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왕 - 용대운 작 서장 우내칠대무학 우내칠대무학 강호무림에 일곱 가지의 놀라운 무공이 있다는 것은 무림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름하여, 우내칠대무학!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내칠대무학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의 입 에서 입으로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와 이제는 하나의 전설이 되 어버렸다. 우내칠대무학은 이천년이 넘는 무림의 역사 중 가장 뛰어난 무공으로, 이 중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익히기만 하면 능히 천하무적 의 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전설을 믿었고, 칠대무학을 찾기 위해서 천하의 방 방곡곡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고금무적의 절기라는 이 일곱 가지 무학은 과연 어떠한 것 인가? 낙일검! 한 자루 검에서 피처럼 붉은 노을이 피어오를 때면 천하의 그 무엇도 당해 낼 수 없다는 무적의 검법. 천애도! 일단 도가 발출되면 시작도 끝도 모르는 사이 상대의 혼백은 구 천을 떠돌게 된다는 신화적인 도법. 음양수! 시뻘겋고 새하얀 두 개의 손이 동시에 움직일 때면 전신이 먼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는 죽음의 손. 최심지! 흔적도 없고 소리도 없다. 창백한 손가락이 미간에 닿는 순간,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 게 된다는 공포의 지공. 수라조! 매의 발톱처럼 모아진 다섯 개의 손가락이 시커먼 흙빛으로 변하면 금석이 두부처럼 으스러지고 어떠한 호신강기라도 종 잇장저럼 찢어져 버린다는 가공할 조법. 취뢰장! 두 개의 손바닥이 마주치는 순간, 시퍼런 번갯불이 사방을 폭풍처럼 휩쓸어 버린다는 전설의 장공. 유령보! 누구도 잡을 수 없다. 일단 펼치면 천하를 무인지경으로 횝쓸며 어떤 무공이라도 피해 버린다는 독보적인 보법. 칠대무학의 어느 한 가지라도 익히게 되면 그자는 무림의 하늘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십 년 전에 천하를 자신의 손안에서 주름잡았던 쌍마쌍성 이 사라진 후 무림에 우내칠대무학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쌍마쌍성이 사라진 후 지난 사십 년 동안 무림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불세출의 마두도, 간악한 효웅도 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이것이 진정한 평화이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웬 청천 벽력이란 말인가? 무림이 태풍 앞의 가랑잎처럼 마구 파동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흥 분해서 정신없이 외쳐 댔다. 이성이 마비되고 전율이 온 몸을 지배했다. -- 드…… 드디어 우내칠대무학이 모두 나타났다! 실로 믿어지지 알는 일이었다. 하나만 나타나도 천지가 번복되고 풍운이 변색 한다는 우내칠대무학이 거의 동시에 모두 나타난 것이다. 혼란은 차라리 당연한 것이었다.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미친 듯이 칠대무학을 찾아천하를 누비고 다녔 다. 멀리 요동에서 남만의 구석진 오지까지, 전무림이 벌집을 쑤신 듯이 들끓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대체 무슨 일이기에 사십 년간 무림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우내 칠대무학이 모두 나타난 것인가! 과연 이것은 신의 섭리인가, 아니면 하늘의 장난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제1장 팔비도룡 휘이이이…… 휘잉! 바람이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다. 흙먼지가 뽀얗게 하늘로 치솟았으며 검은 구름이 몰려와 당장이라도 천지 개벽이 일어날 듯한 매서운 날 씨였다. 대동. 대동은 산서성의 북부에 있는 도시였다. 옛이름은 운주 , 평성이고, 북위의 수도이기도 했다. 때는 시월 하순. 극심한 바람은 더욱 기승을 부렸고 싸늘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창공에는 기러기가 줄을 지어 울면서 날아갔고, 광풍은 구름을 몰고 와서 당장 폭우라도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다. 태양은 구름에 가리워 졌고, 스산한 날씨는 더욱 차가워져서 길에는 인적도 없었다. 천산조비절, 만경인종멸…… 산이란 산에는 새조차 날지 않고, 길이란 길에는 사람의 자취가 끊어 졌다…… 이런 시구가 떠오르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돌연, 두두두두…… 대동성 밖 십리 지점에서 말발굽 소리가들리더니 흙먼지를 헤 치면서 한 필의 말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말 위에는 추의경장을 한 중년인이 바싹 엎드려 있었는데, 안색이 창백했고 몸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한눈 에 보아도 심한 중상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흑의경장인은 미친 듯이 말을 몰다가 돌연 짤막한 신음을 토하면서 땅에 떨어졌다. 쿵! 놀란 말은 십여 장 밖으로 계속 달리다가 크게 울부짖더니 다시 주인 의 옆으로 되돌아왔다. 흑의경장인은 땅을 짚고 간신히 일어섰다. "으음…… 어서 가라! 그게 나를 돕는 길이다." 그는 말의 다리를 후려쳤다. 히히힝! 말은 울부짖으며 세차게 저쪽으로 가버렸다. "으윽……" 그제서야 흑의경장인은 신음을 토하며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근처에는 십여 개의 움막집이 있었다. 원래 대동지방은 장성과 가까워 겨울내 바람이 거세게 불고 강 추위가 밀려오는 척박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이 토굴을 마련하여 바람과 추위를 피했다. 지금도 움막집들은 모 두가 광풍을 막기 위해서 문을 굳게 잠그고 있었다. 이때, 삐걱! 좌측에서 다섯 번째 움막의 문이 빠끔히 열리며 한 소년이 고개를 내 밀었다. "엇?"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진 흑의경장인을 발견하고 짤막한 경호성을 지르며 급히 달려나왔다. 소년은 산서지방 태생 같지 않게 모습이 준수했고, 피부가 산뜻하게 고왔으며, 눈은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매우 섬세하게 생긴 그 소 년은 비범해 보였는데 진귀한 양피구를 걸치고 있어서 더욱 돋보였다. 소년은 흑의경장인을 부축하여 움막 안으로 끌고 가서 자리에 편히 눕혔다. 흑의경장인은 옆구리에 불룩한 피낭 두 개를 차고 있었는데 전신에는 유혈이 낭자했다. 소년은 침착한 눈초리로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흑의경장인의 입가엔 검은 피가 엉켜 있고, 안색은 핏기를 잃고 잿빛 으로 변해 있었다. 하나 짙은 눈썹에 우뚝 솟은 코는 남성다움을 느 끼게 해주었고, 꽉 다문 입술과 날카로운 턱은 고집스러우면서도 씩 씩한 기상을 풍기고 있었다. "아…… 정말 남자답게 생겼구나." 소년은 나직이 탄성을 터뜨리며 그의 맥을 짚었다. 잠시 총명 어 린 눈을 빛내며 추의경장인의 상세를 살피던 소년은 옆방으로 건너갔다. 그 방에는 많은 서적과 약병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매캐한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년은 차분한 태도로 약병을 하나씩 살펴보다가 작은 병에서 분홍빛 환약 세 알을 꺼내 가지고 다시 돌아와 흑의경장인의 입에 넣어 주었 다. 그때였다. 히히힝!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문틈으로 살짝 밖을 내다보았다. 밖께는 흑마를 탄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방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상당한 흑의경장인을 찾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사나운 광풍에 날리는 모래를 막기 위해 모두가 얼굴을 가렸 는데, 가운데 인물은 체구가 우람했고 검은색 피풍을 두르고 있어 당 당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 옆의 두 인물은 반대로 비쩍 마르 고 등뒤에는 감배산도를 매고 있었다. 가운데의 체구가 큰 인물이 신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주위를 쓸 어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그놈의 말이 삼 리 밖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인가?" 그의 음성은 체구만큼이나 굉량했다. 그러자 좌측의 인물이 말을 받았다. "사 대협! 그 여풍운은 대협의 금인마장 에 맞았으니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어쩌면 벌써 쓰러져 죽었을지도……" 체구가 큰 인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여풍운은 팔비도룡이란 외호처럼 결코 호락호락 한 인물이 아닐세. 필시 어딘가에 은밀한 거처를 마련해 두었을 걸 세." "하지만 비록 그렇더라도 장부가 뒤죽박죽되었고, 설령 죽지 않았다 할지라도 상세가 심하여 앞으로 칠 일을 견디지 못할 겁니 다." 하나 체구가 큰 인물은 못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설혹 그렇더라도 그의 생사를 분명히 확인할 필요는 있네. 더 구나 이번 일은 장주께서 신신당부하신 일인데 만에 하나라도 착오가 있게 된다면 내 체면이 어찌 되겠나?" 그때였다. 아무 말도 없던 우측의 사내가 급히 말에서 내리더니 허리를 굽혀 바 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삼각형으로 생긴 기이한 날 이 달린 암기였다. "이건 바로 여풍운의 독문암기 중 하나인 단혼자가 아닙니 까?" 체구가 큰 인물은 그 암기를 받아 들고 자세히 살폈다. 그의 눈에 떠오른 신광이 더욱 짙어졌다. "과연 그렇군." "그렇다면 여풍운은 중상을 입고 말을 탄 채 달리다가 기력이 모자라 떨어지면서 이것을 떨어뜨린 게 분명합니다. 그럼 누군가에 의하여 구원을 받은 게 확실하군요." "그렇지. 더구나 반드시 이 부근에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두두두…… 십여 장 밖에서 누군가가 말을 몰고 광풍을 헤치면서 쏜살같이 지나 갔다. 세 사람은 안색이 변한 채 일제히 그의 뒤를 급히 추격했다. 지금까지 그런 광경을 엿보고 있던 소년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이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흑의경장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빤 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싱긋 웃었다. "일어나셨군요?" 흑의경장인은 뚫어지게 소년을 응시하다가 그의 눈빛이 티없이 맑고 깨끗한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나를 구했군. 정말 고맙네. 한데 내가 당한 상처는 보통 심 한게 아난데 이토록 가뿐하다니, 어디서 그런 영약을 구했나?" 소년은 가볍게 웃었다. "하하…… 아직 모르셨군요? 저희 집은 작은 약포를 겸하고 있 습니다." 그제서야 흑의경장인은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방에 약재가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이거 아무래도 내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이 약포는 자 네 부친이 경영하시는 건가?" 의외로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가부께서는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흑의경장인은 더욱 놀랐다. "그런가? 미안하네. 그렇다면 이 약포는 자네가……?" "미약하나마 제가 꾸려 가고 있습니다." 흑의경장인은 소년의 나이를 아무리 많게 보아도 열여덟을 넘은 것 같지 않자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대견스럽다는 표정을 지 었다. "허…… 그렇군. 그렇다면 조금 전의 약은 자네가 직접 만든 거로 군?" "아닙니다. 그건 저의 선부께서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원래 선부께서는 의학에 조예가 깊으셔서 몇 가지 비방으로 영약들을 만들어 놓으셨지요. 그러나 대협의 상세는 워낙 대단하기 때문에 며칠간은 움직이지 말고 요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 세가 다시 발동하여 위험하게 될 겁니다." 흑의경장인은 난처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건 곤란한데……" 그는 잠시 눈썹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소년은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조용히 앉은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흑의경장인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허허…… 자네는 나이답지 않게 몹시 침착하군. 이름이 무언가?" "저는 강옥봉이라고 합니다." "강옥봉…… 정말 좋은 이름이군. 나는 여풍운이라고 하네." 소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팔비도룡이란 외호를 가진 협객이시죠?" 여풍운은 깜짝 놀랐다. "아니, 자네가 어찌 나를 알고 있나?" 강옥봉은 미소를 멈추지 않으며 조금 전에 나타났던 세 사람에 대하 여 자세히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여풍운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침작대로 그자들은 나를 집요하게 뒤쫓고 있군."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이곳 태생인가?" 강옥봉은 그가 묻는 의도를 몰랐으나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곳 지리에 환하겠군. 미안한 말이지만 내게 한 가지 청 이 있는데, 들어주겠는가?" 강옥봉은 어리등절해 하다가 대꾸했다. "저의 능력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고맙네. 자네는 무공을 모르기 때문에 남들에게 의심을 받지는 않을 걸세." 여풍운은 주머니에서 한 개의 고전을 꺼냈다. "이걸 한곳으로 가서 어떤 사람에게 전해 주게." 그는 강옥봉에게 나직이 무어라 소곤거렸다.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아직도 사나운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강옥봉은 바람을 가르면서 쏜살같이 대동성으로 향해 달려갔 다. 대동성의 남문 근처에는 낡은 사찰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불광사! 불광사는 비록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지은 지가 오래되어 대동성에서 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저물어 가고 바람도 조금씩 잠잠해질 무렵,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소년이 불광사의 산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바로 강옥봉이었다. 그가 산문으로 발걸음을 옳길 때였다. "시주! 잠깐 걸음을 멈추시오." 산문 뒤에서 한 명의 노승이 나타나며 합장을 했다. "오늘밤에 본 사는 마귀를 쫓는 예식을 할 예정이오니 구경을 하시려면 내일 오십시오." 소년은 조금도 놀라지 않으며 나직하게 웃었다. "저는 마귀를 믿지 않으니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노승은 흠칫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시주는 무공을 지닌 강호의 인물이란 말씀이오?" 강옥봉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는 알습니다. 저는 일개 의원으로, 무공에 대해서는 전 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노승은 그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 다. "그럼 선당으로 가시오. 차를 한잔 대접하겠소." 강옥봉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허리를 굽혀 예를 취했다. "그런 수고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단지 마음이 내키는 대로 구경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일순 노승의 두 눈에서는 정광이 번뜩이고 스쳤다. 그러나 그는 태연스럽게 합장을 했다. "그럼 빈승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끝내자 노승은 물 찬 제비처럼 잽싸게 몸을 날려 떠났다. 강옥봉은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주위를 한바퀴 둘 러보고 나서 산문으로 들어섰다. 길 양쪽에서 파란 소나무와 잣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었고, 대웅전의 향불에서는 파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웅전 안에는 촛불을 환하게 밝혔으며, 중앙에 장육금불이 엄숙하게 앉 아 있었다. 강옥봉은 대웅전 안으로 들어갔다. 한데 안에는 승려들이 하나도 없었고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강옥봉은 포단 앞에 경건한 자세로 앉아서 예를 올렸다. 이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대여섯 명의 그림자가 대웅전 안으로 들어왔다. 강옥봉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맨 앞에 들어온 인물은 용모가 위맹스러운 매부리코의 노인으로 나이 는 오십 세 가량 되어 보였다. 그의 눈은 유난히 빛났으며, 턱 아래 불그스름한 수염이 텁수룩하게 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바싹 따르고 있는 자는 얼굴이 징그럽게 생긴 훌쭉 한 중년인이었다. 세 번째 인물도 역시 비쩍 마른 중년인이었는데, 바로 앞선 인물과 용모가 흡사한 것으로 보아 쌍등이 형제임이 분명 했다. 그들의 어깨에는 커다란 감배산도가 매여져 있었다. '음…… 저들은 여풍운을 뒤쫓아왔던 그자들이구나.' 강옥봉은 내심 움찔하여 급히 눈을 돌렸다. 네 번째는 남색 장삼을 입은 젊은이로서 단정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 다. 그러나 눈빛만은 매우 음침했다. 나이는 대략 이십오륙 세 가량으로, 입가에 한 가닥 냉혹한미소를 담고 오른팔에 한마리의 흰 원숭이를 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사람은 보는 사람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 만큼 절세의 미모를 지닌 소녀였다. 샛별처럼 반짝이는 영롱한 두 눈동자…… 앵두처럼 붉은 두 입술 안 에는 백옥 같은 치아가 반짝이고, 얼굴에는 함박꽃 같은 웃음을 담뿍 담고 있었다. 그들은 대웅전 안으로 들어와 강옥봉을 발견하고 일제히 그를 주시했 다. 하나 강옥봉은 태연한 안색으로 앉은 채 예를 올리고 있었다. 원숭이를 안고 있는 젊은이가 주머니 속에서 잣 한 알을 꺼내 강옥봉 의 뒤통수를 향해 던졌다. 쐐액! 잣알은 마치 한 가닥 뇌전처럼 강옥봉의 머리를 향해 쏘아져 갔다. 순간, 소녀가 채찍을 날렸다. 팍! 가벼운 음향과 함께 채찍은 살아 있는 뱀처럼 번개같이 날아가는 잣 알을 땅에 떨어뜨렸다. 이어 소녀는 가냘픈 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서릿발처럼 차가운 어 조로 쏘아붙였다. "저 사람은 무공을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왜 함부로 해치려 하나 요?" 젊은이는 준수한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며 더듬거렸다. "나, 나는 단지 그를 당분간 잠들게 할 생각이었소." 소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젊은이의 두 눈에 질투의 빛이 번뜩였다. "이곳은 여가 놈이 임표와 만나기로 한 장소인데 저놈이 불쑥 찾아왔으니 어찌 의심이 생기지 않겠소? 틀림없이 모종의 목적을 품 고 이곳에 온 게 분명하오." 말이 끝나기도 전, 쓰윽! 그는 신형을 날려 다섯 손가락으로 잽싸게 강옥봉의 어깨를 향해 뻗 어갔다. 강옥봉은 피하려 했으나 상대의 손이 너무도 빨라 그대로 어깨를 붙 잡히고 말았다. "으윽!" 순간 그는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 바람에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떨어지며 고통에 가득 찬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구슬 같은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미 어깨뼈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는 이빨을 부드득 갈아붙이고 젊은이를 노려보며 성난 음성으로 외 쳤다. "나하고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런 짓을……" 순간 소녀는 경멸하는 시선으로 젊은이를 쏘아보더니 즉시 강옥봉의 어깨를 향해 옥수를 내밀었다. 우득! 뼈가 맞춰지는 음향과 함께 그의 탈골되었던 어깨뼈가 다시 복 원되었다. 젊은이는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역시 매 소저의 안목은 정확하군요. 내가 공연 한 의심을 했소." 소녀가 그를 쏘아보며 무어라 말하려 할 때, "노부가 일으켜 주지." 매부리코의 노인이 앞으로 나와 강옥봉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매부리코의 노인이 부 축하는 척하며 재빠른 손으로 강옥봉의 전신을 뒤지고 있었기 때문이 다 하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번개같이 신속한 손으로 강옥봉의 전신을 뒤진 후 씁쓸한 미 소를 지었다. "노부가 아무래도 신경 과민인 모양이군." 소녀는 매부리코의 노인이 의심 많은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라 그의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때 강옥봉의 어깨배는 복원되었으나 퉁퉁 부어 올라 있었고, 그의 안색 또한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소녀는 그의 수려한 용모를 다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마치 봄날의 훈풍 같은 따사로운 말씨로 속삭였다. "조금 전에 저의 동료가 무례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대신 사과하겠 어요." 바로 그때였다. "신성한 불전에서 닭 잡을 힘도 없는 소년을 상하게 하다니… … 무림인들이 이 사실을 알면 당신들은 모두 강호의 웃음거리가 될 거요." 어디선가 냉랭한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의 안색이 홱 변했다 매부리코 노인의 뒤에 서 있던 쌍둥이 중년인들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대웅전의 우측 출입구를 향해 덮쳐 갔다. 파파파……! 그 순간 어디선가 경풍이 불어와 장내의 촛불을 모두 꺼버렸다.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질 찰나, "임표…… 도망치지 못한다!" 매부리코 노인과 중인들이 일제히 쌍둥이 중년인들이 덮쳐 간 곳을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아…… 그쪽 벽면이 송두리째 박살나며 그들의 몸은 비호처럼 어둠 속으로 쏘아 가고 있었다. 강옥봉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반대쪽 어둠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불쑥 나타나 강옥봉을 옆구 리에 끼고 대웅전 뒤쪽에 있는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몸이 막 사라진 직후, 스읏! 부서진 대웅전 벽에서 다시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그 인영은 바 로 조금 전 매부리코 노인과 함께 날아갔던 소녀였다. 소녀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강옥봉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사이에 사라지다니…… 과연 내가 그 소년을 잘못 본 걸까7" 소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무언가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땅을 차고 날아갔다. 대웅전 뒤쪽의 주방에는 나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나무 더미의 오른쪽에 은밀한 비밀문이 있었다. 인영은 그 비밀문으로 급히 들어가 강옥봉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들은 모두 흥신악귀 같은 자들이라 일반인이라도 함부 로놓아 주지 않네. 이곳에 좀더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 가게……" 강옥봉은 눈을 뜨고 인영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인물은 오른쪽 이마에 길다란 검상이 나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의 등뒤에는 붉은 수실 이 달린 금빛 찬란한 창이 삐쭉 내밀어쪄 있었다. 강옥봉은 중년인의 얼굴에 있는 검상과 등뒤에 매여진 금창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귀하는 혹시 임 대협이 아니십니가7" 중년인의 안광이 예리하게 빛났다. "자네는 혹시 나를 찾아온 건가?"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헤쳤다. 중년인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머리카락 속에서 하나의 고전을 꺼내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아! 그걸 그곳에 숨기고 있었군. 그래서 조팔 전 사 노괴 가 자네의 품을 뒤졌을 때도 발각되지 않은 게로군." 강옥봉은 고전을 내밀었다. "자네는 여풍운의 부탁을 받고 온 건가?" "예, 여 대협께서는 지긍 은밀한 곳에서 일 대협을 기다리고 계십니 나. 어서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들은 급히 비밀문을 벗어나 불광사를 빠져 나왔다. 휘이이잉…… 주위에는 여전히 광풍이 몰아치고, 흙먼지가 황야를 온통 뒤덮고 있 었다. 제2장 천애무아도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두 사람은 이경 무렵이 되어서야 대동성 밖에 있는 움막에 당도했다. 여풍운은 누워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임표가 강옥봉과 함께 나 타난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대형!" 임표는 반갑게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둘째, 살아 있었군. 이틀이 지나도 약속 장소에 자네가 나타나지 않 아 변을 당한 줄로만 알았네." 여풍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마터면 그령게 될 뻔했습니다. 강 소제가 아니었으면, 소제는 사 천홍의 금인마장을 두 대나 맞아 영영 형님을 못 뵐 뻔했습 니다." 임표의 얼굴에 걱정스런 기색이 가득했다. "그 사천홍의 금인마장은 악독하기로 유명한 장공인데 두 대나 맞았다면 내장이 모두 상했을 텐데……" "하하…… 다행히 강 소제의 약으로 위급한 처지는 면한 것 같습 니다. 그보다 대형께선 그 사 노괴를 보셨습니까?" 임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 노괴뿐만 아니긴 장백쌍웅과 비원서생 영호 초, 그리고 능파옥녀 매영령도 왔더군." 여풍운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그랬군요. 전 사 노괴와 장백쌍웅만이 제 뒤를 따라온 줄 알았는 데 ……" "아마 도중에 영호초와 매영령이 그들과 만난 모양일세." 여풍운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영호초는 눈치도 빠르지만 심보가 악독하기 그지없어 강 소제를 보 았으면 그냥 두려고 하지 않았을 텐데……" "다행히 강 소제가 무공을 몰랐기 때문에 수법이 악랄한 영호초도 해 치지는 않았네. 하지만 지금쯤은 그들도 강 소제가 갑자기 사라진 것 을 알고 찾고 있을지도 모르지." 여풍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네. 괜히 우리 때문에…… 자칫하면 자네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되겠군." 강옥봉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빙긋 웃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몹시 외진 데다 움막이 모두 비슷비슷해 서 그들에게 쉽사리 발각되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 그들이 어째서 여 대협을 쫓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여풍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그건 다름 아닌 유령고전 때문일세." "유령고전이라고요?" 강옥봉이 금시초문인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렇네 강소제는 무림인이 아니라서 잘 모를 테지만 유령고전은 천 하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령동부가 있는 장소가 그려진 물건이라네. 그래서 많은 무림인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서 혈안이 되 어 있지." 여풍운은 강옥봉이 무림에 대한 견문이 전혀 없는 것을 알고 자세히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강호에는 유령동부에 대한 소문이 전설처럼 떠돌고 있었다.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 다. 심지어 유령동부가 어느 곳에 있는지, 과연 진짜로 존재하는지조차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 많은 무림인들은 유령동부는 전대의 기인의 거처 로,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무공비급들이 비장 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더구나 그 중에는 우내칠대무학 중의 하나인 유령보가 적혀 있다는 소문이 떠돌자 무림은 그야말로 광풍 노도처럼 흔들리기 시작 했다. 유령보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신법으로, 한번 익히면 도산검림 속을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마음대 로 헤집고 다닐 수 있다는 신화적인 무공이었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유령동부를 찾기 위해 천하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중, 여풍운은 우연히 기련산을 걷다가 어느 이름 모 를 고동에서 한 구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니, 그것은 시신이 아니라 하나의 백골이었다. 여풍운은 고동에서 쓸쓸히 죽어 갔을 백골의 주인을 가엽게 여겨 그를 묻어 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백골의 품안에서 하나의 오래된 고전을 발견한 것이다. 그 고전의 앞에는 고색 창연한 전서체로 <유령고전 >이라 쓰여 있었고, 뒤에는 기이한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호기심을 느끼고 그 도형을 살피던 여풍운은 그것이 전설로만 알려진 유령동부를 가리키는 지도임을 알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절친한 의형제인 금창수 임표와 일 양검 막철룡에게 서신을 띄워 함께 유령동부를 찾자 고 제안한 것이다. 금창수 임표와 팔비도룡 여풍운, 그리고 일양검 막철룡은 우의가 돈 독하고 무공이 고강해 중주삼웅이라 불리고 있었다. 한데 마침 막철룡은 다른 일 때문에 집을 비워 연락이 미처 안 되었 고, 임표와만 소식이 닿아 불광사에서 만나기로 한 것리다. 그런데 여풍운이 불광사로 가는 도중 어떻게 알았는지 몇 명의 무서 운 인물들이 고전을 노리고 집요하게 그를 뒤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고절하기 이를 데 없고 추적이 끈질겨 서 여풍운은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와서 쓰러지고 말았 다. 때마침 강옥봉이 그를 발견하고 구원해 준 것이다. 묵묵히 여풍운의 말을 듣고 있던 강옥봉은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 다. "여 대협께서는 유령고전을 발견한 사실을 누구누구에게 알리셨습니 까?" 여풍운은 그가 묻는 의도를 몰랐으나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내 의형제인 임 대형과 막 삼제뿐일세. 그런데 삼제는 연락이 제대로 안 되었으니 그가 알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 겠군." 강옥봉은 이번에는 임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임 대협께선……" 임표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나도 다른사람에게는 절대로 발설하지 않았네. 이번 일은 너무도 막 중하여 만에 하나 남들에게 누설된다면 살신지화를 면치 못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대체 사천흥과 다른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여 대협을 쫓아 왔을까요?" 그제서야 여풍운은 강옥봉이 묻는 질문의 뜻을 알고 안색이 홱 변했 다. "자네의 말은…… 막철룡이 그들을 사주했다는 뜻인가?" 강옥봉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여 대협께서 유령고전을 얻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중주삼웅뿐 입니다. 그런데 두 분이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으셨다면 이론적으로 생각해서 막철룡이란 분에게서 누설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 겠습니까?" 항상 냉정하던 임표의 얼굴도 무겁게 굳어졌다. "일리 있는 말이군." 여풍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막 삼제는 입이 무겁고 행동이 신중해서 절대로 우리를 배반 하거나 신의를 어길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어쩌면 그는 제 연락을 미처 받지 못해서 이런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지 도 모릅니다" "음……" 평소 막철룡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임표는 침중한 신음 을 토했다. 그때 강옥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 일부러 발설하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우연히 다른 누구에게 말했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그분이 실종된 것일 수도 있고……" 그의 말은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다행히 여풍운과 임표는 모두 지 략이 뛰어난 사람들이라 단번에 그의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여풍운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 셋째가 평소 친한 사람에게 무심코 말했다가 그자에게 암습 을 당하거나 사로잡히고, 그자가 고전을 노리는 것일 수도 있 겠군." 임표는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뒤를 쫓고 있는 자들 중에서 셋째와 교분이 있 던 자는 한 사람도 없네." "그건 이령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막 대협의 그 친구라는 자가 뒤에서 그들을 사주했을 수도……" "음…… 자신은 뒤에서 조종만 하고 부하들에게 시켰다는 건가? 그럴 듯하군." 여풍운은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심 각하게 변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일단은 셋째의 집으로 가서 보다 확실한 내막을 조사해야겠습니다." 강옥봉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두 분이 먼저 그 유령동부라는 곳을 찾 아가시는 것이……" "그건 또 왜 그런가?" "만일 막 대협께서 불의의 변을 당하셨다면 그분을 암습한 자는 필시 그분의 거처에 숨어서 두 분이 나타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두 분께선 일단 동부를 찾으신 후에 그분이 사라진 내막을 조사하시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그의 조리있는 말에 두 사람은 수긍하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두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여풍운이 강옥봉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내가 처음 보는 총명절세한 인물일세. 더구나 자 네의 근골을 보니 무학을 익히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 합한 것 같네 어떤가, 이번 기회에 무학을 배워 보지 않겠나?" 강옥봉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올랐다. "저도 진작부터 그러고 싶었지만 어려서 모친을 잃고 다만 부친과 의 지하고 지냈었기 때문에 차마 혼자 떠나서 무공을 배을 수도 없었습 니다. 이제는 부친께서도 돌아가시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니 두 분께서 가르쳐만 주신다면……" 여풍운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우리가 비록 무림의 일류고수라고 하지만 자네같이 근골이 훌륭한 제자를 거둘 실력은 되지 못하네." 그는 돌연 주머니에서 둘둘 말린 족자를 꺼냈다. "이건 내가 기련산의 고동에서 유령고전과 함께 발견한 족자일세. 보 기에는 절세의 무학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내 재질이 미천해서인 지 그동안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저히 그 뜻을 파악할 수 없었네. 자 네의 재지가 뛰어나니 혹시 이 안에서 심오한 무학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강옥봉은 크게 기뻐하며 족자를 공손하게 받았다. 임표가 웃으며 다가왔다. "유령고전을 지닌 임자가 가지고 있었다면 보통 물건이 아닐 텐데 어 디 한번 구경이나 해보세." 강옥봉은 서슴없이 족자를 펼쳐 보였다. 족자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너덜너덜하고 금시라도 바스러질 듯했 다. 족자의 제일 위에는 '천애무아도'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 고, 그 아래 한 폭의 그림과 시구가 적혀 있었다. 세 사람은 정신없이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매우 알쏭달쏭했다. 정자와 누각, 화초, 나무, 인물, 산수, 구름, 폭 포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나 한 폭의 화면을 연결시키기에는 어딘 지 미흡했다. 다시 말해서 동쪽에는 누각, 서쪽에는 폭포, 이렇게 서 로 엇갈리고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어서 난잡하기조차 했다. 강옥봉과 임표는 뚫어져라 바라보았으나 도무지 어떤 그림인지 알 수 가 없었다. 여풍운 또한 그 동안 지겹도록 보아 온 그림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 펴보았으나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보면 볼수록 아리송하여 짜 증이 났던 것이다. 임표는 눈살을 꺼푸렸다. "이건 정말 모르겠군. 여기에 무슨 무학의 이치가 숨겨져 있다 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데……?" 그림 아래에는 팔 행, 십육 구의 시구가 적혀 있었다. <천동풍착력, 계가소화 천소경, 양청섭 정음운롱일, 난심야마 경양염초, 세관추사 소리모, 단탄차 휘풍별원, 명월수가 옥편효처, 우축향차 춘심부정, 비몽천애 동풍의 힘을 빌려 아름다움을 붙잡고, 작은 길을 지나가니 뿌연 먼지가 일도다. 날이 흐리니 구름이 해를 가려 먼지를 찾아보기 어렵고, 가벼운 바람이 풀을 요동시키니 루수한 뱀의 행렬 같도다. 듬성듬성한 울타리에 낮은 담이 둘러 있고, 미풍이 불어오는 별원이 있으니 밝은 달빛 아래 누구의 집인가? 채찍을 휘두르며 다시 향차를 몬다. 춘심을 정하지 못했으니 꿈은 하늘 가에 머물도다.> 강옥봉과 임표는 이 글을 읽고는 아예 멍청해졌다. 특히 강옥봉은 남달리 학문에 열중하여 웬만한 고서는 안 읽은 것이 없어 남달리 글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는데도 시구의 뜻을 제대 로 헤아릴 수 없었다. 엄격히 말한다면 이 시는 썩 훌륭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글자 수도 어떤 행은 아홉 자, 어떤 행은 여섯 자 등으로 천차만별이고 그리 운 치가 있지 못했다. 임표는 한참 동안 그림과 글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아니라 천하제일지자라는 치수재 악궁이라도 여기서 무슨 뜻을 발견하지 못할 걸세. 그런데 자 네는 어떻게 여기에 심오한 무학이 숨어 있다고 단정하나?" 여풍운도 씁쓸하게 웃었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 단지 이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림이라면 그 백골의 임자가 그리도 소중하게 간직할 리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단지 그뿐인가?" 여풍운은 고개를 저으며 족자를 가리켰다. "형님께서는 저 족자의 제일 위에 쓰여진 글자를 보십시오." 임표는 고개를 돌려 족자 위에 씌여진 '천애무아도'라는 글씨를 바라 았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색이 홱 변했다. "그럼 자네는 이 그림이 우내칠대무학 중의 천애도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어찌나 놀랐는지 그의 음성은 주위를 울릴 만큼 쩌렁했다. 여풍운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여느 평범한 그림이 아니고, 무 슨 장보도나 이름 높은 명화도 아닌 다음에야 그럴 가 능성이 충분히 있지요." 임표는 낮게 침음했다. "음…… 천애도라……" 강옥봉은 조금 전에 여풍운에게서 우내칠대무학에 대한 이야기를 얼 른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이 그림 속예 그 칠대무학 중의 한 가지가 숨어 있다는 말을 듣자 커다란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천애도라면 조금 전에 여 대협이 말씀하신 그 신화적인 도법 이 아닙니까7" "그렇다네. 무림 사상 공전절후한 도법이지. 하나 지난 이 백 년 동안 아직 아무도 익힌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누구도 어느 정 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네." 강옥봉은 새삼스런 눈으로 다시 한 번 천애무아도를 응시했다. 하나 역시 아무런 것도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여풍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만일 이 그림이 우내칠대무학 중의 천애도를 나타낸 거라면 절대로 쉽사리 그 뜻을 파악할 수 없을 걸세. 원래 절학일수록 난해하 고 익히기가 어려운 법이거든." 강옥봉은 자신의 내심이 발각된 것 같아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임표가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하하…… 자네는 얼굴에 복이 많은 상일세. 그러니 인연이 닿는다면 절학을 얻을 수도 있지 하지만 탄탄한 내공의 뒷받침 이 없고서는 아무리 뛰어난 절학을 익혀도 제대로 그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법일세. 그러니 내가 간단한 운기토납법을 가 르쳐 주지." 강옥봉은 크게 기뻐하며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임 대협!" "그럴 필요까지는 없네. 이건 내공의 기초가 되는 운기법에 불과하니 까. 하지만 쉬지 않고 노력한다면 무학을 익히기에 적합한 튼튼한 기 초를 이룰 수 있을 걸세." 이어 그는 내공심법의 기초가 되는 운기토납법을 구술 해 주었다. 강옥봉은 원래 총명이 과인하고 배우는 것을 밥 먹기보다 좋아하는지라 금세 그것을 익힐 수가 있었다. 임표는 그의 재질이 예상보다 더욱 탁월한 것을 알고 내친김에 무학 의 전반적인 이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여풍운 또한 자 신의 독보적인 암기술과 당금 강호의 정세에 대해 설명해 주 었다. 원래 무림인들이란무공에 대한 욕심이 많고 자신의 무공에 대 해서 자부심이 대단한 법이다. 그런데 임표와 여풍운은 자신들의 절 학을 기꺼이 전해 줄 뿐 아니라 어쩌면 천하제일의 무학이 담겨 있을 지도 모를 족자까지 선뜻 강옥봉에게 전해 주었으니 실로 쉽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강옥봉도 이를 알고 크게 감격했다. 여풍운은 칠 일 동안 자신의 상세를 치료했다. 상세가 거의 완꽤되자 여풍운과 임표는 강옥봉에게 작별을 고했다. "아마 지금쯤은 우리가 유령고전을 얻었다는 소문이 천하무림에 퍼졌 을 걸세.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동부를 찾아야겠네." 강옥봉은 매우 섭섭했다. "일이란 급히 서둘다가는 도리어 그르치는 법입니다. 여 대협께선 모 쪼록 신중하게 행동하시기 바랄니다. 더구나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 으니 조심하십시오." "알았네. 어쨌든 우리가 비록 유령고전을 입수했지만 유령동부를 찾 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알을 걸세. 찾는다 해도 그 안에 어떤 금제 가 있을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자네에게 많은 폐를 끼쳤네." 여풍운은 잠시 무언가 임표와 소곤거리다가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우리는 지금부터 강호에 나가서 유령동부 에 대한 일을 조사해 보려 하네. 그러니 석 달 후에 낙양의 금 화루에서 만나세. 그래서 함께 동부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네." 강옥봉은 서슴없이 승낙을 했다. 여풍운과 임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강옥봉은 움막 밖까지 나와서 작별 인사를 했다. 휘이잉…… 주위는 풍사가 더욱 거세게 몰아쳤고,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엘 듯 했다. 강옥봉은 그들 두 사람과 겨우 칠 일 동안을 같이 지냈을 뿐인데 막상 헤어지고 보니 어쩐지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바람이 가득한 하늘만 바라보다가 쓸쓸히 돌아섰 다. * * * 눈.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대지는 온통 은빛 세계였다. 산이고 들이고 하얗기만 한 백설 의 둥지였다. 메마른 나무에는 겨울의 꽃이 피었고, 황야에 쌓인 눈은 바람마저 잠 재우는 듯했다. 강옥봉은 허름한 움막의 방안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 동안 그는 날마다 매일 첫새벽에 일어나 혼자 으슥한 곳으로 가서 임표가 가르쳐 준 운기토납법을 열심히 연마했다. 또한 여풍운의 암 기법도 능숙하리만큼 숙달시키고 있었다. 하나 지금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바로 여풍운이 그에게 준 천애무아도 때문이었다. 그는 종이가 뚫어질 정도로 유심히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는 틈만 나면 이 그림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국은 실망뿐이었다. 두 달이 물같이 흐르는 동안 그는 이 천애무아도의 비밀을 조금도 알아 내지 못핼던 것이다. 그의 절세적인 재지를 생각할 때 이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강옥봉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었 다. 그는 한동안 그림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면 볼수 록 아리송하고 짜증이 났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 다. 이미 날은 어두워 그는 등잔에 불을 밝혔다. 잠시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그는 갖가지 생각에 잠겼다. '이 그림에는 분명 아무런 비밀도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 대협이 말한 천애도의 그림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면…… 내 안목이 짧아 미처 비밀을 알아 내지 못한 걸까?' 그는 답답한 싱사를 가눌 길이 얼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그는 이 천애무아도의 비밀을 푸는 것을 포기해 버릴까 하 는 생각을 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크게 도리질을 했다. '아니다! 여 대협이 말한 대로 이것이 만약 천애도를 가리키는 그림 이라면 그와 같은 절학을 어찌 쉽사리 얻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마음 을 가라앉히고 노력한다면 무언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그는 각오를 새롭게 해서 다시 천애무아도 앞에 앉았다. 그런 다음 운기토납을 하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몇 차례 운기를 하자 이마에서 땀이 나며 전신이 개운해졌다. 그는 어려서 여러 가지 약물을 복용한 덕에 다른 사람보다도 체력이 월등히 좋았고, 특히 내공을 익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신이 물처럼 고요해지자 강옥봉은 다시 한 번 그림과 시구를 살펴 보았다. 그림을 들여다본 지 한 시진쯤 되었을까? 문득 그의 눈이 번뜩였다. 처음으로 그림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 견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그림 전체와 시구 전체를 비교하곤 했었다. 한데, 지금 우선 시의 첫 구절에 신경을 집중시켜 그림과 연관시키자 약간의 암시를 찾아 낼 수가 있었다. 그는 시의 첫 구절과 부합되는 도안을 그림에서 찾아 낸 것이다. <천동풍착력, 계가소화 천소경, 양청섭 동풍의 힘을 빌려 아름다움을 붙잡고, 작은 길을 지나가니 뿌연 먼지가 일도다.> 첫 번째 시구는 이것이었다. 그것에 부합되는 도안은 그림의 오른쪽 구석에 있었다. 한 줄기의 반 원형으로 구부러진 길가에 양쪽으로 수양버들이 몇 그루 심어져 있는 장면이었다. 나뭇가지는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으며, 버들잎은 햇빛을 받아서 뿌연 먼지가 일듯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또한 버들잎은 바람에 휘날리다 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여름이 지나갔다는 의미와 세월을 붙 집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더 이상 깊은 해석을 할 수는 없었으나 아무튼 그림의 이 부분 은 시의 첫 구절과 매우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다시 둘째 구절을 읽어 보고 한참 동안 그림을 주시한 끝에 역 시 그림에서 일단의 도안을 찾아 냈다. <정음운롱일, 난심야마 경양염초, 세관추사…… 날이 흐리니 구름이 해를 가려 먼지를 찾아보기 어렵고, 가벼운 바람이 풀을 요동시키니 무수한 뱀의 행렬 같도다……> 그 장면은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 있었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붉은 해를 가리고 있었다. 붉은 햇살 밑에는 어렴풋한 한 겹의 안개가 서려 있었고, 아래에는 야초가 가볍 게 불어오는 바람결을 따라 마치 뱀이 기어가듯 움직이고 있었다. 초원과 밭 등은 역시 희뿌연 안개예 쉽싸여 있었다. 세 번째 구절은 중앙 아래쪽의 낮은 울타리가 쳐진 아담한 누각의 그 림과 일치했고, 네 번째의 구절은 오른쪽 하단에 옅은 구름 아래로 채찍을 휘두르며 어디론가로 정처없이 떠나는 마차의 그림과 맞아떨 어졌다. 결국 각 시구는 한 폭의 그림 속에 한 분씩 도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강옥봉은 두 달이 지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림 속에 담겨진 오묘함 을 찾아 내었던 것이다. 비록 그 그림과 시구가 의미하는 뜻을 완전 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발견 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그토록 갑작스럽게 그림의 비밀을 풀 수 있었 을까? 이것은 그가 마음을 비웠기 때문이었다. 그림의 이름이 '천애무아도'인 것과 같이 이 그림은 오직 자신을 잊 고 명경지수의 상태에 있어야만이 비로소 그 뜻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지금까지 강옥봉은 하루빨리 그림의 비밀을 풀 욕심으로 너무 조급하고 들뜬 마음에서 그림을 바라보았었다. 그러다가 지금에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급함을 버리자 자신도 모르게 무아의 경지에 이 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말에도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쨌든 실마리를 발견한 강옥봉은 더욱 그림을 앞에 두고 연구에 골 몰했다. 그는 반복해 가며 시의 첫 구절과 그 한 폭의 그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윽고 다시 한 시진이 흘렀을 때, 드디어 정신이 통일되어 커다란 깨달음을 느꼈다. 그림을 보고 또 보는 사이에 그는 저도 모르게 화면의 도식대 로 몸을 움직였다. 그는 오른팔을 불쑥 내밀어 갑자기 반원을 그려 마치 반원형으로 구 부러진 작은 길과 같은 모양을 취했다. 순간, 쐐액! 등불이 번쩍이는 가운데 매서운 기운이 노도처럼 일어나는 것이 아닌 가? 강옥봉은 쉬지 않고 두 번째 도형대로 밑에서 위쪽으로 비스듬히 뚫 고 나가 마치 작은 길을 끊어 버리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어 손바닥을 비스듬히 옆으로 하여 버들잎이 햇빛을 받아서 하얗게 반사되는 것처럼 등불에 비추었다. 무아의 경지에 빠진 채 그는 연거푸 시구와 그림에 따라 손을 휘둘러 댔다. 휘두를수록 그는 점점 더 그 안의 오묘한 조화를 깨달을 수 있 었다. 그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빨라져서 종내에는 손 그림짙만이 온통 장내를 뒤덮게 되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총명하고 자질이 뛰어났으므로 하나를 알게 되면 백 을 깨달을 수 있는 일대의 기재였다. 그리하여 수백 번 거듭해 손을 휘두르는 동안에 그는 시의 구절을 그림에 배합시켜 전부 깨우 치고 말았다. 이윽고, "휴우……" 강옥봉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손을 멈추었다. 그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목욕을 한 상태였다. 하나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절묘한 초식이구나……" 그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다 문득 창문 틈으로 밝은 빛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 어느새 아침이 되었구나. 내가 하룻밤을 꼬박 새웠단 말인가?" 그는 거듭 신기함을 느끼고 탄성을 연발했다. 하나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하루가 아니라 꼬박 삼 일 동안을 그림 속의 초식을 연마하며 지새웠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보고 있는 태양은 다음날이 아니라 삼 일이 지난 후의 일출이었던 것이 다. 이를 알 길 없는 강옥봉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초식을 연마하며 하룻 밤을 새운 것을 몹시 기이하게 생각했다. 하나 알고 보면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익힌 천애무아도야말로 여풍운의 짐작대로 우내칠대무학 중의 하나인 천애도를 숨겨 놓은 절세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천애 무아도의 비밀은 너무도 심오하여 지난 세월 동안 무림에서는 아무도 이 비밀을 풀고 천애도를 익힌 사람이 없었다. 천애도는 그야말로 고금무적이라 할 만큼 절세무쌍 한 도법이었다. 그 초식은 시구에 따라 모두 여덟 개로 나뉘었다. 천애팔도! 일초, 천풍소화! 이초, 천경양섭! 삼초, 운롱야마! 사초, 양초관사! 오초, 소리탄차! 육초, 휘풍명월! 칠초, 편효축차! 팔초, 비몽천애! 이들 여덟 초식은 각각으로 펼칠 수도 있고, 연환으로 펼칠 수 도 있었다. 연환으로 펼치면 그 위력이 점점 강대해져서 종내에는 태 산이라도 가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나타낸다. 강옥봉은 침식을 잊고 주야로 천애도를 익히는 데 전심 전력을 기울였다. 하나 천애도는 그 막강한 위력만큼이나 심한 내력을 필요로 하 는 것이어서 아직 내공이 미약한 그는 천애도 본연의 경천동지 할 위력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초식의 변화를 익히는 데 더욱 주력했다. 순식간에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강옥봉은 여풍운과 임표를 낙양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이제 약 십여 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고 길을 떠날 차비를 했다. 이곳 대동에서 낙양까지는 꼬박 십 일이 걸리는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태어난 이후 한 번도 대동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집을 떠나게 되자 몹시 마음이 설레이면서도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이번에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조차 없지 않은가? 그는 근처의 친한 사람에게 자신의 약포를 부탁하고 재산이 될 만한 것은 전부 처분하여 은자로 바꾸었다. 그런 다음 가벼운 행랑을 꾸려 길을 떠났다. 그가 길을 떠나는 날에도 마침 눈이 내렸다. 하얗게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그는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다. 가슴 가득 커다란 포부와 일말 의 설레임을 안고…… 과연, 강옥봉의 앞날에는 어떠한 일이 펼쳐져 있는 것일까? 제3장 주루풍운 대. 대는 산서성 북부 호타강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불문의 사대영산 중 하나인 오대산에서 남 동쪽으로 약 백 리 지점에 있으며 전국시대 이래 조나라의 영토 였다. 휘이이잉…… 눈보라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세모가 지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되어서인지 날씨는 더욱 매 서웠다. 눈보라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앞도 제대로 볼수 없을 만큼 심 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대성 밖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객점이 있었다. 평안객잔. 저녁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질 무렵. 휘몰아치는 눈브라글 뚫고 평안객잔으로 들어서고 있는 한 인영이 있 었다. 머리에 커다란풍모를 눌러쓰고 등에 행낭을 맨 훤칠한 소년이 었다. 그는 객잔의 입구에서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탁탁 털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점소이가 머리를 조아리며 그를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평안객잔에는 좋은 술과 따끈한 요리가 준비되 어 있으며 방도 따뜻하니 쉬어 가시기 좋습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점소이의 뒤를 따라갔다. 식당 안에는 하나의 커다란 유등이 켜 있었고, 네모진 탁자 다 섯 개가 놓여 있었다. 중앙에는 제법 커다란 화로가 있어 그곳 으로부터 후끈한 열기가 장내에 퍼지고 있었다. 장내에는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길고 하얀 머리칼에 이마와 광대뼈가 불쑥 튀어나온 오십쯤 되어 보 이는 노인이 벽 쪽에 놓여진 좌섞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날카로운 생김새와는 달리 안색이 좋고 눈빛이 매서우면서도 부드러운 기운을 풍겼다. 그 노인은 뜨거운 술과 양고기, 그리고 우족탕을 놓고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소년은 노인의 옆 탁자에 가서 모자를 벗어 눈을 턴 다음 자리에 앉 아 술과 안주를 주문해서 역시 혼자서 먹고 마셨다. 소년은 처음으로 집을 떠나 풍진 세계에 나온 강옥봉이었다. 강옥봉은 본시 어려서부터 술을 제법 하는지라 지금도 연거푸 몇 잔 의 술을 들이켰다. 술이 안으로 들어가자 뱃속에서 후끈한 열기가 피 어오르며 지금까지의 추위가 씻은듯이 사라졌다. 강옥봉은 느긋하니 술을 곁들여 음식을 들었다. 그때였다. 히히힝! 객점 밖에서 말의 사나운 울부짖음이 들렸다. 곧 이어 일남일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강옥봉은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눈초리를 빛냈다. 앞장선 여자는 홍피피풍을 걸친 미소녀였다. 눈썹은 반달처럼 생겼고, 몸매 또한 날씬하기 그지없어 보는 이로 하 여금 절로 탐스러운 마음이 들게 할 정도였다. 게다가 흑백이 분명한 두 눈동자에는 지혜로운 빛이 반짝이고 았어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뒤따라 들어온 남자 또한 준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녀보다 한두 살 어려 보였는데, 용모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남매간같이 보였다. 그들은 탁자에 앉더니 음식을 주문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녀는 구석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천 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강옥봉을 발건하자 그녀의 눈빛이 더욱 반짝거렸다. 강옥봉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었으나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붉어지며 고개가 더욱 수그러들었다. 그 순진한 모습에 소녀는 나직이 킥킥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벌겋게 상기되었던 강옥봉의 얼굴이 아주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 이때 돌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가씨가 왜 깝찍하군. 그는 낮가죽이 얇아 부끄럼을 타는데 어찌 자꾸만 눈짓을 보낸단 말인가? 저러다 보면 그 녀석은 술은커녕 음식 도 변변히 먹지 못하고 도망가고 말 텐데……" 말소리는 구석진 자리에서 들려 왔다. 바로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노인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객점이 조용했기 때문에 이 소리는 소녀의 귀에도 들어갔다. 얼른 보아도 슬기가 똑똑 떨어지는 그 소녀가 이 말이 누구를 향한 말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도대체 이 객잔에는 여자 손님이라곤 그녀 밖에 없으니 말이다. 소녀의 얼굴에는 즉시 분흥꽃이 피었다. 그녀의 부끄러움은 곧 분노 로 변했다. 그녀의 버들잎 같은 눈썹이 찡그려지며 앵두빛 입술이 굳 게 다물어졌다. 하나 그녀가 막 화를 내려 할 때 그녀의 동생인 듯한 소년이 입을 열 었다. "누님! 괜한 시비는 일으키지 않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그 소리에 소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노인을 매섭게 노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눈보라가 너무 극성을 부리니 여기서 잠깐 몸만 녹인 다음에 태원으로 떠나자." 그녀의 음성은 얼굴만큼이나 고와서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했다. 어느새 그려의 찌푸려졌던 눈살도 원상으로 펴졌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의 심신이 많은 수양을 쌓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쿵쿵! 이때 다시 층계를 밟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 다. 그는 구레나룻이 가득하고 양쪽 광대뼈가 툭 불거진 장한이었다. 장한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소년과 소녀를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 며 달려왔다. 그는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두 분은 혹시 곽 여협과 곽 소보주가 아니십 니까?" 두 사람은 의아한 듯 얼굴을 마주보다가 그 중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 다. "그래요. 내가 곽희연이고 이쪽이 내 동생인 곽조웅 이에요. 한데 귀하는 누구시죠?" "소인은 오대산 일월문의 문주이신 일월금륜 하극 광 대협의 명령으로 두 분께 한 가지 선물을 드리려고 왔으 니,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두 분이 이번에 태원을 다녀오신 후 오대 산을 찾아 주시면 문주님께서 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시답니다." 그는 품에서 하나의 옥합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소녀, 곽의연이 곱게 웃으며 기뻐했다 "내가 너무나 과분한 선물을 받나 보군요. 아무튼 우리가 태원에 가 서 다른 일만 없다면 오대산으로 일월문을 찾을 테니 그렇게 전하세 요." "알겠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그 사나이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소년, 곽조웅은 그가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빙그레 웃었다. "보아하니 일월문의 소문주인 하덕룡이 지금까지도 누님께 깊은 정을 두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러자 곽희연은 그 즉시 양볼에 홍조를 띠며 그를 나무랐다. "너 지금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느냐!" 곽조웅이 아무 말도 안 하자 곽희연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옥합을 바 라보았다. "이게 무엇일까?" 그녀는 옥합을 열려 했다. 바로 그때, 다시 나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노부가 일월금륜 하극광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사람이란 상대 방을 견제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 노부의 생각에는 그 옥합을 열 어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곽희연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 음성이 구석에 앉은 노인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곽희연은 날카로운 눈으로 노인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노인은 못 본 척 흔자서 술만 마시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으면 그렇게 째려보지만 말고 열면 될 게 아닌가?" 곽희연의 눈초리가 잔뜩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비록 꽃처럼 예뻤지만 자존심도 몹시 강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인의 자존심을 무시했다가는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법이다 그녀는 입을 삐쭉거리더니 서슴없이 옥합을 열었다. 갑자기 어두웠던 주루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옥합 안에는 용의 눈알만한 화룡주 한 알이 들어 있었다. 한 데 그 광채가 너무나 밝아 주루 안을 밝게 비추었고 따뜻한 기운마저 감돌아 마치 봄날이 온 것 같았다. 강옥봉은 호기심을 느껴 멍하니 옥합에서 뿜어 나오는 광채를 바라보 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난데없이 그 노인이 전하는 전음성이 강옥봉의 귀에 흘러들었다. "그 화룡주 속에 독이 있으니 너는 급히 호흡을 멈추어라." 아니나다를까? 곽희연의 안색이 변하며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앗? 큰일났다……" 그녀는 즉시 일어서려 했으나 어느새 중독되었는지 체내의 진기 가 역류되고 하반신에 힘이 빠져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곽조웅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옥합의 뚜껑을 닫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곽조웅 역시 곽희연과 같은 증세가 발작하여 몸을 떨다가 안 색이 변했다. 순간 밖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곽 소저, 그 동안 무고하셨소? 내가 찾아뵈려고 왔소이다." 동시에 일곱 사람이 나란히 들어왔다. 앞장선 소년은 얼굴이 준수하고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서려 있었 다. 하나 눈빛이 음탕하고 몸에는 진귀한 호피구를 잔뜩 걸 치고 있어서 태도가 방자해 보였다. 소년의 뒤에는 여섯 명의 장한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행동이 가 볍고 민첩한 것으로 보아 모두 내외공이 뛰어난 고수들임을 첫 눈에 알 수 있었다. 곽희연은 비록 제압당해 움직일 수 없었으나 정신만은 멀쩡하여 살기 를 뿜으면서 앞장서 들어온 소년을 응시챘다. "하덕룡! 왜 이런 비겁한 수법을 쓰는 거예요?" 하덕룡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곽 소저! 사람이 부처가 아닌 다음에야 애정을 지닐 줄 모르겠소? 나는 소저를 사랑하며 가슴을 태운 지가 오래요. 누차 청혼하 여 영존께서 거절하지 않으셨는데, 소저가 계속 거절하여……" 곽희연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듣자 하니 하 소문주는 평소 뭇여인들과의 정분이 두터워 염문 이 그치지 않는다던데 내가 어찌 응낙을 하겠어요?" 하덕룡은 잠시 무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 다. "나도 여색만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니 소저께서는 나의 굳은 마음을 이해하시오." 웃음 속에 칼이 숨겨져 있는 그의 말에는 음흥스럽고 악기가 서려 있었다. 이때 한쪽 구석에 있던 그 노인이 돌연 껄껄 웃었다. "허허…… 하극광이 저렇게 똑똑한 아들을 두었으니 가문이 크 게 빛나겠군." 그 말은 지독한 조소였다. 하덕룡은 득의 만면해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같은 객점에 있으면서도 저 늙은이는 중독되지 않 았을까?' 노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덕룡에게 접근했다. 순간, 쐐액! 하덕룡의 뒤에서 도광이 번쩍이며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늙은 놈아! 냉큼 비켜라!" 말보다 칼이 먼저 뽑혀 나왔는지 말이 끝났을 때 이미 칼은 노인의 목에 거의 닿아 있었다. 실로 쾌속하면서도 악랄한 손속이었다. 순간 노인은 번개같이 몸을 돌리면서 잽싸게 칼을 움켜잡았다. 뚝! 두꺼운 칼날이 반으로 잘라지고 칼을 잡고 있던 장한은 눈이 툭 튀어 나오면서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윽!" 그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쓰러졌다. 하덕룡은 노인의 가공할 무공에 대경 실색하여 노인을 바라보았다. "귀하는 뉘시오?" 노인은 히죽 웃었다. "노부의 성은 부씨지만 아직도 명성이 없어서, 명성이 천지를 진 동하는 하 소문주는 도저히 모를 걸세." 하덕룡은 노인의 독설에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뒤 로 한걸음 물러섰다. "부씨라고……? 그렇다면 귀하는 혹시 화북의 제일고수라는 복 마철장 부여송 대협이 아니십니까?" 그러자 노인은 껄껄 웃으며 말을 받았다. "노부같이 보잘것없는 존재를 알고 있다니, 하 소문주의 견문은 가히 강호제일이라 할 만하군." 하덕룡의 얼굴이 떫은 감을 씹은 듯 우거지상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복마철장 부여송은 하남성과 산서성 일대에서는 혁 혁한 명성을 떨치는 무서운 고수였기 때문이다. 그의 명성은 하덕룡 의 부친이자 일월문의 문주인 일월금륜 하극광에 못지않았으며, 개인 적인 무공은 오히려 하극광을 능가한다고까지 알려져 있었다. 하덕룡은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 부 대협께서는 평소 남의 일에 관여하시지 않는다고 하 던데, 오늘은 어찌 본 문의 일에 개입하려 하십니까?" 부여송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노부의 신조는 원래 남이 나를 침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침 범하지 않는다는 거지. 하지만 남녀간의 결합이란 절대 억지로 될 수 없는 법일세. 그러므로 노부도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군. 적어도 이 런 일을 보고 가만히 있는다면 어찌 무림에서 고수라고 행세할 수 있 겠나?" 그의 말은 준엄한 추궁에 가까웠다. 하덕룡의 얼굴이 순간척으로 조금 붉어졌다. 하나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는 비록 부여송이 상대 하기 매우 까다로운 인물임을 알고 있었지만 일월문의 명예를 생각해 서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부 대협의 무공이 놀람다는 소문을 듣고 한차례 가르 침을 받으려 했었습니다. 만일 제가 패한다면 즉각 이곳에서 철수하 겠으니 객점 밖으로 나가서 겨룹시다." 그의 음성은 어느새 거칠고 무례하게 변해 있었다. 부여송 또한 눈초리가 고을 리 없다. "좋아! 오늘은 오랜만에 호쾌한 싸움을 해보겠군 노파심으로 하는 소 리지만 만일 자네가 조호이산지계를 써서 노부를 따돌 리려 한다면 일월문은 쑥밭으로 변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하덕룡은 제법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 대협! 안심하십시오. 제가 만일 패한다면 생사가 모두 부 대협의 수중에 있을 거요.그러니 저의 일행들이 곽 소저를 납치하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염려 마시고 어서 손을 쓰시지요." 이어 부여송이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몸을 돌려 객점 밖으로 나갔다. 하나 노련한 부여송은 하덕룡이 나가면서 두 명의 수하에게 눈짓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비겁한 자식! 그 아비에 그 아들이군.' 그는 내심 욕을 했지만 상대가 먼저 나가 어서 덤비라는 식으로 버티 고 서 있는데 한없이 머뭇거릴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천천히 객점 밖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강옥봉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귀에 다시 부여송의 전음성이 들려 왔다. "이 녀석아! 객점 안의 일은 네가 처리해야 되겠다. 힘플겠지만 노부 가 다시 돌아을 때까지 다른 놈들이 못된 짓을 못 하게 막고만 있어 라." 말을 마치자 부여송은 밖으로 나가 하덕룽과 대치했다. 강옥봉은 내심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공의 진전이 빠른 사람도 있다지만 강옥봉이 무공을 익힌 기간은 이제 겨우 석 달도 채 되지 않았지 않은가? 더구나 아직 다른 사람들 과 한번도 대결해 본 일이 없어서 강옥봉은 절로 당황되는 마음을 어 쩔 수가 없었다. 하나 강옥봉은 곧 침착성을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하 덕룡과 함께 왔던 장한들 중 두 명이 슬금슬금 곽희연에게로 접근하 는 것을 본 것이다. "멈추시오!" 강옥봉은 한소리 외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무기가 없어서 대 신 눈길을 혜칠 때 사용하는 기다란 막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두 장한은 막 곽희연을 덮치려다 흠칫 놀랐다. "이 꼬마놈이……?" 그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강옥봉을 노려보다가 느닷없이 그에게 덮쳐 왔다. 그들은 강옥봉 따위는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 지 수비는 생각도 않고 무서운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강옥봉은 슬쩍 옆으로 몸을 피하며 들고 있던 막대를 반원형으로 휘 둘렀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펼쳐 보는 천애팔도 중의 천풍소화였다. 그 위력은 실로 신기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스읏! 매서운 파공음이 울리는 가운데, 빠악! 한 사나이의 머리가 정통으로 막대에 부딪혀 쪼개지며 피분수를 뿜어 냈다. "으악!" 그자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한 장한이 깜짝 놀라 뒤로 피하려는 순간, 스으으…… 강옥봉의 막대는 어느새 밑에서 위로 유성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천경양섭의 초식이었다. 피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었다. 빽! "크윽!" 장한은 막대에 강타당해 턱이 으스러진 채 피를 뿌리며 바닥에 나뒹 굴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곽씨 남매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두 장한은 모두 하덕룡의 심복들로서 일월문 내에서도 일류고수에 속 하는 인물들이었다. 한데 강옥봉의 엉성한 솜씨에 너무도 맥없이 쓰 러져 버린 것이 아닌가? 곽희연의 봉목에도 의아함과 놀라움이 교차되고 있었다. 강호에서 제법 많은 경험을 쌓은 그녀는 강옥봉의 초식이 서투른 듯 하면서도 아주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놀라는 가운데도 마음 한구석에선 기쁨이 샘솟고 있었다. 그때, "휙!"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부여송이 번개같이 날아들었다. 부여송은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바닥에 두 명의 장한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껄껄 웃었다. "허하…… 이 녀석, 보통이 아니군!" 강옥봉은 그의 왼팔에서 검은 피가 뿜어 나오는 것을보고 크게 놀랐 다. "노선배님, 왼팔이……" 부여송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이 녀석아, 어서 이 팔을 칼로 끊어 버려라. 노부가 조심하지 않다 가 하덕룡, 그놈의 칠독황봉침에 맞았다. 급히 잘라 버 리지 않으면 독성이 내부까지 침투하여 생명이 위험하다." 그 말에 곽희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칠독황봉침은 악독하기로 유명한 것으로, 그 위력이 너무도 악랄하여 무림에서는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일곱 가지의 금용암기 중 하나로 지정해 놓았다. 이것에 격중되면 미처 해독할 사이 도 없이 전신이 한줌의 핏물로 변해 버리고 마는 실로 무시무시한 암 기인 것이다. 강옥봉은 급히 품에서 작은 소도를 꺼냈다. 소도의 칼날은 제법 예리해서 서슬 퍼런 광채가 번뜩거렸다. 그러나 부여송은 어이없다는 듯 크게 외쳤다. "그따위 것을 가지고 무얼 어쩐단 말이냐?" 강옥봉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부여송의 팔을 움켜잡았다. 부여송은 팔을 꿈틀거리다가 강옥봉의 힘이 대단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 이 녀석은 생긴 건 곱상한데 팔 힘은 대단하군! 그런데 저걸로 무얼 하려는 게지?' 강옥봉은 서슴없이 상처 부분의 옷을 베어 버렸다. 과연 부여송의 팔 은 빨갛게 부어 올랐고, 독침이 박힌 상처에서는 시커먼 독혈 이 흐르고 있었다. 강옥봉은 눈빛을 반짝거렸다. "노선배님, 이 팔은 충분히 치료할 수 있으니 조금도 염려 마십시 오!" 그는 상처를 칼로 찢고 독침을 뽑았다. 누런 빛이 번쩍거리는 손바닥 길이의 독침이었다. 이것이 바로 악독하기로 유명한 칠독황봉침이었 다. 이어 주머니에서 검은색 약을 꺼내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더니 납작 하게 만들어서 상처에 붙였다. 부여송은 견딜 수 없었던 통증이 가시고 즉시 시원해지자 다시 한 번 놀랐다. '칠독황봉침은 기독이 대단해서 무림에서도 칠대금용암기대 중의 하나로 손꼽는 것인데 이렇게 간단하게 치료하다니… … 보아하니 이 녀석은 근골만 뛰어난 게 아니라 의술 또한 절묘하구 나!' 그는 거듭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 그는 처음 볼 때부터 강옥봉의 근골이 탁월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많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잘만 구슬리면 자신의 절학을 전 수할 제자로 삼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온 터였다. 한데 그런 소년에게서 오히려 구원을 받다니, 부여송으로서는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이때 강옥봉은 다시 품안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굵기가 손가락만하고 길이가 다섯 치 정도 되는 향이었 다. 그는 향에 불을 붙였다 향은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며 기이한 향내를 풍겼다. 곽희연과 곽조웅은 향내를 맡더니 심한 재채기를 하다가 사지가 산뜻 해짐을 느꼈다. 객점 주인과 점소이들은 모두가 하덕룡이 보낸 화룡 주의 독성에 감염되어 있다가 그 향내를 쏘이더니 곧 깨어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제서야 강옥봉은 향불을 끄고 타다 남은 향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 다. 부여송은 그런 광경을 보고 신통해서 물었다. "그 향이 무어냐?" 강옥봉은 빙긋 웃었다. "이것은 용연향이라는 것인데 웬만한 기독은 이 향을 피워서 해독할 수 있습니다." "아! 그게 용연향이군. 노부도 듣기는 했다만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 다. 허허, 참…… 그런데 네 성은 무엇이냐?" 강옥봉이 막 입을 열려 할 때 곽희연과 곽조웅이 그의 앞으로 와서 공손히 허리를 굽혀 심심한 사의를 표했다. 곽조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분양 곽가보의 곽조웅이라고 합니다. 오늘 소협 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성함과 사부의 내력이나 알려 주십 시오." 강옥봉은 마주 인사를 했다. "제 이름은 강옥봉입니다. 무림의 인물이 아니니 소협이란 칭호는 감 히 받을 수가 없군요." 곽조웅이 약간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조금 전에 두 악당들에게 손쓰는 것을 보니, 약간 서투른 것 같기는 하나 초식이 정기하여 상승의 무공임이 분명하였소." "사실 저 혼자서 터득한 무학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순간 부여송의 안색이 변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말 라고 눈짓했다. 이때였다. 밖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 왔다. "부가 늙은이야! 너 아직도 죽지 않았구나!" 동시에 체구가 거대하고 얼굴이 박박 얽은 사나이가 급히 들어왔다. 그자의 얼굴은 흉악하기 그지없었고, 눈빛 또한 흉흉했다. 부여송은 그를 보자 움찔 놀랐다. '아니, 음산앙신 학의행까지도 일월문의 도당이 되 었다니……' 음산앙신 학의행은 음산 일대에서는 거의 사신과도 같 은, 무서운 존재였다. 학의행은 눈에 흉광을 발하며 객점 안을 살펴보다가 냉소를 쳤 다. "부여송! 이건 젊은 남녀의 사적인 일인데 사도 두 사람 까지 끼여들다니, 너무 건방지구나." 그는 아마 강옥봉이 아직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 부여송의 제자인 줄 안 모양이었다. 강옥봉이 어이가 없어 무어라고 하려 할 때 학의행이 먼저 그를 노려 보며 사납게 호통을 쳤다. "이 죽일 꼬마놈아! 어찌 두 사람씩이나 악랄하게 죽였느냐? 노부가 만약 그냥 내버려둔다면 네놈은 끝내 하늘 높은 줄 모를 것이다!" 강옥봉은 별로 화도 내지 않고 담담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에게 그럴 실력이나 있겠소?" 학의행은 그 당돌한 말에 화내는 것도 잊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아 마 너무도 화가 나서 미처 말문을 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여송이 옆에서 껄껄 웃었다. "하하…… 학가 늙은이야! 자고로 영웅은 소년 중에서 나타나 는 법이다. 나의 노제는 솜씨가 고명하여 너 같은 늙은 폐물은 떼거 지로 몰려와도 당해 낼 수 없으니 괜히 으스대다가 당하지나 마라." 이 말은 타오르는 불에 끓는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 찢어 죽일 놈!" 학의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쌍장을 무섭게 휘두르며 강옥봉 에게 덮쳐 왔다. 와아앙! 그의 성명절기인 마왕인의 장세가 강옥봉을 향해 노도처럼 쏘아져 갔다. 그 엄청난 위세에 옆에 있던 곽희연은 물론이고 부여송의 안색마저 홱 변했다. '큰일났다! 이 학가 늙은이의 무공이 그사이에 이토록 높아졌을 줄이 야……' 하나 강옥봉의 안색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여풍운과 임표로부터 정으로써 동을 제압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일부러 학의행을 격동시켜 먼저 손을 쓰도록 만든 것이다. 강옥봉은 학의행의 쌍장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가 번개같이 몸을 비틀면서 막대로 천풍소화의 일식을 펼쳐 냈다. 스읏! 이상하게도 그리 빠른 초식 같지 않았는데 막대는 유연하게 학의행의 마왕인 공세를 가르고 들어가 정통으로 그의 손목을 후려갈기는 것이 아닌가? 딱! 막대가 학의행의 팔목을 강타하며 뼈마디가 부러지는 음향이 들렸다. "으앗!" 학의행은 팔이 저리고 심장에까지 심한 통증을 느끼자 그야말로 대경 실색했다. 그는 부러진 팔을 부여잡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도망치 고 말았다. 실로 천하가 경동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악명이 자자한 음산앙신 학의행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 의 소년에게 단 일 초 만에 손목이 부러진 패 도망치고 말았으니 실 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부여송은 설마 학의행이 단 일 초도 받지 못하고 도망칠 줄은 몰랐는 지라 멍하니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학의행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통쾌하다. 통쾌해! 저 학가 늙은이의 높은 콧대가 오늘 아주 작살이 나버렸구나. 으하하하……!" 그는 무엇이 그리도 신나는지 연거푸 대소를 터뜨렸다. 곽씨 남매도 왜나 통쾌했는지 허리를 잡고 웃었다. 한참을 웃던 부여송은 돌연 진지한 표정으로 강옥봉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방금 네가 사용한 도법은 이름이 무어냐? 나는 아직까 지 무림에 그토록 괴이한 도법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곽희연과 곽조웅도 그게 궁금했는지 웃다 말고 강옥봉을 주시했다. 하나 강옥봉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믿지 못하실지 모르지만저도 이 도법의 이름은 정확히 모릅니다. 그 저 우연히 배운 것이라……"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천애무아도의 그림을 보고 도법을 익혔으나 그 도법이 천 애도가 아닐까 하는 짐작만 할 뿐 정확한 명칭은 알지 못했다. 하나 부여송과 곽씨 남매는 그가 일부러 도법의 명칭을 숨기고 있다 고 생각했다. 부여송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강호 인지라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아직 젊은 곽희연과 곽조웅 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강옥봉도 그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으리란 것을 짐작했지만 굳이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조금 굳어지자 부여송이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한 고비는 넘겼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하덕룡은 심보가 고 약한 놈이니 절대로 그냥 있지는 않을 거다. 더구나 이 소문이 강호 에 퍼지면 일월문의 위신이 말이 아닐 것이므로 이번 사건은 무사히 끝나지 않겠군." 이어서 강옥봉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림의 인물이 아닌 자네가 강호의 시비에 말려들었으니, 모 든게 노부가 경솔했던 탓일세." 곽희연이 예쁜 눈을 치켜 뜨며 죄꼬리 같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강 소협의 무공은 비록 혼자 터득했다지만 재질이 비상하고 실력이 뛰어나 우리처럼 허명만 얻은 사람은 정말 부끄럽군요. 앞으로 머지 않은 장래에 강 소협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할 거예요." 강옥봉은 씁쓸하게 웃었다. "저 같은 게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곽희연은 처음부터 강옥봉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그의 이런 검손한 태도를 보자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곽조웅도 역시 명랑하게 웃더니 점소이를 불렀다. "이 객점에 있는 술과 안주를 모조리 가져 오너라." 그리고는 시선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밤을 지새며 환담이나 나눕시다." 그러자 곽희연이 그를 흘겨보면서 나무랐다. "이렇게 긴박한 위경에 처했는데 무슨 심정으로 술을 마시면서 시간 을 보낸단 말이냐?" 곽조웅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었다. "학의행이 중상을 입고 도망쳤으니 일월문의 도당들은 지레 겁을 먹 고 강 소협의 내력을 확실히 파악하기 전에는 함부로 손을쓰지 못할 겹니다." 부여송이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흠…… 곽 소보주는 확실히 영특하군. 이 늙은 주충이 어찌 그 점을 생각지 못했단 말인가!" 점소이들도 신이 나서 술과 안주를 가져 오며 싱글벙글 웃었다 강옥봉의 신기한무공에 악당들이 꽁무니를 』ㅂ』는 것을 보았기 때 문에 통쾌했던 것이다. 그들은 다시 탁자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술이 돌아가고 장내의 분위기도 화기 애애해졌다 곽희연도 몇 잔의 술을 마셨는지 두 볼이 조금 붉어졌다. 가뜩이나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감돌자 보는 사람의 마음을 그 대로 녹여 버릴 듯한 미태를 풍기고 있었다. 취흥이 도도해지자 부여송은 강옥봉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강 노제는 무슨 특별한 볼일이라도 있나?"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보름 후에 낙양에서 매형을 뵙기로 했습니다. 그 래서 지금 그곳으로 가는 중이지요." 그가 임표와 여풍운을 만나기로 한 것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떠나기 전 자신들의 행방에 대해서 철저히 비밀을 지켜 달라고 신신 당부했기 때문이다. 강옥봉의 안색이 너무도 태연했기 때문에 노련한 부여송도 미처 의심 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곽씨 남매를 향해 물었다. "자네들은? 아까 얼른 들으니까 태원에 무슨 볼일이 있는 모양이던 데?" 곽조웅은 술을 한잔 들이키고는 말문을 열었다. "저희 남매는 사문 선배님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태원의 운 가장으로 가야 합니다." 부여송의 눈빛이 번쩍거렸다. "운가장이라고? 그럼 그 선배는 혹시 일수삼도 운남평 이 아닌가?" "바로 그렇습니다." 부여송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수삼도 운남평은 무림의 아홉 명의 도의 명인 중 하나로 꼽히는 절세의 도객이었다. 특히 그는 명리에 담 백하고 인물 됨이 광명 정대해 많은 무림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기도 했다. "노부도 운남평과 몇 번 만나서 약간의 안면이 있지. 그는 무공이 신 비해서 아무도 사문 내력을 알지 못했는데, 그가 자네들의 사문 선배 라니 놀랍군." "운 선배님은 저희 이모부님의 사숙되십니다. 그분은 운가장에 계신 뒤로 강호의 시비에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이번 환갑도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극광, 그 늙은 놈이 우리 남매가 운 선배님을 축하하려고 태원에 간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요?"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하군. 게다가 하덕룡, 그 자식이 이렇게 대놓고 자네들에게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하극광이 뒤에서 사 주하고 있는 것 같네. 자네들은 이 점에 대해서 무언가 짚이는 거라 도 없나?" 곽조웅은 곽희연과 얼굴을 마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없습니다. 저희들은 한 달 전에 곽가보를 떠나 이모부님이 계 시는 연경에 갔다가 운 선배님이 환갑이시라는 말씀을 듣고 찾 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부여송은 송충이 같은 눈깹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어쨌든 운남평이 환갑이라니 나도 한번 찾아가서 축하를 해주어야겠군." 그는 돌연 강옥봉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어떤가? 자네도 이 기회에 운가장에 가서 무림의 여러 명숙들 을 만나 보지 않겠는가?" 곽조웅과 곽희연도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특히 곽희연의 눈빛은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었다. 하나 강옥봉은 하루라도 빨리 낙양에 당도하여 여풍운 등과 재회하고 싶었기 때문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무림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장소에 가면 괜히 어색하기만 할 뿐 입니다. 게다가 매형과 만나기로 약속한 기일이 촉박해서 아무래 도 힘들 것 같습니다." 곽희연의 얼굴 가득 아쉬운 기색이 떠올랐다. 부여송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어쨌든 태원까지는 같이 동행 하세," 강옥봉도 그 말에는 군소리 않고 승낙을 했다. 다음날 아침. 밖에는 주먹만한 눈이 여전히 광풍에 몰아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야를 가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강옥봉과 부여송, 그리고 곽씨 남매는 아침 식사를 끝낸 후 곧 새벽 눈보라를 가르며 태원을 향해 떠났다. 도중에 곽조웅은 자기 누이인 곽희연이 강옥봉에게 완전히 반하여 정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일부러 두 사람이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눈치가 빠른 부여송이 히죽히죽 웃으며 두 남녀를 번갈아 바라보는 바람에 강옥봉과 곽희연은 괜히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곤 했다. 하나 그러는 와중에도 강옥봉은 일월문 고수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 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심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이튿날 정오 무렵에야 그들은 눈 속에 파묻힌 태원 가까이에 당도했 다. 강옥봉은 여러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이쯤에서 여러분과 작별해야겠습니다." 부여송이 가까이 다가와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강 소제, 우리는 서로 처음 만났으나 노부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같 이 사귀고 싶네. 소제가 아직은 무림인이 아니지만 이 다음 강호에 명성을 떨칠 거라 믿는다네. 그러니 매형을 만난 다음 운가장으로 노 부를 찾아주기 바라네." 곽조웅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 소협, 저희들은 앞으로 한 달 정도 더 운가장에 머무를 예정이니 시간이 나면 꼭 들러 주십시오. 저와 누님은 강 소협이 찾아오길 학 수고대 하겠습니다." 곽희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억지로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 다. 강옥봉은 그들의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빠른 시일 내에 운가장 으로 찾아갈 것을 약속했다. 곽조웅과 곽희연은 그와 혜어지는 것이 못내 섭섭한 표정이었다. 곽 희연의 표정에는 아쉬움과 동경의 기색이 역력했고, 눈자위가 약간 붉어져 있었다. 강옥봉은 그녀의 유정 어린 눈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서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는 말 머리를 돌리더니 채찍을 허공으로 후려쳤다. 히히힝! 말은 네 발굼을 놓아 순식간에 눈보라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부여송과 곽씨 남매는 아쉬움을 달랠 길 없어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 을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제4장 천룡보도 태원. 태원은 산서성의 성도였다. 옛 이름은 양곡, 진양. 분하의 상류에 있는 천연적인 요새지로서 군사, 교통의 요충지 였다. 성내에는 진사, 낭자관 등의 명승지가 많고 내외 두 개의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리는 산지사방에서 모여드는 객상, 유람객 등의 온갖 사람들 과 수레, 기마로 붐볐고 길 양 옆은 주루, 찻집, 형형색색의 점포으 로 등으로 번잡하고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내려도 상인들의 마차는 계속 왕래하고 있었다. 태원성의 북문 대로를 지나 쭉 뻗은 중앙로를 걷고 있는 말 한 필이 있었다. 말 위에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수려한 용모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한데 소년은 무슨 고민이 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가끔씩 한숨까지 내쉬었다. 소년은 바로 강옥봉이었다. 그는 조금 전 부여송 등과 헤어질 때 원 망스러운 듯 자신을 쳐다보던 곽희연의 눈동자가 자꾸 생각나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느 고물상점 앞을 지나게 되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는 호기심도 나고 기분도 풀 겸 해서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옛날의 명사들이 솜씨를 보인 명화와 고서, 그 리고 여러 가지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강옥봉은 대강 보면서 구경하다가 잔뜩 쌓여 있는 고서 밑으로 칼집이 삐죽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자신이 익힌 도법을 펼칠 만한 마땅한 칼이 없어 고민하던 그는 즉시 칼집을 빼보았다. 그것은 삼 척 정도 되는 강도였다. 스릉! 그가 강도를 뽑아 보니 왜나 무거웠으며 누런 녹이 잔뜩 슬어 있었 다. '쳇…… 이제 보니 쓸모없는 폐물에 불과하군.' 강옥봉은 내심 실망하여 다시 칼을 칼집에 꽃으려 했다. 한데 그때, 의외로 녹이 슨 도신의 한쪽에서 괴이한 광채가 번 쩍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다시 자세히 살피다가 눈을 빛냈다. '이건 분명히 보도 같구나!' 과연 그랬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절세의 보도였다. 단지 누군가가 철가 루와 특이한 유약을 발라 놓아 보잘것없게 보였을 뿐이었다. 그가 정신없이 보도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상점 주인의 음성이 뒤에 서 들려 왔다. "그 칼은 본시 한대의 것인데 나으리가 필요하시다면 은자 한 냥만 내십시오." 강옥봉은 즉시 은자 한 냥을 건네 주고 보도를 어깨에 멘 다음 상점 에서 나왔다. 이어 그는 태원의 남쪽 성곽에 있는 성루를 향해 질풍처럼 달 려갔다. 태원성의 외성 성루는 이층으로 지어졌는데, 눈발이 휘날리는 거친 황야가 멀리까지 내다보이는 경승지였다. 마침 석양이 물들어 백설로 뒤덮인 황야가 붉은색으로 반짝거리고 기러기가 외줄로 서서 날아가고 있었다. 태원성 안에는 등불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었고, 백설이 깔린 야산 너머에서는 뽀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옥봉은 성루에 올라가자 보도를 뽑아 들었다. 거무튀튀한 도신 에서 왠지 청량한 기운이 팔을 타고 뻗어 나오는 것 같았 다. 그는 즉시 도신을 향해 지력을 튕겨 보았다. 순간, 쩡! 녹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면서 괴이한 광채가 눈을 찌를 듯 퍼져 나왔 다. 강옥봉은 너무도 기뻐서 즉시 나무기둥을 향해 후려쳐 보았다. 팟! 도광이 번짹이면서 빛났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나무기둥은 꼼짝도 않는 것이 아닌가? 강옥봉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무기등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눈이 크게 뜨여졌다. 나무기둥에는 실낱 같은 작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강옥봉이 나 무기둥을 살짝 밀자, 쿠웅! 나무기등의 선이 그어진 부분이 그대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잘려진 부분은 마치 대리석처럼 반질반질했다. "아! 과연 보도구나!" 이제 보니 나무기둥은 보도에 환전히 잘려졌는데 너무도 예리하게 베 어지는 바람에 미처 쓰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강옥봉은 도신을 어루만지다가 칼자루 부분에 고서가 쓰여 있 는 것을 발견했다. <천룡보도> 넉 자가 황금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과연 그러고 보니 칼자루에서 칼 날까지 이어지는 부분이 용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었다. 강옥봉은 기쁜 웃음을 지으며 칼을 다시 칼집에 꽃고 어깨에 메었다. 마음에 록 맞는 칼을 갖게 되자 강옥봉은 금시라도 무림의 절정고수 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원래 이런 절세의 기병은 특이한 인연이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얻을 수가 엄는 것이었다. 그런 낡은 상점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어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던 천룡보도가 강옥봉의 눈에 띄었으니 어찌 기연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옥봉은 절세의 보도까지 있으니 이젠 어떤 자가 덤벼도 자신이 있 을 것 같았다. 한데 그가 막 성루 아래로 내려가려 할 때였다. 휘휙!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몇 개의 인영이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강옥봉은 잠시 어리등절해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구석에 몸을 숨겼 다. 그 순간 세 개의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올라온 사람들을 보자 강옥봉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이남일녀였는데, 그 중 두 남녀는 대동성의 불광사 에서 보았던 남삼청년과 홍의미소녀가 아닌가! 남삼청년은 여전히 품 안에 원숭이를 안고 있었다. 강옥봉은 그를 보자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불광사에서 그는 남삼청년의 손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지 않은가? 강옥봉은 임표에게 들어서 그 청년이 사도의 고수인 비원서생 영호초임을 알고 있었다. 미소녀는 능파옥녀 매영령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강옥봉이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그는 하늘색 유삼을 입은 키가큰 중년인이었다 눈빛이 칼날같이 예리 한 것으로 보아 내외공이 모두 절정에 이른 고수임이 분명했 다. 강옥봉은 당장에라도 달려나가 영호초의 면상을 쥐어박고 싶었으나 여풍운과 임표를 만나기 전에는 번거로운 일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꾹 참고 더욱 깊숙이 몸을 숨겼다. 그들은 성루에 올라오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그들은 거리낌없이 대화를 나 누었다 먼저 비원서생 영호초가 하늘색 유삼을 입은 중년인을 보며 물었다. "진 대협! 어젯밤에 운가장의 일수삼도 운남평이 갑자기 죽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강옥봉은 그 말에 깜짝 놀라 그들의 대화에 청각을 곤두세웠다. 중년인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 아닙니까? 운남평이라면 무림의 구대도객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절세의 고수인데 어찌 그토록 갑작 스럽게 변을 당할 수 있습니까?" "그 사실 때문에 산서성 일대가 온통 술렁이고 있다네. 더구나 그는 환갑을 삼 일 남겨 놓아 뭇친지들과 친착들이 운가장에 집결해 있었 다네. 그래서 더욱 커다란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지." 한쪽에 서 있던 매영령이 총명한 눈을 반짝거렸다. "운남평은 평소에도 아주 건강하고 병이 없었는데 무슨 곡절이 있는 게 아닐까요?" 영호초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곡절이 란 말이오?" 매영령은 평소부터 잘난 척하고 마음이 흥악한 영호초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중년인의 앞인지라 감히 발작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냉랭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운남평에게는 대대로 운씨문중에서 전해 내려 오는 한 가지 가보가 있다고 해요. 한데 며칠 전, 돌연 회서방 에서 얼마 동안만이라도 그 가보를 빌려 달라고 그에게 부탁 을 해왔답니다." "아니, 그 가보가 무엇인데 회서방에서 빌려 달라고 한단 말이오?" "그건 하나의 금팔찌래요." "그깟 금팔지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천하의 회서방이 그걸 얻으려 한 단 말이오?" 영호초가 자꾸 자신의 말을 가로막자 매영령은 그를 싸늘히 쏘아보았 다. "영호 공자께선 그렇게 미심쩍으면 제 말을 듣지 않으면 될 거 아니 예요?" 영호초는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중년인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매 낭자의 말대로 자네가 궁금한 게 있더라도 일단 말을 끝까지 들 어 보기로 하세." 매영령은 영호초를 힐끔 노려본 후 입술을 살짝 혀로 축였다. "회서방은 두 분도 알다시피 내력이 막강하고 상대하기가 까다로워 운남평은 감히 정면으로 거절을 하지 못했답니다. 그리하여 일단 응 낙은 해놓았으나 물건을 건네 주기도 전에 그만 돌아가신 거지요." 중년인은 잠시 침음하다가 물었다. "확실히 이상하군 운남평이 회서방에게 물건을 건네 주기로 한 날짜 가 언제인지 알고 있소?" "바로 오늘이 에요." "그런데 운남평은 어제 죽었단 말이오? 정말 무슨 곡절이 있긴 있겠 군." 영호초는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 그녀에게 추궁을 받을까 봐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기회를 발견하고는 잽싸게 물었다. "그런데 회서방에신 요구한 그 운가의 가보가 무엇이오?" 중년인도 그것이 궁금한 듯 매영령을 바라보았다. 하나 매영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게 금으로 만든 팔찌라는 것밖에 몰라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까 영호 공자가 물어 보았을 때 말했을 거예요." 중년인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회서방에서 노리고 있다면 필시 보통 물건이 아닐 텐데…… 그런데 이번에 회서방에서 파견한 고수들이 누구인지 아시오?" "구지귀왕 등립과 무연추혼 나종령 , 그리고 병무상 곡풍 세 사람이라고 해요……" "음…… 그들이라면 운남평이 상대하기는 벅차겠군. 거기다가 그들 뒤에는 막강한 회서방이 버티고 있으니 운남평으로서도 달리 방도를 마련할 수밖에는 없었겠지." 중년인의 음성은 나지막했으나 영호초와 매영령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영호초는 즉시 두 눈을 약삭빠르게 굴렸다. "진 대협의 말씀은 운남평이 공성계를 썼단 말입니까?" "장담은 못 하지만 그랬을 가능성도 있소. 아무래도 직접 가보는 수 밖에 달리 방도가 없겠군." 영호초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저희들은 대동성으로 가서 그 여가 놈을 구출한 꼬마녀석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숨어서 이 말을 듣고 있던 강옥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들이 어떻게 그사실을 알고 있을까? 혹시 여 대협이 이미 저들의 수중에 떨어진 게 아닐까?' 중년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결심한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 일은 급히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 만약 짐작대로 이 일에 회서방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면 본 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인즉, 먼저 이 일의 내막을 자세하게 파악한 후에 대동성으로 갑시 다." 강옥봉은 그 말을 듣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여풍운을 구했을 때 나타난 사천홍이란 늙은이도 무슨 장주의 명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 중년인도 '본 장'이니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사천홍과 한패 임이 분명했다. 아울러 그들은 무슨 장의 장주에게 지시를 받 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강옥봉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들은 몸을 날려 성루를 내려갔 다. 그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강옥봉도 조심스레 성루를 내려왔다. 그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고,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우선은 여풍운과 임표의 안부가 걱정되었다. 또한 운남평의 환갑을 위해 운가장으로 떠난 부여송과 곽씨 남매의 일도 걱정스러운 것이었 다. 조금 전에 들은 말대로라면 운가장에는 한바탕의 풍운이 휘몰 아칠 것인데, 그 와중에 그들이 무사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 드 는 것이다. 한동안 강옥봉은 찬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시 태원성으로 향했다. 여풍운과 임표는 모두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지략이 뛰어나 쉼게 남 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들이 변을 당했다 할 지라도 그들의 행방도 모르는 처지이니 지금 당장 달리 손써 볼 방도 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일단은 그들과 약속한 장소에 가서 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 에 없었다. 하나 그 전에 운가장으로 가서 부여송과 곽씨 남매의 안위를 살펴보 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아무래도 먼 곳보다는 발등의 불이 더 급한 법이다. * * * 회서방은 최근 들어 강호상에 창립된 방파였다. 비록 역사는 짧았지만 모든 방파 중에서 제일 빨리 성장한 방파였다. 그들의 위세는 놀라우리만치 쾌속하게 발전하여 당금 천하를 거의 석 권하려 하고 있었다. 하나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이름 그대로 한 무리의 쥐 떼처럼 섬뜩하고 사람들을 오 싹하게 하는 집요함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들은 쥐 떼와 닮은 면이 너무도 많았다. 그들은 쥐처럼 번식률이 높고, 파괴력이 강하며, 종적이 신비스럽고 행사가 사악했다. 또한 천하의 어느 곳에든지 뿌리를 내려 영원히 소 멸되지 않을 것 같았다.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리 쥐를 미워하고 온갖 수단과방법을 동원하여 죽이려고 하지만 마침내 그들의 존재를 인정치 않을 수 없는 것과 같 이 무림인들은 회서방의 존재와 그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강호상에서 비록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또한 회서방이란 명칭에 대해 험담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더구나 그 들의 행사를 거역하거나 방해하는 사람은 더 더욱 찾아볼 수가 없었 다. 왜냐하면 그랬다가는 한 무리의 쥐 떼들에게 보복당하는 것과 마찬가 지로 언제 자신에게 무섭고 끔찍한 화가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 다. 이런 일로 해서 회서방은 짧은 시간 내에 강호무림에서 흑도제일방파 로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다. * * * 운가장은 태원성 동쪽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었다. 태원성의 중앙을 관통하는 십자 대로를 따라 이백여 장 쯤 가다 보면 하나의 거대한 장원이 나온다 장원의 크기는 대략 삼백 장 정도. 높다란 담장 너머로 형형색색의 지붕들이 아련히 들여다보이는 장원의 모습은 우아한 정취를 풍기는 것이었다. 이 장원이 바로 무림 구대도객 중의 한사람인 일수삼도 운남평의 운 가장이었다. 평소 운가장은 대문을 굳게 닫은 채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특별 히 가까운 친지들만 왕래할 뿐이었다. 이것은 운남평이 강호의 시비 에 개입하길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오늘 운가장은 넓은 대문이 활짝 열린 채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 다. 게다가 운가장을 향하는 대로에는 백기와 백색 천막이 근 십리 가량 쭉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그다지 시끄럽지는 않았 다. 누구 하나 웃는 사람도 없이 숙연했고, 슬픈 분위기가 감돌았다. 저녁 무렵. 조상객들 사이로 운가장의 정문을 지나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머리에 커다란 풍모를 깊숙이 눌러써 용모를 알 수 없었고, 단지 등뒤로 고색 창연한 칼을 매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은 강옥봉이었다. 강옥붕은 혹시라도 영호초나 매영령과 마주치게 될까 봐 극히 조심하 고 있었다. 정문 앞에는 한 흑의인이 의자에 앉은 채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강옥봉이 다가가자 흑의인은 힐끔 그를 올려다보고는 퉁명스런 어투 로 물었다. "이름과 소속을 말하시오." 강옥봉은 내심 추의인의 투박한 어조에 기분이 상했으나 담담한 음성 으로 말했다. "장성에서 온 강이라 하오." 그가 성만 밝히자 흑의인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나 강옥봉은 그가 더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훌쩍 안으로 들어가 버 렸다. 정문을 통과하자 널찍한 숲이 나왔다. 운가장은 숲이 웅장하고 그 사 이로 교묘하게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얼른 보기에는 단순한 것 같지 만 기이한 오행의 법칙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강옥봉은 여러 명의 조상객들 틈에 끼여서 숲속의 길을 걸어갔다.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덮여 있었고, 나무 사이 로 찬바람이 불어왔다. 얼마쯤 가니 숲 저편에 높은 지붕이 보였다. 운남평의 저택은 우람하고 호화 찬란하며, 마치 궁전같이 보였다. 아 름다운 누각이 연못 가에 있었고, 사철나무와 화초들이 질서있 게 심어져 마치 이곳만이 봄을 만난 것 같았다. 본채에 가까이 가자 곡성이 들려 더욱 슬픈 분위기가 감돌았 다. 강옥봉의 옆에 가던 두 사람이 나직이 말을 주고받았다. "아…… 일세의 대협께서 이렇듯 갑작스레 돌아가시다니, 정말 안타 까운 일일세." "그러게 말일세. 그분과 안면도 없는 우리도 이렇듯 황당하고 정신이 없는데 그분의 가족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참! 듣자 하니 그분의 슬하에는 일남일녀가 있는데 모두 뛰어난 기재들이라며?" "아직도 소식을 듣지 못했나? 그분의 아드님이신 운자개 소 협은 이미 무림에서 화북일룡이란 외호로 명성을 떨치고 있고, 따님인 운봉랑 소저는 천하의 절색이라 무림의 사대미인 중에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네." "아! 그렇다면 그 사대미인 중의 소비연이 바로……" "그렇지. 한번 웃으면 천하의 모든 남자들을 녹인다는 소이연이 바로 운 소저일세." "그런 훌릉한 자제들을 두고 갔으리 운 대협도 아쉬을 게 없겠군." 두 사람은 연거푸 탄성과 탄식을 토하고 있었다. 본채에 있는 정원에는 커다란 천막이 하늘을 덮고 있었으며 만장 조 기 수백 개가 휘날리고 있었파. 영전을 모신 영당은 분 위기가 엄숙했고, 호화로운 비단으로 장식되어 조문객들의 마음을 더 욱 숙연하게 했다. 강옥봉은 영전 근처에 가자 고개를 살짝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영전의 주위에는 하얀 소복을 입은 이십여 명의 식솔들이 비통한 표 정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가장 앞에는 준수한 청년이 상복들입은 채 우뚝 서 있 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오륙 세 정도였고, 영준한 얼굴에 눈이 날카로웠다. 그가 바로 화북일룡이라 불리는 운남평의 아들, 운자개였다. 운자개의 옆에는 절세의 미녀가 서 있었다. 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황흘하다 못해 넋이 나갈 정도였다. 추수같이 시원한 눈동자, 터질 듯 고운 볼, 붉고 나긋나긋한 입술과 백옥처럼 새하얀 피부…… 게다가 비록 헐렁한 상복을 입었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가끔씩 드러 나는 그녀의 몸매는 굴곡이 완연해서 보는 이들이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흡사 이른 봄 수양버들가지가 흐느적거리는 듯한 그녀의 자태는 강옥봉으로서도 처음 보는 미녀 중의 미녀였다. 그녀가 바로 무림의 사대미인 중의 하나인 소비연 운봉랑이었다. 중원의 고대역사에 소비연, 한달기, 취양비, 병서시, 이렇게 네 명의 절세미녀가 있었다. 즉, 웃음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소비연, 원한 맺힌 미인 인 달기, 술에 취한 듯 화려한 양귀비, 병든 꽃처럼 가련한 서시였다. 그런데 현무림에서도 소비연, 한달기, 취양비, 병서시와 흡사한 미인 들이 있었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그녀들을 사대미인이라 일컫고 있었다. 운자개와 운봉랑 남매는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고, 슬픈 기색이 역력 히 나타나 보는 사람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한동안 그들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린 강옥봉의 눈에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운씨 남매들의 뒤편에 부여송과 곽희연, 곽조웅의 모습이 보였고, 다 시 조금 떨어진 조문객들 틈에서 매영령과 영호초, 그리고 그들의 일 행인 하늘색 유삼의 중년인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영당 안의 분위기는 처참할 정도로 조용하면서도 숙연했고, 관이 놓인 휘장 앞에는 운남평의 손자 손녀인 듯한 어린아이들이 울고 있 었다. 강옥봉은 다른 사람들 틈에 업여 영당 안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고 술 을 따른 후 상주들에게도 절을 하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 강옥봉은 절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행여나 자신을 알아볼까 걱정 했으나 다들 다른 일에 정신이 골몰해 있는지라 그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옥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조문객들 틈에 섞여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시 두 명의 조문객들이 영전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행색은 매우 기이했다.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사나이로 더벅머리에 독수리 같은 코 그리고 음산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첫눈에 음흥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사나이는 쉰에 가까운 나이에 뚱뚱하고 키가 작았는데 짧은 머리칼은 온통 허옇게 보였다. 그들이 영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자 운씨일가의 가족들은 불안한 표정을 띠었다. 하나 가장 앞에 있는 운자개와 운봉랑은 처음의 표정 그대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두 사나이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예의를 표한 다음 상주와 답례를 했다. 한데 막 고개를 수그릴 때, 두 사람 중 음흉한 눈초리의 인물이 손을 교묘하게 휘둘렀다. 슷! 미약한 파공음과 함께 그의 소매에서 무언가 붉은 점같이 생긴 물체가 관을 향해 쏘아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나 무릎을 꿇고 있던 운자개가 어느새 번개같이 쌍장을 내밀고 있 었다. 콰앙! 빛살 같은 광망이 그의 손에서 뿜어지며 붉은 점이 다시 곡선을 그리 며 날아갔다. 팍! "크윽!" 그 붉은 점은 여지없이 음흉한 인물의 복부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실로 무서운 장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이얍!" 키가 작은 뚱뚱한 노인이 번개같이 양손을 휘둘렀다. 파파팍! 그의 양손에서 우박 같은 붉은 점들이 관을 향해 퍼부어졌다. 그 속도는 실로 눈 깜박할 사이인지라 미처 운자개가 막을 사이도 없 이 붉은 점들은 관에 격중되었다. 한데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쨍! 쨍! 응당 관을 박살낼 줄 알았던 붉은 점들은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여기 저기로 튀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관은 강철로 만들어져 있 었던 것이다. 뚱보노인은 대경 실색하여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하나 어느새 운자개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갈 수 없소!" 그는 날카롭게 외치며 오른손을 슬며시 앞으로 내밀었다. 우우우-- 괴이한 파공음과 함께 그의 손에서 한 줄기 거센 광풍이 밀려나왔다. 그것이 바로 운자개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한 압운장이었 다. 그 공세는 그리 빠른 것 같지도 않았는데 뚱보노인은 피할 수가 없어 급히 손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꽝! 장과 장이 마주치자 굉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크윽! 뚱보노인의 안색은 처참하게 변했으며 다섯 손가락은 모두 부러져 피 를 흘렸다. 뚱보노인은 선혈을 게워 내며 신형을 휘청거리다가 맥없 이 관 옆에 쓰러졌다. 한데 우연인지 그는 자기가 쏘아 내었던 붉은 암기 위에 쓰러지고 말 았다. 순간 푸스스…… 그의 옷에서 푸른 연기가 치솟으며 희미한 기운이 감돌았다. "끄아악!" 그의 입술을 뚫고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화염이 솟구쳐 뚱보노인의 몸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것을 본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제 보니 마화정이었구나……" 운자개는 붉은 암기가 무림의 칠대금용암기 중 하나인 마화정임을 알 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화정은 한번 격중되면 물에토 꺼지지 않는 기이한 불길로 타올라 미처 끌 사이도 없이 한줌의 재로 변해 버리고 마는 가공할 암기였 다. 과연 뚱보노인의 시체는 어느덧 시커먼 재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푸지직…… 시체가 타는 역한 냄새가 장내를 질식시킬 듯 퍼져 나갔다. 운자개는 쌍장을 휘둘러 불을 끈 후 하인들을 시컥 급히 두 시체를 밖으로 운반케 했다. 영당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운자개와 운봉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포단 위에 무릎 을 꿇고 앉아 있었다. 밖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여러 군웅들은 내심 크게 놀랐다. 강옥봉 또한 기이함을 금치 못했다. '운씨 남매는 분명 절학을 지니고 있구나 더구나 그런 일을 겪은 후 에도 저렇게 침착하고 태연하니 역시 무림 대가의 후예로 손색 이 없구나. 한데 그 두 사람은 대체 누구이기에 관을 부수려고 했을 까?' 이때였다. "아미타불……" 외마디 염불 소리가 들리며 다시 한 명의 숭인이 영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승인은 몸집이 크고 나이는 쉰 가량 되었는데, 굵고 짙은 눈썹에 부 리부리한 눈에서는 형형한 빛을 발산했다. 더구나 허리춤에는 땅에 끌릴 듯한 커다란 계도를 차고 있었다. 회의승인은 가까이 오더니 합장을 하여 인사를 했다. 하나 그와 동시 에 그의 양손이 가볍게 흔들리며 한 줄기 무형의 경력이 곧장 관을 향해 날아갔다. 운자개의 눈초리가 꿈틀거리며 그의 양 소매가 슬쩍 움직였다. 순간 휘잉! 회의승인이 발출한 무형의 경력은 또 다른 경력에 부딪혀 더 이상 뻗 지 못하고 허공에서 한바탕 소용돌이를 일으킨 후 사라지고 말았다. 회의승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운자개를 바라보았다. "영존께서는 무슨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까? 그분을 뵈려고 먼 길을 달려왔는데 빈승이 한걸음 늦게 와서 소원을 이루기 어렵겐 되었군 요." 운자개는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공손하게 말했다. "그분께서 너무 갑작스레 돌아가신지라 저희도 정확한 사인을 모르고 있습니다. 안됐지만 대사께선 그냥 돌아가셔야겠습니다." 회의승인은 눈빛을 번뜩였다. "사인을 모르겠다고요? 빈승에게 의학에 대한 조예가 약간 있으니 그 분의 시신을 살펴 사인을 조사해 드리지요." 그는 금시라도 관을 향해 덮쳐 갈 듯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운자개는 냉소를 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처음 보는 대사께 어찌 그런 노고를 끼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본 장에도 의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 있으니 대사께선 그만 물러가 십시오." 하나 회의승인은 끈질기게 물고늘어졌다. "이런 일은 여러 사람이 할수록 정확한 법입니다. 부디 빈승의 자그 마한 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운자개는 딱 부러지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의승인의 눈빛이 점차 흥흥하게 번뜩였다. 돌연 그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시주께선 빈승을 막다른 길로 몰고 있구려." 그의 웃음 소리는 우레와 같이 영당을 뒤흔들었다. 운자개는 자신도 모르게 화가 불끈 치밀었다. 운가장의 식솔들과 조문객들도 회의승인의 행동에 크게 노기를 띠었 다. 그때였다. 휘익! 미친 듯이 웃어 젖히던 회의승인이 갑자기 번개같이 몸을 움직여 관 앞에 앉아 있던 어린아이를 빼앗듯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앗?" 운자개와 중인들이 깜짝 놀라 제지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어린아이는 회의승인의 손아귀에 쥐여진 채 놀라서 와앙! 하고 울음 을 터뜨렸다. 운자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 중놈아! 감히 그런 비겁한 짓을 하다니…… 어서 그 아이를 내려 놓지 못하겠느냐?" 하나 회의승인은 얼굴에 징그런 미소를 띠었다. "흐흐…… 내가 꼭 이런 수를 쓰게끔 만든 너회들이 잘못이다. 어서 저 관뚜껑을 열어라!" 운자개는 미친 듯이 분노하여 금시라도 회의승인을 덮칠 듯했으나 그 의 수중에 들린 어린아이가 다칠까 봐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 아이는 운남평의 큰아들, 즉 운자개의 형이 낳은 아들로 그의 형 과 형수는 이미 몇 년 전에 불귀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운남평 이 가장 아끼고 귀여워하는 아이였다. 운자개는 그런 아이를 흉수들 이 출몰하는 영당에 데려다 놓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 다. 운자개가 머뭇거리는 사이 운가장의 고수들이 회의승인을 뺑 둘러 포 위했다. 하나 수중에 믿음직한 인질을 잡고 있는 회의승인은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 "허튼수작을 하면 이 어린 소년은 빈승에 의해 극락을 구경하게 될 것이오. 빈승은 단지 관을 열어 운남평의 사인을 알고 싶을 뿐이니 어서 관뚜껑을 여시오!" 운자개는 찢어 죽일 듯이 회의승인을 노려보았다. 하나 달리 뾰족한 수가 없음을 안 그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회의승인이 음흥하게 소리쳤다. "빈승은 참을성이 그리 많지 않으니 어서 결정하시오. 그렇지 않으 면, 흐흐……" 그는 아이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에 힘을 가했다. 아이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목이 막히는지 기침을 했다. 운자개는 깡짝 놀라 급히 외쳤다. "알겠소. 관을 열 테니 어서 손을 멈추시오." 그제서야 회의승인은 아이의 목을 조였던 손길을 늦추었다. 운자개는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사의 말대로 관을 열 테니 아이를 놓아 주시오." "흐흐…… 시신을 본 후에는 이 아이를 풀어 줄 테니 시주는 걱정하 지 마시구려." 운자개는 내심 노화가 들끓었으나 할 수 없이 몸을 돌려 관 앞으로 다가갔다. 회의승인은 여전히 아이를 움켜잡은 채 바짝 긴장한 눈으로 관을 바 라보고 있었다. 운자개는 관 앞에 서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의 영면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정이 다급하 니 아버님께서도 지하에서나마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린 후 천천히 관뚜껑을 열었다. 회의승인은 마른침을 꼴깍 넘기고 관 안을 들여다보려고 고개를 내밀 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당! 관뚜껑이 벼락같이 열리며 회의승인의 머리통을 향해 쏘아져 가는 것 이 아닌가? "앗!" 회의승인은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그는 황급히 아이를 내던지고 몸을 떼구루루 굴려 관뚜껑을 피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하나 그가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 "이 악적! 죽어라!" 운자개가 노성을 지르며 번개같이 그의 목덜미를 향해 쌍수를 내리쳤 다. 꽝! "크악!" 회의승인은 그의 칼날 같은 수도에 목덜미가 으스러진 채 입으 로 피분수를 뿜어 내었다. 그의 사지가 몇 번 부르르 떨다가 힘없이 축 처지고 말았다. 운자개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무서운 눈으로 회의승인의 시체 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관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천천히 일어났다. "자개야, 손을 멈춰라." 운자개는 급히 관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중인들이 깜짝 놀라 보니 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물은 검은 수염 을 길게 기른 청수한 얼굴의 노인이 아닌가? 얼굴은 자줏빛으로 붉 고, 눈빛이 차고 맑은 노인이었다. 그가 바로 운가장의 주인인 일수 삼도 운남평이었다. 놀랍게도 운남평은 죽지 않았던 것이다. 강옥봉은 흠칫 놀라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설마 했더니 그는 정말로 죽지 않았구나…… 그렇다면 회서방의 손 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죽은 척했던 것인가?' 운남평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애초에 이런 얄팍한 수로 위기를 넝겨 보려 했던 노부의 불 찰이다. 그들이 설마 이런 수를 쓸 줄은 몰랐구나." 이어 그는 경악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중인들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신 여러 동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 다. 여러분께서는 모두 의아한 점이 많으시겠지만 이 운 모 는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어 잠시 여러분들의 눈과 귀를 속였으니 넓 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인들은 웅성거리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 자세한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운 장주께서 무사하시니 천 만다행이구려." 괴이한 음소와 함께 세 명의 인영이 장내에 나타났다. 제5장 출현! 단혼도 그들의 신법은 너무도 놀라워서 누구도 그들이 언제 나타났는지를 정 확히 알지 못했다. 그들의 행색은 모두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가장 우측의 인물은 체구가 거대한 흑의중년인이었다. 얼굴에 크고 작은 흥터가 가득했고, 눈빛이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그 런데 기이하게도 오른손의 손가락이 네 개뿐이어서 섬뜩한 느낌을 불 러 일으키고 있었다. 중앙의 인물은 반대로 체구가 왜소한 늙은이였다. 늙은이는 손에 손때가 꼬질꼬질한 곰방대를 하나 쥔 채 연신 뻐끔거 리고 있었다. 한데도 곰방대에서는 아무런 연기도 피어오르고 있지를 않아 보는 이를 실소케 했다. 세 번째의 인물은 안색이 창백한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의 얼굴은 얼른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한 것 같았다. 하나 조금이라도 안목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중년인의 눈빛이 독사 의 그것보다 예리하다는 것을 알고 그가 절대로 병자가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이들 세 사람을 보자 운남평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들이야말로 회서방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손가락이 아흡 개인 흑의중년인이 구지귀왕 등립이고, 곰방대를 든 노인이 악독하기로 유명한 무연추혼 나종령, 그리고 창백한 얼굴의 중년인이 병무상 곡풍이었다. 중인들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숨소리도 죽인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모두 회서방 내에서 전서급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전서급의 등급은 일반 방파의 향주나 당주급에 해당되는 직위였다. 회서방에서 직위가 가장높은 것은 온서급의 인물이었다. 그것 은 일반 방파의 장로급에 해당되는 높은 신분이었던 것이다. 회서방의 신분 계층은 여타 방파와는 조금 특이했다. 그들은 온, 전, 종, 역, 표의 다섯 가지 등급으 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다섯 자에는 저마다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가장 무서운 의미를 지닌 것은 바로 장로급에 해당되는 온서 등급의 인물들이었다. '온'이란 글자는 가공스러운 염병을 의미하는 것인지라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해지게 만들었다. 즉 다시 말하면, 누구든 그 등 급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면 죽음의 화를 면치 못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마치 구제할수 없는 염병에 전염된 사람과 똑같 은 운명이 된다는 뜻이었다. 회서방 사람들의 신분을 구분하는 표시는 왼쪽 손바닥에 있었다. 그것은 생쥐 모양으로 새겨진 문신이었다. 표서급을 표시하는 한 마리의 생쥐부터 시작하여 등급이 하나씩 올라 갈수록 손바닥에 새겨진 생쥐의 숫자도 한 마리씩 늘어나게 되는 것 이다. 지위가 가장 높은 방주의 손에는 일곱 마리의 생쥐 문신이 새 겨졌고, 총호법에게는 여섯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회서방 내의 종서급만 되어도 웬만한 흑도고수들은 이름만 들어도 꼬 리를 말고 도망치고 말 무서운 마두들이었다. 하물며 전서급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 전서급의 인물들이 세 명씩이나 나타난 것만 보아도 회서방에서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연추혼 나종령은 곰방대를 빨다 말고 히죽 웃으며 운남평을 바라보 았다. "우리는 운 대협께서 변을 당하셨다는 말을 듣고 애통함을 금치 못했 는데 다행히도 운 대협께서 이렇듯 정정하시니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구려, 본 방의 방주께서도 운 대협의 무사하심을 아신다면 크게 반 가워하실거요." 운남평은 그의 이죽거리는 말을 듣고 내심 이를 잘았다. 그는 이미 조금 전에 자신으로 하여금 몸을 드러내게 했던 두 사나이 와 회의승인이 모두 회서방의 종서급 고수들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부러 수하들을 보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끔 유인한 후 이렇듯 태연하게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그들에게 당신들이 회의승인을 사주했느냐고 추궁할 수도 없는 일. 운남평은 고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분께서 이 운 모를 걱정하셨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외다. 더구나 귀방의 방주께서 운 모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신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려." 그의 말은 비록 정중했으나 그 속에는 짙은 조소와 분노가 담겨 있었 다. 나종령 등이 어떤 인물들인데 운남평의 속마음을 모르겠는가? 하나 나종령은 곰방대를 탁탁 털어 다시 물고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 다. "장주께서 무사하시다리 우리는 이제 며칠 전에 장주께 부탁드린 일 을 매듭 지었으면 하오. 장주의 의향은 어떠시오?" 운남평은 짐짓 시치미를 메었다. "부탁한 일이라니요?" 나종령은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도 히죽 웃었다. "운 장주께서 깜빡 잊으셨나 본데 귀장의 물건 하나를 우리에게 얼마 동안 빌려 주시기로 하지 않았소이까?" 운남평은 계속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무슨 물건이었더라7" "흐흐…… 죽었다 살아나시더니 운 장주께선 기억력이 많이 나빠진 모양이구려. 바로 그…… 금환 말이오." 보다 못한 구지귀왕 등립이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운남평도 더 이상 발럼만 할 수는 없었다. "아! 바로 본 장의 가보를 말씀하시는군요? 허허…… 그렇다면 원하 는 물건이 무엇인지 빨리 밝히셨어야지……" 운남평이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등립의 흉악한 얼굴이 노화로 시 뻘게졌다. 하나 유들유들한 나종령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 덕였다. "물론이오. 하지만 이제라도 그걸 아셨으니 우리는 덕망 높으신 장주 께서 일전의 약속을 지켜 주시리라 믿고 있소." 그의 말은 아주 교묘해서 운남평으로 하여금 달리 도망칠 구석을 만 들어 주지 않았다. 운남평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음을 느끼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그가 막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을 하려는 순간, "구지귀왕! 그 동안 신발이 닳도록 찾아 다니던 네놈을 여기서 만나 게 되었구나!" 난데없는 호통 소리가 들리며 한 인영이 구지귀왕 등립의 앞으로 날 아오는 것이 아닌가! 등립이 깜짝 놀라 보니 상대는 머리에 커다란 풍모를 눌러쓰고 등뒤 에 강도를 맨 소년이었다. 소년은등립의 앞에 우뚝 선 채 매서운 눈 초리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등립은 화도 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풍뎅이 새끼야. 너 지금 이 등 나리에게 한 말이냐?" 소년은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흥! 네놈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냐? 삼 년 전에 네놈의 손에 부모를 잃고 그 동안 복수를 하기 위해 천하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다 행히도 오늘 이곳에서 네놈을 만났으니 이게 모두 구천을 방황 하고 계시는 부모님의 영령이 보살핀 덕이 아니고 무엇이냐?" 등립은 소년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보아하니 이 꼬마녀석의 아비 어미는 모두 내 손에 절단난 모양이 군. 그런데 대체 이 녀석의 부모가 누구였더라……?'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그 동안 자신의 손에 죽어 간 사 람이 어디 한두 명이랴? 그렇다고 이제 와서 네놈의 부모가 누구냐고 묻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꺼린 녀 석을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잔인한 빛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소년의 전신을 훌어보았다. "흐흐…… 이 하룻강아지 새끼야. 본 나으리가 아직 화가 나지 않았 을 때 어서 빨리 꼬리를 말고 도망치거라! 그렇지 않았다가는 네놈의 집안은 아예 대가 끊어지고 말 것이다. 흐흐흐……" 그는 커다란 흉소를 터뜨렸다. 하나 소년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외쳐 댔다. "오늘 네놈을 죽이지 않는다면 지하에 계신 부모님의 영령이 영원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그는 버럭 소리치며 등뒤에 매고 있는 강도를 뽑아 들었다. 창!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섬뜩한 도광이 피어올랐다. 등립은 상대의 도가 범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움찔 놀랐다. "이놈? 죽어라!" 소년은 노성을 지르고 칼을 휘두르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쐐애액! 그의 칼이 기이한 반원을 그리며 등립의 콧등으로 다가왔다. 등립은 상대의 초식이 예상외로 기이함을 깨닫고 안색이 대변해 급히 피하려 했다. 하나 막상 피하려 해도 어느새 그가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는 상대가 휘두른 칼의 범위 안에 쉽싸여 있었다. 등립은 사력을 다해 손을 휘둘렀다. 팟! 하나 어느새 그의 오른팔은 소년의 칼에 격중되어 그대로 잘려지고 말았다. "윽!" 등립은 팔이 잘려져 나간 고통보다는 소년의 괴이한 도법에 놀 라 사색이 되었다. 그때, 스으윽! 다시 소년의 칼이 밑으로 축 처졌다가 번개같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등립은 그 순간 전신이 지옥의 나락에 빠진 듯한 암담한 절망감을 맛 보았다. "크악!" 그는 무언가 차가운 것이 자신의 사타구니부터 미간을 가르는 것을 끼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피분수가 히공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틸썩! 수십 년 동안 온갖 악행을 자행하던 구지귀왕 등립은 몸이 두 동강난 채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중인들은 모두 입을 딱 벌렸다. 누구토 설마 구지귀왕 등립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소년에게 단 이 초 만에 몸이 두 토막이 나 쓰러질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한동안 주위에는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은 경악과 의혹에 싸인 채 소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부여송과 곽씨 남매는 더욱더 큰 의혹을 느끼고 있 었다. '비록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저 소년의 몸매와 특이한 도법으로 보아 분명 얼마 전에 혜어졌던 강옥봉이 분명하다. 한데 그는 왜 얼굴을 가리고 있을까? 그리고 또 손에 들린 저 보도는 언제 구했단 말인 가?' 부여송이 의혹에 쉽싸여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을 때, "부 선배닝! 저는 강옥봉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얼굴을 가렸으니 선배 님깨서는 잠시만 처를 아는 척하지 말아 주십시오. 자세한 사정은 다 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곽씨 남매에게도 선배님께서 잘 말씀해 주십 시오." 그의 귓전으로 강옥봉의 전음이 들려 왔다. 그제서야 부여송은 눈앞의 소년이 강옥봉임을 확신하고 찌푸렸던 안 색을 활짝폈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곽 희연과 곽조웅을 향해 전음으로 무어라고 소곤거렸다. 그러자 두 사람은 몹시 기뻐하는 눈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특히 곽희연의 두 눈동자는 기이한 빛을 일렁이고 있었다. 한편, 순식간에 동료를 잃어버린 나종령과 곡풍은 어이가 없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나 정신이 들자 그들은 불같이 노했다. 두 사람 중 성질이 급한 곡풍이 강옥봉을 향해 덮쳐 왔다. "이 피라미 같은 놈! 감히 회서방의 인물을 죽이다니, 죽고 싶어 환 장을 했구나!" 그는 두 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리며 강옥봉의 얼굴을 그어 왔다. 하나 강옥봉은 조금도 당환하지 않고 슬쩍 허리를 구부리며 보도를 휘둘렀다. 파앗! 도광이 번쩍이며 곡풍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윽!" 강옥봉의 이마를 찍어 오던 그의 손가락이 어느새 싹둑 잘려진 것이 다. 그의 손가락은 비록 금강지를 연성해 바위보다 단단했지만, 금석을 두부처럼 잘라 버리는 천룡보도 앞에서는 무 토막과 다 를 바가 없었다. 곡풍은 안색이 대변한 채 손을 부여잡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나 강옥봉은 바싹 뒤따르며 도를 수평으로 그어댔다. 번쩍! 눈부신 도광이 주위를 어지럽혔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진한 피비린내가 화악 풍겨 왔다. 곡풍의 머리가 뎅강 잘려진 채 몸뚱어리만이 비틀거리며 서 있는 것 이 아닌가? 잘려진 목 부위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곡풍의 몸통은 몇 번을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쿵! 그 소리는 중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공포의 음향이었다. 이제 아무도 이 소년을 어리다고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아울러 모두 의 눈에는 소년과 그가 쥐고 있는 보도가 하나같이 공포스러운 존재 로만 보였다. 강옥봉은 순식간에 두 명의 고수를 베어 버린 다음 나종령을 향해 몸 을 돌렸다. 항상 침착하고 유들유들하던 나종령도 이 순간만은 안색이 창백해졌 다. 강옥봉은 그의 안색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일은 귀방과는 상관없이 오직 내 개인의 복수일 뿐이오. 등립은 나의 불공지대천의 원수였기 때문에 죽였소." 나종령은 어느새 평정한 안색을 회복하고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곡풍은 왜 살해했느냐?" 강옥봉은 오히려 되물었다. "그가 나를 죽이려 하는데 내가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려야 되겠 소?" 나종령은 일시지간 말문이 막혔다. 하나 곧 그의 눈빛은 다시 냉혹해졌다. "네놈이 본 방의 인물들을 살해한 이상 네놈과 본 방은 도저히 양립 할 수 없다. 본 방은 무슨 수를 쓰든지 네놈에게서 두 사람의 피빛을 받아 내고야 말 것이다." 강옥봉은 당당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누가 나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나도 다른 사람을 침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소. 하지만 만일 귀 방에서 나를 해치려 한다면 기꺼이 상대해 주겠소." 나종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강옥봉은 잽싸게 머리를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오. 정 부르고 싶거든 단혼도 라 부르시오. 내게 덤비는 자들은 모두 혼을 끊어 줄 테 니……" "단혼도……" 나종령은 나직이 되뇌이더니 악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좋다, 단혼도! 오늘부터 너와 회서방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결판이 나는 필사의 적이 되었다." 이어 그는 운남평을 돌아보며 말했다. "운 장주, 오늘은 운이 좋았소. 금환은 다음에 받으러 오겠소. 그때 는 오늘처럼 쉽게 물러가지 않을 거요." 운남평은 고소를 머금었다. "언제든지 오시오.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겠소." 나종령은 장내를 한번 둘러보더니 쏜살같이 몸을 날려 밖으로 사라졌 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한시름을 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운남평은 강옥봉의 앞으로 다가와 포권을 했다. "오늘 귀하의 도움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오." 강옥봉은 일부러 쌀쌀맞게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소. 본인은 운 장주를 도와 주려고 한 게 아니라 원수를 갚았을 뿐이니." 이어 그는 누가 뭐랄 사이도 없이 휑하니 몸을 돌려 운가장을 떠났 다. 운남평은 멍하니 멀어져 가는 그의 됫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그야말로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떠나가는군. 강호에 한바탕 돌풍이 몰아치겠구나." 운자개가 그에게 다가오며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아버님, 저자가 대체 누구이기에 저렇게 안하무인입니까7" 운남평은 그를 돌아보며 엄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개야, 말을 조심해라. 그는 우리의 은인이다. 어찌 말을 함부로 하느냐!" 운자개는 부친의 음성이 준엄한 것을 알고 움찔했다 "그건 저도 압니다만…… 그자가 아버님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건 방져서……"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느냐! 그가 만약 그러지 않았으면 우리 운 가장은 더욱 큰 곤란에 처했을 게 아니겠느냐?" 운자개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언가를 느낀 듯 탄성을 발했다. "아! 그렇군요." 운남평이 일부러 죽은 척을 하면서까지 회서방을 피하려 했던 것은 그들을 건드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혼도라는 자가 나타나 회서방의 고수들을 운가장 안에서 살해했으니 이치대로라면 운가장은 회서방의 보복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 단혼도는 분명히 회서방의 고수들을 살해한 것이 자기 개인의 원한 관계 때문이라고 못을 박았기 때문에 회서방에서 운가장에 시비 를 걸 건더기가 없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흔도는 운가장을 위해 서 회서방이라는 강적을 혼자 걸머진 것이다. 그러니 운가장의 인물들로서는 단혼도가 그렇듯 박정하게 떠난 것에 오히려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이제 알겠느냐?" 운자개는 부끄러운 듯 준수한 얼굴을 붉혔다. "예, 소자의 생각이 너무 짧았습니다." 운남평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면 됐다. 그러나저러나 회서방의 보복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 의 앞길이 염려되는군." 운자개를 비롯한 운가장와 인물들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 문득 운남평은 팔비도룡 부여송이 조급한 표정으로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부 형!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오?" 부여송은 강옥봉이 그냥 가버릴까 봐 마음이 조급했던지라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소궈만 질러댔다. "급한 일일세! 자세한 사정은 돌아와서 말하겠네." 그때 곽씨 남매도 부여송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운남평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그들의 됫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 다. 그러다 몸을 돌려 주위를 살펴본 그는 더욱 놀랐다. "아니, 그런데 봉랑은 어디로 갔느냐7" 운자개는 부친의 말에 흠칫 놀라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소비연 운봉랑의 모습은 중인들 틈에서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옆에 있었는데……?" 운자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대체 소비연 운봉랑은 어디로 간 것일까? 제6장 성심장 한편, 강옥봉은 운가장을 나와 번개같이 몸을 날려 태원성을 빠져 나 가고 있었다. 그는 부여송 등과 만나면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이 있을 거라고 짐작 하고 이대로 훌쩍 떠나 버릴 심산이었다. 한데 그가 막 태원성의 동문을 지나칠 무렵, "잠깐 걸음을 멈추시오." 낭랑한 외침과 함께 몇 개의 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 가! 강옥봉이 흠칫 놀라 보니 그들은 바로 매영령과 영호초, 그리고 하늘 색 유삼의 중년인이었다. 강옥봉은 비록 커다란 풍모를 깊게 눌러쓰 고 있어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 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시오?" 그는 짐짓 냉랭하게 물었다. 하늘색 유삼의 중년인이 빙그레 웃으며 포권을 해보였다. "하하…… 오해하지 마시오. 우리는 단지 흥악한 회서방의 무리들을 통쾌하게 무찌른 소년영웅과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싶을 뿐이외다." 그의 음성은 차분했고, 태도는 정중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강옥봉도 무턱대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나는 귀하들과 안면이 없는데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거요?" 중년인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담담하게 입을 열었 다. "하하…… 나는 탁천신수 진조영이라 하오. 소협 께선 혹시 이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신지……" 강옥봉은 강호 경험이 일천하여 견문이 극도로 좁았다. 그러니 어찌 탁천신수 진조영을 알겠는가? 그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나는 아직 견문이 넓지 못해 귀하의 이름을 알지 못하 오." 이 말에 매영령과 영호초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아직까지 강호인 중에서 탁천신수 진조영의 이름을 알지 못하 인뚤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탁천신수 진조영은 별호 그대로 한 쌍의 육장 만으로 대강남북을 뒤흔드는 절세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진조영의 무공은 실로 놀라워 수공만으로 따진다면 능히 강호 의 오대고수 안에 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지혜가 높고 심기가 깊어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진조영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껄껄 웃었다. "하하…… 이거 창피막심하오. 보잘것없는 내 이름을 소협 같은 강호 의 신성이 알 리가 없거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협의 성함과 사문 내력을 알 수 있겠소?" 강옥봉은 그의 눈빛이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도 흔들리 지 않고 정정한 것을 발견하고 그의 심기가 보통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조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건 사정이 있어 알려 드릴 수가 없소. 하지만 귀하께서 나의 무공 을 견식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상대해 드리겠소." 그의 이 당돌한 말에 진조영 본인보다도 매영령과 영호초가 더 분노 했다. 진조영이 어떤 고수인데 이제 갓 강호에 이름을 나타낸 풋내기와 손 속을 겨룬단 말인가? 특히 영호초는 처음부터 이 풍모를 깊게 눌러쓴 자식이 도대체 마음 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단번에 이 건방진 녀석의 콧대를 꺾어 주고 싶 었지만 진조영이 앞에 있는지라감히 발작하지 못하고 속으로 이만 부 득부득 갈고 있었다. 진조영은 강옥봉의 도전적인 말투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소협과 무슨 원한이 있다고 무공을 겨루겠소? 한데 소협께선 이제 부모님의 원한을 모두 갚으셨는데 달리 무슨 할 일이라도 있 소?" 강옥봉은 그의 의중을 몰라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건 왜 물으시오?" "하하…… 다름이 아니라 뚜렷하게 갈 곳이 없다면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소? 절대로 후회는 하지 않을 게요." 그제서야 강옥봉은 그의 의도를 짐작했다. 이제 보니 진조영은 그를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려는 것이었다. 강옥봉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도 겉으로는 제법 진지한 어조로 물 었다. "어디로 가자는 말이오?" 진조영은 그가 자신의 말에 솔깃해 하는 것으로 알고 쾌재를 부르며 말했다. "그곳은 바로 천하제일장인 성심장일세. 나는 성심장에서 팔대빈객 중 하나로 있지." "성심장?" 강옥봉은 금시초문인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조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 장은 무림의 사마외도를 척결하고 정의를 구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네. 특히 자네같이 젊고 뛰어난 인재들 의 참여를 바라고 있네. 자네가 본 장에 들어온다면 용이 바다를 만난 듯 자네의 웅지를 마음놓고 펴볼 수 있을 걸세." 강옥봉은 여풍운과 임표에게서 강호의 대략적인 정세에 대해서 설명 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나 그 중에서 성심장이란 문파는 들어 본 적이 얼었다. 그렇지만 진조영 같은 절세의 고수를 팔대빈객으로 삼고 있는 곳이라면 절대로 만만히 볼 수 없는 세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천홍이란 늙은이도 팔대빈객 중 하나일까?' 강옥봉은 내심 이러저러한 생각을 굴리다가 다시 물었다. "실례지만 귀장의 장주는 어느 분이시오?" 진조영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강옥봉의 마음이 자신에게 기울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하…… 븐 장의 장주께서는 무림의 명성을 덧없게 생각하시고 오 랫동안 은거했던 기인이신지라 내가 그분의 명호를 말해도 자 네는 알지 못할 걸세. 단지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무공이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러 당금 무림에서는 누구도 그분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 그의 말투는 어느새 강옥봉을 아랫사람 대하듯 변해 있었다. 강옥봉은 그의 말에 반신반의하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분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분이시오?" 진조영의 음성은 확신에 찬 것이었다. "나는 절대로 허튼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닐세. 그분은 이미 은거하시 기 전에 천하제일인이 되시었고, 지금은 아마 고금무적 에 거의 육박하고 계실 걸세, 자네가 본 장에 들어와 직접 그분을 뵙게 된다면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더욱 절실히 느낄 걸세." 진조영은 은근한 눈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본 장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무림대의를 위해 일 해 보지 않겠나?" 강옥봉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었다. 진조영은 그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강옥봉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그분이 그렇게 뛰어나다면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목적한 바를 이룰 게 아니겠소?" 처음으로 진조영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분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어찌 혼자서 천하의 모든 일을 해결 하실 수 있겠나? 자네가 본 장에 들어온다면 필시 중용될 것이 니 걱정하지 말게." 강옥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소. 나는 원래 어떤 것에도 예속되는 걸 싫어하 는 성격이라 귀장에 가입한다 해도 번거로운 일만 일으킬 게 뻔하 오." 이어 그는 진조영이 더 무어라기도 전에 휑하니 몸을 돌렸다. "이만 실례하겠소." 진조영은 어이가 없는지 멍하니 그의 됫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눈빛이 점차 냉혹하게 굳어졌다. 영호초가 이것을 눈치채고 기회다 싶어 잽싸게 강옥봉을 향해 몸을 날렸다. "멈춰라!" 그는 강옥봉의 머리를 타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조영은 이미 분노가 치솟았는지 영호초를 제지하지 않았다. 영호초는 더욱 기세 등등하여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강옥봉을 노려보았다. "흐흐…… 보자보자 하니까 네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너무 건방을 떨꼬 있구나. 진 대협께서 할 일이 없어 지금까지 네놈을 붙잡고 실 랑이를 하신 줄 아느냐?" 강옥봉은 그렇지 않아도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는지라 자연히 말투가 고울 리 없었다. "누가 그더러 그러라고 했소? 당신은 별걸 다 참견하는군." 영호초의 눈초리가 쭈욱 찢어졌다. "이 하룻강아지 같은 새끼가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지쩔여대는군. 네놈은 내가 누군지 아느냐?" "당신 같은 시렁잡배를 내가 어찌 알겠소? 제법 으스대는 걸 보니 그 의 하인이라도 되는 모양이구려." 영호초가 언제 이런 모욕을 당해 보았겠는가? 그는 더 이상 솟구치는 노화를 참을 수 얼어 버럭 노성을 지르며 그 에게 덤벼들었다. "죽일놈! 이 어르신네는 네놈을 저승으로 보내 줄 염라 대왕이시다!" 그의 양손이 활짝 벌려진 채 강옥봉의 목덜미를 덮어 왔다. 보기와는 달리 영호초의 공세는 몹시도 신속해서 강옥봉은 미리 경각 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쐐액! 강옥봉이 급히 허리를 굽히는 순간 영호초의 양손이 아슬아슬하게 그 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영호초는 숨쉴 사이도 없이 다시 연속적 으로 다가서며 양손을 풍차처럼 마구 휘둘렀다. 파파파! 주위가 세찬 경력에 휘말렸다. 이것이 바로 영호초가 자랑하는 영원십이수의 절초인 영 원공공이었다. 강옥봉은 미처 천룡보도를 뽑지 못한 채 우장을 들어 영호초의 공세에 맞서 갔다. 꽝! 폭음이 터지며, "으음……" 영호초가 짤막한 신음과 함께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의 안색은 당혹과 경악으로 크게 붉어져 있었다. 그는 설마 나이도 어린 강옥봉의 공력이 자신보다 고강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이다. 그가 어찌 강옥봉이 어려서부터 영약을 밥 먹듯이 해온 특이 체질이 라는 것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강옥봉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천룡보도를 뽑아 돌려 치면서 매서 운 공격을 가했다. 파앗! 섬뜩한 도광과 함께 운롱야마의 도세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영호초는 사색이 된 채 피하려 했으나 칼의 변화가 너무도 신속하고 날카로워 팔을 격중당하고 말았다. "크윽!" 그는 왼팔이 팔뚝 아래로 싹둑 잘려져 나가자 비명을지르며 뒤로 물 러났다. 그의 잘려진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주위를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 다. 영호초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흥악하게 일그러뜨린 채 비 오듯 땀을 흘렸다. 강옥봉은 일전에 그에게 고통을 당했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두 눈에 살기를 띤 채 다시 천룡보도를 휘두르려 했다. 순간, "잠깐!" 진조영이 강옥봉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네의 손속은 과연 날카롭군. 하지만 우리는 자네와 뚜렷한 원한도 없는데 어찌 이렇게 심하게 손을 쓰는가?" 진조영의 안색은 처음과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강옥봉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 외호가 왜 단혼도인 줄 아시오? 나를 건드리는 사람의 숨통을 반 드시 끊어 놓기 때문이오. 이번에도 그가 먼저 손을 쓰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가만히 있는 그를 해쳤겠소?" 진조영은 일순 말문이 막혀 한동안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좋네. 어쨌든 이번 일은 우리에게도 잘못이 있으니 더 이상 자네를 탓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자네가 본 장의 내막을 알고도 본 장에 거 역한다면 필시 살신지화를 면치 못할 길세. 내 말을 단순 한 공갈로만 여기지는 말게. 본 장은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닐세." 진조영은 한쪽에 서 있는 매영령과 아직도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인상 을 찡그리고 있는 영호초를 돌아보았다. "그만 가세." 이어 그는 먼저 신형을 날렸다. 영호초는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악독한 눈으로 강옥봉을 노려보다가 진조영의 뒤를 따라갔다. 순식간에 세 사람의 신형은 강옥봉의 눈에서 사라져 갔다. 그제서야 강옥봉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그에게서 멀지 않은 성벽을 향해 있었다. "이제 그만 나오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허핫…… 자네는 거듭 노부를 놀라게 하는군." 호탕한 웃음 소리와 함께 세 명의 인영이 성벽 뒤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부여송과 곽희연, 곽조웅 두 남매였다. 강옥봉은 그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세 분께서 일부러 운가장에서부터 저를 따라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부여송은 껄껄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무슨 사람이 그리도 무심한가?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 다시 말도 없이 훌쩍 떠나가는가…… 노부야 괜찮지만 곽소저가 얼마나 자네를 원망했는 줄 아는가?" 그러자 곽희연의 양 볼에 홍조가 서렸다. "노선배님은 무슨 말씀을……" 강옥봉도 역시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제게 약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허허……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우선 그 모자부터 벗게. 자네가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영 말하기가 거북하구먼." 강옥봉은 웃으며 풍모를 벗었다. 그러자 그의 탈속한 듯한 준수한 모습이 드러났다. 곽희연은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의 모습을 황홀한 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부여송은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래, 그 사정이란 게 뭔가? 우리들이 알면 안 되는 일인가? 그리고 등에 맨 보도는 도대체 언제부터 가지고 다녔나? 아니, 그것보다도 운가장에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어떻게 알았나7" 그가 쉴새없이 연거푸 물어 오자 강옥봉은 담담하게 웃으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얼굴을 가린 건 그때 운가장에서 제 얼굴을 알고 있는 인물이 몇 명 있어서 번거로움을 자초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그는 자신이 우연히 천룡보도를 얻었던 일과 성루에서 진조영 등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사실 등을 말했다. 하지만 여풍운과 임표에 관계된 사항은 조금도 말하지 않았다. 부여송은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돌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진조영 등은 자네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떠난 것 같네. 진조영은 심기가 깊고 무공이 높아서 결코 쉽게 상대할 수 있 는 인물이 아닐세. 그러니 자네는 앞으로 행동에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부 대협께서는 혹시 성심장이란 이름을 들 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부여송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금시초문일세. 그래서 아까 진조영의 말을 듣고 내심 깜짝 놀 랐네, 하지만 진조영 같은 인물이 겨우 팔대빈객 중의 하나에 속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세력도 회서방에 못지않을 것 같네." 그러다 돌연 부여송은 강옥봉을 바라보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자네는 하루 사이게 강호에서 가장 거대한 두 개 문파와 적 이 되었네. 그것은 결코 자네의 잘못이 아니지만, 성심장은 몰라도 회서방은 시비곡절을 따지는 자들이 아니니 앞으로 자네는 편할 날이 없을 걸세." "그쯤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자네의 배짱은 정말 마음에 드는군. 노부 같으면 벌써 보따리를 싸 들고 그들이 쫓아오지 못할 곳으로 줄행랑을 놓았을 텐데……" 부여송이 엄살을 부리자 강옥봉은 피식 웃었다. 그때 문득 그의 눈빛이 무섭게 번뜩였다. 부여송이 의아함을 느끼고 그를 바라보는 순간, 스윽! 강옥봉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한곳을 향해 쏘아져 갔다. "앗?" 난데없이 여인의 짤막한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부여송 등이 놀라서 보니 어느새 강옥봉이 성벽의 우묵한 곳에서 한 인영을 끌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에게 손목이 잡힌 채 밖으로 끌려 나온 인물은 놀랍게도 소복을 입 은 절세의 미녀였다. "운 언니!" 곽희연이 그녀를 보고 놀란 외침을 토해 냈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복의 미녀는 바로 운남평의 딸인 소비연 운봉랑이었던 것 이다. 강옥봉도 숨어서 자신들의 말을 듣고 있던 인영이 그녀일 줄은 미처 몰랐는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 었다. 운봉랑의 미간에 약간 고통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이 손 좀……" 그제야 강옥봉은 자신이 그녀의 여린 손목을 부서져라 움켜쥐고 있음 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손을 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운봉랑은 그에게 잡혔던 손목을 쓰다듬으며 살포시 고개를 수그렸다. "별 말씀을…… 그보다 저희 운가장을 도와 주신 것에 뒤늦게나마 감 사를 드립니다." 강옥봉은 그녀가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았음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 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저는 단지 부모님의 원수를 갚으려고……" 운봉랑이 곱게 웃었다. "호호…… 제게까지 숨기실 필요는 없어요. 소협은 강호인도 아니신 데 어찌 구지귀왕 등과 원한이 있겠어요?" 그녀가 웃자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는 것 같았다. 강옥봉 또한 순간적으로 아찔함을 느끼고 급히 그녀의 얼굴에서 고개 를 돌렸다. 계속 바라보고 있다가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소비연이 한번 웃으면 천하의 남자들이 모두 정신을 잃는다더니 과연…… 거짓이 아니었군.' 강옥봉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제하며 물었다. "제가 무림인이 아닌 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운봉랑은 슬쩍 곽희연을 돌아보았다. "연매가 저희 집에 온 이후 계속 소협에 대한 말만 하던 걸요?" 곽희연의 얼굴은 아예 홍당무가 되었다. "언니는…… 내가 언제……" "호호…… 시치미 떼긴 …… 나만 들었니? 여기 계시는 부 대협과 웅 아도 모두 들었는데……" 곽희연은 부끄러움에 어잴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아이…… 난 몰라." 부여송이 끌끌 웃으며 한술 더 떠 말했다. "흐흐…… 그러기에 노부가 뭐라더냐? 자고로 여인이란 좋아하는 남 자가 있어도 너무 겉으로 드러내면 못쓴다고 하지 않더냐? 흐흐……" 곽희연은 더 이상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운봉랑의 뒤로 몸을 숨겼 다. "하하……" 중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박장 대소를 했다. 운봉랑도 따라 웃었으나 그녀의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울적해 보였다. 부여송은 웃음을 멈추고 운봉랑을 바라보았다. "봉랑은 영존께도 알리지 않고 나온 건가?" 운봉랑은 조금 얼굴을 붉혔다. "예, 이분 소협께서 너무 갑작스레 떠나시기에 인사라도 드릴까 해서 급히 나오느라 미처 알리지 못했습니다." "음…… 그럼 운 장주가 몹시 기다리겠구나. 우리도 여기서 계속 떠 들게 아니라 어서 운가장으로 돌아가자." 강옥봉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전 매형과의 약속이 너무도 촉박하여 아무래도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 먼저 운가장으로 가십시오." 부여송은 몹시 섭섭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흠…… 이번에 자네와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도 없을 텐데 …… 그놈의 약속 때문에 술 한잔 같이 못 하고 혜어져야 하다니… …" 곽씨 남매와 운봉랑도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강옥봉은 그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다. 하나 여풍운과의 약속 기일을 지키려면 지금부터 쉬지 않고 달려도 될까말 까해서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들과 혜어지기로 했다. 막 몸을 돌리다 강옥봉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운봉랑을 돌아 보았다. "제가 운 소저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외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 까?" 운봉랑은 호수처럼 맑은 눈으로 준수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 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강옥봉은 씨익 웃었다. 다름이 아니라 회서방에서 얻으려고 했던 귀장의 가보가 무엇인지 궁 금하군요.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걸 물어서……" 운봉랑은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호호…… 아니에요. 사실 그것은 이제 곧 무림에 알려질 텐데요. 저 희 운문에서 내려오는 가보는 하나의 금팔찌인데 천양금환 이라고 한답니다." 강옥봉은 그녀의 미소를 보자 다시 마음이 울렁거렸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는 무언가에 놀란 사람처럼 급히 포권을 하며 몸을 돌렸다. 운봉랑은 그윽한 시선으로 그의 됫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곽희연은 문득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눈이 강옥봉에 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운 언니도 저분을……' 그녀는 운봉랑이 성격이 고고하고 남자들을 멀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정한 강옥봉의 신형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 곽조웅이 돌연 커다랗게 소리쳤다. "강 형은 될 수 있는 한 분양의 곽가보로 오셔서 누님의 기다리는 심 정을 위로해 주십시오!" 막 태원성을 넘어가던 강옥봉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어 그의 모습은 말과 함께 성 너머로 사라져 버렸 다. 부여송과 곽씨 남매, 운봉랑 등 네 사람은 서로 각기 다른 상념에 싸 인 채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휘이잉…… 때마침 불어오는 차디찬 새벽바람이 네 사람의 몸을 한바탕 쉽쓸고 지나갔다. 제7장 태극혼원신공 계속 극성을 부리면서 내리던 폭설은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멎기 시 작했다. 그러나 찬바람은 여전히 미친 듯 몰아치고 있어서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었다. 강옥봉은 풍모를 깊숙이 눌러쓴 채 눈 덮인 관도 위를 달려가고 있었 다. 다가닥, 다가닥…… 그가 타고 있는 말은 비록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명마는 아니었지만 제법 골격이 튼튼하고 건장한 놈인지라 미끄러운 눈길도 아랑곳없이 질풍처럼 내달렸다. 한데 태원성에서 십여 리쯤 떨어진 관도를 달려갈 무렵. 강옥봉은 멀지 않은 관도 위에서 몇 명의 인물들이 우뚝 선 채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말을 멈추었다. 히이잉! 갑작스럽게 그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놀란 말이 커다란 울음 소리를 토해 냈다. 강옥봉은 말을 안정시킨 후 길을 막고 서 있는 인영들을 바라보았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관도 위에 버티고 서 있는 인영들은 모두 네 명 의 흑의인들이었다. 그들은 전신을 흑포로 친친 감다시피 하고 있었 는데 하나같이 눈빛이 날카롭고 태양혈이 불룩한 것으로 보 아 내외공이 막강한 고수들임이 분명했다. "귀하들은 무슨 일로 관도를 막고 있소? 어서 비켜 주시오." 흑의인들 중 가장 우측에 있는 키가 작은 흑의인이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이 꼬마녀석아!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 될 텐데 어딜 가려 고 하느냐?" 강옥봉은 이들이 자신을 목적으로 삼고 나타났음을 알아차리고 바짝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 문득 그는 등뒤에서 인기척이 들림을 느끼고 번개같이 뒤를 돌 아 보았다. 그의 뒤에도 어느새 네 명의 흑의인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강옥봉은 움찔 놀랐다가 뒤에 서 있는 흑의인들 중에서 한사람이 운 가장에 나타났던 무연추혼 나종령임을 발견하고 눈을 번짹 빛냈다. "이제 보니 당신들은 회서방의 인물들이었군? 한데 무슨 일로 나를 가로막는 거요?" 나종령이 징그럽게 웃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흐흐…… 단혼도인지 개나발인지 하는 애송이놈아! 네가 본 방의 고 수들을 두 사람썩이나 살해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본 방에서는 피의 빛은 꼭 피로 받아 내고야 만다." 강옥봉은 이들의 정체를 알자 오히려 담대해졌다. "그것 참 바람직한 일이구려. 나도 마침 그렇소. 어디 내게서 피빛을 받아 내보시지!" 나종령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과연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은 놈이구나! 형제들, 더 볼 것 없소이다 저놈을 쳐죽입시다!" 그는 폭갈을 터뜨리면서 먼저 강옥봉을 향해 수중에 들고 있던 담뱃 대를 쭉 내뻗었다. 쾌액!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그의 담뱃대는 순식간에 강옥봉의 콧등을 찍어 왔다. 그와 동시에, "이놈! 죽어라!" "흐흐…… 감히 회서방을 건드리다니……" 그의 앞뒤를 에워싸고 있던 일곱 명의 회서방 고수들도 일제히 병기 를 휘두르며 덮쳐 왔다. 그들은 모두 회서방 내에서도 전서급에 해당되는 인물들이었기 해문 에 개개인의 공력이 강호에서도 능히 내로라 하는 무서운 실력의 소 유자들이었다. 그런 고수들이 한둘도 아니고 여덟 명씩이나 덤벼들자 아무리 대담한 강옥봉도 내심 섬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구나 그는 아직 무공을 익힌 경력이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협공을 받아 보기 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좋다. 이판사판이다!' 강옥봉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번개같이 등뒤에서 천룡보도를 뽑아 들 었다. 창!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눈부신 도광이 찬연히 피어올랐다. 강옥봉은 속전속결을 결심하고 처음부터 연속적으로 천애팔도 의 절초를 사용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콧등을 찍어 오던 나종령의 담뱃대를 허리를 굽혀 슬쩍 피한 후 천경양섭과 운롱야마의 두 초식을 연거푸 펼쳐 냈다. 파파파파…… 삽시간에 주위는 온통 시퍼런 도광으로 물들어 버렸다. 나종령은 설마 강옥봉의 반격이 이렇게 신속할 줄은 몰랐는지라 아차 하는 순간에 전신이 도광에 쉽싸이자 사색이 되었다. "이얍!" 그는 사력을 다해 담뱃대를 휘둘렀다. 하나, 팟! 팟! 도광에 부딪힌 담뱃대는 마치 수수깡처럼 잘려 나가고 그의 몸은 핏 줄기에 휘감겨 버렸다. "크악!" 그는 삼 도를 격중당하고 허리가 두 동강난 채 쓰러지고 말 았다. 이를 본 일곱 명의 전서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들은 아직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강옥봉의 도법이 이토록 무서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그들이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사이, 휙! 휙! 휙! 강옥봉은 오히려 그들에게로 육박하며 연거푸 일초 천풍소화부터 사 초 양초관사까지 네 초식을 쉬지 않고 휘둘러댔다. 구름 같은 도세 가 장내를 쉽쓸었다. "크악!" 한 사나이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목이 떨어지면서 피가 사방으로 뿌 려졌다. "크악!" 동시에 뒤쪽으로 다가들던 두 인물은 각기 팔 하나씩을 싹뚝 잘린 채 비실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나머지 네 명의 흑의인들은 동료들이 죽고 다치자두 눈이 발칵 뒤집 혔다. "죽어라! 이 꼬마놈아!" "지옥에나 떨어져라!" 그들은 일제히 노호성을 지르며 강옥봉을 향해 덮쳐 왔다. 강옥봉은 아직 공력이 부족하여 연거푸 네 개의 초식을 펼쳐 내자 손 발이 떨리고 숨이 가빠 왔다. 한데 그때 상대들의 공격이 집중되자 일시지간 손발이 크게 어지러워 졌다. 파파팍! 네 명의 흑의인들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마구 덤벼들자 강옥봉은 미 처 공격할 틈을 찾지 못하고 뒤로 계속 밀려났다. 어느새 그의 어깨 와 등에는 가벼운 상처가 나 있었다. 강옥봉은 이렇게 나가다가는 참패를 면치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 돌연 멀리서 우렁찬 장소성이 들려 오지 않는가? "우우--!" 장소성의 위력은 실로 막강하여 근처의 나무에 쌓여 있던 눈들이 우 수수 떨어지고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 장소성을 듣자 흑의인들은 더욱 기세 등등해졌다. "온칠호님이 오신다!" 그들은 기뻐하며 더욱 맹렬하게 강옥봉을 덮쳐 갔다. 강옥봉은 장소성의 주인이 회서방의 인물임을 알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상대들의 공격과 공격 사이의 가느다란 틈을 노려 그 사이로 몸 을 던지다시피 날렸다. 동시에 그의 천룡보도는 소리탄차와 휘풍명 월, 편효축차의 절초들을 연거푸 뿜어 내고 있었다. 파파파파팍! 도세가 빗발치듯 주위를 휩쓸어 갔다. 천룡보도는 무시무시한 강기를 그어 내면서 노도와 같이 밀려나갔다. 그와 함께 비명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으와악!" "크윽!" "케에엑!" 네 명의 흑의인들은 단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천룡보도에 고혼 이 되고 말았다. 허리가 두 동강으로 잘려진 자…… 가슴이 떡 벌어져 피가 솟구치는 자…… 장내는 그야말로 한 폭의 지옥도를 그려 내고 있었다. 강옥봉 또한 무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비록 단번에 흑의인들을 모조리 도륙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진력 이 떨어져 등에 삼 검을 맞고, 허리와 다리에 각기 이 도씩을 격중당했다. 특히 다리에 당한 상처는 제법 심각해 핏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부상당한 부위에서 핏물이 나오자 그의 전신은 삽시간에 피투성이로 변해 버렸다. 장내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순간,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으흐흐흐……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이렇게 악랄하다니 …… 절대로 그냥 살려 둘 수 없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옥봉의 전면에 회색 장포를 걸친 노인이 떨 어져 내렸다. 세 갈래의 긴 수염을 기르고 표정에서 음산한 기운이 풍기는 노인이 었다. 특히, 눈초리가 세모로 쭉 찢어졌는데 그곳에서는 연신 독사의 광망을 방불케 하는 벽돌색 안광이 번뜩이고 있어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케했다. 팔이 잘린 채 뒤로 물러나 있던 두 명의 흑의인들이 반색을 하고 회 의노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온칠호님! 저 꼬마놈은 정말 악독합니다." 회의노인은 회서방의 다섯 계급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온서급의 인물이었다. 회서방의 온서급은 다른 방의 장로 격으로, 비단 무공이 고강 할 뿐 아니라 하나같이 전대의 이름 높은 마두들이거나 명성이 천하를 진동하는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능히 일파 의 패주가 되어도 부족하지 않은 인물들이 허다했다. 더욱더 공포스러운 것은, 이토록 무시무시한 온서급 인물들이 회서방 내에 도대체 몇 명이나 있는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회의노인은 그들 중에서 일곱 번째의 온서였다. 물론 일곱이라는 숫자는 그의 서열이 일곱 번째라는 말이 아니라 그 가 온서급 인물 중에서 일곱 번째로 회서방에 가입했다는 말이었다. 그자의 이름은 최혼가람 고복양이라고 했다. 그는 이미 삼십 년 전부터 대강남북을 공포에 떨게 한 거마로, 그의 악행을 보다 못한 구파일방에서 제거하려 했으나 끝 내 뜻을 이루지 못한 일세의 흉인이었다. 고복양은 벽돌색 광망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강옥봉을 노려보았다. "피라미 같은 놈! 감히 단신으로 회서방에 대항하려 하다니…… 네놈 의 용기는 가상하다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강옥봉의 코앞으로 닥쳐 들며 가볍게 우수 를 내뻗었다. 꾸아아아앙…… 동시에 어마어마한 장공이 강옥봉의 전신을 짓눌러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압력이 어찌나 가공했던지 장세가 미처 닿기도 전에 강옥봉의 옷 자락이 여기저기 터져 나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강옥봉이 처음 겪어보는 무서운 공격이었다. 강옥봉은 자신이 일생일대의 강적을 만났음을 직감하고도 추호 의 물러섬도 없이 천룡보도를 휘두르며 맞서 갔다. 그는 사력을 다해 보도를 휘둘렀으나 압력이 너무 강해 도법을 제대 로 펼치기가 힘이 들었다. 그는 두 손으로 칼자루가 부서져라 움켜쥔 채 느릿느릿 천애도 중의 소리탄차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그의 칼이 고복양의 장세를 뚫을 때마다 괴이한 음향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고복양은 상대가 비록 느리지만 자신의 엄청난 장공 하에서도 도법을 펼쳐 오자 내심 크게 놀랐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꼬마놈의 도법이 이 정도라니…… 아예 더 크 기 전에 후환을 제거해 버려야겠다!' 그의 눈에서 섬뜩한 살광이 뿜어 나왔다. 고복양은 급히 위치를 바꾸어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쌍장을 교묘하게 휘둘렀다. 쿠아아앙! 무시무시하고 가공할 경풍이 강옥봉의 옆구리를 휩쓸어 왔다. 강옥봉은 싸워 본 경험이 적었기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몸이 반 사적으로 뒤로 젖혀지면서 가슴 부분에 허점을 노출시켰다. "흐흐흐……" 고복양은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강옥봉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후 려쳤다. 강옥봉은 급히 몸을 세우면서 동시에 상대의 어깨를 향해 천룡도를 내리치고는 옆으로 피했다. 하나 어느새 그의 가슴팍부분 옷자락은 먼지로 화해 있었다. 단순히 장세가 스치기만 했는데도 강옥봉은 가슴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 꼈고 코피가 터져 나왔다. 쑤아앙! 그때 다시 고복양의 쌍장이 번개같이 밀려왔다. 강옥봉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진동력에 의해 뒤로 주르륵 밀려났 다.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기혈이 역류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그는 목구멍에서 핏덩이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으나 억지로 집어삼키 고는 급히 진기를 운용해 기혈을 환원시켰다. 그사이 다시 고복양은 무서운 경풍을 날렸다. 그의 이 무시무시한 장공은 마도의 칠대장공 중 하 나인 대유장이었다. 그 위력은 실로 놀라워 강옥봉은 제대로 도법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계속 수세에 몰려 있었다. 강옥봉은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몸을 비스듬히 솟구쳐 고복양의 대유장을 피하려 했다. 고복양은 악독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네놈이 살아서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등시에 우장을 기묘하게 후려쳐 강옥봉의 머리통을 노려 왔다. 꾸아앙! 거센 경풍이 집어삼킬 듯 세차게 몰아쳤다. 하나 그 찰나적인 순간에 이미 한숭을 돌린 강옥봉은 조금도 당황하 지 않고 몸을 빙글 돌리면서 천룡보도를 후려치며 반격했다. 파파파팍! 그는 쉬지 않고 다섯 개의 초식을 날렸다. 고복양은 설마 아직도 강옥봉이 반격할 여력이 남았을 줄은 몰랐는지 라 대경 실색하여 급히 쌍장을 휘둘렀다. 꽝! "크악!" 강옥봉은 정신없이 도를 휘두르다 가슴에 일장을 격중당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하나 고복양 또한 손가락이 몽땅 잘려져 나가 피를 흘렸다. "으윽……" 고복양은 상대의 도가 절세의 보도임을 깜박 잊고 맨손으로 도광에 맞서다가 손가락이 모두 잘려 나가자 고통에 눈을 부릅떴다. "이놈을……!"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아예 강옥봉을 박살내 버릴 생각으로 그가 쓰 러진 곳으로 날아갔다. 한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슴에 정통으로 대유장을 격중당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던 강옥 봉이 벌떡 일어나며 마구 보도를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으앗?" 고복양은 그야말로 질겁하고 급히 허리를 돌려 퍼했다. 하나 어느새 그의 어깨는 살이 한줌이나 떨어져 나가 핏줄기를 뿜어 내고 있었다. 파파팟! 다시 강옥봉의 천룡보도가 빗살처럼 다가왔다. 고복양은 강옥봉의 무공이 이토록 심후할 줄은 몰라 사색이 된 채 뒤 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머리칼이 우수수 잘려 나가고 이 마가 칼에 스쳐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고복양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마터면 이번에 그는 그대로 머리통이 잘려질 뻔했던 것이다. 고복양은 더 이상 상대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그는 뒤로 슬슬 물 러서더니 돌연 몸을 솟구쳐 날아갔다. 팔이 잘려진 두 명의 흑의인들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던 강옥봉은 겨우 보도를 칼집에 꽃았다. 하나 칼을 채 반도 꽃기 전, 쿵! 그는 입으로 피분수를 게워 내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상세를 억누르며 무리를 한 탓에 기혈이 역류한 것이다. * * * 휘잉…… 한동안 내리지 않던 눈발이 다시 세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강옥봉은 핏덩이를 토하며 내리는 눈 속에 쓰러진 채 깨어날 줄을 몰 랐다. 그때 돌연 한 명의 노승이 나타났다. 노승은 야윈 체격에 회색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하얗게 센 눈썹에 은빛 수염이 가슴 앞까지 늘어져 있는 노승의 모습 은 장엄하고도 평정한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무척 야위고 허약한 체 격이었지만 전신에는 기이한 힘이 서린 풍채였다. 노승은 강옥봉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 한동안 그를 내려다보았 다. 그러더니 돌연 탄식을 토하며 허리를 굽혀 강옥봉의 명문혈 을 누르고 한 가닥 진기를 주입하여 역류된 기혈을 환원시켜 주었다. 강옥봉은 고복안의 대유장에 가슴을 강타당한 후 심한 상처를 입었었 다. 하나 어려서부퍼 온갖 영약을 복용한 탓에 그의 기질이 남달라서 쉽 사리 상세가 악화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복양이 다시 덮쳐 왔을때도 벌떡 일어나 도를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애도가 워낙 심한 진력을 필요로 하는 무공인지라 그의 상 세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거의 치명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노숭은 몇 차례 진기를 주입하고는 천천히 손을 떼었다. 강옥봉을 바라보는 노승의 인자한 눈에는 희미한 놀라움의 빛이 떠올 라 있었다. "이 아이의 근기는 정녕 처음 보는 것이로고…… 어찌 이리도 쉽사리 상세가 아물어진단 말인가!" 과연 강옥봉의 얼굴은 조금 전의 창백했던 상태에서 어느새 조금씩이 나마 혈색이 돌고 있었다. 노승은 잠시 강옥봉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눈 내리는 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노승은 무언가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한데 이때 한 가지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리는 눈발이 노 승의 몸에서 두 치쯤 떨어진 곳에서 저절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 가? 어찌 눈발이 사람의 몸에 닿기도 전에 튕겨 나간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노승의 회색 승포에는 조금의 눈도 묻어 있지 않았다. 또한 무릎까지 차는 눈길을 걸어왔음에도 노승이 신고 있는 허름한 짚신도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바로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노승의 공력이 이미 한서불침지신을 넘어서 전설적인 금강불괴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묵묵히 허공을 웅시하고 있던 노승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인연이라는 게로군. 마땅한 전 수자를 찾지 못해 신공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 했더니 이런 곳에서 이 아이를 만나게 될 줄이야…… 아미타불……" 혈기가 다시 정상으로 통하자 강옥봉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떴다가 인자한 얼굴의 노승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자 깜 짝 놀랐다. 그는 급히 일어서며 인사를 했다. "노선사께서 저를 구해 주셨군요. 정말 이 은혜를 어찌 갚아 야 할지……" 노승은 손을 내저었다. "소시주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속히 심신을 수습하여 혼연일 체가 되도록 하게." 강옥봉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노승의 표정이 너무도 엄숙한지라 급히 노숭의 지시대로 정좌를 한 채 심신을 가다듬었다. 노숭은 다시 한숨을 짓더니 나직이 말했다. "노납이 이제부터 한 가지 무공심법을 전해 주겠네. 이것 의 이름은 태극혼원신공이라 하는데 우주 삼라 만상의 이치가다 이 안에 담겨 있네. 이것을 익힐 수 있을 지 없을지는 오직 시주의 재질에 달려 있네." 그리고 조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폐목명심, 악고정사, 만념집일, 혼 원태극……" 강옥봉은 아무 생각 없이 노승이 부르는 구결을 외우는 데만 정신을 집중했다. 노승의 구술은 거의 한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노승의 말대로 태극흔원신공의 구결은 심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을 가히 인간을 반인반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는,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신공이었다. 하나 그만큼 박대하고 정심하기 이를 데 없어 범인이라면 평생 을 연마해도 일 성도 이루지 못할 난해한 무공이었다. 이것은 노승이 수십 년을 참오한 끝에 창안한 것이어서 당금 무림에 서는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을 뿐더러, 이런 신공이 있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전무한 형편이었다 다행히 강옥봉은 총명 절세한 인물인지라 비록 어렴풋이나마 태극흔원신공의 요체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강옥봉은 인연이 많은 사람이었다. 노승의 도움으로 사경에서 구출되었고, 또 지금은 천하제일의 신공까지 터득하게 되었으니 훗날 그의 진경이 어디까지 이를지 그 누가 있어 짐작 할 수 있겠는가? 물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강옥봉은 노승이 주입시켜 준 진원이 체내에서 노도처럼 유동 하여 불타는 듯한 열기를 걷잡을 수 없었으나 꾹 참고 구결만을 암송 했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목욕을 한 상태였다. 갑자기 그의 경맥을 흘러다니던 진기의 힘이 강해지며 미친 듯이 그 의 생사현관을 향해 치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꽝! 순간, 강옥봉은 머릿속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정신을 차린 강옥봉은 내심 깜짝 놀랐다. 머릿속이 명경지수같이 맑아지며 심안이 뜨여져 주위의 경물이 일목요연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모공의 하나하 나에까지 힘이 충만하여 능히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갈았 다. 이것은 바로 그의 생사현관이 타통된 결과였다. 생사현관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타통시키기를 염원하는 것으로, 이것이 타통되면 아무리 진력을 사용해도 진력이 끊이지 않고, 어떤 무공이든지 마음먹은 대로 펼칠 수가 있는 것이다. 강옥봉은 그 동안 절세의 도법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공이 달려 그 위력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없었는데 이제 생사현관까지 타통되었으 니 어느 누가 그의 천룡도를 받아 낼 수 있겠는가? 노승은 강옥봉의 얼굴에 신기가 어린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 다. "소시주는 근기가 심후하고 재질이 뛰어나 무림의 기둥감이니 앞으로 노력하여 악을 제거하고 무림의 평온에 이바지하기 바라 네." 강옥봉은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노선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소시주의 관상을 보니 앞으로도 복연이 끊이지 않겠네. 하지 만 도화살과 천살성의 기운도 있으니 되도록 여인들 을 조심하고 하늘의 호생지덕을 대표하여 살생을 삼가게." 노숭의 몸은 어느새 허공을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강옥봉은 깜짝 놀라 급히 외쳤다. "노선사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함자라도 알려 주십시오." 노승의 몸은 어느새 아득히 멀리 사라져 있었다. 바람을 타고 노승의 음성이 가느다랗게 들려 왔다. "노승은 얼마 후면 세상을 하직하니 굳이 이름 같은 걸 알아서 무엇 하겠나? 하지만 노승과 소시주는 아직 인연이 끝나지 않았으니 한 번 은 다시 만날 수 있을 걸세……" 노승의 모습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강옥봉은 허탈한 심정으로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에 한 가닥 기대를 갖고 섭섭한 마음 을 달랠 수밖에 엄었다. 그는 멍하니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발길을 옳겼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내리는 눈보라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제8장 청삼문사 한동안 평온하던 강호무링이 몇 가지 일로 인해 시끌벅적해졌다. 그 첫 번째는 유령동부에 대한 소문이었다. 유령동부는 원래 이백여 년 전의 천하제일마였던 유령천 자의 거처로, 그 안에는 온갖 진귀한 무공비급들과 영약, 그리고 금은보화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더욱더 무림인들을 흥분시키 고 있는 것은 그 당시에 유령천자가 거의 천하를 독보하다시피 했던 유령보의 비급도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유령보는 비단 우내칠대무학 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누구나가 인정해 마지않는 고금무적의 보법이었다. 당시에 유령천자는 무림 의 십대고수들의 합공 속에서도 이 유령보를 펼쳐 그들을 마음껏 농락했다고 한다. 그 동안 무림에서는 유령동부에 대한 소문만 무성했을 뿐 그곳이 어 디에 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한데 몇 달 전에 유령동부의 위치가 적힌 유령고전이 나타났다는 소 문이 들리더니 이번에는 한술 더 떠 그 고전에 적힌 유령동부의 위치 가 황산의 절영곡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 소문은 전무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족한 것이었다. 무림인들은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환산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무림대이동이라 표현할 만한 엄청난 광경이 었다. 하나 그토록 많은 무림인들이 이 잡듯이 뒤졌지만 황산에서 절영곡이 란 지명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이렇게 되니 무림에는 온갖 의혹과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흥분하여 누가 유령동부의 위치를 알아 냈다는 소문만 들리면 벌메같이 몰려들어 혈겁을 저질렀다. 때문에 무림은 일대혈풍에 휩싸이게 되니 유령동부는 모습을 드러 내기도 전에 벌써 수많은 피와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소문은 무림에 성심장이라는 새로운 문파가 출현했다 는 것이다. 사실 무림에서 새로운 문파가 출현한다는 것은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 하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문파가 세워지고 또 무너지는 곳 이 바로 무림이기 때문리다. 하나 성심장의 경우만은 극히 예외에 해당됐다. 이번에 출현한 성심장의 고수들은 거의 당금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 에 드는 고수일 뿐 아닐라, 알려진 바에 따르면 르들도 성심장에서는 이류급 인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퍼지자 무림인들은 성심장의 장주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했 다. 하나 성심장의 장주에 대한 모든 것은 철저한 비밀로, 정심장 내에서 도 신분이 극히 높은 몇몇 고수들만이 알고 있다고 해서 더욱더 신비 와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러저러한 일로 해서 성심장은 출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흑도를 석권하고 있는 회서방과 함께 천하무림의 이대세력으로 공 인받게 되었다. 세 번째 소문은 북방무림에 한 명의 무서운 소년고수가 출 몰했다는 것이었다. 그 소년고수는 한 자루 기이한 보도를 쓰는데, 그 솜씨가 어찌나 뛰 어난지 누구도 소년에게 삼 초 이상을 받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회서방의 전서급 인물들이 연거푸 그에게 격파당하고, 특히 칠호 온서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최흔가람 고복양마저 그에게 손가락을 모두 잘린 채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져 천하를 경악케 했다. 알려진 바로는 그 소년고수는 이름과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다만 스 스로를 단혼도라 부른다고 했다. 그러자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소년고수를 '무영신룡단혼도 '라 부르기도 했다. 어쨌든 이 무영신룡단혼도라는 긴 이름은 가뜩이나 유령동부와 성심 장의 일로 소란스러운 무림을 더욱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고도 낙양 낙양은 동한의 고도이며, 중국의 오대고도 중 하나 이다. 주나라 때는 낙읍이라 불렸고, 지형이 험준하고 견고하여 옛부 터 전쟁이 터지면 병가들이 서로 다투는 곳이었다. 대도직여발, 춘일가기다. 오릉귀공자, 쌍쌍명옥가. 넓은 길은 꼿꼿한 머리털 같고, 봄날엔 아름다운 맛이 더욱 많이 풍 긴다. 오룽의 귀공자들은 쌍쌍이 말을 달려 안장의 옥 소리가 듣기 좋 게 울리네…… 비록 봄은 아직도 멀었지만 낙양의 넓은 길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 다. 금화루. 금화루는 낙양의 동문 대로에 위치한 크고 아름다운 주 루였다. 금화루의 점소이들은 특별히 교육을 받아 하나같이 친절했 고, 음식도 맛이 있어서 항상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때는 정오경. 밖에는 아직도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금화루 안은 북적거 리는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를 지경이었다. 이때 돌연 청삼을 걸친 문사 하나가 유유자적하게 금화 루로 올라왔다. 그는 손에 조그만 책상자를 하나 들고 있었다. 나이는 사십 세 가량. 키는 훤칠하게 크고 얼굴은 야윈 편인데 긴 수염을 세 가닥으로 기르 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의젓한 풍도가 엿보였다. 그러나 그의 차림새로 보아 정 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낙척서생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금화루를 한바퀴 휘 둘러보더니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이어 의자에 앉는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것 이 아닌가? 식사를 하고 있던 손님들은 그의 행동에 놀라 일제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중년인은 중인들의 시선을 받고도 태연하게 조그만 책상자를 열었다. 순간 그의 정체가 드러났다. 책상자 속에는 수십 개의 대나무 조각이 담긴 죽통이 나왔던 것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대나무 조각이 든 죽통을 자신의 앞에 놓았다. 그리 고는 한 폭의 흰 천을 꺼내더니 자신의 뒤편에 걸어 놓았다. 거기에는 용비봉무의 초서체 글씨가 커다랗게 쓰 여 있었다. -- 신복! 상통천문 하달지리. 길흉화복 만산무불통지! 그 글을 읽자 사람들은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피…… 알고 보니 점쟁이였군." "흐흐…… 간도 크군. 감히 금화루 안에 들어와서 영업을 하려 하다 니……" "저 청삼을 보게나. 최소한 십 년은 입었겠는데……" "그렇군. 천문과 지리에 통달했다는 자가 어찌 저런 몰골을 할 수 있 겠나?" 조롱하고 비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꼬리를 물고 이꺼졌다. 그러나 청삼문사는 그 비웃음의 대상이 자기가 아닌 것처럼 여전히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금화루의 점소이들은 내심 청삼문사가 못마땅 했으나 말썽을 일으킬까 봐 그를 나가라고 하리 못했다. 그때 한 사람이 불쑥 청삼문사에게 다가왔다. "하하…… 귀하는 정말로 길흉화복을 모두 점칠 수 있소?" 청삼문사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은 오만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가 나서자 주위의 사람들은 청삼문사를 비웃던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오히려 그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저 금룡보의 망나니가 언제 왔던가?" "저 떠돌이는 오늘 일진이 사납군. 하필이면 화화태세 팽 진을 만나다니, 쯧쯧……" 청삼문사는 화화태세 팽진을 주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점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당장 시험해 볼 수 있소이다." "흐흐…… 좋소." 팽진은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본 공자의 오늘 운세는 어떻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삼문사는 손을 내저었다. "서두르지 마시오. 점을 보는 것에도 법도가 있는 법이오. 공자는 어 떤것으로 보시겠소?" 팽진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것으로 보다니요?" "가장 간단한 것은 관상으로 점을 보는 것이오. 이걸 인복이라 하오. 두 번째로는사주로 보는 방법이 있으니 이걸 지복 이라 하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죽간을 뽑아 하늘의 뜻을 물어보는 방법이 있으니 이것을 천복이라 하오. 공자는 이 중 에서 어느것을 원하시오?" 팽진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간단하게 관상으로 해주시오." 청삼문사는 팽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청삼문 사의 눈빛이 일순간에 번뜩였기 때문에 팽진은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 으로 몸을 움찔했다. 하나 그 눈빛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청삼문사는 고개를 갸우뚱하 며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윽고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의 오늘 운수는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소." 팽진의 눈초리가 쭈욱 올라갔다. "왜 그렇소?" 청삼문사는 나직이 탄식했다. "공자의 양미간에 음기가 가득 차고, 눈동자에 색살이 끼였으니…… 혹시 공자는 최근에 여인을 간살한 적이 없소?" 팽진은 찔끔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곧 안색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따럭 고함을 질렀다. "이 돌팔이놈아! 너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본 공자는 천하의 협객 금룡검 팽수의 자제이거늘 어찌……" 청삽문사는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 "금룡검이 아니라 천자의 아들이라도 사흘 내에 죽는 것은 마찬가지 요." 팽진의 안색이 돌처럼 굳어졌다. "사흘이라고?" "색살은 아직까지 사흘을 넘겨 본 적이 없는 음독한 것이오." 팽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몇 차례나 변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청삼문사는 실눈을 뜨고 팽진의 모습을 지켜보더니 담담하게 웃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복에 의한 것, 지복을 한번 보시겠소?" 팽진의 얼굴에 금방 희색이 돌았다. 방금까지도 돌팔이 어쩌고 하던 말투까지 싹 변해 버렸다. "그렇다면 지복으로 인복을 누를 수 있단 말이오?" "이를 말이오? 사람이 어찌 땅의 운세를 이길 수 있겠소? 공자의 태 어난 생년월일과 시를 말해 보시오." "나는 정축년 정월 십이일 진시에 태어났소." 청삼문사는 잠시 손가락을 짚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군, 좋아…… 그런데……" 팽진은 그가 좋다는 말을 하자 히죽 웃다가 그의 말끝이 이상하게 변 하자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왜 그렇소?" "공자의 출생일은 매우 좋소. 정축이면 소띠 생인데 소띠가 한겨울에 태어났으니 일 안 하고도 놀고 먹을 수 있는 아주 편안한 운세라고 할 수 있소. 그런데 태어난 시가 문제구려." "시가 문제라뇨?" "진이라면 곧 북두칠성을 가리키는데, 소가 북두칠성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건 곧 되지도 않을 일만 꿈꾸고 있다는 뜻 아니겠소? 게다 가 소가 북두좌에 오를 수 있는 길은 오직 죽어서 별자리에 나 올라가는 길뿐이니 제 명에 죽기는 힘들다는 운세요." "아니 뭐라고!" 팽진은 발연 대로하여 즉시라도 청삼문사에게 덤벼들듯 했다. 하나 청 삼문사는 정색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되겠군. 이제는 천복을 보는 수밖에 없겠소." 이어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죽통을 가리켰다. "공자께서는 이 안에서 아무거나 하나 뽑아 보시오." 팽진은 화를 폭발할까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솟 구쳐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죽통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죽통 안을 힐끔거리며 꼼지락거리던 팽진은 하나의 대나무 조각을 꺼내 들었다. "여기 있소." 그가 뽑은 대나무에는 부유하다는 뜻의 유 자가 쓰여 있었다. 이것을 본 팽진은 득의 양양한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 이걸 보니 본 공자는 평생을 부유하게 살겠다는 하늘의 뜻 이로군. 천복이 이렇게 좋으니 그깟 지복이나 인복이 무슨 상관이 있 겠소?" 그는 조금 전 죽통을 뒤적거리면서 일부러 보아 둔 글자를 집어 내고 는 희색이 만면하여 제멋대로 씨부렁거렸다. 하나 청삼문사의 안색은 무거움을 넘어 침통스럽기조차 했다. "허어…… 오늘 공자의 일진은 정말로 좋지 않구려." 팽진은 움찔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분명 이 글자가 나왔는데……"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아서는 알수가 없는 법이오. 이 '유'라는 글자를 잘 뜯어보시오. 옷은 하나인데 사람은 둘이오. 그러 니 싸움이 날 수밖에 더 있겠소?" "게다가 입 구 자가 가운데 있으니 결국 공자는 그 입 때문에 다 른 사람과 싸우다 옷을 모두 빼앗긴다는 점괘란 말이오." 팽진은 웃어야 좋을지 화를 내야 좋을지 몰라 우스황스런 표정이 되 었다. 그러다 점차로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상기되었다. 그는 기분 같아서는 단숨에 이 재수없는 점쟁이 놈을 때려 죽이고 싶 었으나 왠지 찜찜한 것 같아 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일어섰다. "에이, 재수 옴 붙었군." 그가 막 몸을 돌려 가려 할 때 청삼문사가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공자, 잠깐……" 팽진이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청삼문사를 노려보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게냐?" 그의 입에서 험악한 욕설이 나왔으나 청삼문사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담담했다. "점을 보았으니 복채를 내셔야 할 거 아니겠소?" 말과 함께 청삼문사는 손가락 하나를 펴보였다. 팽진은 눈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은자 한 냥이라구? 그따위 엉터리 점을 보아놓고 그렇게 비싸게 받 아먹으려 하다니……" 그러나 청삼문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열 냥이란 말이냐?" "아니오." 팽진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런 사기꾼 같으니라구. 설마 복채로 백 냥이나?" "공자는 몹시 통이 좁구려. 나는 지금 천 냥을 얘기하고 있소." 청삼문사의 말에 팽진은 물론 중인들의 안색까지 싹 변했다. 은자 천 냥! 은자 열 냥이면 다섯 식구가 두 달은 먹고 살 수 있는 때였으니, 천 냥이라면 상상도 못 할 금액이 아닌가! 그런데 청삼문사는 지금 복채 로 천 냥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팽진의 얼떨떨한 표정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그로 말하자면 낙양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망나니 중의 망나니 로, 부친의 후광을 등에 업고 온갖 악한 짓을 일삼는 자였다. 그 동안 솟구치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그는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대갈일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돌팔이 녀석아! 이거나 먹어라!" 동시에 우수를 꼿꼿이 세워 수휘비파의 초식으로 청삼문사 의 얼굴을 찔러 왔다. "허어! 성질이 급하시군." 청삼문사는 태연하게 찔러 오는 팽진의 손끝을 지켜보다가 돌연 가볍 게 몸을 비틀었다. 빙글! 이어 전제비홍의 일식으로 섬전처럼 팽진의 완맥을 낚아챘 다. 그의 수법은 너무도 쾌속하여 설령 무림의 절정고수라도 피하기 가 힘들 지경이었다. 팽진의 입에선 즉시 고통스런 신음이 새어나왔다. "큭!" 청삼문사가 완맥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후안무치한 것이 점쟁이에게 점을 보고 복채를 내지 않는 것이오. 공자는 당당한 명문세가의 자손으로 어찌 그렇게 뻔뻔 스러운 일을 하려 하시오?" 청삼문사는 팽진의 장삼 앞설을 확 열어제쳤다. 장삼 안에선 잡다한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비수와 은자 몇 덩어리, 그리고 연미표 등의 물건이었는데, 그 중에 는 묘한 것도 하나 있었다. 언뜻 보기엔 학을 세공한 청동조각 같았다. 그러나 견문이 조금이라 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 물건이 바로 하오문의 향학동 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향학동은 바로 창문을 통해 음약 따위를 불어 넣는 고약한 물건이었다. 청삼문사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당당한 금룡보의 소보주가 이런 것을 갖고 다니다니…… 쯧쯧…… 너는 아비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구나……" 돌연 청삼문사는 팽진의 장삼 자락을 쭉쭉 찢었다. 순식간에 팽진은 보기 흉한 알몸뚱이로 변했다. 이어 청삼문사는 팽진의 알몸을 금화루의 계단 아래로 집어던졌다. 쿵! 팽진은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 차디찬 땅바닥에 벌렁 나자빠졌다. 그 모습을 보던 중인들은 일제히 박장 대소를 퍼뜨렸다. 청삼문사의 처사에 그들은 속이 다 후련해졌던 것이다. 팽진은 눈바닥에 나뒹굴 때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가 너무 아파 눈물 이 핑 돌았다. 게다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이니 엄동 설한에 얼마나 춥겠 는가? 그는 고통과 추위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이를 닥닥 부딪히며 청삼 문사를 쏘아보았다. "이, 이놈! 네……놈은 이, 이제 편히 발을 뻗고 잘 수가 없을…… 것이다!" 청삽문사는 쩔껄 대소를 터뜨렸다. "공자는 오늘 내 점괘대로 옷을 모두 빼앗겼으니 하늘의 운세는 어쩔 수 없는 거요. 그러니 다음에 또 점을 보고 싶거든 오늘 밀린 복채까 지 한꺼번에 가지고 찾아오구려." 팽진은 찔끔하는 눈치더니 악독한 눈초리로 청삼문사를 한번 노려본 후 부들부들 떨며 급히 달려갔다. 청삼문사는 빙그레 웃으며 흐트러진 죽통과 대나무 조각들을 정리하 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그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그가 있는 곳에서 두 개의 탁자 건너편에 보도를 맨 소년이 혼자 술 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소년은 이목이 남달리 준수했는데 무슨 생각을 그리도 열심히 하고 있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러다가 가끔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실망스러 운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소년의 탁자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풍모가 놓여 있었다. 청삼문사는 히죽히죽 웃으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흠칫 놀라 고개를 들고 그를 쳐 다보았다. 청삼문사는 소년의 눈빛이 차고 맑은 것을 보자 내심 고개를 끄덕였 다. 이어 그는 불쑥 입을 열었다. "어떻소, 공자? 내게 점을 한번 보지 않겠소?" 소년은 물론 강옥봉이었다. 강옥봉은 오늘 이곳에서 여풍운과 임표를 만나기로 했었는데 한나절 을 기다려도 그들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자 내심 불안하고 초조한 심 정이었다. 그런데 웬 낯선 사람이 불쑥 나타나 점을 보지 않겠느냐고 하자 고개 를 저으려 했다. 그때 청삼문사는 재빨리 그의 탁자 위에 '여풍운'이라고 썼 다. 강옥봉은 움찔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청삼문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웃으며 그의 앞에 털썩 앉 았다. "복채를 많이 달라고 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공자의 안색을 보니 뜻 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몹시 초조한 모양이구려. 내게 고민을 말 한다면 해결책을 마련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강옥봉은 그를 뚫어지게 주시하다가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끄덕였 다. "제겐 두 분의 형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그분들을 여기서 만나 기로 했는데 오지 않으시는군요. 혹시 어느 곳으로 가야 그분들을 만 날 수 있을지 알 수 있겠습니까?" 청삼문사는 주저없이 손에 들고 있던 죽통을 내밀었다. 죽통 안에는 이십여 개의 작은 대나무 조각들이 꽃혀 있었다. "이 중에서 아무거나 한 개만 뽑아 보시오." 강옥봉은 주저없이 대나무 조각 하나를 불쑥 뽑아 들었다. 대나무 조각에는 '등'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청삼문사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등이란 것은 원래 어두울 때만 사용하는 물건이니 밤이 되어야 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구려. 그리고 등이라는 자는 화와 등이란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시 화는 방 위 중남쪽을 가리키는 것이고 등이란 높은 곳을 올라간다 는 말이니, 곧 남쪽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오." 강옥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쪽의 높은 곳이라뇨?" "하하…… 낙양의 남쪽에서 올라갈 만한 곳이라고는 이귈용문 밖에는 없소. 그러니 오늘밤에 이궐용문에 간다면 형님들을 만날 수 있을 거요." 강옥봉은 반신반의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복채는 얼마입니까?" 청삼문사는 껄껄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강옥봉은 그 가 조금 전에 팽진을 상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눈 살을 찌푸렸다. "천 냥이나 됩니까? 저는 지금 그런 돈이 없는데……" "하하…… 천 냥이 아니라 내 대신 한 가지 일을 해달라는 뜻이오." 강옥봉은 절로 궁금해져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청삼문사는 돌연 목소리를 낮추어 조그맣게 속삭였다. "지금 이 길로 남문 대로를 따라 이수 강변까지 쭉 가다 보면 강가에 뗏목이 하나 매여져 있을 거요. 그 안에 한사람이 누워 있는 데, 공자가 가서 그 사람을 좀 구해 주시오." 강옥봉은 난데없는 말에 어리등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구하라구요?" 청삼문사는 진지한 안색이 되었다. "그렇소." "사람을 구하는 거라면 나보다 귀하가 더 잘하지 알겠습니까?" 의외에도 청삼문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자가 아니면 안 되오." "아니, 그건 왜……?" "가보면 알게 될 거요. 이 일은 화급을 다투는 일이니 공자께선 어서 서두르시오." 강옥봉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청삼문사는 조급한 표정이었으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공자께선 정녕 복채를 갚지 않으실 생각이오?" 강옥봉은 그가 절대로 허튼소리를 할 사람 같지는 않으니, 일단 상대 가 말한 곳에 가보기나 하자고 생각하고 자리예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귀하는……" 청삼문사도 따라 일어서며 빙긋 웃었다. "나는 나대로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공자는 걱정하지 마시구려. 멀 지않은 장래에 또 만나게 될 거요." 그는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내뱉고는 짐을 꾸려 쏜살같이 주루를 내려갔다. 강옥봉은 멍하니 그의 됫모습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도 계산을 하고 금화루를 나왔다. 혹시나 하고 거리를 둘러보았 으나 청삼문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강옥봉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가 말한 대로 남문 대로를 따라 걸어갔 다. 제9장 배교대법 이수는 낙수의 지류 중 하나로 낙양의 남쪽을 흐르고 있었다. 탕왕을 보필한 명재상 이윤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수 근 처이다. 이수의 물결은 굽이굽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간간이 크고 작은 얼 음 조각들이 물결을 타고 남으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이수를 중심으로 남쪽 양지바른 곳에는 십여 호의 민가가 옹기 종기 모여 있었다 겨울바람이 세차기 때문인지 민가의 지붕은 모두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강옥봉은 민가를 지나 강가를 거닐었다. 과연 멀지 않은 남쪽 강변에 커다란 뗏목하나가 정박해 있는 것이 눈 에 들어왔다. 멧목 위에는 삼각형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사방이 개방되어 있는 천 막 속에는 한 명의 장한이 울적한 신색으로 앉아 있었다. 장한은 눈썹이 유난히 새카맣고 눈이 큰 사나이였는데 짧은 단삼 을 입은 모습이 틀림없는 무림인이었다. 사나이의 얼굴에는 우수 의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는데 두 눈에는 이슬이 가득 맺혀 반짝였다. 강옥봉은 잠시 그 사나이를 살펴보다가 훌쩍 몸을 날려 뗏목으로 날 아갔다. 시름에 잠겨 있던 사나이는 웬 소년이 짓목으로 날아오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누구요?" 신속하게 몸을 회전시켜 돌아선 사나이는 강옥봉을 보자 흠칫 놀랐 다. 너무나 영준한 강옥봉의 모습에 놀란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수년 동 안 강호를 유람했지만 이처럼 영준하고 기개 넘치는 소년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첫눈에 소년이 악의를 품고 짓목 위로 날아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기분이 상했다는 뜻을 상대에게 보이기 위해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소협은 무엇 때문에 이곳으로 온 거요?" 강옥봉은 미소 띤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불초는 귀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필시 무슨 어 려운 일을 당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도움이 되어 드렸으면 해서 온 것 이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강옥봉의 차분한 말에 사나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소협의 호의에 감사를 드리오. 그러나 내가 당한 어려움은 소협이 도울 수 없을 것이니 이만 돌아가 주시오." "귀하는 어찌 불초가 도움이 될 수 없다고 단언을 하십니까?" 사나이는 이 질문에 일시 말문이 막혀 답변을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을 꺼냈다. "정히 그러시다면 소협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으니 말씀드리겠소." 이어 그는 천막 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누워 계시는 분은 바로 나의 주인님이시오. 병에 걸리셨는데 별의별 약을 다 써보았지만 이제까지 아무런 효력이 없었소. 그러므 로 소협께서 아무리 의술에 깊은 조예가 있다 하더라도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는 못할 거요." 그 말에 강옥봉은 천막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한쪽 구석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이 누워 신음을 하고 있었 다. 강옥봉은 청삼문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내심 놀랐다. '그자는 내가 의술에 능통하다는 걸 알고 이런 부탁을 한 걸까?' 그는 궁금한 생각이 들었으나 꾹 참고 사나이에게 물었다. "귀주인의 연세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여든일곱이오." "언제부터 무슨 병을 앓고 계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사나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주인께서는 비록 연세가 많기는 하지만 평상시 어떤 젊은이 못지 않은 정력가이셨소. 그런데 어느 날 외출하셨다가 저녁 늦게 뗏목으 로 돌아오셨는데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소. 주인께선 곧장 침상으로 가서 누우시며, '내가 죽 을병에 걸렸으니 그리 알라'고 하시면서 이제까지 치료하시는 것조차 좀처럼 응하시려 하지 않았소." "신통한 의술은 죽어 가는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겁니다. 어찌 하다가 무슨 병에 걸리셨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얘기해 주십시오." 사나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잘모르오. 나는 이곳에서 약 백여 리 정도 떨어진 상류에서 명 의를 초청하여 주인의 병세를 진찰하도록 했었소. 그런데 주인 께서는 웬일이신지 진찰을 거부하시고 의원을 돌려보낸 다음 내게 시 키지 않은 짓을 했다고 불호령을 하셨소. 나는 근심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졸이며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 전 주인의 상세가 갑자 기 악화되었소." 돌연 천막 속에서 노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진호! 너는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느냐?" 진호는 갑자기 흠칫 놀랐다. "예, 저…… 지나가는 소협 한 분과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진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강옥봉은 자세를 낮추어 천막 안으로 들어 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한쪽 구석에 초췌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노인의 얼 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은백색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은 퍽 온화 한 얼굴이었는데 지금 몹시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옥봉은 가까이 다가가 미소 떤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노인장, 불초가 한번 진찰을 해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이때 진호가 뒤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왔는데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가득했다. 그는 암암리에 진기를 가득 끌어올리고 강옥봉이 이상한 행동만 하면 즉각 처치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노인은 처음에는 가슴이 섬뜩함을 느졌는지 한차례 몸을 떨었다. 하나 이내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띠었다. "귀하가 만약 명을 받고 나의 목을 베러 왔다면 어서 손을 쓰시 오." 강옥봉은 아연 놀란 표정을 금치 못했다. "노인장, 너무 성급하게 추측하지 마십시오. 불초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노인장의 수하가 몹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기에 연유 를 물어 혹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찾아온 것뿐입니다." 노인은 가슴속에 맺힌 한을 토해 내기라도 하듯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노부는 암습을 받아 머지않아 곧 목숨을 잃게 될 몸이오. 적은 몹시 무서운 인물이니 소협은 괜한 시비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말고 속히 이곳을 떠나시오." 강옥봉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불초는 미력하나마 제 한 몸 지킬 힘은 있으니 제 걱정은 마십시오. 노인장을 구할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한번 진찰을 해보고 싶으니 허 락해 주십시오." 노인은 희멀게진 눈동자를 돌려 강옥봉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는 준수하면서도 탈속한 듯한 강옥봉의 용모에 내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눈빛이 아주 맑으면서도 기이한 신기가 담겨 있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아하니 이 소년의 내공은 이미 극고의 경지에 이른 게 분명 하구나. 대체 이 소년이 누구이기에 아직 약관도 안 된 나이에 내공 이 화경에까지 접어들었단 말인가?' 그는 내심 놀라움을 감추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노부의 나이는 이미 구십에 가까웠소. 당장 죽는다 해도 아무 여한 이 없는 나이요. 하지만 소협의 호의를 저버릴 수가 없구려. 자, 노 부의 오른쪽 어깨 뒤쪽을 살펴보시오." 그제서야 강옥봉은 노인이 왼쪽으로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 똑바로 눕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강옥봉은 노인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오른쪽 어깨 부분의 옷을 찢었 다. 오른쪽 어깨 뒤쪽 부분이 자색으로 변한 채 퉁퉁 부어 있 었다. "노인장께서는 극독이 묻은 암기에 맞으셨군요." "그렇소.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하고 나중에야 알았는데 이미 때가 늦 은 것 같소." "이런 상처는 약물로도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살을 도려 내어 수술을 가할 수도 없고…… 원래 독은 금시 피부로 스며들어 누 구든지 중독되면 곧 목숨을 잃게 마련입니다. 다행히 노인장께서는 내공이 심후하여 아직 목숨을 보존하고 계신 겁니다." 이때 뒤에 서 있던 진호가 무뚝뚝하게 한마디 툭 내쏘았다. "그런 말은 잔소리에 지나지 않소." 강옥봉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돌아다보았다. 진호는 강옥봉의 칼날 같은 시선을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 다. 그제서야 그는 강옥봉이 보기와는 달리 내공이 절정 에 달한 고수임을 깨닫고 안색이 변했다. 다시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린 강옥봉은 아주 신속한 동작으로 노인 의 오른쪽 어깨 부근에 산재해 있는 십여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그 솜씨가 어찌나 라르고 정확했는지 보고 있던 진호는 자신도 모르 게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강옥봉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 대협, 수고스럽겠지만 뗏목을 강 중앙으로 끌고 가십시오. 불초 가 치료를 할 때 방해를 받으면 큰 사고가 발생하게 되니 말입니다." 진호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띄엄띄엄 말했다. "소협은…… 주인을 구할 자신이 있소?" 강옥봉의 음성은 담담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보는 도리밖에 다른 방도는 없습 니다. 빨리 치료를 받을수록 목숨을 구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는 거 지요. 진 대협께서 정말 노인장의 목숨을 구할 생각이 있다면 어서 제말을 따라 주십시오." 진호는 급히 천막 밖으로 뛰쳐 나갔다. 하나 못내 불안한지 몇 번이고 천막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강옥봉은 진호가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조 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알 수 있었 기 때문이다. 강옥봉은 자신의 오른손을 노인의 명문혈에 갖다 붙이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물결이 세차게 흐르는 소리와 함께 핏목은 물결을 따라 흘러 내려갔 다. 진호는 짓목을 조종하면서도 수시로 천막 안을 들여다보떠 강옥 봉의 일거일동을 관찰했다.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 무렵. "으음……" 갑자기 노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면서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진호는 신음 소리에 깜짝 놀라 천막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하나 노인 의 얼굴에 차츰 혈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다시 반 시진 정도 흐르자 노인이 갑자기 생기에 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호, 어서 나가서 깨끗한 수건 몇 개를 준비해 가지고 오너라. 이 상처에서 독수가 흘러나올 것이니 미리 준비해 두었던 수건으 로 닦아 내거라." 진호는 그의 음성이 힘찬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곧 진호는 수건 몇 개를 가지고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와 묵묵히 노 인의 상처를 주시했다. 이내 상처에서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노란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 다. 진호는 급히 다가가서 흘러나오는 노란 물을 수건으로 연신 닦아 냈 다. 한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퉁퉁 부어 올랐던 노인의 상처가 모두 가라앉고 자색으로 변해 있던 살갗이 차차 원상으로 회복해 갔 다. 그제서야 강옥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노인의 명문혈에 바싹 붙였던 손바닥을 떼었다. 이어 품속에서 조그마한 단도를 꺼냈다.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는 날 카로운 단도였다. 강옥봉은 날카로운 단도의 끝 부분을 상처에 갖다 대더니 요령있게 살금살금 움직여 상처를 도려 냈다. 노인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엄습해 왔지만 꾹 참고 어금니 를 악물었다. 도려 낸 피 묻은 살덩이에는 실낱같이 가느다란 세 개의 독침이 박혀 있었다. 독침의 끝에는 마치 낚싯바늘 같은 갈고리가 달려 있어 한번 박히면 도저히 빠지지 않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독침 자체도 거무튀튀한 광 채를 띠고 있어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야말로 칠대금용암기 중 하나인 흑갈자인 것이다 강옥봉은 흑갈자를 살덩이에서 헤쳐 집어 내며 길게 탄식을 했다. "어떤 자의 짓인지는 모르지만 흑갈자를 세 개씩이나 쏘아 보내다니, 실로 악독한 놈이군요." 노인은 감격에 찬 시선으로 강옥봉을 응시했다. "소협, 이 은혜를……" 강옥봉은 급히 노인의 말을 가로챘다. "노인장께선 지금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다시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작은 약병에는 이상하게 생긴 고약이 들어 있었는데 강옥봉은 가운데 손가락에 고약을 찍어 노인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 진호는 코끝에 야릇한 향기가 맴도는 것을 느끼고 혼자 중얼거렸다. "실로 좋은 약인 모양이구나." 강옥봉은 진호를 힐끔 바라보더니 빙긋 웃으며 다시 품속에서 알약 한 개를 꺼내 노인에게 복용시켰다. "노인장, 편히 쉬도록 하십시오. 삼 일 후에는 자유로이 행동할 수가 있을 겁니다." 이때 돌연 천막 밖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누남광! 목숨을 내놓아라!" 진호는 깜짝 놀라 번개같이 밖으로 뛰쳐 나갔다. 강옥봉은 강적이 나타났음을 직감하고 뒤따라 밖으로 나갔다. 한 척의 조그만 배가 옆쪽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뱃머리에는 세 명의 금의경장 차림에 눈에서 홍악한 살기가 폭사되어 나오는 사나이들이 우뚝 서 있었다. 조그만 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뗏목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세 명의 경장차림의 사나이들은사뿐히 뗏목위로 뛰어 올라왔다. 그들 의 신법이 영활한 것으로 보아 내외공을 겸비한 고수들임이 분명했 다. 진호는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채 불문곡직하고 그들에게 덤벼들려 했 다. 그때 강옥봉이 재빨리 그를 제지했다. "잠깐! 손을 쓰지 마시오." 이어 그는 세 명의 경장대한들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벌건 백주 대낮에 도적들이 나타나다니 실로 너무도 당돌하 일이구려," 세 명의 경장 차림의 장한 중에서 얼굴이 검은 사나이가 눈을 부라리 며 외쳤다. "이 애송이 녀석아.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우리들이 어째서 도적이 란 말이냐?" 강옥봉은 태연 자약하게 웃었다. "물건을 강탈하려고 온 도적이 아니라면 불초를 노리고 온 것이 틀림 없구려? 그런데 불초는 세 분과 언제 어디서 원한을 맺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구려," 얼굴이 검은 사나이는 음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대꾸했 다. "네놈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우리는 이 뗏목의 주인을 찾으 러 온 것이다." 강옥봉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불초가 바로 이 뗏목의 주인이오." 이 말에 세 명의 장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검은 사나이는 내심 분노가 솟구쳐 올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 지 않고 싸늘하게 웃었다. "흐흐…… 우리는 하삭삼귀라 불리는 어른들이시다. 네가 의협심을 발휘해 나서려는 모양인데, 원래 무림의 일이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법이니 너는 괜히 쓸데없는 시비에 끼여들지 말고 냉큼 꺼 져라!" 강옥봉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귀하의 말이 납득이 가지 않는구려. 불초는 이제 막 강호 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기 때문에 무림인과는 전혀 교분이 없소. 그 러나 불초는 불의를 보고 그냥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오." 동시에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꾸아앙! 순간, 무서운 기류의 광풍이 일어나 조그만 배에 남아 있는 한 사나 이를 향해 매섭게 휘몰아쳐 나가는 것이 아닌가? 획! 사나이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그대로 물속에 풍덩 빠져 버렸다. 물속에 빠진 사나이는 수면 위로 두어 번 솟아오르더니 끝내 물속에 빠져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조종할 사람 을 잃게된 조그만 배는 물결을 따라 잠시 밀려가더리 소용돌이에 쉽 싸여 서서히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제야 세 명의 장한은 눈앞의 준수한 미소년이 무서운 무공을 지닌 절세고수임을 깨달았다. 얼굴이 검은 장한은 섬뜩함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우리는 누남광이라는 친구를 만나러 온 것일 뿐, 너와는 원한을 맺은 적이 없다. 그런데 네가 끝내 우리와 아무런 이유도 없 이 싸우려 한다면 우리도 목숨을 걸고 사생결단을 내겠다."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기꺼이 상대해 주겠소. 모르긴 해도, 아마 당신들 세 사람 중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요." 이때 얼굴이 검은 장한의 옆에 서 있던, 머리가 노란 사나이가 분노 를 참지 못하고 강도를 뽑아 들었다. 창!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강도를 쁩아 든 노란 머리의 사나이는 번개와 같이 강도를 휘두르며 강옥봉을 향해 무작정 짓쳐 들어갔다. 강옥봉 은 원래 천하절세의 천애도를 연성한 데다 우연히 노승으 로부터 태극흔원신공을 전수받아 생사현관이 타통된 후로는 무공에 새로운 눈을 떠서 능히 강호를 오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사나이의 어설픈 공격을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흥!" 강옥봉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허리를 살짝 굽혀 옆으로 피하면 서 전광석화와 같이 빠른 동작으로 상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상대의 손목을 잡기가 무섭게 강옥봉은 손아귀에 힘을 가하면서 비틀 었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나이는 돼지 멱따는 비명을 토하며 몸 을 축 늘어뜨렸다. 강옥봉은 귀찮다는 듯이 움켜잡았던 상대의 손목을 놓으며 아랫배를 발길로 걷어찼다. 쾅! "크악!" 처절하게 마지막 비명을 지른 사나이는 그대로 강물에 풍덩 빠졌다. 삽시간에 벌어진 광경에 나머지 두 사나이는 질겁을 했는지 몸을 부 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미 동료를 잃은 두 사나이의 눈에서 원한의 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얍!" "죽어라 이놈!" 그들은 마치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양쪽에서 성난사자처럼 일제히 덮 쳐 왔다. 강옥봉을 향해 덮쳐 가는 그들의 모습으로 보아 자신들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었다. 스슷! 강옥봉은 슬쩍 두 걸음 옆으로 비켜 섰다. 그러자 두 사나이의 공세 는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그 순간 강옥봉은 벽력과 같이 쌍 장을 교차시켰다. 와릉! 노도와 같은 경력이 목표를 잃고 허등대는 두 사나이를 횝쓸어 버렸 다. "크악!" "케에엑!" 처절한 두 마디의 비명과 함께 두 사나이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허공 으로 높이 떠오르더니 강물로 떨어졌다. 두 사나이가 떨어진 강물에 는 붉은 피가 번지기는 했지만 끝내 수면 위로 시체가 떠오르지는 않 았다. 바로 이때, 돌연 남쪽에서 아까 나타났던 배와 흡사하게 생긴 조그만 배가 마치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무서운 속도로 미끄러져 오고 있 었다. 뱃머리에는 청색 장포를 입고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한동안 청색 장포를 입은 노인을 바라보고 있던 강옥봉은 진호를 힐 끔 돌아보았다. 웬일인지 진호의 안색은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 겁을 먹은 탓인지 아 니면 분노에 차 있는 탓인지 몸마저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옥봉이 의아함을 느끼고 그를 부르려 할 때, "우우--!" 갑자기 우렁찬 장소성이 고막을 찢는 듯하더니 한 줄기 인영이 유성 처럼 짓목 위로 가볍게 날아왔다. 바로 청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청포노인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강옥봉을 응시하다가 분노에 찬 음성 을 토해 냈다. "노부의 수하들을 모두 강물에 처박은 수법을 보아하니 실로 악랄하 구나!" 강옥봉은 침중한 음성으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불초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괜히 불초에게 시비를 걸며 먼저 악독한 수법으로 공격을 가해 왔소. 불초는 정당한 방위를 했을 뿐인데 귀하는 어찌 불초를 책망하려 하시오?" 청포노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노부는 네가 배교의 문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너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시비에 끼여드는 거 냐?" 배교라는 말에 강옥봉은 움찔 놀랐다. 배교는 강호상에서도 극히 신비한 문파인지라 견문이 얕은 강옥봉도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배교는 극히 기이한 대법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배교대법 은 신묘하고도 기이하기 짝이 없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고수 라 할지라도 막기가 어려웠다. 배교의 문하는 비록 그리 많다 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의 배교대법이 워낙 현묘한지라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강옥봉이 순간적으로 멈칫거리자 청포노인은 더욱 기세 등등하여 진 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놈은 배교의 수하로서 누남광의 행방을 알고 있다. 만약 노부의 추측이 틀림없다면 누남광은 필시 저 천막 속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는 돌연 진호를 노려보며 외쳤다. "진호! 어서 누남광을 내놓거라!" 진호는 마치 석상처럼 우뚝 서 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청포노인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배교의 엄격한 규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진호가 자신의 추상 과 같은 명을 따르려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강옥봉은 이미 마음을 가라앉히고 빙그레 웃었다. "노인장의 말대로 진호가 배교의 제자라면 당신은 배교의 교주 라도 된단 말이오?" 청포노인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너는 노부가 누구인지 아느냐?" "아까도 말했지만 불초는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지 얼마 되지 않기 때 문에 친분이 있는 무림인은 한 사람도 없소. 마찬가지로 당신이 아무 리 이름이 있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하 오." 청포노인의 안색이 철갑을 두른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녕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로군. 누남광은 분명 천 막속에 있으니 너는 방해하지 말고 어서 물러나거라. 만약 네가 끝내 노부의 일을 방해하고 나선다면 곧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강옥봉도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불초가 충고하겠소. 지금도 때가 늦지 않았으니 어서 돌아가시오." "흥!"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청포노인은 강옥봉의 옆을 스치고 천막 쪽으로 다가갔다. 강옥봉은 신속하게 몸을 돌리면서 쌍장을 휘둘렀다. 쿠아앙! 굉음과 함께 엄청난 장력이 청포노인을 향해 휘몰아쳤다. 그 일장을 보자 청포노인은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강호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으므로 단 일 장에 상대의 실력을 능히 간파할 수가 있었다. 단 일 장인데 자신의 일곱 군데 요혈이 압 박을 당하게 되자 청포노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이 섬뜩함을 느긴 청포노인은 신경질적으로 쌍장을 휘저으며 옆 으로 살짝 비켜섰다. 쾅!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경력에 유도되어 강옥봉이 날린 장력은 애꿎 은 강물만 강타하고 물보라를 일으켰다. 놀라운 이화접목 의 수법이었다. 하나 청포노인은 강옥봉의 장력을 완전히 소화해 내지 못하고 자신의 몸이 은은하게 진동됨을 느끼고 크게 경악했다. '이놈은 대체 누구의 제자일까? 아직 나이도 어린 놈의 공력이 나를 능가할 정도라니…… 만약 이놈이 누남광의 동조라면 이제까지의 계 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겠구나.'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굴린 청포노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누남광은 선인이 아니니 너는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다. 노부는 악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천릿길을 멀다 않고 여 기까지 쫓아왔는데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다. 이제부터 노부가 만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네게 구경시켜 줄 테니 구경하고 난 다음 에 순순히 물러가도록 해라." 말을 마친 청포노인은 품속에서 대나무 조각 한 개를 꺼냈다. 강옥봉은 청포노인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몰라 얼떨떨했다. 청포노인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노부가 타고 온 배를 보았느냐?" 그제서야 강옥봉은 청포노인이 타고 온 배를 자세히 보았다. 배에는 확실히 조종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커다란 풍랑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짓목에 바싹 붙어 있었다. 시종일관 뗏목에 붙어서 떨어지 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강옥봉이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을 때 청포노인은 조그만 대나무 조 각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가했다. 순간, 우두둑! 대나무는 십여 개의 토막으로 부서졌다.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짓목에 바싹 붙어 있던 조그만 배가 산산조각이 되어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강옥봉은 단번에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배교대법임을 알 고 가슴이 섬뜩했다. 그는 청포노인이 배교 내에서도 수뇌급 인물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암암리에 진력을 돋우었다. 하나 안색은 오히려 더욱 천연덕스러웠고 입가에는 미소마저 감돌고 있었다. "방금 노인장이 과시한 그 수법은 비록 절묘하기는 하지만 아직 신 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소. 저기를 보시오. 배가 파손되기는 했 지만 중요한 부분은 조금도 파손되지 않았소." 그의 음성과 표정이 너무나 태연한지라 경험이 풍부하고 약삭빠른 청 포노인도 깜빡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청포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강옥봉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번개보다 빨리 천룡보도를 뽑아 휘 둘러댔다. 청포노인은 방금 자신이 과시한 수법으로 인해 필시 상대가 겁을 집 어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녕 커다란 착 각이었다. 강옥봉은 오히려 상대가 강호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또 노 련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기회를 틈타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파파파팟! 빛살 같은 도기가 허공을 가득 수놓았다. 청포노인은 사색이 된 채 허등지등 상체를 숙이며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크윽!" 청포노인은 왼팔이 싹둑 잘려진 채 피를 뿌리며 비틀거렸다. 청포노인의 얼굴이 경악과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순간, 쇄액! 강옥봉은 그림자처럼 다가가며 천룡보도를 섬전같이 내뻗었다. 켁! 천룡보도는 한치의 착오도 없이 청포노인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 어 놓았다. "억!" 청포노인은 헛바람을 출이마시는 듯한 음향을 토해 내며 눈을 부릅떴 다. 그의 가슴에는 사발만한 구멍이 뚫려 겅붉은 선혈을 마구 토해 내고 있었다. 청포노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이 가득 찬 눈으로 강옥봉 과 그의 손에 들린 천룡보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까지 무림에서 이토록 빠르고 무서운 도법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었다. 강옥봉의 천애도법은 그의 생사현관이 타통됨으 로 해서 본연의 위력을 발휘하여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 다. "이…… 이렇게 빠르고 절묘할 수가…… 너는 혹시 무영신룡단혼도가 아니냐?" 강옥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포노인은 강옥봉의 준수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탄식을 토했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욱 어리군. 그리고 더욱 무섭고…… 나는 원래 꾀를 많이 썼기 때문에 끝내 내 스스로 무덤을 판 모양이다. 이 제 후회한들 때는 늦었으니……" 청포노인은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검붉은 선혈을 울컥 토해 내더니 쿵! 하고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뗏목 위를 붉게 물들였다. 제10장 대풍요람 그때 천막속에서 누남광의 음성이 들려 왔다. "소협, 속히 그의 휴대품을 모두 꺼내고 시체를 없애 버리시오. 진호 는 잠시 상관할 필요가 없소." "알겠습니다." 강옥봉은 속히 청포노인의 몸을 뒤져 휴대품을 꺼냈다. 청포노인의 품속에서 녹색 옥으로 정교하게 만든 말 모양의 조 각이 나왔다. 말의 목 부분에는 흑선으로 원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는 흑색 약 병과 세 개의 엽전이 나왔다. 강옥봉은 품속에서 화골산을 꺼내 시체 위에 뿌렸다. 그러자 시체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삽시간에 노란 물로 변해 강물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이 타고 있는 뗏목은, 조종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 문에. 급류에 횝쓸려 무서운 속도로 표류해 내려갔다. 하나 다행히도 강이 넓고 강만이 없었기 때문에 별로 위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 푹 놓고 안심할 수도 없었다. 언제 어느 때 커다란 암초 에 부딪혀 짓목이 산산조각나 버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옥봉은 허리를 굽혀 천막 속으로 들어갔다. 누남광은 침상에 비스 듬히 앉아 있었는데 얼굴에 불그스름한 혈색이 돌아 아까와는 달리 훨씬 생기가 있어 보였다. "노인장의 몸은 좀 어떻습니까?" 누남광은 감사로 충만된 눈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오. 한데 그자의 몸에 서 혹시 옥으로 만든 말 모양의 조각품이 나오지 않았소?" 강옥봉이 웃으며 옥으로 만든 조각품을 내밀었다. "예, 여기 있습니다." 누남광은 반색을 했다. "어서 그것을 나에게 주시오." 강옥봉은 급히 말 모양으로 된 조각품을 누남광에게 주었다. 누남광은 흑선이 그려진 목 부분을 비틀었다. 즉시 말의 목 부분이 떨어졌고. 뱃속에는 흰색 알약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알약에서는 그 으한 향기가 풍겼다. 누남광은 말의 배에서 알약 세 개를 꺼내 복용하더니 다시 목 부분을 비틀어 맞추었다. "소협, 지금은 자세히 설명해 드릴 시간적 여유가 없소. 그러니 이유 는 나중에 물으시고 속히 밖으로 나가 물 한 양동이와 대나무젓가락 한 묶음만 갖다 주시오. 표류하고 있는 뗏목을 속히 정지시켜야겠소 ……" 강옥봉은 급히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사이에도 그들이 탄 짓목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력 으로 하류를 향해 떠내려가고 있었다. 앞을 보니 차츰 하면이 좁아지면서 물결도 더욱 거칠어졌다. 아연 실색한 강옥붕은 급히 대나무젓가락 한 묶음과 물 한 양동이를 들고 천막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누남광은 사의를 표한 후 한 개의 대나무젓가락을 손에 쥐고 나머지 젓가락은 양동이의 물에 띄웠다. 양동이 속에서 뿔뿔이 흩어진 채 떠 있던 대나무젓가락들이 갑자기 한 곳으로 모이더니 자동적으로 뗏목을 형성했다 짓목이 흔들리는 것 과 똑같이 양동이 속에 있는 대나무젓가락 뗏목도 심하게 요동을 쳤 다. 누남광은 두 눈에서 광채를 번뜩이며 무엇이라고 중얼거리더니 별안 간 고함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양동이 속에 집어넣어 흔 들리는 젓가락 짓목을 정지시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이 타고 있는 진짜 뗏목도 그렇게 요동을 치더 니 순풍에 돛을 단 듯 조용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누남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배교대법 중의 잠풍선이라는 수법이오. 이제야 겨우 안심이 되는구려. 소협, 노부는 소협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평생 잊 지 알겠소." 강옥봉은 배교대법의 위력을 또 한 번 실감했다. "과연 놀랄 만합니다. 그런데 불초는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보답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노인장께서도 다시는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누남광은 돌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협은 아까 그 청포노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바로 노부의 셋째 사제인 동일환이오." 이 말에 강옥봉은 어안이 벙벙했다. "동문의 사형제지간이라면 무엇 때문에 노인장을 해치려 했습 니까?" 누남광은 처량하게 웃었다. "노부의 사형제는 모두 세 사람이오. 노부가 그들 중 첫째이고, 둘째 는 육기, 그리고 셋째가 바로 소협의 손에 죽은 동일환이오." 누남광의 말은 이러했다. 그들의 사부는 배교의 이십칠대 교주였던 천지일사 팽우령이 었다. 팽우령은 배교대법을 실질적으로 완성시킨 배교의 제일인자 였다. 그는 세 명의 사형제를 동등하게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인 육기와 셋째인 동일환이 마음이 공명 정대하 지 못하고 강호에서 악행을 자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팽우령은 대 로하여 무공 전수를 중지시키고 그들을 사문에서 쫓아 내었다. 당시 배교의 교주 자리는 서열에 따라 물려받는 것이 아니고 인품과 덕망, 무예 등을 참작하여 결정짓는 것이었다. 한데 자신들이 쫓겨나 자 육기와 동일환은 누남광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여 그런 화를 입 게 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누남광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던 것이 다. 그로부터 사십 년이 지난 후, 그들은 돌연 누남광의 앞에 모습을 드 러내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뒤에는 성심장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후원하 고 있었다. 그제서야 누남광은 그들이 성심장에 가입하여 그들의 힘을 빌려 배교 를 없애려는 것임을 알고 그들을 제지하려 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치 명상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듣고 난 강옥봉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했다. "그런 사소한 일로 오늘날까지 깊은 원한을 품고, 게다가 자신들의 사문마저 없애려 하다니…… 정말 마음이 악독한 자들이로군요." 누남광의 안색도 침통했다. "노부는 벌써 사십 년이 지난 후라 그들이 당시의 일을 잊은 줄로만 알고 있었소. 모두 노부의 불찰이지……" "보아하니 그들은 성심장이란 든든한 힘을 믿고 노인장을 위협하는 것이로군요?" 누남광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만은 아니오. 그들이 이미 오래 전에 성심장의 문 하로 들어간 것으로 보아 그들이 노부를 암습한 것은 단순히 복수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거요. 그랬다면 진작 노부를 찾아왔을 테니 까." 강옥봉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고 물었다. "그럼 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누남광은 잠시 멈칫거렸다. "노부는 함부로 추측하고 싶지 않소." 누남광은 잠시 침음하다가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소협은 지금 체내에 아무런 이상이 없소?"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렇습니다. 불초는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하구려. 노부는……" 말끝을 흐린 누남광은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갑자기 깨 달은 바가 있었는지 급급히 말을 이었다. "노부는 잠시 강변에 갔다 올 테니 소협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시 오."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다녀오십시오." 강옥봉과 누남광은 함께 천막 밖으로 나갔다. 진호는 여전히 석상처럼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누남광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일환은 악독하게도 이 뗏목에 당도하자마자 은밀히 기독을 풀어 놓았소. 그래서 진호가 이런 꼴이 된 거요. 소협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보아 몸에 피독주를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백 독불침인 모양이구려." 강옥봉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온갖 영약을 복용 한 탓에 이미 어떠한 독에도 끄떡하지 않는 체질이 된 지 오래였던 것이다. 누남광은 말 모양으로 된 조각의 목 부분을 비틀어 세 개의 알약을 꺼낸 다음 진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어 뒤로 돌아가서 진호의 뒤 통수를 가볍게 쳐주었다. 진호는 길게 숨을 들이키더니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나는 사람처럼 서 서히 정신을 차렸다. 제정신이 든 진호는 누남광이 완치된 몸으로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 고 몹시 기뻐했다. 그러다가 퍼뜩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물었다 "동일환, 그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누남광은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죽었네. 이분 소협이 제거했네. 그러나 비록 동일환은 제거되기는 했지만 원흥이 아직 남아 있으니 화근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일세. 그러니 각별히 조심하고, 노부는 잠시 다녀을 곳이 있으니 그 동안 소협을 극진히 대접하도록 하게." 돌연 누남광은 품속에서 설탕가루 한줌을 꺼내 공중에 뿌린 후 몸을 솟구쳤다. 획! 그는 마치 평지를 달리듯 수면 위를 질주해 나갔다. 눈 깜박할 사이에 강변 위로 뛰어오른 그는 이내 종적을 감추어 버렸 다. 강옥봉은 의아해 하는 빛으로 진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 노인장께서는 떠나기 전에 설탕가루 한줌을 허공에 뿌리셨는데,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오?" 진호는 빙그레 웃으며 천막 안으로 들어와 강옥봉에게 자리를 권했 다. "소협, 우선 좀 앉으십시오. 소인이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진호는 강옥봉을 굉장히 받들어 모셨다. 뗏목에는 탁자와 의자가 없었으므로 강옥봉은 그 자리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진호는 밖에 나가 마른안주 몇 가지와 술을 가지고 들어왔다. 진호는 강옥봉 앞에 놓인 술잔에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주인께서 아까 설탕가루를 뿌린 것은 바로 배교의 술법 중 한 가지 입니다. 우리 자신은 여기서 자세히 느낄 수 없지만 강변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를 발견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씀드려 강변에 서는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멧목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옥봉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누 노인장께서 이런 절묘한 수법을 지니고 있다면 천하무적일 텐데 어찌 남에게 해를 입었소?" 진호는 고개를 저으혀 씁쓸하게 웃었다. "배교의 법술은 배교의 모든 사람이 다 할 줄 아는 것이 아니 며, 또 설령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다라도 함부로 사람을 해칠 수 없습니다. 만약 함부로 사용하여 사람을 상하게 한다면 천벌을 받게 됩니다. 주인께서는 원래 마음이 인자하시고 또 동문에 의해 해를 입 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미연에 방지를 하지 못하셨습 니다." "지금 진 형이 말씀하시는 동문이란 바로 조금 전에 죽은 동일환을 말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주인님의 둘째 사제인 육 기입니다." 강옥봉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탄식을 했다. "동문끼리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다니, 이것은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 오. 만약 누 노인장께서 사전에 미리 대책을 세웠더라면 아마 이런 변고는 당하지 않았을 거요." 진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건 소협께서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인님께서 교주의 자리 를 인계받기 이전에 육기와 동일환은 이미 본 교에서 쫓겨났고, 그 뒤 그들은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상태에서 암중에 공모했기 때문에 주인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을 미연에 방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오 년 전에 주인님께서 교주 자리를 인계하시고 은거 생활을 할 해도 그들은 본 교에 도전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주인 님께서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진호의 말을 듣고서야 강옥봉은 진호가 왜 누남광을 교주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주인님이라고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남광은 이미 배교의 교주 자리에서 물러나 은거 상태에 있었던 것 이다. 진호는 강옥봉에게 술을 권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던 그들은 성심장에 투신한 이후 어느 날 성심장주의 명령을 받 고 본 교의 총단에 침입하여 마구 살생을 자행했습니다. 심지어 임시 교주까지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본 교에 압력을 넣어 주인님이 은거하고 있는 곳을 찾아 내 주인님께서 지니고 계시는 기서까 지 탈취하려고 했습니다." "기서라니요?" "배교의 대법이 수록된 기서 말입니다. 팽우령 조사께서 심혈 을 기울여 만든 모든 대법이 수록되어 있지요.그 기서야말로 본 교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기가 무엇 때문에 그 기서를 빼앗으려 했을까요?" "거기에 수록된 법술을 성심장의 무리들에게 전수해 주기 위해서지 요. 사실 본 교의 문하들은 대부분 법술을 익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신술로 지니고 있는 것이지 남을 해치는 데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기서에는 각종 기묘한 법술이 총망라되어 있는데 주인님께 서는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연구했지만 절반 정도밖에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과거 육기는 남달리 총명하고 지식이 뛰어났기 때문에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진전을 보였습니다. 당시 조사께서 적 시에 전수를 중단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떤 당금 무림의 형세 는 크게 변했을 겁니다." 강옥봉은 진호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실을 깨달 을 수 있었다. 성심장은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서 배교 의 법술까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랬구려, 불초는 이제 막 강호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 에 강호의 깊은 속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소." 그들이 이렇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휘익! 누남광이 물결을 타고 달려오더니 사뿐히 뗐목 위에 올라섰다. 그는 짓목에 올라서자마자 강옥봉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문을 열 었다. "소협,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진호는 즉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술잔과 젓가락 한 벌을 가지고 들어왔다. 강옥봉과 함께 마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누남광은 진호에게 술잔을 받아 들며 물었다. "소협은 노부가 강변에 나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소?" 강옥봉은 이미 짐작한 일이 있기 때문에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육기가 혹시 일당을 거느리고 뒤를 쫓아오지 않나 확인하고, 속임수 를 써서 육기로 하여금 스스로 다른 길로 가게 만들어 놓고 오시는 길이겠지요." 누남광은 감탄한 얼굴로 엄지를 세워 보였다. "소협은 정말 귀신처럼 정확하게 추측하는구려. 과연 육기는 성심장 의 고수들과 함께 뒤를 쫓아왔소. 노부는 속임수를 써서 그들로 하여 금 노부가 중상을 입고 죽었다는 것을 나타내려 했으나 그래도 육기 의 눈을 속일 수가 없었소." 강옥봉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육기를 속이지 못했다면 노인장께서는 어떻게 결과를 맺으실 생각이 십니까?" 누남광은 어색하게 웃었다. "노부는 소협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오." 강옥봉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불초는 보잘것없는 무공을 지닌 무명소졸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어찌 중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누남광은 고개를 저으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협, 굳이 노부를 속일 필요는 없소. 노부는 비록 별다른 재주는 없지만 사람을 보는 안목만큼은 다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 부하고 있소. 노부가 보건대 소협은 무공이 이미 신화경에 다다랐을뿐 아니라 재지가 탁월하고 인덕이 있어 무림의 대영 웅이 될 것이 틀림없소. 더구나 무영신룡단혼도란 혁혁한 명 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스스로를 무명소졸이라 말하시오?" 그는 강옥봉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품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 냈다. 그것은 겉장이 양피로 되어 있는데, 주삿빛 글씨가 쓰여 있었 다. <대풍요람 팽우령 수찬> 누남광은 그 양피책자를 강옥봉에게 내밀었다. "이 책은 본 교에 위기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무림 전체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소. 내가 보기에 이 책을 지닐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소협뿐이오." 강옥봉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불초에게 무슨 덕이 있다고 이토록 귀중한 물건을 받아들일 수가 있 겠습니까?" 누남광은 정색을 했다. "만약 이 책이 육기나 혹은 성심장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무림은 걷 잡을 수 없는 풍파를 겪게 될 것이오." "누 노인장, 그렇다면 이 책을 없애 버리면 될 것이 아닙니까?" "이 책을 없애 버린다고 해서 무림에 평화가 온다는 보장은 없소. 더 구나 이 책은 선사부께서 심혈을 기울여 창안하신 것인데 어 찌 쉽게 없앨 수 있겠소? 소협과 같은 인재가 이 책의 절학을 익혀 강호무림의 평안을 위해 노력한다면 지하에 계신 선사부께서도 기뻐 하실 거요. 소협, 사양치 말고 이 책을 거두어 주시오. 노부는 재질 이 미천하여 이 책의 내용을 반도 익히지 못했지만 소협이라면 완벽 하게 터득할 수 있을 거요." 누남광은 간절한 눈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강옥봉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으므로 두 손으로 공손히 책을 받았 다. 누남광은 그제서야 큰 시름을 덜은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소협으로 인해 본 교의 법술이 빛을 발한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이어 그는 진호를 돌아보았다. "육기는 내가 부상을 당하기는 했지만 절대 죽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속 추격할 것이 분명하니 각별히 조심을 기하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진호는 크게 대답하며 천막 뀨으로 나왔다. 주위는 어느덧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강옥봉은 해가 기울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남광이 그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왜 떠나려 하시오?" 강옥봉은 씁쓸하게 웃었다. "오늘밤에 이귈용문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잠 시 떠났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누남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이궐용문은 마침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뗏목 을 그곳으로 돌려 정박시키겠소." "일부러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게 어찌 남의 일이란 말이오? 소협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너무 마음쓰지 마시오." 강옥봉은 하는 수 없이 짓목을 타고 이궐용문으로 향했다. 띳목은 이수를 따라 흐르다가 서서히 이궐용문에서 멀지 않은 강변에 사방은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어두워진 하늘에 높이 떠 있는 초생달이 희미하게 강물을 비추고 있 었다. 제11장 치수재악궁 낙양의 남쪽 이수가 분지로 흘러드는 곳에 이궐용문이 있다. 며기에는 북위의 효문제가 낙양에 천도한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석굴이 만들어졌다. 이귈용문은 동서로 나누어져 있는데 서산의 규모가 훨씬 컸다. 황하를 흐르는 이수가 이 지점에서 동서 양쪽의 암산에 의하여 급격히 좁아져서 급류가 흐르므로 용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경 무렵.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다만 들리는 것이라고는 용문의 급류가 세차게 흐르는 음향뿐이었다. 쿠쿠쿠쿠…… 쿠우우우웅……! 지축을 울리는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굽이치는 격랑은 천하의 무 엇이라도 집어삼킬 듯했다. 이때 돌연 짙은 어둠을 뚫고 나타난 한 명의 인영이 있었다. 인영은 머리에 풍모를 눌러쓰고 등뒤에는 보도를 맨 소년이었다. 소년은 마치 유령처럼 기이한 신법을 전개해 눈 덮인 용문을 올라갔 다. 물 찬 제비인 양 날렵한 그의 신법은 절묘하다 못해 아름답기까 지 했다. 소년은 눈 깜박할 새 용문의 석굴 앞에 당도했다. 하나 수천 수백 개나 뚫린 석굴을 보자 소년은 난감한 듯 걸음을 멈 추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문의 석굴은 대소 천여 개에 달하는 엄청 난 숫자였던 것이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강 소제인가? 이쪽으로 오게." 소년이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석굴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오며 소 곤거리는 것이 아닌가? 소년, 강옥봉은 그 음성이 귀에 익음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인영이 서 있는 석굴로 날아갔다. 석굴 앞에 서 있는 인영은 체구가 건장하고 눈쌥이 짙은 흑의경장인 이었다. 강옥봉은 반색을 하고 그에게 달려갔다. "여 대협! 오래간만입니다." 여풍운은 빙그레 웃으며 반갑게 그의 손을 잡았다. "과연 왔군. 우선 안으로 들어가세." 그는 강옥봉의 손을 잡고 석굴 안으로 들어갔다. 석굴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오륙 장쯤 걸어 들어가자 하나의 석실이 나왔다. 석실의 한 쪽에는 우유등이 켜져 있었으며 다른 한 쪽에는 침상과 탁자, 의자 등 가구가 있었다. 뒤에는 부엌도 있었는데 마른 고기들이 많이 매달려 있었다. 강옥봉은 신기해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용문석굴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한데 임 대협은 어디 가 셨습니까?" 여풍운은 탁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대형은 알아볼 일이 있어 잠깐 나가셨네. 곧 돌아오실 걸세." 두 사람은 탁자에 마주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풍운은 강옥봉의 모습과 그가 등뒤에 매고 있는 천룡보도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미소 지었다. "이제는 아주 어엿한 무림인 냄새가 나는군." 강옥봉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하하……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몇 달 안 본사이에 자네가 무영신룡 단혼도라는 어마어마한 명호를 가진 절세고수가 되었다는 걸 내가 모 르는 줄 아나?" 강옥봉은 계면쩍은 웃음을 떠올렸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 일부러 이름도 밝히지 않고 얼굴도 가렸는데 ……" "하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가 어찌 그 일을 모를 수 있겠나? 나는 강호에 기이한 도법을 지닌 소년영웅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즉시 그 소년영웅이 자네임을 짐작했지. 과연 우리의 예상대로 자네 는 그 족자의 비밀을 풀고 절세의 무공을 익혔군그래."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두 분의 덕분입니다." 이어 그는 자신이 어떻게 천애무아도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를 소상 하게 밝혔다. 여풍운은 연신 감탄성을 발하며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걸 두고 보물은 인연이 있는 사람만 얻을수 있다는 거로 군. 나는 몇 달 동안이나 그것을 곁에 두고도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 했는데 자네는 불과 보름 사이에 그 안에서 절세의 도법을 찾아 내다 니…… 역시 자네의 재지는 내가 본 대로 절세무쌍일세." "이 도법은 원래 대협의 물건이니 제가 대협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풍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 도법이 그토록 신비한 방법으로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비밀을 푼 자만이 도법을 익힐 수 있다 는 선인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하네. 비록 운이 좋아 내 가 그것을 얻었다 해도 익힌 사람은 자네이니 자네가 곧 그것의 주인 일세." 강옥봉은 내심 여풍운의 호쾌한 태도에 크게 감읍했다. 절세의 무공비급을 남에게 선뜻 내준다는 것은 웬만한 결단력을 가지 지 않고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강옥봉은 감사와 진정이 충만한 눈으로 여풍운을 바라보았다. 여풍운은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자네가 말한 도법의 위력으로 보아 그것은 처음의 짐작대로 우내칠 대무학의 하나인 천애도임이 틀림없는 것 같네. 만약 그렇다면 자네 에게는 무림의 흥인들을 제거하고 정의를 뿌리내릴 막중한 임 무가 주어진 셈이네. 이 점을 잊지 말고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 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돌연 밖에서 옷자락 스치는 경미한 음향이 들려 왔다. 강옥봉은 흠칫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나 여풍운은 태연한 안색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대헹께서 오신 모양이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과연 두 사람이 불쑥 석실 안으로 들어왔 다. 앞에 선 사람은 얼굴에 검상이 있고 등에는 금창을 맨 금창수 임표였다. "임 대협!" 임표를 본 강옥봉은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달려가 포권을 했다. 임표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 동안 자네의 활약상은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네. 과연 우리의 기대대로 훌릉하게 커주었군." "모두 두 분 대협의 덕분입니다." "하하……" 이때 임표와 함께 석실로 들어온 인영이 강옥봉을 보며 의미 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어떻소, 공자? 내 신복이 틀림없지 않소?" 강옥봉이 놀라 쳐다보니 그 인물은 다름 아닌 금화루에 나타났던 청 삼문사가 아닌가! 청삼문사는 여전히 오른손에 책상자를 든 채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귀하였군요?" 강옥봉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여풍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하하…… 인사하게. 이분은 강호무림에서 제일지자로 손 꼽히는 치수재 악궁, 악 대협일세." "아! 이분이 바로……" 강옥봉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삼문사를 바라보았다. 치수재 악궁은 행적이 신비하고 재주가 많은 기인 중의 기인이 었다. 그는 그야말로 만사무불통지라 할 만큼 다방면에 걸쳐 박학 다식하여 무림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청하 려 한번만이라도 만나기를 소원하는 인물이었다. 하나 그의 성격이 워낙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고 남한테 얽매이는 것 을 싫어하는지라 그를 만나기란 거의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힘 이 들었다. "나와 악궁은 막역한 사이지. 이번에 금화루에서 자네를 만나기로 했 을 때 마땅히 우리가 직접 나가야 했지만 우리는 이미 얼굴이 남들에 게 알려져 있고 뒤를 쫓는 무리들이 있어 할수 없이 악궁에게 자네를 만나달라고 부탁을 한 걸세." 여풍운의 말을 듣고서야 강옥봉은 악궁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악궁은 세 가닥으로 꼰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강옥봉을 향해 물었 다. "공자께선 그 사람을 만나 보았소?" 여풍운과 임표는 때안닌 그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나 총명한 강옥봉은 단번에 그가 묻고 있는 것이 조금 전에 누남광 을 만나라고 부탁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늦지 않게 당도하여 부탁을 들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자라는 말은 제게는 과분합니다. 그냥 소제라고 불러 주십시 오." 악궁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그렇다면 나도 여풍운처럼 자네를 강 소제라고 부르겠네. 누남광은 지금 어디 있는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이수강변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한데 악 대협께 서는 어떻게 누 노인이 중독당해 쫓기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까?" 악궁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여풍운이 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우리도 좀 알면 안 될까?" 악궁이 웃으며 여풍운과 임표에게 누남광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원래 나는 누남광과 약간의 친분이 있었지. 한데 얼마 전에 우연히 주루에서 탁천신수 진조영과 회의중년인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지." 강옥봉은 진조영이라는 말에 조금 움찔했다. "성심장의 팔대빈객 중 하나인 그 진조영 말입니까?" 악궁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바로 그렇네. 한데 자네는 어떻게 진조영이 성심장의 팔대빈객 중 한 명임을 알고 있나? 나도 얼마 전에야 간신히 안 일인데……" 강옥봉은 일전에 운가장에 갔다가진조영을 만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그제서야 악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어쨌든 호기심에서 나는 염치 불구하고 두 사람 의 말을 엿들었는데 그때 우연히 그들의 입에서 배교의 전대 교주였던 누남광이 칠대금용암기 중의 하나인 흑갈자를 맞은 채 그들에게 쫓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네. 그래서 마침 여풍운에게서 자네가 의술이 매우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자네를 그곳으로 보낸 걸 세." 강옥봉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악 대협께선 혹시 진조영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그 회의중년인 의 얼굴을 기억하실 수 있으십니까?" 악궁은 이미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억력 하나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지. 자네가 궁 금 하다면 알려주지. 그 회의중년인은 매부리코에 눈빛이 기이하게도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네. 그리고 입술이 얄팍해서 아주 잔인한 느 낌을 불러일으켰지. 그런데 진조영의 말을 들어 본즉 회의중년인은 보기차는 달리 나이가 이미 고희를 넘은 노인이고, 별호는 천 잔마사이고 이름은 육기라고 하더군." 강옥봉은 자신의 짐작대로 회의중년인이 육기임을 알고는 마음이 무 거워졌다. "과연 그자였군요. 혹시 그자가 성심장 내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는지 아십니까?" "진조영이 그자를 대하는 태도는 몹시 정중하면서도 예의바른 것이었 네. 물론 나이가 진조영보다 훨씬 많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자존심 강한 진조영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팔대빈객보다 는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이것보다 더 자세한건 아직 모르겠네." 듣고 있던 여풍운이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자네도 모르는 게 다 있군그래." 악궁은 껄껄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 나라고 항상 전지전능할 수 있겠나? 웬만한 강 호의 일이라면 제법 안다고 자부하겠는데 성심장은 워낙 갑작스럽게 등장한 문파라서 아직 그들의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지는 못하네. 하 지만 곧 알게 되겠지." 그의 말에는 묘한 뜻이 담겨 있었다. 여풍운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눈을 크게 떴다. "자네의 말은 성심장 내에 자네의 측근이 숨어 있다는 뜻인가?" 악궁은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천기는 누설할 수 없는 법일세. 그렇게만 알고 있게." 여풍운은 괜한 걸 물어 봤다 싶어 입맛을 다셨다. "제길……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괜히 신비스러운 척하지 말게." 악궁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때 여풍운이 갑자기 생각난 듯 급히 임표를 바라보았다. "아참, 대형! 나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임표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언제 그걸 물어 보나 기다리고 있었네. 마침내 옥정검 이 있는 곳을 알아 냈다네." 여풍운은 반색을 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옥정검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낙양에서 제일 큰 표국인 위원표국의 국주, 팔괘만승 도 범중립의 집에 손님으로 와 있는 하장청 이라는 청년이 가지고 있네." "하장청? 그는 범중립과 무슨 관계랍니까?" "숙질간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확실히 모르겠네. 우선 은 더 늦기 전에 그곳으로 가보세." 강옥봉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옥정검이 대체 무엇입니까?" 여풍운이 자신의 머리를 탁, 치며 싱겁게 웃었다. "내 정신 좀 보게. 자네는 아직 그 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지?" "그 일이라뇨?" "내가 천천히 얘기해 주지. 일전에 우리는 자네가 말한 대로 유령고 전에 적힌 지도를 따라 유령동부를 찾아갔다네." 여풍운은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을 이었다. 여풍운과 임표는 우선 의형제인 일양검 막철룡의 행방을 은밀히 수소 문했으나 도대체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강옥봉이 말한 대로 우선 유령동부를 찾기로 했 다. 한데 어떻게 알았는지 익호 사천홍을 비롯한 몇 명의 고수들이 그들의 뒤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사천홍과 고 수들은 모두 심장의 인물들이었다. 여풍운과 임표는 그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유령고전에 새겨진 대로 황 산으로 갔다. 하나 황산 근처에서 다시 그들에게 행적이 노출되어 다 시 쫓고 쫓기는 숨 가쁜 추격전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그들은 황산의 어느 이름 모를 계곡에서 유령동부로 추측되는 기이한동굴을 발견하개 되었다. 될 듯이 기뻐한 그들은 무 작정 그 동굴로 뛰어들었다. 하나 그들은 곧 대경 실색하고 말았다 동굴을 조금 들어가자 어디선가 기이한 음한강기가 불어와 그들의 몸을 꽁꽁 얼려 놓는 것이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동굴 속에서 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독각괴수가 달려나와 그들을 잡아먹 으려 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기절 초풍하여 간이 콩알만해졌다. 그들은 젖 먹 던 힘까지 짜내 간신히 음한강기를 물리치고 다시 동부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들의 동작이 조금만늦었어도그들은 독각괴수의 밥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나중에 악궁에게 들어서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쏘였던 음한강기는 바로 광한쇄골풍이라는 것으로 지하의 깊숙한 곳에서 뻗 어 나오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고 하네." 여풍운은 그 당시를 생각하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그 독각괴수는 전설로만 알려진 독각응룡으로 전 신이 금철불입의 강신으로 이루어진 데다 입으로는 불을 내뿜어 처치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마물일세." 강옥봉은 여풍운의 말에 거듭되는 놀라움을 느꼈다. "그렇다면 유령동부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사지란 말입니 까?" "우리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려 했지. 한데 악궁의 말이 몇 가지 기보를 구할 수만 있다면 광한쇄골풍과 독각응룡을 물 리치고 유령동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세. 그래서 우리는 다시 희망 을 가지고 그 기보들을 구하기로 했지." "아! 그렇다면 옥정검이 바로……" "그렇네. 옥정검이야말로 독각응룡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화기 를 제어하고 도검불침의 강신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신병일 세." 강옥봉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자신이 등뒤에 매고 있던 천룡 보도를 풀어 내보였다. "제가 우연히 입수한 이 칼도 상당히 예리한데 이것으로 독각응룡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천룡보도를 향했다. 악궁은 천룡보도를 유싱히 살피다가 감탄성을 발했다. "정말 훌륭한 보도로군. 이 칼이면 충분히 독각응룡의 강신을 뚫을 수 있네. 하지만 독각응룡이 뿜어 내는 지독한 화기를 피하기 위해서 는 아무래도 옥정검이 있어야 하네. 옥정검에서 흘러나오는 옥정지기 만이 독각응룡의 화기를 억제할 수 있지."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천룡보도를 등뒤에 매었다. "독각응룡은 그렇다치고 그 광한쇄골풍은 또 어떻게 막습니까?" "광한쇄골풍은 지하의 가장 아래에서 뿜어 나오는 극한지기 이기 때문에 아무리 공력이 높은 사람도 일 각 이상을 쏘이게 되 면 견딜 수가 없네. 하지만 한 가지 기보가 있다면 광한쇄골풍을 맞 고도 견딜수가 있지." "그 기보가 무엇입니까?" 악궁은 의미 심장하게 말했다. "바로 천양금환이라네." 강옥봉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것은 바로 운가장의 가보가 아닙니까?" "그렇다네, 바로 회서방에서 노리고 있는 그 물건이지." 강옥봉은 운가장의 천양금환이 광한쇄골풍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을 듣 자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회서방에서도 천양금환의 그런 묘용을 알고 그것을 노리는 걸까요?" 악궁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럴 가능성도 있네. 그들이 그것을 노리는 시기가 너무 공교롭거 든."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그걸……" "여풍운과 임 대협이 유령동부를 찾았다면 그들을 뒤쫓았던 사천홍 등도 찾지 말라는 법은 없네. 무림에 유령동부의 위치가 황산의 절영 곡이라고 알려진 것만 보아도 틀림없이 두 사람 외에 누군가가 유령 동부를 발견했을 걸세. 그렇다면 그들도 그 안에 광한쇄골풍이 불고 독각응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겠지. 아울러 그것들을 물리칠 방 법도 연구했을 테고……" "아……!" 강옥봉은 악궁의 말에 내심 감탄을 발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색이 변해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옥정검 또한 노리는 자들이 있겠근요?" 이 말을 듣자 여풍운과 임표의 안색 또한 크게 변했다. "미처 그걸 깨닫지 못했군." 그들은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더 늦기 전에 어서 손을 써야지……" 그때 악궁이 그들을 제지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소." 여풍운이 눈을 부라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다가 옥정검이 회서방이나 성심장의 인 물들에게 들어간다면 우리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이 아닌 가?" 하나 그가 서두를수록 악궁의 모습은 태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은 채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이미 회서방과 성심장의 인물들은 그 곳에 와 있을 거요." "그렇다면 더욱더……" "내 말을 들어 보시오. 물건은 하나인데 노리는 자들은 여럿이니 필 시 그들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있을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 아니오? 회서방과 성심장은 하나같이 강호독패를 꿈꾸고 있는 거대 세력들이니 쉽사리 물러서지는 않을 게요." 그제야 악궁의 말뜻을 깨달은 여풍운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렇다면 자네의 말뜻은……" "우리는 그저 느긋하니 앉아 그들의 싸움이나 구경하다가 그들 중 어 느 한 쪽이 승리했을 때 그들에게서 옥정검을 슬쩍하면 되는 거요." 여풍운은 감탄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네의 머리는 놀랍군. 이제야 왜 사람들이 서로 자네를 끌어 가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지 알 것 같네." "하하…… 치켜세우는 건 좋지만 공치사는 물건이 수중에 들어온 다 음에 해도 늦지 않소. 그보다 나는 강 소제에게 조용히 할말이 있는 데 두 분은 괜찮겠소?" 악궁의 말은 여풍운과 임표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이었다. 여풍운과 임표는 모두 노련한 인물들인지라 단번에 그의 말뜻을 알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지 우리는 먼저 위원표국으로 가서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을 테 니 두 사람은 천천히 오도록 하게. 하지만 너무 늦지는 말게." 악궁은 고개를 끄덕 였다. "늦지 않게 당도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보다 두 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싸움에 끼여들거나 해서는 안 되오." 여풍운은 장난스럽게 히죽 웃었다. "자네는 모르는 모양인데 원래 자신이 싸우는 것보다 남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게 훨씬 더 재미있는 법일세. 그런데 우리가 미쳤다고 위험 을 무릅쓰고 싸움에 끼여들겠나?" "하하…… 어련하시겠소?" 여풍운과 임표 두 사람은 낄낄거리며 먼저 석실을 빠져 나갔다. 석실에 악궁과 둘만 남게 되자 강옥봉은 악궁을 향해 정중하게 물었 다. "악 대협께서는 소제에게 달리 하교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악궁은 웃으며 탁자를 가리켰다. "하하…… 우선 자리에 앉은 후 이야기를 하세." 강옥봉이 자리에 앉는 것을 기다려 악궁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따로 보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자네에게 한마디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세." "세이경청하겠습니다." "하하…… 심각하게 생각할 건 없네. 내가 말하려는 건 자네가 비록 무공이 뛰어나고 재지가 탁월하지만 아직 강호의 경험이 일천하여 자 칫 남에게 암산을 당할지 모른다는 걸세. 무림이라는 곳이 원 체 흉험하고 귀계가 난무하는 곳인지라 무공만 가지고는 제대 로 활동할 수가 없는 법일세. 그래서 말인데……" 악궁은 품에서 얄팍한 책자를 한 권 꺼냈다. "이것은 역용술에 대해 기록된 책자일세. 비록 절세의 무공 이 수록된 비급은 아니지만 익혀 두면 자네가 강호를 행도하는 데 있어 커다란 도움이 될 걸세." 강옥봉은 크게 기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악 대협. 이 은혜는 기필코 잊지 않겠습니다." 악궁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변변치 않은 걸세. 하지만 자네가 무림 정의를 위해 힘써 준다면 나 로서는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을 것이네." 강옥봉은 설레는 마음으로 책자를 받았다. 악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옥봉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이제 어서 가보세. 아마 모르긴 해도 여풍운이 우리를 기다리느 라 코가 한 자나 라져 있을 테니까…… 하하……" "하하하……" 강옥봉도 따라 웃으며 악궁과 함께 석실을 벗어났다. 제12장 옥정검 위원표국은 낙양의 동문 대로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원표국의 총국주는 팔괘만승도 범중립으로, 그는 한 자루 팔괘도로 수십 년 동안 강북 일대를 주름잡은 절세의 고수였다. 때문에 흑도의 고수들도 위원표국의 깃발이 나부끼는 표차에는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아 자연히 위원표국의 사업은 순조롭게 팽창되었 다. 그래서 지금은 낙양에 있는 스물두 개의 표국 중에서 가장 번창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위원표국의 커다란 건물에는 밤이 깊었는데도 여기저기 등불이 켜져 있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위원표국의 대청에는 지금 두 명의 인물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측의 인물은 체구가 건장하고 검은 수염을 기른 금포노인이었다. 금포노인의 두 눈은 유달리 부리부리하고 신광이 잘 갈무리되 어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고수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금포노인이 바로 위원표국의 총국주인 팔괘만숭도 범중립이었다. 범중립의 앞에는 한 명의 청년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청년은 갈의를 입고 있었는데 이목이 준수하고 기골이 뛰어났다. 하 나 눈빛이 음침한 것으로 보아 심계가 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갈의청년의 등뒤에는 고색이 창연한 보검이 매여져 있었다. 이때 돌연 대청 안으로 다시 두 명의 인물이 걸어 들어왔다. 앞장선 인물은 사십대 가량의 청포중년인이었다. 그는 위원표국의 부국주인 팔수도 곽경당이었다. 곽경당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키가 훌쩍 크고 몸이 비쩍 마른 노인이 었다. 노인을 보자 범중립은 반색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시오, 계 대협! 대협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 었소." 노인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범 국주께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 노부를 청해 왔는데 노부가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소?" "하하…… 늦은 시각에 대협을 불러 내어 죄송하게 됐소. 하지만 사 정이 워낙 다급해서 어쨀 수가 없었으니 양해하시구려." 노인은 비쩍 마른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매달았다. "우리 사이에 그런 예의를 차릴 게 뭐 있겠소? 그보다 급한 일이란 게 뭐요?" 범중립은 앞에 앉아 있는 갈의청년을 가리켰다. "이 청년은 나에게는 이종조카가 되는 하장청이라 하오. 선 하산 신룡애에 있는 창송상인의 의발을 전수받아서 장래가 촉망되는 후기지수지요." 이어 갈의청년을 향해 말했다. "장청, 이분은 하남성의 제일고수이신 만리표 계대망 대협이시다 인사를 올리거라." 하장청은 계대망에게 포권의 예를 갖추었다. "계 대협께 인사드리옵니다." 그는 공손히 인사하는 것 같았으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서려 있어 거만스럽게 보였다. 계대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하남의 제일고수로 오랫동안 혁혁한 명성 을 떨쳐 온 인물이었다 그러니 하장청의 거만스러운 태도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그는 짤막하게 고개만 까닥거렸다. "다행히 이곳에서 만났군." 하장청의 검미가 실룩거리면서 노기가 엿보였다. 하나 때마칭 범중림이 재빨리 말을 꺼냈다. "장청은 이제 처음 강호에 출도하는지라 경험이 없어 본의 아니게 실 수를 할 때가 있으니 계 대협께서 선배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시구 려. 이번에 급히 계 대협을 초청한 것은 사실 장청에게 의외의 일이 생겼기 때문이오." 계대망은 눈초리를 꿈틀거렸다. "무슨 일이오?" "며칠 전에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장청은 어두운 골목을 지나다가 사람 살려 달라는 여인의 애절한 비명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갔는데 그곳에는 삼십 세쯤 되는 사내가 어느 민가에서 소녀를 강간하 더랍니다. 그래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하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때 하장청이 급히 민가 안으로 들어가니 어떤 사내가 소녀의 옷을 홀랑 벗겨 놓고 막 일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장청은 급히 사문의 절학인 복마장법을 전 개하여 후려쳤으나, 그는 의외로 보통 고수가 아니어서 예리한 보검 으로 덤볐다는 것이다. 한데 그 검은 무림에서 전설적인 신병으로 알려진 옥정검이 아 닌가? 깜짝 놀란 하장청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절학을 사용하고 서야 그를 죽일 수 있었다. =3사이에 강간당할 뻔했던 소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기척도 없이 도망치고 말았고, 하장청은 덕분에 절세의 보검을 얻게 되었다. 계대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한 사람의 억울함을 보고 의협심을 발휘하여 돕는 것이 우리 무림 인들의 의무인데 뭐가 그리 대단하단 말이오?" 그러자 범중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데 의외로 그 소녀는 창기에 불과했고 죽은 사람은 회서방 의 고수였소. 그때 강간당하려던 소녀는 계속 비명을 질렀으나 강풍 이 사납게 몰아치는 어두운 밤이어서 다른 사람이 발견하지 못했던 거요. 그런데 우연히 하장청이 발견하여 그런 사건을 저지르자 시비 가 벌어지게 된 거요." 회서방의 이름이 나오자 명성이 자자한 계대망도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만 보아도 회서방의 이름이 얼마나 무림인들을 두렵게 만들고 있 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은 회서방의 고수는 누구였소?" "전서급 고수인 쌍두룡 조청이란 자요. 하장청은 그 사건으로 인해 강호에 나오자마자 명성이 퍼졌지만 회서방에서 이를 알고 이곳까지 그를 추격해 왔소. 그래서 내가 그 일을 무마하기 위 해 오늘밤에 다시 만나자고 하긴 했는데 회서방의 행사가 워낙 악랄 하여 앞으로 한바탕 혈풍이 일어날지 모르겠소." 계대망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물었다. "한데 회서방의 인물이 어떻게 옥정검을 가지고 있었소7" "원래 옥정검은 욱일거사 나후의 소유였소. 한데 조 청은 회서방주의 명을 받고 몰래 나후의 거처에 숨어 들어가 그것을 훔쳤던 거요." "음……" 계대망은 무거운 안색으로 신음했다. 범중립은 혹시라도 그가 회서방의 명성이 두려워 도움을 거절할까 봐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하장청은 검미를 꿈틀거리면서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계대 망을 쏘아보며 무슨 말을 하려 했다. 그때 계대망이 불쑥 입을 열었다. "좋소. 그 옥정검이 원래부터 회서방의 물건이 아닌 다음에야 그들도 그것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오." 그 말에 범중립은 크게 기뻐하며 급히 포권을 했다. "계 대협, 감사합니다." 계대망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들이 옥정검을 요구하는 대신 죽은 조청의 복수를 하겠다 고 덤빈다면 나로서도 개입할 명분이 없지 않소?" 범중립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과연 그렇군요. 하지만 그들이 비록 겉으로는 조청의 원수를 갚겠다 고 해도 노리는 목표는 바로 옥정검이 틀림없소." "대체 그 옥정검이 어떤 것이기에 회서방이 그리도 탐을 낸단 말이 오? 어디 한번 볼 수 있겠소?" 하장청은 내심 불만이 가득했으나 범중립의 눈짓을 받고는 할 수 없 이 등뒤에 매고 있던 옥정검을 뽑아 들었다. 창!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갑자기 대청 안이 으스스한 한기로 뒤덮 였다. 계대망이 놀라 보니 하장청의 손에는 어느새 한기가 몸서리치게 번뜩 이는 은백색의 보검이 쥐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보검의 길이는 여타 검과 비슷했으나 두께는 훨씬 얇았다. 한데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우윳빛 광채가 뿜어 나와 중인들의 눈을 어지럽 게 만들었다. 계대망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아! 정말 좋은 보검이로군." 하장청은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이 옥정검은 비단 바위를 무 베듯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떠한 화 기로부터도 보호되기 때문에 제가 매우 아끼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였다. "크흐흐…… 감히 남의 보검을 강탈한 주제에 마치 자신의 것처럼 지 껄이다니…… 네놈의 낮짝은 두껍기 짝이 없구나." 밖에서 음산한 괴소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깜짝 놀랐다. 하장청은 노기를 띠면서 옥정검을 다시 등에 매고 밖으로 뛰쳐 나갔 다. 범중립과 계대망도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급히 그의 뒤를 따라 자 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대청 밖으로 나가 보니 어느새 정원에는 현의 경장을 한 여섯 명의 중년인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범중림은 그들을 보자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계대망에게 나직이 말했 다. "보아하니 저자들은 회서방의 전서급 중에서도 실력이 막강한 강동육 살 같소. 그들은 모두 개개인이 무시할 수 없는 고수들인 데도 불구하고 오늘 모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회서방에서 이번 일에 단단히 손을 대기로 작정한 모양이오." 이때 강동육살 중 가운데 서 있는 체구가 큰 장한이 하장청을 노려보 았다. "이 하가 놈아! 네놈이 감히 본 방의 형제를 살해하고 보검을 강탈해 가다니,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하장청은 껄껄 웃으며 그들을 응시했다. "하하…… 귀하들이 나후에게서 훔친 것은 정당하고 내가 음적 하나를 죽인 것은 잘못이잔 말이오? 과연 생쥐 같은 심보로군." 그가 회서방의 명호를 빗대어 놀리자 강동육살의 얼굴에 일제히 짙은 살기가 떠올랐다. "흐흐……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네놈이 아니라 네놈의 사 부인 창송상인이 나타난다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할 우리들이 아니거늘 ……" 그때 옆에 있던 다른 장한이 중앙의 장한에게 소리쳤다. "대형! 더 볼 게 뭐 있습니까? 당장 저놈의 모가지를 비틀어 조청의 원수를 갚고 보검을 되찾읍시다." 하장청은 지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피의 빛은 피로 청산하는 것이 당연한 일. 내가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 어서 덤비시오. 되도록 한꺼번에 덤비도록 하시구려. 시간도 절 약하게 될 테니……" 그러자 강동육살 중에서 한 사나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 나왔 다. "이놈! 다 죽게 된 놈이 너무 건방지구나! 어서 목숨을 내놓아라!" 그는 점혈궐을 번개같이 휘둘러 하장청의 미간을 노려 왔다. 꽤액! 갈퀴같이 생긴 사나운 점혈궐이 돌려 쳐지자 하장청의 전면이 금세 그 그림자로 뒤덮여 버렸다. 하나 하장청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며 옥정검을 기묘하게 그어댔다. 파팟! 팟! 뺏골이 시릴 듯한 한기와 함께 새하얀 광망이 번쩍거렸다. 그러자 사 나이의 점혈궐이 가닥가닥 끊어지며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중인들이 놀라 보니 점혈궐을 휘둘렀던 사나이는 옆구리가 잘려진 채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강동육살의 다른 다섯 사람은 대경 실색했다. "네…… 넷째야……!"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일제히 노성을 지르며 하장청에게 덤벼들었다. "이놈! 죽어라!" 파파파팍! 쾌애애액! 순식간에 하장청의 주변은 그들이 휘두르는 검광과 도광 에 휘감겨 버렸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범중립이 깜짝 놀라 달려가려 했으나 계대망이 그를 제지했다. "조금만 더 두고 봅시다. 하 소협은 무공이 탁월하고 보검을 쥐고 있 어 슁사리 당하지는 않을 게요. 그보다 우리는 누가 하 소협을 암습 하지나 않는가를 신경 써야 할 거요." 그 말에 범중립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하장청은 다섯 명의 합공을 당하고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당 당히 맞서 갔다. 원래 그의 무공은 강동육살 중 두 사람 정도의 합공을 겨우 견딜 수 준 이었다. 하나 그의 손에 들린 옥정검이 워낙 날카로운지라 강동오살은 좀처럼 그의 근처에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옥정검에서 흘러나오는 옥정지기는 기이한 한기를 품고 있어 더욱 상대하기가 힘들었 다. 하장청은 용기 백배하여 더욱더 질풍과 같이 옥정검을 휘둘렀다. 파파파팟! 사방이 온통 우윷빛 검광으로 뒤덮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강동오살은 안색이 푸르뎅뎅해진 채 사력을 다해 검광을 피했다. 하나, "크아악!" "으윽!" 다시 그들 중 두사람이 병기가 부러진 채 고꾸라지며 옆구리에선 선 혈을 내뿜었다. 남은 강동삼살은 어쩔 줄 몰라 주춤거리혀 뒤로 물러 섰다. 하장청은 쉴새없이 다시 그들을 향해 덮쳐 들었다. 바로 그 순간, "멈춰라!" 한소리 우렁찬 폭갈이 터지며 하나의 흑영이 번개같이 장내에 뛰어들 었다. 꽝! "윽!" 려락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하장청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범중립과 계대망은 깜짝놀라 나타난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신에 흑포를 친친 감은 우람한 체구의 초로 노인이었다. 안색 에는 기이한 흥광이 이글거렸고, 눈빛은 강철이라도 뚫을 듯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온십 이호님!" 간신히 살아남은 강동삼살이 흑포인을 보자 허겁지겁 머리를 조아렸 다. 흑포인은 냉랭히 호통을 쳤다. "밥통 같은 놈들. 풋내기 하나를 없애지 못하고 세 명이나 쓰러지다 니……!" 강동육살 중 우두머리인 대살 남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놈이 들고 있는 옥정검이 너무 예리해서… …" 흑포인은 한쪽에서 비틀거리며 서 있는 하장청을 바라보았다. 하장청은 아직도 조금 전에 흑포인과 격돌했던 충격이 가시지 않아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흑포인은 그를 무섭게 응시하며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하가 애송이! 지금도 늦지 않았다. 검을 내놓는다면 이제 까지의 일은 불문에 붙이겠다. 이것은 본 방으로서는 파격적인 제안 이다. 어떠냐, 검을 내놓을 테냐?" 하장청은 그의 무시무시한 안광을 받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나 범중립과 계대망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용기를 내어 냉소를 쳤다. "흥! 이 보검은 회서방의 물건도 아닌데 내가 왜 이 검을 내놓는단 말이오?" 흑포인의 안광이 살벌해졌다. 그로 말하면 회서방의 십이호 온서로서 회서방에 가입하기 전에 이미 천하무림을 주름잡았던 절세의 고수였다. 앙천적월 적위 하면 대강남북에서는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존재였으니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자를 본 일이 있었겠는가? "흐흐…… 이놈이 끝까지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군." 음산한 냉소와 함께 그의 몸은 어느새 허공을 날아 하장청의 코앞으 로 육박해 오고 있었다. 쐐액! 그 속도는 실로 눈부실 정도로 빨라 하장청의 눈앞에 무언가 시커먼 것이 번뜩인다 싶은 순간 어느새 적위의 손은 그의 이마에 거의 닿아 있었다. "으헛?" 하장청은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을 정도로 놀라 황급 히 허리를 굽혔다. 파스스-- 적위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하장청의 머리 위를 스치자 애꿎은 하장청 의 머리카락만 눈발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하장청은 간이 콩알만해져서 즉시 옥정검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흐흐…… 하루살이 같은 놈!" 적위는 냉랭하게 웃으며 슬쩍 허공을 날아 하장청의 검을 피한후 다 시 손을 쭉 내뻗었다. 쾌액! 마치 한 가닥의 뇌전이 다가오는 듯 굉음이 들리며 적위의 손 은 어느새 검광을 뚫고 하장청의 왼쪽 어깨 견골을 잡아 가고 있었 다. 하장청은 옥정검의 예리함을 빌려 적위의 공세를 피하려 했으나 적위 의 손이 너무도 빠르고 쾌속한지라 도저히 그의 손을 벗어날 수가 없 었다. 그제서야 오만하기 그지없던 하장청도 회서방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아! 이토록 무서운 고수도 회서방의 일개 온서급에 불과하다니…… 그렇다면 회서방주의 무공은 얼마나 가공하단 말인가!' 그는 더 이상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데 적위의 손이 막 그의 어깨뼈를 으스러뜨리는 찰나, 쐐액!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계대망이 번개같이 쌍수를 휘두르는 것이 아 닌가? 그와 함께 그의 손에서 무언가 시퍼런 광채가 빛살처럼 적위를 향해 폭사되어 갔다. 적위는 막 하장청의 어깨를 움켜쥐려다가 무언가 섬뜩한 것이 쏜살같 이 자신의 등을 향해 날아옴을 느끼고 안색이 변했다. 그는 급히 몸을 돌리며 오른손을 휘둘러 광채를 막았다. "크윽!" 하나 그 순간 그는 손이 뜨끔함을 느끼고 짤막한 비명을 토해 냈다. 광채에 닿는 순간 그의 손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가 놀라 보니 그의 손은 어느새 시퍼렇게 변한 채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장심뢰…… 이제 보니 네놈은 만리표 계대망이었구나……!" 그제서야 적위는 그 광채가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계대망이 천하에 명성을 떨친 장심뢰임을 알고 대경 실색했다. 계대망의 장심뢰는 비 단 막기가 힘들 뿐 아니라 일단 격중되면 순식간에 열독이 치 밀어 올라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마는 무서운 암기였다. 적위는 미처 계대망이 있는 것을보지 못하고 무심결에 장심뢰에 격중 당하고 만 것이다. 적위는 으드득 이를 갈더니 그대로 땅을 박차고 담장을 넘어 사라져 갔다. "계대망…… 이 빛은 꼭 갚고야 말겠다……!" 멀리서 그의 원독에 찬 음성이 들려 왔다. 지옥문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다시 살아난 하장청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대망을 향해 포권을 했다. "계 대협, 도움에 감사드릴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그의 음성은 더 이상 거만하지 않았다. 계대망은 비쩍 마른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적위가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이득을 본 것 같소. 하 지만 회서방웨는 아직도 절정고수들이 많으니 하 소협은 매사에 조심 해야 할 게요." "명심하겠습니다." 이때 범중립이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하하…… 자연 계 대협의 일선추흔 수법은 무림일절 이외다. 오늘 계 대협이 안 계셨더라면 장청은 커다란 낭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오." 범중핌은 계대명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자, 어서 안으로 듭시다. 오늘 계 대협의 노고에 보답하는 뜻에서 내가 크게 한틱내겠소이다." 계대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이어 그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그어졌다. "내가 한 일에 보답하고 싶으면 더 좋은 방법이 있소." 동시에 그는 번개같이 하장청과 범중립의 혈도를 짚는 것이 아닌가? 그 속도가 너무도 쾌속하고 뜻밖이었는지라 하장청과 범중립은 꼼짝 없이 혈도를 제압당하고 말았다. "아, 아니…… 계 대협! 이게 무슨 짓이오?" 범중립은 너무도 놀라 망연자실 계대망을 쳐다보았다. 계대망은 비쩍 마른 얼굴에 음산한 웃음을 띠었다 "흐흐…… 별것 아니오. 당신들이 내 은혜를 갚고 싶다고 하기에 그 대가로 한 가지 물건을 가져 가려 하오." 계대망은 하장청이 들고 있는 옥정검을 빼앗아 들었다. 하장청은 너무도 분하고 원통해서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았으나 혈도 가 짚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계가 늙은이야! 이런 짓을 하고도 네가 무림의 고수란 말이 냐?"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썼다. 하나 계대망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피식 웃었다. "그러기에 네놈은 아직 풋내기일 뿐이다. 무림에서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게다가 네놈은 무공이 변변치 않아서 이런 보검을 가지고 있어 봐야 제대로 간수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장청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계대명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 었다. 범중립은 자꾸만 대청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대망은 그의 의중을 짐작한 듯 낄낄거렸다. "범 국주,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마시오. 아마 부국주인 팔수도 곽경 당을 기다리는 모양인데 그는 아까 내가 대청을 나을 때 이미 혈도를 눌러놨소. 아마 내일 아침이나 돼야 깨어날 거요." 그제서야 범중립은 계대망이 이미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이곳으로 온 것임을 알았다. 그는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계 대협과 나는 특별한 친분은 없었으나 아직 서로 서운한 일을 한 적은 없었소. 한데 오늘 계 대협이 이렇듯 나를 기만하니 나는 도대 체 영문을 모르겠구려." "흐흐…… 이를 일컬어 사람이 죄가 있는 게 아니라 물건이 죄가 있 다고 하는 거요. 옥정검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국주에게 이런 짓을 했겠소? 국주가 애당초 내가 성심장의 인물임을 모르고 나를 초청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오." 범중립은 깜짝 놀랐다. "계 대협도 성심장의 인물이시오?" "그렇소. 나는 장주님의 은덕을 받아 다행히도 팔대빈객 중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소. 장주께서 내게 지시를 내려 옥정검을 찾아오라 했 는데 다행히도 지시를 어기지 않게 되었소. 이게 모두 국주의 덕분이 니 내 후일 충분히 사례하겠소이다. 흐흐……" 계대망은 득의한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날렸다. 그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인 두 사람을 남겨 둔 채 옥정검을 안고 어 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의 몸이 산라진 직후, 위원표국의 정원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커다 란 나무 위에서 소곤거리는 음성이 들려 왔다. "결국 물건은 성심장의 수중에 들어갔군." "계대망은 성격이 괴팍해서 어느 문파에도 가입하지 않을 줄 알았는 데 이미 성심장에 포섭되어 있을 줄이야…… 성심장의 세력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한 것 같소." "어쨌든 강 소제와 여풍운이 계대망의 뒤를 따라갔으니 우리도 따라 가봅시다." "계대망을 덮치자는 말이오?" "하하…… 굳이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할 필요가 있겠소? 아마 계대망 은 옥정검을 성심장의 다른 인물에게 인계할 거요. 그때 기회를 노려 공공묘수를 쓴다면 어렵지 않게 옥정검을 찾을 수 있을 거 요." "하하…… 악 대협의 지략에는 그저 감복할 따름이외다." 희미한 웃음 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두 개의 인영이 튀어나와 어디 론가로 날아갔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희미한 초생달이 범중림과 하장청을 비운듯 내비 치고 있었다. 태백객점. 태백객점은 위원표국에서 이백여 장 떨어진 동문 대로의 중앙에 위치 한 커다란 객점이었다.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질 무렵. 휘익-- 난데없이 하나의 인영이 번개같이 태백객점의 후원을 질주하고 있었 다. 인영은 이곳의 지리에 몹시 익숙한 듯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후원의 한곳으로 날아갔다. 그곳은 후원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객 실이었다. 객실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인영은 서슴지 않고 객실로 들어갔다. 객실 안에는 한 명의 청포중년인이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서며 반갑 게 인영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계 형. 물건은 입수했소?" 객실로 들어온 인영은 다름 아닌 만리표 계대망이었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소. 진 형이 한번 살펴보시구려." 청포중년인은 크게 기뻐하며 옥정검을 받아 들었다. 한데 그의 얼굴 또한 몹시 낯익은 것이 아닌가? 이제 보니 청포중년 인은 바로 탁천신수 진조영이었던 것이다. 진조영은 서슴없이 옥정검을 뽑아 들었다. 창!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우윷빛 검망이 주위를 어지럽혔다. 진조영은 은백색 검에서 혓골이 시릴 듯한 한기가 뿜어 나오자 고개 를 끄덕였다. "과연 화대의 명검이로군 계 형은 오늘 큰 공을 세웠소 이다." 계대망은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 장주께서 하장청을 포섭하려는 의사가 있으신 것 같아 그 를 죽이지는 않았소. 하지만 내일 아침쯤이면 그들의 입을 통해서 우 리가 옥정검을 얻은 사실이 알려질 테니 조심해야 할 게요." "물론이오. 하지만 이미 보검이 우리 손에 들어온 이상 그들은 물론 이고 아무리 회서방이 날뛴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거요. 그러나저러 나 날이 새려면 아직도 멀었으니 우리 바둑이나 한 수 어울려 봅시 다." "흐흐…… 좋소." 계대망은 껄껄 웃으며 바둑판을 앞에 놓았다. 이때 점소이가 들어와 허리를 굽신거렸다. "두 분께서는 야식을 드시렵니까?" 계대망은 노렸던 일을 이루었는지라 마음이 느긋해져 절로 시장기가 들었다. "죽엽청 두 병과 구운 오리 두 마리만 갸져 오너라……" 점소이는 대답을 하고 급히 나가 버렸다. 잠시 후에 다른 점소이가 따뜻한 술과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오리구 이를 가지고 왔다. "탁자에 놓고 가거라." 아직 앳되 보이는 젊은 점소이는 음식을 놓다가 잘못하여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앗? 이런……" 젊은 점소이는 더욱 당황하여 오리구이를 집으려다가 다시 술까지 엎 질러 버렸다. 때마침 술병이 튕겨져 나가면서 등불이 꺼졌다. 그러자 계대망이 신경질을 냈다. "이놈이 무슨 지랄을 하는 거야?" 한데 진조영은 무슨 곡절이 있음을 알고 급히 화섭자에 불을 붙여 방 안을 살펴보았다. "앗?" "거, 검이 사라졌다!" 그들의 입에서 억누를 수 없는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젊은 점소이와 옥정검이 감쪽같이 없어진 게 아닌가! "속았다! 그놈은 가짜였구나……!" 진조영과 계대망은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으며 급히 밖으로 뛰쳐 나왔 다. 하나 젊은 점소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일순간의 돌발 사태로 객점 안은 발칵 뒤집혔고, 두 사람은 범인을 찾으려고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제13장 백효전력 오늘따라 매섭던 눈보라도 그치고 바람도 잔잔한 강변이었다. 누남광이 타고 있는 뗏목은 여전히 이수강가에 정박해 있었다. 진호는 천막 앞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 그는 대나무담뱃대를 꺼내 담 배를 꾹꾹 쑤션 넣고는 부싯돌로 불을 붙여 뻐끔뻐끔 빨면서 연기를 내뿜었다. 아주 한적하면서도 느긋한 모습이었다. 이때 돌연 강변에서 괴이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크크크큭……" 그것은 마치 올빼미의 울음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진호는 그 괴소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기색으로 담뱃대를 빨면서 괴소가 들리는 곳을 응시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한 그루의 버드나무 위에서 돌연 두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쓰윽-- 그들은 마치 유성처럼 뗏목 위로 날아왔다. 이십여 장이 넘는 거리를 날아왔음에도 뗏목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 다. 이것만 보아도 나타난 인영들의 신법이 절정에 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진호는 당황하지 않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두 분은 누구요? 이곳을 찾아온 용건은 무엇이오?"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두 사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비단장포를 걸친 삼십 남짓해 보이는 중년사내였 는데 눈은 작았고, 얼굴은 몹시 깡말랐으며,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살기가 번뜩였는데 매우 오만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에 있는사람은 육십 가량 되어 보이는 온후한 인 상의 은의노인이었다. 노인의 수염은 마치 먹물을 칠한 것처럼 검어서 기이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고, 등그런 얼굴에 매우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은색 비늘로 엮어진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 달빛에 반사되어 눈부신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진호는 그 노인을 보자 문득 강호무림에 전설처럼 떠돌던 어떤 사람이 생각나 가슴이 섬뜩했다. 그 노인이 미소를 지으따 입을 열었다. "자네가 노부를 몰라보는 것은 탓할 수가 없지. 하지만 강호에서 오 랫동안 나돌아다닌 사람이라면 노부의 옷차림만 보아도 한눈에 알 텐 데……"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진호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말을 이었 다. "자네는 노부가 찾아온 의도를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구태여 묻는 가?" 진호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소인은 정말 두 분의 정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찾아 오신 의도는 더욱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냉랭하게 웃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노인은 눈에서 괴이한 빛을 번뜩였다. "자네는 혹시 진호가 아닌가?" 진호는 간담이 서늘해지며 음성마저도 약간 떨렸다. "소인이 바로 진호입니다." "허허허…… 그렇다면 틀림이 없군. 소문에 의하면 자네는 누남광을 따라다녔고, 그에 대한 충성심도 변함이 없으며, 이번에 그가 강호에 다시 나왔을 때도 자네는 늘 붙어 다닌다고 하더군." 진호는 정색을 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누남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진호는 그 말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진호가 침묵을 지키면서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옆에 있던 중년인 이 살기를 번뜩이며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노인이 급히 그를 제지시키며 나직이 말했다. "잠깐, 이 일은 급히 서둘러선 안되네. 이자를 죽여 버린들 무슨 소 용이 있겠나?" 중년인은 냉소를 띠며 진호를 노려보았다. "소제가 저자를 죽일 리 있겠습니까? 다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어 사 실을 실토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남광은 노부가 다년간 만나지 못한 친구지, 개를 때려도 주인의 체면을 보아야 하는 법인데 자네는 왜 함부로 손을 써서 오해를 사려 고 하는가?" 중년인은 노기를 억누르며 팔을 내렸다. 노인은 다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진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노부의 이름은 전력이라 하며 무림에서는 백효라고 불 리고 있다네. 그리고 이 사람은 노부의 의동생인 관륵이며, 뭇 사람들은 독비응이 라고 부르지." 진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그들을 주시했다. '과연 나의 추측이 적중했구나. 오랜 세월 동안 강호에 모습을 드러 내지 않던 무서운 마두들이 일제히 강호에 나타났구나!' 진호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백효 전력은 온화한 응모와는 달리 악독하기 그지없는 무시무시한 인 물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강호무림에 흉명이 자자한 칠대흉인 중의 하나로,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속아 목숨을 잃은 사람 이 부지기수였다. 칠대흉인은 전대의 천하제일인이었던 쌍마쌍성 중 쌍마 이후 가장 무서운 마인들로 공인된 인물들이었다. 진호는 급히 그들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아! 이제 보니 두 분은무림의 대선배이셨군요. 한데 제게 무슨 가르 침이라도 있습니까?" 전력은 미소 지었다. "노부는 항시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는 성격이네. 또한 자신이 한 일 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지 한데 소문에 의하면 누남광 은 은거 생활을 하고 있다가 다시 강호에 나온 후 남에게 암습을 당 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진호는 믿는 구석이 있는지 칠대흥인 중의 하나를 앞에 두고도 담담 히 웃었다. "사실입니다." 전력은 눈을 번뜩였다. "그럼 누남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 일 전에 저는 명령을 받고 강 상류에 있는 금촌에서 그분 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어 그분은 맥없이 돌 아와서 제게 급히 떠나라고 명하시고는, 어제 다시 보름 후에 주구점 에서 기다리란 분부를 남기고 어디론지 가버리셨습니다." 전력은 흠칫 놀라며 안색이 약간 변했다. "과연 이상하군. 그가 어디로 떠났단 말인가?" 진호는 미리 생각해 놓은 대로 머뭇거궈지 않고 말했다. "그분은 본 교를 배반한 사제인 육기에게 암습을 당해 겨우 살아나 다행히 중도에서 무림고수의 치료를 받고 약간 회복할 수 있었습니 다. 하지만 모처로 가서 영약을 복용해야만 완전히 치료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분이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 습니다." 전력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누남광은 늘 단독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행적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 지. 그러니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닐세. 육 기가 그에게 암습을 가한 것은 누남광이 가지고 있는 기서를 탈취하 려는 속셈이었던 모양인데 그가 빼앗았는지 모르겠군." 진호는 그가 누남광이 기서를 소지한 것을 알고 있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 딱 부러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아직도 그분이 지니고 있습니다. 육기가 그 기서를 탈취 하려는 것은 허황된 생각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관륵이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나섰다. "사람에겐 죄가 없는 것인데…… 다만 진귀한 물건을 지니고 있는 것 이 탈이지. 누남광이 만약 늙은 목숨이라토 보존하고 싶다면 그 기서 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생각일 게다." 진호는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 그 기서를 지니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왜냐하 면 육기의 뒤에는 막강한 성심장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만약 다른 사람이 그 기서에 손을 뻗는다면 당장 죽음의 화를 당할 겁니 다." 관륵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전력이 관륵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니 아우는 너무 화를 내지 말게." 그는 다시 진호를 주시하며 물었다. "누남광이 떠날 때 그 기서를 지리고 있는 것을 보았는가?" "선배님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분은 항상 기서를 몸에 지니 고 계셨고 잠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전력은 잠시 각엇을 생각하더니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우리는 이 짓목에서 머무르다가 보름 후에 자네 의 조사가 돌아오면 만나야겠네." 진호는 안색이 돌변해 크게 외쳤다. "그건 안 됩니다." 관륵이 짙은 살기를 띠며 맞섰다. "왜 안 된단 말이냐?" 그러자 전력이 그들의 가운데에 나서며 미소를 지었다. "사람에겐 각자 고충이 있는 법이니 아우는 그렇게 다툴 필요가 없 네." 진호는 씁쓸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육기는 많은 성심장의 고수들을 대동하여 우리 뒤를 추적하고 있으 므로 소인은 자신의 몸을 지키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두 분 선배님께선 이번 시비의 소용돌이 속에 끼여들 필요가 없을 것 같습 니다." 관륵은 여전히 쌀쌀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일단손을 뻗친 이상 반드시 이번 시비에 끼여들어야겠다. 다 만 네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책임지고 네 안전을 돕겠다." 이때 전력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이 뗏목 위에 향불이 있는 것은 어인 일인가?" 진호는 내심 움찔했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인닝께서 떠나실 때 그렇게 하라고 했었습니다." "그건 무엇 때문인가?" "주인님은 치료를 받아 일단 죽음은 면했지만 필시 영약을 얻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백 일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더구나 백 일 동안도 목숨이 풍전등화 같아서 수시로 불이 꺼질 우려도 있습니다. 그래서 법술을 펼쳐 진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전력과 관륵은 반신반의하여 서로 마주보았다. 진호는 그들이 자신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음을 직감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소인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무림인들과 육기에게 발견되 지 않으려고 밤에만 길을 재촉했고 낮에는 은밀한 곳에 숨어 있었습 니다." 전력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짓목 속에 숨어서 누남광의 목숨을 지켜 줘야 되겠 군." 진호는 가슴이 섬뜩했다. '이들이 이토록 끈질기게 달라붙다니…… 아무래도 자칫하다가는 일 이 엉망으로 되겠군.' 전력은 은밀히 진호의 표정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누남광이 상처를 완치할 영약을 찾으러 떠났다면 혹시 황산에 있는 유령동부로 갔을지도 모르겠군. 기사회생의 영약이 있는 곳이라면 유령동부밖에는 없지 않은가?" 진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관륵이 약간 빈정거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개미도 목숨을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사람인데 오죽하겠습니까?" 진호는 못 들은 척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담담한 달빛 아래 밤바람이 세차게 불었으며, 물결은 세차게 강변에 부딪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도 들려 왔다. 이때 돌연 멀지 않은 숲속에서 한 인영이 섬전처럼 튀어나왔다. 그는 머리 깊숙이 풍모를 눌러쓰고 등뒤에는 보도를 맨 소년이었다. 전력과 관륵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소년을 보자 경계심을 돋우었다. 하나 진호는 오히려 반색을 하여 급히 포권을 했다 "강 소협, 오셨군요." 강옥봉은 뗏목 위로 날아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 노인께서는 영약을 찾으러 가셨소?" "예, 그러시면서 소협에게 보름 후에 뵙자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때 전력이 눈빛을 기이하게 반짝이며 앞으로 나섰다 "이 분 소협은 누구인가?" 진호는 정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분은 주인님과 망년지교이신 강 소협이십니다." 강옥봉은 앞으로 나서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두 분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전력은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풍모와 등뒤에 맨 보도를 유심히 살폈 다. "소협은 혹시 얼마 전에 산서성 일대에서 놀라운 명성을 떨친 무영신 룡단혼도가 아니오?"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초가 바로 무영신룡단혼도입니다." 전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강옥봉의 전신을 살폈다. "그랬군. 그렇지 않아도 소문을 듣고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 게보니 이것이 바로 인연이 아닌가?" 강옥봉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요." 한쪽에 서 있던 관륵은 강옥봉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이 험악해졌다. "어린 나이에 제법 명성을 얻었다고 선배를 몰라보는군." 강옥봉은 약간 불꽤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귀하와 나는 서로 초면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관륵은 화가 불끈 치밀어 올라 오른손을 불시에 내밀어 강옥봉의 완 맥을 움켜쥐었다. "흥!" 강옥봉은 냉랭히 코웃음을 치며 슬쩍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관륵의 적엽수가 헛되이 허공을 가르는 것이 아닌가! 관륵은 안색이 확 달라지며 엉거주춤하고 말았다. 어느 틈엔지 강옥 봉의 왼손이 관륵의 오른쪽 손바닥으로 바싹 디밀어지고 있었던 것이 다. 그의 손이 조금만 움직였어도 강옥봉의 손가락이 그의 손에 구멍을 뚫어 버렸을 것이다. 전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남달리 예리한 안력이 있노라 평소에 자부하고 있었는데 방금 강옥봉이 어떤 수법으로 관륵의 손바닥을 제압했는지 미처 보지 못했 던 것이다. 강옥봉은 담담한 눈빛으로 관륵을 지그시 응시했다. "불초는 원래 쉼사리 남에게 손을 쓰지 않는 성미요. 만약 이곳이 누 노인의 뗏목이 아니었다면 오늘 귀하는 크게 낭패를 면치 못했을 거 요" 음성은 비록 조용했으나 귓전을 윙윙 울려 관륵은 꿀 먹은 벙어리처 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강옥봉은 천천히 손을 거두고 진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누 노인이 보름 후에나 만나자고 하니 나는 그때까지 다른 볼일이나 보겠소." 이어 그의 몸은 다시 훨훨 강 위를 날아갔다. 세 사람은 멍하니 서서 그의 몸이 강변에 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때 관륵의 심정은 말이 아니었다. 무림에서 쟁쟁한 명성을 얻고 있는 그가 이름도 없는 약관의 젊은이 에게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단 일 초만에 깨끗하게 참패를 당했 으니 수치와 분노가 극에 달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의 자존심 또한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전력은 그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달리 할말이 없어 침 묵을 지키고 있었다. 진호 또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 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잉--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자 물결이 기세를 부리며 뗏목을 요동시 켰다. 전력과 관륵은 뿌려진 물방울에 온몸을 적시고 말았다. 그들은 흔들 리는 뗏목 위에서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관륵은 얼굴에 뿌려진 물을 닦으며 버럭 소리쳤다. "빌어먹을…… 조금 전만 해도 잠잠하던 하늘에 난데없이 폭풍우라도 몰아치려나? 이게 무슨 일이지?" 전력의 얼굴은 미소가 씻은듯이 사라진 채 무서운 광채를 번뜩이고 있었다. "이 풍랑은 어떤 놈이 요법을 부리는 게 분명하다. 혹시 누납 광이 이 근처에 있다는 말인가?" 콰, 콰아앙-- 풍랑은 더욱 기세를 부리며 몰아쳤다. 물방울이 하늘을 가릴 듯 그들 에게 계속 뿌려졌다. "앗? 이놈이 어디로 갔지?" 관륵이 흠칫 놀라며 소리치자 전력은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바람이 세차게 물아치며 물방울이 사방으로 튕겨지고 있었는데 진호 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뗏목은 그리 크지 않아 둘러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막 앞에 서 있던 진호의 모습은 홀연 몰아 닥친 풍 랑과 함께 씻은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귀신에 흘린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역시 진호는 보이 지 않았다. 거센 풍랑은 한 시진 동안 계속 몰아치더니 차츰 기세가 꺾이며 뗏목 은 어느 모래사장에 닿았다. 하늘에는 아직도 먹구름이 채 걷히지 않았고, 그 사이로 조각달이 살 며시 얼굴을 보였다. 어둠에 잠긴 주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젓목에 타고 있던 두사람은 풍랑에 시달려 피로에 지친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미 낙양에서 너무 멀리 떠내려와 이곳이 어디인지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전력이 씁쓸히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누남광에게 호되게 당한 모양이군. 조금 전의 바람 은 누남광이 배교대법을 이용해 일으킨 게 분명하네." 관륵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그 대법으로 바람까지 자유자재로 불러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네. 그렇지 않고서야 장주께서 그토록 그것을 원하실 리가 없 지. 누남광은 거센 풍랑을 일으켜 우리의 이목을 속인 후에 진호를 빼 돌린 것이 틀림없네." 관륵은 입을 딱 벌린 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전력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여긴 더 볼일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세 계대망이 옥정검을 구했는지 그쪽 일이 궁금하군." 두 사람은 몸을 날려 짓목을 떠나갔다. 그들의 몸이 사라진 직후, 뗏목의 가운데 있는 천막와 한쪽 끝이 걷 히며 그곳에서 두 사람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 도 그들은 바로 진호와 강옥봉이었다. 진호는 전력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강옥봉을 돌아보며 웃음을 떠 올렸다. "정말 강 소협의 재질은 탁월하시군요. 그새 배교대법 중에서도 익히 기가 어렵다는 호풍우를 터득하고 계셨으니…… 오늘 강 소 협이 적시에 나타나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들에게 한바탕 곤욕을 치 렀을 겁니다." 강옥봉은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호풍우와 은형막은 배교대법 중에서도 이치가 비교적 단순 하여 얼마 전에야 겨우 터득했으니 진 형은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보다 칠대흉인 중의 하나인 백효 전력마저도 성심장에 포섭되었다 니 뜻밖이군요." "그렇습니다. 전력은 보기와는 달리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무서운 흉마인데, 이것만 보아도 성심장이 절대로 좋은 집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진호는 돌연 나직한 탄식을 토해 냈다. "칠대흉인들은 벌써 십여 년 간이나 무림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 데 이제 그들 중 하나가 나타났으너 나머지 육대흉인들도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겠군요. 자칫하면 무림은 그들 때문에 다시 한바탕의 혈겁을 당할 것 같으니……" 강옥봉은 묵묵히 그와 말을 듣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칠대흉인이 비록 무섭다고는 하나 그들도 엄연히 사람입니다. 그러 니 우리들이 힘을 모아 상대한다면 그들도 함부로 옛날과 같은 악행 을 저지르지 못할 겁니다." 진호는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무림에 강 소협 같은 분이 한 분만 더 계셨더라면 칠대흉인이 아니 라 그들의 할아비가 온다 해도 횡행하지 못할 겁니다." "별말씀을……" 그때 돌연 멀리서 하나의 인영이 쏜살같이 뗏목을 향해 날아왔다. 강옥봉은 그 인영이 팔비도룡 여풍운임을 알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 다. 여풍운은 번개같이 뗏목 위로 올라와 강옥봉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강 소제, 큰일났네." 그의 얼굴은 평소의 여유 작작했던 모습과는 달리 조급한 표정이 가 득했다. "무슨 일입니까?" 여풍운은 강옥봉에게 나직하게 뭐라고 소곤거렸다. 강옥봉의 안색 또한 크게 변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보지요." 그는 뗏목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여 대협께서는 진 형을 데리고 누 노인이 계시는 곳으로 가 계십시 오." 그의 모습은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그의 음성만이 강물 위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풍운과 진호는 멍하니 뗏목 위에 선 채 강옥봉이 사라져 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강물만이 짓목을 스치고 있을 뿐이었다. 제14장 북망귀왕 멀리서 먼동이 터올 무렵. 낙양으로 통하는 관도 위를 질풍같이 달려가는 세 인영이 있었 다. 그들은 이남일녀였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젊고 준수한 청년들이었고, 여자는 홍의피풍을 두 른 절세의 미소녀였다. 그들 중 황의장삼을 입은 청년은 운가장의 소 장주인 화북일룡 운자개였고, 다른 두 남녀는 곽조웅과 곽희연이었 다. 그들은 무슨 다급한 일이 있는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정신없이 달려 가고 있었다. 한데 그들이 어느 으슥한 죽림을 가로질러 가고 있을 때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운자개 등 세 사람은 신형을 멈추고 얼른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십 장 밖에 도림이 있었고, 그 속에 한 채의 집이 은은히 보 였다. "사람 살려……!" 비명 소리는 계속 들려 왔다. 운자개가 앞장서서 그 집 쪽으로 달려가자 곽조웅과 곽희연도 즉시 뒤를 따랐다. 그런데 급히 그 집의 대문을 지나 방안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방안에는 탁자와 간단한 물건들이 질서 정연하게 진 열되어 있을 뿐,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돌연 밖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려 왔다. "흐흐…… 과연 풋내기들이로군." "앗? 함정이다!" 운자개는 깜짝 놀라즉시 한 개의 연미추혼사를 발사했 다. 쐐액! 남색 광채가 창문을 뚫고 날아갔다. 운자개는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뛰쳐 나왔다. 순간, 도림 안에서 다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희들 셋은 이미 몇 겹의 포위망에 갇혀 있다. 본 장에 대 항하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니 어서 굴복하고 천양금환 을 내놓아라!" 운자개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을 뽑아 들면서 뒤따라 나온 곽희연 남매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내 뒤를 바짝 따르게. 아무래도 이들은 성심장의 인물들 같지만 우리가 사력을 다해 싸우면 이들을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 네." 곽희연과 곽조웅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십시오, 형님!" 운자개는 그들을 다시 한 번 힐끔 본 후 먼저 도림으로 날아 들어가 려했다. 찰나, 번쩍! 도광이 번뜩이며 돌연 두 장한이 나타나 그들을 덮쳐 왔다. 운자개는 즉시 몸을 약간 옆으로 틀면서 수중의 칼을 빗발치듯 그어 댔다. 파파파팍! 괴이하고 신기한 그의 도법은 매서운 도광을 그으면서 밀려갔 다. 이것이 바로 그의 아버지인 일수삼도 운남평이 명성을 떨쳤던 파 운삼도 중의 파운혈세초식인 것이다. 과연 그 위력은 실로 놀라워, 무시무시한 도풍이 귓전을 진동 시켰고 당장 살기가 사방으로 풍겼다. 나타난 두 사람은 운자개의 매 서운 도법에 밀려 앙쪽으로 갈라서더니 서로 눈짓을 한번 하면서 일 제히 덤벼들었다. 운자개는 우선 칼로 상대방의 검을 막으면서 요리조리 피하다가 돌연 좌측에 선 사나이의 목덜미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팟! "으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 사나이의 머리통이 뎅겅 잘려지고 말았다. 동시에 운자개는 몸을 돌려 우측에서 접근하는 사나이의 팔을 잘라 버리고는 잠시 전세를 가다듬었다. 한 사나이는 이미 목이 잘린 채 쓰러져 죽었고, 나머지 사나이는 검 을 잡았던 촌이 잘려 나가자 안색이 잿빛으로 변해 뒤로 피했다. 하나 운자개의 도광은 놓치지 않고 다시 그 사나이의 가슴을 스쳤다. "크악!" 처절한 소리와 동시에 사나이는 피를 뿌리면서 고꾸라졌다. 그는 가슴을 부등켜안고 몸부림치다가 사지를 쭉 뻗고 죽었다. 이메 또 두 사람이 뛰쳐 나오면서 운자개를 공격했다. 하나 도광이 몇번 번쩍거리는 가운테 그들도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창백한 모습으 로 쓰러졌다. 순간, 얘의 음침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놈! 과연 운남평의 자식답게 한가락하는구나. 하지만 솜씨가 너무 악랄하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와 동시에 도림 안으로부터 많은 인영들이 언뜻 보였다. 곽조웅은 그런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운자개에게 나직이 말했다. "저자들이 차륜전으로 우리를 교란시켜 피로하게 만들 속셈 인 것 같으니 야단났습니다." 그의 말이 막 끝났을 때, 스스슥! 아홉 사람이 나타나 새 사람을 포위하고 일제히 병기를 휘둘렀다. 파파팍! 하나 운자개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그들과 맞서 나갔다. 그는 이미 아름다운 곽희연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앞애서 이들을 물리쳐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 그녀의 마음은 온통 강옥봉에게만 쏠려 있으니 과연 그의 뜻대 로 일이 잘 될지…… 운자개는 칼을 기이하게 그어대며 전후좌우로 돌면서 세찬 기세로 맞 섰다. 팍! 파팍! 도풍이 사납게 몰아치는 가운데 또 두 사람이 피를 뿌리면서 징그러 운 형상으로 쓰러졌다. 곽씨 남매의 무공 역시 고강했다. 서로 등을 맞대고 한쪽으로 돌면서 진기를 운용시키더니 돌연 고함을 지르면서 덮쳐 갔다. "이얍!" 팟! 곽희연은 일 검으로 흑의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히자 더 욱 용기 백배하여 검광을 사방으로 뿌리면서 사납게 몰아쳐 갔 다. 쐐액! 쐐액! 사나운 소리가 연거푸 들리면서 곽희연의 검은 핏빛 무지개를 그리며 허공에 난무했다. "크악!" 흑의인은 비틀거리다가 다시 일검을 맞고 고꾸라졌다. 한편 곽조웅은 쌍장을 앞으로 쭉 내뻗어 강맹한 장력을 일으키며 덮쳐 갔다. 꽈릉! 흑의인은 감히 정면으로 맞받지 못하고 급히 몸을 피했다. 하나 어느 새 다가간 곽조웅은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그의 심맥 을 잡아 비틀었다. "끄으윽!" 심맥이 끊어진 사나이는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마치 맹수 가 할퀸 것처럼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이들이 혈전을 벌이고 있을 때, 돌연 버드나무 뒤에서 백의인 이 나타났다. 백의인은 여인이었는데, 실로 그 용모가 흥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귀밑에는 지전을 달았고, 모습이 구반다 와 같이 험상궂게 생긴 노부인이었다. "낄낄낄…… 귀여운 것들!" 노부인은 징그러운 괴소를 터뜨리더니 양손을 슬잭 흔들었다. 그러자 시커먼 흑사가 자욱하게 뿌려지는 것이 아닌가! 그 속도는 실로 쾌속 무비해서 운자개와 곽씨 남매가 무언가 이상함 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느끼한 비린내가 그들의 코를 찌른 후였다. 순간 그들은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그 자리에 쓰러져 까무러쳤다. 노부인은 야릇한 눈초리를 굴리면서 피소를 터뜨렸다. "히히히…… 두 연놈은 아직 동자와 동녀여서 허벅지가 뻐근한 게 맛이 썩 좋겠군." 그러자 한 청의인이 나섰다. "이 세 놈은 몸에 천양금환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같이 재질 들이 탁월하므로 상하지 않게 사로잡아 후송하라고 장주께서 특별히 부탁하셨소." 노부인은 야룻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노신이 한바탕 즐긴 다음 장주께 넘겨도 된다." 노부인은 색정에 젖은 눈초리로 곽희연과 곽조웅을 내려다보면 서 괴이한 믐짓을 했다. 노부인은 옆에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쓰러진 곽조웅의 몸을 옆으로 끌어안더니 색정에 미친 사람처럼 하체를 더듬기 시작했 다. 이때였다. "휘-- 익?" 도림 밖에서 청아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부인은 움찔 놀라면서 일어나더니 세 사람을 옆구리에 끼고 바람처 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다른 흑의인들은 모두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즉시 몸을 솟구쳐 갔다. 방으로 들어온 노부인은 운자개와 곽희연 남매를 바닥에 내려롤고 물 을 먹인 다음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그녀는 아무런 이상도 없음을 알 고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품에서 녹색 환약을 꺼내 그들에게 먹이 고는 신속한 동작으로 지풍을 날려 몇 군데 혈도를 찔렀다. 제일 먼저 깨어난 사람은 곽조웅이었다. 곽조웅은 전신에 힘이 쭉 빠 졌으나 흥측스립게 생긴 노부인이 음탕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 고 깜짝 놀랐다. 노부인의 특이한 용모를 보자 곽조웅은 단번에 이 노부인이 음탕하기 로 유명한 소혼파파임을 알아보았다. 소혼파파는 본시 천성적으로 응탕한 여자였으며, 얼굴이 흉물스럽게 생겼기 때문에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간악한 수 법으로 자신의 색정을 만족시켰는데, 비록 얼굴은 추악하게 생겼지만 방중술이 뛰어나 타의든 자의든 그녀와 한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더 없는 쾌락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채양보음이라는 음술에 정통하여 그 녀와 색정을 즐기다가 죽은 남자가 태반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색을 좋아하는 남자라도 그녀만 보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남자의 혈도를 찔러 제압한 다음 으슥한 곳으로 데려간 후 괴이한 약을 먹여 정신을 차리게 하는데, 무슨 수법을 쓰 는지 절대로 반항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옷을 홀랑 벗어서 매끄러운 살결과 은밀한 부분을 남자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녀의 괴이한 유혹에 걸려 남자가 색정을 즐기는 동안 그녀 역시 재 미를 보는 한편 채양보음의 음술로 더욱 깊은 욕망을 채우면 배 위에 서 꿈틀거리던 남자는 저절로 죽어 갔던 것이다 하지만 채양보음 덕분에 그녀의 공력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이 막강 해져서 그 동안 어느 누구도 그녀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성심장에 포섭된 후 성심장주의 명령 때문에 차마 성심장의 인물들과는 그 짓을 못해 안달이 났지만 이번에 임무를 받고 밖으로 나오자 새장에서 풀려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운자개와 곽조웅 같은 준수하고 산뜻하게 생긴 소년들을 보 았으니 그 욕정이 불길처럼 치솟았던 것이다. 곽조웅이 깨어나자 그녀는 야룻한 미소를 지었다. "요것아, 노신이 널 깍듯이 모실 테니 사양하지 않겠지?" 이때 마침 운자개와 곽회연도 깨어났다. 두 사람은 눈앞에 전개된 광경을 보자 대경 실색했다. 곽희연은 차마 다시 얼굴을 들지 못했으며 운자개는 마구 뛰는 가슴을 겨우 억제하 고 있었다. 소혼파파는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유달리 컸으며, 허리는 가늘었고 양쪽 허벅지도 매우 커서 과연 요부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곽조웅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소혼파파는 낄낄 웃었다. "요것아, 내가 옷을 벗겨 주지……" 그녀는 곽조웅의 옷을 벗기면서 애무하다가 다시 손을 괴이하게 움직 여 나머지 옷을 벗기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온몸에 쾌락의 전율이 밀려오는지 숨결이 거칠어지고 있 었다. "아아! 요것아, 빨리…… 빨리……" 이때였다. "휘-- 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인영이 뛰쳐 들어오더니 태산 같은 장 력이 그녀에게 밀려갔다. 꽝! "아악!" 소흔파파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장력에 횝쓸려 피분수를 뿌리며 날아 갔다. 그녀는 반대쪽 벽에 부딪혀 꼴사나운 모습으로 축 늘어졌다. 아직도 쾌감을 그리워하는 듯 사지를 바르르 떨다가 몸을 가누려고 안간힘을 쌨다. 때마침 나타난 인영은 바로 강옥봉이었다. 강옥봉은 반쯤 몸을 일으킨 그녀에게 덮쳐 가며 천룡보도를 휘둘렀 다. 팟! "크윽!" 그녀는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질퍽한 피바다 속에 누워 죽어 갔다. 강옥봉은 곧 곽조웅에게 옷을 입힌 후 세 사람의 혈도를 풀어 주었 다. 곽조웅이 벌떡 일어나며 감격한 음성으로 외쳤다. "강 소협, 또 신세를 지게 되었군요." 운자개도 자리에서 일어나 사의를 표했다. "고맙소. 이 은혜 잊지 않겠소이다." 곽조웅이 생각난 듯 급히 물었다. "한데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강옥봉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여송 대협이 나를 찾아오다 우연히 나와 친한 사람과 만난 모양이 오. 그래서 그분이 다시 나에게 소식을 전했는데, 마침 성심장에서 세 분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오게 된 거지요."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혼파파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공교롭게도 성심장의 일당 한 명을 만났소. 그래서 그를 제압 하여 심문했더니 세 분이 소혼파파의 손에 걸려 있다고 하더군요. 나 는 그놈으로부터 소혼파파가 채양보음술에도 정통하고 무공도 괴이하 여 쉽게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창 밖에서 엿보다가 그녀의 욕정이 불붙기 시작했을 때를 노려 급습을 가한 겁니다." 이때 곽희연은 그리워하던 강옥봉을 만나게 되어 기쁘기 한량 없었으 나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강 소협은 매우 점잖은 사람인데 왜 저렇게 쑥스러운 말만 할까?' 강옥봉은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곽조웅을 향해 물었다. "나는 아직 부 대협을 직접 만나지 못해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는 데 세 분이 급히 낙양으로 달려온 것은 나를 만나기 위함이오?" 곽조웅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부 대협과 우리는 강 소협이 낙양에서 매형을 만난다는 소식만 믿고 달럭왔지요 도중에 부 대협이 서로 나뉘어 찾는 게 더 좋을거라고 해서 갈라졌습니다." "한데 왜 그토록 나를 만나려고 했소?" 곽조웅은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은…… 운 누님께서 회서방의 인물들에게 납치를 당하셨습니 다." 강옥봉은 뜻밖의 소식에 깜짝놀랐다. "뭐라고요? 운봉랑 소저께서 말이오?" "그렇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나보다 운 형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니 운 형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요." 운자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옥봉에게 다가와 포권을 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귀하께서 일전에 본 장을 위기에서 구해 주신 것을 뒤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강옥봉은 씁쓸하게 웃었다. "별말씀을…… 한데 회서방에서 왜 운 소저를 납치해 갔소이까?" 운자개의 준수한 얼굴은 무겁게 굳어 있었다. "소협제서 본 장의 위기를 구해 주신 후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밤 에 봉랑이 실종되었습니다. 아버님과 제가 깜짝 놀라 봉랑의 침실로 가보니 시녀는 허리가 으깨어진 채 죽어 있고 한 통의 서신만 침상 위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제가 그걸 볼 수 있을까요?" 운자개는 서슴없이 품속에서 한 통의 서신을 꺼내 그에게 건네 주었 다. "그렇지 않아도 강 소협에게 보여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이 일은 강 소협과도 관련이 있으니……" 강옥봉은 의아한 눈으로 서신을 읽어 보았다. <운 장주 전. 운 소저는 본 방에서 잠시 모셔 가겠소. 만일 그녀를 되찾고 싶으면 보름 후 낙양 북망산에 있는 공 동 묘지로 천양금환을 가지고 삼경까지 나오시오. 특히, 천양금환을 가지고 오는 인물은 무영신룡단혼도라는 애송이여 야 하오. 본 방에서는 운 소저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고이 모셔 두겠소만 운 장주에서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시거나 엉뚱한 생각을 품으신다면 그녀의 안전은 더없이 위태롭게 될 게요. 잘 생각해서 결정하기 바라오.> 편지 아래에는 회색빛의 쥐 문양이 찍혀져 있었다. 강옥봉은 괸지를 읽고 침음했다. 운자개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천양금환은 내놓을 수 있었지만 무영신룡단혼도가 어디에 있 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소이다. 그때 보다 못한 부 대협께서 무 영신룡단혼도가 강 소협임을 말씀해 주시고, 낙양으로 매형을 만나러 갔으니 지금쯤 그곳에 있을 거라고 알려 주셨소. 그래서 우리는 황급 히 소협을 찾아 이쪽으로 오게 되었던 거요." 강옥봉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운자개를 바라보았다. "약속한 날짜가 언제입니까?" "바로 오늘이오." "그렇다면 어서 떠납시다. 우선 부 대협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 그들 에 대항할 비책을 연구해야겠소이다." 그라하여 녜 사람은 집에서 나와 도림 사이를 누비고 지나갔다. 이어 낙양성을 향해 유성처럼 달려갔다. * * * 칠흑같이 어두운 밤. 당장이라도 유령이 나타나 옷깃을 끌어당길 것 같은 음산한 공동 묘 지였다. 휘이이…… 휘이이이…… 바람 소리는 마치 귀신이 통곡하는 것같이 들렸고, 우뚝우뚝 서 있는 비석 위에는 까마귀들이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다. 이렇게 음산한 공 동묘지 한쪽 높은 소나무 위에는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서 청승맞게 울고 있었다. 이곳 망산은 원래 고대의 황제와 황후들의 무덤이 있던 곳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많은 무덤이 생겨나서 지금은 산 전체가 아주 거대한 공동 묘지로 변해 버렸다. 이때 돌연 머리에 풍모를 눌러쓰고 등에 보도를 맨 소년이 공동 묘지 앞에 나타났다.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무영신룡단혼도가 물건을 가지고 왔소. 그러니 여러분들은 어서 모 습을 나타내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비석 뒤에서 음첨한 음성이 들려 왔 다. "크크크…… 과연 네놈의 배짱은 알아줘야겠구나. 혼자서 이곳에 오 다니……" 동시에 무덤 뒤 이곳저곳에서 도깨비 같은 인영들이 불쑥불쑥 나타났 다. 공포스런 분위기가 주위에 감돌았다. 하나 소년은 조금도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냉랭하게 웃었다. "하하…… 회서방이 언제 귀신방으로 바뀌었소? 오라 이제보 니 당신들은 낮에는 쥐새끼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밤만 되면 귀신으로 변해 나타나는구려." 그의 비꼬는 소리에 인영들의 눈에서 일제히 노기가 피어올랐다. "크흐흐…… 제법 주둥아리가 여문 놈이로군. 하나 혼자서 이곳에 온 이상 네놈은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한다." 음산한 괴소와 함께 비석 뒤에서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머리를 풀어 산발을 하고 땅에 끌리는 칙칙한 회색 장포를 걸 친 괴인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안광이 푸르스름하게 번뜩이는 것이 선명하게 보 여 흡사 무덤 속에서 갓 튀어나온 강시들을 연상케 했다. 소년은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두 분은 혹시 망산이귀가 아니오?" 산발괴인들은 몸을 움찔하다가 이내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그렇다. 우리가 바로 망산이귀이시다. 우리를 알아보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어떤 분들인지도 알고 있겠지?" 망산이귀는 원래 북망산 일대의 패주인 북망귀왕의 두 제자들로,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심성이 잔인하고 악독해서 모 두들 두려워해 마지않는 흉인들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피와 간을 즐겨 먹어서 더욱 끔찍한 악명을 얻고 있었 다. 얼마 전 북망귀왕이 회서방에 포섭되어 십구호 온서로 발탁되었는데, 그때 그들도 덩달아 전서급 인물로 포섭되었던 것이다. 소년, 강옥봉은 그들이 악명 자자한 망산이귀임을 알았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웃었다. "물론이오. 두 분이 시체의 간을 즐겨 파먹고, 산 사람의 생혈 을 빨아먹는 지저분한 일만 골라서 한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 소." 망산이귀의 눈빛이 흉악해졌다. "찢어 죽일 놈! 오냐. 네놈을 그렇게 죽여 주겠다!" 이어 그들은 막 강옥봉을 덮치려 했다. 이때 강옥봉이 급히 그들을 제지했다. "잠깐! 그 전에 운 소저가 무사한지 알아야겠소. 그녀는 지금 어디 있소?" 망산이귀는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 곧 죽을 롬이 그런 건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 네놈은 다만 천양금환을 두 손으로 받친 채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기만 하면 된 다." 강옥봉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그렇다면 그녀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단 말이오? 비겁한 자들, 약속 을 어겼구나!" "흐흐……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 하지만 너무 늦었다!" 망산이귀는 음산한 괴소와 함께 강옥봉을 향해 덮쳐 왔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 늘어서 있던 괴영들도 벌떼같이 덤벼들었다. 강옥봉은 불 같은 살심이 일어 천룡보도를 뽑아 들고 매섭게 후려쳤다. 팟!팟! 빛살 같은 도광이 일어나며 한바탕 피보라가 허공을 수놓았다. "크앗!" "케엑!" 무작정 달려들던 괴영들 중 서너 명이 가슴이 쩌억 갈라진 채 무더기 로 쓰러져 버렸다. 망산이귀는 대경 실색하여 급히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하나 그들의 가슴팍 부분 옷자락도 어느새 걸레 조각같이 잘려진 후였다. 망산이귀는 강옥봉의 도법을 보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도법이란 말인가? 밀종의 흑사도법 보다 기이하고 소림의 대원도법보다 더 날카롭구나 ……!' 그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파파팍! 강옥봉은 쉬지 않고 천애팔도 중의 운롱야마와 양초관사의 절초를 펼 쳐 괴영들을 주살해 갔다. 그는 이들이 약속과는 달리 운봉랑을 데리고 나오지 않았음을 알고 한바탕 살겁을 저지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손속에 추 호도 인정을 두지 않아 천룡보도는 더욱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 었다. "케엑!" "크아악!" 순식간에 십여 명의 인영이 비명과 함께 피바다 속에 쓰러져 버렸다. 망산이귀는 눈 깜박할 사이에 자신들의 수하가 반이나 쓰러지자 이를 부드득 갈며 강옥봉을 향해 날아왔다. "이놈! 악랄하구나!" 좨애액! 그들의 양손에서 푸르스름한 광망이 우박처럼 퍼부어졌다. 강옥봉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의 공세 속으로 뛰어들며 천룡보 도를 소리탄차의 식으로 그어댔다. 파파팟--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섬뜩한 도기가 구름처럼 퍼어올랐다. 망산이 귀가 쏘아 낸 푸른 광망은 도기에 닿자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망산이귀는 사색이 된 채 허겁지겁 몸을 퍼하려 했다. 하나 도광이 한발 빨랐다. 팟! "크아악!" "으윽!" 피분수가 뿜어져 나오며 망산이귀 중 한 명은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나뒹굴었고, 다른 한 명은 오른팔이 어깨부터 싹둑 잘려져 버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순식간에 동료를 잃고 자신마저 팔이 잘리자 망산일귀는 고통도 잊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이, 이럴 수가…… 이런 도법이 있다니……" 강옥봉은 이미 살심이 크게 솟구쳐 쉬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며 천룡 보도를 휘둘렀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어디선가 사나운 폭갈과 함께 매서운 경풍이 몰아쳐 왔다. 하나 강옥봉은 슬쩍 허리를 비틀어 경풍을 피하며 그대로 천룡보도로 망산일귀의 목을 내리쳤다. 싹! 망산일귀는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수급이 잘려 나가고 말았다. 쿵! 그의 몸뚱이는 몇 번 꿈틀거리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쓰러진 망산일귀의 시체 옆으로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 인영은 괴상한 모자를 썼는데, 헝클어진 머리칼이 모자 밖으로 나 왔고 허연 이빨이 밖으로 툭 튀어나와 더욱 사납게 보였다. 게다가 가죽만 남은 얼굴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고, 구리방울 같은 눈에서는 남색 광채가 번쩍거렸는데 등에는 괴이한 무기를 매고 있었 다. 그야말로 귀신이 무색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몰골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어두운 밤이기에 그의 모습은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망산이귀의 사부이며 회서방의 십구호 온서인 북망귀왕 여 절패였다. 여절패는 자신이 한 발 늦게 당도하여 두 명의 제자가 모두 죽어 버 리자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과연 무영신릉단혼도라는 이름이 무색하구나. 아직 나이도 어린 놈 이 벌써부터 손속이 이토록 악랄하다니, 나중에는 크나큰 살성 이 되겠구나!" 강옥봉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먼저 약속을 어기고 살수를 쓴 건 당신네들이었소.이제 와서 후 회해도 때는 늦었으니 어서 운 소저를 내놓으시오." 여절패는 으스스한 괴소를 띠었다. "흐흐…… 그 계집을 걱정하기 전에 우선 네 몸부터 걱정해라. 오늘 본왕이 네놈을 죽이지 않는다면 귀왕이라는 호를 떼어 버 리겠다." "당신 정도가 왕으로 칭해진다면 나는 앞으로 도왕이라 이름짓 겠소. 귀왕과 도왕 중 누가 진짜 왕의 자격이 있는지 어디 한번 봅시 다." 여절패는 솟구치는 분노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어헝!" 그는 노호성을 지르며 강옥봉을 향해 덮쳐 왔다. 꽤애액!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그의 커다랸 손에는 괴이한 모양의 독각동인 이 쥐여져 있었다. 그의 독각동인은 무게만 해도 무려 팔 십 근이 나갔고, 재질은 특수한 합금이어서 단순히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지고 웬만한 병기는 그대로 박살이 났다. 지금도 분노하며 휘두르는 여절패의 독각동인에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위력이 담겨 있었다. '과연 귀왕이라는 이름이 거저 얻은 것이 아니로군.' 강옥봉은 내심 약간 놀라며 슬쩍 허리를 비틀어 상대의 무서운 일격 을 피했다. 하나 일단 기선을 잡은 여절패는 쉬지 않고 계속 독각동인을 풍차처 럼 휘둘렀다. 팍! 팍! 팍! 주위가 온통 독각동인의 그림자에 쉽싸이며 돌가루가 휘날리고 무서 운 경풍이 휘몰아쳤다. 강옥봉은 이리저리 몸을 날려 피하다가 주위 의 압력이 점차 가중됨을 느끼고 천룡보도를 휘두르며 맞서기 시작했 다. 휙! 휙! 그의 천룡보도가 기이한 호선을 그리며 날아들자 독각돌인의 그림자 로 가득 찼던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여절패는 상대의 도 법이 자신의 상상보다 훨씬 더 뛰어남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도법일까?' 그가 경악하는 사이 독각동인과 천룡보도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쾅! 병기와 병기가 부딪쳤는데도 폭음이 터져 나왔다. 여절패는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 다. 하나 강옥봉은 단지 슬쩍 옆으로 반 걸음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여절패는 깜짝 놀라 급히 자신의 독각동인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단단하기 그지없던 독각동인은 끝 부분이 조금 부러져 나가 있었다. 여절패는 눈을 크게 뜨고 강옥봉의 천룡보도를 기어지게 노려보았다. '아니, 저 녹이 잔뜩 슨 칼이 내 독각동인보다 날카롭다니…… 그리 고 아직 나이도 어린 놈의 내공이 이토록 심후할 줄이야…… 아무래 도 조심하지 않으면 낭패를 면치 못하겠구나!' 여절패는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번에는 강옥봉이 먼저 천룡보도를 휘두르며 여절패에게 덮쳐 왔다. 쓰아악! 기이한 반원을 그리며 날아오는 천룡보도는 순식간에 여절패의 전신 을 뒤덮다시피 했다. 여절패는 자신이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가 도세에 점령되었음을 깨 닫고 눈빛을 흉흉하게 번뜩였다. "이얍!" 그는 커다란 폭갈을 떠뜨리며 독각동인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파파파파…… 엄청난 경풍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큭!" 그 와중에 짤막한 신음이 터지며 한 사람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물러 서고 있었다. 여절패는 독각동인을 무려 마흔여덟 번이나 휘둘렀으나 강옥봉의 도 를 완전하게 막아 내지 못하고 어깨에 일 도를 격중당했던 것이다. 안색이 대변한 채 뒤로 물러서는 그의 어깨는 주먹만한 살덩이가 잘 려나간 채 피를 뿜어 내고 있었다. 가뜩이나 험상궂은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자 그야말로 귀신이 무색할 정도였다. 하나 그가 미처 몸을 가눌 새도 없이 강옥봉의 천룡보도는 다시 날아 들었다. 휘익! 도가 채 가까이 오기도 전에 기이한 호곡성이 터져 나왔다. 여절패는 머리 끝이 쭈뼛해짐을 느끼고 사력을 다해 독각동인을 휘둘 렀다. 하나 이번에 강옥봉이 시전한 초식은 천애팔도 중에서도 절초인 휘풍 명월이었다. 여절패는 자신이 휘두른 독각동인의 공세가 강옥봉의 도 광에 닿자 산산이 흩어짐을 느끼고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팟! "크윽!" 그는 가슴이 화끈거리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휘청거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강옥봉은 그에게 바짝 다가오며 천룡보도를 휘둘렀다. "크…… 아…… 아…… 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오며 여절패는 가슴에 심한 충격을 받고 울컥 핏덩이를 토해 내며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제15장 인질구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망산에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를 무렵. 여절패는 서서히 깨어났다. 그는 자기가 어느 묘지 앞에 누워 있고 전신의 뼈마디가 쑤셔 와 몸 을 움직일 수 없음을 의식했다. "으윽!"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 가슴 부근이 뻐개지는 듯한 통증에 신음을 토 했다. 그의 가슴은 쩌억 갈라진 채 갈비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여절패는 이를 악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눈을 번뜩였다.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한 명의 중년인이 등을 돌리고 앉아 한창 꿩 두 마리를 굽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여절패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르자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친구! 당신이 노부를 구했소?" 중년인은 분주히 놀리던 손을 멈추고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제법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눈빛이 맑은, 호감이 가는 인상의 인물이 었다. 중년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같이 변변찮은 존재가 어찌 무영신룡단혼도를 물리치고 귀하를 구 할 수 있겠소?" 여절패는 어리등절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나는 우연히 지나던 길에 그자가 귀하와 귀하의 수하들을 모두 도륙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손속이 너무 악랄하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꾀를 내어 회선향령표를 쳐내 그자를 다른 곳으로 유인해 낸 뒤 귀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오." 여절패는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내 부하들은……?" 중년인은 무거운 탄식을 토해 냈다. "그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소." 여절패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영신룡단혼도…… 그 악랄한 놈이 감히 내 제자들을 모두 몰살시 키다니……" 한동안 원독에 찬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떠절패는 문득 생각 이 난 듯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생명을 구해 준 은혜는 잊지 않겠소이다……" 그는 새삼스럽게 가슴 부위의 상처에서 지독한 통증이 밀려옴을 느끼 고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와 입술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괴로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 다. "치, 친구…… 수고스럽지만 노부의 주머니에 약병 두 개가 있나 살 펴봐 주시오. 그 중 붉은 병예 금창성약이 들어 있소이다. 중년인은 곧 여절패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약병 두 개와 은자 몇 닢을 꺼내 들며 빙그레 웃었다. "있소이다, 약이……" 그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여절패는 붉은 환약 두 개를 꺼내 손으로 으스러뜨린 후 갈라진 상처 위에 뿌리고 다시 붉은 환약 세 개를 꺼 내 복용했다. 잠시 후 통증이 많이 감소된 듯 그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또한 쩌억 갈라진 채 가슴뼈가 드러나 보였던 상처도 많이 아물고 있었다. 그제야 여절패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 평생 이런 낭패는 처음 당해 보는군. 노부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정말 꿈만 같소이다. 은인의 존함은 어찌 되시오?" 중년인은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나는 봉옥이라 합니다……" 그리고는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꿩고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시장할 텐데 우선 이걸로 요기나 하시고 체력을 회복시켜 속히 돌아 가도록 하시오. 나도 언제까지나 이곳에 죽치고 앉아 있을 순 없소이 다." 여절패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 "봉 친구, 별일없다면 노부와 동행하지 않겠소? 큰 대접은 못 해드릴 망정 최소한의 성의는 표하고 싶소이다." 봉옥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는 것은 응당 사람의 도리인데 무슨 보답을 바라겠소? 그리고 나는 무공이 보잘것없어 내 자신도 보호하기에 미흡하므로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소이다." "봉 친구! 노부는 통증이 다소 가셨으나 내상은 전혀 회복되지 않아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옮기기 어려운 입장이오. 그러니……" 그는 말끝을 흐리면서 봉옥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까지의 북망귀왕 여절패의 명성을 생각하면 실로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무영신룡단혼도에게 호되게 당한 후로 는 오만무도한 여절패도 의기 소침하여 예전같이 안하무인으로 행동 할 수가 없었다. 봉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무척 딱하게 되었군요. 좋소이다! 내친김에 내가 부축해 드 리겠으니 우선 고기나 먹고 봅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핑고기를 한참 동안 열심히 뜯었다. 이윽고 뼈다귀도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운 여절패는 봉옥을 바라보았 다. "이제는 떠나는 것이 좋겠소." 봉옥은 웃으며 여절패를 등에 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절패는 상처가 심한 데다 피를 많이 흘린 까닭에 현기증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봉 친구, 여기서 서쪽을 향해 계속 달려 주시오." 봉옥은 두말없이 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망산은 중조산맥과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산줄기가 험준하 고 하늘을 찌를 듯한 산봉우리가 첩첩이 들어서 있었다. 여절패의 지시를 받으며 이십여 리쯤 내달린 봉옥은 어느 산곡 으로 들어갔다. 수목이 울창한 산곡은 해를 가리어 사방이 어둠침침하였고, 빙굴 속 에 들어간 듯 뼈를 깎아 내는 추위가 몸을 으스스 떨게 했다. 산곡 안으로 얼마쯤 들어가자 난데없는 외침이 들려 왔다. "멈춰라!" 그러자 여절패가 급히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봉 친구, 속히 '현황천지, 홍황우주'라고 대답 하시오." 봉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현황천지, 홍황우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숲속에서 칼을 든 흑의인 일곱 명이 달려오 더니 경이의 시선으로 봉옥의 위아래를 훌어보았다. 봉옥은 급히 말했다. "여러분, 수고스럽지만 이분 여 대협을 호송해 주시오." 일곱 명의 흑의인들은 봉옥의 말을 듣고서야 그의 등에 업힌 사람이 북망귀왕 여절패임을 알아차렸다. "온십구호님!" 그들은 허겁지겁 달려와 여절패를 받아 부축했다. "여 대협! 나는 이만 떠날까 합니다. 후일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 게 되겠지요." 여절패는 눈을 크게 떴다. "봉 친구, 그게 무슨 말이오? 이곳까지 왔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 버 린다면 노부의 심사가 어찌 편안할 수 있겠소?" 그러자 흑의인들 중 눈치 빠른 자가 잽싸게 나섰다. "대협, 꼭 급히 떠날 이유가 없다면 저희들의 호의를 저버리지 마십 시오." 봉옥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할 수 없이 응낙하고 그들과 함께 산곡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후,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장원이 나타났다. 장원은 범위가 매 우 넓고 건물들과 누각이 즐비했다. 봉옥은 여절패 등과 함께 장원으로 들어서며 눈빛을 기이하게 반짝였 다. '이곳은 낙양대협이라 불리는 금시조 도중웅 의 거처인파…… 설마 도중웅마저 회서방에 포섭되어 있을 줄은 몰랐군' 봉옥은 주위를 힐끔힐끔 살피면서 의미 모를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 다. 과연 봉옥의 정체는 무엇일까? * * * 그날 밤. 봉옥은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를 위해 마련된 침실로 돌아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침실 안에는 희미한 등불이 켜 있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창문을 두들기며 스쳐 가는 가운데 밤은 깊어만갔다. 삼경이 지났을 무렵. 돌연 밖에서 나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봉 대협!" 봉옥은 건성으로 코를 골면서 계속 자는 척하고 있었다. 창밖에선 계속 몇 번인가 봉옥을 부르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더 이 상 부르지 않았고, 이내 발걸음 소리는 차츰 멀어져 갔다. 이윽고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자 봉옥은 슬그머니 침 상에서 몸을 일으켜 불을 끈 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그는 집 안의 경계가 삼엄하다는 것을 곧 짐작할 수 있 었다. 그가 묵고 있는 방만 하더라도 문밖 복도엔 네 명의 고수가 각각 위 치를 고수하며 어둠 속에 몸을숨기고 있었다. 하나봉옥의 신법이 너 무도 표홀해 봉옥이 창 밖으로 빠져 나간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 다. 봉옥은 내심 웃으며 도중웅의 거처를 향해 유령처럼 몸을 날려갔다. 대청 안은 밤이 야심한데도 여전히 밝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봉옥은 숨을 죽이고 지붕 위로 올라가 도괘주렴의 신법으 로 거꾸로 매달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널쩍한 대청 안에는 많은 인영들이 앉아 있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태사의가 있었고 그 위에는 이목이 청수한 금포노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금포노인의 안색은 주삿빛으로 붉었고, 눈빛은 강철보다도 예리했다. 이 노인이 바로 낙양 일대에서 대협으로 칭송이 대단한 금시조 도 중웅이었다. 도중웅 앞에는 두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고, 그 뒤로 다시 대여섯 명 의 흑의인들이 둘러서 있었다. 두 명의 노인 중 하나는 봉옥에 의해 구원을 받은 북망귀왕 여절패였 다. 봉옥은 다른 노인의 얼굴을 보고는 눈을 빛냈다. '흠…… 저자는 며칠 전 위원표국에 나타났다가 계대망에게 봉변을 당한 앙천적월 적위라는 자로구나.' 금시조 도중웅과 여절패, 그리고 적위는 서로 나직하게 밀담을 나누 고 있었다. 봉옥이 청력을 기울이니 도중웅와 말소리가 들려 왔다. "무영신룡단혼도의 무공이 그처럼 대단하다러 실로 뜻밖이오. 나는 여 형과 여 형의 수하들만으로 충분히 그놈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 했는데 내가 판단을 잘못했구려." 여절패의 얼굴이 붉어졌다. 도중웅의 말은 얼른 들으면 자신의 판단 착오를 자책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은근히 무영신룡단흔도라는 애송이 하나를 처치하지 못하 고 쫓겨온 여절패를 비웃는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여절패는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도 형의 말씀대로 그 어린 놈의 도법은 실로 놀라웠소. 나는 아직까 지 무림에 그처럼 괴이하고 무서운 도법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없소이다." 그는 회서방 내에서 도중웅보다 서열이 낮았는지 그를 대하는 태도가 정중했다. 도중웅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전에 최혼가람 고복양에게서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고보양이 방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소. 그런데 오늘 여 형의 말 을 들으니 아무래도 그 녀석이 절세의 도법을 익히고 있는 모양이구 려. 그 녀석이 사용하는 도법이 무슨 도법인지 짚이는 거라도 있소?" 여절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혀 없소. 무림에 이름이 나 있는 웬만한 도법이라는 도법은 거의 대부분 알고 있는데 그 자식이 사용하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괴이 무쌍한 도법이었소." 그매 옆에서 듣고 있던 적위가 못마땅찬 기색으로 불쑥 입을 열었다. "그깟 애송이가 사용하는 무공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여 형은 그렇게 호들갑을 떠시오?" 여절패는 안색이 변해 그를 노려보았다. "나였기에 망정이지 적 형이었으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오지도 못했 을 거요." 적위는 눈을 부라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노부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요?" 도중웅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앉으시오. 가뜩이나 복잡한 일도 많은데 우리 편끼리 다툴 필요는 없지 않소?" 그의 말에 적위는 움찔하여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것만 보아도 도중 웅의 권위가 두 사람보다는 훨씬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중웅은 차가운 눈으로 적위를 응시했다. "적 노인도 얼마 전에 계대망에게 뜻밖의 낭패를 당했는데 어찌 여 형만 나무랄 수 있겠소?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무영신룡단혼도 의 도법은 우내칠대무학 중의 하나일 것이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우내칠대무학이라고요?" 도중웅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 형이 모를 정도라면 그자의 도법은 아직까지 당금 무림에 나온 적이 없는 도법이 분명하오. 그런 도법 중에서 여 형을 단숨에 격패 시킬 정도의 위력이 있는 것은 오직 우내칠대무학 중의 천애도뿐이 오." 지붕 위에서 도중웅의 말을 듣고 있던 봉옥은 움찔 놀랐다. '저 도중웅의 예측은 귀신 같구나. 저자를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신중 을 기해야겠는걸.' 여절패는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 천애도가 틀림없을 거요. 그렇지 않고서야 노부가 그토 록 맥없이 당했을 리가 있겠소?" 그는 동의를 구하는 시선을 도중웅과 적위에게 던졌다. 도중웅은 내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한심한 놈 같으니…… 그게 무슨 자랑거리나 된다고 떠들고 있 는 거야?' 도중웅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적위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여절패는 머쓱해져서 급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도중웅은 냉랭한 시선으로 여절패를 살아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옥정검과 천양금환을 구하는 두 가지 일이 모두 실패해 버렸 으니 방주님의 진노를 피하기 어려울 거요." 여절패와 적위는 움찔 놀라 얼굴에 두려운 빛을 떠올렸다. 흉신악살 같은 그들도 도중웅의 입에서 회서방주란 말이 나오자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절패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운봉랑이 아직 우리의 수중에 있으니 그녀를 이용하면 천양금환을 얻을 수 있지 않겠소?" 도중웅의 음성은 쌀쌀맞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여 형이 그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사람은 보여 주지도 않은 채 물건만을 노리려 했으니 다시 운봉랑과 금환을 교환하자고 해도 그들이 순순히 응할 리가 없지 않소?" 여절패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번에 무영신룡단혼도를 상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가 책임을 지기 로 하고 맡은 일이었다. 여절패는 무영신룡단혼도쯤은 충분히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예 처음부터 사람과 물건을 교환할 마음도 없이 기세 등등하게 나섰던 것이다. 그러다가 물건은 구경도 못 해보고 부하들만 몽땅 잃고 돌아 왔으니 아무리 낮짝이 두꺼운 그일지라도 도처히 얼굴을 들 수가 없 었다. 도중웅은 한동안 못마땅한 눈으로 여절패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 었다. "천양금환이 무영신룡단혼도에게 있는 이상 빼앗기는 수월치 않을 거 요. 그러니 그와의 원한 관계는 차후에 해결하기로 하고 우선은 운봉 랑의 오빠인 운자개와 연락을 취해 보도록 하시오. 아무래도 무영신 룡단혼도보다는 운자개가 여 형이 상대하기에 더욱 수월할 테니까." 여절패는 쓴 입맛을 다시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이번에 여 형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무영신룡단혼도로 하여금 천 양금환을 가지고 오게 한 일이었소. 그러니 다음에 인질을 교환할 때 는 운자개가 직접 들고 오게 해야 할 거요." "명심하겠소." 여절패는 기가 팍 죽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도중웅은 적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적 노인!" 적위는 그가 자신을 부르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말씀하시오, 도 형!" "적 노인은 계대망이 성심장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적위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지만 곧 계대망이 성심장의 팔대빈객 중 하나 라는 걸 알게 되었소." 도중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말을 이 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계대망은 적 노인을 쫓아 내고 다시 하장청과 범중립을 제압한 다음 옥정검을 탈취해 갔다고 하오. 그런데 계대망 이 그것을 탁천신수 진조영에게 인계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것을 훔 쳐 갔다는 것이오." 적위는 금시초문인 듯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소. 믿을 만한 수하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니 틀림이 없을 거요" "옥정검을 훔쳐 간 자가 누구인지 아시소?" "그것은 모르오. 하지만 짐작 가는 인물이 있소." 적위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게 누구요?" "무림에서 공공묘수로 이름이 높은 인물은 얼마 되지 않 소. 한데 내가 듣기로는, 며칠 전 낙양 근처에서 천리일순 방각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소." 적위는 눈을 크게 양다. "바로 그 늙은 도적귀신 방각 말이오?" 도중웅은 짜증스러운 듯 그를 흘겨보았다. "천리일순 방각이 그말고 또 누가 있겠소?" 앙천적월 적위의 신분으로 남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커다란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 적위는 조금도 불꽤하지 않은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도 형께서는 방각이 그 옥정검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신단 말이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계대망이 옥정검을 잃어버렸고, 근처에 공공묘 수의 달인인 방각의 행적이 나타났으니 의심을 안 할 수가 없 소. 그러니 적 노인은 방각의 뒤를 추적하시오." 적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방가, 그 늙은 도적은 신법이 강호제일이고 행적이 신비해 어느 곳에 있는지 알아 내기가……" "그래서 내가사람을풀어 이미 방각의 행방을 알아 내었소. 그는 지금 낙양의 진양객잔 후원에 있으니 그곳으로 가면 될 거요." 그제서야 적위는 도중웅이 이미 모든 일의 안배를 끝내 놓았음을 알 고 절로 감탄하는 마음이 일었다 "알겠소. 이번에는 결코 도 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소." "제발 그러기를 바라겠소." 그들이 이러저러한 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대청 밖에서 한 명의 인물이 불쑥 들어왔다 그는 청의를 걸친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도중웅은 언짢은 얼굴로 고개를 들다가 청의중년인의 얼굴을 확인하 고는 정색을 했다. "이게 누군가? 총호법을 보필하는 청면사 곽숭 이 아닌가?" 청의중년인은 다가와 도중웅을 향해 포권을 했다. "곽숭이 온삼호님을 뵈옵니다." 이제 보니 도중웅의 지위는 온서 삼호였다. 회서방의 온서급 인물들은 무공 실력으로 서열을 정한 것이 아니라 회서방에 가입한 순서대로 서열이 매겨져 있었다. 하나 그 중 일호, 이호, 삼호 온서만은 회서방주 가 온서급 인물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세 명을 직접 지명하였 기 때문에 그 서열이 남달랐다. 여절패와 적위가 같은 온서의 신분이면서도 도중웅에게 쩔쩔맸던 것 은 그가 온서 중에서도 특수한 신분인 삼호 온서였기 때문이었다. 청면사 곽숭 또한 여절패와 적위에게는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고 오직 도중웅에게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으니 이것만 보아도 회서방 내에 서 도중웅의 위세가 막강함을 알 수 있었다. 청면사 곽숭은 비록 직급은 전서였으나 총호법의 위사였기 때 문에 온서급 인물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도중웅은 반갑게 곽숭을 맞으며 물었다. "총호법께서는 평안하신가?" "예, 그분께서는 온삼호님께 안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음…… 한데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인가?" 곽숭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총호법께서 제게 한 가지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온삼호님께서는 운봉랑 소저를 잡고 계시지요?" 도중웅은 내심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하나 내색치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총호법제서 그 운 소저를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도쿵웅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고 내심 쓴웃음을 찌었다. '또 총호법의 음심이 발동한 모양이군 하긴 운봉랑은 무림의 사대미인 중 하나이니 그가 노릴 만도 하겠지.' 그는 잠시 생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께서 원하신다면 운 소저를 보내 드리지. 하지만 며칠 내로 그 녀를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내셔야 한다고 말씀드리게. 그녀는 천양금 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니까 말일세." "그건 총호법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도중웅과 곽숭은 여절패와 적위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들끼리만 이 야기를 나누었다. 여절패와 적위는 내심 울화가 끓어올랐으난 한 사람은 신분이 특수한 삼호 온서이고, 다른 한 사람은 회서방주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 는 총호법의 측근이니 자신들로서도 어쨀 수가 없었다. 다만 속으로 앙심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도중웅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흑의인들 중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밀실에 가서 운 소저를 이곳으로 데려오도록 해라." 두 흑의경장은 즉시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기가무섭게 지붕으로부터 하나의 인영이 뒤를 밟 았으나 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후, 밀실로 가는 도중에 번번이 겅문을 받으며 뒤뜰 월동문 앞에 당도한 두 사람은 주위를 한차례 쓸어본 후 나지막이 불 렀다. "감노사." 그러자 차가운 대답이 들려 왔다. "누구냐?" 한 흑의경장인이 말을 받았다. "소지민과 한청이 장주님의 명을 받들어 운 소저를 대 청으로 모시러 왔습니다." 월동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왜소한 체구의 사나이가 나오더니 두사람 을 번갈아 본 후 난색을 표했다. "지금 보다시퍼 밤이 깊어 운 소저는 취침에 든 지 오래요. 그녀의 성미가 어찌나 까다로운지 시중을 드느라 진땀을 빼고 있소." "그렇지만……" "지금 한참 단잠에 빠져 있을 텐데 깨우게 되면 두 분은 아마 단단히 혼이 날 거요.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내일로 미루도록 하시오." 소지민 역시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우리는 졸개의 신분이니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대청 안에서 장주님과 총호법의 위사인 청면사 곽숭이 운 소저를 기다리고 계시니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총호법이라는 말이 나오자 감노사의 태도가 금세 바뀌었다. "그렇다면 두 분은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러나 사전에 미리 말해 두지만 공손한 태도로 그녀를 대해야 할 거요. 자칫 실수라도 해 그 녀가 길길이 날뛰기라도 하면 장주님께 영락없이 경을 치게 될 것이 니 말이오." 한청이 웃으며 대답했다. "염려 마시오. 그녀의 틸끝 하나라도 다치게 했다가는 우리의 모가지 가 달아나리라는 것쯤은 우리도 알고 있으니까." 뜰 안에는 겨을 매화가 시원스럽게 피어 산뜻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 다. 두 흑의경장인은 감노사의 안내를 받으며 운봉랑이 갇혀 있는 방문 앞에 이르렀다. 그들은 헛기침을 한 후 조심스럽게 불렀다. "운 소저!" 그러자 한참 후에 여인의 교성이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누구예요? 누가 이런 깊은 밤중에 남의 단잠을 깨우는 거예요?" 소지민은 문도 열리지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두 손을 모으며 허리 를 굽혔다. "소저, 용서하십시오. 장주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대청에서 소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자 운봉랑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내가 나가지 않겠다면요?" 소지민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저, 그랬다가는 소인들은 당장 모가지가 떨어져 나갈 겁니다. 소 인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런 봉변을 주시렵니까?" 그의 애원 어린 말이 주효했는지 잠시 후에 그녀의 한숨 섞인 음성이 들려 왔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러면서 방안에 불이 밝혀지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짐작컨대 그녀가 옷을 주워 입는 듯하여 두 추의경장인은 귀를 종긋 거리며 의미 모를 웃음을 띠었다. 잠시 후 문이 드르륵 열리며 운봉랑의 아리따운 얼굴이 살짝 내밀어 졌다. "들어오세요. 내가 물어 볼 말이 있으니까." 막 방 안으로 들어서던 두 흑의경장인은 갑자기 일진의 사향 같은 그 윽한 향기가 스며듦을 느끼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으음……" 나직한 신음 소리와 함께 그들은 방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앗!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뜻밖의 사태에 놀란 운봉랑이 어리등절하고 있을 때 검은 그림자가 유유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운 소저는 아직 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운봉랑은 귀에 익은 음성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다가 너무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아! 가…… 강 소협, 당신이 어떻게 여길……?" 검은 인영은 급히 방문을 닫고 속삭였다. "역시 소저는 나를 잊지 않았구려." 들어온 사람은 봉옥, 아니, 강옥봉이었다. 그는 그녀가 갇힌 곳을 알 내기 위해 일부러 중년인으로 변장을 하고 여절패를 구해 주었던 것 이다. 흑의경장인을 안내했던 감노사는 이미 혈도가 짚인 채 밖에 쓰러져 있었다. 운봉랑은 두 눈에 기이한 열기를 띠며 강옥봉을 애타는 시선으로 응 시했다. 아마 그와 다시 만난 것이 사실이라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사태가 긴박하니 우선 도망칩시다." 강옥봉은 동정을 살피면서 그녀에게 소곤거렸다. 여러 날 동안 몸은 편했지만 정신적으로 타격을 많이 받은 운봉랑은 얼굴이 무척 수척해 있었는데, 강옥봉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그 동안 쌓이고 쌓였던 불안 따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가시고 몸이 날 아괌 듯 가벼워졌다. 그녀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운봉랑은 서글서글한 눈으로 강옥봉의 준수한 얼굴을 뜰어지게 바라 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 소협, 전 혈도를 짚여 무공이 봉쇄되었으니 어떻게 이 호랑이 굴 을 빠져 나가지요7" 강옥봉은 빙그레 웃으며 양손을 내밀어 그녀의 등을 눌러 갔다. 그러자 운봉랑은 불타 오르는 듯한 한 가닥 순양진기가 명 문혈을 따라 스떠듦을 느끼고는 몸을 약간씩 꿈틀거렸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침체되었던 혈도가 정상적으로 유통되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됐소. 지금쯤 그들은 운 소저가 오지 않아 의아심을 느낄 것요. 그 러니 더 늦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갑시다." 강옥봉은 운봉랑과 함께 급히 방문을 열고 어둠 속을 날아갔다. 한편, 도중웅과 곽숭은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도중웅은 약간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아니, 왜 여태껏 오지 않을까?" 그는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러자 밖에서 장작개비처럼 몸이 비쩍 마르고 키가 훤칠한 중년인이 즉시 달려들어왔다 "장주님,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 "너는 빨리 뒤뜰 밀실로 달려가 운 소저를 데리러 간 소지민과 한청 이 왜 여태껏 돌아오지 않는가 알아보고 오너라." "예!" 중년인은 힘차게 대답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곽숭은 도중웅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듣자 하니 운봉랑의 미모는 가히 월궁의 항아를 능가하 고 특히 그녀가 한번 웃으면 모든 남자들의 넋이 달아난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7" 도중웅은 껄껄 웃었다. "하하…… 그녀의 용모가 가히 경국지색인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이 곳에 온 후 아직 한 번도 웃지를 않아, 그녀의 미소가 과연 소문처럼 그런 위력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네." "흐흐…… 총호법께서는 평소 사대미인을 모두 품안에 안 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이번에 소비연 운 소저가 온삼호님 의 수중에 있다는 걸 아시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온삼호님께서는 평소에 여색을 멀리하시고 심신의 수양에 힘쓰시는 분이 라 총호법께서도 존경하고 계시지요." 도중웅은 내심 그가 말하는 속뜻을 알고 코웃음을 쳤다. 하나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녀는 비록 인질로 붙잡혀 와 있지만 나는 섭섭지 않게 그녀 를 대접하고 있다네. 게다가 수하들에게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 지 못하게 해서 그녀는 아직 청백지신을 유지하고 있지." 곽숭은 도중웅이 이미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불안해 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과연 총호법의 말씀대로 온삼호님은 당당한 대인의 풍모가 있 으십니다." 그때 밖으로 나갔던 중년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가슴을 두들기며 미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숨만 거칠게 몰아쉬 었다. 도중웅은 눈깹을 치켜 세우며 매섭게 다그쳤다. "웬일이냐!" "크…… 크…… 큰일났습니다. 우, 운 소저가……" "운 소저가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어서 말해라!" 중년인은 도중웅의 사나운 호통에 가까스로 숨을 돌리고 말했다. "운 소저가 실종되었습니다" "뭐라고?" 도중웅은 날벼락을 맞은 듯 순간적으로 멍해 있다가 두 눈에 신광을 폭사해 냈다. "그녀는 혈도가 제압당해 무공을 상실했는데 어떻게 달아날 수 있단 말이냐?" 중년인은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목을 움츠리며 겁먹은 눈동자를 이 리저리 굴렸다. "속하가 가보니 밀실을 지키고 있던 감노사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 고, 소지민과 한청 두 사람도 운 소저의 방안에서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습니다." 도중웅은 안색이 변해 벌떡 일어섰다. "어서 그곳으로 가보자." 도중웅은 먼저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곽숭과 여절패, 적위 등이 줄줄이 뒤따라갔다. 하나 밀실로 달려간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혈도를 짚인 채 쓰러져 있는 세 명의 수하들뿐이었으니…… 운봉랑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힘없이 대청으로 되돌아을 수밖에 없었다. 제16장 천불사 진양객잔은 낙양성의 남문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진양객잔의 후원 쪽으로 날아드는 몇 개 의 인영이 있었다. "샅샅이 살펴봐라! 방가, 그 늙은 도적은 꾀가 많고 몸이 빠르니 신 중을 기해야 한다." 체구가 거대한 회의노인이 십여 명의 흑의인들을 대동한 채 진양객잔 띄 담 위에 우뚝 서서 후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의노인은 바로 회서방의 십이호 온서인 앙천적월 적위였다. 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십여 명의 흑의인들은 번개같이 후원을 포휘한채 객실 하나하나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객실에 투숙했 던 손닝들은 때아닌 불청객들의 출현에 당황했으나 그들의 흉신악귀 같은 모습을 보고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은 듯이 있을 뿐이었다. 적위는 흑의인들이 후원을 거의 다 뒤졌는데도 방각의 행적을 발견치 못하자 점차 초조한 기색이 되었다. 그는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겪었는지라 이번 일마저 성공하지 못한다 면 그의 체면은 물론이고 방 내에서의 위치마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후원을 모두 뒤진 흑의인 중 한 명이 적위에게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방각은 이곳에 없음이 분명합니다." 적위는 신경질적으로 발바닥을 담벼락에 비벼댔다. "그럴 리가 있느냐? 분명 온삼호가 이곳에 방 늙은이가 숨어 있다고 했거늘, 좀더 샅샅이 살펴보아라!" "예, 하지만……" 흑의인이 머뭇거리자 적위는 호통을 질렀다. "무얼 망설이고 있는 게냐? 어서 한 번 더 찾아보지 않고!" 흑의인은 찔끔 놀라 급히 후원으로 달려갔다. 하나 적위의 안색에는 어느새 불안감이 가득 떠오르고 있었다 '보아하니 눈치 빠른 방늙은이가 벌써 낌새를 알아차리고 튄 모양이 군. 이를 어쩌지……' 그때 문득 적위는 후원의 구석에서 하나의 인영이 조심스럽게 움직이 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높은 담장 위에 올라가 후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 치에 있었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적위의 눈빛이 번뜩였다. '옳지 방 늙은이가 저곳에 있군!'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곳으로 날아갔다. "흐흐…… 방가야! 어딜 그렇게 쥐새끼처럼 몰래 가느냐?" 그는 번개같이 인영의 앞에 떨어져 내리며 음산한 괴소를 흘렸다. 그러다 눈앞의 인영을 살펴본 그의 안색이 홱 변했다. "엇! 방 늙은이가 아니잖아?" 과연, 찔끔 놀라며 적위를 바라보는 인영은 머리가 허옇게 세고 은백 색 수염을 길게 기른 온화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처음에는 적위의 출현이 뜻밖인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담 담하게 물었다. "귀하는 누구를 찾고 있소?" 적위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았음을 느끼고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의 안광이 예리해졌다. '이 늙은이는 무엇 때문에 몰래 숨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려고 했을 까? 혹시……"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노인의 전신을 쓰윽 살펴보았다. 노인은 움찔하여 급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적위는 더욱 수상함을 느끼고 노인에게 바짝 다가갔다. "당신은 누구요?" 그때 그들에게 다가오던 흑의인 중 한 명이 노인을 발견하고 경호성 을 질렀다. "앗! 온십이호님, 저자는 바로 배교의 전대 교주인 누남광인니다." 누남광은 그 음성을 듣자 황급히 뒤로 몸을 돌려 밖으로 도주하려 했 다. "멈춰라!" 적위는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두 명의 흑의인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어 누남광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남광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적위는 내심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절로 입가에 득의 만면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각의 행적을 찾지 못해 초조하기 그지없었는데 배교의 기서 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누남광을 발견했으니, 이건 꿩 대신 닭이 아니라 꿩 대신 매를 잡은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적위는 징글맞은 웃음을 터뜨리며 접근해 왔다. "흐흐…… 이제 보니 당당한 배교의 전대 교주이신 누남광 어른이셨 군. 한데 왜 잠자기 로리를 말고 도망치려는 거요?" 누남광은 도주할 생각을 포기하고 돌아서며 쌍장을 가슴에 모았다. "나는 중상을 입어 오래 살지 못하니 언제 죽어도 억울하지 않소. 한 가지 묻겠는데, 노부는 지금까지 회서방과 아무런 원한도 없었는데 왜 노부를 핍박하는 거요?" 적위는 히죽 웃으며 본색을 드러냈다. "기서만 내놓는다면 우리가 어찌 누 노인을 억압하겠소? 누남광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노부를 죽여 입을 봉쇄시키고 기서를 얻어 도주하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엄청난 계산 착오요." 적위는 자신의 홍심이 드러난 것 같아 몸을 움찔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만약 내가 기서에 수록된 현묘한 점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기 서를 손에 넣어도 휴지 조각을 얻은 것이나 진배없소." 이때 한 흑의인이 나서서 사납게 외쳤다. "당신은 그 기서를 수십 년 동안이나 보물처럼 간직하면서 밤낮으로 연구했어도 이렇다 할 묘리를 깨닫지 못했는데 살려 둔다고 무슨 쓸 모가 있겠소?" "흥! 당신의 말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오.노부가 비록 기서 의 내용을 완전히 터득하지는 못했으나 하나도 알지 못하는 여러분들 에게 견준다면 훨씬 고명하다 할 수 있소. 한마디로 말해서 요점을 간파하면 다른 것까지도 깨닫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여러분 의 자질에 달려 있소." 중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만약 당신들이 강제로 기서를 빼앗고 노부를 죽이려든다면 노부는 당신들보다 먼저 출수하여 기서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소." 그러자 적위가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누 노인의 말씀은 우리에게 조건을 내걸겠다는 뜻이오7" "그렇소." "그럼 조건을 말해 보시오." "두 가지 조건이 있소. 회서방에서도 유령동부의 보물을 노리나 본데 만약 유령동부를 열게 된다면 그곳에 숨겨진 보물 중에서 다만 노부 의 상세를 완쾌시킬 수 있는 영약을 내주면 좋겠소." 적위는 흔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은 승낙할 수 있소. 그럼 두 번째 조건을 말해 보시오." "두 번째 조건은 당신네 회서방이 노부를 도와 본 교의 반도 육기를 죽이고 다시 본 교를 부활시켜 달라는 것이오." "좋소. 쾌히 승낙하겠으니 기서를 내놓으시오." 누남광은 그들을 훌어보다가 품속에서 낡은 표지에 황색 줄이 그어 진, 약 사십여 면 되는 책자를 한 권 꺼냈다. 적위는 얼른 그 책자를 받아 펼쳐 보더니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그 책자에는 온통 갑골문과 몇 개의 기이한 도형이 그 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내용을 훌어보았으나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 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누남광이 내심 쾌재를 부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청요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인적이 드물고 오래 전에 폐허가 된 천불사라는 절이 있소. 그곳에서 함께 은거하며 이 책자를 연구합시다. 만약 귀하의 자질이 뛰어나다면 필시 책 속의 오묘함을 빠른 시일 내에 깨우칠 수 있을 것이오." 적위는 날카로운 광망을 쏘아 내며 매섭게 소리쳤다. "누남광,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이곳에서 멀지 않은 중조산 속 에 마침 본 방 온삼호의 장원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는 게 마땅하지 않느냐?" 누남광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토해 냈다. "생각해 보시오. 본 교의 반도인 육기는 이미 성심장의 세력을 이끌 고는 나를 죽이고 기서를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소. 그런데 만약 그들이 내가 회서방에 잡힌 걸 알게 되면 제일 먼저 그곳으로 달려들 게 아니겠소?" 적위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누남광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깨달았 다. 하나 그는 아무래도 미심쩍은 듯 누남광의 기색을 살피며 입을 열었 다. "혹시 천불사 주변에 이미 고수들을 숨겨 놓고 있는 게 아니오?" 누남광은 이를 부드득 갈며 만만찮게 응수했다. "애석한 일이로다. 무림을 진동시켰던 앙천적월의 위명은 다 어디로 가고 갈수록 겁쟁이가 되다니…… 당신이 정 못 믿겠다면 사전에 사 람을 시켜 천불사를 수색케 해보면 될 게 아니겠소!" 적위는 계면쩍게 웃었다. "누 노인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매사를 불여튼튼하게 하자는 것이오. 정광! 네가 우선 천불사에 가보아라." 흑의인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우선 그곳의 위치를 알려 주십시오." 이리하여 그 흑의인은 누남광에게 청요산의 위치와 천불사의 내부 구 조 등을 대략 들은 다음 질풍처럼 밖으로 사라져 갔다. 적위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들도 여기서 기다릴 게 아니라 천불사로 출발합시다. 너희들 중 한 명이 누 노인을 부축해라." 그러자 어떤 추의인이 성큼 나서서 누남광을 등에 업었고, 그들은 인 적이 없는 오솔길만을 골라 천불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그들의 모습이 객잔 밖으로 사라졌을 때,돌연 후원의 담장 너머에서 새 개의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강옥봉과 금창수 임표, 그리고 몸이 호리호리한 갈의노 인이었다. 갈의노인의 얼굴은 비쩍 말랐는데 입가에 몇 가닥의 가느다란 수염을 기른 모습이 익살스러우면서도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 갈의노인이 바로 당금 무림에서 공공묘수의 일인자이며 경공 의 대가인 천리일순 방각이었다. 방각은 임표와 강옥봉을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마침 임 대협과 강 노제가 미리 내게 귀띔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한바탕 곤욕을 면치 못할 뻔했군. 설마 회서방에서 옥정검을 훔친 범 인으로 나를 지목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임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러기에 누가 방 노인더러 평소에 마구 도적질을 하라고 했소? 이게 모두 방 노인이 과거에 저지른 일 때문에 생긴 것이니 누 구를 탓하겠소?" 원래 임표는 방각과 안면이 두터운 사이였다. 때문에 회서방에서 방 각을 잡으려 한다는 것을 알자 급히 강옥봉과 함께 방각에게 달려왔 던 것이다. 방각은 한참 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누남광은 왜 회서방의 수중에 스스로 잡혀간 거요? 노부는 당체 영문을 모르겠구려." 임표는 염려하지 말라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모두 여기 있는 강 노제의 계략이니 방 노인은 그런 문제에 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소." "하지만 그들이 만에 하나라도 그 기서의 비법을 익히게 된다 면……" "하하…… 그들은 백년이 지나도 그것을 익히지 못할 거요." 방각은 무언가를 느긴 듯 눈을 번쩍 빛냈다. "그렇다면 그 기서가 가짜란 말인가?" 강옥봉이 옆에 있다가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주 가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중예 중요한 구절은 바러치기 했 거나 뻬놓았으니 아무리 재질이 뛰어난 인물이라도 그걸 보고는 아무 것도 알아 낼 수 없을 겁니다." 방각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쩐지 누남광이 순순히 기서를 내놓더라니…… 그것도 자네의 생각인가?" 강옥봉은 빙긋 웃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임표가 두 사람의 어깨를 툭 쳤다. "자, 우리도 이제 그만 약속 장소로 가봅시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요"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객점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청요산의 천불사로 향하던 적위와 누남광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납에서 행적을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신중을기해 달려갔기 때문 에 불과 사오십 리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장장 두 시진이 경과해서 야 겨우 청요산 아래의 울창한 밀림 속에 당도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하나의 인영이 불쑥 뛰쳐 나왔다. 그는 먼저 천불사를 조사하러 갔던 흑의인 정광이었다. "누노인의 말대로 천불사는 오래 전에 폐허가되었으며 아무도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적위는 누남광을 힐끔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빨리 가자." 천불사! 천불사는 낙양의 남쪽, 청요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넓은 평원 한쪽에 외롭게 서 있는 청요산은 범위가 이십여 리밖에 되 지 않는 아주 조그만 산이었지만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봉우리는 일곱 개에 달했으며, 곳곳마다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장엄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원래 청요산은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의 별궁이 있 었던 곳이라 한다. 환제는 이곳에 작은 비밀 궁전을 짓고 무라 라고 하는 신애게 관리를 맡겼다고 전해진다. 청요산의 울창하게 늘어선 수림 사이로는 산 위로 통하는 오솔길이 나 있었고, 천불사는 그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름이면 아름다운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 오는 천불 사는 원래 그 규모가 상당하여 거대한 불전이 세 채나 세워져 있었고 승사도 수십 칸에 달했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이 사찰은 사시 사철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나 돌연 강 호의 거마들이 점령하여 사찰을 더럽힌 후론 차츰 사람들의 발 길이 줄어들더니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멎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 이곳 천불사에서 한차례의 살겁이 벌어져 당시 이곳을 침입했던 흑도인물들과 그들에 대항했던 승인들 은 모두 전멸하여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물을 방불케 했었다. 전해 오는 바로는 그 뒤 석 달 동안이나 까마귀의 울음 소리가 그치 질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쓰라린 상처를 안고 있는 천불사에도 해가 지니 땅거미가 짙 어오며 절 전체가 점점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휘이이이-- 스산한 바람이 무성한 잡초을 흔들고 거미줄이 쳐진 처마 끝의 허물 어진 담장을 할퀴고 지나가며 귀신의 호곡 소리를 울려 냈다. 그러자 어둠에 잠긴 천불사 주위는 머리 끝이 쭈뼛해지는 공포스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중인들은 절로 으스스해져 흠칫 몸을 떨었다. 하나 그들은 이내 사찰 부근의 지형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절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다 허물어져 금시라도 무너질 듯한 몇 개의 불전 을 지나쳐 후미진 곳의,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거미줄이 여기 저기 쳐져있는 승사로 들어갔다. 그들은 승사를 말끔히 청소하고 방안에 둘러앉았다. 적위는 책자를 한가운데 펼쳐 놓았다. "시간이 없으니……" 말끝을 흐리면서 누남광의 눈치를 살피자 누남광은 이내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손을 흔들었다. "잠깐! 너무 서둘지 마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위가 눈쌥을 치켜 올리면서 사납게 말을 가로챘다. "누 노인은 또 무슨 조건이 있소?" "하하하! 그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빨리 서둘다간 실패하고 마는 것 이오. 노부는 일단 입 밖에 내뱉은 말은 죽어도 실천에 옮기는 성미 인데 귀하는 아직도 노부를 믿지 못하겠소?" 그 말에 적위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누남광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 천불사가 비록 오래 전부터 폐허가 되어 인적이 끊겼기 때문에 은밀한 장소로 생각은 되오만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 만일의 경우 외인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서 사찰 밖에 잠복을 펼 필 요가 있소. 그러니 적 노인은 회서방의 다른 고수들에게 도움을 청하 는 것이 좋을 거요. 그리고 노부는 적 노인이 보다시피 중상을 입었 기 때문에 반 시진 동안 운공조식을 해야만 진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니 잠시만 노부를 귀찮게 하지 마시오." 과연 듣고 보니 이치에 조금도 틀리지 않는 말인지라 적위는 빙그레 웃으며 군말없이 수락했다. "옳은 말이오. 하지만 누 노인은 록 기운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 소?" 누남광은 정색을 했다. "이 기서에 적힌 무학은 모두 기묘한 술법이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시 켜야만 펼쳐 낼 수 있소."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노부는 수십 년 동안 연구했지만 겨우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으니 제대로 해도 귀하에게 전부 깨닫게 하기 어려운데,기운을 회복치 못 해 술법을 펼쳐 내지 못한다면 귀하는 더욱 깨우치기 어려을 거요." 적위는 누남광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따로 방 한 칸을 마련하여 누남광으로 하여금 운공조식을 하도록 조치하고 문밖에 사 람들을 두어 그를 감시케 했다. 이어 다시 두 명의 수하들에게 명을 내려 도중웅에게 사건의 전토를 밝히고 도움을 청할 것을 지시했다. * * * 청요산에서 남동쪽으로 약 삼 리 가량 떨어진 곳에 죽림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단지 네 가구만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을 뿐이 었다. 굴뚝에서 모락모칼 피어오르던 저녁 연기도 바람에 실려 사라진 지 오래…… 조그만 창문을 통해 가느다란 등불만이 흘러나오고 있을 뿐, 주위는 쥐죽은듯 고요하기만 했다. 이때 돌연 세 줄기의 인영이 밤의 정적을 깨뜨리고 경미한 발걸음 소 리를 일으키며 마을로 통하는 오솔길을 나는 듯이 질주해 가는 것이 었다. 그들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큰 집 문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 중 하얀 머리칼에 광대뼈가 불거쳐 나온 노인이 나직이 말했다. "바로 이곳이오?" 바로 그 순간 집 안에서 강옥봉의 음성이 들려 왔다. "세 분은 빨리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이어 나무로 만든 대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세 사람이 빨려 들어가듯 안으로 사라지자 대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넓고 깨끗한 대청 안에는 풍성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강옥봉이 그들을 반갑게 맞으며 급히 말을 꺼냈다. "세 분은 어서 자리에 앉으십시오. 다른 사람들도 곧 도착할 것입니 다." 들어온 인영은 다름 아닌 팔비도룡 여풍운과 치수재 악궁, 그리고 복 마철장 부여송이 었다. 강옥봉은 그들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정중한 포권의 예를 올렸다. "세 분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회서방과 성심장의 동태를 살피셨으니 그런 수고를 끼치게 한 후배는 마음이 몹시 송구스럽습니다. - 부여송이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허허…… 강 소헙은 그 동안 말솜씨가 몰라보게 늘었구려. 우리가 한 일은 소협의 일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 같은 것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여풍운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야 이제 한물간 폐물들이 아닌가? 그저 노제가 시키는 대로 만 하면 만사가 순조로을 것이네." 강옥봉은 몹시 계면쩍어했다. "부 대협은 그렇다 치고 저를 잘 알고 계시는 여 대협께서도 어찌 그 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 같은 말학후진이 여러 대협들의 도움이 아니면 어찌 강호에서 행세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악궁이 술을 한잔 들이키며 미소 지었다. "자, 서로들 공치사는 그만 하기로 하고 어서 노제에게 경과를 알리 세." 여풍운은 고개를 3덕이며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노제의 짐작대로 적위는 도중웅에게 원군을 청했네. 그래서 도중웅 은 두 명의 온서급 인물과 열다섯 명의 전서급 고수들을 대동하고 급 히 천불사로 달려갔지." "두 명의 온서들은 누구입니까?" "북망귀왕 여절패와 비룡금도 하후태일세. 하후태 는 팔호 온서지." "그렇다면 천불사에는 적위와 도중웅을 포함하여 모두 네 명의 온서 와 스물두 명의 전서가 있는 셈이로군요?" "그령녜. 그 정도면 가히 막강한 세력이지." 강옥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번에는 부여송을 바라보았다. "부 대협께서 하신 일은 잘되었습니까?" 부여송은 히죽 웃으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어느 분의 분부인데 잘못될 리가 있겠나? 노부는 소협의 말대로 평 소 약간의 안면이 있는 탁천신수 진조영을 찾아갔지. 그에게 가서 요 즈음 강호에 누남광이 회서방의 인물들에게 사로잡혔다는 소문이 나 돌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진조영이 질겁을 하고 놀 라더군." 부여송은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흔자 킬킬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진조영이 꼬랑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호들갑을 떨며 그 소식을 언 제 들었느냐고 묻더군. 그래서 방금 전에 우연히 주루에서 들었는데 무심결에 들었는지라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알는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그는 회서방이 누남광을 어디에 가뒀는지 아느냐고 묻기에 나는 잘은 모르지만 회서방의 분타는 너무 알려져 있어 그곳은 아닌 것 같고 청요산 근처인 것 같다고만 말해 줬지. 그 랬더니 그 자식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허등지등 어디론가 달려가더 군. 하하……" 강옥봉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아마 틀림없이 육기에게 알리러 갔을 겁니다." "노부의 생각도 그렇네. 한데 그자들이 회서방에서 누남괌을 천불사 에 숨겼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까?" "별로 어렵지 않을 겁니다. 청요산은 워낙 작고 협소해서 사람을 숨 길 마땅한 장소라고는 천불사밖에 없으니까요." 부여송이 알았다는 듯 감탄스러운 눈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일부러 천불사를 택한 게로군? 성심장의 인물들이 발견하기 쉽게 하느라……" 강옥봉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악궁에게 시선을 돌렸다. "악 선배님께서는 이번에 성심장에서 천불사로 달려갈 인물들이 누구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악궁은 흐뭇한 눈으로 강옥봉을 보고 있다가 즉시 입을 열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낙양 근처에 있는 성심장의 세력들은 모두 집결시 킬 걸세. 누남광의 기서가 회서방으로 들어간다면 그들로서는 너무 커다란 타격이 될 테니까 말일세," 여풍운이 답답한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자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냐니까?" 악궁은 피식 웃었다. "무슨 성질이 그렇게 급한가? 어차피 말하려던 참인라…… 우선은 팔 대빈객 중에서 진조영과 계대망, 그리고 사천홍이 있겠고…… 천잔마 사 육기는 당연히 참가하겠지. 아! 그리고 백효 전력과 그의 못된 아 우인 독비응 관륵도 있겠군." 부여송이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전력이라면 칠대흥인 중의 바로 그 전력 말씀이오? 그자도 성 심장에 가입했소?" "그렇소. 뿐만 아니라 그의 서열은 팔대빈객보다 더 높아 삼총관 의 지위에 있소." "삼총관이라고?" 여풍운이 금시초문인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악궁은 빙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성심장에는 팔대빈객 외에도 성심오로와 세 명의 총관이 있네. 백효 전력은 그 중에서 가장 말석인 삼총관의 자리에 있 는 걸세." 부여송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전력이 어떤 사람인데 겨우 세 명의 총관 중에서 말석이란 말 이오?" "그것만 보아도 지금 드러난 성심장의 세력은 겨우 빙산의 일 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소. 천잔마사 육기만 해도 무림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누남광 이상으로 배교대법에 뛰 어난 무서운 인물이오. 육기는 성심오로 중의 한 명인데, 다른 네 인 물들도 결코 그에 못지않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욱 무서운 고수들일 것이오." 부여송과 여풍운은 악궁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풍운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자네는 며칠 전만 해도 성심장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데 이제 보니 아주 빠삭하군그래?" "하하하! 자화자찬 같지만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 라, 그 며칠 사이에 내가 어찌 놀고만 있었겠소?" 여풍운은 피식 웃었다. "관두세. 이러다가는 자네가 스스로 고금절세한 전무후무 의 기인이라고 떠벌릴 게 뻔하니……" "하하……" 중인들은 박장 대소를 터뜨렸다. 그때 다시 대문이 열리며 군웅들이 속속 도착했다. 금창수 임표, 천리일순 방각, 일수삼도 운남평 등의 명숙부터 화북일룡 운자개와 소비연 운봉랑, 곽희연, 곽조웅 남매 등 젊은 고 수들이 연이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모두 자리를 함께 하여 서로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 돌연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 붉은빛이 감돌며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노인이 성큼성큼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강옥봉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그 노인을 상석으로모셔 술을 권했다. 중인들은 아무도 그 노인이 누구인지 몰라 어리등절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추호도 사양치 않고 상석에 앉아 연거푸 석 잔의 술을 들이킨 후 옆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그 웃음 소리가 어찌나 웅장한지 탁자에 놓여진 접시들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여풍운이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강옥봉에게 시선을 돌렸다. "노제! 저분을 아직 소개하지 않았네." 강옥봉이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엷은 웃음을 지었다. "이분은 누남광 노영웅이십 니다." 중인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평소 누남광과 안면이 있던 악궁이 자세히 노인의 얼굴을 살피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누 노인은 역용을 했구려. 어쩐지 몸집이며 행동거지가 눈에 익다 했소이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눈앞의 노인이 역용을 한 누남광임을 알 수 있었 다. "아니, 누 대협은 회서방의 고수들에게 잡혀 천불사로 갔다고 하지 않았소?" 부여송이 도저히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의혹에 찬 표정으로 누남광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남광은 구름처럼 횐 수염을 점잖게 어루만졌다. "노부는 비록 남 앞에 자랑할 만한 재주는 없으나 남의 눈을 속이는 방법은 제법 알고 있소. 적위는 내일 아침이 되어야만 내가 실종되었 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오." 그제서야 중인들은 누남광이 배교대법을 이용해 천불사에 자신의 환 영을 남겨 놓고 빠져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신기해 했다. 누남광은 껄껄 웃었다. "허허…… 지금 적위 등 회서방은 사람들을 잔뜩 풀어 천불사 밖에 삼엄한 매복을 하고 있소. 노부가 대용으로 만들어 둔 짚인형 을 철통같이 호위하면서 말이외다." 중인들도 모두 통쾌 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여풍운이 강옥봉에게 시선을 돌렸다. "노제가 이번 일을 꾸민 의도는 회서방과 성심장의 세력을 서로 충돌 시켜 그들의 세력을 감소시키자는 것인가?" 강옥봉은 의미 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물론 그런 뜻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이목을 천불사에 집중시킨 후 유령동부를 찾으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풍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유령동부를 깜박 잊고 있었군." "저희는 이미 유령동부에 들어갈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보들을 모두 입수했습니다. 하지만 회서방과 성심장에서는 아직 이를 모르고 기보 의 행방을 뒤쫓고 있지요. 그러니 그들이 이곳에 정신을 팔고 서로 다투는 동안 우리는 하루빨리 유령동부로 가야 합니다. 자칫하다 그 들이 눈치를 채는 날이면 다시 한바탕의 혼란을 면키 어려울 겁니 다." "음, 과연 노제의 계략은 한치의 빈틈도 없군." 악궁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이번에 천불사에 모이는 두 파의 세력은 그야말로 백중 지새여서 정말 볼 만한 싸움이 될 거요. 어떻소? 생각이 있는 분은 나와 함께 싸움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 여풍운이 손력을 탁 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제일 먼저 내가 지원하겠소." "하하하…… 그럴 줄 알았소. 당신은 그저 남들이 싸우는 구경이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이니까." 강옥봉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왕 그곳으로 가시는 김에 제가 한 가지 일을 더 부탁드려야겠습니 다." "그게 무언가?" "성심장에서 천불사를 습격하게 되면 회서방은 틀림없이 그들이 어떻 게 그 사실을 알았나 하고 의혹을 느낄 겁니다. 그들은 누 대협이 발 설했다고 의심하고 그분을 추궁하려 할 텐데, 그렇게 된다면 누 대협 이 이미 사라진 것을 알아차릴 겁니다." 여풍운은 강옥봉의 세심한 머리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겠군. 그렇다면 어쩌지?" "이렇게 하십시오." 이어 강옥봉은 여풍운과 악궁에게 몇 마디 말을 해주었다. 듣고 있던 그들은 손뼉을 치며 반색을 했다. "정말 절묘하군. 알겠네. 꼭 그렇게 하지." 여풍운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강옥봉의 전신을 훌어보았다. 강옥봉은 계면쩍은 표정이 되었다. "여 대협께서는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십니까?" 여풍운은 싱겁게 히죽 웃었다. "아니, 나는 넉 달 전에 보았던 그 소년이 자네와 동일 인물인가 하 고…… 머리가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 "원, 여 대협도……" "하하하, 어쨌든 누가 자네 마누라가 될지 모르지만 이세 걱정 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아버지의 머리가 이렇게 좋으니 안 봐도 뻔 하지 않나?" 강옥봉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붉어졌다. 운봉랑과 곽희연도 수줍음을 느끼고 고개를 떨구었다. 왜냐하면 여풍 운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그터들을 돌아보며 기이한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일면 부끄럽고 일면 달콤한 생각이 들어 전신이 날아갈 것 만 같았다. 강옥봉 또한 고개를 숙인 채 가끔씩 그녀들을 힐끔거리고 있지 않은 가? 중인들은 그 광경을 보자 더욱 크게 웃어댔다. 제17장 처절한 혈전 칙칙한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에워싸고 있는 천불사. 검푸른 창공에 외롭게 걸린 달은 차가운 달빛을 내리뿌려 어둠에 묻 힌 천불사 일대를 비추었다. 간간이 들려 오는 산짐승들의 울부짖음 은 밤의 정적을 속절없이 깨뜨리며 으스스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우우우우! 맞은편 산봉우리에 한 마리 늑대가 꼬리를 말고 앉아 목을 빼고 둥근 달을 향해 처량한 울부짖음을 빛어 내자 공포 속에 잠겨진 천불사에 는 한가닥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며 한차례의 혈풍을 예고하는 듯 했다. 파드득! 천불사 안에는 시커먼 박쥐들이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떼지어 날고 돌 조각, 깨진 기왓장들이 널려진 곳에 무성한 잡초들이 실바람에 우수 수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하나 대전 안은 오랜만에 휘황한 불빛이 밝혀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인간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공포의 성처 럼, 아니 마귀의 소굴처럼 등불이 휘황하게 밝혀진 아래 사람의 그림 자는 보이지 않고 다만 들판에서 쫓겨온 들쥐들과 동굴을 잃어버린 박쥐만이 일시적 휴식처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는 그야말로 적막에 잠겨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조용한 천불사에 난데없이 한 명의 방문객이 날아들었다. 귀신 같은 인영은 휘황한 등불이 어둠을 밝혀 주고 있는 대전 안을 두리번거리 다가 나직이 소리를 냈다. "도 형!" 귀신 같은 인영은 바로 앙천적월 적위였다. 그가 입을 다물고 바싹 몸을 도사리고 있자 한 그루 거목 위에서 옷 자락 스치는 소리와함께 한줄기 인영이 훌쩍 내려서더니 이내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나타난사람은 금포를 걸친 위엄있는 노인이었다. 바로 회서방의 온서 삼호인 금시조 도중웅이 아닌가! 적위는 그를 힐끔 바라보며 되물었다. "지금 시각이 얼마나 되었소?" 도중웅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경이오." "밖의 정세는 어떻소?" 계속되는 질문에 도중웅은 다시 짜증이 난 듯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냉랭하게 말했다. "한마디로 쥐죽은듯 조용하오. 그러나 여절패의 말을 빌리자면 얼마 전 산 밑에 무림인들의 모습이 얼씬거렸다고 했소. 생각컨대 이곳의 비밀이 이미 밖으로 누설된 것 같으니 오늘밤 한차례 침습을 면치 못 할 것 같소." 적위는 도중웅의 말을 듣고 해연히 놀랐다. "소문이 누설되다니…… 그럴 리가 없소." 도중웅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럼 여절패가 거짓말을 했단 말이오?" 적위는 당황하여 급히 머리를 내저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만일 그렇다면 미것은 필시 누남광이 중간 에서 수작을 부려 우리를 골탕먹이려는 것이오. 노부는 그에게 무서 운 맛을 보여 줘야겠소." 적위가 돌아서자 도중웅이 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 "왜 그러시오? 누남광 외에 이 일을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소?" "적 형이 이처럼 분별없는 행동을 계속하면 대사를 그르치기 쉽소. 한마디 묻겠는데, 누남광이 본 방과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런 일을 했겠소?" "……" 적위가 우물쭈물하고 대답을 못 하자 도중웅은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 로 다시 말을 꺼냈다. "누남광이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그렇더라도 자신의 몸을 미끼로 쓰 면서까지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거요." 적위는 그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멋쩍게 웃어 버렸다. "도 형이 아니었다면 노부는 큰 실수를 할 뻔했소." 이때 밖에서 두 인영이 뛰어들어와 도중웅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온삼호님! 산으로 통하는 오솔길에서 미심쩍은 인물을 발견했습니 다. 그러나 그들은 사찰 쪽으로는 오지 않고 산 위에서 배회만 하고 있습니다." 도중웅의 두 눈에서 날카로운 광망이 번뜩였다. "나타난 자들은 어떤 인물이냐?" "모두 세 사람인데 얼굴을 흑건으로 가리고 있어서 알 수가 없 습니다." 도중웅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음…… 아무래도 내가 한번 살펴보는 게 좋겠군." 적위는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럴 필요가 있겠소?" "그렇소. 정세는 우리가 예측한 것보다 훨씬 심각한 듯하오. 적을 치 려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하니 한번 살펴보고 옵시다." 적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찰 내에는 경비가 삼엄하고 곳곳에 한번 빠지면 도저히 살아 나올 수 없는 함정이 배치되어 있으니 이곳은 잠시 비워도 무방하겠지요." 네 사람은 곧 대전을 벗어나 산 위로 통하는 오솔길을 택해 달려갔 다. 과연 산정에는 어깨에 병기를 멘 가 명의 경장인이 얼굴을 흑건으로 가린 채 무언가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도중웅은 적위에게 나직이 소곤거렸다. "우리 둘이 가까이 접근하여 대화를 엿듣고, 만일 저자들이 적이라면 일격에 섬멸합시다." 적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도중웅과 함께 포복하여 풀숲을 혜치 고 접근했다. 가까이 가자 그들의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려 왔다. "이곳이 청요산이오? 그럼 천불사가 이 근방에 있겠군요?" 한 복면인이 말을 꺼내자 다른 복면인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어찌 거짓일 리가 있겠소? 듣자 하니 오늘밤 성심장에서 천불사를 대거 침공하려 한다는데 우리가 이 일에 뛰어드는 것은 바로 죽음을 자초하는 결과밖에 안 되니 그냥 돌아가 버리는 게 어떻겠소?" 숨어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도중웅과 적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때 다시 목쉰 음성이 들려 왔다. "그 소식이 사실인지 매우 의심스러우니 우리는 헛걸음하는 셈치고 산 아래로 내려가 동정을 살펴봅시다. 정말성심장의 인물들이 몰려오 고 있는지……" 두 번째로 말을 꺼냈던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절대 거짓이 아니오. 어제 개방의 제자 하나가 우연히 누 남광의 부하인 진호를 발견하고 미행을 하게 되었는데, 진호는 도중 에 누남광을 만나 몇 마디 나누고는 그의 지시를 받고 어디론가 가버 렸소. 당시 개방제자는 이 광경을 엿보고 큰 호기심이 발동하여 계속 지켜보았는데 진호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회서방의 온서 십이호인 앙천적월 적위가 십여 명의 전서들을 데리고 나타나 누남광을 에워싸 버렸소. 그는 누남광에게서 기서를 빼앗은 후 그를 데리고 청요산으 로 잠적해 버렸다는 것이오." "그 후 어떻게 됐지요?" "개방제자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아 낙양으로 돌아왔소. 개방은 여러 분도 알다시피 천하에 이목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라 곧 소 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이오." "그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구려." 다른 한사람이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오늘밤 우리는 이 일에 개입하여 살신지화를 초래하지 말 고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 나머지 두 사람은 서로 이마를 맞대고 의논을 하더니 몸을 돌 려 산 아래로 바람같이 달려갔다. 적위는 그들의 됫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어색한 미 소를 지었다. "과연 도 형의 추측은 귀신과 같구려. 노부는 한때나마 누남광을 의 심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바이오." 도중웅은 마음이 무거워서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적위 등과 함께 천불사로 돌아왔다. 잠시 후 대전 계단 앞에 내려선 도중웅은 입을 모아 날카로운 휘파람 을 불어 냈다. 휙! 휙! 동시에 사방에서 세 명의 인영들이 날아들어 그의 앞에 나란히 섰다. 우측의 인물은 기이할 정도로 뚱뚱한 중년인이었는데, 허리춤에는 금 빛 찬란한 금도를 차고 있었다. 그는 회서방의 팔호 온서인 비 룡금도 하후패였다. 좌측의 인물은 그와는 달리 비깩 마르고 얼굴이 유달리 길쭉한 중년 인이었다. 한데 중년인의 허리춤에는괴상한모양의 암기들이 수십 개나 꽃혀 있 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대추알 같은 강환이었는데 강환의 양쪽에는 날카로운 쇠침이 돌출해 있었다. 이 중년인은 오호 온서인 일발추혼수 종쾌였다. 종쾌는 별호 그대로 암기술의 명인으로, 그의 쇄혼금표 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상대를 살려 둔 적이 없는 공포의 암기였 다. 적위는 급히 그들에게 조금 전에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말해 주었 다. 여절패는 크게 놀라 다급히 말을 꺼냈다. "비밀이 누설되었다면 우리는 독 안에 갇혀 싸우는 격이니 서둘러 이 곳을 철수합시다." 도중웅은 냉소를 쳤다. "우리들 마음대로 쉽게 철수할 수는 없을 거요. 그리고 지금 누남광 이운공조식을 하고 있으니 적이 어떠한 맹공을 펴온다 해도 그 가 운공조식을 마칠 때까지는 이곳을 수호해야 하오. 만약 그렇지 않 으면 우리는 그야말로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어 버리오." 나머지 사람들은 일제히 도중웅의 말에 찬성을 표하고 각자 제 위치 로 돌아갔다. 도중웅은 누남광이 운공조식을 하고 있는 밀실로 향했다. 밀실 밖에 서 엄밀한 감시를 하고 있는 네 명의 경장대한은 그가 오는 것을 보 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도중웅이 창문 틈새로 밀실 안의 광경을 엿보니 불빛이 희미한 가운 데 누남광은 벽 구석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무아의 경지에 빠져 있었다. 그는 네 명의 경장대한에게 경비를 더욱 엄중하게 하도록 당부하고 대전으로 들어왔다. 이어 자신도 눈을 감고 앞으로 다가을 혈전에 대비해 운공에 들어갔다. 땡……! 어디선가 삼경을 알리는 은은한 종 소리가 들려 왔다. 일말의 구름이 달빛을 가린 가운데 청요산은 칠흑 같은 암흑 속으로 잠겨들었다. 이때 돌연 십여 줄기의 인영이 유령처럼 아무 기척도 없이 사찰 문을 통해 안으로 스며 들어왔다. 앞장선 사람은 은빛 찬란한 옷을 걸친, 칠대흥인 중의 백효 전력이었 다. 뒤이어 독비응 관륵과 탁천신수 진조영, 익호 사천흥, 만리표 계 대망등의 성심장 고수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중 제일 사람의 눈을끄는 인물은 바로 매부리코에 입술이 비정할 정도로 얄팍한 문사 차림의 회의노인이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회의노인의 눈빛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전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초도록 아무도 보이지 않다니…… 혹시 회서방 놈들이 벌 써 도망친 게 아닐까?" 탁천신수 진조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관찰한 바로는 사내 곳곳에 기문 진이 설치되어 있어 놈들은 그 안으로 도피해 들어간 것 같 습니다." 전력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회의노인을 바라보았다. "육 형!" 회의노인은 서두르지 않고 그에게 다가왔다. "삼총관은 무슨 일이오?" "육 형께선 사찰 내에 배치된 기문금제가 영사형인 누남광이 설치한 것인지 한번 봐주시오." 회의노인은 바로 배교의 반도인 천잔마사 육기였다. 그의 신분은 성심오로 중 하나로, 팔대빈객보다 높았고 전력과는 엇 비슷했다. 하나 전력은 실무적인 관리직인 총관인지라 오늘 일의 주재는 그가 맡고 있었다. 육기는 푸른 빛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사찰을 쓰윽 훌어보았다. 그러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이건 누남광이 설치한 것이 아니오." 전력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회서방에서 이번 일에 투입한 인원은 온서급 인물 서 너 명과 전서급 십여 명 정도요. 그러니 그들 정도라면 지금 우리의 실력으로 충분히 박살낼 수 있을 거요." 이어 그는 독비응 관륵에게 시선을 돌렸다. "관 아우, 자네는 남동쪽으로 독응화를 세 개 쏘아 보게." "예 , 알겠습니다." 관륵은 남동쪽으로 돌아서서 손을 휘둘러댔다. 쐐액! 날카로운 음향이 터지며 그의 소매에서 세 줄기 불덩이가 날아갔다. 펑! 펑! 폭음이 터지며 대전 옆 나무기등에 독응화가 작렬되어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불길은 점점 거세게 타올랐다. 찰나, 파스스스…… 시뻘건 혀를 낼름거리는 마귀처럼 화염을 일으키며 타오르던 불길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갑자기 꺼지떠 검은 연기를 바람에 날렸다. 관륵은 노기 등등하여 날카롭게 외쳤다. "나는 사문이 그렇게 대단하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다시 전광석화처럼 쌍장을 놀려 일곱 가닥의 독응화를 다른 장 소로 퍼지도록 쏘아 보냈다. 펑! 펑! 곧 폭음이 일며 주위는 온통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불길은 감쪽같이 잡히고 말았다. 관륵은 어이가 없는지 멀거니 서 있다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얼굴이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전력이 크게 소리쳤다. "아우, 경거망동하지 말게. 이 안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노부 가 직접 살피겠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크윽!" 돌연 관륵이 외마디 신음 소리를 내며 휘청하더니 비틀비틀 뒤로 물 러나는 것이 아닌가! 진조영이 급히 그를 부축했다. "관 형, 왜 그러시오?" 관륵은 참담하게 웃으며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진 형이 직접 보시오." 진조영은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다가 흠칫하며 안색이 크게 변했다. 관륵의 오른팔 곡지혈 부근에는 마치 대추알처럼 생긴 강환 이 박혀 있었는데, 팔꿈치 밑으로는 피부색이 시퍼렇게 변해 있었고 찌르면 터질 듯 팽창되어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 일순 관륵은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리고 괴성을 질러대면서 몸을 가늘게 떨었다. 진조영은 다시 눈을 돌려 보다가 다시 한 번 흠칫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왼팔마저 새파랗게 변하며 퉁 퉁 부어 오르고 있었고, 역시 똑같은 강환이 팔꿈치에 박혀 있는 것 이다. 대추씨만한 강환 속엔 극독이 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이렇게 관륵을 정확히 노리고 암기를 날리고도 다른 사람이 전혀 의 식하지 못하게 하는 쾌속함과 신묘한 수법을 구사하는 상대방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전력과 육기는 몸을 날려와 관륵의 독상을 살펴보고는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건 분명히 일발추혼수 종쾌의 쇄혼금표요." 육기가 한눈에 강환을 알아보고 중얼거리자 전력의 눈에서 살광이 뿜 어 나왔다. "종쾌, 그놈도 이곳에 와 있었군." 전력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전력은 갑자기 소도를 뽑아 들더니 한광이 번쩍함과 동시에 관 륵의 두 팔꿈치를 윗부분에서 잘라 버리고 신속하게 몇 군데 혈도를 찍었다. "크으윽!" 관륵은 고통에 못 이겨 괴로운 비명 소리를 남긴 채 기절해 버렸다. 전력이 땅에 떨어진 팔에서 두 개의 강환을 꺼내 달빛에 비추어 보니 강환 양쪽에는 조그만 세침이 돌출해 있는데, 그곳을 통해 저 장된 독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력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과연 악독한 암기로군! 종쾌마저 와 있다면 오늘 일은 성패를 속단하기 어렵겠구나." 돌연, "이히…… 우후…… 이히히!" 징글맞은 괴소가 여기저기서 나직이 들려 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케 했다. 전력은 눈에 불꽃을 튀기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종쾌! 비겁하게 몸을 숨겨 잔재주를 피우지 말고 정정당당히 나서 라!" 종꽤의 음침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흐흐흐…… 전가야! 네놈이 지금까지 저지른 악행을 생각하고 지껄 여라. 네놈의 입에서 정정당당히란 말이 나을 수 있느냐? 으핫핫!" 순간 전력의 옆에 서 있던 성심장의 고수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전신 을 휘청거렸다. "으앗!" 그 역시 쇄혼금표에 격중된 것이다. 전력은 간담이 서늘함을 느끼며 즉시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잘 라버렸다. 그러자 또 다른 인물의 조소 어린 음성이 들려 와 그들을 공포의 도 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흐흐, 그런 식으로 나가다간 팔이 성한 놈은 하나도 없게 될 것이 다." 전력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생각하다가 안색이 홱 변했다. "네놈은 흑시 금시조 도중웅이 아니냐?" 그러자 그 음성은 이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단번에 내 음성을 알아듣다니, 과연 전력 네 귀는 개처럼 영민하구나!" 상대가 도중웅임을 알자 전력은 화가 나기 이전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이때 육기가 신중한 안색으로 그에게 나직이 소곤거렸다. '도중웅은 심계가 깊어서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오. 더구나 그들이 기문진에 숨어서 암습만 일삼으니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우리 편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 오게 되오." 전력은 다급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육 형은 혹시 그들이 펼친 기문진의 허점을 아실 수 있겠소?" "주위가 너무 어두워서 확실치는 않지만 기문의 방위로 보아 서쪽이 아무래도 수상하오." 전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고 수하들에게 공격 명 령을 내렸다. "저쪽이다. 즉시 맹공을 퍼부어 동지들의 복수를 하라!" 고함 소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지축을 뒤흔드는 함성이 일어나며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성심장 무리들은 속속 몸을 날려갔다. 이윽고 사람 죽는 소리가 연이어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한차례 살육의 향연이 벌어진 것이다. 전력의 명령을 받은 성심장의 고수들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기문금제 구역 안으로 들어왔다. 과연 서쪽은 기문진의 유일한 생문으로, 회서방의 고수들은 그 안에 모여 있었다. 성심장의 고수들은 강호에 이름이 나 있는 일류급 고수들이었기 때문 에 사태의 엄중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일신의 절학을 기탄없이 발휘하 며 암기들을 있는 대로 발출하여 공격을 퍼부어 갔다. 파파파파파…… 차차창! 채앵! "죽어라, 이놈들!" "야압!"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호통 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이에 대항하는 회서방은 다섯 명의 온서급 고수들이 있는 데다. 근 서른 명에 달하는 전서급 인물들도 뒤를 받치고 있어 조금도 겁을 먹 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대적하였다. 쌍방 모두 승산을 확신하고 사력을 다하는 싸움인지라 가히 공 전절후의 혈전이었다. 살풍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소용 돌이쳤고, 사방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끄아아악!" 피 어린 절규. 간담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을 때마다 꼭 한 사람은 피를 뿌리며 쓰러져야 했고, 어떤 때는 두 명씩 혹은 세 명씩 무더기로 쓰 러지며 처참한 죽음을 맛보아야만 했다. 생사를 던져 버린 혈전장에 는 인영과 장영이 난무했고 여기저기서 풍겨 오는 피비 린내가 코를 찌르며 시체가 쌓여 갔다. 반 시진이 지나쓱 쌍방의 인원은 눈에 띌 만츰 감소되었다. 회서방 쪽에서는 북망귀왕 여절패와 비룡금도 하후태 등 두 명의 온 서급 인물과 아흡 명의 전서급 인물들이 차디찬 시신이 되어 쓰러졌 다. 성심장 또한 팔대빈객 중 만리표 계대망과 익호 사천홍, 그리고 독비 응 관륵과 열두 명의 고수들이 생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특히, 관륵의 죽음은 전력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전력과 관륵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크고 작은 수백 번의 싸움을 겪 으면서도 항상 같이 붙어 다니던 절친한 사이였던 것이다. 전력은 가슴이 철렁하여 육기를 돌아보았다. "안 되겠소. 육 형은 어서 창명호혼대법을 전개하시 오." 육기 역시 사태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활으로 발전해 나가는지라 침중 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럴 도리밖에 없군요. 그러나 상대방의 생신팔자를 모르 면 효력은 절반으로 감소될 거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만큼 여유가 남아 돌아가지 않는 형편 이었다. 육기는 말을 끝낸 즉시 소맷자락을 떨쳐 냈다. 어느새인지 그의 양손에 작은 요발악기가 쥐여져 있었다. 육기는 요발악기를 흔들면서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창! 차창! 요란한 괴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윽기는 내력을 일으켜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끼요요오오오……" 그 소리는 흡사 굻주린 늑대의 울음 소리 같기도 하였는데 요발악기 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배합되자 듣는 사람의 심신을 울렁거리게 하 고 넋을 빼앗을 것만 같았다. 전력과 진조영도 그 소리에 정신이 아찔해져서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 리다가 미리 준비한 솜뭉치로 귀를 틀어막고서야 겨우 신형을 바로할 수 있었다. 창명호혼대법은 배교의 수십 가지 대법 중에서도 그 위력이 가장 무 서운 오대대법 중의 하나였다. 창명호흔대법에서 울려 나오는 피성은 천불사를 마구 진동시켰고, 내 력이 막강한 도중웅조차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앙천적월 적위와 일발추혼수 종쾌도 심신이 진동됨을 느끼고 황급히 도중웅의 곁으로 달려왔다. "안 되겠소.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서둘러 이곳을 떠납시 다." 적위가 소리치자 도중웅은 일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누남광은 어떻게 하겠소?" 종쾌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별 도리가 엄지 않소? 문을 부수고 들어가 데리고 떠납시다." 도중웅은 창명호혼대법을 펼치고 있는 육기를 힐끔 보다가 마음을 굳 혔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제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도중웅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나 만약 육기가 그들의 생년월일을 안 후에 창명호혼대법을 펼쳤다 면 그들이 아무리 발버등쳐도 벌써 고혼이 되고 말았을 것이 다. 그만큼 배교대법의 위력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도중웅과 적위, 종꽤는 급히 누남광이 운공조식을 취하고 있는 밀실 로 달려갔다. 하나 도중웅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 다. 밀실 밖을 지괴고 있던 네 명의 전서들은 모두 혈도를 제압당해 쓰러 져 있고, 밀실 문은 활짝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야단났구나!" 마음이 불붙는 듯 다급해진 도중웅이 정신없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누남광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밖으로 나온 도중웅은 쓰러져 있는 네 명의 전서급 고수플을 살펴보 고 누군가의 내가수법에 의해 심맥이 파열되어 죽었음을 알았다. 잠시 갈피를 못 잡고 쩔쩔매던 도중웅은 적위, 종쾌와 함께 황망히 몽을 날려 담장 너머로 사라져 갔다. 한편, 전력은 외마디 외침 소리를 들었다. "삼총관님! 금제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수하들을 이끌고 기문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 다. 육기는 계속 창명호혼대법을 펼쳐 내고 있었다. 전력은 대전의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누남광이 있는 곳을 찾아라!" 살아남은 얼마 되지 않는 성심장의 인물들이 사방을 이 잡듯이 뒤지 고 다녔다. 하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밀실 앞에 쓰러져 있는 네 구의 시신뿐이었 다. 진조영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전력은 맥이 탁 풀려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었다. "도중웅이 이미 누남광을 데리고 가버렸다고? 결국 우리는 헛수고만 한 채 아까운 인명만 희생시켰구나……" 그의 넋두리는 얼굴에 떠 있는 표정만큼이나 침통한 것이었다. 하나 도중웅도 누남광을 데려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그의 얼굴은 어떻게 변할까? 천불사……!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적이 끊겨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천불사 는 다시 이십여 년 전의 참상이 재현되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시체요, 피바다로 피비린내가 코를 감싸 쥐게 하고 있었 다. 그 처참한 광경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까악…… 까악…… 어디서 알고 왔는지 한 떼의 까마귀들이 공지 위를 날아다니면서 기 분 나쁜 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제18장 나타난 음양수 황산! 그 위치로 말하면 안휘성 검현에서 동북쪽으로, 태평 현에서 바라보면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일명 검산 이라고도 한다. 산 높이는 수천 길, 기봉준령들은 우뚝우뚝 구름을 뚫고 사시사철 백설을 덮어쓴 채 솟아 있었고, 거기에 깎아 세운 듯한 석벽이며 수백 길이 넘는 단 애들이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다. 봉우리는 높고 구룽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산이 바로 황산이었 다. 황산의 주봉인 천도봉의 뒤쪽에는 마치 예리한 도끼로 찍어 놓은 듯한 좁다란 계곡이 자리잡고 있었다. 계곡의 주위에는 유달리 울창한 대나무숲이 끝간데 모르게 이어져 있 었다. 정오 무렵. 대나무 숲속에서 오십 세 가량 되는 나이에 무기를 메고 경장 차림을 한 세 명의 강호고수들이 나타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하나 같이 냉엄한 얼굴에 초조하고 불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중에 얼굴이 하얗고, 턱이 네모지며, 입술은 얄팍하고, 두 갈래 생쥐수염이 난 노인이 걸음을 멈추면서 냉소를 쳤다. "우리가 비호 서횡, 그 영은 여우의 간계에 빠져 이처럼 정신이 희미해져 버렸으니 어떻게 유령동부를 찾아 내겠는가?" 다른 한 노인이 노기 떤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그럼 어찌 서횡 그놈을 강제로라도 끌고 오지 않았소? 그렇게 엉성 하게 행사를 하터 남들의 조소를 면할 수 있겠소?" 순간, 그들의 뒤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노부는 본시 남에게 손해를 입히고 자신만 이득을 보려는 사람이 아 니오. 세 분이 이곳에 당도했을 때 노부는 이곳에 무서운 금제 가 설치되어 있으니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십분 당부했지만, 세 분이 호기심을 못 이겨 대나무 숲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같은 봉 변을 당했던 거요." 말소리와 함께 게딱지만한 얼굴에 고슴도치 같은 수염을 기른, 왜소 한 체구의 노인이 불쑥 나타났다. 노인은 뱀 같은 한 쌍의 눈에 냉엄 한 빛을 띠며 세 노인을 의미 심장하게 응시했다. 얼굴색이 횐 노인이 노기 떤 음성으로 외쳤다. "서횡! 당신은 우리더러 이득을 똑같이 나누자고 하면서 두 시진 정 도만 대나무 숲속에서 기다리라고 해놓고 어찌 이제 와서 우리가 호 기심에 의해 모험을 했다는 거요? 당신은 이곳이 유령동부의 입구일 거라고 했지만 나, 필욱은 당신을 믿을 수가 없소." 비호 서횡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필 형은 정녕 모르고 그런 말씀을 하는 거요? 좋소. 마침 이곳이 조 용하니 노부가 왜 이곳을 유령동부의 입구일 거라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얘기해 드리겠소." 필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를 쳤다. "좋소. 귀기울여 경청하겠으니 어서 말해 보시오.그러나 한가지 미리 말해 두지만, 우리 관락삼호가 남의 우롱이나 받는 위인들 은 아니오." 순간, "으하하핫……! 으히히히!" 서횡이 한바탕 괴소를 터뜨렸다. 도깨비 같기도 하고 올빼미 웃음 소 리 같기도 한 괴소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해지고 전율 을 느끼게 했다. 관락삼호는 금세 표정이 달라졌다. 서횡은 괴소를 그치고는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네 관락삼호의 위명은 무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아마 유 령동부에 대한 소문은 모두 들어서 자세히 알고 있을 거요." 필욱이 냉소를 쳤다. "서횡, 괜히 우리를 치켜세을 건 없소. 사실 당금 무림에서 유령동부 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괜히 엉뚱한 소리 말고 어서 본 론을 이야기하시오." "그럼 간단히 요점만 말하겠소. 유령동부가 절영곡이란 곳에 있다고 알려져 그 동안 수많은 무림인들이 이곳 황산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 녔지만, 절영곡을 찾아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한데 얼마 전에 태 산사웅이 천도봉 뒤쪽에 아주 은밀한 계곡이 있음을 발견 하게 되었소. 그 계곡은 아주 협소하면서도 기이한 곳에 위치하여 다 른 어떤 곳에서도 보이지 않고, 오직 천도봉의 서쪽 정상에서 저녁 무렴에만 잠깐 보였던 거요." 필욱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저녁 때만 계곡이 보인다는 거요?" 서횡은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게 바로 노부가 말하려던 것이었소. 원래 그 계곡은 커다란 바위 틈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겉에서 보아서는 도저히 계곡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 수가 없소. 한데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면서 석양 의 그림자가 길게 비치는 바람에 계곡이 보이게 되는 거요. 하지만 그 시각은 그리 길지 않아 채 일 각도 되지 않는다고 하오." "아……!" "그러니 생각해 보시오. 계곡 자체가 그처럼 은밀한 데다가 하루 동 안에 그림자가 겨우 일 각 동안만 비치고 사라지니 절영곡이 란 이름에도 딱 들어맞지 않소?" 그제야 관락삼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신은 그 계곡을 유령동부가 있는 절영곡이라고 생각한단 말이구려? 과연 그럴듯하군" 서횡은 그들을 힐끔 바라보떠 말을 이었다.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운 좋게도 그 계곡을 발견한 태산사웅 은 뛸 듯이 기뻐하며 허겁지겹 계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소. 그리고 그들은 계곡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죽림을 통과헤야 한다는 걸 깨닫 고 모두 죽림속으로 들어가 버렸소." 서횡은 여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필욱은 답답하다는 듯 급히 물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소?" 서횡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림 밖으로 나오지 못 했소이다." 필욱은 어리등절해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유령동부로 들어갔다가 그 안에서 비급을 얻어 그것을 익히 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않소?" 서횡은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에는 노부도 그렇게 생각했소. 한데 태산사웅의 뒤를 몰래 따라 들어간 다른 십여 명의 고수들도 모두 바닷물에 빠진 모래알처럼 소 식이 감감했소. 그래서 노부는 이 죽림 안에 필시 무서운 금제가 있 을 거라고 믿게 되었소이다." "하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지 않소?" "그렇소. 그래서 노부는 세 분을 남겨 놓고 먼저 죽림 속을 살펴봤던 거였소. 태산사웅과 무림고수들은 모두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소." "그게 정말이오?" "노부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소." 관락삼호의 얼굴이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태산사웅는 그들과 비교해서 별로 떨어지지 알는 고수들이었다. 그들 이 모두 몰살했다면 관락삼호도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다 분했다. 그때 문득 필욱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눈빛을 빛내며 서횡을 바라보았 다. "듣자 하니 서 형은 재지가 뛰어나고 각종 기문진식에 능 통하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그의 태도와 음성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서횡은 내심 냉소를 터뜨렸으나 겉으로는 짐짓 겁손을 떨었다. "무림에 무공과 진법에 뛰어난 기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노부가 감히 이름을 내밀겠소?" 필욱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서 형의 외호가 비호인 것만 보아도 필시 지략이 탁월하고 놀라운 것을 알 수 있소.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서 형 의 머리와 우리 삼형제의 무공을 한데 합친다면 남들보다 쉽게 유령 동부를 열 수 있지 않겠소?" 서횡은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생각인 듯한데…… 그러면 동부의 보물을 나중에 어떻게 분배 하겠소?" 필욱은 자신을 대범하게 보이려는 듯 껄껄 웃었다. "하하…… 우리는 유령보가 적힌 비급만 있으면 되니 나머지 는 모두 서 형이 가져도 무방하오." 서횡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 수작에 내심 코웃음이 나왔으나 겉으로는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구…… 그래도 되겠소? 과연 관락삼호 세 분은 마음이 넓고 공 명정대하시……"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며 얼굴빛이 싹 달라지더니 몸을 옆으로 숨기 면서 나직이 소곤거렸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소." 관락삼호는 급히 서횡의 뒤를 따라 몸을 숨겼다. 곧 이어 검광이 번짹이면서 검을 맨 흑삼인 두 명이 나타나 등잔 같 은 눈으로 주위를 쓸어보았다. 그 중 키가 약간 큰 흑삼인이 음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형이 보기엔 이 숲에는 아무런 금제도 없는 것 같군." 다른 흑삼인이 말을 받았다. "외부의 소문이 절대로 허위는 아닐 것이니 형님은 괜히 함부로 행동 하여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성을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이러는 사이 좌측에서 또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하나는 영준스러운 용모에 장검을 맨 소년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건 장한 체구에 먹을 꾹 찍어 누른 듯한 짙은 눈썹과 왕방울만큼이나 큰 눈을 가진, 손에 낭아봉을 든 사나이였다. 그들은 서로 일행이 아닌 듯했다. 이들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 영준한 소년이 담담하게 웃으며 먼저 나타난 흑삼인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두 분은 아마 이곳에 먼저 오신 모양인데 성명과 내력을 말씀해 주 시겠소?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금제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우리는 서로 힘을 합쳐야 할 것이오. 만약 그렇지 않고 개별 행동을 한다면, 모르긴 해도 참패를 면치 못할 것이오." 흑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은 말이오. 우리 막씨 형제는 새북으로부터 조금 전 이곳에 도착했소." 소년은 포권을 하고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두 분은 새북에서 명성을 떨치는 새북쌍패 막동 , 막지광이시군요. 나, 선하산의 하장청 은 두 분을 일찍부터 흠모해 온 터인데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매우 기쁘군요." 이어, 같이 나타났던 사나이를 향해 말을 꺼냈다. "귀하의 성명 내력은……?" 사나이는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우렁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장하일괴 종경문이오." 말을 마치는 순간 그의 얼굴이 조금 변했다. 그는 별안간 몸을 돌리며 낭아봉으로 자신의 앞가슴을 보호했다. 어디선가 날아든 무형의 경력에 의해 낭아봉이 여지없이 부러 지는 것이 아닌가? 실로 놀라운 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부러진 낭아봉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사이에 세 줄기 인영이 비조처 럼 날아서 종경문 앞에 내려섰다. 그들은 바로 관락삼호였다. 필욱은 그를 노려보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종 형, 그 동안 무고하셨소?" 종경문은 세 사람이 바로 관락삼호인 필욱, 위경, 조금창 임을 알아보고 냉소를 치면서 침중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세 분은 아직도 전날의 유감을 잊지 않았소?" 위경이 사납게 말했다. "내 자식을 죽인 원한인데 어찌 잊을 리가 있겠소? 나는 당신을 찾아 천하를 두루 혜맸는데, 오늘 이곳에서 만날 줄은 진정 몰랐소." "흥! 당신의 아들은 그 죄악이 하늘까지 미쳤기에 만번 죽는다 한들 애석한 바가 없소. 그런데 당신은 무슨 면목으로 아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거요?" "우히힛……" 위경은 괴소를 터뜨리면서 월아형의 선인탈을 뽑아 휘둘렀다. 쐐, 쐐, 쐐! 세 줄기의 한성이 종경문의 흥복부에 있는 세 군데 주요 대혈 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끝내 그렇게 나온다면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소!" 종경문은 고함치면서 몸을 옆으로 틀고 부러진 낭아봉으로 선인지로 의 일식을 펼쳐 반격을 가했다. 그 위세는 가히 산악과도 같았다. 팍! 선인탈과 낭아봉이 허공에서 부딪쳐 불꽃을 튀겼다. 위경이 초식을 바꾸려는 찰나, 종경문이 선수를 쳐서 연거푸 삼 초를 시출했다. 휘잉! 휭! 세찬 바람이 일고 허공에는 봉영이 가득히 메워지며 예리한 소 성이 대지를 어지럽혔다. 위경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종경문의 공력이 무섭도록 늘었구나. 자칫 잘못했다가는 관락삼 호의 위신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지고 말겠다!' 그는 잔뜩 경각심을 느끼고 위치를 바꾸어 석 자 옆으로 비켜나면서 선인탈을 잽싸게 휘둘렀다. 그 초식은 비할 데 없이 신묘하고 매서웠 다. 하나 일단 종경문에게 선수를 잡힌 위경은 산악 같은 낭아봉의 기세 에 휘말려들어 열세를 만회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필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창에게 눈짓을 해보인 다음 무기를 뽑아 들고 종경문에게 덤벼들었다. 순간, "멈추시오!" 하장청이 침중하게 고함치면서 장검을 뽑아 필욱을 가로막았다. 검광이 번쩍이고 검영이 허공을 스쳐 가는 가운데 필욱이 아닌 조금 창이 신음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으음……!" 필욱이 놀라보니 조금창의 팔에 한 치 길이의 검상이 나 선혈 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독기가 발발하는 눈으로 하장청을 노려 보았다. "어찌 귀하가 끼여드는 거요?" 하장청은 눈쌥을 꿈틀거리며 냉소를 쳤다. "세 분이 강호의 규칙을 위배하고 한 사람을 상대로 협공을 하기에 내가 나선 것이오." 바로 그때 비호 서횡이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여러분은 어찌 위경에 처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다툼을 하여 제삼자에게 어부지리를 주려 하시오?" 하장청이 고개를 획 돌리며 물었다. "귀하는 뉘시오?" "노부는 서횡이라 하오." 하장청은 비록 나이가 어리고 식견도 넓지 않았으나, 선하산에서 무 공을 연마할 당시 스승인 창송상인으로부터 천하무학의 원류와 이름난 인물들에 대해 거의 다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횡이라는 이름도 퍼뜩 기억해 내고 약간 놀란 기색을 보 였다. "아! 바로 서 노선배님이시군요. 선배님의 기문둔갑술은 천하무림에서 당할 자가 없다고 정평이 있는데 앞으로 많은 지도를 바라겠습니다." '흥, 교활한 놈! 노부가 뜨거운 맛을 보여 줄 테니 어디 두고 보자.' 속으로 이렇게 비웃는 서횡이었지만 겉으로는 지극히 온유하고 자비 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슨 과찬을 그렇게 하시오? 노부가 비록 기문둔갑술을 약간 짐작은 하고 있으나 이곳 죽림에 배치된 금제는 수시로 변화하고 있으니 그 변화의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이 숲 안에서 죽고 말 것이 오." 종경문이 냉소를 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는 귀하의 말을 믿을 수 없소." 서횡은 종경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귀하는 이곳을 무사히 드나들 수 있는 묘책을 알고 계시는 모양이군 요?" 종경문은 크게 외쳤다. "내가 보건대 이 숲 안에 배치된 금제는 모두 수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목들만 베어 버린다면 저절로 파괴되고 말 거요." 서횡은 엄지손가락을 꼽으면서 찬사를 보냈다. "과연 현명한 생각이시오. 노부는 미처 그 점을 생각지 못했소이다." 종경문은 그가 진실로 칭찬을 하는 줄 알고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 다. 그는 숲속으로 달려가며 낭아봉을 휘둘러 수목들을 닥치는 대로 후려 쳐 갔다. 와지끈! 부지직! 분명 대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낭아봉이 닿는 곳에 있던 대나무들이 부러질 듯 양쪽으로 횝쓸렸다가 팽팽히 당겨진 고무줄이 오므라들듯 세차게 모아지는 것이 아닌가? 핑! 핑! 죽영이 어지럽게 이동하는 속에 종경문은 괴이한 고함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펄쩍 나가자빠졌다. "으헛?" 군웅들은 대경 실색했다. 하장청이 앞으로 나가 종경문을 부축해 일으켜 보고는 움찔했다. 종경문은 앞가슴에 있는 중요 대혈 십여 군데를 청색 나뭇가시 에 찔린 채 이미 숨을 거둔 뒤였던 것이다. 판락삼호는 모골이 송연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경문은 철포삼을 연성해 도검이 침투하지 못하는 데 어찌 한낱 나뭇가시에 찔려 죽음을 당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군 요." 서횡이 냉소성을 날렸다. "세 분은 그걸 진정 나뭇가시로 아시오?" 군웅들은 이 말을 듣고 어리등절한 표정을 지었다. 막동이 종경문의 앞가슴에 박힌 청색 가시를 뽑아 살펴보니 과연 정 강으로 만든 강침이었는데, 끝 부분에 독이 묻어 있었다. 서횡은 한 쪽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노부의 말이 어떻소? 이제 금제가 발동하기 시작했으니 여러분은 어 서 노부와 행동을 같이하여 피해야 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마자 서횡은 좌측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하장청 등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 어쩔 수 밑다는 듯 뒤를 따랐다. 서횡은 빠른 속도로 몸을 좌우로 흔들며 마구 달려가더니 하늘을 찌 를 듯 들어선 삼목 밑에 이르러 멈춰 섰다. 순간, 좌르르르릉…… 우우웅…… 꽝! 그들이 지나온 대나무숲에서 은은한 풍뢰성이 터져 나왔다. 중인들은 그 뇌성을 듣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서횡은 진지한 안색으로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우린 금제에 갇혔을 거요. 발동된 금제에 걸리게 되면 그 누구도 죽음을 면치 못할 거요." 하장청이 포권을 했다. "노선배님,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노부가 먼저 묻겠소. 여러분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들어온 것이 오?" 하장청이 서슴없이 맞받아 되물었다. "노선배님은 뻔히 아시면서 왜 물으십니까? 후배 등은 유령천자가 유 령동부에 남겼다는 무공비급을……" 서횡은 히죽 웃음을 지었다. "비급을 노리는 사람은 많고 비급은 한 권뿐이니 결국 쟁탈전이 벌어 질 게 아니오? 노부 역시 비급을 노리는 사람 중에 하나이니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오." "노선배님이 이곳의 금제에 대해 환히 알고 계시는 것을 보니 아마 비급은 이미 노선배님이 인수하신 모양이군요." "천만에! 소문에 듣자 하니 유령천자는 유령동부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기관매복들을 수없이 장치했다 하오. 그것들은 한 사람 의 힘으로는 뚫기가 불가능한데 노부가 어찌 쉽사리 비급을 습득할 수가 있겠소?" "그럼 우린 모두 헛수고만 한 게 아닙니까?" 서횡은 사방을 한차례 쓸어본 후 다시 말했다. "아무튼 비급과 보물을 얻기만 하면 우리 모두가 똑같이 이익을 분배 하도록 합시다." 막동이 코웃음을 날렸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엄는 것인즉, 우리가 어찌 귀하의 말을 신용하겠소?" 서횡은 정색을 했다. "노부가 만일 거짓말을 했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천벌을 받아 죽고 말거요." 그때 막지광이 나직이 소곤거렸다. "누가 오고 있소." 서횡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서횡은 아 차 싶어 황급히 그를 돌아보곤 싸늘하게 코웃음치며 말했다. "당신네 새북쌍패가 노부를 암산하려는 모양인데, 그것은 어림도 없 는 일이오." 막지광이 입술을 꿈틀거리며 눈빛을 험악하게 했다. "흥! 귀하는 괜히 사람을 의심하지 마시오." 서횡의 뒤쪽을 주시하고 있던 하장청이 말을 받아 나섰다. "두 분, 막 대협의 말쏠은 진실입니다." 서횡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일곱 자 옆으로 비껴 나가면서 찬찬 히 바라보니 과연 십여 장 밖 죽림 안에서 회의를 입은, 키가 훤칠한 청년이 우뚝 선 채 냉랭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횡은 그 회의청년을 향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갑자기 어깨가 벌 레에 물린 것처럼 따끔하게 아파 오다가 금시 통증이 가시고 아무렇 지도 않았다. 회의청년은 약 이십삼사 세쯤 되는 나이에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 고, 반대로 입술은 피처럼 붉었다. 한데 청년의 안광에는 기이하게도 붉고 하얀 두 가닥의 광채가 번갈아 이글거리고 있얼다 회의청년은 한동안 그들을 노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귀하들의 대화는 내가 다 들었소. 귀하들 정도의 실력으로 감히 유 령동부의 비급을 얻으려 하다니 가소로움을 금치 못하겠소." 하장청이 눈초리를 꿈틀거리며 경쾌하게 두 발클 놀려 회의청년 앞으 로 다가갔다. "귀하는 누구요? 무엇을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거요?" 회의청년의 눈에서 예의 붉고 새하얀 광채가 다시 번뜩였다. "흐흐…… 그건 잠시 후면 알게 될 거요. 그보다 당신과 새북쌍패는 모두 성싱장의 끄나풀인 걸 알고 있소.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횡은 지 금 새북쌍패의 금색독주에 암산을 당했으니 맥도 추지 못 할 것이오." 그제서야 서횡은 조금 전 자신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미 새북쌍패 에게 암습을 당한 것을 알고, 안색이 싹 달라지면서 노기 띤 시선으 로 새북쌍패를 노려보았다. "두 분이 정녕 노부의 몸에 암산을 가했소?" 막동이 징글맞은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사실이오." 서횡은 별안간 껄껄 웃어 젖혔다. ' "이제 우리는 모두 함께 죽는 도리밖에 없게 되었구려." 새북쌍패의 안색이 변하면서 미처 말을 꺼내지 못하자 회의청년이 불 쑥 입을 열었다. "서 노인, 금색독주가 서 노인의 생명까지 빼앗아 가지는 못할 것이 니 그런 말은 마시오. 더욱이 서 노인의 기문둔갑술은 당대제일이라 서 노인의 도움 없이는 누구도 유령동부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들도 서 노인을 해치지 못할 것이오." "우야압!" 하장청이 별안간 사나운 기합 소리를 내지르면서 연거푸 삼 검 을 쳐내어 회의청년을 급습해 갔다. 파파파팍! 하장청의 검법은 눈부신 발전을 이룬 상태였다. 찬란한 검화가 맹렬히 떨쳐지고 싸늘한 검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여 얼마 전 낙양에서와는 판이한 위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나 회의청년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슬쩍 허리를 뒤틀 었다. 동시에 급히 오른손을 내뻗어 반원형을 그리면서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하장청의 완맥을 쥐어 버렸다. 그 속도는 가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장청은 완맥이 뻐근해지면서 사지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고 두 다리를 후들거 렸다. 이어 회의청년은 식지를 기쾌무비하게 놀려 하장청의 기문혈 을 찍어 버렸다. "억!" 하장청은 놀라 외마디소리를 지르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고 두 다리를 휘청거리면서 이마에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놀랍군! 정말 보통 솜씨가 아니야!" 서횡이 내심 경탄하는 사이 회의청년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 다. "서 노인, 당신은 이미 새북쌍패의 암산을 당했으니 진력을 함 부로 운용하지 마시오. 나는 서 노인의 뛰어난 지혜를 의뢰할까 하는 바이오." 그때 새북쌍패 막동과 막지광이 성난 눈초리로 회의청년을 노려보았 다. "이놈! 악독하구나. 사람을 이런 꼴로 만들다니……!" 서횡이 고개를 돌려 보니 혈도가 찍힌 하장청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 한 채 몸을 사시나무 떨듯 마구 떨고 있었다. 회의청년은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이건 모두 저자가 자초한 일이니 나를 탓할 것 없소. 그는 이미 내 삼양신지에 맞았으니 내가 아니면 누구도 해소시키지 못하 오. 그러니 두 사람은 쓸데없이 그를 건드리지 마시오." 막동과 막지광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 이더니 일제히 회의청년을 향해 덮쳐 갔다. "이놈! 어디 얼마나 강한가 보자!" 파파팍! 그들의 손에서 뿜어 나오는 경력이 주위를 요동쳤다. 관락삼호는 내심 새북쌍패의 막강한 공력에 깜짝 놀랐다. 하나 회의청년은 입가에 조소를 떠올리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다가 새북쌍패가 뿜어 낸 경력이 거의 도달할 즈음에서야 천천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의 오른손은 시뻘겋게, 왼손은 백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시뻘겋고 새하얀 두 개의 손! 그것을 보자 서횡은 대경 실색하여 부르짖었다. "앗! 음양수다!" 막 회의청년의 몸통을 가격하려던 새북쌍패는 서횡의 음성을 듣고는 깜짝 놀라 물러서려 했다. 하나 어느새 회의청년은 붉고 하얀 양손을 슬쩍 휘두르고 있었다. 꽈르릉!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 나오며 후끈한 열기와 뼛골이 시린 듯 한 한기가 동시에 뿜어 나왔다. 왕! "크아악!" "케에엑!" 두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막동과 막지광의 몸은 허공을 훌훌 날아 십여 장 뀨으로 나가떨어졌다. 쿵! 쿵! 바닥에 떨어진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었다. 막동은 전신이 불에 그슬린 듯 시커멓게 탄 채 죽어 있었고, 막지광 은 그와는 정반대로 서리를 맞은 듯 꽁꽁 얼어붙은 시체가 되어 있었 다. 서횡과 관락삼호는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뜬 채 장내의 광경을 바라 보았다. 그들의 뇌리에는 강호무림예 전설처럼 떠도는 하나의 노랫소리가 들 려 오고 있었다. -- 시뻘겋고 새하얀 두 개의 손이 동시에 움직일 때면 전신인 먼지처 럼 사그라진다…… 드디어 우내칠대무학 중의 하나인 음양수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 이다. 제19장 쌍마쌍성 관락삼호는 너무도 놀랍고 당황해서 멍하니 서 있었다 회의청년은 눈빛을 악독하게 빛내며 다시 홍백의 양손을 그들 을 향해 휘둘렀다. 꽈릉! 가공할 경기를 동반한 음양진기가 관락삼호의 몸을 그대로 쉽쓸어 버렸다. 쾅! 쾅! 쾅! 마치 북을 치는 듯한 음향이 연거푸 터져 나오며 관락삼호는 세 덩이 의 혈구가 되어 날아갔다. "끄아아아……!" 그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주위를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 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명의 고수들을 육포로 만들어 버린 회의청년 은 그제서야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관락삼호는 너무도 놀랍고 당황해서 멍하니 서 있었다. "흐흐…… 이제 우리를 번거롭게 할 자들은 모두 사라졌소. 서 노인 께서는 나를 도와 유령동부로 갈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인지 빨리 결정하시오." 서횡은 새북쌍패와 관락삼호의 시신을 둘러보더니 나직이 탄식을 토 했다 "아…… 귀하의 손속은 너무도 악랄하구려. 이들과 대체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런 살수를 쓴단 말이오?" "흐흐흐, 예로부터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고 했소. 내가 그들 을 살려 둬봤자 어차피 그들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자들에 게 살해당했을 거요." 회의청년이 득의에 찬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돌연 음랭한 말소리가 들 렸다. "귀하는 너무 큰소리치지 마시오. 그들이 전혀 무방비 상태에서 암산 을 당하지 않았다면 근토록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요." 동시에 십여 개의 인영이 어른거리며 불쑥 나타났다. 그들의 신법은 너무도 표홀했기 때문에 오만하기 그지없는 회의청년 도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나타난 인물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뚱뚱하기 그지없는 화의 중년인이 었다. 중년인은 어찌나 살이 쪘는지 그야말로 하마를 방불케 했다. 아직 겨울이라 차가운 바람이 연신 불어오는데도 그 화의뚱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시 손수건으로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 내고 있었다. 화의뚱보의 뒤에는 복면을 한 청의노인이 귀신처럼 신형을 흔들거리 며 서 있었다. 청의복면노인의 두 눈은 마치 독사의 그것처럼 섬뜩한 안광을 뿜어 내고 있었다. 청의복면노인의 바로 옆에는 체구가 건장한 홍포노인이 우뚝 서 있었 다. 홍포노인은 사자코에 고리눈을 부릅뜨고 회의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는 데 그 눈에서 뿜어 나오는 안광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담이 약한사람 은 제대로 쏘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 세 인물의 뒤에는 백의를 걸친 여덟 명의 중년인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서 있었다. 회의청년은 그들을 한번 훌어본 것만으로도 그들이 쉽게 만날 수 없 는 무서운 고수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화의뚱보와 청의복면노인은 그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로 보아 절대로 회의청년의 아래가 아니었다. 회의청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급히 물었다. "귀하들은 누구요?" 화의뚱보는 킁지막한 손에 꽃잎이 수놓아진 손수건을 들고 연신 얼굴 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그보다 귀하가 함부로 우리측 사 람을 죽였으니 목숨으로 배상을 해야 할 거요." 회의청년은 어리등절한 표정이었다. "귀하측 사람이라니…… 나는 귀하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귀 하측 사람을 죽일 수 있겠소?"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그의 안색이 홱 변했다. "당신이 말하는 자가 하장청과 새북쌍패들이오? 그렇다면 당신들은 성심장에서 왔단 말이오?" 화의뚱보는 히죽 웃었다. "잘 아는군. 그렇다면 더 이상 긴말은 필요없겠지?" 이어 화의뚱보는 홍포노인을 향해 눈짓을 했다. 그러자 홍포노인은 비호처럼 몸을 날려 회의청년을 덮쳐 갔다. 그때 솥뚜껑만한 쌍수가 휘둘러지면 엄청난 광풍이 회의청년을 향해 몰아쳐 갔다. 꽈르릉……! 회의청년은 그것을 보고 비릿한 냉소를 터뜨렸다. "흥! 감히 내 앞에서 장력을 자랑하려 하다니……!"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어느새 홍백으로 변한 양손을 기이하게 휘둘렀다. 꽝!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폭음과 함께 주위의 땅거죽이 훌렁 뒤집어졌다. 중인들은 세찬 흙먼지가 앞을 가려 급히 뒤로 두 걸음씩 물러났다. "음……" 흙먼지 사이로 미약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무서운 기세로 덮쳐 들었던 홍포노인이 안색이 창백해진 채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고 있지 않은가? "우웩!" 홍포노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커먼 피를 한 덩이 게워 내었다. 하나 회의청년도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는지 뒤로 두 걸음 물러난 채 안광이 조금 흐려져 있었다. 그는 악독한 눈초리로 화의뚱보와 그의 일행들을 노려보더니 지체없 이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곧 그의 몸은 대나무 수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화의뚱보는 날카로운 눈으로 회의청년이 사라져 간 곳을 응시하고 있 다가 홍포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번 형! 괜찮소?" 홍포노인은 입가에 묻은 피를 쓰윽 훔치며 씁쓸하게 웃었다. "견딜 만하외다. 하지만 아직 나이도 어린 녀석의 장공이 그토록 무 서울 줄은 미처 몰랐소." "우내칠대무학이란 이름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니 번 형이 약간의 손 해를 본 것도 당연하오. 하지만 그놈도 새북쌍패와 관락삼호의 시신 을 먼지로 만들어 버리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직 음양수의 공력 이 절정에 달한 것 같지 않소. 그러니 다음에 만날 때는 번 형이 정면으로 그와 격돌하지 말고 초식의 우세로 겨룬다면 결코 이번처럼 쉽게 낭패를 보진 않을 거요." 홍포노인은 심각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총관의 말씀을 명심하겠소이다. 한데 그 녀석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화의뚱보의 안색도 조금 무거워졌다. "없소. 조금 전에 그를 쫓지 않았던 것도 그의 진정한 내력을 알기 전에는 섣불리 손을 쓰고 싶지 않아서였소." 이어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하장청에게 다가갔다. 하장청은 이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마구 뒹굴다가 입가에 검붉은 선혈을 흘린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화의뚱보는 무거운 시선으로 그의 상세를 살폈다. "음…… 정말 지독한 수법이군. 이것으로 보아 그자의 음양수뿐만 아 니라 삼양신지와 삼음마인 등 과거 음양신마의 삼대절학을 모두 연성한 것 같군." 홍포노인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음양신마는 이미 사십 년 전에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 녀석 의 나이로 보아 음양신마가 무림을 횡행할 때는 아직 태어나지 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자는 음양신마가 비밀리에 거둔 제자일 수도 있소. 아니면 음양신마가 남긴 무공비급을 우연히 얻었든지……" 홍포노인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만일 그 녀석이 본 장과 적대하게 된다면 이번 일은 쉽지 않겠는데요?" "고거야 어차피 각오한 일 아니오?" 화의뚱보는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말했으나 그의 안색으로 보아 심사 가 몹시 복잡함을 알 수 있었다. 음양신마는 사십 년 전, 천하무적의 고수들이었던 쌍마쌍성 중 쌍마의 일인이었다. 쌍마란 음양신마 구양청과 현마 좌불자를 말 하고, 쌍성은 화의성수 육만루와 백의성검 화진천을 가리킨다. 이들 네 사람은 그야말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절대의 고수들로, 다 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능히 천하제일의 고수에 올랐을 인물들이었다. 하나 공교롭게도 한 시대에 태어나는 바람에 무적의 무공 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천하무림을 독보하지는 못했다. 음양신마 구양청은 음양수와 삼양신지, 삼음마인의 삼대절학 으로 무림천하를 쉽쓸었는데 이 중 음양수는 가히 그 위력이 파천 황의 겅지에 다다라 우내칠대무학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 다. 과거 음양신마가 이 음양수를 전개하면 반경 십여 장 이내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었다. 아니, 제대로 된 형 체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발출한 음양 이기가 공중에서 서로 부딪쳐 미증유의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오늘 나타난 회의청년은 파거 음양신마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 고 단지 음양이기만을 뿜어 낼 뿐이었다. 그 정도라 할지라도 당긍 무림에서 제대로 당해 낼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화의뚱보는 잡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쪽에 멍하니 서 있는 서횡을 바라보았다. 그때 서횡은 새북쌍패에게 당한 금색독주가 조금 씩 살을 갉아먹고 들어오는 바람에 심각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화의뚱보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그어 냈다. "어떻소, 서 노인? 견딜 만하오?" 서횡은 입가를 실룩거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알면서 왜 물어 보시오? 한데 노부가 귀장과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귀 장의 새북쌍패가 노부를 암습한 거요?" "하하…… 우리가 서 노인과 어찌 원한이 있겠소? 단지 서 노인께서 순순히 우리와 함쩨 유령동부를 찾아 준다면 비단 서 노인의 금제를 풀어줄 뿐 아니라 본 장에서도 서 노인을 섭섭지 않게 대해 줄 거외 다." 서횡은 고통이 극심해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으나 심계가 깊은 인물답게 잠시 생각에 잠긴 척했다. 그러다가 다시 화의뚱보를 바라보며 물었다. "실례지만 귀하의 명호는 어찌 되시오?" 화의뚱보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은 후 빙그레 웃었다. "나는 성심장에서 제이총관의 직위를 맡고 있는 반미륵 고우성이라 하오." 그 말에 서횡은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렇다면 귀하가 바로 신강의 사신이라는 반미륵이 란 말이오?" 그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반미륵 고우성은 둔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흥악하기 그지없는 인물 이었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신강 일대를 석권한 무서운 마두였는데, 그가 칠 대흥인.에 끼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가 신강 땅에서만 활동하고 중원 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칠대흉인 중 몇 사람은 칠대흉인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평생을 신강 땅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고우성이 성심장에 서 이총관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우성은 히죽 웃었다. "내가 바로 고우성이오. 어떻소? 이제 서 노인의 마음이 결정된 것 같은데……" 서횡은 상대가 흥악하면서도 심기가 깊기로 이름난 고우성임을 알자 더 이상 대항할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 대협의 분부를 따르겠소. 그러니 어서 이 독주를 좀……" 그의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고우성은 자신의 등뒤에 말없이 서 있는 청의복면인을 돌아보았다. "조 노인께서 수고를 좀 해주셔야겠소이다." 그가 청의복면인을 대하는 태도는 흥포노인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 구 분될 정도로 정중했다. 청의복면인은 말없이 서횡의 앞으로 다가왔다. 서횡은 독사같이 번뜩이는 그의 눈을 보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눈을 보자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웃음을 띤 채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그의 등에는 징그럽게 생긴 금색독주 한 마리가 상처를 내고 그 속에 붙어 있었다. 서횡은 금색독주가 피를 빨 때마다 심한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내면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원래 금색독주는 묘강에서만 나는 독물로, 한번 걸려들 면 척추에 서식하며 피를 빨아먹기 때문에 해소시킬 방떱이 없었다. 섣불리 독주를 떼어 내려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독주에게 당하거나, 아니면 독주가 상처를 뚫고 몸 속으로 숨어 버려 즉사를 면키 어려웠 다. 청의복면노인은 말없이 금색독주를 노려보다가 서슴지 않고 손을 내 뻗었다. 그의 손은 어느새 푸르뎅뎅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청의복면인이 손을 내미는 대로 금색독주는 피할 생각도 않고 마치 극성을 만난 것처럼 몸뚱이가 위축되면서 움직이지 알는 것이 다. 청의복면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금색독주를 손으로 움켜쥔 채 입으로 가져 갔다. 이어 그것을 우적우적 깨물어 먹는 것이 아닌가! 그가 독주를 씹을 때마다 그의 입가로 독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시 퍼런 선혈과 구역질나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서횡은 독주가 떼어지자 전신이 가뿐해지고 다시 몸에 기혈이 충만되 는 것을 느꼈다. 하나 청의복면노인이 금색독주를 씹어 먹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 게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저 금색독주는 몸에 맹독을 품고 있어서 먹기는커녕 만지기만 해도 살이 썩어 버리는데 그걸 씹어 먹다니…… 과연 저자는 신망 조패란 말인가?' 고우성은 웃으며 서횡에게 다가왔다. "자, 이제 서 노인의 몸이 쾌유된 것 같으니 우리는 어서 유령동부를 찾아갑시다." 서횡은 할 수 업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과 함께 죽림 속으로 들어갔 다. 그들의 몸이 사라진 직후, 스읏! 그 자리에 다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 인영은 바로 조금 전에 홍포노인과 격돌한 후 훌쩍 떠나갔던 회의 청년이었다. 고우성 등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는 회의청년의 얼 굴에는 기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회의청년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더니 돌연 쌍수를 들고 질풍 노도처럼 휘둘렀다. 와르릉! 음양수의 가공할 경력이 일어나며 주위에 둘러쳐진 나무숲들이 태풍 을 만난 듯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회의청년은 무작정 쳐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위를 밟으면서 장력을 갈겨대고 있었다. 와릉…… 와왕! 그가 한 번 손을 휘두를 때마다 아름드리 거목과 대나무들이 스무 그 루씩이나 뽑혀져 버렸다. 순식간에 회의청년은 주위를 거의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와 함께 죽림을 에워싸고 있던 무서운 금제도 해소되었다. 회의청년은 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기문진이 완전히 과괴되었음을 확인하고 괴소를 흘리며 몸을 날렸다. 곧 그의 몽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한편 고우성 일행과 동행하게 된 서횡은 곧 죽림을 뚫고 하나의 깊은 골짜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골짜기 안에는 수십 장 정도나 되는 절벽이 있었다. 서횡은 절벽 앞에 가서 무언가를 살피다가 고개를 돌려 고우성을 바 라보았다. "이 절벽 중간쯤에 좁은 틈이 있소. 그 틈새를 지나가기만 하면 유령 동부로 들어가는 출구가 나올 거요." "좋소, 서 노인이 앞장서시오." 서횡은 즉시 몸을 튕겨 절벽의 중간쯤에 있는 틈새로 들어갔다. 그들이 그 틈새로 들어가자 서횡은 이미 자그마한 계곡 안으로 들어 가고 있었다. 계곡 안에는 고목들이 계곡을 메우려는 듯이 너무도 무성하게 가득 차 있어 햇빛을 볼수가 없었다. 게다가 계곡의 입구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정도로 비좁은지라 밖에서는 이러한 곳에 이런 계곡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과련 절영곡이란 이름이 무색하군. 이래서 지금까지 아무도 유령동 부를 찾지 못한 게로군." 고우성은 중얼거리며 서횡에게 다가갔다. 계곡의 끝에는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었고, 서횡은 그 무덤 앞에 우 뚝선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덤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동그란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었고, 그 무덤 앞에는 여덟 개의 신상 들이 거목처럼 우뚝 서 있어 위압감을 던져 주었다. 고우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서횡을 보며 물었다 "서 노인은 이곳이 유령동부의 입구라고 생각하오?" 서횡은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고우성은 조금 못 미더운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덤이 입구라니, 어째 좀 이상하군." 서횡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유령은 당연히 무덤 속에 살 텐데 뭐가 이상하오?" 고우성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서횡은 주저하지 않고 세 번째의 석상 앞으로 다가가서 석상의 오른 팔을 잡고 힘껏 한바퀴 돌렸다. 순간, 와르르룽! 우렁찬 소리와 함께 무덤 앞의 묘비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고우성은 나직이 감탄성을 토했다. "과연 절묘하오. 서 노인의 기문둔갑술은 정녕 당대제일이오." 서횡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내 한 몸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데……" 고우성은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서 노인이 본 장에 가입하게 된다면 아마 장주님의 은총을 톡톡히 받게 될 거요. 그렇게 되면 무림의 어느 누구도 서 노인을 어 쩌지 못할 거요. 자! 그만 들어갑시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열려진 묘비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무덤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누군가가 화섭자를 켜서 주위를 밝게 비춰 보자 일 장 정도 앞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눈에 띄었다. "모두들 내 뒤를 따르시오. 절대로 어떤것에도 손을 대서는 안 되 오." 서횡은 신중하게 외친 후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우성은 기관매복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서횡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신세이므로 군말없이 그를 따라 계단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내 려갔다. 순간, 한줄기의 싸늘한 한풍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한기는 더욱 더해 가고 모골이 송연한 느낌을 주었다. 얼마 동안 그런 한기를 느끼면서 내려가니 그들의 시야에 하나의 제 단이 눈에 띄었다. 갑자기 서횡은 계단의 입구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오, 서 노인?" 고우성이 뒤에서 의아한 듯 물었으나 서횡은 조용히 하라는 시늡만 하고 심각한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고우성은 제단의 입구 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중층한 석뵉만이 가로막혀 있자 의혹을 참을 수 없었다. 그때 서횡이 별안간 제단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바닥을 향해 슬쩍 장 력을 날렸다. 쾅! 장력이 바닥에 닿는 순간, 덜컹! 길이가 이 장여나 되는 제단의 입구 바닥이 밑으로 푹 꺼졌다. 동시에, 쐐액! 쐐액! 꺼진 복도의 전후로 창끝같이 날카로운 쇠붙이가 번개같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쏘아 왔다. 바닥에는 그 쇠붙이가 통과할 만한 구멍이 있어서 그 쇠붙이들은 모 두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까…… 그리고 꺼진 복도는 다시 복구되었다. 서횡이 천천히 걸어나오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고심한 매복이로군." 고우성은 조금 전의 일에 크게 놀랐는지 얼굴에 식은땀을 주르르 흘 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 서 노인이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했구려. 이곳에 유령천자가 많 은 기관을 장치했다더니 소문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구려." 중인들은 더욱 바짝 긴장하여 제단으로 들어갔다 제단의 사방 벽에는 커다란 야명주가 박혀 있어서 주위가 대낮같이 환했다. 제단의 정면 벽에는 커다란 야수 그림 조각이 하나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갖가지 병장기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제단의 한복판에는 석상이 하나 있는데 석상 위에는 쪽지 하 나가 있었다. 성심장의 백의인 하나가 무심코 그 쪽지를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 라고 말았다. 쪽지에는 옛날 상형갑골문자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백의인은무림에서도 절정고수의 대열에 속해 있는지라 단번에 그 쪽 지에 적혀 있는 글이 심오한 무학구결을 적은 것이라는 것 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크게 기뻐하여 쪽지를 집어 들고 정신없이 들여다 보았다. 그때 마침 서횡이 그 광경을 발견하고 크게 놀라 소리쳤다. "어서 그 쪽지를 버리시오." 중인들은 깜짝 놀라 그 백의인을 바라보았다. 백의인은 쪽지를 들여 다 보고 있다가 서횡의 호통 소리에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 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오?" 서횡은 다급하게 말했다. "그 쪽지에는 무서운 절독이 묻어 있소. 그러리 어서 손을 떼 시오!" 백의인은 흠칫 놀라 쪽지를 잡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순간 등골 이 오싹해졌다. 그의 오른손바닥은 어느새 시커멓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쪽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으나 독기는 어느새 그의 팔뚝을 지나 어깨 부근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다급해진 백의인은 이를 악물고 왼손으로 겁을 뽑아 자신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팟! "크윽!" 그의 팔이 라뚝 잘라지며 시커먼 독혈이 쭈욱 뻗어 올라왔다. 조금만 늦었어도 독기는 어깨를 지나 심장까지 도달했을 것이다. 중인들은 잘려진 백의인의 팔이 어느새 시커먼 독물로 녹아 버린 것 을 보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것이 대체 무슨 독이기에 이토록 지독하단 말인가!" 고우성이 넋두리처럼 중얼거리자 서횡은 침중하게 말했다. "아마 유령천자의 오대기독 중의 하나인 유령부시독 일 것이오." 이어 그는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노부가 분명 어떤 것도 손대지 말라고 했거늘 노부의 말을 어기고 이런 일을 당했으니 누구를 탓하겠소? 이제라도 여러분들은 절대로 다른 물건에 손을 대지 마시오." 중인들을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우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서횡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이 제단에는 별다른 것이 없는 듯한데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소?" 서횡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상을 가리켰다. "노부가 보기에는 저쪽인 것 같소." 석상 밑에는 한 자루의 검과 도끼가 놓여져 있었다. 하나 그 물건들은 모두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서횡은 한동안 석상과 돌검과 돌도끼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불쑥 입 을 열었다. "누구 병기를 가지신 분이 계시면 두 개만 빌려 주시겠소?" 무림인들이란 원래 병기를 목숨처럼 아끼는지라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빌려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나 지금은 사정이 워 낙 다급한지라 백의인들 중 두 사람이 잽싸게 자신들의 검을 내밀었 다. 서횡은 양손에 검을 나눠 쥐고는 조심스럽게 석검을 검끝으로 집어 석상 위에 내려놓았다. 한데 검이 석검에 닿자 어느새 그 끝이 시커멓게 물드는 것이 아닌 가! "정말 악독한 독이구나……" 중인들은 모두 찬따람을 들이마셨다. 서횡은 신중한 동작으로 다시 돌도끼를 검끝으초 집어 석상 위에 놓 인 석검과 교차형으로 올려놓았다. 순간, 쿠르릉…… 벽에 새겨진 사자상이 갑자기 밑으로 내려가고 그곳에 넓이가 한 자 정도 되는 네모난 구멍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고우성이 갑자기 탄식을 터뜨렸다. "이런 곳에 통로가 있다니…… 오늘 서 노인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큰 낭패를 당할 뻔했구려." 서횡은 아무 말도 없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고우성과 다른 인물들 역시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뒤를 따라 들어갔 다. 순간 중인들은 멍해졌다. 그들의 앞에는 넓다란 모래사장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모래사장의 주위에는 짙은 안개가 자욱이 깔려 있어 마치 끝없는 연 기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아 지척을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고우성은 한동안 멍하니 모래사장을 바라보다가 서횡을 돌아보며 물 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동부 속에 때아닌 모래사장이 나타나다니… …" 서횡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안개를 응시하고 있었다. "노부도 확실히 모르겠소. 하지만 금제가 점점 더 가공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유령천자의 유물이 있는 곳이 멀지 않은 것 같소." 유령천자의 유물이라는 말에 고우성은 힘을 얻은 듯 눈을 번쩍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머뭇거릴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이어 성큼 모래사장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했다. 순간, 서횡은 안색이 대변해 급히 그를 제지했다. "잠깐!" 고우성은 이곳에 들어와 몇 번이나 호되게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지 레 놀라 급히 내디디려던 발을 움츠렸다. "왜 그러시오?" 서횡은 심각한 눈으로 모래사장을 응시했다. "이곳의 모래가 아무래도 좀 이상하오. 고 대협의 손수건을 좀 빌려 주시겠소?" 고우성은 이미 서횡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지라 서슴지 않고 수중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서횡은 그 손수건을 모래사장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스스…… 모래사장에 닿은 손수건은 마치 물속에 빠져 드는 조약돌처럼 스르르 모래 속으로 스며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손수건은 순식간에 모래 속 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본 중인들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특히, 하마터면 모래 속으로 발을 들여놓을 뻔했던 고우성은 등골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이…… 이제 보니 이것은 침사였구나!" 서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모래는 깃털조차도 가라앉고 만다는, 바로 그 침사요." 고우성은 입을 딱 벌렸다. "내가 알기로 침사는 무척 희귀해 물 한 동이만큼도 구할 수 없다고 하던데…… 이 넓은 모래사장이 모두 침사란 말이오?" "그런 것 같소." 고우성은 안색이 여러 차례 변하다가 기대 어린 눈으로 서횡을 돌아 보았다. "서 노인, 이 침사를 뚫고 나갈 방법이 없겠소?" 그는 서횡과 함께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차례의 위기를 넘기자 자신 도 모르게 서횡을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 서횡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노부는 일시지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구려." 고우성은 내심 크게 실망하여 암담한 시선으로 모래사장을 바라보았 다. 바로 그때였다. 쿠쿠쿠쿠…… 갑자기 뼛골이 시린 듯한 한기와 함께 걷잡을 수 없는 광풍이 일어나면서 중인들의 몸을 뒤로 밀려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얼음 덩어리로 만들어진 천군만마가 몰려드는 듯한 기세로 그들을 향해 몰아쳐 왔다. 그 광풍이 어찌나 강력하고 차가운 한기를 동반하고 있었던지 광풍에 몸이 살짝 쏘이는 순간 얼음으로 만든 뇌전에 전신을 관통당하 는 듯한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광한쇄골풍이다! 어서 피해라!" 고우성이 대경 실색하여 놀란 외침을 토해 내며 급히 절벽 아래로 몸 을 날렸다. 다른 중인들도 황급히 전력을 다해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 운 절벽 쪽으로 몸을 피했다. 하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가장 빨리 절벽 아래로 피신한 사람이 비 호 서횡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광한쇄골풍이 부는 순간 서횡은 놀라운 속도로 몸을 날려 가장 먼저 절벽 아래로 피신해 있었 던 것이다. 콰콰콰콰…… 광한쇄골풍은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굉음 을 내며 주위 사방을 휘몰아쳐 갔다. 그 가공할 광풍의 소용돌이에 횝쓸리면 설사 쇠로 만든 금동철인 이라도 견며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서횡과 고우성을 비롯한 중인들은 일제히 절벽 아래에 최대한 몸을 바싹 붙힌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쿠쿠쿠쿠……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과 뼛골이 시린 듯한 한기를 동반한 광한쇄 골풍만이 무인지경처럼 장내를 쉽쓸고 있었다. 제20장 무덤 앞에서 죽림이 끝나는 절영곡의 입구. 죽림이 팍괴되어서인지 그토록 신비스럽게 자리하고 있던 절영곡의 모습이 한결 생생하게 드러났다. 어느 순간,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죽림을 뚫고 세 사람이 나타 났다. 그들 중 가장 앞선 인물은 우람한 체구에 등뒤에 검은 창을 맨 초로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위맹하게 생긴 얼굴에 한 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어 더욱 사나워 보였다. 두 번째 인물은 키가 헌칠하고 청수한 이목을 한 황색 장삼의 중년인 이었다. 황삼중년인은 눈빛이 맑고 가슴까지 내려오는 탐스러운 수염을 기르 고 있어 중후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마지막 인물은 비쩍 마르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파였다. 노파는 강팍한 얼굴에 눈빛이 빙굴에서 흘러나오는 듯 차갑기 그지없 었는데 수중에는 용두강괴를 들고 있었다. 세 사람은 번개같은 신법으로 계곡의 입구를 지나 무덤 앞에 내려서 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중 황색 장삼을 걸친 중년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군 소문에 듣기로는 이곳 죽림은 무서운 기문진이 설치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모두 파괴되어 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7" 애꾸노인은 침을 탁 뱉고는 크게 외쳤다. "곽 보주는 별걸 다 신경 쓰는구려. 아마 우리보다 먼저 동부로 들어간 자들 중 누군가가 그랬을 거요. 그러니 우리도 더 늦 기 전에 동부의 입구를 찾읍시다." 그때 용두강괴를 든 노파가 무덤 앞으로 다가와서 바닥을 내려다보다 가 눈을 번뜩였다. "이곳에 발자국이 많은 걸 보니 아무래도 수상하오. 혹시 이 무덤이 유령동부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닐까 하는데, 두 분의 생각은 어떻 소?" 황삼중년인과 애꾸노인은 급히 무덤 앞으로 다가와 바닥을 살폈다. 애꾸노인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냉모모의 말이 맞소. 어서 무덤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갑……" 바로 이때 어디선가 하나의 뫼꼬리같이 맑고 아름다운, 그러나 숨이 가쁜 듯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버님……!" 이 소리에 모두 눈이 휘등그래졌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두 명의 아리따운 미녀들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삼중년인은 그 중 홍의를 입은 소녀를 보자 반색을 했다. "연아로구나! 네가 여기에는 어쩐 일이냐?" 그 소녀는 그들 앞에 서자마자 생긋 웃으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조 그만 입술을 놀렸다. "아버님 제가 여기에 온 데는 곡절이 많으니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이분 언니는 일수삼도 운남평 대협의 따님이신 운봉랑 소저예요." 나타난 소녀들은 다름 아닌 곽희연과 운봉랑이었던 것이다. 황삼중년인은 곽희연의 부친이자 분양 곽가보의 보주인 태을신검 곽일진이었다. 운봉랑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질녀가 숙부님께 인사를 드려요." 곽일진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내 껄껄 웃었다 "하하…… 네가 바로 그 코흘리개 봉랑이란 말이냐? 정말 몰라보게 컸구나. 네가 사대미인 중에 하나로 꼽힌다기에 긴가민가했는데 오늘 보니까 그 동안 정말 예뻐졌구나." 곽일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운남평의 안부를 묻고는 애 꾸노인과 노파를 가리켰다. "너희들은 어서 두 분 선배님께 인사를 올리거라. 이분은 독목신창 여의태 대협이시고, 저쪽 분은 무정신구 냉모모이시란다." 독목신창 여의태와 무정신구 냉모모는 모두 무림의 유명한 명숙 들이었다. 곽희연과 운봉랑은 급히 그들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인사를 마치자 곽일진은 다시 곽희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들도 유령동부의 보물을 얻으려고 이곳에 왔느냐?" 곽희연은 두 눈동자를 샛별같이 반짝이며 생글생글 웃더니 하얀 치아 를 내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저희는 다른 일 때문에 왔어요." 곽일진은 의아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다른 일 때문이라니? 그게 무엇이냐?" 바로 그때 또다시 어디선가 십여 줄기의 인영이 날렵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승, 도, 속이 뒤섞인 인물들이었는데 그 중에서 도 특히 눈부신 백의를 입은 미소녀가 눈길을 끌었다. 그녀의 눈은 샛별같이 반짝였고 살결은 백옥 같았다. 게다가 가느다 란 허리를 하느작거리며 날아오고 있는 모습이 마치 선녀와도 같았다. 운봉랑은 그녀를 보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곽회연은 그녀의 기색을 알아차리고 급히 물었다. "운 언니, 그녀가 누군지 아세요?" 운봉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의미녀에게 걸어갔다. "호호…… 설마 조 낭자께서도 이런 시끄러운 일에 끼여들 줄은 몰랐군요." 백의미소녀는 웬 아름다운 여인이 웃으면서 자신에게 다가오자 두 눈 을 상큼히 뜨고 그녀를 쳐다보다가 눈을 반짝 빛냈다. "이제 보니 소비연 운 낭자였군요. 운 낭자야말로 이곳엔 웬일이세 요?" 운봉랑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호호…… 사연을 말하자면 복잡해요." 두 천하절색의 미녀들이 경쟁이나 하듯이 나란히 웃자 그 야말로 중인들은 넋이 나가는 듯했다. 곽희연은 백의미소녀의 미모가 운봉랑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것을 보 고 깜짝 놀랐다. '저 소녀의 용모는 운 언니보다 결코 못하지 않구나…… 혹시 그녀도 사대미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녀의 생각을 짐작이나 하듯 운봉랑이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연매, 인사해. 이분은 조옥환, 조 낭자야." 곽희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럼 사대미인 중의 한달기라는……" 한 맺힌 달기, 조옥환이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낭자는 혹시 곽가보의 꽃이라는 곽희연 낭자가 아닌가요?" "그래요. 한데 어떻게 저를 아세요?" "호호…… 두 분께서 같이 잘 다닌다는 말을 들었어요. 아무튼 반가 워요." 세 소녀는 서로 종달새처럼 조잘거렸다. 각기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세 미녀가 머리를 맞댄 채 이야기를 하다 가 돌연 까르르 웃곤 하자 중인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의태가 곽일진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들을 보니 우리들이 너무 늙어 버린 것 같구려. 이거 어디 서러 워서 살겠소?" 곽일진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덤 앞에 도착하는 무림인들의 수는 점점 늘어 금 세 백여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죽림에 설치되어 있던 기문진이 깨어 지자 군웅들이 너도나도 몰려든 것이다. 여의태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자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안 되겠소. 이러다간 유령동부를 찾기도 전에 깔려 죽고 말겠소. 어 서 저 무덤을 파괴합시다." 이어 그는 묘비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꽈릉! 그의 내공은 이미 절정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날린 일장에는 천근거석이라도 부숴 버릴 무서운 위력이 담겨 있었다. 꽝! 굉음과 동시에 온 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묘비는 끄떡도 않는 것이 아닌가? 여의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아니, 무슨 놈의 묘비가 이렇게 단단하지……?' 곽일진이 무덤 위로 재빨리 올라가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무덤은 특이한 기관장치가 돼 있는 것 같소." 군웅들이 폭음 소리를 듣고 벌메같이 그들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여의태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오히려 군웅들의 이목을 집중시 켰음을 알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바로 그때, "앗?" 무덤 위로 올라갔던 곽일진이 경악의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냉모모는 깜짝 놀라 재빨리 무덤 앞으로 다가가 궁금한 듯이 다급하 게 물었다. "곽 보주께선 무엇을 발견하셨소?" 곽일진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손을 내밀어 그들을 불렀다. "이리 와보시오." 냉모모와 여의태, 그리고 곽희연, 운봉랑, 조옥환 등이 앞을 다투어 무덤 위로 달려가 보았다. 곽일진의 발 앞에는 하나의 팔괘도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팔괘도는 괴이하게도 저절로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곽일진은 한동안 그 팔괘도를 응시하고 있다가 낮은 소리로 곽희연에 게 재빨리 속삭였다. "연아, 이 팔괘도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으니 난 이들과 함께 그 것의 비밀을 풀어야겠다. 그러니 너희들과 조 낭자는 다른 사람들이 기습하지 못하도록 방비를 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곽희연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고 총총히 밑으로 뛰꺼 내 려갔다. 군웅들은 비록 곽일진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가 도대체 무 엇을 발견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군웅들 중 한 사람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곽희연에게 다급하게 입 을 열었다. "곽 낭자!" 곽희연은 약간 주춤했으나 즉시 그의 앞으로 달려가면서 생긋 웃어 보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그자는 급히 물었다. "영존 등 세 분께서 무엇을 발견하셨소?" 곽희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상냥스럽게 미소를 머금은 채 나직 이 속삭였다. "무슨 팔괘도 같은 것을 발견하시고 지금 연구하는 중이세요." 그녀는 특히 연구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과연 중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곽일진 등을 바라볼 뿐 이상한 행 동을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곽일진과 여의태, 냉모모 세 사랑은 이곳에 모인 군웅들 중에서 명망 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가장 탁뭘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중인들은 그들이 팔괘도의 비밀을 풀 때까지는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 하는 것이다. 이때 중인들 중 가장 구석에 있던 한 사람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면 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자는 얼굴에 칼자국이 있고 뱁새눈을 가 진 장한이었다. 장한은 군웅들의 기색을 살피다가 아무도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이 없 자 그제서야 안심하고 몸을 날럭 계곡 밖으로 달려갔다. "흐흐…… 하루살이 같은 것들. 이제 곧 저 세상으로 갈 줄도 모르고 ……" 장한은 입가에 음독한 미소를 지은 채 계곡 밖으로 치달려갔다. 하나 그는 하나의 신비한 인영이 자신의 뒤를 은밀히 따르고 있는 줄 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곡을 벗어난 뱁새눈의 장한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어느 이름 모 를 절곡으로 들어갔다. 절곡의 중앙에는 한 채의 허름한모옥이 있었다 아마 사냥꾼의 거처인 듯 동물 가죽으로 지붕을 막아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장한은 모윽 앞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온칠호님, 속하 고평입니다." 그러자 모옥 안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려 왔다. "어서 들어와라." 고평은 조심스럽게 모옥 안으로 들어서며 공손히 허리를 굽혀 절을 올렸다. 모옥 안에는 하나의 커다란 탁자와 몇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의 자 위에는 두 명의 인물이 거만스럽게 앉아 고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세 갈래의 긴 수염을 기르고 눈초리가 세모로 쭉 찢어진 회색 장포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절영곡 안의 사정은 어떻더냐?" "온칠호님의 예상대롭니다. 무링인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어 인산인해 를 이루고 있습니다." 회색 장포의 노인은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 그래? 그들 중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없었느 냐?" 고평은 자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엄었습니다. 그자들은 무덤을 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소인이 그들을 염탐하고 돌아가는 것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수고했다. 가서 쉬도록 해라." 고평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물러났다. 한데 수염을 쓰다듬는 회포노인의 손가락은 모두 잘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바로 회서방의 칠호 온서인 최혼가람 고복양이었던 것이다 고복양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노 형! 절영곡 주변에 뇌화신주를 묻어 놓았소?" 그 인물은 불타 오르는 듯한 적발에 적염, 홍안의 노인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흡사 불의 화신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 도였다. 이 적염노인은 회서방의 십사호 온서인 열화진군 노잔양 이었다. 노잔양은 강호무림에서 화기의 제일인자로 손 꼽히는 인물로, 그의 뇌화신주는 단 한 알로도 반경 이십여 장 이내 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화기였다. 노잔양은 고개를 끄덕 였다. "염려 마시오. 이미 열두 개의 뇌화신주를 절영곡의 중요한 곳에 배 치해 놓았소. 절영곡에 들어온 놈들은 하나도 요행을 바라지 못할 거 외다." "흐흐…… 과연 부총호법의 신산묘계는 귀신과 같소이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 본 방에 거역하는 무리들을 섬멸하고, 다른 자들 에게는 본 방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 주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일 석이조의 계략이 아니겠소?" "하하…… 노부는 처음부터 부총호법의 인물 됨이 남다른 것을 알고 있었소이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통꽤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판 밖으로 나간 고평은 계곡 아래에 마련된 자신의 거처로 달려가 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등뒤에서 한 줄기의 싸늘한 한풍이 스치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의 머릿속이 윙윙거리기 시작했다. 잇달아 하나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 왔다. "고 형은 이쪽으로 오시오." 그 음성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마력이 담겨져 있었다. 고평은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정신없이 자신을 부르는 쪽 으로 걸어갔다. 얼마 후 고평은 숲속 깊숙한 곳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평범한 인상의 청의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는 바로 변장을 한 강옥봉이었다. 강옥봉은 배교대법 중 섭혼미령법을 전개하여 고평을 유 인한 것이다. "고 형, 잘 오셨소." 그는 또다시 고평을 뚫어질 듯이 똑바로 주시하며 위엄있게 입을 열 었다. "고 형은 회서방에서의 지위가 어떻게 되시오?" 고평은 혼이 나간 듯 멍청해져서 아무 생각도 없이 저절로 입을 열었 다. "나는 회서방의 사십구호 전서요." "음…… 고 형은 누구의 명을 받고 절영곡에 모인 군웅들을 감시했던 거요.?" "칠호 온서인 최혼가람 고복양이오." "그와 동행 한 홍포노인은 누구요?" 고평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넙죽넙죽 대답했다. "그분은 본 방의 십사호 온서이신 열화진군 노잔양이시오." "고복양과 노잔양이 고 형으로 하여금 군웅들을 감시케 하고 계곡에 뇌화신주를 묻어 놓은 것은 그것을 터뜨려 군웅들을 몰살시키려는 계 획 때문이오?" "그렇소." 강옥봉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담담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위 엄있는 목소리를 발했다. "그렇다면 죽림에 설치한 기문진을 파괴한 것도 회서방의 짓이오?" 고평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것은 부총호법이 하신 것이오." 강옥봉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럼 이번 일은 부총호법이란 자가 계획했단 말이오?" "그렇소." "부총호법은 누구요?" "그는 음양공자 음적양이오." "음양공자? 무림 사대공자 중의 그 음양공자 말이오?" "바로 그렇소." 강옥봉은 내심 침음했다. 무림에는 사대미인이 있듯이 또한 사대공자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혜성같이 강호에 나타난 고수들인데, 하나같이 무공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고 행적이 신비해서 모든 무림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음양공자의 지위는 회서방 내에서 어느 정도요?" "부총호법은 다른 온서급 고수들보다는 높고 총호법의 바로 아래요. 아마 온이호님과 비슷할 거요." "회서방에서 그보다 지위가 높은 자는 몇 명이나 되오?" "부총호법의 위로는 오직 온일호님과 총호법님 그리고 방주님, 세 분 만 계실 뿐이오." 강옥봉은 신광을 내뻗었다. "그렬다면 혹시 회서방주가 누구인지 아시오?" 고평은 처음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건 모르오." 강옥봉은 내심 짐작은 했었지만 약간 맥이 풀려 다시 물었다. "짐작 가는 인물도 없소?" "없소. 방주님의 신분은 극히 신비하여 본 방에서 그걸 알고 있는 사 람은 온삼호님 이상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뿐이오." "그럼 고복양과 노잔양도 방주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오?" 고평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오."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품속으로 손을 넣어 한 장의 지도를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고 형께서는 어느 곳에 열두 개의 뇌화신주를 묻어 놓았는지 좀 얘 기해 주시오." 고평은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즉시 뇌화신주가 묻힌 곳을 지적해 주었다. 그 지도는 바로 절영곡의 지도였다. 강옥봉은 모든 것을 다 알고 나서 그를 향해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의미 심장하게 미소를 보냈다. "고 형, 참으로 고맙소. 이제 그만 가보시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신형을 제비처럼 솟구치며 순식간에 날아가 버 렸다. 고평은 그가 떠나간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조금 전에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떠나갔을 뿐이다. 한편, 강옥봉은 절영곡 안으로 들어선 후에 즉시 열화신군 노잔양이 사람을 시켜 묻어 놓은 열두 개의 뇌화신주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그 중 열한 개를 찾아 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한 그루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뇌화신주를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강옥봉은 혹시라도 회서방의 고수들이 눈치를 챌까 봐 곧장 그곳으로 가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무엇을 찾는 시능을 하며 그 나무 옆으로 다가갔다. 군웅들은 그의 거동이 의심스러웠지만 그가 무덤의 비밀을 찾으려는 줄로만 알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한데 그가 막 마지막 뇌화신주까지 제거해 버릴 때였다. 갑자기 그의 등뒤에서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롭고 음산한 소리가 으스 스 하게 들려 왔다. "흐흐…… 귀하!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강옥봉은 그 소리에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의 뒤에는 마흔 가량의, 몹시 징그럽게 생긴 중년대한 한 명이 서 있었다. 중년대한은 또다시 음침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면서 비웃듯이 강옥봉을 노려보았다. "귀하, 거기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오?" 강옥봉은 한눈에 중년대한이 회서방의 고수임을 직감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하고도 냉랭한 태도로 중년대한을 매 섭게 쏘아보았다. "수작을 부리고 있으펀 또 어떻소?" 말과 함께 갑자기 일장을 날렸다. 순간, "윽!"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중년대한은 가슴에 정통으로 한 대 맞고 그 대로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이렇듯 약간 소란스러운 소리에 곽희연과 운봉랑은 고개를 돌려 보다 가 청의중년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들은 한눈에 그 중년인이 바로 강옥봉이 변장한 것임을 알아차렸 다. 곽희연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운봉랑을 향해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언니, 그분이 왔어요." 운봉랑도 내심 마음이 울렁거리고 뛸 듯이 기뻤는지라 고개를 끄덕이 며 소곤거렸다. "그래, 정말 오셨구나." 그녀들은 사실 이곳에서 강옥봉과 만나기로 했는데 그의 모습이 보이 지 않아 내심 애를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이 그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보려고 발돋움을 하려는 찰나, 강 옥봉은 벌써 그 대한을 쓰러뜨리고 커다랗게 냉소를 터뜨리며 몸을 홱 돌려 절영곡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군웅들은 비록 강옥봉이 출 수를 해서 어떤 중년대한 한 사람을 제압한 것을 보았지만 쓸데없는 시비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던지 아예 모르는 척 외면을 하는 것이 었다. 운봉랑은 강옥봉이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자 다급히 곽희연에게 눈짓을 했다. "빨리 가서 그분이 어디로 가려는지 물어 보아라."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곽희연은 주저없이 강옥봉의 뒤를 따르면서 목 소리를 낮추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강 소협……" 그러나 강옥봉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계속 걸어가면서 전음성을 발 했다. '곽 소저, 상황이 매우 다급하니 나를 모르는 척하시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회서방의 고수들이 이리로 올것이니 목하 제일 시급한 것은 바로 곽 보주께서 무덤의 비밀을 빨리 알아 내는 것이오." 곽회연은 그제서야 뒤따르던 몸을 멈추고 즉시 운봉랑을 향해 되돌아 갔다. 운봉랑은 곽희연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궁금한 듯이 성급하게 물었 다. "그분께서 뭐라고 하셨지?" 곽회연은 즉시 표정을 굳히고 강옥봉이 일러준 말을 속삭이듯 얘기해 주었다. 운봉랑은 비로소 죽림의 기문진을 파괴한 것이 회서방의 계략임을 알 아차리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달기 조옥환은 두 소녀가 청의중년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저희들끼 리만 속닥거리자 한편으로는 의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약 이 올랐다. 그는 곽회연이 만났던 청의중년인을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물인 것을 보고 더 이상 의혹을 참지 못하고 그녀들에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두 분만 알지 말고 저도 좀 알면 안 될까요?" 두 소녀는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 뿐 입을 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조옥환은 내심 매우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바로 그때 곽일진이 갑자기 흥분된 어조로 소리쳤다. "다행히 이 무덤의 오묘함을 알아 냈소이다!" 여의태는 그의 말을 듣고 매우 기쁜 듯이 곽일진의 앞으로 다가서며 다급하게 서둘렀다. "일이란 지체를 해서는 안 되니 곽 보주께선 속히 묘문을 여시오." 곽일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덟 개의 석상 중 첫 번째 석상 앞으로 다가가서 석상의 왼팔을 빙그르르 밀었다. 그것은 얼마 전에 비호 서 횡이 묘비의 문을 열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다. 이 순간 군웅들은 전부 다 무덤 앞으로 몰려왔다. 그러나 곽희연과 운봉랑의 표정은 괴이할 정도로 매우 긴장되어 있었 다. 조옥환은 마음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위윙! 무덤 속에서 갑자기 괴이한 음향이 들려 오더니 잇달아 묘비가 옆으 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유령동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인 모양 이었다. 하나 이를 알 길 없는 여의태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껄껄 대소를 터뜨리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묘문이 열렸다. 우리 어서 들어갑시다!" 한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골짜기 안에서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한 광소와 함께 십여 줄기의 인영이 유성처럼 날아오는 것이 아닌 가? "으하하하히……!" 그들은 바로 최흔가람 고복양과 열화진군 노잔양을 비롯한 회서방의 고수들이었다. 막 무덤으로 뛰어들려던 여의태는 그들의 때아닌 출현에 놀라 몸을 우뚝 세웠다. 고복양은 음산한 괴소를 날렸다. "흐흐…… 여 형은 잠깐 멈추시오." 여의태는 속으로 움찔했지만 고개를 돌려 고복양을 아니꼽다는 듯 노 려보며 퉁명스럽게 살아붙였다. "무슨 일이오?" 고복양은 빙글빙글 웃으며 무덤 앞으로 다가왔다. "여 형과 곽 보주께서 무덤의 비밀을 알아 낸 데 대해 먼저 축하를 드리오. 하지만 여러분들은 무덤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안타깝 게 되었구려." 이 말에 여의태는 깜짝 놀란 듯이 고복양을 똑바로 노려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가 무덤 안에 들어갈 수 없다니……" 고복양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 이곳은 이미 본 방에 접수된 지 오래요. 그러니 본 방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무덤에 들어갈 수 없소." 이 말을 듣고 있던 여의태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껄껄 대소를 터뜨리며 대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황산이 언제부터 회서방의 관할이 되었단 말이오? 설사 그렇더라 도 노부는 꼭 무덤에 들어가야겠소!" 고복양은 날카로운 눈으로 여의태를 노려보다가 냉소를 터뜨렸다. "흥! 노부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인데 곧 그걸 믿게 해드리겠 소." 이어 그는 자신의 옆에 우뚝 서 있는 홍포노인을 가리켰다. "이분은 본 방의 십사호 온서이신 열화진군 노잔양이라 하오." 여의태는 고복양이 노잔양을 가리키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저놈들이……' 노잔양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왼쪽 손바닥을 재빨리 펴더니 그들에 게 내밀었다. 순간 그의 손바닥에는 오리알만한 등근 구슬이 나타났 다. 곽일진이 그것을 보고 놀란 외침을 로해 냈다. "아…… 저것은 뇌화신주다!" 순간 군웅들 틈에서 왁자지껄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이제야 군웅들은 고복양의 위협이 결코 허풍이 아님을 안 것이다. 고복양은 득의 만면한 미소를 지은 채 군웅들을 쓸어보았다. "흐흐…… 이곳 절영곡 주위에는 이미 열두 개의 뇌화신주가 구석구 석 숨겨져 있소이다. 만일 여러분이 본 방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한 다면 뇌화신주의 뜨거운 맛을 단단히 보게 될 거요." 군웅들은 눈에 띄게 불안해져 서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나 이 넓 은 절영곡 안에 열두 개의 뇌화신주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를 어떻 게 알 수 있겠는가? 여의태는 수시로 안색이 변했다가 고복양을 노려보며 물었다. "당신의 뜻은 무엇이오?" "흐흐…… 간단하오. 내게 약이 있는데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가 고 싶으면 반드시 내가 주는 약을 먹어야 하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서 불고기 신세를 면치 못할 거요." 여의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건 틀림없이 귀방의 해약이 없으면 풀지 못하는 독약이겠구려?" "흐흐…… 그거야 여 형이 생각하슥기에 달렸지. 만일 순순히 본 방 에 귀순한다면 오히려 무공을 증진시키는 영약이 될 수도 있소." 바로 이때, 갑자기 낭랑한 소리가 허공에서 들려 왔다. "고복양, 자신의 힘을 알고 말해라. 기껏 뇌화신주 몇 알을 가지고 우리들을 위협하려고 하느냐?"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누가 소리쳤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고복양은 대뜸 안색이 변하더니 고개를 재빨리 돌려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느 친구인지 나와서 말해라!" 하나 그 음성은 냉랭한 코웃음을 터뜨렸다. "흥! 내가 나가면 당신은 아예 꼬리를 말고 도망쳐 버릴걸 그보다 좋 게 말할 때 순순히 뇌화신주를 거두고 물러나는 게 어떻겠소?" 고복양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두 눈에서 살기를 뚝뚝 떨어뜨 렸다. "누군지 어서 나타나라! 그렇지 않으면 뇌화신주를 그쪽으로 던지겠 다." 소리가 들려 온 쪽에 서 있던 군웅들은 질겁을 하고 사방으로 몸을 피했다. 그 바람에 한 사람의 몸이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사람은 스스로 앞으로 걸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주위에 있는 군웅들이 모두 물러서고 자신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바람에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뿐이었다. 그는 평범한 인상의 청의중년인이었다. 제21장 무영신룡단혼도의 신위 청의중년인은 혼자서만 동그마니 앞에 남게 되자 피식 웃으며 고복양 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뇌화신주가 마치 신주 단지라도 되는 양 툭하면 그걸 앞세우 고 있구려. 하지만 원래 그런 신외지물은 그리 믿을 게 못 되는 법이오." 고복양은 청의중년인의 음성을 듣자 그가 조금 전까지 중인들 틈에서 말하던 자임을 즉각 알아보았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청의중년인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 다. "흐흐…… 귀하의 배포는 정녕 부러을 정도요. 뇌화신주가 그렇게 만 만하게 보인다면 어디 직접 당해 보시지." 이어 그는 노잔양에게 눈짓을 했다. 이에 노잔양이 수중에 들고 있던 뇌화신주를 막 청의중년인에게 던지 려는 순간. "잠깐!" 청의중년인이 급히 그를 제지했다. 고복양은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죽거렸다 "왜, 이제야 겁이 나는가? 하지만 너무 늦었다." 청의중년인은조긍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지었 다. "그게 아니라, 내게도 마침 약간의 화력을 가진 물건이 있는데 귀하도 흥미가 있다면 한번 보시구려," 이어 그는 품속에서 오리알만한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그냥 뇌주라고 하는 건데 아마 뇌화신주보다 못하진 않 을거요." 고복양과 노잔양은 그 구슬을 보자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모양으로 보아 뇌화신주와 너무도 흡사한 게 아닌가! 특히 노잔양은 청의중년인의 수중에 들린 뇌주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가 안색이 변한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은 어디서 노부의 뇌화신주를 훔쳤느냐?" 청의중년인은 담담하게 운으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요? 이건 귀하의 뇌화신주가 아니라 내 가 십여 년의 연구 끝에 직접 만들어 낸 뇌주란 말이오. 귀하는 착각 하지 마시오." 노잔양은 평생을 화기와 함께 살아 온 인물이었다. 어찌 자신이 심혈 을 기울여 만든 뇌화신주를 몰라보겠는가?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금시라도 청의중년인을 향해 덮쳐 들 기세였 다. "이놈! 감히 노부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네놈이 어찌 노부의 뇌화신주를 뇌주라고 하느냐!" 청의중년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당신이 들고 있는 뇌화신주가 어째 내 뇌주 와 모양이 똑같은 것 같소. 아, 알겠다!" 청의중년인은 돌연 무릎을 탁 쳤다. "나는 뇌주를 딱 열세 개만 만들었는데 얼마 전 누군가가 그것 중 하 나를 훔쳐 갔소. 그러고 보니 당신이 바로 그 범인이구려." 노잔양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딱 벌린 채 멍하니 청의중년인 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청의중년인은 짐짓 혀를 차며 그를 꼬나보았다. "쯧ㅉ…… 어째 점잖게 생긴 노인이 그런 몹쓸 짓을 했소? 내가 어떻 게 만든 뇌주인데 그걸 홈쳐 가다니…… 그러고도 그걸 자기 것이라 고 우겨대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너무하지 않소?" 노잔양은 너무 화가 나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 너…… 네놈이……" 청의중년인은 다시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뇌주를 한 움큼 꺼내 들었다. "보시오. 이게 내가 만든 열두 개의 뇌주들이오. 당신이 들고 있는 것까지 합치면 꼭 열세 개가 되지 않소?" 그것을 보자 고복양과 노잔양의 얼굴이 홱 변했다. 고복앙은 무언가를 느긴 듯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이놈! 이제 보니 네놈이 절영곡에 숨겨 둔 열두 개의 뇌화신주를 모 두 꺼냈구나!" 청의중년인은 돌연 히죽 웃었다. "혜혜…… 사실을 말하면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이 근처 길에 떨 어져 있던 걸 주운 거요. 제법 가지고 놀기 좋게 생겼기에 내가 아끼 고 있소이다." 고복양과 노잔양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군웅들은 그제서야 청의 중년인이 회서방에서 설치한 뇌화신주를 모두 제거해 버렸음을 알고 안색이 활짝 펴졌다. 반면 고복양과 노잔양 등 회서방의 고수들은 찢어 죽이고 싶도록 청 의중년인이 얄미웠다. 청의중년인은 수중에 들고 있는 열두 개의 뇌주, 아니 뇌화신주를 다 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어쨌든 이건 내가 잘 보관하고 있다가 심심하면 하나씩 꺼내 사용할 테니 두 분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누군지 몰라도 이 귀중한 걸 길 바닥에 함부로 뿌려 놓다니…… 정신이 나간 사람이군." 노잔양은 그야말로 귀에서 연기가 나을 정도로 노했다. "어헝!" 그는 더 이상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갈을 터뜨리며 청의중 년인을 향해 덮쳐 들었다. 꽈릉! 그의 독특한 열화장공이 후끈한 열기를 뿜어 내며 청의중 년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나 청의중년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슬쩍 몸을 비틀어 아주 가 볍게 장력을 퍼했다. 노잔양은 더욱 노해 청의중년인을 향해 마구 장력을 갈겨댔다. 와르릉! 와아앙! 주위 사방이 온통 노잔양이 뿜어 내는 열화장력에 휘감겨 버렸다. 그 위력이 어찌나 놀라웠던지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던 군웅들은 미처 그 위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엄이 뒤로 물러나 버렸다. 하나 청의중년인은 유연한 신법으로 노잔양의 열화장공 사이를 움직 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고복양은 내심 움찔 놀랐다. '저놈이 누구기에 저토록 무공이 고강하단 말인가? 안 되겠다. 아무 래도 노잔양 혼자로는 역부족인 것 같구나!' 막 수하들에게 협공하라고 지시를 하려던 고복양은 무엇을 보았는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반격을 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던 청의 중년인이 느릿느릿 어깨 부근으로 손을 가져 가는 것이다. 청의중년인의 어깨에는 고색 창연한 보도의 손잡이 부분이 삐 쭉 올라와 있었다. '저, 저것은……?' 그 보도는 고복양에게는 너무도 눈에 익은 것이었다. 고복양은 그제서야 청의중년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실색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열 손가락을 모두 잘라 버린 원한 맺힌 그 칼을…… 그 순간 청의중년인은 번개같이 칼을 뽑아 들고 노잔양을 향해 휘둘 렀다. 파앗! 날카로운 도광이 열화장공을 뚫고 하늘로 치솟아올랐다. "크아악!"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계곡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느새 노잔양은 허리가 베어진 채 피를 뿜으며 쓰러져 있는 것이 아 닌가! 구경하고 있던 군웅들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에 입을 딱 벌린 채 멍하 니 청의중년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상에 열화진군 노잔양을 단 일 도에 쓰러뜨릴 수 있는 고수가 있을 줄이야…… 고복양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너…… 네놈은 무영신룡단혼도구나!" 그 외침에 군웅들이 다시 한 번 경악하는 순간, "하핫…… 고복양!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너무 둔하구나!" 청의중년인이 낭랑한 대소를 터뜨리며 벼락같이 고복양을 향해 덮쳐 왔다. 고복양은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난 채 악을 쓰듯 소리쳤다. "모두 덤벼랏!" 그의 뒤에 늘어서 있던 이십여 명의 회서방 고수들이 벌메와 같이 강 옥봉을 향해 덮쳐 들었다. 강옥봉은 비록 수십 명의 협공 아래 놓여 있었으나 여전히 여유있게 천룡보도를 휘둘러 댔다. 팟! 팟! 천룡보도가 무시무시한 도광을 흩뿌릴 때마다 시뻘건 혈화가 피어올잤다. "크악!"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눈 깜박할 사이에 세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고복양은 이 광경을 보자 두렴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해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자신도 쌍장을 휘두르며 가세했다. "이놈! 죽어라!" 하나 강옥봉은 이미 강호무림의 최고고수의 대열에 올라 있는 고수 중의 고수인지라 고복양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는 뎃발치는 듯한 기세로 천룡보도를 휘둘렀다. 파파파파팟! "크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또다시 몇 명이 쓰러졌다. 채 반각도 흐르지 않아 고복양을 제외한 모든 고수들이 쓰러져 버렸 다. 고복양은 경악과 공포가 서린 눈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저게 대체 무슨 도법이기에 저렇게 무시무시하냐?' 하나 그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옥봉의 천룡보도가 가공할 기 세로 덮쳐 들었다. 고복양은 안색이 사색이 된 채 사력을 다해 몸을 피하려 했다. 하나 어느새 그는 가슴 부위가 후끈거리는 통증을 느끼고 두 눈을 부 릅떴다. "윽!" 그의 가슴은 어느새 쩌억 잘라져 시뻘건 선혈을 뿜어 내고 있었다. 강옥봉은 천룡보도를 거둔 채 냉엄한 눈으로 고복양을 응시하고 있었 다. 고복양은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 "너…… 저, 정말 무섭구나…… 그 전에는 이렇게까지 강하지 않았었 는데……" 강옥봉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부총호법은 어디에 있소?" 고복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네, 네놈은 한 발 늦었다. 그분은 이미 유령동부 안으로 들어가신 지 오래다…… 곧…… 유령동부의 물건은 본 방의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안광이 급격히 흐려졌다. 동시에, 쿵! 그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실로 일세 의 흉마답지 않은 비참한 죽음이었다. 강옥봉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 다. "당신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거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돌연 고개를 쳐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군웅들은 경악과 불신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옥봉은 신광이 번짹거리는 눈으로 그들을 쓸어보았다. 사람들은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무형의 기세에 압도되어 숨조차 멈춘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강옥봉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직접 보신 대로 이곳은 이미 용담호혈이 되어 버렸소. 이번에 회서방의 흥계는 본인이 우연히 알게 되어 막을 수 있었지만 일단 동부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누구도 살아서 나온다고 장담할 수 없소. 그러니 여러분들은 쓸데없는 생각은 포기하고 어서 이대로 돌아가시오."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아주 멀리에 있는 군웅들까지 똑똑 히 들을 수 있었다. 군웅들 중 대부분은 그의 말에 마음이 동한 듯 망설이는 표정을 떠올 렸다. 그때 여의태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이번 도움에 정말 감사해 마지않는 바이오. 하지만 우리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유령동부의 보물들은 모두 회서방의 수중에 들어 갈 게 아니겠소?" 강옥봉은 그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보물은 원래 하늘로부터 정해진 인연이 있는 자에게만 돌아가는 것 인데 어찌 회서방 같은 흥악한 무리들에게 넘어가겠소? 그러니 여 대 협께서는 아무런 걱정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여의태는 하나밖에 없는 눈을 번쩍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어떤 안배가 있단 말이오?" 강옥봉은 입가에 기이한 이소를 머긍은 채 엉뚱한 말을 했다. "유령동부의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보가 필요한데 회서방 과 성심장 모두 그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보물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여의태는 그의 말에 깊은 뜻이 있음을 직감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 다. 강옥봉은 곽희연과 운봉랑을 돌아보며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 소저는 군웅들을 이끌고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어쩌면 절영곡 은 오늘로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떠나도록 하십시오." 곽희연은 조금 머뭇거렸다. "하지만 만일 군웅들 중 일부가 떠나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지요?" 강옥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 화를 자초하겠다면 굳이 막을 필요는 없소. 두 분 소저는 떠 나겠다는 군웅들만 데리고 가시면 됩니다. 특히 곽 소저께서는 영존 을 잘 설득하십시오." 곽일진, 여의태, 냉모모 등 세 사람은 강옥봉이 한 말에 대해서 서로 상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곽일진은 곽희연이 강옥봉과 아주 친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자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중년서생이 무영신룡단혼도란 말인가? 한데 연아가 언제부터 저 자를 알고 있었기에 저렇듯 다정하게 대해 주지……?' 이때 마침 곽희연이 그에게 총총히 달려왔다. "아버님, 이곳에 계시면 더 이상 위험을 면치 못하니 우리 떠나도록 해요." 곽일진도 마침 여의태 등과 그런 결정을 내고 있었으므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다가 의미있는 눈으로 곽희연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했다. 한데 연아야, 너는 언제부터 대명이 자자 한 무영신룡단혼도를 알게 되었느냐?" 곽희연은 갑자기 얼굴을 홍당무처럼 빨갛게 붉히면서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도망치듯 달려가 버렸다. 곽일진은 딸의 그런 모습에 불안한 눈빛을 띠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 이유는 소중히 키운 딸을 내력조차 자세히 모르는 중년서생에게 주기에는 무척 아까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강옥봉은 운봉랑과 곽희연에게 두서너 마디의 말을 더 하고는 급히 몸을 날려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두 소녀는 안타까움과 걱정 어린 눈빛으로 =1의 됫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곽희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공자님! 아무쪼록 몸조심하세요." 강옥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두 분은 어서 떠나시오." 이어 그의 모습은 무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두 소녀는 아쉬움과 허탈한 마음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연매, 그분 말씀대로 어서 가자." 운봉랑의 말에 곽희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때 문득 그녀들은 한달기 조옥환이 몇 명의 군웅들과 함께 강옥봉 이 사라진 무덤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조 낭자!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조옥환은 막 무덤 속으로 들어가려다 그녀들을 돌아보고 방긋 웃어 보였다. "소녀는 반드시 유령동부의 보물을 얻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 요. 그러니 두 분 언니는 저를 앙해해 주세요." 그녀의 웃는 모습은 왠지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운봉랑과 곽희연이 뭐랄 사이도 없이 조옥환은 급히 몸을 돌려 무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운봉랑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단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녀에게는 말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구나." 그녀들은 쓸쓸히 몸을 돌리고는 나머지 군웅들과 함께 절영곡을 떠났 다. 백여 명이 넘는 군웅들 중 강옥봉의 말을 거역하고 무덤 속으로 들어 간 인물은 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오늘 강옥봉이 군웅들에게 보 여준 신위와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인상은 뚜렷한 것이었다. 곧 절영곡에는 십여 구의 시신들만 즐비할 뿐, 더 이상 사람들의 모 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유령동부 안. 칠흑 같은 통로 속을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이 입고 있는 백의가 가끔씩 주위의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을 뿐 이었다. 백의여인은 바로 한달기 조옥환이었다. 조옥환은 강옥봉보다 조금 늦 게 무덤 속으로 들어왔을 뿐인데도 어찌 된 일인지 강옥봉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무덤 내에는 여러 개의 통로가 무질서하게 뚫려 있어 어 느것이 제대로 된 통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무 덤 속으로 들어온 십여 명의 무림인들도 어느새 제각기 뿔뿔이 흩어 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 동안 몇 차례의 위험한 고비를 넘긴 듯 백의 자락 여기저 기가 찢겨져 있었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 다. 그때 문득 그녀는 멀지 않은 통로 저편에서 밝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음을 알고 눈을 반짝이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이 하나의 석실임을 안 그녀는 보검을 뽑아 가슴을 보호한 다음 다짜고짜 들어가 실내를 살펴보았다. 네 군데 벽에 야명주가 박혀 광채를 발산하고 있을 뿐 석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한쪽 문을 열고 옆 석실로 들어갔다. 역시 마찬가지 였다. 연거푸 칠팔 칸의 석실을 통과한 그녀는 내심 의아했다. '이 동부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무림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게 아닐까?' 그때였다. "흐흐흐……" 뒤에서 돌연 음침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마치 얼음굴 속에서 뻗쳐 나오는 냉풍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조옥환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끼고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회의를 입고 눈빛이 홍백으로 번뜩이는 청년이 만면에 기이한 웃음을 띠고 서 있었다. 회의청년의 기이한 눈빛을 보자 그녀는 내심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 눈빛에서 한 줄기 음탕함을 알아차린 것이다. 회의청년은 그녀의 전신을 쓰윽 훌다가 말했다. "낭자는 혹시 무림에서 사대미인 중의 하나로 꼽히는 한달기 조옥환 이 아니오?" 그녀는 회의청년의 안광이 날카로운 것으로 보아 상대가 예사 고수가 아님을 알았으나 태연한 태도로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제가 바로 조옥환이에요. 한데 공자는 누구시죠?" 회의청년은 그녀의 요염한웃음과 꽃 같은 얼굴에 심신이 흔들 리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본인은 음양공자 음적양이라고 하오. 조 낭자는 혹시 본 공자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시오?" 조옥환은 상대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사대공자 중의 하나임을 알자 내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입 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 이제 보니 바로 그 유명한 음 공자이셨군요. 듣자 하니 공자의 무공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다다라서 적수가 없다고 하던데, 공자 께서도 유령천자의 무공을 노리고 이곳에 오실 줄은 몰랐군요." 그녀의 말은 비록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 담긴 뜻은 날카로운 것이었 다. 음적양도 그것을 알고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보물은 원래 인연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기에 본 공자도 인연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오. 한데 이곳에서 뜻하지 않 게 조 낭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인연이 아니고 무엇 이겠소?" 조옥환은 상대의 말에 내심 움찔했다. "공자의 말씀은 무슨 뜻이죠?" 그녀의 음성은 어느새 냉랭해졌다. 하나 음적양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음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이곳은 아주 호젓하고 아무도 없 으니 나는 우리의 인연을 확실히 맺어 볼까 하오." 조옥환은 은근히 살의가 떠올랐으나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지 었다. "나는 남녀간의 야합을 죽도록 싫어하는 성미예요. 당신이 진 심으로 나를 좋아한다면 당당히 중매쟁이를 놓아 청혼을 하세요." 음적양은 얼굴에 음흥한 웃음을 떠올렸다. "물론 그럴 것이모. 하나 지금은 일단 낭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겠소." 이어 오른손을 번개처럼 돌려 움켜잡아 왔다. 조옥환은 낯빛이 달라지며 보검을 휘둘러 그의 가슴팍 부근에 있는 아홉 군데의 주요 혈도를 엄습해 왔다. 쐐애액! 검광이 번뜩이는 가운데 매서운 검기가 휘몰아쳤다. 음적양은 그것을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낭자의 솜씨가 너무 악랄하구려." 입으로는 말을 지껄이면서도 그는 어느새 우장을 가볍게 내밀었다. 우우웅! 나직한 굉음과 함께 장력이 뿜어져 나왔다. 음적잉은 그녀를 상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가공할 음양 수의 무공은 펼치지 않았다. 하나 그의 간단한 장영 속에는 천변만화 가 내포되어 있어 장강대하와도 같은 기세가 몰려나와 그녀를 연거푸 퇴각시켰다. 조옥환도 사납게 고함을 치면서 검을 휘둘러 맞서 갔다. 파파팍! 그녀의 산화검법은 얼른 보기엔 아무 질서도 없는 듯했으나 실은 독랄 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음적양은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 수세만 취해 그녀의 검세를 착착 막아냈다. 그녀는 자신이 연거푸 절초를 펼쳤는데도 음적양의 옷깃 하나 건드리 지 못하자 절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음적양은 번개같이 그녀의 겅세 속으로 뛰어들며 식지를 튕겨 그녀의 좌측 유 방을 찔러 왔다. 팟! "악!" 조옥환은 유방의 감각이 마비됨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면서 보검을 떨 어뜨리고 쓰러져 버렸다. 음적양은 두 눈을 기이하게 번뜩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어 서슴없이 그녀의 윗옷을 벗기는 것이 아닌가? 조옥환은 흔비백산하여 정신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이 음적놈아! 네놈이 사대공자 중에 하나라고 자처하면서도 이런 짓을 하다니…… 천벌이 두렵지 않느냐?" 하지만 음적양은 여전히 야수와 같은 괴소를 입가에 흘렸다. "나 역시 이런 식으로 낭자의 정조를 무너뜨리기가 좀 안되었지만 낭 자가 한번 나에게 정조를 바친 다음 나와 함께 마음에 맞는 곳에 가 서 영원히 지내면 얼마나 좋은 일이오?" 이어 빠른 솜씨로 그녀의 상의를 완전히 벗겨 버렸다. 그러자 백설같이 새하얀 피부와 소담스러우면서도 탐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유방이 송두리째 드러났다. 그녀의 몸은 가히 사대미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황홀한 것이었 다. 음적양은 이것을 보자 더욱 욕정을 걷잡지 못하고 성급하게 치마를 벗겨 냈다. 곧 속옷이 드러나자 그는 그것마저 찢어 버리려고 손을 내뻗었다. "아아……!" 조옥환은 거의 까무러칠 듯 절규를 터뜨리면서 몸부림쳤다.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샘솟고 있었다. 그녀는 차라리 자결 을 해버리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한데 음적양이 막 그녀의 속옷을 찢으려는 순간, "도저히 더 이상은 눈뜨고 못 보겠군. 천하의 음적양이 겨우 이런 작 자였을 줄이야……" 갑자기 어디선가 냉랭한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음적양은 전신이 싸늘해짐을 느끼며 벼락같이 몸을 돌렸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청의중년인 하나가 석실의 입구에 서서 냉랭한 눈 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비록 욕정에 눈이 어두웠다고는 하나 상대가 이토록 가까이 올때까지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예사 놈이 아니다!' 음적양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방해꾼을 노려 보았다. 한편 조옥환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무영신룡단혼 도임을 알고 한편으로는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 로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와 미칠 것만 같았다. 음적양은 어느새 냉정을 되찾고 입가에 음산한 웃음을 떠올렸다. "흐흐…… 감히 본 공자의 좋은 일을 방해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이군 네놈은 누구냐?" 청의중년인, 강옥봉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너 같은 음적만을 전문적으로 해치우는 단음객이시다." 음적앙은 상대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알고 눈빛이 냉혹해졌다. "흐흐…… 네놈이 감히 본 공자를 놀려……?" 꽈릉! 강맹한 위력을 띤 장공이 강옥봉의 전신을 짓누를 듯한 기세로 몰아 쳐왔다. 강옥봉은 냉랭한 코웃음을 터뜨리며 슬쩍 소매를 흔들었다. 순간, 꽝!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이 터지면서 음적양은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 났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 어린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네놈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음적양의 눈빛이 어느새 흥백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그의 양손은 각기 붉고 하얀색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강옥봉은 상대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경각심을 돋우었다. 음적양은 악독한 눈으로 강옥봉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네놈은 곧 본 공자를 건드린 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뼈 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그는 번개같이 양손을 휘둘렀다. 와르르룽…… 그러자 그의 양손에서 각기 붉고 횐 기류가 물밀듯이 뿜어져 나왔다. "음양수?" 강옥봉은 깜짝 놀라 다급한 경호상을 터뜨리며 마주 쌍장을 휘둘렀다. 와르릉…… 황! 석실 전체가 금시라도 무너질 듯 마구 뒤흔들렸다. 그와 함께 무지막지한 강기의 소용돌이가 질풍 노도처럼 주위를 횝쓸 고 지나갔다. 그 여파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조옥환의 몸도 강 기에 휘말려 벽 쪽으로 날아갔다. 쿵! 벽에 사정없이 부딪히자 그녀는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며 급히 앞을 바라보았다. 강옥봉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고 있었 다. 하나 음적양 또한 세 걸음이나 격퇴당해 있는 것이 아닌가? 음적양은 자신의 음양수로도 상대를 물리칠 수 없자 경악과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강옥봉을 노려보았다. "네…… 네놈이 어떻게 내 음양수를 견뎌 내느냐?" 그의 질문은 몹시 어리석게 들렸다. 하나 강옥봉 또한 그 점을 궁금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원래 음양수는 천하제일이라 할 만한 극양공과 극음공이 합쳐진 것으 로서,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인물이라도 음양수에서 발출되는 열기와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게 되어 있었다. 즉, 상대의 무공이 더 높다 하더라도 음양수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 이한 힘을 견뎌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데 강옥봉은 정면으로 음적양의 음양수와 격돌하고도 아무런 부상 도 입지 알고 멀정하지 않은가! 강옥봉도 조금 전에 자신이 약간의 열기와 한기를 느꼈을 뿐 별다른 기이한 점을 느끼지 못하자 의아해졌다 '음양수의 위력이 고작 이 정도인가?' 그는 내심 어리등절했으나 또한 불 같은 호기가 일어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등뒤의 천룡보도를 뽑아 들었다. "하하하…… 음양수의 맛은 잘 보았다. 이제 내 칼 맛 좀 보아라!" 이어 그는 멍하니 서 있는 음적양에게로 달려들며 천룽보도를 기이하 게 그어댔다. 파팟! 섬뜩한 도광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음적양은 천하무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자신의 음양수가 상대에게만은 별다른 위력을 나타내지 못하자 짙은 의혹과 함께 기가 꺾여 싸울 마음이 나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의 도법이 자신으로서는 처음 본다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것을 보고는 급히 일장을 날려 상대의 공격을 저지시킨 후 급히 석실 밖으로 달아났다. "어딜 도망가느냐?" 강옥봉은 버럭 노성을 지르며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음적양의 경 공은 확실히 뛰어나 금세 석실의 한 모퉁이로 사라져 버렸다. 뒤쫓던 강옥봉은 멈칫 몸을 세우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땅을 내려다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어라 중얼거 리더니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석실로 돌아오자 상체를 송두리째 드러낸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조 옥환의 고혹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옥환은 강옥봉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흥시처럼 새빨개졌다. 다 큰 처녀가 외간남자에게 가슴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누워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을쏜가? 강옥봉은 급히 몸을 돌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낭자는 어서 옷을 입으시오." 조옥환은 얼굴이 더욱 달아올라 몸둘 바를 몰라했다. "저…… 저는 혈도를 찔려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강옥봉은 그녀의 말을 듣자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멋쩍게 물었다. "어느 부분의 혈도를 찔렸소?" 조옥환은 그야말로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강옥봉은 더욱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어디란 말이오?" 조옥환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좌측 유, 유방……" 끝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강옥봉은 일시지간 난감해졌다. 또한 조옥환의 딱한 처지에 내심 동정심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의 젖가슴을 만질 수 있 겠는가? 그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자 조옥환은 개미 소리만한 음성으로 물었 다. "절 구해 줄 생각이 없나요?" 강옥봉은 할 수 없다는 듯 나직이 탄식을 토해 냈다. "오늘의 사건은 낭자의 명예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낭자는 누구에 게도 이 사실을 얘기하지 마시오. 괜히 나까지 남에게 애매한 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이오." 조옥환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대협이 저의 명예를 위하여 하시는 말씀인데 제가 어찌 외인에게 이 런 말을 하겠어요?" 강옥봉은 그제야 획 돌아서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는 탐스러운 젖가슴을 송두리째 드러낸 채 그가 하는 대로 맡기 겠다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온몸이 화끈 달아올라 바르 르 떨고 있었다. 강옥봉은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으나 막상 그녀의 우윷빛 살결과 젖 가슴을 보자 가슴이 크게 울렁거렸다. 살짝 만지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유방과 탄력있는 피부는 사나이의 욕정을 불러일으켜 당장 열기 의 도가니 속으로 끌려들 것 같았다. 더구나 그녀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공인된 네 명의 미녀 중 하 나가 아닌가! 강옥봉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뛰는 가슴을 억제해야 했고, 터질 것 같은 혈맥으로 인해 하체가 확확 열기를 뿜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후 그녀의 젖가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그녀의 풍만한 계곡 사이에 엷은 흥색을 띤 지흔이 찍혀 있었다. 강옥봉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악독한 놈이로군. 여인에게 이런 독수를 쓰다니……" 강옥봉는 단번에 그 지흔이 음적양의 삼양신지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전의 야릇했던 감정 과 욕정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강옥봉은 두 눈을 살며시 감고 손에 태극혼원신공의 진기를 모아 조옥환의 젖가슴을 꾹 누르고 있었다. 그는 모든 잡념을 억제했으나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에 짜릿한 맛이 전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 그는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계속 누르고 있었다. 조옥환은 처음에는 미치도록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으나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사지가 나른하게 풀려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촛불 하나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강옥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떼었다. 다시 그녀의 살결에 눈이 돌려지자 당장 점유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으나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 "낭자, 이제 낭자의 혈도는 풀렸으니 아무 이상이 없을 거요." 진기가 유통되고 행동이 자유로워진 그녀는 몹시 부끄러운 마음으로 급히 옷을 주워 입고 강옥봉 앞으로 돌아가서 넙죽 절을 했다. "소녀는 대협의 은덕에 죽는 날까지 보답하겠어요." 강옥봉은 바삐 그녀를 붙잡아 일으켰다. "남의 위급을 구해 주는 것은 우리 무립인의 의무인데 그게 무슨 말 씀이오? 한데 낭자께서는 내가 누구인지 아시오?" 그녀는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호호…… 무덤 앞에서 대협을 뵈었어요. 대협께선 바로 요즘 대명을 떨치시는 무영신룡단혼도가 아닌가요?"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낭자께서도 무덤 앞에 계셨다니 그때 내가 한 말도 들었겠구려. 그 런데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이곳에 들어오셨소?" 그의 준엄한 추궁에 조옥환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는 금시라도 눈물 방울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 다. 그러다가 그녀는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협께 솔직히 말씀드리겠어요. 소녀는 피맺힌 원한에 몸부림치고 있어요. 그래서 유령동부에 숨겨져 있는 무공비급을 기필코 수중에 넣어 원수를 갚아야 해요." "낭자의 원수는 누구요?" 조옥환의 눈에서 원한으로 가득 찬 안광이 흘러나왔다. "그는 마화도인이에요." 강옥봉은 흠칫 놀랐다. "마화도인이라면 칠대흉인 중에서도 서열이 셋째에 속하는 인물이 아 니오?" "그래요. 그자는 바로 소녀의 선부를 살해한 철천지원수예요." 그녀의 아름다운 볼에서는 어느새 가느다란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옥봉은 내심 그녀의 처지에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 하나 마화도인 은 강호무림에서 누구나가 두려워해 마지않는 일세의 거마로서 지금의 그녀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 다. 강옥봉은 잠시 멈칫하다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선부의 원수를 갚겠다는 낭자의 효성은 참으로 가상하오. 그러나 너 무 조급히 서둘거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서는 안 되오. 더 구나 이미 회서방과 성심장의 고수들이 이곳에 들어와 있으니 유령동 부의 비급을 얻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요." 강옥봉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설사 낭자께서 유령동부의 비급을 얻 는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마화도인을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는 거요." 그는 조옥환이 실망에 젖은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자 다시 입을 떼었 다. "낭자는 너무 낙담하지 마시오. 유령천자의 무공비급이 비록 현오 하다 해도 무림에는 그보다 뛰어난 절학이 얼마든지 있으니 낭자 가 인연이 닿는다면 복수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요." 조옥환은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처연히 웃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각오로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반 드시 성공할 거예요." "하늘의 가호가 낭자에게 내려지길 빌겠소." 조옥환은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돌연 고개를 번쩍 들어 강옥봉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그런데…… 강호에 알려진 바로는 무영신룡단혼도는 아직 나이가 많 지 않은 소년영웅이라고 하던데, 대협께서는 혹시……?" 강옥봉은 그녀가 묻는 뜻을 알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하…… 본인은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역용을 했소이다." "아! 그랬군요." 갑자기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조그만 소리로 소곤거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협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강옥봉은 일시지간 난처해 하며 머뭇거렸다. "그건……" 조옥환은 원망스런 눈초리로 강옥봉을 주시했다. "대협께서는 이미 소녀의 몸까지 보시고도 저를 외인 대하듯 하십니까?" 강옥봉은 어리등절해 있다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낭자? 나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조옥환이 돌연 고개를 돌리며 나직하게 흐느꼈다. 그 울음 소리는 마 치 여우나 원숭이가 적막한 산중에서 우는 것같이 매우 처량하게 들 렸다. 강옥봉은 총명 절세한 인물이었으나 이런 상황에 처하고 보니 당황해 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낭자……" 조옥환은 흐느끼면서 원망에 가득 찬 음성으로 말했다. "강호의 여인은 여인이 아닌 줄 아십니까? 제게도 지켜야 할 정조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협께서 이미 제 몸을 보셨으니 저를 소유하신 것 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게 얼굴조차 보여 주려 하시지 않으 니 이건 저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닙니까?" 강옥봉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어찌 낭자를 무시하겠소? 하지만 낭자도 알다시피 조금 전의 상황은 부득이한 일이지 않았소? 그러니 낭자께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옥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정 그렇다면 소녀는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키겠어요!" 그녀는 돌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보검을 집어 들고 스스로 가슴을 찌 르려 했다. "엇?" 강옥봉이 즉시 그녀의 손을 뿌리치자 단검이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강옥봉은 나직하게 탄식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이어 그는 얼굴을 손으로 슬쩍 문질러 본 얼굴을 드러냈다. 순간, "아……" 눈물로 얼룩졌던 조옥환의 눈이 크게 뜨여지며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실로 절세적이라 할 수 있는 강옥봉의 용모가 아닌가! 쭉 뻗어 올라간 짙은 검미와 별빛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이지적인 눈동자…… 태산준령 같은 장쾌한 콧날과 사나이의 굳은 의지를 나타낸 듯 두툼한 입술…… 그야말로 여인의 방심을 뒤흔들기에 족한, 영준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조옥환은 한동안 정신없이 강옥봉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강옥봉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불쑥 물었다. "이제 만족하시겠소?" 조옥환은 돌연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생각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 다. "아이…… 모, 몰라요!" 그녀는 교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하하……!" 강옥봉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그녀의 마음에는 어느새 달콤한 감정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아악!"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는 그 들이 있는 석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 온 것이었다. 잠시 기이한 감정에 빠져 있던 두 남녀는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마 주보았다. 강옥봉은 잽싸게 다시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그녀에게 말했다. "어서 가봅시다." 이어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조옥환은 아쉬운 눈초리로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도 몸을 날려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강옥봉은 한곳에 우뚝 서서 무거운 시선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정신없이 그의 뒤를 따라왔던 조옥환은 급히 시선을 내려 장내를 바 라보고는 짤막한 비명을 토해 냈다. "앗?" 바닥에는 다섯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는데, 그 죽은 모습이 하나같 이 참혹하여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조윽환은 그들을 살펴보더니 더욱 놀랐다. "이자들은 저와 함께 동부에 들어왔던 고수들인데……" 그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크아악!" 또다시 구슬픈 비명 소리가 동굴을 뒤흔들었다. "저쪽이군!" 강옥봉은 나직이 외치며 몸을 날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쏘아 갔다. 그의 신법은 전광석화와도 같아 비명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비명 소리가 들린 곳에 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방금 죽은 듯한 노인 두 명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아니? 이들은 상산쌍로예요." 조옥환이 깜짝 놀라 외쳤다. "이들도 낭자와 함께 들어온 인물이오?" 강옥봉의 물음에 조옥환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옥봉은 두 눈을 무섭게 번뜩였다 "필시 회서방이나 성심장의 고수들이 무덤 안에 들어온 군응들을 주 살하고 있는 것이오. 이럴 것을 염려해서 아무도 들어오지 말 라고 했거늘……" 그 말이 마치 자신에게 들으라고 한 것 같아 조옥환은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강옥봉은 그녀의 내심을 알아차리교 씁쓸하게 웃었다. "낭자보고 한 소리는 아니오. 하지만 일이 다급하게 됐으니 낭자는 내 뒤에서 두 걸을 이상 떨어지지 마시오." 조옥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그들이 어두운 통로 속을 반 마장 가량 전진했을 때였다. 강옥봉은 앞에서 아주 낮은 숨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차가운 검빛이 그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웬 놈이냐?" 강옥봉은 버럭 노성을 지르며 번개괌이 쌍장을 앞으로 내뻗었다. 꽈르릉! 장력과 검광이 허공에서 격돌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꽝! "크으윽!" 암습했던 인물은 자신의 검광이 눈 녹듯 사라지며 동시에 가슴팍이 뻐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강옥봉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유성처럼 그자에게 달려들어 맥문 을 움켜잡았다. 그자는 설마 강옥봉의 무공이 이토록 고강하리 라고는 미처 상상치도 못했던 듯 꼼짝못하고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는 전신에 흑의를 걸치고 눈이 쭉 찢어진 삼십대의 중년인이었다. 강옥봉은 한눈에 그자의 복장이 회서방의 독특한 복장임을 알아보았 다. "회서방의 인물이냐?" 흑의중년인은 움찔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네놈은 누구냐?" 강옥봉은 냉랭하게 웃었다. "흥! 내가 물어 볼 걸 먼저 묻는군. 너는 회서방에서의 지위가 무엇 이냐?" 흑의중년인은 움찔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의중년인은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였다. "내게서 무엇을 알아 낼 생각은 하지 마라. 사실 나는 본 방에서 그 리 변변치 않은 인물이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옥봉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즉시 그 의 몇 군데 혈도를 찔렀다.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다." 이때, 흑의중년인은 갑자기 온몸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옥봉은 잠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 다. "이제 슬슬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 흑의중년인은 조금 전에 혈도를 짹힌 순간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느 꼈다. 그는 고통을 참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이마에서는 녹두알만 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말…… 말하겠다. 그러니 내 혈도를 좀……" 강옥봉은 여유있는 미소를 흠뻑 머금었다. "때가 되면 풀어 줄 테니 우선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해라.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나, 나는 팔십사호 전서인 독룡검 위천량이다." "흠……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무덤 안에 들어온 군웅들을 살해한 것은 모두 너희들 짓이냐?" 위천량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본 방의 전서급 인물 열두 명이 암도 속에 숨어 있다가…… 군웅들을 보는 즉시 살해하기로 되어 있다." "그 명령은 누가 내린 것이냐?" "부, 부총호법께서……" "부총호법이라면 음양공자 음적양 말이지?" "그, 그렇다…… 제발 이 혈도를 좀……" 위천량은 애원하는 표정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기에도 끔찍스럽게 일그러뜨리고 손과 발을 벌벌 떨면서 어 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이, 마치 고양이 앞의 쥐와 흡사했 다. 강옥봉은 그의 혈도를 두 군데 더 찍으며 호통을 치듯 무게있게 압력 을 가했다. "오늘 이 무덤에 들어온 회서방의 고수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되느냐7" 위천량은 고통이 어느 정도 가심을 느꼈으나 아직도 몸이 근질근질해 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는 감히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대답했다. "부총호법님과 세 분의 온서, 그리고 스물두 명의 전서급 인물들이 오." 강옥봉은 회서방의 고수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내심 흠 칫 놀랐다. "세 명의 온서란 누구누구를 말하느냐?" "온이호님과 온구호님, 그리고 온십일호님이오." 강옥봉은 깜짝 놀랐다. "이호 온서도 왔다고?" "그렇소. 그분이 오늘 일의 책임자이시오." 회서방의 일호부터 삼호까지의 온서는 모두 특이한 직분의 인물들이 었다. 그들은 비단 같은 온서급 인물들보다 권한이 막강할 뿐 아리라 그들 을 호령할 수도 있었다. "이호 온서는 누구냐?" 위천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강옥봉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자 황 급히 입을 열었다. "혈영추혼 양만균이오." 강옥봉과 조옥환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혈영추혼 양만균은 칠대흥인 중의 하나로, 장력과 경공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서운 고수였던 것이다. 강옥봉은 몇 가지를 더 물은 후 더 이상 위천량에게서 알아 낼 것이 없다고 생각되자 그의 흔혈을 짚어 잠을 재운 후 조옥환과 함 께 앞으로 달려나갔다. 얼마쯤 가자 통로가 막히며 그들의 앞에 석벽 하나가 나타났다. 강옥봉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석벽을 더듬더니 조옥환을 돌아보며 말 했다. "조 낭자, 석벽을 열 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니 조심하시오." 조옥환은 공력을 잔뜩 끌어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강옥봉은 벽을 조심스래 살피다가 어느 한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끼! 끼-- 이익! 돌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며 돌연 동굴 벽이 옆으로 물러났다. 순간, 콰콰콰콰콰…… 갑자기 열려진 동굴 벽에서 엄청난 한기를 동반한 강풍이 물아 닥치 는 것이 아닌가? "악!" 조옥환은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었으나 강풍의 위력이 너무도 막강하 여 뒤로 주르르 밀려나 버렸다 게다가 강풍 속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독한 한기가 담겨 있어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으……!" 그녀는 순식간에 몸이 얼어불어 이를 닥닥마주치며 제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바로 그때 강옥봉이 그녀의 옆으로 날아오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강풍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그의 품안에 안기자 그토록 매서웠던 한기가 껏은듯이 사라지 는 것을 느끼고 부끄러움 이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 이분은 어째서 이 지독한 바람 속에서도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그때 그녀의 귓전으로 강옥봉의 믿음직스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낭자, 이것은 지하의 깊은 곳에서 뿜어 나오는 광한쇄골풍이라는 것 이오.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으니 불편하더라도 잠시만 내 품 에 안겨 계시오." 조옥환은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하나 동시에 흐뭇한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품에 바싹 안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강옥봉의 오른쪽 손목에 하나의 기이한 모양의 금팔찌 가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굵기가 어른의 손가락 세 개를 합친 것만했는데 전신에는 여 러가지 동물 모양의 조각들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데 바람이 세차게 불고 한기가 거세질수록 그 금환에서 기이한 열 기가 뿜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기라도 하듯 때맞춰 강옥봉의 음성이 들 려왔다. "니는 광한쇄골풍을 막아 주는 천양금환이란 기보를 가지고 있기 때 문에 광한쇄골풍의 영향을 받지 않소. 이제 동부 속으로들어갈 테니 낭자는 내게서 떨어지지 말고 꼭 붙어 있으시오." 조옥환은 그 음성을 듣자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의 굵은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짙은 남성의 체취가 물씬 풍겨 왔다. 하나 그녀는 마치 어미새의 품 속을 파고드는 어린 새처럼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깊숙이 안겨 있었다. 광한쇄골풍을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듯했다. 강옥봉은 자신의 가슴팍에 그녀가 내뿜는 숨결이 탕자 간지러움을 느 꼈고, 게다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생생하게 피부에 전달되어 내심 기이한 감정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더구나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그의 가슴을 바짝 압박하고 있지 않 은가? 하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음을 굳게 먹고는 열려진 석벽 속을 향 해 몸을 움직였다. 콰콰콰콰…… 미친 듯이 불어 닥치는 광한쇄골풍도 천양금환에 의해 보호되는 두 사람에게는 조금도 해가 될 수 없었다. 과연 석벽 속에는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제22장 독각응룡 한편, 제일 먼저 동부 속으로 들어간 비호 서횡과 반미륵 고우성을 비롯한 성심장의 고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콰콰콰콰…… 광한쇄골풍은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채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듯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강풍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끔찍스러울 정도로 지독한 한기는 적어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견뎌 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나 절벽 아래로 피한 고우성 등은 능숙한 태도로 품속에서 각기 하 나의 단약과 보자기들을 꺼내 들었다. 이어 그들은 재빨리 단약을 복용한 후 보자기를 폈다. 그것은 우중충한 빛깔의 바람막이 피풍이었다. 그들은 급히 피풍을 둘러쓴 채 약효가 돌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들이 복용한 것은 조양단이라는 것으로, 복용하면 몸에서 후끈한 열기가 피어올라 웬만한 추위쯤에는 오히려 땀을 흘릴 정도로 효력이 좋은 열양약이었다. 또한 피풍은 특이한 천잠사로 짠 다음 오동나무기름에 칠 일 동안 절였기 때문에 아무리 강한 바랑이 불어와도 견딜 수 있는 것이 었다. 이것들은 모두 성심장에서 특별히 구입한 것으로, 그들은 천양금환을 입수할 수 없게 되자 그 대용으로 이것들을 준비해 놓은 것이다. 과연 조양단을 복용하고 특이한 바람막이 피풍을 하자 그토록 무서운 광한쇄골풍 속에서도 그들은 몸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한데 고우성이 막 성심장의 고수들에게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고…… 고 대협…… 노…… 노부는 더…… 더 이상은 못…… 견디겠 소." 절벽 아래에서 금시라도 꺼져 버릴 듯한 미약한 음성이 들려 오는 것 이 아닌가! 고우성이 돌아보니 비호 서횡이 몸이 꽁꽁 얼어붙은 채 절벽 아래 웅 크리고 있었다. 고우성은 한눈에 그가 광한쇄골풍의 한기 때문에 목숨이 거의 경각에 다다른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서횡을 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모래사장을 바라본 그는 결심을 굳혔다. '아무래도 저 침사를 통과하려면 이 늙은 여우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 다. ' 결정을 하자 그는 서슴지 않고 서횡에게 다가가 품속에서 조양단을 꺼내 입 속에 넣어 주었다. 이어 여벌로 갖고 왔던 바람막이 피풍을 꺼내 그에게 덮어씌워 주었 다. 잠시 후, 새파랗게 얼어붙어 있던 서횡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휴우……" 그제서야 서횡은 기다란 한숨을 토한 후 비실비실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는 크게 계면쩍은 듯 고우성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설마 이곳에 전설로만 알려진 광한쇄골풍이 있을 줄은 몰랐소. 까딱 했으면 노부는 그대로 동태가 되어 버릴 뻔했소이다." 이어 그는 바람막이 피풍을 둘러쓰고 있는 성심장의 고수들을 돌아보 았다. "이제 보니 여러분들은 이미 이런 사실을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해온 모양이구려?" 고우성은 얼굴을 굳힌 채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무 안심하지 마시오, 서 노인. 우리가 복용한 조양단과 이 피풍이 비록 신묘하다고는 해도 광한쇄골풍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소이다. 잘해야 한 시진을 견딜 수 있을 뿐이오. 그 전에 저 침사를 건너 동 부의 비급을 얻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서 노인의 말대로 이곳에서 동 태가 되어 버릴 것이오." 서횡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마침 노부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으니 여러분들은 어서 이리로 오시오." 서횡은 급히 모래사장 앞으로 다가갔다. 고우성은 귀가 번깩 뜨여 그에게 걸어오며 물었다. "그럼 이 침사를 건널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단 말이오?" 서횡은 눈을 반짝이며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 시도해 봄 직한 방법이 있소." "그게 무엇이오?" "원칙적으로 침사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건널 수 없는 것이오. 게다가 이곳의 침사는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어서 아무리 경공이 뛰어 난 고수라 할지라도 건너갈 수가 없소." 고우성은 성격이 급한 인물은 아리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참지 못하 고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럼 건널 수 없단 말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서횡은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부의 생각은 조금 다르오. 유령천자가 유령동부를 만든 것은 누군 가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무공을 얻기를 바라서였을 것이 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힘들여서 동부를 만들 필요도 없고 더구나 무공비급 따위를 남기지는 않았을 거요. 그래서 말인데, 노부는 아마 도 유령천자가 이 침사를 누구도 건널 수 없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 고 믿고 있소." 고우성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고 다시 물었다. "서 노인의 말은 침사를 건널 수 있는 비밀통로나 암도가 있을 거라는 말이오?" "바로 그렇소." 고우성은 그제야 서횡의 생각을 알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서 노인의 머리는 비상하구려. 그럼 어서 그 비밀통로를 찾아 봅시다." 고우성을 비롯한 성심장의 고수들은 모래사장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 져 보았다. 하나 머지않아 그들은 실망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모래사장이 있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이 잡듯이 뒤졌으나 통로는커녕 조그 만 구멍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고우성은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서횡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통로 같은 건 없는 모양이오." 서횡은 별로 실망하지도 않고 모래사장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해답은 한 가지뿐이오. 통로는 바로 저 모래사장 속에 있 는 것이오." 고우성은 일시지간그의 말뜻을 깨닫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 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저 모래사장은 얼른 보기엔 모두 침사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필시 그 중에 침사가 아닌 길이 나 있을 거요. 단지 침사가 그 길 위를 덮 고 있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오." 고우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럴듯한 말이오. 하지만 이 넓은 모래사장에서 그 길을 어떻게 찾 는단 말이오?"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확실한 방법이 한 가지 있소. 칼로 모래사 장을 전부 찔러 보는 것이오. 길이 있다면 분명히 뭔가가 칼에 걸릴 거요." 고우성은 그것이 어처구니없는,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 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서 노인의 말대로 가지고 있는 병기로 모래사장을 찔러 보시 오." 성심장의 고수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모래사장의 가장자리를 찌르며 옆으로 이동했다. 십여 명이나 되는 절세고수들이 제각기 병장기로 조심스럽게 텅 빈 모래사장을 찌르고 있는 광경은 일견 우습기도 했고 해괴해 보이기도 했다. 하나 어쨌든 그들은 이 침사를 건너겠다는 일념에서 힘든 줄도 모르 고 모래사장의 구석구석을 찌르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돌연 그 중 한 백의인이 기쁨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여기다!" 중인들은 반색을 하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고우성은 백의인에게서 장검을 건네 받고 그가 가리키는 곳을 조심스 럽게 쩔러 보았다. 과연 검이 침사를 약 한 치쯤 뚫고 들어가자 검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닿는 촉감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고우성은 크게 기뻐하며 급히 그 부분의 모래를 파혜쳐 보았다. 그러자 과연 바위로 이루어진 약 한 자 넓이의 길이 모습을 드러냈 다. 고우성은 새삼스러운 듯 서횡을 바라보며 입가에 활짝 미소를 떠올렸 다. "과연 서 노인은 무림의 지다성이오. 나는 새삼 서 노인의 지혜에 경탄을 보내는 바이오." 서횡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매단 채 짐짓 겸손을 부렸다. "별말씀을…… 그보다 더 늦기 전에 그 길을 따라감시다." 고우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윅길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길이라고 해봤자 그 폭은 손바닥 길이보다 조금 더 넓을 뿐이라 조금이라도 실 수했다가는 그대로 침사로 빠질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길이 곧장 일직선으로 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뱀처럼 구절 양장을 이루고 있어 한걸음 걸을 때마다 검으로 찔러서 일 일이 확인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전진하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서횡이 고우성에게 말했다. "고 대협, 돌아올 때를 생각해서 길 위에 있는 침사는 모두 걷어 버 리는 게 어떻겠소?" 고우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사를 헤쳐 길이 밖으로 드러나게 했다. 그러다 보니 일 각이 넘었는데도 그들은 겨우 오십여 장을 전진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그들이 하나같이 무공이 절정에 다다른 고수였기에 가능했지 일반고수들이었으면 아직 십여 장도 채 앞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이 다. 어쨌든 그들은 더디기는 하지만 꾸준히 침사 속에 묻혀 있는 길 을 파헤치며 앞으로 전진해 갔다. 백여 장을 더 전진해 가자 짙은 안개 사이로 반대쪽 지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앞에 있던 고우성이 뒤를 돌아보며 뚱뚱한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가득 웃었다. "여러분,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오. 앞으로 이십여 장만 더 가면 이 침 사도 끝이 나고 마오." 성심장의 고수들은 크게 기뻐하며 더욱 부지런히 침사를 파헤치며 앞 으로 전진했다. 한데 그들이 모래사장을 거의 다 건너와서 이제 약 십여 장 남짓만 남겨 놓은 곳에 다다랐을 때였다. 돌연, 크르르르릉…… 괴이한 울부짖음 소리가 주위를 쩌렁하게 울리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이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모래사장 이 끝나는 반대쪽 지면 저쪽에서 한 마리의 괴이한 괴물이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그 괴물은 크기가 무려 삼 장이 넘었고, 전신에 붉은 틸이 수북이 덮 여 있었다. 게다가 머리에는 날카로운 뿔이 하나 달려 있었고, 어른 의 주먹만한 눈에는 횃불 같은 안광이 번깩거리고 있었다. "크르르릉!" 괴물은 예리한 이빨을 드러낸 채 울부짖으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 다. 고우성은 침사를 혜치고 전진하던 걸음을 즉시 멈추고 놀라움에 가득 찬 얼굴로 외쳤다. "저놈은 독각응룡이구나!" 서횡을 비롯한 중인들은 일생 동안 강호를 떠돌아다녔지만 그런 괴물 은 전혀 구경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인지라 안색이 확 달라졌다. "책에서만 나오는 독각응룡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 줄이야……" 서횡은 떨리는 눈으로 괴물, 독각응룡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고우성이 품안에서 하나의 죽통을 꺼내 드는 것을 보고 의 아해서 물었다. "고 대협, 그건 무엇이오?" 고우성은 죽통을 꺼내 독각응룡을 향해 겨누면서 긴장된 안색으로 말 했다. "이건 마염묵죽통이오. 만약을 대비해서 가지고 왔는데 저놈에게 쓰기에는 더없이 적합할 것 같소." 마염묵죽통이란 말에 서횡은 깜짝 놀라 고우성의 손에 들린 거무튀튀 한 죽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염묵죽통은 무림의 칠대금용암기 중에서도 그 위력이 독랄하기로 이름난 것으로, 이 죽통 안에는 악독하기 그지없는 마염신무액 이 들어 있었는데 한번 죽통을 발사하면 이 마염신무액이 반 경 십 장 이내를 뒤덮어 그 안에 있는 것은 어떤 생물이든 살아남지 못했다. 고우성은 마염묵죽통으로 독각응룡을 겨냥하며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갔다. 독각응룡은 화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들이 침사를 벗어나기만을 기다리며 으르룽거리고 있었다 독각응룡과의 거리가 약 오 장 정도로 좁혀지자 고우성은 신중한 음 성으로 소리쳤다. "이제 마염묵죽통을 발사하겠으니 모두 조심하시오." 이어 그는 힘껏 마염묵죽통의 튀어나온 부분을 눌렀다. 그러자 그 안에서 시뻘건 액체가 분수처럼 독각응룡을 향해 뻗어 나 갔다. 쭈악! 그와 함께 매캐한 비린내가 중인들의 코를 찔렀다. 파파파팍! 마염신무액이 닿는 곳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마구 피어올랐고, 풀 포 기도 녹아 내려 주위는 금세 폐허가 되었다. "크르르릉!" 마염신무액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독각응룡은 마구 괴성 을 지르며 발광을 했다. 독각응룡의 전신은 마염신무액의 위력 때문에 시커멓게 탄 채 이글이 글 끓고 있었다. "콰아아앙!" 독각응룡은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떼구루루 굴렀다. "저…… 저럴 수가……" 고우성은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딱 벌렸다. 독각응룡은 겉의 털과 피부가 시커멓게 탄 채 꿈틀거리면서도 바닥에 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그 악독한 마염신무액으로도 독각응룡을 죽이지는 못했던 것이다. 크르룽! 독각응룡은 흉성이 발작했는지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혈광을 흘리며 고우성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고우성은 질겁을 하여 급히 침사 속에 나 있는 길 위로 물러났다. 순간, 독각응룡은 그를 향해 입을 딱 벌렸다. 화라락! 독각응룡의 입에서 시뻘건 화염이 쭈욱 뻗어 나와 고우성 등을 덮쳤 다. "으헛!" 고우성은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황급 히 뒤로 물러났다. 하나 어느새 그의 머리카락과 화의는 시커멓게 그슬려 있었다. 독각응룡은 침사에 가로막혀 더 이상 다가들지 못하고 마구 괴성을 지르며 입으로 불길을 뿜어 냈다. 화라락! 고우성은 급히 불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들의 앞 길을 가로막았던 침사는 이제 오히려 독각응룡으로부터 그들을 보호 해 주는 보호막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고우성은 마염묵죽통으로도 독각응룡을 어쩌지 못하자 크게 낙담하여 서횡을 바라보았다. "이거 큰일났소이다. 서 노인 거의 파와서 저놈을 만났으니…… 무슨 뾰족한 수가 없겠소?" 서횡은 한숨을 내쉰 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노부도 저런 괴물은 처음 보오. 무슨 절세의 신병이 있기 전 에는 저놈을 어쩌지 못할 것이오." 고우성이 갑자기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빌어먹을! 그 옥정검만 도둑맞지 않았어도……" 서횡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옥정검? 그 검이라면 물론 저 독각응룡을 죽일 수 있을 거요. 한데 그게 어디 있다는 거요?" 고우성은 머뭇거리다가 성심장의 팔대빈객 중 하나인 계대망이 하장 청의 손에서 옥정검을 빼앗았다가 다시 정체 모를 인물에게 도난당한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 하장청은 성심장에 포섭되었다는 것까지…… 말을 마친 다음 고우성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일단 다시 후퇴했다가 저 독각응룡을 해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 다음 다시 옵시다." 서횡도 별반 다른 생각이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 같소." 그래서 중인들은 다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서횡의 제안에 따라 모래사장읖 통과하는 길을 확실하게 만들 어 놓았기 때문에 물러나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었다. 한데 가장 앞에 가던 백의인이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냐?" 버럭 노성을 지르던 고우성은 백의인이 가리키는 대로 앞을 쳐다보고 는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느샌지 그들이 떠나왔던 절벽 아래에는 십여 명의 인영들이 우뚝 서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선두에는 전신을 흥포로 친친 감은 복면인과 회의청년이 나란 히 선 채 차가운 눈으로 고우성을 쏘아보고 있었다. 고우성은 회의청년이 바로 죽림 안에서 만났던 음양수의 주인공임을 알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귀하들은 누구요?" 홍포복면인이 음산하게 웃었다. "흐……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그의 웃음 소리는 마치 쥐가 고목을 갉아먹는 듯 거칠기 그지없어 듣 는 이의 모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고우성은 물론 이들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때문에 홍포복면인의 말을 듣자 그는 즉시 되물었다. "그렇다면 귀하들은 회서방의 인물이란 말이오?" 홍포복면인은 징그러운 괴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자신의 짐작이 사실인 것을 알자 고우성 등은 안색이 모두 변했 다. 평상시라면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사정 이 달랐다. 그들은 지금 주위가 침사로 둘러싸인 모래사장의, 겨우 폭이 한 뼘밖 에 안 되는 통로 위에 서 있는 상태였다. 이런 위치에서 공격을 받는 다면 달리 피할 데가 얼어 꼼짝없이 당할 게 뻔했다. 그제서야 고우성은 주위를 살펴보지도 않고 무작정 모래사장을 건너 왔던 자신의 소홀함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홍포복면인의 두 눈이 혈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흐흐…… 며칠 전 청요산의 천불사에서 성심장이 베풀어 준 은혜는 잘 받았다. 이번에는 본 랑에서 그 보답을 각별하게 베풀어 주겠다." 홍포복면인이 말하는 것은 성심장에서 누남광의 기보를 노리고 천불 사로 회서방을 습격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싸움은 양파가 처음으로 격돌한 것으로, 두 파 모두 상당한 피해만 입은 채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했었다. 돌연 홍포복면인은 성심장의 고수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백의인을 향 해 벼락같이 일장을 갈겨댔다. 꽈릉! 그의 양손에서 피처럼 시뻘건 기류가 뿜어 나왔다. 이것을 보자 고우성은 놀란 외침을 토해 냈다. "혈혼장! 이제 보니 네놈은……?" 하나 그의 마지막 말은 비명 소리에 가려 들리지 알았다. 꽝! "크악!" 장력에 격중당한 백의인은 피를 폭포수처럼 토하며 훨훨 날아 침사가 있는 모래사장으로 떨어졌다. 파스스…… 몸이 침사에 닿자마자 백의인은 급격히 모래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악…… 사, 살려 줘……!"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듯 백의인은 입으로 피를 게워 내면서도 빠지 지 않으려고 바둥거렸다. 하나 그럴수록 그의 몸은 점점 더 빨리 모래 속으로 잠겨들었다. 마침내 그의 몸은 완전히 모래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성심장의 고수들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홍포복면인의 공력도 공력이지만 자칫 실수라고 해서 모래 속에 빠지 는 날에는 더욱 가공할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 것 이다. 고우성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흥포복면인을 노려보았다. "혈영추혼 양만균! 네놈이 감하……" 홍포복면인은 바로 우내칠대흉인 중의 한 명이자 이호 온서인 혈영추 혼 양만균이었다. 그의 혈혼장은 사람의 심맥만을 전문적으로 끊어 놓기 때문에 마도칠대장공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무서운 장력이었다. 양만균은 음산한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 고우성! 이런 날이 올줄을 미처 몰랐겠지? 이제 네놈들은 안단간에 결정을 내야 한다. 고스란히 장력을 맞고 저 세상으로 가든 지 아니면 침사 속으로 가라앉든지…… 으하하하하!" 이어 그는 옆에 서 있는 회의청년, 음양공자 음적양을 돌아보았다. "이번 일에는 부총호법의 음양수가 제격일 걸세." 음적양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고우성은 그가 나서자 앞이 캄캄해졌다. 가뜩이나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음양수를 이런 상황에서 마주친다면 어떤 결과카 벌어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노룻이 아닌가? 하나 음적양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쌍장을 천천히 들어올렸다가 기이하게 흔들었다. 꽈르릉! 흥백의 기류가 언뜻거리며 독보적인 음양수가펼쳐졌다 앞에 서 있던 서너 명의 백의인들은 사력을 다해 쌍장을 휘둘러 맞서 갔다. 그들로서는 달리 피할 수도 없으니 이판사판으로 해보자는 식이었다. 꽝! 굉음이 터지며 음적양이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비록 막강한 음양수를 사용했지만 네 명의 절정고수의 합공을 완벽하게 물리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네 명의 백의인들도 각기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나 그 결과는 판이했다. 음적양은 단지 두 걸음 물러선 후에 몸을 우뚝 세웠지만 네 명의 백의인들은 그만 침사 속으로 빠져 들고 말았 다. "앗!" "으악!" 그들은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떠오르려 했으나 침사 속에 서 기이한 흡력이 밀려와 떠오르기는커녕 더욱 빠른 속도로 가 라앉고 있었다. 고우성 등이 어어, 하는 사이에 그들 네 명의 모습은 곧 침사 속으로 잠겨 버리고 말았다. 실로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가만히 있자니 장력에 맞아 죽겠고, 맞받아 치자니 조금만 몸을 휘청 거려도 침사 속으로 끌려 들어가 끝장이 나고 만다. 다시 음적양이 쌍수를 몇 번 휘두르자 나머지 세 백의인들도 모조리 침사 속으로 날 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사람이라고는 체구가 커다란 홍포노인과 청의복면인, 그리 고 서횡과 고우성뿐이었다. 홍포노인은 팔대빈객 중의 한 명인 건곤팔장 번일악 이었다. 그는 장력으로만 따지자면 천하무림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절세의 고수였다. 번일악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두 손을 번쩍 쳐든 채 음적양을 노 려보았다. "이놈! 어디 노부도 그런 식으로 산러뜨려 보아라!" 그러면서 번일악은 재빨리 고우성에게 말했다. "노부가 이놈을 막을 테니 이총관과 조 노인께서는 고사이 이곳을 벗 어나십시오." 고우성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겠소. 번 형은 잠시만 견며 주시오, 일단 나와 조 노인이 저들이 있는 곳으로만 날아가면 지긍까지 당한 복수는 몇 배로 갚을 수 일을 거요." 이어 청의복면노인과 서횡을 향해 소곤거렸다. "두 분은 번 형이 손을 쓰는 순간 동시에 몸을 날리시오. 어쩌면 기 회는 이번 한 번뿐일지 모르오." 두 사람은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있던 터라 아무 소리도 하 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음적양은 번일악을 향해서 음양수를 떨쳐 냈다. 번일악은 이미 공력을 전부 끌어올린 채 준비하고 있었던지라 주위가 쩌렁한 호통을 내지르며 쌍장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이-- 야-- 압!" 꽈르릉! 노도와 같은 경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번일악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공세가 모래사장을 슬쩍 스치도록 했기 때문에 모래바람이 세차게 휘말려 일시지간 주위에는 아무것도 보이 지 않게 되었다. "바로 지금이오!" 고우성과 청의복면노인, 그리고 서횡은 있는 힘을 다해 모래 속을 뚫 고 침사 위를 날아갔다. 광!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폭음이 터지며 번일악은 술 취한 사람처 럼 비틀거리며 거구를 휘청이고 있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은 침사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했 다. 음적양 또한 상대의 심후한 내력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물러서 고 있었다. 그때 양만균이 노성을 질렀다. "이놈들! 얕은 수작을 쓰다니……" 어느샌가 고우성과 청의복면노인 등은 십여 장을 날아 땅바닥에 내려 서고 있었다. 양만균은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음을 알아차렸으나 이미 고우성은 다시 땅을 박차고 그들에게 덮쳐 오고 있었다. "양가야!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말겠다!" 고우성은 이미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던지라 그의 손에서는 하나같이 악독하고 흥악하기 그지없는 초식들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양만군은 그의 사나운 기세에 놀라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 섰다. 그동안에 청의복면노인은 비호와도 같이 아직 신형이 안정되지 않은 음적양을 향해 달려들었다. 서횡도 그의 뒤를 따라 회서방의 고수들 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때 정신없이 양만균을 몰아치고 있던 고우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 다. "서 노인! 당신은 싸움에 끼여들지 말고 어서 번일악을 구해 주시 오." 서횡은 퍼뜩 정신이 들어 번일악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번일악은 어느새 허리 아래까지 침사에 빠져 든 채 허우적거리고 있 었다. 서횡은 절로 다급해져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번일악을 구해 줄 뾰 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횡이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번일악은 머리까지 침사 속에 빠져 들 어갔다. 서횡은 혀를 차며 할 수 없이 분풀이라도 해야겠다는 듯이 회서방의 고수들에게 덤벼들었다. 고우성은 번일악마저 침사 속에 빠져 최후를 맞이한 것을 알자 분노 가 폭발하여 자신의 수비는 생각도 않고 미친 듯이 양만균을 향해 덤 벼들었다. 원래 고우성과 양만균의 무공 수준은 서로 엇비슷한 정도였다. 한데 고우성이 수비를 도외시한 채 공격만 하자 양만균은 정신없이 뒤로 밀려날 수밖에 얼었다. 양만균도 부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워낙 고우성의 공격이 거칠어 꼼짝도 못하고 수비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 다. 한편 음적양과 청의복면노인의 대결은 그야말로 용호상박 의 불꽃 튀는 격전이었다. 청의복면노인은 성심오로 중의 하나인 신망 조패였다. 그는 칠대흉인 중의 하나로, 원래 무팡보다는 독술과 각종 동 물들을 다루는 재주가 비상한 인물이언지만 무공 또한 결코 얕잡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수법은 하나같이 상궤를 벗어난 기이하고 음독한 것이어 서 아직 대적 경험이 풍부하지 알은 음적양을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 다. 하나 조긍씩 격전이 계속될수록 음적양은 침착을 되찾고 음양수의 가 공할 위력으로 조패를 압도해 가고 있었다. 서횡은 일곱 명의 회서방 고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정신없이 그들의 공격을 막기에 바빴다. 그의 무곧은 장내에 있는 고수들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축인지라 겨우 회서방의 전서급 인물 둘 정도를 당할 수준 이었다. 그런데 일곱 명의 전서급과 싸우게 되었으니 어찌 무사하기를 바라겠 는가?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아이고…… 고 대협! 어서 노부를 좀 살려 주시오…… 이크! 고 대 협! 빨리 좀…… 그는 연신 고우성을 애타게 부르며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그가 얼마나 악을 써대는지 고우성은 정신이 헷갈려 마음이 싱란해질 지경이었다. "아니, 저 미친 놈의 늙은이가 왜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 누구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나?' 고우성은 양만균 하나만으로도 벅찬 형편인데 어떻게 서횡을 도울 수 있겠는가? 오히려 서횡이 그를 자꾸 불러대는 통에 정신이 흐트러져 조금씩 열 세에 몰리게 되었다. 쾅! 쾅! 파파팍! 장내는 고함 소리와 장영, 검풍이 마구 뒤섞여 일대 아 수라장이 되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스읏! 어디선가 한 명의 청의중년인이 불쑥 나타나 장내에 뛰어들었다. 제23장 유령천자 그는 허리춤에 백의소녀를 껴안고 있었는데도 행동이 비호처럼 빨랐 다. 팟! 팟!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수중에 들고 있던 보도에서 눈부신 도광이 피어올랐다. "크!" "크악!" 두 명의 회서방 고수들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쓰러졌다. 청의복면인은 순식간에 몇 명의 회서방 고수들을 더 쓰러뜨리고 번개 같이 모래사장 위에 뚫려 있는 통로 위로 날아갔다 이 광경을 보자 맹렬히 싸우고 있던 중인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손을 멈추고 청의중년인의 뒤를 따라갔다. "이놈! 멈춰라!" 그 중에서도 혈영추혼 양만균은 경공으로 이름을 날린 고수답게 한번 몸을 날릴 때마다 오륙 장씩 쭉쭉 뻗어 나가며 일행 중 제일 앞으로 튀어나왔다. 청의중년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불구불하게 뚫려 있는 길 위를 비호처럼 달려갔다. 양만균은 더욱 노하고 마음이 급해져 신법을 배가하여 그자의 뒤로 바싹 따라붙었다. 순간, 청의중년인이 몸을 우뚝 세우고 빙글 돌며 매섭게 도를 휘둘러 댔다. 팟! 양만균은 설마 상대가 이토록 갑작스럽게 몸을 멈출 줄은 몰랐는지라 대경 실색하여 급히 피하려 했다. 그러다가 사방이 침사인 것을 깨닫고 사색이 된 채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파스스…… 그의 복면 윗부분이 잘라지며 반백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잘려 나갔다. 양만균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감히 더 이상 몸을 일으켜 청의중년인의 뒤를 쫓아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양만균의 뒤를 바짝 따라오던 고우성이 그의 몸을 타넘고 청의 중년인에게 덤벼들었다. "이놈!" 와릉! 그의 양손에서 매서운 경기가 뿜어 나왔다. "흥!" 청의중년인은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수중의 도를 질풍같이 휘둘렀다. 팟! 팟! 팟! 마치 빗발 같은 도기가 내리꽃히며 고우성의 왼팔에서 핏줄기가 솟구 쳐 나왔다. "크악!" 고우성은 상대의 도법이 이토록 무서우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하고 있 었다가 졸지에 팔에 일도를 격중당하고 비틀거렸다. 때마침 달려온 신망 조패가 그의 몸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대로 침사 속으 로 빠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음적양은 상대가 얼마 전에 자신의 좋은 일을 방해했던 자임을 알 아보고는 이를 바드득 갈아붙이며 벼락같이 음양수를 갈겨댔다. 하나 청의중녀인은 그를 힐끔 돌아보고는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쏘 아나갔다. '저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그것을 보고 있던 중인들은 모두 쾌재를 불렀다. 음적양의 음양수는 등을 보이고 랄아가던 청의중년인의 등판에 사정 없이 작렬했다. 쾅!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하나 음양수에 의해 육포가 되거나 아니면 침사 속으로 떨어져 나갈 줄 알았던 청의중년인은 오히려 반탄력을 이용해서 더욱 빠르게 앞으 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앗?" 중인들은 이 엄청난 광경에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음양수를 맨몸으로 받아 내고도 멀정한 인물이 있을 줄이야 그들이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 그들의 놀라움은 음적양에 비하면 반의 반도 되지 않았다. 음적양은 그야말로 대경 실색하여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 도였다. '아니, 저놈이 내 음양수를 맨몸으로 받아 내다니…… 먼젓번에도 그 랬고 지금도 어째서 내 음양수가 유독 저놈에게만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들이 멈칫하는 사이 청의중년인은 어느새 모래사장을 건너 반대쪽 지표에 내려서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쿠르르릉! 피이한 울부짖음과 함제 피부가 새카맣게 그슬린 독각응룡이 맹렬한 기세로 청의중년인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앗!" 청의중년인의 품속에 안겨 있던 백의소녀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 다. 중인들은 다시 희망을 갖고 모래사장 위를 달려갔다. 하나 청의중년인은 조금도 당환하지 않고 냉엄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독각응룡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오른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 갔다. 이제 보니 그의 허리춤에는 길다란 장검이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등에는 칼을 매고 허리에는 검을 차다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청의중년인은 서슴없이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용이 울부짖는 듯한 검영과 함께 우윷빛 광채가 뿜어 나와 중인들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중인들은 난데없이 우윳빛 검광과 함께 뼛골이 시린 듯한 한기가 밀 어 닥치자 깜짝 놀라 청의중년인이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앗? 옥정검이다!" 누군가가 청의중년인이 들고 있는 검을 한눈에 알아보고 경호성을 터 뜨렸다. 그 말에 중인들은 더욱 놀랐다. 그 순간 청의중년인은 독각응룡을 향해 몸을 날리며 수중에 든 옥정 검을 휘둘렀다. 번쩍! 옥정검기가 번뜩이자 독각응룡은 눈이 부신 듯 일시지간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커헝! 사나운 울부짖음과 함께 독각응룡의 목이 옥정검에 의해 뎅겅 잘려져 나갔다. 독각응룡은 몇 번 바둥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쿵! 청의중년인은 급히 독각응룡을 타넘고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경악에서 깨어나 급히 그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 다. 그들이 모래사장을 벗어났을 때 청의중년인은 이미 오십여 장 밖을 달려가고 있었다. 청의중년인이 달려가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 에 하나의 석문이 나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석문의 위에는 커다랗게 '유령동부'라는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보자 중인들의 마음은 불같이 다급해졌다. "이놈! 멈춰라!" 성심장이고 회서방이고 가릴 것 없이 그들은 일제히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청의중년인의 뒤를 맹렬하게 따라갔다. 하나 그들이 패 반도 따라가기 전에 청의중년인은 어느새 석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순간, 쿵! 열려 있던 석문이 굉음을 내며 굳게 닫혀 버렸다. 간발의 차이로 닫혀 버린 석문 앞에 도착한 중인들은 망연자실한 표 정이 되었다. "에잇!" 꽝! 굉음이 터지며 주위의 지반이 울렸다. 음적양의 음양수는 가히 만근의 위력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석문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석문을 후려친 음 적양만이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졸지에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만 중인들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서로 얼굴을 마주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실로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그들의 원독에 가득 찬 시선을 받으며 유령동부의 석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 * *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탁! 강옥봉이 화섭자를 켜자 주위의 전경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하나의 길다란 회랑이었다. 회랑 저편은 언뜻 보기에도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석실로 통해 있었 다. 강옥봉은 조옥환이 아직도 푸 눈을 꼭 감은 채 자신의 허리를 죽어라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낭자, 이제 내려와도 되오." 조옥환은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가 자신들이 이미 안전한 곳에 와 있음을 알고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황급히 그의 품에서 뛰어나왔다. 하나 그녀의 가슴은 아직도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강옥봉은 조옥환이 몹시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담담한 표 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아하니 이곳이 바로 유령천자의 유물이 있는 곳 같구려." 조옥환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급히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거 렸다. 그러다가 자신들이 서 있는 회랑이 하나의 화려한 석실과 통해 있는 것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저곳인가 봐요!" 그녀는 강옥봉이 뭐랄사이도 없이 한 마리 놀란 제비처럼 훌쩍 그곳 으로 달려갔다. 강옥봉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때 문득 강옥봉은 자신이 걷고 있는 회랑의 양쪽 벽에 무수한 날짐 승들의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의아함을 느끼고 걸 음을 멈춘 채 조각들을 관찰했다. 기이하게도 그 날짐승들의 생김새는 전부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강옥봉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점점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마치 그 자리에 못박혀 버린 사람처럼 벽 앞에 우뚝 서서 벽에 가득 새겨진 조각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이상한 동작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벽에 새 겨진 날짐승 모양의 동작을 무의식중에 따라서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정산없이 벽 에 새겨진 도형을 따라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스스스! 처음에는 느리고 완만한 것 같던 그의 신형이 점차 빨라지더니 나중 에는 하나의 희뿌연 그림자만이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먼저 석실로 들어갔던 조옥환은 뒤에서 강옥봉이 따라오는 기척이 들 리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저분이 왜 저렇게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의혹을 참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강옥봉이 있는 곳으로 가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돌연 그녀가 서 있던 석실이 빙글빙글 회전하는 것이 아닌가! "앗!" 그녀는 화들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우웅! 석실은 조금썩 빨리 회전하면서 점차 아래로 하강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큰 소리로 강옥봉을 불렀다. "대협! 대협!" 하나 강옥봉은 조각에 심취되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석실은 아래로 완전히 내려가 버렸다. 이미 강옥봉이 있 던 통로는 보이지도 않고 그녀는 커다란 석실에 혼자 동그마니 서 있 을 뿐이었다. 조옥환은 할 수 없이 마음을 굳게 먹고 석실을 두리번거렸다. 석실은 가로 삼 장에 세로 오 장 가량 되는 장방형인데, 정면에 백옥 으로 만든 좌대가 있고 그 위로 곤룡포를 입은 노인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노인의 무릎 위에는 대여섯 권의 책이 놓여져 있었으며 노인의 앞에 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병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첫눈에도 무공비급과 진귀한 영단인 것 같았다. 어디 그뿐인가? 그 백옥좌대까지 이르는 길 좌우에는 길다란 대리석 탁자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위에는 갖가지 금은보주와 기진이보가 찬란한 보광을 발하고 있었다. 실로 천하의 기진이보가 다 모인 듯 그 보광은 강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성 하나와 맞바꿀 수 있는 기이한 추안석으로부터 보검 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종류는 다양하기 이를 데 없어서 천하의 청 렴가라도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조옥환은 홀린 듯 기진이보를 바라보면서도 옥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갖은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이곳까지 온 것은 유령천자의 무 공비급을 얻어 선부의 원한을 갚으려는 것이었으니 그들 기보가 아무 리 귀중한 것이라 해도 그녀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조옥환은 옥대로 가까이 다가가서 먼저 노인의 무릎에 있는 대여섯 권의 책자를 바라보았다. 그 책들은 모두 비단 표지로 되어 있었는데 가장 위에 있는 책의 겉 장에는 '유령신공·유령천자 수록'이란 글씨가 쓰여져 있 었다. 크게 기뻐하며 막 그 책자를 집으려던 조옥환은 멈칫거렸다. '아무리 급해도 먼저 이 책의 주인께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가 아닐 까? 아까 그분께서도 너무 서두르지 말고 모든 일을 차분하게 풀어 나가라고 말씀하셨지 않은가?' 그녀는 우선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켜는 이미 그 노인이 살아 있는 인물이 아리라 유령천자의 좌화 한 시신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전신에 화려한 곤룡포를 입고 얼굴은 불그스름했으며 백설 같 은 수염이 배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전설상의 신선 같은 모습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광오한 기상이 가득했다. 이 노인이 바로 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었던 유령천자 환 홍군인 것이다. 조옥환은 잠시 유령천자 환흥군의 시신을 쳐다보더니 공손히 무릎을 꿇고 대례를 올렸다. "소녀는 피맺힌 원한이 있어 이곳 유령동부로 와서 노선배님의 영거 를 소란스럽게 했사옵니다. 이제 소녀는 노선배님의 절학을 습 득하고자 하오니 영혼이 계시거든 허락해 주시옵소서……" 머리를 조아리던 조옥환은 문득 바닥에 조그만 글자들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절을 하느라 머리를 땅에 대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안력이 좋은 사람 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각도로 새겨진 글이었다. <그대가 탐욕을 내지 않고 제일 먼저 본 천자의 유해를 배알한 것에 큰 치하를 보낸다. 이 석실에 있는 모든 기보들과 무공비급에는 이미 본 천자의 오대기 독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흑혈독장이 발라져 있다. 만약 그대가 허튼 마음을 먹고 본 천자의 유해를 무시하고 그것들을 취하려 했다면 벌써 한 구의 백골로 화해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대의 마음이 선량하고 예의를 알아 본 천자의 유해를 배알 했으니, 이는 비단 그대의 홍복일 뿐 아니라 선량한 후계자를 얻게 된 본 천자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대는 우선 본 천자의 옆에 있는 다섯 개의 옥병 중 노란 뚜껑이 있는 병을 열어 대라금환을 복용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흑혈독장을 비롯한 천하의 어떤 독으로부터도 안전할 뿐 아니라 능히 생사현관이 타통되어 공력이 천인합일의 경 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연후 본 천자가 남긴 다섯 권의 유령천서를 익히기 바란다. 한 가지 부언할 것은 본 천자의 절학 중 가장 뛰어난 유령보 는 그대가 들어온 석실의 입구에 있는 벽에 새겨 놓았다. 만일 그대가 이 석실에 들어오기 전에 그 유령보를 발견하여 익혔으 면 모르되 그렇지 않았다면 유령보의 절학은 그대와 인연이 없는 것 이니 단념하도록 하라. 이것은 유령보의 절학이 너무도 현오막측하여 절세의 재 지가 없는 인물은 평생을 연마하여도 익힐 수 없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 그대의 재지가 능히 유령보를 익힐 수 있다면 석벽에 새겨 진 도형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단순한 조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모쪼록 본 천자의 절학을 익혀 무림의 군마들을 제압하고 본 천자의 위명을 다시 천하에 떨치도록 하라. 유령천자 환홍군.> 조옥환은 긴 글을 다시 읽고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한숨을 토해 냈 다. 그녀는 실로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토록 얻고자 했던 유령보의 절학은 이미 자신의 수중을 훨훨 떠나 버렸다. 대신에 그녀는 유령천자의 유해를 대하고 그의 진전을 얻은 것 에 만족해야만 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가 석실로 들어오기 직전에 보았던 강 옥봉의 기이한 행동으로 보건대 유령보의 절학이 다른 사람이 아닌 강옥봉에게 전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녀와 강옥봉은 유령천 자의 절학을 익힌 사형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며 강옥봉의 준수한 얼굴을 떠올리고는 달콤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유령천자의 무공을 얻었다는 것만 해도 강옥봉의 도움이 없었담 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가뿐한 마음으로 먼저 유령천자의 유지대로 그의 옆에 놓여진 다섯 개의 병 중에서 노란 뚜껑의 병을 집어 들었다. 마개를 여니 그윽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황홀하게 만드는 향기와 함 게 금빛 찬란한 알약 하나가 나왔다. 그녀는 이것이 바로 유령천자 환홍군이 심혈을 기울여 단 두 알만을 만들었다는 절세의 성약인 대라금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유령천자의 유해에 절을 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대 라금환을 복용했다. 이어 약효를 소화하기 위해 그 자리에 정좌를 한 채 운공조식에 들어갔다. 제24장 냉상아 하룡포. 하룡포는 안휘성의 중앙을 흐르는 장강을 건너는 나루터 중의 하나였다. 멀지 않은 곳에 천하의 명산인 황산과 동관산이 있어서인지 하룡포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해가 느릿느릿 중천으로 떠오를 즈음, 하룡포의 입구에 일남일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등에 보도를 맨 청의중년인과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백의미 녀였다. 특히 백의미녀의 용모는 가히 천하절색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녀 를 보는 순간 눈이 휘등그래지고 몸이 굳어 멍하니 서 있곤 했다. 그들은 바로 유령동부를 나온 강옥봉과 조옥환이었다. 원래 유령동부를 나온 강옥봉이 유령보를 익히고 있는 동안 그녀는 유령천자의 절학을 얻게 되었다. 하나 유령천자의 절학이 결코 단시일 내에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조옥환은 대라금환을 복용하여 생사현관을 타통시킨 후 유령천자의 무공의 근간이 되는 유령신공만을 간 단히 익히고 강옥봉과 함께 다시 무림에 나온 것이다. 그러는 그녀의 마음에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유령천자의 절학을 완 성하여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강옥봉과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 이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조옥환의 성품은 한마디로 외유내강하였고, 남녀간의 애정 에 대해선 일체 무관심하였다. 하지만 그녀라고 석녀는 아니었다. 다만 모진 세파 속에 몸을 담고 있자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봉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 다. 그러나 강옥봉을 만난 후로는 그의 늠름한 기질과 준수한 용모에 은연중 마음이 끌려 마치 정다운 연인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비록 치료를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강옥봉에게 자 신의 반나신을 보였다는 묘한 심리가 작용하고 있기도 했다. 강옥봉은 그녀가 묻는 말에 공손히 대답했지만 시종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의 이러한 태도는 조옥환의 호감을 더욱 사게 되었 다. 그들은 나룻배를 타고 장강을 건너갔다. 겨울의 강바람은 비록 매서 웠지만 조옥환은 강옥봉과 함께 있으니 조금도 추운 줄을 몰랐다. 잠시 후 나룻배가 맞은편 강변에 닿자 두 사람은 배에서 내려 계속 걸어갔다. 묵묵히 길을 걷고 있는 강옥봉은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졸지에 유령천자의 비급을 빼앗기게 된 회서방과 성심장의 고수 들이 자신과 조옥환을 절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용케도 여러 기인플의 도움으로 자신의 행적이 발각되지 않아 그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 유령동부의 일로 회서 방과 성심장에서도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게 틀링없고 보면 앞으로의 행로가 지긍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을 게 분명했다. 조옥환은 그의 침울한 표정을 보고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강옥봉은 꿈에서 깨어난 듯 깜짝 놀라며 제정신을 차린 뒤 사방을 둘 러보았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주루의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의 계면쩍음을 감추려는 듯 급히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낭자, 저곳에서 간단히 요기나 하고 갑시다." 조옥환은 이미 강옥봉에게 흠뻑 빠져 있는지라 그가 가자고 하면 지 옥의 불구덩이 속이라도 뛰어들 판이었으니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루는 장강의 요지에 면해 있어서인지 제법 킨다. 그들이 들어가자 눈치 빠른 점소이가 우르르 달려나와 연신 허리를 굽혀 보이곤 병풍이 둘러쳐진 아늑한 특실로 안내하였다. 두 사람이 함께 자리를 하고 점소이에게 음식 주문을 끝냈을 때였다. 건너쪽에 마련된 특실에서 젓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왔다. 닥…… 다닥…… 닥…… 강옥봉은 때로는 빠르고 크게, 때로는 천천히 들려 오는 그 소리에 잠시 동안 귀를 기울이더니 안색이 차츰 변해 갔다. 조옥환은 그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는 다소 긴장하는 빛을 나타 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 왜 그러세요?" 강옥봉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빙긋 웃었다. "잠자코 구경만 하면 되오." 이때 마침 다른 점소이가 길게 드리워진 휘장을 젖히며 주문한 음식 을 날라 와 탁자 위에 차려 놓았다. 강옥봉은 점소이를 향해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잠깐 여기에 앉게. 내가 몇 마디 물어 볼 게 있네." 점소이는 환송한 듯 허리를 굽신거렸다. "소인 같은 미천한 존재가 어찌 지체 높으신 손님과 동석할 수 있겠 습니까? 그리고 소인은 다른손님을 접대해야 하기 때문에 한가하지 않습니다." "괜찮으니 어서 앉게. 우리는 이 지방에 초행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생소하네." "그렇지만……" 점소이가 계속 난색을 보이며 머뭇거리자 강옥봉이 갑자기 빠르게 손 을 내밀어 완맥을 움켜쥐었다. 점소이는 흠칫하며 안색을 일변하더니 감히 뿌리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강옥봉은 빙그레 웃으며 조옥환을 바라보았다. "조 낭자, 술 한잔 따르지 않겠소?" 조옥환은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술주전 자를 들어 잔이 넘치도록 따랐다. 그러자 강옥봉은 기이한 눈빛을 뿜어 내며 의미 심장한 말을 던졌다. "낭자는 귀찮더라도 점소이의 입을 벌리고 그 술을 먹인 후 천천히 이야기를 나눕시다." 점소이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고, 이마엔 땀방울이 솟아나왔다. 그는 이를 악물고 발버등을 쳤으나 그것은 오로지 마음뿐 전신에 맥 이 하나도 없어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조옥환은 그제서야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절실히 느끼고 왼손으로 점 소이의 양쪽 뺨을 눌러 저절로 입이 벌어지도록 한 후 천천히 술을 입 속으로 부었다. "우…… 웁……!" 점소이는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별 짓을 다 했으나 별수없이 한 방울 도 남김없이 꼴깍꼴깍 삼켜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강옥봉은 움켜쥐었던 완맥을 풀어 주었다. "그대는 속히 그대를 사주한 인물에게 돌아가 더 이상 헛되이 심기를 부리지 말라고 전하시오. 만약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내게 수작을 부리려 했다가는 부득이 독수를 쓰겠노라 아울러 전해 주시오." 점소이는 심신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귀하는 소인의 계략을 어찌 간파하시었소?" "세상에 비밀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오. 그대는 어서 돌아가 그대 로 전하시오." 점소이가 허리를 굽혀 보인 후 총총히 물러가자 조옥환이 입을 떼었 다. "공자는 저들의 암산을 어떻게 알았어요? 혹 옆방에서 들려 온 젓가락 소리 가 공자에게……" 강옥봉은 신비스럽게 웃었다. "낭자는 알았으면 더 묻지 마시오. 그리고 잠시 후면 한바탕 혈전이 벌어질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는 게 좋을 거요." 조옥환은 흠칫 놀랐다. "공자께서는 조금 전 점소이를 사주한 인물이 다시 공격해 오리라 생 각하세요?"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 였다. "원래 그들은 회서방의 인물들이오. 그런 만큼 쉽사리 포기하거나 단 념하지는 않을 거요." "공자께선 그들이 회서방의 인물이란 걸 어떻게 아셨어요?" "조금 전에 점소이의 완맥을 잡을 때 얼른 보니까 그의 왼쪽 손바닥 에 세 마리의 쥐가 그려져 있었소." 그제서야 조옥환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서방에서는 왼쪽 손바닥에 쥐를 그려 놓음으로써 신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가장 낮은 표서급 인물은 한 마리의 쥐가 그려져 있고, 직급이 한 단 계씩 올라갈수록 손바닥에 새겨진 쥐의 숫자도 한 마리씩 많아져 온 서급 고수는 모두 다섯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총호법은 여섯 마리, 가장 높은 회서방주는 모두 일곱 마리의 쥐를 새기고 있었다. 회서방은 마치 한 무리의 쥐 메처럼 집요하고 끈질겨서 일단 목표로 정한 인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해치워서 아직 어느 누구도 그들의 수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강옥봉은 그틀의 마음을 짐작한 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들은 아마 낭자보다는 나를 노리고 있을 거요. 그러니 낭자가 섣불리 유령천자의 무공을 쓰지만 않는다면 어느 누구 도 낭자가 유령천자의 무공비급을 얻은 것을 알지 못할 거요." 조옥환은 고운 아미를 상큼히 찌푸렸다. "그럼 저더러 공자에게 모든 위험을 덮어씌우고 혼자 피하라는 말씀 인가요? 전 그렇게는 못 해요." 강옥봉은 빙그레 웃었다. "하하…… 나야 홀몸이라 그들의 공격이 두려울 게 없지만 낭자에게 는 꼭 갚아야 할 혈한이 있지 않소? 자칫 그들과 복잡한 일에 휘말리게 되면 낭자가 복수하는 길은 점점 어려워질 거요." 조옥환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강옥봉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는 것을 모르는 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그녀 혼자서만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겠는 가? 강옥봉은 껄껄 웃으며 술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하하…… 그런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음식이나 듭시다." 이어 그는 술주전자 뚜껑을 열고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리며 하얀 김이 주전자 주풍이를 통 해 계속 뿜어 나왔고, 잠간 사이에 주전자 속에 들어 있던 술은 하얀 김으로 증발되어 버렸다. 조옥환은 가을날의 호수와 같이 잔잔한 눈길을 펼치고 강옥봉의 거동 을 주시했지만 그가 어떤 무공을 전개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마치 오리무중에 빠진 듯하였다. "공자, 주전자 속에 든 술을 쏟아 버리는 게 더 간편하지 않을까요?" 강옥봉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술 속엔 극독이 들어 있기 때문에 증발시키지 않으면 다른사 람들에게 화가 미칠지 모르오." 말을 마치고는 대력수법으로 주전자를 납작하게 쭈그러뜨 려 창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자 계산을 한 후 주루를 벗어났다 소호! 소호는 안휘성의 중부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였다. 달리 초호라고도 하며, 세외도원 같은 절경과 더불어 아득한 옛날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아주 운치 있는 호수였다. 소호의 근방에 위치한 혜산은 특히 절경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 었다. 싸락눈이 조금씩 휘날리고 있는 혜산. 강옥봉과 조옥환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혜산의 중턱을 걷고 있었다. 그때 멀지 않은 산길에 옷차림이 남루한 중년사나이가 쭈그리고 앉은 채 고개를 떨구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중년사나이의 머리와 옷은 내리는 눈을 맞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조옥환은 청숭맞게 눈을 맞으며 코를 골아대고 있는 중년사나이를 발 견하자 몹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한데 막 그들이 중년사나이의 앞을 지나치려 할때 돌연 강옥봉의 얼 굴색이 변했다. 그는 전음술로 말을 보냈다. '낭자는 빨리 후퇴하시오." 그리고는 급히 조옥환의 앞으로 나섰다. 순간 잠에 취해 있던 사나이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비할 데 없이 빠르게 강옥봉에게 덮쳐 오며 두 팔을 뻗어 냈다. 파락파팍! 마치 태풍 같은 강맹한 장력을 대동한 무수한 강환이 덮쳐 내렸다. 조옥환은 이 광경을 보자 깜짝 놀라며 정신없이 외쳤다. "조심하세요!" 찰나, "크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끼 사나이는 입에서 선혈을 뿜어 내며 맹렬히 튕겨 나가다가 그대로 곤두박질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조옥환은 어찌 된 영문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멍하니 눈 내리는 바 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사나이는 팔과 다리배가 완전히 으스러지고 오공에서 시뻘건 선혈을 콸콸 뿜어 내고 있 었다. 사나이는 괴로운 신음 소리를 울려 내더니 참담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으으…… 호신강기의 위력이 이토록 막강할 줄이야…… 나 일발추혼수 종좌는 수십 년 동안 명성을 떨쳐 온 이래 한 번도 남 에게 패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이름도 모르는 놈에게 당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조옥환은 사나이가 암기술로 명성을 떨치던 일발추혼수 종쾌임을 알 자 깜짝 놀랐다. 종쾌는 회서방 내에서도 오호 온서에 속하는 절정의 고수였다. 강옥봉은 이미 청요산의 천불사에서 회서방과 성심장이 격돌을 할 때 숨어서 종쾌의 모습을 잘 관찰해 두었기 때문에 오늘도 길 옆에서 졸 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임을 알아차리고 태극혼원신공을 끌어올려 그 의 암습을 격퇴시킨 것이다. 강옥봉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귀하가 만약 십이 성의 공력만 사용하지 알았다면 이런 중상은 입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니 날 원망치 마시오." 종쾌는 입으로 검붉은 선혈을 게워 내면서도 악독한 눈으로 그를 노 려보았다. "닥쳐라! 죽어 원귀가 되어서라도 이 한은 풀고 말겠다." "하하! 나는 귀신과 어울리지 않는 성미이니 당신의 독한 마음은 그 대로 허공에 날려보내는 게 좋을 거요. 어쨌든 내게 먼저 공격을 한 사람은 당신이니 이제 와서 누굴 탓하겠소?" 종쾌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라! 네가 오늘 요행히 살아났다만 보이 지 않는 화살은 방비하기 어렵듯이…… 네…… 놈은 앞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강옥봉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낭랑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일깨워 주어 고맙소. 하지만 내가 회서방 따위를 두려워할 위 인이라면 애당초 당신들과 적대 관계를 맺지도 않았을 것이오." "으…… 이, 이놈……!" 종꽤는 입술을 꿈틀거리며 눈가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마침내 선 혈을 울컥 토해 내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 난데없이 바람을 타고 음산한 냉소가 들려 왔다. "흐흐…… 무영신룡단혼도! 과연 대단하구나. 하나 네놈은 오늘로써 끝장이다." 그와 함께 소도 쪽에서 십여 줄기의 귀신 같은 인영들이 나타 나 그들을 포위했다. 그들은 음양공자 음적양과 삼호 온서인 금시조 도중웅, 그리고 열두 명의 흑의인들이었다. 강옥봉은 그들을 돌아보다 음적양과 시선이 마주치자 피식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개처럼 도망을 잘 다니는 음적이었군." 음적양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그는 금시라도 찢어 죽일 듯한 무서운 눈으로 강옥봉을 노려보았다. 하나 그는 자신의 음양수가 이상하게도 강옥봉에게만은 별다른 효력 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그에게 얼마쯤 두려운 마음 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감히 덤비지는 못하고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 다. "흥! 네놈이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 만만한지 두고 보겠다." 이어 그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열두 명의 흑의인들에게 눈짓을 했 다. 순간 그들은 일제히 소매 속에서 하나의 황색 동관을 꺼내 들 었다. 황색 동관은 길이가 한 자 가량 되었는데 조그마한 구멍이 벌 집처럼 뚫어져 있었다. 음적양은 득의 양양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 무영신룡단혼도! 눈깔이 있으니 저게 무엇인지 알아보겠 지?" 강옥봉은 고개를 힐끔 돌려 흑의인들이 들고 있는 황색 동관을 보고 는 내심 크게 놀랐다. 하나 겉으로는 담담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하하…… 저건 칠대금용암기 중의 하나인 폭우천심사가 아니냐?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이냐?" 음적양은 그의 태연 자약한 태도에 움찔 놀랐다. "과연 배짱 하나는 두둑한 놈이군 하지만 네농이 폭우천심사 아래서 도 살아날 수 있을까?" 이어 그는 흑의인들의 뒤로 몸을 움직였다. 열두 명의 흑의인들은 폭우천심사를 움켜쥔 채 강옥봉과 조옥환을 빙 둘러 에워쌌다. 조옥환은 초조한 표정으로 강옥봉을 돌아보았다. "공자, 폭우천심사는 칠대금용암기 중에서도 그 범위가 가장 넓고 한 번 방출되면 피하기가 어렵다는데 어떻게 하지요?" 강옥봉은 믿음직스럽게 웃었다. "내가 낭자의 손을 잡을 수 있게 허락만 해준다면 폭우천심사를 무용 지물로 만들어 보이겠소." 조옥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평소 충후하기 그지없던 강옥봉 이 왜 이렇게 다급한 순간에 와서 실없는 농담을 할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나 강옥봉이 나직하게 전음으로 몇 마디를 하자 그녀는 그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넙죽 그에게 자신의 손을 맡길 수도 없어 고개를 떨구었다. 강옥봉은 열두 명의 흑의인들이 금시라도 폭우천심사를 발출할 기세 를 보이자 조금 다급해졌다. "어떻소, 낭자? 허락해 주시겠소?" 조옥환은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공자님 마음대로 하세요." 한쪽에서 이들의 정겨운 모습을 보고 있던 음적양은 불 같은 질투심 이 타올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발사해라!" 그가 노성을 지르자 열두 명의 흑의인들은 폭우천심사의 발사장치를 일제히 격발시켰다. 순간 열두 개의 폭우천심사에서는 수백, 수천 개의 빛살 같은 광망 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나왔다. 파파파파파…… 천지가 온통 광망에 횝싸여 버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때아닌 폭우가 장내를 횝쓸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찰나. 이미 조옥환의 손을 꼬옥 잡고 있던 강옥봉은 두 발을 기이하 게 움직였다. 스스슥! 그와 조옥환의 몸이 허공에 두등실 떠올랐다. 이어 그들의 몸은 폭포수 같은 기세로 퍼부어지는 폭우천심사의 공세 를 너무도 유연하게 기고 밖으로 뛰쳐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앗!"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음양공자 음적양과 금시조 도중웅 등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찢어지게 부릅뜨고 경악성을 터뜨렸 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단 한 개만으로도 반경 십여 장 이내는 완전히 페허로 만들 수 있다 는 폭우천심사가 무려 열두 개나 동시에 발사되었는데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그 사이를 뚫고 나온 것이다. 강옥봉과 조옥환이 서 있 던 자리에는 목표물을 잃고 바닥에 떨어진 폭우천심사의 암기들이 수 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때 문득 멍하니 강옥봉을 바라보고 있던 음적양이 무슨 생각을 했 는 지 안색이 변한 채 부르짖었다. "유령보…… 네놈은 과연 유령보를 익혔구나!" 그의 음성을 듣자 모두들 다시 한 번 놀랐다. 강옥봉은 여전히 조옥환의 옥수를 꼭 움켜쥔 채 담담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다. 이게 바로 고금독보의 유령보다!" 아아…… 천하가 경동할 것이다! 누구도 잡을 수 없다. 일단 펼치면 천하를 무인지경으로 쉽쓸며 어떠한 무공도 피해 버린 다! 강호천하를 수백 년 동안 떠돌고 있던 유령보의 전설이 그대로 실현되는 순간이 아닌가? 음적양은 철석같이 믿고 있던 폭우천심사로도 강옥봉을 어쩔 수 없자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한층 높아졌다. 그때 강옥봉이 조옥환의 손을 놓으며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그의 두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뻗어 나오고 있었고, 전 신에서는 맹렬한 기세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원래 남에게 빛을 지고는 못 사는 성미다. 그러니 이번에는 너 희들이 맛을 좀 봐야겠다." 음적양은 움찔 놀라 급히 외쳤다. "저놈을 쳐라!" 열두 명의 흑의인들은 폭우천심사를 버리고 병기를 뽑아 들며 일제히 강옥봉을 향해 덤벼들었다. 강옥봉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그들 속으로 뛰어들며 천룡보도를 뽑아 휘둘렀다. 팟! 팟! 팟! 천애도 특유의 빗발 같은 도기가 일어나며 연이어 비명이 터져 나왔 다. "큭!" "크아악!" 순식간에 두세 명의 흑의인들이 맥없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 버렸다. 강옥봉의 도법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다다랐는지라흑의인들 중 아 무도 그의 일도를 받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음적양은 강옥봉이 마치 짚단을 베듯 흑의인들을 베어 넘기는 것을 보고 겁이 덜컥 나서 도중웅을 돌아보았다. "저놈의 도법은 소문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 같소. 더구나 이상하게 도 내 음양수마저 저놈에게는 별다른 효력을 나하내지 못하니 난같하 구려. 온삼호께서는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시오7" 도중웅은 심각한 눈으로 강옥봉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 다. "저자의 도법은 아무래도 우내칠대무학 중의 천애도 같소이다." 음적양은 움찔 놀랐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무서운 위력을 나타빌 수가 없지 않소? 저 자가 천애도에다 유령보마저 익혔다면 아마 방주님께서 직점 나오시 지 않는 이상 우리들로서는 역부족일 것 같소." 음적양의 표정도 잔뜩 굳어졌다. "그럼 어쩌지요?" 도중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일단은 저자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음적양은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온삼호의 의견은 이대로 도망을 가자는 말씀이오?" 도중웅은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자식! 알면서도 쓸데없는 소릴 지껄이는군.' 그는 속으로 울화통이 치밀었으나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정색을 했다. "도망이 아니라 일보 후퇴지요. 병법에도 이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는 필수적이라고 했소. 여기서 쓸데없는 힘을 낭비할 게 아니 라 후일을 기약하자는 말이오." 그제서야 음적양은 얼굴이 풀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온삼호님의 고견에 동감하는 바이오. 그럼 어서 물러납시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한데 그와 도중웅이 막 숲속 으로 몸을 날리려는 순간, "호호!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회서방의 부총호법과 온삼호께서 단 한 사람이 무서워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면 천하인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 어디선가 여인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 나오더니 장내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긴 녹색 치마에 보라빛 단삼을 입었는데, 그 용모가 가히 경국지색이었다. 얼굴은 참외같이 생겼고, 송편 같은 코에 입술은 도톰하니 불그스름하여 절로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예뻤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미간에 살기가 짙게 서려 있어서 감히 똑 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었는데, 그게 또 오히려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보였다. 강옥봉 또한 난데없는 녹의미녀의 출현에 의아심을 느끼고 손을 멈추 었다. 그때는 이미 열두 명의 흑의인들 중에서 겨우 네 명만이 살아남아 있 을 뿐이었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있다가 강옥봉이 칼을 거두자 걸 음아 날 살려라 하고 음적양과 도중웅에게 달려갔다. 음적양은 그 꼴을 보자 내심 한심스럽기도 하고 울화통이 치밀기도 했으나 자신들도 도망가려 했었던지라 그들을 꾸짖지는 못했다. 대신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녹의미녀를 노려보며 노성을 질렀다. "누가 도망친다는 거요?" 녹의미녀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건 당사자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매요." 음적양은 일시지간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미간에 싸늘한 살기를 떠올렸다. "본 방의 일에 외인은 절대 간섭을 할 수가 없는데 낭자는 어 찌 우리 일에 끼여드는 거요? 좋게 말할 때 어서 떠나시오." 녹의미녀는 돌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그깟 회서방이란 이름이 그토록 대단한가요? 본 낭자는 꼭 이번 일에 끼여들어야겠어요." "흐흐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소." 음적양은 음산하게 웃으며 네 명의 흑의인들에게 매서운 시선을 돌렸 다. "저 여자를 해치운다면 조금 전에 쫓겨온 일을 더 이상추궁하지 않겠 다." 네 명의 흑의인들은 얼굴에 크게 기뻐하는 표정을 떠올렸다 원래 회서방의 규율은 극히 엄격하여 적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음적양도 아까 도중웅에게 의견을 물어 같이 몸을 빼려 했던 것이다. 흑의인들은 음적양을 향해서 허리를 숙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부총호법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녹의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이들을 보고 있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연검을 뽑아 들었다. 창!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싸늘한 검광이 뿜어 나왔다. 네 명의 흑의인들은 기세 등등하게 그녀에게 다가서다가 그녀의 수중 에 들린 검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뿜어 나오자 내심 움찔했다. 순간 녹의미녀는 검을 옆으로 세우며 기이하게 그어댔다. 쑤아악! 한 줄기 싸늘한 한광이 무서운 기세로 뻗쳐 갔다. 흑의인들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각기 병기를 휘두르며 맞서 갔으나 그녀의 검은 괴이하게도 기세가 강맹하여 사면팔방이 모두 검영 에 휩싸여 도저히 맞서서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몸을 옆으로 피하면서 허겁지겁 물러섰다. 한편 강옥봉은 그녀의 검식이 보통이 아닌 것을 알고 신경을 기울여 검식의 변화를 관찰했다. 이때 네 명의 흑의인들은 우레와 같은 고합을 지르면서 일제히 사나 운 기세로 녹의미녀에게 덮쳐 들었다. "야압!" 획! 휘획!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기합 소리와 병장기 소리가 귀를 진동시키면서 다섯 사람은 한데 어우러졌다. 녹의미녀는 검을 교묘히 휘둘러 옆으로 쳐내고 위로 밀치면서 막더니 돌연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파파팍! 그녀의 검식은 과연 괴이하여 네 사람의 검을 막음과 동시에 한사람 의 가슴을 그대로 베고 지나갔다. "크아악!" 흑의인 중 한 명이 가슴이 쩌억 갈라진 채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나머지 세 명의 흑의인들은 그녀의 악독한 검세에 놀라 안색이 창백해졌다. 검에서 풍겨지는 살기는 당장 피를 부를 것 같았고 맹렬 한 기세는 노도와 같았다. 파파파파! 그녀의 검은 수천, 수만 개의 검영을 뿌렸고 상대방들은 그녀의 검을 분간하지 못했다. "크악!" 다시 한 명의 흑의인이 미처 그녀의 검을 막지 못하고 목이 잘려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남은 두 명의 흑의인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죽기 아니 면 살기라는 각오로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미친 듯이 공격했다. 그 러나 그녀는 신형을 더욱 교묘하게 움직여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허 점을 노려 느닷없이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관전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신비스런 검법과 민첩한 동작에 내심 탄복하고 있었으며 강옥봉은 계속 그녀의 변화하는 검식을 자세히 관 찰하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검을 앞으로 쭉 뻗으며 접근하다가 홱 올려치고는 다시 사나운 기세로 내리그었다. "케에엑!" 또 한 명의 흑의인이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것을본 음적양과 도중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동시에 몸을 날려 장내에 뛰어들었다. 하나 그녀는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그들이 덮치 기도 전에 다시 매섭기 그지없는 일검을 날리고 있었다. "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리며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흑의인이 가슴을 움켜잡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런 망할년!" 도중웅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향해 주 먹을 마구 휘둘렀다. 꽤애액! 질풍 같은 권세가 그녀에게 몰아쳐 왔다. 하나 그녀는 어느새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도중웅의 권세를 피한 후 뭔개같이 몸을 날리면서 그의 가슴과 목을 향해 각기 이 검 씩을 날렸다. 도중웅은 간담이 서늘해져서 허겁지겁 허리를 굽혔다. 하나 어느새 그 어깨 부근 옷자락이 잘려져서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녹의미녀는 추호도 공격을 늦추지 않고 다시 도중웅에게 다가들며 섬 같은 공격을 가했다. 파파파! 장내는 살기가 번뜩이며 먼지가 자욱하게 날렸다. 도중웅은 몇 차례 공격을 가했으나 그녀의 날카로운 검세에 밀려 점차 열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음적양은 내심 잽싸게 생각을 굴렸다. '저 계집의 검법은 내가 나서도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겠군. 게다가 한쪽에서는 무영신룡단혼도가 버티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더 지체해 봐야 이로을 게 없겠다!' 그때 녹의미녀가 검을 괴상하게 앞으로 뻗으며 밀어 나가다가 돌연 도중웅을 향해 세차게 가로 그었다. 순간 도중웅의 엄밀한 권세가 깨어지며 그의 가슴이 환히 드러났다. 음적양은 그것을 보고 벽력 같은 고함과 함께 일장을 날렸다. "얍!" 와르릉! 음양수의 가공할 기세가 노도처럼 녹의미녀를 향해 몰아쳐 갔다. 녹의미녀는 힐끔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보다가 상대의 장공에 붉고 횐 기류가 섞여 있는 것을 보고 놀란 경호성을 터뜨렸다. "앗! 음양수?" 그녀는 다급히 검을 회수하며 허공으로 이 장 가량 솟구쳐 올랐다. 꽝! 폭음이 터지며 눈보라가 세차게 휘날렸다. 음적양이 쏘아 낸 음양수가 헛되이 바닥을 강타해서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냈다. 그 찰나적인 순간에 음적양은 도중웅의 손을 잡고 번개같이 숲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실로 신속하기 이를 데 없는 동작이었다. 녹의미녀는 설마 음적양이 이렇게 도망쳐 버릴 줄은 몰랐는지라 허공 에서 내려오며 쓴웃음을 지었다. "비겁한 자식! 그러고도 감히 사대공자라고 자처하다니……" 장내는 다시 고요해졌으나 아직도 살기가 풍겨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 고, 네 구의 시체는 징그럽게 나동그라져 있었다. 이때 강옥봉이 녹의미녀에게 다가오며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낭자, 오늘 도움을 주션서 감사하오." 그는 비록 그녀의 출현이 썩 달갑지는 않았으나 예의를 잃지 않기 위 해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나 그녀는 쌀쌀하게 웃었다. "좋아할 것 없어요. 당신이 바로 무영신룡단혼도인가요?" 강옥봉은 조금 눈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돌연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내놓으세요." 강옥봉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뭘 말이오?" "유령동부에서 얻은 유령천자의 비급 말이에요." 강옥봉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돌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이제 보니 낭자도 그것을 노리고 왔구려. 낭자는 성심장에서 왔소?" 녹의미녀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더니 싸늘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요. 이총관에게 들으니 당신이 별안간 나타나 유령동부의 보물 을 강탈해 갔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좋게 말할 때 어서 그것들을 내 놓으세요" 강옥봉은 내심 어이가 없어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내가 왜 그걸 내놓아야 한단 말이오?" 그녀는 길다란 눈썹을 치켜세웠다. "당신이 본 장의 계대망에게서 옥정검을 훔쳐 갔잖아요? 그렇지 않았 다면 당신은 유령천자의 비급을 구경도 해보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 니 우리는 그걸 되찾을 권리가 있어요." 이제껏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조옥환이 쌍심지를 돋우며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강옥봉이 눈짓으로 그녀를 제지하며 재빨리 말했 다. "옥정검은 원래 욱일거사 나후의 소유였소. 그걸 회서방이 탈취했다 가 하장청에게 빼앗기고, 다시 하장청은 계대망에게 강탈당했던 거 요. 그렇게 따지자면 오히려 성심장보다는 욱일거사 나후에게 권리가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 아니겠소?" 그의 조리있는 말에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하나 그녀는 다시 냉소를 치면서 버럭 역정을 냈다. "그렇게 복잡한 건 난 몰라요. 어서 비급을 내놓든지 아니면 내 검을 받을 각오를 하세요." 강옥봉은 그녀가 억지를 부리는데도 오히려 입가에 담담한 웃음을 머 금었다. "하하! 검을 쓰기 전에 우선 낭자의 방명이나 알려 주시오." "나는 무정독연 냉상아예요." 강옥봉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를 주시하며 빙글거렸다. "아! 그렇구려. 오늘 아침에 소호가에 내린 서리가 아주 무정하 더니 낭자의 외호도 무정하구려." 냉상아는 앙칼진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당신은 괜히 쓸데없는 말로 나를 놀리려들지 말고 어서 가부간 결정 을 하세요. 비급을 내놓겠어요, 아니면 내 검을 받아 볼 테예요?" "유령천자의 비급은 내가 어렵게 입수한 것이니 낭자의 말 한마디에 쉽사리 내줄 수는 없소. 그리고 조금 전에 낭자의 검을 잘 구경했지 만 그걸로는 나를 어쩔 수 없을 거요." 냉상아는 코웃음을 쳤다. "흥! 배짱이 두둑하시군요." "낭자가 내 말을 믿든 말든 그건 상관하지 않겠소. 하지만 보물은 이 미 임자가 정해졌으니 낭자는 허튼 욕심을 부리지 말고 어서 돌아가 시오." 냉상아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당신은 정말 오만무도하굴요. 당신에게 과연 그렇게 큰소리칠 자격 이 있는지 보겠어요." "낭자는 정녕 나와 꼭 겨루어야 하겠소?" "그래요." 다시 옆에 서 있던 조옥환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강옥 봉은 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이어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눈으로 냉상 아를 바라보았다. "나는 여자들과 싸우는 것을 싫어하오. 그러나 낭자가 정히 고집을 부리겠다면 십 초로 초수를 정하여, 내가 만일 진다면 깨끗 이 낭자에게 비급을 바치겠소. 그 대신에 만약 낭자가 패한다면 이대 로 조용히 떠나 주시오." "좋아요." 냉상아는 즉시 검을 비껴 차면서 노도와 같은 검광으로 강옥봉에게 접근하여 공격했다. 그녀의 공격은 워낙 신속하고 빨랐는지라 그녀의 입에서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검은 강옥봉의 가슴팍에 거의 육박하고 있었 다. "하하하!" 강옥봉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녀의 검이 다가서기를 기다렸다가 슬쩍 두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몸이 기이하게 흔들리더니 그토 록 날카롭던 냉상아의 검이 헛되이 허공를 가르는 것이 아닌가? 냉상아는 강옥봉의 신묘한 몸놀림에 흠칫 놀랐으나 더욱 세차게 검을 휘둘러댔다. 파파팍! 사나운 검기가 주위 사방을 질풍 노도처럼 쉽쓸고 지나갔다. 하나 강옥봉은 그 엄밀한 검세 속을 마치 장난하듯 가볍게 움직여 혜 쳐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눈 깜박할 새에 여덟 초가 물같이 흘러가 버렸다. 랭상아는 돌연 검을 멈추었다. 강옥봉도 따라서 움직이던 몸을 멈춰 세웠다. 냉상아는 기이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 다. "알았어요. 당신은 이미 유령보의 절학을 터득했군요?" 강옥봉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낭자의 두뇌는 정말 비상하오." 냉상아는 그의 비꼬는 말에도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검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일순 그녀의 눈에 독살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유령보를 익혔다고 내 검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 에요." 이어 그녀는 느릿느릿 수중에 든 검을 가슴 앞으로 세워 들었다. 양손으로 검을 잡은 채 자신의 가슴 앞에 우뚝 세우는 특이한 자세를 보자 강옥봉은 전신이 아연 긴장되었다 한눈에 그는 이번에 그녀의 일검이 절대로 만만히 볼 수 없는 놀라운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두 손으로 검을 쳐든 채 지그시 눈을 감으며 구결을 암송했 다. 순간, 우우웅…… 마치 벌떼가 날아가는 듯한 음향이 들려 오며 그녀의 검에서 돌연 불 그스름한 검광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석양이 지면서 붉은 노을이 피어오르는 것과 흡사한 광경이었다. 그 광경을 보자 강옥봉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대경 실색하여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낙일검!" 그 순간 그녀의 수중에 들린 검이 무섭게 요동을 쳤다. 동시에 그녀 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노을이 갑자기 확장되며 강옥봉의 전신을 뒤덮는 것이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강옥봉은 미처 유령보를 전개할 틈을 놓쳐 버렸다. 강옥봉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번개같이 천룡보도를 뽑아 휘둘렀 다. 차차창!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터지며 무섭게 확산되었던 붉은 노을이 씻은듯이 사라져 버렸다. 냉상아와 강옥봉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강옥봉의 수중에는 어느새 천룡보도가 섬뜩한 도광을 발하며 쥐여져 있었다. 냉상아의 왼팔 옷소매는 팔뚝 부근까지 길게 찢어졌으나 핏발은 보이 지 않아상처는 입지 않은 것 같았다. 한편 강옥봉은 인피면구에 매달 린 수염이 싹둑 잘라져 약간 우스왕스러운 모습이 되어 있었다. 하나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냉상아는 옷소매를 내려다보더니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강옥봉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내 팔을 자를 수도 있었는데 왜 마지막에 가서 손끝을 늦추 었죠? 내가 여자라서 사정을 봐준 건가요?" 강옥봉은 잘려진 수염을 쓰다듬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낭자의 착각이오. 난 최선을 다했소이다." 냉상아는 그의 말이 못 미더운 듯 눈을 살짝 치켜 떴다. "그게 정말이에요?" 강옥봉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잘려진 수염을 가리켰다. "이게 바로 그 증거이지 않소? 하마터면 목이 잘려질 뻔했는데 어찌 남의 사정을 봐줄 여유가 있었겠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한 사람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느냐고 다그치고 다른 한 사람은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았노라고 강변하고 있으니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기광을 번뜩인 채 강옥봉을 응시하고 있던 냉상아는 문득 입 을 열었다. "이제 보니 당신은 역용을 하고 있었군요?" 강옥봉은 움찔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아시오?" "수염이 잘려진 부분의 피부색이 다른 곳과 조금 달라요." 알고 보니 수염이 잘려지면서 인피면구도 조금 잘려져 그 바람에 인 피면구 안에 있던 강옥봉의 본래 얼굴색이 살짝 드러났던 것이다. 강옥봉은 보쓸하게 웃으며 인피면구를 벗었다. 그러자 그의 절세적인 풍모가 드러났다. 냉상아는 두 눈을 반짝거린 채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당신의 진짜 얼굴인가요?" "그렇소. 실망을 끼쳐 드려 죄송하오." 냉상아는 돌연 뜻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에서 무영신룡단혼도가 나이 어린 소년영웅이라는 소문이 있어 도 믿지 않았는데 사실이었군요……" 그녀는 돌연 검을 다시 허리춤에 차고는 착잡한 표정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나는 비록 당신에게 패해서 이대로 물러가지만 본 장에서는 계속 당 신을 노릴 거예요." 이어 한 번 더 각별한 눈으로 강옥봉의 준수한 얼굴을 주시한 후 몸 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강옥봉은 그녀가 떠날 때 던진 기이한 시선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며 한동안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하나 한 가지 사실만은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 한 자루 검에서 피처럼 붉은 노을이 피어오를 때면 천하의 그 무 엇도 당해 낼 수 없다. 바로 그 전설의 낙일검이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만은…… 제25장 진회하 매하 매하는 소호의 서북쪽에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마을 전체가 매화에 뒤덮여 한겨울이면 매화 향기가 가득하고 하얀 매화꽃이 만발해 일대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저녁 무렵. 매하의 마을 입구에 절세의 풍모를 지닌 두 남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강옥봉과 조옥환이었다. 강옥봉은 인피면구가 찢어졌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군계일학 같은 그들의 뛰어난 용모는 지 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강옥봉의 영준한 외모와 굳건한 기 상은 뭇사람들의 호팜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한데 그들이 매하로 막 들어설 즈음이었다. 돌연 한 명의 절름발이 늙은 거지가 앞을 가로막으며 구걸을 청했다. "나으리, 한푼 줍쇼. 이 늙은 것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강옥봉은 무심코 은전 한 닢을 꺼내 늙은 거지의 손에 쥐여 주다가 그의 손에 똘똘 말은 종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그러자 늙은 거지가 은전을 받는 척하며 눈짓을 해보여 강옥봉은 총 망간에 종이 쪽지를 집어 들었다 "나으리, 고맙습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늙은 거지는 은전을 받아 쥐고 몇 번이나 허리를 굽신거린 뒤 총총히 발길을 돌렸다. 조옥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속삭이듯 물어 왔다. "저 늙은 거지는 소협의 동도예요?" "글쎄, 나는 저 사람을 모르오." 잠시 후 성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어느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접어 들어 종이를 펼쳐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쓰여 있었다. <냉상아는 원래 성심장주가 총애하는 여인으로 성격이 오 만하고 자신의 무공에 대한 긍지가 대단한데, 이번에 자네에게 낭 패를 당해 크게 낙담하고 운하를 통해 금룽으로 가고 있네. 한데 그 뒤를 음적양과 도중웅이 은밀하게 뒤쫓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냉상아가 성심장의 주요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그녀를 사로잡아 성심장의 비밀을 알아 내려는 속셈인 듯하네. 만일 냉상아가 그들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자칫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 될지 모르니 자네가 어서 금릉으로 가서 은밀히 그 녀를 지켜보고 있다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구해 주도록 하게. 자네가 그녀를 잘만 이용한다면 우리는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르네. 자네의 건투를 빌겠네. 치수재 악궁.> 편지를 다 읽고 난 강옥봉은 얼굴을 굳히며 조옥환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낭자와는 이쯤에서 헤어져야 할 것 같소." 조옥환은 어리등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자는 왜 저와 헤어지려고만 하세요?" 강옥봉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 금릉으로 가는 길은 비단 흉험할 뿐 아니라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모르오. 그런데 낭자는 아직 유령천자의 무공을 익히지 못 한 상태요. 그러니 더 이상 나와 함께 동행하다가는 오히려 낭자가 복수하는 데 방해가 될지 모르오. 낭자는 우선 안전한 곳으로 가서 유령천자의 무공을 완벽하게 익히시오. 그 다음에 강호에 나와 다시 만납시다." 조옥환은 그의 말을 듣고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녀는 정말 강옥봉과 헤어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하나, 강옥봉의 말대로 그녀에게는 꼭 갚아야 할 피빛이 있지 않은 가? 아직 무공을 완벽하게 터득하지 못한 상태로 그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녀는 냉상아를 만난 이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 다. 또한 이런 상태로는 복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그녀는 잘 알 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채 상념에 잠겨 있자 강옥봉은 탄식을 토했다. "낭자, 그럼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 조옥환이 깜짝 놀라며 쳐다보았을 때는 그는 이미 수십 장 밖으로 달 려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 다. 심신을 사로잡는 좌절감…… 은연중에 한껏 부풀어올랐던 기대가 일 시에 산산조각나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조옥환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귀에 익은 음성이 바람을 타고 바람을 타고 들려 왔다. "옥환아!" 조옥환이 깜짝 놀라 급히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돌아보니 조금 전 에 강옥봉에게 종이 쪽지를 전해 주었던 늙은 거지가 삼 장밖에 홀 연히 서 있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늙은 거지는 히죽 웃더니 얼굴에서 한 장의 인피면구를 벗겨 내었다. 그 아래 나오는 얼굴을 보자 그녀의 눈에서 기쁨에 찬 빛이 흘러나왔 다. "어머, 방 백부님!" 드러난 얼굴은 바로 강호제일의 경공 대가인 천리일순 방각이었다. 원래 방각은 조옥환의 선부인 신수검객 조비홍과 절친한 사이로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각별히 귀여워해 준 사람이었 다. 나루터의 주루에서 젓가락을 두들겨 신호를 보냈던 이도 바로 방각이 었다. 방각은 조옥환 앞으로 다가섰다. "네가 강 소협과 함께 유령동부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걱정했 었다. 다행히 기연을 얻어 유령천자의 비급을 구한 모양이구나." "예, 그분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녀는 또다시 격한 감정이 들어 말을 맺지 못했다. 방각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커다란 탄식을 토해 냈다. "아…… 네 아버지가 마화도인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노부 는 무공이 미약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이제 네가 유령천자 의 무공을 얻었다니 이 백부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이게 모두 지하에 계신 네 아버지의 영혼이 너를 굽어살핀 덕이 아니겠느냐!" 조옥환은 눈물을 흘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측은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방각이 돌연 정색을 했다. "이 백부가 네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대답해 주겠느냐?" 조옥환은 눈물을 그치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해 보세요." "너 혹시 강 소협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조옥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었다. 부친이 살아 계실 적에는 한 지역을 장악하는 권세를 떨쳤기 때문에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권세에 반해 구애를 해온 영준한 사나이 들은 이루 혜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나 그녀는 눈도 돌리지 않았었다. 한데 무뚝뚝하기만 한 강옥봉에겐 왠지 정신없이 빠져 드는 것이다. 방각은 조옥환을 어렸을 때부터 쭉 보아 와서 그녀의 성품을 잘 아는 지라 한동안 말이 없다가 긴 한숨을 지었다. "네가 강 소협에게 정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강 소협은 인품과 기질이 비범해서 당금 천하에서 제일가는 기재라 할 만하지. 이 백부가 보건대 강 소협은 무정한 사람이 아니지만 두 어깨에 너무 도 막중한 임무를 떠받치고 있는지라 남녀의 애정을 일부러 외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도 너의 깊은 정을 받아들일 것이다." "……" 조옥환은 자신도 모르게 처량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방각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자! 힘을 내거라. 네게는 갚아야 할 원한이 있지 않느냐? 강 소협의 말대로 우선은 네가 유령천자의 무공을 익히는 게 급선무다. 나중의 일은 이 백부가 최선을 다해 성사시켜 주마." 조옥환은 묵묵히 그를 따라 걸어갔다. 곧 두 사람의 모습은 어두워 오는 밤 그림자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 * * 어느덧 봄이 가까워졌다. 드넓은 평원 저편에서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피어오르고 만산에 는 푸르름이 숲을 이루고 싱그러운 풀 내음은 바람을 타고 상쾌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금릉성! 휘휘 늘어진 버들가지 사이로 손에 손을 맞잡은 다정스런 연인 들이 쌍쌍이 거닐며 밀어를 속삭이는, 바야흐로 완연한 봄날이 었다. 강남의 고도, 금릉에도 봄의 그림자는 어느새 짙은 나래 를 펴고 있었다. 금릉의 옛 이름은 강녕이었다. 옛날 초나라의 도읍이었고, 삼국 정림 시대에는 오나라의 수도로 건업이라 불렀다. 또 한 동진 이후에는 남조의 수도로서 건강이라고도 불렸다. 그 후 많은 변천을 거쳐 명나라 초기의 제도가 되었으나 영락제가 도 읍을 북평으로 옮기고부터 이 지방을 남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명승지가 많았고, 웅장한 육조 시대의 고루거 각들이 곳곳에 늘어서 있었다. 금릉성 안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위치한 부자묘는 사방에서 대낮같이 밝혀진 불빛에 의해 더욱 돋보였다. 성내는 상점과 객점들 이 줄을 이었고, 삼교구류 등 어중이떠중이들이 와글거렸 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 유명한 진회하가 있다. 진회하는 천하제일의 홍등가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을 뿐 만 아니라 부근에 명승 고적이 많기 때문에 사시사철 유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강에는 어선과 화방들이 휘황한 등불을 밤새도록 켜놓 고 있었으며 화방 안에는 풍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많은 화방들 중에서도 제법 멋지게 보이는 한 척의 배가 하류 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 배가 저쪽 언덕에 가까워지자 돌연 안에서 고운 목소리가 들려 왔 다. "이제 다 왔군요." 그러자 뱃머리에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나오더니 닻을 내리고 언덕 위로 뛰어내렸다. 노파는 언덕 위에 있는 몇 채의 작은 청루 중에서 제일 옆에 있는 청루 앞으로 가더니 싸리문을 가볍게 열었다. 그 노파의 뒤를 이어 화방 안에서 냉상아와 검을 맨 소녀 셋이 급히 나오더니 언덕 위의 노파가 열어 놓은 청루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냉상아는 아담하고 작은 대청 안으로 들어가 노파에게 말했다. "화방 안에서 반나절이나 시달렸더니 너무 피로하군요. 아…… 잠이 나 자야지." 노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는 매우 시장하실 테니 내가 음식을 준비하지요." 그러나 냉상아는 손을 저었다.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요. 그보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곳 이 발각되면 큰일이니 신중하게 행동해야 해요." 노파는 그녀의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살폈다. "아가씨의 무공은 이장주님에게 직접 전수받아 당금 무림에 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왜 남을 무서워하치요?" 냉상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혜산에서 만났던 무영신룡단혼도의 무공은 정말 무서웠어요. 그래서 나는 일시적인 자비심 때문에 그에게 선수 를 당하여 소맷자락이 찢어지기까지 했어요." 노파는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평소 아가씨의 솜씨는 악랄하고 냉정한데 왜 그자에게는 자비심을 베풀었나요?" 그러나 냉상아는 서릿발같이 싸늘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노파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며 즉시 화제를 돌렸다. "이곳은 아주 은밀하고 안전하니 아가씨께서 마음 푹 놓으시고 편안 히 쉬세요." 순간, 어둠 속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흐흐…… 그렇게는 못 할걸. 본 방은 이미 이곳이 성심장의 금릉분 타임을 알고 있었소." 그와 함께 몇 명의 인물이 대청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그들의 선두에 서 있는 인물은 바로 음양공자 음적양과 금시조 도중 웅이었다. 눈치가 빠른 냉상아는 이내 그들이 자신의 뒤를 밟아 왔음을 깨닫고 벌떡 일어나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음적양! 내가 특별히 인정을 베풀어 혜산에서 살려 주었는데, 어찌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내 뒤를 따라 이곳까지 나타났단 말이냐?" 음적양이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흐! 낭자가 화를 내는 모습은 더욱 아름답구려. 이 음 모 는 한번 당한 빛은 꼭 갚고야 마는 성미요. 그래서 오늘은 낭자 의 야들야들한 몸을 안는 것으로 그 빛을 갚으려 하는데 낭자의 의향 은 어떻소?" 도중웅이 옆에서 피식피식 웃으며 이죽거렸다. "흐흐흐! 부총호법은 냉 낭자를 보더니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이구 려." 음적양도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렇게 예쁘고 아리따운 낭자에게 차마 살수를 쓸 수는 없지 않겠소? 흐흐흐……" 냉상아는 얼굴에 무서운 살기를 띠고 사납게 쏘아보고 있다가 냉소를 쳤다. "이제 보니 네놈은 비겁할 뿐 아니라 흉악하기 그지없는 음적 이로구나, 네놈은 필시 지금까지 많은 선량한 아녀자들을 욕보였을 테니 오늘 본 낭자가 네놈을 죽임으로써 강호여인들을 위 해 후환을 거해 버리겠다." 동시에 그녀는 허리춤에서 연검을 뽑아 들고 음적양을 향해 날아들었 다. 음적양은 비록 입으로는 농담을 걸고 있었으나 그녀의 무공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이미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즉시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그녀의 매서운 일격을 피한후 대소 를 터뜨리며 쌍장을 휘둘렀다. "하하하! 낭자가 이렇게 급히 내게 안기고 싶어하는 줄은 몰랐소. 어 서 오시오! 잠시 후에 우리 한번 신나게 즐겨 봅시다." 냉상아가 비록 성격이 차갑고 무정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엄연한 여인 이었다. 어찌 음적양의 이와 같은 음탕한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불같이 노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더욱 사납게 검을 휘둘렀 다. 팍! 팍! 팍! 날카로운 검기가 질풍처럼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하나 음적양은 비호처럼 몸을 날리며 그녀의 공세를 피해 갔다. 한편 노파와 세 명의 소녀들도 일제히 도중웅과 회서방의 고수들에게 맹렬히 덮쳐 갔다. 노파는 철장을 휘두르며 도중웅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쳤다. "이놈!" 도중웅은 버럭 폭잘을 터뜨리며 슬쩍 철장을 피한 후 번개같은 일권 을 내갈겼다. 쾅! 폭음이 터지며 노파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그녀의 얼굴을 백 지장처럼 핼쑥해진 채 매서웠던 안광도 급격히 흐려져 있었다. 단 한 주먹에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도중웅은 단번에 노파를 격상시킨 후 허공으로 번개같이 몸을 날려 세 소녀에게 덮쳐 들었다. 가히 금시조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신묘한 몸놀림이었다. 세 명의 소녀는 막 회서방의 고수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다가 등뒤에 서 매서운 경력이 밀어닥치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돌렸으 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파파팍! 도중웅의 양손이 번개같이 움직이며 세 소녀의 혈도를 짚자 그녀들은 신음도 내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과연 회서방의 삼호 온서에 부끄럽지 않은 절묘한 무공이었다. 음적양을 공격하면서도 한쪽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냉상아는 눈 깜박할 사이에 노파와 세 명의 소녀가 도중웅에 의해 쓰러져 버리자 절로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음적양은 어찌 된 일인지 반격은 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며 연신 음담패설을 지껄이고 있었다. "흐흐…… 낭자의 탱탱한 젖가슴은 그야말로 일품이구려 보기만 해도 이렇게 침이 넘어가니 실제로 맛을 보면 얼마나 황홀하겠소?" "죽일놈……!" 냉상아는 이를 부드득 갈며 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파파파팍! 이미 대청 안은 그녀가 내뿜는 검기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음적양 또한 그녀의 검세를 막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하나 그는 음양수를 살지 않은 채 연신 몸을 날려 피하며 기회를 엿 보았다. 마침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도중웅이 쓰러진 세 소녀에게 다가가자 음적양을 공격하고 있던 냉상아의 눈이 아주 잠깐 그쪽으로 돌려졌던 것이다. 그 순간은 가히 눈 한 번 깜짝할 사이도 되지 않았으나 음적양 같은 절세고수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음적양은 즉시 그녀에게 덮쳐 들며 오른쪽 소매를 세차게 흔들었다. 쾌쾌쾌! 무언가 시커먼 광채가 허공을 잔뜩 뒤덮으펴 냉상아의 전신을 향해 퍼부어졌다. 냉상아는 깜짝 놀라 급히 엄밀한 검세를 휘둘러 그 광채들을 막았다. 차차창!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광채의 태반은 그녀의 검기에 막혀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하나 그 중 몇 가닥은 그녀의 검세를 뚫고 여지없이 다리 쪽에 격중 되고 말았다. "음……" 그녀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며 교구가 휘청거렸다. 그제서야 음적양은 득의 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하하하…… 낭자는 이미 절명탈혼사에 격중되었으니 함부로 몸을 움직 인다면 그대로 즉사할 것이오. 그러니 순순히 내 품에 안기시오." 이어 그는 비틀거리며 서 있는 그녀의 완맥을 움켜쥐려 했다. 그때 돌연 그녀가 두 손으로 힘겹게 검을 움켜잡으며 느릿느릿 가슴 팍으로 옳겨 세웠다. 그와 한께 두 눈을 사르르 감으며 무언가 중얼 거리자 그녀의 검에서 붉은 노을이 아로새겨지는 것이 아닌가? 막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려던 음적양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그녀 의 검을 보자 대경 실색하며 있는 힘껏 뒤로 물러났다. "나…… 낙일검이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도중웅을 비롯한 회서방의 고수들도 그의 외침을 듣자 놀라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들의 몸이 사라진 직후, "으음……" 그녀는 짤막한 신음을 토하며 검을 놓치고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버 렸다. 사실 그녀에게는 지금 낙일검을 시전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녀는 마 지막 공력을 끌어모아 낙일검을 펼치는 흉내만 내었던 것이다. 하나 음적양은 그것도 모르고 상대의 검에서 노을빛 검광이 뿜어 나오는 것에 놀라 허겁지겁 도망을 치고 말았다. 냉상아는 낙일검강을 끌어올리느라 진력을 너무 소모시켜 서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 낭랑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낭자의 동작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큰일났을 텐테 정말 적시에 낙 일검을 운용했구려." 냉상아는 대경 실색하여 급히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달빛이 내리비치는 담장 밑에 용모가 준수하고 몸에 청삼을 걸친 소년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그녀는 그가 혜산에서 만났던 강옥봉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당신은 무엇 하러 또 이곳에 오셨어요?" 강옥봉은 미소를 지었다. "낭자는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낭자가 부상당한 틈을 타서 괴롭히려는 그런 사람은 아니오. 조금 전에 음적양이 사총했던 절명 탈혼사는 칠대금용암기 중에서도 세 번째에 속하는 악독한 것이니, 낭자는 어서 그것을 뽑아 내고 치료하도록 해야 할 거요." 냉상아는 앙칼진 음성으로 외쳤다. "그까짓 암기가 감히 날 상하게 할 것 같아요?" "앞으로 한 시진만 더 지나면 치료할 수 없을 텐데 어찌 내 말을 우 습게 여기시오? 나는 절대로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 낭자 는 내말을 명심해서 속히 치료하도록 하시오. 그럼……" 그가 짐짓 발길을 돌리자 냉상아의 안색이 돌변했다. "잠깐……" 강옥봉은 일부러 의아스런 표정을 짓고 시선을 돌렸다. "무슨 할말이라도 있소?" "단지 그 말을 해주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거예요?" "그렇소. 만약 음적양이 비겁한 수단으로 낭자를 암산하지 알았다면 나는 절대로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요." 강옥봉이 금시라도 떠날 자세를 취하자 냉상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 으며 전신에 경련이 일어났다. 안색 또한 더욱 파리하게 변했다. 강옥봉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아마 낭자의 상세가 발작하는 모양이니 만약 나에 대한 적의 만 버린다면 한번 치료해 줄 용의가 있소." 냉상아는 노기를 띠며 급히 손을 저었다. "나는 남의 은혜는 조금도 받을 뜻이 없으니 잔소리 말고 어서 꺼지 세요." 순간 강옥봉이 어느새 그녀에게 접근하여 번개같이 혈도를 찔러 갔 다. 냉상아는 몸을 급히 옆으로 틀면서 외쳤다. "뉘 앞에서 감히……!" 그녀는 다섯 손가락으로 기묘한 일식을 펼쳐 강옥봉의 완맥을 움켜잡 으려 했다. 그러나 강옥봉의 동작이 더욱 빨랐다. 그는 손을 급히 움직여 한 줄 기 지풍을 매섭게 튕겨 냈다. 팟! 냉상아는 흉복부가 마비되어 옴을 느끼면서 전신의 진력이 풀려 얼굴 에 화색을 잃었다. 그녀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네가 감히 날 욕보이려 하다니…… 죽어 악귀가 되어 뼈를 갈아 마시겠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떨면서 쓰러지자 강옥봉은 냉상아의 옷을 차분한 태도로 벗겼다. 냉상아는 눈앞이 아찔했다. 욕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는 것이 좋겠 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결할 기회를 노리면서 눈물만 마구 흘렸다. 강옥봉은 그녀의 옷을 벗기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고 끓어오 르는 욕정을 꾹꾹 눌러 참았다.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과 고운 피부. 그리고 넋을 빼앗아 갈 것 같은 향긋한 체취는 사나이라면 한 번쯤 넘겨다보았을 것이었다. 그녀의 상처는 허벅지 위로 교묘한 부분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강 옥봉의 손이 저절로 떨렸다.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여색을 싫어 하는 사람이라도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의 용모와 눈부시도록 고운 피 부를 본다면 동요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강옥봉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억눌러 참았다. 한동안 그녀의 상처를 관찰하던 강옥봉은 주머니에서 자석을 꺼내어 상처 부위에 갖다 대었다. 잠시 후 그 자석에서 이십여 개의 소털같이 생긴 남색 절명탈혼사가 흡수되어 나왔다. 강옥봉은 백지를 깔고 절명탈혼사를 싸놓은 다음에 예리한 비수로 상 처를 찢었다. 그러나 독혈이 조금도 나오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절명탈흔사가 이처럼 매서우리라고는 미처 몰랐군. 조금만 늦었어도 낭자의 생명은 위험했을 게요." 냉상아는 그가 자기의 나체를 보고도 아무런 욕정을 표시하지 않고 눈초리가 야릇하게 변하지도 않자, 그제서야 그가 보기 드문 정인군 자라는 것을 알았다. 강옥봉은 다시 우장을 그녀의 명문혈에 밀착시키고 한 가닥 뜨거운 순양진력을 점차 투입시켰다. 그러자 그녀는 기분이 점차 상쾌해지는 것을 느졌으며 상처에서 검붉 은 독혈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심장 부위로 침투했던 독혈이 강옥봉 의 지순한 태극혼원신공의 힘에 의해 다시 밖으로 밀려나온 것이다. 강옥봉은 그녀의 옷을 하나 하나 다시 입혀 준 후 쓰러져 있는 세 소 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세 소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옥봉은 그녀들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고 연이어 냉상아의 혈도를 조 심스럽게 풀어 주고 종이에 싼 절명탈혼사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는 급히 몸을 날려 유령처럼 사라졌다. 냉상아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고,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강옥봉의 손길이 닿았던 곳에 짜릿한 쾌감을 느꼈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끌려 시종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흥분되었다. 그녀는 잠시 강옥봉의 수려한 모습을 그려 보다가 종이 뭉치를 서서 히 풀었다. "앗!" 그녀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십여 개의 절명탈혼 사의 끝에는 검푸른 피가 묻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너무도 감격해서 엉엉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그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매련아!" 그러자 세 소녀 중에서 호리호리한 홍의소녀가 대답했다. "예, 무슨 분부가 계셔요?" "너는 급히 소파파에게 가보아라." 그러자 홍의소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노파에게 달려가 부축하여 일 으켰다. "아가씨, 다행히 소파파께서는 약간의 내상을 입어 기절하셨을 뿐입 니다." 냉상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돌연 기나긴 탄식을 토해 냈다. "음…… 한 번의 실수로 공들였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구나!" 그녀는 잠시 탄식을 토하다가 손짓을 하여 소녀들과 함께 사라졌다. 다시 조용해진 청루에는 조금 전의 흉험했던 격전을 말해 주듯 부서 진 가구들만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제26장 춘강화월야 진회하의 밤은 점점 더 화려하게 깊어 가고 있었다. 벌써 삼경이 지난 지 오래인데도 놀잇배에서는 아직도 풍악 소리가 들렸고, 강물 위를 흐르는 노랫가락도 여전했다. 강옥봉이 한 화방 안으로 들어가자 예쁘게 생긴 가기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공자, 어서 앉으세요." 그녀의 교태스러운 미소와 하느적거리는 몸놀림은 마치 꽃이 예쁘니 사달라는 듯이 보였다. 강옥봉은 담담한 심정으로 술과 안주를 청해 놓고 그 여자와 마주앉 아 술잔을 기울이면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여자는 술이 거나해지자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강옥봉의 곁에 바 싹 붙어 앉았다.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연신 강옥봉의 얼굴을 훔쳐 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강옥봉의 수려한 풍모에 방심이 들끓고 있는 모양이었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각 배에 있던 손님들도 이젠 잠을 자는지, 아니면 술에 곯아떨어졌는지 조용해졌다. 오직 뱃전을 가볍게 때리는 물소리만이 주위에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 다. 이때 돌연 밖에서 가벼운 기침 소리가 들렸다. "강 노제, 안에 있는가?" 강옥봉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악 대협" 한 사람이 화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는 바로 꾀죄죄한 청삼을 걸친 치수재 악궁이었다. 강옥봉은 이곳에서 악궁을 만나기로 하고 지금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 었던 것이다. 악궁이 들어오자 가기는 계면쩍은 듯 아쉬운 표정으로 강옥봉의 곁에 서 조금 떨어졌다. 악궁이 짓궂은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하하하! 두 사람이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내가 방해를 한 것 같군. 자네가 원한다면 다시 나갔다가 잠시 후에 들어오겠네." 가기의 예쁜 얼굴이 홍조로 물들었다. 강옥봉도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악 대협께선 농담도 짤하십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아 시지 않습니까? 어서 자리에 앉으십시오." 이어 가기를 바라보자 눈치를 챈 가기는 일어나서 두 사람에게 공손 하게 인사를 한 후 다른 방으로 갔다. 악궁은 자리에 앉으며 우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아! 좋군. 봄밤에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달빛을 벗삼아 앉아 있으 니 이게 바로 '춘강화월야'가 아닌가?" 강옥봉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악 대협의 풍취가 대단하십니다. 저도 마침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 니다." 이어 그는 춘강화월야의 몇 구절을 나직이 읊어 보았다. "봄날 장강의 조수는 가득 차서 바다와 맞닿았고, 바다 위에는 조수와 더불어 명월이 떠오른다. 달 그 림자는 해면에 빛나 물결 타고 멀리 비추매, 어느 봄 날 강에 또 달리 이런 달빛이 있으리오……" 악궁은 절로 시흥이 일어나 뒷구절을 이어 갔다. "강 줄기는 구불구불 꽃핀 들판을 돌아 흘러, 달빛 이 꽃숲을 비추니 꽃은 마치 싸락눈을 뿌린 듯하다. 하늘에 서리처럼 보이는 것은 아릿한 달빛이요, 강 가의 흰 모래는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강물도 하늘도 달빛으로 맑아 티끌 하나 없고 공중에 홀로 걸려 있는 달은 하얗게 빛나고 있다 이 강기슭에서 달과 처음 만난 사람은 누구며 저 달이 처음으로 사람을 비춘 것은 언제였는가 인간 세상은 영원히 유전하여 끝이 없으며 강월은 해마다 바라보는 모습이 변치 않는다 이 밤의 강월은 누구를 비추는지 알 수 없고 단지 눈앞의 장강만은 예나 다름없이 흐르고 있다 흰 구름 한 조각은 유유히 어디로 흘러가는지 단풍 푸른 청풍포에서 시름에 잠겨 있노라 이 밤에 조각배에서 잠자는 나그네는 누구인가 그의 아내는 지금쯤 달을 보며 그리움에 잠겨 있으리라 가련하게도 아내 있는 다락에서 달은 배회하고 홀로 자는 아내의 경대 위에 비추고 있으리라 문틈에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발로 감으려 하나 사라지지 않고 다듬이 위의 달빛을 떨치려 하나 가지 않는다 이때 두 사람은 서로 그리워하나 소식을 알 길 없고 달빛을 쫓아가 달빛이 되어 임께 안기고 싶다 기러기 길게 메지어 날아가는 곳마다 빛이 가리고 물고기는 수면에 뛰어 물에다 무의를 짓고 있다 지난밤에는 연못에 꽃잎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는데 이미 봄도 거의 지나갔으나 집에 못 가는 신세가 되었다 강물은 봄을 흘려 보내어 이 봄도 가려 하고 강물에 저문 달도 서쪽 하늘에 걸려 지려고 한다 기운 달도 고요히 깊은 바다 안개 속에 숨고 북쪽 알석에서 남쪽 소상까지 떠도는 나그네길 그 중 이 달빛을 따라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지는 달이 강물과 나무에 가득하니 나그네 마음을 한없이 뒤흔든다 …… 한동안 두 사람은 봄밤의 무한한 정취에 잠겨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 고 있었다. 그러다가 악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세상은 원래 이처럼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법인데 몇몇 무리들 때문 에 혈풍이 가실 날이 없으니…… 언제나 강호가 다시 조용해지 려나." 강옥봉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뛰고 있는 게 아닙니까?" 악궁은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하하! 옳은 말일세. 이번에 자네가 냉상아를 구한 건 백번 잘한 일일세. 비록 운봉랑과 곽희연, 두 낭자가 알면 별로 좋아하지는 않 겠지만 말일세" 강옥봉은 얼굴에 쓴웃음을 피워올렸다. "왜 또 그녀들을 들먹거리십니까?" "하하하! 그건 노제가 몰라서 하는 말일세. 자네가 유령동부에 들어 간 이후 두 낭자가 얼마나 안절부절못했는지 아나? 아마 자넨 짐작도 못 할걸세. 자신들의 아버지가 들어갔더라도 그처럼 걱정하지는 않았 을 걸세. 한데 자네가 동부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들을 팽개쳐 두고 엉 뚱한 여자의 뒤치다꺼리를 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녀들이 가만히 있 겠나?" "이건 모두 악 대협께서 지시하신 일이 아닙니까?" "하하! 나야 그녀가 위기에 처하면 도와 주라고만 했지 그녀의 옷을 벗기고 알몸을 감상하라고 하지는 않았네." 강옥봉의 준수한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모두 보셨군요?" 악궁은 익살맞은 눈짓을 했다. "하하! 모두 보지는 못했네. 단지 나는 자네가 그녀에게 옷을 입혀 주는 광경만을 간신히 보았을 뿐이네. 그녀는 아주 감격해 하더군." 강옥봉은 고소를 머금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악궁은 술을 한잔 들이킨 후 장난스런 기색을 거두고 신중한 안색이 되었다. "내가 자네를 급히 보자고 한 것은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어서일 세" 강옥봉은 그의 음성이 심각한 것을 보고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 다. "말씁하십시오." 악궁의 음성도 표정만큼이나 심각해졌다. "방 노인에게 언뜻 듣기로는 냉상아가 우내칠대무학 중 낙일검을 익 히고 있다고 하더군. 그게 사실인가?" 악궁이 말하는 방 노인이란 천리일순 방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강옥봉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화후는 육 성 가량 되더군요." 악궁은 눈을 빛내며 급히 물었다. "그녀와 손속을 겨뤄 본 느낌은 어떤가? 다시 말하면 그녀의 낙일검 을 자네의 천애도로 막을 수 있겠냐는 말일세." 강옥봉은 잠시 생각하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그녀 정도의 수준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상대가 낙일검을 십 성의 경지까지 수련했다면 어떤가? 자신 있겠나?" "낙일검과 천애도의 위력은 엇비슷합니다. 제 천애도는 십일 성에 달 해 있으니 아마 패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저보다 내공이 강한 사람이 낙일검을 완벽하게 터득했다면 아무래도 약간 불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악궁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열기 떤 표정이 되어 다시 물었다. "자네의 내공은 지금 어느 정도인가?" 강옥봉은 그가 왜 이토록 집요하게 묻는지 몰라 조금 의아해 했으나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저의 내공은 두 갑자를 조긍 넘었습니다." 악궁의 눈에 경탄을 넘어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일전에 여풍운에게 듣자 하니 자네가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겨우 작년 겨울부터라고 하던데 벌써 두 갑자의 내공이라니 믿어지지 않는군." 악궁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두 갑자라면 백이십 년을 수련해야만 이룩할 수 있는 내공수위 였다. 한데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여섯 달밖에 안 된 강옥봉의 내공이 두 갑자라니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아마 당금 강호를 통틀어도 두 갑자를 넘는 내공의 소유자는 채 열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강옥봉의 재질이 남다른 점도 있지만 일전에 우연히 만 난 노승이 개정대법으로 공력을 주입시켜 준 후 태극혼원신공을 익히게끔 도와 준 것에 힘입은 바가 컸다 특히 태극흔원신공은 가히 천하제일의 신공이라 할 만큼 뛰어 난 것으로, 그 신공을 익히고서야 비로소 강옥봉은 천애도의 위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 강옥봉의 내공이 두 갑자라는 말을 듣고도 악궁의 무거운 표정 은 활짝 펴지지 않았다. 악궁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만일 상대의 내공이 세 갑자가 넘는다면 어떻겠는가?" 강옥봉은 내심 움찔 놀랐다. 세 갑자라면 백팔십 년에 해당되는 공력이었다. 강옥봉은 아직 당금 무림에서 세 갑자의 내공을 지닌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악궁의 물음에 의아심을 금치 못했 다. "세 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닌 고수가 낙일검을 펼친다면 아무래도 제 가 당해 내기 힘들 것 같군요." 악궁의 얼굴에 희미하게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네에게 천룡보도와 유령보가 있는데도 말인가?" "제 보도가 비록 날카롭긴 하지만 상대도 보검을 가지고 있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병기로는 우세를 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유령보는 원래 공격보다는 수비를 위주로 만들어진 무공이기 때문에 비록 제게 어느 정도의 이로움이 있을지언정 상대를 격파시키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비록 상대를 이길 수는 없지만 자네도 패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로군?" "이치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보다 정확한 것은 싸워 봐야 알겠지요." 그제서야 악궁의 얼굴에 조금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됐네, 자네가 패하지만 않는다면 자네의 진경으로 보아 일 년내에 상대를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걸세." 강옥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주시했다. 악궁은 긴장되었던 표정을 풀고 강옥봉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한 게 몹시 이상하게 생각되겠지?" 강옥봉은 솔직한 성격답게 시인을 했다. "그럽습니다. 악 대협께서 그렇게 물으신 데는 이유가 있으시겠지 요?" "물론이지. 아주 중대한 이유가 있네." 그는 돌연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는 낙일검이 원래 누구의 무공인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지난 백 년 이래 낙일검을 익힌 자는 천하에 오직 한 사람뿐일세." 강옥봉은 그가 누구냐고 묻고 싶었으나 악궁이 먼저 심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십 년 전, 강호무림에 무림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고수 네 사람이 동시에 출현했네. 그들의 무공은 가히 천하무적이라 불려도 추호의 손색이 없는 것이었네. 나타 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그들은 무림의 절정고수들을 모두 격파 하고 천하제일인의 위치에 서게 되었지." 강옥봉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악궁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들 자신뿐이었네. 하나 그 들은 서로 겨루지 않았네. 왜냐하면 그들의 무공은 너무도 막강해서 상대방을 물리칠 확고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들은 천 하제일이라는 명예를 공유한 채 사정정립을 하게 된 걸세. 그들 중 두 사람은 마도를 걷고 있었고, 다른 두 사람은 정파에서 나왔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쌍마쌍성이라 부르게 되었네." 쌍마쌍성! 이들은 이미 강호의 전설이 된 지 오래였다. 고금무적에 필적하는 네 명의 무적고수! 달리 그 짝을 찾아볼 수 없는 정과 사의 절대천재들! 그들은 이미 사십 년 전에 강호무림을 석권하고는 홀연 사라져 버렸 다. 하나 그 이후 얼마나 많은 전설과 신화가 탄생되었던가? 악궁의 음성은 심각함을 넘어 침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낙일검은 바로 쌍성 중의 한 사람인 백의성검 화진천의 독문절학일세." 강옥봉은 악궁이 쌍마쌍성의 전설을 이야기할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 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말을 직접 듣게 되자 충격이 컸다. 악궁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에 화진천은 낙일검으로 강호를 종횡천하했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절대제일검이라고도 불렀지. 화진천 이후 낙일검을 익힌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네." 강옥봉은 어느새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악 대협께선 냉상아의 사부가 바로 백의성검 화진천이라고 생각하십 니까?" 악궁은 장탄식을 토해 냈다. "바로 그렇네. 처음 방 노인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믿어지 지가 않았네. 하지만 냉상아가 낙일검을 익힌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 면 그것은 화진천에게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네. 그 이유는 화 진천은 당시에 전혀 제자를 두지 않았고, 낙일검 같은 초상숭검학은 초절정의 검객이 직접 가르치지 않는 한 혼자서는 절대로 익힐 수가 없기 때문이지." 강옥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악 대협께선 성심장주가 바로 화진천이라고 의심하시는군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일세. 사실 성심장에 소속된 고수들의 면모로 보아 쌍마쌍성 정도의 인물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그와 같은 절정고수 들을 규합할 수가 없네. 반미륵 고우성이나 백효 전력이 어떤 사람들인데 남의 밑에 있을수 있겠나? 성심장주가 바로 화진천이기 때문에 그들도 꼼짝못하고 그의 수하가 된 걸세." 강옥봉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뜻밖의 말을 했다 "제 추측이 틀림없다면 성심장에는 화진천말고도 쌍마쌍성 중의 다른 인물이 또 있을 겁니다." 악궁은 깜짝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강옥봉은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까 냉상아가 측근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는데 그때 그 녀는 성심장의 이장주에게 무공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악 대협의 말씀대로 그녀의 사부가 화진천이라면 성심장에는 그말고도 적어도 한명의 장주가 또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악궁은 대경 실색했다. "그게 정말인가?"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화진천이 이장주라면 대장주도 쌍마쌍성의 인물 중 한 사람이 아닐까요?" 악궁의 표정은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음…… 자네의 말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일세. 내 생각인데 아마 그렇다면 대장주는 같은 쌍성 중의 일인인 화의성수 육만루가 아닐까 싶네. 우선 화진천과 육만루는 사이가 가까워 서로 호형호제 하는 처지였고, 또 그들이라면 성심장이란 이름과 잘 어울리리까 말일세." "정말 그렇군요." 강옥봉의 음성 또한 무거웠다. 악궁은 한동안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허공을 노려보다가 길게 탄식을 토했다. "아! 산 너머 산이라더니…… 나는 성심장주가 화진천이라면 자네가 충분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조금 전에 그렇게 물어 보았던 거 였네. 한데 성심장주가 육만루와 화진천 두 사람이라면 우리 측의 승 산은 거의 없는 셈이로군." "그렇게 낙담할 일만은 아닌 것 같군요. 최소한 성심장주가 누구라는 것은 알았으니 마음으로부터라도 그들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을 것 이고, 또 그들과 회서방을 서로 격도케 하여 어부지리를 노린다면 그들을 격파하여 무림평화를 되찾는 일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강옥봉의 논리 정연한 말에 악궁은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아! 이거 부끄럽기 짝이 없군. 아직 나이도 어리고 강호 경험도 일 천한 자네가 이렇듯 당당하고 꿋꿋하게 나오는데 제법 산전수전 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나는 상대의 명성에 놀라 지레 꽁무니 를 빼려고 했으니…… 정말 부끄럽네." 강옥봉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별말씀을…… 악 대협의 신기묘산이라면 아무리 상대가 쌍마쌍성이라도 쉽사리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는 상대를 아는데 상대는 아직 우리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니, 우리가 기 병의 묘를 잘 살린다면 의외로 수월하게 승리를 올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 자네의 말이 백번 지당하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인 것은 병법의 기본이니 우선 상대의 내막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하고 우리의 행적을 보다 은밀하게 해야 할 걸세." 이어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 심 사숙고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멀리 먼동이 터 오고 있건만 그들은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심한 강물만이 그들이 타고 있는 뱃전을 찰싹거릴 뿐이었다. 제27장 현세화타 동소원. 동소원은 진회하에 있는 수많은 유곽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이곳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보기 드문 절색일 뿐 아니라, 가무에 뛰어나고 시화에 고루 능해 일대재녀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정오 무렵. 동소원의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어느 아담한 누각의 대청 안으로 들어가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바로 강옥봉이었다. 그가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던 몇 명의 인물들 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그들은 금창수 임표와 팔비도룡 여풍운, 복 마철장 부여송, 그리고 천리일순 방각 등의 인물들이었다. "노제, 어서 오게." 강옥봉은 그들을 둘러보며 미안스런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들 모두 강호의 명협들이신데 저 한사람을 기다리시느라 아까운 시간을 빼앗겼으니 대단히 죄송합니다." 여풍운이 껄껄 웃으며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하하하! 알았으면 어서 벌주나 한잔 받게." 강옥봉이 술잔을 받자 여풍운은 잔이 철철 넘치도록 술을 가득 부었 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우리들이야 뭐 한 게 있나? 자네하고 악궁이 죽어라 뛰어다니며 고생하고 있지…… 어쨌든 유령동부의 일이 잘 마 무리되었다니 정말 다행일세." 강옥봉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 여러분들이 뒤에서 도와 주신 덕분입니다. 그런데 운 형과 곽 형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가 물어 보는 운 형과 곽 형이란 화북일룡 운자개와 곽가보의 소보 주인 곽조웅이었다. 부여송이 돌연 의미 심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불쑥 입을 열었다. "아마, 묻고 싶은 것이 그게 아닐 텐데……" 강옥봉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하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여송은 짓궂게 눈웃음을 쳤다. "흐흐……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는 운 낭자와 곽 낭자의 소식이 궁금 한 게 아닌가? 그런데 그걸 직접 묻는 게 조금 쑥스러워 괜히 운, 곽 두 소협을 찾는 게 아닌가 말일세." 그제서야 중인들은 부여송이 강옥봉을 놀리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모 두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맞소, 맞아! 그게 틀림없을 거요." "낄낄낄……" 강옥봉의 준수한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그는 부여송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 대협께선 참으로 짓궂으십니다. 그런데 그들 네 사람은 어디로 갔습니까?" "흐흐……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들은, 아니 두 낭자는 잘 있으니까 자네가 미친 듯이 궁금해 하는 두 낭자와 자네가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두 소협은 모두 분양의 곽가보로 갔네." 강옥봉은 고소를 머금으며 다시 물었다. "곽가보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습니까?" "그게 아니라 누남광 노인이 두 낭자의 재지가 뛰어난 것을 보고 그 녀들에게 배교대법을 전수해 주려고 하자 곽 낭자의 부친인 곽 보주 가 크게 기뻐하며 이왕이면 곽가보로 가서 전수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해서 모두 그곳으로 간 걸세." 돌연 부여송은 괴이쩍은 미소를 흘렸다. "흐흐…… 그녀들이 떠날 때의 표정은 정말 볼 만하더군. 몇 번씩이 나 자네를 보게 되면 꼭 곽가보로 데려오라고 노부에게 신신당부를 했다네. 에헴! 덕분에 노부의 주가가 조금 올라갔지." 천리일순 방각이 낄낄거렸다. "허허허…… 그게 주가가 올라간 건가? 자네가 억지로 끌어올린 거 지." 부여송은 원래부터 방각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짐짓 눈을 크게 뜨 고 그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방 늙은이, 그게 무슨 말인가?" "흐흐……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그녀들이 뭐라기도 전에 자네가 먼저 나서서 강 소협을 보는 즉시 책임지고 곽가보로 끌고 갈 테니까 술상이나 떡 벌어지게 차려 놓으라고 하지 않았나?" 부여송은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하며 강옥봉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어험, 그거야…… 그녀들이 하도 안달을 하니까 보기 안타까워서 내 가 선심을 쓴 거지. 자자, 술이나 마시세." 방각도 더 이상 그를 놀리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강옥봉을 바라보았 다. "조옥환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말게. 그녀는 지금 은밀한 곳에서 열심 히 무공을 익히고 있다네. 아마 조만간 유령천자의 무공을 모두 익히 고 다시 강호에 나을 수 있을 걸세," 강옥봉은 담담한 신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지않아 강호에 또 한 명의 여기인이 등장하겠군요." "허허…… 그렇겠군." 중인들은 화기 애애한 분위기에서 담소를 즐기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 관원 한 사람이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관원은 중인들을 둘러보다 부여송을 발견하고는 급히 그에게로 다가 왔다. "부 대협……" 이어 그는 부여송의 귓전에다 은밀히 몇 마디를 전했다. 그러자 부여송은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노부는 잠깐 자리를 비워야겠으니 이해하게." 방각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갔다 오게." 부여송은 곧 관원과 함께 대청을 빠져 나갔다. 강옥봉은 내심 의아했으나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먼저 물어 보는 사 람이 없자 자신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방각이 그의 안색을 살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소협, 지금 부 늙은이가 왜 급히 나갔는지 아는가?" "글쎄요……" 방각은 싱긋 웃음을 머긍었다. "부 늙은이의 질녀가 이곳 금룽 하 지부의 며느리라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사돈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아…… 그랬군요." 강옥봉은 매우 의외라고 생각했다. 방각이 가려운 곳을 긁어 주려는 듯 보충 설명을 했다 "강호인이 관부 사람과 사돈을 맺는다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지. 부 늙은이의 질녀는 원래 타고난 미인인 데다 재지가 뛰어나 일대 에서는 재녀로 일찍부터 소문이 났네. 그래서 하 지부 부부의 큰 호감을 산 나머지 지난해 그분들의 큰아들과 결흔을 하게 되었네." 강옥봉은 한결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조금 전에 보니 부 대협의 표정이 몹시 어둡던데 하 지부 집안에 무슨 변고라도……?" 방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소협은 영민하기가 그지없군. 하 지부 가문은 매우 훌륭하여 그의 부친은 당대의 승상으로서 성격이 대쪽 같은 충신일세. 그런데 하 지부의 둘째 아들은 금년 나이가 열 살로 삼 년 전에 괴병을 얻어 음식을 먹으면 즉시 토하는 통에 날로 수척해져 가고 있지. 이제는 피골이 상접하여 목불인견의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동안 좋다는 약은 다 깼고 이름난 신의들이 증상을 수없이 검진하고 치료를 해봤으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지" "허, 참! 그거 매우 안됐군요. 한데 무슨 괴질인지……" 방각의 표정이 절로 어두워졌다. "그게 무엇인지 통 모르겠단 말씀이야. 여러 의원들의 진단이 일치되 지 못하고 있으나 그 중 어떤 의원은 동자로라고 하더군. 그리고 작년 가을부터 등에 오리알만한 혹까지 생겨 밤낮으로 아파서 울부짖고 있다네. 오늘도 하 지부는 부 늙은이가 이 근처에 온 것을 알고 상의하기 위해서 그를 청해 간 걸세." 강옥봉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제가 알기로 부 대협께서는 의술 방면에는 그리 조예가 깊지 못하신데 무엇 때문에 하 지부께서 그분을 청해 가셨지요?" 방각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지부는 영락의 증세가 심하여 의원들이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하지 만 혹시나 무림인들의 심후한 내력으로 상세를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부 늙은이를 청해 간 걸세, 그러나 사태는 거의 절망적 인 것 같네. 듣자 하니 하 지부는 얼마 전에도 대내에 있는 고수들을 초청하여 자식의 병세를 보였으나 누구 한 사람 나서지 못했다고 하더군." 강옥봉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처님도 인연이 있는 사람을 제도해 주시는 법입니다. 하 지부의 영락이 투병 생활 삼 년에 아직 죽지 않은 걸 보아 어쩌면 다스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강호 생활에 잔뼈가 굵어 온 노련한 방각은 그의 말뜻을 즉각 알아차 리고 내심 기뻐했다. '듣자 하니 강 소협의 의술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던데 어쩌면 병을 다스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방각은 강옥봉에게 어떤 생각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잠시 후 부여송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떠날 때보다 한결 더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강옥봉은 그의 신색을 살피며 물었다. "부 대협, 방 대협께 대충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혹시 하 지부 영랑의 병세가 더 악화된 게 아닙니까?" 부여송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 하 지부는 유령동부에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성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다급한 나머지 자신의 부친인 하 승상께 그 사실을 알린 후 대내의 힘을 빌려 유령동부의 약을 구할까 하는 생각으로 노부를 불러 상의한 것일세." 강옥봉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유령동부는 이미 조옥환 낭자에 의해 열렸지만 그 안에는 그런 성약 이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대라금환도 이미 조 낭자가 복용 해 버린 후이니…… 아무래도 하 지부의 계획은 현실에서 조금 벗어 난 것 같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장담은 못 하지만 한번 치료를 해볼 수 없을까요?" "정말 그래 주겠나?" 부여송은 기쁨을 이기지 못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부탁을 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무림대의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에게 쓸데없는 부담을 주기 싫어 망설이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강옥봉이 자청해서 말을 하니 그의 기쁨은 한결 컸던 것이다. 부여송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지금 부리나케 달려가서 하 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네." 강옥봉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게 아니라 병세가 급한 모양이니 우리가 직접 가기로 하지요." "그러세." 그들은 중인들에게 대충 인사를 한 후 서둘러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말에 올라 하 지부 관아로 달려갔다. 지부란 직책은 그 지방의 모든 업무를 통괄하고 다스리는 책임 자를 말한다. 더구나 금릉은 수도인 북경과 더불어 중국에서도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니 금릉의 지부라는 자리는 여타 지부와는 차원 이 다른, 막강하기 그지없는 위치였다. 당금의 금릉지부인 하천성도 자신의 재질이 탁월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의 부친이 현조정의 승상이라는 후광이 없었다면 이런 막중한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금릉지부의 관아는 금릉에서도 가장 번창한 동문 대로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마침 관아 앞에는 하 지부가 여러 사람에게 둘러 싸인 채 무슨 상의를 하고 있었다. 하 지부는 두 사람이 말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급히 앞으로 나섰다. "저분이 바로 강 소협이시오?" 강옥봉은 그의 묻는 기색으로 보아 부여송이 벌써부터 자신에게 하 지부 영랑의 치료를 부탁할 생각이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여송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히 띠고 두 사람을 소개시켰다. "강 노제, 이분이 바로 현임 금릉지부 하천성 대인이시네." 하천성은 청의를 입고 관모를 쓰고 있었는데 당당한 체구에서 무언의 위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옥봉이 정중한 포권의 예를 취하자 하천성은 그의 뛰어난 용모를 보고 크게 탄복하여 선망의 시선을 보냈다. "강 소협, 어서 안으로 듭시다." 그는 이미 부여송에게 강옥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은 듯 강옥봉 을 깍듯하게 대해 주었다. 세 사람은 대청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하천성은 두 사람을 번갈 아 보다가 강옥봉에게 시선을 멈추며 침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강 소협의 올해 나이는 어떻게 되시오?" 강옥붕은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올해 꼭 약관입니다. 미흡한 점이 있으면 즉시 일깨워 주시기 바람니다." "원 천만에……" "제가 이번에 영랑의 병을 꼭 완치시키겠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한번 검진해 볼 기회를 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하천성은 진심으로 감사해 마지않았다. "강 소협! 정말 고맙소!" 그리고는 두 사람을 대청 좌측에 있는 방으로 안내하였다. 방안에 들어서자 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침상 위에서 끙끙 앓는 소리 가 계속 들려 왔다. 그리고 침상 옆에는 지성미가 엿보이는 중년부인이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고 있었고, 부인 뒤엔 미모의 소부가 서글픈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하천성은 장탄식을 토해 내며 두 여인을 소개했다. "강 소협, 나의 안사람과 며늘아이네." 강옥봉은 공손히 인사를 나눈 다음 침상 위로 시선을 옳겼다. 침상 위엔 앙상히 뼈만 남은 소년이 윗통을 벗은 채 엎드려 있었는데, 척추뼈 위쪽에 자주색의 혹이 나 있었고 반점의 색깔은 썩은 종이와도 같았다. 벌써 내장까지 썩어 들어간 증세였다. 강옥봉은 한동안 소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 을 내쉬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하천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끼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소협, 이미 가망이 없겠나?" 강옥봉은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경솔히 단언할수는 없습니다. 한데 영랑의 병이 삼년이라는 세월을 유지해 온 것을 보면 아마 독을 제거하고 새 살을 돋게 하는 약을 써 오신 모양이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영랑이 처음 병을 얻었을 때 독으로써 독을 제거하는 처방만 했던들 거뜬히 나았을 것인데 무지한 의원들이 그걸 모르고 병세를 악화시켰 군요." 하천성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애가 처음 병에 결렸을 땐 무슨 독증인지 몰랐다가 뒤늦게 발견하고 보니 병세가 이미 기울어져서 손을 쓸 여가가 없었네." "이건 시초에도 보통 독증이 아니었는데 영랑이 어쩌다가 이런……" 강옥봉은 말끝을 흐리며 방안을 돌아보다 퍼뜩 깨닫는 바가 있어 급 히 물었다. "영랑은 그 동안 줄곧 이 방에서만 기거를 했습니까?" "그렇네." 강옥봉은 갑자기 천룡보도를 뽑아 들더니 천장에 부착한 목판을 향해 번개같이 그어 갔다. 팟! 예리한 도광이 번뜩이며 목판이 두 동강나면서 전신이 빨간, 한 자쯤 되는 지네 한 마리가 칼에 맞아떨어졌다. "앗?"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기겁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씩 뒤로 물 러났다. 강옥봉은 칼끝으로 지네를 가리키며 말했다. "생각컨대 영랑은 이 지네의 독액이 묻은 음식을 먹어 왔기 때 문에 이런 병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하천성은 놀란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네. 이 아이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떡과 밀조를 먹고 그게 남으면 그냥 침상 곁에 두었다가 새벽에 일어나 마저 먹곤 했었지." 부여송이 긴장을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제, 어떤가? 회복될 가망이 있겠나?" 강옥봉은 대답 대신 손을 움직여 환자의 수혈을 가볍게 찍었다. 그러자 고통에 못 이겨 끙끙 앓고 있던 소년은 금시 잠이 들었다. 부여송은 크게 놀라며 혀를 끌끌 찼다. "우리는 삼 년 동안 공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온갖 점혈 수법을 사웅해 보았으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자네는 어떤 수법을 썼기에 이렇듯 단번에 효과를 보았나?" 강옥봉은 담담히 말을 받았다. "점혈수법이란 배우긴 쉽지만 정묘하기는 어려운 것이기에 저 역시 절반밖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음양경맥 부터 폐쇄시키고 나서 수혈을 찍었더니 다행히 잠드는군요."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펼쳐 환자의 맥을 짚어 보았다. 하천성 등은 숨을 죽이고 긴장한 채 강옥봉의 표정을 주시했다. 그로 부터 얼마 후, 강옥봉은 손을 거두며 숨을 크게 내쉬면서 하천성을 바라 보았다. "영랑이 보약으로써 생명을 유지해 왔으나 그것만으로는 매우 부족하 여 현재 진기가 고갈 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혹시 귀부에 백 년 이상 묵은 인삼이나 하수오가 있어 잠시 후 약을 조제할때 넣을 수 있으면 진기가 보다 쉽게 회복될 것입니다." 하천성은 눈을 깜빡거리며 잠시 생각하다 반색을 했다. "전날 부친께서 보내 주신 인삼 두 뿌리가 있긴 한데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는 급히 부인을 시켜 인삼을 가져 오게 했다. 부인이 가져 온 침향목갑 속엔 인형과 같은 인삼 두 뿌리가 들어 있었다. 강옥봉이 잠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뿌리로 충분하니 남은 한 뿌리는 잘 간수해 두십시오." 하천성은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갈망하는 시선을 보냈다. "만약 이애의 병이 완치된다면 소협에게 응분의 보답을 하겠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강옥봉은 환자 곁으로 바싹 다가앉아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조그만 동합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고 길고 짧은 금침 몇 개를 뽑아 환자의 척추뼈 부위에 꽃았다. 그리고는 장심을 혈도에 밀착시키고 진기를 운용하여 한 줄기 열류를 주입시켰다.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부여송은 하천성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을 건넸다. "강 노제는 나이는 젊지만 지혜가 뛰어나고 학문이 깊은 데다 무공 또한 비범하여 백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희대의 기재입니다." 하천성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오. 더욱이 풍채가 준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 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오게 하는군요. 강 소협과 차분한 시간을 갖 게 되면 흥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소이다." 약 반 시진이 경과하자 강옥봉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구슬 같 은 땀을 닦아 내고 서서히 금침을 뽑았다. 돌연 부여송이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앗?" 하천성이 크게 놀라면서 다급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하천성은 고개를 돌려 보다가 아들의 등에 난 혹이 전보다 배 이상 커진 것을 발견했다. "아니……! 증세가 더욱 악화된 게 아닐까요?" "아닙니다. 아마 강 노제가 영랑의 체내에 응고되어 있던 독성을 밀 어낸 모양입니다." 이때 강옥봉이 고개를 돌렸다. "부 대협, 문방사우를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하천성은 손수 밖으로 나가 붓과 벼루, 종이 등을 들고 들어왔다. 강옥봉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붓을 들어 번개같이 약방문을 적어 하천성 앞에 내밀었다. 하천성은 약방문에 적힌 글씨가 용이 날아가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 명필인 것을 보고 재차 놀랐다. "이 처방대로 약 세 첩을 지으시고 인삼을 넣어 달인 후 칠 일 동안 계속 복용시키도록 하십시오." 하천성은 즉시 수하 한사람을 약방으로 보냈다. "강 노제, 저 혹을 어떻게 하려고 하나?" 강옥봉은 부여송의 질문을 받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제거해 버리면 되지요. 앞으로 두 시진 후면 남은 독성이 그곳으로 유출될 겁니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비수를 꺼내 혹을 잘라 버렸다. 그러자 시커먼 독 혈이 뿜어 나오며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 나왔다. 강옥봉은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독혈이 멎기를 기다려 혹을 잘라 낸 부위에 구생신이라는 약을 바른 다음 소년의 수혈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소년은 몇 번 몸을 뒤척거리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버님, 이제 조금도 아프지 않아요." 비록 음성이 가볍게 떨리고는 있었으나 전에 비해 원기가 많이 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천성 부부는 아들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지난 삼 년 이래 처음으로 아들의 평온한 모습을 보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뜨거 운 그 무엇이 일시에 치밀어 오른 것이다. 그때 심부름을 갔던 사람이 약을 가지고 들어오자 강옥봉은 중년부인 을 바라보며 은근히 재촉했다. "어서 약 한 첩을 달여 복용시키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 미음을 끓여 주십시오. 그렇게 칠 일 동안 복용시키면 틀림없이 완쾌될 것입니다." 중년부인은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약을 달이기 위해 밖 으로 나갔다. 하천성은 부여송과 강옥봉을 대청으로 안내하고 백 년 묵은 죽엽청을 대접했다. 지극히 향기롭고 입에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맛이 기가 막힌 죽엽청 이 몇 순배 돌아간 다음 하천성이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소협의 은혜는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가 없을 것이네만 한 가지 물 건으로 조그만 성의를 표할까 하니 소협은 부디 사양치 말게." 그는 품안에서 한 면이 다섯 자쯤 되어 보이는 사각 금패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금패 양면에는 발이 다섯 개 달린 금룡과 두 줄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옆에서 이것을 보고 있던 부여송은 그 금패가 황상이 직접 하사하신 오룡금패임을 알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오룡금패는 당금의 황상이 하천성의 부친인 하승상에게 친히 하사하 신 것으로, 그 권위는 황상의 어패인 구룽금패 다음으로 엄청난 것 이었다. 이 오룡금패는 대내의 모든 시위들의 생사여탈권이 있을 뿐 아니라 친왕들을 제외한 모든 황족과 관리들을 호령할 수 있는 권위 가 있는 것이다. 황상은 하 승상의 충정에 감복하여 이것을 그에게 주었는데 하승상은 다시 자신의 아들인 하천성에게 이 오룡금패를 건네 주었던 것이다. 부여송은 그런 속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금패가 있으면 앞으 로 강옥봉이 일을 해 나가는 데 있어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 하고 그에게 어서 받으라는 눈짓을 했다. 강옥봉은 망설이다가 오룡금패를 받아 품안에 간직하고는 일어나서 포권의 예를 취했다. "제가 앞으로 뜻한 바를 이루게 되면 지부 어른을 다시 찾아뵙겠습니 다." 하천성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천만에! 그리고 염치없는 부탁인 줄 아네만, 강 소협께선 칠 일 동안만이라도 이곳에 머물면서 자식놈의 병세가 호전되도록……" 강옥봉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염려 마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영랑이 완치된 후에 떠나기로 작정했 습니다." 그로부터 약 두 시진 후 시녀가 달려들어와 하천성에게 공손히 허리 를 굽혔다. "소공자께서는 약을 잡수신 뒤 침상에서 내려와 거동을 하시고 안마 님께서 새 옷까지 갈아 입히셨습니다." 하천성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알았다. 이건 오로지 강 소협 덕분이로다." 이렇게 해서 강옥봉은 동소원에 묵으면서 하루에 두세 번씩 하천성의 관아에 찾아가 치료를 해주고 돌아왔다. 이즈음 강옥봉은 부여송, 여풍운 등과 더불어 금릉의 명승지인 서하 산, 연지정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유람에 도취되어 있어 어찌 보면 세 속의 일을 잊은 듯 하였다. 하나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사실은 방각과 임표 등이 성심 장과 회서방의 동태를 면밀히 주목하고 매일 강옥봉과 함께 그들에게 대항할 방법을 의논하고 있었다. 눈부신 태양이 동산에 떠오르던 어느 날 아침. 금릉 제일가는 홍등가인 동소원의 후원에도 따사로운 햇살이 내비치 고 있었다. 강옥봉은 아침부터 동소원의 여러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녀들의 짤랑짤랑한 교소와 은근한 정을 담은 눈빛, 그리고 온갖 산해진미와 향기만으로도 사람을 취하게 하는 명주……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여러 미녀들은 강옥봉의 곁에 찰싹 달라붙은 채 그가 술을 마실 때마다 서로 안주를 먹여 주고 술을 따라 주려고 한바탕 법석을 피우곤 했다. 사실 동소원에 있던 여러 미녀들은 강옥봉의 산뜻하게 생긴 얼굴과 활달한 성격에 무한한 관심을 품어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들 중에서 아정이란 미녀는 세속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 강옥봉의 일거일동에 찬사를 보냈고, 사나이 같은 용모에 홀딱 반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강옥봉의 첩이라도 되기를 은근히 갈망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옥봉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왔고, 비록 술을 마구 퍼마시며 그녀들과 어울리고 있었으나 내심으로는 주위를 관찰하며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때 밖에서 하인 하나가 총총히 들어왔다. "공자, 흑의추녀 하나가 찾아와서 뵙자고 합니다." "어서 오라고 해라." 아정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어요." 강옥봉이 고개를 저으며 아정에게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잠시 후 그 하인이 과연 흑의추녀를 데리고 왔다. 그 흑의추녀의 안색은 마치 송장처럼 누렇게 떴고 모습이 냉랭하게 생겨,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검은 옷에 검은 피풍을 걸 쳤고, 어깨에는 장검을 메고 있었다. 강옥봉은 그 흑의추녀가 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낭자, 어서 앉으시오." 흑의추녀는 그의 뜻밖의 환대에 몸을 움찔하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강옥봉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아정을 힐끔 주시하다가 대뜸 강옥봉에게 물었다. "나를 아시겠어요?" 강옥봉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강옥봉은 빙그레 웃었다. "가장 무정한 것은 소호가에 밤새 내린 서리더군요." 그렇다. 이 흑의추녀는 바로 무정독연 냉상아가 변장한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강옥봉이 지금까지 동소원에 머무르면서 여러 미녀 들과 환락을 즐기는 척하고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겉으로는 무정한 척하나 실제로는 한번 입은 은혜는 마 음속 깊이 새겨 두고 있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흑의추녀로 변장한 냉상아는 약간 노기를 띠고 있었다. "나의 성격이 외모와 같은 줄 아세요? 가장 무정한 것은 당신이에요." 점차 깊은 말이 나오자 아정과 여러 미녀들은 슬쩍 자리를 피했고, 강옥봉과 냉상아만이 남게 되었다. 강옥봉은 그녀들이 자리를 피하자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낭자와 나는 우연히 서로 만났을 뿐, 조금의 은원 관계도 없는데 어 찌 무정하단 말을 하시오?" 냉상아는 안색이 빨개지며 냉소를 쳤다. "흥! 그런 말이 입에서 나와요? 여자란 순결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인데 당신은 여러 수하들 앞에서 나의 옷을 벗기고……" 강옥봉은 그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고 어색하게 웃었 다. "그건 낭자의 위급함을 보고 피치 못할 사정이었기에 그런 방법을 썼 던 것이오. 그리고 그날 밤의 일에 대해선 내가 일체 입 밖에 내지 않을테니 낭자는 조금도 염려치 마시오." 그러나 냉상아는 쌀쌀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그런다고 간단히 끝날 줄 아세요? 당신이 만일 승낙하지 않으면 내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강옥봉은 가슴이 뜨끔했다. "낭자는 나더러 무엇을 승낙하라는 거요?" 냉상아는 더욱 화가 치솟아 얼굴에 경련까지 일으켰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는데 당신은 왜 시치미를 떼세요?" 강옥봉은 정색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부처님이 아닌 이상 어찌 애정에 담담하겠소? 그러나 나는 이미 무림정의를 위해 미력하나마 이 한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터라 애정 관계에 대해선 얽히고설킬 여가가 없소. 그러니 낭자는 나의 사정을 이해해 주시오." "흥! 일전에 보니까 한달기 조옥환은 공자와 은근한 사이인 모양이던 데 지금 이곳에 오셔서 미색에 빠져 있다는 걸 그녀가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강옥봉은 얼굴이 붉어지며 매우 난처해 했다. "이건 일시적인 흥취를 즐기는 것뿐이오. 그리고 조 낭자는 괜히 질투하고 강짜를 부릴 사람이 아니오." 냉상아는 멍해진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원망하고 있는지, 아니면 은근히 사랑하는 연정을 품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강옥봉은 그녀의 그런 표정을 살피며 다시 말했다. "조옥환은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무림동도일 뿐이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시오." 냉상아는 여전히 냉소를 쳤다. "조옥환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강옥봉은 가벼운 기침을 하고 화제를 돌렸다. "낭자가 변장을 하고 이곳에 온 것을 보니 아마 누군가가 뒤를 따라 왔던 모양이구려." 냉상아는 그의 정확한 추측에 내심 놀랐으나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맞았어요. 음적양과 회서방의 인물들이 끝내 뒤쫓아오다가 나의 교 묘한 수법에 의해 따돌림을 받았어요. 그러므로 음적양 일당이 아무 리 의심을 품고 내 뒤를 계속 미행했다 해도 이렇게 변장한 나를 절 대로 알아 내진 못했을 거예요." 강옥봉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보건대 낭자의 그런 변장은 그리 고명하다고 할 수가 없소. 더욱이 음적양과 도중웅은 모두 눈치가 빠르고 안목이 날카로운 자들 이니 아마 다르게 변장을 해야 할 거요." 그러자 냉상아는 약간 짜증을 냈다. "그럼 나더러 이곳에 있는 기녀로 분장하란 말이에요?" 그녀는 이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은 것이었다. 한데 의외로 강옥봉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그거 좋은 생각이오. 낭자는 어서 그들이 오기 전에 기녀로 변장해 있으시오." 냉상아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말 내가……" 강옥봉은 미소를 지었다. "이건 일시적인 방편술에 의한 것이니 낭자에게는 아무런 손해가 없을거요." 냉상아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를 흘겨보았다. "좋아요. 당신이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의 말대로 하겠어요." 짤막한 그 말 속에는 무한한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강옥봉은 내심 동요를 일으켰으나 꾹 참고 그녀를 아정의 방으로 보 내서 분장하게 했다. 잠시 후 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당황한 표정의 하인이 노기 등등한 세 사나이를 데리고 왔다 얼굴이 징그럽게 생긴 사나이 하나가 강옥봉이 있는 화청 안을 주시 하면서 냉소를 쳤다. "이곳 동소원에서 왜 손님을 거절하는가 했더니 귀공자가 와 있어서 그랬군!" 그리고는 시선을 돌리며 사납게 외쳤다. "얘들아, 어서 저따위 잡것들은 모조리 밖으로 쫓아 내라." 이 말이 끝나자 밖에서 수십 명의 고약스럽게 생긴 사나이들이 우르 르 몰려와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강옥봉은 묵묵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돌연 번개같이 그들 속 으로 뛰어들며 쌍장을 마구 휘둘렀다. "크악!" 순간 외마디 비명 소리가 나더니 한사나이가 얼굴에 피를 흘리고 비 틀거리며 밖으로 뛰쳐 나왔다. 펑! 펑! 다시 사나운 굉음이 몇 번 들리더니 다른 도당들도 제각기 옆구리와 배를 움켜잡은 채 비명을 지르며 뛰쳐 나왔다. 이런 삽시간의 변고에 호통을 치던 그 사나이는 발끈 노하여 악을 썼 다. "이 꼬마녀석아, 감히 이곳에서 행패를 부려 사람을 상하게 하느냐? 내가 따끔한 맛을 보여 주겠다!" 그는 번개같이 화청 안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강옥봉은 싸늘한 코웃음을 치며 슬쩍 일장을 내뻗었다. 왕! "악!" 그 사나이는 옆구리에 정통으로 일장을 맞고 갈비뼈가 모두 부러진 채 피를 뿌리며 다시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잔 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는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다른 사나이들의 부축 을 받고 급히 사라졌다. 강옥봉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태사의에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자 한 하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허리를 굽히더 니 나직하게 말했다. "공자, 그 사나이는 장홍태라는 자로서 금릉 강령전장 소속인데 관부와 결탁하여 그 세력을 믿고 악행을 저질러 왔습니다. 그는 진작부터 아정 낭자에게 눈독을 들였으나 아정 낭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불행히 그의 비위를 거슬리게 했으리 동소원은 앞으로 편할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옥봉은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에개도 다 생각이 있으니 넌 걱정하지 마라." 이때 아정과 냉상아가 천천히 화청 안으로 들어왔는데 냉상아는 꽃무 늬가 예쁘게 새겨진 옷을 입고 얼굴에는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게 보였으나 표정만은 여전히 쌀쌀했다. "무식한 것들에게 약간의 혼만 내주어 보낼 것이지 왜 심하게 손을 써서 주위를 소란스럽게 만들어요?" 강옥봉은 웃음을 터뜨렸다. "낭자는 왜 또 자비심을 베푸시오? 장홍태란 자는 어떤 사람의 명을 받고 으스대면서 이곳에 왔을 게요." 그제야 냉상아는 퍼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급히 말했다. "그럼 회서방에서……?" "그렇소." "그들이 내가 이곳에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강옥봉은 대답하려다가 시선을 돌리더니 즉시 일어섬과 동시에 오른 손을 창문 쪽으로 쭉 내뻗었다. 쾅! "으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퍽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강옥봉은 다시 냉상아와 아정에게 눈짓을 했다. 두 소녀는 재빨리 알아차리고 화청 뒤로 몸을 숨겼다. 곧 이어 얼굴이 길고 흑포를 걸친 사람이 표연히 들어서더니 눈에 냉 엄한 빛을 발산하면서 음침하게 외쳤다. "당신이 내 수하들을 상하게 했소?" 강옥봉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소. 그런데 귀하는 도대체 누구시오?" "나는 대내의 삼등시위로 있는 관한홍이라 하오. 오늘 나는 어떤 못된 여자를 추격해 왔는데 아마 당신도 그녀의 일당인 것 같소. 괜히 버티다가 죽음을 당하지 말고 그 여자를 속히 내놓으시오." 강옥봉은 싸늘한 웃음을 날렸다. "당신이 자칭 대내의 시위라고 하지만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소. 그리고 이곳 동소원에 그 여자가 숨어 있을 턱이 없으니 어서 가보시오." 관한흥은 노기를 띠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닥치시오! 그대가 감히 관부의 일을 방해하려 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요? 동소원 밖에 이미 고수들이 수없이 배치되어 있으니 일단 나의 명령이 떨어지면 모조리 박살날 거요." 강옥봉은 겁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당담하게 웃었다. "관한홍,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아시오?" 강옥봉이 태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자 관한홍은 내심 움찔했다. '표정이 느긋한 것으로 보아 혹시 이 녀석도 관부의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 근처에 내가 모르는 관부의 인물은 없으니 저놈은 필시 허풍을 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관한홍이 막 호통을 치려는 순간, "전임 조운총독이신 부 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돌연 화청 밖에서 하인이 길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관한흥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 제28장 금검공자 곧 이어 얼굴이 네모지고 옷차림이 화려한 노인이 당당한 태도로 화 청 안으로 들어왔다. 노인은 강옥봉을 보자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하하…… 제 대인이 대내를 떠나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방금 전에 받았네. 어찌 노부의 거처로 오지 않고 이곳에 있었나?" 강옥봉은 노인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포권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단지 총독님께 폐를 끼치기 싫어 잠시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허허…… 폐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오히려 대내에서 명망이 높은 제 대인을 맞게 되면 노부의 영광이 아니겠나?"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관한홍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자도 대내에서 나온 관부의 인물인가 보구나. 더구나 전임 조운총 독이 직접 마중 나온 것으로 보아 최소한 대내의 일등시위임이 분명하겠다. 관한홍의 생각이 여기에 이를 때 노인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이자는 누구인가?" 강옥봉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관한흥은 넙죽 허리를 구부렸다 "소인은 대내의 삼등시위 관한홍입니다. 부 대인님을 뵙습니다." 노인은 위엄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관 시위는 무슨 일로 이곳에 왔나?" 관한홍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인은 한 명의 강호여적의 뒤를 쫓아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노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가? 그렇다면 자네는 잘못 찾아왔네. 이분은 대내의 시위영반인 제 대인인데, 자네는 어찌 무례를 범하는가?" 그 말을 듣고 관한홍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시위영반이라면 대내의 정예라는 일등시위보다도 더 높은 자리로, 관한홍 같은 시위는 감히 제대로 올려다 볼 수도 없는 지고한 위치 였다. 때문에 그 위세는 실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막강해서 대내에서도 불과 십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관한홍은 자신이 호랑이수염을 건드렸음을 깨닫고 즉시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소인 관한홍이 제 대인을 몰라뵙고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옥봉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모르고 한 일은 죄가 되지 않으니 관 시위는 그만 일어나시오." 그의 음성에는 당당한 위엄이 담겨 있었다. 관한홍은 공손히 자리에서 일어나 감히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 하고 한쪽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강옥봉의 음성이 돌연 엄격해졌다. "하지만 당신이 일을 처리하는 태도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관부에 몸을 담고 있다고 해서 그 위세를 빌려 일반인들을 함부로 능멸한다면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오." 관한홍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식은땀을 주르르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제 대인이 아량을 베풀었으니 자네는 어서 그만 가보게." 관한홍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부리나케 밖으 로 달려나갔다. 한데 그의 몸이 막 동소원의 후원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돌연 전면에서 무형의 비침 여섯 개가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쌕! 쌕! 쌕! 그 속도는 너무도 빨라 관한홍이 무언가 눈앞에서 번뜩한다고 느낀 순간 비침은 사정없이 그의 양쪽 눈에 꽃히고 말았다. "아악!" 그는 두 눈을 부둥켜 잡고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져 몸부림치고 있었 는데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차마 눈뜨고는 똑바로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는 곧 숨이 끊어졌다. 기이하게도 그의 시체는 금세 노란 물로 변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 다. 밖에서 지켜 서 있던 관한흥의 부하들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앞을 다투어 사방으로 도망쳤다. 그때 담장 밖에서 하나의 인영이 솟구쳐 올라와 관한흥이 쓰러져 있 던 곳으로 날아왔다. 그는 바로 회서방의 온서 금시조 도중웅이었다 도중웅은 관한홍의 시체가 흔적도 없이 녹아 버린 것을 보고 이를 부 드득 갈았다. "관한홍은 그 제 대인이란 소년에게 죽은 것이 아니고 밖으로 나오 다가 기독이 묻은 독침에 암산을 당해 쓰러진 것이다. 흥! 범인은 이 사건의 책임을 그 제 대인에게 뒤집어씌워 본 방으로 하여금 대내와 적이 되도록 하려는 간계를 꾸몄구나. 하지만 노부가 그런 얕은 수법에 속을 줄 아느냐?" 도중웅은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몸을 돌 려 비호처럼 사라져 갔다. 한편, 화청에 있는 줄 알았던 노인과 강옥봉은 도중웅이 사라지는 것을 숨어서 보고 있다가 다시 화청으로 들어왔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강옥봉의 어깨를 툭 쳤다. "정말 노제의 계략은 귀신과 같군. 그 약아빠진 도중웅도 꼼짝없이 속고 말았네." 노인은 바로 부여송의 변장이었다. 강옥봉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아직 안심하긴 이릅니다. 도중웅을 비롯한 회서방에서는 냉 낭자를 사로잡아 성심장의 본부가 있는 곳을 알아 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니 그녀의 처지는 앞으로 더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냉상아가 은방울을 굴리듯이 밝게 웃으며 병풍 뒤에서 나왔다. "호호…… 두 분의 기묘한 계략에 그들이 보기 좋게 속았군요. 한데 왜 저보고 관한홍을 살해하라고 하셨나요?" 조금 전에 관한홍에게 독침을 던진 사람은 바로 냉상아였던 것이다. 강옥봉은 나직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관한홍은 이곳 금릉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필시 진짜 전임 조운 총독의 거처를 알고 있을 겁니다. 그가 만에 하나라도 부 대협께 의 혹을 느끼고 전임 조운총독을 찾아갔다면 우리의 계략은 깨어지고 맙니다." 그제야 냉상아는 강옥봉의 치밀한 두뇌에 새삼 감탄을 했다. 냉상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일은 아무래도 좋아요. 먼저 우리의 일이나 결말지어요." 강옥봉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막중한 임무가 있을 뿐 아니라 일정한 처소도 없어 가정을 꾸리기에는 부적합한 인물이오. 게다가 낭자와는 본시 적대 감정 으로 맞서 오던 사이이므로 낭자의 그런 호의를……" 냉상아는 버럭 신경질을 내면서 말을 가로챘다 "듣기 싫어요! 도대체 절 좋아하세요, 아니면 좋아하지 않으세요?" 강옥봉은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얼굴을 약간 붉히며 어안이 벙벙 해졌다. 이런 어색한 순간에 다시 병풍 뒤에서 아정의 고운 음성이 들렸다. "제가 중간에 나서서 두 분의 일을 원만하게 조절하겠어요. 두 분이 어떻게 그런 일을 직접 해결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는 살며시 나와서 냉상아의 손목을 잡고 자기 방으로 갔다. 강옥봉이 착잡한 심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자 부여송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노제, 냉 낭자는 비록 겉으로는 무정하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도 뜨거운 여자일세. 그러니 자네가 자칫 그녀의 애정을 거절했다가는 나중에 커다란 곤경을 면치 못할 걸세." "하지만 제게는 운 낭자와 곽 낭자, 그리고 조 낭자 등과 아직 해결 치 못한 일들이 많이 있는데 어찌……" "자네의 심정은 잘 알겠네. 하치만 그녀들도 자네의 처지를 이해해 줄 걸세. 무룻 영웅이란 호색하는 법이라고 하지 않았나? 더구나 자네 같은 기재라면 삼처사첩을 거느린다 해도 아무도 흉볼 사람이 없을 것이네." 강옥봉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부여송이 그의 심정을 짐작하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 그 일은 아정 낭자의 말대로 그녀에게 맡기기로 하고 우리는 다음 단계의 일이나 착수하세." 강옥봉은 씁쓸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화청을 벗어났다. * * * 연자기. 연자기는 금릉 북교, 장강에 근접해 있었다. 기암 괴석이 즐비하고 삼면에 강물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으며, 마치 제비가 강물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 같은 지형이라하여 연자 기라 불리고 있었다. 연자기 위에 정자 한 채가 절벽을 의지하고 세워져 있었다. 동이 튼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른 아침. 강옥봉은 홀로 연자기에 올라 정자로 들어갔다. 멀리 보이는 현무호 와 서하산의 절경들이 한눈에 들어왔고, 봉우리는 희뿌연 안개가 휘감고 있었다. 강옥봉은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상쾌한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이때 별안간 낭랑한 웃음 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하하…… 이른 아침부터 연자기에 올라 주위의 절경을 감상하다니, 형장의 풍취도 대단하구려" 강옥봉은 느릿느릿 시선을 돌려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이 정자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강옥봉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성심장의 팔대빈객 중 한 사람인 탁천신수 진조영이었다. 진조영의 옆에는 화려한 금의를 입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 자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아직도 희미한 미 소가 가시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금 전 말을 한 사람은 아마도 금의 미남자인것 같았다. 강옥봉은 담담한 눈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다가 금의청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원래 이곳의 풍경은 하루 중에서도 아직 안개가 사라지지 않은 아침이 제일 뛰어나오." 금의청년은 정자 위로 올라오며 싱긋 미소 지었다. 언뜻 드러나는 새하얀 이빨이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옳은 얘기요. 하하…… 형장의 풍모를 보니 범상치 않은 기질이 보이는데, 우리 서로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떻겠소?" 이어 그는 강옥봉이 거절하기도 전에 먼저 자기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나는 도옥린이라고 하오. 남들은 나를 금검공자라고 부르지요." 그 말에 강옥봉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과연 금의공자의 허리춤에는 보기에도 눈이 부신 찬란한 금검 이 매여져 있었다. 강옥봉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도옥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사대공자 중의 한 분이시군요. 나는 제백석이란 사람이외다." 금검공자 도옥린은 강호의 신진고수인 사대공자 중에서도 검법 으로 이름 높은 인물이었다. 도옥린은 제백석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 보는 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 리다가 빙그레 웃었다. "제 형이었구려. 반갑소. 한데 외람된 말이지만 나는 아직 견문이 짧아서인지 제 형의 이름을 처음 듣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문 내력을 알 수 있겠소?" 강옥봉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무림의 인물이 아니니 도 공자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나는 대내에서 나왔소이다." 도옥린과 진조영은 흠칫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원래 진조영은 강옥봉을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었으나 그 당시에 강옥봉은 머리에 풍모를 눌러쓰고 있어서 진조영은 강옥봉의 얼굴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도옥린은 어리등절한 표정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 보니 관부의 인물이구려. 실례했소이다. 나는 귀하의 풍모가 몹시 마음에 들어 서로 교우를 맺어 볼까 하는데, 귀하의 의향은 어떻소?" "나는 이번에 특별한 임무를 띠고 이곳에 왔기 때문에 다른사람들과 교분을 맺을 만큼 여유롭지 못하오. 아쉽지만 귀하와의 인연은 다음 기회에 맺어야 할 것 같소." 도옥린은 매우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 참 안됐구려. 사실은 본인도 이번에 사문의 사매가 실종되어 그녀를 찾기 위해서 강남에 왔소이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귀하가 임무를 끝낼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을 텐데……" 강옥봉은 도옥린이 사매를 찾아 나섰다는 말에 내심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사매는 바로……?' 강옥봉은 즉시 물었다. "귀하의 사매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만일 운이 좋아 내가 귀사매의 소식을 알게 된다면 귀하에게 알려 주겠소." 도옥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건 사문의 기밀에 속하는 일이라 아쉽게도 밝힐 수가 없구려. 양해해 주시오,"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알겠소. 사실 나는 강호의 시비에 끼여들고 싶지도 않고, 더욱이 볼 일이 있으니 귀사매가 누구인지 알아도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을 거요." 그때였다. 다가닥! 다가닥! 요란스런 말발굽 소리가 아침 공기를 깨뜨리며 들려 왔다. 연자기 밑 오솔길로 관원 한 사람이 채찍을 휘두르며 준마를 질풍처 럼 몰아 치달려오고 있었다. 도옥린과 진조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준마는 정자 앞에 이르러 힘찬 울부짖음과 함께 우뚝 멈춰 섰 다. 히히힝! 마상엔 짙은 눈썹에 호목을 지닌 중년 관원이 타고 있었는데 훌쩍 몸을 날려 땅위에 내려서더니 강옥봉을 향해 정중하게 부복했다. "제 대인! 금릉지부이신 하 대인께서 급히 대인을 뵙고자 하십니다." 강옥봉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지부께선 지금 관아에 계시는가?" "그렇사옵니다." "알겠네. 내 곧 간다고 말씀드리게." 관원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다시 말을 몰아 연자기를 내려갔다. 강옥봉은 도옥린과 진조영 두사람을 바라보며 포권했다. "아무래도 두 분과는 이만 혜어져야 할 것 같소. 도 공자께선 아무쪼록 귀사매를 무사히 찾으시기 바라겠소. 그럼……" 이어 그는 두 사람이 뭐랄 사이도 없이 휑하니 몸을 돌려 관원이 사 라진 곳을 따라 몸을 날렸다. 그의 신법은 몹시 탁월해서 몇 번 땅을 박차고 뛰더니 곧 아득히 멀리 사라져 버렸다. 도옥린은 그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감탄했다. "아! 정말 훌릉한 신법이구나!" 진조영은 묵묵히 강옥봉이 사라진 곳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 다. "나는 그가 대내에서 나왔다고 해서 별로 믿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그는 정말로 대내에서 나온 인물인 것 같네."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가 무엇 때문에 처음 보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진조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강호에 하도 귀계가 난무해서 나도 모르게 무턱대고 상대방의 말을 의심부터 하는 습관이 들고 말았네. 그가 관부의 인물이라면 친분을 맺어 두는 것도 좋은 일이긴 한데 자칫 잘못했다가는 다른 무림인들 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우려가 있네. 그러니 자네는 신중하게 행동 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도옥린은 성심장주의 세 제자 중 하나이지만 진조영도 팔대빈객 중의 인물이므로 무턱대고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한데 냉 사매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혹시 이미 회서방의 인물들에게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요?" 진조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닐 것이네. 만약 그랬다면 벌써 그들에게서 무슨 움직임이 있었을 텐데 아직 그런 건 보이지 않고 있네." 도옥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냉 사매는 본 장과 일체 연락을 끊었 을까요? 그 일 때문에 이사부께서는 몹시 진노하고 계신데……" 진조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단순히 내 생각인데, 혹시 냉 소저에게 무슨 다른 생각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토옥린의 안색이 변하며 급히 말을 가로챘 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냉 사매의 성격은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마음이 굳고 심지가 곧아 절대로 두 마음을 가질 여자가 아닙니다." 진조영은 조금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글쎄 그건 나도 아는데 강호의 일은 워낙 괴이 막측한 데가 많아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곤 하네. 그리고 그런 이유가 아니 라면 그녀가 굳이 연락을 끊고 종적을 감춰 버릴 까닭이 없지 않나?" 도옥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건 아닐 겁니다. 아마 그녀에게 피치 못할 어떤 이유가 있든지 아니면 우리가 상상치 못할 곤궁에 빠져 있든지……" 진조영은 도옥린이 끝까지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자 쓴웃음을 지은 채 입을 다물었다. 그는 도옥린이 사매인 냉상아에게 각별한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여 그의 심기를 거 스르고 싶지 않았다. 진조영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녀는 좋든 싫든 이달 보름까지는 장에 돌아와야 할 걸세. 그렇지 않으면 비명 횡사하게 될 테니……" 도옥린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진 대협,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진조영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채 날카로운 도옥린의 시선을 피 했다. 바로 그때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정자 안으로 날 아들었다. 그들이 깜짝 놀라 보니 나타난 인영은 등에 보도를 맨 청삼복면인이 었다. 진조영은 청삼복면인의 등뒤로 비어져 나와 있는 보도를 보자 흠칫 놀라 소리쳤다. "귀하는 혹시 무영신룡단혼도가 아니오?" 청의복면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 노사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구려." 그의 음성은 몹시 굵직해서 음성만 듣고는 쉽사리 나이를 짐작할 수 가 없었다. 진조영은 안색이 변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다. 그때 도옥린이 성큼 앞으로 나서며 싸늘한 눈으로 청의복면인을 응시 했다. "당신이 바로 유령동부의 보물을 강탈해 간 무영신룡단혼도요?" "하하…… 강탈이란 말은 당치 않지만 내가 무영신룡단호도임은 분명한 사실이오. 한데 귀하는 뉘시오?" "나는 금검공자 도옥린이라 하오. 한데 귀하는 혹시 얼마 전에 연검을 잘 쓰는 녹의미소녀를 만나지 않았소?" 무영신룡단혼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을 반짝였다. "아! 귀하가 말하는 사람은 혹시 무정독연 냉상아가 아니오?" 도옥린은 정색을 하며 얼굴을 굳혔다. "그렇소. 귀하는 과연 그녀를 만났구려. 당신은 그녀를 어떻게 했소?" 무영신룡단혼도는 가볍게 웃었다. "어쩌긴, 그때 마침 회서방의 고수들과 그녀가 한바탕 드잠이질을 벌여 잠시 구경을 하다가 나는 그냥 떠나왔소." "뭐라고? 회서방의 놈들이 그녀를 습격했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회서방에서 마침 나를 습격했는데 그때 그녀가 나타났소. 한데 음적양은 그녀의 미모에 마음이 끌렸는지 그녀를 집적거리다가 싸움이 붙게 된 것이오." 도옥린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음적양…… 그놈이 감히 냉 사매에게 허튼수작을 부렸다면 내 그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말리라!" 무영신룡단혼도는 사나운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는 도옥린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리려 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난 그만 가보겠소." 도옥린은 퍼뜩 정신이 들어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무영신룡단혼도는 조금 짜증스러운 듯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귀사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슨 일이오?" 도옥린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원래 냉 사매는 귀하에게서 유령동부의 보물을 다시 찾아오라는 사부의 명령을 받고 떠났던 거요. 한데 내가 마침 이곳에서 귀하를 만났으니 사매가 맡은 임무를 대신 해결해 줄 생각이오." 무영신룡단혼도는 우두커니 서서 그를 보고 있다가 돌연 껄껄 웃었 다. "하하…… 정말 의리있는 사형제시군. 한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리라고 생각하시오?" 도옥린은 무서운 안광을 번뜩이며 천천히 허리춤에 찬 금검을 잡아 갔다. "안 될 것도 없지." 무영신룡단흔도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흔꽤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청해 오는 싸움을 거절할 내가 아니니 이번 기회에 어디 사대공자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보겠소." 도옥린은 주저하지 않고 금검을 뽑아 들었다. 챙!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휘황찬란한 검광이 번뜩거렸다. 무영신룡단혼도는 도옥린의 수중에 들린 찬란한 금검을 바라보며 나 직이 감탄했다. "정말 좋은 검이군." 도옥린은 두 손으로 검을 움켜잡고 자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은 무림의 오대명검 중 하나인 금광검이오. 듣자 하니 귀하에게도 한 자루 보도가 있다고 하던데, 이 금광검에 미치지는 못할 거요." "하하…… 그거야 겨뤄 봐야 아는 일이지. 본시 승부란 병기의 우열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무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오." "옳은 말. 그럼 어디 내 검을 받아 보시오." 도옥린은 금검을 휘두르며 무영신룡단혼도의 가슴팍을 노리고 짓쳐 들었다 무영신룡단혼도는 급히 등뒤에서 천룡보도를 뽑아 들고 맞서 갔다. 창! 차차창! 그들의 공세는 너무도 신속하여 단 한 번의 격돌에 서로의 병장기가 무려 스물두 번이나 맞부딪쳤다. "으음……" 도옥린은 그 격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하나 무영신룡단혼도는 몸을 한번 휘청거렸을 뿐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도옥린은 이것을 보고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 왔다. '아니 내 공력은 이미 두 갑자에 거의 육박하는데 저자의 내공이 나를 능가하다니…… 과연 무영신룡단혼도가 백년래 최고의 도객 으로 도왕이라고까지 불린다더니, 명불허전이구나.' 도옥린은 경각심이 크게 높아져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즉시 전력을 돋우어 십이 검을 발출했다. 파파파팍! 주위가 온통 찬란한 검광에 횝싸여 버렸다. 하나 무영신룡단혼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검광 속으로 뛰어들며 매섭게 도를 휘둘렀다. 팟! 팟! 팟! 도기가 빗발같이 뿌려지며 도옥린이 펼쳐 냈던 검광이 모래성처럼 허 물어져 버렸다. 도옥린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연신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는 상대의 도가 이토록 날카로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 다가 반격 한번 못 해보고 정신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러다가 돌연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동시에 그는 양손으로 금광검을 움켜쥔 채 천천히 가슴팍으로 끌어올 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무영신룡단혼도는 눈을 번쩍 빛냈다. '드디어 저자가 낙일검을 펼쳐 내는군.'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상대의 검을 주시했다. 찰나, 휘이이이잉……!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빛 검광을 뿜어 내던 도옥린의 금광검에서 붉 은 노을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급격히 확산되더니 이내 반경 오 장 이내를 피처럼 붉은 노을빛 검광으로 휘감아 버렸다. 무영신룡단혼도는 주위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고 두 눈을 번갯불처럼 빛낸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차-- 아-- 압!" 돌연 도옥린이 천지가 떠나갈 듯한 고함과 함께 긍광검을 세차게 휘 둘렀다. 그 휘두르는 모양은 몹시 특이하여 마치 풍차를 돌리는 듯 무질서 하기조차 했다. 하나 그 순간 주위를 휘감았던 노을빛 검광이 미친 듯이 요동을 치며 무영신룡단혼도에게 몰아쳐 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노도와 같은 폭풍우가 일엽편주를 휘몰아치는 듯한 광경 이었다. 순간 무영신룡단혼도는 수중에 움켜쥔 천룡보도로 커다란 원을 그렸 다. 고오오오…… 그러자 허공에 커다랗게 그려진 원 속에서 뼈를 에는 듯한 무시무시 한 도기가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콰콰콰쾅! 폭발하는 도기와 노을빛 검광이 마주치자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도옥린은 전신의 피부가 갈라 터지는 듯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입 가로 실낱 같은 핏줄기를 흘린 채 뒤로 물러났다. 그때 돌연 폭발하는 도기 한 가닥이 그의 미간을 향해 살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쾌액! "앗?" 대경 실색한 도옥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왼손 중지를 튕겨 냈다. 찰나, 팟!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오던 도기가 갑자기 무형의 장벽에 가로 막힌 듯 튕겨져 나갔다. "엇?" 동시에 도기 속에서 무영신룡단혼도의 짤막한 경호성이 들려 왔다. 잠시 후 주위를 뒤덮었던 폭발할 듯한 도기와 검광의 소용돌이는 씻 은 듯이 사라졌다. 무영신룡단혼도의 모습 역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도옥린만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금광검을 든 채 장내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수중에 들린 금광검은 끝 부분이 한 치쯤 부 러져 있었다. "도 공자, 괜찮은가?" 도옥린은 몸을 부르르 떨며 주위를 둘러보다 돌연 땅이 꺼져라 탄식 을 토해 냈다. "아! 그가 낙일검강까지 막아 낼 줄이야…… 그자의 무공은 소문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진조영은 그가 별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음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이만하길 다행이다. 한데 그가 왜 더 공격을 하지 않고 떠났는지 궁금하군" 도옥린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그게 의아스러웠습니다. 그가 한 번만 더 칼을 휘둘렀으면 나는 당해 내지 못했을 텐데…… 설마 내가 죽일 가치도 없는 인간 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겠지요?" 단 한 번의 패배로 그는 크게 의기 소침한 모습이었다. 진조영은 그를 위로해 주었다. "도 공자는그런 소리 말게. 아마 그도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네를 상대할 힘이 없어 도망갔는지도 모르네." 도옥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까요?" 진조영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을 걸세. 그렇지 않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아무런 말도 없이 훌쩍 떠났겠나? 자네는 결코 패한 게 아닐세." 도옥린은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낙일검이 천하무적의 검학인 줄 알았는데 그에 의해 깨지다니…… 대체 무영신룡단혼도의 그 무서운 도법은 무엇일까요?" "내가 언뜻 들은 이야기인데, 그자의 도법이 우내칠대무학 중 하나인 천애도일 거라는 소문이 들리더군." 도옥린은 깜짝 놀랐다. "천애도라고요?" "그렇네. 그게 아니고서야 어찌 낙일검을 상대할 수 있겠나?" 도옥린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렇겠군요. 어쩐지 그자의 도법이 무섭더라니…… 같은 우내칠대무학을 익힌 데다 그자의 내공이 나보다 조금 더 높아 낙일검이 깨지고 만걸 겁니다." "흠…… 어쨌든 그자의 무공이 저토록 높으니 그에게서 유령천자의 무공을 빼앗는다는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두 사람은 나직한 음성으로 몇 마디 더 소곤거린 후 몸을 날려 정자 를 떠나갔다. 한편 도옥린과 격돌한 후 돌연 사라졌던 무영신룡단흔도는 유성 같은 신법으로 연자기 아래쪽에 있는 숲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사람이 초조한 안색으로 그를 기다리고 서 있다 가 반색을 하며 맞았다. "이제 왔군," 그는 바로 조금 전 정자에 나타났던 관원 복장을 한 중년인으로, 팔비도룡 여풍운이 변장을 한 것이었다. 그의 앞에 도착한 무영신룡단혼도는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강옥봉의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여풍운은 급히 그에게 물었다. "그래, 도옥린과 맞서 본 느낌은 어떤기? 그의 낙일검을 받아 낼 수 있겠나?" 강옥봉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그자의 낙일검은 거의 구 성 수준이었지만 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한데 마지막 순간에 그자가 돌연 일지를 뻗었는데 그 위력이 실로 놀라웠습니다." 이어 강옥봉이 자신의 왼쪽 소맷자락을 가리켰다. 여풍운이 보니 그의 소맷자락에는 오리알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여풍운은 깜짝 놀라 걱정스런 안색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이게 지공에 뚫린 흔적이란 말인가? 정말 엄청나군…… 다치지는 않았나?" 강옥봉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유령보를 펼쳐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데 그자의 지법은 정말 괴이하더군요. 분명 제 도법보다 늦게 발출되었는데도 어느새 제 보도를 막아 냈을 뿐 아니라 튕겨 내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 지법은 아무 소리도 없고 형체도 보이지 않아, 제가 유령보를 익히고 있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여풍운은 그의 말을 듣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갑자기 안색이 홱 변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최심지란 말인가……?" 강옥봉은 그의 넋두리 같은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최심지라면 우내칠대무학에 속해 있는 무적지공이 아닙니까?" 여풍운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해졌다. "그렇네. 자네가 말한 대로라면 그런 위력을 가진 지공은 무림에서는 오직 최심지밖에 없네. 최심지는 쌍성 중 화의성수 육만루의 독문절학인데, 그렇다면 자네의 짐작대로 성심장주는 바로 쌍성임이 분명하겠군." 최심지는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사상 공전절후한 무적의 지공이었다. -- 흔적도 없고 소리도 없다. 창백한 손가락이 미간에 닿는 순간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게 된다. 당년에 화의성수 육만루는 바로 이 공포의 지공이라는 최심지와 여의산수로 무림에서 적수를 만나지 못했었다. "성심장이 쌍성이 세운 것이라면 아마 그 잠재력은 회서방을 능가할 지도 모르네. 아무래도 회서방을 먼저 제거하고 성싱장과 마지막 결판을 내야 한다는 악궁의 계획이 백번 옳은 것 같네." 여풍운의 진지한 말에 강옥봉은 어느새 담담한 신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악 대협과 저는 이미 이런 사태를 충분히 예상하고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쌍성이 성심장주로 밝혀진 이상 계획에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냉 낭자를 회서방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어서 회서방의 총단이 있는 곳을 알아 내는 일입니다." "그야 그렇지만 그놈들은 정말 한 떼의 쥐새끼들같이 행동이 은밀 해서 도무지 꼬리가 잡히지 않는다네. 하다못해 그들의 분타마저 알려진 게 거의 없으니……" "관건은 음적양입니다. 도중웅은 자신의 거처가 있지만 음적양은 일정한 거처가 없습니다. 때문에 만약 냉 낭자를 놓치게 되면 음적양은 특정한 일이 없는 한 다시 총단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때를 놓치지 말고 그자의 뒤를 밟아야 합니다." "염려 말게. 사람 뒤를 쫓는 거라면 천하제일의 재간을 가지고 있는 천리일순 방각이 이미 그놈의 뒤를 따르고 있으니……" 그때 돌연 한 사람이 비호처럼 날아왔다. "강 노제……" 강옥봉과 여풍운이 보니 그는 바로 부여송이었다. 부여송은 급히 달려와서 입을 열었다. "방금 방 늙은이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냉 낭자가 자네를 찾아 연자기로 떠났다네, 한데 그 뒤론 음적양과 도중웅이 쫓고 있다는 소식일세." 여풍운은 다급한 표정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늦기 전에 빨리 가보게."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후 몸을 날렸다. "이번에 실패해도 음적양은 당분간 냉 낭자의 뒤를 쫓을 것입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는 일전에 알려 드린 대로 준비를 해주십시오……" 그의 마지막 말은 어느새 숲 저편에서 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강옥봉의 기경할 신법이 새삼 감탄스러운 듯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도 몸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제29장 금제 정오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일 무렵. 연자기 정상에 있는 정자에 네 개의 인영이 유성처럼 치달려왔다. 그들은 모두가 예쁘게 생긴 소녀들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얼굴에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앞장선 소녀가 정자를 둘러보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가 벌써 떠나 버렸단 말인가?" 그 음성으로 보아 앞장선 소려는 바로 냉상아임이 분명했다. 뒤따르고 있는 세 명의 소녀는 그녀의 수하들인 매련, 이운, 취연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하하…… 냉 낭자, 또 만나게 되었구려." 우렁찬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음적양과 도중웅이 십여 명의 회서방 고수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십여 명의 회서방 고수들이 정자를 포위하는 사이 음적양과 도중웅은 정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음적양은 음침한 시선으로 냉상아의 전신을 쓰윽 훌어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냉 낭자……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우리는 정말 인연이 각별한 사이구려." 냉상아는 자신이 인피면구를 썼는데도 그가 한눈에 알아보는 것을 보고, 그가 진작부터 자신들의 뒤를 따라왔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흥! 음적양, 그렇지 않아도 네놈에게 일전에 받은 빛을 갚으려고 했는데 네놈이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나다니…… 쓴맛을 더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흐흐…… 아직 단맛도 보지 못했는데 어찌 쓴맛부터 본단 말이오?" 말을 하면서도 음적양의 눈초리는 연신 냉상아의 탐스러운 가슴과 허 리 아래의 미묘한 부분을 훑고 있었다. 그녀는 그 시선을 대하자 마치 전신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몸이 오싹하고 기분이 나빴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음적양의 음 탕한 눈을 후벼 파주고 싶었으나, 일전에도 그의 격장지계에 넘어가 봉변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솟구치는 노화를 억지로 참아 눌렀다. "음적양, 네놈은 그 음탕한 마음 때문에 필시 제 명에 죽지 못할 것 이다." 하나 음적양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받아 넘겼다. "흐흐…… 인간이라면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게 아니겠소? 이왕 죽을거라면 꽃 속에 파묻혀 풍류귀신이 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오." 냉상아는 두 눈을 잔뜩 찌푸린 채 매섭게 쏘아붙였다. "정말 심보만큼이나 입도 더럽구나. 사대공자의 명성이 너로 인해 땅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흐흐……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돌연 음적양이 냅다 고함을 지르며 다섯 손가락을 펼쳐 냉상아의 왼 쪽 어깨를 움켜 갔다. 획! 그것은 너무도 빠르고 돌발적인 일이었던지라 냉상아는 미처 피할 생 각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냉상아의 가녀린 어깨뼈가 으스러질 찰나, 탁! 괴이하게도 음적양의 손가락이 무형의 탄력에 의해 그녀의 어깨에서 저절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엇?" 음적양은 내심 크게 놀라며 멈칫거렸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냉상아 는 고함을 지르면서 연검을 뽑아 들고 그의 상단과 하단을 연거푸 공 격했다. 파파파팍! 삽시간에 주위는 엄밀한 검영에 휘감겨 버렸다. 음적양은 일시지간 허를 찔려 계속 뒤로 밀려나며 피하기에 바빴다. 그녀의 공세가 얼마나 질풍 같던지 미처 음양수의 공력을 끌어올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 도중웅이 회서방의 고수들에게 눈짓을 하고는 껄껄 웃으며 덤벼들었다. 그러자 냉상아를 따라왔던 소녀들도 서슬이 퍼런 검광을 번뜩이며 맞 서 갔다. 쐐쐐쐐! 파파파팟! 삽시간에 정자 안은 온통 검광이 번뜩이고 고함 소리와 장풍이 난무 하는 격전장으로 변해 버렸다. 냉상아는 옆으로 몸을 약간 돌려 도중웅의 주먹을 피하면서도 급히 천성비사의 절묘한 일초를 전개하여 세차게 후려쳤다. 쾌애액! 음적양은 그녀의 강맹하고 피이한 검세를 겨우 피했으나 왼쪽 소맷자 락이 길게 찢겨져 팔이 송두리째 드러났다. "앗!" 하마터면 팔을 잘릴 뻔한 음적양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급히 뒤 로 물러났다. 하나 이미 그에게 살심을 품고 있는 냉상아는 추호의 여유도 주지 않고 그에게 날아들며 팔 검을 쉴새없이 내뻗었다. 파파파팍! 그 순간 도중웅이 번개같이 달려와 그녀를 향해 삼 권을 내뻗었다. 꽈릉! 굉음과 합께 막강한 권세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녀는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급히 검을 거두며 옆으로 몸을 돌려 피 했다.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된 음적양은 이를 부드득 갈며 양손을 들어올렸 다. "이년, 더 이상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 그는 사실 그녀의 몸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알아 이제까지 음양수의 공 력을 사용하는 것을 억제하고 있었으나, 조금 전에 하마터면 큰 낭패 를 당할 뻔하자 마음이 바뀌었다. 쳐들려진 그의 양손은 어느새 시뻘겋고 새하얀 색으로 변해 있었다. 냉상아는 그것을 보자 안색이 약간 변하며 검을 양손으로 잡고 가슴 팍으로 끌어올렸다. 우우웅…… 그녀의 검에 노을빛 검광이 어리기 시작했다. 한 쪽은 천하제일의 장공인 음양수! 다른 한 쪽은 천하제일의 검법인 낙일검! 두 희대의 절기가 막 격돌하려는 찰나, "크윽!" 뒤에서 냉상아를 암습하려던 도중웅이 갑자기 짤막한 신음을 토하며 몸을 휘청거렸다. 막 음양수를 내뻗으려던 음적양은 그것을 보고 몸을 멈칫했다. 도중웅은 간신히 흔들리는 몸을 가누더니 안색이 창백해져 급히 외쳤 다. "이 근처에 절세고수가 숨어 있소. 어서 달아납시다." 그는 비호처럼 몸을 날려 정자를 마져 나갔다. 음적양도 정세가 심상 치 않음을 느끼고는 급히 일행을 데리고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냉상아는 도리어 의아스런 표정이 되어 정자 안을 살폈다. 그때 언뜻 인영이 번뜩거리는가 싶더니 정자의 지붕 위에서 한 사람 이 떨어져 내렸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강옥봉이었다. 그를 보자 그녀는 한편으로는 매우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당신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어요?" 강옥봉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에 왔소." 냉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혹시 아까 음적양이 나를 암습하다가 갑자기 물러난 것은 공자 가 손을 썼기 때문인가요?" 강옥봉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냉상아는 그제서야 자신이 음적양의 암습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강 옥봉이 은밀히 도와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강옥봉의 준수한 얼굴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공자는 왜 동소원에서 아무 말도 없이 떠났어요?" 그녀의 표정과 말속에는 원망스러움과 씁쓸해 하는 기색이 역력히 깃 들여 있었다. 강옥봉은 가볍게 탄식했다. "낭자, 나의 심정을 몰라서 그렇게 묻는 것이오?" 냉상아는 잠시 말이 엄다가 심각한 기색을 보였다. "아정 낭자가 이곳에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해서 부리나 케 달려왔는데, 그런 말씀은 저에게 하셔도 되지 않았을까요?" 나에게는 강적들이 수없이 많아서 언제 무슨 화를 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인데 낭자까지 성심장을 배반하여 또 강적을 만들려 하시오?" 냉상아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공자께서 절 믿어만 주신다면 성심장쯤은 배반해 봤자 아무렇지도 않을 거예요." "낭자가 날 사랑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게 하면 도리어 궁지에 빠 져 화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할 거요." 냉상아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더욱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강옥봉은 주위를 살퍼다가 나직이 말했다. "이곳은 자세한 이야기를 할 곳이 못 되니 어디 은밀한 장소로 가서 얘기합시다." "좋아요." 강옥봉은 냉상아 일행을 먼저 정자 밖으로 나가게 한 후 자신은 잠시 정자에 머물러 있다가 그녀들에게로 걸어왔다. 냉상아는 의혹에 찬 표정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방금 정자에서 무엇을 하셨어요?" 강옥봉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별일 아니오. 간단한 미끼를 놨을 뿐이오. 어서 갑시다." 냉상아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강옥봉이 먼저 몸을 날리자 할 수 없이 세 소녀와 함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자 앞에 다시 두 개의 인영이 나 타났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에 떠나갔던 금검공자 도옥린과 탁천신수 진조영 이었다. 도옥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군요. 아까 보니까 이곳에 예리한 검기가 번뜩이고 있었는데 ……" 진조영은 그의 뒤를 따라오며 급히 물었다. "그 검기가 냉 낭자의 옥현검기가 확실한가?" 도옥린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원래 이 사부께서는 오대신검 중 천황검을 대사형께, 그리고 금광검과 옥현검을 저와 사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방금 전에 제가 본 검기는 그 중에서 가장 부드러우면서 도 예리한 옥현검에서 뿜어 나오는 검기가 분명했습니다." 정자를 둘러보던 도옥린은 싸움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나 있는 것을 보고 표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방금 전에 여기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게 분명하군요. 사매가 부상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때 진조영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경호성을 지르며 급히 한쪽 구석으 로 달려갔다. "앗? 여기……" 도옥린은 절로 마음이 다급해져 그에게 달려가며 물었다. "진 대협, 무엇이……" 도옥린은 채 말을 맺지 못했다. 진조영이 찢어진 녹의 자락을 바닥에서 집어 들고 있는 것을 본 것이 다. 녹의 자락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도옥린은 그것이 사매인 무정독연 냉상아의 옷께서 떨어져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이건 사매의 옷자락인데……" 그는 안색이 핼쑥해진 채 몸을 휘청거리며 더듬거렸다. 진조영은 그보다는 조금 더 침착하게 날카로운 안광을 번뜩였다. "도 공자는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건 단지 옷소매에 불과할 뿐이니 냉 낭자가 아직 혈겁을 당했다는 증거는 되지 않네." 그때 도옥린이 갑자기 정자의 한쪽 기둥으로 달려갔다. 정자는 장정 한 사람이 겨우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나무기둥 여덟 개 로 세워진 것인데, 그 중 한 나무기둥에 기이한 흔적이 나 있는 것이 다. 그것은 마치 예리한 도끼에 베어진 듯 움푹 파인 자국인데, 이상하게 도 그 부분의 색깔이 붉고 하얀 두 가지 색으로 알록달록하게 물들어 져 있었다. 도옥린을 뒤따라온 진조영은 그 흔적이 도끼에 베어진 것이 아니라 칼날처럼 예리한 장력에 의해 그렇게 된 것임을 알아보았다. 도옥린은 낯빛을 딱딱하게 굳힌 채 홍백으로 물든 기등의 잘려진 부 분을 응시했다. "이건 음양수의 장공이 스쳐 간 흔적입니다." 진조영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양수는 음양공자 음적양의 독문절학인데…… 아무래도 냉 낭자는 그자에게 끌려간 것 같군." 도옥런은 이를 악물며 두 눈에서 줄기줄기 살광을 뻗어 냈다. "음적양! 그놈이 감히 냉 사매를 납치해 가다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진조영도 침통한 안색으로 도옥린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도옥린의 성난 외침만이 정자 위를 공허하게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 * * 한편 연자기를 떠난 강옥봉과 냉상아 일행은 질풍처럼 신형을 움직여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들이 약 십오 리쯤 달리자 어느 산골짜기 입구에 당도했다. 어느새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하늘에는 월광이 떠오르고 있었다. 달빛은 교교하고 별들만이 소리없이 소곤대는데 경색은 참담해 보였다. 강옥봉은 그녀들을 데리고 절벽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내려가니 덩굴이 얽혀 있는 곳에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그는 냉상아의 손을 이끌고 덩굴을 헤치며 동굴로 들어가서 송지등에 불을 붙였다. 세 명의 소녀들도 물론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석실은 세 칸 정도였는데 탁자와 의자, 그리고 침구 등도 준비되어 있었고, 부엌도 마련되어 있어서 보통 가정집처럼 생활하기 불편한 점이 없었다. 석실은 매우 깨끗하고 조용했는데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맑고 시원했다. 냉상아는 인피면구를 벗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활짝 웃었다. "이곳이 몹시 마음에 드는군요. 언제 이런 곳을 알아 두었나요?" 강옥봉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이곳은 원래 부 대협이 발견한 장소였소. 간단하게 청소를 하고 가구들을 들여놓으니 제법 그럴듯해서 며칠 거주하기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을 거요." "당신은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오려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군요?" "그런 건 아니고 만일을 위해서 임시로 피할 곳을 마련해 두었던 거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게는 적이 많아서 언제 습격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오." 냉상아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의 그 적 속에는 성심장도 포함되나요?" "하하…… 성심장이 내게서 유령천자의 비급을 빼앗으려고 하는 한은 그들도 내 적이 분명하오. 낭자도 그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오?" 냉상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짐짓 토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그 일로 나를 원망하세요?" 강옥봉은 빙그레 웃었다. "그럴 리가 있소? 덕분에 낭자와 같은 미인를 알게 되었는데……" 냉상아는 홍조를 가득 띤 채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었다. 강옥봉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낭자에게 유령천자의 비급을 입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두 명의 장주 중 누구요?" 그 말에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당신은 성심장에 장주가 두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내게도 약간의 소식통이 있어 귀장에 대한 일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소. 낭자의 사부는 이장주인 모양인데, 그가 지시를 내린 거요?" 냉상아는 해연히 놀랐다. "당신은 얼마나 더 알고 있어요? 내가 이장주의 제자라는 건 본 장에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그리 많이 알고 있지는 않소. 귀장에 세 명의 총관과 성심오로, 팔대빈객이 있다는 것과 성심장주에게는 낭자말고도 두 명의 제자가 더 있다는 것…… 뭐 그 정도요." "성심장주가 어떤 사람들인지도 알고 있나요?"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가 낙일검을 쓰는 것을 보고 짐작했소." 냉상아는 한동안 강옥봉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당신의 이목은 정말 대단하군요.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성심장에 대항하겠다는 거예요?" "상대가 누구이건 무림의 정의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이라면 분골쇄신 해서라도 막겠다는 것이 내 결심이오." 냉상아는 그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 내십 탄식을 토했다. "당신의 그런 결심에는 찬사를 보내는 바예요.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강옥봉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오전에 낭자의 사형인 도옥린을 반났소." 냉상아는 흠칫하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도 사형이 금릉에 왔나요?" "그렇소. 그는 낭자를 찾고 있었소. 아마 귀장에서 한동안 낭자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자 낭자를 찾으려고 그를 보낸 모양이오." 냉상아의 얼굴에 걱정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강옥봉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아마 낭자가 곧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필시 낭자를 의심하게 될거요. 내가 임시 방편으로 그들의 의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놓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발각되고 말 거요." 이어 그는 자신이 연자기의 정자에 그녀의 소매와 음양수의 흔적을 흉내내어 남겨 놓았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일면 놀라고, 일면 경탄하는 표정이 되었다. "당신은 내 옷자락을 언제 잘라 갔어요?" "하하…… 그건 단지 낭자의 옷과 비슷한 옷감을 골라 찢어 놓은 조각에 불과하오. 내가 어찌 낭자의 옷을 자를 수 있겠소?" 냉상아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은 보기보다는 아주 계략이 뛰어나군요. 그렇게 된다면 도 사형은 필시 음적양을 의심할 거예요." "그렇다고 안심할 수만은 없소. 만일 도옥린이 음적양을 직접 찾아가 따진다면 곧 그때 일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될지 모르오." 냉상아의 눈살이 다시 찌푸려졌다. "그럼 어쩌지요?" "도옥린이 사실을 알기 전에 낭자가 성심장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음적양과 도옥린이 직접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하오." 냉상아는 딱 부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난 절대 성심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이곳에 남아 당신과 함께 싸우겠어요!" 그녀의 음성에는 강옥봉에 대한 짙은 애정과 함께 어떤 일이 있어도 굽히지 않겠다는 각오의 빛이 뚜렸했다. 강옥봉은 자신을 위해서 사문마저 저버리겠다는 그너가 점점 사랑스 러워짐을 느끼고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강옥봉이 아무 말도 없이 주시하자 그녀는 곱게 눈을 흘겼다. "아니,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혹시 내 얼굴이 보기 싫어서……" "낭자의 얼굴은 꽃보다 더 예뻐서 백번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소." 그녀는 내심 가슴이 터질 듯 기뻤으나 짐짓 쌀쌀맞은 표정을 지어 보 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당장 죽여 버렸을 거예요." 강옥봉은 정색을 하면서 슬쩍 물었다. "낭자는 성심장의 명령을 받고 왔으니 반드시 돌아갈 기한이 있을 게 아니오?" "그건 왜 물으세요?" "낭자의 생사에 관한 문제인데 어떻게 내가 그걸 묻지 않겠소?" 냉상아는 그의 말이 진지한 것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단오절 안에 성심장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어요." 강옥봉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보름밖에 남지 않았구려. 낭자가 그 기한 안으로 가지 않으면 비명에 죽을 거요." 냉상아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낭자뿐만 아니라 이 세 분 낭자들도 참화를 당하게 될 것이오……"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도옥린과 진조영이 대화하는 걸 엿들었는데 그들은 낭자가 보름 내로 장에 돌아오지 않으면 비명 횡사할 거라고 하더군요. 낭자는 일단 그 기한 안에 가는 것이 유리할 겁니다." 냉상아는 고운 아미를 잔뜩 찌푸렸다. "기한 내 돌아가는 게 유리할 거라는 말씀은 믿겠는데, 우리 네 사람이 몽땅 비명에 죽는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어요." 강옥봉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보기에는 아마 성심장주가 낭자들의 몸에 무서운 금제를 가해 놓은 것 같소." 이런 날벼락 같은 말에 냉상아를 비롯한 네 소녀들은 대경 실색했다. "아니, 당신의 말은 사부께서 내게 하독하셨다는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싫지만 도옥린과 진조영의 대화는 그것을 암시하고 있었소." 냉상아는 너무도 어이가 없는지 멍청히 서 있었다. "사부께서 왜 나를……?" "그건 아마도 낭자가 성심장 내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만에 하나라도 딴마음을 품거나 적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 두려워서였을 거요." 냉상아는 한동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나직하게 탄식했다. "그분만을 탓할 수는 없군요. 결국 그분의 걱정대로 되고 말았으니.." "낭자가 기한 내로만 돌아가면 아무 일 없을 거요." 냉상아는 조금 의기 소침해졌다. "내가 금제당한 것을 알고도 태연하게 돌아가란 말인가요? 난 그렇게는 못 해요. 당신이 보기에는 어느 부분이 제압당한 것 같아요?" "내가 의도를 약간 알고 있기 때문에 맥을 짚어 보면 어느 부분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거요." 그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냉상아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놓았고, 다른 소녀들도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맡겼다. 강옥봉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반 시진 동안 그녀들의 맥을 세밀히 짚어 보았다. 냉상아는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강옥봉을 바라보았 다. "어느 부분인지 아셨나요?" 강옥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은 왼쪽 옆구리 아래 부분에 제압을 당해 있소. 내가 해소시킬 방법을 좀더 연구하고 있을 테니 서로 검사해 보시오." 그녀들은 놀라는 표정으로 다른 석실로 들어가 옷을 벗더니 서로 자 세히 관찰했다. 과연 눈에 띌 만한 붉은 반점이 있었다. 잠시 후 냉상아가 그녀들을 데리고 나오더니 한 소녀를 가리키며 신 중한 표정을 지었다. "저 매련의 옆구리에 콩알만한 반점이 있는데 해소시킬 방법이 있나요?" 강옥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긴 있소만, 좀 곤란한 점이 있으니 냉 낭자는 날 따라오시오." 냉상아는 눈을 깜빡거리며 잠시 생각하다가 그 이유를 알고 세 소녀들을 향해 의미있는 미소를 짓더니 뒤를 따랐다. 그녀는 다른 석실로 가서 자리에 앉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너무 어색해서 못쓰겠어요. 당신은 이제부터 내 이름을 직접 부르든지 아니면 아매라고 부르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이곳으로 데리고 왔나요?" "잘은 모르지만 네 분은 어떤 기독에 상해 있는 것 같소. 추측하기에는 다섯 가지 독물이 혼합된 것인데 독성이 서로 견제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발작하지 않아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것이오. 그러나 독성이 약간 미약한 독물이 먼저 융화되면 다른 독물도 뒤를 이어 융화될 것이므로 한번 발작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치료할 수 없게 되오." "그럼 어서 손을 써주세요." 그러나 강옥봉은 고개를 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전번에도 치료하기가 어려웠는데 어찌 또다시……" 냉상아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더니 결심한 듯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때 방편술을 썼다고 했지 않았나요? 그녀들 세 사람은 저와 친자매와 같으므로 모든 것을 제가 책임질 테니 어서 우리들을 치료해 주세요." 강옥봉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그 석실에서 나오면서 명랑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 부근의 약포에 가서 약재를 사오겠소. 그리고 적의 침범을 막기 위해 동굴 밖에 기문진을 쳐놓을 테니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지 마시오." 냉상아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만약 약재를 사러 나갔다가 아주 도망쳐 버린다면 이젠 정말 용서하지 않겠어요." 강옥옹은 그녀의 말이 농담인 것을 알면서도 짐짓 정색을 했다. "낭자는 아직도 날 믿지 못하오? 난 그렇게 실언하는 사람은 아니오!" 냉상아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서 입을 가리고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알겠어요. 어서 다녀오기나 하세요."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미소를 음미하면서 밖으로 나왔 다. 강옥봉이 나간 후 네 소녀들은 피로에 지쳐서 얼마 동안 자다가 깨어 났으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송지등의 불은 여전히 밝혀져 있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강옥봉은 오지 않았다. 그녀들이 초조하고 불안해 하고 있을 때 하나의 인영이 급히 날아들 었다. 냉상아가 놀라 보니 그는 바로 강옥봉이었다. 냉상아는 그가 손에 큼직한 포대 하나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난 또 당신이 약속을 어기고 아주 도망쳐 버린 줄로 생각할 뻔 했어요. 그 포대에는 무엇이 있나요?" 강옥봉은 미소를 지으며 포대 속에서 약재를 위시하여 연잎에 싼 만 두와 고기, 그리고 술까지 한 병 꺼냈다. 냉상아는 그런 물건들을 보고 강옥봉의 세세한 마음씨에 흐뭇해 했 다. "우리들이 이런 곳에서 음식을 먹게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어요." "네 분들의 기독이 완전히 해소되려면 이곳에서 최소한 삼 일간은 있어야 하오." 그는 포대에서 그릇과 기타 도구를 꺼내면서 다시 말했다. "수고스럽겠지만 누가 음식을 좀 만드시오." 그리고는 경장 차림으로 바꿔 입자 냉상아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그러세요?" "조금 전에 이 너머 황폐한 절 옆을 지나다가 수상한 인물들이 놀란 표정으로 숲속에 숨어서 밀담을 나누는 것을 보았소. 그들은 낭자를 뒤쫓던 회서방의 고수들인 것 같은데, 무공도 고강하고 안력도 무척 예리하게 보이더군요." 강옥봉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네 분을 치료하는 사이에 그자들이 만일 이곳을 발견하고 침입 한다면 우린 꼼짝없이 당하게 될 것이므로 사전에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려는 것이오." 그는 말을 끝내고는 인피면구를 꺼내어 썼다. 그러자 황산의 절영곡에 나타났던 중년인의 모습으로 변했는데, 인상이 무척 싸늘하게 보였다. 그는 그녀들에게 고개를 까딱거리고는 질풍처럼 밖으로 나갔다. 제30장 밤의 열풍 날씨는 청명하고 태양이 나무 사이로 스며들어 사람의 기분을 무척 상쾌하게 했다. 강옥봉은 동굴에서 나와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두 개의 인영이 급히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나이는 사십 세에 가까워 보였고, 표정은 냉혹했는데 흑의를 걸친 사나이들이었다. 좌측에 선 사람이 강옥봉을 보더니 음침하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 다. "당신은 누구이기에 이곳에서 기웃거리고 있소?" 강옥봉은 냉랭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당신들이 내 동굴 부근에서 무얼 하는지 알아보려던 참이었소. 만일 솔직히 말하지 알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소이다!" 그러자 우측에 선 흑의인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건방진 놈! 감히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그러느냐? 수십년 전에 운남 일대에서 위명을 날리던 벽력무상이 바로 우리들이시다!" 그의 호통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벽력무상 광씨 형제는 운남성에서는 거의 제왕 같은 존재들로, 얼마 전에 회서방에 포섭되어 각기 이십사호 온서와 이십오호 온서로 발탁되었다. 강옥봉은 담담하게 웃었다. "당신들이 운남 지방에서 제법 명성을 날렸나 본데, 지난 일은 모두 물거품과 같으므로 전날의 명성으로 나를 위협하지는 못할 거요." 그러자 좌측에 선 흑의인이 냉소를 쳤다. "흥! 네놈이 감히 이 광운 앞에서 시건방진 소릴 지껄이느냐?" 꽈릉! 그가 우장을 휘두르자 한 가닥 암경이 비껴나더니 아름드리 나무에 부딪혔다. 꽝! 굉음과 함께 나무는 중간이 부러져 넘어자면서 세찬 바람 소리를 냈 다. 하나 강옥봉은 태연스런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따위 걸 가지고 나를 위협하려는 게요?" 좌측에 선 흑의인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형님, 잠시 손을 멈추십시오." 그리고는 강옥봉을 향해 말을 꺼냈다. "우리는 원수를 찾아서 이곳까지 왔을 뿐 귀하와는 아무 관계도 없소." 강옥봉은 침중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나와 관계가 없다면서 왜 무례하게 구시오? 나는 평소 남을 침범하지도 않고 남이 침범하면 용서하지도 않소. 당신들이 내게 먼저 수작을 걸었으니 솜씨가 악랄하다고 원망하지 마시오." 그는 등뒤에서 천룡보도를 뽑아 들었다. 창!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섬뜩한 도기가 무섭게 번쩍거렸다. 벽력무상 광운과 광뢰는 상대의 도가 절세의 보도임을 알고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하나 이들은 이번에 회서방에 가입한 후 처음으로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완수하기로 작정을 하고 있던 터인지라 상대가 칼을 뽑자 불 같은 흉성이 끓어올랐다. 광운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놈이 또 하나 나타났군!" 강옥봉은 담담하게 말했다. "죽을 사람들은 바로 당신들이오. 내 금지에까지 침입하여 손수 심은 나무까지 박살냈으니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마시오." 그는 수중의 천룡보도를 힘껏 움켜잡은 후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내 삼 도를 받아 낸다면 이곳에서 무사히 보내 주겠소. 그러니 잘 생각해서 행동을 취하시오." 이런 말을 듣자 성질이 급한 광운은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하고 쌍 장을 휘두르며 덮쳐 왔다. 와르릉! 노도와 같은 경력이 강옥봉을 향해 몰아쳐 왔다. 하나 강옥봉은 태연스런 표정으로 우뚝 선 채 천룡보도로 원형을 그 리면서 기묘한 동작을 취하더니 돌연 칼을 휘둘렀다. 그의 이번 초식 은 천애팔도 중에서도 절초인 소리탄차 일식이었기 위력이 막강하기 그지없어 도풍이 회오리바람처럼 사납게 몰아쳤다. 파파파팍! 광운은 느닷없이 무시무시한 도기가 몰아쳐 오자 대경 실색하며 급히 손을 움츠리며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강옥봉의 천룡보도가 전면에서 돌려 치는 것 같더니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번개같이 날아왔다. 팟! "크악!" 광운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급히 뒤로 물러 섰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분수 같은 핏줄기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강옥봉은 다시 접근하면서 매서운 일도를 그어댔다. 팟! 핏빛 무지개가 그려지며 광운은 배가 써억 갈리진 채 내장을 쏟아 내 며 쓰러졌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죽음이었다. 악. 그는 갖은 만행을 저지르며 숱한 사람들을 괴롭힌 희대의 마두였으나 결국 강옥봉와 손에 의해 일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광뢰는 자신의 형인 광운이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참사를 당하자 간담 이 서늘해져 급히 몸을 공중으로 솟구쳤다. "어딜 도망치려 하느냐?" 강옥봉은 버럭 외치면서 도를 들어 일단 허공을 향해 원을 한 번 그 리며 휘두르다가 세차게 던졌다. 쐐액! 도는 푸른 도광을 그으며 날아가더니 허공에 떠 있는 광뢰의 두 다리 를 치고 땅에 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천애팔도의 일곱 번째 초식인 편효축차였다. 광뢰는 두 다리가 잘려져 나가자 피를 흘리며 추락하여 처참하게 부 르짖었다. "다, 당신은 무영신룡단혼도……!" 그러나 강옥봉은 천룡보도를 집어 다가들더니 사정없이 내리쳤다. "크윽!" 그는 처참한 비명을 토하며 두 동강나 버렸다. 순식간에 두 명의 마두를 처치한 강옥봉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쓰악! 싸늘한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매서운 한광이 강옥봉의 이마를 향해 폭사해 오는 것이 아닌가! 강옥봉은 급히 몸을 륵 돌리며 칼을 휘둘렀다. 쨍그랑! 뒤에서 날아오던 비수는 그의 칼에 부딪힌 채 떨어졌다. 동시에 키가 크고 얼굴이 괴상하게 생긴 사나이가 채찍을 들고 징그 럽게 웃으며 나타났다. "네놈이 무영신룡단혼도라고? 어디 네놈의 도법이 소문처럼 뛰어난지 노부가 한번 시험해 보겠다." 그는 말과 함께 긴 채찍을 일단 허공으로 휘둘러 원을 그리면서 서서 히 접근하다가 팔을 쭉 내뻗었다. 쾌액! 채찍 끝이 한 마리의 비사처럼 강옥봉의 목을 향해 사납게 휘감겨 왔다. 강옥봉은 급히 머리를 숙이며 채찍을 향해 도를 쳐올렸다. 하나 사나이의 비웃음만 들릴 뿐, 허탕을 치고 말았다. 대신에 채찍만이 유령의 그림자처럼 집요하게 그를 따라오고 있을 뿐 이었다. 사나이의 정체는 회서방의 사호 온서인 편왕 가구사였다. 가구사는 편왕이라는 외호답게 채찍으로는 당금 무림에서 제일인자로 손꼽히는 절세의 고수였다. 그의 채찍을 쓰는 솜씨는 그야말로 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어 누구도 피하기가 불가능했다. 하나 아깝게도 그의 상대는 다름 아닌 강옥봉이었다. 강옥봉은 천애도뿐만 아니라 고금독보의 신법인 유령보를 익힌 인물 이 아닌가! 스읏! 가구사의 채찍이 막 강옥봉의 머리를 강타할 순간 강옥봉의 몸이 기 이하게 흔들리며 가구사의 채찍이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구사는 강옥봉의 기묘한 신법에 흠칫 놀라며 뻗쳐 나갔던 채찍을 오므리며 다시 강옥봉의 미간을 노렸다. 그의 이 한수는 회선참홍이라는 것으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그의 이 수법에 목숨을 잃었는지 모른다. 강옥봉은 두 발을 십 자로 교차시켰다. 찰나 휘익, 하는 소리와 함에 가구사의 채찍이 다시 그의 몸을 빗나 가고 말았다. 가구사는 제풀에 놀라 급히 몸을 뒤로 피하면서 여전히 채쩍을 교묘 하게 휘둘러 강옥봉의 전신을 노렸다. 강옥봉은 전력을 기울이면 단 몇 초에 그를 처치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채찍을 돌리는 솜씨가 하도 괴이하고 절묘하여 솜씨를 지켜볼 생각으로 절초를 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직 이처럼 긴 병기를 휘두르는 상대와 싸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의 수법을 잘 익혀 자신의 경험과 실력을 진보시킬 생각을 한 것이다. 휘익! 강옥봉은 매섭게 돌려 쳐지는 채찍 끝에서 약 일 척 정토 떨어져서 천룡보도를 휘둘러 맞서고 있었다. 한동안 가구사는 맹렬한 기세로 십여 초를 휘둘렀으나 강옥봉을 격중 시키지 못하자 점차 초조한 기색이 되었다. 그는 한결 신중한 동작으 로 옆으로 돌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돌연 채찍을 사납게 후려쳤다. 쾌애액! 칼날 같은 바람 소리가 터지면서 가구사의 채찍은 무서운 속도로 강옥봉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왔다. 그의 이 수법은 일선단홍이라는 것으로, 그가 가장 자신하는 수법 중 하나였다. 원래 목이란 노리기도 어렵지만 피하기도 그만큼 어려운 곳이었다. 하나 유령보를 익힌 강옥봉은 아주 간단하게 그 공격을 피하면서 상 대의 가까이로 접근하여 칼을 교묘하게 내뻗었다. 착! 채찍이 칼에 휘감겨지면서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서로 당기고 있었 다.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가구사의 채찍은 두 사람의 내공에 의해 철봉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강옥봉은 도를 치켜 세운 채 가구사를 사납게 쏘아보면서 공력을 구 성쯤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 당기고 있을 때 가구사의 안색이 붉어지면서 채찍을 잡 은 손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의 내공이 높다 해도 두 갑자를 훨씬 넘는 강옥봉에게는 견줄 수 없는 것이다. 강옥봉은 야룻한 미소를 지으며 도를 돌리면서 채찍을 감기 시작했 다. 가구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채찍을 버린 채 몸을 솟구쳐 달아나 려 했다. 강옥봉은 가구사가 자신의 무기인 채찍을 놓아 버리고 급히 달아나자 아주 빠른 동작으로 채찍을 던지며 동시에 옆으로 당겼다. 쓰악! "윽!" 가구사는 목에 채찍이 감겨 한쪽으로 기울어지다가 쓰러졌다. 순간, 팟! 강옥봉의 천룡보도가 한 번 움직여지더니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 다. "아아악!" 한 자루 채찍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편왕 가구사는 너무도 허망하게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강옥봉은 그제서야 천천히 천룡보도를 거두어들였다. 보기에는 간단해 보였지만 조금 전 그는 천애팔도 중의 세 절초를 연 거푸 사용하였던 것이다. 단지 그 동작이 너무도 빠르고 연결이 매끄 러워 마치 하나의 초식을 시전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한 순간에 너무 과다한 공력을 소모해서인지 그의 안색은 약간 창백 해졌다. 그는 잠시 운기를 한 후 작은 병에서 화골산을 꺼내 벽력무상과 가구사의 시체에 뿌렸다. 파스스…… 세 구의 시체는 즉시 물로 변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옥봉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동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냉상아가 동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 "나더러 무정하다고 하더니 당신의 도법은 더 무정하더군요. 어째서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고 그렇게 모조리 죽였나요?" 강옥봉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일은 일체 비밀에 부쳐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살려 둘 수 없었소. 만약 회서방이나 성심장에서 낭자에 대해 무언가 의혹을 느낀다면 앞으로의 일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될 거요." 냉상아는 눈살을 찡그렸다. "당신은 정말 나를 다시 성심장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세요?" "그렇소. 낭자는 단오절까지 성심장으로 돌아가야 하오." "하지만 나는 지금부터 그들과 관계를 끊을 작정이에요." "그건 안 되오. 싫더라도 계속 겉으로는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생기오." 냉상아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당신은 성심장에서 절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여기나요?" "그렇소. 낭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성심장주가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낭자에게 금제를 놓지는 않았을 거요. 낭자가 만약 돌아가지 알는다면 성심장주는 의혹을 품고 제일 먼저 나를 의심하게 될 거요. 그러면 만사가 도로아미타불이오." "제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라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군요." 냉상아는 미소를 지으면서 곱게 눈을 흘겼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절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옥봉은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나는 사주팔자에 애정 관계가 복잡한 모양이야……" 냉상아는 그를 흘겨보면서 뾰로통하게 말했다. "누가 당신더러 가는 곳마다 애정을 주랬나요?" 강옥봉은 어이가 없어 속으로 투덜거렸다. '속 터지는군. 누가 누구에게 애정을 줬다고 그러나……?' 하나 냉상아는 옥수를 내밀어 강옥봉의 손목을 잡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세 소녀가 고기로 반찬을 장만하고 만두를 다시 따뜻하게 끓이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냉상아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같이 음식을 만들었다. 이때 매련이 손을 멈추고 강옥봉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공자님, 저희 아가씨는 성격이 매섭고 서릿발처럼 냉정하여 평소에는 함부로 웃지도 않아요. 그런데 공자님을 만난 후부터는 마음이 솜처럼 부드러워지고 친절미가 철철 넘쳐요." 그녀는 강옥봉의 표정을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공자님은 제발 저희 아가씨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해주세요." 냉상아는 자존심이 강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 았다. 하지만 사실은 매사에 함축성이 있고 다정다감한 소녀였다. 그녀는 강호를 쏘다녔으나 강옥봉 같은 남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 다. 심지어 이제까지 그녀가 강호제일의 기남이라고 알고 있었던 그녀의 대사형마저 강옥봉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다. 그녀는 강옥봉의 늠름하고 준수한 풍모에 매혹되어 첫눈에 반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쌀쌀하던 마음은 빙산이 태양을 만난 듯 사르르 녹아 버려 평소와는 아주 판이해졌던 것이다. 강옥봉은 미소를 지었다. "냉 낭자가 말하길 세 분 낭자의 충심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맹세할 만하다고 했는데 과연 거짓이 아니었군요." 잠시 후에 맛있는 요리가 푸짐하게 준비되어 다섯 사람은 빙 둘러앉 았다. 그들은 음식과 술을 먹으면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으며, 냉상아는 행 복감에 젖어서 연신 웃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 갔다. 그때 매련이 눈치 빠르게 동료 들을 데리고 다른 석실로 가버리자 강옥봉과 냉상아, 두 남녀만이 남 게 되었다. 두사람은 그녀들의 의도를 알고 난감하면서도 부끄러운 심정이 되었 다. 잠시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계속되더니 냉상아가 용기를 내어 먼저 입 을 열었다. "공자, 피곤하실 테니 어서……" 그녀는 어서 잠자리에 들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고개 를 떨구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며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본 강옥봉은 내심 야릇 한 심정에 사로잡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다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냉상아는 돌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오늘 이분을 잡지 못하면 나는 어쩌면 영원히 이분을 소유할 기회를 얻지 못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다급해지고 강옥봉에게 쌓였던 애정이 물밀 듯 솟구쳐 올라와 그녀는 옆에 앉은 강옥봉의 품속으로 몸을 던졌다. "엇?" 강옥봉은 처음에는 흠칫 놀랐으나 그녀가 자신의 가슴에 안긴 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뜨거운 입술을 살짝 벌리자 그토록 단단했던 인내 심도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내 낭자……!" 그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힘껏 끌어당기며 붉은 입술을 더듬었 다. 그러자 그녀는 몸을 가느다랗게 떨면서 점점 얼굴을 붉혔고, 끝내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나 그녀는 조금도 뿌리치지 않고 오히 려 강옥봉의 목을 팔로 껴안으면서 더욱 열렬하게 입술을 마주쳐 갔 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타액을 교환하며 꿈결 같은 도취감에 잠겨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강옥봉은 그녀를 살며시 밀치더니 번쩍 들어 침상에 눕혔다. 아늑하고 조용한 석실 안에는 훈훈한 기운이 흘렀고 두 남녀의 체온 은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강옥봉은 붉게 상기된 냉상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그녀의 옷 을 벗기기 시작했다. 냉상아는 아직도 도취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두 눈을 게슴츠레 뜨 고 그를 바라보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흥당무가 되어 급히 눈을 감았다. 강옥봉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며 드러나는 나신을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녀의 완전한 나신이 드러났다. 그것은 가히 아름다움의 극치였으며, 미의 화신이었다. 강옥봉은 한동안 그녀의 완벽한 나신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급히 옷을 벗고 그녀의 몸을 뜨겹게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보드랍고 매끈한 가슴을 애무하면서 점점 깊은 환희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 다. 그녀 역시 기름통이 불에 타는 것 같은 열기를 느끼며 짜릿한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오직 그들 남녀만이 정감을 나누고 있는 석실에는 향긋한 여인의 향 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강옥봉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몸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촉촉이 젖은 그녀의 입술에서는 환희의 신음 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다. 밤은 더욱 깊어 갔고, 두 남녀는 애욕의 바다에 빠진 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잊고 있었다. 제31장 끈질긴 추적 강옥봉은 삼 일 동안 그녀들과 지내면서 침술과 약물로 치료를 해주 었다. 삼 일 후. 강옥봉은 언제 준비했는지 역용약과 옷을 가지고 와서 그녀들 전부를 남자로 변장시킨 다음 동굴에서 나왔다. 그들은 동굴을 벗어나 질풍처럼 신형을 날려갔다. 십여 리쯤 가니 하 나의 강 언덕이 나오고, 언덕을 넘자 장강의 푸른 물결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강옥봉은 그녀들을 데리고 서슴없이 강가로 달려갔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배 한척이 정박해 있었는데 강옥봉은 조금도 머 뭇거리지 않고 그 배 위로 올라갔다. 그들이 전부 올라타자 배는 서서히 장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날씨는 청명했고, 물결은 바람결에 세차게 뱃전을 때리고 있었다. 홍 목으로 만들어진 그 배는 다섯 칸의 선실에 돛이 두 개 였고, 구조가 산뜻하여 기분이 저절로 유쾌해졌다. 강변에 우뚝 솟은 산들은 바위와 수림으로 뒤덮여 절경을 이루고 있 었고, 멀리 보이는 널따란 암석은 마치 선인들이 노닐다가 승 천한 곳같이 보였다. 냉상아는 턱을 괴고 강 언덕의 풍경을 응시하다가 강옥봉에게로 시선 을 돌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봉랑, 이제 보니 봉랑은 무림에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군요?" 강옥봉은 그녀에게 자신의 본명을 알려 주었고, 강옥봉을 이미 낭군으로 생각한 냉상아는 그를 봉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강옥봉은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소?" "제가 이 배를 탈 때 사공이 봉랑을 아주 공경스럽게 대하는 것을 보았어요. 사전에 완전한 계획을 세워 이 배를 미리 대기시킨 것 같더군요." 강옥봉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매는 정말 새심하고 총명하군 이제 성심장은 아매 같은 유력한 여걸을 잃게 되었으니 애석하게 줬소." 그녀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놀리시면 싫어요." "하하…… 내가 아매를 놀릴 리가 있겠소?" 그는 그녀를 지그시 웅시하다가 다시 말했다. "내가 만일 사전에 아무런 계획도 마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회서방과 성심장 같은 거대 세력과 대항할 생각을 했겠소?" 냉상아는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내가 멋도 모르고 봉랑과 끝까지 대립했다면 영락없이 패할 뻔했군요." 그리고는 미소를 짓자 강옥봉도 명랑하게 웃었다. "일이란 계획을 완전하고 세밀하게 세워야 실패가 적소." 그녀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자 강옥봉은 팔을 벌려 기지개를 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매, 저렇게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보니 인생백년이 덧없이 느껴지는군" 냉상아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봉랑께서는 지금 아정 낭자를 생각하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사실 아정 낭자는 지금 규방을 홀로 지키면서 봉랑을 그리워하는 한편 원망하고 있을 거예요." 강옥봉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비록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방천지에 여인들의 정분이 쌓여 있으니, 일전에 내게 도화살을 조심하라던 노승의 말씀이 조금도 틀림이 없구나.'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저 멀리 산봉우리에는 엷은 안개가 휘감기고 있었으며, 수면에는 뽀얀 저녁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공이 등불을 밝히고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왔다. 강옥봉이 남장을 한 소녀들과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사공이 다시 들어와 나직하게 말했다. "소협, 지금 강 위에 수상한 배가 자주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장강수로연맹의 인물들 같은데,그들이 회서방의 지시를 받고 냉 낭자의 행방을 수색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장강수로연맹은 장강 일대를 주름잡는 수적들의 연합체인데, 오래 전에 연맹의 맹주인 좌지군왕 허표가 회서방의 십일호 온서로 포섭되어 있었다. 강옥봉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소. 그들이 접근하도록 내버려두시오." 그리고는 사공의 귀에 입을 대고 몇 마디 속삭이자 사공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사공은 부여송의 먼 사질뻘 되는 인물로, 수룡신 낙궁이라는 무림의 고수였다. 낙궁은 강옥봉의 지시를 받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별빛만이 강물에 어려 파랗게 보였고 물결이 뱃전을 때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 주위는 매우 조용했다. 그런데 강바람이 점점 거세게 불고 있어서 찬란하게 비치던 별빛이 흐트러졌고, 강옥봉의 배에는 등불이 전부 꺼져 있었다. 이때였다. 별안간 언덕에서 칠팔 명의 검은 그림자가 마치 유령처럼 어른거리더 니 강가에 있는 소형 쾌속선에 뛰어올랐다. 그 쾌속선은 급히 강옥봉 등이 타고 있는 배로 접근하다가 다시 그 인영들이 질서있게 빠른 동 작으로 몸을 날렸다. 휙! 휙! 휙! 그 인영들은 귀신 같은 동작으로 강옥봉이 타고 있는 뱃머리에 가볍 게 내려섰다. 그 중 한 사나이가 나직이 속삭였다. "이 배에는 확실히 무슨 곡절이 숨어 있소. 우리 두목님이 이 배를 수상하게 생각한 것도 절대 억측은 아니오." 옆에 서 있던 키가 큰 사나이가 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배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지 않소?" "흥! 그래서 두목님이 당신을 바보라고 한 거요. 확실한 사실이 드러나 있는데 아직 무엇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이오?" 키가 큰 사나이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그럼 이 배가 수상한 점을 말해 보시오." "정말 답답하군. 처음에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이런 엉뚱한 곳에 정박한 것을 보면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니겠소……?" 순간 방금 말을 한 사나이가 갑자기 화살 맞은 기러기처럼 그 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아니?"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놀랐다. 다음 순간, "억……!"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그들은 무릎이 쑤셔 왔고, 전신의 맥이 탁 풀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대경 실색하여 급히 몽을 움직이려 했으나 전신이 마비되고 눈앞이 아찔했다. 수적들은 비틀거리면서 당황하더니 무형와 경력에 밀려서 세차게 강물로 떨어져 버렸다. 풍덩! 풍덩! 순식간에 그들의 신형은 물속 깊숙이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강옥봉의 배는 다시 스르르 미끄러져 가기 시작하더니 돌연 뱃머리를 돌려 강 가운데로 쏜살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휘이이잉! 난데없이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해 배는 그야말로 바람처럼 달려나가 는 것이 아닌가! 그때 냉상아의 놀란 외침이 들려 왔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녀는 수적들의 암습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지 않 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배가 돌연 빠른 속도로 움직이자 급히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순간 옆 선실에서 강옥봉의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아매, 아매를 미행하던 적을 귀신도 모르게 처치했으니 이젠 안심하고 자도록 하시오." 냉상아는 어안이 벙벙했다가 물었다. "이 계절에 어찌 순풍이 불어올까요?" 강옥봉의 웃음 섞인 대답이 들려 왔다. "계절도 계절이겠지만 일기란 예측하지 못한 바람과 비가 있는 법이 오." "저는 잠도 오지 않으니 봉랑의 선실로 가서 이야기나 하면서 밤을 지새우겠어요." "밤이 깊었으니 얘긴 내일 하고 그냥 자도록 하시오." 그러나 냉상아는 이미 자신의 방을 빠져 나와 그의 선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선실로 들어선 그녀는 대경 실색했다. 강옥봉의 선실 안에는 물 한 통이 놓여져 있었고, 물통 안에는 조그 만 배 한 척이 작은 인형들을 싣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옥봉은 이미 들어온 그녀를 다시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매, 놀라지 말고 어서 앉으시오." 냉상아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짐작하고 감탄했다. "아! 봉랑께서 술법에까지 정통하다는 것을 미처 몰랐어요. 제가 만일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믿지 않았을 거예요." 강옥봉은 그녀를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우연히 이인 한 분을 만나 기문둔갑술을 전수받은 일이 있었소." 냉상아는 그가 바람을 일으켜 배를 빨리 달리게 했다는 것이 아직도 완전하게 실감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퍼뜩 고개를 쳐들고 탄성을 발했다. "이제 알겠에요. 봉랑께선 누남광의 기서에서 이런 신술을……" 강옥봉은 급히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매, 그런 말이 타인들에게 알려지면 참변을 면키 어려우니 조심하 시오." "염려 마세요. 봉랑께선 절세의 보도와 도법을 가지고 계신 데다 유 령천자의 무공을 얻고, 게다가 이런 신술까지 익히고 계시니 누가 당 해 낼 수 있겠어요?" 냉상아는 다정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자기 선실로 가버 렸다. 강옥봉은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배교대법을 계속 시전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동녘 하늘이 회끄무레해지며 바람도 자고, 배는 멎었다. 냉상아는 소녀들과 함께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배는 어느 작은 항구에 닿았고, 주위는 온통 갈대밭으로 둘러사여 있 었는데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돌연 저쪽 갈대밭에서 몇 개의 인영이 비조처럼 날아서 뱃머리에 사 뿐히 내려섰다. 그들 중에는 어젯밤에 보았던 사공, 수룡신 낙궁도 끼여 있었다. 모 두가 사공으로 분장한 그들은 움직이는 신형으로 보아 절정고수들임 이 분명했다. 낙궁은 선실 앞에 서 와서 크게 불렀다. "강 소협!" 곧 선실 문이 열리면서 강옥봉이 나와 뱃전에 선 채 미소를 지었다. "낙 형, 어젯밤에는 수고가 많았소이다." "천만에요. 어젯밤에는 순풍을 만나 사백여 리나 되는 이곳 대통진 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냉상아는 자신들이 탄 배가 하룻밤 사이에 물길을 사백 리나 지나왔 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강옥봉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우린 이제 배를 버리고 대통진을 거쳐 안경으로 갑시 다." 그리하여 그들은 배를 빠져 나와 땅에 내려섰다. 이날 신시쯤, 태양은 포근하게 내리쪼이고 봄바람은 버들가지를 애무하면서 스쳐 갔다. 그때 돌연 관도 위에 한 대의 쌍두마차가 나타났다. 두두두…… 쌍두마차는 뽀얀 먼지를 일으키면서 줄기차게 달리고 있었으며, 마차 옆과 뒤에는 십여 기의 말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검은 경장을 하고 있었는데 어깨에는 병장기를 메었으며 눈에서는 새파란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마차에는 주렴이 길게 드리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지위 높은 어느 관 인의 행차처럼 보였다. 마차 앞에서 말을 모는 두 사람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냉정했다. 마차가 계속 세차게 달리고 있을 때 뒤에서 또 말굽 소리가 들렸다. 다가닥…… 다가닥…… 그 말굽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리더니 세찬 기세로 마차를 스치고 지 나갔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 이목구비가 수려한 청삼소년이 나 직이 말했다. "아매, 우리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강호인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회서방에서 이미 안휘성 일대에 삼엄한 잠복을 배치해 놓고 우리의 동태를 염탐하는 모양이오." 그러자 다른 사람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설령 우리들의 모습이 밝혀진다 해도 회서방에선 감히 덤비지 못할 거예요." "아무튼 우리는 신중을 기해 원래의 계획대로 행사해야 하오." 이들은 바로 변장한 강옥봉과 냉상아의 일행이었다. 그들의 행렬이 칠 리쯤 가자 길가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서 있고 수십여 채의 민가가 나타났다. 그 중 한 집에 안상객잔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현판 좌측에는 어옹이 고기를 낚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오 래된 그림이었으나 뚜렷하게 보였다. 강옥봉이 크게 외쳤다. "자, 우리 저 객잔으로 갑시다!" 강옥봉이 먼저 말을 몰아 그 객잔으로 가니 마차도 곧 따라왔다. "깨끗하고 조용한 방이 있는가?" 산간 벽지에 있는 그 객잔에 좋은 방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강옥봉은 무슨 고관 대작의 행차라도 되는 것처럼 일부러 크 게 외쳐서 타인의 의심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객잔 안에서 사십여 세쯤 되어 보이는 사나이가 급히 나왔다. "손님,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는 요란스러운 마차와 기세가 등등한 무사들을 보고 어려둥절 해졌다. 강옥봉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말했다. "이봐, 이 객잔의 객실을 우리가 전부 세낼 테니 어서 차와 음식 을 준비하시오." 그리고는 다시 마차 곁으로 다가가서 발을 걷어 올리며 공손히 굽신 거렸다. "대인, 어서 내리십시오." 그러자 청의를 입은, 위풍 당당한 중년인 하나가 마차 안에서 점잖게 내렸다. 그들의 웅장한 행차에 산촌 사람들은 큰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 럼 우르르 몰런들었다 그러나 여러 무사들이 검을 가슴에 안고 무서 운 눈초리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객점 문 양쪽에 일렬로 늘어서 있자 아무도 더 이상 얼씬거리지 못했다. 마차에서 의젓하게 내린 중년인은 곧 객잔으로 들어갔고, 여러 무사 들은 여전히 밖에서 파수하고 있었다. 해는 어느덧 서산으로 기울어 석양이 되었다. 객잔 안에 들어갔던 중년인은 방에서 나오더니 점소이들과 담소를 나 누면서 민정에 관한 얘기도 곁들여 물었다. 그 중년인의 자상스럽고 인자한 풍채로 보아 벼슬아치임이 분명했다. 그 중년인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 흔자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강옥봉은 예리한 눈초리로 주위를 살피다가 한곳으로 눈길을 모았다. 객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한그루의 버드나무 아래에 머리와 수염이 하얀, 괴이하게 생긴 노인 하나가 담뱃대를 빨면서 하얀 연기 를 푹푹 내뿜고 있었다. 그 노인은 호리호리한 몽에 청수한 안색이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평 온해 보였다. 강옥봉은 느릿느릿 그 노인의 곁으로 갔다. "노인장의 연세는 어떻게 되십니까?" 노인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 늙은 것이 헛되이 칠십 세가 되었다오." 강옥봉은 다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 노인의 옆에 앉았다. "이곳 일대에 작년 농사는 잘되었습니까?" 사실 노인은 천리일순 방각의 변장으로 그와 노인은 짐짓 이 일대의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은밀하게 전음술을 주고받고 있 었다. "방 노인께선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하…… 강 소협에 비할 바가 되겠소?" "음적양과 도중웅의 행방은 어떻게 됐습니까?" "음적양과 두중웅은 대통진까지는 동행해서 소협의 뒤를 은밀히 따르 고 있었는데 대통진에서 서로 헤어졌소. 그 뒤 음적양은 안경으로 가고 도중웅은 여전히 수하들을 이끌고 소협을 추적하고 있소이다." "음적양은 필시 냉상아의 추격을 도중웅에게 맡기고 자신은 총단으로 돌아가는 걸 겁니다. 그는 어디로 갔습니까?" "강 소협이 알면 놀랄 거요. 그는 안경의 조가장으로 갔소이다." 강옥봉은 흠칫 놀랐다. "조가장이라면 안휘성의 명숙인 용호풍운검 조중화의 거처가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오. 조중화는 공명 전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어느새 회서방에 포섭되었는지 모르겠소." 강옥봉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전음성으로 말했다. "일이 조금 복잡하게 되었군요. 음적양은 필시 조중화의 조가장에서 며칠 묵으면서 총단과 연락을 취한 후 귀환할 겁니다. 아니면 조가장 내에 총단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든지……" 그의 말을 듣자 방각의 표정도 굳어졌다. "만일 조가장에 비밀통로가 있다면 큰일 아니오? 그렇다고 무턱대고 조가장에 침입했다가는 그들을 경동시키게 될 텐데……" "제게 한 가지 계획이 있으니 방 노인은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남들이 의심할지 모르니 방 노인께선 그만 가보십시오." 방각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강옥봉은 안색이 변하며 급히 장력을 모아 허공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꽤액! 사나운 바람 소리와 동시에 십여 장 밖에 있는 회나무 위에서 괴상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케에에……" 그와 함께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그자의 심맥은 어느새 끊어져 있었다. 이것은 강옥봉의 태극혼원신공 중의 진자결을 운용해 떨친 것인데 그 위력이 실로 가공스러웠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마디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매우 악랄한 장공이군." 강옥봉은 냉소를 쳤다. "귀하는 매우 대담하군. 감히 관부의 행차를 넘겨다보는 자는 첩자가 아니면 도둑놈이기 때문에 마땅히 극형에 처했을 뿐이오." 어둠 속에서 체구가 건장하고 태도가 거만스러운 중년인 하나가 질풍 처럼 나타나 광소를 터뜨렸다. "나는 지금까지 관부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고관으로부터 현령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소. 그런데 당신의 얼굴은 처음 보았으니 아마 여우가 호랑이 탈을 쓴 모양인데 어찌 날 위협하오?" 강옥봉은 피식 웃었다. "귀하의 말을 들으니 아마 관부에 있는 모양인데 성명이 어떻게 되시 오?" "내가 물을 말을 먼저 묻다니 정말 뻔뻔스럽군." 강옥봉은 냉엄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정말 관부의 사람이란 말이오?" 동시에 우장을 서서히 밀어 내자 그 중년인은 냉소를 쳤다.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군!" 그는 말을 하면서 몸을 피했으나 사나운 장풍에 안색이 싹 변했다. 강옥봉이 쳐낸 일장에는 태극혼원신공 중의 탄자결이 담겨 있어 그 중년인은 몸이 진동되어 저절로 튕겨 나갔다. 그가 강적을 만났음을 알고 대경 실색하여 머뭇거리는 사이에 강옥봉 은 재빨리 그에게 접근하면서 탄자결을 점자결로 바꾸어 번개같이 인후혈을 찔러 갔다. 강옥봉의 칼날같이 예리한지력에 그 중년인은 칼로 뼈를 에는듯한 통증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크윽!" 강옥봉은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관이 데리고 온 일행들은 이미 우리의 손에 제압되었소. 귀관이 과연 관부 사람이라면 왜 성명을 밝히지 않소?" 그러나 중년인은 여전히 거만한 태도였다. "나는 대내의 이등시위인 위조덕이다. 네가 아무리 대담하다 해도 나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게다." 강옥봉은 싸늘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내가 만일 강호 사람이었다면 귀관을 벌써 처치했을 것이지만 귀관과 동료라는 점을 감안하여 참겠소. 하지만 귀관이 사적으로 대내를 떠나서 악인들과 결탁한 것은 그 죄가 반역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당장 이 자리에서 죽여도 누가 욕하진 않을 거요." 위조덕은 그제서야 사색이 되어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귀관도 대내에 계신 모양인데 어찌 서로 안면이 없을까요?" 강옥봉은 슬쩍 물어 보며 능청을 부렸다. "위 시위는 어느 때에 대내를 떠났소?" 위조덕은 그에게 한차례 추궁을 당하고 나자 그렇게도 거만스럽던 태도가 씻은듯이 사라졌다. "저는 반년 전에 말미를 얻어 대내에서 떠났습니다." 그러자 강옥봉은 담담하게 웃었다. "나는 하 승상의 지우지은을 입어 현재 시위영반의 직책에……" 순간 위조덕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면서 황급히 그 자리에 엎드렸 다. "소인이 모르고 시위영반께 실례를 범했으니 만번 죽어도 마땅합니 다." 그러나 강옥봉은 손을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나는 하승상의 부탁으로 일종의 비밀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사복 차림으로 은밀히 나온 것이오. 그래서 내가 출도한 것을 아무도 모르오." 그는 다시 냉엄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그럼 위 시위는 자신의 죄를 알겠지?" 위조덕은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발발 떨면서 목소리마저도 더듬거렸 다. "주…… 죽을죄를 지었으나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강옥봉은 품에서 금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대며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위 시위는 오랫동안 대내에 있었다니 이 금패를 잘 알아보겠군." 용이 다섯 마리 그려진 그 금패는 모든 시위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오룡금패가 아닌가? 그러니 위조덕이 어찌 벌벌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거의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안색에는 핏기도 엿보이지 않았다. 강옥봉은 오룡금패를 서서히 품에 넣으며 미소를 지었다. "같은 입장에서 너무 가혹한 형벌은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위 시위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승낙해라." 위조덕은 살았다는 듯이 뤼가 번쩍 뜨였다 "대인의 분부라면 제가 물불인들 사양하겠습니까?" 강옥봉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내가 이번에 극비리 행동을 취한 것은 혹시라도 강호인들에게 번거로운 일을 당할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네. 그러니 위 시위는 이곳에서 나를 만났다는 사실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도록 하게." 위조덕은 허리를 굽히며 공손한 태도로 응했다. "예, 삼가 명령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강옥봉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국법은 엄중하여 강호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위 시위의 이번 자취가 탄로나면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하게 될 테니 알아서 신중히 행동을 취해 다오." "대인의 분부와 가르침을 소인은 명심하겠습니다." 강옥봉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위 시위는 언제 대내로 가겠는가?" "삼 일 후에 가겠습니다." 강옥봉은 껄껄 웃으며 내심 그를 빨리 보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서 가보아라." 그러자 위조덕은 마치 대사령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매우 기뻐하며 포권의 예를 갖추고는 급히 야음 속으로 사라졌다. 강옥봉은 잠시 그가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있다가 몸을 돌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싸악! 싸늘한 기운이 감돌며 흑의인영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검을 휘둘러 강옥봉을 급습했다. 강옥봉은 급히 유령보를 펼쳐 옆으로 피함과 동시에 쌍장을 교묘히 날렸다. 파릉! 매서운 강기가 몰아치자 흑의인영은 흠칫 놀라며 눈에 불을 켜고 맞 서갔다. 한데 그 초식이 하나같이 괴이했고, 동작도 민첩하기 그지없 었다. 파파파팍! 사방이 온통 흑의인영이 뿜어 내는 검광에 휘감겨 버린 듯했다. 하나 강옥봉은 마치 한줄기 연기처럼 유연하게 검광 속을 헤치며 흑 의인영에게 접근해 갔다. 흑의인영은 안색이 변한 채 사력을 다해 검 을 휘둘렀다. 하나 강옥봉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검광 속을 자유자재로 누비며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눈 깜박할 사이에 흑의인영의 코앞으로 다가간 강옥봉은 쌍장을 날카 롭게 휘둘렀다. 쐐액! 흑의인영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으나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하고 옆구리에 일장을 격중당했다. 쾅! "크윽!" 그의 입으로 핏줄기가 뿜어 나왔다. 강옥봉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번개같이 다가들며 발길질을 했다. 우두둑!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음향과 함께 흑의인영은 정통으로 가슴팍을 걷 어채이고 오 장여나 날아가 버렸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그의 입에서는 시뻘건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 지고 있었다. 쿵! 바닥에 꼴사납게 떨어진 흑의인영은 꿈틀거리며 일어서려고 애를 썼 다. "끄으으……" 하나 이미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지고 그 중 하나가 폐를 찔러 흑의인 영의 몸은 곧 축 늘어지고 말았다. 강옥봉은 천천히 흑의인영에게 다가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흑의인영은 다름 아닌 회서방의 삼호 온서인 금시조 도중웅이었다. 이로써 이번에 냉상아를 추격해 온 회서방의 고수들은 모조리 전멸당 하고 만 것이다. 강옥봉은 담담한 눈으로 도중웅의 시체를 내려다보다 화골산을 뿌리 고는 다시 객잔으로 향했다. 악이란 아무리 사나운 기세로 날뛰어도 결국에는 피를 뿌리며 그 죄값을 달게 받는 법이다. 그래서 옛말에도 사필귀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 때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제32장 신의 용당운 안경. 장강에 인접한 안경은 상당히 크고 번화한 마을로서 온갖 장사 치들이 운집해 있고 행인과 차마의 행렬이 끊이지 않아 거리는 항상 붐비고 있었다. 지운재는 안경에서 손꼽히는 병점이었다. 떡 빛는 솜씨는 물론이요, 안주 솜씨 좋기로 정평이 난 있는 지운재 는 일 년 내내 고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불황을 몰랐다. 이 덕분에 지운재 근처의 거리도 번화하게 되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 도 지운재 옆에 있는 신농당이란 약포는 열흘 전에 신의 로서 이미 그 명성을 떨친 바 있는 용당운을 초청함으로 써 날로 사업이 번창했다. 나이 사십이 넘은 용당운은 깨끗한 인상을 주는 사람으로서 풍모가 우아하고 의술이 신통하여 어떤 난치병이라도 그가 치료했다 하면 거뜬하게 나아 버렸다. 정오 무렵. 더위가 조금씩 기승을 부려 제법 후텁지근한 태앙이 내리좌는 바람에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용당운은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대나무를 얇게 쪼개어 엮은 발을 드 리운 채 약포 주인과 더불어 바둑 두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몸집이 비대한 약포 주인은 유달리 더위를 타는지라 윗통을 벗어부치 채 부채질을 하며 흑집을 공략할 작전 짜기에 정신을 모으고 있었다. 국세가 불리했던지 한참 동안이나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던 약 포 주인은 길게 숨을 토하고 심부름꾼을 불렀다. "어서 가서 얼음에 재워 둔 술 두 병을 내오고, 지운재에 가서 몇 가 지 맛좋은 안주를 가져 오도록 해라." 용당운은 고개를 들며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거 제가 괜히 폐를 끼치는 것 같군요." 약포 주인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오? 이렇게 목이 컬컬하고 무더 운 날에 시원하게 한잔 쭈욱 들이키는 진미란 아마 천금 을 주고도 살 수 없을 것이오. 내가 꼭 용 선생에게 바둑 을 져서 술을 사는 것만은 아니외다." 잠시 후 심부름꾼이 죽엽청 두 병과 닭고기, 토끼다리, 오리 간, 생요리 등을 날라 왔다. 주객이 다시 바둑을 두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 미모의 청의 소녀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들어왔다. 그녀는 이목이 그린 듯 수려하고 눈빛이 초롱하게 밝았는데 얼 굴에 다급한 표정이 가득했다. "용 선생은 어디 계세요?" 주인이 히죽 웃으며 용당운을 가리켰다. "낭자, 이분이 바로 용 선생이시오." 청의소녀는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옷깃을 여미고 용당운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용당운은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황망히 일어났다. "낭자, 어찌 이러시오?" 청의소녀는 죄꼬리 같은 음성으로 급히 말했다. "가부께서 십 일 전 등에 독창이 났는데, 백약이 무효이며 오늘따라 농혈이 팽창하고 통증이 극심해 생명이 경 각에 달려 있으니 제발 선생께서 저의 가부를 살려 주세요." 용당운은 사연을 듣고 난 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 의도란 본시 인술이므로 치료할 수 있는 증세라 면 내 어찌 사절할 리가 있겠소? 하지만 지금 영존은 백약이 무효라 니 내 실력이 미치지 못할까 심히 염려되는군요." 약포 주인이 나서며 말을 거들었다. "용 선생, 선생은 당대의 화타이시니 더 이상 겸손하실 필요 없소이다. 한 생명을 구해 주는 것이 부처님에게 공을 드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말도 있으니 성과를 뒤로 미루고 한번 치료해 보도록 하 시오." 용당운은 고개를 끄덕인 뒤 동자에게 약상자를 들리고 청의소 녀를 따라 나섰다. 청의소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눈물이 글쌩한 눈 에 미소를 띠며 큰길을 건너 골목길을 돌아서 조그만 집 앞에 당도했 다. 그녀는 집이 누추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 멈칫하더니 용당운을 뒤 돌아 본 뒤 문을 밀치고 방안으로 용당운을 안내했다. 침상 위에는 한 사람이 엎드린 채 끙끙 앓고 있었고, 침상 옆에는 남 색 포의를 입은 노파가 앉아서 시종 독창에서 흘러나오는 피고름을 씻어 내고 있었다. 청의소녀가 노파를 향해 나직이 말을 꺼냈다. "어머님, 제가 용 선생님을 모시고 왔어요." 노파는 수심에 가득 싸인 얼굴을 서서히 들고는 용당운에게 앉 기를 청했다. 용당운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방안을 둘러보더니 환자 곁으로 다가 가 증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등에는 자줏빛 독종이 나 있는데 피고름이 터져 악취가 코를 감싸 쥐게 했다. "얘야! 어서 약상자를 열어라." 용당운의 지시를 받은 동자가 지체없이 약상자 뚜껑을 열고 대령하 자, 용당운은 자기로 된 병에서 추색 약가루를 쏟아 내어 상처 부위에 살포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환자는 등 부분이 시원해지면서 통증이 싹 가심을 느끼고 깊은 숨을 내쉬고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청의소녀와 노파는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몰 라 했다. 노파는 혹 환자가 잠을 깰세라 음성을 낮추고 두 순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용당운은 청의소녀를 향해 말을 꺼냈다. "내 의술이 정통한 게 아니라 영존이 평소에 많은 음덕을 쌓아 왔기 때문에 이렇듯 빠른 효과를 보게 된 것이오. 만일 반 시진만 더 경과 했던들 독기가 내부에 침투하여 생명이 위험하게 됐을 것이오." 이어 고약을 꺼내 상처에 붙이고 한 가지 약방문을 써준 다음 다시 부탁했다. "낭자, 이 처방대로 약재를 사다가 정성젓 달여 하루에 한 첩씩 사흘 간 영존께 복용시키도록 하시오. 그러나 영존의 증세가 워낙 중했던 관계로 앞으로 칠 일이 지나야만 완쾌될 수 있을 것이오." 청의소녀는 감읍해 마지않으떠 공손히 사의를 표했다. "가부를 치료해 주신 큰 은덕은 이 다음 반드시 보답해 드리겠어요. 오늘 치료비는 얼마나……" 용당운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본시 치료비에 대해 일정한 금액플 정해 놓고 있는 게 아니라 그때 그때 상황을 보아 부자에게는 몇만 냥도 받고 가난한 사 람에겐 무료 봉사도 하오. 보건대 낭자의 효심이 지극한 것 같 아 오늘 치료비는 받지 않기로 하겠소." "하오나……!" "괜찮소. 절대 마음에 두지 말고 영존이나 간호해 드리시오." 용당운은 말을 끝내고는 동자와 함께 홀연히 밖으로 나갔다. 그 후 꼭 칠 일째 되던 날 밤 이경 무렵, 그 청의소녀가 다시 신농당 으로 용당운을 찾아왔다. 그녀는 고운 얼굴에 활짝 웃음꽃을 띄우며 말했다. "가부께서는 완쾌되셨어요. 선생님의 큰 은혜는 소녀 가슴 깊이 새겨 두고 영원히 잊지 않겠어요." 그녀는 은자 이십 냥을 공손히 앞으로 내밀었다. "약소하지만 소녀의 성의이오니 물리치지 말아 주세요." 용당운은 그것마저 사양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은자를 받았다. "낭자의 방명은 어찌 되시오? 이곳 심부름하는 아이의 말을 들 으니 낭자는 매일 지운재로 떡을 사러 온다고 하던데……" 청의소녀는 고운 얼굴에 불그레한 홍조를 피었다. "저는 손지유라 하옵고 가모는 조가장 조중화 장주님의 아드님 유모였으며 가부는 조가장 댁에 일꾼으로 있 어요. 그리고 제가 꿀떡을 사가는 이유는 조 장주님의 다섯 살 난 손 자가 꿀떡을 즐겨 먹기 때문이에요." 용당운은 껄껄 웃었다. "아, 그랬었구려! 하하…… 난 또 낭자가 떡을 즐기는 줄 알았었소… …" 활짝 웃는 그의 눈빛이 유달리 반짝거리고 있었다. * * * 그 후로도 신농당 약포에는 병을 고치려고 찾아온 환자들로 연일 줄 을 이뤘다. 그러던 어느 날, 다가닥…… 다가닥…… 대로에 경쾌한 말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세 필의 건마가 쏜살 같이 달려왔다. 히히힝! 세 필의 말은 신농당 앞에 이르러 힘찬 울부짖음과 함께 딱 멈춰 섰 다. 이어 말 위에서 세 사람이 뛰어내려 신농당으로 들어갔는데 그들은 수려한 미모의 청의소녀와 두 명의 청삼노인이었다. 두 노인은 광채 가 형형하고 걸음걸이가 민첩하여 일신에 고강한 무공을 지녔음이 분 명했다. 청의소녀는 바로 손지유였다. 마침 환자를 진맥하고 있던 용당운은 손지유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다가 곧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손 낭자, 무슨 일이시오?" 손지유는 옷깃을 여ㅁ!며 공손히 대답했다. "장주님의 명을 받들어 선생님을 모시러 왔으니 왕림해 주시길 바라 겠어요." 용당운은 흠칫 놀랐다. "조 장주께서……? 혹 무슨 병이라도 얻으셨는지……" 손지유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에요. 장주님의 손자가 갑자기 괴질을 얻어 전신에 반점 이 돋아나고 입으로 피를 토하며 경련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잠자리 에 들게되면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밤새 헛소 리만 해요." "병세는 언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소?" "그제 밤이었어요." 용당운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겁게 입을 떼 었다. "어찌하여 지금까지 시일을 끌었소? 증세가 심상치 않은 모양인데… …" "장주님께서 신통하다는 의원을 불러 약 두 첩을 지어 치료하려 했어 요. 그런데도 병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어요." "음, 마침 오늘 환자가 유달리 많은데…… 가더라도 시간을 오래 지 체할 수가 없을 것이오." "편하실 대로 하세요." 용당운은 진맥을 하던 환자에게 약방문을 해준 다음 청의동자에게 약 상자를 들리고 세 사람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밖에는 십여 명의 무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용당운은 손지유가 내주는 말에 올라 십여 무사들의 엄중한 호위 속 에 질풍같이 달려갔다. 조가장은 안복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팔자형의 대문은 위세를 자랑하고, 높다란 담장 안에는 웅장 한 건물들이 들어차 있는데, 그 규모가 매우 장엄하고 호화찬란했다. 조가장의 장주인 용호풍운검 조중화는 한 자루 풍운신검으 로 대강남북에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그의 무공은 비 록 강호무림의 초절정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인물 됨이 공정 하고 솔직해 많은 무림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용당운이 손지유 등웨 안내를 받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자줏빛 둥근 얼굴에 봉목을 지니고 턱수염이 듬성듬성 난 노인이 나와 맞이했다. 용당운은 그 노인이 곧 조중화임을 짐작하고 깊숙이 허리를 굽혀 인 사했다. "제가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널리 이해해 주십시오." 조중화는 답례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별말씀을…… 손자 녀석 때문에 용 선생에게까지 수고를 끼치니, 내 가 도리어 미안하군요." "병세가 중한 모양이니 어서 병세부터 진찰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 오." 조중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어느 누각으로 안내했다. 그 누각 안에는 비녀들이 대령해 있었는데 조중화와 용당운이 모습을 나타내자 모두 일어나 맞으면서 누각 옆에 있는 방문을 조용 히 열었다. 방안에는 한 명의 노부인과 미모의 소부가 동자가 누 워 있는 침상 옆에 앉아 있었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용당운은 침상 옆으로 바바 다기가 동자의 증상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 동자의 바싹 야윈 몸에는 반점이 돋아나 있었고, 눈을 꼬옥 감은 채 연신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노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애원했다. "용 선생, 이 녀석을 완치만 시켜 준다면 수만 금을 아끼지 않겠 으니 제발……" 용당군은 엷은 미소를 띠며 노부인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제가 최선을 다해 보겠으니 노부인은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영손 에겐 절대 불행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어 동자의 이마를 짚어 보니 마치 불덩이에 닿은 것처럼 뜨거웠다. "음…… 신열이 대단하군." 용당운이 나직이 뇌까리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자 조중화 부부와 미소 부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요, 마지막 버팀목인 용당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는 것은 그들에게 최악의 사태를 의심케했다. 용당운은 다시 동자의 세 군데 맥을 신중히 짚기 시작했다. 방안은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은 듯 고표하여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것만 같았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흘렀다. 용당운은 손을 거두며 크게 숨을 내쉬더니 아무 말 없이 약상자에서 흥색 환약 한 알을 꺼내 물에 개어서 서서히 동자의 입 속으로 흘려 넣어주었다. 조중화가 긴장과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떼었다. "완치될 가능성이 있소?" 용당운은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제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중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끼고 눈가에 경련을 일으켰다. "무슨 말씀인지 서슴지 말고 해보시오." 용당운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영손은 세 가지 증세가 한꺼번에 발작하는 희귀한 병을 얻었는데, 아마 요귀의 침투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 요귀를 제 거하지 않으면 살아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조중화는 깜짝 놀랐다. "요귀……? 혹 이 녀석이 밖에 놀러 갔다가 요귀의 침범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제가 보건대 그 요귀는 귀장 안에 있는 것 같습니 다." 조중화의 얼굴에 놀람과 의아해 하는 빛이 엇갈리며 떠올랐다. "그럼 용 선생은 그 요귀를 색출할 자신이 있소?" "인기척이 없는 밤중을 이용하여 제가 귀장 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러나 그 요귀의 소재를 완전히 포착하려면 상당한 시일을 요해야 될 것입니다." 조중화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의사를 받아들였다. "용 선생만 믿겠으니 수고를 좀 해주시오." 용당운은 우선 약방문 하나를 써주었다. "신농당에 찾아온 많은 환자들이 제가 돌아오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해서, 일단 신농당으로 돌아갔다가 오늘밤 다 시 오겠으니 우선 이 약방문대로 약을 지어다 잘 달여서 복용시키십 시오." 이때 동자는 헛소리를 그치고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조금 전 먹인 환약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조중화는 가까스로 한숨을 돌리고 대문 앞까지 따라 나와 용당운을 전송해 주었다. * * * 초경 무렵. 안경성의 밤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길거리 양쪽으로 야등이 밝혀져 황홀한 빛을 발산하게 되자 야 경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중천에 떠올라 은구슬처럼 교교한 빛을 뿌려 내 수 면을 은백색으로 만들고, 신선한 바람이 일어나 훅훅 더운 김을 내뿜 었던 대지를 서서히 식혀 주고 있었다. 안경성 후미진 곳에 위치한 호젓한 골목. 돌연 가벼운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골목에서 다섯 명의 청삼 노인들이 나타났다. "끼랴!" 날카로운 외침과 동시에 말발굽 소리가 일어나며 다섯 청삼노인들은 나는 듯이 말을 몰아 신농당으로 질주해 갔다. 그들은 바로 조중화가 보랜 사람들이었다. 신농당 약포 주인은 윗통을 벗은 채 대문 밖에 나와 밤거리를 감상하 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진의 말발굽 소리와 함 께 기마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의식적으로 몸을 도사렸다. 청삼노인들은 어느새 신농당 앞에 도착하여 홀쩍훌쩍 말에서 뛰어내 렸다. 약포 주인은 그제야 그들이 조가장의 고수들임을 알아보고는 바삐 입 을 메었다. "용선생은 낮에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기 때문에 몹시 피로하여 지금 잠자리에 들어 계십니다. 그분은 삼경에 귀장을 찾아가겠다는 말을 나에게 남겼으니 좀 기다려야 할 겁니다." 한 노인이 일행을 돌아보았다. "삼경이 되려면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았으니 우리는 그 동안 주점이 나 찾아가 기다립시다." 그래서 그들은 부근 주점을 찾아가 술잔을 기울이면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 노인이 나직이 말을 꺼냈다. "기노삼, 성심장 고수들이 일제히 안경으로 집결한다는 소문 에 장주께서 이미 많은 고수들을 동원시켰으니, 아무래도 안경 일대 에 한차례 풍파가 일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려." 다른 노인이 음성을 낮추어 말을 받았다. "벽에도 귄가 있는 법이니 말조심해야 되오. 더욱이 그런 비밀을 누설시켰다는 것을 장주께서 알게 되면 엄중한 힐책을 면치 못할 거 요." 어느덧 삼경이 가까워졌다. 청삼노인들은 그때까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일어나 면서 말했다. "자, 이제 그만 약포로 가봅시다." 잠시 후 그들은 신농당에서 잡일을 보고 있는 하인의 안내로 약포 후 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용당운이 모기장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한 노인이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입을 떼었다. "험! 용 선생, 이제 삼경이 됐으니 그만 일어나십시오. 폐장주께서 용선생을 고대하고 계시오." 용당운은 그제야 눈을 부스스 뜨고 일어나더니 그들을 보고는 겸연쩍 은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거 미안스럽게 됐군요. 어서 갑시다." 그들은 곧 말을 나누어 타고 조가장으로 향했다. 조가장에 당도하자 미리 밖에 나와 있던 조중화가 용당운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용 선생." 대청에 자리를 잡자 용당운이 먼저 물었다. "영손의 증세는 어떻습니까?" 조중화는 다소 마음을 놓은 듯 여유있는 웃음을 지었다. "반점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신열은 가셨고, 지금까지 줄곧 잠에 취 해 있소이다." "음…… 이삼 일 내로 그 요귀의 소재를 알아 내야겠습니다." 조중화는 정색을 하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용 선생은 당대의 화타이시니 손자 녀석의 생명은 오직 용 선 생에게 달려 있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한 장정이 황급히 대청 안으로 들어와 조중화에게 공손히 말을 꺼냈 다. "밖에 학귀라는 사람이 찾아왔는데 자칭 성심장의 인물이라면서 장주님 뵙기를 청했습니다." 조중화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학귀라면 당금 무림의 구대도객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운도가 아닌가? 나는 성심장과는 아무런 은원 관계 도 없는데 어찌 그가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그때, 징그럽고 음침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 왔다. "조중화, 그 말이 진정이오? 흥, 가소롭기 짝이 없군! 회서방의 주구 인 주제에 그런 뻔뻔한 소리를 하다니……" 조중화의 표정이 일변하면서 급히 밖으로 뛰쳐 나갔다. 행랑채 밑에 자주색 장삼에 칼을 맨 중년인 하나가 입가에 냉혹한 미 소를 띠고 우뚝 서 있었다. 그 중년인은 움푹 들어간 눈에 광대배는 유난히도 튀어나왔고, 먹을 찍어 꾹 누른 듯한 눈쌥이 매우 차갑고도 사나운 인상을 주고 있었 다. 이 중년인이 바로 성심장의 팔대빈객 중 하나인 권운도 학귀였다. 조중화는 그의 행색을 훑어본 뒤 포권의 예를 갖추었다. "나는 귀하와 아직 정식으로 안면도 없는데 어찌 그런 무례한 말을 하시오?" 학귀는 냉소를 머금은 채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회서방의 부총호법인 음양공자 음적양이 감히 본 장의 삼공녀 이신 냉상아 소저를 납치해서 이곳으로 온 것을 알고 있소. 그러 니 순순히 냉 소저를 내놓으시오." 조중화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냉상아라니? 그녀가 누군데 이곳에 있다는 거요? 그리고 회서방의 부총호법이 왜 이곳에 왔다는 말이오? 노부는 귀하의 말을 하나도 이 해하지 못하겠구려." 학귀의 입가에 음침한 웃음이 번져 나갔다. "흐흐…… 조 장주는 회서방의 삼십호 온서이거늘 어찌 시치미를 떼 려하시오?" 조중화는 그 말을 듣자 학귀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왔음을 직감하 고 사태가 좋게 마무리 지어질 지경에서 벗어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노부가 회서방에 속해 있건 아니건 귀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 오? 그리고 귀장의 냉상아라는 낭자에 대해서 노부는 들어 본 적도 없으니 괜한 시비 일으키지 말고 순순히 물러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노부의 솜씨가 독랄하다고 원망하게 될 거요." 학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이곳이 설사 용담호혈이라 해도 나는 조금 도 두렵지 않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이곳을 찾아왔겠소?" 조중화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돌연 그는 눈을 크게 부릅뜨면서 소리쳤다. "어서 저 당돌한 놈을 붙잡아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네 명의 청삼노인이 번개같이 사방에서 뛰쳐 나오며 각기 귀두도를 뽑아 들었다. 차차창! 주위가 온통 네 자루의 귀두도에서 뿜어 나오는 도광에 휩싸여 버렸 다. "흥!" 학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차갑게 코웃음을 날리며 등에 매고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창! 경미한 음향이 울려 퍼지자 도기가 하늘을 찌르며 찬란한 도광이 눈 을 부시게 했다. 학귀의 손에 들린 권운도는 푸른빛이 감도는 두꺼운 보도였다. 조중화는 두 눈에 살기를 번뜩였다. "당신은 정말 이곳에서 목 피를 보아야겠소?" "흥! 빨리 냉 소저를 내놓지 않으면 이 조가장은 오늘로써 영원히 사 라지게 될 것이다!" "계속 있지도 않은 냉상아라는 여인을 들먹거리며 시비를 거는 것을 보니 본 장을 우습게 여긴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본 장이 결코 호락 호락한 곳이 아님을 알게 해주지!" 조중화는 차가운 웃음을 떠올리며 오른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네 명의 청삼노인이 즉시 도광을 번쩍이면서 맹렬히 학귀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흥! 가소롭구나." 학귀는 수중에 들고 있던 권운도를 번개같이 휘두르며 맞서 갔다. 파파파팍! 쐐애애액! 도영이 난무하고 옷자락이 연신 펄럭이는 가운데 쌍방은 한데 어울렸다. 천만 갈래의 도광이 소용돌이치며 허공을 누빔과 동 시에 예리한 소성이 일어나 기왓장을 들썩였다. 파파파팍! 청삼노인 네 명의 도진은 매서웠다. 그러나 학귀의 도법이 워 낙 기묘하여 십여 초를 어울리게 되자 모두 그의 도세에 휩싸여 몸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얍--!" 학귀의 입에서 커다란 외침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네 명의 청삼노인 은 그림자처럼 좌우로 물러났다. "크윽!" 그 중 한 노인은 오른팔에 도상을 입고 피를 뿌리면서 귀두도 를 떨어뜨렸다. 나머지 세 청삼노인은 만면에 살기를 띠고 날카롭게 외치면서 야수처 럼 덤벼들었다. "이놈! 죽어라!" 학귀는 여유 만만하게 소리쳤다. "흥! 끝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눈알을 뽑아 주겠다." 이어 그는 눈앞에 쇄도해 오는 도세를 향해 전광석화와 같은 도를 쳐 댔다. 쾌액! 푸른 무지개가 허공을 가르고 선혈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크아아악!" 정말 그의 말처럼 한 노인의 두 눈이 도에 의해 절반으로 갈라져 땅 바닥에 떨어졌다. 세상에 칼을 휘둘러 눈알을 뽑아 내다니…… 정녕 학귀의 도법은 신묘하고도 꽤속한 것이었다. 학귀는 남은 두 노인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이제는 내가 당신들의 두 다리와 두 팔을 잘라 놓겠소."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리한 도풍이 스쳐 갔다. 쐐애액! "크아악!" "케엑!" 두 노인은 사지가 잘려지면서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조중화는 두 노인이 마치 다 잡아 놓은 돼지와 같은 형상으로 피를 콸콸 쏟으며 뒹구는 것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참으로 악랄무비한 도법이구나.' 학귀는 무서운 광망을 번뜩이면서 랩다 고함을 질렀다. "조중화! 어서 냉 소저를 풀어 주어라. 그렇지 않으면 조가장을 피로 씻고 말겠다!" 바로 그 순간, "휘이익!" 정원 저쪽에서 청아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그와 함께 훤칠한 키에 체구가 깡마르고 얼굴색이 숯검정 같은 괴인 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괴인은 괘속한 신법을 전개하여 흐르는 빛과 같이 날아오더니 학귀의 일 장 앞에 우뚝 멈춰 섰다. 학귀는 괴인의 초절한 신법에 흠칫 놀라 외쳤다. "넌 누구냐?" 순간, 괴인이 오른손을 번개처럼 앞으로 내밀며 덮쳐 왔다. 꽤액! 그의 손길이 학귀의 몸에 닿기도 전에 매서운 경풍이 학귀의 견정혈 을 노리고 핍박해 왔다. 학귀는 괴인의 손속이 가공할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운 것을 보고 내심 놀라면서 급히 난강절두의 초식 을 구사하여 괴인의 오른팔을 베어 갔다. 싸악! 괴인은 강맹한 도세가 반격을 가해 옴을 보고 슬쩍 옆으로 비켜나면 서 다시 두 손가락을 내뻗어 상대의 춘심혈을 내리찍었다. 학귀는 괴인이 강적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급히 다섯 자 옆으 로 피했다. 동시에 서풍소엽 일도를 구사하여 괴인의 전신 주요대혈을 한꺼번에 엄습해 갔다. 그 순간, 학귀는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도세가 뻗쳐 나가는 도중 한 가닥 경풍이 전신을 압박해 왔던 것이 다. 그 경풍은 피인의 왼손에서 발출된 것으로, 마치 그물처럼 학귀의 몸 을 친친 감아 와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학귀는 상대의 괴이한 장세에 어쩔 줄을 몰라 머뭇거렸다. 그때 누군가의 전음성이 들려 왔다. "그것은 마도 칠대장공 중의 하나인 귀망인이오. 속히 오룡 개천초식을 전개하여 몸을 보호하면서 서방 쪽으로 물러가시오." 학귀는 그 전음이 누구의 것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 지시대로 몸을 움직였다. 파팟! 그러자 신기하게도 학귀는 괴인의 괴이무쌍한 장세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괴인은 일 장 높이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수평으로 달려들었다. "제법 날뛴다 했더니 역시 무공이 보통이 아니구나." 괴인은 다시 쌍장에서 장력을 쏟아 내며 폭포수 같은 기세로 학귀의 머리 위를 짓눌러 내렸다. 쿠아아아앙! 학귀는 전신이 터질 듯한 중압감을 느끼고는 칼을 휘둘러 맞서 가려 했다. 바로 그때 전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조가장에는 금제가 몇 겹으로 되어 있어 귀하 혼자서는 감다 해 낼 수 없으니, 일각을 지체하지 말고 서소문 성루 위에 숨어 있다가 동도들을 규합해 공격해 오도록 하시오." 학귀는 퍼뜩 정신이 들어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올랐다. 이어 그는 괴인이 다시 귀망인을 떨치기도 전에 비스듬히 밖으로 날 아가면서 소리쳤다. "며칠 내로 다시 올 테니 그때 만납시다." "섰거라! 오늘 승부를 결정짓자!" 괴인은 사납게 고함치면서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학귀의 신법은 상당히 민첩하여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 다. 곧 그들 두 사람의 신형은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편, 용당운은 사지가 피투성이가 된 채 축 늘어져 있는 시체들을 보고는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의 얼굴은 겁에 질린 듯 새파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조중화는 장정들로 하여금 시체를 치우도록 분부한 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용당운을 향해 말을 꺼냈다. "용 선생, 강호에는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이 비일비재하여 자칫하다간 노부가 예기치 않은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니 오늘밤에 일어났던 일은 일체 비밀에 붙여 주시오." 용당운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러지요." 그는 급히 조중화를 따라 누각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그는 동자의 증세를 검진하고는 약처방을 해준 다음 손지유와 두 명 의 무사와 함께 요귀 수색에 나섰다. 조가장 안에는 삼엄한 금제가 쳐져 있고, 살기가 충만되어 있었다. 용당운은 두 무사의 안내로 장 내 각처를 두루 살피면서 요 귀를 진압시키는 주문을 연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연 손지유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용 은공, 만일 장주님이 은공을 깊이 믿는 처지가 아니라 면 저는 은공을 성심장의 첩자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네요." 용당운은 크게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아니…… 낭자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혐의를 피하지 않을 수가 없 게 됐군요." 그는 안색이 크게 굳어지며 홱 발길을 돌렸다. 손지유는 급히 가로막으며 죄송스런 표정을 지었다. "은공, 농담으로 한마디 건넸을 뿐이니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용당운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다가 시간을 헤아려 보고 는 무겁게 입을 떼었다. "시간이 이미 오경에 임박한 것 같으니 내일 다시 수색해 봐야 겠소. 장원에는 건물들이 많고 정원 또한 넓어서 사흘은 걸려야 모두 수색할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한 무사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어찌 꼭 밤중에만 수색해야 됩니까?" "요귀를 색출해 내려면 절대적으로 어둠이 필요하오. 요귀는 본시 밝 음을 싫어하는 법. 소공자의 병세가 낮에는 감소되고 밤이 되면 심해지는 이유도 바로 그런 점 때문이오." 다른 무사가 극구 칭찬을 했다. "용 선생은 과연 당대의 신의이시군요." 용당운은 담담한 미소를 띠었다. "무슨 과찬의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의도란 원래 인명 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 병의 근원을 정확히 알아 내기 위해 여러 가지 의학서적들을 참고했을 뿐이오." 어느덧 동녘이 훤히 밝아 왔다. 용당운은 조중화 등과 작별을 고하고 말에 올라 신농당으로 향했다. 한편 학귀와 그를 쫓아갔던 괴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학귀는 전음성의 주인이 지시한 대로 서소문 쪽으로 질풍처 럼 도망쳐 갔다. 서소문 안은 안경성 내에서도 가장 번잡한 곳으로, 많은 가구들이 옹 기종기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상점들도 많았고 주민들 역시 다른 데 보다 배나 더 많았다. 학귀의 뒤를 추적해 갔던 괴인은 복잡한 서소문의 골목에서 끝내 그 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괴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생쥐 같은 놈! 칼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달아나는 데도 소질이 있 구나,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온다고 했으니, 오냐! 그때 보자." 그는 발길을 돌려 조가장으로 향했다. 한데 그때였다. 휘익! 돌연 멀지 않은 성루 위에서 한 사람이 홀연 나타나더니 성밖 으로 유연하게 몸을 날려가는 것이 아닌가? 괴인은 눈을 크게 뜨고 그 인영을 응시하다가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성밖을 벗어나는 순간, 앞선 사람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괴인은 어리등절하여 그 자리에 멍하니 서버렸다. 바로 그때 숲속에서 눈초리가 날카로운 노인이 불쑥 나타났다. "귀하는 무슨 일로 노부의 뒤를 쫓아오는 거요?" 괴인은 움찔하여 고개를 돌려 보았다. 노인은 그가 찾고 있는 학귀가 아니었다. 괴인은 일순 당황하다가 한 가지 퍼뜩 생각나는 바가 있꺼 얼음장처 럼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길이란 본시 누구나 오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귀하는 어 찌 나더러 귀하를 쫓아왔다고 트집을 잡는 거요?" 노인은 노기 어린 시선으로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다. "노부의 눈이 멀지 않았으니 교활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냉큼 성명과 신분을 밝히시오. 그렇지 않았다가는 노부의 솜씨가 독랄함을 원망하 게 될 것이오." 괴인은 흥심이 발발하여 소름이 오싹 끼치는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 나의 성은 당이오." 말을 끝내는 순간 다섯 손가락을 부챗살처럼 펼쳐 상대방의 왼편 옆 구리를 낚아채 갔다. 채액! "풋! 어딜 감히……!" 노인은 빈정거리며 잽싸게 몸을 날려 숲속으로 꼬리를 말았다. 괴인은 뻗쳐 내던 손을 움츠렸다. "이제 보니 당신은 호랑이 대갈통에 뱀 꼬리를 단 무리였구려." 숲속에서 노인의 대꾸가 들렸다. "노부는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호두사미란 말은 듣지 못했 소. 그리고 나는 당신의 솜씨를 보고 당신이 누구인지 이미 짐작했 소." 괴인의 눈에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광채가 뿜어 나왔다 "그렇다면 어서 말해 보시오." 그는 쌍장에 진기를 끌어올리고 기척없이 한 발 한 발 접근해 갔다. 그때 노인의 차가운 외침 소리가 울렸다. "당신은 무영귀수 당력이 아니오? 당신의 그 귀망인 은 마도칠대장공 중에 서열 사위에 해당되는 것으로, 노부 또 한 익히 그 이름을 들어 알고 있소." 당력은 몸을 움찔했다. "한눈에 나를 알아보다니, 제법 눈이 날카롭구려." "어디 그뿐인 줄 아시오? 당신이 육 개월 전에 이미 회서방에 가입하 여 이십일호 온서의 지위에 있는 것도 알고 있소. 노부의 말이 틀렸 소?" '아니…… 저놈이 내 신분을 어떻게 알았을까?' 당력은 내심 크게 놀라면서 숨 가쁘게 물었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았소?" "하핫…… 다 아는 수가 있지 어쨌든 당력! 어서 귀방 총단이 어디에 있는지 밝히시오." '아……!' 당력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적의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짐작하고 고개 를 돌려 주위를 훌어보았다. 그때 다시 노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당력! 도망칠 생각은 아예 버리는 게속 편할 것이오. 다시 묻겠으니 시원스레 대답해 주시오. 회서방 총단의 소재와 방주의 이름을 대시 오." "불응한다면?" "물론 죽음을 선사하겠소. 그러나 노부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해 준 다면 호생지덕을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 주겠소." "흐히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지……" 당력은 히죽거리다가 급히 호흡을 중단하고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올 랐다. 기이한 향내가 일진의 미풍에 실려 와 콧속으로 스며듦을 느꼈던 것 이다. 하나 어느새 그는 한 줄기 향내를 흡입하고 머리가 무거워지며 몸의 진기가 흩어짐을 깨달았다. 그 순간, 쿠아앙! 머리 위에서 산악 같은 경풍이 무겁게 짓눌러 내려왔다. "앗?" 전혀 예기치 알은 사태에 놀란 그는 짤막한 비명 소리를 내며 땅으로 추락했다. 그는 기혈이 역류되고 정신이 아찔해져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하핫…… 무영귀수도 별거 아니군!" 조소와 함께 노인이 숲속에서 용수철에 튕겨나듯 뛰쳐 나왔다. 노인은 당력을 옆구리에 끼고 바람처럼 몸을 날려갔다. 제33장 조가장 희뿌연 안개가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온 누리를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기분좋은 아침의 정경. 밤새 내렸던 이슬은 풀잎과 나뭇잎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눈부신 아 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경쾌한 새들의 합창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용당운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속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이때 한 명의 매채옹이 연신 "나물 사려,나물 사 려!" 하고 외쳐대면서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 장사꾼이 조가장에서부터 따라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용당운은 속으로 냉소를 흘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몰아갔다. 조가장 에서는 혹시라도 그가 엉뚱한 짓을 할까 봐 이런 식으로 감시자를 붙 여 놓았던 것이다. 그가 신농당 앞에 이르렀을 때, "아? 용 선생님이 오셨다!" 약포 문이 활짝 열려지고, 병을 고치러 온 환자들이 용당운이 돌아오 는 것을 보고 저마다 기쁨을 나타내며 환성을 올리기에 바빴다. 용당운은 안으로 들어가 아침 식사를 끝낸 다음 평일파 다름없이 환 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맞아 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환자들 속에는 위장한 조가장의 수하들도 몇몇 끼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용당운에게서 아무런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는지 라 슬슬 꽁무니를 랬고, 이 사실을 조중화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밤새 잠을 설친 용당운은 피로를 느끼고 졸린 듯 이따금씩 눈을 스르 르 감으며 큰 하품을 연발했다. 지금 그의 심정은 단 한 시진만 자고 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원래 아침나절에 사십 명의 환자를 보기로 계획을 세운 그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환자들을 처리해 나갔다. 이윽고 그는 열다섯 명째 환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환자는 얼굴색 이 노랗고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었다. 용당운이 오른손으로 노인의 맥을 짚는 사이, 노인이 전음성으로 말 을 전했다. "지금 예정한 계획대로 당력을 성심장에서 잡아온 것처럼 조작하여 회서방과 성심장으로 하여금 서로 분쟁을 일으키도록 하고, 우리는 적당한 기회에 어부지리를 취해야겠습니다." "음적양은 아직 조가장의 깊숙한 곳에 숨어 꼼짝도 하지 않는 모양일 세. 그걸로 보아 조가장 내에 비밀통로가 있는 것 같은데, 자네는 조 사해 보았나?" 노인은 다름 아닌 천리일순 방각의 변장이었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본채 뒤쪽의 창고가 조금 의심스럽더군요. 아 마 내일쯤이면 어디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방각은 돌연 히죽 웃었다. "그건 그렇고, 누남광 노인과 함께 온 운, 곽 두 낭자가 자네를 보고 싶어 성화라네. 그러니 잠깐 시간을 내어 그녀들을 좀 달래 주게." 용당운은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하지요." 그는 약처방 종이에 몇 가지 의병지계를 기재하여 방각에 게 건네 주었다. 방각은 약처방 아닌 약처방을 받아 소중히 간직하고 허약한 몸을 일 으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신농당을 나섰다. 그는 어느 으슥한 골목 으로 접어들어서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절정의 경공을 전개하여 서 소문 쪽으로 달려갔다. 세월은 태평 성대라…… 관병들의 경비는 허술하기 짝이 얼었고, 대낮에도 모여 앉아 술과 도박을 즐겼다. 서소문 성루 위에 숨어 있는 권운도 학귀는 매우 따분하고 갑갑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무료한 나머지 두 팔을 뽑아 내고 있을 때 성루 밑에서 처음 듣 는 음성이 들려 왔다. "학 대협은 그만 내려오시오." 학귀는 움찔하여 급히 물었다. "귀하는 뉘시오?" "노부는 조가장에서 학 대협에게 경고를 해준 사람의 친구요." 학귀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오?" "그 사람은 조가장 내에 잠적하여 회서방의 비밀을 염탐하는 임무를 띠고 있소." "흠…… 그런데 귀하는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시었소?" "노부는 학 대협에게 그 친구의 부탁을 전하러 왔소. 지금 안경 일대 엔 회서방의 이목이 많으니 학 대협은 단신으로 행사하다가 최악의 불행을 당하지 말고 일찌감치 이곳을 떠나라는 부탁이오. 그런 노부 도 볼일이 많아 더는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이만 갈까 하니 몸조심하 시오." 말소리가 끊기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멎어 버렸다. 학귀는 상대방이 떠났음을 짐작하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성루에 서 내려와 사방을 한차례 훌어본 다음 교외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가 약 십여 장 앞을 내닫고 있을 때 성루 밑에서 방각의 비쩍 마른 신형이 불쑥 나타났다. 방각은 얼굴에 괴이한 미소를 머금더니 곧 학귀의 뒤를 추적해 가기 시작했다. * * * 조가장. 조가장 주변에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었다. 겉보기엔 예나 다름없이 평범한 저택 같았지만, 기실 내부엔 살기가 충만하여 여차하는 날이면 대살겁이 벌어질 상황에 처해 있 었다. 조중화는 마치 펄펄 끓는 가마솥 뚜껑 위를 맴돌고 있는 개미와 같이 마음이 십분 초조하고 불안하여 됫짐을 진 채 대청 안을 서성이고 있 었다. 대청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태사의에는 한 명의 회의소년이 앉은 채, 왔다갔다하고 있는 조중화를 거만한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었다. 회의소년은 바로 음양공자 음적양이었다. 음적양은 거만하고 냉담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조 장주, 적은 무력으로 막고 물은 흙으로 막는 게 정해 진 이치요. 더욱이 이곳은 경비가 천라지망 같고 내가 이 미 총단으로 급보를 전했으니 이제 곧 총단의 고수들이 달려올 텐데 무얼 그리 안절부절못하고 있소?" 조중화는 씁쓸히 웃었다. "당 형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적들의 독 수에 당한 것 같군요. 나는 수년 동안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는 데도 결국은 정체가 발각당하고, 그 동안 쌓아 왔던 일들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게 되었는데 어찌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음적양은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쨀 수가 없소. 어젯밤만 해도 장주가 직접 손을 썼다면 학귀를 능히 사로잡았을 게 아니오?" "그런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상대방이 워낙 갑작스레 나타난 데다가 얼토당토않게 냉상아를 내놓으라고 하는 바람에 미처 정신을 가다듬 지 못했습니다." 음적양은 돌연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그때 금릉의 연자기에서 숨어 나를 암습한 놈은 성심장의 고수가 틀 림없소. 그런데도 성심장에서 냉상아를 핑계로 조가장을 급습한 것을 보니 그들은 이미 본 방과 한바탕 격전을 벌이기로 작정한 모양이 오." 조중화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총호법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때 청의를 입은 장정 하나가 급히 안으로 들어와 부복했다. "장주님의 명을 받들어 용 선생을 다시 모셔 왔습니다." "어서 모시고 들어오너라," 청의장정은 곧 물러났다. 잠시 후 용당운이 모습을 나타랬다. 용당운은 태사의에 거만한 표정의 회의소년이 앉아 있고 장주인 조중 화는 서 있는 것을 보고 주춤거렸으나 곧 조중화의 앞으로 다가와 인 사를 했다. "신농당에는 아직도 환자들이 많은데 어찌 저를 다시 부르셨습니까? 조 장주께선 매우 성질이 급하신 모양이군요." 조중화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건 용 선생이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오. 나는 어젯밤 사건으로 용 선생의 신변이 위태로워질까 염려해서 오시라고 한 것이오." 용당운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저로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이군요." "이 성안에는 노부의 손자 녀석이 기병에 걸렸다는 것과 용 선 생을 청해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런 데 만일 성심장 도당들이 용 선생을 납치해 간다면 용 선생은 물론이 고 노부의 손자 녀석도 치료를 받지 못해 생명이 위험해질 것이며, 어쩌면 노부까지도 그들의 위협을 받을 게 아니겠소?" "……" "폐장에 계시면 우선 침식이 편하고 또 비복들이 극진히 모실 것이니 용 선생은 얼마 동안만 자유롭게 지내 주시오." 말이야 공손했지만 그것은 거의 명령에 가까운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용당운은 승낙을 하고 한 동자의 안내로 어느 객실에 들 게 되었다. 그 객실은 안채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서 매우 조용했다. 문 앞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었는데 꽃나무가 빙 둘러 있어 아주 운치 있는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아담한 객실에 든 용당운은 창 밖으로 연못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 다가 분위기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을조리게 되었다. "풀빛은 푸르르며 버들 움은 노랗고, 복숭아꽃 흐드 러지며 살구꽃 향기 그윽하다, 봄바람 조차 내 시름 을 불어 씻지 못하고, 도리어 시름 돋우니 하루 해 왜 이다지 길더니……" 그가 한창 시를 읖조리고 있을 때 등뒤에서 갑자기 고운 목소리가 들 려 왔다. "어머! 용 은공께선 취향이 썩 낭만적이시군요. 생활에 여유가 있어 서 그런가요?" 동시에 눈빛같이 매끄럽고 섬세한 관능미를 자랑하는 손지유가 복숭 아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듬뿍 머금은 채 총총히 들어왔다. 용당운은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낭자는 이제 보니 무공을 지닌 모양이구려. 낭자가 가까이 다가 오 는 것을 내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오." 손지유는 요염하게 웃었다. "전 겨우 몸을 보호할 정도의 무공밖에 터득하지 못했으니 장주님에 비한다면 천양의 격차가 있어요." "아……! 그런데 소공자의 증세는 어떻소?" "반점은 조금 사그라졌으나 이따금씩 헛소리를 하고 있어요." 용당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요귀를 제거하기 전에는 완치되기 어려울 것이오." 손지유는 영특함이 엿보이는 샛별 같은 눈에 새삼 의아스런 빛을 떠 올렸다. "본 장에 진정 요귀가 있을까요?" "물론이오." "그럼 빨리 잡아 내세요. 만일 요귀를 잡아 내지 못한다면 장주님께 선 용 은공께서 본 장의 금제를 죄다 알고 있다 하여 절대 놓아 보내 지 않을 거예요." 용당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절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 소." 손지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은공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겠어요." "휴--!" 용당운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표정을 짓자 손지유 가 두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은공께선 어찌 그런 표정을 하고 계세요?" 니는 관상술을 약간 터득하고 있소. 조금 전 조 장주의 안색 으로 미루어 보건대 흉살한 기운이 화개 부위까지 침투 해 있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되오." 손지유는 안색이 조금 변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용당운은 조금 침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강호의 일에 전혀 무식하지만, 마음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가산 이 풍부한 조 장주께서 왜 여생을 편히 보내시지 않고 엉뚱한 욕망으로 큰일을 벌이는지 모르겠소." 손지유가 말을 받았다. "은공께선 장주님께서 어찌 강호의 일에 관여하시느냐 하는 말씀이시 군요. 저는 그 점에 대해 조금은 짐작하고 있어요."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회서방이 비록 강호에서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으나 그 세력은 이미 무림을 거의 석권하고 있어요. 장주께선 전날 무림의 고수로 강호에 행도하실 때 만만찮은 원수를 맺은 적이 있는데, 당시 하마터 면 원수에게 죽음을 당할 뻔했어요. 그런데 천행으로 회서방주 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셨고, 그 후 그 은혜에 보답키 위해 회 서방에 가입하신거예요." "아…… 그렇다면 회서방주는 나이가 많고 덕망도 높은 기인이 겠군요?" "회서방주가 덕망이 높은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무림의 절대고수 라는 것은 확실해요. 그리고 회서방 총단은, 저는 물론 장 주님도 확실히 알지 못해요." 용당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강호상의 일은 우리 의도와는 전적으로 질이 다르군요. 의도 는 사람의 생명을 그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건만 강호에선 수급이 잘 려진 시체가 길바닥에 뒹굴어도 예사로운 일로 취급하니…… 어젯밤 만 해도, 그 냉 낭자란 여자가 얼마나 대단한 신분이기에 학귀라는 자가 찾아와 그 같은 유혈극을 벌였는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오." "그건 저희 장주께서도 가장 의아해 하시는 일이에요. 언뜻 들은 이 야기로는, 냉상아란 여인은 성심장주가 아끼는 제자 중 하나로서 일 대기녀라고 해요. 그런데 회서방에서는 그녀를 생포하려다 실패하여 종적을 잃어버렸는데 오히려 그들이 그것을 핑계삼아 선제 공격을 가해 온 거지요." 용당운은 슬쩍 화제를 돌려 손지유와 잡다한 얘기를 나누었다. 손지유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용당운과의 대화에 열중하는 바람에 그날 밤 늦게서야 그의 방에서 나왔다. * * * 순식간에 이틀이 지났다. 그 동안 조가장은 매우 평온한 시간을 유지했다. 용당운은 조가장 전 체를 두루 살피고 나서도 요귀가 있다는 곳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중화가 기다리다 못해 그를 불렀다. "노부가 보건대 손자 녀석은 요귀의 장난이 아닌 것 같소." 용당운은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요귀의 소재를 알아 냈으나 조 장주의 명예에 손상을 입 힐까 염려스러워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던 겁니다." 조중화의 표정이 약간 달라졌다. "노부는 한평생 양심에 가책받을 만한 행사를 해본 적이 없으니 어떤 말씀이든 서슴지 말고 해보시오." "그럼 말씀드리지요. 요귀는 바로 읍취루 밑에 있습니다. 그 요물은 앞으로 이십 일만 지나면 완전히 제 모습을 형성할 것이므로 요물을 제거할 몇 가지 법물을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만약 사 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고 요물을 잡아 내려다간 뜻하지 않은 피 해를 보게 됩니다." 조중화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읍취루…… 그럼 언제 요물 제거에 들어갈 생각이시오?" "미리 냉수 한 병과 도지 마흔아홉 개 그리고 황지 스물넉 장, 그리고 읍취루 앞에 한 층의 법대 를 준비한 다음 오늘밤 삼경을 기해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조중화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하인들을 불러 그대로 행 할 것을 분부했다. 어느덧 석양이 황혼을 물들이며 노을이 타올랐다. 어둠이 짙어 오면서 넓고 넓은 장원에는 공포스런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읍취루 앞에는 법대가 세워져 있었다. 법대 양쪽에는 두 개의 자명등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져 밀려 오는 어둠을 쫓아 내고 있었다. 법대 주위에는 조가장 내 사람들이 용당운이 요물을 제거하는 것을 보기 위해 거의 전부 모이다시피 했 다. 모두들 긴장된 표정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상경이 되자 사방은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가끔씩 풀벌레 울음 소리 만이 애처롭게 들려 와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은은히 스며들고 있었 다. 조중화와 용당운은 서서히 읍취루 밑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뒤에는 네 명의 무사와 손지유가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이날 밤따라 현의경장을 한 손지유의 모습은 한결 더 늘씬하고 아름 다웠으며,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위압하는 기운을 흘려 내고 있었다. 용당운은 두 명의 무사를 시켜 읍취루를 중심으로 아홉 개의 도지 를 방위에 따라 박도록 했다. 조중화는 이것을 보고 있다가 나직이 말을 건네 왔다. "용 선생, 이처럼 신중히 다루는 것을 보니 만만찮은 요물인가 보구 려." 용당운은 쓴운음을 지었다. "그 요물은 하나의 강시로서, 괘를 뽑아 보건대 여자인 듯 합니다. 그 요물은 달의 정기를 받아 제 모습을 형성했고 영손은 악귀가 몸에 침투되어 그 같은 괴병을 얻은 것입 니다." 강시라는 말에 조중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크게 놀 라고 있었다. 용당운은 다시 두 무사에게 분부했다. 당신들은 읍취루 대청으로 들어가 마룻장을 뜯어 내고 일곱 자 두 치 깊이로 구덩이를 판 다음 내게 고하시오." 말을 마친 그는 법의를 걸치고 법대 위에 올랐다. 그는 아홉 번 큰절을 올린 다음 검을 거머쥐고 북두의 방위로 걸으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길 약 반 시진. 용당운은 스물넉 장의 황지에 주사로 각기 다른 부적을 그려 검끝에 매달더니 촛불에 소각시키고 냉수를 한 모금 머금어 사방으로 뿌려냈다. 그때 두 무사가 대청 밑에 구덩이를 다 팠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용당운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뒤 법의를 벗어 놓고 법대 위에서 내 려와 조중화등과 함께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이 구덩이를 중심으로 하여 마흔 개의 도지를 박으시오." 용당운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두 무사가 도지를 꽃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작업이 끝나자 용당운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다시 분부 를 내렸다. "다섯 치만 더 깊이 파 내려가시오. 그러면 하나의 석관이 나 올 것이오." 두 무사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과연 구덩이 속에서 네모진 석관이 드러났다. 석관! 그 속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용당운의 말대로 여인의 시체가 들어 있단 말인가! 조중화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크게 소리쳤다. "어서 관뚜껑을 열어라!" 두 무사는 강도를 쑥 뽑아 들어 칼끝을 틈새로 밀어 넣은 다음 진력 을 모음과 동시에 번쩍 치켜 들었다. 다음 순간, 덜컹! 관뚜껑이 활짝 열렸다. 긴장된 표정으로 관 속을 살그머니 들여다보던 조중화 등은 소스라치 게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앗?" 석관 속에는 하나의 고루가 들어 있었다. 한데 괴이하게도 고루는 전신 배다귀에 한 치 길이의 녹색 털이 돋아 났고, 어리 부분에는 살이 생겨났으며 움푹 들어간 눈에서는 푸르스 름한 한광이 발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중화는 사실 그 동안 강시가 있다는 용당운의 말을 반신반의했으나 이렇게 막상 섬뜩한 형상의 강시를 직접 보게 되자 식은땀이 잔뜩 배 어나옴을 느끼면서 내심 용당운의 뛰어난 재학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 강시를 어떻게 처치하면 되겠소?" 용당운은 가볍게 웃었다. "동유에 담근 연료를 가져다가 깨끗이 소각시키고 해독을 제거 해야 합니다." "아……!" 조중화는 감탄성을 연발했다. 잠시 후 석관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횝싸였다. "끼익…… 끼익……" 강시는 괴성을 연발하면서 사지를 꿈틀거렸는데 강시가 타면서 코를 감싸 쥐게 하는 악취가 진동했다. 강시는 약 한 시진 만에 완전히 소각되어 한줌의 재로 변했다. 용당운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듯 깊은 숨을 내쉬고는 조중화를 돌 아보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 드디어 요물이 없어지고 영손이 완쾌를 보게 되었으니 매우 기 쁜 일입니다." 조중화는 흡족한 표정으로 싱글벙글했다. "이건 오로지 용 선생의 은덕이오. 노부가 후히 사례하겠소." 그는 용당운과 나란히 누각으로 올라왔다. 그의 손자는 몸에 있던 반점이 물로 씻은 듯 없어졌고 깊은 잠에 빠 져있었다. 용당운은 동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영손이 중병을 앓고 나서 진기가 많이 소모되었을 것이니 반달간 보 약을 복용해야 할 것입니다." 조중화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용당운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수그렸다. "이젠 제가 이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으니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조중화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의 의사를 표했다. "노부는 몇 달간 용 선생을 모시어 노부의 성의를 표할까 하니 물리 치지 말아 주시오." '음…… 내가 이곳 조가장에 배치된 금제를 알고 있기에 조중화는 내 가 비밀을 폭로시킬까 두려워 계획적으로 나를 잡아 두려는 것이다.' 용당운은 이렇게 생각했으나 사전에 계획한 바가 있기 때문에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주, 내가 귀장에 머무른다면 오히려 장주에게 불편함이 있을 겁니 다." 조중화는 크게 의아해 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저는 본시 운학과도 같은 성격인지라 한곳에 오래 머물지도 않을 뿐더러 누구에게 얽매여 살지도 않습니다. 제가 만약 그런 괴상 한 습벽만 없었다면 벌써 대내로 들어가 어의 노릇을 하 고 있을겁니다." 용당운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더욱이 저는 이번에 완서 순무사의 초청을 받고 왔기 때문에 귀장에 머물러 있다면 장주께 애로만 끼쳐 드리게 됩니다. 그 리고 장주와 성심장과의 분쟁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비밀을 지켜 드 리겠다는 맹세를 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치 마십시오." 조중화는 내심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용당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구나.' 그의 속셈을 간파한 용당운은 엷은 웃응을 띠며 다시 말을 꺼냈다. "내일이 바로 완서 순무사의 생신이라 저는 조그만 선물까지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필히 가서 축하를 드려야겠습니다." 조중화는 잠시 긴 침묵에 잠겨 있다가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용 선생의 사정이 그렇다면 노부로서도 더는 만류할 수 없 군요. 좋소이다. 노부는 그럼 다음 기회를 빌려 용 선생을 대접하겠 소." 그는 수하를 시켜 황금 백 냥을 가져 오게 했다. 용당운은 조중화가 내주는 황금 백 냥을 굳이 사양했다. 이때 하인 하나가 대청 안으로 들어와 아뢰었다. "장주님, 순무부에 계시는 유 교두 나으리에서 오 셨습니다." 조중화는 이 의외의 방문객에 어리등절해 하다가급히 자리에서 일어 났다. "노부가 나가서 영접해야 되겠구나." 그가 막 밖으로 나가려는 사이 밖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무 통보도 없이 들어옴을 조 장주는 널리 이해하시오." 바로 이어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한 유생 하나가 몸에 하늘색 장삼을 걸치고 들어와 웃음떤 표정으로 포권의 예를 취했다. 조중화는 얼른 답례하고 맞이했다. "유 교두께선 무슨 분부가 있으시기에 이렬듯 급작스럽게 왕림하셨습 니까?" 유 교두는 용당운을 힐끔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내가 어제 순무사 어른의 명령을 받고 신농당으로 용 선생을 뵈러 갔더니 귀장에 와 계시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소이다. 내일은 순무 사 어른의 생신이며 용 선생은 순무사 어른과 망년지교이 시므로 지금 순무사께서 주석을 마련하고서 용 선생을 고대하 고 계십니다." 조중화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렇다면 용 선생은 속히 가보셔야 되겠군요. 그런데 순무 사께서 새벽같이 손님을 맞이하시는 것으로 미루어 성미가 매우 급하 신 모양이군요." "하핫…… 조 장주는 그 내막을 잘 모르실 것이오. 용 선생께선 성격 이 고고하여 순무사 어른과 절친한 사이라는 것을 일체 남에게 알리지 않으셨고 또 이부에 찾아오시는 예도 극히 드물기 때문 에 순무사께선 오늘 생신을 계기로 용 선생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 며 회포를 푸시려는 것이오." "아…… 그렇군요. 노부는 진정 몰랐소이다." 그제서야 모든 의심이 완전히 풀린 조중화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유 교두는 용당운과 함께 조중화와 작별하고 조가장을 떠났다. 제34장 장원변고 밤. 어둠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그림자처럼 주위를 물들여 가고 있었 다. 어둠에 잠긴 조가장의 대청에서는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대청 안에서는 조중화와 음적양이 긴밀한 의논을 계속하고 있었다. 음적양이 도도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조 장주, 아마 조만간에 성심장의 놈들이 이곳을 습격할지 모르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시오." 조중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부총호법께서는 언제쯤 총단으로 가실 생각이십 니까?" "원래는 어제쯤 떠날 생각이었는데 아직 총단에서 돌아오라는 연락이 오지 않아 망설이고 있소. 하나 이곳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총단으 로 떠날 예정이오." 이때 손지유가 두 손에 찻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손지유는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부총호법님, 차 드세요." 음적앙은 사의를 표하고 기이한 눈빛으로 손지유를 응시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시선이 마주친 손지유는 금세 얼굴을 붉히더 니 고개를 한쪽으로 숙이며 황망히 밖으로 나갔다. 음적양은 그녀의 미색에 마음이 크게 움직여 침을 꿀꺽 삼키며 조중화에게 나직이 물었다. "지금 그 낭자의 방명은 어찌 되오?" "손지유라고 하는데 폐장에서는 모두 유아라고 부르지요." "지유라……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한 이름이군요. 나는 본시 여색 을 과히 즐기는 사람은 아닌데 웬일인지 마음이 끌리는군요." 그가 입술에 침도 밧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자 조중화는 가볍게 헛기 침을 했다. "유아는 어려서부터 폐장에서 성장하여 집사람이 친딸처럼 여기고 있 는데 그 성격이 괄괄해서 몹시 다루기가……" 음적양은 손을 내저으며 말문을 가로막았다. "조 장주가 허락만 하신다면 그녀로 하여금 내게 진심으로 복종토록 설득시킬 자신이 있소이다." 조중화는 잠시 망설였으나 상대가 부총호법인지라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부총호법께서 그애를 거두신다면 그건 정말 큰 복입니다. 대사가 이 루어지도록 힙써 보겠습니다." 음적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조 장주가 수고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그녀를 만나 얘기를 나누 어 보겠소이다. 그녀의 방이 어디지요?" "오운각입니다." 음적양은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곧 밖으로 나갔 다. 조중화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바깥쪽을 응시하다가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실로 향했다. 오운각으로 돌아온 손지유는 미간을 기분이 나쁜 듯 잔뜩 찌푸리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때 돌연 오운각 밖 버들가지가 휘휘 늘어진 곳에서 노랫소리가 바 람을 타고 유유히 들려 왔다. "옷소매 은은히 바람결에 나부끼건만, 버들가지는 누각 위에 떠오른 달을 향해 춤을 추네. 부채에서 이는 바람 따라 방긋 웃는 복사꽃은, 지난 날에 술 취한 얼굴인 듯 붉기만 하네. 오늘밤은 은빛으로 비춰 주는 달빛을 만나, 꿈속에서라도 서로 만나 즐겨 보았으면……" 그것은 남녀간의 애정을 의미하는 노랫소리였다. 본시 어려서부터 서시와 노래를 즐긴 손지유는 이 노랫소리를 듣고서 금시 의미를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혔으나 그 음성이 음적양의 것임을 알고는 아미를 찡그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아무리 회서방의 부총호법이라 해도 그따위 솜사탕 같은 노래로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흥! 나 손지유를 값싼 여자로 알았 다면 큰 오산이다." 이때 노랫소리는 멎고 춘정에 몸부림치는 듯한 퉁소 소리가 은 은히 울려 퍼졌다. 퉁소소리에는 기이한 음공의 힘이 실려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이내 퉁소 소리도 멎고 온유한 음성이 들려 왔다. "손 낭자……!" 손지유는 고동치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다가 고개를 돌려 보니 자신 도 모르는 사이 음적양이 막 오운각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부총호법님……" 손지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입을 떼자 음적양은 하얀 이를 드러 내 보이며 싱긋 웃었다. "낭자, 나는 전부터 낭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소. 진정으로 낭자 를 사모하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눈은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눈빛처럼 무섭게 빛 나고 있었다. 손지유는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나직이 말했다. "부총호법께서 미천한 소녀를 그토록 아껴 주신다니 감당하기가 어렵 습니다." "하핫…… 어려워할 것 없소. 자! 우리 자리를 함께하고 얘기나 나눕 시다." 두 사람은 오운각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함께했다. 손지유는 비록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으나 음적양이 연 신 음탕한 눈초리로 자신의 전신을 쓸어보는 것을 느끼고 불안한 심 정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때 손지유의 귓전으로 난데엄는 전음성이 들려 왔다. "낭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시오. 자칫 잘못했다간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너무 완고하게 거절을 말로 적당히 응해 주는 척 하며 위기를 모면토록 하시오." 그녀는 내심 깜짝 놀랐다. 그 음성은 분명 용당운의 말소리였던 것이다. 손지유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고개를 숙이고 있 다가 일부러 수줍은 웃음을 머금었다. "부총호법께선 진심으로 절 사랑하세요?" 음적양은 그녀의 음성이나 눈빛이 여전히 초롱한 것을 보고 내심 흠 칫했다. '나의 섭혼소를 듣고도 까딱없는 것을 보니 정력이 예 사가 아니구나.' 음적양은 능글맞게도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본시 여색에 관심을 두는 성미가 아니오. 그런데 어찌 된 셈인 지 낭자를 보고는 마음이 완전히 끌리는구려. 이걸 보고 사람들은 천 생연분이라 하는 모양인데, 아무튼 낭자가 승낙만 한다면 나는 평생 낭자에게 사랑을 바치겠소."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그렇소. 내가 만일 속에 없는 말을 했다면 필시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손지유는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도 겉으로는 교태 어린 음성으로 말했 다. "저 같은 계집이 부총호법님을 모시게 된다는 것은 더없이 즐겁고 분 에 넘치는 일이에요. 그러나 저는 야합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부총호법께서는 정당하게 중매를 내세워 청혼을 해주세요." 음적양은 약간 난색을 띠다가 곧 말을 받았다. "그야 당연한 일ol 아니겠소? 이번 임무를 마친 뒤에 조 장주를 중매 쟁이로 내세워 낭자를 예의로써 맞이하겠소." "그 말씀 고마워요." 음적양은 짐짓 호탕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우리 한 쌍의 원앙이 되어 경치 좋은 총단에서 행복을 누 립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 모두 우릴 부러워할 것이오:' 총단이라는 말에 손지유는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라 넌지시 물어 보았다. "회서방의 총단은 어디쯤 있지요?" "이 다음에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 너무 서둘지 마시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익!" 저 멀리 성루쪽에서 고막을 울리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 다. 음적양은 금시 안색이 싹 달라졌다. "학귀가 성심장의 도당들을 이끌고 다시 나타난 모양이군." 그는 손지유에게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 나갔다. 때는 대지에 어둠이 깔리고 중천에 달이 떠오른 밤이었다. 손지유는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키면서 나직이 불렀다. "용 은공……" 그러자 오운각 뒤에서 한줄기 인영이 소리없이 나타나 곧 손지유 앞 으로 다가왔다. 손지유는 그 인영이 바로 용당운임을 알아보고 의아스럽게 물었다. "은공께선 순무부에 가셨다더니 언제 돌아오셨나요?" 용당운은 전에 없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파. "낭자는 현재 나쁜 길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오. 나는 본시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무림의 정의가 말살되어 가 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기에 다시 되돌아온 것이 오." 손지유는 별빛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용당운을 빤히 응시했다. "은공은 자신의 무공을 짐작하고 계시나요?" "그렇소. 하지만 과히 자랑할 만한 것은 못 되고 낭자처럼 겨우 자신 을 지킬 정도요." 용당운은 품속으로 손을 우겨 넣더니 한 알의 환약을 꺼내 손지유에 게 내밀었다. "음적양은 술수가 많은 자이기 때문에 낭자가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필시 음독한 방법을 사용할 거요. 그러니 낭 자는 이 환약을 미리 복용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시오." 손지유는 고마운 마음으로 환약을 받아 삼킨 뒤 물었다. "은공은 성심장 사람이세요?" 용당운은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어찌 패도불의한 성심장 무리들과 어울리겠소? 나는 무림이 회서방과 성심장에 의해 어지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러는 것이니 낭자가 나를 좀 도와 주시오." 손지유는 굳은 표정을 지 었다. "저는 이 몸이 으스러지는 한이 있러라도 은공의 은혜에 보답할 결심 이 서 있어요." "고맙소." 이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밖에서 경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 오자 급 히 눈짓을 해보이고는 됫방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 순간 조중화의 음성이 들려 왔다. "유아…… 안에 있느냐?" "네, 저 여기 있어요." 손지유가 대답하며 얼른 문을 열어 주자 조중화가 표연히 안으로 들 어와 형형한 눈초리로 방안을 쓸어보았다. 손지유는 곧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총호법께선 휘파람 소리를 듣고 급히 밖으로 나가셨어요." "그건 노부도 알고 있다. 그런데 너는 방금 누구와 얘기를 나누고 있 었느냐?" 손지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곧 기지를 발휘하여 대답했다. "저 혼자 중얼거렸어요." 조중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부총호법께서 저와 장래를 함께하겠다는 제의를 하셨는데 결단을 내 리지 못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중얼거린 거예요." 조중화는 그녀의 표정을 뚫어지게 살피다가 말했다. "부총호법같이 지체가 높고 무공이 고강한 분은 구하려 해도 쉽지 않 은데 하물며 그쪽에서 먼저 의사를 비추어 오는데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단 말이냐?" "……" 조중화는 성큼 걸음을 옮겨 뒷방으로 들어갔다. 이 광경을 본 손지유의 가슴은 방망이질치듯 두근거렸다. '뒷방에는 따로 나갈 만한 길이 없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지……?' 마음이 다급해진 그녀는 바로 조중화의 뒤를 따라갔다. 뒷방으로 들어간 조중화는 화섭자에 불을 붙여 들고 방안을 살펴보았 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는 눈을 썬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약간 의아해 하다가 오른손으로 가슴을 보호하면서 매우 조심스 럽게 옷장 문을 열어제쳤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처녀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옷가 지들뿐이었다. 이때 손지유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약간 토라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 다. "장주님은 제가 이곳에 사람을 숨겨 두었다고 의심하세요?" 조중화는 자신의 추측이 빗나가자 매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노부의 청각은 몹시 예민하여 십 장 밖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꽃잎이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노부는 네가 누군가와 얘기하는 것을 분 명히 들은 것 같은데 참으로 이상도 하구나." 손지유는 내심 용당운이 어디로 숨었기에 보이지 않을까 신기하게 여 기면서도 짐짓 슬픈 듯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장주님은 저를 못 믿으시는군요. 전 오직 장주님만을 믿어 왔는데… …" 조중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손지유는 퍼뜩 밖을 내다본 뒤 방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조용히 불렀 다. "은공, 어디 계세요?" 하나 아무 대답도 들려 오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서 빠져 나가신 모양이구나. 그런데 어떤 수법으로 감쪽 같이 사라졌을까?' 손지유는 아리송한 기분이 되어 옷장 문을 닫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용당운은 어떻게 방안에서 사라진 것일까? 중천에 떠오른 달은 교교한 빛을 온 세상에 뿌리고 세상은 괴 괴한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듯한 심산의 수목들이 소슬하니 불어오는 밤바람에 괴이한 소리를 내면서 흔들리고, 이따금씩 들려 오는 풀벌레의 울음 소리가 적막을 깨뜨리며 대지를 뒤흔들고 있었 다. 삼경 무렵, 돌연 조가장 담장 밖에서 꽹과리 치는 소리가 롸란스럽게 들려 왔다. 쨍……! 째쨍! 이 밤중에 무슨 왱과리 소리란 말인가? 좽과리의 여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수한 인영들이 도광을 번 쩍이면서 속속들이 사면팔방으로 나타나더니 조가장을 침습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조가장 내에서는 지금까지 일체 아무런 반응 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적이 대거 침습할 크나큰 위기가 눈앞에 박두했는데도 무사 태평이라 니…… 바로 그때였다. 기괴한 형상으로 자라 있는 한 그루 나무 뒤에서 금의청년 하나가 흘 연히 모습을 나타냈다. 샛별같이 반짝이는 두 눈동자, 날카롭고 미끈한 콧날…… 게다가 허리춤에는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금검읖 차고 있어 한층 더 준수해 보이는 금의청년은 바로 금검공자 도옥린이었다. 도옥린은 주위를 훌어보면서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냉엄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학 대협, 조 노적이 혹시 철수해 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러자 한 인영이 유성처럼 날아와 그의 앞에 내려섰다. 그는 바로 권운도 학귀였다. 학귀는 침중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요즘 이틀 동안 조가장을 엄밀히 감시하고 있었는데 오늘 오후부터 회서방의 고수들이 줄을 지어 도착하더군. 이곳 주위에 우리의 천라 지망이 펼쳐져 있는 한 조중화는 절대 철수하지 못했을 것이네." 도옥린은 냉소를 날렷다. "그렇다고 해서 경솔히 움직이다가는 도리어 우리가 역습을 당할 우 려가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겁니다." 바로 그때 음침한 말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 왔다. "흐흐…… 과연 그럴까? 귀장의 수하들은 이미 위험지경에 처 해있소. 만일 믿어지지 않거든 시험삼아 수하들을 일차 소집해 보시 오." 도옥린의 짙은 검미가 꿈틀거렸다 "흥! 누군지 말버룻이 상당히 건방지구려." 도옥린은 상대방의 위협적인 언사를 냉소로 일축하고 우장을 번개처 럼 내밀어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강맹한 장력을 밀어 냈다. 꽝! 요란한 굉음 소리에 이어 소나무 한 그루가 흔들리며 나뭇잎이 우수 수 무수히 떨어져 내렸다. "흐흐…… 왜나 성질이 급한 젊은이로군." 빈정대는 말소리가 또다시 들려 오며 바로 그 소나무 부근에서 인영 하나가 유유히 나타났다. 그는 조가장의 장주인 조중화였다. "귀하의 무공은 대단하오. 그러나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반드시 패하 는 법. 귀하는 이곳에서 마음대로 물러가지 못할 것이오." 말소리가 떨어지자마자 그 소나무 뒤에서 네 명의 청삼노인이 빠르게 뛰쳐 나왔다. 그들은 그대로 장검을 뽑으며 도옥린에게 덤벼들었다. "흥! 가소롭군." 도옥린은 네 명의 청삼노인이 눈에 차지도 않른지 가볍게 코웃음치며 금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학귀가 먼저 칼을 뽐아 앞으로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나? 이공자는 잠시 구경 하고 있게. 저자들은 내가 맡겠네." 학귀는 번개같이 앞으로 날아오며 칼을 휘둘렀다. 파파파팍! 예리한 소성과 함께 맹렬히 회전하는 잘 그림자의 소용돌이가 마치 바람개비처럼 네 청삼노인을 향해 쇄도해 갔다. "훌륭한 도법이다!" 네 청삼노인은 동시에 소리치면서 기묘한 검초를 전개하여 민 첩한 동작으로 공방전을 시작했다. 학귀의 도법은 사실 훌릉하기보다는 독랄하고 기묘한 초식이 내포되 어 있었다. 쓱! 그가 한번 도를 휘두를 때마다 서릿발 같은 도기가 쭉쭉 뻗치면서 상 대방의 주요 대혈만을 노렸다. 이에 맞서는 청솨노인들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고 상대방의 진기가 소모되기 를 기다려 일검에 승부를 결판 지으려는 전법을 쓰기 시작했다. 일 대 사의 대결. 학귀는 상대편이 일검을 쳐내는사이 연속적으로 사 도를 쳐 내야 했기 때문에 점차로 열세에 몰리는 기미를 보였다.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도옥린은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버럭 노성을 질렀다. "손을 멈추시오!" 학귀는 고함소리를 듣고 바삐 신룡회미 일도를 펼쳐 달려 드는 네 줄기의 검홍을 방어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 순간, "이얍!" 일갈이 터져 나오고 도옥린이 쾌속하게 청삼노인들에게 달려들며 금 검을 뽑아 기이하게 휘둘렀다. 파파파파…… 주위가 온통 금광검에서 뿜어 나오는 금빛 검광 때문에 환해지며 싸 늘한 검기가 피어올랐다. 네 청삼노인은 상대의 검법이 거의 절정에 다다랐음을 깨닫고 사력을 다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반격을 가했다. 팍! 팍! 팍! 별안간 도옥린의 입에서 호쾌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 그와 함께 금광검에서 뿜어 나오는 검광이 더욱 강렬해졌다. 순간, "크윽!" "으음……!" 청삼노인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이어 그들 중 두 사람이 오른팔이 싹뚝 잘린 채 그 자리에 쓰러져 버 렸고, 다른 두 사람은 장검을 놓쳐 버리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실로 무시무시한 검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중화는 도옥린의 검법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어 왔다. '저자의 검법은 나와 비할 바가 아니구나. 게다가 수중에 들고 있는 검 또한 절세의 신검인 것 같으니……' 그 순간 조중화의 뒤에서 음랭한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저들을 깨끗이 청소해 버리겠소." 조중화가 급히 뒤돌아보니 음적양이 막 몸을 냘려 도옥린에게 접근해 가고 있었다. 도옥린은 난데없이 나타난 음적양을 보자 얼굴을 굳히며 두 눈을 무 섭게 번뜩거렸다. "네놈이 바로 회서방의 부총호법이라는 음적양이냐?" 음적양은 거만스럽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렬다. 금검을 가진 것을 보니 녜가 바로 사대공자 중의 금검공자 도옥린이구나?" "안목이 제법이군. 냉 사매는 지금 어디 있느냐?" "냉상아가 네 사매냐? 그녀가 어디 있는지 본 공자가 어떻게 알겠느 냐?" 도옥린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네놈이 내 사매에게 흑심을 품고 몰래 암습해서 그녀를 납치 해 간 것을 알고 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그녀를 순순히 내 놓아라." "하하하하……!" 음적양은 앙천 대소를 터뜨린 후 경멸의 시선을 던지며 말을 꺼냈다. "너야말로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본 공자는 그녀의 코빼기도 구경하 지 못했는데 무슨 개수작이냐? 괜히 쓸데없는 심기 부리지 말 고 나와 더불어 진정한 무공으로 승부를 가려 누가 진짜 사대공자의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 보자!" 말과 동시에 그는 즉시 우장을 번개처럼 휘둘러 왔다. 꽈릉! 도옥린은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신중을 기해 우장으로 화산입정 초식을 펼쳐 냈다. 쌍방의 장력이 맞닥뜨려지는 순간, 꽝! 폭음 소리가 터져 나오며 장풍의 여파가 허공을 맴돌았다. 음적양이 신형을 약간 휘청거린 반면 도옥린은 뒤로 주춤 한걸음 물 러났다. '장력으로 이놈과 맞서서는 안 되겠구나.' 안색이 조금 굳어진 도옥린은 급히 금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네놈의 장력은 그런 대로 쓸 만하구나. 자, 그럼 이번에는 내 검을 받아 보아라!" 동시에 그는 금검으로 허의환영 일초를 펼쳐 냈다. 쐐쐐쐐쐐액! 천만 가닥의 검광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며 음적양의 전신을 휘감아 왔 다. "흥!" 음적양은 싸늘하게 코웃음치며 오른손 중지를 뻣뻣이 세워 삼 양신지를 발휘하여 도옥린의 미심혈을 쾌속하게 찔러갔다. 쐐액! 도옥린은 상대의 삼양신지가 자신의 엄밀한 검영을 뚫고 들어오자 흠 칫 놀라 급히 금광검을 양손으로 움켜잡으며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 다. 팟! 삼양신지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 밑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우웅…… 괴이한 음향과 함께 도옥린의 금광검에서 붉은색 노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도옥린이 낙일검강을 끌어올린 것이다 그의 무공은 냉상아보다 고강 하여 그녀보다 훨씬 수월하게 낙일검을 운용하고 있었다. 음적양은 상대가 낙일검을 끌어올린 것을 보고 표정이 잔뜩 굳어진 채 자신도 음양수의 장공을 운용했다. 찰나 그의 양손은 각기 붉고 희게 물들어 있었다. 도옥린과 음적양은 각기 낙일검과 음양수를 끌어올린 채 서로 마주보 며 팽팽히 대치하고 있었다. 구경하고 있던 중인들은 두 절정고수가 강호무림의 최고 무학들을 펼 치려 하자 절로 긴장되고 초조해져 목에서 갈증이 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노려본 채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가 필승의 자신이 없어 아직 손을 쓰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그때 돌연 도옥린의 귓전으로 가느다란 전음성이 들려 왔다. "귀하의 낙일검은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않아 음적양의 음양수를 확실 하게 꺾는다는 보장이 없소. 그러나 귀하는 일단 물러났다가 기회를 보아 귀 사매를 구출하는 게 도리인 듯싶소." 도옥린은 그 음성이 일전에 금흥의 연자기에서 우연히 만났던 제백석 의 것임을 알고는 내심 깜짝 놀랐다. '제백석은 대내의 인물인데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그가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제백석의 전음이 다시 들려 왔다. "나는 이무를 띠고 이 근처에 있는 완서 순무부에 들렀다가 마침 조 가장에서 무림인들이 싸움을 한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와 본 것이오. 이곳에서 다행이 도 형을 만났으나 나는 대내의 시위영반의 직책이 있는지라 공개적으로 도 형을 도와 주지 못하니 도 형이 양해하시 오." 그제서야 도옥린은 사정을 짐작하고 낙일검을 거두었다. 음적양은 돌연 도옥린이 낙일검강을 거두자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도옥린은 두 눈에 날카로운 신광을 번뜩이며 일 장 밖으로 물 러서더니 고개를 쳐들고 크게 웃어 젖혔다. "으하핫…… 과연 음양공자의 무공은 보통이 아니군. 내 귀하의 무공 을 높이 사 특별히 양보하는 바이니 이틀 내에 냉 사매를 석방하도록 하시오." 이어 그는 잽싸게 몸을 튕겨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학귀도 청아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그 뒤를 따랐다. 학귀의 휘파람 소리가 사방으로 메아리쳐 가자 조가장 곳곳에서 검은 인영들이 속속 나타나며 담장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조중화는 해연히 놀라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그들은 이미 본 장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었구나. 그런데 어찌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고 물러간 것일까?" 음적양은 서서히 음양수를 거두며 음침하게 웃었다. "도옥린과 몇 초를 겨루어 본 바 나와 막상막하의 실력을 지니고 있 으므로 승부를 예측하기 어렵소. 그가 이틀의 말미를 주고 물러간 것 은 그동안 성심장 내의 실력자들을 동원하여 나를 상대하려는 수작인 데 내가 그의 술책에 말려 들어갈 위인이 아니오. 아무튼 우리는 만 반의 준비를 하고서 그들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려 일거에 몰살시키 는 게 현명한 방법이오." 조중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총호법의 요인요사는 귀신 같습니다. 그리고 무영 귀수 당력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성심장 무 리들의 독수에 당한 것 같군요." 음적양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오늘밤 도옥린이 당력에 대한 얘기를 일체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으 로 보아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듯하오. 조 장주는 재치있는 수하 몇 사람으로 하여금 성심장 수하 한 놈을 잡아 대령토록 하고 그자를 심 문해 내막을 알아보도록 하시오." 조중화는 대답하고 난 뒤 다시 물었다. "부총호법은 유아를 만나 보셨습니까?" 음적양은 손지유의 얘기가 나오자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매우 총명한 사람인지라 나더러 정당한 절차를 밟아 청혼을 해야만 응하겠다는 야무진 대답을 했소. 내가 그처림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마음이 흡족하겠소만 그녀를 그리는 마음이 불꽃 처럼 타올라……" 그는 여기서 말끝을 흐렸다. 조중화는 그가 손지유를 진정한 애정이 아닌 일시적인 욕정 의 대상으로 생각하과 있는 것 같아 슬며시 울분이 치밀어 오르며 역겨움이 일어났다. 그러나 내색치 않고 오히려 웃음을 머금었다. "유아는 얼굴이 예쁠 뿐더러 정조가 서릿발 같고 성미가 괄괄 하여 부총호법의 다급한 생각은 일시에 이루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다른 미소녀를 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음적양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내겐 오직 그녀뿐이오. 내가 이미 예의로써 맞이하겠다고 약속을 했 는데 어찌 성사가 되지 않겠소?" 조중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애는 부총호법에게 자신의 정조만 잃고 나중에는 헌신짝 같은 취 급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오." 음적양은 자못 정색을 했다. "명색이 일방의 부총호법이란 지위에 있는 내가 어찌 그같이 무분별 한 처사를 하겠소? 조 장주는 나를 믿지 못하시오?" 조중화는 민망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천만에요. 제가 유아의 성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노 파심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하…… 그것이 기우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오." 음적양은 가볍게 웃고는 몸을 튕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중화는 그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뜻 모를 한숨을 내쉬 며 몸을 돌렸다. 제35장 실날 같은 희망 오운각. 손지유는 홀로 방안에 앉아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음적양이 순순히 물퍼날 것 같지 않아 걱정이 태산 같았던 것이다. 처녀로서 순결을 짓밟힌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삶의 가치를 잃어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남자에게, 그것도 정식으 로 혼인도 하지 않고 순결을 빼앗긴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고 비참 한 일이다.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고뇌의 결정체가 이슬이 되어 복숭아꽃이 만발 한 것처럼 싱그럽고 생동감 있는 고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용 은공은 신의이기에 앞서 분명히 무림의 기인일 것이 다. 그분이 나를 마수에서 구출하여 순결을 보존케만 해주신다 면 나는 그분을 위해 분골쇄신, 뼈가 가루가 되도록 봉사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분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나의 열망은 여기서 이대로 종결되고 마는가?' 손지유는 생각할수록 더욱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평소의 총명함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흐리멍덩해져서 마치 안개에 쉽싸인 듯 갈 피 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중얼거렸다. 마침내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죽음으로써 순결을 지킬 것이다. 이것만이 나의 갈 길인 것 같 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자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듯이 기분이 홀가분해 졌고 조금의 여유마저 생기게 되었다. 눈물을 닦은 그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 방으로 가보았다. 용당운이 어디로 빠져 나갔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방은 거의 밀폐된 곳으로, 기껏해야 구석에 작은 창문 하나만이 뚫려 있을 뿐이었다. 하나 그 창문은 너무나 작아 사람은커녕 조그만 강아지 새끼도 빠져 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혹, 은공은 오행둔법을 터득하고 계신단 말인가?' 오행둔법이란 민간에서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일종 의 기문둔갑술이었다. 하나 지금까지 강호에서 이 수법을 펼쳤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 다. 그렇다면 용당운은 과연 어떠한 수법으로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 었단 말인가? 바로 그때 돌연 음적양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손 낭자……!" 그의 음성은 사뭇 정중하고 나직했으나 손지유의 귓전에는 천둥치듯 요란하게 울렸다. 손지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눈앞이 캉캄해졌다. '사악한 놈! 드디어 마수를 뻗쳐 내 몸을 정복하려고 왔구나.' 손지유는 비장한 각오를 새롭게 하고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억제하며 천천히 방에서 걸어나왔다. 음적양은 온유한 웃음을 머금은 채 홀연히 서 있었다. 그는 손지유의 고운 얼굴에 전에 볼 수 없었던 서릿발 같은 기운이 서려 있음을 보고 내심 어리등절해 하면서 염두를 굴렸다. '조 장주의 말이 틀림없군. 역시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형세는 이미 활시위에 오른 화살이다.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낭자, 어짜……" 손지유는 냉랭하게 말을 가로챘다. "부총호법, 제가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정조를 지키려 함은 어느 누구에게도 못지않아요. 부총호법께서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면 이곳에 자주 오시지 말고 중매를 내세워 주세요." 음적 양은 히죽 웃음을 지 었다. "내 맹세코 낭자를 예의로 대하겠으니 조금도 염려치 마시오. 평소 성격이 강직하여 여자 친구라곤 단 한 명도 사귀지 못했던 내가 이제 야 마음에 맞는 낭자를 만나고 나니 여간 기쁘지 않소. 마침 내가 객 지에 나와서 마음도 쓸쓸하니 함께 촛불을 밝혀 놓고 앞으로의 계획 을 세우도록 합시다." 그는 손지유가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의 곁을 지나쳐 먼저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됫모습을 노려보다가 냉정 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총호법, 당장 나가 주세요. 회서방에서는 어느 누구든지 최악의 순간에 처하게 되면 자결을 하기 위해 독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저 역시 독약을 어금니 안에 지니고 있으니 부 총호법이 핍박을 가하신다면 자결하고 말겠어요." 음적양은 움찔하여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제기랄! 이 계집이 죽음마저 각오했다면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써야겠구나.' 그는 번개같이 생각을 굴리고는 서서히 돌아서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 다. "낭자, 내 절대로 경박한 행동을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어찌 그처럼 경솔한 말씀을 하시오?" 손지유의 표정은 얼음장 같았다. "그럼 부총호법께선 내일 밝은 날에 다시 오세요. 이러다간 남들에게 애매한 소리를 듣게 돼요." 음적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석이 아닌 바에야 남녀간에 감정이 없는 사람이 있겠소? 낭자는 너무 냉정하게 대하는구려," 그는 짐짓 길게 탄식을 토한 후 밖으로 나가 버렸다. 손지유는 그제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이때 돌연 용당운의 말소리가 들렸다. "낭자……" 손지유는 뜻밖에 용당운이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기쁨 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으, 은공…… 어디 계세요? 어딜 다녀오셨지요?" 용당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음성만 다시 들려 왔다. "조가장은 이미 여러 사람들의 화살받이가 되어 금방 큰 화난 이 미치겠기에 외부에 나가 정세를 살피고 막 돌아오는 길이오." "어디를 통해 이곳을 빠져 나가셨어요?" 그때 용당운이 기척도 없이 문밖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녀의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손지유는 용당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의아스런 표정을 짓다 가 나직이 입을 메었다. "저는 강호의 정세에 밝지 못하지만, 은공은 혹시 성심장 사람이세 요?" "아니오." "그럼 구대문파 중의 고수이시군요?" "나는 운학과 같은 몸으로서 의술을 펴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살리는 데 뜻이 있을 뿐 구대문파와는 아무런 연유도 없는 데 낭자의 단정은 좀 성급한 듯하구려." 손지유는 무안함을 느꼈는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제가 보기에 은공께선 반드시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오신 것 같아요." 용당운은 그녀의 총명함에 내심 감탄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전에는 아무 목적도 없었지만 오늘밤만은 분명히 목적이 있소." "냉상아라는 낭자를 구하러 오셨나요? 하지만 그 낭자는 정말 이곳엔 없어요." "그게 아니오. 나는 무림을 장악하려는 회서방의 음모를 분쇄하고 그 들을 해체시키려는 거요." 손지유는 깜짝 놀랐다. "은공 흔자의 힘으로 어떻게 그런 큰일을……" 용당운은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지유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래서 나는 낭자의 도움을 얻으려고 되돌아온 것이오." 손지유는 크게 놀라는 기색을 띠었다. "저는 은공을 위하는 일이라면 이미 죽음을 각오한 바 있지만 저 같 은 약한 존재가 괜히 나섰다가 대사를 그르칠까 심히 염려되는 군요." 용당운은 정색을 하며 말을 받았다. "이 일은 낭자가 아니고는 강당해 낼 사람이 없소. 낭자는 음적양에 게서 회서방의 총단이 있는 곳을 알아 내면 되는 것이오." 손지유는 암담해진 표정을 지었다. "은공은 절 그놈의 마수에 희생시키려고 하세요?" 용당운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낭자, 절대로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음적양으로 하여금 낭자의 수 법에 저절로 빠져 들도록 하려는 바이니 낭자는 서서히 손을 써야 될 것이오." 이어서 귓속말로 소곤거리더니 품속에서 주홍색 환약 한 알을 꺼내 주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이 환약을 복용하면 칠 일간은 상대방이 어떠한 미독을 써도 방어할 수 있을 것이오." 손지유는 향내가 코를 찌르는 그 환약을 받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삼켰다. 그때 돌연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용당운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번개처럼 됫문을 통해 옆 방으로 피하 면서 전음성으로 말을 보냈다. "낭자, 누가 오고 있으니 경각하시오." 손지유가 놀라는 사이 조중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아야! 지금 자느냐?" 촛불이 밖으로 흘러나가고 있는 것을 보아 그녀가 아직 잠자리에 들 지 않았음을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물어 보는 것이다. "네…… 들어오세요." 손지유가 나직이 대답하자 조중화는 표흘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린 채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는 손지유 의 모습을 보고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머지않아 날이 샐 텐데 어찌 지금까지 자지 않고 있는 거냐?" 손지유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부총호법이 조금 전에 다시 저의 방에 찾아왔기에 제가 죽기로 타협 을 거부했더니 할 수 없이 언짢은 표정으로 되돌아갔어요," 조중화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부총호법이 마음에 없느냐?" "생각만 해도 역겨움이 일어요. 만일 부총호법이 또다시 치근덕거린 다면 전 깨끗이 죽어 버릴 테예요." 조중화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노부가 부총호법에게 널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해두었 으니 너무 염려 말고 잠이나 푹 자두거라." 조중화는 이 말을 남기고 서서히 발길을 돌려 밖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정오 무렵. 청의여비 하나가 급히 손지유의 방문 앞에 이르더니 문을 두들겼다. "언니, 장주님이 부르세요." 방안에 앉아 있던 손지유는 움찔하다가 되물었다. "장주님은 어디 계시냐?" "대청에 계세요." "알았다. 곧 가마!" 손지유는 그렇게 대답한 뒤 일부러 화려한 화장을 하고서 대청으로 향했다. 넓고 우아한 장식으로 단장된 대청 안 중앙 탁자에는 푸짐한 술자리 가 마련되어 있었다. 술잔은 번쩍번쩍 빛이 나는 황금잔이었고, 조중화와 음적양이 마주앉 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따금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조중화의 눈샙이 갑자기 약간 꿈틀 거려지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아가 오는 모양입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손지유가 대청으로 들어섰다. 음적양은 만면에 온화한 웃음을 띠며 그녀를 맞이했다. 일신에는 눈처럼 희고 고운 비단에 홍선을 두른 옷을 입고, 짙 은 화장을 한 손지유. 더욱이 빙그레 미소 지을 때 드러나보이는 박속처럼 하얀치아는 싱그 러운 미와 고결한 미를 융화시켜 본래의 미를 한결 돋보이게 하였다. 정녕 손지유는 전날의 서시나 왕소군에 비할 바가 아 니라 요지궁에 있다는 선녀를 연상케 하는 천하절색이 었다. 그녀의 무공과 지위가 조금만 높았더라도 당금 무림에는 사대미인이 아니라 오대미인이 있었을 것이다. 음적양은 그녀의 미색에 도취되어 두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멍 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지유는 두 사람 앞으로 나아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입을 떼었 다. "두 분은 무슨 가르침이 계시어 저를 부르셨습니까?" 음적양은 자리에 앉으면서 앞자리를 가리켰다. "낭자, 편히 앉아 얘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손지유는 약간 고개를 숙이며 수줍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의 자리에 미천한 제가 어찌 동석할 수 있겠어요?" 조중화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노부는 평소 너를 비녀의 신분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어서 자리에 앉거라." 손지유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자 조중화가 다시 말을 꺼냈다. "부총호법께선 오늘밤에 너와 함께 회서방 총단으로 돌아가 방주님께 사연을 말씀드리고 예의로써 너를 아내로 맞이할 계획이시란다." 손지유는 내심 구역질이 났으나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여전히 수줍어하는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저는 부총호법께서 제발 그렇게 해주시길 바랄 뿐이에요." 조중화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너는 부총호법을 모시고 얘기를 나누도록 해라. 노부는 볼일이 있어 먼저 나가 봐야겠다." 그는 음적양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한 다음 총총히 밖으로 물러갔다. 음적양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밖을 응시하다가 술잔에 술을 가 득 부어 손지유에게 권했다. "나는 오늘밤 총단으로 돌아갈 계획이니 나에게 다른 요구 조건이 있 거든 서슴지 말고 제시하시오. 내 힘이 미치는 한 시행토록 하겠소." 손지유는 서서히 고개를 들며 곱게 웃었다. "부총호법께서 미신약이 든 술로 저를……" 말끝을 흐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술잔을 들어 몇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사실 저는 미신약쯤은 일체 두려워하지 않아요. 부총호법께서 진정 그런 야비한 수법을 썼으면 부총호법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을 거 예요." 이 말을 들은 음적양의 안색이 약간 달라졌다. '나의 이 수법은 조중화도 모르는데 손지유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 확실히 보통은 아니로구나.' 내심 긴장하며 혀를 내두른 그는 얼른 안색을 고치며 억지웃음을 지 었다. "낭자, 낭자는 어찌하여 나를 그런 몰염치한 인간으로 생각하시오?" "……" 손지유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잔을 들어 남은 술을 홀짝홀짝 들이 켰다. 그러자 음적양은 내심 쾌재를 아니 부를 수 없어 은근히 좋아했다. '맹랑한 계집! 하지만 너도 이제 털수없이 조금만 있으면 온몸을 비 틀어대면서 스스로 내 품에 안길 것이다.' 이때 손지유가 넌지시 물어 봤다. "성심장 사람들이 다시 온다는 날짜가 아직 이틀이나 남았는데 어찌 그냥 떠나려 하세요?" "사실 나는 그 일 때문에 방주님의 지시를 받기 위해 급히 떠나려는 것이오." "방주님은 남자예요? 여자예요?" 음적양은 조금 머뭇거렸다. "그건…… 아직 얘기하기엔 때가 이르오." 손지유는 그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총호법께서 이곳을 마음대로 떠나실 수 있을는지 걱정이 되는군 요." 음적양의 얼굴빛이 크게 달라지며 긴장된 기색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말이오?" 손지유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총호법께선 현재 성심장 고수들의 화살받이가 되어 있어요. 더욱 이 지금 본 장 밖에도 그들이 몸을 감추고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으니, 이런 시기에 떠나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총단의 소재를 알려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거예요." 음적양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냉소를 날렸다. "흥! 그들이 나의 뒤를 따라온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니 걱정하 지 않아도 되오." 손지유는 두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일전에 찾아왔던 금검공자 도옥린의 무공을 부총호법에게 비한다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음적양은 무거운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침중하게 굳히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그자의 실력이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결국 나를 이기진 못할 것이 오." "그럼 무영신룡단혼도에 비한다면……?" 음적양은 움찔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낭자도 그자에 대해서 아시오?" 손지유는 입가에 생긋 미소를 매달았다. "무림인 중에서 무영신룡단혼도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전 비록 그 를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그의 쟁쟁한 위명만큼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어요. 제가 우연히 듣기론 부총호법께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던데, 그자의 도법이 정말 소문대로 그렇게 무섭나요?" 음적앙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자의 도법은 괴이무쌍하여 당대제일 이라 할 만하오. 하지만 내 음양수도 결코 그자의 도법에 뒤진다고는 생각지 않소."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는 법이니 부총호법은 남을 너무 얕잡아 보지 마세요." 음적양은 손지유를 응시하다가 밀을 꺼냈다. "낭자는 외부의 정세를 환히 짐작하고 있는 것 같구려." 손지유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정세가 그처럼 노골화되었는데 제가 모를 리 있겠어요?" "그러나 낭자는 이 조가장에서 교외로 나가는 비밀통로가 있다 는 것은 모를……" 그는 순간적으로 자기가 실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말끝 을 흐렸다. 손지유는 눈치 빠르게 그 기색을 알아차리고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권했다. 음적양은 술을 받아 마시면서 내심 의아해 했다. '이상하군. 지금 이 여인의 얼굴 표정이나 태도로 보아 전혀 춘약 의 효력이 발동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유가 무엇일까? 이상하 구나.' 바로 그때 경장 차림의 한 사나이가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음적양은 급히 고개를 돌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무슨 일이냐?" 사나이는 꾸벅 절을 했다. "장주님께서 부총호법을 잠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음적양은 조중화가 직접 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자신을 부른 것에 필 시 곡절이 있음을 짐작하고 곧 밖으로 나가 다른 대청으로 갔다. 대청 안에서 조중화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됫짐을 지고 왔다갔다 하다가 음적양이 오는 것을 보고 반색을 했다. "무슨 일이오, 조 장주?"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조중화는 그에게 다가오며 급히 말했다. "방금 장 밖으로 탐색을 나갔던 수하들이 하는 말이, 성심장에서 성 심오로를 비롯한 고수들을 대거 파견하여 이곳을 급습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음적양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음…… 성심오로라면 성심장에서도 최정예 고수들인데…… 아무래도 나는 오늘밤 안에 총단으로 달려가 방주님의 지시를 받아야겠소. 그 러니 조 장주는 지금 이 시각부터 귀장에 배치된 금제를 모조리 발동시켜 적들의 침습에 대비토록 하시오." 조중화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런데 부총호법은 이번에 가시면 언제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시게 되겠습니까?" 음적양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늦어도 삼 일 안에 돌아오겠소. 한데 귀장에 비밀통로가 있다는 것 을 다른 사람도 알고 있소?" "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릅리다" "그럼 됐소. 나는 손지유와 함께 비밀통로를 통해 귀장을 빠져 나가 야겠소." '음…… 부총호법이 유아를 무척 아끼는구나.' 내심 이렇게 중얼거린 조중화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말을 꺼냈 다. "유아는 지금쯤 제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니 부총호법이 직접 만나 잘 설득시키도록 하십시오." 음적양은 매우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손 낭자는 지금 대청 안에 있지 않소?" 그는 춘약이 든 술을 마신 손지유가 지금쯤 약의 효력이 발동하여 대 청 안에서 흔미한 상태에 빠져 있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조중화는 멋도 모르고 역시 크게 의야해 하는 기색을 보였다. "부총호법은 유아에게 대청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까?" 음적양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급히 대청으로 달려갔다. 과연 그곳에는 빈 술상만이 쓸쓸히 놓여 있을 뿐 손지유의 모습은 보 이지 않았다. 음적양은 안색이 변해 급히 오운각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오운각 앞에 이른 그는 주위를 한차례 훌어본 다음 가볍게 소 리내어 불렀다. "낭자!" 기다렸다는 듯 방안에서 손지유의 고운 음성이 들려 왔다. "부총호법이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음적양은 또렷또렷하게 들리는 손지유의 음성에 움찔하다가 심신을 가다듬고 웃음마저 띠며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지유는 침상 위에 앉은 채 화조를 수놓고 있다가 그가 들어 오는 것을 보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부총호법, 어서 오세요." 음적양은 내심 이상하게 여기면서 말을 꺼냈다. "낭자, 나는 지금 바로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 "그럼 언제 돌아오시나요?" "이삼 일 내로 돌아오겠지만 이번 길에 낭자도 동행해 주길 바라오." 손지유는 아연히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응시하다가 입을 떼었 다. "이곳을 빠져 나가다가 강적에게 발각된다면 저야 어찌 되든 상관이 없으나 부총호법께 누를 끼쳐 드리게 될 게 아니겠어요? 더욱이 본 장에 있는 백여 명의 사람들은 모두 부총호법 한 분만 믿고 있는데 부총호법께선 어찌 선뜻 떠나려 하세요?" 음적양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 "비밀통로로 빠져 나간다면 귀신도 알지 못할 것이며 이곳에는 삼엄 한 배치가 되어 있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손지유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본 장에 그런 비밀통로가 있는지의 여부는 저도 확실히 알지 못하지 만, 성심장의 고수들이 지금 안경 일대에 운집해 있고 그 중에는 기 인이나 이름없는 천재들도 분명히 끼여 있을 것이에요. 부총호 법은 그들을 절대 얕잡아 보시면 안 돼요." "……" 싱긋이 미소를 띤 채 아무런 대꾸가 없는 음적양의 두 눈에서는 무서 운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손지유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다시 물었다. "부총호법께선 꼭 저와 동행하셔야만 되겠어요?" 음적양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거렸다. "그렇소." 손지유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좋아요. 전 옷을 갈아입고 떠나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옆 방으로 들어가서 이내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그녀는 음적양과 함께 조중화의 서재로 향했다. 제36장 비밀통로 조중화는 무슨 글씨를 쓰고 있다가 음적양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 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총호법, 지긍 떠나실 겁니까?" "그렇소. 어서 안내하시오." 조중화는 그들 남녀를 데리고 본채의 뒤껼에 있는 어느 허름한 창고 로 들어갔다. 창고의 문을 열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썰렁한 공기가 밀어닥쳤다. 창고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예전에는 쌀창고로 쓰였던 듯 여기저기에 낡은 쌀가마니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다. 조중화는 그 중 한쪽 구석으로 가서 그곳에 놓여져 있는 쌀가마니를 뒤집었다. 쌀가마니 아래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조중화가 가운뎃손가 락을 구멍 안에 집어넣고 돌리자 나직한 음향과 함께 바닥에 입구가 나타났다. 크릉! 입구 아래에는 십여 개의 계단이 나 있었다. 조중화는 서슴없이 계단을 내려가 통로로 향했다. 통로에는 여러 개 의 기관장치가 있는 듯 그들은 다시 세 개의 비밀문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비밀통로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곳은 조가장의 후원에서 지하로 어림잡아 약 오 장 정도 내려간 부 근이었다. 거기서부터는 지형이 점차 낮아졌고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곳에 돌 로 만든 넓은 장진고가 나타났다. 장진고 안에는 많은 금은 보주들이 진열되어 있어 매우 휘황찬란했다. 조중화는 양손으로 신력을 일으켜 네모진 철가를 밀어젖 힌 다음 석벽에 박힌 등근 철환을 힘껏 비틀었다. 끄르르릉! 굉음과 함께 석벽이 이동하며 두 자 둘레의 출입문이 나타났다. 조중화는 조금 전에 글을 썼던 종이 쪽지를 음적양에게 건네 주면서 말했다. "여기서 교외까지의 거리는 약 칠 리쯤 되는데 도중에 세 군 데의 금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부총호법께서는 비밀통로를 쭉 따라 나가시다 금제를 만나게 되면 여기에 기재된 대로 움직여 주십시오. 그럼 무사히 통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조중화는 말을 마친 다음 작별을 고하고 총총히 되돌아갔다. 음적양은 화섭자에 불을 붙여 들고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손지유는 약간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가 음적양이 뒤따라오기를 재촉하자 조심스럽게 발을 옳겨 안으로 들 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드디어 세 군데의 금제를 완전히 통과하자 앞으로 나갈수록 지형이 높아졌다. 음적양은 갑자기 명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우린 빨리 밖으로 나갑시다." 손지유가 멈칫했다. "잠깐! 만일 적들이 이곳에 비밀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출구 에 잠복을 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에요?" "놈들이 알 리가 없소." 손지유는 곱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총호법께서는 상대를 너무 무시하시는군요. 전 안 가겠어요. 잘못 하다간 개죽음을 면치 못할 것 같아요." 음적 양은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낭자는 매우 조심성이 있는 여자요. 하지만 나도 신중을 기할 만큼 은 기하고 있으니 너무 우려하지 말고 뒤따르시오." 손지유는 할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통로를 걸어갔다. 다시 일 각쯤 지나자 그를은 비밀통로를 벗어나 밖으로 나올 수 있었 다. 출구는 한 그루 아름드리 고목이었는데 썩어 버린 고목 안에는 겹칠 수 있는 사닥다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음적양은 밖으로 나온 후 고목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며 중얼거렸다. "과연 신통하고 은밀스런 장치로군. 어느 누가 이 고목 속에 사다리 가 숨겨져 있는 줄 알겠는가?" 손지유가 야무지게 한마디 던졌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베어 버리면 모든 것이 드러날 게 아니 에요?" 음적양은 의미 깊은 운음을 지었다. "이처럼 다 ㅆ은 고목을 무엇에 쓰려고 베어 버리겠소? 땔감으로도 마땅치 알은 나무인데……" 돌연 멀리 떨어진 나무 위에서 비조 한 마리가 무엇에 놀란듯 끼악, 소리를 지르며 푸드득 날아갔다. 손지유의 안색이 일순간에 싹 달라졌다. "제가 이 나무 위에 올라가 주위의 동정을 살펴보겠어요." 음적양은 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낭자, 나의 신변에 대해 이처럼 염려해 주니 매우 감사하오.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숨기고 살펴보시오." 손지유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나루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척하면서 한 쪽 소매 속에서 용당운이 건네 준 조그만 새 한 마리를 공중으로 날려보내고 밑으로 내려왔다. "부총호법,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 같아요." 그녀의 미색에 반쯤 얼이 빠져 있는 음적양은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 았다. 따라서 손지유는 용당운의 첫 단계 지시를 무난히 이행하게 된 것이 다. 두 사람은 나무 뒤에서 나와 수림 속을 걷기 시작했다. 음적양은 얼마쯤 걷다가 나직이 물었다. "손 낭자, 여긴 어디쯤 되오?" "자세히는 모르지만 수목이 울창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산속인 가 봐요." "음…… 혹시 적들이 나타나지 않을지 모르겠소." "글쎄요. 만일 이런 곳에 적들이 대거 잠복해 있다면 우리는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 거예요." 음적양은 빛나는 눈초리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한번 뱀에게 놀라게 되면 두레박줄을 보고도 놀란다더니 낭자처럼 의심이 많다가는 단 한 발짝도 전진하기 힘들겠구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이익!" 귀를 찌르는 듯이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손지유가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만면에 두려운 빛을 띠었다. "부총호법, 안 되겠어요. 우리 그냥 되돌아가도록 해요." 그녀가 빌길을 돌리자 음적양은 급히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낭자, 이젠 이미 기호지세가 되어 총단으로 향하는 수밖 에 없소. 조가장은 앞으로 몰살당하고 말 것이오." "어쨌든 저는 이대로 돌아가겠으니 부총호법은 총단으로 가세요." 그때였다. 휘익! 밀림 속에서 일진의 바람이 불어오며 유령 같은 인영들이 속속들이 뛰쳐 나왔다. "앗!" 두사람이 움찔 놀라는 순간 상대편 다섯 사람이 쾌속한 속도로 쇄도 해 왔다. 그 중 한사람은 냉막한 얼굴에 청의를 걸친 중년인이었으며, 나머지 네 사람은 맨발에 마삼을 걸친, 모습이 악귀처럼 흉악스 럽게 생긴 괴인들이었다. 그들은 성심장의 고수들인 염라사귀 였다. 음적양은 자신의 행적이 발각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일신의 무공 을 믿는 그는 손지유로 하여금 자신의 보호를 받도록 뒤로 물러서라 는 눈짓을 한 다음 다섯 사람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염라사귀 중 한 사람이 청의중년인을 향해 음홍스럽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과연 귀하의 추측대로군요. 우리는 절대로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니 귀하는 서슴지 말고 요구 조건을 제시하시오." 청의중년인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너무 날뛰지 마시오. 회서방 부총호법은 무공이 뛰어나 당 신들이 저자를 사로잡는다는 것은 무리요." "……" "나는 달리 요구할 것도 없고…… 다만 한평생 여색을 즐기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만큼 저 낭자만 손에 넣으면 그걸로 만족하겠 소." 염라사귀는 히죽 의미있는 웃음을 지었다. "이 숲속에 회서방이나 조가장의 문하들이 잠복해 있다 해도 우리 성 심장 고수들이 있는 이상 별수없을 거요." 이어 손지유를 힐끔 쳐다본 뒤 다시 말을 계속했다. "과연 저 계집의 얼굴은 반반하오. 귀하의 뜻이 그렇다면 우린 그 문 제에 대해 일체 신경을쓰지 않겠으니 알아서 하시오." 이 말을 들은 음적양은 두눈에 노기를 띄우며 음양수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는 나서라. 가차없이 죽여 주겠다!" 말하는 동시에 몸을 빙글 돌리면서 쌍장을 휘둘러 염라사귀에게 덮쳐 갔다. 손지유가 내심 놀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고 청의중년인도 한쪽으로 비켜서서 관전할 자세를 취했다. 꽈앙! 염라사귀는 음적양의 손이 채 이르기도 전에 뜨겁고 차가운 두 가닥 기운이 쇄도해 옴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 다. 하나, 쾅! "크악!" "으으악!" 그들 중 두 사람은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놀랍게도 그들이 막 피하려는 찰나 등줄기에서 무형의 암경이 노도처 럼 밀어닥쳤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음양수 중 회선어공 수법으로, 보이지 않는 경력이 이미 상대방의 뒤편에 이르렀다가상대가 물러나는 순간을 이 용하여 격살시키는 가공할 무공인 것이다. 이 수법은 매우 기괴하여 웬만한 고수들은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음적양은 단 일 수에 염라사귀 중 두 명이 시체가 되어 쓰러진 것을 보고 득의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감히 본 공자에게 덤벼들었단 말이냐?" 그는 번개처럼 달려들며 다시 쌍장을 휘둘렀다. 쾅! 쾅! 북 치는 듯한 음향이 터지며 다른 두 명의 염라귀들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끄아아아……!" 그들의 비명이 긴 꼬리를 물며 울려 퍼질 때, 쐐액! 한 줄기 인영이 섬전처럼 날아오며 양손을 내밀어 음적양의 미간을 노려 왔다. "멈춰라! 어린 놈이 솜씨가 너무 악랄하구나!" 날아든 인영은 키가 훤칠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간일발의 차이로 염라사귀가 이미 몰살당한 것을 알아차리자 고함을 치며 양손을 계속 휘둘러 강맹한 역도를 발출했다. 콰콰쾅! 음적양은 노인의 두 주먹이 휘둘러지며 엄청난 권세가 밀어닥치자 흠 칫 놀라 좌측으로 피했다. 쾅!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폭음이 터지며 방금까지만 해도 음적양이 서 있던 자리에 반경 이 장이 넘는 거대한 웅덩이가 패었다. 음적양은 이 쾅경을 보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아직까지 이토록 패도무쌍한 권법이 있다는 말 을 들어 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는 안색이 일변해 경악성을 터뜨렸다. "혹시…… 당신은 패권 혁련후?" 노인은 음적양이 자신의 이름을 단번에 알아맞히자 껄껄 대소를 터뜨 렸다. "크하하…… 노부가 누구인지 안다면 노부의 손에 걸린 자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도 알겠지?" 패권 혁련후는 백년래 무림에서 권법으로는 가장 강한 고수였 다. 그의 패권은 이름 그대로 무지막지한 위력이 있어 피와 살로 이루어 진 인간이라면 견뎌 내기가 힘들었다. 패권 혁련후는 성심오로 중의 한 명이었다. 음적양은 내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었 다. '좋다. 이렇게 된 바에는……' 그는 이판사판이라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혁련후를 향해 날아가 며 음양수를 휘둘렀다. 쿠쿠쿠앙! 뜨겁고 찬 두 가닥 기류가 섬전처럼 혁련후를 향해 휘몰아쳐 갔다. 혁련후는 설마 상대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기습을 가할 줄은 몰랐는지라 미처 진력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엉겁결에 일권 을 마주쳐 갔다. 쾅! 음양수의 위력은 가히 놀라워 혁련후는 미처 그 여세를 완전히 감당 치 못하고 어깨 부근의 옷자락이 길게 찢어진 채 뒤로 한걸음 물러섰 다. 혁련후의 안색이 시뻘겋게 변했다. 비록 그가 다급한 중에 공력을 채 칠 성밖에 끌어올리지 못 했다고 하나, 설마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에게 격퇴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만약 음적양의 내공이 그와 엇비슷했다 면 혁련후는 음양수에 의해 한줌 퍼모래로 변해 버렸을 것이다. "이런 고얀……!" 분노가 머리 끝까지 충천해 오른 혁련후는 얼굴이 험상궂게 변하면서 우권을 빠르게 움직여 연거푸 일곱 번을 찔러 갔다. 콰아아아아아! 칠성조현의 권세가 바다를 뒤엎어 놓을 듯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휘몰아쳤다. '놀랍다! 정말 주먹 하나는 끝내 주는 늙은이구나. 시간을 오래 끌다 가 는 내 쪽이 불리하겠다.' 음적양은 바짝 긴장되어 단전에 진기를모으며 음양수를 맹렬히 휘둘 렀다. 한동안 두 사람은 치열한 격전을 전개했다. 내공이나 초식의 능숙도 면에서는 혁련후가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음 적양의 음양수가워낙 절묘하여 일시지간 결정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 했다. 그때였다. 삼장 밖에 서 있는 손지유의 앞으로 청의중년인이 접근해 오면서 음 침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낭자, 낭자는 이 같은 싸움에 끼여들 필요가 없으니 나를 따라오시 오." 손지유는 움찔하여 급히 피하려 했다. 하나 청의중년인의 몸놀림은 귀신과도 같아 꼼짝없이 혈도를 제압당 해 버렸다. "흐흐흐……" 청의중년인은 음흥한 귀소를 터뜨리며 손지유를 옆구리에 끼고 접전 장을 벗어나 숲속으로 달려갔다. 음적양은 손지유가 청의중년인에게 사로잡혀 가는 것을 알면서도 혁 련후의 권세가 너무 패도적인지라 몸을 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 었다. 손지유는 수치심과 노여움이 한꺼번에 치솟아올라 당장 혀를 깨물어 죽고 싶었다. 음적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것 이 낫다고 생각한 그녀는 악에 받쳐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청의중년인은 연방 징그러운 웃음을 입가에 흘려 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으히히…… 앙탈 부리지 마라. 잠시 후면 내가 너를 즐겁게 해줄 것 이니……" 바로 그때 낭랑한 음성이 귀청을 울리면서 들려 왔다. "멈추시오!" 동시에 커다란 나무 뒤에서 금검공자 도옥린이 불쑥 나타나더니 경멸 이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청의중년인은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며 호통쳤다. "나는 성심장 고수들의 승낙을 받고 이 낭자를 데려가는 것인데 그대 가 어찌 나서는 거요?" 도옥린은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이유가 어찌 됐든 음행은 만악의 근본인 만큼, 귀하의 추잡한 몰골을 대하니 분노에 앞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구려." "그대는 지금 회서방의 부총호법을 만나러 왔소, 아니면 나와……" 도옥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귀하가 그 낭자를 데리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가길 바랄 뿐이 오." 청의중년인은 냉소를 날렸다. "그 점에 대해선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만일 그대가 이 낭자에 게 손을 댄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이오." 바로 그때였다. 쐐액! 한줄기 냉풍이 청의중년인의 등뒤로 쏜살같이 엄습해 오면서 성심장 고수 한 명이 나타나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공자님께 너무 무례하게 구는군." "흥!" 청의중년인은 냉소를 치면서 재빨리 석 자 옆으로 비켜섰다. 동시에 몸을 돌of키며 왼발을 쳐들어 그자의 오른편 무릎을 힘껏 걷 어찼다. 그 각법과 겨냥은 너무나도 신속하여 절세고수라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딱! "크윽!" 무거운 신음 소리와 함께 공격했던 인물은 무릎뼈가 박살난 채 뒤로 벌렁 나자라져 버렸다. 청의중년인은 그를 힐끔 바라본 뒤 다시 손지유를 옆구리에 낀 채 바 람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옥린은 그를 가로막으려다 몸을 멈춘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음적양과 혁련후가 싸우고 있는 격전장 쪽으로 날아갔다. 청의중년인은 그녀를 안은 채 말없이 질풍처럼 달려갔다. 칠팔 리쫌 내달렸을 때 전면에 죽림 하나가 나타났다. 그 죽림은 범위가 사오 리쯤 되었고, 죽림 안에는 두 칸의 죽옥 이 있었다. 청의중년인은 죽옥 안으로 들어가 손지유를 내려놓았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제 저놈에게 '나의 순결을……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결하고 말겠다!' 그녀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원망과 저주의 빛이 스친 눈으로 청의중 년인을 응시했다. 청의중년인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돌연 담담하 게 말을 꺼냈다. "여기는 아무도 찾아을 사람이 없을 것이니 마음 푹 놓으시오." 손지유는 이 말을 듣고 만면에 놀랍고 기쁜 빛을 띠었다. 음성이 몹시 귀에 익었던 것이다. "아니, 용 은공이 아니세요?" 청의중년인, 그는 바로 용당운이었다. 용당운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고 나서 말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용당운이오." 손지유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원망스런 음성으 로 말했다. "은공께선 어찌 지금까지 절 속여 오셨어요? 야속하군요." "만일 노부가 미리 기밀을 누설시키면 음적양과 도옥린을 떼어 버리 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여 그런 것이니 이해하시오." 손지유는 절망에서 벗어나 기운을 차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단정 히 한 다음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곳은 정말 안전한가요?" 용당운은 엷은 웃음을 지었다. "대나무들이 몇 겹으로 둘러서 있고, 또 집 주위에 기문둔갑진이 배 치 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미궁이라 할 수도 있는 곳이오." 손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저는 음적양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씹지 못하는 것이 한이에요. 은공은 무림의 기인이시나 저로 하여금 그놈을 직접 죽여 한을 풀게 해주세요. 그러면 저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불전에 장명등 을 켜놓고 은공의 복을 빌겠어요." 용당운은 길게 한숨을 지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노부가 어찌 낭자의 심정을 모르겠소? 그러나 음적양을 죽일 수는 없소." 손지유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놈은 단신이므로 제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녔다 해도 성심장 고 수들의 합공을 막아 내진 못할 텐데요?" "그게 아니오. 지금 성심장에서도 회서방의 총단이 어느 곳인지를 모 르기 때문에 그에게 중상을 입혀 총단으로 도망치게 한 다음 총단의 소재를 알아 내려는 것이오." 그때 돌연 밖에서 은방을 구르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호호호…… 속 모르는 사람들은 당신을 음적으로 간주하겠어 요?" 동시에 두 줄기의 날렵한 인영이 놀란 기러기 같은 신법으로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들은 아리따운 미모의 소녀들이었다. 바로 운봉랑과 곽희연이었다. 손지유는 애정이 담뿍 서린 눈빛으로 용당운을 응시하는 두 소녀를 바라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용 은공은 이미 나이가 사십이 넘었는데도 저렇듯 미색이 뛰어난 젊 은 소녀들과 깊이 사귀고 있구나.' 이때 용당운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이 생각 외로 복잡하게 발전되어 두 분 낭자로 하여금 많은 수고 를 겪게 해서 미안하오." 곽희연은 횐 이를 드러내며 곱게 웃었다 "마음에 없는 말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러자 운봉랑이 요염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성심장에서는 이번에 성심오로 중의 두 사람과 팔대빈객 중 세 사람 이 나왔어요. 그리고 금검공자 도옥린과 이총관인 반미륵 고 우성도 왔는데, 오늘 일의 주재자는 반미륵 고우성이에요. 그런데 무 슨 일로 저희들을 부르셨나요?" "우리는 당분간 행동을 중지하고 여러 흉사들의 행동을 주시해 야 되겠소. 나는 잠시 다녀오겠으니 두 분 낭자는 손지유 낭자를 잘 모시고 있으시오." 용당운은 말을 마친 뒤 밖으로 나와 황삼을 걸치고 흉악스럽게 생긴 면구를 얼굴에 썼다. 그런 다음 천룡보도를 등에 매고 죽림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금제 밖에 이르렀을 때, 휘익!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몇 줄기의 인영들이 번개같이 날아왔다. 용당운은 태연히 몇 걸음 걸어나갔다. 그때 한 사람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멈추시오!" 말소리와 함께 다섯 사람이 나타나 번개같이 그를 포위했다. 그들은 바로 권운도 학귀와 네 명의 성심장 고수들이었다. 용당운은 냉랭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노부는 다섯 분과 전혀 알지 못하는 처지인 듯한데 어찌하여 앞길을 가로막으시오?" 학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가볍게 예를 취한 다음 말했다. "귀하는 이곳 죽림 안에 거주하고 계시오?" 용당운은 거만스럽게 쏘아붙였다. "이런 죽림 안에 무슨 집이 있겠으며, 노부의 처소가 다섯 분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그러자 학귀의 뒤에 있던 네 명의 사나이가 앞으로 나섰다. "이 죽림 밖에는 우리 성심장의 고수들이 확 깔려 있기 때문에 당신 이 우리의 비위에 거슬리면 한 발짝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될 것이오. 지금 수상쩍은 청의인 한 명이 죽림 안으로 들어가 여태껏 나오지 않았는데, 보아하니 당신은 그의 일당인 것 같소." "흥!" "순순히 대답하시오. 쇈히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곤욕을 자초하지 말 고……" 용당운은 연신 코웃음을 치면서 학귀를 주시했다. "어찌하여 사람을 이토록 업신여기는가 했더니 역시 성심장의 수하들 이었군, 노부는 평소 남을 침범하지도 않을 뿐더러 남이 침범하는 것 도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성미인데, 이번 기회에 노부는 성심장의 절 학을 한번 구경해 봐야겠소." 말을 마치고는 그 경장사나이를 향해 우장을 서서히 밀어 냈다. 경장사나이는 그가 손을 쓰기 무섭개 슬쩍 옆으로 비켜서며 오른손으 로 철각동삭을 들어 비스듬히 내리침과 동시에 왼손을 가 볍게 떨쳐 냈다. 쌕!쌕!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아홉 개의 연미추혼침이 발사되어 용당운의 전신 급소를 한꺼번에 엄습해 왔다. 다음 순간, 쨍쨍쨍! 경쾌한 음향이 잇달아 울려 퍼지며 예리하게 파고 들머가던 연미추혼 침은 무형의 경력에 의해 모조리 땅으로 추락하였다. 경장사나이는 이 광경을 보고 내심 놀라면서 다시 철각동삭에 전력을 가하여 벼락 같은 기세로 내리쳤다. 용당운은 냉랭하게 웃으며 등뒤에 매고 있던 보도를 뽑아 들었다. "과연 한 수가 있군. 어디 내 칼 맛도 좀 보시지!" 팟! 팟! 그는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도에서 무시무시한 도세가 일어나 며 경장사나이의 철각동삭과 상반신을 통째로 뒤덮어 갔다. 철각동삭을 휘두르던 경장사나이는 이 놀라운 광경에 얼굴이 새파랗 게 질렸다. 까깡! 철각동삭이 서너 토막으로 잘려지며 처절한 비명이 피분수를 동반하 고 장내에 울려 퍼졌다. "크아악!" 경장사나이는 가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이 놀라운 광경에 학귀를 비롯한 세 명의 사나이들은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단 일 도에 성심장에서도 일류인 무림고수가 도륵나고 만 것 이다. 학귀가 경악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용당운은 보도를 다시 집 어넣으며 그를 힐끔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그의 신법은 눈부시도록 빨라서 숨을 몇 번 내쉬기도 전에 아득히 멀 리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학귀는 그제서야 흠칫 몸을 떨었다. 세 명의 사나이들 중 하나가 분노에 찬 음성을 토해 냈다. "아니, 왜 저놈을 그냥 가도록 내버려두는 겁니까!" 학귀는 얼굴을 실룩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자의 도법을 보니 우리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네. 물론 평상시라면 사생결단을 내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가? 음적양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정 체 모를 고수까지 상대하게 된다면 자칫 일을 그르칠지도 모르네." "하지만……" "자네들의 심정은 알고도 남네. 오늘의 복수는 언제고 반드시 하고야 말겠네. 하지만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 더 늦기 전에 음적양이 있는 곳으로 가세." 세 사나이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학귀의 말대로 그의 뒤를 따 라 몸을 움직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엄청난 폭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쾅! 와르릉! 움찔 놀란 그들은 황급히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하나의 폐허와도 같았다. 반경 이십여 장 이내가 형체를 잃어버렸고, 부서진 바위와 돌 조각, 뿌리째 뽐혀진 나무들이 사방으로 널려 있어 그야말로 흉험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그 폐허의 한가운데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대격돌이 벌어지고 있었 다.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은 위맹한 인상의 노인과 회의청 년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얕은 언덕 위에 서너 명의 인물이 몸 을 숨긴 채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총관과 이공자가 이곳에 계셨구려." 격전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성심장의 이총관인 반미륵 고우성과 금검공자 도옥린이었다. 고우성은 학귀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시오." 학귀는 장내의 격전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혁련 노사의 무공으로도 아직까지 음적양을 쓰러뜨리지 못하다니, 과연 그놈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로군요." 장내에서 싸우고 있는 인물들은 다름 아닌 패권 혁련후와 음양공자 음적양이었다. 고우성의 안색은 의외로 심각했다. "쓰러뜨리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칫하면 혁련 노사가 낭패를 당할지토 모르겠소." 학귀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 정도입니까?" "음적양의 내공은 비록 그리 정순하지 못하지만 음양수의 위력 이 너무 막강해서 혁련 노사의 패권으로도 결정적인 우세를 잡지 못 하고 있소. 그들의 싸움이 벌써 이백여 초에 이르렀는데 혁련 노사는 나이가 많아 이대로 가다가는 진력이 점차로 떨어져 의외의 일 이 벌어질지도 모르오." 그의 말대로 처음에는 혁련후가 노련한 무공과 현란한 초식, 웅후한 내공으로 일방적인 우세를 잡고 있었으나 격전이 계속될수록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음적양보다 세 배나 나이가 많아 일단 피로를 느끼게 되자 쉽사리 떨어진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힘들기는 음적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응양수 특유의 음양이기가 뿜어 내는 위력으로 근근 이 버티느라 여러 차례 위기를 넘겨 전신에 유혈이 낭자했다. 두사람의 싸움이 삼백 초에 이르자그들의 의복은 갈가리 찢겨졌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하나 그들 중 누구도 뒤로 물러퍼려는 사람이 없었다. 고우성과 도옥린 등은 혁련후를 도와 주고 싶었오나 섣불리 나서다가 혁련후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 다. 게다가 그들의 목적은 음적양을 제거하기보다는 그를 추궁해 회서방 의 총단을 알아 내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합공할 수도 없었다. 그때 잠자기 장내의 격전이 일변했다. 음적양이 체내에 남아 있던 진원진력까지 끌어올려 음양수 의 절초들을 거푸 전개해 혁련후를 세차게 공격했던 것이다. 꾸르릉! 뇌성이 울리는 듯한 음향과 함께 붉고 횐 두 가닥의 장영이 폭풍 노 도와 같은 기세로 혁련후를 향해 몰아쳐 갔다. 혁련후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정면으로 음양수의 장공에 맞서 갔다. 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주위 사방이 온통 휘날리는 먼지 와 돌 조각으로 자욱했다. "욱!" "크윽!" 음적양과 혁련후는 각기 커다란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며 뒤로 세 걸 음 물러났다. 하나 혁련후의 신형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음적양이 휘청거리던 몸 을 곧추세우며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의 쌍수는 붉고 희게 물든 채 가공할 경기를 담고 있었다. 혁련후는 조금 전의 격돌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데다 설마 음적양이 부상을 무릅쓰고 이토록 저돌적인 공격을 해을 줄은 몰랐는지라 크게 당황하여 두 주먹을 급히 앞으로 내뻗었다. 쾌액! 두 가닥 뇌전 같은 권풍이 음적양을 향해 뻗어 왔다. 하나그 권풍이 채 반도 뻗기 전에 음적양의 음양수는 혁련후의 가슴 팍을 정통으로 가격하고 말았다. 쾅! "크악!" 음양수에 가슴을 강타당한 혁련후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오 장여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혁련 노사!" 지켜보고 있던 성심장의 인물들이 깜짝 놀라 혁련후에게 다가왔을 때 혁련후는 이미 오공으로 검붉은 피를 흘리며 즉사한 후였다. 음적양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간신히 혁련후를 격살하기는 했으 나 목구멍에서 핏물이 넘어오고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하나 그는 여기서 머뭇거렸다가는 꼼짝없이 성심장의 인물들에게 사 로잡히고 만다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혁련후가 쓰러진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나 그의 몸이 채 일 장도 움직이기 전, "목은 두고 가라!" 싸늘한 호통과 함께 그의 코앞으로 눈부신 금검이 섬광처럼 폭사해 왔다. "도옥린! 네놈이구나……!" 음적양은 대경하여. 급히 음양수의 절초인 획분음양을 구 사해 냈다. 콰쾅! 홍백의 기류가 두 가닥으로 매섭게 뻗쳐 나가며 긍광을 가로막 았다. 창! 콰쾅! 금속성이 일어나고 불꽃이 튀기는사이 두사람은 각기 일곱 보씩 뒤로 물러났다. 상대방은 바로 긍검공자 도옥린이었다. 그는 금빛 찬란한 금의가 십 여 군데나 찢겨지고 기혈이 역류하여 입가에 가는 선혈이 내비치고 있었다. 음적양 또한 금광검이 왼쪽 어깨에 스쳐 선혈이 배어나왔으며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하나 그때 그는 문득 도옥린의 몸이 이상하게 경직되어 있는 것을 깨 달았다. 한 가지 생각이 퍼득 머리에 떠오른 그는 이를 악물며 왼손을 번개처 럼 놀려 도옥린의 완맥을 움켜쥐었다. 휙! 어찌 된 일인지 도옥린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맥없이 음적양의 수중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음적양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급히 그의 혈도를 찍었다. 순간, "휘익!" 사방에서 맑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며 고우성과 학귀를 비롯한 성심장 의 정예고수들이 나타났다. 음적양은 그들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취하려는 것을 보고 눈썹을 꿈틀 거리며 사납게 소리쳤다. "누구든지 먼저 손을 쓴다면 이자의 숨통을 끊어 놓고 말겠소!" 고우성은 도옥린이 음적양의 수중에 제압당해 있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해 급히 손을 흔들었다. 막 음적양을 향해 덮치려던 성심장의 고수들은 급히 몸을 멈추었다. 음적양은 거듭된 격전으로 온몸이 찢어지는 듯 아파 왔으나 이를 악 물고 참으며 태연한 표정으로 냉소를 쳤다. "당신들이 강호의 규칙을 무시하고 차륜전을 펼쳤지만 가만 히 서서 죽음을 기다릴 내가 아니오. 나는 도옥린을 이용해 포위망을 벗어난 다음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곱게 돌려보내겠으니 당신들도 더 이상 날뛰지 말고 기다리시오." 고우성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음적양의 손에 제압당해 있는 도옥 린을 응시했다. 원래 도옥린은 성심장주의 세 제자 중 하나로 장래가 유망한 기재 였다. 그래서 두 명의 장주는 매월 한차례씩 은밀한 곳으로 불러다가 자신 들의 절기를 전수해 주었기 때문에 그 신임이 여간 두텁지가 않았다. 고우성은 음적양을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는 그대가 실언하지 않기를 바라겠네." 음적양은 엷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에게 실언을 해본 적이 없으니 그 점에 대해선 염려치 말고 내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 나가게 해주시초. 안경 성을 벗어나는 즉시 이자를 풀어 주겠소." 그는 도옥린을 옆구리에 끼고 천천히 걸어갔다. 고우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뒤로 물러났다. "저자를 막지 마라." 주위에 매복해 있던 성심장의 고수들은 떠나가는 음적양의 앞을 가로 막지 않고 비켜 주었다. 음적양은 포위망을 벗어나자 고우성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섣불리 내 뒤를 쫓거나 미행할 생각은 하지 할기 바라오. 그렇지 않 으면 불행한 일이 벌어질 거요." 그는 말을 마치고는 재빨리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고우성 등은 멍하니 그가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학귀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몸을 날리려 했다. "이총관, 어서 쫓아갑시다." 고우성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되네. 그랬다가 음적양이 도 공자를 상하게라도 하는 날에는 장 주님의 진노를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는가?" 학귀는 움쪘하여 몸을 멈추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저놈이 떠나가는 걸 멍하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고우성은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원래의 계획은 저자에게 중상을 입힌 후 슬쩍 놓아 주려는 것이었는 데 뜻밖에도 도 공자가 저자에게 사로잡히는 바람에 계획이 어긋나게 되었네. 나는 어째서 도 공자가 그렇게 맥없이 제압당했는지를 모르 겠네!" 학귀도 의혹에 찬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옥린의 무공은 음적양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아 이미 기력이 탈진한 음적양에게 절대로 제압당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서로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선 안경성 밖에 수하들을 풀어 음적양의 행적을 뒤쫓고, 그가 도 공자를 풀어 주는 기미가 있으면 다시 추적하는 수밖에 없겠네." 고우성의 말에 학귀는 수긍하는 빛을 띠었다. 그들은 수하들에게 몇 마디의 지시를 한 후 음적양이 사라진 방향으 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모두 떠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근처의 커다란 나무 위에서 하 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용당운이었다. 도옥린이 음적양의 손에 제압당한 것도 알고 보면 모두 그의 솜씨였 다. 그는 조금 전 도옥린과 음적양이 서로 격돌할 때 몰래 격공지 를 날려 도옥린의 심맥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도 옥린은 미처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멍한 상태에서 어이없이 음적양 에게 제압당하고 만 것이다. 하나 도옥린 자신도 그것이 음양수에 의한 충격인 것으로만 알 뿐 설 마 자신이 용당운의 암습을 받은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 다. 용당운은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도 몸 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해가 지고 대지에 어둠의 그림자가 깔려 올 무렵. 안경성에서 멀지 않은 산촌 근처에 하나의 회의인영이 나타났 다. 회의인영은 바로 음적양이었다. 음적양은 여전히 도옥린을 옆구리에 낀 채 산마루에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저녁 연기를 바라보았다. "벌써 날이 저물어 가는군," 그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산촌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 다. 음적양의 옆구리에 끼인 도옥린은 비록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으나 정신만은 말짱했다. 그는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자신의 신세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 었다. 그러나 이미 혈도를 제압당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 인지라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음적양은 산촌을 지나 제법 후미진 산언덕을 향했다. 음적양이 점점 으슥한 산중으로 들어가자 도옥린은 불현 듯 불 안감이 엄습해 왔다. '혹시 이 녀석이……?' 아니나다를까! 주위에 수풀이 을창한 어느 산곡에 당도하자 음적양은 괴소를 흘리며 도옥린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쿵! '으음……!' 도옥린은 땅바닥에 세차게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눈앞에 별이 보일 정 도로 충격이 컸으나 그보다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음적양은 입가에 스산한 웃음을 띤 채 도옥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흐흐…… 이제 안경성을 벗어났으니 약속을 지켜야겠지?" 그는 느릿느릿 우수를 쳐들었다. 도옥린은 음적양의 눈에서 살광이 뿜어지고 쳐들린 손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사색이 되어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하나 아혈 마저 제압당해 있는지라 고함을 지를 수조차 없었다. 음적양은 도옥린의 두눈에 경악과 분노, 절망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득의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 네놈을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 다만 내 삼양신지가 네놈의 기해혈을 파괴한다면 내공이 없어지고 칠 일 동안 뼈가 녹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애초에 비정한 무림의 세계에서 순진하게도 약속을 지킬 것을 믿었던 너희들이 어리석은 것이니 나를 탓하지는 마라……" 그는 혈수로 변한 오른손으로 사정없이 도옥린의 단전을 후려쳐 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멈춰라!" 어디선가 낭랑한 호통 소리가 들려 오며 한줄기 경풍이 음적양의 뒤 통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쐐액! 음적양은 질겁을 하고 놀라 급히 몸을 돌리면서 도옥린을 내리치려던 우수를 휘둘러 갔다. 광! 삼양신지와 경력이 격돌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큭!" 그 순간 음적양은 손가락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짤막한 신음을 토 해냈다. 어느새 장내에는 청의를 입은 수려한 용모의 소년이 우뚝 서 있었다. 청의소년은 별빛처럼 찬란히 반짝이는 눈으로 음적양을 무섭게 노려 보고 있었다. "감히 암수를 써서 반항할 힘도 없는 사람을 해치려 하다니… … 너 같은 악적은 엄히 다스려 국법의 무서움을 뼈저리 게 느끼도록 해야겠다!" 음적양은 청의소년의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무형의 기도에 압도당해 뒤로 주춤 물러났다. "너…… 너는 누구냐?" 청의소년은 냉 랭한 코웃음을 쳤다. "흥! 그건 알 것 없다!" 청의소년은 돌연 번개같이 우수를 휘두르며 음적양에게 덮쳐 들었다. 쓰아악! 청의소년은 별로 몸을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기이하게도 음적양 의 전신이 그의 공세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음적양은 깝짝 놀라 상대가 자신의 하수가 아님을 알고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황급히 음양수를 일으켜 한 대 갈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날려 도망쳐 갔다. 꽝! 청의소년이 급히 몸을 움직려 음양수의 장공을 피하는 동안 음적양의 몸은 벌써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청의소년은 음적양의 약삭빠른 도주에 어이가 없는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도옥린에게 다 가왔다. 이어 도옥린의 혈도를 풀어 주자 도옥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 격에 찬 음성으로 외쳤다. "제 형! 정말 고맙소." 청의소년은 그가 연자기에서 우연히 만났던 대내의 시위영반 제백석 이었던 것이다. 제백석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불편한 곳은 없소?" 도옥린은 고개를 저으며 정중하게 포권했다. "다행히 기혈이 약간 들떴을 뿐 부상은 입지 않았소. 한데 제 형께서 어찌 알고 때맞춰 나타나셨소?" "나는 일전에 조가장에서 도 형을 뵌 다음부터 조가장을 은밀히 주목 하고 있었소. 한데 오늘 우연히 조가장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 에서 무림인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순무부 무사의 소식을 듣고 혹시나 도형이 오지 않았나 하고 달려와 봤던 거요." 제백석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 조금 전의 회의소적이 암수를 써 도 형을 제압하는 것을 보았소. 하지만 나는 대내의 인물인지라 가급적이면 무림인들 간의 싸움에 끼여들고 싶지 않아 그가 안전한 곳으로 가서 약속대로 도 형을 풀어 주면 나타나지 않으려 했소. 한데 그가 약속을 헌신짝 처럼 저버리고 도 형을 해치려 하기에 부득이 손을 쓰게 된 거였소." 도옥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구려, 이거 번번이 제 형에게 폐를 끼치게 되어 면목이 없소." 제백석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도 형과 나는 의기가 통하는 점이 있으니 너무 괘념치 마시 오. 그보다 그 소악적이 누구이기에 그토록 악독한 심보를 가지고 있 는 거요?" 도옥린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그놈은 음양공자 음적양이라는 놈으로서 무림의 흥악한 문파 회서방 에서 부총호법의 직위를 맣고 있소." "일방의 부총호법이란 자가 자기 입으로 내뱉은 말을 스스로 짓밟아 버리다니…… 내 회서방이란 문파가 요즘 들어 악행을 일삼는 다는 소문을 듣고 반신반의했더니 이것만 보아도 그들의 악행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겠구려." "회서방에는 온갖 흉악무도한 무리들이 모여 있어 그대로 두면 무림 뿐만 아니라 대내에도 크나큰 화근이 될 것이오." 제백석은 도옥린이 그런 말을 하는 의도를 짐작하고 내심 웃으면서 담담히 물었다. "그런데 일전에 찾고 있다던 사매는 찾으셨소?" 도옥린의 표정이 돌연 무거워졌다. "아직 찾지 못했소. 나는 내 사매가 음적양에게 사로잡힌 줄 알았는 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소." "그렇다면 아마 어딘가에 잘 있을 거요." 말을 하면서 그들은 산을 내려왔다. 그때 멀지 않은 관제묘에 등불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제백 석이 도옥린을 바라보았다. "배도 출출한데 저곳에서 잠시 쉬어 가지 않겠소?" 도옥린은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불이 반짝이는 관제묘로 달려갔다. 제37장 태허관 관제묘는 산에서 삼사 리쯤 떨어진 한적한 오솔길 옆에 위치해 있었다. 한데 그곳으로 달려가던 제백석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한데……" 도옥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제 형?" 제백석은 관제묘 입구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바위들을 가리켰다. "저 바위들은 아무래도 무슨 기문진식에 의해 놓여져 있는 것 같소." 도옥린은 흠칫 놀라 안력을 돋우어 유심히 바위들을 보았다. 과연 관제묘 입구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듯한 십여 개의 바윗덩 어리들은 보면 볼수록 기이한 현기를 느끼게 하는 방위에 위치 해 있었다. "아니……? 저것은 십방열석진 같은데……" 제백석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십방열석진? 이제 보니 도 형은 진식에 대한 조예가 상당하구려?" 도옥린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오. 저 진식은 내 사문의 비전 진식이오. 그 런데 저 진식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니……" "그게 정말이오?" 제백석도 깜짝 놀라 바위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도옥린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번개같이 몸을 날려 바윗덩 어리 사이로 뛰어들었다. "제 형, 내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오시오." 제백석은 망설이지 않고 도옥린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도옥린은 자오보법을 밟으면서 암석군을 통과했다. 그러자 관제묘 입구가 나타나며 안에서 하나의 유등이 반짝이 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도옥린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관제묘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다. 바로 그때였다. "누구예요?" 깜짝 놀라는 듯한 여인의 뾰족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 음성을 듣자 도옥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냉 사매…… 정말 사매인가?" 그는 소리를 지르며 관제묘 안으로 날아들었다. 관제묘 안에서 흠칫하는 소성이 들리더니 녹의를 입은 훤칠한 미녀가 뛰어나왔다. 녹의미녀는 도옥린을 보자 환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이사형! 사형이셨군요……!" 관제묘 안에서 달려나온 여인은 놀랍게도 실종되었던 냉상아였던 것 이다. 도옥린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는 할말을 잃어 멍하니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냉상아 또한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그녀의 안색은 어딘지 모르게 파리하기 그지없어 병약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도옥린은 그 기색을 알아차리고 급히 물었다. "사매, 부상당했느냐?" 냉상아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음적양에게 암습을 당해 심한 내상을 입었어요. 그래서 미처 사형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이곳에 숨어 내상을 치료하고 있었어요." 도옥린의 눈이 무섭게 번뜩거렸다. "음적양……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 사매를 다치게 하다니 …… 그래, 상처는 어떤가?" "음양수의 공력을 정통으로 맞지는 않았으나 심맥을 스쳐 한동안 제 대로 거동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그가 계속 저를 뒤쫓고 있어 행 적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이곳에 숨어 상처가 낫기를 기다렸지요." "음…… 난 그것도 모르고 사매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게 아닌가하여 몹시 걱정했었네. 이사부께서도 염려가 많으셨지." 냉상아는 속으로 냉소를 흘렸으나 겉으로는 짐짓 감사하는 표정을 지 었다. "사형과 사부님들께 폐를 끼치게 되어 면목이 없군요." 도옥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등을 다독거렸다. "사매가 무사하니 다행이다." 그때 하나의 인영이 석진을 빠져 나와 관제묘로 들어왔다. 도옥린이 보니 그 인영은 냉상아의 비녀인 매련이었다. 매련은 먹을 것을 장만해 온 듯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다가 도 옥린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공자님!" 그녀는 반갑게 외치며 급히 도옥린의 앞으로 다가와 절을 올렸다. 냉상아가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메었다. "매련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곳에서 오도 가도 못 하고 꼼짝없이 굶어 죽었을 거예요. 다행히 제가 내상을 치료하는 동안 매련이 틈틈이밖 에 나가 먹을 것을 가져 와서 허기를 면했지요." 도옥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매련을 잡아 일으켰다. "네 고생이 많았구나." 매련은 얼굴을 붉힌 채 머리를 조아렸다. "소녀가 뭐 한 게 있겠어요? 소녀보다는 아가씨께서 너무 상처가 심 하셔서……" 도옥린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다른 두 소녀는……?" 냉상아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 아이들은 음적양의 수하들에게 살해당했어요." 도옥린은 낮빛이 굳어지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비통해 하지 마라, 사매. 이 복수는 몇 배, 몇십 배로 받아 내 고야 말 것이다." 냉상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옥린은 고개를 돌리다가 제백석이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것을 발 견하고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내 정신 좀 보게. 제 형! 인사하시오. 내 사매인 냉상아요." 제백석은 빙긋 웃으며 다가와 냉상아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두 분께서 다시 만나시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제백석이라 합니다." 냉상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소녀는 냉상아입니다." 도옥린은 흐뭇한 웃음을 머금다가 제백석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이렇게 사매를 만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제 형의 덕분이오. 그러니 내가 오늘은 제 형에게 한턱 단단히 사겠소." 제백석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보다는 두 분께서 오랜만에 만나셨으니 서로 회포를 푸시 는 게 좋겠소. 나는 순무부에 또 일이 있어 가봐야 하니 도 형의 성 의는 다음에 받겠소이다." 도옥린은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 이거 정말 서운하군 그럼 내가 내일 중으로 순무부로 제 형을 찾아가겠소이다." "그러실 필요는 없소. 나는 순무사 어른을 모시고 민정 시찰을 나가 야 하오. 그러니 도 형은 번거롭게 나를 찾아오지 말고 다음에 인연 이 닿을때까지 기다리시오. 그럼…… 그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도옥린이 말릴 사이도 없이 관제묘 밖으로 몸을 날렸다. "제 형……!" 도옥린이 깜짝 놀라 그를 불렀을 때 그의 신형은 이미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야말로 섬전이 무색할 절세의 신법이었다. 도옥린은 아쉬운 심정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아! 제 형은 정말 꼬리를 감춘 신룡처럼 신비한 인물이구나. 그러니 어린 나이에 대내에 발탁되었겠지." 냉상아는 짐짓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사형, 그분은 누구세요?" 도옥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내의 시위영반이다. 일신에 절학을 지니고 있는데 아쉽게도 무림엔 뜻이 없는 것 같구나. 그만 들어가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 에 하마." 냉상아는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옥 린을 따라 관제묘로 들어갔다. 한편 관제묘를 벗어난 제백석은 질풍처럼 앞으로 치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돌연 멀지 않은 곳에서 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휘익!" 제백석은 망설이지 않고 휘파람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은 길가에서 멀지 않은 어느 공동묘지 앞이었다. 제백석이 공동묘지로 날아가니 큰 무덤 뒤에서 인영 하나가 불쑥 나 타났다. "어서 오게." 그는 바로 복마철장 부여송이었다. "음적양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게 참 이상하네. 그놈은 중년도사로변장하고 안경성을 향해 달려갔네" 제백석은 흠칫 놀랐다. "뭐라고요? 그놈이 어찌 회서방 총단으로가지 않고 안경성으로 되돌 아갔을까요?" 부여송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서 지금 방 늙은이가 그놈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네만…… 어찌 할 텐가?" 제백석은 잠시 낯빛을 굳힌 채 생각하다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계속 음적양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되 면 회서방을 섬멸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알겠네. 그럼 어서 안경성으로 가보세" * * * 안경성…… 창망한 야색에 물든 거리에는 휘황찬란한 불빛이 밝혀졌고, 마 차와 사람들이 제법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제백석과 부여송은 어느 호젓한 골목에 접어들었다. 부여송이 사방을 훌어본 뒤 손뼉을 가볍게 치자 높은 담장 위에서 두 줄기 인영이 불쑥불쑥 튀어올랐다. 그들은 바로 여풍운과 악궁이었 다. 제백석은 그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후 급히 물었다. "음적양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여풍운이 막다른 골목을 가리켰다. "그놈은 바로 저기 있는 태허관 안에 있네." "태허관주는 누굽니까?" "장청도인이란 자인데, 이 근처에서는 누구도 그자의 내력 을 확실히 모른다네." 제백석은 악궁을 돌아보았다. "악선배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태허관이 혹시 회서방의 총단이 아 닐까요?" 악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걸세. 이건 노부의 생각이네만, 태허관주가 회서방 내의 주요 인물이고 음적양은 아무래도 혼자 힘으로는 이곳을 빠져 나가기가 힘들다고 생각해서 도움을 청하러 간 것 같네." "음적양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면 회서방주를 제외하고는 총호법과 일호 온서뿐일 텐데, 혹시 그들 중 하나가 아닐까요?" 악궁은 수긍하는 빛을 띠었다. "그럴 확률이 높네." 여풍운이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어서 태허관으로 쳐들어갑시다." 제백석은 손을 내저었다. "안 됩니다. 조가장에도 비밀통로가 있는데 태허관이라고 없겠습니 까? 괜히 섣불리 태허관으로 들어가다가는 타초경사의 우 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때 돌연 임표가 급히 달려왔다. "성심장의 고수들이 조중화가 회서방 총단의 소재를 알고 있 으리라 생각하고 조가장을 습격하려고 하네." 그 소식을 들은 제백석은 한 가지 계획이 떠올라 급히 악궁에게 무어 라고 소곤거렸다. 악궁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의 빛을 표하자 제백석은 급히 용당운으 로 변장을 한 다음 조가장으로 달려갔다. 그가 조가장에 거의 당도했을 때였다. 어두운 골목에서 갈의노인 하나가 나타나 음침하게 외쳤 다. "용 선생,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용당운은 급히 몸을 멈추었다. "귀하는 뉘시오? 또 무슨 일로 노부를 부르시었소?" 잘의노인은 정중하게 포권했다. "나는 정문통이오. 용 선생은 지금 조중화를 찾아가는 길이 시오?" "그렇소." "용 선생, 무림창생들의 운명이 걸려 있는 일이니 모종의 약물로 조중화의 손자를 혼수 상태에 빠뜨린 다음 조중화를 위 협하여 회서방 총단의 소재를 알아 내시오. 만약 그렇게만 해주신다 면 내가 황금으로 보답해 드리겠소." 용당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말을 꺼냈다. "명색이 의도를 펴는 노부가 어찌 약물로써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겠 소? 못할 짓이오. 하나 무림의 운명이 좌우되는 일이라면 다른 방법 을 강구하여 실토를 받도록 하겠소." 정문통의 표정은 기분 나쁠 정도로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품안에서 녹색 환약 한 알을 꺼내 들었다. "용 선생이 만일 나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독 수를 사용하겠소." 말이 끝나는 순간, 휙! 용당운은 전광석화처럼 오른손을 내뻗어 정문통의 완맥을 사납게 움 켜쥐어 버렸다. 불의의 기습을 받고 꼼짝없이 견제당한 정문통의 안색이 확 달라지며 노성을 질렀다. "으…… 이제 보니 네놈도 회서방의 일당이었구나!"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요?" 용당운이 호통을 치면서 완맥을 잡은 손에 힘을 가하여 힘껏 비틀었 다. 으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음향과 함께, "크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일어나며 정문통의 오른팥이 그대로 부러져 버렸 고 고통을 이기지 못한 그는 사지를 꿈틀거리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일순, "섯거라!" 어둠 속에서 몇 차례의 고함 소리가 들리며 네 줄기 인영이 신속하게 날아들었다. 용당운은 부러진 정문통의 오른팔을 사납게 내던지며 버럭 고함을 질 렀다. "나는 무림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으니 당신들은 조중화를 찾아가 서 시시비비를 가리시오. 만약 당신들이 좋은 말로 설득시켜도 조중 화가 듣지 않을 경우엔 내가 가만두지 않겠소." 네 명의 인영 중 얼굴이 숯검정처럼 검고 까칠까칠한 턱수염이 돋아 난 노인이 두 눈에 살기를 번뜩였다. "정문통이 무슨 죄가 있어서 팔목을 분질러 버렸소? 용 선생, 각오하 시오. 피의 빛은 오로지 피로써 청산해야 하는 법이오." "닥치시오! 네 분이 꼭 정문통의 원수를 갚겠다면 장소와 시일을 달 리 정하시오. 반드시 응해 주겠소." "좋소. 내일 밤 삼경에 장강 하류 십리 지점에 있는 백사장에 서 만나기로 합시다. 그리고 조중화에게 우리 성심장의 친구들이 한 번 만나자는 말을 전해 주시오." "……" 용당운은 아무런 대꾸 없이 몸을 돌려 조가장으로 걸어갔다. 조가장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용당운이 대문에 달린 철환을 흔들어대자 담장 위로 한 사람이 쑥 올라섰다. "용 선생이오?" 용당운은 고개를 쳐들어 자신의 얼굴을 보였다. "그렇소!" 끼끼끽…… 육중한 대문이 열리면서 늙은 하인 한 사람이 나와 미소 띤 얼굴로 용당운을 맞이했다. "주인님께선 내청에서 손님과 앉아 계시니 용 선생은 잠시 대 청으로 가시어 기다리십시오. 소인이 주인님께 통고를 드리겠습니 다." 용당운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곧장 대청으로 향했다. 대청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조가장 안에는 보이지 알는 살기가 충만되어 말없는 공포가 흐르고 있었다. 용당운은 뒷짐을 지고 대청 안을 거닐면서 벽에 걸린 산수도 와 화조도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얼마 후, 조중화가 기침을 하면서 들어와 정중히 포권의 예를 취했 다. "노부가 밖에 나가 영접하지 못했음을 널리 이해하시오. 손자 녀석은 점차 완쾌되어 가고 있는데, 이건 오로지 용 선생의 덕이오." 용당운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영손은 체력이 워낙 많이 허약해졌으니 보약을 너무 과도하게 써서 는 안 됩니다 제가 위장부터 단계적으로 보양시킬 약방문을 준비해 왔으니 그대로 약을 써주십시오." 그는 소매 속에서 약방문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는 돌연 정색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관위에 있으면서 듣건대 모든 일이 조 장주에게 불리하 게 발전되고 있더군요. 회서방 부총호법도 결국 빠져 나가지 못했다 더군요." 조중화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아니, 그럼 적들에게 사로잡혔단 말이오?" "손지유 낭자는 딴사람이 이미 구출해 갔고 부총호법은 포위망에서 간신히 빠져 나가 태허관으로 도망쳤다 하더군요." 태허관이란 말에 조중화는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답니까?" 용당운은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퍼며 입을 열었다. "성심장에서는 조금 전에 그 사실을 알고 태허관을 포위하고 그 안으 로 잠입해 들어가려 한다더군요. 조 장주에선 여태까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던가요?" 조중화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노부가 비록 한 가지 고충이 있어 회서방에 의탁은 하고 있 지만 악행은 일체 범한 적이 없소. 그리고 이번에 부총호법이 본 장 에 들러 총단으로 가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닌데 성심장에서 이 토록 이목을 집중하고 있으니 그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소." "지금 성심장뿐만 아니라 전무림이 조 장주가 회서방의 총단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소. 그들이 만약 태허관에서조차 음적양을 놓친다면 필시 귀장을 대거 습격할 것이니 큰 화난을 면치 못할 것입 니다." 조중화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총단의 소재를 아는 사람은 부총호법 이상인데 노부와 신분으로 어 찌 알겠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노부가 백번 변명해 보았댔자 아무 소용없을 것이오. 오늘 새벽에 회서방의 온서급 인물 세 명이 본 장 에 파견되었으니 노부는 죽을 때 죽더라도 가만히 있을 순 없게 되었 소." 그는 대청을 한차례 훑어본 다음 입을 열었다. "노부는 내청에 잠시 다녀올 테니 편히 앉아 계시오." 그는 표연히 대청을 나서서 내청으로 향했다. * * * 초경 무렵. "와아아……!" 난데없는 함성 소리가 귀가 따갑도록 들려 오며 성심장의 고수 수십 명이 대문을 박차고 조가장 내로 돌입해들었다. 마침내 성심장에서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그들 중에는 반미륵 고우 성과 팔대빈객 중의 권운도 학귀, 탁천신수 진조영의 모습도 보였다. 특히, 모습이 음침하고 살이라곤 한 점도 없을 만큼 뼈다귀만 앙상하 게 비쩍 마르고 광대뼈가 꼴사납게 튀어나온 황발노인의 모습이 두드러져 보였다. 황발노인은 노란 머리가 어깨까지 길게 드리워졌고 몸에는 금선 을 두른 장삼을 걸쳤다. 오른손에는 긴 죽장을 들었고, 왼손에는 한 개의 목령을 쥐고 있었는데 발끝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신법이 뛰어났다. 그들이 백석이 깔린 정원 통로에 이르렀을 때였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내청 안에서 기왓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러 친구들이 찾아왔는데 노부가 미처 영접하지 못해 매우 죄송스 럽게 되었소." 이어 경장 차림에 풍운신검을 맨 조중화가 회서방에서 파견된 세 명 의 온서급 고수들과 나란히 모습을 나타내었다. 쌍방은 피차 살기를 띠고 있어 장내의 공기는 삽시간에 동결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은 극 도로 긴장되어 갔다. 현정세로 보아 한바탕의 살겁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승부는 어느쪽으로 돌아가려는지…… 이 무렵, 용당운은 흑의에 복면을 하고서 대청을 살며시 빠져 나와 한 그루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 지금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환히 내 려다보고 있었다. 고우성이 불타는 시선으로 조중화를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조 장주, 귀방의 부총호법은 태허관으로 도망쳤소. 그래서 본 장에 서 태허관을 급습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태허관은 텅팅 비어 있고 부 총호법은 물론, 태허관주의 모습조차 사라져 버렸소. 조 장주는 그런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겠지요?" 조중화는 가볍게 웃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본 방의 부총호법이 어젯밤에 폐장을 떠난 뒤부터 그의 행적에 대해 일체 아는 바가 없소. 또 태허관으로 갔었다는 것도 귀하가 말 하지 않았다면 아마 믿으려들지도 않았을 거요." 고우성은 두 눈샙을 꿈틀거리며 숨가쁘게 다그쳐 물었다. "태허관은 귀방의 소속이 아니오?" "그것 역시 노부는 모르오." 그때 돌연 황발노인이 고개를 쳐들며 음침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 태허관이라면 여기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네가 모 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그의 음성은 쥐가 고목나무를 갉아먹듯 거칠어서 듣기에 거북했다. 조중화는 황발노인이 대뜸 자신에게 하대를 하자 눈살을 찌푸리며 그 를 돌아보았다. "귀하는 뉘시오?" "크흐흐…… 노부는 뇌공린이다." 황발노인의 말에 조중화는 내심 깜짝 놀랐다. 뇌공린은 별호가 금사관일로서, 수십 년 전부터 북해 일대에서 제왕과 같이 군림하던 절세의 고수였다. 그는 금사라는 특이한 무기를 암기로 사용했는데, 그 위력이 어찌나 놀랍던지 아직까지 완벽하게 피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 다. 그는 북해 일대에 칩거하여 중원에는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 나 그 명성만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중원무림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그가 성심장에 포섭되어 성심오로 중의 하나가 되어 무림에 나 타난 것이다. 조중화는 상대가 전설적인 명성을 날리던 희대의 대마두임을 알자 전신이 바짝 긴장되었으나, 겉으로는 담담한 웃음을 날렸다. "허허…… 당신은 북해에서 편안하게 제왕 같은 생활이나 즐기고 있 을 것이지 무엇 때문에 머나먼 중원에까지 와서 소란을 피운단 말이 오?" 뇌공린의 안색이 흉악하게 변하며 두 눈에서 살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조중화인지 쥐새끼인지가 감히 함부로 아가리를 놀리는구나. 노부가 무슨 짓을 하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조중화는 상대방이 자신을 쥐새끼라고 놀리자 불 같은 노화가 치밀어 올랐다. "뇌공린, 북해에서는 네가 제법 행세할 수 있었는지 모르나 이곳에서 는 어림없다. 너의 금사 따위는 노부의 풍운신검에 비하면 어린아이 손장난에 불과하다." 뇌공린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흐흐…… 찢어진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군. 함부로 입을 놀릴 만큼 실력이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 이어 그의 몸이 허깨비처럼 허공으로 불쑥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그의 소맷자락 속에서 세 가닥의 무시무시한 금광이 폭 사되어 나왔다. 쐐쐐쐐! 그것이 날아오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오직 세 줄기의 금선 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것이 뇌공린을 북해제일고수로 불리게 한 금사수법 이었다. 조중화는 이미 그가 금사를 날릴 것에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었는지 라 조금도 놀라지 않고 등뒤에 맨 풍운신검을 뽑아 들었다. "이얍!" 이어 벼락같이 고함을 내지르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금사를 후려쳐 갔다. 챙! 챙! 챙!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불꽃이 튀기며 세 가닥 금사는 풍운신검에 튕겨져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팍!팍! "크아악!" "아악!" 미처 피하지 못한 성심장의 고수 대여섯 명이 금사의 파편에 격중당 해 처절무비한 절규를 터뜨리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들의 전신에는 금빛이 반짝거리는, 실처럼 가느다란 금사가 박혀 있었는데, 금사에 격중되는 순간 숨이 끊어졌는지 눈을 희멀겋게 부 릅떴고, 몸에서는 검은 피가 흘러나왔으떠 피부 색깔이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이 참상을 목격한 성심장의 고수들이 경호성을 울리며 뒤로 주춤 물 러섰다. 순간, "받아라!" 회서방의 온서급 고수 세 명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외치면서 몸을 튕겨 올리더니 매가 링을 덮치는 형상으로 성심장 고수들의 머리 위 에서 무겁게 짓눌러 왔다. 펑! 펑! "아악!" 다시 세 명의 고수들이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혀를 길게 내빼면 서 픽픽 쓰러졌다. 고우성은 발연 대로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그들에게 덮쳐 갔다. "이놈들!" 그제서야 학귀와 진조영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우성과 함께 몸을 날렸다. 그들은 세 명의 온서급 고수들과 맞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 다. 한편 뇌공린과 맞선 조중화는 연거푸 일곱 차례나 매섭고 예리한 검 초를 시출해 냈다. 그의 이 검법은 매우 특이한 것으로서 당금 무림 에서는 좀처럼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뇌공린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전개하는 도영섭허 신법은 참으로 기묘하여 상대방의 거미줄같이 밀집되고 서릿발같이 매서운 검세를 능수능란하게 피했 다. 뇌공린은 문득 회서방의 온세급 고수 세 명이 일거에 성심장의 고수 들을 쓰러뜨리고 고우성 등에게 맹공을 퍼붓고 있는 것을 보고 불 같 으 살심이 끓어올랐다. 그는 즉시 조중화를 향해 두 개의 금사를 발출해 그를 물리친 후 그 쪽으로 몸을 날려갔다. 쐐액! 섬전 같은 속도로 일직선을 그으며 날아간 뇌공린은 족장을 휘둘러 원형을 그려 내면서 한 줄기 경풍을 뻗쳐 냈다. 그 순간, "어딜 감히……!" 조중화가 풍운신검을 세차게 휘두르며 몸을 날려왔다 뇌공린은 퍼뜩 돌아보며 낄낄 웃음을 터뜨리더니 홱 돌아서서 앞으로 뛰어오르며 죽 장을 그대로 뻗쳐 내 조중화의 기문혈을 노렸다 조중화는 그의 죽초가 신묘함을 깨닫고 있었기에 방심하지 않 고 즉시 풍운신검으로 천외래운 일초를 시출해 맞섰다. 탕! 검과 장이 서로 부딪치면서 조중화는 검을 쥔 손아귀가 떨어 져 나갈 듯 저림을 느끼고 입을 딱 벌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검 을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여차하면 목이 댕강 달아날 판국이었다. 돌연 뇌공린은 몸서리쳐지는 괴소를 흘려 내었다. "으히히…… 마치 당나귀가 발놀이를 하는 듯한 솜씨로 감히 뉘 앞에 서 까부는 거냐!" 동시에 왼손에 든 하얀 목령을 높이 치켜 들었다. 이 순간 잽싸게 검을 집어 든 조중화는 하얀 그림자가 자신의 면전을 향해 번뜩이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검을 들어 맞섰다. "후후후……" 조중화의 당혹해 하는 기색을 본 뇌공린은 목령을 날리지도 않고 흔 들기만 하면서 경멸이 담긴 조소를 보냈다. "이런 육시랄……!" 조중화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성깔나게 한마디 내뱉으면서 막 검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쐐액! "크윽!" 조중화는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뇌공린이 한치의 허점도 놓치지 않고 죽장을 날려 조중화의 기문혈을 정통으로 맹타해 버린 것이다. 조중화는 무거운 신음 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칠팔 보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으로 변해 있었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비 오 듯 흘러내렸다. 이때였다. "으아악!" "케에엑!" 저쪽에서도 신음 소리, 비명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리면서 쌍방의 우 열이 가려졌다. 회서방의 세 고수는 고우성과 진조영, 학귀를 당하지 못하고 실 끊어 진 연처럼 일 장 밖으로 힘없이 날아가다 곤두박질쳐 그대로 까무라 치고만 것이다. 그 중에서도 고우성의 신위는 가히 놀라워서 그의 상대였던 회서방 고수는 즉사해 버렸고, 다른 두 고수 또한 진 조영, 학귀와 엇비슷하게 겨루다가 고우성의 일격을 받고 패퇴해 버 린 것이다. 뇌공린은 그것을 보고 입가에 음산한 웃음을 떠올렸다. "흐흐……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벌일 차례로군." 그는 성큼 조중화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바로 그 순간, 팟!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잣나무 가지가 심하게 흔들리며 용수철에 튕겨나듯 한 줄기 인영이 쾌속무비하게 뛰쳐 내려와 땅위에 사뿐히 떨어졌다. "멈추시오!" 뇌공린은 불시에 나타난 인영이 흑의복면인인 것을 보고 어리등절했 다. "네놈은 누구냐?" 흑의복면인은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조중화 앞으로 쑥 나섰다. "조 장주, 뒤로 잠간 물러나시오." 뇌공린은 크게 의아해 하다가 살기 등등하게 외쳤다. "네놈도 회서방 소속이냐?" "흥! 나는 회서방이란 이름도 못 들어 본 사람이다. 다만 억울한 일 을 보면 나에게 직접 관계되지 않더라도 칼을 뽑아 도와 주는 성미 다." 뇌공린은 냅다 고함을 질렀다. "싸움에는 말이 필요없는 법. 오직 실력으로써 승부를 판가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는 죽장을 들어 분운취월 일초를 펼쳤다. 파파파파! 파란 장영이 복면인의 흥복부 부분에 있는 주요혈을 엄습해 왔 다. 그의 초식은 비할 데 없이 신속하고 변화가 무궁하여 놀라운 위세를 띠었다. 하나 죽장이 복면인의 앞가슴에 막 닿으려 하는 순간 복면인의 신형 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스으으…… 그러자 죽장은 여지없이 허탕을 치고 허공을 그어 갔다. 뇌공린은 내심 놀라며 장세를 급변시켜 쫓아가면서 연속적으로 삼 초를 쳐냈다. 흑의복면인은 여유있게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기이한 보법을 전개하여 장세를 유령처럼 살짝 지나갔다. 먹장구름이 밀려오고 태풍이 휘몰아쳐 오는 기세를 뚫은 복면인은 신 통하게도 털끝 하나 상한 곳이 없었다. '아! 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신법의 오묘함은 신기에 가 까을 정도로구나. 그런데 어찌하여 공격은 하치 않고 피하기만 하는 것일까?' 조중화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뇌공린은 왼손을 한차례 세차게 휘둘러 목령을 날렸다. 위잉! 목령은 흑의복면인의 면전을 정확하게 노렸다. 흑의복면인은 날아드는 목령을 형형한 눈초리로 웅시하고 있다가 민 첩한 동작으로 옆으로 이동하며 등뒤에 매고 있던 보도를 쾌속하게 휘둘렀다. 쩡! 도광이 허공에 확 뿌려지며 보도에 맞은 목령은 날카로운 음향을 발 산했다. 바닷물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던 침향목으로 만든 이 목령은 금철보다도 더 단단하여 보도에 정통으로 맞았으나 쪼개지지는 않았 다. 그러나 복면인의 신력에 진동되어 하얀 그림자를 뿌리면서 공 중에서 선회하여 오히려 뇌공린을 공격하는 기까로 날아갔다. 그와 함께 복면인은 번개같이 보도를 휘두르며 덮쳐 들었다. 복면인의 도세는 뇌전 같은 위세로 뇌공린의 면전을 겨냥하고 신속히 날아들었다. 팟! 팟! "앗?" 뇌공린은 상대의 빗발치는 듯한 도법을 보자 기절초풍하듯 놀라 정신 없이 경호성을 울리며 전력을 다해 목령을 튕겨 내고 죽장으로 보도 를 막아 냈다. 퍽! 쨍! 도와 장이 강렬하게 맞부딪치는 순간, 뇌공린은 손목이 떨어 져 나갈 듯 뻐근하게 저려 오고 기혈이 역류됨을 느꼈다. 찰나 복면 인의 보도는 허공을 기이하게 선회하며 뇌공린의 가슴을 그대로 가르 고 지나갔다. 팟! "크아아악!" 뇌공린은 처절이 극한 비명을 토해 내며 가슴이 쩌억 갈라진 채 바닥 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쪽에서 이 팡경을 보고 있던 고우성과 성심장의 고수들은 대경 실 색했다. 그때 진조영이 복면인의 수중에 들려 있는 보도를 보고 경악성을 질 렀다. "앗? 무…… 무영신룡단혼도다!" 그 소리를 듣자 성싱장의 고수들은 질겁을 하며 장원 밖으로 도망쳤 다. 진조영과 학귀는 물론이고 고우성마저 안색이 변한 채 허겁지겁 몸을 날리고 있었다. 실로 천하가 경동할 일이었다. 당금 무림의 내로라 하는 절세 고수들이 무영신룡단혼도라는 한마디에 꼬리를 말고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하하핫…… 하루살이 같은 무리들!" 복면인은 한바탕 통꽤하게 웃어 젖힌 후 주위를 한차례 훌어보았다. 그는 금방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조중화를 두 손으로 안아 대청으로 옮겼다. 조중화는 극도의 긴장 속에 빠져 있다가 복면인의 구원을 받자 자기 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이 풀려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던 것 이다. 복면인은 뒤따라 안으로 들어온 조가장의 무사들에게 일렀다. "여러분은 정문을 엄밀히 경비하고 다시는 성심장의 인물들이 침범하 지 못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무사들은 경이와 존경의 빛을 담은 채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밖으 로 나갔다. 그들에게 있어 무영신룡단혼도는 도왕일 뿐 아니라 무의 신으로 여겨졌다. 복면인은 지체없이 우장을 들어 조중화의 명문혈에 밀착시키 고 진원지기를 주입시켜 막힌 기혈을 소통시키고 풀리는 진기를 환원 시켜 주었다. 약 반 시진 후. 의식 불명이 되어 있던 조중화는 미약한 신음 소리를 내면서 눈을 부 스스 뜨더니 복면인을 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으며 감격의 빛을 얼 굴에 띠었다. "노부의 목숨을 구해 주어 정말 감사하오. 노부는 귀하가 시키는 일 이라면 물불도 가리지 않을 결심이오." 복면인은 담담히 웃으며 복면을 벗었다. "천만에요. 사람을 구하는 건 나의 임무이자 도리요." 나타난 얼굴을 보자 조중화는 그야말로 너무도 놀라 정신이 멍해졌 다. "억……!" 그는 바로 용당운이 아닌가? 단순한 신의로만 알았던 그가 절학을 감춘 기인이라는 것을 알자 조중화는 더욱 그에 대해 감탄과 존경의 마음이 샘솟았다. "아! 이제 보니 용 선생이 바로 그 유명한 무영신룡단혼도이셨구려. 이 조중화는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해 그것을 몰랐으니…… 노 부를 용서해 주시오." 용당운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흘려 내었다. "용서라니, 당치않소. 그보다 지금 회서방은 너무 많은 악행을 저지 르고 있으니 조 장주는 악인을 도와 주는 일은 삼가는 게 좋을 것이 오" 조중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는 일전에 회서방주의 구원을 받아 본의 아니게 회서방에 가입 하게 되었소. 하나 이번 일로 당시의 빛은 갚았다고 생각되오. 모쪼 록 대협의 선처를 바랄 뿐이오." "조 장주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천만다행이외다. 한데 음적양이 태허관으로 간 일에 대해서 조 장주께선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 오?" 조중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한 가치 짐작 가는 일이 있기는 하오만……" 용당운은 눈을 번쩍 빛냈다. "그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이제 와서 대협께 무엇을 속이겠소? 사실 태허관주인 장청도인은 회 서방의 온일호인 독검 구소양의 변신이오. 음 적양은 필시 혼자의 힘으로 탈출하는 것이 어려을 것 같자 그에게 도 움을 청하러 간 것이오." 용당운은 흠칫 놀랐다. "독검 구소양이라면 칠대흉인 중에서도 서열 일위에 올라 있는 전대 의 천하제일마검이 아니오? 그가 태허관에 숨어 있었단 말이오?" "그렇소." 용당운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정색을 하고 물엇다. "조 장주께선 회서방주의 정체와 총단의 소재를 정녕 모르고 계시 오?" 조중화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찌 대협을 속이겠소? 당년에 내가 비록 회서방주에게 목숨을 구원받긴 했지만 그가 복면을 하고 있어 정체를 알지 못하오. 또 총 단에는 회서방에 가입할 때 한 번 갔었는데, 눈을 가린 채 마차로 며 칠 동안 옮겨 다닌 통에 도저히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소. 단지…… 이건 전적으로 노부의 추측인데…… 아마 낙양 부근이 아닌가 싶소." 용당운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눈을 가리고 있었다면서 그건 어떻게 아시오?" "총단 근처에 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물줄기가 세차게 흐르는 소 리를 들었소.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물소리는 이궐용문이 굽이치는 소리였소." "그게 정말이오?" 조중화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나중에 우연히 낙양의 용문을 지날 때 일부러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보았소. 틀림없이 당시의 그 물소리였소. 회서방의 총단 은 필시 이궐 용문에서 사방으로 십리 이내에 있을 거요." 용당운은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조 장주의 말씀은 큰 도움이 되었소. 하지만 그래도 너무 막연하구 려." 조중화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아참!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소." 용당운은 급히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엇이오?" "총단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총단에서 백 리 떨어진 지점 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시 연락을 취해야 하오. 음적양과 구소양도 필시 그곳으로 갔을 거요" "그곳이 어디요?" "하남성의 허창 부근에 있는 화신묘요." 용당운은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다 조용히 뇌까렸다. "화신묘라……" 제38장 노승의 정체 허창. 허창은 하남성 중앙에 있는 도시이다. 진 시대에는 허현으로 불렸고, 후한 말기에는 일시 국도를 두었던 일도 있었다. 삼경이 가까워질 무렵. 사방은 쥐죽은듯 고요하고 검푸른 밤하늘에 뜬 별과 달이 세상을 환 하게 내리비추고 있었다. 허창 서쪽으로 칠 리 되는 지점에 하나의 허름한 화신묘가 있었다. 평소에도 인적이 별로 없는 화신묘는 몸이 으스스 떨릴 정도로 차가 운 밤공기 속에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돌연 인영 하나가 수림 속에서 화신묘로 비호처럼 날아왔다. 그는 허리가 구부정한 꼽추노인이었다. 꼽추노인은 번갯불 같은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화신묘로 다가 가며 입을 열었다. "구 형과 부총호법은 그만 나오시오." 그러자 화신묘 안에서 두 개의 인영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도포를 걸친 중년의 도인들이었는데 그 중 한 도인은 키가 훤 칠했고 유달리 깡말랐다. 게다가 눈빛이 독사의 그것처럼 차갑고도 예리했는데 등뒤에는 기형의 장검을 매고 있었다. 장검은 폭이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만큼 가느다랬고, 붉은 수실이 매달려 있어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바로 태허관주로 변장해 있던 회서방의 온일호, 독검 구소양이 었다. 구소양의 독검은 사십 년 전의 쌍마쌍성 중 백의성검 화진천을 제외하고는 가장 가공스런 마검으로 알려져 있었다. 구소양과 동행한 중년도인은 음양공자 음적양의 변신이었다. 음적양은 꼽추노인을 보자 급히 물었다. "황 노인, 총단으로 들어오라는 허가가 떨어졌소?" 꼽추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곧 나를 따라 총단으로 갑시다." 꼽추노인은 회서방에서 순찰의 지위를 맡고 있는 팔호 온서 타 배귀옹 황일시였다. 한데 그들이 막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아하하하……" 어디선가 냉랭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언제부터인지 하나의 인영이 달빛을 받으며 우뚝 서 있 었다. 그는 냉막한 인상의 청의중년인이었는데 등에 보도를 매고 있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세 분을 기다렸으니 세 분은 잠시 걸음을 멈 추시오." 청의중년인은 싸늘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음적양은 청의중년인을 보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앗? 무영신룡단혼도……!" 무영신룡단혼도라는 말에 구소양과 황일시도 대경 실색하여 청의중년 인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사실 당금 무림에서 무영신룡단혼도라는 이름은 외경과 신비 그리고 공포의 상징과도 같았다. 아무도 정체를 모른 채, 신비하기 짝이 없는 도법으로 강호의 거마들을 짚단처럼 베어 버리는 무영신룡단혼도의 명성은 과거 쌍마쌍성에 조금도 뒤지 지 않는 것이었다. 구소양은 폭사 같은 안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무영신룡단혼도를 노 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귀하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째서 우리를 불러 세운 거 요?" 무영신룡단혼도는 껄껄 읏었다. "하하…… 세 분은 회서방에서도 당당한 지위에 있는 분들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구소양은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회서방이라니…… 혹시 귀하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오?" "구소양 과거의 천하제일마검답지 않구려. 이런 상황에서 꼬리를 빼 려 하다니……" 그 말을 듣자 구소양은 상대가 이미 자신들의 정체를 환히 꿰뚫어보 고 있음을 직감하고 마음속에서 불 같은 살심이 끓어올랐다. '이자가 우리의 정체를 알면서도 나타난 것을 보면 필시 만반의 준비 를 한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때 황일시가 대갈일성을 터뜨리며 쌍장을 밀어 냈다. "무영신룡단혼도인지 개지렁이인지 모르지만 어디서 큰소리냐?" 콰릉! 한 줄기 광풍이 무영신룡단혼도 앞으로 쇄도해 왔다. "흥!" 무영신룡단혼도는 냉랭히 코웃음치며 기쾌무비한 동작으로 태극혼원 신공을 끌어올려 우장을 번개처럼 내밀었다. 황! "크악!" 요란한 폭음과 함께 어이없게도 황일시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심맥 이 파열되어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오공에서 검붉은 선혈이 마구 뿜 어져 나오고 등 부분의 살점이 손바닥만큼이나 떨어져 나가 처참하기 그지없는 형상이었다. 황일시는 수십 년 동안 막강한 타배신공으로 흥명을 떨치 던 거마인데 상대의 일격을 감당하지 못해 비명 횡사를 하고 만 것이 다. 이것을 본 구소양과 음적양은 안색이 대변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 다. '이놈의 장력이 이토록 무섭다니…… 그렇다떨 도법은 또 얼마나 뛰 어나겠는가?'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시선을 교환했다. 돌연 구소양은 등뒤에 매고 있던 기형검을 뽑아 들며 무영신룡단혼도 를 향해 덮쳐 들었다. 동시에 음적양 또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음양수의 공력을 끌어올 려 덤벼들었다. 파파파파…… 좌르르르릉! 두 절대고수의 합공에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위력이 담겨 있어 주위 가 온통 지진을 만난 듯 마구 뒤흔들렸다. 무영신룡단혼도는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번개처럼 천룡보도를 뽑아 들고 맞서 갔다. 팟! 팟! 팟! 천애도 특유의 빗살 같은 도기가 일어나며 구소양과 음적양의 공세를 뚫고 폭사되었다. 구소양은 흠칫 놀라 자신이 무림을 종횡할 때 사용했던 칠혈마검 의 절초들을 연거푸 전개해 냈다. 음적양의 상황은 더욱 다급했다. 그는 무영신룡단혼도가 자신의 음양 수 장공 속을 유유히 휘집고 들어오자 겁도 나고 다급하기도 했다. 원래 음양수 장공 속에는 기이한 열기와 한기가 내포되어 있어 아무 리 공력이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열기와 한기를 견며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음적양보다 무공이 훨씬 고강한 패권 혁련후가 그에게 패퇴하고 만 것도 음양수의 기이한 위력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 다. 그런데 무영신룡단혼도는 음양수의 그러한 위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풍지대를 누비는 것처럼 태연히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대체 왜 유독 이놈에게만은 내 음양수가 제 위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일까?' 음적양은 할수 없이 음양수와 삼양신지, 삼음마인의 삼대절초를 번갈 아 가며 사용하여 간신히 무영신룡단혼도의 도세를 막아 갔다. 파파파파파…… 휘휙! 휙! 장내는 그야말로 검풍과 도기, 장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아무것 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눈 깜박할 새 반 시진이 지났다. 그들의 격전은그야말로 점입가경에 접어들어 누구도 승부 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이 무렵 수림 밖에선 두 쌍의 예리한 시선이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악궁과 여풍운이었다. 여풍운이 나직하게 입을 떼었다. "아무래도 불안하군. 자네는 나보다 관찰력이 뛰어나니 저들 중 누가 패하리라는 걸 벌써 판단하고 있겠지?" 악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그렇지도 못하네. 그들의 신형이 너무 빨리 움직여 나도 제대 로 알아볼 수가 없네. 하지만 강 노제는 당대의 기재인 데다 도법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패하지는 않을 걸세." 그제서야 여풍운은 무거운 표정을 조금 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저런 고수들 간의 싸움에선 순간적인 실 수가 치명적일 수도 있으니…… 왜 강 노제는 그들을 따로따로 놓아 격퇴시키지 않고 한꺼번에 상대하는 걸까?" "그건 음적양의 음양수를 우리 중에서 오직 강 노제만이 받아 낼 수 있기 때문일세. 게다가 구소양의 독검도 강 노제의 보도만이 막을 수 있고…… 어쨌든 우리는 강 노제를 믿고 사태를 지켜보기로 하세." 이때 음적양은 강옥봉이 펼쳐 낸 소리탄차의 일식에 의해 전신이 도 기에 횝싸이게 되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지금까지의 공세를 버리고 수세로 급변시켜 전신을 보호했다. 순간, "얍!" 날카로운 고함 소리와 함께 음적양의 위기를 알아차린 구소양이 칠혈 파홍의 검초를 휘두르떠 강옥봉의 뒤통수를 노리고 짓쳐 들었다. 강옥봉은 일부러 등뒤에 허점을 보이며 구소양의 검세 를 무시하고 더욱 사납게 음적양의 전신을 핍박해 갔다. 이것을 본 구소양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전력을 다해 강옥봉의 등으 로 덮쳐 들었다. 막 구소양의 독검이 강옥봉의 뒤통수를 꿰뚫으려는 순간, 스으으…… 강옥봉의 신형이 갑자기 연기처럼 흩어지며 구소양의 검세를 빠져 나 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유령보가 최상승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나타나는 유령무영경의 신법이었다. "앗?" 구소양은 대경 실색하여 급히 독검을 회수하려 했으나 이미 그의 독 검은 강옥봉 앞에 있던 음적양의 가슴을 그대로 훌고 지나가고 있었 다. 음적양은 가슴이 후끈거림을 느끼고 짤막한 신음을 토하며 비틀거렸 다. 구소양이 멈칫거릴 때 강옥봉의 천룡보도는 예리한 파공음을 내며 기 이한 각도로 날아들었다. 팟팟! 그 속도와 변화, 각도의 기묘함은 구소양으로서도 일찍이 보지 못했 던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구소양은 사력을 다해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어 있었다. "으윽!" 그는 가슴과 이마에 섬뜩한 통증을 느끼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양미간과 가슴팍에서 시뻘건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크으으…… 저, 정말 무서운 도법이구나……!" 구소양은 입을 딱 벌린 채 몸을 휘청거리다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 러졌다. 음적양은 믿었던 구소양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지자 기절초 풍할 듯 놀라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하나 막 몸을 움직이려는 순 간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오르며 전신의 진력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음적양은 자신이 조금 전에 구소양의 독검에 격중되었음을 경각하고 몸을 굳혔다 구소양의 독검에는 기독이 묻어 있어 스치기만 해도 기독이 혈 맥을 타고 전신에 유포되어 죽음을 면치 못하는 무서운 것이었 다. "으으……" 그는 입술이 굳어지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며 휘청거리고 있었다. 강옥봉은 수중에 천룡보도를 굳게 움켜쥔 채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 다. "으으…… 오, 오지 마라……!" 음적양은 경련을 일으키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이미 상반신이 굳어 버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강옥봉은 그를 향해 느릿느릿 천룡보도를 들어올렸다. 음적양의 얼굴은 죽음의 공포와 기독 때문에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아미타불……" 어디선가 나직한 불호 소리가 들려 왔다. 강옥봉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에페서 오 장 떨어진 곳에 잿빛 가사를 걸친 노승 한 명이 불호를 외우며 우뚝 서 있었다. 노승은 무척 야위고 허약한 체격이었는데, 하얗게 센 눈썹에 은빛 수 염이 가슴 앞까지 늘어져 있어 왠지 범접치 못할 위엄을 품고 있었 다. 강옥봉은 노승을 보자 깜짝 놀랐다 그 노승은 다름 아닌, 그에게 태 극혼원신공의 구결을 알려 주고 진원지기까지 선사한 정체 모를 고승 이 아닌가? "노선사님!" 그는 반갑고 기쁜 마음에 크게 소리치며 노승의 앞으로 달려가 넙죽 엎드렸다. 노승은 인자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 었다. "아미타불…… 보도를 보고 소시주가 일전의 그 소년임을 알아보았 네. 그 동안 소시주의 진경이 놀랍도록 정진했으니 이게 모두 불존 의 뜻이 아닌가 하네." 강옥봉은 그 동안 노승의 내력이나 행적을 전혀 듣지 못해 답답해 하 던 참에 이런 곳에서 뜻밖에도 노승을 다시 만나자 감회가 치밀어 올 랐다. "모두 노선사님의 덕분이옵니다. 한데 이곳엔 어인 일이신자……" 노숭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미타불……" 노승은 나직이 불호를 외며 전신이 굳어진 채 서 있는 음적양을 바라 보았다. "노납은 저 아이 때문에 온 걸세." 강옥봉은 어리등절한 표정이 되었다. "선사께선 음적양을 아십니까?" "아미타불…… 저 아이의 본명은 구앙욱이라네 노납에게는 친손자가 되는 아이지." 노승의 말에 강옥봉은 대경 실색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노숭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소시주는 노납이 누구인지 아는가?" 이어 그는 어두운 허공을 응시한 채 긴 탄식을 토해 냈다. "노납의 속세명은 구양청이라고 하네.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강옥봉은 침착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으나 이때만큼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구양청이라면…… 음양신마?" 어찌나 놀랐던지 그의 음성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노숭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노납이 바로 사십 년 전에 악명을 떨쳤던 쌍마쌍성 중 음양신 마일세……" 노승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사십 년 전에 쌍마창성은 그야말로 무림을 거의 독보하다시피 했다. 그 중에서도 음양신마 구양청은 음양수와 삼양신지, 삼음마인의 삼대 절학으로 천하제일마라 불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같은 쌍마 중 하나인 현마 좌불자는 내심 불만을 품게 되었다. 즉, 무림인들이 자신보다 구양청을 더 고강한 고수로 보는 것이 못마 땅했던 것이다. 하나 심기가 깊고 귀계막측한 좌불자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확고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구양청을 의형이라 부 르며 따르는 척했다. 그런던 어느 날. 마침내 좌불자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연히 구양청이 두가지 절세의 기보를 입수하게 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두 가지 기보란 우내칠대무학 중의 하나인 천애도의 비밀이 적혀 있 는 족자와, 역시 우내칠대무학 중의 유령보가 있는 유령곡의 지도가 새겨진 하나의 고전이었다. 구양청은 이미 음양수만으로도 천하제일마라 불리고 있는데 거기에 다시 두 가지 개세무학을 익히게 된다면, 천하제일마를 뛰 어넘어 능히 고금제일인에 오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 릇이었다. 그래서 좌불자는 은밀히 쌍마쌍성 중의 쌍성인 화의성수 육만루와 백 의성검 화진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의 짐작대로 평소에 구양청을 두려워하고 있던 두 사람은 구양청이 다시 두 가지 절대기보를 얻었 다는 소식에 이성을 잃고 구양청을 암습했던 것이다. 이때 좌불자도 합세하여 구양청은 세 명의 초강고수에게 합공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구양청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해도 쌍마쌍성 중 세 사람의 합공을 견 딜 수는 없었다. 결국 구양청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필사적으로 그들의 공 세를 뚫고 도주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그는 두 가지 기보를 자신의 아들인 구양혼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그들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다 만길 벼랑으로 떨어지 게 되었다. 하나 하늘의 도움인가! 구양청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기는커녕 그 아래에서 오백 년 전의 신 승 일원대선사의 유진을 얻는 기연을 맞았 다. 일원대선사는 달마선사에 비견되는 일대의 고승이었다. 구양청은 이 절세의 기연에 크게 기뻐하며 복수의 염원에 불타 일원대선사의 무공을 익히는 데 자신의 심혼을 기울였다. 하나 일원대선사의 무공은 불문의 무상심법으로, 정 심하면서도 광명 정대하기 이를 데 없어 심성이 잔인한 그로서는 대성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구양청은 포기하지 않고 전력을 기울여 무공을 익히는 데 일 로 매진했다. 그러기를 이십여 성상…… 마침내 구양청은 자신의 독보적인 음양수와 일원대선사의 무상신공인 일원상상심공을 융합하여 일찍이 무림에 없던 절세의 신공을 창안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강옥봉에게 전수해 주었던 태극혼원신공인 것이다. 태극이란 본시 음과 양이 합쳐진 것으로, 음양이 뭉쳐 일원 태극을 형성하니 이것이 태극혼원신공의 요체였다. 강옥봉이 유독 음양수의 기이한 위력에 금제당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 은 그가 익힌 태극혼원신공이 음양수의 공력에 기초를 두어 더윽 발 달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즉, 태극혼원신공은 음양수의 공력을 포괄 하는 더욱 뛰어난 신공이니 어찌 음양수가 그 앞에서 위력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태극혼원신공을 창안한 구양청은 사대개공이 트이고 마음 속에 불타오르던 원한의 불길이 씻은듯이 사라져 절로 불가에 서 말하는 상상지와 요요심을 이루게 되었다. 비로소 그는 복수니 무림의 패권이니 하는 것이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고 떠돌이 중이 되어 천하를 주유하면서 불심을 전 파하는 데 주력했다. 한편, 그에게서 두 가지 기보를 건네 받고 좌불자와 쌍성을 피해 도 망친 구양혼은 두 가지 기보의 비밀을 풀어 복수하려 했으나 그의 재 질이 미약해서인지 도저히 그 안의 심오한 비밀을 해독할 수가 없었 다. 좌불자는 수하들을 천하에 풀어 그의 행방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 었다. 그러다가 이십 년이 흐른 후에 구양혼의 행적이 좌불자의 수하들에게 발각되었다. 그 당시 구양혼은 거의 복수를 포기하고 평범한 여인과 혼인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좌불자의 급습을 받고 아내와 아직 핏덩어리인 자식을 빼앗 긴 채 혼자 필사적으로 도주하다가 기련산의 어느 이름 모를 고동 에서 상처가 도져 죽고 말았다. 그 시신을 다시 이십 년이 흐른 후에 복마철장 여풍운이 우연히 발견 하게 되었던 것이다. 좌불자는 구양혼의 아내를 죽이고, 구양혼의 거처에서 입수한 음양수 의 비급을 구양혼의 어린 아들에게 전수시켜 자신의 충복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구양혼의 아들, 즉 구양청의 손자인 구양욱은 자신의 신세 내력도 모른 채 음적양이란 이름으로 회서방주의 꼭두각시가 되어 활 동하게 된 것이다. 노승, 구양청의 긴 이야기를 들은 강옥봉은 그들 구양일가 의 불행한 과거에 가슬이 크게 무거워졌다. "그렇다면 노선사에서는 제가 천애도의 무공을 익힌 것을 진작부터 알고 계셨군요?" 구양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시주가 전개하는 것처럼 괴이무쌍한 도법은 천하에서 오직 천애도 밖에 없네, 그래서 자네와 노납이 전생부터 인연이 있음을 알 고 소시주에게 태극혼원신공을 전수해 주었던 것일세." 강옥봉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회서방주는 현마 좌불자이겠군요." "틀림없네, 좌불자는 일찍부터 무림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가 지고 있었지. 노납을 제거한 후에 회서방을 창립해서 무림을 계패하 려 했던 것일세." 구양청은 온화한 시선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표정이나 눈빛은 친할아버지가 손자를 대하듯 자상하기 그 지없는 것이었다. 누가 지금의 그를 보고 과거에 살인을 밥 먹 듯이 하던 천하제일마임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구양청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시주가 회서방과 쌍성이 세운 성심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당시의 기보들이 소시주 같은 뛰어난 기재 에게 전해진 것은 모두 무림의 홍복일세. 한 가지 명심 해야 할 것은 좌불자의 무공은 비록 쌍마쌍성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그의 심계와 지혜는 그들 중 가장 뛰어남을 잊지 말아야 하네. 소시주에게 가장 커다란 적은 컥심장의 쌍성이 아니라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를 좌불자, 바로 그자일세." 강옥봉은 곰곰이 그의 말을 되씹어 보다가 물었다. "좌불자는 지금 총단에 없습니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네. 그자는 행적이 기이하고 귀계가 많아 아무리 친한 심복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지. 그자는 그 야말로 구멍을 백 개나 뚫어 놓고 있는 늙은 쥐처럼 상대하기 힘든 인물일세."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이 그를 찾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 그자는 오른쪽 팔이 의수라네." 강옥봉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른쪽 팔이 의수인 신비의 인물! 그런 사람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군.' 강옥봉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구양청을 바라보았다. "노선사께선 음적양을 데려가시렵니까?" 구양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제부터라도 저 아이가 저지른 악행을 정화시 켜 줄 참이네." 강옥봉은 한쪽에 멍하니 서 있는 음적양에게 다가가 품속에서 환약 한 알을 꺼내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자 음적양은 굳었던 몸이 풀리며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구양청의 앞으로 달려와 바닥에 엎드렸 다. "할아버지…… 욱아가 할아버지를 뵙니다……!" 그는 비록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나 귀는 열려 있었기 때문에 구양청 과 강옥봉의 대화를 모두 들었던 것이다. 구양청은 인자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욱아야, 이 할아비와 함께 가자. 세존의 불심만이 너의 죄악을 껏써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음적양, 아니 구양욱을 부축해 일으키며 강옥봉을 돌아보았다. "소시주, 이제부터 우리 두 조손은 남은 여생을 불존께 바치며 지내겠네 앞으로 두 번 다시 무림에 나오는 일은 없겠지만 소 시주의 무운장도를 멀리서나마 빌어 줄 테니 용기를 잃지 말게." 강옥봉은 정중하게 포권했다. "노선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구양 형! 잘 가시오." 구앙욱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협, 정말 고맙소. 불초를 살려 주신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소." 구양청은 온화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은 채 한걸음 내딛었다. 스으응! 단순히 한 발짝 내딛었을 뿐인데도 그들의 몸은 섬전처럼 앞으로 치 달려갔다. "아미타불……!" 나직한 불호와 함께 두 조손의 모습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 다. 강옥봉은 감회에 젖은 눈으로 멍하니 그들이 사라진 곳을 다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닥에 쓰러진 채 혼절해 있는 구소양의 몸을 옆구리 에 끼고는 번개처럼 몸을 날려 어디론지 사라져 갔다. 제39장 미망인 낙양에서 남쪽으로 십여 리쯤 떨어진 어느 이름 모를 야산. 야산은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제법 깊숙한 산골짜기를 갖추고 있었 다. 주위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빈틈없이 들어찼고 수림 사이로 희 미한 등불이 은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림 안에는 한 채의 자그마한 초가집이 있었다. 초가집 안에는 침상이 있었는데, 침상 위에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독검 구소양이 반듯이 누워 있었고,그 옆에는 한 명의 청삼도인이 앉 아 있었다. 한데 그 청삼도인의 얼굴은 바로 음양공자 음적양이 아닌가? 음적양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내가 도중에 간신히 그자를 부상시키고 구 노인을 빼내 오지 못했다 면 우리는 필시 그 무영신룡단혼도에게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그러고 보니 음적양의 전신에도 크고 작은 상처가 많이 나 있어 유혈 이 낭자했다. 구소양은 피를 많이 흘려 사지가 나른하고 눈꺼풀이 자꾸만 감겨져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다. 그는 얼굴에 초조해 하는 빛을 띠며 씁쓸히 웃었다. "그자의 도법이 그토록 무서우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네…… 자네와 노부가 합공을 하고도 양패구상을 면치 못하다니……" 음적양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번에 적지 않은 부상을 입어 진기를 제대로 끌어올릴 수 없 는 상황이오. 이때 만일 성심장의 고수들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큰 낭 패가 아니겠소?" 이 말에 구소양은 크게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 야단났군. 노부도 지금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아무런 힘도 쓸 수 가 없네. 자네는 속히 노부를 데리고 총단으로 가게." 음적양은 난색을 보이며 잠시 대답을 주저하다가 말했다. "지금 이런 행색으로 길을 나섰다가는 당장에 성심장 고수들에게 발 각 당하고 말 것이오. 일단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구 노인의 진력이 보충되기를 기다려 길을 떠납시다." 구소양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 "그럼 쉬시오." 음적양은 수혈을 찔러 그를 잠속에 빠뜨렸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면서 운봉랑과 곽희연, 손지유 등의 미소녀들과 조중화, 여풍운, 임표, 악궁, 누남광, 방각 등이 들어왔다. 운봉랑은 곱게 웃으며 음적양을 바라보았다. "강 소협은 구소양을 어떻게 처리하실 거예요? 제 생각엔 구소양의 무공을 전폐시키고 총단의 소재를 대라고 위협하는 게 가장 적 합한 방법인 것 같은데요." 음적양은 바로 강옥봉의 변신이었다. 강옥봉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구소양은 칠대흉인 중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인물인만큼 절대로 순순히 굴복하지 않을 것이오. 그보다는 내게 약간의 편법이 있으니 여러분은 구소양이 성심장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문을 밖으로 내보내시오."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회서방의 총단이 있는 곳을 알아 내고, 그것을 은밀히 성심장에 전해지게 해서 양파로 하여금 격돌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기밀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아야 하고 절대 로 허점이 드러나서는 안 되니 여러분께서는 이 점을 각별히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각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소협의 명령인데 여부가 있겠나?" 이때 하나의 회색 인영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바로 부여송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남루한 장포에 미투리를 신은 그는 근래에 많 은 풍파를 겪어 온 관계로 수염과 눈썹이 하얗게 새어 버렸다. "안녕들하시오?" 그는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품안에서 한 통의 서신을 꺼내 강옥봉에게 건네 주었다. "이건 자네가 애타게 기다리던 냉 낭자의 친서이리 어서 읽어 보게." 강옥봉의 얼굴은 괜스레 붉어졌다. "부 대협께서는 절 놀리시는군요." 그때 운봉랑이 배시시 웃으면서 입을 놀렸다. "듣자 하니 냉 낭자의 미모가 몹시 뛰어나고 소협과의 사이도 각별하 다고 하더군요." 부여송이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이를 말인가? 하지만 그녀도 두 분 낭자 이야기만 나오면 벌벌 떠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곽희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저희들 이야기만 나오면 벌벌 떨다니요?" 부여송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강 노제의 곁에 두 낭자가 딱 버티고 있다는 걸 그녀가 모 를 줄 아나? 아마 나중에 처첩의 서열을 매길 때 이것을 참조 하면 상당히 유리할 거야." 그제야 부여송의 말뜻을 알아들은 중인들은 박장 대소했다. 강옥봉은 쓴웃음만 머금었고 운봉랑과 곽희연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고 싶은 듯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만 손지유만 억지로 미소를 지은 채 눈가에 시름의 기색을 가득 띠 고 있을 뿐이었다. 강옥봉은 더 이상 있다가는 부여송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급히 냉상아의 서신을 펼쳐 들었다. 서신을 펼치니 그윽한 향기와 함께 미려한 글씨가 눈 속 가득 들어왔다. <봉랑. 저는 봉랑의 계책대로 무사히 성심장 내로 돌아왔습니다. 이사부께선 조금 의아해 하셨으나 제 설명을 듣고 저에 대한 의심을 푸셨고, 저는 다시 전처럼 삼공녀의 지위에 정해졌습니다. 저는 이사부님을 졸라 회서방을 공격하도록 건의했거니와 성심장에 서도 이번 기회에 심복대환이라 할 수 있는 회서방을 섬 멸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해서 정세가 낙관됩니다. 그러니 봉랑께서는 하루빨리 회서방 총단의 소재를 알아 내어 은밀 히 알려 주시면 빠른 시일 내에 성심장의 고수들을 대동하여 회서방 을 제거하겠습니다. 부디 봉랑의 무운을 빕니다. 상아 올림.> 서신에는 구구절절 여인의 애틋한 정이 담겨 있었다. 강옥봉은 그 서신을 그대로 중인들에게 보일 수 없어 대충 그 안에 담긴 뜻만 말해 주었다. 하나 부여송은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 입가에 괴이쩍은 미소를 흘 린 채 의미있는 눈으로 강옥봉을 보며 웃고 있었다. 강옥봉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 근처에 대한 금제는 완벽하게 되었습니까?" 악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말게 천둔기문의 금제가 완전히 배치되었고 누 교주를 따르는 배교의 정예고수인 이십팔숙이 삼엄 한 경비를 하고 있으므로 외부의 적은 절대 침입하지 못할 것이니 노 제는 마음놓게." 강옥봉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 구소양을 깨워 총단의 소재를 알아 내야 되겠군요." 그는 숙연해진 얼굴로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구소양의 맥을 짚고 기혈의 변화를 진찰하면서 형형한 눈초리로 구소양의 이마를 주시했다. 방안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많은 듯 조용해져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것만 같았다. 여러 사람들은 강옥봉의 진정한 의도를 몰라 의아스러운 눈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대체 무슨 수로 구소양의 입에서 회서방 총단의 소재를 알아 낸단 말 인가?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운봉랑은 강옥봉을 주시하고 있다가 여러 소녀들을 돌아보며 나직이 말을 꺼냈다. "강 공자는 모든 면이 다 좋지만, 한 가지 흠이라면 행사에 있어서 깊고 얕은 것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는 것이에요. 지금도 모르긴 하지만 구소양의 맥을 짚는 것으로 보아 치료를 해줄 생각일 거예 요." 일순, 싹! 강옥봉이 느닷없이 오른손을 확 펼치더니 구소양의 좌측 태양혈 을 향해 한 줄기 강력한 지풍을 튕겨 냈다. 그러자 신기한 변화가 일어났다. 혼수 상태에 빠져 있던 구소양이 전신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얼 굴색이 급변되면서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마구 지껄여댔다. "으…… 으이…… 으아아아아! 어허……" 그러다가 이내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옥봉은 이 같은 변화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음적양의 목소리를 흉 내내어 나직이 말했다. "구 노인, 그자의 악독한 도기에 당해 장부가 파손되었으니 이 걸 어쩌면 좋겠소? 내 능력이 미치지 않으니 심히 안타까울 뿐이오." 구소양은 경련을 일으키며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초, 총단에 홍죽옥수고 세 병이 있네. 어떠한 병도 치 료할 수 있는 영약이니 수고스럽지만…… 노…… 노부를 빨리 총단으 로 호송해 주길 바라네." 강옥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구 노인은 앞으로 길어야 두 시진 정도밖에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 는데, 내가 구 노인을 총단까지 호송할 경우 도중에 상세가 진 동되어 큰 변을 당할 우려가 있소. 하지만 내가 단신으로 총단으로 간다면 혹 두 시진 내에 홍죽옥수고를 가져 올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 그럼 어서 다녀오게. 노부는 절대로 눈을 감을 수가 없네." 여러 사람들은 구소양이 눈을 꼭 감은 채 비밀을 토해 내는 것을 보 면서 모두들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강옥봉은 무슨 신통한 수법 을 썼기에 혼수 상태에 빠진 사람으로 하여금 비밀을 말하도록 했을 까? 이것은 그들의 한결같은 의아싱이었다. 그때 누남광이 여러 사람들에게 나직이 입을 떼었다. "노부는 강 소협이 전개한 수법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겠소. 그 수법 은 노부가 일전에 강 소협에게 전해 준 기서인 대풍요람 중에서 가장 심오하고 익히기 어려운 미망인이라는 것이오. 그것은 배교 의 조사이신 팽우령 사조께서도 익히지 못하시고 구결만 남겨 놓으신 것인데 재질이 뛰어난 강 소협이 결국 터득해 내고 말았구려." 강옥봉은 구소양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나는 총단을 떠난 지가 너무 오래되어 그 정확한 위치가 잘 기억나 지 않소." "총단은 낙양 두가장이지 않나?" 강옥봉은 눈을 반짝이며 짐짓 탄성을 발했다. "아! 이제 기억나는구려. 하지만 두가장 내에 총단이 있다는 것은 두 가장 사람들도 모를 텐데 누가 나를 인도해 주겠소?" "두가장에 가서 두칠랑을 찾게." "두칠랑은 어디에 있소?" "두가장의 총관인 지일산에게 물어 보면 알 걸세." "만일 두칠랑이 일이 있어 잠시 두가장을 떠났다면 그땐 어떻게 하겠 소?" 구소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두칠랑은 무공이 고강하지만 나이가 이미 백 세에 접어들었고, 왼팔 조차 쓰기가 거북하여 수십 년 동안 강호에 나온 적이 없으니 틀림없 이 두가장에 있을 걸세." "하지만 세상에는 뜻밖의 일이 많은 법이오. 만에 하나 두가장에 두 칠랑이 없다면 구 노인의 생명이 위험하게 될 것인즉, 그렇게 되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소?" 옆에서 듣고 있던 운봉랑은 내심 중얼거렸다. '강 공자는 평소 심성이 성실한 군자로서 매우 다정다감한 사 람인데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니 마치 딴사람처럼 달라져 버렸구나.' 이때 구소양은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을 토해 냈다. "자네는 정말 세심한 사람이군. 나의 신변에 옥서령이 있으 니 그걸 가지고 주방에 있는 장님노파를 찾아가게. 그러면 자네를 총 단으로 안내해 줄 걸세." 이어 구소양은 총단 내에 장치된 금제에 대한 조정 방법과 홍죽옥수 고가 비장되어 있는 곳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신기해 하는 표정을 지으 며 강옥봉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 강옥봉이 별안간 구소양의 맥을 짚고 있던 손을 급히 떼었다 그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운봉랑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옥봉의 옆으로 다가왔 다. "공자, 왜 그러시죠?" 강옥봉은 넓은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었다. "괜찮소. 아무 일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리고는 품안에서 단약 한 알을 꺼내 삼킨 다음 조용히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중인들은 모두 초조한 심정이 되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약간 파리해졌던 강옥봉의 얼굴빛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순간 구소양은 잠에 취한 듯한 음성으로 횡설수설하다가 마지막에 가 서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부…… 부총호법, 어서 빨리 다녀오게." 겨우 이 말을 마치고는 다시 혼수 상태에 빠져 버렸다. 강옥봉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사용한 수법은 대풍요람의 제일 마지막에 있는 미망인이란 것 인데 워낙 많은 진기의 소모를 요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두 번 이상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오." 운봉랑이 급히 물었다. "공자께선 회서방 총단의 소재를 알았으니 그 장소를 성심장에 흘리 기만 하면 될 텐데 왜 그 안으로 잠입하는 방법을 그토록 상세히 물 었어요?" "회서방 총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일을 완벽하게 진행시킬 수 가 없소. 자칫 총단 내에 비밀통로가 있거나 기관장치가 너무 삼엄하 다면 일을 그르치고 마오." "그렇다면 공자께선 직접 총단으로 들어가시려고 하세요?" 운봉랑의 놀란 외침에 강옥봉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구소양으로 변장하고 총단 내에 잠입해 들어가 일대 혈극이 조용히 막을 내리도록 와해 공작을 펴보려는 것이오." 이어 그는 중인들을 향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중인들은 그의 말을 듣고 모두 수긍했다. 운봉랑을 비롯한 소녀들은 강옥봉이 직접 회서방의 총단으로 뛰어든 다는 것이 여간 꺼림칙하지 않았으나 그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알고 말리지는 못했다. 다만 그녀들은 강옥봉이 무사하기만을 천지신명께 기도드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 * * 두가장. 두가장은 낙양의 동남쪽, 이귈 용문에서 동쪽으로 십여 리쯤 떨어진 동문로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두가장은 예로부터 낙양의 명문으로 유명하거니와 당금에 와서 는 그 명성이 낙양뿐 아니라 천하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 이유는 당금의 두가장 장주가 바로 사대공자 중의 제일인자 라는 낙양대공자 두진악이었기 때문이다. 낙양대공자 두진악은 문무를 겸비한 일대기재로 알 려져 있었고, 용모가 준수하고 기개가 헌앙한 미장부 였다. 하나그는 두가장에 칩거한 채 웬만해서는 무림에 잘 나타나지 않아 그를 직접 본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에 불과했다. 이른 아침. 여명이 서서히 밝아 오면서 선녀의 날개옷 같은 엷은 안개가 온 산에 빽빽이 들어선 수목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낙양의 동쪽을 굽이쳐 흐르는 이수의 물결은 여전히 도도하기 그지없었고, 길가에 휘휘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는 오가는 사람들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한가롭게 흔들거렸다. 돌연, 두두두두…… 일진의 말굽 소리와 함께 급박하게 돌아가는 수레바퀴 소리가 들리며 낡은 마차 한 대가 낙양의 동문로를 질주해 갔다. 오가던 행인들은 급급히 길 양쪽으로 물러섰고 마부는 신바람이 난 듯 채찍을 세차게 휘둘러 마차를 질풍처럼 몰아갔다. 낙양성…… 때는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이른 새벽인지라 사람들의 모습을 흔하 게 볼 수 없었다. 마차는 말굽 소리도 경쾌하게 청석이 깔린 대로를 달려가 잠깐 사이 두가장의 정문 앞에 이르렀다. 마차가 멈추자 곧 두가장에서 몇 명의 무사들이 뛰어나왔다. "멈추시오!" 그때 마차 안에서 조중화가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구소양을 안고 내려 섰다. 조중화는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무사들에게 소리쳤다. "빨리 총관인 지일산을 불러라!" 무사들은 그의 안광이 예리하고 표정이 절박한 것을 보고 더 이상 묻 지 않고 급히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곧 두가장 안에서 이목이 청수하고 염소수염을 기른 황포노인이 달려 나왔다. 그 노인이 두가장의 총관인 지일산이었다. 지일산은 피로 얼룩진 의 복이 군데군데 찢겨지고 얼굴색이 창백한 구소양을 보자 두 눈이 휘 둥그래졌다. "온일호께서 어찌 이 지경이 되시었소?" 그가 급히 구소양을 부축하려 하자 조중화가 말했다. "온일호께서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 하시오.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을 시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오." 지일산은 구소양의 전신에 칼자국이 나 있음을 보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음을 짐작했다. 조중화는 곧장 대청으로 들어가 구소양을 호피교의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구소양은 부스스 눈을 뜨더니 무기력한 음성으로 지일산을 향해 더듬 더듬 말을 꺼냈다. "두, 두 장주는 어디에……?" 지금의 구소양. 그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강옥봉의 변신이었다. 그러나 그 용모 하며 말투와 태도는 설령 부모라 해도 그가 구소양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것이었다. 지일산은 허리를 굽혔다. "장주께선 방주님의 밀명을 받고 급히 낙양을 떠나셨는데 오시 는 도중에 만나지 못하셨는지요?" 조중화는 냉소를 치면서 말을 받았다. "지 총관, 지금 온일호께선 심한 내상을 입으셨으니 괜한 말은 하지 마시오. 온일호께서 도중에 두 장주와 만나셨다면 왜 지 총관에게 물 으셨겠소?" "……" 지일산이 무안한 듯 미처 입을 열지 못하자 강옥봉이 나직이 꾸짖었 다. "예끼, 못난 사람 같으니…… 어서 두칠랑이나 불러 오게."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지일산이 대답하고 물러간 지 오래지 않아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 주름살투성이인 두칠랑이 허겁지겁 달려들어왔다. 일신에 장삼을 걸친 두칠랑은 오른손엔 괴장을 들었고, 팔뚝이 잘려 나간 왼편 소맷자락은 저절로 펄럭거렸으며, 흰 눈썹이 길게 내 리덮인 두 눈에선 매서운 정광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강옥봉을 잠시 주시하고 있다가 조중화에게 물었다. "온일호께서 어찌하여 이런 중상을 입으셨소?" 조중화가 바삐 대답했다. "온일호님의 생명은 앞으로 두 시진밖에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속히 총단으로 옳겨 치료해야 할 것이오." 두칠랑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조중화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 일순 강옥봉이 힘겹게 눈을 뜨며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두칠랑,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입씨름만 하고 있소! 노부가 죽길 바라 고 있는 거요?" 두칠랑은 황망히 강옥봉의 맥을 짚어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노신이 곧 총단으로 달려가 홍죽옥수고를 가져 오겠습니다." 조중화가 즉시 말했다. "온일호님을 총단으로 옮기지 않고서 성심장 도당들의 습격을 받게 된다면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격이 될 것이오." 두칠랑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노신은 수십 년 동안 살계를 범하지 않았소. 그러나 놈들이 습격해 온다면 도저히 가만 내버려둘 수가 없군요. 노신은 여기 남아 놈들을 상대하겠으니 귀하가 책임지고 온일호님을 총단으로 호송하시 오." 조중화는 짐짓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사양했다. "나는 안휘 지단의 향주에 불과한 신분인데 어찌 감히 총단으로 들어가겠소?"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어디 있소? 속히 떠나도록 하시 오." 조중화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더니 안색이 홱 달라졌다. "온일호님께서 또 의식을 잃으셨소. 나는 총단으로 가는 길을 모르는 데 어쩌면 좋겠소?" 두칠랑이 막 고개를 돌리는 사이 강옥봉은 전신에 한바탕 경련을 일 으키더니 입으로 피를 울컥 토해 내면서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조 장주 어서 나를 총단으로 옳기시오." 조중화는 그를 부축해 등에 업으면서 두칠랑을 향해 말했다. "내가 온일호님을 모시고 오는 도중에 온일호님께서 말씀하시길, 두 칠랑은 고집이 세어 자신은 물론 남의 일까지 그르치는 예가 있다고 하시더니 과연 사실이로군." 두칠랑은 발끈 노해 흰 머리칼을 곤두세우며 일장을 쳐낼 태세를 취 했다. 바로 그때였다. 대청 밖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려 왔다. "구소양! 네가 끝까지 도망칠 줄 알았더냐?" 조중화는 강옥봉을 업은 채 됫문을 통해 주방으로 향했고 두칠랑은 괴장을 들고 대청 밖으로 뛰쳐 나갔다. 대청 앞마당 한복판에는 복면을 한 청의노인과 세 명의 중년대한이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두칠랑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다가 청의복면노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청의복면노인의 두 눈은 독사의 그것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칠랑은 그 눈을 보자 떠오르는 인물이 있어 안색이 일변했다. "이제 보았더니 신망 조패, 네놈이었구나! 네놈이 감히 성심장을 등에 업고 이곳까지 쳐들어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게 로구나!" 신망 조패는 칠대흉인 중 하나로 독물을 잘 썼고, 무공이 괴이 무쌍한 마두였다. 그는 성심오로 중 한 명으로, 강옥봉이 냉상아를 통해 은밀히 누설한 소식을 들은 성심장주의 명령을 받고 제일 먼저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조패는 냉소를 날렸다. "두칠랑, 용케도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려." 두칠랑의 배분은 그보다도 오히려 높아서 평소 거만하기 그지없던 조 패도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어서 두칠랑을 해치우시오!" 세 명의 중년대한들은 즉시 장검을 뽑아 들고 검광을 번쩍이면서 두 칠랑의 전신 주요 대혈을 노리고 엄습해들었다. 그들은 변황 일대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천황삼검 마씨 삼형제였다. "죽고 싶다면 얼마든지 덤벼라!" 두칠랑은 노성을 내지르며 괴장으로 천풍사사 일초를 구사 하여 벼락이 치는 기세로 반격했다. 쨍쨍쨍……! 날카로운 금속성이 잇달아 울려 퍼지며 장영은 검세를 빈틈없 이 막아 냈다. 천황삼검은 검을 쥔 손목이 떨어져 나갈듯이 저렸지만 튕겨나려는 검을 가까스로 움켜잡고 뒤로 물러났다. "흥!" 두칠랑은 추호의 여유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냉소치면서 즉시 유운출 수 절초를 쳐내 천황삼검의 둘째인 마운의 가슴팍으 로 괴장을 빠르게 찍어 갔다. 쾌액! 마운은 장세가 위맹함을 보고 해연히 놀라면서 급히 옆으로 비켜남과 동시에 우장을 신속하게 내밀어 괴장을 움켜쥐려 했다. 하나 남달리 뛰어난 안력을 지니고 있는 두칠랑은 상대방의 수법이 괴이할 뿐더러 장세가 사혈을 쉽싸고 있는 것을 판단하 고 즉시 괴장을 거두며 공중으로 몸을 튕겨 올렸다. 싸싸싹! 그러자 세 자루의 검이 번개처럼 그녀의 두 발을 노리고 그어졌다. 두칠랑은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면서 괴장을 교묘하게 휘둘러 장강 대하와 같은 공세를 발출시켰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조패는 한마디 냉소와 함께 상엄한 장세 속 으로 뛰어들며 양손을 마구 휘둘렀다. 파파파파파…… 그의 장세는 기이하게도 흡수력이 강한 강기를 띠고 있어 장력 이 공중을 가르면서 몰아쳐 갔다. 두칠랑은 자신의 공세가 일순간에 봉쇄되어지면서 몸 또한 앞으로 끌어당겨짐을 느끼고는 마음을 가다 듬었다. '이 조가 놈의 장세는 정말 괴이해 살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되 겠다!' 그녀는 단전에 진력을 모으고 추풍소엽 일초를 펼쳤다. 파아아아악! 장영이 허공을 난무하면서 예리한 소성이 고막이 따갑도록 일어났다. 그와 함께 돌연 괴장 끝에서 담홍색 광채가 뻗쳐 나오며 아울러 가늘 기가 쇠털 같은 비침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나왔다. 파파파파팍! "으…… 으악!"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는 속에 천황삼검 마씨 삼형제는 선혈 을 빗발치듯 뿌리면서 검을 내던지러니 배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다가 픽픽 쓰러져 버렸다. 그들의 가슴팍은 괴장에 여지없이 격중되어 살 점이 한 움큼씩 떨어져 나가 시뻘건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패는 소름이 오싹 끼침을 느끼면서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는 마씨 형제의 검에 길이 한 치쯤 되는 독침들이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아…… 화혈침이구나!" 화혈침은 무림의 칠대금용암기 중에서도 악독하기로 이름난 것이었 다. 두칠랑은 침중하게 외쳤다. "그렇다. 노신은 본디 이 화혈침을 노신의 팔을 절단한 원수에게 사 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그 원수는 죽은 지 오래기 때문에 강호에서 발을 씻고 여생을 두가장에 의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패는 냉소를 날렸다. "흥! 강호에서 발을 뺐다면서 어찌 도리어 회서방에 투입하여 악행 을 저지르고 있소?" 두칠랑은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여러 소리 할 것 없다. 넌 결국 죽고 말 것이다." 동시에 일장을 노도와 같은 기세로 밀어 가자 조패는 싸늘하게 웃었 다. "흐흐흐……" 그는 마도칠대장공 중의 하나인 유유음명장 을 구사하여 기괴한 일장을 발출했다. 꽝! 두칠랑은 유유음명장의 괴이한 장세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안색이 굳어지며 크게 소리쳤다. "네가 끝내 노신에게 덤비려 하느냐?" 조패는 냉랭히 코웃음쳤다. "누가 할 소리! 당신은 오늘 본 장의 사람을 셋이나 죽였으니 그 피 빛을 피로써 보상해야 하오." "어리석은 소리 집어치워라!" "흐흐…… 본 장에서는 이미 이 두가장이 회서방의 총단임을 알고 본 장의 전고수들을 동원해 이곳을 초토화시키기로 결정했소. 그러니 두 칠랑,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두칠랑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광소를 터뜨렸다. "크케케…… 그런 소리에 겁먹을 노신인 줄 아느냐? 노신의 괴장에는 화혈침 외에도 무혈화까지 비장되어 있다 무혈화는 색도 냄 새도 없고 또 체내에 침투되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으나 한 시진이 경 과되면 몸이 농혈로 화해 버린다. 네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진기를 운용해 보아라." 조패는 내심 가슴이 철렁했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거만스런 자세를 취 했다. "두칠랑, 너무 날뛰지 마시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금색 독주가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이 말을 들은 두칠랑의 머리에 과거의 어떤 일이 떠올랐다. 원래 금색독주는 운주와 귀주 지방에 있다. 일년 내내 독장이 끼여 있어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소택에 서식하는 금색독주는 몸이 동전 같고 금빛 털이 나 있으며, 성 격이 잔인하고 흥악하여 저희들끼리도 서로 잡아먹기 때문에 번식률 이 극히 낮으며 잡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들은 외부의 적이 침투하면 죽기를 다하고 싸우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어느 해, 두칠랑은 동도 한사람과 남만 지방에 가던 중 금색독주가 서식하는 어느 소택을 지나게 되었는데, 금색독주 한 마 리가 날아와 동도의 목덜미에 찰싹 달라붙었다. 동도는 즉시 비명을 지르며 발광을 하다가 깊은 소택 속으로 떨어졌 는데, 순식간에 뼈만 앙상하니 남은 백골로 화해 버렸다.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두칠랑이었지만 짐짓 내 색하지 않고 크게 소리쳤다. "무슨 소릴 지껄이고 있는 거냐? 설령 금색독주가 눈앞에 있다 해도 노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흥! 금색독주는 바로 당신 등에 부착되어 있소. 그러므로 어떤 신공 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오." 두칠랑은 그 말을 듣고서야 등 부분이 부자연스러운 감을 느끼고 소 스라치게 놀라 부르짖으면서 정신없이 안으로 달려갔다. "흥! 그런다고 살아날 줄 아시오?" 조패는 두칠랑의 뒤를 추격해 갔다. 한데 몇 걸음 걷지 않아그는 갑자기 진기가 흩어지고 머리가 아찔해 짐을 느끼고는 안색이 대변했다. '아차! 내가 이미 두칠랑의 무혈화에 중독된 모양이구나……' 미처 생각을 가다듬기도 전에 그는 비틀거리다가 픽 쓰러져 버렸다. 이어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파스스……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시체는 한줌 핏물로 녹아 버려 시신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제40장 회서대전 한편, 강옥봉을 등에 업고 주방으로 들어간 조중화는 다급히 소리쳤 다. "장님노파는 어디 있소?" 넓은 주방 아궁이에서는 솔가지가 불길을 활활 타올리고 솥에서는 구 수한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으나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중화가 주방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 다. "장님노파가 당신 부르라는 이름인 줄 아시오?" 동시에 높이 쌓여 있는 땔감 뒤에서 육십 남짓한 노파가 걸어나왔다. 눈자위는 퀭하니 들어갔고 머리는 새둥지처럼 꼴사납게 헝클어졌으며 일신에 포의를 입은 노파였다. 조중화는 크게 말했다. "당신은 어서 온일호님을 총단으로 호송하시오." 장님노파는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전신을 한차례 비틀었다. 그러자 전신의 골절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조중화는 냉소를 머금으며 다시 소리쳤다. "온일호님이 위경에 처해 있으니 쓸데없는 위세는 과시하지 말고 어 서 온일호님을 호송토록 하시오." 장님노파는 크게 놀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온일호님은 어디 계시오?" "지금 혼미 상태에 빠진 채 나의 등에 업혀 계시오. 만일 홍죽옥수고 를 복용치 않으면 앞으로 반 시진밖에 생명을 보존할 수가 없소." 이 말에 장님노파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검은 눈동자에서 정광이 무섭게 발산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조중화는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이제 보니 저 할망구는 가짜 장님이었구나! 휴…… 내가조심을 했기 망정이지 조금만 경솔히 굴었더라도 본색이 탄로날 뻔했구나.' 이때 노파가 음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서 노신을 따라오시오.그러나 노신은 총단의 입구까지 가는 길은 알아도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모르는데 온일호님은 어째서 두칠랑을 찾아가지 않으셨지요?" "두칠랑은 현재 대청 밖에서 성심장 도당들과 대치하고 있소. 속히 서두르시오." 노파는 히죽 웃으며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어 오른손을 아궁이 속으로 집어넣고 약간 흔들어댔다. 덜컹! 그러자 놀랍게도 부엌 밑바닥에 사각형의 출입구가 나타났다. 조중화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제아무리 총명한 사람도 총단으로 들어가는 비밀지하도가 부엌에 있 다는 것을 알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노파의 뒤를 따라 돌층계를 밟고 내려갔다. 앞서가던 노파는 대뜸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귀하도 본 방의 소속인 모양인데, 총단으로 들어가는 법을 알고 있 소?" "내가 온일호님을 호송해 오는 도중에 온일호님이 다소 일러주셨는데 윅낙 다급한 나머지 그 기억이 얼른 떠오르지 않으니 이젠 오직 온일 호님의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소." "그럼 귀하를 총단 입구까지 안내한 다음 노신은 다시 나가서 두칠랑 을 대신해 성심장 도당들을 맡고 그를 들여보내겠소." 그녀는 화섭자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어둠침침했던 주위가 환히 밝아졌는데 밑으로 향한 계단이 백 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총단은 매우 깊은 지하에 위치해 있음이 분명했다. 조중화가 강옥봉을 업은 채 돌계단을 완전히 내려섰을 때 노파가 나 직이 말을 꺼냈다. "온일호님의 생명이 위급하니 귀하는 일 각을 지체하지 말고 노신의 뒤를 바짝 따르시오." 조중화는 부지런히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지하도는 과히 넓지 않았으며 마치 염소 창자처럼 구불추불하 고 굴곡이 심했다. 한참동안 쉴새없이 내달려 지하도의 마지막 굽이를 돌아서자 전면에 태극형의 월동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태극형의 월동문은 철 문이었는데 앞쪽에 쥐머리 모양의 서두 하나와 사발만한 흑주 두 개가 달려 있을 뿐 문을 열 만한 손잡이는 보이지 않 았다. 노파가 말을 꺼냈다. "여기가 바로 총단 입구요. 노신은 더 이상 안내할 재간이 없으니 귀 하는 온일호님이 일러주신 말을 차분히 생각해 내어 불행한 일이 없 도록 하시오." 그리고는 화섭자를 벽 쪽에 꽃아 놓고 발길을 돌려 걸어나갔다. 그러다가 감자기 돌아섰다. "아참! 노신은 귀하가 진정한 본 방의 소속인지의 여부를 미처 확인 해 보지 못했소." 조중화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삼십호 온서임을 증명하는 온서패와 온일호님이 주신 옥서령 까지 가지고 있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당신이 잠시 온 일호님을 부축하고 있으시오. 내가 온서패와 옥서령을 제시하겠소." 그가 강옥봉을 앞으로 돌려 두 손으로 받쳐 들자 노파는 조금도 주저 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순간, 팟! 강옥봉이 느닷없이 두 손을 내밀어 노파의 목을 사납기 졸라 버렸다. "으…… 윽! 오, 온일호님…… 어…… 어찌……" 선혈 한줄기가 분수처럼 내뿜어지는 가운데 노파는 숨이 콱 막혀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동그래지며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 졌다. 그러다가 이내 사지를 부르르 떨다가 양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강옥봉은 땅으로 두 발을 내리며 목을 졸랐던 손을 풀었다. 쿵! 노파는 차디찬 시신이 되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강옥봉은 지체없이 문 위쪽에 부착된 두 개의 흑주를 붙잡고 각기 반 대 방향으로 일곱 번 돌렸다. 스릉! 그러자 서두가 자동적으로 우측으로 한바퀴 회전하면서 태극도형으로 된 문이 가볍게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아홉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강옥봉은 한차례 훌어보고 급히 말했다. "시간이 없소. 성심장에서 이곳까지 쳐들어오기 전에 이곳의 기문금 제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오.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조중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협이 만일 구소양으로부터 이곳의 비밀을 알아 내지 않았더라면 어림도 없을 뻔했구려 그런데 이 아홉 갈래의 길 중에서 과연 어느 길이 총단으로 직통하는 길인지 아시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옥봉이 입을 열었다. "좌측으로부러 세 번째 길이오." 강옥봉은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조중화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횃불과 등불이 어 둠을 밝히고 그윽한 전단향 내음이 풍겨 오는 지하도는 안으 로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다시 몇 장쯤 들어가자 규모가 웅장하고 단청이 찬란한 대전이 전면에 나타났다. 문 위에는 금색으로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진 현판이 덩그러니 걸 려 있었다. <회서대전> 여기서부터가 바로 회서방의 총단이었다. 많은 강호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회서방 총단에 지금 외인 으로선 맨 처음으로 강옥봉의 발길이 닿아 있는 것이다. 대전 대들보엔 네 개의 유등이 달려 있고, 중앙에는 향연이 피 어오르는 향로와 촛불이 밝혀진 금촛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양쪽에 일 자로 놓여진 신감에는 여러 개의 신상들 이 앉은 모습으로, 혹은 선 형상으로 안치되어 있었는데 신상들의 머 리가 모두 쥐 모양이어서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느낌이 들게 했다. 사람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대전 안은 조용한 가운데 유등과 촛불이 밝혀져 있었는데 싸늘하고도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 고 있었다. '총단치곤 너무 샐렁하군.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눈초리가 있을지 모 르니 각별히 조심해야 되겠다.' 강옥봉은 마음을 도사려 먹었다. 노련한 무림명숙인 조중화도 이 분위기에 휘말려 절로 모골이 송연해 졌다. '은연중에 사람을 짓누르는 섬뜩함이 흘러나오고 있구나.' 강옥봉은 묵묵히 대전의 형태를 둘러보다가 구소양의 말을 상기시키 며 중앙의 향로 좌측으로 서서히 돌아서 대전 됫문으로 나갔다. 대전 뒤에는 매우 넓은 공지가 있었는데 그 둘레에는 높이 오 륙 척쯤 되는 화목들이 들어섰고, 오색 영롱한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화원은 무척 넓어 반경이 이백여 장도 넘어 보였다. 그런데 강옥봉은 한 가지 기이한 것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피어 있는 꽃들이 희귀한 종류일 뿐 아니라 심어진 위치가 서로 얽혀 지며 기문금제가 배치되어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화목에는 일정 한 간격을 두고 일, 월, 성신을 상징하는 명주 들이 박혀있어 오색의 기화를 반사시키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 람의 눈을 부시게 했다. 강옥봉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화원의 진세를 관찰했다. 잠시 후, 강옥봉은 이 화진의 변화를 터득하고 나서 이음전성 으로 말했다. '조 장주, 내 발자국을 따라 걸으시되 조금도 차질이 없도록 하시 오." 그는 하도와 낙서의 보법으로 서서히 꽃나무들이 들어선 속으로 들어갔다. 약 이 리에 달하는 꽃나무 진을 통과하자 백석이 깔린 길이 십여 갈래 나타났는데, 끝 부분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어 어디 로 통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강옥봉은 서슴없이 네 번째 길로 접어들었다. 한데 그때 돌연 눈앞에 불빛이 번쩍이며 이마가 훌렁 벗겨진 홍포노 인이 불쑥 나타났다. 홍포노인은 형형한 눈으로 강옥봉을 응시하며 말했다. "구 형, 내당까지 들너오시면서 어찌 면구를 쓰 지 않고 또 암호를 사용하지 않으시오?" 강옥봉은 일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선 미처 구소양에게 물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시 총명 절세한 그는 기지를 발휘하여 조중화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우뚝 멈춰 섰다. 순간 그의 얼굴빛은 참담하게 변했고, 눈빛마저도 흐리멍덩해졌다. 조중화는 즉시 강옥봉의 의도를 짐작하고 앞으로 나섰다. "온일호님은 부총호법과 함께 안경을 출발한 후 강적과 치열한 싸움 을 벌여 부총호법님은 돌아가시고 온일호님은 심한 내상을 입으셨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호송해 온 것이오. 그러나 아직 본 방의 영약 인 홍죽옥수고를 복용치 못했기 때문에 말씀을 못 하시는 것이오." 홍포노인은 얼굴에 놀라움과 의아해 하는 빛을 띠었다. "어느 강적이었소?" "성심장." "그대는 대체 누구요?" "안경성을 책임지고 있는 용호풍운검 조중화라 하오." 홍포노인은 그의 이름을 들어 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삼십호 온서였구려. 온일호와 함께 출발한 사람은 어찌 되었소?" 조중화는 그럴듯하게 꾸며서 말을 한 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온일호님께서 내공이 심후한 관계로 한 가닥 진기로써 생명 을 유지하고 계시지만 시간이 늦으면 큰일이오. 그러니 귀하는 속히 서두르시오." 흥포노인은 황망히 앞장서서 걸어갔다. "조 장주는 어서 구 형을 부축하여 노부를 따라 단실로 들어오 시오." 노인이 들고 가는 불빛은 횃불도 아니고 촛불도 아니었다. 수백 개의 반딧불을 한데 뭉친 것 같았는데 이 장 둘레를 환히 비춰 주었다. 두 사람이 그를 따라 한참 동안 들어가자 눈앞에 하나의 석문 이 나타났다. 석문 위에는 서두 형상으로 만들어진 동환 두 개가 달려 있었다. 홍포노인이 손을 들어 두 개의 동환을 좌측과 우측으로 각기 한바퀴 씩 돌리자 석문이 소리없이 옆으로 이동했다. 단실! 문이 열려진 곳은 바로 단실이었는데 검은 칠을 한 목가가 가 로 세로로 드리워져 있었다. 목가에는 단약들이 들어 있는 자기병과 자기그릇들이 많이 안치되어 있었다. 그리고사방 벽 구석에는 유등이 밝혀져 있어 단약의 이름과 용도를 적은 표지를 환히 볼 수가 있었다. 홍포노인은 그 중 제일 위에 있는 선반에서 옥병 하나를 집어 들고 병마개를 열었다. "구 형, 입을 벌리시오." 강옥봉은 입을 하마처럼 크게 벌리고 옥병에 든 단약을 계속해서 받 아 삼켰다. 약 반 병을 먹었을 때 홍포노인은 옥병의 마개를 닫아 목가에 안치했 다. 강옥봉은 체내에 뜨거운 열기가 고루 유포됨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앉아 조용히 운공조식에 들어갔다. 홍포노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강옥봉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중화는 내심 번개같이 생각을 굴렸다. '강 소협이 깨어나서 이자가 누구인지 몰라본다면 큰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피면서 홍포노인에 게 말을 건넸다 "저는 오랫동안 안경성에만 있어서 아직 본 방의 고수들을 잘 알지 못하오. 보아하니 귀하는 총단에서도 높은 지위의 분 같은데, 높으신 명호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흥포노인은 가볍게 웃음지었다. "노부는 이호 온서인 혈영추흔 양만균이라 하오." 이 말을 듣고 조중화는 깜짝 놀랐다 눈앞의 이 홍포노인이 회서방에서 서열 오위에 있는 이호 온서 일 줄이야…… 더구나 혈영추혼 양만균은 칠대흉인 중의 하나로 장공과 경공 에서 가히 무림일절로 손꼽히는 무서운 고수였다. 조중화는 즉시 머리를 숙여 포권했다. "아! 이제 보니 온이호님이셨군요. 몰라뵙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양만균은 간단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모르고 한 일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조 장주는 사과할 필요 가 없소." 그때 돌연 조중화 귓전에 강옥봉의 이음전성이 들려 왔다. "음……" 조중화는 강옥봉으로부터 무언가를 전해 듣고 우울한 기색을 보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양만균은 그것을 보고 즉시 물었다. "조 장주는 어째서 한숨을 내쉬시오?" "본 방에 큰 화난이 닥친 기미를 온이호님께서는 느끼지 못하고 계십 니까?" 양만균은 안색이 확 달라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조중화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본 방의 화난은 외부보다 내부에 있습니다. 온일호님께선 성심장에 서 본 방의 비밀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계 셨는데 조금 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양만균의 얼굴 표정이 심하게 변화되면서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그럼 온일호는 본 방에 침투해 있는 성심장의 첩자가 누구라는 것을 아셨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대체 첩자가 누구요?" "두칠랑, 바로 그 늙은이입니다." "뭐라고?" 양만균의 두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두칠랑의 사람됨은 노부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그녀는 결코 우리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를 첩자로 오인 하게 되었소?" 조중화는 내심 그의 기세가 당당한 것을 보고 가볍게 다루어선 안 되 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 성심장 고수들이 두가장으로 습격해 왔을 때 두칠랑은 대적 하기는커녕 도리어 화혈침을 온일호님께 발사하려고 했습니다. 그것 만보더라도 그 늙은 것의 속셈이 어떻다는 것을 환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소." 그때 강옥봉이 벌떡 일어났다. "조 장주의 말은 진실이니 양 형은 더 이상 의심하지 마시오!" 양만균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중화는 길게 탄식했다. "두칠랑은 본 방의 비밀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기 때문에 조 금만 있으면 성심장 도당들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방주께선 총단의 고수들을 모두 외지로 파견시키셨으니 온이호님께서 아무리 무 공이 높다 해도 중과부적입니다 아……! 본 방이 수십 년 동안 심혈 을 기울여 쌓아 올린 노력의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군요." 양만균은 입가에 싸늘한 냉소를 머금었다. "흥! 그년이 그런 위인이라니…… 아무리 내부 세력이 외부로 나갔다 해도 이곳엔 절정고수가 이십여 명이나 있으니 두칠랑이 서슴없이 겉 들을 끌어들이진 못할 것이오." 강옥봉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설령 이십여 명의 고수가 있더라도 중과부적이 될 것이니 양 형은 어서 방주께 연락을……" 겨우 이 말을 마치고는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 다시 털 썩 주저앉아 운공조식을 했다. 양만균은 우려하는 눈빛으로 강옥봉을 내려다보다가 조중화를 돌아보 았다. "구 형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소. 아무래도 노부가 방주님께 급 보를 띄워 도움을 요천해야 할 것 같소." 바로 그때였다. "양 형……" 돌연 밖에서 두칠랑의 음성이 들려 왔다. 강옥봉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양만균에게 두칠랑을 유인해 들이라 는 눈짓을 했다. 양만균은 잠시 주저하다가 밖을 향해 크게 말했다. "내가 마침 구 형을 도와 상세를 요양시키고 있으니 어서 안으로 들 어 오시오." 두칠랑은 얼굴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린 채 비틀비틀 안으로 걸어 들어 왔다 "나…… 나는 이미 금색독주에 당했소. 양 형은 부디 나의 원수를 갚 아주…… 주……" 말을 이으려 안간힘을 썼으나 끝내 맺지 못한 채 두칠랑은 그 자리에 나동그라졌다. "앗?" 양만균이 경호성을 울리며 한 발 앞으로 나가는 사이, 파스스…… 두칠랑의 시신은 점차 푸른 연기로 화해 올라가며 백골만이 징 그럽게 남게 되었다. "저 저럴 수가!" 조중화도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때 두칠랑의 뼈 속에서 강철처럼 단단하게 생긴 독주가 기어 나왔다. 등 부분에 자색 반점이 있고, 발에 금색의 털이 난 독주는 배가 불렀 다는 표현인지 빠른 속도로 백골의 주위를 돌며 연방 괴성을 질러댔 다. 찍…… 찌익…… 강옥봉은 두 눈에 살기를 번뜩이며 독검을 뽑아 한차례 쾌속하게 후 려쳤다. 팟! 독주는 번뜩이는 검광에 난도질당해 버렸다. 강옥봉은 재빨리 양만균을 향해 말했다. "양 형, 즉시 총단의 고수들을 소집해 성심장의 침입에 방어토록 하 시오." 양만균은 백골을 내려다보며 머뭇거렸다. "두칠랑이 성심장 도당들에게 당한 것을 보면 본 방을 배반하지 않은 것……" 강옥봉은 급히 손을 내저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같이 위급한 시기에 무엇을 따지고 있는 거요?" 바로 그때였다. "우와아아아……!" "와아아!" 지하도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연거푸 들려 왔다. 양만균의 안색이 크게 달라졌다. "야단났소. 적들이 벌써 지하도까지 몰려든 모양이오." 그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 나갔다. 강옥봉은 그의 됫모습을 지켜보며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그들끼리 싸우다 죽든 살든 상관할 필요가 없으니 이곳에 있 읍시다." 조중화는 불현듯 생각이 나서 물었다. "소협은 아까 왜 두칠랑을 첩자라고 몰아세웠소?" 강옥봉은 고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양만균으로 하여금 사태가 이미 그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절감케 하여 회서방주의 행방을 알아 내려는 의도였 소. 한데 두칠랑이 때마침 나타나서 일을 방해하고 만 거요." 그는 나직이 탄식했다. "비록 이번에 회서방의 총단을 없앨 수 있을지는 모르나 회서방주를 색출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소." 조중화도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져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 밖에서 양만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구 형!" 강옥봉은 급히 눈을 감고 운공조식하는 척했다. 양만균은 양 어깨를 들섹이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안으로 들어와 조중화를 향해 말했다. "본 방 고수들은 현재 침입자들을 화진 안으로 유인하여 혈전 을 벌이고 있소. 그런데 적들은 무공이 고강하고 진식에 달통 한 인물들이 있어서 그들을 화진으로 제압하기는 어려을 것 같소." 강옥봉은 눈을 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양 형, 내가 바로 뒤따라 나갈 테니 어서 나가서 본 방 고수들을 독 려하여 잠시만 화진이 격파되지 않도록 하시오." "알겠소" 양만균이 황망히 밖으로 달려나가자 조중화는 즉시 물었다. "소협은 어떻게 처리하실 작정이오?" "음…… 침입자들은 틀림없이 성심장 소속들일 텐데 만일 그들 중에 냉상아나 그녀의 측근이 있다면 억울하게 희생당하게 되니 참으로 난 처하군요." "그러나 무림을 위해선 사소한 것에까지 신경을 기울일 수가 없소. 그리고 냉 낭자는 사정을 알고 있으니 섣불리 끼여들거나 하지 않을 거요." "아무튼 나가 봅시다." 두 사람은 단실에서 나와 화진 앞에 당도했다. 드넓은 화진은 하나의 거대한 격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쾅! 콰쾅! 퍼퍼펑! 차차차창! 연신 터지는 폭음과 검명, 도풍 소리…… "크아아악!" "아아악!" 그리고 처절하게 들려 오는 비명 소리, 신음 소리……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성심장에서는 일거에 회서방을 섬멸할 작정인 듯 성심오로와 팔대비 객을 비롯한 정예들이 거의 대부분 망라되어 있었다. 그에 대항하는 회서방 측에서도 열다섯 명의 온서급 고수들과 삼십 명이 넘는 전서급 고수들을 위시한 백여 명에 육박하는 인물들이 맞 서고 있었다. 쌍방은 치열하게 싸움을 벌여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때 돌연 화진 밖에서 하나의 기화가 솟구쳐 올라 주위를 눈 부시게 비추었다. 그 기화는 배교에서 소식을 전할 때 사용하는 만리화통이 었다. 강옥봉은 운봉랑 등이 자기의 안위를 걱정하여 달려왔음을 짐작하고 급히 조주오하에게 말했다. "조 장주, 수고스럽지만 화진 밖으로 나가서 운 낭자 등이 화진 안ㄴ 으로 들어오는 것을 제지하시오. 만일 그들이 들어온다면 나의 행동 이 부자연 스럽게 됩니다." 조중화는 망설였다. "노부는 화진을 출입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데……" 강옥봉은 급히 옥서령과 냉상아에게서 받은 성심장의 신물을 꺼내 주며 몇 마디 밀담을 속삭이고는 말했다. "이곳의 화진은 하도와 낙서의 이수에 근본을 두 고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그 구결에 의해 드나들면 조금도 어 려울 게없소." 조중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화진 안으로 들어갔다. 이 무련 양만균 등 회서방 고수들은 워낙 많은 수로 달려드는 성심장 의 고수들에게 중과부적으로 밀려 화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성심 장 고수들과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상대방의 기력이 쇄진하기를 기다 려 금제를 발동시켜 사로잡으려는 전략을 쓰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성심장 측에서도 지략이 뛰어난 기재들이 많아 슁사리 걸려들 지 않았다. 따라서 쌍방은 화진 안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 다. 조중화가 화진 안으로 들어서자 양만근이 앞으로 나와 의혹에 찬 눈 으로 바라보면서 전음성으로 물었다. "조 장주 어딜 가려는 것이오?" "성심장의 많은 후원부대가 지금 화진밖에 쇄도해 있소. 그러므로 온일호께서는 저더러 그들을 화진 안으로 유인하여 일망타진하라고 하셨습니다." 조장주는 양만균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온 일호님은 적들의 숫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정면 대할은 피하고 암습으로써 승부를 지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노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양만균은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저쪽으로 가버렸다. 조중화는 다시 화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회서방 고수들이 가끔 그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옥서령을 보이자 무사 히 통과되었다. 그가 화진 한복판에 이르린을 때 음침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게 서시오!" 동시에 마관을 쓴늙은 도인이 전면에 나타나더니 냉엄한 눈초 리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 도인은 창백한 얼굴에 푸른 기운이 은은하게 떠 있고 뱁새눈에 매 부리코를 지니고 있었으며 턱주가리엔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그리고 어깨에 남광이 번쩍이는 기형의 구연환을 맸으 며, 손에는 오목으로 자루를 만든 불진을 들었다. 그는 바로 성심오로 중의 한 명인 마화도인으로, 칠대흉인 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조중화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강옥봉이 건네 준 노란 깃발을 꺼내 들었다. 깃발에는 녹색 글씨로 '성' 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마화도인은 노란 깃발을 보자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귀하는 삼공녀가 보낸 분이오?" 삼공녀란 바로 냉상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깃발은 냉상아가 강옥봉에게 건네 준 것으로, 성심기라 불렸다. 성심기는 모두 다섯 개가 있었는데 그 중 두 개는 두 장주의 신물 이었고, 나머지 세 개는 각기 세 명의 제자들을 나타내는 물건이 었다. 그 중에서 냉상아는 녹색 글자가 적힌 녹기를, 도옥린은 금기 를, 그리고 대제자인 삼절공자 남검당 은 남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조중화는 정중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그렇소. 지금 삼공녀께선 이 화진의 오묘함을 깨우치시고 총단 내로 잠입하시면서 나에게 화진을 드나드는 법을 여러 동지들에게 알리라 명령하셨소." 그리고는 화진의 내용에 대해 소상히 얘기했다. "삼공녀께선 회서방 도당들을 발견하는 즉시 인정사정 보지 말고 가 차없이 쳐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셨으니 진법과 명령을 여러 동지들에 게 전해 주시오." 이어 그는 몸을 날려 앞으로 달려갔다. 얼마쯤 더 나가자 운봉랑과 락희연이 진 내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모 습이 보였다. 운봉랑과 곽희연은 각기 얼굴을 엷은 흑사로 가렸고 일신에는 간편한 청의와 흥의경장을 걸쳤는데, 아름다운 몸매가 두드러지게 돋 보여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들은 불안과 초조에 쉽싸여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조중화가 불쑥 나타나자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조 대협, 그분은 어디에 있나요?" 조중화는 내심 운음을 금치 못하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분이라니?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오?" 그녀들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곧 운봉랑이 정색을 했다. "조 대협께선 지금같이 다급한 시기에도 농담을 하시나요?" 조중화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소협은 무사하네. 그는 노부더러 두 분 낭자에게 함부로 화진 안으 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내리도록 부탁했네." 이어 강옥봉이 은밀히 부탁한 말을 소상히 전해 주었다. 그녀들은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아무 말 없이 회서대전 안으로 물러났 다. 제41장 회서방의 멸망 한편 단실에서 나온 강옥봉이 화진 앞에 이르자 양만균이 급히 뛰쳐 나왔다. 강옥봉은 짐짓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정세가 어떻게 되었소?" "우리 측은 구 형의 지시에 의해 움직였던 바 다행히도 피해를 최소 한으로 줄일 수 있었으나, 적의 숫자가 워낙 많고 또 화진의 금제 를 이미 간파했으니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겠소." 강옥봉은 일이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됨을 느끼며 일부러 침중한 표정 을 지었다. "화진이 이미 위력을 상실했다면 차라리 파괴한 후 적들을 찾아 내어 몰살시키기에 편리하도록 해야 되겠소." 그리고는 몸을 날려 화진 안으로 돌입했다. 마침 그곳에는 회서방의 온서급 고수 한 명이 검광을 그으면서 세 사 람의 성심장 고수들과 싸우고 있었다. 파파파팍! 혼자서 세 사람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온서의 무공은 상당히 고강해 서 당장 핏빛 선풍을 몰아칠 것같이 기세 등등했다 하나 성심장의 세 고수도 무공이 상당했으며 더구나 세 가지 무기를 유효 적절히 사용 하면서 맹렬하게 협공하고 있었다. 강옥봉은 잠시 관전하다가 온서급 고수를 향해 슬쩍 일지를 튕 겨 보냈다. 그러자 온서급 고수는 자기도 모르게 동작이 느려지면서 검초가 뜻대 로 움직여지지 않자 의아해 했다. 순간, 팍! 성심장 고수 한 사람이 급히 접근하면서 파란 광망을 그었다. "으악!" 회서방의 온서는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때를 노려 강옥봉은 고함을 지르면서 나섰다. "이놈들! 감히 여러 놈이 한 사람을 협공하다니…… 어서 목숨을 바 쳐라!" 그는 구소양이 원래 사용하던 독검을 뽑아 들었다. 창! 독검이 뽑히자 시퍼런 검날에 싸늘한 광채가 번쩍거리며 즉시 살기가 떠올랐다. 파파팍! 강옥봉이 독검을 허공으로 휘두르자 수십 개의 검영이 난무했 다. "크아악!" 회서방의 온서를 죽였던 성심장 고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강옥봉은 숨쉴 겨를도 없이 몸을 돌리면서 연거푸 검풍을 날렸다. 팟! 팟! "아아악!" 다시 피가 사방으로 뿌려지면서 두 개의 몸뚱어리가 네 동강으로 잘 라져 땅위에 뒹굴었다. 그때 마침 장내로 뒤따라왔던 양만근이 그 광경을 보고 해연히 놀랐 다. '아! 과연 독검이란 명성대로 잔인한 솜씨로군. 구소양의 무공이 과 거보다 놀랍도록 정진됐구나.' 순간 저쪽 화진 안에서 몇 마디의 비참한 비명 소리가 들리면서 괴이 하게 생긴 사나이가 십여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는 팔 척의 키에 단장차림이었는데,표범 같은 눈에 서는 신광이 무섭게 빛났고, 손에는 굵은 곤을 들었으며, 체구는 마치 거령신같이 우람했다. 그 사나이는 그들에게 다가서면서 사나운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 두 늙은이들은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순순히 굴복해라! 그러 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강옥봉은 화진 안에 많은 성심장 고수들이 있음을 알고 낭랑하게 웃 더니 버럭 외쳤다. "죽어랏!"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덮쳐 가면서 기묘한 일식으로 독검을 사정없이 그어댔다. 팍! 파팍! 예리한 검풍이 휘날리는 가운데 강옥봉의 신형은 마치 쥐를 덮치는 고양이와 같은 기세로 날아들었다. "크아악!" "케엑!" 그는 전후좌우로 몸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검광을 뿌렸고, 성심장 고 수들은 미처 상대하지도 못하고 계속 쓰러졌다. 삽시간에 주위의 꽃 과 나무들이 모조리 잘려져 나갔으며 십여 개의 인영이 피를 솟구치 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파파팟! 혈광이 난무하면서 독검은 계속 붉은 선을 뿜어 핏빛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으윽!" "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계속 들리는 가운데 강옥봉의 신형은 잽싸게 움 직이고 있었다. 과연 그의 동작은 무영과도 같았으며 괴이한 검법은 어느 누구 라도 당할 자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천애도를 검법으로 변형하여 운 용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장내에는 시체가 즐비했고, 오직 거대한 체구의 사나이만 동그마니 남게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그 사나이가 강옥봉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심상치 않 음을 경각하고 십여 장 밖으로 급히 피했기 때문이었다. 사나이는 자신의 수하들이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고혼이 되어 버리자 안색이 변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강옥봉은 독검을 든 채 껄껄 웃었다. "아니, 왜 큰소리만 치고 꽁무니를 빼는 거냐? 정말 체면도 없는 작 자로구나!" 사나이는 반룡곤 허자강이라는 인물로, 성심장 내에 서 팔대빈객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한 자루 반룡곤으로 대강남북 에서 적수를 만나지 못한 무서운 고수였다. 그러니 어찌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있겠는가? "죽일 놈의 늙은이……!" 그는 발끈 노하더니 이를 부드득 갈면서 반룡곤으로 기묘한 일식을 전개하여 강옥봉을 공격했다. 휘휘휘획! 주위 사방이 온통 곤영에 갇혀 버린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그의 동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빨랐으며 초식도 기괴하여 보통 고수들이라면 도저히 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나 그의 상대는 다름 아닌 강옥봉이었다. 강옥봉은 그의 옆으로 접근하여 독검을 올려 쳤다. 팟!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반룡곤의 끝 부분이 싹둑 잘려졌다. "앗?" 허자강은 깜짝 놀라 급히 반룡곤을 풍차처럼 마구 회전시키며 연거푸 열두 번이나 찔러 왔다. 파파파파…… 강옥봉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빙긋 운으며 서슴없이 곤영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독검이 천애도의 절초인 휘풍명월의 변화를 일으키며 곤영을 꿰뚫었다. 팟! 팟! 빗발 같은 검기가 몰아치는 가운데 허자강은 양쪽 팔이 싹둑 잘려 나 가는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그의 잘려진 양쪽 팔목에서는 선혈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강옥봉은 조금의 사정도 두지 않고 다시 복부에 일격을 가했다. 팟! "크아아악!" 허자강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강옥봉은 다시 독검을 휘둘러 꽃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다. 화진을 모두 없애려는 것이었다. 양만균은 그런 광경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내심 안타까워했다. '수년 동안 애써 가꿔 온 화전기진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렸구나.' 꽃나무와 잡초들을 베어 버리자 처참한 시체들이 더욱 많이 나타났 다. 가뜩이나 수적으로 열세에 몰려 있던 회서방의 고수들은 화진마저 깨 어지자 속수무책으로 성심장 고수들에 의해 쓰러져 갔다. 문득 주위를 둘러본 양만균은 안색이 일변했다. 장내의 싸움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가장 큰 싸움이라고 해봐야 장강수로연맹의 총맹주인 이십일호 온서 좌지군왕 허표와 성심장의 삼총관인 백효 전력 과의 격전 정도에 불파했다. 그 외의 회서방 고수들은 양만균 한 사람만이 겨우 남았을 뿐 모두 죽었던 것이다. 한편 성심장 도당 십여 명은 강옥봉의 무시무시한 검법에 겁을 집어 먹고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번 싸움에서 성심장 의 피해 또한 격심하여 그들 중에서도 강옥봉에 맞설 만한 절정고수 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강옥봉은 허표와 전력이 싸우는 곳으로 달려가면서 양만균에게 크게 외쳤다. "양 형! 성심장 도당들은 하나도 놀치지 말고 죽여 버리시오." 양만균은 분노에 찬 마음에 대답도 없이 즉시 몸을 날려 성심장 도당 들을 추격해 갔다. 그는 바닥에서 검을 집어 들어 허공으로 휘두르다가 돌연 앞을 향해 힘껏 던졌다. 채액! 검은 바람을 가르면서 날아가더니 정신없이 달려가는 한 성심장 도당 의 등에 꽃혔다. "악!" 그자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양만균은 그자의 등에 꽃힌 검을 빼더니 다시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허표와 전력과의 격전은 종국으로 치달려가고 있었다. "이압!" 전력은 매서운 기합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쌍장 으로 천라지망의 일초를 전개하여 보라때처럼 허표를 향해 덮쳐 내렸다. 허표는 전력의 무서운 기세에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겨우 반격을 가 했으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마치 험상궂은 악귀 같은 모 습이 되었다. "끼야아아아……" 그는 독기에 찬 괴성을 지르더니 비대한 몸을 솟구쳐 팔을 독수리 날 개처럼 벌리고 전력에게 덮쳐 내렸다. 그는 양패구상을 결 심하고 전신의 공력을 전부 집중한 것이다. 그 위세는 실로 놀라워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신법이 기쾌한 전력은 상대방의 무서운 공력을 미꾸라지처럼 교묘히 빠져 나가면서 쌍장으로 좌우를 후려쳤다. 꽈르르릉! 예리한 장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악!" 허표는 무서운 눈으로 전력을 노려보다가 맥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 았다. 전력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강옥봉이 섬전처럼 그의 앞으로 날아 내렸다. "전 형의 솜씨와 마음은 너무 독랄하구려. 이 피의 빛을 어떻게 보상 하겠소?" 전력은 숨을 세차게 몰아쉬면서 강옥봉을 응시했다. "당신은 일호 온서인 독검 구소양이 아니오?" "그렇소." 전력의 표정이 침중하게 변했다. "구 형은 나와 함께 칠대흉인에 속해 있으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이런 싸움에서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건 뻔 한 이치가 아니겠소?" 강옥봉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무림에서는 오직 승리자만이 있을 뿐이오. 전 형이 만일 본 방에 투 항한다면, 내 과거는 묻지 않고 중용하겠소. 그러지 않는다면 내 독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전력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흥! 구 형이야말로 어서 본 장에 투항하시오!" 그는 버럭 호통을 치며 쌍장으로 연거푸 삼 장을 갈겨댔다. 꽝! 꽈르릉! 강옥봉은 껄껄 웃더니 오른손을 잽싸게 움직여 검광을 번뜩이 며 맞서 갔다. 파팟! 전력은 그의 검법이 소문보다 훨씬 매서운 것을 알고 급히 피했으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검광을 피할 수가 없어서 닥치는 대로 쌍수를 휘둘렀다. 강옥봉은 그의 옆구리를 위협하더니 돌연 초식을 변화시켜 후면으로 돌아서며 팔을 향해 후려쳤다. 팟! "으윽……!" 전력은 왼팔이 싹둑 잘려 나가자 사색으로 변하여 슬슬 뒤로 피했다. 그러나 강옥봉은 공격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계속 접근하면서 전면을 위협했다. 전력은 겨우 공격을 피했으나 이제 완전히 겁에 질려 도저히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역시 무공이 고강했으나 이미 겁 을 먹고 기세가 꺾여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팟! 팟! 다시 빗발 같은 검풍이 몰아치면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 다. "아악!" 전력은 온몸이 난자된 채 바닥을 뒹굴다가 죽었다. 과연 강옥봉의 무공은 무적이라 불리기에 모자라지 않는 것이 었다. 강옥봉은 전력을 죽인 후 독검을 다시 검집에 꽃더니 주위를 둘러보 았다. 주위에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라 할 만큼 시체가 쌓여 있었 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번 싸움으로 적어도 성심장은 오 할 이상세력이 감퇴되었 을 뿐 아니라 회서방은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그의 이번 계략은 몹시 치밀해서 상당한 시간과 인력을 소모했 을 뿐 아니라 강옥봉 자신도 여러 번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이제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으니 그의 마 음은 기쁘기 이를 데 얼었다. 그때 멀리서 양만균이 허겁지점 달려왔다. 그는 성심장 고수 중에서 대여섯 명을 격살시켰지만 나머지는 모두 회서대전으로 들어가 버렸 다. 양만균 역시 진력을 너무 소모했기 때문에 감히 더 이상 추격하여 회 서대전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할 수가 없어 강옥봉에게 달려왔던 것이 다. 그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우뚝 선 채 호흡을 조절하고 있는 강옥봉을 보고 내심 놀라면서 물었다. "구 형, 왜 그러시오?" 강옥봉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척하며 씁쓸히 웃었다. "상세가 완쾌되지 못한 데다 다시 진력을 많이 소모시켰던 관계로 좀 피로하오. 아무래도 우리 두 사람은 이곳을 빠져 나가지 못할 것만 같소." 양만균이 자신있다는 듯이 힘있게 말했다. "염려하지 마시오. 놈들은 구 형의 독검에 이미 겁을 집어 먹고 감히 덤비지 못하고 있소. 그들은 단지 회서대전 안에서 슬슬 도망치기 시 작했는데 만일 놈들이 끝내 철수하지 않는다면 그 안에 배치된 금제 를 발동시켜 몰살해 버리도록 합시다." 그러나 강옥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놈들이 만약그 안에 배치해 놓은 금제를 미리 알아차리고 지하도로 빠져 나와 외부에 있는 두가장원에서 진을 치고 사수한다면 우리는 이 안에서 죽게 되오." 양만균은 냉소를 치면서 여전히 자신만만해 하였다. "총단 안에는 먹을 것도 많고 지내기가 불편하지도 않은데 놈들이 이 곳까지만 침입하지 않는다면야 이곳에서 죽을 리가 있겠소?" 강옥봉은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놈클은 외부만 사수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오 반드시 불을 놓든지 아 니면 독약 같은 것을 사용할 것이외다." 양만균은 그제서야 안색이 변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겠소?" 강옥봉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방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양만균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한데 그러려면 우선 회서대전 안으로 들어가야 하 오." "그럼 양 형께서 회서대전 안의 동태를 살펴보시오." 양만균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회서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회서대전 안에는 굵직한 촛불 두 개가 타고 있었으며 향연 이 가득했다. 모종의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충만해 있었다. 양만균도 칠대 흉인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었지만 이때만큼은 등골이 오싹 해지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 았다. "아…… 벌써 가버렸군." 성심장의 고수들은 이미 회서대전에서 물러갔음이 분명했다. 이때였다. 휘잉! 별안간 차가운 바람이 가늘게 몰아치면서 촛불이 꺼져 버렸고, 주위 는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양만균은 뭔가 이상이 있응을 직감하고 내심 크게 놀랐다. 바로 그때 돌연 뒤에서 한 줄기 냉풍이 엄습해 오는 것이 아닌 가? 쐐액! "앗!" 그는 급히 몸을 피했으나 이미 혈도가 마비되고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잠시 후 촛불이 다시 밝혀지고 강옥봉이 담담한 표정으로 양만균이 쓰러져 있는 앞에 서 있었다. 뒤를 이어 인기척이 들리더니 회서대전 뒤의 어둠속에서 인영들이 어 른거렸다. 그들은 바로 운봉랑, 곽희연, 손지유, 조중화, 부여송, 임표, 여풍 운, 악궁, 누남광, 방각, 곽일진, 운남평 등의 중인들이었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양만균을 바라보며 강옥봉의 주위에 몰려 들었다. "강 노제, 수고했네." 부여송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것으로 이제 회서방은 완전히 궤멸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네." 강옥봉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회서방주와 총호법을 처치하지 못했으니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총단이 와해되고 고수들이 전멸되었는데 그들 두 명이 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풀을 제거할 때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언젠가는 파시 돋아나게 마련 입니다. 회서방주를 제거하지 않는 한 회서방을 완전히 없앴다고는 할 수 없지요." 부여송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종적이 묘연한 회서방주를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회서방 의 수뇌인물들도 그자의 행적을 모르는데……" 강옥봉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양만균을 가리켰다. "양만균은 회서방주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로 하여금 회서방주에게 연락을 하게 한 후 그것을 추적해 가면 회 서방주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어서 그렇게 하도록 하게."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인 후 양만균에게 다가가 신중한 안색으로 혈맥 을 조사하다가 돌연 일지를 내뻗었다. 바로 절세의 기학 인 미망인을 시전하려는 것이다. 팟! 강옥봉의 손가락이 양만균의 태양혈에 격중되었다. 순간, "으어어……" 양만균은 괴이한 신음을 토하며 손을 허우적거렸다. 강옥봉은 그를 내려다보면서 사납게 외쳤다. "아리, 왜 이곳에 쓰러져 있는 거요?" 그제야 양만균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떴는데 눈동자가 흐리 멍덩하고 초점이 없어 자신의 코앞에 우뚝 서 있는 강옥봉의 모습조 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구 형…… 내가 잠깐 존 모양이오. 미안하외다." "괜찮소. 나도 몹시 피곤하니 양 형은 어서 방주님께 연락을 취하시 오. 그런 다음 편히 쉼시다." 양만균은 녈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지요. 나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으니 구 형이 대신 좀 해줘야겠소. 우선 중앙에 있는 향로로 가서 향로를 좌측으로 세 번 돌려 보시오." 강옥봉은 그의 말대로 향로로 다가가 좌측으로 세 번 돌렸다. 그러자, 끼이익! 나직한 음향과 함께 향로가 밑으로 쑥 내려가며 그 안에서 하나의 새 장이 불쑥 튀어나왔다. 새장은 창살이 사람이 손가락만큼 굵직했는데 그 안에는 깃털이 유달 리 반짝거리는 기형의 새 한 마리가 퍼득거리고 있었다. 새는 얼핏 매처럼 생겼는데 크기는 훨씬 작았다. 새의 발에는 작은 대롱이 매달려 있었다. "새장에 있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뇌응신조요. 그 새 의 발에 매달려 있는 대롱에 서신을 집어넣고 머리를 세 번 두들기면 뇌응신조는 방주님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게 되어 있소……" 강옥봉은 담담한 표정으로 양만균에게 물었다. "방주님이 지금 어디 계시는지 저 새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소위 회서방의 수석 온서라는 사람이 평소에 그렇게 물었다면 양만균 은 그가 가짜 인물이란 것을 즉각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정신이 몽롱해진 양만균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묻 는 말에 바른대로 대답했다. " 뇌응신조는 방주님과 정신적으로 감응되어 있기 때문에 방주 님이 어느 곳에 계시든 찾아갈 수가 있소. 구 형도 그걸 잘 알 텐데 왜 물어 보시오?" "하…… 내가 그만 깜박했소. 한데 총호법은 방주님과 함께 있소?" "총호법이 방주님의 특명을 받고 급히 나간 것은 알겠으나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오." 강옥봉은 잠시 생각하다 불쑥 물었다. "총호법은 두가장의 장주인 낙양대공자 두진악이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총호법인 두 공자는 방주님의 유일한 직전제자라는 걸 구 형도 잘 알고 있지 않소?" "……" 강옥봉은 가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손가락을 떼었다. "끄으음……" 양만균은 신음을 토하며 다시 인사불성 상태로 빠져 들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부여송이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사대공자 중에서 제일이라는 낙양대공자가 설마 회서방의 총호법일 줄은 미처 몰랐군. 그놈을 제거하지 않으면 필시 커다란 후환이 될 걸세." 강옥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돌연 하나의 인영이 대전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 인영은 녹의를 곱게 차려입은 냉상아였다. 냉상아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조금 어색한지 얼굴이 붉어 졌으나 강옥봉을 발견하고는 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봉랑!" 그녀가 태연히 강옥봉을 봉랑이라고 부르자 운봉랑을 비롯한 소녀들 의 안색이 야릇하게 변했다. 강옥봉은 내심 어색하기 그지없었으나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냉 낭자, 어서 오시오." 냉상아는 그가 자신을 아매라 부르지 않고 냉 낭자라 부르는 것을 보 고 사태를 짐작했다. 과연 강옥봉의 주위에 서 있는 여러 미소녀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 어있지 않은가! 그녀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봉…… 강 공자의 계획대로 회서방은 결국 멸망했군요. 하지만 본 장에서도 피해가 심각해요." "성심장에서는 몇 명이나 죽었소?" "어림잡아도 오륙십 명은 넘어요. 그 중에서도 팔대빈객 중의 네 사 람이 죽고 삼총관인 백효 전력과 성심오로 중의 신망 조패, 패권 혁 련후 등이 목숨을 잃은 것은 치명적이에요." 강옥봉은 자신의 예상대로 성심장의 타격도 막대한 것을 알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흠…… 하나 아직도 성심장은 절반 이상의 고수들이 남아 있겠구 려." 냉상아는 그를 곱게 흘겨보았다. "본 장의 씨를 아예 말리려고 하세요? 아마 한 번만 더 이런 타격을 입었다가는 본 장도 회서방의 뒤를 따르게 될 거예요." 여인의 묘한 심리였다. 그녀는 성심장주가 아끼는 애제자 중의 하나였지만 강옥봉을 만나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성심장을 헌신짝처럼 배반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 전 동문의 동지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보고도 모 르는 척했던 것이다. 강옥봉은 그녀와 몇 마리 대화를 더 나눈 뒤 중인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회서방이 무너진 이상 성심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무림을 장악하 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한편으로는 그들의 동 태를 면밀히 주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뇌응신조를 뒤쫓아가 회서방 주의 행적을 색출해야 할 겁니다."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누남광이 힘차게 입을 열었다. "그 일이라면 본 교에게 맡겨 두게. 배교의 천리추종 술은 천하제일이니 그 뇌응신조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능히 추격할 수 있을 걸세." 중인들은 몇 마디의 밀담을 더 나눈 후 회서대전을 빠져 나왔다. 제42장 낙가보 이곳은 황토먼지가 휘날리는 관도였다. 한중부 남쪽 교외에 있는그 관도에는 행인과 마차들의 왕래 가 그다지 많지 않은 곳이었는데 최근 며칠 사이에는 웬일인지 행인 들의 왕래가 부쩍 늘어났다. 행인들 중에는 가끔 뽀얀 먼지를 날리며 준마를 질풍처럼 몰고 달려 가는 경장 차림의 사람들도 있었다. 정오 무렵. 제법 무더운 햇살이 내리쪼이는 관도 위를 걸어가는 두 노소가 있었다. 노인은 온화한 얼굴에 은빛 수염을 나부끼며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 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십여 세쯤 되어 보이는, 체구가 가냘픈 동자 의 손목을 꼭 잡은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 동자는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 올려 묶었는데 두 눈에서 전광을 번쩍거리면서 사방을 살피더니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낙가보는 아직도 멀었나요?" 노인이 빙글 웃었다. "저 앞에 보이는 산굽이를 돌아서 이 리쯤만 더 가면 바로 낙가보다." 동자는 매우 기쁜 표정을 지었다. "낙가보에서 전개될 좋은 구경거리는 도대체 무엇이에요?" "얘야, 가보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 잠자코 있거라. 난들 어떻게 자 세히 알겠느냐?" 동자는 뾰로통해졌다. "할아버지가 모르신다면 전 가지 알겠어요." 동자가 땅에 주저앉자 노인은 인자스런 표정으로 껄걸 웃었다. "허허…… 오냐, 오냐. 내가 일러줄 테니 떼쓰지 말고 어서 일어나 라. 낙가보에서는 십 년 만에 한 번씩 신굿을 해왔는데 이번에는 보 주인 철수패공 낙일립이 비무대를 세워 놓고 군웅들을 초청하여 무공 시합까지 한다고 하는구나." 동자는 그제서야 못 이기는 척하면서 일어서더니 히죽 웃었다. "평소에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싫어하셔서 주루에 가셔서도 겨우 두어 잔만 마시고 일어나시는 성미이신데 이번에는 먼 낙가보까지 찾아가시니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노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 제법 영리하구나. 소문에 의하면 낙일립이 공래산 절정에서 천년이나 묵은 구엽인삼을 한 뿌리 캐었는데 그 인삼은 보통 사람이 먹으면 장수할 수 있으며 무공을 연마한 인물이 먹으면 골수를 세척시키고 생사현관이 소통되어 최 고의 무공을 이룰 수 있단다." 그들은 길을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낙일립이 이번에 보 내에 비무대를 설치해 놓고 군 웅들의 무공 시합을 벌여 누구라도 무공이 제일 뛰어난 사람에게는 그 구엽인삼 반 뿌리를 주기로 약속했단다. 너도 보았지? 지금 말 타 고 급히 지나가던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무림인들로 모두 구엽인삼 에 욕심을 내고 낙가보를 찾아가는 중이란다." 동자는 알았다는 듯 맑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저에게 그 무공 시합을 구경시켜 주려고 데리고 가시는군요?" 노인은 여전히 인자하게 웃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번 군웅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구엽인삼의 잎으로 끓인 진귀한 인삼차를 한 잔씩 준다고 하기 에 너에게 얻어 먹여 체력을 건강히 하고 수명도 늘려 주려는 것이 다." 동자는 기뻐하면서 웃었다. "할아버지는 무공을 모르시는데 그곳에 갔다가 남들이 무공을 모른다 는 것을 알게 된다면 괜히 창피만 당할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인삼차 한 잔씩 얻어 마시면 그만이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서 무공 시합만 구경하고 있을 터인데 누가 우리들을 괜히 의심 하겠느냐?" 이때 누군가의 낭랑한 음성이 뒤에서 들렸다. "비무대 안으로 들어가려면 세 군데의 관문을 통과해야 되는데 무공을 모르는 두 분이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려고 그러시오?" 그 노인은 누가 따라오면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줄을 모르 고 있다가 내심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뒤에는 남포장삼에 부채를 든 준수한 청년이 웃음띤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서 있었다. 남포청년은 키가 훤칠했고 이목구비가 수 려했다. 노인은 그의 눈빛이 별빛처럼 차갑고 예리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움 찔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그 세 군데 관문을 통과할 수 있겠는가?" 남포청년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낙가보에서는 상대방이 무림인이라는 것을 증명한 뒤에야 통과시켜 주기 때문에 누구나 무공 솜씨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자 동자가 할아버지에게 졸랐다. "할아버지, 우리 그만 되돌아가요." 남포청년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영조부께서 먼 길을 오셨는데 어찌 그냥 돌아가겠느냐? 그 러니 아무 말 하지 말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고는 앞장서서 걸어가자 노인은 동자와 같이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산굽이를 돌아서 보리밭 사이를 지나자 저 멀리 울창한 숲이 보이며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깽…… 깨갱! 그 근방에 또니 길에는 행인이 많았으며, 모두가 병장기를 소유한 무 림인들인 것을 보니 낙가보로 가는 것 같았다. 남포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인과 동자를 데리고 낙가보 가까 이에 당도했다. 낙가보의 범위는 매우 커서 외보와 내보로 나뉘어 있었 다. 외보에는 천 호의 인가가 들어차 있었으며 길거리 좌 우에는 상점들이 많았다. 외보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하나의 완벽한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평소에 없었던, 찬란하게 장식된 은등들이 줄을 지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방문객들을 환영하는 것 같았다. 내보는 낙일립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낙가보의 넓이는 십만여 평 정도였는데 주위에는 붉은 담장이 높이 둘러져 있어서 하나의 장원을 이루었고 작은 자갈이 깔린 마차 길이 반듯이 나 있었다. 보문 앞에는 손님들을 안내하는 낙가보의 고수 십여 명이 양쪽 에 서 있었다. 남포청년이 노인과 동자를 데리고 럴문 앞에 당도하자 한 사나이가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혔다. "귀하는 명부에 성명과 문파를 기입해 주시오." 그는 옆에 놓인 탁자 위의 명부를 가리켰다. 남포청년은 노인과 동자를 돌아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동행이니 내가 대신 모두 적겠소." 이어 붓을 들어 웅건한 필체로 단숨에 내리갈겼다. <감숙의 흑운보 설일비와 고영, 그리고 손자 고태룽.> 그는 자신을 감숙의 설일비라 적고, 노인과 동자를 고영과 고태릉이 라고 적은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사나이는 매우 의아스러웠다. "흑운보…… 무림에 언제 이런 문파가 있었나?' 그는 남포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는 식견이 좁아서 흑운보란 이름을 처음 듣소이다. 그러나 흑운보 주는 반드시 유명하신 인물일 테니 죄송하지만 보주의 높으신 성함이 나 알려 주시오." 남포청년, 설일비는 낭랑하게 웃었다. "흑운보 사람들은 중원에 나온 일이 없었으므로 귀하가 처음 듣는 것 도 무리는 아니오. 그러나 낙 보주께서 이미 손님들을 초청하였고 손 님들은 그 초청에 의해 찾아온 것이니 귀하가 저희들을 거절하진 않 겠지요?" 사나이는 말문이 막히자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그럼 귀하가 한 가지 솜씨를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설일비는 희미하게 웃으며 몸을 돌리더니 길가에 있는 큰 나무를 향 해 들고 있던 섭선을 가볍게 부쳤다. 순간, 쿠아아아아아…… 굉음과 동시에 나무가 세차게 흔들리면서 굵은 가지가 부러지고 잎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줄을 지어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있던 무림인들은 설일비의 그런 무 공을 보고 모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원래 섭선같이 얄팍한 물체에 강기를 주입시켜 펼쳐 낸다는 것 은 웬만한 내공의 소유자는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이었다. 낙가보에서 나온 그 사나이도 탄복하면서 부러진 나뭇가지 가까이에 가서 살펴보았다. 나뭇가지는 마치 예리한 무기에 잘려진 듯 반듯하 게 잘려져 있었다. 이것을 보자 그 사나이는 안색이 잿빛으로 변해 급히 설일비에게 포 권하면서 허리를 굽혔다. "소인이 눈이 어두워 대협을 몰라뵈었으니 널리 용서하시고 세 분은 안으로 드십시오." 설일비는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보 내로 들어섰다. 장내에는 웅장한 전각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고, 정원에는 사 철나무와 꽃들이 잘 가꾸어져 있어 향기가 상래했다. 세 사람이 큰 전각을 돌아서 들어가자 넓은 정원 가운데에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비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비무대 동서에는 여덟 군데의 천막이 쳐져 있었고, 천여 명이 앉을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천막 안에는 이미 백여 명의 군웅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호탕하게 웃 고 있었고, 인부들은 술과 안주를 들고 부산하게 왔다갔다하고 있었 다. 설일비는 노인과 동자를 데리고 빈자리에 앉았다. "오늘이 유월 그믐이니 우리는 내일부터 좋은 구경을 하게 되겠군." 노인이 말을 받았다. "노부와 이 아이는 보잘것없는 존재인데 그대의 덕택으로 무사히 들 어오게 되어 정말 감사하네." 설일비는 미소 지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이 정도 일로 감사해 하실 게 뭐 있습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 시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쪽을 보더니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낙 보주가 오는군." 설일비가 시선을 돌려 쳐다보니, 흑의사내 네 명이 하얀 머리칼에 풍 모가 위엄스럽고 키가 후리후리한 노인을 호위하면서 걸어오고 있었 다. 그들이 들어간 천막은 군웅들이 앉아 있는 천막과 약간 거리가 떨어 졌고 손님도 적어서 매우 조용했다. 백발노인은 바로 낙가보의 주인이며 강호의 유명한 고수인 철수패공 낙일립이었다. 낙일립은 주위를 살피더니 좌중을 향해 물었다. "어느 분이 흑운보에서 오신 설 대협이시오?" 설일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바로 설일비입니다." 그러자 낙일립은 시선을 돌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노부가 듣건대 수하들이 설 대협을 몰라뵙고 실례를 범한 모양이니 노부가 안으로 모셔서 심심한 사과를 드리겠소." 설일비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저같이 명성도 없는 존재가 어떻게 감히 과분한 대우를 받겠습니까? 더욱이 저는 성미가 운학 같아서 사소한 일은 마음에 새겨 두 지도 않으니 보주께서는 그 점에 대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낙일립은 호탕하게 웃었다. "설 대협은 정말 쾌활한 분이오. 그럼 나는 안에 볼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소." 그는 포권의 예를 취한 후 네 사나이들을 대동하고 천막에서 나와 안 쪽으로 갔다. 이때 설일비 등이 앉은 좌석에 음식이 들어왔다. 그러나 설일비는 자리에 앉더니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참선에 들어간 승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노인은 한동안 그를 주시하다가 술잔에 술을 부어 들고는 동자에게 말했다. "얘야, 목이 컬컬해서 우선 한잔 마셔야겠다." 노인은 느릿하니 술잔을 기울이며 안주를 집어먹었다. 손님들은 계속 밀려들었고, 빈자리가 많았던 천막 안도 겋점 사람들 로 붐비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는 서산을 넘어갔다. 천막마다 등불이 환히 밝혀졌고 여러 군웅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돌연 눈을 감고 있던 설일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이곳에서 노인장파 헤어져야겠소." 노인은 술을 마시다가 어리등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늦은 시각에 어딜 가려는가?" "다른 사람과 만날 약속이 있소." 설일비는 노인이 더 뭐라 할 여유도 주지 않고 기쾌무비한 신법으로 여러 인파들의 틈을 지나서 밖으로 사라졌다. 노인은 멍하니 그의 됫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 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그의 귓전으로 나직한 전음성이 들려 왔다. "강 노제, 냉 낭자의 전갈이 왔네." 전음성을 발한 사람은 노인의 뒤쪽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머리가 부 스스한 중년대한이었다. 노인은 그 중년대한이 부여송의 변장임을 알아보고 이음전성으로 말 했다. "그녀가 뭐랍니까?" "조금 있다 초경이 지날 무렵에 뒤쪽 죽림에서 자네를 만나자 고 했네."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는 물론 강옥봉의 분신이었다. 강옥봉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성심장에서 이번에 낙가보를 이용해서 군웅대회를 연 의도는 회서방 과의 격전에서 잃은 고수들을 총원하려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이번 에 낙가보에 온 고수들은 얼마나 됩니까?" 부여송은 다시 술을 한잔 들이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전음을 보냈다. "어림잡아 칠팔백 명에 달한다네. 그들은 모두 무림의 고수들이니 실 로 엄청난 숫자일세." "음…… 그런데 부 대협께서는 혹시 조금 전 저와 동행했던 남포청년 의 정체를 아십니까?" "흑운보에서 왔다는 그 설일비라는 인물 말인가?" "그렇습니다." "노부가 단언하건데 무림에 흑운보라는 문파는 아직 없네. 아마 설일 비라는 이름도 필시 가명일 걸세. 그리고 그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겠네." 강옥봉은 눈살을 조금 찡그렸다. "그자의 무공은 자에 못지않습니다. 성심장의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도지 정체를 파악할 수 없으니 담담하군요. 방 노인에게 연락해서 그 자의 일거일동을 은밀히 감시하라고 일러주십시오." "알겠네." 부여송은 술을 한 잔 더 들이킨 후 자리에서 일어나 비실비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동자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강옥봉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배시시 웃 었다. "냉 낭자와 만나기로 하니까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지요?" 동자는 강옥봉에게 전음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그 음성은 옥구슬이 굴 러가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더구나 말한 내용으로 보아 조금 전 강옥봉과 부여송의 대화 내용을 알아들은 것 같은데, 이음전성을 듣는다는 것은 내공이 가 히 출신입화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강옥봉은 동자를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 낭자도…… 농담이 심하시구려." 동자는 바로 한달기 조옥환이 변장한 것이었다. 조옥환은 은밀한 곳에서 유령천자의 무공을 연성한 후 바로 얼 마 전에 다시 무림에 출도했던 것이다. 그녀가 강옥봉과 동행할 것을 하도 졸라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남들 의 이목을 숨기기 위해 조손으로 변장하고 길을 떠난 것이다. 강옥봉은 그녀가 또 뭐라고 할지 몰라 급히 술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얘야! 이 할아비에게 한 잔 더 올리려무나." 그의 음성은 어느새 늙수그레한 노인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조옥환은 혀를 낼름해 보인 뒤 일부러 잔이 철철 넘치도록 술을 부었 다. "할아버지, 많이 드시고 이 환아를 귀여워해 주세요." 강옥봉은 내심 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이 할아비의 말만 잘 듣는다면 무엇인들 못 해주겠느냐? 허허 ……" 조옥환도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며 나직이 웃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 조손이 무엇 때문에 웃는지 몰라 어리둥 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경 무렵. 낙가보의 외보 깊숙한 곳에 있는 죽림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 었다. 달도 뜨지 않는 그믐날이라 주위는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웠고, 괴 괴한 어둠 속에 쭉쭉 뻗어 있는 대나무들은 왠지 음산한 분위기를 풍 기고 있었다. 이때 돌연 죽림 앞에 한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인영은 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녹의를 걸친 훤칠한 키의 여인이었다. 녹의복면녀는 번갯불 같은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죽림 속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리며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 다. "아매, 여기요." 녹의복면녀는 급히 고개를 돌리다 어둠 속에 강옥봉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반색을 하며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봉랑!" 녹의복면녀는 바로 냉상아였다. 강옥봉은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히 웃었다. "남들이 보면 웃겠소. 그보다, 급히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요?" 냉상아는 강옥봉의 품속에 깊이 파묻혀 그의 남성적인 체취를 가득 음미하다가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봉랑은 그저 일밖에 모르는군요…… 혹시 일양검 막철룡 이란 분을 아세요?" "막철룡? 중주삼웅 중의 하나인 그 막철룡 말이오?" 강옥봉은 흠칫 놀랐다. 막철룡은 금창수 임표와 팔비도룡 여풍운과 함께 중주삼웅으로 불리 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돌연 실종되어 임표와 여풍운은 크게 의아해 하고 있었다. 냉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막철룡은 사실 오래 전에 섣심장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 래서 여 대협이 유령고전을 입수했던 것도 성심장에서 제 일 먼저 알게 되었던 거지요." 그녀는 본 장이라고 하지 않고 아예 다른 문파를 말하듯 성심장이라 고 말했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의 마음은 성심장에서 완전히 떠나 있 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강옥봉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막 대협이 갇힌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었소 막 대협은 지금 어디에 있소?" 냉상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배시시 웃었다. "어딘지 알아맞혀 보세요." 강옥봉은 총명 절세한 인물답게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그가 이 낙가보에 감금되어 있다는 말이오?" "호호…… 봉랑은 과연 눈치가 빠르군요." "그렇다면 내 짐작대로 낙가보는 성심장의 세력이오?" "단순히 그뿐인 줄 아세요? 사실대로 말하자떤 낙가보는 바로 성심 장, 그 자체예요." 강옥봉은 흠칫 놀랐다. "그게 정말이오?" "그래요. 낙가보의 외보와 내보를 통틀어 성심장이라고 해요." "으음…… 그렇다면 낙가보주인 낙일립은……" "그는 성심장의 수석총관이에요. 뿐만 아니라 낙가보의 총 관인 비호 서횡은 얼마 전에 죽은 백효 전력을 대신해서 성심장의 삼총관에 임명되었어요." 강옥봉은 문득 황산의 절영곡 안에서 보았던 꾀죄죄한 몰골의 약삭빠 른 노인이 기억났다. "서횡도 성심장에 포섭되었소?" "그는 절영곡에서 이총관 고우성을 따라 이곳에 왔어요. 낙가보에서 재주를 인정받아 총관이 되었다가 전력이 회서방 총단에서 죽자 대신 삼총관으로 봉해진 거지요." "정말 굉장한 출세를 했군." 냉상아는 피식 웃었다. "비웃지 말아요. 그래봬도 그 여우같은 늙은이는 꾀가 많고 재주가 비상해서 이곳에서도 지낭으로 통하고 있어요." 그녀는 붉은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축인 후 말을 이었다. "내일 다시 이곳으로 오세요. 그러면 제가 막철룡이 감금된 곳을 알 려 드리겠어요. 그분은 이미 갇힌 지가 오래되어 빨리 구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을 거예요."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 였다. "알겠소. 그리고 참……! 한 가지 알아봐 줘야 할 일이 있는데……" 강옥봉은 문득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른 일 때문이었소. 내 짐작이 틀림없 다면 회서방주는 바로 이 낙가보에 와 있을 거요." 그 말에 냉상아는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소. 회서대전에서 뇌응신조를 날려 추적한 결과, 뇌응신조는 바 로 이 낙가보 안으로 들어갔소. 이것은 누남광 노인이 배교의 전고수 들을 동원하여 알아 낸 것이니 틀림이 없을 거요." "아……!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그러니 아매는 지금부터라도 낙가보 내에서 행적이 수상하거나 낯선 인물을 보게 되면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보에는 누가있소?" "낙가보의 내보에는 성심장의 중요한 인물들이 거주하고 있어요. 그 건 왜 물으시죠?" 강옥봉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누 노인의 말로는 아무래도 뇌응신조가 향한 곳이 낙가보의 내보인 듯하다 하오." "그럼 회서방주가 성심장의 인물로 행세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럴 확률이 크오." 냉상아는 입을 반쯤 벌리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군요. 성심장의 고수들은 모두 엄격한 심사 를 거쳐 선발된 인물들인데 회서방주가 그들 틈에 끼여 있다니……" "확실한 것은 아니니 너무 속단하지 마오. 그리고 군웅대회 는 언제부터 개최되오?" "내일이에요. 성심장에서 군웅대회를 개최하는 이유는 알고 계시지 요?" "아무래도 그들은 회서방과의 격전에서 입은 결원을 보충하려 는 것 같소. 아니오?" 냉상아는 방긋 웃었다. "과연 봉랑의 머리는 보통이 아니군요." "하하…… 이렇게 칭찬만 받다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겠소. 더 늦기 전에 아매는 어서 가보시오." 냉상아는 아쉬운 듯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꼭 이곳으로 나오세요." "알겠소." 두 남녀는 아쉬운 작별을 하고 서로 죽림을 빠져 나와 다른 길로 사 라졌다. 다시 죽림은 적막에 잠긴 채 괴괴한 어둠에 싸여 있었다. 제43장 무영멸절장 이른 아침부터 낙가보는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이 바로 낙가보에서 군웅대회가 개최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많은 무림인들이 아침 일찍부터 설레는 가슴을 안고 낙가보로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시경.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비무대 주변에 쳐 있는 천막들이 러 이상 비집 고 들어갈 틈도 없이 미어질 무렵. 쾡! 징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반경 십여 장의 거대한 비무대 위로 한 사람이 올라왔다. 그는 게딱지 같은 얼굴에 고슴도치 같은 수염을 기른, 체구가 왜소한 노인이었다. 군웅들 중 몇 사람이 노인의 얼굴을 알아보고 경호성을 터뜨렸다. "앗? 저자는 꾀주머니 서횡이다!" "여보시오, 고은 여우! 그곳에는 뭣 하러 올라갔소?" 여기저기서 외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나 노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입가에 빙긋 미소를 머금으며 비 무대의 중앙으로 가서 손을 들어 주위의 소란을 제지했다. "강호제현 여러분! 노부는 낙가보에서 총관을 맡고 있는 서횡이라 하오. 오늘 본 보에서 개최하는 군웅대회에 참가해 주 신 것에 우선 감사를 드리외다." "와아아……!" 주위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와 그를 비웃던 소리들을 묻어 버렸 다. 서횡은 함성이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이미 알려진 대로 천하의 영약인 구엽인삼 반 뿌리를 주겠소." 그러자 대 아래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물었다. "서 노인! 나머지 반 뿌리는 그럼 어디로까는 거요?" 서횡은 히죽 웃었다. "그거야 인삼의 원주인이신 낙 보주께서 이미 해치우셨소이다." 그는 말을 하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군웅들은 이것을 보고 와, 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서횡은 손을 흔들어 그것을 제지하고 말을 이었다. "이번 군웅대회의 규칙이 약간 특이함을 여러분께 미리 알려 드리겠 소. 누구든지 다섯 명의 고수들을 연달아 격파한다면 일차관문 을 통과한 것으로 하겠소. 또 북을 열 번 칠 때까지 상대가 나 타나지 않아도 역시 통과한 것으로 간주하겠소. 내일까지 예선전을 벌여서 일차관문을 통과한 사람끼리 결선을 벌일 것이오." 이어 그는 주위를 한차례 쓸어본 후 소리쳤다. "그러면 지금부터 군웅대회를 시작하겠소!" "와아아……!"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함성 소리가 한동안 장내를 뒤흔들었다. 서횡이 비무대 아래로 내려가자 어느새 대 위로 한 인물이 올라왔다. 그는 구릿빛 얼굴에 어깨엔 괴이한 무기를 멘 사나이였다. 그 사나이는 군웅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본인은 제남의 철비웅 하력산이라고 하오. 어느 분이 먼저 가르침을 내리겠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휘익! 하력산 앞으로 한 인영이 날아 내려왔다. 그의 신법은 아주 표홀해서 군웅들 틈에서 탄성이 절로 일어났다. 그자는 얼굴이 창백하고 몸이 홀쭉한 흑의인이었다. "나는 흑선풍 곽달이라 하오. 내가 먼저 귀하에게 도 전하겠소." 이어 두 사람은 서로 맹렬하게 병장기를 휘두른 채 격전을 벌이기 시 작했다. 파파팍! 두 사람의 무공은 상당해서 대위는 금세 도풍과 검영이 난무했다. 그들의 실력은 막상막하여서 좀처럼 승부가 판가름날 것 같지 않았 다. 많은 군웅들은 비무대의 좌우에 마련된 천막에 앉아서 두 사람의 대 결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보고는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듯 무표정한 상태였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술만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 특히 남포를 걸치고 손에 섭선을 든 준수한 청년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그는 바로 설일비였다. 그가 비무대를 바라보며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아! 자네 여기 있었군." 등뒤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 왔다. 설일비가 흠칫 놀라 돌아보 니 어제 만났던 노인과 동자가 손을 잡은 채 나란히 서서 그를 바라 보고 있었다. "노인장이었구려. 무슨 일이시오?" 노인은 동자를 데리고 그의 옆에 틸썩 앉으며 웃었다. "무슨 일은…… 이곳에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자네밖에 더 있겠 나?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혹시 자네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여 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었다네" 이어 그는 앞에 놓인 술잔을 서슴없이 들이켰다. "크……술맛 좋다! 환아야, 한 잔 더 따라라." 동자는 잽싸게 술병을 들고 노인의 술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설일비는 두 조손을 응시하다가 파식 웃으며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 다. 그때 비무대에서는 이미 몇 차례의 격전이 끝나고 새로운 고수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와아……" 갑자기 군웅들이 함성을 질렀다. 비무대 위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던 두 고수 중 혈검을 휘두르 는 청삼인이 막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자는 혈성검 동운이라는 인물인데 연속 두 번의 격 전을 승리로 이끌고 얼굴 가득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또 어느 분이 이 동 모에게 가르침을 주시겠소?" 순간, "크흐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겨우 피라미 두 명을 꺾어 놓고 기고만장이로군." 돌연 대 아래에서 음침한 괴소가 터져 나왔다. 동운은 눈초리를 짙게 꿈틀거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느 분인지 자신이 있으시면 숨지 말고 정정당당히 모습을 나타내 시오." 순간, "크크크…… 죽고 싶다면 노부가 상대해 주지." 예의 음충맞은 괴소와 함께 한 인영이 비무대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칙칙한 흑의를 입은 그는 음침하게 생긴 육순 가량의 노인이었는데, 손에는 귀두도를 들고 눈빛을 아주 음산하게 번뜩이고 있었 다. 동운은 그를 보자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앗? 귀…… 귀하는 혹시 염라도 귀거상 노사 가 아니시오?" 그 말에 군웅들 틈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염라도 귀거상은 무림의 구대도객 중 하나로 마도에 서 손꼽히는 고수일 뿐 아니라 마음이 매우 흥악하여 흑백양도의 고 수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귀거상은 음산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 이제야 알아봤나 보군.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동운은 상대가 흥악하기로 이름난 귀거상임을 알자 싸우고 싶은 마음 이 쑥 들어가 버렸다. 하나 그렇다고 수많은 군웅들이 지켜보고 있는 데 싸워 보지도 않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 동 모는 기꺼이 귀 노사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겠소이 다." 이어 수중에 든 혈검을 뽑아 들었다. 창!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시뻘건 혈광이 피어오르자 귀거상은 어이가 없 다는 듯 피식 웃었다. "크흐……이 놈이 죽고싶어 환장을 했군. 감히 노부인 줄 알면서도 덤비려 하다니……" 그는 주저없이 깡마른 손을 내밀어 동운의 혈검을 잡아채 왔다. 쐐액! 아직 도를 펼치지도 않았는데 일진에 매서운 기운이 동운의 손목을 노리고 덮쳐 왔다. 동운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혈검을 휘둘러 귀거상의 양미간을 노려 갔다. 싹! 날카로운 혈광이 일직선을 그으며 귀거상의 이마를 향해 폭사되었다 귀거상은 움찔하여 옆으로 한걸음 물러서며 염라도를 움켜잡았다. "흥! 제법 한 수가 있군……" 귀거상은 냉소와 함께 염라도를 뽑아 세차게 휘둘러댔다. 파파파파…… 싸늘한 도기가 마치 폭죽 터지듯 동운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동운은 그 엄청난 위세에 놀라 사색이 된 채 혈검을 휘둘렀다. 땅! 따땅! 도기에 탕는 순간 그의 혈검은 산산이 박살나 사방으로 파편을 날렸다. 동시에, "크아악!" 동운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 져 버렸다. 그의 전신은 마치 예리한 톱날에 짓이긴 듯 수십, 수백 개의 칼자국 이 나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도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흐흐…… 가소로운 놈!" 귀거상은 음산한 괴소를 흘리며 염라도를 칼집에 도로 꽃았다. 군웅들은 그의 악독한 도법에 치를 떨며 박수를 보내는 것도 잊은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귀거상은 잔인한 빛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쓸어보며 소리쳤다. "어느 놈이 감히 노부에게 도전을 하겠느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방금 그의 악랄한 솜씨를 보았으니 누가 선뜻 나서려 하겠는가! 귀거상은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흘리며 북을 열 번 치기만을 기다렸 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런 솜씨로 천하무적인 양 설치다니…… 도저히 눈뜨고는 못 보겠 군." 어디선가 낭랑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들려 왔다. 귀거상은 눈을 부릅뜨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느 놈이 함부로 아가리질을 하는 게냐?" 한 사람이 천천히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바로 설일비였다. 군웅들은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남포청년이 대마두인 귀거상에게 도 전을 하자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귀거상은 설일비가 여유 작작하게 섭선을 부치며 자신의 앞으로 걸어 오는 것을 보자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이 피라미 새끼야. 네놈은 누구냐?" 설일비는 귀거상의 거친 욕설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본 공자는 네 찰아비시다." "뭐라고?" 귀거상은 안면 근육을 실룩거리더니 냅다 고함을 쳤다. "뒈져라, 이 미친놈!" 그는 냅다 설일비를 향해 주먹을 후려갈겼다. 콰릉! 요란한 음향과 함께 무서운 권세가 설일비를 향해 몰아쳐 갔 다. 하나 설일비는 담담한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다가 슬쩍 섭선을 흔들 었다. 순간, 꽝! 비무대가 뒤흔들릴 듯한 폭음이 터지며 귀거상이 뒤로 주르르 밀려나 는 것이 아닌가! "음……" 귀거상은 충격이 심한 듯 낯빛이 창백해절다. 그는 상대가 자신의 일격을 간단히 격퇴시킨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설일비를 노려보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놈! 노부를 원망하지 마라!" 그는 염라도를 뽑아 들고 설일비를 향해 덮쳐 들었다. 파파파! 예의 폭발할 듯한 도기가 일어나며 설일비의 전신을 뒤덮었다. 하나 설일비는 슬쩍 허공으로 몸을 날려 도기를 피한 후 우장을 뒤집 으면서 오히려 귀거상의 칼등을 잡으려고 쭉 앞으로 뻗어 냈다. 그 수법은 능란하고도 쾌속하기 그지없어 절대고수의 그것에 못지않 았다. 귀거상은 상대방의 무공이 괴이한 것을 직감하고 급히 옆으로 피했 다. 하나 상대의 손 그림자는 몹시 집요해 계속 접근해 오는 장영 을 피할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에잇!" 파파파파…… 그는 염라도를 세차게 휘두르면서 계속 뒤로 피하며 상대의 손을 벗 어나려 했다. 그러나 설일비는 계속 교교한 신댑으로 접근하면서 장력을 날려 위협 했다. 그의 장력은 몹시 특이하여 언뜻 보기에는 별다른 위력이 있는 것 같지 않지만 장세 속에 갇힌 사람은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지 고 심맥이 절단나는 가공할 위력이 담겨 있었다. 귀거상은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급히 도기를 휘둘러 막아 냈 다. 꽝! 시퍼런 불꽃이 튀기면서 겨우 장력은 막았으나 다시 덮쳐 오는 노도 같은 암경을 보자 귀거상은 암담한 표정이 되었다. '으…… 대체 이게 무슨 장법이란 말인가!' 그는 미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계속 뒤로 밀려나갔다. 설일비는 비무대의 한쪽 끝까지 귀거상을 밀고 나가더니 돌연 쌍장을 마구 휘두르며 괴이하기 짝이 없는 장세를 발출해 냈다. 고오오오…… 귀거상은 사색이 된 채 있는 힘을 다해 염라도를 휘둘렀다. 파파파팍! 장세와 도기가 허공에서 격돌하며 괴이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돌연 설일비는 웬일인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손을 멈추었다. 그 순간, "쿠우욱!" 귀거상은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비틀거리더니 입에서 선혈을 왈칵왈칵 토해 냈다. 선혈 속에는 잘려진 내장 조각이 섞여 있었다. "으으…… 이렇게 무서운 장공이 있다니……" 귀거상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염라도를 놓고 힘없이 바닥 에 나뒹굴고 말았다. 쿵! 그의 몸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관전하고 있던 여러 군웅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가, "와아…… 최고다!" 군웅들은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설일비는 느긋한 표정으로 비무대에 우뚝 선 채 주위의 군웅들을 향 해 포권을 해보였다. 준수한 용모의 그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비무 대 중앙에 우뚝 서 있자 그야말로 바람 앞에 선 옥수 같았다. 대 아래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동자는 노인을 향해 전음을 날렸 다. "강 공자, 저자의 장공은 몹시 특이하군요. 혹시 무슨 장공인 지 아시겠어요." 노인, 강옥봉은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설일비의 미소 띤 얼 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나직이 이음전성을 보냈다. "무림에서 저런 위력을 가진 장공은 오직 하나밖에 없소." 동자는 급히 물었다. "그게 무언가요?" 강옥봉은 잠시 침음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마도칠대장공 중의 수위인 무영멸절장 이오." "아!" 동자, 아니 조옥환은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토해 냈다. 무영멸절장은 비록 우내칠대무학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가공무쌍한 장공이었다. 이 무영멸절장은 보이지 않는 암경 속에 쇠로 만든 금강동인 이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한 엄청한 위력이 숨겨져 있었다. 지난 백여 년 동안 무림에서는 이 장공을 익힌 사람이 아무도 없었 다. 한데 약관의 설일비가 그 무영멸절장을 익히고 있을 줄이야…… 조옥환은 고운 아미를 찡그리다가 불쑥 물었다. "저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점점 더 궁금해지는군요. 강 공자께서는 저 자의 무영멸절장을 막아 낼 자신이 있으세요?" 강옥봉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알기로 무영멸절장은 우내칠대무학에는 속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소." 그는 비록 말을 돌려서 했으나 조옥환은 단번에 그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무영멸절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우내칠대무학보다는 아무 래도 약간의 손색이 있다. 그래서 우내칠대무학에 끼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강옥봉은 우내칠대무학 중에서 두 가지를 익히고 있으니 무영 멸절장으로 어찌 그를 꺾을 수 있겠는가? 조옥환은 어두웠던 마음이 활짝 풀어져 입가에 엷은 미소를 매달았 다. "그렇다면 저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겟군요. 적 이라면 강 공자의 상대가 되지 않을 테고, 적이 아니라면 더 말 할 나위도 없고요……"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오. 저자의 무공이 무영멸절장뿐이라는 보장도 없고, 또 저 정도의 절세고수가 성심장에 합세하면 아무래도 일이 어려워지지 않겠소." 조옥환의 아미가 다시 찡그려졌다. "과연 저자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이런 시기에 성심장에 저런 신비의 인물이 불숙 나타난 것이 아무래 도 석연치 않소. 저 정도 무공이라면 굳이 구엽인삼 같은 것을 필요 로 하지도 않을 텐데…… 어쨌든 조만간 그자에 대해 알게 될 날이 있을 거요." 그 말을 끝으로 강옥봉은 입을 다물었고, 조옥환도 더 이상 묻지 않 았다. 왜냐하면 설일비가 비무대에서 내려와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북이 열 번 울리도록 적수가 나타나지 않아 일차관문을 통 과한 상태였다. 강옥봉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껄껄 웃었다. "허허…… 축하하오, 설 공자. 과연 노부의 짐작대로 이번 대회에서 제일 먼저 일차관문을 통과하셨구려." 설일비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노인장." 강옥봉은 마주앉으며 술잔을 내밀었다. "자, 한잔 받으시오. 노부가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잔 따라 드리겠 소." 설일비는 사양하지 않고 잔을 받아 마셨다. 강옥봉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그를 묘한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었 다. 설일비. 과연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제44장 막철룡 석양이 짙어 붉은 노을도 점점 잿빛으로 변하고 땅거미가 서서히 깔 리고 있었다. 신록으로 우거진 나뭇잎들도 조금씩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새들은 둥지를 찾아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낙가보의 외보 뒤편에 있는 울창한 죽림 앞. 돌연 일진의 미풍과 함께 죽림 앞에 강옥봉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노인으로 변장한 상태였다. 그는 냉상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죽림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문득 그는 시선이 마치 무엇에 끌린 듯 한곳에 집중되더니 유난히 커 다란 대나무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 그는 대나무에 녹색 제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매우 기뻐했다. 그는 한눈에 그것이 냉상아가 그린 그림임을 짐작한 것이다. 냉상아의 외호는 무정독연이고 그녀는 녹의를 즐겨 입으니 녹색 제비는 그녀가 자신을 나타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녀는 왜 직접 나타나지 않고 표기를 남긴 것일까? 어쨌든 따라가 보자.' 강옥봉은 제비의 부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삼 리쯤 달려가자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창공에는 별들만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스쳐 갈 때마다 나 뭇가지가 서로 마찰하면서 내는 소리는 마치 유령들의 괴소와도 같아 서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강옥봉은 또 다른 큰 대나무 아래에서 걸을을 멈추더니 화섭자를 꺼 내 불을 밝혔다. 순간 나무에 또 한 마리의 녹색 제비가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비의 주등이에 생선 한 마리가 물려져 있었던 것 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강옥봉은 생각을 굴리다가 눈을 반짝였다. '이 그림은 필시 막 대협이 갇혀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생선은 곧 막 대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화섭자를 껐다. 그는 몸을 돌려 다시 제비의 주등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급히 달 려갔다. 그는 달리다가 또 나무에 새겨진 암호를 발견했다. 다시 달리고 달려서 이미 이십여 리나 달려갔을 때는 삼경이 되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은밀한 골짜기 하나가 나타났다. 강옥봉은 잠시 살피더니 골짜기를 향해 들어갔다. 골짜기는 기암괴석 이 마치 유령처럼 우뚝우뚝 서 있었으떠 급류가 세차게 흐 르고 있었다. 강옥봉이 막 큰 바위를 넘었을 때 냉상아의 전음성이 들렸다. "과연 봉랑이 찾아오셨군요. 제가 나타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세 요." 강옥봉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어디에도 그려의 모습이 보이지 않 자 그녀를 찾는 것은 포기하고 그녀의 전음에 귀를 기울였다. "이사형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오래 몸을 뺄 수 없으니 잘 들으세 요. 계곡을 따라 오 리쯤 올라가면 고찰 하나가 있을 거예요. 막 대협께선 그 고찰에 감금되어 있을 거예요." 이렇게 말한 그녀의 음성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전음이 갑자기 끊긴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사형인 도옥린이 그녀에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강옥봉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품에서 복면을 꺼내 쓰고 달려갔 다. 그가 오 리쯤 달려가자 과연 고찰 하나가 나타났다. 고찰 앞에는 급류가 흐르고 있었고 뒤편에는 높은 산이 솟아 있었다. 주위의 숲은 울창했고 썩어서 쓰러진 나무들이 발길에 차였는데 인적 은 찾을 수도 없었다. 가끔 나무 위에서 새들이 날아갈 뿐, 매우 적 막한 산중이었다. 강옥봉은 주위를 살피다가 몸을 날려 사문 앞에 내려서더니 태 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다가 사문 위에 있는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소응고사> 그가 현판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사내에서 우렁찬 염불 소리가 들렸다. "아미타불…… 폐사에서는 외객을 접견하지 않습니다. 강호인 들의 출입은 더구나 엄금하니 시주는 어서 돌아가십시오." 강옥봉은 그 자리에 선 채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가사를 따라 이곳 소응사에 와서 이십여 년 동안 있다가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늘 이렇게 다시 돌아왔소. 당신은 누구이기 에 함부로 큰소리를 치시오? 옛 주인이 돌아왔으니 어서 비키시오." 그는 말을 마치고는 비조처럼 몸을 날려 산문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한 승인이 선장을 쥔 채 앞을 막으면서 외쳤다. "옛 주인이라면 왜 사내에서도 복면을 벗지 않소?" 강옥봉은 담담하게 웃었다. "나는 선사 외에는 누구에게도 진면목을 나타낸 일이 없소. 나 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에겐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오." 그러자 중년승인은 안색이 돌변하면서 외쳤다 "빈승은 시주의 진면목을 꼭 보아야 되겠소이다." 동시에 좌장을 쭉 뻗어 강옥봉의 명문혈을 찍어 왔다. 팍! 그의 동작은 신속무비했고 초식도 대단했다. 하나 강옥봉의 쌍장이 더욱 신속하게 움직여지면서 한 가닥 암경이 승인의 전면을 향해 다가왔다. 파아아…… 장영이 스치는 가운데 승인은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질렀다. "아……!" 그는 두어 번 비틀거리더니 그 자리에 쓰러졌다. 강옥봉은 급히 승인을 옆구리에 끼더니 허공으로 몇 번 몸을 솟구치 면서 산문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순간, "웬 놈이냐?" "막아라!" 사내에서 인영이 번뜩하더니 고함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사람들이 불 쑥불쑥 나타났다. 하나 강옥봉은 전후좌우로 번개같이 움직이면서 추격자들을 교란시킨 후 빠른 신법으로 달려갔다. 쐐액! 그의 신법이 어찌나 쾌속했던지 추격자들이 산문에 당도했을 때에는 그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강옥봉은 급히 달려와 그 승인을 기암괴석 사이에 내려놓았다. 승인은 공포에 질려 와들와들 떨면서 입을 열었다. "시주, 빈승이 비록 실언했다 해도 죽을죄는 아닐 듯하오이다. 그런 데 왜 빈승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소이까?" 강옥봉은 냉랭히 코웃음을 치더니 돌연 중년승인의 수십 군데 혈도를 찔렀다. 파파팍! 이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대사의 음혈 아홉 군데를 찍음과 동시에 다섯 군데의 골 절을 비틀어 놓았소. 대사가 만약 분근착골 수법과 음화분 신의 고통을 참을 수 있다면 즉시 살려 주겠소." 중년승인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비…… 빈승은 시주와 아무런 원한도 없거늘 시주께선 왜 이러시 오?" 그때 음화분신의 고통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전이 마비되는 듯했으며 한기가 전신으로 스며들 었고 맥이 탁 풀렸다. 그의 안색은 고통으로 무섭게 일그러졌다. 강옥봉은 그런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냉랭하게 웃었다. "대사가 막철룡이 감금되어 있는 곳을 얘기한다면 즉시 혈도를 풀어 주겠소." "시, 시주가 어찌 그것을……?" "빨리 말하지 않으면 그만큼 대사의 고통만 더 심해질 것이오." 그러자 승인은 더 이상 고통을 참을 수 없는 듯 상판까지 일그러졌 다. "그, 그는 바로 대전 뒤에 있는 함광각에 감금되어 있 소. 아…… 제발 혈도를 좀 풀어 주시구려……" "그럼 내가 곧 그곳으로 갈 것인즉 만약 순조롭게 구출되지 못하면 대사도 영원히 살 가망이 없게 될 것이오." 승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급히 말했다. "사…… 시주! 경거망동해선 안 되오…… 사내는 열두 명의 고 수들이 지키고 있소. 시주의 공력이 제아무리 높다 해도 혼자선 감당 하기 어려울 거요." 그러자 강옥봉은 가볍게 웃더니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승인의 수혈 을 짚었다. 그런 다음 다시 몸을 날려 소응사로 돌아갔다. 어둠에 잠긴 소응사. 돌연 몇 개의 인영이 대전의 뒤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대전의 뒤쪽 어둠 속에는 삼층 누각이 거대한 괴수처럼 우뚝 솟아 있 었다. 이곳이 바로 함광각이었다. 인영들이 누각 계단 앞에 당도하자 기등 뒤에서 어떤 사람이 불쑥 나 타나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여 러분은 왜 이 렇게 급히 달려왔소?" 그러자 한 사람이 대꾸했다. "지금 괴영 하나가 홍뢰대사를 납치해 갔소. 필시 이 근처 사내에 숨어 있을 텐데, 막철룡을 구하러 온 것이 분 명하오." "아니, 그자가 이곳에 막철룡이 갇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 이오?" "낸들 어찌 알겠소? 아무튼 이곳의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할 것 같소." 그들은 몸을 날려 삼층 누각 위에 올라섰다. 나머지 사람들도 뛰어 올라가 문을 활짝 열자 짙은 어둠 속에서 하나 의 인영이 벽 쪽을 향한 채 돌아누워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인영의 행색은 구차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등은 널찍하고 체구가 상당히 거대해서 당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 중에서 텁석부리 사나이가 안으로 들어와 인영이 누워 있는 침 상 가까이로 다가가 살펴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철룡은 대장주님의 괴이한 수법에 혈도를 찍혀 하루에 겨 우 반 시진밖에는 행동할 수 없지. 설사 그놈이 이곳에 막철룡이 있 다는 것을 안다 해도 쉽게 구출하여 도망치기는 힘들 테니 어서 밖으 로 나가 수색합시다." 그들 여덟 사람은 다시 누각 아래로 내려오더니 무어라고 수군댄 후 각기 사방으로 흩어져 달려갔다. 소응사 내에 잠복해 있던 고수들은 지금 강옥봉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서 내외를 두루 뛰어다니 고 있었다. 그들이 함광각을 떠나간 직후, 스읏! 괴영 하나가 섬전처럼 어둠을 가르고 함광각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괴영의 신법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쾌속무비한 것이 었다. 잠시 후 그 괴영은 다시 밖으로 나와서 태연히 사내를 걸어가고 있었 다. 괴영이 대전 쪽으로 거의 다 다가섰을 때에야 비로소 성심장의 고수 들은 괴영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잡아라! 저기 있다!" 동시에 십여 개의 인영들이 괴영을 향해 덮쳐 들었다. 괴영은 다름 아닌 강옥봉이었다. 강옥봉은 즉시 쌍장을 앞으로 쭉 뻗으며 세차게 휘둘렀다. 콰르르릉! 노도와 같은 경력이 일어나며 성심장 고수들을 향해 휘몰아쳐 갔다. 제일 앞에서 덤벼들었던 성심장 고수는 급히 몸을 틀어 반격하면서 버럭 외쳤다.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왕! 두 사람의 장력이 맞부딪치면서 요란한 폭음이 들렸다. "크윽!" 성심장의 고수는 입으로 피를 폭포수처럼 쏟아 내며 칠팔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앗! 절정고수다. 조심해라!" 막 강옥봉을 향해 다가들던 다른 인물들이 이 광경을 보고 경호성을 터뜨렸다. 강옥봉은 몸을 솟구치더니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려는 것처럼 다 른 두 명의 고수에게로 치달아 내리면서 장력을 날렸다. 두 명의 성심장 고수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팔을 치켜 올려 장력으로 맞서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쾅! 뢍! 두 가닥의 폭음이 턴지며 그들은 가슴팍에 일 장씩을 격중당하고 피 를 토하며 날아갔다. "크아악!" "케에엑!" 순식간에 세 명의 고수가 피떡이 되어 날아가자 다른 고수들은 겁을 집어 먹고 주춤거렸다. 강옥봉은 껄껄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너희들이 어서 이 절을 떠나지 않으면 당장 죽여 버리겠 다!" 그들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에 강옥봉의 신형은 그들의 머리를 타넘 고 먼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강옥봉의 신위에 놀라 쫓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우두커 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성심장 고수 한 사람이 고개를 돌리며 급히 말했다. "어서 장주님께 소식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 한 사나이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대꾸했다. "시간적 여유가 없다. 더구나 저놈의 공력이 너무 고강하니 더욱 급 한것은 우선 막철룡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 일이다. 지금 그놈과 정면으로 맞서다간 도리어 불리하다." 그들은 즉시 함광각을 향해 달려갔다. 누각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어 보니 막철룡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자 고 있었다. 화섭자를 컥 들고 두사람이 먼저 막철룡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다. "앗! 이게 웬일이냐?" 놀랍게도 막철룡인 줄 알았던 그 인영은 조금 전에 사로잡혀 갔던 홍 뢰대사가 아닌가! 홍뢰대사는 수혈이 짚인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니, 막철룡은 어디 가고 이놈이 누워 있단 말이냐?" 우두머리 사나이는 대경 실색해 급히 누각 안을 뒤져 보았다. 하나 어디에도 막철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두머리 사나이는 홧김에 침상에 누워 있는 홍뢰대사에게 달려들어 곤히 잠들어 있는 그의 대을 찰싹찰싹 갈겼다. 짝! 짝! "이놈아! 네놈이 왜 여기에 누워 있느냐?" 그가 몇 차례 손찌검을 하자 홍뢰대사의 얼굴은 금세 퉁퉁 부어 오르 고 입가로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한데 아무리 흔들고 때려도 흥뢰대사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 다. 그때 다른 사람이 무친가를 느낀 듯 급히 우두머리 사나이를 제지하 고 홍뢰대사의 맥을 짚어 보았다. 홍뢰대사의 손목츤 얼음장처럼 차 가워져 있었다. "앗? 죽었다……!" 그의 외침에 우두머리 사나이는 깜짝 놀라 급히 손을 멈추었다. 과연 홍뢰대사의 숨결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홍뢰대사의 맥을 짚었던 인물이 우두머리 사나이를 돌아보며 성난 음 성으로 외쳤다. "아무리 그렇다고 같은 편 사람을 죽이면 어떡하오!" 우두머리 사나이는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글쎄…… 나는 그렇게 세게 때리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홍뢰대사가 죽었단 말이오?" 우두머리 사나이는 다른 사람들의 성난 눈초리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이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강옥봉은 이미 막철룡을 빼돌려 소응사에서 멀리 떨어진 골짜기를 치달려가고 있었다. 강옥봉은 어느 으슥한 동굴로 와서 막철룡을 내려놓았다. 막철룡은 그 동안의 고생이 심했던 듯 초췌했고 수염이 얼굴 가득 덮 여 있었다. 하나 부리부리한 눈에서는 여전히 굽힐 줄 모르는 무인 의 패기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막철룡은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귀하는 누구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소?" 강옥봉은 복면을 벗으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임표 대협과 여풍운 대협의 분부를 받고 막 대협을 구출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막철룡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정말이오? 두 분 형님은 지금 어디 계시오?" "그분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대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막철룡은 눈가를 실룩거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늘이 돌보시어 다행히도 두 분 형님이 무사하시게 되었군. 나는 성심장주의 음독한 수법에 정신을 잃고 여 형님이 유령고전을 입수한 사실을 발설하고 말았소 그래서 그 동안 여 형님이 그들의 독 수에 당하셨으면 어쩌나 하고 하루하루를 걱정과 불안으로 지 새웠소……" "그런데 막 대협은 어떻게 그들의 암수에 당하게 되었습니까?" 막철룡은 돌연 눈을 빛내며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이게 모두그 찢어 죽일 놈의 낙일립 때문이오." "낙가보의 보주 말입니까?" "그렇소. 원래 그자와 나는 평소에 제법 친한 교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소. 그래서 작년에 여 형님이 유령고전을 찾았으니 함께 유령동 부로 떠나자는 전갈을 받고 무심결에 그자에게 그 사실을 흘리고 말 았소. 그로부터 며칠 후에 그자가 나를 초청해서 긴히 할말이 있다고 하기에 낙가보에 갔다가 암수를 당하고 만 거요."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낙일립은 성심장의 수석총관이 되는 자입니다." "나도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소. 그놈은 자신의 입으로 아주 자랑 스레 말하더군." 막철룡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은 처음에는 좋은 말로 나를 회유하기도 했으나 내가 유령고전 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않자 온갖 협박과 고문을 가해 왔소. 다행히 나는 그런대로 참는 데는 이골이 나 있어서 그놈의 고문을 버터 왔는 데 어느 날 머리가 백설같이 하얗고 알록달록한 화의를 입은 노인이 찾아왔소." 강옥봉은 눈을 반짝였다. "혹시 그 화의노인의 손가락이 유달리 하얗지 않았습니까?" 막철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랬소. 나는 낙가 놈이 그 노인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보고서 야 그 노인이 바로 성심장의 장주인 것을 짐작했소. 한데 귀하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저도 짐작만 할 뿐입니다. 제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그 노인은 성심 장의 두 장주 중에서도 대장주인 화의성수 육만루 일 겁니다." 막철릉은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유, 육만루라면 쌍마쌍성 중의 바로 그……!" "그렇습니다. 성심장은 바로 그들 중의 쌍성이 무림제괘를 목 적으로 세운 문파입니다." 막철룡은 아연해져서 입을 딱 벌렸다. "아! 그런 줄은 몰랐구려. 어쩐지…… 그 노인이 내게 다가와 돌연 일지를 내뻗었는데 그 순간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한참 후에야 다시 의식이 돌아왔는데, 그 때 낙일립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미 모든 사실을 불었다는 거 였소. 나는 그자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 뒤로 그들이 내게 유 령고전에 대해서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낙가 놈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소." 그의 음성에는 자책하는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강옥봉은 그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육만루가 시전한 것은 아마도 우내칠대무학 중의 하나인 최심지 일 겁니다. 최심지에는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기이 한 섭혼의 위력이 있지요. 그 수법에 당하게 되면 아무리 철담 목석 같은 사람이라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랬었구려……" 막철룡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강옥봉은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다시 말했다. "지금 대협의 몸에는 윽만루가 시전한 최심지의 효과가 여전히 남아 있어 진기가 제대로 유통되지 못하고 금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다 행히 제가 그 방면에 약간의 조예가 있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협의 상세를 살펴볼 수 있을까요?" 막철룡은 그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그래 주시겠소?" 사실 그는 지금까지 공력이 상실되고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숱 한 고통을 겪어 왔었다. 더구나 자신을 금제한 수법이 우내칠대무학 중의 하나인 최심지임을 알고 암담한 절망에 빠져 있던 터였다. 그러니 어찌 강옥봉의 말이 반갑지 않겠는가? 하나 그러면서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과연 이자가 최심지의 금제를 풀 수 있을까?' 강옥봉은 그의 그런 심리를 짐작하고 있는 듯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막 대협께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누우십시오." 막철룡은 자리에 반듯하게 누웠다. 강옥봉은 잠시 그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 보다가 능숙한 손길로 그 의 기경팔맥을 더듬어 보았다. 그의 기경팔맥은 차디차게 굳어 있었는데 강옥봉이 진기를 흘려 보내자 기경팔맥 안에서 돌멩이 같이 단단한 기운이 뭉쳐 있다가 세게 반발을 해왔다. 강옥봉은 그 단단한 기운이 바로 최심지의 기력임을 깨닫고 흠 칫 놀랐다. '몇 달 동안이나 사람의 몸 속에 이토록 강한 기운을 남겨 놓다니… … 과연 최심지의 위력은 소문 이상이구나.' 그는 신중한 안색으로 막철룡의 전신 혈도를 면밀하게 조사했다. 그가 막철룡의 상세를 고치겠다고 나선 이유는 물론 막철룡을 정상적인 상태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지만, 이번 기 회에 말로만 듣던 최심지에 대해 알아보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강옥봉 정도의 무공을 가진 초절정고수는 상처만 보고도 상대의 무공 에 대한 장단점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강옥봉은 운이 좋게도 육만루가 직접 시전한 최심지의 흔적을 보게 되었으니 이것을 잘만 연구하면 최심지의 파해식을 발견할 수 있을지 도 몰랐다. 그러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육만루와 대결할 때 커다란 도움이 될 것 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동안 죽음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막철룡은 강옥봉이 아무런 기색도 없자 납을 단 듯 가슴이 무거워졌 다. '아! 혹시 이자도 최심지를 파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 다면 나는 평생 동안 이런 상태로 지내야만 한단 말인가……?' 강옥봉은 막철룡의 전신 혈도와 혈맥을 샅샅이 조사한 후 미간을 찌 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별다른 실마리를 찾지 못한 듯 어두운 표정으로 생각에 골몰했 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무림에 전해 내려오는 최심지에 대한 전설이었다. -- 창백한 손가락이 미간에 닿는 순간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게 된다…… '그렇다!' 강옥봉은 무릎을 탁 치며 급히 막철룡의 미간을 살펴보았다. 막철룡의 미간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하나 강옥봉의 섬 세한 손가락은 미간의 피부 아래에서 미약한 느낌을 감지할 수 있었 다. 강옥봉의 눈이 밤하늘에 빛나는 유성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막철룡의 미간을 통하는 신경은 강력한 힘에 의해 거의 끊어져 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막철룡은 정신을 잃고 상대가 묻는 대로 술술 입을 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심지의 무서운 점이었다. 피부를 상하게 하지 않고 오 직 상대의 뇌신경만을 끊어 버리는 것이 바로 최심지의 정체 였던 것이다. 육만루는 막철룡에게서 비밀을 알아 내고 싶었기 때문 에 그의 뇌신경을 완전히 끊어 놓지 않고 절반만 상하게 했다. 그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어 이제는 거의 끊어져 가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조금만 더 경과되었다면 막철룡의 뇌신경은 완전히 끊어 져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강옥봉은 이것을 생각하자 머리 끝인 쭈뼛해졌다. 창백한 손가락이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날아들어 뇌신경을 파괴해 버 린다……! 실로 상상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 광경이 아닌가! -- 흔적도 없고 소리도 없다. 창백한 손가락이 미간에 닿는 순간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게 된다. 무림에 떠돌고 있는 최심지의 전설은 사실과 너무도 잘 부합되는 말 이었다. 강옥봉은 한동안 생각에 골몰하다가 품에서 하나의 옥갑을 꺼내 들었 다. 옥갑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사십팔 개의 금침이 가지런히 놓 여있었다. 강옥봉은 신중한 동작으로 그 금침들을 막철룡의 전신에 꽃기 시작했 다. 그 중에서도 특히 머리 부분에 집중적으로 금침을 꽃았다. 이어 우수를 내뻗어 막철룡의 이마를 지그시 누르고 태극흔원신공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마치 벌떼가 날아가는 듯한 음향이 들리더니 막철룡의 얼굴이 술에 취한 듯 시뻘게졌다. 강옥봉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막강한 태극혼원신 공의 진력이 노도처럼 막철룡의 머리에 있는 혈맥을 타고 흘러가는 것이다. "으으……!" 막철룡은 이마가 불에 타는 듯한 통증에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절대로 기절하거나 정신을 잃으셔서는 안 됩니 다." 강옥봉은 심각한 음성으로 말을 한 후 거의 끊어져 가는 막철룡의 뇌 신경으로 진력을 조금씩 유도해 갔다. 우두둑! 막철룡이 고통을 참기 위해서 얼마나 손을 꽉 쥐었는지 그의 손이 백 지장처럼 하얘지며 뼈마디가 부러지는 음향이 들려 왔다. 하나 그래도 막철룽은 이빨을 악문 채 신음 소리도 내지 않고 일었 다. 강옥봉은 막철룡이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으려 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 대협께서 이분은 강철보다 단단해서 깨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고 하셨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군.' 뇌신경은 인체 내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약한 곳이라 조금만 심하게 힘을 써도 그대로 끊어지고 마는 곳이었다. 강옥봉이 금침으로 그 뇌신경 주위를 자극해 보호하지 않았다면 진력 이 흘러 들어가는 순간 그대로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강옥봉의 이마에서도 진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막강한 태극혼 원신공의 힘을 유화결로 바꾸어 계속 막철룡의 뇌신경을 치 료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옥봉은 전신이 땀으로 목욕을 한 상태가 되어서야 간신히 손을 거 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는 품안에서 알약 두 개를 꺼내 하나는 막철룡의 입에 넣어 주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목용했다. 그런 다음 막철룡의 전신에 꽃혀 있던 금침을 하나씩 뽑아 옥갑에 집 어넣었다. "제가 보호해 드릴 테니 이제 조금씩 운기를 해보십시오." 막철룡은 고통에 가득 찼던 얼굴을 꿈틀거리며 진력을 끌어 보았다. 처음에는 전신이 텅 빈 듯 아무런 진기도 끌어 모아지지 않았다. 하나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단전이 따뜻해지며 미약하나마 진 기가 모이는 것이 아닌가? '아! 이제 됐다……!' 막철룡은 크게 기뻐하며 계속해서 운기조식을 했다. 강옥봉은 그의 얼굴에 한 가닥 홍조가 떠오른 것을 보고 그의 진력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잔잔한 기쁨의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최심지를 파해해 냈다……!' 그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격동을 억누르며 막철룡이 운기하는 것을 지 켜보고 있었다. 어느덧 주위에는 먼동이 터와 아침 햇살이 그들이 있는 동굴 안으로 조금씩 새어들고 있었다. 이날 아침은 강옥봉이나 막철룡 두 사람 모두에게 정녕 뜻 깊은 의미 를 지닌 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심장 격파의 대계가 더한층 무르익었다 는 신호이기도 했다. 제45장 군웅대회 오늘은 군웅대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비무대 주위에 있는 천막으 로 몰려들었다. 군웅들이 비무대 주위에 구름처럼 모여들자 어제처럼 서횡이 비무대 중앙으로 올라왔다. 서횡은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일차예선은 오늘 정오까지만 하고 오후부터는 결선에 들어갈 예정이 니 여러 군웅들께서는 착오없으시기 바라오!" 그가 대 아래로 내려가자 다시 비무가 시작되었다. 제일 처음의 격전은 삼상 지방의 고수인 비화검 양민 과 점창의 제일고수인 분광신검 사혁 간의 대결이었다. 양민의 비화검은 비록 현란하고 기묘했으나 사혁의 분광검에는 적수 가 되지 못했다. 결국 십여 초 만에 사혁이 양민의 왼팔을 잘라 버려 쉽게 승부가 가려졌다. 사혁은 연거푸 네 명의 도전자를 더 연파하고 다섯 번째로 결 선에 진출하는 고수가 되었다. 강옥봉은 묵묵히 비무대 위를 주시하고 있다가 조옥환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번 대회와 우숭자는 그 설일비일 것 같소. 아직까지 그 에 비견될 만한 고수가 보이지 않는구려." 조옥환은 희미하게 웃었다. "강 공자께서 한번 나가 보시지 그래요?" 강옥봉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원래 몸이 건강해서 구엽인삼 같은 영약도 필요없고 명예욕도 없어서 무림에 이름을 날리고 싶은 마음도 없소. 그러니 나가서 그를 꺾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조옥환은 까르르 웃었다. "호호…… 성인군자 같은 말씀만 하시는군요. 아마 무림에서 강 공자 같이 사심없는 분도 아마 없을 거예요." 그때 돌연 그들의 뒤에서 나직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 조 낭자의 말은 정말 노부의 생각과 일치하는군. 강 노제 는 다 좋은데 욕심이 너무 없는 게 탈이란 말이야." 그러면서 한 사람이 불쑥 그들 사이에 끼여 들어와 털썩 앉았는데 그 는 다름 아닌 부여송이었다. 조옥환은 그를 보며 곱게 웃었다 "욕심이 없는 것은 좋은 일인데 그게 왜 탈이란 말이에요?" 부여송은 탁자 앞에 놓인 술잔을 쭈욱 들이켰다. "크…… 강 노제가 욕심을 좀 부려야 이 늙은이도 곁에 끼여서 한몫 볼텐데, 이건 국물도 없고 뼈빠지게 일만 하니 노부 같은 약골 이 어찌 견디겠나?" 그가 익살스럽게 얼굴을 실룩거리며 말을 하자 조옥환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호호…… 부 대협이 약골이라면 이 세상에서 강골인 사람은 단 하나도 없을 거 예요." 부여송은 강옥봉을 가리키며 눈을 찡긋거렸다. "왜 저기 있지 않나? 희대의 강골인 우리의 강 노제가" "호호……!" 두 사람이 박장 대소를 하자 강옥봉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저라고 왜 욕심이 없겠습니까? 단지 무림의 사정이 너무 급박하고 중대한지라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 부여송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허허……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네. 이게 따지고 보면 괜히 편안 하게 잘 살고 있는 자네를 무림으로 끌고 들어온 여풍운과 임표 때문 이지. 그러니 억울하면 그들에게 가서 따지게." 그 말에 생각난 듯 강옥봉이 급히 물었다. "참, 막 대협은 그분들과 상봉했습니까?" 부여송은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연신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말게. 다 큰 어른들이 애들처럼 서로 끌어안고 웃다가 울다가 하는 바람에 노부는 막철룡과 인사도 못 나눴네. 내가 나올 때 보니 까 여풍운과 임표가 자네를 보게 되면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라고 하 더군." 강옥봉은 담담히 웃었다. "그분들이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한다면 그런 일이 어디 비교가 되겠습니까?" "제길…… 정말 성인군자가 따로 없군. 노부 같으면 이럴 때 크게 생 색을 내고 그들에게서 한턱 단단히 우려낼 텐데……" 조옥환이 옆에서 잽싸게 끼여들었다. "그래서 부 대협께선 성인군자가 못 되시는 거라고요." 부여송은 짐짓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조 낭자는 노부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게. 그렇지 않았다가는 당장 운 낭자와 곽 낭자에게 일러 지금부터 두 사람 사이를 훼방 놓을 테 니까." 조옥환은 얼굴이 빨개지며 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녀가 동자로 변장하고 강옥봉과 동행하게 된 것은 모두 운봉 랑과 곽희연이 모르는 척 눈감아주었기 때문이다. 하나 이를 모르는 조옥환은 행여 그녀들이 알게 되면 강옥봉에게 심술이라도 부릴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부여송은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느긋한 웃음을 떠올렸다. "흐흐…… 하지만 방 늙은이의 부탁도 있고 하니 노부가 참도록 하 지. 그런 의미에서 조 낭자가 이 늙은이에게 술 한잔 따라 주지 않겠 나?" 조옥환은 속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흥! 주책없는 늙은이…… 나중에 두고 보라지.' 하나 겉으로는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부여송은 그 잔을 단숨에 들이키며 무릎을 탁 쳤다 "크하하…… 정말 꿀맛이군, 꿀맛이야! 술은 확실히 미녀가 따라야 제맛이 난다니까……" 강옥봉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담담히 물었 다. "부 대협께서 저를 보러 오신 것은 술을 드시기 위해서는 아닐 텐데 요?" 그 말에 부여송은 쓰게 웃었다. "자네가 일러주지 않았으면 깜박 잊을 뻔했군." 그는 돌연 정색을 하며 소리를 죽여 입을 열었다. "자네의 지시대로 방 고은이는 어제부터 계속 설일비라는 작자를 뒤 쫓고 있었다네. 그런데 어젯밤 삼경쯤에 설일비가 자신의 거처에서 은밀히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네. 그랬더니 설일 비는 낙가보의 외보 됫산에서 누군가를 만나 밀담을 나누고 헤 어졌다더군." 강옥봉은 눈을 반짝였다. "그가 만난 사람이 누굽니까?" 부여송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혀 의외의 인물일세. 누구인 줄 아나? 바로……" 정오가 되자 징 소리와 함께 군웅대회의 일차예선은 모두 끝이 났다. 어제오늘 양일에 걸쳐 일차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모두 일곱 명 이었다. 오시가 되자 군웅들은 마지막 결선을 기다리며 비무대 주변으 로 모여들었다. 돌연, 징! 징! 징! 세 번의 징 소리가 연거푸 들리며 군웅대회를 주도한 낙가보주 낙일 립이 나왔다. 그런데 낙일립의 뒤에는 빨간 비단으로 쟁반을 받쳐 든 두 사나이가 따르고 있었다. 군웅들이 일시에 조용해지떠 낙일립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 리고 있었다. 낙일립은 비무대 위로 올라서더니 여러 군웅들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이렇게 많은 무림 선배 고인과 여러분들이 모이신 가운데 일 곱 분의 고수를 모시고 군웅대회의 마지막 결선에 임하게 된 것을 영 광으로 생각하오." 그는 주위를 한번 쓸어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 내가 비록 군웅대회를 열어 여러분들을 모셨지만 사실은 명 령을 받고 행사했을 뿐이오." 그 말에 대 아래의 군웅들은 웅성거렸다. 낙일립은 군웅들의 소란을 묵살하고 종이 울리듯 큰 소리로 말을 계 속했다. "나는 천하제일 성심장의 수석총관으로서 본 장의 장주님 의 뜻을 받들어 여러 군웅들과 뜻을 함께 하고자 이번 대회를 열!! 된 것이오." 이런 노골적인 말에 군웅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 성심장?" "아니 낙 보주가 성심장의 수석총관이었단 말이오?" 장내는 삽시간에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당금 무림에서 누가 성심장의 이름을 모르겠는가? 그들의 행사는 신비로 점철되어 있었고, 세력은 거대하기 짝이 없어 모든 무림인들에게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낙일립은 태연 자약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식을 들어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본 장은 얼마 전에 무림에서 해악을 일삼던 회서방을 섬멸하는 일대 쾌거를 이 루었소. 하나 본 장에서도 여러 고수들이 아까운 생명을 잃어 공석 이 된 자리가 많이 생겨났소. 그래서 본 장에서는 이번 기회에 무림의 여러 동도들에게 문호를 개방해서 본 장에 가입할 기회 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오." 그의 음성은 굉량하기 그지없어 시끌벅적하던 주위 소란을 완전히 압 도해 버렸다. 군웅들은 입을 다물고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번에 일차관문을 통과한 일곱 분은 우선적으로 본 장에서 높은 지 위를 얻게 될 거요. 단, 이건 어디까지나 본인이 원할 때이고 만약 본 장에 아무 뜻이 없는 분이라면 지금 물러난다 해도 본 장에서는 절대로 원망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겠소." 그때 대 아래에서 누군가가 소리쳐 물었다. "그럼 군웅대회는 이것으로 끝나는 겁니까?" 낙일립은 그쪽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는 않소. 군웅대회는 정상적으로 진행하여 최종 우승자를 결 정하게 될 거요. 최종 우승자는 본 장의 총순찰에 임명하고 구엽인삼 반 뿌리와 함께 무림의 오대신검 중 하나인 상심 검을 드리겠소. 그리고 준우승자에게는 새로 마련되는 육대 용사의 우두머리 자리를 수여하고 나머지 다섯 분은 육용 사의 한자리씩을 차지하게 될 거요." 그는 이어 비단헝겊으로 받쳐 들고 있는 쟁반을 가리켰다. "이 두 가지 물건을 여러분들에게 보여 드리겠소. 이것은 천 년 묵은 구엽인삼이고 또 이것은 무림의 보물인 상심검이오. 본 대회의 우승 자에게는 총순찰의 직위와 함께 이 두 가지 기보를 증정할 것이오." 그러자 좌중이 떠들썩해지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돌연 여러 군웅들 중에서 누군가가 우렁찬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시합에 이겼으나 귀장에 가입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소?" "그래도 응당 구엽인삼을 드리겠소.그게 애초의 공약이었으니 까 말이오." "그렇다면 쟁반에 있는 물건을 좀 보여 주시오." 낙일립이 껄껄 운었다. "허허…… 이 두 가지 물건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다 지니고 싶어하 는 물건이오. 여러분들께서 만약 의심한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 겠지만 나 자신의 인격과 성심장의 수석총관이란 이름을 걸고 맹세하 겠소. 절대 약속을 어기지는 않을 거요." 이어 그는 대 아래 일렬로 앉아 있는 일곱 명의 결선 진출자들을 돌 아보았다. "일곱 분의 의향은 어떻소?"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하나 무림인치고 영약과 신병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 는가? 더구나 성심장은 이미 회서방을 무너뜨리고 명실상부하게 천하제일문 파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성심장의 총순찰이란 직위 또한 유혹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낙일립은 그들의 표정을 살피다가 회싱의 미소를 지었다. "일곱 분은 거절할 의사가 없는 것 같으니 이제 곧 추첨을 해서 결선 상대를 가리겠소." 일곱 사람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낙일림이 손뼉을 탁 치자 어디선가 서횡이 급히 달려나와 미리 준비 한 일곱 개의 죽통을 내밀었다. 서횡은 끝 부분을 종이로 싼 일곱 개의 대나무막대를 한 사람 한 사 람에게 나누어 주며 말했다. "이 대나무에는 각기 두 개씩 일, 이, 삼의 숫자가 적혀 있고 오직 한 개만이 아무 글씨도 써 있지 않소. 여러분들은 나누어 가진 대나무막대를 풀어 같은 숫자가 나오는 사람끼리 겨루게 되는 것이오." 한 사람이 불쑥 물었다. "아무 글씨도 써 있지 않은 막대가 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요?" 서횡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매달았다. "그 사람은 싸우지 않고 부전승으로 이회전에 진출하게 되는 거요." 이렇게 해서 일곱 명의 결선 진출자들은 손에 쥔 막대의 종이를 풀어 보았다. 그 결과 부전승으로 올라가는 행운아는 설일비로 결정되었고, 나머지 여섯 사람들은 서로 상대를 골라 겨루게 되었다. 제일 처음의 격전은 산서의 호걸인 벽력도 염비 와 절강성의 제일고수인 신창 왕방의 대결이었 다. 벽력도 염비는 체구가 건장하고 얼굴에 구레나룻이 자욱한 사나이였 는데 무게가 칠십 근이나 나가는 벽력패도로 산서 지방을 주름잡는 무서운 고수였다. 그에 비해 신창 왕방은 체구가 나뭇가지처럼 호리호리하고 키가 훌쩍 하게 큰, 앙상한 중년인이었다. 왕방의 무기는 길이가 삼 척쯤 되고 양쪽으로 날이 서 있는 비룡창 이었다. 염비는 벽력패도를 뽑아 들고 고리눈을 부릅뜨며 왕방을 응시했다. "왕 형과 처음으로 대결할 줄은 몰랐소. 왕 형은 어서 손을 쓰시오." 왕방과 염지는 평소 약간의 안면이 있었다. 왕방은 손에 비룡창을 쥔 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가 어찌 먼저 손을 쓸 수 있겠소? 염 형은 걱정하지 말고 먼저 공 격하시오." 염비는 고개를 끈덕이며 힘차게 패도를 쳐들었다. "그럼 왕 형은 조심하시오." 이어 그는 칠십 근이나 되는 패도를 세차게 휘두르며 왕방의 목덜미 를 찔러 갔다. 위이잉! 부드러웠던 말과는 달리 그의 공격은 무지막치하기 그지없어 왕방의 호리호리한 몸은 금시라도 칼 아래 절단이 나고 말 것 같았다. 하나 왕방은 싸늘한 눈으로 염비의 패도를 노려보고 있다가 그것이 자신의 지척으로 다가들자 슬짹 허리를 뒤틀어 피하며 수중의 비룡창 을 쾌속하게 휘둘렀다. 파파파파…… 수십, 수백 개의 창영이 어른거리며 염비의 전신이 창날 아래 환하게 노출되었다. 염비는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입술을 질끈 깨물고 패도를 회수 하며 수평으로 그어 댔다. 파앗! 마치 뇌전이 번쩍이는 듯한 섬광이 일어나며 만근 신력이 담긴 패도가 왕방의 허리춤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 위세는 가히 놀라워 구경하고 있던 군웅들은 금시라도 왕방의 허리가 두 동강날 것 같아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댔다. "앗?" "위, 위험하다!" 개중에는 눈을 질끈 감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 왕방은 조금도 당활하지 않고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선 채 두 손 으로 비룡창을 움켜쥐고 있다가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질풍처럼 창을 휘둘렀다. "이야압!" 파파파파파파…… 비무대 위가 온통 창 그림자로 뒤덮여 버렸다. 그의 이번 수법은 비 전절초인 비룽사십팔방이라는 창법으로 단숨에 사십 팔 방위를 점해 상대를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무공 이었다. 염비는 안색이 대변했다. 순간, 차차창! 예리한 소성과 함께 불똥이 사방으로 튀며 한 사람이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크으으……" 그는 바로 염비였는데 염비의 옆구리와 가슴팍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왕방은 즉시 창을 거두며 정중히 포권을 했다. "다행히 염 형이 손에 사정을 봐주어 내가 약간의 이익을 본 것 같소 이다." 염비는 얼굴을 실룩이며 그를 응시하다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왕 형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나는 왕 형에게 패했음을 인정하오." 군웅들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환호성을 보냈다. "와아……" 이어 두 번째 대결은 점창의 분광신검 사혁파 하북의 패자 인 마환 조익기의 격전이었는데 그 싸움은 불과 십 여 초 만에 사혁의 분광검이 조익기의 어깨를 꿰뚫음으로써 간단하게 승부가 났다. 세 번째는 화산의 제일고수 육합검객 임원량 과 진주의 명가인 진주언문의 소패왕 언일곤의 대결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세 번의 대결 중에서 가장 치열한 것이었다. 임원량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의 사대검파 중 하나인 화 산파의 제일고수였고, 언일곤은 권법으로 유명한 진주언문이 자랑하 는 신진고수였으니 그들의 대결은 가히 용호상박이었다. 콰아아앙! 언일곤의 주먹은 뇌정과 같은 위력이 있어 비무대는 금시라도 무너질 것같이 뒤흔들렸다. 파파파팍! 그에 맞서는 임원량의 검법 또한 현란하기 짝이 없어 대 위는 온통 검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군웅들은 그들의 막상막하 대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신없이 구경 했다. 조옥환은 흥미 진진한눈으로 그들의 격전을 치켜보다가 각옥봉을 돌 아보며 물었다. "강 공자는 저들 중에 누가 승리할 것 같아요?" 강옥봉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아마 임원량이 조만간에 승세를 잡을 것 같소." 조옥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보기엔 언일곤이 쉽사리 패할 것 같지 않은데요?" "언문의 권법은 비록 위력이 강하지만 그만큼 내공 소모도 심한 수법 이오. 그에 비해 화산의 무공은 온유하고 끈질긴 육합신공 에 기초를 두고 있으니 그만큼 저력이 강하오. 조금 후면 언일곤은 내력이 달려 임원량의 검세를 제대로 막지 못할 것이오." 조옥환은 반신반의하며 비무대 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과연 이백여 초가 지나자 언일곤의 몸이 눈에 띄게 느려지며 연신 뒤 로 몰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임원량은 아직도 진기가 충만한 듯 예 리한 초식을 연거푸 사용하여 언일곤을 공격하고 있었다. 조옥환은 그것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과연 강 공자의 혜안은 정확하군요." 강옥봉은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임원량도 그리 좋아할 일은 아니오. 그는 이번 격전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 넣었기 때문에 다음 상대가 누가 되든 슁게 패하고 말 것이오." "호호…… 임원량은 이번 싸움으로 반짝하고 끝이란 말이군요?" "그렇소." "그럼 강 공자는 누가 우숭하리라 보세요? 설일비인가요?"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대나무 조각으로 부전승자를 뽑을 때부터 결과는 정해진 거 요. 설일비는 다른 출전자들보다 무공이 고강한데 싸우지도 않고 이 차전에 진출하여 내공을 고스란히 보존한 상태이고, 다른 인물들은 이미 격전을 치러 진기가 소모된 상태이니 어떻게 그의 상대가 되겠 소?" "그럼 구엽인삼과 상심검은 그의 차지가 되겠군요." 조옥환이 아쉬운 듯 말하자 강옥봉은 괴야한 미소를 흘렸다. "조 낭자가 원한다면 그것은 조 낭자의 것이 될 수도 있소." 조옥환은 아름다운 눈을 크게 치켜 떴다.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강옥봉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와아……!" 주위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조옥환이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비무대 위의 격전은 어느새 끝나 있 었다. 강옥봉의 예측대로 임원량이 언일곤을 부상시키고 승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네 명의 이차 진출자가 모두 결정되었다. 곧 다시 추첨해서 마지막 결승 진출자를 가리게 되었다. 부전승으로 올라온 설일비 대 신창 왕방! 그리고 점창의 제일고수인 분광신검 사혁 대 화산의 제일고수 육합검 객 임원량! 군웅들은 모두 흥미 진진한 표정으로 그 두 쌍의 대결을 고대하게 되 었다. 첫 번째 대결은 설일비와 왕방의 격전이었다. 설일비는 오른손으로 섭선을 부치며 여유 작작한 걸음걸이로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대 위에는 이미 신창 왕방이 비룡창을 꼬나 쥔 채 그를 기다리고 있 었다. 왕방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오고 있는 설일비를 날카로 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설일비는 그의 앞에 걸음을 멈춘 채 여유 만만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 다. "왕 대협께서 먼저 손을 쓰시지요." 왕방의 메마른 얼굴에 언뜻 노기가 스쳐 지나갔다. 무림에서의 배분 이나 나이로 보아 아직 그의 아들뻘밖에 되지 않는 설일비가 먼저 공 격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이 녀석이 귀거상을 물리쳤다고 너무 건방을 떠는군.' 왕방은 내심 눈살을 찌푸리며 언짢은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의 창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으니 자네가 먼저 손을 쓰게." 설일비는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왕 대협께선 너무 겸손하시군요. 그럼 불초가 먼저 실례하 겠습니다." 이어 그는 왕방을 향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섭선을 슬쩍 흔들었다. 왕방은 일전에 그가 섭선으로 귀거상의 무서운 일격을 물리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바짝 긴장하여 급히 옆으로 피했다. 하나 의외로 섭선에서는 아무런 경풍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니 왕방은 상대의 헛손질에 완전히 혼자서 날뛴 꼴이 되고 말았다. 왕방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설일비는 야릇한 미소를 지은 채 그의 부화를 박박 긁었다. "하하…… 과연 왕 대협의 몸놀림은 신기에 가깝군요. 소생의 가벼운 부채질에도 훨훨 날아다니시니……" 왕방은 솟구차는 노화를 참을 수 없어 낯빛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아무 말도 없이 비룡창으로 설일비의 양미간을 노려 왔다. 쾌액! 그의 이번 한 수는분노한 와중에 펼쳐 낸 것이기 때문에 위맹하기 그 지없었다. 설일비는 슬쩍 허리를 뒤틀어 왕방의 매서운 일격을 피하면서 다시 섭선을 흔들었다. '흥! 이번에도 노부가 속을 줄 아느냐?' 왕방은 코웃음을 치며 섭선을 무시한 채 설일비의 가슴팍을 노리고 비룡창을 찔러 갔다. 하나 그 순간, 쿠르르릉! 섭선에서 갑자기 무시무시한 경풍이 일어나며 왕방의 전신을 향해 짓 쳐 들었다. '아차! 또 속았구나……!' 왕방은 질겁하며 급히 비룡창을 회수하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장!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가 경풍에 쉽쓸리며 움푹 파여 들어갔 다. 왕방은 이것을 보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섭선으로 이런 강기를 내뿜다니…… 저 녀석의 무공은 생각보다 더 엄청나구나.' 그가 미처 몸을 가다듬기도 전에 설일비는 슬쩍 그에게 날아들며 좌 수를 흔들었다. 고오오…… 마치 주위의 공기가 압력에 짜부러지는 듯한 소용돌이 속에 말려 들 어가며 왕방의 전신이 터질 듯한 기운에 휘말렸다. 바로 절세의 무영멸절장이 펼쳐진 것이다. 왕방은 사색이 된 채 사력을 다해 비룽사십팔방을 전개해 냈다. 파팍! 하나 비룡사십팔방은 주위의 엄청난 압력 때문에 채 절반도 펼쳐지지 못했다. 꽝! "크윽!" 왕방은 폭발할 듯한 강기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의 안색은 백지장처렁 핼쑥하게 변해 있었다. 설일비는 천천히 손을 거두어들이며 가볍게 포권을 했다. "왕 대협께서 괜찮으시다면 우리의 겨룸은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 겠군요." 왕방은 어처구니가 없어 한동안 망연자실 서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절강성 제일의 고수로 군림하던 그가 정체 모를 청년에 게 불과 삼 초 만에 패하고 말았으니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더구나 조금전의 상황으로 보아 상대가 만약 손속을 늦추지 않았더라면 왕방 은 그야말로 참담한 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왕방은 얼굴을 실룩거리며 설일비를 응시하다가 땅이 꺼져라 탄식을 토해 냈다. "노부가 패했네……" 군웅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창의 귀신이라고까지 불리던 왕방이 이토록 맥없이 물러설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황방이 설일비의 격장지계에 넘어가 너무 쉽게 흥분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설일비는 담담한 미소를 지은 채 중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천천히 비 무대를 내려갔다. 이어 분광신검 사혁과 육합검객 임원량이 비무대 위에 모습을 나타내 었다. 두 사람 모두 사대검파 중의 하나인 점창과 화산, 양파를 대표하는 고수들이었기 때문에 이번의 격전 또한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일전이 었다. 하나 결과는 너무봉 싱겁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 이미 소패왕 언일곤과의 격전에서 너무 힘을 써버린 임원량은 제대로 실력 발휘도 해보지 못하고 사혁의 분광검에 패퇴한 것이다. 이제 이번 군웅대회의 우숭자는 설일비와 사혁의 결전에서 판가름나 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잠시의 휴식을 가진 후에 각기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군웅들은 이번에야말로 볼 만한 싸움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며 모두 들 눈을 빛냈다. 사혁은 키가 훤칠하고 턱에 삼각형의 수염을 기른 인물이었다. 그는 고동색 장포를 걸쳤는데, 그의 분광검은 장포 속에 숨겨져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처럼 잠복해 있었다. 그는 좀처럼 말이 없는 과묵한 성격이어서 설일비를 앞에 두고도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칼날처럼 예리한 시선으로 그를 뚫어 지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설일비 또한 이번에는 제법 진지해져서 항상 미소가 감돌던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사혁은 그가 이번 비무대회에서 만난 고수들 중에서 가장 강한 인물 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본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군웅들은 비무대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고 숨소리도 죽인 채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돌연, 스으으…… 사혁의 비쩍 마른 몸이 흔들린다 싶은 순간, 번쩍! 눈을 부시게 하는 섬광이 그의 허리춤에서 폭사되어 나왔다. 그 섬광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설일비의 목덜미를 노리고 쏘아져 갔 다. 그 속도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쾌속한 것이었다. 찰나 설일비의 머리가 뒤로 주르르 물러나더니 그의 몸이 빙글 회전 했다. 팟! 사혁의 살인적인 검광은 아슬아슬하게 설일비의 목을 비껴 지나갔다. 설일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양손을 열 십 자로 교차하여 흔 들어댔다. 고오오…… 무영멸절장의 가공할 기운이 일어나며 사혁의 전신을 핍박해 갔다. 사혁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장세 속으로 몸을 던지며 연속적으로 십팔 검을 발출해 냈다. 파파파팟! 그것이야말로 점창파의 분광십팔수검의 최정화 인 분광추영인 것이다. 설일비는 상대의 놀라운 공세에 안색이 조금 변한 채 십자로 교차한 양손을 풀어 각기 상하로 움직이며 기이한 일장을 털어 냈다. 파아아아…… 사혁의 분광검강과 설일비의 장세가 마주치며 듣기 거북한 소음이 일 어났다. 츠츠츠츠츳! 그것은 마치 쇠로 만든 철관이 땅바닥에 끌리는 듯한 음향이었 다. 동시에, 꽝! 비무대가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엄청난 폭음이 일어났다. "크윽!" "으음……" 두 마디의 짤막한 신음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 떨어졌다. 군웅들은 눈을 부릅뜨고 두 사람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설일비는 왼쪽 가슴 부근의 옷자락이 길게 찢어져 맨살이 드러나 보 였다. 게다가 오른쪽 소맷자락도 잘려져 나가 팔뚝이 훤히 드러났는데 팔뚝 에는 가느다란 검상이 나 있어 핏방울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사혁은 몸에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정했다 '아…… 사혁이 이겼구나!' 이런 생각이 군웅들의 머리를 파고드는 순간, "울컥!" 미동도 않고 우뚝서 있던 사혁이 별안간 시커먼 피를 한사발이나 토 하며 몸을 휘청거렸다. 그와 함께 그의 안색은 시체처럼 푸르죽죽하 게 변해 있었다. 그는 비록 설일비의 공세를 막아 냈으나 무영멸절장 의 가공할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심각한 내상을 당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설일비의 상처는 피육이 긁힌 것에 불과하니 누가 보아도 승패는 명약관화한 일이 아닌가! "우아…… 설일비가 이겼다!" "설 공자 만세!" 비무대가 떠나갈 듯 우렁찬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일비는 언제 다쳤냐는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린 채 군웅들 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우와아……!" 군웅들의 환호성 소리가 더욱 커졌다. 낙일립이 비무대 위로 올라오더니 설일비에게 다가왔다. "설 대협, 축하하오. 처음 본 순간부터 설 대협이 보통 인물이 아님 을 알았으나 지 정도일 줄은 노부도 몰랐소이다." 설일비도 답례하며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구엽인삼 반 뿌리와 상심검은 제 것이 되었군요." 낙일립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물론이오. 하지만 본 장에 가입하겨야만 검을 드릴 수가 있소. 만약 본 장에 가입하지 않는다면 구엽인삼과 명주 열 알, 그리 고 황금 백 냥을 상금으로 드리겠소." 설일비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물었다. "귀장에 가입한다면 저는 총순찰이 되는 겁니까?" "그렇소." "총순찰의 지위는 성심장 내에서 어느 정도입니까?" 낙일립은 그가 성심장에 가입할 의사가 있다고 확신하는 듯 환히 웃 으며 말했다. "총순찰의 지위는 본 장에서 세 번째요. 위로는 오직 두 분 장주님과 대공자님만이 계실 뿐이오." 설일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분 장주님의 아래라는 건 이해하겠는데 대공자는 또 어느 분이시 오?" "허허…… 두 분 장주님께는 세 분의 제자 분이 계신데 대공자님은 그 중의 수제자이시오. 본 장예서는 부장주가 없는 대신 그 분이 부장주의 직책을 담당하고 계시오." 설일비가 다시 물었다. "그럼 총순찰과 수석총관의 차이는 어떻게 됩니까?" "허허…… 노부와 총순찰 중 누가 더 높은가 하는 거요? 두 지위는 업무가 서로 달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상호 보완의 관계요. 즉 총수찰은 본 장의 외적인 일을 총괄하는 책임자이고, 본 총 관은 본 장의 내부 일을 담당하는 책임자요." 낙일립은 의미 심장한 눈으로 설일비를 바라보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 다. "이제 설 대협의 마음은 결정되었으리라 믿소. 어떻소. 본 장과 함께 무림대의를 위해 일해 볼 의향은 없소?" 설일비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한데 바로 그때였다. "잠깐만!" 대 아래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고 동시에 한 노인이 은색 수염을 휘날 리며 이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제46장 무우노인 노청봉 설일비는 그 노인이 낙가보의 입구에서 자신과 동행했던 노인임을 알 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노인장은 무슨 일이시오?" 노인은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노부는 설 공자가 성심장의 총순찰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 하드리오. 그런데 설 공자에게 한 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설일비는 상대의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낙일립은 노인과 설일비가 서로 안면이 있는 것 같자 참견하지 않고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설일비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청이라니…… 그게 무엇이오?" 노인은 히죽 웃었다. "다름이 아니라, 노부의 손자 녀석이 평소 몸이 허약해서 항상 보약 을 찾아 혜맸는데 자네가 마침 구엽인삼을 얻게 되었으니 그것을 노 부에게 건네 주지 않겠나?" "뭐요? 구엽인삼을……?" 설일비는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노인을 쳐다보았다. 하나 노인은 넉살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자네가 노부에게 구엽인삼을 인도해 준다면 노부는 이제부 터 절에 들어가 장명등을 켜고 자네의 무운장도를 부처님께 빌어주겠네." 설일비는 하도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엽인삼이 어떤 물건인가! 무림인들이 복용하면 능히 생사현관을 타 통하고 내공이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펀게 되는 희대의 영 약이 아닌가! 그런 영약을 생면부지의 아니, 불과 며칠 전에 우연히 만난 노인이 선뜻 달라고 요구하다니…… 설일비는 혹시 노인의 정신이 이상한 것은 아닌가 하고 그를 빤히 바 라보았다. 하나 노인완 눈빛은 유달리 초롱초롱한 것이 미치기는커녕 다른 사람 들보다 횔씬 러 또렷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설일비는 한동안 우두커니 노인을 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노인의 사정을 듣고 나니 저도 도와 드리고는 싶지만, 구엽인삼은 내가 여러 고수들을 물리치고 힘들게 얻은 것이니 쉽사리 내줄 수가 없소." 노인은 울상이 되었다. "그럼 노부의 손자는 어쩌나? 그 아이가 병이라도 걸려 죽게 된다면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겠나? 자네가 책임이라도 지겠나?" 설일비는 노인의 억지에 슬슬 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쌀쌀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노인장의 손자는 멀정한데 왜 병에 걸려 죽는단 말이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내려가시오." 하나 노인은 막무가내였다. "세상일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데 그 아이가 병에 걸릴지 아닐 지를 자네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러지 말고 어서 구엽인삼을 내놓 게. 자네같이 젊고 팔팔한 젊은이는 그런 보약 없이도 오래오래 살 수 있지 않나?" 노인은 아예 빛쟁이가 빛 독촉을 하는 것처럼 구엽인삼을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렸다. 마침내 참고 있던 설일비의 분통이 폭발했다. 그는 무서운 시선으로 노인을 노려보며 냉혹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 다. "그렇게 구엽인삽을 가져 가고 싶으면 나를 꺾고 가져 가시오." 노인은 그 말에 겁을 집어 먹기는커녕 오히려 히죽 웃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나?" "그렇소. 나도 힘으로 그것을 얻은 이상 노인이 나보다 힘이 세다면 당연히 그것을 가져 갈 권리가 있소." 노인은 손뼉을 탁 치며 좋아했다. "정말 그렇군. 자네는 과연 이해심 많고 친절한 젊은이일세." 설일비는 노인의 말에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 다. 하나 어느새 그의 표정은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하나 이것만은 명심해 두시오. 나는 누가 내 물건을 빼앗으려고 덤 비면 가만히 있지 않는 성미요. 노인장이 만약 구엽인삼을 노리고 내 게 덤벼들다 내 손에 목숨을 잃어도 후회하지 마시오." 노인은 껄껄 웃었다. "허허…… 그거 정말 바람직한 성미로군. 자네의 말은 점점 노부의 마음에 쏙쏙 드네." 노인의 너무도 태연 자약한 태도에 설일비는 문득 무언가를 느낀 듯 표정이 약간 변했다. "노인장도 무공을 알고 있소?" 노인은 가슴팍까지 내려온 은빛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허허…… 그런 건 모르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남에게 두들겨 맞은 적은 없네" 설일비의 눈에 기광이 번쩍거렸다. "이제 보니 노인장은 절학을 숨기고 있는 기인이었구려. 몰라뵈서 죄송하오." "허허, 기인이라니…… 가끔 노부보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는 하지만 자네 앞에서 노부가 어찌 기인 행세를 할 수 있겠나?" 설일비는 상대가 무공을 숨긴 인물임을 알게 되자 오히려 마음이 흘 가분해졌다. "흐흐…… 그런 줄도 모르고 노인장을 이곳까지 모시고 왔으니 모두 내 불찰이오." "젊은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선뜻 시인하다니 쉽지 않은 일일세." 노인의 이죽거리는 말에도 설일비는 화내지 않고 냉랭한 음성으로 말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내 불찰을 씻고 노인장의 절학을 한번 구경해 볼 참이오." 노인은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오! 이제야 그 생각을 했군 과연 자네의 무공은 그런대로 쓸 만하지 만 머리는 약간 둔하군그래." 설일비는 낯빛을 싸늘하게 굳힌 채 노인을 노려보더니 별안간 우수를 쭉 내뻗었다. 팟! 그의 손은 한 줄기 유성처럼 눈부신 속도로 노인의 가슴팍 오 개 대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허허…… 점잖던 젊은이가 갑자기 무례해졌군. 말도 없이 손을 쓰다 니……" 노인은 껄껄 웃으며 슬쩍 옆으로 한걸음 움직였다. 아주 간단한 동작 이었는데 그 시기가실로 적절하여 설일비의 날카로운 일격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이 늙은이의 무공은 보통이 아니군.' 설일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다시 매섭게 쌍수를 휘둘렀다. 팍! 팍! 팍! 금세 대 위는 그의 장영으로 뒤덮이다시피 했다. 그 공세가 어찌나 맹렬했던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낙일립조차 급히 대 아래로 몸을 피해야만 했다. 하나 노인은 여전히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태연히 몸을 움 직여 설일비의 공세를 피했다. 노인의 보법은 기이하기 이를 데 없어 단순히 전후좌우로 몇 걸음씩만 움직이고 있을 뿐인데도 설 일비의 질풍 노도 같은 공세가 비껴 나가는 것이다. '대체 이 늙은이의 보법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신묘할까?' 설일비는 절로 마음이 다급해져 장세를 급히 전환했다. 고오오…… 괴이한 음향과 함께 노인의 전신을 핍박해 가던 장세가 돌연 무거워 졌다. 설일비가 더 참지 못하고 무영멸절장을 발출한 것이다. 노인은 그것을 알고 눈을 반짝였다. '무영멸절장이 아무리 놀랍다 해도 유령보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이 녀석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어야겠다.' 무영멸절장이 펼쳐지자 노인의 발걸음도 더한층 경쾌해졌다. 쿠쿠쿠아아아아……! 십여 장에 달하는 넓은 비무대가 온통 설일비의 장세에 흔들려 금시 라도 무너질 듯했다. 하나 그 엄밀하기 그지없는 장세의 중앙에 있는 노인의 신형은 표홀하기 그지없어 조금도 제약을 받지 않는 것 같았 다. 설일비의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원래 무영멸절장에는 기이한 압력이 담겨 있어 설사 피한다 해도 그 압력에 짓눌려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법이었다. 한데 눈앞의 이 노인은 무영멸절장 속을 무풍 지대처럼 유연하게 빠 져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오십여 초가 흘러갔다. 그 동안 노인은 단 한 번도 반격을 하지 않고 계속 피하기만 했다. 설일비는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의식했다 무영멸절장은 그 막강한 위력만큼이나 과도한 진력을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이러다간 제풀에 먼저 지치겠구나…….' 설일비가 마음을 고쳐 먹고 공세를 바꾸려는 순간, 휘익! 이제까지 피하기만 하던 노인이 쏜살같이 그에게 달려들며 우수를 내 저었다. "으헉……!" 설일비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듯이 놀라 급히 뒤로 몸을 피했다. 하나, 찌익! 그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은 어느새 길게 찢어져 있었다. 노인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오른손으로 설일비의 찢어진 옷자락 을 만지작거리면서 빙그레 웃었다. "허허…… 아주 질 좋은 옷감이로군. 자네가 구엽인삼을 양보한다면 노부가 이것과 똑같은 옷감으로 옷을 한 벌 해주지." 설일비는 더 이상 덤벼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노인을 바라보 았다. 그는 지금토 상대가 무슨 수법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갔는지 짐 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굳은 음성으로 물었다. "노인장은 뉘시오?"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며칠 동안 같이 있었으면서 그것도 모르나? 아참! 이곳에 들어을 때 자네는 노부를 고영이라고 적었지? 노부가 바로 그 사람일세." 설일비는 안색을 무겁게 굳혔다. "노인장께서 무공을 숨긴 절세의 기인이라는 건 인정하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사람을 능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그의 패기만만한 말에 노인은 껄껄 웃었다. "허허…… 정말 좋은 말이로군. 그럼 알려 주지. 노부는 노청봉 이라고 하네." "노청봉?" 설일비는 금시초문인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번개같이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선배님께서는 혹시 무우노인이 아니십니까?" 정중한 음성으로 물어 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낙일립이었다. 노인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아직까지 노부를 잊지 않고 있는 후진이 있었군. 노 부가 바로 무우노인이라 불리던 노청봉일세." 그 말을 듣자 낙일립은 경악과 존경의 빛을 만면에 가득 떠올린 채 급히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후배 낙일립이 노선배님을 몰라뵈어 면목이 없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마치 죽은 아버지를 모시듯 노인을 대하자 군웅들은 물론이고 설일비조차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낙일립은 그 기색을 알아차리고 급히 설일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설 대협은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노선배님의 명성을 듣지 못한 모 양인데, 이분은 옥미 육십 년 전에 정파의 제일기인 으로 천하를 누비셨던 무우노인이란 분이시네. 어서 예를 갖추시게." 육십 년 전의 천하제일기인이란 말에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육십 년 전이라고……? 그렇다면 지금은 고금제일이 되었을 게 아닌 가?' 설일비는 크게 놀랐다가 급히 노인, 노청봉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말학후진이 미처 무림의 대선배님을 몰라뵙고 실수를 저 질렀습니다.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 다." 노청봉은 설일비가 공손한 모습으로 절을 하자 속으로 피식 웃었다. '불리한 걸 알아차리고 금세 구부러지다니…… 과연 일대효웅 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구나.' 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실수랄 게 뭐 있겠나? 다 노부가 쓸데없는 장난을 해서 벌 어진 일이거늘…… 그런데 구엽인삼은 노부가 가져도 되겠나?" 설일비는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의 영손을 위하는 일인데 제가 어찌 구엾인삼을 아끼겠습니 까? 그것은 곧 노선배님께 올리겠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정말 고마운 일일세. 이 일은 노부가 잊지 않고 갚기로 하겠네." 설일비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한쪽으로 물러섰다. 낙일립은 잽싸게 노청봉의 앞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이번에 무슨 일로 본 보에 왕림을……" 노청봉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노부는 이번에 손자 녀석의 등쌀에 못 이겨 유람도 하고 그 녀석의 몸을 건강하게 해줄 보약도 얻을 겸해서 왔다가 이 근처에서 구엽인 삼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리로 온 걸세." "그러시군요. 마침 저도 구엽인삼 반 뿌리가 남았으니 노선배님께서 필요하시다면 내드리겠습니다." "허허…… 그럴 것까지야 없네. 노부의 손자는 반 뿌리만 있어도 충 분할 걸세." 낙일립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런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서는 혹시…… 본 장에 대해서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 까?" 노청봉은 그가 묻는 의도를 훤히 짐작했으나 겉으로는 어리등절한 척 했다. "본 장이라니? 자네는 낙가보의 보주가 아닌가?" 낙일립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조금 전에 제 말씀을 못 들으신 모양이시군요 후배는 성심장의 수석 총관으로 있습니다." 그제서야 노청봉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 성심장……" 낙일릴은 귀가 번쩍 뜨여 반색을 하며 물었다. "본 장에 대한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노청봉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는 그 동안 무림에 별로 뜻이 없어 통 소식을 듣지 못했네. 얼 마 전에 언뜻 듣기로는 당금 무림에서 회서방과 성심장이라는 두 개 의 거대한 세력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자네가 말하는 건 그 성심장인 가?" "예, 그리고 회서방은 얼마 전에 본 장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 낙일립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 그렇다면 성심장은 이제 무림에서 홀로 독보하겠군그래?" 낙일립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본 장은 천하를 독보하거나 제패할 야심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약한 자를 도와 악을 멸하고 무림정의를 세우는 게 본 장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노청봉은 내심 냉소가 터져 나왔으나 짐짓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로군." 낙일립은 그의 칭찬에 크게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 "본 장의 두 분 장주께서는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시고 선행을 널리 권장하시는 분들이시니 노선배님을 보시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 다." "귀장의 장주가 누구인가?" 낙일립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본 장의 장주님은 사십 년 전 천하를 석권하셨던 쌍마쌍성 중의 쌍 성이신 화의성수 육만루 대협과 백의성검 화진천 대협이십니다." 그는 이 말을 하며 급히 노청봉의 기색을 살폈다. . 하나 쌍마쌍성의 쟁쟁한 위명을 듣고도 노청봉은 별반 표정이 달라지 지 않았다. 그는 단지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이다. "쌍마쌍성……? 노부가 은거할 때 무림에 네 명의 무서운 후배들이 나왔다고 하던데, 바로 그들인가?" 낙일립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분들입니다. 노선배님께서는 그 동안 무림을 떠나 계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쌍마쌍성의 위명은 이미 사십 년 전부터 무링을 진동한 지 오랩니다." "음…… 그렇군." 낙일립은 그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본 장의 두 분 장주님께서는 노선배님 같은 명망 높으신 기인 들의 도움을 바라고 계십니다. 아마 노선배님께서 본 장을 도우신다 면 두분 장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은 물론이고 무림정의를 구현 하는데도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노청봉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자네의 말은 노부보고 성심장에 가입하라는 뜻인가?" 낙일립은 공손한게 머리를 조아렸다. "후배가 어찌 감히 노선배님께 그런 제안을 할 수 있겠습니까? 후배 는 단지 노선배님께서 본 장을 기꺼이 보아 주시고 용기를 북돋워 주 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겠습니다. 노선배님께서 본 장의 여러 고수들 에게 아낌없는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고 가끔 조언도 해주신다 면 더욱 영광이 겠습니다만……" 그는 말을 멈추고 노청봉의 표정을 살폈다. 노청봉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 덕였다. "자네의 의견을 고려해 보겠네." 낙일립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허리를 구부려 정중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노선배님! 본 장의 장주님을 대신해서 제가 깊은 사의 를 표하겠습니다." 노청봉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럴 필요까지야…… 그보다 노부의 목이 컬컬한데 술 한잔 마실 수 없겠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본 장에서는 이미 중앙의 의사청 에 조촐하나마 연회석을 마련해 놓고 노선배님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어서 그쪽으로 가시지요." 이어 그는 노청봉을 안내하며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그의 입가에는 시종 희희낙락하는 미소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뜻하지 않게 노청봉 같은 전대의 최고 기인을 성심장으로 포섭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나 그게 과연 정말로 기뻐해야 할 일인지는 나중에 가야 알게 될 것이다. * * * 낙가보의 내보 깊숙한 곳체 위치한 의사청. 그 안에서는 지금 호화로운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참석자는 설일 비를 비롯한 군웅대회의 결실 진출자 일곱 명과 낙일립, 서횡을 위시 한 성심장의 고수들이었다. 물론 노청봉과 그의 손자인 노환도 참석해 있었다. 의사청의 커다란 대청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은 채 주연 을 베풀고 있었다 가장 상석에는 노청봉이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성심오로 중의 생존 자들인 천잔마사 육기와 마화도인, 그리고 낙일립, 고우성, 서횡 등 세 명의 총관이 앉아 있었다. 좌중은 시끌벅적한 가운데 화기 애애한 분위기가 넘치고 있었다. 문득 수석총관인 낙일립이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 무림의 일대 기인이신 노청봉 대선배님을 모시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우선 그분을 위해서 일차 건배 를 합시다."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 건배!" 낙일립의 외침과 함께 그들은 일제히 노청봉에게 인사를 하며 술잔을 비웠다. 노청봉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은 채 중인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은 조금 거만스러워 보였으나 누구 하나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성심장주인 쌍성보다 더 전대에 무림을 주름잡던 일대의 기인이 아닌가? 그러니 누가 감히 그에게 불손할 수 있겠는가? 노청봉은 술잔을 기울이다 문득 낙일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두 분 장주는 어디 가셨나?" 낙일립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떠 공손하게 말했다. "후배가 이미 그분들에게 사람을 보냈으니 이제 곧 나오실 겁니다." "음…… 그건 그렇고 성심장예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있군." 그는 자신의 옆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천잔마사 육기를 돌아 보았다. "저자의 안광을 보리 배교의 대법을 수련한 것 같은데, 배교의 제자인가?" 이 말을 들은 낙일립은 내심 깜짝 놀랐다. '아! 눈빛만 보고도 육 노인의 무공내력을 알아차리다니…… 과연 무 우노인답다!' 그는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저분은 본 장의 오로 중 한 분으로 천잔마사 육기라 하는데 배교의 제자였으나 사정이 있어 탈퇴하였습니다." 그는 육기가 듣고 있는 앞에서 감히 파문당했다는 말을 할 수 가 없어 탈퇴했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 노련한 노청봉은 이미 사정을 짐작한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나이로 보아 하니 팽우령의 제자인 듯한데, 팽우령 은 깐깐한 인물이지……" 육기가 듣고 있다가 노청봉을 바라보았다. "노선배님께서는 선사를 아십니까?" 노청봉은 껄껄 웃었다. "허허…… 팽우령은 과거 노부와 약간의 안면이 있었네. 그래서 노부 는 그에게서 배교의 대법 몇 가지를 배우기도 했다네. 허헛, 벌써 육 십 년도 더 된 옛날 일이군……" 노청봉은 잠시 회상에 잠긴 듯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허공을 응시하 고 있었다. 육기는 반신반의하여 다시 물었다. "선사께서 노선배께 배교법술을 가르쳐 주셨습니까?" "허허…… 가르쳐 주다니, 노부가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사람인가? 단지 심심풀이로 그와 내기 바둑을 두었다가 그가 패하게 되자 몇 가 지 시범을 보여 주었을 뿐이네. 노부는 제법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그 중 몇 가지를 몰래 훔쳐 배웠지." 육기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교의 대법은 기묘하기 그지없는 만큼 익히기도 어려워 절대로 몰래 훔쳐 배우거나 할 수 없는 수법이었다. 노청봉은 그가 불신의 표정을 짓자 크게 기분이 언짢은 듯 돌 연 자신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노환을 돌아보았다. "환아야, 이 할아비에게 술 한잔 따르거라." 노환은 공손하게 술을 따랐다. 그러자 중인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분명 따를 때는 멀 쩡했던 술이 잔에 탕자 김을 솟구치며 펄펄 끓는 것이 아닌가? 노청봉은 낙일립을 보며 넌지시 말했다. "자네는 이 술을 한번 마셔 보지 않겠나?" 낙일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술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술잔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도저히 손을 댈 수 엄을 정도로 뜨겁게 끓고 있지 않은가? 하나 그는 성심장의 수석총관이었다. 중인들이 모두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깨달은 그는 이를 악물고 술 잔을 집어 들었다. 노청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입술이 데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걸세." 낙일립은 술잔을 억지로 잡기는 했지만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 다. 술잔이 이렇게 뜨거운 것으로 보아 그 안의 술은 얼마나 더 뜨거울 것인가? 하지만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술잔 을 입술 가까이 가져 갔다. 한데 술잔 안을 들여다보던 낙일립은 깜짝 놀랐다. 펄펄 끓던 술이 갑자기 식어 버린 듯 조용하지 않은가? 그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노청봉을 바라보았다. "만일 자네가 입술을 데기라도 한다면 자네의 마누라가 가슴 아파할 게 아닌가, 하하……!" 낙일립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술을 마셨다. 노청봉은 이어 삼총관인 서횡에게도 술을 한잔 따라 주었다. "자네도 한잔 마셔 보게." 서횡은 내심 망설여지지 않는 것이 아니었으나 이미 낙일립이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주저없이 잔을 집어 들고 술을 들이켰다. 순간, "앗, 뜨거……!" 그는 기겁을 하고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놀랍게도 어느새 그의 술잔 속에는 펄펄 끓는 술이 들어 있었던 것이 다. 중인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놀랄고 신기해 했다. 그때 마화도인의 등뒤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 "소도의 이 불진은 참으로 마응에 드는군." 마화도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 노청봉은 어느 틈에 그의 등뒤에 서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등에 매고 있던 불진까지 들고 있지 않은가? "어엇?" 대청에 있던 모든 중인들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마화도우! 저쪽을 보시오……" 낙일립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손가락질을 하자 마화도인은 급히 그가 가리키는 곳을 응시했다 순간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멍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노청봉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또 다른 하나의 노청봉이 앉아 술을 마 시고 있지 않은가? 마화도인은 이 기막힌 상황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누가 진짜 노선배닝 입니까……?" 그뿐만 아니라 대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닌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 잘 구경했네." 마화도인은 노청봉이 불진을 내미는 통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는 벌써 마화도인의 불진을 제자리에 꽃은 후 자기 자리로 돌아가 고 있었다. 두 명의 노청봉은 순간 하나로 뭉쳐지는 듯하더니 다른 하나는 어디 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원래의 노청봉이 앉아 있었다. 돌연 천잔마사 육기가 넙죽 자리에 엎드리며 말했다. "노선배님을 일시나마 의심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노선배닝께서 보여 주신 환영술은 배교의 오대대법 중 하나인데 그것 을 터득하신 걸 보니 과연 선사와 친분이 두터우셨군요." 육기가 비록 배교의 반도라고는 하나 사부였던 팽우령에 대한 존경심은 여전했다. 그것은 그만큼 팽우령이라는 인간이 배교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청봉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 "모르고 한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자네는 그만 일어나게." 그제서야 육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 그로 인해 노청봉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십분 공손하게 변해 있 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내의 모든 인물들도 새삼 경이와 존경의 시선 으로 노청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장주님께서 듭시옵니다." 길게 외치는 시비의 소리가 들려 왔다. 장내에 있던 성심장의 고수들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직 노청봉만이 느긋하게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뿐, 심지어는 오만한 설일비조차 공손히 일어나 시립하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쌍마쌍성이라는 이름이 무림인들에게 얼마나 거대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곧 대청의 뒤에서 다섯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다. 가장 앞선 인물은 질 좋은 화의를 걸치고 머리카락이 눈처럼 새하얀 백발노인이었다. 노인은 됫짐을 지고 있었는데 눈빛이 유리처럼 맑고 투명했다. 화의노인의 옆에는 눈부신 백의를 입은 중년인이 당당한 모습으로 걸 어오고 있었다. 백의중년인의 키는 후리후리했고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어 청수한 인상을 풍겼다. 두 사람의 뒤에는 이남일녀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금동옥녀처럼 용모가 뛰어난 미남미녀들 이었는데 그 중 두 사람은 바로 금검공자 도옥린과 무정독연 냉상아 였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남색 장삼을 걸친 준수한 미남자였는데 얼굴 에 오만한 기운이 가득하고 눈빛이 유달리 싸늘했다. 그가 바로 성심장의 대공자인 삼절공자 낭검당이 었다. 화의노인과 백의중년인은 천천히 대청 안으로 걸어와 상석으로 다가 섰다. 노청봉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돌연 노청봉을 향해 걸어오던 화의노인이 슬쩍 우수를 내뻗었다. 스으응…… 그러자 한 줄기 무형의 암경이 노청봉을 향해 몰아쳐 갔다. 낙일립을 비롯한 중인들은 이 광경을 보자 대경 실색했다. 하나 노청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중에 들고 있던 빈 술잔을 허공 을 향해 던졌다. 파스스…… 무형의 암경은 술잔에 부딪히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한바탕 소 용돌이를 일으키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이번에는 백의중년인이 번개같이 달려들며 발길질을 했다. 쾌액! 그의 발길질은 그 속도가 섬전과도 같고 각도가 기묘하여 설사 미리 방비하고 있었다 해도 피하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하나 노청봉은 껄쩔 웃으며 다른 손으로 젓가락을 집어 들더니 슬쩍 찍어 갔다. 팟! 백의중년인은 한눈에 노청봉이 내민 젓가락에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가공할 기운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보았다. 만약 그 젓가락에 발이 격중된다면 뼈가 부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할 수 없이 백의중년인은 발길질을 회수하며 쌍장을 휘둘렀다. 파아악! 두가닥의 예리한 공세가 노청봉의 양쪽 관자놀이를 노리고 짓쳐 들었 다. "허허…… 훌륭한 단봉조양이로군." 노청봉은 담담히 웃으며 젓가락을 빙그르르 돌렸다. 파파파파…… 노청봉의 손이 무섭게 회전하면서 대젓가락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 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십여 개의 대젓가락을 십여 개의 손이 붙잡고 휘두르는 것 같았다. 백의중년인은 다시 급히 손을 오므렸다. 그때 그는 날카로운 바람이 십여 군데에서 전신을 향해 엄습해 옴을 느끼고 흠칫하며 뒤로 한걸 음 물러났다. 그러자 십여 개의 대젓가락을 휘두르던 손들도 씻은듯이 사라져 버렸 다. 백의중년인은 예감이 이상해서 얼른 오른쪽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으음……!" 이게 웬일인가? 백의중년인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가늘게 새어나왔다. 그의 손등에는 꼭 찍은 듯 음식 국물이 한 점 묻어 있었다. 노청봉이 대젓가락으로 그랬음은 의심할 나위도 없었다. 만일 노청봉이 악랄한 마음을 먹고 공격을 가했다면 그의 오른손은 박살나고 말았을 것이 다. 백의중년인은 안색이 조금 변했다가 돌연 빙그레 미소 지으며 노청봉 을 향해 포권했다. "후배들이 선배님을 감히 시험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노청봉은 그들이 자신을 공격한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담 담하게 미소 지었다. "허허…… 노부가 육십 년 만에 다시 나타났으니 의심이 가는 것도 당연하지.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리에 앉게나." 화의노인이 먼저 자리에 앉으며 미소 지었다. "노선배님의 넓으신 아량에 감복했습니다. 저는 성심장을 맡 고 있는 육만루이고 이쪽은 제 의제인 화진천이라 합니다." 육만루와 화진천! 수십 년 동안 무림인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지던 쌍마쌍성 중의 두 사 람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백의중년인, 화진천도 육만루와 나란히 상석에 앉았다. 이어 그는 냉상아 등 세 사람을 손짓해 불렀다. "너희들은 이리 와서 노선배님께 인사를 올리거라." 냉상아와 도옥린, 남검당 세 사람은 노청봉의 앞으로 와서 머리를 숙 였다. 육만루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들은 저와 제 아우가 기른 세 제자입니다. 비록 불민한 점이 있더라도 노선배께서 좋게 보아 주십시오." 노청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세 사람을 살펴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 였다. "과연 하나같이 용봉지재들이로군. 이 아이들이 자네들의 진전을 이어받았다면 앞으로의 천하는 이 아이들이 이끌고 나가게 될 걸세." "허허…… 과찬의 말씀. 너희들은 어서 노선배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 고 무얼 하느냐?" 남검당은 내심 못마땅한 듯 간단하게 고개만 까닥거렸다. 하나 도옥린과 냉상아는 공손하게 절을 했다. "노선배님께서 불초들을 어여삐 보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청봉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탐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었다. "허허…… 어서 자리에서 일어들 나게. 노부 같은 폐물이 뭐 그리 대 단하다고 이러는가?" 말을 하면서 그는 슬쩍 양쪽 소매를 흔들었다. 그러자, 우웅! 엎드려 있던 도옥린과 냉상아의 몸이 저절로 부웅 뜨며 자리에서 일 어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아! 정말 엄청난 내공이다!' 그들은 더욱 외경의 마음이 들어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한쪽으로 가 서 서 있었다. 육만루가 노청봉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조금 전에 낙 총관의 말을 듣자니 노선배님께서 본 장의 고수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하셨다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허허…… 가르침이랄 게 뭐 있겠나? 단지 노부도 자네들의 뜻에 동 참해 볼까 하네만……" 육만루의 유리같이 투명한 눈이 번쩍거렸다. "노선배께서 본 장에 들어오시겠다면 저희들은 쌍수를 들어 환 영하겠습니다 단지……" 노청봉은 의아한 듯 물었다. "단지 무언가……? 어서 말해 보게." "노선배님을 본 장에서 어떻게 예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지위야 아무려면 어떤가? 자네들이 임의대로 정하게." 육만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노선배님의 배분도 있고 하니 본 장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자리가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노청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노부가 원하는 자리가 있으면 내줄 텐가?" "물론입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노청봉은 돌연 술잔을 기울이며 히죽 웃었다. "그럼 오늘밤에 잘 생각했다가 내일 아침에 일러줌세." "그렇게 하십시오." 육만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 그럼 노선배님의 장도와 본 장의 앞날을 위해서 건배합시 다." 모든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건배!" "건배!"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일제히 술잔을 들이켰다. 이어 육만루는 장내를 둘러보다가 설일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네가 이번 군웅대회에서 우승한 설일비 소협인가?" 설일비는 급히 포권을 했다. "불초가 바로 설일비입니다." 육만루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전신을 쓰윽 훑었다. 그 순간 설일비 는 자신이 알몸으로 그의 앞에 서 있는 것 같아 내심 전율했다. 육만루는 잠시 그를 눈여겨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던한 인재로군. 사문은 어디인가?" 설일비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서장의 기인이신 천지태공께 사사했습니다." "음……서장의 천지문은 유서가 깊은 명문이지. 영사 께서는?" "삼 년 전에 별세하셨습니다." 육만루는 혀를 찼다. "무림의 기인 한 분이 또 사라지셨군 그렇다면 자네는 그분의 무영멸 절장을 수련했나?" "그렇습니다." "어디 노부에게 한번 펼쳐 보게." 설일비는 그의 말에 조금 머뭇거리다가 우수를 천천히 내밀었다. 고오오…… 무영멸절장 특유의 기운이 풍겨 오며 육만루의 앞에 있던 술상이 마 구 뒤흔들렸다. 윽만루는 담담한 기색으로 기운이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슬쩍 소매를 흔들었다. 순간, 파아아아…… 무거운 무영멸절장의 기운이 허공에서 한차례 소용돌이치다가 씻은듯 이 사라졌다. "으음……!" 설일비는 한 가닥 억제할 수 없는 힘을 느끼고 주춤거리며 뒤로 한걸 음 물러섰다. 육만루는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담담하게 웃었다. "자네의 무영멸절장은 거의 십 성 수준이로군. 그 정도면 내 대제자인 남검당에 못지않을 걸세. 이제부터 자네를 총순찰에 임명할 테니 부디 본 장을 위해서 힘써 주게." 설일비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본 장을 위해서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겠습니 다. 하나 바닥에 엎드려 있는 설일비의 눈에서는 기광이 번득이고 있었 다. 장내가 워낙 소란한 데다 설일비는 바닥에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그 의 눈에 어린 기광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단 한 사람, 노청봉만은 그것을 발견하고 허공을 올려다보며 소 리없이 웃었다. '큰 여우와 작은 여우의 첫 번째 싸움에서는 작은 여우가 승리했군.' 그는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제47장 폭풍전야 연회는 밤늦게서야 끝이 났다. 마화도인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껏 들이킨 술이 전신에 퍼져 짜르르한 전율을 일으켰 다. 그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야룻하면서도 기분좋은 것이었다. '크흐흐…… 회서방도 무너지고 노청봉 같은 기인마저 본 장에 가입 했으니 앞으로 천하는 본 장의 것이다……!' 그는 노랫소린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휘청이는 걸음으 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방문을 열고 짙은 어둠 속으로 한 발 들여놓는 순간, 그는 자신 외에 누군가가 방안에 있는 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절대고수들만이 느낄 수 있는 직감 같은 것이었다. 그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끼고 조싱스럽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탁자에 있는 불을 켰다. 한 사람이 조용히 침상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바짝 긴장되었던 마화도인의 몸이 서서히 풀어 졌다. 대신에 그의 뇌리에 커다란 의혹이 밀려 들어왔다. '자네는 노청봉 선배님의 손자가 아닌가? 한데 본 도인의 방에는 무 슨 일로 들어 왔는가?" 방안에 앉아 있는 인영은 다름 아닌 노청봉의 손자, 노환이었던 것이 다. "도인쩨 여쭤 볼 말이 있어요." 마화도인은 어리등절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말인가?" 노환은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도인께서는 혹시 칠 년 전에 태호 부근에서 신수검객 조비홍이란 사람을 살해한 적이 있나요?" 마화도인은 흠칫 놀랐다. "조비홍? 아니, 자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노환의 눈빛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건…… 그분이 바로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뭐라고?" 마화도인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노환은 번개같이 그에게 달려들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러댔 다. 파파파파…… 괴이무비한 수십 개의 손 그림자가 장내를 뒤덮으며 마화도인의 전신 을 짖쳐 들었다. 그것은 마치 귀신의 손 그림자인 듯 너무도 쾌속하고 섬뜩하게 다가 왔다. 마화도인은 안색이 대변해 사력을 다해 손을 휘둘렀다. 하나 그가 펼 쳐 낸 장영은 손 그림자에 닿자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쾅! "크악!" 마화도인은 손 그림자에 열두 번이나 가슴을 격중당하고 피를 뿌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쿵! "크으으……!" 바닥에 쓰러져 바둥거리는 그의 오공에서는 시커먼 핏물이 콸콸 뿜어 나오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무공이냐?" 마화도인은 사지를 바둥거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 노환은 원독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것은 유령마인이라는 것이다. 이 원수!" 마화도인은 눈을 부릅떴다. "그…… 그것은 유령천자의 독문절학인데……" "그렇다. 선친께서 네놈에게 복수를 하라고 내려 주신 무공이다." 노환의 음성은 어느새 여인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마화도인은 피를 꾸역꾸역 토해 내면서도 몸을 격하게 떨었다. "너…… 너는 조비홍의 자식이냐?" "그렇다. 나는 그분의 딸인 조옥환이다." 노환은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그러자 어린 동자의 얼굴이 사라지고 배꽃같이 처연하면서도 아름다 운 소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네…… 네가……" 마화도인은 노환이 남장여인인 것을 상상도 못 했는지 눈 을 크게 뜨다가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실로 일대 흉인답지 않 은 허망한 죽음이었다. 조옥환은 싸늘하게 식어 가는 마화도인의 시신을 앞에 놓고 뜨거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버님…… 소녀가 이제야 아버님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지하에서나 마 편히 잠드십시오……" 그녀는 가녀린 어깨를 흔들며 흐느꼈다. 그때 돌연 가느다란 탄식성이 울려 퍼졌다. "조 낭자, 조 대협께서도 이제는 저승에서 웃고 계실 것이 오. 그러니 그만 눈물을 거두시오." 말소리와 함께 노청봉의 모습이 방안에 나타났다. 그를 보자 그녀는 더 이상 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강 공자님……!"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애타게 부르짖었다. 노청봉, 아니 강옥봉은 나직한 한숨을 쉬며 그녀의 등을 다독거렸다. "낭자, 이제 진정하시오." 조옥환은 그의 품에 꼬옥 안긴 채 흐느껴 울다가 조금씩 마음을 가라 앉혔다. 그녀가 눈물을 그치자 강옥봉은 그제서야 그녀의 몸을 살짝 떼어 놓 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너무 지루하지 않겠소?" 그 말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 채 급히 그의 품에서 떨어 져 나왔다. 순간, "하하…… 두 사람의 좋은 일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노부는 꼭 이런 자리에만 나타나게 된단 말씀이야……" 웃음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방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한데 그는 다름 아닌 마화도인이 아닌가?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고 죽어 있던 마화도인이 어떻게 살아나서 걸어 들어올 수가 있단 말인가? 사실 지긍 들어온 마화도인은 부여송의 변장이었다. 다만 그 역용술 이 너무도 절묘해서 설사 마화도인의 친아버지가 나타난다 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을 뿐이었다. 부여송이 나타나자 조옥환은 조금 전 자신이 강옥봉의 품속에 뛰어들 었던 일이 생각나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부여송은 히죽 웃으며 그녀를 향해 짓궂게 한마디하려 했다. 하나 강옥봉이 어느새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 "부 대협께서는 조금 갑갑하시더라도 이 방안에서 꼼짝도 말고 계십 시오. 자칫 섣불리 돌아다니다가 다른 사람의 눈에 띄면 발각당할 우 려가 있으니까요." 부여송은 싱겁게 웃었다. "염려 말게. 노부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인 줄 아나?" 강옥봉은 빙긋 웃으며 품에서 화골산을 꺼내 마화도인의 시신에 뿌렸 다. 시신이 한줌 핏물로 변하자 그는 조옥환의 손을 잡고 황급히 방을 빠 져 나갔다. "수고하십시오." 부여송은 총망히 밖으로 사라지는 두 남녀를 보고 쩝쩝 입맛을 다셨 다. "제길…… 조금 놀려 주려고 했러니 잽싸게 알고 사라지는군." 그는 투덜거리며 침상에 가서 벌렁 누웠다. * * * 육기는 자신의 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문득 잠결에 방안의 공기가 매우 이상함을 경각하고 잠을 깼다. 눈을 뜬 순간, "음……?" 그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안에는 기이하게도 짙은 혈무가 잔뜩 끼여 있었다. 혈무 속에서는 느끼한 피비린내가 풍겨 절로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육기는 영문을 몰라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밖으로 걸어나왔다. 발에 닿는 바닥의 촉감이 이상해서 아래를 내려다본 그는 더욱 놀랐 다. 바닥에는 시뻘건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발에는 어느새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육기는 안색이 대변해 황급히 방문 쪽으로 달려갔다. 한데 문고린를 잡고 막 열려는 순간, "……!" 육기는 대경 실색하여 황급히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놀랍게도 문고리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리고 혀를 낼름거리는 시 뻘건 독사가 자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육기는 아직도 정신이 없어 뒤로 주춤 물러서다가 눈을 번뜩였다. "누구냐? 어떤 놈이 감히 사술로사람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느 냐?" 그는 사술의 고수답게 곧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상황이 누군가의 사 술에 의한 것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순간, "허허허…… 과연 자네의 솜씨는 아직 녹슬지 않았군." 담담한 웃음 소리와 함께 시뻘건 퍼로 얼룩져 있는 방안에 한 명의 노인이 불쑥 나타났다. 그 노인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너무도 갑작스레 나타났다. 육기는 그 노인을 보자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당신은…… 대사형!" 나타난 노인은 배교의 전대 교주인 누남광이었던 것이다. 누남광은 껄껄 웃었다. "허허…… 자네 눈에 아직도 이 대사형이 보인단 말인가?" 육기는 안면을 실룩거리다가 돌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누남광! 당신이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온 이상 빠져 나갈 수는 없다." "허허…… 노부도 빠져 나갈 생각이 없네." 누남광의 태도가 너무나 여유 만만하자 육기는 내심 의아심이 일어났 다. '누남광의 배교대법은 아직 나보다 못할 텐데 무얼 믿고 저렇게 큰소 리를 치는 걸까?' 그는 번개같이 생각을 굴리다가 누남광을 향해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누남광! 이제 드디어 우리가 다시 만났으니 못다 한 결판을 내야겠 다." 누남광은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우뚝 선 채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옛날에는 어전는지 모르지만 지금 자네는 노부의 상대가 아닐세." 육기는 눈초리를 꿈틀거렸다. "과연 그럴까?" "못 믿겠으떤 한번 시험해 보게." 육기는 무서운 눈으로 누남광을 노려보다가 번개같이 허공을 향해 침 을 뱉어 냈다. "퉤……!" 그가 펼치려는 수법은 배교의 오대대법 중 하나인 무영망이 라는 것이었다. 한데 침을 뱉는 순간 육기는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응당 허공으 로 안개같이 퍼져 나가야 할 그의 침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이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육기는 대경 실색하여 급히 이빨로 왼손 약지를 깨물었다. 이어 왼손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사방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하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분명 혈화우의 가공할 수법이 펼쳐져야 하건만 그의 손에서 뿜어 나오는 피는 바닥으로 뚝뚝 떨어 져 내릴 뿐이었다. 육기는 안색이 대변했다. '아…… 내…… 내 대법이 모두 사라졌다……' 그때 누남광이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자네는 오늘 술이 너무 취해 정신이 없었던 모양일세. 자네는 이 방안에서 무슨 향기가 나는 줄도 모르고 있으니……" 누남광의 말에 육기는 급히 코를 킁킁거렸다 과연 방안의 자욱한 혈 무 속에서 구토가 날 듯 느끼한 비린내가 풍겨 나왔다. 그 냄새를 맡자 육기는 한 가지 생각이 퍼쪽 떠올라 얼굴이 창백해졌 다. '이, 이것은…… 용뇌향!' 그때 그의 귓전으로 누남광의 음성이 들려 왔다. "이제야 알았나 보군. 용뇌향을 맡게 되면 배교의 대법을 익힌 사람 은 숨을 멈추고 귀식대법을 시전해야 하네. 그래야 내공이 사라지지 않지. 자네는 그걸 깜박한 모양이군." 육기는 그제야 자신이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음을 깨닫고 식은땀을 주 르르 흘렸다. 원래 용뇌향은 팽우령 사조가 배교의 제자들이 대법을 사악한 목적에 사용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지만 배교대법을 익힌 사람에게만은 치명적인 독약이 되는 것이다. 평상시의 육기라면 금세 방안에 용뇌향이 피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 렸을 텐데 잠결인 데다 방안의 기묘한 혈무와 바닥에 깔려 있는 피에 놀라 미처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용뇌향을 흡입한 이상 그의 무공은 일시지간 산산이 흩어져 보통 사 람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이다. 육기는 안색이 변해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발이 메어지지 않는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놀랐다. 누남광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자네는 얼마쯤 넋이 나간 모양이군. 바닥에 깔려 있는 것 은 피가 아니라 붉은 아교일세. 자네는 지금 아교 바닥에 서 있는 걸 세." 육기는 바닥을 내려다보고는 얼굴을 흥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과연 바닥에 질퍽하게 깔려 있는 것은 펏물이 아니라 붉은 물감이 섞 여 있는 강력한 아교였다. 아교를 발에 가득 묻히고 있었으니 어찌 움직일 수가 있겠는가? 누남광은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내가 왜 아까부터 이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는 줄 아나? 노부가 서 있는 이곳에만 아교가 발라져 있지 않기 때문일세. 자네는 이제 그만 동 사제의 곁으로 가야겠네," 육기는 경악과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누남광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손이 번개같이 휘둘러지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비 명을 질러댔다. "안 돼……!" 그것이 천잔마사 육기의 최후였다. 소리없는 변혁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성심장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고수들은 건의 대부분이 밤새 암 살을 당하고 전혀 다른 인물들로 바러어졌다. 그 일은 너무도 은밀하 고 신속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성심장 내에서는 어느 누구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성심장의 파멸전야는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도옥린은 왠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두근거리는 걸까?' 그는 몇 번이나 잠을 청하려고 억지로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아 보았 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잠자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어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몇 개의 별만이 희미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금시라도 꺼질 듯 아슬아슬하게 반짝거리는 희미한 별들…… 도옥린은 한동안 멍하니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한 줄기 유성이 밤하늘을 가르고 지나갔다. '아……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생애도 저 유성처럼 짧게 피었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는 한동안 남모를 적막감에 쉽싸여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이런 야밤에 혼자서 별을 구경하다니 도 형의 취미도 유별나구려." 돌연 뒤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음성은……?' 도옥린은 안색이 대변해 번개같이 몸을 돌렸다. 있었다. 어둠에 잠겨 있는 정원 한쪽 구석에 한 인영이 우뚝 선 채 그를 바라 보고 있었다. 인영의 눈빛만이 어둠 속에서 유난히도 찬란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도옥린은 인영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몸을 굳혔다. "제 형……!" 나타난 인영은 뜻밖에도 대내의 시위영반인 제백석이 아닌가! 제백석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새하얀 이가 별빛을 받아 더욱 반짝거렸다. "내가 이곳에 나타나 뜻밖이오?" 도옥린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소. 나는 제 형께서 이곳에 오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 했소." 제백석은 빙긋 웃으며 다가왔다. "내가 대내의 인물이기 때문이오?" 도옥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성심장의 중심부이기 때문이오. 제 형이 이곳까지 온 것을 보니 이미 오래 전부터 본 장을 주시하고 있었구려?" "그렇소." 도옥린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제 형이 이곳에 온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겠지요?" "우연이 아니오." "그럼 나를 찾아온 거요?" "그런 이유도 있소." 도옥린은 한동안 무거운 시선으로 제백석을 응시했다. 하나 제백석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만이 떠올라 있을 뿐 아무런 표 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도옥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제 형이 날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오?" 제백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금릉에서 처음 도 형을 보았을 때부터 나는 도 형이 성심장 같은 패 도의 무리들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소.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요. 그래서 나는 도 형을 찾아온 거요." 도옥린은 얼굴에 기이한 빛을 일렁거린 채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 었다. 제백석은 말을 이었다. "도 형은 당당한 정인군자요. 하지만 성심장은 무림의 패 권을 추구하고 있소. 나는 무공을 익힌 무림인의 한사람으로서 성심 장이 무림을 제패하려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소. 그래 서 성심장의 야욕을 꺾기 위해서 나의 있는 능력을 모두 발휘 해서 그것을 제지하려고 애썼소. 이제 내 계획은 거의 실현 단계에 와 있소." 도옥린의 눈빛이 조금 흐려지며 얼굴색이 변했다. 제백석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성심장은 조만간에 무너질 거요. 하지만 나는 도 형만큼은 해치고 싶지 않소. 이것은 절대로 도 형을 얕잡아 보거나 내 개인적인 감정 에 치우쳐서가 아니오. 나는 도 형의 정정당당한 마음씨와 군자풍 의 태도를 보고 그렇게 결정한 거요. 도 형! 부디 나의 고충을 이해하시오." 도옥린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불쑥 물었다. "제 형이 내게 원하는 게 무어요?" 제백석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성심장을 떠나시오." 도옥린의 눈빛이 급격히 흐려졌다. 그는 안색이 변한 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릴 수는 없소. 성심장은 나의 유일한 사문이고 두 분 장주 는 나를 이십여 년 동안이나 길러 주신 사부님들이오. 나는 그분들을 배신할 수가 없소." "나도 사실은 제 형이 무척 마음에 드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제 형을 내 사형보다도 좋아하게 되었소. 하지만 제 형 때문에 사문 을 배반할 수는 없소.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오." 제백석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응시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별들이 반짝이는 암천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도 형, 보시오. 밤하늘에 반짝이는 저 별들은 수천 년이 흘러도 변 함이 없소. 하지만 백 년도 못 사는 우리 인간들은 밤낮없이 모략과 귀계를 일삼으며 피를 흘리고 있소. 우리가 태어나고 생활하고 다시 죽어 가는 이 세상은 절대로 어느 한사람의 것이 될 수 없소. 이것은 우리 모두의 것이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 다는 말이오." 제백석의 음성은 정점 더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하나 성심장은 이것을 어기려 하고 있소.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소. 우리는 그것을 막아야 하오. 이것은 어느 개인이가 혹은 사문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오. 인간이라면, 적어도 힘을 가진 무림인 이라면 누구나가 지켜야 할 의무이고 도리인 것이오. 도 형은 이것을 알아야 하오." 도옥린은 얼굴을 실룩거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제백석은 그를 흘끗 돌아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도 형, 우리는 무림인이오. 그러므로 무릇 무림인의 본분을 알아야 하오. 두리가 처음 무공을 익힐 때 어떤 생각을 했소? 무림을 제패하고 어지럽히겠다는 생각을 했소? 천만에! 우리는 모두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를 억누르며 무링평화에 이바지하자고 생각했을 거요. 나는 도 형께서 좀더 넓은 안목을 가지 고 무림인으로서의 본분 을 자각했으면 하오." 제백석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도옥린 또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무거은 침묵을 지킨 채 다른 생각을 하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휘이이이이…… 돌연 밤바람이 석상처럼 서 있는 두사람의 몸을 한바탕 쉽쓸고 지나 갔다. 도옥린은 고개를 쳐들고 제백석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 형은 말씀을 무척 잘하시는구려." 제백석도 고소를 금치 못했다. "별말씀을……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 다." 도옥린은 피식 웃었다. "내가 정말 공자라면 얼마나 좋겠소?" "도 형은 공자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사람이오." 도옥린은 제백석의 말을 듣고 희미하게 웃었다. "하하……" 그러다가 돌연 정색을 했다. "제 형의 오늘 말씀은 정말 잘 들었소. 제 형은 나에게 새로운 자각 을 일깨워 수었소 정말 감사드리오." 그가 허리를 굽히자 제백석은 급히 만류했다. "이러진 마시오, 도 형. 송구스럽소이다." "아니오. 제 형이 아니었으면 나는 영원히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악의 구렁텅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거요. 제 형으로 인 해 나는 비로소 무림인으로서의 나아갈 바를 깨닫게 되었소." 제백석은 기광을 번뜩였다. "그럼 도 형은……!" 도옥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형의 말씀대로 성심장을 떠나겠소." 제백석은 얼굴이 환해지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도 형! 정말 고맙소." 도옥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겠소." 두 사람은 힘주어 서로의 손을 마주잡았다. 두 사람의 마주잡은 손을 통해 뜨거운 사나이들의 정이 흐르고 있었다. 이때 돌연 죄꼬리 같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호호…… 소매도 진심으로 두 분께 축하드려요." 도옥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샌지 녹의를 곱게 차려입은 냉상아가 활짝 웃으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냉 사매!" 도옥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며 더듬거렸다. 냉상아는 입가에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호호…… 이사형께서는 놀라실 필요 없어요. 사실은 저도 이분과 한 생각인 걸요." 이어 그녀는 제백석의 옆에 나란히 섰다. 도옥린은 제백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애정의 빛이 충만한 것을 발견하고 더욱 놀랐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사매와 제 형이 벌써……' 제백석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 형을 속여 미안하오. 사실 아매와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교분이 있던 사이였소." '아매라고……?' 도옥린은 더욱 갈피를 못 잡고 어리등절한 얼굴이 되었다. 냉상아가 살포시 웃으며 제백석의 팔을 살짝 잡았다. '사실…… 이분은 저의 부군이세요." 그 말을 듣고 도옥린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본래 총명하기 그지없던 인물인지라 곧 사정을 짐작하고 활짝 웃었다. "아…… 일이 그렇게 된 거로군. 그럼 그때 관제묘에서 내가 사매를 만난 것은 제 형이 안배했던 일이었구려?" "하하…… 그때는 사정이 다급해서 어쩔 수 없이 도 형을 잠깐 속였 소. 늦게나마 사과드리오." 제백석은 담담히 웃으며 포권했다. 도옥린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씀을…… 이런 경우에는속은사람이 멍청한거요.하하……" 그는 원래 사매인 냉상아를 은근히 사모하고 있었으나 대범한 성격답 게 냉상아와 제백석의 관계를 축복해 주었다. '제백석은 나보다 열 배는 더 뛰어난 사람이다. 사매가 그와같이 뛰 어난 인물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사형으로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 디 있겠는가?' 그는 이렇게 자신을 위안하며 쓰라린 가슴을 스스로 달랬다. 그러다가 불현듯 제백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한 가지 제 형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해 줄 수 있겠 소?" 제백석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 보시오." "제 형은 도대체 정체가 뭐요? 정말로 대내의 시위영반이오, 아니면 무림의 고수요?" 제백석은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돌연 품에서 하나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도 형은 이 칼을 알아보시겠소?" 도옥린은 제백석이 들고 있는 칼을 보자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 다. "아니, 그 칼은……! 그럼 제 형이 바로 무영신룡단혼도……?" 그는 너무나 놀라고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린 채 멍하니 제백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마도 평생 놀랄 일을 오늘 하루에 모두 놀라는 것 같았다. 제48장 도왕천하 의사청의 아침이 밝았다. 아침 식사를 끝낸 성심장의 고수들은 모두 의사청으로 모여들었다. 오늘은 총순찰을 비롯해 새로 영입된 고수들의 임명식이 거행될 예정 이었기 때문이다 드넓은 의사청의 앞마당에는 수십여 명의 고수들이 도열해 있었고, 수뇌급 인물들은 의사청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청 안에는 붉은 비단 이 깔려 있었고 중앙에 세 개의 커다란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태사의 아래에는 양쪽으로 십여 개씩의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진시가 되자 의사청 안은 거의 꽉 들어찼다. 이제 비어 있는 자리라고는 중앙에 있는 세 개의 태사의뿐이었다. 돌연, "장주님이 나오십니다!" 한소리 긴 외침과 함께 대청 뒤편에서 몇 명의 인물들이 걸어나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성심장의 고수들은 모두 일어서서 그들을 영접했 다. 들어온 인물들은 모두 여섯 사람이었는데 성심장주인 육만루와 화진 천, 노청봉과 남검당, 도옥린, 냉상아 등 세 명의 제자들이었다. 남검당 등 세 사람은 태사의 옆에 늘어섰고, 을만루와 화진천, 노청 봉은 세 개의 태사의에 각각 앉게 되었다. 중앙에 육만루가 앉고 좌측에 화진천, 우측에 노청봉이 앉았다. 그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나머지 고수들도 제각기 착석했다. 이어 수석총관인 낙일립이 일어나 소리쳤다. "그럼 지금부터 행사를 거행하겠소이다." 이어 그는 두루마리를 들고 인물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추운보의 설럴비, 점창의 분광신검 사혁, 화산의 육합검객 임원량, 신창 왕방, 진주언문의 소패왕 언일곤, 벽력도 염비, 마환 조익기! 이상 일곱 분은 앞으로 나오시오." 설일비 등 군웅대회에서 뽑힌 일곱 사람은 태사의 앞으로 걸어나와 일렬로 늘어섰다. 낙일립이 다시 소리쳤다. "총순찰에 설일비!" 그러자 육만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의 옥패를 설일비에게 건네 주 었다. 그것은 화옥으로 만든 옥패였는데, 중앙에 '성'이란 글자 가 쓰여 있었다. "이것은 본 장주를 상징하는 성심옥패일세. 앞으로는 이 옥패가 총순찰의 신물이 될 걸세." 설일비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성심옥패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장주님." 설일비가 옥패를 품에 갈무리하고 물러나자 낙일립이 다시 호명했다. "분광신검 사혁 등 여섯 사람은 본 장의 육용사에 봉하오. 육용사의 우두머리인 사혁은 앞으로 나오시오." 사혁이 앞으로 걸어나와 설일비와 마찬가지로 옥패를 하나 건네 받고 는 절을 하고 물러났다. 일곱 사람의 직위수여식이 끝나자 중인들의 시선은 태사의 우측에 앉 아 있는 노청봉에게로 향했다. 노청봉은 과연 어떤 직책을 받을 것인가?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궁금증이었다. 육만루가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노청봉을 바라보았다. "이제 노선배께서는 원하시는 직책을 말씀해 보시지요. 어떠한 것이 든 본 장주는 수용하겠습니다." 노청봉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정말인가?" 육만루는 눈살을 코금 찌푸렸다. "아무려면 본 상주가 노선배께 허언을 하겠습니까? 염려 마시 고 말씀하십시오." 노청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말하겠네. 노부가 원하는 자리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노청봉의 입에 고정되어 있었다. 노청봉은 빙긋 웃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바로 성심장의 장주일세." 그 말이 떨어지자 모두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육만루와 화진천 또한 안색이 대변해 노청봉을 바라보았다. 육만루는 투명한 눈을 번뜩거리며 자신의 귀를 후벼 팠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노청봉은 태연 자약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노부는 성심장의 장주 자리가 탐이 난다네." 자신의 귀를 긁던 육만루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이어 그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화진천 또한 싸늘한 안색으로 노청봉을 노려보았다. 하나 노청봉은 히죽 웃으며 넉살좋게 말했다. "왜 그렇게 떫은 표정을 짓고 있나? 분명 자네들 입으로 아무거나 원 하는 자리를 말하라고 하지 않았나?" 육만루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소." 그의 말투는 어느새 냉혹하게 변해 있었다. 노청봉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딴소리 하긴가?" 육만루는 이미 평정을 회복했는지 안색이 평상시로 돌아와 있었다. 하나 그의 유리알같이 투명한 눈만은 무시무시한 살기로 번뜩거리고 있었다. "내가 미처 귀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소." "그게 무언가?" "본 장의 장주는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될 수 없다는 것 이오." 노청봉은 눈을 크게 떴다. "오! 그거 정말 별 해괴 망측한 규칙도 다 있군그래. 하지만 규칙이 란 사람이 정한 것이니 사람이 깰 수도 있지 않나?" 육만루의 음성은 음산한 울림을 띠고 있었다. "이 규칙만큼은 절대로 깰 수가 없소." 한데 바로 그때였다. "이총관이 장주님께 한말씀 올리겠습니다." 돌연 중인들 중에서 반미륵 고우성이 벌떡 일어나며 외치는 것이 아 닌가! 육만루는 그를 힐끔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총관은 어서 말하시오." 고우성은 목청을 가다듬은 다음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옛부터 장부의 일언이란 중천금이라 했습니다. 하물 며 천하제일문파인 본 장의 장주께서 하신 말씀은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인만큼 장주께서는 언약하신 대로 노청봉 선배 님께 장주의 직위를 인도해야 옳을 줄로 압니다." 그의 이 청천 벽력 같은 말에 육만루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눈을 멀뚱멀뚱 뜨고 고우성을 바라보았 다. "지금 이총관은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고우성은 또렷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본 총관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멀정합니다." 육만루와 화진천은 하도 어이가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 얼굴만 마주보고 있었다 그때 성심오로 중의 하나인 마화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도가 한말씀 올리겠습니다." 육만루는 귀가 번쩍 뜨였다. . 그는 평소 마화도인의 심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그가 이번에 고우성의 말을 통쾌하게 반박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 "도인께서는 어서 말씀하시오." "어험…… 빈도의 생각으로는 이총관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다고 생각 합니다. 무릇 일방의 주인이라면 스스로의 말에 책임을 져야 마땅하니 장주께서는 더 이상 구차하게 변명하지 마시고 깨끗하게 물 러서시기 바랍니다. 그게 지금까지 장주께서 쌓아 올린 영명을 무너뜨리지 않는 최선의 방책인 줄 압니다." "……!" 육만루는 아연해져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고우성과 마화도인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 해할 수가 없었다. 자른의 충복이었던 인물들이 지금 자신을 장주의 지위에서 내쫓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같은 성심오로 중의 하나인 천잔마사 육기가 벌떡 일어났다. "노부도 한마디하겠소이다. 노청봉 대선배께서는 비단 덕망이 높으실 뿐 아니라 무공 또한 가히 신선의 경지에 다다르신 일대기인 이시외다. 이런 분을 장주로 모시게 된다는 것은 비단 개 인의 영광일 뿐 아니라 본 장의 크나큰 기쁨이니 당연히 본 장을 창 립하신 두 전대 장주께서도 기뻐하시리라 믿소이다." 그는 특히 전대 장주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육만루는 멍하니 육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육기가 한차례 열변을 토한 후 자리에 앉자 이번에는 수석총관인 낙 일립이 일어났다. "본총관은 육노인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사실 노청봉 대선 배 같은 기인은 일부러 모시려고 해도 어려운 판인데 그분께서 자진 해서 본 장을 이끌어 주시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경하해 마지않는 일 이오이까? 그러니 우리들은그분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속히 그분을 장주로 추대합시다." "옳소!" "노선배님을 장주로 모시는 데 나 권운도 학귀도 찬성이오!" "노부도 절대 찬성이오!" 여기저기서 낙일립의 말에 호응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내의 몇 몇 극소수 인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고수들이 노청봉을 장주로 추대하자고 외치고 있었다. 육만루는 멍한 시선으로 아우성치는 중인들을 쓸어보다가 느릿느릿 시선을 남검당 등 세 명의 제자들에게 돌렸다. "너희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남검당은 장내의 변화에 놀라 있다가 이 말을 듣자 안색이 변해 큰 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저는 절대로 반대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육만루는 도옥린을 바라보았다. "옥린, 너는……?" 도옥린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제자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사부님께선 평소 남자는 스스로의 일 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만루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남검당이 그를 노려보떠 노호성을 질렀다. "둘째!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도옥린은 당담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사형, 순리를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 뭐가 순리란 말이냐?" 남검당은 이를 부드득 갈며 허리춤에 찬 장검을 뽑았다. "오냐. 네놈이 진작부터 딴생각을 품고 있는 줄 짐작하고 있었다. 내 가 네놈에게 배반자의 말로가 어떠한 것인지 똑똑히 보여 줄 테다!" 이어 그가 막 도옥린을 향해 덮쳐 가려는 순간, 팟! 그의 옆에 서 있던 냉상아가 돌연 우수를 휘둘러 그의 혈도를 찍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너무도 도발적인 일이었는지라 남검당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 하고 그대로 제압당하고 말았다. "사, 사매…… 네가……" 남검당은 믿어지지 않는 듯 냉상아를 쳐다보았다. 육만루 또한 눈앞의 광경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냉상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믿었던 제자들의 연이은 배신은 수하들의 반역보다 더한층 커다란 충격을 그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상아야…… 네가 감히 이런 짓을……" 냉상아는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대사부닝, 죄송해요. 하지만 대제는 어쩔 수가 없으 니 대사부께서도 순응하세요." 화진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상아야! 우리들이 너를 얼마나 귀여워해 주었는데 감히 배신을 하는 거냐?" 냉상아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래서 이사부께서는 제 몸에 악독한 금제를 가하셨나요?" 화진천은 그 말을 듣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니, 저년이 어떻게 그 사실을……' 그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혀서 한동안 아무 생각도 떠오르 지 않았다. 육만루는 조금 더 침착했다. 그는 느릿하게 앉아 있는 노청봉을 돌아보며 담담해진 음성으로 물었 다. "노선배, 이게 모두 노선배의 걸작이오?" 노청봉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인하지 않겠네." 육만루는 한동안 뚫어지게 그를 응시하다가 돌연 탄식을 토해 냈다. "정말 노선배의 고명한 수법에는 탄복했소. 내가 이렇게 완벽하게 당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소." "자네의 불찰만은 아닐세." "그렇지 않소. 노부가 불민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소? 원래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는 심리전은 병법 에서도 가장 고도의 싸움인데,나는 이 심리전에서 완패 하고 말았으니 변명할 여지가 없소." "자네가 너무 자책하니까 노부도 마음이 아프군." "하나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소." 육만루의 음성이 돌연 강해지며 눈에서 날카로운 신광이 줄기 줄기 뻗어 나왔다. 그는 무시무시한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노청봉을 뚫어지게 바라보 았다.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예로부터 장수들 간의 싸움이었소. 나는 이 싸움에 마지막 승부를 걸고 싶소." 노청봉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좋은 말이로군 자네는 노부에게 도전하려는가?" "그렇소. 도전을 받아 주시겠소?" 노청봉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혼자로는 노부의 적수가 아니네 두 사람이 함께 덤빈다면 또 모르지만……" 그 말에 모든 사람의 안색이 대변했다. 냉상아는 급히 노청봉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안 돼요. 한 사람만 해도 벅찰 텐데 왜 굳이 두 사람을……" 육만루는 그녀를 힐끔 돌아보았다. "상아야, 너는 사부보다 노선배를 더 걱정하는구나!" 냉상아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육만루는 다시 노청봉을 돌아보혀 입을 열었다. "노선배의 제안은 확실히 뜻밖이오. 나 혼자서는 노선배의 적수가 되 지 못함을 솔직히 시인하겠소. 어제 내가 최심지를 장으로 변환 시켜 공격했을 때 노선배는 술잔으로 간단히 그것을 막아 냈소. 그것 을 보고 나도 노선배의 무공이 나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했소. 하지 만 노선배가 우리 두 사람을 당해 낼 수 친다고는 결코 믿지 않소." 노청봉은 담담히 웃었다. "그거야 겨뤄 봐야 아는 일 아닌가?" 육만루는 그를 빤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선배는 확실히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구려. 좋소! 우리 두 사 람은 정식으로 노선배에게 한 수 가르침을 청하는 바이오." 이제 결정되었다. 사십 년 전부터 천하를 주름잡았던 희대의 고수, 쌍성! 그들이 한 사람을 상대로 합공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육만루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청 중앙에 우뚝 섰다. 화진천 봉한 아무 말 없이 육만루의 옆에 가서 나란히 서 있었다. 어느새 그의 허리춤에는 하나의 신검이 매달려 있었다. 검집 표면에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그림이 양각되어 있는 그 검은 오 대신검 중의 제일인 승룡검이었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채 노청봉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노청봉은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다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품속에서 하나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고색 창연한 칼집에 든 보 도는 칼자루부터 도신까지가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보도를 보자 육만루는 눈을 번쩍 빛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근자에 듣자 하니 강호에 한 명의 도왕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노선배께서 혹시……?" 노청봉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무영신룡단혼도요." 어느새 그의 음성은 노인의 늙수그레한 음성에서 젊은 청년의 그것으 로 변해 있었다. 동시에 그가 얼굴을 슬쩍 문지르자 주름살투성이의 노인의 얼굴은 어 디론가 사라지고 준수하기 그지없는 미소년의 옥안이 드러났 다. 그는 바로 강옥봉이었다. 강옥봉은 천룡보도를 움켜쥔 채 두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그 동안 선배 행세를 하며 두 분을 속여 죄송합니다. 늦게나마 인사 를 드리겠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육만루와 화진천은 강호의 대선배인 줄로만 알았던 노청봉이 아직 약 관도 넘지 않은 준수한 소년인 것을 보자 망연자실해졌다. 그들은 미소년의 준수한 얼굴을 거듭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육만루가 탄식을 하며 물었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저는 강옥봉이라 합니다." "강옥봉…… 좋은 이름이군 올해 몇 살인가?" 육만루는 마치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강옥봉 또한 착한 손자처럼 고분고분 대답해 주었다. "올해 스무 살입니다." 육만루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스무 살이라…… 너무 젊군." "죄송합니다." "아닐세. 이제 세상은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의 것이 될 걸세. 노부의 시대는 벌써 지나갔네." 그의 음성에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비감이 서려 있었다. 강옥봉은 달리 할말이 없어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돌연 육만루는 냉상아를 돌아보았다. "상아야, 이 소년과 너는 어떤 사이냐?" 냉상아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강옥봉을 바라보고 있다가 육만루가 물어 보자 화들짝 놀라며 엉겁결에 대답했다. "네? 그분은 제 낭군이세요." 말을 마치곤 그제서야 그녀는 부끄러워져 얼굴을 붉게 물플였다. 육만루는 그녀와 강옥봉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군." 이어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노부는 아까의 제안을 약간 수정하겠네." "네?" 강옥봉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육만루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우리들의 승부는 단 십 초로 제한하겠네. 그리고 승패에 관 계없이 우리는 성심장을 자네에게 인계하고 무림을 떠나겠네." 강옥봉은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선배님…… 사실 저는 성심장에는 아무런 뜻아……" "사양할 것 없네. 성심장이 세워진 목적이야 어떻게 됐든 자네가 뜻 하는 바대로 이끌어 나가면 될 테니까. 정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다면 자네가 알아서 해체시켜 버리게." 이어 그는 화진천에게 눈짓을 하고 강옥봉의 전후로 갈라섰다. "나는 이제 모든 욕심을 버렸지만단 한 가지, 무공에 대한 욕심만은 아직 남아 있네. 듣자 하니 자네는 우내칠대무학 중의 천애도와 유령 보를 익혔다고 하더군. 우리도 우내칠대무차 중의 최심지와 낙일검을 익혔으니 자네의 좋은 적수가 될 걸세," 강옥봉은 그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 수 븐탁드리겠습니다." 이어 그는 천룡보도를 봅아 들고 몸을 우뚝 세웠다. 중인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세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 쪽은 이미 사십 년 전부터 강호에서 무적으로 공인된 두 명 의 절정고수! 다른 한 쪽은 혜성같이 나타나 무림 사상 제일의 도왕으로 불 리는 희대의 풍운아! 그들이 우뚝 서서 대치하자 장내에는 금시라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동안 세 사람은 석상이 된 듯 미동도 알고 우뚝 서 있었다. 그러던 한 순간, "차합!" 한소리 폭갈과 함께 화진천이 먼저 승룡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파파파파파! 츠츠츠츠츳! 장내는 순식간에 검풍과 도기, 지영의 소용돌이 속에 잠겨 버렸다. 쾅! 콰쾅! 그들의 격돌하는 여력이 어찌나 엄청나던지 의사청이 금시라도 무너 질 듯 마구 흔들거렸다. 중인들은 충격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급급히 뒤로 물러난 채 격 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나 장내에는 검풍과 도영만이 난무할 뿐 사람의 모습은 도무지 보 이지 않았다. 세 사람의 몸이 하도 빠르게 움직여 도저히 중인들의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인들은 몇 초가 흐른지도 모른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경천동지 의 격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무공깨나 익힌 절정고 수들이었지만 인간의 무공이 이 정도에 이를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강옥봉과 육만루, 화진천 세 사람이 보여 주는 화려한 격전은 가히 무예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다. 중인들 중에 그들의 일초반식 이라도 알아보는 사람은 전무했다. 그러던 한 순간, 차차창! 갑자기 격전장 내에서 요란한 굉음과 함께 검기와 도기가 화려한 폭 발을 일으켰다. 중인들은 깜짝 놀라 급히 안력을 돋우어 장내를 바라보았다. 언뜻 그들의 눈에 두 개의 그림자가 휘청거리며 물러나는 모습과 다 른 한 개의 그림자가 허공을 훨훨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핫…… 두 분께 죄송합니다만 제가 이긴 것 같군요!" 날아가는 인영은 낭랑한 웃음 소리를 터뜨렸다. 이어 그 인영은 의사청을 휠훨 날아 입구에 떨어져 내렸다. "앗?" 중인들은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뜨다가 더욱 놀랐다. 어느새 두 명의 인물이 막 의사청을 빠져 나가려다가 날아온 인영에 게 제지를 당한 것이다. 두 인영은 바로 삼총관인 비호 서횡과 총순찰인 설일비였다. 그들은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격전에 쏠린 틈을 타 장내에서 도망가 려다 제지당하자 몹시 당황해 했다. 그들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이 강옥봉임을 알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노선…… 아니, 강 소협! 무슨 일로 우리들을……" 설일비가 떨리는 눈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강옥봉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껄껄 웃었다. "하하……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서횡은 급히 안색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렇네. 노부는 잠시 뒷간에 가려 하는데 자네는 무슨 일로 노부를 가로막았는가?" "하하…… 당당한 회서방의 방주와 총호법이 뒷간을 핑계대다니, 부 끄럽지도 않소?" 그 말에 중인들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뭣? 회서방주라고?" 서횡과 설일비 또한 얼굴이 창백해진 채 뒤로 주춤 물러났다. "회, 회서방주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강옥봉은 냉엄한 눈으로 서횡을 노려보았다. "좌불자! 당신의 계략은 이미 산산이 깨어졌소. 나는 이미 당신과 설 일비가 밤마다 몰래 만나 성심장을 무너뜨릴 계획에 골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서횡은 안색이 변해 아무 말도 못 하고 강옥봉을 응시했다. "당신의 거처에서 회서방의 비밀전서구인 뇌응신조를 찾아 냈고, 무 엇보다도 어제 연회장에서 당신이 뜨거운 술잔을 오른손으로 쥐고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손이 의수임을 알았소. 그러니 더 이상 꼬리를 감추지 말고 순순히 정체를 드러내시오." 서횡의 얼굴이 흥악하게 일그러졌다. "네놈이 끝까지 노부를……" 서횡은 더 이상 피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자 본성을 드러내며 두 눈 에 흉흉한 살기를 피워올렸다. 그는 설일비에게 눈짓을 하더니 돌연 강옥봉에게로 덤벼들었다. "이놈! 죽어라!" 채액! 그의 좌수는 어느새 매의 발톱처럼 모아진 채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것을 본 육만루와 화진천이 경악성을 토해 냈다 "앗? 수라조……!" 수라조! 금석을 두부처럼 으스러뜨리고 어떠한 호신강기라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린다는 우내칠대무학 중의 수라조는 바로 현마 좌불자의 절학이었 다. 설일비는 본래 두가장의 장주인 낙양대공자 두진악의 변장이었다. 설일비 또한 수라조와 무영멸절장을 동시에 펼치며 강옥봉을 향해 덮 쳐 들었다. 쾌애액! 두 절세고수의 합공은 태산이라도 박살낼 듯 가공스럽기 그지없었다. 하나 강옥봉은 두 눈을 횃불처럼 반짝인 채 우뚝 서 있다가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천룡보도를 뽑아 휘둘렀다. 파파파파파파……! 천룡보도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듯한 엄청난 도기의 폭풍이 휘 몰아쳤다. 그것은 바로 천애팔도 중의 최절초인 비몽천애 였던 것이다. 도기의 폭풍에 닿는 순간 좌불자와 두진악이 펼쳐 냈던 수라조와 무 영멸절장의 강기는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사색이 되어 몸을 날리려 했으나 도기의 폭풍을 피할 수는 없 었다. 파팟! "크아악!" "으아아악!" 처절한 두 마디의 단말마와 함께 좌불자와 두진악은 가슴과 배가 쩌 억 갈라진 채 피를 뿌리며 살러졌다. 그들은 몇 번인가 바닥에서 꿈 틀거리며 원독에 찬 눈으로 강옥봉을 노려보다 숨이 끊어졌다. 실로 일세의 흉마들다운 처참한 최후였다. 일순간 장내는 무거운 침묵과 적막으로 휩싸였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온 천하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희대의 마 두인 회서방주 좌불자가 너무도 허망하게 죽는 순간을 지켜보면서 감 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반미륵 고우성으로 변장했던 치수재 악궁이 중인들을 돌아보 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무림을 어지럽히던 원흉이 죽었으니 강호에는 다시 평화 가 찾아오게 되었소. 이건 모두 여러분들의 공이거니와 특히 강 소협의 활약은 정말 눈부신 것이었소." 강옥봉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씁쓸히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모든 것을 완수한 지금 그는 몹시도 허탈해 보였다. 힘없이 걸어가는 그의 뒤를 냉상아, 운봉랑, 곽희연, 조옥환, 손지유 등의 미녀들이 말없이 뒤따르고 있었다. 강옥봉! 평범한 시골 의원의 아들로 태어나 일신의깐위를 돌보지 않고 고난과 시련의 연속인 강호세계로 뛰어들어 천하를 유랑했던 그는 그 동안 무수한 역경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고 고군 분투 하여 마침내는 무림 역사상 영원히 남을 위대한 공적을 이 루게 되었다. 강호가 존재하는 한 무영신룡단혼도라는 일곱 글자 는 언제까지나 무림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강옥봉 일행이 가는 앞길에 태양이 미소 지으며 밝은 광명을 뿌려 주 고 있었다. < 대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