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견해 보기에도 지금의 그는 과거의 그와는 여러 가지로 달랐다. 우선 검은 현의장포(玄衣長袍)에 같은 색의 묵단화(墨端靴)를 신은 모습이 마치 도회지 귀공자처럼 세련되어 보였다. 허리춤에 달린 팔십 근 한철검과 그 옆에 꽂힌 벽옥척(碧玉尺)이 그 멋을 더하는 듯했다. 뿐인가? 검은 띠로 질끈 동여매고 잘 빗어내린 머리는 칠흑처럼 윤기가 흘렀으며, 그 동안은 봉두난발인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던 햇살 같은 이마와 뚜렷한 눈썹의 윤곽이 돋보였다. 그리고 한 줄기 투명한 광채가 일렁이는 듯한 성목(星目)은 그대로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천상공자(天上公子)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사랑을 할아버님이 반대하셨다는 거예요. 거의 무조건적인 반대였지만 화백부님은 말없이 그분의 말씀을 따르셨다고 해요. 그렇게 헤어진 두 사람은 이후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어 버렸구요." "……!" "사실 저는 신녀궁에 가면서도 마음이 조마조마했어요. 아줌마가 오빠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구요. 한데 그분은 여전히 그 오래 전의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계셨던 거예요. 정말 숭고한 사랑이지 뭐예요?" 난난은 생긋 웃으며 운룡이 입은 옷을 가리켜 보였다. "아줌마는 바느질이 익숙지 않아서 그 옷을 만드는 데에 아마도 열 번은 손가락을 찔렸을 거예요. 그런데도 굳이 시녀들의 도움을 마다하고 혼자 만드신 것만 봐도 그분의 마음을 알 수 있어요." 운룡은 자신이 입은 옷의 우측 소맷자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조그만 글씨로 사랑 애(愛)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운룡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녀는 마치 어머니 같았다.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 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궁을 떠나올 때 산 위까지 따라와 오랫동안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의 그 쓸쓸한 모습이 뇌리에 어른거렸다. '아버지는 운도 좋다…… 그런 분을 만날 수 있었으니…….' 그때 돌연 쉴새없이 재잘거리며 걷던 난난이 그 자리에 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녀의 눈은 놀람으로 자욱이 물든 채 저쪽의 한 산봉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봉화(烽火). 그것은 바로 먼 곳으로 소식을 전할 때 쓰는 둥근 원 모양의 봉화였다. 난난은 그 봉화의 뜻을 알고 있음일까? "기어이…… 일을 저질렀구나……."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돌아다볼 시간도 없다는 듯 휙 신형을 날렸다. "성에 일이 벌어졌어요! 빨리 가요. 오빠!" * * * 둥둥둥― 배에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십 척의 대선단은 호수의 중간쯤에서 멈추어 서 있었다. 거기부터는 수초(水草)와 암초로 온통 어우러진 험한 뱃길이었다. 또한 백팔 종의 무서운 매복이 숨겨져 있는 곳이기도 했다. 두자상은 시선을 돋구어 배쪽을 바라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도남강인가?" 그의 중얼거림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배를 향했다. 대선단 중에서도 최선두에 선, 용각(龍刻)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배. 그 화선(華船)의 선수(船首)에는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지그시 팔짱을 낀 자세로 서 있었으며, 일신에는 금포(金袍)를 걸치고 있었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에 얇고 섬세한 입술 등이 일견해 보기에도 만인지상(萬人之上)의 풍도였다. 한쪽의 무애공자 이환명이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로 도남강 방주요. 그 뒤에 서 있는 선비 차림의 사내가 용헌위 방주이고, 그 좌측이 천룡대라마이오. 도남강 세력의 삼두마차(三頭馬車)이외다." 점창의 수일평이 송충이 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이형은 대봉황천의 핵심인물이었으면서도 저들의 음모를 모르고 있었소?" "부끄럽게도 그렇소이다. 소생은 위경경 방주 및 학천종 대교두와 친분이 있었는지라 저들과 어울릴 수 없었소. 설사 알고 있었다 해도 저들의 힘이 워낙 강대하여 막을 수 없었을 것이오." 이때 중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귀곡 혈기자가 침통한 어조를 흘렸다. "어쨌든 빨리 방도를 세워야 하오. 내가 보기에 혈호의 진세가 비록 훌륭하기는 하나 저들의 능력으로 보아 앞으로 서너 시진 후면 뚫고 들어올 것 같소." 혈기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기관진학(機關陣學)의 명인(名人)이라 그의 말이라면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중인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바로 그때 도남강의 선단쪽에서 몇 척의 소선(小船)이 스르르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앞에는 밧줄, 도끼 등을 든 흑의무사들이 타고 있었으며, 그들은 이내 수초지대와 암초지대로 다가가 무엇인가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 * * 파아앗! 초식인가? 분명히 검으로 펼쳐지고 있으나 마치 유성(流星)이 군락(群落)하는 것 같았다. 흑의인(黑衣人)도 그것을 분명히 보았으나 채 검을 빼들기도 전에 허리가 동강나 쓰러져 갔다. 운룡은 대세를 몰아 나머지 두 흑의인의 목도 허공으로 날려버린 후,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검집에 꽂았다. 난난이 동굴의 입구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빨리!" 그는 휙 몸을 날려 스르르 동혈의 입구로 스며들었다. "벌써 도남강 일파의 세력이 전 산에 쫙 깔려 있군요. 그러나 그들도 이 비밀입구만은 찾지 못했을 거예요. 이건 내가 만든 거니까요." 그러나 운룡의 귀에는 이미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소리! 철커덩― 철컹― 마치 지옥의 습지로부터 울려오는 듯한 무거운 쇠사슬 소리였다. 동굴을 들어서면서부터 이 소리는 운룡의 가슴을 둔중하게 짓밟고 있었다. 마침내 시야가 확 트인 드넓은 공지로 나왔을 때, 무림의 제황이라 불리던 자의 처참한 모습이 운룡의 시선 속으로 제일 먼저 쏘아져 들어왔다. 그는 마치 느닷없이 찬물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사람처럼 호흡을 멈추고 말았다. 한 사람. 그는 이 땅의 지배자요, 하늘이며, 태양으로 우러러 칭송되던 인물이었다. 흰 장포를 드날리며 삼척보검을 쳐들고 중원 십팔만리 대륙을 질타하였고,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명예와 부귀, 권세를 한 손에 장악하여 이제는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던 이 사람 또한 운룡의 모습이 나타나는 순간, 등에 지고 있는 오십만 근 무게의 바위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시선과 시선이 불꽃 튀기듯 허공에서 얽혔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시선들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당신이 나의 할아버지이며……. 네가 나의 손자임을……. 시선의 마주침은 길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제황 진천우도의 창백한 얼굴에 스르르 한줄기 웃음이 번졌다. "네가…… 왔느냐?" 비록 짤막한 말이었으나 그 속에 담긴 것은 천만 마디 말보다도 더욱 짙은 격정의 물결을 일게 했다. 운룡의 두 눈에 찰랑찰랑 이슬이 고였다. 그는 허리춤의 검을 벗어 들고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대례를 올렸다. "삼가 불충손자 운룡이 조부님을 뵈옵니다!" "나의 핏줄이여…… 이리…… 이리 가까이 오라……." 운룡이 주춤 다가서자 진천우도는 인자한 눈길로 그의 모습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아까보다도 훨씬 짙은 웃음이 그 얼굴에 떠올랐다. "너는 나를 닮았구나. 그 코며, 눈매가 나를 닮았어……." "……." "녀석, 그러나 너를 만져줄 이 할아비의 손은 묶여 있구나. 네 아비가 떠날 때는 마음을 묶고 있더니 지금은 또 손을 묶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너를 버렸던 이 할아비를 용서하겠는가? 손자여……." 진천우도는 문득,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던 뜨거운 혈육의 정이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돌이켜 보자면 얼마나 냉정하게 살아온 세월이었던가. 검 한 자루에 삶을 걸고 인생을 의지하며 걸어온 길이었다. 그 황량한 검업(劍業)이 이제 와서 그에게 준 것이 무엇인가? 세 아들 중 하나는 죽었고, 둘은 그에 대해 반역의 기를 쳐들었으며, 자신은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손마저 묶여 있는 신세이거늘…….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피붙이 하나가 버림받았음을 원망치 않고 이렇게 돌아와 준 것이다. 이때 한쪽의 난난이 붉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천진난만하게 종알거렸다. "도대체 무슨 난리가 났다고 두 분은 온통 눈물바다죠? 그것보다도 급하고 급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진천우도는 긴 상념에서 깨어난 듯 번쩍 고개를 쳐들더니 크게 입을 벌려 웃었다. "헛허…… 좋아, 좋아. 그래도 내가 지금껏 살아온 보람이 있구나. 이리 오라. 두 아이들아…… 와서 할아비의 얘기를 들어라." 운룡과 난난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천우도의 앞에 나란히 앉았다. "지금부터 할아비가 하는 얘기를 잘 듣도록 해라." "명심하겠어요, 할아버지." "이 할아비는 이미 알고 있다시피 마공(魔功)을 연마하다 이러한 모습이 되었다. 갈수록 정상인이 되어있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 마성(魔性)이 뱃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 그의 시선이 운룡의 얼굴을 쓰다듬듯 향한다. "이것은 성심마공(聖心魔功)이라 한다. 공령(空靈)을 향하는 길고 어두운 통로라고나 할까…… 너는 금악(金嶽)의 무예를 익히기 전에 반드시 이 성심마공의 단계부터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금악에 숨어있는 가문의 최후비예, 한우월잔영(寒雨月殘影)을 익혀낼 수 없느니라." 난난이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물었다. "한우월잔영, 들은 적이 있어요. 바로 천 년 전의 만룡대사조께서 쓰셨던 세 번째 무기이죠?" "그렇다." "그게 도대체 뭔가요, 할아버지?" "그것은 이 할아비도 모른다. 할아비는 성심마공의 단계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한우월잔영은 너희들의 백부들이 가지고 있는 오대신병(五大神兵)을 모조리 합친 것보다도 더 극강한 위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정말 놀랍고 무서운 일이로군요." "그렇다. 그래서 만룡대사조께서도 그것만은 스스로 억제하여 종내 쓰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난난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다면 그 한우월잔영만 터득한다면 이 년 앞으로 다가온 십사연방천하검회에서도 무적이 될 수 있겠군요?" "그것만은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그 동안 무서운 성취를 보여왔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 문제는……." "문제는요?" 진천우도의 두 눈에서 돌연 한 줄기 섬뜩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천축(天竺) 유가법종(瑜伽法宗)의 제세생불(齊世生佛)을 구심점으로 하여 해외십파가 이 년 후의 검회를 중원침공의 호기(好機)로 삼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 난난과 운룡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런 일이?" "나는 그것을 이미 십 년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원에 남은 삼계파와 연계를 하려 했으나 종내 그 끈이 닿지 않았다." "……!" "사해대검회는 후계자 옹립 외에 삼계파를 일으켜 보려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나…… 개 같은 두 아들놈은 그것을 곡해하여 오히려 나에게 천역의 기를 쳐든 것이다." "……!" 진천우도는 한동안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한줄기 긴 장탄식을 터뜨렸다. "이 모든 것들은 모두 하늘이 정해준 운명일지니…… 이 할아비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너희들에게 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맡기고 마는구나." 파팍! 이때 돌연 진천우도의 얼굴 한쪽으로 선연한 붉은 혈선(血線)이 나타났다. 이는 바로 마인(魔人)이 되려는 최초의 징조인 것이다. 진천우도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운룡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간이 없구나…… 운룡, 일어나서 이 할아비의 몸을 뒤져 보아라." 운룡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진천우도의 품속에서 나온 것은 한 장의 누렇게 바랜 양피지 책자였다. 그 겉면엔 붉은 주사체로 다음과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성심마공(聖心魔功)> "이 책을 너에게 주는 것은 너를 만룡가의 제백일대 가주(第百一代家主)로 봉하고자 함이다." "조부님……." "무릎을 꿇어라, 운룡!" 운룡은 부르르 몸을 떨며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진천우도는 또다시 하늘을 우러렀다. 느닷없이 그의 입으로부터 우렁차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후손 진천우도는 조사(祖師)의 유훈(遺訓)을 기리어 오늘 이 자리에 섰나이다. 그 동안 후손은 조사의 음덕(蔭德)을 입자와 만룡가의 일인으로서 검을 들어 왔거니와 무수한 잘못과 그릇된 행실로써 가문의 명예에 손상을 입힌 바 자못 크다 할진저…… 이에, 눈물로써 엎드려 죄를 고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조사의 위령이시여…… 이제 가문승계의 대업(大業)으로써 죄의 만분지 일이나마 사하고자 하오니 부디 후손의 부덕과 무능력에 힘을 더하여 가문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목소리의 여운이 아직도 공간을 맴도는데 순간, 진천우도의 입으로부터 한 줄기 새파란 불꽃이 솟구쳐 나왔다. 그것은 무엇이라 말할 사이도 없이 엎드려 있는 운룡의 몸 위로 왈칵 뒤집어씌워졌다. 순간 운룡은 극심한 뜨거움이 전신을 강타하는 것을 느끼고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펄쩍 뛰어오르더니 그 자리에 푹 하고 쓰러졌다. 난난은 무심히 진천우도를 바라보다가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할아버지!" 보라! 생생한 중년인의 모습이던 진천우도의 얼굴이 어느새 주름살투성이의 백발노인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바로 일신의 내공을 한 곳에 모아 격체전공(隔體傳功)함으로써 생긴 현상이다. 즉, 진천우도가 일생을 두고 연마한 내공이 한순간에 모조리 운룡의 몸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난난은 미친 듯이 진천우도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옥용을 그 얼굴에다 마구 부벼대는 것이다. "할아버지!" "난난……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다. 운룡은 할 일이 너무 많지 않으냐? 가문을 정리하고 금악의 무예를 찾으며, 새외의 거센 세력을 막아야 하는 책임이 그 한 어깨에 달려 있다. 나는 그에게 힘을 조금 빌려준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할아버지!" 진천우도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운룡의 성취에 너는 반드시 큰 힘이 되도록 해라……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만룡가의 새날이 너희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쿠쿠쿠― 일대거인의 종말을 예감함일까? 돌연 그가 지고 있는 오십만 근 무게의 거암에 미미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뿌지직! 진천우도는 힘을 다해 그의 손녀를 밖으로 밀어냈다. 연후, 빙그레 웃으며 서 있던 그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라…… 어서 가라…… 난난, 할아비는 네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할아버지……." 난난은 운룡의 몸을 느릿하게 안아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선으로 오랫동안 진천우도를 바라보던 그녀는 돌연, 빙글 몸을 돌리더니 미친 듯이 밖을 향해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우르르― 쿠쿠쿵! 거대한 바위가 송두리째 허물어지는 폭음과 일찍이 인간세상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괴이한 마성(魔聲)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크아아아아악!" 쿠쿠쿵― * * * "드디어 그들이 뚫었소!" 한 사람의 놀란 외침에 제각기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십일 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호수 위의 다섯 척의 쾌선. 이 배들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중인들이 있는 쪽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었다. 뱃전에서 번뜩이는 창날이 사뭇 서슬이 시퍼렇다. 녹림총수 묵비향이 챙! 하고 검을 빼들며 연비를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이래도 기다려야 하오?" 연비의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리고 그의 무표정한 회색동공이 말했다. "가고 싶으면 가라!" 듣는 이의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냉막한 어조였다. 묵비향은 흠칫했으나 이내 검날을 비스듬히 일으키며 거세게 말했다. "흐흥! 좋아. 자못 도도한 기세로군." 발작하려는 그를 이환명 등이 달려들어 뜯어말렸다. "참으시오. 참으시오, 묵형! 대사(大事)를 앞두고 집안싸움을 하면 어찌하오?" 가만두지 않겠다느니 어쩌겠다느니 난리법석을 피우는 묵비향쪽을 힐끗 바라보고 난 혈독 혜공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럴 때 생사선(生死船)만 있었더라면……." 바로 그때였다. 돌연 그의 말을 따르기라도 하겠다는 듯 느닷없이 호수의 반대편으로부터 한 척의 배가 쏘아낸 화살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도남강쪽의 쾌선도 빨랐지만 이 배는 더 빨랐다. 그것은 순식간에 중인들과 쾌선의 중간에까지 이르렀다. 배의 모습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위치로 가까워지자 혈독 혜공의 입에서 한소리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생사선?" 그 배는 온통 번쩍거리는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선수는 날아갈 듯한 비사(飛獅)의 형상이요, 선미는 용의 꼬리를 본떠 만든 형상이었다. 그리고 뱃전에 우뚝 서 있는 한 사람을 보라. 금방이라도 불어오는 호풍에 실려 둥실 떠오를 듯 섬연한 몸매의 미녀. 긴 머리를 찰랑이며, 한 자루 기형검(奇形劍)을 허리에 찬 채 오연히 서 있는 그녀는 바로 화독 혜혜가 아닌가? 화독 혜혜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는 다섯 척의 쾌선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돌연 우수를 크게 한차례 휘저었다. 순간 배의 우현으로부터 찢어지는 듯한 폭발성이 터져나왔다. 콰쾅! 동시에 시뻘건 불덩이가 허공을 가로지르는가 싶더니 선두의 쾌선 한 척을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쿠쿠쿵― 콰―쾅! 사방으로 난무하는 나무판자조각과 걸레짝처럼 퉁겨져 나가는 찢겨진 육체들. "아악!" "크악!" "잘한다!" 혈독 혜공은 주먹을 휘두르며 환호를 내질렀다. 중인들은 이 가공할 광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혜형, 방금 그게 도대체 뭐요? 벽력탄도 아니고……." 점창 수일평의 말에 혜공은 껄껄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하하…… 서역(西域)으로 나갔다가 황금 만 냥을 주고 사들인 것이오. 벽력포(霹靂砲)라고 하는 것인데 조그만 야산 하나 정도는 그대로 평지로 만들 수 있소." 말을 잇는 동안에도 다시 세 척의 쾌선이 박살났다. 쿠쿵! 쿠르릉― 꽈앙! 이때 뱃전으로 다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순간 중인들은 놀람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앗! 저 사람은 바로 무불검 운룡이 아닌가?" 연비, 두자상, 운연, 예소벽 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운룡. 선두에 우뚝 선 그는 과연 운룡이었다. 일견해 보기에도 그 신위가 범상치 않았다. "정말 운룡이로군!" 연비와 두자상은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고, 운연과 예소벽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눈물부터 피워 올렸다. 한데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 운룡은 우뚝 선 채로 옷깃을 바람에 드날리며 우수(右手)를 천천히 쳐들었다. 보라. 바람도 없는데 그의 소맷자락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가 싶은 한순간 그의 전신으로부터 솟구쳐 나가는 한 줄기 가공할 경력을! 슈파악― 파아아앗! 물결이 두 갈래로 쫘악 갈라지더니, 이어 믿을 수 없게도 한 채의 배가 송두리째 부서져 나갔다. 쿠쿠쿠― 그 힘은 조금 전의 벽력포에 비해서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쿠쿠쿵! 오히려 더욱 강한 느낌도 있었다. 콰앙!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사람들은 입을 쩍 벌렸다. 백 인은 족히 탈 수 있을 법한 거선(巨船) 한 척이 일개 사람의 장력에 부숴지다니……. 저것이 과연 인간의 힘이란 말인가? 그때 배 위에서는 난난이 웃으며 옆의 혜혜에게 말하고 있었다. "오빠는 완벽해졌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군요." "본래의 백년내력에다가 적룡환, 신녀오보, 할아버지의 공력이 가세하여 가히 무적(無敵)의 경지를 이루었어. 아마도 당금 무림에서 오빠의 내공을 능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혜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운룡의 건장한 뒷등을 향해 감개무량한 시선을 던졌다. 누가 저 사람이 바로 육 개월 전, 타인의 일장에 심장을 맞아 나가떨어지던 그 엉터리 삼류무사라 하겠는가? 그는 당금 무림에서 가장 경이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좋았다. 도남강 등은 그의 이 일장에 가슴이 서늘해진 모양이었다. 다가서던 쾌선단이 일시에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그 틈에 혜혜는 소선을 내려보내 호변에 있던 십일 인을 모조리 배 위로 옮겨 실었다. 이때 운룡이 느닷없이 도남강쪽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들으시오, 대백부(大伯父)!" 가까이 선 사람은 귀를 막고, 호수의 수면이 일시에 출렁거릴 정도로 굉렬한 목소리였다. 하나 도남강은 검미를 깊게 찌푸렸다. "저자가 지금 나를 무어라고 불렀나?" 용헌위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대꾸했다. "대…… 백부라고 했소. 틀림없소." "그가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가?" 운룡의 쩌렁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오고 있었다. "오늘 소질은 그냥 가도록 하겠소! 그러나 나의 조부요, 이 땅의 지배자인 진천우도의 이름을 빌어 말하노니……." 여기까지 말이 이어졌을 때 도남강과 용헌위는 한줄기 불길한 예감이 찌르르 뇌리를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조부……?" "오오…… 그렇다면 혹시 저 아이가……?" "나는 반드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당신들을 응징하겠소! 이는 만룡가 제백일대 가주의 맹세이오." 용헌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틀림없소. 저 아이는 바로 화천상 이형(二兄)의 아들일 것이오. 저 아이는 이미 아버님을 만난 모양이오." 목소리의 여운은 아직도 호수를 쟁쟁하게 감도는데 혜혜의 구령에 따라 생사선은 주르르 그 위를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도저히 배의 속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 배는 이미 도남강 등의 시야로부터 아득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도남강은 묵묵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쫓아가 봐야 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는 안다. 아니, 그것보다도 뱃전에 우뚝 선 채 도도히 팔짱을 끼고 있던 운룡의 모습이 잊혀지질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외팔이 병신에게 안겨 사라진 놈이 어쩌다가 저런 광세(廣世)의 고수가 되어 나타났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적통후계자의 등장이오!" "거기다가 백일대 가주라…… 아버님이 그놈을 승인하셨다는 말인가?" 도남강은 오랫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키다가 돌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성의 모든 고수들을 다 풀어라! 봉황무색오살(鳳凰無色五殺)도 총출동 시켜라!" 자욱이 노을이 번지고 있는 하늘을 힐끗 바라보고 난 그는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추적한다!" * * * 반란! 대봉황천 내의 반란!. "오오…… 그게 정말인가? 이 땅의 하늘인 그곳에서 정말 반란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렇다네, 이 사람아. 도남강, 용헌위가 주축이 되어 단숨에 성(城)의 대권(大權)을 장악했다는 거야." "그럴 리가…… 나는 바로 이레 전에 그곳에서 검회를 구경하고 왔네. 그것은 이를 데 없이 훌륭한 대회였으며 대회가 끝난 후에는 뽑힌 팔대고수를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가 벌어져 일주야(一晝夜)를 흥겹게 놀기도 했단 말인세. 한데 느닷없이 반란이라니……?" "흐흠! 이 일은 사전에 세밀하게 계획되었던 것이라 하네. 도남강 등은 자신의 반대세력인 위경경, 학천종을 주축으로 한 노장계열의 고수들을 약 일 년 전부터 포섭하거나 암살하여 꾸준히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확장해 왔다는 거야." "……!" "한 예로 학천종 십만대교두의 경우에는 그의 측근시녀를 이용하여 무려 일 년간이나 그가 먹는 음식에다 만성독약을 타왔다고 하네. 그 결과 학천종은 이번 반란에서 힘도 못 써보고 단숨에 척살당했다는 거야." "놀라운 일이로군……." "뿐인가? 위경경 방주도 그들에게 붙잡혀 지하뇌옥에 감금되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이 이제 대봉황천은 완전히 도남강의 것이 되었네." "거참, 그렇다면 진천우도 노천주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단 말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실로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네. 혹자는 진천노천주가 무예수련을 위해 폐관(閉關)했다고도 하고, 혹자는 또 이미 그가 독살(毒殺)을 당했을 거라기도 하네. 또 어떤 자는 어디 먼 곳으로 떠나갔다고도 하나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어." "……." "분명한 것은 그분은 이번 반란사건에서 빠졌다는 사실이야." "제기랄! 그럼 검회에서 선발된 팔대고수들은 어찌되는 건가?" "그들은 위경경의 딸인 난난을 중심으로 하여 이미 성을 탈출했다 하네. 향하는 곳은 대막(大漠)에 있다는 전설의 금악(金嶽)인데 도남강은 전력을 다해 그들을 추적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것 참 우습게 되었군." "단, 한가지 특기할 사실은 성을 탈출할 당시 팔대고수의 하나인 무불검 운룡 대협이 보여준 신위(神威)였다고 하네." "그가 무엇을 어쨌단 말인가?" "그는 비단 위험에 빠진 나머지 칠대고수들을 모조리 구했을 뿐 아니라 추적선단의 배 하나를 단 일장으로 박살을 냈다고 하네." "배를……? 그것도 단 일장으로……? 예끼, 설마……." "흐흠! 이건 도남강쪽의 수하 하나가 직접한 말이네. 일장을 뻗으니 온 호수가 진동하고 다음 순간 배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더라고 했네. 호풍에 옷깃을 휘날리며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운룡 대협의 모습은 마치 천신(天神)이 강림한 듯 늠름한 모습이었다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가 바로 십오 년 전 성을 떠났던 화천상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라네." "억! 그렇다면 만룡가의 적통후계자가 아닌가?" "그렇네. 그는 도남강을 향해 반드시 다시 돌아오고 말겠노라 선전포고를 하고는 훌쩍 떠났다는 게야. 이를 두고 운명이요, 숙명이라는 거지…… 화가의 부자(父子)는 이 대(二代)를 이어 그렇게 성을 떠나니 말이야."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도남강과 그의 숙질인 운룡의 관계였다. 진천노천주의 행방이 묘연해진 지금, 과연 만룡가의 적통은 누가 잇게 될 것인가? 일 년 반 뒤로 훌쩍 다가온 십사연방천하검회를 앞두고 중원 제일의 가문인 만룡가는 과연 시간 내에 가문을 정비하여 천하의 강호들과 어깨를 겨누며 싸울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소문과 의문들이 십팔만리 중원대륙을 회오리치고 있는 바로 그 무렵! 아무도 주의해 보지 않았지만, 또 감히 주의해 볼 수도 없었지만 땅의 서쪽 끝에서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까지 솟아 있는 해발 이십칠만 척(尺)의 거봉(巨峯), 성모봉(聖母峯)에선 괴이한 집회 하나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집회는 사실상 중원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엄청난 성격을 지닌 것이기도 했다. 슈슈슈욱― 빛인가? 온통 흰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백설(白雪)의 극지(極地)를 솟아오르는 한 개의 백색 인영! 사방은 온통 만년설(萬年雪)로 뒤덮인 거대한 산봉들이었다. 구름조차 저 아래 아득히 걸린 엄청난 높이인지라, 하늘은 마치 비단처럼 푸르게 펼쳐져 있었고 일광에 반사되는 흰빛은 섬뜩하도록 강렬했다. 아마도 범인이 멋모르고 이곳으로 들어선다면 그는 단숨에 눈이 멀 것이다. 한 줄기 백영이 향하는 곳은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싼 연봉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쐐애애액― 발 아래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의 계곡들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백영은 한 발자국을 내딛는가 싶었는데 봉우리 하나를 그냥 뛰어넘고 있었다. 아아…… 신법이라기엔 너무도 엄청난 희대의 공력이었다. "아미타불……." 그때 돌연 한소리 장중한 불호와 더불어 날아오르는 인영의 앞으로 붉은 그림자가 스스슷 피어올랐다. 마치 순식간에 붉은 담벼락 하나가 생긴 것 같은 그들은 놀랍게도 일신에 붉은 승포를 걸친 라마승들이었다. "오시는 시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순간 희뿌연 빛살이 날던 자리에서 서너 번 도는가 싶더니 장내엔 다시 한 명의 사람이 우뚝 서 있게 되었다. 소녀. 인영은 놀랍게도 한 명의 아름다운 미소녀였다. 나이는 이제 십팔구 세나 되었을까? 일신에는 주위의 눈보다 더욱 흰 백의를 걸쳤는데, 그 용모가 아예 사람의 것이 아니다. 보라! 햇살 아래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늘어뜨려진 검은 수발(秀髮)이며, 그 아래 햇살처럼 밝고 얼음처럼 정교하고 맑은 옥부(玉膚)에 붉디붉은 단순호치(丹脣晧齒)를……. 더욱이 촛불이 일렁이는 듯한 한 쌍의 서글서글한 눈망울과 마주치노라면 누구든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깨끗하게 물들고 마는 듯한 착각을 느낄지니……. 우물(尤物). 마치 천지간의 무슨 우물을 보듯 현란한 모습이 아닌가? 그녀는 수중에 황금으로 살을 하고 기이한 자광(紫光)이 떠도는 능라비단으로 면을 한, 한 자루의 금선(金扇)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무심히 앞을 바라보다 배시시 웃음을 피워 올렸다. "누구신가 했더니 서장의 고수님들이군요. 망망천리 돌아갈 곳이라고는 나무조각 한 조각 없는 설지(雪地)에 그렇듯 완벽히 은신함은 서장밀종(西藏密宗)의 천둔비형술(天遁飛形術)이 아닌가요?" 세 명의 라마승은 제각기 홍색가사의 가슴 어림에 금륜(金輪), 은륜(銀輪), 동륜(銅輪)을 새기고 있었다. 그 중 금륜을 새긴 라마승이 담담하게 웃으며 두 손을 마주잡았다. "아미타불…… 소승은 그 누가 있어 이기어풍(以氣馭風) 잠룡비행(潛龍飛行)의 엄청난 신법을 구사하는가 하였더니 바로 새북(塞北) 진종주(陳宗主)이셨구려. 집회에는 조금 늦으셨소이다." 소녀는 또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봄날 송화가루가 터지는 것 같았다. "각 종주들은 모두 오셨나요?" "이미, 다들 진종주를 기다리고 계시오." "고마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람은 이미 간 곳이 없었다. 라마승들이 황급히 시선을 던지니 흰 백영은 벌써 이백 장 밖을 날고 있었다. 금륜의 라마승이 두 눈에 감탄지색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새북(塞北) 관산장(關山場)의 무예에도 엄청난 진보가 있었구나. 오늘 본 새외십대종주(塞外十大宗主)들은 하나같이 예년에 비해 월등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새북 관산장에다 새외십대종주라면? 오오…… 그렇다면 이들은 바로 전설 속에 나오는 새외십종(塞外十宗)의 고수들이란 말인가? 설마하니 그들이 모조리 회동(會同)을 하였고, 그 장소가 바로 이 근천적지(近天的地) 성모봉이란 말인가? 그것은 모를 일이다. 허공에 번뜩이던 백영은 이내 아득한 점으로 변해 사라졌다. 무심한 월광만이 그 위를 스르르 내려앉고 있을 뿐……. 19. 또 하나의 追跡者 휘이잉― 휘이― 구름이 있을 까닭이 없는 짙푸른 하늘인데도 산정(山頂)엔 그대로 사람을 날려보낼 듯한 강풍(强風)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텅 빈 공간 속에 섬세한 바람결이 새겨지고 있는 것처럼……. 산정의 사방을 다 합한다 해도 스무 자[尺]나 될까? 땅 위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지금 구 인(九人)이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승인(僧人)도 있고 속인도 있으며, 여자도 있고 노인도 있다. 그들은 제각기 틀린 용모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들의 몸에선 모두 하나같이 기이한 서광(瑞光)이 보일 듯 말듯 발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처의 후광(後光)이 바로 이러한 모습일까? 일반적으로 무예가 어느 정도의 경지까지 이르게 되면 기(氣)라는 것이 분출되게 된다. 검을 든 자는 검기(劍氣)요, 살의(殺意)를 품은 자는 살기(殺氣)다. 그리고 그냥 맨몸으로 있는다 해도 앞에 선 자를 무형중에 짓누르는 것이 그 기(氣)라는 것인데, 고대무예를 서술한 마각기(馬角記)라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기(氣)에는 세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육체의 기가 그 첫째고 마음의 기가 그 둘째이며 영혼의 기가 그 셋째이다. 육체의 기란 일신의 단련이 지고하고 오래되어 깊은 연륜을 쌓은 바, 그 힘이 무궁무진하여 어떤 경우를 당하여도 거의 공력의 지연이 없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능히 먹을 것을 먹지 않고 마실 것을 마시지 않고도 범인의 십 배 이상 견딜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된다. 이를 일컬어 조화지기(造化之氣), 즉 조화경(造化境)이라 한다. 마음의 기란 그 심적 수련이 지대하여 인간의 단계를 넘어섰을 때 생긴다. 즉, 마음을 자유자재로 억제하며 얼음처럼 정결하고 자연무심(自然無心)함을 지키게 됨으로써 예(藝)나 술(術)이 아닌 도(道)의 지경에 이르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을 지념지기(止念之氣), 혹은 지념경(止念境)이라 한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른 고수들은 그 몸에서 보일 듯 말듯한 보기(寶氣)가 서리어 뭇사람들을 압도하게 된다. 영혼의 기란 일견 마음의 기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하지만 양기(兩氣)는 사뭇 다르다. 마음의 기가 타의(他意)적인 것이라면 영혼의 기는 자의(自意)적인 것이다. 즉, 마음이 일어나면 그렇게 행하고자 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지고, 마음을 죽이면 다시 행치 않게 되는 경지를 말한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鍾鍾法生) 생멸즉종종법멸(生滅卽鍾鍾法滅)의 이 도리를 공심지기(空心之氣), 또는 공심경(空心境)이라 한다. 이 경지까지 이르면 그의 몸에선 찬연한 보기와 더불어 그윽한 단향(檀香)이 풍기게 된다. 무릇,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이상의 삼기(三氣)이다. 만약 참으로 신비로운 인간이 있어 스스로 인간의 껍질을 벗고 이러한 삼기(三氣)를 넘어서게 되면, 그때의 경지는 무생무아(無生無我) 천지합일(天地合一)의 공령(空靈)이라고 일컫는다. 인간이 아닌 신(神)의 경지를 뜻함이다. 즉, 생각함도 없고 행위하는 것도 없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결국 천하의 연고(緣故)를 느껴[感] 통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 아래 지극히 신명한 자 아니면 그 누가 이러할 수 있으랴! 공령의 기를 접하는 순간부터 그는 인간이라 불릴 수 없게 된다.> 구구절절 설명이 길어지고 말았지만 이 가운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지념의 경지에 이르면 몸에서 보광이 인다는 구결이 바로 그것인데, 지금 산정에 있는 구 인들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니 이는 그들이 지념경에 이른 기의 소유자들이란 이야기가 아닌가?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 땅의 무황 진천우도는 자신의 무예가 조화경에 머무르고 있음을 종내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지념의 경지, 즉 마음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열기 위해 성심마공이란 마공을 익히다 스스로 마인(魔人)이 되어 파멸하고 만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데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이 산정의 구 인은 하나같이 진천우도의 경지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이른 자들인 것이다. 그렇다. 만약 그 어떤 사람이든지 이 구 인이 이렇게 한자리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아마도 입에 거품을 물고 실신이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이 구 인이야말로 사람들의 입과 입에서 오르내리는 전설 속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십파! 천 년을 이어오는 전통의 천외십사종 중 새외십파의 종주급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천축 유가법종(瑜伽法宗)의 제세생불(齊世生佛). 서장 밀종(密宗)의 호리대법왕(狐里大法王). 열하 철혈문(鐵血門)의 독거천근정(獨擧千斤鼎) 철패왕(鐵覇王). 남만 만독성(萬毒城)의 일우독군(一羽毒君). 동영 일월이도류(日月二刀流)의 검귀(劍鬼) 가등옥(加藤玉). 요동 음자촌(陰者村)의 혼제(混帝) 최재봉(崔宰鳳). 대막 광풍사(狂風砂)의 사군(沙君) 향동래(香東來). 서촉 파산파(巴山派)의 수왕조왕(獸王鳥王). 남해 십검지(十劍地)의 검후(劍后) 옥수령(玉秀令). 이 엄청난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경천동지의 모사(謀事)가 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어쨌든 시간은 고요히 흘렀다. 이때 돌연 검푸른 하늘 속에서 홀연 낙엽이 휘날리듯 한 줄기 인영이 유성처럼 떨어져 왔다. 고요한 정적 속에 사뿐히 몸을 내린 이는 백의미소녀 상아선녀(嫦娥仙女) 진진(陳眞)이었다. 천외십사종, 새외십파 중 새북 관산장(關山場)의 제백육대 종주(第百六代宗主)이기도 한 그녀. 그녀가 착지하는 순간 고요히 눈을 감고 있던 구 인 중 가장 상석에 앉은 이가 눈을 번쩍 떴다. 귀밑까지 뻗어내린 백미와 불타듯 짙은 홍의가사에 검은 선삼(禪衫)을 두른 노라마승. 그가 눈을 감고 있을 땐 모르겠더니 눈을 뜨자 가히 사람을 얼릴 듯한 실 같은 안광이 솟구쳐 나왔다. 그의 표정을 알 수 없는 쭈글쭈글한 노안(老顔)에 한줄기 흐릿한 웃음이 번지는가 싶더니, 한소리 장중한 불호가 노승의 메마른 입술을 뚫었다. "아미타불…… 진종주! 늦으셨구려……." 상아선녀 진진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길에 잠시 지체가 있었어요. 용서하기 바래요, 대활불(大活佛)." "아미타불…… 자리에 앉으시오." 그녀가 아홉 번째 서열에 앉고 나자 노라마승 제세생불은 한차례 하늘을 우러러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상의하기 위해서이오." 사람들은 모두 눈을 뜨고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을 이어가는 제세생불을 주시했다. "우리 천외십사종은 아득한 옛날, 십사연방천하검회를 주창한 후, 그에 준하는 단금삼규(斷禁三規)를 정하였소. 이 단금삼규를 관산장 진종주께서 말씀해 보시오." 상아선녀 진진은 맑은 눈망울을 또르르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첫째 단금강호(斷禁江湖), 둘째 단금종무(斷禁宗武), 세째 단금확지(斷禁擴地)예요. 즉, 천외십사종은 검회 이전까지는 강호에 출도하지 않고, 무예를 쓰지 않으며 세력을 넓히지 않는다는 규약이에요." "아미타불…… 그렇소. 한데, 근자에 들어 천외십사종 중에서 공공연히 그러한 규약을 어기는 가문이 나타났소이다." "화북 만룡가를 말씀하시는가요?" "그렇소. 그들은 비단 오십 년 전부터 무림에 출도했을 뿐 아니라 무예를 사용하여 세력을 넓히는 등 단금삼규 전부를 어기고 있소." "……." "노납은 이제 오백사십 일의 기한을 남겨둔 검회에 앞서 이 사실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하오이다. 서장의 법왕께서 말씀을 이어주시오." 서장 밀종은 천외십사종 중 법을 관장하는 일종의 형당(刑當)의 기능을 맡고 있는 곳이었다. 호리대법왕. 아홉 개의 계단 위에 화살표 모양의 흰 머리가 붙어있는 갈색가사의 깡마른 모습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어떤 문파든 단금삼규를 어겼을 때는 즉시 종주총련(宗主總聯)에 정식 회부되오. 연후, 모인 인원의 과반수를 넘는 찬성이 성립되면 즉시 전체의 힘으로 규약을 어긴 문파를 응징하오이다." "아미타불…… 응징방법은?" "대유(大酉) 화사동천(華沙洞天)에 있는 칠악동(七惡洞)에 입동시키오." 칠악동. 순간 중인들의 얼굴이 가볍게 변했다. 도대체 그곳이 어디길래 지념경에 이른 고수들이 이토록 놀란단 말인가? 제세생불은 그런 중인들을 향해 횃불 같은 시선을 던졌다. "노납은 이 일을 정식으로 제종주 앞에 회부시키는 바이오. 그럼 지금부터 선표에 들어가겠소." 그는 말과 함께 한 개의 투명한 옥돌을 꺼냈다. "찬성자는 이 옥돌에 구멍을 뚫어주시오. 현 인원이 십 인이니 육 인 이상이 동의하면 되오이다." 십검지의 옥수령부터 차례가 돌아왔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것을 옆의 상아선녀 진진에게 넘겼다. 진진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옆 사람에게 다시 넘겼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대막, 요동, 동영, 남만, 서촉, 열하, 서장의 순서로 옥돌은 넘겨졌다. 결과는 오(五) 대(對) 사(四). 대막, 요동, 동영, 남만, 서장이 찬성하여 다섯 표요, 남해, 새북, 서촉, 열하가 반대하여 네 표였다. 옥돌은 마지막으로 제세생불에게 넘어왔다. 제세생불은 무거운 표정으로 옥돌에 찍힌 다섯 개의 구멍을 바라보았다. 그가 찍으면 여섯으로써 응징이 성립되고 그가 찍지 않으면 이 안건은 부결되는 것이다. 하나 그는 이내 우수 중지를 들어 옥돌 위에 갖다댔다. 지지직― 한소리 미세한 둔음과 함께 들고 있던 옥돌에 구멍이 뚫렸다. 선표 여섯! 이것은 응징을 뜻함이라……. 제세생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법규에 의하여 만룡가의 후예를 정식으로 응징하……." 그때 돌연 종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해 옥수령이 발딱 고개를 쳐들었다. "잠깐, 본 주는 이 일에 약간의 어패가 있다고 생각해요!" 순간 중인들의 놀란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제세생불. 그는 새외십파의 실질적인 영수(領袖)였다. 그런 그에게 저렇게 당돌한 어투로 말을 하다니……. 하나 제세생불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미타불…… 어떤 점에 있어 그렇다고 생각하시오?" "대활불이 말씀하신 응징의 대상은 어느 한도까지 포함되는 건가요?" "그야…… 만룡가의 진학(眞學)을 익힌 자에 한하는 것이오." "소녀가 알기로는 진천우도는 이미 죽었어요. 그의 아들들은 만룡가의 무학을 오성(五成)도 다 익히지 못했고, 그의 후계자는 이제 막 금악을 향해 출발했어요. 그 중 누구를 칠악동에 입동시킬 생각인가요?" 제세생불은 말이 막혔다. 규약에서는 오성 이상의 무예수준에 이른 자만을 종주로 인정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그녀의 말대로라면 지금 만룡가에는 아무도 해당자가 없는 것이다. "아미타불…… 그건……." "실상 그 안에 해당자가 있다고 해도 오늘의 득표는 문제가 있어요." "……!" "천외십사종 중 새외십파만이 이 집회에 참석했을 뿐, 만룡가를 비롯한 중원의 한북(漢北), 화남(華南), 중주(中州)의 종주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어요. 과연 그들이 왔어도 지금과 같은 득표가 나왔을까요? 칠악동의 입동이란 그 사람을 매장시키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천 년을 이어온 명문 하나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거예요. 나는 이 일에 제종주의 재삼숙고가 있으시길 바래요." 옥수령의 열기 띤 말이 끝나자, 열하 철패왕이 큰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종주의 말씀에 일리가 있소. 칠악동은 너무 가혹하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규약에 대한 선표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소. 본 주의 생각이오만 이 두 안건의 중간형태를 취하는 것이 어떨지……." 제세생불이 시선을 던졌다. "아미타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소?" "사실 우리는 만룡가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없소이다. 진천우도가 무림에 나와서 영토를 확장하기는 했으나 만룡가의 진학을 썼는가 하는 것엔 의문의 여지가 있소. 거기다가 그는 이미 죽은 몸이오." "……!" "우리는 일단 이 일에 대한 특계(特戒)를 만드는 것이오. 즉, 소속인원으로 하여금 지금 금악을 향하고 있는 후계자들의 뒤를 면밀히 조사하게 하여 만약 그들이 금악의 무예를 익히고 나와 그 무예를 검회 전에 쓴다면 즉시 응징을 가하도록 하는 것이오." "흐음……." "단, 만룡가의 후계자들이 종내 그들의 진학을 익히지 못했을 때에는 이 모든 법규는 폐지되는 것으로 하오." 순간 중인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철패왕의 말은 질서정연했고 조금의 기움도 없는 것이다. 제세생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은 말이오이다. 아미타불…… 그렇다면 특계조(特戒組)는 어떻게 꾸미는 것이 좋겠소?" "육 파 이상의 문파고수 십여 명 정도, 그리고 특계조 계주(戒主)는 종주급으로 하면 좋겠소이다." 그러자 즉시 서장, 남만, 동영, 요동, 대막에서 자파의 고수들을 천거해 왔다. 서장(西藏). 금륜(金輪), 은륜(銀輪), 동륜(銅輪)의 천외삼존자(天外三尊者). 남만(南蠻). 혈살추혼(血殺追魂), 팔비수라(八臂修羅). 동영(東瀛). 혈전신도(血電神刀), 자전신도(紫電神刀). 요동(遼東). 일진풍(一陣風), 일지향(一枝香). 대막(大漠). 광사(狂沙), 혈사(血沙). 그리고 제세생불이 천거한 냉면천왕(冷面天王) 비명대사(飛明大師), 천수여래(千手如來) 보법대사(普法大師) 등 도합 십삼 인이었다. 이러한 특계조의 계주로는 만장일치로 상아선녀 진진이 선임됐다. "아미타불…… 그럼 오늘의 집회는 이것으로 끝내오이다. 특계조는 내일부터 활동을 개시하며 이들의 조사 후, 다시 집회를 소집하겠소." 슈슈슉! 슈숙― 올 때도 흔적없이 오더니 갈 때도 마찬가지로 흔적이 없다. 그로부터 일각 후, 산정에는 옥수령 혼자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옥수령은 한줄기 긴 탄식을 터뜨리더니 고요히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투명한 하늘 저편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투박하지만 정(情)이 있고 우직하지만 재질이 뛰어났던 한 사람. "운룡…… 당신은 운도 없군요. 간신히 가문을 찾아 그 위용을 떨치는가 싶더니 선대(先代)의 잘못을 그대로 이어받게 되다니…… 이제부터 나는 당신이 금악의 무예를 얻지 못하기를 빌어야 하는 건가요?" 비록 치료를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살을 섞은 부부의 몸이었다. 옥수령은 일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운룡의 일에 섣불리 뛰어들었다간 자신마저 징계의 대상이 될 것이 아닌가? 그것은 비단 자신을 파멸시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문파를 배신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걷잡을 수 없는 여심(女心). 한소리 쓸쓸한 탄식만이 파란 하늘 위로 무심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 * * 猿鳴客散暮江頭 人自傷心水自流 同作遂臣君吏遠 靑山萬里一孤舟 저문 날 나루터에 님과 이별하고 나니, 사람은 돌아가고 원숭이만 울고 있네. 슬픈 일 모른 척하고 물은 잘도 흐르는구나. 나 또한 자네같이 귀향길 신세인데, 자네가 가는 곳은 나보다도 먼 곳이네. 만리 길 푸르른 산과 배 한 척만 있구나……. 배가 물 위가 아닌 곳을 간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비단 놀라운 일일 뿐 아니라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나 이 배는 분명히 물이 아니라 뭍을 가고 있었다. 그것도 사막 위를……. 배는 크고 거대했다. 또한 화려했다. 한데 이 배의 앞편에는 노가 없고 엉뚱하게도 말 다리가 대신 튀어나와 있었다. 도합 구십육 개의 말 다리이니 스물네 마리의 말이 배 안에서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 배에는 거대한 타목(舵木) 하나가에 달리어 있어 그것으로써 방향을 조정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라 하겠으나 배는 분명히 달리고 있었고, 난난은 아까부터 배의 선창에 섬연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생사선(生死船)의 묘용(妙用)에 매우 탄복하고 있었다. 게다가 생사선이 가지고 있는 묘용은 이것뿐만이 아니라고 했다. 도합 팔십구 종(八十九種)이나 되는 각종 기관장치가 이 배 안에는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입을 쩍 벌리게 하는 것으로써 이 배 하나를 가진다면 십만대군과도 능히 싸울 수 있을 정도였다. 금악까지의 수송수단을 가장 큰 난제로 여겼던 난난에게 있어 이 배는 가히 보물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전까지 이 배의 운용방법을 혜공과 혜혜 남매로부터 완전히 전수받고 난 참이었다. 사막에도 달이 떴다. 두두두― 두두두― 배 밑창의 말발굽 소리 외에 모래 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거기서 혼자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죠?" 돌연 그윽한 목소리와 함께 운연이 선창 안으로부터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 생각할 것도 있고…… 경치도 볼 겸…… 이곳의 달빛은 매우 좋군요." "감상적이군요……." 운연은 웃으며 난난의 앞으로 다가섰다. "좋은 밤이긴 하지만 바람이 차요. 운룡은 어디 갔죠? 벌써 며칠째 보이지 않고 있어요." 난난은 배시시 웃으며 말을 받았다. "지하방에 틀어박혀 있어요. 무공을 연구하고 있을 거예요." "어떤……?" "할아버지가 주신 비급이죠. 그는 그것을 금악까지 가는 도중에 필히 익혀야만 해요." "후훗…… 앞으로 얼굴 보기 힘들겠군요. 그는 무슨 일이든지 한번 빠지면 정신이 없어요." "장점이죠." "그건 그렇죠." 칠흑 같은 수발을 쓸어올리며 운연이 말을 이었다. "금악은 아직 멀었나요? 도대체 그곳이 어디죠?" "이 사막 안에 있어요. 오백 리쯤 남았을까……." "오백 리라…… 그런데 이상하군요. 도남강의 추적대가 왜 통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요? 그들이 추적을 포기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순간 난난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였다. '도남강…… 그는 왜 오지 않을까?' 난난 등은 지금 큰 길가에서 온몸에 불을 지르고 다니는 격이라 할 수 있었다. 생사선은 너무 특이해서 그들이 지나온 길의 사람들이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이 모습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생사선이라면 삼척동자라도 능히 쫓아올 수 있다. 그런데도 도남강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자랑이요, 정예인 봉황무색오살 등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난난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는 반드시 올 거예요. 오히려 그보다 그의 수하들이 더 무섭다고 할 수 있어요. 누가 오든 간에 도남강 일파가 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괴로움을 각오해야 해요." 촛불. 촛불 아래 한 사람. 그는 한 줄기 그윽한 황촉 불빛이 이글거리는 관옥처럼 단아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얼굴은 지금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는 큰 고뇌로 얼룩져 있었다. "이것은…… 도저히 정상적인 무예가 아니다." 운룡, 그는 지금 한 권의 책자를 앞에 펴놓은 채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리고 매우 당황한 채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심마공(聖心魔功). 그것은 공력을 운기하는 신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초식에 가까웠다. 요요부단(了了不斷). 무애소지(無涯所地). 공공유극(空空有極). 성심마공은 모두 이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초식의 이름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무순(無順)으로 되어 있었다. 요요부단(了了不斷). 글 그대로 직역하자면 마치고 마치어 끊임이 없다라는 뜻인데 그 아래에는 엉뚱하게도 천섬일격(天閃一擊)이라는 주해가 있었다. 무애소지(無涯所地). 끝닿는 데가 있는지 없는지 요상막측한 이 문구의 아래에는 자전신교(紫電神巧)의 주해가 있었다. 공공유극(空空有極). 텅 비었는지 비려다 말았는지 난해한 이 문구의 아래에는 또한 어기분여전(馭氣奔如電)의 주해가 있었다. 하나 운룡은 그 어느 것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 초식들은 한마디로 인간의 뼈와 살의 구조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즉, 팔은 안으로 굽고, 뼈는 일정 각도 이상 더 굽히거나 올리지 못한다는 상식을 아예 무시한 것이었다. 뿐인가? 이 괴상한 초식들을 펼치자면 몸 속의 진기를 마치 바람난 여편네처럼 좌충우돌 휘둘러야만 했다. 피가 흐르는 제 방향도, 혈도가 이루어진 제 각도도 모조리 무시한 채 거두고, 또는 모로 휘둘러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마치 밥을 식도로 넘겼으되 뇌(腦)로 보내어 소화를 시킨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두두두― 두두두― 이곳은 지하방인지라 몹시 시끄러웠다. 바로 밑에서 달리는 말발굽 소리로 인하여 온 방안이 우르르 울리고 있었다. 하나 운룡의 귓전에는 그 어느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검미를 역팔자로 깊이 찌푸린 채 글자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책을 바짝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 * * 늑대. 그것이 늑대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쳐다보기 시작한 지 반 시진 정도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두두두― 백여 마리가 넘는 숫자라고는 하지만 늑대가 달리는데 말발굽 소리가 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앞에 걸리는 것이라면 그것이 나무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뚫고 치달려대는 그런 늑대들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의 몸집은 오히려 황소보다도 컸다. 온몸에는 창날이 뾰족뾰족 솟아난 철갑을 두르고 있었으며, 발톱에는 특이한 금속제 갈고리를 부착하여 그 발로 바위를 부숴댔다. 뿐이랴! 시뻘건 혀를 날름대는 입으로는 철을 물어 끊으니, 이는 하늘 아래 존재하는 그 어떤 맹수보다도 더 흉악하고 무서운 놈들이 아닌가? 두두두― 배. 그것은 오색찬란한 생사선이었다. 타목을 잡은 이는 혈독 혜공이었고, 선창에는 팔 방(八方)의 방위를 연비, 두자상, 이환명, 수일평, 혈기자, 예소벽, 엽상의 등이 난간을 잡은 채 도사리고 서 있었다. 그들은 지금 맹렬히 추적해 오고 있는 백여덟 마리의 괴상한 늑대들을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운 놈들이군……." 괴상한 늑대들의 무리 뒤로 시커멓게 일고 있는 황사를 바라보며 두자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점창의 수일평이 뒤를 이었다. "저놈들은 난데없이 나타났으나 마치 처음부터 이 배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했소. 이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때 늑대들의 속도가 돌연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두두두― 순간 십 인은 바짝 긴장하며 각자 병기자루를 힘주어 움켜잡았다. 크르르!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던 늑대 한 마리가 섬뜩한 괴음(怪音)을 토하며 맹렬하게 이환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환명은 씩 웃으며 우수(右手)를 쭉 앞으로 뻗어냈다. 카앙!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달려들던 늑대는 비명을 토하며 물러났다. 하나 놀란 것은 오히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환명의 공력이 어떤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한데 그런 그가 공력을 주입시켜 내지른 일검(一劍)이 늑대의 몸을 베어내기는커녕 간신히 물리치는 것으로 그치고 말 줄이야……. 카랑! 또다시 날카로운 금속음이 터져나왔다. 이번에는 수일평의 일검이 또 다른 괴늑대와 부딪쳐서 난 소리였다. 그때 선창 덮개의 중간 부분에 조그맣게 뚫린 구멍으로 난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힘으론 안 돼요. 저놈들은 남해특종(南海特種)으로써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은 천산갑(天山甲)이란 보물이에요. 만천랑(萬天狼), 천년조(千年鳥), 단혼인(斷魂人), 수혼화(搜魂花), 마령비(魔靈匕)를 뜻하는 도남강의 봉황무색오살 중 만천랑이라는 괴물이니 검 대신 쾌(快)를 사용해 봐요." 쾌(快). 일반적으로 얇은 검은 바위보다 강도가 못하다. 그러나 검으로 바위를 자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쾌의 원리였다. 그때 연비의 우수가 번쩍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공간을 자르듯 일어나는 한 줄기 장엄한 불꽃! 끄―강! 순간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던 괴늑대 한 마리가 시뻘건 핏물을 흩뿌리며 허공에서 반으로 잘려져 튕겨 나갔다. 난난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후후…… 좋은 수법이에요." 끄―엉! 켁! 멋모르고 달려들던 괴늑대 중 십여 마리가 신명이 나 흔들어대는 십 인의 검날 아래 순식간에 핏덩이로 갈기갈기 찢긴 채 허공에 피무지개를 그려냈다. 그러자 괴늑대들은 일시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뜻밖에 만난 강적에 당황한 듯……. 하나 이 맹수들이 망설인 것은 눈 깜짝할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다. 다음 순간 괴늑대들은 기이한 방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자욱한 흙먼지를 그려내며 선두의 오십 마리는 배의 아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남은 오십 마리는 일제히 배 위의 십 인을 향해 덮쳐오는 것이다. 열 사람은 배의 아래로 가는 괴늑대들의 행동에 의아했으나 이내 덮쳐오는 무리를 향해 맹렬히 검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켁켁! 켁! 놀라울 정도로 정밀한 훈련을 거친 것이리라. 괴늑대들은 앞의 동료가 죽으면 그 토막난 시신을 밟으며 또다시 뛰어올라 덮쳐오는 기민한 동작까지 보였다. "허어……!" 탄성을 터뜨리며 정신없이 베어내기를 얼마……. 돌연 선창 안에서 난난의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아래를 막아요!" 해연히 놀란 시선을 밑을 향해 던진 십 인.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향한 것과 배를 모는 이십여 마리 말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간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당탕― 쾅! 맹렬히 달려나가던 생사선이 뚝 멈춰 섰다. 그 반동으로 열 사람은 말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은 빌어먹을 괴늑대들을 향해 노호를 터뜨리며 덮쳐갔다. "타앗!" 혜공 또한 합세했다. 케액! 켁! 이십 마리의 말을 죽여 흉성(兇性)이 오를 대로 오른 괴늑대들이었으나 제각기 독보적인 무예의 소유자들인 십일대고수의 합공(合功)만은 어쩔 수 없었다. 케액! 켁! 켁! 먼 하늘에 아스라이 노을이 피어오를 때쯤엔 살아 있는 괴늑대는 한 마리도 없게 되었다. 온몸이 피로 낭자하게 물든 십일 인의 고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힘없이 웃고는 배를 향해 걸어갔다. "젠장!" 묵비향이 투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모조리 이 모양이 됐으니 무엇으로 간단 말인가?" 혈기자가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술을 한 모금 꿀꺽 들이키며 말을 받았다. "그러나 저 배의 성능은 놀랄 정도였소. 아까 배가 급정지할 때도 나는 그 반동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으니까." 순간 배의 선창으로 난난의 얼굴이 삐죽 튀어나오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날 알아주는 건 대협밖에 없는 듯하군요 이 생사선은 도합 팔십구 종의 묘용(妙用)이 있어요. 여러분, 어서들 올라타세요. 갈 길이 머니까." 중인들은 그녀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없는데 무슨 수로 간단 말인가?' 난난은 그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마차에 오르자 손을 이마에 세우며 주위를 한차례 빙 둘러보더니 말했다. "좋은 날씨다. 때는 십이월 하고도 보름이니 바람은 서북여풍(西北麗風)이렷다? 우리는 오늘 저녁식사는 좀 늦긴 했지만 밤참 삼아 은주성(銀州省)에서 먹게 될 것이에요." 은주(銀州). 지금 있는 곳이 감숙성(甘肅省) 혜안보(慧安堡)이니 은주까지는 무려 이백 리 길이었다. 중인들은 난난이 만천랑을 보고 놀란 나머지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시진의 시간 동안 말도 없이 이 배가 이백 리 길을 갈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그긍! 그때 돌연 괴음(怪音)이 이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배의 사면 귀퉁이에서 열 개의 쇠기둥이 튀어나왔다. 그 쇠기둥에는 두 개씩 가로질러 얇은 짐승가죽이 걸려 있었다. 이어 또다시 소성과 함께 배 밑창에선 수십 개의 바퀴가 천천히 내려졌다. 그그긍― 바퀴는 그 하나가 마차바퀴 두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거대했고, 순간 불어오는 바람을 안고 배는 스르르 앞으로 굴러나가기 시작했다. 두두두― 배 바퀴에는 톱날들이 솟아 있었다. 그것은 어떤 험한 길도 평지처럼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그긍― 기음과 함께 또다시 배의 앞부분으로 솟아나온 거대한 칼날. 중인들이 서로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가 싶더니 이내 그 웃음은 통쾌한 대소(大笑)로 변했다. 설사 나무숲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해도 거침없이 뚫고 나갈 수 있는 이 괴상한 배에 대한 감탄이 그렇게 웃도록 만든 것이다. 쏴아아아― 바람을 안고 배는 쾌속하기 이를 데 없는 속도로 달려나갔다. 설사 바람이 없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십여 명의 고수들이 번갈아 가며 약간씩의 장풍을 쳐내면 되는 것이므로……. 20. 欲望을 쫓는 불나비떼 시간(時間)은 곧 생명이다. 시간을 번다는 것은 생명을 연장시킨다는 말과 같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살 수 없다. 알고 있다 해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더 살 수 없다. "저게 뭘까?" 새벽 내내 기승을 부리던 눈이 그쳤다. 어렴풋이 밝아오는 아침 미명(微明) 속에서 두자상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지던 중인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뭘까? 구름떼인가…….' '구름이 아니라면 자욱한 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중인들의 의아한 시선을 안고, 느닷없이 붉은 하늘 한구석을 가린 괴물체의 모습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리하여 그 모습이 육안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 중인들의 입에서는 자신들도 모르게 다급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헛!" 보라! 새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크고 거대한 저 붕조(鵬鳥)들을……. 푸드덕푸드덕! 그것들이 펼친 날개의 길이는 일 장이 넘는 것 같았다. 두 눈은 시뻘건 혈안(血眼)이요, 그곳에서 솟구쳐 나온 혈광(血光)은 핏빛인 양 섬뜩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데, 마치 기둥 같은 두 다리 밑으로 삐죽 튀어나온 발톱들은 무쇠처럼 단단해 보였다. "이쪽으로 오고 있소." 그렇다. 일견해 보기에도 삼사백 마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혈조군(血鳥群)은 배를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휘익! 휙! 슈욱! 중인들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다급하게 장검을 뽑아 들었다. 순간 최초의 십여 마리가 무서운 기세로 중인들을 향해 덮쳐들었다. "팟!" "타앗!"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무지개처럼 허공을 가르고 솟구치는 네 줄기의 검광(劍光)! 파파팟! 슈슝! 검광에 서린 검기(劍氣)는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마치 모습 그대로 광풍폭우(狂風暴雨)요, 번천단해(蒜天斷海)의 기세! 한데 보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차―창! 혈조들은 날렵하게 몸을 뒤트는가 싶더니 창날 같은 발톱으로 고수들의 공격을 여유있게 막아내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몸을 선회시키거나 뒤틀며 검광의 사이로 교묘하게 공격까지 가해오는 것이었다. 찌이익! 순간 얼떨떨하여 넋을 잃고 있던 두자상의 옷자락이 날카롭게 찢겨져 나갔다. "헉!" 그의 어깨살이 푹 솟아오르며 순식간에 그의 상반신이 핏물로 붉게 물들어 버리고 말았다. 연비가 날카롭게 외쳤다. "이 새들은 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한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새들이오. 소홀히 상대하지 마시오."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물(微物) 대 인간의 싸움! 그러나 미물들은 제각기 독특한 공격법에다 수비법까지 몸에 익힌 천고(千古)의 영물(靈物)들이 아닌가? 거기다가 선천적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와 칼날 같은 부리에다 발톱까지 지녔으니……. 열 명의 고수들은 평생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싸움을 거쳐온 역전의 맹장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찍이 이렇듯 힘들고 피곤한 싸움을 치뤄 보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챙―창! 카캉! 삭풍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옷자락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었고, 백 리(里) 길을 단숨에 치달려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헉헉……!" 반면에 혈조들은 불과 대여섯 마리가 땅을 뒹굴고 있을 뿐, 그들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때였다. 지나치게 힘을 소모한 혜공이 잠시 한눈을 파는 동안 한 마리의 혈조가 배 위의 돛을 향해 맹렬히 날아들었다. "안 돼!" 이환명과 연비가 다급히 그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으나 몸이 조각나면서도 혈조의 예리한 부리는 돛을 꿰뚫고 말았다. 파―팍! 찌이익! 달려가던 배가 둔음과 함께 그 자리에 뚝 멈춰 섰다. 이렇게 되자 혈조들의 공격은 한 수 더 맹렬해졌고, 고수들은 맥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욱!" 맹렬히 좌충우돌하던 점창 수일평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의 검은 한 마리 혈조의 가슴에 박혔지만, 그 사이에 또 다른 혈조가 그의 옆구리를 부리로 찍어버린 것이다. 휘청 몸을 돌리는 수일평의 옆구리 사이로 핏물이 쭈욱 뿜어져 나왔다. 준수한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심한 부상을 당한 것이리라. 그때였다. 돌연 마차 안에서 난난의 침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말이 끝나는 순간 전력을 다해 이십 장 밖으로 몸들을 날리세요. 나는 저놈들이 얼마나 튼튼한 껍질을 지니고 있는지 시험해 봐야겠어요." 순간 열 명의 고수는 서로의 시선을 힐끗 마주본 후, 맹렬히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이환명은 수일평을 안고 몸을 날렸다. 슈욱! 순식간에 공격할 목표를 놓치고 만 혈조들이 막 고수들이 몸을 날려간 쪽으로 방향을 틀려는 순간이었다. "한낱 미물들이 인간을 상대로…… 용서할 수 없다. 천년조(千年鳥)!" 쾅! 다음 순간 배 선창의 덮개 중 하나가 풍차처럼 회전하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위―잉! 카악! 칵! 선두에 있던 세 마리 혈조가 맹렬히 회전하는 철판에 부딪혀 피곤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순식간에 혈조군의 가운데까지 솟아오른 철판이 허공의 한 지점에서 폭죽처럼 폭발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카악― 콰쾅! 쾅! 파편.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파편들이 사방으로 튕겨졌다. 열 명의 고수들은 모래바닥에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다가 넋을 잃고 말았다. 공중은 일시에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피와 피의 무지개들이 여명 속에 얽히고 설켜,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구름떼마저 이 광경에 숨을 죽이고 말았다. 머리가 구멍이 난 채 떨어지는 놈, 날개가 산산조각이 난 놈, 형체를 구분할 수 없는 고깃조각이 되어 핏속을 부유하는 후두둑! 피의 소나기가 쏟아지듯 삼사백을 헤아리던 혈조들은 단숨에 모래땅을 질펀한 주검의 행렬로 뒤덮고 말았다. 귀곡의 혈기자는 잘려져 나간 자신의 장삼자락을 힐끗 바라보더니 툴툴 웃음을 흘렸다. 순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장검이 무지개처럼 허공을 갈랐다. 쐐액! 마지막 한 마리의 혈조. 퍽! 그것은 느닷없이 날아온 장검에 몸이 관통되어 또 한 줄기의 피그림자를 허공에 그려냈다. 이어 마치 죽음 같은 정적이 황량한 모래벌판 위에 내려 쌓였다. 난난의 머리가 덮개없는 선창 밖으로 쑥 내밀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쯧쯧! 이 무슨 꼴인지…… 돛뿐만 아니라 매달려 있던 수통까지 모조리 박살나고 말았구나. 도남강의 이 봉황무색오살인지 하는 괴물들은 갈수록 무서워지는군." 하나 그녀는 이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염려 마세요. 물은 이 사막 천지에 얼마든지 있어요." * * * 그러나 얼마든지 있다던 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천하의 난난도 천년조의 한차례 기습 후 가야 할 노선을 그만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허기는 혈조들의 날고기로 대충 때우기는 했다. 그러나 기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물이 없다고 생각하니 기갈이 오히려 더 심해지기는 것이다. 구르르― 두두두― 배는 생사선의 선도들 이십여 명이 밧줄로 온몸을 얽어맨 채 황소처럼 끌어가고 있었다. 운연, 예소벽, 연비, 두자상, 이환명, 묵비향, 혈기자, 혜공, 혜혜, 엽상의 등 십 명의 고수들은 털레털레 배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심한 부상을 입은 수일평은 배 선창에 길다랗게 누워 있었고, 난난은 뱃머리에 주저앉아 심각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룡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배를 버려야겠군. 너무 인력소모가 심하다…… 그러나 이 배는 너무 아깝구나." 그때 돌연 한소리 두툼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난난?" 순간 난난의 긴 머리가 검은 원을 그리더니 바로 위에까지 와 선 사람을 보고는 반가움의 외침을 터뜨렸다. "오빠!" 운룡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순간, 그 시선들 속에서는 일종의 경이로움이 피어올랐다. 운룡의 얼굴은 조금 상한 듯이 보였다. 머리칼이 약간 흐트러지긴 했으나 오히려 먹물처럼 검은 현의(玄衣)와 어울려 발랄한 세련미를 연출해내었다. 뿐인가, 한 쌍의 동공은 무엇인가 깊은 지혜로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듯했고, 굳게 다문 입술은 거문고의 현인 양 단아했다. 한마디로 문무의 기품이 어우러진 귀공자의 모습이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 이환명, 수일평 등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것이 운룡의 모습인가? 그러나 검회 때와는 너무나 다르구나. 정제된 기품이 눈이 부실 정도가 아닌가?' 운연, 예소벽 등의 소녀들은 얼굴을 가볍게 붉혔고, 연비는 두자상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갈수록 완벽해진다. 매일매일의 느낌이 다르다는 것은 그의 성취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겠지. 우리는 정말 불가사의한 놈을 만난 게요." 그때 운룡이 난난과 더불어 배 위에서 휙 뛰어내렸다. 그는 중인들을 향해 가벼운 목례로써 인사를 대신하더니 배를 끌고 가는 생사선도들을 향해 외쳤다. "정지!"' 그는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인들을 향해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사막에선 체력소모를 가장 조심해야 하오. 배는 이곳에 버리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 여러분 중에 오각(五覺)을 단련했던 분이 계시면 나와주시오." 오각이라면 미각, 후각, 시각, 청각, 촉각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오각을 단련했다 함은 그러한 제기능의 수련을 거쳤던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귀곡 혈기자가 앞으로 나섰다. "노부가 그 방면에 진도가 있었소만……." "좋소. 그럼 노협(老俠)께서는 이 모래의 수분을 짐작해 주시오. 여덟 방향의 모래를 임의대로 짐작하여 수분이 많은 쪽을 가려내 주시면 되오." 귀곡 혈기자는 즉각 그 자리에 앉아 손으로 모래를 파서 냄새를 맡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방위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귀곡 혈기자의 시선이 힐끗 운룡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수분이 있는 모래가 동북 방향으로 뻗어 있구려." "가늘게 뻗어 있소?" "그렇구려." 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오래 전에 사막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소. 거기에는 사막의 수로(水路)에 대한 언급이 있었소." 가장 좋은 방법은 새떼를 발견하는 것이다. 새의 방향은 곧 녹주(綠州)가 있는 곳을 의미하므로……. 새가 없을 땐 모래를 본다. 모래에 묻은 수분으로써 물길의 멀고 가까움을 가려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래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하늘을 본다. 구름이란 그것이 아무리 부피가 작은 것이라 해도 수분의 증발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이 틀림없다면 물은 십 리 안에 있소. 동북 방향으로 길을 틉시다." * * * 녹주(綠州). 눈앞에 있는 것이 푸른 녹빛을 띠고 있는 녹주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거의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망막을 통해 전달되어 오는 시신경(視神經)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비록 겨울이라 풀은 모두 시들었어도 몇 그루의 나무는 분명히 푸르렀다. 그 아래에 몽매에도 그리던 물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첨벙! 물 속으로 가장 먼저 얼굴을 처박은 사람은 이십여 명의 생사선도와 두자상이었다. 이어 수일평, 묵비향이 정신없이 물을 들이켜 마셨고 운연, 혈기자, 예소벽 등도 혀끝에 와닿는 감촉을 만끽했다. 운룡과 난난, 혜혜 등은 가장 마지막으로 녹주에 들어갔다. 그들은 함성과 고함을 지르며 물을 퍼마시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고는 씨익 웃으며 자신들도 물가로 다가섰다. 한데 이때 무심코 물로 입술을 축이던 연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순간 머리를 쳐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멈춰!" 순간, 중인들은 정신없이 물을 마시다 말고 의아한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 "……?" 연비는 침중한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 다 물을 마셨소?"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는 중인들. 물을 먹지 않은 사람이라면 운룡, 난난, 이환명, 혜혜뿐이었다. 연비는 탄식을 터뜨렸다. "이것은 독(毒)이다……!" 그때 창자를 쥐어뜯는 듯한 비명이 숲속에서 터져나왔다. "으아악……!" 그곳으로 들어간 사람이 혈독 혜공이란 것을 이내 알아챈 중인들은 다급히 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사람. 오오…… 도대체 저런 것도 사람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걸까? 우선 그는 키가 보통 사람의 두 배는 훨씬 넘었다. 하늘로 향해 뻗어오른 녹주의 거목도 그에 비하면 난쟁이나무처럼 보일 정도였다. 거기다가 그는 또 얼마나 뚱뚱한지 어디가 목이고 어디가 얼굴인지, 심지어는 어느 쪽이 엉덩이고 어느 쪽이 배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치 코끼리를 몸통 부분만 껍질을 벗겨놓은 듯한 모습이 아닌가? 순간, 난난의 입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봉황무색삼살(鳳凰無色三殺) 단혼인(斷魂人)!" 만천랑, 천년조, 단혼인, 수혼화, 마령비의 세 번째 괴물인 이 무지막지한 괴물의 벌거벗은 알몸 아래에서 대롱거리는, 그야말로 어찌나 큰지 소름마저 끼치는 남성의 성기(性器)를 보는 순간 소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혜공은 그의 엉덩이 밑에 깔려 있었다. 그의 검은 단혼인의 복부를 깊숙이 찌르고 있었으나 단혼인은 일말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하긴, 표피의 지방질 두께만 해도 장검의 길이보다 배는 더 두꺼울 테니……. 단혼인은 혜공의 배를 아예 짓뭉개고 있었다. "으윽!" 그럴 때마다 혜공의 입에선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으며, 종래에는 뱃속의 창자며 장부(臟腑)까지 꾸역꾸역 입 밖으로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멈춰!" "물러서라!" 순간 운룡, 이환명, 연비, 혜혜의 입에서 일성의 폭갈이 터져나오더니 단혼인을 향해 맹렬한 일장을 밀어냈다. 슈우욱― 노도 같은 경기는 단숨에 공간을 가로질러 단혼인의 면상에 작렬했다. 그러나 네 고수가 마치 두꺼운 쇠뭉치를 두드린 듯한 느낌을 받은 반면 단혼인은 몸을 흠칫했을 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중인들은 입을 쩍 벌렸다. '거석(巨石)이라도 박살낼 강맹한 경기를 맞고도 멀쩡할 수 있다니…….' '저 괴물은 설마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때 돌연 단혼인의 입에서 괴성(怪聲)이 터져나왔다. 아마도 네 고수가 쳐낸 장력에 흉성(兇性)이 격발된 듯, 그는 양팔을 쫙 벌리고 중인들을 향해 사납게 덮쳐들었다. "카악! 칵!" 놀랍게도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괴인의 동작은 섬전(閃電)처럼 빨라, 단번에 삼사 장(丈)을 훌훌 날아 중인들을 덮쳐왔다. 운룡 등은 크게 놀라 다급히 그를 향해 맞부딪쳐 나갔다. 그러나 몇 수 펼쳐보기도 전에 그들은 난색을 떠올리고 말았다. 장력도 통하지 않았다. 검으로 찔러도 소용이 없었다. 발길질을 해봐도, 지풍을 날려도 괴인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도대체가……." "이건 마치 생명이 없는 고무공과 싸우고 있는 꼴이 아닌가?" 이때 혜혜는 오빠 혜공의 옆에 쭈그린 채, 부들부들 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혜공은 이미 즉사해 있었다. 몸 속의 오장육부가 입 밖까지 밀려나온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있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빠……." 혜혜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눈물 사이로 비치는 것은 주위를 자욱이 얼려놓을 듯한 살기였다. 그녀는 혜공의 눈을 손으로 내려감겨 주고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드세게 악문 이 사이로 한 줄기 붉은 선혈이 턱 밑으로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혜혜는 그 핏물을 씻을 생각도 않고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았다. 그 한구석으로 혜공의 웃는 모습이 스쳐가고 있었다. 그것은 어릴 때의 모습이었다. 나이 열 살의 오빠가 혜혜에게 말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배불리 먹어보자, 혜혜. 너는 저 만두가 얼마나 맛있는 건지 아니? 입에 넣기만 하면 사르르 녹는단 말이야. 아아…… 그러나 저 하늘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하늘이다. 그녀는 운룡이 사력을 다해 저지하고 있는 단혼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단혼인의 양 미간 사이 미심혈(眉心穴)이었다. 순간 그녀의 섬세한 몸이 빛살처럼 허공을 갈랐다. "악마! 죽어랏……." 슈우욱― 일학충천(一鶴庶天)의 수법에 이어, 쌍룡개월(雙龍開月)의 일식으로 양발을 모아 괴인의 가슴을 힘차게 차나갔다. 괴인은 눈빛을 번뜩이더니 괴소(怪笑)를 터뜨리며 덥썩 혜혜의 양발을 잡아챘다. "크흐흐……." 그는 이어 잡은 혜혜의 양쪽 발을 사정없이 잡아뜯었다. 부욱― 바로 그 순간 유성(流星) 같은 하나의 장력이 괴인의 미심혈에 틀어박혔다. 피[血]! 자욱한 핏물이 사방에 튀겼다. 몸이 찢겨 나가는 동안에도 혜혜는 웃었다. 문득 그녀의 뇌리 속으로 운룡의 모습과 작약꽃잎들이 회오리치며 밀려들었다. 그것뿐이었다. 혜혜는 아득한 심연의 회오리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일세(一世)의 기녀(奇女)요, 기재였던 그들 남매. 흑도(黑道)가 배출한 백 년 최고의 고수요, 강북황하도계(江北黃河盜界)의 영수로서 그 영명(英名)을 사해(四海)에 드날리던 남매고수. 혜공과 혜혜는 이렇게 죽었다. 쿵― 단혼인이 엎어지는 충격에 땅이 흔들렸다. 운룡은 묵묵히 장검을 드리운 채 산산조각이 난 혜혜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 그렁그렁 고여든 것은 뜨거운 눈물이었다. 난난 또한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급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도대체 누군가? 우리가 가는 곳을 이토록 일일이 알아내는 자가…… 배를 버렸는데도 미리 앞길을 차단할 수 있다니…… 오오! 일행 중에 누군가 첩자가 있구나.' * * * 십이월(十二月) 삼십일(三十日) 새벽 인시(寅時). 나는 도저히 성심마공을 익힐 수가 없다. 누차 말하고 있듯이 그것은 인간의 근본체계를 망각한 무공인 것이다. 때때로 나는 성심마공의 세 초식 속으로 몰입해 본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만을 내 육신에 강요할 뿐,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무예를 억지로 익히려 하면 할수록 심중 깊은 곳에서 이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무차별 파괴와 제한없는 폭력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무조건 깨부수고, 무조건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지배해 왔으며 그런 것들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뒤에는 허무할 정도의 고통만이 남곤 했다. 그런 와중에 우리 일행이 이 황량한 오지에서 겪어야 했던 갈등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전설의 산, 금악(金嶽). 그것에 대한 일념이 아니라면 우리는 도저히 그 동안의 허기와 기갈, 그리고 우리 안에 첩자가 있다는 생각이 빚어내는 불신(不信) 등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태반은 중독(中毒)되어 있다. 나와 난난, 이환명을 빼고 운연, 연비 등은 늘상 구토를 하고 오한에 시달린다. 특히, 단숨에 물을 많이 마신 두자상과 묵비향, 혈기자 등은 아예 걸음조차 옮기지도 못할 정도인지라 나와 이환명이 그들을 번갈아 부축하고 있다. 점창의 수일평은 죽었다. 그는 본래 천년조의 부리에 옆구리를 찢기는 중상을 입고 있었는데, 그 쇠약한 몸이 독을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라 해야 할까? 어찌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욕망을 찾아 떠도는 불나비떼와도 같다. 죽음은 늘 친근하게 가까이 와 있고 삶의 즐거움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금악의 그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달뜬 욕망의 굴레에 허위적거리도록 만드는가? 어쨌든, 대봉황천을 탈출해 나온 지 사십오 일 만에 우리는 금악을 찾고야 말았다. 휘이잉― 휘잉! 사풍(砂風)이 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해 모래바닥 위에 몸을 눕히거나 앉아 있었다. 위잉― 바람이 심하여 모래가 쉴새없이 콧구멍을 들락거리고, 누워있다고는 하지만 몸이 아예 모래 속에 파묻히고 있는 가혹한 환경이었다. 운룡과 난난, 이환명은 지쳐 쓰러진 사람들을 뒤에 두고 나란히 선 채,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었다. 그저, 하늘이고 땅이고 그 사이의 공간 모두가 희뿌연 바람 속에 싸여 있었다. "금악(金嶽)이 어디 있소?" 바람에 찢길 듯 옷자락을 나부끼며 이환명이 물었다. 그의 눈은 이 황량한 벌판 어디에 산(山)이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난난은 수중의 낡은 양피지 지도를 한 번 더 들여다본 후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이곳이에요. 금악은 늘 모래바람에 싸여 있어요. 그것이 언제 나타날지는 나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오일제(五日祭)를 지내도록 해요." 이환명은 노골적으로 불신(不信)의 표정을 드러냈으나 운룡은 묵묵히 작은 보따리 하나를 풀었다. 그것은 수통을 버리면서까지 메고 온 보따리였다. 그 안에선 조그만 상 하나와 지전(紙錢), 그리고 두 자루의 초가 나왔다. 운룡이 그것들을 가지런히 정돈하자 난난이 쭈그리고 앉아 초에 불을 밝혔다. "두 사람은 오 일 동안 이 촛불을 번갈아 가며 지키도록 하세요. 단 일각이라도 불이 꺼지면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아요." 난난은 말을 끝맺기 무섭게 초 앞에 정좌하고 앉아선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그녀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운룡도 천천히 그 옆에 앉았다. 그는 쌍수를 앞을 향해 지그시 뻗었다. 옷깃을 찢어낼 듯한 거센 바람 속에서 약한 촛불을 보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력을 일으켜 초의 주위로 한 겹의 강기막( 氣幕)을 둘러야만 했다. 이때 입술을 질끈질끈 씹으며 무애(無涯)의 사막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이환명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말을 뱉었다. "제기랄! 운형은 쉬시오. 내가 먼저 하겠소." 운룡은 그를 힐끗 바라본 후 가타부타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중인들은 지친 표정으로 묵묵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연과 예소벽은 서로에게 힘없이 기대어 있었고 연비는 꼿꼿하게 정좌하고 앉아 힘없이 누운 두자상의 머리를 받쳐주고 있었다. 묵비향, 엽상의, 혈기자도 시체처럼 드러누워 있었다. 그 중, 엽상의는 온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가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운룡은 묵묵히 그들에게 다가가 우선 묵비향과 혈기자의 얼굴이 모래에 덮이지 않도록 옷을 벗어 감싸주었다. 연비는 가까이 다가오는 운룡을 바라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두형도 많이 좋아지고 있네. 다른 사람이나 보살펴 주게." 운연과 예소벽도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버틸 만해요." 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엽상의를 향해 다가갔다. 검회가 열리는 내내 한 올의 웃음도 짓지 않던 냉막한 미녀고수. 그래서 빙인(氷人)이란 호로 불렸던 그녀도 지금은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운룡은 묵묵히 그녀의 몸을 안아 자신의 품속에 눕혔다. 그리고 옷자락으로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몸은 뜨거워도 겨울사막의 밤은 얼어붙을 듯 추웠다. 따라서 뜨거운 몸의 체온이 식는 순간 그녀는 죽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운룡을 힐끗 바라보곤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엽상의의 감겨져 있던 눈이 힘없이 떠졌다. "운룡…… 대협이신가요……?" "그렇소. 그냥 편히 쉬도록 하시오. 말은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소." "참으로…… 좋으신…… 분이로군요." 엽상의는 말없이 웃었다. "참…… 이상하지요? 당신의…… 품은 남 같지가 않군요."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유난히 말이 많았다. 운룡은 그녀가 말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녀의 얼굴 한쪽으로 붉은 반점이 나타나고 있었다. 수독(水毒)에 풍독(風毒)까지 겹친 것이다.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살릴 수 없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말해 보시오." "대협은…… 도인인가요…… 속인인가요……? 처음에는 도복을 입더니…… 이제는 속세의…… 사람 같아요." "나는 도인(道人)이오." 운룡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도인의 수행을 벗어나고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소. 사실, 도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겠소? 마음이 없으면 도인이어도 도인이 아닌 것이 되고 무인이어도 무인이 아니게 되는 것이오. 나는 도가(道家)를 사랑하오. 내 마음을 지탱해 나가는 것 또한 그런 사실들이오." 엽상의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파랑처럼 번졌다. "맞아요…… 마음이라는 것…… 후후…… 나는 그걸 부정해 왔지요." "……." "나는 만사패(萬邪牌)의 후인이에요. 진천우도의 손에 패망하여 숨은 중원일백대사파의 공동전인이지요……." 순간 운룡의 얼굴에 가벼운 놀라움이 번졌다. 그는 이 소녀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설마 오십 년 전에 사라졌던 중원일백대사파의 후예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사문의 밀명으로…… 검회에 참가했지요…… 그래서 진천우도의 제자로 투신하여 그를 척살하는 것이 제 임무였어요. 다 쓸모없는 짓이었지만…… 후훗……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나…… 우습죠……?" "아니오. 전혀 우습지 않소." "이상하게 졸리는군요. 편안해요. 운룡 대협에게 한가지 부탁을 해도 될는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때 돌연 엽상의의 얼굴에 한줄기 고통스런 표정이 번졌다. "악!" 입가로 한 줄기 선연한 핏물이 흘렀다. "소저!" 운룡은 급히 그녀의 명문혈(命門穴)에 진기를 주입시켰다. "놔…… 두어요. 틀렸어요…… 복우산(伏牛山) 기슭에 가면…… 행류촌(杏流村)이 있는데…… 거기에 내 어린 동생이……." "엽소저!" 운룡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을 향했다. "엽…… 산(散)…… 그를 부탁…… 고마웠어요…… 마음의…… 말…… 고마……." 말은 다 이어지지 않았다. 운룡은 엽상의의 몸이 그의 손 안에서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고개가 모래땅을 향해 툭 떨구어지고 있었다. 죽은 것이다. 사람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 표정엔 죽음에 대한 경탄도, 놀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지나치는 사물,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을 보듯 그렇게 무표정했다.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그렇게 건조하고 삭막하듯……. 휘이잉― 휘잉― * * * "그들이 언제쯤 오리라고 생각하나?" 개촉(開燭) 사 일째. 이제 이 날이 밝으면 난난이 예언한 오 일째 날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희망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금악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사람들은 사막 속에 파묻혀 그렇게 사라져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연비가 말한 그들이란 도남강에 관한 것이었다. 운룡은 지겹도록 불어대는 모래바람 속에 뿌옇게 터오르는 여명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오겠지요. 이제 곧……." 바로 그때였다. 마치 그의 말에 답하기라도 하듯 뿌연 모래바람 속에서 수십 줄기의 인영들이 유령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일신에 핏빛 혈의를 걸친 스산한 차림새의 혈의인들이 나타났다. 석고처럼 냉막한 안색에 분칠을 한 듯 희고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휘이익! 그들의 머리 위로는 기이한 모양의 호접표(蝴蝶 )들이 수천 개나 꽃잎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바로 봉황무색오살의 하나인 칠십이마령비인(七十二魔靈匕人)이 아닌가! 또 있다. 그들의 반대쪽. 일신에는 제(祭)를 지낼 때나 입는 희고 거친 소복(素服)을 입었고, 머리는 멋대로 풀어헤쳐져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달빛 아래 선 나찰(羅刹)처럼 희고 요사스럽다. 이들은 마치 모래 위를 흐느적거리듯 걷고 있었는데, 손 아래 갈무리된 은빛 철륜(鐵輪)이 쨍그랑거리는 가벼운 소음이 질식할 것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봉황무색오살의 최후서열인 삼십육수혼혈녀(三十六搜魂血女)가 틀림없었다. "과연 왔군…… 그것도 포위되었는데……." 연비의 침중한 중얼거림을 신호로 운연, 예소벽, 두자상 등이 몸을 움직였다. 촛불을 보호하고 있는 난난과 이환명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의 전부였다. 휘이잉― 운룡은 난난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제 초는 거의 밑부분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난난의 가녀린 몸이 거의 쓰러질 듯 휘청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됐어…… 난난,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우리는 너에게 감사하고 있다." 무심한 중얼거림을 흘리며 운룡은 묵묵히 수중의 팔십 근 한철검을 빼들었다. 이곳에 온 사람은 수혼녀와 마령비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봉황천의 정예 모두가 몰려왔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어디로 가겠는가? 그저 무인답게 흔쾌하게 싸우다 죽을 뿐이다. 한데 그때, 돌연 막 시선을 거두려던 운룡의 몸이 흠칫했다. 아니 아예 폭풍을 만난 듯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두 개의 동공은 흰자위가 보이도록 휩떠지고……. 운룡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저쪽 편의, 여명이 터오고 있는 하늘을 보라! 느닷없이 거대한 모래바람이 일고 있었다. 주위의 모래들이 폭풍이라도 만난 듯 사위로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번지는 한 줄기 서기(瑞氣)! 그것은 태양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태양빛보다 더욱 강하고 드센 일련의 대광채군(大光彩群)이었다 쿠쿠쿠― 쿠우우― 다가오던 대봉황천의 고수들도, 이쪽의 군웅들도 모두 다 일시에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 전체의 몸이 찬란한 금광(金光)으로 물들여지기 시작했다. 쿠쿠쿠― 빛! 도저히 인세(人世)에 존재하리라곤 상상조차 해볼 수 없었던 극렬한 황금의 빛! 수천 수만의 그 찬란한 빛줄기 사이로 환상처럼 산(山) 하나가 나타났다. 21. 生死之門 황금산(黃金山)! 아아…… 그 빛나는 모습이란! 계곡도 있고 봉우리도 있으며, 바위도 있고 나무도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황금이었다. 인세의 사람들이 그토록 환장하는 황금이 온 산에 널려 있는 것이다. 금악(金嶽)! 이곳이 전설의 금악이었다. 산, 산이여……. 그 빛은 너무 강렬하여 감히 마주볼 수조차 없었고, 그 웅대한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일시에 압도하고 말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움직였다가는 저 모습이, 저 황금이 그대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그저 꿈에 불과하다는 듯……. 그 죽음 같은 황금의 정적을 가장 먼저 깨뜨린 사람은 난난이었다. "뛰어요!" 슈파악― 그녀와 이환명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오빠, 빨리!" 연비, 운연, 예소벽, 두자상이 그 뒤를 따라 발작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때 운룡은 멈칫하며 몸을 멈추었다. '묵비향과 혈기자, 그들을 두고 어떻게 가나…….' 그의 시선이 힐끗 그들을 향했다. 순간 묵비향과 혈기자는 누운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혈기자가 운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가시오. 착한 청년이여, 뒤는 우리가 맡겠소." 묵비향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런 몸이긴 하지만 아직 서너 놈은 때려눕힐 수 있소. 이것은 당신의 착한 마음에 대한 보답이오이다." 그들은 말을 맺기 무섭게 일제히 운룡을 향해 쌍수를 내밀었다. 슈파악― 운룡은 해연히 놀라 급히 장력을 맞받았다. 피잉! 그의 몸이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연이어 이삼장의 장력이 차례로 작렬하자 그의 몸은 어쩔 수 없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혈기자와 묵비향은 운룡에게 어서 가라는 뜻으로 장력을 쳐낸 것이다. 운룡은 씁쓸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칠십이마령비인을 향해 사력을 다해 덮쳐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그는 발작적으로 몸을 틀었다. 한 마리 대붕(大鵬)처럼 그의 몸은 금악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계단. 그것은 끝도 없이 아득하게 뻗어오른 황금계단이었다. 계단의 끝에는 하나의 문(門)이 있었고, 활짝 열려 있던 그 문은 지금 느릿하게 닫혀가고 있는 중이었다. "무문관(無門關)이에요.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요. 저 문은 앞으로 일 년 뒤에나 열리게 돼요." 난난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이미 사람들은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계단을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들도 빠르지만 수혼화, 마령비도 빨랐다. 사람인지 괴물인지 모를 그것들은 어느새 중인들의 바로 뒤까지 바싹 따라붙고 있었다. 슈―슉! 슈욱! 그때 돌연 앞서 오르던 예소벽의 몸이 휘청했다. "악!" 운룡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어깨 부분에 한 자루의 예리한 호접표(蝴蝶 )가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무성(無聲), 무색(無色)의 무서운 암기였다. "어…… 어서 올라가세요. 늦으면……." 연비가 급히 다가왔다. "이리 주게. 자네는 어서 올라가." "그러나……." "이 새끼야! 여기까지 와서 모든 공(功)을 수포로 돌릴 생각이냐?"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대갈이었다. 운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뚝 몸을 멈춰 세웠다. "역시 당신이 가는 것이 좋겠어요. 단 한 사람이라도 들어가야 해요." 연비, 운연, 예소벽, 두자상의 시선이 일제히 운룡을 향했다. "어서!" 난난과 이환명은 벌써 저만큼 오르고 있었다. 운룡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럼…… 용서하시오." 눈가에 언뜻 이슬이 맺히는 것도 잠깐, 그는 계단을 박차며 솟구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연비는 운룡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눈물이 흘러 옷깃을 스치는 것도, 괴수들이 바로 등뒤까지 덮쳐든 것도 그들은 느끼지 못했다. '다시…… 우리는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연비는 툴툴 웃으며 발작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검이 폭풍 같은 검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잘 가게…… 운룡!' 두자상은 쌍수를 흩뿌리며 덮쳐들었고, 예소벽은 혜연보검을 뽑아 들었다. '살아 있노라면 언젠가는…… 죽음도 이별도 슬프지 않아…….' 운연의 교구도 퉁겨 올랐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태산(泰山) 산마루에, 남루한 삶을 걸치고, 구도(求道)의 일념으로 꿈을 캐는 사나이가 있었소. 비탈진 구릉을 넘고, 가시밭 험한 길 헤치며, 오르는 하루 영겁(永劫)의 길…… 주문처럼 외는 간절한 소망의 비애(悲哀)여……. 피! 피가 위로 솟구쳐 오른다. 운룡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베고 무엇을 찌르고 있는지 몰랐다. 그저 스쳐가는 희고 붉은 편린을 그렇게 베어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악!" "윽……." 어깨로, 등 어림으로 몇 자루의 날카로운 호접표가 박혀들고 있었다. "빨리, 오빠!" 구구구― 황금의 문은 거의 닫혀가고 있었다. 이환명은 이미 문 앞에 서 있었고, 그 아래서 난난이 초조한 얼굴로 손을 휘젓고 있었다. 한 자루 보검, 옆에 차고, 비바람 천둥 속을…… 찢긴 살결 드러내 놓고, 전생(全生)을 하늘에 거는, 이 집념(執念)의 의지여……. 슈슈슉! 이제 불과 십여 보. 난난이 먼저 문 안으로 몸을 들여 놓았다. 이환명은 막 발을 걸치고 있었다. 운룡은 마지막 힘을 돋우어 크게 도약해 날았다. 한데 그때 돌연 느닷없이 이환명의 몸이 홱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사악하게 웃으며 솟구쳐 오르는 운룡을 향해 무서운 일장을 퍼부었다. "무슨 짓이에요?" 난난의 찢어지는 듯한 교갈과 더불어, 운룡은 엉겁결에 그 일장을 정통으로 두들겨 맞고 말았다. 쾅! 울컥 입 밖으로 선혈이 솟구쳐 나왔다. '너…… 바로 네가…… 도남강의 첩자였나?' "크핫하하……." 이환명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앙탈하는 난난을 뒤쫓아 문 안으로 들어섰다. "잘 가게, 운룡." 삼업(三業)을 물에 갉아, 청천장공(靑天長空)에 남아의 혼(魂)을 실으니……. 그때 돌연 두 줄기의 회영(灰影)이 떨어지는 운룡의 등뒤로 맹렬히 파고들었다. "힘을 내요. 사형(師兄)!" 슈악! 한 줄기 무형의 강기가 운룡의 몸을 떠받쳤다. 운룡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오오…… 너희들은 벽뢰(霹雷), 여의(如意)…….' 문은 거의 닫히기 직전이다. 두 회영은 사력을 다해 운룡을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슈욱! 운룡의 몸이 안으로 사라진 것과 문이 닫힌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쾅! 기적(奇蹟),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아아…… 이 구도의 일념이 정녕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차마 못다 걸어 산마루에 망천석(望天石)되어 남아도, 그 사나이 혼(魂)은, 가시밭 정기(精氣) 속을…… 그렇게 걷게 하소서……. 두 회의인, 벽뢰와 여의는 서로를 바라보며 히죽 웃다가 느닷없이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자식아, 네가 현청사부를 모셔다 드리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환명 그놈을 못 들어가게 할 수 있었잖아." "이 살찌다 못해 부어터진 놈아! 오던 길에 돼지처럼 처먹다 설사가 나서 길을 지체한 게 누구냐?" "이 말라빠져 삐꺽거리는 놈아! 나만 먹었냐? 너는 안 처먹었냐?" "너…… 왁자……." "너는…… 지껄……." 도남강. 일세의 효웅인 그는 지금 마상(馬上)에 우뚝 앉아 사라져 가는 금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은 점점 꺼진다. 산의 모습도 서서히 흐려져 가고 있었다. 난무하는 듯한 모래바람이 그 주위를 뿌옇게 가리기 시작했다. "무엇이 어찌 되었다고?" 그가 탄 말 아래에는 한 명의 혈의인이 부복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환명 소공자, 난난, 그리고 운룡입니다." "운룡도 들어갔단 말이냐?" "마지막 순간에 회의인 두 명이 그를 안으로 넣었습니다." 순간 도남강의 두 눈에서 한줄기 살기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환명! 이 멍청한 놈……." 애초에 이 모든 것이 치밀한 각본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난난과 팔대고수의 도움을 얻어 금악에까지 이르고, 최후의 순간에 이환명이 그들 모두를 처치하고 금악을 차지한다는 것이 각본의 전부였다. 다만 금악이란 곳에는 문이 있고, 그 문이 한 번 닫히면 인력(人力)으로는 열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오차였을 뿐……. 이미 금악은 그 자취를 거의 감추고 있었다. 도남강은 묵묵히 그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면 이제 모든 일은 이환명에게 맡기는 수밖에는 없다. 자신은 엉뚱하게도 열외자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쯧쯧…… 어렵게 되었다." 그러기에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謀事在人], 성사는 하늘이 하는 것[成事在天]이라고 말이다. 도남강의 대군이 허무하게 철군하는 바로 그 시각에, 그 반대쪽에선 또다시 일단의 무리가 사라져 가는 금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아선녀 진진과 그녀를 보좌하는 새외십파 특계조(特戒組) 십삼고수(十三高手)들이었다. "시작되었군." 진진은 오연하게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저 신비로운 금악에서 나오는 자가 바로 만룡가의 후예이다. 우리는 그를 기다려야 해." 그녀의 시선이 한쪽 옆에 서 있는 천축의 고수 냉면천왕(冷面天王) 비명대사(飛明大師)를 향했다. "이환명과 운룡, 그 둘 중에 누가 만룡가의 후예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요?" 비명대사는 담담하게 웃으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이환명쪽이 조금 낫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이환명은 소림, 대봉황천을 거치면서 착실하게 기초를 닦은 청년고수이오이다. 그것은 마치 잘 다져놓은 땅에 비가 내려 더 굳혀준 것과 같은 것으로써 그는 뛰어난 재질과 더불어 무예, 사문의 삼박자를 이루었소." "흐음…… 그런데?" "그에 반해 운룡은 근본적으로 토질이 약하지요. 지금까지 올라온 것도 순전히 본인의 재질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것이오이다. 독불장군이란 것이 세상에서 용납이 안 되듯 그런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소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요."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본다면 이환명이 마땅히 후계자이오. 그러나 어떤 돌발적인 일이 벌어진다면 또 모르지요. 운룡이란 위인이 워낙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인지라…… 하지만 노납은 기적이란 것이 이 세상에 그리 흔하게 일어난다고는 생각지 않소이다." 상아선녀 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금악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풍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웬일일까…… 그날 성모봉 집회에서의 남해 옥수령의 모습……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만룡가를 옹호했고…… 그것을 슬퍼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환명과 운룡, 둘 중의 하나가 그녀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단 말이야…… 흐흥! 이게 사실이라면 호적수 하나를 없애는 기회가 되겠지만…….' * * * 바람. 바람이 분다. 어떻게 되는 걸까? 금악으로 들어간 세 사람의 운명은? 그곳에는 과연 한우월잔영(寒雨月殘影)의 신비가 있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내일 일은 대개 내일 고민하는 것이 좋다. 오늘은 그저 바람이 불고 있다. * * * 어둠. 주위는 그저 먹물처럼 검은 어둠이었다. 손을 내밀어도 내민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 속에 운룡은 팽개쳐져 있었다. 운룡은 누운 채로 조용히 자신의 의식을 가다듬어 보았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파온다. 이환명의 일장(一掌). 그것은 아마도 대봉황천의 절예 중 하나인 보리살타장공(菩提薩陀掌功)이었을 것이다. 원래 그것이 대봉황천의 십대기예(十大奇藝) 중 하나여서 위력이 크기도 했지만, 워낙 엉겁결에 얻어맞은 것이라 타격이 더 큰 것 같았다. 운룡은 누운 채로 단전(丹田)에 진기를 모으다가 문득 한 가지의 요상법을 떠올렸다. 만진행공(萬眞行功). 요 근래 들어 난난과 더불어 생활하다 보니 그에게는 무공방면에 많은 진보가 있었다. 난난은 대봉황천의 기예들을 하나하나 풀어 그에게 설명해 주었을 뿐 아니라, 틈만 나면 직접 펼쳐 보이곤 했으므로 운룡은 그것들을 거의 다 기억했거나 알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지공(指功)이나 장공(掌功)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대개의 진보가 그쪽 방면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요상법인 만진행공은 무심히 한 번 듣고 스쳐 지난 것에 불과했다. 하나 운룡은 누워서 기억을 더듬자 순식간에 그 구결을 떠올릴 수 있었다. '행허(行虛)의 기운을 단전으로부터 시작하여…… 운액, 요각(腰角)의 주요혈도로 이동시킨다…….' 구결을 암송하여 가는 동안에 몸은 차츰 가벼워졌고 통증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자 운룡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돌연 팍! 하는 미미한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어둠의 한구석이 환해졌다. 빛[光]. 그것은 분명히 인공적인 빛이었다. 무심히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던 운룡의 얼굴에 한줄기 노색(怒色)이 피어올랐다. 얼굴, 불빛에 드러난 그 얼굴은 바로 이환명의 것이 아닌가? 그 또한 운룡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운룡의 품안으로 무엇인가 섬세하고 매끄러운 물체 하나가 미친 듯이 파고 들어왔다. "오빠!" 난난. 비오듯 옥용(玉容)에 눈물을 흩뿌리며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은 바로 난난이었다. "난난!" 운룡이 큼지막한 손으로 그 몸을 안자 난난은 그의 품안에서 얼굴을 도리질하며 외쳤다. "난, 나는…… 오빠가 안으로 못 들어오신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복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한 것이리라. 반은 웃고, 반은 울먹이는 어조였다. 운룡은 그녀를 꽉 껴안아 등을 몇 차례 토닥여준 후 조용히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난아. 나는 우선 빚을 좀 해결해야겠다." 말을 잇고 나서 운룡은 이환명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마침 그곳에 있었군." "……." "나는 또 아까의 일장과 그 동안 우리 모두를 괴롭혀온 첩자질에 대한 빚을 갚지 못하게 될까봐 약간의 걱정을 했지." 일거수 일투족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얼음송곳처럼 피부에 콕콕 와닿는 살기였다. 이환명은 눈을 또르르 굴렸다. 그는 한눈에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직감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운룡만 해도 자신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는 고수가 아닐 뿐더러 거기에다 난난까지 가세한다면 도저히 승산이 없을 것이 아닌가. 이에 생각이 미친 이환명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인간이란 으레 그런 것이 아니겠소, 운형. 나는 그저 남들에 비해서 욕심이 많았던 것일 뿐이오." "흐흠, 낯가죽이 두껍다는 얘기로군." "무어라 해도 좋소. 어쨌든 우리는 지금 이렇듯 불필요한 싸움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소이다." 이환명은 주위를 휘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 금악은 우리의 예상과는 상당히 어긋나 있는 것 같소. 이곳만 해도 사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전혀 알 수 없을 뿐더러 앞으로도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 형편이오." 운룡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향했다. 과연, 이곳은 하나의 긴 통로였다. 통로일 뿐 아니라 매우 어둡고 복잡했고, 앞으로 쭉 뻗어있는 길 저편으로는 지옥 같은 혼돈과 암흑이 도사리고 있었다. 운룡은 잠시 망설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난이 피식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오빠는 마음이 정직하여 남들의 심계(心計)에 쉽게 말려들고 만다. 굳이 다투어 좋을 건 없으니…….' 그녀는 짐짓 냉막한 표정으로 이환명을 주시했다. "당신의 말대로 하겠어요. 대신 그 화섭자를 나에게 양도하도록 해요." 어둠 속에서의 화섭자란 마치 폭풍에 흔들리는 배의 타목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환명은 내심 욕을 퍼부으며 화섭자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난난은 한 손에 화섭자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운룡의 팔을 낀 채,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이환명은 뒤쳐진 채 어둠 속에서 살랑이는 난난의 풍만한 엉덩이를 바라보며 두 눈에 한줄기 살기를 피워 올렸다. '흐흠! 삼 년 동안 노려온 너를 내가 이대로 포기할 성 싶으냐? 언젠가는 반드시 오만한 네가 내 발을 핥도록 만들고 말겠다.' 푸드덕― 어둠 속을 박쥐들이 간단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습기는 없었다. 건조한 가운데 한줄기 기이한 송진냄새 같은 것이 통로를 떠돌고 있었다. 난난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군요…… 숲도 없는데 어디서 송진냄새가 날까? 아마도 이 동굴은 바깥과 멀지 않은 것 같아요." 그때다. 돌연 커다란 날짐승이 홰를치는 듯한 소리에 이어 날카로운 금속성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정적을 찢었다. 푸드덕! "맞아요, 맞아요. 밖은 이곳에서 멀지 않아요." 또 다른 목소리 하나가 말을 받았다. "거짓말, 거짓말. 밖은 아직도 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목소리도 이상하지만 그 뜻은 더 이상하다. 하나는 그렇다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아니라니 말이다. 운룡 등이 목소리의 임자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돌연 팍! 하고 한 줄기 밝은 광채가 주위를 환히 밝혔다. 보주(寶珠). 이 빛은 놀랍게도 양쪽 벽에 나란히 박힌 오색(五色)의 보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고, 그 앞에는 기이하게 생긴 두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하나는 희고 하나는 검다. 모습은 구관조(九官鳥)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이 새들의 몸집은 독수리만큼이나 컸다. 운룡 등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 중 흰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부리를 꼼지락거렸다. "이곳은 금악의 입관동(入關洞)이에요. 당신들은 이제부터 생사문(生死門)을 통과해야 해요." 검은 새가 말을 받았다. "거짓말, 거짓말. 통과하지 않아도 돼요. 문은 없어요." 그러나 문은 분명히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통로는 모두 끝나 있었고, 전면에는 하나의 막다른 석벽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석벽의 위에는 고대(古代)의 갑골체(甲骨體)로 다음과 같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금악별부(金嶽別府)> 글자 하나하나가 모조리 황금으로 이루어진 이 위풍당당한 글씨의 아래에는 두 개의 돌을 깎아서 만든 석문(石門)이 있었다. 똑같은 용호(龍虎)의 조각이 훌륭하게 양각된 표면에, 문고리 하나 없는 둔탁한 문이었다. 그 두 개의 문은 터럭 하나 틀림없이 똑같았다. 이때 난난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백조(白鳥)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새님, 당신이 말한 생사문(生死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백조는 그녀의 질문이 흡족했던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두 개의 문 중 하나는 생문(生門)이지만 하나는 사문(死門)이에요. 두 개의 문은 똑같이 열려요. 당신들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요." "거짓말, 거짓말. 선택하지 않아도 돼. 그게 편해." 난난은 회의에 찬 시선을 문을 향해 던졌다. 아무리 봐도 똑같은 문이다. 한데 그 속에 생사(生死)의 갈림길이 있단 말인가? 난난이 다시 말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나요?" "없어요. 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무서운 재앙이 닥쳐요." "거짓말, 거짓말! 재앙은 없어. 그게 나아." 이때 운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나는 문을 선택하겠소." 그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두 개의 문 중 좌측의 문 앞으로 가서 우뚝 섰다. 이환명도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굳은 얼굴로 남은 우측의 문 앞에 다가섰다. "사문은 말 그대로 죽음의 문이에요. 황량한 고통과 외로움…… 마음도 죽고 몸도 죽어요. 반면에 생문은 삶의 문이에요. 그 안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어요. 그가 학자라면 희서장진(稀書藏珍)을 보게 될 것이요, 그가 무인이라면 기급보기(奇 寶器)를 얻게 될 거예요. 세상의 명예, 부위, 권세 등이 모조리 그 안에 있어요. 아름다운 아가씨, 당신이 이곳으로 와서 문을 열도록 해요. 이 아래의 구슬을 세 번 누르면 돼요." 새의 아래에 있는 석벽에 박힌 한 개의 투명한 구슬을 말함이리라. 난난은 묵묵히 구슬의 앞으로 와 섰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기실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뛰고 있었다. '오빠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일까? 만약 선택한 문이 사문이라면 어쩌지? 저들을 물러나게 하고 이것부터 먼저 눌러 볼까?' 온갖 생각이 난무하는 중에 백조의 말이 다시 귓전을 두드려 왔다. "어리석은 생각은 말아요. 사람이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문이 열리면 십재(十災)가 쏟아져 나와 모조리 죽고 말아요. 어차피 여자란 남자를 따르기 마련이에요. 어서 두 사람에게 자신들의 앞길을 보여줘요." 기분 나쁘도록 영민한 새였다. 난난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구슬에 갖다댔다. 한 번. 파르르 손끝이 떨린다. 두 번. 콩콩 가슴이 뛰고 있었다. 문득 운룡의 건장한 뒷모습이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순간 난난은 입술을 으깨져라 깨물며 힘껏 구슬을 눌렀다. 휘이잉― 구구구― 다음 순간 느닷없이 둔탁한 소음들이 온 동굴을 뒤덮는가 싶더니 운룡과 이환명의 앞에 있는 석문이 이를 데 없이 빠르게 열렸다. 파파팟! 운룡은 무엇인가 섬뜩한 수십 개의 한성(寒星)이 자신을 향해 쏘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저 느꼈다 뿐이다. 그것들의 속도는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쾌속했다. 순간 운룡의 입에서 둔탁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욱!" 창(槍). 그것은 스물네 자루의 창이었다. 이 창들은 운룡의 몸을 머리, 이마, 눈, 가슴, 팔, 다리, 할 것 없이 모조리 꿰뚫었으며, 꿰뚫었다 싶자 그의 몸을 꼬치처럼 꿴 채 다시 안으로 푹 들어가고 말았다. 슈슈슉! 쾅! 그리고 문이 닫혔다. 반면에 이환명은 자신을 향해 상쾌하게 쏘아져 오는 찬란한 일광을 보았다. 광채. 문 안은 바깥 세상이었다. 그것은 온통 광채로 이루어진 세상이었다. 황금으로 이루어진 산과 진주(珍珠)가 쌓인 강가, 마노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며, 보주와 대리석을 연이어 지은 집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뿐이랴! 문 앞에는 열 명의 백의미소녀(白衣美少女)들이 날아갈 듯 서 있었다.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미녀들이었다. 그녀들의 몸은 그대로 자연석을 빼어 가공한 듯 섬연하고 웃음은 꽃처럼 상큼하다. 이 천향국색의 미녀들은 이환명의 시선이 닿아오자, 즉시 그 자리에서 날아갈 듯 대례(大禮)를 올렸다. "삼가 금악십미(金嶽十美)가 악주(嶽主)님을 뵈옵니다." 악주(嶽主). 산의 주인이란 뜻이니……. 처음에 이환명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입을 벌려 웃음소리인지 무엇인지 모를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크핫하하……." 그가 일생 동안 웃어온 웃음 중 가장 유쾌하고 굉렬한 대소를 터뜨려낸 것이다. 그렇다. 악주! 그는 운좋게도 생문을 택했던 것이고, 그리하여 마침내 금악의 주인이 된 것이었다. 천 년을 이어온 전통의 가문, 만룡가의 후계자가 된 것이었다. "크핫하하……." 난난은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여기에 서 있어야 하는 자신이 몹시 싫어졌고, 그러므로 어서 꿈에서 깨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힘껏 혀를 깨물어 봐도 꿈은 깨어지지 않았다. "크핫하하……." 저주스런 웃음소리가 귓전을 파고 들어왔다. 난난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 자세 그대로 그녀는 스르르 썩은 짚단처럼 땅을 향해 쓰러져 갔다. 나의 오빠는 사문(死門)을……. 악마는 생문(生門)을……. 하늘이여! 당신은 이토록 엄청난 실수를……. 용기있고 정직한 자를 파멸로 내던지고, 사악하고 간사한 자를 행운의 길로 인도하다니……. 싫다…… 정말 싫다. 22. 또 하나의 地獄 금악은 한 마디로 완벽했다. 그곳에 축적되어 있는 부(富)는 대명제국의 황실(皇室)보다도 더 거대했고, 소장되어 있는 서책(書冊)은 온 나라의 서책을 모조리 다 모은 것보다도 더 많았다. 무예 방면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 곳의 병고(兵庫)엔 십만구천 종(種)의 병기가 소장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사라진 오대신검(五大神劍) 중 담노(曇盧), 어장(魚藏), 막사(莫邪) 등의 절대신병(絶對神兵)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뿐인가? 약고(藥庫)로 들어서니 자령신초(紫靈神草), 학우근(鶴羽筋), 구룡신담(九龍神膽) 등의 희대의 영물부터 시작하여, 학정홍(鶴精紅), 화혈단근산(化血斷筋散), 음양생사초(陰陽生死草), 흑서(黑鼠) 등의 극독이물(極毒異物)까지 가득가득했다. 그리고 무고(武庫). 바닥은 흰 대리석(大理石)과 검은 오석(烏石)이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었고, 그 양쪽은 석실(石室)이었다. 이름을 자련(紫蓮)이라 한 미소녀 하나가 사근사근한 어조로 이환명을 향해 말했다. "천하웅주(天下雄主)의 수업은 바로 이 서책에 있어요. 이곳에는 천하의 모든 경서(經書)와 무서(武書)가 총망라되어 있어요." 책이 많다많다 해도 이렇게 많을 수가 있을까? 그것들은 모두 삼 단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제일실(第一室). 이곳은 학문(學文)을 위한 모든 종류의 경서(經書)가 총망라되어 있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에 예기(禮記), 춘추(春秋), 무경칠서(武經七書)는 말할 것도 없고, 산해신경(山海神經), 잠아함경 같은 심오한 경론(經論)에다, 불도선(佛道仙) 삼가의 법문(法文)에 이르기까지 물경 만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서책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이실(第二室). 제일실이 광대한 학문의 집산이라면 제이실은 방문잡학의 총체였다. 기문진법(奇門陣法), 수리역학(數理易學)에 기관장치(機關裝置), 점복역리(占卜易理). 뿐이랴! 의법(醫法)에 용독술(用毒術)에다 상경(商經), 토지(土地)에 관한 경제서책까지 구비되어 있으니 하늘 아래 이렇듯 잡다한 학문이 한 곳에 모인 곳이 어디 있으랴? 제삼실(第三室). 이곳을 들어서는 순간 이환명은 두 눈에 크게 놀란 빛을 스쳐 보냈다. 제일실과 제이실이야 그렇다 쳐도 이곳엔 그가 감히 상상해 보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보라! 수백 권에 달하는 이 고서(古書)들은 바로 각대문파가 죽음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비전절예(秘傳絶藝)들이 아닌가? 달마역근세수경(達摩易筋洗修經). 무당(武當)의 태극양의검법(太極兩儀劍法). 곤륜(崑崙)의 태허도룡대구식(太虛屠龍大九式). 아미(峨嵋)의 금정천룡신공(金頂天龍神功). 화산(華山)의 태을전진미리장(太乙全眞迷離掌) 등. 병기, 무예, 단약, 그밖에도 금악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악주께서는 이곳에서 일 년간 무예수련을 하실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음대로예요, 이 안에 있는 것들은. 심지어는 이 말씀을 드리고 있는 저까지도 바로 악주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세요." 이환명은 크게 흡족했다. 그는 용봉촛대와 상아침상이 어우러진 곳에서 잠을 잤고, 아침에 일어나선 벽산(碧山) 자봉단련차(紫鳳端蓮茶)와 금릉죽순(金陵竹筍)에 빙정(氷精)을 섞은 연와탕(燕渦湯)으로 식사를 했다. 이어 미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머리를 빗고 운남 연잠사(軟蠶絲)로 만든 유의장삼을 입고는 처소를 나서는 것이다. 연후 무고를 한 바퀴 돌아 이것저것 훑어보노라면 저녁 무렵이고 다시 처소로 돌아와 장미꽃잎을 띄운 미수로 목욕을 하고, 사천(四川)의 백옥호춘(白玉壺春)을 한 잔 마시며 미녀의 부드러운 손길 아래 잠드는 식이었다. 그는 결코 황제가 부럽지 않았고 온 천하가 바로 자신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굳이 불만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난난이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건너편 누각에 자리를 잡은 그녀에게 추근거려 보았다. 하나 그녀는 마치 서릿발처럼 차가웠고 얼음처럼 냉정했다. 이환명은 거의 그녀에게 말을 붙여볼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환명은 그런 그녀의 태도를 굳이 불만이라고까진 생각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는 세상에 하나쯤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있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으니까. 세월은 아직도 많고, 어차피 일 년간을 자신과 함께 지내게 될 테니까! "언젠가는 그 도도한 몸을 짓밟을 때가 오리라……." 난난은 최초 열흘간은 누각에 틀어박힌 채 머리칼 하나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식사조차도 그녀는 하루 한 끼 정도였고, 그것도 거의 숟가락을 들다 말 정도로 먹었다. 이환명의 풍요, 이환명의 행복, 이환명의 즐거움. 이 모든 것들은 비례하여 그녀에게 불행과 괴로움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녀는 곰곰이 죽음을 생각했다. '하늘은 어차피 만룡가의 후예로 이환명을 택했어. 가문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이것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다만 나는저 사치스런 악마와 한 하늘을 이고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죽음에 대한 생각은 엉뚱하게도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 주었다. 난난은 열흘째 되던 날 근처에서 서고(書庫) 하나를 발견했다. 무술과는 관계없는 일반서적이었지만 난난은 이내 그 서책들에 깊이 함몰해 들어갔다. 오늘도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누군가가 쓴 인생론(人生論)이었다. 그곳에는 이러한 구절이 하나 있었다. <풍요는 인간을 방탕하게 하고 고통은 의지를 준다. 전자는 가을을 맞은 무성한 나무요, 후자는 봄을 준비하는 겨울나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인생은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꿈이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고통스런 시합이다. 부자에게는 희극이고 가난한 자에게는 비극이다. 마음도 그렇다…….> 순간 난난은 왈칵 눈물을 쏟으며 미친 듯이 책을 찢어발겼다. "거짓말! 거짓말! 내 오라비는 그토록 마음이 풍요로웠어도 결국 죽고 말았지 않았는가……." 흩어져 날리는 종이와 무거운 오열. 종이가 찢겨져 나가듯 여인의 마음도 그렇게 찢겨지고 있었다. * * * 그렇다면 운룡,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정말로 죽은 것일까? 하지만 위대한 인간에게는 위대한 적(敵)이 있다고 했다. 불패의 승부사 운룡, 그는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가? 아니, 그렇지도 않다. 그는 죽었다고도 살았다고도 할 수 없는 미묘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어둡다. 도대체가 이곳은 죽음처럼 어두운 곳이다. 지금까지의 내 삶이 그래왔듯 나는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나는 지금 호흡을 하고 있지 않다. 내 심장의 박동을 느낄 수 없다. 피도, 의식도, 모조리 그 흐름을 멈추었다. 나는 분명히 살아 있지 않다. 내가 느끼는 것은 오직 고통뿐이다. 우습지 않은가? 심장이 멎은 자가 고통을 느낄 수 있다니 말이다. 스물네 자루의 창은 내 전신을 누에고치처럼 앞뒤로 꿰뚫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럴 때 죽어서 고통을 잊지만 나는 죽지 못했으므로 그 고통을 고스란히 맛보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한없이 부드럽고 수축력 있는 한 공간에 몸이 떠 있다. 꽂혔던 창들은 빠졌지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나의 몸으로는 각종의 철조각들이 실험이라도 하듯 베고 자르고 지나간다. 어떤 때는 도끼가 백정이 소의 몸을 분해하듯 나의 어깨에, 무릎에, 허리뼈에 틀어박힌다. 섬뜩한 도끼날이 내 살을 파고 들어와 뼈에 박히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고통까지도……. 또 어떤 때는 톱니바퀴가 소리없이 나의 등을 찢고 지나간다. 살갗의 표피로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더 깊게, 그리고 치밀하게 파고 들어온다. 도끼에 찍힌 뼈를 그것이 긁고 지나기도 한다. 그밖에도, 칼, 창, 죽장, 소도, 비도 등이 끊임없이 잠시의 시간도 주지 않고 내 몸에 틀어박혔다간 다시 빠지곤 하는 것이다. 고통. 나는 더 이상 고통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 동안 내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빚어왔던 고통을 지금의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마치 거대한 숲속의 나뭇잎 하나, 바다 속의 물방울 하나와도 같다. 나는 그래서 이 상황들을 고통스럽다거나 아프다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들로 어줍잖게 표현하기에는 내 육체에게 너무 미안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지금 도대체 왜 살아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포악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누군가가 내게 베풀고 있는 이 가혹한 행위가 아니라 이 행위로도 죽지 못하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어떤 시간들이 흐르고 있는 걸까? 모든 것은 망각되었다. 그러나 운룡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쉴새없이 뇌리를 엄습하는 환상들이었다. 환상.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다채롭고 다양했다. 어떤 때는 할아버지 진천우도가 피투성이가 되어 바로 눈앞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나를 살려다오!" 심지어, 할아버지는 온통 머리를 풀어헤치고 나타나선 운룡의 목을 조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운연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자(者)에게 강간(强姦)을 당하고 있기도 했다. 대개는 얼굴은 있으되 이목구비가 없는, 또는 입 하나, 눈 하나만 달랑 있는 그런 괴상한 몰골을 한 자에 의해서 운연은 완강하게 짓눌리고 있었다. 근처에는 발기발기 찢겨나간 옷이 아무렇게나 수북이 쌓여 있었다. 눈 덮인 땅 위에, 또는 파도 위에, 또는 모래 위에 그녀의 새하얀 나신(裸身)이 눕혀져 있곤 했다. 운연은 반항을 한다.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괴물을 밀쳐내기 위한 그녀의 몸부림은 거의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괴물의 우람한 동체는 그런 그녀의 몸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구름결 같은 운연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기묘한 율동을 해가는 것이다. 그의 하체가 한 번 꿈틀거릴 때마다 운연은 바르르 몸을 떨며 고통스런 신음성을 터뜨려내곤 했다. 그 여린 나체는 슬퍼 보인다. 희끄무레한 운연의 종아리와 털이 북실북실한 사내의 다리가 얽히고 설키고, 해초(海草)처럼 흐물흐물 풀어헤쳐진 검은 미발(美髮)은 흐느적거리듯 통곡을 터뜨린다. 강간의 환상, 그리고 또 환상……. 냉혼이 위지중걸을 찌르고 있었다. 옥수령이 그를 향해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검으로 배를 쭈욱 긋고 있었다. 엽상의가 깔깔 웃으며 지글지글 철판 위를 걸어가고 있었고, 혜공이 웃으며 꾸역꾸역 내장을 토하고 있었다. "웃는다, 웃는다. 너도 웃고 나도 웃는다." 예소벽이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넌 죽었어." 연비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너도 웃어라, 죽어도 웃어." 아아…… 아버지 화천상이 웃고 있다. 현청사부가 비웃고 있다. 삶도 웃고 있었고, 죽음도 웃고 있었다. 녠녠…… 킬킬…… 헤헤…… 호호…… 하하…… 히히……. 웃자, 웃어! 무엇을 못 웃고, 무엇을 웃을 텐가? 빌어먹을 세상도 웃고, 고통도 웃고, 검도 웃고, 계집도 웃고, 보살도 웃고, 정사도 웃고, 신음도 웃고, 나체도 웃고, 정액도 웃고, 술도 웃고, 물도 웃고, 성기도 웃고, 웃음도 웃는다. 운룡도 웃었다. "왜……?" 껄껄 웃는다. "도대체 왜……?" 내장이 간지러워지도록 웃었다. "누가 도대체 왜……?" 핫하하하…… 핫하하하…… 핫하하…… 하하……. "왜?" 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고통만이 진실해질 수 있어요. 고통은 믿음이요, 진실 또한 가난함입니다. 생각해 보아요. 겨울이 없다면…… 그 추운 바람과 눈보라가 없다면 어둠이 어찌 그리 풍요롭겠어요. 불행한 여자의 웃음이 더 아름다운 것도…… 삭풍 속의 불꽃이 더 뜨거운 것도 모두 같은 까닭이에요.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진실한 무예는 바로 그 고통 속에서 탄생합니다.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무엇을 더 두려워하겠어요? 이 고통을 극복한다면 당신은 강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극복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죽고 말 겁니다……." 왜 갑자기 그것이 떠올랐을까? 도저히 자신으로서는 이겨낼 수 없는 육체와 정신의 두 가지 고통이 쌓이고 쌓여 화살처럼 한줄기 거대한 비명으로 분출해 올랐을 때, 운룡은 더불어 성심마공의 구결을 떠올렸다. 마치고 마치어 끊임이 없고[了了不斷], 끝닿는 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며[無涯所地], 텅 비었는지 비다 말았는지 모를[空空有極]. 말 같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그 빌어먹을 놈의 무예가 떠올랐던 것이다. 깊이…… 깊이 함몰한 채……. 운룡은 그 떠오르는 초식에 몸을 맡겼다. 그는 일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의 환상도, 육체적인 고통도 없었다. 대신 그의 마음에는 참으로 괴이한, 말로는 표현할 수조차 없는 괴상한 존재 하나가 생기기 시작했다. * * * "우욱!" 돌연, 운룡은 몸을 휘청이며 한 모금의 선혈을 왈칵 뿜어냈다. 파아앗! 그러나 그는 피를 뿜음과 동시에 한 마리 맹수처럼 공간의 한쪽에 몸을 도사리며 예리한 시선을 좌우로 굴렸다. 누군가 있다. 성심마공(聖心魔功)의 뜻을 새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운룡은 집요하게 자신을 노리는 한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인적(人跡)이라고는 있을 까닭이 없는 무애공간이 아닌가? 그러나 분명히 있다. 형체도, 흔적도 없는 무형무적(無形無跡)의 존재가! 성심마공만 생각하면, 그것이 느껴진다. 소름끼치도록 전신을 파고드는 공포의 기운이 마음속을 제멋대로 할퀴고 다니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생각하지 마라…… 너는 죽는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너는 틀림없이 죽고 만다." 그러나 성심마공에 대한 생각만 지우면 공포의 그림자는 더불어 사라지곤 하였으니……. 극렬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부터 운룡은 보다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세밀히 살필 수 있었다. 이곳은 바닥만 있고 천장과 사방은 없는 절대무비의 거대한 공간이었다. 온 천지는 뿌연 황색이었고, 마치 천지가 생기기 전의 세상의 모습이 이랬을까 싶은 광경이요, 장소였다. 하나, 운룡은 성심마공에 몰두하다가 무려 세 번이나 피를 토했다. 공포의 그림자에 대항한 대가였다. 피를 토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고통으로 하여 마치 악귀 같았고 전체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를 토하는 따위는 수백 수천 번도 더해 본 것이다. 다만, 이 알 수 없는 공포의 그림자. 운룡은 이것이 바로 성심마공 속에 숨은, 보이지 않는 마성(魔性)이라고 생각했다. 진천우도를 마인(魔人)으로 만든 그 사악한 놈인 것이다. 그렇다. 드디어 이 마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또 다른 인간 하나를 자신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 * * 어딘가? 하기야, 어디 있든 상관은 없겠지. 너는 또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방해를 놓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좀 달라……. 나는 이미 상상도 할 수 없는 모든 고통을 다 겪었다. 그 지옥 같은 고통보다 더한 것이 이 세상에 있으리라곤 여길 수 없을 지경이란 말이야. 자…… 오라, 마성이여……. 진천우도의 손자요, 화천상의 아들인 나 운룡과 한판 승부를 벌이자. 생각을 일으켰다. 그것은 성심마공의 제일식(第一式) 요요부단(了了不斷)! 순간 운룡은 음산하고 싸늘한 기운 하나가 자신의 몸을 자욱이 둘러싸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끌어올려진 요요부단의 생각을 이어 나갔다. 뇌(腦)를 쪼개내듯 느닷없이 강렬해지는 기운이여……. 파아앗― 무엇인가가 금방이라도 목을 잘라낼 듯한 극도의 공포와 자신을 죽일 음모가 서서히 무르익는 듯한 느낌이 팽배해진다. 운룡은 거의 필사적으로 갈라지려는 생각들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러나 극심한 심적 고통으로 또다시 울컥 입 밖으로 치밀어 나오는 핏물. '안 돼!' 그는 사력을 다해 목구멍까지 솟아나온 피를 삼켰다. '피를 토하면 또 진다!' 아아! 사투(死鬪)! 차라리 형체있는 대상을 향해 도검권장(刀劍拳掌)을 휘두르는 것이라면 죽어도 속이나 시원하겠건만……. 피가 마른다. 뼈가 갈라지고 세포가 산산이 분해되는 듯한 격동이 마음을 두들겼다.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 순식간에 열흘의 시간이 흘러갔다. 인간이 밥과 물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그것은 운룡을 보면 안다. 그가 쓰러지는 시간이 바로 그 한계인 것이다. 불과 열흘의 시간이련만……. 그의 몰골을 보라. 머리카락은 들쑤셔 놓은 듯 난잡하게 헝클어졌고, 입가에는 삼키고 삼킨 핏물의 흔적이 제멋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움켜쥔 주먹의 열 손가락은 모조리 장심(掌心)을 파고 들어가 그곳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을 흥건히 적셨고, 몸에서 발산된 기(氣)는 그가 앉은 돌바닥을 한 자(尺)나 파놓았으니……. 산 사람이 보면 귀신을 보았다고 도망칠 것이고, 귀신이 보면 일찍이 경험 못한 귀상(鬼像)이라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날 몰골. 운룡은 지금 성심마공의 두 번째 초식인 무애소지(無涯所地)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다. 몸을 엄습하던 마성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카롭던 예봉이 이미 태반이나 꺾였음을 운룡은 느낌으로 알았다. 다시 사흘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막 열나흘째의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 돌연 엉덩이 밑의 바닥이 굉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만난 듯 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운룡의 뇌리를 엄습하던 마성의 기운이 갑자기 그 유래가 없도록 강렬해졌다. 파파팟! "으헉!" 운룡의 신형이 한차례 휘청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고통! 그 고통은 너무 삼엄하여 그것이 고통인지 아닌지, 괴로움인지 뭔지조차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아득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가?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던 실오라기 같은 생각조차 폭죽 터지듯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가 태어나서 마주치며 살아온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현청노도사와 그의 동문형제(同門兄弟)들, 그리고 여러 여인들의 얼굴……. 연비와 두자상과 백리천과 혜공……. '안 돼…….' 마음속으로만 맴도는 실낱 같은 외침! 그러나 다음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이나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중얼거림에 이어, 그가 일찍이 토해낸 적이 없던 굉렬한 외침이 운룡의 입을 뚫고 튀어나왔다. "안…… 돼…… 안 돼!" 순간 느릿하게 뒤로 엎어져 가던 그의 몸이 퉁기듯 원래의 자세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정적. 웃음[笑]. 운룡의 차고 무심한 얼굴에 피어올라 있는 것은 웃음이었다. 아니, 속인(俗人)들의 관습은 그것을 웃음이라고 얘기하나 기실은 웃음이 아닌 다른 차원의 것! 이 세상에 무엇이 생기고 없어지기 이전(以前)의 모든 것을 포용하며 모든 것을 용서하는 무념(無念), 그리고 무상(無想)의 절대경지! 무(無)란 그저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겨울의 나뭇가지 끝에서 봄날의 파릇한 새순이 피어나듯 운룡에게 닥친 극도의 고통은 그 반대 경우인 초극(超極)의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 원한도, 사랑도, 그밖에 인간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두었기에 겪어야 하는 모든 질서와 굴레를 초월한 무아(無我)의 경지. 마음은 이제 그의 것이다. 진정한 마음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이 무아의 마음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 운룡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몰골은 여전히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흉측했으나 그의 두 눈만은 물처럼 맑고 담담했다. 그는 마치 지나온 광경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으나 그의 마음에 부딪혀 오는 깨달음은 분명히 달랐다. 한 개의 돌이 빠져 들어가면 소연(小淵)의 수면에는 파장이 일어난다. 본래 수면이란 잔잔한 것이다. 다만 돌이란 외적인 힘이 가해졌을 때 수면은 흔들린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번뇌하면 할수록, 무질서하게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마음은 어지러워진다. 운룡은 허리춤에 찬 한철검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검(劍)…… 네 모양은 검이 아니나 너는 검이다. 내 마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한차례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그의 몸은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정적, 그리고 침묵. 한순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서광(瑞光)이 공간에 자욱이 피어올랐다. 만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보는 이의 눈을 와르르 떨게 하는 광채. 파파팡! "요요부단(了了不斷)!" 마음! 마음이다! 마음의 힘 앞에 육체란 무력(無力)한 것이며……. "무애소지(無涯所地)!" 성심마공이란 바로 그 마음으로 펼치는 것이다. 육체란 그 심결(心訣)을 방해하는 한낱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공공유극(空空有極)!" 인류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후의 위대한 초식이여……. 한줄기 믿음으로 그 힘을 만천하에 뿌리노라. 쿠쿠쿵! 쾅! 인간의 육체구조로써는 익혀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석 자 길이의 한철검에서 쏟아져 나오는 검기(劍氣)는 아직까지 이 세상에 없었던 미증유(未曾有)의 거력(巨力)을 휘몰아쳐 왔다. 바닥 전체가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날리는 가루들은 눈앞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것들은 송두리째 하늘로, 또는 먼지로 변해 팔랑팔랑 공중으로 날아갔다. 꽈르르! 아아…… 이 땅의 무황인 진천우도도 익혀내지 못했던 그것! 조화에서 지념(止念)의 단계에 이르는 연결무예이자 초극의 강공(强功)! 성심마공이 인세에 그 찬연한 모습을 내보이는 순간이었다. 쿠쿠쿠― 크크크― 운룡은 아직도 폭음이 일고 있는 지상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광활무변의 공간을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허탈했다. 그리고 고요했다. 그 공간 한구석에 할아버지 진천우도의 밝게 웃는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장하다……. 정말 장하구나, 룡아……. 한 줄기 이슬이 언뜻 눈가에 맺혔다. 운룡은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찍으며 빙글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갈지…….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운룡은 그저 가면 된다. 부르는 자는 없으나 반드시 나타나는 자는 있을 것이므로……. * * * 짹짹짹! 새가 운다. 졸졸졸! 시냇물이 흐른다. 그리고 눈부신 햇살. 소녀(少女). 검은 머리를 허리 아래로 우단처럼 내려뜨린 이 소녀는 하나의 깊은 연못가 바위 위에 섬연히 앉아 있었다. 쿠쿠쿵! 한 줄기 굉렬한 폭포가 그 폭음을 사위로 흩뿌려내는 가운데 폭포가의 한쪽에는 아담한 목옥(木屋) 하나가 지어져 있었다. 얼마나 걸어왔는지……. 그리고 그 무애공간의 끝에 이렇듯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펼쳐져 있을 줄이야 누가 감히 상상인들 하였으랴! 이때 돌연 소녀의 검은 머리가 부드러운 한 줄기 호선을 그려냈다. 시선. 부드럽고 투명하다. 이 아름다운 시선은 곧장 운룡의 얼굴에 이르는가 싶더니 이내 배시시 한줄기 웃음을 머금었다. "이곳이 대체 어디이오?" 운룡의 물음에 미소녀의 붉은 입술이 나풀거렸다. "금악(金嶽)." 이어 그녀는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없이 훌쩍 바위를 내려서더니 폭포가의 목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운룡은 새삼스레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금악, 금악이라고? 도대체 금악은 몇 개나 있는 것이란 말이냐?' 만지면 금방 흰 분가루라도 묻어날 듯 희고 선연한 종아리. 몸매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종아리까지 이렇듯 아름답게 가꾸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소녀는 군살 하나 없는 아름다운 종아리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소녀의 몸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 살이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지 못한 부분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소녀는 지금 녹색단삼(綠色短衫)에 같은 색의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운룡이 앉은 탁자 위에 말없이 음식을 진열해 놓았다. 나무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은 매우 정갈하고 맛깔스러워 보였다. 운룡 또한 가타부타 한마디 말없이 그 음식들을 입 속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요 근래 그는 매우 평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것은 어떤 일은 알고자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지지만, 또 어떤 일은 알고 싶어 안달을 해도 알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소녀에게 묻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음식을 먹는 데 열중했다. 그러고 보니 요 근래 식사다운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음식을 보자 뱃속의 식충(食蟲)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볼이 메어 터지도록 음식을 쑤셔 넣었다. 씹고 삼킴의 이 감미로움이여……. 음식은 놀랍도록 입에 맞았다. 소녀는 그가 음식을 먹는 동안 한쪽의 의자에 앉아 조용히 바느질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깁고 있는 것은 남자옷이었다. 운룡이 거의 음식을 다 먹어갈 때쯤 그녀의 입이 고요하게 열렸다. "매우 강해지셨군요…… 축하 드려요." 운룡은 막 끄윽 트림을 하며 물그릇을 집어들려다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무슨 말이오?" "고통을 이겨내신 것을 축하한다는 말이에요……." 그때 문득 운룡의 뇌리로 하나의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났다. 목소리. 극한의 고통 속에서 그가 비명을 터뜨렸을 때 고요하게 귓전을 타고 들어오던 그 목소리. 그렇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이 소녀였다. 운룡의 분노로 일그러진 시선이 소녀를 향해 쏘아갔다. "그 고통, 그 지옥…… 모두가 당신의 짓이었소?" "그래요." 간단한 대답. 운룡의 손이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사람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은 그런 상태에서 웃으며 내 살을 무자비하게 파헤쳤단 말이오?" 순간 소녀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고인 물처럼 고요하게 정지된 시선이었다. "애초에 사문(死門)을 택한 당신의 잘못이에요. 나는 사문제일비(死門第一妃)예요. 이곳에서 사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나의 임무예요. 보인 것은 이 금악이 만들어 놓은 안배구요." "안배라고……?" "금악에는 생사양문이 있어요. 생문은 풍요롭고 환락적이며 무예를 익힐 수 있는 제반 설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곳이에요. 반면에 사문은 경험하신 것처럼 황폐하고 외로우며 지겨운 곳이에요." "……!" "그러나 두 사람에겐 똑같은 기적이 있어요. 즉, 생문에는 생문의 관문이, 사문에는 사문의 관문이 있는 거지요. 누가 먼저 그 관문을 뚫고 한우월잔영이 있는 곳까지 가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능력에 달렸어요. 당신은 사문사관(死門四關) 중 이제 겨우 하나를 지나온 것이구요!" 말을 잇던 소녀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당신에게 그런 것을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당신이 만약 사문 제일관문에서 주저앉았다면 이미 금악 밖으로 쫓겨나 있을 거예요. 물론 생명은 건진 채…… 앞으로의 관문이 두렵다면 이제라도 포기하세요! 그만두란 말이에요!" "……." "사랑이 두려우면 애초에 만나지 않으면 되고, 배신이 두려우면 배신당할 만한 관계를 아예 갖지 않으면 돼요. 당신 한 사람의 그 알량한 존재가 이 사문을 통과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니 아예 죽어버린다고 해서 세상이 눈 하나 깜짝일 것 같은가요? 해는 여전히 떠오르고 새는 똑같은 소리로 노래를 이어요. 바람은 불던 곳을 향해 불고, 물은 여전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요. 무엇 하나 변할 줄 아나요? 당신이 죽으면 사람들이 모두 삶을 포기할 것 같은가요? 산이 바다로 변하고 내일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기라도 한단 말인가요? 그따위 응석은 집에 가서 늙은 노모한테나 부려요. 그런 한심한 의지의 사람이라면 이곳의 밥 한 끼도 아까워요!" 단숨에 여기까지 내뱉고 난 소녀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문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바로 그때 운룡의 입에서 한소리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는 탄식과 함께 말했다. "내가 잘못했소. 운룡은 사문사관을 계속 통관하길 원하오." 순간 소녀의 몸이 뚝 멈춰 섰다. 그녀는 말없이 몸을 돌리더니 식기들을 챙겨선 주방으로 들어가 달그락달그락 씻기 시작했다. 그녀는 약 반각 후에야 걸어나오더니 털썩 자리에 앉아 바느질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운룡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리고 아까의 얘긴데…… 당신은 내게 집에 가서 늙은 노모에게나 응석을 부리라고 했지만 나는 그 늙은 노모가 없어요. 뿐만 아니라 나는 응석을 부린 것이 아니오. 왜냐하면 그런 것은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참으로 엉뚱한 말이었다. 소녀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그 눈가에 보일 듯 말듯 떠오른 것은 웃음일까? 그녀는 실 끝을 오므려 바느질을 마무리짓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어, 침상쪽으로 다가가 대충 침구를 정돈하더니 운룡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얼굴이랑 몸의 상처가 나을 때까지 이곳에 계세요. 남은 삼관은 주로 무공으로 벗어나는 것이니 그 동안 자신의 무예를 손질해 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앞으로는 저를 유혜(柳慧)라고 부르세요." 그녀는 사뿐사뿐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다 말고 문득, 그녀는 웃음띤 얼굴을 문 안으로 살짝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제일관에서 웃으며 당신에게 고통을 준 적은 없어요. 많이 울었지만요." 23. 死門四關 "아흑…… 아아……." 이를 데 없이 뇌쇄적인 여인의 목소리. 흰디흰 손은 침상자락을 꽈악 거머쥐고 있었다. 폭풍이 휘몰아치듯 한번 피어오른 정열의 불꽃은 좀처럼 사그라질 줄 몰랐다. 땀에 절은 동체와 동체가 비늘을 번뜩이며 맞닥뜨리고……. 욕망의 피안을 향해 두 사람은 지칠 줄 모르고 치닫고 또 치달았다. 이윽고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있던 두 육체가 긴 한숨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정사(情事)의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감돌았다. 유혜의 벗은 상반신이 운룡의 가슴을 눌러왔다. 그녀의 흰 손이 그의 가슴 위로 얹혀졌다. 유혜는 깨끗한 알몸이었다. 운룡은 손을 돌려 그녀의 허리에 감고, 나머지 손으로는 그녀의 젖가슴을 만졌다. 그녀의 머리칼이 별빛을 받아 푸르게 반짝였다. 문득 유혜가 중얼거렸다. "가슴의 상처…… 몸의 상처는 다 없어졌군요." "응!" "그러고 보니 벌써 한 달……." "지겨워서?" "아뇨, 슬퍼서……." 운룡이 유혜의 허리를 어루만지자 그녀는 허리를 약간 비틀었다. 운룡의 얼굴 위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덮어 내려왔다. 향긋한 냄새가 스쳤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어요." "그렇군." "무예는 어느 정도 정리됐어요?" "거의 다. 만룡가의 기본무학은 자부할 수 있지." 유혜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일어나 앉았다. 등과 엉덩이의 둥근 곡선이 미끈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침상 옆에 쌓인 옷을 주워 들었다. "왜?" "밥을 지어야겠어요. 마지막 아침이니 성대한 만찬으로……." 유혜는 내내 웃었다. 운룡의 머리를 빗기고 지은 옷을 입혀 이리저리 돌려도 보고, 밥과 반찬을 만들며 콧노래도 흥얼거렸다. 그녀의 태도가 너무 유쾌하고 즐거워 보여 운룡은 그녀가 이별을 즐거워하고 있다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쿠쿠쿵! 폭포는 여전히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지난 한 달간 심신을 바쳐 무예를 수련했던 곳이었다. 바위 위에 올라섰을 때 유혜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동안 고마웠어." 유혜의 뽀얗게 웃음띤 얼굴이 운룡을 향했다. "제 일인 걸요. 악주(嶽主)를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그…… 정도인가……?" 운룡이 약간 실망하는 눈치를 보이자 유혜는 혀를 날름 내밀었다. "머뭇거리다간 하루가 또 지나가 버려요. 어서 가세요." 운룡의 시선이 오랫동안 그녀를 향했다. 그러다 말고 그는 몸을 거칠게 홱 돌리더니 바위를 박차고 연못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럼……." 슈팟! 풍덩! 물보라가 햇살에 비쳐 뽀얀 무지개를 만들어낸다. 운룡의 몸이 가물가물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이내 그 몸이 시야에서 완전히 꺼지는 순간, 유혜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신, 한 줄기 영롱한 이슬이 주르르 볼을 타고 내리는가 싶더니 그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가시는구나……." 여정(女情)에 얽매일까 못내 웃었더니 이 가슴이 이렇게 시리구나. 산천은 만고의 세월을 두고 그 웅대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초목은 태어남에서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 떠나지 않는데…… 찰나를 사는 현세의 인간사(人間事)는 왜 이리도 이별이 많은가? 후훗…… 일생(一生)이란 그런 것일 테지. 가는 자는 가고, 남는 자는 남는 거지. 때론 만남이란 그렇게 허망한 거지. 님은 가네. 소중한 님은 가네. 삼각돛배 황톳길 넘어서 그렇게 님은 가네. 뒷모습 허망하여 꿈깨듯 소스라친들…… 병든 고목처럼 숨죽여 눈물 참아본들…… 아아…… 님은 가네. 소중한 님은 가네. 내가 더 무엇이 되어 여기에 남겠는가……. * * * 춥다. 연못의 안은 뱃속까지 얼어붙이듯 시리고 추웠다. 운룡은 급히 호신강기(護身 氣)를 끌어올려 추위를 막는 한편 시력을 최대한으로 돋구었다. 그렇잖아도 햇살조차 스며들지 않는 지하계곡의 연못은 눈앞에 내민 손가락조차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웠다. 그야말로 한 올의 희망도 엿보이지 않는 절망연(絶望淵)이란 명칭이 실감나는 순간인데……. 돌연 운룡은 밑으로부터 강력하게 잡아끄는 흡력(吸力)을 느꼈다.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밑바닥을 향해 시선을 던진 후 이내 흡력에 몸을 맡겨 버렸다. 어디로 가는지 한도 끝도 없이 빨려 내려간다. 운룡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 끌려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추웠다. 호신강기를 두르고 있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이빨이 부딪쳤다. '무서운 곳이로군…….' 그때였다. 돌연 운룡은 밑으로 하강하던 몸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급히 빙글 몸을 뒤집음과 동시에 공력을 돋우어 활처럼 쏘아져 나갔다. 수평의 굴. 좁디좁다. 고개를 쳐들면 부딪힐 것이다. 그러나 그 굴은 이내 끝이 났으며, 그 끝은 다시 위로 통하고 있었다. 운룡은 아련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는 수면 위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다 온 것 같군…….' 분지. 하나 이런 곳도 분지라고 할 수 있을까?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였으니 분지는 분지인데 그 크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하다. 또한 절벽은 그 끝을 알 수 없었으며, 운무가 자욱이 드리운 탓에 햇살조차 제대로 스며들지 않았다. 뿐이랴! 놀랍게도 분지는 전체가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대용암연(大熔岩淵)이었다. 아니, 바다라고 해야 옳았다. 전후사방을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공간은 매캐한 냄새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아마도 초열지옥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곳일 듯 싶은데……. 돌연 분지 한쪽에 있는 조그마한 소연(小淵) 속에서 인영 하나가 솟구쳐 나왔다. 허공에서 비룡번신(飛龍蒜身), 유룡출해(流龍出海), 창응하산(蒼鷹下山)의 신법으로 거푸 몸을 돌린 인영은 이윽고 사뿐히 용암바다의 끝에 위치한 바위 위로 내려앉았다. 말할 것도 없이 인영은 바로 절망연으로 들어갔던 운룡이었다. 운룡은 물빛 고요한 시선으로 주위를 한차례 휘둘러보더니 검미(劍眉)를 가볍게 찌푸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한 주위의 경치에 내심 적잖이 놀란 듯했다. 며칠 전, 유혜가 말한 옥음이 뇌리를 두드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두 번째 관문은 신법(身法)이에요. 신법으로써 용암바다를 건너야 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늘 아래 짝을 찾을 수 없이 고절한 신법이라 해도 백여 장을 나는 것이 고작이다. 날개가 달리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이 용암바다를 건너랴. "신법……." 운룡은 묵묵히 용암바다를 향해 시선을 꽂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운룡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렇군……." 신법(身法). 본래 신법이란 몸 속의 내력(內力)을 이용하여 몸을 띄우거나, 한정된 공간을 나는 것이다. 그것이 한정되었다는 것은 공력이 채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공력이 끊임없이 뒷받침되면 무한의 공간을 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만룡가의 신법 중에 어기어풍잠영술(馭氣御風潛影術)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사실 어풍비행술(馭風飛行術)이나 능공허보(凌空虛步) 같은 최상승의 신법보다도 오히려 한 단계 위의 절학으로써, 그런 것들과 동등한 위력을 가지되 진기의 탕감은 최소로 억제하는 희대(稀代)의 절학이었다. 그러나 이 어기어풍잠영술에도 분명히 한계는 있다. 아마도 이토록 넓은 바다라면 반도 못 가 떨어지고 말 것이다. 운룡은 그때가 바로 공력이 다하는 한계이며, 그 순간 몸 안의 잠재력을 격발시키는 일종의 유가내력(儒家內力)이 병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재력! 진기의 조절로써 그것을 격발시킬 수도 있으나 그 손실은 엄청난 것이다. 어쩌면 운룡은 순식간에 공력의 십분지 일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은 길고 시간은 그리 여유있는 것이 아니다. "타앗!" 용이 울부짖듯 우렁찬 장소음(長嘯音). 다음 순간 운룡의 몸은 이미 용암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슉! 귓전으론 화살 같은 바람이 스쳐 지난다. 운룡은 최소의 시간에 최대의 거리를 가기 위해 공력을 극한까지 올렸다. 어기어풍잠영술! 아마도 이 순간, 그 누가 있어 운룡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는 허깨비를 보았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운룡은 일각도 안 되는 사이에 삼백 장 위의 허공을 날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발 아래 용암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열기는 가히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운룡의 옷 앞자락이 피지직피지직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준수한 얼굴도 열기를 이기지 못해 달아올랐다. 그러나 열기를 피하기 위해 더 높이 뜬 채 날아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보다 큰 진력의 손실을 가져올 것이므로……. 슉― 슈슉! 한데 이때 돌연, 운룡의 몸이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수평을 유지하고 있던 몸도 비스듬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는 바로 공력의 뒷받침이 다하는 징조! 운룡은 황급히 잠재력을 격발시키는 유가내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그의 몸 내부로부터 기음(奇音)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퍼퍽! 퍽! 이는 공력이 채 닿지 않는 세맥(細脈) 아래 고여 있던 잠력(潛力)이 솟구치는 현상. 다음 순간 운룡의 온몸 근육이 푸르르 떨렸다. 고통! 살을 베고 뼈를 깎는 듯한 무서운 고통이 운룡을 덮쳐들었다. 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깨물었다. 기울어 가는 몸을 사력을 다해 본 위치로 되돌렸다. 세상에 싸움이 많고 그 종류가 다양하다 하나 이렇듯 허무한 싸움이 또 있을까? 이는 바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과의 사투(死鬪)가 아닌가 말이다. 잠력은 그 힘이 대단한 반면에 진력 소모가 몹시 심했다. 운룡은 벌써 다섯 번째 유가내력을 일주천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의 위험. "헉헉……." 숨이 턱에 닿았다. 땀은 이미 온몸을 흠뻑 적시고 있는데 바다의 끝은 보일 생각을 않고……. 운룡은 돌연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사문사관(死門四關), 그리고 용암바다……. 자연의 신비를 향해 도전하는 인간의 발악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태초(太初). 짐승들은 사람을 공격했을 것이다. 하나 그들의 날카로운 이빨과 흉악한 발톱과 맞서 싸우기엔 인간은 너무나 무력(無力)했을 것이다. 도대체가 쓸모라곤 없는 손과 발. 새처럼 하늘을 날 수도 없다. 물고기처럼 비늘이 덮여 있는 것도 아니고, 표범 같은 날렵함과 호랑이의 엄청난 힘도 없다. 인간은 생존(生存)을 위해 머리를 싸안고 골몰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그들은 이 땅 위에서 슬기롭게 살아나가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각종 연장과 무기가 만들어졌으며 독수리 발톱보다도 더 날카로운 창과 칼, 그리고 도끼와 석추(石鎚) 등도 생겼을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적(內面的) 힘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고, 그리하여 맹수들이 움직이는 동작과 신비로운 자연현상을 쫓아 조금씩 흉내를 내다가 마침내 조식법(調息法)이라는 운기술(運氣術) 따위를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들의 후예인 한 사람. 마공 성심마공을 통달해내 사실상 거의 천하제일인의 경지에 이른 이 사람이 이따위 오지의 난관 하나도 제대로 헤쳐 나가지 못하는 바에야……. 운룡은 자신의 기력이 다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숨을 돌릴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불패의 승부사라는 그도 끝장이었다. 운룡은 깊이 숨을 한 모금 들이쉬었다. 그로서는 마지막 모험을 할 때였다. 즉, 강기로써 몸을 최대한 보호한 연후에 용암을 찍고 다시 솟아오르는 것이다. 찍는 순간 이미 발이 녹아버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시도해 보지도 않고 물로 변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슈욱!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우우웅! 전 공력을 다한 탓으로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몸의 장삼은 부풀어오를 대로 부풀었다. 한순간 운룡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한데 이때, 돌연 그의 얼굴에 한줄기 격렬한 놀람의 빛이 번뜩 스쳐 지났다. 땅[地]. 오오…… 그가 밟은 것은 놀랍게도 이미 땅이 아닌가? 자욱한 연기에 가려 그것을 분간하지 못했던 것이다. 놀람의 다음은 허탈이었다. 운룡은 몸을 허무는 자욱한 허탈감에 그 자리에 쓰러지듯 엎어지고 말았다. 한 줄기 뜨거운 몽연이 그의 몸을 자욱이 휩쓸고 갔다. * * * 내력일주천(內力一週天). 공력. 흩어진 공력을 다시 모은다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다. 돈을 쓸 때는 눈 깜빡할 사이이지만 모으기는 어려운 것처럼……. 운룡은 은은히 저려오는 오장(五臟)의 통증을 무시하고, 사지백해로 제멋대로 흩어져버린 공력을 다시 모으는 데 사력을 다했다. 한 줄기 희미한 공력을 전신 삼백육십대혈로 돌리고 또 돌리기를 그 얼마 만일까. 돌연 운룡의 주위로 뽀얀 백기(白氣)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 백기는 동글동글 십여 개의 화형(花形)으로 뭉쳐지는가 싶더니 그의 머리를 중심으로 가볍게 소용돌이쳤고, 다음 순간 운룡이 한차례 숨을 들이키자 한 줄기 백선(白線)으로 변해 그의 콧속으로 남김없이 빨려들어가 버렸다. 운룡은 담담하게 웃으며 눈을 떴다. 두 눈에 이글거리는 검은 횃불 같은 신광(神光).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정도로 회복이 될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암반 위였다. 시야가 닿은 정면은 바로 아득히 보였던 사면의 절벽 중 하나. 그 무혼단애의 아래에는 거대한 동굴 하나가 있었다. 동굴이라곤 하나 투박한 암벽으로 막혀 있는 기이한 동굴이었다. 운룡은 천천히 절벽의 동혈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동굴의 안에는 시기(始旗)라 불리는 어형기(魚形旗)가 하나 꽂혀 있어요. 기가 꽂힌 바위는 극천혈석(極天血石)이라는 것으로써 천하에서 가장 강한 돌이에요. 세 번째, 네 번째 관문은 모두 그 어형기의 안에 있어요. 어형기를 뽑는 순간, 당신은 한우월잔영(寒雨月殘影)의 신비를 풀게 되는 것이지요. 천 년 전의 만룡대사조에 이어 당신은 두 번째로 어형기에 도전하는 사람이에요. 세 번째 관문은 바로 내공(內功)이에요. 동굴, 금화동천(金華洞天)을 뚫어야 해요. 동굴을 막고 있는 것은 극천혈석보다는 못하지만 천하에서 거의 두 번째로 강한 만년오석(萬年烏石)이에요. 그것을 뚫는 방법은 부수는 것뿐이에요. 운룡은 금화동천을 마주하고 우뚝 섰다. 만년오석. 운남(雲南)의 오지(奧地)에서나 난다는 이것이 어찌하여 이 자리에 있으며, 또한 형체를 갖추어 동굴의 문 역할을 하고 있단 말인가? 운룡은 의문이 가슴을 스쳤으나 이내 털어버리고 그 자리에 단정히 정좌하고 앉았다. '거석(巨石), 그것도 철보다 더 단단하다는 오석(烏石)을 깨뜨릴 때는 단편적인 파해(破解)보다는 적극적이며 집중적인 파해 방법이 좋을 것이다.' 그는 묵묵히 혼신의 진력(眞力)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전신으로부터 찬란한 서기(瑞氣)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만년오석을 향해 허공을 격(隔)하여 내민 그의 쌍장(雙掌)은 구슬처럼 투명해지는 것이었으니, 이는 바로 만룡가의 상승절학 중에서도 최상승에 속하는 보리대제신력(菩提大帝神力)이 아닌가! 오십 년 전, 무황(武皇) 진천우도가 탕마제일공(蕩魔第一功)으로 사용했던 바로 그 신공인 것이다. 돌연 유리처럼 맑고 투명하게 변한 운룡의 쌍장에서 실처럼 가는 경력이 쑤욱 솟구쳐 나왔다. 파앗! 경력은 마치 화살처럼 바위 속에 박혔다. 운룡의 손과 바위 사이엔 두 줄기 실이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 투명한 광채는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할 듯했다. 일각, 또 일각……. 무심한 시간은 마치 화살처럼 흘러갔다. 바위. 만 년의 한(恨)을 담은 것인가? 아니면 그 두께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란 말인가? 천하제일가문의 절대신공(絶對神功)이 그 한 곳에 작렬하고 있는데도 바위는 오연히 버티고 서 있기만 했다. 운룡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마는 깊은 내 천(川) 자를 그렸고, 굵은 이랑이 파이기라도 한 듯 볼은 부들부들 떨렸다. 본래 상승의 내공이요, 신공일수록 공력의 소모는 더욱더 극심한 법. 그렇잖아도 내력의 태반을 잃어버린 운룡으로선 더욱더 견디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운룡은 내력을 거두었다가 심신을 조절한 후 다시 내뻗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용암바다란 자연에게 한 번 희롱을 당한 일이 있는 그인지라 또다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오기가 치솟은 것이다. 그때였다. 돌연 거대한 바위의 겉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찌익―찌찍― 그는 황급히 꺼져가는 촛불 심지처럼 가물거리는 공력을 배가시켰다. 순간 솟구쳐 나온 것은 엉뚱하게도 그의 몸 속에 있던 피였다. "윽!" 느닷없이 배가시킨 공력 탓으로 오장육부가 심하게 흔들린 탓이리라. 솟구쳐 나온 피는 보기에도 섬뜩한 암혈색(暗血色)이었다. 그러나 그때 운룡은 눈앞을 뽀얗게 가리는 혈막 속에서 분명히 보았다. 그토록 굳건하던 만년오석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가는 모습을! 부수어지고 으스러진 채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장쾌한 모습을! 콰쾅― 꽝! 파파팍! 운룡은 옷자락으로 입가의 피를 한차례 쓰윽 문지른 후,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켜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하게 되었다는 기쁨 탓이었을까. 그는 중대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다. 유혜가 그에게 예고했던 네 번째 관문은 세 번째 관문의 바로 뒤에 있는 것이란 사실을……. ―반드시 조식을 충분히 한 연후에 들어가도록 해요. 네 번째 관문은 충(蟲)의 관문이에요. 동굴 안으로 채 다섯 발짝이나 옮겨 놓았을까? 돌연 운룡은 코끝으로 왈칵 밀려드는 자욱한 피비린내에 선뜻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시선 속으로 빠르게 쏘아져 들어오는 물체 하나. 오오…… 저게 도대체 무슨 괴물인가? 전체적인 모습은 거미를 연상시켰다. 다리의 길이가 무려 일 장에 달하며, 몸은 그대로 작은 산이요, 두 눈에선 시퍼런 인광(燐光)을 철철 흘려내는 무시무시한 괴물. 그 다리는 고사하고 온몸에 숭숭 돋아난 털에 찔리기만 해도 즉사하고 말리라. 크아악! 괴물은 운룡을 보자 동굴이 떠내려갈 듯한 괴성을 내질렀다. 이어 그 거대한 몸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휘익! 운룡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저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망칠 기력이나마 남아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던 것이다. 쾅! 운룡을 노리고 날아든 괴물의 다리는 운룡이 한 발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돌벽에다 요란한 둔음을 터뜨려냈다. 콰쾅! 크아악! 한차례의 공격이 실패하자 바짝 약이 오른 것이리라. 괴물은 더욱더 흉측한 괴성과 더불어 이번에는 배나 더 사나운 기세로 덤벼들었다. 운룡은 돌벽에 바짝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두 눈이 가물가물하여 덮쳐오는 괴물의 몸이 두 개로도 보이고, 세 개로도 보였다.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 운룡은 이번에는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괴물의 몸을 향해 마주 뛰어들었다. 우수의 중지(中指)와 식지(食指)를 꼿꼿이 세운 자세였다. 그 손끝은 괴물의 미간을 겨냥하고 있었다. 슈욱― 지력(指力)! 금석(金石)도 두부처럼 꿰뚫는다는 희대의 절기 천유탄지(天遊彈指)였다. 그러나 두 개, 세 개로 보이는 괴물이니 제대로 맞출 리가 있으랴. 지력은 보기 좋게 빗나가 날아온 괴물의 다리에 맞는 바람에 운룡은 뒤로 일 장이나 퉁겨나고 말았다. "우욱!" 피가 튀고 살점이 튀었다. 콰당탕― 이어 사정없이 돌벽에 부딪힌 운룡은 순간 거의 초인적인 정력으로 돌벽에 퉁기는 반동으로 불쑥 솟구쳐 올랐다. 다음 순간 공중에 뜬 자세 그대로 또다시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가공할 지력! 슈욱! ―이 천유탄지는 절대위기가 아니면 쓰지 말아요, 오빠! 몸 속의 내공을 한꺼번에 응축시켜 뿜는 것이라 극한의 내력소모를 가져오게 돼요. 더욱이 연달아 두 번을 쓴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임을 명심하세요. 그것뿐이었다. 겨냥을 하긴 했으나 맞았는지 어쨌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의 몸은 이미 맥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땅에 부딪히는 충격으로 혼절하고 말았으므로……. 쿵! * * * 어떤 시간들이 흐른 걸까? 비[雨].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꽈당! 꽝! 벽력까지 난무하는 겨울비였다. 온 천지를 부술 듯 섬광과 벽력이 공간을 마구 찢어냈다. 그때였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운룡의 몸이 돌연 꿈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동굴바닥의 흙을 움켜쥐고 주춤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꽈꽝! 동굴 밖의 새파란 전광(電光)에 그의 모습이 잠깐 나타났다. 피[血]. 칠공(七孔)으로부터 피가 솟구쳤다. 공력의 소모가 얼마나 심했던 것일까? 그 피는 붉다 못해 검게 보였다. 귀며, 눈이며, 코며, 입이며 할 것 없이 모조리 핏물로 얼룩진 채 흙바닥을 피가 나도록 움켜쥐는 가공할 정신력! 어둠 속을 벌레처럼 꿈틀대는 그 모습은 마치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 하나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자! 가야 한다! 내 육신이 조각나고, 내 혼이 부서져도 단 한 조각의 껍질이라도 가자! 운룡아, 운룡! 네 정녕 그렇지 않고는 천하제일인을 할아버지로 두었던 자라고 말하지 말라! 무릎으로 기는지, 뼈로 기는지 알 수가 없다. 운룡의 윗이빨은 아랫입술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있었다. 그의 동작은 안타까울 정도로 느리고 느렸다. 바로 그때, 그의 시선 속으로 돌연 한 줄기 서광이 스며들었다. 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물체. 어형(魚形)으로 빛나는 황금의 빛은 어형시기(魚形始旗)요, 그 밑의 붉고 투명한 것은 그것을 받치고 있는 극천혈석(極天血石)이 아니겠는가! 운룡의 손이 느릿하게 어형기를 향해 뻗어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닿을락 말락 떨리는 손! '무당산을 떠나…… 여기까지…… 그 얼마나 오랜 고통 속에서…… 한우월잔영! 내가 왔노라!' "와아……!" 한순간 굉렬한 한소리 고함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오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운룡의 피묻은 손은 어형시기를 꽉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였다. 쿠쿠쿵! 콰당! 엄청난 벽력음! 어디 지척에라도 떨어진 것일까. 쿠쿠쿠― 동굴 안이 지진이라도 만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동굴은 일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우르르― 쿠쿠쿵! 천근(千斤), 만근(萬斤)의 거석들이 일시에 그의 몸이며 뼈마디를 뒤덮었다. "아악!" 오오…… 운룡! 하늘은 끝내 그를 버리시려는가? 그때 돌연 느닷없이 장중한 한소리 외침이 쩌렁하게 허공에 울려 퍼졌다. "보라! 이야말로 자랑스런 만룡의 아들이니라!" 이어 한 줄기 무지개빛 채광(彩光)이 동굴 안으로 빠르게 스며 들어오더니 온통 돌더미 속에 파묻히고 있는 운룡의 몸을 향해 쭈욱 뻗어갔다. 순간 채광이 닿기 무섭게 운룡의 몸이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그의 몸은 채광의 인도에 따라 서서히 동혈 밖으로 딸려 나갔다. 실로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 이 느닷없는 채광은 무엇인가? 동혈 밖으로 나선 운룡의 몸은 다시 단애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단애. 그 정상은 사방 십 장 정도의 공지였다. 또한 그곳에는 붉은 줄기에 잎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채광은 운룡을 그 나무 아래에 스르르 내려놓았다. 이어 그 찬란한 채광은 나무 끝부분의 땅 속으로 사라져 갔다. 24. 虛僞와 眞實 비[雨]. 뇌성벽력과 퍼부어대는 이 겨울비는 좀체로 그칠 것 같지 않더니 한 시진 가량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쳤다. 먹빛 구름 사이로 파아란 하늘이 비치고 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공간으로 영롱하기 이를 데 없는 무지개가 스르르 피어올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무지개의 한쪽 끝이 적수(赤樹)에 매달린 빨간 능금 모양의 과일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과일은 영롱하고 해맑은 햇살처럼 사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돌연 사라졌던 채광이 다시 나타나더니 과일을 나무로부터 따내서 운룡의 입에다 넣어주었다. 꾸르륵― 과일이 넘어가기 무섭게 운룡의 몸은 무서운 진동과 함께 괴이한 음향을 불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가 누워있던 땅까지 미미한 진동을 일으키며 흙덩이가 튀거나 돌멩이가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이어 그의 몸 밖으로 조금씩 스며 나오기 시작하는 서기(瑞氣). 오오…… 바로 그때 쥐죽은 듯 누워있던 운룡의 몸이 돌연 반 자 정도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괴사(怪事)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바위에 부딪히고 할퀸 그의 흉터가 스르르 아무는가 싶더니 새살이 돋아났다. 이어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혈관들이 조금씩 위치를 바꾸었고, 각 곳의 뼈마디들이 요란한 음향과 함께 늘어나거나 줄어들기 시작했다. 뿐이랴! 전신의 땀구멍으로부터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더니 이내 수증기로 변해 사방으로 날려갔다. 역근탈골(易筋脫骨). 악기방출(惡氣放出). 오오…… 이것은 바로 가장 완전한 육체를 의미하는 탈태환골(脫胎換骨)의 현상!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신체기능 전체가 완벽한 힘과 조화를 이루고, 모든 신체가 이상적인 균형을 이루어 최고의 지혜와 힘을 낼 수 있는 초인(超人). 바로 초인의 탄생인 것이다. 몸 속으로부터 솟구치는 힘을 이기지 못해 운룡의 일신에 걸치고 있던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퍽! 퍽! 아무리 내공이 극의 조화에 이르러도 뚫을 수 없는 세맥(細脈)들이 봇물 터지듯 뚫려 나갔고, 근육과 핏줄 사이에 고여 있던 잃어버린 힘들은 한 군데로 집결했다. 주위의 공기들이 태풍이라도 만난 듯 파동쳤다. 흙더미가 춤추듯 위로 솟아오르고 심지어는 적수(赤樹)조차 뿌리째 뒤흔들렸다. 이때 돌연 운룡의 얼굴이 불길에 달구어지기라도 한듯 시뻘개졌다. 그의 몸 속에선 지금 세 줄기의 제각기 다른 힘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 첫째는 운룡 본신의 백년내력이요, 둘째는 신녀오보, 진천우도의 희생 등 외부요인으로부터 발생한 진기들, 그리고 셋째로 단애의 주과(朱果)가 일으킨 힘! 이것은 실로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자제력을 잃고 다른 것과 융화하지 못한다면 그 즉시 운룡은 혈맥이 모조리 끊어져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세 힘이 제대로 융합만 되어준다면 그것은 이 무림에 전해져 내려온 신화(神話)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지금, 세 가지 기운은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그의 인도는 아랑곳 않고 단전기운은 단전기운대로, 또한 외력(外力)과 과력(果力)들도 야생마처럼 날뛰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몸 아래 땅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주과의 적수는 이미 뿌리째 뽑혀 허공을 날고 있었다. 우르르― 콰콰쾅! 이때 마구 날뛰던 기운들이 각각 머리와 몸의 좌우에서 뚝 멈추었다. 순간 운룡의 몸 밖으로 뻗어 나오는 세 줄기 각각 다른 광휘. 절제를 하는 것일까? 눈치를 보듯 잠시 멈칫거리던 삼기(三氣)는 이윽고 몸의 한 곳, 단전(丹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파파팟! 슈르릉! 운룡의 안면근육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몸 또한 폭풍을 만난 나무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안 돼!' 드디어 맹렬히 치솟아온 삼기(三氣)는 단전에서 일찍이 없었던 대격돌을 일으켰다. 꽈꽝! 우르르―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산정을 찌르르 울렸다. 순간 운룡의 몸이 무엇에 퉁겨지기라도 한듯 불쑥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슈우욱! 오십 장, 백 장, 이백 장……. 아득한 한 점 흑점으로 변해 사라져 버린 운룡. 도대체 무엇이 어찌된 것일까? 긴장된 공기가 허공을 자욱이 감돌았다. 바로 그때였다. 운룡이 사라졌던 아득한 허공에서 돌연 밝기 이를 데 없는 광채가 나타났다. 동시에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핫하하……." 한 사람이 광채에 휩싸인 채 아득한 곳으로부터 내려서고 있었다. 보라! 한 겹의 서기(瑞氣)가 둘린 관옥 같은 얼굴과 탈속하기 이를 데 없는 용모를……. 두 눈은 물처럼 맑은 것이 하나의 잡념조차 찾아볼 수 없고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에선 금방이라도 한 송이 붉은 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오를 것만 같다. 뉘라서 이 미장부를 보고 감탄치 않을 것이며, 뉘라서 그에게 연모의 정을 품지 않을 것인가! 이 천상의 선인(仙人)인 듯한 사람은 운룡, 바로 그였다. 그는 천천히 내려선 후 공력을 거두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력을 거두었는데도 그의 발은 땅으로부터 반 치 정도 둥둥 떠 있었다. "나는 다시 살아났군." 나직한 한 마디. 하나 이 한 마디만 가지고도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떠한지는 익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운룡은 한쪽의 적수를 힐끗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단지 그리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공력은 저절로 끌어올려져 그의 몸은 이내 그곳에 이르렀다. 오오…… 공심경(空心境)!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법도 따라 일고[心生卽鍾鍾法生], 마음이 죽으면 모든 법도 따라 죽는다[心滅卽鍾鍾法滅]는 무학의 최고경지. 곧 신(神)이 되는 공령 바로 이전의 단계가 아닌가? 무림사(武林史)! 그 긴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영웅협걸들이 이 땅에서 명멸해 갔던가! 하나 지금 이 순간 탄생한 사람과 같은 공력의 소유자는 일찍이 아무도 없었다. 아니 누구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 이렇게 불러도 조금의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운룡은 이미 말라비틀어진 나무둥치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한우월잔영(寒雨月殘影)…… 이것이 바로 너였구나. 바로 너를 일컬어 만룡대사조께서는 만룡가 최후의 무기라 하셨구나. 성심마공이 조화경에서 지념경으로 이르는 통로라면 너는 바로 최후의 공심경으로 인도하는 말없는 인도자…… 나 만룡의 후인, 운룡은 묵묵히 천년세월을 이겨준 너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노라." 아아…… 그랬던가? 한우월잔영! 그 누구도 알지 못하던 그 최후의 신비는 바로 한 그루의 나무였던가? 영롱한 붉은 광채를 흩뿌리던 가지들은 이미 낡은 고목으로 변해 있었다. 운룡은 오랫동안 그윽한 시선으로 나무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소리 맑은 장소를 터뜨렸다. "우우……!" 순간 그의 몸이 허공을 향해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쭈욱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고통과 무학의 갈등 속에서 보낸 일 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중원을 향하여! * * * 스스슷― 문은 손이 닿자 매우 쉽게 열렸다. 사문(死門)이었다. 일 년 전엔 창에 의해 끌려 들어갔던 그곳을 운룡은 천천히 걸어나왔다. 바로 그때 옆에 있던 생문(生門)의 문 또한 느닷없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타난 두 사람. 그들 중 여자를 보는 순간 운룡의 두 눈에는 한줄기 반가움의 물결이 일었다. "난난!" 순간 남자를 부축하여 막 한 걸음을 내딛던 여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회의에 찬 시선을 느릿하게 운룡을 향해 돌렸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변했다. 운룡도 변했지만 난난은 더욱 변했다. 탐스럽게 내려뜨려 늘 살랑이던 머리는 틀어올렸고, 용모엔 세월의 연륜이 그윽이 깃들어 있었다. 난난의 커다란 두 눈에 문득 눈물이 뽀얗게 고였다. "살아 계셨군요. 오빠!" 운룡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그녀가 부축하고 있는 남자를 향해 그윽한 시선을 던졌다. "그는 누구냐, 난난?" 남자.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몸은 비교적 깨끗했지만 주독(酒毒)에 절었는지 얼굴과 코, 그리고 목덜미가 불그죽죽했으며, 수염조차 제멋대로 뻗쳐 온 얼굴을 수북이 덮고 있었다. 운룡의 말에 난난은 얼굴을 가볍게 붉혔다. "제…… 남편이에요." "남편이라고? 그렇다면 생문 안에는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얘기냐, 난난!" 난난은 잠시 머뭇거리다 한줄기 탄식을 터뜨렸다. "이 사람은 이환명이에요, 오빠!" 순간 운룡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들었다. "이환명……?" 준수하기로 말하자면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자. '무림의 기남아(奇男兒)로서 명성을 떨치던 그가 어째서 저런 모습을……?' 사내의 시선이 힐끗 운룡을 향했다. 향했다고는 하지만 그 충혈된 시선은 운룡에게 제대로 초점도 맞추지 못했다. 그저 흰자위를 위아래로 희번뜩일 뿐……. 거기다가 또 그의 나이는 아무리 못 되어도 사오십은 족히 되어 보였다. 간단없는 주색잡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그는 일 년 내내 술과 여자 속에서 살았어요. 너무 완벽한 환경이 오히려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지요." "……!" "그는 과거엔 무림의 기남아였지만 이제는 남의 부축이 없으면 걷지도 못해요. 같이 지내다 보니 그런 모습이 측은해서…… 용서하세요. 오빠!" 난난은 말을 잇다 말고 그 자리에서 돌연 날아갈 듯 대례를 올렸다. "오빠의 대업성취를 축하드려요. 또한 그 모습을 더불어 보좌하지 못하는 저를 용서하세요." 운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난은 한줄기 탄식을 터뜨리더니 다시 한 번 목례를 한 후, 부축한 이환명을 끌어안고 저만치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쓸쓸했다. 생문! 사문보다는 천배 만배의 설비와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곳. 그래서 생문에 있는 자는 사문에 있는 자보다 몇 배나 훌륭한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결국 그런 풍요는 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하긴, 눈앞에 먹을 것과 즐길 것을 놓아두고 골치아픈 무예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이란 몹시 드물 것이다. 난난은 이제 막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운룡의 침중한 목소리가 그녀의 뒷등을 잡아챘다. "난아!" 순간 난난은 부르르 몸을 떨며 그 자리에 뚝 걸음을 멈추었다. 하나 시선을 돌리진 않았다. 운룡은 한줄기 장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이를 낳거든 같이 데리고 오너라, 네 남편도 함께! 나는 언제나 무당산에 있을 것이다." 난난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오빠…….' 그녀와 이환명의 모습은 이내 석굴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운룡은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세월이 가져다준 상처를 혼자 묵묵히 새기기라도 하듯……. 여담(餘談)이지만…….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강소(江蘇) 소주성(蘇州城)엔 스스로를 무애공자 이환명이라고 자처하는 술주정뱅이가 하나 있었다. 그는 희대의 술중독꾼이었으며, 술만 한 잔 들어가면 자신이 옛날 사해대검회에서 십이연승(十二連勝)을 거둔 그 이환명이라고 떠들곤 했다. "나이가 스무 살만 젊으셨어도 가능하지요, 영감님!" "핫하…… 그 얼굴에 딸기코만 뺀다면 말이오." 자칭 이환명은 결국 어느 겨울날 술에 만취한 상태로 바닷가에서 얼어붙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시체는 다섯 살 난 딸을 업은 한 여인에 의해 쓸쓸히 사라져 갔고, 이후 인세(人世)에서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소년은 물을 긷고 있었다. 겨울도 이제 그 예봉을 꺾을 이월(二月)이긴 했지만 아직 얼음이 두껍게 언 시내를 깨고 물을 긷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큰 돌멩이를 낑낑대고 들어올리려 해도 그 돌마저 얼어붙어 땅에서 떨어지지 않자 소년은 그만 울상이 되고 말았다. 그때 문득 소년의 앞으로 긴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소년은 무심히 시선을 들다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다…… 당신은 사람이세요, 신선이세요?" 사람이냐, 신선이냐?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의 눈앞에는 아직도 찬바람이 쌩쌩 불어대는 이 삭풍의 계절에 엷은 웃옷 하나만을 입은 청년이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 청년의 얼굴에는 추운 기색은커녕 온화하고 풍요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뿐인가, 허리춤에 비스듬히 매달린 무거워 보이는 검 한 자루와 자신을 그윽이 내려다보는 시선 속에 담긴 불가사의한 흡인력을 도대체 무슨 말로 다 형용하랴! 청년은 물처럼 고요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산(散), 엽산(葉散)이 맞느냐?" 소년은 또다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저씨가 그걸 어찌 알지요? 제가 바로 산이에요." "흐음! 너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느냐?" "저…… 위…… 도관(道?)에서요." "부모는 안 계시지?" "아저씬 마치 점장이 같군요. 나는 누나 한 분밖에 없어요. 그 누나도 삼 년 전에 나가더니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요." "좋아. 산, 너는 이 아저씨를 따라가지 않겠느냐?" 순간 소년은 화들짝 놀라 주춤 물러나더니 주위를 황급히 돌아보았다. "함부로 그런 말씀 마세요. 관주님이 아시면 큰일나요. 관주님은 성격이 매우 포악해요. 무공도 세구요." 그때 돌연 굉렬한 외침과 함께 언덕 너머로부터 거대한 도인(道人) 하나가 나타났다. "산! 산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는 개울가의 엽산에게 시선이 닿자 한달음에 달려 내려오더니 다짜고짜 한줄기 거센 수편(手片)을 올려부쳤다. 짝! "이 새끼! 아궁이에 불을 넣을 장작을 패오랬더니 이런 데서 시간을 죽여?" "어이쿠! 관주님, 잘못했어요." "이 새끼!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냐?" 중년관주는 욕설과 더불어 눈이 묻은 발을 성큼 쳐들었다. 쓰러진 소년을 아예 짓밟아버릴 기세였다. 그때 돌연 그는 한줄기 기이한 힘이 자신을 떠미는 것을 느꼈다. "어어……." 순간 그는 논바닥의 개구리처럼 개울가에 거꾸로 처박혔다. 첨벙! 얼음이 튀고 시리도록 찬 물이 튀었다. 중년관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한쪽에 선 청년에게 부르르 몸을 떨며 시선을 던졌다. "저, 저 새끼가 지금…… 고양이가 범의 얼굴을 할퀴었어!" 그는 말과 함께 양 소맷자락을 둥둥 걷어부치더니 돌연 꿀먹은 벙어리처럼 뚝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보라! 개울가에 있던 돌 하나가 무심히 선 청년의 손 안으로 천천히 날아들고 있었다. 청년은 그것을 쥐더니 마치 종이조각 꾸기듯 힘도 안 들이고 부숴버리는 것이 아닌가? 우수수― 일시에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돌조각을 중년관주는 어안이 벙벙하여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앞으로 동전꾸러미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도록 하겠소. 이의없겠지요?" 조용하고 담담한 말. 중년관주는 입이 얼어붙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청년은 빙그레 웃더니 엽산의 손을 잡았다. "가자, 산!" 엽산은 얼떨떨하여 청년과 관주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다음 순간 활짝 웃으며 들고 있던 물바가지를 내팽개쳤다. 와당탕! 부서진 물바가지는 이내 얼어붙고 있었다. * * * ―십사연방천하검회(十四聯邦天下劍會)! 세상은 또다시 떠들썩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천 년의 세월을 이어온 십사연방천하검회가 불과 며칠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딘가? 어딘가? 도대체 십사연방천하검회가 열리는 장소가 어딘가?" "허어, 그것 참! 그 장소가 놀랍게도 천하제일봉 성모봉(聖母峯)이라네!" "성모봉? 오오…… 도대체 왜? 거긴 중원으로부터 천여 리도 더 떨어진 곳이 아닌가?" "글쎄 말이네. 그 성모봉 중턱에 부용지(芙蓉池)라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열린다는구먼. 무려 해발 이십칠만 척(尺) 위에서 말이야." "그 이유가 뭘까? 그렇게 멀고 높은 곳이라니…… 거기다가 또 연못이라니!" "그거야 뻔하지 않은가? 새외 십파 놈들이 이득을 보려는 생각이지. 보게나, 중원의 고수들은 우선 그 먼 곳까지 가면서 심리적으로 먼저 지치게 된단 말이야. 그런 틈을 타려는 약삭빠른 계산이겠지!" "제기랄, 오랑캐놈들! 한데 우리 중원에선 어떤 고수들이 그 검회에 참여하게 되는가?" "우선 만룡가를 꼽을 수 있네. 이 만룡가는 과거에 정예들이 금악을 찾아 떠난 후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라는 거야. 그래서 만룡가에선 도남강 천주가 직접 참가한다고 하네." "그리고 또?" "신선도의 대표인 연비 대협이 있네. 본래 신선도란 것이 은퇴한 무당파 고수들이 모인 무당연합이라는 거야. 그래서 그곳에선 사해대검회의 풍운아 운룡 대협을 후계자로 책정했었는데 그가 금악으로 떠난 후 소식이 없자 직접 나서게 되었다는 거야." "연비……?" "왜 과거 최고의 조련인이라던 운룡의 특수조련인 조가 있었잖는가. 거기의 한 사람일세. 그는 요 일 년 동안 대봉황천에서 쭉 머물었는데 이번에 도남강 천주와 함께 길을 떠난다 하네." "친한 모양이로군." "그렇지도 않아. 다만 연비의 일행인 청조각의 예소벽 소저가 일 년 전에 큰 부상을 입은 바 있는데 도남강이 그것을 직접 치료해 주었다더군. 그게 인연이 되어 대봉황천에 머물게 되었고 도남강은 그에게 많은 지도를 받았다더군." "허어…… 천하의 도남강이 말인가?" "연비는 검도의 당대 고수라네. 사실 그가 가르친 운룡과 도남강은 앙숙이라 할 수 있는데 연비는 대의(大義)를 위해 그를 가르쳤다는 얘기가 있어." "그밖에는 또 누가 있는가?" "한북(漢北) 용권풍(龍卷風) 가(家)의 구절환녀(九絶幻女) 이옥군(李玉君)과 화남(華南) 광무천(廣武天) 가(家)의 혈정공자(血鼎公子) 사문공이 있네. 하나 이들의 실력은 완전히 미지수야." "한 마디로 중원이 약세로군." "그렇네. 연비 대협이 출발하며 그랬다더군. 단 한 시합이라도 중원이 이길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이라고 말이야." "큰일이로군…… 큰일이야……." 중원의 절대약세! 새외에는 제세생불(齊世生佛), 호리대법왕(狐里大法王), 검귀(劍鬼), 혼제(混帝) 등의 막강한 열강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반해 중원은 번듯하게 내세울 만한 고수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수없이 많은 중원의 무림인들이 성모봉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위에까지는 못 올라가더라도 산 아래서나마 자신들의 대표를 응원하겠다는 일편충정(一片忠情)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십사연방천하검회! 이 천하열강들의 각축전은 도대체 어찌 되려는가? * * * "그는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요?" "그것이 참으로 기이하오이다. 그는 전혀 아무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소." "도남강, 연비 등에도 말인가요?" "그렇소이다. 그가 금악을 나온 뒤 한 행동이라고는 엽산이라는 이름의 소년 하나를 데리고 다니게 된 것뿐이오. 거기다가 그는 또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낚싯대 하나를 둘러메고는 음산(陰山)으로 들어갔다 하더이다." "음산을? 검회가 내일모레인데?" "그러게 말이지요." "알 수 없는 위인이로군. 혹시 그가 금악에서 아무것도 배우거나 익히지 못한 것이 아니오?" "그것도 모를 일이오. 도대체가 그는 무공다운 무공이라곤 한 번도 펼친 적이 없으니 말이지요." "이렇게 되면 계획이 어긋난다." "참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도리어 잘된 일이 아닐까요?" "모르는 소리, 그의 성격은 그렇지가 않소. 할 수 없잖은가…… 직접 시험을 해보는 도리밖에는." "시험이라 하면?" "그에게 특계조의 고수들을 보내요. 오늘 당장!" * * * 뭉클뭉클― 운무(雲霧). 뽀얗게 피어오르는 것은 지척도 분간할 수 없게 만드는 안개다. 이곳은 음산(陰山). 북방 제일의 고산(高山)이자, 사시사철 안개와 장독( 毒), 그리고 기독(奇毒)의 맹수, 충류(蟲類)들이 우글거리는 험악무쌍한 곳.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사냥꾼이라 해도 이 음산을 올 때는 서너 명씩 짝을 짓지 않고는 절대로 들어서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런데 이 음산에서도 가장 깊디깊은 곳인 오지(奧地) 구룡곡(九龍谷) 아래에서 느닷없이 어린 소년의 짤랑짤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앗! 차가워! 이 물은 마치 얼음 같군요."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안개 때문에 수천 마리의 충류들이 떼지어 덤벼들어도 까맣게 모를 이런 험한 곳에 사람이라니? 안개를 헤치고 조금 내려가 보면 양쪽은 한 마디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햇빛이라곤 일 년 내내 단 한 올도 스며들 기회가 없는지라 푸르다 못해 시커먼 이끼가 한 자도 더 붙어 있다. 절벽 중앙의 나무들은 모조리 기상천외하게 뻗어오른 것이 대부분이요, 그 습기찬 나뭇가지 위로는 붉고 검은 뱀들이 혓바닥을 날름대며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절벽을 타고 수백 장을 내려가니 하나의 연못이 언뜻 시선에 들어왔다. 사방 너비는 거의 이백여 장 정도의 넓은 면적이로되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물색이 아예 먹물 같은 흑담(黑潭). 이곳까지 이르니 시계(視界)는 마치 밤처럼 어두워져 버렸다. 한데 이 흑담의 저쪽 한 개의 바위 위에는 지금 놀랍게도 두 사람이 히히덕거리며 앉아 있었다. 푸른 장포의 청년 하나와 소년 하나. 안개가 가물가물 스쳐가는 아래로 한 개의 기이한 벽옥척(碧玉尺)이 꽂혀 주위를 대낮같이 밝히고 있었는데, 이 벽옥척엔 기이한 힘이 있는지 그 방원 십 장 안으로는 우글거리는 충류들이 하나도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붉은 눈을 휘번뜩이며 이 기이한 침입자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청년의 몸에서는 한줄기의 기이한 단향(檀香)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 냄새와 벽옥척의 빛의 조화는 그의 단아한 얼굴을 일종의 신비로움으로 물들이는 듯했다. 청년은 지금 연못 속에다 한 자루의 형형한 청죽(靑竹)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소년이 말했다. "아저씨, 이 물은 왜 이렇게 차지요?" "이곳은 만년냉소(萬年冷沼)라는 곳이다. 연못의 바닥이 온통 한석(寒石)으로 이루어져 있어 수온이 보통 물보다 열 배는 차지. 아마도 범인이라면 이 물에 몸을 담그기만 해도 얼어죽고 말 것이다." "한데 이토록 차가운 물에 무슨 고기가 있다는 거지요?" "핫하…… 그놈은 좀 특수한 놈이야. 고기라기보다는 큰 뱀이 천 년 이상을 묵어 일종의 이무기가 된 것인데 독각교룡(毒角蛟龍)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순간 소년 엽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으악! 이무기라고요? 그걸 낚싯대로 잡아요?" "암!" "세상에, 이 낚싯대에는 아무 먹이도 없잖아요." "먹이가 왜 없겠느냐? 너도 먹이고 나도 먹이이다. 이런 훌륭한 먹이를 그놈이 그냥 보고만 있겠니?" 엽산은 그 말을 듣자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곳의 지형이 하도 특이하여 재미있었는데 이젠 와락 겁이 난 것이다. 이때 돌연 잔잔하던 연못의 물이 돌연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쉿, 온다." 소년 엽산은 기겁을 하며 황급히 운룡의 뒤로 몸을 숨겼다. 운룡은 씩 웃으며 낚싯대를 질끈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한가롭게도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생은 무상하여 즐길 것이 없구나. 저마다 얽히고 설킨 낚시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내 한 몸 의탁할 곳 없으니, 그저 고기나 잡아 식구(食口)를 이어감이네……." 노래가 끝나는 순간 고요한 계곡을 온통 허물어뜨릴 듯한 일성 괴성이 터져나왔다. 크와악! 동시에 거대한 물기둥을 안고 시커먼 물체 하나가 연못에서 솟구쳐 나왔다. 슈아악! 입. 크고 거대했다. 두 사람을 한 입에 삼킬 듯이 벌린 입 속에서 부글거리는 붉은 거품을 보는 순간, 엽산은 비명을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게거품을 물고는 그 자리에 기절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악!" 운룡은 싱긋 웃었다. "뜻밖에 큰 놈이로군." 보라! 비늘 하나가 어른 머리통만한데 그것이 수천 개나 이어진 괴물의 거대한 동체를……. 뱀을 수천 배나 확대한 듯한 그 몸의 네 귀퉁이에서는 아름드리 고목만한 다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순간 맑은 기합성과 함께 운룡의 몸이 괴물을 향해 질풍처럼 쏘아져 갔다. "타앗!" 그는 수중의 낚싯대를 휘둘러 괴물의 머리에 불쑥 솟은 뿔에 낚시줄을 친친 감음과 동시에, 우수를 쭉 뻗어 두 줄기의 지풍을 매섭게 쏘아냈다. 슈우욱! 슉! 천유탄지(天遊彈指)였다. 퍽! 크아악! 뜻밖의 급습에 괴물은 물 속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소나기 같은 핏물과 함께 튀어나온 두 개의 눈알이 운룡의 몸에 소나기처럼 흩뿌려졌다. 운룡은 잽싸게 몸을 돌려 혈우(血雨)를 피하며 우수로써 괴물의 뿔을 꽉 움켜잡았다. 꽈아앙! 괴물은 자신의 뿔이 잡히자 기겁을 하며 거세게 요동을 쳤다. 우당탕! 우르르― 그리고는 큰 몸을 거대하게 회전하며 물 속으로 첨벙 스며드는 것이다. 딴에는 상대의 예공(銳功)을 피한 후 전력을 정비하여 다시 덤벼들겠다는 심산이겠지만 일신의 무예가 공심경에 이른 운룡이 어디 그것을 그냥 놔두겠는가? "올라오라!" 한소리 외침이 일자 독각교룡은 잘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쭈르르 딸려 올라오고 만다. "핫하하……." 운룡은 태풍처럼 몸을 선회시켰다. 그는 대력천근추(大力千斤鎚)의 수법으로 급속히 하강하는가 싶더니, 그 몸이 독각교룡의 허리춤에 이르자 일순 그의 허리춤으로부터 한 줄기 묵빛이 쭈욱 뿜어져 나왔다. 까가가강! 이게 무슨 소리인가? 보라! 놀랍게도 독각교룡의 몸이 허공에서 반 토막으로 잘려지고 있었다. 피와 내장과 괴성이 구룡곡 전체를 쩌렁하게 찢었다. 크아아악! 본시 이러한 천년영물들은 그 표피가 몹시 단단하다. 그것은 거의 두꺼운 철판의 강도와 버금가는 것으로써 제아무리 무예가 신화경에 이른 고수라도 그 표피를 단숨에 잘라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나 운룡은 괴물의 그러한 강점을 거꾸로 이용했다. 즉, 그는 단 일초에 일만 번의 변화를 넣어 괴물의 복부를 찰나의 순간에 베어버린 것이다. 인세 최고의 고수가 일만 번을 두드린다면 태산이라 해도 그냥 베어지고 말 터인데 독각교룡 따위가 어떻게 버틸 수 있으랴? 슈팟! 운룡은 찢어진 독각교룡의 하체는 그대로 놓아두고 상체만을 덥썩 잡아들어 스르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최고예요!" 어느새 깨어났는지 엽산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 어린 눈에는 운룡에 대한 존경, 감탄, 놀람 등이 한꺼번에 범벅이 되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운룡은 씩 웃으며 그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이리 와서 좀 돕도록 해라." 운룡은 한 자루의 예리한 비도를 꺼내선 독각교룡의 몸을 세밀히 분해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을 어디에다 쓸려고 하세요? 아저씨." "내게는 좋은 활이 하나 있지. 이 이무기의 뼈로는 살촉을 만들고 힘줄로는 시위를 만들 생각이다." 아아…… 그렇다. 헌원탄궁(軒轅彈弓)! 그에게는 위지중걸이 준 헌원탄궁이 있지 않았던가? 대충 탄궁에다 시위를 끼우고 이십여 개의 살촉을 만든 운룡은, 이어 교룡의 뱃속에서 붉은 내단(內丹)을 꺼내서 싫다는 엽산에게 억지로 먹었다. "시…… 싫어요. 아유, 비린내!" "이놈이? 남들은 꿈속에서도 찾아 헤매는 이 영단이 왜 싫다는 말이냐?" 엽산은 내공의 기초가 없으므로 사실 내단을 먹는다 해도 별 효력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장 추위나 더위를 모르게 될 것이고 고뿔 한 번 걸리지 않는 건강체가 될 수 있다. 뿐인가? 향후, 그가 내공을 연마하게 된다면 잠재되어 있던 교룡의 내단의 힘은 단숨에 그에게 삼십 년이란 내력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연후, 시위를 끼운 헌원탄궁을 엽산이 등에다 가뿐히 짊어지니, 내단을 먹은 덕에 얼굴이 불그레해진 그는 마치 패기당당한 소년궁사(少年弓士) 같았다. "좋구나……." 싱긋 웃고난 운룡은 다음 순간 엽산의 손을 잡고 튀어오르듯 솟구쳐 올랐다. 슈우욱! 무려 삼백여 장의 거리를 단숨에 솟아오른 것이다. 엽산은 귀가 멍멍하여 두 눈을 감고 잠시 있자니 어느새 발이 사뿐히 땅에 닿았다. "아저씨, 이건 정말 너무 신기하군요! 나중에 좀 가르쳐 주세요, 네?" 한데 그때 운룡의 표정은 뜻밖에도 가볍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무엇엔가 쫑긋 귀를 기울이는 눈치이더니 이내 그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매달았다. "부나방들이 몰려오는군. 하나, 둘, 셋, 넷…… 모두 네 놈이로군…… 드디어 행동개시라 이건가? 이를 두고 호랑이는 잡을 생각도 않는데 여우가 지레 겁을 먹는다고 하지." 한소리 중얼거림을 흘린 운룡은 엽산의 몸을 안고 근처의 고목 위로 스스슷 솟구쳐 올라갔다. "이곳에서 내가 올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한다. 절대로 움직이지 말도록!" 엽산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이미 운룡의 몸은 연기처럼 휙 사라지고 없었다. 무심한 안개가 나무 밑을 한가로이 스쳐날고 있었다. 25. 道魔의 秘密 네 사람. 천수여래(千手如來) 보법대사(普法大師). 그는 천축제일(天竺第一)의 암기달인(暗器達人)이다. 그의 일수(一手)가 뻗으면 그 기묘한 암기행공에 지옥의 염라도 울고 간다 했다. 일전에는 천축의 대도적떼인 천축사자단(天竺獅子團) 오백 명을 단 한 번의 암기수법으로 몰살시켜 오백살공(五百殺功)이라 불리기도 했던 희대의 고수. 그는 제세생불(齊世生佛)의 첫째 제자였다. 자전신도(紫電神刀). 동영제일(東瀛第一)의 쾌도수(快刀手). 그는 일생에 세 번 도(刀)를 휘둘렀다. 한 번은 영주(瀛州) 최고의 쾌검수라는 검쾌인(劍快人)에게, 두 번째는 동영 경도(京都)의 검의 대명가(大名家) 영목태랑(永木太郞)에게,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하늘의 번개를 향해……. 결과 그는 그 셋 모두를 베어낼 수 있었다. 일진풍(一陣風). 요동제일(遼東第一)의 신법자(身法者). 안시성(安市城)은 요동에 있고 장백산(長白山)은 길림(吉林)에 있다. 대륙의 동북과 서북으로 도합 만리 길. 십 년 전, 안시성주가 중환을 앓고 있을 때 오직 장백파의 백호환(白虎丸)만이 그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안시성의 군사들은 가장 빠른 말로 갈아타며 장백산을 향해 달렸다. 한데 일진풍은 두 다리로 달려 그들보다 먼저 장백파의 백호환을 얻었다. 그리고 안시성의 군사들이 여정의 반쯤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미 되돌아오고 있다가 그들과 마주쳤다. 혈살추혼(血殺追魂). 남만제일(南蠻第一)의 독행가(毒行家). 그는 독(毒)의 마술사다. 멀쩡하던 물체가 그의 시선만 닿으면 독물로 변했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퉁겨 강을 독강(毒江)으로 만들 수도 있었으며 소리없는 웃음으로도 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탓인지, 그는 혈살추혼이란 호를 얻은 이래 어느 누구하고도 같이 식사를 해보지 못했다. * * * 다가닥다가닥― 돌연 새벽의 정적을 찢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주성(銀州城)의 수문지기는 눈앞을 번쩍 하고 스쳐 지나가는 한 필의 말에 졸린 눈을 껌벅거렸다. 그는 자기가 꿈결에 잘못 들은 것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세상에 그토록 빨리 달릴 수 있는 말이란 아무 데도 없을 테니까. 다가닥다가닥― 미친 듯이 치달리던 한 필의 말은 한 주루(酒樓) 앞에서 급히 멈추어 섰다. 이히힝! 이어 말 위의 기사는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상아선녀 진진. 새북 관산장의 종주인 그녀는 주루의 현판을 한차례 힐끗 올려다보고는 급히 주루의 계단을 올랐다. 주렴을 들치기 무섭게 돌연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술! 술을 가지고 오란 말이다! 이 개새끼들아!" 상아선녀 진진은 아미를 가볍게 찌푸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 사람. 승인(僧人)도 있고 속인(俗人)도 있다. 하나 그들은 지금 승속을 막론하고 고주망태가 된 채 고래고래 고함들을 질러대고 있었다. 진진은 조용히 그쪽을 향해 다가선 후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응? 으음…… 웬놈이야……?" "야! 술 가지고 와!" 진진은 감정없는 시선으로 네 사람을 휘둘러본 후 우수를 가볍게 쳐들었다. 순간 그녀의 우수에서 몽롱한 백기(白氣)가 스며 나오더니 그것은 곧 네 갈래로 갈라져 사 인(四人)의 머리를 휘감았다. 그러자 돌연 사 인의 머리 위로 회백색 주기(酒氣)가 둥실둥실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취정신공(聚精神功)은 확실히 보는 이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로부터 약 반각의 시간이 지난 후, 사 인은 취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바로 옆에 있는 진진을 발견하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계주(戒主)!" 진진은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진진이에요. 네 분의 일은 어찌 되었는지? 이런 곳에서 한가하게 약주를 자시고 계시니…… 이미 여러 날이 지났는지라 저는 궁금증을 이길 길이 없어 이곳까지 왔어요." 순간 보법대사, 자전신도, 일진풍, 혈살추혼의 네 고수는 몸을 가늘게 떨며 고개를 툭 떨구었다. "면목이…… 없소, 계주……." 돌연 보법대사가 자신의 가슴자락을 홱 펴보였다. 진진은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담담한 얼굴에 한줄기 경악지색을 떠올렸다. 보법대사, 그의 가슴에는 일천여 개의 가시가 수도 없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손을 뿌려 암기를 던졌을 때 그는 땅에 있던 모래로 그것을 모조리 떨구었소. 그리고 이 가시를 박았소. 자그마치 일천 개요……." 자전신도가 자신의 우측 소맷자락을 쭉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우측 팔은 손목부터 싹독 잘려나가 있었다. "만약 내가 도를 좀더 쳐냈더라면 잘린 것은 팔이 아니라 목이었을 게요. 내 도가 반도 뻗기 전에 그의 검은 이 팔을 자르고 있었소." 이번엔 일진풍이 땅이 꺼질 듯한 장탄식과 함께 장포자락을 위로 걷어 보였다. 놀랍게도 그의 두 발은 발목부터 싹독 잘려나가 있었다. "내가 한 걸음 걸으면 그는 두 걸음…… 내가 일 장을 날면 그는 이 장을 날았소. 그는 무서운 인물이오." 일진풍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때 혈살추혼이 고소(苦笑)를 지으며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독을…… 뿌릴 사이도 없었소. 내 독이 채 뻗어나가기도 전에 나는 내가 이미 중독(中毒)된 몸임을 알았으니까…… 그는 독의 종주이오." 진진의 두 눈에서 한 줄기 기광(奇光)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라니, 그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에요? 설마……." 사 인은 일제히 얼굴에 공포의 빛을 떠올렸다. "운룡!" 진진은 이 사 인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극도의 놀라움과 공포! 그것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리라. "운룡…… 과연 그가 정말 운룡일까? 한 사람이 일 년 만에 그런 가공할 무예를 성취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걸까?" 바로 그때였다. 홀연 한소리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온 것은……. "그 해답은 내가 대신 말씀드려도 되겠소?" 마치 종탑 속에 들어가 앉은 듯 사방에서 메아리쳐 오는 굉렬한 목소리! 순간 진진의 안색이 싹 변했다. 육합전성(六合傳聲)! 울려온 목소리는 바로 그녀조차 엄두도 못 내는 천리전성(千里傳聲)의 신공, 육합전성이었던 것이다. 사 인은 이 목소리를 듣자 유령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라더니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진진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연 입술을 잘근 깨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좋아!" 무엇이 좋다는 건지……. 이어 희디흰 옥수(玉手)에 살포시 들리는 것은 한 개의 투명한 옥금(玉琴)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무릎 위에 얹고는 가볍고 우아하게 줄을 고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유령처럼 객점의 주렴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운룡! 일신에는 남의를 걸치고 그윽한 단향냄새를 풍기는 그는 바로 운룡이었다. 운룡이 천천히 자신과 삼 장여 떨어진 곳으로 다가오자 진진은 사르르 눈을 들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시선으로 그의 모습을 가볍게 훑어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정제된 기품…… 불가사의한 흡인력…… 과연 불패의 승부사요, 중원 최고의 고수라는 당신의 이름에 어울리는군요." "과찬의 말씀……." 상아선녀 진진은 맑은 눈을 깜박이며 구슬이 굴러가듯 투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 탄금곡조(彈琴曲調)를 한번 들어보겠어요?" 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털썩 그 자리에 정좌했다. 진진은 화사한 얼굴에 달콤한 웃음을 지으며 안고 있던 옥금(玉琴)을 고쳐 잡았다. "제 금은 혈무(血舞), 혈우(血雨), 혈폭(血暴)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혈연금살(血然琴殺). 진진의 혈연금살은 새북의 무림인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안색이 변하는 음공(音功)이었다. 실로 이 음공으로 하여 죽은 사람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듣는 이를 몽롱한 환각에 빠뜨려 백치로 만드는 혈무. 거듭되는 충격으로 아예 광란지경(狂亂之境)에 빠뜨리는 혈우. 혈관이 터지고 살이 갈라져 죽게 하는 혈폭. 그러나 운룡은 이 살공(殺功)의 이름을 듣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윽고 진진은 가늘고 긴 섬섬옥수로 옥금의 현(絃)을 뜯기 시작했다. 곡조는 귀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힘들 만큼 가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운룡의 고요한 눈이 진진의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깊은 심산유곡 담청빛 계수(溪水)가 흘러내리듯, 대면 피라도 밸 듯한 파란 하늘에 점점이 편운(片雲)이 떠가듯 진진의 손가락은 차츰 빨라졌다. 봄날 싹이 돋기 시작하는 언덕에 누워 춘풍(春風)을 쐬는 듯 싶던 곡조는 차츰 변하더니, 돌연 삭막하고 황량한 겨울풍경을 묘사해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순백색 설원(雪原)과 쌓인 눈을 휘말아가며 몰아치는 삭풍, 쉴새없이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허공을 떠도는 처절한 추위. 그러나 운룡은 여전히 무심했다. 듣는 이를 몽롱한 환각에 빠뜨리는 혈무도 그에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진진의 시선이 힐끗 운룡을 향했다. 순간 나직한 외침과 함께 곡조는 다시 일변했다. "혈우!" 그것은 실로 거대한 굉음이었다. 인간이 어찌 그런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천군만마가 한꺼번에 대평원을 내달리듯, 메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고 대해가 한꺼번에 뒤집히듯 상상도 할 수 없는 굉렬한 소리가 옥음으로부터 터져나왔다. 혈우! 인간을 광란지경에 빠뜨리는 혈우였다. 진진은 혈우를 탄주하며 회심의 미소를 띠고 다시 운룡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옥용이 새하얗게 질렸다. 운룡은 한 올의 동요도 없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당신은 좋은 재주를 가졌구려." 운룡의 담담한 말에 진진은 지그시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삼변(第三變) 혈폭!" 순간 천붕지괴(天崩地壞)의 굉렬한 소리가 뚝 그쳤다. 이어 진진은 옥금의 제일현(第一絃)을 세차게 한 번 퉁겨냈다. 뚱! 몹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그녀의 옥금에서 튀어나왔다. 순간 그녀가 기대어 앉아 있던 주루의 회벽이 진동을 못이겨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운룡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대신 진진의 꽃처럼 붉은 입술 사이로 실같이 가는 선혈이 주르르 새어나왔다. 무릇 이와 같은 음공의 겨룸에서는 내력의 겨룸같이 공력이 약한 자가 손해보는 것이다. 진진은 전신의 내력을 모두 끌어올려 다시 비파의 현을 퉁겨냈다. 순간 따당! 하고 마치 폭음 같은 굉음이 터져나왔다. 다음 순간 사방의 벽이 일제히 우수수 떨리고 혹은 지붕까지 들썩거리며 자욱한 먼지를 피워 올렸다. 실로 가공할 위력! 음공이 터지는 순간 운룡의 몸이 한차례 미세한 떨림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이내 원래의 담담한 표정을 되찾았다. 반면에 진진은 음공을 펼쳐낸 후 쉴새없이 몸이 흔들거리더니 왈칵 한 모금의 선혈을 쏟아냈다. 그녀의 발그레한 뺨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운룡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간신히 지념경(止念境)에 이른 무예…… 뿐인가? 내가 강기막을 펼쳐 이곳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사방 방원 백 장은 아예 초토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일반 백성은 생각지도 않는 이러한 한심한 수양…… 진진, 당신은 아직 멀었소. 집에 가서 어린 동생하고나 노시오." 말은 아직도 장내를 맴도는데 사람은 이미 간곳없다. 진진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의 평생에 언제 이러한 수치를 당해본 적이 있던가? 그녀는 생각할수록 분하여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개새……." 끼! 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는 말 대신 다시 한 줌의 핏덩이가 터져나왔으며, 그 자세 그대로 그녀는 썩은 고목처럼 그 자리를 나뒹굴고 말았다. 쿵! 그제서야 주루 주인의 놀람으로 희번뜩이는 시선이 조심스럽게 장내에 나타났다. 그런 것이다. 얻어맞은 통증은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치욕의 말은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이다. * * * "엽산, 내가 말한 대로 다리를 놀리지 않으면 크게 다친다. 넘어지기만 해도 뼈가 부러져." "염려 말아요, 아저씨. 아아…… 그런데 이건 너무 신나는군요?" 슈슉! 쐐액! 일진광풍! 아니, 그저 바람인가? 무심히 관도를 걷고 있던 두 사람이 서로 의아한 시선을 나누었다. "지금 뭐가 지나갔나?" "글쎄, 바람이겠지. 거참, 이상한 바람이로군." "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는 바람이었어." 쐐애액! 엽산은 신이 났다. 가로수와 산, 들 등의 경치가 휙휙 그의 눈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축지둔형(縮地遁形)이라고 했다. 그는 운룡이 일러준 대로 발을 놀리고 있었고, 마주잡은 손에 의해 몸이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앞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 거죠? 어디쯤 왔어요?" 말을 하는 데도 숨이 턱턱 막혀올 정도의 빠른 속도. 운룡이 아니라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운룡은 진기의 운행을 조금 늦추며 말했다. "청해(靑海)의 청호(靑湖)를 지나고 있다." "청해? 와아…… 그럼 우리는 반나절 동안 천 리를 온 셈 아니에요?" "앞으로도 천 리를 더 가야 한다." 호수. 그들의 옆으로는 장대한 호수가 무변의 기세로 펼쳐져 있었다. 청호(靑湖). 그저 보이는 것이라곤 호수와 들판뿐인 청해에서도 손꼽히는 대호(大湖)였다. 길가엔 철이른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춘삼월(春三月)이 바로 내일이었다. 수면은 마치 거울처럼 깨끗하고 맑았고 그 위로 팔뚝만한 잉어들이 팔딱팔딱 뛰어오르고 있었다. "와아! 저 잉어 좀 봐!" 이때 엽산을 위해 일부러 경치 좋은 호변을 택해 달리고 있던 운룡은 문득 두 눈에 한줄기 특이한 광채를 떠올렸다. 저기 앞쪽. 파란 수면 한구석에 둥실 뜬 배 한 척. 호수에 배가 떠 있는 것이 뭐 그리 기이할까마는 운룡의 절정에 달한 시력은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중원인이란 것을 이내 꿰뚫어본 것이다. '청해의 호수에 중원인이라…… 드문 일이로군. 게다가 저들은 또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아닌가?' 이때, 배의 우현에 있던 사내가 이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운룡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축지둔형으로 달리고 있는 우리를 알아본다? 이것은 저자가 지념경에 이른 고수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의 생각을 입증이라도 하겠다는 듯 사내는 배 위에서 이쪽을 향해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했다. "거기 오시는 분은 혹시 운룡, 운대협이 아니시오?" 거기다 이미 이쪽의 정체까지 꿰뚫어보고 있을 줄이야……. "정지!" 운룡은 급히 진기를 거두고 그 자리에 우뚝 몸을 세웠다. 급정거하느라 비틀거리는 엽산을 잡아준 후 그는 힐끗 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일남일녀. 한쪽은 백의(白衣), 다른 쪽은 홍의(紅衣). 백의의 사내는 햇살처럼 맑고 단아한 용모요, 홍의의 소녀는 우아하고 귀품이 있어 보였다. 둘 다 나무랄 데 없는 미모들이었다. 여인이 사르르 몸을 일으키자 사내는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중원의 풍운아를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가시는 길이 바쁜 줄은 아오만 소제는 한 잔의 술을 대협에게 바치고자 하오……." 사내의 탈속어린 기품과 이들의 정체에 지극히 호기심이 인 운룡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삐그덕―삐걱! 네 사람이 각기 좌정하여 앉자 작은 배가 기분좋게 흔들렸다. 먼저 사내가 정중히 한 잔의 술을 부어왔다. 술은 연엽청(燕葉淸)이요, 잔은 투명한 옥배(玉杯)였다. 운룡은 즉시 호쾌하게 한 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킨 후 사내를 향해 잔을 건네려고 했다. 한데 그때 돌연 뜻밖에도 홍의미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또다시 술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운룡은 얼떨결에 잔을 받기는 받았지만 몹시 의아해졌다. '노류장화(路柳墻花)가 아닌 다음에야 정숙한 여인은 외간남자에게 함부로 술을 따르지 않는 법…… 한데 이들은 부부처럼 보이거늘 어찌 지아비를 둔 여인의 몸으로서 나에게 술을 권하는 것일까?' 운룡은 고지식한 성격이라 이런 것들을 오래 참고 넘기지 않았다. 그는 잔을 놓자마자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두 분께선 하나같이 눈의 정기를 안으로 갈무리하고 계시니 이는 반박귀진(返撲歸眞), 지념경의 경지이오. 나는 중원인으로서 이러한 공력을 지닌 두 분이 누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구려." 순간 사내가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과연 운대협의 눈은 도저히 속일 수 없소이다. 이렇게 된 이상 무엇을 더 숨기리까. 여기 이 사람은 이옥군이라 하고 소제는 사문공이오이다." 순간 운룡의 고요한 두 눈에 한줄기 놀람의 파랑이 일었다. 이옥군과 사문공. 이들은 바로 이번 천하검회에 참가하는 십사연방 중 한북 용권풍과 화남 광무천의 대표고수들이 아닌가? 운룡이 놀람의 빛을 보이자 사내 사문공은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운대협을 이렇게 만났으니 소제 등은 허심탄회한 말씀을 드리겠소이다. 사실 이소저와 소제는 이미 약혼을 한 몸이오.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소만 중원인인 이상 결혼만큼은 천하검회 이후로 미루고 싶소." "흐흠……." "그리고 이제 막 우리 두 사람은 이번 검회를 포기하였소이다." 운룡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의 실력이라면 적어도 중원에 이승(二勝)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인데……?" "헛허…… 하나 우리는 그러한 승부보다는 우리의 사랑을 더 소중히 여기기로 한 것이지요." "……!" "부끄러운 말씀이오만…… 운대협,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명리(名利)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이겠소? 우리의 선조들은 한낱 뜬구름 같은 명예에 목을 매어 오늘과 같은 이런 일들을 만드셨소이다. 무예를 익히는 자로서 일견 솔깃해지는 것이 천하제일인이라는 이름이지만 그러한 길을 걷다 보면 사실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된단 말씀이오. 부단없는 싸움, 또 도전, 다시 싸움…… 인간으로 태어나 다른 한 인간을 만나 다시 인간을 낳고 웃으며 평범하게 살다가 죽는…… 그러한 삶 앞에 명예라는 것은 가장 큰 짐이 되오." 문득 이옥군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한 결심을 굳힌 것은 이미 여러 해 전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해대검회에서 당신을 눈여겨보았고 거기서 운대협을 중원의 운명을 맡길 만한 사람으로 점찍게 된 것이에요." "핫하…… 이건 돼지 얼굴에 금칠이구려." 사문공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진심이오. 운대협, 오늘 소제 등이 운대협에게 드린 일배(一杯)는 부디 소제 등의 뜻까지 모아 중원을 일으켜 달라는 부탁의 뜻이오. 운대협이 아니면 이 땅에 그 일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운룡은 싱긋 웃었다. "그래서 내게만 그런 골치아픈 일을 맡기고 두 분은 어디 무릉도원에라도 들어가 틀어박히겠다는 얘기가 아니오? 이거야, 어디 불공평해서……." 말은 투박하지만 웃음은 햇살 같다. 운룡이 진심으로 기분이 좋다는 것을 눈치챈 사문공 등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이해해 주시니 삼가 문파를 대표하여 감사드리오이다." 이옥군이 말을 이었다. "저희들은 세외(世外)로 은거할 생각이지만 만약 운대협이 오신다면 대문을 활짝 열고 환영하겠어요. 또한 저희들의 혼례에도 부디 참석해 주세요." "핫하…… 싫소. 난 도인이지만 도가의 경문에 대해서는 아예 백지상태란 말이오. 한데 혼례에 갔다가 느닷없이 경문이라도 읽으라면 어찌하오?" 순간 세 사람은 흰 이를 드러내며 대소를 터뜨렸다. 호면에 떠오르는 잉어와 장난을 치고 있던 엽산이 화들짝 놀라 그들을 향해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져왔다. 운룡은 기분이 좋았다. 그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다시 길을 가는 도중에도 그가 끊임없이 싱글벙글하자 엽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으세요? 그분들을 만난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이에요?" "암……." 운룡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본다는 것은 늘 기분좋은 일이다. 산아, 쥐꼬리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높은 곳을 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本性)이라면 높은 것을 가지고도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름답다 할 수 있는 것이다……." * * * "내일…… 바로 내일인가?" 동혈(洞穴). 이곳은 한 곳의 동혈이었다. 바로 밖이 극천(極天)의 설지(雪地)였지만 특별하게 고안한 짐승가죽이 입구에 둘려 있고 사방에 불을 밝혀 놓은 탓으로 안은 훈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람들. 언뜻 보기에도 도남강, 용헌위, 연비, 두자상, 운연, 예소벽, 백리천 등이 보였다. 도남강의 심복인 천룡대라마도 있었다. 탄식을 터뜨린 사람은 도남강이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인원에 화남 광무천과 한북 용권풍이 불참통고를 해왔으니 이제 남은 것은 만룡가와 신선도뿐……." 연비가 침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 낮에 잠깐 보았지만 새외십파는 모조리 지념경에 이른 고수들이오. 도저히 승산이 없소." 용헌위가 말을 받아 탄식을 터뜨렸다. "도대체 금악으로 들어간 세 아이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들어가 확인해 볼 수도 없는 일이니 참으로 암담하구나……." 도남강이 무거운 어조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들이 혹시 안에 들어가서 서로 죽고 죽이는 잔살극(殘殺劇)을 벌인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야…… 무공으로 본다면 운룡, 난난이 이환명보다 우위지만 심기는 이환명이 낫거든? 서로 싸웠다면 필시 양패구상(兩敗俱像)을 했을 것이다." 그는 긴 탄식을 뿜어냈다. "필부의 한순간 잘못으로 젊은 영재들을 그렇게 파묻고 말았으니…… 나는 도저히 만룡가의 선조와 중원을 볼 면목이 없구나……." 그때 두자상이 검미를 찡그리며 말했다. "도천주는 너무 자학하지 마시오. 그 동안 도천주가 보여준 무예에 대한 열성과 마음가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도천주를 이해하고 있소.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오. 연형은 내일 비무에서 가장 힘겨운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연비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천축의 제세생불이 제일 힘겨운 적수이고 그 다음으로는 서장 호리대법왕과 동영 가등옥을 꼽을 수 있소. 요동의 혼제와 대막의 사군도 무시할 수 없지……." "소제가 보기에는 이미 화남과 한북은 기권을 했고, 남해의 옥검후와 열하의 철패왕은 오긴 왔으나 참가의 뜻이 없는 것 같았소. 그렇게 된다면 결국 중원의 이 개 파와 천축, 서장, 새북, 동영 남만, 요동, 대막, 서촉의, 총 십 개 파의 대결이 아니오?" "천축, 서장의 내가기공과 동영의 검술, 그리고 남만의 독술은 이미 익히 알려진 것이지만 기타고수들의 무예는 사실 아는 바가 없소. 듣자하니 요동의 혼제 최재봉은 본시 고려(高麗) 사람으로서 고려 특유의 음자(陰者)들을 이끌고 문파를 세웠다 하오. 그들은 음양파형검(陰陽派形劍)을 쓰며 멸절음린(滅絶陰燐)이란 무서운 암기가 있다 하오. 그밖에 기타문파에 대해서 아는 분은 말씀해 보시지요?" 백리천이 입을 열었다. "대막(大漠) 광풍사는 만승은광정자팔(萬勝銀光正字八)이란 특이한 무기를 쓴다 하오. 특히 그들의 단혼사(斷魂砂)는 요주의 암기이오." 운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 얘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어요. 또한 서촉 파산파는 예로부터 편(鞭)의 기예에 달통해 있어요. 그들의 천왕편(天王鞭)은 천하삼대기병(天下三大奇兵)의 하나예요." 운연의 말을 끝으로 장내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더 이상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때 돌연 한소리 낭랑한 목소리가 바람결처럼 들려왔다. "당신들이 열거하고 있는 그들은 사실 하류(下流)요. 당신들은 천축, 서장, 동영, 남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소? 남만에는 비단 독(毒)뿐만 아니라 사두일우전(蛇頭一羽箭)이란 무서운 암기가 있소. 그것은 한 번 날게 되면 소리없이 상대의 혀에 날아가 박히오. 즉, 그들과 겨룰 땐 절대로 입을 열어선 안 되오." 나직하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 요동, 서촉, 대막 등을 하류라고 단언한 이 목소리는 이어 각국 제파의 장단점들을 상세하게 열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천축은 자고로 천룡계(天龍界)의 내공장법이 유명하지만 사실은 용봉쌍패(龍鳳雙牌)라는 무서운 무기를 숨기고 있다. 그것은 도박의 패장만큼 얇은 암기로써 한 번 날리면 피를 보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 하여 일비혈견휴(一飛血見休)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거기다 서장 밀종의 음흉한 돌머리들은 마음이련(魔音異聯)이란 괴상한 음공(音功)을 개발해냈다. 그것은 얇게 입을 오므려 혀끝으로 내는 소리에 불과하지만 내공을 주입시키면 인간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로 변한다. 만약 지념경 정도에 이른 고수가 그 마음이련을 전개하면 소리만으로도 상대를 살상할 수 있게 된다. 그밖에도 새북, 동영의 숨겨진 비예가 마치 청산유수처럼 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그가 바로 그 문파 출신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윽고 근 반 시진에 걸친 설명이 끝나고 나자 사람들은 어리벙벙하여 서로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목소리로 보아 중원인이요, 젊은 사람인 것 같지만 중원에 이런 청년고수가 있었던가 하는 의구심이 그들의 눈빛에는 담겨 있었다. 문득 도남강이 연장자답게 침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귀 공은 누구요?" "나요." 순간 짤막한 대답과 더불어 장내에 마치 유령처럼 한 사람이 나타났다. 좌중의 절정고수들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절묘한 신법. 청년. 나이 이제 약관이나 되었을까? 한데 그는 실로 지독하게 못생겼다. 얼마나 못생겼는지 원숭이라도 이 청년을 보면 만족하여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볼 정도의 추상(醜相)이었다. 먼저 그의 눈은 양옆으로 일제히 뻗었고, 눈동자는 각기 초점이 틀린 사팔뜨기였다. 게다가 코는 돼지가 시샘할 정도의 완벽한 들창코요, 입은 하마처럼 큰데다 입술마저 둥글넓적했으며 얼굴표면은 거친 자갈밭인 양 얼기설기했다. 그러나 장내의 그 누구도 그의 이러한 모습을 대하고서도 웃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가 보여준 신법과 말들이 너무 경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추면청년은 옆에 선 십여 세 가량의 소년에게 옆으로 가라고 이른 후, 큰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어험, 제현들은 나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으면 물어 보시오." 물어보지 않으면 말도 않겠다는 듯한 거만한 태도. 연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귀하의 신분내력은 무엇이오?" "흘흘…… 나는 운추(雲醜)라 하오. 출신은 금악이며 신분은 악주(嶽主)이오. 내력은 만룡가이며, 저기 앉은 도남강은 따지고 보면 내 이대 사질뻘이 된다 할 것이오." 순간 금악이라는 말에 중인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운연이 퉁기듯 일어났다. "당신은 혹시 운룡이라는 사람을 아나요?" "으음?" 운추는 그녀를 아래위로 쓱 훑어보았다. "소저는 누구요?" "운연, 곤륜의 운연이에요." "흐흠! 운룡은 내 사질이지. 지금은 목하 폐관수련중이오." 순간 중인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여인들은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채워 흘렸다. '살아 있었다! 우리의 운룡이…….' 그때 도남강이 침중한 어조를 터뜨렸다. "아까 운공은 나를 이대 사질뻘이라 하였는데 그에 대한 정확한 근거라도 있소?" "의심스러운 모양이군. 그럼 잘 들어 보시게." 운추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이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이어 그의 입에선 만룡가의 천 년 전 조사부터 최근의 조사까지 그 이름, 용모, 특징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은 만룡가 제구십팔대 조사의 의발제자로서 나이 삼 세에 금악에 입문하였으니 곧 진천우도의 사숙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남강은 자신의 증사질뻘이 된다는 얘기였다. 도남강은 적이 미심쩍은 부분이 없잖아 있었으나 가문의 천 년 전 조사부터 줄줄 외워대는 그의 기세에 눌려 할 수 없이 큰절을 올리고 말았다. "삼가 도남강이 사숙조(師叔祖)를 뵈오." "으험!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라. 그건 그렇고 내일 검회에는 내가 참가하겠으니 그리 알아라. 이는 운룡의 부탁이 있었기에 내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여 주신다면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오소이다." "불감증이고 뭐고, 저기 저 친구." 두자상은 해연히 놀란 시선을 던져왔다. "소생 말씀이오이까?" "그래, 나는 자네의 의문을 좀 풀어주어야겠어." "그게 무슨……." "자네는 도마(道魔)를 찾고 있지 않나? 그 진범을 말해 주겠다는 얘기네." 도마. 백 년 전 도가혈사를 일으킨 대살성! 사람들은 전 무림이 나섰어도 오리무중이었던 도마의 정체를 말해 주겠다는 운추에 대해 경이로움을 넘어서 신비로움마저 느꼈다. 순간 두자상은 상기된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게 누구이오이까?" "허어! 서두르긴, 내 말을 들어 보라." 생긴 건 젊은데 말투는 영락없는 노인네였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범인은 바로 제세생불이야." 짤막한 말! 그러나 순간 중인들은 다급한 신음을 들이키고 말았다. '제세생불! 제세생불이라니?' '천축은 말할 것도 없고 중원에까지 그 인자함이 널리 알려진 제세생불이 어찌 도마란 말인가?' "흐흠! 못 믿겠나? 그러나 이건 확실해. 제세생불의 나이 올해 백 하고도 사십이다. 즉, 이 일은 그가 나이 사십에 저지른 일이야. 그 이유가 뭔고 하니……." "뭔고 하니?" "그는 우연히 만룡가가 대대로 마공을 익히다 마인이 되곤 하는 것을 알고는 이 음모를 꾸몄지. 즉, 스스로 변용하여 도가에 대한 대혈겁을 저지르고는 그 죄를 만룡가에 덮어씌우기로 한 거야." "왜요?" "만룡가는 대대로 그의 가장 큰 호적수였다. 만약 이번 검회에서 만룡가가 우승하면 그는 도마의 비밀을 멋지게 폭로할 생각이었던 거지. 즉, 만룡가의 마인들이 그 짓을 저질렀다고 말이야. 당시의 마인들은 이미 죽고 없으니 그의 말은 큰 효력이 있다. 게다가 그 영악한 놈은 또 몇 가지의 위증(僞證)을 준비하여 멋진 함정을 만들어 놓았지. 그 중 하나가 바로 저놈이야." 운추의 손이 한 사람을 가리켰다. 천룡대라마. 순간 그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여 황급히 밖을 향해 몸을 퉁겼다. 그의 이 동작은 너무 순간적이었으므로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때 운추가 씩 웃었다. "엽산!" 순간 모닥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던 소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를 데 없이 재빠르게 메고 있던 화살에 촉을 매겨선 시위를 당겼다. 번갯불에 콩 구어먹는 듯한 놀라운 빠르기! "욱!" 다음 순간 한소리 둔탁한 신음과 함께 막 동혈 밖으로 몸을 퉁기려던 천룡대라마의 몸이 푹 쓰러졌다. 그의 양 허벅지에는 어느새 두 개의 하얀 화살이 박혀 있었다. 두자상 등은 소년의 궁술에 혀를 내두르며 재빨리 천룡대라마를 잡아들였다. "저놈은 제세생불의 제자야. 오십 년 전 만룡가에 투신한 것도 위장이지. 그의 임무는 제세생불이 도마의 일을 폭로할 때 가장 훌륭한 증인이 되어주는 거다. 즉, 마인의 증세에 대해서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말이야." 그때 도남강이 형언할 수 없이 정중한 표정으로 천룡대라마에게 물었다. "천룡! 사숙조님의 말씀이 모두 사실인가?" 천룡대라마는 체념한 듯 힘없이 웃더니 고개를 푹 떨구었다. "저런 괴물 같은 자를 만났으니 무엇을 더 숨기랴…… 그의 말은 다 사실이오." 아아…… 백 년을 이어오던 비밀, 도마! 드디어 그 비밀의 내막이 백일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사대도가의 공동전인인 백리천이 부들부들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운노사(雲老師), 제세생불이 유독 도가를 그렇게 참살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렇다. 제세생불이 만룡가의 마인의 만행으로 덮어씌우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다른 대상이 있었을 것이다. 한데 하필이면 왜 도가였을까? 운추는 그의 말에 씩 웃어 보였다. 웃으며 그는 말했다. "사실은 그것이 가장 큰 단서였는데 말이야. 제세는 어릴 때 푸른 옷을 입은 사람한테 죽도록 얻어맞은 적이 있다. 그것 때문에 그는 푸른색에 대해 일종의 보복심리를 무의식중에 지니게 된 것이지. 그것이 생불이 아닌 도마의 신분으로 피의 태풍을 일으킬 때 무심결에 폭로된 거야. 즉, 도가는 재수없게도 푸른 도복을 전문적으로 입는 바람에 그 살인마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운이 없었다고나 할까?"& 26. 그건 春風花雨였다니까 대풍운! 대격돌! 지켜보는 이라고는 관계고수 오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이 절산설지(絶山雪地)를 오를 생각도 못하고 산아래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십사연방천하검회! 이 미증유의 일대검회는 처음부터 파란의 연속이었다. 우선 중원의 화남, 한북에 이어 신선도의 연비도 스스로 비무를 포기했으므로 중원에선 만룡가만이 단독으로 출전했고, 새외쪽은 예상대로 남해 십검지, 열하 철혈문, 새북 관산장을 제외한 천축, 서장, 동영, 남만, 요동, 대막, 서촉 등의 칠 개 파가 참가를 했다. 천축, 서장, 중원의 대표들이 선포한 대진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천축 유가법종(瑜伽法宗)의 제세생불(齊世生佛) 대(對) 요동 음자촌(陰者村)의 혼제(混帝) 최재봉(崔宰鳳). 서장 밀종(密宗)의 호리대법왕(狐里大法王) 대 대막 광풍사(狂風砂)의 사군(沙君) 향동래(香東來). 동영 일월이도류(日月二刀流)의 검귀(劍鬼) 가등옥(加藤玉) 대 남만 만독성(萬毒城)의 일우독군(一羽毒君). 그리고 화북 만룡가(萬龍家)의 운추(雲醜) 대 서촉 파산파(巴山派)의 수왕조왕(獸王鳥王). 맨 첫번째 대결에서 제세생불은 과연 새외제일인(塞外第一人)다운 눈부신 면모를 과시했다. 그는 천룡신장(天龍神掌), 서천불수인(西天佛手印), 보리옥폭참(菩提玉暴斬) 등의 유가법종 특유의 기예를 발휘하여 요동의 혼제 최재봉을 마음껏 몰아부쳤다. 최재봉은 특유의 음양파형검(陰陽派形劍)에서 비롯되는 순양십이검(純陽十二劍)과 파란 인광이 번뜩이는 멸절음린(滅絶陰燐) 등으로 사력을 다해 항거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이십오초수 만에 서천불수인에 격중당하여 대 아래로 나가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두 번째 대결은 장중한 밀종의 무예와 괴이난해한 대막의 무예가 어울린 한판 승부였다. 결과는 호리대법왕의 아슬아슬한 반초승(半招勝). 대막 사군의 저돌적인 공세에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호리대법왕은 승포자락을 길게 찢기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세 번째 대결은 동영 가등옥의 검예(劍藝)가 단연 돋보인 대결이었다. 검귀(劍鬼), 또는 검마(劍魔)라고도 불리는 희대의 검도절인 가등옥. 그의 일월쌍검(日月雙劍)에서 펼쳐지는 사일(射日), 요월(遙月)의 두 검식은 마치 태양과 달빛이 어우러진 듯한 한바탕 거센 춤사위였다. 남만의 일우독군은 그의 검세에 밀려 주특기인 독술을 전개할 엄두도 못 냈으며, 결국 십일초 만에 팔 하나가 달아나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한데 문제는 네 번째 대결에 있었다. 만룡가의 운추. 그는 도대체 무인(武人)일까, 희극배우일까? 이 믿을 수 없도록 못생긴 추남은 서촉 수왕조왕의 천왕편(天王鞭)이 대 위를 난무하기 시작하자 사람 살리라며 연신 대 위를 빙글빙글 맴돌아 중인들은 한바탕 배꼽을 뺐다. 그런가 하면 화가 난 수왕조왕이 그의 주특기인 수조공(獸鳥功)을 펼쳐 수십 마리의 무시무시한 독문괴조들을 불러들이자, 이번엔 또 오십여 마리의 독수리들에게 달려들어 그 털을 뽑고 올라타며 난리를 쳐댄 것이다. "산아, 여기 한 마리 간다. 이따 통구이 해먹자!" "이랴! 끼랴!" 그러던 어느 한순간 운추의 개산배월(開山拜月) 일초에 의해 일장을 두들겨 맞고 대 아래로 굴러 떨어진 수왕조왕을 보고도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실력으로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화병으로 울화통이 터진 게 주된 원인일 거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어쨌든 이리하여 일회전은 천축, 서장, 동영, 중원이 각기 귀중한 일승씩을 올리게 되었다. * * * "오후의 비무상대는 동영의 가등옥이오, 사숙조. 제발 그 기행(奇行)으로 사람 가슴 좀 철렁하게 하지 마십시오." 도남강의 말에 운추는 씩 웃었다. "봤나? 내 개산배월 일초가 어땠나?" 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했소. 시간, 각도, 위치 다 좋았소." "역시 자네는 보는 눈이 좀 있군." "그러나 오후의 가등옥과는 전법을 다르게 구사하셔야 할 것이오." 연비는 침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후 비무부터는 장소가 부용지(芙蓉池)로 옮겨지오이다. 즉, 물 위에 뜬 연꽃 위에서 대결을 하셔야 하오. 이는 공력이 배로 들 뿐 아니라 두 개의 무기를 사용하는 가등옥에게 열 배는 더 유리한 것이오." "흐음, 자네 검(劍) 가진 것 있나?"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묻는 운추의 말에 연비는 무심히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운추는 검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너무 가볍군." 그리고는 운연에게 시선을 던졌다. "낭자의 것도 줘보게." 운연이 자신의 검을 내밀자 운추는 두 개의 검을 한 손에 들었다. "괜찮군, 이걸로 하지." 순간 중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라! 운추가 두 자루의 검 중 하나의 검자루를 두부 자르듯 뚝 떼내고는, 이어 두 개의 검날을 한데 모아 쥐자 피시식 하는 기음과 함께 두 검이 하나로 변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흐음…… 역시 괜찮아……." 쉴새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걸어나가는 운추의 모습을 보며 중인들은 입을 쩍 벌렸다. 검을 통째로 달구어 버리다니! 그러한 순양기공(純陽氣功)이란 보기는커녕 상상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운추, 아니 운룡은 검을 허리에 꿰차고는 느릿하게 밖으로 걸어나왔다. 하늘은 가볍게 흐렸다. 흐린 산야(山野)가 주는 시원한 바람이 운룡의 눈을 적셔왔다. 그가 천천히 걸어 한 곳의 칼끝 같은 벼랑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돌연 나직한 교갈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잠깐만요." 힐끗 돌린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섬세한 인영 하나. 문득 운룡의 무심한 동공에 가벼운 출렁거림이 일었다. '옥수……!' 옥수. 그렇다. 하얀 입김을 훅훅 내뿜으며 빨간 볼을 한 채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남해 십검지의 옥수령이 아닌가! "무슨…… 일이신가?" 옥수령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저…… 귀공께서는 운룡의 사숙조가 되신다고……." 정인(情人)의 안부를 묻기 위함이어선지 그녀의 볼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순간 운룡은 가슴이 뭉클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높은 신분. 일국 일계파의 종주라는 높은 신분의 그녀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이러한 부끄러움까지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는 짐짓 퉁명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렇긴 하오만…… 소저는 어인 일로 그 아이를 찾으시오?" 옥수령은 이제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고 말았다. "저는…… 그를 한 번 만나고자……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지……." "아녀자가 수업중인 남자를 만나서 무엇하려고?" 거듭되는 퉁명함에 옥수령의 눈가가 붉게 물들고 말았다. 그냥 놔두었다간 눈물이라도 쏟고 말 것 같았다. 운룡은 짐짓 헛기침을 한차례 한 후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 소저의 사정이 딱한 것 같으니 청을 안 들어줄 수 없겠구려." 순간 옥수령의 얼굴에 기쁨의 물결이 보석처럼 스쳐 지났다. "그게 정말이신가요?" "흐음…… 그놈은 사실 이곳으로 오기로 되어 있소. 그렇다고 사람의 이목이 많은 곳도 이상하니…… 그렇지, 저기 저 산봉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그곳에 괜찮은 동굴 하나가 있는 것을 내 봐두었소. 그놈이 오면 그곳으로 보내지." 순간 옥수령은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소리를 순식간에 열 번도 더했다. 이어 그녀는 한 마리 놀란 토끼처럼 폴딱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운룡은 착잡함이 감도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힐끗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운룡아…… 운룡…… 너는 도대체 이러한 여업(女業)들을 어찌할 생각인가?" 하계(下界)는 춘삼월이지만 이곳은 아직 겨울이다. 눈이라도 오려는지 하늘은 잔뜩 찌푸렸다. * * * 연(蓮). 부용(芙蓉)이라고도 한다. 하늘하늘 물 속을 뻗어 올라온 가는 줄기 위로 싱그러울 정도로 소담스러운 꽃을 피워 올리는 강한 생명의 꽃. "해발 이십칠만 척의 연못에 연꽃이라…… 아마도 이것은 지상최고의 높이에서 피는 연꽃이 되겠군." 운룡은 무심히 중얼거리며 연잎에 둥실 몸을 실었다. 이어 그는 아까부터 벌써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동영의 가등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가등옥. 그는 흑발을 어깨 어림까지 치렁치렁하게 길렀고, 회색장포를 걸쳤는데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다만 그 시선만은 독수리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검귀 가등옥의 얄팍한 입술이 열렸다. "중원에 대단한 고수가 있었소. 아까의 개산배월의 초식에는 정말 감복했소. 그 위치와 각도였다면 나라 해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오." 운룡은 씩 웃었다. "옳은 말이오. 하나 당신은 지금도 여전히 피할 수 없을 것이오." "그 말은 본인의 심기를 흐리고자 하는 말이신가?" "아니, 그저 나는 당신이 일초를 펼친 후엔 다시는 검초라는 것을 펼칠 기회가 없으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 이것은 진심이오." 검귀 가등옥의 시선이 무표정해졌다. 그는 쌍수쌍검(雙手雙劍)을 비스듬히 들어 보이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한줄기 폭죽 같은 살기가 그의 전신으로부터 폭사되어 왔다. 오후의 첫번째 비무에서는 제세생불이 호리대법왕을 오십초 만에 이겼다. 따라서 이것은 두 번째 겨룸이었다. 운룡은 천천히 급조하여 팔십 근의 무게를 맞춘 검자루를 꼬옥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검자루의 감촉이 친밀하게 느껴졌다. 금악을 나온 이후 운룡은 지금까지 누구하고든 건성으로 싸워왔다. 승부에 크게 집착한다는 것, 명리나 명예나 권력 따위의 풋내나는 것들은 공심경에 이른 그가 보기에는 모두 한 잎 풀조각 같은 것이었다. 하나 검귀 가등옥의 검기(劍氣)가 싸늘하게 피부에 닿아오자 팽만하는 몸 속의 혈관……. 운룡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만인가…… 가볍게 피부를 찔러오는 살기의 통증, 약간의 두려움이 내포된 혈관의 팽창, 검자루의 두툼한 감촉, 머리 속으로는 초식…… 이것이 겨룸의 느낌이다. 아아…… 나는 이런 것이 좋다…….' 흐린 하늘 한구석으로 그의 고요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타앗!" 공간을 자르듯 무서운 검기가 쏘아져 오고 있었다. 운룡의 손목 힘줄이 불끈 일어났다. 그의 손이 춤추듯 검로(劍路)를 치닫기 시작했다. 검은 그대로 광채로 빛나고……. 초식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劍 劍劍活躍 具其所處 於基行焉 刺之絶局 검. 검 하나하나가 살아 있다. 반드시 가고 싶어하는 길을 가지고 있다. 그 검의 마음을 헤아려 그대로 가주었을 때, 검은 절대로 인간의 재주로는 피해낼 수 없는 사각(死角)을 찌르는 것이다. "아아악!"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제세생불이 놀라움에 가득찬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연비도, 두자상도, 운연도, 예소벽도……. 아니 단 한 초식이라도 무술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순간 솟구치는 피를 부여잡고 쓰러져 가는 검귀 가등옥의 몸 위로 번뜩인 이 한 자루 검의 마력을 알 것이다. 한 마디로 그 검은 완벽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검귀 가등옥이 아닌 자신이 찔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연비가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것은 운룡이다. 운룡만이 할 수 있는 운룡의 무예다……."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겠다는 듯 연꽃 위의 운룡은 스스로 얼굴에 쓰고 있던 인피가면을 벗고 있었다. 즉시 드러나는 투명하도록 해맑은 얼굴! "운룡!" "도마(道魔)! 사라져간 일천 도가를 대신하여 말하노니 내려와서 검을 받으라!" 운연 등의 소녀들이 비명을 지르다시피 그의 이름을 외친 것과, 운룡의 손이 저만큼 위의 제세생불을 가르킨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온 산에 메아리가 칠 정도로 굉렬한 외침. 제세생불은 부르르 몸을 떨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하나 이때 백리천 등에 의해 끌려 나오고 있는 천룡대라마의 모습이 그의 시선 속으로 빠르게 쏘아져 들어왔다. 순간 그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는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고소(苦笑). 그 웃음은 이내 엉뚱하게도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대소로 변했다. "핫하하하…… 대단하구나, 운룡! 내 너를 과소평가한 것이 실책이었다! 네가 올라오라!" 운룡의 두 눈에 불길이 확 일었다. 팍! 그는 수중의 인피가면을 내팽개치기 무섭게 제세생불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덮쳐갔다. "원수야!" 제세생불은 그런 그를 힐끗 보더니 한서린 광소를 터뜨리며 마주 덮쳐들었다. "핫하…… 네놈이 모든 걸 깨뜨리고 마는구나!" 드디어 용호상박의 대혈전이 벌어졌다. 한쪽은 백사십 세의 새외제일인이요, 다른 한쪽은 중원이 키워낸 풍운의 영웅! 일찍이 이렇듯 거대한 두 거인(巨人)의 싸움이 있었을까? 한 손을 휘저으니 십여 개의 절학이 난무하고, 일보에 십여 장을 평지처럼 걷는다. 펼쳐지느니 희대의 기공(奇功)이요, 뻗어 나오느니 실전된 기학(奇學)이 아닌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인들은 또다시 넋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는 각 계파의 종주들조차 입을 쩍 벌릴 정도였다. "오오…… 저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神)의 무예로구나." "도대체 무예의 길이란 어디가 끝인지……." 두 사람. 이 희대의 고수들은 싸움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기류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현상. 조금씩 높아지던 두 사람의 몸은 이내 아득한 흑점으로까지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순간 가슴을 조이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철렁하게 할 만큼 쩌렁한 외침이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왔다. "천룡대라만겁인(天龍大羅萬劫印)!" "춘풍화우(春風花雨)!" 빛! 희고 검으며, 투명하고 혼탁한 두 개의 빛이 마치 태양이 폭발하듯 허공의 한구석에서 작렬했다. 파아악! 그리고 다음 순간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사람의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으아아아악!" 도대체 무엇이 어찌된 것일까? 잠시 후, 빗발치는 피보라와 함께 한 사람이 느릿하게 허공으로부터 하강하고 있었다. 후두둑! 한 사람. 오오…… 그는 바로 운룡이 아닌가! 순간 연비를 비롯한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기쁨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만세!" "운룡 만세!" "와아아……." 승리. 이것은 진정한 인간승리였다. 십사계파의 고수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저 청년의 눈은 맑디맑소." "그 무예는 이미 하늘에 닿았소." "패망한 문파를 홀로 일으켜 세운 의지인이오." "이제야 천하는 진정한 제일인(第一人)을 맞이하였구려……." * * * 연비가 씩 웃었다. "저 미친놈…… 저놈이 마지막 순간에 펼친 초식이 무엇인지 아나? 바로 춘풍화우야. 무림의 원숭이도 아는 그 검식을 새외제일인에게 썼단 말이야. 그 배짱하며…… 그 우직함…… 그는 늘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운연이 웃으며 말을 뱉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매력이 아닌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말하잖아요. 불패의 승부사라고 말예요." 도남강이 조용히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익주(翼州)에 땅을 좀 사놓은 것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나무나 길러보는 것이 어떨까?" 용헌위가 놀람에 찬 어조로 말했다. "성은 어떡하고요, 형님?" "운룡이 있잖은가?" "그는 도인이오. 속인이 아니외다, 형님." "도인?" 도남강은 피식 웃었다. 웃으며 그는 말했다. "물론 무당파는 그를 오랫동안 기억하겠지만 그놈은 천생 도인이 될 팔자가 아닐세. 저 야생마처럼 날뛰는 계집애들을 보게나. 환호하는 군웅들을 봐. 나의 조카지만 그는 이 시대가 만들어낸 영웅이다. 사람들이 영웅을 도포나 입고 염불이나 외우게 놔둘 것 같은가? 자자…… 이제 무림은 젊은 아이들에게 맡기면 돼. 골치아픈 얘기는 그만두고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구." 운룡이 옥수령의 젖무덤을 꼬집으면서 말했다. "이 동굴이 어때? 높긴 하지만 경치는 그만이거든." 옥수령은 그의 품안에 나른한 고양이처럼 안겨 있다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알고 보니 엉큼한 사람이야." "어어…… 무서운 모함이로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아까 제세생불과 싸울 때 춘풍화우 초식 속에 엉큼하게도 슬쩍 횡소천군을 갈무리하지 않았단 말인가요?" "아니, 그건 선인지로였소." "핏! 횡소천군이에요." "선인지로라니까." 참으로 한심한 남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동굴에 들어와선 미친 듯이 옷까지 벗어놓고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횡소천군에다 춘풍화우 어쩌구란 말인가? 투닥투닥 말싸움, 몸싸움을 이어가는 이 한심한 동굴 밖으로는 소담스러운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 마지막 눈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최후의 무예 공령(空靈)까지 익힐 건가요?" "공령? 웃기지 마시오. 옥수, 그럼 나보고 신이 되라는 얘긴가? 그건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르오. 그리고 나는 신보다는 인간쪽이 좋단 말이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