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소년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쳐와 천지의 초목을 말라죽게 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망막한 평원이 모두 백색의 눈 뿐이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이때 휘날리는 눈꽃 속을 뚫고 두 마리의 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앞서 달려오고 있는 말 위에 탄 사람은 다 해진 누더기 옷을 걸쳐 입고 있었고, 두 손은 소매 속에 집어넣은 채 말 고삐는 방치해 두고 있었다. 말은 상당한 준마였으나 그 위에 탄 사람은 아주 초라한 모습이었다. 다 해진 가죽모자를 눈썹 위까지 푹 눌러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따라오는 말 위에는 이미 뻣뻣하게 굳은 시체 한 구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차가운 탓인지 죽은 사람의 얼굴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조차 띠고 있었다. 그는 매우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있었는데, 마치 새옷을 단정하게 해입은 것 같았다. 또한 이 죽은 사람의 전신에는 아무 상처자국도 없었으며, 보건대 아주 편안히 죽은 모습이었다. 이 두 마리의 말이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나, 그들이 가는 방향은 개봉성(開封城) 밖에 있는 아주 이름난 장원이었다. 이윽고 말을 탄 사람이 눈을 들었다. 그는 멀리 장원의 모습을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장원은 호성하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수백 개의 집들이 이어져 있어서 그 기상이 웅장하게 보였다. 높이 솟은 대문은 일 년 내내 닫힌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 문 앞에는 수많은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장원 담장 아래로는 어지럽게 공고문이 붙어 있었는데, 붙여진 지 오래된 듯 비바람에 시달려 그 공고문의 내용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장원 안으로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사랑채 같은 조그마한 집이 있었다. 이 집 앞 대청에는 십여 개의 새 관들이 놓여 있었는데 텅텅 비어 있는 관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마치 죽은 사람들이 와서 그 속에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엄동설한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청에는 불도 피워놓지 않은 채 두 명의 흑의인이 관을 탁자 삼고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관 옆에는 이미 비워진 술통이 세 개나 있었으나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술기운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무척 마른 체구였으며, 얼굴은 아주 냉혹하고 엄숙하게 보여 마치 돌부처 같았다. 왼쪽에 앉은 사람의 오른팔은 팔꿈치 밑에서부터 잘려나가 있었고, 이 잘려나간 팔에 검고 거대한 쇠갈고리를 달아매었는데 적어도 십여 근은 될 듯이 보였다. 그가 그 갈고리를 한 번 휘두르자 마치 관 뚜껑에 큰 구멍이 뚫릴 듯했으나 그 갈고리가 떨어진 곳에서는 아주 작은 땅콩이 튀어올라왔을 뿐이었다. 이 땅콩을 담은 접시마저도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얼핏 보기에 사지가 멀쩡해보였으나 한 잔 들이킬 때마다 허리를 굽히고 쉼없이 기침을 해댔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계속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마치 기침을 하다 죽을지언정 술을 마시지 않을 수는 없다는 듯이....... 담장의 왼쪽으로 나 있는 긴 계단과 회랑을 지나면 바로 대청이 있었는데, 대청 안에는 화롯불이 활활 타고 있었으며 여덟 개의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술상마다 술과 안주가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일곱 사람만이 앉아서 술과 안주를 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곱 사람은 같은 주안상에 앉지 않고 모두 각기 다른 주안상들의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아랫자리에 앉는 것을 싫어한다는 듯이....... 이 일곱 사람의 나이는 많아야 서른한두 살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기세는 당당했으며 표정 또한 거만하기가 이미 극에 이른 듯이 보였다. 이들 중에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으며, 중도 있었고 속인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가죽 주머니를 비스듬이 차고 있었다. 이들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서 비록 나이는 젊지만 무림에 이름을 날리는 고수들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가 아는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했지만 절대로 한 곳에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들이 같은 시간에 이곳에 온 까닭이 무엇인지는 그들 자신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대청을 지나서 다시 회랑을 지나면 또 하나의 집이 있었다. 이 집의 울타리 안은 적막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었고 왼쪽 사랑방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은은한 약 냄새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머리를 늘어뜨린 동자 한 명이 약탕을 들고 나왔다. 열린 문 사이로 세 명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삐쩍 마른데다 얼굴은 납황(蠟黃)색이었으며 이불을 감싸안고 긴 침상에 앉아 있었다. 병상에서 이미 오랜 세월을 지낸 사람처럼. 다른 한 사람은 키가 훌쩍하게 크고 위풍당당했으며, 두 눈썹은 비스듬히 치켜올라가 있었다. 그의 눈빛은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손은 백설 같았다. 이 사람은 청년 시절에는 널리 이름을 날린 미남자였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또 한 사람의 몸체는 굉장히 거대했는데, 수염이 마치 송곳처럼 솟아 있었으며 한쌍의 둥근 눈은 부리부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옷을 풀어 헤쳐 앞가슴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이 사람의 수염과 머리가 희지 않았다면 아무도 노인이라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세 노인은 병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병상 앞에는 조그마한 탁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 탁자 위에는 몇 권의 장부와 색깔과 재질이 서로 다른 수십 개의 허리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때 둥근 눈에 수염난 노인이 허리띠 하나하나를 풀어 헤치고 있었으며 그럴 때마다 그 속에서는 단정하게 접힌 종이쪽지들이 나왔다. 키 큰 노인은 둥근 눈의 노인이 주는 종이쪽지를 받아서 거기에 적힌 글들을 다른 곳에 옮겨 적고 있었다. 이 세 노인의 안색은 매우 침중하게 보였고 이맛살을 찌푸린 모습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차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키 큰 노인이 길게 탄식하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얻어낸 것이 겨우 이것에 불과하다니......." 그는 가볍게 기침을 하면서 말을 멈추었다. 그의 미간에는 아쉬워하는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병색이 짙은 노인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 정도의 수확도 결코 적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떻든 우리들이 모든 힘과 노력을 다해서 했던 일이니 언젠가는 성공할 날이 있겠지." 이때 수염난 노인이 손바닥을 치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큰형님 말씀이 맞아요." 키 큰 노인이 가볍게 웃으면서 그 말을 받았다. "최근 십 년 동안 무림에서 가장 이름을 날렸던 칠대고수(七大高手)들이 모두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무공이 그들의 이름 만큼 뛰어나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이들 일곱 사람이 모두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서로 상대에게 양보를 하지 않아 오히려 분열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때였다. 두 마리의 말이 장원 앞에 멈춰섰다. 말 위에는 다 해진 옷을 걸치고 낡은 가죽모자를 쓴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는 말 위에서 몸을 훌쩍 뒤집으며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다른 말 위에 실려 있는 시체를 내려서 껴안고는 장원 안으로 들어왔다. 흐느적흐느적 걷는 모습이 곧 주저앉아 버릴 것처럼 보였으나 한 손으로 시체를 껴안고도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낡은 가죽모자를 벗었다. 이때야 비로소 그의 얼굴 모습이 나타났다. 짙고 굵은 검미(劍眉)와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영민하고 준수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양쪽 끝이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간 입은 웃지 않을 때도 웃는 듯한 모습이었다. 표정은 아주 나태해 보였는데 그렇게 방관하는 듯한 표정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다만 허리에 비스듬히 차고 있는 장검이 사람들을 약간 두렵게 할 수 있는 정도였으나, 검집 또한 상당히 낡아 있어서 그 날카로운 검이 비록 살인의 흉기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그가 차고 있으니 그렇게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담장에 어지럽게 붙어 있던 것은 모두 현상금을 내걸고 사람을 잡아들이는 공고문이었다. 공고문에는 각각 한 사람의 성명과 내력, 그리고 그가 범한 악행 및 현상금의 액수가 적혀 있었다. 여기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은 모두 흉악한 악행을 저지른 흉악범들이었다. 공고문은 모두 십여 장에 달하였고 이를 통해서 최근 강호에 흉악한 무리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공고문의 아래에 서명한 것은 관가(官家)가 아니었다. 단지 '인의장(仁義莊)' 주인이라고만 씌어 있었다. 이 인의장 주인은 많은 현상금을 자신의 돈으로 충당하면서 강호를 위해 흉악한 무리들을 잡아들이고 있었으니, 인의라는 두 글자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초라한 소년은 눈을 들어 그 공고문을 훑어보다가 마지막의 가장 낡은 공고문 위에 시선이 멈췄다. 그 공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뢰추황(賴秋煌), 삼십칠 세, 그의 무공은 공동(共同)파에서 나왔으며 쌍편(雙鞭)을 아주 잘 사용함. 그가 차고 다니는 주머니에는 칠십삼구상문정(七十三口喪門釘)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무림계 열아홉 종류의 가장 독한 암기의 하나임. 이 사람은 계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음탕하고 흉악한 무리로서 재물을 빼앗고 여자를 겁탈하는 등 어떠한 악행도 서슴지 않음. 최근 칠 년 동안 매달 적어도 한 가지 악행을 범했음. 만약 이 사람을 죽은 채이든 산 채이든 잡아오는 사람에게는 은 오백 냥을 보수로 지불함. 이 말은 절대 식언이 아님. 인의(仁義)장주 백. 초라한 소년은 이 공고문을 읽고 나서 그것을 찢은 다음 몸을 돌려서 오른쪽에 있는 작은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마치 여러 번 이곳에 왔던 것처럼 지리에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 돌부처처럼 앉아서 술을 마시던 두 명의 흑의인은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일어섰다. 초라한 소년은 그가 끼고 들어왔던 시신을 바닥에 내려놓고 허리를 편 다음 손을 벌려서 은자(銀子)를 요구했다. 한쪽 팔을 가진 흑의인이 갈고리로 시신을 집어들어서 살펴보았다. 그의 냉혹한 눈빛 속에서 약간의 만족스러운 기색이 뻗쳐나오고 있었다. 그는 시신을 겨드랑이에 끼고서 큰걸음으로 뛰어나갔다. 다른 흑의인은 술을 따라서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초라한 소년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단숨에 입 안에 술을 털어넣었다. 그가 들어와서 세 사람이 서로 상면하고부터 지금까지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모두 벙어리인 것처럼....... 그 한 팔 밖에 없는 흑의인은 소로(小路)를 통해 두번째의 집들이 모여 있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 키 큰 노인이 문을 열고 나오다가 그가 온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이지?" 한 팔의 흑의인은 시신을 눈이 쌓인 땅 위에 내던지며 오른손 손가락을 들어서 가리켰다. 키 큰 노인이 몸을 굽혀 살펴보더니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 뢰추황이로군." 수염난 노인이 뛰어나와 기쁜 소리로 말했다. "뢰추황이 죽었어." "진짜 하느님도 눈이 있구만. 어떤 사람이 그를 죽였지?" 한 팔의 흑의인이 말했다. "사람." 둥근 눈에 수염난 노인이 웃으면서 욕을 했다. "나도 사람이 죽인 줄은 알지. 사람이 죽이지 않았다면 쥐새끼가 죽였단 말인가? 늑대가 기른 자식아! 한 마디 더 정확하게 말해주면 혀에 쥐가 나나?"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 한 팔의 흑의인이 갑자기 갈고리를 휘둘러 공격해왔다. 갈고리가 일으키는 바람은 강했으며, 그 공격하는 기세는 맹렬했다. 갈고리가 닿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이 미간으로 엄습해 들어왔다. 둥근 눈의 노인은 크게 놀라 몸을 비틀면서 옆으로 날아갔다. 키는 크고 둔해보였으나 몸놀림은 경쾌하고 가볍기 이를 데 없었다. 재빠르게 위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앞가슴의 옷은 이미 갈고리에 의해 구멍이 나고 말았다. 한 팔의 흑의인은 일초를 공격한 후 더이상 추격해 들어가지는 않았다. 둥근 눈의 노인은 화가 나서 욕을 퍼부어댔다. "이 망할 자식. 또 손을 써. 내가 만약 약간만 늦게 피했다면 너의 그 갈고리에 몸이 두 조각 날 뻔했잖아." 이때 병상에 앉아 있던 노인이 가볍게 질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셋째 동생, 입을 닥치게. 자넨 냉삼(冷三)의 성격을 모르는가? 알면서도 그를 욕했으니 스스로 싸움을 건 게 아니고 무엇인가?" 수염난 노인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다만 그와 장난을 했을 뿐인데. 어쨌든 그는 나를 이기지 못할 테니까. 냉삼! 만약 나를 이긴다면 너도 참 대단한 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러나 이러한 빈정거림에도 냉삼은 얼굴색도 변하지 않았으며 더이상 그와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곧바로 병든 노인이 앉아 있는 침상 앞으로 걸어가서 말했다. "오백 냥." 말을 함과 동시에 갑자기 그는 몸을 돌리면서 곧장 수염난 노인의 어깨를 공격해 들어갔다. 이번에는 갈고리를 사용하지 않고 손을 사용했다. 수염난 노인은 그의 일격에 격중당하여 곧장 날아가 벽장에 '펑' 하고 부딪혔다. 그는 곧 몸을 비틀면서 뛰어 일어났지만 견고한 돌로 쌓은 벽은 거진 부서져내렸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는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망할 자식! 진짜로 때려?" 그는 소매를 걷어 붙이면서 싸울 준비를 했다. 키 큰 노인이 가볍게 몸을 날려 그들 사이에 들어서면서 말렸다. "셋째, 어린애처럼 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다만 그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것뿐인데......." "물을 필요없다. 뢰추황이 죽을 때의 표정을 봐라. 이미 그를 죽인 사람이 이상한 소년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병든 노인이 말했다. "그 소년은 도대체 어떤 내력을 가진 자인가?" 키 큰 노인이 말했다. "누구도 그의 성과 이름을 모릅니다. 그리고 또 아무도 그의 무공이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최근 일 년 동안 그는 일곱 구의 시체를 보내왔는데 그 일곱은 모두 다년간 우리가 현상을 걸었으나 잡을 수 없었던 악적들로 이들의 악행이 아주 다양할 뿐만 아니라 아주 간사하고 흉악하고 무공 또한 아주 높은 자들입니다. 이 소년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죽였는지 그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병든 노인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가 이미 일곱 번이나 왔는데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인가?" 키 큰 노인이 말했다. "그는 올 때마다 절대 열 마디 이상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다만 '히히' 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을 뿐입니다." 수염난 노인이 실소하면서 말했다. "그 황소 고집은 냉삼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다만 그 소년은 적어도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어서 냉삼의 죽은 사람과 같은 차가운 면과는 다를 뿐이죠." 냉삼이 차가운 눈빛으로 힐끗 바라보자 수염난 노인은 크게 웃으면서 옆으로 삼보나 비켜섰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병든 노인이 실소하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떻게 그 소년이 뢰추황을 죽였다고 생각하는가?" 키 큰 노인이 그 말을 받았다. "그 소년이 죽여서 데리고 온 사람들은 얼굴에 기이한 웃음을 띠고 있는데, 이 동생이 이미 자세히 살펴보니 뢰수황 역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수법으로 그들을 죽였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병든 노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수염난 노인과 키 큰 노인은 그 옆에 서서 병든 노인의 생각을 방해할까봐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이때였다. 냉삼이 다시 손을 벌려서 말했다. "오백 냥." 수염난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은자는 네가 가질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급해......." 이 두 사람이 다시 입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든 노인은 여전히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비로소 병든 노인은 천천히 말을 했다. "그 소년은 틀림없이 아주 깊은 내력을 갖고 있을 거요. 오늘 일에 그 소년도 참석하게 해서 같이 있을 수 있도록 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냉삼. 자네는 그에게 가서 대청에 자리를 잡고 같이 술을 마실 것을 청하도록 하게." 냉삼이 다시 말했다. "오백 냥." 병든 노인이 실소하면서 다시 말했다. "이런 태도가 바로 냉삼을 믿을 수 있는 점일세. 그는 무슨 일을 하든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철두철미하게 하지. 어떤 사람이든 그에게 융통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걸세. 그의 말 한 마디는 벽에 못을 박는 것보다 더 단단하게 믿을 수가 있지. 심지어 나마저도 그의 생각을 바꾸게 할 수는 없을 것일세. 둘째 동생은 빨리 그에게 은자를 주도록 하게. 그렇지만 냉삼, 자네는 그 은자를 그 소년에게 준 후에 그를 그냥 돌아가게 해서는 절대 안 되네." 냉삼은 은자를 받은 후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돌아가버렸다. 수염난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처럼 주인보다 더 흉악한 종복은 드물거요." 병든 노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냉삼 형제의 무공으로 만약 그가 그들의 부친과 나와의 양대에 걸친 정분을 생각하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그가 허리를 굽히고 이곳에 있겠는가. 셋째 동생, 자네는 어떻게 그를 종복으로 본단 말인가?" 수염난 노인이 그 말을 받아서 말했다. "내가 말한 것은 장난말에 불과해요. 내가 냉삼의 손자라면 그를 종놈이라고 보겠죠." 키 큰 노인이 병든 노인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셋째 동생이 말을 할 때 좀더 우아하게 말하도록 바란다는 것은 냉삼이 말을 많이 하게 하기보다 더 어려울 것입니다." 한편, 초라한 소년과 흑의인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고 있었으나,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번갈아 마시고 있었다. 흑의인은 술잔이 차면 곧 마시고 나서 계속 기침을 해댔다. 초라한 소년은 흑의인보다 더 통쾌하게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 관 옆에는 빈 술통이 하나 더 늘었다. 냉삼이 한쪽 손엔 은자를, 한쪽 손엔 시체를 끼어들고 큰 걸음걸이로 들어와서 은자를 관 위에 팽개쳤다. 그리고 관뚜껑을 열어젖히고 쇠갈고리를 한 번 휘둘러서 시체를 관 속으로 쳐넣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동작을 정확히 알아볼 때쯤 그는 이미 땅바닥에 앉아서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동작은 번개같이 빨랐다. 초라한 소년은 연속 세 잔을 마시고 은자를 집어든 다음 포권을 하고 웃으면서 일어서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냉삼이 몸을 번쩍 날리면서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초라한 소년은 두 눈썹을 찌푸렸다. 마치 그에게 '왜 내 앞을 막는 거요?' 하고 묻는 것처럼....... 냉삼은 마침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장주께서 대청에 가서 술을 드시기를 원하오." 초라한 소년이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대청으로 올라가서 술을 마시겠소." 냉삼은 계속해서 몇 마디를 더하고 나서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느꼈는지 더이상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소년의 앞을 가로막고서 소년이 좌측으로 한 걸음 움직이면 그도 좌측으로 한 걸음 움직여서 가로막고, 또 소년이 우측으로 한 걸음 움직이면 그도 또한 우측으로 한 걸음 움직여서 가로막고 할 뿐이었다. 그러나 초라한 소년이 미미하게 웃는 순간 그 소년의 모습은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냉삼의 몸 뒤에 있었다. 냉삼이 몸을 돌려 쫓아가려고 했을 때 그 소년은 이미 바람막이 장벽 밑에 이르러서 냉삼을 향해 웃음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냉삼은 그를 추격할 수 없음을 깨닫고 갑자기 쇠갈고리를 쳐들어 자기의 정수리를 향해 곧바로 내려찍으려 했다. 초라한 소년이 크게 놀라서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들었다. 소년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한 줄기의 장력이 이미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냉삼은 쇠갈고리가 한쪽으로 비켜나가는 것을 느꼈으나 쇠갈고리는 그의 왼쪽 어깨에 격중되어 상처를 냈으며, 그 상처는 거의 하얀 뼈가 보일 정도로 깊었다. 초라한 소년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당신 지금 뭘 하려는 거요?" 냉삼의 상처에서는 선혈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눈썹도 까닥하지 아니하고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가면 나는 죽을 뿐이야." 초라한 소년이 멍청해져서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당신도 죽지 않겠군요." 냉삼이 말했다. "나를 따라오도록 해요." 냉삼은 몸을 돌려서 그 소년을 대청으로 인도해 갔다. "앉으시오." 이렇게 내뱉듯이 말한 냉삼은 대청에 있는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초라한 소년은 냉삼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씁쓸한 미소를 뜬 채 탁자 하나를 골라 아랫자리에 앉았다. 그 탁자의 윗자리에는 삼십 세 전후의 중이 한 명 앉아 있었는데, 그 중은 몸에 청색 승포를 입고 있었다. 그는 앞가슴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는데 상당히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 중의 두 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었으며,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움직인 적이 없는 듯이 보였다. 눈빛은 곧바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초라한 소년이 그의 맞은 편에 앉았으나 그 중은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초라한 소년이 그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으나 그 중은 여전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소년은 어쩔 수 없이 술병을 들고 잔에 가득 채운 다음 자작하려고 했다. 이때 청색 승복을 입은 중이 갑자기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술을 마시려면 이 탁자에는 앉지 말도록 하시오." 초라한 소년은 깜짝 놀랐으나 얼굴에는 웃음을 띠면서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술잔을 내려놓고 다른 탁자로 옮겨 앉았다. 이 탁자의 상석에 앉은 사람은 아주 화려한 옷을 입은 미소년으로서 초라한 소년이 앉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냉랭하게 말했다. "본인도 다른 사람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술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이다." 소년은 두말도 하지 않고 세번째 탁자로 옮아갔다. 세번째 탁자의 상석에 앉은 사람은 눈같이 하얀 옷을 입은 아주 예쁜 여자로서 그 초라한 소년이 건너오는 것을 보자 냉랭하게 그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초라한 소년은 얼른 세번째 탁자를 떠나서 네번째 탁자로 옮겨갔다. 네번째 탁자에는 아주 삐쩍 마른 오잠도인(��箴道人)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서면서 그 앞에 놓여 있던 모든 술과 요리들에 가래침을 뱉고 나서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초라한 소년은 그 모습을 보면서 미미하게 웃고는 다섯번째 탁자로 옮겨갔다. 그 탁자에는 뚱뚱하고 아주 못생긴, 그리고 얼굴에는 큰 혹이 났으며 잡초처럼 누우런 머리가 헝클어져 있는 여자가 마치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와작와작 큰소리를 내면서 탁자의 요리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 초라한 소년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돌연 옆 탁자에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술 좋아 하는 친구.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오." 초라한 소년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눈을 돌려보니 그곳에는 누더기 옷에 얼굴에는 때가 더덕더덕 낀 애꾸눈 거지가 웃음을 띠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탁자를 건너서 이미 거지에게서 풍겨나오는 시큼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초라한 소년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쪽으로 걸어가서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애꾸눈 거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귀하와 통쾌하게 한 잔 마시고 싶지만 이 술병에는 술이 다 떨어졌소. 이 안주를 술 삼아서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그 거지는 젓가락을 들어서 누우런 이빨로 안주를 와작와작 씹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 젓가락으로 옆에 있는 기름덩이의 고기를 집어서 초라한 소년의 접시로 옮겨놓았다. 초라한 소년은 보지도 않고 그 거지가 옮겨놓은 고기를 살과 가죽이 붙어 있는 채로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 고기가 비록 개나 돼지의 주둥이에서 뱉어놓은 것이라 했을지라도 그는 아마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을 것이다. 일곱번째 탁자에 앉았던 자색(紫色) 얼굴의 대한은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듯한 이 소년의 모양에 크게 흥미를 느껴 손에 들고 있는 술을 마시는 것도 잊고 있었다. 돌연 청색 옷을 입은 동자 오더니 손에 술병을 들고 오더니 이때 곧장 거지의 탁자 앞으로 가서 웃으면서 말했다. "술이 너무 늦었습니다. 두 분 용서하세요." 그리고 두 사람의 술잔에 술을 가득히 따라놓았다. 초라한 소년이 웃으면서 말했다. "고맙소." 그리고는 백 냥짜리 은전꾸러미를 꺼내서 그 동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벗겨지는 비밀 그는 길게 탄식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당시 무림의 혼란한 상황은 이러한 사실들로도 알 수가 있소. 더구나 그해 겨울에는 그 전보다 더욱더 혼란한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소." 노인은 마치 옛날 공포스러운 상황을 회상하는 듯 눈빛은 아주 참담하게 변했으며, 정신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한참 동안 있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 당시 중추절이 지난 뒤에 무림에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소. 백 년 전에 무적화상이 천하를 떨게 했던 이른바 무적보감 칠십이종 내외 공비급(無敵寶鑑七十二種內外功秘)이 형산 회안봉 꼭대기에 있다는 소식이었소." 키 큰 노인은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다음 계속 이어서 말했다. "이 소문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나 그 무적보감은 확실히 사람들의 마음을 동하게 했소. 당시 무림의 호걸들은 아무도 그 소문이 거짓이라고 생각지 않았소. 때문에 누구도 이러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냥 보내려 하지 않았소. 이러한 소문에 접한 당시의 호걸들은 하던 일을 모두 팽개치고 즉각 형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소. 강호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형산으로 가는 도상에서, 즉 길에서 매일 죽었던 말들이 적어도 백여 필 이상에 이르렀다고 하며, 무림 호걸들이 형산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만 어떤 사람이 형산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면 즉각 칼을 뽑아서 그 사람을 죽이는 큰 전쟁이 발생했던 거요. 즉 그들은 형산으로 가는 사람이 한 사람 적어지면 그 무적보감을 얻으려는 적들이 한 사람 적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렇지만 가장 한탄스러운 것은 형산으로 불공을 드리러 가던 여인들도 까닭없이 독수를 당했다는 것이오." 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웅사 교오와 여제갈 화사고 등은 참담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단홍자나 김불환은 조금도 얼굴색을 변하지 않고 있었다. 키 큰 노인은 침통하게 장탄식을 한 다음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는 바로 십일월 말이었소. 하늘에서는 이미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고, 무림 호걸들은 한발이라도 먼저 형산에 도착하기 위해서 그 형산으로 가는 길에서 비록 친지나 친구들의 시체를 보아도 아무도 매장해 주지 않았소. 후에야 노부는 형산에 도착하지 못하고 그 도상에서 죽은 무림 고수들의 숫자가 백팔십여 명에 달한다는 것을 알았소. 이 백팔십여 명 중에서 일파의 종주의 신분이었던 사람도 세 사람이나 있었소.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한 사람에게 협객으로서의 이름을 조성하는 계기를 제공했던 거요. 이 사람은 보감을 얻을 수 있는 그 귀중한 시간을 희생하면서 형산으로 가는 도상에서 죽어간 시체들을 하나하나 거두어 매장했던 것이오." 서약우가 끼어들어서 말했다. "그 사람은 만가생불(萬家生佛)이라고 불렸던 시옥관(柴玉關)이죠?" 키 큰 노인이 말했다. "맞소. 서 소협의 견문은 넓군요." 서약우가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색을 나타내면서 말했다. "제가 일찍이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시 대협의 행동은 아주 정직하고 언제나 협객으로서의 정정당당한 기품을 지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림인사들이 흠모하고 존경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없었다 합니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도 형산 싸움에서 불행히도 재난을 당했으며 나아가 너무나 비참하게 죽었다 합니다. 당시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암기 천운오화면(天雲五花綿)에 부상당하여 얼굴이 썩어 문드러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합니다. 하늘은 어진 사람을 돕지 않았으니......." 키 큰 노인이 몇 마디 칭찬하는 말을 하자 그는 아는 바를 줄줄 읊어대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탄식하는 말을 하였으나 얼굴에는 도리어 득의에 가득찬 기색을 만면에 드러냈다. 키 큰 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 표정은 슬픔인지 분노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 그 노인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약간이라도 견식이 있었던 무림의 호걸들은 자기 혼자서는 절대로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진경보감(眞經寶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거요. 이에 서로가 자신과 뜻을 같이한 사람들을 모아서 연맹을 조성했던 거죠. 그러나 당시에 아주 음흉하고 교활한 자들은 이러한 연맹을 이간질 시켰으며, 그 연맹을 깨뜨리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거요. 명리(名利)에 담백한 사람들은 비록 원래는 이 진경보감에 별 마음이 없었으나 당시에 동문 사제들에 끼어서, 혹은 친구들과의 정에 이끌려서 그들을 돕기 위해 부득불 이러한 혼란 속으로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던 거요." 그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당시에 흉악하고 교활한 무리들은 진경을 얻어서 천하를 호령하려 했던 것이고, 협의의 인사들은 진경이 이러한 악당들의 손에 들어가서 강호가 편안할 날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끼어들었던 거요. 이들은 진경을 탈취하려는 목적은 크게 달랐으나 모든 사람이 진경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소. 형산 회안봉에는 근 이백여 명이 넘는 무림의 영웅호걸들이 모여들었지요. 이들은 당시의 절정의 고수들이었소. 무공이 약간 낮은 자들은 회안봉에 이르기 전에 이미 죽음을 당했거나 죽지 아니한 자들은 이미 자기의 능력을 알고 스스로 물러섰던 거요." 그 노인이 하는 이야기는 상당히 호소력이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계속 이어서 말했다. "이들 무림 고수들은 동서남북 사면팔방에서 온 사람들이었소. 그 중에는 무림 칠대문파의 장문인을 포함하여 무림계에서 은퇴했던 마두들, 혹은 이미 은거한 협객들도 끼어 있었소. 이백여 명이 스물일곱 개의 집단을 만들어서 십구 일 동안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소." 그는 장탄식을 발하고 나서 말했다. "그 십구 일 동안 형산 회안봉에서는 검기가 하늘을 찔렀고 날아가는 새도 그 종적이 끊길 정도였소.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고 아무리 높은 무공이라도 그 회안봉에 있었던 사람은 촌각의 편안함도 가질 수 없었던 거요. 사방 모두가 강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사면에 위기가 깔려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생명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처해 있었던 거요. 중주검객(中州劍客)이 밥을 먹다가 암살을 당하고 만승도(萬勝刀) 서노표두가 잠자다가 그 머리를 잃어버린 후부터 사람들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소. 먹고 자는 일상 행위들도 모두 극히 위험한 일로 변해 버렸던 거요. 날마다 계속되는 이러한 생사의 싸움으로 모든 사람의 정신은 모두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반 미치광이 상태로 변해갔소. 평소에 공손하고 예의를 아는 군자도 이러한 상태에 처하자 도리를 따질 줄 모르는 미치광이가 돼버렸소. 형산파 장문인 옥현자(玉玄子)는 닷새 동안 마시지도 먹지도 않고 직접 여섯 사람의 적을 죽이고 나서 제일 먼저 미쳐버렸소. 그래서 그는 평생의 유일한 지기(知己)인 석기도인을 한칼에 죽이고 자기도 또한 만장의 절벽으로 떨어져서 죽어버렸소. 결국 그의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거요." 이때 갑자기 '딱!' 하는 소리가 났다. 화사고가 그 노인의 얘기를 듣다가 손이 떨려서 잡고 있던 술잔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화사고 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도 노인의 모두 노인의 얘기를 들으면서 정신이 나가 얼굴색이 변해 있었다. 키 큰 노인은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십구일간의 치열한 싸움이 끝난 후 회안봉에 있었던 이백여 명의 고수는 겨우 열한 사람으로 줄었소. 그렇지만 이 열한 사람도 모두 부상을 입었고 무공은 다시 옛날의 공력을 회복할 수 없게 돼버리고 말았소. 무림 중의 빼어난 인재들이 이 싸움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던 것이오. 오백 년 이래 강호 중에 일어났던 대소의 싸움 중에서 그 살육의 처참함이나 목숨을 잃은 자의 숫자 어느 것을 놓고 보더라도 이 십구일간의 싸움은 가장 치열한 것이었소."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 노인의 꼭 감은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원래 이 노인은 옛날 사람들이 불패신검(不敗神劍)이라고 칭했던 이장청(李長靑)이며, 병든 노인은 천기지령(天機之靈) 인중지걸(人中之傑)이라 불렸던 제지(齊智)이다. 그리고 수염난 노인은 기탐두우(氣呑斗牛)라 불린 연천운(連天雲)으로, 이 세 사람은 결의형제로서 모두 형산 싸움에서 살아 돌아왔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옛날 그 참혹한 광경을 생각할 때마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대청에는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이장청은 이어서 천천히 말했다. "그렇지만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이러한 소문들이 근본적으로 사람을 속이는 장난이었다는 점이오. 나와 제지 형님 그리고 연천운 동생, 소림사 홍법 대사, 무당 천현 도장(天玄道長) 및 당시 일대 대협 구주왕(九州王) 심천군(��天君)이 마지막으로 회안봉 꼭대기의 보물을 감춰둔 곳에 이를 수 있었소. 그 무렵 우리 여섯 사람은 공력을 이미 소비한 후라 여섯 사람이 힘을 합해서야 비로소 그 보물이 감춰진 동굴의 돌덩이를 옆으로 옮겨 놓을 수 있었소. 그러나 굴 속에는 아무것도 없소. 벽에 붉은 글씨로 '여러분 속았습니다'라는 몇 글자가 씌어 있을 줄이야......." 이미 오래된 일이었지만 그가 '여러분 속았습니다' 라는 대목에 이르자 그의 목소리는 떨려나왔다. 그는 머리를 쳐들고 긴 한숨을 토해낸 이후에야 계속 말을 이을 수가 있었다. "여섯 사람은 벽에 씌어 있는 글씨를 보고 제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화가 나서 그 자리에 기절해 버렸소. 한참의 시간이 흘러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야 비로소 심 대협과 소림의 홍법 대사가 이미 그 굴 속에서 죽은 것을 발견했소. 원래 이 두 분 대협은 상당히 인자한 사람들로서 이 회안봉 전투에서 죽었던 무림 친구들을 생각하고는 마음이 아파서 비탄에 빠져 스스로 벽에 부딪쳐 목숨을 끊어버린 거요. 무당파의 천현 도장의 상태는 제일 엄중했소. 억지로 기를 써서 무당산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부상 때문에 곧 돌아가셨소. 다만 우리 세 사람이 오늘까지 속절없는 삶을 살아오고 있는 거요." 그의 소리는 울먹이는 소리로 변해서 더이상 얘기를 하지 못했다. 이러한 강호의 옛일을 들은 사람들은 비록 이 일의 결과를 모두 알고는 있었으나 이 시점에 이르러 측은한 마음이 일어났으며 심지어 그 초라한 소년마저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교오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생사는 무상하다지만 가치가 있고 없다는 구별은 있는 겁니다. 이 노선배님의 삶이 저희들에게는 태산보다 더 가치있는 일인데 어찌 속절없이 살아왔다 그러십니까? 노선배님께서 만약 형산의 싸움에서 돌아가셨다면 어찌 오늘의 인의장이 있어 강호를 위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장청은 묵연히 탄식하면서 말했다. "형산의 싸움에서 흑백 양도의 인사들이 각각 손상을 입었으나 고수들 중에서는 백도의 영웅들이 열에 아홉은 죽음을 당했소. 그렇지만 흑도 친구들 가운데 심계가 깊은 사람들은 당시의 상황을 보고 자기의 실력을 가늠해서 물러섰소. 그래서 백도 고수들보다 그 세력을 많이 보존할 수 있게 되었던 거요. 정파가 약해지고 사파가 성장했으니 무림의 정세가 만약 이러한 까닭으로 혼란해진다면 어찌 우리들의 죄가 막중하다고 아니할 수 있겠소. 그래서 우리 제지 형께서는 현상금을 내걸고 이러한 흉악한 무리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생각했던 것이오. 이러한 방법을 시행한다면 비단 소년 영웅들이 서로 다투어서 일어날 뿐 아니라 흑도 인사들 중에서도 역시 이 현상금을 탐내어 서로 싸움을 일으키게 할 수 있었던 것이오." 화사고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노선배께서는 무림에서 제일지자(第一智者)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이장청이 말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업에 소요되는 자금이 너무 커서 우리 형제들은 여러 방면으로 모집을 하였으며, 강호에 있는 십팔가(十八家) 대호걸들이 모두 기꺼이 그들의 주머니를 풀어놓았소. 그렇지만 그 모금된 돈은 여전히 부족했소. 그런데 그 모금방법에서 구주왕 심 대협의 후예에게 상당히 고마움을 느끼는 바이오. 심 대협의 후예는 그가 남긴 모든 재산을 보내왔소. 심 대협 집안은 역대의 고관 집안으로 그 재산이 어찌 천만금에만 그쳤겠소. 이 모든 재산을 보내온 그 기백은 고금에 없었던 아주 대단한 것이었소." 웅사 교우가 감탄한 목소리로 끼여들었다. "심 대협이 명성을 천하에 떨쳤는데 그의 후예도 이처럼 기개가 큰 줄은 몰랐군요. 그 심 대협의 후예는 어디 있습니까? 이 교오는 진정한 마음으로 그와 한 번 사귀어보고 싶군요." 그러나 이장청은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형제도 이미 돈을 보내온 사람에게 여러 번 심 공자가 어디 있는지를 물어보았소. 그러나 그 사람은 심 공자가 재산을 정리한 다음 혼자 천하로 유랑을 떠났다고 말했소.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심복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 심 공자는 겨우 열 살 전후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였다는 점이오. 열 살 전후밖에 되지 않는 어린애가 이처럼 가슴이 넓고 기백이 뛰어났으니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경모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겠소." 화산옥녀 유옥여가 낮게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여자들이 만약 그런 소년에게 시집을 갈 수 있다면 헛된 인생을 살지는 않은 셈이 되겠지요." 옥면요금 신검수 서약우가 냉랭하게 말을 이어받았다. "세상에 협의를 실행하는 뛰어난 소년들이 어찌 심 공자 하나만 있겠소." 유옥여가 차갑게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도 소년 영웅 중의 하나란 말인가요?" 그 초라한 소년이 미미한 웃음을 띠면서 말을 이어받았다. "서 형은 당연히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해야 되겠죠." 서약우가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감히 나와 형과 아우로 칭할 수가 있단 말이냐?" 초라한 소년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유옥여가 그 초라한 소년을 한 번 쳐다보고 경멸하듯이 말했다. "진짜 꼴불견인 남자로군 . 남자의 체면을 떨어뜨리는군." 그 목소리는 상당히 경멸하는 냄새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초라한 소년은 도리어 못 들은 듯한 태도를 취해보였다. 그러나 화사고는 다시 한 번 그 초라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화사고의 눈에는 아주 찬탄하는 듯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이장청이 더이상 다른 사람들이 끼어드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우리 형제가 인의장을 지킨 것이 오늘로 구 년이 되었소. 이 구 년 동안 외부의 적이 쳐들어 온것도 수십 차례였소. 우리 형제의 무공은 십의 구는 이미 소실된 상태로, 만약 충성스런 충복인 동시에 정의를 실현할 줄 아는 냉가(冷家) 형제들이 목숨을 걸고 적을 물리쳐주지 않았다면 인의장은 이미 소멸되어 버렸을 것이오. 인의장이 지원했던 현상금들은 오늘날까지 십여 만 냥에 이르고 있으나 옛날 처음 모았던 원금은 오늘날까지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소. 이처럼 원금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냉이제(冷二第)의 돈에 대한 관리가 상당히 유효 적절했기 때문이오. 냉이제는 일 년 사계절을 외부에서 이 원금을 관리하면서 보냈소. 그래서 그를 통해서 걷어들인 이자로 충분히 현상금을 지불할 수 있었던 것이오. 세 사람의 정의로운 행동은 놀랄 만한 것이었소. 그들은 명성도 구하지 않고 그렇다고 재물도 원하지 않았소. 결국 인의장이 오늘과 같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들 세 사람 형제의 힘에 의했던 것으로서 우리 형제 세 사람은 그들의 미명(美名)을 도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오. 우리들의 이름은 허명인 것이오. 생각하건대 진짜 참담한 노릇이라 아니할 수 없소." 유옥여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겸손하게 말씀하시는군요. 그런데 노선배께서 오늘 저희들을 이곳에 부르신 이유는 어떠한 가르침이 있어서인지요?" 이장청이 아주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산에 무공비급이 감춰져 있었다는 것은 비록 사람을 속이는 것이었으나 형산의 전투 후에 도리어 놀랄 만큼 많은 재물이 남겨지게 되었던 거요." 김불환이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무슨 재물이죠?" 이장청이 말했다. "회안봉에 올라갈 수 있었던 이백 명의 고수들은 모두 그 이름이 다년간 강호에 떨쳤던 사람들이고 그들의 무공은 모두 나름대로의 절기를 창안하고 있었소. 이들은 회안봉에 올라간 후에 살아돌아갈 확률이 극히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무공이 그로 인해 전해지지 아니할 것을 두려워하여 모두 자신의 무공비급과 재산을 타인에게 부탁하려 하였소. 그러나 이 사람들은 후손이 없거나 혹은 후손이 있어도 이미 모두 형산 싸움에서 죽거나 자신의 신변에 없었던 거요. 그래서 도대체 이 무공비급과 재산을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상당히 크게 부각되었던 것이오. 최후에 그들은 무공비급과 재산을 은밀한 곳에 숨겨서 만약 그들이 살아 돌아와서 그것을 다시 꺼내지 못하더라도 먼 후대에 인연이 닿는 사람이 그것을 취해주기를 바랐소. 이때 그 만가 생불시 옥관은 강호에서 아주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요. 강호인들은 모두 그의 뛰어난 무공과 선량한 보살과 같은 마음씨를 찬양하고 있었소. 그리고 시옥관은 평시에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친구들을 좋아해서 무림 중의 이름이 있는 영웅들은 대부분 그와 교분을 맺고 있었소. 이러한 까닭으로 사람들은 그의 비급과 보물을 묻을 때 아무도 그가 아는 것을 꺼려 하지 아니하였던 것이오. 도리어 어떤 사람은 특별히 비급과 보물을 묻은 곳을 그에게 말해주었소. 만약 자기가 형산 싸움에서 죽을 경우에 그에게 자기의 보물들을 적절히 처리해 주기를 부탁했던 것이오." 이장청이 길게 탄식하면서 말을 이었다. "형산 싸움에서 살아남은 열한 사람 중 일곱 사람은 모두 그들 자신의 보물들을 시옥관에게 부탁했던 것이오. 그들이 살아 돌아와서 그들이 숨겨놓은 보물과 비급을 꺼내려고 했을 때 어찌 숨겨놓은 장소에 보물이 없으리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소. 그러나 보물을 숨겼던 장소에는 한 장의 종이쪽지밖에 없었던 거요. 그 종이쪽지에는 '여러분 속았습니다'라는 글이 남겨졌을 뿐이었소." 형산 싸움의 여파는 여러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한 비밀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장청의 얘기를 들으면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서약우는 반문했다. "그렇지만 시 선배께서는 이미 중독되어 죽지 않았습니까?" 이에 대해 이장천이 말했다. "누구도 시옥관이 진짜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보지 못했소. 또 어떻게 그가 자기의 옷을 다른 시신에 입혀놓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겠소? 하물며 우리 제지 형이 그 글자 자체를 연구했는데 .여러분 속았습니다.라는 글자는 시옥관의 필적과 완전히 같았소. 다시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 회안봉 위에 무적보감이 숨겨져 있다는 소식은 열 사람 중 대여섯 사람은 모두 시옥관의 입을 통해서 들었던 거요. 그들은 모두 시옥관을 신임해서 그대로 믿고 이러한 내용을 부지불식간에 다른 사람에게 말했던 것이오. 그리고 또 이러한 내용을 전해들은 무림 고수들은 이들을 신임해서 사실로 믿고 다른 사람에게 또 말해주는 과정을 통해서 이 소식은 갈수록 점점 멀리 퍼져 나갔고, 점점 사실처럼 믿어졌던 거요." 그의 얼굴에는 점점 원한에 사무친 분노의 기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다년간의 계획을 세워서 이러한 비참한 결과를 만들어내었으니, 무림 고수들을 일망타진하여 혼자서 무림을 종횡할 수 있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이름을 떨쳤던 무림 고수들의 절기는 이로 인하여 대부분 전해지지 않아서 무림계로 하여금 영원히 다시는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게 했으니. 이와 더불어 그 자신은 많은 무공비법을 얻어서 스스로 그 혼자 몸에 여러 사람들의 절기들을 갖추게 되었으니 이후에 그가 천하를 종횡한다 해도 누가 그를 막을 수 있을 것인지. 요 몇 해 동안 그는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으니 아마도 각 문파의 무공의 진수를 이미 수련해 냈을 것이오. 지금 이 시점은 그가 다시 강호에 그의 모습을 나타낼 때라고 생각되오." 여러 사람들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아무도 더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다음에 오대산 천법대사가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 사람은 진짜 천백 년 이래에 강호에 나타난 가장 흉악하고 간사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모두 증거가 명확하다 할지라도 모두 시옥관의 행위였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노선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의 말은 비록 천천히 이어졌으나 그 목소리는 종을 치는 듯 웅장했고 사리에 대한 분석은 더욱 공평하고 정대하여서 현재의 무림의 제일 고수로서 소림사 홍법 대사가 타개한 이후에 그 명성이 소림사 현재의 장문인 인심 대사(刃心大師)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거짓이 아님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이장청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좋은 말씀을 하셨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여러분들을 이곳에 오시도록 한 원인이외다. 회안봉 싸움이 끝난 삼 년 후 어느 날 우리들은 발견하고야 말았소. 옥문관(玉文關) 내외에 한 사람의 기인이 출현하였는데 이 사람의 행적이 묘연할 뿐 아니라, 선인인지 악인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었소. 가장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점은 이 사람이 일신상에 각문 각파 무공의 정수만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오. 그가 초식을 전개할 때마다 모두 다른 문파의 초식을 전개하였던 것으로서, 어떤 사람이 무당파, 소림파, 아미파, 공동파, 곤륜파 등 오대문파의 이미 전해지지 않는 절기를 전개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오. 그리고 그가 전개했던 초식은 심지어 오대문파의 장문인들도 배우지 못했던 그러한 것이었소." 장청이 이어서 말했다. "이 사람의 행동거지는 호방하고 화려하기가 천하무쌍이었소. 한 번 출현할 때마다 수행 인원은 언제나 백 명이 넘었으며 하루에 쓰는 돈은 백은 만 냥을 초과했소. 그렇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나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심지어 그가 어디 사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소. 다만 그가 원래 변경지방의 흉악한 무리들을 그의 당파로 끌여들였다는 것을 알 뿐이오. 그러나 그 세력은 점점 확장되어서 중원일대로 진입하기 시작하여 천하를 독패할 형세를 보이고 있소." 서약우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시옥관이란 말입니까 ?" 이장청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 출현하자마자 우리 제형께서는 이미 그가 시옥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사람들로 하여금 그행적을 알아보게 하는 한편 사람들을 멀리 사면팔방으로 보내서 시옥관과 관계있는 자료들을 모으게 했소. 우리 세 사람이 시옥관은 과거행적에 대한 내용을 알면 알수록 그가 아주 음험하며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거요." 천법 대사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천하 영웅들은 만가생불 시옥관의 협명은 알고 있지만 그가 이름을 날리기 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약우가 이어서 말했다. "그러면 그가 이름을 날리기 전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이장청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형제 세 사람은 오십만 냥 이상의 자금과 천 명 이상의 사람을 동원해서 마침내 시옥관의 출신과 내력 및 과거 행적의 윤곽을 어느 정도 찾아냈소. 방금 그에 대한 자료를 전부 입수했으니 여러분께서 먼저 본 후에 의논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이렇게 말을 마친 그는 잠시 주저하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는 창문으로 눈길을 던졌다. 마치 엿듣는 사람을 방비하는 듯한 태도였다. 주위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키 큰 노인은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손에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쳐서 벽에 걸었다. 이때 머리를 늘어뜨린 동자가 여덟 사람분의 종이와 붓을 가지고 들어와서 한 사람씩 나눠주었다. 그 종이 두루마리는 모두 두 폭으로 되어 있었는데 넓이는 약 한 장 정도였으며 부잣집 대청에 걸려 있는 족자모양이었다. 그 족자에는 글씨들이 촘촘하게 씌어 있었다. 좌측에 걸려 있는 두루마리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성명 : 이십 세 전에는 시량(柴亮)이라 이름함. 이십에서 이십육 세까지는 시영명(柴英明)이라 함. 이십육 세에서 삼십칠 세까지는 시립(柴��)이라 했음. 삼십칠 세 후에는 시옥관이라 했음. 내력 : 부친 이름은 시일평(柴一平)으로 악중(鄂中)의 거부임. 모친 이름은 이소취(李小翠)로서 시일평의 일곱번째 첩임 . 형제는 모두 열여섯 사람으로 시옥관은 열여섯째 아들임.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각 성(省)의 사투리에 정통했음. 이름을 날린 후에는 중원의 인사로 칭했으며, 천하인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음. 시옥관이 열네 살 때 식구 삼십여 명이 하룻밤에 모두 몰살됨. 시옥관이 그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후에는 종일 강호상의 하오문(下五門)의 음적들인 원앙호접파(鴛鴦蝴蝶派)와 어울려 돌아다님. 삼년 후에 돈을 모두 날린 다음 시옥관은 출가하여 중이 되었음. 문파 : 십칠 세 나던 해에 소림 문하에 들어가서 화공승이 되었으나, 후에 무공을 몰래 훔쳐 배웠다는 이유로 방출됨. 이십 세 이후로는 십이연환오(十二連環塢)에 들어갔는데, 계략이 출중하고 말을 잘했기 때문에 방주 천남일검 사송수의 신임을 받음. 그래서 사송수의 문하로 들어감. 사송수 문하에서 무공을 배운 지 육년 만에 천남일검의 애첩이었던 금연(金燕)과 정을 통한 다음 사송수의 평생 재산을 가지고 도망감. 사송수는 대노하여 모든 제자들은 풀어 그를 수색했음. 시옥관은 어쩔 수 없이 멀리 관외로 도망을 가서 금연을 강호인들이 색마라고 칭하는 칠심옹(七心翁)에게 바쳐서 그의 문하로 들어감. 십 년간 칠심파의 무공을 노화순청의 단계에 이르도록 배웠음. 이때 칠심옹이 또 원인을 알 수 없이 죽음. 시옥관이 다시 중원으로 들어와서 협객으로서 재물을 가볍게 하는 모습으로 출현함. 그는 먼저 양하(兩河)의 영웅호걸들과 연합하여 십이연환오를 제거한 다음 천남일검의 문파를 재건하여 비로소 강호에 이름을 떨치게 됨. 외모 : 이 사람의 얼굴은 백옥 같이 흼. 눈썹끝과 눈끝이 약간 아래로 쳐졌음. 코는 매부리 코처럼 약간 구부러졌음. 입술은 두툼하고 욕심이 많게 생겼으며 입가 양쪽에는 각각 검은 사마귀가 하나씩 있음. 눈썹 사이에는 하나의 혹이 있음. 그는 치장하기를 좋아하며 정성들여서 꼼꼼하게 만든, 몸에 찰싹 달라붙는 옷을 입어서 키가 크고 신체가 늘씬한 것을 나타내기를 좋아함. 특히 자색 계통을 좋아함. 두 손은 아주 예쁘게 생겼으며 그 손의 희기가 여자의 손과 같음. 가운데 손가락에는 자금(紫金) 반지를 끼었으며, 말할 때마다 손짓을 하여 두 손이 깨끗하고 희며 예쁜 것을 보여주기를 좋아함. 기호 : 주량이 아주 셈. 그는 대국주(大麴酒)와 모태주(茅台酒) 고량주(高梁酒) 및 죽엽청주(竹葉酒)를 혼합한 독주를 특히 좋아함. 안주로는 반쯤 익힌 골뱅이나 굴조개를 좋아하며 이에 더하여 가끔씩 뱀 고기를 먹기도 함. 그러나 돼지고기는 좋아하지 아니하여 거의 먹지 않음. 기마술이 아주 뛰어나서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달리기를 좋아하는데 말이 죽을 때까지 채찍을 가하여 뛰어다님. 그리고 큰 도박을 좋아하는데 도박장에서는 자극을 얻기 위해 잔재주를 부리지는 않음. 또 사냥을 좋아하는데 특히 미녀사냥을 좋아함. 그는 색욕이 아주 강하여 매일 밤 두 명의 여자와 같이 자지 않으면 기쁨을 느끼지 못함. 특징 : 이 사람은 말재주가 상당히 좋고 사람의 뜻을 잘 헤아려서 이름난 호걸들이 그와 교분을 맺기를 원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없음. 언제나 얼굴에 웃음을 띠며 사람을 죽인 후에는 곧바로 손을 깨끗이 씻어버림. 그가 사용하는 무기에 약간의 핏자국이라도 묻으면 즉시 이것을 버림. 아울러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재주가 있으며 그의 서법(書法)은 이왕(二王)의 계통을 이었으며, 매우 높은 경지를 이루고 있음." 이 두루마리는 아주 간단했지만 매우 정확하게 시옥관의 일생을 서술해 내고 있었다. 그의 일생은 정말 다양하고 사악한 역사로 가득차 있었다. 사람들은 그 내용을 훑어보고서 가슴이 뛰고 멍해져서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오른쪽의 두루마리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성명 : 옥문관 밖의 사람들은 환희왕(歡喜王)이라 칭하나 진짜 이름은 정확히 모름. 내력 : 정확히 모름. 문파 : 정확히 모름. 그러나 천하 각 문파의 비전(非傳)하는 무술에 두루 통하고 있음. 외모 : 눈과 눈썹이 약간 아래로 처졌으며 긴 수염을 기르고 있음. 코는 매부리 코처럼 약간 휘어졌으며, 눈썹 사이에는 상처자국이 있음. 장식을 좋아하며 사람을 고용해서 매일 머리를 감기게 함. 키는 아주 큼. 옷은 아주 화려한 것을 좋아함. 말할 때는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기를 좋아하는데 수염과 손은 상당히 아름다움. 왼손 중지에는 세 개의 아주 작은 반지를 끼고 있는데 암기로 사용하는 듯도 함. 기호 : 주량이 상당히 좋으며, 특이한 맛이 나는 음식을 좋아함. 그러나 돼지고기는 먹지 않음. 그의 곁에는 언제나 절세의 미녀 몇 사람이 같이 있음. 그는 종종 거부들과 한 번에 천금을 거는 큰 도박을 하기를 좋아함. 특징 : 우스갯소리를 잘 하며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매우 좋아함. 하루에 쓰는 금전은 언제나 금 만 냥을 상회함. 아주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만약 손님이 약간이라도 더러운 면을 보이면 즉시 쫓겨남. 그를 수행한 삼십육기(三十六驥)는 모두 외모가 잘생기고 기마술이 뛰어난 소년들임. 장검을 사용하는데 그의 검초는 겨우 십삼식이나 그 초식들은 기이하고 신랄하여서 비록 무림에 이름을 떨친 고수들이라 할지라도 이 십삼식을 피해내거나 당해낼 사람은 많지 않음. 이외에도 주(酒), 색(色), 재(財), 기(氣)의 사대사자(四大使者)가 있는데 이들은 환희왕이 가장 신임하는 부하들임. 그러나 환희왕 곁에 붙어 있는 일은 매우 드문데 그 까닭은 각자 그들이 맡은 특이한 임무 때문임. 주사자는 환희왕을 위해 좋은 술을 찾아 돌아다니고, 색사자는 그를 위해서 각처에서 절세의 미녀들을 찾으러 돌아다니며, 재사자는 그를 위해서 재산을 관리하고 아울러 돈을 벌어들이는 일을 함. 다만 기사자는 언제나 환희왕의 신변에서 떨어지는 적이 극히 드문데 만약 어떤 사람이 환희왕에 대해서 약간의 무례라도 범하게 될 때 기사자는 즉각 검을 뽑아 그 사람의 수급을 잘라버림. 이 네 사람은 모두 성격이 상당히 기괴하고 무공은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음." 이 두루마리를 보고 나서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사람들이 두루마리에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요점을 모두 기록해낸 다음에 이장청이 비로소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은 이 두 사람이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서약우가 앞다투어 말했다. "이 사람은 적어도 열세 가지 점에서 비슷합니다. 우선 얼굴이 희고 눈썹이 처졌으며, 코는 매부리 코이며, 키가 크고, 손이 아름다우며, 의복이 화려하고, 술을 좋아하며, 여자를 좋아하고, 도박을 좋아하고 그리고 특이한 맛을 내는 음식을 좋아하는 반면 돼지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손에는 반지를 끼는 것을 좋아하고, 말할 때 손짓을 잘한다는 점입니다. 수염을 쓰다듬는 것도 손짓으로 간주할 수 있겠죠." 그는 단숨에 열세 가지의 비슷한 점을 지적해내고 얼굴에 득의한 기색을 나타냈다. 그러나 화산옥녀 유옥여는 도리어 냉랭하게 말했다. "아직 두 가지가 더 있는데 당신이 지적해내지 못했어요. " 서약우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어떤 두 가지 점이죠?" "시옥관은 입술이 두텁고 사마귀가 있는데 환희왕은 도리어 긴 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점. 시옥관은 눈썹 사이에 혹이 있는데 환희왕의 눈썹 사이에는 칼자국이 있다는 점으로서 이 두 가지는 아주 특이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라 생각돼요.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우스갯소리를 잘하며, 친구 사귀기를 좋아한다는 점으로, 쉽게 지적해낼 수 있는 점이에요. 사실 제가 덧붙여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서약우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유옥여의 지적에 수긍했다. "그건 그렇군요!" 그는 머리를 돌려서 술잔을 들고 목을 곧추 세운 다음 목구멍으로 부어넣었다. 그리고 다시는 유옥여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장청이 말했다. "서 소협이 말한 게 맞습니다. 그리고 유씨 아가씨가 살핀 것은 더욱더 자세하군요. 그렇지만 이러한 점들 외에도 더욱 많은 점을 주의해야 할 거요." 일곱번째 아가씨 "아! 그래요?" 유옥여의 얼굴도 붉어졌다. 이장청이 이어서 말했다. "여러분들이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시옥관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대부분 하룻저녁에 비명횡사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거요. 심지어 부모형제와 같은 친지들도 예외는 될 수 없었던 거요. 그들이 하룻저녁에 몰살당했던 원인은 틀림없이 시옥관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오. 이로 볼 때 그 사람의 흉악함과 몰인정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소. 시옥관이 형산 싸움의 여파로 얻었던 비급과 재물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환희왕은 바로 재산도 많고 천하 각파의 무공을 알고 있다는 점도 주의할 만한 점이오. 시옥관이 그 부자형제를 독살시키고 사부를 배반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같이 잠자리를 하는 여인들을 다른 사람에게 뺏어와서 조금도 애석함이 없이 그대로 넘겨 줄 정도니 친구를 팔아 넘긴다는 것은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오." 그의 말투는 갈수록 분노의 기색을 띠었으며,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여러 가지 상황에 근거하건대 시옥관과 환희왕은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해도 좋을 것 같소." 사람들은 그의 말에 더이상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천법대사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합장을 하고 말했다. "이 사람이 욕심도 많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니 후일 반드시 그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장청이 그 말을 이어서 말했다. "대사의 말씀이 옳소. 이 사람이 바로 욕심이 지나치게 크고 너무 사치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끝을 쭈뼛하게 하는 큰 일을 해치웠던 것일 거요. 그렇지만 그가 스스로 멸망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요. 그때까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 할지 모르오." 천법 대사는 합장을 하고 장탄식을 하며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장청이 천천히 이어서 말했다. "우리 형제가 오늘 여러분을 이곳으로 모이게 한 것은 바로 여러분이 동심협력(同心協力)해서 그의 진면목을 파헤쳐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오. 그가 흉악하다 하나 여러분들은 현재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니 여러분들이 힘을 합한다면 무림계를 위해서 이러한 화근을 제거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하오." 그가 얘기를 다 마치자 대청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침중하게 변했으며 어떤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겼으며,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쳐들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눈썹을 찌푸렸다. 한참이 지나자 김불환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만약 그 환희왕을 죽인다면 그가 남긴 보물들은 어떻게 처리되는 거죠?" 이장청이 그를 쳐다보고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가 남긴 보물들은 주인이 없는 물건이니 당연히 여러분에게 드려야죠." "그 외에 또 다른 것은 없소." "그 외에도 본 장원에서는 십만 냥의 은자를 준비해서 여러분에게 드리려 하고 있소." 김불환이 웃으면서 손뼉을 치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볼 만한 일인데." 말을 하고 나서 술잔을 들어 잔을 비운 다음 고깃덩이를 큰 입에 집어넣고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웅사교오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과연 재물을 봐야 마음이 동한다는 그 말은 헛되이 전해진 것은 아니었군. 관 속에 들어가서도 손을 벌릴 사람이야." 김불환이 대소하며 말했다. "지나친 칭찬이시오." 옥면요금 신검수는 계속 고개를 쳐들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하나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있다가 비로소 천천히 말했다. "이 일은 비록 위험하긴 하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요." 그는 갑자기 탁자를 치더니 이어서 말했다. "맞소! 그 환희왕을 죽인 사람에게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의 고수라는 명칭을 주어야 할 거요." 유옥여가 냉랭히 그 말을 받았다. "그렇게 된다면 천하제일고수라는 명칭은 아마 당신 신검수에게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서약우가 냉소하면서 말을 받았다. "과연 그럴까요? 헤헤." 그리고 다시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대청에는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한참 후 청성현도관주(靑城玄都觀主) 단홍자가 갑자기 앙천대소하면서 말했다. "하하 우습군, 우스워. 정말로 우습군." 그의 입에서는 비록 큰 웃음이 터져나왔으나 얼굴은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다. 더구나 그의 웃음소리는 더욱 냉막하고 무정하여 조금도 우습다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장청이 말했다. "단홍도장께서는 무엇이 우스운지 모르겠군요?" 단홍도장이 말했다. "귀하는 이 사람들이 동심협력할 그러한 사람들로 보입니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오." "귀하께서는 이들 영웅호걸들을 한 번 보십시오. 명성을 구하지 아니하면 바로 일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을 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이 사람들에게 동심협력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산에 가서 물고기를 낚아오라는 것보다 더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교수란심 여제갈 화사고가 웃으면서 말했다. "단홍도장의 말씀은 일리가 있으나 이곳에 아무도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의견은 약간 잘못이 있는 것 같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교오 오라버니만 보더라도 평생 동안 정의로운 일을 위해서 동분서주했던 사람인데 이 분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 때가 있었던가요? 하물며 비록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이해관계가 서로 같을 수만 있다면 동심협력하지 못할 것도 없는 것 아닌가요?" 단홍자가 눈을 뒤집으면서 냉소를 흘렸다. 이장청이 탄식하며 말했다. "화사고의 탁견은 확실히 뛰어나오." 이때 갑자기 오대산 천법 대사가 옷을 털면서 일어나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시옥관 그 사람은 명백히 죽여야만 할 사람이오. 빈승 또한 의로운 일이라면 사양치 않겠소. 그렇지만 만약 빈승이 다른 사람들과 동심협력해야 한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하오.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 그는 옷소매를 떨치면서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이때 갑자기 일진의 급박한 말발굽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 소리는 장원 앞에 이르러서도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인마(人馬)가 곧바로 장원으로 지쳐들어오는 것 같았다. 천법 대사는 어쩔 수 없이 떠나려던 몸을 멈추었다. 다른 사람들도 약간 안색이 변하면서 동시에 몸을 날렸다. 대청에는 일진의 가벼운 옷깃이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가 났으며, 순식간에 아홉 사람은 모두 대청 창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그들의 경공과 몸놀림은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 차이는 극히 미미한 것이었다.이장청이 비록 무공의 십의 칠팔은 이미 상실했다고 하나 그의 신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아 한발 앞서 도착하여서 문을 열고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곳의 고인께서 폐장(蔽蔣)에 왕림하셨소?"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여덟 필의 건장한 말이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크고 건장한 말들은 차가운 바람이 부는 속에 우뚝 서서 길게 울부짖었다. 그 말들은 드물게 보는 준마들이었다. 마상(馬上)에는 흑의 경장 대한들이 타고 있었는데 깊고 검은 눈썹에 붉은 얼굴을 가진 장한들로 온 몸에 눈을 뒤집어 쓰고 있었으나 그 기세가 대단하여 조금도 위축됨이 없어 보였다. 대청에 있던 아홉 사람은 한눈으로 쓱 쓸어보고는 이 여덟 사람의 무공은 비록 일류 고수들에 미치지는 못하나 그들의 내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장청이 아직 대답을 하기도 전에 급한 바람소리가 일어나며 냉삼이 이미 말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의 키는 비록 크지는 않았으나 단신으로 이 여덟 필의 건장한 말을 막아 섰는데도 전혀 이들을 안중에 두지 아니하는 듯한 모습으로 냉랭히 말했다. "말을 내리지 않으려면 빨리 꺼져라." 말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상대방이 겁을 먹고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면 그들을 격노시키기에 충분한 어투였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얼굴에는 여전히 차가운 빛을 띠고 입은 꾹 다문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진흙으로 빚어놓은 동상 같았다. 냉삼은 왼팔을 들어올려 말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 말이 비록 천리마라 할지언정 어찌 냉삼의 휘감는 힘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말은 소리를 지르면서 옆으로 쓰러져 내렸다. 냉삼은 이와 더불어 한발을 차내었다. 언뜻 보기에 분명히 말 위에 앉아 있는 기사를 찰 수 없을 것 같았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발길질은 정확히 기사를 때렸다. 말은 땅으로 쓰러지고 말을 탄 기사는 냉삼의 발에 맞아 멀리 날아갔다. 갑작스러운 변화와 냉삼의 동작의 빠름은 진실로 전광석화와 같았다. 그러나 다른 일곱 필의 준마는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방금 일어났던 사건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듯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말에 탄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일곱 필의 말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실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점으로 아주 엄격한 훈련을 받지 아니한 말들이라면 어찌 이럴 수가 있을 것인가? 냉삼이 첫번째 말을 쓰러뜨리고 나서 더이상 쳐다보지 않고 다시 두번째 말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는 기계처럼 조금의 감정도 없고 한 가지 일을 하면 끝까지 해치워야 하는 그러한 성격이었다. 외부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든 그 변화가 사람을 놀라게 하든 말든 그의 생각을 돌릴 수는 없었다. 갑자기 이장청이 침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멈춰라!" 냉삼이 휘두르던 갈고리를 멈추고 뒤로 삼 척 가량 후퇴했다. 이장청의 몸은 이미 그의 앞에 와 있었다. 이장청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오? 폐장에 무슨 일이 있어서 왔소?" 김불환이 이어서 말했다. "인의장에 와서 말에서 내리지도 않다니. 친구들 도대체 누구의 힘을 믿고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하는 거요?" 그러나 그 대한들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문 밖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한 자 한 자 똑똑히 들려왔다. "내가 이렇게 하고 싶으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싶으면 저렇게 할 뿐 아무도 간섭할 수 없어요." 그것은 오만함이 극에 달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주 맑고 부드러워 마치 꾀꼬리 소리 같았다. 김불환이 어리둥절한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 원래 계집애였구만!" 그는 고개를 돌려서 서약우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서 형! 당신이 나설 차례인 것 같소." 서약우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우스갯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가 입으로는 이처럼 말했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자를 바로 쓰고 옷차림을 고치면서 단정한 모습을 지으려고 행동했다. 그리고 나서 얼굴과 눈썹을 약간 아래로 내려뜨려 곁눈질로 앞을 바라보았다.거기에는 그림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화려한 마차를 네 필의 백마가 끌고 들어오고 있었으며, 두 명의 흑의 대한이 말을 몰고 있었고, 그 마부들 옆에는 두 명의 금의 대한이 걸터 앉아 있었다. 이장청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그 마차가 곧장 대청 계단 앞에까지 달려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이처럼 안하무인격인 행동을 하다니!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마차 속의 사람이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상관할 수 없어요." 이장청이 비록 수양이 깊다고는 하나 이때 만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한 기색을 드러내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가씨는 이 장원의 주인이 누구인 줄이나 아시오?" 그러나 어찌 마차 속에 있는 사람의 분노가 그보다 더 클 줄을 알았으랴? 마차 속에 있는 사람은 큰소리로 말했다. "문을 여시오! 내가 나가서 그와 얘기 좀 해봐야 되겠소." 두 명의 마부 옆에 걸터 앉아 있던 금의 대한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푸른옷으로 자루를 만들고 마포로 아주 세밀하게 짠 빗자루를 들고 먼저 뛰어내려서 마차 문 앞을 깨끗이 쓸었다. 이어서 두 명의 사람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예쁜 계집아이들이 모포를 받쳐들고 마차 안에서 나와 몸을 굽혀 바닥에 그 모포를 펴서 깔았다. 김불환은 팔짱을 낀 채 재미있는 구경을 한다는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서약우의 눈은 더욱 커졌으며, 유옥여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은 역력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자의 기세가 대단하구나. 감히 인의장 주인에게 이처럼 무례하다니......! 그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그 여자가 오만하고 않고는 차후의 문제이고, 이 여자가 예쁜가 안 예쁜가 하는 것이 그녀가 가장 관심을 쏟았던 일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마차의 문을 바라보았다. 마차 속에서 갑자기 일진의 큰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전신이 마치 불처럼 붉은 삼척동자가 튀어나왔다. 그의 차림새를 보건대 마치 여자애 같았으나 그의 웃음소리를 들어보면 꼭 여자애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러한 애였다. 그의 몸은 아주 뚱뚱했고, 두 손은 희고 부드러웠으며, 머리에는 열 몇 가닥의 댕기를 틀었는데, 그 댕기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쳐 있었고, 몸에는 아주 붉은 옷을 입었으며 신발도 아주 붉은 색이었다.그러나 머리에는 도리어 주둥이를 크게 벌린 불처럼 붉은 가면을 쓰고 있어서 두 개의 둥근 눈알만이 나타나 있었다. 한눈에 보건대 바로 일종의 '불아이' 같은 그러한 모습이었다. 그 불아이가 '히히'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집 일곱째 아가씨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어요. 기다려 보세요. 우리 아가씨가 당신보다 몇 배나 더 예뻐요." 유옥여는 이 애가 어리지만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마음이 이처럼 깊어서 단번에 그의 마음을 궤뚫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대꾸했다. "야, 이 녀석아! 누가 얼굴이 예쁜지 안 예쁜지 상관한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의 눈앞을 어른거리면서 이미 한 명의 백색 옷을 입은 소녀가 깔아놓은 붉은 모포 위에 조용히 내려섰다. 눈처럼 흰 옷을 입은 그녀는 아름다운 몸매가 바닥에 깔아놓은 모포와 색상의 조화를 이루면서 말할 수 없이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풍겨내고 있었다.하물며 그녀의 얼굴의 아름다움이랴......!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약 직접 보지 않았다면 누구도 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유옥여는 종내 안하무인격인 여자였으나 그녀와 비교한 자기 형색의 초라함과 자신이 못생겼다는 생각에 가슴이 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은근히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 냉소하며 말했다. "그래! 맞아. 과연 예쁘구나! 그렇지만 천사처럼 예뻐도 어떻게 인의장주에 대하여 이렇게 무례를 범할 수 있단 말이냐? 아가씨! 너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랬는지 좀 들어보자." 백의의 여자가 말했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내 말을 들으려 하는지 먼저 말해 보시지요. 제가 들어 보게요." 그녀의 표정은 아주 냉랭했으며 말씨도 냉막하여, 한 마디로 그녀는 봉숭아처럼 아름다웠으나, 그 냉막함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것이었다. 이장청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씨 아가씨가 한 말은 바로 노부가 하려던 말이오." 백의의 여자가 말했다. "노선배께서는 진짜로 화가 나신 거예요?" 이장청의 얼굴이 냉랭하게 변하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의의 여자가 요염하게 웃을 줄 어찌 알았으랴? 그녀가 웃자 그 냉랭하던 얼굴은 즉각 말할 수 없는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변했다. 비록 철석심장을 가진 남자라 할지라도 그녀를 거칠게 대하고 화를 낼 수 없게 만드는 그러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아름답게 웃으면서 봄비에 솟아나는 죽순처럼 부드러운 손을 뻗어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아이 창피해! 그렇게 나이가 많이 먹었어도 어린애한테 화를 내다니......! 진짜 창피해 죽겠네요!" 사람들은 그녀의 이러한 말을 듣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만면에 교태스럽고 아름다운 웃음을 지을 때는 이십여 세의 이미 성숙한 여성으로 보였으나 장난스럽게 말을 할 때는 불과 열서너 살 정도의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사람들은 그가 순식간에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아 멍청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이장청마저도 멍청하니 서서 우물쭈물 "너는......? 너는......?" 하고 말할 뿐이었다. 평상시에는 말이 아주 유창하던 이장청도 이런 상태에 이르자 한 마디도 뱉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백의의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이숙(李二叔). 저를 모르시겠어요?" 이장청이 말했다. "저...... 이것...... 확실히......?" 백의의 여자가 말했다. "구 년 전, 이 이숙. 다시 자세히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장청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생각나지 않는데......?" 백의의 여자가 말했다. "제가 보건대 이숙께서는 나이가 들어 건망증이 심하신 것 같아요. 구 년 전 비가 오던 날 이숙께서는 비에 젖어서 우리집에 오셨지 않아요." 이장청이 생각나는 듯 놀라며 말했다. "주. 그러면 네가 바로 주씨(朱氏) 집안의 그 귀한 딸이란 말이냐?" 백의의 여자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맞았어요. 제가 바로 이숙께서 오셨을 때 대청 위에서 울면서 과자를 먹고 있었던 그 여자 아이에요." 그녀는 아름답게 웃으면서 섬섬옥수를 내밀어 이장청의 수염을 만졌다.그리고 계속 웃으면서 말했다. "이숙께서 여전히 화가 나신다면 이 조카딸에게 화를 좀 풀어버리세요. 때리고 싶으시면 때리시고 야단치고 싶으시면 야단치세요. 어떻든 제가 조카니까 반격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이장청은 다년간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곤란과 고초를 겪었던 사람인가? 얼마나 많은 신비스러움과 무공이 깊은 고수들을 맞닥뜨려보았던가? 이 순간 이 여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책도 어떠한 방법도 없었다.방금 전까지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던 노기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 시간이 빨리도 흘렀구나! 네가 벌써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로 변할 줄이야? 영존께서는 여전하시냐?" 백의의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버지께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져요. 아버지는 주기 싫지만 주지 않을 수도 없고. 속이 상해서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렸어요." 이장청이 그녀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녀의 몇 마디 말이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구 년 전에 노부가 인의장의 일 때문에 영존께 도움을 청했는데 영존께서는 끝내 황금 만 냥을 내놓았지만 상당히 가슴이 아픈 듯한 모습이었지!" 백의녀가 아름답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저씨께서는 아직 그 후의 결과는 모르세요. 아저씨께서 떠나신 후에 아버지는 가슴이 아파서 사흘낮 사흘밤을 밥도 드시지 못하셨어요. 술은 아까워서 마시지 못하셨구요. 어쨌든 '절약'이란 방법을 통해서 잃어버린 황금 만 냥을 채워넣었는데 저희들이 고기를 먹고 싶으면 어쩔 수 없이 주방 속에 숨어서 먹어야만 할 정도였어요." 이장청이 속시원히 대소를 터뜨리며 그녀의 손을 잡고, 큰걸음으로 대청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해 부지불식간에 따라 들어갔다. 심지어 천법 대사와 같은 우스갯소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때에 이르러서는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김불환은 가장 마지막에 따라 들어가면서 슬쩍 서약우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보건대 저 계집애는 활재신(活財神) 주씨 노인의 딸인 것 같소!" 서약우가 말했다. "틀림없는 것 같소! 틀림없소!" 김불환이 말했다. "이제 당신과 내가 합작할 기회가 이미 온 것 같소." 서약우가 말했다. "뭘 합작한다는 거죠?" 김불환이 기이한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서 형의 재주와 용모에다가 내가 약간의 계략을 부린다면 어찌 이 계집애가 서 형의 발 아래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겠소? 그때에 이르러 서 형은 재(財)와 색(色)을 모두 거두어 무림인들로 하여금 아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할 수 있으며 나는 서 형을 도운 그 공로로 약간의 이득을 볼 수 있겠죠." 서약우가 순간 얼굴에 기쁜 기색을 드러냈으나 곧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만약......!" 김불환의 눈빛이 번쩍 하면서 서약우가 약간 머뭇거리는 기색을 띠자 곧 말을 가로챘다. "만약이 어떻단 말이오? 서 형은 자신의 재주와 용모가 저 계집애를 차지할 만하지 못해서 저 계집애를 어떻게 해보지 못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서약우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누가 못 한다고 말했소?" 김불환이 얼굴을 펴고 웃으며 말했다. "쇠는 뜨거울 때 두드리라고 했소! 움직이려면 빨리 움직입시다." 갑자기 그들의 뒤에서 그들을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짐승들! 두 마리 짐승들이구만!" 서약우와 김불환이 깜짝 놀라서 동시에 몸을 돌렸다.거기에는 그 불아이가 손을 허리에 올려 놓 채 눈을 똑바로 크게 뜨고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김불환이 노해서 소리쳤다. "짐승? 너 지금 뭐라고 그랬지?" 불아이가 말했다. "당신들에게 짐승이라고 그랬소!" 갑자기 그 아이가 뛰어올라와서 김불환의 뺨을 후려쳤다.그의 빠름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다만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김불환의 왼쪽 얼굴이 이미 그의 손에 격중되었다.강호에서 혁혁한 명성을 가진 그가 이처럼 조그만 아이의 일 장에 뺨을 얻어 맞다니. 이것은 진실로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김불환은 놀라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 개 같은 자식이!" 그는 독수리 발톱과 같은 손을 펼쳐 그 아이를 잡으러 들어갔다. 그러나 눈앞에 붉은 빛이 번쩍 하더니 불아이가 대청으로 뛰어들어가 버릴 줄이야! 서약우가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소. 우리들의 계획이 저 귀신 같은 녀석에게 들켜버렸소." 그는 모의에서 빠져나가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김불환이 한 손으로 그를 잡으면서 말했다. "뭐가 겁나오? 계획이 이미 세워졌는데 좋든 싫든 끝까지 해봅시다." 서약우는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불아이는 이미 그 백의 여자 옆에 서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두 마리 짐승이 들어 오네요!" 이장청이 '흠!흠!' 하고 콧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어린애가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러나 불아이가 이 말을 받아서 말했다. "저 두 사람이 우리 아가씨를 속여서 사람과 재물을 모두 얻자고 의논하는 것을 제가 들었어요. 노선배께서 한 번 말씀해보세요. 이 두 사람이 짐승이 아니고 뭐겠어요?" 이장청은 계속 잔기침을 해댔으나 입으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두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서약우의 얼굴이 붉어졌으나 김불환은 도리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백의의 여자가 말했다. "이 두 분은 도대체 누구시죠?" 그녀는 방금까지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서 그녀의 표정은 다시 냉랭하게 변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유옥여가 눈알을 굴리면서 먼저 말했다. "이 두 분 중에 한 분은 견의용위 김불환이라고 하는데 그분은 또다른 두 개의 별명을 가지고 있어요. 견전안개(見錢眼開)라는 것과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거예요. 단 두 개의 별명이 그 앞의 별명보다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지요." 일곱째 아가씨가 말했다. "그런 것 같군요. 앞의 것보다 그 뒤의 것들이 훨씬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요." 김불환은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주먹을 마주잡고 말했다. "아가씨! 지나친 칭찬이시오!" 유옥여가 '픽'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의 얼굴이 두껍다는 것은 진짜 천하무쌍이오. 아마도 도검(刀劍)도 그 두꺼운 얼굴가죽을 찢어내지는 못하겠죠?" 일곱째 아가씨가 말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누구죠?" 유옥여가 말했다. "나머지 한 분은 강호에 더욱 이름을 날리고 있는 분으로 사람들은 옥면녹음 신검수 서약우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보기에는 상당히 어리석은 듯한데 사실상에는 조금도 어리석지 아니하다는 거예요. 반대로 다른 사람보다 훨씬 총명해요." 일곱째 아가씨는 그를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예쁘게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약우를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 "겨우 이 두 사람의 힘으로 백로의 고기를 먹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요? 진짜 우습군요! 진짜 우스워요! 이런 종류의 사람들도 무림 칠대고수로 칭하다니 진짜......! 어떻게 이런 자들을 무림 칠대고수 중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예요!" 그녀의 웃는 모습은 꽃가지가 하늘거리듯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으나 그 웃음소리 속에 숨어 있는 경멸의 뜻은 사람들을 상당히 난처하게 만들었다. 서약우의 창백한 얼굴이 갑자기 붉게 변했다. 웅사 교오가 아주 한탄스러운 듯한 소리로 말했다. "정말 창피하군! 망할 종자로구만!" 단홍자는 입을 열어서 '탁'하고 짙은 가래침을 내뱉었으며, 천법 대사의 얼굴도 침중하게 변해갔고, 유옥여는 가볍게 탄식했다. 유옥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칠대고수 중에 이러한 사람들이 있는 줄 진작 알았으면 저는 정말 칠대고수 중에 저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약우는 이미 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김불환은 비록 약자를 괴롭히고 강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뻗쳐나옴을 금할 수 없었다.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망할 계집애가 돈이야 많겠지만 무공이야 나 만큼 못 하겠지. 내가 너에게 꼭 본때를 보여줘야 겠다.) 그러나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록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약간의 망설임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다가 서약우를 쫓아가서 뒤에서 그를 잡아세웠다. 서약우는 발을 멈추면서 말했다. "당신......! 당신이 나를 욕먹게 만들었으면서 다시 나를 잡고 뭐를 하자는 거요?" 김불환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그냥 그만두겠다는 거요?" 서약우가 한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만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김불환이 웃는 듯 마는 듯 한참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당신이라면 이러한 절세가인을 놓고서는 머리가 터지더라도 끝까지 한 번 해보겠소. 만약 중간에서 그만둔다면 어찌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서약우가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비웃음을 사요? 사람들이 비웃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렇지만 저 여자애가 나한테 조금도 마음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김불환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잘랐다. "이 멍청한 사람아! 누가 그녀가 당신한테 마음이 없다고 애기했소?" 서약우가 당황한 듯 우물쭈물 말했다. "그렇지만 약간이라도 만약 그녀가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그렇게 나를 경멸하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이, 그만둡시다! 그만둬요, 그만둬!" 김불환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우습군요! 우스워! 당신은 여인의 마음을 정말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오?" 서약우는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김불환이 이어서 애기했다. "그녀가 당신한테 마음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표현한단 말이오! 그녀가 당신에게 매달려야만 당신은 알아차릴 수 있단 말이오?" 서약우가 눈을 깜빡거리더니 말했다. "그것도 일리는 있는 것 같소만......?" 김불환이 말했다. "소녀들의 마음이라는 것은 상당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으로서 여자가 당신한테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당신을 괴롭히는 법이오. 즉, 당신이 진심으로 자기를 좋아하는가 아닌가를 알고 싶어서 당신을 괴롭히게 되는 거죠. 만약 당신이 중간에서 물러선다면 당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니겠소!" 서약우가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그렇소!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동생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겁니까?" 김불환이 말했다. "방금 우리는 부드러운 방법으로 성공을 못했으니까 이번에는 강한 방법으로 밀어붙여 봅시다." 서약우가 말했다. "강한 방법? 강한 방법이란 어떻게 하는 거죠?" 김불환이 말했다. "당신은 모를 거요. 소녀들은 보통 영웅을 숭배하는데 당신과 같이 잘생긴 인물이 만약 영웅의 기상까지 있다면 어떻게 여자들이 당신을 모른 체 할 수가 있겠소?" 서약우가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렇군요! 만약 김 형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이 동생은 일을 그르칠 뻔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강한 방법으로 밀고 나갈까요? 김 형께서 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김불환이 말했다. "다만 당신이 중도에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즉 나와 같은 입장을 취해주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오. 나머지는 나한테 맡기시오." 말을 마치고 다시 몸을 돌려서 대청으로 들어왔다. 서약우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옷매무새를 매만진 다음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김불환을 쫓아 들어왔다. 대청에서는 이장청이 그 일곱째 아가씨와 담소를 하고 있었다. 이 일곱째 아가씨가 이장청에 대해서는 비록 천진스럽게 웃고 말하고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대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천법 대사 같은 강호에 이름을 혁혁하게 날리고 있는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여러 호걸들은 비록 그녀에 대해서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녀가 이처럼 거만한 모습을 보이자 상당히 언짢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천법 대사가 몸을 일으켜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도 가슴 가득한 답답한 기분을 발작하지 못할 바에는 아예 돌아가서 이러한 기분에서 빠져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장청이 백의녀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네가 이번에 이곳에 온 것은 아무 뜻이 없는 것이냐?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서냐?" 일곱째 아가씨가 아름답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본래 일부러 아저씨를 뵈러 왔다고 말하려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아저씨를 속일 수도 없고......! 아저씨는 제발 화는 내지 마세요." 이장청이 수염을 쓰다듬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아무 뜻없이 지나가다 여기에 들린 것은 아니겠구나!" "바로 그래요. 저는 사람을 찾아왔어요." 이장청이 놀라면서 말했다. "사람을 찾아와? 누군데? 여기 있는 사람이니?" "바로 이 대청에 있어요!"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 돌아가려던 생각을 버렸다. 이 대청에는 겨우 칠팔 명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 천하제일의 거부 활재신의 천금 아가씨가 천 리를 마다 않고 누구를 찾아왔는가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이다. 천법 대사가 제일 먼저 떠나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비록 수양이 깊었으나 그의 호승심은 조금도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았다. 이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본좌(本座)의 이름을 흠모하여서 일부러 나를 찾아와서 가르침을 달라는 것은 아닐까? 눈을 돌려서 바라보니 사람들의 표정이 웃는 듯 마는 듯 아주 기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장청의 눈빛이 번쩍이면서 웃으며 말했다. "현금 무림계의 천하고수들은 모두 이 대청에 있다. 그런데 모르겠구나. 네가 찾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일곱째 아가씨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섬섬옥수를 들어서 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바로 저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봄비에 솟아나는 죽순처럼 부드러운 섬섬옥수가 가리키는 그곳에는 지금까지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않고 있던 그 초라한 소년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일곱번째 아가씨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으나 이때 그녀의 손가락은 정확히 그를 지적하고 있었다. 즉 그녀는 지금까지 표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이미 여러 번 그를 몰래 훔쳐보았던 것이다.사람들은 갑자기 실망스런 기색을 나타냈다. 그녀가 찾는 것은 내가 아니구나! 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거렁뱅이 같은 어린 녀석은 어떻게 이 아름다운 미인을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들었을까?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놀랍고 이상하다는 기색을 드러내보였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불원천리하고 그를 찾아왔단 말인가? 그 초라한 소년이 마른 기침을 한 번 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포권을 하고 말했다. "후배는 그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붉은 그림자가 번쩍 하더니 불아이가 그를 막아섰다. 불아이는 큰소리로 외쳤다. "좋아요! 다시 가시려고요? 우리 일곱째 아가씨가 당신을 찾으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시기나 하세요?" 일곱째 아가씨는 이를 악물고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좋아요, 좋아요! 당신, 가세요! 당신이 다시 또 가신다면 나는 바로......! 나는 바로......!" 말을 하면서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변해가고 있었다. 말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그 초라한 소년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 하필 이렇게까지 할 필요야......?" 그 불아이는 두 손을 다시 허리에 척 걸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양심도 없는 인간! 그렇게까지 얘기를 하다니! 우리 일곱째 아가씨가 당신을 어떻게 대해줬는지 잊어버렸습니까?" 그 초라한 소년은 또 기침을 하고 탄식을 했다. 일곱째 아가씨는 여전히 발을 구르면서 눈물을 훔쳐냈다. 사람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때 사람들은 눈이 일곱째 아가씨가 이 초라한 소년에 대해서 매우 깊은 정을 갖고 있으나, 이 초라한 소년은 도리어 그 미인의 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망가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옥여는 그 초라한 소년을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눈썹을 찡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이상하군! 천하의 남자가 깡그리 죽어 없어진 것도 아닌데? 일곱번째 아가씨는 이 보잘 것 없는 소년을 어떻게 좋아하는 거지......?) 이장청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이 소년을 바라보았다.그는 도리어 이 소년이 실로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여제갈 화사고의 눈길도 이장청과 비슷한 빛을 띠고 있었다. 대청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김불환과 서약우는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다시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들 두 사람이 낯가죽 두껍게도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웅사 교오가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두 사람이 다시 돌아와서 다른 사람의 체면까지 떨어뜨리려 하는 것이오?" 김불환은 그를 상대하지도 않고 곧장 일곱번째 아가씨를 보고 얄팍한 웃음을 띠면서 포권을 하고 말했다. "공격하시오!" 서약우도 즉각 웃음을 띠고 말했다. "공격하시오!" 불아이의 내력은? 이때 일곱째 아가씨는 그렇지 않아도 가슴 가득한 원망스런 기운을 발설할 곳이 없었는데 이들의 도전에 무섭게 그들 두 사람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꺼져. 빨리 꺼져버리란 말야." 서약우는 놀라서 훌쩍 뛰었으나 김불환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히히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본인은 원래 꺼질려고 그랬소. 그렇지만 아가씨가 무슨 방법으로 우리를 꺼지게 하려는지 한 번 보고 싶소." 그는 한편으로 말을 하면서 등 뒤의 서약우를 향해 계속하여 손짓을 했다. 서약우는 즉시 마른기침을 하면서 가슴을 치켜들고 큰소리로 말했다. "김 형이 무림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며 누가 감히 그를 경멸하려고 하겠소. 당신이 감히 김 형에 대해서 이처럼 무례하게 굴다니.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당신 앞에선 조무라기로 보인단 말이오?" 이 사람은 비록 남의 말을 잘 듣고 마음이 얄팍하여 또 총명한 척 하기를 좋아하나 그의 말주변은 확실히 뛰어난 것이었다.이때 가슴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어느 정도 영웅의 기개가 배어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그 둘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냉랭한 표정으로 그들 두 사람이 작당을 하여 한 사람이 치고 다른 한 사람이 받는 그러한 말을 듣고 있었다. 그들이 말을 끝내자 갑자기 그녀는 예쁜 모습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요. 진짜 대장부답군요." 서약우는 크게 기뻐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김 형의 묘기는 과연 뛰어나군.) 동시에 그는 말했다. "당신이 과연 그러한 점을 안다면 이후에는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오." 그는 가슴을 더욱 높이 치켜올렸으나 그의 말씨는 부지불식간에 부드러워져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후 저는 다시는 두 분을 멸시하지 않겠어요." 서약우가 기쁜 얼굴을 더이상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펴면서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일곱째 아가씨가 예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두 분은 일개 연약한 여자인 제가 감히 어떻게 두 분의 적수가 될수 있나 하고 의논하고 나서 부드러운 방법으로는 안 되니까 강한 방법으로 나와서 저에게 본때를 보여주리라고 의논했으니, 이처럼 부드러운 방법과 강한 방법을 동시에 사용해서 기회를 봐서 이를 처리하는 대영웅 대호걸의 모습은 강호상에서도 참 드물게 보는 모습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두 분을 멸시하겠어요." 그녀는 말을 할수록 웃는 모습이 더욱 달콤한 모습을 띠었으나 서약우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난처해져서 어찌할 줄 모르고 멍청히 서 있었다. 방금 일어났던 기쁜 마음은 이미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김불환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일개 아녀자의 말이 이렇게 날카롭고 이렇게 거칠고 오만한 행동을 취하다니 네 부친이 너를 어떻게 가르쳤는지 모르겠구나." 일곱째 아가씨가 말했다. "그러면 당신께서 저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얘기인가요?" "그렇다. 서 형이 나이가 젊고 잘생겼으며 공손하고 예의가 있어 그렇게 쉽게 멸시할 수 있단 말이냐. 흥, 서 형이 비록 사람들에 대해서 공손하고 예의가 있지만, 그러나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너 같이 건방진 아녀자이다. 서 형! 맞습니까?" 서약우는 '흠흠' 하고 잔기침을 할 뿐이었다.일곱째 아가씨가 섬섬옥수를 올려서 귀밑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자, 손을 쓰시죠." 불아이가 그 초라한 소년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소리쳤다. "방금 제게 따귀까지 맞은 저녀석에게 아가씨까지 손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김불환이 말했다. "너희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덤벼도 관계없다. 어떻든......." 그의 얼굴은 시종 음흉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지금까지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던 단홍자가 갑자기 냉소를 하면서 말을 잘랐다. "김불환! 당신은 빈도가 직접 손을 쓰기를 바라시오?" 김불환이 마른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바라는 바이오." 단홍자가 말했다. "활재신의 재산이 비록 억만에 달하며 천하제일의 갑부라 하더라도 수십 년 동안 어떠한 흑도 고수들도 감히 그 집의 은자 한 냥도 손을 대지 못하였소. 왜 그런지 아시오?"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흑도 고수들이 그 집 은자가 녹슬어서 피했던 것이오?" 그는 점점 득의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소를 터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단홍자의 푸른 안색을 보고서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웃음소리를 억지로 삼켰다. 단홍자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듣기 싫소. 흠흠...... 당신이 듣기 싫어도 빈도는 꼭 말을 해야겠소. 왜 흑도 고수들이 그 집의 은자에 손을 못댔냐면 옛날 무림 중에 많은 고수들이 복수를 피해서 활재신의 집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오. 활재신은 비록 돈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지만 그 집으로 숨어들은 고수들에 대해서 백이면 백 모두 순종하려는 태도를 보였소. 이 수십 년 동안 활재신의 집은 후일 용담호혈이 되었던 거요. 우리 다른 사람은 얘기하지 맙시다. 바로 오늘 주 아가씨를 쫓아온 인물만 보더라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다가 도리어 본때를 당하지나 마시오." 김불환이 불아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도장께서 말씀하시는 게 바로 그녀요?" 단홍자가 말했다. "그녀를 제외하고 이 대청 안에 누가 또 작은 친구가 있겠소." 김불환이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도장께서 가리키는 사람이 바로 그녀라구요. 도장께서는 너무 남을 치켜세우고 자신을 낮추는 것은 아닌가요? 겨우 이 조그마한 괴물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랍니까? 비록 그가 태어나자마자 무공을 배웠다고 해도 그의 나이에 이르러서 어떻게 우리 천하 칠대 무림 고수들을 이길 수가 있단 말이오?" 단홍자가 냉랭하게 말했다. "믿지 못하겠거든 직접 시험해 보시오." 김불환이 말했다. "당연히 내가 시험해 볼 거요!" 그는 싸울 준비를 했다. 웅사 교오가 갑자기 소매를 걷어 붙였다.그러자마자 화사고가 그를 가볍게 잡아 당기면서 조용히 말했다. "다섯째 오라버니, 뭐 하는 거예요?" 교오가 말했다. "이 놈이 어린애와 싸움을 하려고 하잖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못 들은 척 하더라도 나 교오는 결코 이런 것을 그냥 보고 넘어 갈수 없소." 화사고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이 듣도 보도 못한 척 한 것은 저 일곱째 아가씨가 너무 오만하여서 싸움하는 것을 통해 그녀가 도대체 얼마나 재간이 있는지를 보려고 하는 거예요. 노선배도 수수방관하고 있는데 왜 그러는지 아세요. 이 노선배께서도 그렇게 재미있는 구경을 하려고 그러는 걸까요?" 교오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건 그래요. 본인도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화사고가 조용히 말했다. "이 노선배께서는 붉은 옷을 입은 작은 친구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수수방관하면서 싸움을 말리지 않는 거예요." 교오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아직 어린데 뭐가 이상한 것이 있단 말이오?" 화사고가 이어서 말했다. "나도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작은 친구는 확실히 여러 방면에서 이상한 것이 있어요. 아마도 가만히 기다려보면 곧 알게 될 거예요." 교오는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중얼중얼 말했다. "그렇다면 좀더 기다려보죠." 김불환은 한동안 옷소매만 만지작거리면서 공격을 하지 않다가 도리어 서약우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가서 속닥속닥 무엇인가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장청과 단홍 도장, 천법 대사 등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불아이를 쳐다보고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상당히 기이하다는 듯한 안색을 띠고 있었다. 교오가 그 불아이를 쳐다보자 자기 자신도 모르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애는 왜 저렇게 이상한 가면을 쓰고 있지? 왜 진면목으로 사람을 대하지 아니하는 걸까? 보건대 많아야 겨우 열한두 살 먹은 어린애인 듯한데 말할 때 어째서 늙은이 같은 어투가 나타나는 거지?) 불아이는 다만 그 초라한 소년의 옷깃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으나 눈썹을 찌푸리고 난처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차가운 눈으로 김불환을 노려보더니만 곧 그 초라한 소년에게서 눈을 돌려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김불환은 서약우를 한편으로 끌고 가서 한스러운 듯한 소리로 말했다. "기회가 왔소." 서약우가 말했다. "무슨 기회 말씀이오?" 김불환이 말했다. "큰소리 치고 나올 기회죠.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빨리 가서 저 조그마한 괴물을 몇 초 내로 쓰러뜨리시오. 그래서 저 안하무인격인 계집애에게 당신이 조금은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시오." 서약우가 말했다. "그렇지만 저 녀석은 아직 애에 불과한데 어떻게 내가 손을 쓴단 말입니까?" 김불환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애면 또 어떻소. 당신 단홍자가 저 애에 대해서 그렇게 대단히 치켜올리는 것을 보지 못했소? 당신이 만약 저 녀석을 쓰러뜨린다면 당신의 위세를 나타내보이는 것이 아니겠소." 서약우가 한동안 신음소리를 발하더니 돌연히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띠면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김 형! 이번에는 이 동생이 김 형에게 속지 않을 겁니다." 김불환이 말했다. "무슨 말씀이오?" 서약우가 말했다. "만약 그애와 싸워서 이긴다면 당연한 것이고, 내가 진다면 상당히 체면을 손상할 일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김 형께서 직접 손을 쓰지 않고 나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닙니까?" 김불환이 냉랭하게 말했다. "진짜 손을 쓰지 않을 거요?" 서약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위세를 나타낼 기회를 제가 김 형께 양보하죠." 김불환이 그를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말했다. "후회하지 마시오." 서약우가 이 말을 받았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소." 김불환이 한숨을 쉬면서 냉소하며 말했다. "옷을 준 사람에게 떡까지 내놓으라 그런다더니 사람 마음도 모르고......." 그는 냉소하면서 몸을 돌려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서약우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점점 없어졌다. 그리고 눈을 돌려 그 일곱째 아가씨를 쳐다보며 갑자기 김불환을 불렀다. "김 형!" 김불환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무슨 일이오?" 서약우가 말했다. "이 동생이...... 이 동생이 손을 쓰겠습니다." 김불환이 말했다. "안 돼요. 당신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소. " 서약우는 만면에 난처한 듯한 웃음을 띠면서 우물쭈물 말했다. "저, 김 형께서 오늘 저를 위해 양보를 해주신다면 후일 이 동생은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 김불환은 한참 동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비로소 몸을 돌려서 말했다. "그럼 당신이 해보시오." 서약우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김 형, 매우 고맙소." 그리고는 몸을 날려서 나아갔다.김불환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냉소하면서 말했다.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여도 사실상 멍청한 녀석이군. 줄 때는 거절하고 안 줄 때는 달려드니...... 천생에 천한 놈이야!" 서약우는 몸을 날려서 대청 중앙으로 가서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 인의장의 세 분 선배를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본인은 금검(琴劍)을 가지고 오지 않았소. 그렇지만 누구라도 손 쓸 의향이 있다면 이 서모(徐某)는 받아들이겠소." 일곱째 아가씨는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초라한 소년에게서 눈을 거두고 고개를 흔들고 웃으면서 불아이에게 말했다. "이 녀석이 보건대 또 김씨 성 가진 놈에게 설복당했구나." 불아이는 그 초라한 소년을 일곱째 아가씨 곁으로 끌고가서 말했다. "아가씨. 이 사람을 지키세요. 그가 가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돼요. 나는 가서 저 놈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어요." 일곱째 아가씨는 냉소하면서 말했다. "누가 그를 지킨댔어? 가도록 내버려둬요! 내버려둬!"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손가락 두 개를 내밀어 그 초라한 소년의 옷깃을 꼭 잡았다. 초라한 소년은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키다니! 이 무슨 고생이오." 일곱째 아가씨가 말했다. "누가 그렇게 당신 같이 성격이 좋대요? 왼쪽 얼굴을 때리면 오른쪽 얼굴을 내미는 그런 성격, 나는 그런 성격은 싫어요. 다른 사람이 나를 모욕한다면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그 초라한 소년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맞소, 맞아. 당신이 참 무서워. 헤헤! 당신이 말썽을 일으킨 후에 다른 사람에게 수습해 달라고 부탁이나 하지 마시오." 일곱째 아가씨가 화를 내면서 말했다. "당신은 상관할 필요없어요. 안심하세요. 내가 죽어도 상관할 필요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지는 않았으나 그를 휘어잡은 손가락은 여전히 꼭 잡고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불아이는 거만한 자세로 서약우 면전을 몇 번 훑어보고 히히하고 웃더니만 말했다. "덤벼요. 뭘 기다리죠?" 서약우가 침중하게 말했다. "서모는 원래 너에게 손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지만......." 불아이가 말했다. "싸우기도 했으면 싸우는 거죠.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요." 갑자기 그는 몸을 솟구치면서 그 조그마한 손을 들어서 서약우를 따귀를 때려나갔다. 이 일 초는 기이한 점은 없었으나 그 동작의 빠름은 신속하기가 번개같아 도저히 안력으로는 분별할 수 없었다. 서약우는 다행히 김불환이 이미 이 아이에게 뺨을 얻어맞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아이가 곧 때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아이가 공격해 들어올 때 비로소 몸을 피할 수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 아이의 일장에 뺨을 얻어맞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불아이가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과연 약간 재주가 있긴 있군요." 입으로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으나 손은 조금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붉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사이에 한 쌍의 작은 손이 미친 바람처럼 쳐나갔다. 그러나 그 아이의 초식에는 전혀 일관성이 없었으며 마치 애들이 싸움을 하는 그러한 형상이었다. 그렇지만 그 아이의 초식과 초식 사이에는 조금도 허점을 보여주지 않았으며, 그 손씀의 빠름은 더욱 상대방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서약우는 마치 기선을 재압당한 듯이 보였으며, 반격은 해볼 수도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아이의 초식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그의 몸놀림은 여전히 매끄럽고 우아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속이 다 시원하게 만들었다. 여제갈 화사고가 조용히 교오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보기에 저 아이가 이상하지 않아요?" 교오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저 아이와 같은 초식은 내가 확실히 본 적도 없는 초식이오." "이게 바로 그의 무공출신의 내력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방법이죠." "그렇다면 저 아이도 아주 대단한 내력이 있다는 말인가요?" "내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서약우 같은 인물을 열세에 빠지게 만들 수 있겠어요?" 교오가 고개를 쭈뼛거리며 이마를 더욱 찡그렸다. 한참이 지나서 화사고가 또 탄식하면서 말했다. "저 아이가 비록 본문의 무공을 실현하지 않더라도 서약우가 지금처럼 싸운다면 반드시 지고 말 거예요." 교오는 싸움을 주시하면서 말했다. "서약우가 만약 저처럼 억지로 멋있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면 아마 그의 무공이 진일보 했을 거요." 원래 서약우는 스스로 풍류남아라고 자처하여서 그는 사람들과 싸울 때에도 멋있는 초식만 골라썼으며 보기에 좋지 않은 초식은 죽어도 하지 않았다. 불아이가 삼 장을 공격했을 때 그 아이의 좌측 아래쪽에 허점이 드러나 있었다. 화사고와 교오는 모두 이 허점을 보았으며 서약우가 만약 이때 철우경지(鐵牛耕地)라는 초식을 실현했다면 적어도 열세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서약우는 도리어 이 철우경지란 초식이 멋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사용하지 않고 전혀 소용이 없는 풍취어류(風吹御柳)라는 초식을 실현해 냈다. 김불한은 계속 머리를 흔들면서 냉소하면서 말했다. "죽어도 멋있는 것만 고집하다니!"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여전히 안심을 하고 있었다.서약우가 비록 빠른 시간 안에 이기지는 않아도 절대 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사고가 중얼거리면서 말했다. "노선배께서는 그녀의 초식을 알아냈는지나 모르겠네요?" 눈을 돌려 바라보자 냉삼이 어느새인가 만면에 병든 노인을 부축하고 이장청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의 눈은 쉴새없이 불아이의 움직임에 따라서 같이 돌아갔다. 그리고 이장청과 눈빛을 교환했다. 이장청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큰형님은 알아내셨습니까?" 병색이 짙은 노인 제지(齊智)가 신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대략 칠할 정도는 알아낸 것 같네." 웅사 교오는 들을수록 점점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도대체 뭡니까?" 화사고가 탄식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당신은 저 아이의 공격방법이 조금도 일관성이 없는 초식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공격할 때 미미하나마 그의 진짜 무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아시겠죠? 만약 수십 년의 무공기반이 없었다면 어떻게 저러한 기법을 사용할 수가 있겠어요?" 교오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저 여자아이는 많아야 열서너 살밖에 안 될 것 같은데." 화사고가 말을 잘라서 말했다. "열 몇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어떻게 수십 년의 무공에 대한 기초가 있겠어요. 다만 그녀의 나이가 적지 않고 키가 작을 뿐이라면 또 몰라도. 어떻든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으니 사람들이 그가 도대체 몇 살이나 먹었는지 알아볼 수가 없군요." 교오가 중얼거렸다. "수십 년의 무공기초, 거기다가 키가 어느 정도밖에 자라지 않았다면......."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한 사람을 생각해냈다. 그리고는 화사고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녀란 말이오?" 화사고가 말을 받았다. "보건대 십중팔구는 그런 것 같아요." 교오가 얼굴색을 변하면서 말했다. "그 사람이 여러 해 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더니만 그가 활재신의 집에 숨어 있는 줄은 진짜 생각도 못한 일이오." 천법 대사를 바라보고 목소리를 아주 낮춰서 말했다. "천법 대사께서는 그의 내력을 혹시 알아내셨는지요? 만약 그녀의 내력을 알아내셨다면 아마도......." 화사고가 말했다. "어찌 천법 대사뿐이겠어요? 유옥여나 단홍자 등도...... 만약 진짜로 그녀의 내력을 알아냈다면 아마도......."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면서 말을 멈추었다. 천법 대사의 장대한 몸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침중한 얼굴에는 일진의 자색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서약우와 그 불아이가 싸움을 하고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일곱째 아가씨가 사방을 보더니만 이때 큰소리로 외쳤다. "빨리!" 불아이는 마침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가 이 '빨리!'란 말을 듣자 갑자기 몸을 꺾고 두 팔을 돌리면서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곧장 서약우를 공격해 들어갔다. 이 일 초는 변화가 상당히 정묘했을 뿐만 아니라 위력이 강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족했다. 이장청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면서 실성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룡식(飛籠式)." 외친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서약우는 스스로 놀랜 소리를 내면서 이미 바닥에 엎드렸다. 그의 이름은 확실히 요행히 얻은 것은 아니었다. 이때 그는 비록 패색이 짙었으나 침착하게 연청 십팔번(嚥靑十八番)이라는 초식을 전개하면서 신형을 안정시켰다. 이어서 몇 번 몸을 뒤틀더니만 몇 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의 몸에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멍청하게 불아이를 바라보면서 눈에는 두려운 기색을 나타내 보였다. 일곱째 아가씨가 가자!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한 손에는 그 초라한 소년을 잡고 한 손에는 불아이를 잡고 밖을 향해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아미타불! 하는 불호가 마치 거대한 종소리처럼 사람들의 고막에 울려퍼지는 순간 천법 대사의 거대한 신체가 이미 그들이 가는 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의 몸은 마치 거대한 산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그가 걸친 가사는 바람이 안 부는데도 펄럭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불상처럼 장엄했으며 어떠한 사람도 그 불상을 지나쳐갈 수 없다는 듯한 대단한 기세였다. 일곱째 아가씨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신형을 다시 틀어서 창문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사람 그림자들이 번쩍이는 순간 냉삼, 단홍자, 유옥여, 서약우, 김불환 다섯 사람이 그들 세 사람이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이 다섯 사람의 얼굴은 상당히 무거웠으며, 은은히 분노한 기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초라한 소년이 가볍게 탄식을 발하면서 근심스런 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담력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소? 분명히 사람들이 그녀의 내력을 알아볼 줄 알면서도 그녀를 데리고 이곳에까지 감히 오다니......." 일곱째 아가씨는 침울하게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원망스러운 듯이 말했다. "모든 게 당신 때문이 아닌가요? 당신을 찾기 위해서 상당히 어려운 고생을 다 겪었어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단 말이에요." 이 두 마디 말을 하기 시작할 때 천법 대사와 냉삼 등 여섯 사람은 이미 그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곱째 아가씨와 초라한 소년, 그리고 불아이 세 사람을 그들의 중앙에 단단히 에워쌌다. 일곱째 아가씨는 갑자기 얼굴에 예쁜 미소를 보이면서 애교있게 말했다. "여러분들께서 무엇을 하시는 거죠?" 천법 대사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잘 아시면서 왜 또 물어보시오?" 일곱째 아가씨가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둘째 아저씨! 아저씨의 손님들이 날 못가게 해요. 아저씨 댁에서 사람들이 나를 모욕하는데 아저씨의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 아닌가요?" 이장청은 제지를 바라보면서 대답을 하지 못하였고, 제지의 눈빛이 번쩍 했으나 일순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상황은 상당히 엄중한 단계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세 사람을 에워싼 사람들은 숨소리를 죽이고 강호 제일지자의 말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 노인의 한 마디는 천금과 같아서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겨우 제지가 침중한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폐장(幣莊)을 건립한 기금은 대부분 영존께서 낸 돈의 힘이었소. 주 아가씨가 오든 가든 여기서 아무도 막을 사람이 없소." 일곱째 아가씨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천법 대사 등은 모두 얼굴이 변했다. 제지의 말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주 아가씨와 같이 온 사람은 반드시 이곳에 남아야 되겠소. 누구도 그를 데려갈 수는 없소." 일곱째 아가씨가 눈을 깜박이면서 고의로 그 초라한 소년을 가리키면서 웃으면서 말했다. "노선배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가요? 그렇지만 이 사람이 여기있는 누구한테도 죄를 끼치지 않았잖아요!" "그 사람이 아니오." "만약 그 사람이 아니라면 이 작은 애란 말이죠! 이 작은 애는 나를 쫓아다니는 계집종에 불과한데 노선배께서 그를 여기 남아서 누구 시중을 들게 하려는 건가요?" 제지의 얼굴색이 무겁게 변하면서 말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는데도 아가씨는 아직도 장난말을 하려는 거요?" "노선배께서 하시는 말씀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는데요!" 제지가 냉소하면서 말했다. "이해가 안 돼? 냉삼! 저 벽에 붙어 있는 공고문을 뜯어다가 그에게 보여주시오." 냉삼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몸을 돌려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초라한 소년의 손을 잡은 일곱째 아가씨의 손은 이미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에 여전히 미소를 띠고서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는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냉삼이 다시 날아 들어왔다. 그에 손에는 한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는데 바로 방금 그 초라한 소년이 찢어냈던 종이와 꼭 같은 것이었으나, 다만 그 초라한 소년이 찢어내었던 공고문보다 약간 더 낡은 것이었다. 제지는 손을 뻗쳐서 그 종이를 받아든 다음 고개를 쳐들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공고문이 여기에 붙은 지 이미 칠 년이나 되었는데 오늘 이 공고문을 찢어낼 수 있을 줄이야......." 일곱째 아가씨가 또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 "그게 뭔데요?" 제지가 말했다. "아가씨가 알든 모르든 어떻든 한 번 가져가서 살펴보시오." 말을 마치고 나서 그 종이를 일곱째 아가씨의 발 아래로 집어 던졌다. 일곱째 아가씨는 눈을 한 번 굴리고 나서 그 종이를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당신 두 사람도 같이 와서 보세요." 몸을 굽히고 그 초라한 소년과 불아이를 모두 한데 모은 다음 머리를 맞대었다. 공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다. 화예선(花蘂仙)...... 사람들은 상천입지 장중천마(上天入地 掌中天魔)라고 칭한다. 그는 옛날 무림 십삼 천마(十三天魔)중의 한 사람이다.형산 싸움 후에 십삼 천마 중에는 이 사람 혼자만 남았을 뿐이다. 이 사람은 형산 싸움 훨씬 이전에 그 종적이 사라져서 강호 중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의 나이는 대략 오십에서 육십 사이이며 키는 도리어 어린애처럼 작다. 그녀는 붉은 옷을 좋아하며 그의 무공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육십 년 전 오대마공(五大魔空) 주인의 진전을 얻은 듯하다. 그러나 평생 동안 무기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암기 또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경공은 상당히 뛰어나며 그 장력의 독랄함은 무림 중에 여섯번째에 속한다고 일컬어진다. 오태산 옥륭대사(五台山 玉籠大師), 화산 유비선(華山柳飛仙), 강남대엽 담철장(江南大燁 潭鐵掌) 등 강호 일류 고수가 모두 이 사람의 장력 아래에 죽었다. 십여 년 전 무림 중에는 이 사람이 이미 황화 나루터에서 죽었다고 전해졌으나 최근 일 년 사이에 무릇 이 사람과 원수를 졌던 사람은 모두 심야에 복수를 당했다. 이 복수를 당할 때 집안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하나도 살아난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상처는 바로 이 사람의 독문장법(獨門掌法)으로서 지금까지 이미 일백사십여 인이 이 장력에 맞아 죽었다. 이 사람을 한 번 흘겨보면 반드시 보복을 당하며 비록 원한이 극히 미미하다고 해도 그는 하늘 끝, 땅 끝이라고 해도 절대로 그냥 놓아두는 법이 없다. 인의장 주인은 본래 이 복수과정에서의 흉수가 그녀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친히 그 죽은 시체들의 상처를 검시한 결과 그녀임을 확인했다. 듣건대 이 사람은 어렸을 때 극히 비참한 상황을 당하여 어떤 사람이 그녀를 팔 년이나 조그마한 광우리에 가두어버려서 그의 키가 자라지 못해 난장이가 되었다 한다. 이로 인해 그의 성격이 크게 변하여 천하인을 원망하는 마음이 뼈에 사무치게 되었다 했다. 특히 그녀는 어린아이들을 병신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며 두 손에는 언제나 피냄새가 묻어나고 그의 폭행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두려움에 머릿발을 서게 했다. 만약 그녀를 생포하거나 죽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보수로 은 오천 냥을 지불한다. 이 공고문은 절대 식언(食言)이 아니다. 인의장 주인 백. 일곱째 아가씨의 손에는 이 공고문을 들고 있었으나 그녀는 이 공고문에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쉴새없이 슬쩍슬쩍 사방을 훑어보고 있었다. 문 밖에 서 있었던 일곱 명의 기사는 이때 모두 말에서 내려서 손에 말고삐를 쥔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천법 대사 등의 표정은 더욱 격동하는 모습을 드러내어 마치 즉각 손을 쓰지 않은 게 원망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인의장 주인을 꺼려서 억지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곱째 아가씨의 눈빛이 이리저리 굴러가더니만 갑자기 그 초라한 소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 나하고 저애가 나갈 수 있고 없고는 전적으로 당신한테 달려 있어요." 그 초라한 소년의 눈빛은 다시 그 공고문으로 향했다.그러나 천천히 말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군요." 그의 목소리는 목에서 나오고 있었으며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일곱째 아가씨가 원망스러운 듯이 말했다. "당신이 상관하고 싶지 않아도 상관해야만 돼요. 잊지 마세요. 누가 당신의 목숨을 구했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해줬는지 당신은 잊어버렸던 가요?" 그 초라한 소년은 길게 탄식을 하면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곱째 아가씨 또한 길게 장탄식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말했다. "이 분 장중천마의 수단이 정말 그렇게도 독랄한가요?" 제지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이미 알고 있다면 어째서 계속 그를 비호하는 거요?" 일곱째 아가씨가 그 불아이를 한 번 쳐다보면서 탄식하며 말했다. "보건대 저들은 이미 너를 화예선으로 확신하는 것 같구나." 불아이는 말했다. "진짜 웃기는 얘기네요!" 일곱째 아가씨는 웃는 듯 마는 듯 그 초라한 소년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웃기는 얘기든 아니든 나는 이미 그가 칠 년 동안 한 번도 내 곁에서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가 만약 밖에 나가서 사람을 죽였다면 당신은 내 머리를 부셔버려도 좋아요." 그녀의 이 말은 모든 사람을 향했던 것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도리어 그 초라한 소년의 몸에 고정 되어 있었다. 그 초라한 소년은 마른 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천법 대사가 예리한 목소리로 외쳤다. "근 칠 년 내에 흉악한 살인의 사건이 화예선의 행위인지 아닌지를 불문하고 본좌는 옥룡(玉籠) 사숙의 핏빛 복수를 오늘 더이상 연기할 수가 없소." 유옥여도 크게 외쳤다. "맞습니다. 내 고모 !"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면서 분노를 띠면서 계속 말했다. "누가 감히 나에게 이미 돌아가신 고모를 위해 복수 하는 것을 막는 사람이 있다면 맹세컨대 나를 막는 사람과 끝까지 싸울 겁니다." 그녀의 이 말은 모든 사람을 향해 한듯 했으나 그녀의 눈은 일곱째 아가씨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김불환은 슬쩍 서약우를 향해 눈짓했다. 그에 따라서 서약우도 큰소리로 말했다. "서모(徐某)가 화예선에게 비록 깊은 원한은 없으나, 그렇지만 그녀와 같이 흉악하고 독랄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합심하여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오." 불아이가 냉소하면서 말했다. "내 손에 패한 자가 감히 또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서약우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으나 김불환이 즉시 불아이의 말을 받았다. "서 형께서는 일순간 적을 가볍게 보아서 반 초를 진 것이지 그의 실력이 모자랐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오." 서약우가 말했다. "맞소. 서모는 본래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양보했던 거요. 어린아이에게 이 서모가 어찌 살수를 전개할 수가 있겠소." 일곱째 아가씨가 냉소하면서 말했다. "그가 진짜 장중천마라면 당신이 지금까지 목숨이 붙어 있겠어요? 피 ! 스스로 자기 자신의 실수를 변명하다니 진짜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로군." 서약우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김불환이 냉소하면서 일곱째 아가씨의 말을 받았다. "맞소. 화예선의 무공은 확실히 약하지 않소. 그렇지만 무림을 위해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는 데는 우리는 반드시 일 대 일로 그녀와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복수할 사람은 복수를 하고 원한이 있는 사람은 원한을 갚는 거요. 우리 모두가 함께 덤빈다면 그녀가 하늘에 오르고 땅 속으로 꺼진다 해도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되오." 이장청이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권하니 화 부인(花婦人)께서는 그대로 포박을 받는 게 좋을 듯하오. 그리고 또 주 아가씨께서는 그녀를 위해서 더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오." 일곱째 아가씨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숙부께서도 그녀를 진짜 화예선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이장청이 말했다. "그래도 강변하려고 그러시는 거요?" 일곱째 아가씨가 말을 받았다. "그녀가 만약 화예선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려는 거죠?" 김불환이 큰소리로 외쳤다. "아가씨가 그녀의 가면을 벗기시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녀가 진짜 아이인지 아닌지를 볼 수 있게 하면 될 거요. 만약 그녀가 진짜 아이라면 이 노선배께서는 그녀에게 직접 사과를 하게 될 거요." 그의 이 말은 아주 교묘한 표현이었다.만약 일곱째 아가씨가 그의 말을 들어서 그녀의 가면을 벗긴다면 자기의 위신이 서게 되는 것이며, 만약 진짜 그녀가 아이라면 그에게는 조금도 난처한 일이 없고 이장청이 사과를 하는 것이다. 손해 보는 일은 견전안개 김불환은 절대로 하지 아니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말이었다. 일곱째 아가씨가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좋아요. 제가 이 아이의 가면을 벗기죠. 당신들 한 번 보세요." 불아이가 크게 말했다. "흥, 봐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손을 들어서 그 불처럼 붉은 가면을 벗어 던졌다. 사람들의 눈길이 머무른 곳에 확연히 들어난 그 아이의 모습은 그들을 놀라게 하기에 족했다. 그 불처럼 붉은 가면 아래서 나타난 것은 아주 하얗고 작은 얼굴로서 주름살 하나없는 아주 완전한 어린아이의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서는 결코 오륙십세 되는 노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곱째 아가씨가 호호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분 똑똑히 보셨죠. 이 아이는 원래 피부가 좋지 않아서 찬바람을 맞은면 안 되기 때문에 이 가면을 썼던 거예요. 그 가면이 이렇게 많은 이름난 대영웅들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버렸으니......." 그녀는 그 초라한 소년과 불아이의 손을 잡고 느릿느릿한 자세로 밖으로 걸어나갔다. 사람들이 멍청한 상태에 빠져서 누구도 감히 그녀가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다만 일곱째 아가씨의 옷이 계속 요동치고 있음을 알 뿐이었다. 그녀의 옷이 요동치는 것은 바람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몸이 떨려서 요동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가 대청을 나가자마자 그녀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제지가 예리한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그녀를 그냥 보내선 안 돼. 멈춰라." 그 말이 나오자마자 일곱째 아가씨는 즉각 땅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초라한 소년의 팔목을 아주 따끔하게 꼬집으면서 말했다. "양심도 없는 사람! 우리 두 사람의 생명은 완전히 당신한테 달려 있어요." 천법 대사와 유옥여는 이미 몸을 날려서 그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 두 사람은 제지가 "멈춰라" 하는 소리를 질렀을 때 이미 일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이 두 사람이 몸을 날려 그들을 쫓아갈 때 그들의 손에는 진력(眞力)이 충만한 상태에 있었다.일곱째 아가씨가 이미 말안장에 올라 앉아 말의 배를 걷어찼으나 어찌 이 말들이 무림 칠대고수들의 그 신속함에 비길 수 있겠는가. 이미 그녀는 장원문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초라한 소년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몸 뒤편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천법 대사와 유옥여가 그의 좌측과 우측에서 번쩍 하며 그의 몸을 스쳐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로 머리털이 겨우 빠져나갈 듯한 찰나의 순간에 초라한 소년은 탄식을 발하더니 두 손을 갑자기 들어올렸다. 오른손은 마치 칼처럼 날카롭게 세웠으며 왼손은 그의 소매 속에 숨긴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장력을 발산해 냈다. 그의 장력은 모두 날카롭고 정확하여 천법 대사와 유옥녀가 피하지 않는다면 즉사할 수 있는 곳에 격출되었다. 마치 눈이 달려있는 사람처럼....... 천법 대사와 유옥여는 사람을 쫓아가는 것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손에는 이미 전력이 충만해 있어서 마치 활에 화살이 제어져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이때 초라한 소년에게 즉각 반격해 나가기 시작했다. 유옥여가 냉소하면서 소리쳤다. "죽음을 자처하는구나." 유옥녀는 그 소년의 두 팔을 향해 나아갔으며, 천법 대사의 안색도 침중하게 가라앉아 기압 소리를 내면서 오른손으로는 앞으로 밀어내고 왼손은 뒤에서 그것을 받쳐 두 손을 합친 상태에서 공격해 나아갔다. 그의 붉은 손바닥은 곧바로 초라한 소년의 손등을 향하고 있었다. .팍팍. 하는 두 번의 둔탁한 소리가 마치 먼산 뒤에 시커멓게 밀집되어 있는 검은 구름 속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벼락소리처럼 들렸다.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쳐다보면서 그 소년이 현금 무림계의 양대 고수의 협공 아래에서 뼈가 부서지고 시체가 산산조각나리라고 생각했다. 난장이 홍의인 화예선 그러나 벼락소리와 같은 장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 다음 유옥여가 입으로 놀라는 소리를 뱉어내면서 날씬한 몸매가 그 반탄력에 의해서 하늘로 날아 올라갈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천법 대사 역시 크게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킁! 킁! 킁!' 하고 계속 일곱 걸음을 뒤로 물러섰는데 매 걸음마다 바닥에 깔아놓은 석판들이 모두 깊숙한 발자국을 남기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가 남긴 발자국은 갈수록 더욱 깊어졌으니 그에 따라서 천법 대사가 전력을 다해서 비로소 그 몸이 바닥에 쓰러지지 않고 겨우 지탱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초라한 소년은 도리어 이 장풍이 풀어내는 반탄력을 이용해서 비스듬히 날아가면서 두 소매를 표표히 날리면서 바람소리를 일으켜 장원 문 밖으로 날아가버리고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가 말에 채찍을 가하면서 가볍게 외쳤다. "가자." 그녀가 오른팔을 휘두르자 불아이는 공중으로 뛰쳐오르면서 왼손으로 그녀의 옷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 소년의 초라한 옷깃을 부여잡았다. 말이 말발굽소리를 내면서 뛰어가기 시작하자 불아이와 그 소년도 같이 날아나갔는데 두 사람의 몸은 공중에서 마치 광풍에 휘날리는 두 장의 깃발처럼 펄럭이면서 같이 끌려나갔다. 그 자리에 있던 고수들의 가슴에는 가슴 가득히 분노가 차올랐으나 그들의 이처럼 뛰어난 신법을 보자 멍청하게 눈을 뜬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유옥여는 공중에서 다시 몸을 비틀면서 땅에 내려섰는데 그녀의 가슴은 여전히 급격히 뛰고 있었다. 천법 대사는 억지로 신형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나 얼굴은 홀연히 푸르렀다 희었다 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이를 악물었으나 입가에서는 선혈이 삐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가 만약 쓰러지는 것을 억지로 참지 않았다면 그렇게 큰 부상은 입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이 시점에 이르러서 그는 기혈이 뒤집히고 그에 따라서 선혈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가 입은 내상은 가볍지 않은 것 같았다. 이때 팔 명의 대한은 살아있는 일곱 마리의 말을 앞세워 세 마리, 뒤에 네 마리 두줄로 놓아서 천천히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말을 급히 몰고 뛰어나가지 않았는데 마치 그들은 이 두줄의 말의 행렬로 인해서 그들의 주인을 쫓아가려는 사람을 막으려는 듯한 기세였다. 그들은 이미 이 장원 중에 있는 이들 무림 군웅들이 그들에게 어떠한 복수를 가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제지가 이장청의 어깨를 부여잡고 앞으로 나서서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쫓아. 쫓아. 더 늦으면 쫓아갈 수 없어!" 그의 눈은 단홍자를 바라보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단홍자는 마른 기침을 하면서 못본 척 했다. 눈이 다시 서약우를 향하였다. 그러나 서약우는 도리어 김불환을 쳐다보았다. 김불환은 마른 웃음을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그녀와 깊은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쫓아가서 뭘해." 이들은 이미 그 초라한 소년의 무공을 보고 나서 마음 속에 두려운 기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천법 대사와 유옥여 같은 칠대고수들 중의 손꼽히는 자들이 연합하여 협공했으나 당해내지 못했던 이 초라한 소년을 그들 중에 누가 감히 쫓아갈 생각을 했겠는가. 제지가 장탄식을 하면서 계속 발을 구르면서 중얼거렸다. "칠대고수들이 동심협력한다면 천하를 종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위 칠대고수란 사람들이 모두 모래알과 같은 사람들이니. 아깝다, 진짜 아깝다!" 웅사 교오는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의 가면을 벗겨보니 분명히 어린아이에 불과했는데 노선배께서는 어째서 어린아이를 쫓으시려 합니까?" 제지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 아이의 얼굴 속에 다시 인피면구를 쓰고 있지 않다고 누가 감히 단정할 수 있단 말이오? 십삼마의 역용술은 천하무쌍이라고 소문이 나 있소." 교오가 멍한 상태로 있다가 깨달았다는 듯 소리쳤다. "아, 그랬었군요." 김불환은 이때 초라한 소년 등이 멀리 달아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즉시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아! 노선배께서 왜 일찍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서 형! 우리 쫓아갑시다." 그는 서약우를 끌고 급히 미친듯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화사고가 머리를 흔들면서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서약우가 김불환 같은 자에게 끌려다니다니......? 고생깨나 하겠군!" 교오가 말했다. "나도 쫓아가야 되겠소." 말을 마치자마자 그도 달려나갔다. 화사고가 말했다. "오라버니! 당신도 당할 거예요." 그러나 교오는 이미 멀리 달려나가고 있었다. 화사고는 발을 구르면서 몸을 돌려서 말했다.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 이 후배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화사고는 교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교오의 안위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높은 것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화사고가 원문을 나서자 일진에 바람이 불어오면서 하늘에서는 부슬부슬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유옥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청히 정신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서 있다가 천법 대사 앞으로 걸어가서 말했다. "대사의 상처는 괜찮습니까?" 천법 대사가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상처를 입었단 말이오? 상처를 입은 것은 그 어린 녀석이오." 유옥여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아, 예! 우리 오대산과 화산 두 파의 불공 대천지 원수는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대사께서 만약 저하고 손을 잡는다면 복수할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대사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천법 대사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본좌는 아무하고도 손을 잡아본 적이 없소." 그는 승포자락을 흔들면서 큰걸음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몇 걸음을 옮겨 놓기도 전에 그는 비틀거리면서 땅 위에 주저앉았다. 유옥여의 입가에 얼핏 웃음이 스치면서 곧 천법 대사에게 쫓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눈보라가 상당히 심한데 제가 좀 바래다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천법 대사는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만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하면서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보라는 점점 거세어졌다. 제지는 이 무림 칠대고수들이 순식간에 전부 싹 가버리는 것을 보고 나서 갑자기 마음이 으스스한 것을 느끼면서 옷깃을 여미며 처량하게 말했다. "무림인사들이 이와 같다니...... 아!" 왼손으로는 냉삼을 의지하고, 오른손으로는 이장청을 의지하여 천천히 다시 대청으로 돌아갔다. 이장청이 말했다. "칠대고수라는 사람들이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그렇지만 이 넓은 강호에 이 칠대고수 외에 다른 영웅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제지가 말했다. "아, 그래. 둘째 동생의 말이 맞네.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는 것 같군. 빨리 문이나 닫게." 이장청은 천천히 몸을 돌려서 문을 닫아 걸었다. 눈보라 속에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 냉삼이 술에 취할 때마다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눈보라는 중원을 뒤덮고, 강호에는 아는 사람을 찾아볼 수도 없구나. 술 한 잔을 마시고 천애(天涯)에 눈물을 부리며 사노라." 노랫소리는 아주 처량하여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정서가 담뿍 담겨 있었다. 이장청은 취한 듯 한참을 그 노랫소리를 듣고 있더니 갑자기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한동안 몸을 돌릴 줄을 몰랐다. 김불환은 서약우를 이끌고 장원문을 나서서 남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서약우가 눈을 들어보니 말발자국은 반대로 서북 방향을 향해 나 있었다. 그는 신형을 세우고 김불환에게 말했다. "김 형! 그들은 서북 방향으로 도주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도대체 남쪽으로 뭘 쫓아가는 거죠?" 김불환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누가 그들을 쫓는다고 했는가? 다만 우리가 그 핑계로 그곳을 빠져나왔을 뿐이야. 그곳에 더 오래 머물다간 우리의 입장이 더 난처하지 않겠소?" 서약우는 어쩔 수 없이 김불환에게 끌려서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에서는 여전히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일단 그들을 추격한다고 말했으면 좋든 싫든 추격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김불환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서 형께서는 아까 그 소년의 무공을 보지 못했단 말이오? 우리 두 사람이 비록 그들을 추격해서 쫓아갈 수 있다고 해도 도대체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이오?" 서약우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기인은 함부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그 소년이 바로 그런 소년이군요? 그 소년의 무공이 그렇게 사람을 놀라게 할 줄이야......? 일곱째 아가씨가 그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김불환이 눈을 치켜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서 형의 말 속에서는 어쩐지 약간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군요." 서약우가 얼굴을 붉히면서 강변하였다. "나는 다만 그 소년이 이상하다고 말한 것 뿐이오." 김불환이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무공이 높고 대단한 내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오늘 그가 여러 사람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으니 특히 인의장의 세 늙은이와 천법 대사는 조만간 그를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것이오." 말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앞에서 눈보라가 일어나더니 갑자기 십여 필의 말이 남쪽에서 날아오듯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이 걸친 검은 비단 바람막이는 광풍에 날려 올라가고 있었다. 얼핏 봤을 때는 마치 그 모습이 검은 먹구름이 솟아오르는 듯이 보였다. 김불환의 눈이 번쩍 빛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저 십여 필의 인마가 상당히 건강하고,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데도 저처럼 급히 달려오고 틀림없이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 같군. 보건대 내가 또 돈을 벌 일이 온 것 같군." 그가 이렇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십여 필의 인마가 눈앞에 도착했다. 앞장선 말에 탄 거무튀튀한 수염을 기른 괴한이 말채찍을 높이 쳐들면서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살고 싶지 않느냐? 빨리 길을 비켜." 김불환이 길을 가로 막고 실실거리면서 말했다. "나 김불환은 당신이 물어본 것처럼 살고 싶지 않소. 그대로 나를 말발굽으로 죽여주시오." 수염난 괴한이 말채찍을 공중에서 멈추고 소리를 한 번 지르자 십여 필의 인마가 모두 갑자기 멈추었다. 수염난 대한이 말에서 내려서 웃으면서 말했다. "아! 김 대협이셨군요. 전모(典某)가 너무 마음이 급해서 대협께서 여기에 계신 줄 몰랐습니다. 득죄한 점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두 손으로 포권을 하며 허리를 깊게 숙여 예를 갖추었다. 김불환의 눈이 그를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더니만 웃으면서 말했다. "아, 난 또 누구시라고! 원래 위무표국의 전령송(典笭松) 포두이시구만? 총표두께서 이처럼 급히 달려오고 계시니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거요? 강도라도 쫓는 거요?" 전령송이 탄식하듯이 말했다. "전모가 쫓고 있는 것은 비록 강도는 아니지만 강도보다 더 나쁜 놈입니다. 김 대협께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위무 비록 대단치는 않지만 양하(兩河) 주변에 친구들의 보살핌으로 다년간 체면을 손상당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어젯밤 돌연 어떤 계집애에게 까닥도 없이 표기를 도둑맞았습니다. 전모가 비록 무능하고 보잘 것없지만 그를 쫓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위무국이란 글자가 어찌 강호에서 여러 동도(同道)들과 같이 어울릴 수가 있겠습니까?" 김불환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전령송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그의 멀어버린 한쪽 눈마저도 빛을 발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약간 웃으면서 말했다. "총표두께서 말씀하시는 게 흰 옷을 입은 좀 큰 아가씨와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조그마한 계집애를 말하는 거요?" 전령송이 정신이 번쩍 든 듯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김 대협께서 혹시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김불환은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전령송이 입고 있는 흑단 여우가죽 바람막이 옷을 몇 번 바라보다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총표두께서 입고 계신 바람막이 옷은 어디서 사셨는지요? 총표두의 위신이 진짜 위풍당당하게 보이는군요. 후일 이 거지도 돈을 벌게 되면 반드시 하나 사서 입어보고 싶군요." 전령송이 멍청히 있다가 즉각 바람막이 옷을 벗어서 두 손으로 김불환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김 대협께서 너무 낡았다고 싫어하지나 않으신다면 제가 입던 옷을 받으시죠." 김불환이 웃으면서 거절하듯이 말했다. "아유,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소?" 입으로는 비록 이렇게 말을 하면서 손은 이미 그 바람막이 옷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전령송이 마른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이런 조그마한 물건이...... 뭐 그리 대단하지는 않습니다.김 대협께서 만약 그 여자애들이 어디로 갔는지만 가르쳐 주신다면 이 전모는 후일 반드시 김 대협께 은혜를 갚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불환은 이미 그 바람막이 옷을 걸치고 손을 들어 서북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 큰 아가씨와 작은 계집애가 모두 저쪽으로 갔소. 쫓아가려면 빨리 가야 할 거요." 전령송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령송은 몸을 날려 말에 오르자 긴 말울음소리와 함께 십여 개의 말들이 땅에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처럼 서북 방향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서약우는 김불환을 바라보면서 이마를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는 이미 그 소년의 가죽 겉옷을 입고 다시 바람막이 옷을 입다니 너무 많지 않으신가요?"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많지 않소. 많지 않아. 김불환이 무엇을 원하든 언제나 작은 것을 싫어할 뿐이지 많은 것을 싫어해 본 적은 없소. 하하하하. 이상도 하지. 또 사람들이 달려오네......?" 서약우가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자 과연 눈보라 속에서 십여 개의 말들이 서로 바짝 붙어서 달려오고 있었다. 십여 개의 말의 기사들은 어떤 사람들은 금의장포를 입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경장 차림이었다.그 기세는 방금 그 지나간 십여 개의 말들처럼 위풍당당하지는 않았으나 그 말들이 이미 수 장 밖에까지 달려왔을 때 말 위에서 어떤 사람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서 계신 분은 견의용위 김 대협이 아니신가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 말들은 이미 김불환과 서약우의 면전에까지 도착해 있었다. 서약우가 속으로 놀라서 생각했다. (이 사람의 눈이 상당히 매섭군!) 그 소리를 지른 사람의 키는 상당히 작았으나 머리와 수염은 모두 백색이었고, 길이가 겨우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면사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전혀 특이한 점이 없어 마치 시골 구석에 가난한 노인 같았으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칠 장 밖의 거리에서 내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사람이 무림 중에 신안응 방천리(方千里)를 제외하고는 있을 수가 없겠죠?" 키 작은 노인이 말에서 내려서 수염을 쓰다듬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몇 해 동안 뵙지 못했는데 만나자마자 김 형께서 너무 추켜올리는 것이 아니오. 떨어질까봐 겁이 나는군요." 김불환이 같이 온 사람을 쓸어보면서 말했다. "정말, 반갑군요! 방 형 외에도 복천조 이정(李挺) 이 대협, 천운안(穿雲雁) 이여풍(易如風) 이 대협께서도 오셨군요." 좌측 말에 타고 있던 신체가 위맹한 백발 노인과 우측 말에 타고 있던 몸에 금포를 걸치고 턱에 다섯 가닥의 긴 수염을 기른 키 큰 노인도 모두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려 포권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 오랜만에 뵙는군요." 김불환이 말했다. "강호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풍림삼조(風林三鳥)는 형산 싸움 이후에 모두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그러던데 오늘 세 분 형제께서 전부 같이 출동하였으니 혹시 눈 구경이라도 나오신 건가요?" 키 작은 노인 방천리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우리 형제는 편안한 삶을 살지 말라는 팔자였던 것 같소. 은퇴하자마자 시원한 벌이가 없으니 세끼 밥조차 거를 뻔했소. 어쩔 수 없이 간판을 내걸고 도장을 차려서 제자 몇 사람을 모아 몇 푼 벌어 겨우 그날그날을 꾸려나갔죠. 몇 년의 고생끝에 어렵게 나마 큰 제자가 몇 가지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재주들을 배웠소. 우리는 이때에 이르러서 도장을 제자들에게 넘겨주고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던 거요. 그렇지만 아! 어떻게 알았겠소? 어젯저녁 어디서 나온지도 모르는 미친 계집애가 한마디 말도 없이 우리 도장의 간판을 부숴버릴 줄이야. 그들은 도장을 부수고 도망가면서 무슨 '일곱째 아가씨가 이런 꼴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다!'는 그러한 말을 했던 것 같소." 김불환과 서약우가 서로 바라보고 나서 둘은 분노인지 혹은 웃음인지 모를 그런 느낌을 받았다.그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일곱째 아가씨는 가는 데마다 말썽을 일으키는 말썽꾸러기였군!) 방천리가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키워낸 몇 안 되는 제자 녀석들은 쓸모없는 녀석들이었소. 그 미친 계집애한테 얻어터져서 절뚝절뚝거리면서 돌아와서는 우리한테 복수를 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소. 우리 세 늙은이가 이러한 보잘 것 없는 젊은 제자를 키워냈으니 좋든 싫든, 그들이 잘난놈이건 못난 놈이건 그들을 위해서 분풀이를 해줘야만 하지 않겠소! 그래서 나왔던 거요. 이 늙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미친 계집애를 쫓아가서 도대체 왜 남의 밥그릇을 부수어버렸는지라도 물어보고 싶었던 거요." 서약우가 김불환이 말을 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손가락을 들어 서북 방향을 지적하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모두 저쪽으로 갔소. 여러분들께서는 빨리 쫓아가셔야 할 거요." 방천리가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면서 말했다. "이 분은......." 김불환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이분은 남의 돈벌이를 막는 서약우라는 사람이오. 방 형께서는 이 사람을 본 적이 있소?" 방천리가 어리둥절한 듯 그를 다시 한 번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서약우! 옥면요금 신검수 서 대협이 아니오?" 이렇게 말한 그는 포권을 하면서 예를 갖추었다. "서 형의 가르침. 우리 세 형제는 가슴 깊이 간직하겠소." 그들은 말 위로 몸을 날려 말채찍을 서북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김불환은 서약우를 흘겨보면서 냉소를 했다. 서약우는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이 동생은 김 형의 돈벌이를 막은 것은 아닙니다.다만 그들이 바람막이 옷도 걸치지 못한 채 달려오는 것을 보고 그들은 돈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그래서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쫓아보낼려고 그렇게 말한 겁니다." 김불환이 애꾸눈을 두 번 깜박거리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이 내가 돈버는 것을 방해했다면 그 사람은 나 김불환의 불공대천의 큰 원수가 되었을 것이오. 그렇지만 서 형이야...... 하하 어쨌든 형제 아니오! 뭐 더 말할 필요가 있겠소." 그는 큰소리로 웃더니 서약우를 끌고 오던 방향을 돌려 방천리 등이 쫓아간 서북 방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서약우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김 형께서는 왜 또 그들을 쫓아가십니까?" 김불환은 웃으면서 말했다. "전령송과 풍림삼조 그들이 이미 쫓아갔는데...... 그들이 앞장서서 선봉을 선다면 그들은 좀 고생할 거요. 그들 고생하는 것을 쫓아가서 본다고 해도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겠소?" 갑자기 멀리 있는 길 옆 나무 뒤에서 어떤 사람이 김불환의 말을 이어받아서 웃으면서 말했다. "쫓아가서 구경하다 보면 어쩌면 약간의 이익이 있을 수도 있겠죠. 맞습니까?" 여제갈 화사고가 웃는 소리와 더불어 나무 뒤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옆에는 아주 거대한 사자와 같은 대한이 서서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웅사 교오였다. 김불환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으나 곧 하하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웅사가 이렇게 너구리로 변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행동거지가 이처럼 은밀하다니...... 하마터면 이 거지를 놀라 자빠지게 할 뻔했잖아." 그는 분명히 교오의 행동이 점잖지 못함을 욕하면서도 빙 돌려서 말을 뱉았다. 그래서 비록 교오를 비꼬면서도 직접적으로 그를 화나게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교오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져서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 교오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뒷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김불환은 또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두 분께서 오신 것은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어선가요?" 화사고가 미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들은 서 소협에게 한 마디 해주려고 그러는 거예요. 서 소협께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는 그러한 소인의 꾀임에 빠지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고 싶었어요." 김불환은 자기 자신을 욕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도리어 웃으면서 말했다. "화사고가 이처럼 신경을 쓰시다니 확실히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을 불러 일으키게 할만 하군요." 그리고 서약우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그렇지만 서 형께서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강호를 편력하면서도 언제부터 그의 행동거지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건지 저는 이해할 수 없군요." 서약우의 얼굴도 붉어지면서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서모의 행동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뿐이오. 두 분께서 그렇게 관심을 표명할 필요가 없소." 화사고가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을 하기도 전에 김불환이 이미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원래 서 형께서는 자기 자신의 행동거지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하시는군요! 그런데 두 분께서는 쓸데없이 원하지도 않는 관심을 표명하셨소." 웅사 교오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덤벼들려고 했으나 화사고가 슬쩍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그만두게 하였다.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두 분께서는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지셨소? 진짜 축하할 만한 일이오. 후일 좋은날에 이 김모를 청하여서 축하주를 마시게 하는 것을 잊지나 말아주시오." 큰웃음소리 속에서 김불환이 서약우의 옷깃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교오가 노갈을 터뜨리면서 몸을 돌려 그를 쫓아가려고 했으나 화사고가 그의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다만 서약우가 점점 멀어지면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이군요." 교오가 발을 굴리면서 말했다. "저녀석이 멋대로 지껄이는 말 화사고께서는 마음에 두지 마시오." 화사고가 미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어찌 저 사람들과 같은 그 정도의 인간이겠어요?" 교오가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면서 말했다. "당당한 무림의 대협이 결국 이처럼 비겁한 소인들이었다니......! 아!" 찬바람이 지나가는 곳에 멀리서 다시 말발굽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화사고가 소리를 들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주 아가씨를 찾아서 분풀이를 하려는 일행이 또 있는 것일까?" 일곱째 아가씨는 미친듯 말에 채찍을 가하여 달려나아갔으며 불아이가 그 초라한 소년을 잡은 손 또한 놓지 않아서 세 사람은 순식간에 반 리 이상의 길을 달려나갔다. 일곱 대한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서 달렸다. 일곱째 아가씨는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말에 가하던 채찍을 멈추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한 번 손을 쓰면 아무도 감히 쫓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저는 진작 알고 있었어요." 초라한 소년이 말 위에 앉아서 고개를 흔들며 탄식하듯이 말했다. "주칠칠(朱七七) 당신! 정말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군요." 주칠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당신이 그녀를 구했으니 그녀는 당신을 절대로 잊지 않을 거예요. 이봐요. 당신 심랑(��浪)을 잊을 수가 있겠어요?" 불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잊지 못하지......! 절대 다시는 잊지 못할 거야!" 주칠칠이 사랑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만 당신을 잊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저도 당신을 잊지 못할 거예요." 심랑이라 불리운 초라한 소년은 탄식하면서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두 분이 가급적이면 나를 빨리 잊어주기를 바라오. 두 분께서 만약 나를 잊지 못한다면 나는 진짜 당신들 때문에 난처한 입장에 빠질 거요." 불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집 아가씨가 너를 좋아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난처하게 만든단 말인가?"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됐소. 제발 나를 갖고 장난이나 마시오." 그의 얼굴색이 갑자기 침중해지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한테 묻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는데 당신은 분명히 말해주시오. 당신은 화예선이 아닌데 어째서 그 사람들이 당신을 화예선이라 믿도록 그렇게 행동했소?" 주칠칠이 눈을 깜박이면서 말했다. "누가 그를 화예선이 아니라고 그랬어요?"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가 만약 장중천마 화예선이었다면 서약우의 목숨이 아직 붙어 있겠소? 만약 그녀가 상천입지였다면 우리가 도망쳐나올 때 내가 그 길을 막을 필요도 없었을 거요. 주칠칠, 당신 사람을 너무 기만하는 게 아니오. 까닭도 없이 나를 그 소용돌이 속에 끼어들게 하여 천법 대사로 하여금 나를 뼈에 사무치도록 원망하게 하다니......!" 불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그 인의장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집 일곱째 아가씨가 심공자가 어떻고 어떻게 하며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 보니까 확실히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군요. 진짜 대단하오. 그 천하제일지라고 칭송받는 늙은이도 심 공자에 비한다면 발끝도 쫓아가지 못할 거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그 붉은 가면을 벗어내렸다. 그러자 하얗고 통통한 어린애의 얼굴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그는 그 외에 과연 한 장의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그 얼굴은 하얗게 보이면서도 붉은 홍조를 띠고 있었고 그 홍조 속에 다시 하얀 면이 있는 마치 큰 사과와 같은 얼굴로 사람들로 하여금 한입 깨물어 주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 소녀는 두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웃자 한쪽 볼에 하나씩 움푹 패인 보조개가 드러나 보였다. 그 소녀는 심랑을 바라보고 포권을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 동생은 주팔(朱八)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저를 희아(喜兒)라고 부르고 누나는 저를 장난꾸러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불아이라고도 부릅니다. 형님께서 저를 무엇이라고 부르시든 형님이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누가 뭐래도 저 주팔은 이미 형님께 항복했으니까요." 심랑이 비록 이미 그 불아이가 화예선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냈지만 이에 이르러 그가 주칠칠 아가씨의 동생 주팔이라는 것을 알자 멍청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 그는 길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너도 원래 주씨 가문의 자제였구나!" 주칠칠이 마치 꽃가지가 흔들리는 듯 요란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동생은 우리 다섯 명의 오빠마저도 골치 아파하는 그런 애예요. 그런데 오늘 당신께 항복했으니 진짜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군요."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아까와 같은 행동도 장난이라고 간주할 수 있겠소. 이건 하나의 음모였소. 화예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당신 동생으로 하여금 그러한 장난을 하게 하다니. 결국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 동생이 진짜로 화예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잖소. 그 천마비룡식이라는 일초는 더욱 대단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소. 심지어 제지와 같은 그런 무림계의 대선배들도 속았으니 말이오." 불아이가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천마 십삼식(千魔十三式) 중에 겨우 한 초 밖에 몰라요. 그 격식없이 어지럽게 치고받는 초식이 바로 저의 진짜 무공실력이에요."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너의 그 되는 대로 치고받는 초식이 진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구나. 만약 그 초식이 없었다면 제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속았을까? 그렇지만 나는 너에게 꼭 한 가지 물어야 할 게 있다. 너의 그 남을 가장하는 음모 속에 도대체 어떠한 비밀이 있는 거지! 너희들이 나를 그 음모에 끌여들였으니, 나는 적어도 이것 만큼은 반드시 알아야 될 것 같애." 불아이가 말했다. "그건 저는 잘 몰라요. 형님께서는 누나에게 물어보세요." 주칠칠이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우리집 여덟째가 화예선으로 가장하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믿게 한다면 화예선이 다른 곳에서 했던 행동들은 도대체 누가 한 건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 수 있겠죠. 그렇지만 당신은 안심하셔도 좋아요. 화예선이 이번 했던 일은 절대로 조금도 다른 사람한테 손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녀는 다만 그 연천운을 잡아서 지난날의 분통을 약간 터뜨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심랑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연천운은 성격이 상당히 호방하고 인의를 중시하는 사람인데 심지어 그 인의장의 세 노선배 중에서도 연천운 노선배가 가장 협의의 인물인데 화예선이 만약 그와 지난날 애매한 관계가 있었다면 그건 아마도 틀림없이 화예선의 잘못일 거요." 주칠칠이 말했다. "이번에는 당신이 틀렸어요." 심랑이 말을 받았다. "당신은 말마다 화예선을 변명하려고 애쓰는데 이건 도대체 어찌 된 것인지 알고 싶소. 당신은 그녀가 이미 십여 년 동안 피냄새를 묻히지 않았다고 여러 번 강조하면서 나로 하여금 믿게 했소. 그렇지만 노후가 칠 년 전에 일백사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녀의 손에 죽지 않았다고 믿을 수가 있겠소?" 주칠칠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두 가지 일은 바로 그 중에 하나예요." 심랑이 말을 받았다. "당신은 좀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없겠소?" 주칠칠이 말했다. "화예선은 이미 십일 년 동안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간 적이 없어요. 여덟째 동생이 올해 열한 살이에요. 당신이 믿지 못하겠다면 동생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는지." 불아이가 말했다. "저는 매일 화예선을 귀찮게 굴고 있는데 그녀가 어떻게 한 발자국이라도 밖으로 나갈 수가 있겠어요?" 심랑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녀가 정말로 십일 년 동안 당신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면 칠 년 전에 일백사십 명이나 되는 생명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의 손에 죽었단 말이오?" 주칠칠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상한 건 바로 그점이에요. 그 일백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두 화예선의 원수도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그들이 죽임을 당한 수법은 화예선이 사용하는 장법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여기에 창주의 김진우 김씨 가문의 노소 십칠 명이 하룻밤 사이에 전부 참사를 당했는데 연천운과 그 냉삼이 그 일이 있고 나서 금방 그곳에 가서 자세한 조사를 한 후에 더욱 흉수는 반드시 화예선이라고 단정을 했어요. 그들이 한 말은 무림계에 있는 사람 누가 굳게 믿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화예선이 그날 밤 분명히 저희집에서 저와 동생들과 밤새 장원홍(狀元)이라는 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만약 그녀가 분실술을 써서 창주로 가서 사람을 죽였다면 그건 정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심랑이 얼굴색을 변하면서 말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당신들은 그녀를 위해서 그녀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되지 않겠소?" 주칠칠은 그 말을 받아서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화예선의 옛날 흉명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한 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과연 믿어줄까요? 아울러 우리의 말은 연천운과 같은 무림계 대선배의 말보다 신빙성이 없으리라고 사람들이 생각하지나 않을까요?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의 결백을 증명해 주고 싶지만 저희들이 어떻게 해볼 수가 있겠어요?" 심랑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 말도 틀리지는 않소." 주칠칠이 말했다. "연천운이 친히 목격하지도 않고 확실한 증거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죄명을 뒤집어 씌웠으니 비단 화예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화가 났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오누이 마저도 화가 났죠. 그래서 벌써부터 연천운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작정을 했으나 시종 그 사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그는......." 그녀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에 우리는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냈던 거죠. 화예선으로 하여금 밖에서 연천운을 끌어내서 천마이종술(天魔移踪術)로 그를 실컷 놀린 다음 고의로 그 모습을 연천운에게 드러내서 연천운으로 하여금 자기를 놀린 사람이 화예선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거죠. 연천운은 화예선에게 놀림을 당해서 낭패하면서 돌아가겠죠. 그리고 나서 반드시 그가 당했던 일을 그 형제들에게 자세히 말할 거예요. 그렇지만 이장청과 제지는 도리어 오늘 인의장을 시끄럽게 한 장본인이 화예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화예선이 인의장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그 순간에 밖에서 연천운이 화예선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연천운은 종내 그 한마디가 천금보다 더 중하다고 자부했던 사람인데...... 그래서 무림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형제들마저도 연천운의 말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겠죠? 연천운이 어떻게 가슴 가득 화가 나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이때 말은 비록 급하게 달리는 것을 멈췄으나 여전히 그 눈을 무릅쓰고 앞으로 달려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말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다시 반 리 이상을 지나왔다. 갑자기 길 옆에 있는 마른나무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은 화가 가득 차서 당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화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지." 말소리의 날카로움이 마치 송곳으로 유리를 긁는 것 같았다. 심랑이 눈을 돌려 바라보았으나 그 마른나무 위에는 눈이 쌓여 있을 뿐 어느 곳에서도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자 마른나무 위에 있던 그 하얀 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표표히 땅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하얀 눈은 도리어 순식간에 붉은 옷을 걸치고 얼굴에는 귀신 형상의 가면을 둘러 쓴 사람모습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비단 불아이와 꼭 같았을 뿐만 아니라 키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다만 이 사람이 입은 붉은 옷의 밖에 다시 하얀 여우가죽 바람막이용 겉옷을 걸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차림으로 나무에 웅크려서 그 바람막이용 겉옷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썼기 때문에 그 마른 나무에 쌓인 하얀 눈과 구별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연천운이 비록 그 마른나무를 몇 번이나 지나쳐도 그녀를 정확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생각컨대 이것이 바로 천마이종술 중의 오색호신법이겠군? 진작 그 이름은 들었으나 오늘에야 비로소 눈을 넓히게 되니......!" 홍의인 화예선이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싸움도 할 줄 모르고 그렇다고 빨리 도망칠 줄도 모르는 작은 벌레나 짐승들에게서 배운 보잘 것 없는 재주에 불과하오. 심 공자께서 그렇게 칭찬을 하시니 이 노파가 얼마나 무안해 고개를 들지 못하겠소." 이 보호색은 확실히 자연도태 과정에서 그 자신을 유효적절하게 지킬 수 없었던 작은 짐승들이나 곤충들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에서 배워온 것으로 화예선의 이 말은 솔직한 것이었다.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벌써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전부 하셨어요?" 화예선이 말했다. "물론 정확하게 해치웠지. 연천운이란 놈 진짜 고생깨나 했어." 이때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오면서 급박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주칠칠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누가 쫓아온 걸까?" 화예선이 말했다. "전령송이란 놈 아니면 바로 방천리란 친구겠지!" 심랑이 이상하게 여겨 말했다. "전령송? 방천리? 그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당신을 쫓아 온다는 거요?" 화예선이 갑자기 대소하며 말했다. "이것 또한 우리 일곱째 아가씨의 장난의 하나죠. 까닭도 없이 일곱째 아가씨가 그 표국의 표기들이 별로 보기 좋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뽑아버렸던 거요." 주칠칠이 예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제가 직접 뽑은 것은 아니에요." 불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큰소리로 말했다. 심양성(��陽城)의 괴사(怪事) "제가 그랬다면 또 어쩔거예요? 그 녀석들이 여기까지 쫓아온다면 이 주팔 어르신께서 그들한테 본때를 보여주고 말거예요." 화예선이 웃으면서 말했다. "됐어 됐어. 하나밖에 없던 말썽꾸러기가 다시 하나가 불었구나. 이들 오누이가 한녀석이 장구치고 한녀석이 나팔부니 심 상공! 당신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심랑이 포권을 하고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그 사람들과 싸울 준비를 하세요. 본인은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길 옆으로 달려나갔다. 불아이가 크게 부르짖었다. "심 형! 가지 마세요." 주칠칠의 눈이 다시 금방 붉어졌다.그녀는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가게 내버려둬라. 비록 그의 목숨을 한 번 구해준 적은 있지만 그 사람한테 우리가 그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꼭 기억해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니?" 말소리에는 슬픈 기색이 배어나왔으며 원망스러운 듯 그리고 가련한 듯한 모양으로 고개를 숙였다.심랑은 달려나가던 몸을 멈추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나의 고조 할머니! 도대체 나한테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주칠칠은 얼굴을 활짝 펴고 웃으면서 가볍게 말했다. "저는 당신이......! 당신이......!" 그녀는 눈을 몇 번 굴리고 앵두 같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더니 예쁜 웃음을 띠면서 머리를 쓸어올렸다. 눈보라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으며 말발굽소리는 점점 가까워졌지만 그녀는 조금도 조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화예선은 조급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이 계집애야! 지금 교태를 부릴 때가 아니야. 싸울 건지 도망갈 건지 어떻게 빨리 결정을 지어야지!" 불아이가 말했다. "당연히 싸워야죠. 심 형께서도 저희들을 도울 거예요." 심랑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싸워?" 그는 불아이의 앞까지 걸어 들어가서 갑자기 번개같이 손을 뻗어 그 불아이의 견정혈을 움켜쥐었다. 불아이는 몸이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심랑은 허리를 굽혀 그를 안아올리더니 몸을 날려 주칠칠이 몰던 말등에 올라타서 손을 돌려 말의 궁둥이를 힘껏 내리쳤다.건장한 말은 긴 울음소리를 내더니 악으로 바람처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화예선도 어쩔 수 없이 쫓아갔다. 그리고 여덟 명의 건장한 대한들도 주칠칠의 말이 움직이자마자 모두 채찍을 휘둘러 따라갔다. 화예선이 한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그녀의 몸은 이미 여덟 대한이 탄 말 중에 한 마리의 엉덩이 부분에 올라섰다. 말탄 그 대한은 말을 그녀에 넘겨주려고 했으나 화예선이 도리어 말했다. "너는 말이나 그대로 몰아라. 날 상관하지는 말아." 그녀의 몸이 비록 말 위에 있었으나 마치 아무런 물건도 없는 것처럼 말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 대한은 놀라고 감탄하는 듯한 모습을 나타내 보였다. 불아이가 심랑의 겨드랑이에 끼어진 채로 크게 발버둥치며 말했다. "내려줘요. 당신이 날 내려주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욕을 하겠어요."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더이상 말썽을 부린다면 내가 너의 머리를 빡빡 밀어서 오대산으로 보내어 천법 대사를 모시는 작은 중으로 만들어버릴 거야." 불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당신이! 당신이 감히......." 심랑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한 번 시험해 봐라." 불아이가 찬바람을 들이키고 말을 멈췄다.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다더니 여덟째 동생도 다른 사람에게 항복할 때가 있을 줄이야. 오늘 아주 호적수를 만났지." 불아이가 말했다. "심 형은 내 매형인데 남도 아니잖아요? 매형을 약간 두려워하는 게 무슨 대단한 거라고......? 매형! 그렇죠?" 심랑은 씁쓸하게 웃었고 주칠칠이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망할 녀석! 혓바닥을 마음대로 놀리면 내가 네 주둥이를 찢어놓을 거야." 불아이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누나는 겉으로는 나를 욕하는 척 하지만 마음은 기뻐서 하늘을 나는 듯 할 걸요?" 주칠칠이 예쁘게 웃으면서 몸을 돌려서 불아이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몸을 한 번 돌리자 도리어 심랑의 가슴에 안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불아이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보세요. 누나가 기회를 봐서 슬쩍 매형에게 안기잖아요!" 멀리 눈보라 속에서 말발굽소리와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떠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말발자국이 아직 선명한 것을 보니 그 미친 계집애가 탄 말이 그렇게 멀리 가지는 못한 것 같소." 이때 바람은 서북방향을 향해서 계속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쫓는 인마들의 말발굽소리는 바람을 따라 주칠칠 등이 들을 수 있었으나 이들을 쫓는 사람들은 주칠칠 등이 탄 말발굽소리와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수가 없었다. 심랑은 말을 더욱 급하게 몰았다.그러자 주칠칠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그들을 이기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빨리 도망을 가죠?" 심랑이 말했다. "내가 당신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당신과 싸움을 못하잖소? 그와 똑같은 원인이오." 주칠칠이 교태를 부리면서 말했다. "저는 진지하게 말하는데 당신은 도리어 농담을 하는군요?" 심랑이 탄식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내가 왜 진지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겠소? 비록 당신의 무공이 현재보다 열 배가 더 강하다고 해도 꼭 알아야 할 점이 한 가지 있소. 그것은 이러한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요." 주칠칠이 말했다. "왜 안 된다는 거죠?" "원래 당신이 까닭도 없이 소란을 떨었기 때문에 그들이 쫓아오는 것인데 만약 다시 그들과 싸운다면 어찌 강호의 친구들이 비웃지 않겠소? 하물며 전령송이나 방천리 이러한 사람들은 만만하게 볼 인물들도 아니오. 만약 당신이 그들과 원수를 맺는다면 차후에 아마 당신 부친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약간 귀찮은 일을 당하게 될 거요." 주칠칠이 교태를 짓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의 말을 들어보면 당신은 나를 위해서 싸우면 안 된다는 거네요?"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를 구해준 은혜를 어찌 갚지 않겠소?" 주칠칠은 가볍게 탄식을 하더니 몸을 더욱 심랑의 가슴에 기대면서 말했다. "좋아요. 도망가라면 도망가죠 뭐. 언제까지라도 어느 길이라도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요." 불아이가 실실거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너무 낯간지럽네요." 그들 일행은 강을 끼고 서쪽으로 달려서 용성(籠城)에서 강을 건너 곧장 심양(沁陽)으로 들어갔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그들을 쫓는 인마들을 완전히 따돌릴 수 있었으나 이미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여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였다. 이때는 이미 이틀째 정오 무렵으로 눈보라는 여전히 휘몰아치고 있었다. 주칠칠은 계속하여 탄식하며 말했다. "못 참겠어요! 더는 못 참겠어요. 깨끗한 여관을 찾아서 쉬지 않는다면 진짜 죽을 것 같아요." 심랑이 말했다. "이곳은 쉴 만한 곳이 못 되는 것 같소. 만약 그들이 다시 쫓아온다면......?" 주칠칠은 어리광부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쫓아온다면요? 이 시점에서 제가 그들이 쫓아오든 말든 그걸 상관할 수 있겠어요? 그들이 쫓아온다고 해도 그리고 나를 죽이든 살리든 나를 후벼파든 깨물든 어떻든 나는 먼저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심랑이 눈썹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어리광이나 부리면서 곱게 자란 아가씨라서 어쩔 수가......." 주칠칠이 말했다. "뭐라고 중얼거리세요?" 심랑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나는 지금 쉬어야 될 것 같다고 말했소." 그러나 불아이가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쉬어야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는 누나가 어리광이나 부리면서 곱게 자란......." 그는 말소리를 갑자기 멈추면서 눈을 들어 곧바로 길 앞쪽을 바라보면서 더이상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때 그들은 이미 성 안으로 들어온 후로 심양성의 집과 길들이 멀리 바라다보이고 있었다. 그 청석(靑石)을 깔아놓은 도로의 먼쪽에서 마치 기다란 뱀처럼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행렬이 있었다. 눈을 들어 바라보자 다만 몸에 해진 옷을 걸치고 가슴을 풀어헤친 수십 명의 건장한 대한들이 열일곱 여덟 개의 관을 들고 곧장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 대한들의 전신에는 석탄가루와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으며 그들이 들고 있는 관은 모두 새것으로서 심지어 어떤 것은 아직 칠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확실히 아주 급하게 만든 관임에 분명했다. 아마도 이 심양성 중에 최근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관마저도 만들어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도로 양쪽에 있던 행인들은 모두 발걸음을 멈췄으나 누구도 이 기이한 출상 행렬을 바라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돌렸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길 옆에 있는 상점으로 숨어 들어가기도 했다. 마치 그들의 모습은 이 관을 보기만 해도 공포스러운 재앙이 자신들에게 닥칠까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였다. 불아이는 그 행렬을 보면서 놀랍고 이상하기도 하여 눈알도 굴리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그는 탄식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아주 많은 관이로구만!" 주칠칠이 이를 받았다. "확실히 적지 않아!" "적지 않은 것이 아니고 너무 많은 거죠. 이렇게 많은 관들이 동시에 출상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어요. 헤헤. 누나도 아마 본 적이 없을 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죽다니 확실히 드문 일이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관의 행렬을 피하는 모양을 봐. 여기에 혹시 무슨 전염병이라도 번진 건 아닐까?" "만약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이라면 그 시체들을 이미 태워버렸겠죠." "만약 전염병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무림계의 복수극만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죽일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관을 나르는 사람들은 조금도 무림계 호걸들의 모습이 아니잖아?"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다는 거죠." 화예선이 이미 이들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얼굴에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어린애의 장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주칠칠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볼 수 있겠어요?" 화예선이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든 아마 이 심양성은 틀림없이 무슨 변고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린 아예......." 그녀가 아직 가버리자는 말을 하기도 전에 주칠칠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변고가 있는 곳이면 또 어때요?" 화예선이 이를 받아서 말했다. "아무 소리도 아니야." 그녀는 가볍게 탄식하면서 중얼거렸다. "변고가 있는 곳에 또 두 명의 말썽이나 부리는 아이들이 왔으니. 아! 또 시끄러운 일들이 일어나겠군!" 주칠칠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면서 심랑을 힐끗 바라보았다. 심랑이 이곳에 머물 것을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화예선이 뭐라 하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을 듯한 태도였다. 관을 든 사람들의 행렬이 지나가고 나서 그녀는 즉각 그 큰 길에 내려섰다. 길에는 정막만이 감돌고 있을 뿐 사람들은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제 갈길만 가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지나간 행렬이 비록 이상했지만 이때 그 큰 길에는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확실히 일상적인 정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칠칠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듯 여관을 잡고 행장을 풀었다. 그들이 찾아들어간 여관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아마 이 심양성 중에 가장 큰 여관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여관 역시 인적이 끊겨 썰렁했으며 그 맞은편에 있는 음식점에도 사람이 한 사람도 눈에 뛰지 않았다. 이미 심양에 도착한 상인들은 전부 돌아가버린 듯했으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인들도 아마 멀리 빙 돌아서 지나가는 듯한 기색이었다. 심양성은 이미 하나의 흉성으로 변한 듯한 모습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주칠칠은 비로소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오후 내내 잠을 잤으나 충분히 깊은 잠을 자지는 못했다. 꿈 속에서 마치 말발굽들이 왔다갔다 오락가락 끊기지 않는 듯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급히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곧바로 그 옆방으로 달려가 창밖에서 가볍게 불렀다. "여덟째! 여덟째!" 두 번 가볍게 부르는 소리가 나자마자 창문이 활짝 열리면서 불아이가 불처럼 붉은 반코트를 걸친 채 창가에 놓여져 있는 침대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불아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누나가 일어날 시간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 주칠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은?" 불아이가 코를 찡긋거리면서 말했다. "누나는 그렇게 편하게 자는데 난 고생했어요. 심지어 눈 한 번 깜박하지 못하고 계속 이 사람을 지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나 모르게 살짝 빠져나갈 수 있겠어요? 보세요. 저쪽에 저렇게 웅크리고 누워서 돼지처럼 자고 있잖아요?" 주칠칠이 교태로운 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을 욕하면 안 돼." 눈을 돌려보자 불아이의 침상 맞은편 침상에 이불이 높게 솟아올라 있었다. 마치 심랑이 여전히 높은 베개를 베고 자고 있는 것처럼. 주칠칠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더이상 자지 못하게 해. 빨리 그 사람을 깨워라!" 불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요! 알았어요!" 그는 급히 몸을 곤두박질 치더니 맞은편 침상으로 날아가서 큰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세요. 그만 일어나세요. 여마왕(女魔王)이 깼는데 계속 잘 수가 있어요?" 그러나 심랑은 마치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아이가 중얼거렸다. "소도 아니고 마치 돼지 같이 자는구만." 그는 갑자기 이불을 휙 걷어젖혔다. 그러나 이불 속에 있는 것은 도리어 밑에 깔아놓은 요였을 뿐이고 심랑의 모습은 없었다. 주칠칠이 깜짝 놀라는 소리를 발하며 창을 뛰어 넘어 들어와 이불을 바닥으로 집어던지고 베개도 집어던지면서 발을 구르며 말했다. "네가 그 사람한테 돼지라고 할 것이 아니고 네가 돼지야. 네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파리, 모기가 돼서 날아가버렸단 말야? 밖에 누구 없어요?" 화예선과 흑의 대한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다. 주칠칠이 소리질렀다. "그 사람, 그 사람이 또 가버렸어요." 말을 끝맺기 전에 그의 눈가에 눈물 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불아이는 주칠칠에게 야단맞은 다음 작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부끄럽지도 않은가봐! 다 큰 사람이 걸핏하면 눈물이나 흘리고." 주칠칠이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나는, 나는 그 사람이 가버린 게 뭐가 대단하다고 다시 찾아오면 되지 않을 거냐고 그랬어." "빨리 가서 찾아와. 만약 그 사람을 다시 데려오지 못한다면 널 죽여버릴 거야. 당신들도 빨리 쫓아가세요. 눈만 휘둥그레 뜨고 뭐하는 거예요? 아마 이번에는 그 사람을 다시 데려오지 못할 것 같애." 그녀는 갑자기 침대 위에 엎드려서 울기 시작했다.불아이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자. 쫓아가자." 그러나 이때 갑자기 창밖에 한 인영이 번쩍 하더니 심랑이 표연히 웃으면서 걸어 들어왔다. 불아이는 놀라고 기뻐서 그에게 달려가 그의 옷깃을 부여잡고 큰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좋아. 심 형께서는 언제 나가신 거죠? 내가 누나한테 야단맞아서 나도 울 뻔했잖아요." 심랑이 미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꿈 속에서 김불환을 욕할 때 나갔던 거야." 주칠칠이 벌떡 일어나며 겸연쩍은 듯 말했다. "나 배고프단 말야. 빨리 밥먹으러 가자." 그들이 음식점에 도착하자 손님들이 모두 주칠칠에 대해서 쑥덕거리자 불아이는 눈을 크게 치켜뜨면서 말했다. "누나! 보세요. 저 녀석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요! 내가 누나 대신 그들에게 한 번 본때를 보여줄까?" 주칠칠이 말했다. "무슨 본때?" 불아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사람들이 누나 얘길 하잖아요! 누나는 화도 나지 않아요?" 주칠칠이 예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 누나가 예쁘게 생겼으니까 사람들이 그러는 거지. 만약 누나가 못생긴 추녀였다고 생각해봐. 네가 가서 사람들에게 누나 애기를 해달라고 부탁해도 사람들은 아는 체도 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저 사람들은 예쁜 것과 못생긴 것을 구별할 줄 아는데, 어떤 사람은......." 그녀가 심랑을 힐끗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은 눈이 있으면서도 봉사인 것처럼 사람이 예쁘게 생겼는지 못생겼는지도 모르잖아!" 심랑은 다만 듣지 못한 척 할 뿐이었다.주칠칠은 이를 깨물고 탁자 밑으로 심랑을 힘껏 걷어찼다. 그러나 심랑은 여전히 가벼운 웃음을 띤 채 모른 척 마치 아무런 감각도 없는 척 하는 태도를 보였다. 불아이가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누나는 진짜 어쩔 땐 상당히 이상하단 말이야. 화를 내야 할 때는 화를 내지 않고 화를 안 내야 좋을 듯 할 때는 도리어 화를 내니 말이야." 주칠칠이 말했다. "이 녀석아! 네가 무슨 상관이야!" 불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요. 좋아. 나는 어려서부터 누나가 무서웠으니까. 화가 난다면 나한테 발설하지나 마세요." 사람들이 하는 말은 더욱더 노골적이 되었으며 웃음소리도 갈수록 더욱 커졌고 눈빛은 더욱 쉴새없이 그들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불아이가 눈썹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뛰어나가서 여덟 명의 대한을 모두 데려와 문신(門神)처럼 주칠칠의 뒤에 서 있게 했다. 여덟 대한의 얼굴은 모두 푸른색으로서 얼굴 가득 살기를 띠고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한 번 둘러보자 주칠칠에 대한 애기가 갑자기 수그러들어갔다. 다만 왼쪽편 구석에 있는 한 사람이 의자에 꼿꼿이 앉아서 시종 처음부터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차가운 눈빛으로 그 음식점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 사람의 눈에는 아주 깊은 복수심이 가득차 있었다. 그는 몸에 푸른색의 장삼을 입었는데 이 장삼은 여러 번 빨은 듯 이미 하얗게 변해 있었고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조금의 혈색도 없었으며 턱아래의 수염도 기르지 않고 있었다. 나이는 많아야 이십오륙 세에 불과한 듯 보였다. 이때 문 밖에서 또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는데 그 얼굴 모습이나 신체가 그 좌측편에 앉아있던 남색 장삼을 걸친 소년과 꼭 같았다. 새로 걸어들어온 그 소년의 옷은 매우 화려한 천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였으며 나이도 몇 살이 적은 듯 보였고 입가에 언제나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 있어서 그 좌측편에 앉아 있던 소년의 차가운 표정과는 크게 대조적으로 보였다. 그의 눈빛이 주칠칠의 얼굴에 가서 잠깐 멎더니 심랑을 거쳐서 곧바로 그 소년에게 걸어가서 앉으면서 말했다. "형님! 일찍 오셨습니까?" 그러나 남삼소년의 눈빛은 여전히 식당 음식점 입구에서 떠날 줄을 몰랐으며 화려한 옷을 입은 소년도 마치 이미 그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앉자마자 마시고 먹기 시작했다. 가끔 그의 눈빛이 문 밖을 향해 보내질 뿐이었다. 다른 한편의 둥근 탁자에는 몇 사람의 대한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슬쩍슬쩍 심랑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의 표정은 아주 표독스러웠으며 사람을 흘겨보는 눈빛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때 그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저 두 사람이 바로 옛날 무림계에 이름 꽤나 날렸던 정가(丁家) 형제가 맞습니까?" 그 옆에 있는 사람은 그 복장이 극히 화려했으나 노루머리에 쥐새끼 같은 눈을 하고 있어서 그 모습이 매우 더럽고 천하기가 짝이 없었다. 이 사람은 질문을 받자 웃으면서 말했다. "철 형의 눈이 과연 예민하군요. 한눈에 저들을 알아보시다니!" 그 표독스러운 표정을 한 대한이 짙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말했다. "저 두 사람도 여기에 올 줄은 진짜 생각도 못했군요. 듣건대 그 두 사람은 상당한 강적이라 하던데. 이 일에 두 사람이 끼어들다니. 아마 우리가 일을 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군요." 그 쥐새끼 같은 눈을 가진 대한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가 형제가 비록 끼어든다 해도 우리는 신창 세조운 철승룡(鐵勝籠) 철 형이 계신데 뭐가 두렵단 말이오!" 철승룡이 웃으면서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았다.그는 갑자기 웃음소리를 멈추고 멍청하니 문 밖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진정으로 이 일에 끼어들 사람이 왔소." 이때 음식점 가득 앉아 있던 호걸들이 열 사람 중에 아홉 사람은 모두 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입구로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일남 일녀로서 손에 어린 여자애를 데리고 큰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들 두 사람은 부부인 듯하였다. 남자는 곰 같이 탄탄한 어깨에 원숭이 같이 늘씬한 허리를 가졌으며 그 근골이 매우 강해 보여서 전신이 마치 하나의 근육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양쪽 광대뼈는 높이 솟았으며 입은 귀밑까지 찢어져 있어서 그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두렵게 하기에 족했다. 여자의 신체는 상당히 날씬했으며 검은 머리를 구름처럼 위로 말아올려서 옆에서 보면 상당히 아름다운 미부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정면으로 보면 그 부용꽃 같이 아름다운 얼굴 가운데에 약 칠 촌 남짓한 칼자국이 나 있었다. 이마의 머리가 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곧바로 미간을 가로질러서 비스듬히 입가까지 그어져 있었다. 그녀가 만약 얼굴 모습이 못생긴 데다가 이러한 칼자국이 나 있었다면 별 감흥을 주지 않았을 것이나 이처럼 예쁜 여자의 얼굴에 흉악한 칼자국이 나 있어서 부지불식간에 사람들로 하여금 약간의 두려운 의식을 만들게 했다. 음식점에 앉아 있던 호걸들의 담력은 하늘을 덮을 듯한 사람들이었으나 그들 두 사람을 본 후에는 가슴 속에서 찬바람이 스치는 듯한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다. 그들 부부 두 사람은 비록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족했으나 그들 손에 끌려 들어오고 있던 작은 여자아이는 도리어 천진난만하고 예뻐서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스러운 마음을 불러 일으키기에 족했다. 그 여자아이의 둥글둥글한 작은 얼굴에는 역시 둥근 두 눈이 나 있었는데 그 여자아이는 눈을 들어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불아이를 바라보고 갑자기 장난꾸러기 얼굴을 하면서 혀를 내밀고 히히거리고 웃었다. 불아이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저 계집애가 상당한 장난꾸러기 같군!"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저애보다 나을 게 없을 것 같은데!" 음식점을 가득 메운 호걸들이 모두 이들 부부 두 사람을 쳐다보았으나 그들 부부는 도리어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다만 그들의 딸을 어르면서 뭘 먹을 건가 뭘 마실 건가를 물을 뿐이었다. 마치 천하에 이 작은 딸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이.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갈수록 재미있어지는군요! 이상한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구요! 이 심양성이 이렇게 시끄러울 줄은 정말 몰랐어요." 심랑이 말했다. "당신은 저 두 사람이 누군줄 아시오?" 주칠칠이 말했다. "그러면 그들이 내가 누군줄 알까요?"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아가씨! 저 두 사람의 이름이 아마 당신보다 열 배 이상은 알려져 있을 거요."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날 무림 칠대고수도 별것 아니던데 그들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어요?" "아가씨! 강호에는 용이 숨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곳이오. 비록 오늘날과 같은 인재들이 드문 이 시점에서도 그 종적을 숨기고 나타내지 않을 기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거요. 그 칠대고수는 불과 기회를 잘 만나서 그들의 이름을 날린 몇 사람에 불과할 뿐이오. 칠대고수가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고 어떻게 무림계에 그들을 이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소." "좋아요. 어떻든 말로는 저는 당신을 이길 재간이 없으니. 그런데 저 두 사람이 도대체 누구죠?" "나도 모르오." 주칠칠이 화가나서 발을 구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없다면 저는 당신을 진짜 한대 물어주고 싶어요." 이때 갑자기 일진의 광소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는 사람의 귀를 울렸으며 마치 십여 명이 동시에 웃는 듯한 목소리였다. 음식점에 앉아 있던 여러 호걸들이 깜짝 놀라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 입구에는 칠팔 명의 대한이 비대하고 키가 큰 화상 한 명을 에워싼 채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 칠팔 명의 대한이 입은 옷은 모두 화려하기가 극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걸음걸이가 침착하고 두 눈에 형형한 빛이 발해지고 있어서 무림계에서 이름있는 인사들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 화상에 대해서 공손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이 뚱뚱하고 큰 화상은 상당히 꼴불견으로 못생겼다. 이러한 엄동설한에도 그는 몸에 무릎까지 내려온 승포를 걸쳤으며 그 속에는 짧은 체코 잠뱅이를 입고 악가슴을 풀어헤쳐서 그 비계덩어리를 밖으로 드러내놓고 있었다. 한걸음을 걸을 때마다 그 가슴에 붙어 있는 비계덩이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주칠칠은 눈살을 찌푸렸다. 불아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누나가 보건대 저 화상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 녀석아! 사람이 밥을 먹고 있는데 너 또 이상한 소리하면 안 돼. 이상한 소리해서 나 밥을 못 먹게 하면 네 가죽을 벗겨놓을 거야." 불아이가 말했다. "만약 저 뚱뚱이도 무공을 할 줄 안다면 그건 진짜 천지가 놀랄만한 일이 될거야. 걷는 것도 저렇게 숨을 헐떡거리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싸울 수가 있겠어?" 이 비대한 화상과 같이 온 칠팔 명의 대한은 확실히 교재의 범위가 넓었다. 음식점에 가득 찼던 호걸들이 그 칠팔 명의 대한을 보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웃음을 띠고 아는 체를 했다. 그 한 쌍의 부부만 여전히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남색장삼를 입은 형제 두 사람도 고개를 숙이고 먹고 마실 뿐 그들쪽으로는 눈 길 한번 주지 않았다. 철승룡이 그 쥐새끼모양의 대한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뚱보 화상은 누구죠? 혹시 아시는가요?" 쥐새끼 같은 대한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강호에서 약간이라도 이름있는 사람은 나 만사통(萬事通)이 한 사람도 모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생각이 나질 않는군요." 철승룡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틀림없이 강호에 무명소졸이겠죠?" 만사통이 신음을 하면서 말했다. "이것은 확실히......." 철승룡이 갑자기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엉터리 같은 인간! 그가 무명소졸이라면 진(秦)표두나 왕(王)표두, 송(宋)장주 같은 사람이 이처럼 공경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이오? 이것은 당신 눈이 멀었다는 증거요." 이때 음식점에는 객석이 꽉 차서 더이상 빈자리가 없었다. 팔구 명의 점원들은 머리에서부터 땀을 흘리며 그들을 접대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제대로 접대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음식점에서는 그 비대한 사람 한 사람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의 소리는 화상의 웃음소리 때문에 들리지도 않았다. 불아이가 입술을 삐죽이면서 말했다. "정말 꼴불견이군." 주칠칠이 말했다. "확실히 꼴불견이로군. 우리 아예......." 심랑이 말했다. "또 말썽을 일으키려는 거요?"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은 저런 사람 싫지도 않으세요?" 심랑이 말했다. "한 번 쳐다봐요. 여기에 있는 사람이 모두 그 사람을 싫어하고 있지 않소. 저쪽에 앉은 형제 두 사람이 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서는 곧바로 눈에 그를 잡아먹을 듯한 기색을 보이고 있소. 둘 중 그 형은 이미 몇 차례나 일어서려 했으나 동생에 의해서 제지당하고 있을 뿐이오. 저쪽에 부부 두 사람 또한 비록 화상쪽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의 표정도 이미 정상적이 아니오. 하물며 맞은편에 있는 철탑(鐵塔)과 같이 생긴 대한 또한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소. 다만 약간의 두려움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이 사람들이 조만간 참지 못하고 손을 쓸 거요.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기만 하면 되는 거지 하필 당신이 직접 손을 쓰려 하시오?" 주칠칠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나는 말로서는 당신을 이길 수 없으니까." 갑자기 그 화상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맞다. 맞소." 이때 또 두 명의 흑의 대한이 찌그러진 가죽모자를 쓴 남자를 양쪽에 낀 채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남자는 한눈에도 뒷골목의 불량배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이미 놀래서 얼굴색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두 명의 흑의 대한은 그를 비대한 화상 악으로 끌고 가더니 그 중 한 사람이 공손하게 말했다. "이놈의 성은 황(黃)이고, 별명은 황마(黃馬)라고 부릅니다. 듣건대 그 일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심양성에서 이 녀석만 그 일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얘기할 수 있답니다." 비대한 화상이 웃으면서 말했다. "좋다, 좋아. 우선 그 녀석에게 은자 백 냥을 줘라. 그 녀석이 마음놓고 말을 할 수 있도록." 즉시 한 대한이 나오더니 은자를 꺼내서 황마라는 자의 발 악에 집어던졌다. 황마는 눈을 똑바로 뜨고 비대한 화상을 바라볼 뿐 아무말이 없었다. 비대한 화상이 웃으면서 말했다. "말만 잘 한다면 또 상을 줄 거야." 황마가 숨을 내쉬고 나서 말했다. "소인은 황마라고 하는데 심양성에서 이미 십여 년이나 놀았습니다." 비대한 화상이 말했다. "간단히 말해. 잔소리는 필요없어." 그의 눈빛이 사방을 훑어보더니만 갑자기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크고 확실하게 또박또박 말하도록 해.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황마가 몇 번 기침을 하더니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심양성 북쪽은 원래 석탄이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심양성 부근에는 누구도 석탄을 캐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반 달 전에 갑자기 십여 명의 객상(客商)들이 와서 땅을 전부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심양성 밖에서 백여 명의 석탄을 캐는 인부들을 고용해서 지난달 십오일부터 석탄을 캐기 시작했어요. 반 달 동안 캐었으나 석탄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얼핏 들으면 하찮은 석탄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주칠칠과 심랑은 이 일이 심양성 부근에 최근에 발생했던 놀랄 만한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그 남자가 하는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황마는 슬며시 발을 뻗어서 그 앞에 놓여있던 은자를 자기쪽으로 끌어들인 후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리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이달 초하룻날, 다시 말해서 나흘 전인데 그들은 석탄을 캐지 못하고 다만 그 산기슭에서 돌비석 하나를 캐냈습니다. 그 돌비석에는 몇 마디 글이 씌어 있었는데......." 이렇게 말을 얼버무린 그는 잠깐 떠올랐던 만족스러운 표정은 이미 사라졌고 도리어 두려운 기색이 떠올라서 심지어 말소리마저도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몇 글자는 바로 '돌비석을 보고도 더 들어오면 지옥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음식점에 앉아 있던 호걸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그 표정들도 더욱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비대한 화상도 더이상 웃지 않고 말을 재촉했다. "그 몇 글자 외에 그 돌비석에는 다른 무슨 그림 같은 것이라도 조각되어 있지 않았소?" 황마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 글자들도 모두 일필일획이 한 대의 화살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 일백이십 대의 화살로 비로소 이런 몇 글자를 만들어냈다고 그럼니다." 호걸들은 서로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동시에 "화살?" 하고 가볍게 부르짖었다. 그 소리에는 놀라움과 이상함을 동시에 띠고 있었으나 모두가 그 화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는 기색이었다. 황마가 다시 숨을 몰아쉬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 석탄을 캐는 인부들 중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돌비석에 씌어 있는 글을 보고는 더이상 파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그들 객상은 이 돌비석을 보고 나서 얼굴에 상당히 기쁜 기색을 드러내면서 인부의 임금을 세 배나 올려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파들어가게 했던 겁니다. 그날 저녁 그 산기슭에서 하나의 석문(石門)이 발견되었습니다. 문에는 몇 개의 글자가 씌어 있었습니다. '한 걸음이라도 들어오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은 주사로 쓰여 있었으며 그 글귀가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족했습니다." 음식점에는 적막만 감돌았고 호흡소리가 이쪽 저쪽에서 들릴 뿐이었다. 황마는 계속 이어서 말했다. "석탄을 캐던 인부들이 이 몇 글자를 보고 나서는 도저히 더이상 파내려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객상들은 이미 이러한 일이 있을 줄 알기라도 했다는 듯이 술과 고기를 사들고 들어와서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그 인부들에게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 인부들이 실컷 먹고 마셔서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라온 다음에 객상들이 다시 한 번 그들을 재촉하자 인부들은 그 석문에 무슨 글자가 씌어 있든 관계하지 않고 문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안으로 한꺼번에 몰려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날, 그 다음날......." 비대한 화상이 예리한 목소리로 말을 재촉했다. "그 다음날 어떻게 됐다는 건가?" 황마의 이마에 다시 식은 땀이 배어 나오고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석문을 열어젖치던 첫날 저녁 들어갔던 사람들은 그 다음날이 되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정오에 그들의 처자와 부모가 모두 그곳에 몰려들어서 그 갱도 악에 모여서 통곡하고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그 통곡하고 부르짖는 소리는 멀리 성 안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며 그 처참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소인도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쓰라려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날 하오까지 그 갱도 속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는 손을 뻗쳐 식은 땀을 닦아낸 다음 계속 이어서 말했다. 이때에 이르러 그의 손은 더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후에 비교적 담이 큰 몇 사람이 서로 어울려 들어갔습니다. 들어가고 나서 그들은 비로소 먼저 들어갔던 사람들이 모두 그 석문 안에 있던 하나의 대청에 같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들 몸에서는 어떠한 상처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은 모습은 상당히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 눈알이 튀어나왔는데 그 눈알은 죽을 당시의 놀람과 공포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후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그들을 자세히 쳐다도 보지 못하고 소리지르면서 뛰쳐나왔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집안 식구들은 앞다투어 들어가려고 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말려 그만두게 했습니다. 결국 비교적 나이가 젊고 힘이 센 청년 몇 사람을 선출하여서 그 갱 속으로 들어가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메고 나와서 그 시체를 매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일째 된 날 정오에 나중에 들어가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메고 나왔던 그 사람들도 갑자기 죽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음식점 안에서 벌어진 일 황마는 비록 뒷골목의 불량배에 불과했으나 말 주변은 그리 사납지 않았다. 자초지종에 대해서 마치 그림을 그리듯 자세히 설명했다. 음식점에 앉아 있던 호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담력이 컸으나 이 말을 듣자 모두 손발이 차가워지면서 가슴에서 찬 기운이 일어남을 느꼈다.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술잔을 들고 고개를 하늘로 쳐든 다음 한 번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 비대한 화상의 옆에 앉아 있던 비쩍 마른 노인이 술잔을 들고 한참 동안 신음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너는 들어가서 시체를 메고 나온 그 사람들이 사흘째 되는 날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황마는 몇 차례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끝내 한 마디도 더 하지 못했다. 여러 번의 재촉을 받고 나서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들은 세번째 날 정오에 어떤 사람은 밥을 먹다가, 어떤 사람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 향불을 피우다가, 그리고 어떤 사람은 물을 긷다가, 어떤 사람은 뒷간에서 허리를 굽히고 앉아 일을 보다가 죽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그날 정오에 사방으로 흩어져있으나, 약속을 하지도 않았는데 동시에 귀신을 본 듯 갑자기 앉아있던 자리에서, 혹은 일어나던 자리에서 높이 뛰어 오르더니만 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온 몸이 뒤틀리고 꼬이면서 죽어갔습니다." 비쩍 마른 노인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땅' 하고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두 눈은 멍하니 대들보를 쳐다보고 있었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자시에 독을 만나서 오시를 넘기지 못하다니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하구나." 그의 눈에는 놀랍고 두려운 기색으로 가득차 있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내려놓은 술잔도 완전히 부서져버렸다. 주칠칠은 탁자 위에서 조심스럽게 심랑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얼굴색은 이미 파리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다만 불아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사람들이 정말 독에 중독되어 죽은 걸까요?" 비쩍 마른 노인이 말했다. "맞다.독! 독이야! 그 성문 안 어느 곳에나 모두 극독이 있었던 거야. 보통 사람은 그 성문이나 석벽 심지어는 중독을 당해서 죽은 사람들의 몸에 손만 닿아도 열두 시진을 넘기지 못하는 거지. 이처럼 무서운 독약은 노부가 이미 이십 년 동안 본 적도 없소." "그 독이 당신 자오최혼 막희(莫希)가 사용하는 독보다 더욱 무섭단 말이오?" 호걸들은 이 노인이 바로 현재 무림 열아홉 중독을 받은 암기를 사용하는 사람 중에 세번째로 이름이 올라있는 자오최훈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듣고 모두 얼굴색이 변했다. 그러나 막희는 웃으면서 말했다. "노부가 사용하는 독약은 그 성에 발라져 있는 독약과 비교한다면 어린애의 장난에 불과할 뿐이지요." 비대한 화상이 약간 눈썹을 찌푸렸다가 갑자기 광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했다. "여러분들이 본인과 같이 있기만 한다면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오. 그보다 더 독한, 더 대단한 독약이라도 내 눈에는 불과 밀가루 정도에 불과하오." 웃음을 멈추고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그 동굴 입구가 이미 막혔는가?" 황마가 말했다. "그 마동이 사흘 저녁 사이에 이백여 명을 죽였는데 누가 감히 그 입구를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심지어 이 심양성을 거쳐가는 사람들마저도 빙 돌아서 가는 실정입니다. 만약 누가 그 마동에 가서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곰의 심장을 먹고 표범의 쓸개를 먹지 않은 사람이고서는 반드시 미친 사람일 겁니다." 비대한 화상이 앙천대소하면서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가보고 싶어할 텐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모두 미친 사람이란 말인가?" 황마가 깜짝 놀라 얼굴색이 변하더니 털썩 그 자리에 꿇어앉아 머리를 땅에 찧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 소인이 한 말은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비대한 화상이 말했다. "빨리 꺼지지 못 할까?" 그는 마치 큰 사면이라도 받은 듯 무릎으로 몇 걸음 옮기더니 그 앞의 은자도 잊어버린 채 밖으로 뛰어나갔다. 불아이가 갑자기 몸을 날려 재주넘기를 하더니 손을 뻗쳐 은자를 집어서 그에게 던졌다.은자는 '땅' 소리를 내면서 이미 문 밖을 나간 황마 앞에 떨어졌다. 불아이는 얼른 자기 의자로 돌아와 앉으면서 히히덕거리며 말했다. "어렵사리 벌어들인 돈을 가져가지도 않다니!" 그곳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불아이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뛰어난 경공을 보이자 얼굴색이 변했다. 비대한 화상이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경공이 뛰어나구나. 누구에게 배운 것이지?" 불아이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말을 받았다. "우리 누나한테서 배웠어요." "누나한테서 배웠어? 그래 그래. 얘야 니 이름이 뭐냐?" "주팔 어르신이라고 불러요. 화상 아저씨는 뭐라고 부르시죠?" "하하, 좋은 이름이구나. 내 이름은 일소불이라고 한다.들어본 적이 있느냐?" 그는 크게 웃으면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불아이의 앞으로 걸어갔다. 발을 옮겨 놓을 때마다 전신의 비계덩이가 다시 출렁거렸다. 상당히 우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주칠칠과 심랑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일소불이 불아이의 면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방비를 하고 있었다. 오른손은 슬며시 불아이의 등을 받쳤다. 일소불의 비대한 몸이 번개같이 옆으로 날더니 불아이에게 덮쳐오지 않고 도리어 한편 구석에 앉아 있던 정씨 형제를 향해 덮쳐나갔다. 이 일 초는 확실히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소불이 쳐들어가는 기세가 비록 비호같이 빠르긴 했으나 정씨 형제들의 몸놀림도 결코 그에 못지 않았다. 남삼소년 정매가 몸을 한 번 웅크리고 그 앞에 있던 탁자를 발로 내지르자 탁자는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는 손을 돌려서 허리 부분에서 한 자루의 연검을 꺼내어 앞을 향해 한 번 흔들자 마치 그 연검은 살아 있는 것처럼 꽂꽂하게 펴졌다. 화복소년 정우는 광소를 하면서 말했다. "우리 형제가 너를 찾아가기도 전에 네가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구나." 두 사람의 신형이 번쩍이자 좌우로 일곱 척이나 갈라 섰다. 왼쪽의 신형이 공중에 떠 있을 때 탁자가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일소불은 피하지도 얼른 내려서지도 않고, 그렇다고 손을 뻗쳐서 막지도 않고 머리로 부딪쳐 나아갔다. 다만 '쿵' 하는 큰소리가 나면서 그 탁자는 완전히 부서져서 사분오열하였으며, 그에 따라 탁자를 이루었던 목탄과 술잔들 그리고 술안주들이 마치 폭우처럼 사방에 어지럽게 날았다. 일소불은 그 순간 그 탁자의 두 다리를 움켜잡고 대갈일성하며 두 팔을 뻗쳐서 정씨 형제들을 쓸어 나갔다. 그의 신체가 워낙 거대한데나 두 팔도 상당히 길었고, 여기에 탁자의 두 다리까지 더해졌으니 그의 공격이 미치는 범위가 어찌 일장에 그쳤을 것인가? 바람소리가 일어나며 음식점 안에 켜져 있던 촛불들이 꺼질 듯 말 듯 바람에 가물거렸다.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정씨 형제들은 일소불의 일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날려 그곳을 피했으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 일격의 위맹스러움에 놀라서 어떤 사람들은 얼굴색이 변하고, 어떤 사람은 갈채를 보냈으며,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정씨 형제들을 걱정했다. 그러나 어찌 그들의 신형이 '번쩍' 하면서 일소불의 겨드랑이를 빠져나갈 줄을 알았으랴? 그들이 만약 뒤로 물러서거나 했다면 비록 잠깐의 순간은 모면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반드시 일소불의 다음 공격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싸움의 경험은 극히 풍부하여, 적과 싸울 때 판단의 정확함과 신속함은 다른 사람이 쫓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위급한 순간에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내리지 못할 결정을 재빠르게 내려 물러서지도 피하지도 않고, 도리어 앞으로 지쳐 들어가면서 일소불의 겨드랑이 밑으로 가볍게 빠져나가 그의 등 뒤에 이른 것이다. 일소불이 이처럼 공격해 들어올 때 그의 겨드랑이 밑은 가장 허점이 많은 곳이었다. 일소불은 눈앞이 갑자기 허전해지며 정씨 형제의 모습을 잃어버린 순간 뒤에서 장풍이 공격해옴을 느꼈다. 정씨 형제들이 그의 겨드랑이로 빠져나간 다음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뒤집어서 일 초를 격출했던 것이다.이때는 바로 일소불의 공세가 발동하여서 가장 극에 이른 때여서 공격을 멈출 수도, 거기에서 발을 빼서 몸을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마침 중의 무공은 확실히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순식간에 왼팔을 구부리고 오른팔을 좌우를 향해 휘두르며, 동시에 왼다리를 약간 앞으로 굽히고 오른다리를 좌측으로 쳐나가자, 그 거대한 신형이 마치 풍차처럼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돌며 왼손으로는 탁자 다리를 잡고 팔을 굽혀 교묘하게 정매의 검을 막았으며, 오른다리로는 정우의 견갑골 부분을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방금 탁자 다리를 잡고 휘두르던 그의 공세의 위력은 감히 그것을 가로막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의 일 초의 차고 휘두르는 공격은 공수가 겸비된 것으로 무림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절묘한 초식이었다.그 공격 시간과 공격의 정확함, 그리고 날카로움은 극에 달하여서 조금도 오차가 없었다. 아무도 이처럼 비대한 몸에서 이처럼 교묘한 절초가 전개해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정씨 형제들은 냉소를 흘리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일소불의 신형이 바닥에 내려설 때 그들 형제는 이미 문 밖 멀리까지 뛰쳐나가고 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매가 냉소하면서 '싸울려면 나와봐라'고 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정우도 정매의 말을 받아서 말했다. "그가 이미 왔는데 나오지 않을까봐 걱정이냐?" 일소불이 공격을 하기 시작하고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쌍방의 초식은 모두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으며, 그 공격과 방어가 마치 전광석화와 같아서 경험과 무공과 지혜, 이 삼자가 정확하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그러한 절묘한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이때까지 멍하니 있다가 정씨 형제의 말소리가 점점 약해지다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일소불에게 갈채를 보내기 시작했다. 갈채 소리에 일소불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으나 정씨 형제들을 쫓아나가지는 않았다. 자오최혼 막희가 음침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회우쌍용검 밑에는 만만한 자가 없으니, 대사께서는 이후에 진짜 조심하셔야 할 것이오." 일소불이 갑자기 앙천광소하면서 말했다. "그 두 털도 안 마른 녀석들! 본인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일이 중요하지 않았다면 그 두 녀석이 도망갈 수 있도록 그냥 놔두었을 것 같소이까?" 그는 웃음소리를 갑자기 멈추고 사방을 쓸어보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심양성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이미 잘 들었을 거요. 만약 여러분들 중에 이 일 때문에 겁을 내시는 분이 있다면 여기서 나가주시기를 부탁드리오. 그러나 모두 그냥 계시면 본인이 여러분들과 환담이나 나누고 싶소." 주칠칠이 냉랭하게 말했다. "무엇을 믿고 나가라고 그러시는 거죠?" 일소불이 잠깐 그녀를 노려보더니 호탕하게 대소하며 말했다. "여시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여시주께서는 이 일 때문에 온 것은 아니라는 의미겠군요." 주칠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보기에는 힘만 있을 뿐 머리는 텅 빈 듯 보이는데, 심지가 이렇게 깊을 줄은 정말 생각밖이로구나. 과연 대단한 인물이로군!) 마음 속으로 이미 그가 무시못할 인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조금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냉랭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생각이 틀렸어요. 나는 바로 그 일 때문에 온 것이에요. 그 일 때문에 왔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흘낏 심랑을 쳐다봤다. 일소불의 눈도 심랑에게 옮겨졌다. 그러나 심랑은 한가하게 술잔을 들어올려 쩝쩝 입맛을 다시면서 술맛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이 속에서 그렇게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졌는데도 그는 한 번도 눈길을 돌리는 적도 없었다. 이러한 사람을 일소불은 확실히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멍하니 있다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소이다! 하하, 좋소이다." 그는 몸을 돌려 옆에 있는 탁자로 가서 말했다. "당신들은 어......?" 이 탁자에 앉아 있던 다섯 대한은 동시에 일어섰으나 얼굴색이 이미 변해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대사께서 질문하시는 건......." 그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일소불이 손을 뻗쳐서 그를 잡으려고 덤벼들었다. 그는 일소불이 손을 뻗쳐서 자신을 잡으려는 것을 명백하게 보면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피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그 대한은 일소불의 손에 잡혀 높이 쳐들려졌다가 '텅' 소리를 내면서 탁자 위에 내팽개쳐졌다. 술과 안주 그릇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나머지 네 명의 대한들은 놀랍고 분노가 교차하는 가운데 소리지르면서 덤벼들었다. "너......." '너' 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다만 '팍팍' 하는 소리들이 들리면서 이 네 명의 대한의 얼굴에 이미 각각 한 장씩 맞아서 순식간에 양쪽 볼이 부어오르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일소불이 웃으면서 말했다.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다시 예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를 처리하는 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렇지만 너희들 같이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들이 끼어든다면 일을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더 많아. 빨리 꺼지지 못할까!" 네 사람은 그 쓰러진 대한을 부축하고 일어서서 걸어나갔다. 그들 다섯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어떤 사람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어떤 사람은 한숨을 쉬면서 누군가의 가자는 소리에 따라 고개를 숙이고 나가버렸다. 일소불은 다시 몸을 또다른 탁자로 돌렸다. 이 탁자에는 네 명의 대한이 앉아 있었는데, 이미 눈을 크게 뜨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일소불의 공격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소불이 그들에게 접근하자 네 명의 대한이 동시에 일소불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여덟 개의 밥그릇만한 주먹들이 어지럽게 일소불의 얼굴을 향해 짓뭉개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소불은 앙천대소하면서 왼손으로는 한 대한의 옷을 움켜잡고, 오른손으로는 다른 한 대한의 어깨를 탁 치자 그 대한은 그 자리에서 두 바퀴를 돌고 쓰러졌다. 그 쓰러지는 순간 일소불은 다시 팔굽으로 그 대한의 머리를 가격했다. 또 한 대한은 배를 움켜잡고 몸을 구부린 채 낑낑거리기 시작했으며, 남아 있는 한 대한은 그의 발에 맞아 날아 올랐다. 그리고 정확하게 심랑과 주칠칠이 앉아 있는 탁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때 심랑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을 흔들자, 그 대한은 그의 이 가벼운 일 초에 다시 탁자에서 옆으로 날아가 안전하게 바닥에 내려섰다. 그는 놀랍고 기쁘고 또 감사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려 심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심랑은 여전히 술잔을 들고 술맛을 보고 있었으며,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상관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일소불이 눈썹을 찌푸리며 대갈일성하면서 왼손에 움켜잡았던 대한을 집어 던졌다. 바람소리가 '휭' 일어나며 등불이 깜박거리다가 꺼졌다. 옆 탁자에 앉았던 한 대한이 돌연 대갈일성하며 벌떡 일어서더니 두팔을 벌려서 그 날아오는 대한을 받아내렸다. 대한을 받아내면서 비록 다리가 약간 비틀거렸으나 곧 우뚝 서서 신형을 안정시켰다. 그 사람은 바로 신창세조운 철승룡이었다. 만사통은 갈채를 보내기 시작했다. 일소불이 대소하며 말했다. "사람들이 철승룡을 하복채 일의 허한이라고 하더니 오늘 보니 확실히 헛되이 전해진 말은 아니었군요." 철승룡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대사께서 저의 보잘 것 없는 이름을 알고 계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철승룡과 같은 인물은 본인이 잘 대접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일소불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봤다. 음식점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이미 그의 성세와 무공에 겁을 내어서, 열 사람 중 일곱 사람은 이미 몸을 비켜서 몰래 빠져나갔다. 일소불이 통쾌하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영웅들이겠죠. 그렇지만 본인은 모두 시험을 해봐야 될 것 같소."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만사통의 얼굴에 멈춰졌다. 만사통이 마른 웃음을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옆 탁자에 앉아 있는 두 분 중 자색 옷을 입은 사람은 통주일패(通州一覇) 황선호이고, 꽃무늬가 있는 옷을 입은 사람은 그의 의붓아들 소패왕(小覇王) 여광(呂光)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 옆은 발설쌍도장(發雪雙刀將) 팽립인(彭��人)이고 또 진산장(震山掌) 황보숭(皇甫嵩), 한지무환(恨地無環) 위패(李覇), 유화봉(遊花蜂) 소모운(簫慕雲)입니다. 그리고 빈 담뱃대를 빨고 있는 저 분은 바로 양하(兩河)에서 점혈명가(點穴名家)로 이름난 왕이마자(王二麻子)입니다." 그는 이들 무림 인사들을 마치 그의 집 안에 숨겨놓은 보석을 헤아리듯 차례로 소개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그가 모르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일소불이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말했다. "좋소. 그리고......." 만사통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쪽 탁자에 앉아 있는 두 분은 세온후 손통(孫通) 손 대협과 은화표 승형 승대관(勝大官)입니다. 그리고 소인은 만시숭(萬詩崇)인데 사람들이 부를 때 만사통으로 부르죠. 그리고 저쪽 탁자에 앉아 있는 아가씨는 활재신 주씨 가문의 천금 아가씨가 아니면은 바로 강남 해씨 가문의 아가씰 겁니다. 저쪽에 앉아 있는 부부는 어떤 분들인지 알 수가 없군요." 일소불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오. 과연 만사통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군요. 후일 본인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당신과 같은 견식이 풍부한 사람이 반드시 필요할 날이 있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대화상께서 그렇게 추켜세워 주시다니......." "승대관, 술을 드시죠." 그가 갑자기 탁자를 내려치자, 그 탁자에 있는 술잔이 하늘로 날아올라 곧바로 승형의 앞으로 날아갔다. 승형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주시는 술 고맙게 받겠소." 손을 뻗쳐 내리자 그의 술잔이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의 손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고개를 쳐들고 단숨에 술을 들이키고 나서 잔을 일소불에게 내보였다. 이 사람은 나이가 어리고 용모가 뛰어났으며 선비냄새가 철철 흘러내려, 얼핏보면 부자집 연약한 공자와 같은 모습이었으나 무공의 뛰어남은 확실히 일반 범부(凡夫)와는 다른면이 있었다. "좋소이다, 좋소이다. 손 대협! 본인은 당신에게도 한 잔 권하고 싶소." 그가 탁자를 내리치자 또 하나의 술잔이 곧장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세온후 손통에게 날아갔다. 이 손통이라는 사람 역시 영준한 소년으로 그 미간에 오만한 기색이 약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술잔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손을 뻗치지도 않고 갑자기 입을 벌려서 그 술잔을 물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쳐들고 단숨에 술잔 속에 들어 있던 미주(美酒)를 삼켰으나, '팍' 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술잔은 그가 받아 내는 순간 이미 부서져버렸던 것이다. 비록 그의 빠르고 정확하기는 했으나, 내력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여 술잔이 깨졌던 것이다. 손통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했으나, 다행히 일소불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백조는 까마귀와 같이 날지 않는다더니. 그곳에 앉아 있는 네 분은 과연 모두가 영웅이군요." 손통은 그가 자기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일소불이 낮은 목소리로, '만약 입술이 터졌다면 빨리 술로 씻어내시오.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하고 말할 줄이야. 손통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가르쳐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소불이 고개를 쳐들고 크게 몇 번을 웃더니만 다시 몸을 번쩍 날리자 두 줄기의 바람소리가 공중에서 퍼져나왔다. 그는 언제인지 두 자루의 젓가락을 손에 갖고 있다가, 이때 쇄수전 중에 이룡창주라는 수법으로 곧장 소패왕 여광의 다리를 향해 날려보냈던 것이다. 여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약간 뛰어올라서 그 두 자루의 젓가락이 그의 다리의 격혈에 닿을 듯한 순간 두 다리를 잽싸게 굽히면서 공중에서 계속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자 두 자루의 젓가락은 오 척 높이로 뛰어올라 공중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여광은 번개같이 손을 내뻗어 그 젓가락을 손에 움켜쥔 다음 몸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그 젓가락으로 닭고기를 집어서 입 안에 넣고 말했다. "젓가락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의 얼굴은 붉어지지도 않았고 숨을 헐떡이지도 않았다. 그가 보인 이 초식은 바로 그의 담력과 허리힘과 다리힘 그리고 손의 힘이 조금도 부족하거나 지나침이 없어야만 비로소 실현이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초식을 행할 때 보여준 경공도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 모습을 보자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통주일패 황화호는 안색을 침중하게 가라 앉히면서 온 신경을 집중하여, 일소불이 그에게 다가와서 자신을 실험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일소불이 도리어 크게 웃으면서 말할 줄이야. "자식이 이럴진대 그 아버지야 시험해 보나마나겠지요." 일소불은 말을 마치자 그를 지나쳤다. 황화호은 크게 숨을 내쉬며 남이 모르게 식은 땀을 훔쳐냈다. 일소불은 큰 걸음걸이로 발설쌍도장 팽립인 면전에 이르러서 그를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더니 갑자기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벽화산(��劈華山)." 팽립인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비로소 일소불이 입으로 초식을 말하여서 자기의 도법(刀法)을 실험하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도법에 침잠하기 수십 년! 마치 시험관이 제시한 문제가 자신이 어젯저녁 본 책 속에 있는 시험문제를 냈을 때 의기양양하게 곧바로 알아맞추는 것처럼 팽립인은 얼굴을 펴고 웃으면서 말했다. "왼쪽으로는 봉황단전시(鳳凰單展翅)를 전개하고, 오른쪽으로는 설화개정문(雪花蓋頂門)을 전개하면 됩니다." 이 일초양식은 공수를 겸비한 것으로서 과연 팽립인은 도법의 명가라고 하는데 부끄러움이 없을 만했다. 일소불이 곧 이어서 말했다. "오강벌개." 팽립인이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즉시 대답했다. "왼쪽으로는 옥대난요(玉帶欄腰)를 전개하고, 오른쪽으로는 현조획사(玄鳥劃沙)를 전개합니다." 이 두 초식 역시 하나는 공격의 초식이고, 하나는 방어의 초식으로서 쌍도도법(雙刀刀法)의 정수를 그대로 지닌 것이었다. "눈에 보이게는 발초심사(撥草尋 )를 전개하고 보이지 않게 암암리에 독사출혈(毒 出穴)을 전개합니다." 도법 중에 발초심사라는 일 초는 장도(長刀)를 마치 지렁이가 꿈틀거리듯 꿈틀꿈틀하는 기세를 반복하여서 공격해 들어가는 초식으로서, 그 변화가 상당히 복잡하지만 부드러운 기세를 잃어서는 안 되는 초식이다. 그리고 독사출혈은 도리어 정면으로 곧장 공격해 들어가는 것으로서 신속하기가 비할 데 없이 빨라야 하며, 사용하는 방법은 바로 도법 중에 극히 드물게 보는 제(制) 자결(字訣)이다. 이 두 초식이 비록 한 사람에게서 실현되지만 공세는 상당히 강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서, 상대방이 이를 파악해내지 못하거나 약간의 실수를 저지를 경우, 아주 돌이킬 수 없는 비참한 결과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팽립인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좌측도로는 여봉사폐(如封似閉)를 전개하고 우측도로는 완저생화(脘底生花)를 전개합니다. 만약 그래도 그 공격을 받아낼 수 없다면 쌍도를 십자모양으로 비스듬하게 엇걸어서 공격을 받아냅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좋아요. 나도 완저생화로 당신을 공격하면 어떻게 하겠소." 팽립인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 공격을 받아내는 방법을 말하자 일소불이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일소불은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빨라지고 있었다. 삼 초가 지난 후 팽립인은 이미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다시 입벽화산을 전개하겠소. 당신은 방금 고수반금 일수를 전개했으니, 지금은 다시 운화개정(雲花蓋頂)이라는 초식은 전개하지 못할 것이오." 팽립인이 눈썹을 찌푸리고 수염을 어루만지며 차 한 잔 마실 동안 생각을 하다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왼쪽으로는 조천일주향(朝天一炷香)을 전개하고 오른쪽으로는 귀문삼격랑(龜門三擊浪)을 전개하여 당신을 공격하면 반드시 그 공격도 받아낼 수 있을 것이오." 일소불이 미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소. 휘수봉후(揮手封喉)를 전개하오." 팽립인이 식은땀을 훔치고 얼굴을 펴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이미 당신의 아랫배를 공격했으므로 당신은 반드시 뒤로 물러서야만 할 겁니다. 어찌 다시 휘수봉후 초식을 전개하여 공격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른 사람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본인은 가능하오. 보시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서 팽립인의 허리 위에 비스듬히 차고 있던 장도를 뽑아내어 입벽화산이라는 초식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초식을 완전히 전개하기도 전에 마치 습격을 받은 듯 돌연히 아랫배를 뒤로 향해 움츠렸다. 어깨도 다리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뒤로 약 일 척 가량 배를 잡아 빼는 것이었다. 일소불은 갑자기 도의 끝을 반전시키면서 과연 휘수봉후라는 초식을 전개하여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번쩍이는 도검이 곧장 팽립인의 목을 향해 지쳐 들어왔다. 그러나 그 도검이 그의 피부에 닿을락말락 하는 순간 그는 공격을 멈추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보기엔 어떻소?" 팽립인은 얼굴 가득히 뿜어져 나온 땀을 줄줄 흘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사께서 만약 진짜로 이 일 초를 사용해서 공격해 들어온다면 소인의 머리통이 이미 없어졌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비참해 필요는 없소. 당신의 도법도 이미 무림의 일류 고수 수준이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본인이 완저생화라는 초식을 전개할 때 이미 목숨을 바쳤을 것이오." '창' 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 장도는 다시 칼집 속으로 들어갔다. 일소불은 팽립인을 다시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황보승에게로 다가갔다. 팽립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두 다리가 떨리고 흐물거렸으며, 몸이 차가워오는 기분을 느낄 뿐이었다. 이미 그가 흘린 땀이 옷을 적시고 있었는데 찬 바람이 불어오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발설쌍도라는 이름이 무림계에 알려진 이후 팽립인이 그의 도법으로 어찌 수십 수백 차례만 다른 사람과 결투를 했겠는가? 그러나 그 숱한 전투보다도 오늘 일소불과 겨뤘던 입을 통한 싸움이 놀라움이나 위급한 상황 혹은 긴장하는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싸움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진산장 황보숭, 한지무환 위패, 유화봉 소모운 세 사람은 마치 서로 의논이 있었던 듯, 일소불이 그들의 면전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이패가 갑자기 몸을 돌려 뛰어나가서 정원에 있는 커다란 청석을 들어올렸다. 청석은 음식점에 있는 탁자만한 크기였는데 그 무게는 소 댓근은 족히 나갈 듯했다. 만약 천성적으로 강한 힘을 지니지 않았다면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할 수 없는 그러한 크기였다. 그러나 이패는 이 청석을 번쩍 머리꼭대기 위로 들어올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왔다. 호랑이 등과 곰의 허리와 같은 아주 굳세보이는 신체에 두 팔의 근육이 불끈불끈 튀어져 나왔다. 그에게서는 마치 패왕의 기개가 뿜어져 나오는 듯 보였다. 진산장 황보숭이 '대단한 힘이로군' 하고 가볍게 갈채를 보내는 순간 몸을 날려 빠른 일 장을 날렸다. 다만 돌과 나무가 부딪치는 듯한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 청석에는 장풍에 맞은 자리가 나고, 돌부스러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그 거석은 바람소리를 동반한 채 정원 밖으로 날아갔다. 유화봉 소모운의 신형이 약간 구부러지는 듯하더니 곧 펴지면서 그의 비쩍 마른 몸이 갑자기 활을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그 날아가는 돌을 향해 쏘아져 나아갔다. 거석의 날아가는 속도가 빨랐으나 그의 몸이 날아가는 속도는 거석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는 순식간에 날아가는 거석을 쫓아가 손으로 가볍게 그 거석을 받쳐들었다. 그러나 그의 다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몇 번을 펄쩍펄쩍 뛰더니 그 위의 거석을 받쳐들고 담장 뒤로 사라졌다. 차 한 잔 마실 만한 시간이 지나서 멀리서 '펑' 하는 소리가 들리고, 또 차 한 잔 마실 만한 시간이 지나서 소모운이 마치 제비처럼 돌아왔다. 그는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고, 숨도 헐떡이지 않았다. 그는 포권을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 돌이 정원에 있으니 참 보기가 싫더군요. 그래서 제가 황보 형의 일장에 힘을 빌어서 그 돌덩이를 집 뒤 쓰레기 더미에 갖다 놓고 왔습니다." 그 쓰레기 더미는 적어도 이곳에서 백여 장 이상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유화봉 소모운이 단숨에 그 거석을 그곳까지 옮겨 놓은 것은, 약간의 남의 힘을 빌려 자기의 힘을 사용함과 동시에 약간의 기교를 피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신법의 빠름과 그 힘의 적절한 사용방법은 이미 강호의 일반 무사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 할 수준이었다. 한지무환 이패의 그 역발산 기개세와 진산장 황보숭의 장력과 더불어 막상막하라고 할 수 있는 재주였다. 일소불이 미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세 분이 비록 사용한 무공은 서로 다르나 한 가지 일을 해냈군요. 세 분 모두 각자 절묘한 수법을 사용한 것을 알겠소. 이 형은 힘을 조금 더 많이 쓰셨고, 소 형은 여기에 경신법을 약간 더했소. 그러나 만약 사람과 직접 싸움을 하게 된다면 역시 황보 형의 무공이 가장 쓰임새가 많으리라고 생각되오." 이패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면서 고개를 돌렸다. 일소불의 말에 불복하는 그러한 기색이었다. 소모운이 손을 뻗어 황보숭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마치 뭐라고 말하려는 듯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갑자기 빈 담뱃대를 사용한 전혈수법으로 양하 연한에 이름을 떨친 왕이마자가 대소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대사의 판단과 평가는 확실히 명가의 판단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소. 그렇지만 본인이 보건대 황보숭의 장력은 사람과 싸울 때는 별 가치가 없을 것 같소." "무슨 의미시오?" "그의 장력은 비록 강하긴 하지만 투박할 뿐 정교하지는 못하오. 방금 그가 격출해 낸 장력에 의해 부서진 돌덩어리들은 그 크기가 일정하지 않소. 그리고 그의 장력을 맞은 거석도 상당히 흔들흔들 불안한 모습을 보였소. 이를 통해서 볼 때 그의 장력이 아직 부족하며 더욱이 그의 장력을 사용하는 무술은 기껏해야 십의 오륙 정도의 수준밖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소." 황보숭의 안색이 약간 변했으나, 왕이마자의 명확한 분석과 용의주도하고 예리한 관찰력에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소불이 미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한다면 왕 형 당신의 일 장은 황보 형의 수준을 능가할 수 있단 말이오?" 황보숭도 예리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도 마침 가르침을 받고 싶었던 참이오." 왕이마자가 몸에 걸치고 있던 겨우 무릎까지 오는 황토색 옷을 툭툭 털고 탁자 모서리에 담뱃대를 몇 번 턴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초췌하여 누렇게 뜬 얼굴에 세모꼴 눈 , 그리고 입가에는 산양 같은 수염이 달린 초라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는 똑바로 서 있기도 어려운 듯 몸을 비틀비틀 흔들면서 황보숭의 면전에 다가와 미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일 장을 공격하여 시험해 보시오." 황보숭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인의 장력은 정교하지 못하여 만약 실수로 당신을 부상시키면 어떻게 하란 말이오?" 왕이마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설혹 나를 죽인다 해도 내 자신이 재수없었다고 생각하겠소. 당신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식구도 없으니 내 후대를 이어가게 할 사람도 없소. 더욱이 나를 대신해서 복수할 사람은 없으니 그점은 안심해도 좋소." 황보숭이 눈을 돌려 사방을 돌아보고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이 말은 이 양반이 직접 한 말입니다. 여러분께서 모두 증언을 해주셔야 할 겁니다." 그는 일성대갈하고 수염을 흩날리면서 일 장을 빠르게 격출해 냈다. 장풍이 '휭휭' 소리를 내면서 곧장 왕이마자의 가슴과 배 사이로 지쳐 들어갔다. 그 위력의 대단함은 드물게 보는 것이었다. 왕이마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공격이오." 그는 손을 내려뜨려서 손바닥을 앞으로 향해 지쳐 맞받아나갔다. 소천성(小天星)의 장력으로 곧바로 황보숭의 공격을 맞받아나가는 것이었다. 쌍장이 서로 부딪쳐 '펑' 하는 소리가 나면서 진산장 황보승의 비대한 신형이 뒤로 몇 걸음 쿵쿵 물러서서, 가슴이 쉴 새 없이 들썩거리면서 왕이마자를 한참 쳐다보더니 갑자기 입을 벌려 선혈을 내뿜었다. 소모운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황보숭 당신!" 소모운이 얼른 쫓아가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황보숭은 그의 손을 부리치고 발을 구른 다음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나갔다. 소모운은 그를 쫓아서 밖으로 뛰어 나가려는 듯한 태도를 취하다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 뿐 움직이지는 않았다. 일소불이 대소하며 말했다. "물건을 알아볼 줄 모르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고, 물건을 구별할 줄 모르는 게 두렵다더니만. 왕 형 ! 본인의 눈을 다시 한 번 크게 뜨게 했소." 왕이마자는 일 장으로 적을 격출한 다음 여전히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수염을 쓰다듬고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좋은 말씀이야. 다만 대사께서 사람을 물건에 비교하니 약간 듣기 거북할 뿐이오." 이때 그 음식점 안의 수라장인 모습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탁자와 의자, 그릇, 술잔들이 깨지고 부서져 바닥에 가득히 널려 있었다. 다만 주칠칠과 그 부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탁자만이 여전히 안전하여 조금도 손상을 받지 않은 정도였다. 사신이 밤에 활을 쏘네 이때 심랑은 술잔을 들고 여전히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 한가로운 태도는 마치 모든 일들에 대해서 간섭하기를 싫어하고 반항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의 모든 일에 방관하는 듯한 태도는 기이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생활에 대해 이미 흥미를 상실했다는 표현보다는 모든 일에 자신이 있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듯한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주칠칠은 홀린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그 부부 역시 웃음을 띠고 그들의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녹색옷을 입은 작은 계집아이는 수시로 고개를 돌려 불아이를 쳐다보고 혀를 쑥 내밀어 장난을 치곤 했다. 그러나 불아이는 못 본 척 무시하고, 가끔 눈썹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는 등 다 큰 어른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 여섯 사람은 마치 자기들만의 세계에 있는 듯 다른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일소불이 그 부부에게 걸어갔으나 두 사람은 여전히 보지도 듣지도 못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칠칠이 낮은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저 비대한 화상이 저들 부부 두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은 아마 그 자신이 욕보려고 그러는 것이겠지?" 그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모두 일소불과 그 부부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들의 얼굴에는 일소불이 도대체 어떻게 이 두사람을 상대할 것인가, 그리고 또 어떻게 충돌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려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일소불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먼 곳에서 일련의 처참한 부르짖음이 들려올 줄이야! 그 부르짖음은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어떤 것은 가까운데서, 어떤 것은 먼 곳에서, 또 어떤 것은 왼편에서, 또 어떤 것은 오른편에서, 어떤 것은 바로 이 여관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 처참한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일소불이 나는 듯이 창 앞으로 달려가서 한 손으로 창문을 열어젖치자 일진의 광풍이 눈보라를 동반하고 쏟아져 들어왔다. 그에 따라 겨우 남아 있던 몇 개의 등불도 꺼져버렸다. 그 캄캄함 속에서 멀리서 일진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달빛이 내 무덤을 비치네. 강호인들아! 탐욕스러운 마음을 갖지 마라. 심양성에 들어오면 반드시 이 성 중에서 죽게 되나니." 그 노랫소리는 처량하고 표표하게 들렸는데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뛰엄뛰엄 들려왔다. 이 끝이 없을 것 같은 혹한과 어둠 속에서 마치 어떤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듯했다. 그 노랫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한참이 지나서 일소불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쫓아라!" 그 소리에 이어 어둠 속에서 일진의 옷깃 스치는 소리가 일어나며, 많은 홀쭉한 그림자들이 창을 뛰어넘어 밖으로 달려나갔다. 일소불은 앞장서서 제일 앞에서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옆에서 '쏴' 하는 소리가 몇 번 들렸는데 서너 사람의 그림자가 자신을 앞질러 달려나가는 듯했다. 달은 구름에 가리워져 천지는 어둡고 바람은 거세고 눈보라가 그들 앞으로 휘몰아쳐왔다. 일소불도 그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몇 사람의 모습은 서너 번 오르락내리락하더니 갑자기 멈추어 서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마치 무엇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 앞에까지 달려가서야 일소불은 비로소 이 세 사람이 바로 심랑과 그 부부 두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 앞의 눈 위에는 칠팔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그 시체는 조금 전에 음식점을 몰래 떠났던 무림인사들이었다. 이 사람들의 신형은 뭉뚱그러져 있었는데 동쪽으로나, 서쪽으로 널려져 있었다. 마치 갑작스런 습격에 반항도 한 번 해보지 못한 채로 죽은 것처럼....... 일소불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누가 손을 쓴 거지? 정말 빠른 수법이로군." 눈 깜짝할 순간에 칠팔 명의 무림인사들을 모두 죽일 수 있는 사람이란, 그가 어떤 방법을 사용했든지 간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눈앞에 쓰러져 있던 시신들 중에 한 사람이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대한은 손에 작은 계집아이를 껴안고 손뼉을 치면서 기쁜듯이 말했다. "아, 한 사람이 아직 죽지 않았군." 심랑은 그 사람을 일으켜 앉히고 오른손을 등 뒤에 대고 진기를 밀어넣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미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나, 심랑이 진기를 밀어넣음으로 인해 약간의 생기가 돌아오는 듯 깊게 숨을 몰아 쉬더니 손가락을 떨면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가운 화살......." 심랑이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화살이오? 어디서 날아온 거죠?" "그 화살은......." 그 사람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더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손을 축 늘어뜨렸다. 그 사람의 몸은 이미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비록 신선이 온다고 해도 그 사람을 구할 수는 없을 듯했다. 보통 사람이 죽은 후에는 비록 이처럼 추운 곳에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혈액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야 차가워지는 법인데, 이 사람은 죽자마자 곧 몸 전체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심랑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누구 불을 가진 사람이 있소?"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심랑이 불을 찾자마자 곧 몇 사람이 횃불을 밝혀 들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꺼질 듯한 횃불 아래서 그 죽은 사람의 얼굴을 살펴보는 그는 얼굴 가득히 놀라움과 두려움을 띤 채 두 눈이 붉어져 나오고, 얼굴은 이미 검은색으로 변해있었으며, 전신이 부스럼투성이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말할 수 없는 공포심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은 모두 차가운 숨을 불어내면서 다만 자오최혼 막희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독이로군. 무서운 독을 바른 암기로군." 일소불이 몸을 굽히고 두 손으로 죽은 사람의 옷깃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그 사람의 전신이 모두 검게 변했으며 부스럼이 다닥다닥 돋아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슴의 상처 자국은 화살촉 만큼 작았으며 거기에서 시커먼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진실로 피인지 아니면 고름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그 상처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어떠한 암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몇 구의 시체를 살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모두 일종의 상당히 강한 독을 바른 암기에 부상을 당한 듯했으나 그 암기는 찾아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바라볼 뿐 할 말을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갑자기 '딱딱'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이 추위 속에서 부딪치는지 몰라도 사람들이 이 이빨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소불이 한숨을 쉬면서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이미 보았을 것이오. 이 사람들이 도대체 어떠한 암기에 부상을 당한 건지 아시는 분이 있소?" 심랑이 말했다. "이 상처를 보면 아마 화살에 부상을 당한 것 같소." 막희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화살! 그렇다면 화살은 어디 있다는 거요?" 일소불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화살을 쏜 사람이 이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시 화살을 뽑아가지 않았다면 그 화살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오? 그렇지만 사람을 죽인 다음에 화살을 다시 뽑아가는 것도 상식에 상당히 어긋나는 일이오." 갑자기 그 처량한 노랫소리가 다시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차가운 달빛이 내 무덤을 비추네. 사신이 밤에 활을 쏘네. 등불을 밝혀 들고 화살 끝의 새털을 찾지만, 이미 핏속에 녹아들어가 버린 것을......." 일소불이 대갈했다. "쫓아라." 그러나 그 노랫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홀연히 앞에서 나는가 하면 다시 뒤에서도 들리는 듯하고, 좌측에서 나는가 하면 홀연히 우측에서도 나는 것 같아 누구도 어느쪽에서 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 노랫소리를 쫓아간단 말인가? 일소불이 노랫소리를 듣고 '쫓아라' 하면서 일어섰으나 그 자신도 멍청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갑자기 '와' 하는 소리가 나면서 녹색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작은 손을 들어서 멀리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귀신! 귀신! 저쪽에 귀신이 있어요. '번쩍' 하더니 사라져버렸어요."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인 대한이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정정(亭亭)! 두려워하지 말아라.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단 말이냐?" 말은 비록 그렇게 했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딸아이의 작은 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서 눈을 돌렸다.그러나 그곳에는 짙은 어둠만이 깔려 있고 찬 바람만이 휘몰아치고 있을 뿐이었다. 일소불이 앙천광소하면서 말했다. "귀신장난을 하는 녀석들은 기껏해야 어린애를 놀라게 할 수 있을 뿐이오. 본인은 귀신이라는 것을 믿지 않소. 갑시다! 배짱이 있는 사람들은 나를 따라서 같이 갑시다.가서 그 녀석의 소굴을 뒤집어 엎어서 도대체 그 녀석이 어떤 물건인가 살펴보도록 합시다." 왕이마자가 침착하게 말했다. "만약 같이 가볼 배짱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여기서 이 작은 여자아이를 따라서 뱃전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그의 말은 아주 날카로웠으나 다른 사람들은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슬며시 빠져나갔다. 그 대한은 그의 딸을 그의 아내에게 넘기면서 말했다. "당신은 애를 데리고 돌아가시오. 내가 한 번 같이 쫓아가보겠소."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반면미부(半面美婦) 말했다. "당신이 그애를 데리고 가세요. 제가 쫓아가겠어요." 그 대한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아이고, 당신 하필 또 어떻게......." 정정이 큰소리로 울면서 말했다. "저는 아빠도 필요하고 엄마도 필요해요. 두 분 다 저랑 같이 돌아가요." 그 대한은 눈썹을 찌푸리며 탄식을 했다.그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구슬르고 어르고 달래도 아이는 그를 다른 사람과 같이 귀신을 쫓아가게 놔두지 않았다. 그 대한은 평상시에는 성격이 불같이 격했으나, 이 딸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 듯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던 심랑이 말했다. "두 분께서는 따님을 데리고 같이 돌아가도록 하시죠. 사람을 쫓아가는 일이 따님을 놀라게 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따님을 놀라게 하고 나서 그 사람을 쫓아가 비록 약간의 수확이 있다고 해도 그게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 대한 부부의 눈에 감격하는 기색이 드러나 보였다. 정정이 말했다. "그래도 역시 이 아저씨가 제일 좋아요."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반면미부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세 사람이 같이 돌아가도록 하죠." 그녀는 눈을 치켜뜨고 왕이마자를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누가 만약 우리가 두려워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흠흠......." 그녀가 섬섬옥수를 한 번 휘두르자 어찌된 일인지 왕이마자가 손에 들려 있던 담뱃대가 그 여인의 손에 옮겨져 있었다. 반면미부는 그 담뱃대를 부러뜨려서 땅 위에 내팽개치더니 남편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서 왕이마자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왕이마자가 강남이북을 횡행하기 수십 년, 심지어 꿈 속에서도 손에 가지고 있던 담뱃대를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순간 그는 멍청한 상태로 서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부부 두 사람이 멀리 사라진 다음에도 화낼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소불이 말했다. "빠르군, 정말 빨라. 이렇게 빠른 손은 내가 사십 년 동안 불과 한두 사람 봤을 뿐인데......." 왕이마자는 이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마른 기침을 하더니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 여자는 불과 손발이 약간 빠를 뿐이오. 본인이 만약 여자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이미......." 그는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고 애를 썼으나 끝까지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줄 것이라는 말만은 입밖에 낼 수 없었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손발이 빠른 데 불과할까요? 제가 보건대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던데요." 왕이마자가 가슴에 가득찬 분노를 발산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부릅떴다.그의 얼굴 가득히 덕지덕지 피어 있는 곰보닥지들도 번들거리는 듯했다. 그는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손발이 약간 빠른 것에 불과하지 않다면 또 무슨 재주가 있단 말이오." 그러나 심랑은 화를 내지 않고 웃음을 띠면서 땅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를 보시오."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심랑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부러진 두 개의 담뱃대가 흔적도 없이 땅 속으로 들어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눈이 온 지 며칠이 지났기 때문에 지상에는 윗부분에 약간 부드러운 눈이 있을 뿐 그 밑은 쇠보다도 더 단단하게 얼어붙어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여자가 힘도 들지 않는 듯 가볍게 휘저은 손짓에 일 척이나 되는 부러진 담뱃대 두 자루가 땅 속에 꽂혀 들어가서 흔적도 없어진 것은 확실히 사람을 놀라게 할 만했다. 사람들이 친히 목격하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일이었다. 왕이마자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이것은......." 그는 식은 땀을 닦으며 냉소를 날렸다. "약간의 재주가 있긴 있군." 비록 입으로는 이렇게 가볍게 말했으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일소불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확실히 약간 이상한 점이 있소." 그는 앙천대소하면서 또 말했다. "우리가 그 사람들을 상관할 필요는 없소. 어쨌든 빨리 저 귀신인지 모르는 자를 쫓아가기나 합시다." 왕이마자가 기회를 틈타서 끼어들었다. "대사의 말씀이 옳소. 빨리 쫓아갑시다." 일소불이 심랑을 바라보고 물었다. "상공께서도 같이 가시려오?" 심랑이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주칠칠 오누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소. 갑시다!" 그들 일행은 본래 서로가 알지 못하고 심지어 같은 길은 걷는 사람도 아니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을 함께 쫓아간다는 기분에서 서로가 다정한 친구로 변했다. 사람들이 비록 의논은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발걸음은 심양성 북쪽, 즉 그 귀신소굴을 향해 동시에 내딛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 사이의 경공의 고하가 확연히 들어나 보였다. 일소불이 앞장을 서고 자오최혼 막희가 그를 바짝 쫓고 있었으며, 심랑은 이들에게서 떨어지지도 그렇다고 바짝 붙지도 않은 채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왕이마자와 유화봉 소모운도 역시 심랑과 별로 거리를 두지 않고 있었으며, 철승룡도 이들을 바짝 붙어서 갔다. 그러나 세온후 손통과 음화표 승형은 한참이나 뒤처져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낮은 소리로 담소를 나누는 모양으로 보아 전력을 다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한참이 지나서 발설쌍도장 팽립인이 쫓아와 웃으며 말했다. "그 황화호 부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꽤 담력이 있어 보이던데, 만사통처럼 슬며시 빠져나갈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가 없는 것 같애요." 승형은 가볍게 웃으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통은 도리어 팽립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뒤에는 사람이 더 없습니까?" "한지무환 이패가 있긴 있는데 한참이나 뒤처졌을 거요. 아, 이 사람이 무공이 약하지는 않은데 다만 경공이 약간 차이가 나서......."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처참한 비명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팽립인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위패가......." 사람들도 이 소리를 듣고 안색이 변하면서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급히 몸을 돌려 비명소리가 난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일소불이 침중한 음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은 무기를 꺼내시고, 몸에 암기를 지닌 사람은 암기를 발산할 준비를 하시오.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즉각 그 사람을 향하여 암기를 발사하도록 하시오." 몇 마디의 말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앞의 눈 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방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손통과 승형이 서로 앞서서 엎드려 있는 그림자로 뛰어갔다. 그러나 일소불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들을 제지했다. "멈추시오! 횃불을 밝히시오. 먼저 눈 위에 발자국이 있는지를 조사해봅시다." 승형과 손통은 서로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일소불이라는 인간, 보기에는 살찐 구더기 같이만 보였는데 이처럼 용의주도한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구나.) 두 사람은 일소불에 대해서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남을 느꼈다. 더이상 일소불은 비웃는 그러한 기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팽립인, 막희, 소모운 세 사람은 이미 횃불을 받쳐 들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 유화봉 소모운은 본래 하룻밤에 천 집을 턴다는 대도적으로서 그의 횃불제조기술의 뛰어남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했다. 그가 만든 횃불은 불꽃의 크기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었다. 횃불이 사방을 비추자, 마치 큰 불을 피워놓은듯 주위 일장여의 사방이 환하게 눈안에 들어왔다. 그 불빛 아래 드러난 땅에 엎드린 검은 그림자는 바로 한지무환 이패였다. 위패가 엎드린 앞과 뒤쪽에는 한 줄기의 발자국이 나 있었다. 그러나 양 옆의 눈은 깨끗하여 아무 흔적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일소불이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조심해서 접근하시오. 자기 발자국은 자기가 찾아내야 하오." 승형이 먼저 자신의 발자국을 찾아냈다. "이것은 내 발자국이오." 그는 손으로 자기 발자국 옆에 엑스자 표시를 했다. 원래 모든 사람이 발의 형태가 다르고 크기가 차이가 있으며, 경공 또한 고하의 구분이 있고 신발 모양이 서로 다르다. 때문에 남의 발자국을 구별해내기는 어려웠으나 자기 발자국을 찾아내기는 상당히 쉬운 일이었다. 손통도 자기 발자국을 찾아낸 다음 말했다. "이건 내 발자국이오." 그 역시도 옆에 엑스자 표시를 했다. 순식간에 왕이마자 소모운, 철승룡, 팽립인 등 모두가 자신의 발자국을 찾아냈다. 팽립인은 자신의 발자국이 가장 깊이 패인 것을 발견하고 얼굴이 붉어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일이 아주 중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자기의 발자국이 다른 사람보다 약간 깊게 패였다 해서 입밖에 소리를 내거나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눈 위에는 한쌍의 발자국만 누구의 발자국인지 가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불빛이 더욱 밝게 비춰지자, 이 두 개의 발자국은 아주 낮게 패였으며 이 발자국을 남긴 사람의 신발은 아주 거칠은 마로 짜여진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일소불이 신고 있는 마(麻)로 짠 신발에 눈길을 돌렸다. 일소불이 웃으면서 말했다. "남아 있는 발자국은 바로 본인의 발자국이오. 그렇지만 상공 당신은......?" 사람들은 이때서야 비로소 발자국 한쌍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랑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마 본인의 몸이 너무 말라서 발자국을 찾아낼 수 없는 것 같군요." 그는 겸손하게 말을 했으나,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도 이렇게 젊고 문약해 보이며, 사람들의 멸시를 받아도 말대꾸도 하지 않던 무명소년이 답설문흔(踏雪無痕) 절정의 경공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모두 감탄의 기색을 나타내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의아한 기색을 얼굴에 떠올렸다. 이 소년이 어떻게 무공의 절정을 연마했는지, 또 이 소년의 신분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들은 의아했던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을 입밖에 내서 물어보지는 않았다. 일소불이 대소하면서 말했다. "기인은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더니 상공께서 이렇게 절정의 무공을 숨기고 있는 사람일 줄이야." 그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또 말했다. "사방에 다른 사람의 발자국은 없고 또 싸웠던 흔적도 없는 것 같소. 이로 보건대 이패도 역시 암기에 부상을 당한 것 같소. 도대체 그 암기가 무엇인지 우리 한 번 같이 살펴봅시다." 그는 위패의 시신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나 그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있었으며, 옷깃을 풀어헤치자 어깨 아래 상처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만을 볼 수 있었을 뿐 어떠한 암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에 따라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으나,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는 막을 수가 없었다. 막희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 암기는 인간이 발사한 게 아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핏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시신을 옮긴 흔적도 없고 다른 사람의 발자국도 없는 점으로 보아, 이패의 앞가슴에 맞았던 암기는 절대로 다른 사람이 이미 뽑아갔을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말해 이패가 앞가슴에 암기를 맞은 다음 앞을 향해 쓰러졌으니, 누구를 막론하고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신이 쏜 암기를 걷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생각하고 머리를 짜보아도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은 몸의 떨림이 점점 심해짐을 느낄 뿐이었다. 팽립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마 일종의 무형의 검기가 아닐까요?" 일소불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당신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요?" 팽립인이 몇 마디 말을 더 하려 했으나, 일소불을 바라보는 순간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일소불은 만면에 살기를 띠고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마치 사람들에 의해서 화가 난 맹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갑자기 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넓은 승포를 벗어서 알몸을 드러냈다. 눈발이 그의 몸에 떨어져 내렸으나 그는 조금도 추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도리어 그의 몸에서는 일진의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하여 바라보는 순간, 일소불은 벗은 승포를 약 삼사 척 넓이의 가닥으로 만들어 자기의 팔과 대퇴부 그리고 가슴과 배부분에 출렁거리는 그 비계덩어리들을 질끈 동여맸다. 그의 몸에 떨어져 내린 눈은 이미 녹아서 흘러내려 그의 몸에 동여맨 천들을 적셨다. 일소불은 일어서서 팔을 뻗고 다리를 펴는 동작을 해보였다. 그의 동작은 전에 비해서 훨씬 더 민첩해져 있었다. 일소불은 비로소 눈을 들어 사람들을 쓸어본 다음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살고 싶은 사람은 빨리 돌아가도록 하시오. 본인을 쫓아가고 싶은 사람은 목숨을 버릴 준비를 하시고......." 팽립인이 말했다. "어디를 가신다는 겁니까?" 일소불이 광소를 하면서 말했다. "귀신 소굴이 아니면 어디를 가겠소." 그는 눈을 한웅큼 움켜쥐더니 입 안으로 쑤셔넣어 와작와작 소리를 내면서 씹었다. 그리고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 귀신소굴을 뒤엎고 싶은 담력이 있는 사람은 본인을 쫓아서 같이 가봅시다!" 그는 소리를 지르면서 앞장서서 달려가기 시작했다.승형, 손통, 막희, 왕이마자, 철승룡, 소모운이들 모두는 피가 끓는 사람들로 어찌 자신의 안위와 생사를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 그들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일소불을 쫓아 달려나갔다. 팽립인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심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억지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상공께서 한발 앞서 가시죠. 본인은 이패와의 교분이 두터운데, 그를 이렇게 황야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그의 시신을 묻은 다음 곧 뒤쫓아가도록 하겠소." 심랑은 가볍게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팽립인이 다시 고개를 들어 쳐다봤을 때 심랑의 신형은 이미 한 점의 검은 그림자를 남긴 채 사라져가고 있었다. 팽립인은 그가 이미 멀리 간 것을 확인한 다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패의 시신을 다시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여관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심랑은 순식간에 승형 등을 쫓아갈 수 있었으나 그들보다 앞서지 않고 멀찍하니 그들을 뒤따라갔다. 그는 가장 뒤에 처진 상태였으며, 만약 다시 그 차가운 화살이 날아 온다면 자연히 그를 향해 쏘아져 오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랑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조금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신이 다시 나타나기를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신의 활에서 쏘아져 나오는 화살이 도대체 얼마나 신기한 것인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종 그는 사신이 밤에 활을 쏘네.. 편안무사하게 달려나갈 수 있었다. 성을 나온 지 한참이 지나서 곧 그 귀신소굴이 있는 곳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심랑이 실망하여 탄식소리를 내는 순간, 갑자기 앞쪽에서 일소불이 외치는 소리와 막희의 놀라는 듯한 비명소리, 그리고 사람들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들려왔다. 일소불의 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담력이 있는 녀석이라면 나와서 본인과 고하를 가려보도록 하자. 귀신의 모습을 하고 머리는 숨긴 채 꼬리만 내미는 것은 개나 짐승의 행동이라 볼 수밖에 없다." 심랑이 눈썹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빨리하여 마치 화살처럼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때 사람들은 신형을 멈추고 있었으며 일소불은 만면에 위엄스런 기색을 띤 채 손에는 한 조각의 흰 천을 꽉 움켜쥐고 욕지거리를 퍼부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사방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으며 일소불의 욕지거리에 대한 반응도 없었다. 심랑이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 발생했습니까?" "이것을 보시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흰 천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심랑이 손을 뻗쳐 그 천을 집어들고 눈빛에 비추어 보았다. 그 천에는 붉은 핏빛글씨로 몇 자가 씌어져 있었다. "여러분들께 권하오. 빨리 돌아가도록 하시오.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면 후회 막급할 것이오." "이것은 어디서 나온 천입니까?" "방금 본인이 제일 앞에서 달려가고 있었는데......." 일소불이 제일 앞장서서 달려가고 있을 때, 앞길에 움푹 패인 웅덩이가 있었는데 그 웅덩이에서 큰 눈덩이가 불쑥 나타나더니 미친듯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일소불이 얼핏 보건대 그 눈덩이 속에는 마치 하얀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그 눈덩이는 곧장 일소불에게 부딪쳐와서 '휙' 하는 소리를 내면서 일소불의 머리를 지나쳐 날아가버렸다. 그러나 이 하얀 천조각을 일소불의 손에 남겨놓았던 것이다. 심랑이 듣고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 사람은 어디로 날아갔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왜 쫓아가지 않으셨죠?" 일소불이 화나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그림자는 자신이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건대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소. 키가 삼 척 정도에 불과한데 마치 한 마리의 여우와 같았소. 본인의 안력으로도 그가 앞으로 달려들기 전에 눈 위에 엎드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소. 본인이 눈을 똑바로 뜨고 그 모습을 보려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 모습은 이미 사라진 후였던 거요." 심랑이 생각되는 바가 있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소운의 천마미종술(天魔迷踪術) 중의 오색호신장안법과 비슷하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건대 그 사람 모습을 한 것은 십중팔구는 화예선인 것 같은데...... 그렇지만 화예선과 그 귀신소굴은 아무 관계도 없는데 도대체 그가 여기에 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였지?" 일소불이 심랑의 생각을 끊으면서 말했다. "상공은 더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소. 그들이 어떤 짓을 하든 본인을 놀라게 하지는 못할 것이오. 다만 상공께서 본인과 앞장서서 길을 만들고 막형과 승, 승...... 뭐죠?" 승형이 웃으면서 말했다. "형입니다." "그렇지요. 승형과 막희가 뒤를 책임진다면 우리는 아무 걱정않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오." 심랑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좋소. 뚫고 들어가봅시다!" 승형도 말했다. "좋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뚫고 나갑시다! 뚫고 나갑시다!" 비록 동시에 소리는 질렀으나 누구인지 떨리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뿐 물러설 수 없는 형국으로서 가슴을 쳐들고 부딪쳐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의 발걸음은 훨씬 느려졌으며 전에 비해 훨씬 신중해졌다. 멀리서 산그림자가 나타났으며 몽롱한 산그림자에서는 마치 음산한 기운이 뻗쳐나오는 듯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 귀신소굴에 도대체 무엇을 발견하러 온 것인지. 그들은 원래 이 묘혈(墓穴)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단정했기 때문에 쫓아왔던 것인데, 그들은 더이상 보물을 탐내는 마음이 없어져 버렸다. 심랑은 속으로 탄식하면서 중얼거렸다. "다행히 그 큰아가씨가 쫓아오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갑자기 그들의 앞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웃음소리와 동시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께서는 지금에야 비로소 도착하셨습니다." 팽립인은 쉬지도 않고 숨도 돌리지 못한 채 미친듯이 달려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관도 이미 혼란이 극에 달한 형국이었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시체를 밖으로 메어 나가고 있는 듯했다. 어떤 사람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또 십여 명의 목숨이......." 팽립인은 감히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단숨에 자기 방으로 달려와, 왈칵 방문을 열어제쳐 방으로 들어선 다음 방문을 잠그고 문에 기댔다. 등으로 문을 가로막아 기대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내 목숨은 잃어버린 것을 주어온 거야.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그 묘 속에 비록 산더미 같은 보물들이 있다고 해도 나는, 나는......." 갑자기 그는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방에는 어느새인지 등이 켜져 있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피가 말라붙는 듯한 기분을 느껴 중얼거리는 말소리를 멈췄다. 그의 아! 하고 벌린 입은 더이상 다물 수 없었으며 두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방 가운데에는 회색장포를 입은 사람이 단정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등을 문쪽으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팽립인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침침한 장포와 풀어헤친 장발, 거기에 음침한 방 안의 불빛 아래서 그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방금 묘지에서 부활한 유령 같은 모습이었다. 팽립인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당, 당신은 누구......." 그는 하하하고 웃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차가운 달빛이 내 무덤을 비추니......." 팽립인은 다리의 맥이 빠지면서 문에 기댄 채 털썩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죽음이 두려운가? 돌아가고 싶은가?" "소, 소인은......." "이미 심양성에 들어선즉 반드시 이 성에서 죽어야만 할 거야." 팽립인은 이를 깨물면서 갑자기 전신의 기력을 한데 모아 그 회색장포를 입은 사람의 머리를 향해 일 장을 격출했다. 그가 강호에 이름을 날린 지는 이미 오래된 일로서 그가 격출한 이 일 장의 위력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회색장포를 입은 사람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긴 소매를 뒤로 향해 휘저었을 뿐이다. 팽립인은 다만 음산하고 부드럽기가 한량없는 기운이, 그러나 아주 강한 기세을 띤 내력이 그의 가슴으로 밀려들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앞가슴이 마치 천 근이나 되는 철추로 세게 얻어맞은 듯 그는 문으로 날아가 '펑'하고 부딪친 다음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는 입을 벌려서 선혈을 토해냈다. 회포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의 힘으로 감히 귀신과 싸우려 하다니." 팽립인은 눈앞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핏자국들을 바라보면서 몸을 계속 떨고 있었다. 그가 기대고 있던 방문마저 그의 떨림에 따라서 덜덜 소리를 냈다. 회포인이 천천히 물었다. "살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 팽립인은 입을 열었으나 목 안에서만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회포인이 또 날카로운 소리로 재촉했다. "빨리 말해라." "살...... 살...... 살고 싶습니다." 그가 애써서 살고 싶다는 말을 뱉어냈을 때 그의 몸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회포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만약 네가 살고 싶다면 내 명령을 따를 텐가?" 보이지 않는 적 "여러분께서는 지금에야 비로소 도착하셨습니다." 이 부드러운 말은 간단하고 아주 평범했으나,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마치 깊은 밤 귀신의 울음소리를 들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고, 심지어 철승룡은 뒤로 몇 걸음이나 황급히 물러섰으며 소모운은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일소불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누구! 누구냐? 나와라." 갑자기 어둠 속에서 백의 인형이 표연히 날았다. 그 백의 인형은 뻣뻣하게 굳어 있어서 조금도 굽히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다리를 들어올리는 모습도 또한 볼 수 없었다. 다만 그 백의 인형은 꼿꼿한 자세로 날아왔을 뿐이었다. 그 인형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그의 흉악한 모습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 듯이. 그 백의 인형의 무릎 아래는 마치 지상에서 일 척 이상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차가운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리고 온 몸이 차갑게 굳어졌다. 만약 이 백의 인형이 사람이라면, 세상에 어떻게 몸을 조금도 굽히지도 다리를 옮기지도 않고 날아올 수 있단 말인가? 일소불이 비록 그 담력이 하늘을 덮을 듯 했으나, 이 백의 인형은 확실히 무덤 속에서 나온 유령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놀라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네가 비록 귀신이라 할지라도 너를 없애야겠다." 그는 두 팔을 쳐들고 몸을 날려 백의 인형의 가슴을 향해 예리한 장풍을 쏘아나갔다. 백의 인형의 옷이 떨리듯 부풀어 오르며 냉소를 날리더니 몸이 평평하게 뒤로 몇 척이나 물러섰다. 일소불은 다시 한 번 놀랐으나 이를 악물고 다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때 그의 신변에서 바람소리가 일어나면서 심랑이 그의 앞으로 나섰다. 심랑은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주칠칠! 당신, 장난하는 게 너무 지나치지 않소." 백의 인형이 홀연 '픽' 하는 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가렸던 소매를 내리고 부드러운 눈으로 심랑을 쳐다보았다. 그 속에 나타난 것은 얼굴이 마치 봄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는 다름아닌 주칠칠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발 아래서 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불아이가 뛰쳐나와서 말했다. "역시 심 형은 대단하시군요." 불아이가 뒤에서 주칠칠의 두 다리를 껴안고 움직이게 했기 때문에 주칠칠의 몸은 굽히지도 다리를 들지도 않고 앞뒤로 마음껏 왔다갔다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모두 강호에서 다년간 구른 여우들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야밤중에 귀신의 묘지 앞에서 간담이 서늘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도 이러한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일소불 또한 놀람인지 분노인지 모를 표정을 짓고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의 이 수법은 사람을 너무 놀라게 한 것 같소." 불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대 화상은 확실히 담력이 있으십니다. 심지어 귀신도 당신을 어쩌지 못했으니......." 일소불이 앙천대소하면서 말했다. "본인이 비록 악마를 굴복시키는 나한은 아니지만, 귀신을 항복시키는 재주는 약간 있소." 불아이가 가볍게 추켜세운 한 마디에 일소불의 화가 종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도리어 심랑을 향해 말했다. "저 오누이가 상당히 활발하여서 우리와 장난을 한 것인데 상공은 화를 내지 마시오. " 주칠칠은 심랑에게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흥! 그 사람이 화를 내요? 그가 내 장난을 망쳐놨는데 제가 화를 내지 않으면 다행이죠." 일소불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묘하군. 묘해요. 상공은 화를 내지 않았소. 만약 누가 상공에게 화를 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재주가 도리어 대단하다고 해야 되겠지." 주칠칠이 참지 못하고 얼굴을 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이오, 그 사람......." 그녀는 슬며시 심랑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꼬집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무로 만든 사람이에요? 말좀 해봐요." 심랑이 말했다. "좋소. 내가 말하리다. 내가 당신께 묻겠는데 어떻게 온 거죠? 언제 왔소? 그리고 저 묘 속에 들어가본 거요, 안 들어가본 거요? 그리고 그 화, 화 부인은?"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된 거죠? 말을 하기 싫으면 하지나 말지. 말을 하기 시작하니 마치 범인을 심문하듯. 좋아요. 당신께 말해 드릴께요. 당신이 이리로 오는 도중에 시신을 살펴볼 때 왔어요. 곧장 묘 속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었지만 그 속이 사실상 너무 어두웠어요. 그리고 또 우린 횃불도 없었구요. 저는 두렵지 않았으나 여덟째가 겁이 나서 몸을 계속 떨고 있었어요. 저는 동생이 병이 날까 걱정되어서 뛰쳐나와 버렸어요." 불아이가 말했다. "누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누나는 겁나지 않았어? 왜 그 속에서 내 손을 꼭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지? 그때 누나 손이 차가웠던 것까지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주칠칠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야, 이 녀석. 너 다시 말할 거야?" 불아이가 개구장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나가 나를 창피주지 않으면 내가 창피줄 리가 없잖아." 이때 갑자기 전면의 산구덩이에서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명소리는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졌으며, 비록 낮았으나 처참하고 날카로워 듣는 사람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곧 이어서 그 소리는 찢어지는 소리로 변했으며 한 사람의 모습이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어둠 속에서 뛰쳐나왔다. 뛰쳐나온 사람은 사람들을 보자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여러 번 놀랍고 두려운 일을 겪어 약간 신경이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도 뛰쳐나가 그를 부축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심랑이 뛰어나가 그 사람을 부축하여 진력을 주입시키면서 말했다. "형씨! 형씨! 정신 차리시오." 그는 심랑이 보내준 진력을 받고 천천히 눈을 떠 사방을 돌아본 다음 가벼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철...... 철룡." 철승룡이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고 놀라운 소리로 말했다. "아니 김 형! 김 형이셨군요. 도대체 어쩌다 이런 지경에......." "우리...... 우리 다섯 사람 중 겨우 나 혼자 남았소." 철승룡의 안색이 변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안양오의(安陽五義)가 이미 모두 이곳에서 죽었단 말이오? 도대체 누가 독수를 쓴 거죠?" 그의 얼굴에 처참한 미소가 흐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 저속에는 귀신이...... 귀신이 있어요. 들어가면 안 돼요. 들어가면......." 돌연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대갈했다. "아냐...... 귀신이 아니야. 귀신이 아니고!" 심랑이 급하게 재촉했다. "귀신이 아니고 뭐죠? 형씨! 도대체 뭐요? 형씨! 정신차리시오." 그러나 그는 두 눈을 감더니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심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장탄식을 발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자기의 발끝을 바라볼 뿐이었다. 일소불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사람은 안양오의 중의 한 사람입니까?" 철승룡이 처량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안양오의의 우두머리인 김림(金林)입니다. 아마도 이들 안양오의가 이 묘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들어갔던 것 같군요. 그렇지만 이렇게 될 줄이야......." 그는 장탄식을 하더니 겉옷을 벗어서 김림의 시체를 덮었다. 그러자 일소불이 외쳤다. "그 옷을 치우시오." 철승룡이 멍청한 모습으로 쳐다보자 일소불이 말했다. "본인은 이 분 김림이 어떻게 죽었는지 살펴봐야겠소." 곁에 서 있던 막희가 끼어들었다. "그의 치명상을 위패 등과 함께 바로 살펴봐야 할 것 같소." 일소불이 김림의 옷을 찢어 헤치고 살펴봤으나 앞가슴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그러나 등 뒤에는 자색(紫色)의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는데 다섯 손가락 자국은 이미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 있었다. 막희가 한숨을 불어내면서 말했다. "대단히 무서운 장력이로군!" 일소불은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그 장인을 바라보았다. 차 한 잔 마실 만한 시간이 지나자 일소불은 비로소 고개를 들고 심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상공은 이게 무슨 장력인지 알아내었소?" "알아냈습니다." 주칠칠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알아내었다는 거예요? 말해봐요." "자살수(紫煞手)!" 주칠칠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그 장인이 자살수란 말인가요? 진짠가요?" 일소불이 말을 받았다. "조금도 틀리지 않소. 최근 오십 년 동안 무림계에 이 자살수라는 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겨우 색상신용(塞上神籠), 독수수혼 및 요명신개 세 사람 뿐이었소. 이 세 사람을 제외하면 강호에는 아무도 이러한 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소." 막희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이미 죽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그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오."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을 옮겨 한데 뭉쳐섰다. 이때 주칠칠이 큰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약간 겁이 나네요. 만약 다른 사람이 정말 자살수라는 장력을 사용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이미 죽은 세 사람이 그 묘지에서 기어나와서 김림을 때려 죽였다는 말인가요?" 주칠칠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사람들은 모두 푸른얼굴색으로 변해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부지불식간에 차가운 한기가 가슴을 져며오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더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불아이가 주칠칠의 말을 듣고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심랑에게 몸을 기대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여기는 재미가 없어요. 또 너무 추워요. 우리 돌아가도록 해요." 그의 목소리는 약간 떨려 나오고 있었다. 심랑이 말했다. "너희 두 사람은 먼저 돌아가도록 해." "심 형은요?" "나는 평생에 귀신을 본 적이 없어. 만약 오늘 귀신을 볼 수 있다면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그렇지만 귀신을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도 안 돼. 귀신들이 놀라서 도망가 버릴 테니까." 그는 평소 말을 많이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려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태연히 우스갯 소리를 했다. 일소불이 대소하면서 말했다. "본인의 이러한 차림은 귀신과 별로 차이가 없을 것 같소. 남자귀신이든 여자귀신이든 본인을 보면 아마 자기들과 같은 귀신이 왔다고 생각하고 절대 도망가지는 않을 것이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대사께서 같이 들어가신다면 좋죠." 그는 눈을 들어 슬며시 자오최혼 막희와 은화표 승형을 바라봤다. 승형이 큰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본인은 형씨의 뒤를 쫓아가겠소." 막희도 웃으면서 말했다. "강호인들이 모두 본인을 죽음을 부르는 귀신이라고 말하는데, 오늘 이 가짜 귀신이 진짜 귀신을 한 번 만나봐야 될 것 같소." 그도 역시 비록 억지 웃음이었으나 큰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섰다. 심랑이 말했다. "좋습니다. 네 명이면 충분합니다." 주칠칠이 말했다. "그럼, 저는요?" "당신은 돌아가시오." "당신은 도대체 뭘 믿고 나한테 명령을 내리는 거죠? 전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여덟째, 우리 목을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쳐들고 먼저 앞서서 들어가 보자. 만약 귀신이 우리를 죽인다면 우리도 귀신이 될 텐데 뭐가 겁나니? 우리가 먼저 들어가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막는지 두고 보자." "나는, 나는......." 그는 눈을 한 번 돌리고 고개를 가로젓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난 안 가. 누나도 가지 말았으면 해." "귀신이 겁나는 거니?" "귀신은 겁나지 않지만, 그렇지만 나는 심 형이 겁이 나. 우리가 심 형 말씀을 거역할 순 없잖아?" 그는 슬며시 주칠칠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누나가 끝까지 심 형을 괴롭게 한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누나를 좋아하겠어? 만약 다른 사람이 누나를 끝까지 귀찮게 해봐. 누나가 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애?" 주칠칠이 눈을 한 번 굴리더니 탄식하면서 말했다. "진작부터 너를 데려오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렇지만 이미 데리고 왔는데 또 너를 돌보지 않을 수 없고. 좋아! 돌아가라면 돌아가지 뭐." 불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돌아가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생각컨대 여관에도 이미 모종의 변고가 발생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 변고를 진정시켜 주리라 믿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왕이마자가 얼른 그 말을 받아서 말했다. "그렇소. 이곳이 비록 위험하기는 하지만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 또한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닐 것이오. 우리는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처리하도록 합시다. 누구도 한가로이 빈둥거려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하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 생각이 바로 그렇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그 신비한 귀신소굴로 걸어 들어갔다. 갑자기 주칠칠이 외쳤다. "심랑! 당신!" 심랑이 고개를 돌려 주칠칠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오?" 주칠칠이 앵두 같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당신, 당신! 귀신에게 잡혀가서는 절대 안 돼요." 불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 우리 누나는 심 형을 걱정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나는 심 형의 실력을 믿고 어떤 귀신도 심 형을 잡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걱정하지 않아요." 불아이는 고개를 돌려 왕이마자, 소모운 등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들은 진작부터 빠져나가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뭘 더 기다리는 거죠? 가요. 우리 같이 가도록 해요." 심랑, 일소불, 승형, 막희 네 사람은 마침내 이미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간 귀신소굴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파묻힌 다음에 왕이마자 등은 비로소 객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주칠칠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심랑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나! 울긴 왜 울어? 그 사람이 영원히 안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불아이가 주칠칠을 위로했다. 그러나 주칠칠은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어쩐지, 어쩐지 상당히 겁이 나. 여덟째! 만약, 만약 그 사람이 돌아올 수 없게 된다면......." 불아이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산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그레하던 작은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으며, 한참 동안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주칠칠의 신형이 번쩍 하더니 미친 듯 심랑 등이 사라진 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불아이가 깜짝 놀라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누나! 누나!" 주칠칠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넌 먼저 돌아가라. 가서 화 부인을 찾아라. 나는 쫓아가서 그 사람을 돌봐야겠어." 날씬한 백의의 신형이 몇 번 번쩍이더니 그 모습이 사라졌다. 불아이가 눈을 돌려 사방을 쳐다보았으나 차가운 밤바람에 마른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귀신의 모습처럼. 불아이는 이제야 비로소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누나! 기다려요. 기다려." 그도 미친 듯 주칠칠이 사라진 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칠흙 같은 동굴은 마치 요기가 주둥이를 벌리고 사람을 집어삼키려는 듯 시커먼 주둥이를 잔뜩 벌리고 있었다. 사방에는 돌덩이와 암석들이 널려 있었고, 돌무덤, 돌해에는 얼음이 덮여 있었다. 칠흙 같은 동굴 속에서 군데군데 신문이 덮여 있는 모습은 음산한 기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굴은 얼마나 깊은지 끝도 보이지 않았다. 귀신소굴이라는 몇 글자로 이 동굴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그 동굴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스런 귀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칠칠은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곧장 앞으로만 달려나갔다. 동굴 속에서 죽든 살든 그녀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마치 동굴 속에서 죽는것이, 밖에서 심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때의 걱정스러움과 조급함에 비해서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뒤에서 불아이가 큰소리로 누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기다려요. 누나!" 두 번 부르고 나서 마치 무엇에 걸려 넘어진 듯 부르는 소리가 잠시 멈췄다. 그러나 즉각 다시 일어난 듯 '기다려요' 하고 외치고 있었다. 이번에 외치는 소리에는 놀라움과 두려운 기색이 더욱 짙었다. 심지어 목소리마저 찢어지듯 날카로웠다. 그가 비록 담력이 크다고는 하지만 아이에 불과한 것이다. 주칠칠은 기다리지 않고 그가 어쩔 수 없이 돌아가게 만들 생각이었으나 참지 못하고 그의 신형을 멈췄다. 그리고 한심스러운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관으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돌아가지도 않고. 조심해, 또 넘어질라." 어둠 속에서 불아이의 신형이 또 앞으로 꼬꾸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계속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주칠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주칠칠은 얼른 달려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아프니?" "아니." 비록 아프지 않다고 말했으나 그 목소리는 이미 아파서 죽겠다는 듯 울음섞인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노루가죽 장갑을 낀 자그마한 손은 주칠칠의 섬섬옥수를 꽉 잡은 채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주칠칠이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아버지가 어떻게 너를 내보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횃불이 없으니까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따라와." 오누이는 손을 꼭 움켜쥔 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둠은 점점 더 짙어졌으며, 심지어 손을 펴도 다섯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심랑 등의 네 사람은 어느쪽으로 갔는지 이미 종적이 묘연했다. 동굴 밖에서는 찬바람이 휭휭 불고 있었다. 그러나 굴 속으로 들어갈수록 그 바람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은 죽은 듯한 적막만이 감돌뿐이고 일진의 음산하고 습한 기운이 얼굴로 훅훅 스쳐 들어왔다. 갑자기 차갑고 습한 물건이 그들을 향해 덮쳐 들어왔다. 주칠칠은 놀라서 날카롭게 부르짖으며 전력을 다해 일 장을 격출해 냈다. 그 물건은 '찍'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날아가버렸다. 주칠칠이 말했다. "얘 두...... 두려워하지 마. 다...... 다만 박쥐일 뿐이야." 그녀는 동생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으나 자기 자신은 도리어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갑자기 앞에서 사람 모습이 번쩍 하더니 하나의 인형이 그들 앞으로 달려 들어왔다. 주칠칠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 누구요?" 그 인형은 말했다. "칠칠이오? 나, 심랑이오." 주칠칠이 기쁨에 찬 소리를 크게 내지르면서 온 몸을 던져 심랑에게 달려들어 그를 꼭 껴안았다. 차가운 얼굴을 그의 따뜻한 가슴에 대고 비비면서 눈물을 흘렀으나, 그녀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심랑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결을 쓰다듬으면서 탄식했다. "오지 말라는데. 놀래서 이 모양이 됐으니 이게 무슨 고생이오?" 주칠칠이 갑자기 거칠게 심랑을 밀고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내가 죽일 년이지. 당신 같은 사람을 구했으니. 당신을 죽게 그냥 내버려뒀으면 오늘 내가 이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을......." 멀리서 불빛이 '번쩍' 하면서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자국을 비추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쳐냈다. 이 성격이 완강한 아가씨는 심랑에게 눈물자국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심랑이 어떻게 그 눈물자국을 보지 못할 것인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심랑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동생이 훨씬 더 어른스럽구나. 당신은 애들처럼 이게 뭐요? 눈물을 다 흘리고......." "당신이 어린애 같애요." 그녀는 심랑을 흘겨보면서 말했으나, 얼굴은 이미 활짝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는 무한한 부드러움과 따뜻함, 그리고 깊은 정을 담뿍 담고 있었다. 돌 같이 심장을 가진 남자라도 그 웃음을 보고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심랑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일소불이 손에 횃불을 들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주씨 아가씨요? 본인은 아가씨가 반드시 쫓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앞에 바로 성문이 있소. 두 분께서는 빨리 오시오." 큰 웃음소리가 동굴 속에 메아리쳐 귀신소굴에 일말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주칠칠은 정신을 차리고 눈물자국을 닦은 다음 큰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이 아니고 세 사람이에요." 그는 한 손에는 심랑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불아이의 손을 잡은 후 큰걸음으로 앞으로 달려갔다. 일소불의 눈빛이 '번쩍' 하더니 불아이가 얼굴에 붉은 귀신가면을 쓴 것을 보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얘야. 네가 귀신가면을 쓴 것을 보고 진짜 귀신이 온 줄 알고 내가 깜짝 놀랐구나." 심랑은 승형의 손에서 횃불을 받아들고 높이 쳐든 다음 앞장서서 나아갔다. 사람이 움직임에 따라 횃불에 비춰지고 있는 사방의 암석은 더욱 공포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주위의 암석들은 모두 마치 이름을 알 수 없는 요괴와 같은 모양이었다. 횃불은 바닥에서 불어오는 음산한 바람에 계속 너울거렸다. 갑자기 하나의 성문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 성문에는 어떠한 조각이나 장식도 없었으나 크기가 거대하여 그 밑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보아도 성문의 끝을 바라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상당히 미미한 존재라는 기분을 느꼈다. 더불어 이 신비한 동굴에 대해서 더욱 경원함 있는 마음과 두려움이 더해졌다. 그 침중한 두 짝의 성문은 가운데가 약간 열려 있었다. 성문에는 사람이 곡괭이로 내려친 흔적이 있었으나, 두께가 약 일 척에 달하고 무게가 천 근 이상이 나갈 것 같은 문은 결코 사람이 억지로 열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심랑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맨처음 이곳을 발견했던 인부들이 어떻게 들어갔던 것이죠? 저는 황마의 말을 정확히 들은 것 같지 않군요." 일소불이 두 눈썹을 찌푸리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황마는 그 인부들이 술기운이 올라 있는 상태에서 힘을 합해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고 했소."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이 문은 사람이 열어놓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황마가 한 말이 사실 그대로 인 것 같지는 않군요."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주칠칠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이 문이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열은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유령이 나와서 문을 열어놓았단 말인가요?" 주칠칠의 말은 다른 사람도 이미 생각했던 것이었으나, 주칠칠의 입을 통해서 그말이 뱉어지자 사람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아이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찢어지는 듯했으며 두 번이나 잔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그렇지만 이 묘지 속의 귀신은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는데 왜 문을 열어 놓았을까요? 그들이 혹시 이 속에 너무 오래 있어서 적막했기 때문에 고의로 몇 사람을 들어오게 해서 귀신을 만들어 같이 있으려 했던 것일까요?" 그의 말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주칠칠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 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라." 그녀의 목소리는 계속 떨려 나왔다. 자오최혼 막희는 더욱 겁에 질려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는 듯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예 여기서 멈추었다가 날이 밝은 다음에 들어가보면 어떨까요?" 일소불이 차갑게 말했다. "자오최혼은 강남북을 수십 년 동안 횡행하여 강호 중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인물인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소?" 막희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는 끝내 머리를 숙이고 한 마디도 뱉어내지 못했다. 심랑이 가볍게 탄식하면서 그를 대신하여 말했다. "이 묘굴 속에는 이상한 일이 사실상 너무 많습니다. 막 형께서 지금 들어가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것도 까닭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일소불은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떤 사람이 감히 도망을 가겠단 말이오?" 심랑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누구를 막론하고 이 성문을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선다면 그후에 생사와 화복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대사님과 저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할 수는 있어도 까닭도 없이 목숨을 바치라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일소불은 멍하니 선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심랑이 이어서 말했다. "막 형께서 들어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돌아가시도록......." 일소불이 큰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혼자서 지금까지 온 길을 돌아간다는 것은 아마 살아 돌아가기가 힘들 것이오." 막희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를 깨물고 미친 듯 소리쳤다. "들어가자면 들어가죠." 그는 갑자기 몸을 날려 성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귀신 녀석들아! 담력이 있다면 나와서 나 막희 어르신과 내가 죽든 네가 죽든 싸워보자. 나와! 나와! 하하, 겁이 나냐? 겁이 나서 못 나오는 거냐? 하하......." 처참하리 만큼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굴 속을 울려서 천장의 돌부스러기들을 우수수 떨어지게 만들었다. 주칠칠이 중얼거렸다. "저 사람 미쳐버린 걸까?" 심랑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번쩍' 막희를 따라서 석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막희는 그 속에서 손으로 치고 발로 차면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심랑은 번개같이 손을 뻗어 막희의 맥문을 움켜쥐고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막 형! 고정하시오. 이러지 마시오. 진짜 죽고 싶은 겁니까?" 막희는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숙이고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때 사람들은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석문 속으로 들어왔다. 석문 속에는 둥근 원형의 대청이 있었다. 사방에는 아홉 개의 문이 있었으며 둥근 천정에는 마치 무슨 그림이 그려 있는 듯했으나, 천정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횃불이 미치지 않아 어떠한 그림인지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대청 속은 텅 텅 비어있었으며 오직 둥근 탁자 하나가 중앙에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이 텅 빈 넓은 대청은 더욱 음산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주칠칠 등이 그 속에 서 있자 마치 아주 넓은 공동묘지에 서 있는 듯했다. 둥근 천정은 높은 하늘 같았으며, 사방벽에 비치는 자신들의 모습은 마치 귀신들의 모습인 듯 너울거려 더욱 음산한 기운을 자아내고 있었다. 주칠칠이 말했다. "여...... 여기는 도대체 어떤 사람의 능묘죠?" 승형이 말했다. "옛날 제왕들도 이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오." 갑자기 그는 무엇을 발견한 듯 한 걸음에 대청 가운데 놓여 있는 탁자로 달려가 손을 뻗쳤다. 심랑이 소리쳤다. "멈추시오." 승형이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이 탁자의......." 심랑이 말했다. "그 탁자에 무엇이 놓여 있든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됩니다. 이점 승형께서는 반드시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주칠칠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렇죠?"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이 속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다는 것을 잊어버렸소? 이 속에 있는 모든 곳에는 극독이 발라져 있을 가능성이 있소. 만약 누구라도 손을 뻗쳐서 만지기만 하면 살아날......." 불아이가 처참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귀...... 귀신이 나타났어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불아이는 좌측 문앞에 서 있었는데 과연 파란 불빛이 '번쩍' 하며 사라졌다. 그 파란 불빛은 말로만 듣던 귀신의 것과 꼭 같은 것이었다. 일소불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쫓아가시오!" 그러나 심랑이 제지했다. "멈추시오. 이 능묘에는 반드시 비밀통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것입니다. 대사께서 만약 그 비밀통로 중 하나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어간다면 아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경거망동을 해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승형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형씨의 말씀이 옳소. 제가 아는 바로는 옛날의 능묘에 나 있는 비밀통로들은 그 능을 지을 때의 설계도를 얻지 않는 이상 누구도 왔다갔다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고......." 그는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손가락을 뻗쳐 등 뒤에 있는 돌탁자를 지적했으나 그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찢어지는 소리를 낼 뿐 한 마디도 말을 하지 못했다. 일소불도 얼굴색이 변하면서 급히 물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놀라시오?" 승형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방금 저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돌탁자 위에 거무칙칙한 철패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순식간에, 순식간에 없어져버렸어요." 막희가 크게 놀라서 말했다. "당신! 정말 똑똑히 본 거요?" 승형이 말했다. "저는 일곱 살 때부터 암실에서 향불을 바라보는 훈련을 십 오 년 동안 받았습니다. 제 안력이 극히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삼 장 이내에서 날아다니는 파리나 모기들도 제 눈을 벗어날 순 없습니다. 금방 저는 똑똑히 보았어요. 절대 틀림없을 겁니다." 은화표 승형은 중원무림에서 암기의 명가로 이름난 승가보(勝家堡) 문하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승씨 형제의 안력의 뛰어남과 정확함은 이미 강호에서 공인하고 있는 바로, 승형이 이처럼 단정적으로 말할 때 그것은 조금도 틀림이 없는 일이었다. 막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런 일은 장난을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도대체 어느 분이 철패를 가져가신 거죠? 빨리 내놓으세요."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안색이 침중하게 변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막희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쳐댔다.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 철패에 날개가 달려서 날아가버렸단 말이오?" 사방에서 메아리가 마치 벼락소리처럼 우우거리면서 끊기지 않았다. 그 메아리는 가까이에서 멀리로, 멀리에서 가까이로 계속 퍼져나가 이 능묘가 상당히 깊고 거대한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메아리가 울렸으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주칠칠이 막희에게 냉소를 흘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노루대가리 쥐새끼 눈을 한 놈이 이렇게 발광을 하는 것을 보니, 혹시 그가 몰래 철패를 가져가서 귀신장난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막희는 승형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녀석이 아무 것도 보지 못했는데 일부로 철패를 보았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이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게 하여 자신이 무슨 이득을 취하려는 것은 아닐까?) 승형은 차가운 눈으로 일소불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 일소불이라는 친구의 무공이 약하지도 않은데 강호 중에서 그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으니. 혹시 이 녀석이 능묘 중의 사람과 작당을 하고, 고의로 사람들을 이곳에 끌어들여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철패는 이 녀석이 가져간 게 틀림없을 거야.) 일소불은 여러 번 입을 열어 말을 하려는 듯했으나 끝내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심랑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린 녀석의 내력은 의심스러운 점이 많아. 나이가 어린데도 무공은 그렇게 고강하니. 지금까지 일어났던 놀랍고 이상한 일들은 혹시 이 녀석이 암암리에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각자 뒤로 몇 걸음씩 물러섰다. 사람들은 모두 상대방의 표정이 혹시 이상하게 변하지나 않을까, 혹은 상대방의 손이 어떠한 동작을 취해서 자기를 공격하지나 않을까 의심하는 모습들이었다. 다만 심랑만이 태연한 표정으로 조금도 조급해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불아이가 갑자기 외쳤다. "문 밖에 귀신이 있는 것은 제가 보았고, 철패도 귀신이 가져가버린 것이 틀림없어요. 이곳은 오래 머무를 곳이 못 돼요. 우리 빨리 돌아가도록 해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막희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일소불과 승형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가서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서너 걸음을 옮겨놓기도 전에 멈춰섰다. 심랑이 먼저 달려가서 막희를 부축하여 일으켰던 것이다. 막희의 안색은 창백했으며 눈에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고 한쌍의 눈은 여전히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으며, 가슴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숨을 쉬고 있었다. 심랑은 그가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막 형!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슨...... 무슨 일이 있었소." "무슨 일이지요?" "방금 어떤 사람이 내 등을 한 주먹 내갈겼소."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당신 뒤에는 사람도 없는데, 당신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막희가 찢어지는 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이 내 등을 때렸소. 지금도 내 등이 얼얼하게 아프단 말이오. 만약 내 말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내가 곱게 죽지 못할 것이오." 사람들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숨을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승형은 냉소를 흘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때렸단 말인가? 틀림없이 저 녀석이 고의로 말하는 걸 거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 있다고 믿게 하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취해보려는 것이겠지.) 주칠칠도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 장난하고 있는 거지? 혹시 이 심랑 녀석이 그러는 건 아닐까?) 일소불 역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젊은 녀석이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저 여자아이도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아마 좋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어. 이 두 녀석의 잔꾀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 사람들은 마음 속에서 서로를 의심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욱 짙어졌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으며 서로를 엿보았다. 횃불이 너울거리는 아래서 사람들의 안색은 푸른 색으로 변했으며 미간에는 살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죽음 같은 정적 속에서 막희가 중얼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도대체 누가 나를 때린 거지? 누가......." 갑자기 그는 대갈일성하여 승형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면서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방금 네 녀석이 나랑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어. 네 녀석이 혼자 귀신장난을 해놓고서 이제 와서 나를 물고 늘어져? 어림없는 소리......." 그는 동시에 승형의 전면으로 일장을 격출했다. 승형이 몸을 날려 뒤로 수 척을 물러선 다음 그의 암기 은화표를 꺼내려고 손을 표낭 속으로 집어넣었다. 막희가 노갈을 터뜨렸다. "너 승가보의 암기가 무섭다고는 하지만 나 자오최혼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자, 공격해라. 이 막희 어르신은 은화표가 무서운지, 내 최혼침이 무서운지 직접 보고 싶다." 두 사람의 형국은 마치 활에 제어놓은 화살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 두 사람의 암기 기술은 무림계에서 이미 이름난 것이었다. 만약 서로가 암기를 발사할 경우 사태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순간이었다. 이러한 순간에 다른 사람들이 어찌 앉아서 그 싸움을 구경만 할 수 있을 것인가? 일소불은 대갈을 터뜨리면서 막희를 잡았고, 심랑은 승형에게 싸움을 그만두도록 권했다. 심랑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과 같은 순간에 두 분께서 서로 싸우려고 하십니까? 어찌 보이지 않는 적을 도와주는 행동을 하십니까?" 막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보이지 않는 적이 어디 있단 말이오?" 심랑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적이 없다면 누가 막 형을 때린 것이겠소?" 불아이가 날카로운 소리로 외쳐댔다. "귀신이오! 귀신! 틀림없이 귀신이 때린 거예요!" 고묘(古墓)속의 귀신들 갑자기 '휙'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일소불이 들고 있던 횃불이 꺼져버렸다. 사방은 더욱 캄캄한 어둠에 빠져 들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은 차가운 기운이 짙어졌다. 일소불이 찢어지는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좋소! 좋아! 싸우시오! 당신들 마음대로 싸워보시오! 어쨌든 우리들 중 아무도 살아서 이곳에서 나가지는 못할 테니까. 통쾌하게 싸워보기나 하시오!" 그는 막희를 잡았던 팔을 풀었으나, 막희는 여전히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어찌 다시 싸움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승형이 큰소리로 말했다. "계속 앞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돌아갈 것인지 빨리 결정을 해야만 할 거요. 계속 앞으로 나가다 비록 죽는다 해도 여기에서 머뭇거리다가 죽는 것보다는 나으리라고 생각하오." 말을 끝맺기도 전에 심랑이 손에 잡았던 횃불을 훅 불어서 꺼버렸다. 사방은 다시 칠흙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손을 뻗어도 다섯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이었다. 사람들은 동시에 크게 부르짖었다. 일소불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 상공! 도대체 뭐하는 짓이오?" 심랑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불씨를 아껴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든 돌아가든 불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예서 그대로 불을 낭비하여 우리가 앞으로 나갈것인지 아니면 뒤로 물러설 것인지 결정한 후에 불이 없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지 않는 상황에서 나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리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자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승형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상공의 생각은 아주 용의주도하군요. 만약 불씨가 모두 타버린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여기에 갇혀서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을 거요." 어둠 속에서 불아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왜 나를 꼬집는 거야?" "내...... 내가 언제 너를 꼬집었니?" "누...... 누나가 아니라면 그럼 누가 꼬집은 거죠?" 심랑, 승형, 막희, 일소불이 동시에 말했다. "나는 아니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모골이 송연한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기를 꼬집거나 때린다는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식은땀으로 그들의 옷은 이미 축축히 젖어 있었다. 불아이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가요. 가요. 빨리 가요. 더 머뭇거리다가는 가지도......." 말소리가 갑자기 멈췄다.어둠 속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터벅터벅, 한 걸음 한 걸음 은은히 들려왔다.마치 발자국 소리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밟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굽히고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누...... 누구냐?" 밖에서 침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또 누구냐?" 일소불과 주칠칠은 두 주먹을 가슴 앞에 끌어올려 자신을 방비했으며, 승형과 막희는 암기를 손에 꼭 움켜쥐었다. 불빛이 석문 밖에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가 석문 밖에서 멈추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일소불이 몸을 번쩍 날려 문 뒤로 다가서면서 승형을 향해 손짓을 했다. 승형은 마른기침을 하고 말했다. "문 밖에 있는 친구! 들어오시오." 문 밖에서는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돌연 한손이 문밖에서 뻗쳐나와 일 장으로 석문을 때렸다. '펑'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 무거운 석문이 수 척이나 옆으로 밀려나갔다. 일소불은 더이상 문 뒤에 몸을 숨길 수가 없어서 공중으로 펄쩍 뛰어오르며 수 척을 뒤로 물러섰다. 거대한 석문이 활짝 열렸다. 문밖에서 사람모습이 '번쩍' 하였을 때 자오최혼 막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손을 뻗쳐 독침을 쏘아보냈다. '쨍쨍'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리면서 독침은 모두 석문에 부딪쳤다. 일세를 풍미한 암기의 명가 죄우최훈은 겁에 질려 손이 떨려서 암기도 정확히 던지지 못했던 것이다. 불빛이 번쩍하는 사이에 한 명의 대한이 횃불을 높이 쳐들고 문을 막아 가로섰다. 그 신형은 마치 금강(金鋼)처럼 곧게 우뚝 섰으며 그의 몸 뒤에 펼쳐진 끝없는 어둠과 어울려 더욱 위풍당당하게 보여 감히 마주 바라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넓은 등, 벌꿀의 허리, 그리고 매의 눈과 큰 입을 가진 대한이었다. 그는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을 여관에 돌려보내고 다시 나타난 그 부부 중의 남편이었다. 막희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당신이었군!" 그 대한은 냉랭하게 말했다. "친구는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독수를 사용하다니! 너무 거칠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막희는 히히 하고 마른웃음을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일소불이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있소. 먼저 손을 쓴 사람이 잘한 것이오. 비록 실수를 했다고 해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오. 친구! 빨리 친구의 이름과 내력을 말하시오. 친구가 적인지 아니면 친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가 당신에게 죄를 질지도 모르오." 그 대한이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본인이 이 고묘의 유령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지......!" "당신이 꼭 본인의 내력을 알고 싶다면 말해주지 않을 이유도 없지. 그렇지만 먼저 당신에게 묻겠소. 옛날 대비상인(大悲上人)이 죽으면서 읽었던 부처의 공덕을 찬양했던 노래를 아시오?" 일소불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얼굴색이 변하면서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노래는 '흰구름이 다시 나타나고 자살수가 다시 출현했을 때 이 넓은 무림계에 큰 혼란이 시작된다'는 것이 아니었소?" "맞소. 이 일대 고승께서는 십 년 전에 이미 그 이후의 무림계에 큰 재난이 닥칠 것을 예견했던 것이오. 그래서 이 마지막 네 구절의 노래를 읊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셨던 거요. 그 뜻은 자살수가 다시 강호에 나타나게 된다면 무림계에 큰 혼란이 나타난다는 것이었소." "그 네 구절의 노래와 당신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당신은 이것을 좀 보시겠소?" 그는 천천히 자기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불빛이 번쩍이는 아래서 그의 다섯 손가락은 보통 사람과 꼭 같았으나 손바닥 가운데는 짙은 자색(紫色)이 배어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기이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동시에 크게 놀라 외쳤다. "자살수!!" 그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맞았소. 난세신룡 자살수(亂笹神籠紫煞手)." 막희가 찢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 녀석! 안양오의가 너한테 죽은 것이었구나." 그는 손을 들어올려 다시 암기를 쏘아보냈다. 난세신룡 자살수가 대갈을 터뜨리며 손을 흔들자 암기들은 모두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 대한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 미쳤소? 지금 뭐라고 말씀하신 거요?" 막희가 이를 깨물면서 노한 소리로 말했다. "안양오의는 분명히 자살수 아래 죽었소. 당신 외에 누가 또 자살수를 전개할 수 있었겠소? 당신! 그들을 살려내시오." 그는 노갈을 터뜨리면서 몸을 날려 일 장으로 그 대한의 가슴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장력이 적중하기도 전에 심랑이 가볍게 그의 손목을 잡았다. 막희가 찢어지는 소리로 말했다. "당신! 당신! 왜 말리는 거요?" "막 형께서는 냉정하게 천천히 생각해 보시오. 안양오의가 죽었을 때 이 분 형씨께서는 우리와 같이 있었소. 어떻게 이 분이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와서 그들을 죽일 수가 있었겠소?" 막희는 이 말을 듣고 멍청한 듯 한참을 있더니 슬며시 손을 내렸다. 그 대한은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저 녀석이 여기에 와서 미쳐버린 거요?" 심랑이 포권을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형씨께 한 가지 여쭙고 싶군요. 듣건대 옛날 색상신용 유 대협께는 외동딸이 한 분 계셨는데 어려서부터 색외(塞外)의 드넓은 사막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 분이 귀하와 어떤 관계......." 대한이 말을 잘라서 말했다. "바로 이 사람의 안사람이오." "귀하께서 유 대협의 사위되시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또 말했다. "무림계 인사들은 모두 자살수는 강하기가 비할 데 없는 무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여자를 모르는 남자가 연마해야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독수수혼 사도(師徒)는 모두 죽었고 요명신개는 성격이 괴퍅하여 제자를 두지 않았고, 색상신용 유 대협께는 따님 한 분만 있었기 때문에 강호에서는 그 혁혁한 인명을 날렸던 자살수가 전해질 수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 대협께서는 당신 딸이 직접 이 장력을 연마하지 못하자, 그 비결을 형씨에게 전해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요. 무림의 절기가 이로 인해서 다시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으니 진짜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축하드립니다." 그 대한이 입가에 웃음을 보이면서 천천히 말했다. "형씨는 나이도 어린데 옛일을 마치 집안의 감춰둔 보물을 헤아리듯 자세히 알고 있으니 필히 명문자제이겠구려?" "소인은 심랑이라 합니다. 무명소졸이지요. 형씨의 함자는 어떻게 되는지요?" "철화학이라 하오." 그의 미간에 나타났던 살기는 심랑의 몇 마디 말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심랑은 웃음을 거두고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무림계에는 철 형 외에도 자살수를 시험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철 형께서 모르고 계실 뿐이죠." 철화학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무슨 말이오?" 심랑은 그에게 안양오의의 첫째인 김림이 몸에 자살수를 맞고 죽은 일을 자세히 얘기해줬다. 철화학은 안색이 변하더니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이 고묘 속에 이렇게 기괴한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군. 복수수혼 일파는 몰살당하여 대가 끊겼고, 요명신개 또한 제자가 없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자살수를 배울 수가 있었지? 본인은 오늘 어떻게 된 진상인지 정확히 밝혀 보아야 하겠소." 그는 횃불을 높이 쳐들고 큰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갔다. 일소불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그래도 이분 철 형이 담력이 크군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호랑이 새끼를 잡는단 말이오?" 그는 철화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오른쪽 첫번째 문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말했다. "막희, 승형 당신도 우리를 따라 들어올 수 있겠소?" 막희와 승형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주칠칠이 심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죠?" 심랑은 철화학 등 세 사람의 모습이 문 안으로 들어서고 불빛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 심랑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불아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니?" 불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가도록 해요. 이곳에는 틀림없이, 틀림없이......." 불아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랑이 마치 전광석화처럼 모지와 식지, 중지 세 손가락을 뻗쳐서 불아이의 맥문의 경맥을 움켜쥐고 왼손을 들어서 그의 팔꿈치에 있는 곡지(曲池)대혈을 내려쳤다. 주칠칠이 놀라서 말했다. "당신! 뭐하시는 거예요?" "아직도 이 사람이 당신의 동생이라고 생각하오?" 왼손으로 횃불을 밝혀 든 다음 횃불을 주칠칠에게 건네주고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그가 누구인지 보시오." 손을 들어 불아이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겨내자 쭈글쭈글한 박껍질 같은 피부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얼굴이 나타났다. 불아이가 동굴 속으로 뛰어들어올 때 이미 화예선으로 변했던 것이다. 주칠칠은 놀라서 얼굴색이 변하며 소리쳤다. "내 동생은...... 당신! 당신 내 동생을 어떻게 했죠?" 화예선은 순식간에 심랑에게 제압당하자 얼굴 가득 놀라는 기색을 들어내 보이더니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동생은 내가 혼수혈을 짚어서 포대에 잘 싼 다음 숨겨놓았으니 절대 변고가 발생하지는 않을 거야." 주칠칠은 자기가 동굴 속으로 뛰어들어올 때 불아이가 한참 있다가 쫓아왔으며, 불아이가 들어오기 전 동굴 밖에서 놀람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을 생각했다. 아마 이때 화예선이 손을 썼던 모양이었다.불아이가 동굴 속으로 들어온 후에 불아이의 음성이 약간 변했음을 알았으나, 그녀는 동생이 너무 놀랐기 때문에 목소리가 약간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고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그녀는 화예선이 이처럼 자신을 기만한 것을 알자 놀라움과 분노가 솟구쳐 올라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당신! 당신은 왜 그렇게 한 거죠? 미쳤어요?" 화예선은 더욱 머리를 숙였다.주칠칠이 계속 소리를 질렀다. "말좀 하세요. 말좀 해보라니까요. 도대체 왜 그랬는지 듣고 싶어요." 심랑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가 상대하려고 했던 사람은 당신 혼자가 아니오. 방금 석문 밖에서 푸른 빛이 번쩍 했는데 그것도 이 사람이 한 짓이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문밖의 불이 번쩍이는 곳으로 쏠려있을 때 그녀는 돌탁자 위에 있는 철패를 슬그머니 감췄소. 그리고 또 아무도 모르게 막희를 한 주먹 쥐어박았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어린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던 거요. 그리고 그가 어둠 속에서 누가 자기를 꼬집었다고 외쳤던 것은 그녀의 자작극이었소." 그는 말을 멈췄다가 웃으면서 다시 이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이 자작극 때문에 나는 그가 당신 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던 거요. 생각해 보시오.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의 얼굴을 꼬집을 수 있었겠소?" 주칠칠은 들을수록 더욱 멍해졌다. 한참이 지나서 그녀는 길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원래 그녀였군요......! 하마터면 제가 놀래서 죽을 뻔 했잖아요."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놀라서 죽을 뻔 한 것은 당신 혼자만이 아니잖소?" "우리집 식구 모두가 그에게 야박하게 대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이 고묘에 들어와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걸까요? 왜 무엇 때문에 제 동생에게 그런 짓을 했을까요?"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 화가 나는지 갑자기 손을 들어올려 화예선의 얼굴에 갖다 붙였다. "말해 보세요. 왜 그랬죠? 왜 그랬어요? 말해 보세요." 화예선이 고개를 쳐들더니 주칠칠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서는 일종의 원한과 표독스러운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주칠칠은 그녀와 여러 해를 같이 살았으나 한 번도 이처럼 표독스러운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주칠칠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갑자기 화예선이 째지는 듯한 소리로 울부짖더니 전력을 다해 두 발을 날려 심랑의 하복부를 걷어차 들어갔다. 심랑은 가볍게 몸을 날려 그 공격을 피했다. 화예선은 주칠칠의 일 장에 그의 흉악한 본성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치 발광한 야수처럼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차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랑에게 맥문이 재압당한 채여서 심랑의 옷깃조차 건드릴 수 없었다. 화예선은 입을 벌려 심랑의 손등을 물어뜯으려 덤벼들었다. 그러나 심랑이 도리어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팔을 등 뒤로 잡아 비틀었다. 화예선이 하늘에 올라갈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해도 더이상 반항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주 흉악한 기색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하게 했다. 심랑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이 고묘에서 고의로 일종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여 우리가 빨리 이곳에서 나가도록 하려는 것을 알았소. 그렇지만 왜 그랬던 거요? 이 고묘에 무슨 비밀이 있는 거요? 그 비밀을 우리가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거요? 당신은 이 고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요? 당신이 사실대로 얘기하기만 한다면 절대 당신을 난처하게 하지는 않겠소." 화예선이 찢어지는 소리로 말했다. "먼저 손을 놔라. 그러면 내가 얘기하마!" 심랑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한 번 손을 놓으면 다시는 당신을 잡을 수 없게 되지는 않을까요?" 화예선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면서 돌연 물구나무서기로 몸을 비튼 다음 두 발로 심랑의 가슴을 차들어갔다. 그러나 심랑이 살짝 손을 털자 헛발길질이 되고 말았다. 화예선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좋다.네가 나를 괴롭혔지? 네가 죽은 다음에 묻힐 곳도 없게 만들어버릴 거다. 네가 죽은 다음에 혀를 뽑아내고 눈알을 파내고 이를 하나씩 하나씩 부수고 머리를 한가닥 한가닥 전부 뽑아버릴 테다." 주칠칠이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그만둬요. 당신. 당신! 제발 그만 얘기하세요." 화예선이 흉악한 웃음을 날리면서 말했다. "겁이 나냐? 내가 진짜로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빨리 이 사람한테 손을 놓으라고 해. 그렇지 않으면......." 주칠칠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당신이 부상을 당하여 곧 죽게 되었을 때 우리집에서는 당신을 받아들여 치료를 해주었어요. 당신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는 내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당신대신 화풀이를 하게 만들었죠. 당신이 지난 날 너무 악한 일을 많이 해서 밤중에 악몽을 꿀 때 내가 밤새 당신 옆에서 지켜드렸어요. 그런데, 그런데 내가 지금 이런 결과를 보답으로 받다니......!" 주칠칠은 점점 울먹거리더니 두 줄기의 맑은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화예선은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더니 쭈글쭈글한 얼굴에 미안한 기색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입을 벌려 뭐라고 말을 할 듯했으나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심랑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왜 이런 짓을 한 거죠?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왜 솔직히 말을 하지 않는 거죠? 이 고묘에 있는 어떤 사람이 당신과 관계가 있나요? 당신은 그 사람을 도와야만 되는 건가요? 이 고묘에 있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자매란 말인가요?" 화예선이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어떻게 알았지?" 말소리가 입밖에 나오자마자 화예선은 비로소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화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짐승 같은 녀석! 너! 너! 내 입에서 더이상 얘기를 들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심랑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으나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화 부인의 형제자매가 아직도 세상에 살아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군요. 당신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한 행동을 했다면 진작 말을 했어야 했소. 당신이 말을 했으면 나도 당신을 도와서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았겠소? 그렇지 않을 경우 당신이 비록 오늘은 우리를 속여서 물러가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고묘의 비밀이 이미 밖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조만간 강호의 호걸들이 어떤 까닭인지 알기 위해서 몰려오게 될 것이오. 그때 당신이 후회해도 너무 늦는 것이 아니겠소?" 그의 말은 평온했으나 사람의 마음을 설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화예선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하면 당신이 나를 도와주시겠소?" "내가 만약 당신을 도와주려는 생각이 없었다면 사람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당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았겠소? 당신은 총명한 사람이오. 이러한 도리도 생각해내지 못한단 말이오?" 화예선이 이를 깨물면서 말했다. "좋소. 내가 말하리다. 이십 년 전, 우리는 바로 여기에 보물을 숨긴 고묘가 있다는 것을 알았소. 그때 우리 십삼천마(十三天魔)는 무림계를 횡행하였던 때였으나 시시각각으로 원수들이 추격해 오는 것을 방비해야만 했소. 그래서 시간이 없어 이곳에 찾아와 보물을 캐낼 수가 없었던 거요. 후에 형산싸움에서 십삼천마는 거의 모두가 죽어버렸소. 나도 또한 이 고묘의 비밀을 영원히 가슴 속에 간직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런데 비밀이 끝내 사람들에게 알려질 줄이야!" 주칠칠이 얼굴색이 변하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고묘의 비밀을 지키고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수단을 택했다는 건가요?" 화예선은 얼굴을 약간 실룩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지는 않소." 주칠칠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랬죠?" "다만. 다만, 이 고묘에서 중독되어 죽은 사람들이 모두 입지초혼산에 독살당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오. 입지초혼산은 우리 화씨 집안의 독문비방으로서 천하에 오직 한 사람 우리 큰오빠 초혼천마 화경선(花梗仙)만이 제조해 낼 수가 있는 독약이오." 심랑과 주칠칠의 안색이 변했다.주칠칠이 다그쳐 물었다. "초혼천마 화경선은 이미 형산싸움에서 죽지 않았어요?" "형산싸움은 마지막 오일째에 이르러 상황이 크게 혼란해졌었소. 매일 매일 들려오는 소문들은 모두 달랐고 누구도 그 진상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었소. 그 당시 사람들은 이미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어 있었소. 우리 십삼천마는 원래 두 집단으로 나눠서 그 산에 올라갔으나 산에 올라간 후에 전부 헤어졌소. 나는 다만 큰오빠 화경선이 난운간(亂雲澗)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끝내 그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소."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의 큰오빠가 죽었다는 소문이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화예선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틀림없이 잘못된 것일 거요."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의 큰오빠가 지금 이 고묘 안에 있다는 건가요?" 화예선이 눈을 부릅뜨고 냉랭하게 말했다. "틀림없이 그럴 거요. 입지초혼산이 이 고묘에서 나타났는데 초혼천마는 당연히 이 고묘에 있어야 되지 않겠소?" 심랑이 갑자기 미소하면서 말했다. "그 입지초혼산은 혹시 당신 큰오빠의 혼백이 이 묘역(墓域)에서 제작한 것인지도 모르지 않겠소?" 화예선의 몸이 부르르 떨렸으나 순간 험악한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비록 이 고묘 중에 있는 것이 우리 큰오빠의 혼백일지라 하더라도 나는 그래도 그를 도와야겠소. 절대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 혼백을 귀찮게 하도록 놔두지는 않겠소." 그녀는 왼손으로 가슴을 더듬더니 철패 하나를 꺼내서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심랑은 주칠칠이 손에 들고 있는 횃불에 비춰 철패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 거무칙칙한 철패에는 은은한 연기와 같은 것이 요동치고 있었다. 더욱 자세히 보자 조그마한 철패는 하늘과 지옥을 뒤덮을 듯한 기세와 무한한 변화를 가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심랑은 안색이 변하면서 말했다. "이것은 옛날 천하제일의 암기인 천운오화면(天雲五花綿)의 주인인 운몽선자(雲夢仙子)의 천운령(天雲令)이 아니오?" 화예선이 말했다. "그래도 약간의 견식은 있군." 주칠칠이 놀라서 말했다. "천하를 떨게 한 천운령이 다시 강호에 출현했다면 운몽선자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화예선이 천천히 말했다. "다른 사람의 생사는 확실히 단정해서 말할 수 없소. 그렇지만 운몽선자가 옛날 구주왕(九州王) 심천군(��天君)의 건곤제일지(乾坤第一指)에서 죽을 때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운몽선자가 죽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소." 주칠칠이 말했다. "죽은 사람의 물건이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다는 거죠?" 화예선이 냉랭하게 그 말을 받았다. "자살수 신공, 입지초혼산 천운령. 이 물건들이 어느 것 하나 죽은 사람의 물건이 아닌 게 없지 않소? 그렇지만 오늘 모두 이 고묘에서 나타난 거요. 이를 통해 볼 때 고묘에 있는 귀신은 하나만은 아닌 것 같소. 나는 그들과 살아서는 좋은 친구였고, 죽은 후에도 친구가 되려 하오. 그런데 어찌 그들이 죽은 후 편안히 숨쉬는 이곳에 다른 사람이 와서 소란을 떠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있겠소? 당신들은 빨리 나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일소불, 철화학 그들과 비슷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오." 심랑이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의 최후가 어떻단 말이오?" 그는 일소불과 철화학 등이 걸어 들어간 문이 소리도 없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심랑 등은 모든 정신을 화예선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이 닫힌 것도 몰랐던 것이다. 주칠칠이 크게 부르짖었다. "저 문! 저 문이......." 화예선이 대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지금에야 발견했단 말인가? 이 고묘에 몇 개의 귀신이 불어났으니 내가 여기 있는다고 해도 적막하지는 않겠군. 그렇지만 옛날의 정을 생각해서 너희들에게 빨리 돌아갈 것을 권하니 가급적 빨리 돌아가는 게 나을 거야." 그의 처량한 웃음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했다. 심랑은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여덟 개의 문이 바로 팔괘(八卦)의 원리에 의해서 세워진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들이 걸어들어간 문은 생문(生門)인데 어떻게 죽게 된다는 거지?" 그는 화예선을 이끌고 앞으로 달려들어가 전력을 다해 문을 향해 일 장을 날렸다. 다만 '펑' 하는 소리만 났을 뿐 석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석문은 두껍고 단단하고 무거워 사람의 힘으로는 열 수 없는 것이었다. 석문이 심랑의 장력에 맞아 울리는 소리와 화예선이 방금 내뱉었던 처량한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메아리쳐 마치 벼락소리처럼 들렸다. 갑자기 십여 개의 손에 횃불을 들고 허리에는 날카로운 무기를 지닌 대한들이 문밖에서 한꺼번에 몰려 들어왔다. 사방에서 울리는 메아리 소리가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집어삼켜서 그들이 곧장 문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심랑과 주칠칠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몰려들어온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은 바로 팽립인과 만사통이었다. 심랑이 말했다. "팽립인께서는 과연 약속한 대로 다시 오셨군요. 본인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팽립인의 뒤에서 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년! 여기 있었구나. 이 어르신들께서 너를 찾느라고 많이 돌아다녔다." 이 몇 사람은 바로 천운안 이여풍과 복천조 이정, 신한응 방천리와 위무표국의 총표두 전령송이었다. 이여풍과 이정 두 사람은 심양까지 주칠칠 등을 쫓아왔으나 주칠칠은 보지 못하고 팽립인을 만났던 것이다. 팽립인은 원래 그들과 안면이 있어서 그들을 보고 곧 이 고묘의 비밀을 들려준 다음 그들에게 고묘의 비밀이 어떤 것인지 같이 가서 알아볼 것을 청했던 것이다. 방천리와 전령송 등은 호기심이 많은 인물들로 팽립인과 만사통이 여러 번 권하자 같이 이곳으로 몰려왔던 것이다. 주칠칠이 눈을 돌려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군요. 저 인간들이 쫓아왔어요." 그녀의 신형이 갑자기 비스듬히 날아가더니 돌연 다른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웃으면서 말했다. "이 속은 전부 귀신이 가득차 있어요! 당신들 감히 쫓아들어올 수 있겠어요?" 그녀는 알게 모르게 심랑을 향해 눈짓을 했다. 심랑은 속으로 발을 굴렀으나 화예선을 끌고 쫓아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복천조 이정이 노기를 터뜨렸다. "네 년이 지옥까지 도망간다 하더라도 이 어르신께서는 끝까지 쫓아갈 것이다." 그는 장도(長刀)를 빼어들고 몸을 날리려는 순간 방천리가 한 손으로 그를 붙잡았다. 주칠칠의 백의(白衣)가 펄럭거리더니 그녀의 모습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심랑이 주칠칠을 쫓아가서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담력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소? 어찌 이렇게 경거망동할 수 있단 말이오?" "일을 중도에 그만두면 시작하지 아니함만 못하죠! 화예선이 사람을 놀라게 할수록 저는 끝까지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아봐야겠어요. 어쨌든 우리 곁에는 그녀가 있으니까 그녀 오빠가 사람이든 귀신이든 저희들을 약간은 봐주겠죠! 하물며 제가 방천리 같은 사람들 손에 떨어지느니 차라리 귀신에게 죽는 게 낫겠어요."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당신의 이러한 성격은 귀신마저도 골치를 썩힐 것이오." 갑자기 '우르릉'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리더니 뒤에 있는 문이 꽉 닫혀버렸다. 문밖에 있는 사람들의 소리와 불빛이 일시에 보이지 않고 주칠칠이 손에 들고 있던 횃불마저도 꺼져버렸다. 사방은 어둠 속에 잠겨버렸다. 문 밖에 있던 복천조 이정은 마침 방천리를 향하여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하고 있었다. "큰형님께서는 왜 쫓아가는 것을 말리시죠? 우리 눈앞에서 또 그년이 도망가게 놔둘 생각이신가요?" 방천리가 냉소하면서 말했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사문(死門)일세. 어떻든 살아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야.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문으로 따라 들어간단 말인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문이 위에서 내려와 그들이 들어간 문을 막아버렸다. 이정이 몸을 움찔 하면서 말했다. "큰형님께서 만약 기문팔괘(寄門八卦)에 통달하지 않았다면 이 동생은 아마 지금쯤 그 문 속에 갇혀 있을 겁니다." 방천리가 두 눈을 한 번 굴리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이 고묘에 있는 것이 만약 사람이라면 기문팔괘술은 과연 효과를 볼 것이요, 그러나 또 귀신이라 할지라도 '헤헤' 제갈무후(堤葛武候)가 다시 살아나온다 해도 저 속에서 살아나오지는 못 할 것이오." 천운안 이여풍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계집애는 우리에게 쫓겨 사문으로 들어가버렸으니 우리의 화풀이는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쯤해서 돌아가는 게 더이상 귀찮은 일을 당하지 않을 듯한데요." 전령송 등은 한참을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표정으로 보아 이미 다른 계책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담력은 비록 다른 사람보다 컸지만 고묘에서 풍겨나오는 음산한 귀기는 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만사통과 팽립인이 몰래 눈짓을 교환하더니 팽립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 고묘 속에 숨겨진 보물의 양은 천하의 보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소. 우리가 보물산에 들어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소? 숨어 있는 것이 귀신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그들을 겁내야 한단 말이오?" 만사통이 유유히 말했다. "여러분께서 만약 겁이 나신다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팽 형은...... 헤헤 좋든 싫든 한 번 들어가 봐야겠소." 전령송이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두렵다고 했소? 우리 위무표국 문하는 적 앞에서 도망가는 무리가 아니오. 우리가 앞장서겠소." 칠팔 명이 그에 응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앞으로 뛰쳐나왔다.신한응 방천리가 냉랭하게 말했다. "우리 풍림삼조(風林三鳥)도 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니오. 그렇다고 힘만 믿고 날뛰는 어리석은 무리도 아니오. 우리도 들어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는 볼 것이오. 그렇지만 먼저 자세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오. 총표두께서는 본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전령송이 말했다. "방 형께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을 두 무리로 나눕시다. 한 무리는 먼저 들어가서 길을 찾아보고, 다른 한 무리는 여기에 남아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합시다. 먼저 들어가서 길을 찾는 무리는 긴 줄을 끌고 들어가고, 여기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줄을 잡고 있습시다. 그렇게 할 경우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혹시 길을 잃는다 해도 다시 나올 수 있게 되지 않겠소?" 팽립인이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방 형의 계책이 과연 뛰어나고 용의주도하군요. 그렇지만 누가 앞장서서 길을 찾죠?" 방천리가 말했다. "전 총표두와 본인이 말을 꺼냈으니 도박으로 누가 길을 찾는 책임을 질 것인지 결정합시다." 전령송이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 방천리가 한쪽 손을 등 뒤에 숨기며 말했다. "총 표두께서는 내 손가락이 홀수인지 짝수인지를 맞추어 보시오." 전령송이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홀수요." 방천리가 미미하게 웃으며 두 손가락을 펴보였다. "짝수요. 당신이 틀렸소." 전령송이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앞장서서 길을 찾아보겠소. 위무표국 문하의 제자들은 날 따라오도록 하라!" 팽립인이 냉소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방천리란 인물은 정말 늙은 여우로구나. 손을 등 뒤에 숨기고 전령송과 도박을 하다니! 전령송이 만약 홀수라고 하면 그는 두 손가락을 펴보일 것이고 짝수라고 하면 다섯 손가락을 펴보일 것이다. 이런 도박은 일 년 내내 한다고 해도 전령송이 이길 승산은 조금도 없지. 다만, 오늘 너희들이 이 굴에 들어온 이상 하나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야 할 거야. 도박에서 이기든 지든 아무 의미가 없지.)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본인은 전 형과 길을 찾는 역할을 맡겠소." 방천리가 긴 밧줄을 꺼내서 밧줄 끝을 전령송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총 표두께서는 밧줄 끝을 몸에 매시오. 밧줄이 전부 풀린 후에 어느 곳에 갔든 금방 돌아와야 하오. 그리고 지나가는 곳에는 반드시 표시를 해둬야 하오. 만약 중간에서 무슨 변고가 생기면 밧줄을 한 번 가볍게 당기시오. 우리가 즉시 달려가겠소." 전령송이 말했다. "알았소." 그는 말을 마치고 밧줄 끝을 허리부분에 질끈 동여맨 다음 큰소리로 외쳤다. "나를 따르라!" 그는 횃불을 높이 쳐들고 큰 걸음걸이로 앞장서서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를 수행하는 표두 중의 한 사람이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이 문에서도 위에서 다른 문이 내려온다면 우리는 그 속에 갇혀버리지 않을까요?" 이정이 말했다. "그 점은 걱정마시오. 이 문에서도 만약 석문이 내려와 닫히게 된다면 나와 동생 이여풍이 일순간은 떨어지는 문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오. 전 형께서 그 밧줄을 따라서 즉각 돌아오면 무사할 것이오." 전령송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복천조는 비단 경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산을 뒤엎을 만한 힘이 있다더니 이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군요! 그렇다면 이 형께 부탁드리겠소!" 말을 마치고 팽립인과 그 수하들은 마치 물고기가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문 속으로 들어갔다. 아홉 개의 횃불은 문 속의 어두컴컴한 길을 환하게 비췄다. 아홉 사람의 신형이 멀리 사라졌을 때 이정이 말했다. "과연 대장부로군!" 방천리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너무 우둔해!" 전령송은 앞장서서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비밀통로의 천정은 두 장이나 되었으며 길의 양측은 모두 암석으로 되어 있고 꾸불꾸불 끝이 없어 보였다. 통로의 양쪽으로 가끔 다른 문들이 나타났으나 모두 꼭 닫혀 있어서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귀신 화살 팽립인은 그들과 멀리 떨어져서 두 손에 쌍도를 들고 얼굴에 야릇한 웃음을 띠고 쫓아오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걱정하지 듯했다. 마치 이들이 전부 죽는다 해도 자신에게는 아무 위험도 없을 것이라는 듯이....... 한참을 걸어간 후에 팽립인은 장도를 들어올려 긴 밧줄을 끊어버렸다. 앞서가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가 밧줄을 끊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팽립인은 밧줄을 끊고 나서 비로소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 형! 앞이 어떻습니까?" 전령송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이 고묘가 이렇게 클 줄은 진짜 몰랐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앞에서 반쯤 열려진 문이 하나 보였다. 문 속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전령송이 놀란듯 말했다. "이 속에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요?" 그는 한걸음에 달려가 고개를 들어서 살펴보았다. 그 문 안은 육각형의 석실이었으며 석실 구석자리마다 하나씩 여섯 개의 동관이 놓여 있었다. 석실 가운데 동으로 만든 받침 위에는 등불이 있었으며 귀신불빛과 같은 불빛을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 등불도 누가 피운 것인지, 언제 피워 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푸른 불빛은 푸릇푸릇한 동관을 비춰서 일종의 귀기를 자아내어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전령송이 긴장한 듯 긴숨을 불어내고 말했다. "들어가 볼까요, 들어가지 말까요?" 팽립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신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몸에 걸친 밧줄을 잡아당겨 방 형 일행과 같이 이 모습을 보고 의논한 다음 결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령송이 말했다. "그럽시다." 그는 손을 돌려 밧줄을 잡아당겼다. 한참을 잡아당겼으나 밧줄은 줄줄 끌려 들어올 뿐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전령송은 얼굴색이 변하며 급하게 밧줄을 잡아당겼다. 갑자기 그 밧줄 끝이 보였다. 이때에야 그들은 비로소 밧줄이 잘려나간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우리 빨리 물러섭시다." 팽립인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이것은 누가 이렇게 잘라놓은 거죠? 이런 변고가 발생했으니 물러서는 것도 제가 보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오. 아예 안으로 들어가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나 살펴봅시다." 전령송이 한참을 침중한 기색으로 생각하더니 이를 깨물면서 말했다. "생사는 이미 정해진 것이고 부귀는 하늘에 달린 것이오. 본인 전령송이 오늘 여기서 죽는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죽을 수밖에...... 들어가 봅시다." 말을 마친 그는 신형을 번쩍 날려 먼저 석실로 들어갔다. 팽립인이 말했다. "제가 이 문을 지킬 테니까 여러분께서 먼저 들어가시죠."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머뭇거렸다. 팽립인의 눈빛이 번쩍 하더니 다시 말했다. "저 동굴 안에는 보물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팽립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감돌더니 발을 한 걸음 옮겨 그 석문을 밀었다. 문에는 기관장치가 되어 있어 '팍' 하는 소리를 내면서 닫혀버렸다. 석문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상황이 좋지 않음을 발견하고 놀라는 소리를 냈을 때에는 석문은 닫혀있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놀라는 소리도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때 그 통로에 갑자기 한 명의 회색인형이 '번쩍' 하고 나타났으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팽립인은 석문을 밀어 닫은 후 회색인형이 나타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낮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전령송. 나를 원망하지는 마시오. 이것은......." 뒤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음침하게 그의 말을 가로채면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잘하셨소. 이제는 빨리 돌아가서 그 잘라버린 밧줄을 잡아당겨 방천리 등이 들어와서 죽게하시오." 팽립인은 즉각 이 음성은 바로 회색장포를 입은 사람이 하는 말임을 알아차리고, 두 다리에 맥이 빠졌으나 억지로 몸을 떨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등 뒤에서는 귀기 서린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곧장 걸어가시오. 뒤는 돌아보지 마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에게 좋은 점이 있을 것이오. 만약 뒤를 돌아본다면 당신도 똑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오." 밖에서는 방천리가 풀어가는 밧줄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이정과 이여풍 등은 전령송 일행이 들어간 문의 양쪽에 꼼짝 않고 서서 문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밧줄이 거의 다 풀려나갔을 무렵 갑자기 더 이상 풀려나가지 않았다. 방천리는 그 밧줄이 이미 잘린 줄도 모르고 눈썹을 찌푸리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령송이 어째서 더 앞으로 나가지 않는 거지? 혹시 무엇을 발견했단 말인가?" 사람들은 숨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여 이미 들어간 사람들에게서 무슨 동정이 있기를 기다렸다. 시간의 흐름이 무척이나 더뎠다.사람들의 손발은 이미 얼음처럼 차가워졌으며 호흡은 점점 침중해졌다. 한참이 지나서 갑자기 그 밧줄이 세 번이나 요동쳤다.또 한참을 지나서 다시 세 번 요동쳤다. 이정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속에서 무슨 변고가 생긴 모양입니다.우리가 들어가서 도와줍시다." 방천리가 냉소하면서 말했다. "진짜 들어가서 그들을 도와주고 싶소? 그들과 함께 죽고 싶다는 거요?" 이정이 멍청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만사통의 눈빛이 번쩍 하더니 말했다. "전령송 등이 이미 속에서 보물을 발견했을지도 모르죠. 여러분께서 들어가지 않는다면 본인 혼자만이라도 들어가 봐야겠소." 그는 신형을 번쩍 날리더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천리의 음침한 얼굴에도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한참을 아무 소리 않고 서 있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비록 전령송과 두터운 교분은 없지만, 강호의 의리를 지키지 않을 수는 없지. 가자. 들어가서 그를 도와주자." 그는 수하들을 이끌고 만사통의 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정과 이여풍은 제일 나중에 그들의 뒤를 따랐다. 만사통은 속으로 웃으면서 생각했다. (늙은 여우 같은 녀석! 속으로는 음흉한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인의(仁義)를 내세우다니. 모두 그가 보물이 탐나서 쫓아 들어가는 것을 아는데도 입으로는 여전히 전령송을 도와주러 간다는 소리를 하다니! 그렇지만 너, 늙은 여우는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화살 한 개가 날아갈 만한 거리를 들어갔을 때 뒤에서 석문이 우르릉 소리를 내면서 닫혀버렸다. 이여풍이 석문이 닫힌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소. 우리가 꾐에 빠진 것 같소." 방천리도 크게 놀라서 몸을 돌려 살펴보았으나, 그 석문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힘을 합한다 해도 조금도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방천리가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은 앞으로 나갈 수는 있어도 더이상 뒤로 물러설 수는 없소. 용기를 내서 앞으로 들어가 봅시다." 또 화살 두 개가 날아갈 만한 거리를 나아갔을 때 그들은 밧줄의 잘려진 끝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더욱 대경실색했다. 이정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전...... 전령송 그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지? 이미 독수를 당했단 말인가?" 방천리는 돌처럼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대답도 없이 눈은 앞을 주시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갈 뿐이었다. 그들은 비록 두려움으로 몸을 떨고 있었으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방천리를 따라서 앞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눈 앞에 꽉 닫힌 석문이 나타났으며 그 석문 앞에는 이미 꺼져버린 횃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횃불은 이미 꺼져있었으나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어 횃불이 꺼진 시간이 얼마 경과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방천리가 그 횃불을 들어올렸다.그의 얼굴색은 더욱 굳어졌다. 그는 들어올린 횃불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이 횃불은 바로 전령송 그들이 들고 갔던 것이오. 보건대......." 그는 말을 멈추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말을 다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전령송이 이미 불행한 일을 당했으리란 것을...... 사람들은 두려움과 함께 약간의 비통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점에서 더 이상의 말은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정면에 세 갈래의 교차로가 나타났다. 교차로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이 하나 떨어져 있었으며 그 피는 아직 응고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팔은 주먹을 꼭 움켜쥐고 있었으나 식지(食指)는 곧장 뻗어서 좌측에 있는 교차로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측에 있는 교차로에는 횃불에 의해서 길 가득히 백골들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 백골들은 어떤 것은 완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어떤 것은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다. 또 어떤 백골들의 손에는 여전히 보검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 보검은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음산하게 보이는 백골은 마치 사람들이 악몽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으스스한 귀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정이 한숨을 들이키면서 말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방천리가 말했다. "나가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한단 말이오?" 이정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전면이 죽음의 굴인 것 같은데......." 방천리가 냉랭하게 말했다. "원래가 죽음의 굴이었소." 이정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이 고묘에 있는 사람들은 어째서 우리를 전부 사지로 몰아넣는 것일까요?" 방천리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고묘에 유인되어 온 사람들은 그 내력(來歷)이 다르고 서로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오. 그런데도 사람들을 모두 사지로 몰아넣는 것으로 볼 때 절대 원한에 의한 살인은 아닌 것 같소." 이여풍이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죠?" 방천리가 말했다. "내가 보건대 이 고묘에는 아주 큰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소. 이 음모는 아마 무림계의 대동란의 전주곡인 것 같소. 우리는 모두 이 음모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는 것이오." 만사통이 말했다. "방 형께서는 고묘에 있는 것이 귀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방천리가 냉소하면서 말했다.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소? 다만......." 이때 그들 뒤에서 냉소가 들려왔다.방천리는 머릿발이 곤두서며 즉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뒤에는 텅 빈 통로만 있을 뿐 인형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다시 머리를 돌렸을 때 피가 뚝뚝 떨어지던 팔은 방향을 바꾸어서 가운데 있는 통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놀란 소리를 내었다. 누구인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 이게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짓이란 말입니까?" 방천리가 재빠르게 그 잘린 팔을 걷어차고 대갈했다. "귀신이라 해도 한 번 싸워나 보아야겠소." 그는 신형을 번뜩이며 가운데 통로를 향해 쫓아 들어갔다. 만사통이 일종의 기이한 웃음을 떠올리며 슬쩍 몸을 굽혀서 발끝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닦았다. 이 핏자국은 바로 그가 아무도 모르게 잘려진 팔의 방향을 바꾸었을 때 생긴 것이었다. 풍림삼조와 문하제자들이 모두 중앙의 통로로 들어간 것을 보고 만사통은 비로소 큰 걸음걸이로 쫓아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팔 하나가 불쑥 나오더니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한 명의 회의인이 석벽 사이에서 걸어나와 그의 등 뒤에 서서 음침하게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도 그들을 따라 죽고 싶단 말이냐?" 만사통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하였다. "소인은......." 회의인이 말했다. "넌 아직 쓸 데가 있으니 내가 너를 어떻게 죽게 둘 수 있겠는가? 기억해라. 오른쪽의 백골들이 가득 쌓여 있는 통로로 가면 너의 친구 팽립인이 나와서 자네를 맞이할 것이다." "아......, 알았소." 중앙통로 쪽에서 풍림삼조 등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사라져버렸다. 만사통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선채 한참 동안 몸을 부르르 떨다가 점차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죽음과 같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불빛 아래 나타난 그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공포감을 자아내고 있었다.만사통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으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회의인은 귀신처럼 나타났다가 귀신처럼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풍림삼조와 문하제자들은 중앙의 통로로 뛰쳐들어가서 모퉁이를 두 번 돌았을 때 갑자기 눈앞에 하나의 석실이 나타나자 그 석실의 조금 열려진 문에서 보석들이 뿜어내는 은은한 빛이 나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방천리는 눈이 번쩍 뜨이면서 기쁜 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제대로 찾아들어온 것 같군." 그는 앞장서서 석실의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석실의 중앙에는 네 개의 돌관이 놓여져 있었으며 관 뚜껑은 모두 열려 있었다. 네 개의 돌관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기이한 보석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그 보석들이 현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풍림삼조는 보석을 탐내는 무림의 호걸들이 아니었으나 일생 중 이렇게 많은 진기한 보석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도 눈빛을 번쩍이면서 놀람의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풍림문하의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을 헤 벌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그들은 기쁨에 찬 소리를 지르며 날듯이 뛰쳐나가 각자 손을 뻗쳐서 그 관 속에 있는 보석들을 한아름씩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물들을 손으로 잡자마자 갑자기 보물들이 부서지며, 여러색의 물방울들이 부서진 보물들 속에서 뿜어나와 그들의 몸과 손, 얼굴을 덮어씌울 줄이야. 그들은 물방울들이 닿는 곳마다 마치 불로 지진 듯한 뜨거움을 느껴 참혹한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 물방울들이 닿는 곳은 옷이나 피부나 머리카락을 막론하고 순식간에 완전히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풍림제자들은 고통에 이리저리 구르면서 몸부림쳤다.그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풍림삼조는 비록 가슴 가득 놀람과 두려움을 느꼈으나 그 독즙(毒汁)들이 자신의 몸에 묻을 것을 두려워하여 손을 뻗쳐서 부축하거나 안아올리지 못했다. 제자들의 몸부림이 멈춰지고 호흡이 점점 미약해지다가 마침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더니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피부는 점점 더 넓은 범위로 썩어들어가 그 건장한 풍림제자들은 순식간에 한 무더기의 백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방천리는 가슴이 아파 부르짖었다. "지독한 독이야!" 갑자기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뒤돌아 보았을 때 그들이 들어왔던 석실의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심랑과 주칠칠, 화예선, 세 사람은 석문이 닫혀버린 후 칠흙 같은 암흑 속에 빠져들었다.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있었으나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심랑은 더욱더 화예선의 손목을 꼭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주칠칠은 손을 뻗어 심랑의 목을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 부드러운 볼을 심랑의 얼굴에 갖다 대고 탄식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진짜 좋군요!" 화예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사람이 곧 죽게 되었는데 좋긴 뭐가 좋단 말인가?" 주칠칠이 유유히 말했다. "이 꿈 같은 어둠 속에서 이 사람과 서로 의지할 수만 있다면 죽는다 해도 좋다고 생각돼요." 그녀는 심랑의 귓볼을 살짝 잡아 당기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싫어요. 당신! 당신, 그녀를 놔주세요. 그녀를 쫓아버리세요." 그러나 심랑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난 아직 충분히 살지 못했소. 이 사람을 놔줄 수는 없소." 주칠칠이 머리를 돌리고 심랑을 물어 뜯으면서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정한 사람! 분위기도 모르는 짐승 같은 사람! 죽어버려요. 진짜 당신을 물어주고 싶어요." 화예선이 냉랭하게 말했다. "빨리 물어뜯어 죽여버려라. 빠를수록 좋지!" 심랑이 주칠칠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놓으시오." "뭘 내놓으란 말예요?" "횃불말이오." "이미 다 써서 없어요." "당신이 횃불을 끈 다음 왼쪽 가슴 속에 숨기는 것을 보았소. 심지어 흰 손수건으로 싸서 곱게 간직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렇지 않소?" 주칠칠이 계속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갖고 가서 이걸 먹고 죽어버리세요." 그녀는 횃불을 꺼내 심랑에게 건네주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이었으나 심랑은 정확히 그녀가 건네주는 횃불을 받아들었다. 횃불이 밝혀지자 주칠칠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으며, 눈에는 원망인지 애정인지 모를 기묘한 빛을 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횃불이 있으니 앞으로 계속 전진합시다.갑시다!" "누가 당신을 쫓아간댔어요?" 그녀는 발을 구르면서 돌아섰다.한참이 지나서 그녀가 슬쩍 심랑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이미 화예선의 손을 잡고 멀찍이 걸어가고 있었다. "좋아요. 당신은 내가 죽든 살든 상관없다는 거죠? 갈 테면 가보세요. 제가 여기서 죽으면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나 보고 싶군요." 심랑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등 뒤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나 보시오. 그 사람에게......."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주칠칠이 '어머나'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와 심랑의 어깨를 내리쳤다.입으로는 계속하여 '나쁜 사람! 때려 죽일 거예요!' 하고 말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손은 가볍게 심랑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정도였다. 그녀는 '누가 당신을 쫓아간댔어요?' 하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심랑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세 사람이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반쯤 열린 문이 보였으며 그 문 안에는 관이 있었고, 관 안에는 촛불이 켜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칠칠이 말했다. "이 속에 아마 사람이 있는 것 같애요. 제가 들어가서 살펴볼께요." 그녀가 걸음을 옮겨서 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랑이 외쳤다. "들어가서는 안 되오." "왜요? 전 꼭 들어가봐야겠어요." 심랑이 탄식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가씨! 아직도 그것이 상대가 우리를 유인하려는 수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요? 당신이 그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문은 즉각 닫혀버릴 거요." 주칠칠이 눈을 굴리더니 '픽'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총명하다고 치죠. 당신이 옳다고 하기로 해요." 그들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또 한참을 걸어가자 앞에 세 갈래의 교차로가 나타났다. 그 교차로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잘려진 팔 하나가 손가락을 뻗쳐 좌측 통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측 통로에는 죽은 사람들의 백골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주칠칠이 눈을 깜박거리더니 말했다. "우리는 아예 중간의 이 길로 가기로 해요." 심랑이 신음소리를 내고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진실 속에 거짓이 있고, 거짓 속에 진실이 있다고 했소. 우측의 이 통로는 얼핏 보기에는 가장 위험한 듯하나 이 고묘의 중앙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오. 이 고묘의 비밀은 묘의 중앙에 있을 것이오. 중간의 이 길은 절대 가서는 안 되오." 주칠칠이 말했다. "그렇다면 왜 밖에는 여덟 개의 통로가 나 있는 거죠?" 심랑이 말했다. "내가 이미 생각해봤소. 밖에 여덟 개의 통로가 있는 것은 모두 사람을 현혹하기 위한 것이오. 여덟 개의 통로는 모두 똑 같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하나에 이르는 길일 거요. 다만 매 통로마다 틀림없이 많은 교차로가 있고, 또 함정이 있을 것이오. 우리가 만약 이 함정을 피해서 올바른 통로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이 고묘에 묻혀 있는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오." 말을 하면서 그들은 우측에 있는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 화예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화경선은 매사에 상당히 조심하는 사람이다. 너희들은 절대 그 사람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가급적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야. 왜 꼭 죽으려 하나?" 심랑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갑자기 주칠칠의 기쁨에 찬 환호성이 들려왔다. "맞았어요. 맞았어! 우리가 제대로 찾아 들어 왔나봐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곳은 하나의 석실이었으며 그 석실에는 진귀한 보석들이 가득차 있었다. 화예선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주칠칠은 비록 부자집에서 낳아서 자랐으나 어찌 이렇게 많은 보석들을 보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쁜 마음이 솟아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참지 못하고 뛰어가서 그 보석들을 집어들고 쓰다듬어도 보고 살펴보기도 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보석에 닿으려는 순간 심랑이 재빨리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주칠칠이 말했다. "제 손을 잡고 뭐하겠다는 거예요?" "당신은 부자집에서 자랐으면서도 세상에 이처럼 지나치게 찬란한 빛을 내는 보석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이 보석들이 이렇게 찬란한 빛이 나는 것은 틀림없이 무슨 까닭이 있기 때문일 거요. 당신이 만약 이 고묘의 비밀을 살아서 알고 싶다면 그것들을 만지지 않는 게 좋을 듯하오." 주칠칠이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다시 또 당신 말을 더 듣기로 하죠." 화예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똑똑하긴 똑똑하군. 이 재주는 바로 화경선이 자랑하는 재주 중의 하나지. 이 보물들의 껍질은 그가 비방(秘方)으로 만든 것이고, 이 보석들 속에는 독즙이 있어서 누구를 막론하고 건드리기만 하면 죽게 되지. 헤헤! 그렇지만 좋아하긴 너무 일러. 화경선은 생각이 깊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지. 네가 비록 그 재주 중의 하나를 알아차렸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많은 재주가 있어. 너를 죽음으로 인도하도록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너는 빨리 내 손이나 놔줘. 그러면 아마 그 사람이 내 체면을 봐서라도 너희들을 놓아줄지 모르니까." 그가 주절이 주절이 말을 했으나 심랑은 여전히 못 들은 척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갈 뿐이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모퉁이들은 더욱 많아졌다. 갑자기 하나의 인형이 좌측에서 번쩍 나타나서 우측으로 사라졌다. 바로 이 번쩍 하는 순간, 그 인형은 네 줄기의 회색빛이 나는 물체를 발사하였다. 그 회색빛 물체는 바람소리를 동반한 채 곧장 심랑, 주칠칠, 화예선 세 사람을 향해 날아왔다.그 회색빛 인형과 심랑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으며 또 심랑 등이 이런 갑작스런 방법을 생각해내지도 못했고, 동굴 속을 비록 횃불이 비추고 있었으나 여전히 어두침침한 상황이어서 번개같이 날아오는 암기를 어떠한 사람도 막아낼 수 없을 듯 보였다.그렇지만 심랑이 오른손을 들어 둥근 원을 그리자, 갑자기 무형의 흡입력이 생겨서 네 줄기의 흐릿한 빛을 모두 흡수할 줄이야! 푹! 푹! 푹! 푹! 몇 번의 소리가 나더니 네 줄기의 회색빛은 모두 심랑의 소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주칠칠은 놀랍고 감탄하여 기쁨에 찬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자 이 네 개의 암기는 아주 기이하게 만들어진, 회색이 번쩍번쩍 빛나는 아홉 척 정도 되는 짧은 화살이었다.그 암기가 화살임을 보자 주칠칠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화살! 그러면 이것이 그 사신이 쏜 것이란 말인가요?" 심랑은 옷깃을 찢어서 손을 감싼 다음 그 화살을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었다. 비록 심랑의 손은 찢어낸 옷으로 감싸고 있었으나 그가 화살을 만질 때마다 뼈를 에일 듯한 기이한 차가움이 전해져 옴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마음 속은 이미 이상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횃불을 빌려서 그 화살을 자세히 살펴보던 심랑은 찌푸렸던 이마를 활짝 펴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랬었군!" 주칠칠의 표정도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서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그랬다니요?" "사신(死神)이 쏘아댄 화살은 그렇게 신비해 보이더니만 겨우 이 정도에 불과했군!" 통로 모퉁이에서 들릴 듯 말 듯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달빛이 내 무덤을 비치네. 사신이 밤에 활을 당기네. 등불을 밝혀 들고 화살의 꼬리털을 찾으나, 이미 푸른 핏속에 녹아버린 것을......." 전에 이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는 확실히 음산하고 공포스럽고 기이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 심랑은 이 노랫소리를 듣고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귀신 화살이란 말이오? 겨우 몇 개의 얼음조각으로 만든 화살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낼 수 없었던 비밀은 결국 이렇게 간단했던 것이다. 사신의 활에서 쏘았던 귀신화살은 한빙(寒氷)을 깎아 만들었으며, 그것에 내력을 가해서 발사하여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게 했고, 그러나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간 화살은 뜨거운 피와 맞닥뜨려져서는 곧 녹아 물로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아무리 화살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칠칠이 숨을 몰아쉬고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이 생각해낸 장난이 진짜 사람을 반은 놀래서 죽을 뻔 하게 했잖아요. 그렇지만 이러한 장난도 날씨가 이렇게 춥지 않으면 별로 효과도 없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겠죠!" 심랑이 말했다. "당신은 이것을 지나치게 간단히 보진 마시오. 이 얼음화살을 만들기 위해서 얼려놓은 물에는 틀림없이 극히 독한 독즙들이 풀어져 있을 거요. 그래서 이 화살이 한 번 발사되어 사람의 피와 맞닥뜨리면 즉각 녹아서 사지로 퍼지면서 사람이 죽게 되는 거요." 그는 말을 하면서 손을 가볍게 떨쳐 그 네 개의 귀신화살을 멀리 날려버렸다. 주칠칠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어쨌든 이 고묘의 장난은 우리가 알아낸 셈이죠? 그렇지만 또 어떤 일이 있는지 전 끝까지 조사해봐야겠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 뒤의 평평한 석벽이 약간 갈라지면서 짙은 연기가 극히 빠르게 스며나왔다. 주칠칠이 아직 호흡을 멈추기도 전에 그녀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심랑의 계략(計略) 고묘에는 기이한 변화가 많았다. 주칠칠이 깨어났을 때 그녀의 머리는 숙취 후처럼 어지러웠으며 자기 자신이 습기가 가득찬 석실의 한 귀퉁이에 누워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사지는 비록 묶여 있지는 않았으나 전신은 흐물흐물하여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을 돌려 바라보자 심랑과 화예선도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듯 꼼짝을 안 하고 있었다. 주칠칠은 깜짝 놀라 외쳤다. "심랑! 당신......! 당신도 이 지경이 되었어요?" 그녀는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심랑이 이러한 지경에 빠진 것을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며 머리를 가로젓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평상시처럼 태연하였다. 화예선의 얼굴에는 오히려 득의에 찬 기색이 가득했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이 미향도 화경선이 독문비방으로 조제한 것이지. 어떻게 조제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 이름은 신선일일취(神仙一日醉)라고 하지. 비록 신선이라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이 미향의 냄새를 맡기만 한다면 하루 이상을 취한다는 뜻이지. 정신은 멀쩡하다 할지라도 사지가 흐물흐물하여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지. 너희들이 만약 지금이라도 영원히 이곳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내가 화경선을 만났을 때 너희 둘을 위해서 약간의 변명을 해줄 수 있어." 주칠칠이 온 힘을 모아서 큰소리로 말했다. "헛소리 마라!! 네가 이렇게 은인을 배신하고 은혜를 모르는 노파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무림계 인사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군!" 화예선이 노한 소리로 말했다. "악랄한 기집애! 이러한 지경에 빠져서도 감히 나를 욕하다니!" 석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한 줄기의 눈을 부시게 하는 등불빛이 문 밖에서 비쳐 들어왔다. 화예선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됐어! 됐어! 우리 큰오빠가 오셨군! 너의 성질이 언제까지 그렇게 표독스러운지 한 번 보기로 하자." 불빛이 '번쩍' 하더니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비췄다. 그 불빛은 어떠한 등에서 나오는 것인지 너무 강렬했다. 불빛이 너무 강렬하여 그들은 순간 눈을 뜰 수도 없을 지경이었으며, 눈 앞에 어떠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때 한 명의 회색옷을 입은 인형이 번쩍 날아들어와 거만한 모습으로 그 등불 뒤에 앉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세 분이 멀리서 여기까지 오시는데 본인이 마중하지 못한 점 용서하시오." 그의 말은 비록 겸양하는 투였으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 조금의 인정도 없어보였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이미 혀끝에서 뭉쳐져서 꽉 다문 이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화예선은 사람 모습이 번쩍 그들이 있는 석실 안으로 날아 들어오자 큰오빠가 온줄 알고 얼굴에 기쁜 기색을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그 회의인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색이 변하여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우리 큰오빠 화경선의 문하인가? 빨리 나의 미약을 해독시켜라." 회의인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다만 냉랭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세 분께서 먼길을 달려서 여기까지 오셨으니 마음 푹 놓으시고 여기에서 편히 쉬시오. 무슨 필요한 것이 있거든 한 마디 분부만 하시면 본인이 금방 사람을 시켜서 보내드리겠소." 주칠칠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얼굴마저 붉어졌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우리를 여기까지 끌어들인 목적이 도대체 뭐지? 너......, 너는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할 작정이지?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 빨리 말해라!" 회의인의 목소리가 그 등불 뒤에서 들려왔다. "강남(江南) 주백만(朱白萬)에게 귀한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아가씨였군......? 귀한 몸으로 이렇게 누추한 곳에 왕림하셨으니, 만나서 반갑소!" 주칠칠이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뭐가 반갑다는 거지?" 회의인이 말했다. "무림계에 이미 이름이 알려진 명인들이 적지않게 본인의 청에 의해 이곳에 올 수 있었소. 본인이 왜 그분들을 청해 왔는지 그리고 왜 세 분들을 청해 왔는지는 세 분이 편히 쉬신 다음에 말할 예정이었으나, 주 아가씨가 먼저 물으셨기 때문에 본인이 미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더구나 후일 본인은 주 아가씨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으니." 주칠칠이 큰소리로 말했다. "빨리 말해라." 이때 그녀가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상대기 누구인지간에 뛰어 일어나 상대방과 생사의 대결을 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회의인은 목소리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얼굴색도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이 여러분들을 이곳에 청한 것은 조금도 악의는 없소. 세 분께서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라도 돌아가셔도 좋소. 본인은 절대 돌아가시는 것을 막지 않을 뿐 아니라 송별연까지 베풀어드리겠소." 주칠칠이 멍청한 자세로 생각했다. (그것 참 이상한데......!) 회의인은 계속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만 세 분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간단한 편지 한 통만 써주기를 원하오." 주칠칠이 말했다. "무슨 편지말이오?" 회의인이 말했다. "바로 세 분이 편안하다는 것을 집에 알리는 편지를 말이오. 그 편지에 세 분 모두가 매우 안전한 상태에 있으며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을 쓰시오. 그리고 세 분의 안전에 대해서는 미력이나마 본인의 힘이 약간 가미되었으니, 만약 본인에게 조금이나마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면 편지에 몇 글자만 더 넣어주시오. 그 내용은 부모형제에게 약간의 돈을 보내서 본인의 세 분에 대한 보호에 대해서 보상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오." 주칠칠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너는....... 인질을 잡고 돈을 긁어내는 녀석이로구나? 회의인의 목구멍에서 마치 짧고 날카로운 늑대소리와 같은 웃음소리가 순간 들렸으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정하게 들려나왔다. 그것은 우아하고 부드러우나 상당히 냉혹한 평정이었다. 회의인은 이어서 천천히 말했다. "위대한 화가를 아가씨는 어떻게 장인(匠人), 혹은 길거리의 화가들로 비유할 수 있단 말이오? 본인과 같은 금은수집가(金銀收集家)를 아가씨는 어떻게 인질범이란 말로 표현한단 말이오?" 주칠칠이 말을 받았다. "금은수집가? 흥! 흥! 미친 녀석!" 그러나 회의인은 화도 내지 않고 여전히 천천히 말했다. "본인이 그렇게 장기간에 걸친 계획을 세워서 여러분들을 청해 왔는데......, 또 여러분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으며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대접하고 있는데....... 이 몇 가지 점에 근거해서라도 세 분에게 몇 푼 안 되는 돈을 요구하면서 본인은 상당히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고 있소. 그 몇 푼 안 되는 돈이 아깝다고 말한다면 어찌 본인이 상심하지 않겠소?" 심랑이 미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도 맞소. 그런데 귀하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돈을 요구하는 거요?" 회의인이 말했다. "물건에는 귀하고 천한 것이 있으며 사람도 고귀한 신분과 비천한 신분이 각자 다르오. 세 분의 몸값은 당연 많고 적음이 있겠죠. 방천리나 전령송 그런 평범하고 어리석은 자에게 본인이 많은 은자를 요구한다면, 도리어 본인이 그자들의 신분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셈이 될 것이오. 본인은 그런 일은 절대 할 수가 없소." 그는 돈을 요구하면서 도리어 체면을 세워주는 척 하고 있었다. 주칠칠은 그의 말을 듣고 화도 나고 우습기도 하여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얼마를 요구하시는 거죠?" "본인은 전령송 등에게는 십오만 냥을 요구했소. 그렇지만 아가씨께는......, 아가씨께는 적어도 백오십만 냥은 되야 할 거요." 주칠칠이 놀라서 말했다. "백오십만 냥이오?" "그렇소. 아가씨께서 이처럼 총명하고 고귀한 분인데, 전령송 등보다 열 배는 더 받아야 하지 않겠소? 본인이 만약 이 백오십만 냥에서 조금이라도 액수를 낮춘다면 바로 아가씨를 무시하는 것이 될 것이오. 보건대 아가씨도 절대 본인이 아가씨를 무시하도록 놔두지는 않겠지요?" 주칠칠은 어리벙벙해져서 한참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노한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헛소리! 당신. 당신은 미친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미 회의인의 얘기 대상은 심랑에게 돌아간 듯 그녀가 뭐라고 욕하든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이 분 공자의 용모는 옥을 깎아 만든 나무가 바람 중에 서 있는 듯,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빼어난 기품을 지녔고, 총명하기가 만사를 꿰뚫어보는 듯한 분이니, 본인이 아가씨와 마찬가지로 백오십만 냥을 요구한다 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겠지요?" 심랑이 대소하며 말했다. "고맙소! 고맙소! 귀하께서 이처럼 나를 높이 평가해 줄 줄은 몰랐군요. 본인은 당신에게 감격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소. 백오십만 냥 정도가 대단한 숫자겠소? 그 정도는 충분히 드릴 수가 있겠지요." 회의인이 날카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공자께서는 과연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시는 분이군요. 이 분 화, 화 화......." 화예선이 대갈했다. "화 뭐란 말야? 나한테도 돈을 요구하겠다는 거요?" "당신의 외모는 비록 난장이 같고 늙고 추해 볼품 없지만, 그렇다고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화예선이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 같은 자식, 짐승 같은 자식, 너...... 너......." 회의인은 화예선의 욕지거리에 개의치 않고 계속 자기 말만 할 뿐이었다. "당신은 자신을 너무 낮춰보지만, 본인의 생각은 다르오. 적어도 당신에게 이삼십만 냥은 요구해야 되겠소. 그래야 무림계에서의 당신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경의를 표하는 것이 되지 않겠소?" 주칠칠의 가슴에는 분노와 조급한 마음이 가득차 올랐고 화예선의 이마에는 푸른 핏줄들이 울근불근 솟아나왔다. "짐승 같은 자식! 우리 큰 오라버니께서 오시면 네 놈의 근육을 한 조각 한 조각 뽑아내고, 껍질을 다 벗기고, 천 가닥 만 가닥으로 찢어서 죽여버릴 것이다." "당신의 큰 오라버니가 누구요?" "화경선! 모른단 말이냐?" "화경선? 그렇소. 그는 확실히 약간의 재주는 있었지요. 그렇지만 아주 오래 전 형산싸움에서 이미 죽었소. 본인은 다른 것은 몰라도 귀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니오." 화예선이 노해서 부르짖었다. "우리 오라버니는 여기를 주재하시는 분인데, 네가 감히......." "이곳을 주재하는 사람은 바로 본인이오!"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낮았으나 다른 사람의 말을 자르는 힘이 있었다. 화예선이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순간 곧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헛소리! 짐승 같은 녀석! 화경선이 죽었다면 그 쉽게 부서지는 보석과 신선일일취 같은 미혼 약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단 말이냐?" 회의인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것은 바로 본인이 직접 만든 것이오." 화예선의 얼굴색이 참담하게 변해서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 나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이 세상에 우리 큰오라버니를 제외하고는 이 독문비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경선! 오라버니! 당신은 어디......?" 갑자기 한줄기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그 바람 소리는 그녀의 목 아래 쇄골 좌측에 있는 아혈(啞穴)을 정확히 맞았다. 화예선이 "...... 있어요?" 라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녀의 목소리는 목 안에 맴돌며 더이상 한 마디도 뱉어낼 수 없었다. 회의인의 격공타혈(隔空打穴) 수법의 악독함과 정확함은 이미 일반 무림 고수가 꿈에도 꿀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회의인이 말했다. "본인이 무례를 범하는 게 아니고, 다만 화 부인께서 너무 큰 소리를 질러서 몸에 이상이 생길까 염려되어 아혈을 점했을 뿐이오."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아주 마음이 좋으신 분이군요?" "본인이 여러분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이상, 당연히 여러분들의 신체상에 이상이 없도록 해야겠지요." 주칠칠은 그의 조롱하는 듯한 말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심랑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귀하께서는 시옥관 쾌락왕(快樂王)의 밑에 있는 분이군요. 귀하의 이와 같은 높은 무공과 행동들을 볼 때 틀림없이 쾌락왕의 주(酒),색(色),재(財),기(氣) 사대 사자(四大使者) 중의 재 사자(財使者)임이 분명한 것 같은 데......, 내 말이 맞소?" 그는 회의인의 안색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볼 수 없었으나, 주칠칠은 크게 놀라서 금방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알죠 ?"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화경선의 독문비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렇지만 이 분이 독문비법을 알고 있으니, 이것은 다만 한 가지의 방법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거요." "저는 도대체 어떠한 방법으로 해석한다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요?" "아마 화경선이 죽기 전에 독문비법을 옥관 선생에게 남겼으리라는 거요. 이 친구는 금은 수집가로서 옥관 쾌락왕 문하의 재 사자임에 틀림없소." 주칠칠은 놀라서 한동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심랑이 또 말했다. "화경선은 죽기 전에 이 고묘의 비밀을 알았을 거요. 그리고 이 고묘의 비밀과 그의 무공이나 독약 제조에 대한 독문비법을 같이 남겼을 거요. 그래서 옥관 선생은 이분 재 사자로 하여금 이곳에 와서 보물을 캐게 하였던 거요. 그렇지만 이 고묘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요언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소? 이 고묘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거요. 재 사자는 급한 마음에 무림 친구들의 돈을 울거낼 계책을 세웠던 거요. 그는 바로 이 고묘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을 이용해서 무림 친구들을 이 고묘로 끌어들였던 거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사람들을 이 고묘로 끌어들이고는 어째서 그처럼 사람을 놀래키는 잔재주를 피운 거죠? 그 잔재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나아가서는 사람들을 이 고묘 속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잖아요?" "그것도 재 사자의 계책의 하나였소. 이 재 사자는 무림 친구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거요. 이 고묘가 신비하고 공포스러울 수록 무림계의 이름있는 인사들은 더욱 이곳에 와 보고 싶어 할 것을 알았던 거요. 이곳이 조금도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했다면 이 고묘로 달려올 사람들은 강호의 무명배들에 불과했을 거요. 이들 집안에는 아마 반푼의 은자도 없었을 것이오." 주칠칠이 몇 번 한숨을 불어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 그랬었군. 틀림없어. 아....... 왜 저 사람이 생각하는 걸, 나는 생각해낼 수가 없는 것이지?" 회의인이 한참을 조용히 있더니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자의 대명은 심랑이죠? 음! 심 형은 과연 총명한 분이오. 본인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총명한 분이오." "귀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본인의 생각이 맞았다는 얘기이겠군요?"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나를 듣고 셋을 안다면 이미 기재라고 말씀하셨소. 그런데 심 형은 하나를 듣고 일곱을 알 줄이야. 본인은 생각지도 못한 바이오. 화예선의 몇 마디 말을 듣고 모든 비밀을 하나 하나 전부 알아낼 수 있다니 말이오. 다만, 본인의 이름이 재사 김 무망(財使金無望)이라는 것과 내 뒤에 서 있는 것이 나의 제자 아도(阿堵)라는 것, 이 두 가지 점을 제외하고 심 형이 추측했던 것은 조금도 틀림이 없소. 꼭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말이오." 아까부터 그의 뒤에는 한 명의 동자가 서 있었다. 심랑이 말했다. "김 형께서는 상당히 담백하시군요. " "심 형과 같이 총명한 사람 앞에서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겠소 ? 그러나 심 형은 총명한 사람은 반드시 하늘의 미움을 받는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소 ? 그래서 재자(才子)는 요절하고, 홍안는 박명하는 법이오." "그러나 본인은 안심해도 좋다고 생각하오. 김 형께서 본인에게 은자를 요구하는 이상 결코 본인의 목숨을 요구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본인은 본인과 대적할 만큼 똑똑한 사람이 있다는 점이 싫소. 특히 당신, 심 형처럼 똑똑한 사람 말이오!" 주칠칠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당신,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할 작정이죠?" 김무망이 가볍게 웃자 야수와 같은 날카로운 흰 치아가 드러났다. "본인이 오늘 그의 목숨은 건드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의 한 손 한 발은 빼앗아야 되겠소. 이 세상에 심 형과 같은 무서운 적이 한 사람 없어진다면, 후일 본인의 잠자리가 더욱 편해질 거요." 주칠칠이 놀라움이 극에 달해서 비명을 질렀으나, 심랑은 도리어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이 그렇게 독한 마음을 쓸 수가 있소?" "심 형께서는 본인이 자비에 가득찬 부처라고 보시는 거요?" "그렇지만 김 형이 본인 신상의 머리털 하나라도 그렇게 쉽게 빼앗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김무망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본인이 직접 시험해보면 금방 알 수 있겠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심랑이 갑자기 앙천대소하면서 말했다. "본인은 김 형이 총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소. 그렇지만 지금에야 비로소 김 형이 그렇게 뛰어난 사람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소." 웃음 소리가 갑자기 멈추며, 그는 눈을 들어 김무망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김 형께서는 본인이 정말로 그 신선일일취에 중독됐다고 생각하시오?" 김무망이 깜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 짙은 연기가 생기자 마자 본인은 즉각 호흡을 멈췄소. 비록 그 신선일일취라는 미혼향이 천하를 떨어 울리게 할 수 있을지라도 본인은 조금도 마시지 않았소." 김무망이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더니 입가에 다시 그 빽빽이 박힌 하얀 치아를 드러내 보이면서 말했다. "심 형께서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본인은 속일 수 없을 거요. 만약 신선일일취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나 김무망의 포로가 될 수 있었겠소?" "김 형께서는 그 이유도 모른단 말이오?" 심랑의 얼굴에 웃음이 더욱 짙어지며 이어서 말했다. "생각해 보시오. 이 고묘 중의 비밀통로는 상당히 복잡하고 위험하오. 본인이 직접 그 통로를 찾는다면 며칠 내로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이오. 허나 본인이 그 신선일일취가 스며들어 왔을 때, 그 미약에 취한 듯이 있으면 편안히 다른 사람이 이 통로의 핵심부로 나를 찾아 오지 않겠소? 천하에 이것보다 쉽고 편한 방법이 어디 있겠소?" 순간 김무망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으나, 입에서는 여전히 냉소를 날리며 말했다. "심 형의 말은 틀림이 없소. 그러나 본인은......." 심랑이 그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그러나 김 형께서는 어떻단 말씀인가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랑은 벌떡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무망의 얼굴은 이미 잿빛으로 변해 있었으나, 이때에는 더욱 놀라서 '헉' 소리를 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심랑은 눈에 빛을 번쩍이며 김무망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오늘, 본인이 김 형과 이곳에서 생사일전을 벌여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오. 나나 당신 중 누가 싸움에서 죽든 다시 다른 곳에 묘 자리를 찾을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오." 김무망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계속 심랑을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으나 누구도 눈 한번 깜짝이지 않았다. 심랑의 눈빛은 더할 수 없이 냉정하고 굳세 보였다. 주칠칠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심랑! 그에게 삼 초를 양보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가 감히 당신하고 맞싸울 수가 있겠어요?" "삼 초를 양보한다는 것은 양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칠 초를 양보해 주세요." "그래야 말이 되겠지. 본인은 김 형에게 칠 초를 양보하겠소. 자, 시작하지요." 김무망의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갔다. 그는 온갖 의지력을 발휘해서 심랑과 주칠칠이 주고 받으며 상대방을 충동질하여 이성을 잃게 하는 계책에 말려 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했다.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왜요? 저 사람이 칠 초나 양보했는데도 덤비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김무망이 갑자기 몸을 돌려서 뒤쪽으로 달려갔다. 그에 따라 대청의 석문이 '우르릉'하는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닫혀버렸고 그는 이미 석문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주칠칠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큰일났어요. 그가 도망가버렸어요." 심랑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어쩌면 도망가버린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소." 말을 마친 그는 갑자기 몸을 기우뚱하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칠칠이 크게 놀라서 말했다. "당신, 당신 어떻게 된 일이죠?"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신선일일취라는 미혼약은 대단한 것이오. 내가 어떻게 그 약에 중독되지 않을 수가 있었겠소? 방금 나는 몸 안에 남아있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겨우 일어섰던 것이오." 멍하게 심랑을 바라보던 주칠칠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방금 그가 덤벼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았다면......." 심랑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김무망 같은 사람은 절대 다른 사람이 충동질하여 이성을 잃게 할 수 없을 줄 알았소. 그런데......."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일진의 광소가 석문 뒤에서 들려왔다.그리고 석문이 다시 열리더니 김무망이 큰걸음으로 들어왔다. 주칠칠의 안색이 참혹하게 변했으며, 김무망이 대소를 하고 말했다. "심 형, 과연 총명하신 분이군요. 그러나 누구라도 한 가지의 실수는 있게 마련이오. 심 형이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게 생각했지만, 이 석실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거일동은 석실 밖에서도 정확히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못했던 것 같소." 웃음소리가 멈춰지는 곳에서 다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는데 다시 더 할 말이 있소?" 심랑은 탄식을 하며 눈을 감고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무망이 한 걸음 한 걸음 심랑에게 가까이 다가와 험악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과 같은 사람과 적이 된다는 것은...... 본인은 부득불 심 형의 팔 한쪽을 잘라내지 않을 수 없군요." 말을 마치고 그는 심랑의 앞으로 다가들어 험악한 표정으로 웃으며 팔을 뻗었다. 주칠칠은 참지 못하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기적이 나타날 줄이야. 즉, 김무망이 손을 뻗치는 순간 심랑의 손이 번쩍 들리더니 김무망의 혈도를 움켜쥐었던 것이다. 심랑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오른손으로는 김무망의 완맥의 대혈을 움켜쥐고 왼손으로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말했다. "본인의 이러한 일 초는 김 형도 생각하지 못하신 것이겠죠?" 김무망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한 방울 뭉쳐나왔다. 주칠칠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놀라고 기쁨에 차서 참지 못하고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본인은 그 신선일일취라는 미혼향에 중독된 것이 아니었소. 이 점 김 형께서는 이미 알아차렸으리라고 생각하오." "당신이 중독된 것이 아니라면, 금방은 왜......?" "방금 내가 김 형과 싸움을 했다면, 누가 지고 누가 이길지 확실한 자신이 없었던 거요. 그리고 또 설혹 내가 김 형을 이길 수 있었다 해도 김 형을 이렇게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었소. 그러나 본인의 몇 가지의 수단으로 김 형은 이미 본인에 대해서 조금도 경계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었던 거요. 이러한 상황에서 갑자기 손을 쓰면, 김 형께서 피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거요." 주칠칠의 얼굴이 기쁨에 차서 환하게 밝아졌다.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당신! 방금 저 사람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나 마저도 간이 콩알만해지게 만들었잖아요. 조금 있다가 단단히 앙갚음을 하고야 말거예요." 김무망이 한참을 멍하게 있더니 비로소 고개를 쳐들고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나 김무망이 오늘, 심랑과 같은 사람 손에 죽어도 그렇게 억울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구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렇게 말씀하시니 김 형께 약간 귀찮음을 끼쳐드려야 할 것 같군요. 먼저, 우리들을 이 석실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시오. 그리고 또 오늘, 김 형의 계책에 말려들어서 김 형의 포로가 된 강호의 친구들을 석방해 주시오. 그러면 본인이 김 형께 감사하겠소." 김무망이 깊이 숨을 들이키고 나서 말했다. "좋소, 나를 따라 오시오." 심랑은 등에 주칠칠을 업고, 손으로는 김무망의 혈도를 움켜쥔 채 석실을 나왔다. 몇 개의 모퉁이를 돌아서 다시 다른 석실 앞에 도착했다. 주칠칠은 전신이 무력했으나, 두 손으로 심랑의 목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가 큰소리로 물었다. "이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죠 ?" 김무망의 눈에서 이상야릇한 웃음이 번쩍이더니, 천천히 말했다. "신안응 방천리, 복천조 이정, 천운안 이여풍 및 위무표국의 전령송 이렇게 네 사람이오." 주칠칠이 깜짝 놀란듯 말했다. "그들 네 사람 말예요?" "그렇소. 그들을 놓아 줄까요?" "기다리세요! 그 사람들을 놓아 줄 수 없어요." 심랑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왜 그들을 놓아 줄 수 없단 말이오?" 주칠칠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들 네 사람은 모두 제 원수들이에요. 그들이 나오기만 한다면, 당신들께 감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목숨을 빼앗으려 들 거예요. 어떻게 그들을 놓아 줄 수 있단 말인가요?" 김무망의 눈빛이 차갑게 심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놓아 주느냐, 놓아 주지 않느냐는 문제는 오직 상공(相公)이 결정할 문제요." 주칠칠이 크게 노해서 말했다. "그러면 저는 조금도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건가요? 지금 저는 전신에 조금의 힘도 없는데, 만약 그들이 나오게 된다면 어찌 내 목숨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있겠어요? 그 네 사람이 손을 쓰게 된다면 심랑도 그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게 될 거예요." 김무망의 눈빛은 여전히 심랑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냉랭하게 심랑이 결정할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도대체 놔 줄거요, 안 놔 줄거요?" 심랑이 길게 탄식하고서 말했다.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결정하기 어렵소. 이 사람들도 신선일일취에 중독되지는 않았소?" 김무망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신선일일취가 무슨 영단이나 묘약은 아닐지라도 방천리나 전령송 정도의 인물들에게 어찌 그렇게 귀한 약을 쓸 수가 있단 말이오." "저 석문은 어떻게 여는 것이오?" "석문에는 기관장치가 되어 있소. 저기 조그만 구슬처럼 생긴 돌이 보이지요? 그 돌이 바로 기관을 여는 장치요. 그것을 왼쪽으로 세 번 돌리고 오른쪽으로 한 번 돌린 다음 위쪽으로 밀어올리면 석문은 자연히 열리게 되어 있소." 심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주칠칠의 얼굴에 즉시 기쁨에 가득찬 기색이 넘치면서 고개를 숙여 심랑의 귓등에 가볍게 두 번 입맞춤을 하고 예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그러나 김무망은 도리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나는 심 상공이 고난에 빠진 영웅호걸들을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구하는 군자인 줄 알았소. 그렇지만 지금 보니...... 하하!" 그는 고개를 쳐들고 그치지 않고 냉소를 날렸다. 그를 쫓아가고 있던 아도는 비록 나이가 어리나 마음 씀씀이는 그렇게 어리지 않았다. 눈알을 한 번 굴리고 나서 김무망의 말을 받아서 아도가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웅은 미인관을 돌파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영웅은 미인을 위해서 자신의 오래된 친구들도 돌보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심 상공만 탓할 수 있겠습니까 ?" 말을 마친 그도 역시 냉소를 날리고 있었다.마치 심랑이 전령송 등을 구하지 않고 주칠칠의 말을 따르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심랑은 그들의 비웃음을 듣고도 못 들은 척 흘려버렸다. 그러나 주칠칠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심랑은 김무망을 끌고서 다시 모퉁이를 하나 돌아서 갑자기 어두컴컴한 곳에 발걸음을 멈추고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 고묘 중의 비밀을 김 형께서는 어떻게 알게 되셨소?" "본인의 선친이 어느 분인지 당신은 알고 계시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오." 김무망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인의 선친을 사람들은 금쇄왕(金鎖王)이라고 칭하지요." 심랑이 얼굴을 펴고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그랬었군요. 금쇄왕은 기관에 정통하기가 천하무쌍이라고 하더니 김 형이 선친의 기관에 대한 배움을 이어 받으셨군요. 자연히 이 고묘 중의 비밀이 김 형의 눈과 귀를 속이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소. 쾌락왕이 김 형을 이곳에 파견했던 것은 결국 김 형의 장기(長技)를 적절히 이용하려 했던 것이군요." 그는 말을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김 형께서 이 고묘 중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던 흔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틀림이 없겠지요?" "그것은 귀하가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오." "좋소." 그의 손가락 끝이 가볍게 떨리더니 갑자기 김무망 신상의 세 곳의 혼수혈을 짚고, 다시 손을 돌려 아도의 겨드랑이 밑 세 곳의 혈도를 짚었다. 그가 손을 쓴 것은 선후가 있었으나, 그 손 씀씀이는 마치 전광석화 같았다. 김무망과 아도 두 사람은 동시에 쓰러지는 듯했다. 주칠칠이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 뭘 하는 거죠?" 심랑이 어깨를 돌려 그를 안아내려서 조심스럽게 석벽에 기대어 앉히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시오. 이 고묘 안에는 더 이상의 적들의 종적은 찾아 볼 수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거요." 주칠칠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당신...... 당신. 가서 그들을 풀어......."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내가 먼저 가서 그들 네 사람을 풀어 주고 이곳을 떠나도록 말하고 돌아오겠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이오." 주칠칠은 얼굴 가득 놀라움과 분노의 기색을 드러내었으나 곧 체념한 듯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나는 당신이 그들을 풀어 주지 않고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일시도 마음 편하게 있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죠."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 금방 돌아오리다." 말을 마친 그는 벌써 몸을 돌려 그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주칠칠이 갑자기 가볍게 그를 불러 세웠다. "기다려요. " "뭘 기다리라는거요?" "당신, 당신......."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인지 애걸인지 모를 기색이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가볍게 말했다. "웬일인지 갑자기......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어요. 마치...... 마치 어떤 악마가 저를 해치려고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어요."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착한 아이지! 김무망과 아도가 이미 나한테 제압을 당했으니 당신이 더이상 겁을 낼 게 뭐가 있단 말이오? 여기서 착하게 기다리고 있으시오. 내 곧 돌아오리다." 말을 마친 그는 손을 흔들면서 급한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주칠칠은 그의 신형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어쩐 일인지 갑자기 뼈를 에이는 듯한 한기가 몰려오는 느낌을 받아 더이상 참지 못하고 가볍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석문에 붙어 있는 기관장치를 심랑이 왼쪽으로 세 바퀴, 오른쪽으로 한 바퀴를 돌리고 다시 위로 밀어올리자 석문은 과연 소리없이 열렸다. 그 문 안에 있는 동으로 만든 등잔 받침대 위의 기름은 이미 거의 다 말라가서 꺼질락 말락 하는 불빛만 내고 있었다. 그 꺼질락 말락한 붉은 불빛은 이미 한 줄기의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그 검은 연기는 공중에서 마치 악마가 그 꼬리로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듯한 형상을 보이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이 번쩍이는 속에서 심랑은 석실 속을 자세히 살펴봤으나, 그 석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석실 안 어디에도 방천리, 전령송 등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심랑은 깜짝 놀라서 당황한 듯 눈을 똑바로 뜨고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 석실 안에는 먼지가 가득차 있었으나, 석실 바닥의 네 곳은 상당히 깨끗하여 마치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만 있을 뿐 이미 사람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 그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미 이곳을 빠져나갔단 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이미 그들을 구해갔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을 구해간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또 이들이 지금 어디에 가 있단 말인가? 심랑은 이리저리 생각을 해봤으나 정확한 답안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가슴 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훅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려 그가 방금 달려왔던 길을 향해 되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속으로 가볍게 부르짖고 있었다. (주칠칠! 당신 별일 없죠?) 그는 방금 주칠칠 등이 있던 모서리까지 달려와서 신형을 멈췄다. 마치 피가 얼어붙는 듯 전신이 차가워짐을 느꼈다. 방금 그 모서리 벽에 등을 기대게 해서 앉혀 둔 주칠칠과 화예선, 김무망, 아도는 이 차 한 잔 마실 만큼도 되지 않는 시간에 전부 실종되고 말았던 것이다. 마치 악귀가 한입에 그들을 삼켜버린 듯이....... 심랑은 놀라서 멍하니 그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마치 가을날 아침 나무 이파리에서 이슬이 맺혀나오듯 송글송글 배어나왔다.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험악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 상공! 오랜만이오." 심랑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입언저리와 볼 아래 근육이 분노와 놀람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토해내면서 지금부터 벌어질 위험에 대처할 준비를 하려는 듯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이 사람이 나타난 후에는 어떠한 더럽고 흉악하고 음험한 일도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심랑이 이미 이 사람을 상대할 준비를 갖췄으나 그는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않았다. 다만 큰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이틀 동안 뵙지 못했는데 김 형께서 이미 오랜만이라고 생각하실 줄이야......? 김 형께서 이처럼 동생을 생각해 주시는 줄은 미처 몰랐구려!" 그 찢어지는 듯한 음성이 '하하'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확실히 본인은 심 상공을 많이 생각했소. 그런데 심 상공께선 어째 몸을 돌려서 본인에게 당신이 요 이틀 동안 더 말랐는지, 살이 붙었는지도 보여주지 않는 거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이처럼 소제(小弟)를 생각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소."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몸을 틀고 신형을 '번쩍' 하더니 이미 그 몸 뒤의 말소리가 들려나오는 곳을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렸을 때, 눈에 흐릿한 그림자가 들어오자 손을 뻗쳐 이미 그 그림자를 낚아챘다. 그가 흐릿한 그림자를 발견했던 시각과 손이 이미 그 그림자를 낚아챘던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검은 그림자가 어떻게 심랑의 이 재빠른 일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러나 그 흐릿한 그림자는 어느새 피했는지 웃음소리만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밝은 불빛이 그곳을 활짝 밝혔다. 견리용위 김불환은 비스듬히 석벽에 기대서서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매우 한가로운 모양으로 왼쪽손에는 방금 밝혀든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는 조그마한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나무 막대기에는 한 벌의 겉옷이 걸쳐져 있었다. 심랑이 낚아챘던 것은 이 나무 막대기에 걸쳐져 있던 겉옷이었다. 김불환이 만면에 득의한 기색을 드러내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 겉옷은 바로 심 상공께서 본인에게 주신 것인데......! 심 상공께서는 지금 다시 이 겉옷을 거둬가고 싶으신 것인가요?" 심랑은 비로소 김불환이 아주 간사한 무리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심랑은 비록 속으로는 크게 실망했으나, 입으로는 도리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본인은 김 형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 다가가서 껴안고 오랜만에 악수라도 나누고 싶었던 거요. 그렇지만 본인이 잡은 게 여우 가죽일 줄이야......!" 그는 손을 뻗쳐 그가 움켜 쥔 겉옷의 털들을 가볍게 몇 번 쓰다듬고 나서 말했다. "다행히 본인이 그렇게 독하게 손을 쓰지 않아서 이 겉옷의 털들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군요. 김 형께서는 어서 이 겉옷을 다시 받아 가시죠. 차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옷을 내주는 행동은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김불환도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 상공께서는 농담도 잘 하시는 군요. 본인 몸 어디에 가죽과 털이 있다는 거요? 심 상공께서는 잊으셨소 ? 이 여우 가죽은 원래 본인이 심 상공 당신 몸에서 벗겨낸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오?" 그는 손을 뻗어서 심랑이 건네주는 그 여우털 겉옷을 받아서 어깨에 걸치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심 형의 이 여우털로 만든 겉옷은 확실히 따뜻하기는 하오." 심랑이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 녀석은 입으로도 남한테 지려들지를 않는군!) 그러나 겉으로는 도리어 웃으면서 말했다. "보검은 열사에게 주어야 하고, 홍분(。紛)은 미인에게 주어야 한다는 옛말이 확실히 맞소. 이 여우 가죽으로 만든 겉옷은 김 형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는 어울릴 것 같지 않소." 두 사람은 서로 '히히', '하하' 하고 주거니 받거니 내가 한 마디 풍자하면, 네가 한 마디 풍자하면서 누구도 서로 상대방에게 양보하려들지 않았다. 그러나 심랑은 결코 주칠칠이 실종된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김불환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미칠 듯한 심정이 되어서 마침내 물었다. "주 아가씨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데 심 상공은 이상하다고 생각지도 않소?" 심랑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주 아가씨는 이미 서약우 서 소협이 곁에서 보살피고 있는데, 본인이 그렇게 조급해 할 필요가 있겠소?" 김불환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 상공은 과연 뛰어난 분이오. 그 서 노제(徐老弟)가 본인과 같이 왔다는 것까지 알아차리다니 말이오. 그렇소. 그 서 노제는 천성적으로 정이 많은 인간이라서 주 아가씨를 아주 친절하게 보살피고 있소. 그들 두 사람은 지금쯤 어쩌면, 아마......." 그의 눈빛은 심랑이 그의 말을 듣고 화를 내는지를 살펴보려고 슬쩍슬쩍 심랑의 모습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심랑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심랑이 김불환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본인은 김 형이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지, 또 이곳의 기관에 어떻게 그렇게 익숙하게 알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뿐이오." 김불환이 눈을 굴리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심 상공께서는 본인을 쫓아와서 보도록 하시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서 심랑의 앞에서 걸어 나갔다. 심랑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 불빛이 현란하게 김불환이 걸치고 있는 그 여우털 겉옷을 비추고 있었다. 심랑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속으로 탄식하면서 생각했다. (이 망할 녀석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내 겉옷이고 주머니에 가득 들어있는 것은 내 돈인데 이 녀석은 도리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해치려 들다니. 이러한 인간은 천하를 다 뒤져도 몇 안 될 거야.) 일순간 그는 분노인지 무엇인지 모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두 사람은 문이 열려 있는 하나의 석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 석실에서는 등불빛이 매우 밝게 빛나고 있었다. 주칠칠, 화예선, 서약우, 김무망, 아도는 모두 그 석실 가운데 있었다. 김무망의 혈도는 아직 풀리지 아니한 상태였으며 주칠칠은 마침 이를 악물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서약우는 그녀의 욕설로 멀찌감치 한구석에 피해 있다가 심랑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즉각 화살처럼 주칠칠 곁으로 쏘아 들어와 장검을 들고 주칠칠의 목을 겨누었다. 주칠칠은 마치 배고픈 어린애가 엄마를 만난 듯,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몇 번 비죽거리더니 참지 못하고 울면서 말했다. "저는...... 저는 당신께 가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은...... 지금은......." 서약우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가슴이 아파 더이상 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김불환은 몸으로 주칠칠과 심랑의 사이를 갈라 놓으면서 손가락을 뻗쳐 맞은편 구석 자리에 있는 돌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시오." 심랑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천천히 그 돌의자 쪽으로 걸어가 침착하게 앉았다. 김불환이 손을 뻗쳐 서약우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형제! 심 상공이 조금이라고 움직인다면 형제의 손에 쥔 검을 움직여도 괜찮소. 예쁜 꽃을 아끼는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천하에 더 예쁜 꽃도 있는 법이니까!" 서약우가 말했다. "본인도 생각하는 바가 있소이다." 김불환이 말했다. "우선, 심 상공의 마음에 몇가지 답답해 하는 점이 있으니 우리가 먼저 설명해 줘도 괜찮겠지. 그가 너무 답답해서 미쳐버리면 안될 테니까. 심 상공! 본인이 연극 한 토막을 심 상공께 보여드리겠소. 괜찮겠소?" 말을 마친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서 김무망의 신상의 세 곳의 혼수혈을 풀었다. 그러나 동시에 손을 써서 그의 허리 아래에 있는 혈도를 짚어버렸다. 심랑은 일순간 김불환의 이러한 행동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김무망은 마른 기침을 하고 몸을 일으켜 사방을 쓸어보았다. 그는 먼저 차가운 눈빛으로 심랑을 바라본 다음 김불환을 발견하고 얼굴에 놀라운 기색을 나타내더니 예리한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동시에 처참한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 다시 주저 앉았다. 김불환이 방금 짚었던 것은 바로 그의 허리 아래에 있는 장문대혈(章文大穴)이었던 것이다. 이 장문혈은 갈비뼈의 제일 아래쪽 겨드랑이 말단에 있는 것으로 다른 말로는 혈낭(血囊)이라고도 한다. 바로 족궐(足厥) 음간(陰肝) 경중(經中) 대혈의 하나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팔상수법(八象手法)으로 이 혈도를 짚었을 경우 하반신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쓰리고 저리고 풀어지고 가려움이 대단하여서 마치 천만 마리의 거미들이 두 다리를 어지러이 오르내리고 물어뜯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김무망이 비록 무쇠 같은 사나이이긴 했으나 그가 이처럼 가볍게 움직임에 따라 일어나는 그 아픔을 참을 수가 없어서 눈물을 흘렸다. 심랑은 차가운 눈으로 방관하고 있었으나 김무망의 얼굴 표정을 보고 확연이 깨달아서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이 두 사람은 옛날 서로가 원수지간이었군. 그렇지만 김불환이 이처럼 독한 수단으로 그를 상대하다니 너무 잔혹한 면이 있군!) 김불환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 손에 든 나무 막대기를 뻗어서 김무망의 몸을 툭툭 건드리며 웃으면서 말했다. "형님 ! 이곳에서 이 동생을 만난 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한마디 '형님'이라는 말은 심랑을 놀라게 하기에 족했다. 그는 이 두 사람이 형제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김불환이 김무망에게 대한 수단은 원수에게 사용해도 너무 잔인한 수단이데 그가 자기와 같은 핏줄에게 이러한 수단을 사용하다니......? 진짜 짐승만도 못한 놈이군!)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형님은 천하에 어떤 사람도 이 고묘 중에 있는 몇 되지 않는 기관을 알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나, 동생이 기관의 명수라는 것은 전혀 잊어버렸던 모양이오." 김무망이 이를 악물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능묘(陵墓)의 내력 "이 짐승 같은 놈! 하늘이 어떻게 너 같은 녀석을 지금까지 살려두었는지 모르겠구나!" "이 동생과 같이 좋은 사람을 하느님이 어떻게 아까워서 죽게 놔 둔단 말이오? 그렇지만 형님께서는 이 동생을 보자마자 않았다고 죽으라고 저주하니 너무 지나치게 형제의 정을 살피지 않는 건 아니오?" "내 선친께서 너를 의붓 아들로 받아들여서 어른이 되도록 키웠으며 또 너에게 무예를 전수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너는 선친이 남긴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나를 모함하니 내가 더이상 발 붙일 곳이 없어서 세계로 유랑하게 될줄이야." 여기까지 말하고 김무망은 울화통이 치미는 듯 목소리가 갈라졌으며, 기력이 쇠하여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김불환이 미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형님께서는 오늘날 강호인들이 이 동생을 강호상의 인의대협(仁義大 )으로써 견리용위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아시오? 그렇지만 당신은 도리어 그 악적 쾌락왕의 수하로서 그 쾌락왕을 위하여 금이나 은을 모으러 다니는 종놈에 불과하니 형님이 아무리 사실을 말하여서 나를 강호에서 난처하게 만들려고 해도 강호인들이 누가 형님의 말을 믿겠소? 내가 오늘 형님을 죽인다 해도 강호인들은 틀림없이 내가 대의를 위하여 멸친(滅親)하였다고 칭송할 것이오. 하하. 그러한 상황에서 강호인들은 대의멸친 견리용위 김불환이라고 부르겠지요. 하하." 그는 말을 할수록 더욱 기쁜 듯 앙천대소하기 시작했다. 김무망은 다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으며, 주칠칠도 참지 못하고 김불환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 악적! 짐승 같은 놈!" 이때 심랑이 홀연히 말했다. "방천리나 전령송, 이들은 김 형께서 구하신 거요?" "그렇소. 심 형께서는 어떻게 그것을 알아차렸소 ?" "김 형께서 그 사람들을 구해 주고 빨리 이 고묘에서 나가도록 말을 했으니 그 사람들은 비단 김 형에 대해서 감격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김 형을 이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생각하고 후일, 각지에서 김 형의 협명( 名)을 선전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김 형이 다시 그들을 필요로 할때, 돈을 요구하면 돈을 바칠 것이고 사람을 요구하면 사람을 보내줄 것이니, 여기에서 그들에게 몇 푼 안 되는 은자를 요구하는 것보다는 훨씬 고명한 방법이겠구려? 그렇지만 이 분 김 형께서는 쾌락왕의 수하로서 비록 이러한 점을 알아차렸다 할지라도 사용할 수 없었으니 결국 이 분 김 형은 눈을 뜬 채 김 형께 그 사람들이 이용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겠구려?" 김불환 대소하면서 말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심 상공이군요!" "김 형이 연출한 이 한 토막의 연극은 더 할 수 없이 뛰어나오. 이 동생은 확실히 감탄했소. 그렇지만 김 형께서 왜 이러한 연극을 연출하여 이 동생으로 하여금 구경토록 하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군요?" "다만 본인은 심 형이 이 연극을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오. 그래서 심 형께서 조그만 상을 내려주기를 바라고 연출했던 거지요." 심랑이 대소하면서 말했다. "이 동생은 진작 이 연극이 공짜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소. 김 형께서는 어떠한 분부가 계신지 우선 말씀해 주시기 바라오." "심 상공은 확실히 총명한 사람이오. 다만......." 그는 '킥킥'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다만 지나치게 총명한 것이 화근인 것 같소. 그래서 본인이 심 상공을 처음 보았을 때 나 자신에게 물었소. 하늘이 김불환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데, 왜 또 하필 심 상공 같은 사람을 태어나게 했는가? 이 강호상에 심 상공과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이상 너 김불환은 대단한 역할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김 형의 지나친 과찬이시오.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본인은 악인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후일을 생각해서 심 상공을 해치지 아니할 수 없소. 다만 본인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지금까지 심 상공을 해칠 수 없었을 뿐이었소." "김 형의 솔직한 말씀, 이 동생을 감복케 하는구려!" "그렇지만 오늘에 이르러 본인에게 기회가 온 것 같소." 말을 마친 그는 갑자기 주칠칠의 옆으로 달려가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께서는 이곳을 보시오. 이분 주 아가씨의 몸값은 백만 냥을 훨씬 상회할 것이오. 아울러 이처럼 총명하고 꽃과 같은 용모를 갖고 있는데도 심 상공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으니......! 만약 지금 주 아가씨가 어떻게 된다면 그 어찌 애석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소?" 심랑이 고의로 웃으면서 말했다. "주 아가씨는 편안히 앉아 계시고 더욱이 서 소협과 같은 영웅이 그 곁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어떻게 그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이오? 김 형은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이겠지요?" "맞소. 본인은 바로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이오." 말을 마친 그의 몸이 갑자기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주칠칠을 향하여 부딪혀 나아갔다. 그에 따라 주칠칠의 아래 턱이 서약우가 잡고 있던 검끝에 찔려서 꽃과 같이 예쁘고 하얀 얼굴에 즉시 피가 철철 뿜어져 나오는 상처 자국을 만들어냈다. 주칠칠은 이를 악물고 신음 소리도 뱉지 않았으나 서약우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그러나 김불환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본인이 방금 한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었구려! 심 상공 보셨소? 하늘에는 예상할 수 없는 비바람이 몰아 칠 수도 있고, 사람에게는 조석으로 그 화복이 변할 수도 있는 거요. 만약 본인이 방금 약간만 더 심하게 넘어졌다면, 주 아가씨의 이 꽃과 같은 용모는 아마 나찰(羅刹)보다도 더 흉악한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겠소?" 심랑이 깜짝 놀라 커졌던 눈을 다시 김불환의 얼굴로 향하며 말했다. "확실히 위험했소. 다행히 김 형께서......." 김불환의 안색이 갑자기 침중해지며 험악한 소리로 말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너는 아직도 태연한 척 할 셈이냐? 만약 주칠칠이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기를 원한다면, 내가 요구하는 세 가지 조건에 대답하기 바란다." 김불환의 음성이 험악하게 변했으나 심랑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는 방금까지 이 동생에게 깊은 정을 보이더니, 이순간 도리어 정이 없는 듯 말씀하시니 어찌 이 동생을 슬프게 만든 일이 아니겠소?" 김불환이 냉랭하게 웃으면서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손을 돌려 주칠칠의 얼굴을 한 대 후려갈겼다. 심랑의 안색이 순간 변했으나 곧 다시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사실 김 형의 분부는 비록 주 아가씨의 이러한 일이 없다 할지라도 이 동생이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오. 김 형께서는 왜 하필 이처럼 험악한 방법으로 연약한 여자를 상대하시는 겁니까 ?" "첫번째 요구 조건은 네 녀석이 오늘 보고 들은 일을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그건 쉽지요. 본인은 본래가 말 많은 아낙네는 아닙니다!" "다음은 네 녀석이 영원히 나와 맞상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이것도 받아 들일 수 있겠는가?" "좋소이다." 그러나 김불환의 얼굴에 갑자기 야릇한 웃음이 떠돌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보건대, 네 녀석의 대답이 너무 쉽게 나오는 것 같구나. 내가 확실히 안심을 할 수가 없게 만들고 있다. 나 김불환은 아주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지. 내가 안심하지 못하는 일은 절대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김 형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면 안심할 수가 있단 말이오?" 김불환이 갑자기 품에서 비수 한 자루를 꺼내 심랑 앞으로 던지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만약 네가 죽는다면 제일 안심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나는 네 녀석하고 원수진 일도 없고 원한도 없으니 어떻게 네 녀석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 하물며 네 녀석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은 대협으로서의 내 명성에도 흠이 가는 일이지!" 잠시 말을 멈춘 그의 눈빛이 다시 심랑을 주시하면서 한 자 한 자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다만 네 녀석의 오른팔을 자르기를 요구할 뿐이다. 만약 네 녀석이 오른팔의 팔굽 밑에서 팔을 자른다면 나는 주칠칠이 머리털 하나 손상없이 이 고묘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보장하마!" 주칠칠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으며, 얻어맞은 두 볼은 이미 퍼렇게 멍이 들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눈썹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있다가 이순간 부르르 몸을 떨며 놀람에 가득차 부르짖었다. "당신! 당신 절대 그의 조건을 받아들여서는 안 돼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불환이 다시 그녀의 볼을 한 대 후려갈겼다. 주칠칠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때려 죽여봐! 네 녀석이 만약 나를 때려 죽인다면......! 심랑 당신은 저를 상관하지 말고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세요. 이 짐승같은 녀석은 결코 당신을 막을 수 없을 거예요!" 심랑의 얼굴 근육이 일순간 부르르 떨렸으나, 입으로는 천천히 말을 했다. "인간의 몸은 부모한테 받은 것인데, 어떻게 자기 뜻대로 그것을 손상시킨단 말이오. 하물며, 본인이 만약 오른팔을 잘라버린다면 김 형께서 즉시 본인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덤비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단 말이오? 이 세번째 요구 조건에 대해서 본인은......." 심랑은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의 몸이 움직이는 순간 김불환은 왼손으로 주칠칠의 머리를 휘어잡고 오른손으로는 품속을 더듬더니 다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 주칠칠의 목을 겨누고 냉랭하게 말했다. "서 노제 이 양반은 아직도 예쁜 여자를 아끼는 마음이 약간 남아 있을지 모르나 나는 지저분한 남녀간의 정을 모르는 사람이다. 네 녀석이 더이상 움직인다면 내 손이 따라서 움직일 것이다. 그러면 이 팔팔 살아있는 미인은 즉각 차갑게 굳어버린 시체로 변하고 말 것이다." 심랑은 두 주먹을 불끈 움켜 쥐었으나, 그의 두 발은 한 걸음도 더이상 그들 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주칠칠의 몸은 다시 김불환에 의해서 내팽개쳐졌고 그녀의 가슴은 오르락 내리락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러나 한쌍의 아름다운 눈에서는 더이상 아픔을 참지 못해 눈물이 가득 고여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입으로는 도리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계속 외쳤다. "저를 상관하지 마세요! 저를 상관하지 마세요! 당신, 당신은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심랑은 마치 뾰쪽한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또 그 돌의자로 돌아와 털썩 주저 앉았다. 김불환이 험악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 녀석의 마음이 부드러워졌는가? 주칠칠은 네 녀석의 목숨을 구해 줬었는데, 너는 지금 한 팔로 그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데도 구하지 않다니, 그게 과연 대장부라 할 수 있는가?" 심랑은 나무토막처럼 그 자리에 앉은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김불환이 말했다. "네 녀석이 만약 내 세번째 요구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다만 네 녀석이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또 한 토막의 연극을 보도록 하는 수밖에......." 말을 마친 그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비수로 주칠칠의 가슴을 동여 맨 옷끝을 가볍게 긋는 순간 그 옷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밝고 부드럽기가 옥과 같은 그녀의 가슴이 들어났다.그 가슴 가운데에는 붉은 선이 칼끝에 따라 그어졌으며 선혈이 비어져 나왔다. 주칠칠의 부르짖음은 이때 이미 신음소리로 변했으나 김불환의 칼끝은 멈추지 않고 계속 아래로 조금씩 움직여 나갔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받아들이겠는가?" 그러나 주칠칠은 신음하면서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돼요. 당신의 오른팔이 만약 잘려진다면 그들은 절대 당신을 그대로 두지 않을 거예요.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세요." 김불환이 험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녀석은 네 목숨의 은인이며 동시에 네 애인인 여자의 이러한 모습을 차마 볼 수 있단 말인가? 네 녀석이 차마......." 김불환은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 그 칼을 여전히 밑으로 내리 그었다. 이미 주칠칠의 옥과 같은 앞가슴을 지나 칼끝은 점점 그녀의 배꼽 부분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칼끝에서 비어져 나오고 있는 그 선혈은 이미 그녀의 풍만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피부를 지나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빨간 선혈이 서로 어우러져 처참하고도 더할 수 없는 이상한 아름다움을 풍겨내고 있었다. 심랑이 갑자기 이를 악물더니 그의 앞에 던져진 비수를 집어들고 말했다. "좋소이다!!" 김무망이 앙천대소하면서 말했다. "당신도 어쩔 수 없이 저 녀석에게 항복하는 거요?" 주칠칠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안 돼요! 안 돼요! 당신의 목숨이......." 심지어 김무망마저도 두 눈을 감고 더 이상 주칠칠의 참혹한 모습을 바라볼 수 없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심랑은 손을 들어올려 다섯 손가락으로 비수를 꼭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은 창백하게 변했고 푸른 힘줄이 불거져 나왔으며 손은 쉼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마에도 역시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고 콩알만한 식은땀이 한 방울 한 방울 그 불거져 나온 푸른 힘줄에서 솟아나왔다. 갑자기 칼빛이 번쩍하며 '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칠칠은 참혹한 소리로 부르짖었다. 주칠칠의 부르짖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김불환의 오른손에 쥐고 있던 비수가 서약우의 일검에 의해서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김불환이 노갈을 터뜨렸다. "당신! 당신 미쳤소?" 서약우의 안색이 푸르게 변하며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래도 당신이 사람인 줄 알았소. 그렇지만 당신이 개, 돼지만도 못한 짐승일 줄 이야. 나 서약우는 당당한 대장부로서 어찌 당신 같은 사람을 따라서 짐승만도 못한 일을 할 수가 있단 말이요?" 말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검광이 번쩍이며 순식간에 이미 김불환을 향해 칠검을 공격해 들어갔다. 심랑의 놀람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불환은 이미 서약우의 물샐틈 없는 검광에 의해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심랑은 그들 두 사람의 싸움에는 상관도 없는 듯 급히 주칠칠의 옆으로 뛰어가 김불환의 칼끝에 의해서 찢겨진 주칠칠의 앞가슴을 여며 주었다. 주칠칠은 놀란 가슴이 약간 진정되자 심랑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드디어 더이상 참지 못하고 방성통곡 하기 시작했다. 김불환은 놀랍고 화가 나서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 짐승 같은 녀석! 네 녀석은 우리의 이번 계획을 잊어버렸단 말이냐 ? 네 녀석은 심랑이 죽기만 한다면 주칠칠 저 계집이 네 녀석의 계집이 된다는 것을 잊어버렸단 말이냐? 멈춰! 그래도 손을 멈추지 않아?" 그러나 서약우는 이를 악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격해 들어가는 기세는 더욱더 빨라졌다. 그의 신검수라는 별호는 허명이 아니었다. 격노한 상황하에서 그는 평시에는 가벼이 사용하지 아니하는 수혼탈명추풍칠십이검(搜.奪命追風七十二劍)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초식은 그 이름에 걸맞게 매 초식이 모두 살수였다. 물샐 틈 없는 검광이 뻗쳐나오자 과연 그 초식은 탈명(奪命)의 위력을 나타내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김불환도 사람은 비록 간사하고 교활하지만 그의 무공은 확실히 허명이나 날리는 무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했다. 그는 놀라움과 분노 속에서 비록 기선을 제압당했으나, 이때 개방의 절기인 공수입백인 십팔로단절수(空手入百刃 十八路短截手)를 전개하여 서약우의 노도와 같은 검광을 빙빙 돌아나가면서 반격할 기회를 찾아내었다. 검광이 번쩍이고 인형이 춤을 추듯 이리저리 뛰었다. 벽에 걸린 등불은 그 소용돌이 치는 검풍에 꺼질 듯 가물거려 마치 귀신의 불빛과 같았다. 주칠칠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당신! 당신은 더이상 저한테 신경쓰지 마시고 가서 김불환 저 악적을 빨리 사로잡으세요! 저는......, 저는 저 녀석의 근육을 한 가닥 한 가닥 뽑아내고 껍질을 벗겨야만 비로소 분이 풀릴 것 같아요." 심랑이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좋소. 당신은 여기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시오." 그가 몸을 날리려 일어났을 때 김불환은 빠르게 삼 초를 공격하더니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서서 큰소리로 말했다. "멈추시오! 내 말을 들으시오!" 서약우가 말했다. "너는 이미 독안에 든 자라이고 그물에 갇힌 물고기 신세인데, 무슨 더 할 말이 있단 말인가?"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언젠가 후회할 날이 있을 거요!" 그가 말을 하면서 몸을 석벽에 기대자 갑자기 '우르릉'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리면서 그가 기댄 석벽이 갈라졌다. 김불환이 번쩍 몸을 날려 그 갈라진 석벽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약우가 일검을 날려 그를 추적했을 때 석벽은 이미 다시 닫혀버렸으며, 날카로운 검 끝은 그 석벽에 부딪혀 '번쩍' 하는 불빛을 내었다. 심랑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죽일 놈 ! 내가 저 녀석한테 이러한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잊었군!" 서약우가 말했다. "우리 빨리 쫓아가도록 하죠!" 갑자기 김무망이 천천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고묘의 비밀 통로는 아주 복잡다단 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소. 당신들은 그를 쫓아가도 잡을 수 없을 거요!" 서약우가 노한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이미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소?" 김무망이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이 내 동생이요, 아니면 김불환이 내 동생이오?"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서 형께서는 이 분 김 형을 탓할 수는 없소." 서약우가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하면서 '땅' 하고 그 손에 들었던 장검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주칠칠이 심랑에게 말했다. "모두 당신이 잘못하신 거예요. 당신이 먼저 저를 돌보지 않고 그 녀석을 잡았더라면 그가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겠어요?"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며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안심해도 좋소. 언젠가 내가 그 녀석을 산 채로 잡아다가 당신 발 아래 꿇어 앉게 하리다.그때는 당신이 맘대로 해도 좋소. 오늘 당한 화풀이를 할 수 있을 거요." 주칠칠은 심랑의 가슴에 기댄 채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갑자기 말했다. "사실을 말하면 저는 지금, 그가 별로 원망스럽지는 않아요. 그가 원망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심지어 그에게 약간 감사하는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어요!" 심랑이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그말은 나도 잘 이해가 안 되는구려?" "만약 그 녀석이 저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가 당신 심중을 알았겠어요? 평일에 당신은 저에게 그토록 냉랭하게 대하셨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당신이 저를 위해서 죽음마저도 불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 한 가지만으로도 저는 방금보다 더 심한 고통이나 어려움도 참아낼 수 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에는 아직도 수정과 같은 눈물 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은 이미 선녀와 같은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서약우는 그녀를 위해서 방금 그렇게 위험한 상황을 겪었으나 그녀가 모든 정을 심랑에게 바치고 있으며 심랑이 그녀에게 좋게만 대한다면 그녀가 만족하고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좋게 대하든, 나쁘게 대하든, 흉하게 대하든, 악하게 대하든 전혀 상관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옴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심랑의 앞으로 걸어가 장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동생의 순간적인 생각의 잘못으로 그 간사한 녀석의 꾐에 빠졌으니......! 이 동생의 마음이 상당히......."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랑이 가볍게 웃더니 그의 말을 가로채서 말했다. "서 형이 자신의 잘못을 알고 고칠 수 있었으니, 그 용기는 보통 사람이 미치지 못할 바입니다. 이후에는 반드시 강호의 이름난 대협이 될 것을 이 동생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동생이 오늘 서 형과 같은 분을 친구로 사귈 수 있었음은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서약우가 말했다. "그러시다면, 이 동생은......." 그의 눈빛이 주칠칠의 얼굴에 멎더니 갑자기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큰걸음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심랑이 급히 그를 불렀다. "서 형 ! 멈추시오." 서약우가 말했다. "산은 높고 물은 길게 흐르는 법이오.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오. 이 동생은 심 형과 주 아가씨가 백년해로 하기를 기원하겠소." 그의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칠칠이 예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서약우 저 분도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후일 그가 어려울 때 성심껏 그를 도와주기로 해요."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도와주도록 만들지나 않으면 그것으로 이미 괜찮은 거요." 김무망이 갑자기 냉랭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가버렸소. 지금 당신이 나를 죽일건지 살릴건지 빨리 손을 쓰시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오른손으로 그의 왼팔의 완맥을 잡고 왼손으로는 그의 막힌 혈도를 풀어 주었다. 김무망은 깜짝 놀랐으나, 심랑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본인은 천하의 영웅호걸들에게 실례를 범하는 것을 원치 않소이다. 김 형은 천하의 영웅 중의 한 분이신데 본인이 어떻게 영웅의 예로 김 형을 대하지 않을 수 있겠소?" 김무망의 눈에 순간 감격하는 빛이 스쳤으나 입으로는 여전히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이미 당신의 포로가 되었는데 무슨 영웅을 논한단 말이요?" 심랑은 미소를 지을 뿐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의 왼팔 완맥을 쥐었던 손마저 풀어 주었다. 주칠칠이 깜짝 놀라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당신. 당신. 당신은 저 사람이 도망갈 것이 두렵지도 않아요 ?" 그러나 그녀의 말이 아직 입 속에서 나오기도 전에 심랑이 눈짓으로 그 말을 막았다. 김무망은 나무 토막처럼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을 뿐 조금도 도망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안색은 붉으락푸르락 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이를 악물고 큰소리로 말했다. "본인은 비록 당신이 이처럼 나를 좋게 대해 주는 것이 반드시 원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러는 줄 알지만, 당신이 나를 영웅의 예로써 상대하였으니 나 또한 어떻게 소인의 행동으로써 당신을 대하겠소?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심랑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형씨께서는 수고스럽지만 먼저 우리 두 사람을 이 고묘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신 다음에 다시 얘기합시다." 김무망이 더이상 말하지 않고 아도의 혈도를 풀어준 다음, 벽에 걸려 있는 동받침대로 만든 등잔불을 떼어 내서 손에 들고 몸을 돌려 큰걸음으로 앞서서 걸어갔다. 심랑은 주칠칠을 등에 업었다. 그러나 주칠칠은 끝내 참지 못하고 그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저 사람이 도망갈까 두렵지도 않으세요?"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도망갈 수 없을 것이오." 주칠칠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당신들 남자들의 행동은 어떨때는 진짜 이상해요. 심지어는 저도...... 저도 어떤 때는 어리벙벙할 정도예요." 심랑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당신과 같은 여자들의 마음도 이 세상 그 많은 남자들 중 몇 사람이나 알고 있겠소?" 주칠칠이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 "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심지어 당신도 포함해서요. 그렇지만 저의 당신에 대한 마음을 당신은 진짜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거짓으로 모르는 척 하시는 거예요?" 심랑은 그녀의 이 말을 듣지 못한 척 했다. 주칠칠은 입을 벌려 그를 깨물려 하다가 그 앵두 같은 입술을 그의 귓볼에 가볍게 갖다 대고 입맞춤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나직히 탄식하면서 말했다. "빨리 나가기나 해요." 이 '빨리 나가기나 해요.'하는 말은 비록 앞에 한 말보다 더 작은 소리로 말했으나, 심랑은 이 말은 알아 들은듯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 아직도 사람이 더 있는데 당신은 잊어버린 거요?" 주칠칠은 김무망에게 혈도를 제압당하여 그 석실의 구석에 혼절하여 쓰러져 있는 화예선을 바라보고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이 석실 속에 갇혀 죽는 게 나아요." 한참이 지났으나 심랑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칠칠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심랑의 등을 떠밀면서 말했다. "왜 멍청히 서 계세요? 빨리 가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지 않으시고......." 심랑이 실소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그녀를 그렇게 원망하면서도 또 그녀를 구해주라고 하니......! 어떤 때는 사람을 미친 듯 사랑을 하고, 또 어떤 때는 그 사람을 빨리 죽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다니, 이러한 게 바로 당신과 같은 여자들의 마음인데 누가 이런 마음을 그때 그때 이해할 수가 있단 말이오?" 그는 화예선을 옆구리에 껴안고 큰 걸음으로 그 석실을 걸어나왔다. 김무망은 손에 등불을 들고 과연 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칠칠이 눈을 들어 둘러보았으나, 아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그 작은 귀신 같은 녀석은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그들의 귀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작은 귀신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도가 모퉁이에서 급히 뛰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이미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청색 보따리가 들려 있었으며, 그의 등에는 비스듬히 긴 활이 메어져 있었는데, 그 활의 길이는 그의 키보다도 더 큰 듯 했으며, 그가 앞에 안고 있는 보따리는 그의 허리께를 훨씬 넘는 그런 큰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큰 보따리를 안고도 아도는 그 신법이 경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의 경공에 대한 기초가 상당한 수준에 이른 듯 하였다. 주칠칠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주 똑똑한 아이로구나. 내 동생이 이 녀석을 보면 틀림없이 좋아할 텐데.) 그녀가 동생을 생각하자마자 걱정인지 화인지 모를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내 동생에게 만약 어떠한 일이라도 생겼다면, 내가 화예선의 껍질을 산 채 벗겨 놓을 테다." 그녀는 화가 나면 언제나 사람의 껍질을 벗겨 놓겠다고 말을 하곤 했으나, 사실상 어떤 사람이 그녀의 면전에서 사람의 껍질을 벗긴다고 하면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도망갈 그러한 심성이 고운 여자였다. 김무망은 손에 등불을 들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는 이 고묘의 비밀 통로에 대해서 아주 익숙한 듯했다. 등불빛 아래서 심랑은 비로소 이 고묘의 크기가 아주 넓어서 제왕의 궁전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그 내부 기관의 교묘함과 밀실이나 지하 통로의 복잡함은 더욱 상상을 초월할 지경임을 알았다. 심랑은 그 생각이 이 고묘의 공사 규모의 방대함에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고묘는 어느 제왕(帝王)의 걸작품인지 모르겠군!"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이 고묘가 제왕의 능묘라고 생각하시죠?"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능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의 많은 재물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또,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되었는지 모를 거요. 보시오! 이 고묘 안에 있는 불 하나, 기둥 한 그루나 심지어 등 하나가 어느 것이 인간의 지혜와 노력과 피, 눈물의 결정체가 아닌 것이 있소? 인간세상의 지존인 제왕을 제외하고서 누가 이처럼 많은 재물과 사람을 동원할 수 있겠소? 또, 누가 이처럼 독한 마음을......." 김무망이 갑자기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틀렸소!" 심랑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김 형의 말씀은 이 고묘가 제왕의 능묘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인간 세상의 제왕의 능묘가 아니고, 무림지존(武林至尊)의......."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침중한 음성으로 이어서 말했다. "구주왕 심천군(九州王深天君)이라고, 이 이름을 당신은 들어본 적이 있소?" "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무림인들은 심씨 가문은 무림 중에서 역사가 가장 유구한 세가(世家)이며, 심씨 가문의 자제들이 최근 이백 년 동안 일곱 차례의 큰 재난을 겪었으나, 일곱 차례나 또 그 가문을 중흥했다는 고사를 알고 있으며, 그게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소. 그런데 이들은 백 년 전에 강호에 또 하나의 세가가 있었는데 그 세가의 위망이나 재력, 무공이 모두 심씨 가문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으며, 심지어 그 가문의 역사의 유구함은 위로 한당(漢螳)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소." "형씨가 말씀하시는 것은 중원의 고씨(高氏) 세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이 능묘는 바로 고씨 가문의 최후의 주인의 혼을 묻은 묘지요." "최후의 주인이오? 그렇다면, 고산청(高山靑)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바로 그 사람이오. 그 사람은 재주가 뛰어나며, 그 무공의 깊이는 사람들이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소. 중원 고씨 가문은 그 대에 이르러서 최고로 번창하였소. 그렇지만, 그 사람이 말년에 이르러서 갑자기 성격이 이상하게 변하고 심지어 불교를 맹신하여서 잠자는 것과 먹는 것마저도 전폐할 정도에 이르렀소. 그는 천만금을 소비하여서 이 고묘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후대 자손들에게 이 고묘의 소재지를 알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소." 주칠칠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건 또 왜 그렇죠? 그 사람은 그 자손들이 자신을 기려서 제사를 올리는 것도 바라지 않았던 건가요?" "사람이 죽은 후에 많은 재물들과 함께 묻힌다면 내세(來世)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자신과 같이 묻었던 재산을 다시 자신이 쓸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거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후대의 자손들이 그 보물이 묻혀 있는 장소를 알아서 보물을 빼내다가 써버릴 것을 두려워했던 거요." 주칠칠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을 묻은 사람들은 결국 이 고묘의 소재지를 알게 되지 않아요?" "그는 죽기 전에 이미 모든 재산과 고씨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무공비법을 모두 이 고묘에 가져다 놓은 후에 고묘의 입구를 막아버렸소. 그리고 이 고묘 안에서 자신이 죽기를 기다렸던 거요." 주칠칠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미친 사람이군요! 그 사람은 확실히 미친 사람이에요!" "그래서 수백 년 동안, 수십대를 거치면서 전해져 내려왔던 고씨 가문의 위망은 바로 이 미치광이의 손에서 끊기게 되었던 거요. 그 후에 고씨 가문의 자제들은 이 능묘의 소재지를 찾기 위해서 더이상 생업을 돌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무공마저도 연마하지 않았소. 그래서 이 일 때문에 미쳐버린 고씨 가문의 자제들이 그 사람 이후 양대에 걸쳐서 열한 사람이나 나오게 되었던 거요. 이 고씨 가문은 고산청의 손자 대에 이르러서 겨우 남아있던 집과 살림마저도 모두 저당잡혀 버렸소. 그래서 그 재산이 나라에 비할 만큼 많았던 고씨 가문의 자제들은 이때부터 거지로 전락하고 말았소. 무림을 떨어 울리게 했던 고씨 가문의 무공도 점점 사라져서 전해지지 않게 되었던 거요." 김무망의 말이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 주칠칠이 눈을 들어 바라보자 이미 고묘의 출구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으나, 가슴은 시원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답답하여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심랑은 김무망의 말을 듣고 감개무량한 듯 장탄식을 하고 묵연히 말했다. "그 일은 다만 고씨 가문의 후대 자손들이 분발하여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거요." 이 말을 듣고 주칠칠이 말했다. "만약 나였어도, 조상들의 능묘 속에 그렇게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다른 일은 다 팽개치고 고씨 가문의 자제들이 했던 것처럼 했을 거예요. 그것은 인지상정이에요. 어떻게 그들만을 탓할 수 있겠어요?" - 제1권 끝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