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림백서 제1권 안내 ━━━━━━━━━━━━━━━━━━━━━━ 신작 중의 신작!!! 따끈따근해서 뜨겁기까지 한 방금 나온 검 궁인님의 신작 무협소설 '무림백서'가 업 로드를 시작했습니다. 살아있는 무림의 사서(史書) 활사관인 구양중백이 남긴 강호혈사록의 마지막 장은 미완성인 채 끝나고 있다. 천년의 미맥이 부활하고 악마지겁이 도래 한다는 무서운 예언은 과연 실현될 것인 가? 구룡성궁을 열 수 있다는 구룡개천환비도 의 행방은? -네게 죄가 있다면 백도무림을 위해 빛나 는 청춘을 바친 것 뿐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날 죽이려는 것이냐? 하늘이 노하고 땅이 저주하리라! 뇌정이 한 이이의 이마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뇌문을 남기노니, 기억하라 더러운 백도인이여! 톱니바퀴게 맞물리는 듯한 치밀한 구성과 지루함을 느낄 수 없게 하는 검궁인 특유 의 스피디한 문체가 여러분에게 커다란 흥 미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무림백서 제1권 - 차 례 - ━━━━━━━━━━━━━━━━━━━━━━━━━━━━━━━━━━━ 서문(序文) 서막(序幕) 강호혈사록(江湖血史錄) 제1장 운명(運命)의 그 날 제2장 냉막한 소년(少年) 제3장 운명(運命)을 건 거래 제4장 십자혈각(十字血閣)의 부활 제5장 대살종(大殺宗) 제6장 드러난 진실(眞實) 제7장 화중지화(花中之花) 제8장 달마삼식(達磨三式)의 비밀 제9장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 제10장 을지사란(乙支思蘭) ■ 무림백서 서문(序文) ━━━━━━━━━━━━━━━━━━━━━━━━━━━━━━━━━━━ 선과 악의 개념은 모호하다. 고래로 수많은 철학가나 성자들이 남 긴 행적이나 기록을 살펴보면 선악(善惡)의 다양한 해석과 그 실 행방안을 풀어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순한 개념처럼 복잡한 것이 없다. 시대에 따라 바뀌고, 상황에 따라 전 도(顚倒)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게 발생한다. 이 세 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진리(眞理)란 것도 변천하기 마련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렸다는 식의 판단을 우 리는 번번이 내리게 될 때가 있다.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라는 것이 있다면 싹둑 잘라내고 싶다. '이것이 지선(至善)이다.' 과연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자 몇이나 되랴. 법정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건의 재판을 한다. 검사가 범행을 밝히 며 구형(求刑)을 내리고, 변호사가 무죄를 주장하며 변론을 하거 나 형량을 낮추기 위해 범인을 미화시킨다. 판사의 나무망치는 전 가의 보도처럼 판결을 내린다. 우리는 이러한 법도 아래 살고 있다. 그런데 명쾌하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일들이 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끝내 해명되지 않은 채 한 시대가 흘러가고, 또 한 시대가 다가와서는 과거의 행적을 들추어낸다. 여기서 과거의 악이 선이 되고 선이 악으로 뒤바뀌는 경우를 익숙 하게 보아왔지 않은가! 그래서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다. <무림백서(武林白書)>는 또 다른 현실의 이야기다. 무더운 하루 자오정(子午亭)에서 검궁인 배상. ■ 무림백서 서막(序幕) 강호혈사록(江湖血史錄) ━━━━━━━━━━━━━━━━━━━━━━━━━━━━━━━━━━━ 영웅은 난세(亂世)를 부르고, 난세는 영웅을 탄생시킬지니 역사는 끊임없이 구르는 수레바퀴와도 같은 것이다. 어쨌든 세월은 유수처럼 흐르고 또 흐른다. 난세의 영웅과 더불어 태풍의 시대를 창조하는 효웅들로 인해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굴러간다. 건륭(乾隆) 십년. 무림사상 보기 드문 강호사가(江湖史家)가 나타나 희대의 사서인 강호혈사록(江湖血史錄)를 작성했으니 세인들은 그를 활사관인(活 史官人) 구양중백(歐陽仲伯)이라 불렀다. 명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무림사상 처음으로 강호사서를 작 성한 살아있는 사록이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 다. 강호혈사록에는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무인들의 이야기와 강호흥망 사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후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지금부터 전개될 이야기는 그가 남긴 강호혈사록 제삼십구장으로 부터 시작된다. 강호에서 태어나 강호에서 늙은 한 노강호인(老江湖人). 그는 만년에 낙향하여 손자의 재롱을 유일한 낙으로 삼아 여생을 즐기고 있다. 서리처럼 흰 백발에 수염만 보아도 그의 나이가 지긋함을 알 수 있으리라. 어린 손자의 뛰노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눈가에는 세월의 흔적인 양 깊은 주름살이 새겨져 있 다. 그의 모습은 여느 노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당당한 풍채 나 유난히 빛나는 눈은 그가 젊었을 적에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음 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지금은 손자의 재롱을 보며 너털웃음을 짓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 날도 손자 녀석이 무릎에 걸터앉아 재롱을 피우며 재촉했다. "할아버지 옛날 이야기 해주세요. 네? 빨리요." 손자는 그의 수염을 잡아당기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졸라 대었다. 노인은 아이의 행동이 마냥 귀여운 듯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면 서 말했다. "허허, 녀석. 그렇지 않아도 이 할애비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해주려던 참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단다." 그는 비밀의 막을 여는 듯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아득히 오랜 옛날 무림이란 세계가 생성할 무렵부터 선과 악은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단다. 광명을 좋아하고 의(義)를 쫓으며 천도(天道)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정도(正道)를 추구했으며, 반대 로 암흑을 좋아하고 어둠의 그늘에서 이기심과 욕망, 야심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버린 사람들, 그들은 마도(魔道)를 추구했 지. 그리해서 그때부터 세상은 둘로 나뉘어졌단다." 노인의 얘기에 아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럼 지금도 그때처럼 세상이 둘인가요? 나쁜 사람들하고 좋은 사람들하고?" 아이의 천진한 표정에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 다. "그렇단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욱 복잡해졌다고 할 수 있단 다. 세상은 둘이 아니라, 셋, 넷으로 갈라졌단다. 하지만 근원은 바로 그 두 갈래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단다." "......?"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은 흑과 백에서 출발했단다. 그중에서 만사만악만겁(萬邪萬 惡萬劫)의 총체인 악마천부(惡魔天府), 또는 마교(魔敎)라 불리우 는 집단을 이룬 암흑의 무리들에 의해 뚜렷한 명암을 이루게 되었 단다." "마교요? 할아버지, 그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가요?" 아이는 눈빛을 반짝이며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허허,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선과 악의 두 가지 마음이 있단 다. 단지 그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달려있을 뿐이지. 마교의 사 람들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그 길을 택한 거란다." "그럼 좋은 사람들은요?" "그들은 애당초 정토 위에 선 자들이라 그만큼 자부심도 강했지. 그렇지만 결국 그 자부심 때문에 그들은 한 번도 뭉친 적이 없단 다. 만약......." "......?" "그들이 힘을 하나로 뭉쳤다면 무림의 사정은 달라졌을게야. 마교 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정의를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의문이 생긴 듯 할아버지를 쳐 다보았다. "그런데 왜 뭉치지 못했을까요?" "허허, 그건 이 할아비도 모른단다. 단지 자부심과 자파(自派)의 명예 따위가 이유라고나 할까? 아무튼 마교의 등장으로 인해 강호 는 한시도 피바람 잘 날이 없었고, 무림계는 하루가 멀다하고 혈 겁에 휩싸였단다." 아이의 천진한 표정 위에 한 가닥 두려움이 뒤덮였다. "한때는 마교로 인해 무림이 궤멸될 뻔한 적도 있었지. 그때의 일 을 살아있는 사록이라 불리던 활사관인 구양중백이란 사람은 강호 혈사록 제사장에 이렇게 기록했단다." "......?" <......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중원천지는 온통 피비린내와 시신 썩은 냄새로 진동했다. 까마귀떼가 허공을 맴돌고 있으면 그 아래에는 반드시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곤 했다. 악마지겁(惡魔之 劫)이 도래했나니! 산 자는 의인이 아니요, 의인은 모두 망객(亡 客)으로 화했더라.> 악마지겁(惡魔之劫)! "허허,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마교의 시대는 불과 오십 년 만에 끝이 났단다." 손자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어떻게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지. 천지가 암흑에 잠겨있었으나 갑자기 아홉 가닥의 빛이 일어나 도탄에 빠져 있던 무림을 기사회생시켰 단다." 아이는 앙증맞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좋은 사람들이 드디어 뭉쳤군요?"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그랬으면 오죽 좋았겠느냐? 당시 정도는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마교의 앞잡이가 되거나 아니면 용기를 잃고 산곡(山谷)으로 들어 가 숨는 것이 고작이었단다." "그런데 어떻게 무림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죠?" 아이는 실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기적이 일어났단다. 어느 날 갑자기 구룡(九龍)이 천계로부터 현 신하여 암흑무림을 구원한 것이다." "구룡?" "그렇지. 아홉 마리의 용이란다. 그들은 가히 천상의 무학을 한 몸에 지녀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르는 신력(神力)을 지녔었 지. 마음만 먹으면 하늘의 구름을 부르고 뇌(雷)의 힘을 쓰는가 하면, 손가락으로 만근거석을 날리고 단지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작은 언덕을 가루로 날려 버리는 믿을 수 없는 능력을 가진 분들 이셨단다." "와아! 구룡의 무공이 그렇게 엄청났나요?"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이는 흥분으로 인해 양볼이 사과같이 빨개졌다. 너무나 맑고 천진스러운 모습이었다. 노인은 아이를 사 랑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살아있는 신인(神人)들, 그 분들께서는 구주(九州)에서 일어나 단 삼 년만에 암흑무림을 구원하고 저 공포와 전율의 마교(魔敎) 를 이 땅에서 몰아내 지옥의 유계(幽界)에 가두어 버렸단다." "야아, 정말 통쾌해요!" 아이는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노인은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로 인해 악마지겁은 물러가고 무림에는 광명이 찾아들었단다. 이른바 백년태평시대라고 하지. 활사관인은 당시를 이렇게 기록했 단다." <구룡성제(九龍聖帝)는 무림의 살아있는 신화다. 중원백도(中原白 道)의 새로운 융성기가 그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무림인들은 구룡 성제를 기념하기 위해 아미태산(阿彌泰山)의 한 산역에 구룡성궁 (九龍聖宮)을 건립하고 백도의 삼만팔천 종을 헤아리는 무학비급 을 비장시켜 예를 표명했다 한다. 하지만 그 진위는 파악되지 않 았다. 다만 구룡성제의 초상(肖像)이 그려진 아홉 장의 그림만이 전설처럼 나돌았으니, 이를 구룡개천환비도(九龍開天幻秘圖)라 하 였다. 아홉 장의 구룡비도가 모두 모이면 전설의 구룡성궁이 열린 다는 신화만을 남긴 채 유구한 세월 속에 묻혀 버렸도다.> 아이는 흥분한 듯 물었다. "그럼 구룡비도를 얻으면 천하제일인이 되겠군요?" "허허, 그렇지.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하늘이 점지한 자만이 가능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후 유구한 세월이 흐르며 간간이 구룡비도가 나타나기는 했으나 그때마다 탐욕이 빚은 피보라가 일어났을 뿐 다시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단다." "그럼... 아직 천하제일인은 나타나지 않았겠네요." "허허, 녀석. 너도 천하제일인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것 은 모두 하늘의 뜻이라는 것만 명심해 두거라. 자, 이제 이야긴 다음에 더 하도록 하고 이만 자도록 해라." "네, 할아버지. 오늘은 그만 하고 내일 다시 얘기해 주셔야 해 요?" 다음 날도 아이는 어김없이 할아버지의 무릎에 올라탄 채 재촉했 다. "어제 그 얘기 또 해줘요? 응? 할아버지!" "허허, 이 녀석!" "빨리요." "아이쿠! 알겠다. 이 녀석, 할아비 수염이 남아나지 않겠다." 노인은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다 갑자기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무림혈사록의 제이십사 장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지. 그것은 아 주 무서운 얘기란다." <......그들은 인세에 태어나 가장 불행했으며 저주받은 운명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보상받기 위해 천하 를 혈세(血洗)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후 그들이 일으킨 혈겁을 십마지겁(十魔之劫)이라 기록하려니와, 이전에도 없었으며 이후에도 다시 있어서는 아니 될 공포의 겁난이었다.> 십마지겁(十魔之劫)! 노인의 얘기를 듣는 동안 아이는 어느덧 무릎을 벤 채 잠이 들고 말았다. "허허, 녀석. 이야기 해달라고 졸라대더니 몹시 고단했던 모양이 로구나." 그는 잠든 아이가 깰세라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만이라도.......' 아이가 잠든 건 차라리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 를 듣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십마지겁. 십마(十魔)가 일으킨 혈겁은 강호혈사록을 온통 붉게 물들였을 뿐 더러 마교가 일으킨 악마지겁 이래 가장 저주스런 사건으로 기록 된 사건이었다. 십 인의 개세혈마(盖世血魔). 그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저주받고, 능멸받고, 천대받던 시절이 존 재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한 한을 무림에 돌렸고, 그로 인해 무림 은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십마혈겁삼십년(十魔血劫三十年). 삼십 년의 피의 세월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그들의 무공이 인간 의 한계를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혈세를 저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후, 그들이 홀연히 실종된 사실은 하나의 불가사의(不可思議)에 다름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십 년만 더 무림을 혈세했더라면 무 림은 그 막을 내려야 했을 것이다. 절대불패할 것만 같았던 그들은 홀연히 강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 다. 그들이 왜, 무엇 때문에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한결같이 그들이 죽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의 무공이 불가사의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당시 또 하나의 무서운 소문이 나돌아 세인들을 경악케 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딘가에 마궁(魔宮)을 세웠으며 그곳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비장하고, 저주받은 인간들의 이상향을 건설했다는 것 이었다. 훗날 세인들은 그곳을 암흑마전(暗黑魔殿)이라 칭했다. 어쨌든 십마지겁은 그렇게 끝이 났다. 마교의 악마지겁으로 인해 정도무림인 백만이 피보라 속에 사라졌 다면 십마(十魔)의 겁(劫)은 정도사도(正道邪道)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살육(殺戮)이 자행되었다는 점이 달랐다. 잠든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노강호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야망과 애욕, 원한과 명예욕으로 점철되었던 젊은 날의 기억이 주 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던 것이다. '아! 모든 것이 허망하구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던 가? 이제 와 생각하니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 을.......' 노인은 다시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강호혈사록 제삼십구 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 다. <무림개사 이래 악마지겁(惡魔之劫), 십마지겁(十魔之劫)의 이대 환란 외에도 일흔아홉 번의 대소겁사(大小劫事)가 무력(武歷)를 형성해 왔으니 강호사는 온통 핏빛으로 얼룩졌더라. 그러나 작금 에 이르러서도 혈겁이 그치지 않음은 통탄할 일이로다. 당금의 흑백양도는 최융성기에 이른 듯하다. 무학의 발달은 최고 조에 달하였으며 살인을 위한 실전무공(實戰武功)이 그 주류를 이 루고 있다. 오늘날 정도의 무학은 정심함과 심신수양, 극기(克己)를 그 목적 으로 하여 대성에 달하기까지 무수한 세월의 고련을 요구하나 사 도(邪道)의 무학은 빠름과 편벽괴이함으로써 승부를 걸고 있다. 그 결과 점차 사도의 무학이 승하게 되어 도처에서 도(道)가 격하 되고 마(魔)가 일어서는 이변이 속출하니.......> 강호혈사록 삼십구 장은 무림의 앞날에 대한 염려로 시작되고 있 었다. 사서는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나 거기에는 사관(史官)의 주 관적인 견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강호혈사록 삼십구 장에 이러한 염려가 드러나 있다는 것은 결국 구양중백의 무림관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즉, 활사관인 구양중백은 살아 있는 사서(史書)이면서 고금제일현자(古今第一賢 者)이기도 한 셈이었다. 강호혈사록은 삼십구 장이 마지막이었으며 그 부분의 길이는 전체 길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길었다. 그 이유는 삼십구 장이 바로 그의 시대였기에, 작금무림의 상황과 편성, 구분, 그리고 나름대 로의 예견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활사관인은 그후 실종되었다. 그가 죽었는지, 아니면 풍진 속으로 사라졌는지 그의 종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강호혈사록이 영원불멸의 무림사록(武林史錄)이 며, 그것을 남긴 그가 고금제일의 현자임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삼십구 장의 어느 한 부분을 주목해 보면 백도무림 최대의 비사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마도십세(魔道十勢), 녹림팔절(綠林八絶), 흉천십이교(兇天十二 敎) 등....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신장되어 가는 흑도의 세력을 감 당하기에는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백도 이십팔정문(二十八正門)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그러나 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게 되었 다. 급기야 소림의 삼백년내 최고의 성승이라는 대활성승(大活聖僧) 법천신승(法天神僧)의 주창으로 이십팔정문은 대동단결하여 대활 련(大活聯) 십전무맹(十全武盟)을 결성했다. 그 목적은 침체일로를 걷고 있던 백도에 활력을 불어넣어 흑도의 준동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십팔정문의 비전지학이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 라 많은 백도기인들이 참여하게 되었으니 일백 명의 기재(奇才)를 각처에서 선발하여 정영(精英)으로 수련시키게 되었다. 이들이야 말로 백도의 미래를 걺어질 동량(棟樑)이었던 것이다. 백도 이십 팔숙(二十八宿)과 십전천사(十全天師)는 소년기재들을 훈련시키기 에 피와 땀을 쏟았으니 마침내 이십 년의 각고 끝에 일백 명의 십 전무랑(十全武郞)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 치열한 경합 끝에 수좌(首座)는 옥수서생(玉手書生) 천무 옥(天武玉)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십전무맹의 젊은 맹주로 대망의 탕마멸사의 장도에 올랐다. 이후 그는 뛰어난 무공과 병법을 발휘 하여 흑도사마인들에게 공포의 십전옥수겁(十全玉手劫)이란 무명 을 날려 백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는 명문 출신이 아 님으로써 무림인들의 질시와 시기를 끊임없이 받게 되었다. 십전 무랑은 대부분 명문가의 자제들이기 때문이었다.......> 활사관인 구양중백은 목에 칼이 떨어져도 진실만을 밝히는 인물이 었으므로 그의 기록은 조금도 꾸밈이 없었다. <...... 결국 백도 최대의 비극이 발생했다. 그것은 천무옥이 십 전무맹주가 된 지 십 년만에 일어났다. 그는 마도십세(魔道十勢) 중 마화궁(魔花宮)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모함을 받게 되 었다. 결국 그가 결혼식을 올리던 날 추악하기 그지없는 함정에 빠지게 되었으니.......> <...... 주모자는 알 길이 없으나 천무옥은 흑도와 내통했다는 누 명을 쓴 채 십전무랑의 연수합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비록 경세절륜한 무공으로 당당히 대항하였으나 종국에는 독(毒)의 암 산을 입은 아내 화중지화(花中之花)를 안고 십전무맹의 후면에 위 치한 절혼애(絶魂涯) 아래로 스스로 뛰어내렸으니....... 오호! 통재라! 백도인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무림최대의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실을 접한 강호인들은 만고기재의 죽음을 눈물로 안 타까워하였음이라!> 백도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니 어쩌면 영원히 감추어 두고 싶은 치욕적 혈사(血事)였다. 이제 이 이야기는 강호혈사록의 기록이 끊어진 지 정확히 십 년 후부터 이어지게 된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어느 곳으로부터 말이다. ■ 무림백서 1권 제1장 운명(運命)의 그 날 ━━━━━━━━━━━━━━━━━━━━━━━━━━━━━━━━━━━ 번- 쩍! 우르르르... 콰앙! 뇌성폭우(雷聲暴雨). 천지를 양단할 듯한 뇌성이 울린다. 먹장구름으로 뒤덮힌 하늘은 온통 칠흑이었고, 그 사이로 섬광이 갈기갈기 암천을 가르며 대지를 때린다. 쏴아아아아! 뇌성과 함께 하늘 한 귀퉁이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져 내리는 폭우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문득 뇌성과 폭우를 뚫고 들려 오는 한 가닥 처참한 소리가 있었다. "으아아아......!" 한(恨)과 증오가 서린 듯한 절규였다. 원한과 저주에 찬, 듣는 이 로 하여금 소름이 오싹 끼치게 하는 절규가 사위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뇌성벽력과 폭우는 금세 절규를 삼켜버렸다. 천장단애(千丈斷涯)의 끝이었다.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한 인영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옆구리에 여인을 끌어안은 채, 손에는 부러진 장검(長劍)을 움켜쥐고 암천을 향해 원한 맺힌 장소를 울부짖고 있었다. 번-- 쩍! 뇌전이 폭우를 가르는 순간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삼십사오 세 가량 되었을까? 훤칠한 체격의 청년의 모습이 잠깐 드러났다 사라 졌다. 그는 일신에 남의(藍衣)를 입었으며 영준하기 그지없는 용 모였다. 검미(劍眉)는 관자놀이까지 길게 뻗어 손을 대면 베일 듯 했으며, 화광(火光)이 이글거리는 듯한 눈은 천하를 꿰뚫어 볼 듯했다. 한 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입술은 그의 굳센 의지를 말하는 듯하다. 그가 입고 있는 남의는 본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로 물들어 있었다. 또한 그의 어깨, 등, 옆구리, 배 할 것 없이 무려 이십여 가지의 병장기가 빽빽이 꽂혀 있었다. 어떤 것은 복부를 관통해 등뒤까지 튀어나와 있었고, 어떤 것은 어깨에 박혀 부러져 있었다. 온몸에 병기가 박혀있는 그의 몰골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더욱 경악스런 것은 청년의 복부 밖으로 삐져나와있는 내장(內臟) 이었다. 내장은 절반 이상 삐져나와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그는 눈을 부릅뜬 채 경련하고 있었다. 분노가 극에 달한 듯 그는 하늘을 우러러 절규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청년은 부러진 장검을 암천을 향해 겨눈 채 저주에 찬 장소를 울 부짖었다. 청년의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의 전신은 물론 바닥까지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으핫핫핫핫......! 왜? 무엇 때문에 날 죽이느냐? 천하여, 무림 이여! 널 위해 청춘을 바친 대가가 고작 이것이었더냐? 으아아아 아아!" 청년의 입에서 터져 나온 분노에 찬 절규는 폭우가 쏟아지는 온 산천을 뒤흔들었다. 번- 쩍! 우르르르.... 쿵! 우레 소리가 산역(山域)을 뒤흔든다. 그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인영들이 있었다. 하나, 둘, 셋... 사십... 오십... 근 백에 가까운 인영들이 다가 오고 있었다.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그들의 표정이 섬뜩하게 드러 나곤 했다. 그들의 눈에서 살기가 이글거렸다. 간혹 경악과 두려움이 엿보이 긴 했으나 한결같이 필살(必殺)의 신념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핫핫핫! 모두 오너라! 너희들이 원한다면 내 파천(破天)의 춤 을 추어주마!" 청년은 눈을 부릅뜨며 광소를 터뜨렸다. 그런데 그때, 옆구리에서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으... 음." "화(花)... 화매!" 신음을 흘린 여인은 임부(姙婦)였다. 만삭에 가까운 듯 배가 불러 보이는 흑삼미부였다. 청년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사신(死神)처럼 단애를 향해 좁혀드 는 인영들을 바라보며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흐흣! 화매, 저들을 봐라! 어제까지만 해도 형제였으며 수 하였고, 동료였던 저들이 오늘은 날 죽이기 위해 살기등등한 채 다가오고 있다. 화매, 똑똑히 보아라. 저들이 누구였던가를! 그리 고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말이다. 크하하 하하핫!" 청년의 광기에 찬 웃음소리에는 비감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임부는 말이 없었다. 그저 그에게 부축된 채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쿠후후후훗! 단지... 강하다는 이유 때문에... 아니, 명문혈족 (名門血族)이 아니란 이유 때문에? 또 있다. 화매... 사파(邪派) 출신의 너와 맺어졌다는 이유로 인해 날 배반자로 몰아... 저들은 나의 몸에 검을 쑤셔 박았다." 그는 미친 듯이 웃어대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인영들을 노려보았 다. "맹세한다! 나 천무옥(天武玉)... 맹세코... 더러운 하늘을 깨뜨 려 버리고야 말겠다!" 그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다가오는 인영들을 부릅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세인들은 그를 일러 이렇게 말한다. 이 땅에선 가장 강하며, 가장 완벽한 인간. 백도가 키워낸 일백정영(一百精英) 가운데서도 발군의 기량으로 정상을 차지한 이 시대의 위대한 승부사(勝負師)이자 최고의 무예 가(武藝家)라고 말이다. 십전옥수겁(十全玉手劫) 천무옥(天武玉). 그가 이렇게 처절한 모습이 되어 외로운 늑대처럼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 무림이여! 널 위해... 천하여! 널 위해... 나 무옥은 청춘을 다 바쳤다. 탕마멸사(蕩魔滅邪) 하기를 삼 년여... 삶과 죽음을 초개 처럼 버린 내게 내리는 대가가 겨우 이것이었더냐? 번-- 쩍! 쏴아아아아아--! 폭우는 천지를 함몰시킬 듯이 쏟아지고 뇌성은 산천초목을 뒤흔들 었다. 번쩍이는 뇌전 속에서 백도 최고의 영웅과 구십구 인의 승부사는 마침내 파천무(破天舞)를 추기 시작했다. 번-- 쩍! "크아아아!" 뇌성벽력이 치는 순간 저주와 한(恨)을 안은 채 천무옥은 그가 목 숨을 걸고 사랑했던 여인을 안고 신형을 날렸다. 그의 육신은 허공에서 혈우(血雨)가 되어 흩어졌고, 그의 비명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낙화(落花).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붉은 꽃잎이 흩날렸다. "......." 몸서리쳐지는 침묵이 인영들을 목석처럼 굳게 했다. 그들이 내려다 보는 바닥에는 갈기갈기 찢겨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육십육 인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생의 미련을 떨구지 못하는 듯 채 눈을 감지 못했다. 나머지 삼십삼 인은 살아 남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동료 육십육 인의 죽음을 보아야 했다. 명예, 야망, 권세, 이기(利己), 자존(自尊), 그리고 질투.... 그 것이 빚어낸 고금최대의 백도의 비극은 이렇게 그 막을 내렸다. 삼십삼 인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핏물로 젖어버린 그들의 얼굴에는 서서히 부끄러움이 치밀어 오르 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천무옥의 강함에 모골이 송연해짐 을 금치 못하며 지난 날을 회상했다. 백도의 총아로 자부하던 그들이었다. 지난 이십 년간 똑같이 굶주린 채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지옥의 수련을 쌓았던 그들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이나 자살하고픈 유 혹을 혀를 깨물어가며 참아온 그들이었다. 서로의 손을 움켜잡고 용기를 북돋으며 혹독한 훈련을 참아내었 고, 그 과정을 거쳐서야 오늘날 백도의 영화를 이룩해낸 그들이었 다. 그런데 결말은 어떠한가! 아무 것도 남은 것은 없었다. 오직 허탈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 다. 형제와도 같았던 우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에게는 배 반과 음모의 대가인 허탈감과 부끄러움만 남았다. 쏴아아아아아--. 억수같이 내리는 폭우 속에서 삼십삼 인은 말없이 돌아섰다. 저벅저벅....... 무거운 발자국소리를 남기며 그들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어 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무서운 추억을 떨쳐버린 채 그들은 사라져갔다. 쏴아아아아--! 여전히 폭우는 계속되고 있었다. 뇌전이 내리치자 하늘과 맞닿은 단애 위에 널려있는 수십 구의 시 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오, 이럴 수가!" "한 발 늦었소. 벌써 일은 벌어지고 말았소." "아미타불......!" 단애 위에 십 인의 인영이 유성처럼 날아 내렸다. 그들은 단애 위 에 벌어져 있는 끔찍한 정경에 전율했다. 승(僧), 도(道), 속(俗), 개( ), 여인 등.... 다양한 신분이었 다. 한결같은 점이 있다면 그들의 기도가 범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눈 빛은 안으로 깊숙이 갈무리되어 있어 내공 수위가 화경에 접어들 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위인들이었다. 십 인의 기인들은 넋을 잃은 채 단애 아래를 내려보았다. 단애의 아래에는 칠흑같은 암공(暗空)만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그 무엇이 있을 턱이 없었다. 오직 그들의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 는 뇌성소리 뿐이었다. 쿠쿠쿵......! "아! 마침내 비극은 벌어졌소. 항차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오?" "허어! 무림의 장래가 보이는 듯 하오." "아미타불! 혈겁(血劫)이 다시 중원산하를 물들일 것이오." 단애 위에서 한숨 짓고 있는 십 인은 누구인가? 세인들은 그들을 십전천사(十全天師)라 부른다. 십전무맹 대활련의 창시자이자 백도이십팔성(白道二十八聖)들조차 그들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 백도의 대기인들이었다. "갑시다. 시체나마 찾아야 하오. 그것이 그 아이의 넋이나마 위로 하는 일일 것이오. 아니... 반드시 찾아내야 하오." 번-- 쩍! 뇌전이 천지를 가르는 순간 십 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쏴아아아! 격류(激流)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노도질탕의 격류는 집채만한 바 윗덩어리를 산산조각낼 듯 엄청난 기세로 계곡을 흘러내려 가고 있었다. "......!" 암흑 속에서 십 인의 인영이 횃불같은 눈으로 격류를 살피고 있었 다. 번-- 쩍! 새파란 뇌전이 격류를 밝혔을 때였다. "오! 저기!" 누군가 창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 음성에는 반가움과 격동이 한 꺼번에 담겨져 있는 듯했다. 휙! 열 가닥 인영이 전광석화처럼 격류 위를 가로질러 갔다. 그들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천무옥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그의 피 맺힌 한을 위로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파아앗! 그들이 수면을 스친 순간 검은 물체가 물 속에서 건져졌다. 그로 인해 새로운 무림의 역사가 태동되고야 말았으니. "이럴 수가......." "아... 아이가 살아 있소!" 십 인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들이 건져낸 것은 흑의미부였다. 그녀는 이미 숨이 끊긴 지 오 래인 천무옥의 아내였다. 죽은 여인의 앞가슴이 열려 있었다. 그녀의 가슴팍을 내려다 보는 열 명의 기인들은 호흡조차 멎은 채 격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어야 만 했다. 여인의 옷깃을 필사적으로 끌어잡은 채, 피로 얼룩져 있는 여인의 젖가슴을 죽어라 빨아대고 있는 갓난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고사리 손은 여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옷깃을 부 여잡고 있었고, 작은 입술은 여인의 가슴을 세차게 빨고 있었다. 기인들의 가슴은 벅찬 감동으로 무너져 내리는 듯 했다. '오오! 하늘이여! 이 아이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셨나이까?' 번- 쩍! 뇌화(雷火)가 수백 가닥으로 찢어져 대지를 때리는 순간에도 기인 들은 갓 태어난 아이의 질긴 생명력 앞에서 장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털썩! 무림의 하늘 아래 가장 숭고한 신분을 지녔다는 열 명의 노기인들 은 마침내 차례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것은 아직도 천의(天意)가 살아 있음이오! 하늘은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았소." 천의(天意)! 어찌 알았으랴? 장차 그 이름이 천하를 위진시키게 될 줄이야. 십 인의 표정은 엄숙했다. 그들의 떨리는 손에 의해 아이는 받쳐 올려졌다. 번-- 쩍! 한 가닥 뇌전이 불가사의하게도 천중(天中)을 가르며 아이의 정수 리로 떨어졌다. 십 인의 기인들은 모두 그 광경을 보았다. 그 순간 그들의 가슴은 터질 듯이 뛰었다. 뇌전이 떨어지는 순간 아이의 이마 한가운데 상흔(傷痕)이 뚜렷이 보였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뇌전(雷電)의 형상이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래야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상흔은 격류 속에서 입은 상처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하늘의 묵시 (默示)일런지도. 기인들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뇌(雷)... 천(天)... 의(意)!" 운명이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기인들이 동시에 부르짖 은 말이야말로 운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무림백서 1권 제2장 냉막한 소년(少年) ━━━━━━━━━━━━━━━━━━━━━━━━━━━━━━━━━━━ 대천산(大天山). 하늘에 맞닿을 듯이 솟아 있는 백색의 거봉(巨峯). 만년설(萬年雪)이 쌓이고 쌓여 빙봉(氷峯)을 형성하고 있는 대천 산은 끝없는 연봉(連峰)을 이루고 있다. 휘이이이잉! 칼날처럼 예리한 한풍은 빙봉을 스치며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관통한다. 이런 곳에서는 인간은커녕 짐승도 발붙일 곳이 있을 것 같지 않았 다. 만일 있다면 전설상에나 등장하는 설인족(雪人族)이 살 법할 뿐이다. 대천산 깊은 곳에는 하나의 빙동(氷洞)이 있다. 그곳은 온통 투명한 얼음만으로 이루어진 동부였다. 동굴의 천장에는 수만 년을 두고 형성된 빙주(氷柱)가 고드름처럼 주렁주렁 걸려 있으며 벽은 금강석보다 매끄럽고 단단한 빙석(氷 石)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빙무(氷霧)를 뚫고 흐르고 있었다. 그곳은 시간 은 물론 인간의 오욕칠정이 정지된 느낌을 주었다.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어디선가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생명을 지닌 그 어느 것도 살지 못할 것 같은 빙동에서 인기척이 들려온 것이다. 빙동의 안쪽. 놀랍게도 한 소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소년은 이제 십이삼 세 가량밖에 안되어 보였다. 치렁치렁한 흑발 을 아무렇게나 등뒤로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소년의 오관은 정연했 다. 그는 미소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백짓장처럼 창백한 안색이 빙 동의 얼음보다 더 찬 느낌을 주었다.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 얼음처럼 투명해 보이 는 눈동자, 짙은 눈썹,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강철보다 도 강인한 의지를 느끼게 했다. 지금 소년은 기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맞은편 빙벽을 향해 끊임없이 같은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었 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뭉툭한 쇠뭉치였는데 길이가 일 장 여에 달해 마치 봉(棒)처럼 보였다. 무조차도 벨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투박한 철봉(鐵棒)을 소년은 한 손으로 든 채 빙벽을 향해 끊임없이 그어대고 있었다. "......." 슥! 슥! 물론 단단한 빙벽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소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소년은 흑의(黑衣)를 입고 있었는데 창백한 피부와 대조를 이루어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빙벽에 아무런 흠집도 나지 않고 있음에도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 로 계속해서 허공에 일자만 긋고 있었다. 검과 공기의 마찰로 빚어지는 규칙적인 음향만 빙동에 미세한 울 림을 전달할 뿐이었다. 이때였다. 스스! 빙무가 흐트러지며 소년의 등뒤에 두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한 명의 백발 장미노인(長眉老人)과 중년인이었다. 장미노인은 일 견하기에도 백 세가 훨씬 넘어 보였으며 도복을 입었으며 눈빛이 투명했다. 중년인의 모습은 더욱 기이했다. 그는 눈이 없었다. 아니, 눈이 있기는 있되 오직 검은 동공만이 있었다. 장미노인이 입을 열었다. "어형(魚兄). 저 아이의 동작은 안정되었소이다. 만근거검(萬斤巨 劍)을 한 손으로 들뿐 아니라 획도 일정하여 조금의 떨림도 없소 이다." 중년인은 흡사 눈으로 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하지만 심검(心劍)의 단계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소이 다. 더 두고 보아야겠소." 심검이라면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을 능가하는 전설상의 검의 경 지가 아닌가? 이때 무표정하던 소년의 얄팍한 입술가에 한 가닥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스슥! 섬뜩한 음향이 철봉 끝에서 일어났다. 두 기인의 안색이 변했다. 특히 중년인의 놀라움은 상당했다. 분 명 철봉과 빙벽 사이에는 석 자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한데 그 공간을 격하고 빙벽에 뚜렷한 획이 새겨진 것이 아닌가? "오오!" "음......." 두 기인은 신음을 터뜨렸다. 중년인은 빙벽에서 들린 소리만으로 도 소년이 이미 심검의 경지에 접근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일개 소년이 이루어 내기에는 가히 불가능 한 일이기도 했다. '불과 십삼 세에 불과한 저 아이가 벌써 심검의 단계에 접근하다 니.......' 중년인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때 검에 미쳤었고 평생을 검에 바쳐 중원검왕(中原劍王)이란 명성을 얻은 나 어우양(魚宇陽)조차 칠십이 넘어서야 저 정도에 이르렀거.......' 중원검왕(中原劍王) 어우양(魚宇陽). 무림인이라면 그 이름은 당금 황제의 이름보다 높다. 그는 저 유 명한 십전천사(十全天師) 중의 일원인 것이다. 장미노인과 함께 소년의 수련과정을 살피러 빙동으로 들어온 중년 인, 그가 바로 중원검왕 어우양이었던 것이다. 어우양은 놀라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냉랭하게 말했다. "천의(天意), 이제부터 너는 저 원 속에 일만자를 새겨 넣어야 한 다." 치직! 그가 가볍게 일수(一手)를 뻗자 빙벽에 원 하나가 새겨졌다. 원의 크기는 불과 한 자 범위였다. 그런데 그 속에 만 개의 글자를 새 겨 넣으라니! 소년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실상 그가 이 정도에 경지에 이른 것만 해도 피를 말리고 뼈를 깎 는 수련을 거친 것이었다. 그런데 한마디의 칭찬도 없이 곧바로 다음 단계에 돌입하라니. 그러나 소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다만 얄핏한 입술 가에 냉소가 어렸을 뿐이었다. "흥, 자신이 없으면 포기해도 좋다!" 어우양의 말에 소년은 차갑게 말했다. "누가 당신더러 그런 걱정하라고 그랬소?" 일개 나이 어린 소년의 말투치고는 거칠고 무례했다. 이들의 대화 는 도저히 스승과 제자 사이로 여겨지지 않았다. "후훗, 좋다. 기간은 일 년이다." 그 말이 끝이었다. "갑시다." 두 기인은 다시 빙무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정적뿐이 었다. "......." 미소년은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 그는 철봉을 움직이 기 시작했다. 스슥! 슥! 아주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일견하기에 그다지 힘들어 보이 지도 않았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만 근 무게의 철봉은 일반 사람이라면 들 수조차 없다는 것을. 게 다가 추호의 떨림도 없이 허공을 격하고 빙벽에 글자를 새겨넣는 일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지난한 일인 것이다. 소년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 소년, 그의 이름은 뇌천의(雷天意)다. 저주받은 운명의 존재, 벽력의 뜻으로 세상에 떨어진 비극의 이단 아인 것이다. 일 년 후. 동굴 안에는 장미노인과 중원검왕 어우양이 긴장한 표정으로 빙벽 을 바라보고 있었다. 뇌천의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빙벽을 향해 철봉을 뻗고 있었다. 우우웅! 빙벽을 향해 뻗어진 철봉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봉끝에서 가 느다란 선이 뻗어나가는 것 같았다. 고막을 울리는 파공성과 빙무 가 회오리쳤을 뿐,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철봉을 뻗고 있 을 뿐이었다. 파파파팟! 빙벽에서 얼음가루가 휘날렸다. 이윽고 자욱하던 얼음가루가 떨어진 후. 놀랍게도 빙벽에는 깨알같은 글자가 원 속에 가득 새겨진 것이 아 닌가! "출동(出洞)이다. 천의." 묵묵히 서 있던 어우양의 입에서 떨어진 것은 무정한 음성이다. 뇌천의의 짙은 눈썹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빙동에 좌정하고 있었다. 출동이라면? 더 이상 빙동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닌가? 어린 나이에 죽음과도 같은 적막과 싸우며 오직 빙벽을 향해 만 근의 철봉을 휘둘러야만 했던 그에게 이 이상 반가운 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옷자락을 툭툭 털며 일어섰을 뿐이다. 그의 차가운 얼굴에는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휘이이잉! 세찬 눈보라가 휘날리는 산봉 위. 뇌천의는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장미노인과 어 우양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장미노인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로써 너는 노납의 건천열화신공(乾天熱火神功)과 관음성니(觀 音聖尼)의 관음벽라신공(觀音碧羅神功)을 십 성까지 익혔다. 그 두 가지 신공은 양공(陽功)과 음공(陰功)의 쌍벽을 이루는 것이 다." "......." "이제 너는 두 가지 상반된 기공을 합벽기공(合壁奇功)으로 융화 시켜야 한다. 그것만 성공하면 너는 무림사상 최강의 내력을 소유 하게 될 것이다." 이때 어우양이 검은 동공을 깜빡이며 말했다. "너는 나 어우양의 심검류(心劍流)와 벽파검법(壁破劍法)을 모두 익혔다. 남은 것은 얼마나 숙련시키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 뇌천의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한 듯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어우 양은 그가 듣거나 말거나 계속 말했다. "너는 검왕도신(劍王刀神)의 모든 것을 익혀야 한다. 곧 도신(刀 神) 냉면혈제(冷面血帝)가 널 데려갈 것이다." "......." "너는 우리 십 인의 무학 중에 고작 삼 인의 무학을 기초 정도 터 득했을 뿐이다. 그러니 자만은 금물이다. 알겠느냐?" 뇌천의는 냉랭하게 말했다. "누가 자만한단 말이오? 설사 당신들의 무학을 모두 익힌다 해도 나는 자만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곧 당신들이 천하무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될 테니 말이오." 실로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마침내 어우양도 참을 수 없다 는 듯 버럭 외쳤다. "건방진 놈!" 뇌천의는 잘라 말했다. "당신들이 날 이렇게 키웠잖소?" 어우양은 흠칫했다. 뇌천의의 말은 추호도 틀리지 않았다. 그는 할 말을 잃고 검은 동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로든 보내 주시오." 뇌천의는 차가운 시선을 장미노인에게 향한 채 말했다. 장미노인 이 껄껄 웃었다. "허허허! 천의, 그는 이미 와 있네." "......!" 뇌천의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장미노인의 말이 끝나기 가 무섭게 등골을 찌르는 듯한 살기가 엄습해 왔다. 빙글! 그는 몸을 돌렸다. 과연 눈앞에 한 명의 홍의인(紅衣人)이 서 있 었다. 그는 마치 혈죽을 연상케 할 정도로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노인의 얼굴은 세모꼴이었는데 수중에는 얇기가 종잇장 같은 면도 (面刀)를 들고 있었다. 그의 몸은 그 자체가 한 자루의 칼을 연상 케 할 정도로 으스스한 느낌을 주었다. "네놈이 천의란 놈이냐?" 냉면혈제의 음성은 그의 인상보다 더 비정했다. 감정이라곤 전혀 없는 듯했다. "그렇소." "따라와라!" "......." 뇌천의는 두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가자 어우양은 장미노인을 향해 중 얼거렸다. "예정은 이 년이오. 그러나 놈은 분명 초과달성할 것이오. 장미천 도(長眉天道)." 장미천도는 관음성니와 함께 십대기인 중에서 내공이 가장 심후하 다고 알려져 있었다. 장미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무서운 집념이오. 게다가 저 아이는 초인적인 자질을 지녔소." "후후, 당년의 그 아이와 꼭 닮지 않았소?" "어쩌면 그 아이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될지도 모르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 "우리는 저 아이를 비정하게 키웠소. 그 결과가 심히 우려되는구 려." 어우양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며 말했 다. "그것은 저 아이의 무공을 속성시키기 위한 고육책이 아니었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그러나 만일 저 아이가 사도로 흐른다면 그 결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오. 설사 우리 모두가 나선다 해도 막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어우양은 어두운 표정으로 찌뿌둥한 하늘을 올려보았다. "모든 것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소. 어차피 저 아이는... 장차 정 사에 걸친 살성(殺星)의 운명을 걸어야 할 테니......." "무량수불.... 어째서 이대(二代)에 걸쳐 그 일을 행해야 하는 지....... 저 아이가 제 부친의 일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 는......." 장미천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우양의 음성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예견된 일이지 않소? 저 아이는 이마제마(以魔制魔)의 역 을 해내야 하오. 강호에 대살성(大殺星)이 출현함으로써 사분오열 된 백도무림에 경종이 울릴 것이오. 그 방법만이 정도무림을 혼미 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오." "허허....... 불행한 일이오, 불행한 일.... 저 아이는 결국 희생 양에 불과하지 않소? 장차 저 아이가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우리 늙은이들은 물론 천하무림이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 것이오." "저 아이의 성격상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오. 정이든, 사든 모두 저 아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기 대하는 것은......." 어우양은 말끝을 흐렸다. 두 노기인의 눈빛이 부딪쳤다. 그들의 내심은 하나로 통한 듯했 다.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은 중얼거렸다. "대천신문(代天神門)과 구룡성궁(九龍聖宮)의 개궁(開宮)을 바랄 뿐이오!" 무슨 뜻인가? 구룡성궁이라면 바로 구룡신화(九龍神話)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천신문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휘류류륭! 눈보라가 두 노기인의 몸을 휘감았다. 눈보라가 쓸고 지나갔을 때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봄이 왔다. 대륙의 지붕이라는 천산(天山)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들었다. 비 록 중원이 여름에 접어들어 찌는 듯한 무더위에 잠길 무렵 아주 잠깐 찾아오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봄은 봄인 것이다. 분지(盆地). 하늘을 뚫을 듯이 솟아오른 첨봉의 정상 부분에 기이하게도 분지 가 형성되어 있다. 분지에는 새파란 풀이 돋아나 있었다. 사방이 빙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가운데, 분지 형상의 바닥만이 온 화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빙벽에 반사된 태양광이 따스 한 기류를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 분지는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분지에는 온갖 희귀한 기약영초(奇藥靈草)가 자생하고 있 었다. 졸졸졸....... 분지에는 맑은 내가 흘렀다. 그것은 빙벽의 얼음과 만년설이 녹아 흐른 물이 분지를 휘돌아 흐르기 때문이다. 내는 한 지점에 이르 러 폭포수가 되어 떨어졌다. 폭포 아래 공지가 있고, 그곳에 십여 채의 모옥(茅屋)이 그림처럼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가히 신선(神仙)들의 거처인 양 아늑한 분위기였다. 쏴아아! 일직선으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는 적지 않은 소리를 울린다. 폭 포수의 물은 바닥이 비칠 정도로 맑았으며 뼈가 시릴 만큼 차가웠 다. "......." 짧은 흑색의 반바지만 걸친 십오륙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폭포수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자욱한 포말이 휘날려 소년의 벌거벗은 상반신을 적시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소년의 피부 위에는 한 겹의 얇은 얼음이 뒤덮여 있 었다. 소년의 손에는 한 자루의 목도(木刀)가 쥐여져 있었다. 그는 목도 를 수평으로 뻗고 있었는데 그 자세는 능히 폭포수를 가를 듯 무 거워 보였다. 스스스! 움직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척(四尺) 길이의 목도 끝에서는 대 기(大氣)를 양단할 듯한 도기가 뻗어나오고 있었다. "타--!" 한순간 폭포수의 굉음(轟音)마저 숨을 죽였다. 분명 소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정자(丁字)로 암반을 밟고 있는 그의 정수리 부분에서 환 영이 솟구쳐 올라 폭포수의 중간지점까지 날아올랐다. 파츠츠츠츳! 일순 섬광이 폭포수를 베었다고 느낀 순간. 폭포수가 비단폭 갈라 지듯 양단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아주 잠깐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니, 마치 환상처럼 일어났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상태로 돌아오고 말았다. "으음......." 소년은 비틀거렸다. 뇌천의(雷天意)였다. 그의 냉막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 다. "해냈다! 일 년만에... 척천일도(擲天一刀)를 완성했다. 후후훗! 결국 나는 해낸 것이다." 척천일도. 그것은 당대 최고의 검도쌍절(劍刀雙絶)로 불리는 검왕도신 중 도 신 냉면혈제 북궁규(北宮珪)의 천하제일도법을 말하는 것이다. 뇌천의는 이 년여에 걸쳐야 할 수련과정을 불과 일 년만에 해낸 것이었다. 스슷! 폭포 속에서 한 가닥 홍영이 쏘아 나왔다. 허공 중에 괴소가 울려 퍼졌다. "후후후! 자만하지 마라. 너의 성취는 구 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더 가르쳐 줄 순 없다. 십 성에 오르는 것은 네가 하기에 달렸다. 이제부터는 네놈이 알아서 해라! 크ㅋ!" "......." 뇌천의는 목도를 내려보았다. 목도에는 물방울 하나 묻어있지 않 았다. 그는 분명 폭포수를 갈랐으나 조금도 물기를 찾아 볼 수 없 었다. "더 매달리진 않겠소. 다만 언젠가는 척천일도로 당신을 꺾어 주 겠소. 알겠소? 나는 그런 놈이오." 뇌천의는 슬쩍 어깨를 흔들었다. 팟! 그의 몸이 신기루인 양 사라졌다. "건방진 놈! 하지만 노부는 네놈이 해낼 것을 믿는다. 그게 바로 네놈의 핏줄이 가진 근성이니까." 홍영은 뇌천의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천산의 봄은 몰인정하다. 낙조(落照)의 잔광 속에 드러난 빙천설지 위로 설무(雪霧)가 자욱 히 피어오른다. 뼈를 에일 듯한 한풍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눈가 루를 안개처럼 일으키기 때문이다. 흑영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검은 흑막이 어른거릴 정도였 다. "헤헤헤헷! 아직 멀었다. 무영무풍공(無影無風空)은 소리도, 느낌 도, 빛도 없어야 한단 말이다. 천의, 네놈의 자질은 돼지새끼만도 못하구나." 지독한 욕설을 담은 야비한 말투였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 이는 것은 없었다. 파아앗! 눈덩이가 솟구쳤다. 그리고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후훗! 두고 보시오. 사흘 안에 당신의 입을 다물게 해 주겠소." 목소리의 주인은 흑삼소년, 즉 뇌천의였다. 그는 키가 훌쩍 커 있었다. 낯빛은 더욱 창백했고 눈썹은 하늘이 라도 벨 듯 날카롭게 뻗쳐 있었다. 그는 어느덧 십칠 세가 되었다. 그의 전신에는 냉염(冷焰)이 이글거렸으며, 지독한 고집과 굴강한 기운으로 인해 감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아성을 이루고 있었다. "건방진 놈! 사흘 후 해내지 못하면 네놈의 눈깔을 뽑아내 주마!" 스스스......! 한 가닥 바람이 설풍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무영무풍수(無影無風 ). 천하제일의 경공(輕功)을 지녔다는 기인이다. 아무도 그의 실체를 본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빨랐다. 그는 하루에 삼천 리를 간다는 전설적 인물이었다. 장천옹(掌天翁). 그는 십 인의 기인 중에서 방대한 무학을 소유한 기인이었다. 그는 천하의 권장지각술(拳掌指脚術)을 모두 섭렵한 사람이고 능 히 천파만문(千派萬門)의 무공 장단점을 파악한 무공광인이었다. 그가 아는 무학은 삼천팔백 종에 달했으며 과거 대활련 십전무맹 (十全武盟)의 기본 무학체계를 세우기도 한 장본인이었다. <통천무록(通天武錄)> 바로 그가 저술한 무경(武經)으로 아직도 백도최고의 무학기서로 남아있었다. 지금 그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한 소년의 손에서 수천 종의 무학이 장강대하(長江大河)처럼 쏟아 져 나오고 있었다. 천조봉(天鳥峯). 천산의 한 봉우리가 불과 열흘 사이에 높이가 십 장이나 낮아졌 다. 뇌천의는 지금 십 일 동안 수천 종의 무학을 펼쳐내고 있었다. 그 의 일거수일투족에 얼음이 깎이고 봉우리가 낮아졌다. 그의 얼굴은 냉면(冷面) 그 자체였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빙벽 을 향해 쌍장을 뻗고 있었다. 꽝-! 경천동지할 폭음이 들렸다. 우르르르르......! 지축이 흔들렸다. 그리고 천지는 정적에 휩싸였다. 빙벽은 처음 그대로인 듯했다. 그러나 무공광인 장천옹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거대한 빙벽에 미 세한 금이 거미줄처럼 가 있다는 것을! 그것은 머지 않아 붕괴될 것이다. 다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균열이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이었다. "......!" 두 사람은 마주 보았다. 전대의 무공광인 장천옹과 당대의 소년 무공광인 뇌천의. 그들은 반각이 넘도록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팽팽하게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어느 한쪽이 시선을 비키는 순간 패배를 자인해야만 할 정도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결국 균열은 왔다. "지독한 놈!" 장천옹은 흰수염을 선혈로 붉게 물들이며 비틀거렸다. 진홍의 선 혈을 토해낸 것이었다. 뇌천의는 비릿한 냉소를 입가에 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천옹은 그를 노려보며 더듬거렸다. "이제... 백도육대절공(白道六大絶功)을 모두 익혔다. 남은 것 은... 일 년 안에 터득해야 한다." 스슷! 장천옹은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설지 위에는 두 개의 족인(足印) 이 찍혀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평소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기인이었건만 몹시 당황했던지 그같은 실족(失足)을 남기고 말았다. "후훗!" 뇌천의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그는 걷기 시작했다. "오늘부터는 따분한 날이 되겠군!" 그에게서는 인간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천면인(千面人). 일명 환상자(幻像子)라고도 부른다. 그는 당대의 역용술의 대가이 자 신투(神偸)였다. 지금까지 그의 진면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어쩌면 그 자신조차 자신의 본 얼굴을 모를지도 모른다. 그는 일 보(一步)를 옮길 때마다 얼굴을 바꾸는 재간을 지니고 있었다. "역용술에는 모두 열 단계가 있다. 그 첫 단계는 역용고약 등을 사용하여 얼굴을 바꾸는 것이다. 그 중에는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사용하는 간단한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 해도 도합 백서른다 섯 가지의 술법이 있다. 그렇지만 그 정도는 역용술의 기초로 그 다지 고명하다 할 수는 없다." "......." 모옥 안. 뇌천의는 듣는지 안 듣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키워온 십 인의 기인들조차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사이에는 정이라곤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무공을 매개로 기계와 같은 생활을 할 뿐이었다. 하나를 익히면 곧장 다음 단계를 진전시키기에 바빴기에 그들 사 이의 대화라고는 명령 뿐 칭찬이나 감사의 말은 한 번도 오간 적 이 없었다. 천면인은 허리가 굽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 이단계는 일명 역체환용술(易體幻容術)이라 부르는 것으로 내 공을 이용하여 신체의 근육과 뼈를 움직여 모습을 바꾸는 것이다. 또한 음성도 변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 일갑자(一甲 子) 이상의 내공수위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며 상대방의 언어습관 이나 동작 등을 자세히 연구하는 과정이 못지 않게 중요하다." 천면인은 말을 하는 동안 모습이 변했다. 노인에서 중년인으로, 청년으로, 그리고 소년으로 변했다. 실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불가사의한 역용술이었다. 뇌천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흐흐, 네놈의 썩어빠진 오만은 언제고 스스로 고통을 겪게할 것 이다." 갑자기 천면인의 음성은 간데 없고 요사스런 웃음소리가 들렸다. 뇌천의의 눈썹이 꿈틀했다. 천면인은 어느새 계집의 모습으로 변 해 있는 것이었다. 뇌천의는 냉소했다. "흥, 아마 나는 그런 것들을 쓸 필요가 없을 거요." "호호홋! 그럴까?" "속임수를 쓰게 할 정도로 강한 자라면 내가 가만 놔두지 않을 테 니까." "크크....... 어리석은 놈! 세상에는 힘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 다는 것을 모르느냐?" 천면인의 얼굴은 음침한 인상의 청면인(靑面人)으로 변했다. "아무튼 좋소. 그럼 삼단계는 무엇이오?" "크크....... 삼단계의 역용술은 고금이래 가장 신묘한 것이지. 그것은 일명 환상공(幻像功), 또는 천면무안술(千面無顔術)이라 부른다." 천면무안술(千面無顔術). 그것이야말로 고금제일의 역용술로 환상자 천면인의 독보적 경지 를 말하는 것이다. 그가 천하제일의 대도(大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술법에 기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면무안술을 시행하려면 백 년 수위의 내공이 없이는 불가능하 다. 이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 빛의 정도에 따라, 보는 자의 시점 에 따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능히 천 가지 이상의 변화를 일으 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 명이 동시에 얼굴을 본다해도 모두 틀 린 얼굴로 비쳐지는 환상의 역용술이다." 처음으로 뇌천의의 안색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런 사술(邪術)도 있소?" "뭣이?" 부르르......! 추악한 곰보의 모습으로 변한 천면인의 안면근육이 분노로 인해 부르르 떨었다. 뇌천의는 차게 웃었다. "그럼 그것이나 가르쳐 주시오." "못된 놈!" 천면인은 침을 뱉었다. 그러나 그는 구결(口訣)을 외우고 있었다. "우주일심(宇宙一心) 천변만화(千變萬化)... 기일무상(氣一無常) 만상유유(萬像有有)......." 뇌천의는 침묵에 잠겼다. 그는 천면인이 읊조리는 구결을 한 자 한 자 뇌리에 각인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위인이었다. 약전(藥田). 초지 위에 형성된 약초밭에는 그윽한 약향이 풍기고 있었다. 일만 종의 기약영초가 잘 가꾸어져 있는 곳이었다. "육지초(六芝草), 천문동(天門冬), 여위위유(女萎萎柳), 건지황 (乾地黃), 암려자(庵麗子), 황련(黃蓮), 결명자(決明子), 석룡예 (石龍芮), 백선피(白鮮皮), 백자인(柏子人), 오두오락(烏頭烏 落)......." 약전을 가로지르며 약초의 이름을 줄줄 외우는 사람은 키가 사 척 밖에 안 되는 난장이 마의노인이었다. 딸기코에 눈은 옴팍눈이었다. 그의 외모를 보면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명호를 듣는다면 천하가 놀란다. 무우초자(無憂草子). 그는 근심이 없는 신의(神醫)였다. 그의 의술은 너무나 탁월하여 백골에 살 한 점만 붙어 있어도 기사회생시킨다는 귀의였다. 뇌천의는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벌써 열흘째 풀뿌리, 나무껍질만 외웠소. 당신이 가르쳐 줄 것은 이것뿐이오?" 무초자는 대노했다. "어리석은 놈! 의술의 기본은 약초라는 걸 모르느냐?" "흥, 기약영초를 쓴다면 그게 어디 신술이랄 수 있소? 그 정도면 장사꾼 돌팔이라도 할 수 있겠소." 무우초자는 눈알을 부라렸다. "그럼 네놈은 무얼 원하느냐?" 뇌천의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피어올랐다. "백팔제령금침대법(百八制靈金針大法)." "뭣! 내 밑천을......?" 무초자는 눈을 부릅떴다. 백팔제령금침대법(百八制靈金針大法). 그것은 전설의 금침술로 백팔 개의 금침으로 시체도 일어나게 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영혼까지 금제할 수 있었다. 단지 금침 몇 개 를 꽂음으로써 생사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탈진상태에 이른 사람이나 닭모가지 비틀 힘도 없는 병자에 게 금침 몇 개를 꽂음으로써 평소보다 열 배의 힘을 내게 하는 불 가사의한 마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법이었다. "크크ㅋ! 네놈은... 정말 야비한 놈이야!" 무우초자는 그를 한참동안 쏘아보더니 몸을 돌려 모옥으로 향했 다. "따라와!" "후훗!" 뇌천의는 차디찬 웃음을 흘리며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꼭 필요한 것만을 취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토록 빨리 십 대기인의 절기를 습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류류류륭! 회오리바람이 천산을 거대한 설막(雪幕)으로 신비스럽게 휘어 감 는다. 뇌천의는 칠십이 개의 대나무를 눈바닥에 꽂아 넣고 있었다. 지금 그는 기문둔갑진을 익히고 있었다. 아홉번째 기인. 그는 천뇌서생(千腦書生) 만기생(萬奇生)이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천하의 학문을 달통했으며 특히 병법 (兵法)과 기문진법(奇門陣法), 기관지학에 있어서는 당대에 따라 갈 사람이 없었다. 대활련 십전무맹의 십전무성(十全武城)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 이유는 바로 만기생이 직접 설계했기 때문이었다. 뇌천의는 만기생으로부터 기문진법을 익히는 중이었다. 그는 천 권의 병서(兵書)을 독파했으며 만류기관진해(萬流機關眞 解)를 통달했다. 마지막 남은 것은 기문진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푹! 마지막 칠십이번째의 대나무가 꽂히는 순간이었다. 휘이잉......!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주위의 풍경이 일변했다. 설원(雪原). 눈앞은 끝없는 설원으로 바뀐 것이다. 분명 곳곳에 빙봉이 우뚝우 뚝 솟아있는 천산의 산역이었건만, 봉우리는 모두 사라지고 아무 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끝없이 펼쳐진 설원만이 보일 뿐이었다. "후훗, 천방미로대진(天防迷路大陣)이다. 정반(正反)이 역(逆)을 이루고 구궁(九宮)과 오행(五行)이 시(時)에 따라 변화하므로 파 해법을 모르면 백 년이 지나도 진세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후 훗! 더구나 사문(死門)은 구백구십칠로(九百九十七路)에 걸쳐 있 고 생문은 단 삼로(三路)밖에 없으니 그 누가 파해하겠는가?" 뇌천의는 웃고 있었다. 그는 기어이 해낸 것이다. 그의 시선은 하 늘로 향했다. 카악! 깍......! 천공을 날던 새들이 보이지 않는 그물에라도 갇힌 듯이 울부짖으 며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 보였다. 놀랍게도 천방미로대진은 지상 은 물론 하늘까지 가두어버린 것이었다. "후훗, 천방미로대진에 보이지 않게 금천미환진(禁天迷幻陣)을 곁 들였으니 만기생도 이 진을 파해하려면 능히 한 달은 골머리를 썩 혀야 할걸?" 놀라운 일이었다. 기문진법을 가르쳐 준 것은 천뇌서생 만기생이었다. 그러나 뇌천 의는 단 삼개월 만에 모든 것을 익히고 도리어 만기생의 경지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이때였다. "호호호호호......!" 요염한 교소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뇌천의의 검미가 찌푸러졌다. 그는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호호, 의(意) 오빠! 정녕 소녀를 모른 척 하기예요?" 스슷! 환영처럼 그의 앞에 날씬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소녀였다.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잿빛 승복을 입었으나 그 속에 감싸여져 있는 동체는 미려한 굴곡과 탄력이 여실히 느껴지고 있 었다. 그 몸매만으로도 가히 우물(尤物)이라 할 만했다. 소녀의 두 눈은 살구씨같이 동그란 가운데 쉴 새 없이 고혹적인 눈빛을 흘려내고 있었으며 승복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유지처럼 매끄러운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입술은 또 어떤가? 막 터져 오른 작약의 농염함과도 같았다. 이제 십육 세쯤 되었을까? 천산의 오지에 승복을 입고 나타난 소 녀의 용모는 가히 뇌쇄적이었다. "호호....... 너무하시는군요. 섬화(閃花)를 이렇게 대접하긴가 요?" 섬화. 그것이 소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터질 듯이 팽팽한 앞가슴을 도발적으로 흔들었다. 출렁! 금방이라도 승복을 뚫고 나올 듯한 젖가슴이 야릇하게 흔들리며 야릇한 체향을 뿌렸다. 섬화는 사뿐사뿐 다가왔다. 뇌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섬화, 너는 조금도 얌전해지지 않았구나? 만 권의 불경도 네 요 사함을 누르지 못했단 말이냐? 지금 네 옷차림과 행동이 걸맞는다 고 생각하느냐?" 섬화는 두 손을 척하니 가는 허리에 걸치고 눈꼬리를 흔들었다. "호호! 설사 십만경(十萬經)을 읽는다 해도 의오빠에게 향하는 섬 화의 마음은 변치 않을 걸요. 흥! 그럼 나더러 더러운 비구나가 되란 말인가요? 흐응......." 섬화는 콧소리를 내며 뇌천의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오빠의 연공이 거의 끝난 걸 알고 있어요. 이제 오빠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지요. 오빠, 저랑 도망쳐요. 응? 넓은 세계 로... 악!" 털썩!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뇌천의가 그녀를 밀쳐 버린 것이다. "섬화! 너같은 계집은 딱 질색이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라!" "......!" 섬화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뇌천의의 모욕적인 언사에 그녀의 자존심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 했다. 뇌천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사라져갔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섬화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두고 보자. 흥! 무화(舞花) 그 계집애 때문에 날 멀리하는 거지? 다 알고 있다구! 호호호홋! 두고 봐,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테 야!" 소녀 섬화, 그녀는 가슴 속에 한(恨)을 키우고 있었다. 눈보라 속으로 멀어져 가는 뇌천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사 랑과 증오의 감정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한 마장 정도 떨어진 언덕 위. "아미타불......." 합장한 채 불호를 외우는 여승(女僧)이 한 명 있었다. 일신에 잿빛 가사를 두르고 손에는 투명한 염주를 굴리는 중년여 승의 용모는 관음보살과도 같았다. 한없는 불심과 자비를 느끼게 했다. "아미타불....... 모든 것이 부처님 뜻이로다. 섬화와 무화는 한 핏줄을 타고난 자매이건만 어찌 이리도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요 성(妖性)과 선성(善性)을 각각 나누어 가지고 있으니.... 아미타 불.... 불심으로도 섬화의 요성을 누를 수 없단 말인고?" 그녀는 장미천도(長眉天道)와 함께 무림에서 불도이성으로 추앙받 고 있는 여승으로 세인들은 그녀를 관음성니(觀音聖尼)라 불렀다. 관음성니의 자비로운 눈에 반짝 이슬이 맺히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미타불.... 고해(苦海)의 겁을 건너면 피안의 정토가 있나 니... 불심이 이르지 못한 것은 모두가 빈니의 불찰이노라. 아아! 아이야, 언제고 너는 다시 부처님께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네 운 명이란다." 스스스! 관음성니의 모습은 안개처럼 흐려지더니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뇌천의가 걸음을 멈춘 곳은 죽림 앞이었다. 천산에서만 자생한다는 투명한 빙죽(氷竹)이 군락을 이룬 곳이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도 유난히 냉기가 흘렀다. 인간은 물론 짐승도 살 수가 없는 곳이었다. 뇌천의는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많이 변했군, 무화." "가가(哥哥)도 변했어요." 눈보다 흰 백의를 입은 한 절세미녀가 빙죽림으로 통하는 소로 앞 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똑바로 들지 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의 용모는 섬화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고는 왼쪽 입술 언저리에 작은 점 하나가 찍혀있는 것 정도였다. 그것 만 아니라면 동일인이라 해도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섬화와는 정 반대의 기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천선지기(天善之氣)가 느껴지는 것이다. 뇌천의는 묵묵히 무화를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늘 차갑고 오만하기만 하던 그가 무화 앞에서 만은 달라진 것이다. "그녀는 있소?" 무화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사부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뇌천의는 단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는 한 번도 사부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열 명의 기인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무화의 얼굴에 경이로움이 떠 올랐다. "그렇다면 가가께서는 벌써... 만백부님의 절기를?" 뇌천의는 냉소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보잘 것 없는 것들이지." 무화는 그가 연성을 마친 것을 기뻐하면서도 스승을 욕되게 하는 그의 모습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 오빠는 무서운 분이에요. 그 누구도 오빠를 꺾을 순 없을 거 예요. 이렇게 강한 걸 보면... 그런데 왜 백부님들에게 적의를 품 으시는 건가요?" 뇌천의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들이 자초한 일이니까." 그는 소로 안으로 들어섰다. 무화가 그를 막았다. "가가, 물어볼게 있어요." "......?" "모든 것을 배운 후... 이곳을 떠나실 건가요?" 뇌천의는 그녀의 눈빛에 무언가 갈망하는 뜻이 어려 있음을 보았 다. 그는 그녀의 눈빛을 읽었으나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뇌천의는 한숨을 쉬며 시선을 구름 한 점 없는 창천으로 돌렸다. "저 하늘이 끝나는 곳... 어디로든." "무화는... 가가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가요?" 뇌천의의 검날같은 눈썹이 흔들렸다. 무화. 그녀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싸늘한 그의 마음을 녹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무화의 뺨을 슬쩍 만졌다. "너는 아직 어려." 무화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무화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후후, 내가 보기에는 아직 철부지 소녀야." 뇌천의는 그녀의 그런 행동이 귀엽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의 뇌리 에 과거의 즐거웠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쌍둥이 소녀 무화와 섬화는 어릴 적부터 그를 몹시 따랐다. 그녀 들은 틈만 나면 뇌천의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곤 했다. 그도 한때는 천진한 아이였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두 자매와 함께 천산 기슭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고 토끼를 잡기 위해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게 뛰어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두 소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 우린 이 다음에 오빠의 색시가 될 거야! 당시에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 줄도 몰랐다. 그러나 그 말을 하고는 두 자매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달아나곤 했었다. 소꿉놀이를 하면서도 그녀들은 서로 그의 아내가 되겠다고 다투곤 했었다. 결국 둘 모두 그의 아내 노릇을 하기로 합의하곤 했다. 그런 무화와 섬화가 이제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뇌천의는 무화의 곁을 지나쳐 죽림 안으로 접어들었다. "......." 무화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의 눈에 무언 의 결심이 어렸다. 죽림 한가운데 누대가 있었다. 얼어버린 연못 위에 세워진 수상누대였다. 그곳에서 은은한 비파 음(琵琶音)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띵... 띠딩... 띠잉....... 비파음을 듣는 순간 뇌천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음공(音功)!' 그는 즉각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비파음은 더욱 그의 심금을 뒤흔들었다. "으으......!" 그는 신음을 흘렸다. 환각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편을 잃은 아내가 깊은 밤 외로움을 참지 못해 오열을 터뜨린 다. 여인의 애간장을 끊는 듯한 애소가 뇌천의의 얼어붙은 가슴을 흔들었다. 띵... 디딩 딩....... 비파음은 변화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일변했다. 참을 수 없는 격노가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머리를 풀어헤친 악귀나찰이 달려들고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수급을 들고 덤벼들고 있었다. '헉!' 그는 등뒤에서 무서운 살기를 느끼고 돌아섰다. 망나니가 자신의 몸만큼이나 큰 귀두도를 번쩍 휘둘러 목을 베려는 것이 아닌가! '으으으......!' 뇌천의는 뒷걸음질쳤다. 실로 무서운 음공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환각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며 누각을 향해 걸어갔다.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일곱 차례 나 심마(心魔)에 빠져들고 있었다. 만일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면 벌써 칠공 (七孔)에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누각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한 걸음을 전진할 때마다 고통은 더해만 갔다. 오만가지 허상(虛像)이 나타나 그를 유혹하고 격동시켰다. 급기야 누각의 계단에 이르렀을 때였다. 툭......! 그의 입술이 터지며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뇌천의는 스스 로 입술을 물어뜯는 것이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누각 속에 앉아 비파를 타고 있는 여인을 바 라보았다. 삼십 세쯤 되어 보이는 천상의 선녀와도 같이 아름다운 미부가 그를 바라보며 비파를 탄주하고 있었다. 천음선자(天音仙子). 과거 우내제일미(宇內第一美)로 불려졌던 절세미인이다. 그녀는 미색은 물론 음공(音功)의 제일인자였다. 또한 십대기인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했다. 띵! '윽!' 비파음이 날카롭게 울리자 뇌천의는 울컥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 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계단을 하나 밟았다. 둥! 다시 비파음이 울리자 그는 심장을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 을 느꼈다. 두당! "억!" 이번에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뇌천의의 앞섶은 이미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단지 비파의 현을 한 번 퉁기는 것만으로 살인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니. 드디어 마지막 한 계단이 남았다. 따당! 이번에는 마치 쇠북을 친 것 같은 음이 들렸다. "큭!" 뇌천의는 가슴을 부여잡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곳은 천 음선자의 발 아래였다. "아아! 무서운 아이구나. 천락살음(天樂殺音)까지 받아내다 니......." 천음선자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중얼거렸다. 이때였다. "겨우... 이 정도요......?" "......!" 천음선자는 교구를 바르르 떨었다. 뇌천의는 바닥에 누운 채 차갑 게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본 순간 천음선자는 가슴이 쿵, 하고 내 려앉는 듯했다. "너... 너는......!" "난 결코 지지 않소. 그 누구에게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천음선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이 아이가 만일 길을 잘못 든다면... 고금제일의 살성(殺星)이 될 것이다. 아아!' 천음선자는 섬섬옥수를 뻗어 뇌천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문득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일세의 가인인 그녀의 나이가 얼마인지 아는 자는 없었다. 다만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이 적어도 이십여 년 전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 뇌천의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천음선자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흡사 그를 통해 과거의 정인(情人)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듯했 다. 그녀의 뇌리에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고집이 센 청년,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존경하였고 또한 두려워하기 도 했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빼어 닮을 수가......." 천음선자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뇌천의의 얼굴을 쓰다듬는 천음선자의 눈동자에는 뿌연 물막이 어 리고 있었다. 뇌천의가 깨어났을 때는 황혼 무렵이었다. "......!" 그의 가슴에 한 권의 책자가 놓여 있었다. <천락음보(天樂音譜).> 그는 무심히 책자를 펼쳐보았다. 책자 안에는 빽빽한 구결과 음보 (音譜)가 적혀 있었다. 책자를 넘기던 그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 다. 책표지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소 의문을 느꼈을 뿐, 그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 다. "후훗! 이로써 그 자들의 모든 것을 얻었다. 십 년은 족히 걸린다 고 했지. 하지만 삼 년 단축시켰다." 파- 앗! 뇌천의의 몸이 한 줄기 빛살처럼 창밖으로 쏘아나갔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신법이었다. 그가 사라진 직후, 방안에 한 소녀가 들어섰다. 그녀는 전신에 요 기가 흐르는 소녀 섬화였다. 빈 침상을 바라보는 섬화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 무림백서 1권 제3장 운명(運命)을 건 거래 ━━━━━━━━━━━━━━━━━━━━━━━━━━━━━━━━━━━ 빙동(氷洞). 보통 사람으로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만년한빙지기(萬年寒氷之 氣)가 짙게 깔려 있는 곳이다. 자칫 모르고 들어갔다가는 그 즉시 얼음조각이 되어버리는 곳이었다. 빙동 안에는 열한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다. 원형으로 앉아 있는 인물들의 한가운데 뇌천의가 정좌하고 있었 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 앉아있는 십 인은 대활련 십전무맹의 기인들인 십전 천사(十全天師)였다. 장미천도(長眉天道). 관음성니(觀音聖尼). 중원검왕(中原劍王) 어우양(魚宇陽). 도신(刀神) 냉면혈제(冷面血帝). 장천옹(掌天翁). 무영무풍수(無影無風 ). 천면인(千面人). 무우초자(無憂草子). 천뇌서생(千腦書生) 만기생(萬奇生). 천음선자(天音仙子). "......." 빙동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십전천사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뇌천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표정 이 저마다 각각이었다. 어떤 자는 감개무량한 표정이었고, 어떤 자는 비감어린 표정, 어 떤 이는 근심이 가득 찬 표정이었고, 어떤 자는 연민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중앙에 앉아있던 뇌천의였다. "십 년이 걸려야 익힐 수 있다던 당신들의 쓸모 없는 무공을 칠 년만에 모두 익혔소. 이제 어찌 하겠소?" 십전천사의 얼굴에 한결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아쉬움이랄까, 경 탄이랄까?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는 듯했다. 이윽고 장미천도가 입을 열었다. "너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었다. 그렇다고 그리 좋아할 것은 없 다. 너는 애초에......." 뇌천의는 훈계는 듣고 싶지 않은 듯 잘라 말했다. "알고 있소. 당신들이 내게 무공을 가르친 것은 단지 거래일 뿐이 라는 것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십전천사가 그에게 무공을 전 수한 것은 후계자를 양성하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미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 사이에는 사제지간의 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널 구한 것은 처음부터 하나의 거래를 하기 위함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십전천사가 고작 거래를 위해 뇌천의를 구하고 그에게 자신들의 지닌 바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니. 뇌천의는 차갑게 말했다. "말해 주시오, 나는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오. 당신들에게 진 빚만 갚으면 우리 사이는 깨끗이 청산되는 것이오." 십전천사의 안색이 흔들렸다. 특히 천음선자는 들릴 듯 말 듯 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장미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전에 알려줄 것이 있다." 뇌천의는 냉막하게 말했다. "말하시오." 여전히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는 어투였다. "그것은 네 부모에 대한 것이다." "......!" 불끈! 뇌천의의 관자놀이에 심줄이 돋았다. 지금까지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철이 들기 전부터 줄곧 십전천사의 곁에 있었다. 때문에 그 에게 부모의 존재는 하나의 환상일 뿐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아 주 어렸을 적에 부모를 떠올리고 흐느껴 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그의 차디찬 가슴에서 부모의 존재는 지워진 지 오래였다. "너의 부모는 무림인이었다." "......." 뇌천의는 눈썹조차 까닥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는 자 신의 내부에 무인의 뜨거운 피가 끓고 있음을 숙명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장미천도의 말이 이어졌다. "네 부모는 흑도인(黑道人)이었다." "......!" 뇌천의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잠시 후 그는 무심하게 반문했 다. "그렇소?" 그의 표정은 처음의 무심으로 돌아왔다. "널 구했을 때 네 부모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그들은 누군 가와 혈전을 벌인 끝에 죽은 것이다." 뇌천의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일어났다. "상대는 누구였소?" 장미천도는 그를 주시하며 물었다. "복수할 셈이냐?" 뇌천의는 차갑게 말했다. "그들이 누구냐고 물었소." "허헛, 알겠다. 네 마음을." 장미천도는 조롱기가 담긴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그들 역시 흑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지역의 패권(覇權)을 놓고 쟁 패를 벌였다. 하지만 네가 할 일은 없다. 당시 네 부모의 무공은 꽤 높았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우......!" 뇌천의의 입에서 괴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허탈감이 그를 엄습 했다. 그는 부모를 위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지금까 지 그가 미친 듯이 무공을 익힌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모두... 죽었다고?" "그렇다. 네 부모는 원수들과 동귀어진했다." "부모의... 이름은......?" 뇌천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장미천도는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사천 검천령(劍天嶺)에 십자혈각(十字血閣)이란 단체가 있었다. 네 부친은 각주인 혈룡수(血龍手) 뇌무비(雷武丕)란 인물이다. 그 의 부인은 날수혈교(辣手血嬌) 매지운(梅芝雲)이다." "혈룡수 뇌무비... 날수혈교 매지운......." 뇌천의는 몽롱한 눈빛으로 몇 차례 이름을 반복했다. "그들을 공격한 자들은 누구였소?" 그의 음성에는 억양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십전천사는 그만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원수가 살아있다면 그 씨까지도 말릴 기세다.' 장미천도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더 이상 입을 열고 싶지 않았으 나 할 수 없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십자혈각과 경쟁 관계에 있었던 무영살막(無影殺幕)의 인 물들이었다. 무영살존(無影殺尊) 회영(會影)이 당시의 무영살막의 주인이었다." 뇌천의는 다시 물었다. "그들은 어떤 점에서 경쟁하던 사이였소?" 장미천도는 긴 눈썹을 흔들었다. "지난 일이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 무엇 때문에 그걸 묻는냐?" "알아야겠소이다." "으음......!" 십전천사는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먹구름이 몰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오늘 이후 로 흑도무림계에 무시무시한 혈풍이 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장미천도는 탄식하며 말문을 열었다. "십자혈각과 무영살막은 당시 강호의 사대살류(四大殺流)에 속했 다." "살류라 함은?" "청부살인단체를 말한다. 즉, 자객(刺客)들의 단체다." 뇌천의는 눈썹을 성큼 치켜올렸다. "그렇다면 남은 두 단체는?" "정인전(情人箭)과 복수회(復讐會)다." "그들은 아직 현존하고 있소?" "그렇다." 뇌천의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궁금할 것이 없다는 표정이었 다. 그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냉막한 소년. 그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들은 너에게 무공을 전수하기는 했으나 네 사부라 할 수 없 다. 너의 몸에는 살객(殺客)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네 출신 이 살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때문에 하나의 거래를 하기로 했 다. 핏덩이에 불과한 널 구하는 순간부터 거래는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무공을 전수한 것은 순전히 네 능력을 빌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니 추호도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이제 거래할 때가 되었다. 구명의 은혜는 네가 우리의 청부를 해결하면 자연히 사라지게 된 다." 뇌천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얄핏한 입술이 이지러지고 있었다. "후훗! 내 몸에 살류(殺流)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좋소, 당신들 의 청부를 받아들이겠소. 그것으로 우리 사이의 빚이 청산될 테니 까." 그의 음성은 비정 그 자체였다. 십전천사는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고금제일의 대자객(大刺客)이 탄생할지도!' 당대제일의 자객인 형가(荊茄)나 무엽(無葉)이 자객의 원조라 하 나 그들은 모두 단맥(斷脈)이었다. 무림에서는 십자혈각을 비롯하여 유수의 청부단체들이 시대를 풍 미했으나 그 주인들이 연이어 죽거나 실종됨으로써 산하의 수하들 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자객은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마침내 장미천도의 입에서 청부내용이 흘러나왔다. "우리의 청부는 몇 장의 초상화를 찾아달라는 것이다." "초상화?" 뇌천의는 뜻밖의 말에 눈썹을 성큼 치켜올렸다. "그것뿐이오?" 장미천도는 너털웃음쳤다. "허헛, 그뿐이냐고? 어쩌면 천하를 상대로 싸워야 할지 모르는데 말이냐?" "......?" "각각 다섯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 초상화다. 그것은 아득한 과거 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적인 기보(奇寶)다. 그동안 초상화가 일으킨 분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초상화가 나타나기만 하면 무림은 혈풍에 휘말리곤 했다. 초상화는 한 장의 가치만 해도 능 히 수만 명의 인명과 맞바꿀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어찌 가벼운 청부라고 할 수 있겠느냐?" "......." 뇌천의는 입을 다물었다. "구룡개천환비도(九龍開天幻秘圖)라 부른다. 본래는 아홉 장이나, 그 중 다섯 장만 찾으면 네가 할 일은 끝난다. 이것이 우리의 청 부다." 구룡개천환비도. 그것은 저 피비린내나는 악마지겁(惡魔之劫)을 종식시켰던 전설적 인 아홉 기인이 남겼다는 구룡성궁(九龍聖宮)을 열 수 있다는 전 설의 비도였다. 또한 백도의 삼만팔천종(三萬八千宗)의 무학과 구룡성제(九龍聖 帝)의 무학을 얻을 수 있다는 비도였다. 오늘날까지 구룡비도를 얻기 위한 싸움이 그 얼마였던가? 아니, 지금까지도 구룡비도에 대한 말만 나오면 무림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곤 하지 않던가? 뇌천의는 차갑게 말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찾아내겠소." 장미천도는 침중하게 말했다. "기간은 십 년이다. 십 년 후, 이곳으로 구룡개천환비도 다섯 장 을 가져와야 한다." 뇌천의는 몸을 일으켰다. "말이 끝났으면 가겠소." "......!" 너무도 무정한 그의 행동에 십전천사는 아연했다. 어찌 되었건 십 칠 년간이나 그들이 키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용무가 끝나자마자 미련없이 떠나겠다는 것이다. "잠깐!" 장미천도가 손을 뻗었다. "......?" "마지막으로 너에게 줄 것이 있다." 뇌천의는 그를 바라보았다. "현재 너의 공력은 일백 년 수위다. 그 정도로는 청부를 이행하기 가 쉽지 않을 것이다." 뇌천의는 잘라 말했다. "누가 그런 걱정하라고 그랬소?"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내게는 나의 방식이 있소. 어떻게 하든 나의 자유요. 일만 해결 하면 되는 것 아니오?" 장미천도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들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너의 내력을 높여주기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개정대법을 실시하기로 했다." 개정대법(開頂大法)이라면? 그야말로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무림인으로서 개 정대법을 시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과 같은 것이 었다. 놀랍게도 십전천사는 뇌천의를 위해 자신들의 공력을 희생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뇌천의의 반응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필요 없소." "뭣이?" "필요 없다고?" 십전천사는 모두 넋잃은 표정을 지었다. 뇌천의는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차례차례 훑어보며 말했다. "더 이상 신세 지지 않겠소.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오." 저벅, 저벅! 그는 묵직한 발자국소리를 내며 빙동 밖으로 걸어나갔다. 끝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고 빙동을 나 가버렸다. "......!" 십전천사는 모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무량수불. 지독한 아이구려." "아미타불. 무옥(武玉), 그 아이와 너무나 닮았어요. 흡사 분신을 보는 것 같아요. 그 고집까지도......." 모두 한숨을 쉬며 한마디씩 했다. 이때, 천음선자는 뇌천의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닮았어요. 너무나... 닮았어요." 뇌천의, 그는 그렇게 미련 없이 십칠 년의 세월을 청산했다. 과연 그의 앞날은? 십전천사와의 청부계약의 결과는 어찌될 것인 가? 휘류류류륭! 먹물을 풀어헤친 듯 캄캄한 밤이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 둠 속에서 오직 바람만 황량하게 불고 있다. 천산의 밤은 형언할 수 없는 애조를 담고 있다. 이따금 귀곡성과 도 같이 휘몰아치는 바람소리만 천산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있었 다. "......." 뇌천의는 빙구(氷丘)에 우뚝 선 채 암천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무 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너는 뭐냐?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떨어져 고독을 삼켜대고 있느 냐?' 냉막한 소년 뇌천의. 그의 가슴속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독이 응어리져 있었 다.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운명이 그를 더욱 외롭게 하고 있었 다. "......?" 뇌천의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사박사박! 등뒤에서 눈 밟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는 뒤 돌아보지 않았 다. "왜 왔느냐? 섬화." 등뒤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오늘밤 나는 이곳을 떠난다. 귀찮게 굴지 마라, 어차피 우리들은 인연이 없는 사이다." "......." 여전히 아무런 응답이 없자 뇌천의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화, 너였군?" 희미한 별의 잔광을 받고 서 있는 백의소녀는 바로 섬화가 아니라 무화였다. 그녀의 왼쪽 입술 언저리에 찍힌 콩알만한 점이 말해주 고 있었다. "저어......." 무화는 고개를 떨구었다. 하던 말도 채 마무리하지 못했다. 뇌천 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무화, 너와 나는 길이 다르다. 오늘밤 이후로 날 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빠를수록 더욱......." 무화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발개졌다. "알아요. 가가를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말이에요. 하지 만......." 그녀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다. 이슬방울이 어른거리는 눈은 무 언가를 갈망하는 듯했다. "최소한 이별주 정도는 나눌 수도 있잖아요." 뇌천의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화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이별주?" 무화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가가와 소매는 그동안 친남매 이상으로 지냈잖아요? 그런데 이대 로 떠난단 말인가요?" "분명... 옛날에는 그랬었지." "지금도 소매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뇌천의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지금은 다르다." "다르지 않아요. 결코......." 무화의 속눈썹 끝에 이슬이 걸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뇌천의는 한숨을 쉬었다. "소매의 마지막 부탁이에요. 네? 오늘밤만이라도 함께 있고 싶어 요." 무화는 하소연하는 듯 그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뇌천의는 뭐라 말하려다 고개를 저은 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늑한 동혈(洞穴). 천산의 곳곳에는 이런 동혈이 많다. 어떤 것은 깊었고, 어떤 것은 겨우 눈보라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작기도 했다. 지금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동혈은 중간 정도 크기였다. 그곳에는 목침상과 몇 가지 소박한 집기가 보였다. 작은 탁자 위에 황촉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간소하나 마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무화는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들며 입 을 열었다. "가가, 팔 년 전 일을 기억하고 있나요? 눈보라 속을 헤매다 이곳 을 처음 발견했을 때 말이에요." 뇌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세 사람은 뛸 듯이 기뻐했죠. 그리고 이 물건들을 구입한 후 신방(新房)을 꾸몄어요. 신랑은 가가였고 우리 자매는 공동으 로 신부가 되기로 했어요." 무화의 얼굴은 추억을 더듬는 듯 상기되어 갔다. "철부지 시절이었지만 무화는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곤 해요." 뇌천의는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부질없는 얘기다." "그럴까요?" 무화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섬화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화는 뇌천의에게 몸을 기대며 물었다. 뇌천의는 그녀의 뜻밖의 행동에 흠칫했으나 곧 차갑게 말했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럼 저는요? 무화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찬가지다." 뇌천의는 무심한 답변에 무화의 눈이 더욱 빛났다. "정말인가요?" "......." 뇌천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딸그락! 무화가 술잔을 건드렸다. 술잔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뇌천의가 손바닥으로 받았다. 그는 술잔을 탁자 위에 바로 올려 놓았다. 무화는 술병을 들었다. "우리 오늘밤 이별주를 나누어요. 가가." 쪼르륵! 그녀는 술잔에 술을 따랐다. 뇌천의는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잔이 채워지자 무화 는 술병을 내밀었다. "저에게도 따라주시겠어요?" 문득 뇌천의가 한마디 했다. "변한 것 같군, 무화." "네?" 무화의 안색이 변했다. 잠시 당황하던 그녀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 가 떠올랐다. "아마 변할 거예요. 앞으로는......." 뇌천의는 그런 그녀의 말에 의아한 느낌이 들었으나 더 이상 생각 하지 않았다. 그녀가 술잔을 내밀었던 것이다. 탁. 가벼운 소리와 함께 술잔이 부딪쳤다. 두 개의 술잔은 각자의 입 술로 향했다. 뇌천의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러자 무화의 눈 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뇌천의가 빈 술잔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술잔 을 기울였다. "......!" 한편 뇌천의는 술잔을 탁자에 놓는 순간 눈썹을 흠칫했다. 그는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는 무화를 노려보았다. 무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무화, 너 술 속에......." 뇌천의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갑자기 단전 아래가 더워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무화를 노려보았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너... 너......!" 그는 손가락으로 무화를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무화는 술잔을 던 지며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녀는 벌써 온몸이 뜨겁게 달아 올라 있었다. "이럴 수밖에 없었어요! 가가." 무화의 몸에서 강렬한 향기가 풍겼다. 그 향기는 뇌천의의 콧속으 로 흘러들어와 더욱 욕망을 부채질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추... 춘설로(春雪露)를 술 속에......." 춘설로. 그것은 일종의 최음제다. 남녀를 불문하고 한 방울만 복용해도 이 성을 잃고 욕정에 몸부림치게 되는 강렬한 춘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요조숙녀라도 일단 춘설로를 복용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망각한 채 욕정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춘설로의 약성을 해독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오직 음 양화합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의 경우는 양기가 고갈되어 죽게 되고 여인은 음기가 고갈되어 죽게 되는 것이다. "흐으윽, 가가...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어요. 이대로 가가를 보 낼 순 없었어요......." 무화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온몸이 달아오른 채 뇌천 의의 목에 팔을 두르고 온몸을 비벼대고 있었다. "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이런다고 달라질 줄 아느냐? 무화 너답지 않게 이게 무슨......." 뇌천의는 어이가 없었다. 섬화와 달리 무화는 평소 다소곳하고 수 줍음 많은 여인이었다. 설마 그녀가 이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 랐다. 그러나 뇌천의도 인내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뜨거운 기운이 단전으로 몰리면서 아랫도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 른 것이다. 더구나 무화가 목에 매달려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더운 입김까지 뿜어대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무화는 그의 몸에 밀착된 채 온몸을 비틀어댔다. 그럴 때마다 뭉 클한 여체의 느낌이 옷을 격하고 고스란히 전달되어 뇌천의를 괴 롭혔다. "아아... 아무래도 좋아요. 이대로 죽어도 좋아요." 무화는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그녀는 완전히 달라진 듯했다. 이제 까지의 얌전하고 차분한 그녀가 아니었다. 눈에서는 뜨거운 기운 을 발하며 온몸으로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후... 후회할 것이다, 무화!" 뇌천의는 마침내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 심줄이 툭툭 돋아났다. 만일 욕정을 해 소하지 못하면 혈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무화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허억!" "음......." 마침내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렬한 입맞춤을 나누었 다. 이어 자연스럽게 서로를 껴안은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장난삼아 소꿉놀이의 신방으로 꾸며 두었던 동혈이 정말로 신방이 되버렸다. 북! 부욱! 무화의 몸에서 백의가 뜯겨져 나갔다. 뇌천의는 야수로 화해 그녀 의 옷을 거침없이 찢어내 버렸다. 옷자락이 뜯겨져 나갈 때마다 눈부시게 흰 피부가 드러났다. 마침내 그녀는 태초 그대로의 알몸이 된 채 꿈틀거렸다. "흐윽." 무화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을 흘렸다. 뇌천의의 포악한 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쥔 것이다. 난생 처음 으로 남자의 손길이 그녀의 나신을 구석구석 누비기 시작했다. 뇌천의의 눈에서는 욕망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이제 그는 아무 것 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사고력을 잃은 것 같았다. 다 만 본능에 따라 욕망을 발산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뇌리를 지배했 다. 마침내 그도 알몸이 되었다.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채 마른 풀이 깔려있는 동 굴 바닥을 뒹굴었다. 몇 번이나 자세가 바뀌었다. 어떨 때는 뇌천 의가 올라갔다가 어떨 때는 무화가 올라가기도 하면서 그들은 서 로의 육체에 깊이깊이 탐닉했다. 뇌천의는 고독한 늑대가 되어 설원을 질주했다. 전인미답의 설원 에 발자국을 찍으며 그는 미친 듯이 질주했다. "아아!" 무화는 그의 등에 손톱자국을 내며 간간이 입을 벌려 신음을 토해 냈다. 일렁이는 황촛불이 그녀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때로는 고통 의 그늘을, 때로는 열락의 그늘을 드리웠다. 동굴 안은 열기로 가득 찼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있는 남녀의 육체가 어느 순간 격렬 하게 떨렸다. 파르르....... 촛불조차 그들의 행위에 가파르게 경련을 일으켰다. "실수였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리들의 환상은 깨졌다. 무화! 그게 진정 너였단 말이냐?" 뇌천의는 설원을 걷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 는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설지에 발자국이 점점이 남겨졌다. 눈이 내리면 발자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무릇 인간의 영혼에 새겨진 흔적이란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후훗!" 뇌천의는 동굴 속에서 일어난 예기치 않은 무화와의 정사(情事)를 떠올리며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그에게 추파를 던진 적이 없었다. 그 역시 무화를 애틋하게 생각한 적은 있었어 도 이성이나 연인으로 느낀 적은 없었다. 그것은 무학을 익히는데 전념했으므로 그녀가 가슴 속에 들어올 짬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별주를 마시자고 제의한 것이 섬화였다면 그는 결코 응하 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무화를 믿었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차갑게 웃었다. "후훗! 무화! 네가 고작 그런 여자였다니... 이것으로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어느덧 천산의 설지에 새벽 여명이 비추기 시작했다. 점차 어둠이 걷히고 햇살이 비쳐들었다. 뇌천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드넓은 설원 뿐이 다. 그가 십칠 년간을 정을 두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련을 두 지 않기로 했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미지(未知)의 세계로. 결코 순탄할 리가 없는 미지의 앞날을 향해 그는 규칙적인 발걸음을 옮겼다. 한 빙봉 위. 백의를 바람에 휘날리며 무화가 서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설원 저 너머로 사라져 가는 뇌천의의 뒷모 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윽한 빛이 흐르고 있었 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가, 용서하세요. 무화는 결심했어요. 당신을 따르기로......." 무화의 손에는 작은 보따리가 안겨 있었다. "못난 계집이기에 가가를 위해 밤새 지은 흑삼(黑衫)조차 드리지 못했어요." 흑삼을 밤새 지었다니? 그녀는 분명 어젯밤 뇌천의와 함께 밤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렇다 면 그와 정사를 벌인 것은 무화가 아니었단 말인가? "사부님, 백부님들.... 용서하세요. 무화는 그 분을 따르기로 결 심했답니다." 무화는 십전천사가 살고 있는 쪽을 향해 삼배(三拜)를 올렸다. 몸 을 일으키는 순간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호호홋......!" 그녀가 사라진 직후, 간드러진 교소와 함께 그 자리에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잿빛 승복을 걸친 요염한 소녀 섬화였다. 섬화는 염기가 넘치는 눈꼬리를 흔들며 뇌천의와 무화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가히 놀라운 것 이었다. "호호! 무화, 내 그럴 줄 알았어. 바보 같으니라고. 하지만 가가 는 결국 내 차지가 될 거야. 두고봐, 그는 이미 내 사람이고 내가 지금 그를 쫓아가지 않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야." 놀라운 말이다. 기실 지난 밤 동굴에서 술 속에 춘설로를 탄 것은 무화가 아니라 그녀였다. 천성적으로 요기를 타고난 섬화는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손에 넣 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뇌천의를 사랑하고 있 었다. 그래서 그녀는 춘설로를 구했다. 그가 떠나기 전 확실한 육체의 정표(情表)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뇌천의는 그녀를 무화로 깜빡 속은 채 당한 것이었 다. "왜냐고? 그 사람은 할 일이 많고 힘이 필요할 거야. 그래서 이 섬화는 그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생각이야. 호호호 홋......" 한동안 교소를 날리던 섬화는 몸을 돌려 날아갔다. 그녀가 달려간 방향은 십전천사가 살고 있는 쪽이었다. 휘류류륭!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그 날은 하루종일 눈보라가 그치지 않았다. 밤이 되었을 때 눈보 라는 더욱 거세져 폭설로 화했다. 천산을 온통 눈으로 덮어버리려 는 듯이. ■ 무림백서 1권 제4장 십자혈각(十字血閣)의 부활 ━━━━━━━━━━━━━━━━━━━━━━━━━━━━━━━━━━━ 무학의 발달은 수많은 방파의 탄생을 불러왔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숱한 기인고수(奇人高手)들이 등장하여 그때마다 무림천하의 패권을 두고 쟁패하게 되었다. 당금무림은 어떠한가? 그야말로 어지러운 국면을 형성하고 있으니, 수천 년을 내려오며 대립해 온 흑백양도는 당금에 이르러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격동의 무림계를 반영하듯 곳곳에서 신진방회와 문파들이 우후죽 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이십팔정문(二十八正門)으로 불리는 백도제파(白道 諸派)는 아직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소림(少林), 무당(武當), 아미(蛾嵋), 청성(靑城), 화산(華山), 전진(全眞), 태청(太靑), 곤륜(崑崙), 공동( )과 개방( ) 등을 일컫는 소위 구파일방을 위시하여....... 남북쌍보(南北雙堡), 오대가문(五大家門), 삼장사곡(三莊四谷), 풍운사방(風雲四 ). 등 통칭 백도십팔련(白道十八聯)이라 불리는 십팔개방회가 바로 이십팔정문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정통명문(正統名門)으로서의 자부심이 팽팽했다. 다만 유 구한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권위주의에 안주하려는 구파일방과 달리 백도십팔련은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여 오늘날에 있어서는 구 파일방의 성세를 능가하기에 이르고 있었다. 실상 무림인, 특히 백도인이라면 백도십팔련에 직간접으로 관계를 가지지 않는 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금화보(金華堡). 천상보(天商堡). 남북쌍보라 불리는 두 문파는 십팔련 중에서도 가장 방대한 영지 와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각각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을 거점으로 구축한 그들은 남북무 림을 분할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금화보는 북무림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천상보는 하남(河南) 지방 의 상권(商權)을 기반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해운업(海運業)을 주사업으로 수상의 패권을 장악한 천상보 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부를 구축하여 가히 중원의 절반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무림인이면서도 황금을 좋아했다. 그들의 재력은 황실에서 조차 눈치를 볼 정도가 되었다. 석대세가(石大勢家). 천왕검가(天王劍家). 진천세가(震天勢家). 사천당가(四川唐家). 벽력뇌가(霹靂雷家). 그들은 일명 오대가문, 또한 오대세가(五大勢家)라고도 부른다. 그들은 가전의 독문무공을 지니고 있었는데 각각 지가(智家), 검 가(劍家), 도가(刀家), 암기가(暗器家), 화가(火家)로 명성을 날 리고 있었다. 각 방면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는 그들은 철저히 가계를 중 심으로 내려와 어떤 문파보다도 결속력이 든든했다. 성수구세장(聖手求世莊). 풍천백림장(風天百林莊). 천수신장(天手神莊). 이른바 삼장(三莊)으로 불리는 그들은 독특한 영역을 지니고 있 다. 의학(醫學)과 낭인백숙(浪人百宿). 장인(匠人)들의 문파로 강호상 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 천하제일의 의술과 낭인무사들의 안식처로서, 명검기병(名劍奇兵) 의 산지로 삼장은 백도무림의 명소로 알려져 있었다. 만화곡(萬花谷). 천락곡(千樂谷). 음양곡(陰陽谷). 만수곡(萬獸谷). 사곡(四谷)에 속한 그들은 모두 천연적인 요새에 자리잡고 있었으 며 빼어난 특징들을 지니고 있었다. 철기방(鐵騎 ). 표화방( 貨 ). 독수방(獨手 ). 의녀방(義女 ). 그들은 통칭 풍운사방이라고도 불리는데 협골간담의 기개를 자랑 하는 철기방과 중원전역의 표국업을 장악하고 있는 표화방, 불구 자들만으로 이루어진 독수방, 여인만으로 만들어진 의녀방으로 구 성되어 있다. 풍운사방은 비록 정통은 아니나 기백과 협의심으로 인해 오늘날 백도무림의 정기를 북돋우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들 이십팔대정문이야말로 당금무림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림계를 어찌 흑백만으로 나눌 수 있겠는가? 백도, 흑도를 위시하여 녹림도(綠林道)가 있으며 여기에 오랜 역 사를 지닌 마도(魔道)와 기회만 있으면 중원정복을 노리는 변황 (邊荒)에 이르기까지 무림계는 다양한 분할구도를 유지하고 있었 다. 세월은 말없이 흐른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천하의 주인이 바뀌듯 무림의 판도 또한 시대 에 따라 돌고 도는 법이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 대륙은 추색(秋色)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염천(炎天)의 여름은 거 짓말처럼 물러가고 기후 또한 소슬해졌다. 천고(天高)의 계절, 티없이 푸른 가을 하늘은 손을 갖다대면 벨 듯이 추상같은 기미를 보인다. 검천령(劍天嶺). 사천이 험지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더욱이 검천령은 황폐한 곳으로 사람들이 살기 척박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도 농토는 있었다. 농부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땅을 일구고 척박한 대지에 순응하며 살고 있었다. 아쉬운 것은 검천령이 험지 중의 험지라 화전(火田)을 가꿀 수밖 에 없다는 것이었다. 화전민들은 수렵을 겸하고 있어 여타의 농부들에 비해 용맹스럽고 기질이 호방한 편이었다. 이곳 검천령에 삼개월 전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일신에 흑삼(黑衫)을 입고 있었다. 단신으로 검천령에 나타 난 그는 오자마자 놀라운 일을 벌였다. 검천령에 있는 화전민 마을의 주민은 삼백오십 명이었다. 그는 화 전민들 앞에 자루 하나를 내려놓았다. 자루를 열자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놀랍게도 황금이 가득 든 것이었다. 흑삼청년은 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검천령의 땅을 모두 파헤치시오. 땅 속에서 기왓장 하나, 담벽의 흔적이라도 찾아낸다면 모두 값을 쳐주겠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더구나 화전민들은 막 수확을 앞두고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 밭을 몽땅 파헤친다면 겨울을 어떻게 난단 말인가? 그들은 흑삼청년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부신 황금만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이오? 기왓장이나 담벼락의 흔적을 찾아내면 황금을 준 단 말이오?" "그렇소. 불에 타다남은 서까래도 좋고, 아무 것이나 좋소. 오래 전 이곳에 있었던 건물의 잔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두 값 을 쳐주겠소." 이렇게 되자 화전민들은 점차 동요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가난 한 사람들이었다. 흑삼청년이 자루에 담아온 황금 중 일부만 얻어 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개중에는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피땀 흘려 일군 화전 을 파헤칠 수는 없다고 깨끗이 거절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화전민들은 미치기 시작했다. 이굉(李轟)이란 자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 머리가 모자란 것으로 알려진 작자였다. 우연히 잡초더 미에서 깨진 기왓장 하나를 발견한 그는 흑삼청년에게 갖다 주었 다. 그런데 흑삼청년은 군말없이 황금조각 하나를 그에게 보상해 준 것이 아닌가? 황금은 분명 진짜였다. 마을 사람이 그 사실을 전하자 온 마을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미친 듯이 밭을 파헤치 기 시작했다. 이젠 곡식을 수확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어른, 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화전민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밭을 파헤쳤다. 아니, 검천령 일대를 샅샅이 뒤집어 엎었다. 그들은 풀뿌리 하나, 나무등걸 하나, 바위 아래까지 샅샅이 뒤졌 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을 발견하면 그 즉시 흑삼청년에 게 갖다바쳤다. 흑삼청년은 그 즉시 황금조각을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되자 화전민들은 식음을 전폐하게 되었고, 마침내 한 달쯤 지나자 엄청난 수확(?)을 거두게 되었다. 깨어진 기왓장이 백열두 수레, 주춧돌이 열두 수레, 그 밖에도 어 떤 건축물의 잔해인 듯한 부스러기가 무려 삼백오십여 수레 분이 나 발굴되었다. 그것은 모두 검천령을 중심으로 방원 일 마장 주변에서 발견된 것 들이었다. 화전민들은 한 달만에 모두 부자가 되었다. 빠짐없이 황금을 받은 그들은 더 이상 검천령에서 화전을 가꿀 필 요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큰 도시로 나가 집도 사 고 옷도 사고 맛있는 것도 사먹는 꿈에 젖었다. 그러나 인간의 호기심은 못말리는 법. 그들은 대체 흑삼청년이 무엇 때문에 이런 전대미문의 괴사를 벌 이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개중 많은 사람들이 그가 황금으로 사들 인 건물의 잔해로 무엇을 하려는지 지켜보게 되었다. 흑삼청년은 산더미처럼 쌓인 잔해를 바라보며 하루종일을 아무 것 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잔해 앞에 묵묵히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 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추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얼음처럼 찬 얼굴이었다. 눈빛은 투명할 정도로 차가웠고, 피부 또한 희었다. 눈썹은 칼날 처럼 날카로왔으며 한 일자로 다문 입술은 오기와 집념을 말하듯 얄핏했다. 만 하루가 지났다. 흑삼청년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불에 타버리고 조각조각이 난 파편들을 일일이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꼬박 한 달여에 걸쳐 잔해조각을 맞추는 일에 매달렸 다. 한 달 후. 화전민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방원 일마장에 걸쳐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높이가 십 장이 넘는 거대 한 전각(殿閣)이었다. 그야말로 불사사의한 일이었다. 산산조각난 기왓장과 주춧돌, 불타버린 잔해들을 끼워 맞춰 그토 록 거대한 전각을 복원(復元)하다니, 듣고 보도 못한 괴사 중의 괴사였다. 문득 누군가 전각을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저것은... 십자혈각(十字血閣)이다. 십자혈각......!" 그렇다. 검천령에 우뚝 솟아난 거대한 전각이야말로 지난날 무림의 사대살 류(四大殺流)의 하나였던 십자혈각이었다. 번- 쩍! 쏴아아아아......!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갈라지는 듯 번개가 쳤다. 뒤이어 폭우 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검천령을 온통 무너뜨리기라도 할 듯 뇌성벽력이 연이어 울리며 장대같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 했다. "우우우...... 우!" 폭우 속에서 처절한 장소가 울려 퍼졌다. 불타버린 잔해를 모아 복원한 십자혈각의 앞에 흑삼청년이 무릎꿇 고 있었다. 그는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며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며 장소를 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그의 입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십자혈각....... 이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란 말인가? 뇌전혈룡수 (雷電血龍手) 뇌무비(雷武丕)가 바로 나의 부친이란 말인가?" 흑삼청년. 그는 바로 뇌천의였다. 천산을 떠난 그는 곧바로 자신의 고향인 십자혈각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검천령에서 두 달간 머물며 불타버린 검천령을 복원시켰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뿌리도 없이 던져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 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십자혈각을 보는 순간 그의 가 슴에는 말할 수 없는 허탈감만 밀려 들었다. 타버린 잔해로 복원된 건물. 거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부모는 이미 죽었고, 원수들 도 모두 죽은 지금에 와서 복원된 건물이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십자혈각은 복원됐으나 그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있는 것이 없었 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허상(虛像)에 다름 아닐 뿐이었 다. 영원히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후후후후훗! 이것이었던가? 이것이 바로 십자혈각이란 말인가? 내가 태어난 곳이고... 내 뿌리였단 말인가?" 뇌천의는 억수같이 퍼부어 내리는 폭우를 맞으며 그렇게 중얼거렸 다. 이때였다. 번- 쩍! 한 줄기 뇌전이 떨어져 십자혈각을 때렸다. 꽈르르르- 릉! 십자혈각은 삽시에 불덩어리에 휩싸여 붕괴되고 말았다. 지난 한 달간 피땀흘려 복원시킨 십자혈각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무너 져내린 것이다. "흐으으, 역시 과거는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단 말인가?" 뇌천의는 자조의 중얼거림을 발했다. 그러나 조금도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후련하다는 표정 같기도 했다. 번- 쩍! 다시 시퍼런 뇌전이 암천을 물들이는 순간 그의 이마에 나있는 뇌 문(雷紋)이 드러났다. "으하하하핫핫핫......!" 문득 미친 듯한 광소가 흘러나왔다. 뇌천의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 럼 웃어댔다. 그는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광소와 함께 지워버리 려는 것 같았다. 문득 쌍장을 뻗었다. 꽈르릉.....! 가공할 경력이 뻗어나가 화염에 휩싸여 있는 십자혈각의 잔해를 날려버렸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과거를 뭉개버린 것이다. 이제 그의 눈앞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십자혈각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으하핫핫.....! 과거는 사라졌다. 하지만 다시 시작할 것이다. 십자혈각은 이 뇌천의에 의해 지상에서 가장 강한 살종(殺宗)으로 태어날 것이다. 으하하하하......!" 우르르릉....... 또 하나의 운명을 예고하듯 벽력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날을 시작으로 무림에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보았소?" "봤소......." "... 들었소?" "들었소......." 폭우가 퍼붓는 검천령의 후미진 숲속. 두 사람이 격동으로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경련하고 있었다. 그 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전을 일구는 두 명의 중노(中老)였다. 뇌천의의 부탁대 로 십자혈각의 잔해들을 찾는데 앞장섰던 인물들이었다. 화전민들 사이에서는 장량(張亮)과 한구(韓九)로 불리던 두 사람 은 격동에 몸을 떨고 있었다. 장량은 눈물을 흘렸다. "오... 오......! 각주(閣主)께서 살해되신 후... 소각주의 시신 이 발견되지 않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오늘까지 살아왔건만... 드 디어!" 한구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그의 가슴은 쿵쿵 뛰고 있 었다. "그렇소. 그것은 믿음이었소. 십자혈각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소. 비록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모 두 이 날이 오기를 기다려 오지 않았소?" 그들은 단순한 화전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십자혈각에 소속돼 있던 살수(殺手)들이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그들이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그대들은?" "헉!" 장량과 한구는 기겁을 했다. 어느새 그들의 눈앞에 흑삼청년이 서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소... 소주! 저희들은 십자혈각의 쌍살(雙煞)인 무형도(無形刀) 장엽(張葉), 검무흔(劍無痕) 한비(韓比)입니다. 소주의 왕림을 기 다렸습니다. 오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두 사람의 눈에는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뇌천의는 두 인물의 말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사태를 파악했다. 그는 혈관에 열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십자혈각의... 쌍살이라고?" "소주!" "크으윽......!" 무형도, 검무흔, 두 살수는 이마를 땅에 비벼대며 오열을 터뜨렸 다. 한동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뇌천의는 괴소를 흘렸다. "후후훗!" "......?" 장엽과 한비는 의혹에 싸인 채 서로를 마주보았다. 뇌천의는 본래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와 담담히 말했다. "그렇군. 십자혈각은 멸망했으나 질긴 뿌리 몇 가닥이 남아 있었 군." "그... 그렇습니다. 본각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뇌천의는 냉정하게 물었다. "그대들은 어느 정도의 인물들인가?" "본각은 오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살(煞), 혈(血), 사(死), 풍 (風), 뇌(雷)로 구분합니다." 장엽은 격동의 음성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살조(煞組)는 쌍살 즉, 십자쌍살을 수뇌로 하여 총 십이 명의 십 자살(十字煞)을 말한다. 혈조(血組)는 삼십육 인으로 이루어진 광혈대(狂血隊)를 말하며, 풍조(風組)는 칠십이 인의 사풍대(死風隊), 사조(死組)는 백팔 명 의 상문단(喪門團)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뇌조(雷組)는 염라사(閻羅使)로 불리며 총 인원 백팔십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 뇌천의는 십자혈각이 의외로 조직적이며 규모가 크다는데 놀랐으 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냉정하게 물었다. "생존자들은 얼마나 되는가?" 이번에는 검무흔 한비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촌노(村 老)에 불과하던 그들은 허리가 활짝 펴져 있었으며 눈에서는 살수 특유의 예리한 안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목소리 역시 노인의 것이 아니라 차갑게 변했다. "무영살막(無影殺幕)과의 혈전 이후로 살아 남은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대략 백여 명 정도로......." "연락은 가능한가?" 뇌천의의 음성은 더욱 차가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종사(宗師)의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한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연락만 하면 한 달 이내로 달려올 것입니다." "음." 뇌천의는 몸을 돌려 폐허가 된 십자혈각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장엽과 한비는 그저 그의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두 사람은 과거 십자혈각의 제 이인자였다. 그만큼 무공이 강했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소주에 대해서는 막연 한 공포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차라리 그 점이 좋았다. 십자 혈각이 무너진 것은 완벽한 강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주군인 뇌천의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강한 신뢰의 마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크다. 과거의 주군에 비해 훨씬 큰 분이다. 오오! 십자혈각은 이 분으로 인해 부활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은 피가 끓기 시작했다. 그것은 살수의 본능적인 반응이었 다. 이때 뇌천의의 입에서 억양을 느낄 수 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연락해라. 빠를수록 좋다. 수하들을 집결시키고 삼개월 이내에 십자혈각을 복원해라. 본각의 사업은 다시 시작할 것이다. 물론 전중원(全中原)으로 영역을 확장시킬 것이다." "아아!" "소주!" 장엽과 한비는 감격의 눈물을 뿌렸다. 그들의 염원이었던 십자혈 각의 부활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복(伏)- 명(命)-!" 그들은 우렁차게 부르짖고는 이마를 땅에 찍었다. 그들은 지금 당 장이라도 일에 착수할 것을 맹세했다. "후후훗, 다시 시작한다. 본각은 간판을 내걸고 중원전역에 청부 사업을 벌인다. 흩어진 수하들은 고금제일의 살종(殺宗)을 이룩할 것이다." 뇌천의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말! 그로 인해 무림에는 풍운이 일어날 것이다. 쿠쿠쿵!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던 밤, 검천령에서 대풍운의 시발 점은 일어났다. "으하하하핫핫......!" 삼 인의 웃음소리가 폭우를 뚫고 퍼져나가고 있었다. ■ 무림백서 1권 제5장 대살종(大殺宗) ━━━━━━━━━━━━━━━━━━━━━━━━━━━━━━━━━━━ 그들은 소리도 없이 다녀간다. 그들이 다녀가면 반드시 이런 소리 가 난다. "으아악!" 단말마의 비명이다. 누군가 이 땅에 마지막으로 절규하듯 짜내는 비명이다. "끄- 악!" 또 누군가가 당했다. 하나 둘.... 비명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일단 비명을 낸 사람은 영원히 눈을 뜨지 못했다. 그가 누구이든, 신분이 어떤 작자이든 일단 표적이 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다음날이면 그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다. 중원의 일각에서 시작된 죽음의 행진은... 빠른 속도로 중원전역 으로 확산되었다.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살겁에 무림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 작했다. 살수(殺手)라 불리는 인간들, 다른 말로는 살인청부업자(殺人請負 業者), 또는 자객(刺客)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무림을 위협하기 시 작한 것이다. 지난 날 사대살종(四大殺宗)이라 불렸던 살수집단은 자체적인 내 분으로 인해 사라졌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그들이 부 활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 대살종(大殺宗)! 무림을 공포에 떨게 만든 그들은 공공연한 청부를 벌이기 시작했 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살종이라 불러주기를 원했다. 모든 것은 황금만 있으면 해결되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대살종(大殺宗). 일찍이 무림에 그런 이름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정도 사도 없었다. 그들은 어느 곳이든 나타났다. 소 리 없이 나타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싸늘한 주검 뿐이었다. 청부받은 대상자는 어김없이 대살종의 방문을 받았고, 그들은 얼 마 후면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관통된 채 나뒹굴었다. 어떤 자는 백도(白道)의 거물이었으며, 어떤 자는 거부(巨富)로 황금과 여색(女色)의 탐닉 속에 군림하던 자였고, 어떤 자는 흑도 (黑道)의 거마(巨魔)이기도 했다. 대살종은 청부대상에서 정사를 가리지 않았다. 일단 청부를 맡으 면 그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 틀림없이 삶에 종지부를 찍어 준 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오직 하나였다. 신용(信用)!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청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들의 철칙이었다. 대살종의 출현은 무림을 일대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자는 없었다. 때문에 무림인들은 가슴을 졸이 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었다. 대살종이 누구냐에 대한 의문이 일었으나 무림인들이 알아낸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대살종의 근거지는 과거 십자혈각(十字 血閣)이 있던 사천성 검천령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검천령을 찾아갔다. 그들의 목적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첫번째는 청부를 하기 위해서다. 황금을 싸들고 검천령을 찾아 누 군가를 살해해 달라고 당부하는 자들이었다. 두번째는 대살종을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목적을 품고 검천령을 찾은 자들은 아무도 살아 돌 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검천령에 뼈를 묻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되자 검천령에 이르는 길은 인적이 끊어지고 말았다. 오직 그곳에 발을 내딛는 자는 청부를 하기 위한 자일 뿐이었다. 대살종의 출현. 그것은 잠잠하던 무림에 한바탕 폭풍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금화보(金華堡). 북무림의 패자(覇者)인 금화보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 다. 금화보주인 금화태세(金華太歲) 엽무웅(葉武雄)은 과거 대활 련 십전무맹의 십전무랑(十全武郞)의 일인이었다. 특히 그는 십전옥수겁 천무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기재로 알려진 인물이다. 천무옥이 죽은 후 그는 금화보를 세웠고 십수 년만에 강북무림의 태두로 성장했다. 따라서 북무림에서 그의 지위는 구파일방의 성 세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그는 남다른 의협심과 호방한 기질로 인해 숱한 군웅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기도 했다. 밤이다. 그믐의 달빛은 희미하게 대지를 비출 뿐, 어딘가 모르게 음산한 느낌을 주는 밤이다. 스스스......! 한풍(寒風)이 분다. 이월의 바람에는 마지막 엄동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찬 바람이 금화보를 휘돌고 있었다. 엽무웅은 본시 호방한 위인으로 강북무림의 패자로 군림하면서도 금화보의 문호를 개방해 놓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나 자유롭게 출 입할 수 있다는 그의 개방적인 성품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호위무사를 두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만큼 무공에 자 신이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실상 그는 대활련 십전무맹에 속할 당시 서열 이삼을 다툴 정도로 대단한 위인이었던 것이다. 금화보의 정문 앞. 흑영(黑影)이 나타났다. 그는 바람의 일부인 듯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일신에는 흑색장포 를 걸쳤으며, 머리에는 역시 검은 색의 죽립(竹笠)을 쓰고 있어 용모를 알 길이 없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질식할 듯한 살기와 음산함이 풍기고 있었다. 그는 금화보의 정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금화태세 엽무웅, 과연 거인다운 뱃심이군. 자신의 거처를 이렇 게 허술하게 해놓다니 말이다. 후후....... 하지만 대살종은 그런 것을 가리지 않는다. 너는 오늘밤 희생양이 되어야겠다." 대살종! 그렇다면 그가 바로 당금무림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신비의 대 살종이란 말인가? 쿵! 쿵! 쿵! 흑삼인은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대문이 조금 열리며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뉘시오... 억!" 막 고개를 내밀던 중년장한은 찬바람을 들이켰다. 흑삼인의 전신 에서 풍기는 음랭한 기운에 전신이 얼어붙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귀, 귀하는 뉘시오?"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엽무웅을 만나러 왔다." 흑삼인은 차갑게 말했다. 중년인의 고리눈이 부릅떠졌다. "귀하는 누구기에 함부로 보주님의 이름을......." "엽무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흑삼인의 어조는 얼음장보다도 더 차가웠다. "이런... 무례한 놈!" 휙! 참다 못한 중년인은 대뜸 장력을 날렸다. 그러나 그의 장력이 채 뻗어지기도 전이었다. "크- 윽!" 그는 눈앞에 새하얀 손바닥이 덮여오는 것을 보았고 다음 순간 얼 굴이 화끈해졌다. 퍽! 둔탁한 음향과 함께 그의 머리는 중추신경의 통제를 잃었으며, 비 틀비틀 뒤로 물러나다 마치 뼈가 없는 인간처럼 주저앉고 말았다. 저벅저벅! 흑삼인은 무심히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자신의 집으 로 돌아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 게 하였다. "......!" 금화태세 엽무웅은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는 화원 한가운데 있는 정자(亭子)에 서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발자국 소리에서 그는 사신의 예감을 느꼈다. 중문(中門)을 지난 발자국 소리는 점점 더 확실히 들려왔다. 이따 금 걸음이 멈춰지긴 했으나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일 뿐이었다. '하락쌍웅(河落雙雄) 염씨 형제와 산동사룡(山東四龍), 총관 하태 룡(河太龍)조차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가 열거한 이름들은 금화보의 쟁쟁한 고수들의 명호였다. 그는 보지 않고도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이날 따라 금화보는 텅 비다시피 했다. 그것은 그가 지시를 내렸 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지금 금화보에는 소수의 측근밖에 없었다. 발자국 소리는 중단없이 점점 가까이 울려왔다. 그로 미루어볼 때 이미 방해자를 모두 해치운 것 같았다. 염무웅은 마음을 가다듬고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근방에서 멈추었다. "......!" 엽무웅은 뒷짐을 진 채 몸을 흠칫했다.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왔다.' 그는 상대방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느 꼈다. 한편, 흑삼인은 화원에 들어선 순간 눈빛을 빛냈다. 그는 다름 아 닌 뇌천의였다. 희미한 달빛 아래 향기를 뿌리는 것은 매화(梅花)였다. 화원은 매화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찌 보면 매우 아늑하고도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문사라면 한가롭게 시(詩)라도 읊을 만큼 정취있는 풍경이었다. "......." 뇌천의는 화원 입구에서 멈춘 채 숨결을 가다듬었다. 그는 이 화원이 평범한 듯 하면서도 상당히 질서있게 다듬어져 있 다는 것을 느꼈다. 매화가 심어진 배열이나 다른 꽃나무들이 심어 져 있는 위치가 절제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화원을 빙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한곳에서 멈추었다. '빈틈이 없다.' 화원 한가운데 정자가 있고, 그 정자 속에 뒷짐을 진 금삼인이 보 였다. 당당한 체구였다. 뒷모습만으로 이미 태산과도 같은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 다. '역시 북무림의 태두답군.......' 뇌천의는 금삼인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만 뒷모습 만으 로도 이 정도의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은 흔치 않은 것이다. 그는 서서히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정자로 오르는 계단에 이르렀을 때였다. 엽무웅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물었다. "그대가 바로 대살종(大殺宗)인가?" 대살종(大殺宗). 당금 무림을 공포에 몰아넣은 공포의 이름! 뇌천의는 대답 대신 차갑게 반문했다. "그대는 엽무웅이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각자 질문만 던졌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부 인하지 않는 것은 곧 수긍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잠시 후 엽무웅이 돌아섰다. "그렇군. 공연한 질문이었다." 엽무웅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십이 조금 넘어 보이는 사각형의 얼 굴에는 위엄이 넘쳐흘렀다. 귀밑과 턱을 뒤덮고 있는 구레나룻과 짙은 눈썹은 감히 범접 못할 인상을 풍겼다. 그에게서는 범인들에 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위엄이 넘치고 있었다. 그는 뇌천의를 직시했다. 눈빛이 얼마나 강한지 뇌천의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엽무웅은 한동안 쏘아보다가 갑자기 껄껄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대살종 자네가 직접 찾아 주다니 노부 이루 말 할 수 없는 영광일세." 그는 정말 반갑다는 듯 길을 비켜 주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뇌천의는 그의 호방한 기질에 감탄하기 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그러나 아무 말없이 정자 위로 올랐다. "과연 금화보주 답소." 그는 죽립을 벗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최대의 경의의 표시였 다. 지금까지 그는 누구에게도 이런 태도를 취한 적이 없었다. 죽립이 제거되자 창백하면서도 냉막한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뇌천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엽무웅은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으음, 생각보다 어리군." 뇌천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살수는 나이를 따지지 않소. 경력으로 말할 뿐이오." "그렇군." 엽무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의 경력. 그것은 곧 살인의 경력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살인의 전문가는 나이와 무관했다. 그것은 남녀의 구 별도 없었으며, 노소의 구별 또한 무의미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경력이다. 얼마나 많은 살인을 했느냐도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인 상대방이 누구냐에 달린 것이다. 삼류인물 백 명을 죽인 것 보다는 일급인물 한두 명을 죽인 살수의 경력을 훨씬 높게 치는 것이다. 엽무웅은 빠르게 그동안 대살종이 죽인 인물들을 떠올려 보았다. 놀라운 이름들이 줄줄이 거론된다. 그들은 하나같이 각 지방의 패 주거나 영향력 있는 흑백양도의 일류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대살종은 살인횟수도 대단한 편이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고금최고 인 셈이다. 뇌천의는 그가 말이 없자 또박또박 말했다. "누군가 당신의 목을 요구했소. 물론 당신이 거물이니 만큼 대가 도 크오. 내게는 대가가 필요했소. 그래서 승낙했소." 엽무웅은 고소를 지었다. "그렇겠군. 노부의 목은 제법 값이 나가는 셈이지. 그래 얼마나 나가던가? 허허...." 그는 쓰윽 자신의 목을 쓰다듬어 보였다. 그리고는 너털웃음을 지 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의 태도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풍도였다. "아깝군." "......?" 엽무웅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뇌천의는 담담히 말했다. "진작에 당신을 알았다면 이번 청부는 받지 않았을 것이오." 엽무웅은 빙긋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그러나 듣기로 대살종은 한 번 받은 청부는 어기는 법이 없다던데?" "그렇소." "허헛! 그럼 틀림없이 오늘밤이 노부의 제삿날이 되겠군. 이런, 살아남긴 글렀구먼." 엽무웅의 태도는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도저히 죽음을 눈앞에 두 고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뇌천의는 무엇을 느낀 듯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오늘밤 내가 이곳에 올 줄 알고 있었소?" 엽무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까지 흘리고 있던 웃음을 거 두고는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노부의 생각이 맞는다면 아마도 자네의 고객은 일석이조(一石二 鳥)를 노린 것 같네." "음......." 뇌천의는 신음을 흘렸다. 상대의 말을 듣는 순간 확연히 깨달아지 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미리 알려 주었다는 얘기군. 일석이조라 는 것은 나와 엽무웅 둘 중에서 누가 죽어도 좋다는 이중계(二重 計)를 의미하지 않겠는가?' 사실이 그렇다면 무서운 계략이었다. 당금 강북무림의 태두인 금화태세 엽무웅과 죽음의 사신 대살종 중에서 한 명만 죽는다 해도 무림에 태풍과도 같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뇌천의는 낮게 웃었다. "후훗, 제법 머리를 썼지만 그들은 한 가지 소홀히 한 것이 있 소." "......?" 엽무웅은 뇌천의를 바라보았다. "대살종은 한 번 약속한 청부는 틀림없이 이행하지만 단 기만한 대가는 백배, 천배로 돌려준다는 사실이오." 뇌천의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의 음성에는 은은한 노기가 서려있 었다. 엽무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대는 이번 청부를 이행할 수 있다고 믿는가?" "후훗! 귀하가 알고 있었다니 이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겠지. 하 지만 대살종에게 실패란 없소." "잘못 짚었네." 엽무웅의 노안이 뇌천의를 주시했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었다. 그것은 오직 죽음을 달관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노부는 아무런 준비도 취하지 않았네." 뇌천의는 흠칫했다. "노부는 벌써부터 이런 때가 오리라 예측하고 있었네. 또한 인력 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네. 왜냐하면 노부를 제 거하려는 세력이 워낙 크기 때문이네." 뇌천의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단 말이오?" "허헛, 그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노부는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 네." "어째서 그렇소?" "숭고한 생명의 낭비를 막고 싶기 때문이네. 나 하나만 죽으면 그 만 아닌가? 아울러 백도의 힘을 감소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네." "......." 뇌천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허헛, 오랫동안 끌어온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네. 이젠 그 종지부 를 찍을 때도 되었네." 뇌천의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백도가 무엇이길래 자신의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뇌천의는 엽무웅의 한없이 깊은 마음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자, 자네의 살법(殺法)을 견식하고 싶네. 그런 연후 나도 자네에 게 청부할 것이 있네." "청부?" 뜻밖의 말에 뇌천의는 아연해졌다. 자신의 목숨을 가지러 온 살수 에게 도리어 청부를 하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엽무웅, 이 자는 언제부터 이렇게 호기로운 인물이었단 말인가?' "왜 싫은가? 노부가 알기로 대살종은 어떤 청부도 거절치 않는다 고 들었거늘." 뇌천의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원칙을 깨고 싶지 않았 다. "하지만 아직 청부가 끝나지 않았소." "허헛! 그러기에 살법을 먼저 견식하고자 하지 않는가?" 그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슉! 금화태세 엽무웅의 수도(手刀)가 일직선으로 가로 질렀다. 허공을 가른 그의 수강(手 )은 눈 깜짝할 사이에 뇌천의의 급소를 꿰뚫 었다. "후후훗......!" 뇌천의는 신형을 옆으로 살짝 틀어 엽무웅의 수도를 피해냈다. 그 의 입에서 냉소가 흘러나왔다. 스스......! 그는 유령처럼 신형을 움직였다. 그의 몸은 여덟 개로 늘어났다. "음! 연대팔품환허보(蓮臺八品幻虛步)!" 엽무웅은 경악성을 발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그가 이렇게 뛰 어난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뇌천의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무심했다. 아무런 감 정도 없었다. "이건 어떻소?" 차가운 음성과 함께 장심에서 오색기류가 뻗어나갔다. 우- 웅! "그... 그건... 오행불영수(五行佛影手)!" 엽무웅은 오색기류에 휘말린 채 붕 떠올랐다. "흐윽!" 엽무웅은 어깨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저만치서 떨어져 비틀거렸다. 엽무웅은 뇌천의의 일격에 심한 부상을 입은 듯 했다. 그러나 역 시 북무림의 패자다웠다. 휘리리링! 그는 소매 속에서 금빛 섭선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아홉 번 찌르 고, 열여덟 번을 후려쳤다. "그대가 어찌 십전천사(十全天師)의 절기를......." 공격하면서 엽무웅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뇌천의의 행동이 그의 중얼거림을 중도에서 끊어 버렸다. 슈- 악! 뇌천의의 소맷자락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가공할 철수진기를 뿜어 냈던 것이다. "허... 억!" 엽무웅은 자신의 섭선이 뒤로 밀려나며 문호가 열리는 것을 느꼈 다. "후후훗......!" 음산한 웃음과 함께 뇌천의는 양손바닥을 뒤집었다 떨쳐냈다. 꽈꽝! "으아악!" 엽무웅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붕 떠서 날아갔다. 그는 허공에서 곤두박질치며 정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스슷......! 뇌천의는 엽무웅을 유령처럼 따라붙었다. 한순간도 엽무웅에게 기 회를 주지 않았다. 팟! 그의 좌수가 엽무웅의 천령개를 내리쳤다. 그런데 그의 손이 막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잠깐!" 엽무웅이 다급하게 외쳤다. 간일발의 찰나로 뇌천의의 손이 멈추 었다. 엽무웅은 피를 울컥 토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노부도... 늙었군." "......." 뇌천의는 비정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았다. 엽무웅은 숨을 몰아쉬 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노부가 졌다. 자네의 청부는... 성공했다." "......." "죽기 전에... 이번에는 노부가 청부를 맡기겠네. 들어줄 텐가?" '이 자의 속셈은 무엇인가?' 뇌천의는 잠시 생각하다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 "받아들이겠소." 간단한 대답이었다. 엽무웅은 소매로 입가의 피를 문지르며 말했 다. "먼저 대가를 치르겠네. 바로 이것이네." 엽무웅은 손목에 끼고 있던 금환(金環)을 꺼냈다. "......?" 뇌천의는 그 금환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금환의 가치는 무궁한 것이네. 어쩌면 향후무림의 운명을 좌 지우지할지도 모르는 것이네." 이렇게 말하는 엽무웅의 모습에는 비장함마저 곁들여 있었다. 뇌 천의는 침묵했다. "언제고 이 금환의 가치를 알 날이 올 것이네." 뇌천의는 엽무웅의 인품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금환을 받아 왼쪽 손목에 꼈다. "청부는 무엇이오?" "허허, 꽤 귀찮은 일이네. 다름이 아니라 노부의 두 아이를 맡아 달라는 걸세." 뇌천의는 처음으로 안색이 변했다. 엽무웅의 말이 너무나 뜻밖이 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을 맡아 주게. 그 아이들이 이 피비린내 나는 무림계에 서 발을 끊는 것이 좋지만... 모든 것을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뇌천의는 어이가 없었다. '아이들을 맡으라니, 이런 청부도 다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호랑 이 새끼를 기르라는 셈이 아닌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사랑스런 자식들을 살수 에게, 그것도 자신을 살해한 자객에게 맡기려 하다니. 뇌천의는 냉랭하게 말했다. "후훗, 당신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르오? 그 아이들 은 내가 원수인 것을 알면 날 죽이려 들것이오. 그런데도 그들을 맡으란 말이오?" 엽무웅은 너털웃음쳤다. "허허헛! 노부는 자네를 믿네." 뇌천의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엽무웅은 탄 식했다. "그럼 거래는 성립된 걸로 알겠네. 향후 노부의 죽음으로 천하는 어지러워질 걸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가 강북무림의 힘을 움 직이지 않는 것은......." "......." "남북무림의 반목을 원치 않기 때문이네." 뇌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허헛! 어리석은 자들이야. 머지 않아 무서운 겁난이 닥칠 것이 네. 무림을 송두리째 흔들지도 모르는 엄청난... 겁난이......." 엽무웅의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뇌천의는 안색이 변해 물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뇌천의는 그를 흔들었다. "허허헛.... 머지 않아 피부로 느끼게 될 걸세." 뇌천의는 점점 더 엽무웅에 대하여 의혹을 느꼈다. '대체 이 자의 말은 무슨 뜻인가?' 엽무웅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를 보니 노부의 옛 지기가 한 명 떠오르는군. 너무나 닮았 어. 너무나." "......!" "그는... 고금제일의 기재였으며, 참다운 백도제일인이었지." "......!" 엽무웅은 기이한 눈으로 한동안 뇌천의를 응시했다. "자네는 그와 너무나 닮았네. 아니, 마치 환신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뇌천의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가 대체 누구요?" 엽무웅은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다. "그의 이름은 천무옥. 십전옥수겁(十全玉手劫) 천무옥이라네." 뇌천의는 다소 조소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영광이구려, 그렇게 생각해주어서." "무옥은... 당대제일의 기재이자... 영원히 무림사에 기록될 기인 이었네. 허나......" 엽무웅의 얼굴에는 쓰라린 회한의 빛이 떠올랐다. "그를... 죽인 것이 누군지 아나?" "......?" "허허, 바로 그의 동료들이었네. 십전무랑....... 그들이 연수공 격하여 그를 죽였네." "......!" "그 이유는... 질투심 때문이었지. 단지 질투심만으로 그를 죽였 다네." 뇌천의는 차갑게 말했다. "후회하고 있는 것이오?" "후회? 어디 그뿐이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을 걸세. 우리들 은... 누군가의 음모에 빠졌지. 음모에 말이네......." 뇌천의는 의혹이 짙어졌다. 그러나 엽무웅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고 백일하에 진상이 드러날 날이 있을 걸세." 뇌천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엽무웅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의 두 아이는 검혜(劍慧)와 검영(劍英)이네. 그 아이들은 지 금 청원부의 대강루(大江樓)란 곳에 묵고 있네." 뇌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아이들을 부탁하네. 그리고......." 엽무웅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일 천궁산(天弓山) 낙일애(落日涯)로 가 무치노인(無痴老人)이 란 분을 만나보게." 뇌천의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분명 엽무웅을 죽이기 위 해 왔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는 아무런 적의도 느낄 수가 없었 다. "자네가 무림사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꼭 그를 찾아보게. 그는... 당금 무림에서 유일하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현자(賢者)라네." 뇌천의는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천하 일을 모두 알고 있단 말이오?" "그렇네. 그는... 고금제일현자네. 반드시 그를 찾게... 꼭... 그럼......." "엇!" 뇌천의는 대경했다. 엽무웅이 갑자기 비수를 꺼내 자신의 심장에 푹 꽂아버린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찰나적인 일이라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일어났다. 뇌천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그가 자결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엽무웅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노부는... 스스로 죽음을 마무리짓고 싶었네.... 노부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으로...... 자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네." 엽무웅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언제고... 자네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 마침내 엽무웅은 고개를 꺾었다.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 뇌천의는 멍하니 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왠지 알 수 없는 감정 이 가슴을 헤집고 있었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었다. 그는 쓰게 웃었다. "후훗! 뇌천의, 감상에 빠지다니....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감정 은 너에게 있어 사치에 불과할 따름이다." 잠시 후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쏴......아......! 새벽의 한풍이 옷자락을 스쳤다. 등골을 오싹하게 할 만큼 차가운 한기였다. 그것은 단지 한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주인을 잃 은 화원에 황량한 기운이 감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뇌천의는 하늘을 바라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후훗.... 기다려다오. 대살종을 기만한 대가를 곧 돌려줄 테니." 스슷!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밤바람을 타고 그의 신형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 밤, 왠지 복잡한 음모가 얽힌 듯한 밤이었다. ■ 무림백서 1권 제6장 드러난 진실(眞實) ━━━━━━━━━━━━━━━━━━━━━━━━━━━━━━━━━━━ 금화태세 엽무웅의 죽음은 무림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 금화태세를 죽인 것은 대살종(大殺宗)이다. 그 소식은 삽시에 전 무림에 퍼져나갔다. 금화태세의 죽음은 곧 강북무림에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나 다름 없는 사태였다. 금화태세는 강북무림의 태두적(泰斗的) 존재였던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강북무림은 격동에 휩싸이고 말았다. - 대살종을 척살(擲殺)하라! 강북무림인들은 하나같이 노성을 발했다. 그들은 타오르는 복수심 에 모이는 곳마다 이렇게 떠들어댔다. 그들은 무림첩을 띄워 이번 기회에 대살종을 무림의 공적으로 몰아 무림에서 영원히 지워버려 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찌 세상 일이 뜻대로만 되겠는가? "후후훗! 소문은 빠르기도 하군. 일석이조(一石二鳥)라.... 돌 하 나로 두 마리 새를 잡겠단 말이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금화태세 를 제거한 다음 다시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로 날 처치한 다?" 뇌천의는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채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금화태세의 죽음은 전 강호에 퍼졌다. 놀랍게도 그는 엽무웅이 죽은 이후 지금까지 금화보가 있는 청원 (淸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온다. 틀림없이. 놈들은 이 미끼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 나 그물이라고 다 반드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청원부에 있는 객점 대강루(大江樓)였다. 대 강루의 후원에 칩거하면서 그는 두 소년소녀를 은밀히 지켜보고 있었다. 후원의 별채에 기거하고 있는 남매였다. 그들은 바로 금화태세 엽 무웅의 자식들이었다. 엽검혜(葉劍慧)와 엽검영(葉劍英). 각각 십육 세, 십사 세의 귀여운 남매였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부친인 금화태세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전에 엽무웅으로부터 암시를 받은 듯 대강루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부친의 시신마저 돌볼 수가 없었다. 두 남매의 풀죽은 모습은 너무나 애처로웠다. 지금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들을 찾아올 사람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그것은 엽무웅이 그들에게 남긴 안배이기도 했다. 뇌천의는 줄곧 두 남매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했다. '놈들은 내가 움직이기를 바라고 있다. 일단 움직이면 수많은 강 북무림 고수들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것은 놈들의 생각대로 움직 여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후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대살종이 아니다. 이정제동(以靜制動)으로 대응해 주마.' 이정제동.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압한다. 그것은 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곧바로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으면 초조해 질 것이고, 결국 놈들이 먼저 움직이게 될 것이다. 문제는 시간 싸움이다. 놈들이 먼저 정체를 드러내게 해야 한다. 그런 연후 놈들이 금화태세를 사주한 사실을 폭로해야 한다.' 뇌천의의 생각은 빈틈이 없었다. 그는 대살종답게 매사에 차분하 고 치밀했다. '그러나 관건은 두 남매다. 저들은 날 기다리고 있다. 분명 엽무 웅이 안배해 두었을 것이다. 때문에 놈들은 이미 저 아이들 주위 에 손을 써놨을 것이다. 일주일 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분명히 냄새가 난다.' 뇌천의의 두뇌는 무섭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치 의 오차도 없는 작전이 짜여지고 있었다. '엽무웅은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 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의 상황 또한 예측하고 있었음이 틀림없 다. 그러나 놈들의 손은 그보다 빠르고 치밀하다. 또한 그의 두 자식은 그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 청원부의 객점 대강루. 며칠 사이에 대강루는 초만원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무 림인들로 인해 청원부는 혼잡해졌고 모든 객점이 그렇듯이 대강루 또한 만원이었다. 유독 엽검혜, 엽검영 남매가 묵고 있는 별채만이 한산했다. 아직 도 여분의 객방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투숙객을 받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남매와 접촉하도록 종용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너희들의 계산에는 착오가 있다.' 상황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있는 뇌천의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은 저 아이들로 하여금 순순히 날 따라오도록 유도하는 것이 첩경이다. 그것은 엽무웅의 청부였으니까.' 뇌천의는 마침내 움직였다. 그는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통해 화원 하나를 건너 불빛이 켜져 있는 별채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반짝 광채가 솟아올랐다. '오늘밤이다.' 창가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왁자지껄한 주청(酒廳). 술이 오른 주객들은 타인의 이목이 있건 없건 마구 떠들어대기 마 련이다. 특히 무림인이라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그들은 흥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들의 입에서는 금화태세 엽무웅의 죽음이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지금 주청의 한가운데에는 강북무림에서 제법 내로라 하는 인물들 이 한 명의 중년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일신에 화복(華服)을 입었는데 나이는 대략 사순에서 오순 사이로 보였으며 살집이 좋고 배가 약간 나와 있었다. 그는 열손 가락에 금지환(金指環)을 차고 있었으며 수중에는 역시 금으로 된 주판을 쥐고 있었다. 금반십지환(金盤十指環) 위무해(韋武海). 삼척동자라도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강남무림의 패주인 천상보(天商堡)의 제이인자였다. 그는 탁 월한 지혜로 천상보의 지낭(智囊)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지금 그는 금화태세의 죽음과 관련하여 특별히 이곳에 모습을 보 인 것이다. 강북무림인들은 그의 출현에 감격해 하고 있었다. 금반십지환 위무해의 실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의 옆으로 뇌천 의가 지나갔던 것이다. 뇌천의는 그의 곁을 스쳐가며 전음을 보냈 다. (오늘밤 삼경에 계산을 끝냅시다. 서북(西北) 십리밖의 관제묘에 서.) 위무해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눈치채 지 못했다. 따닥... 딱......! 그는 금주판을 퉁겼다. 뇌천의가 사라진 후 그는 군웅들에게 이렇 게 말했다. "두고 보시오, 조만간 놈은 걸려들 것이오." 그 말에 한 중년인이 물었다. "그는 볼일이 끝났는데 다시 나타난단 말입니까?" "허허, 놈은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오. 왜냐면 뿌리까지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려 들게 뻔하기 때문이오." "뭣이? 그럼 별채에 있는 남매마저 해치려 들 거란 말씀이시오?" "허허, 염려 놓으시오. 놈이 비록 치밀한 작자라 하지만 이번만은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머지 않아 놈의 최후를 보게 될 것이오. 하하하하......!" 위무해는 대소를 발하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 군웅들은 모두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복수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대강루에 밤이 깊었다. 별채는 야색이 짙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스슷......! 별채를 향해 한 가닥 연기와도 같은 인영이 접근했다. "......!"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담장 밑이나 화원의 나 무 뒤, 처마 아래 도사린 눈동자는 인영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 다. 그 눈빛은 한결같이 살기에 차 있었다. '대살종... 드디어 걸려 들었다!' 그들은 모두 주먹에 땀을 쥐며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스스슷......! 그것도 모르고 인영은 담장을 뛰어넘어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별 채의 한 방으로 접근해 갔다. 방 안에는 두 남매가 궁등 아래 마주앉아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큰 눈동자를 지닌 소녀는 엽검혜였으며 아직 치기 가 가시지 않은 귀여운 얼굴의 소년은 엽검영이었다. 엽검혜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대살종 탓이지만 그 이면에는 흑막이 있어." 엽검영은 볼이 퉁퉁 부은 채 작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어쨌든 검영은 대살종을 죽일 테야! 그는 아버님을 죽인 원수 야!" "영아(英兒), 속단해선 안돼, 아버님께서 당부하신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엽검영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영아는 승복할 수 없어. 대살종은 영아의 불공대천지수 야!" 엽검혜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동생을 달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벌써 며칠째 검영은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아버님은 당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신 거야. 백도무림을 위 해......." "흥! 왜 아버님이 희생되셔야 하지? 왜? 무엇 때문에?" "영아, 아버님께서는 큰 뜻이 있으셨던 거야. 우리는 아버님의 뜻 대로 대살종을 만나야 해. 그는 틀림없이 아버님의 뜻을 알고 있 을 거야." "흥! 두고 봐. 영아는 그 자를 죽이고 말 테니까." 검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 었다. 부친의 죽음은 아직 나이 어린 소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 격을 던진 것이다. 사실 그녀 자신도 부친의 뜻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부친의 뜻을 어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때였다. 우지끈! 돌연 창문이 박살나며 한 인영이 뛰어들었다. "앗......!" 갑작스런 괴인의 출현에 어린 남매는 겁에 질려 서로를 부둥켜안 았다. "소주......!" 창문을 부수고 방안에 뛰어든 인영은 울컥 피를 토해내며 쓰러졌 다. "앗! 하숙부(河叔父)!" "총관!" 남매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고는 창황중에도 반색을 금치 못했다. 뜻밖에도 그는 죽은 줄 알았던 금화보의 총관 하태룡(河太龍)이었 던 것이다. 금검우사(金劍羽士) 하태룡. 그는 엽무웅의 수족과 같은 인물로 성격이 곧고 의협심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금화태세가 죽던 날 함께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숙부... 죽지 않았군요?" 엽검혜는 그를 부축하며 눈물을 뿌렸다. 그녀는 감격을 금치 못하 고 있었다. 그러나 하태룡은 앞섶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아가씨... 소인은... 이미 틀렸습니다......." "숙부, 흐흐흑......!" 엽검혜는 오열을 터뜨렸다. 그러나 엽검영은 달랐다. 그는 나이가 어렸지만 사내였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총관, 말해줘요. 봤죠! 아버님을 누가 죽였죠?" 그의 음성은 날카로웠다. 하태룡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보주님께서는... 자결하셨습니다." "자결을......!" "그럴... 리가......?" 남매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들은 부친이 대살종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직접 본 것은 아니었으나 소문이 그러했다. 그런데 하태룡의 말은 너무도 뜻밖이 아닌가? "사... 사실입니다. 소인이 두 눈으로 확인한 사실입니다." "대살종이 죽이지 않았다고요?" 엽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실상... 그는 누군가의 청 부에 응했을 뿐... 보주님을 살해한 것은......" 하태룡은 다시 울컥 피를 토해냈다. 그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엽검혜는 얼른 그의 명문혈을 손바닥으로 쳤다. "숙부! 정신차리세요. 그가 누군가요? 네, 숙부?" "그 자는... 그 자는......" 하태룡은 컥컥거리며 곧 숨이 끊어질 듯했다. 이때였다. 휙! 휙! 휙......! 방안에 인영들이 뛰어 들었다. 그들은 별채 주위를 감시하고 있던 북무림도의 인물이었다. 갑작스런 그들의 출현에 남매는 당황했다. "하대협! 정신차리고 말해 주시오! 청부자가 대체 누구란 말이 오?" 백발의 성성한 노검사(老劍士)가 하태룡의 명문혈에 손바닥을 갖 다 붙이며 말했다. "아! 철백부(鐵伯父)님......!" 엽검혜는 그를 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청명쾌검(淸明快劍) 철우진(鐵友鎭). 그는 북무림의 명숙이었고, 또한 엽무웅의 지기이기도 했다. 철우진은 침중하게 말했다. "질녀, 시간이 없네, 우선......." 그는 진기를 주입했다. "으음......." 하태룡이 꺼져가는 의식을 조금 회복했다.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 더니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무서운... 음모요.... 여러분은 반드시 흑막을 파헤쳐... 본보의 원한을 갚아주기 바라......." "하대협! 어서 말하시오! 그가 누구요?" "관제묘... 삼경... 그곳에 가면... 그곳에... 원흉의 정체를... 끄윽!" 하태룡은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 군웅들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한편 이때, 군웅들 가운데 슬며시 자리를 뜨는 인물이 있었다. 그 는 주청에서 금반십지환 위무해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던 중년인 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리를 뜨는 것을 유의해서 보는 자는 아무도 없었 다. "갑시다! 관제묘로! 그곳에 가면 진상을 파악할 것 같소!" 청명쾌검 철우진이 벌떡 몸을 일으키자 군웅들은 모두 흥분을 감 추지 못했다. 이때 엽씨남매가 나섰다. "우리도 갈래요!" 철우진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어차피 너희들도 강호에 몸담은 운명이니... 가자!" 휙! 휙! 군웅들은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그들은 모두 밖으로 사 라졌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지자 죽은 줄 알았던 하태룡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후후! 이제부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군."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뇌천의의 얼굴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휘휙! 관제묘를 향해 달리던 중년인은 다급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태룡이 살아있었을 줄이야! 한데 놈이 어떻게 비밀을 알아냈을 까? 어쨌든 총관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바로 그때였다.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무엇을 알린단 말인가?" "헉! 누구냐?" 그는 홱 돌아서는 순간 소매를 번개같이 뿌렸다. 파파파팟-! 은성사침이 소나기같이 뿌려졌다. "후후! 겨우 그 정도냐?" 조소가 들렸다. "헉!" 중년인은 눈을 부릅떴다. 바로 눈앞에 한 명의 흑삼인이 나타났다. 그가 슬쩍 손을 젓자 자 신이 발출했던 은성사침이 가공할 속도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 가? "으아아악-!"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이 고슴도치가 되어 썩은 짚단처 럼 나뒹굴었다. "후후......." 흑삼인은 얼굴을 슥 문질렀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방금 전의 중 년인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다름 아닌 뇌천의였다. 그는 다시 관제묘를 향해 달리기 시 작했다. "서랏!" 관제묘에서 일 마장쯤 떨어진 곳. 달리던 뇌천의의 앞에 호통과 함께 두 인영이 앞을 가로막았다. "날세, 나야." 뇌천의는 히죽 웃었다. 두 인영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뇌천의를 확인하더니 경계를 풀었다. "으응, 천형이었군. 헌데 무슨 일이오? 대강루를 떠나지 말라는 명이었는데." 뇌천의는 싱긋 웃었다. "볼일이 있어 왔소." "무슨 볼일?" "후후, 이것이오." "......?" 두 장한은 그가 주먹을 앞으로 내밀자 어리둥절해 하며 얼굴을 가 까이했다. "왁! 크웩!" 뇌천의의 주먹이 활짝 펴짐과 동시에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벌렁 쓰러졌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모래알이 수없이 박혀있었다. 뇌천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들을 일별 하더니 발끝으로 사혈 (死穴)을 가볍게 걷어찼다. "......." 두 장한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황천으로 직행했다. 뇌천의는 유유히 관제묘를 향해 다가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 십 명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때마다 그는 손쉽게 그들을 처 리하곤 했다. 마침내 그는 관제묘 입구에 다다랐다. 입구에는 두 명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서라!" 중년인들은 바짝 긴장하여 각각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뇌천의는 본래 얼굴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는 중년인들을 향해 다 가가며 히죽 웃었다. "내가 누구냐고?" "그렇다! 누구이기에 이곳에......." 뇌천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지금 시(時)가 어떻게 되었느냐?" 중년인들은 안색이 홱 변했다. "대살종......!"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부르짖었다. 뇌천의는 빙긋 웃었다. "긴장할 것 없다. 단지 거래하러 왔을 뿐이니까. 너희들의 상관에 게 계산을 마치러 왔다." 두 중년인은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한... 한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막지 않았단 말이냐?" 뇌천의는 눈을 멀뚱거렸다. "글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때 관제묘 안으로부터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를 들여보내라!" "예... 옛!" 두 중년인은 급히 길을 비켜 주었다. 뇌천의는 히죽 웃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지나치며 그는 그들의 어 깨를 툭툭 쳤다. "......!" 두 중년인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렸 다. 어느새 사혈을 짚인 것이다. 삼경(三更). 사위는 어두웠다. 이지러진 편월(片月)만이 스산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휘휙휙! 관제묘 주위로 수십 개의 인영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바로 금화보 에 속한 강북무림의 군웅들이었다. 그 중에는 엽검혜, 엽검영 두 남매의 모습도 보였다. 엽검영은 작은 주먹을 꼬옥 움켜쥐고 있었다. 초롱한 눈망울은 어 둠 속에서도 원독을 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엇! 시체가......." "여기도......!" 갈대밭 주위에는 수십 구의 시신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바로 뇌천 의가 처치한 천상보의 수하들이었다. 청명쾌검 철우진이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으음, 이들은 천상보의 고수들이오!" "......!"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철우진은 의혹에 찬 표정으로 관제 묘로 접근해 갔다. 관제묘 앞. 두 명의 고수가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이때였다. 관제묘 안으로부터 누군가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후훗! 금반십지환 위무해, 청부는 약속대로 이행했소. 이제 계 산을 치룰 차례요." "......!" 철우진을 포함한 군웅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잠시 간격을 두고 관제묘 안으로부터 위무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후....... 물론이오, 과연 대살종다운 솜씨였소. 귀하의 솜씨 에 만족하오." "그럼 약속한 청부대금을 받아야겠소. 준비는 되었겠지?" 그 말에 군웅들은 충격을 받았다. 실로 꿈에도 생각지 못한 사실 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금화보주를 살해하라는 청부가 천상보의 주문이었단 말 인가? 이... 이럴 수가?' 한편, 엽씨 남매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전신을 떨고 있었다. 이때 관제묘 안으로부터 위무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후, 물론이오. 대금은 준비했소. 하지만 그 전에 알려줄 게 있 소." "무엇이오?" "잡초는 뿌리째 뽑지 않으면 이듬해 봄에 되살아나는 법, 대강루 에 엽무웅의 자식들이 있소." 예의 음산한 음성이 반문했다. "그럼 그 아이들마저 죽여달란 말이오?" "후후, 죽이란 말은 하지 않았소. 다만 그 아이들이 화근임을 일 깨워줄 뿐이오." "후후, 누가 당신에게 그런 걱정까지 하라고 했소? 나 대살종은 스스로의 일은 알아서 하는 사람이오." "좋소! 어쨌든 우리의 계산은 끝난 셈이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관제묘로부터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나왔다. 그들은 과 연 뇌천의와 금반십지환 위무해였다. 뇌천의는 밖으로 나오자 주위를 둘러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위무해, 오늘밤은 유난히 풍취가 있는 것 같소?" "......?" 위무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뇌천의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짜르륵, 주판알 을 퉁기며 말했다. "그렇소. 나도 거래가 무사히 끝나 홀가분하오." 이때였다. "이런 천인공노할 놈! 무엇 때문에 엽보주님을 사주했단 말이냐!" "강북무림을 통째로 삼킬 셈이냐?" "저 자를 쳐라!" 갑자기 사방에서 고함과 욕설이 터지며 수십 명의 인영이 속속 모 습을 드러내 두 사람을 포위했다. 위무해는 대경실색했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더듬거렸다. "아니 여... 여러분....... 이게 무슨 짓이오?" 청명쾌검 철우진은 대갈했다. "위무해! 이 늙은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 천상보주 사마대협이 야말로 천하의 군자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양의 탈을 쓴 늑대 였구나!" 위무해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철노형, 무슨 오해를......" 그는 뒷걸음질치며 손을 내저었다. 이때 뇌천의가 수중의 은표를 흔들며 괴소를 흘렸다. "후후! 위무해, 그럼 천상금표(天商金 )는 잘 쓰겠소." 휙! 그는 말과 함께 신형을 날렸다. '아차!' 위무해는 비로소 자신이 덫에 걸렸음을 알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 았다. '일이 잘못되었구나, 더구나 매복한 수하들마저 보이지 않으 니.......' 그는 문옆에 두 명의 수하가 죽어있는 것을 보고 목전에 위기가 다가온 것을 깨달았다. '틀렸다. 그렇다면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멀리서 뇌천의의 음성이 전해져 왔 다. "후후후훗! 여러분은 사마보주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 오. 그가 엽무웅을 청부한 것은 오래 전부터 강북무림을 통합하려 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오." "미... 미친 놈!" 위무해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깨달았다. 뇌천 의에게 속은 것이었다. "죽여라!" "위선자를 쳐라!" 분노에 찬 군웅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포위망을 압축해 왔다. 그들 은 대부분 강북무림에 속한 군웅들이었다. 평소 강남무림과는 은 연중 대치하던 터라 천상보가 엽무웅을 사주한데 대해 참을 수 없 는 분노를 느낀 것이었다. 위무해는 다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러분! 저 자의 말에 속지 마시오. 터무니 없는 소리요. 여 기... 그 증거가 있소이다." "......!" 군웅들은 모두 주춤했다. 기실 그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음 모를 알긴 했으나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대살종보다는 위무해를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군웅들이 손을 멈추고 의아해 하는 사 이 철우진이 호통쳤다. "여러분, 조심하시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군웅들은 위무해의 간교함에 넘어간 것이다. "으하하핫......!" 위무해의 웃음소리가 들린 순간. 짜르르르륵! 위무해는 금빛 주판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러자 수백 개의 주판 알이 군웅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그의 성명절기가 발 휘된 것이었다. "으악!" 워낙 가까운 거리였다. 위무해의 근처에 있던 군웅들의 이마와 목에 금주판 알이 어김없 이 박혀버렸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벌렁벌렁 쓰러졌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사태에 군웅들은 우왕좌왕했다. 위무해는 기회 를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진세가 흩어진 사이에 재빨리 신 형을 날렸다. "앗! 달아난다!" "서라!" 쐐애액! 군웅들의 호통과 함께 검광이 번쩍 일어났다. 제일 먼저 공격을 가한 것은 청명쾌검 철우진이었다. 그는 신검합 일(身劍合一)하여 달아나는 위무해를 공격했다. 뒤이어 십여 명의 군웅들이 공격에 가세했다. 그러나 금반십지환 위무해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강남무 림의 패주인 천상보의 제이인자였다.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 다. "으하하하핫......!" 그는 유룡처럼 허공에서 군웅들의 공격을 피하며 십지를 뻗었다. 피피피핑! 귀청을 찢는 파공성과 함께 십지금환(十指金環)이 날아갔다. "으악!" 군웅들의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만년강모로 만들어진 십지금환은 군웅들의 도검을 부러뜨리며 그대로 목을 관통했다. 그 사이 위무해는 유유히 신형을 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십장 밖으로 달아났다. "크으으......! 분하다!" 군웅들은 발을 굴렀다. 위무해는 다시 한번 신형을 날리더니 금세 숲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청명쾌검 철무진은 뒤늦게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장검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십지금환 때문이었다. 그는 눈썹을 경련하며 뇌까렸다. "두고 보라! 이로써 강남과 강북무림의 우의는 깨졌다." "크으! 물론입니다. 결코 놈들을 좌시할 수 없소이다!" "옳소! 강남무림 놈들이 먼저 건드린 이상 우리도 가만 있을 수는 없소이다!" 군웅들은 주먹을 움켜쥐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평화를 이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기는 더욱 어려운 법이다. 이제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무림의 평화는 더 이상 지켜지 기가 어렵게 된 셈이다. 관도(官道). 추색(秋色)이 짙어가는 관도는 황량했다. 두두두두! 관도를 한 대의 마차가 쏜살같이 질주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마차였으며 네 마리의 털빛이 흰 설총마가 끌 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마부석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마차 안에는 세 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 엽검혜, 엽검영 남매가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들의 맞은편에는 뇌천의가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엽 씨 남매는 풀이 죽어 있었다. 졸지에 천애고아가 된 탓도 있었으나 두 사람은 부친을 사주한 자 가 강남무림의 패주인 천상보라는 충격적인 사실에 넋을 잃은 상 태였다. 뇌천의는 남매를 바라보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너희들을 맡아 달라는 청부를 받았다." 엽검영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눈에서는 원독의 광망이 흘러나 오고 있었다. "흥! 두고 봐. 당신을 꼭 내 손으로 죽이고 말 테니." 소년의 음성에는 증오가 담겨 있었다. 뇌천의는 괴소를 흘렸다. "후후! 네 원수는 내가 아니라 천상보주 사마신무(司馬神霧) 임을 잊었느냐?" 엽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흥! 어쨌든 너도 원수다!" 뇌천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눈앞의 소년이 귀엽게만 느 껴진 것이다. "후후, 꼬마야. 기백이 좋구나. 안심해라. 얼마든지 네 도전을 받 아줄 테니. 그런데 그럴 기회가 올 수 있을까?" 엽검영은 자신이 무시당한 듯한 기분에 이를 악물고 몸을 떨었다. 한편 엽검혜는 달랐다. 그녀는 몰래 뇌천의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아, 저 분이 대살종이라니.......' 기이한 일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는 뇌천의에게 마음이 끌 렸다. 비록 겉보기에는 냉혹한 인물이었으나 보면 볼수록 그의 내 면에 고독한 그림자가 엿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뇌천의에게 적의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니, 도리어 친 근감마저 느꼈다. '아...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번민에 잠겼다. 이때 뇌천의의 음성이 들려왔다. "엽무웅은 너희들이 무림계에 몸을 담지 않기를 바랬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엽검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달라졌다." "......?" 남매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나는 청부를 받았다. 그것은 너희 둘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좋든 싫든 나는 청부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 "흥! 그래서?" 엽검영은 코웃음치며 반문했다. "후후, 나는 너희 둘을 제이의 살종(殺宗)으로 키울 생각이다." 남매는 안색이 변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엽검영은 의혹에 차 반문했다. "당신...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물론이다." 엽검영은 입술을 악물었다. "만일... 내가 커서 당신을 죽인다면?" 뇌천의는 빙긋이 웃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웃음이었다. 평소 얼 음처럼 냉랭하기만 하던 그가 이런 미소를 짓는 것은 극히 이례적 인 일이었다. 그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한 번 본다면 영원히 잊지 못할 정도로 인상적인 미소였다. '아아!' 엽검혜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두 볼이 확확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홀린 듯이 뇌천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뇌천의의 음성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무림의 율법은 단 하나다. 적자생존이지. 강해야 산다. 편법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따라서 너희들이 강해진다면 당연히 나는 도 태될 것이다. 상대가 너희들이 아닐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슨 뜻 인지 알겠느냐?" "......!" 엽검영의 작은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아직 치기도 가시지 않은 소년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이 지펴졌다. 뇌천의는 품속에서 엽전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살(殺)> 엽전 표면에는 그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부터는 너희들 스스로 가야 한다." 엽검혜는 불안한 듯 물었다. "어디로 가란 말인가요?" "살종의 고향으로." "살종의... 고향?" "검천령에 가면 너희들을 맞이할 자가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걸 보이면 된다." 뇌천의는 엽전을 던졌다. 천천히 날아간 엽전은 엽검혜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마차 안에 미풍이 일었다. 엽검혜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그의 모습 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차 밖에서 뇌천의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배는 미리 해두었다. 후훗! 다시 만났을 때 너희들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기대하마!" "......!" 엽검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뇌천의가 앉아있던 의 자를 바라보며 가슴이 텅 비는 듯한 허탈감을 느꼈다. 그것은 엽 검영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원한이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에 게 끌린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아! 냉정한 듯하면서도 뜨거운 심장을 가지신 분.......' 엽검혜는 엽전을 꼭 움켜쥔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속 눈썹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한편 엽검영은 작은 주먹을 부숴져라 움켜쥔 채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고봐! 언젠가 당신의 그 오만한 콧대를 꺾고 말 테니.......' 두두두두......! 마차는 황진을 일으키며 관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 무림백서 1권 제7장 화중지화(花中之花) ━━━━━━━━━━━━━━━━━━━━━━━━━━━━━━━━━━━ 백화군방원(百花群芳院). 색도(色都)로 유명한 항주(杭州)에서 이 이름을 모른다면 항주인 이 아닐 뿐더러 풍류을 알지 못하는 인간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백화군방원은 바로 항주에서도 손꼽히는 미녀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 기원(妓院)이었다. 일백군방화(一百群芳花). 모두 일백 명에 달하는 기녀들을 말한다. 그녀들은 옛 전설에 나오는 월궁(月宮)의 항아나 서시(西施) 같은 미녀를 능가할 정도로 천하절색이었다. 일백군방화는 미모 뿐 아니라 가무예기(歌舞藝技)와 학문에도 능 해 풍류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백화군방원에 가보는 것이 평생 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군방원은 보통 기원과는 달랐다. 더구나 일백군방화와 풍류를 나누려면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그녀들은 황금이나 권세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내거는 조건은 의외로 황금이 아니었다.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기예(技藝)를 내놓는 것을 대가로 그녀들 은 술과 풍류를 팔았다. 그동안 숱한 왕후장상과 명문귀족들이 황 금을 가득 실은 수레를 몰고 찾아왔으나 그들은 여지없이 문전박 대 당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백화군방원은 아무나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주로 강호의 기인들이 찾게 되었다. "호호호호......!" "하하하하하!" 호색가(好色家)로 소문난 강호인들은 항주에 오면 어김없이 군방 원을 찾았다. 그들은 부자도 아니요, 세도가도 아니지만 군방원의 환영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지닌 절기(絶技)를 대가로 내놓기만 하면 황홀한 풍류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흘을 채 견디 지 못하고 군방원에서 쫓겨나고 만다. 더 이상 치를 만한 절기가 없을 경우에. 백화군방원은 그런 곳이었다. 소문이 중원 전역을 돌게 되자 뜻있는 인물들은 개탄을 금치 못했 다. - 쯧쯧! 이러다간 내로라 하는 영걸들이 모두 계집의 치마폭 아래 노예가 될 것이오. 더구나 그 많은 절기들이 노출된다면 장차 어 떤 사태가 벌어질지 두렵기만 하오. 황혼 무렵. 흑삼청년이 노을 빛을 받으며 항주에 들어섰다. 그는 곧장 서문통(西門通)으로 들어섰다. 바로 백화군방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놀라운 변신이다. 과연 누가 군방원이 사대살종(四大殺宗)의 하 나인 정인전(情人箭)이라는 것을 알겠는가?' 흑삼청년은 다름 아닌 뇌천의였다. 그는 뿔뿔이 흩어졌던 십자혈각의 수하들을 대부분 복귀시켰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대살종을 통합시킬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다. 그가 항주에 온 것은 첫번째 목표로 정인전을 선택했기 때문이었 다. 소위 살종이라 불리는 사대조직에 속한 고수들은 전문살수들이다. 그들은 타고난 본능적인 감각과 탁월한 육감을 지니고 있었다. 따 라서 그들을 통합한다면 강호상에 폭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 '후후, 엽씨 남매는 십자혈비동(十字血秘洞)에 입동시켜 살종(殺 宗) 훈련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일 년 후면 또 하나의 비밀병기가 될 것이다.' 뇌천의는 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 그는 백화군방원의 화려한 문루 앞에 당 도했다. 그곳은 서문통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의 중심부에 있었다. "......." 뇌천의는 문루를 바라보며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야심만만한 여인이야. 일개 여살종((女殺宗)이 감히 대업의 야망을 품다니.......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대의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뇌천의는 문루로 다가갔다. 문루 주변에는 무림인으로 보이는 십여 명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배회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군방원에 들어갔다가 며칠만에 밑천이 떨어져 쫓겨 난 위인이거나 군방원이 원하는 수준의 절기를 제시하지 못해 아 예 들어가 보지도 못한 위인들이었다. 한낱 색에 눈이 먼 그들의 모습에서는 비굴함만이 보이고 있었다. 뇌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못난 작자들.' 그는 성큼성큼 문루로 걸어 올라갔다. 군방원의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개방의 원칙을 지키고 있으나 실제로는 철저히 출입 을 통제하고 있었다. 문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일장 높이 석비를 발견했다. 석비 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만근의 힘을 들 수 있는 자만이 들 수 있다.> "좋은 얘기야. 힘이 있어야 오래도록 풍류를 즐길 수 있을 테니." 뇌천의는 히죽 웃으며 발끝으로 석비를 툭 찼다. 만근 무게의 석비가 마치 공깃돌인 양 붕 떠올랐다. 그는 발등에 석비를 올려놓은 채 중얼거렸다. "이런, 위치가 좋지 않군. 그래 저곳이 좋겠군."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석비를 툭 찼다. 휘익! 석비는 오장 가량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마치 깃털인 양 가볍게 위치를 이동시킨 것이었다. 뇌천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청석(靑石)이 가지런히 깔려있 는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잠시 후 그는 전청으로 보이는 대전 앞에 당도했다. 그동안 아무 도 제지하는 자가 없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전 안으로 들어 섰다. 대전은 텅 비어 있었는데 중앙에 팔선탁자가 놓여 있었다. "흠, 이건 또 뭐지?" 맞은편 벽에 족자가 걸려 있었다. 그 족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독주(毒酒) 일배를 권하오. 영웅은 독주를 사양치 않고 미녀는 영웅을 사모하나니.......> 팔선탁 위에는 술잔이 놓여 있었다. 뇌천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 렸다. "꽤나 수속이 복잡하군." 기실 백화군방원에는 연일 풍류귀들이 몰려오므로 그들을 걸러내 는 작업이 필요했다. 독주를 마실 수 있다면 일차 관문에 합격되 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침 잘됐군. 목마르던 참이었는데." 뇌천의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흠, 가주로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한 방울이면 창자를 끊는 독주였으나 아무 타격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대전을 통과했다. 대전 밖으로는 회랑이 이어졌는데 회랑을 지나가자 인공 연못이 있는 화원이 나타났다. 인공 연못은 방원 백여 장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연못 한가운 데 규모가 상당히 큰 수상대전(水上大殿)이 축조되어 있었다. <풍류를 아는 자라면 기꺼이 월향전(月香殿)에 초대하리다. 다만 혈린어(血鱗魚)는 풍류를 모르는지라 부디 조심하소서.> 연못가에는 그 같은 경고 팻말이 서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연못에는 대전으로 통하는 길이 없었다. 말하자면 대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연못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후후! 친절한 안내문이군.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뇌천의의 신형이 떠올랐다. 그는 연못의 수면을 스쳐 십장 가량 날다가 한 장의 연꽃잎 위에 내려섰다. 그때였다. 파파팟! 갑자기 수중으로부터 붉은 빛이 쏘아왔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크 기의 물고기들이었다. 전신에 붉은 비늘이 덮여있는 물고기! 그러나 무시했다가는 참사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것은 혈린어라 불리는 것으로 남방의 오지에서만 사는 식인괴어(食人怪魚)인 것 이다. 집채만한 코끼리라도 일단 혈린어떼에 걸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뼈만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혈린어는 뇌천의의 몸에 달라붙었다. 놈들은 날카로운 이빨로 뇌 천의의 몸을 물어뜯었다. 그 순간 핏방울이 자욱히 일어났다. 놀 랍게도 혈린어는 무형의 반탄력에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며 퉁겨져 나간 것이다. 스스! 뇌천의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수면을 스치며 날아갔다. 그가 날 아갈 때마다 수백수천 마리의 혈린어가 달라붙었으나 모두 으스러 지며 떨어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연못물은 시뻘겋게 물들었다. 불과 서너 차례만에 뇌천의는 월향전에 내려섰다. 그때였다. "공자님을 환영합니다." "흠."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듯한 옥음이 들려왔다. 뇌천의는 고개를 돌렸다. 대전 안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 으며 네 개의 기둥에는 보옥이 박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천장에 는 궁등이 걸려 있었는데 아늑한 빛을 밝혀주고 있었다. 지금 그곳에서는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실로 괴이한 연회 였다. "볼만한 풍경이군." 뇌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대전 안에는 여러 인물이 있었다. 늙은이나 중년인도 있었고, 심 지어는 중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각각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들을 낀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띠잉... 띵....... 삘리리......릴리리....... 한쪽에서는 악사들이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뇌천의는 방금 전 말을 건넨 여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다 흠칫했다. "......!" 대전 한가운데에서 기이한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원형의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반라의 두 미녀가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두 미녀는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망사의만을 걸친 채 감미로 운 음율에 맞추어 흐느적거리며 춤추고 있었다. 말이 춤이지 그것은 색정을 유발시키는 도발적인 동작이었다. 두 미녀의 춤동작은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는 남녀의 행위를 묘사하고 있었다. 젖가슴을 흔들며, 서로의 은밀한 부위를 접촉시 키며 흥분을 유도하는 춤이었다. '......!' 뇌천의도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두 미녀의 색기에 찬 춤에 절로 마음이 움직였다. 연회에 참석한 남자들은 한결같이 눈이 충혈된 채 그 광경을 바라 보고 있었다. 아니, 관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 그들의 행위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어떤 자는 아예 무릎 위에 기녀를 올려놓은 채 부지런히 손을 움 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손은 기녀의 젖가슴을 주무르거나 치맛속 으로 서슴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흐응!" "아이... 으응." 기녀들은 온몸을 뒤틀어대며 자극적인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뇌천의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무대 좌측에는 커다란 대형 욕조가 있었다. 욕조에는 욕수 대신 질퍽한 흙탕물이 고여 있었다. 그런데 그 속에 역시 두 명의 미녀가 엉켜있는 것이 아닌가? 놀랍 게도 그녀들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는 알몸이었다. 두 개의 나신이 흙탕으로 범벅된 채 씨름을 하듯 엉긴 채 엎치락뒤치락하 고 있었다. 비록 온몸에 진흙이 달라붙어 있었으나 거대한 젖가슴과 둔부를 흔들어대며 씨름하듯 싸우고 있는 광경은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뇌천의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수상대전 안의 풍경은 상상을 절하고 있었다. 그는 혀를 차며 중 얼거렸다. "쯧쯧, 이곳이야말로 영웅의 무덤이로군." 그때였다. 갑자기 등뒤에 뭉클한 감촉과 함께 간드러지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호호! 무덤이 아니라 지상낙원이지요, 공자님." 뇌천의는 빙글 돌아섰다.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을 가진 소녀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왼쪽 뺨에 좁쌀만한 홍점이 찍혀 있는 미소녀였다. 소녀는 역시 속살이 고스란히 비쳐보이는 망사의만 입고 있었다. 뇌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뭐하는 곳이지?" 미소녀는 생긋 웃었다. 그러자 양뺨에 보조개가 피어났다. "손님에 대한 환영회랍니다. 물론 공자를 포함하여 관문을 통과한 분들에 대한 예우랍니다." 뇌천의는 짐짓 탄성을 발했다. "호, 그럼 저 계집들이 일백군방화들이겠군?" 미소녀는 고래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에요. 저희들은 시녀들일 뿐이랍니다." "......!" 뇌천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녀에 불과하다고? 그렇다면 일백군방화는 대체 어느 정도기 에?' "호호! 공자님도 즐기세요." 미소녀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뇌천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는군." "어머, 왜요?" "후후! 시녀들을 상대하기 위해 온 게 아니다. 내가 여기 온 건 화중지화(花中之花)를 만나기 위함이다." 미소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화후(花后)님을요?" "물론." 미소녀는 비웃듯이 말했다. "호호! 잘못 아셨어요. 화후님은 절대로 접대를 하지 않아요." "그건 누가 세운 원칙이지?" "그야 화후님께서......." 뇌천의는 코웃음쳤다. "난 내 원칙이 있다. 여기 온 이상 화후를 만나야겠다." 미소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호홋! 과연 그럴만한 능력이 있을까요? 이제 겨우 관문 세 개를 거치고 말예요?" 뇌천의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그의 미간에 은은한 뇌문(雷紋)이 나타났다. 미소녀는 갑자기 홀린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뇌천의의 이마에 나타난 뇌문을 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얼굴 이 달아오르며 온몸이 노곤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우선... 환영연회를 참관하셔야죠." 그녀는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후후, 그럴까?" 뇌천의는 생각을 돌렸다. 그는 성큼성큼 대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 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한 미녀의 젖가슴에 번들거리는 대머리 를 처박고 있는 중을 발견하고 그의 곁에 앉았다. '기왕 여기까지 온 이상 이것도 나쁘진 않지.' "흐응! 좋아요!" 기녀는 중의 대머리를 끌어안은 채 기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뇌천 의는 어이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말세로군. 중이라면 불도에 전념할 것이지 환란계에서 불심을 구 할 수 있단 말인가?" "헤헤헷! 어떤 작자가 이 부처님의 고행(苦行)에 관심을 두는가?" 그의 말을 들었는지 화상이 걸걸한 음성으로 말하며 고개를 들었 다. 뇌천의는 움찔했다. 그 자는 서른쯤 되어 보이는 청년화상이었는데 뜻밖에도 청수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눈빛이 호수처럼 맑아 한눈에 불심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뇌천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보살 나으리, 고행을 통해 무엇을 얻으셨소?" 화상은 뇌천의를 보는 순간 눈을 번쩍 빛냈다. "헤헤헷!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랴? 나무관세음보살! 형장도 수련하러 왔소?" 그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손이라기에는 희고도 깨끗한 손 이었다. 뇌천의는 비록 내키지 않았으나 그의 손을 잡았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번뇌가 있기 마련 아니오? 하지만 번뇌를 푸는 방법은 제각각일 것이오. 소생은 뇌천의라 하오." 화상은 히죽 웃었다. "헤헷! 마음에 드는데? 빈승은 우담(憂曇)이오." '우담!' 뇌천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담은 당대제일의 괴승(怪僧)이다. 적어도 강호인이라면 그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는 소림이 배출 한 최고의 기재로 삼 년 전만 해도 대단히 존경받는 승려였다. 그런 우담에게 얼마 전부터 광불치승(狂佛痴僧)이란 별호가 붙었 다. 그는 달마동(達磨洞)에서 면벽십년을 거쳤으며, 소림 칠십이종절 예 중에서 사십팔종을 연성한 고수였다. 명실상부한 소림사 최고 의 고수인 것이다. 더불어 그는 소림사의 차기 방장감으로 내정되 어 있었다. 십 년 전, 그는 갑자기 미쳐버렸다. 그때부터 그의 행동은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파계(破戒)를 일삼기 시작한 것이다. 술을 퍼마시고 기루에서 기녀들을 탐하지 않나, 대웅전 앞마당에 서 개고기를 먹지를 않나, 소림에 분향 온 여신도들을 희롱하지를 않나, 그의 파계 행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급기야 소림에서는 그를 파문(破門)하기에 이르렀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광불치승이란 불명예스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자를 군방원에서 만나다니.......' 뇌천의는 기이함을 금치 못했다. 백화군방원의 한 대전. 일백군방화가 뇌쇄적인 미색을 뽐내며 도열해 있었다. 그녀들은 홍황흑백청의 다섯 가지 색깔의 교의를 입고 있었다. 하나같이 절색의 가인들로 피부는 빙결같이 매끄럽고 희었고, 이 목구비는 반듯했으며 눈망울은 호수처럼 맑았다. 대전 한가운데는 뇌천의와 우담이 서 있었다. 전면에는 구슬 주렴이 쳐져 있었는데 주렴 사이로 은은히 한 여인 의 그림자가 투영되고 있었다. 주렴 안으로부터 달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뇌공자, 우담대사. 당신들은 본 화후(花后)를 원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전례 없는 일이므로 본 화후는 이번에 새로운 규칙을 정했 어요." 그녀의 음성은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 뇌천의는 물론 우담도 화후의 음성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 다. 화후의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조건을 내걸겠어요. 먼저 당신들은 본원의 일백군방화 중 십화 (十花)의 연수합격을 받아내야 해요. 만일 두 분이 모두 무사히 받아낸다면......." 화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아시다시피 본 화후는 혼자 몸이에요. 비록 영웅을 좋아하는 마 음은 변함이 없으나 두 분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 때는 두 분께서 비무(比武)를 통해 최종 승자를 가려내셔야 합니 다. 본 화후는 강자를 좋아하니까요." 뇌천의는 괴소를 흘렸다. "후훗! 성가신 절차로군." 우담은 노골적으로 탐욕을 드러내며 좌우에 도열하고 있는 일백군 방화를 둘러보았다. "헤헷! 미녀들과 마음대로 사랑놀이를 해도 좋단 말이지? 아암, 하고 말고." 화후의 잔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럼 어느 분께서 먼저 나서시겠어요?" 우담이 나섰다. "아미타불......! 빈승이 먼저 놀아보겠소이다." 뇌천의는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헤헤......." 우담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손을 뻗어 백의를 입은 군방화를 가리켰다. "빈승은 백화(白花)를 좋아하니 이 아가씨들과 놀겠소." 말이 떨어진 순간 군방십화(群芳十花)는 소리없이 움직였다. 치렁 치렁한 치맛자락 아래로 발끝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다. 열 명의 백의녀들은 물흐르듯 유연한 신법으로 우담을 에워쌌다. 화후의 잔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조심하세요, 우담대사. 그녀들은 아름답기는 하나 가시가 돋혀 있으니까요." 우담은 입을 쩍 벌렸다. "헤헤헷! 드디어 오늘 우담이 부처님의 은총을 입나 보구나." 위잉! 말할 땐 바보스러웠으나 우담의 동작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번쩍 하는 사이에 그는 옥수를 뻗었다. 그의 공격은 동시에 열 명의 군 방화를 공격권에 포함시켰다. "아! 소림불옥수(少林佛玉手)......." 화후의 탄성이 들렸다. 아닌게 아니라 감탄할만 했다. 우담의 쌍수는 허공에서 열 개로 늘어나며 십화를 향해 각각 다른 변화를 일으키며 날아갔다. 파파팍! 십화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들은 다급히 허리를 꺾으며 요대를 끌 러내 휘둘렀다. 잘록한 세류요에 휘감겨져 있는 요대를 병기로 사 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 개의 요대가 만천화우인 양 허공을 뒤덮었다. 우담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으음......." 그 가운데 여인들의 신음이 울렸다. 어지러운 요대가 걷혀지자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십화의 위치 는 처음 그대로였다. 그런데 우담은 엉뚱하게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헤벌쭉 웃으며 중얼거렸다. "헤헤......!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있겠소? 빈승은 충분히 낭자들 의 솜씨를 견식했소이다." "......?" 십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무슨 말이지?' 이때 뇌천의는 상황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순간 주렴 속으로부터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정말 멋진 무형불음지(無形佛音指)예요. 대사께서 이기셨어 요." 명백한 승부선언이었다. "어머......!" 그제서야 군방십화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들은 황급히 요대를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요대에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만 물러나거라. 소림무학은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화후의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오자 군방십화는 얼굴이 창백하게 변 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뇌천의가 나설 차례였다. 그는 주렴을 향해 손을 내밀었 다. "검을 잠시 빌려주겠소?" 그러자 주렴이 갈라지며 보광이 뻗어왔다. 뇌천의는 가볍게 보광 을 낚아챈 후 고개를 끄덕였다. "호, 이건 송대(宋代)에 유명했던 해벽(海壁)이로군." 해벽(海壁). 그것은 널리 알려진 명검이었다. 송나라 때 유명한 장인(匠人)이 었던 해야자(海野子)가 만든 것으로 쇠를 무 자르듯 하는 보검 중 의 보검으로 알려져 있었다. 뇌천의는 해벽검을 한 차례 쓰다듬은 후 턱으로 좌측의 흑의여인 들을 가리켰다. 눈처럼 흰 피부에 흑의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미모가 더욱 돋보였다. 여인들은 즉시 공격해왔다. 먼저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도인 듯했다. "하앗!" 츄리리리릿-! 그녀들은 일제히 연검(軟劍)을 발출했다. 그물처럼 빈틈없는 검경(劍勁)이 밀려들었다. 자욱한 검막이 뇌천 의를 뒤덮었다. 뇌천의는 아직 해벽검을 뽑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검경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옷자락이 바람을 안은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츠츠츳! 해벽이 움직였다. 느릿느릿, 육안으로 변화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하게 움직였다. 싸악! 놀랍게도 허공을 가득 메웠던 군방십화의 검경이 마치 종잇장 찢 어지듯 갈라졌다. "흑!" 여인들의 다급한 비명이 울렸다. "아미타불......!" 우담의 입에서 불호가 터져나왔다. 뇌천의는 히죽 웃었다. 그 순간 이마의 뇌문(雷紋)이 빛을 발했 다. 군방십화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들의 가슴에서 하체에 이르기 까지 흰 선이 그어져 있었다. 툭! 흰 선이 넓어지며 눈부시게 흰 젖가슴이 튀어 나왔다. 흑의가 좌 우로 벌어지고 있었다. 군방십화의 흑삼은 가랑이까지 정확히 아 래로 잘려져 있었다. "악!" 군방십화는 날카로운 비명을 발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 서 있다가는 여인의 은밀한 부위까지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 것 같았 기 때문이었다. "......!"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적을 깬 것은 뇌천의였다. "후후! 잘 썼소이다. 화후." 슷! 해벽검이 날아갔다. 수평으로 날아간 해벽검이 주렴을 좌우로 갈 랐다. 뇌천의와 우담의 눈이 빛을 발했다. 주렴 뒤에 숨어있던 여인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나이는 십팔구 세쯤 되었을까? 가히 십전십미(十全十美)라 할 수 있는 완벽한 미녀가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십팔구 세쯤 되었을까? 피부는 백옥 같았으며 이목구비는 조물주가 심혈을 기울인 듯 완 벽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히 극미의 화신체였다. 화후는 궁장(宮裝) 차림이었다. 그녀는 아미월 같은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놀란 눈으로 뇌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두 사람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뇌전과도 같은 느낌이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갔다.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 두 사람의 가슴을 쳤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것일까? "......!" 두 사람은 대좌(對坐)한 채 벌써 한 시진 이상을 미동도 않고 있 었다. 그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대전 한가운데 대좌하고 있는 뇌천의와 우담의 이마에는 송 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주렴은 다시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주렴 속에 화후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화후는 어디선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격돌해야 한다. 둘 중 한 명만이 화후를 차지할 수 있다. 어차피 무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다. 두 사 람 다 화후를 만나기 위해 군방원에 온 것이다. 그렇다면 승부를 가려야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극과 극의 노선을 걸어왔다. 우담은 비록 파문당한 승려였으나 과거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 에서 사십여종의 정통 불문무학을 익힌 몸이었다. 반면 뇌천의는 십전천하의 무학을 익혔다. 대전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은 곧 깨질 것이다. 어느 쪽의 정력(定力)이 강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될 것이다. 시간이 흘러갔다. 하루, 이틀....... 놀랍게도 그들의 대치는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 딱하지 않은 채 그들은 치열한 격전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아미타불......!" 길고 긴 침묵을 깬 것은 우담이었다. 그의 잿빛 가사는 땀으로 흠 뻑 젖어 있었다. 뇌천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단하오이다. 뇌시주." 뇌천의는 무거운 음성으로 받았다. "우담대사도 마찬가지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지난 삼 일 동안의 대 치에서 그들은 마치 십년지기라도 된 양 친근감을 느낀 듯했다. 우담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마 이 상태라면 열흘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소." 뇌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것이오." "아미타불. 하지만 승부는 내야만 하오." "물론이오." 스스! 순간 두 사람의 몸이 앉은 채 석자 가량 떠올랐다. 이제 그들은 최후의 절기로 승부를 결하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미풍이 불었다. 두 사람의 곁에는 한 절세우물이 나타났다. 화후였다. 그녀는 고 혹적인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뇌천의와 우담의 몸이 섬광처럼 움직였다. 그들은 가공할 속도로 서로를 향해 부딪쳐갔다. 실로 탄지지간이었다. 두 사람은 허공에서 스친 후 각각 반대의 위치에 떨어져 내렸다. "으음......!" 동시에 침중한 신음성이 울렸다. "아미타불......! 내가 졌소." 우담은 불호를 외우며 비틀거렸다. 팔락! 그의 승복이 펄럭였다. 자세히 보니 앞가슴 부위가 손바닥 정도 크기로 떨어져나가 있었다. 뇌천의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겉보기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 은 듯했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이번 승부는......." 문득 그는 말을 끊었다. 귓전에 혜광심어(慧光心語)가 흘러든 것 이다. (헤헤.... 뇌형, 설마 빈승더러 저 천하의 우물을 감당하라하진 않겠지요? 히히... 빈승은 자신 없으니 뇌형이 요리하시구려.) '......!' 뇌천의는 안색이 변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우담을 바라보았 다. 우담은 승복을 툭툭 털며 대전을 돌아서고 있었다. "헤헷! 소승의 목숨을 살려주어 감사하오, 뇌형. 아미타불!" "......!" 뇌천의는 그의 뜻밖의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체 저 자의 내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 그는 이번 승부에서 내게 양보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 로 작은 구멍이 세 개나 뚫려 있었다. 그야말로 등골이 서늘했다. '나는 우담에게 일장을 적중시켰을 뿐이다. 만약 그가 공력을 조 금 더 높였다면.......' 뇌천의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졌다. 과연... 소림의 무학이 이토록 강하단 말인가?' 우담은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밖에서 그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뇌공자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관문이 남아있습니 다." 천하우물 화후의 음성이 들렸다. 뇌천의는 몸을 돌렸다. 순간 사 방에서 탕! 탕! 하는 굉음이 울렸다. 뇌천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전의 통로와 사방의 창문이 일제 히 닫혀버린 것이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가공할 광경이 전개된 것이다. ■ 무림백서 1권 제8장 달마삼식(達磨三式)의 비밀 ━━━━━━━━━━━━━━━━━━━━━━━━━━━━━━━━━━━ "호호호호......." "깔깔깔깔......." 요사스러운 교소가 메아리쳤다. 어느덧 대전의 풍경은 일변해 있었다. 사면 벽이 온통 거울로 화 한 것이다. 그 속에 일백군방화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들은 뇌천의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돌며 군무(群舞)를 추고 있었다. "......!" 뇌천의는 안색이 굳어진 채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서서히 핏발이 섰다. '으음! 이건... 마염환락무(魔艶歡樂舞)!' 마염환락무는 수백 년 전 사라진 미혼만색교(迷魂萬色敎)의 비전 지비로 가공할 색공(色功)의 일종이었다. 백 명의 미녀들이 군무를 추게 되면 아무리 정력(定力)이 굳건한 자라도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설사 초인적인 정력으로 유 혹을 물리친다 해도 결국에는 정력이 고갈되고 죽고 마는 무서운 색공이었다. 너울너울....... 일백군방화는 뇌쇄적인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은 점점 더 노골적으 로 화해갔다. 오색의 의복이 춤을 출 때마다 한 겹 한 겹 흘러내 리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절색의 미녀들만으로 이루어진 군방화였다. 하나씩 벗겨 진 옷자락은 허공에 던져졌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럴 때마다 여 인들은 차츰 나신이 되어갔다. 여인들이 조금씩 옷을 벗는 동안 뇌천의의 혈관은 무섭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혈관의 피가 빠르게 돌고 있었 다. '으으! 지독한 색공이다.' 투둑! 툭! 혈관이 팽창하여 실핏줄 터지는 소리가 고막으로 전해지는 듯했 다. "호호호홋......!" 일백군방화는 온갖 동작을 연출하며 그의 주위를 돌며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해왔다. 어떤 여인은 터질 듯이 부푼 젖가슴을 흔들어 대며 그의 코앞까지 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마침내 뇌천의는 단전 아래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신 지가 흐려지면서 환각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천산의 한 동굴에서 무화와 벌였던 최초의 정사 광경이 자꾸만 눈 앞에 떠올라 아른거렸다. '무화.......' 그는 손을 허우적거렸다. 마치 눈앞에 무화가 있기라도 한 듯. 그때였다. "흐흥......." 뜨겁고 뭉클한 여체가 그의 품에 안겨왔다. "헉!" 결국 그의 이성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와락 여체를 껴 안았다. 여인은 뱀처럼 그의 몸을 휘감으며 매달렸다. 뇌천의는 이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본능이 시키는 대로 따라할 뿐이었 다. 그는 여인을 껴안은 채 뒹굴기 시작했다. 바닥에 두 개의 동체가 뒹굴었다. 여인들은 그들을 가운데 두고 더욱 노골적인 군무를 추 었다. 그런데 한순간. '......!' 뇌천의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어디선가 천룡선창(天龍禪唱)의 법음이 울린 것이다. 그것은 혜광 심어로 전달된 것이었다. 천 개의 거종이 일시에 울리듯, 만근화약이 일제히 폭발하듯 불문 최고의 파사현정의 음공(音功)이 그의 신지를 일깨운 것이다. 뇌천의는 두 손으로 여인을 밀쳐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앗!" 여인은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뇌천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군방화가 그를 가운데 두고 차마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음탕한 행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사면의 벽거울에는 나체여인들이 가득 비치고 있었다. "우우우!" 그의 입에서 용의 울음과도 같은 장소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그는 쌍장을 뻗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벽이 부서지며 동경이 산산조각났다. "아악!" 일백군방화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그녀들은 대경실색하여 비 틀거렸다. 뇌천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장력을 전개했다. "요사한 것들! 사라져라!" 펑! 펑! 둔중한 폭음과 함께 한꺼번에 세 명의 여인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 며 날아갔다. 그때였다. 그그긍! 괴음과 함께 한쪽 벽면이 회전하며 통로가 나타났다. 뇌천의는 생 각할 것도 없이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통로를 지난 뇌천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한 칸의 아늑한 침실이었다. 침실 한가운데에는 상아(象牙)로 만든 호화롭기 그지 없는 침상이 놓여 있었다. 침상 위에는 절색의 미녀가 비스듬히 누워 그를 바 라보고 있었다. 화후(花后)였다. 그녀는 잠자리 날개같이 얇은 침의만을 걸친 채 요염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뇌공자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군요. 설마 마염환락무를 견뎌낼 줄 은 몰랐어요." 뇌천의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스쳤다. '견뎌낸 게 아니다. 만일 천룡선창이 울려오지 않았다면.......' 그는 뼈아픈 경험을 했다. 만일 천룡선창이 그의 신지를 일깨워주 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진땀이 날 지경이 었다. 뇌천의는 차가운 눈으로 화후를 노려보았다. 그의 입에서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화후,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아느냐?" 화후는 살구씨 같은 눈동자를 사르르 굴리며 의아스러운 듯 물었 다. "풍류를 즐기러 오지 않았나요?" "후후! 진흙탕에서 풍류를 찾을 정도는 아니다." "지... 진흙탕이라고요?" 화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최대한의 모욕을 받은 것이다. "후후! 그럼 이곳이 선녀궁이라도 된단 말이냐? 내가 볼 때는 시 궁창보다 더 추잡한 곳이다." "그... 그런 심한 말을!" "후후! 그보다 더한 말을 해줄 수도 있지만 참겠다. 어차피 너를 포함한 이곳을 접수할 예정이니까." 뇌천의의 냉혹한 말에 화후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방금... 뭐라고 말했죠?" "널 내 수하로 거둔다는 뜻이다." 화후는 눈을 크게 뜨더니 갑자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홋......!" 잠시 후 그녀는 웃음을 그치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린가요?" 뇌천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무색투명해 보였다. "......!" 화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역시 보통 여인이 아니었 다. 그녀는 매끈한 팔을 뻗어 침상 머리맡에서 과일을 집어들어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본 화후는 도리어 당신을 호법으로 삼을 생각이에요. 그 점에 대 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뇌천의는 피식 웃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다." "호호! 과연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 봐야 할 걸요?" 화후는 눈을 갸름하게 뜨며 다시 말했다. "본 화후는 당금 무림에서 정인전을 피할 사람이 있다고는 믿지 않아요." 정인전(情人箭). 마침내 그녀는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뇌천의는 담담히 말했다. "천하살종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살종! 그럼... 당신은......?" 화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남들이 대살종이라 부르지." "여... 역시......." 화후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차갑게 말 했다. "당신이 바로 대살종이었군요. 호호호! 마침 잘됐군요. 그렇지 않 아도 본 화후도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이미 만났소. 주종관계로." 냉막한 말이 떨어진 순간 뇌천의의 신형이 두 개로 분리되었다. 슷! 하나는 허공으로 솟구치고, 하나는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화후의 안색이 희어졌다. "감히!" 어느새 그녀의 섬섬옥수에는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활 이 쥐어져 있었다. 활에는 세 치 가량의 녹색 화살이 장착되어 있 었다. 그것은 이른바 천하살병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으로 알려진 정 인전(情人箭)이었다. 정인전은 비록 크기가 작았으나 단단하기 그지없다는 만년한철을 꿰뚫으며, 어떤 종류의 호신강기도 격파한다. 뿐만 아니라 빠르기 가 뇌전을 방불케 하여 일단 격발되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슉! 녹섬(綠閃)이 뻗었다. 아니, 뻗었다 싶은 순간 정확히 허공에 솟 구쳐 있는 뇌천의의 얼굴 한가운데 박혀버렸다. 그러나 뇌천의의 모습은 그 순간 환영처럼 꺼져버렸다. 팟! 동시에 바닥에서 인영이 일어서며 화후의 몸을 덮쳤다. "호호호! 어림없다!" 화후의 교소가 터졌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 또 하나의 정인전이 매겨져 있었다. 슉! 이번에는 먼저번보다 열 배나 빠른 속도로 정인전이 발사되었다. 정인전은 뇌천의의 양미간 사이에 박혔다. 털썩! 그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호호호! 대살종도 별 수 없......." 화후의 득의에 찬 교소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녀는 채 말을 맺 지도 못한 채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후후......!" 한 가닥 음산한 괴소와 함께 뇌천의가 코앞에서 얼굴을 내민 것이 다. 분명 정인전은 그의 얼굴에 적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 도 이빨 사이에 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악!" 화후는 비명을 질렀다. 퓻! 뇌천의의 입에서 정인전이 쏘아나왔다. 정인전은 화후의 가느다란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르륵! 백옥처럼 흰 목에 혈선이 그려지고 핏방울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아!" 화후는 탄식을 발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패한 것이다. 긴 속눈 썹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요. 내가 졌어요." 한동안 기다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화후는 눈을 떴다. "......!" 바로 코앞에 뇌천의의 얼굴이 있었다.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귀엽군." 뇌천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아아!' 화후는 전신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졌어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뇌천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툭 건 드렸다. "대살종에 들어온 것은 너의 행운이다." 화후는 얼굴을 붉히며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몽예(夢藝)라 불러주세요." "몽예? 그럴 듯한 이름이군." 몽예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대살종을 기꺼이 따르겠어요. 하지만 그 전에 절 완전히 굴복시 키셔야만 해요." "......?" 뇌천의는 그녀의 안색이 다시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완전하게 굴복시키라고?" 몽예의 속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저는 완전한 주종관계만을 원해요. 저는 정인전의 영수이기 전에 한 여인이에요. 여인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삶을 살 수 없어요. 당신이 영원한 주군(主君)이 되시려면 저의 모든 것을 소유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언제고... 당신을 배반할지도 몰라요." 뇌천의는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 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묘한 여자로군.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었 다." "저도요......." 몽예는 얼굴을 더욱 붉히며 눈을 살며시 감아버렸다. 몽예. 여인의 몸으로 살수집단인 정인전(情人箭)을 이끌어 온 희대의 기 녀(奇女).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삶으로 접어들려 하고 있 었다. 그녀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 사람을 만난 것은 운명인지도 몰라.' 그녀는 강한 여인이었다. 또한 아름답고 순수한 여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불같이 뜨거운 정 열과 초인적인 이성, 무한한 지혜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러나 여 인은 여인이었다. 주군을 만난 그녀는 비로소 완전한 여인이 되고 자 했다. "몽예." "주인님......" 몽예는 힘없이 뇌천의의 품으로 안겨왔다. 이제 그들은 주종의 의식을 치뤄야 했다. 그것은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뇌천의는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더 이 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두 남녀의 입술이 겹쳐졌다. 뜨거운 열기가 입술을 통해 넘나들었 다. 두 사람은 침상 위에 쓰러졌다. 몽예의 몸에서 한 겹씩 허물이 벗겨졌다. 여인의 육체는 양파와도 같다. 벗겨도벗겨도 신비한 속살의 비밀 이 끝없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처음 뇌천의는 주종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단순한 의식이라고 생각 했다. 그래서 쉽게 그녀의 옷을 벗겼고 육체를 소유하는 것으로 의식이 끝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에게도 끓는 피와 넘치는 젊음이 있었다. 옷을 모두 벗겼을 때 몽예의 눈부신 나신은 그의 심금을 온통 흔들고 말았다. 세상에 미인은 많다. 미인의 기준 또한 다양하다. 공통적인 것은 미인이 사내의 마음을 흔든다는 것이다. 몽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 보기 에는 보다 특별한 면이 있었다. 몽예의 피부는 만지면 분가루가 묻어날 듯 희었으며, 촉감은 비단 을 방불케 했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내릴 정도였다. 그 보다 더 그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그녀의 정열이었다. 놀랍게도 단시간에 그녀의 몸이 펄펄 끓어오른 것이다. 그는 용광 로 속에 빠진 철과도 같았다. "하아!" 몽예는 신음을 토해냈다. 뇌천의가 그녀의 깊은 육체 속으로 들어 갔을 때 그녀는 사지를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여 그의 몸을 휘감았 다. 손과 손이 그를 가두었고, 미끈한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싸버렸 다. 그는 달아날 수가 없었다. 여인의 깊고 깊은 육신 속으로 한 없이 침몰하고 말았다. 버들가지처럼 유연하고, 벌꿀처럼 농밀하며, 화산처럼 뜨겁고, 배 암처럼 끈끈하고, 유사(流砂)처럼 만물을 삼키는 그런 기술을 가 진 여인이었다. 뇌천의는 몽예에게 있어서 첫 남자다. 그리고 마지막 남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주종의 의식에 충실하다기 보다는 여인의 관문을 넘 는 의식에 전념하는 듯했다. "아아!" 몽예의 입술이 벌어졌다. 뜨거운 한숨과 신음, 그리고 격렬한 육 체의 경련이 일어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전신이 땀으로 흠씬 젖고, 침상마저 푹 젖어들고 있었다. '후훗! 좋아, 네 영혼과 육체 모두를 갖겠다.' 뇌천의는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하늘 높이 비등하는 것을 느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우주와 육체를 하나의 느 낌으로 이어주고 있었다. 어느 순간 몽예의 육체가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렸다. "이제... 그만......!" 아침이다. 뇌천의와 몽예는 한 침상에서 아침을 맞았다. 뇌천의는 눈을 뜬 순간 갈증을 느꼈다. 그때 몽예가 벽록색 잔에 물을 받쳐 올렸다. 그가 감로수와 같은 물을 단숨에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을 때, 몽예는 비단에 싸인 기다란 물체를 두 손으로 받 들어 올리고 있었다. "뭐지?" 뇌천의는 의아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그녀가 받쳐 올린 물건을 보지 않았다. 눈부시게 흰 다리가 양탄자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얇은 망사의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살짝 늘어진 옷자락 사이로 두 개의 유방이 들여다 보였다. 지난 밤의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이 은은한 홍반으로 남아 있었다. 뇌천의는 불끈 아랫도리에 힘이 가는 것을 느꼈다. 긴 머리를 질끈 동여 맨 몽예의 모습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달 라져 있었다. 눈부신 아름다움과 다소곳한 순종의 미를 품고 있었 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주군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 몽예는 비단보를 풀었다. 그 속에서 삼척 길이의 뭉툭한 쇳덩이가 나왔다. "겉보기에는 녹슨 쇠꼬챙이 같지만 기실 예리함으로만 친다 해도 해벽신검을 능가한답니다." 뇌천의는 눈썹을 꿈틀했다. "이것은 병기제일지(兵器第一地)로 불리는 천수신장(天手神莊)에 서 흘러나온 것이랍니다." "천수신장이라면?" "백도십팔련의 하나인 삼장(三莊)의 일원이지요. 그들은 일만 종 에 달하는 각종 상고신병(上古神兵)을 지니고 있어요." "으음." "처음에는 저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죠. 하지만 이걸 보세요. 이 걸 누르면......." 몽예는 손잡이의 한곳을 눌렀다. 쩡-!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쇠뭉치 같았던 괴검이 축소되더니 달걀 만한 크기의 철환(鐵環)으로 변신했다. "아니?" 뇌천의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손목에 낄 수도 있어요." 몽예는 철환을 뇌천의의 팔목에 끼워주었다. 뇌천의의 반대쪽 손 목에는 엽무웅으로부터 받은 금환이 채워져 있었다. "몽예는 이 병기에 묵아(墨兒)란 이름을 붙였어요. 주군께 큰 도 움이 될 거예요." "묵아라? 고맙군." 뇌천의는 담담히 말했다. 그는 묵아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가 어떤 물건에 애착을 느꼈다면 그것이 최초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묵아의 참다운 가치를 알았다면 또다른 특별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괴병 묵아(墨兒)와의 만남은 또 하나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소. 어째서 비무할 때 내게 양보했소? 또 천룡선창 (天龍禪唱)으로 날 구해준 이유는 무엇이오?" 두 가지 질문이 한꺼번에 토해졌다. 월향전에서 우담을 만난 뇌천의의 질문이었다. 우담은 게걸스럽게 오리구이를 맨손으로 쥐고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었다. 그는 뇌천의의 질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술 한 병을 벌컥벌컥 들이킨 연후에야 소매로 입가의 기름을 쓱 문질러 닦고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씩 대령하겠소. 비무에서는 실력 때문에 졌고......." 그는 히죽 웃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고른 치열이 빛났다. 어쩐지 고독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천룡선창을 읊은 것이 뭐가 잘못됐소? 그저 심심해서 읊었을 뿐 인데." 뇌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헤헤! 위대하신 대살종께 바라는 것은 그저 이 환락의 낙원에서 날 쫓아내지만 말라는 것뿐이오." 우담의 마지막 말은 농담이라기에는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뇌천의는 가슴이 식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그는 우담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그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유혹마저 일었다. 그러나 이렇게 농담으로 받으면 그럴 수가 없었다. 뇌천의는 차갑게 말했다. "우담, 계속 회피한다면 본인은 정말 이곳에서 쫓아낼 지도 모르 오. 애초부터 난 중 따위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으니 말이오." "어이쿠!" 우담은 비명을 질렀다. "제발 쫓아내지만 마시오. 소림에서도 쫓겨났고 천하 어디를 가도 환영할 사람 없는 불쌍한 이 우담이오. 부디 뇌형께서 받아주구 려." 뇌천의는 문득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 주시오. 듣기로는 당신은 차 기 소림방장 감이었다는데 어째서 파계했소?" "헤헷, 불당에 파리 몇 마리가 날아들어 쫓아버렸더니 파계로 몰 지 뭐요? 무량수불......." "......?" 중이 도호를 외다니. 그야말로 성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뇌천의는 번뜩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불당에 날아든 파리 몇 마리?' 그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 말은 소림에 찾아온 손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누구기에?' 뇌천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렇다. 천축마승(天竺魔僧)! 그들일 것이다.' 뇌천의는 대살종이다. 천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살수들을 통해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갖 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무림 각계에서 일어나는 소식들이 어김없 이 답지되고 있었다. 그는 현재 소림사에 천축에서 온 승려들이 체류하고 있음을 보고 받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불법의 전파를 목적으로 천축에서 건너 와 소림에 머물고 있었다. 적어도 표면적인 목적은 그러했다. 강호인들은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뇌천의는 그들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천광사(天廣寺). 천축이대사찰의 하나인 천광사는 기실 마승들의 집단이었다. 천광사는 축융포찰(祝戎布刹)과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변황팔절(邊荒八絶)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들은 근 천여 년간에 걸쳐 중원무림을 끊임없이 위협해 왔다. 그런데 수년 전, 갑자기 천광사의 마승들이 소림에 상주하기 시작 한 것이다. 물론 표면적인 목적은 천축과 중원의 불경의 교류 때문이었다. 그 러나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다. 뇌천의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 '우담은 보통 중이 아니다. 그는 천광사의 목적을 눈치챘을 것이 다. 결국 그들과 반목을 했다는 것인가?'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한데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소림의 고승들 이오. 그들은 그 파리들을 차기방장보다도 중시했단 말이오?" "헤헷! 썩었어, 썩었어! 암, 어물전의 생선은 모두 썩었다니까. 그러니까 파리가 꼬이지, 암!" 흥얼흥얼거리는 우담의 말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뇌천의는 점점 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소림과 천광사의 관계는 매우 불투명하다. 더구나 소림의 속가장 문인(俗家掌門人)이자 천상보의 보주로 남무림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천수여래(千手如來) 사마신무의 행동은 의혹을 사고 있다. 천상보는 천하의 상권(商權)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그 영향력이 막 강하다. 한데 북무림의 패자인 금화보를 친 것과 최근 천상보에 이국인이 자주 드나든다는 점은 모종의 흑막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뇌천의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의 추리는 점차 놀라운 방향으로 접근해 가고 있었다. 뇌천의는 다시 술병을 목구멍에 처박고 있는 우담을 바라보았다. '이 자는 한때 불문의 후계자이자 백도제일의 기재로 총망받던 자 다. 한데 그런 일로 파문된 이면에는 반드시 어떤 의도가 있을 것 이다.' 뇌천의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담,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물전의 썩은 생선을 골라 내버 려야 하지 않겠소?" 그의 질문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우담의 눈에서 기광이 솟았다 가 빠르게 사라졌다. "헤헷! 모두가 썩었으니 내다 버리려면 어물전 문을 닫는 게 낫 지. 헤헤! 술 더 없소?" 우담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반짝 이슬이 빛났다. "여기 있어요." 이제껏 아무말 없이 듣고만 있던 몽예가 술병을 건네주었다. "아미타불! 낭자는 하룻밤 새 더욱 예뻐진 것 같구려." 몽예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룻밤의 의미, 그것이 연상되었기 때문 이다. 뇌천의는 우담을 주시했다. 그는 내심으로 한 가지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당신을 쫓아내진 않겠소. 그러나 공짜로는 안되겠소." 우담은 히죽 웃었다. "쫓아내지만 않는다면야 무슨 짓이든 못하겠소? 헤헤, 그게 뭐 요?" 뇌천의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도 사람이라면 일을 해야 먹고산다는 것쯤은 알 것이오." "암, 좋지. 사람은 일을 해야지." "사천에 가면 검천령(劍天嶺)이란 곳이 있소. 그곳에 말괄량이 남 매가 있소. 당신이라면 그 아이들에게 남에게 맞아죽지 않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오." 우담은 흠칫했다. "검천령? 그곳에도 술이 있소?" "후훗, 그 아이들은 아마 매맞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황 제가 마시는 술이라도 구해다 줄 거요." "헤헤헷! 기특한 아이들이로군." "그럼 승낙한 것으로 알겠소." 뇌천의는 몸을 일으켰다. "잠깐!" "......?" 우담은 게슴츠레한 눈을 치뜨며 말했다. "떠나기 전에 이제까지 얻어먹은 술값은 치러하지 않겠소? 그렇지 않소, 부인?" "어머!" 갑작스런 부인이란 호칭에 몽예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헤헷! 쓸모 없는 땡중이긴 하지만 장경고(藏經庫)의 냄새나는 책 중에서는 꽤 값나가는 책이라오. 그래서 슬쩍 했던 것인데 이렇게 술값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소." 휙! 그는 소매에서 누렇게 바랜 책자 한 권을 던졌다. 뇌천의는 얼떨결에 책자를 받았다. 그가 막 뭐라 물어보려는 순간 우담은 벌써 몸을 날리고 있었다. 휘익! 그는 삽시에 삼십 장이나 허공을 날아가 인공호수를 스쳐 사라져 버렸다. 멀리서 그의 흥얼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에라, 검천령으로 가자! 말 잘 듣는 아이들과 한 세상 어울려 거 나하게 취해나 보자! 아미타불...... 무량수불...... 냄새나는 사 바세계여......." 그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뇌천의는 비로소 책자를 살펴보았다. <달마검급(達磨劍 )> 뇌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책자의 제목을 보는 순간 실망을 느낀 것이다. 달마검법은 소림 칠십이종 무학 중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검법으 로 소림삼검(少林三劍)의 하나였다. 달마삼검(達磨三劍), 불영구검(佛影九劍), 다라십팔검(多羅十八 劍)이 바로 소림삼대검법이었다. 그 세 가지 검법 중에서도 달마삼검은 가장 위력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달마삼검은 소림 이대제자급이면 누구나 익히는 검법이거늘 우담 은 꽤나 생색을 냈군." 그는 달마검급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꺼냈다. '그가 쓸모 없는 것을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때 몽예가 다가오며 물었다. "주군, 우담에게 부탁한 두 아이들은 누구인가요?" 뇌천의는 그녀의 허리를 슬쩍 안으며 말했다. "금화태세 엽무웅의 자식들이오." "아!" 몽예는 탄성을 발했다. 그녀는 곧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건...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오시면?" 뇌천의는 히죽 웃었다. "말하자면 도박을 하는 셈이지." "도박?" 뇌천의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잠시 생각할 일이 있소, 몽예." 몽예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네, 주군." 그녀는 가볍게 몸을 날려 사라졌다. "......." 혼자 남은 뇌천의는 의자에 앉아 달마검급을 펼쳐 살펴보았다. 달마검급은 모두 열여덟 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 장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구결은 한 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여 달마삼검의 도해를 살펴보았다. '음, 달마삼검은 일초에 도합 육식(六式)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구 나. 음?'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일초육식(一招六式). 말하자면 여섯 개의 도해가 하나의 초식을 이루는 셈이다. 그 중 검을 사용하는 도해는 마지막 한 장뿐이었다. 나머지 도해 는 모두 합장하거나 누워있는 도해, 또는 보행하는 도해, 하늘을 우러러보는 도해 따위였다. 도해 속의 인물은 소림에 선종을 전파한 달마대사였다. "......!" 한동안 도해를 눈여겨 보던 뇌천의는 무릎을 쳤다. '진정한 달마삼검은 일초에 육식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 면 도합 십팔식인 셈이다. 하지만 현재 내려오는 달마삼검은 오직 삼식에 불과하다. 이제 보니 각 초의 마지막 도해에서 유래한 것 이다. 그렇다면 각 초식의 앞부분 다섯 가지 도해는 무엇을 의미 한단 말인가?' 뇌천의는 천부적으로 무의 자질을 타고 태어난 기재였다. 그는 어 려서부터 오직 무공만을 익혔다. 따라서 무학에 대한 집념이 비할 데 없이 강했다. 십전천사로부터 무학을 배울 때도 풀리지 않는 점이 있으면 열흘 이고 보름이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열중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 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잊고 달마검급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몽예는 여러 차례 음식물을 들고 그를 찾았으나 번번이 헛걸음질 했다. 뇌천의가 무공삼매에 빠져 있었으므로 건드릴 수 없었던 것 이다. 이렇게 되자 그녀는 걱정이 됐다. '벌써 칠일째 물 한 모금 드시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참오하시기 에.......'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몽예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넋을 잃고 뇌천의를 지켜보 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음식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뇌천의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괴상한 행동을 했 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가 하면 벌렁 드러누워 코를 골며 잠을 자 기도 하고, 느닷없이 물구나무서기를 하질 않나, 끊임없이 뭐라 중얼거리며 뒷짐을 진 채 어슬렁어슬렁 대전을 거닐기도 했다. 괴이한 것은 그런 괴행을 하면서도 조금도 몽예를 의식하지 못한 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애당초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 르는 듯 했다. 이따금 그는 손을 허공으로 뻗어 어떤 도식을 그려보이기도 했다. '......?' 몽예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뇌천의의 동작이 점차 안정되어 간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가 손으로 도식을 그릴 때마다 은은한 뇌음(雷音)이 울렸 다. 마침내 그녀는 깨달았다. '아! 이제 보니 주군께서는 일종의 무학을 연마하고 계셨구나.' 그녀는 뇌천의의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대전 을 물러나왔다. 보름이 흘렀다. "으하하하하......!"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월향전 한가운데서 뇌천의는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의 웃음소리에는 진기가 충 만해 있었다. 그로 인해 인공연못의 물이 출렁거렸으며, 진동을 이기지 못한 식 인어들이 수중 깊이 가라앉았다. "아......!" 마침 대전에 나타났던 몽예는 심장이 콱 막히는 것을 느끼며 귀를 감쌌다. "몽예! 드디어 성공했소." 뇌천의는 그녀를 발견하고 희열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선광(禪光)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달마삼검을 터득해냈소." 몽예는 그만 멍해졌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 며 웃었다. "호호....... 저도 달마삼검을 할 줄 아는 걸요." 뇌천의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어찌 몽예만 알겠소? 달마삼검은 아마 무림인들 중 삼분지 일은 알고 있는 평범한 검법이오. 하지만 그들이 달마삼검의 껍데기만 익혔을 뿐이란 걸 알고 있소?" "네?" "후후, 본래 달마삼검은 달마대사가 면벽구년을 마친 후 처음으로 깨달은 검도상(劍道上) 극치에 달한 상승의 내검(內劍)이었소." "내검(內劍)?" 뇌천의의 얼굴에 신광이 감돌았다. "그렇소, 일반인들은 소림의 무학이 외공(外功)에 치중해 있는 것 으로 알고 있으나 달마삼검만의 실체는 바로 내검에 있는 것이오. 현재 항간에 전해지고 있는 달마삼검은 진정한 소림의 무학이 아 닌 것이오." "......?" 몽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한 달마삼검은 정순한 내력을 바탕으로 펼치는 일초육식의 오묘한 변화에 있소. 총 십팔식의 검식에는 삼라만상의 모든 변화 가 포함되어 있소." "......!" 몽예는 그만 망연해졌다. "그것만이 아니오. 달마삼검의 변식(變式)은 그저 한 형태에 불과 할 뿐, 진정한 정화는 검정양기공(劍精養氣功)에 있는 것이오." "검정양기공?" 차분한 음성으로 설명하는 뇌천의의 이마에서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성광(聖光)이 은은히 비치는 듯했다. "일종의 연기단공(練氣丹功)과 같은 것이오. 다만 기공수련의 본 령을 검에 두고 있다는 점이 다르오. 이 기공은 잠을 잘 때나, 걸 을 때나, 또는 싸움을 할 때조차 끊임없이 연단이 이루어지므로 내공의 진취속도가 일반 연좌법에 비해 십배 이상 빠른 것이 특징 이기도 하오." "그... 그럴 수가?" 몽예는 아연실색했다. 세상에 이런 연공법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 문이었다. 뇌천의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상 이것은 검도의 차원을 넘어섰소. 그러나 달마대사는 이것 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을 원치 않은 것 같소. 왜냐하면......." 뇌천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진정한 불제자라면 불심 이외의 것을 마음속에 키워선 안되기 때 문이오. 그래서 달마는 달마삼검의 요체를 도해(圖解) 속에 남겼 소. 구결이 배제된 도해는 오랜 세월을 통해 전해졌고 그동안 많 은 고승들이 보았지만 그것을 깨달은 자가 없었던 것이오. 그래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도 그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오." "아!" 몽예는 탄성을 발했다. 그녀는 눈부신 듯한 시선으로 뇌천의를 바 라보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달마삼검에 감추어진 위대한 검학을 깨우쳐낸 뇌천의의 오성이야말로 고금제일이 아니겠는가? '이 분은 어쩌면 무림사에서 유일무이한 절대자가 될지도 몰라!' ■ 무림백서 1권 제9장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 ━━━━━━━━━━━━━━━━━━━━━━━━━━━━━━━━━━━ <금번 본인의 오십회 생일을 맞아 천하무림동도를 모시고 자축연 을 벌일까 하니 동도들께서는 필히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기 를 앙망하오이다. 일시:유월 육일. - 천상보주(天商堡主) 천수여래(千手加來) 사마신무(司馬神霧).> 열흘 전, 남북무림의 내로라 하는 명숙들과 각 문파에 이러한 내 용의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생일잔치의 초대 장으로 보였다. 천수여래 사마신무의 오십회 생일. 사마신무는 금화태세 엽무웅의 죽음 이후로 무림의 거목으로 떠오 르고 있었다. 강남무림의 지주로, 뿐만 아니라 소림의 속가장문(俗家掌門)으로 천하백도의 상징적 존재인 그의 생일잔치는 사실상 무림최대의 성 회가 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따라서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그의 생일이 연일 화제에 오르고 있었다. 중원 전역에서 수많은 무림인들이 여행길에 올랐다. 그들은 초대장을 받고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천상보로 향했다. 과연 단순한 생일 자축연인지 아니면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흑막 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일부 속깊은 인물들은 이번 연회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기도 했다. 그것은 금화태세 엽무웅이 죽은 이후 남북 무림의 반목이 깊어져 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루어진 연회였기 때 문이었다. 또한 사마신무가 중원전역에 초대장을 발송한 이면에는 보이지 않 는 저의가 숨어 있기도 했다. 그것은 명실상부한 백도의 거목인 천상보주의 초청에 응하지 않는 다는 것은 장차 강호에서의 활동에 상당한 불이익이 있을지도 모 른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듯 보이는 초대장이었으나 그것이 던지는 파문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다. 과거 대활련 십전무맹의 결성 이후로 이처럼 대규모의 성회는 없 었다. 따라서 군웅들은 천리 길을 마다 않고 너도나도 천상보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장사성(長沙城)의 무공산(武功山) 일대는 몰려드는 인파로 북새통 을 이루었다. 대강남북에서 몰려드는 강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인마(人馬)를 대동하고 있었으며 수레마다 산더미 같은 짐이 실려 있었다. 천상보주의 생일 축하를 위해 가져온 선 물들인 것이다. 그들로 인해 장사성의 객점과 주루는 밀려드는 손님들로 즐거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손님은 무공산 천일평(天日坪)에 있는 천상보의 생일연회에 참석 하기 위해 몰려든 하객들이었다. 그들은 호방한 기질의 무림인들 이었으므로 어디를 가나 행동이 눈에 띄었다. 거리낌없이 큰소리로 웃어대는가 하면 얼큰히 취해 고성방가를 서 슴치 않았다. 그때문에 장사성의 온 거리가 떠들썩했다. 그러나 취하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싸움만은 일으키지 않았다. 생일연회에 초대된 하객인 만큼 모두가 화기를 해치지 않으려 했 던 것이다. 천상보의 규모는 방대했으나 하객들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다. 또한 하객이라고 모두 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상보에서는 두 종류의 초대장을 발송했다. 황첩(黃帖)과 금첩(金帖)이었다. 각 지역의 패주나 무림명숙들, 문파의 영수급 위인들에게는 금첩 을 발송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황색 배첩을 발송한 것이다. 따라서 천상보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금색 배첩을 받은 사람에 한해 허용되었다. 황색 배첩을 받은 하객들은 천상보 외부에 임시 로 설치한 장소에 수용되었다. 또 한 가지, 배첩을 받지 않아도 천상보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다. 유월 오일 정오(正午) 무렵이다. 생일잔치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하객들은 대부분 무공산 천 일평에 당도했다. 천일평을 가득 메운 무림인들로 천상보 앞은 그 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하하! 이런 성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걸세." "껄껄! 아무렴! 이 모두가 사마대협의 인망이 하늘같이 높은 탓이 아닌가?" "사마대협이 없었다면 백도무림이 오늘같은 평화를 유지할 수는 없었을 거야." 온통 이런 말들로 시끌시끌했다. 군웅들은 저마다 입에 침이 마를 세라 천상보주를 칭송하고 있었다. 천상보의 문루 앞. 문루에는 축등이 걸려있고 수십 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또 한 끊임없이 드나드는 사람들로 인해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 었다. 문루 앞 마당에는 연무를 할 수 있는 목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런데 목대 앞에서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헐헐헐! 그래, 이 늙은이의 옷차림이 좀 남루하다고 들여보낼 수 없다 이거지? 이런 괘씸한 놈들! 사람을 옷차림으로 판단한단 말 이냐?" 목대 앞에는 방명록을 적는 서사(書士)가 있었고, 그 앞에 근처에 만 가도 악취에 콧등이 부러질 것 같은 거지노인이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흥! 고작 사마신무의 인심이 이렇단 말이지? 아, 이 늙은이가 먹 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음식이 아까와 못 들어가게 한단 말인가?"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백색 유삼을 입은 중년서사는 막무가내로 역성을 내는 거지노인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배첩을 받지 않은 분은 규칙상......." "흥, 규칙은 무슨 규칙! 사마신무는 사람도 몰라본단 말인가! 고 작 행색이 초라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이렇게 쫓아내? 흥! 인심 한 번 고약하구나. 잔치집에는 개도 내쫓지 않는다는 말도 모른단 말 이냐?" 거지노인의 행색은 그의 말대로 초라했다. 봉두난발에다 눈꼽이 낄 대로 낀 게슴츠레한 눈,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누더기 옷에다 발은 맨발이었다. 옆구리에는 개를 때려잡 는데 사용하는 타구봉(打狗棒)을 끼고 있었다. "훠- 이! 워- 이! 사마신무! 환갑도 못 치르고 요절이나 해라. 훠 이!" 갑자기 늙은 거지는 펄쩍펄쩍 뛰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 리고는 문루 앞에 침을 퉤 뱉고는 돌아섰다. 문을 지키고 있던 천상보 인물들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드러났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그들은 억지로 화를 눌러 참고 있었다. "실력으로 한판 붙지 그래?" "어이! 늙은이! 설마 그대로 가려는 건 아니지?" 군웅들 사이에서 누군가 충동질을 했다. 아마도 상황이 재밌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거지 노인은 힐끔 시선을 돌리더니 중년서사를 노려보았다. 중년서사는 내키진 않았지만 군웅들이 보고 있는지라 어쩔 수 없 이 굳어진 안색으로 말했다. "노인장, 배첩이 없어도 본보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 오. 그러나 실력으로 들어가야만 하오." 거지 노인은 눈을 휩떴다. "실력? 그거 좋지!" "하지만 노인장의 나이가 있는 만큼 조심해야 할 것이오." "아, 내 걱정은 마시게. 후회는 자네가 하게 될 거야. 흘흘!" "그럼 저곳으로......." 서사가 목대를 가리키는 순간 거지 노인은 신형을 훌쩍 날렸다. 의외로 그는 가볍게 목대 위에 내려선 후 군웅들을 둘러보았다. 군웅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우하하하핫! 저 늙은이가 오늘이 자신의 제삿날인 줄도 모르고 까불어 대는군!" 목대 위. 그곳에는 열여덟 명의 중년화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파르스름하 게 깎은 머리에 선명하게 계인이 박혀있는 그들은 무림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중들이었다. 소림십팔나한(少林十八羅漢). 바로 소림사 이대제자 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하다는 법자(法字) 항렬의 승려들인 것이다. 서사가 목대 위로 오르더니 군웅들을 향해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 다. "본보에서는 배첩을 받지 못한 분들을 위해 연회에 참석할 수 있 는 길을 열어 두었소이다. 그것은 여기 계신 십팔나한승이 벌이는 소림 소나한진(小羅漢陣)을 십초 이상 받아내는 것입니다." 늙은 거지는 히죽 웃었다. "흘흘, 그러니까 나더러 이 쓸모 없는 땡초 중놈들과 장단을 맞추 란 말인가? 아이구, 오늘은 이 천풍거사(天風居士)의 체면 깎이는 날이구나." 군웅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아무도 천풍거사란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 실 감히 천상보에 와서 소동을 피우는 이면에는 제법 명망 있는 기인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옷차림만으로 보면 거지 노인은 개방출신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 다. 개방인 특유의 마대 표식이 없었던 것이다. 거지 노인, 즉 천풍거사는 히죽 웃으며 십팔나한승을 향해 손가락 을 까딱했다. "어디 덤벼보시지, 땡중 나리들." "아미타불!" 십팔나한승은 일제히 불호를 외웠다. 그들은 수양이 깊은 탓인지, 아니면 평소에 훈련을 받은 탓인지 몰라도 천풍거사의 모욕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불쾌한 표정이 없었다. 다만 일제히 소나한진을 발동하였을 뿐이다. 스스스! 열여덟 명이 전개하는 나한진은 질서정연했다. 신형이 움직이는 순간 천풍거사는 금세 진세 한가운데 갇혀버렸다. 위이잉! 아홉 명은 계도(戒刀)를 사용했으며 아홉 명은 선장(禪杖)을 사용 했다. 진세가 발동하자 선풍이 회오리치며 철벽과도 같은 무형의 강벽이 형성되었다. "천룡타미(天龍打尾)!" 위이이잉! 아홉 자루의 계도가 일제히 태산을 가를 듯 천풍거사를 공격했다. "아이쿠! 나 살려!" 천풍거사는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펄쩍 뛰었 다. "와하하하하!" "이제 보니 형편없는 허풍쟁이였군!" 군웅들은 박장대소했다. 천풍거사의 동작이 너무도 우스꽝스러웠 던 것이다. "아이쿠! 어이쿠......!" 두번째로 선장 공격이 가해지자 천풍거사는 신형의 중심을 잃고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낭패한 모 습이었다. 나한진은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또한 전진(前陣)과 후진(後陣)이 교차하며 차륜전을 전개하므로 힘의 배합이 이루어 져 선후가 일정한 힘으로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공격 을 당하는 사람은 점점 더 진력이 탈진되어 급기야는 무릎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공격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계도가 춤을 추고 선장이 허공을 갈랐다. 그때마다 천풍거사는 돼 지 멱따는 비명과 함께 목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가뜩이나 남 루한 옷이 찢기고 더럽혀져 관전하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자아 낼 지경이었다. "푸하하핫!" "저것 좀 보게! 푸하! 배꼽이 드러났잖아!" 군웅들은 포복절도를 했다. 그야말로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어 떤 이들은 눈물을 질금거리기도 했고 손뼉을 쳐가며 발을 구르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천풍거사가 아직까지 계도나 선장 공격을 한 차례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한편, 군웅들 가운데 흑삼을 입고 있는 청년은 투명한 눈빛으로 목대 위를 주시하고 있었다. "......." 그는 왠지 모호한 느낌을 주는 청년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양 손목에 금환과 묵환을 차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뇌천의였다. 지금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저 자야말로 기인이다. 비록 낭패해 보이기는 하지만 십팔나한승 이 전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솜털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저 자는 초절정고수일지도 모르겠다.' 징! 갑자기 징소리가 울렸다. "합격!" 중년서사가 내키지 않는 듯한 음성으로 외쳤다. 어느덧 약정된 십 초가 지난 것이다. "우우--!" "와-! 엉터리다!" 군웅들은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천풍거사는 흙투성이가 된 옷 자락을 툭툭 털며 일어서더니 히죽거렸다. "거 운동 한 번 잘했네." 그는 누런 황금 이빨을 드러내 웃어 보인 후 보라는 듯이 어깨를 들먹이며 문루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군웅들은 웅성거렸다. 그제서야 그들도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소림사의 십팔나한승이 보통 고수인가? 비록 목대 위를 공처럼 굴러다니긴 했어도 천풍거사가 관문을 통과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방문객들의 배첩을 받으며 방명록을 기록하던 서사는 이상한 느낌 이 들었다. 갑자기 서늘한 공기가 불어옴을 느낀 것이다. "......?" 고개를 드니 한 명의 흑삼청년이 서 있었다. "귀하는?" "들어가고자 하오." 뇌천의는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중년서사는 그의 아래위를 훑 어보았다. "배첩은 가지고 있소?" "없소." 중년무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그는 턱으로 목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험을 거쳐야 하오." 그는 내심 투덜거렸다. '연속 괴상한 놈들만 나타나는군.' 그는 짜증을 억누르며 물었다. "어쨌든 방명록은 적어야 하니 성함을 밝히시오." 뇌천의는 짧게 말했다. "뇌천의." "뇌... 천의라......." 서사는 방명록에 기록을 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뇌천 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 돌려 목대를 바라본 그는 흠칫 했다. 뇌천의는 어느새 십팔나한승과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웅들은 다시 구경거리가 생기자 일제히 목대로 몰려들었다. 그 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십팔나한진이 발동했다. "발진!" 수좌승이 선장을 휘두르자 십팔나한진은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그들은 천풍거사를 통과시킨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한 듯 이번에 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듯했다. 위-- 잉! 계도와 선장이 춤을 추며 고막을 울리는 파공성이 울렸다. 뇌천의는 진세의 한가운데 서서 목상이라도 된 양 꼼짝도 하지 않 고 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아홉 자루의 계도가 날아왔다. 군웅들은 눈을 크게 떴다. 계도가 그의 정수리와 어깨에 떨어졌는데도 움직이지 않았 던 것이다. "억!" "허억!" 비명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차차창! 쩡! 뒤이어 요란한 금속음이 울렸다. 군웅들은 무엇이 어찌된 것인지 보지 못했다. 그저 계도와 선장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만 보았 을 뿐이었다. 잠시 후 드러난 목대 위의 풍경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십팔나 한진은 완전히 와해되어 있었다. 뇌천의는 처음 그 자세 그대로였 으나 십팔나한승은 넋을 잃은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계도와 선장은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저... 저럴 수가!" "신기(神技)다!" 군웅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뇌천의는 신형을 가볍게 날려 문루 앞에 떨어진 후 거침없이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중년서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급히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은 후 한 무사에게 건네주었다. "빨리 통보해라!" 무사는 종이를 받자마자 문 안으로 달려갔다. 서사가 종이에 적은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요주의(要注意) 인물 출현. 내력:미상. 성명:천풍거사(天風居士). 뇌천의(雷天意). 방문목적: 알 수 없음. 서사는 눈을 가늘게 하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너희들이 좋은 뜻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살아서는 영원히 본보를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서사는 몸을 돌렸다. 방문객들은 여전히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줄을 서서 한시라도 빨리 천상보에 들어가려고 다툼을 벌 일 지경이었다. 천상보의 규모는 방대했다. 또한 가히 황금성(黃金城)이라 불릴 정도로 호화로운 구조물로 이 루어져 있었다. 처마를 맞대고 있는 고루거각(高樓巨閣)이며 금전옥루(金殿玉樓) 는 물론이려니와 곳곳에 인공호수와 가산(假山)이 배치되어 있었 으며 백화가 만발한 화원(花園)만 해도 수십 개가 넘었다. 단 한 채의 건물도 그 위치와 축조에 세심한 신경을 썼으며 전체 적으로도 완벽한 구도로 배치되어 건물 자체만으로도 억만금의 가 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보 밖의 들뜬 분위기와 달리 정작 보 안으로 들어서면 뜻 밖에도 조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금색 배첩을 받고 초청된 군웅들이 특별히 마련된 객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이한 것은 천여 명에 달하는 초대받은 군웅들의 숙소가 한 곳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각각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 은 서로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밤이 되었다. 편월(片月)은 천상보의 곳곳을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물들였다. 낮동안의 떠들썩한 공기가 가라앉고 적막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 다. 객관의 한 방. 뇌천의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상념에 잠겨 있었다. '천풍거사가 어떻게 내 정체를 알았을까?' 그가 기거하고 있는 객관은 삼층의 누각으로 특별히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머물고 있는 손님은 오직 그와 천 풍거사밖에 없었다. 자연히 객관의 분위기는 적막할 수밖에 없었다. 잔치집에 초대된 것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스산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누각에는 두 명의 시녀가 시중을 들 뿐, 오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처음 만난 내게 검천령의 일을 묻다니... 마치 나의 행적을 손바 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객관에서 천풍거사를 만났을 때였다. 그는 키득거리며 그에게 접 근해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뇌천의는 그에 대한 의혹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쨌든 머지 않아 본색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보다는 다른 일이 우선이다.' 휙! 그는 신형을 날렸다. 창문을 통해 그는 한 가닥 연기가 되어 어딘 가로 날아갔다. 내성(內城). 그곳은 천상보주를 비롯하여 요인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한 가닥 흐릿한 인영이 내성으로 스며들었다. 내성의 경비는 삼엄했다. 보보마다 살기가 느껴지고 곳곳에 매복 과 초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영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내성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무영무풍공(無影無風空). 흔적을 남기지 않는 무림 최고의 경공술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인영은 한 건물의 처마 밑에서 멈추었다. 뇌천의였다. 그는 박쥐처럼 처마 밑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방안에서 흘러나 오는 소리를 청취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기이하게도 그것은 한어(漢語)가 아니었다. 뇌천의는 의혹을 느꼈 다. '내성에 이방인들이 이렇게 많다니?' 그는 이곳에 오기 전 내성을 한 바퀴 돌며 관찰했다. 그러는 사이 에 뜻밖의 일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성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 부분이 한인(漢人)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천축어(天竺語)에서 남만어(南蠻語), 심지어는 동영어(東瀛語)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틀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변방 각국의 인물들 이 모인 것이다. '알 수가 없군. 대체 생일 잔치에 이렇게 많은 변방인들을 초대하 다니.......' 이때였다. 한 가닥 탁성이 그의 귓전에 울렸다. (홀흘, 저들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나?) "......!" 뇌천의는 하마터면 처마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만큼 놀랐던 것이 다. '천풍거사!' 방금 전 귓전에 울린 음성이야말로 정체불명의 거지 노인이었다. 다시 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찾을 것 없네. 노부는 자네와 십장이나 떨어진 안전한 곳에 숨어 있으니 말야. 헤헷.... 그러고 보니 자네의 경공도 꽤 쓸만하더 군.) 뇌천의는 역시 전음으로 물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킬킬, 천풍거사라 하지 않았느냐?) (음.) 뇌천의는 더 물어야 소용없다는 것을 느꼈다. 다시 천풍거사의 전 음이 들려왔다. (이보게. 지금 천상보는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네. 생일잔치를 빙자하여 전무림을 장악하겠다는 악랄한 흉계를 꾸미고 있단 말일 세.) 뇌천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후후, 사마신무는 중원정복을 위해 벌써 오래 전부터 야심을 키 워왔지. 그는 이미 소림을 위시한 구파일방을 암중에 장악했을 뿐 아니라 새외세력까지도 끌어 들였네. 이곳에 상주하고 있는 저들 이 바로 그들이라네.) 뇌천의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네가 본 바 있는 변방인들이 누군지 아나? 바로 변황팔절(邊荒 八絶)이라네.) (......!) 뇌천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변황팔절이라고?' 변황팔절.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중원을 노리던 새외의 팔대세력을 말한다. 축융포찰, 천광사를 포함하는 천축 양대사찰을 위시하여 묘강(苗 疆)의 만독사태청(萬毒邪太廳), 장백(長白) 구월마궁(九月魔宮), 동영(東瀛) 동방회(東方會), 일명 사해삼도(死海三島)라 불리는 잔월망혈도(殘月亡血島)와 십이군마도(十二群魔島), 환상금천도 (幻像禁天島)가 바로 변황팔절이었다. 그들은 기름진 중원땅에 군침을 삼키며 야망을 키워온 변방의 무 림세력들이었다. 뇌천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오랑캐들을 끌어들이다니.' 천풍거사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흘흘! 오늘은 이쯤 해두세. 너무 시간을 끌면 의심을 살 테니 말 이야. 아직 생일연회까지는 사흘이 남았으니 그 안에 더욱 재미있 는 일이 벌어진 걸세. 흘흘흘.......) 뇌천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번뜩였다. 본래 그는 사마신무의 생일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그가 항주의 백화군방원을 떠나 이곳에 온 것은 달리 목적이 있어서였다. 그것 은 사대살종의 하나인 복수회(復讐會)를 포섭하기 위함이었다. 본래 복수회의 본거지는 망산(邙山)이다. 그러나 몽예로부터 복수 회주와 주력인물들이 은밀히 천상보로 떠났다는 정보를 듣고 이곳 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일은 엉뚱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중원정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흑도든 백도든 모두가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흑백을 떠나서 그도 무림인이었다. 때문에 사마신무의 비 열한 행위에 대해 분노를 느끼게 된 것이었다. (흘흘! 무얼 생각하시나, 대살종 나으리?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 게. 하지만 한 가지는 조심하는 게 좋을걸? 누구나 꽃을 좋아하겠 지만 아름다운 꽃일수록 독가시가 날카롭다네. 특히 이곳에는 독 을 품은 꽃이 유난히 많다네. 그 중에서도 특히 헤헤....... 한 송이 꽃을 조심하게. 사람들은 그 꽃을 이렇게 부르지, 사란(思 蘭)이라고.) 뇌천의는 흠칫했다. '사란?' 그는 천풍거사의 말뜻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뭐라 물어보려 했을 때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천풍거사가 십장 밖 교목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괴인이다. 비록 거지 행색을 하고 있지만 역시 고수가 틀림없 다.' 뇌천의는 천풍거사의 충고를 듣기로 했다. 아직 생일까지는 삼 일이 남아 있으므로 좀더 사태가 진전되는 것 을 보는 것이 옳을 듯했다. 그는 오늘밤 일어난 일들에 대해 냉정한 마음으로 분석을 해 보았 다. 그 결과 그는 놀라운 예감이 들었다. '만일 변황팔절이 사마신무에게 포섭되었다면 이번 연회는 축제가 아니라 일종의 소혼연(消魂宴)이 될 지도 모르겠구나.' 뇌천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훗!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하지만 사마신무란 자는 정 말 마음에 들지 않는군.' 슷! 그는 한 가닥 연기가 되어 날아갔다. ■ 무림백서 1권 제10장 을지사란(乙支思蘭) ━━━━━━━━━━━━━━━━━━━━━━━━━━━━━━━━━━━ 따뜻한 욕조 속에 누우니 근육이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시비가 목 욕물을 데워놓았다고 말했을 때는 별로 목욕할 생각이 나지 않았 었다. 그러나 마음을 돌려 목욕을 하기로 했다. 그는 호굴에 들어온 셈 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긴장하는 것은 상황대처에 도움이 되지 않 는다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음, 날아갈 것 같군.' 뇌천의는 욕조 속에 누운 채 느긋한 기분을 즐겼다. 복잡했던 심 사마저 한가하게 풀어지는 듯했다. 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비웠다. 그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들어섰다. 그는 당 황을 금치 못했다. 여인은 바로 그의 시중을 드는 모화(母花)라는 시비였던 것이다. "모화예요. 등을 밀어드리려고요." 모화는 욕조에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며 대담하게 말했다. 뇌천의는 흠칫했다.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모화가 옷을 벗었기 때문이었다. 모화는 한겹의 홑옷만 입고 있었다. 허리띠를 풀자 그대로 알몸이 나타난 것이다. "......!"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두 개의 젖가슴은 익을 대로 익어 터질 듯이 팽팽하게 솟아나 있 었다. 피부는 기름을 바른 듯 반들거렸고, 아랫배에는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쭉 빠진 몸매였다. 게다가 배꼽 아래에는 무성한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그야말로 사내의 혼백을 앗아갈 정도로 완 숙한 육체였다. 뇌천의는 너무나 놀라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모화는 교태로운 미 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나으리,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뇌천의의 뇌리에 번뜩 천풍거사의 충고가 떠올랐다. - 꽃을 조심하게, 독가시가 있으니까 말야. 헤헤헷......! '미인계?' 뇌천의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느긋이 욕조 속에 드러누 우며 말했다. "모화, 천상보는 지나치게 친절하군. 모든 손님들에게 이렇게 접 대하나?" 모화는 미끈한 다리를 들어 욕조 속에 담그었다. 그 바람에 그녀 의 모든 것이 훤히 눈앞에 드러났다. 아찔한 풍경이었다. "후훗, 천상보는 귀빈 접대에 소홀하지 않지만 이번만은 특별 대 우랍니다." "특별 대우?" "나으리는 특별한 손님이니까요." 뇌천의는 눈앞에서 출렁이는 풍만한 젖가슴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 게 떴다. "어째서 내가 특별하다는 거지?" "나으리께선 실력으로 귀빈 자격을 얻으셨으니까요." "후후, 그럼 특별 감시대상이라 이거군?" "아이, 무슨 그런 말씀을......." 모화는 그의 등뒤로 돌아갔다. 솜같이 부드러운 손이 그의 등을 가볍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 뇌천의는 혈관의 흐름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고소를 금치 못했 다. '이건 등을 미는 것이 아니라 애무하는 것이군.' 모화는 상체를 그의 등에 밀착시키고 있었다. 터질 듯이 부푼 젖 가슴으로 그의 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동시에 손으로는 그의 전신 을 어루만졌다. 뇌천의는 눈을 감은 채 몸을 내맡겼다. "흠, 시원하군." "호호, 다행이에요." 모화의 손길은 차츰 대담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어깨나 팔 을 문지르더니 가슴으로, 그리고 탄탄한 아랫배로 내려오고 있었 다. 모화는 겉보기엔 천진무구한 소녀처럼 보였으나 그녀의 몸매나 행 동은 대담무쌍했다. 뇌천의가 몸을 맡기자 그녀의 행동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뇌천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등뒤로 모화의 나긋나긋 하며 뭉클한 육체를 느끼면서도 눈을 감은 채 편히 누워있을 뿐이 었다. 잠시 후 그는 모화의 호흡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귓전에 부어지는 호흡이 뜨겁게 느껴졌다. 모화의 손이 아랫배로 내려가 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망설이는 듯 하더니 사나이의 상징을 가 볍게 움켜쥐었다. "아!" 모화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듯했다. "됐다, 모화." 쏴아! 물방울이 치솟아 올랐다. 뇌천의가 몸을 일으킨 것이다. 모화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좀더 안 하시고요?" 뇌천의는 히죽 웃었다. "널 생각해서다, 모화." "네?" "하하! 네 몸이 불덩이다. 그러다가 타버릴까 두렵다." "어머!" 모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뇌천의가 욕조를 빠져나가자 그녀는 얼른 준비한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물기를 닦는 모화의 표정은 무엇에 홀린 듯했다. 단단하게 근육만 으로 뭉쳐진 듯한 뇌천의의 나신은 가히 철나한과도 같았다. 그는 다리를 벌린 채 우뚝 서서 그녀의 시중을 받았다.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어색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모습이 더 욱 모화를 매료시켰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마지막으로 뇌천의의 발까지 정성껏 물기를 닦아 주었다. 이윽고 물기가 다 닦이자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한숨을 쉬었다.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뇌천의는 그녀의 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다. "왜 한숨을 쉬느냐?" 모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떤 여인이 나으리를 모실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여인은 정말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후후, 과연 그럴까?" 뇌천의는 옷을 찾았다. 그의 옷은 흑삼이었다. 그러나 흑삼 대신 모화가 한 벌의 남삼을 두 손으로 바쳤다. "내 옷이 아닌데?" "입으세요. 맞을지 모르지만요." 뇌천의는 약간 망설였다. 그는 줄곧 흑삼만을 입고 있었다. 특별 한 이유는 없었으나 검은 옷이 무난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남삼을 바치고 있는 모화를 바라보았다. 아직 옷을 입지 않 아 알몸인 그녀의 모습이 왠지 애처롭게 느껴졌다. "고맙다. 모화." 그가 팔을 벌리자 모화는 남삼을 입혀 주었다. 옷을 입혀주는 그 녀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옷을 모두 입자 그녀는 뒤로 돌아갔다. "소비가 머리를 손질해 드리겠어요." "......." 뇌천의는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을 통해 여전히 알몸인 모화의 모습이 보였다. 만일 그의 정력이 굳건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유혹 을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육감적인 몸이었다. 모화는 그의 머리를 빗질했다. 그녀의 표정은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빗질하여 가지런해진 머리칼을 역시 남색의 비 단끈으로 묶었다. "아......!" 머리 손질이 끝나자 그녀는 눈부신 듯한 시선으로 뇌천의를 바라 보았다. 흑삼을 입었을 때 뇌천의는 다소 음침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남삼 으로 바꿔입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풍류가 넘치는 귀공자 로 변해버린 것이다. "아아, 나으리." 마침내 모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저는... 아직 처녀예요." 모화는 그의 목에 매달렸다. 뇌천의는 곤혹을 느꼈다. 그는 비록 여색을 멀리하는 사람은 아니 었으나 그렇다고 무분별한 사람은 더욱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은 적지(敵地)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몸의 여인 이 매달리니 그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모화의 등을 쓰다듬었다. 매끄럽고 뜨거운 피 부가 손바닥에 달라붙는 듯했다. "안아줘요, 나으리......." 모화는 신음을 발하며 더욱 파고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당탕! 이층의 계단으로부터 갑자기 소음이 들려왔다. "아악!" 뒤이어 들린 것은 여인의 뾰족한 비명이었다. 철썩! 철썩! 무엇을 후려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천풍거사의 걸걸한 웃음소리가 났다. "헤헤헷! 이 어르신은 계집 볼기치는 것이 취미란 말씀이야. 헤 헷!" 찰싹! "아얏! 아얏! 제발 그만해요, 나리!" 여인의 비명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볼기치는 소리는 쉬지 않고 들렸다. 우당탕! 쿵탕! 계단에 무엇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마침 뇌천의가 있는 곳으로 알몸의 여인이 구르다시피 도망쳐 내려왔다. 그녀의 이름은 홍아(紅兒)였다. 객관에서 천풍거사의 시중을 맡고 있는 시비였다. "어머머.... 호호홋!" 홍아는 엉덩이에 손바닥 도장이 벌겋게 찍힌 채 양탄자가 깔려 있 는 거실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 광경에 모화는 그만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으흑흑!" 홍아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뛰쳐나 갔다. 그녀의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묘한 느낌을 주었다. 뇌천의는 혀를 찼다. "쯧쯧, 임자를 잘못 만났군." 그는 몸을 돌리며 모화에게 말했다. "모화, 밤이 깊었다. 이만 자야겠다." 그는 침실로 걸어갔다. "나으리......." 모화는 부풀어진 기대가 무산되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뇌천의는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난 고약한 잠버릇이 있어서 말이야." "그... 그게 뭔가요?" 모화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후후! 곁에 있는 사람을 물어뜯는 습관이 있거든. 그래도 좋다면 함께 자도 좋다." "......!" 모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주... 주무세요." 그녀는 금방 시무룩해 지더니 자신의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하하하......!" 뇌천의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 유월 사일. 생일 연회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뇌천의는 천상보에 든 군웅들을 나름대로 분류했다. 그들은 크게 나누어 네 부류에 속했다. '가장 인원이 많은 것은 정도십팔련(正道十八聯)이다. 그들은 약 사백 명 정도다. 다음은 구파일방으로 장문인을 비롯하여 장로급 인물까지 대략 삼백 명 정도가 된다. 문제는 이백여 명의 인물들 이다. 그들은 어쩌면 연회의 불씨가 될 것이다. 대부분이 강북무 림에 속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회에서 금화태세의 죽음에 대해 사마신무를 추궁할 것이다. 그 밖에 나머지 일백여 명의 인물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이다.' 결국 하객들은 천여 명에 달했다. 그들은 각각 분산 수용되어 있어 서로의 동태를 알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낮 동안에는 비교적 자유스럽게 왕래할 수 있었다. 뇌천의는 며칠 사이에 군웅들 가운데서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 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강북무림에 속한 군웅들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 그들은 강 북무림이 정신적 지주였던 엽무웅의 죽음으로 사마신무를 향한 복 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반면 구파일방은 조용했다. 정사십팔련의 인물들도 중립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 사이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 천상보주는 이번 연회를 통해 중대한 발표를 할 것이다. - 그 분은 무림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중대선언을 하실 것이다. 어떤 근거로 그런 소문이 도는 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소문은 차 츰 기정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한 생일연회라면 굳이 강남북의 무림인을 망 라하여 초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어쨌든 군웅들은 막연한 가운데 생일날이 오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대감 속에는 한 가닥 불길한 심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강북무림도의 군웅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호전적 (好戰的)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북빈관(北賓館). 천상보의 동서남북 사대빈관 중의 하나로 강북무림도 군웅들이 기 거하는 곳이었다. 지금 북빈관의 대청에는 이백여 명에 달하는 군웅들이 격앙된 표 정으로 모여 있었다. 상석(上席)에는 사 인의 인물이 있었다. 금화태세의 죽음 이후로 사실상 강북무림을 영도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중앙에 앉아있는 금포(金袍)를 걸친 칠순 가량의 청수한 노인은 황경(皇京) 일대에서 명망을 날리고 있는 명숙이었다. 그의 뒤에는 두 명의 동자가 길이 일 장여에 달하는 황색 수실이 달려있는 금창(金槍)을 받쳐들고 있었다. 무적진구주금창신협(無敵震九州金槍神俠) 여사성(呂査星). 긴 별호를 가지고 있는 그는 사실상 강북무림의 제일인자였다. 그가 쓰는 무적금창으로 무림을 위진시킨 바 있었다. 또한 그는 특수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는데 황실(皇室)의 어영금위군의 무태 감을 역임한 적이 있었다. 여사성은 금화태세 엽무웅의 장인이기도 했다. 일찌감치 죽긴 했 지만 엽무웅의 아내 여진진(呂眞眞)은 그의 딸이었던 것이다. 엽무웅의 죽음에 그가 격노하여 노령에도 마다하지 않고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밖에도 상석에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았다. 낙성추혼신군(落星追魂神君) 군유명(君有命). 신도묵궁(神刀墨弓) 탄금부(彈金負). 금강존자(金剛尊子). 그들은 한결같이 쟁쟁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표정은 분노로 인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적진구주금창신협 여사성은 흰 수염을 푸르르 떨며 입을 열었 다. "북무림도의 제위 여러분! 이 늙은이는 이번 사안에 처음부터 성 의를 다하였소. 백도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여러 차례 천상보주 에게 노부의 사위인 엽보주의 죽음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소." "......." 군웅들은 일제히 그를 주시했다. "하지만 번번이 대답은 같았소. 그놈은 도리어 엽보주가 무림정복 의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응징을 했다고 모함하는 것이었소이다." 군웅들은 일제히 야유의 함성을 질렀다. "터무니없는 소리요!" "감히 그런 모함을 하다니......!" 여사성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놈은 일말의 증거도 없이 엽보주를 모함하는 것이었소. 그래서 노부는 수 차례에 걸쳐 놈의 명확한 해명을 요구했지만 결과는 마 찬가지였소. 급기야 놈은 노부에게 이번 연회의 초대장을 보내며 이런 통고를 했소이다. 그것은 모든 흑백을 천상보에서 가리겠다 는 것이었소. 아니, 그뿐아니라 이 자리에서 엽보주의 음모를 밝 히고 그 주모자들을 처벌하겠다는 것이오." "우우......!" "천인공노할 놈!" "참을 수 없소이다!" 군웅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헛헛......! 놈은 우리 북무림을 얕보고 힘으로 누르려 함이 분 명하오. 허허....... 결국 이 늙은이는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내 걸기로 했소이다. 만일 목숨이 아까운 제위들이 있다면 여기서 빠 지셔도 좋소이다. 하지만 노부는 늙은 뼈를 이곳에 파묻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엽보주의 원수를 갚고야 말 것이오." 여사성의 격앙된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대협!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이미 생사를 도외시했기 때문입 니다!" 군웅들은 주먹을 움켜쥐며 분노의 외침을 발했다. 이때였다. 어디 선가 괴소가 들려왔다. "흘흘흘! 의기 하나는 가상타만 부질없는 짓! 사마신무가 그렇게 어리석다면 어찌 천상보가 천하제일보가 될 리가 있는가? 흘흘... 필부의 만용이라니까. 쯧쯧!" "......!" 군웅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구석진 곳에서 남루를 걸친 거지 노인이 닭다리를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그는 바로 천풍거사였다. 군웅들은 그의 말에 격분을 금치 못했다. 천풍거사는 여전히 태연 하기만 했다. "홀홀! 호랑이 굴에 들어와서도 정신을 못 차리니... 쯧쯧! 앞날 이 훤하다, 훤해!" "뭣이!" 군웅들은 눈에 불똥이 튈 지경이었다. 천풍거사의 말은 그야말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마침내 누군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섰다. "늙은이! 입 닥치지 못하면 이 대력거웅(大力巨熊)이 네놈의 아가 리를 찢어주마!" 키가 팔척이 넘는 거한이 벌떡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천풍거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강북무림 도상에서 꽤 이름난 인물이었다. 천풍거사는 그를 힐끗 보더니 도리어 독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끌끌! 너같은 곰이 있기에 사마신무는 손 하나 까딱 않고 북무림 을 주무르려 하느니라. 쯧쯧!" "뭣이 이... 이... 영감탱이가?" 위-- 잉! 대력거웅은 솥뚜껑 만한 손바닥을 쓸어쳤다. 태산같은 장경이 천 풍거사를 후려쳐갔다. "아이쿠! 이놈이 조상 잡네!" 천풍거사는 짐짓 멱따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앞으로 숙였다. 퍽! "으윽!" 비명이 터졌다. 군웅들은 천풍거사가 뻗어 버렸으려니 생각하고 내심 고소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비명을 발한 것은 그가 아니 라 대력거웅이었다. 천풍거사가 머리로 그의 가슴을 받아버린 것이었다. 쿵! 바닥이 진동했다. 대력거웅은 어이없게도 벌렁 큰 대자로 뻗어버 린 것이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군웅들은 벌떡벌떡 일어섰다. "아니 저 영감이?"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천풍거사는 대소를 터뜨렸다. "껄껄껄! 힘이 있다면 아껴뒀다 사마신무의 오랑캐 친구들에게나 쓰게. 흘흘!" 천풍거사는 의미심장한 소리를 남긴 후 비틀하는 듯하더니 눈 깜 짝할 사이에 군웅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저... 저......." 군웅들은 신형을 날리려 했다. "여러분, 잠깐만." 여사성이 급히 군웅들을 제지시켰다. 그의 노안에는 기이함이 어 려 있었다. "내버려두시오. 그는 우리의 적이 아니오. 그가 한 말을 새겨 들 을 필요가 있는 것 같소이다." "......?" 군웅들은 모두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북빈관에서 이런 일이 있을 즈음이었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날 만나겠다는 거냐?" 침실로 들어온 모화의 모습은 정숙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공손히 말했다. "그건 만나보시면 아실 거예요." 뇌천의는 내심 중얼거렸다. '흠, 하긴 만나면 알겠지.' "아가씨께서는 나으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셔요. 어쩌면 나리께 큰 행웅이 올지도 몰라요." 뇌천의는 짐짓 눈썹을 찡그렸다. "행운이라니?" 모화는 야릇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지금까지 어떤 남자에게도 관심을 보이신 적이 없 어요. 물론 직접 남자를 초청하신 일도 없어요. 나리께서는 아가 씨의 관심을 끈 첫 남자예요." "후후, 그게 사실이라면 영광이겠군." 뇌천의는 짐짓 기대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천상보의 여상귀재(女商鬼才)가 우내제일미란 소 문은 귀가 따갑게 들었다. 후후, 그녀가 내게 관심이 없다해도 나 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지." 여상귀재(女商鬼才). 무림인, 특히 강남도상에서 활동하는 무림인이라면 그 이름을 모 르는 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상보가 천하제일의 부를 축적하게 된 이면에는 천수여래(千手如 來) 사마신무의 탁월한 상술 외에도 한 여인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고 한다. 여상귀재, 그 이름이 말하듯 그녀는 타고난 상술의 귀재다. 사실 천상보의 막대한 금력과 상권을 지배하고 있는 조직은 모두가 그 녀의 두뇌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나이 불과 십이 세때부터 천상보의 상권을 지 휘했다는 것이다. 그 점만 보더라도 타고난 기녀임이 분명했다.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은 신비에 싸여 있었다. 본시 사마신무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딸이 있을 리 없었 다. 그녀는 사마신무의 양녀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 한 가지 그녀에 관해 알려진 것은 그녀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라는 사실뿐이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한 채의 전각. 내성에 있는 전각은 다른 전각에 비해 검박한 느낌을 주었다. 내 부 장식도 단순하면서도 정갈함이 느껴졌다. 뇌천의는 모화의 안내를 받아 이곳으로 따라왔다. 전각 안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천상보의 상권을 지휘하는 여인이라면 거처가 화려할 줄 알았는 데 뜻밖이로군.' 그는 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 철제로 된 의자 하나가 있었 고, 그가 서 있는 정면에 휘장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실로 삭막하기 그지없는 정경이었다. 휘장 안에서는 밖을 볼 수가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뇌천의는 희미한 그림자만으로 휘장 속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 뇌천의는 휘장 안의 인물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휘장 안의 인물이 섬세한 윤곽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 여 인이라고 생각했다. '흠, 여인이로군. 저 여인이 여상귀재란 말인가?'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모화는 그를 이곳까지 안내한 후 나가버렸기 때문에 그는 휘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휘장 속에서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 으므로 지루한 침묵이 이어졌다. 뇌천의는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먼저 열었다. "험! 언제까지 날 세워둘 셈이오?" 휘장 속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옥음(玉音)이 흘러나왔다. "그렇군요. 귀한 손님이신데 접대가 소홀했군요." 뇌천의는 내심 중얼거렸다. '음성으로 미루어 나이가 많지는 않겠군.' 그는 짐짓 무뚝뚝하게 말했다. "본인이 누군지는 아실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 는 것은 손님을 맞이하는 예가 아닌 줄 아오만?" 휘장 속에서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겠지요. 그것도 시인하겠어요. 소녀는 을지사란(乙支思蘭)이 라고 해요." '사란!' 뇌천의는 흠칫했다. 천풍거사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송이 꽃을 조심하게, 그 꽃의 이름은 사 란....... 뇌천의는 히죽 웃었다. "후훗, 아름다운 이름이오. 하지만 얼굴도 이름만큼 아름다울지 모르겠구려?" 을지사란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호호! 뇌소협의 높은 눈에 들 수 있을지 두렵군요. 소녀는 자 신이 없습니다." 뇌천의는 방안을 둘러보다 가운데 놓여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 다. "저 의자는 설마 장식용은 아니겠지요? 계속 서 있어야 한다면 나 는 돌아가겠소." "아... 깜빡 잊었어요. 뇌소협, 앉으세요." 뇌천의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휘장을 바라보며 불만을 감추지 않 았다. "실로 유감이구려. 본인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건만 을지낭자는 어 째서 본신을 감추는 것이오? 혹시 남에게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하기라도 한 것이오?" 뇌천의는 일부러 자극적인 말을 던졌다. 휘장 안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뇌천의는 지루함을 느꼈다. 그때 을지사란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인에게 있어 용모란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요?" 뇌천의의 얼굴에 기소가 번졌다. "후훗! 그렇게 묻는 낭자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만일 내가 이런 얼굴이라면 말이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 문질렀다. 손을 내리자 그의 얼굴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눈썹은 성기고 얼굴 피부는 곰보였으며, 코는 벌렁 뒤집혀져 하늘을 향하고 있었 다. 실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추악한 얼굴이었다. "아......!" 휘장 속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군요, 이제야 깨달았어요. 사람의 얼굴이 얼마나 중요한 것 인지를 말이에요. 뇌소협이 만약 그런 얼굴이었다면 정말 가까이 하고 싶지가 않겠군요." 뇌천의는 빙긋이 웃었다. "낭자의 얼굴이 그렇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오." 을지사란은 비꼬듯 말했다. "뇌소협은 격장계를 쓰는군요?" "하하핫! 미녀를 좋아하는 것은 영웅의 본색이거늘 흉이 될 이유 가 있겠소?" "솔직하시군요." "나는 언제나 솔직하오." "그렇다면 우리 더욱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좋소." "이곳에는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죠?" 뇌천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일감을 찾으러 왔소." "일감?" "청부를 말하는 것이오." "......!" 일순 휘장이 가볍게 흔들렸다. 잠시 후 을지사란은 떨리는 음성으 로 물었다. "뇌소협은 살종에 속한 분인가요?" 뇌천의는 담담히 말했다. "그렇소. 얼마 전 낭자의 양부와 거래한 적이 있었소." "그럼 당신은... 대살종!" 을지사란의 음성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뇌천의는 기소를 흘렸 다. "후후, 이번에는 더욱 많은 일감이 있을 것 같아 자진하여 고객을 찾아온 것이오." "대단.... 하군요." "후후, 대살종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소." 뇌천의는 결심했다. 그것은 정면으로 부딪친다는 것이었다. 어차 피 호굴에 들어온 이상 지리적인 불리함을 안아야 했다. 그렇다면 정정당당히 부딪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었다. 더구나 큰 고기를 낚기 위해선 그만큼 큰 미끼가 필요하다. 그래 서 대담하게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킨 것이었다. 휘장 속에서 을지사란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죠?" "대살종." 을지사란은 싸늘하게 말했다. "거짓말! 사대살종 중에서 당신같은 인물을 키워낼만한 자는 없어 요." "후후,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좋아요. 그럼 어떤 일이든 청부할 수 있나요?" "대살종은 종류를 가리지 않소." "대가는?" "청부 내용과 대상에 따라 다르오." 을지사란의 음성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래요? 호호, 그렇다면 우리는 좀더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 같 군요. 사실 뇌소협을 부른 것은 한 가지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였 어요." 뇌천의는 빙긋 웃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적이냐 아군이냐를 결정지으려는 것이 아니 겠소?" "호호! 정말 노골적이시군요. 그렇다고 해두죠. 하지만 이젠 근심 할 필요가 없겠군요." 뇌천의는 어조를 바꾸었다. "낙관은 금물이오." "......?" "나는 방식을 바꾸겠소. 이번 청부는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오. 따 라서 그 값도 달라질 것이오." 을지사란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청부 내용을 말하지도 않았어요." "후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소." "......?" "이번 연회는 소혼연이 될 것이오. 사마신무는 자신의 야심을 이 번 기회에 이룩하려 들 것이오. 때문에 방해자들을 제거할 것이 오. 그래야 다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겠소?" 을지사란은 가볍게 탄성을 발했다. "정말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군요. 어젯밤 이곳에 들어왔 을 때 당신을 붙들어두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는군요." 뇌천의는 가슴이 섬뜩했다. '이제 보니 나의 행동을 훤히 알고 있었군.' "하지만 뇌소협,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은 가요?" "아마 그럴 것이오." "어떤 대가를 요구할 건가요?" 뇌천의는 휘장 속을 주시하며 낭랑하게 말했다. "보수는 상대적이오. 하지만 그 전에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할 것 같소." "......?" 뇌천의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내게는 원칙이 있소. 그것은 청부자가 자신의 신분을 감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오. 먼저 낭자의 얼굴을 보여 주시오." 휘장 속에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대화는 어색하게 끊어졌다. "후후, 싫다면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오." 뇌천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래가 없다면 이 자리에 있을 필요도 없을 것이고." 휘장 속에서 날카로운 반응이 있었다. "건방지군요, 대살종!" 을지사란의 음성에는 살기가 느껴졌다. "후훗, 난 두 말 하는 사람이 아니오. 뜻이 다르면 길도 다르오." 을지사란의 음성은 더욱 차가와졌다. "자신만만하군요. 하지만 계속 큰소리칠 수 있을까요?" 철컥! 철컥!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의자에서 쇠고리가 튀어나와 뇌천의의 양 발목을 묶었다. 뿐만 아니라 막 일어섰던 그의 허리까지도 금속 띠가 뻗어나와 단단히 채워버렸다. 그는 한순간에 영어의 몸이 되고만 것이다. 뇌천의는 가슴이 섬뜩했다. 그의 발목과 허리를 채운 것은 보통 쇠가 아니었다. 그것은 만년오금철로 제련한 것으로 천하의 보검 이 아니면 절단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의자에 서서히 앉았다. 급변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색 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기왕이면 팔도 묶는 것이 좋을 것이오." "호호! 물론이에요." 철컥! 의자 손잡이에서 쇠고리가 튀어나와 그의 두 손목마저 채워버렸 다. 뇌천의는 손을 움직여 보았다. 역시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고 개 들어 휘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낭자는 단순하구려." "흥!" "이따위 기관장치로 날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런 단순한 생 각을 하다니 몹시 귀엽구려." 을지사란은 냉소를 보냈다. "소녀는 당신의 뼈와 살이 강철보다 강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뇌천의의 입가에 괴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정말 그럴까?" 쩡! 쩡! 갑자기 날카로운 쇳소리가 일어나더니 손목을 채운 고리가 토막토 막 끊겨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 을지사란의 경악성이 들렸다. 뇌천의는 태연히 몸을 일으키며 말 했다. "낭자, 잘 알아두시오. 이런 것은 내게는 썩은 새끼줄에 불과하다 는 것을 말이오." 그는 히죽 웃었다. 지금 그는 내심 몽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었 다. '고맙군, 몽예. 그대가 선물한 묵아의 덕을 크게 보았소.' 과연 고리를 끊어낸 것은 순전히 묵아의 힘이었다. 묵아는 손목에 채워져 있었는데 그것을 검으로 환신하자 고리가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진 것이었다. 뇌천의는 가슴을 쭉 펴며 휘장 속을 노려보았다. "낭자, 나는 단순한 사람이오. 받은 빚은 반드시 돌려주는 사람이 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번-- 쩍! 한 가닥 묵광이 섬광처럼 뻗었다. "으아악!" 거의 동시에 네 마디의 비명이 연속 일어났다. 쿵! 천장이 쫙 갈라지며 한 흑의인이 두 동강이가 난 채 바닥으로 떨 어졌다. 그 뿐이 아니었다. 좌우와 후면의 벽에서 핏물이 치솟으 며 흑의인이 벽면에서 분리되어 쓰러졌다. 그들은 교묘하게 은형술로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토막난 시신 으로부터 역한 피비린내만이 풍기고 있었다. 휘장이 가볍게 흔들렸다. "호호호호......." 을지사란의 웃음소리가 길게 이어지다가 멎었다. 그녀의 음성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달콤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뇌소협, 당신은 정말 강하군요. 이 사란의 생각보다 몇 배나 더 말이에요. 사란은 강자를 좋아하죠." 뇌천의는 빙긋 웃었다. "현명한 생각이오." 그는 뚜벅뚜벅 휘장을 향해 걸어가더니 거침없이 휘장을 걷어버렸 다. 휘장이 젖혀지자 그 속에 자색 나삼을 입은 한 여인의 모습이 나 타났다. 그녀는 의자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대한 순간 뇌천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그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미녀들을 보아왔다. 야생화처럼 싱싱한 매력을 발산하던 무화, 섬화 자매를 위시하여 한 떨기 작약같은 여인 몽예도 천하의 절색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가 개성적인 미색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은 그녀들과 비견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을지사란은 마치 난(蘭)을 연상케 했다. 청초하면서도 고아한 품격이 느껴졌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내재된 아름다움! 그것은 표면적으로만 드러나는 미와는 근본적으로 달랐 다. 그녀는 내면미(內面美)를 느끼게 하는 여인이었다. 피부는 희다 못해 투명했으며 눈동자는 한없이 빠져들 것 같은 깊 이를 지니고 있었다. 부드러운 수발은 어깨를 덮고 허리까지 치렁 치렁 흘러내렸으며 나이는 이십을 갓 넘은 듯이 보였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무릎에 놓은 채 지혜로운 눈으로 뇌천의를 바 라보았다. 을지사란의 마음도 이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마치 넋을 잃은 듯 서로의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뇌천의는 입을 열었다. "아름답군, 내 생각보다 더욱 말이오. 후후, 나는 아름다운 여자 를 좋아하오." 그는 손을 뻗어 을지사란의 동그란 턱을 받쳐들었다. 뜻밖에도 을 지사란은 별로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당신같은 미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 같군." 그의 태도는 무례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그만이 행할 수 있는 대담함과 정열이 묻어나 있는 행위였다. 을지사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 당신은 겁이 없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였다. 뇌천의의 등뒤에 기척도 없이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머리 에서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다. 심지어는 얼굴도 온통 흑 색이었다. 유령처럼 나타난 그는 뇌천의의 등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뇌천 의는 그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는 듯 을지사란의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당신같은 여자라면 무얼 해도 손해 본다는 생각 따위를 하지 않 을 거야." 그의 모습은 마치 을지사란에게 푹 빠진 듯했다. 을지사란의 눈 속에서 홀연히 득의의 빛이 솟아났다. "후후, 대살종이 천하의 바람둥이라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어 요. 당신은 모든 여자에게 그렇게 말하나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섭섭한 일이지. 나는 오직 미인에게만 관대하 오." "소녀가 그토록 아름답나요?" 을지사란은 속삭이듯 말했다. 이때 흑영은 멈칫하고 있었다. "물론이오. 이런 기분은 처음이오. 당신을 위해서라면 천하의 모 든 고수들을 죽여줄 수도 있소." 뇌천의는 몽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을지사란은 섬섬옥수를 들어올 려 긴 수발을 쓸어 넘겼다. 이때 머뭇거리던 흑영은 갑자기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뇌천의의 눈 속에서 알 수 없는 광채가 솟았다 꺼졌다. '모험이 통했군.' 그는 을지사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엇이라도 좋소. 내게 부탁하시오. 난 오늘부로 사란의 노예가 되겠소." 을지사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지혜로운 눈으로 뇌천 의를 내려보았다. 뇌천의는 부신 듯이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몽롱해 보였다. 을지사란은 뇌천의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당신은 정말 다정다감하신 분이군요. 소녀가 당신을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에요." "사란이 기쁘다면 나도 기쁘오." 뇌천의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바보스럽게 웃기까지 했다. 을지사 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의외야. 대살종에게 이런 약점이 있을 줄은 몰랐어. 호호... 그 렇다면 일이 쉬워지겠군.' 천하의 우물이자 하늘을 덮는 지혜를 지녔다는 여상귀재 을지사 란. 그녀는 발아래 무릎꿇고 있는 사나이를 바라보며 마음이 든든해지 고 있었다. - 2권에 계속 - ■ 무림백서 제2권 - 차 례 - ━━━━━━━━━━━━━━━━━━━━━━━━━━━━━━━━━━━ 제11장 흑사풍(黑死風)의 비밀 제12장 죽음의 도전 제13장 구룡지학(九龍之學)을 얻다 제14장 혈로(血路) 제15장 악마천부(惡魔天府) 제16장 동굴 속의 기연(奇綠) 제17장 영세태평무국(氷世太平武國) 제18장 밝혀진 신세(身世) 제19장 풍운의 자금성(紫禁城) ■ 무림백서 2권 제11장 흑사풍(黑死風)의 비밀 ━━━━━━━━━━━━━━━━━━━━━━━━━━━━━━━━━━━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비밀리에 사 인의 인물을 없애는 일이에 요." 을지사란은 침상에 걸터앉은 채 속삭이듯 말했다. 뇌천의는 그녀 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듣고만 있었다. "현재 북무림을 영도하고 있는 무적진구주금창신협 여사성은 네 명 중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죠. 그 다음은 낙성추혼신군 군유 명, 신도묵궁 탄금부, 금강존자 등이에요. 그들을 거의 같은 시각 에 죽여야만 해요." "......." "당신이 그들을 죽인 직후 본보의 수하들이 그들을 대신할 거예 요." "......." "더 궁금한 게 있나요? 그들의 무공 실력이나 습관 등에 대해서는 정보를 미리 수집해 놓았으니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 어요." 뇌천의는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여전히 그녀만을 바 라보고 있었다. 을지사란은 교소를 흘렸다. "호호, 연회가 무사히 끝나면 당신에게 만족할 만한 대가가 주어 질 거예요." 뇌천의는 고개를 저었다. "대가는 필요 없소, 사란." "그럼?"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오직 그대 뿐이오." "그건......." 을지사란은 그의 노골적인 요구에 얼굴이 붉어지며 할 말을 잃었 다. 뇌천의는 여전히 그녀를 주시하며 말했다. "안심하시오. 나는 꽃을 꺾을 줄만 아는 무뢰한은 아니오. 당신같 은 꽃이라면 스스로 고개를 숙일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소." 을지사란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뇌천의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이죠? 당신은 소녀가 당신을 좋아할 것이 라고 생각하나요?" "틀림없이." 뇌천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당신은 강한 자를 좋아하오. 더구나 당신에게는 야심이 있소. 여 자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말이오. 그 야심을 내가 채워 준다면 당 신은 결국 내게로 오게 될 것이오." 을지사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자신이 있나요?" "후후후! 사란, 당신은 설마 그 변방의 오랑캐 친구들을 믿고 있 는 것은 아니겠지? 그 자들이 당신을 만족시킬 것 같소? 당신의 꿈을 이루어줄 사람은 나뿐이오." "......." "두고보시오. 이 뇌천의는 그 친구들보다 몇 배나 더 당신을 만족 시켜 줄 것이오. 그대가 원하는 모든 것이라면 어떤 일이든 완벽 하게 해 주겠소." 을지사란의 차분하기만 하던 눈동자가 흔들림을 보였다. 한 순간 의지를 잃은 듯이 그녀는 멍하니 뇌천의를 바라보았다. '걸려들었다.' 뇌천의는 싱긋 웃었다. "사란, 당신같은 여인은 천하를 아래로 두어야 만족할 여인이오. 또한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소." "호호! 뇌소협. 당신은 자신을 너무 믿는 것이 아닌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대살종이오. 나 자신 외에는 누구 도 믿지 않소. 내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오." "......." 을지사란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점차 흔들리 고 있었다. '이 사람은 왜 나에게.......' 그녀는 지금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점점 더 뇌천 의에게 빠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가. 여상귀재(女商鬼才) 을지사란. 그녀는 본래 동이(東夷) 출신이었다. 그녀의 성이 을지(乙支)인 것은 그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우연히 사마신무의 눈에 띄었다. 그녀의 총명함에 반한 사마신무는 그녀를 양녀로 삼았다. 그녀는 사마신무의 야망을 알고 있었다. 사마신무는 본래 순수한 한족이 아니다. 그의 부계는 천축출신이 었으며 모계만이 한족이었다. 그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사실 그는 천축 이대사찰 중 하나인 천광사 주지의 아들인 것이 다. 그는 천광사의 대법사 파미야(波彌也)의 아들로 파미야의 음 모에 의해 어릴 적부터 중원에서 살았다. 계획대로 그는 소림에 투신하게 되었고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여 소림의 속가장문인이 되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무려 사십 년 이상이 걸린 음모였다. 결국 그는 중원무림을 정복하겠다는 끈질긴 야망의 화신체인 셈이 었다. 그리고 이제 야망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한편 을지사란은 요즘 들어 고독과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생애는 오직 양부인 사마신무에게 바쳐졌다. 그녀의 삶도, 목적도, 이상도, 심지어는 여인으로서의 앞날까지도 온통 사마신무의 야망에 바쳐져 왔다. 그녀는 사마신무의 충견(忠犬)이어야만 했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 에게 반문해야 할 때가 있었다. '나는 누구지?'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한때 그녀에게도 보랏빛 여심(女心)이 피어오르던 날이 있었다. 그때 그 꿈이 무참히 깨진 것을 그녀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몇 년 전 그녀는 한 남자에게 사랑을 느꼈었다. 백의수재(白衣秀才) 백가형(白可形)이란 청년이었다. 백가형은 다정다감한 성품에 문(文)을 사랑하는 영준한 서생이었 다. 그는 강남무림에서 손꼽히는 수재였으며 고강한 무공과 함께 학문에도 일가견을 이룬 인물이었다. 처음 만나던 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반했고 은밀히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백가형은 남창(南昌) 출신으로 천상보에서 남창일대의 상권을 관 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가형은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 서고를 정 리하던 그는 장부 속에서 천상보가 벌어들인 막대한 황금이 천축 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그는 치밀하게 조사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누군가 천상보의 황금을 빼돌린 줄로만 알았었다. 그러 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사마신무의 짓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사마신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무서운 음모를 눈치채게 되었고, 자신의 힘으로는 그 음모를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을지사란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천상보를 탈출하고자 했다. 을지사란은 갈등을 금치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탈출이냐, 아니면 그와 이별을 해야 하느냐는 기로에 놓였다.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비록 백가형을 사랑하긴 했지만 자신을 길러준 양부를 배신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그녀가 한족이 아니라는 점이 작용했다. 만일 그녀가 동이 출신이 아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한편 사마신무는 백가형의 동태를 알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자신의 뒷조사를 한다는 보고를 듣고 있던 터였다. 마침내 그는 고수를 풀어 그를 체포했다. 명목은 횡령죄 및 첩자 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을지사란은 백가형이 체포되었다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백가형이 압송된 천상보의 형당(刑堂)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때는 늦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너무나 끔찍한 일이 벌어진 후였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그 광경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면 수도 없이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백가형은 이미 형당의 고수들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 다. 그는 모진 고문 끝에 사지가 찢겨나갔다. 떨어져 나간 그의 살점 은 황구(黃狗)에게 뜯겨 먹히고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녀는 그 충격으로 혼절하고 말았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사마신무는 이렇게 말했었다. - 사란, 너는 그 누구도 사랑해선 안된다.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 야 한다. 허허허! 만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죽게 될 것이다. 알겠느냐? "......." 을지사란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과거의 뼈아픈 추억이 주마등 처럼 스쳐 떠오르자 가슴에는 허탈감만이 남았다. 이때 뇌천의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란, 꽃이란 가꿀수록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오. 하지만 화원에만 갇혀있는 꽃은 그 향기가 진하지 않소. 자유롭게 들판에서 자라난 꽃일수록 더욱 향기가 진하게 마련이오." "들판에 핀 꽃?" 을지사란의 얼굴이 흐려졌다. "당신은 화원 속의 꽃일 뿐이오.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해 가꾸어지 고 다듬어진....... 아름답긴 하나 향기가 없소. 그런 꽃은 매력 이 없지. 그러나 이제부터 당신을 해방시켜 주겠소. 자유로운 야 생화로 말이오." 을지사란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했다. "자유로운... 야생화?" 뇌천의는 힘차게 말했다. "두고 보시오. 난 한다면 하는 성미요." 을지사란은 탄식했다. "당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무슨 뜻이지?" "야생화는 비록 자유롭긴 하지만 안전하진 못해요. 언제 누구에 의해 꺾일지 모르는 운명이죠. 그러나 제가 있는 화원은 절대적으 로 안전해요." 뇌천의는 냉소했다. "문제는 화원을 가꾸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소. 이 화원의 임자 는 오직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만 꽃을 가꿀 뿐이오. 필요에 따라 서 언제든지 화원의 꽃을 무참히 꺾어버릴 것이오. 그래도 안전하 단 말이오?" "......!" 을지사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두려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신은 정말 겁이 없군요?" "하하하! 대살종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소. 두려운 것이 있다 면 나 자신일 뿐이오.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무섭기 때문이오. 그 밖의 적은 두려워하지 않소. 누구라도 약점은 있기 마련이오. 그 곳을 찾아 공격하는 것이 살종의 장기라는 것을 모르오?" 을지사란은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의 마음은 아득 히 먼 곳으로 날아올라갔다. 그녀가 태어나 자랐던 곳은 해뜨는 나라 해동성국(海東聖國)이었 다. 그곳의 사람들은 너무나 오래 전 일이라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으 나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중원에서의 생활은 달랐다. 눈만 뜨면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 는 살벌한 세상이었다. 약자를 짓밟고 강자가 되어 군림하려는 야 망으로 해가 뜨고 졌다. 을지사란의 속눈썹에 이슬이 어렸다. "돌아가고 싶어요. 내가 태어난 곳으로......."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을지사란은 당황한 표정을 지 었다. 뇌천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안심하시오, 사란. 내가 당신을 그곳으로 보내주겠소." 그는 을지사란의 섬섬옥수를 거머쥐었다. "......!" 을지사란은 몸을 가늘게 떨었으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뇌천의는 그녀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직시했 다. "당신......." 을지사란은 흡사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의 강렬한 눈빛 속으로 빨려들었다. "내가 당신을 보호해 주겠소." "아아......." 을지사란은 마침내 뇌천의의 품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밤이 되었다. 북빈관의 한 전각에는 밤이 깊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북무림의 영도자 격인 사 인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연회에 대비해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무적진구주구창신협 여사성을 위시하여 나머지 삼 인들은 침중한 표정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여사성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마신무는 엄청난 흑심을 품고 있음 이 확실하오." "......." 그의 말을 경청하던 낙성추혼신군 군유명, 신도묵궁 탄금부, 금강 존자는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내성에 머물고 있는 자들은 변황팔절(邊荒八絶)의 고수들임이 확 인되었소." 여사성의 노안에 분노의 빛이 이글거렸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놈은 변황팔절을 비롯하여 수많은 오랑캐들을 끌어들여 무림을 장악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오." 군유명이 입을 열었다. "놈의 흑심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대협." "물론입니다. 기필코 분쇄해야 합니다!" 탄금부도 맞장구쳤다. 여사성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동안 노부는 구파일방과 정도십팔련의 동정을 살펴보았소. 그 런데 결과는 비관적이오. 구파일방은 이미 사마신무의 조종을 받 고 있는 것 같았소. 십팔련은 아직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지만 그 들은 사마신무를 두려워하고 있소." 이제껏 말이 없던 금강존자가 탁자를 탕! 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 작자들은 중원무림을 오랑캐들에게 넘겨줘도 좋다는 생각이란 말이오!" 여사성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이 바로 사마신무의 무서운 면이오. 놈은 변황팔절을 끌어들 여 중원과 변황무림의 화친을 도모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소." "그런 뻔한 개수작을 누가 믿는단 말이오!" "허허, 사마신무는 늙은 여우요. 어이없는 일이지만 대부분 그의 말을 믿고 있소이다." 여사성의 말에 삼 인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한참 후에 군유명이 물었다. "그럼 서빈관에 머물고 있는 백여 명의 군웅들은 어떻습니까?" 여사성의 얼굴에 한 가닥 기대의 표정이 어렸다. "사실 구파일방과 정도십팔련이 넘어간다면 남는 것은 그들 밖에 없소. 아직까지 그들은 이렇다할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소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유력한 동지가 될 가능성이 있소. 그들중 은 연중에 영도자 역할을 하고 있는 광해제군(廣海帝君)은 노부와 막 역지기인 만큼 그를 설득할 자신이 있소이다." "아!" 삼 인은 탄성을 발했다. 광해제군(廣海帝君) 종리백(鍾里白). 그는 그 어떤 문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기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의 무공 수위는 천하십강에 들 정도였다. 그는 성품이 고고하고 직선적이나 은연중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 고 있었다. 만일 그가 북무림을 지지한다면 큰 힘을 얻게 되는 셈 이었다. 여사성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마신무가 우리들을 초청한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 이오. 그에 대비하여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오. 더욱이 적은 암중에 있고 우리는 노출되어 있으니......." 이때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조롱하는 듯한 음성이 울려왔다. "후후, 그렇소. 그대들의 승산은 희박하오." "누구냐!" 창창! 군유명과 탄금부, 금강존자는 벌떡 일어나며 무기를 뽑아냈다. 그 러자 천장에서 소리없이 인영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너는?" 그들은 안색이 변했다. 나타난 사람은 뇌천의였다. 뇌천의는 여사성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여노협, 그리고 세 분은 오늘밤 안으로 죽어야 할 운명이오." "......!" 사 인은 눈을 부릅떴다. 뇌천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적은 그늘에 있고 당신들은 밝은 곳에 있으니 승패는 뻔한 것이 오. 그러므로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적의 계를 역으로 받아 야 하오." "......?" 사 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대체 상대방이 적인지 친 구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여사성이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뇌천의는 신비스럽게 말했다. "모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 "사람들은 종종 눈앞에 보이는 점만을 중시하는 버릇이 있소. 그 러나 그런 편견은 허구에 빠지기 쉬운 법이오." 군웅들은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뇌천의 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적지에 와 있소. 기민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오. 설마 그러고 싶지는 않을 것이오." 사 인의 안색은 수시로 변화를 일으켰다. 뇌천의는 그들을 둘러보 며 계속 말했다. "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당신들의 자유요. 다만 한 가지 밝혀둘 것은 나 역시 한인이며 오랑캐들의 손에 이곳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오." 그의 말에는 사람을 감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 자는 누구기에 이토록 신비롭단 말인가? 분명 적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우리의 큰 힘이 될지도.' 사 인은 점차 뇌천의에게 신뢰감을 느꼈다. 이윽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뇌천의는 전음으로 그들에게 얘 기했다. 그가 뭐라 말했는지 사 인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 었다. 그날 밤. 허허실실(虛虛實實)의 묘계가 이루어졌다. 전각 안. 을지사란은 기쁜 듯 교소를 발하고 있었다. "호호호! 설마 당신이 이토록 빨리 그들을 제거하리라고는 생각지 도 못했어요. 당신의 능력을 재평가해야겠어요. 역시 대살종답군 요." 뇌천의는 히죽 웃었다. "그 정도 일은 식은 죽 먹기요. 그런데 그들을 대신할 자들이 투 입된다고 했는데 잘 해낼까 모르겠소." 을지사란은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본보에서 오랫동안 훈련받은 자들이에요. 절대로 실수하 지 않을 거예요. 이미 오래 전부터 무림고수들의 신체적 특징과 습관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흉내내도록 훈련된 자들이거든요." 뇌천의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으음, 놀라운 일이구나. 과연 사마신무다운 짓이다. 과연 누가 상상이나 한 일이겠는가?' 그는 을지사란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바꿔치기가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단 말이오?" "호호.... 본보에서 하는 일은 언제나 완벽해요. 남은 것은 이번 연회에서 그 성과를 확인하는 것뿐이에요. 이 정도면 답이 되었나 요?" 을지사란은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뇌천의는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그렇다면 바꿔치기 당한 군웅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단 말인가? 더구나 가짜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면... 이번 연회는 그야말로 죽 음의 잔치가 되겠구나.' 뇌천의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 자들의 명단을 입수해야 한다.' 지금으로써는 그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뇌천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을지사란이 말했다. "뇌소협, 당신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요." "......?" 뇌천의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흑사풍(黑死風), 나오세요." 스슷! 흡사 바닥에서 솟아난 듯이 흑영이 나타났다. 그는 며칠 전 뇌천 의가 을지사란과 대화할 때 그의 뒤에서 기척도 없이 나타났던 위 인이었다.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흑색이었다. 심지어는 얼굴까지도 검었다. 그로 인해 음산한 사기(死氣)가 풍기는 위인이었다. 뇌천의는 번뜩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흑사풍이라면... 바로 복수회주(復讐會主)가 아닌가!'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대살종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부류로 꼽히는 것이 복수회였다. 그들은 일명 흑사풍, 죽음의 검은 바람으로 불리고 있었다. 을지사란이 흑사풍을 향해 입을 열었다. "흑사풍, 이분이 바로 대살종이에요. 인사들 나누세요." 흑사풍은 뇌천의를 향해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을 뿐, 입을 열지 는 않았다. "호호호, 이제 보니 두 분은 모두 살종의 지존이시군요. 같은 노 선을 걷고 있으니 쉽게 친해질 수 있겠군요.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하세요. 이번 일을 성사시키려면 서로간에 협조가 필요할 거예 요." 을지사란의 말에 뇌천의는 한 가지 생각을 굳혔다. 그는 흑사풍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천하살종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오." "후후......." 흑사풍, 즉 복수회주는 낮게 웃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표현이었다. 뇌천의는 그의 유난히 반짝이는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다. '이 자, 대단한 인물이다. 조심해야겠는걸.' 뇌천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죽음의 연회일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초조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부심하는 거지? 중원무림을 위해? 후후, 어울 리지 않는 감정의 사치가 아닌가?' 그는 눈을 감았다. 얼마 전에 만났던 복수회주의 반짝거리던 눈빛이 떠올랐다. 그는 왠지 그 눈빛이 낯익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를 제압해야 한다. 또한 가짜로 대치된 자들의 명단을 입수해야 한다. 어쩌면 흑사풍이 명단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 다.' 뇌천의는 눈을 감았다. 그는 달마검급상의 검정연기공(劍精練氣功)을 일으켰다. 그동안 그의 내공은 확연한 진경을 보이고 있었다. 잠을 잘 때나 걸을 때를 막론하고 진기가 끊임없이 운행되고 있었으므로 하루하 루 내공이 급증하고 있었다. 검정연기공은 본래 불문(佛門)의 정통내가법이었다. 따라서 그 화 후가 깊어질수록 잡념이 배제되고 마음이 맑아지는 효험이 있었 다. 그것은 일종의 청명부동심공(淸明夫動心功)과 같은 종류인 것이 다. 뇌천의는 대천산에서 홀로 자라나 성격이 편격하고 냉혹해졌다. 그런데 검정연기공을 익히면서부터는 성품이 자신도 모르게 변화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자신만이 그런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하늘의 뜻인지도 몰랐다. 그가 한창 운공삼매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천장이 미세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한 자루 예리한 박도에 의해 찢어지는 것이었다. 슷! 흑영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흑색인 복수회주였다. "......." 그는 잠든 듯 조용한 뇌천의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의외로 희고 부드러웠다. 마치 미인의 옥수와도 같았다. 그의 손은 뇌천의의 이마를 향해 뻗어갔다. 그런데 도중에 옥수가 가늘게 떨렸다. 마음만 먹으면 천하의 대살종을 일수에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이윽고, 그의 오른손 중지가 뇌천의의 이마에 닿았다. 그때였다. 차가운 웃음소리가 울린 것은. "후후! 복수회주. 제 발로 찾아와 주었구나." "앗!" 복수회주는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허리가 따끔해진 것이다. 그는 전신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풀썩 고꾸라지고 말았다. 뇌천의가 그의 허리를 낚아챈 것이었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그를 제압해 침상에 쓰러뜨린 후 올라탔다. "복수회주, 마침 잘 와주었다. 안 그래도 네 생각을 하고 있었 지." "아!" 복수회주의 눈에 당황기가 스쳤다. 뇌천의는 그의 배위에 올라탄 후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복수회주, 날 죽이러 왔느냐?" 복수회주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후훗, 그럼 무엇을 정탐하러 왔느냐? 사란이 보냈느냐? 아니면 사마신무가?" 복수회주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기이하게도 그는 뇌천의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그 점이 뇌천의의 의심을 샀다. "후후,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네 목을 부러뜨려 주마." 그는 복수회주의 목을 눌렀다. "자... 잠깐." "진작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복수회주는 탄식하며 말했다. "의가가의 말투는 여전하군요." "......!" 갑자기 변한 복수회주의 음성은 뜻밖에도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었 다. 뇌천의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너... 너는?" 그는 손바닥으로 복수회주의 얼굴을 문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복수회주는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얇은 껍질이 벗겨져 나가자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너는... 섬화(閃花)!" 뇌천의는 아연실색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복수회주는 천산의 쌍둥이 자매 중의 하나인 섬 화였던 것이다. "네가 여길 어떻게? 더구나 복수회주로 변장을 하다니?" 뇌천의는 기가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섬화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오빠와 함께 있으니 기분은 좋지만 이 혈도는 언제 풀어줄 건가 요?" 뇌천의는 피식 웃었다. "미안하구나, 섬화." 그는 즉시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고 배 위에서 내려왔다. 갑자기 어색한 기분이 든 것이었다. 그런데 섬화의 다음 행동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녀는 와락 그의 목을 껴안으며 품으로 안겨든 것이었다. "아아! 가가!" 뇌천의는 흠칫했다.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그만 그녀를 안고 말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향긋한 여인의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섬화!" 그는 준엄하게 꾸짖었다. "흐응, 오빠는 섬화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른단 말인가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오빠가 천산을 떠난 지 육개월 후 섬화도 산을 떠났어요. 참, 그 런데 무화는 어디 있죠?" "어디 있다니?" "흥! 시치미뗄 셈인가요? 오빠가 떠나던 날 무화도 함께 없어졌어 요." "그럴 리가? 무화가 없어지다니." 뇌천의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섬화는 그의 표정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말을 돌렸다. "섬화는 일년 전 천산을 내려왔어요. 물론 은사님들 몰래요. 산을 내려온 후 오빠가 대살종이란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곧바로 복 수회로 들어갔어요." "어째서지?" 섬화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그의 가슴에 비벼대며 흥분한 음성 으로 말했다. "섬화는 언제고 오빠가 복수회에 손을 뻗을 것을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든 오빠를 돕고 싶었으니까요." 뇌천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운이 좋았는지 복수회주의 눈에 들게 되었어요." 뇌천의는 궁금증이 치밀었다. "흠, 그래서?" 섬화는 깔깔 웃었다. "글쎄 그 영감탱이가 섬화에게 못된 짓을 하려 들잖아요." "......." "죽여버렸죠, 뭐." "뭐... 뭐라고?" 뇌천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호호!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어요. 저에게 반한 영감은 앞뒤를 가리지 않았어요. 제가 침상에 누워 손짓 한번 하니 금방 침을 흘 리며 다가오더군요. 그래서 단숨에 사혈을 짚어버렸죠." 그녀는 자랑스럽다는 듯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섬화는 생각했죠. 기왕 영감을 죽였으니 복수회주로 가장해야겠 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호호! 처음에는 발각날까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아무도 의심하지 않더군요." 섬화는 인피면구를 들어보이며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뇌천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섬화, 네가 이렇게 무서운 아이가 되다니!' 한낱 소녀가 천하사대살종의 하나인 복수회의 회주를 죽이고도 태 연히 말을 한다는 것은 가히 놀라운 일이었다. 본래 섬화의 성품은 잔인한 일면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쌍둥이 자매인 무화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뇌천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흠, 그후에 사마신무의 청부를 받아 이곳으로 왔겠군. 대체 너는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사마신무가 맡긴 청부가 무엇이냐?" 섬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가가는 오랜만에 만난 저에게 꼭 이런 식으로 딱딱하게 대하실 건가요?" "섬화,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은......." "그만둬요. 한 가지만 묻겠어요." "......." "오빠는 섬화가 싫은가요?" "그건......." "흥! 무화 때문인가요?" 뇌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흐흥! 그럼 그 요사스런 화후(花后)인가 뭔가 하는 계집 때문인 가요?" 뇌천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세히도 알고 있군." "오빠에 관한 일이라면요." "그럼, 날 도와줄 수도 있겠구나." 뇌천의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섬화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건 오빠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지요." 섬화는 그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 이 맞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안아줘요." 뇌천의는 정색을 했다. "섬화, 이런 일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섬화의 눈에 앙칼진 빛이 떠올랐다. "오빠는 책임을 회피할 건가요?" 뇌천의는 의아했다. '무슨 책임?' 그는 문득 어린 시절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 섬화는 장차 오빠의 색시가 될 거야! "하하! 그건 소꼽장난 시절의 얘기가 아니냐? 이제 와서 그 때 얘 기를 하다니......." 섬화는 느닷없이 깔깔거렸다. "호호호홋! 어리석은 건 오빠예요. 제가 말하는 건 그 얘기가 아 니에요. 오빠는 천산에서의 마지막 밤을 벌써 잊진 않았겠지요?" 뇌천의는 안색이 홱 변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흥, 그때 오빠는 섬화를 어떻게 했죠?" "어떻게 하다니?" 뇌천의는 오리무중에 싸인 기분이었다. "흥, 그날밤 오빠와 함께 보낸 것이 무화라고 생각하나요?" '그... 그럴 수가!' 뇌천의는 마치 쇠뭉치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 그럼, 그게 바로 너였단 말이냐?" 섬화는 오히려 반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화가 감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 인가요?" 그 순간이었다. 짝! 섬화는 뺨에 불이 번쩍 이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뇌천의 가 호되게 뺨을 갈긴 것이었다. "파렴치한 계집!" 뇌천의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참 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었다. "......!" 섬화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뺨을 맞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 었다. 그녀는 이 순간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낀 것이 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오빠는... 섬화가 그렇게 싫은가요? 오빠를 사랑한 게 잘못이란 말인가요?" 그녀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런 짓을 하다니......." 뇌천의는 어이가 없었다. 섬화의 행동은 정말 상상도 못했던 것이 다. 그는 어이없이 속아넘어간 자신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그 날의 수치심이 되살아나는구나. 고작 섬화의 잔꾀에 넘어가다 니.... 그것도 모르고 난 무화를 미워했으니.......'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나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흑흑! 왜... 왜... 섬화를 미워하시죠? 섬화는 오빠의 사랑을 받 고 싶었단 말이에요, 흑흑!" 섬화는 마침내 목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눈물. 그것은 여인의 최대무기다. 그녀가 통곡을 터뜨리자 뇌천의는 그 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는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 보며 할 말을 잊고 있었다. 뇌천의는 문득 섬화가 애처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너도 외로운 아이다.'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쌍둥이 자매는 고아출신이었다. 그녀들은 뇌천의와 마찬가지로 십 전천사의 손에서 자랐다. 두 자매와 뇌천의는 친남매 이상으로 의 지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과거의 일들은 모두가 한폭의 그림같기만 했 다. 그는 계속 오열하고 있는 섬화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섬화, 내가 잘못했다." 섬화는 얼굴을 들었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은 함초롬했다. 뇌천의는 가슴 한구석이 찡함을 느끼며 그녀의 젖은 뺨을 닦아주 었다. "우리는 다정한 친구였다. 그렇지?" 섬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뇌천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어찌 널 미워하겠느냐? 다만 내 성품이 비뚤어진 이후, 십전 천사와 관련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연을 끊고 싶었을 뿐이다. 때문에 너와 무화를 멀리하려 한 것이다." "그랬... 었나요?" 섬화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뇌천의는 더욱 애 처로운 느낌이 들어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네가 그토록 날 생각했단 말이냐?" 섬화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미칠 것 같이 오빠 생각만 했어요. 죽도록 그리워했어요. 언제고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뇌천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머릿결은 비단결처럼 고왔다. 어린 시절을 함께 자랐지만 이렇게 고운 머리카락을 지녔 는 줄은 몰랐었다. 그동안의 무관심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 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굳게 부둥켜안았다. 그들은 젊은 남녀였다. 더구나 이미 서로의 육체를 겪은 사이였 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섬화는 그토록 갈망하던 뇌천의의 사랑을 이번에는 마음에서우러 나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뇌천의는 이제까지 마음에 두지 않 았던 섬화를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창밖이 밝아지고 있었다. 머지 않아 해가 뜰 시각이었다. 두 사람은 땀에 흠씬 젖은 채 침상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뇌천의 는 섬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들이 바꿔치기한 자들의 명단을 얻을 수 있을까?" 섬화는 뇌천의의 가슴을 작은 손으로 어루만지며 방긋 웃었다. "오빠, 복수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천상보와 관계를 맺고 있었어 요." 뇌천의는 흠칫했다. "그랬었군." "저도 그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있어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 에요." 뇌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로군. 그렇다면 사마신무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게 되겠 군." 섬화는 문득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와 적대하려 드나요? 살종은 정사간의 일에 관 여하지 않는 게 관례 아닌가요?" 뇌천의는 담담히 말했다. "음. 그렇긴 하다면 나 역시 변황인들이 중원무림을 어지럽히는 건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그뿐이 아닐 거예요." "무슨 뜻이냐?" "오빠는 변했어요. 뭐랄까.... 오빠에게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기도같은 것이 느껴져요." 뇌천의는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말이다." 섬화는 정색을 했다. "정말이에요. 예전의 오빠는 냉혹하기만 했어요. 그런데 지금 오 빠에게서는 대협의 풍도가 느껴져요." "대협이라고? 후후, 그럴 리가." 뇌천의는 그녀의 말을 일축한 뒤 말했다. "어쨌든 나는 사마신무의 음모를 막아볼 생각이다. 그 자의 뜻대 로 중원무림을 내줄 순 없다." 섬화는 고혹적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힘 닿는 대로 오빠를 돕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아요. 시켜주세요." 뇌천의는 그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쥐며 말했다. "섬화." "네?" "이제야 네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너도 많이 변 한 것 같구나. 과거에는 어린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섬화는 부끄러움을 느낀 듯 얼굴이 빨개졌다.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이고 말고. 못 믿겠단 말이냐? 이래도?"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섬화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더니 그만 고개를 그의 품에 박고 말았다. "어쩜.... 아이, 안돼요." 무엇이 안 된다는 것인가? 뇌천의의 손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그녀의 은밀한 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무림백서 2권 제12장 죽음의 도전 ━━━━━━━━━━━━━━━━━━━━━━━━━━━━━━━━━━━ 밀전(密殿). 사방이 밀폐되어 있어 답답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전면 벽쪽에는 두터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휘장 앞에 자의를 입은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밀전에는 숨막히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휘장 안으로부터 한 가닥 궁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란, 지난 십 년 동안 우리 부녀는 만족한 관계였다. 나는 너에 게 한 번도 소홀한 적이 없다고 자부한다. 네 생각은 어떠냐?" 자의여인은 을지사란이었다. 그녀는 두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그녀의 음성은 다소 떨리고 있었다. "비록 양부녀지간이긴 하지만 너와 나는 혈족 이상으로 서로 의지 하며 지내왔다." 휘장 속 인물은 천수여래 사마신무였다. 밀전은 사마신무의 거처였다. 천하의 상권을 주무르는 인물답게 밀전은 정교하게 축조되어 있었다. 안이든 밖이든 일체의 소리가 흘러나가지 못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나는 언제나 널 아끼고 사랑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을지사란은 고개를 숙였다. "소녀 항상 감격하고 있나이다." "음, 애비는 과거의 일을 후회하고 있다. 네가 그 일로 크게 상심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백가형은 총명한 젊은이였다. 그를 죽인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 슴아픈 일이었다." "아버님......." 을지사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옛일을 들추어내는 사미신무의 의중을 이해할 수가 없었 다. "그러나 네가 모르고 있는 일이 있다. 너에 대한 그의 사랑은 가 식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널 통해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을지사란은 안색이 변했다. "나는 너의 애비로서 널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그를 제거한 것이다. 설마 아직도 애비를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을지사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사마 신무의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허, 란아야, 그러고 보니 너도 어엿한 여인이 다 되었구나." 을지사란은 흠칫했다.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된 것 같구나. 다 큰 녀석을 영원히 곁에 둘 수는 없지 않느냐?" "아버님, 소녀는 아직 혼인을 생각하고 있지 않사옵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백가형이 참혹하게 죽은 이후로 그녀는 다시 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사마신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그래서야 쓰겠느냐? 언제고 너도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 게 살아야 한다." 그는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그동안 마음에 둔 청년이라도 있느냐? 수줍어하지 말고 애 비에게 귀뜸해 다오." 을지사란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없사옵니다." "그럴 리가......." 다분히 여운이 있는 음성이었다. 을지사란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다면 애비가 묻겠다. 솔직히 대답해 다오." "네." "대살종이란 청년은 어떠냐?" 을지사란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애비는 지난번 그가 너에게 관심을 표명한 것을 알고 있다." "그건......." 을지사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들며 말했 다. "소녀는 그가 본보를 위해 필요한 자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를 이용한다면......." 사마신무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란아, 너는 애비를 속이고 있다. 너 역시 그에게 마음을 두고 있 지 않느냐?" "아버님, 소녀는 결코......." 을지사란은 가슴이 죄여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소녀는 단지... 그를 이용할 생각만 했을 뿐입니다." "정말이냐?" "어찌 감히......." 을지사란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사마신무는 갑자기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를 죽여라." "네엣?" 을지사란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비틀거렸다. "그에게 한 호리의 마음도 없다면 죽여라." "어... 어째서?" 을지사란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사마신무는 잘라 말했다. "물론 이유가 있다. 그는 지금 반간계(反間計)를 쓰고 있다." "그... 그럴 리가!" "너는 그가 정말 여사성을 위시한 사 인을 죽였다고 보느냐?" "그... 그럼?" 을지사란은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죽이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속였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는 제게 충성을 맹세하였 고......."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 줄 아느냐? 그들 네 사람 가운데는 이미 애비에게 투항한 자가 있었다. 그러니 애 비의 정보는 정확한 것이다." 사마신무의 음성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 그럴 수가." "금강존자(金剛尊子)가 바로 애비의 심복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들 사 인은 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대신하기로 한 수 하들이 도리어 죽은 것이다. 지금 그들 사 인은 여전히 그대로 활 동하고 있다. 그야말로 완벽한 이중계(二重計)인 것이다." "아!" 을지사란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그의 달콤한 말에 내가 속았단 말인 가? 아아! 하지만 그의 눈빛은... 진실이 담겨있지 않았던가?'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뇌천의를 떠올리자 자꾸만 혼선이 빚어 졌다. 사마신무는 냉혹하게 말했다. "그를 죽여라. 그가 이중첩자인 것이 증명된 이상 더 놔둘 수가 없다. 더욱이 그를 죽여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 "네가 이미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애비의 눈은 못 속 인다. 네 눈빛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어. 너는 반드시 애비가 정해 주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허락해야 한다. 알겠느냐?" "......." "너는 오직 애비만을 따라야 한다. 네 개인은 없다. 그를 죽여라. 하겠느냐?" "......." 을지사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는 사마신무의 말이 아 득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를 죽임으로써 너의 효심을 보여다오." 을지사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갈기갈기 찢 겨지고 있었다. - 오직 나만을 따라야 한다. 네 개인은 없다. 오직....... 사마신무의 말이 그녀의 뇌리를 치고 있었다. '내 개인은 없다고? 아버님의 뜻대로만 살아야 한다고? 정녕 이것 이 나의 삶이란 말인가?' 순간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얼마 전 뇌천의가 했던 말이었다. -이 화원의 임자는 오직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만 꽃을 가꿀 뿐이 오. 필요에 따라서 그는 언제든지 화원의 꽃을 무참히 꺾어버릴 것이오. 그녀는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부드러운 손바닥에 파고 들어가 고 있었다. 이때 사마신무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를 죽이겠느냐?" 을지사란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죽이겠어요." 그녀의 눈에서 한 가닥 독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사마신무는 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유월 오일. 생일연회는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천상보는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특히 동서남북 사대빈관의 군 웅들은 거의 칩거하다시피 했다. 그들은 무엇인가 은밀한 토론을 벌이고 있는 듯했다. 하루. 이제 운명지일(運命之日)이 눈앞에 닥쳐든 것이다. 똑똑똑! 뇌천의는 월동문(月洞門)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으로부터 달콤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뇌소협." 을지사란의 음성이었다. 뇌천의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움찔했다. 그곳은 을지사란의 침실이었다. 을지사란은 침상에 앉아 있었는데 속살이 은은히 비쳐보이는 나의 만을 걸치고 있었다. 뇌천의는 그녀의 차림에 놀람을 금치 못했 다. 탁자에는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뇌천의는 빙긋 웃었다. "무슨 일이오? 음식을 차려놓고 날 부르다니?" "앉으세요, 뇌소협." 을지사란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에는 어딘가 모르 게 슬픔이 어려 있는 듯했다. 뇌천의는 힐끗 탁자 위의 음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음의 정찬이구려?" 을지사란의 눈빛이 반짝였다. "역시 살인전문가라 다르군요. 맞아요. 이 음식 속에는 입만 대도 전신이 피고름이 되는 극독이 들어 있어요. 말 그대로 죽음의 정 찬이죠." 뇌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보단장산(七步斷腸散)에 오보추혼분(五步追魂粉), 학정홍, 연 미독갈분, 천갈미주, 오공산독 등.... 참 많이도 준비했군." 그는 독물의 이름을 줄줄이 외웠다. 을지사란의 얼굴에는 탄성이 떠올랐다. "독에 정통하시군요." 뇌천의는 담담히 말했다. "용독(用毒)은 살종이 되기 위한 기본 상식이오." "그럼 독식(毒食)도 할 줄 알겠군요." 뇌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대가 정성껏 장만한 정찬을 어찌 마다할 수 있겠 소?" 그는 저를 들어 음식을 집었다. 치지직......! 저 끝에서 황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히 놀랄 만한 독성이었다. 그러나 뇌천의는 개의치 않고 음식을 태연히 입으로 가져갔다. "음, 맛이 기막히구려. 이 맛좋은 음식을 나 혼자 들게 되어 미안 하오. 하하하핫!" 그는 천천히 음식의 맛을 음미했다. 탁자 위의 음식을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골고루 들었다. "......." 묵묵히 지켜보던 을지사란은 술병을 들었다. "소녀의 술을 받으시겠어요?" "황송하구려." 술은 일반적으로 호박색이거나 담청색, 또는 백색을 띠기 마련이 다. 그런데 이 술은 특이하게도 시커먼 먹색이었다. "흠, 천지삼대극독의 하나인 묵혈사망중수(墨血死亡重水)로군. 정 말 귀한 술이오, 사란." 뇌천의는 단숨에 검은 액체를 들이마셨다. 묵혈사망중수. 그것은 한 방울만 마셔도 위장에 구멍이 뚫리며 전신이 타 들어가 는 무서운 극독이었다. 뇌천의는 반각에 걸쳐 식사를 마쳤다. 그는 소매로 입가를 쓱 문 지른 후 말했다. "잘 먹었소, 사란." "......." 을지사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망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 며 말했다. "뇌소협은 소녀가 왜 초청했는지 알고 있나요?" 뇌천의는 빙긋이 웃었다. "나는 살종으로서 본능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소. 내 예감은 한 번 도 틀린 적이 없소.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이미 오늘의 흉험을 느 낄 수 있었소." 을지사란은 탄복의 빛을 띠었다. "역시 대살종답군요. 맞아요. 소녀는 오늘 뇌소협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뇌천의는 놀라지 않았다. "그렇소? 과연 사마신무답구려." 을지사란은 원망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날 속였어요." "......?" "보주께서는 이미 당신이 반간계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셨어 요." 뇌천의는 흠칫했다. '놀랍구나. 그렇다면 어딘가 구멍이 뚫렸다는 얘긴데. 과연 누 가?'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안위보다는 여사성의 안위가 더 걱정이 되었다. 을지사란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사성은 위험에 정면으로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만일 그가 죽는다면 이번 연회를 저지할 계획이 무산되지 않겠는가. 을지사란은 담담히 말했다. "금강존자의 입을 통해 흘러 나갔어요. 그 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보주에게 굴복했어요." "그랬었군." 뇌천의는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그런데 왜 내게 그것을 얘기해 주는 것이오?" "그건... 당신이 곧 죽을 목숨이기 때문이에요." 을지사란의 눈에 은은히 살기가 일어났다. "처음부터 당신은 소녀에게 접근하면서 계략을 썼지만 실패했어 요. 보주의 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해요." 뇌천의는 피식 웃었다. "후훗, 사란. 그도 사람이오. 따라서 어딘가 빈틈이 있기 마련이 오." "그래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분의 손길을 벗어날 사람은 없어 요." 을지사란의 얼굴에는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뇌천의는 그것을 놓 치지 않았다. "그도 인간인 이상 약점이 있을 것이오. 사란, 당신은 그의 노리 개가 아니오. 왜 굳이 스스로를 비천하게 만들려 하오?" 을지사란은 갑자기 처절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 노리개라고요? 그래요, 저는 그의 노리개예요. 그러니 어쩌란 말이죠? 이 사란은 그 분의 손길을 벗어나서 살아갈 용기 가 없는 걸요!" 뇌천의는 부드럽게 말했다. "사란, 이미 말했지 않소? 이제부터는 내가 보호해 주겠노라고." "......!" 을지사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문득 그녀는 미친 듯이 웃었다. "호호호호홋......! 뭐라고요? 절 보호한다고요?" "그렇소." "당신은 이미 코앞에 다가온 죽음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요?" 뇌천의는 진중하게 말했다. "사란, 인간의 운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오. 사마신무가 아무리 무 서운 능력으로 천하를 장악하고 있다해도 그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소. 그가 날 죽일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아는 일이오. 이 뇌천 의의 운명은 오직 하늘만이 결정할 수 있소." "하늘? 하늘이 대체 무얼 하죠? 한 소녀의 애틋한 감정을 무참히 짓밟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하늘인가요? 호호! 그것이 하늘의 뜻이 라면 전 하늘을 믿지 않아요!" 을지사란은 마침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사란." 뇌천의는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멈춰요!" 을지사란은 차갑게 말했다. "두고 보겠어요. 당신이 이 죽음의 함정을 빠져나갈 가능성은 전 무해요. 만일 당신이 살아날 수 있다면 하늘에 대해 다시 생각하 겠어요." 스르륵!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침상이 미끄러지더니 벽 속으로 빨려 들듯 사라져 버렸다. 쿵! 침상은 사라지고 그곳에는 벽만 남게 되었다. "......!" 뇌천의는 이 뜻밖의 변화에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 았다. 방안은 소름끼칠 만큼 정적에 싸여 있었다. 그가 들어왔던 출입구도 봉쇄되어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내게서 하늘의 능력을 시험하겠다고? 그것 참 재미있는 일이군." 그는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댔다. "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고봐야겠군." 이때였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천장으로부터 까만 점 하나가 소리없이 내려오는 것이 마침 발견 된 것이다. 만일 그가 의자에 드러눕듯이 기대지 않았다면 결코 발견하지 못 할 뻔했다. '저건... 만독제왕지주(萬毒帝王蜘蛛)!' 내심 부르짖은 뇌천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만독제왕지주는 일명 독중성(毒中聖)이라 불리는 독문의 지보였 다. 설사 만독이 불침하는 몸이라도 만독제왕지주에 물리면 일각 도 버티지 못하고 누런 피고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뇌천의의 이마에 땀방울이 배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파앗! 그가 우수를 뻗자 묵광(墨光)이 날았다. 만독제왕지주는 정확히 두 쪽이 나 떨어졌다. 뇌천의가 팔목의 묵아를 전개한 것이다. 우...... 웅......! 묵아는 어느새 삼척 길이의 괴검으로 변하여 기이한 진동음을 발 하고 있었다. 뇌천의는 눈길을 돌렸다. '두번째 공격은?' 순간 그는 의자가 가볍게 진동하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사면의 벽에 무수한 구멍이 뚫리더니 독전(毒箭)이 무더기로 발출되었다. 슈슈슈슈슉! 뇌천의는 앉은 채로 몸을 떠올렸다. 그의 수중에서 묵아가 빙글빙 글 돌아갔다. 실내는 온통 시커먼 검광에 뒤덮였다. 파파파팟! 독전은 모두 검막에 차단되어 퉁겨나갔다. 그가 독전들을 막아내자마자 이번에는 벽 속의 구멍으로부터 시커 먼 독수(毒水)가 뿜어져 나왔다. 그야말로 숨쉴 틈도 주지않는 것 이었다. 칙! 칙! 뇌천의는 장미천도(長眉天道)에게 전수받은 양강신공인 건곤열화 신강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독수는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자욱한 수증기를 내며 타버 렸다. 그 바람에 실내는 온통 독연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뇌천의는 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독공에 단련된 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옷자락은 온통 구멍이 숭숭 뚫려 버렸다. 뇌천의는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이러다간 벌거숭이가 되겠군." 그는 눈을 번뜩였다. 이번에는 어떤 함정이 전개될 지 모르기 때 문이었다. 쏴아......! 문득 벽의 구멍으로부터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차!' 처음으로 그의 안색이 변했다. 수공(水攻)!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밀폐된 공간에서의 수공이야말로 어떤 악랄한 공격보다도 피하기 힘든 것이었다. 만일 물이 가득 차게 되면 만 가지 절학이 소용없게 되는 것이다. 쏴아아아! 벌써 물은 무릎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물이 빠져나갈 틈은 어디에 도 없었다. 이대로 가면 한 식경도 안되어 물이 가득 찰 것이다. '빠져나갈 곳이 없다!' 뇌천의의 안색이 굳어졌다. 물은 더욱 빠르게 차올라 마침내 그의 코를 넘고 말았다. 그는 물 속으로 잠겨버렸다. 그는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음?' 그는 수중에서 신음을 흘렸다. 발끝이 화끈했다. 무엇인가 날카로 운 물체가 발끝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살펴보니 발치에서 시뻘 건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알고 보니 수십 개의 톱니형 원반이 수중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 었다. 츄리리리릿! 톱니형 원반은 어디서 날아왔는지 몰라도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수중을 종횡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아차 하면 온몸이 갈갈이 찢겨 져 나갈 판국이었다. 촤아악! 이번에는 왼쪽 옆구리로 강한 수류(水流)가 쏘아왔다. 그는 반사 적으로 묵아를 휘둘렀다. 카앙! 원반이 두 동강 나 날아갔다. 묵아는 물 속에서도 그 위력을 충분 히 과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수십 개의 원반은 전후좌우에서 무섭게 쇄도해 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눈알이라도 달린 듯이 그를 향해 정확히 공격해 오고 있었 다. '정말 무서운 기관이군.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익사하기도 전 에 온몸이 난도질 당하겠군.' 그는 점차 호흡이 가빠지며 진기가 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에 따라 원반을 피하는 동작도 둔해지기 시작했다. 물 속에서의 운신은 진기유통이 가장 큰 문제다. 진기가 이어지지 않는 데야 아무리 천하제일고수라 해도 한계가 있었다. 뇌천의는 왼쪽 어깨가 화끈함을 느꼈다. '윽!' 원반이 어깨의 살점을 뜯고 날아간 것이었다. 또다시 물 속은 붉 게 물들었다. 뇌천의는 문득 한 가지 맹점을 발견했다. '저 의자! 저것이 기관의 중심이다.' 판단을 내린 그는 의자 쪽으로 신형을 이동했다. 그는 천뇌서생 만기생으로부터 진법 및 기관술을 배운 적이 있었 다. 이 기관은 그가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지만, 그가 배운 기관 술의 몇 가지를 응용한 형태인 것 같았다. 이곳은 정사각형의 형태를 지닌 방이고 의자는 방의 정중앙에 위 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반들은 모두 의자를 중심으로 위아래로 규칙적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의 고비를 넘긴 끝에 간신히 의자 곁으로 다가갔다. 아 니나 다를까? 의자를 중심으로 원반공격이 반복될 뿐, 의자가 있 는 곳은 공격이 미치지 않았다. 뇌천의는 의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수중이 붉게 물들어 시야에 장애를 받았으나 그는 의자의 팔걸이 부분에 세 개의 구슬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홍(紅), 청(靑), 백(白).' 세 가지 색의 구슬이었다. 그것은 기관을 움직이는 장치임이 분명 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올바른 기관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뇌천의는 호흡이 가빠진 나머지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그 런 상태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여유가 없었다. '모르겠다. 아무 것이나 누르자.' 그는 손을 뻗어 붉은 색 구슬을 눌렀다. 그러자 굉음이 울렸다. 우르르르르......! 뇌천의는 최후의 진력을 끌어올려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쾅! 꽈르릉--! 고막을 찢는 듯한 폭발음과 함께 뇌천의는 의식이 가물가물 흩어 지는 것을 느꼈다. '끝장인가?' 엄청난 충격에 그나마 간신히 남아있던 진기가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그의 몸은 세찬 수류에 휘말려 어디론가 빨려 들 어가고 말았다. 찰랑찰랑... 철썩! 뇌천의는 귓전에 차 오르는 물소리에 점차 정신이 들었다. '이곳은?' 그는 눈을 떴다. 주위를 살펴보던 그는 어리둥절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거대한 지하공간에 고여있는 호수였다. 그는 호숫가에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으윽!' 전신이 부서져 나갈 듯한 고통이 왔다. 다행히도 운신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는 듯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어 보았다. 불행 중 다행인 듯 내상은 없는 듯 했다. 다만 그나마 걸치고 있던 누더기 같은 옷이 거의 찢어져 나 가 알몸이나 다름없는 행색이었다. "후훗, 어쨌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로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천연적으로 형성된 지하동부인 듯했다. 천장에는 종유석이 날카롭게 뻗어있고, 바닥과 벽은 온통 괴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군.' 뇌천의는 의혹을 느꼈다. '붉은 구슬을 누른 후 물살과 함께 빨려 들어온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이곳은 천상보의 지하일 것이고.......' 그러나 그 점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짐작가는 것이 없었다. 그는 동부를 살펴본 후 앞으로 걸어갔다. 동부는 대체로 어두웠으나 천장의 종유석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 와 시야에 그다지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뇌천의는 앞으로 뻗은 길을 따라 서서히 걸어갔다. 얼마쯤 가니 길이 어지럽게 갈라져 있어 그를 당황케 했다. 그는 기억력에 의 지하여 지로가 나타날 때마다 방향을 바꾸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니... 이곳은 본래의 장소가 아닌가?' 놀라운 일이었다.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오래 걸었으나 그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 고 만 것이었다. 그는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제 보니 이곳에는 진(陣)이 펼쳐져 있구나!' 그는 눈을 가늘게 한 채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방은 희뿌연 안개 같은 것으로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 듯했다. 그는 천뇌서생 만기생으로부터 기문진학을 배운 적이 있었다. '일단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 한번 진세에 휘말리면 빠져나오지 못하고 제자리만 맴돌다 지쳐 죽을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공력을 운행하여 칠주천을 하고 나자 비로소 머리가 맑아졌다. 그 는 빛나는 눈으로 사방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이것은 팔괘(八卦)에 십상(十相)을 혼합한 진법이다. 그 렇다면.......'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일단 진법의 종류를 알아낸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앞 으로 걸어나갔다.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그는 오른쪽 만을 택해 걸어갔다. 여덟 번을 우측으로 돌아간 후 이번에는 열 번을 왼쪽을 택해 걸 어나갔다. 비로소 갈림길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향은 중심부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는 계속 걸어갔다. 얼마쯤 갔을까? "크워억!" 갑자기 짐승의 괴성이 울렸다. 그는 느닷없이 좌측의 구부러진 모 퉁이에서 공격을 받았다. 이미 진기를 회복한 그는 본능적으로 장 력을 날렸다. 펑! 폭음과 함께 괴성이 울렸다. "음!" 뇌천의도 신음을 발했다. 그는 어깻죽지가 떨어져나가는 듯한 통 증을 느낀 것이다. 그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본 순간. "저, 저럴 수가......!" 그는 찬바람을 훅 하고 들이켰다. 괴인(怪人). 도무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한 자가 우뚝 서있었 다. 그의 전신에는 온통 살점이 너덜거렸으며 고름주머니가 주렁 주렁 매달려 있었다. 얼굴이라야 제 형상을 찾아볼 수도 없을 정 도로 피고름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다만 얼굴에 움푹 꺼져 있는 동공에서 괴광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썩어 문드러진 코와 입술은 형태조차 남지 않은 채 누런 이빨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뇌천의는 코를 움켜쥐었다. 참을 수 없는 악취로 인해 머리가 아 플 지경이었다. "크크......!" 괴인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괴인의 왼쪽 다리는 살점이 녹아내 려 허연 뼈만 남아 있었다. 괴인은 흡사 먹이를 본 맹수처럼 다가왔다. 뇌천의는 구역질을 간 신히 참으며 소리쳤다. "서시오! 귀하는 대체 누구요?" 괴인은 무작정 달려들었다. "크크...... 크......!" 위-- 잉! 괴인은 주먹을 휘둘렀다. 뇌천의는 급히 무영무풍보를 펼쳐 주먹 을 피했다. 퍽! 괴인의 주먹이 석벽에 박혔다. 흡사 썩은 두부를 친 듯한 위력이 었다. 뇌천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놀라운 공력이다. 대체 이 자는 누구기에?' "크와악!" 위잉! 이번에는 등뒤에서 괴성과 함께 맹렬한 경풍이 뻗어왔다. "억!" 뇌천의는 신형을 풍차처럼 회전하며 장력을 뿌렸다. 꽈르릉! 하는 폭음이 일었다. "윽!" 뇌천의는 심장이 터질 듯한 충격을 받고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 났다. 그러나 그를 공격한 상대는 다만 두 걸음 물러났을 뿐이었 다. 그는 다시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뇌천의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대체 이건 뭐란 말인가? 인간도 아니다!' 그는 뒷걸음질을 쳤다. "크크!" "끄끄끅! 캐애액......!"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방에서 괴인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왔 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뇌천의는 전신이 온통 식은땀으로 젖고 말았다. '대체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한결같이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 다니.......' 뇌천의는 좌절을 느꼈다. 한 명의 괴물도 상대하기 벅찬 판국에 통로를 메우며 점점 더 숫자가 불어나고 있는 괴인들을 물리치기 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괴인들의 숫자는 어느덧 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크아악... 캑캑......!" 그들은 소름 끼치는 괴성을 지르며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 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는 반 자 깊이의 족인이 푹푹 찍혔다. 다만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들의 행동이 무척이나 느리다는 것이 었다. 그들은 사지가 성한 자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손가락 발가락이 없음은 물론 심지어는 하반신이 모두 썩어 버린 자도 있었다. 그 때문에 행동이 느린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상태에서도 불가사의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 었다. '할 수 없다. 묵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쩌엉! 그의 오른손에서 묵광이 치솟은 순간. "크아악!" 위이이잉! 괴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아무런 초식도 전개하지 못 했으나 그 위력은 가공했다. 되는 대로 휘두르는 팔다리에 동부의 천장과 벽이 무너져 내렸다. 번쩍! "끄악, 깨액......!" 묵아의 검광이 뻗어나가는 순간 다섯 명의 괴인이 토막 나 뒹굴었 다. 동굴 안은 순식간에 역겨운 피비린내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 러나 괴인들은 동료들의 죽음에 흥분한 듯 더욱 무섭게 덤벼들었 다. "끄아아악!" 위잉! 꽈르릉! 뇌천의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묵아의 위력이 경세적이라 해도 한계가 있었다. 괴인들은 베어도 베어도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토막 난 동료들의 시신을 밟고 꾸역꾸역 밀려왔다. "차앗!" 뇌천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묵아를 휘둘렀다. 이제는 죽고 사는 문제조차 의식되지 않았다. 자욱한 피보라와 역겨운 피비린내에 마비된 듯 그는 미친 듯이 묵아를 휘둘렀다. "혈천일도!" "천지풍뢰!" "파멸뇌섬!" 그는 기억나는 모든 검법과 도법을 모조리 쏟아냈다. 괴인들은 추풍낙엽처럼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이었다. 뇌천의는 차츰 환멸을 느꼈다. 베어도 베어도 꾸역꾸역 몰려드는 괴인들.... 그는 차라리 괴인들에게 뜯겨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그는 비분에 찬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핫핫핫......!" "굉천(轟天)... 혈우(血雨)!" 일성 노호와 함께 묵아의 검극으로부터 가공할 검기가 뻗어나갔 다. 검기는 회오리가 되어 괴인들의 전신을 휘감았다. "크웨에에엑!" 끔찍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검기가 걷히고 난 후....... 비틀! 뇌천의는 피로 목욕한 듯 시뻘겋게 젖은 채 묵아로 바닥을 짚고 섰다. 그의 주위에 서 있는 괴인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모 두가 토막이 난 채 쓰러진 것이다. "흐으으... 모두... 죽었다.... 모두......."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바닥에는 온통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괴인들의 혈육이 뒹굴고 있었다. 그는 웩! 하며 토해냈다. 한동안 구토를 한 그는 더 이상 토할 게 없자 비로소 벽에 기댄 채 거친 호흡을 했다. 그에게는 한 올의 진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마신무! 만일 내가 살아날 수 있다면... 널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죽여주마." 그때였다. 어디선가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꼬마야, 그 말이 진심이냐?" 말할 수 없이 사이한 음성이었다. 뇌천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구요?" "크크.... 정말 사마신무를 죽여주겠느냐?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말이다." 뇌천의는 사마신무의 이름이 거론되자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 아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렇소." "그렇다면 이리 오너라." 그 순간이었다. 한 가닥 항거할 수 없는 무서운 흡인력이 그의 몸 을 끌어 당겼다. 뇌천의는 미처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붕 떠서 어딘가로 끌려갔다. ■ 무림백서 2권 제13장 구룡지학(九龍之學)을 얻다 ━━━━━━━━━━━━━━━━━━━━━━━━━━━━━━━━━━━ 동부의 막다른 곳. 세 쌍의 횃불같은 안구(眼球)가 어둠 속에 번쩍이고 있었다. 그들은 삼 인의 괴인이었다. 두 명은 하반신이 없었다. 그중 한 명은 중이었고, 다른 한 명은 도사였다. 비록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문드러졌으나 입은 복장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중과 도사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나머지 한 명은 뜻밖에도 팔다리가 성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신에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어찌나 말랐는지 얼굴은 해골을 얹어 놓은 듯했다. 흑의인은 석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면 석벽으로부터 손 가락 굵기의 쇠사슬이 뻗어나와 그의 어깨의 견골과 비파골을 관 통하고 있었다. 흑의괴인은 얼마나 오래 묶여 있었는지 머리칼이 자라 바닥까지 길게 끌리고 있었다. "......!" 뇌천의는 가공할 흡인력에 끌려와 삼 인의 괴인을 대하게 되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귀하들은 대체 뉘시오?" "크크... 건방진 놈, 귀하라고?" 흑의괴인이 음침하게 말했다. 그의 음성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뇌천의는 피식 웃었다. "피차 같은 처지에 무얼 따지시오? 어쨌든 이곳에서는 내가 가장 형편이 나은 것 같구려." 그는 연이어 생사의 고초를 겪은 터라 더 놀랄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담담히 자신의 소개를 했다. "소생은 뇌천의라 하오." 흑의괴인이 쿡쿡 웃었다. "건방진 꼬마놈이로구나. 하지만 뱃심 하나만은 마음에 든다. 너 는 만독제군(萬毒帝君)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뇌천의는 흠칫했다. "그럼 당신이 바로 만독사태청(萬毒邪太廳)......." "흐흐! 노부가 바로 만독사태청의 청주인 만독제군이니라." 뇌천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만독사태청은 변황팔절의 하나로 독공으로 유명한 묘강 제일의 문파가 아닌가? 한데 만독제군은 이십여 년 전 실종됐다는 전대청 주인데.... 그가 이런 곳에 갇혀 있을 줄은 몰랐구나.' 만독제군은 녹광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옆의 두 사람을 힐끗 보며 말했다. "이봐, 땡중 고불(古佛)! 말코 적봉(赤鳳)! 어떠냐? 이 꼬마가 우 리의 뜻을 이루어 줄까?" "......!" 뇌천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고불과 적봉이라면!' 그들은 불도이성(佛道二聖)으로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성자로 추 앙받던 인물들이었다. 고불선사(古佛禪師)와 적봉우사(赤鳳羽師)로 불리는 그들은 소림 과 전진(全眞)의 전대장교로 그들의 무공은 역대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다. 어느날 그들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의 실종에 온갖 소문 이 나돌았다. 어떤 이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도 했고, 어 떤 이들은 그들이 우화등선(羽化登仙)했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연명하고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백사십 세가 넘은 고령이었다. "아미타불......." 고불선사가 불호를 외웠다. 그는 잔잔한 눈으로 뇌천의를 향해 물 었다. "소시주는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소?" 뇌천의는 절로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얘기해도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생은......."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살종의 자격으로 사마신무의 청부를 받아 엽무웅을 찾아갔던 일 부터 오늘에 이르까지의 일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특히 사마 신무가 생일을 핑계로 무림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최대한 자세히 이야기 했다. 삼 인의 괴인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안색이 수십 차례나 변했다. 특히 만독제군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듯 쉴새없 이 쇠사슬을 절그럭거렸다. 이윽고, 그의 이야기가 끝났다. 적봉우사는 눈을 감고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그 아이의 악이 극에 이르렀구려. 이를 어찌해 야 한단 말이오?" 고불선사도 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 아이는 이미 무림을 절반 이상 장악하고 있 는 것 같구려. 천축 천광사의 주지 파미야(破彌也)의 아들인 그가 중원무림을 삼킬 야심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오." 뇌천의는 흠칫했다. "그가 천광사 주지의 아들이라니?" 만독제군이 탁성으로 말했다. "흐흐! 놈은 중원무림을 정복하기 위해 일곱 살 때부터 소림에 몸 을 던진 놈이지." "으음." 뇌천의는 신음을 흘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뿌리 깊은 음 모였다. 이제까지 그가 알고 있던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문득 그는 의문을 느꼈다. "그런데 이곳에 있던 괴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고불선사는 합장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모두 그 아이의 야망에 희생된 무림의 종주(宗 主)들이라네." "......?" "그들은 각파의 장문인들이거나 지역의 패주들이네. 아마도 현재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그 아이가 내세운 가짜들일 것이네." "그... 그럴 수가!" 뇌천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무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괴인들이 각파의 장문인이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허... 헌데 어째서 그렇게......." 만독제군이 설명했다. "그들은 노부의 부시독고(腐屍毒蠱)에 당했네. 흐흐.... 부시독고 에 중독되면 뼈와 살이 썩어 문드러지게 되지. 그것은 일반 독과 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떤 해독제로도 독소를 몰아낼 수 없다. 오 직 노부의 고술(蠱術)만이 해독할 수 있다." "......!" 뇌천의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괴물로 만든 게 당신의 짓이란 말이오?" 우웅! 그의 팔목에서 묵아가 울음을 토했다. 그러자 한 가닥 묵광이 뻗 었다. 만독제군은 신경도 쓰지 않고 괴소를 흘렸다. "흐흐! 사마신무 그 놈은 변황대동맹(邊荒大同盟)인 천외천추맹 (天外天秋盟)을 결성하여 노부를 비롯한 변황팔절을 끌어들였다. 노부 역시 중원정복의 꿈이 있었기에 기꺼이 연맹체에 가담했었 지." "......." "놈은 노부의 고술을 이용하여 중원무림의 고수들을 이곳에 가두 어 그 지경이 되게 했지. 흐흐! 그들이 미친 것은 고술과 뇌환마 초(腦幻麻草)라는 약성 탓이다. 그런데 놈은 노부를 두려워한 나 머지 결국 이곳에 가두고 말았지." "......." "크흐흐! 놈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놈의 거죽을 벗기고 뼈를 갈아 마실 것이다!" 뇌천의는 비로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사마신무의 악랄 한 성품과 치밀한 음모에 대해 증오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삼 인의 괴인과 뇌천의는 지금 같은 환경 속에 놓여있었다. 그로 인해 은연중 야릇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만독제군은 녹안을 희번뜩이며 말했다. "네가 사마신무를 죽여준다면 너에게 노부의 모든 것을 전해 주겠 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불선사와 적봉우사를 돌아보았다. "클클! 이봐, 당신들도 밑천을 털어놓을 때가 된 것 같아. 그렇지 않은가?" 고불선사와 적봉우사는 서로 마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금무림의 정세로 보아 오직 이 아이만이 사마신무의 음모를 저 지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들은 의견의 일치를 본 듯 품속에서 각각 한 가지 물건들을 꺼 냈다. 그것은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두루마리였다. "아미타불, 사마신무가 아직까지도 우리 두 늙은이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는 바로 이 물건들 때문이네." "......?" 뇌천의는 호기심을 느꼈다. '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고불선사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것은 한 장의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는 붉은 가사를 입은 중이 그려져 있었는데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중의 배경에 는 가공할 지옥도(地獄圖)가 그려져 있었다. 지옥도의 내용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전라의 미녀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미녀의 전신을 수백 마 리의 뱀이 휘감고 있는가 하면, 악귀들이 중을 에워싸고 원무를 추고 있었다. 목이 없는 귀신이 중의 어깨에 매달려 손으로 목을 조르고 있었으며, 온갖 괴수의 형상을 한 괴물들이 서로의 몸통을 물어뜯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중은 눈을 반쯤 내려감은 채 염화시중의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중의 전신에 은은한 보광(寶光)이 어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뇌천의는 두루마리의 그림에 넋을 잃었다. 고불선사는 탄식하며 설명했다. "아아!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중생 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며 죽어갔는지 시주는 모를 걸세." "......?" "이것은 아홉 장의 구룡개천환비도(九龍開天幻秘圖)중 하나라네. 전설의 구룡성궁(九龍聖宮)을 여는 열쇠이지." "아!" 뇌천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얼마나 신비스런 지보인가? 전설의 구룡성궁을 여는 자, 고금 제일인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때문에 아홉 장의 구룡환비도는 인간의 탐욕을 불러일으키며 세상 에 나타날 때마다 혈겁을 일으켰었다. 그런데 그중 한 장이 나타난 것이다. "빈도에게도 한 장이 있네. 이것은 빈도의 사문인 전진에서 수백 년 동안 보관해온 것이네." 적봉우사가 펼친 두루마리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는 도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도사는 반쪽은 희고, 반쪽은 검은 색인 음양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양손을 교차하여 허공으로 뻗고 있었다. 왼손에서는 화염이 뻗어 나오고, 오른손에서는 빙무(氷霧)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도사의 얼굴 역시 반쪽으로 갈라진 채 희고 검은 색 으로 선명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도사의 머리 위에는 태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태극(太極)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 두 장의 구룡환비도를 자네에게 주겠네. 훗날 인연이 닿는다 면 나머지 일곱 장을 얻을 수도 있겠지." 뇌천의는 내심 격동을 금치 못했다. '십전천사는 내게 다섯 장의 비도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 중 두 장을 이렇게 쉽게 얻게 될 줄이야.'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장의 비도를 받았다. 고불선사가 자비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홉 장의 구룡환비도가 모이면 구룡성궁을 열 수가 있네. 뿐만 아니라 각 비도에는 구룡성제(九龍聖帝)가 남긴 상승의 절학이 비 장되어 있다고 하네." 뇌천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 속에 절학이 비장되어 있다고?' "아미타불, 빈승은 오랜 세월 동안 비도 속의 무학을 찾으려 했으 나 허사였네. 아마도 인연이 닿지 않은 모양이네. 어쩌면 시주가 그 비밀을 풀 수도 있을 것이네." 뇌천의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때 만독제군이 입을 열 었다. "꼬마야, 노부도 줄 것이 있다. 하지만 명심해라. 네놈이 좋아서 가 아니다. 이건 일종의 거래인 셈이지. 흐흐! 사마신무를 죽여 달라는 청부 대가로 주는 것이다. 알겠느냐?" 뇌천의는 이제 그의 말에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 는 동안 그는 만독제군이 겉으로는 흉폭해 보이지만 기실 마음은 훈훈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후후! 당신의 쓸모 없는 사술 따위는 관심이 없소. 하지만 성의 를 봐서 받아들이겠소이다." "뭣? 으하하하... 핫핫!" 만독제군은 광소를 터뜨렸다. 한참 후 그는 웃음을 그치더니 녹광 을 번뜩이며 말했다. "꼬마야, 점점 네놈이 마음에 드는구나. 이놈아, 하지만 앞으로 노부의 절기에 두고두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핫핫핫......!" 만독제군은 다시 광소를 터뜨린 후 정색을 했다. "노부는 평생 동안 독술을 익혔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심령고술(心靈蠱術)이다. 이것은 노부가 익힌 독술과 고술의 정화 로 그 효용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네놈이 이것을 익혀 써먹게 되 면 노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뇌천의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심령고술은 일반적인 독술과는 다르다. 오직 정신력을 동원하여 상대의 체내에 고(蠱)를 집어넣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를 움직여 상대의 뇌(腦)속으로 침투시켜 마음대로 심령을 조종할 수도 있 다." 뇌천의는 반신반의했다. "세상에 그런 사술도 있소?" "흐흐! 사술? 건방진 놈! 심령고술의 내용을 알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만독제군은 곧 전음술로 그에게 심령고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구결을 전해 듣는 뇌천의의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는 경악 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만독제군의 심령고술은 과연 허풍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독술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심오한 정신수련에서 얻어낸 결과였던 것이다. 제령심고(制靈心蠱)라 불리는 심령고술은 독문이 낳은 최고의 기 인인 만독제군이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대법으로 가히 불가사의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고(蠱)란 묘강 지방에서만 자생하는 충의 일종으로 그 크기가 워 낙 작아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였다. 고는 극독을 지 니고 있는데 바람에 실려 날아가며 사람의 호흡을 통해 인체로 침 투한다. 고는 자신을 키운 사람에게는 독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만독제군 은 이런 고의 특성을 이용해 독특한 고술을 창안하여 독문의 제왕 으로 군림한 적이 있었다. 그는 사마신무에게 당해 동굴에 갇힌 후 고술을 더욱 발전시켜 정 신력으로 고를 조종하는 대법을 완성했던 것이다. 혈의(血衣). 피로 얼룩진 옷조각이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들추어보던 뇌천의는 점차 가슴에 차오르는 벅찬 감격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의 귓전에 고불선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그것이 이곳에서 숨진 각파 지존과 영웅들이 남 긴 절기(絶技)들이네. 그들은 자신의 죽음으로 자파의 절기가 유 실될 것을 우려하여 이렇게 구결(口訣)을 남겼네.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소시주가 그것을 익힌 후 언제고 그들의 문중(門中)으로 전해주기 바라네." 뇌천의는 한 무더기의 혈의조각을 소중히 품에 간직했다. 그의 손 은 벅찬 감동으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피로 쓴 혈구(血句)들. 그것은 자파의 명예를 보전하려는 고인들의 집념이 서려 있는 것 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기는커녕 흐르는 피로 생명과도 같은 절기를 남긴 그들, 뇌천의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는 비장한 어조로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반드시 각 문파에 전달하 겠습니다." "아미타불....... 한 가지가 더 있네." "......?" 고불선사는 품속에서 피로 물든 한 장의 천을 꺼냈다. "여기에는 우리 삼 인이 공동으로 창안한 무학이 적혀 있네." 뇌천의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고불선사와 적봉우사, 만독제군은 모두 출신이 틀릴 뿐더러 정사 개념도 상반된 사이였다. 그런데 그들이 공동으로 무공을 창안하 다니? 그는 경이로운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장기간 갇혀 있는 동안 출신이나 정사의 의미가 무의미해 졌구 나. 결국 인간은 그 근본이 같다는 사실이 증명된 게 아닌가?' 뇌천의는 은은한 감동을 느끼며 천조각을 살펴보았다. - 건곤삼식(乾坤三式). 그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천에는 단 세 초식이 구결로 적혀 있었 다. 공공불영수(空空佛影手). 일기파천홍(一氣破天紅). 구유살황류(九幽煞荒流). 뇌천의는 무학에 관한 한 뛰어난 오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구 결을 보는 순간 그것이 장법(掌法)으로도, 검이나 도로도 사용할 수 있는 무학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또한 불문무학과 도가의 무공, 만독제군의 패도적인 마공이 각각 특징적으로 담겨져 있었다. 그는 모두 삼초에 불과한 건곤삼식의 구결을 보고 새삼 자신이 지 닌 무학이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불선사는 구결에 빠져있는 뇌천의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소시주는 어렵지 않게 그 무공들을 익힐 수 있을 것이네. 부디 그 무학을 선을 위해 사용해 주기 바라네." 이때 만독제군이 툭 쏘아부쳤다. "이런 땡중 같으니! 시간 허비할 때가 아니라구!" 그는 뇌천의를 노려보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 꼬마야. 밖으로 나가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 은 이 벽을 뚫는 것 뿐이다. 물론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 뇌천의는 그가 가리키고 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검은 빛이 도는 벽은 보기에도 단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이 벽은 만령묵강석(萬靈墨剛石)이다. 그것도 두께가 석 자나 된 다. 우리 셋이 힘을 합쳐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뇌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만독제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렇지.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 어떻게?" "ㅋㅋ, 우리 사 인의 힘을 합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세 명의 힘으로는 안됐지만 자네까지 가세한다면 얘기가 틀려질 거 야." "......?" "우리 넷의 공력을 모두 합쳐 적봉 말코의 일기파천홍(一氣破天 紅)을 전개하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뇌천의는 의아스러운 듯 반문했다. "하지만 어떻게 네 사람의 공력을 합친단 말이오?" 만독제군은 괴소를 흘렸다. "흘흘, 오래 전부터 상의한 것이 있었지. 그것은......." 그는 말끝을 흐린 후 뇌천의를 녹광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주시했 다. 뇌천의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갑자기 무엇을 깨달은 듯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안되오! 그건......." 그는 앞으로 푹 쓰러졌다. 갑자기 세 사람이 그를 향해 손가락을 뻗은 것이다. 그는 동시에 현기(玄氣), 기문(機門), 영대(靈臺), 세 군데의 혈도가 짚혀버린 것이다. "제발.... 그것만은 안됩니다!" 그는 힘겹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세 기인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이미 결심한 대로 실행하 고 있었다. 만독제군의 전신에서 묵기(墨氣)가 흘러나오고 있었 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뇌천의는 그만 아혈(啞穴)마저 짚혀 버렸다. 철컹! 하는 쇳소리와 함께 만독제군의 손이 뻗어와 그의 백회혈에 얹어 졌다. "꼬마야! 그리 감격할 건 없다. 어차피 우리들은 이곳을 떠나지 못할 몸이다. 쓸모 없는 내공을 지니고 있어봐야 재가 될 뿐이지. 차라리 네놈에게 몰아주어 그 교활한 사마신무를 죽이는데 사용하 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스스스......! 그의 손바닥을 통해 한 가닥 기류가 뇌천의의 천령개를 통해 스며 들어갔다. "제령심고술을 시전하려면 노부가 백이십 년간 쌓아온 고정(蠱精) 을 흡수해야 한다. 구결만으로는 완전한 시전이 불가능하지. 흐 흐! 이것이 네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뇌천의의 눈썹이 부르르 진동했다. 만독제군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령개를 통해 이루 말할 수 없이 강한 기운이 밀려 들어온 것이 다. 쿠쿠쿵......! 만근뇌정이 정수리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에 그는 내심 비명을 질 렀다. '윽!' 한순간 체내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그는 의식 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뇌천의는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다. '......!' 그는 자신에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첫번째로 느끼는 변화는 시력이 말할 수 없이 좋아졌다는 것이었 다. 동굴은 칠흑처럼 어두웠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동굴 안을 대낮처 럼 환하게 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바닥의 모래알의 숫자까지 헤 아릴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좋아진 것이다. 두번째 변화는 청력(聽力)이었다. '......!'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귀로 온갖 소리가 다 들리고 있었다. 땅 속에서 지네가 기어가는 소리, 지하 깊은 곳의 수맥이 흐르는 소리, 심지어는 동굴 안에 흐르는 공기의 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을 이룩하다니!" 그렇다. 그는 전설로만 전해져 오는 천안통과 천이통을 얻은 것이었다. 그 는 희열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럴 수가!" 그는 고불선사와 적봉우사, 만독제군을 바라보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는 백골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모두...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백골더미를 움켜쥐었다. 우수수......! 백골은 가루가 되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허망하게 흘러내렸다. 그 들은 내공을 모두 전해준 뒤 숨을 거두고 만 것이었다. 실로 숭고 한 희생을 치른 것이었다. 툭! 백골 속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투명해 보이는 혈 옥색의 구슬이었다. "이건... 연기단정(練氣丹精)!" 그렇다. 그것은 오랫동안 도가의 상승기공을 익힌 적봉우사의 몸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종의 내단(內丹)이었다. 만일 그것을 복욕하면 적봉 우사가 평생에 걸쳐 쌓은 도가의 기공을 고스란히 이어받을 수 있 는 것이었다. "아아!" 뇌천의는 가슴이 미어질 것 같만 같았다. 평소 냉담하기 그지없는 그의 성격으로 이같은 격동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삼 인의 기인은 그에게 너무도 큰 선물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갔 다. 천이통과 천안통은 고불선사의 선물이었다. 만독제군은 고정(蠱 精)을 남겨 주었으며, 적봉우사는 도가 최고의 비전이라는 연기단 정을 남겼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선물이었다. "아아......." 뇌천의는 백골더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서 소리없는 눈 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세 이인(異人)으로부터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셈이었 다. 또한 난생 처음으로 그에게 사람의 정을 느끼게 해 준 것이었 다. 그는 지금까지 인간에게 이토록 뜨거운 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던 십전천사에게도 정을 느끼지 못했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세 이인에게서는 혈육 이상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말했다. "세 분은 들으시오. 이 뇌천의는 반드시 세 분의 염원을 이룩하고 말겠습니다. 생면부지인 소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킨 세 분의 은덕은... 죽어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적봉우사가 남긴 연기단정을 받쳐들었다. 혈 옥색의 구슬에는 적봉우사가 백 년 이상을 단련한 전진문의 최고 기공인 적양신공(赤陽神功)의 정화가 담겨져 있었다. 뇌천의는 그것을 삼켰다. 확! 삼키자마다 그는 온몸이 불구덩이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으윽!"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그는 바로 달마검급 상의 검정연기공을 일으켰다. 그의 체내에는 연기단정이 녹으며 불덩이같은 기운이 미친 말처럼 혈맥을 치달리 고 있었다. '으으윽!' 그는 열기로 인해 내장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아무리 열기를 다스 리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의 전신 모공으로부터 연기와 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는 더욱 검정연기공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고통 은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으으, 뭐가 잘못됐단 말인가?' 그는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이었다. 뇌리에 한 중의 모습이 떠올 랐다. 그것은 아수라지옥을 배경으로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고 있는 그림 이었다. 바로 구룡환비도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뇌천의는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 영감을 느낀 그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구룡환비도의 그림 속에 빠져들자 저절로 한 번도 행해본 적이 없는 운기법(運氣法)이 일 어났다. 휘리리리링......! 뇌천의의 모공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연기와 불꽃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잠시 후 다시 모공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해낸 것이다. 그것은 여의천형공(如意天形功)으로 구룡성제 중 한 명인 여의대 불성(如意大佛聖)이 남긴 불문최고의 심법이었다. 만사만겁(萬邪萬劫)을 물리치는 항마대법력을 지닌 불문의 최고무 상심법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천하의 어떤 종류의 신공도 융합시키는 무궁한 묘용 이 있는 것이었다. 뇌천의는 마침내 구룡절학 중 일절을 얻은 것 이다. "일기파천홍(一氣破天紅)!" 뇌천의의 입에서 무거운 일성이 떨어졌다. 순간 그의 장심(掌心) 이 붉게 변하더니 손목으로, 나중에는 팔 전체가 붉게 변했다. 번-- 쩍! 홍광(紅光)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 석벽을 강타했다. 동굴이 진동하며 만령묵강석으로 이루어진 벽이 시뻘겋게 달아올 랐다. 콰콰쾅! 곧이어 엄청난 폭음과 함께 석벽에 구멍이 뻥 뚫렸다. 콰르르르......! 구멍 속으로 화염의 소용돌이가 밀려나갔다. 잠시 후 뇌천의는 구 멍이 뚫려 있는 벽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벽을 통과한 그는 흠칫 하고 멈춰섰다. 석벽 밖은 한 칸의 정실이 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한 여인이 경악에 휩싸인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을지사란이었다. "이럴 수가......? 만겁지옥뢰(萬劫地獄牢)를 통과하다니......." 을지사란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여러 차례 눈을 깜 박이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장방형의 석실이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었 는데 놀란 나머지 경직되어 있었다. 뇌천의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로 인해 겪은 고통과 위험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란, 다시 보게 되었구려. 아름다운 모습은 여전한 것 같소." "대체... 어떻게?" 을지사란은 회의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놀랄 것 없소. 내가 말하지 않았소? 인간의 운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 을지사란은 몇 차례나 안색이 변했다. 이윽고 그녀는 힘없이 중얼 거렸다.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뇌천의가 다가가며 말했다. "사란, 이제 당신은 사마신무를 떠날 때가 됐소." 을지사란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젖어있었다. 그녀는 고개 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미 늦었어요." 뇌천의는 흠칫했다. 을지사란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흐흑! 그 분은 단 한 번의 배신이라도 용납하는 분이 아니에요." "무슨 뜻이오?" "소녀는 이미 그 분에게 낙인이 찍혀버렸답니다." 뇌천의는 안색이 변했다. "낙인이 찍히다니?" "소협께서 의자의 빨간 구슬을 눌렀을 때... 소녀가 기관을 파괴 했다는 것을 아시나요?" 뇌천의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렇다면?" "소녀가 기관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소협은 살아나실 수 없었을 거 예요. 소녀는 도박을 걸기로 했어요. 기관을 파괴한 후 소협의 운 명을 시험하기로 말이에요." 뇌천의는 뜻밖의 말에 마음이 혼란해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소협이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했어요. 소협이 떨어져야 할 곳이 만겁지옥뢰였기 때문이죠. 아직까지 그곳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오 시다니......." 뇌천의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럼 사란이 기관을 파괴함으로써 사마신무의 노여움을 샀단 말 이오?" 을지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명백한 배반이었어요. 때문에 저는 이곳에서 영원히 나 갈 수가 없게 되었어요." 뇌천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말이오?" 을지사란은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제가 일어서는 순간 기관장치에 의해 이곳은 폭발하게 되어 있어 요." "......!" 뇌천의는 분노로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악랄한 안배로군!" "그 분은 저에게 마지막으로 충성을 강요했어요." "......?" "이곳에 기다리고 있다 소협이 탈출한다면 함께 자폭하라는 명이 었어요." "으음." 뇌천의는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사마신무는 집요하고도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새삼 동굴 속에서 겪은 일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반드시 네 놈을 죽여버리겠다!' 을지사란은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당신은... 저에게 새로운 인생을 느끼게 해 준 분이에요." "......." "사실 저는 이미 수년 전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제 얼어붙 은 마음을 녹여준 것은 뇌소협이었어요." 뇌천의는 한 가닥 가책을 느끼며 어색하게 말했다. "미안하오, 소저. 내가 그대에게 접근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 이었소." 을지사란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인(情人)을 잃은 후로 차갑게 얼어붙었던 제 마음속에 소협은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어요. 그 은덕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사란......." 뇌천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을지사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인이 자신 의 눈앞에서 참혹하게 죽은 후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 했을 것이다. 과연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겠는 가? 그녀의 삶은 고독 그 자체였을 것이다. 비록 그가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하지만 잠시나마 그녀는 여자로서의 삶을 맛보았을 것 이다. 뇌천의는 부드럽게 말했다. "사란, 결코 늦지 않았소. 당신은 아직도 젊고 아름답소." "늦지 않았다고요?" 을지사란은 처절하게 웃었다. "호호호홋....... 모두 끝났어요. 소협의 말씀은 고맙게 받아들이 겠어요." 그녀는 어조를 바꾸더니 급히 말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세요. 소녀가 나가는 길을 알려드리겠어요."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뇌천의는 문득 엉뚱한 질문을 던 졌다. "내가 이곳에 떨어진 지 얼마나 지났소?" 을지사란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곧 대답했다. "하루 반나절이 지났어요." 뇌천의는 안색이 홱 변했다. "그렇다면?" 을지사란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탄식을 발했다. "아아, 늦었어요. 그 분은 벌써 죽음의 연회를 벌였어요. 이제 잠 시 후면 천하는 그 분의 손에 떨어질 거예요. 화살은 이미 날아갔 어요." 뇌천의는 크게 부르짖었다. "안돼! 그래서는 안되오!" 그는 급히 물었다. "사란, 당신은 알 것이오. 군웅들을 구출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주시오!" 을지사란은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요. 설사 음모를 저지한다 해도 천상보를 빠져나간다는 것 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 분은 벌써 곳곳에 진법을 펼쳐놓았어 요." 뇌천의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해야 하오! 악인의 손에 무림이 넘어가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만 하오!" "하지만......." "사란! 하늘은 정의의 편이오! 날 보시오! 이렇게 살아 나오지 않 았소?" "소협......." 을지사란의 눈에는 감동이 어렸다. "이 뇌천의는 결코 그 자의 손에 무림을 넘길 수가 없소! 갑시 다!" 을지사란은 깜짝 놀랐다. 뇌천의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던 것이다. "어... 어떻게 하시려고?" 그녀의 눈은 불안에 차 있었다. "이곳을 나가는 것이오." "불가능해요. 이곳에는 수천 근의 화약이......!" 순간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뇌천의가 그녀의 손을 잡았던 것이 다. 그는 무겁게 말했다. "한다면 하는 것이오." 그의 음성은 낮았으나 확고한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을지사 란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춘 후 말했다. "운명은 하늘에 달려 있소.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오. 자, 꽉 잡 으시오." 뇌천의의 음성이 흐려지는 순간 그녀의 몸은 붕 떠올랐다. 뇌천의 의 가슴에 안긴 것이다. '아!' 을지사란의 가슴이 터질 듯했다. 말할 수 없는 감동이 그녀를 휘 감았다. "소협......." 그녀의 말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폭발음이 울렸다. 꽝! 콰르르르릉! 석실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고, 사방으로 굉렬한 폭발이 일어났 다. 을지사란은 엄청난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의식할 수가 없었다. ■ 무림백서 2권 제14장 혈로(血路) ━━━━━━━━━━━━━━━━━━━━━━━━━━━━━━━━━━━ 석실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산산조각난 바윗덩이 속에 두 남녀의 몸은 완전히 파묻히고 말았 다. 아무리 빨리 신형을 날렸다지만 폭발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 이다.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은 후. 잔해더미가 움직였다. 이어 손 하나가 나타났다. 여인의 고운 손 이었다. 와르르....... 바위가 무너지며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바로 을지사란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바위를 파헤쳤다. 잠시 후 그녀는 뇌천의를 발견했 다.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뇌소협......!" 그녀는 다급히 그를 흔들었다. 그러나 뇌천의는 눈을 뜨지 않았 다. 그녀는 격동을 금치 못했다. '아아! 이 분은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 날 지켜 주었어!' 그렇다. 폭발이 일어난 순간 뇌천의는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감쌌던 것이 다. 그로 인해 을지사란은 무사할 수 있었으나 대신 그가 중상을 입은 것이었다. "살려야만 해.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을지사란은 굳은 각오를 하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뇌천의의 행동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흐흐흑, 뇌소협......."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뇌천의를 어루만졌다. 뇌천의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다행히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것은 만겁지옥뢰에서 삼 인의 기인으로부터 내력을 전해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호신강기가 몸을 보호하고 있다 해도 가공할 폭발 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전신의 경락이 막히고 내장이 틀어져 버린 것이다. 을지사란은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학문과 병술은 물론 의 도(醫道)에도 밝았으므로 뇌천의의 상태를 보고 그가 보통 방법으 로는 치유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잠시 후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이 분을 살리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그녀의 눈에서 결의의 빛이 솟았다. "음양회천대법(陰陽廻天大法)을 사용할 수밖에......." 음양회천대법. 그것은 일종의 밀법으로 천축에서 은밀히 전해지는 비법이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비전지술로 을지 사란은 과거 사마신무로부터 대법을 배운 바 있었다. 기이한 것이 사람의 운명이었다. 사마신무도 설마 자신이 전수해준 대법이 자신의 적에게 쓰여질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음양회천대법은 아무나 시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시술자나 환자가 함께 죽을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술자가 동정이거나 순음지기를 간직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당신을 위해... 사란의 모든 것을 걸겠어요." 을지사란은 뇌천의를 안고 걸어갔다. 석실이 완전히 무너졌으므로 대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장소를 옮 겨야 했다. 잠시 후, 그녀는 다른 석실로 들어갔다. 석실 안에는 돌로 된 침상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뇌천의를 침상 위에 눕힌 후 그의 옷을 모두 벗겼다. "흐흑......." 처참했다. 뇌천의의 몸은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온통 파편으 로 인해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진 것이다. 그녀는 정성껏 그의 몸을 닦았다. 자신의 옷을 찢어 상처의 피를 닦아내는 데만 해도 꽤나 오래 걸렸다. 비록 순결한 처녀의 몸이었으나 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엄숙한 마음이 들뿐이었다. 피를 모두 닦아낸 후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굳이 옷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었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벗자 곧 아름다운 나신이 드러났다. 신의 걸작품이었다. 두 개의 젖가슴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백설같이 흰 피부에 들 어갈 곳과 나올 곳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육체가 드러났다. "......." 그녀는 슬픈 듯이 자신의 나신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었던 청백지신이 었다. 이제 그녀는 한 남자를 위해 고이 가꾸어 온 육체를 희생시 켜야 하는 것이다. 파르르......! 그녀의 몸이 가는 경련을 느꼈다. 아무래도 처녀인 그녀는 미지의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두려워 할 것 없어. 날 구해주신 이 분을 위해... 무엇을 아까워 한단 말인가?' 그녀는 뇌천의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방금 전 그의 몸을 닦아줄 때는 몰랐으나 새삼 그의 몸을 내려다 본 순간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그녀는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순결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펐다. "흑......!"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악물 고 중얼거렸다. "천의, 제발 살아나 주세요. 당신만 살아난다면 저는... 어떻게 되도 좋아요."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침상 위로 올랐다. 그녀는 뇌천의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쳤다. 두 사람의 몸이 맞 닿은 순간 그녀는 부르르 경련했다. 뇌천의의 몸은 차가웠다. 얼음장처럼 찬 감촉이 그녀의 정신을 일 깨운 것이다. 그녀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사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가슴과 가슴, 복부와 복부, 팔과 다리가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그녀는 사지를 벌려 그를 껴안으며 대법을 운용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신의 모공을 열었다. 그녀는 독특한 운기법에 따라 체내의 음기(陰氣)를 모공으로 배출 시켰다. 스스스......! 잠시 후 그녀의 나신으로부터 뽀얀 기류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순 음지기였다. 순음지기가 뇌천의의 싸늘하게 식은 몸을 뒤덮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을지사란은 이를 악문 채 사지를 움직였다. 온몸으로 밀착된 부위 를 마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여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초였다. 특히나 남자 경험이 전혀 없는 그녀로서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닿 는 뇌천의의 딱딱한 근육이 마음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을 꾸짖었다. '사란! 정신을 차려라! 여기서 잘못되면 이 분은 물론 너마저 망 치게 되는 거야! 사란!' 그녀는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반응이 나타났다. 죽은 듯이 누워만 있던 뇌천의의 몸이 차츰 더워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다. 손과 발로 그의 전신을 감쌌으 며 온몸을 밀착시킨 채 마찰시켰다. 심지어는 입술을 벌려 뇌천의의 입술을 강하게 비벼댔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일단 땀이 흐르자 미 끈거렸다. 그렇게 되자 마찰하는 일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하아!" 그녀는 입을 벌려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힘들기도 했으려니와 점 차 이상한 느낌으로 온몸이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성숙한 남녀가 알몸으로 마찰하 는데 느낌이 없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가 시술하는 음양회천 대법은 순음과 순양의 기운을 하나로 합쳐야 하는 것으로 구결을 시행하면 자연스럽게 욕념이 일게 되어 있었다. 급기야 그녀는 온몸이 짜릿짜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절로 벌어졌으며 끊임없이 뜨거운 숨결이 토해져 나왔다. 그녀는 여전 히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뇌천의의 입술과 뺨, 귓볼을 마구 부벼 댔다. 점차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인의 은밀 한 부위에서는 음정(陰精)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어대며 더욱 강하게 마찰하기 시작했다. 남녀의 모든 신체 부위가 빈틈없이 밀착된 채 미끈거리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꿈틀거렸다. '흐윽!' 을지사란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이마에서, 콧등에서 맑은 땀방 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마침내 뇌천의의 몸도 뜨거워지기 시작 했다. 반응이 없던 그가 반응을 일으켰다. '......!' 한순간 그녀는 하복부에서 이물질을 느꼈다. 그녀는 얼굴이 도화 처럼 상기되었다. 드디어 대법이 고비에 이른 것이었다. 그녀는 몸을 더욱 빨리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모 공으로부터 흘러나온 순음지기는 서서히 뇌천의의 모공에서 나오 는 순양지기와 혼합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자욱한 기류에 휩싸이게 되었고, 석실 안에는 후끈한 열기가 퍼져 나갔다. 뇌천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순양지기가 체내에서 발산되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의 하복부에서는 한 부분이 뜨겁게 팽창되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을지사란은 이를 악물었다. '때를 놓치면 안돼!' 그녀는 흥분으로 온몸이 달아오른 상태였으나 정신만은 명경지수 처럼 맑아야 했다. 그녀는 자세를 바꾸었다. 마치 말을 탄 자세처럼 뇌천의의 아랫배에 올라탄 것이다. 상체를 일으킨 그녀의 가슴이 크게 기복을 일으키며 출렁거렸다. 처녀의 젖가슴이었다. 한 번도 타인에게 보인 적이 없는 젖가슴이 갑자기 크게 부풀어올랐다. "아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온몸 이 터질 듯했다. 그녀는 몸을 움직였다. 뇌천의의 한 부분이 그녀 의 은밀한 부분과 맞닿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다. '악!'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정확히 두 사람의 몸이 하 나로 결합된 것이다. 온몸이 찢어질 듯한 고통에 그녀의 아미가 찌푸러졌다. 그러나 거기서 중단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을지사란은 강하게 몸을 움직였다. '흑!' 그녀는 이빨을 악물었다. 고통이 밀려들었다. 온몸이 열린 것이 다. 파과(破瓜)! 그녀의 여인지문이 열린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앞으로 엎어지며 뇌천의의 목을 껴안고 진기를 돌 렸다. 그녀의 체내에서 순음지정이 끓어 넘쳤다. 그녀는 구결을 따라 진기를 운행시켰다. 뜨거운 기운이 하복부로부터 밀려들었다. 그것은 뇌천의의 체내로 부터 유입된 것이었다. 그녀는 그 기운을 흡수했다. 대하처럼 뇌 천의의 순양지기가 그녀의 음문을 통해 밀려 들어왔다. "하악!" 그녀는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 다. 그녀는 받아들인 순양지기를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순음지 기와 융합시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스스스......! 자욱한 수증기가 두 사람의 몸을 뒤덮었다. 수증기는 차츰 두 사람의 모공을 통해 빨려 들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기운은 하나로 융합되어 갔다. 을지사란은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악문 채 운기를 계속했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몸은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학!' 을지사란의 눈이 치떠졌다. 갑자기 그녀의 내부로 엄청난 느낌이 온 것이다. 뇌천의의 양물이 무섭게 팽창되어 그녀의 내부를 꽉 채우는가 했더니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고비가 도래한 것이다. 을지사란은 정신이 산산히 흩 어지는 것을 붙잡아야 했다. 그녀는 온몸을 경직시켰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내부에서 순음지정을 모아 밀어냈다. 휘류류류륭-! 한순간 백무가 모두 두 사람의 모공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흐윽!" 을지사란은 전신이 아스라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온몸 을 축 늘어뜨렸다. '해... 냈어.'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뇌천의의 가슴 위로 쓰러졌다. 편안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식감이 그녀의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뇌천의의 넓은 가슴에 안긴 채 가쁜 호흡을 내 쉬었다. 그녀의 뺨은 마치 복숭아처럼 빨갛게 달아 있었다. 문득 누군가 그녀의 젖은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고맙소. 사란." 뇌천의였다. 그는 눈을 뜬 채 을지사란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을지사란은 눈 둘 곳을 몰라 당황했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다. 더구나 두 사람은 아직도 육체가 결합되어 있는 상태였다. 뇌천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 을지사란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뇌천의의 손은 그녀의 머리칼에서 등으로 부드럽게 내려왔다. 그 의 손은 따스했다. 을지사란은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새 고 통은 사라지고 한없는 충족감이 밀려들어왔다. 그녀는 몸을 떼어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뇌천의의 몸에 올라탄 채 엎 드려 있었다. '영원히... 이대로 있고 싶어.'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뇌천의는 모든 것을 알았다. 그는 을지사란의 몸 속에 들어가 있 었다. 말할 수 없이 아늑한 기분이었다. 그도 역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으나 몸과 몸으로 수많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란.... 그대에게 빚을 졌구려." 뇌천의는 을지사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에요. 빚을 진 것은... 저예요. 제가 아니었더라면 당신이 그렇게 되지는......." 뇌천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영원히 잊지 않겠소. 사란." "아아......! 천의!" 을지사란은 그를 강하게 껴안았다. 그녀는 눈물에 젖은 뺨을 그의 가슴에 부볐다. 환란 속의 결합. 그것은 두 사람을 하나로 맺어준 결과가 되었다. 아울러 한 여인 의 인생을 바꾸게 만들었다. 이제 을지사란은 몸과 마음이 모두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뇌천의 의 여인으로 그녀의 인생은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뇌천의는 부드럽게 을지사란의 몸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을지사 란은 허전한 느낌이 들었으나 부끄러움에 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 다. 뇌천의는 일어나 앉다가 바닥에 한 송이의 혈화가 피어난 것을 보 고 이상한 감동을 느꼈다. 을지사란의 순결의 상징인 것이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옷을 찾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벗 은 옷은 옷이라고 할 수도 없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누더기를 대충 걸치고 을지사란에게도 건네주었다. "후후! 이곳에서 나갈 때까지는 할 수 없구려." 을지사란은 얼굴을 붉히며 급히 옷을 걸쳤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 로 보이는 그녀의 팔다리는 눈부시게 희었다. "갑시다, 사란. 더 이상 지체하면 군웅들이 위험하오." 을지사란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는 걸요." 뇌천의는 완고하게 말했다. "한 사람이라도 구해야 하오." 그 말은 을지사란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 누군가를 위해 산 적이 없었다. 그런데 뇌천 의는 단 한 사람만이라도 구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뇌천의가 무 척이나 존경스러워졌다.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 그녀는 뇌 천의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맞아요, 어서 가요. 우리." 휙! 두 사람은 즉시 신형을 날렸다. 황금전(黃金殿). 천상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대전이었다. 으리으리한 장식도 장식이려니와 능히 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대전이었다. 지금 황금전은 혈풍(血風)에 휩싸여 있었다. 대전 앞마당은 온통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차차차창--!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와 처절한 비명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가공할 참극이었다. 사마신무의 생일 연회는 죽음의 연회로 변해버렸다. 잔치가 벌어지기도 전에 혈전이 벌어진 것이다. 강북무림도의 군 웅들은 사마신무를 향해 엽무웅의 일을 강력히 추궁했고, 사무신 무는 마침내 공격명령을 내린 것이다. 애당초부터 화합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싸움이 벌어지자 사망자가 속출했다. 바닥에는 삼백 명 이상의 시 신이 뒹굴었다. 시간이 흐르자 군웅들은 점점 더 밀리기 시작했 다. 한가운데 이백여 명의 군웅들이 피를 뒤집어쓰다시피 한 채 몰려 있었다. 그들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선의 방책은 탈 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혈로(血路)를 뚫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여 명의 인물들이 그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 로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문득 군웅들 가운데서 장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핫! 사마신무, 왜 네가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이냐? 하늘 이 두려운 줄 알기나 아는 것이냐?" 장소를 터뜨린 자는 일장이 넘는 금창(金槍)을 위맹하게 휘두르고 있는 백발노인이었다. 그는 바로 무적진구주금창신협 여사성이었다. 백염을 시뻘겋게 물 들인 채 그는 금창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두세 명 의 천상보 고수들의 목이 날아갔다. "크아악!" 여사성의 무위는 놀라웠다. 벌써 그 혼자 해치운 천상보의 수하들 만도 사오십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 자들은 끊임없이 몰려들었 다. 더구나 포위하고 있는 자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들 속에는 구 파일방을 비롯한 백도이십팔련(白道二十八聯)의 인물들도 가세하 고 있었다. 더구나 변황팔절의 인물들까지 끼여드니 전세는 일방 적으로 북무림도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여사성은 수염을 떨며 내심 중얼거렸다. '구파일방은 물론 백도이십팔련마저 놈의 주구가 될 줄이야! 오 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썩어빠진 작자들아! 너희들은 중원무림을 오랑캐에 게 넘겨줄 셈이란 말이냐! 자존심도 없는 비열한 인간들 같으 니... 노부의 금창을 받아 보아라!" 위이이잉! 금창이 맹위를 떨쳤다. 그는 한 마리의 늙은 사자처럼 전장을 누 볐다. 그가 이렇게 분전하자 이백여 명의 군웅들도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도외시하고 공격을 펼쳤다. 비록 중과부적이었으나 군웅들의 비장한 공격에 천상보의 고수들 은 쉽사리 전세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음침한 음성이 울렸다. "여노영웅! 금창만 휘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중원무림과 변황의 평화를 위해 고개를 숙이시오. 더 이 상 피를 흘린다면 그나마 남아있는 맥은 영원히 끊어지게 될 것이 오." 여사성은 발연대로했다. "이 더러운 놈!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중원무림을 어찌 오랑캐 들에게 넘겨준단 말이냐? 노부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죽어 도 안된다!" 위이이잉! 금창이 풍차처럼 돌아갔다. "크아아악!" 다시 네 명의 고수가 그의 금창에 목이 떨어지며 날아갔다. 한편, 후위에서는 광해제군(廣海帝君) 종리백이 쌍장을 날리며 분 전하고 있었다. 낙성추혼신군 군유명도 한쪽 팔이 달아난 상태임 에도 분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신도묵궁 탄금부는 양손에 도와 묵궁(墨弓)을 들고 눈부신 활약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배신자인 금강존자는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싸 움이 벌어졌을 때 몰래 여사성을 암습하려다 군유명이 뛰어드는 바람에 대신 그의 왼팔을 자르는 데 그쳤다. 반면 그는 군유명의 묵궁에 머리가 으스러진 채 즉사해버린 것이 다. 배신자다운 최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다시 사마신무의 괴소가 들려왔다. "으하하하핫! 대를 위해서는 항상 소가 희생되는 법이지. 여러분! 더 이상 봐줄 것 없소. 저들을 지옥으로 보내 주시오!" "와아아아!" 천상보와 구파일방, 정도이십팔련, 변황팔절의 고수들은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공세를 강화시켰다. 이렇게 되자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고막을 찢는 장풍소리,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일어나며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실로 가공할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군웅들은 모두 천상보에서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들 은 죽으면 죽었지 굴복할 마음이 없었다. 적에게 무릎 꿇느니 이 곳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혼신의 힘으로 싸우고 있었다. 천여 명의 인물들, 그들은 천외천추맹(天外天秋盟)을 결성했다. 사마신무의 야심 아래 영혼을 판 자들이었다. 혈전은 이제 서서히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결사적으로 항전하 던 군웅들의 수는 절반 이상 줄었으며, 그나마 점점 동작이 둔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외천추맹의 인물들은 더욱 공세를 강화하 고 있었다. 이제 전멸은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이때였다. 꽈르릉--! 문득 천외천추맹의 일각에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으아악!" 비명과 함께 진세가 흩어지더니 한 괴노인이 모습을 보였다. "흘흘흘! 여러분들, 이쪽으로 오시오!" 산발을 휘날리며 나타난 자는 바로 거지 노인인 천풍거사였다. 그는 허리춤에 무엇인가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는데 하나씩 떼어 내어 던지고 있었다. 꽈꽝--! 폭음과 함께 천외천추맹의 인물들은 비명과 함께 사지가 떨어져 나가며 날아갔다. "으헤헤헷! 옛다! 선물이다." 천풍거사가 던진 것은 화탄(火彈)이었다. 화탄을 던져 포위망을 와해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수가 많고 무공이 강하다 해도 화탄을 당할 수는 없었다. 차츰 포위망이 무너지고 있었다. "와--!" 군웅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솟아 올랐다. 사기가 충천한 군웅들은 일제히 생로를 향해 달려갔다. 한편, 그 광경에 안색이 퍼렇게 질린 자가 있었다. 그는 정도십팔 련의 하나인 벽력뇌가(霹靂雷家)의 가주 벽력신군(霹靂神君) 뇌황 (雷黃)이었다. "어... 어찌된 일인가? 본가의 벽력뇌화신탄을 사용하다니! 대체 저 놈은 누구기에?" 천풍거사가 던지고 있는 화탄은 바로 벽력세가의 독문화기였던 것 이다. 꽈꽝! 쾅......! 연속 터지는 폭음소리! 천외천추맹의 포위망 일각은 완전히 무너 져 내리고 말았다. 군웅들은 천풍거사의 뒤를 따랐다. 절망 끝에 생로를 찾은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신형을 날렸다. 꽝! 콰콰쾅......! 앞을 막는 자들은 여지없이 벽력뇌화신탄의 가공할 위력에 불덩이 가 되어 날아갔다. "으헤헤헷! 얼마든지 막아 보거라. 오늘은 특별 요리를 하는 날이 로구나!" 천풍거사는 화탄을 사방으로 던지며 괴소를 터뜨렸다. 실로 불가 사의한 일이었다. 그는 벽력뇌가의 화기를 훔쳐서 군웅들을 돕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벽력뇌화신탄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지니고 있던 화탄이 바닥나 버린 것이다. 무너졌던 포위망이 다시 복구되고 있었다. 군웅들은 다시 무력으로 생로를 뚫을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찰거머리 같은 놈들이군!' 천풍거사는 헐렁해진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군웅들은 계속 앞으로 질주했다. 그런데 갑자기 괴이한 일이 벌어 졌다. 삐이이익! 하는 고막을 거슬리게 하는 호각 소리가 들려온 순간 갑자기 사위 가 적막해져 버린 것이다. "......?" 군웅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앞을 가로막던 천외천추맹의 인물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눈 앞에는 막막한 안개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 어찌된 일이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소......." 군웅들은 병기를 내리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의 아수라장과도 같 았던 분위기가 마치 아득한 옛날 일인 것만 같았다. 자욱한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그들 앞에는 끝없는 화원(花園)이 펼쳐지고 있었다. 화원에는 수백 종의 기화요초가 피어나 있었다. 가히 꽃의 바다와 도 같은 풍경이었다. "......!" 군웅들은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유령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한편 천풍거사의 안색은 굳어져 있었다. '이곳은... 진세가 깔려 있는 것 같구나. 비록 겉보기에는 평화로 운 것 같지만... 어쩌면 흉험하기 그지없는 죽음의 진법인지도 모 르겠구나.' 그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꽃과 죽음. 일견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가슴 속으로 서늘한 바람이 밀려드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는 군웅들을 둘러보았다. 그들도 불길한 예감을 느낀 듯 우왕좌 왕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끝없이 펼쳐진 화원을 노려보았다. '사마신무는 무서운 놈이다. 결코 우리를 순순히 놓아 줄 리가 없 다. 놈이 설치한 진법은 필경 죽음의 절진일 것이다.' 이때 누군가가 외쳤다. "빨리 빠져나갑시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 오!" 그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은 함성을 지르며 화원을 향해 신형을 날 렸다. 이때였다. 갑자기 허공으로부터 한 가닥 낭랑한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들 기다리시오!" 휘익! 군웅들이 멈칫 하는 사이에 허공으로부터 두 가닥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일남일녀였다. 일신에 온통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걸친 남녀, 바로 뇌천의와 을지사란이었다. 군웅들 중 몇 사람이 그들을 알아보았다. "엇! 저 자는 대살종이 아니오?" "맞소! 사마신무의 청부를 받고 온 자요!" 군웅들은 동요를 일으켰다. 대살종에 대한 평판이 좋을 리가 없었 다. 그러나 이때 천풍거사는 뇌천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휴우, 살아 있었군." 그의 중얼거림은 몇 사람만이 들었다. 이때 누군가가 을지사란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여자는 여상귀재(女商鬼才)다!" 이렇게 되자 군웅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그들은 을지사란이 천상 보의 지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때 뇌천의는 군웅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상황이 몹시 위급하오이다! 소생을 믿어 주시오! 이곳을 탈출하는데 미력을 다하겠소이다.) 군웅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모두의 얼굴에는 불 신의 빛이 강하게 드러났다. 더더욱 그들은 을지사란의 출현에 분 노마저 일으키고 있었다. 이때 천풍거사가 괴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흘흘흘! 좋소이다. 노부는 뇌소협을 믿어 보겠소." 군웅들은 다시 동요를 일으켰다. 그들은 방금 전 그가 군웅들을 위해 눈부신 활약을 한 것을 보았다. 그가 뇌천의를 지지하자 어 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혼란을 일으키는 표정이었다. 한편 천풍거사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여사성을 비롯하여 군웅들 중 수뇌급 인물들에게 전음을 보 낸 것이었다. '여러분, 안심하시오. 저 두 사람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오. 지금 은 저들을 믿어야 할 때요. 특히나 저 여인은 이곳 출신이니 눈앞 의 진법을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오.' 수뇌인물들은 그의 전음에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천풍거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다시 여사성을 바라보았 다. 그가 군웅들의 영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사성은 결심한 듯 뇌천의를 향해 다가왔다. "좋소이다. 뇌소협, 소협을 믿어 보겠소." 뇌천의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소생을 믿어 주시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의 태도는 얼마 전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군웅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대살종은 편격할 뿐더러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살종 뇌천의의 모습은 대인대의한 풍도를 보여주 고 있었다. 완전히 딴 사람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뇌천의는 을지사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여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흉적 사마신무의 양녀로 천상보에 속해 있었소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중원무림을 위해 나섰 소이다. 여러분께서는 을지낭자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여사성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이를 바가 있겠소? 무림을 위해 홍복이외다!" 군웅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뇌천의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을지낭자는 천상보의 모든 것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알고 있소이 다. 우리가 이곳을 탈출하고 못하고는 낭자에 달려 있소이다."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을지사란에게 향해졌다. 을지사란이 공손히 허리를 숙인 후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요점만 말씀 드리겠어요. 사마보주는 이번 연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어요. 그는 천상보를 중심으로 방원 오 십 리에 걸쳐 천라지망(天羅之網)을 펼쳐 놓았습니다. 이곳을 빠 져나가는 것은 여러분께서 얼마나 합심하시느냐에 달려 있습니 다." "으음!" 군웅들은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사마신무의 치밀하고 악독한 암 계에 대해 치가 떨렸다. "이곳에 펼쳐진 진법은 천문금쇄진(天門禁碎陣)이란 것입니다. 진 세는 아흔아홉 개의 사문(死門)이 있으며 생문(生門)은 오직 일로 (一路)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살아나갈 길도 하나인 셈이랍니다. 하지만 생문을 돌파하려면 무수한 난관을 거쳐야 합니다." 군웅들은 숨을 죽인 채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을지사란은 화원을 향해 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이 화원은 필히 지나야 할 관문입니다. 여러분께서 보기에는 기 화요초가 피어있는 아름다운 화원이지만 기실 이곳은 평범한 화원 이 아닙니다. 화훼천살진(花卉天煞陣)이란 죽음의 함정이 도사리 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훼천살진?" "꽃나무 사이는 물론 땅속에도 매복이 숨어 있어요. 그들의 주력 은 동방회(東方會)의 일천인자단(一千忍者團)이에요. 여러분이 화 원에 들어서는 즉시 진세가 가동될 거예요. 일단 진세가 가동되면 여러분은 환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 틈을 타 인자단이 기습을 가 하면 속수무책이 된답니다." "......!" 군웅들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화원으로 진입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얼마 전 자 신들의 행동을 상기하며 진저리를 쳤다. 을지사란은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다고 뒤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오직 화원으로 들어가야만 생로(生路)를 찾을 수가 있어요." 천풍거사가 나섰다. "파해방법은 있소?" "소녀가 진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으나 완전하지는 못해요. 하지 만 여러분께서 한마음이 되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주신다면 가능 성이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진법(陣法)을 알면서도 무공이 고강한 분이 앞에서 지휘해 주셔야 해요. 그럼 어느 분께 서 나서주시겠어요?" 그녀는 군웅들을 둘러보았다.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진법에 대해 아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뇌천의가 나섰다. "소생이 하겠소이다." 군웅들은 그가 나서자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을지사란은 낮은 음성으로 뇌천의에게 여러 가지 주의를 주었다. 뇌천의는 그녀의 말을 모두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군웅 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는 숫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소이다. 여러분께서 아 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이미 지쳐 있는 데다 동방회의 인자단은 전문적인 살수들이오. 그러니 그들을 상대하려면 진형(陣形)을 이 루어야 할 것이오. 여러분께서 펼칠 진형은 삼재천강진이오. 상처 를 입은 분은 가운데 서고 아직 여력이 있는 분들은 천지인(天地 人)의 방위를 맡아주셔야 합니다." 군웅들은 머뭇거렸다. 그러자 여사성이 앞으로 나섰다. "노부가 천방(天方)의 지휘를 맡겠소." 천풍거사도 앞으로 나섰다. "흘흘! 노부는 지방(地方)을 맡겠네." 광해제군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신형을 날리며 말했다. "노부는 인방(人方)을 맡겠소." 이렇게 되자 군웅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삼각형(三角 形)의 진형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소수로 다수를 상대할 때 가장 유용한 진형이었다. 뇌천의는 진의 중심에 우뚝 선 채 웅후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께서 명심해야 할 일이 있소이다. 일단 화훼천살진에 들어 서면 환각현상이 일어날 것이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허상(虛 像)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추호도 현혹되지 말아야 하오.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움직이는 사물은 가차없이 베어야 하오이다. 선 두에 계신 분들은 힘이 딸리면 즉시 후진으로 물러나고, 후진이 그 자리를 메꾸어 주어야 합니다." "......!" 군웅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뇌천의의 지 휘에 따라 진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 지금의 무림상황은 바로 난세에 해당되었다. 뇌천의는 은연중 군 웅들의 영도자가 되어 있었다. 난세의 영웅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뇌천의는 화원을 바라보며 명을 내렸다. "진입하시오!" 군웅들은 눈을 번뜩이며 화원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비 장한 신색이 떠올라 있었다. 스스스스......! 군웅들이 화원 안으로 진입한순간, 사방으로부터 자욱한 안개가 일어났다. 안개는 도화빛이었다. 동시에 어디선가 은은한 비파의 선율이 들려왔다. "......!" 군웅들은 바짝 긴장했다. 이때 누군가 신음을 흘렸다. 보라! 화원의 수많은 꽃나무 사이에 서 여인들이 걸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군웅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인들은 전신에 투명한 망사의만 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걸어올 때마다 망사의를 통해 속살이 훤히 비쳐 보였던 것이다. "으음!" 군웅들은 신음을 흘렸다. 실로 상상도 못했던 광경이 전개된 것이 다. 이때, 한 가닥 웅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신 차리시오! 저것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오!" 뇌천의의 음성이었다. 그의 음성에는 불문의 사자후가 깃들어 있 어 군웅들은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병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너울거리며 다가오던 여인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군웅들은 말로만 듣던 진법의 조화에 간담이 써늘해지는 느낌이었 다. "으아아아악!" 갑자기 진세의 좌방, 즉 지방(地方) 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렸 다. 여인들의 모습에 정신을 팔던 한 중년인이 땅속에서 튀어나온 검에 심장이 관통된 것이었다. "조심하시오. 인자들이오!" 뇌천의의 음성이 천둥처럼 울렸다. 군웅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러자 안개 속에서 검광이 번쩍이는 것 이 보였다. 슈슉! 그들은 꽃나무 뒤에 숨어있던 동영의 인자들이었다. "뒈져라! 왜구들!" 위이잉! 우렁찬 호통이 천방(天方) 쪽에서 울렸다. 여사성이 금창을 풍차 처럼 휘두른 것이었다. "크아악!" 전신에 착 달라붙는 흑의를 입은 인자들의 몸이 두 동강이 나며 날아갔다. 군웅들도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사방에서 비명이 꼬리를 물며 혈전이 전개되었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 숨막히게 전개되었다. 동방회는 왜인들로 이 루어진 인자단이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살인술을 전문적으로 익 힌 자들이었다. 따라서 기습, 암습에 특히 강했다. 그러나 정통 무공으로 따지면 군웅들의 적수는 아니었다. 다만 진 세의 힘을 빌었을 뿐이었다. 군웅들이 삼각진을 형성하며 상대하자 그들의 공세는 저지되었다. 그러나 땅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안개와 은형물을 이용해 공격해오는 데는 군웅들도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숨막히는 혈전이 이어졌다. 한편 을지사란은 좌우를 살피며 뇌천의에게 귀뜸해 주고 있었다. "좌삼방, 우칠방 쪽을 지원해 주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뇌천의의 신형이 날아갔다. 그가 떨어진 곳에서는 묵아가 죽음의 광선을 뿌렸다. 인자단은 무더기 로 황천으로 날아갔다. 그는 종횡무진 활약했다. 삼각진의 한 곳이 약해지면 즉각 날아갔 고, 그때마다 십여 명의 인자들의 목을 베었다. 가히 엄청난 신위 를 보여주고 있었다. "천살(天煞) 방향으로 진입하시오!" 그는 간간이 명을 내렸다. 군웅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신속히 위치를 이동하며 전진했다. 이 제 그들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뇌천의의 지시에 따 라 움직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뇌천의의 웅후한 음성에 매료되고 있었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용기가 나고 힘이 솟아났다. "하하하핫! 동영의 왜구들아!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날뛰는 것이 냐?" 쐐애애액! 묵아가 섬광을 뿌렸다. "크아아악!" 인자들은 그의 무위를 막아내지 못하고 무더기로 쓰러졌다. 가히 무신이 현신한 것 같았다. 그는 우수로는 가공할 검기를 뿌리며 좌수로는 웅후한 장력을 쏟 아내고 있었다. 우우웅! 장력이 날아갈 때마다 오륙 명의 인자들이 가슴이 으스러지거나 복부가 터지며 황천으로 갔다. 군웅들도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 그들의 전신은 온통 피로 물 들었으나 지칠 줄 모르고 전진하고 있었다. 베고, 베고, 또 베었다. 눈앞에서 피보라가 튀면 고스란히 맞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동 강난 인자들의 몸뚱이를 밟고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케에엑!" 인자들의 비명이 마치 아스라히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군웅들의 희생도 늘어가고 있었다. 인자들의 수가 워낙 많 으려니와 진법의 잇점을 안고있어 군웅들을 끊임없이 괴롭혔기 때 문이었다. 앞에서 전진하던 군웅이 쓰러지며 뒤에 받치고 있던 군웅이 위치 를 바꾸었다. 그러나 부상자가 늘어가자 진세는 차츰 동요하기 시 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군웅들은 갑자기 눈앞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자욱하던 안개가 사 라지고 눈앞이 탁 트였다. "오오! 드디어 진세를 뚫었소!" 군웅들은 희열에 차 부르짖었다. 과연 그들은 화훼천살진을 뚫고 지났다. 더 이상 앞을 가로막는 인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군웅들 은 기쁨에 차 환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희생은 너무나 컸다. 이제 살아남은 자는 고작 육십여 명 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거의 대부분 중상을 입고 있었다. 뇌천의는 을지사란을 돌아보며 물었다. "사란,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하오?" "......." 을지사란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녀는 갑자기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모두 전멸하고 말 거예요." 그녀의 음성은 낮았으므로 오직 뇌천의만이 들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면 되오. 결과는 하늘에 달린 것이오." 을지사란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미소지었다. "당신과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어요." "사란......." 뇌천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군웅들을 향해 힘차게 말했 다. "여러분, 갑시다!" 그는 앞장 서 신형을 날렸다. 이제 군웅들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수없는 죽음의 고비를 넘어온 그들은 설사 더 무서운 함정이 나타난다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 을 것 같았다. 그것은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들 은 저만치 앞장 서 인도하고 있는 한 젊은 영웅으로 인해 무한한 용기가 샘솟고 있었다. 뇌천의의 호연지기가 그들에게 전이되고 있었다. 그들은 뇌천의의 웅후한 외침이 들릴 때마다 영웅의 호기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 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이었으나 이제 군웅들에게 뇌천의의 존재는 확고한 대영웅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지금까지 뇌천의가 보여준 것은 군웅들을 감동시키고도 남았다. 그의 놀라운 담력, 무위, 그리고 호방한 기질은 군웅들의 가슴에 뚜렷한 지표를 세워준 것이다. 화훼천살진의 뒤를 잇는 것은 연속되는 매복이었다. 천외천추맹의 고수들은 그들의 앞을 계속 가로막았다. 천상보에서 방원 오십여 리에 달하는 지역에는 이미 천라지망이 쳐져 있었다. 따라서 군웅들은 한 걸음을 나갈 때마다 혈전을 치 뤄야만 했다. 차차차창! "으아악!" 그야말로 피로 물든 탈출로였다. 군웅들은 무수한 매복과 함정을 넘으며 계속 전진했다. 그들에게 는 후퇴란 있을 수 없었다. 비록 군웅들의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 고 있었으나 전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동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 무림백서 2권 제15장 악마천부(惡魔天府) ━━━━━━━━━━━━━━━━━━━━━━━━━━━━━━━━━━━ 사십 인. 혈로를 뚫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숫자였다. 그들은 대부분 천상보주가 보낸 금첩을 받은 고수들이었다. 개개 인이 일문의 문주거나 지방의 패주들이었다. "......!" 군웅들은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뿌렸다. 이제 그들마 저 죽는다면 무림의 장래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으흐흐흐...... 우하하하하핫......!" 군웅들은 비통한 광소를 터뜨렸다. 아니, 그것은 통곡에 가까운 것이었다. 뇌천의의 비장한 음성이 들렸다. "여러분! 이제 마지막 관문이 남았소. 모두 힘을 냅시다. 무림의 장래와 운명은 우리들에게 달려있소이다." "그렇소! 힘을......." "모두 힘을 냅시다!" 군웅들은 일제히 부르짖으며 다시 검을 움켜잡았다. 그들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나 집념의 빛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뇌천의는 을지사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사란, 견딜만 하오? 당신 덕분에 여기까지 왔소. 이제 조금만 더 참으시오." 을지사란도 중상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드러나 있었는데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생긋 웃었다. "걱정 말아요, 천의. 전 괜찮아요." 그녀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관문 하나만 돌파하면 돼요." 그녀는 전면을 가로막고 있는 울창한 숲을 가리켰다. "저곳은 일명 혈림(血林)이라 불리는 곳이에요. 저곳에는 천축 천 광사의 마승들이 매복하고 있어요. 그들은 변황팔절 중에서도 가 장 무서운 자들이에요.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혈림만 돌파하면 더 이상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없을 거예요." 뇌천의는 불길이 이글거리는 듯한 시선으로 혈림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갑시다." "우우우--!" 군웅들은 장소를 터뜨리며 일제히 혈림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최 후의 관문을 향해 전진하게 된 것이다. 스스스스......! 혈림 속에는 핏빛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선 순간 군웅들의 가슴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숲속은 조용했다. 너무나 조용한 나머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 뇌천의도 같은 느낌이었다.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한가? 긴장한 탓일까?' 그는 옆에 붙어서 걸어오고 있는 을지사란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군웅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앞만 보며 묵묵히 걷고 있을 뿐이었다. 혈림에는 죽음의 기운이 두텁게 깔려있는 듯했다. 흡사 지옥(地獄)의 입구로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 뇌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사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소?" 을지사란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요." 그녀의 음성은 공포심에 짓눌려 있었다. "혈림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어요. 아무래도 무서운 일이 벌어 질 것 같아요." "무서운 일이라니?" "모르겠어요.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요." 을지사란은 몸을 부르르 떨며 뇌천의의 팔을 잡았다. "혈림의 넓이는 십리 정도 돼요. 이곳에는 천광사의 일천겁마승 (一千劫魔僧)이 빈틈없이 매복하고 있어요. 그런데......." "......?" "지금 우리는 이미 오리 가량 들어왔어요. 그런데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뇌천의는 안색이 변했다. "뭔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아요." 뇌천의는 섬뜩한 기분이었다. 을지사란의 눈동자는 응축되어 있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무서운 일이 벌어진 것 같아요......." 뇌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염두를 굴렸다. '그렇다.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사마신무가 다른 방 법을 행하고 있단 말인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절반 이상을 들 어왔는데 어째서 막는 자가 없단 말인가?' 뇌천의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분명 날이 밝아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온통 피를 뿌린 듯 시뻘겋 게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실로 공포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사란, 본래 이곳이 이렇소?" "네?" 을지사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늘을 보시오. 온통 핏빛이오." 을지사란은 놀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겁에 질려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이런 현상은... 저도 처음이에요." 한편 군웅들도 붉은 하늘을 보고 한결같이 공포의 표정을 지었다. 뇌천의는 내심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지옥의 문이 열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때였다. "악! 저... 저기를 보세요!" 갑자기 을지사란이 숨 넘어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 굴을 가렸다. 뇌천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군웅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우, 저럴 수가!" "헉! 저것은......!" 군웅들은 마치 악마라도 본 듯 전신을 떨었다. 백골이었다. 숲 한가운데 수백 구의 백골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살점이라곤 한 점도 붙어있지 않은 백골이 핏빛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자세 그대로 백골로 화 해 있었다. "저... 저들은 일천겁마승이에요!" 을지사란이 비명처럼 부르짖었다. "뭣이?" 뇌천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 렸다. "무슨 소리요? 일천겁마승이 어째서 백골이 되었단 말이오?" 을지사란은 전신을 떨며 말했다. "저들을 보세요.... 마치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당한 것 같아요. 아아! 절정고수들인 저들이... 어째서 저 지경이 됐을까요? 세상 에 이런 무공도 있을까요?" 일천겁마승은 천광사의 최정예고수들이었다. 개개인의 무공만 해 도 놀랍거니와 그들의 합공은 가히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단숨에 백골로 만들다니! 그것도 옷은 멀쩡한 채 전신의 살만 녹여 백골로 만들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군웅들은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표 정이었다. "이... 이건 악마의 짓이오!" 누군가가 이렇게 외치자, 군웅들은 공포심에 안색이 퍼렇게 질리 고 말았다.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 붙고 말았다. 뇌천의는 더 이상 혈림에 머물러 있어 보았자 얻을 게 없다는 것 을 깨달았다. 그는 진력을 실은 음성으로 군웅들을 일깨웠다. "여러분. 어쨌든 이곳을 벗어납시다. 이곳만 벗어나면 탈출에 성 공하는 것이오. 힘을 내시오!" "......!" 군웅들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혈림을 가로질러 가 기 시작했다. 가는 동안 곳곳에서 겁마승의 백골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들 역시 가사를 입은 채 백골로 화해 있었다. 대략 일각쯤 지났을까? 마침내 일행은 무사히 혈림을 벗어날 수 있었다. 혈림을 통과하여 탁 트인 초원에 이르렀을 때였다. "저... 저럴 수가?" "아아! 저것은......!" 군웅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초원에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뇌천의 일행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변황팔절을 위시한 천외천추맹의 고수들이 운집해 있었 다. 그런데 한결같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천축이대마사를 비롯하여 묘강의 만독사태청, 장백 구월마궁, 사 해삼도(死海三島), 동방교 등의 고수들이 모두 오체복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곳에는 눈을 의심할 광경이 벌어져 있 었다. 악마거상(惡魔巨像). 높이가 무려 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악마신상이 하늘을 뚫을 듯이 우뚝 서 있었다. 악마상은 가히 공포스런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악마신상은 사람의 머리를 말린 두상(頭相)을 목걸이로 달고 있었 다. 머리에는 세 개의 뿔이 돋아나 있었고 뻥 뚫려 있는 눈은 마 치 지옥문과도 같았다. 쩍 벌어진 입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뻗어나 와 있었다. 악마신상의 팔은 열두 개였다. 각각 다른 방향으로 뻗고 있는 손 에는 금방 잘라낸 듯한 사람의 수급이 피를 뚝뚝 흘리며 움켜쥐어 져 있었다. '저... 저것은!' 군웅들은 악마신상을 보는 순간 아득한 전설을 떠올렸다. - 저주의 악마지겁(惡魔之劫)이 도래하나니...... 악마천부(惡魔 天府)가 나타나면 세상은 피바다에 잠길 것이다. 군웅들은 공포에 질려 부르짖었다. "우우, 악마천부가 나타났소!" "악마지겁이 도래했단 말인가!" 무림에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저주의 악마지겁! 전설의 악마천부가 마침내 세상에 나타났단 말인가? 군웅들은 악마신상의 발치 아래 수백 명의 괴인들이 지옥사자인 양 도열해 있는 것을 보았다. 악마신상은 거대한 수레에 실려 있었다. 그들은 바로 수레를 끄는 자들이었다. 일신에는 흑의(黑衣)를 입었으며 가슴에는 해골문양이 새겨져 있 었다. "저... 저길 보시오! 사마신무요!" 군웅들 가운데 한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뇌천의는 그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악마신상이 있는 초원의 중앙에 금포노인이 두 손으로 머리를 움 켜쥔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크아아... 아아... 아......!" 폐부를 긁어내는 듯 구슬픈 비명이었다. 일대효웅인 천수여래(千手如來) 사마신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머리를 움켜쥔 채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 고 있었다. "끄아아아- 악!" 그의 비명은 점점 더 높아졌다. 그에 따라 오체복지하고 있는 천 외천추맹의 인물들은 두려움에 전신을 떨며 이마를 땅에 박아대고 있었다. 이때였다. 악마신상의 입으로부터 도무지 인간같지 않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크크크크....... 숭배하라! 나의 시대가 도래했도다! 크크... 천 년의 잠에서 깨어났도다! 이제 천하는 나의 지배를 받아야 하느니 라!" "끄아아아악--!" 사마신무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의 입에서 피화 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크크크......! 사마신무, 천외천추맹은 악마천부에 귀속될 것이 다. 너의 영혼은 성전의 제물로 받아들이겠다. 너에게 경배의 영 광을 맛보게 해주마." 스스스스! 자욱한 혈무가 악마신상의 입에서 흘러나오더니 사마신무의 몸을 휘감았다. 그의 몸은 혈무에 감싸인 채 둥실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악마상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우두둑... 뚝!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사마신무는 통째로 악마신상의 이빨에 씹 히고 말았다. 악마상의 입가로 피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크크크... 악마가 부활했도다! 모두들 경배하라!" "우우우--! 우우우우--!" 수백 명의 흑의인들이 일제히 입을 벌려 장소를 터뜨렸다. 그들의 장소가 길게 이어지자 천외천추맹의 인물들은 이마를 땅에 부딪치 며 부르짖었다. "오오, 악마의 신이여!" "악령이시여!" 그야말로 광란의 악마제전이었다. 초원은 온통 공포의 기운에 감싸였으며 흑의인들의 장소와 천외천 추맹 인물들이 경배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 군웅들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악 몽이었다. 그들은 장소가 계속 울리자 기혈이 뒤집히고 머리가 터 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마침내 내공이 약한 자들은 귀를 감싸쥐 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뇌천의는 망연자실한 채 내심 중얼거렸다. '악마지겁이 도래하다니.... 대체 누가 이 겁난을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으으......." 군웅들은 이제 얼이 빠져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상 황이었다. 이때 악마상으로부터 소름끼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크크크......! 너희들은 무엇하고 있느냐? 사마신무처럼 제물이 되고 싶단 말이냐?" 웅... 웅! 악마신상의 음성에 군웅들의 고막이 파열될 듯 했다. 한편, 뇌천의의 귓전으로 누군가의 다급한 전음이 흘러 들어왔다. (아아! 뇌소협, 마침내 우려하던 악마천부가 출현하고 말았네. 이 제 무림의 평화는 끝장이 난 것 같네. 더구나 천외천추맹마저 악 마천부에 굴복했으니 무림의 앞날은 암담하기만 하게 되었네. 이 제... 희망은 오직 자네의 어깨에 달려 있네.) "......!" 뇌천의는 흠칫했다. 전음을 보낸 사람은 천풍거사였다. (노부의 말을 명심하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는 이곳을 탈출해 야 하네. 자네는 이곳을 떠난 뒤 천궁산(天弓山)의 무치노인(無痴 老人)을 찾아가게. 그에게 악마천부의 재현을 알려야 하네. 어쩌 면 그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네.) 뇌천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궁산 무치노인이라고?' 그는 안색이 변했다. 갑자기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 다. 그는 급히 전음으로 물었다. (노인장은 대체 뉘시오?) 천풍거사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바로 자네의 손에 죽었던 쓸모 없는 늙은이라네.) "......!" 뇌천의는 충격을 느꼈다. 비로소 그는 그가 누군지를 깨달은 것이 다. 그는 비틀거리며 천풍거사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바로... 엽무웅!) (헛헛.... 그렇다네. 노부가 바로 엽무웅이네.) (그럴 수가......?) 뇌천의는 아연실색했다. (본래부터 자네를 속일 생각은 없었네. 다만 사마신무의 눈을 속 이기 위해 연극을 한 것이네. 그런데 일이 이렇게 급변하게 될 줄 은 몰랐네.) 뇌천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무치노인을 만나보면 알 것이네. 뇌소협, 자네만은 살 아야 하네. 무림의 운명이 자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뇌천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후후! 어째서 내게 달려 있단 말이오?) 엽무웅은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자네의 핏줄 때문이네.) 뇌천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무수한 의문이 떠올랐다. (자세한 것은 곧 알게 될 것이네. 아아! 이제 시간이 없네.) 뇌천의는 안색이 굳어졌다. 악마신상의 팔이 움직이는 것을 본 것 이다. (뇌소협! 초원의 동쪽 일마장 밖에 천인애(千刃涯)란 절벽이 있 네. 그 아래 귀곡하(鬼谷河)가 흐른다네. 인명은 재천이라네. 전 력으로 이곳을 달아나 그곳으로 뛰어 내리게. 아아! 하늘이 무심 치 않다면 자네에게 생환의 기회를 줄 것이네.) 이때 악마신상이 마소를 터뜨렸다. "크크크! 어리석은 백도의 쓰레기들아! 너희들을 악마성전의 영광 스런 제물로 만들어 주마! 크하하하하핫!" 고막을 울리는 광소가 터진 순간. 번-- 쩍! 악마신상의 열두 개의 손이 일제히 뻗었다. 흡사 뇌전처럼 붉은 빛이 군웅들을 향해 뻗어왔다. '어서 가게, 뇌소협! 부디 잊지 말게. 무림의 운명은 오직 자네에 게 달려 있네.......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즉시 노부가 준 금환(金環)을 부수도록.......' 엽무웅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엄청난 폭음이 울렸던 것이다. 꽈르르릉! "크아아악!" 군웅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뇌천의는 눈앞에 혈광이 쇄도하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속이 메스 껍고 현기증이 났다. 그는 다급히 곁에 있던 을지사란의 손목을 낚아챘다. 휙!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신형을 날렸다. 천하제일의 경공술인 무영 무풍공을 전개한 것이다. "크카카카캇......!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 냐?" 악마의 비웃음과 함께 혈광이 그의 몸을 향해 뻗었다. 뇌천의는 을지사란을 끌어안은 채 혼신의 공력으로 호신강기를 펼 쳤다. 꽝! 하는 폭음이 일어났다. "크- 윽!" 뇌천의는 전신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울컥 피 를 토했으나 달리던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더욱 빨리 날아갔다. 악 마상의 공격을 역으로 이용하여 달린 것이다. "크카카카캇... 크카카카카......!" 다시 악마의 웃음소리가 뒤따라왔다. 열두 개의 팔에서 혈광이 뻗 어나왔다. 그는 다시 등에 충격을 느꼈다. 그것은 난생 처음 느끼는 엄청난 압력이었다. "으아아아악-!" 참혹한 비명이 울렸다. 그의 몸은 까만 점이 되어 허공으로 날아 갔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의식할 수가 없었다. 콰르르르......! 귀곡하의 급류는 집채만한 바위를 가루로 만들 정도로 무섭게 흐 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급류는 한 곳에 이르러 엄청난 소용돌이 를 이룬다. 콰르르르르......!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어떤 물체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다. 상류에서 떠내려온 바윗덩이나 부유물들이 소용돌이에서 완벽 하게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뇌천의는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그의 귓전에 물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첫번 째 증거이기도 했다. 그는 눈을 떠보았다. 그러나 시야가 뿌옇기만 했다. 사물이 흔들 거리며 좀처럼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그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몸을 일으키려 팔로 땅을 짚었으나 힘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한 올의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일단 의식이 돌아오자 전신이 으스러질 듯한 통증이 밀려 들었다. '내가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그는 악마신상으로부터 무사히 도망쳤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악마상을 떠올리자 그는 진저리가 쳐졌다. '으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는 군웅들을 떠올렸다. '엽무웅이 내게 부탁을 했었지. 그런데 혈섬이 뻗어왔고.......' 갑자기 그는 을지사란이 떠올랐다. '사란은?' 그러고 보니 을지사란이 어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끝까 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은 기억이 났지만 그 다음은 머 리가 하얗게 비어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무사할까?' 이때였다. 문득 가까운 곳에서 소녀의 짜랑짜랑한 음성이 들려왔 다. "호호호! 이제 깨어났구나?" 뇌천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름답고 탄력이 넘치는 소녀의 웃음소리였다. 그것은 도무지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소 한 것이었다. 그는 눈을 크게 떠보았다. 한순간 코앞에 한 소녀의 얼굴이 들이 밀어졌다. 처음에는 상이 잡히지 않아 흔들흔들했다. 점차 윤곽이 잡히자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아름다운 소녀로군.' 십칠팔 세쯤 되었을까? 탐스러운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특이 한 것은 야성미가 물씬 풍긴다는 것이었다. 피부는 약간 까무잡잡 했는데 그것이 도리어 큰 눈과 조화를 이루어 건강미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소녀는 도톰한 입술을 움직이며 물었다. "이봐! 남자, 이제 깨어났어?" "......!" 뇌천의는 귀엽게 생긴 소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 랐다. 그는 아연해져 눈을 멀뚱히 뜰 뿐 대답하는 것조차 잊고 말 았다. 소녀는 계속 반말을 지껄여댔다. "이봐, 깨어났으면 말을 해야지. 내 이름은 방방(芳芳)이야, 네 이름은 뭐지?" 뇌천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라, 너 벙어리구나? 맞지? 그럼, 내가 묻는 말에 머리를 끄덕 끄덕 해봐." 뇌천의는 화를 눌러 참고 물었다. "낭자가 날 구했소?" 괴소녀 방방은 눈을 부릅떴다. "어? 말을 할 줄 아네. 그런데 왜 대답하지 않는 거야? 네 이름이 뭐냐고 물었잖아! 그리고 내 이름은 낭자가 아니라 방방이야." 그녀는 도리어 화를 내고 있었다. 뇌천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 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내 이름은 뇌천의요, 낭... 아니 방방." "뇌천의? 이상한 이름이네?" 방방은 신기하다는 듯이 손을 뻗어 뇌천의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 보았다. "이야, 너 이상하게 생겼구나? 할아버지가 죽은 이후 방방은 너같 은 사람은 첨이야. 어? 이건 또 뭐야?" "아니!" 뇌천의는 대경실색했다. 이제 보니 그는 알몸으로 누워 있었던 것 이다. 귀곡하의 급류에 휩쓸리면서 옷이 찢겨져 나가버린 것 같았 다. 그런데 방방이 그의 벌거숭이 몸 여기저기를 건드린 것이다. 게다 가 그녀는 겁(?)도 없이 그의 아래쪽에 달려있는 한 부분을 손가 락으로 툭 치는 것이 아닌가? "대체 이게 무슨 짓......!" 갑자기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알고 보니 방방도 알몸이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그는 당황을 금치 못해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비록 순간적으로 본 것이었으나 괴소녀 방방의 육체는 깜짝 놀랄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두 개의 유방은 사발을 엎은 듯했으며 잘록한 허리, 토실토실한 둔부가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의 나신은 보통 소녀 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틀렸다. 야성미가 물씬 풍기면서도 무척 이나 육감적이었다. 방금 전 뇌천의는 방방의 우거진 숲을 보았다. 그곳은 나이답지 않게 짙게 우거져 있었다. 감추어져 있어야 할 부분이 당당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맙소사! 이 소녀는 대체 인간인가, 아니면 요물인가? 아니... 이 곳은 옷을 입지도 않는 세계란 말인가?' 이때 방방의 쾌활한 음성이 들렸다. "뇌천의! 너 잘 생긴 것 같다. 너같이 생긴 사람을 할아버지가 남 자라고 했어. 남자란 모두 너같이 예쁜 거야?" '아이쿠!' 뇌천의는 내심 비명을 질렀다. "이야! 너 피부가 아주 곱구나? 우리 할아버지는 거칠거칠했는데 말야." 방방은 쉴새없이 그의 전신을 더듬어대고 있었다. 뇌천의는 그녀 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으나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다. '이걸 어쩐다? 여자 앞에 알몸으로 누워 있으니!' 뇌천의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런 망신은 처음이었다. '하긴 손해볼 것은 없지. 방방이란 이 괴상한 소녀도 벗고 있으 니.......'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는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떠보았다. 순간 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방방이 무엇을 살피느라 그에게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벌어진 다시 사이가 훤히 보이고 만 것이다. "뇌천의, 너 왜 그래? 왜 자꾸 눈을 감지? 어디 아픈 거야? 졸 려?" 뇌천의는 다급히 말했다. "방방, 뭐 덮을 것을 좀 다오! 어서......." 방방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덮을 것? 왜? 추워?" 뇌천의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래. 춥다, 아주 추워." 잠시 생각하던 방방은 문득 그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 곧 춥지 않게 해줄 테니." "......?" 뇌천의는 다시 눈을 가늘게 떠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 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럴 수가!' 방방은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신법이 불가사의했다. 그녀는 상반신부터 마치 안개가 스러지듯 흐려지더니 감쪽같이 사 라져버린 것이다. '내가 꿈을 꾸었나?' 뇌천의는 몇 번씩이나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그는 아직까지 이런 경신법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젠 헛것이 다 보이는군.' 그는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생겼다. 그가 있는 곳은 한 칸 의 석실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방방이란 소녀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출입구도 없는데 사라지다니, 역시 헛것을 본 거야.' 이때였다. 스스스! '아니?' 그는 이번에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방방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맞은편 석벽 속에서 나타났다. 마치 연기처럼 석벽에서 스 며나오고 있었다. "이걸 마셔 봐, 그럼 더워질 거야." 방방은 그의 코앞으로 그릇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 뇌천의는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방방이 내민 그릇 속에는 시뻘건 피가 담겨져 있었다. '맙소사! 귀신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구나. 이젠 피까지 먹으라 고?' 방방은 그릇을 내밀며 재촉했다. "뇌천의, 어서 마셔. 너는 아는지 모르지만 이건 천년화리(千年火 鯉)의 피야." 뇌천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천년화리의 피라구." 뇌천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아귀처럼 그릇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방방의 말대로 그것이 천년화리의 피라면 마 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값을 따질 수 없는 영물(靈物) 중의 영물이기 때문 이었다. 천년화리는 극양의 성질을 지닌 영물로 그 피를 복용하면 무궁한 영효를 얻게 된다. 일반인이 복용하면 무병장수하게 될 뿐더러 영 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만일 무인이 복용하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진다. 내공이 급증할 뿐 더러 양강무학(陽剛武學)을 익히는데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뇌천의는 보혈(寶血)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호호호! 잘 먹는구나 너는. 방방은 처음에는 잘 못 먹었는데." 뇌천의는 좋아라 손뼉치는 방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이걸 마셨단 말이냐?" 방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엔 화리가 많아. 그래서 방방은 매일 먹고 있어." "그럴 수가!" 뇌천의는 아연실색했다. 그는 방방이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천년화리의 피를 매일 복용했다면 이 소녀의 내공이야말로 천하 제일이 아니겠는가?' 뇌천의는 계속 염두를 굴렸다. '대체 이곳은 어디이기에 천년화리가 그리도 많이 산단 말인가? 또 이 소녀는 누구인가? 행동하는 것으로 보면 세상물정을 조금도 모르는 것 같은데.......' 뇌천의는 문득 가슴이 섬뜩해졌다. '이 소녀는 정말 순진하다. 만일 세상의 악에 물들기라도 한다 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이때였다. 그는 단전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은 곧 전신의 혈맥 으로 전이되었다. 문득 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으음! 이러면 안되는데.......' 그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전신이 뜨거워지며 욕화(慾火)가 치밀 어 오른 것이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악마지상의 마공에 적중되어 내공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런 데 천년화리의 피를 복용하게 되자 극양지기가 한꺼번에 격발하게 되었다. 그는 얼마 전 을지사란과 음양회천대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그의 진기는 음양의 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데 천년화리의 양성이 강한 기운이 들어오자 그만 그 균형이 깨어 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비정상적으로 욕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끼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방방! 어서... 가라! 내 앞에서... 사라져! 으으... 어 서......." 그는 손을 마구 내저었다. 더욱이 눈앞에 방방의 알몸이 어른거리니 도저히 욕망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방방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나더러 어딜 가라는 거야? 왜 그래?" 그녀는 물러나기는커녕 더욱 다가와 뇌천의의 손을 잡고 흔들었 다. 뇌천의는 버럭 고함쳤다. "제발... 물러가라! 난... 나는......." 방방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의 이마를 짚었다. "어? 왜 이렇게 뜨거워?" 그녀는 눈을 깜박이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무릎을 쳤다. "아하, 그렇구나. 아마 제일 큰놈 화리왕(火鯉王)을 잡아 먹여서 그런가 보구나." 화리왕! 만일 누군가 그 말을 들었다면 놀라 까물어쳤을 것이다. 화리왕은 보통 화리와 다르다. 천년화리가 다시 만년을 묵어야만 되는 화리의 왕인 것이다. 따라서 화리왕의 보혈은 천년화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효험이 큰 것이었다. 뇌천의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으으, 제발... 제발 물러가다오!" "왜 그래, 조금만 참아 봐." 방방은 콧등을 찡그리며 그를 달랬다. 이때 뇌천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 방방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뇌천의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 었다. 그는 잡아먹을 듯이 방방을 노려보았다. 방방은 그를 바라 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뇌천의의 하체를 본 순간 그녀의 눈 이 동그래졌다. "너......." 뇌천의는 갑자기 야수처럼 그녀를 덮쳤다. "아!" 방방은 그만 뇌천의의 몸에 깔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빽 고 함을 질렀다. "왜 이러는 거야!" "억!" 뇌천의는 비명을 질렀다. 방방이 무의식중에 그의 가슴을 쳤기 때 문이었다. 그는 붕 떠서 삼장 밖으로 날아가버렸다. 쿵! 맞은편 석벽에 부딪친 그는 거꾸로 떨어졌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 지 그는 울컥 피를 토해냈다. 방방이 슬쩍 민 것이 그에게는 대단 한 충격으로 작용한 것이다. "으으... 방방... 제발......." 뇌천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정신을 차린 듯 방방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러나 방방은 여전히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이마며, 목덜미에 심줄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만일 욕화를 잠재우지 못하면 그의 혈관은 터져버릴 것이다. 뇌천 의는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다. "방방... 이리 와 다오......." 방방은 더욱 어리둥절했다. "언제는 가라고 하더니?" 방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눈길이 뇌천의의 몸을 한 차례 쓸어보았다. 문득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방금 전 뇌천의가 그녀 를 덮쳤을 때, 이제껏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느낌을 받았 던 것이다. 왠지 그 느낌은 그다지 싫은 것이 아니었다. "왜 그래? 어디가 아픈 거야?" 방방은 앞으로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지자 뇌천의는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자꾸 이러면 정말 때릴 거... 읍......!" 방방의 말이 중도에서 끊겼다. 뇌천의의 입술이 그녀의 작은 입술 을 덮어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찌된 셈인지 온몸에 맥이 쑥 빠지고 말았다. 동시에 그녀의 내부로부터 짜릿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몸 을 바르르 떨었다. 뇌천의는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그의 뜨거운 혀가 방방의 입술을 열고 물고기처럼 파고 들어갔다. "으음......." 방방은 혼란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쾌감이 온몸을 둥둥 뜨게 하는 것 같았다. 뇌천의의 손이 그녀의 온몸을 더듬어대고 있었다. 그의 손이 봉긋한 유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으나 그녀는 그 부 분으로부터 짜릿한 쾌감이 오는 것을 느끼며 물러나기는커녕 더욱 그에게 다가갔다. 뇌천의의 다른 손은 그녀의 둔부를 쓰다듬었다. 방방은 자신도 모 르게 신음을 내며 몸을 비틀었다. '아아! 왜 이러지, 내가?' 그녀는 눈을 감으며 야릇한 쾌감에 몸을 내맡겼다. 한편 뇌천의는 이미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방방이 반항하지 않 자 그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방방의 몸을 바닥에 눕힌 후 다짜고짜로 그녀의 다리를 벌리려 했다. 방방은 깜짝 놀라 다리를 오므렸다.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뇌천의는 집요하게 그녀의 온몸을 주무르며 다리를 벌리려 했다. 방방은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갑자기 무엇인가 뜨거운 이물질이 그녀의 예민한 부분으로 파고 들었다. "악......!" 날카로운 고통이 밀려왔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통증에 방방 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이었다. 손 만 뻗으면 분명 상대를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 지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허우적거리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뇌천의를 밀쳐버리기는커녕 도리어 그의 목을 세차게 껴안고 있었다. 남녀의 교합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체득하는 것인 가 보다. 방방은 고통과 쾌감을 동시에 느끼며 으스러져라 사내의 목을 껴 안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 올라탄 사내는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입술은 크게 벌어졌고, 야릇한 신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화려한 폭발이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 나는 것을 느꼈다. "이런 행위는 아무하고나 해서는 안돼. 오직 부부 사이만 하는 거 야, 알겠지? 방방." 두 사람은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껴안고 있었다. 방방은 뇌천의의 가슴에 안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뺨은 장미빛으로 물들 어 있었다. "응, 알았어." 그녀는 콧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상한 생각이 든 듯 눈을 갸 름하니 뜨며 물었다. "왜 다른 사람과는 안 돼는 거야?" 뇌천의는 당황했다. 그는 방방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더듬거렸 다. "그건... 으음. 아무튼 다른 사람하고는 안돼." "알겠어. 뇌천의 하고만 하면 되잖아. 그럼 됐지?" 너무나 천진스런 소녀였다. 뇌천의는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 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둔부를 쓰다듬으며 말했 다. "방방, 이제부터는 옷을 입어야 해. 벌거벗고 다니는 것은 야만인 이나 하는 짓이다." 방방의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 "그리고... 이제부터는 날 오빠라고 불러라." "오... 빠?" 방방은 눈에 이채가 빛났다. "음.... 왜냐면 우린 이제 보통 사이가 아니거든." "그럼 무슨 사인데?" "음....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갑자기 방방은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알았어, 그럼 우린 부부니까 방금 전 같은 일을 또 할 수 있는 거지?" "......!" 뇌천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순진하다고 해도 너 무한 말이었다. 그는 당황하여 급히 말했다. "방방, 그런 말을 하면 안돼." "응? 왜?" "부부간의 일은 남에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니까." 방방은 눈을 깜박였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자고로 여자란 정숙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숙? 그게 뭔데?" "이제부터 오빠가 하나씩 가르쳐 주마. 그럼 방방도 알게 될 거 다." 방방은 그의 가슴에 안긴 채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신기한 듯 뇌천의의 근육질인 가슴팍을 더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뇌천의는 내심 탄식했다. '정말 때묻지 않은 소녀다. 앞으로는 내가 보호해야 한다. 만일 악인의 손에 떨어진다면.......' 그는 결심을 굳혔다. '결코 그렇게 되면 안 된다. 방방은 천사같은 소녀다.' 그는 방방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점점 더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 무림백서 제2권 제16장 동굴 속의 기연(奇綠) ━━━━━━━━━━━━━━━━━━━━━━━━━━━━━━━━━━━ 방방의 안내로 동굴을 둘러 본 뇌천의는 경이를 금치 못했다. 놀랍게도 그곳은 조화문(造化門)의 조사동(祖師洞)이었던 것이다. 조화문은 오늘날의 녹림(綠林)을 구축해낸 기문(奇門)이다. 그들은 독특한 전통을 지니고 있어 강호상에서 흑도 백도 어느 부 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며 그들은 복잡한 계보로 갈라지게 되었다. 다양한 부 류의 인물들이 잡다한 무학과 잡술을 집대성하면서 수많은 지류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들의 무학은 비록 정순하지는 못했으나 나름대로 독특한 일맥 (一脈)을 이루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경공(輕功), 수공(水功), 투술(偸術), 암기술(暗器 術), 미혼술(迷魂術), 기문학(奇門學)을 비롯하여 각종 잡학들이 꽃을 피워 독보적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화문은 멸절되고 말았다. 다만 그 맥을 이은 자들이 강호상에 퍼져 녹림도(綠林道)를 구축 하기에 이르렀다. 수십 년 전 녹림도는 여덟 부류로 갈라져 무림에 풍파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녹림팔절(綠林八絶)이었다. 녹림팔절은 흑도도 아니요, 백도도 아니었으나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당시 마교십세, 흉천십이교와 함께 겁란을 일으킨 바 있었다. 그러나 당대에 대활련 십전무맹이 탄생하면서 급격한 쇄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급기야 얼마전 녹림팔절은 규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조직으로 탄생 되기에 이르렀다. 불회림(不廻林). 바로 그것이었다. 실상 녹림도에 소속된 인물은 근 백만(百萬)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들은 명가의 전통이나 후광을 입지 못하여 개인적으로는 백도 무림인들의 멸시와 모욕을 받아왔다. 그러나 불회림이 녹림도를 통합한 후로는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오늘날 녹림도의 수뇌는 불회림의 수장(首長)이었다. 그는 녹림총 표파자(綠林總飄把子)라 불린다. 그런데 녹림도에는 하나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녹림도를 이끌 진정한 영도자는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이 며, 그는 반드시 조화문(造化門)의 진전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 다. 비록 오늘날 불회림의 녹림총표파자가 백만 녹림도를 이끌고 있으 나 녹림대종사가 출현한다면 녹림인들은 그의 명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방이 살고 있는 곳은 뜻밖에도 전설의 조화문이 멸절하면서 최 후의 진전을 남겨두었던 곳이었다. 조화동(造化洞)이라 불리는 그곳은 들어올 수는 있으되 나갈 방법 이 없는 곳이었다. 방방이 외부세계와 차단된 채 살아온 것도 바로 그런 연유 때문이 었다. 뇌천의는 조화동을 둘러본 결과 동굴이 모두 세 부분으로 되어 있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조화담(造化潭)이었다. 그것은 귀곡하의 급류가 소용돌이를 이루어 빨려온 곳으로 동굴의 유일한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두번째는 천연적으로 형성된 동굴로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를 지니 고 있었다. 세번째는 인공의 힘으로 다듬어져 있는 두 군데의 석전이었다. 그중 한 석전은 평소 사람이 기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었 고, 다른 한 곳은 조화문의 역대 문주들의 유체를 모신 조사전이 었다. "이제야 볼 만 하군." 뇌천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방방이 그의 앞에서 어색하게 두 팔을 들어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누렇게 바랜 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처음 입어본 옷이 갑갑한 듯 이리저리 옷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뇌천의도 낡은 베옷을 걸치고 있었다. 조사동에서 간신히 구한 것 이었다. 물론 오랜 세월이 흘러 누렇게 바래져 있었으나 그래도 알몸으로 지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불편해요." 방방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정숙한 여인은 알몸을 보이면 안 된다. 조금 있으면 익숙해 질 거야." 뇌천의가 짐짓 엄숙하게 말하자 방방은 입술을 삐죽였다. "피이, 하지만 이곳에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잖아요. 오빠가 뭐 남인가?" "그래도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뇌천의는 시선을 돌렸다. 옷입는 것이 어색하여 그녀의 앞섶이 벌 어져 뽀얀 젖가슴의 일부가 비어져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생 각을 정리해 보았다. '방방의 내력은 삼백 년 이상의 수위다. 다만 그것을 제대로 쓰지 못할 뿐이다. 만일 무공을 익히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일개 소녀의 내공이 삼백 년이라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조화담(造化潭) 속에는 천년화리가 떼지어 살고 있었다. 방방은 어릴 적부터 그 화리를 먹고 자랐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방방이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은 어릴 적 홍수에 휩쓸려 귀곡하에 떠내려 왔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조화동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조화동에는 조화문의 마지막 문주가 살고 있었다. 그는 방방 이 일곱 살 되었을 때 생을 마감했다. 그후로는 그녀 혼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실로 기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사전. 그곳에는 역대 조화문주의 해골들이 있었다. 그들은 앉거나 누운 모습으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명패나 신위(神位)조차 보이지 않았다. "......." 뇌천의는 조사전에 들어온 순간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은 기인들이다. 하늘을 가릴 정도의 무학과 기이한 술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명리(名利)를 추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죽으 면서도 위엄을 내세우지 않았으니.......' 그는 해골들을 바라보며 존경심이 우러나는 것을 느꼈다. '이 분들에 비한다면 오늘날의 무림인들은 어떤가? 명예와 이익을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비록 조화문이 정통문파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이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기인들이다.' 조화문의 전통은 녹림도로 계승되었다. 그들은 격식이나 예의에 구애받지 않았다. 세상을 자유롭게 살며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했다. 따라서 파벌을 따지지 않아 수많은 부류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녹림도가 분열하여 녹림팔절로 분할된 것은 조화문의 기본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만일 조화문의 진전을 이어받은 녹림대종사가 탄생한다면 녹림도는 과거의 전통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뇌천의의 눈빛이 빛났다. 조사전을 둘러보던 그는 사방의 석벽과 바닥에 어지럽게 긁힌 자 국들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무공 이나 잡학의 구결들이었다. 때로는 도형(圖形)이나 갖가지 그림들 이 새겨져 있기도 했다. 그것은 조화문의 역대문주들이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기 전 자신 이 그동안 깨우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었다. 뇌천의는 흥미를 느끼며 그 중 몇 가지 구결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는 경이로움이 떠올랐다. '정말 놀랍구나! 모두가 기이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조사전에 새겨져 있는 무공이나 잡학들은 심오한 것들은 아니었 다. 그러나 하나같이 기괴했다. '이것은 방방이 익힌 경공술이구나.' 그는 한쪽 석벽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석벽에는 사람의 그림이 연속 동작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무 림의 일반적인 경공술과는 판이하게 틀린 것이었다. 그것은 외공(外功)을 가미한 것으로 축골공과 경신법을 혼합하여 펼치는 것이었다. 축골공으로 몸의 골격을 최소한으로 줄이게 되 면 그만큼 속도도 빨라지고 기민하게 된다. 경공술의 이름은 야무비(夜霧飛)였다. 특이한 것은 야무비를 펼치면 아무리 작은 틈만 있어도 기척도 없 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조사전에는 훗날 녹림계에 퍼져나갔던 각종 기괴한 절기 들이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당금의 녹림도에 실전되어 버린 것들 도 많이 있었다. 뇌천의는 석벽과 바닥을 두루 살펴보았다. 뇌천의는 방방과 함께 조화동에서 살게 되었다.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찾기 전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곳 에서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음식은 천년화리로 해결되었 다. 실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덕분에 그의 상세는 완쾌되었을 뿐 아니라 내공은 오히려 전보다 훨씬 심후하게 발전되고 있었다. 조화동 안의 생활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오직 방방과 그 둘 뿐 이었으므로 변화가 있을 수 없었다. 뇌천의는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느낌이었다. 강호에 나온 이래 하 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눈만 감으면 그는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악마천부가 출현한 후로 무림은 어찌 되었을까? 그들에 의해 피 바다가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무림의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그는 마음이 급해지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조화동을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방방은 차츰 변화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사람이라곤 할아버지밖에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인간생 활이나 예의범절에는 백지상태였다. 그녀는 하루하루 뇌천의로부 터 그런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던 그녀는 차츰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생각도 깊어지게 되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일 경우도 있다. 지금 방방이 그런 경우였다. 인간생활의 규범을 익히면서부터 그 녀는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부모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동안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왔던 삶에 대해서도 회의하게 되었 다. "......." 방방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어떨 때는 하루 종일 턱을 고인 채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지금 그녀는 뇌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 각을 하고 있는지는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것이다. 뇌천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허송세월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출구를 찾을 때까지 이곳 에서 무공을 익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두 장의 구룡환비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구룡환비도를 가늘게 말아 묵아(墨兒)의 빈 공간 속에 넣어 보관했으므로 아직도 무사히 보관하고 있었다. 묵아를 만지는 순간 그의 뇌리에 엽무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이곳을 빠져나가는 즉시 내가 준 금환을 부수도록 하게. 그는 왼손에 찬 금환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부수라고?'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손목에 찬 금환을 풀렀다. 금환은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손가락으로 누르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두쪽으로 갈라졌다. "아니?" 그는 깜짝 놀랐다. 금환 속으로부터 한 장의 양피지가 나타난 것 이다. 그것은 이미 지니고 있던 두 장의 구룡환비도와 같은 재질 이었다. '이럴 수가? 이것은 구룡환비도가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세 장의 구룡환비도를 얻은 셈이었다. 금환 속에서 나온 구룡환비도에는 역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고대인의 복장을 한 한 중년인이 정좌한 채 손가락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의 손가락이 중지(中指)밖에 없다는 사실 이었다. 중지 끝에서는 한 가닥 기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뇌천의는 그림을 수십 번 이상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얻 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구룡환비도를 다시 금환 속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조화동에서는 별달리 할 일이 없었다. 무료한 나머지 그는 조사전 의 석벽이나 바닥에 새겨져 있는 조화문의 무공과 잡학들을 익히 기 시작했다. 그는 진전이 있을 때마다 방방에게 그것을 가르치기도 했다. 방방은 비록 가공할 내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무공의 기초는 형편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자질이 출중했다. 며칠이 흐르자 그녀의 무공은 놀랍게 발전했다. 그녀는 유독 검법(劍法)에 관심을 보였다. 뇌천의는 그녀에게 십 전천사 중 중원검왕(中原劍王) 어우양의 검법을 가르쳤다. 또한 달마검급 상의 검법도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여기던 방방은 차츰 검도에 심취해갔다. 이제 는 거의 하루종일을 검도를 익히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조화동에서는 밤낮을 구별할 수 없었으므로 며칠이 흘렀는지, 아 니면 몇 달이 지났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뇌천의는 세번째로 얻은 구룡환비도를 바닥에 펼쳐놓은 채 중얼거 리고 있었다. "단전(丹田)... 기해(氣海)... 수분(水分)... 옥당(玉堂)... 화개 (華蓋)... 그리고 중부혈(中府血)로 진기를 모아서... 그 다음 은......." 그는 조금씩 무엇인가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을 볼 수가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그는 한숨을 쉬고는 벽에 기대앉 았다. 쉬쉭쉭......! 파공성이 울리고 있었다. 방방이 종유석을 잘라 만든 석검을 쥐고 검법연마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검법은 이미 경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특히 달마삼검은 가 히 조화경에 달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공할 내공을 지니고 있었으 므로 빠르게 검법을 터득했다. 요즘 들어 그녀는 달마삼검을 자신 에게 맞는 방향으로 새롭게 창출해 내는데 빠져 있었다. 스스스! 그녀의 몸이 뿌연 검막에 휩싸였다. 검도 몸도 종국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뇌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음, 이 상태로 가면 천하제일검객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겠구 나.' 그는 다시 구룡환비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림 속의 중년인의 자세로 보아 진기의 운행이 일반적인 방식과 는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깨닫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과연 그러했다. 그림 속의 고대복장을 입은 중년인의 가부좌 자세는 특이한 데가 있었다. 그는 왼손을 단전에 얹고 있었는데 다섯 손가락으로 단전 주위의 혈도를 짚고 있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진기의 운행에 영 향을 주기 위함이었다. '중부혈로 모인 진기가 극천혈(極泉穴)에 이르면 포화상태가 된 다. 그리고 극문혈(極門穴)을 지나 신문(神門)에 이르게 되면 정 점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가 문제......." 뇌천의는 난관에 봉착했다. 그는 이 구룡환비도의 그림으로 미루어 한 가지 지공(指功)이 담 겨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 보아도 그 오의를 깨우칠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림 속의 사람은 중지(中指)밖에 없을까? 설마 이 지공 을 익히기 위해 나머지 손가락을 절단했단 말인가?' 갑자기 그는 머리가 확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것이다!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이 지공은 패도적인 공 부다. 진기를 오직 한 손가락에 모아 퉁겨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 면 그 위력은 가히 산이라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뇌천의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았다. '그렇다고 멀쩡한 손가락을 자를 수야 없지 않은가?' 산 넘어 산이었다. 하나를 깨달으면 또 하나의 의문이 남았다. 그는 난감해졌다. 아 무리 천하제일의 지공이라 해도 성한 손가락을 자를 수는 없는 일 이었다. '.......' 그는 다시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 손가락을 자르지 않아도 지공을 시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활짝 펼친 손바닥. 분명 손가락은 다 섯 개였다. 그는 중지만 남기고 네 개의 손가락을 접었다. 눈까풀 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진기를 운행하며 손가락을 전면을 향해 뻗었다. "일지파천(一指破天)!" 슉! 중지로부터 시퍼런 뇌전이 뻗었다. 뇌전은 맞은편 석벽에 적중됐 다. 쾅! 석벽이 흔들리며 자욱한 돌가루가 일어났다. "성공이다!" 뇌천의는 흥분하여 벌떡 일어났다. 놀랍게도 석벽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또한 그 깊이가 한 자 이상이 되었다. 지공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믿 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뇌천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고금제일의 지법이다. 지공을 숙련시키면 지공(指孔)은 손가락 굵기로 작아질 것이다. 더욱 연마하면 아마도 실같이 가느 다란 구멍만 뚫리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운용하기에 따라 직 선만이 아니라 마음대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대쪽에 있는 적도 단숨에 살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뇌천의는 구룡환비도를 와락 움켜쥐었다. "과연 구룡비학이야말로 고금제일의 무공이로구나!" 그는 구룡비학 중 세 가지를 얻은 셈이었다. 얼마 전 그는 적봉우 사로부터 얻은 비도의 비밀을 풀었다. 그것은 음양천도결(陰陽天 道訣)이란 것이었다. 그것은 도가의 비학으로 음과 양의 양대기공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심법이었다. 이 기공의 뛰어난 점은 양심신공(兩 心神功)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한꺼번에 두 가지 신공을 일으킬 수 있고, 몸과 마음을 분리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익히려면 체내에 음과 양의 진력이 완전한 평형을 이루어야만 했다. 뇌천의는 천년화리를 복용함으로써 양강지기는 천하무적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음유지기가 부족했다. 그는 십전천사 중 관음성니로부터 음유지학인 관음벽라신공을 익힌 바 있으나 그 화후가 부족한 상태였다. 또한 을지사란과의 음양회천대법으로 음양지기의 균형을 이룬 바 있었으나 천년화리를 복용함으로써 균형이 깨어진 것이었다. 이때, 생각에 잠겨있는 뇌천의의 귓전에 방방의 음성이 들렸다 "오빠, 뭐해요?" "응? 아무 것도......." 그는 그림을 회수했다. 방방은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음, 아무 것도 아니다." "오빠가 며칠째 그 그림만 들여다 보고 있는 걸 보니 무척 중요한 건가 보죠?" 뇌천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그림은 무림계의 보물이지." 방방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응? 방방도 그와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림은 좀 다르 긴 하지만." 뇌천의는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냐?" "으응." "어디 있느냐?" 뇌천의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이리 와 봐요, 오빠." 방방은 그의 손을 잡고 조사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조사전의 구석에 놓여있는 작은 항아리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양피지 한 장 을 꺼냈다. "이걸 보세요, 똑같잖아요?" 과연 그러했다. 그녀가 꺼낸 양피지는 그 재질이 뇌천의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가 먼저 얻었던 두 장의 구룡환비도도 양피지 재질은 같았으나 다른 점이 있다면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있다는 것 뿐이 었다. 근본적으로 네 장의 양피지는 똑같은 재질인 것이었다. 뇌천의는 황급히 양피지를 펼쳐보았다. 과연 그것은 틀림없이 구룡환비도였다. "방방, 본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이냐?" 방방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방방이 급류에 휘말려 이곳에 들어왔을 때 목에 걸고 있던 밀랍통 속에 들어있던 거야.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뇌천의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방방의 부모는 이것 때문에 무림인들에게 쫓겼을 지도 모 르겠구나.' 어쨌든 그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네번째의 구룡환비도를 너무나 쉽게 얻은 것이었다. 이번 구룡환비도에는 특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 산봉우리 위에 청년이 우뚝 서 있는 그림이었다. 그는 한 손으 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는 전면에 있는 거대한 암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에서 뇌전(雷電)이 떨어져 청년의 손끝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런데 뇌전은 다시 청년의 다른 손끝으로 이어져 암석을 쪼개는 장면이었다. 뇌천의는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뇌벽신공(雷霹神功)이었다. 그것은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무학으로 구룡성제의 한 명인 뇌제 (雷帝)가 남긴 무학이었다. 그것은 뇌정의 기운을 흡수하여 무공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인간의 능력이 초자연 현상까지도 흡수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준 것이 었다. "아아! 정말 대단한 신공이로구나!" 뇌천의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날부터 그는 온 정력을 집중하여 뇌벽신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이미 극양진력이 충만한 그에게 뇌벽신공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무 공이라 할 수 있었다. 천 년 동안을 내려오는 동안 구룡환비도를 얻은 사람은 무수히 많 았다. 그러나 그들 중 그림 속에 숨어있는 무학을 깨우친 자는 극 소수였다. 대부분 구룡환비도가 단순히 구룡성궁이 있는 곳을 암 시하는 장진도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뇌천의가 구룡환비도의 무학을 쉽게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은 어려 서부터 혼자서 무공을 익혀야만 했던 특수한 환경에 기인한 것이 었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네 장의 구룡환비도에 담 겨져 있는 무공을 연마하는데 모든 것을 쏟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다섯 장의 구룡환비도였다. 과연 그것을 모두 얻 을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은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부글부글......! 조화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뇌천의는 오랫동안 조화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방방 이 턱을 두 손으로 받친 채 애정이 담뿍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생활은 완전히 변했다. 방방은 줄곧 혼자만의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뇌천의 가 들어온 후부터 그녀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다. 이제 그녀는 완 전한 여인으로 변모한 것이었다. '아아, 이제 난 이 분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거야. 앞으로는 이 분을 떠나지 않을 거야!' 이때 뇌천의가 그녀의 상념을 깼다. "이상하군. 조화담의 물은 어딘가로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밖 으로부터 들어온 물이 나갈 곳이 없다면 이렇게 수위가 일정할 리 가 없는데." 그녀는 눈을 반짝 떴다. "응? 뭐라고 했어요?" 뇌천의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방방,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는 거냐?"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방방, 내 말을 들어봐라. 이곳의 물은 귀곡하란 곳의 급류가 소 용돌이를 이루며 빨려 들어온 것이다. 귀곡하의 급류는 그 양이 엄청나게 많다. 한데 조화담의 물의 양은 언제나 일정하니 이상하 지 않느냐?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그건......." 방방은 막 대답하려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뇌천의는 안색이 변했다. 방방은 순진한 소녀였다. 그녀의 표정은 아무래도 무엇인 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는 방방의 어깨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방방, 너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오빠." 방방은 문득 서글픈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해 봐라.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지?" 방방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오빠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죠? 방방을 버리고......." 뇌천의는 비로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피식 웃었 다. 그는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럼 이곳에서 평생 지내잔 말이냐?" "그래요. 방방은 오빠와 둘이라면 영원히 이곳에서 살 수 있어 요." "뭐라고?" "전에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오빠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어요." 뇌천의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 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방방, 그럼 못쓴다. 이곳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다. 너도 이 곳을 떠나 사람들이 사는 세계로 나가야 한다. 넓은 세상에서 인 간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방방은 서글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방방보다 더 예쁜 여인들이 많겠지요? 그럼 오빠는 이 방방을 버릴 거예요." 뇌천의는 자신도 모르게 껄껄 웃고 말았다. "하하하핫, 방방! 이제 보니 너는 참 어리석구나." 방방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 그런 사람으로 보다니 섭섭하단 말이다." "......." 뇌천의는 그녀를 끌어당기며 진지하게 말했다.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내 어찌 널 버린단 말이냐? 세상에 나 간다 해도 내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방방은 눈을 반짝 빛냈다. "정말인가요?" "하하, 맹세하마. 널 영원히 버리지 않겠노라고." "아아!" 방방은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녀의 흑진주같은 눈에 이슬이 맺히 고 있었다. 잠시 후 방방은 조화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속에는 동굴이 있어요. 그 동굴 속으로 물이 무섭게 빨려 들 어가고 있어요." 뇌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곳으로 들어가 보았느냐?" "네, 호기심에 살펴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끝까지 들어갈 수 없 었어요." "왜?" "안으로 들어갈수록 흐름이 빨라지는 데다 한기(寒氣) 때문에 더 갈 수가 없었어요." "한기 때문이라고? 너의 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단 말이냐?" 뇌천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방의 체내에는 극양지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한기라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실은 오래 전에 들어가 보고는 무서워서 다시 시도해 본 적이 없 어요." 뇌천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면 시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한 가닥 희망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방방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방방, 사람은 일정한 목적과 이상(理想)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만일 아무 이상도 없이 산다면 짐승들의 삶이나 다름이 없다. 아 울러 세상에는 정(正)이 있고 사(邪)가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하느 냐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정(正)을 지향해야만 한 다." "......." 방방은 그의 가슴에 기댄 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뇌천의는 담 담히 말을 이었다. "나도 본래 어떤 것을 택해야 할지 몰랐었다. 그것은 세상에 태어 났을 때부터 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그의 얼굴에는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내 삶은 달라졌다.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지."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이 겪 은 일들을 방방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부모도 없이 천산에서 자라며 십전천사로부터 무공을 익혔던 일, 그들로부터 청부를 받고 강호에 출도하며 겪은 여러 가지 사건 들.... 십자혈각을 복원하고 대살종이 되기까지의 피비린내 나는 혈행(血行)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이어 천상보(天商堡)에서 일어났던 정사대전과 끝없는 탈출과정에 서 겪었던 일.... 마지막으로 악마천부(惡魔天府)가 등장했던 일 들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 방방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순하게만 살아온 그녀의 머 릿속은 갑자기 복잡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혼란을 일으키게 한 것은 무림정세보 다도 뇌천의와 얽힌 여인들의 이야기였다. 뇌천의는 그가 만났던 여인들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방방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오빠에겐 많은 여인들이 있군요." 뇌천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셈이지." "그녀들을 모두 사랑하나요?" 뇌천의는 방방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건 운명이 결정할 문제다. 하지만 지 금 현재는 방방만을 생각하고 있단다." "정말이에요?" "물론이지." 방방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불안한 표 정을 지었다. "세상에 나가면 그 여인들을 모두 만나겠네요?" "그렇겠지." 방방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녀들은 모두 예쁘지요?" 뇌천의는 빙긋 웃었다. "모두 아름답지, 하지만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세상의 꽃들은 모두 아름답지 않느냐? 하지만 꽃마다 그 색과 향 기가 다르듯 여인들도 각각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방방의 얼굴에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럼 방방은 어떤가요?" "방방은 들판에 핀 한 떨기 야생화와도 같지. 아직 아무도 그 향 기와 빛깔을 느껴보지 못한......." 뇌천의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며 말했다. "날 믿어다오. 방방." "......." "너는 내게 새 삶을 열어준 여인이다. 어떤 일이 있다해도 널 버 리지 않겠다." 방방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 다. "오빠가 좋아하는 언니들이라면... 방방도 좋아할 수 있을 거 같 아요." "방방!" 뇌천의는 그녀를 뜨겁게 껴안았다. 조화담 안으로 뛰어드는 순간 급류의 소용돌이가 무서운 흡인력으 로 온몸을 잡아당겼다. 뇌천의와 방방은 손을 잡은 채 나란히 물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들은 조화동을 탈출하기로 한 것이었다. 행여나 급류에 휘말려 놓칠세라 두 사람은 서로의 손목을 꼭 잡고 있었다. '......!' 아래로 내려갈수록 무서운 수압이 그들의 몸을 압박해왔다. 다행 히 뇌천의는 조화문의 잡다한 무공을 익힌 몸이었다. 그중에는 수 공(水功)도 포함되어 있어 거센 물살 속에서도 안정된 자세를 유 지할 수 있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엇!' 뇌천의는 어느 한 곳으로 온몸이 무섭게 끌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 다. 그는 방방의 손목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저곳이로군!' 잠시 후 그의 눈에 뻥 뚫린 동혈(洞穴)이 보였다. 두 사람의 몸은 물과 함께 그곳으로 무섭게 끌려 들어갔다. 뇌천의는 동혈 속으로 들어간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실로 북극의 빙동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 터 천산에서 살았다. 따라서 추위에는 익숙하다 할 수 있었다. 그 러나 동혈 속의 한기는 보통 차가운 것이 아니었다. 대략 한 마장 정도 들어갔을 때 그는 온몸이 마비되는 듯했다. 만 일 체내의 순양지기를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 다. '저것은?' 잠시 후 그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방도 그것을 발견한 듯 그의 손을 꼭 잡는 것이 느껴졌다. 동혈 속에는 빛이라곤 한 점도 들어오지 않는 암흑 일색이었다. 두 사람의 공력이 화경에 접어들었으므로 천안통(天眼通)을 발휘 하여 사물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맞은편에 두 개의 녹색 광채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 것은 거대한 이무기의 눈에서 발하는 빛이었다. '저것은... 한담익수룡(寒潭翼水龍)이 아닌가!' 뇌천의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한담익수룡이란 차가운 한담에 살면서 극한지기를 흡수하는 일종 의 영물이었다. 익수룡에 관한 것은 고서에 언급된 것으로 인세에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고 적혀 있었다. 콰르르르......! 익수룡은 입을 벌려 물을 삼키고 있었다. 익수룡은 상상을 절할 정도로 거대했다. 몸통의 길이만도 근 오십 장에 달했으므로 입을 벌리니 마치 커다란 동굴처럼 느껴졌다. 그 큰 입을 쩍 벌리고 물 을 빨아들이니 가공할 흡인력으로 모든 것이 빨려들어가고 있었 다. '윽!' 뇌천의와 방방은 익수룡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만일 놈의 입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뇌천의는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방방, 좌우로 갈라져서 저놈을 공격해야겠다!) 방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이대로는 얼마 견디지 못한다 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뇌천의는 손목에 차고 있던 묵아를 그녀에 게 넘겨주었다. '이것을 사용해라.' 슈-욱! 잠시 후 두 사람은 좌우로 갈라졌다. 그들은 비스듬히 선회하면서 익수룡의 머리를 향해 접근해 갔다. 가까이 가보니 익수룡은 가히 공포스런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뿔이 세 개나 돋아나 있었는데 전신은 암청색의 번쩍이 는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쩍 벌린 입에는 아래위로 검날처럼 날 카로운 이빨이 빽빽하게 나 있었다. 캬아아......! 익수룡은 두 사람을 발견한 듯 머리를 좌우로 돌렸다. 쿠르르릉! 갑자기 익수룡이 뇌천의를 향해 무엇인가를 토해냈다. 그것은 새 하얀 이물질이었다. 뇌천의는 이물질이 다가오기도 전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윽......!' 그것은 일종의 빙정(氷精)으로 극한지기의 정화였다. '일기파천홍(一氣破天紅)!' 그는 우장으로 적봉우사의 절기를 뻗어냈다. 콰르르르! 굉렬한 폭음이 일었다. 그의 장력은 물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뻗 어나갔다. 그러나 익수룡이 머리를 한 차례 내두르자 그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마치 거대한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 그는 바람 개비처럼 날아가고 말았다. '크윽......!' 그는 동굴의 천장에 부딪쳤다. 등으로 부딪쳤기 망정이지 머리로 부딪쳤으며 황천으로 갈 뻔했다. 이때 방방이 그의 위기를 보고 신검합일(神劍合一)의 자세로 익수 룡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카-- 캉! 그녀의 검은 정통으로 익수룡의 이마에 적중되었다. 그러나 시퍼 런 불꽃이 튕기며 그녀의 몸은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버렸다. '방방!' 뇌천의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방방을 다급히 껴안았다. 물이 붉 게 물들었다. 그것은 방방이 토해낸 선혈이었다. 뇌천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녀를 살펴볼 경황이 없었 다. 이번에는 익수룡이 몸을 비틀며 거대한 꼬리를 후려쳐 온 것 이었다. 뇌천의는 시커먼 꼬리가 날아오자 방방을 안고 신형을 날렸다. 물 속이라 행동이 민첩하지가 못했다. 콰아아--! 꼬리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빗나갔다. 그는 신형을 틀어 익수룡 의 머리부분으로 접근해 가며 전력으로 장력을 날렸다. 쾅--! 장력은 정통으로 익수룡의 머리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는 팔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을 뿐, 익수룡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안되겠다! 놈의 약점을 찾아야 한다. 묵아도 통하지 않는 걸 보 면 급소가 아니면 놈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익수룡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익수룡의 전신에는 빈틈없이 비늘이 덮혀있었다. 어느 한 곳도 약한 부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때 익수룡의 머리가 그 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눈에서 시퍼런 녹광이 반짝였 다. 그것을 본 뇌천의는 영감이 떠올랐다. '그렇다! 놈의 약점은 바로 눈이다!' 그는 구룡비학 중의 하나인 일지파천(一指破天)을 전개하기로 했 다. 진기를 온몸에 돌린 후 네 손가락을 접고 중지 하나만을 빳빳 이 세운 후 기회를 노렸다. 콰아아! 익수룡은 그를 발견한 듯 머리를 무섭게 뻗으며 다가왔다. 뇌천의 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전신의 내력을 중지를 통해 뻗어낸 것 이다. 슉--! 중지로부터 뇌전과도 같은 기운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그것을 본 익수룡은 위험을 직감한 듯 고개를 돌려 피해냈다. 물살이 무 서운 와류를 일으켰다. '어억!' 뇌천의는 와류에 휩쓸려 일곱 번이나 곤두박질쳐야 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그는 익수룡을 노려보았다. 보통 방법으로 놈을 공격 해서는 효과가 날 것 같지 않았다. 놈은 거대한 몸을 지녔으면서 도 영민하기 그지없는 것 같았다. 문득 그는 영감이 일어났다. 슉......! 다시 지강(指 )이 뻗어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동굴 의 천장 쪽으로 뻗어갔다. 그것을 본 익수룡은 자신에게 위험이 없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찌 알았으랴! 지강은 천장으로 뻗는 듯하다가 선회하더니 정확히 익수룡의 왼쪽 눈에 적중하는 것이 아닌가? 퍽! 섬뜩한 소리와 함께 익수룡의 눈알이 파열되었다. 쿠와왁! 익수룡은 깜짝 놀란 듯 요동쳤다. 한쪽 눈알이 파열된 충격으로 놈은 온몸을 뒤틀어댔다. 콰콰콰......! 오십여 장이나 되는 몸통이 요동을 치자 동굴 안에는 가공할 와류 가 형성되었다. 뇌천의는 와류에 부딪쳐 빙글빙글 돌며 날아갔다. 그러나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두번째로 일지파천 을 전개했다. 퍽! 마지막 남은 눈알이 파열되어 버렸다. 익수룡은 이제 두 눈을 모 두 잃어버린 것이다. 놈은 미친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아차!' 뇌천의는 그만 안고 있던 방방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당황하여 급히 그녀를 다시 잡으려 했다. 그러나 동굴 속의 물은 엄청난 와 류를 일으키고 있어 눈 깜짝할 사이에 방방의 몸을 어딘가로 날려 버렸다. 뇌천의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찾아보았으나 어디로 날아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쿠쿠쿠쿵......! 동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익수룡의 꼬리 에 부딪쳐 동굴의 벽과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와류가 문제가 아니라 비오듯이 떨어지는 거대한 바윗덩이가 더 문제였다. 뇌천의는 사력을 다해 헤엄치며 방방을 찾아보았으나 점점 더 절망을 느낄 뿐이었다. 콰콰콰...... 쿠르릉......! 마침내 동굴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위가 쉴새없이 떨어 져 내렸다. 뇌천의는 전력을 다해 동굴 안으로 쏘아 들어갔다. 동굴이 완전히 무너져버리면 밖으로 나가는 길마저 영원히 차단되기 때문이었다. 꽈르릉......! 가공할 물의 소용돌이와 떨어지는 바위.... 갑자기 그는 엄청난 폭음을 들으며 그만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의식이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느낀 것은 따가운 햇살이었다. 그는 서서히 눈을 떴다. '......!' 눈이 부셨다. 강렬한 태양이 곧바로 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희열이 밀려들었다. '살았구나!' 그가 있는 곳은 한 산곡(山谷)이었다. 사방에 병풍처럼 수려한 산 세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호숫가에 누워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호수 위에 익수룡이 거대한 몸통을 뒤집은 채 둥 둥 떠 있었다. "익수룡이......?" 결국 익수룡은 죽은 것이었다. 그는 황급히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가 찾고자 하는 방방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 다. "방방....... 나는 이렇게 살아있는데, 너는 어찌된 것이냐?" 그때였다. 우연히 익수룡을 바라보던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익수 룡의 목 부근에 구멍이 뻥 뚫려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 부 분에만 유독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혹시?' 휙! 그는 익수룡을 향해 날아갔다. 다행히 경신법을 구사하는데는 아 무 지장이 없는 듯했다. 익수룡의 목 부위에 내려선 그는 구멍이 뚫린 곳을 자세히 관찰해 보았다. '예리한 보검에 뚫린 듯한 흔적인데?' 사실 익수룡은 목 바로 아래 부분이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 그건 데 그곳이 십자 형태로 베어져 있었다. '이상하다. 누가 익수룡을......?' 뇌천의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이때였다. 갑자기 익수룡이 꿈틀거렸다. 크게 놀란 그는 황급히 몸을 추스렸다. 하마터면 아래로 떨어질 뻔한 것이다. "엇!" 그는 기겁을 했다. 갑자기 익수룡의 목 속에서 시뻘건 물체가 불 쑥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장력을 날리려 했다. "호호호! 오빠, 방방이에요!" 그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전신에 피를 뒤집어 쓴 물체는 과연 사람이었다.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방방의 모습이었다. "아니, 대체......!" 그는 아연실색했다. 죽은 줄 알았던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반 갑기는 했지만 그녀의 괴이한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방방은 그를 향해 헤죽 웃으며 말했다. "오빠도 살아있었군요. 호호! 익수룡의 급소는 목 아래였어요. 언 젠가 할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해 주셨거든요. 그래서 묵아로 힘껏 찔렀지요." 뇌천의는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속에 들어간 것이냐?" 방방은 무엇인가를 들어보였다. "이걸 꺼내려고요." 뇌천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손에는 세 개의 구슬이 들려 있 었는데 그것은 크기가 용안 만했는데 홍(紅), 청(靑), 백(白)색이 었다. 방방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영물들은 뱃속에 정기(精氣)를 모아두어 이런 내단(內丹)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걸 꺼내려고 뱃속에 들어간 거예요. 할아버지 말씀이 맞았어요. 익수룡은 내단 을 세 개나 가지고 있었어요." 뇌천의는 놀란 눈으로 내단을 바라보았다. '저것은 빙혼신주(氷魂神珠)와 피독주(避毒珠), 피수주(避水珠)가 아닌가? 하나같이 전설적인 보물이거늘.......' "이걸 오빠에게 드리겠어요." 방방은 세 개의 내단을 내밀었다. 뇌천의는 선뜻 받지 못했다. "그걸 어째서 내가......." "방방은 오빠에게라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요. 어서 받으세요." "방방......." 뇌천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방방의 애틋한 마음이 감동을 준 것 이다. 세 개의 내단 중에서 빙혼신주(氷魂神珠)야말로 그에게 가장 필요 한 것이었다. 빙혼신주에는 천지간에서 가장 강한 극음지정이 형 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뇌천의는 빙혼신주를 복용함으로써 체내의 음양이기(陰陽二氣)를 조화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구룡무학 중 음양천도결을 완벽 하게 익힐 수가 있는 것이었다. 뇌천의는 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 무림백서 2권 제17장 영세태평무국(氷世太平武國) ━━━━━━━━━━━━━━━━━━━━━━━━━━━━━━━━━━━ 수천 년의 역사를 지녀온 무림은 피비린내 나는 혈사(血事)의 연 속이다. 장강을 중심으로 나뉘어진 남북무림과 정사무림, 거기에 변황무림 (邊荒武林)은 끊임없는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말하자면 무림계는 단 하루도 피바람 잘 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천 년의 무림사를 뒤집어엎을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 영세태평무국(永世太平武國). 무림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런 이름을 내세운 집단은 없었다. 그들은 바람처럼 나타나 영세태평무국이라는 이름으로 무림일통 (武林一統)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미 그들에게 강남무림의 패자인 천상보(天商堡)가 굴복했으며 정도이십팔련, 심지어는 변황팔절까지도 무릎을 꿇었 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영세태평무국의 황제, 즉 태평무황이 누군지 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신비에 싸인 채 영세태평무국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전무림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북상하더니 강북무림도를 공략했다. 강북무림도상의 군웅들은 도저히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 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스러지고 말았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영세태평무국에 대항하는 인물들은 참혹한 죽 음을 맞이해야 했다. 무림일통을 선언한 자들의 발길은 마침내 전 무림을 짓밟아 가고 있었다. 그들은 태평무국의 군림을 거부하는 자는 흑도백도를 막론하고 철 저히 멸절시켰다. 심지어는 그 직계가족이나 문인들은 물론 주변 의 십 리 이내의 무림인들까지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 북무림이 태평무국의 장하에 드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무림은 사상 유례없는 파국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출신이 나 문벌을 망라하여 전무림인들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무림의 일각에서는 심상치 않은 또 하나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마도(魔道) 세력이 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무림에 서는 마도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활련 십전 무맹의 등장으로 패퇴했던 그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 다. 전륜궁(轉輪宮). 혈륜성(血輪城). 백마부(百魔府). 야우림(夜友林). 아수마궁(阿修魔宮). 그들은 지난날 마교의 맥을 이어받은 부류들이었다. 그들의 힘은 엄청났다. 사실상 마도인의 숫자는 백만 이상이며, 그들은 서로가 지난날 마교의 정통을 이었다고 주장하며 세확장에 불을 당기고 있었다. 영세태평무국의 등장! 마도세력의 준동! 바야흐로 무림에 혈겁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구월로 접어들자 중원대륙에는 추색이 완연해졌다. 산은 단풍으로 불이 붙은 듯했으며 논밭에는 곡식이 익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수확의 계절이 온 것이다. 그러나 무림계에 몸 담은 사람들은 한가롭게 가을의 풍광을 감상 할 여유가 없었다. 나날이 무림이 흉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강남도상을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다정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는 남녀가 있었다. 남자는 흑의를 입었으며 여인은 몸에 꼭 맞는 녹의를 걸치고 있었 다. 두 사람은 몸매로 보아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남자는 죽립(竹笠)을 쓰고 있었고 여인은 얼굴에 엷은 면사를 드 리우고 있어 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남녀의 몸에서는 왠지 신비한 기운이 풍기고 있어 그들이 보 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들은 장강을 넘어 북상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두 사람 모두 경신술을 사용했다. 가히 놀라운 경신술이었다.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으며, 한 번씩 뛸 때마다 사오십 장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무협(巫峽) 쪽이었다. 스스스......! 추풍(秋風)이 분다. 촉(蜀)의 지세는 험하기로 이름난 곳이다. 그만큼 풍광이 아름답 기로도 유명했다. 눈길 닿는 곳마다 험준한 산세가 펼쳐지고 있는 촉의 땅에는 가을이 짙게 다가와 있었다. "어떠냐? 이런 풍경은?" 죽립인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들은 한 산등성이에 서있었 다. 녹의녀는 산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산야를 바라보며 탄성 을 발했다. "아! 정말 아름다워요! 조화동에 있을 때 바깥 세상에 대해 많은 상상을 해 보았지만 이 정도로 아름다울 줄은 몰랐어요. 난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남자는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전면의 풍림(楓林)을 바라보며 손으 로 죽립을 치켜올렸다. 죽립 아래로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바로 뇌천의였다. 물론 녹의녀는 조화동에서 함께 나온 방방 (芳芳)이었다. 뇌천의는 풍림을 한동안 바라본 후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중원은 아름다운 곳이지. 하지만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모 두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지." 방방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저는 너무나 많은 것 들을 봤어요. 가는 곳마다 온통 피바다였어요 왜 사람들은 하루도 싸움을 그치지 않는 걸까요?" 뇌천의는 바람에 날리는 방방의 머리칼을 뺨으로 느끼며 말했다. "그게 모두 욕망 때문이지. 특히 무림인들은 재물보다는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지. 그래서 무림계는 하루도 피바람 잘 날이 없는 것 이다." 방방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무림이 이렇게 험하고 무서운 곳이라면 왜 밖으로 나오자고 했나 요? 방방은 차라리 오빠와 함께 조화동 안에서 사는 것이 더 좋을 뻔했어요." "......!" 뇌천의는 그 말에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벌써 강호에 대 해 두려움과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슬며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방방, 꼭 그렇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물론 명예욕으로 인해 수 없는 다툼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 떤 이들은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뛰어드는 자 도 있었다. 다만 당금무림이 난세이므로 겉으로 보기에 의인(義 人)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방방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그럼 오빠가 나쁜 사람들을 ㅉ아내세요. 그런 후 좋은 사람들과 살면 되겠네요." 뇌천의는 그녀의 순진한 말에 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엄 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이다.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악인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오빠......!" 방방은 그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사랑이 담뿍 담긴 눈으로 뇌천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뇌천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가자,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누군데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가 누구죠?" 뇌천의는 빙긋 웃었다. "글쎄, 그가 무치노인(無痴老人)이라 불리는 것밖에 모른다." "......?" 뇌천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의 모습은 연기 처럼 사라졌다. 실로 불가사의한 경공술이었다. 숲은 바다처럼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북쪽으로 수 리 가량 가다보면 우뚝 솟은 한 산이 나타난다. 허공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듯 산등성이에 두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뇌천의와 방방이었다. "이 산이 천궁산이 맞다면 근처에 낙일애가 있을 텐데......?" 뇌천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위는 온통 송림이 우거져 있었다. 그는 낙일애에 산다는 무치노 인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름만으로 낙일애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 석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던 뇌천의는 서쪽의 한 절벽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마침 석양이 절벽 모서리에 걸려있었다. '음, 저곳이 낙일애일 것 같군.' "방방, 저곳으로 가보자." 그는 다시 방방의 손을 잡고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멀리 보았을 때는 그저 하나의 절벽으로 보였으나 정작 낙일애로 가는 길은 험하기 이를데 없었다. 바닥이 울퉁불퉁했으며 기암괴 석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 가파른 경사를 오르던 뇌천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진법이 깔려 있군." 그는 사방에 널려있는 기암괴석들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의 눈 썹이 찌푸려졌다. "누군가 진세를 파괴시켰다." 그렇다. 그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진법의 내력을 알아냈다. 그것은 지 난날 제갈무후가 펼쳤다는 팔진도(八陣圖)를 모방한 팔괘금천진 (八卦禁天陣)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진세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기암괴석이 제 위치를 벗 어나 있었으나 여기저기 땅에 구덩이가 파헤쳐져 있었다. 분명 누 군가가 진세를 파괴시킨 것이 분명했다. 방방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오빠?" "아무래도 일이 일어난 것 같다." 뇌천의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진중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과연 진세는 철저히 파괴되어 있어 두 사람이 들어갔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쯤 걸어갔을까? "으음!" 그는 신음을 흘렸다. 전면에 여러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기이한 것은 그 들이 모두 서생 차림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불과 이삼십대에 불 과한 젊은 서생들이었다. 그들이 죽은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한결같이 두개골이 짓 뭉개지거나 늑골이 드러나도록 짓밟힌 모습이었다.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뇌천의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아아! 무서워요, 오빠." 방방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떤 시체는 팔다리가 통째로 뜯겨나간 것도 있었다. 서생들은 무 공을 전혀 모르는 자들인 것 같았다. 반항한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뇌천의의 안색은 차갑게 굳어졌다. '무공을 모르는 서생들을 이토록 잔인하게 죽이다니.......' 그는 방방의 손을 잡고 신형을 날렸다. 낙일애(落日涯). 서쪽을 향해 끊어져 내린 듯한 절벽 위에 한 마장 정도의 분지 형 태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 분지에는 여러 채의 모옥(茅屋)이 있었다. 막 떨어지는 석양빛 을 받은 모옥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일견하기에 평화로운 모습이 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뿐이었으니....... "아아아악!" 공포에 찬 비명이 석양을 뒤흔들었다. 분지 한가운데 위치한 모옥의 마당에는 실로 참혹한 광경이 벌어 지고 있었다. <무치서원(無痴書院)> 모옥의 대청 위에 걸린 편액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단촐한 편액 이었으나 서체만은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듯 수려하기 그지없었 다. 대청 위, 교의에는 분노로 전신을 경련하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학창의를 입고 있었는데 수염과 머리칼이 눈처럼 희었다. "으으..., 잔인무도한 놈들!" 그의 옆에는 칠척이 넘는 거구의 흑의괴인(黑衣怪人)이 살기띤 음 성으로 추궁하고 있었다. "구양중백(歐陽重白)! 설마 문하제자들을 모두 죽이려는 것은 아 니겠지? 어서 놈들이 있는 곳을 대라." 구양중백이라면? 바로 살아있는 사서(史書)라 일컬어지는 활사관인(活史官人)이 아 닌가! 편액의 글씨로 미루어 그가 바로 무치서원의 원주임이 분명했다. "죽여라." 흑의괴인의 입에서 차디찬 명령이 떨어졌다. 퍽! 둔중한 격타음과 함께. "아아악!" 참혹한 비명이 터졌다. 한 서생이 머리가 으깨어진 채 쓰러졌다. 그러고 보니 서원의 앞마당에는 이미 이십 구가 넘는 시체가 널브 러져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백의서생들이었다. 이제 남아있는 서생은 불과 다섯 명에 불과했다. 마당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휘감은 괴인 십여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 은 혈고루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편 대청에 우뚝 서 있는 흑의괴인의 가슴에는 은고루(銀 賜)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징그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흐흐, 구양중백. 네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겠다. 혈루삼호(血賜三 號)!" "옛!" 한 명의 흑의인이 허리를 굽혔다. "책벌레들의 사지를 하나씩 떼어내라." "옛!" 흑의인은 백의서생의 오른쪽 팔을 잡았다. "제발......." 백의서생은 안색이 퍼렇게 질린 채 애원했다. 그러나 흑의인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흑의인이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아아악!" 놀라운 일이었었다. 서생의 왼팔이 어깨서부터 통째로 뽑혀져 나 가는 것이 아닌가? 서생은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뽑혀져 나간 팔 뚝이 바닥에 떨어져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으으... 이놈들! 네놈들이 사람이냐?" 활사관인 구양중백의 눈에 핏발이 섰다. "크흐흐흐! 무엇들 하느냐? 계속해라." 실로 잔인한 명령이었다. 흑의인들은 서생들의 팔을 차례로 뽑아 냈다. 그야말로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마당에는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고, 뽑혀져 나간 팔뚝이 여기저기서 꿈틀대고 있었다. "우왁!" 구양중백은 입을 벌려 선혈을 토해냈다. 너무나 격노한 나머지 그 는 혼절 직전이었다. 고루인들은 인간성이라곤 한 올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만큼도 여기지 않는 자들이었다. 마침내 서생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오오! 하늘이여!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이오?" 구양중백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살아있는 사서 활사관인. 그는 오래 전에 무림에서 사라진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 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낙일애에서 무치서원을 열고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그는 평화롭게 학문에 파묻혀 살아왔다. 무림의 일에는 일 체 관여치 않았던 것이다. 기이한 것은 고루인들이었다. 무엇 때문에 무림에서 은퇴한 구양 중백을 찾아왔고, 또 잔인한 수법으로 구양중백의 제자들을 죽인 단 말인가? "흐흐흐, 구양중백. 아직도 고집을 피울 테냐? 그렇다면 너의 늙 은 뼈다귀를 하나씩 부러뜨려......." 대청 위 흑의괴인의 입에서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우우우우......!" 어디선가 용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장소성이 울려왔다. "......!" 흑의괴인의 안색이 변했다. "감히 누가 본국의 파황대진(波荒大陣)을 뚫었단 말인가?" "우우우---." 낭랑한 장소는 점차 가까워졌다. 이어 모옥 앞마당에 마치 하늘에 서 뚝 떨어진 듯이 두 인영이 나타났다. 일남일녀. 그들은 바로 뇌천의와 방방이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 였다. 나란히 손잡고 있는 모습은 마치 한가롭게 산보라도 나온 사람같았다. 그러나 실은 이곳으로 오기까지 가슴에 고루문양을 새긴 칠십이 명의 흑의괴인들과 혈전을 벌여야 했다. 물론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현재 두 사람의 무공수위는 가히 선인지경에 올라있기 때문이었 다. 그들은 간단히 고루인들을 해치우고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네놈들은 누구냐?" 흑의괴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뇌천의는 삿갓을 치켜올렸다. 담담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마당 에 죽어있는 서생들을 가리키며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들은 모두 너희들이 죽였느냐?"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흑의괴인은 심 금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흐흐...! 맞다. 뭐가 잘못 됐느냐?" "잘못 됐느냐고?" 뇌천의의 입가에 선이 그어졌다. 언뜻 보면 미소짓는 것도 같았 고, 달리 보면 조소를 흘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이마 한가운 데 선명하게 뇌문이 빛났다. '헉! 저 놈이 누구기에?' 흑의괴인은 뇌문을 보는 순간 가슴이 섬뜩했다. 한편 구양중백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도 뇌문을 본 것이다. '오오! 저것은......?' 그는 격동을 느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때 뇌천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악마천부의 주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세태평무국이 란 그럴 듯한 이름을 내걸고 있으나 무림을 멋대로 짓밟으려 하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결코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이곳이 너희들의 무덤이 된다는 것을 일러주마." 뇌천의는 흑의인들을 보는 순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들은 과거 악마신상의 수레를 끌던 자들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뭣이? 네놈이 감히 본국에 반기를 들겠단 말이냐? 흐흐흐! 역천 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도 하는 소리란 말이지? 내 네놈의 혀를 뽑고 눈알을 파헤쳐 반역의 죄를 묻고야 말겠다!" 흑의괴인은 손을 번쩍 들었다. 휙휙! 고루인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려 뇌천의와 방방을 포위했다. 그들 의 눈에는 살기가 이글거렸다. 이제껏 잠자코 있던 방방이 입술을 열어 은방울같은 웃음을 터뜨 렸다. "호호호! 너희같은 잡졸들은 이 아가씨가 상대해 주마!" 창! 그녀의 손에서 검광이 일어났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 한 고 루인에게서 청강장검을 빼앗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검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고루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뇌천의는 그녀에 대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대청 위의 흑의괴인을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친구, 자네는 나와 놀아보는게 어떤가?" 흑의괴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건방진 애송이놈! 감히 이 탈명귀혼(奪命鬼魂)에게 도전하다 니......." 그는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법은 독특했다. 마치 박쥐처럼 양팔 을 활짝 편 채 날아온 것이다. 위잉! 허공에서 쌍장을 교차하여 날리자 시커먼 장력이 뻗어 나왔다. 뇌 천의는 그의 장력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슬쩍 손바닥을 뒤집어 쳤다. 꽝! "크윽!" 뇌천의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반면 탈명귀혼은 허공에 붕 떴다가 저만치 떨어졌다. 그는 안색이 횟빛이 된 채 비틀거렸다. 그의 얼 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편 뇌천의도 은근히 놀라고 있었다. '악마천부의 이급고수에 불과한 자의 공력이 이 정도라니.... 과 연 무시할 수가 없겠구나.' 악마천부의 수하들중 고루문양을 한 자들의 서열은 고루문양의 색 으로 구분하게 되어 있었다. 금은혈백(金銀血白)이 바로 그것이었다. 흑의괴인은 은고루였으므로 두번째 서열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의 위쪽에는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 었다. 탈명귀혼은 몇 차례나 안색이 변했으나 꿀리지는 않았다. 그에게 는 믿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애송이 놈! 제법이다만 아직 멀었다." 그는 다시 박쥐처럼 덮쳐오며 장력을 날렸다. "네놈을 백골로 만들어 주마! 묵천화강(墨天化 )!" 우우웅! 그의 장심으로부터 시커먼 기류가 뻗어 나왔다. 뇌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코로 시체 썩는 듯한 냄새가 났던 것이다. '으음, 독장(毒掌)을 익혔구나.' 그의 몸은 검은 기류에 뒤덮히고 말았다. "흐흐흐! 잘도 날뛰더니 어떠냐, 애송이놈!" 탈명귀혼은 득의의 괴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검은 기류가 사라진 후 그는 눈을 부릅떴다. "억! 이럴 수가?" 뇌천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탈 명귀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의 독장을 맞은 자는 그 즉시 살이 썩어 흘러내려야 마땅한 것이었다. "탈명귀혼이라고 했느냐? 너무 오래 살았다. 이제 그만 염라전으 로 가거라." 슉! "......?" 탈명귀혼은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묵광이 번뜩인 것 같았다. 피 하고 말고가 없었다. 그저 가슴이 뜨끔했을 뿐이었다. 고개 숙인 그의 안색이 희게 변했다. 한 자루의 검은 괴검이 심장 을 관통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끅!" 창! 하는 맑은 음향과 함께 묵아는 다시 환으로 돌아왔다. 뇌천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혈림에서 일천겁마승이 백골이 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바로 이 악독한 독공 때문이었군." 방금 전 그가 독공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익수룡에게서 얻은 피독주 때문이었다. 만천하의 독이 피독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 던 것이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방방이 그를 바라보며 방긋 웃고 있었다. "오빠, 저 자들은 너무 싱거웠어요." "싱거워?" 뇌천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뒤에 고루인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모두 황천으로 가 있 었다. 방방은 오직 일초만을 펼쳤을 뿐이었다. 달마삼검을 나름대로 변 화시킨 검법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검이 발출된 순간 고루인들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저 백광이 온몸을 휘감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단 일초에 그들은 전멸하고 만 것이다. 뇌천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놀랍군." 방방은 수줍게 웃었다. "뭘요, 다 오빠 덕분이에요." 뇌천의는 내심 중얼거렸다. '만일 방방이 악인을 만났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군.' 그는 시선을 대청으로 향했다. 교의에 앉아있던 백발은염의 노인 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경이의 빛이 떠올라 있 었다. "노인장은 뉘십니까?" 뇌천의가 포권하며 묻자 구양중백은 허탈한 웃음을 흘려냈다. "허허! 이럴 수가.... 완벽하게 닮았군. 이걸 두고 하늘의 뜻이라 고 한단 말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부는 언제고 자네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네." 뇌천의는 흠칫했다. '나를 기다렸단 말인가?' 그는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의 시선은 빠르게 대청 위의 편액에 향해졌다가 다시 구양중백을 바라보았다. "그럼 노인장께서 바로 무치노인이란 말입니까?" 구양중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틀리지 않았네. 또한 구양중백이기도 하지." "아!" 뇌천의는 탄성을 발했다. 구양중백이라면 살아있는 사서이자 고금 을 통틀어 가장 지혜로운 현인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는 한 동안 구양중백을 바라보다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소생이 올 줄 아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구양중백은 마당에 널린 서생들의 시신을 바라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 모두가 내 죄로다. 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 뇌천의는 침묵했다. 만일 그가 조금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이런 참 극은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협, 하늘의 가호가 있어 자네를 만나게 되었네. 하마터면 노부 먼저 황천으로 갈 뻔했네." 뇌천의는 담담히 말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구양중백은 뇌천의를 유심히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자넬 보니 지난날의 무옥을 다시 보는 듯하군......." 뇌천의는 흠칫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옥과 너무나 닮았다는 말이네." 뇌천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누군지 몰라도 소생은 그런 인물을 모릅니다." 구양중백은 문득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물론 그럴 테지.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세상 일이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라네." 뇌천의는 더욱 더 의아했다. 그는 눈앞의 현인이 심오한 말을 한 다고 느꼈다. 그러나 방금 전 무옥이란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가슴 이 두근거렸었다. 물론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을 뿐이었다. "이곳은 풍경이 그리 좋지 않으니 장소를 옮기는 게 어떤가? 내 자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네." "......." 뇌천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게 아니라 마당에 수십 구 의 시체가 뒹굴고 피바다가 된 터에 이런 곳에서 대화를 나눌 수 는 없는 일이었다. "허허, 제자들이여, 세상을 원망하게나. 노부는 참으로 운도 없도 다. 근 백 명의 제자를 키웠으면서도 단 한 명의 후계자도 얻지 못했으니 말이야." 구양중백은 서생들의 시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평생 학문을 익힌 노학자였다. 천기를 살필 줄 알고 인간의 길흉화복까 지 내다볼 줄 아는 현자 중의 현자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이 야말로 인간이 하늘을 넘을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몰랐다. 그는 비록 무림계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었으나 그가 원한 것은 학자로서의 삶이었다. 그는 사서를 쓰면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만년에 제자들을 키우며 학문의 성과를 논하고 싶은 것 이 꿈이었다. 그런데 애써 키운 백여 명의 제자가 몰살했다. 그의 노안에 흐르는 눈물에는 아픔이 배어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노부를 따라오게나." 구양중백은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겼다. 뇌천의는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얼마 후 일행은 동편의 절벽 아래에 당도했다. 구양중백은 암벽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구구구궁! 암석이 마찰되는 듯한 음향과 함께 바위가 돌아가며 하나의 동문 (洞門)이 나타났다. ■ 무림백서 2권 제18장 밝혀진 신세(身世) ━━━━━━━━━━━━━━━━━━━━━━━━━━━━━━━━━━━ 동부 속에는 몇 칸의 인공으로 다듬어진 석실이 있었다. 구양중백은 두 사람을 서재로 쓰이는 서실로 안내했다. 서실은 단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방의 벽에는 고서가 쌓여 있었 으며, 중앙에는 돌로 된 탁자와 의자가 단촐하게 놓여져 있었다. "앉게나." 그는 의자에 앉으며 두 사람에게도 권했다. 일행이 자리잡자 그는 방방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방방은 그가 뚫어져라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 었다. 잠시 후 구양중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 다. "허허.... 불운한 과거를 가진 아가씨구먼. 하지만 앞날에는 무궁 한 홍복이 있을 뿐이니 걱정이 없겠군. 다만 미간에 살(煞)이 끼 여 있으니 장차 이 아름다운 아가씨로 인해 한바탕 혈풍이 불겠구 먼." "......?" 방방은 그저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그러나 뇌천의는 그 말에 가슴이 섬뜩했다. '방방이 혈풍을 일으킨다고?' 그는 구양중백의 말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그것은 그녀의 순진무 구한 성품과 무공내력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구양중백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역시 고금제일의 현자답구나. 한눈에 방방의 운명을 알아보다 니.' 구양중백은 시선을 돌려 뇌천의를 응시했다. "뇌소협, 자네는 부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뇌천의는 흠칫했다. 그의 부친은 십자혈각의 각주 혈룡수 뇌무비였다. 어찌 생각해 보 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부친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괴로움만 커 질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친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비록 말투는 담담했으나 쓰라림이 담겨있는 음성이었다. 구양중백 은 탄식했다. "아.... 그야 마땅한 노릇이라네. 자네는 부친이 누구인지조차 모 르고 있으니 말이네." 뇌천의는 눈썹을 꿈틀했다. "내 어찌 부친을 모른단 말이오?" 구양중백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네에게 보여줄 것이 있네." 그는 오른쪽 서가로 걸어가더니 장방형의 자단목 상자 하나를 가 져왔다. 탁자에 상자를 내려놓은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네. 상자를 열어보게. 그 속에 자네의 운명이 들어있다네." '운명이라고?' 뇌천의는 심금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구양중백이 허튼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상자를 바라보던 그는 손을 뻗었다. 뚜껑이 열렸다. 뇌천의는 불안과 회의에 찬 눈으로 상자 속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안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족자 하나와 보 광(寶光)을 발산하고 있는 검 한 자루, 한 권의 얇은 책자였다. 구양중백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족자를 펼쳐보게." 뇌천의는 시키는 대로 족자를 펼쳐보았다. 순간 그의 안색이 창백 하게 변했다. "아......!"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족자에는 남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백삼을 입은 청년과 다 정하게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흑삼미녀였다. 두 사람은 잘 어울리 는 선남선녀의 모습이었다. "어머! 오빠와 똑같아요." 그의 어깨 위로 족자의 그림을 훔쳐보던 방방이 깜짝 놀라 외쳤 다. 과연 그러했다. 그림 속 백삼청년의 얼굴은 뇌천의와 판에 박은 듯이 닮았던 것이 다. 마치 그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다. 뇌천의는 갑자기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는 당대제일의 기남아일세. 사람들은 그를 십전옥수검(十全玉 手劍) 천무옥(天武玉)이라 부른다네. 또한 자네의 생부이기도 하 네." 쿵! 뇌천의는 심장이 뚝 떨어진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마치 벼락이 떨 어진 듯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전신을 떨었다. '이... 이 사람이 내 부친이라고?' 한동안 그는 입을 열지 못했다. 뚫어져라 그림 속의 청년만을 바 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무섭게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혈룡수 뇌무비는 누구란 말이오?" 구양중백은 탄식했다. "그는 남일 뿐이네. 자네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네. 십전천사가 자 넬 속인 것이라네." 뇌천의는 거대한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 그럴 수가!" 그는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에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잠시 후 그는 격하게 물었다. "왜? 무엇 때문에 날 속였단 말이오?" 구양중백은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십전천사에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네.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자네도 이해하리라 믿네." 뇌천의는 차갑게 물었다.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이오?" "자네가 천무옥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두 가지 비극이 일어 나기 때문이라네." "두 가지 비극?" 뇌천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구양중백은 부드러운 음성 으로 말했다. "허허, 뇌소협! 아니 천소협이지. 노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겠는 가?" 뇌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자신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네의 부친인 무옥은 본래 백도무림의 결사인 대활련 십전무맹 에 의해 선택되었는데 발군의 자질로 인해 훗날 백 명의 십전무랑 중 영수가 되었네. 그후 탕마멸사의 길에 나서 눈부신 업적을 쌓 게 되었네." "......." 뇌천의는 망연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말일세. 무옥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나? 놀랍게도 그는 자 신이 청춘을 바쳐 헌신했던 백도인들에게 죽었다. 그것도 동료이 자 수하들이었던 십전무랑의 합공(合攻)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마 쳤다네." "......!" 뇌천의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구양중백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과거를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첫째는 무옥 의 유일한 혈육인 자네를 백도무림이 용납하지 못하게 될 것이네. 두번째는... 당금의 겁난을 타파할 수 있는 인재를 잃게되는 것이 라네. 그래서 십전천사가 자네의 내력을 숨기게 된 것이네." 뇌천의는 갑자기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 으하하핫핫......!" 광소는 길게 이어졌다. 그런데 그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 러내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눈물은 붉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 었다. "오빠......!" 보다못한 방방은 그의 품으로 뛰어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 왜 그래요, 오빠!" 뇌천의의 광소가 뚝 끊어졌다. 그녀는 방방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준 후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구양중백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계속하시오." 구양중백은 탄식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무옥을 십전무맹에 추천한 것은 노부였다네." "......!" "노부는 무옥의 자질이 비범한 것을 발견하고 십전맹에 천거했지. 때문에 무옥은 노부를 의부(義父)로 섬겼었다네." "......." 뇌천의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너무나 큰 충격에 마음 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탓에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는 것 같았 다. "과연 무옥은 노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네. 예상대로 그는 십 전무랑의 영수가 되었고 그후 눈부신 활약을 벌여 마도십세를 비 롯하여 녹림팔절, 흉천십이교가 일으킨 겁난을 종식시키는데 성공 했다네. 그것은 그의 놀라운 무공과 뛰어난 병략(兵略)의 결과였 지." 뇌천의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그 분이 죽어야 했단 말이오?" "그의 불운은 마중지화(魔中之花)라 불리던 미인마궁(美人魔宮)의 소궁주 추설화(秋雪花)를 사랑함으로써 시작되었네." 뇌천의가 족자 속의 흑삼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 초상화 속의 여인이......." "마중지화 추설화일세. 자네의 어머니이기도 하지." 추설화는 비록 그림에서였지만 아름답다 못해 일종의 요기(妖氣) 까지 느껴졌다. 그야말로 인세에서 유일무이한 완미의 여인이었 다. "그가 마중지화를 아내로 맞이하려 하자 그를 시기하던 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네. 그들은 무옥이 명문의 후예가 아닌 한낱 낭인 출신이므로 그가 십전맹주가 된 데 늘 불만을 갖고 있었지." "......." "결국 두 사람의 혼인식이 벌어지던 날 일이 일어난 것일세." 구양중백은 잠시 침묵했다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무옥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았네. 그래서 혼례식을 치르기 전 책자 한 권을 남겨두었지. 그 는 자신의 후인에게 훗날 그 책자를 넘겨달라고 노부에게 부탁을 했다네." 뇌천의는 상자 속의 책자를 집어들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책 장을 넘겼다.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힘찬 필체로 적혀 있 었다. <언젠가 태어날 자식을 위해 이 글을 남긴다.> 뇌천의는 책장을 넘겼다. 그의 안색은 격동으로 쉴새없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책자에는 천무옥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천가(天哥)의 내력에서부터 천무옥이 자라왔던 환경이 상세히 적 혀 있었다. 훗날 구양중백의 천거에 의해 십전맹에 들어갔던 일, 발군의 기량으로 십전무랑의 영수가 되었던 과정까지 빠짐없이 기 록되어 있었다. 특히 탕마멸사를 하던 중 마도십세의 하나인 미인마궁의 소궁주인 추설화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일.... 그녀를 사랑함으로써 십 전맹에서 고립무원의 위치가 된 과정이 속속들이 담겨 있었다. '그... 그랬었군.' 뇌천의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책을 덮었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부친 천무옥은 이 책자를 만든 후 십 전무랑의 함정에 빠져 죽음을 당한 것이다. "......." 석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구양중백은 물론 방방까지도 긴장한 채 뇌천의를 바라보고 있었 다.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뇌천의는 상자 속의 보검을 꺼냈 다. 보검은 짧았다. 한 자 반에 불과하여 검이라 부르기 힘든 길이였 다. 그러나 희대의 보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착! 보검을 뽑자 석실 안은 휘황한 서기(瑞氣)에 휩싸였다. 검신에서 오색영롱한 광채가 흘렀다. 검신에는 용(龍)이 승천하는 듯한 문 양이 은은히 비쳐보이고 있었다. 뇌천의는 보검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천추황검(千秋皇劍).... 이것이 천가(天哥)의 신물이란 말인가?" 우우웅! 그가 검을 바로 세우자 검신이 진동하며 검명이 울었다. 그 광경 에 방방의 입이 벌어졌다. "야아! 정말 대단한 보검이에요!" 구양중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네. 천추황검이야말로 천가의 가문 전래의 보검이라네." 천추황검(千秋皇劍). 거기에는 놀라운 내력이 깃들어 있었다. 천추황검은 본시 황실(皇室)에서 옥새 다음으로 중시했던 황궁지 보의 하나였다. 대명황실은 그 검을 한 장군가에 하사했다. 바로 영종제(英宗帝)가 친히 황검을 내린 것이다. 천추장군가(千秋將軍家). 이렇게 불리던 장군가는 지난 수백 년간 문중에서 기라성 같은 장 군들을 배출해냈다. 그들은 명조가 위기에 몰렸을 때마다 눈부신 공적을 세웠으며, 변방에 출정하여 영토를 넓히는 데도 혁혁한 공 을 세웠다. 일찍이 한 가문에서 그렇듯 많은 공신을 배출한 적이 없을 정도였 다. 따라서 천추장군가의 사람들은 명조의 수호신과도 같은 가문 으로 그 맥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종제가 황실의 보물로 아끼던 황검을 하사한 것은 조금 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추장군가에 대한 보답이었으 며, 훗날 명조의 황제들이 천추가의 충성을 영원히 기억하라는 깊 은 뜻을 담은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천추황검이 지니는 권능이었다. 황검을 지닌 자는 왕후장 상(王侯將相)과 똑같은 권위와 황법상 지위를 누리게 되어 있었 다. 따라서 천추황검으로 황제에게 어떤 요구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천추황검의 권한으로 제후나 군왕(君王)의 운명을 뒤꿀 수 도 있는 것이었다. 이런 놀라운 내력을 가지고 있는 천추황검을 천무옥이 지니고 있 는 것은 그가 바로 천추장군가의 마지막 후예였기 때문이었다. 본래 천무옥의 부친은 병마도독(兵馬都督)으로 북방(北方)이 위태 로웠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출정(出政)했었다. 그의 눈부신 활 약으로 북방의 난은 곧 평정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돌아오 지 않았던 것이다. 천무진(天武眞). 그가 바로 천무옥의 부친이었다. 천무진이 실종된 것은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었다. 황궁에서는 그 가 전사(戰死)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천무진을 아는 자들의 생각 은 달랐다. 실상 황가의 천추장군가에 대한 편애는 황족을 위시하 여 많은 고관들의 질시를 사왔던 것이다. 천무진의 성격 또한 문제였다. 그는 결코 타협할 줄 모르는 인간 이었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곧은 성격을 지닌 그의 주변에 는 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를 질시하는 무리들이 전장의 와중에서 천무진을 살해했 을 것이란 설이 은연중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천무진의 실종에 대한 조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천무옥은 천추장군가의 마지막 후예였다. 그런데 어느 날 천추장 군가는 폐문하고 말았다. 어린 아들을 안고 천무진의 부인이 모습 을 감춘 것이었다. 그녀가 장군가를 폐문하고 아들과 함께 사라진 것은 보이지 않는 위험 때문이었다. 천무진이 실종된 후, 장군가의 맥을 완전히 끊 으려는 죽음의 손길이 끊임없이 뻗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는 천가의 혈맥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장군가 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천무옥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서주(徐州)에서 신분을 감춘 채 학문을 익히며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완전히 장성하여 힘을 키우기 전에는 북경의 장군가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 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서주를 지나던 구양중백이 천무옥을 발견하고 그의 뛰어난 재질에 반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양부를 자 처하게 되었고 천무옥을 십전무맹에 천거한 것이었다. 천무옥이 남긴 책자 속에는 이런 가문의 내력까지 소상히 적혀 있 었다. 뇌천의는 감회를 금치 못했다. '아아, 내가 장군가의 후예였구나.' 그는 마음속으로 묘한 감동이 스며드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과거지사일 뿐이었다. 그는 가문은 옛 영화보다는 부친 에 관한 것이 더 중요했다. "아버님을 함정에 몰아넣은 것이 정말 십전무랑이란 말입니까?" 그는 처음으로 아버님이란 단어를 썼다. 구양중백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어렸다.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네." 뇌천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또 누가 있단 말입니까?" "십전무랑은 분명 무옥을 합공했네. 그들이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진정한 원흉은 따로 있는 것이나 다름없 네." "그게 누구란 말입니까?" "사마신무일세." "......!" 뇌천의의 안색이 변했다. 구양중백은 눈길을 내리며 설명했다. "사마신무는 본래 천축 출신으로 음모를 안은 채 소림에 투신했 네. 그의 야망은 중원무림을 장악하는 것이었네." 뇌천의도 그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시 무옥은 치밀한 조사 끝에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네. 그러나 손을 쓸 수가 없었지." "어째서 말입니까?" "그것은 당시 상황 때문이었네. 사마신무는 이미 백도십팔련을 거 의 포섭해 놓고 있었던 것이네. 따라서 섣불리 나서다간 도리어 십전무맹의 분열을 초래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네." 구양중백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결국 화근은 그가 시기를 놓친 데서 일어난 것이네. 사마신무는 자신의 정체를 무옥이 눈치챈 것을 알았고, 십전무랑을 충동질하 여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네." "......." 뇌천의는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진정한 원흉 은 사마신무인 것이다. 그러나 사마신무는 악마천부에 의해 이미 제거되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십전무랑이 아버님을 죽인 죄는 씻을 수 없습 니다." 구양중백은 탄식했다. "허허.... 물론 그렇겠지."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깔렸다. 다시 석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긴 침묵을 깬 것은 구양중백이었 다. 그는 암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자네의 신분을 감춰야 했던 이유를 알았을 것이네. 자네가 무옥의 핏줄이라는 것이 알려졌다면 오늘날 백도무림은 자네의 복 수 대상이 되었을 걸세." "......." 뇌천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허공을 노려보고 있 었다. "두번째 이유를 설명하겠네. 사실 노부는 오래 전부터 천기를 살 펴보았네. 그 결과 무림을 위협하는 진정한 암류를 알게 되었지. 그것은 변황무림의 내습이 아니었네." "......?" 뇌천의는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전설의 겁(劫)이 도래하고 있었네." "전설의 겁?" "당시 무림은 변황무림의 침입이 가장 큰 우환이었으나 노부는 천 기를 통해 그들의 기가 곧 꺾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정작 두려 운 것은 전설의 악마지겁(惡魔之劫)과 십마지겁(十魔之劫)이 닥쳐 온다는 것이었네." "......!" 뇌천의는 격동을 금치 못했다. 그는 구양중백에 대해 경이를 금치 못했다. '악마지겁을 미리 예측했단 말인가? 과연... 얼마 전 악마천부가 등장했다. 이 사람은 정말 천기를 읽을 능력이 있단 말인가?' 구양중백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희미한 미소 를 지었다. "그것이 바로 자네의 출신을 숨겨야 할 절대적인 이유였네." "무슨 뜻입니까?" 뇌천의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무옥의 혈육인 자네야말로 양대겁란을 종식시킬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네." 뇌천의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찌하여......." 구양중백은 현기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의 이름이 왜 천의(天意)인지 아나? 그것은 하늘의 뜻을 이 어받았기 때문이네." "......!" "양대겁란을 해소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전설의 구룡성궁(九 龍聖宮)을 열어 백도의 잊혀진 무학을 되살리는 것이라네. 그 일 은 오직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네." 뇌천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나여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자네가 천추장군가의 후예이며 천추황검의 주인이기 때문 이네." 구양중백이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 십전천사가 자네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지 않았는가?" 뇌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룡환비도를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그렇네. 다섯 장의 구룡환비도를 얻어야 구룡성궁을 열 수 있기 때문이네." 뇌천의는 눈썹을 찌푸렸다. "구룡환비도는 모두 아홉 장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나 자네는 네 장은 이미 얻은 것이나 다름없네. 또 한 오직 자네만이 네 장의 구룡환비도를 지닐 자격이 있지." 뇌천의는 점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소협, 자네의 상을 보니 그동안 수차례의 기연이 있었던 듯하네. 이미 몇 장의 비도를 얻었을 것 같군. 어떤가?" 뇌천의는 그의 예리한 안목에 놀라며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네 장을 얻었습니다." "오! 과연 하늘의 뜻이 자네에게 있음이 틀림없네. 한 장을 얻기 도 힘든 것을 네 장씩이나 얻다니." 구양중백의 안색은 오랜만에 밝게 빛났다. "그럼 여덟 장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머지 한 장만 남았 군." 뇌천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네 장밖에 지니고 있지 않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구양중백은 빙그레 웃었다. "네 장은 황궁밀고에 있네." "......!" "천추황검의 권능으로 황제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었나? 결국 네 장의 비도는 자네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 지일세." 뇌천의는 비로소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결국 오늘날의 모든 것이 활사관인 구양중백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후후... 훗......!" 그는 괴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되었군. 이제야 알겠다. 내 부모를 속이고 내가 이런 혹 독한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군!" 그는 한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구양중백은 자애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협,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란 말을 명심하 게.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성사는 하늘에 달린 것이네. 물론 자네 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든 자네의 자유네. 하지만 호생지덕을 잊 어서는 안될 것이네." "......." 뇌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족자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 그의 가슴속에는 회의가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 다. 그에게 조부가 되는 천무진은 충열의 장군이었으나 그를 시기하는 왕족과 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전장에서 사라졌다. 부친은 또 어떠 한가? 백도무림을 위해 청춘을 바쳤으나 결국 백도인에 의해 죽음 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는...? 나 역시 그리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는 가?' 어쩌면 그도 조부와 부친이 걸었던 길을 답습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하고 있었다. 석벽에 걸려있는 유등이 깜 박였다. 그때마다 그의 얼굴에 음영이 일렁였다.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그의 얼굴에는 만감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십전천사는 어디 있습니까?" 구양중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오대마벌이 집결하고 있네. 그것은 마도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네."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십전천사는 오대마벌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떠났네. 어쩌면 이미 두번째 환란이 태동하고 있는지도 모르네." 문득 뇌천의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나자 방방도 따라 일어섰 다. "가겠습니다." 구양중백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결코 핏줄을 속일 수 없네. 천추장군가는 충혈의 맥을 갖 고 있네." 뇌천의는 무심하게 말했다. "소생의 일은 소생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구양중백은 탄식하며 말했다. "과거 무옥은 내게 이렇게 말했었지.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운비 (雲飛)라 짓겠노라고." "......!" 뇌천의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다시 걸음을 빨리하여 사라져갔다. 구양중백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노부가 할 일은 끝났군......." 자금성(紫禁城). 자금성은 명조의 황성으로 북경(北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역대의 황제들이 기거한다. 자금성에서 바람이 불면 천 하가 흔들리고, 억조창생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은 엄청난 파장을 불 러일으키는 것이다. 하물며 황위(皇位)를 둘러싸고 음모가 일어난 다면 천하의 민심은 걷잡을 수없이 동요를 일으키게 된다. 신종(神宗) 만력제(萬歷帝) 사십삼 년. 반석에 올라있던 명조도 국운(國運)이 차츰 쇠하고 있다는 것은 아는 이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만력 초기에 이른바 철완재상(鐵婉宰相)으로 이름을 떨치던 명재 상 장거정(張居正)이 죽은 이후, 그가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명조 의 기반은 환관과 위정자들의 수탈, 파벌싸움으로 하루가 다르게 쇠해갔으며 당대에 이르러서 국운은 완연히 기울어 가고 있었다. 지금 자금성에는 머지 않아 보위에 오르게 될 황태자(皇太子)를 둘러싼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자금성은 암운(暗雲) 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호화롭기만 한 것이 또한 자금성 인 것이다. 북경 외곽. 규모는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으나 북경사람들은 이 저택을 지날 때면 숙연한 표정을 짓곤 한다. 그것은 황족이 기거하고 있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만 력제의 여러 왕자 가운데 한 명일 것이라는 설이 나돌 뿐이었다. 정오 무렵이었다. 끼익! 육중한 대문이 열리더니 한 대의 삼두마차(三頭馬車)가 달려나왔 다. 마차는 청석이 깔린 포도 위를 힘차게 내달렸다. 행인들은 급히 길을 비켜섰고, 마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 다. 백운산(白雲山). 북경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 이곳에 삼두마차가 나타났다. 두두두두......! 산길에는 인적이라곤 없었다. 그러고 보니 마차의 마부석에는 마 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산로를 따라 달리던 마차가 험한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스슷! 문득 연기와 같은 인영이 마차로부터 빠져 나오더니 숲속으로 사 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차는 그대로 달려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차는 다시 오던 길로 모습을 보이더니 북경을 향해 달려 갔다. 한편 마차로부터 몰래 빠져나온 인영은 숲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 었다. 그런데 그가 막 스쳐 지나간 자리의 두 그루 나무가 움직였다. 나 무처럼 보였던 것은 두 명의 괴인이었다. 그들은 장안은신법(障安 隱身法)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흐! 드디어 꼬리를 잡았군. 이번에야말로 철혈부(鐵血府)의 뿌 리를 뽑을 때다." "크크.... 여부가 있겠는가? 이제껏 당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 리지." 두 괴인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가세. 철혈부의 집회를 탐지해 낸 것만도 큰 수확이니까." "물론이지." 휙! 그들의 신형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채 삼장도 떠오르기 전에 그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쿵! 쿵! 그들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들의 이마 한복판에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 자리에 한 명의 백삼인이 나타났다. 영준한 얼굴에 이마에 은 은한 뇌문(雷紋)이 있는 청년, 그는 바로 뇌천의였다. 그는 두 구의 시체를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쯧쯧.... 자금성이 이렇게 썩어있다니." 그는 눈을 가늘게 한 채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비록 철혈부가 썩은 가지를 잘라내려 애쓰고 있지만 너무 미약하 다." 철혈부(鐵血府). 그것은 자금성에 소속된 비밀결사였다. 철혈부는 기울어 가는 명조의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우국충정을 지닌 명문가 청년들이 조직한 것이다. 그들은 장군가의 후손도 있 었으며, 황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명조를 부패시키고 있는 환관을 징계하고 후궁들의 문란한 통정을 감시하며, 황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모나 위정자 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데 있었다. 지금까지 철혈부의 조직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심지어 는 영수인 철혈부주가 누구인지, 또는 철혈부에서 실질적으로 활 동하는 자들이 누군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히 암호에 의해 행동했으며 움직일 때는 한결같이 철 가면을 써 위장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철혈부는 실질적인 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감시나 조사 를 넘어 명조를 갉아먹고 있는 위정자나 부패한 관리들을 살해하 는 일을 전개한 것이다. 사당(祠堂). 백운산 깊은 곳에 낡은 사당이 있었다. 오랫동안 돌보는 이가 없어 반쯤 허물어져 내리고 있는 사당이었 다. 따라서 향화가 끊긴 지도 오래되어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다. 사당 안은 고요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사당 안에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숨소리 하나 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실로 괴이했다. 차림새는 한결같이 똑같은 모습이 었던 것이다. 모두 청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으므로 체격을 구분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얼굴에는 같은 모양의 푸른 색 철가면을 쓰고 있었 다. 이들이야말로 수년 전부터 결성된 비밀결사인 철혈부(鐵血府)였던 것이다. 사당의 신단 위. 청색장포의 청삼인이 서 있었다. 그는 백여 명의 철가면인들과는 달랐다. 얼굴에 쓰고 있는 철가면이 귀면상(鬼面像)이었던 것이 다. 이들은 철혈부의 행동대였다. 모두 무장 출신으로 독자적인 무예 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소매에 금줄로 신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 나에서 다섯 개까지의 등급이었다. 지금 사당에 있는 철가면은 모두 두 개 이상의 금줄이 그어져 있 었다. 특히 신단에 서 있는 귀면인은 다섯 줄이었다. 말하자면 그 가 신비의 철혈부주인 것이다. 철혈부주는 신비한 눈으로 사당 안의 철가면을 둘러본 뒤 입을 열 었다. "정세는 하루하루 급박하게 변하고 있소. 정귀비(鄭貴妃) 일당은 복왕(福王)을 황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대왕야(大王爺)이신 상왕 (常王)을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사당 안은 크게 술렁거렸다. "감히... 대역모를 꾀하다니." "천하의 요녀 같으니!" 정귀비(鄭貴妃). 그녀는 만력제의 후궁으로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총희였다. 만력제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직 정귀비의 처소에서만 보내게 되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황제는 주위의 간언을 듣 지 않고 더욱 정귀비만을 총애했다. 그로 인해 정귀비의 권세가 높아진 것은 물론이었다. 더욱이 그녀 는 복왕(福王)을 낳자 온갖 수단으로 만력제를 치마폭에 휘감은 후 황태자(皇太子)를 제치고 복왕을 대신 앉히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미 정귀비의 일파는 자금성을 장악하다시피했다. 또한 환관들은 그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온갖 비행을 자행하고 있는 실정이었 다. 정귀비 일파와 환관들의 부패와 패악이 극에 이르니 명조의 국운 이 기울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한편 황태자 상락왕(常洛王)은 인품이 중후한데다 야심이 없는 위 인이었다. 그는 나날이 자금성이 어지러워지자 모든 것을 운명으 로 돌리고 현실을 회피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철혈부의 의사들은 황태자를 보위하고 명조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결사를 조직한 것이었다. 철혈위(鐵血衛). 철혈부 의사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의 눈은 철가면 사이로 활 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차례로 자신들이 조사한 자금성의 동태에 대해 보고했다. 각자 환관이나 대신, 탐관오리들의 비행과 부패상들을 낱낱이 보 고했다. 그들의 보고로 미루어 정귀비 일파와 환관들의 부패는 극에 이르 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관직을 황금으로 주고받을 정도로 정국이 문란해져 버린 것이다. "......!" 귀면인, 즉 철혈부주의 눈에서는 분노의 빛이 흘러나왔다. 사실 그는 원대한 뜻을 지닌 위인이었다. 썩어버린 대명(大明)의 가지를 쳐내고 혁신적인 황조를 재건할 포 부를 지니고 있었다. 철혈부를 조직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보고가 끝나자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조만간 귀비 일파는 역모를 단행할 것이오. 그 전에 그들의 흑심 을 백일하에 밝혀내 진실을 보지 못하고 계시는 황제폐하의 눈을 바로 뜨게 하여야 하오." "......." 장내에는 숙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문제는 어영금위군이 귀비와 한 패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오. 그들이 귀비를 보호하고 있는 이상 그들의 음모를 더 이상 밝혀낼 수가 없다는 것이오." 귀면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기회는 올 것이오. 하늘은 명조를 버리시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그는 손을 들었다. "이것으로 마지막 모임이 될 것 같소. 오늘 이후로는 집회를 좀처 럼 열 수 없을 것이오. 놈들의 감시가 이미 지척에까지 뻗고 있기 때문이오." 귀면인의 음성은 무겁게 깔렸다. "모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철혈령(鐵血令)이 떨어지기를 기다리 시오. 확신을 갖고 승리의 그 날까지 싸우는 것이오. 하늘은 우리 와 함께 하실 것이오." 그의 말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사뭇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따라 서 철혈위의 가슴도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본인은 다시 한 번 폐하께 간언하겠소. 폐하께서 비록 요녀의 술 책에 잠시 용안이 어두워졌다 하나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하오. 이 번에는 기필코 폐하의 마음을 돌리고 말겠소." 그는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들 몸조심하기 바라오......." 그의 음성은 왠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움직이지 않 았다. 그의 말은 끝났다. 그런데 철혈위는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 았다. 잠시 후, 그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철혈부주의 말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이다. 더 이상의 집회는 없다니? 그렇다면 철혈부에 심각한 위기가 도래했다는 뜻이 아닌 가? 철혈위가 모두 빠져나간 후. 철혈부주는 텅 빈 사당을 뒷짐을 진 채 서성였다. 그의 모습은 왠 지 초조해 보였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아! 시운(時運)이 따르지 않는구나.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되살 리기엔 너무 늦었단 말인가?" 그의 음성에는 비탄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때 그의 귓전에 누군 가의 담담한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칠왕야(七王爺), 낙망은 아직 이르외다." "누구냐?" 철혈부주는 깜짝 놀라 몸을 빙글 돌렸다. 그는 돌아서는 순간 우 수를 뻗었다. 신상 뒤쪽의 기둥을 향해서였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기둥이 부러졌다. 단지 우수를 뻗었을 뿐이 었는데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스스! 그의 눈앞에 안개가 뭉치는 듯하더니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는 정중히 포권하고 있었다. "일개 강호야인이 인사 드리오." 인영은 바로 뇌천의였다. "너는......." 뇌천의는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천운비(天雲飛)라 합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왕야를 만나 러 왔습니다." 철혈부주, 즉 칠왕야의 눈에 불신의 빛이 드러났다. "그대는 이미 모든 것을 탐지했군?" 뇌천의는 스스로를 천운비라 밝혔다. 결국 그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천운비는 공손히 말했다. "결코 불측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왕야." 칠왕야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뚫어 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렸다. "좋네. 그럼 내 앞에 나타난 목적이 무엇인가?" 그는 말하면서 손을 움직였다. 비록 약간 움직였을 뿐이었으나 수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손은 천운비의 모든 사혈을 노리고 있었다. 천운비는 현기증을 느끼며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칠왕야가 황궁무학의 달인이라더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구 나!' 천운비는 즉시 손을 들어 원을 그렸다. 그러자 칠왕야의 공격은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천운비는 문득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놀라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소생은 거래를 하러 왔을 뿐입 니다." 칠왕야는 한 걸음 나서며 이번에는 식지와 중지를 퉁겼다. "거래?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슈슉! 철판이라도 뚫을 듯한 지력이 뻗어나갔다. 지척의 거리였으므로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하! 이런 놀라운 실력을 숨기고 계셨다니... 왕야께서 무림에 나서셨다면 일문의 종사가 되실 겁니다." 천운비는 낭랑하게 웃으며 왼손을 수도로 하여 반원을 그렸다. 파파팟! 칠왕야의 지력은 무형의 벽에 차단되어 버렸다. "본부의 비밀이 새나가면 대명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대는 죽어줘야겠다." 위잉! 칠왕야는 쌍장을 교차하여 뻗었다. 쩡! 하는 금속음과 함께 눈부 신 광채가 회전하며 날아왔다. 천운비는 가슴이 섬뜩했다. 그는 칠왕야의 무공이 초절정급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으면 후수(後手)이므로 손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장력을 밀어냈다. 꽝! 사당이 무너질 듯한 진동이 일어났다. "음!" 두마디 신음이 들렸다. 천운비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가슴 옷자락이 찢겨져 있었다. 한편 칠왕야는 두 걸음 밀려나간 채 전신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고수들은 한순간에 서로의 무공수위를 알아볼 수 있다. 천운비는 칠왕야가 황실제일고수이면서도 무림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만일 수개월 전이었다면 그는 이 일장의 대결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한편 칠왕야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천운비.... 대체 이 자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에 이런 고수가 있었다니?' 그는 암담함을 느꼈다. '이 자가 귀비 일당이라면... 그야말로 큰일이구나.' 이때 천운비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선 후 정중히 포권했다. "칠왕야께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소생은 왕야와 거래를 하러 온 것입니다. 왕야께서 생각하는 귀비 일파는 결코 아닙니 다." "......!" 칠왕야는 흠칫했다. 면구 사이로 보이는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천운비의 눈빛에 서 진실을 읽은 것이다.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대를 믿어 보겠다." 그는 천운비를 정시하며 말했다. "자네를 의심한 것은 본인이 추진하고 있는 일이 너무나 중대할 뿐더러 수많은 동지(同志)들의 생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네. 이 점을 그대가 이해해 주었으면 하네."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런데 거래란 어떤 것인가?" 천운비는 진지하게 말했다. "소생은 진실한 거래를 원합니다." "진실한 거래?" "먼저 칠왕야의 진면목을 뵙고 싶습니다." "......!" 칠왕야는 흠칫했다. 면구 속의 눈빛이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칠왕야는 흔쾌히 말했다. "좋네." 그는 손을 들어 얼굴에 쓴 면구를 벗었다. 면구가 떨어져 나간 순 간 천운비는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 진면목이 나타난 것이다. 칠왕야는 자금성에서 신비한 인물로 알 려져 있었다. 그는 남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여 왕부에서 두문불 출하며 지냈으므로 그의 진면목을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뜻밖에도 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 보석 같이 빛나는 눈, 수려한 눈썹과 선홍빛의 입술.... 가히 절세미남 자였다. 다만 남성적인 면모가 부족했을 뿐, 미녀가 무색할 정도로 완벽한 얼굴이었다. "왕야께서 이렇게 미남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외람된 말씀 이나 왕야께서 여인이었다면 소생은 목숨을 걸고 구애할 뻔했습니 다." 천운비의 말에 칠왕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머리에 은색의 띠를 묶고 있었는데 나이는 이십세를 전후해 보였다. 천운비는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왕야께 신하의 예를 올리지 않음을 용서하십시오. 소생은 강호인 인지라 왕법에 구애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칠왕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소 말투를 바꾸었다. "알고 있소. 나도 신경쓰지 않겠소이다." 그는 궁금한 듯 물었다. "이제 되었소? 그럼 거래에 대해 말해 보시오." 천운비는 느긋하게 말했다. "소생은 한때 청부를 맡았던 적이 있소이다. 때문에 이번에 왕야 께도 청부를 받고자 합니다." "청부?" 칠왕야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빛이 떠올랐다. "청부의 대가로는 어떤 것을 원하오?" "소생이 얻고자 하는 물건이 하나 있소이다." "어떤 물건이오?" "황공하오나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수가 없소이다. 다만 황궁보고 에서 소생이 원하는 물건을 취할 수 있게만 해 주신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 칠왕야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는 눈을 반쯤 감더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소. 청부의 종류를 가리오?" "불문가지(不問可知) 이오." "좋소. 그럼 그대에게 청부를 맡기겠소." "황공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잠시 후 그들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칠왕야는 그동안 철혈부가 활동한 일을 솔직히 얘기해 주었다. 천 운비에게 청부를 맡기기로 한 이상 신임하기로 결심한 듯했다. 천운비는 근 반 시진에 걸쳐 칠왕야에게 황실을 둘러싸고 있는 음 모의 전말을 모두 들었다. 한편, 천운비가 북경에 오기까지는 숱한 갈등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심적인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 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친부가 천무옥이란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구나 백도무림 전체가 그의 원수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혔다. 결국 그는 마음을 결정했다. 전대의 은원은 결코 단순 하게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복잡한 무림의 양상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는 운명에 순응하기로 했다. 그래서 황궁에 비장되어 있다는 네 장의 구룡환비도를 얻기 위해 북경으로 온 것이었다. 도중에 방방과 헤어졌다. 물론 그녀는 한사코 헤어지지 않으려 했 으나 어렵게 설득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사천의 검천령으로 떠났 다. 북경에 도착한 그는 일이 수월치 않음을 느꼈다. 비록 천추황검을 지니고 있다고 하나 자금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만력제를 만남으로써 더욱 복잡한 일에 휘말려 들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것 은 철혈부의 청부를 받는 대가로 구룡환비도를 얻기로 한 것이었 다. ■ 무림백서 2권 제19장 풍운의 자금성(紫禁城) ━━━━━━━━━━━━━━━━━━━━━━━━━━━━━━━━━━━ 밤. 자금성의 경비는 삼엄하다. 만력제는 나이가 들면서 주위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자금성의 경 계를 철통처럼 강화시켰다. 자금성 안팎의 정세가 그만큼 불안하 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여러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향락을 즐기고 있었다. 그 중에서 도 후궁 정귀비(鄭貴妃)에게 푹 빠져 있었다. 소화궁(素和宮). 그곳은 정귀비가 거처하는 후전의 내궁으로 다른 후궁들의 거처와 달리 호사스러울 뿐더러 규모가 컸다. 소화궁 경비의 삼엄함은 황후(皇后)의 처소를 능가할 정도였으니 그녀의 비중이 어떠한지 능히 알만한 일이었다. 스스! 야행복을 입은 인영이 연기처럼 소화궁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교묘한 신법으로 소화궁의 내전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칠보 마다 매복해 있던 금궁의 위사들은 아무도 그의 침투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잠시 후 그는 창문 아래 당도했다. 그가 숨을 죽이고 숨어있는 창문 안은 호사스런 침전(寢殿)이었 다. 네 개의 기둥은 상아로 만들어졌으며 금은보화가 촘촘히 장식되어 있는 넓은 침상 위에는 미부(美婦)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녀 는 놀랄 정도로 아름답고 고혹적인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침의를 입고 있었는데 좌우에서 궁녀 두 명이 몸을 주무르 고 있었다. 그녀는 지루한 듯 하품을 했다. "하암! 올 때가 되었는데?" 그때였다. 한 가닥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물론입니다, 귀비." 스스.... 환영처럼 나타난 인영은 채의(彩衣)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그는 영준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눈가가 푸르스름한 것이 흠이 라면 흠이었다. "어서 오세요,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가 나타나자 미부는 반가이 그를 맞았다. 한편 창밖의 야행인은 내심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황제가 총애하는 귀비의 침소에 남자가, 그것도 심야에 들어오다 니? 자금성이 썩을 대로 썩었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과연 이 사실 을 황제폐하께서도 알고 계실지 모르겠군.' 야행인은 바로 천운비였다. 그는 칠왕야와 청부계약을 맺은 뒤 동정을 살피기 위해 소화궁에 잠입한 것이었다. 침실 안의 미부는 정귀비였다. 정귀비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거라." "예......." 두 명의 궁녀가 물러갔다. 침실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게 되었 다. 정귀비는 요사스런 눈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귀비, 황제는 요즘 어떠시오?" 정귀비는 눈꼬리를 흔들었다. "호호! 물론 저에게 푹 빠져 있지요.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 드 신답니다. 모두가 그대가 가르쳐 준 대법(大法) 덕분이에요." "후후, 그렇소?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오. 며칠 후면 귀비의 몸 은 마력적인 능력을 얻게 될 것이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말이오." 중년인은 침상으로 다가갔다. "응......!" 정귀비는 야릇한 신음을 발하며 침의를 스스로 벗어던졌다. 천운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천안통을 익히고 있었으므로 창문의 얇은 창호지를 격하고 방안의 풍경을 은은히 투시해 볼 수 가 있었다. '저럴 수가.... 귀비가 불륜을 저지르다니!' 이때 침전 안에서는 가히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침의를 모두 벗어 던진 정귀비의 나신은 풍만하기 그지없었다. 두 개의 젖가슴은 터질 듯이 팽팽했으며, 사지는 대리석처럼 미끈했 다. 그녀는 침상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채의 중년인이 그녀의 나신에 무엇인가를 바르고 있었다. 옥병에서 향유(香油)와 같은 액체를 손바닥에 쏟은 후 그것을 정 귀비의 온몸에 골고루 바르고 있었다. 향유를 바르며 그는 손바닥 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마찰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연인의 몸 을 애무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의 손은 원을 그리며 정귀비의 나신 구석구석을 문질렀다. 그때 마다 정귀비는 온몸을 비틀며 야릇한 신음을 발했다. 방안에는 향 유의 냄새가 자욱하게 퍼졌고, 정귀비의 나신은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후후! 이제 귀비의 몸에는 욕망을 자극시키는 환락유(歡樂油)가 골고루 배어들었소. 관계를 하면 할수록 늙은 황제는 점점 더 귀 비에게서 헤어날 수 없게 될뿐더러 결국에는......." 중년인의 음성이 낮아졌다. 천운비는 천이통을 시전했다. 정귀비의 음성이 귓전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게 정말이에요?" "쉿! 음성을 낮추시오." 중년인은 정귀비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정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중년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녀의 유방을 가볍게 거머쥐었다. "으응......." 정귀비는 쾌감을 느낀 듯 눈썹을 바르르 떨며 신음을 흘렸다. 중년인의 입가에 음탕한 미소가 흘렀다. 그는 손바닥으로 정귀비 의 나신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그의 손은 편편한 아랫배를 지 나 삼각지역의 우거진 숲까지 한꺼번에 점령해버렸다. 오직 명조의 황제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귀비의 나신을 마음껏 볼 뿐아니라 소중한 그녀의 신비지처까지 거침없이 만진 것이다. 천운비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침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행위는 불 충(不忠)이요, 대역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으응...." 정귀비의 신음이 차츰 높아졌다. 중년인의 손길이 점점 더 자극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이용하여 그녀의 나신 구석구석에 묘한 자극을 주고 있 었다. 그때마다 정귀비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뻗으며 허리를 들썩들썩했다. 그녀의 유방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중년인은 그녀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정귀비는 하 반신을 한껏 들어올렸다. 그녀의 몸이 공처럼 둥그렇게 말렸다. 그야말로 기묘한 자세가 된 것이다. 중년인은 위치를 바꾸어 그녀의 발치께로 갔다. 그가 있는 위치에 서 보면 정귀비의 음문(陰門)이 훤히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쉬지 않고 뭐라고 지시했다. 정귀비의 자세가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는 한쪽 다리를 허공으로 뻗은 것이다. 몸을 비틀며 다리 하나는 허공에, 하나는 뒤로 뻗어 무척이나 자극적인 자세가 되었다. "흐윽...." 그녀의 입에서는 뜨거운 숨이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천운비는 천안통으로 침전 안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 는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 의아했으나 곧 깨닫게 되었 다. '저것은... 밀교(密敎)에서 전해오는 방중술(房中術)!' 그렇다. 정귀비는 사이한 방중술의 자세를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놀 라운 일이었다. 일국의 황제의 귀비가 외인을 끌어들여 요사스러 운 방중술을 배우고 있다니....... 정귀비는 머리를 바닥에 붙인 채 둔부를 한껏 치켜든 자세를 취하 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 그녀의 둔부가 움직였다. 전후좌후로 조 금씩 움직여 대고 있었다. "......." 중년인은 여전히 그녀의 아래쪽에 있어 그녀의 모든 것을 낱낱이 볼 수 있었다. 여인의 소중한 비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까지 상세 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때때로 음사한 빛이 번들거렸다. 그는 자세가 틀렸을 때는 직접 손을 뻗어 교정해주곤 했다. 허벅 지를 당기고 벌리고, 또는 둔부 아래 손을 넣어 올려주기까지 했 다. 만일 이 광경을 만력제가 보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천운비는 더 이상 볼 수 없어 그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아......." 정귀비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전신은 향유로 인해 번들거리고 있었는데 땀까지 흘러 등 불 아래 마치 기름 속에서 갓 나온 듯했다. 그녀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침의를 걸쳤다.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죠?" "이제 곧 귀비의 세상이 올 것입니다." 중년인의 대답에 정귀비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거사는요?" 중년인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계획이 섰습니다." "어떤 건가요?" "보름 후 자경궁(紫慶宮)의 경비병 수를 줄이도록 손을 써 놨습니 다. 그때 잠입하여......" 중년인의 음성이 낮아졌다. 천운비는 천이통을 사용하여 그들의 대화에 귀기울였다. '거사? 상락왕을 시해하겠단 말인가?" "틀림 없겠지요?" "후후! 걱정마십시오. 대세를 판가름 짓는 일인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도 이번 거사를 위해 특별히 고수를 파견 하셨습니다. 그러니 절대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 당신들만 믿겠어요." "보름 후 자시가 지나면 황태자의 자리는 복왕(福王) 전하에게 돌 아올 것입니다. 축하할 준비나 해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흐흐흐!" "호호! 그렇게만 된다면 이 귀비, 당신들을 잊지 않을 거예요." "후후! 귀비께서 잊고 싶어도 그렇게는 안될 것입니다." "......!" 정귀비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중년인의 눈에서 요사스런 빛 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아......!" 정귀비는 스르르 침상으로 쓰러졌다. 중년인은 탐욕스런 눈으로 그녀의 육체를 훑어보며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후후! 그때가 되면 너는 네 의사와는 관계없이 본부(本府)에 귀 속될 테니 말이다." 스스! 중년인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저 자를 놓치면 안된다.' 천운비는 중년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자금성을 넘어 날아가는 인영이 있었다. 그의 신법은 너무나 빨라 마치 한 줄기 선이 그어지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는 승천문(承天門)을 지나더니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거대한 저택을 향해 사라졌다. 그 저택은 어영금의위의 대장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인영이 담장을 넘은 직후, 또 하나의 인영이 소리없이 담장을 넘 어갔다. 그는 바로 천운비였다. 조화동에서 익힌 녹림의 절기인 야무비(夜 霧飛)는 추적할 때 큰 위력을 발휘해 냈다. 중년인은 그가 뒤따르 는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저택 안의 경비는 삼엄하지 않았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금의 위의 부중을 감히 넘볼 자가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천운비는 중년인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방안에는 십여 명의 인물이 있었다. 전면의 태사의에 흑의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의 가슴에는 금색의 고루( ��)가 수놓아져 있었다. 천운비는 지붕을 통해 기와를 들어내고 침투해 있었다. 천장에 엎 드린 그는 미세한 구멍을 통해 방안을 내려보고 있었다. 태사의에 앉아있는 고루인을 보는 순간 그는 가슴이 섬뜩했다. '이제 보니... 황궁을 넘보는 무리들이 악마천부(惡魔天府)의 인 물이었단 말인가?' 고루문양은 악마천부의 표식이었다. 특히 금색 고루문양을 한 인 물은 최고의 신분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방안의 바닥에는 한 무장(武將)이 엎드려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어영금의위의 대장 황태영(黃太英)이었다. 그밖에 정귀빈의 처소 에서 떠난 중년인이 있었으며, 주위에는 여덟 명의 은색 고루문양 을 한 자들이 시립하고 있었다. "차질이 없겠느냐?" 금고루인의 말에 중년인은 머리를 조아렸다. "물론입니다. 정귀비의 몸에 베푼 대법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 녀가 만색비교(萬色秘敎)의 염천환락대법(艶天歡樂大法)을 익힌 이상 늙은 황제가 죽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천운비는 안색이 변했다. '만색비교라면 수십 년 전 사라진 음탕하기로 이름난 사교가 아닌 가? 그들이 악마천부에 소속되어 있을 줄은 몰랐구나.' 악마천부는 나날이 거대해지고 있었다. 무림의 수많은 방회와 사 악한 문파들이 앞을 다투어 가입했던 것이다. 천운비는 숨을 죽인 채 방안의 대화를 들었다. 그가 엿듣는 것도 모른 채 방안에서는 쉴새없이 대화가 오가고 있 었다. 천운비는 그들의 대화내용으로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악마천부가 이미 자금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 실이었다. 둘째로는 어영금의위가 그들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주 로 금의위를 기반으로 황궁 내의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는 사실이 었다. 셋째, 악마천부의 최종목적은 황태자를 바꾼 후 명조의 황권마저 장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번 거사에 뜻을 같이 할 자들은 얼마나 포섭했느냐?" 금고루인의 질문에 황태영은 품속에서 책자를 꺼내 두 손으로 바 쳤다. "여기 그들이 서명한 연판장이 있습니다." "흐흐.... 수고했다." 금고루인이 슬쩍 손을 뻗자 책자는 마치 끈이라도 달린 듯 그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탁자 위에 책자를 내려놓은 후 고 개를 돌렸다. "철혈부의 동정은 파악했느냐?" 시립하고 있던 은색 고루인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 "그들의 조직은 철저히 점조직이었습니다. 칠왕야를 중심으로 서 로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활동하고 있어 상세한 내막을 알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쾅! 금고루인은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바보같은 녀석들! 대체 얼마나 시간을 줘야 한단 말이냐? 이번이 마지막이다. 보름을 주겠다. 그때까지 놈들의 조직을 파악하지 못 하면 네놈들은 모두 혈고루로 강등될 테니 그리 알아라!" 은고루인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보름 후면 모든 것이 끝난다. 거사의 성공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향후 본부는 무림에 이어 황권마저 장악하게 될 것이 다. 보름이다. 그때가 되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 "......!" 고루인들의 눈에서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으하하하하핫......!" 금고루인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북경성 외곽에 위치한 저택. 칠왕야 왕부였다. 아직 날은 밝지 않았다. 동편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새 벽의 찬 공기가 흐르는 왕부의 후원에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 두 사람, 기울어 가는 명조의 칠왕야와 한 강호인이 새벽 이슬에 젖어있는 화원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칠왕야는 금삼을 입고 있었다. 그의 체격은 청삼을 하고 있을 때에는 몰랐으나 왜소하고 연약해 보였다. 다만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새벽여 명 속에서 더욱 매력 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금삼자락이 이슬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이나 화 원을 걸었다. 천운비는 그의 곁에서 묵묵히 동행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밤 보고들은 것들을 칠왕야에게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보고가 끝나자 칠왕야는 산책을 하자고 했다. 그는 줄곧 어두운 표정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천운비는 그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으므로 묵묵히 그 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칠왕야의 입술이 열렸다. "그대가 보기에 악마천부의 힘은 어느 정도인 것 같소?" 천운비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모르오. 다만 미증유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 오. 오랫동안 무림에 나도는 전설상의 악마지겁(惡魔之力)이 그들 에 의해 도래한다면 그들을 막을 힘은 현세에서 찾기 힘들 것이 오." 칠왕야는 준미한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전 무림이 그들에게 굴복할 것이란 말이오?" "왕야, 그들은 무림뿐 아니라 황궁까지도 넘보고 있소이다. 이 사 람이 탐지한 바에 의하면 정귀비를 조종하는 것도, 거사를 일으키 는 주력도 바로 그들이외다." "......." 칠왕야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왕야, 소생이 청부대가로 황궁보고를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 십니까?" "......?" "솔직히 말씀 드리겠소이다. 그것은 전설의 구룡성궁(九龍聖宮)을 열 수 있는 열쇠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외다." 칠왕야의 안색이 변했다. "그... 렇군." 그는 적지 아니 놀란 듯했다. 갑자기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 었다. "그대는 대천신문(代天神門)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 천운비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금시초문이외다." 칠왕야는 신비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는 내가 왕야이면서도 무공을 익힌 데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 해 본 적이 없소?"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왕야의 무공은 확실히 경세적이오. 하오면?" "후후! 나는 우연히 황궁서고(皇宮書庫)에서 무공비급을 발견한 적이 있소. 그것을 익힌 것이오." "......!" "서고에서 발견한 비급은 구십구 권이나 되었소. 거기에는 심오박 대한 무공들이 수록되어 있었소. 나는 그 중에서 삼성(三成) 정도 를 익혔을 뿐이었는데 대내제일고수라는 금의위의 영반을 꺾은 적 이 있었소." "아!" 천운비는 탄성을 발했다. "구십구 권의 무경은 천 년 전 존재했던 대천신문(代天神門)이 남 긴 것이었소." 천운비는 기이함을 금치 못했다. 칠왕야는 화원을 거닐며 계속 이 야기했다. "나는 점점 무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소. 나중에는 식음을 전폐 할 정도로 빠져들고 말았소. 더욱이 대천신문의 유래를 알게 된 후로는 바짝 매달리게 되었소." "......." "대천신문은 악마천부의 혈겁을 막기 위하여 천 명의 기인들이 만 든 비문(秘門)이었던 것이오." 뇌천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악마천부에 의해 세상이 온통 암흑 속에 빠져 있었을 때. 구룡(九龍)의 출현은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구룡이 나 타나지 않았다면 무림정기는 영원히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무림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악마천부의 가공할 마 공에 눌린 백도무림계는 의지를 상실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천하를 둘러보아도 의인(義人)은 한 명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사 실은 은밀히 백도무림의 결사(結社)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 명 의 기인들이 악마천부를 척결하기 위한 비문을 만든 것이다. 그들은 개인의 자존심과 문파 간의 의식마저 버렸다. 악마천부를 물리치기 위해 자신들이 익힌 무학을 집대성하기로 한 것이다. 악 마천부를 몰아내지 않고는 개인도, 문하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공 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천인무학(千人武學)이 집대성되었다. 그것을 기반으로 악마지겁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무학을 창안하 기 시작했다. 그 결실로 탄생한 것이 바로 백 권의 무경(武經)이 었다. 그들의 피와 땀이 마침내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러나.... 천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들이 백도무학의 정화를 완성시키고 엄선된 기재들에게 전수하 기도 전에 구룡(九龍)이 출현했던 것이다. 구룡에 의해 악마천부 는 물러가고 무림에 평화시대가 열린 것이다. 천운비는 내심 탄식했다. '안타까운 일이구나. 대천신문의 위대한 뜻이 꽃피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나 버렸으니....' 칠왕야의 설명이 계속됐다. "그들은 허탈감에 빠져 버렸소. 그런데 중대한 문제가 생기게 되 었소. 그것은 대천신문을 누가 승계하느냐는 것이었소. 천 명의 기인들은 대천신문에 모든 것을 바쳤소. 그러니 누구를 지명해야 할지 곤란해진 것이오. 결국 그들은 이렇게 결정을 내렸소. 백 권 의 무경을 한곳에 비장한 후 하늘의 선택에 맡긴다는 것이었소." "음." "이후 무경은 우여곡절 끝에 황궁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소. 그 런데 대천신문의 기인들은 무경과는 별도로 강호에 열 개의 무류 (武流)를 흘려 보냈소. 그들은 천 년이 흐르는 동안 나름대로의 맥을 형성하게 되었소. 그러나 그들의 최종목적은 바로 대천신문 의 문주(門主)를 찾는 것이었소." 그것은 일종의 비사였다. 칠왕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독자적인 문파를 형성하지는 않았으나 은자류(隱者流)란 독특한 맥을 이루게 되었소. 그들은 단맥(單脈)으로 전해져 왔으 며 줄곧 대천신문의 후계자를 찾는 노력을 기울여 왔소. 그러나 언제인가 신물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대천신문의 맥이 끊기고 말았 던 것이오." 천운비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열 명의 인물... 단맥으로만 내려오며 은자류를 형성했다고? 그 렇다면... 십전천사가 그들이 아닐까?' 천운비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모든 상황이 맞았 기 때문이었다. 십전천사는 모두 무공이 강했으나 무림에 이렇다 할 문파를 만들지 않았다. 그들의 무공 연원 또한 밝혀진 바가 없 었다. 은자(隱者)란 숨어있는 자를 말한다. 십전천사야말로 은자맥을 형 성한 기인들이 아닌가. 천운비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칠왕야께서는 구십구 권의 무경을 얻었다고 하셨는데 나머지 한 권은 어떻게 된 것이오?" "그렇소. 내가 얻은 것은 구십구 권 뿐이오. 나머지 한 권을 얻어 야만 비로소 대천신문의 진정한 진전을 얻을 수 있소." 칠왕야는 그를 돌아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엇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어쨌든 그대는 황 궁밀고에서 구룡절기를 얻기 바라오. 나는... 언젠가 대천신문을 열 생각이오."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대는 황태자 암살건을 막아 주시오. 성공하면 황궁밀고를 열어 주겠소." "알겠소이다." 천운비는 포권한 후 몸을 돌려 걸어갔다. "......."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칠왕야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의 눈에는 까닭모를 우수가 어려 있었다. 천운비는 검천령으로 전서구를 날렸다. 자금성의 역모사건이 예상 밖으로 중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검천령의 살수들을 동원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전서구를 날 린 지 보름만에 찾아온 것은 정인전의 몽예였다. "주인님!" "와 주었군. 몽예." 몽예는 천운비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였다. 지난 날 살종의 영수 였던 그녀는 많이 변해 있었다. 사랑을 알게 된 탓일까? 비록 주종관계로 시작되었으나 그녀의 마 음은 한 사나이의 여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시오." 천운비는 바닥에 무릎꿇은 몽예를 불렀다. "아......." 몽예는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몸에서는 향기로운 체향이 풍겼 다. 천운비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주인님을...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용기를 내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천운비는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어루만졌다. 그의 눈빛에는 진정 이 담겨 있었다. "몽예. 앞으론 날 운비라 부르시오." "네?" 몽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본래 이름은 천운비요. 우린 더 이상 주종관계가 아니오. 무 슨 뜻인지 알겠소?" "아......." 몽예는 감격에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고마와요. 주......."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주인님, 하고 말하려는 순간 천운 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어버린 것이다. "바보 같군. 난 주인이 아니오." 천운비는 그녀의 입술에서 격정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목에 매달 리며 온몸으로 격정을 표현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두 사람은 뜨거운 피를 지닌 남녀였다. 거추장스러운 옷이 벗겨져 나가고 알몸이 된 두 사람은 곧 하나가 되었다. 이제는 주종관계가 아닌 사랑하는 남녀 사이가 되어 두 사람은 서 로를 뜨겁게 주고받았다. "나빠요!" 한바탕 열풍이 지나간 후 몽예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 녀는 미끈거리는 몸을 천운비의 가슴에 찰싹 붙인 채 턱 아래에서 곱게 눈을 흘겼다. "나쁘다니......?" 천운비가 의아하여 묻자 그녀는 손톱으로 가슴을 꼬집었다. "아야!" "당신은... 바람둥이에요. 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들과 알고 있는 거예요?" 천운비는 시치미를 뗐다. "그게 무슨 뜻이오?" "흥! 검천령으로 보낸 그 야생마 같은 아가씨 말이에요." 천운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방방 말인가?" "그래요." 천운비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내 생명의 은인이오." "흥! 그래서 사랑으로 보답했나요?" "그건......." 몽예는 갑자기 입을 벌리더니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억!" "그뿐이면 말도 안 해요. 흥!" 천운비는 흠칫했다. "또 무엇이오?" 몽예는 이빨로 그의 어깨를 잘근거리며 말했다. "무화(舞花)란 이름을 기억하나요?" "......!" "그녀가 찾아왔어요. 아마 지금쯤 검천령에서 방방과 어울려 한창 당신의 흉을 보고 있을 거예요." 천운비는 기가 막혔다. "무화가 찾아왔단 말이오?" "당신을 찾아 천하를 헤매고 다녔더군요. 소문을 듣고 검천령에 찾아왔어요. 그곳에서 당신이 오기를 영원히 기다리겠다는 거예 요." 천운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철없는 짓을 했군." 몽예는 이번에는 그의 귓밥을 깨물었다. "철없는 것은 당신이에요." "또... 뭐요?" "흥! 어떻게 했기에 그 어린 검혜마저 죽도록 당신을 그리워하는 거죠?" "뭐? 검혜가?" 천운비는 깜짝 놀랐다. '아이쿠!' 갑자기 골치가 지끈거렸다. "이젠 아이가 아니에요. 그녀는 완숙한 여인이에요." 천운비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맙소사! 그 아이를 만난 것은 불과 반식경 정도밖에 안 되었소. 그게 어째서 내 탓이란 말이오?" "흥! 반식경이 아니라 일각이라도 사랑을 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 간이에요." 천운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모르는 일이오." "글쎄 나는......" "의랑." 몽예는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 붙이며 속삭였다. "걱정 마세요." 그녀는 천운비의 목을 껴안았다. 천운비는 그녀의 부드러운 나신 이 자신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달콤한 느낌이었다. "몽예는 결코 질투나 하는 여자는 아니에요." 천운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몽예, 나는......" "알아요. 당신은 도무지 말릴 수 없는 분이에요. 당신의 잘못이 아닌 줄도 알아요. 호호.... 가는 곳마다 여인들이 따르는 걸 어 쩌겠어요? 오죽하면 철혈부주까지 그러겠어요?" 천운비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이오? 칠왕야가 어떻단 말이오?" 몽예는 갑자기 깔깔 웃었다. "정말 모른단 말인가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소. 그는......." "호호! 조만간 알게 될 날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니 에요. 어쩌면 의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 될지도 모르 니까요." "......?" 천운비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몽예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몽예는 그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의랑! 저는 당신의 여자예요. 영원히...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천운비는 그녀의 부드러운 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앞으론 이런 기회도 드물겠죠? 당신에게 많은 여인들이 있으니 내가 독차지할 수는 없을 거예요." 천운비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몽예, 당신은 정말 좋은 여인이오.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은 행운 이었소." "그 말... 정말인가요?" "후후, 정말이고 말고." "아?" 몽예의 얼굴이 붉어졌다. 천운비의 손이 등을 미끄러져 내려가 그 녀의 둔부를 감싼 것이다. 그의 입술이 몽예의 입술을 덮었다. 그 사이에도 손은 쉴새없이 움직여 여인의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방안에는 다시 열기가 일어났다. 칠왕야는 화원을 거닐고 있었다. 별원이 있는 곳이었다. 별원에는 천운비가 머물고 있었다. 별원 쪽으로 걷던 그의 귓가에 야릇한 신음이 흘러 들어왔다. "아......." 새벽이었다. 칠왕야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는 멍하니 별원의 창문을 바라보았 다. 그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신음은 간헐적으로 들려 오고 있었다. 칠왕야는 몸을 돌렸다. 약간은 빈약해 보이는 그의 어깨에 이슬이 내려앉아 축축히 젖어 있었다. 화원을 돌아가자 가산의 바위 위에 남매로 보이는 소년소녀가 앉 아 있는 것이 보였다. "두고 봐, 누나! 검영(劍英)은 반드시 복수하고 말 테야!" 십오 세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이보다 훨씬 건장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아버님을 죽인 것은 악마천부야! 난 반드시 복수할 거야!" 엽검영이었다. 이젠 성숙한 여인의 티가 물씬 나는 엽검혜는 망연 한 표정으로 별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아버님을 돌아가시게 한 것이 그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어." 엽검영은 문득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헤헤! 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 분이 그걸 알 기나 할까?" 엽검혜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상관 없어. 그 분이 영원히 모른다 해도 난 오직 그 분만을 생각 할 거야." 엽검영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엽검혜의 손을 잡으며 또렷이 말했다. "걱정 마, 누나. 이 검영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누나의 사랑이 이 루어지게 할 거야. 만일......." 엽검영은 차갑게 말했다. "만일 그 분이 누나를 슬프게 한다면 이 검영은 가만 두지 않을 테야!" 엽검혜는 황급히 말했다. "그러면 못써. 그 분은 우리 남매의 은인이야." 칠왕야는 방향을 돌렸다. 그는 남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그의 기분은 더욱 암담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천운비... 그에게는 여인들이 많구나. 모두 그를 좋아하고 있으 니.......' 사라지는 칠왕야의 어깨는 더욱 처지고 있었다. 한편, 엽검혜 남매는 그동안 검천령에서 괴승 우담에게 무공을 사 사 받았다. 남매는 본시 명문 출신이었으므로 자질이 뛰어났을 뿐 더러 적극적으로 무공을 익히려 했다. 덕분에 짧은 시간 동안이었으나 그들의 무공은 일취월장할 수 있 었다. 아울러 그들은 살종(殺宗)에서 전해 내려오는 각종 살법들 을 전수받았다. 이제 그들은 과거의 어린애가 아니었다. 검천령에서 북경으로 온 인원은 백 명이었다. 우담과 몽예를 위시 하여 십자혈각, 정인전의 살수들이 주축이었다. 엽씨남매는 한사 코 우겨서 함께 오게 된 것이었다. 한편 방방은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방방의 손에 피가 묻는 것 을 원치 않았던 천운비의 특별 당부 탓이었다. 천운비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일거에 자금성 내 에 뿌리 내리고 있는 악마천부의 세력을 소탕할 계획이었다. "몽예, 한 가지 일을 해주어야겠소." "무엇인가요?" 몽예는 눈을 빛냈다. "역모에 가담한 자들의 연판장이오. 그것을 입수해 주시오. 단, 조금도 흔적을 남겨선 안되오." "알겠어요." "이것은 연명부의 모조품이오. 당신은 이것을 진짜와 바꿔치기 해 야 하오." 천운비는 책자 한 권을 내밀었다. 몽예는 생긋 미소지었다. 그런 일은 그녀가 자신있는 일이었다. "그 밖에 또 제가 할 일은 없나요?" "있소." 천운비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일거에 그들을 섬멸할 생각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황궁의 구조나 그 밖의 정보가 많이 필요하오. 부탁하오." 몽예는 걱정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의랑." 오랜만이 술자리가 벌어졌다. 천운비는 술잔을 들며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우담형, 오랜만이오." 정자 안에는 삼 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칠왕야와 우담, 천운비 등이었다. "아미타불......! 속세의 번뇌를 이 한 잔 술로 씻을까 하외다." 우담은 술잔을 들어 냉큼 마셨다. "......." 칠왕야는 묵묵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야께서도 한 잔 드십시오." 천운비는 그에게 술잔을 돌렸다. "아, 나는......" 칠왕야는 사양하려 했으나 이미 술잔은 그에게로 와 있었다. "하하! 이 나라에 칠왕야 같은 분이 있는 이상 황실은 건재할 것 이외다." 천운비는 먼저 술잔을 비웠다. 칠왕야는 할 수 없이 술잔을 기울 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나는... 술을 잘 못하오." 그의 겸연쩍은 말에 천운비는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천하의 왕야께서 술을 못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자, 어서 한 잔 더 받으시오." 천운비는 오래간만에 흥이 났다. 그는 술병을 들어 칠왕야의 빈 잔에 가득 따라 주었다. 칠왕야의 얼굴에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술잔을 잠시 내려보더니 결심한 듯 단숨에 비워버렸다.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본래 준미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달아오르 자 마치 여인처럼 아름다웠다. "허! 왕야의 용모는 정말 아름답소이다. 전날의 송옥(宋玉)이 무 색할 지경이오. 안 그렇소? 우담형?" 우담은 닭다리를 뜯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관음보살도 반할 정도외다." 천운비는 다시 술을 권했다. 칠왕야는 귀밑까지 붉어졌으나 용기 를 얻은 듯 사양하지 않고 다시 마셨다. "하하하......!" 좌중은 화기애애해졌다. 술기운이 오르자 의기 투합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학문과 무공 등을 논했다. 세 사람 모두 당대의 젊은 영웅들이었기에 일단 대화의 물꼬가 트 이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몽예가 몇 번이나 정자를 다녀갔으 나 고개를 흔들고 나갈 정도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술도 바닥나고 안주도 떨어졌다. 그들은 모두 취해 있었다. "으음......." 칠왕야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하하, 소생이 모셔드리겠소이다." 천운비가 그의 팔을 부축했다. 칠왕야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한편 천운비는 칠왕야의 몸이 너무나 가냘픈 것에 놀랐으나 억지 로 그를 부축했다. "괜찮소이다. 왕야, 소생이 모시겠소이다." "난 괜찮......." 칠왕야는 거절하려 했으나 천운비가 억지로 팔을 둘러메자 할 수 없이 몸을 의지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왕부의 내전으로 들어섰다. 내전을 지키고 있 던 시종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칠왕야는 손을 저었다.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천소협이 있으니......." 시종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왕부는 비록 그리 크지 않았으나 격식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내전의 분위기는 칠왕야의 성품을 보여주듯 단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칠왕야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기왕이면... 침전으로. 미안하오......." 천운비는 빙긋이 웃었다. "심려 마십시오. 하지만 한마디 해야겠소이다. 왕야는 이제부터라 도 주량을 늘려야겠소이다. 천하의 왕야께서 이렇게 술이 약해서 야 쓰겠소이까?" "후.... 천소협과 함께라면 한 말이라도 마실... 것이오." "하하! 얼마든지." 그는 칠왕야를 어깨에 둘러메고 침전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 선 순간 그는 의아했다. 침전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마치 여인의 규방과 같이 꾸며져 있었던 것이다. 침상은 네 귀퉁이가 상아로 되어 있었으며 은은한 색조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휘장을 걷고 침상 위에 칠왕야를 내려 놓 았다. 그가 막 일어서려는데, "잠시만... 곁에 누워 주겠소?" 칠왕야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천운비는 머리를 긁적였다. "천한 백성이 어찌 감히 왕야와 나란히 눕는단 말이오?" "후.... 왕야가 별 존재겠소? 다 똑같을 뿐인데.... 나도 인간이 구! 나도 자유롭고 싶단 말이오." 칠왕야의 혀는 반쯤 꼬부라져 있었다. 천운비는 히죽 웃었다. "취했습니다. 왕야, 하지만 원하신다면 잠시 함께 있겠소이다." 그는 칠왕야의 곁에 누웠다. 칠왕야는 그를 향해 돌아누우며 말했 다. "어떤 때는... 차라리 강호야인으로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 도 하오. 내가 그런 출신이라면... 그대와 함께 술도 마시고 여행 도 하고... 얼마나 자유롭겠소?" 칠왕야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천운비는 그의 눈을 마주보며 물었 다. "내가 그렇게 자유로워 보이시오?" "그렇소.... 나는 그대를 만난 후로는... 황족이라는 신분이 얼마 나 거추장스러운지... 모르겠소." "하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왕야." 칠왕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농담이 아니오.... 이곳의 역모를 막은 후에는... 황궁을 떠날 생각이오." 천운비는 흠칫했다. 칠왕야의 눈에 간절한 빛이 어렸다. "부탁이오. 천소협, 날 데려가 줄 수 없겠소?" 칠왕야의 상기된 얼굴에 애원의 빛이 어렸다. 천운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왕야께서는 강호생활이 얼마나 험악한 것인지 모르고 계십니다." 칠왕야는 눈을 반짝였다. "알고 있소. 하지만 그대와 함께라면......." "......!" "그대만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대와 나란히 말을 달리며 강호의 악을 제거하는 유협이 되고 싶소......." 천운비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칠왕야에게서 뼈저린 고독을 읽었다. "그건 아니될 말씀이외다. 왕야는 왕야로서 할 일이 있는 법입니 다. 강호는 소생처럼 거칠게 살아온 야인들이 사는 곳인즉 어찌하 여 그런 말씀을 하신단 말이오?" "이 몸은......" 칠왕야의 눈까풀이 떨렸다. 갑자기 그는 얼굴을 침상에 묻었다. 그의 어깨가 들먹여지고 있었다. 천운비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칠왕야가 너무나 약한 면을 보인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왕야, 자금성에 혈풍이 일어날 날이 멀지 않았소이다. 왕야께서 는 마음을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그대는......." 칠왕야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젖어 있었다. "만일... 이 몸이 왕야의 신분을 버린다면 날 받아 주겠소?" 천운비는 실소했다. "왕야는 어디까지나 왕야이십니다. 게다가 받고 안 받고가 어디 있습니까? 왕야께서 원하신다면 거친 세계지만 왕야를 수행해 드 려야지요." "고맙소......." 칠왕야는 다시 침상에 고개를 묻었다. 천운비는 그에게 포권한 후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귓전에 잔잔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에게는 여인들이 무척이나 많더군. 그대는... 복이 많은 사 람이오." 천운비는 걸어가며 어색하게 말했다. "왕야께서 원하신다면 더욱 많은 가인들이 따를 것입니다." "가인? 후후.... 과연 그럴까?" 천운비는 침전을 빠져나왔다. 그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칠왕야에게서 이제까지 느낄 수 없었던 묘한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기분 탓이겠지. 술이 너무 과했나?' - 3권에 계속 - ■ 무림백서 제3권 - 차 례 - ━━━━━━━━━━━━━━━━━━━━━━━━━━━━━━━━━━━ 제20장 만붕왕(萬鵬王) 제21장 황궁밀고(皇宮密庫) 제22장 칠왕야(七王爺)의 정체 제23장 녹림(綠林)의 지기(知己) 제24장 대마성(大魔城) 제25장 미인루(美人淚) 제26장 암흑마전(暗黑魔殿)의 부활 제27장 패배(敗北) 제28장 구룡파천환무도(九龍破天幻舞圖) ■ 무림백서 3권 제20장 만붕왕(萬鵬王) ━━━━━━━━━━━━━━━━━━━━━━━━━━━━━━━━━━━ 자경궁(紫慶宮). 일명 동궁(東宮)이라고도 불리는 대명(大明)의 황통(皇統)을 이을 황태자 상락왕이 기거하는 곳이다. 상락왕은 황후의 몸에서 태어난 정통(正統)이었으므로 그가 황통 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궁의 대신들은 물론 온 천하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상락왕은 보위에 등극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 다. 그는 본시 인품이 소탈하고 야심이 없으며 학문을 즐기는 위인이 었다. 그런 성격 탓에 당금의 어지러운 정세와 자금성의 풍운에 대해서 도피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정세는 환관들과 정귀비의 추종자들이 합심하여 황제의 총애 를 받는 정귀비의 소생인 복왕(福王)을 황태자로 삼으려는 움직임 을 보이고 있었다. 상락왕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초연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 었다. 그는 오로지 자경전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글을 벗삼고 있 었다. 그의 나이 삼십팔 세, 한창 자신의 포부를 펼칠 때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젊음의 패기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밤이다. 태자는 아직 침소에 들지 않은 듯 자경궁의 침전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간혹 태자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려올 뿐 주위는 적 막했다. 자경궁은 황태자가 머물고 있는 곳이므로 경비가 삼엄했다. 황궁 에서 황제 다음으로 가장 많은 경비위사들이 자경궁 곳곳을 지키 고 있었다. 때문에 그곳에 잠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스며드는 한 가닥 연기같은 인영이 있었다. 스스슷......! 누구도 그 인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인영이 녹림 최고의 경공은신 술인 야무비(夜霧飛)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영은 소리없이 상락왕의 침전을 향해 날아갔다. 침전 안. 주인의 성품을 대변하듯 침전은 간결하고 단아했다. 황태자는 금포를 입고 있었다. 사각형의 얼굴에 짧은 수염이 돋아 있었고, 눈은 호안이었으나 전체적으로 순후한 인상이었다. "......." 그는 머리를 풀고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독 서에 몰두한 듯 미동도 없이 책장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가끔 씩 책장을 넘기는 그의 모습에서는 학자의 면모가 풍기고 있었다. 이때 침전의 벽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천운비였다. 그는 궁등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는 황태자를 바라보 았다. '역시 소문대로군.' 그의 순후한 인상으로 미루어 고매한 인품을 느낄 수 있었다. 천운비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무인으로서는 최대한의 예 를 표한 것이었다. "강호야인 천운비, 삼가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황태자는 뜻밖의 음성에 몸을 돌렸다. 그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천운비를 바라보았다. 단지 미미하게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을 뿐 이었다. 그는 의연하게 책을 덮으며 말했다. "오, 그대가 바로 일곱째... 가 추천한 인물인가?" 그는 일곱째란 호칭에서 말을 얼버무렸다. 천운비는 공손히 대답 했다. "그렇습니다. 무례하게 처소에 든 점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황태자는 빙그레 웃었다. "허허, 무슨 소리요? 그대들 강호인들은 원래 왕법을 따르지 않거 늘 본인을 이만큼 존중해 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오." 천운비는 그의 소탈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황태자가 소심하여 황제감이 못된다 하거늘 오늘 보니 틀린 말이 로구나.' "그런데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천운비는 몸을 일으켜 품속에서 책자 한 권을 꺼내 두 손으로 바 쳤다. "전하께서는 이것을 살펴보십시오." "이게 무엇이오?" "읽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황태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책을 받아 읽었다. 잠시 후 그의 안색이 처음으로 변했다. "이것이 사실이오?" "틀림없습니다. 연판장에 서명한 글씨는 모두 직접 서명한 것이니 대조해 보면 알 것입니다." 그 책자는 몽예가 바꿔치기하여 빼낸 역모자들의 연판장이었다. "이럴 수가! 자금성의 중신(重臣)들이 이 정도로 썩었단 말인가?" 천운비는 황태자의 얼굴에 슬픈 빛이 떠오른 것을 보았다. "전하, 놀라실 일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자 금성의 역모가 황궁뿐 아니라 강호의 사집단(邪集團)과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뭐라고?" 황태자는 다시 한 차례 동요를 일으켰다. 천운비는 악마천부, 즉 영세태평무국에 대한 말을 꺼냈다. 무림의 전설인 악마지겁이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과 악마천부가 영세태평 무국이란 이름으로 황권까지도 넘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이야기 했다. "아.... 어찌 그런 일이?" 황태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천운비는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의 힘은 미증유입니다. 만일 지금 소탕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도탄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천운비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그들은 역도들과 함께 내일 밤 전하를 암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나를 말인가?" 황태자는 하마터면 연명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전하를 암살한 후 복왕을 황태자로 내세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설마... 복왕이?" "그렇습니다." 황태자는 이내 눈길을 천정으로 돌리며 한숨지었다. "내 이미 오래 전부터 그가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 네만 설마하니 골육상쟁까지 불사할 줄은 몰랐군." 천운비는 탄식했다. "모든 것이 전하의 어진 마음 같지가 않습니다. 이 일의 주모자는 정귀비입니다." 황태자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정귀비?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는 정귀비...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녀는 황제폐하의 총애를 업고 온갖 부패를 저지르 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악마천부로부터 악마의 힘을 얻고 있습니 다. 게다가......." 천운비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는 차마 소화궁에서 본 요사스러 운 광경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들은 황태자의 자리에 눈이 어두워 전하를 시해하려 하 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그들이 그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오. 모든 것이 내가 못난 탓이오. 나같이 나약한 사람이 황통을 잇는 것은 애초 부터 잘못된 일이오." 천운비는 깜짝 놀랐다. "전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황통은 정 통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전하께서 그런 나약하신 말씀을 하신다 면 대명황실을 믿고 따르는 억만 양민들을 버리는 결과가 됩니 다." 천운비의 말에는 준엄한 꾸짖음이 깃들어 있었다. "......!" 황태자의 안색이 변했다. "전하께선 홍무제(洪武帝)께서 어떻게 이 땅에서 원(元)을 몰아내 고 한족의 땅을 되찾았는지 벌써 잊으셨단 말입니까? 홍무제와 개 국공신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조정입니다. 그것을 정녕 간신과 요 사한 무리들에게 넘겨주시겠단 말입니까?" 천운비는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로 황태자를 일깨우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개 무인에 불과한 자신이 황실의 흥망에 대해 역설하고 있는 것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확실히 그에게는 천추장 군가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 황태자의 안색이 몇 차례나 변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안색을 가다듬었다. 처음의 모습대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허허헛......! 천소협이라 했던가? 그래, 자네가 강호야인이라고 는 하나 내게는 커다란 교훈을 주는구려. 심히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그렇소. 사실 나는 그동안 제왕의 도를 잊고 있었소. 아니 잊으 려 했다는 것이 더 옳을 것이오. 이렇게 말하기 부끄럽소만 어지 러운 세상을 도피하려는 안일한 마음 때문이었소." "전하." "허허, 그대는 날 일깨워 주었소. 일곱째... 의 말에 의하면 그대 를 무조건 믿으라 하더군." "황공합니다." 천운비는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다시 고개를 드는 그의 눈에서 광채가 발산됐다. "이제 내일 밤의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 보시오." "소생은 내일 밤 역도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전하께 서 도와주실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이오? 내 능력이 닿는 만큼 힘껏 도우리다." "전하께서는 연명부를 황제폐하께 보여 그들을 처단할 수 있는 윤 허를 얻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뿐이오?" "그렇습니다. 나머지는 소생에게 맡겨 주십시오. 이제 내일 이후 로 자금성의 썩은 가지는 모두 잘려져 나갈 것입니다." 천운비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의 믿음직한 모습에 황태자는 기 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대의 말 대로라면 대명은 새롭게 일어설 것이오." 천운비는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황제께서는 정귀비에 게 빠져 있습니다. 때문에 윤허를 제대로 내려 주실지 걱정입니 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폐하의 마음은 정귀비에게 기울어져 계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폐하는 정귀비를 벌하시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이렇게 증 거가 뚜렷한 이상 이번 일에 연루된 자들을 엄중히 다스릴 수는 있을 것이오." "악마천부를 황궁에서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소협은 어찌할 작정이오?" 천운비는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소생에게 계책이 있습니다. 내일 밤 전하께서는 소생에게 잠시 이곳을 빌려주십시오." "그거야 어렵지 않소만......." 황태자는 눈을 크게 떴다. 천운비가 몸을 빙글 돌린 것이다. 그런 데 그의 얼굴이 완전히 바뀌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 천운비의 얼굴은 황태자의 얼굴이었다. 자신이 보아도 도저히 구 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닮은 얼굴이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천운비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만하면 누가 보아도 전하로 보겠습니까?" "그... 그렇소. 나 자신도 구별 못할 정도요. 정말 신기하구려." "하하! 그럼 되었습니다. 내일 밤에 이곳에 올 자객은 소생이 맞 이하겠습니다." 천운비는 낭랑하게 웃으며 의자로 가 앉았다. 그는 황태자가 읽던 책을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 자세, 표정, 모든 것이 완벽했다. "......!" 황태자는 마치 도깨비에라도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구월 그믐. 칠흑같이 어두웠다. 때문에 자경전은 암흑에 싸여 한 치 앞도 분 간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늦게까지 켜져 있던 침전에도 불빛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늘따라 경비위사들은 고향 생각을 하는지 건물의 그늘에서 한숨 을 쉬고 있었다. 경비위사들의 숫자도 평소보다 반 이상 줄어들어 있었다. 스슷! 한 가닥 인영이 자경전 안으로 연기처럼 침입해 들어갔다. 경비위 사들은 그저 바람이 스쳤다고 느꼈을 뿐 그의 존재에 대해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침전에 든 황태자는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 들었다. 탁자 위에는 읽다만 책이 놓여 있었다. "......." 황태자는 침상에 누운 채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흑영이 소리없이 들어왔다. 그는 야행복을 입고 있었 는데 어둠 속에서 가슴에 금빛 고루( ��) 문양이 은은히 보였다. 그는 기척을 살피는 듯 침상을 주시하다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검은 소매 속에서 흰 손이 소리없이 뻗었다. 그 손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느낌을 주는 소수(素手)였다. 악마의 흰 손. 오래 전 악마지수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악마지수는 마교(魔敎) 의 비전으로 천 명의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빨아들여 연성하는 저 주의 마공이었다. 소수에 스치는 순간 상대방은 전신의 피가 말라 즉사하게 되고 만 다. 스슷....... 소수가 어둠 속에서 둥실 떠올랐다. 마치 손바닥 하나만이 존재하 는 듯한 괴이한 광경이었다. 소수는 황태자의 목으로 떨어졌다. 황태자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소수가 목을 누르자 그는 사 지를 버둥거렸다. 그것도 한순간, 금세 몸을 뻗고 말았다. "흐흐......!" 살수가 성공했음을 확인한 고루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 다. 그때였다. "으아아악!" 참혹한 비명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뒷 걸음질쳤다. 그의 오른손 손목이 잘려 있었다. 잘려진 손이 침상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헉! 너는... 누구냐?" 고루인은 잘린 손목을 움켜쥔 채 부르짖었다. 침상 위에서 황태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루인을 바라보며 너 털웃음을 흘렸다. "허허헛......! 감히 날 해하려 들다니, 그대는 대역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른단 말인가?" "헉......! 누, 누구냐?" 고루인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팔목을 지혈시킬 생각도 못한 채 뒷 걸음질쳤다. "후훗, 내가 누구냐고? 그것은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나는 이 나라의 황태자니라." 황태자는 침상에서 내려와 걸어왔다. "금고루 문양을 보니 악마천부에서 제법 신경을 쓴 셈이군. 하지 만 그 정도로 황실을 차지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단 말이 냐?" "으으......!" 고루인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 나왔다. 그는 이를 악물고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어떻게든 공격을 펼칠 기회를 노려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상대에게는 빈틈이 없었다. 일견 허술한 듯 싶으면서도 바늘 한 개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고루인은 일이 틀려버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최선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필살기를 펼치기로 했다. "죽어랏!" 위-- 잉! 그는 하나밖에 없는 좌수로 장력을 날렸다. 그의 공격은 악랄했 다. 상대가 맞받을 경우 동귀어진할 각오를 한 것이다. 스스....... 문득 황태자의 모습이 흐려졌다. 그는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꽝! 그 바람에 벽에 구멍이 뚫렸다. 고루인은 절망을 느끼며 신형을 창문쪽으로 날렸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 황태자의 담담한 음성이 울렸다. "가더라도 목숨은 남기고 가거라." 번뜩! 고루인은 한 가닥 광채가 어둠을 가른다고 느꼈다. 뒷목이 선뜻했 다. '......?' 그는 어리둥절했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았다. 툭! 어깨에서 무엇인가가 굴러 떨어졌다. 그것은 그의 목이었다. 황태자는 손에 끝이 뭉툭한 검을 쥐고 있었다. 슬쩍 흔들자 쩡!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묵환으로 변해 그의 손목에 채워졌다. 그는 목을 잃은 채 아직도 서 있는 고루인을 힐끗 보더니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의 얼굴이 달라졌다.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것이 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모두들 움직이고 있겠지? 내일 아침이면 모 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다." 천운비는 창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믐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 밤, 자금성에서는 소리 없이 역적 소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영금의위 부중. 그믐밤의 적막한 공기를 깨뜨리며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 비명소리는 밤새 그칠 줄을 몰랐다. 슈슉! "으아악!" 어영금의위의 부중 담장을 뛰어넘은 자들은 한결같이 영활한 신법 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단 부중에 뛰어들자 먹이를 찾는 야수처럼 사방을 누볐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시체들이 쌓여갔다. "으아악!" 부중은 갑작스런 기습으로 혼란을 일으켰다. 북경성 내에서, 그것 도 천하를 울린다는 어영금의위 부중에 자객들이 대거 급습해 오 리라는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울리자 여기저기서 어영금의위가 뛰쳐 나왔 다. 또한 가슴에 핏빛 고루문양을 새겨넣은 흑의인들도 눈에 띄었 다. 그들은 어둠을 가르며 날아간 암전(暗箭)을 피할 수 없었다. 공포의 살인병기인 정인전(情人箭)이 마치 연인의 달콤한 혀처럼 심장 속을 파고든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헤헤헤......!" 장난기가 넘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한 소년이 마당을 가로질러 달 려갔다. 그는 바로 십자혈각에서 나온 엽검영이었다. 그는 한 혈고루인의 뒤로 접근해갔다. "이 새끼!" 혈고루인은 몸을 홱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눈이 부릅떠졌 다. "헉!" 눈앞의 소년이 검 한 자루를 내밀고 있었다. 거리는 분명 일장 이 상이었다. 그런데 엽검영의 검은 쭉 늘어나 그의 심장을 관통한 것이었다. "헤헤헤......!" 엽검영은 웃음을 흘리며 검을 회수했다. 찡!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석자 두 치의 길이로 줄어들었다. 그는 검 을 휘두르며 달려갔다. 닥치는 대로 혈고루인이나 금의위가 보일 때마다 그는 검을 불쑥불쑥 내밀었다. 그때마다 검은 상대의 목이나 심장에 구멍을 뚫었다. 엽검혜의 활약도 눈부셨다. 그녀의 소매 속에서는 정인전이 발사 되었다. 슈슈슉! "크아악!" 부중에서 한창 살륙이 감행되고 있을 때, 자금성 깊은 곳에서는 기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황제가 어리석으면 간신들이 활개를 치는 법이다. 매관매작(賣官 賣爵)을 하게 되면 탐관오리가 들끓고 도덕은 땅에 떨어지게 된 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는 궁녀(宮女)들이 살고 있다. 궁녀들은 황제 가 아닌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궁녀는 황제의 여인이니 어떤 사내와도 짝을 이룰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그 율법이 깨진 지 이미 오래다. "흐응, 어서......." 궁녀는 교태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뽀얀 종아리가 허공에 춤을 추다가 벌거벗은 사내의 허리를 힘껏 조이고 있었다. "흐으...." 쾌락이 절정에 이른 듯,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오순 가량의 사내는 침을 흘렸다. 그는 지금 황제만이 드나들 수 있는 궁녀의 깊은 비 문에서 환락의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가 막 최후의 열락을 맛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등이 화끈했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끄으......." 그의 목에서 괴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궁녀는 영문도 모르고 숨 넘어가는 교성을 발했다. 사내의 몸이 한껏 경직되었던 것이다. 파아! 사내의 등에서 분수같은 선혈이 솟구쳐 올랐다. "꺄아악!" 궁녀는 얼굴에 뜨끈한 액체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 다. 사내의 몸이 축 늘어지고 있었다. 궁녀는 기절할 듯 놀라 사 내를 밀치고 일어섰다. 사내의 등에 한 자루의 비수가 깊숙이 꽂 혀있는 것이 보였다. "아아아악... 아아악!" 궁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죽음의 밤이었다. 자금성 곳곳에서 살인이 일어났다. 살인 대상은 다양했다. 대신(大臣)이 있는가 하면 환관이 있었고, 장군도 있었다. 그들은 소리 없이 날아온 비수에, 어둠을 끊고 떨 어진 검에, 어디에선가 쏘아진 화살에 맞아 이승을 하직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이 모두 부패된 관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길고 긴 밤이 지나가고 새벽이 왔다. 여명과 함께 황성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것은 끝이 나 있었 다. 시월 초하루. 날이 밝자 자금성은 발칵 뒤집혔다. 엄청난 충격이 자금성을 뒤흔 들었다. 지난밤에 사라진 인물들은 하나같이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역모에 가담한 중신, 환관, 시위들이었다. 정귀비를 중심으로 황태자를 해치고 복왕(福王)을 위에 올려 영화 를 추구하려던 자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졌다. 만력제는 그 일에 대해 일체 함구하도록 명을 내렸다.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자금성은 아무 이상이 없는 듯했다. 중신들 은 전날과 다름없이 입궁(入宮)했으며 평소대로 집무를 보았다. 북경의 혈야는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소화궁(素和宮). "흑흑......!" 정귀비가 침상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황제의 총희로 장차 황후(皇后)가 되어 보려던 그녀의 야심은 하 룻밤 사이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매일같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중신과 환관들의 발길도 뚝 끊 어졌다. 아니, 오려해도 그들은 황천으로 갔으니 올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흐흐흑......." 정귀비는 머지 않아 자신에게도 화가 닥칠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 리 자신을 총애하는 만력제라 해도 이번 일만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낱 물거품으로 스러져 버린 그녀의 욕망은 초라한 눈물로 떨어 져 내리고 있었다. 일개 궁녀에서 일약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 이 되었던 시절이 그녀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제 이 몸의 영화도 끝장이구나.'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베개 밑에서 작은 목합 을 꺼낸 그녀는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비수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언젠가 쓰일 날이 있을지 몰라서 몰래 간직하고 있던 비수의 날에 는 남빛이 감돌고 있었다. "......."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비수를 움켜쥐었다. '이젠 모두... 끝났어.......' 그녀는 손에 힘을 주었다. 심장에 갖다대고 살짝 누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비수에는 극독이 발려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뒤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귀비(貴妃)." "......!" 그녀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빙글 돌아서면서 탑이 무 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폐하, 흐흐흑......!" 그녀는 오열을 터뜨렸다. 쨍......! 그녀의 손에서 독비가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폐하! 다시는 부를 수 없는 호칭, 그 말은 그녀의 입속에서 맴돌았다. "......!" 만력제는 그런 정귀비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늙은 황제의 가슴 에 격동이 일어났다. 황제의 자리란 화려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비정함과 뼈저린 고독 을 함께 해야 하는 자리다. 그동안 그의 고독을 열정으로 풀어 주 었던 여인이 바로 정귀비였다. 만력제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것은 황제와 후궁이라는 형식적인 관계 이상이었다. 오래 전부 터 그는 정귀비가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했기에 모든 것을 묵인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굳이 함구령을 내린 이유도 바로 정귀비 때문이었다. 황제는 어수를 뻗어 정귀비를 부축했다. "쯧쯧, 그만 눈물을 거두어라." 만력제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는 순간 정귀비는 그의 넓은 품에 몸 을 던지고 말았다. "흐흑, 폐하......!" 만력제는 정귀비의 허리를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간밤에는 바람이 몹시 불었던 것 같소. 이제 바람이 그치고 날도 밝았으니 귀비도 그만 눈물을 거두시오. 건강에 유념해야 하지 않 소? 허허, 기후가 조석으로 바뀌는 계절이오." "......!" 정귀비는 감동으로 전신을 떨었다. 그녀는 황제의 애정이 조금도 변치 않았음을 느꼈다. "며칠 후 뱃놀이를 합시다. 허허, 귀비의 춤을 다시 한 번 보고 싶구려." "아아......!" 정귀비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만력제는 이미 자신을 용서한 것이 었다. 그의 말은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겠다는 뜻이 아닌가? "폐하......! 이 몹쓸 계집을 죽여주옵소서. 폐하의 성은을 입은 몸이... 감히... 흐흐흐흑!"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허허, 이 무슨 망언인가? 짐이 그대를 죽이다니? 어찌 그런 흉언 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폐하......!" "허허, 귀비. 밖을 좀 보시오. 오늘은 날이 쾌청할 것 같지 않소? 오랜만에 귀비와 단둘이 산책을 할까 하는데 따라오겠소?" "폐하......." 정귀비는 만력제의 깊은 애정에 그만 감루를 흘리고 말았다. '아아, 폐하.......' 만력제가 집무를 보는 곳이다. 만력제는 복잡한 정사를 직접 다루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대부 분의 집무는 중신(重臣)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를 틈타 환관이 득세하고 중신이 월권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 으나 만력제는 황제로서보다는 개인적인 낙(樂)을 더 중시하는 편 이었다. "......!" 대전 안은 조용했다. 기둥은 금박이 되어 있었고, 웅대함과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 다. 자금성의 모든 건축물은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만력이십사년(萬歷二十四年)에 자금성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났 다. 그로 인해 곤녕궁(坤寧宮), 건청궁(乾淸宮)이 불타 버렸고, 다시 이듬해에는 중화전(中和殿), 건극전(建極殿)과 함께 대전마 저 타버렸다. 만력제는 타버린 주요한 전각과 궁전을 막대한 자금을 들여 증축 하거나 복구했으므로 지금의 대전은 그 화려함이 당년의 건축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황제의 용상은 온갖 주옥(珠玉)으로 휘황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만력제는 용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네 명의 궁녀가 그의 좌 우에 앉아 어신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항상 궁녀가 들끓었다. 그것 또한 대명이 깊은 병 을 앓고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당대제일의 명재상인 장거정(張居正)이 죽은 이후, 그에게 제왕학 (帝王學)을 배웠던 만력제는 만년에 이르면서 향락에 빠져버린 것 이다. 그래도 그는 제왕이었다. 그의 눈은 대전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 예를 표하는 청년을 바라보는 그의 용안은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백삼청년이었다. 바로 천운비였는데 그의 곁에는 칠왕야가 자리하고 있었다. 천운 비는 절을 한 후 몸을 일으켜 포권지례했다. "강호의 천민 천운비, 폐하를 뵈옵니다." 신하의 예를 표하되 결코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만력제는 제왕의 눈을 들어 그를 살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천운비라고? 과연 영걸이로다. 상락의 말이 틀림없구나." "......." 천운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 덕분에 황궁에 불던 미친 바람이 멎었네." "소생은 그저 할 일을 다했을 뿐입니다." 만력제는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를 보니 한 무장의 얼굴이 떠오르는군. 지금 보니 무척 닮았 다는 생각이 드는군." "......!" 천운비는 흠칫했다. 만력제는 눈을 반쯤 감으며 말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변경에 출정하게 되었지. 장래가 유망한 청년 이었어. 그런데 오랑캐와 싸우던 도중 유감스럽게도 전사하고 말 았다네. 명조에서 가장 훌륭한 무가 출신이었는데......." 천운비는 심금이 떨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이때 칠왕야가 물었 다. "폐하, 그 분의 가문을 기억하십니까?" "허허, 물론이지. 천추장군가(千秋將軍家)를 내 어찌 모르겠느냐? 비록 지금은 문중이 문을 닫았으나 그가 짐의 곁에 있다면 발을 뻗고 자겠건만 아쉬운 일이었지." 만력제는 유심히 천운비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은 천무진(天武眞)이었지. 보면 볼수록 자네와 꼭 닮았 군. 참, 자네도 천씨인데......?" 만력제의 눈이 빛났다. 칠왕야도 의혹이 담긴 눈으로 천운비를 바 라보았다. 천운비는 갈등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미루어 자신은 분명 천 추장군가의 마지막 후예였다. 그러나 그는 가문에 무심했던 황실 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었다. 만력제는 기대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천운비, 그대의 가문에 대해 말해 주겠느냐?" 천운비는 더 이상 감출 수 없음을 느끼고 품속에서 보검을 꺼냈 다. 보검을 본 순간 만력제는 격동을 일으키며 부르짖었다. "오! 천추황검(千秋皇劍)! 그렇다면 그대는 틀림없는 천추장군가 의 후예이겠군?" 천운비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의 조부는 천무진, 부친은 천무옥입니다. 지난 날의 천추장 군가가 저의 가문입니다. 하지만 소생은 지금 강호야인(江湖野人) 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오오, 이럴 수가! 천추장군가의 후예가 살아 있었다니.... 이런 경하할 일이 있는가? 짐, 천무진을 다시 본들 이렇게 기쁘진 않을 것이네! 자네는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이제야 나 타났는가?" 만력제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벌떡 일어서더니 아래로 걸어 내려 왔다. "이리... 이리, 가까이 오게." 황제의 음성은 흥분으로 가벼운 떨림을 보이기까지 했다. "......!" 천운비는 잠시 망설였으나 곧 다가갔다. 만력제는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오!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했다니, 천무진은 북방을 진압했고 그 로 인해 희생되었다네. 황실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도 그의 덕택이 라 할 수 있다네. 그의 후예가 살아있었다니 정녕 황실의 축복이 로다." 노황제는 격동하고 있었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칠왕야의 눈도 흥분으로 인해 경련하고 있었다. 정작 천운비는 담담하기만 했다. "폐하, 소생은 단지 강호인일 뿐입니다." "허허헛! 아니 그게 무슨 말인고? 이제서야 천추장군가의 후손을 만났거늘 다시 그대를 야인으로 보낸다는 것은 황실에 큰 죄를 짓 는 것인즉, 이제부터라도 그대를 짐의 곁에 둘 것이네. 향후 천추 장군부를 증축하고 그대에게 황실을 맡기겠네." 천운비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소생은 그런 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황 궁밀고에 한 가지 볼 일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뜻이 이루어 지면 다시 강호로 떠나야 합니다." 만력제는 껄껄 웃었다. "그 무슨 소리인가? 천추황검만으로도 무엇이든 요구할 수가 있 네. 자네가 원한다면 황궁밀고는 물론이고 제후(帝侯)나 왕으로 봉(封)할 수도 있네." 천운비는 무릎을 꿇었다. "용서하십시오, 폐하. 소생은 오직 강호야인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그 말에 만력제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정녕 짐을 뿌리치겠단 말인가?" 천운비는 황급히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폐하, 소생은 다만 강호인의 생활이 몸에 익어 있어 그쪽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폐하나 황실에 감정이 있어 서가 아닙니다. 제발 소생의 뜻을 받아 주십시오." 만력제는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어허, 섭섭한지고, 짐의 뜻을 그리도 몰라준단 말인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허헛......!" 만력제는 맥이 빠지는 듯 몸을 축 늘어뜨려 용상에 묻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어안을 빛내며 말했다. "자네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자네에게 봉책을 하나 주고 싶은데 이것마저 거절하면 안되네." "그것은......." 천운비는 사양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만력제의 얼굴에 은은한 노 기가 어렸기 때문이었다. "이것마저 거절하면 짐은 화를 내겠네. 헛헛, 설마 짐의 작은 성 의까지도 짓밟지는 않으리라 믿네." "......." 천운비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만력제는 기억을 더듬는 듯 어안을 굴리며 말했다. "개국 당시의 일이네. 홍무제께서는 강호야인들과 무인들을 기용 하여 그 힘으로 대명제국을 세우셨네. 자네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하나의 숨은 큰 힘이 암중으로 선황을 보위하 고 있었는데 그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네." "......?" "당시 선황께서 대의를 품고 천하를 주유하셨을 때 강호의 한 신 비기인(神秘奇人)을 사귀어 도움을 입은 적이 있었네. 또한 그를 통해 무인들과 교분을 맺게 되었다네." 천운비는 황제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선황께서는 그 신비기인에게 만붕왕(萬鵬王)이란 위(位)를 내리 시고 그로 하여금 강호인들을 다스리게 하였네. 만붕왕은 곧 무림 왕(武林王)을 의미하는 것이었네." '무림왕?' 천운비는 처음 듣는 비사에 흥미를 느꼈다. 뿐만 아니라 칠왕야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짐은 그대를 만붕왕으로 봉하려 하네." 천운비는 안색이 변했다. "어찌 감히......" 만력제는 손을 저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게나. 헛헛, 황명마저 거역하지는 않겠지?" "폐하......." 천운비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만력제는 궁녀들을 향해 명을 내렸 다. "가서 승천황검(昇天皇劍)을 가져오너라." "예!" 두 명의 궁녀가 후전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궁녀들은 은빛 쟁반에 한 자루의 보검(寶劍)을 받쳐들고 와 만력제에게 바쳤다. 검집은 교룡피로 된 것이었고, 손잡이는 만년서각을 깎아 만든 것 이었다. 길이는 두 자 반, 비교적 짧았으나 전체적으로 고색이 창 연하여 희세의 보검임을 알 수 있었다. "승천황검은 천추황검과 더불어 이대황검(二大皇劍)으로 불리는 선황의 유물이네. 앞으로 이 승천황검을 만붕왕의 신표로 삼을 것 이며......." 만력제의 눈에 형형한 빛이 어렸다. "칠십이만금군(七十二萬禁軍)을 지휘할 수 있는 태사령(太師令)의 직분과 황궁밀천위사(皇宮密天衛士) 천 명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겠네." 칠십이만금군과 황실고수들로 알려진 황궁밀천위사를 지휘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대명(大明)의 병권(兵權)을 장악할 수 있는 엄 청난 권한이 아닌가? 천운비는 심금이 떨렸다. "이리 가까이 오게." 만력제는 위엄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승천황검을 건네었다. "자네를 만붕왕에 봉(封)하노라." "......!" 천운비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음을 느꼈다. '만붕왕! 일명 무림왕.... 내가 무림의 왕이라고?'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후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승천황검 을 받들었다. "헛헛......! 오늘은 짐의 생애 최고로 기쁜 날이도다. 이제야 천 무진 장군에게, 그리고 천추장군가에 진 빚을 갚은 기분이네." 노황제 만력제의 웃음. 그것은 제왕의 웃음이었다. 그리고 이 순 간은 중원무림사의 새 장을 여는 순간이기도 했다. ■ 무림백서 3권 제21장 황궁밀고(皇宮密庫) ━━━━━━━━━━━━━━━━━━━━━━━━━━━━━━━━━━━ 자금성의 구중심처에 인공가산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내전의 경치를 운치있게 보이게 하기 위한 가산이었으나 기실 그곳에는 엄청난 보물이 비장되어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황궁밀고가 있는 곳이었다. 수백 년 동안 역대 황제 외에는 누구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황 궁제일지(皇宮第一地)였다. 황궁밀고는 황제의 윤허 없이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이 곳에는 갖가지 보물은 물론 실전(失傳)된 무공비급(武功秘 )들도 간직되어 있었다. 때문에 황궁밀고의 주위에는 대내고수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선다. 그들은 황실(皇室)의 비전무학을 익힌 고수들로 강호의 기인들조 차 두려워하는 무서운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황궁밀고로 접근하는 두 인영이 있 었다. 칠왕야와 천운비였다. '생각대로 경비가 삼엄하군.' 천운비는 곳곳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대내고수들의 눈빛을 느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가산 아래의 석문 앞에 당도했다. 석문의 좌우에는 두 마리의 석사자(石獅子)가 마주보고 있고, 전 면에는 두 마리의 황룡(黃龍)이 교차하는 부조가 조각되어 있었 다. 천운비가 탄성을 발했다. "참으로 훌륭하오. 이곳을 축조하는 데만도 엄청난 공이 들었을 것이오." 칠왕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곳은 사실 황실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소." "......." "때문에 이곳에는 기관과 매복이 중첩되어 있어 섣불리 들어갔다 가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칠왕야는 좌우의 석사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입구부터 죽음의 기관이 설치되어 있으므로 잘못 건드리면 무수 한 독전(毒箭)과 독수가 쏟아지지요." "흠." 천운비는 신음을 흘렸다. '치밀한 안배로군.' "오직 역대 황제들만 출입이 가능한 곳이지요."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칠왕야께선 어떻게......?" 칠왕야는 미안(美顔)에 신비한 미소를 떠올렸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부황의 총애를 받아 특별히 구경할 수 있었지 요." "아!"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왕야의 수려한 눈동자가 천운비의 얼굴에 머물렀다. 어딘가 모르게 의미가 담긴 눈길이었다. 칠왕야는 석문 앞으로 다가섰다. 금방이라도 비상할 듯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쌍룡(雙龍)의 눈에 는 주먹만한 야명주가 박혀 있었다. 칠왕야는 남자의 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고운 손을 뻗어 용안을 눌렀다. 이어 가슴에 걸고 있는 옥패로 용의 꼬리부분에 비늘이 빠진 곳에 맞추었다. 구르르릉! 석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석문은 다시 굳게 닫 혀버렸다. 두 사람은 한 마장에 달하는 석전에 당도했다. 그곳은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바닥에는 홍황청흑백(紅黃靑黑白) 다섯 가지 색의 대리석이 깔려 있었으며 석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은 온통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 었다. 천장에는 명장(名匠)의 조각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으며 야명주의 불빛을 받아 신비한 광휘를 발하고 있었다. '이곳만 해도 천하의 황금을 반은 동원해야 축조할 수 있겠구나.' 천운비는 석전의 화려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칠왕야는 황궁밀 고에 대해 설명했다. "이곳은 건국 초기에 만들어졌지만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지요. 사실 명조의 종사가 유지되는 원동력인 셈이지요." 황궁밀고는 크게 삼대광장(三大廣場)과 칠십이 개의 소전(小殿)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기에 일곱 개의 인공가산과 다섯 개의 인 공호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히 지하궁전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규모인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천하에 없는 것이 없었다. 갖가지 진귀하고 희귀 한 기진이보(奇珍異寶)는 물론이요, 불로장생의 희귀영약, 천하의 서책이란 서책은 총망라하여 비장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이름조차 잊혀진 전설의 상고기병(上古奇兵) 을 비롯하여 역대의 무공비급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들은 사대비고에 나뉘어져 있소." "사대비고?" "황금천고(黃金天庫), 천약비고(天藥秘庫), 천병신고(天兵神庫), 천장서고(天藏書庫) 등 네 종류의 보물들을 분류하여 보관하고 있 는 곳이지요." "음." 천운비는 연신 신음을 발했다. "사대비고야말로 황궁밀고의 꽃이라 할 수 있소. 황제께서 가장 아끼는 곳이기도 하지요." 칠왕야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부황께선 특별히 천대협께 사대비고를 열 수 있게 윤허하시고 그 곳으로부터 한 가지씩의 기보(奇寶)를 취할 수 있도록 하셨소." 천운비는 겸손하게 말했다. "황공할 따름입니다." 그들은 통로를 걷고 있었다. 통로는 열 걸음을 갈 때마다 갈림길 이 나와 도저히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칠왕야의 인 도로 어렵지 않게 전진할 수 있었다. 칠왕야는 문득 천운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참 왜 내게 말하지 않았소?" "무엇을 말이오?" "천대협이 천추장군가의 후손이라는 사실 말이오." 천운비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소이다." "......?" "실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바램이었소. 칠왕야에 게 청부를 제시했던 것도 신분이 알려지기 마련인 천추황검을 사 용하지 않기 위함이었소." "그랬었군." 칠왕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협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소. 황궁에 있는 대신들은 수단 방법 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 하는데 어찌하여......." "후훗, 권세와 욕망에 눈이 어둡게 되면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 아넣게 되는 법이오." "그럼 대협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단 말이오?" "글쎄.... 내게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잠재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지 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소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오." "......." 천운비를 바라보는 칠왕야의 눈빛이 그윽해졌다. 반면 그의 마음 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곳을 곧 떠나겠구나.' 그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대협은 황궁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천운비는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감정을 묻는 것이오?" "그렇소." "한때는 가문의 과거지사로 인해 울분을 느낀 적이 있소이다. 실 은 폐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황궁에 대해서 그리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소. 그런데 폐하를 뵙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소 이다." 칠왕야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실은 나도 부황께서 대협을 만붕왕에 봉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습니다. 아무튼 잘된 일이오." "하하! 내게는 과한 칭호외다." "아니오, 지나친 겸손은 실례요. 천대협."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하나의 대전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편액이 하나 걸려 있었다. <황금천고(黃金天庫)> 황궁밀고의 사대비고(四大秘庫)중 하나였다. 대전 앞에서 천운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음, 이렇게 거대한 문이 있다니.' 대전의 문은 폭이 삼장에 높이가 오장이 넘었다. 그것도 전체가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낱 문만 해도 이럴진대 비고의 내부는 어떻겠는가?' 칠왕야는 황금의 문 오른쪽에 있는 검은 구슬을 눌렀다. 구구궁!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휘황한 보광이 쏟아 져 나왔다. 칠왕야의 담담한 음성이 들렸다. "이곳이 사대비고의 첫번째인 황금천고요." "......!" 두 사람은 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운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고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로 많은 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단 하나만으로도 일개 성과 맞바꿀 수 있다는 칠채묘안석(七彩猫 眼石)을 비롯하여, 호박(琥珀), 유리(琉璃), 산호(珊瑚), 청라옥 (靑羅玉) 등....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진귀한 보화들이 지천으 로 널려 있었다. 천운비는 동요됨 없이 대전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모 습에 칠왕야는 눈길을 떼지 못했다. '보화를 보고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니,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구나.' 기이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그는 점점 더 천운비 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대협은 이곳에서 한 가지를 취할 수 있소." "아무 것이나 말이오?" "그렇소." 천운비는 보화를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진귀한 것들이었으나 그가 눈길을 멈춘 것은 하나의 꽃이었다. 그것은 매화(梅花) 형상이었는데 비취(翡翠)로 만든 정교한 조각 품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꽃을 집어 들었다. 순간 서늘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왔다. 칠왕야는 의외인 듯 물었다. "꽃을 좋아하시오?" 천운비는 빙긋이 웃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소?" "후후, 그래서 여인들이 대협을 그토록 따르는구려?" 칠왕야의 표정이 묘해지고 있었다. 그는 그윽한 눈으로 천운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여인에게 그 꽃을 줄 셈이오?" 천운비는 담담히 말했다.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소이다." "워낙 여인이 많기 때문이오? 아니면 꽃을 바칠만한 여인이 없기 때문이오? 아무튼 누군지 몰라도 꽃을 받을 여인이 부럽소이다." 칠왕야의 아름다운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홍조가 피어났다. 천운 비는 꽃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가 아무 생각없이 취한 꽃은 불사화(不死花)란 것이었다. 불사 화에는 신비한 묘용이 있었는데 간직하게 되면 영원히 청춘을 간 직할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천운비는 물론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만 마음이 끌려 취했을 뿐이었다. "따라오시오. 대협." 칠왕야가 앞장서 다른 통로로 향했다. 두 사람이 보고를 빠져나가자 문은 저절로 닫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천약비고(天藥秘庫)였다. 그곳의 문은 자단목(紫丹木)으로 되어 있었다. 가까이 가기도 전에 단아 한 향기가 정신을 상쾌하게 했다. '이번에는 목문이군.' 칠왕야가 구슬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의외로 천약비고는 약전(藥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방 반 마장 정도 되는 공간에 온갖 약초가 재 배되고 있었다. 희귀한 약초에서 내뿜는 향기가 정신을 맑게 해주고 있었다. 약전을 둘러본 천운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의도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었으므로 약초를 보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약전에 재배되고 있는 약초들, 그밖에 수백 개의 화분에 심어져 있는 약초는 하나같이 진귀한 영약들이었던 것이다. 만년석균(萬年石菌), 천년설연실(千年雪蓮實), 구지선엽초(九芝仙 葉草), 만년삼왕(萬年蔘王), 인형동자삼(人形童子蔘) 등.... 값을 따질 수 없는 기사회생의 영약들인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쪽에는 시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수천 개의 약병이 진열되어 있었다. 공청석유(孔淸石油)를 비롯하여 만년학정혈(萬年鶴精血), 적양신단(赤陽神丹), 태을보정단(太乙補精丹) 등.... 약병에 적혀 있는 이름은 가히 전설의 영약들이었다. "아무 것이나 하나 취하시오, 대협." 칠왕야의 말에 천운비는 작은 자기병을 하나 집어들었다. 자기병의 표면에는 소림대환단(少林大環丹)이란 글이 적혀 있었 다. 놀라운 일이었다. 대환단은 소림사 내에서도 오직 세 개밖에 없다 는 희세의 영약이었다. 그런데 그가 집어든 자기병 속에는 무려 다섯 개나 들어 있었다. 천운비는 자기병을 갈무리했다. 칠왕야는 다시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묵강석(墨剛石)으로 된 석문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엔 천하에 없는 병기가 없지요."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곳이 천병신고(天兵神庫)겠군.' 과연 그러했다. 천병신고로 들어서자 좌우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병기가 늘 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병장기가 걸려 있었다. 검(劍), 도(刀), 륜(輪), 부(斧), 창(槍), 조(爪), 구(鉤), 궁 (弓), 간(干).... 그야말로 없는 병기가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병장기는 평범한 것이 없었다. 모두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보검이나 명기들이었다. 전설적인 신장(神匠) 구야자(丘冶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사대신검(四大神劍)은 물론,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병기들이 빠짐 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천운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병기가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병기는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오. 무공에 진력하지 않 고 병장기의 힘에 의지한다면 상승의 무도에 이를 수 없는 법이외 다." 칠왕야의 얼굴에 탄복의 빛이 어렸다. "천대협은 과연 타고난 무의 귀재시오. 감히 범부가 따를 수 없는 진리요." 그는 부신 듯이 천운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부황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오 만......." 천운비는 빙긋 웃었다. "그럼." 그는 역시 손을 뻗어 가까이 있는 피리 하나를 집어들었다. 전체 가 검은 빛을 띤 묵적(墨笛)으로 별 특이한 점이 없어 보이는 것 이었다. 천운비는 묵적을 살펴보더니 입으로 가져갔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옆구리에 꽂아버렸다. 칠왕야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대협은 음률을 좋아하시오?"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왕야는 더 묻지 않았다. 천운비가 취한 묵적은 겉보기에는 평범하게 생긴 피리에 불과했 다. 그러나 그것은 전설 속에 사라졌던 음문(音門)의 지보였다. 두 사람은 이제 마지막 보고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천장서고(天藏書庫)였다. "......!" 엄청난 서가(書架)가 눈 닿는 곳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서가 에는 고서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천운비는 눈을 크게 떴다. 이제까지의 보고에서 그는 조금도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으나 수많은 책을 보고는 안색이 미미하게 변하 고 있었다. "이곳에는 백팔십만 권의 장서가 비장되어 있소이다." 칠왕야의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 천운비의 눈은 서가를 훑어보고 있었다. "고금을 통틀어 거의 모든 서책(書冊)들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요. 아마 책의 제목만 훑어보는 데만도 족히 수년은 걸릴 것이오." "정말 놀랍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천운비는 처음으로 탄성을 발했다. "그리 놀랄만한 일은 못되오. 아직 모든 책들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르 지만." "음, 대단하구려." "분류가 끝난 것은 학문을 담은 만경루(萬經樓), 무공비급들을 모 아 놓은 무경루(武經樓), 잡학(雜學)에 관련한 서적을 모은 잡경 루(雜經樓), 의학서책을 모은 의경루(醫經樓) 등......."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서가 사이를 걸었다. 벌써 수십 개의 서 가를 지나쳤으나 서가의 끝은 보이지도 않았다. 칠왕야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 밖에도 실전된 무림의 비급들을 모아놓은......." 천운비는 그의 말을 끊었다. "칠왕야, 소생이 원하는 것은 무공비급이 아니오." "그럼......?" "소생이 얻고자 하는 것은 네 장의 족자입니다." "족자?" 칠왕야는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족자라면......." 그는 더 묻지 않고 우측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곳에는 또 하나의 서고(書庫)가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책이 없었다. 대신 사방 벽과 천장에 이르기까지 온통 고서화(古書畵)들이 메워져 있었다. 인물화를 비롯하여 산수화(山水畵), 서화(書畵)에 이르기까지 없 는 것이 없었다. 당대(唐代)의 화성(畵聖)으로 불리던 염립덕(閻立德), 이사훈(李 思訓), 오도현(吳道玄)을 비롯하여 송대(宋代)의 연운산수(烟雲山 水)로 유명한 미패, 미우인(米友仁) 부자의 그림이 있는가 하면 왕희지(王羲之), 유공권(柳公權), 안진경(顔眞卿) 등의 명필가의 진품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천운비는 말로만 듣던 작품들을 접하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잠시 후 그는 난감한 기색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 속에서 네 장의 족자를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서고의 방대한 분량으로 미루어 볼 때, 살펴보는 데만도 족히 일 년은 걸릴 듯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바다에 빠진 바늘을 찾는 격이로군.' "......." 칠왕야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운비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한쪽으로 걸어갔다. 천운비는 그의 뒤를 따 랐다. 서고 한쪽 구석에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는 녹슨 철궤 하나가 방치 되어 있었다. "이것은 홍치제(洪治帝)께서 친히 이곳을 정리하시다 손수 모아놓 은 서화(書畵)를 보관한 것이오. 혹시 천대협께서 찾는 물건이 있 는지 살펴보시오." 효종 홍치제(洪治帝). 그는 홍무제, 영락제, 선종(宣宗)과 더불어 사대명군(四大名君)이 라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성정이 곧고 청렴했으며 특히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던 현군 (賢君)으로 그가 서화에 관심을 가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운비는 기대에 찬 눈으로 철궤를 바라보다 뚜껑을 열었다. 철궤 안에는 고색창연한 서화들이 들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일세에 보기 힘든 명품들이었다. "음." 천운비는 그중 족자 형태로 된 서화를 분류해 냈다. 족자만 해도 모두 백여 점이나 되었다. 그는 족자들을 일일이 살 펴보았다. 칠왕야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그가 하는 양을 지보 았다. 천운비는 족자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원하는 족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족자는 몇 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지켜보던 칠왕야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어렸다. "찾았소!" 천운비는 격동의 외침을 발했다. 칠왕야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천 운비가 들고 있는 족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철궤의 맨 밑바닥에 있었다. 네 개의 족자가 따로이 보관 된 것이었다. 크기와 모양이 같은 네 족자는 다만 그림의 내용이 모두 틀렸다. 칠왕야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천대협, 축하하오." "하하! 모두가 왕야의 덕분입니다." "아니오. 기보(奇寶)는 그 주인을 알아보는 법이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웃을 때 칠왕야의 가지 런한 치아가 유난히 하얗게 빛났다. 칠왕야는 황궁밀고를 남김없이 안내하며 구경시켜 주었다. 천운비는 넉장의 구룡환비도를 얻었으므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 다. 따라서 칠왕야를 따라 느긋한 마음으로 밀고 안을 살필 수 있 게 되었다. 황궁밀고는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또한 정교한 건축물이기도 했 다. 바닥에는 태극, 음양, 사상, 팔괘 등의 변화를 함축시킨 도형(圖 形)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중앙의 기관과 연결되어 있어 잘못 밟으면 죽음의 기관이 작동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통로의 벽면에는 정교한 조각들이 양각 되어 있었다. 그 조각들은 역대 황조의 역사를 표현한 것이었다. 천운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은 또 다른 석전에 당도했다. 그곳은 다른 곳과 달리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먼저 문 부터가 틀렸다. 문은 은은한 담홍색이었는데 무슨 재질로 만든 것 인지 알 수가 없으나 기이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곧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섰다. "......!" 석전 안에는 실로 기괴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 벽과 기둥, 심지어는 바닥과 천장까지 온통 해괴하기 이를 데 없는 춘화도(春畵圖)가 있었다. 마치 실체를 보듯 정교하게 새 겨진 남녀의 나신상들이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듯이 생생하게 그려 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석전 안에는 기이한 홍무(紅霧)가 흐르고 있었다. 한쪽 서가에는 방중술에 관한 책들이 꽂혀 있었으나 한가운데 놓 여 있는 탁자 위에는 낯뜨거운 도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남근(男根)의 모양을 한 온묘석(溫猫石), 여성의 성기를 본따 만 들어진 이상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맞은편 벽에는 두 다리를 허공으로 뻗고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 기고 있는 여인상이 그려져 있었다. 칠왕야의 안색이 변했다. "자... 잘못 들어왔소." 그는 왠지 허둥댔다. 천운비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석전을 빠져나왔다. 천운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황실에 자손이 번창하는 이유를 알겠소이다." 칠왕야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물론 목덜미까지 빨 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천운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칠왕야는 다른 석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그들은 또다른 석전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골동품들이 가 득 비치되어 있었다. 각종 신상(神像)을 비롯하여 도자기, 희귀한 물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어릴 적에 나는 호기심으로 이곳에 들어온 적이 있었소." 칠왕야는 비로소 안색을 회복하고 말했다. "이곳에서 한 가지 기연(奇緣)을 얻었지요." 천운비는 칠왕야가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청동신장 (靑銅神將)이었다. 얼굴은 부처의 형상인데 장군의 갑주를 입고 있었다. 한 손에는 검을 치켜들고 있었으며 다른 손에는 우담화(優曇華)를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발 밑에는 아수라(阿修羅)와 악귀들이 밟힌 채 신음하고 있었다. 칠왕야의 눈에 회상의 빛이 어렸다. "나는 왠지 이 신상이 마음에 들어 자주 와보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칠왕야는 손을 뻗어 신상의 오른 손을 잡았다. "검을 들고 있는 이 팔에 매달려 놀고 있었소. 그런데......." 스르릉......! 그가 팔을 당기자 신상의 가슴 한가운데가 열렸다. "이 신상의 가슴에서 대천신문의 무경백서(武經百書)가 나온 것이 오." "아!" 천운비는 신상의 가슴속에 과연 백여 권의 책자가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실로 기묘한 안배로군." "그렇소. 우연한 기연으로 대천신문을 만나게 된 것이오. 하지만 나는 아직 대천신문을 완전히 계승하지 못했소." "어째서요?" "그건 대천신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오." 칠왕야는 우담화를 들고 있는 신장의 좌수(左手)를 가리켰다. "이곳을 잘 보시오." 천운비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원래 이 손목에는 묵환(墨環)이 끼워져 있었소. 그것을 찾아 이 곳에 끼워 맞추어야만 나머지 한 권의 대천신서를 얻을 수 있는 것이오." 과연 그러했다. 좌수의 손목에는 묵환이 끼워져 있던 흔적이 있었 다. 이때 천운비의 뇌리에 번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럴 수가......!" 칠왕야는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천운비는 갑자기 대소를 터 뜨렷다. "하하하핫......! 세상에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있다니, 정말 믿 을 수 없는 일이군!" "......?" 칠왕야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천운비는 자신의 손목 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칠왕야, 그 묵환은 바로 내가 가지고 있소이다." "......!"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손목을 본 칠왕야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이럴 수가.... 그것이 어떻게 천대협의 손에 있단 말이오?" "하하! 이런 것을 두고 인연이라는 것이 아니겠소?" 천운비는 묵아를 끌러 신상의 왼쪽 손목에 끼웠다. 철컥! 묵환은 신상의 좌수에 꼭 들어맞았다. 그 순간이었다. 철컹! 쇳소리와 함께 신상이 입을 딱 벌렸다. 두 사람의 눈은 일제히 한 곳에 꽂혔다. 신상의 벌어진 입 속에 한 권의 책자가 들어있는 것이 보인 것이 다. <대천신서(代天神書)> 책자의 표지에는 그런 제목이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멍 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천운비는 포권하며 말했다. "축하하오, 칠왕야. 왕야께서 그토록 잇고 싶어하던 대천신문을 이제야 계승하게 되었소이다." 칠왕야는 대천신서를 꺼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엄숙한 표정 으로 말했다. "이것은 천대협의 물건이지 내 것이 아니오." 천운비는 깜짝 놀랐다. "무슨 말씀이오? 마땅히 칠왕야께서 취하셔야지요. 소생은 그저 묵환을 빌려드린 것뿐이오." 칠왕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나는 대천신문을 이을 자질이 부족하고, 그러니 천대협 께서......." "안될 말이오. 나는 네 장의 족자를 얻었으니 대천신문의 무학은 필요가 없소. 왕야께서 대천신문을 이어야 하오." 천운비의 완강한 태도에 칠왕야는 할 수 없이 대천신서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실로 우연치고는 너무도 공교로운 일이었다. 천운비는 신상의 좌수에 채웠던 묵아를 끌러 칠왕야에게 주었다. "이것은 원래 대천신문의 물건이니 왕야께서 간직해야 할 것 같소 이다." 칠왕야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소. 대천신문을 계승하게 된 것도 천대협 덕분이었 는데 어찌......." "받으셔야 하오. 왕야께서 완전한 진전(眞傳)을 얻어야 사마의 무 리들을 퇴치할 수 있을 것이오." "......." "지금 이 순간에도 악마지겁(惡魔之劫)이 태동하고 있소이다. 왕 야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빠지는 것을 방관하지는 않겠지 요?" 천운비의 눈에서 정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음!" 칠왕야는 낮게 신음했다. 천운비의 음성이 이어졌다. "악마지겁이 도래하면 천하는 도탄에 빠질 것이오. 그에 대비하여 힘을 기르지 않으면 세상은 암흑세계가 될 것이오." 칠왕야는 마지 못해 묵아를 받아 손목에 끼웠다. 천운비는 만족한 듯 빙그레 웃었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원하는 것을 얻은 셈이었다. 자금성은 빠르게 평화를 회복했다. 천운비는 몽예와 우담, 엽씨남매를 십자혈각으로 돌려 보냈다. 그 도 자금성을 떠나려 했으나 칠왕야가 한사코 만류하는 바람에 며 칠 더 머물기로 했다. 지금 그는 의혹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몽예가 떠나기 전 그에게 한 말 때문이었다. - 호호! 북경의 밤은 아주 달콤한 거예요. 의랑! 좋은 소식 기다 리겠어요. 그녀가 남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천운비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화원에는 국화가 만개해 있었다. 사르륵! 사륵!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고 있었다. 인공 연못에 떨어진 꽃잎은 빙 그르르 돌았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낙엽이 바람에 날려와 어깨에 내려앉는다. "......." 천운비는 뒷짐을 진 채 추색이 완연한 화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가을이 깊어가는구나. 이곳에 머문 지도 꽤 됐구나.' 수많은 상념이 뇌리를 스쳤다가는 사라져갔다. 그는 이 며칠간 지 난 일들을 생각할 여유를 가졌다. 기구하기만 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 짐의 곁에 있어 주게. 얼마 전 황제가 한 말이 뇌리에 맴돌고 있었다. 당시 그는 완곡하 게 거절했지만 섭섭해 하던 황제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에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비록 가문을 다시 일 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지 않았으나 자유를 구속받고 싶지가 않았 다. 상념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무림은 하루가 다르게 영세태평무국에 유린되고 있었다. 그들의 가공할 힘에 대항할 세력이 없었다. 감히 반기를 들 문파도, 의기 를 떨치고 일어서는 자도 없었다. 천운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겐 할 일이 많다. 무림이 누란의 위기에 놓여있다. 가문도 좋 지만 무림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버님께서 살아 계신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천운비는 달라졌다. 강호에 처음 나왔을 때 그는 무림의 안위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하루하루 피폐해져 가고 있는 무 림정기를 우려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명가의 피가 몸에 흐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가 한참 상념에 젖어 있을 때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오? 천대협."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 천운비는 보지 않아도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서서 히 돌아섰다. 만개한 국화 속에 금의를 입은 미장부가 서 있었다. 그는 국화가 무색할 정도로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내가 저리 아름답다니.......' 천운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저히 사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칠왕야는 국화꽃 한가운데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천하절색 의 미녀의 웃음보다 매력적이었다. 천운비는 담담히 말했다. "별 것 아니외다. 그런데 왕야께서 어인 일로 이곳에 행차하시었 소?" "그저 바람을 좀 쐬러 나왔지요." 칠왕야는 국화 사이를 걸어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 야릇한 향기 가 천운비의 후각에 스며들었다.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하고,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향기였다. 처음에는 남자가 무슨 향료를 쓰나 의아했으나 며칠 동안 익숙해 지자 그 향기가 점점 더 좋아졌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왕야는 여인과 같은 취향이 있단 말야. 하지만 그리 나쁘진 않 군.' 칠왕야는 다가오며 말했다. "천대협, 아니 이젠 만붕왕(萬鵬王)이라 해야겠군요. 덕분에 요즘 대천신서를 익히고 있소이다. 나는 하루하루 무학에 새로운 눈을 뜨는 기분입니다." 천운비는 낭랑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경하드릴 일이외다. 왕야께서 하루빨리 대공을 이룩하길 빌겠소이다." 칠왕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관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만붕왕께서도 구룡환비도(九龍幻秘圖)의 비학에 진전이 있겠지 요?" 천운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왕야, 그런 칭호는 감당키 어렵소이다. 예전처럼 불러주시오." 칠왕야는 정색했다. "무슨 말씀이시오? 부황께서 아시면 진노하실 것이오. 폐하의 성 의를 무시할 생각이오?" 천운비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좋으실 대로 하시오." 그는 시선을 국화밭으로 돌리며 말했다. "구룡환비도에는 구룡성제의 절학이 한 가지씩 비장되어 있소이 다. 꾸준히 연마하는 중이오." "하긴... 만붕왕의 자질은 초인적이니 머지 않아 경세적인 무학으 로 천하제일인이 될 것입니다." "과찬의 말씀을......." 천운비는 쑥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구룡비학을 완성하려면 아홉 장의 구룡환비도를 모두 얻 어야 하오. 나는 그 중 여덟 장밖에 얻지 못하였소. 마지막 한 장 을 얻어야만 구룡성궁을 열 수 있는 것이오." 칠왕야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만붕왕께서는 그것을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것이오. 하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조만간 필히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글쎄......." 천운비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푸르다. 몇 조각의 구름이 물에 풀린 솜처럼 점점이 흩어 져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하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천운비의 표정은 어두웠다. "무림은 암운에 싸여 있소. 악마천부의 힘은 미증유의 것이오. 하 루를 지체하면 할수록 무림의 정기는 사멸되고 말 것이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침울한 음성이었다. 칠왕야는 그를 부신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믿고 있습니다. 만붕왕이야말로 도탄에 빠진 무림을 구할 구성이 될 것이오." 칠왕야의 수려한 눈에서 신비의 빛이 일렁였다. 천운비는 기소를 흘렸다. "후후, 지나친 과찬의 말씀이시오." 문득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겠소이다." 칠왕야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당황한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 "벌써... 떠나신단 말이오? 혹 내가 그대에게 소홀하기라 도......?" "아니오. 왕야께선 소생에게 너무나 잘 대해 주셨소이다. 하지만 너무 지체했소이다. 이젠 강호로 돌아가야 할 것 같소이다." "그렇다면 며칠이라도......." "아니, 떠나야 하오." 천운비의 말은 단호했다. "하지만......." 칠왕야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떠올랐다. 그의 맑은 눈동자에는 안 타까움이 어렸다. "이제 그만 무림계로 돌아가야겠소." "설마 지금 당장 떠나려는 것은......." 천운비는 그에게 포권했다. "그렇소이다." "대협......!" "소생도 왕야와 함께 좀더 정을 나누고 싶소이다. 하지만 사사로 운 정에 매여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는 일이오. 왕야께서도 이 점 을 이해하시리라 믿소." 천운비의 얼굴에는 확고한 결의가 어려 있었다. 칠왕야는 더 말릴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잘근 물더니 간절하게 말했 다. "하면... 오늘밤만이라도. 이별주를 나눌 수는 있겠지요?" 천운비는 그의 염원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럼 오늘밤만......." 밤이다. 고월헌(高月軒)이란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에 푸른 월색이 비추고 있다. 고월헌은 본래 칠왕야의 거처였다. 고월헌에 마주 앉아 이별주를 기울이고 있는 두 사람. 천운비와 칠왕야였다. 밤은 깊어가고 술잔도 여러 순배 돌았다. 탁자 위에는 술병이 즐 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풍물지리에서 학문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칠왕야의 학문은 높았으나 풍물에 관해서는 천운비가 좀더 많이 알고 있는 편이었다. 두 사람은 얼큰하게 취했다. 특히 칠왕야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 라 목덜미까지 변해 있었다. 문득 칠왕야는 탁자를 탕, 치며 말했다. "만붕왕, 당신이 날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소?" 그의 혀가 반쯤 돌아가 있었다. 어리둥절하던 천운비는 그가 취했 다는 것을 느끼고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많이 취하셨구려. 무시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그렇게 애원했거늘... 어째서 혼자서 떠나려 한단 말이오?" 칠왕야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그 바람에 술병이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천운비는 술병을 잡아 탁자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왕야, 이제 그만 드시는 것이 좋겠소." 칠왕야는 코웃음 치더니 술병을 통째로 입으로 가져갔다. "응? 술이 떨어졌군." "하하, 그만 합시다." "아니오! 아직 멀었소. 밤새... 마셔야 하오. 자, 한 잔 따라주시 오." "왕야." 천운비는 불쑥 술잔을 내밀고 있는 칠왕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 이 충혈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새 술병을 들었다. "그럼 딱 한 잔만 따라드리겠소." 술잔이 차자 칠왕야는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는 소매로 입술을 쓱 문지른 후 중얼거렸다. "두고 보시오.... 난 언제고 이곳을 떠날 거요. 정말이오. 이곳은 너무 답답해.... 미칠 것 같단 말이야." 칠왕야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는 이미 만취되어 있었다. 천운비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는 칠왕야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황족이었으나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칠왕야는 새가 되어 자유 롭게 세상을 날아다니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끄윽! 만붕왕... 내 조만간 당신을... 찾아가겠소. 딸국! 어디로 가든 말이오.... 설마 날 싫어하진 않겠지요?" 이젠 딸꾹질까지 하고 있었다. 시간은 중단없이 흘러간다. 아쉬운 시간은 더욱 빨리 지나가는 법, 달빛이 기울고 있었다. "하하, 내 어찌 왕야를 박대할 수 있겠소?" 천운비는 안심하라는 듯이 웃었다. 칠왕야는 고개 들어 그를 바라 보았다. 몽롱한 눈에 이슬이 어리는 듯했다. "약속... 하지요?" "물론이오. 장부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리다." 칠왕야는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럼... 가야지요." 비틀! 그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왕야!" 천운비는 급히 그를 부축했다. 칠왕야의 얼굴은 도화빛으로 화해 있었다. 본래 아름다운 얼굴이 더욱 고혹적으로 보였다. "놓으시오. 난... 혼자서 갈 수 있소." 칠왕야는 그의 손을 뿌리친 후 정자 아래로 내려갔다. "앗!"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그만 중심을 잃고 털썩 주저앉고 말 았다. 천운비는 혀를 찼다. "쯧쯧, 천하의 왕야께서 이렇게 술이 약해서야." 그는 허락도 받지 않고 칠왕야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렇게 가볍다니.' 그렇다. 칠왕야의 몸은 짚단처럼 가벼워 조금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천하의 초고수인 칠왕야가 이렇게 몸이 가볍다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내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머무는 곳은 원 래 칠왕야의 거처였으므로 침실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으음.... 갈 테면 가란 말야.... 날 버리고 가다니......." 칠왕야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술을 이기지 못해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잠시 후 천운비는 침실로 들어가 그를 침상에 눕혔다. 막 몸을 일 으키려는데. "으응... 만붕왕... 난 그대를... 으응......!" 칠왕야는 두 팔을 뻗어 천운비의 목을 껴안았다. 순간 그에게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뺨이 확확 달아오르고 있었다. 천운비는 잠시 당황했으나 곧 그의 팔을 풀었다. 그는 칠왕야를 내려다 보았다. 얼굴이 도화처럼 상기되어 있는 칠 왕야의 모습은 가히 고혹적이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 다. "만일 왕야가 여인이었다면 천하제일미녀가 되었을 텐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때였다. 칠왕야의 신음이 들렸다. "으음......." 천운비는 고개를 돌렸다. 칠왕야는 몹시 갑갑한 듯 가슴을 쥐어뜯 고 있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왕야, 옷을 벗겨 드리리다." 칠왕야는 그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여전히 가슴의 옷을 잡 아당기고 있었다. '하긴 많이 마셨으니 갑갑하기도 하겠지.' 천운비는 조심스럽게 칠왕야의 금삼을 벗기기 시작했다. 가슴이 단단히 여며져 있어 고름을 풀기가 쉽지가 않았다. 이윽고 가슴이 열렸다. "......?"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이상한 것이 발견된 것이다. 칠왕야의 겉옷 이 젖혀지자 가슴이 흰 천으로 칭칭 동여매어져 있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 "으응......." 칠왕야는 그 천이 몹시 갑갑한 듯 손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 갑갑할 수밖에.' 천운비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뻗었다. 잠시 후 가슴을 동여맨 천 이 풀렸다. "엇?" 그는 대경실색했다. 천이 풀리는 순간 무엇인가 툭 튀어나온 것이 다. 그는 넋을 잃고 말았다. '이럴 수가! 왕야가... 여인이었다니?' 그는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보라. 가슴을 동여맨 천이 풀린 자리에 불쑥 솟아오른 두 개의 젖 가슴을! 만지기만 채도 터질 듯 팽팽한 육봉이 하늘 높은 줄 모르 고 솟아나 있었다. 두 개의 연홍빛 유실이 겁도 없이 그를 바라보 고 있는 것 같았다. 천운비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금삼으로 덮어버렸다. '그랬었군. 어쩐지.......' 천운비는 비로소 몽예가 떠나기 전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칠왕야가 보여주었던 여러 가지 이상한 행동 들도 모두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아연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공주의 신분으로 지금까지 왕야 행세를 해왔단 말인가?' 놀라운 사실이었다. 천운비는 슬며시 눈을 돌려 잠들어 있는 칠왕 야, 아니 공주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는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극미(極美)의 아름다움을 안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제 그녀가 여 인이란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천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빨려드는 기 분이었다. 주천화(朱天花). 이것이 칠왕야의 본명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명랑했다. 타고난 성격이 유별나 남 장하는 것을 즐겨했다. 황제 또한 그녀가 남장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귀 엽게 봐주고 있었다. 결국 그녀가 남장하는 것은 굳어져 버렸고 황실의 몇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 되고 말았다. "......." 한동안 주천화를 바라보던 천운비는 손을 뻗었다. 그는 그녀의 머 리에 씌워져 있던 금건을 벗겨냈다. 쏴아....... 탐스러운 미발(美髮)이 폭포수처럼 흐트러져 내렸다. "음......!" 천운비는 신음을 흘렸다. 남장을 했을 때는 다만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느낌이었으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의 모습은 가히 뇌쇄적이었다. 바닷속의 해초인 양 퍼진 채 어깨를 덮고 있는 머리칼, 빨갛게 홍 조를 띤 양볼, 약간 벌어져 있는 붉은 입술, 그 사이로 보이는 백 옥같은 치아....... 조개처럼 고운 선을 그린 작은 턱과 그 아래로 학처럼 우아하게 뻗은 목덜미, 비록 급한 김에 옷자락으로 덮어두긴 했으나 살짝 엿보이는 우윳빛의 탄력있는 가슴은 가히 절세우물(絶世尤物)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천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공주 주천화의 눈까풀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천운비는 그것 을 발견하지 못한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공주, 그대는 나같은 낭인과는 어울릴 수 없는 귀한 분이오. 하 지만......." 그는 품속에서 꽃을 꺼내들었다. 불사화(不死花)였다. 바로 두 사람이 황궁밀고에서 가져온 비취로 된 꽃이었다. - 어떤 여인에게 그 꽃을 줄 셈이오?" -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소이다." - 워낙 여인이 많기 때문이오? 아니면 꽃을 바칠만한 여인이 없기 때문이오? 아무튼 누군지 몰라도 꽃을 받을 여인이 부럽소이다. 천운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불사화를 취했을 때 두 사람이 주고 받았던 대화였던 것이다. 그는 불사화를 주천화의 가슴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이 꽃은 공주께 드려야 할 것 같소이다." 주천화의 긴 속눈썹이 눈에 띄게 떨렸다. 천운비는 돌아서며 중얼 거렸다. "지금 이대로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그는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창문을 연 그는 한숨을 길게 쉰 후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때였 다. "운비(雲飛)......." "......!" 천운비는 부르르 떨었다. 누가 그의 이름을 부르겠는가? 그는 빙 글 돌아섰다. 눈과 눈! 두 쌍의 눈이 운명처럼 마주쳤다. 그윽한 정과 뜨거운 정열을 내 뿜는 두 쌍의 눈! 억겁일수유(億劫一須臾)라고나 할까?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의 눈빛에 얽혀 있 었다. "가지 말아요. 운비." 주천화는 몸을 일으켜 천운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 천운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아주 단순 한 관계에 와 있었다. 남자와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주천화는 지금 이런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그 녀의 눈동자가 담뿍 물기를 담고 있었다. 천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공주......." 그는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주천화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사랑이 충만한 눈빛이었다. 어느새 동공에 맑은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운비......!" "공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를 불렀다. 또 누가 먼저랄 것 도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 술을 부딪쳐 갔다. 지금 이 순간에는 신분도 환경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말도 필요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서로를 확 인하는 것뿐이었다. 서로의 뜨거운 정을, 애정을 확인하고 또 확 인할 뿐이었다. 길고 긴 입맞춤이었다. 서로의 입술이 부딪치고 부벼졌으며 치아와 치아가 마주쳤다. 혀 와 혀가 춤을 추었다. 서로의 영혼을 끌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혼 신의 힘으로 춤을 추었다. 그 사이에 주천화의 어깨에 걸쳐져 있 던 금삼이 흘러내린 것은 물론이었다. 눈부신 어깨와 동그란 젖가슴이 드러났다. 주천화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고귀한 공주의 신분으로 남자 앞에서 처음으로 속살을 드 러냈지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녀는 천운비는 목에 두 팔을 두른 채 그가 어서 자신을 사랑해주기만을 갈구했다. 한참 후에야 천운비의 입술이 떨어졌다. "......." 그는 주천화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주천화도 그의 눈을 들여 다보았다. 서로의 눈 속에 서로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두 사람 은 불덩이가 되고 말았다. 천운비의 입술이 그녀의 하얀 목에 떨어졌다. "아......." 주천화는 입술을 벌리며 신음했다. 그녀의 몸이 바르르 경련을 일 으켰다. 사내의 입술은 화인(火印)처럼 그녀의 목에 찍혔다. 뜨겁 게 목을 누비던 입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눈부시게 흰 젖가슴이었다. 천운비의 입술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한쪽 젖가슴을 베어 물었다. "......!" 이런 느낌! 이런 느낌이었나? 주천화는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무엇인가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안타깝게 허공을 움켜쥐었다. 사내의 입술이 다른 쪽 가슴으로 옮겨갔다. 강하게, 아주 강하게 젖가슴이 빨렸다. 그녀는 영혼이 통째로 그에게 빨려나가는 것 같았다. 허공을 움켜 쥐던 손이 떨어졌다. 사내의 굵은 목을, 사내의 탄탄한 등을 단번 에 할퀴듯 껴안았다. 천운비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온몸은 타오르고 있었 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 고귀함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 운 여인, 아름다움을 숨기고 지금까지 그를 몰래 연모했던 여인, 주천화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아......." 주천화의 입술이 더욱 벌어졌다. 사내의 입술이 젖가슴을 지나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 의 손은 사내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 르는 듯 그녀의 몸이 꿈틀거렸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갈증과, 뜨거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밀려드는 바람에 그녀는 그저 입만 벌릴 뿐이었다. 천운비는 손을 움직였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였다. 주천화가 입고 있던 옷이 방해가 되었다. 방해를 제거하는 것은 잠깐이었다. 그녀는 눈부신 육체를 드러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 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를 끝냈다. 천운비도 옷을 벗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두 사람은 알몸이 되었 다. 그리고 한 덩어리가 되었다. 침상 위에서 하나가 되기위한 격 렬한 몸부림이 일어났다. 여체는 펄펄 끓었고 사내는 끓는 대지위 에 기름을 부었다. 두 육체는 폭발을 향한 불꽃을 무수히 일으켰 다. 그리고 한 순간. 마침내 두 사람은 화려하게 폭발했다. 뜨거운 밤이었다. 불회림(不廻林). 돌아오지 않는 숲! 무림인이라면 그곳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한 번 들어가면 돌아나올 수 없는 숲. 그 숲속에 사는 인간들은 백도도 흑도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녹림도(綠林道)라 불리웠다. 명문대파도 아니요, 전통을 이어온 부류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살았고 마음 내키는 대 로 행동했다. 한때는 파벌을 형성하여 무림에 혼란을 야기한 적도 있었다. 녹림 팔절이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은 불회림으로 그 힘이 합쳐졌다. 녹림도는 백만을 헤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에 별다른 영 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은 수많은 비기들이 멸절됐기 때문이었 다. 동악(東嶽) 태산(泰山). 오악(五嶽)의 하나이자 중원의 성산으로 불리워지는 태산 기슭에 불회림이 있었다. 이곳에는 울창한 수림(樹林)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가히 수해(樹 海)를 방불케 했다. 오래 전부터 강호에 떠도는 말이 있다. 숲을 만나면 결코 들어가지 말라! 그것은 아무리 절정고수라 해도 숲의 곳곳에 숨어있는 암전(暗箭) 을 피하기 어렵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불회림(不廻林)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녹림인이 아니라면 아무도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 했다. 그런데 일반적인 경구를 무시하고 홀홀단신으로 불회림으로 들어 서는 한 명의 백삼청년이 있었다. "흠, 정말 하늘이 보이지 않는군." 천운비는 숲으로 들어선 순간 그 울창함에 경이를 금치 못했다. 어찌나 밀림이 우거졌는지 햇빛조차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그가 이곳으로 온 것은 한 가지 목적이 있어서였다. 그는 북경을 떠난 후 자신의 행로를 결정했다.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는 무림을 위해 살기로 했다. 설사 그의 부친 무옥이 그러했듯 훗날 천하가 그를 버릴지라도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그의 가 문 천추장군가가 그러했듯이, 십전옥수겁(十全玉手劫) 천무옥이 그러했듯이. 그는 운명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선은 힘을 모아야 했다. 악마천부의 힘은 사상초유였다. 그들에게 대항할 세력을 모으는 것이 급선무였다. 만력제로부터 만붕왕(萬鵬王)을 책봉받은 것은 하나의 전기였다. 그는 칠십이만금군과 천 명의 대내고수들을 명령할 수 있었다. 그 힘은 적은 것이 아니다. 아니, 엄청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살종이다. 천하의 모든 살종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검천령으로 수백 권의 무공기서들을 보냈다. 그것은 주천화의 제안이었다. 그녀는 악마천부와 싸우려면 무엇보다도 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 다. 결국 황궁밀고에서 수백 권의 전대 무공비급들을 모아 검천령 으로 보내게 된 것이다. 그가 이곳 불회림을 찾은 것은 녹림도의 힘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는 조화동의 기연을 얻었다. 그가 얻은 기연은 멸절된 녹림도의 뿌리를 찾은 것이었다. 조화동의 기연을 활용한다면 불회림에서 백만 녹림도를 수중에 넣 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악마천부와 무림의 운명을 건 일전을 결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흘흘흘! 담이 큰 녀석이군. 감히 허락도 없이 불회림에 들어오다 니?" 불쑥! 천운비의 앞에 나타난 괴인이 있었다. 울창한 침엽수림 사이에서 그는 마치 나무처럼 서 있다 움직인 것이다. 녹의(綠衣)를 걸친 괴인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자광이 흐르고 있 었다. 그것은 독공을 익힌 자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천운비는 담담히 그를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이곳은 지옥이 아닌데 어찌 못 들어오겠소?" "뭣? 지옥이 아니라고? 흐흐!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떤 자 들에게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지." "나는 그 어떤 자들에 해당되지 않소." 괴인은 눈알을 번뜩였다. "무슨 뜻이냐. 꼬마야?" "친구를 사귀러 왔소. 그래도 이곳이 지옥이어야 하는지 묻고 싶 구려." "친구?" 괴인은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코웃음쳤다. "방금 친구라고 했나? 크흐흐! 달콤한 말을 잘도 둘러대는구나. 꼬마야, 안됐지만 불회림의 친구는 단 한 부류뿐이다. 녹림도가 아니면 모두가 적이다." 천운비는 여전히 담담한 신색으로 말했다. "본인은 총표파자를 만나러 왔소." 괴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자광을 번뜩이며 천운비를 노려보 다 다시 괴소를 흘렸다. "흐흐! 총표파자께서 너같은 애송이를 만날 만큼 한가한 줄 아느 냐?" 천운비는 빙긋이 웃었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오." 괴인은 눈을 번쩍 빛냈다. "그래? 그럼 시험해 보거라." 그는 옆으로 물러나며 길을 비켜 주었다. "불회림에선 길을 막지 않는다. 흐흐!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총 표파자님을 무엇 때문에 만나려는지 몰라도 그 분을 만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게 무엇이오?" "불회림의 칠대관문(七大關門)을 통과해야 하지." "좋소, 그것이 규칙이라면." 천운비는 의연한 모습으로 괴인을 지나쳐 걸어갔다. "흐흐! 명심해라, 꼬마야. 제일관은 독관(毒關)이다." 등뒤에서 괴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알려주어 고맙소." 천운비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는 숲속으로 깊이 들어가 고 있었다. 울창한 숲속. 스스....... 담홍색 안개가 자욱히 바닥에 깔려 흐르고 있었다. '장독( 毒)이로군.' 천운비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곳은 수만 년을 두고 형성된 원시림이었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낙엽이 썩어 온갖 독충들이 서식하는 곳이었다. 그들의 배설물과 분비물이 혼합되어 독특한 독무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독무를 마시거나 접촉하게 되면 온몸이 푸석푸석 썩어 들어간 다. 천운비는 망설이지 않고 장독이 깔린 지역을 걸어갔다. 그의 하반 신이 온통 독무에 잠겼으나 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품속에는 피독신주(避毒神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간단하게 독관을 통과했다. 독관을 벗어나자마자 또 다른 괴인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안색이 불그스름한 홍면수사(紅面秀士)였는데 다짜고짜 말했 다. "제이관은 진관(陣關)이다." 홍면수사는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한마디 내뱉고는 홀연 히 사라져버렸다. "진법이라." 천운비는 낮게 중얼거린 후 숲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사위가 캄캄해졌다. 처음에는 숲이 울창해서 그런 줄 알았 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보았다. 주변에 나무가 한 그루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진세에 빠졌다는 것을 느꼈다. '침착하자. 일단 어떤 진법이 설치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는 마음을 평정하게 가라앉힌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육감을 발동했 다. 그러자 주변의 지형이 느껴졌다. 그가 있는 곳은 여전히 숲속 이었다. 다만 진세가 지형을 보이지 않게 했을 뿐이었다. '이제 보니 철흑마라진(鐵黑魔羅陣)이었군......!' 철흑마라진은 수백 년 전 마도사상 최고의 기재라는 마환객(魔幻 客)이 창안한 진법이었다. 혼진(混陣)의 일종으로 이 진법의 무서 움은 시야가 완벽하게 차단된다는 것이었다. 설사 천안통을 익혔 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진세가 발동하면 천지간의 이치를 역 전(逆轉)시키므로 육안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시야가 완벽히 차단된 상태에 빠지면 아무리 절정고수라 해도 암 습을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진법의 유래와 이치를 알게 되면 파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 다. 마도의 전설적인 진법인 철흑마라진도 천운비에게는 무용지물 이었다. 그는 십전천사의 한 명인 천뇌서생(千腦書生) 만기생의 진전을 십 분 이어받은 몸인 것이다. 잠시 후 그는 유유히 진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번째 관문에는 유사(流沙)가 펼쳐져 있었다. 그것도 백 장이 넘 는 지역이었다. 이곳은 지하수맥의 영향으로 지반이 형성되지 않은 채 유사가 흐 르고 있었다. 깃털 하나가 떨어져도 즉각 삼키는 유사는 사람은 물론 날짐승도 넘어가기 힘든 곳이었다. '이곳이 세번째 관문인 모양이군.' 스슷! 천운비는 신형을 날렸다. 그는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발을 옮기 며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있는 양 한 발 한 발 허공 을 밟고 올라갔다. 실로 기묘한 경공술이었다. 답공술(踏空術). 그것은 전설로나 전해지는 것으로 구룡환비도 상에서 익힌 것이었 다. 잠시 후 그는 무사히 유사지역을 통과했다. 네번째 관문에 접어들자 매캐한 유황냄새가 코를 찔렀다. 부글부글! 넓은 지역에 온통 유황이 끓고 있었다. 자욱한 황연이 덮인 가운 데 유황냄새가 현기증을 불러 일으켰다. 이곳은 지하의 유황소가 밖으로 노출된 곳으로 엄청난 열기와 유 황독을 뿜어내고 있었다. 천운비는 태연히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왜 돌아오지 않는 숲이라 부르는지 알겠군." 그는 유황소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몸에 담담한 백무(白霧)가 어렸다. 유황의 독기와 연기는 그 의 몸에서 한 치 이상 접근하지 못한 채 밀려나갔다. 그는 구룡지학의 하나인 음양천도결(陰陽天道訣)을 운용하여 발밑 으로 순음지기를 발출하여 유황의 열기를 차단시킨 것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유황소를 무사히 건넌 그는 다섯번째 관문에 접어들고 있었다. 검은 색의 바위 위에 괴인이 앉아 있었다. 봉두난발의 괴인은 어울리지 않게 오색의 채의(彩衣)를 입고 있었 다. 나이는 육순이 넘어 보였으며 머리가 보통 사람보다 두 배 이 상 컸다. 대두괴인(大頭怪人)은 천운비를 보자마자 괴상하게 웃었다. "헤헤헷! 드디어 친구가 오시는군. 이봐, 이리와 노부와 도박이나 한판 하자구." 천운비는 느끼는 바가 있어 빙긋이 웃었다. "오관은 도박관(賭博關)인 모양이구려." "꼬마야, 이 도왕(賭王) 헌원기(軒元奇)는 하루라도 도박을 하지 않으면 살지를 못하지. 물론 도박에 지면 이곳을 통과할 수 없음 은 물론이지." 도왕 헌원기는 대두를 흔들어대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오 랫동안 도박을 하지 못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었다.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어떤 것으로 하겠소?" 대두괴인은 불쑥 손을 뻗었다. 푸드드득! 마침 허공을 날던 새 한 마리가 허공섭물진기에 의해 그의 손아귀 에 빨려 들었다. 헌원기는 주먹을 움켜쥐고 말했다. "노부가 내는 문제는 간단하지. 주먹 속의 새 말일세. 살아있나? 아니면 죽어있나?" "......!" 천운비는 안색이 변했다. 그야말로 난감한 문제였다. 만일 살아 있다고 말하면 헌원기는 주 먹에 힘을 주어 새를 죽일게 틀림없었다. 반대로 죽었다고 말하면 손을 펼쳐 살려줄 것이 아닌가? 아무리 머리가 뛰어난 자라도 이같은 질문에 정답을 맞추기란 불 가능한 것이었다. 천운비는 잠시 생각하다 히죽 웃었다. 그는 헌원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었을 것이오." 헌원기는 득의의 괴소를 터뜨렸다. "헤헤헷! 꼬마야, 네가 졌다." 그는 주먹을 활짝 펼쳤다. "이 새는 멀쩡히 살아... 억! 주, 죽었다!" 그는 대경실색했다. 그의 손바닥 안에 있는 새는 죽어있는 것이었 다. "하하하! 자, 그럼 본인은 안으로 들어가겠소." 천운비는 낭랑하게 웃으며 바위 곁을 지나쳤다. 도왕 헌원기는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주먹으로 자신 의 머리를 치며 통곡했다. "어허어엉! 노부가 지다니... 도박 평생에 오점을 남기다니... 어 허어어엉!" 그는 정말 서럽게 울고 있었다. 한편, 천운비는 어떻게 새가 죽은 것을 맞추었을까? 실은 너무도 간단했다. 그는 헌원기가 새를 가볍게 움켜쥐고 있을 때 만겁지옥뢰의 만독제왕으로부터 배운 심령고술을 펼친 것이다. 고술로 주먹 속의 새를 죽인 것이었다. 이 오묘한 고술에 대해 헌원기가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띠디딩... 띵... 띵....... 아름다운 선율이 울렸다. 숲속에 아름다운 정자가 있었다. 정자 안에서 유삼을 입은 중년인 이 한가하게 앉아 비파를 타고 있었다. 비파음은 언뜻 듣기에는 감미로웠다. 정자로 접근해 가던 천운비 는 갑자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여섯번째 관문은 음공(音功)이었군!' 그는 약간 놀랐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힌 후 비파음을 들었다. 중년인이 타는 곡은 칠백 년 전 음공(音功)의 일인자였던 천음마 제(天音魔帝)의 파천소혼곡(破天消魂曲)이란 것이었다. 띵띠딩... 띵......! 음률은 처음에는 잔잔히 흐르다가 갑자기 격렬해지며 광풍폭우처 럼 변했다. 화드득...... 딱! 딱! 음률의 폭풍에 휘말린 숲속에 이변이 일어났다. 나뭇가지가 뚝뚝 분질러지는가 하면 작은 나무는 뿌리째 뽑혀지고 있었다. 실로 가 공할 일이었다. 한순간 음률이 날카로워지더니 비수처럼 예리하게 고막을 파고 들 었다. 캬아악! 칵! 숲속 여기저기서 짐승들이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죽어 자빠졌다. "......." 천운비는 목각처럼 선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반면 중년인 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그는 과다한 내공 소모로 기혈이 역류한 것이었다. 그는 경악과 두려움에 찬 눈으로 천운비를 바라보았다. "훌륭한 곡이었소."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인 후 품속에서 검은 색의 피리를 꺼냈다. 그것은 황궁의 천병신고(天兵神庫)에서 얻은 묵적이었다. 그는 묵적을 입에 대고 불기 시작했다. 삘리리....... 순간 중년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오체투지했다. "오오! 음제(音帝)의 현신을 알현하옵니다......!" 음제(音帝). 그는 천 년 전의 인물로 음문(音門)의 조사였다. 그는 천음삼절(天音三絶)이란 음공을 창안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 가 세운 음문은 당대에 십전천사의 일원인 천음선자(天音仙子)에 게 전해졌다. 천운비가 불고 있는 피리는 바로 음제가 사용하던 천음신적(天音 神笛)이란 것이었다. 중년인은 천음신문에서 갈라져 나온 한 지류인 파음문(巴音門)의 후예였다. 때문에 그가 음제의 신물을 알아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 한 일이었다. 어쨌든 천운비는 무사히 여섯번째 관문을 통과했다. 불회림이 끝났다. 울창한 숲을 벗어나자 눈앞이 탁 트이며 거대한 분지가 나타났다. 분지에는 거대한 성채(城寨)가 자리잡고 있었다. 성채 안쪽에는 고루거각이 솟아있어 황궁을 방불케 하는 규모였다. 천운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놀랍구나, 불회림 한가운데 이런 곳이 있다니.' 그는 성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가자 다리(橋)가 나타났다. 숲이 있는 곳과 분지의 경계지 점에 내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리는 꽤 길었다. 대충 계산해 보아도 이십여 장 가량 되었다. 다리는 목교였는데 운치있게 만들 어져 있었다. "......!" 천운비는 눈썹을 모았다. 목교 한가운데 열두 명의 노인들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 두 백발은염에 녹색장포를 입고 있었다. 하나같이 칠순이 넘어보 였다. 천운비는 그들을 바라보며 다리 위로 걸어갔다. 잠시 후 열두 명 의 노인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한 백발노인이 입을 열었다. "육대관문(六大關門)을 통과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이 제 우리 늙은이들만 통과하면 총표파자님을 만날 수 있소이다." 노인은 정중하게 말했다. 조금도 상대를 무시하는 빛이 없었다. 천운비는 내심 감탄했다. '녹림도는 생각보다 훨씬 절도가 있구나. 지금까지 만난 자들만 해도 그 기도가 평범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떻게 통과하면 되오?" "간단하오. 우리 녹림십이신(綠林十二神)의 합공(合功)을 받아내 면 되오." 녹림십이신은 녹림계의 원로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백여 년 전부터 녹림최강의 고수들로 한 가지씩의 독 특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어 녹림도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 었다. 특히 그들이 함께 펼치는 합벽진(合壁陣)은 녹림일절(綠林一絶)로 꼽힐 정도로 무적이었다. "자, 시작하겠소." 백발노인의 구두신호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파파팟--! 검도창륜월부곤척편조도극(劍刀槍輪鉞斧棍尺鞭爪刀戟). 열두 가지의 각각 다른 병기가 폭풍처럼 날아왔다. 가히 태산이라 도 쓸어버릴 듯한 위력이었다. 열두 명이 동시에 펼치는 공격은 천지사방을 위맹하게 휩쓸어 왔 다. 천운비는 어디로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어깨 를 흔들었다. 스스스! 그의 모습이 흐려졌다. 마치 연기처럼 뿌옇게 화한 신형이 녹림십 이신의 사이를 누볐다. 그들의 병장기 사이를 바람처럼 빠져나갔 다. 그러나 녹림십이신의 공격은 숨쉴 틈도 없이 이어졌다. 마치 장강대하처럼 한순간도 끊이지 않고 공격이 계속되었다. 순식간에 이십사초의 공격이 퍼부어졌다. 콰르르르! 천운비는 야무비(夜霧飛)를 펼쳐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약점을 찾 았다. 그들의 합공은 일정한 진세 형식을 띄고 있었다. 머지 않아 그는 진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하하! 좋은 진세외다!"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린 그는 쌍수를 뻗었다. "어억?" 녹림십이신은 다급한 신음을 발했다. 그들의 눈이 한껏 커지고 있 었다. 허공에 수많은 손의 환영이 일어난 것이다. 천 개의 손바닥 이 허공을 뒤덮었다. 녹림십이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분명 손이었다. 그 손이 그들의 전신 요혈을 향해 우박처럼 떨어졌다. 그들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퍼엉! 펑! 둔탁한 굉음과 함께 녹림십이신은 뒤로 연달아 물러섰다. 그들은 중심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휘청거렸다. 단 일초에 합벽진이 와해되고 만 것이다. 더 이상 싸운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시인했다. "졌소......." 예의 백발노인의 입가에 선혈이 흘러나왔다. 그는 뒤로 물러섰다. 길이 트이자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갔다. "고맙소이다.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오." 추호도 교만하지 않되 위엄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녹림십이신의 얼굴에는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으음, 나이는 어리지만 이 자는... 일대종사의 풍모를 지니고 있 구나.' 천운비는 저만치 걸어가다 돌아서며 말했다. "소생은 총표파자를 만나러 왔소이다. 어떤 분이 안내해 주시겠 소?" 우두머리인 듯한 백발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노부를 따라 오시오." "고맙소이다." ■ 무림백서 3권 제23장 녹림(綠林)의 지기(知己) ━━━━━━━━━━━━━━━━━━━━━━━━━━━━━━━━━━━ 호수(湖水). 녹림십이신에 의해 안내된 곳은 둘레가 십여 리는 족히 되어 보이 는 호숫가였다. "총표파자님은 이곳에 계시오." "......?" "그럼 이만......." 노인은 포권한 후 돌아서 사라졌다. 천운비는 의아한 표정으로 호 수를 둘러보았다. 호수는 맑았다. 수면은 거울처럼 잔잔하여 하늘 이 그대로 비쳐보였다. 호수를 바라보노라니 세상사가 덧없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는 서 서히 호숫가를 걷기 시작했다. '총표파자란 위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군. 이런 곳에 산다면 보통 사람은 아닐 터인데.' 얼마쯤 걸었을까? 호숫가를 거닐자니 마음이 가라앉으며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자 칫 이곳에 온 이유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팔랑! 어디선가 낙엽 한 장이 떨어져 호수 위에 떨어졌다. 잔잔한 수면 위에 작은 파랑이 일었다. 천운비는 내심 중얼거렸다. '한낱 낙엽 한 장이 떨어져도 파문이 일거늘.... 인간사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욕망도 이기심도 천년을 지나면 낙엽 한 장만도 못한 것인데.......' 그는 흠칫했다. 저만치 앞쪽에 누군가 한가롭게 호수에 낚시를 드 리우고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곳에서 고기를 잡다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곳은 녹림도의 본거지인 불회림이다. 이런 곳에서 한가하게 낚 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다. 그 자는 회의(灰衣)을 입고 있었으며 방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 었다. 호수처럼 담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연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고즈넉한 인물이었다. 비록 뒷모습만 으로는 나이를 알 수 없었으나 이미 허무(虛無)의 경지를 뛰어넘 은 인물처럼 느껴졌다. 천운비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회의인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낚싯대를 던진 채 앉아 있는 그 는 설사 등뒤에서 태산이 무너진다해도 까딱도 하지 않을 것 같았 다. "......." 천운비는 잔잔한 수면에 박혀 있는 듯한 찌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미끼를 물지 않은 듯 찌는 수면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문득 찌가 움직였다. 순간 회의인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낚싯대를 들어 올렸 다. 휙......! 낚싯대가 반원처럼 휘어졌다. 파드득......! 낚싯줄 끝에는 한 자가 훨씬 넘는 커다란 금빛 잉어가 걸린 채 펄 떡거리고 있었다. 천운비는 흥이 일어났다. 그는 평생 한 번도 낚시를 해본 적이 없 었다. 그러니 몹시 신기한 느낌이 든 것이다. 이때 회의인이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핫, 이놈아! 너는 어제도 잡혔는데 오늘 또 잡히느냐? 어리 석은 놈, 내가 그리도 좋단 말이냐?" 회의인은 잡힌 잉어를 쥔 채 눈을 들여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천운비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물고기가 어찌 말을 알아듣는단 말인가? 어지간히 한가한 친구로 군.' 이때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회의인은 잉어를 놓아주었다. 잉어는 한 차례 유유히 원을 그리며 물가를 맴돌다 사라졌다. "이놈아, 다시는 걸리지 말아라. 네 녀석만 자꾸 올라오면 다른 녀석들은 세상 구경을 어찌 한단 말이냐? 다른 놈들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회의인은 다시 낚싯대를 던졌다. 그때였다. "......!" 천운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낚싯줄 끝에 의당 있어야 할 바늘 이 달려있지 않은 것을 본 것이다. '저럴 수가? 바늘도 없이 낚시를 하다니... 대체 무슨 수로 고기 를 낚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회의인에 대해 강한 호기심이 일어났다. '혹시?' 그는 회의인에게 다가갔다. "귀하는 어째서 잡은 고기를 놓아주시오?" 회의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나는 양식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고기를 잡아 무엇 하겠소?" 천운비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낚시를 하시오?" "후후, 사람이란 본시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소? 당신은 그런 적 이 없소?"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귀하의 말이 맞는 것 같소. 하긴 나 역시 쓸데없는 일 로 이곳에 왔으니 말이오." 회의인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하지만 낚시질은 결코 쓸데없는 일은 아니오." "......?" 천운비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흘렸다. "하하! 하루종일 호숫가에 앉아 고기를 잡았다 놓아주는 것이 쓸 데 있는 일이란 말이오?" "고기와의 대화란 알고 보면 꽤 흥미있는 일이오." 회의인의 대답이었다. "그럼 당신은 단순히 흥미 때문에 고기를 낚았다가 다시 풀어준단 말이오?" 회의인은 도리어 반문했다. "그럼 당신은 흥미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이오?" 천운비는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살지 않고, 그렇다고 탁하면 고기 는 죽는 법이오." "......."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회의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 른 후 회의인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맞는 말이오. 하지만 사람에 따라 다르오. 나는 누군가 날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소. 내가 먼저 남을 건드리는 일은 하지 않소." 천운비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세상사란 그리 단순하지가 않소. 토끼는 연약하여 한 번도 남을 해한 적이 없소. 그래도 범의 먹이가 되지 않소? 그것이 바로 약 육강식의 법칙이 아니오?" 회의인의 몸이 굳어졌다. 빙글! 그는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방갓 아래로 한쌍의 차가운 눈이 빛 났다. 천운비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총표파자, 난 당신의 친구가 되고자 찾아왔소. 천운비라 하오." 총표파자. 낚시를 하던 회의인이야말로 백만 녹림도의 영수인 총표파자였다. 천운비는 그의 기도로 미루어 확신했던 것이다. 회의인, 즉 총표파자는 방갓을 벗어버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푸른 숲에 사는 사람은 영웅을 마다하지 않소." "......!" 천운비의 얼굴에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뜻밖이었다. 그는 상대가 최소한 오륙십대는 되었으리라 생각했 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방갓을 벗은 총표파자의 모습 은 많아봐야 이십대 중반에 불과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영준하기 그지없는 미청년이었다. 칼끝처럼 뻗은 검미(劍眉)와 고집스러워 보일 정도로 우뚝한 콧 날,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입술과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 헌칠 한 이마는 매력이 넘치는 미장부의 그것이었다. 총표파자는 몸을 일으키더니 정중히 포권했다. "이 사람은 백불범(白不凡)이라 하오. 푸른 숲을 찾아준데 대해 감사와 환영의 인사를 드리는 바요." 그는 인사를 마친 후 거침없이 손을 내밀었다. 천운비는 그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과 손에 굳센 힘이 들어 갔다. 두 사람은 동시에 뜨거운 직정(直情)을 느꼈다. 그것은 사 나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호쾌한 정이었다. 그들은 비록 처음 만났으나 마치 오랜 세월을 두고 우정을 나눈 사이처럼 의기가 투합하는 것을 느꼈다. '정말 뜻밖이다. 녹림 총표파자가 이토록 비범한 인물이었을 줄이 야.' 천운비는 상대에게 끌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백불범도 마찬가 지였다. 사나이끼리의 정은 남녀 사이의 정과는 다르다. 한 번 맺어지면 영원히 변치 않으며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우정인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백불범은 호탕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형이 숲을 통과한 경과를 보고 받았소이다. 정말 대단한 실력 이외다." 천운비는 담담히 말했다. "과찬이오." 그는 호수를 한 차례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에 온 후로 녹림도를 새롭게 보게 되었소이다. 더구나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는 백형에게 질투가 납니 다." "하하하! 천형이 원한다면 영원히 이곳에서 함께 살아도 좋소이 다." "하하! 농담이었소이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아무런 사심도 없는 웃음이요, 서로에게 강한 호감을 표현하고 있는 웃음이었다. 달빛이 흐르는 밤. 호숫가에 자리잡은 정자에도 달빛이 교교하게 비치고 있다. 이 정자의 이름을 망월정(望月亭)이라 붙인 것은 글자 그대로 달 빛을 바라보기가 너무나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 가을밤의 달빛은 낭만적이었다. 게다가 술이 있고 친구가 있다면 어찌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망월정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연신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 다. 천운비와 백불범. 두 젊은 영웅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뜻이 통하면 모든 것 이 통하는 법이다. 그들은 짧은 사이에 지기가 되었다. 백불범은 아쉬운 듯 천운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천형,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내셨기에 이제야 이곳을 방문하셨단 말이오?" "하하! 그러게 말이오. 진작 이곳을 알았더라면 벌써 달려왔을 것 이오." 백불범은 문득 진지하게 말했다. "천형에 대해 알고 싶소이다." "하하, 물론이오. 백형에게라면 무엇을 숨기겠소이까?" 천운비는 백불범의 호탕한 기도에 끌려 숨김없이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었다. 그의 얘기가 계속됨에 따라 백불범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특히 천운비가 십전옥수겁 천무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 을 때는 격동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천형, 내가 소년 시절이었을 때 가장 존경했던 분이 바로 선부이 신 무옥(武玉)님이었소." "아버님을......?" 천운비는 가슴이 진동했다. "무옥님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던 이상적인 무인상이셨소이다." "......!" "이제 그 분의 후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소이다." 백불범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포권했다. "영광이오. 또한 천형이 아버님의 뜻을 이어받으신 데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오." 천운비는 눈물을 흘렸다. "아니, 천형!" 백불범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천운비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는 씨익 웃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천무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다. 잃어버렸던 뿌리를 되찾은 느낌에 절로 눈물이 흘러내린 것이다. 백불범은 안심한 듯 말을 계속했다. "백모는 영웅을 존경하오. 존경하는 무옥님의 후인이신 천형을 만 난 것은 금생의 영광이오. 내게 이런 행운이 올 줄은 몰랐소이 다." 천운비는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농담을. 이 천모가 백형께 무엇을 해드렸다고 그러시오." "아니오. 소생은 천형을 만나게 된 것을 하늘에 감사하고 있소이 다." 천운비는 정색하며 말했다. "백형, 도리어 천모가 할 말이오. 이 사람은 백형이 푸른 숲에서 유유자적 인생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감복했소이다." 백불범은 흠칫 하더니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 말씀 언중유골이외다." "하하! 농담이었소. 자, 술을 받으시오." 젊음은 좋은 것이다. 두 사람은 비록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 았으나 금세 백년지기인 양 친해졌다. 그들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자연을 얘기하며 즐겁게 담소했다. 충분히 준비한 술도 그들이 밤 새 마시게 되면 부족할 게 틀림없었다. "하하! 이거 주량이 대단하구려, 백형." "천형이야말로 강적인 것 같소이다. 하하핫!" 주흥은 더욱더 무르익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운비는 안색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백형,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무엇이오?" "당금무림에 대한 백형의 생각을 듣고 싶소이다." "......!" 백불범의 안색이 침중하게 변했다. 그는 눈앞의 술잔을 단숨에 비 우더니 눈을 반쯤 감았다. "소생의 생각으로는... 솔직히 암흑과도 같소이다."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흑이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음, 천형께서 몰라서 묻는 말씀은 아닐 것이오. 무림정기가 땅에 떨어졌고 악마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어찌 암흑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소?" 천운비는 그를 정시하며 입을 열었다. "역시 백형의 식견은 탁월하구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이 다. 한데 백형은 현무림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영세태평무국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시오?" 백불범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하며 물었다. "천형께서 알아낸 바가 있는 모양이구려?" "영세태평무국의 정체는 악마천부외다. 오래 전부터 전설로 내려 오는 이대악마지겁의 하나인 것이오." "그... 그럴 수가?" 백불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상황은 심각해 졌소이다. 이미 이십팔정문이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뿐더러 놈들의 마수는 강호에 국한되지 않고 황궁까지도 뻗고 있소이다." "그게 사실이오?" 백불범의 안색이 몇 차례나 변했다. 천운비는 그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백형, 이곳은 변함없이 푸른 숲을 지키고 있으나 안심할 수는 없 는 일이오. 악마천부는 머지 않아 이곳마저 짓밟으려 들 것이오." "......!" "악마천부가 푸른 숲을 당장 짓밟지는 않는다 해도 그건 한시적일 뿐일 것이오. 내가 백형을 찾아온 것은 그때문이오." 백불범은 시선을 호수로 향했다. 그의 눈에서 신광이 번쩍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불범은 고개를 돌려 천운비를 바라보았다. "천형의 말씀을 듣고 보니 비로소 개안(開眼)하는 듯한 느낌이 오." 천운비는 희색이 만면해졌다. "오, 그렇다면 날 도와주시겠소?" 백불범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돕고 말고가 어디 있소? 이 백모는 결코 이 아름다운 푸른 숲을 악마에게 내놓지 않을 생각이오. 아니, 그 전에 먼저 놈들을 제거하는 게 순서가 아니겠소?" "백형!" "천형!"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굳게 마주잡았다. 마침내 두 젊은 영웅의 의기가 투합했다. 백만 녹림도의 총표파자 인 백불범과 만붕왕 천운비가 손을 잡게 된 것이다. 다시 술잔이 돌았다. 일단 마음을 합치기로 한 두 사람은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 다. 천운비는 아직 털어놓지 않았던 조화동의 일을 얘기했다. 조화동은 녹림도의 근원(根源)이다. 녹림인이라면 누구나 조화동 에 들기를 꿈꾸어 왔다. 백불범은 그가 조화동의 진전을 얻었다는 말에 크게 놀라워했다. "오오! 천형께서... 그곳의 기연을 얻으셨다니......." 갑자기 그는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바닥에 엎드렸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천운비는 놀라 그를 일으키려 했다. "아닙니다. 조화동은 녹림의 고향입니다. 그곳의 진전을 얻었다면 녹림인은 마땅히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이 백불범... 녹림 대종사(綠林大宗師)를 뵈옵니다!" "......!" 천운비는 망연자실했다. 그렇다. 조화동의 진전을 얻는 자 녹림대종사가 된다는 말은 녹림 에 전해져 오는 오래된 전설이었다. 그 전설이 실현된 것이다. 천운비는 한동안 백불범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에 갈등이 일어 났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도 불회림을 수중에 넣기 위함이었다. 하지 만... 인위적으로 손에 넣는 것은 그 껍데기만 얻는 것에 불과하 다. 백형은 진정한 장부다. 그의 마음을 얻는 것이 곧 녹림을 얻 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백불범을 마주한 채 무릎을 꿇었다. 백불범은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대종사......?" "아무 말 마시오.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당장 이곳을 떠나겠소." "......?" 백불범은 의혹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천운비는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백불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백형과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소이다. 차라리 결의 형제가 되는 것이 어떻겠소?" 백불범의 안색이 변했다. "감히 어찌......." 천운비는 벌떡 일어서며 차갑게 말했다. "백형이 이 사람을 신뢰하지 않으니 난 이만 가야겠소이다."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형님!" 격동에 찬 음성이 울려왔다. 천운비는 돌아섰다. 백불범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뜨거운 정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백불범, 영원히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비록 태어난 시는 달 라도 죽을 때는 함께 죽겠습니다! 이 아우를 받아 주십시오." 천운비는 가슴이 뛰었다. 그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백불범의 손을 마주잡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그는 한동안 할 말을 잊 었다. 비록 나이로 친다면 백불범이 몇 살 더 많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안되었다. 천운비는 녹림대 종의 신분이므로 엄밀히 말한다면 총표파자인 백불범의 존장인 셈 이었다. 그러므로 백불범이 그를 형님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형제가 되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들은 허심탄 회한 기분이 들었다. 술잔이 다시 몇 순배 돌고나서 천운비는 엄 숙하게 말했다. "내 아우에게 줄 것이 있네." 그는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내밀었다. "무엇입니까, 형님?" "그것은 본시 녹림의 물건이니 자네가 보관하는 것이 나을 것이 네." 백불범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펼쳐보았다. "이... 이것은?" 백불범의 얼굴에 경이로움이 떠올랐다. 두루마리에는 빽빽한 무공 구결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조화동에 비장되어 있던 녹림도의 절전된 무공들이네. 녹 림에 돌려주기 위해 옮겨적은 것들일세." 백불범은 감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아! 형님.... 이런 귀중한 것을 저에게 주시다니......." "하하! 이 사람, 형이 아우에게 선물을 주는 것인데 무슨 소린가? 그걸 녹림도에게 익히게 한다면 녹림의 실전된 무학을 되살릴 수 있으니 장차 녹림은 크게 부흥할 것이네." "정말... 고맙습니다. 형님." 삼일이 지났다. 천운비는 불회림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불회림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녹림의 세력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백불범은 그에게 녹림의 현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녹림인들은 전 무림에 그물처럼 퍼져 있었다. 불회림에 상주하는 녹림고수들만 해도 삼만이 넘었으며 그밖에 무림에 퍼져있는 녹림 인은 백만을 헤아렸다. 천운비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 달리 녹림인들이 대단히 정직하 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표물을 약탈하거나 도적질 따 위를 끊은 지 오래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백불범이 총표파자가 된 후 바뀐 것이었다. 백불범은 녹림인들이 비적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그가 벌인 사업체는 실로 다양하기 그지 없었으니. 해운업(海運業), 도박장(賭博場), 전장(錢場), 기루(妓樓) 등이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리는 사업체였다. 그밖에도 수많은 사업에 손 을 대었으며, 사업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녹림인들로 자 신의 신분을 완벽하게 속이고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그 결과 녹림의 재산은 나날이 불어나 가히 천하의 절반을 살 정 도가 되었으나 그 사실을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특히 녹림도의 정보망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의 정보망은 천하제일의 소식통을 지니고 있다는 개방( )을 일찍이 능가하 고 있었다. 불회림의 조직만 해도 놀랄 만큼 잘 짜여져 있었다. 구전(九殿), 삼각(三閣), 사당(四堂), 오보(五堡), 팔루(八樓)가 주축으로 십이향주(十二香主), 삼십육기령(三十六旗令), 칠십이녹 반(七十二綠班) 등의 질서정연한 명령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같이 엄청난 일을 백불범은 불과 약관의 나이에 이룩해 냈다. 그는 가히 녹림이 배출한 최고의 기재였던 것이다. 천운비는 내심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아우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로구나. 과연 그 누가 이런 대단한 일을 이룩해 냈단 말인가? 그는 녹림의 총표파자가 아니라 대종사 가 된다 해도 어울리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크게 고무되었다. 그래서 삼일 동안 불회림에 머물면서 백여 명의 청년고수들에게 직접 무학을 지도했다. 백불범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천운비의 무학이 깊이를 모를 정도 로 심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비록 사흘 동안이긴 하지만 백 명의 녹림도 청년고수들에게는 평생의 기연을 만난 것이나 다 름없다고 생각했다. 호수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한 채의 소축. 그곳은 백불범이 천운비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처소였다. 천운비 는 소축의 정자에서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지도 어언 사흘이 지났다. 지금 그의 마음은 무척이나 흡족했다. 평생의 지기인 의형제 결의를 맺었으며, 백만 녹림도의 세력을 얻 게 되었다. 그가 의도한 모든 것을 얻고도 남은 것이다. 그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백아우 덕분에 모든 것이 수월해졌다. 특히 녹림의 힘이 생각보 다 강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렇게 되면 악마천부와 대등한 힘을 지닌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정자로 다가오는 인영이 있었다. "형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아, 백아우." 천운비는 돌아서며 미소지었다. 백불범은 정자로 오르며 묘한 표 정을 지었다. "오늘은 형님을 색다른 곳으로 초대할까 합니다." "색다른 곳?" "하하! 가시면 압니다. 절 따라 오십시오. 그동안 무공을 가르치 시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 않습니까?" "......?" 천운비는 의아했으나 백불범이 앞장 서자 더 묻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백불범은 호숫가의 선착장에 그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한 척의 소선(小船)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소선에 올랐다. 끼이익...... 끼익......! 백불범은 직접 노를 저었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연신 싱글거리고 있었다. "형님, 이 호수의 물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천운비는 사방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군. 이렇게 넓은 호수의 물이 어디서 발원된 것인지 모르겠 군." 백불범은 서서히 노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이 호수는 멀리 황하(黃河)의 지류와 통하고 있습니다. 아 무리 가뭄이 들어도 이곳의 물은 줄어드는 법이 없지요." 얼마쯤 갔을까? 갈대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이 나타났다. 배는 갈대밭을 향해 미끄 러져 가고 있었다. '......?' 천운비는 의아했다. 갈대가 워낙 빽빽하여 아무리 봐도 배가 들어 갈 틈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촤아아아! 배는 그대로 갈대 속으로 밀고 들어갔다. "아!" 천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우거진 갈대를 일장 쯤 밀고 들어가자 빽빽한 갈대 사이로 가느다란 수로(水路)가 나타났 던 것이다. 겉으로 봐서는 조금도 알 수 없는 수로였다. 그야말로 은밀하기 그지없었다. "이 수로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백불범은 히죽 웃었다.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입니다." "그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걸세." "가보시면 압니다. 아마 형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백불범은 약을 올리는 듯 웃기만 했다. 그는 수로 사이를 익숙하 게 노를 저어 나아갔다. 얼마 후 갈대밭이 끝나고 시야가 확 트였다. "이곳입니다. 형님." 백불범은 손을 들어 가리켰다. 눈앞에는 호수가 있었다. 호중호 (湖中湖)! 몹시 특이한 정경이었다. "......?" 호수 한복판에는 한 척의 배가 유유히 떠 있었다. 그 배는 꽤 규모가 큰 목선이었다. 마치 물위에 떠 있는 한 채의 아름다운 장원(莊園)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옮겨 타야 합니다." 소선이 목선에 다가가자 백불범은 노를 놓았다. 휙! 그는 먼저 신형을 날려 목선에 올라탔다. 천운비도 그의 뒤를 따 라 목선에 올랐다. "형님께 소개할 사람이 있습니다." "......?" 천운비는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때 선실의 문이 열 리며 두 명의 녹의를 입은 소녀가 걸어나왔다. 귀엽게 생긴 십육칠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소녀들이었다. 복장으로 미루어 시비인 듯했다. 비록 나이는 어려 보였으나 두 시비의 몸매는 굴곡이 완연하여 육 감적인 느낌을 주었다. "대종사님을 뵈옵니다." 두 시비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천운비는 황급히 소매를 저었 다. "예는 거두시오." "......!" 두 시비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그녀들의 몸을 떠받쳤던 것이다. 그녀들은 천운비를 훔쳐보며 얼굴을 붉혔 다. "들어갑시다, 형님." 백불범이 서둘러 선실 안으로 향했다. 천운비는 점점 더 궁금해졌 다. '이런 곳에 목선이 떠 있고 또 이 두 시비의 용모만 해도 보통이 아니다. 대체 누가 살고 있는 걸까?' 선실 안은 아늑했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융단으로 깔려 있었으며 집기들은 하나하나가 정갈하고 품위가 느껴지는 것들로 배치되어 있었다. 천운비는 선 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곳에 배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마치 한 아름다운 장원의 내부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선실 안에는 이미 주석(酒席)이 마련되어 있었다. 탁자 위에는 진 수성찬이 차려져 있었으며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천운비는 군침이 돌았다. 김이 피어오르는 음식에서는 향기가 물씬 풍겼다. 마침 시장기를 느끼던 참이었던 것이다. 백불범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아니, 손님을 초대해 놓고 어디로 간 거지? 화연(花燕)아, 네가 보고 싶어하던 형님을 모시고 왔는데 인사도 안 할 셈이냐?" 천운비는 흠칫했다. 이때 내실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나왔다. "......!" 천운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경이를 금치 못했다. 내실로부터 걸어나온 것은 연남빛 나삼을 입은 미녀였다. 바람만 불어도 꺾일 듯이 가는 세류요, 삼단같이 빗어내린 머리카 락, 걸을 때마다 하늘거리는 나삼 아래로 앙징맞게 작아 보이는 발, 환상적인 몸매의 여인이었다. 나이는 이제 십팔구 세 가량 되어 보일까? 앵두같은 입술과 살구 같은 눈,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볼, 혜성을 닮은 한 쌍의 눈은 가 히 꽃중의 꽃을 보는 듯했다. "하하하핫! 말괄량이가 오늘은 제법 계집 티를 내는구나?" 백불범이 호탕하게 웃자 여인은 상큼 눈을 뜨더니 쏘아 부쳤다. "흥! 오라버니, 정녕 그러시긴가요?" 그녀는 성격이 발랄한 듯했다. 그러나 천운비가 계속 자신을 바라 보고 있자 갑자기 홍당무가 되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하하! 형님, 누이동생입니다. 글쎄 먼 발치서 형님을 한 번 본후 줄곧 소개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지 뭐요. 화연이라 합니다. 아니, 넌 인사 드리지 않고 뭐하느냐?" 백불범은 너스레를 떨었다. 천운비는 먼저 포권했다. "천운비라 하오." 백화연은 목덜미까지 붉히며 날아갈 듯이 인사했다. "소녀 백화연(白花燕)이라 하옵니다." "하하! 녀석 그래도 여자라고 부끄러움을 탈 줄도 아는구나." 백불범은 기분이 무척 좋은 듯 유난히 말이 많았다. 백화연은 살 짝 눈을 흘겼다. "오라버니!" "하하! 알았다, 알았어." 두 남매의 모습에 천운비는 가슴이 훈훈해 지는 것을 느꼈다. "형님, 우리 남매는 어릴 적부터 외롭게 자라왔소이다. 형님도 화 연이를 동생처럼 여겨주면 좋겠습니다." "아우의 누이라면 내게도 누이인 셈이지." 천운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백불범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기념으로 저 아이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심이 어떻습니까?" 천운비는 빙긋이 웃었다. "이제 보니 자네 내 밑천을 몽땅 들어낼 셈이로군?" "하하! 형님의 무학은 바다같이 깊은데 몇 수 빼낸다고 흔적이나 나겠습니까? 이 아우가 부탁드리는 걸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 요?" 한편 백화연의 봉황과도 같은 눈은 줄곧 천운비에게서 떠나지 않 고 있었다. 그녀의 뺨이 더욱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주석이 벌어졌다.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오늘따라 백불범은 기분이 좋은 듯 줄곧 농담으로 일관했고 천운비도 간만에 긴장을 풀고 마음껏 즐기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백화연은 본래의 명랑한 성품으로 돌아가 활달해졌 다. "소녀의 술을 한 잔 받으세요." "고맙소." 천운비가 잔을 내밀자 백화연은 곱게 눈을 흘겼다. "아이, 오라버니. 편하게 대해 주세요." "하하! 알겠다, 화연." 쪼르륵....... 옥배(玉杯)에 호박색 미주가 찰찰 넘치고, 술잔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천운비는 단숨에 술잔을 비운 뒤, 잔을 내밀었다. "화연도 한 잔 받아라." "호호! 물론이지요, 오라버니." 주흥은 무르익어갔다. 몇 순배의 술잔이 오고 가고 세 사람은 적 당히 취기가 올랐다. 궁등 아래 주기로 인해 발갛게 달아오른 백화연의 얼굴은 마치 한 떨기의 장미와도 같았다. 그녀는 시종 천운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녀가 뜨거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때마다 천운비는 가슴이 진 탕하는 것을 느꼈다. 이때 백화연의 대담한 행동을 보며 백불범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핫! 네 표정을 보니 오라비가 아니라 마치 다정한 연인을 보는 듯 하구나?" "어머!" 백화연은 화들짝 놀라며 그만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천운비는 어 색함을 금치 못해 연신 헛기침을 했다. 백불범은 한마디로 그치지 않았다. "이 오라버니의 술잔에는 관심도 없으니, 이거야 원 누이동생을 눈 멀쩡히 뜨고 뺏긴 꼴이 되었군. 하하하!" 천운비는 급히 술병을 집어 들었다. "아우, 우형이 한 잔 따르겠네." 백불범은 단숨에 술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아우는 이만 나가봐야 겠습니다." "아우?" 천운비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러나 백불범은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선실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 선실에는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잠시 후 백화연이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천가가의 무학이 신기에 가깝다고 들었어요." 천운비는 어색하게 말했다. "그건 아우가 과장한 것이다." 백화연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청했다. "소녀에게도 한 수 가르쳐 주시면 안될까요?" "......." 천운비는 잠시 생각해본 후 물었다. "화연은 어떤 무기를 사용하지?" 백화연은 교구를 일으키더니 허리띠를 끌렀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에 감겨있던 것은 연검(軟劍)으로 여인이 쓰기에 알맞는 병기 였다.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에서 검법을 시전해 보일 수 있을까?" 백화연은 수줍은 미소를 띄웠다. "알겠어요. 하지만 흉보시면 안돼요?" "엇!" 천운비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갑자기 그녀가 나삼을 벗어던졌 기 때문이었다. 나삼 속에는 몸에 찰싹 달라붙는 푸른색의 경장이 나타났다. 경장은 그녀의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옷을 입지 않은 듯 팽팽하게 솟아난 유방과 잘록한 허리, 팽팽한 둔부가 그 대로 느껴졌다. 천운비는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이때 백화연은 연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쐐애액! 허공을 울리는 날카로운 소성에 이어 교구가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가볍게 허공으로 떠오르며 두 발을 교차시키는가 하면 몸 을 수평으로, 뒤로 완전히 젓히며 연검을 휘둘렀다. 가히 날렵한 자세요, 변화무쌍한 검무(劍舞)였다. "......." 천운비는 넋을 잃은 듯 그녀의 검무를 바라보았다. 천상의 선녀가 하강한 듯, 월궁(月宮)의 항아(姮娥)가 춤을 추는 듯 검무는 그녀의 미려한 육체의 선과 융화된 채 끊임없이 이어졌 다. 그녀의 검법은 빠르고 변화가 무쌍했다. 천운비는 정신을 가다듬 고 그녀의 검초를 주시했다. 이윽고 검무가 끝났다. 백화연은 콧등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채 동작을 멈추었다. "부끄러워요, 소녀는 백팔난화검법(百八蘭花劍法)을 익혔지만 아 직 화후가 형편없어요." 천운비는 눈을 가늘게 한 채 말했다. "화연, 지필묵을 가져다 주겠소?" "물론이에요." 백화연은 시비를 불러 지시했다. 잠시 후 시비가 지필묵을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천운비는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춤추듯 놀리는 붓끝을 따라 구결이 적혀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 는 여러 개의 그림을 그려넣기도 했다. 첫번째 그림은 바로 백화 연이었다. 날렵한 경장을 입은 백화연이 연검은 안은 채 한쪽 발 로 중심을 잡고 빙글 회전하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지켜보던 백화연의 눈망울이 커졌다. "......!" 그녀는 자신의 검법에 커다란 헛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가 익힌 백팔난화검법은 빠르긴 했지만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것은 신법에 안정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일 강적을 만나 힘이 밀리게 되면 중심을 잃게 되고, 검법의 자 세가 흐트러져 위력이 크게 감소되는 단점이 있었다. 천운비는 종이 위에 여러 개의 발자국을 그렸다. 그것은 일종의 보법(步法)이었다. 백화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 음속으로 발자국을 따라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녀의 눈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그대로 운신(運身)하게 되면 신형이 안정될 뿐더러 검법의 위력이 몇 배나 상승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천운비가 그린 그림과 구결은 백팔난화검법의 결점을 보완한 것이 었다. 그는 달마삼검과 백팔난화검법을 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검법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걸 익히면 검도가 증진될 것이다. 향후의 진전은 얼마나 열심 히 하느냐에 달려 있겠지." "아!" 백화연은 종이를 받고 탄성을 발했다. 그녀는 감격을 금치 못했 다. 비록 여인이라 해도 그녀 역시 무림인이었다. 무공을 높일 수 있다면 어떤 일도 해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천운비를 만남으로써 그녀는 눈이 트인 기분이었다. 아마 도 그녀가 평생을 익힌다 해도 천운비가 적어준 검법에는 발치도 따르지 못했을 것이다. 천운비는 그녀가 시연한 검법을 단 한 번 본 후에 단점을 지적해 냈을 뿐더러 그 보완점까지 해결해 냈다. 그야말로 무학의 일대종 사가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역시... 너무나 멋진 분이야!' 백화연은 황홀한 눈빛으로 천운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보면 볼수록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선실의 창문으로 흘러드는 햇살은 석양빛이었다. 천운비의 얼굴이 석양을 받아 더욱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또한 그를 바라보는 백화연의 가슴은 더욱 진홍빛으로 물들고 있 었다. 한 번 연심을 품은 여심은 걷잡을 수가 없다고 했던가! 그녀의 눈은 천운비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밤이다. 교교히 비치는 달빛 아래 두 남녀가 갑판 위에 나란히 서 있다. 만추의 명월은 호수 속에 담겼고, 잔잔히 흔들리는 수면에는 두 사람의 정다운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백화연은 그윽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달빛이 참 밝아요." "그렇군." "천가가, 소녀가 옛날이야기를 해드릴까요?" 천운비는 빙긋이 웃었다. "해보아라." "하지만 약속해 주셔야 해요. 비웃지 않는다고요." 천운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화연의 눈빛이 마치 꿈꾸는 듯 영 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왜 비웃겠느냐? 안심해라." 백화연이 살풋이 눈을 감으며 입술을 열었다. "한 소녀가 있었어요." "......." "달을 무척 좋아하는......." 감미로운 음성이었다. 백화연의 눈동자는 꿈에 잠겼다. "소녀에게는 어릴 때부터 간직해 온 혼자만의 비밀이 있었어요." 스스스....... 미풍이 지나갔다. 백화연의 머리카락이 날려 천운비의 뺨을 스쳤 다. 천운비는 야릇한 체향을 느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계속 그의 콧등을 간지럽혔다. 그는 나른한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잡았다. 백화연의 음성이 마치 비파의 선율인 양 흘러나왔다. "......." 천운비의 눈은 호수에 떨어진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화연이 한 이야기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비밀이랄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한 소녀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불회림에서 자랐고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남자란 백불범 뿐이었다. 어릴 때는 그것만 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오빠에게 어린양을 부리고, 장난을 치 고, 매달리고.......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는 여인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리움 이란 것이 그녀를 괴롭혔다. 누군지 알 수도 없는 대상을 향한 안 타까운 그리움으로 그녀는 잠이 들 수 없었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훗.... 그 꿈이 뭔지 아세요?" "......?" 천운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화연의 눈에서 그윽한 빛이 흘러 나왔다. 한없이 달콤한 눈빛이었다. 천운비는 갈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꿈속에 한 분이 나타났어요. 그 분은 제가 그리워하던 그런 분이 었어요. 전 그 분과 함께 꿈속에서 뛰어 놀았어요. 호수를 헤엄치 고, 손을 잡고 숲을 뛰놀기도 하고... 그런데 그 느낌이 달랐어 요." "다르다니?" "오라버니와 함께 보냈던 그런 느낌이 아니었어요. 뭔지는 모르지 만... 가슴이 마구 뛰고... 한없이 달콤해지고... 아무튼 말할 수 없는 달콤한 느낌이었어요." 천운비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누구길래?' "궁금하지 않으세요? 꿈속의 그 분이 누군지?" "......." "바로 천가가랍니다." "......!" 천운비는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백화연이 했던 이야기는 바로 자신에 대한 사랑 고백이 었던 것이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줄곧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것이 사랑으로 승화되었고, 대담하게도 그의 앞에서 직접 사랑 고 백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첫사랑의 고백. 그것도 여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화연, 당돌하구나.' 천운비는 혀를 내둘렀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푸른 숲에 갇힌 새.......' 그런 느낌이 들었다. 백화연은 연모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는 뜨거운 정열이 흐르고 있었다. 석양보다 더 붉고 뜨거운 눈. 천운비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화연......." "천가가." 백화연은 그에게 몸을 기대왔다. 천운비는 흠칫하며 말했다. "안된다. 화연." 백화연은 큰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죠? 제가 마음에 안 드나요?" 천운비는 그녀의 직설적인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니다. 화연은 아름답다. 세상 누구보다도." "그렇다면 왜 안되나요? 혹 제가 녹림 출신이라서인가요?" "그럴 리가 있느냐?" "한데 왜......?" "난... 누군가를 사랑할만한 처지가 아니다." "어째서죠?" "내겐 할 일이 너무도 많다. 한가하게 사랑을 나누기에는......." "훗, 그때문이라면 염려마세요." "......?" "절대 가가를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만 제 마음을 받아 주시기만 하면 돼요.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아요." 천운비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그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또 뭔가요?" "으음. 내겐 이미... 여인이 있다. 화연의 아름다운 마음을 받아 들일 자격이 없는 셈이지." 일순 백화연의 옥용이 일그러졌다. "여인이... 있다구요?" "미안하구나." 천운비는 몸을 돌렸다. 그는 등진 채 호수에 떨어진 석양을 바라 보았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마음이 괴로웠다. 난생 처음으로 소녀의 부끄러움을 무릅쓰 고 사랑을 고백한 백화연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준 것이다. 하지 만 어쩌겠는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만 가야겠구나." 그는 담담히 말한 후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잠깐만요. 가가!" "......?" 천운비는 돌아섰다. 그때 한 마리의 새처럼 백화연이 안겨들었다. 그녀는 품에 몸을 던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흐흑......!" 엉겁결에 백화연을 안은 천운비는 한숨을 쉬었다. "'화연......." 백화연은 오열했다. 천운비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쓰다듬어 주 었다. 뭐라 말하고 싶었으나 할 말이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사랑 을 느낀 사나이. 그에게 이미 여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녀 의 마음이 오죽 하겠는가? 그저 달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백화연의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머리카락에서도 그윽한 향 기가 풍겼다. 천운비는 그녀의 체온을 느꼈다.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는 그녀 의 모든 것이 느껴졌다. 체온과 체온이, 호흡과 호흡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전... 상관없어요. 가가에게 어떤 여인들이 있는지 몰라도 질투 하지 않을 거예요. 절...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네?" 눈물 젖은 얼굴을 치켜든 백화연이 그렇게 말했다. "바보같이......." 천운비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가냘픈 몸이 깊 숙이 안겨들었다. 이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서 로의 몸을 안은 채 달빛을 받고 있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다 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면 될 테니까. 다음날 아침. 소선이 갈대를 가르며 나타났다. "하하하! 형님, 잘 주무셨소?" 백불범의 호탕한 웃음이 호수의 정적을 깨뜨렸다. 천운비는 눈을 떴다. 그는 선실의 창가에 앉아 잠이 들어 있었다. "......!" 그의 무릎에 백화연이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새근거리며 잠 든 그녀의 얼굴에는 달콤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좋은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었다. '가엾은.......' 천운비는 손으로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으응......." 백화연은 신음을 발하며 그의 다리를 껴안았다. 천운비는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고 침실로 걸어 들어갔 다. 침상에 가만히 내려놓은 그는 살짝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돌아섰다. "화연, 너는 귀여운 여인이다." 그는 갑판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보지 못했다. 잠든 줄 알았던 백화연이 그 순간 반짝 눈을 뜬 것을. 그녀는 밖으로 사라지는 천운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녀의 눈속에 달콤한 빛이 솟아나고 있었다. 소선에 뛰어내린 천운비는 백불범의 어깨를 쳤다. "이 사람, 날 이렇게 내버려두고 달아나다니, 괘씸하군?" "하하! 형님께 멋진 밤을 보내라고 한 짓인데 아우가 잘못했단 말 입니까?" 백불범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천운비는 피식 웃었다. "좋은 밤? 그래, 좋은 밤이었지. 하하하!"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백불범은 웃음을 그친 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누이는 좋은 아이입니다. 비록 버릇이 없기는 하지만 그애 는 불쌍한 아이입니다. 형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고 총명한 아가씨지." 백불범은 눈썹을 찡그렸다. "형님, 제 말은......." "하하! 무슨 말인지 아네. 자네가 노심초사할 것 없네. 화연은 이 미 어린애가 아닐세.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네." 백불범은 내심 중얼거렸다. '어린애가 아니라고? 그럼.......' 그는 활짝 웃었다. "형님의 말씀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하하! 이제야 오라비로서 한 시름 덜었습니다." "......." 천운비는 대답 대신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불회림의 하늘은 맑았 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눈이 부셨다. 쏴아....... 소선은 갈대 사이의 수로를 미끄러져 갔다. "형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 "중원 전역의 녹림도로부터 속속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입니다." 천운비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백불범은 안색을 굳히며 말 을 이었다. "얼마 전 입수된 보고에 의하면 오대마벌(五大魔閥)을 중심으로 마도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운비는 그를 돌아다 보았다. "아우는 어떻게 생각하나?" "오대마벌은 과거의 마도십세에 비해 약하지 않습니다. 아니, 도 리어 더욱 강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한꺼번에 준동한 다면 악마천부에 못지 않은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움직인다면 어떤 계기가 있었을 텐데 짚이는 것이라 도 있나?" "글쎄요, 확실치는 않지만 그들이 모두 움직인다면 아마도 구심점 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마종지주(魔宗之主)가 탄생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마종지주?" "그렇지 않고서는 오대마벌이 동시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도 서로간에 반목이 심했던 자들입 니다. 더구나 악마천부가 횡행하는 마당에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 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운비는 침묵했다. '마종지주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니겠구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천운비가 입을 열었다. "아우는 활사관인 구양중백을 아나?" "알다 말다요. 살아있는 무림의 사서가 아닙니까?" "그는 천기를 보는 분이지. 그에게서 들었네. 당대에 악마지겁(惡 魔之劫)과 십마지겁(十魔之劫)이 동시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이 네." 백불범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천운비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들은 사실이네. 십마지겁은 과거의 십마가 만든 암흑마전 (暗黑魔殿)을 말하는 것일세." "그렇다면?" 백불범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어렸다. "아우, 녹림도의 조직을 움직여 오대마벌의 움직임을 조사해 줄 수 있겠지?" 백불범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이를 말이겠습니까? 형님은 녹림대종사입니다. 명만 내리면 백만녹림인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만녹림인이 목숨을 바친다! 그는 가슴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천운비는 열흘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전서(傳書)를 직접 읽었다. 그것은 중원전역에 퍼져있는 녹림의 무리들로부터 날아온 보고서 였다.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전서를 읽는 동안 무림의 정세가 한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으음, 불행한 일이야. 활사관인의 예언이 맞아 들어가는 것 같 군." 백불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악마지겁과 십마지겁이 동시에 부활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 천운비는 창밖을 응시했다. 그가 있는 소축에서는 호수가 모두 보인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다. "아우, 무작정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네." 백불범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형님 생각은?" "떠나야겠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천운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적을 알아야 싸울 방법을 찾을 수 있는 법이네." 백불범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형님 생각은......?" 천운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게. 결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다만 정확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약간의 모험이 필요하네." "형님 혼자 말입니까?" 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편이 오히려 안전하네." "......." 백불범은 입을 다물었다. 천운비의 표정에서 그가 이미 결심을 굳 혔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백불범은 몸을 일으키더니 정중히 포권했다. "녹림은 형님에게 달려있습니다. 녹림대종사가 가는 길은 곧 녹림 의 길입니다. 이 아우는 형님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천운비는 담담히 말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네. 옳은 길을 간다면 반드시 성사될 것 이네." 그는 눈길을 다시 호수로 돌렸다. "안심하게, 아우. 우리에게는 녹림뿐 아니라 여러 친구들이 있네. 황궁의 힘과 살종의 힘도 가세할 것이네. 결코 밀리는 싸움이 되 지 않을 것이네." 백불범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물론입니다. 녹림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천운비는 빙긋이 웃었다. 그는 백불범이 무척이나 자존심 강한 인 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한 말의 이면에는 황궁고 수나 살종에 비해 녹림이 결코 꿀릴 바가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천운비는 돌아서며 말했다. "오늘밤 떠나겠네. 그 전에 상의할 것은......." ■ 무림백서 3권 제24장 대마성(大魔城) ━━━━━━━━━━━━━━━━━━━━━━━━━━━━━━━━━━━ 경동천하(驚動天下). 무림이 난세(亂世)에 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무수한 격 랑 속에 무림은 혈풍에 휩쓸려 왔다. 그러나 당금 무림이 겪는 진 통은 과거와 같지 않았다. 암흑시대(暗黑時代)!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영세태평무국은 점차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들은 잔악무도했 다. 그들의 발아래 엎드리지 않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멸절시켰 다. 일찍이 그들처럼 잔혹한 자들은 없었다. 그것도 잔악하기 그지없는 방법을 동원했다. 영세태평무국의 기치 아래 굴복하지 않는 자는 당사자를 참혹하게 죽일 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 최대한 모욕과 능멸을 준 후 사지를 찢어 죽였다. 검군도후(劍君刀后). 그들은 무림인들이 부러워하는 한 쌍의 협객부부였다. 검군 용화 운(龍火雲)과 도후 군소희(君素姬)는 강남무림에서는 이름난 고수 이자 뿌리있는 부부였다. 그들에게 영세태평무국은 복종의 통첩을 보냈다. 그들은 당연히 거절했다. 죽을지언정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그들이 살고 있는 동정군산의 화운장(火雲莊)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검군은 목이 잘린 채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져 동정호에 뿌려져 고 기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것은 도후 군소희였다. 그녀의 나이 사십 세, 한때 강남미인으로 소문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남편의 목이 잘리고 사지가 찢기 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피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몸은 고루인들에게 팽개쳐졌다. 그녀의 옷은 갈기갈기 뜯겨 나갔고, 알몸이 된 채 밤새도록 윤간(輪姦)을 당해야 했다. 다음날 그녀는 미쳐버렸다. 그것도 부족하여 그녀는 목에 족쇄가 채워진 채 알몸으로 무창성 (武昌城)을 다섯 바퀴나 돌아야 했다. 고루인들은 키들거리며 실 성한 그녀를 질질 끌고 다녔다. 사흘 후 그녀는 사창가에 던져졌다. 육욕에 굶주린 거지패들이 그녀를 실컷 가지고 놀게 한 것이다. 결국 그녀는 열흘 이상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능욕당한 끝에 죽 고 말았다. 그녀의 시체는 토막이 난 채 동정호의 고기밥이 되고 말았다. 이런 잔악한 일은 무림이 개사한 이래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소 문이 전무림에 퍼진 후 영세태평무국은 가히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서 굴종의 통첩이 오면 무림인들은 오직 두 가지 중의 하 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하나는 악마의 발등에 입맞추고 경배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스 스로 자결하는 길밖에 없었다. 공포시대(恐怖時代)! 암흑시대(暗黑時代)! 무림인들은 숨을 죽여야 했다. 살기 위해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 던가, 아니면 기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시 대가 도래한 것이다. - 영세태평무국...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악마의 화신체다! 오 오! 하늘이여, 어찌하여 그들을 이 땅에 보내셨소? 무림인들은 이렇게 절망의 외침을 발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시간은 쉬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겨 울이 오고 있었다. 혹한이 몰아쳤다. 공포의 시대만큼이나 대륙에 몰아쳐온 한파는 사람들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 다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으 니....... - 마도(魔道)가 일통(一統) 되었다!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 확인되지 않았으나 세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런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무림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세태평무국만 해도 무림을 암 흑으로 만들고 있는 판국에 다시 마도가 준동한다는 사실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소문은 사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 백도(白道)의 위선자들에게 고하노라! 정의의 탈을 쓰고 온갖 더러운 짓을 자행하는 그대들이 어찌 무림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느 냐? 마도의 이름으로 위선을 타파하겠노라! 기다려라! 새로운 무 림의 질서를 바로 잡고야 말리라! 가공할 선언(宣言)이었다. 마도일통은 뜬 소문이 아니었다. 무림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 다. 경악! 전율! 공포의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제 저 무서운 십마지겁(十魔之劫)이 도래하고야 만 것이다. 또 하나의 소문이 들려왔다. 그것은 도탄에 빠진 무림계에 간만에 들려온 낭보 아닌 낭보였다. 소문의 진원지는 황도(皇都) 북경이었다. <천자께서 어지러운 무림계를 굽어보시어 한탄을 금치 못하였노 라! 무릇 억조창생(億兆蒼生)이 대명의 하늘 아래 존재할진대 무 림의 도가 땅에 떨어지고 사마(邪魔)가 난무함을 더 이상 방관할 수가 없게 되었노라! 이에 어지러운 무림을 평정하기 위해 만붕왕 (萬鵬王)을 무림에 내보내니 만붕왕은 곧 무림지왕(武林之王)이니 라! 천하무인들은 만붕왕을 따르기 바라노라!> 가히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고금이래 황제가 강호무림의 일에 관여한 적은 전무했다. 무림은 그만큼 황제의 권한 밖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금무림의 분위기는 극한을 치닫고 있었다. 얼마 전 검군 도후 부부가 피살당했을 때도 영세태평무국의 고루인들은 무창성 의 백주도상에서 하루 종일 도후를 질질 끌고 다닌 적이 있었다. 당시 무창관아에서는 병사들이 달려나왔으나 고루인들을 당할 수 가 없었다. 결국 영세태평무국은 황제의 병사들마저 무시했던 것 이다. 이렇게 되니 황제가 무림의 일에 나서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버린 것이다. 무림계는 크게 술렁거렸다. - 천하무인은 만붕왕을 따르라. 황제의 포고가 중원곳곳에 나붙었다. 무림개사 이래 초유의 사건 이 벌어진 것이다. 만붕왕은 무림지왕이니 무인된 자는 그를 따르라! 그것은 만붕왕을 무림의 황제로 여기라는 뜻이었다. 만일 평화시 였다면 무림인들은 흑도백도를 막론하여 황제의 포고에 코웃음을 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무림이 극도로 피폐해졌기에 황제의 칙 령에 무림인들은 솔깃해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강호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던 녹림인들이 가장 먼저 만붕왕의 명을 따르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백만 녹림도는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그 수효도 많지 만 정작 녹림의 세력이 무서운 것은 그들의 다양함 때문이었다. 온갖 잡술은 물론이려니와 중원 전역에 퍼져 있는 방대한 정보망, 더구나 수년 전부터는 상권에까지 진출해 있는 녹림의 힘은 영세 태평무국조차 아직까지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무림은 들끓기 시작했다. 녹림의 총본영 불회림이 만붕왕을 따르기로 한 소식에 이어 이번 에는 청부 살인업을 본업으로 하고 있는 살종(殺宗)의 무리들이 가세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이번에는 무림과는 상이한 무학계보를 이루고 있는 황궁의 대내고 수들이 만붕왕을 따라 무림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무림은 경동(驚動)하기 시작했다. 천하무림에 군림하려는 영세태평무국! 마도로 무림을 정립하겠노라 선언한 십마의 후예 출현! 거기다 무림지왕이란 황제의 칙령을 업고 등장한 만붕왕에 이르기 까지 무림은 폭풍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무림인들은 전전긍긍했다. 과연 누구를 따를 것인가? 판단을 잘못 내리면 패가망신함은 물론이려니와 자칫하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것이다. 옥룡산(玉龍山). 절경을 이룬 명산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모양이라 하여 옥룡 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옥룡산은 이제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곳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부터 그곳은 마도의 성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암흑마전(暗黑魔殿). 십마(十魔)가 이룩해 냈다는 전설의 암흑마전이 옥룡산에 자리잡 은 것이다. 옥룡산에서 가장 높은 두 봉우리, 용두봉(龍頭峯)과 용설봉(龍舌 峯) 사이의 계곡에 천하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집마부가 또아리 를 튼 것이다. 대마성(大魔城)! 계곡을 메운 채 축조된 거대한 성보의 문루에는 그런 현판이 걸려 있었다. 천하 오대마벌이 오체복지했고, 십마의 전설이 실현됐다 는 암흑마전의 실체가 바로 대마성으로 현신한 것이다. 정오 무렵. 두두두두......! 한 필의 털빛이 흰 설리총이 대마성의 문루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 갔다. 히히히힝! 힘찬 말울음소리와 함께 설리총이 두 발을 번쩍 치켜들며 멎었다. 마상의 인물이 비로소 드러났다. 붉은 옷이 잘 어울리는 미청년이었다. 나이는 삼십 전후로 보였는데 전체적으로 오만하면서도 사기가 흐 르는 인상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금패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문을 열라!" 그의 음성은 낭랑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음기가 배어있는 음 성이었다. 구구궁! 굉음과 함께 육중한 성문이 열렸다. 홍의청년은 말을 탄 채 성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성안으로 사라지자, 문루를 지키던 흑의 인들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제길, 재수가 없단 말이야. 이번엔 또 얼마나 많은 계집들을 해 치웠을까?" "흐흐! 말조심하는 게 좋을걸? 혈수미안마(血手美顔魔)가 누구냔 말야. 백마부(百魔府)의 서열 오위에 드는 고수가 아닌가? 계집 홀리는 재주만 좋은 게 아니라 무공도 그만 못지 않을걸?" "빌어먹을! 하긴 혈수미안마 방룡(龐龍)은 희대의 색마(色魔)긴 해도 결코 무시할 존재는 아니지. 그 자의 혈옥신공(血玉神功)과 뛰어난 기지는 백마부의 숨은 힘이라지?" "흐흐, 오죽하면 백마부의 지낭(智囊)으로 불리겠나?" "하긴 오대마벌 중에서 가장 인원이 적긴 해도 백마부의 힘을 무 시할 수 없는 건 저 방룡이란 자 때문이기도 하지. 제기랄, 아무 튼 이곳에 있는 반반한 계집들은 모두 저 자에게 반해있으니 기분 나쁘단 말이야." 문루를 지키는 흑의인들의 대화는 사뭇 심상치 않은 점이 있었다. 그들은 대마성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로 미루어 대마 성은 완전히 융화되어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튼....... 혈수미안마(血手美顔魔) 방룡(龐龍)이 대마성에 돌아온 것은 화젯 거리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욕실(浴室). 쏴아! 물 끼얹는 소리와 함께 여인들의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렸 다. 한 사내가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 다. 그는 바로 희대의 방탕아로 알려진 백마부의 서열 오위에 들 어있는 혈수미안마 방룡이었다. 그는 막 대마성으로 돌아와 먼지를 씻기 위해 목욕중이었다. 그는 하루라도 목욕을 거르지 않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후후! 홍화(紅花), 춘앵(春櫻), 내가 없는 동안 무척 외로웠지?" "호호! 그럼요, 나리." "아이, 왜 이렇게 늦게 돌아오셨어요? 저희가 보고 싶지도 않으셨 나요?" 홍화와 춘앵은 허리를 비틀어대며 애교를 부렸다. 그녀들은 방룡의 몸종이었다. 대체로 강호인들은 여종을 두는 법 이 없으나 방룡은 달랐다. 그는 매우 사치스러웠을 뿐더러 늘 주 변에 여종들을 거느리고 다닌다. 지금 두 시녀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그의 목욕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녀들은 부끄러움을 타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방룡의 눈에 들까 한껏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그를 유혹하려 애쓰고 있었다. 터질 듯이 부푼 가슴을 방룡의 등에 문지르기도 하고, 일부러 허 리를 휘젓기도 하면서 서로가 방룡의 환심을 사려 애쓰고 있었다. 춘앵은 아예 욕조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마주 앉아 방룡의 가슴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물었다. "호호, 이번엔 또 어떤 계집들을 건드리셨나요?" "후후! 백도의 계집들을 맛보았지." "흐응, 어떤가요? 그 계집들은?" 춘앵의 눈 가장자리가 붉그레하니 젖었다. 방룡의 손은 물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의 손은 부지런히 춘앵의 허벅지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야 이를 말이냐? 흐흐, 처음엔 제법 도도하고 빼는 듯하더니 이 방룡 나으리한테 통하기나 하겠느냐?" "그럼 어떻게 하셨나요?" 홍화도 그의 등뒤로 몸을 밀어넣더니 자신의 가슴으로 등을 문지 르며 물었다. "후후, 신주오미(神州五美) 중 하나라는 삼상일미(三湘一美) 용화 미(龍花美)란 계집이 있었지. 처음엔 앙탈을 부리더니만......." "흐응, 그래서요?" "아무리 고결한 척 해봐야 별 수 있겠느냐? 알고 보니 그 계집도 정부(情夫)가 있었더군. 그래서 정부를 보는 앞에서 때려 죽인 후 안아버렸지." "어머!" "아이, 너무 하셨어요." "하하핫!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그 계집이 어땠는지 아느냐? 처 음과 달리 좋아서 매달리며 신음하는 꼴이란, 흐흐! 백도의 계집 이라고 다를 게 하나도 없더라니까." 방룡은 음소를 흘리며 벌떡 일어섰다. "어머멋!" 두 시비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방룡이 양팔에 그녀들을 낀 채 일어섰던 것이다. 두 시비는 그의 목에 매달리며 콧소리를 냈다. 방룡은 두 시비를 안은 채 욕실을 걸어나왔다. 침실로 나오자 시녀들은 그의 몸에 물기를 닦아준다, 머리를 빗겨 준다 야단법썩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들은 옷을 입을 생각을 도통 하지 않았다. 방룡은 시중을 받으면서도 연신 손을 움직여 그녀들을 주물러대었다. 그야말로 음탕한 광경이었다. 혈수미안마 방룡. 그는 비록 마도인이었으나 생김새만은 미남이었다. 시비들이 머리 를 단정히 빗은 후 묶어주자 그의 모습은 여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이 두근거릴 정도로 준수했다. 숱한 여인들이 그에게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것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이윽고 몸치장이 끝나자 두 여인은 좌우에서 감겨들었다. 그녀들 의 얼굴에는 갈망의 빛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이때였다. 문 밖으로부터 여인의 교소가 들려왔다. "호호호......! 다섯째가 돌아왔다고? 그렇다면 이 누님이 가만 있을 수야 없지." 문이 활짝 열렸다. "안 그래, 동생?" 문이 열리고 들어선 것은 궁장(宮裝) 차림의 미부였다. 나이는 삼 십을 갓 넘었을까? 전신에 보석과 진주를 온통 장식한 채 육감적 인 몸을 야릇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미부는 익을 대로 익은 풍염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가슴은 금 방이라도 옷을 뚫고 나올 듯이 팽팽해 보였으며, 잘록한 허리 아 래로는 급격히 둔부가 굵어져 있었다. 눈에는 색기가 자르르 흐르고, 붉은 입술은 만지기만 해도 툭 터 질 듯했다. 미부는 동경 앞에서 두 시비가 알몸으로 방룡의 좌우에 매달려 있 는 것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눈을 반 짝이며 웃음을 흘렸다. "호호....... 과연 동생답군. 돌아오자마자 방안이 온통 도화빛이 니 말이야." 홍화와 춘앵은 황급히 손으로 앞을 가리며 절을 했다. "마라부인(魔羅婦人), 오셨습니까?" 마라부인. 그녀는 백마부의 서열 제삼위에 속하는 여고수다. 그녀의 무공은 대단한 면이 있었다. 특히 그녀가 장기로 삼는 것은 섭혼술(攝魂 術)과 마라수(魔羅手), 두 가지 무공이었다. "그래,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 있거라." "예에......." 두 시녀는 볼이 잔뜩 부어 있었으나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물러갔 다. 방룡은 그녀를 바라보며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누님, 오랜만입니다." 마라부인은 눈꼬리를 흔들며 요염하게 방룡의 아래위를 훑어보았 다. 방룡은 아직 하반신만 수건으로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 이번에 나갔던 일은 수확이 있었나요?" 방룡은 히죽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호호! 당연히 그래야지. 천하의 혈수미안마 방룡을 누가 말리겠 어. 물론 이번에도 꽃놀이를 거르진 않았겠지?" 마라부인은 둔부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왔다. 그녀는 방룡의 근 육질로 이루어진 가슴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붉은 입술을 놀렸 다. "하지만 동생도 이젠 조심해야 할걸? 언제고 큰코 다칠 날이 있을 테니 말이야." 방룡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누님의 말씀 뼈에 새겨 두리다." "호호, 정말?" 마라부인은 슬쩍 그의 몸에 어깨를 기대왔다. 방룡은 서슴없이 그 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의 손은 스르르 미끄러져 그녀의 둔부를 더듬었다. "누님." "으응?" "소제 아무리 눈을 까뒤집고 강호를 훑어보았지만 어디서도 누님 만한 미인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흐흥, 동생.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거짓말을......." 그녀는 말을 다하지 못하고 못 이기는 척 방룡의 품으로 쓰러졌 다. "정말이오. 맹세할 수 있소. 누님이야말로 천하절색의......." 이번에는 방룡이 말끝을 흐렸다.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입만 열면 달콤한 사탕발림이요, 손만 움직이면 여인의 민감한 부위를 자극하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기술(?)이 있는 이상 사실 말은 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흐응." 마라부인은 어느새 입술을 반쯤 벌리며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방룡의 손은 그녀의 옷섶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어디를 어떻 게 건드렸는지 그녀는 다리를 비틀어대며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 듯 방룡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동생... 동생......." 그녀는 뜨거운 입술을 방룡의 입술에 비벼댔다. 실로 뜨거운 장면 이었다. 그런데 방룡은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졌을 때 갑자기 손을 떼며 뒤로 물러섰다. "......!" 마라부인은 뜻밖인 듯 눈을 떴다. 방룡은 재빨리 그녀의 뺨에 입 술을 맞춘 후 말했다. "누님, 우선 대형부터 만나야겠습니다." 마라부인은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맞아. 그 일로 동생을 부르러 왔는 데......." "하하! 지금 가면 되지요." 마라부인은 아쉬운 듯 한손으로 방룡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말했 다. "이번에 동생이 다녀온 결과에 대해 몹시 궁금해하고 계셔. 뿐만 아니라 그 분께서도 동생의 보고를 듣고 싶어하셔." 방룡은 옷을 걸치며 말했다. "실망시켜 드리진 않을 겁니다. 후후! 두고 보시오, 누님. 이 동 생의 진가가 발휘될 테니 말입니다. 머지 않아 우리 백마부는 반 석 위에 올라서게 될 겁니다." 그 말에 마라부인은 이제까지의 표정을 거두고 눈꼬리를 치켜올렸 다. "흥! 물론이지. 지금까진 오대마벌 중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지만 앞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야." 그녀는 은근히 부추겼다. "모두가 동생 덕분이야." "하하하! 뭘요. 자, 갑시다. 누님." 방룡이 길을 비키며 정중한 태도를 보이자 마라부인은 흡족한 듯 미소 지으며 앞장섰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걸을 때마다 터질듯한 둔부를 요란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혈수미안마 방룡의 눈길은 그녀의 둔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백마부(百魔府). 이곳은 대마성의 요지로 오대마벌의 하나인 백마부가 자리잡고 있 는 곳이다. 대마성에는 오대마벌의 주력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파벌 이름과 같은 건물에 기거했으며, 은연중 대마성의 주력(主力)이 되기 위해 암중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백마부의 한 전각. 삼 인이 있었다. 상석에 앉아있는 인물은 머리카락과 피부빛이 모 두 자색이었다. 이 자면의 중년인은 눈을 반쯤 감고 있었는데 전 신에 만인을 압도하는 중압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면신군(紫面神君) 낙일우(洛日宇). 그가 바로 백마부의 제일신마(第一神魔)이자 백마부주였다. 그의 옆에는 황색 가사를 입은 비대한 체격의 중이 앉아 있었다. 박박 깎은 머리 한가운데에는 선명한 계인(戒印)이 찍혀 있고, 손 에는 염주를 쥐고 있었다. 그런데 염주를 자세히 보면 누구나 안색이 변하고 만다. 그 염주 는 백골두(白骨頭), 즉 사람의 해골로 만든 것이었다. 사람의 해 골을 특수한 약물에 담가 축소시킨 후 염주로 꿴 것이었다. 백골비마(白骨飛魔) 혈공(孑空). 그는 바로 백마부의 서열 제이위에 올라있는 인물이었다. 세번째 인물은 방금 전 대마성으로 돌아온 바 있는 방룡이었다. "다섯째, 그동안 수고했네. 이 정도면 대단한 성과네. 자네가 수 집해온 정보를 토대로 하면 틀림없이 본부는 오대마벌 중에서 단 연 월등한 공적을 올릴 수 있을 것이네." 백마부주 낙일우의 말에 방룡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대형, 그야 물론입니다. 전륜궁(輯輪宮)이나 혈륜성(血輪城)이 규모면에서 본부를 능가한다고는 하지만 소제가 수집한 정보를 이 용하면 본부가 탁월한 공적을 거둘게 틀림없을 겁니다." 딸각딸각......! 이제껏 해골염주를 굴리고 있던 백골비마 혈공이 문득 괴소를 발 했다. "흘흘! 아암, 맞는 말이야. 머지 않아 본부의 실력이 드러난단 말 씀이야. 흘흘, 이번에야말로 이 부처님은 만 개째의 인두탑을 쌓 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군." 그 말에 자면신군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둘째, 인두탑을 꼭 세워야 하는가?" "흘흘, 그건 이 혈공의 평생 소원이라는 걸 아시지 않소?" "인두탑을 쌓은 뒤에는?" "컬컬! 혈지(血池)를 팔 생각이오." 자면신군은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역시 둘째답군!" 그는 문득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오는 원단(元旦)을 기해 마도대동맹(魔道大同盟)은 군림천하의 장정에 나서게 될 걸세." "......!" 혈공과 방룡은 모두 침을 삼켰다. "물론 최대의 적은 영세태평무국이 되겠지. 비록 지금은 놈들이 무림을 장악하고 있지만 일단 우리가 나서게 되면 놈들의 독주는 금세 와해되고 말 걸세." "컬컬! 그야 물론입죠." "천하를 장악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전각 안의 세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방룡은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그는 두 마두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으나 이따금 그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광채가 솟아오 르곤 했다. "아우들, 이제 그 분께서 출관하실 때가 멀지 않았다. 보름 후면 암흑제(暗黑祭)가 열리게 된다. 다섯째도 준비는 되어 있겠지?" 자면신군 낙일우의 말에 방룡은 음침한 눈빛을 흘리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대형." "물론 널 믿는다. 백마부에서 너만한 자질을 가진 형제들은 없으 니. 그러나......." 자면신군은 눈을 가늘게 했다. "오대마벌이 내세우고 있는 네 명의 경쟁자들을 무시해선 안된다. 그들은 각자가 천만 중에 하나 뽑은 기재들이다. 다섯째를 포함하 여 그들 다섯 명 중에서 누가 그 분의 후계자가 되는가에 따라서 오대마벌의 순위도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방룡의 눈에서 번쩍 빛이 일었다. "소제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노부도 널 믿는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대형?" 자면신군의 눈에서 마광이 뻗어나왔다. "아우는 여색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탈이다." 방룡은 짐짓 쑥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자면신군은 더욱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심해라, 다섯째. 너의 어깨에 본부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 을. 오대마벌은 그 분의 후계자를 배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백마부의 장래는 너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그러니 결 코 자만해선 안되는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자면신군은 잘라 말했다. "대형으로서 네게 명을 내리겠다. 앞으로 보름 후까지 일체의 금 욕(禁欲)을 명령한다." "......!" 방룡은 안색이 홱 변했다. "대형......!" 그는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명령이다. 더 얘기할 것 없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 형제들이 네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어왔는지 모른 단 말이냐? 또한 우리가 너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지 않았느냐? 백마절학(百魔絶學)이 네 한 몸에 집중되었을 뿐더러 내공을 높이기 위해 형제들이 희생을 치르기까지 하지 않았느냐? 고작 보름 동안의 금욕은 그에 비한다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모 른단 말이냐?" "......." 방룡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고개 숙인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는 것을. 자면신군은 차갑게 말했다. "보름 후에는 모든 것이 끝난다. 오늘 한 말 명심해라." "넷, 알겠습니다." 방룡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그는 포권한 후 조용히 전각을 물러나왔다. 그가 사라진 후, 자면신군 낙일우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다섯째는 우리의 희망이다." "컬컬, 그렇고 말고요." 한편, 밖으로 나오던 방룡은 회랑을 돌아나오다 마라부인과 마주 쳤다. 그녀는 서슴없이 그의 목에 손을 걸고 속삭였다. "동생, 오늘밤... 으응? 알지?" 방룡은 그녀의 둔부를 철썩 때리며 말했다. "빌어먹을, 누님. 방금 전 대형이 무슨 명을 내렸는지 아시오?" "......?" "글쎄 암흑제를 치를 때까지 금욕령(禁欲令)을 내렸지 뭐요." "뭐라구?" 마라부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잠시 후 그녀는 낙담을 금치 못하 며 중얼거렸다. "맙소사, 내가 얼마나 동생을 기다렸는데......." 그녀가 샐쭉한 표정을 짓자 방룡은 슬며시 그녀의 둔부를 꼬집으 며 말했다. "후후! 하지만 누님, 내가 누구요? 오늘밤 누님 방으로 가겠소." "정말?" 마라부인의 눈에 반짝 생기가 감돌았다. "하하하......!" 방룡은 그녀의 곁을 지나치면서 손가락으로 살짝 콧등을 건드렸 다. "아......." 마라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방룡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눌러야 했다. '다섯째가 강호에 다녀온 뒤로 더 매력이 있어졌어.......' 대마성에 밤이 깃들었다. 계곡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인지 밤이 되면 대마성에는 짙은 안 개가 형성된다. 안력이 보통이 넘지 않으면 이삼 장 거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스스! 안개가 출렁였다. 누군가 안개를 스치며 지나간 것이다. "어서 와, 동생!" 이제나저제나 하고 고대하고 있던 마라부인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 서며 환호했다. 그녀의 모습은 낮과는 완전히 달랐다. 궁장 대신 속살이 은은히 비쳐 보이는 망사의만을 입고 있었다. "오늘밤 누님의 모습은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구려." 방룡은 색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굴리며 그녀에게 다가가며 침을 꿀꺽 삼켰다. "흐응, 이 누나가 동생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왜 이 렇게 늦었어?" 마라부인은 스스로의 손으로 망사의를 뚫고 나올 듯한 젖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봐, 이렇게 가슴이 뛰잖아?" 그녀는 방룡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방룡은 뭉 클한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지자 입가에 매혹적인 웃음을 흘렸다. "흐흐, 정말 그렇군요."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라부인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콧소리를 냈다. "흐응." 방룡은 서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여자 다루는 솜씨는 정평 이 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슴을 슬슬 주무르며 두 개의 유실을 자극했다. 마라부인은 본래가 색정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그러니 어찌 자극받지 않겠는가? 그녀의 몸은 벌써 달아오르고 있었다. 기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망사의는 옷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잠 자리 날개처럼 얇았으므로 옷 위로 만지면 속살을 그대로 만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느낌을 주었다. 방안은 후끈 달아올랐다. 마침내 두 사람은 한 덩이가 된 채 침상 위로 쓰러졌다. 마라부인은 이미 참을 만큼 참았다. 이제 인내가 한계에 달해 있 었다. 그녀는 몇 차례나 침상 위에서 뒹굴었다. 그때마다 방룡이 그녀의 민감한 부위를 자극했으므로 육체가 폭발직전이었다. "동생... 동생!" 그녀는 입술을 벌리며 뜨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그러나 방룡은 그 녀의 애만 태울 뿐 도무지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서지 않고 있었 다. 마라부인은 마침내 사지를 뻗어 방룡을 휘감은 채 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방룡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그의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그는 입술을 벌려 마라부인의 입술을 덮었다. "으음......." 마라부인은 그의 입술을 맞이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갑자기 그녀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방룡의 눈빛을 마주본 순간 혼백이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방룡은 입술을 뗀 후 그녀에게 명을 내렸다. "마라부인, 이제부터 너는 나의 충실한 하녀다. 알겠느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마라부인은 심적 충격이 큰 듯 전신을 경련했다.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가 벽안으로 변했다. 방룡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럴 수가? 이 요녀는 역시 틀리구나. 섭혼술을 익혔다더니 심력 이 대단하구나!' 그는 진기를 돋구었다. 마음으로 심령고(心靈蠱)를 움직였다. "잘 들어라, 마라. 너는 이제부터 나의 충실한 하녀다. 알겠느 냐?" "으으... 나는... 나는......." "마라, 네 영혼은 고통에 빠지게 될 것이다. 구천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죽지도 못한 채 억겁의 고통을 치르겠느냐? 아니면 주인의 명을 따라 환락을 맛보겠느냐?" 방룡은 심령고를 움직였다. 마라부인은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악! 아... 악......." 어느덧 방룡의 얼굴이 변하고 있었다. 얼굴 근육이 움직이더니 전 혀 다른 얼굴이 되었다. 그는 바로 천운비였다. 방룡! 그는 천운비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지금 천운비는 고술(蠱術)을 쓰고 있었다. 그가 익힌 심령고술은 상대의 영혼을 억제할 수 있는 신비한 묘술이었다. "마라, 네 고통은 오직 주인만이 덜어줄 수 있다. 알겠느냐?" 마라부인의 얼굴이 수십 차례나 변했다. 그녀는 섭혼술의 대가답 게 심력이 강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굴복하고야 말았다. "주... 주인님." 그녀의 벽안이 비로소 정상으로 되돌아 왔다. 천운비는 내심 안도 의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마라, 너는 심령독고(心靈毒蠱)의 지배를 받고 있다. 만일 명을 거역하게 되면 독고는 너의 심장을 파먹고 말 것이다. 나의 명은 곧바로 심령고에 전달되니 설사 내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령만 으로 명을 내릴 수 있다. 알아듣겠느냐? 너는 이제부터 나의 노예 가 되는 것이다." "네......." 마라부인은 멍청한 표정으로 순순히 대답했다. 이제 그녀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의지는 완전히 꺾인 듯 했다. '됐군.' 천운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새삼 만독제군의 고술 의 위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가 방룡으로 변신한 것은 고심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그는 암흑마전의 내막을 탐지하기 위하여 대마성으로 잠입할 계획 을 세웠다. 그래서 장장 삼 개월 동안 그 방법을 연구했다. 그 결과 선택한 것이 바로 방룡이었다. 방룡은 백마부의 서열 오위로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어 백마부 의 마두들이 가장 아끼는 자였다. 마침 그는 특수한 임무를 띠고 강호에 나와 있었다. 천운비는 그의 뒤를 미행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익혀 두었다. 사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방룡으로 변장하여 대마성에 잠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집요하게 그를 미행하며 그의 모든 것을 익 히게 되었다. 삼 개월이 지났을 때, 그는 완벽하게 방룡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동안 그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방룡은 희대의 색마였다. 따라서 그가 강호에서 자행한 엽색행각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 도였다. 그는 숱한 강호여인들을 능욕했고, 특히 정파의 여인들을 잔인하게 간살하기도 했다. 천운비는 번연히 그가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도 나설 수가 없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천운비는 이번 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오대마벌은 암흑마전의 후계자를 서로 자파에서 배출하기 위해 각 각 한 명씩의 기재를 선발해 놓고 있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그 들에게 무공을 집중적으로 연마케 했다. 방룡도 그 후보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백마부의 절학을 모두 익히고 있었으므로 그의 무 공은 초절정급이었다. 만일 천운비가 구룡비학(九龍秘學) 중 여덟 가지를 익히지 않았다 면 방룡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구룡성제의 한 명인 혈영성제(血影聖帝)가 남긴 혈영신공(血 影神功)으로 간신히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는 방룡을 제압한 후 고술(蠱術)을 걸어 그의 심령을 제어하여 여러 가지 비밀을 얻어냈다. 그런 연후에야 대마성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마성에 들어온 그는 제일 먼저 마라부인을 점찍었다. 누군가 그 를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게 되었다. 시작부터 순조롭게 일이 풀리게 된 것이다. 천운비는 수면상태로 빠진 마라부인을 내려보며 상념에 잠겼다. '내가 이곳에 잠입한 목적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이곳에 갇혀있 는 십전천사(十全天師)를 구출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암흑마전의 내막을 파헤치는 것이다.' 십전천사가 대마성에 갇혀있다는 사실은 방룡으로부터 알아낸 사 실이었다. 그들은 오대마벌을 암중에서 조종하고 있는 암흑마전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대마성을 찾았다가 그만 마수에 떨어진 것 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천운비의 눈이 불을 뿜었다. '암흑마전의 전주를 죽이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가 누군 지조차 모른다. 또한 십전천사가 갇혀 있는 곳도 알아내지 못했 다.' 그의 상념은 계속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암흑제가 열리기 전에 오대마벌의 후계자들을 파악 하는 일도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는 눈을 번쩍 빛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는 무릎을 쳤다. '왜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암흑마전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내가 후계자가 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완벽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놀라운 발상이었다. 아니, 실로 기발한 묘책이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그야말로 암흑마전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으니 모든 것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될지는 미지수였다. 대마성은 하늘 아래 초강 마두들의 집결체였기 때문이다. 성사여 부는 오직 하늘에 달려 있는지도 몰랐다. ■ 무림백서 3권 제25장 미인루(美人淚) ━━━━━━━━━━━━━━━━━━━━━━━━━━━━━━━━━━━ 오일이 지났다. 암흑제(暗黑祭)는 열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대마성의 마두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암흑제를 무사히 치른 연후 에야 무림의 정복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 두 자파가 암흑마전을 승계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동안 천운비는 완벽하게 방룡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대마성 에서 그를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라부인은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녀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 자 신이 심령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 다. 심령고는 유사시 명을 내려야만 움직이므로 그녀의 행동은 조 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천운비는 암흑마전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려면 우선 백마부의 무공에 대해 파악해야 했다. 그가 아무리 완벽하게 방룡의 행동을 모방한다해도 무공이 다르면 들통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천운비는 지난 오일 동안 백마부의 마두들을 거의 모두 보았다. 그것은 일부러 그가 일일이 그들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구실은 간단했다. 백마절학에 대한 의문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기실 방룡은 백마부의 절학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으나 그 모두를 습득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마를 일일이 만나 직접 그들에게 무공을 사사받는 다는 구실을 내세운 것이다. 백마는 암흑제가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를 의심하지 않고 자신들 의 무공을 최대한 일러주었다. 결국 천운비는 그들로부터 백마부 의 무공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그가 가장 고역으로 느끼는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목욕을 하 는 일이었다. 물론 목욕하는 일이 힘들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때마다 홍화와 춘앵이 알몸으로 시중을 든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방룡 의 습관이었으므로 이제 와서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한 일이 있다면 자면신군이 금욕령을 내린 것을 그녀 들도 알고 있었으므로 노골적으로 육탄공세를 펼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정말 운이 좋았다. 만일 금욕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을 치뤄야 했을 것이다. 대마성은 하나의 거대한 화약고와 같은 존재였다. 그것도 언제 터 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일단 터지면 무림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 게 될 것이다. 대마성의 마인들은 암흑제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무림을 짓밟기 위한 대장정의 그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천운비는 뒷짐을 진 채 화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처소에 한가하게 붙어있는 일이 없었다. 되도록 대마 성을 구석구석 관찰했다. 그것은 대마성에 대해서 가능한 많은 것 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방룡의 신분으로 대마성 내에서 네 곳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음 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는 전륜 궁, 혈륜성, 야우림, 아수마궁 등이 있는 네 곳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는 대마성 마인들의 무공이 한결같이 고강하다는 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점점 더 그의 결심을 확고하게 만 들었다. '무슨 수를 쓰던 이곳을 궤멸시켜야 한다. 악마천부에 이은 또 하 나의 암적 존재를 강호에 나서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생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악마천부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당분 간은 대마성을 유지시킬 필요가 있다. 이들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 이다.' 그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악마천부와 이곳을 동시에 섬멸하는 방법은 암흑마전의 후계자가 되는 것 뿐이다.' 천운비는 뒷짐을 진 채 상념에 빠져 있느라 마라부인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마라부인은 그의 곁에 다가와 고혹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동생, 뭘 그리 생각하지?" "......!" 천운비는 흠칫했다. '마라부인이 언제 이곳에?' 그는 곧 싱긋 웃으며 물었다. "누님께서 웬일이시오?" 마라부인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떠올랐다. "큰 오라버니께서 동생을 보자고 해." "대형께서?" 그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내게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 데.' 그는 마라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넷째가 사경을 헤매고 있어." "넷째 형님이 말입니까?" 천운비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 다. '내가 지나치게 민감해졌군.' 그는 짐짓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넷째 사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입니까?" "가 보면 알아, 모두가 동생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구요?" 천운비는 의혹을 금치 못했으나 마라부인이 몸을 돌리는 바람에 그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백마부의 전각에 도착한 천운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전에는 자면신군 낙일우를 비롯하여 백골비마 혈공, 그리고 서 열 십위 안에 드는 마두들이 한결같이 침통한 표정으로 한 구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모여 있었던 것이다. 시신은 서열 사위인 유령신마(幽靈神魔) 당고(堂古)였다. "대형,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넷째 사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천운비는 짐짓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자면신군은 침통하게 말 했다. "다섯째를 위해 일하다 이렇게 되었다." "넷? 절 위해서요?" 자면신군은 눈에서 자광을 뿜으며 말했다. "모든 것은 다섯째가 전주의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 만이 오늘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자면신군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일어났다. "넷째는 자네를 위해 경쟁자의 실력을 탐지하려고 했지. 네 명 중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진 혈륜공자(血輪公子)란 놈의 실력을 알아 보려 하다가 놈에게 당하고 만 것이다." 천운비는 눈썹을 떨며 급히 물었다. "살릴 가망이 없단 말입니까?" "틀렸다. 이미 숨이 끊어졌다." "......!" 천운비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백마부의 마두들 을 거의 모두 만나보았다. 그 결과 의외의 점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흉악한 인간들이었으나 놀랍게도 서로에 대한 정 이 두터웠던 것이다. 기실 타인이 흉금을 털어놓고 지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고 무려 백 인이었다. 그런데 백마부의 마두들 사이에는 끈끈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점이었다. 천운비는 주먹을 움켜쥐며 짐짓 흥분했다. "으! 혈륜공자......! 내 널 가만 두지 않으리라!" 혈공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섯째, 넷째는 결코 헛된 죽음을 하지 않았다." "......?" "이걸 봐요, 동생." 마라부인이 당고의 가슴 옷자락을 들추어 보였다. "아!" 천운비는 탄성을 발했다. 당고의 가슴 한복판에는 시뻘건 혈장인(血掌印)이 선명히 찍혀 있 었다. 뿐만 아니라 전신의 요혈마다 혈홍색의 반점이 찍혀 있었 다. "넷째는 이것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 혈륜공자의 명공혈뢰살강(冥 空血雷殺 )과 혈륜겁화지(血輪劫火指)! 그것이야말로 놈의 최대 절기인 것이다." "명공혈뢰살강과 혈륜겁화지?" 자면신군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다섯째, 너는 이것을 분석하여 필히 파해법을 찾아야 한다. 알겠 느냐?" 천운비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대답했다. "흐흐, 어찌 넷째형의 죽음을 헛되게 하겠습니까, 염려 마십시 오." 그 자리에 모여있던 마두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분노의 빛이 어리 고 있었다. 백마부 제사마의 죽음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이었다. 천운비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형,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넷째형과 단 둘이 있고 싶습니다." 자면신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말인가?" "예, 시간을 아껴야 할 것 같습니다. 넷째형의 희생을 헛되이 하 지 않으려면 지금 즉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알겠네." 자면신군은 마두들에게 눈짓을 했다. 마두들은 모두 자리를 떴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기 전 천운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언의 격려 를 보내는 것이었다. 대전에 혼자 남게 된 천운비는 당고의 시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당고의 몸에 남아있는 장인과 지상(指傷)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 격을 주고 있었다. '혈륜공자 영호전성(令狐全盛)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 나. 과연 자면신군이 염려할만 하구나. 이 정도 무공수위면 방룡 을 능가하고도 남을 것이다.' 천운비는 방룡의 무공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무공은 백 마부의 정화이긴 했으나 혈륜공자 영호전성의 무공은 당할 수가 없었다. 천운비는 오랫동안 당고의 시신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당고의 시신으로부터 무엇을 알아냈는지는 오직 그만이 아는 일이었다. 천운비는 화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는 계속 명공혈뢰살강과 혈륜겁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전 당고의 시신을 본 이후로 줄곧 그 생각에 몰두하여 밥을 먹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그는 천성적으로 무공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일단 의문이 생기면 그것을 풀 때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명공혈뢰살강은 양(陽)의 무학이다. 혈륜겁화지도 마찬가지다. 당고의 상흔으로 보아 혈륜공자는 놀랍게도 이백 년 이상의 공력 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파해하는 방법은.......' 그는 화원을 가로지르며 생각을 거듭했다. '구룡비학에서 음(陰)의 무학은 빙하성제(氷河聖帝)의 빙하신공 (氷河神功)이 있다. 빙하신강과 빙하지를 사용하면 물론 혈륜공자 를 꺾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백마부의 무공을 써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혈륜공자의 무공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만일 구룡비학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백마부의 무공만을 써야 한다는 것이문제였다. 그는 방룡의 신분인 것이다. '백마부 서열 십일 위의 빙백천마(氷魄天魔) 구양소가 가장 음에 가까운 무공인 빙백신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화후에 있어서 는 크게 부족하다. 어설프게 펼쳤다가는 당하기 십상이다. 그렇다 면 결국 은밀히 빙하성제의 무공을 곁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때였다. 밤안개가 화원에 깔리기 시작했다. 천운비는 의례 그것이 안개려니 했다. 대마성은 밤만 되면 안개가 흔히 덮히는 지형인 것이다. 그러나 이번 안개는 달랐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사위가 온통 안개에 뒤덮여버린 것이다. "......!" 그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으흐흐흐...... 키키키......!" 문득 사방으로부터 요사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천운비는 안색이 변했다. 안개 속에서 꽃송이들이 흔들리고 있었 다.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꽃송이는 여인들의 얼굴로 변했다. "오호호호......!" "깔깔깔......!" 수많은 여인들이 요사스런 웃음을 흘리며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 었다. 안개가 스물스물 여인들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 놀랍게도 여인들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는 나녀들이었다. 젖 가슴을 덜렁거리며 그녀들은 춤추듯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것은......!' 천운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호호호호......!" 나녀들은 젖가슴과 둔부를 흔들며 다가왔다. 그는 코웃음쳤다. '흥, 모두 허상이다.' 그는 눈앞에 다가온 한 나녀를 향해 백마부 십팔 위에 올라있는 마두의 독문절기인 최심장(催心掌)을 뻗었다. 퍽! "캬아악!" "아니?" 천운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둔탁한 소리와 날카로운 비명! 허 상인 줄 알았던 나녀는 놀랍게도 실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피를 뿜으며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여 인은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이 여인들이 모두 진짜란 말인가?' "호호호......!" 나녀들은 한 여인이 죽었음에도 아랑곳없이 교소를 흘리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천운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몸을 빙 글 회전시키며 쌍장을 좌우로 뻗었다. 퍼펑! 펑! 요란한 폭음과 함께 핏빛의 수영이 뻗어나갔다. 그것은 혈옥수(血 玉手)란 무공으로 방룡의 절기였다. "아아악!" 이번에는 세 명의 나녀들이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후두두둑! 그녀들이 뿜어낸 선혈이 허공에서 우박처럼 쏟아졌다. 이렇게 되 자 천운비는 진저리를 쳤다. '이럴 수가? 일단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구나.' 그는 신법을 전개하여 나녀들 사이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이번에는 검은 안개가 뭉클거리며 밀려오 는 것이 아닌가? 안개라기보다는 마치 먹물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는 간담이 써 늘해짐을 느끼며 천안통을 발휘하려 했다. 그때였다. "크크크크......!" "내 얼굴... 내 얼굴을 다오!" "헉......!" 천운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검은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나타난 괴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그에게 죽은 방룡이었다. 하나 도 아니고 수십 명의 방룡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그를 향해 다가 오고 있었다. "내 얼굴... 내 얼굴을... 돌려다오." 천운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방룡이 저승에서 돌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는 방룡을 죽인 장본인이다. 그러니 놀라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머리가 굳어졌다. 그런데 한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이제 알겠다. 아수마궁(阿修魔宮)의 시험이다!' 아수마궁. 그들은 오대마벌 중 하나다. 그들은 사술(邪術)과 환술(幻術)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리들이었다. 정통의 무공보다는 이같은 괴술에 의지하는 편이지만 아무도 그들의 괴술을 파해하지 못했으므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천운비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죽은 방룡의 환상이 나타 난 것은 그의 허를 찌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술이나 환술은 마음이 흔들리면 더욱 강하게 작용하게 마련이 다. 천운비는 현깃증을 느꼈다. 환영은 쉴 새 없이 나타나 그를 괴롭힌 것이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수마궁 사술의 무서움은 시각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심상에 나타 나는 것이었다. 스스......! 검은 안개 사이로 흑영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그는 머리끝서 발 끝까지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오직 드러나 보이는 것은 눈뿐이었다. 사삭....... 그는 천운비의 뒤로 접근했다. 한편 천운비는 달마검급 상에서 터득한 부동심법(不動心法)을 끌 어올리고 있었다. 그러자 어지러웠던 마음이 다소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번에는 구룡비학에서 얻은 불문의 심법을 운용했다. 그러 자 비로소 마음이 명경지수처럼 맑아지며 모든 환상이 연기처럼 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흐흐, 죽어라!" 슈욱! 등뒤로 날카로운 경풍이 밀려왔다. 기척없이 다가들던 흑영이 살 수를 펼친 것이다. 푹! 한 자 가량의 비수가 천운비의 등에 박혔다. "으아악!" 그러나 비명을 지른 것은 그가 아니라 흑영이었다. 천운비의 등을 찌른 순간 강렬한 흡인력이 비수는 물론 손목까지 끌어당겼던 것 이다. 그 바람에 손목이 끊어져 버렸다. "후후! 아수마궁의 귀졸이 감히 나 방룡을 시험하다니, 괘씸하구 나." 천운비는 음소를 흘리며 돌아섰다. 흑영은 잘라진 손목을 감싸쥔 채 물러났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는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누구냐? 네놈은 방룡이 아니다! 방룡은 이미 죽었다." "......!" 천운비는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낸 것에 대해 크게 놀랐다. '아니 어떻게?' 그러나 곧 자신이 상대의 사술에 현혹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흐흐, 용케 알아냈다만 넌 죽어줘야겠다." 슈슉! 그의 손이 뻗어나갔다. 손가락을 구부린 채 뻗었는데 장인지 조 (爪)인지 괴이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이때 흑영은 갑자기 입을 딱 벌리더니 선혈을 뿜어냈다. 푸아아! 자욱한 핏방울이 뿜어졌다. 순식간에 주위가 시뻘건 안개로 뒤덮 히고 말았다. '아차!' 천운비는 속았음을 느끼고 신형을 떠올렸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 미 어디로 달아났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급해졌다. 그를 놓치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는 품속에서 승천황검(昇天皇劍)을 꺼냈다. 이어 전 공 력을 끌어올려 청력을 집중시켰다. 천이통을 시전한 것이다. 스으으....... 왼쪽 삼십 장 밖으로 미세한 음향이 들렸다. 순간 그의 검미가 치 켜 올라갔다. "천(穿)- 극(極)- 일(一)- 기(氣)- 통(通)-!" 파아앗! 그의 모습은 환영처럼 사라졌다. 승천황검과 함께 날아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줄기 빛이 뻗어 나가는 것 같았다. 아니, 뇌전이 치는 것 같았다. 뒤이어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흔들었다. "크아아악!" 스스스! 안개 속에서 천운비의 신형이 나타났다. 그는 본래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되돌아오는 섬광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 승천황검은 그의 손에 돌아왔다. 그는 품에 갈무리한 후 몸을 돌 렸다. 비로소 안개가 걷히고 화원이 나타났다. 화원의 꽃이 어지럽게 쓰 러져 있었다. 그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린 후 유유히 화원을 등지 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한 인영이 정수리로부터 두 조각 난 시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머리서 발끝까지 백색으로 감싼 위인이었다. '......!' 그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남자인지 여자인 지를 구별할 수 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흠, 이상하다. 방룡은 원래 검을 쓰지 않는다. 더구나 이것은 전 설의 어검술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한 초검도인데... 대체 저 자 는 누구란 말인가?" 백색인영의 눈빛이 곤혹으로 흔들렸다. "후후, 어쨌든 나 야월향(夜月香)은 그의 약점을 잡는데 성공한 셈이로군." 야월향! 그는 오대마벌 중 야우림(夜雨林)이 배출한 후계자였던 것이다. <귀하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오늘밤 자시 천잔애(天殘涯)로 나오 시오. -야월향(夜月香).> 방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천운비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쪽지를 발 견했다. 쪽지에 쓰여진 문구를 읽은 그는 가슴이 섬뜩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쪽지의 글씨는 섬세했다.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짚이는 것이 있었다. '이 자는 어젯밤 화원에서의 일을 모두 보았단 말인가?' 그는 쪽지를 손바닥에 놓고 비볐다. 쪽지는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 다. '어쨌든 만나보면 알겠지. 굳이 쪽지로 날 유인하는 걸 보면 필시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심사 숙고해야만 했다. 암흑제는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오 인의 후보들은 서로간에 치열한 탐색전을 벌이고 있었 다. 서로 암중으로 상대방의 실력을 탐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 고 있었다. 때문에 오대마벌 사이에서 종종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천운비는 백마부의 마두들이 자신을(?) 위해 헌신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방룡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내고 있었다. 혈륜공자(血輪公子) 영호전성(令狐全盛). 마서생(魔書生) 모백량(毛白凉). 야월향(夜月香). 만겁동자(萬劫童子). 그들이 사대마벌이 내세운 후보들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암흑마전의 대통을 이어받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 었다. 사대마벌은 자신들이 내세운 후보가 대통을 이어받는 것이 마도를 장악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마도인들에게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그들은 동원 가능한 모든 것을 행하고 있었다. 백마부의 마두들이 헌신한 결과 천운비는 그들 사 인의 내력에 대 해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네 명의 후보는 모두 젊었다. 그것은 규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 중 가장 강한 자는 혈륜공자 영호전성과 마서생 모백량이었 다. 그것은 오대마벌의 전력상 구도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혈륜성과 전륜궁이야말로 오대마벌을 양분하고 있는 세력들인 것 이다. 그들 중 가장 신비한 인물은 야월향이다. 그의 모든 것이 비밀에 감싸여 있었다. 무공 정도는 물론이려니와 심지어는 그가 남자인 지 여자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대마벌 중 가장 은밀한 조직을 갖추고 있으며 무공 또한 알려진 게 극히 적은 야우림의 내력 탓이었다. 만겁동자는 아수마궁의 소궁주다. 그는 오래 전부터 아수마궁의 각종 사술과 환술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방룡으로 위장한 천운비와 사 인의 후보들. 과연 그들 중 누가 암흑마전의 후예가 되어 다가올 마도천하의 지 존이 될 것인가? 그야말로 예측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객관적인 전력으로만 따진다면 그들 오 인 중 혈수미안마 방룡이 가장 처진다고 할 수 있었다. 천잔애(天殘涯). 대마성에서 오리쯤 서쪽으로 가면 도끼로 찍어낸 듯한 단애가 나 타난다. 아차 발 한 번 잘못 딛으면 천애만애의 낭떠러지로 떨어 져 뼈조차 추릴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천잔애의 깎아내린 절벽 중간에는 바위가 돌출되 어 있었다. 천운비는 약속대로 천잔애 위에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시가 되었는데?'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때였다. 남녀를 분간하기 힘든 음성이 절벽 아래에서 들려왔다. "후후! 방형이시오?" 천운비는 흠칫했다. "그렇소만......." "아래로 내려 오시오." 천운비는 절벽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십여 장쯤 내려가다가 바위가 돌출된 부분이 있었다. 그곳에 서있던 인 영이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곤 다시 사라졌다. '은밀한 곳이로군.' 천운비는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사 함정이라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는 신형을 날렸다. 바위 위에 내려선 그는 절벽 쪽에 동굴이 뚫 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은 제법 컸다. 오륙 장쯤 들어가자 확연히 넓어지면서 제법 큰 공간이 나타났다. "......!" 천운비는 눈썹을 꿈틀했다. 석실은 천연의 구조에 약간의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었다. 석실 한가운데 역시 돌로 된 탁자가 있었는 데 그 위에 간단한 술과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백색으로 휘감은 인영이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천운비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대가 야월향이오?" "그렇소." "하하, 이런 은밀한 곳에서 술자리를 벌이다니, 그대의 취미는 각 별하구려?" 야월향은 머리에 흰색의 두건을 쓰고 있어 두 개의 눈구멍만이 보 였다. "방형은 일세의 풍류아라고 들었소. 그래서 이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소이다." "하하핫! 뭘 좀 아시는구려." 천운비는 대소를 터뜨리고는 야월향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한 쪽 눈썹을 찡긋하며 물었다. "그래, 용건이 무엇이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야월향은 기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선 귀공의 담력에 경탄하는 바이오." 천운비는 히죽 웃었다. "후후,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 "귀하의 담력 말이오." 순간 할 말을 잃은 야월향의 눈에서 독기가 뿜어지는 듯했다. 그 러나 무엇을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술병을 집어 들 었다. "오늘밤 이 술자리는 결코 나쁜 뜻으로 마련한 것이 아니오." 그는 미리 준비된 두 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은 옅은 호박빛으 로 가득 따르자 술병이 비었다. 정확히 두 잔 분량의 술만 준비한 것이다. 천운비는 묵묵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야월향은 술잔을 내려 보며 말했다. "술 속에는 독(毒)이 들어있소이다." "......?" 천운비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독주를 따라놓고 그것이 독주라 고 알리다니. 그는 상대에 대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야월향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야월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독은 미인루(美人淚)란 것이오." "미인... 루!" 천운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인루(美人淚)는 세상에 존재하는 독 중에서 가장 특이한 독이었 다. 일명 원앙주로 불리우기도 하는데 기실 초야에 임한 신랑신부가 마시는 합환주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엄연히 독주였다. 미인루는 삼백 년 전의 인물이었던 독성(毒聖) 화운(華雲)이 만든 것으로 총 삼만 가지의 독초를 배합해 만든 신비한 효능을 가진 독이었다. 미인루는 반드시 남녀가 함께 나누어 마셔야 한다. 만일 한 명이 마시면 그 즉시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화운은 경고했다. 남녀가 함께 미인루를 나누어 마시면 그 이후 이해할 수 없는 심 령적인 교통(交通)를 이루게 된다고 했다. 즉 이체일심(異體一心) 이 된다는 것이다. 상대가 고통을 느끼면 똑같이 고통이 전달되고, 그러나 어느 한쪽 이 먼저 죽게 되면 미인루의 독이 발작을 일으켜 죽게 된다는 것 이다. 화운이 미인루를 만든 데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그는 사매 인 교영(嬌英)을 정말로 사랑했었다. 그러나 당시 교영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려 무진 애를 썼 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는 혼신을 다해 모든 독술을 동원하여 미인루를 제조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은밀히 수를 써 교영에게 미인루를 마시게 했다. 물론 자 신도 함께 마셨다. 훗날, 교영이 다른 사내와 결합하려 했을 때, 화운은 세상이 끝났 음을 느끼고 자살을 택해버렸다. 그가 만든 미인루는 확실히 그 위력을 나타냈다. 화운이 죽자 막 혼례식을 올리던 교영은 갑작스럽게 독이 발작하여 죽고 만 것이 다. 그것은 강호에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 기였다. 천운비는 미인루의 전설을 떠올리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이오? 설마 미인루를 함께 마시자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요, 함께 마셔요." "엇?" 천운비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야월향의 음성이 갑자기 여인의 음성으로 변한 것이다. 야월향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여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야우림에서도 극소수예요. 하 지만 당신에게는 밝히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천운비는 경이로운 시선으로 야월향을 바라보았다. "음, 좋소. 내게 무슨 부탁이 있소?" "당신이 가짜라는 것을 안 것은 우연이었어요. 백마부를 정탐하러 갔다가 화원에서 당신이 아수마궁의 첩자를 죽이는 것을 보게 되 었어요." "역시 그랬었군." "그후 많은 생각을 했어요. 당신 정도의 실력이라면 암흑제에서 어쩌면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서 모험을 걸어보기로 한 거예요." 천운비는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방룡이 아닌 것은 그렇다치고 낭자는 내 정체를 알고 있 소?" 백색 두건 속에서 야월향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알고 있어요." "아니? 어떻게......." "승천황검을 쓰는 것을 보고 알았죠." "아!" 천운비는 탄성을 발했다. 승천황검은 만붕왕의 신물이었다. 만력 제가 무림에 무림지왕의 현신을 포고할 때 그의 신물임을 함께 밝 혀두었던 것이다. '내가 만붕왕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뿐더 러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야월향은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하지만 경고하겠어요. 이곳에서 날 죽이면 당신의 정체는 즉시 폭로될 거예요. 내가 그 정도도 예상 못하고 여기까지 왔을 줄 알았나요?" "음." 천운비는 신음을 발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다. 그런데 야월향의 다음 말은 뜻밖이었다. "안심하세요. 당신이 만붕왕이란 사실을 폭로할 생각이 없으니까 요. 물론 내 부탁을 들어준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죠." 천운비는 그녀에게 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그 부탁이란 무엇이오?" 야월향의 눈에 뿌연 안개가 어렸다. "아버님을 구해 주세요." 천운비는 흠칫했다. "그대의 부친이라면... 야우림주(夜雨林主)를 말하는 것이오?" 야월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가 어찌 되었는데 그러오?" "아버님은 지금 전륜궁에 갇혀 있어요." "......!" 천운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대체 어찌된 일이오?" 야월향은 탄식하며 순순히 사정을 털어놓았다. 오대마벌의 하나인 야우림의 림주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어려서부터 아들처럼 키웠다. 복 장도 남복을 입혔으며 대외적으로 아들인 것처럼 행세하게 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마서생 모백량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야월향의 진면목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야월향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야심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야월향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석이조 를 달성하는 일이었다. 즉, 그녀를 맞이함으로써 장차 야우림의 세력까지도 틀어쥐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음모를 꾸몄다. 구실을 세워 야우림주를 초대한 것이었다. 야우림주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찾아갔다가 그만 함정에 빠져 제압되고 말았다. 그후 모백량은 야우림주의 목숨을 담보로 야월향을 계속 협박하고 있었다. 한편 야월향은 부친이 전륜궁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일체 비밀에 부쳤다. 오대마벌의 세력판도에 영향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암흑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암흑제 에서 후계자가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부친을 구할 수 있을 뿐더러 모백량을 징계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능성은 미미하기만 했다. 실상 그녀의 무공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오대마벌의 후예들에 비해 뚜렷한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고민에 잠겨 있던 그녀는 우연히 천운비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천운비의 무공이 불가사의한 것을 보고 그를 이용할 수 있 다고 생각했다. 야월향은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그녀는 술잔을 가리키 며 말했다. "내가 내세운 조건을 수락한다면 이 술을 마셔요. 그것으로 거래 는 성사될 테니까요." 천운비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보니 낭자야말로 효녀이구려. 마도에 속해 있는 여인 답지 않게 말이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낭자는 여인으로서의 모든 것 을 잃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소?" 미인루는 남녀의 운명을 묶는다. 미인루의 전설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나누어 마신 순간부터 그녀는 천운비 외의 남자와는 영원히 결합할 수 없는 몸이 될 것이다. 또 한 그녀가 천운비를 묶어둘 수 있듯이 천운비 역시 그녀를 파멸로 몰고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호호호....... 평범한 여자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날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 "나는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버렸어요. 내게 여인의 삶이 없어진 지는 이미 오래예요. 그러니 상관없는 문제죠. 게다가 죽을 때까 지 만붕왕 같은 절세고수가 날 보호해 줄 텐데 손해볼 일이 뭐가 있겠어요?" 천운비는 어이가 없었다. 야월향은 무섭도록 치밀하고 영활한 여 인이었다. 그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오히려 날 호법으로 삼겠다고? 후후, 하긴 그녀를 보호해야 나도 생명을 부지할 테니, 정말 기가 막힌 여인이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하며 물었다. "하지만 내가 암흑마전의 후계자가 된다면 마도출신인 당신은 날 방관할 수 없지 않겠소? 설마 내 손에 마도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 만 보고 있진 않을 텐데 말이오." 야월향은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홋......! 당신은 마도를 너무나 우습게 보는군요. 당신이 설사 후계자가 된다해도 마도가 당신의 손에 놀아난다고 생각한다 면 큰 착각이에요. 더구나 당신은 전주님을 과소평가하고 있어 요." "암흑마전주의 힘이 그토록 대단하단 말이오?" "호호! 만붕왕이 아무리 무림지왕이라지만 결국은 마도에 귀속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것만이 당신이 살 길이에요. 또 하나 잘 생각해 볼 일이 있어요. 당신과 내가 합심한다면 야우림과 백마부 가 손을 잡게 되니 당신은 만승지존이 될 수도 있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천운비는 피식 웃었다. "낭자야말로 착각을 하고 있소." "......?" "마도의 힘이 크다하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오. 예로부터 사팔귀정의 진리는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소. 언제나 정은 마 를 누르는 법이오." 야월향은 눈을 깜박였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싶지 않아요. 어쨌든 내 조건을 받아들 이느냐, 거절하느냐만 결정하세요, 만붕왕." 천운비는 담담히 물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좋겠소?" 야월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모백량과 맺어지는 것을 마다하는 것이오?" 야월향의 눈이 경련을 일으켰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치를 떨며 말했다. "그는 동자공(童子功)을 익혔어요." "음!" 천운비는 비로소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야월향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륜궁의 궁주는 대대로 동자공을 익히죠.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부인을 맞아들였고, 자식을 낳아 혈맥으로 대통을 이어가고 있어 요." "아니, 동자공을 익힌 몸으로 어찌 혈족을 보존할 수 있단 말이 오?" 야월향의 눈에서 분광이 흘러나왔다. "호호호! 그들은 짐승이에요. 그들이 혈통을 잇는 방법이 어떤지 알고 있나요? 그들은 가장 우수한 체질을 가진 사내들을 선발하여 이름뿐인 궁주의 부인과 집단적으로 교합(交合)을 시켜요. 그런 방식으로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씨를 만든 후 후계자로 삼는 거예요. 더러운 인간들!" "그럴 수가......!" 천운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야월향을 이해할 수가 있었 다. 과연 어떤 여인이 그런 일을 허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전 륭궁의 극악함에 심금이 떨릴 지경이었다. '전륜궁.... 실로 무서운 자들이다. 어쩌면 마서생이야말로 사인 중 가장 무서운 작자일런지도 모른다.' 이때 야월향이 말했다. "미인루를 마실 건가요? 아니면......." 천운비는 싱긋 웃었다. "좋소, 마시겠소. 그러나 그 전에 조건이 있소." "......?" 그는 신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먼저 낭자의 진면목을 보고 싶소." 야월향은 몸을 움츠렸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의 얼굴도 궁금하군요." 천운비는 히죽 웃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오." 그는 얼굴을 쓱 문질렀다. "아......!"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야월향은 탄성을 발했다. 천운비의 얼굴은 신비한 면이 있었다. 특히 이마에 은은히 새겨진 뇌문은 흉터라기 보다는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하하......! 이제 낭자의 옥용을 보고 싶소." 야월향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문만 듣던 만붕왕이 이렇게 젊을 줄은 몰랐어요." 천운비는 빙그레 웃었다. "소문은 항상 사실과 차이가 나는 법이오." 야월향은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내 진면목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어요. 아버님과...... 모 백량......." "하하, 그럼 영광으로 알겠소이다." 야월향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 위로 백색두건을 벗겼다. 차르르! 기다란 수발이 해초처럼 어깨를 덮으며 흘러내렸다. 그녀의 드러 난 얼굴을 본 순간 천운비는 충격을 받았다. 우물(尤物). 그녀는 일세의 우물이었다.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희었으며, 한 쌍의 눈은 심해를 보는 듯 깊 었다. 약간 오만해 보이는 코, 잘근 깨문 입술은 야멸차면서도 내 면에 뜨거운 정열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흐음!" 천운비는 한숨을 쉰 후 말했다. "정말 아깝소." "네에......?" "낭자같은 미인이 남자 행세를 한다는 것은 정말 옳지 못한 일이 라는 생각이 드오." 야월향의 옥용이 살짝 붉어졌다. "듣기로 만붕왕에게는 수많은 미녀들이 따른다 하던데 나같은 마 도 출신의 여인이 어디 성에나 차겠어요?" 천운비는 내심 웃었다. '역시 여인은 여인이구나. 자신의 용모에 신경을 쓰는 것은 범녀 나 다름없단 말이야.' 그는 짐짓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목을 넓힌 듯한 기분이오. 낭자와 함께 미인루를 마시게 된 것 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이오." 그는 술잔을 들었다. "자, 듭시다." "......!" 야월향의 안색에 묘한 흔들림이 일었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들어 술잔을 잡았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미인루를 흘려 넣었다. 이 한 잔의 술! 그것 은 향후 두 남녀를 동생동사(同生同死)의 운명으로 잇게 해 줄 것 이다. 실로 기이한 만남이었다. ■ 무림백서 3권 제26장 암흑마전(暗黑魔殿)의 부활 ━━━━━━━━━━━━━━━━━━━━━━━━━━━━━━━━━━━ 드디어 암흑제(暗黑祭)가 열렸다. 십만을 헤아리는 대마성의 고수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리고 있었 다. 대마성의 후면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절벽이 솟아 있었다. 지금 그 앞에는 대마성의 마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구구구궁! 굉음과 함께 절벽의 한곳이 벌어졌다. 그것은 믿기 힘든 장관이었 다. "와아아아아......!" 천 년의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마침내 암흑의 마전이 열린 것이 다. 이른바 천마벽(天魔壁)이라 불리는 절벽은 전체가 붉은 색으로 이 루어져 있었다. 그 천마벽이 좌우로 갈라진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십만의 마도가 일시에 내지른 함성은 대마성을 진동시키고 천마벽 을 흔들었다. 마도들의 얼굴에는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만면에 격동의 빛을 띤 채 천마벽으로 달려들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거대한 지하대전에 도착했다. 암흑의 제왕, 버림받고 학대받은 전설의 제왕! 십마(十魔)가 저주 를 품고 세웠다는 암흑의 성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와아아아-!" 군마(群魔)들의 격동과 흥분에 찬 함성이 지하광장을 온통 뒤흔들 었다. 수 마장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광장에 들어선 군마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사방의 벽면에는 벽화(壁畵)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그 벽화의 내 용이야말로 천년 이래로 실전된 마도(魔道)의 개세절학들이었다. "와아아......! 우우......!" 군마들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벽화상의 무공은 한 가지만 익혀도 능히 천하를 독패할 수 있는 가공지경의 마학이었다. 마침내 전설이 실현된 것이다. 암흑마전(暗黑魔殿). 천년 이래로 숱한 마두들이 실종되었다. 그들은 천하를 종횡하다 만년에 이르러 연기가 꺼지듯 사라졌다.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아는 이가 없 었다. 그런 가운데 이런 소문이 나돌았다. - 그들은 마도의 성지(聖地)로 떠났다. 마도부활의 염원을 안은 채 암흑의 성전으로 떠났다!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지하광장의 벽에 새겨진 무수한 벽화들이야말로 사라진 마도고수 들이 남긴 유학들이었던 것이다. 군마들은 기뻐 날뛰었고 마침내 암흑(暗黑)의 축제가 벌어졌다. 둥--! 둥--! 둥--! 어디에선가 심금을 뒤흔드는 듯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북소리 가 끝날 무렵이 되자 군마들의 환호성은 잠잠해졌다. 북소리는 도 합 백팔 번을 울린 끝에야 멈추었다. 지하광장에는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둔중한 굉음이 들려왔다. 구구구구궁! 마침내 암흑마전의 궁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 군마들은 숨을 죽였다. 그토록 염원하던 암흑마전의 대전주(大殿 主)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군마들의 눈길은 일제히 궁문 으로 향했다. 암흑마전은 지하광장 안쪽 벽속에 축조되어 있었다. 벽이 열림으 로써 암흑마전의 실체가 드러나고 전주의 모습이 현신되는 것이었 다. "오오!" 벽으로부터 일단의 무리들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음침한 인상의 노인들이었다. 모두 백팔 명이었다. 이때 군마들 가운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르짖는 음성이 있었다. "앗! 저 분들은 백 년 전 사라졌던 신주백팔마들이오!" 신주백팔마(神州百八魔)! 백 년 전, 군마와 마방(魔 )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마도의 중흥 기를 이룬 적이 있었다. 당시 거의 동시에 백팔 명의 개세마두들 이 출현했으니, 그들은 하나같이 일대종사급의 무공을 지니고 있 었다. 그런데 그들은 원인도 모르게 일제히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무림의 비사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런데 백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그들이 암흑마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의 나이는 최소한 백오십에서 근 이백 세에 이른 셈이었다. 군마들은 이같은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때 궁문 안으로부터 다시 일련의 괴인들이 걸어 나왔다. 각양각 색의 인물들로 그들에게서는 소름끼치는 마기가 넘치고 있었다. 군마들 속에서 그들의 행색을 보고 어렴풋이 기억을 되살려 내는 자들이 있었다. "오오! 저 분은 오십 년 전의 개세무상혈마(蓋世無常血魔)!" "저 분은... 백이십 년 전의 고루시마( 賜屍魔)......." "우우! 백삼십 년 전에 사라졌던 현천비마(玄天飛魔)시다." "흑! 백팔십 년 전의 천조육사(天弔六邪)가 아니신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암흑마전으로부터 줄지어 걸어나오는 인물들은 과거에 실종되었던 전설적인 마두들이었다. 암흑대전으로부터 나온 마인들의 수는 근 천 명 이상이었다. 가깝 게는 수십 년 전부터, 멀게는 이백 년 전까지 활약했던 거마들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는 사실은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한편, 천운비는 백마부의 인물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공포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게 과연 현실이란 말인가? 하나같이 개세마두들 인 저들이 모두 살아있었다니.......' 그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만일 저들이 강호에 나와 활개 친다면 무림은 어찌될 것인가? 그야말로 시산혈해를 이룰 것이다! 이때 암흑마전으로부터 나온 마인들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암흑(暗黑)- 수라제(修羅帝)- 현신(現身)-!" 마인들은 일제히 마전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 군마들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전신을 부르 르 떨었다. 털썩! 털썩! 누가 먼저인지 몰랐다. 십만의 군마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가히 질식할 듯한 분위기 속에 그들은 마전을 향해 오체복지했다. 이때 군마들의 눈에 궁문 안으로부터 나오는 인물이 보였다. 열두 명의 동자(童子)와 열두 명의 동녀(童女), 즉 이십사 명의 동남동녀들이 교자를 멘 채 걸어나고 있었다. 교자는 흑오목(黑烏 木)으로 만들진 듯 검은 색이었다. 교자 위에는 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현의(玄衣)을 걸친 중년인이었다.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청면(靑 面)이었으며 짙은 눈썹과 얄핏한 입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기이한 것은 푸른 기운이 현의인의 전신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이 었다. "오오, 대전주(大殿主)시여!" "암흑수라제여!" 대마성의 군마들은 감히 현의인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이마를 땅 에 박으며 외쳤다. 암흑수라제(暗黑修羅帝). 전설의 십마지겁(十魔之劫)이 탄생시킨 암흑의 제왕이자 천만 마 도인의 지존인 것이다. 군마들은 지하광장이 가공할 마기에 휩싸이는 것을 느끼며 가슴이 터질 듯이 긴장되었다. 암흑수라제의 교자는 이동하여 광장 한복판에 멈추었다. "마(魔)-- 마(魔)-- 천(千)-- 세(歲)!" 천여 명의 전대 마인들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우우우웅! 지하광장이 진동을 일으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장내를 술렁이게 했던 흥분과 격동이 가라앉자 암흑수라제는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청수한 얼굴은 여전히 푸른 기운에 감싸여 뚜렷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도들이여, 암흑의 성전이 열렸도다! 오늘로 마도의 출발을 알 리노라! 이제 천하무림은 마도로 일통됨을 선언하노라!" 우우...... 웅......! 암흑수라제의 선언이 떨어진 순간 군마들은 가슴의 피가 끓어오름 을 느꼈다. 마도천하! 마침내 마도의 하늘이 열린 것이다. "으하하하하핫! 천 년 동안 잠자고 있던 십마(十魔)의 원혼이 부 활했도다! 마도여, 일어서라! 그동안 멈추었던 대파천의 춤을 추 거라!" 쿠르르르......! 암흑제(暗黑帝)가 시작되었다. 마도의 개천(開天)이 선언되고 군 마들은 충성을 맹세했다. 암흑수라제의 등장! 마침내 무림에 새로운 국면이 열린 것이다. - 암흑마전의 장정(長征)은 원단(元旦)에 결행되리라. 암흑수라제는 선포를 내렸다. 그들의 상대는 영세태평무국의 배후인 악마천부였다. 마도일통을 위해서는 그들과 결전을 벌여야만 했다. 군마들은 숨가쁘게 움직였다. 원단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그들 은 대장정에 대비하여 바쁘게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만사군자(萬邪君子). 그는 백 년 전의 마도제일뇌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지금 그 는 암흑마전의 군사(軍師)를 맡고 있었다. 하늘을 움직이는 두뇌와 병략(兵略)을 지닌 그의 머릿속에서 무림 에 군림하기 위한 대책략이 세워졌다. 우선 그는 삼만의 군마를 편성했다. 이름하여 암흑군단(暗黑軍團)이라 했다. 사상최강의 마도세력이 조직을 정비했으며, 군마들은 자신들이 지 닌 무공 정도에 따라 적재적소에 편성되었다. 이제 무림을 장악하 기 위한 막이 오른 것이다. 거대한 대전. 암흑수라제의 후계자가 되려는 오 인의 후보들이 오체복지하고 있 었다. "......." 이곳은 암흑마전의 중심부다. 이곳에서 암흑마전의 모든 일이 결정된다. 또한 암흑수라제가 항 시 기거하는 곳이기도 했다. 대전의 단상에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휘장은 워낙 두터워 안 쪽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속에 암흑수라제가 있다는 것은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 오 인은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은 숨마저 삼킨 채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벅찬 기대감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 들이 손꼽아 기다렸던 암흑제전은 열렸으며, 마도천하는 시간문제 일 것이다. 그들은 마도의 희망으로 선발되었다. 적어도 그들 오 인 중 한명 이 장차 마도천하의 지존으로 선택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 시험대에 올라야 한다. 그들은 이 날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으며 혼신이 힘으로 야망에 담금질을 한 것 이다. 암흑수라제의 후계자. 그의 대통(大統)을 잇게 된다면 영세제일인으로 군림할 것이다. 그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후계자로 발탁되리라는 야망을 품 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오대마벌의 염원이기도 했다. 문득 휘장 속으로부터 궁량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듣거라. 너희들은 오대마벌에서 엄선한 마도사상 최고의 기재들 이다. 본제(本帝)에게 후사가 없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 다. 이제 너희들 중에 한 명을 본제의 후계자로 선택하여 대통을 이을 생각이다." "......!" 오 인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대통을 잇는 자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여야 한다. 마도의 제왕이 될 자질과 무공, 지혜 등에서 한 치의 부족함이 없는 자만이 본제 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어느 한 방면에서라도 뒤진 다면 그것은 진정한 승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 인의 후보들은 아무리 귀를 기울여 보아도 암흑수라제의 음성 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들으면 부드럽고 은은했으며, 어 떻게 들으면 냉막하고 차디찼다. "선택은 너희들 스스로 해야 한다. 이제 십마지관(十魔之關)을 통 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암흑마전의 조사이신 십마제(十魔帝)께 서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관문이다. 너희들은 동시에 입관해야 한 다." 암흑수라제의 말이 이어졌다. "십마지관에는 마도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그것으로 충분히 너희들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으리라 본다. 방법은 간단하다. 누 가 가장 빨리 십마지관을 통과하느냐에 달려 있다." 오 인은 모두 손에 땀을 쥐었다. "하하핫......! 십마지관 속에는 무수한 함정과 기관, 그리고 백 팔 명의 고수가 매복하고 있다. 그것은 수시로 너희들을 공격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 살고 죽는 것은 너희들의 능력에 달려있다." '으으.......' 오 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암흑수라제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듣는 동안 심장이 파열될 듯한 압박감을 느낀 것 이다. 이때, 천운비는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그는 암흑수라제의 음 성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온몸의 피가 끓어올랐다. '암흑수라제....... 어째서일까? 저 자의 음성은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으니.......' 그는 내심 부인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어찌 그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너무 긴장 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점점 더 진동했다. 그것은 왠지 알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암흑수라제의 음성에는 이해할 수 없는 흡인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암흑수라제의 명이 떨어졌다. "입관하라!" 열 개의 문. 그들이 부복하고 있던 대전의 사방에 열 개의 문이 열렸다. 그 문은 모양과 크기가 똑같아 구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 문이나 선택하여 들어갈 수 있었으나 오 인은 망설이고 있었다. '저것이 십마지관으로 통하는 문!' 그들은 뚫어져라 문을 노려보았다. 한 번의 선택으로 중대한 고비 를 맞이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최대한 신중해야겠다는 눈빛들이 었다. "어느 문을 택하든 자유다. 살아나올 수만 있다면... 영세제일인 이 될 것이다. 으핫핫핫핫......!" 암흑수라제의 웃음소리가 공명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 "......!" 오 인은 고개를 들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에서 똑같은 표정을 읽었다. 그것은 불안(不安). 그것이었다. 이윽고 하나 둘 일어섰다. 그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리며 각각 하나의 문을 선택한 후 걸어 들어갔다. 야월향은 걸음을 멈추더니 천운비를 돌아다보았다. "......!" 그녀의 백건 사이로 보이는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천운비는 그 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야월향은 그의 미소를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용기가 솟는 것을 느꼈다. 휙! 그녀는 교구를 날려 문으로 날아 들어갔다. 천운비는 사 인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사방을 둘러본 후 가장 가 까운 곳에 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기분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암흑마전의 힘은 상상이상이다. 어쩌면 악마천부보다 강할 수도 있다.' 십마지관을 통과하는 것보다 지금 그의 마음은 암흑마전의 놀라운 힘에 대해 쏠려 있었다. 특히 암흑수라제를 대한 이후로 그는 난 생 처음으로 두려움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막 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쿵!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이어 그의 눈앞이 캄캄해졌 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갔다. 마도사상 최고의 기재 오 인이 십마지관으로 들어간 후 정확히 열 흘이 흘렀다. 그동안 그들이 십마지관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는 자는 아무 도 없었다. 심지어는 그 속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는 한 명도 나온 자가 없었다. 전설의 십마제(十魔帝)가 세웠다는 관문, 대체 그 속에 어떤 안배 가 되어있는지 아는 사람은 사상 처음으로 관문을 돌파했던 암흑 수라제만이 알고 있었다. 그동안에도 암흑마전은 무림에 군림의 제일보를 내딛기 위한 준비 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제 남아있는 일은 암흑수라제의 후 계자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원단지일까지는 닷새가 남았다. 닷새 후면 그들은 마도천하를 위한 장정에 나설 것이다. 사상 유례없는 암흑군단(暗黑軍團)의 힘은 미증유의 거력으로 단 숨에 무림을 짓밟게 될 것이다. 적어도 현재의 힘만으로 보면 그 것은 거의 확실했다. 무림계의 상황은 별로 변화한 것이 없었다. 영세태평무국은 무림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강남무림에 이어 북무림까지 손을 뻗고 있었다. 명실공히 무림일통의 대업을 눈앞 에 두고 있었다. 영세태평무국이 내세우고 있는 군림의 율법은 무림계를 질식시키 고 있었다. 아무도 감히 반기를 드는 자가 없었다. 다만 있다면 유일하게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 만붕왕(萬鵬王). 만력제(萬歷帝)가 무림지왕으로 책봉했다는 신비의 인물 만붕왕만 이 마지막 남은 무림의 희망이었다. 비록 중원무림을 영세태평무국이 장악했다 하지만 북경을 중심으 로 한 화북(華北) 지역만은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만붕왕 예 하에 있는 자들이 사력을 다해 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작 그들의 영수인 만붕왕은 몇 달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전. 사방에 나 있는 열 개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 암흑수라제는 휘장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천만마도인의 하늘인 그는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했다. 장차 마도의 대 통을 이을 후계자야말로 모든 것에 우선하는 중대사인 것이다. "흠, 내가 십마지관을 뚫는데는 십삼 일이 걸렸다. 그런 데......." 그의 음성에는 은은한 경이가 어려 있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폭음이 울렸다. 쿵......! "흠, 또 하나의 관문을 통과했군." 암흑수라제는 보지 않아도 십마지관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꿰뚫 어본 듯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지옥십팔관(地獄十八關)을 삼 일만에 격파하더니 금천 수라탈혼진(禁天修羅奪魂陣)을 반나절에 무너뜨렸다. 어디 그 뿐 인가? 연옥이십팔화강시(煉獄二十八火 屍)마저 전멸시켰으 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들은 하나같이 마도에서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진법이요, 마공들이었다. "그 아이의 심기(心機)와 담력... 무공은 대단하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어린 나이에 부동(不動)의 심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암흑수라제의 음성에는 감탄이 깃들어 있었다. "이 상황으로 간다면......." 쿵......! 다시 한 차례의 폭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가까운 곳인 듯 대전이 진동했다. "아마 그 아이는 오늘 미시(未時)쯤 출관할 것 같군." 휘장이 가늘게 흔들렸다. "흐흐흐훗......! 그 아이는 마도사상 최고의 기재임이 틀림없다. 본제의 대통을 이어받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암흑수라제의 음성에는 만족함이 어려있었다. 쿵! 쿵....... 폭음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뿐만 아니라 폭음이 울리는 간격도 빨라지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아이군. 결국 백팔 명의 관주들마저 그 아이를 막아 내지 못하는구나." 이때였다. 꽈아앙! 천지가 붕멸되는 듯한 폭음과 함께 문 하나가 박살났다. 그 속으 로부터 인영이 비틀거리며 튀어나왔다. "으음!" 인영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형체를 알 아볼 수가 없었고, 전신은 피에 흠뻑 물들어 있었다. 그는 천운비였다. 그는 옆구리에 두 사람을 끼고 있었는데 그들은 혼절한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야월향과 마서생 모백량이었다. 생사의 와중에서도 그는 두 사람을 구해낸 것이었다. 그의 안색은 초췌하다 못해 크게 상해 있었다. 지난 십 일 동안 겪은 일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지옥, 그 자체였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깔려있는 죽음의 함정, 도처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장치는 물론 백팔십마관주들의 독랄한 기습....... 그 속에서 걸레처럼 육신이 찢겨져 죽은 혈륜공자와 만겁동자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들은 결국 관문을 돌파하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만 것이다. 천운비는 절망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다. 그가 쓰러진 다는 것은 무림의 정기가 소멸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싸웠다. 죽고 죽이고, 닥치는 대로 베었다. 상 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그의 이성은 마비되어 버렸다. 관문을 지키는 자들의 의무는 간단했다. 관문을 돌파하려는 자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관문을 방어 하는데 임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죽이도록 명을 받았다. 따라서 관문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관주들을 모두 죽여야하는 것이 었다. 가히 악마천부다운 방식이었다. 그는 육관에서 야월향을 구출했다. 그것은 어떨 수 없는 일이었 다. 만일 그녀가 죽는다면 미인루의 독성에 의해 그 자신도 죽을 지 모르는 일이었다. 칠관에서는 오른팔이 잘려져 있는 모백량을 구출했다. 그것은 야 월향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죽는다면 전륜궁에 갇혀있는 야우림주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최후의 기력을 모아 문을 부수고 대전으로 뛰쳐 나왔다. 마침내 십관을 모두 돌파한 것이다. 그러나 기력이 탈진해 있었다. 그는 대전에 나오는 순간 울컥 피 를 토해냈다. 현깃증이 일면서 바닥과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의 손에서 피 묻은 승천황검이 쨍!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 대전 안쪽의 휘장이 흔들렸다. 잠시 후 침중한 음성이 흘러 나왔 다. "어떻게 생각하오? 군사?" 암흑수라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디에선가 암흑마전의 군사인 만사군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주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본제는 이제 막 결심했소. 저 아이를 후계자로 택하겠소." "하지만 그는 만(萬)......." 만사군자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암흑수라제의 입에서 광소가 터 져나왔기 때문이었다. "후후후...... 으하하하핫......!" 쩌르르르릉-! 대전이 그의 웃음소리로 인해 무너질 듯 진동했다. "상관없소. 저 아이가 누구이든 변함없을 것이오. 본제는 저 아이 를 완벽한 마도의 아들로 삼을 것이오. 두고 보시오, 향후 마도는 새로운 제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오. 으하하하핫......!" "전주......." "하하하핫! 이미 끝난 얘기요, 더 말할 것 없으니 그 아이를 만령 의전(萬靈醫殿)으로 데려가시오. 회복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예......." 그들의 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 하는 것 같았다. "군사, 저 아이를 보고 있으면 본제는 과거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단 말이오. 후후후후훗......!" "......?" 천운비는 상세를 회복했다. 악몽과도 같은 십마지관 속에서 그는 극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내 공도 탈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다. 만령의전에는 마도 출신의 귀의(鬼醫)들이 득실거렸다. 그들은 백 골에 한 점의 살만 붙어 있으면 기사회생시키는 의술을 지니고 있 었다. 그로 인해 단 하루만에 완전히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암흑수라제의 후계자가 되는데 성공했다. 체력을 회 복한 그에게는 소전주(小殿主)란 칭호가 내려졌다. 원단일을 불과 삼일 앞두고 있었다. 삼일 후면 암흑군단은 대장정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천운비는 암흑마전의 대통을 잇기 위해 천일의 폐관수련에 들어가 게 되어 있었다. 정식으로 십마절학(十魔絶學)을 익히기 위함이었 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전에 십전천사(十全天師)를 구해내야 한다.' 그는 밤낮으로 지력(智力)을 동원하여 무림을 위한 대계를 짜기 시작했다. 천하는 삼분된 상태였다. 악마천부(惡魔天府)와 암흑마전(暗黑魔殿), 만붕왕이 이끄는 황궁 고수, 녹림도, 살종의 연합체가 그것이었다. 그중 가장 약세를 보이는 것은 만붕왕이었다. '힘은 힘으로 막아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악마천부와 암흑마 전을 대결시키는 일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소 낙관하고 있었다. 암흑수라제는 결코 악마천부와 손을 잡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악마 천부를 최대의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방법은 한 가지다. 우선 십전천사를 구한 후 북경으로 보내야 한 다. 그들로 하여금 구양중백을 만나 중원대동맹(中原大同盟)을 결 성토록 하자.' 그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무림을 구하는 일이었다. 하나라도 실수가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고작 삼일이다. 삼일 내로 십전천사를 구해야 했다. 묵부(墨府). 이곳은 뇌옥(牢獄)이다. 죄인을 가두는 곳이므로 경비가 삼엄하기 이를데 없었다. 묵부를 지키고 있는 자는 백 년 전에 활약했던 신주백팔마(神州百 八魔)에 속해있는 다섯 명의 거마였다. 이른바 사사오천사(死死五天邪)라 불리는 그들은 나이가 백오십 세가 넘었으며 공력이 화경이 이르러 흰머리가 다시 검어진 상태 였다. 그들의 무공은 가공할 경지에 올라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지키고 있는 한 죄수가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클클....... 이제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지하생활도 끝이다." 대사(大邪)의 말에 삼사(三邪)는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대형, 우리들의 녹슨 팔다리도 이제 써먹을 때가 되었소이다." 그들은 비록 나이가 들만큼 들었으나 아직도 야심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무림에서 한창 활동할 시기에 암흑마전의 사자(使者)에 의 해 끌려갔다. 그것은 물론 자의가 아니었다. 암흑마전은 천년 이래로 계속 대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완 벽한 마도천하를 이룩하기 위해 삼십 년마다 한 번씩 사자를 파견 하여 마도고수들을 끌어 모았다. 그때문에 주기적으로 개세의 마두들이 실종되곤 했던 것이다. 묵부로 향하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사사오천사는 흠칫했다. 이곳은 절대금지다. 때문에 누구를 막론하고 출입이 금지되어 있 는 곳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발자국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사사오천사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구부러진 통로를 주시했다. 발자 국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모퉁이로 인영이 모습을 보였다. "......!" 인영을 본 순간 사사오천사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어졌다. "하하! 수고들 하시오." 일신에 유삼(儒衫)을 입은 청수한 모습의 중년서생이었다.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아니, 군사(軍師)께서 웬일이시오?" 중년서생은 만사군자였다. 그는 암흑마전의 총군사로 전 마도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만사군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전주께서 죄수들을 데려오라 명하셨소이다." "......?" 사사오천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대사가 물었다. "영패는 가지고 오셨소?" 만사군자는 빙그레 웃었다. "여러분은 정말 철저하시구려. 본인을 못 믿겠단 말씀이시오?" 대사는 안색을 굳혔다. "믿고 안 믿고가 문제가 아니오. 그것은 묵부의 규칙이오." "허허헛......! 내 그럴 줄 알았소." 만사군자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접근한 위치는 기이했 다. 정면으로 대사와 이사(二邪)가 있었고, 그들에 의해 세 명의 마두는 시야가 차단되어 있었다. "물론 가져왔소. 자, 보시오." "......?" 대사와 이사는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그들은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만사군자는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단 일초에 두 명의 목을 동시에 베야 한다. 나머지 세 명이 놀라 는 순간 역시 단 일초에 끝내야 한다.' 만사군자. 대체 무엇 때문에 사사오천사를 죽여야 한단 말인가? "여기 있소." 소매로부터 무엇인가가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번뜩! 검광이 환상처럼 일어났다. "켁......!" 대사와 이사는 무엇이 어찌됐는지조차 모른 채 목이 댕겅 떨어졌 다. 그와 동시에 만사군자의 왼손 식지가 뒤로 퉁겨졌다. 슈슉! 빛과 같은 지강이 뒤로 뻗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삼사, 사사, 오사는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벌써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배반자!" "뒈져라!" 위-- 잉! 그들은 가공할 장력을 휘두르며 일제히 만사군자를 공격했다. 그 러나 만사군자는 그들의 공격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장력이 막 퍼부어지려는 찰라. "끄아아악!" 참혹한 비명이 울렸다. 세 노마두의 이마에서 피화살이 뿜어져 나왔다. 그들의 이마에는 손가락 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분명 만사군자가 퉁긴 지강은 빗나갔 다. 그런데 지강이 되돌아와 그들의 뒤통수를 관통해버린 것이다. 쿵, 쿵! 그들은 앞뒤로 바닥에 쓰러졌다. "일단은 성공이다." 만사군자는 한숨을 쉰 후 철문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묵강석(墨剛 石)으로 주조된 문이었다. 그는 대사의 옆구리에서 손가락 크기의 금빛 열쇠를 찾아내 열쇠 구멍에 넣고 돌렸다. 찰칵! 하는 음향과 함께 묵부의 철문이 기관작동에 의해 부드럽게 열렸다. 만사군자는 곧바로 묵부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무림백서 3권 제27장 패배(敗北) ━━━━━━━━━━━━━━━━━━━━━━━━━━━━━━━━━━━ "오오! 자... 자네가......?" "아아, 하늘이 무심치 않았구나!" 재회(再會). 엄밀히 말하면 스승과 제자간의 재회다. 그러나 과거의 뇌천의와 십전천사의 관계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묵부에 갇혀있던 십전천사는 이미 과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동안 부쩍 늙어 있었다.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오랜 뇌옥생활의 고초로 인해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과거 뇌천의를 가르칠 때의 낭랑하던 음성과 호된 기세는 온데 간데 없었다. 그들은 만사군자로 가장하여 나타난 천운비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본래의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그들의 모든 것을 주었던 대상이 아닌 가? 격동으로 인해 십전천사는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운비는 가능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는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 을 정리하여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십전천사는 하나같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아울러 무림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음에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없소이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오." 십전천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속에 할 말은 가득했으나 그들도 사태의 중엄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일행은 묵부를 빠져나가기 시작 했다. 천운비는 이미 탈출로를 정해두고 있었다. 올 때와는 달리 밀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진 직후였다. 휙! 묵부 앞에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진짜 만사군자였다. 그는 금골섭선(金骨攝扇)을 흔들며 음침 하게 중얼거렸다. "과연 예측대로야, 그 아이는 마도와는 어울리지 않아." 그는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대마성에서 동북으로 십 리쯤 떨어진 곳. 십전천사는 밀로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감격으로 몸을 떨었다. "어서들 나가십시오." 천운비는 길을 열어주었다. "......?" 십전천사는 그를 바라보았다. 천운비는 시선을 돌렸다. 북궁규가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천의(天意)......! 자네는?" 천운비는 평소에 말이 없고 냉담한 성격이었던 냉면혈제(冷面血 帝) 북궁규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기나긴 세월이었다. 그는 인간의 정을 끊고 살아야 했다. 혹독한 무공수련 속에서 한 마리의 미친 이리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그는 입가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떠나십시오. 나는 이곳에 남아 할 일이 있습니다." 천운비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자네 혼자 말인가?" "긴 설명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길로 북경으로 가셔 야 합니다. 활사관인 구양중백이란 분을 만나서 하루라도 빨리 중 원대동맹을 결성하십시오." "......!" 십전천사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변했다.' 그것은 그들이 느낀 공통적인 감정이었다. 천운비는 그들이 알고 있는 과거의 뇌천의가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지난 날 십전옥수겁 무옥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럼." 천운비는 몸을 돌렸다. "잠깐!" 천음선자(天音仙子)가 그를 불러 세웠다. 한때 아름다웠던 그녀의 얼굴도 이제 중년을 넘어 주름을 보이고 있었다. 천운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천의... 아니 천소협, 이곳에 남아 무엇을 할 생각인가요?" 천운비는 담담히 말했다. "기회를 봐서 만악의 영수인 암흑수라제를 죽일 생각이오." "암흑수라제를... 죽인... 다고?" 천음선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말까지 더듬거렸다. "물론이오. 마도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기 위해서는 그를 죽이는 것이 첩경입니다." 천음선자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눈에는 기 이하게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악물더니 말했다. "소협께... 꼭 할 말이 있어요." "무엇이오?" 천운비가 재촉하자 천음선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암흑수라제는... 그는..... 바로......." "......?" 천운비는 그녀가 말을 계속 더듬자 의혹을 느꼈다. "선자......!" "선자, 안돼오!" 십전천사가 일제히 당황성을 외치며 천음선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천음선자는 눈물을 떨구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조심... 해야 해요. 암흑수라제는... 사상최강의... 마종사(魔宗 師)니까......." 천운비는 그들의 기이한 태도에 의혹을 금치 못했으나 시간이 없 음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말씀 명심할 것입니다. 그럼......." 그는 천음선자에게 포권한 후 고개를 들었다. "북경의 칠왕부(七王府)를 찾아가시오. 만붕왕이 보냈다고 하면 여러분께 편의를 제공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후 그는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천음선자는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오열을 터뜨렸 다. "흐흐흑......!" "사매......!" "아미타불......!" 십전천사는 모두 탄식을 터뜨렸다. 잠시 후 관음성니가 그녀를 부 축해 일으켰다. "아미타불....... 사매, 아직은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밝힐 단계 는 아니오. 만일 그 아이마저 정도를 버리게 된다면 무림은 영원 히 도탄에 떨어지게 되니......." 천음선자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하지만 어찌 그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을... 향해 검을 들 게... 말인가요?" 울먹거리는 바람에 천음선자의 말은 중간중간 끊겨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자, 이제 이곳을 떠납시다." 휙! 휙휙! 십전천사는 신형을 날렸다. 그들은 북경을 향해 출발했다. "......!" 천운비는 걸음을 멈추었다. 밀로가 막힌 것이다. 그의 앞에는 만사군자가 우뚝 서서 금골섭선 을 부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십여 명의 마두들이 서있었다. 황색의 장포를 입은 마두들은 신주백팔마보다도 한 단계가 높은 전대의 거마들이었다. 그들의 내공은 조화지경에 이르러 반박귀진 을 넘어서고 있었다. 물처럼 담담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군사." 천운비는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사군자는 섭선을 흔들 며 부드럽게 말했다. "대전주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소전주." 천운비는 가슴이 섬뜩했다. '올 것이 왔군.' 그는 자신의 행적이 탄로났음을 느꼈다. 그러나 아직도 만사군자 가 소전주란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담담히 물었다. "군사,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챈 것 같구려?" 만사군자는 여전히 부드럽게 말했다. "벌써부터 알고 있었으니 재론할 필요는 없소이다. 소전주." 천운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데 어째서 소전주라 부르는 것이오?" "대전주의 뜻이기 때문이오." 천운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대전주, 암흑수라제에 대해서는 지금도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소. 십마지관에서 이 승천황검을 사용했으니 말이오." 스스릉! 그는 소매 속에서 승천황검을 뽑았다. 눈부신 보광이 주위를 밝게 비쳤다. "비록 세가 모자람을 알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않소, 군사." 우우웅......! 검명(劍鳴)이 울었다. 내공을 가하자 천운비의 몸은 검광에 휩싸 였다. 그의 몸이 하나의 검이 된 듯했다. 뜻밖에도 만사군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전주, 검을 거두어주시오. 결코 소전주를 해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외다." 천운비는 흠칫했다. "그럼?" "대전주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소." "......?" "만붕왕(萬鵬王)이 진정한 영웅이라면 때를 알 것이며 원한다면 언제고 기회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소." "기회를 주겠다고?" "그렇소." 천운비는 검미를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은 의미가 깊은 것이었다. 때를 알리라는 것은 설사 그가 탈 출한다 해도 암흑마전이 건재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 했다. 또한 기회를 준다는 것은 언제고 그의 도전을 받겠다는 의 미가 아니겠는가? 천운비는 한동안 침음했다. "대전주께서는 하실 말씀이 있다 하셨소. 일단 따라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소만." 천운비는 승천황검을 거두었다. "좋소." 천운비는 대전 안에 홀로 섰다. 만사군자는 그를 안내한 후에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천운비는 휘장 속에 암흑수라제가 앉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그는 휘장을 향해 물었다. "암흑수라제, 내게 할 말이 무엇이오?" 그에게는 추호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상 호혈(虎穴)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조금도 위축됨 없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휘장 속으로부터 암흑수라제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만붕왕, 자네의 용기에 감탄했다." "......." "자네의 뛰어난 담력과 자질을 본제는 아끼고 싶네." 천운비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나 우리는 양립할 수 없는 존 재요."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자네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정반대일 수 도 있네." 천운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붕왕, 자네는 정상에 오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고독을 이해하 는가?" "......." "정상에 오른 자들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지. 처음에는 정상에 올랐다는 충족감으로 세상이 손아귀 안에 들어있는 것 같은 기분 이라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고독이란 놈이 찾아오게 마련이네. 그것은 오직 정상에 오른 자만이 느끼는 것이지." 천운비는 내심 중얼거렸다. '음, 암흑수라제도 고독을 느끼는군.' 그는 암흑수라제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네를 처음 본 순간 마치 내 지난 날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 네. 그래서 자네가 만붕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던 것이네. 그러나 이제는 선택할 때가 온 것 같네." "그렇소." 천운비는 무겁게 말했다. 암흑수라제의 음성이 차가와졌다. "자네가 내 후계자가 되겠다면 모든 것을 물려주겠네. 암흑제왕 (暗黑帝王)의 권세와 십마(十魔)의 무공, 그리고 천하를 주겠네." 천운비는 잘라 말했다. "싫소." "후후, 예상대로군. 그렇다면 자네가 갈 길은 하나......." 천운비는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본인은 귀하께 한 가지를 원하오." "무엇인가?" "정정당당히 겨루어 보고 싶소." "후후! 승산이 있다고 믿는가?" 천운비는 가슴을 쭉 폈다. 그에게서는 호연지기가 뿜어져 나왔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휘장이 가볍게 흔들렸다. "음....... 자네의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하군. 낯이 익은데. 우 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던가?" "나는 당신을 만난 적이 없소." "흐흐흐......! 하긴 자넬 만났을 리가 없지. 좋아, 자네의 소원 을 들어주지." 스스스......! 천운비는 흠칫했다. 그는 휘장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휘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허공에서 생성되듯이 그의 앞에 누군가 모습 을 드러냈다. 암흑수라제였다. 여전히 청면에 푸른 기운을 휘감고 있었다. 천운비는 품속에서 승천황검을 뽑았다. '기회는 한 번뿐,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는 검을 곧추세우며 전 공력을 끌어올렸다. 츠츠츳......! 희뿌연 검기가 흘러나와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는 암흑수라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전신은 청색강기에 휘감겨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일격에 상대를 제압하 려는 일념만이 있었다. 천운비의 신형이 완전히 검무에 휩싸였다. 어느 부분이 검이고 어 느 부분이 신체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 대전에는 질식할 것만 같은 적막이 흘렀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띵! 하고 현이 끊어져 나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고수대 고수. 그들의 대결에서는 한 호리의 호흡 차이에도 승부가 난다. 더 이 상 오를 수 없는 초극무학(超極武學)을 익힌 자들에게 불필요한 동작은 극도로 배제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단지 기(氣)만으로도 상대방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었 다. 웅......! 천운비의 전신에서 검명(劍鳴)이 울었다. 그는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있었다. 암흑수라제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핫핫핫......!" "척(斥)- 마(魔)- 광(光)- 살(殺)- 검(劍)-!" 번-- 쩍! 검신일체(劍身一體)인 천운비의 기(氣)가 전광처럼 뻗었다. 번개 를 천분의 일로 쪼갤 정도로 짧은 순간에 그는 청색강기에 싸여있 는 암흑수라제를 베었다. '성공이다!' 분명 그는 상대를 베었다. 그리고 두 눈으로 청색기운이 두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두 갈래로 쪼개졌던 청색의 강기가 다시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스스스....... 청색강기가 홀연히 천운비를 향해 쇄도해 왔다. '음!' 천운비는 질식할 듯한 압박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승천황검을 휘둘러 청색강기를 베었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뇌정일기공(雷霆一氣功)을 뻗어 냈다. 꽈꽈꽝......! 대전이 온통 무너져 내릴 듯한 굉음이 울렸다. "으아아- 악!" 천운비는 청색강기와 부딪친 순간 만근화약이 폭발하는 듯한 압력 을 느꼈다. 인간으로서 항거하기 불가능한 거력에 의해 오장육부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끝... 장... 이... 다......!' 그는 윙윙거리는 소음을 느끼며 붕 떠올랐다. 의식이 까마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무리 눈을 부릅떠 봐도 보이는 것은 회색뿐이었다. 역부족이었다. 그는 짧은 순간에 구룡비학(九龍秘學)을 전력으로 전개했다. 그러 나 십마지력(十魔之力)을 이기지 못했다. 십마의 마공이야말로 저주의 천년마공인 것이다. 스스스! 암흑수라제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청수한 인상이었다. 안색은 파리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천운비와 닮은 모습이었다. 그는 눈을 반쯤 감으며 중얼거렸다. "대단한 아이다. 앞으로 십 년만 지나면 이 아이는 천하무적이 될 것이다." 그는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 하지만 때를 잘못 만났다. 본제는 암흑의 제왕이니라. 어 찌 널 살려둘 수 있겠느냐?"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살짝 뻗기만 하면 천운비는 이승을 하직해야 할 판국이었다. 문득 암흑수라제가 멈칫거렸다. "음!" 그의 표정이 흔들렸다. 왠지 그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그는 곧 손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만붕왕, 너의 능력을 시험해 보겠다. 본제는 십마지공(十魔之功) 을 터득하는데 십 년이 걸렸다. 만일 네가 그 안에 십마지공을 연 성한다면 다시 한 번 자웅을 겨루어 보겠다." 암흑수라제. 그의 중얼거림에는 정상에 선 자의 고독이 물씬 배어 있었다. 그 에게는 이제 적수가 없었다. 적수가 없는 삶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험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모험을 걸 기로 한 것이었다. "십마윤회동(十魔輪廻洞)에 널 집어넣겠다. 십 년 내에 십마지공 을 얻는다면 다시 한 번 도전하거라. 그때는 일통된 천하를 걸겠 다." 스스스......!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천 운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우르릉...... 콰앙......! 무림의 하늘에서는 쉴 새 없이 뇌전이 쳤다. 무림에 종말이 다가오는가? 대지는 온통 피에 젖었다. 흰눈이 두텁게 쌓인 설지조차 시뻘건 선혈이 떨어져 있었다. 엄동의 하늘에는 까마귀떼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무림의 역사는 군림(君臨)하려는 자와 저항하는 자의 혈사로 이어 내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당대무림의 혈겁은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주검은 침묵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무림(武林)은 끝났다! 대혈전(大血戰). 무림의 제왕을 가리기 위한 대혈전이 중원 전역에서 벌어졌다. 이미 무림을 장악한 영세태평무국, 즉 악마천부와 십마지겁을 불 러 일으킨 암흑마전이 무림의 패권을 놓고 일대혈전을 벌이기 시 작한 것이다. "크아아악!" 원단(元旦)에서 시작된 혈전은 중원대륙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혈사는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훗날 구양중백의 무림혈사록(武林血史錄)에는 이렇게 기록 될 것이다. <혈천암흑시대(血天暗黑時代)......! 무림의 종말이 도래하였다.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고 대지는 혈하(血河)로 양단되었으니... 오 호 통재라! 이대지겁(二大之劫)의 재현으로 중원의 맥(脈)은 끊어 지도다. 악마의 추종자들과 암흑의 인간들... 그들은 피에 굶주렸 던가!> 천하는 양분되었다. 암흑마전과 악마천부는 무림을 동서로 분할했다. 이제 그들에게는 양보도 타협도 없었다. 오직 죽느냐 죽이느냐, 군림하느냐, 짓밟 히느냐만 남아있었다. 혈전은 정월에서 이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대지에 누운 자들은 몇 만, 아니 몇 수십만이 넘었다. 무 엇을 위해, 무엇을 얻으려 이토록 피를 흘리는지 아는 자는 아무 도 없었다. 과연 이 상태로 간다면 무림은 완전히 맥이 끊겨버릴 것이다. 겨울은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깊은 곳. 십마윤회동부(十魔輪廻洞府). 이곳은 천 년 전 십마지겁을 일으켰던 십마제(十魔帝)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으으...! 이건... 인간의 무학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 은... 저주의 마공이다." 산발을 한 괴청년이 동굴 벽에 새겨져 있는 무학도해를 바라보며 전신을 떨고 있었다. 그는 바로 천운비였다. 암흑수라제에게 패한 후 그는 이곳에 던져졌다. 십마가 묻혀 있는 곳이었고, 과거 암흑수라제가 무공을 수련한 곳이었다. 천운비는 자신을 죽이지 않은 암흑수라제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십마윤회동부를 둘러보고서 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십마무학은 저주와 학대 속에 태어나 인간을 저주하게 된 십마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비공을 창안하여 남긴 곳이었다. 지금 그가 바라보고 있는 석벽에는 저주의 주문이 새겨져 있었다. 피의 주문, 저주의 마공....... 누구라도 이 엄청난 마공을 대한다면 미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 다. 특히 무인이라면 무엇보다도 상승의 무공에 미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설사 그것이 마공이든 정공이든 뛰어난 무학을 보고는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었다. 일 반적으로 마공이 정공과 다른 점은 자신도 모르게 마성에 젖어든 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십마지공에는 저주의 주문이 들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무 공을 익히게 되면 서서히 마성에 빠지는 것이다. 천형(天刑)의 병자로 태어나 돌팔매질을 맞으며 세상을 증오하게 된 병마(病魔), 사생아(私生兒)로 태어나 주위의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온 환마(患魔), 창녀의 몸에서 태어나 뭇 사내들을 증오하게 된 한녀(恨魔), 한 푼의 은전이 없어 병 걸린 노모를 구하지 못해 훗날 천하의 의원들을 모두 죽였던 혈마(血魔), 그밖에 벙어리 아 마(啞魔), 치마(痴魔), 광마(狂魔), 잔결마(殘缺魔), 겁화마(劫火 魔)......! 십마의 공통점은 인간을 불신했다는 것이며 세상을 저주하고 증오 했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천대와 멸시, 학대를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세상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무공을 익혔으며 그 후로 닥치는 대로 살륙을 저질렀다. 인간을 증오하였기에 인간들을 짓 밟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 강해져야 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과 한계에 도전했다. 급기야는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마공(魔 功)을 창안하기에 이른 것이다. 저주의 십마지공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으으......! 이것들을 익히면 마성에 빠진다." 천운비는 석벽에 새겨진 저주마공의 구결들을 애써 보지 않으려 머리를 움켜쥐며 외쳤다. 그러나 한 번 스쳐본 것에 불과한 마공 구결은 이미 그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으으으... 이아아......!" 천운비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절규했다. 그의 모습은 광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십마윤회동부는 어느 곳에도 출구(出口)가 없었다. 그는 윤회동부 속을 맴돌며 점차 성격이 편협해지고 분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심마(心魔)에 빠진 것이다. "으아아아- 아-!" ■ 무림백서 3권 제28장 구룡파천환무도(九龍破天幻舞圖) ━━━━━━━━━━━━━━━━━━━━━━━━━━━━━━━━━━━ 장장 두 달여를 끌던 혈전으로 대륙은 피에 젖고 말았다. 지천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어디를 가나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이월 말이 되자 겨울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얼어붙은 대지에도 결국 봄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봄 의 기운은 엿보이지 않았다. 처절하고 끔찍한 혈전의 아수라장에 놀랐는지 봄은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해의 한파(寒波)는 유난히도 기승을 부렸다. 매서운 한파 속에 서도 칼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동서로 갈라진 대륙. 암흑마전과 악마천부의 고수들은 한수(漢水)를 사이에 두고 사상 유례없는 혈전을 벌였다. 암흑마전으로서는 한수를 건너야 중원을 넘볼 수 있었으며, 반면 악마천부가 한수를 넘겨준다는 것은 중원을 내놓는 것이나 같았기 때문이었다. 시산혈해(屍山血海). 도도히 흐르던 한수의 물결은 한파로 인해 꽁꽁 얼어붙었다. 그 얼음장 위에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고, 피는 흐르다 다시 얼어 붙 었다. 때문에 아름답기로 유명한 한수는 붉은 피로 물들어버렸다. "으하하하핫......! 천하는 암흑마전의 것이다!" "크크크......! 무슨 개소리냐? 영세태평무국의 군림천하다. 쳐- 라!" 만사군자가 이끄는 삼만의 암흑군단은 이제 이만으로 그 숫자가 줄었다. 그러나 악마천부의 손실은 그보다 훨씬 심했다. 만사군자 의 병술로 인해 그들은 연일 패퇴했던 것이다. 암흑군단은 시체를 넘고 또 넘었다. 꽈르릉......! "으아아악!" 한수(漢水)는 더 이상 한수가 아니었다. 한수가 시체로 메워질 무렵 마침내 암흑마전은 한수를 넘는데 성 공했다. 혈전장은 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대륙은 진저리를 쳤다. 마인들의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그들은 이미 삶의 목적도, 생에 대한 미련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마비되었다. 그 와중에 무림의 마지막 희망이 솟아나고 있었다. 만붕왕(萬鵬王)은 그동안 무림인들의 보루로 남아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하나로 뭉쳤다. - 중원대동맹(中原大同盟). 하나의 기치 아래 중원무림인들이 뭉쳤다. 암흑마전과 악마천부를 피해 심산은곡으로 숨어야 했던 의인들은 더 이상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만붕왕의 영도 아래 백도의 부활을 꿈꾸며 중원대동맹을 세운 것이다. - 무림을 구하리라! 백도가 무너지면 무림도 무너진다. 마도를 몰 아내 무림정기를 되살리리라! 중원대동맹은 급속히 성장했다. 만붕왕의 휘하에 있던 황궁대내고수(皇宮待內高手)를 비롯하여 백 만녹림도의 불회림(不廻林), 살종이라 불리는 살수집단들이 중원 대동맹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여기에 한 가닥 서광이 비쳤으니....... 살아있는 사서(史書)요, 고금제일의 현자로 불리던 활사관인 구양 중백이 중원대동맹의 총군사로 나선 것이다. 여기에 수십 년간 실종되었던 십전천사가 가세했다. 급기야 마세 에 신음하던 백도무림은 극적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구파일방을 비롯하여 정도이십팔련이 악마천부의 그늘을 벗어나 속속 가맹했다. 중원대동맹-. 이제 그것은 백도무림의 상징이 되었다. 삼월로 접어들었을 때, 중원대동맹은 남하하기 시작했다. 무림의 주도권을 탈환하기 위한 혈전에 가담하기 위해서였다. 꽈르릉......! 천운비는 닥치는 대로 장력을 날렸다. "안돼!" 그는 밀려드는 심마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심마의 마 공구결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기억 속에 지우고 싶어도 그럴수록 더욱 생생하게 파고 들었다. "우우......!" 콰쾅......! 장력을 맞은 석벽이 움푹움푹 패이고 돌가루가 난무했다. 천운비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닥치는 대로 부수고 또 부수었다. 그렇게 해야만 답답한 가슴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 았다. "우우우......!" 그는 짐승같은 울부짖음을 발하며 미친 듯이 장력을 날렸다. 그러나 그가 무의식중에 휘두르는 장법이야말로 십마의 마공이 깃 들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마경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한순간. 와르르......! 한쪽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는 또다른 석실이 나타난 것을 보았 다. 무너진 벽 저쪽에 한 칸의 서실(書室)이 보였다. 서실의 벽면에는 고서가 빽빽하게 꽂혀 있으며 자단목으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갖추어져 있었다. '이곳은?' 천운비는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서재 안으로 들 어섰다. 서재의 분위기는 뜻밖에도 고아했다. 그 주인의 성품이 그대로 느 껴지는 듯했다. "이런 곳에 서재가 있다니......." 그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암흑마전주가 폐관에 들어가기 전 기거하던 곳이 아닐까?' 그의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이 서실은 암흑수라제가 사용하던 곳이었다. 그는 본래 책을 읽고 명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는 위인이었다. 지금의 성격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할 수 있었다. 천하마종 의 하늘인 현재의 모습은 과거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 벽에는 암흑수라제가 직접 그린 듯한 산수도(山水圖)가 걸려 있었 다. 그것을 바라보던 천운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대단한 솜씨다. 이 정도의 필력이라면 오랜 수양을 거치지 않고 는 나오지 않는다.'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다 한 장의 초상화에 눈길을 멈추었다. "......!" 초상화에는 한 괴인이 그려져 있었다. 흑의를 입은 인물이 눈을 천으로 가리고 있는 그림이었다. 초상화치고는 괴이하기 짝이 없 었다. 세상에 눈을 가린 인물을 초상화로 그리는 사람도 있단 말 인가. "이... 이건 구룡개천환비도(九龍開天幻秘圖)!" 그렇다. 초상화를 보는 순간 그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족자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바로 그가 찾아 헤매던 마지막 한 장의 구룡환비도 였던 것이다. 천운비는 격동을 금치 못했다. 그는 족자를 급히 떼어냈다. "오오! 마지막 일도가 이곳에 있을 줄이야!" 만일 그가 족자의 뒷면에 쓰여진 서명을 보았다면 더욱 놀랐을 것 이다. 그러나 흥분한 나머지 그는 미처 살펴볼 수가 없었다. 족자 속의 인물은 구룡성제의 한 명인 천안성제(天眼聖帝)였다. 그는 광안투살신공(廣眼透殺神功)이란 안공(眼功)으로 천하를 위 진시킨 바 있었다. 천운비는 품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덟 장의 구룡환비도를 꺼냈다. 마침내 전설의 구룡환비도를 모두 얻은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구룡성궁을 열 수 있을 것인지가 문제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천운비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홉 장의 구룡환비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속에는 필시 비밀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는 수많은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구룡환비도를 일렬로 늘어 놓 기도 하고, 엇갈리게 이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연구해 보 아도 비밀을 풀 길이 없었다. 천운비는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천하를 구하기 위해서는 구룡성궁을 열어야 한다!' 명제였다. 그는 식음을 전폐했다. 십마윤회동부에는 식수와 식량을 대신할 수 있는 익곡단이 있었으 나 그것조차 취하지 않은 채 그는 비도의 비밀을 푸는 데만 전념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오! 이것이다!" 희열에 찬 부르짖음이 서실을 울렸다. 그날도 그는 족자를 바닥에 늘어놓은 채 고심하고 있었다. 멀찌감치 서서 족자를 내려보던 그는 아홉 장의 그림 중 한 장이 동굴의 습기를 못이겨 울퉁울퉁해진 것을 보았다. 그것을 펼치기 위해 그림을 편편하게 펼치려는데 뜻밖의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그림은 모두 양피지에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양피지가 이중으로 겹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흥분을 금치 못하며 양피지를 분리해 보았다. 그러자 또 다 른 그림이 나타났다. 첫번째 양피지에서 분리해낸 그림에는 승천하는 용(龍)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나머지 양피지도 분리해 보았다. 기이하게도 모두가 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홉 마리의 용! 그것은 비슷해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각각 달랐다. 또아리를 틀고 있는 용, 비천하는 용, 입을 벌려 불을 토하는 용,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용.... 실로 다양한 자세였다. 구룡파천환무도(九龍破天幻舞圖). 이 아홉 장의 그림이야말로 전설의 구룡성제(九龍聖帝)가 공동으 로 창안해 낸 구룡무학의 정화였던 것이다. 마침내 개천의 비밀이 풀린 것이다. 삼월도 지나가고 있었다. 암흑마전과 암흑천부의 싸움은 팽팽했다. 어느 쪽도 불리하거나 유리하지 않았다. 그저 끝없는 혈전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었다. 오랜 혈전이 승부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그들은 최후의 결전을 벌 이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사월 사일. 동백산(桐栢山)의 천장야(天章野). 그곳에서 천하무림을 놓고 쟁패하기로 최종합의한 것이다. 암흑군단대 악마사자들의 최후의 싸움은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마침내 그 날이 왔다. 동쪽에는 암흑군단의 진영이 형성되었다. "와아아아- 아-!" 수만에 달하는 군마들이 함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기는 충 천했다. "크하하핫......! 오늘 이후로 천하는 마도의 것이 될 것이다!" 서쪽 진영의 상황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우우우- 우......!" 십장이 넘는 거대한 악마신상(惡魔神像)을 가운데 두고 고루인들 이 둘러싸고 있었다. 열두 개의 팔을 가진 악마신상은 수레에 실려 있었다. 고루인들의 주력은 변황팔절(邊 八絶)을 위시하여 전율의 마교(魔敎)를 구축 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군림혈단(君臨血團)으로 일컬어지고 있 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천하는 우리 것이다!" "우아아아아......! 와아아아아......!" 태양도 공전절후의 혈전을 보고 싶지 않은 듯 먹구름 속으로 얼굴 을 감추어 버렸다. 마침내 암흑마전과 악마천부의 혈전이 시작되 었다. - 인생이 무어냐고, 삶이 무어냐고, 사랑이 무어냐고 묻지 말자. 욕망이 무어냐고, 영화가 무어냐고, 권세가 무어냐고 묻지 말자. 오직 통곡할 뿐이니....... 훗날, 무림혈사록 제사십장에 천장야의 혈전은 이렇게 기록되었다 고 한다. <하늘은 돌아섰으며 혈우(血雨)가 쏟아져 내렸다. 천장야는 시체 로 뒤덮였으며 피가 강을 이루었도다! 참혹한 비명소리에 구름도 놀라 흩어졌도다! 참경은 아수라지옥도(阿修羅地獄圖)를 재현하는 듯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에 덧없이 흘린 피는 백 년이 흘 러도 천장야의 붉게 물든 땅을 씻어내지 못할 지어다! 오오, 무림 사상 최대의 비극이도다.> 활사관인 구양중백은 거기에서 필을 놓았다고 했다. 훗날의 이야 기는 그의 후손들이 메울 것이다. 번- 쩍! 꽈르릉......!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이 갈라졌다. 천장야에 낙뢰가 불을 뿜었다. 쏴아아아아-! 비가 내린다. 길고 길었던 한동(寒冬)이 물러가려는지 대지에 폭 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암흑수라제는 광야를 둘러보았다. 어두워지고 있는 광야는 시신들로 메워져 있었다. 천장야에 널려 있는 시신들의 모습은 끔찍하기 이를데 없었다. 십만, 아니 이십 만 이상의 주검이 널려 있었다. 고금을 통털어 이보다 더한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곳곳에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후후후훗......!" 암흑수라제는 툴툴 웃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장소를 터뜨렸다. 그 는 눈을 들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멀리 거대한 악마신상이 보였다. 악마상도 비를 맞고 있었다. 그 토록 위세를 자랑하던 열두 개의 팔은 방금 전 떨어져 내린 낙뢰 에 부러져 있었다. "으하하하핫......! 이제 모습을 보이거라. 언제까지 숨어있을 것 이냐? 네가 신이 아닐진대 더 이상 신비한 척 할 필요가 있겠느 냐?" 암흑수라제의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크크크크......!" 악마상의 입에서 가공할 마소가 흘러나왔다. "암흑수라제, 물론 우리는 신이 아니다. 다만 신이 하지 못한 일 을 하려고 한다. 크크크.... 이제 마지막 승부를 결할 때가 온 것 같구나." 스스스....... 돌연 악마상의 입이 벌어지더니 혈무(血霧)가 둥실 떠 나왔다. 혈 무는 수평으로 날아오더니 암흑수라제의 면전에 떨어져 내렸다. "그대가 악마천부의 부주인가?" "크크, 그렇다." "그럼 말이 필요 없겠군." "물론이다." 더 이상의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무엇이 오늘의 결 론을 유추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 하나는 청색강기요, 또 하나는 핏빛의 운무였다. 그것은 그들이 익힌 마공의 정화였으며 다시 말해 십마지공과 악마지공의 모든 것이었다. 청색강기와 혈무가 부딪친 순간. 쿠쿠쿠쿠쿵......! 대지가 갈라졌다. 이 땅의 최고의 대마인의 싸움은 이미 육안으로 는 볼 수 없었다. 쩍- 쩌억- 쩍-! 휘류류류륭......! 죽음의 바람이 분다. 고오오오......! 싸움은 끝이 났다. 과연 누가 이겼을까? 죽음의 바람이 흙먼지를 동반한 채 회오리치고 있어 그 결과는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천장야를 뒤집어 엎는 듯한 함성이 일어났다. "와아아아--!" 갑자기 돌변한 상황! 그것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천장야에 수만 명의 고 수들이 밀려 들었다. 그들은 암흑마전과 악마천부의 마인들을 가 리지 않고 주살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크아악!" 마인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고 수들, 그들은 구름처럼 밀려 들었고, 천장야에 나타난 순간부터 살수를 펼쳤다. 중원대동맹!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만악으로 오염된 적토를 씻기 위해 나타 났다. "우우우-! 마인(魔人)을 몰아내라-!" "이제 인내는 끝났다! 마인은 지옥으로!" 꽈르르릉-! 쿠쿠쿵......! 일거에 몰아닥친 중원대동맹의 힘은 엄청났다. 비록 개별적으로 본다면 무공성취는 부족했으나 그들에게는 합일된 힘이 있었다. 그것은 중원정기를 되살리겠다는 의지였다. 게다가 마도인들은 격전 끝에 탈진할 대로 탈진해 있었다. 그들은 제대로 대항도 못한 채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중원무림인들은 치욕적인 삶을 겪었다. 이제 그들은 다시는 그 시 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한결같은 마음은 천장야에서 뼈를 묻 겠다는 결심이었다. 신념이 확고하면 평소의 배의 힘을 발휘한다. 중원대동맹의 고수들은 개인적으로 본다면 악마천부나 암흑마전의 마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한 그들의 공격은 능력을 초월하고 있었다. - 설사 이곳에 뼈를 묻을지언정 다시는 굴종의 삶을 살지 않으리 라! 다시는... 마(魔)에 능멸당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뭉쳤다. 문파도, 파벌도, 개인감정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생 명을 도외시한 채 달렸고 당황하여 사방으로 달아나는 마인들을 도륙했다. 중원지혼(中原之魂). 드디어 잠자던 휴화산이 폭발한 것이다. "으으......!" 암흑수라제는 가슴을 움켜쥐며 피를 토했으나 간신히 신형을 바로 잡았다. 눈앞에 혈무가 흩어지며 악마천부주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한편, 이 광경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 만붕왕이었다. 그는 구룡환비도의 비밀을 풀어 전설의 구룡파천환무(九龍破天幻 舞)를 익힌 후 암흑마전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는 바로 중원대동 맹에 합류하여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대세가 중원대동맹 쪽으로 기울었음을 느꼈다. '이것이었던가? 이것이 욕망의 대가란 말인가? 승자도 패자도 없 는, 오직 죽음만이 있는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단 말인가?' 그는 암흑수라제의 경악성을 들었다. 그는 눈길을 돌렸다. 혈무가 흐트러지며 악마천부주의 실체가 드 러났다. "아니......?" 그는 대경실색했다. 자욱한 혈무가 걷히자 그 속에 나타난 것은 한 명의 가냘픈 여인이었던 것이다. "사란(思蘭)......!" 을지사란(乙支思蘭)! 악마천부주는 바로 죽은 줄 알았던 을지사란이었다. 그녀는 금화 보의 마지막 탈출로인 혈림에서 악마천부가 등장함으로써 헤어졌 던 여인이었다. '이럴 수가...? 악마천부주가 을지사란이었다니.......' 천운비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증오했던 악마천 부의 부주, 그녀가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었다는 사실에 그 는 전신의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사란......! 그대가?" 천운비는 부르짖으며 그녀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이때 그를 발견 한 암흑수라제는 안색이 변했다. "......!" 그는 천운비의 출현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사란! 이게 어찌된 일이오? 정신차려 보시오. 사란......!" 천운비는 을지사란을 흔들었다. 그러나 을지사란은 이미 가망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은 완전히 으스러져 피와 살이 뒤엉켜 있었 다. "사란!" 천운비의 다급한 외침에 을지사란은 힘없이 눈을 떴다. 그러나 천 운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악마... 그가... 마성(魔性)을......." 그녀는 고르지 못한 숨을 토하며 더듬거렸다. "사란! 날 몰라본단 말이오? 나 천의요 뇌천의......." 천운비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을지사란이 힘없이 고개를 꺾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마구 흔 들었다. "사란!" 그는 울부짖었다. 그러나 을지사란은 이미 황천으로 떠난 후였다. "사란.... 그때 내가 당신을 놓치지만 않았더라면....... 그대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을......."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사란의 시신을 부둥켜 안았다. 이때 악마상의 입에서 시뻘건 혈광(血光)이 뇌전처럼 뻗어 나왔 다. 쐐애애애액! "크크크...... 사라져라!" 짜자작! 혈광은 사란을 안고 있는 천운비의 등에 작렬했다. 그것은 너무도 빨라 도저히 피할 틈이 없었다. "악마천부주! 드디어 마각을 드러냈구나!" 암흑수라제가 외치며 혈광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는 청색강기 와 함께 혈광의 앞을 가로막았다. 쾅......! 참담한 비명이 터졌다. "크으으윽!" 암흑수라제는 피를 뿜으며 십장 밖으로 곤두박질치며 날아갔다. 암흑천부주의 마력(魔力)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뻘건 혈구체(血球體)가 소용돌이치며 천운비를 향해 다가갔다. "크크! 죽인다, 모두 죽인다!" 혈광이 천운비를 향해 번쩍 뻗어갔다. 천운비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에 분광을 폭사했다. 그 순간 이 마에 새겨진 뇌문(雷紋)이 선명하게 꿈틀거렸다. "크하하하핫......! 악마천부주! 네가 사란을 꼭두각시로 만들었 느냐?" 혈구체는 도저히 인간의 입에서 나온 음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괴성을 발했다. "크크......! 이제 보니 네놈은 혈림에서 만났던 그 애송이놈이로 구나!" 악마천부의 부주는 천운비를 알아본 듯했다. 천운비는 들끓는 감정을 억제했다. 최강고수들의 대결에서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악마천부주, 기억력이 꽤 좋구나. 하지만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 다." "크크, 어린 놈! 아무래도 상관없다. 너는 본 부주를 이길 수 있 다고 생각하느냐?" "후후!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겠지." 천운비는 품속에서 두 자루의 보검을 꺼냈다. 그것은 황실의대신 검인 승천황검(昇天皇劍)과 천추황검(千秋皇劍)이었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봐라, 이곳은 피바다가 되었다. 이것이 네가 바라던 것이냐? 혈 겁은 끝났다. 남은 것은 너와 나의 일전일 뿐이다." "......!" 혈구체는 부르르 파동을 보였다. 그는 악마신상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항상 명령만 내리 던 악마천부의 영수, 그도 최후의 결단을 내릴 때가 도래했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크하하하핫! 어리석은 놈. 모든 것이 끝났다고? 과연 모든 게 끝 났다고 보느냐? 본인은 일년 내로 이전보다 더욱 강한 마병들을 양성할 수가 있다." 천운비는 그를 바라보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악마천부주! 그대는 천 년 전의 일을 벌써 잊었느냐?" "......?" "당시 악마지겁을 종식시킨 구주(九州)의 아홉 마리 용을 벌써 잊 었단 말이냐?" 혈광구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한참 후. "크크......! 내 어찌 잊는단 말이냐? 그럼 네놈이 구룡의 후예라 도 된단 말이냐?" "그렇다." 슈- 욱! 천운비는 신형을 솟구쳤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공 중으로 떠오른 천운비의 몸에서 불가사의한 변화가 일어났다. 구룡(九龍)! 아홉 마리의 용이 환영을 일으키며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아아......!" "오오... 저것은... 신(神)의 무학이다!" 군웅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인간의 몸에서 아홉 마리의 용의 환 영이 표출되고 있었다. 그것은 가히 장관이었다. 천공은 온통 무지개빛 광휘에 휩싸였다. 천운비는 드디어 구룡파천환무를 펼친 것이었다. 실로 가공할 무 학이었다. 길이가 십 장이 넘는 용!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닌 아홉 마리의 용 이 여의주를 다투듯 천공을 누볐다. 그 광경은 군웅들의 혼백을 온통 앗아가 버렸다. 악마천부주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크크......! 그따위 구룡의 졸학은 이제 소용이 없다!" 우우우우웅......! 혈구체가 회전하며 커지기 시작했다. 흙먼지, 돌가루가 휘말려 올 라갔고, 군웅들은 심장이 찢어질 듯한 마기에 모두 뒷걸음질을 쳤 다. 세상이 온통 핏빛 혈무에 뒤덮이는 듯했다. "천지(天地)- 악마(惡魔)- 현세(現世)-!" 혈구체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쿠르르르릉......! 천지가 온통 암흑에 잠긴 듯 태양마저 빛을 잃었다. 오직 들리는 것이라곤 용(龍)의 포효와 악마의 절규뿐이었다. "콰아아아아......!" "크- 아- 아- 악-!" 지옥유계의 천만악귀들이 내지르는 듯한 비명에 군웅들은 진저리 를 쳤다. 이윽고 암흑이 걷혔다. 그들은 보았다. "와아아아아-!" 천지를 붕멸시킬 듯한 감격의 함성이 터졌다. 혈구체가 땅에 떨어 져 뒹구는 것을 본 것이다. 천운비는 맞은편에 내려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창백 하게 질려 있었다. "가거라, 지옥으로...... 악마여......!" 번-- 쩍! 그의 오른손에서 승천황검이 섬전처럼 날아갔다. "크아아악!" 혈구체로부터 참혹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승천황검이 혈구체 를 관통한 것이다. 스스스......! 혈무가 걷힌 후 보인 것! 군웅들은 모두 이 역사적인 광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 다. 혈무가 걷힌 후 나타난 것은 심장에 승천황검이 관통된 채 비 틀거리는 한 노인이었다. 그는 일신에 핏빛의 장삼을 입고 있었다. 악마천부의 부주였다. 악마의 숭배자, 무림의 이단아, 피와 마성의 하늘! 마침내 그는 비틀거리다 푹! 하고 쓰러졌다. "아아아-- 아--!" "만붕왕(萬鵬王)!" "무림지왕(武林之王)......!" 군웅들은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천장야를 떠나보낼 듯한 함성 은 그칠 줄을 몰랐다. 천운비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암흑수라제를 향해 다가갔 다. 암흑수라제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사신의 빛 이 드리워져 있었다. 천운비가 다가오자 그는 만면에 격동의 표정 을 지었다. "자... 자네...... 결국... 해냈군......." 왠지 그의 음성에는 만족의 빛이 어려 있었다. 천운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소. 해냈소. 이젠 당신 차례인 것 같소이다." 슥! 그는 수중의 천추황검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 죽음으로써 무림은 평화를 찾을 것이오. 아울러 마도천하 를 이루겠다는 헛된 망상도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오." 천운비는 결심을 단단히 굳히고 있었다. 그는 암흑수라제를 죽여 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죽임으로써 기나긴 혈겁의 종지부를 찍 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쳐다보는 암흑수라제의 눈빛에는 적의가 조금도 느 껴지지 않았다. 아니, 따뜻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주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어디선가 본 듯 하다.' 그는 멈칫하며 물었다. "암흑수라제,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소?" 암흑수라제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 자네가 지니고 있는 검은 무척이나 귀한 것이로군." 암흑수라제는 엉뚱한 말을 했다. 말하는 순간 그의 눈에서는 반짝 물기가 어렸다. 천운비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무슨 뜻이오?" "잘 간직하게. 그 검은 본래 유래가 있는 검일세." 천운비는 벼락을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당신이... 이 검을 안단 말이오?" 암흑수라제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네. 다만... 왠지 사연이 있는 검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이네. 후후, 이제 내 심장에 그 검을 꽂아넣게. 이것으로 무림의 역사는 다시 쓰여질 걸세." 암흑수라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그의 표정은 담담 하고 편안해 보였다. "물론이오. 내 어찌 당신을 죽이지 않을 수......." 천운비는 천추황검을 뻗었다. 그는 이 일검으로 모든 것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날렸다. 이때였다. 갑자기 처량한 흐느낌과 함께 한 섬세한 인영이 뛰어 들었다. "안돼요--!" '......!' 천운비는 인영이 자신의 검을 막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무림의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 각한 것이다. 푹!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아아악!" 천추황검은 연약한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선렬한 핏줄기가 뿜어 져 나왔다. 천운비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 은 착각이었다. "아니... 왜?" 그는 당황하며 눈썹을 경련했다. 그의 검을 대신 받은 것은 여인 이었다. 천음선자(天音仙子). 그녀는 암흑수라제가 받아야 할 검을 대신 맞은 채 비틀거리고 있 었다. 그녀의 가냘픈 몸매는 피에 물들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그녀는 암흑수라제를 가로막고 대신 검을 막아낸 것이다. 그것도 몸으로 막은 것이다. "왜......? 왜......?" 천운비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한편 암흑수라제도 뜻밖의 광경에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 다. "무옥! 사랑했어요. 당신을... 죽도록 사랑했어요. 이제야 당신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군요......." 천음선자는 무릎을 꺾었다. 그녀는 암흑수라제를 바라보고 있었 다. 심장에 검을 꽂은 채, 그러나 아무런 아픔도 삶에 대한 미련 도 보이지 않은 채 그윽한 눈으로 암흑수라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운비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무... 무옥이라고?' 이때 암흑수라제는 양손을 뻗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천음선자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눈에서는 회 한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선(河仙), 그대가... 그대가 이럴 필요는 없지 않소? 나는 이 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거늘... 하선! 오오......!" 하선(河仙). 그것은 천음선자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밝은 빛이 흘러 나왔다. 조금도 슬프지 않은 눈빛이었다. 아니, 사랑에 충만한 눈 빛이었다. "이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의 모습을 보았으니 이젠......." 천음선자. 그녀는 암흑수라제, 아니 지난날의 기남자 십전옥수겁 천무옥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이 끊어진 그녀의 얼굴에는 아주 만족 한, 행복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그녀 평생 이렇게 평안한 미소를 지어본 것은 처음이리라. "하선......!" 천무옥은 그녀의 시신을 안은 채 부르짖었다. "......!" 천무옥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천무옥, 천무옥이라니... 암흑마전주가 내 부친이었단 말인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억겁일수유라고나 할까? 군웅들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일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그들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 다. "아... 버... 님......!" 천운비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주위에는 십전천사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뜨 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때 천무옥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랬었군. 널 처음 볼 때부터 끌리는 것이 있었다. 천추황검을 쓸 때 이미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는지도 몰랐어......." 천무옥은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펑 펑 솟아나오고 있었다. 언제 그가 이렇게 운 적이 있었던가! 그는 눈물을 닦고 싶지 않았다. 마음껏, 눈물이 마를 때까지 그 는, 할 수만 있다면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여명이 트고 있었다. 암흑마전주, 천무옥은 여명을 향해 몸을 돌 렸다. 그의 품에는 여전히 천음선자가 안겨 있었다. "죄 많은 이 몸은 천하를 볼 낯이 없다." 그는 천음선자를 안은 채 걷기 시작했다. 한때는 무림의 구성으로 백도제일인이었으며, 이제는 암흑의 제왕 으로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인간, 그리고 또 다시 과거의 모습으 로 돌아온 사나이는 그를 사랑했기에 죽음으로 사랑의 고백을 끝 낸 한 여인을 안은 채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의 길을 막는 자는 없었다. 군웅들은, 군마들은 그가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들은 이미 자 신들이 왜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는가를 잊고 있었다. 원한 도, 증오도, 야망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여명을 받으며 여인의 시신을 안고 사라져 가는 이 시대의 풍운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았다. 살아있는 무림의 사서 활사관인 구양중백은 혼신의 필력으로 당시 의 상황을 재현하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그는 그 날의 이야기를 충분히 적어 넣지 못했다. 그 것은 당시의 이야기가 너무나 애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을 문장으로 담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변(辯)이었다. 만붕왕(萬鵬王) 천운비는 무림을 떠났다. 풍문에 의하면 그는 부친인 천무옥이 떠난 동쪽으로 무작정 떠났 다고 한다. 천무옥이 사라진 곳은 동쪽 끝, 바다 건너 천외(天外)의 땅이라고 한다. 그가 천무옥을 만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혼자 떠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를 사랑했던 여인들이 그의 그림자를 쫓아 떠났던 것이다. 훗날 그 이야기는 이제는 백발이 된 한 노강호인의 입에서 무릎을 베고 잠든 손자를 향해 구전(口傳)되었다. 과연... 잠들어 버린 천진한 어린아이가 그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 대미 - ■ 저작권에 대한 안내 ━━━━━━━━━━━━━━━━━━━━━━━━━━━━━━━━━━━ 이 게시물과 함께 <프로무림>에 연재되고 있는 모든 소설 및 읽을 거리 등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는 작품들입니다. 이 게시물들을 다른 통신망이나 자료실 등에 업로드할 경우 민· 형사상의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 <가자! 프로무림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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