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함정(陷穽) 서약우가 말했다. "내가 죽고 사는 것은 큰 문제가 될 게 없소. 다만 그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다는 게......."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바람소리가 휙 하고 일어나더니 한 줄기의 불빛이 창을 뚫고 들어와 벽에 박혔다. 그것은 불화살이었다. 심랑이 재빨리 손을 들어 장풍을 날려 벽에 박힌 불화살의 파란 불길을 껐다. 이때 창밖에서 다시 신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서약우,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다 전했다. 그래도 나오지 않는다면......." 주칠칠이 그 말을 가로채고 대갈하면서 말했다. "네 녀석이 나오라고 하지 않아도 나갈 참이다. 누가 네 녀석을 겁낼 줄 아느냐?" 몸을 날려 한 발로 창문을 걷어차는 순간, 갑자기 옆에서 심랑이 그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펑' 하는 소리가 나며 그녀는 침상 위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때 심랑이 나는 듯이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창밖에는 칠팔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꽉 둘러서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심랑은 서약우가 말하려던 비밀이 틀림없이 중요한 것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서약우 한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원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창밖으로 뛰쳐 나가는 순간, 그 사람들 무리 속에서 갑자기 두 자루의 횃불이 밝혀졌다. 그 불빛 덕분에 심랑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이 칠팔십여 인이 모두 머리를 풀어 헤치고 남루한 옷에 맨발을 한 거지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등 뒤에 마대를 걸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들은 개방 내에서도 그 지위가 비교적 높은 제자들인 듯하였다. 그 두 개의 횃불 가운데는 불그스레한 얼굴에 이마가 약간 벗겨진, 나이가 오십 남짓된 거지가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차림은 다른 거지들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도 없었으며, 그 키도 다른 사람보다 크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거지들 무리 속에 우뚝 서있는 그의 모습은 군계일학처럼 눈에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비록 그자리에 꼼짝않고 서 있었으나 그 표정이나 그 기세는 다른 사람과는 달랐던 것이다. 심랑은 그를 한 번 바라보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의 화살처럼 예리한 눈빛은 깜박이지 않고 심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랑이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혹시 좌공룡(左公籠) 장로이십니까?" 그 사람이 말했다. "바로 그렇소. 귀하는 서약우와 어떤 관계요?" "저는 심랑이라고 합니다. 서 형과는 친구지간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좌공룡이 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심랑? 노부가 강호에 새로운 소년검객이 나타나서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그 이름을 천하에 날리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오늘 여기에서 만나보게 될 줄은 몰랐구려." 좌공룡 장로의 말은 정정당당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사악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서약우는 지난 날 그 행동이 사람들의 눈에 달갑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서약우가 좌공룡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할만 하였다. 그러나 심랑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심랑은 가볍게 신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개방의 세 분 장로께서는 물과 고기처럼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지금 단 장로와 구양 장로께서는 어디에 계신지요?" 좌공룡이 말했다. "그 두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든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요?"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다만 그 두 분에게 서약우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렇게 많은 제자들을 동원해서 그를 체포하려는지 여쭤보고 싶을 뿐입니다." 좌공룡이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그 두 사람께 물어볼 필요도 없이 노부의 한 마디로도 충분히 그를 체포할 수 있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몇 가지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좌공룡이 화가난 목소리로 말했다. "개방의 일에 대해서 일반인이 간섭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소." 심랑이 그 말을 듣고 눈을 번쩍 빛내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정녕 그렇다면 저도 이 일에 끼어 들어서는 안 되겠군요." 말을 마치면서 그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향해 소리쳤다. "주 아가씨, 우리 그만 가도록 합시다." 그의 이 말은 방 안에 있던 서약우를 크게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칠칠마저도 깜짝 놀라 창밖으로 뛰쳐나와서 이상하다는 기색으로 물었다. "가다니오?" "그렇소. 빨리 갑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서약우 그 사람을 우리가 어찌 모른 척 한단 말이에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서 형과 우리는 비록 친구지만 서 형이 이미 개방의 법도를 어겼기 때문에 개방의 제자들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맞길 수밖에 더 있겠소 ? 이것은 무림계의 규칙이오. 우리가 어찌 그 일에 끼어든단 말이오." 주칠칠은 안타까워 심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심랑은 그녀가 더이상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다시 좌공룡을 향해 포권을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들은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그러나 좌공룡이 도리어 그들을 막을줄 누가 알았겠는가? "네 녀석도 이 자리를 벗어날수는 없다." 심랑은 고의로 얼굴에 이상하다는 기색을 떠올리면서 물었다. "귀하께서는 방금 저에게 개방의 일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 제가 이 자리에서 물러가려는 것은 바로 귀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귀하께서 다시 저를 가로막는 까닭을 모르겠군요." 좌공룡은 잠깐 당황한 듯하였으나, 곧 표정을 태연하게 고치며 차갑게 말했다. "노부가 하는 일을 너는 꼬치꼬치 캐물을 자격이 없다." "그렇지만 이 일은 저와 관계가 있는데 제가 어찌 물어보지 않을수가 있겠습니까?" 좌공룡이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좋다. 말해주마. 왜냐하면 강호에 네 녀석은 간사한 무리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서약우의 반당행위가 네 녀석과 틀림없이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귀하께서는 저를 서약우와 같이 처치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좌공룡이 대갈을 터뜨렸다. "바로 맞췄다." 이때 심랑이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주칠칠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좌공룡이 화난 소리로 말했다. "뭐가 우습다는거지?" 심랑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다만, 당신 같은 여우도 남의 꾀에 쉽게 말려들 때가 있다는 것이 우스웠을 뿐이오." 좌공룡이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도대체 그 말뜻은 뭐지?" 심랑이 말했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에게서 사악한 기운을 찾아볼수가 없었소. 그래서 당신이 인면수신(人面獸心)의 악한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렇지만 서 형이 이미 나에게 당신에 대해서 해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당신을 시험해 보았던 거요." 그는 웃고나서 이어서 말했다. "그 간단한 몇 마디 시험에 당신은 마각을 드러냈소. 그렇지만 당신은 당신의 마각이 어디에서 드러났는지 모르고 계시겠지요? 제가 설명해 드릴까요?" 좌공룡이 노갈을 터뜨렸다. "어떻든 너는 곧 죽을 녀석이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 "당신은 원래 혼자 이곳에 왔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방금 개방 삼로의 이름을 꺼냈을 때 당신은 약간 당황을 했소. 만약 당신이 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게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왜 당황을 했겠소?" 좌공룡이 냉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또 있단 말인가?" 심랑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여러 번 나한테 이 일에 관계하지 말라고 말을 했소. 그렇지만 내가 이자리에서 물러서려 하자 당신은 도리어 나를 물러서지 못하게 가로막았소. 이러한 사실은 바로 당신이 서약우가 이미 나에게 당신의 비밀에 대해서 말해줬을까봐서 두려웠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오. 그래서 나를 서 형과 같이 없애버리려 생각했던 거겠죠? 만약, 당신이 한 일이 정정당당한 것이었다면 왜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겠소?" 좌공룡의 안색이 마침내 약간의 변화를 일으켰다. 이때 서약우가 방 안에서 뛰쳐 나오면서 기쁜 소리로 말했다. "심 형께서 저를 이해해 주시다니 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서 형의 말씀이 맞소. 호랑이는 가죽은 그릴 수 있지만 그 뼈까지는 그릴 수 없는 법이고, 사람은 얼굴은 알 수 있지만 마음은 알 수 없는 법이오. 누가 인(仁)과 의(義) 두 글자로 무림계에 널리 알려진 개방 삼로의 한 분인 좌공룡이 바로 이런 사람일줄 알았겠소?"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좌공룡은 번쩍 손을 쳐들었다. 그에 따라 그의 주위에 돌부처처럼 우뚝 서있던 개방 제자들이 풍차처럼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약 두 바퀴쯤 돌았을 때 갑자기 번쩍 하며 수십 개의 칼빛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서약우, 주칠칠, 심랑 등을 에워쌌다. 그 번쩍이는 칼빛사이로 다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밖에 둘러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십여 인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은 허리에 주머니를 차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손에 화살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심랑 등이 만약 공중으로 몸을 솟구치기만 하면 암기를 발사할 듯한 그러한 태세였다. 만약 평지에서라면 이러한 암기들이 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주칠칠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몸을 공중에 날리는 순간 암기들이 발사된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심랑 등이 경공을 발휘하여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뛰쳐 나가게 된다면 막을 수 없을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에워싼 사람들 밖에 다시 암기를 발사할 수 있는 사람들로 밖을 에워쌌던 것이다. 그에 따라 심랑 등은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그자리에서 빠져 나갈 생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주칠칠의 얼굴이 창백해져갔다. 그녀는 비록 여러 번 생사를 건 싸움을 겪었으나 이처럼 수단이 독날하고 용의주도한 적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밤은 깊어가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왔으며 칼빛은 눈을 어지럽혔다. 심랑, 주칠칠, 서약우 세 사람을 에워싼 수십 명의 개방제자들의 눈에서는 야수와 같은 형광이 뻗쳐 나오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털이 쭈뼛 일어서게 하는 살기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주칠칠은 이순간, 그들을 에워싼 이들이 오랜동안 훈련을 받아 왔으며, 그들이 발동하려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위력이 대단한 진법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을 에워싼 개방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무공은 비록 보잘 것 없었으나, 이러한 진법 안에서 그들이 공격을 하게 된다면 수십 명의 무공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는 것이다. 이 수십 인의 무공이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면 마치 한 사람에게 수십 개의 팔이 달린 듯한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주칠칠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록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나 그녀 맞은 편에 서있는 사람의 얼굴 모습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번쩍거리는 수를 셀수도 없는 수많은 칼뿐이었다. 그녀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곧 일어날 혈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혈전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녀는 더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심랑은 당황할 수 없었다. 어지럽게 오가는 사람 그림자들과 칼빛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다른 사람이었다면 더이상 관찰할 마음의 여유도, 생각을 정리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랑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자신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서른여섯 명이며, 그 서른여섯 명은 얼른 보기에는 일체가 된 듯 하나, 사실상 세 사람이 하나의 조를 이루고 있고, 또 서른 여섯명의 움직임은 모두 똑 같은 듯하나 사실상 세 사람, 세 사람 사이에는 조그만 특별한 특색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을 에워싼 서른여섯 사람의 손에 든 장도가 가볍게 움직이며 진법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칠칠은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꽉 움켜쥔 두 주먹은 피가 날 지경이었으며 온 몸은 이미 가볍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서약우의 창백한 얼굴에서는 이미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나오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세 자루의 장도가 번쩍하며 그들의 머리 위로 내려쳐왔다. 그에 따라 숨막힐 듯한 긴장감에 휩싸였던 주칠칠과 서약우가 한숨을 내쉬며 그 내리쳐오는 장도를 맞받아쳐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손을 쓰기도 전에 돌연 심랑이 앞으로 번쩍 나서며 맨손으로 그 중의 한 사람의 장도를 빼앗고 팔굽으로 좌측에 있는 사람을 쳐서 밖으로 튕겨냈다. 우측에서 공격해 들어오던 사람은 깜짝 놀라 몸을 빼려 하였으나 심랑이 손을 돌리는 순간, 칼등으로 그의 목을 가볍게 내리쳤다. 그러자 그 사람은 '캑' 하는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털썩 쓰러져 버렸다. 심랑이 가볍게 손을 몇 번 쓰는 순간, 그들을 공격해 오던 세 사람이 그대로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주칠칠은 비록 심랑이 어떻게 상대방들을 거꾸러뜨렸는지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세 사람이 연거퍼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장도를 손에 든 심랑은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 '쨍그랑!쨍그랑!'하는 소리를 연거퍼 내며 공격해 들어오는 장도들을 하나씩 맞받아 치고 있었다. 사면팔방에서 번쩍이는 칼빛들은 심랑의 춤추듯 움직이는 인영에 의해서 모두 막혀버렸다. 주칠칠과 서약우는 그 칼빛 속에 서 있었으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서약우는 멍청한 듯 입을 벌린 채 심랑의 움직이는 모습만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주칠칠은 가볍게 웃으며 이러한 모습의 서약우를 바라보았다. 주칠칠의 눈길을 느낀 서약우가 가볍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심 형의 무공은 정말......."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주칠칠의 머리와 옷깃이 춤을 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자신도 사방에서 장도가 일으키는 질식할 것 같은 차가움을 느꼈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계속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심랑은 어지러이 날리는 칼빛 속에서 마치 춤을 추듯 이리저리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갈수록 눈을 어지럽게 하였으며 장도가 일으키는 바람은 갈수록 거세게 휘몰아쳐 왔다. 그들을 에워싼 이 장도진은 이미 점점 그들을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주칠칠의 얼굴에서는 더이상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심랑, 그, 그 사람이......." 서약우가 말했다. "심 형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지만 두 주먹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상대하기는 어려울거요. 하물며 상대방은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진법이 상당히 위력이 있으니, 심 형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칠칠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상황이 그렇다면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잖아요? 뭘 기다리는 거죠? 빨리 가서 그를 도와줘야 되잖아요?" 그녀는 입으로는 비록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으나 그녀 역시 꼼짝않고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이때, 진법은 완전히 발동하기 시작했으며 사방의 칼빛은 마치 그물을 짜듯이 어지럽게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끼어들어야 좋을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서약우도 그 자리에 멍청히 선채 손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주칠칠은 계속 발을 구르면서 소리쳐댔다. "심랑, 잠깐 멈추세요. 제가 도와드릴께요.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끼어들 수가 없어요. 심랑, 심랑! 제 말이 들려요?" 그러나 심랑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하였다. 대신 좌공룡이 그 칼빛 밖에서 냉소를 날리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랑은 지금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오. 어떻게 손을 멈출 수가 있겠소? 그렇지만 아가씨도 그렇게 조급해하지는 마시오. 심랑을 먼저 처치한 다음 아가씨도 심랑 곁으로 보내드릴 테니까." 주칠칠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욕설을 퍼부어댔다. "늙은 거지! 이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인간! 담력이 있다면 나와 한 번 사생결단을 내보자. 멀찍이 숨어서 남의 비위나 상하는 말을 하다니. 어떻게 개방 삼로(三老)의 대열에 낄 수 있었지? 천하인들이 모두 눈이 삐었지. 당신 같은 인간을 영웅대접을 하다니......." 좌공룡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거친 무림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소. 아시겠소? 죽은 사람은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이오. 당신들 세 사람은 지금 이순간 반은 황천길에 올랐다고 말해도 좋소." 주칠칠이 노갈을 터뜨렸다. "무슨 말을 하는거냐? 네 녀석이 금방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때 서약우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의 오른손을 감싼 붕대는 이미 회색빛으로 더럽게 변해 있었으며, 끊임없이 선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부상을 당한 지 오래되지 않은 듯하였으며 지나치게 피를 많이 흘려 기력이 쇠잔해졌다. 그가 비록 오늘 심랑과 더불어 싸움에 끼어든다 해도 결코 오래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주칠칠은 이러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그를 불렀다. "서 상공!"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서약우가 도리어 놀란 듯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무슨 분부라도 있으시오?" 주칠칠이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이전에 제가 서 상공께 무례했던 점, 제발 탓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비로소 저는 서 상공이 매우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녀의 서약우를 부르는 칭호가 변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표정이나 어투도 모두 매우 더할 수 없이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위급한 상황 하에서 그녀가 이처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말을 하자 도리어 서약우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서약우는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중얼 말했다. "저는, 저는 아가씨께서는 그렇게 겸손해 하실 필요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칠칠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말을 가로채고 말을 이었다. "제가 겸손한 게 아니에요. 제가 한 말은 모두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오늘, 만약 심랑 한 사람이 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려 한다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거예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약우는 이미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칠칠이 갑자기 그에게 이렇게 부드럽게 대했던 것은, 그에게 이렇게 겸손하게 말을 했던 것은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곧 죽을 사람에게는 누구나 평상시보다 부드럽게 대하는 법이다. 주칠칠이 말을 이었다. "심랑이 어떤 사람인 줄은 서 상공께서도 아시리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만약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비밀을 알아내기 전에는 그 사람 혼자 이 포위망을 뚫고 뛰쳐나가려 하지 않을 거예요. 서 상공! 서 상공께서는......." 서약우는 처연히 웃으면서 말했다. "더이상 말씀하실 필요가 없소. 아가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고 있소. 본인의 생사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가 없소. 그렇지만 그 비밀은 반드시 심 형께 말씀을 드려야 하오." 주칠칠이 장탄식을 하고 중얼거렸다. "다만, 다만 심랑이 그 비밀을 알아낸 다음 이 포위망을 빠져나갈수만 있다면 나는, 나는 여기에서 죽든 살든 여한이 없어요." 서약우는 고개를 쳐들고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신중한 음성으로 소리질렀다. "심 형, 똑똑히 들으시오. 바로 그날 밤, 그 황폐한 사당에서......."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심랑이 실성한 소리로 외쳤다. "말을 멈추시오!" 이어서 좌공룡의 웃음소리와 득의에 찬 말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그랬었군! 네 녀석은 아직 그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었군."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긴 휘파람 소리가 일어났으며 그 휘파람 소리에 다라 진법이 갑자기 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원래 하나로 뭉쳐있던 칼빛이 갑자기 두 개로 갈라지며 심랑과 서약우의 사이를 뚫고 들어왔던 것이다. 심랑은 발을 굴러 공중으로 치솟아올랐다. 그는 서약우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올리는 순간, 쉭!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일으나며 화살들이 폭우처럼 그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주칠칠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부르짖었다. "아, 심랑!" 심랑이 손에 들었던 장도를 번쩍이는 순간, 그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던 화살들은 모두 땅에 떨어졌으나 그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로 떨어져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순간, 그를 에워쌌던 진법은 완전히 두 개로 갈라졌다. 이미 서약우를 단단히 에워싸는 새로운 진법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때 주칠칠이 심랑의 곁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도대체 어...... 어떻게 된 일이죠?" 심랑이 그 말에 노갈을 터뜨렸다. "아직도 모르겠소? 모두 당신탓이오." 심랑의 말에 주칠칠은 깜짝 놀란 듯 눈에 원망의 기색이 드러나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제탓이라구요? 제가 또 무엇을 잘못했죠?" 그러나 심랑은 그녀를 더이상 상대하지 않고 손에 잡은 장도를 휘둘러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때 그를 에워싼 사람들의 숫자는 비록 줄어들었으나, 그들은 더이상 공격을 하지 않고 방어만 할 뿐이었다. 그들의 공격목표는 이미 심랑에게서 서약우에게로 옮겨졌던 것이다. 열다섯 자루의 장도가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내며 서약우를 공격해 들어갔다. 열다섯 개의 장도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완전히 조화를 이루며 흉맹한 살기를 띤채 단칼에 서약우를 두 조각이라도 내겠다는 듯 매섭게 내리치고 있었다. 서약우는 다만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해낼 뿐 반격을 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처한 위험한 이 순간에 다시 서약우의 그 유약한 천성이 드러났다. 그는 한숨을 쉬고 땀을 흘리며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외쳐댔다. "심랑, 심 형! 빨리, 빨리 저를 구해주세요." 그러나 심랑은 일순간 공격을 하지 않고 방어만 하는 자신을 에워싼 진법을 깨부수고 서약우를 구하러 달려갈 수 없었다. 십여 자루의 장도가 그를 단단히 에워싸고 있었다. 서약우의 외침소리는 더욱 처참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이미 기력이 다한 듯하였다. 주칠칠이 이를 깨물면서 말했다. "그만 소리치세요. 죽든 살든 가슴을 치켜들고 용기를 내어 한 번 맞서 보세요. 당신 같은 남자는 여자보다도 못 해요." 그랬다. 그녀는 확실히 서약우보다 강한 여자였다. 그녀는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칼빛 속에서 좌충우돌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아니한 채 적과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서약우는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나는, 나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오. 다만, 다만 그 비밀이 ...... 나는......." 주칠칠이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진정한 사내 대장부라면 지금 이순간 생사를 걸고 한 번 부딪혀 보세요. 그리고 적들을 물리친 다음 그 비밀을 말하고 죽으세요. 그러면 당신의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라고 제가 말해 드리죠." 서약우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내 손이...... 내 손이......." 주칠칠이 노갈을 터뜨렸다. "당신 손이 어떻다는 거죠? 당신은 지금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어요. 당신은 겁쟁이에요. 당신은 담력이 없는 사람이에요. 남에게 의지해서 목숨을 건지려고 당신은 애를 쓰고 있어요. 당신은 근본적으로 상대방과 맞설만한 용기가 없는 거예요." 서약우는 여전히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칠칠의 말은 바로 그의 아픈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주칠칠은 이러한 그의 마음을 모르는 듯 여전히 소리를 질러댔다. "용기를 내세요. 적들과 맞서 싸우세요. 목숨을 걸고 싸워 보세요. 당신이 용기를 내서 싸우기만 한다면 그들은 결코 당신을 죽일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서약우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틀렸소. 나는 틀렸소. 나는, 나는 너무 무섭소. 심랑! 심랑, 제발 도와주시오. 나를 제발 구해주시오.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소." 주칠칠은 한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겁쟁이. 자존심도 없는 사람! 나는 당신이 도대체 어떻게 칠대 고수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주칠칠은 서약우가 남자 같은 호기가 없을 뿐 무공은 약하지 않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누구도 그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 상황 하에서는 그의 뛰어난 검법과 우아한 풍모로 하여금 그 자신의 유약한 성격을 감출 수 있었고, 쉽게 명성을 얻을 수가 있었다. 다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무리 감추려고 애를 써도 중대한 시련을 만났을 때는 결점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서약우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겨울밤은 길기만 하였다. 동틀 무렵은 그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가장 추운 법이다. 갑자기 서약우가 처참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 비명소리는 장도가 일으키는 바람소리보다도 더 날카롭고 처절하게 들렸다. 심랑이 실성한 소리로 물었다. "서 형! 어떻게 된 일이오?" 서약우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내...... 내가......." 그의 말이 나오는 순간 다시 비명이 이어졌다. 이어서 좌공룡의 득의에 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바람과 칼빛, 비명소리, 미친 듯한 광소. 어두컴컴한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함박눈이 쏟아져 내릴 듯했다. 붉은 선혈이 이미 눈을 물들이고 있었다. 좌공룡이 광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다 해치웠는가?" 칼빛이 어지러이 날리는 속에서 그 물음에 응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끝났습니다. 다섯 번 찍었습니다." 좌공룡이 대갈을 터뜨렸다. "우리 개방의 반도는 이미 제거되었다. 가자!" 칼빛이 다시 어지러이 번쩍이며 심랑과 서약우를 둘러쌌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한무더기의 화살들이 심랑을 향해 날아왔다. 심랑이 장도를 휘둘러 화살들을 떨어뜨리는 순간, 그곳에 나타났던 개방 제자들은 어둠 속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피로 물든 눈 위에는 서약우가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있었다. 심랑은 탄식소리를 내며 몸을 굽혀 서약우를 안아 일으켰다. 서약우의 얼굴과 전신을 흠뻑 적신 선혈은 어둠침침한 새벽빛에 거무칙칙하게 보여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 했다. 서약우는 아직 숨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온 몸을 피로 뒤집어 쓴 서약우는 미약하나마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서약우가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한 심랑은 날아갈듯 기뻤다. 그는 가볍게 서약우를 불러 깨웠다. "서 형, 힘내시오! 제발 힘내시오!" 서약우는 미미하게 몸을 꿈틀대며 가늘게 눈을 떴다. 이미 초점이 사라진 그의 눈동자는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미약하게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심랑이 조급하게 말했다. "서 형, 나요! 심랑이오!" 서약우의 눈에는 마침내 가벼운 빛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 빛은 바람앞에 날리는 촛불처럼 미약한 것이었다. 그는 몸부림치며 입을 벌려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심 형, 난...... 난 끝났소. 이제 정말 끝났소." 심랑이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당치도 않은 소리요. 당신은 죽지 않을거요. 당신은 살아날 수 있어요." 서약우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입가에 가냘픈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처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알고 있소. 더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애석하게도 그 비밀을...... 그 비밀을...... 나는 이미 말할 힘이 없소." 심랑이 말했다. "이제 그 비밀을 잊어 버리시오. 기운을 차린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소." 서약우가 말했다. "말하지 못할 것이오. 나는 영원히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오....... " 그는 말 끝을 맺지 못하고 기침을 하더니 더이상 숨을 몰아쉬지 못했다. 주칠칠이 그를 흔들면서 조급하게 말했다. "당신말고 누가 또 그 비밀을 알고 있죠?" 서약우는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편지. 내가 갖고 있는 편지...... 유옥(柳玉)...... 유옥...... 에게...... 에게 주...... 주....... " 그러나 격렬한 기침과 거친 호흡으로 더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심랑은 이러한 그의 모습을 쳐다보며 처연한 표정을 짓고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서 형, 안심하시오. 서 형께서 이미 유옥여(柳玉茹) 아가씨에게 편지를 주신 이상, 내가 유 아가씨를 찾아서 어떻게 된 일인지 반드시 알아 내고 말거요. 맹세코 좌공룡 그 녀석이 뜻을 이루도록 가만 놔두지는 않을 것이오." 서약우는 전력을 다해 몸부림쳤다. 그는 무슨 할 말이 더 있는 듯하였으나 한 마디도 더 입밖에 내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심랑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 눈빛에는 더할 수 없는 고통과 후회와 미안함이 가득차 있었다. 심랑이 중얼거렸다. "안심하시오. 안심하시고 가시오. 고통스러워 하지도 말고 자책을 하지도 마시오. 누가 뭐라든 나는 서 형이 이미 전력을 다했음을 알고 있소. 당신은 이미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였소." 서약우는 비록 말은 할 수 없었으나 그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말, 진심에서 하시는 말이오? 내가 더이상 자책을 하지 않아도 되겠소? 사실...... 사실 나는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소.'라고. 부릅뜬 채 심랑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마침내 천천히 내리감겼다. 일생 동안 자기의 유약함과 싸우던 소년이 죽음에 임박해서 짧으나마 마음의 평정을 얻은 채 눈을 감았던 것이다. 마침내 동쪽 하늘에서 나타난 어슴프레한 새벽빛이 서약우의 얼굴을 비췄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주칠칠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심랑이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가련한 사람이오." 주칠칠이 말했다. "그렇지만 사내 대장부라면 차라리 남의 미움을 받을지언정 남의 동정을 받아서는 안되겠지요. 남에게 동정을 받는 남자라는 것은 진정한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없어요. 만약 서약우 이 사람이 유약한 성격만 아니었다면 오늘 죽지는 않았을 텐데......." 심랑이 갑자기 냉랭하게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그렇소. 서 형은 오늘 죽을 필요가 없었소. 그렇지만 당신의 손에 죽은 것이오." 주칠칠이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내 손에요?" "그렇소. 당신이......." 주칠칠의 눈이 다시 붉게 물들어 올랐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듯 말했다. "또 제탓이군요. 당신은 어떤 일이라도 나쁜 일만 발생하면 모두 제탓으로 돌리는군요. 오늘 제가 또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죠? 서약우는 좌공룡을 위시한 개방 제자들에게 포위당해 죽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왜 저 때문에 죽었다는 거죠?" 심랑이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그때 만약 서약우를 핍박하여 말을 하게 하지 않았다면 좌공룡은 서약우가 이미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거요. 그랬다면 당연히 공격을 모두 서약우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도 않았겠지요. 자연히 서약우는 죽지 않았을 것이오. 좌공룡은 원래 먼저 전력을 다해 나를 제거한 다음 서약우를 제거할 예정이었소." 주칠칠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당신은 그때 이미 그들에게 포위되어서 위급한 상황에 빠져 있었어요. 당신...... 당신이 만약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서약우 그도 도망가지 못했을 것 아니겠어요?" "당신은 어떻게 내가 그 당시에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것은......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었어요. 당신, 당신은 그때 한참 동안 싸웠지만 한 사람도 쓰러뜨리지 못했잖아요?" "당신은 내가 일격에 그들 중 세 사람을 제압하는 것을 보지 못했단 말이오? 그것을 보고도 내가 이미 위험에 빠져서 그들을 한 사람도 쓰러뜨리지 못할 상황이었다고 생각했다는거요?" 주칠칠이 당황한 듯 말했다. "그것은...... 그것은......." 심랑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당시에 만약 내가 그들의 진법을 깨뜨려버렸다면 그들 중 일부는 서약우에게 칼끝을 돌렸을 것이오. 진법이 깨뜨려지면 내가 당신과 서약우를 돌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소. 그래서 나는 그들과 시간을 끌면서 그들이 진법을 좁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거요. 그들의 진법이 더이상 좁혀질 수 없을 만큼 좁혀들었을 때 일격에 그들을 제거할 생각이었소." 그는 탄식을 하고 이어서 말했다. "어떠한 진법이라도 진법이 좁혀들대로 좁혀들면 쉽게 그 진법을 깨뜨릴 수 있는거요. 왜냐하면 진법이 좁혀들었을 때는 진법을 형성했던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공격을 할 수 없게 되는거요. 이러한 기회를 틈타서 일격을 가한다면 쉽게 그 진법을 깨뜨릴 수가 있는 것이오. 당신은 원래 이처럼 간단한 이치를 알 수 있었소. 그렇지만 당신은 이러한 이치를 알아보려고 애를 쓰지 않았을 뿐이오." 주칠칠의 머리가 점점 밑으로 수그려졌다. 심랑이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고심을 해서 바로 그 진법을 깨뜨리는 순간, 당신은...... 당신은......." 주칠칠이 갑자기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래요, 모두 내 잘못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계속 이어서 소리질렀다. "그렇지만 당신도 생각해보세요. 내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했던건데...... 만약 당신이 아니었다면 내가, 내가 그러한 일을 했겠어요? 하물며, 하물며 당신은 그게 간단한 이치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게 간단한 이치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이 세상 사람들은 당신처럼 그렇게 모두 똑똑한 것만은 아니라구요." 그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방성통곡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망연히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던 심랑이 길게 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됐소, 그만 우시오. 날이 이미 밝았소. 그런데 김무망이 여전히 소식이 없으니...... 어떻든 먼저 김무망 그 친구를 찾아봐야 될 것 같소." 한편 김무망은 차가운 바람 속을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의 머리가 어지럽게 흩날렸다. 차갑게 얼어붙은 어둠 속에서 그의 전신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본래 수수께끼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남에게 얘기해 주지도 않을 뿐더러 심지어 그 자신마저도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생사문제로 고민해본 적도 없으며, 더욱이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눈물을 흘려본 적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는 다만 그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남을 의식하지 않고 해치웠고, 그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한칼에 없애버렸을 뿐이었다. 그는 자기 손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지를 알지도 못했으며, 더욱이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가슴을 아파해본 적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죽어야만 한다는 것은 더할수 없는 진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는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 자신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천지는 캄캄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김불환이 도대체 어느쪽으로 도망갔는지, 어떻게 추격을 해야 되는지 김무망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다만 본능적인 직감을 따라서 추적을 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야수들만이 갖는 본능이었다. 그처럼 평생을 천하를 유랑하는 사람들만이 갖는 본능이었다. 캄캄하게 얼어붙은 천지에서 김무망은 비로소 자신의 생명이 야수와 비슷한 점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의 입가에는 씁쓸하고 조소하는 듯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김무망의 야수처럼 예리한 눈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어슴프레한 물건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백비비가 머리에 꽂고 다니는 비녀였다. 얼마나 총명한 여자인가? 납치되어 가는 그러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지혜와 용기를 잃지 않고 슬쩍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떨어뜨려 김불환이 도망가는 방향을 가르쳐 줄 수 있다니...... 김무망은 백비비의 비녀를 발견하는 순간, 자기가 추적해 가는 방향이 틀리지 않음을 알았다. 그는 더욱 발걸음을 빨리 하였다. 그리고 더욱 예리한 눈을 들어 사방을 더 자세히 살폈다. 비녀가 떨어진 곳에서 수십 장을 더 달려갔을 때, 김무망은 또 백비비가 떨어뜨린 귀걸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수십 장을 달려가자 다른 한쪽 귀걸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손수건과 허리띠도 발견할 수 있었고 마지막에는 백비비가 벗어서 떨어뜨린 신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신발은 작고 붉은 매화가 수놓아진 예쁜 신발이었다. 이러한 물건이 떨어져 있는 이상 김무망의 추적은 훨씬 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김무망이 두번째 신발을 발견했을 때, 그는 갑자기 따뜻하고 짙은 향기가 코속으로 스며듬을 느꼈다. 그것은 차가운 겨울밤, 더할수 없이 사람의 코를 벌름거리게 하는 고기를 굽는 냄새였다. 이처럼 깊은 밤에 황량한 벌판에서 어떤 사람이 고기를 굽고 있는 것일까? 김무망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기냄새를 쫓아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에 어슴프레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집 안에서 너울거리는 불빛마저도 볼 수 있었다. 김무망이 본 집은 황폐한 사당이었다. 그 사당 안에서 너울거리는 불빛은 사당밖의 눈에 덮인 대지를 환히 비춰주고 있었다. 사당의 눈에 덮인 대지에는 새로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김불환의 경공이 비록 약하지는 않으나, 백비비를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눈에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무망은 얼른 사방 밖 벽에 그의 몸을 숨긴 채 그 발자국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발자국을 살펴보던 그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은 이미 그 신발이 마로 짠 신발을 신은 사람이 남긴 발자국임을 알아냈던 것이다. 꼼짝않고 그늘 속에 숨어있던 김무망이 갑자기 새처럼 몸을 번쩍 날리더니 사당 속으로 뛰쳐 들어갔다. 사당 안에서는 모닥불이 활활 타고 있었으며 그 모닥불에는 마침 반 마리의 개고기가 구워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김불환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매우 좁고 다 쓰러져 가는 사당이었다. 그 사당에는 창도 없었고 김무망이 방금 들어온 문이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나 문밖의 눈에 덮힌 대지에는 이 사당 안으로 들어온 발자국이 있을 뿐, 사당에서 밖으로 나간 발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빛이 김무망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비췄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불을 바라보면서 문을 가로막고 우뚝 섰다. 김불환은 틀림없이 아직 이 사당 안에 있을 것이다. 얼어붙은 천지에 유일하게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던 사당에는 순식간에 살기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김무망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나와라! 내가 찾아내기를 기다리는 거냐?" 그의 차가운 음성은 사당의 구석구석을 메아리쳐 울려퍼졌다. 그러나 사방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 사당의 한구석에는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쳐 있었으며,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신단이 있었고, 그 신단의 윗쪽으로는 이미 퇴색한 종이 조각들이 걸려서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었다. 이때, 김무망은 신단 아래쪽에 사람의 다리 비슷한 물건이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김무망은 마치 화살처럼 그곳으로 뛰어가 번쩍 다리를 들어 신단을 걷어찼다. 신단 아래에는 놀랍게도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김불환과 백비비가 아니었다. 그들은 봉두난발의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 옷을 걸친 늙은 두 명의 거지들이었다. 그 거지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차갑게 김무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꿈에라도 나타날까봐 진저리를 칠 만큼 험상。은 모습이었다. 김무망이 아무리 담력이 크다 해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얼른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차갑게 외쳤다. "누구냐?" 그러나 두 거지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김무망을 노려볼 뿐이었다. 김무망을 노려보는 그들의 눈에는 놀라움과 비분과 원망스러움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그것은 두 명의 죽어있는 거지의 시체였던 것이다. 이미 죽어있는 시체임을 확인한 김무망이 천천히 시신들을 살펴보았다. 그 시신들은 이미 죽은 지 적어도 삼 일은 지난 것 같았으나, 추운 겨울날씨 덕택에 아직 썩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시체를 다시 이리저리 주의해 보았다. 그들은 약 오십 남짓한 나이였고, 등에는 몇 자루의 마대를 메고 있었다. 김무망은 마음을 안정시킨 다음 다시 자세히 그 두 사람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얼굴을 살피던 그가 갑자기 실성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단궁(單弓), 구양륜(歐陽輪)!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죽어있는 거지? 도대체 누가 죽인걸까? 그렇다면 그 좌공룡은 또 어디로 간거지?" 개방 삼로의 무공은 비록 강호 중의 절정고수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 명성은 어떠한 절정 고수보다도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오랫동안 강호를 돌아다닌 김무망은 자연 이 두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혁혁한 명성을 갖고 있으며,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개방 삼로 중 두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두 구의 시체로 변해 누워있게 되었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김무망은 차가운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뻗쳐 오름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쳐 모닥불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드는 순간, 그는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듯함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모닥불 위에 올려져 있던 반 마리의 개고기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도대체 누가 가져갔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 김무망의 등 뒤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귀신을 제외하고 누가 이렇게 뛰어난 경공을 가졌단 말인가? 김무망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이순간,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웃음 소리가 나며 천천히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무망!" 김무망이 대갈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는 사당문 밖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의 비쩍 마른 몸은 차가운 바람에 금방이라도 휘어질 듯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음산하고 괴이한 웃음소리를 터뜨리고 있었고 시커멓고 비쩍 마른 손은 귀신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모닥불빛으로 그 사람은 몸에 낡은 옷을 걸친 거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체나 행동거지로 보아 결코 김불환은 아니었다. 김무망은 확실히 강호인이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숨막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을 억제하고 꼼짝않고 그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사람은 마침내 흔들흔들 걸어 들어와서 '하하'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 여러 해 동안 못 뵈더니 이렇게 지옥에서 만나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군요." 김무망이 냉랭하게 말했다. "나 김무망은 아직 여전히 살아있소. 당신이 귀신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은 놀랐을지 몰라도 나 김무망에게는 어림도 없는 짓이오." 그는 목소리가 아직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약간의 동요하는 기색이 조금도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아직 살아계시다구요? 하하 우습군요, 우스워. 김 형께서는 방금 죽었어요. 자기 자신이 죽은 걸 모르시다니 김 형 답지 않군요." 김무망이 냉랭하게 말했다. "나 김무망이 만약 죽었다면, 내 자신이 틀림없이 알 수 있었을것이오. 귀하께서 깨우쳐주는 그러한 수고로움을 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렇지만 귀하는 귀신장난을 하고 있는데 이 김무망은 귀하가 귀신이 되는 것을 원하는 듯하니 진짜 귀신으로 만들어 드리겠소." 그 사람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귀신이오? 김 형이 보시기에 나는 지금 가짜 귀신이란 말이오?" 그는 비록 큰소리로 웃고 있었으나 그 웃음소리에는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기색이 가득차 있었다. 김무망이 날카롭게 말했다. "도대체 누구냐?" "제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 손을 내려봐라." 그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좋소이다. 김 형께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 드리지요. 김 형이 만약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나하고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소? 살아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는 말을 할 수 없는 법이오. 이 점은 알고 계시겠지요?" 말을 하면서 그 사람은 천천히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그 얼굴은 봉두난발의 거무티티한 색이었으며, 두 눈이 붉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바로 개방 삼로 중의 단궁이었던 것이다. 신단 밑에서 시체를 발견했던 일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고기가 사라져버렸던 일들은 이미 김무망을 아연실색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순간, 다시 방금 전에 차갑게 신단 밑에 누워있던 시체가 살아서 자기와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김무망의 담이 아무리 크다고해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얼굴색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단, 단궁! 당...... 당신이......." 단궁이 당황하는 김무망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나는 개방 삼로 중의 하나인 단궁이오. 나는 당신이 나를 알아볼 줄 알고 있었소. 방금 당신이 살아있을 때 내 죽은 모습을 보았는데 금방 죽어서 다시 내 모습을 보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죠?" 이순간 김무망이 아무리 총명하고 침착하다 해도 어리둥절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고개를 돌려서 그 신단 아래 누워있던 두 구의 시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단궁의 손이 뻗쳐와서 전광석화처럼 김무망의 혈도를 봉해버렸다. 그가 깜짝 놀라는 순간, 단궁의 손이 그의 몸에 닿았으며, 그는 그에 따라서 쓰러져버렸다. 다만, 김무망은 쓰러지기 전에 얼핏 신단 아래에 있는 두 구의 시체가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죽은 단궁이 신단 밑에 여전히 누워있다면 이 살아있는 단궁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이때 김무망의 뇌리에 번쩍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단궁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왕련화, 네 녀석이었구나." 그는 비록 왕련화에게 혈도를 제압당하여 쓰러졌으나 그의 말소리는 여전히 냉혹하고 차가왔다. 그 살아있는 단궁이 앙천대소하면서 말했다. "과연 김무망 당신답구려. 다만, 당신이 지금에야 내가 누군지를 알아차렸으니 좀 늦었다고 생각되지 않소?" 그는 광소를 터뜨리며 몸을 돌렸다. 그가 다시 김무망에게 돌아섰을 때 그 시커멓던 피부와 튀어나왔던 눈알은 이미 사라졌고,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을 가진 젊은 소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왕련화였다. 김무망이 한스러운 듯 말했다. "내가 진작 네 녀석인줄 알았어야 했는데......."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당신만을 탓할 수 없겠죠. 방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떠한 사람이라도 모두 놀라서 혼비백산했을 것이오. 자연히 판단력이 흐려졌겠죠."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지붕 위에서 또 일진의 자극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에 이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통쾌하군요, 통쾌해! 언제나 남에게 겁이나 주던 김무망이 오늘 도리어 놀라서 혼비백산하다니 말이오." 웃음소리와 더불어 한 덩어리의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지붕 위에서 밑으로 내려왔다. 그것은 바로 방금 사라져버렸던 개고기였다. 원래 그 개고기는 가느다란 줄에 매어 있었던 것이다. 김무망이 사당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사당 안에 인적이 있는가 없는가에 주의했을 뿐, 모닥불 위에 얹혀져 있던 개고기가 얇은 줄에 묶여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당 안에 비록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으나 어두침침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여기에 더하여 김무망이 그 개고기를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그 개고기가 줄에 매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김무망은 속으로 탄식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냉랭하게 말을 했다. "원래 네 녀석들은 내가 쫓아올 줄을 알고 있었던 거로구나. "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우리는 확실히 당신이 쫓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에서 이처럼 완벽한 계획을 세울 수가 있었겠소?" 천정 위에서 웃음소리가 나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바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오." 말소리와 더불어 하나의 인영이 떨어져내렸다. 그것은 바로 김불환이었다. 그는 얼굴 가득 득의의 기색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여 김무망을 바라보고 또 웃으면서 말했다. "김무망, 하하. 김무망! 오늘 같은 날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김무망이 차갑게 말했다. "그렇게 득의해 할 필요는 없다." 눈 위에 난 발자국 김불환은 이순간 김무망이 놀랍고 후회스러움에 당황한 모습을 보일줄 알았으나, 김무망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그를 모욕하고 괴로움을 주려고 했으나 오히려 김무망이 전혀 흐트러짐조차 보이지 않자 약이 올랐다. 그는 눈을 굴려 사방을 돌아보더니 비굴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네 녀석이 여기까지 쫓아올 때는 상당히 기고만장했겠지? 네 녀석은 스스로 자신의 지혜가 상당히 뛰어나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천만의 말씀! 네가 무엇을 보고 여기까지 뒤쫓아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이상하지 않더냐?" "무슨 말이냐?" "네 녀석은 기껏 길에 떨어져 있는 비녀나 귀걸이, 손수건, 신발들을 보고 뒤쫓아 온 것이 아니냐? 너는 그 물건들은 보고 백비비가 자기가 납치되어 가는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서 떨어뜨린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 그렇지만 네 녀석이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 그것은 백비비가 그 물건들을 떨어뜨린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약간의 수단을 부린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김무망이 냉랭하게 말했다. "대단한 수단이로군!" 그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여전히 침착하고 차갑게 굳어 있었으나, 사실 속으로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김불환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 녀석의 실수를 한 가지 더 가르쳐 줄까? 백비비가 나에게 제압되어 있는 상황 하에서 비록 나 모르게 슬쩍슬쩍 비녀나 귀걸이 같은 것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해도 어떻게 신발을 벗어서 떨어뜨릴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네 녀석은 조금이라도 고민을 했어야 했다." 김무망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그래, 아주 대단한 수단이로군. 그날 진작 네 녀석을 죽였어야 하는건데......." 김불환은 통쾌하다는 듯 대소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후회가 너무 늦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그날 네 녀석이 나를 살려준데 대해서 나는 조금도 감사하는 마음은 없어. 그날 네 녀석이 나를 살려준 것은 네 녀석이 자비로와서라기보다 모두 나의 재주로 네 녀석이 나를 놓아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거야!" "그래, 그 재주도 대단한 재주라고 해두자!" "그날, 네 녀석은 나를 놓아줬지만 오늘 나는 네 놈을 죽여야겠는데...... 그날 나를 놔준 것에 대해서 매우 후회스럽겠지. 겉으로야 비록 조금도 후회하는 빛을 드러내지 않겠지만,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겠지만, 네 녀석은 지금 그날 나를 놓아 준 것에 대해서 너무 후회하고 있겠지." 김무망이 냉랭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놈은 지금까지 내가 어떤 일을 하고나서 후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네 녀석이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오늘은 후회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또 네 녀석이 남에게 굴복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오늘은 나에게 굴복을 해야만 할 것이다. 네 녀석은 스스로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네 녀석의 일거일동은 모두 우리 계산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과연 그럴까?" "우리는 네 녀석을 이곳까지 유인해 올 때, 이미 너 혼자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랑이 네 녀석과 같이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거지!" 김무망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만약 심랑이 나하고 같이 이곳에 왔다면 네 녀석들이 이렇게 쉽게 나를 사로잡을 수가 있었을까?" 김불환이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미 심랑이 네 녀석하고 같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손을 쓰려고 계획을 했던 거지. 우리가 어떻게 심랑이 네 녀석하고 같이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는지에 대해서 네 녀석은 이상하지 않다는 건가?" 사실 김무망은 김불환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 점이 궁금했다. 그리고 벌써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표정은 더욱더 싸늘하게 굳어갔다. 김무망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랑이 나하고 같이 오든 안오 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김불환은 김무망의 반문에 깜짝 놀란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네 녀석은 우리가 심랑이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다는 거냐?" 김무망은 관심 없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이 모습을 본 김불환은 오히려 입이 근질거리는 듯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이 알고싶지 않다고 해도 나는 꼭 네 녀석에게 우리가 어떻게 심랑 그 녀석이 같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는지에 대해 말을 해야만 하겠다!" 그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김무망을 화나게 하고 싶었다. 김무망의 표정이 차가우면 차가워질수록, 침착하면 침착해질수록 그는 도리어 속이 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 자신이 먼저 김무망 때문에 화가 나버렸던 것이다. 그는 얼굴을 험상。게 찌푸리더니 김무망의 옷깃을 부여잡고 크게 외쳤다. "똑똑히 들어! 그 놈은 개방 사람들에게 오늘 저녁 죽지 않는다 해도 결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소위 강호 제 일방이라는 개방은 이미 우리에게......." 왕련화는 계속 가벼운 웃음을 띤채 두 사람의 수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간, 김불환의 입에서 개방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마자 그는 가볍게 기침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시오!" 김불환은 하던 말을 즉각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련화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선 너무 많은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김불환이 얼른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예, 예......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군요!" 그는 거칠게 김무망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왕련화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이 녀석은 곧 죽을 놈인데 조금 많은 것을 들었다 해도 발설할 염려는 없지 않겠습니까?" 왕련화가 말했다. "그래도 매사에는 조심을 하는 게 좋지 않겠소?" "예, 예.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김무망은 실눈을 뜨고 그 두 사람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는 김불환이 왕련화에 대해서 이처럼 비굴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김불환이 이미 왕련화에게 매수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김불환이라는 인간은 원래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가 누구에게 매수를 당했든 김무망은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김무망이 놀랐던 것은 천하제일방이라는 개방도 이미 왕련화와 한통속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개방도 왕련화에게 매수를 당했단 말인가? 단궁과 구양륜, 개방의 두 장로는 왕련화에게 대항을 했기 때문에 참사를 당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개방은 무엇 때문에 심랑을 못살게 구는 것일까?) 김무망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으나 그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왕련화는 사당의 입구 문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무엇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참이 지나자 멀리서 일진의 말발굽 소리가 급하게 들려오더니 이어서 낮고 침중한 음성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공자, 속하가 돌아왔습니다!" 왕련화가 물었다. "내 명령을 제대로 이행했느냐?" 그 사람이 말했다. "속하는 이미 명을 받들고 백 아가씨를 안전하게 모셔 놓았습니다. 아마 지금쯤 백 아가씨는 잠이 들어있을 겁니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잘했다. 며칠 동안 고생했구나. 가서 전대위에서 은자 오십 냥을 가져다가 며칠 푹 쉬도록 해라. 그리고 실컷 놀고 나서 다시 와서 내 명령을 기다리도록 해라!" 그 사람의 목소리에 기쁜 기색이 넘쳐 흘렀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왕련화가 말했다. "밖에 나가서 놀때 하고 싶은대로 재미있게 놀아도 좋은데 꼭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도록 조심해라. 만약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면 수습하기가 매우 까다로워질 테니까. 더구나 강호인들에게 네 정체가 탄로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해라!" 그 사람이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본문은 본문의 속하들에 대해서 비록 관대하지만 속하들이 만약 규정을 어기는 경우에 받을 고통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네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더욱 공손해졌다. "잘 알고 있습니다!" 왕련화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제 됐다. 그만 가봐라!" 그러나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 사람은 여전히 가지않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러자 왕련화가 또 입을 열었다. "내가 가라고 했는데 왜 가지 않고 여전히 여기 있는거냐?" 그 사람이 우물쭈물 말했다. "속하에게 또 한 가지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인지 말해 보도록 해라!" 그 사람이 말했다. "방금 연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조명(趙明)이 저와 함께 이곳에 왔습니다!" 왕련화가 눈섭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조명? 그 녀석이 돌아왔다면 얼른 이곳으로 올 것이지 왜 밖에서 여지껏 기다리고 있단 말이냐?" 그 사람이 말했다. "조명이...... 조명이...... 감히 공자를 뵐 면목이 없다고 해서......." "나를 볼 면목이 없다고? 혹시 일이 잘못됐다는 말이냐?" "조명이 연주에 파견되어 갔던 일은 아주 잘 되었다 합니다. 연주에서는 명령하신 대로 이틀만에 은자 오천 냥을 내놓아서 이미 가져왔다 합니다!" "그렇다면 조명에게는 공이 있을 뿐이지 잘못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나를 볼 면목이 없다는거지?" 그 사람이 우물쭈물 말했다. "그 친구는, 그 친구는 다른 일 때문에 먼저 속하로 하여금 공자께 사과말씀을 드리도록 부탁을 했던 겁니다!" 왕련화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우물거리지 말고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해라.!" "조명, 그 친구는...... 그 친구는 태부인(太夫人)께서 데리고 계신 목녀평아(萍兒)와 눈이 맞아서......." 왕련화가 재촉했다. "눈이 맞아서 어쨌다는 건가?" "평아가...... 평아가 애를 가졌답니다. 그래서 지금...... 지금......." 왕련화가 '흥!'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그 일은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왕련화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오르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 일은 기뻐해야 할 일인데 왜 조명은 나를 뵐 면목이 없다고 하는거지? 빨리 이곳으로 들어오도록 불러라!" 그 사람은 예상밖인 듯 한참 동안 아무소리 못하고 있더니 짤막하게 대답했다. "예!"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나자 젊은 사람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조명이 공자님을 뵙습니다.!" 왕련화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연주에 갔던 일 때문에 고생이 많았겠구나!" 조명이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 일은 속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너와 평아간에 있었던 일은 이미 내가 모두 알고 있다. 너는 성실한 친구라고 알고 있는데 이제보니 상당히 풍류를 좋아하는 친구였구나. 젊은 사람이 풍류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주 칭찬할만한 일이지!" 조명은 일순간 왕련화의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몰라서 오직 사과하는 말을 연신 중얼거릴 뿐이었다. "공자께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왕련화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평아...... 평아는 평상시에는 차갑기가 얼음장 같더니 너에게 마음을 허락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네 재주가 대단한 모양이지?" 조명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기쁨에 들뜬 소리로 말했다. "용장 밑에 약졸이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 제가 공자와 같은 주인을 모시고 있는데 풍류, 그 방면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못 해서야 되겠습니까?" 왕련화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다. 좋아. 과연 용장 밑에 약졸이 없었구나. 원래 너의 풍류기질은 바로 나를 배운 것이었구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몸은 마치 화살처럼 사당 밖으로 튕겨져 나갔으며 이어서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말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네 놈이 감히 나를 닮으려 하다니......."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문밖에서는 조명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비명이 끝나는 순간 왕련화는 다시 사당으로 돌아와 문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주위에는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흘렀다. 한참 후 왕련화가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말했다. "조명의 시신을 떼메다가 장사를 잘 지내주도록 하여라. 그리고 또 전위대에 가서 은자 이백 냥을 더 가져다가 평아에게 주고 조명이 연주에서 순사했다고 전해주도록 해라!" 그 사람의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아...... 알았습니다!" 이순간, 그 사람은 놀라서 이가 맞부딪혀 말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하였다. 이들의 대화와 왕련화의 행동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김무망도 이순간 얼굴색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에야 비로소 왕련화가 거느리고 있는 조직의 방대함과 그 조직의 치밀함, 그리고 규율의 삼엄함 등이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이 어린 왕련화의 속하에 대한 분명한 상벌의 시행과, 용의주도한 수단은 이미 일대효웅의 기개를 갖추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순간, 김무망은 비로소 자신이 왕련화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갑자기 일진의 바람이 불어왔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도 돌아오는구려!" 왕련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당 안에 피워놓은 모닥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하더니 사당에는 또 전신에 검은 옷을 걸친 장한이 나타났다. 김무망은 속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련화의 속하 중에 이렇게 경공이 뛰어난 인물이 있을 줄이야. 도대체 어떤 내력을 가진 사람일까?) 방금 나타난 흑의 장한은 몸이 비쩍 마르고 키가 작았으며 전신을 검은 옷으로 칭칭 동였을 뿐만 아니라 머리에도 검은 복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 흑의인의 번쩍이는 두 눈만이 밖으로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그 흑의인은 번쩍이는 두 눈을 들어 김무망을 한 번 쏘아보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잘됐군! 네 녀석이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와 있을 줄이야."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녀석을 알고 계시오?" 흑의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방금 내가 이 녀석과 심랑이라는 녀석을 유인해 냈을 때, 이 녀석이 그 심랑이라는 녀석과 동시에 약간의 재주를 부려서 나를 속이려 했었지요. 다행히 내가 그 꾀에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을 속이려 했다니...... 이 친구들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겠소?" 김무망은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새로 나타난 흑의인이 바로 방금 전에 자신과 심랑이 쫓아갔던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왕련화가 또 말했다. "당신은 왜 지금에야 돌아 오시는거요?" 흑의인이 말했다. "이 녀석과 심랑 그 녀석이 몇 마디 소곤대더니, 이 녀석은 다시 이 녀석들이 묵었던 객점으로 돌아가버렸소. 그러나 심가 성을 가진 그 녀석은 그 자리에 숨어서 내가 나타나기만을 계속 기다리는거요. 인내심이 대단히 강한 녀석이었소. 내가 숨어서 꼼짝을 않자 그 녀석도 꼼짝을 하지 않았소!"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랬을거요. 심랑 그 녀석은 인내심이 상당히 강한 녀석이라고 할 수 있소이다!" 흑의인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주칠칠이라는 그 아가씨는 내가 보기에 너무 인내심이 없는 아가씨였소. 이 녀석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우리가 숨어 있는 곳으로 심랑을 계속 부르며 뛰어왔던 것이오. 심랑도 더이상 숨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그 아가씨를 따라서 객점으로 돌아가버렸소."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되겠구려?" "그렇소이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 이순간까지 나는 그곳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왕련화가 문밖의 하늘을 힐끗 살피더니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시간을 보건데, 지금쯤 개방 제자와 심랑이 맞닥뜨렸을거요!" 김불환이 말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왕련화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개방, 그 몇 안 되는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심랑을 어떻게 하지 못했을 거요. 다만 서약우는 아마 그들 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될거요!" 김불환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심랑이 만약 우리의 일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심랑이 비록 우리의 계책이었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별로 상관이 없소. 골치 아프게 되는 것은 개방일 뿐이오. 우리는......." 김불환이 가볍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공자의 귀신 같은 판단에 나는 탄복할 수밖에 없소이다." 그들 세 사람은 옆에 김무망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듯 서로 주거니 받거니 거침없이 말을 해댔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김무망은 속으로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는 오늘, 결코 그들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몇 개의 장작을 더 집어넣자 모닥불은 더욱 거세게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당문 밖에서는 이미 흐릿하나마 밝은 빛이 비춰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미 아침이 밝아왔던 것이다. 왕련화는 사당문 입구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숙이고 왔다갔다 하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미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 이미 돌아왔어야 하는데......."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갑자기 사당 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흑의인이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제 돌아온 것 같소!" 또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그 발자국 소리들은 사당에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이어서 세 명의 거지가 큰 걸음걸이로 사당 안으로 들어왔다. 앞장 선 사람은 머리가 이미 허옇게 세었으며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등에는 여덟, 아홉 개의 마대를 매고 있었다. 김무망은 이 사람이 바로 개방 삼로 중의 좌공룡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강호상에 협의의 인물로 널리 알려진 좌공룡이 왕련화와 같은 패거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왕련화는 좌공룡에 대해서는 그래도 꽤 예를 갖추는 편인 듯해보였다. 그는 좌공룡을 바라보고 가볍게 웃으면서 예를 하고 말했다. "방주께서 고생을 하셨겠습니다!" 좌공룡은 수염을 쓰다듬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공자께서는 그렇게 부르지 마시오. 이 노부가 방주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소이다. 노부를 방주라고 부르는 건 노부를 당황하게 만드는 게 아니겠소?"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좌 형께서 비록 지금 방주 자리에 오르지는 않으셨지만 그 두 녀석이 이미 제거된 이상, 그리고 또 왕 공자께서 뒤에서 좌 형을 보고 있는 이상 그 방주 자리는 좌 형이 아니면 누가 차지할 수 있겠소?" 공룡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노부가 진정 개방의 방주가 되는 날이 있다면 개방의 집법 장로(執法長老) 자리는 김 형이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을 것 같구려."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집법 장로라구요? 보수가 얼마나 되지요?" 좌공룡이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는 농담도 잘하시는구려. 김 형께서 요구하는대로 어찌 이 노부가 드리지 않을 수 있겠소?"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먼저 이 자리에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왕련화가 입을 열었다. "개방의 오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군요!" 좌공룡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비록 아주 만족할만 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성과는 있었소이다!" 왕련화가 말했다. "서약우는 이미 부상을 당한 몸이었는데...... 그가 신이었다해도 살지는 못했겠죠?" 김불환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심랑은 어떻게 되었죠?" 좌공룡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심랑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닌 것 같소이다!" 김불환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그 녀석의 명이 이렇게 길 줄이야!" 그는 수십 년 동안 강호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으나 그 숱한 강호인물들 중 심랑을 제일 두려워했다. 그를 만나는 강호인들은 대부분 골머리를 앓았으나 김불환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이는 바로 심랑이었던 것이다. 왕련화는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는 아직 실망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소. 어쩌면 내년 오늘이 바로 심랑의 제삿날이 될지도 모르니......." 김불환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넘쳐 흐르더니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왕 공자께서는 무슨 좋은 방책이라도 있으시다는 겁니까?" "김 형께서는 내가 말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시오?" "공자께서 묘책을 갖고 계시다면 빨리 말씀해 보시오!" 왕련화가 천천히 말했다. "대략 한 시진이 지나면 심랑은 틀림없이 이곳에 나타날 것이오!" 좌공룡이 말했다. "어떻게 그러리라고 생각하오?" 왕련화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든 지금 상황에서 그 녀석은 틀림없이 김무망과 백비비의 종적을 찾아 나서지 않겠소?" 김불환이 맞장구를 쳤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왕련화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녀석은 김무망과 백비비를 결코 찾아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서조차 발견하지 못할 것이오." 김불환이 그 말을 받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 그 녀석이 아무 단서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곳에까지 올 수 있겠소?" "그는 처음에는 단서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겠지요. 어느 길이나 모색해 볼 가능성이 있으니까. 만약 김 형이 심랑의 처지라면 어떤 길을 찾아 보겠소?" 김불환이 말했다. "그것은......."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내가 심랑이라면 나는 개방 제자들의 발자국을 쫓을 것이오. 개방 제자들의 발자국을 쫓다보면 비록 김무망을 찾아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개방 제자들이 도대체 어디로 몰려 갔는지는 알아낼 수 있을 것 아니겠소?" 김불환이 박수를 치고 말했다. "아! 그렇겠군요! 공자께서 생각할 수 있는 걸 나는 왜 생각하지 못하는지......." 좌공룡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당신과 나 같은 사람이 공자의 생각을 쫓아갈 수 있겠소?" 김불환이 또 말했다. "그렇지만 심랑이 여기까지 쫓아온다고 해도 또 어떻게 그를 처치한단 말이죠?" 왕련화가 말했다. "심랑, 그 친구의 무공은 확실히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녀석을 상대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계책으로 해야지, 무공으로는 당할 수가 없을거요. 어떻든 그 녀석은 반드시 두 발로 걸어서 이곳에 올 것이오. 그러나 다시는 이곳에서 돌아갈 수는 없게 될거요." 김불환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심랑 그 녀석도 상당히 잔재주가 많은 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거요!" 왕련화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는 김무망은 잔재주가 없다고 생각하시오? 김 형께서 보시듯 지금 김무망은 내 발 아래 꿇어 엎드린 죄수꼴이 되어 있지 않소. 김무망을 속일 수 있었는데 심랑을 속이지 못하리라는 보장이라도 있다는거요?" 김무망이 갑자기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심랑의 지략은 나보다 수십, 수백 배나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네 녀석의 그 얄팍한 귀신 장난으로 심랑을 속일 수 있을 것 같느냐? 이건 정말 미치광이가 멀쩡한 사람에게 설교를 하는 것보다도 더 우스운 일이군!"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마시오. 틀림없이 심랑은 걸려들고 말 테니까." 그는 김무망을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악독한 살기로 가득차 있었는데 그는 김무망을 노려보면서 한 자 한 자 십듯이 말했다. "내가 심랑을 잡기 위해 두 가지 계책을 세워놓았는데, 첫번째 계책이 실수하면 나는 두번째 계책을 사용할 것이다. 내가 두번째 계책을 사용할 때는 네 녀석에게 빌릴 물건이 한 가지 있을 것 같은데......." 김무망이 노갈을 터뜨렸다. "나 김무망이 오늘 네 녀석의 손아귀에 떨어진 이상 이미 살 생각은 없다. 그러나 만약 네 녀석이 나를 능욕하려 한다면, 나는...... 나는......." 왕련화가 가볍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김 대협은 하늘이 내리신 귀재인데 본인이 어찌 감히 김 대협께 약간이라도 무례를 범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환 형, 제 말이 맞습니까?"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하, 맞소! 맞소!"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김 대협께서 방금 말씀하셨듯이 김 대협이 오늘 보잘 것 없는 본인의 수중에 떨어진 이상 본인이 김 대협을 좀 능욕한다해도 김 대협께서는 또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불환 형, 제 말이 맞습니까?" 김불환이 팔장을 낀 채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맞소, 하하. 맞소!" 김무망은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으나 더이상 아무 말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김불환이 말했다. "김무망, 네 녀석은 이제야 강적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겠지? 네 녀석의 무공이나 표정은 비록 나를 놀라게 할 수는 있어도 우리 왕 공자에게는 통하지 않아. 심랑이라는 녀석도 왕 공자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물건에 불과하지. 그리고 또 네 녀석이 비록 쾌락왕 문하의 사대사자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쾌락왕도 왕 공자의 눈에는......." 왕련화가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그만두시오!" 그는 또 김무망에게 고개를 돌리고 가볍게 웃으면서 이어서 말했다. "김 형께서 쾌락왕에 대해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이 나온김에 본인은 또 김 대협께 한 가지 해야 할 말이 생각났소이다. 김 대협의 그 사대사자 중의 한 사람인 색사자 말씀이오. 본인은 그 색사자를 손아귀에 잡은 적이 있지만 다시 그 녀석을 놔주었소이다. 물론 본인이 자비심이 일어서 그 녀석을 놔준 것은 아니오. 김 대협께서는 본인이 왜 그 녀석을 놔주었는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왕련화는 빙글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띤채 김무망을 바라보았으나 김무망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이를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왕련화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본인이 그 녀석을 놓아준 이유는 다만 한 가지, 그 녀석으로 하여금 쾌락왕에게 김 대협이 쾌락왕을 배반했다는 것을 말하게 하려 함이었소이다. 쾌락왕이 자신을 배반한 수하들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는 김 대협께서는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김불환이 대소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녀석이 오늘 우리 왕 공자 수중에 떨어진 것은 그런대로 운이 좋은 셈이라고 말을 해야 될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사당 안으로 불어왔다. 왕련화는 김무망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뚫어질 듯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심랑, 심랑! 어째서 아직까지 오지 않는건가? 네 녀석이 정말 보고 싶구나." "김무망을 찾아야 한다구요? 당연히 찾아야 되겠지요. 그러나 어디로 가서 찾지요?" 주칠칠은 눈앞에 펼쳐진 막막한 눈밭을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제가 비록 김무망이 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긴했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쫓아갔는지는 모르고 있어요.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람을 찾아야 되는거죠?" 심랑은 전방만을 뚫어질 듯 주시할 뿐,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칠칠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심랑, 말좀 해 보세요." 심랑이 고개를 돌려 주칠칠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개방 제자들도 모두 김 형이 사라진 쪽으로 도망을 갔소. 개방 제자들이 남긴 발자국은 아마 충분히 쫓아갈 수 있을거요." "개방 제자들을 쫓아간다구요? 당신은 방금 가장 중요한 문제가 빨리 김무망을 찾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개방 제자들이 남긴 발자국을 쫓아가는 것과 김무망을 찾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심랑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 형이 어느쪽으로 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소. 그러나 개방 제자들이 도망간 방향도 김 형이 쫓아간 방향이 일치하고 있지 않소? 그렇다면 우리는 개방 제자들의 발자국을 쫓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소? 그들을 쫓아가다보면 어쩌면 김무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오." 주칠칠이 박수를 치고 좋아하며 말했다. "그렇겠군요. 역시 당신이 똑똑하긴 똑똑해요. 그러면 이 발자국을 쫓아가기로 해요. 비록 김무망을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망할 개방 제자녀석들은 찾아낼 수 있겠지요." "내 생각도 그렇소." 그는 비록 입으로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으나 그 자리에 우뚝 선채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주칠칠은 심랑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우두커니 서 계시는거죠?" "그 발자국을 쫓아간다는 것도 약간 꺼림칙한 면이 있어서 그러오." "어떤 면이 꺼림칙하다는 거죠?" "백비비가 납치된 일은 어쩌면 개방 제자들이 이곳에 찾아왔던 일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오. 그리고 개방의 반란, 서약우가 말했던 비밀은 또 어쩌면 김불환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오. 이 일들은 비록 전혀 서로 관계가 없는 듯하지만 어쩌면 한 사람이 모두 계획하고 실행한 일인지도 모르오. 그 사람은 어쩌면 바로......." 그는 천천히 말소리를 멈추더니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볼 뿐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칠칠이 조급하여 다그쳤다. "어쩌면 누구라는 거죠? 쾌락왕인가요? 아니면, 아니면...... 왕련화라는 말씀인가요?" 심랑이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바로 맞혔소. 왕련화요." "흥! 왕련화라면 어때요?" 심랑이 말했다. "이 일들을 모두 왕련화가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라면 우리가 개방 제자들의 발자국을 쫓아가다보면 우리는 틀림없이 왕련화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될 것이오. 왕련화, 그 친구의 교활하고 악독함은 천하무쌍이라고 할 수 있소. 우리의 행동이 이미 그의 계산 속에 있는 것이었다면 우리가 쫓아가는 길은 상당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할 수 있소." 주칠칠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한참을 심랑을 바라보더니 실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당신의 머리는 아무도 쫓아갈 사람이 없지요. 그렇지만 당신은 너무 세세한 것까지 걱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당신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아예 이곳에 가만히 서서 쫓아가지 않으면 되겠지요."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갈공명의 신기에 가까운 예비능력은 아무도 쫓아갈 사람이 없소. 그렇지만 제갈공명의 일생은 조심스러움을 제일로 삼았다는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소?" 주칠칠이 실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자기 자신을 제갈양과 비교하다니 말이에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제갈공명보다 못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렇지만 조심은 어디까지나 조심일 뿐이고, 쫓아가기는 쫓아가야겠지요." 그는 마침내 큰 걸음으로 개방 제자들이 남긴 발자국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지기(知己) 길은 눈에 덮혀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뼈를 에일 듯 휘몰아치고 있었으나 심랑과 주칠칠은 고통스럽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들이 한참을 달려갔을 때, 바람에 실려 고기를 굽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주칠칠이 눈을 반짝 빛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이 부근에 어쩌면 도둑 고양이가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아직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고기를 굽는 것을 보니 말이에요." 심랑이 말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이런 엄동설한에 황폐한 교외에서 고기굽는 냄새가 나는 게 당신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소?"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도둑 고양이는 어느 곳에나 다 있는 법 아닌가요?" 심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고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그 쓰러져 가는 사당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개방 제자들의 발자국도 바로 그 사당 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주칠칠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한데......." "당신은 이제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소?" "고기 굽는 냄새는 이 사당 속에서 풍겨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고기를 굽고 있는 걸까요? 개방 제자일까요? 만약, 개방 제자라면 그 녀석들이 어떻게 여기서 한가로히 고기나 구워 먹을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거죠?" 심랑이 신중하게 말했다. "원래 위험한 일일수록 겉으로는 안전하게 보이는 법이오. 당신 눈에 보이는 여유와 한가로움 같은 것은 어쩌면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함정일지도 모르오." 주칠칠은 그래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말했다. "고기 한 덩어리에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거죠? 그 고기에 독이라도 발라 놨다는 건가요? 만약 독이 발라져 있다면 또 어때요? 우리가 먹지 않으면 그걸로 되지 않겠어요?"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어떤 때는 확실히 상당히 똑똑한 편이오." 주칠칠이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상당히 멍청하다는 거죠?"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당신이 제대로 알아맞췄소." 주칠칠은 여전히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이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당신 혼자 뿐이에요. 천하의 똑똑함이란 똑똑함은 모두 당신에게만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겉으로는 화가 난 듯 말을 하고 있었으나, 한동안 그녀를 야단치기만 했던 심랑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본 그녀의 마음은 날아갈 듯 기뻤다. 이때, 심랑은 주칠칠의 기분을 모르는 듯 그 사당을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주칠칠이 그 모습을 보고 그를 팔굽으로 툭 치면서 불렀다. "이봐요!" 심랑이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왜 그러시오?" "들어가요. 여기서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것 아니겠어요? 사당 안에 무슨 매복이 되어 있거나 함정이라고 해도 들어가서 살펴봐야 되지 않겠어요?" 심랑은 그녀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사당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들어갈 테니까 당신은 여기서 나를 기다리도록 하시오." 주칠칠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했으나, 심랑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속으로 탄식을 하며 억울한 듯 고개를 숙이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때는 아가씨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오. 만약 사당 안에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당신에게 곧 알리도록 하겠소." 말을 마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주칠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를 불러 세웠다. "이봐요!" 심랑이 눈썹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주칠칠이 말했다. "나를......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요." 심랑은 마침내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사당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심랑의 뒷모습을 보면서 주칠칠은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사당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심랑이 사당 안에서 놀람에 찬 부르짖음이나, 노한 외침 혹은 왁자지껄한 소리, 무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심랑이 사당으로 들어간 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으나 사당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밖에는 여전히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얼어붙은 대지는 죽은 듯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주칠칠은 입술을 깨물고 두 주먹을 부르쥔 채 미칠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으나 사당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도대체 사당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심랑은 도대체 사당 안에서 어떤 상황에 빠져있단 말인가? 혹시 왕련화에게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왕련화! 네 녀석이 만약 심랑을 죽였다면...... 심랑을 죽였다면 나도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주칠칠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참지 못하고 사당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어두침침하던 하늘은 이미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어슴프레한 빛이 허물어져 가는 사당 안을 비추자 그 사당 안은 더욱 음산하고 괴기에 넘쳐 흘러 보였다. 사당 안에 피워 놓았던 모닥불은 다 사그러들고 있었다. 모닥불 위에 얹어 놓았던 고깃덩어리도 불길이 사그라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시커멓게 타들어 가지 않은 채 여전히 그대로 걸려 있었다. 사당 안에 걸려 있던 퇴색된 휘장들은 이미 찢겨져내려 사당 안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신단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뒤집혀져 있었다. 그리고 모닥불과 신단 사이에는 시커멓게 거무스레한 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은 물이 아니고 선혈이었다. 그러나 방금 사당 안으로 들어간 심랑의 모습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사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귀신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심랑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미 왕련화에 의해 당했단 말인가? 주칠칠은 놀람에 차 부르짖었다. "심랑!" 날카로운 부르짖음 소리는 죽음과 같은 정적을 깨뜨려버렸다. 이때였다. 갑자기 뒤집혀진 신단 아래서 머리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심랑의 머리였다. 심랑은 신단 아래서 머리를 쳐들어 주칠칠을 힐끗 바라보고는 재빨리 다시 신단 아래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주칠칠은 나는 듯이 그쪽으로 달려들어가 한 팔로 심랑의 몸을 끌어안고 기쁨과 놀라움과 원망이 섞인 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계셨군요. 아무 일 없었군요. 왜 저에게 한 마디도 말을......." 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랑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냉랭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말을 했다. "나가시오 !" 주칠칠은 깜짝 놀라 심랑의 목을 끌어 안았던 손을 얼른 풀었다. 여태껏 심랑이 그녀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이처럼 자신에게 냉정하게 대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주칠칠은 심랑의 목을 끌어 안았던 손을 놓고 자신도 모르게 얼른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서는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랑은 여전히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홀린 듯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주칠칠은 알 수 없었다. 일순간 그녀는 가슴이 차갑게 식어감을 느꼈다. 그녀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끝났어...... 끝났어...... 내가 이게 무슨 고생이지?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거지? 왜 집에 가만히 앉아서 행복하게 살지 않고 이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이런 고생을 하는거지? 이러한 모멸감을 참아야만 하는거지?" 그녀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좋아, 심랑, 당신이 나를 이렇게 밖에 대해줄 수 없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을 보지 않을거야.) 그러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심랑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대체 심랑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지를 말할 수 없었다. 호방함으로 말하자면 웅묘아보다도 못했고 침착함으로 말하자면 김무망보다 못했다. 만약, 풍류와 준수함,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으로 말하면 그는 왕련화보다도 훨씬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왠일인지 심랑 외에는 아무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심랑이 보이기만 하면 그녀의 가슴에는 기쁨이 넘쳐 흘렀으며, 환희로 가득찼다. 만약 한시라도 심랑을 보지 못하면 그녀는 조바심이 나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저 사람은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 그리고 나는 왜 저 사람을 이렇게 쫓아다니는 거지.) 일순간 그녀는 사랑과 원망이 가슴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며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울먹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방성대곡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심랑, 심랑, 미워요 정말 미워요." 그러나 심랑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칠칠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당신은 죽었어요 말좀 하세요." 그녀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갑자기 손을 들어 심랑의 얼굴을 세차게 후려 갈겼다. 그러나 심랑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여전히 꼼작을 않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주칠칠로 하여금 사랑과 원망에 지치게 만든 심랑의 뺨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하나 생겨났을 뿐이었다. 주칠칠은 조급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여 마침내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을 터뜨렸다. "심랑, 당신은 왜 저를 이렇게 대하는 거예요? 왜 그러는 거죠? 제발 죽여주세요.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애절한 울음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장이 녹아나는 듯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심랑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마침내 그녀의 울음소리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심랑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소? 이제 좀 괜찮아졌소?" 주칠칠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일순간 희열이 지나갔다. 그러나 심랑은 또 이어서 김무망을 향해 말했다. "김 형. 괜찮소. 힘내시오." 심랑은 그녀에게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주칠칠의 얼굴에 일순간 떠올랐던 희열의 표정은 실망과 원망으로 넘쳐 흘렀으나 곧이어 놀람에 차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심랑의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로소 심랑의 앞에 한 사람이 엎드러진 채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무망이었다. 김무망은 핏구덩이 속에 엎어져 누워있었다.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얼굴은 마치 백짓장 같았으며 호흡은 이미 상당히 미약해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는 이미 다 죽어 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사당 안에 언제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김무망은 왜 또 이렇게 변해있단 말일가? 왕련화, 김불환은 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주칠칠의 눈길은 김무망의 얼굴을 훑어내려가면서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팔은 어깻죽지에서부터 싹뚝 잘려 나가 있었다. 거기에는 붉은 피가 범벅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칠칠은 너무나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심랑은 오른손 바닥을 김무망의 가슴에 대고 내력을 주입하여 곧 끊어지려는 김무망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주칠칠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김무망, 김무망, 당신 어떻게 된 일이죠?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죠." 그녀는 방성통곡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입술을 악물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소리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마치 줄 끊어진 연처럼 끈임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김무망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김무망, 죽어서는 안 돼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지 마세요." 그녀는 속으로 전심전력을 다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심랑, 부탁이에요. 제발 그 사람을 살려주세요. 당신이 그 사람을 살려낼 줄을 믿어요." 미약한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 번, 두 번, 김무망이 마침내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심랑의 창백하고 침통한 그리고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무망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하자 그의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가에 비로소 약간의 안도의 기색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김무망이 마침내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점점 김무망의 호흡이 거칠어졌으며 가슴의 기복이 더욱 커졌다. 주칠칠은 두 주먹을 부르쥐고 입술을 악물었다. 그녀는 마치 전신의 기력을 다해 김무망과 더불어 죽음의 문턱을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김무망이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지난날의 칼날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는 흐릿한 눈을 들어 주위를 몇 번 훑어보더니 심랑의 얼굴에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그는 애써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심, 심랑......." 심랑이 재빨리 그의 손을 들어 김무망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면서 말했다. "김 형!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걱정 마시오. 모든 게 다 잘 되었소." 김무망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서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과 안심과 기쁨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죽음 속에서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평생의 지기라고 할 수 있는 심랑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입가에 일말의 안도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방금 겪었던 그 싸움은 지금 이 순간 그에게는 마치 악몽을 꾼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는 방금의 그 악전고투로 벌인 싸움이 상당히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되었다. 만약 방금의 그 싸움이 없었다면 심랑은 혹시 이순간 이미 왕련화의 간사한 계략에 말려 들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주칠칠도 길게 안도의 숨을 불어내 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김무망, 괜찮으세요." 이때 갑자기 심랑이 "흥!"하고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여전히 주칠칠에게 차가운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칠칠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김무망의 귓가에 갖다대고 가볍게 그를 불렀다. "김무망......." 그러나 심랑이 냉랭하게 말했다. "비키시오. 김 형을 귀찮게 하지 마시오." 주칠칠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며 재빨리 뒤로 물러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제가 귀찮게 한 것은 아니잖아요. 저는, 저는......." 말을 하던 그녀는 마치 무엇을 생각해 낸듯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몸을 이리저리 뒤지며 무슨 물건을 찾던 그녀가 마침내 은박지로 싼 조그마한 물건을 꺼내들고 기쁜소리로 외쳤다. "여기에 약이 있어요." 심랑이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약이오." "부상을 당했을 때 쓰는 약이에요. 듣건데 이건 황제가 사는 황궁에서 쓰는 약이래요. 우리 아버지가 상당한 고생끝에 얻어낸 약이에요. 제가 집을 나올 때 아버지 몰래 슬쩍 한 봉지 갖고 나왔어요." 심랑이 말했다. "이리주시오." "반은 상처 위에 바르고 반은 물에 타서 마시면 되요." 김무망은 약을 복용한 후에 얼굴색이 상당히 좋아져 있었다. 주칠칠은 사당 안에 공기가 차가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쉬지 않고 땔감을 장작불 속에 집어 넣어 모닥불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불빛 속에서 보는 김무망의 얼굴은 붉은 기운이 다시 나타난 듯하여 보였다. 그는 다시 눈을 뜨고 심랑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감격의 눈빛이 넘쳐 흐르고 있었으나 입으로는 한 마디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간단히 심랑에게 말했을 뿐이었다. "잘 됐구려. 마침내 심 형이 왔구려." 심랑도 마침내 얼굴에 웃음을 보였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제가 왔소이다. 김 형께서는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많은 말을 하게 되면 몸을 상하게 되오." 김무망이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시오. 나는 이미 죽지 않을 자신이 있소." 그는 눈을 들어 사방을 훑어보더니 주칠칠을 바라보고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얼굴에서 사라졌으며 그의 눈에는 다시 환한 기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왕련화는 어디로 갔소," 심랑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를 보지 못했소이다." 김무망이 원망스러운 소리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나쁜녀석." 주칠칠은 김무망을 바라보다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그녀석에게 부상을 당하게 된거죠." 김무망이 말했다. "그녀석이 비록 나를 이렇게 부상시키기는 했지만 그녀석도 온전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이것은 도대체......." 그녀는 원래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하고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심랑을 쳐다보는 순간 그녀는 얼른 말을 바꿔서 말했다. "말을 많이 하면 몸을 해칠 우려가 있으니 그만 쉬도록 하세요. 몸이 완쾌가 되면 계속 말을 하도록 하세요." 김무망이 다시 심랑에게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일을 나혼자 가슴 속에 묻어 둔다면, 내가 더 괴로울 것 같소. 내가 말을 할테니 제발 들어주시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만약 말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되면 말을 해보십시오." 김무망이 말했다. "내가 심 형과 헤어진 다음 객점에서 두 아가씨와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전부 알고 계시겠죠? 제가 곧장 이곳까지 추적해 왔을 때 갑자기 고기 굽는 냄새를 맡게 되었고 곧장 이 사당 안으로 뛰어들었소. 그러나 이 사당은 바로 나를 유인하기 위한 함정이었소. 나는 사당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계책에 말려들어 사로잡혔소." 주칠칠이 심랑을 바라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확실히 아무 일도 심랑을 속일 수는 없군요. 이 사람은 그 고기굽는 냄새를 맡자마자 금방 알아차렸어요. 이곳이 틀림없이 함정이라는 것을......." 심랑이 차갑게 그 말을 가로챘다. "끼어들지 마시오." 심랑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던 주칠칠은 도리어 면박을 당하고 다시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김무망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얼굴은 후끈 달아 올랐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그녀는 다시 김무망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심랑에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나는 이미 요혈을 제압당했소. 그녀석들은 내가 이미 그들의 그물 속의 고기이고 밥상 위에 올려진 국이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오. 그래서 나를 앞에 두고 아무 거리낌 없이 이말저말을 하는 것이었소. 그때야 나는 비로소 왕련화 그녀석들이 상당히 잔인하고 간악하고 그리고 상당히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소. 그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방대한 규모였소."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황련화 그 친구는 확실히 총명한 사람이오. 그러나 그 총명함이 도리어 그 친구를 망쳐놓는 것 같소." 김무망의 말은 계속 되었다. "후에 개방 삼로 중에 좌공룡이 사당으로 들어왔소. 좌공룡이라는 그녀석은 평소에 인과 의를 중시하는 도덕군자인 체 하지만 누가 그녀석이 이미 왕련화에게 매수당했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소. 그녀석은 단지 개방 방주라는 자리 하나 때문에 왕련화와 한통속이 되어 있었던 거요." 심랑은 얼굴색을 변하면서 말했다. "서약우가 알고 있었던 비밀은 과연 왕련화와도 관계가 있었던 거군요." 김무망이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서약우? 그가 도대체 무슨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요?" 심랑이 말했다. "그가 알고 있었던 비밀은 개방의 반란사실에 관한 걸거요." 그는 이어서 서약우가 어떻게 그들을 찾아왔으며, 또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상세히 김무망에게 들려주었다. 심랑의 말을 다 듣고 난 김무망이 한참을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서약우 그 사람과 개방 삼로 등 네 사람은 바로 이 사당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오. 밤이 한참 깊었을 때 왕련화 그 녀석이 나타났겠지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서약우는 내가 왕련화 그 녀석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큰 비밀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바로 나에게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왔던 것 같소." 김무망이 말했다. "그러나 서 형은 또 어떻게 심 형께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까요?" 심랑이 말했다. "제가 생각컨데 틀림없이 좌공룡은 그 당시에 이미 왕련화의 심복이 되어 있었을 것이오. 내 행적에 대해서는 왕련화 입에서 말이 나왔겠죠. 그리고 틀림없이 서 형은 그곳에서 내가 어디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거요." 김무망이 말했다. "왕련화가 얼마나 생각이 치밀한 인간인데 서약우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은 왕련화의 눈에서 벗어 날 수 없었을 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의 행적은 이미 왕련화의 눈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을 거요.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나를 찾아내기도 전에 이미 왕련화에게 부상을 당했던 것일거요. 그러나 어떻게 또 서 형이 왕련화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를 모르겠소." 주칠칠이 얼른 끼어들면서 말했다. "그때 왕련화는 틀림없이 다시 그 산 위에 있는 소굴로 돌아갔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를 해치려고 모든 노력을 쏟고 있었겠죠. 그렇기 때문에 서약우는 비록 부상을 당했지만 왕련화가 방심하는 틈을 타서 빠져 나올 수 있었을 거예요." 잠깐 말을 멈췄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서 설명했다. "서약우는 비록 왕련화의 손에서는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감시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대낮에는 행동하지 못하고 깊은 밤에 모든 사람들이 잠에 빠진 후에야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삼 경에 우리를 찾아왔던 것일 거예요." 김무망이 웃으면서 말했다. "최근 당신은 사태에 대한 분석능력이 매우 나아진 것 같구려." 그러나 심랑은 도리어 차갑게 말을 했다.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전체 대국을 얘기하는 것이오. 그런 자질구레한 자그마한 일들은 생각해볼 필요가 없소. 주칠칠의 추측이 비록 맞았다 할지라도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대국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소. 당신은 가급적 말을 적게 하는 게 좋겠소." 김무망의 칭찬하는 말에 기쁜 기색이 얼굴에 떠올랐던 주칠칠은 다시 심랑의 이러한 말에 얼굴색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더이상 이곳에서 머뭇거릴 수가 없음을 느꼈다. 그러나 또 그곳을 얼른 뛰쳐 나가기도 난처했다. 김무망이 안스러운 눈길로 주칠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소이다. 주 아가씨가 얘기한 것은 사소한 일들에 불과하오. 왕련화가 그때 어디 있었던, 어떻든 이순간 그는 다시 나타났소. 서약우가 그순간 어떻게 왕련화의 손에서 도망쳐 나왔든 이순간 서 형은 이미 운명을 달리했소." 심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서 형이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와서 말을 했던 왕련화의 비밀을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요. 서약우는 헛되게 목숨을 버렸다고 얘기할 수가 있겠죠. 상당히 억울한 죽음이었소." 김무망이 침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일은 비록 빤히 죽을 줄을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소. 그리고 그 일을 했을 경우 과연 이로움이 있는가 없는가는 그 일을 한다는 사실과는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소. 서약우는 비록 자기의 목숨을 걸고 무용한 일을 했지만, 그는 인,의를 위해서 죽었으니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었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거외다. 그의 죽음이 어찌 억울하다고 얘기할 수가 있겠소." 심랑이 얼굴색을 변하면서 말했다. "김 형의 금과옥조와 같은 말 가슴에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김무망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방금 한 말은 생각나는 대로 몇 마디 해본 것에 불과하오. 심 형께서는 이미 그러한 일들을 하고 계시니 제가 더이상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심랑이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할수록 더 빨리 죽게 되는 법이오. 반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럴수록 죽을 기회에서 살아나는 경우가 많은 법이지요." 김무망이 갑자기 대소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의 그 말씀이 바로 금과옥조라고 얘기할 수 있소. 그 말을 명심하고 가슴에 새겨 두지 아니할 수가 없구려. 나 김무망이 방금 만약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어쩌면 지금 이순간 이미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죠?" 심랑이 말했다. "왕련화와 그 친구가......." "김무망은 상당히 흥분한 듯해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는 이미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심랑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을 가로채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왕련화, 김불환, 좌공룡 등은 누구든 모두 이미 내가 금방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온갖 수단을 다해 나를 능욕했을 뿐만 아니라 내 앞에서 어떻게 심 형 당신을 해칠 것인가에 대한 계획까지도 서슴없이 얘기를 하는 것이었소. 나는 겉으로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모습을 지어 보였지만 사실상 나는 이미 속으로 내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왕련화 그 친구의 눈이 상당히 악독하고 날카롭다고 하지만 김형의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바까지야 알아낼 수 없었겠지요. 그리고 왕련화만이 아니라 세상의 누가 김 형의 마음 씀씀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소." "그녀석이 비록 내 속을 엿볼 수 있었다 해도 그 당시의 내가 상당히 비분강개한 태도를 지어보이는 것이 일부러 지어 보였던 태도라는 것을, 그리고 또 꼼짝하지 못하고 그자리에 드러누워있는 것이 사실은 재빨리 몰래 일 수 있었음에도 가식적으로 취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오." 주칠칠이 다시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러나 그 당시 당신은 이미 왕련화 그녀석에게 혈도를 제압당했던 게 아니었던가요?" 김무망이 말했다. "그순간 내가 왕련화 그녀석에게 혈도를 제압당한 것은 매우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혈도를 제압당하는 순간 나는 재빨리 몰래 운기를 했기 때문에 그녀석이 혈도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던 거요." 심랑이 말했다. "해내(海內)의 무공명사들 중 만약 운기조식을 가지고 논한다면 이미 옛날에 대가라고 손꼽을 수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소. 아울러 형산회합 이후에 그는 더욱더 많은 성취를 이뤘을 게 틀림없소. 다만 놀라운 것은 김 형께서 시옥관 그 사람에게서 바로 그 운기조식하는 것을 배웠다는 사실이오. 시옥관이 자신의 절기를 그 수하에게 전수하였다는 사실이 나 심랑을 상당히 탄복하게 만드는구려." 김무망이 처참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입을 열었다. "시옥관 그 사람이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 문제에 관해서는 논하지 맙시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시옥관에게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고 사람을 제대로 쓸줄 아는 재주가 있소. 그리고 그 문하인들에게는 조금도 숨기는 법이 없소."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일대 효웅은 당연히 일반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법이오. 만약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할 장점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할 악행을 저지를 수 있겠소. 아! 김 형께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나도 한시 바삐 그사람을 한 번 만나보고 싶소." 김무망이 놀랍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심 형 당신은 그사람을 상당히......." 심랑이 말허리를 잘랐다. "시옥관의 악독한 행위에 대해서는 더이상 참을 수 없소. 그렇지만 그 사람의 뛰어난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는 탄복할 수밖에 없소이다." 김무망은 더이상 쾌락왕 시옥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심랑의 얼굴을 바라보던 김무망이 말을 돌려 자기가 하던 말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비록 운기해서 혈도를 제압하는 왕련화의 손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왕련화의 지력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었소. 나는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소."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왕련화 그 친구 또한 오늘날의 효웅의 한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겠죠." 김무망이 이어서 말했다. "내가 그들 손아귀에 잡힌 제물인 척 행동했던 데에는 내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어서였소. 첫째는, 시간을 벌어서 운기를 하여 마비된 전신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고,둘째는 비밀을 엿듣기 위함이었소. 그리고 그 녀석들이 심 형 당신이 틀림없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추측해냈을 때 나는 그곳에서 가만히 그 상태 그대로 심 형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손을 쓸 생각이었소." 주칠칠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또 끼어들었다. "왕련화 그 녀석이 정말로 심랑이 이곳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요." 김무망이 말했다. "왕련화의 예감은 상당히 뛰어난 것이었소. 그는 심 형 당신이 개방 제자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이곳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해냈던 거요. 그래서 당신을 사로잡을 궁리를 하였소." 주칠칠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왕련화의 지략이 비록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렇지만 심랑은, 심랑은 이미 그 점을 알아차렸던 거예요."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는 슬쩍 곁눈질로 심랑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심랑은 도리어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당신을 벙어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소." 주칠칠이 말했다. "아!그래요. 그래요. 가서 장작이나 더 지펴야 되겠어요." 그녀는 몸을 돌려 얼른 모닥불 쪽으로 뛰어가서 곁에있는 장작들을 집어 모닥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김무망은 그녀의 들썩이는 어깨를 바라보면서 가볍게 탄식했다. "가련한 아가씨!" 그러나 심랑은 얼굴색을 바꾸지 않은 채 김무망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소." 김무망이 말을 이었다. "후에 그녀석들은 심 형 당신이 나타나기 전에 나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말을 했소. 그래서 나는 상대가 많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부득이 맞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소." 심랑은 다시 사당에 어지러운 모습을 한 번 휘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생각컨데 그것은 틀림없이 일장의 경천동지할 싸움이었겠구려." "그것은 인간의 싸움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소. 그것은 야수의 생사를 건 싸움이었소. 왕련화, 김불환, 좌공룡 세 사람의 무공은 확실히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그는 처연하게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만 김불환 그녀석은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이미 겁에 질려 있었고 좌공룡은 비록 매우 경험이 풍부하고 그 무공 또한 뛰어난 것이었지만 내 살기가 대단함에 놀라서 그의 능력을 오분의 일밖에 발휘할 수가 없었소. 다만 왕련화 그녀석은 확실히 늑대와 같은 인간이었소." 심랑이 말했다. "왕련화의 무공도 그녀석의 지략 만큼이나 뛰어나고 독랄하다는 건가요?" "그녀석은 각문각파의 장기를 모두 겸비한 잡다한 무공을 펼치고 있었소. 그리고 그 초식에 독랄함은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족할 정도였소. 그렇지만 가장 두려웠던 것은 그 녀석의 심계가 그녀석의 무공을 더욱 흉악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소." "김 형의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요." "깊은 뜻을 가진 것은 아니오. 다만 그녀석의 무공이 상당히 복잡하고 심계가 뛰어났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던 것이오. 그녀석은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하기 전에 이미 상대방이 어떠한 초식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었소. 때문에 상대방이 공격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상대방이 공격해올 초식을 미리 막아 버리는 것이었소. 그리고 그녀석은 마음과 손의 일치가 마치 팔뚝과 손가락이 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잘 통했소." "그 친구의 무공은 천법 대사와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되오?" "천법 대사는 결코 그의 공격을 이십초 이상 받아내지 못할 거요." 심랑이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대단하다는 거요?" 김무망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심 형께서는 틀림없이 그녀석의 무공이 그처럼 대단한데 내가 어떻게 그녀석을 부상을 입힐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는 거겠죠?" 심랑은 당연히 그의 오기를 잘 알고 있었다. 김무망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는 재빨리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뜻으로 말을 한 것은 아니었소." "만약 무공으로 말한다면 확실히 나는 그녀석에게 부상을 입힐 수는 없었소. 그러나 심 형께서도 아시다시피 싸움을 할 때 가장 뛰어난 무공은 바로 목숨을 내놓고 싸운다는 것이오." 목숨을 내놓고 덤비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싸움도 막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심랑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김무망이 처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 오른팔을 제물로 삼아 비로소 그녀석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었던 거요. 다만 애석한 것은 그순간 내 자신이 혼절을 하였기 때문에 그녀석에게 얼마나 큰 부상을 입혔는지는 알지 못하겠다는 거요." 심랑이 말했다. 김 형의 일장을 어떻게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몸으로 막을 수가 있었겠소. 만약 그녀석의 부상이 크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지금 이순간 제가 김형과 이렇게 평안히 말을 할 수 있겠소? 김무망의 얼굴에 비로소 약간의 웃음기가 돌았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렇소이다 내가 생각컨데 그녀석은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 것이오. 그래서 더이상 심 형을 해치려는 생각을 못하고 이 자리를 빠져나갔던 것일 거요." 심랑은 김무망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길게 탄식 하면서 말했다. "김 형, 당신은 하필 그렇게 할 필요까지야......." 김무망이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내가 어떻다는 거요. 내가 잘못 했다는 거요."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저를 많이 생각해주시다니 제가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김무망이 말했다. "내가 심 형 당신을 위해서 그랬을 것 같소. 이 일은 원래 내가 방심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일 뿐이오. 이 일이 심 형 당신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요?" "그렇지만 김 형 당신은 그들과 직접 싸울 필요가 없었소." 심랑은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했다. "사실의 김 형의 마음은 저기 피워져있는 모닥불보다도 더 뜨겁다는 것을 나 심랑은 알고 있소이다. 김 형의 그러한 말씀은 불안한 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인 줄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는 괴로운 듯 얼굴을 약간 찡그리고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만 김 형께서는 모르시는 점이 있소. 김 형께서 저를 위해서 이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내 마음은 더욱더 괴롭다는 것이오. 나는, 나는......." 김무망이 큰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심 형이 왜 괴롭다는 거요. 심 형은 벌써 내가 이미 병신이 되었다고 동정하는 거요. 흥! 나 김무망이 비록 팔이 한쪽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두 팔을 가진 그녀석들보다 수십 배 수천백 배 더 강하다는 것을 심 형은 믿지 못하겠소." "나는, 나는......." 김무망이 날카로운 소리로 질책했다. "더이상 말하지 마시오. 심 형은 오늘 왜 말 많은 아가씨처럼 그렇게 말이 많소. 심 형은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줬는데 나는 한 마디도 고맙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소. 그런데 심 형은 그와 같은 사소한 일을 가지고 그렇게 말이 많은 거요." 심랑이 갑자기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사내 대장부에게 있어서 그까짓 팔 하나가 대수로울수 있겠소. 외팔이 김무망은 틀림없이 두 팔을 가진 왕련화보다 수십백 배 더 강할 것이오." 그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중상을 입고 피구덩이에 드러누운 채 일어날 수도 없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서로 크게 웃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칠칠은 비록 그들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나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가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와 닿았다. 일순간 그녀의 두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번에 흐르는 그녀의 눈물은 가슴이 아파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감동하여 흐르는 눈물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면서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김무망은 점점 자신의 기력이 다시 돌아옴을 느꼈다. 그것은 기적처럼 빠르게 부상에서 회복되고 있었다. 그는 기쁨에 차올라 더욱더 큰소리로 웃어 제꼈다. 그러나 갑자기 그는 심랑의 웃음소리가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심랑의 손이 시종 그의 가슴에 얹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랑은 지금까지 자신의 진기를 계속 김무망에게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무망의 부상이 그렇게 빨리 치유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쉬지 않고 오랫동안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기는 무공을 연마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것이며 피와 같은 것이다. 무공을 연마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진기는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심랑은 이순간 이처럼 중요한 자신의 진기를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김무망에게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무망은 쉽게 회복될 수 있었으나 자신은 도리어 기력이 쇠하여져 힘을 잃어갔던 것이다. 김무망이 갑자기 웃음 소리를 뚝 그치고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빨리 손을 내 가슴에서 떼시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알았소. 하하...... 알았소." 심랑은 사실 더이상 버틸 기력이 없었다. 그는 김무망의 가슴에서 손을 뗀 다음 비스듬히 신단에 기대었다. 심랑과 김무망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동정은 모두 주칠칠의 눈과 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더이상 심랑의 일의 관계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무섭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결코 이 남자를 포기할 수 없어. 만약 이 남자를 포기한다면 더이상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어지는 거야. 결코 영원히 나는 포기할 수 없어. 만약 이 남자를 포기한다면 나는 일생을 후회와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할거야.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괴롭혔든 나는 반드시 이 사람을.......) 그녀는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모닥불로 이미 잘 익은 고기를 손에 들고 심랑쪽으로 걸어갔다. 고기는 껍질이 이미 불에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으나 향기는 더욱 사람의 구미를 끌어 당겼다. 주칠칠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피곤하시죠? 이것 좀 드세요." 그러나 심랑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 "치우시오." 주칠칠이 말했다. "제가 이미 은비녀로 독이 들어 있나 없나 살펴봤어요. 괜찮아요." 심랑이 여전히 말했다. "치우라고 그랬소." 주칠칠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고기를 드시고 싶지 않다면 이 부근에 틀림없이 마을이 있을 거예요. 무엇을 드시고 싶은지 말씀만 하세요. 제가 가서 사오도록 할게요. 김무망 당신도 무엇을 좀 드셔야 할 것 같아요." 심랑이 말했다. "우리에게 신경쓰지 마시오." "그러나 저는...... 저는 당신을 위해서 무슨 일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심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고 싶다는 거요? 좋소, 우리를 위해서 한 가지 일만 해주시오." 주칠칠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흐르며 재빨리 심랑의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죠? 말씀만 하세요. 무슨 일이든 제가 할 수만 있다면 다 하겠어요."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우리에게서 약간 멀리 떨어져 있어주는 거요. 멀면 멀수록 좋소. 영원히 내 눈에 보이지 않게 멀리 떨어져 있어 준다면 당신은 나를 위해서 아주 좋은 일을 하는 셈이오. 나는 당신에게 상당히 많은 고마움을 느낄 것이오." 주칠칠은 깜짝 놀란 듯 입을 약간 벌린 채 심랑을 멍한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둥그런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띤채 말했다. "그렇지만 저는, 저는......."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 눈길을 돌리자 김무망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김무망이 쳐다보며 마음 속으로 비웃으면 어떠랴!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심랑을 받아드리기로 결심했는데. 그녀는 입을 깨물면서 이어서 말했다. "제가 도대체 무슨 일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그렇게 화를 내시는지 제발 좀 말씀해 주세요.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반드시 앞으로 잘못하지 않도록 고쳐 나갈 거예요. 약속 드릴게요. 반드시 고칠게요." 이러한 말을 그녀는 평생 입밖에 내본 적이 없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가볍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얼굴에 미소를 띤 모습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정과 쓰라림, 그리고 괴로움을 동시에 띠고 있는 그러한 흐느낌이었다. 심랑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주칠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마치 얼음처럼 차가왔고 쇳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주칠칠로 하여금 마음을 떨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죠? 뭘 잘못한 거죠?" 심랑이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거요? 만약 당신이 아니었다면 백비비가 어떻게 납치될 수 있었겠소. 만약 당신이 아니었다면 김 형이 어떻게 이러한 모습으로 부상을 당할 수 있었겠소." 주칠칠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모두 제 잘못이란 말인가요." 심랑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면 누구 잘못이라는 거요. 당신이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생각해 줄줄 알았더라면, 당신이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줄줄 알았더라면 이러한 일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요." 주칠칠의 눈에서 빗물처럼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그러나 나는 나는......." 심랑이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 날카롭게 질책했다. "당신이라는 여자는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멋대로이고 질투만 할줄 아는 여자요. 당신은 자신이 기쁠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조금도 생각할 줄 모르는 여자요. 당신은 자신이 기쁠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심장이 갈갈이 조각조각 찢어진다고 해도 결코 애석해 하지 아니할 그런 여자요." 심랑의 이 말들은 마치 채찍처럼 주칠칠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심랑의 질책하던 소리를 듣던 주칠칠은 마침내 그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이렇게 심한 질책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지금 이순간 심랑의 이러한 질책에 멍청해져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반문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정말 그렇게 못된 여자란 것인가?) 순식간에 웅묘아, 백비비, 방천리, 전영송 등등 그 사람들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체면을 손상당하고 어떤 사람은 그녀 때문에 자존심을 상했고, 어떤 사람은 그녀 때문에 가슴의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나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나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계속 자기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던 심랑이 말했다. "그렇소. 당신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소. 그렇지만 당신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다는 거요. 이러한 가슴의 상처는 사실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자르는 상처보다 더 괴롭게 만드는 거요. 당신은 언제나 당신 혼자만이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소. 다른 사람들이 언제나 당신을 존중해주고 당신을 사랑해주기만을 원했던 거요. 당신은 모든 사람들 머리 위에 있기를 원했고, 모든 사람을 자기 발아래 깔아 뭉게기를 원했소. 당신은 언제나 모든 사람이 당신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자란 사람이오." 주칠칠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아녜요. 아녜요. 저는 결코 그런 적이 없어요." 그러나 심랑은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아니라고 할 생각이오?" 주칠칠이 방성통곡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좋아요. 당신말대로 나는 나쁜 여자예요. 그렇지만 나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사람이잖아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당신은 그런데도, 그런데도 용서해줄 수 없다는 건가요." 그러나 심랑은 여전히 차갑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그러한 점들을 도저히 그냥 용납할 수 없소." 주칠칠은 손을 들어 땅바닥을 내리치면서 부르짖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도 당신은 모두 용서해 주었어요. 당신은 왜 나만 유독 용서해 줄 수 없다는 건가요?" 심랑이 차갑게 말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용서해 준 것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준 것보다 훨씬 많았소." 주칠칠은 입술을 깨물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심랑의 면전에 우뚝 서서 눈물을 참고 이를 깨물면서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나를 용서해줄 수 없다면 나도 당신에게 더이상 용서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어요. 다만 당신이 이미 당신이 용서할 수 없는 많은 나쁜 사람을 죽였듯이 당신이 용서할 수 없는 저도 죽여주세요." 심랑이 차갑게 내뱉었다. "죽여달라고? 나는 그것도 못 하겠소." 주칠칠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당신 너무 하는군요. 당신에게 더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요. 다만 당신 손에 죽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것마저도 못 해주겠다는 건가요? 저를 죽여 줄 수도 없다는 건가요?" 심랑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칠칠은 다시 그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통곡을 했다. "하느님! 아! 하느님!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죠? 나보다 더 나쁜 사람들도 최소한 심랑의 손에 죽을 수는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저는 지금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데 어째서 심랑의 손에 죽을 수도 없다는 건가요." 심랑은 가볍게 눈을 감았다. 김무망은 벌써 눈을 감은 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의 어떠한 말로도 지금 이순간 주칠칠의 마음을 위로할 수는 없을 듯하였다. 그녀는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심랑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원망스럽고 심랑이 원망스러워도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사당 안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물건들을 집어서 심랑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날카롭게 외쳤다. "당신을 저주할 거예요.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당신을 저주할 거예요."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몸을 돌려 사당 밖으로 뛰쳐 나갔다. 한참이 지나자 심랑은 눈을 떳으나 그 자리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다. 김무망도 마침내 눈을 뜨고 조용히 심랑을 바라보았다. 심랑은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김무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심 형! 당신 마음은 강철로 만든 거요?" 심랑의 웃음 속에는 처량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겠소?" 김무망이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그녀를 그렇게 차갑게 대할 수 있소?" 심랑이 말했다. "김 형 생각엔 내가 그녀를 어떻게 대했어야 옳았다고 생각하시오?" 김무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는 거요." 심랑이 말했다. "김 형의 말씀은 그녀를 용서해 주라는 거요?" 김무망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심 형께서 더이상 그녀를 용서해 줄 수 없다해도 심 형은 다시 그녀를 용서해 주어야만 하오." "무슨 말이오?" 김무망은 어두침침한 사당의 천장의 한쪽 끝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심형 당신이 내 나이 만큼만 더 살면 곧 알게 될거요. 세상에는 미녀가 수도 없이 많지만 주칠칠처럼 당신을 깊게 사랑하는 여자를 찾기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오." 그는 천장 한쪽을 바라보던 눈빛을 돌려 심랑을 바라보면서 이어서 말했다. "심 형! 당신은 어떻든 그녀의 모든 행동이 남을 해치기 위해서 했던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오. 당신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면서 유독 그녀에게만은 관대하지 못한거요?" 심랑은 가볍게 눈을 내리 감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한 자세로 있던 심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관대해 질 수 있소. 그렇지만 그녀에게만은 관대해 질 수 없소." 김무망은 멍청한 듯 한참을 그를 바라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탄식을 내뱉은 다음 말했다. "그렇소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해 질 수 있소. 그렇지만 그녀에게만은 관대해 질 수 없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미묘하고도 복잡한 관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한참이 지나서 심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용서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도저히 그녀를 용서해 줄 수 없소." 그의 말을 듣고 김무망이 다시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있지만 당신은 용서해 줄 수 없을 것이오. 다른 사람들의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만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으로 족하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상의 문제로 자신의 일을 방해받는다 그래도 괜찮다고 할 수 있소. 그렇지만 심 형 당신은 당신의 어깨에 걸린 책임이 너무 무겁소. 너무, 너무 무겁소......." 심랑이 고개를 들고 김무망을 바라보며 웃었다. "김 형은 내 평생의 유일한 지기라고 할 수 있소."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심랑이 천천히 대답했다. "한 인간이 한 사람의 지기를 얻을 수 있다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모닥불은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당은 점점 더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모닥불이 사당 안을 따뜻하게 하는 건지 두 사람간의 우정이 사당을 따뜻하게 하는 건지 하여튼 두 사람은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어떻든 제발 그녀가......." "어떻든 제발 그녀가......."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어 꼭 같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하고자 했던 말이 어떻든 제발 그녀가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오."라는 말이었다는 것을....... 무덤 속의 비밀소굴(秘密巢窟) 사당을 미친 듯이 달려나왔던 주칠칠은 이순간 터벅터벅 정처 모를 곳으로 발길을 옮겨 놓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마치 칼날처럼 와 부딪히던 차가운 바람은 그녀의 얼굴을 마비시켰고, 은은한 아픔까지 동반한 채 마치 수백만 마리의 거미가 그녀의 얼굴을 기어가는 듯한 간지러움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고, 그녀의 발걸음은 천 근 만 근 터벅터벅 한 걸음 한 걸음씩 옮겨 놓고 있었다. 이때, 앞에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집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그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따뜻한 한 그릇의 국물과, 따뜻한 침대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본 것은 집이 아니었다. 그리고 따뜻한 한 그릇의 국과 침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집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상 하나의 무덤일 뿐이었다. 그 무덤은 부잣집 무덤인 듯 상당히 거대한 크기였다. 그녀는 다시 실망했다. 실망해서 크게 한숨을 불어냈다. 왜 그녀에게는 아픔과 절망만이 찾아온단 말인가!그녀는 그 무덤의 묘비 뒤에 웅크리고 주저 앉았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직 이 묘비 뒤만이 차가운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묘비 뒤에 쭈그리고 앉은 그녀는 신발을 벗어 발가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발가락을 주무르던 손을 멈추었다. 정처없이 미친 듯이 달릴 때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으나 지금 묘비 뒤에 웅크리고 앉고보니 그녀의 가슴에는 다시 억울함과 원망스러움이 되살아 났던 것이다. 그녀가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심랑은 그녀를 미워했다. 그녀는 그것이 괴로웠다. 그래서 심랑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는 좋게 대하면서 나에게는 그렇게 차갑게만 대하는 걸까?" 그녀는 심랑이 미웠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매우 잘해주는데 나는 왜 그들을 상대하지도 않았을까. 왜 나를 차갑게 대하는 심랑을 잊지 못하고 자꾸 그를 생각하는 것일까?) 주칠칠은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싫었다. 그녀의 마음은 사랑과 원망과 괴로움으로 어지러워 더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사람의 말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녀는 바짝 긴장하며 숨소리를 죽이고 그 말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그런데 어디서 들려오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니 그 소리는 무덤 속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소리는 틀림없이 무덤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려오다니...... 죽은 사람이 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주칠칠은 깜짝 놀라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침착을 되찾고는 즉각 생각을 굴리기 시작했다. (혹시 이 무덤은 어떤 무리들의 비밀소굴이 아닐까?) 그녀가 다시 눈을 들어 사방을 살피는 순간 이미 그 묘비 아래서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 무덤 속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방금까지 전신에 기력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던 주칠칠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장 남짓 떨어져 있는 돌하루방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가 이렇게 번개같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본능적인 잠재력으로 뛰어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돌하루방 뒤에 몸을 숨긴 후 여전히 참지 못하고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펴보았다. 그 묘비가 약간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시커먼 입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무덤의 입구에서 한 사람의 머리가 쑥 빠져 나왔다. 그 뒤를 이어 또 한 사람의 머리가 나왔다. 그 사람들은 양가죽으로 만든 겉옷을 걸친 대한들이었다. 먼저 뛰쳐 나온 사람이 건성으로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 사람은 주위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듯 그저 슬쩍 훑어 볼 뿐이었다. 뒤쫓아 나온 사람은 주위를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은채 다시 그 묘비를 밀어서 입구를 닫아 버렸다. 묘비의 입구를 닫은 두 사람은 큰 걸음으로 묘비 앞에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서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말했다. "그 병신 녀석은 도대체 어떤 녀석이지? 기개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이러한 엄동설한에 우리에게 수십 리 길이나 가서 약을 지어오게 시키다니 말이오. 사람을 일부러 괴롭히려는 수작이지 뭐요?"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왕 형! 제발 그만 원망하시오. 그 녀석이 누구든 어떻든 우리 두목하고 의리 관계가 보통이 아닌 것 같지 않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두목이 여기까지 데리고 왔겠소?" 왕씨라 불린 사람이 말했다. "흥! 만약 내가 그러한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 병신녀석의 말을 들었을 것 같소." 다른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든 하루 종일 무덤 속에 앉아서 술과 여자와 노닥거리는 일보다는 차라리 이런 기회에 한 번이라도 밖으로 나와서 시원한 바람을 마셔 보는 것도 좋지 않소?" 왕씨 성을 가진 대한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우리 이 기회에 한 번 세상 구경이나 실컷 해봅시다. 그 병신 녀석은 얼핏 보아하니 약을 먹지 않아도 죽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두 사람은 서로 떠들고 웃으면서 주칠칠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주칠칠은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진 다음 숨었던 돌하루방 뒤에서 일어나 묘비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들어 묘비를 밀어 봤다. 그러자 가볍게 밀었을 뿐인데도 그 묘비가 이렇게 쉽게 열려질 줄이야! 그 묘비가 열리자 입구가 드러났다. 묘비가 움직이는 순간 주칠칠의 가슴도 동시에 움찔하고 움직였다. (도대체 어떤 녀석들의 소굴이지? 그리고 또 그 병신이라는 녀석은 누구지? 소굴을 무덤 속에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틀림없이 좋은 인간들은 아니 것 같은데. 죽든 살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나 보자.) 이렇게 결심한 주칠칠은 천천히 그 입구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여자였다. 특별난 일이 없을 때는 일부러 일을 만들어서라도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그녀가 지금 이순간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 눈앞에 놓여있는데 어찌 그냥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있겠는가! 강산은 쉽게 변해도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래서 전해오는 것이다. 그녀의 상황이 결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지만 그녀의 성격은 여전히 고칠 수 없었던 것이다. 묘비가 약간 움직이는 순간 입구가 나타나고 그녀는 재빨리 입구 속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녀는 또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안 돼. 이것이 어떤 사람의 비밀인지 좋은 사람 것인지 나쁜 사람 것인지 이러한 사실들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왜 나는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려는 거지. 그래서 심랑이 나를 그렇게......." 그녀는 쓸데없는 일에 끼어든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려 했으나 그 생각이 심랑에게 미치는 순간 그녀는 다시 마음을 바꿨다. (심랑! 흥! 왜 내가 지금 이순간까지도 그 녀석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어떻든 더이상 살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 동굴 속에서 다른 위험을 맞닥뜨린다해도 별로 대수로울 것은 없지 않겠어.) 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걸음을 빨리하여 굴 속으로 번쩍 뛰어들었다. 세상에 모든 비밀소굴이나 지하터널은 대부분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음산하고 어둡고 곰팡이 냄새가 퀘퀘한 그런 분위기를 말이다. 그러나 이 지하통로가 다른 일반 지하통로와 다른 특별한 점은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고 기관 설치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이곳이 너무 은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찾아올 염려가 없어서 지키는 사람을 세워두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이 비밀소굴의 주인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극히 오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곳을 알아낼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지키는 사람을 세워두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칠칠은 도대체 지키는 사람이 왜 없는지는 생각해 보지않은 채 묘비를 밀어 다시 그 입구를 막은 다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약 십여 개의 돌계단을 내려갔을 때 그녀는 조그만 대청에 이를 수 있었다. 그 대청에는 가구와 배치된 장식이 일반의 부잣집 객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주칠칠은 고개를 내밀어 대청 안을 살펴보았다. 대청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 조그만 대청으로 불쑥 들어갔다. 그녀는 근본적으로 두려움이 없었다. 현재 그녀는 일종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도리어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대청 앞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주칠칠은 곧장 그 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바로 이순간 그 문 안에서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공자께서는 상당히 주도 면밀하시군요. 공자의 부하들이 이곳에서 답답해 할까봐 이처럼 예쁜 두 명의 아가씨를 데려다놓고 그들을 보살피게 했으니 말이오. 대단하오! 정말 대단하오!" 주칠칠은 몸을 움찔 떨면서 옮기던 발자국을 즉각 멈췄다. 그것은 바로 김불환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있단 말인가!) 이때 다른 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김 형께서는 모르는 바가 있으신 것 같소. 공자께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공자께서 이렇게 큰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만약 이곳에 그 정도의 즐거움도 없다면 누가 기꺼이 이곳에 숨어서 공자를 지원하겠소?" 그 목소리 또한 상당히 귀에 익은 것이었다. 그러나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주칠칠은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했다. 마침내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번쩍 떴다. (아! 저것은 바로 좌공룡 그녀석이로군.)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겠지요. 만약 기꺼운 마음으로 이곳에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이곳에 있으라고 강요한다고 해도 슬쩍슬쩍 밖으로 빠져 나갔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예쁜 아가씨들과 술들이 준비되어 있으면 회초리로 때리면서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으려 하겠소." 그에 이어서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은 김 형께서 맛보고 계시지 않소. 명하야! 빨리 술을 따라 드려라." 그것은 바로 왕련화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왕련화의 목소리는 조금도 힘이 없는 듯 무력하게 들렸다. 그리고 말을 끝내자마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속 잔기침을 해대는 것이었다. 주칠칠은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올 듯 고동쳤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선채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 문은 여전히 닫혀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문 밑으로 약간의 틈이 벌어져 있어 불빛이 주칠칠이 서있는 그 조그만 대청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멍청히 서있던 주칠칠은 정신을 가다듬고 그 문쪽으로 걸어가서 몸을 굽히고 머리를 밑으로 숙여 한쪽 눈을 감고 한쪽 눈으로 그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문 속에는 넓직한 방이 있었으며 그 방 가운데에는 동으로 만든 불화로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불화로 옆에는 술과 안주가 가득 차려진 상이 놓여져 있었다. 김불환과 좌공룡은 바로 그 곳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붉은 옷을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렸으나 얼굴에는 상당히 요염한 기색을 띤 여인이 그 불화로 옆에서 그 불길을 부젓가락으로 휘젓고 있었다. 그 여자의 허리는 마치 뱀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녹색옷을 입은 여자는 김불환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나타나 있었으며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한쌍의 눈은 눈물을 머금은 듯하여 도리어 상당히 혐오스럽다는 기색도 보였다. 도대체 왕련화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주칠칠이 이리저리 눈을 돌리자 비로소 한쪽 구석에 호랑이 가죽을 깐 침대에 되는대로 누워있는 왕련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잘 생긴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김무망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악마는 이미 부상을 당한 듯하여 보였다. 심지어 좌공룡이나 김불환도 모두 부상을 당한 듯하여 보였다. 좌공룡의 오른팔은 이미 붕대로 칭칭 동여 매어서 가느다란 천으로 감싼 채 목에 걸려 있었다. 그의 부상은 가볍지 아니 한 듯 보였다. 그러나 김불환의 부상은 그렇게 대단한 듯 하여 보이지는 않았다. 이때 김불환은 먹고 마시면서 쉬지 않고 짓꿋은 손짓으로 자기 가슴에 안겨 있는 여자의 이곳저곳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왜 사람을 시켜서 자신이 먹을 약을 구해오라고 그랬단 말인가? 주칠칠이 방금 보았던 양가죽 겉옷을 걸친 대한이 말했던 병신 녀석은 당연히 김불환을 말하는 듯하였다. 주칠칠은 아무 생각없이 이리저리 거닐다가 왕련화의 비밀 소굴로 찾아 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인간 세상에서의 일은 이처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가장 실의에 차 있는 것은 왕련화였고 가장 득의만만해 보이는 사람은 김불환 같아 보였다. 김불환은 크게 웃고 떠들고 있었으나 왕련화는 도리어 구석에 구겨박혀 있는 듯해 보였다. 김불환은 가슴에 품은 녹의 소녀를 한참 쓰다듬더니 이번에는 다시 화롯불을 만지고 있는 허리가 뱀처럼 매끄러운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도 끌어 당겨 양쪽 가슴에 한 사람씩 품어 안았다. 김불환의 가슴에 안긴 두 여자는 겉으로는 킥킥거리고 웃고 있었으나 그녀들의 눈빛은 김불환의 이러한 행동이 혐오스러운 듯한 기색을 보였다. 이때 좌공룡이 언짢은 듯 입을 열었다. "김 형께서는 상당히 즐거우신 모양이구려?" 김불환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 저는 상당히 즐겁군요. 이렇게 예쁜 아가씨들이 옆에 있는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겠소? 자! 령아(玲兒)야! 이 어르신 볼에 뽀뽀 한 번 해라." 좌공룡이 냉랭하게 말했다. "방금 그렇게 험악한 일을 겪었는데도 김 형께서 즐거우실 수 있다니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방금 일이오? 헤헤!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오. 김무망 그 녀석은 더이상 살아나기 어려울거요. 그 녀석이 이미 제거 되었는데 우리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필요가 있겠소?" 좌공룡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그때 김무망 그녀석에게 한 번만 더 공격을 했더라면 그 녀석은 틀림없이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애석하게도 김 형께서는 너무 도망가기에 바빠서......." 김불환이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도망가기에 바빴다면 좌 형께서는 도망가기에 바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그때 저는 왕 공자께서 이미 부상을 당하셔서 더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재빨리 그곳에서 빠져나왔던 것이오. 좌 형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까?" 좌공룡의 얼굴은 불그락푸르락 수시로 변했으나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불환은 도리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좌 형께서도 마음을 푸셔야죠. 령아야! 빨리 일어나서 노래 한 곡 들려 드리고 답답한 기분을 풀어 드려라." 그 녹색 옷을 입은 아가씨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저는 노래를 할 줄 몰라요." 김불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기랄! 이런 장사를 하면서 노래도 할 줄 모른단 말이냐?" 뱀허리를 가진 아가씨가 얼른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저 아이는 정말 노래를 못 해요. 제가 대신하면 안 될까요?" "누가 네년 노래를 듣고 싶다고 했느냐? 령아야! 노래를 할 줄 모르면 춤을 출줄 알게 아니냐? 어디 춤이라도 한 번 추워 보아라. 제기랄, 춤이란 게 별거냐. 마음대로 온 몸을 흔들어대면 그게 춤이지." 령아라고 불리운 그 처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일어서서 손과 발을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나무막대기나 허수아비가 비틀비틀 몸을 흔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좌공룡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휴식이 필요한데 김 형께서 좀 조용히 해주시면 안 되겠소?"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왕 공자요? 헤헤. 어떻든 왕 공자도 오래 살지는 못할테니까. 숨이 붙어있는 짧은 시간이나마 좀 재미있게 해드려야 하지 않겠소?" 그의 말은 방 안에 있던 다섯 사람만이 아니라 문밖에 있던 주칠칠까지도 깜짝 놀라게 했다. 좌공룡의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그가 우물쭈물 말했다. "김 형께서는 지금 우스갯소리를 하시는......." 김불환이 그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나는 우스갯소리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는 어떻게 제가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시는지......?" 그는 아무 일도 아닌 척 이렇게 물었으나 사실은 그의 안색이 변해 있었다. 김불환이 말했다. "다 아는 방법이 있지요." 좌공룡이 말했다. "공자께서는 비록 김무망 그녀석의 일 장을 공격당하긴 했으나 그 장력으로 어떻게 공자의 목숨을 잃게 할 수 있단 말이오? 며칠 지나지 않아서 공자께서는 틀림없이 완전히 회복되실 것이오." 김불환이 히죽거리면서 말했다. "과연 그럴까요? 나는 왕 공자께서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좌공룡이 실색을 하며 말했다. "김 형, 당신, 당신 미쳤소? 무슨 소리를......." "나는 왕 공자가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소. 나랑 내 기라도 해보시겠소?" 이 말을 들은 왕련화는 대소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제가 언제 죽을지까지 알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구려. 저는 이곳에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두었는데 아쉽게도 관은 준비하지 못했군요." 김불환이 말했다. "그건 괜찮소. 왕 공자께서 죽은 후에 시신을 인의장에 보내면 인의장에서 당연히 알아서 당신이 들어갈 관을 마련해 줄거요."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주 담담하게 말했으나 그말을 듣는 좌공룡은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김 형, 김 형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김불환이 말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거요?" 등불아래 비치는 그의 얼굴에는 차갑고 냉혹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지금 이순간, 그의 흐릿한 눈에서도 늑대와 같이 날카롭고 악독한 빛이 뻗쳐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좌공룡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저, 저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좌공룡은 김불환의 무공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방금 김무망과의 싸움에서 김불환의 무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무공은 좌공룡 자신의 무공보다 높다고는 얘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김불환의 얼굴에 나타난 잔인한 웃음이었던 것이다. 그 잔인한 웃음은 김불환의 징그럽게 생긴 얼굴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좌공룡 자신도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일평생 동안 만났던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 보다는 나쁜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김불환보다 더 나쁜 사람은 본 적이 없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생 이처럼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잔인한 웃음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김불환은 천천히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왕련화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입에는 여전히 왕련화가 그에게 준 고기를 십고 있었으며 손에는 왕련화가 그에게 마시도록 준 술잔을 들고 있었다. 술잔에는 술이 가득차 있었다. 그가 비틀비틀 왕련화쪽으로 걸어가자 술잔에서는 술이 한 방울씩 한 방울씩 잔 밖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 잔인한 웃음을 띤채 눈에서는 흉포한 살기를 뿜어내면서 왕련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련화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변해갔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얼굴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 거요?" 김불환이 음흉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좌공룡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모른다치고, 왕 공자께서도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오?" 왕련화가 말했다. "김 형께서 뭘 하려는지는 알고 있지만 왜 그렇게 하려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려." 김불환은 냉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무엇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거요?" "김 형께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니오!" 김불환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과연 똑똑한 아이라고 할 수는 있군." "그러나 김 형과 나는 이미 친구가 아니오? 왜 꼭 나를 죽여야겠다는 건지 그 이유를 모르겠소?" 김불환이 거칠게 바닥에 침을 퉤 뱉고 나서 징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친구라고? 친구라는 게 도대체 몇 푼이나 값어치가 나가는 거지? 나 김불환은 일생 동안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소. 만약 나 김불환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는 아마 눈이 먼 인간이겠지." 왕련화도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김 형 당신은 지난 날......." 김불환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지난 날에는 내가 왕 공자에게서 얻을 게 있었기 때문에 당신 가까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오. 그러나 이제 왕 공자 당신은 마치 죽은 개처럼 꼼짝을 못 하고 누워있는데 더이상 무엇을 얻을 게 있다고 왕 공자를 친구로 사귀어야 한단 말이오?" "제가 지금은 비록 약간의 부상을 입었으나 이 부상은 며칠 지나지 않아 나을 상처에 불과하오. 내 세력은 십성에 걸쳐 널리 퍼져있고 그 수하만도 천 명은 더 되오. 김 형께서 나를 친구로 받아들이신다면 내가 이 부상에서 회복된 다음에 김 형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겠소? 김 형께서는 총명한 분이시오. 그런데 이러한 점도 생각을 하지 못하신다는 거요?" 문밖에서 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주칠칠은 이러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으면서도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하게 김불환에게 말하는 왕련화를 보고 속으로 탄복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김불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 공자의 말씀에도 일리는 있소. 그러나 나는 첫째,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고, 둘째, 내가 지금 당신을 죽여서 인의장으로 보내면 왕 공자가 부상에서 회복해서 나에게 줄 수 있는 이점보다 훨씬 더 많다고 생각되오만......." 이렇게 말한 그는 말을 멈추고 한바탕 대소하고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나 김불환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 이로운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궁둥이를 닦아 달라고 해도 나는 개의치 않고 해왔소. 나는 나에게 어떤 것이 이로운가만을 생각하오." 왕련화가 눈을 부릅 뜨며 물었다. "그렇다면 김 형께서 나를 죽여서 도대체 어떤 이로운 점이 있다는 겁니까?" 김불환이 헤벌쭉 웃더니 말했다. "적다고 할 수야 없지요. 왕 공자께서는 듣고 싶소?" "이왕 죽을 거라면 내가 죽음으로써 김 형께 도대체 어떠한 이로움을 드릴 수 있는지 들어나 봅시다." 김불환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첫째, 내가 지금 왕 공자를 죽임으로 인해서 왕 공자께서 주칠칠을 속여서 빼앗아 온 귀거리를 내 소유로 만들 수 있소. 그러면 그 많은 돈이 곧 내 돈이 되는 거지요." 왕련화가 찬바람을 들이키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는 그 일도 알고 계셨소?" 김불환의 말이 이어졌다. "두번째, 왕 공자는 지금 현상금이 붙은 사람이오. 내가 왕 공자를 죽여 인의장으로 보내면 현상금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의장 삼로 및 천하 무림인들로부터 의사(義士)라는 칭송을 들을 수 있소. 나는 명예와 돈을 동시에 얻을 수 있으니 어찌 기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소. 또 더 나아가서 심랑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왕 공자 당신이지 내가 아니오. 내가 만약 왕 공자를 죽여 없앤다면 심랑은 어쩌면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부드럽게 나를 '친구 고맙소.'라고 말해 줄지도 모르오. 김무망은 왕 공자 당신이 죽인 거요." 왕련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대단하군요. 대단해요. 정말 대단해요!" 김불환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대단하지요. 왕 공자 당신도 내 판단 능력에 탄복하는 거요?" 왕련화가 말했다. "그러나 김 형께서는 제발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시오. 내 부하들 중에 고수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그들을 제외하고도 내 모친은 천하제일 고수라고 할 수 있는 분임을 말이오. 만약 김 형께서 나를 죽인다면 그들이 당신을 가만히 놔 둘 것 같소?" "왕 공자께서는 내가 왕 공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만약 김 형께서 내 시신을 들고 인의장에 간다면......." 김불환이 말허리를 잘랐다. "그 점은 왕 공자께서 안심하셔도 좋소. 인의장에서는 현상금을 받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신분을 지켜주는 것을 절대 원칙으로 하고 있소.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 누가 그 몇 푼 안 되는 현상금을 노리고 골치 아픈 일을 하려고 하겠소?" 왕련화는 힐끗 좌공룡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리고 또 좌 방주께서 계시지 않소?" 그는 일부러 방주라는 두 글자를 힘주어 말했다. 이미 의자에 널부러져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 있던 좌공룡은 방주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몸을 움찔하고 놀랐다. 왕련화가 죽게 된다면 과연 누가 좌공룡 자신을 도와서 방주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방주라는 두 글자는 즉각 그의 가슴 속에 탐욕이라는 불길을 일으키게 했다. 그 탐욕은 김불환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대갈을 터뜨렸다. "그렇소! 누구든 왕 공자를 해치려는 생각을 한다면 나 좌공룡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그의 목소리는 방을 진동할 만큼 컸으나 김불환은 그를 돌아보지고 않고 다만 냉랭하게 말할 뿐이었다. "좌공룡이 만약 총명한 인간이라면 얌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현명한 생각일 것이오. 좌공룡이 지금 이순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면 왕 공자 당신이 죽은 후에 오히려 그에게 더 이로운 점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오." 왕련화가 말했다. "좌 방주가 만약, 만약......." 김불환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만약 좌공룡이 총명하지 않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당신과 함께 그를 없애버릴 수밖에 없소. 죽은 사람은 영원히 말을 할 수 없는 법이오. 만약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좌공룡은 지금 즉각 시험해 봐도 좋소." 그는 몸을 휙 돌려 좌공룡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한쪽밖에 안 남은 팔을 들고 지금 당장 시험해 봐도 좋소." 그말에 좌공룡은 자신의 부상당한 팔을 바라보고서 맥없이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김불환은 대소를 터뜨리며 손에 들고 있던 술을 입 안에 털어넣고는 잔은 바닥에 던져버렸다. 이때 그 방에 같이 있던 두 아가씨는 놀라서 구석자리에 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순간 붉은 옷은 입은 아가씨가 가슴을 쳐들고 일어나서 령아라고 불린 아가씨의 얼굴을 꼬집으면서 말했다. "봐라! 애! 네가 김 어르신의 심신을 화나게 해서 이 모양이 되었잖니? 빨리 가서 김 어르신께 용서를 빌고 기분을 풀어드려라." 세상 물정을 모두 겪은 이 여자는 과연 위급한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왕련화를 구하기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왕련화가 죽게 되면 결국은 자신들도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왕련화는 비록 그녀의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고마운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령아의 손을 잡고 궁둥이를 흔들며 흐느적흐느적 김불환의 면전까지 걸어가 령아의 겁에 질린 몸뚱이를 김불환의 가슴에 떠밀었다. 그리고 자신도 몸을 비비꼬며 김불환의 가슴으로 뛰어 들어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교태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발 화내지 마세요. 우리 자매 두 사람이 어르신을 즐겁게 해드릴게요. 틀림없이......." 그녀는 얼른 말소리를 낮춰 김불환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를 더 했다. 김불환은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르고 령아의 몸을 더듬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이년들. 몸이 제법 쓸만하구나. 이 어르신께서 네년부터 죽여줘야겠군!" 순간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의 눈에 공포의 빛이 스쳐 지나갔으나 곧 코먹은 소리로 말했다. "죽이려면 지금 당장 죽여주세요. 더 참을 수 없어요. 이 뒷쪽에 방도 있고 푹신한 침대도 있어요. 얼른 우리 가요." 김불환의 얼굴에 잔인한 웃음이 떠오르더니 말했다. "좋다." 말을 마치는 순간 김불환은 '팍! 팍!' 하고 두 여자의 얼굴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두 아가씨는 비틀거리며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들의 하얀 얼굴에는 다섯 손가락의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가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 당신......." 김불환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갈보년들. 이 어르신을 어떻게 보고 그 짓거리냐. 이 어르신은 네년들 같은 것들을 수천 아니 수만 명도 더 만나 보았다."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가 갑자기 큰소리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 병신, 이 아가씨 눈에 네 녀석이 조금이라도 찬 줄 알았단 말이냐. 이 아가씨 밑을 닦아줄 자격도......." 그녀는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되는대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불환은 도리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좋다. 욕을 잘하는구나. 이 어르신은 일을 할 때 누군가가 욕설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기분이 좋아지니까. 왕 공자를 죽이는 순간에도 그렇게 욕설을 퍼부어라." 주칠칠은 먹은 게 목구멍을 통해 올라오는 듯했다. 왕련화는 탄식하면서 입을 열었다. "김 형, 당신과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눈을 씻고 찾아 보려고 해도 몇 안 될 거요. 나 왕련화가 오늘 당신과 같은 사람에게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또한 그렇게 크게 억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겠구려." 김불환이 통쾌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왕 공자 당신은 사람을 볼 줄 아는군!" 그는 실눈을 뜨고 잔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지금 왕 공자 당신은 후회막급 하겠구려. 왜 개방 제자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는지, 또 왜 그 두 명의 대한을 나를 위해서 약을 구해오라고 밖으로 내보냈는지 말이오?" 왕련화가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나는 지금 후회스러울 뿐만 아니라 상당히 애석해 하고 있소이다." "하하하! 무엇이 애석하다는 거요?" "당신과 같은 인재가 오래 살 수 없다는 점을 애석해하고 있소." 그 말에 김불환은 깜짝 놀란 듯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곧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왕 공자, 당신은 이미 정신이 어떻게 되기 시작했소? 지금 죽게 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왕 공자 당신이오." 왕련화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의 말씀도 맞소. 나는 곧 김 형의 손에 죽을 것이오. 그러나 김 형 당신도곧 죽게 될 것이오." 김불환이 대갈을 터뜨렸다. "입 닥쳐!" 왕련화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김 형, 당신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 중 가장 비겁하고, 흉악하고, 교활하고, 양심이 없는 사람이오. 그렇지만 나 왕련화고 김 형에 비해서 조금도 못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오." 김불한이 냉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내 손아귀에 잡히지 않았소?" "나는 비록 김 형의 계략의 말려 들었지만 김 형 또한 내 잔재주에 말려 들었소. 김 형께서 방금 마신 그 술 속에는 이미 오장육부를 썩어 들어가게 하는 독약을 타놓은 상태였소." 순간 김불환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모양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쏟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왕 공자 당신은 나를 속일 생각이오. 하하!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만약 술 속에 독이 있었다면 내가, 내가 왜 지금까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는 거요?" 그는 고개를 쳐들고 웃어제꼈다. 그러나 그의 웃음소리는 울음소리보다도 더욱 듣기 싫은 소리였다. 왕련화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탄 그 독약은 일주일 후에야 발작을 하게 될 것이오. 그 독약은 이 세상에 오직 나 왕련화 만이 해독을 할 수 있소. 김 형이 지금 나를 죽이게 된다면 일주일 후에는 어쩌면 김 형께서도......." 김불환은 서있던 자리에서 펄쩍 뛰면서 외쳤다. "왕 공자, 나를 속일 생각이오! 하하! 꿈을 꾸지 마시오. 나는 지금 당장 당신을 죽여버리겠소." "김 형께서 만약 믿지 못하신다면 김 형 생각대로 하시죠. 지금 당장 손을 쓰셔도 좋소." 김불환은 왕련화에게 달려들어 번쩍 손을 쳐들었다. 그러나 그의 쳐든 손은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왕련화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는 왜 손을 쓰지 않소?" 김불환은 쳐들었던 손을 도리어 자기의 얼굴에 도로 철썩 갖다 붙였다. 그는 몇 번 자기 뺨을 후려갈기더니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모두 너의 주둥이 탓이야. 못된 소리를 지껄여 왕 공자를 놀라게 하다니 너는 맞아야 되. 맞아야 되......."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는 왜 하필 자기자신을 괴롭히시오?" 김불환은 갑자기 그자리에 털썩 꿇어 앉더니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왕 공자, 대인은 소인의 잘못을 탓하지 않는다 합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시고 방금 제가 했던 행동은 다만, 다만, 일 장의 장난을 하고자 했던 것에 불과하오. 왕 공자, 제발 내 몸에 들어간 독을 없애주시오. 내가 왕 공자를 한평생 받들어 모시겠소."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는 나에게 김 형을 구해달라고 하시지만 제가 보기에는 일주일 후에나 가능할 것 같소이다." 김불환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일주일이 지나면 왕 공자의 상처도 아물지 않겠소?" 왕련화가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그렇겠지요." 김불환은 손을 들어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왕 공자, 당신의 부상이 완케되면 당신이 나를...... 나를 놔주겠소?" "하하 당연히 놓아 드려야죠. 그러나 제 말을 믿고 안 믿고는 김 형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실 일이오." 김불환이 고개를 계속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일주일, 일주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요. 왕 공자께서는 지금 당장...... 제발 부탁이오." 왕련화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지금 당장 해독약을 드린다면 그 대신 나는 다시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 아니오." 김불환이 대갈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왕 공자, 내가 당신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당신의 체면을 봐서요. 당신은 지금 내 손아귀에 잡혀 있는 몸이오. 얌전히 좋은 말로 할 때, 내 몸에 있는 독약을 제거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왕련화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만약 제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김불환은 지금 이순간, 왕련화를 죽일 수도 그렇다고 일주일 후 왕련화의 부상이 완쾌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는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 왕련화를 손아귀에 쥐었으나 도리어 왕련화에게 역습을 당하고 말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은 호랑이보다도 더 위엄이 있었으나 지금은 쥐새끼보다도 더 가련한 모습이었다. 주칠칠은 방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았다. 그녀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나고 우습기도 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김불환 저 놈의 악독한 심장과 철면피와 같은 얼굴은 가히 천하무쌍이라고 할만 하구나. 아, 세상이 비록 넓다고 하지만 저런 인간을 다시 찾아보기는 힘들거야.) 만약 김불환을 여우라고 한다면 왕련화는 늑대라고 할만 했다. 또 김불환을 악마라고 한다면 왕련화는 마왕이라고도 할만 했다. 주칠칠은 다시 생각했다. (저 마왕이 지금 부상을 당해 꼼짝 못 하고 침대에 누워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만약 이런 기회를 내가 잘 이용하지 못한다면 나 주칠칠은 이름을 갈아야겠지.) 이때, 왕련화의 가볍게 웃는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려왔다. "김 형께서는 왜 거기에 꿇어 앉아 계십니까? 제 앞에 꿇어 앉아 계시니 제가 마음이 불편하구려." 좌공룡의 아첨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예, 예. 그렇습죠. 왕 공자 말씀이 맞습니다. 김 형 당신은......." 김불환이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좌공룡, 당신이 아첨하기는 때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소? 당신이 아첨한다고 왕련화가 당신을 그대로 놔둘 것 같소?" 좌공룡이 이마에 식은 땀을 손으로 훔치면서 말했다. "나...... 나는 방금 김 형이 위협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김불환이 말했다. "잊지 마시오. 지금 이순간에도 당신의 목숨은 내 손아귀에 달려있소. 내가 당신을 죽이고 싶다면 언제라도 간단히 당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오." 좌공룡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나, 나는...... 나는......."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펑'하는 소리가 나며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한 사람이 나는 듯이 달려와 곧장 김불환을 덮쳐갔다. 뒤바뀐 여자와 남자 김불환이 깜짝 놀라 몸을 돌이키는 순간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주칠칠, 네 년이었구나!"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도망갈 생각이에요? 심랑! 심랑! 이 녀석들이 모두 여기에 있어요. 빨리 오세요." 그녀는 이렇게 소리치며 바람처럼 손을 뻗더니 수 장을 공격해 들어갔다. 김불환은 사실 그녀의 출현이 놀랍기도 했지만 내심으로는 기뻤다. 그는 그녀가 호랑이 굴속에 들어온 양무리라는 생각에 순간적으로나마 기쁜 생각이 들었으나 주칠칠의 입에서 심랑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의 손에는 갑자기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의 머릿속에 번개 같은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 주칠칠 네가 이곳에 나타난 이상 심랑이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겠지.) 주칠칠이 대갈을 터뜨렸다. "김불환! 도망갈 생각은 버려라!" 김불환이 중얼거렸다. "도망갈 생각을 버리라고?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맞아 죽으라는 말이냐?" 그는 더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번쩍 손을 들어 옆에 있는 문을 활짝 열고 그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석실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던 것이다. 그 문은 얼핏 보기에도 묘 밖으로 통하는 지하통로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칠칠이 말했다. "좌공룡! 저 녀석은 도망을 갔지만, 네 녀석은 도망갈 생각을 버려라." 좌공룡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김불환 그 녀석이 도망을 갔는데, 내가 왜 도망을 가면 안 된다는 말이냐? 내가 바보인줄 아느냐?) 그는 발바닥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 김불환보다도 더 매끄럽게 도망을 가버렸다. 주칠칠이 크게 소리 질렀다. "사내 녀석들이라면 도망가지 말아라! 네 녀석들은 도망갈 수 없을 거야!" 그녀는 쉬지않고 도망가지 말라고 계속 소리를 질러댔으나 자신은 뒤쫓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입으로는 그렇게 소리쳤지만 속으로는 그들이 더 빨리 더 멀리 도망가기를 바랐다. 왕련화는 주칠칠이 문을 열어 제치고 나는 듯이 들어오는 순간,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심랑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주칠칠이 꼼짝않고 선 채 김불환과 좌공룡에게 도망가지 말라는 소리만 지르는 것을 보자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삐어져 나왔다. 주칠칠은 여전히 소리치고 있었다. "심랑! 저 녀석들이 그쪽으로 갔어요. 빨리 쫓아가세요." 왕련화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왕련화는 아직 도망가지 않았으니 더이상 쫓아갈 필요없소!" 주칠칠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바로 심랑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때, 채 무덤밖으로 뛰쳐 나가지 못했던 김불환이 심랑의 목소리를 듣자 더욱 재빠르게 무덤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때 왕련화가 목소리를 낮춰서 웃으면서 말했다. "주 아가씨, 본인을 위험에서 구해주셔서 매우 고맙소." 주칠칠이 몸을 돌려 날카롭게 외쳤다. "입 닥쳐요!" 왕련화가 말했다. "심 형께서는 어떻게 주 아가씨와 같이 오시지 않으셨죠?" "당신, 무슨 얘기를 하는거죠? 그 사람은 바로 밖에 있어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께서 만약 문밖에 있다면 주 아가씨께서는 고의로 그들을 도망가게 소리를 질러댈 필요가 없었소. 그리고 본인도 아가씨를 도와서 심랑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그들을 더 빨리 도망가도록 쫓아버리지도 않았을거요."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얘기 하는군요." 왕련화가 말했다. "상황을 보고 사세를 판단하는 것은 본인의 장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소."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심랑이 비록 오지 않았다고 해도 나 혼자의 힘만으로도 당신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해요." 왕련화가 말했다. "사실이오. 지금 본인은 닭모가지 하나 비틀 힘이 없소. 아가씨는 당연히......." 주칠칠이 말허리를 잘랐다. "상황이 그렇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당신은 기뻐할 수가 있어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구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생각하세요? 흥, 천만의 말씀! 나는 다만 당신이 다른 사람 손에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제 손으로 직접 당신을 죽이고 싶었던 거예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당신은 방금 김불환을 위협해서 당신에게 손을 쓰지 못하게 했죠? 그러나 지금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나는 김불환보다 더 큰 고통을 맛보게 할거예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이순간, 아가씨께서 나를 죽인다면 나는 기쁘게 그 죽음을 받아들이겠소. 아가씨처럼 아름다운 미녀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김불환과 같은 그런 애꾸눈의 병신에게 죽는 것보다는 훨씬......."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내 손아귀에 사로잡힌 게 김불환에게 사로잡힌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시나 보죠? 틀렸어요! 김불환은 기껏해야 당신을 쉽게 죽이고 말겠지요. 그러나 나는, 나는 당신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려 죽일 거예요." 그녀의 뇌리에 왕련화가 종종 그녀에게 했던 못된 짓들이 스쳐갔다. 그녀는 가슴에 응어리진 분노가 폭발한 듯 한달음에 왕련화가 누워있던 침상으로 달려가더니 손을 들어 세차게 그의 따귀를 몇 대 올려붙였다. 왕련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 같은 아름다운 미녀의 섬섬옥수에 따귀를 맞는 기분도 과히 나쁘지는 않군요. 아가씨게서 손이 아프지 않으시다면 몇 대 더 때리셔도 좋소이다." 주칠칠은 어이가 없어하며 입을 열었다. "진심에서 하는 말인가요? 좋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따귀를 대여섯 차례 올려붙였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기분이 좋군요, 아주 기분이 좋아요." "기분이 좋다니 다시 몇 대 더 때려 드릴까요?" 그녀는 다시 일곱,여덟 차례 세차게 왕련화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왕련화의 얼굴은 마치 썩은 돼지간처럼 검붉은 색깔로 변했으며 퉁퉁 부어 올랐다.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따귀를 맞는 기분이 좋으신가보죠? 더 때려 드릴까요?" 왕련화는 놀란 듯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주 아가씨, 당신...... 당신......." 그는 당신 소리만 연발할 뿐 그 유창한 말솝씨가 어디로 갔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여전히 그 곳에 남아있던 두 아가씨는 주칠칠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들은 꿈에도 이처럼 선녀와 같이 예쁘게 생긴 소녀의 마음이 이처럼 독랄하고 수단이 악독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주칠칠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말을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더 때려 달라는 의사인가요? 좋아요, 더 때려 드리지요." 그녀는 비록 공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따귀를 올려 붙이고 있었으나 그녀의 손은 매우 빠르고 매서웠다. 왕련화가 마침내 탄식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언제부터 이렇게 독한 여자로 변하게 되었소?" 주칠칠이 말했다. "이제 그만 때리라는 건가요?" 왕련화가 재빨리 말했다. "제발 부탁이오. 그만 때리시오." 주칠칠이 말했다. "따귀를 맞는 게 억울한가요?" "아니오, 아니오! 조금도 억울하지 않소." "왕련화, 당신이 만약 나를 예전의 주칠칠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에요. 나는 옛날, 당신에게 희롱을 당하던 그때의 주칠칠이 아니에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나는 완전히 변했어요." "아가씨께서는 혹시 화난 일이라도 있으시오? 누가 아가씨를......."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주칠칠이 손을 들어 그의 따귀를 두 차례나 올려붙였다. 주칠칠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만약 더이상 허튼 소리를 하면 지금 당장 당신의 한쪽 귀를 잘라버리겠어요. 당신이 믿든 말든 그건 맘대로지만, 흥, 당신은 똑똑히 알아두어야 해요. 나 주칠칠은 그렇게 호락호락 가볍게 보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에요." 왕련화가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알았소, 알았소!" "당신, 내가 저번에 당신 손에 얼마나 처참한 몰골이 되었는지 기억하고 계세요" "기억하오. 예, 기억합니다. 아니오, 아니오. 기억하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가씨께서는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서 무엇을 하시려고......." 왕련화는 매우 당황한 듯 횡설수설 했다. 주칠칠이 말했다. "지난 일을 다시 꺼내서 무얼 하냐구요? 흥! 나는 평생 그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알고 당신을 내 손에 보내준거라고 생각해요. 더이상 할 말이 있으세요?" 왕련화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본인은 더이상 할 말이 없소. 주 아가씨께서 나를 어떻게 하든 나는 달갑게 받아들일 뿐이오." 주칠칠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아요. 먼저 이리 주세요." "뭐, 뭣을 말이오?" 주칠칠이 노갈을 터뜨렸다. "모른 척 시치미 뗄 건가요? 나를 속여서 빼앗아간 물건을 돌려달라는 거예요." 왕련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알았소, 돌려드리리다." 그의 팔은 과연 가볍지 않은 듯 얼굴을 여러 번 찡그리며 용을 쓴 다음 겨우 주칠칠에게서 빼앗아간 귀걸이 한쌍을 꺼냈다. 귀걸이를 보는 순간, 주칠칠은 재빨리 달려들어 왕련화의 손에서 그것을 낚아 챘다. 그리고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왕련화, 당신은 오늘 같은 날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죠?" 왕련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또 다른 분부라도 있으신지요?" 주칠칠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쓸어올려 귀걸이를 다시 귀에 꽂으면서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기 시작했다. 그녀가 서쪽으로 걸어가면 왕련화의 눈도 그녀를 따라 서쪽으로 가고, 그녀가 동쪽으로 걸어가면 왕련화의 눈도 그녀를 따라 동쪽으로 옮겨졌다. 그는 전심전력을 다해 주칠칠의 현재의 마음과 고민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듯했다. 이때,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가 의자를 끌어다가 주칠칠의 옆에 놓으며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 그만 화내시고 이곳에 앉아서 좀 쉬세요. 왕 공자께서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것은 왕 공자가......." 주칠칠은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 노한 소리로 말했다. "잔소리 그만하고 멀찍히 물러서요. 저 녀석이 나한테 잘못을 했다고? 흥, 저 녀석은 나한테 잘못을 할 자격도 없어요. 아가씨는 한쪽 구석에 얌전히 서 있으세요. 그러면 제가 결코 아가씨를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 만약 이 일에 끼어들어 이러쿵 저러쿵 얘기를 한다면, 흥!"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는 재빨리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결코 아가씨 일에 끼어들지 않겠어요." 그녀 자신도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가 화가 나면 남자보다도 더 악독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과연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한쪽 구석으로 물러섰다. 이때 왕련화가 얼굴에 득의에 찬 기색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남자들이 변심하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오. 주 아가씨께서 만약 변심한 남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마땅한 사람을 찾는다면 본인이 가장 적임자라고 할 수가 있을거요." 주칠칠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날카롭게 그의 말을 잘랐다. "닥쳐!" 그녀는 흉악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으나,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왕련화의 이 몇 마디 말은 확실히 그녀의 아픈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왕련화는 속으로 암암리에 기뻐했다. 그는 주칠칠이 지금 당장 결코 그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 잘 모면하면 틀림없이 주칠칠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주칠칠은 다시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왕련화의 두 곳의 혈도를 제압했다. 그리고 이불로 그를 둘둘 만 다음 옆구리에 끼고 방 밖으로 벗어났다.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가 얼른 물었다. "아, 아가씨! 왕 공자를 어디로 데려 가시려고 그러는 거죠?"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만약 누가 돌아와서 아가씨들에게 묻거든 아가씨들은 왕련화는 주칠칠에게 납치되어 갔다고 애기해 주세요. 그리고 또 한 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마세요. 만약, 왕련화의 부하들이 나 주칠칠을 찾아서 왕련화를 구해낼 생각이라면 나 주칠칠이 먼저 왕련화의 목숨을 빼앗고 나서 그들을 상대할거라고 말이에요." 그 아가씨는 눈망울을 몇 번 굴리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수하들이 돌아올 때면, 아마 우리도 이 자리에 없을 거예요." 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왕련화는 탄식하면서 말했다. "웃음을 파는 여자들은 정말 믿을 게 못 되는군." 그 말을 들은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강호상의 남자들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왕련화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렇소. 강호상의 남자들도 믿을만 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흥, 내가 당신을 안 후로 처음으로 당신에게서 사람다운 말을 들어보는군요." 그녀의 경공은 비록 약하지 않았으나 어깨에 다 큰 남자를 떼메고 먼 길을 걷는다는 것은 확실히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왕련화의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왕련화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본인을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시는 거요?" "이곳에서 명령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에요. 바로 나, 주칠칠 한 사람 뿐이라고요. 아셨어요? 내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든 당신은 입닥치고 가만히 있기나 하세요." 왕련화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알았습니다." 주칠칠은 눈을 들어 사방을 쳐다봤으나 사람이 사는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약간씩 조급해져 갔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여자가 다 큰 남자를 어깨에 떼메고 이리저리 돌아다닌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칠칠이 한쪽 방향을 택해서 한참을 걸어갔을 때 마차들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 큰 길로 접어든 듯하였다. 사방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자신이 큰 길 로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주칠칠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말라 비틀어진 나무 둥지를 찾아내어 그곳으로 다가가 큼직한 바윗덩이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어깨에 메었던 왕련화를 눈덩이 위로 팽개쳤다. 왕련화는 확실히 사태파악을 잘하는 남자였다. 주칠칠이 아무리 그를 험악하게 대해도 그는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에 웃음을 띤채, 주칠칠이 하는대로 자신을 내맡길 뿐이었다. 한참이 지났을 때, 마차 한 대가 멀리서부터 천천히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마차가 그들 앞에까지 바짝 다가왔을 때 주칠칠은 벌떡 일어나 마차의 앞을 가로막았다. 천천히 달려오던 마차는 주칠칠이 그 앞을 가로막자 멈춰섰다. 말을 몰던 마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차 안에서 고개 하나가 쑥 밖으로 삐어져 나오더니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빨리 가게. 빨리, 빨리! 이 마차는 전세낸 것일세. 다른 손님은 태워줄 수 없어." 주칠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뻗쳐 마차의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마차 안에는 세 명의 장사꾼 비슷한 차림을 한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매우 눈에 익은 듯하기는 했지만 주칠칠은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날카롭게 외쳤다. "내려! 빨리 마차에서 내려!" 얼굴이 둥그스런 남자가 깜짝 놀란 듯 말했다. "내리라고? 무엇 때문에 내려?" "당신들은 강도를 만났어요. 아셨어요?" 얼굴이 둥근 남자가 대경실색한 물었다. "강...... 강도가 도대체 어디에 있소?" "내가 바로 강도예요." 그녀는 그 남자가 허리께 쯤에 단도를 차고 있는 것을 보더니 번개같이 손을 뻗어 그 단도를 뽑아내어 무릎에 단도의 면을 대고 밑에서 내리쳤다. 그에 따라 단도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그 세 명의 장사꾼 모습을 한 장한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렀다. 그들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둥지둥 마차에서 내렸다. 주칠칠은 길옆에 쓰러져 있는 왕련화를 안아올려 마차 속으로 팽개쳐 넣으며 말했다. "마부, 빨리 가요." 그 마부도 주칠칠의 기세에 놀란 듯 우물쭈물 했다. "아, 아가씨...... 아니, 대, 대왕님! 어디로 가는거죠?" "앞으로 곧장 가면 되요. 내가 세우라고 할때 세우세요." 주칠칠의 명령에 따라 마차는 다시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를 타고 왔던 세 명의 대한들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들판에 버려둔 채.......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대왕이라구요? 하하! 아가씨가 대왕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구려." 주칠칠은 눈을 들어 앞만 바라볼 뿐 그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방금 자신이 했던 행동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마차를 가로채던 그 모습을 생각하자 그녀 자신의 얼굴에 고소가 떠올랐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방금과 같은 일은 그녀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뇌리에 심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심랑이 방금 그녀가 해치웠던 일을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틀림없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지금 심랑은 어디에 있을가? 일순간 주칠칠의 얼굴에는 희비가 엇갈리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든 왕련화가 지금 내 손아귀에 잡혀 있으니 내 뜻대로 할 수 있겠지. 저 녀석은 똑똑한 녀석이니까 틀림없이 내 말을 들어야만 자기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을거야. 저 녀석이 내 손아귀에 있는 이상, 나는 틀림없이 그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큰 일을 할 수 있을거야. 아마 심랑도 비록 지금은 내 옆에 없지만 내가 큰 일을 해치웠다는 것을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겠지......?) 여기까지 생각을 한 주칠칠은 갑자기 용기 백배하여 대갈을 터뜨렸다. "마부! 마차를 멈춰요. 이 부근에서 가장 큰 마을로 가서 가장 큰 객점을 찾으세요. 시키는대로만 해요. 말은 하지 말고. 그러면 당신에게 큰 상을 내릴테니까." 마차는 주칠칠이 시키는 대로 규모가 큰 객점 앞에 멈춰섰다. 주칠칠은 왕련화의 몸을 더듬어 왕련화가 갖고 있던 은표를 찾아냈다. 그 은표를 살펴본 결과 가장 적은 것이 오백 냥 짜리였다. 주칠칠은 아무 생각없이 그 오백 냥짜리 은표 한 장을 마부에게 건네주었다. 주칠칠의 손에서 은표를 받아든 마부는 그 은표를 살피는 순간, 깜짝 놀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이어서 마부 의 표정에 기쁨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주칠칠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일에 대해서 한 마디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지 마세요. 만약, 한 마디라도 누설했다가는 당신은 내 손에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마부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하였다. 앞에 본 것은 악몽이고, 뒤에 본 것은 좋은 꿈인 듯했다. 주칠칠이 건네준 오백 냥짜리 은표 한 장이면 그의 나머지 여생은 마부 노릇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한 돈이었던 것이다. 주칠칠은 마부의 그러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소리없이 객점 안으로 들어가 계산대 위에 천 냥짜리 은표를 올려 놓으면서 말했다. "이 천 냥짜리 은표로 우리가 여기에 묶을 동안의 숙박비를 계산하세요. 그리고 먼저 이곳에 있는 모든 점원에게 각각 이십 냥씩 나눠주도록 하세요. 그리고 좋은 방을 찾아서 저 마차 속에 있는 환자를 먼저 그 방으로 옮겨 놓도록 하세요." 천 냥짜리 은표는 주인에서부터 말단 점원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을 주인을 쫓는 충실한 개의 모습으로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주칠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객점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왕련화가 옮겨졌다. 그 방에는 좋은 차와 술, 그리고 눈처럼 희고 푹신한 침대, 눈처럼 하얀 손수건이 이어져 나왔다. 그 방의 화로에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객점의 모든 점원의 얼굴에는 웃음이 감돌았다. 주칠칠이 점원 한 사람을 붙잡고 말했다. "방금 내가 계산대에 놓은 돈 중에서 일부를 떼어서 남녀 옷을 몇 벌씩 사오도록 하세요. 그리고 다시 크고 쓸만한 마차를 한 대 구해다가 밖에서 대기시키도록 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부르지 않는 이상 결코 이 방에 들어와서는 안 돼요. 알았어요" 밥 한끼 먹을 시간도 못 되어서 그가 주문한 옷이 들어왔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의 씀씀이가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어떻든 내 돈을 쓰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괜찮아요. 왕련화, 당신이 마음이 아프다는 건가요?" "아니오, 아니오! 결코 조금도 마음이 아프지 않소. 내 목숨마저도 아가씨의 것인데 내가 지니고 있는 돈 몇 푼을 아가씨가 맘대로 쓴다고 해서 내 마음이 아플 리가 있겠소 ? 돈만이 아니라 내 살가죽을 벗긴다 해도 나는 달갑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소?" 주칠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처지를 알기는 아는군요?" "당연히 알고 있죠." "좋아요. 당신이 당신 처지를 알고 있다면 당신에게 몇 가지 물어볼 테니까 솔직히 말을 하세요. 먼저, 내가 당신에게 시킬 일이 한 가지 있는데 내 말을 들을 건가요? 얌전히 말을 듣기만 한다면 당신의 목숨은 그래도 살아날 희망이 있을텐데......." "아가씨께서 어떠한 명령을 내린다해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시키는대로 따르겠소." "좋아요. 첫번째, 당신은 먼저 당신의 모습을 바꾸도록 하세요. 눈살을 찌푸리지 말고 시키는대로 하세요. 나는 이미 당신이 언제나 역용술에 필요한 도구들이 들어있는 상자를 몸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아가씨께서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기를 원하시는거요?" 주칠칠은 잠깐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여자로 변장하세요." 왕련화는 깜짝 놀란 듯 입을 벌리고 한참 동안 주칠칠을 쳐다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자로요? 그것은...... 그것은......." 주칠칠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요? 싫다는 건가요?" "나는, 나는 여자로 변하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여자로 변하면 그 모습이 여자다울지 그게 걱정이 되어서......." "여자다울 거예요. 어쨌든 당신의 생김새는 여자와 같은 모습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좋아요, 그 상자를 꺼내세요. 내가 당신의 상반신 혈도를 풀어드릴 테니까 빨리 손을 쓰도록 해요." "아가씨께서는 내가 어떤 모습의 여자로 분장하기를 원하시는 거요?" "하얀 얼굴에 가는 눈썹, 그리고 눈가에 약간 그늘지게 하세요. 아주 오랫동안 병상에 있었던 사람처럼...... 음, 그리고 머리는 봉두난발을 하게 만드세요. 아주 풀어헤쳐진 그런 모습 말이에요." 여자의 모습으로 변장한 왕련화는 과연 그럴듯해 보였다. 하얀 얼굴에 가는 눈썹, 그리고 눈가에 진 그늘은 오랫동안 병을 앓은 미인의 모습이었다. 주칠칠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옴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련화는 울고 싶은 심정인 듯해 보였다. 주칠칠은 옷을 한 벌 집어들고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이 옷을 사면서 점원은 틀림없이 내가 입을 옷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에게 입히려고 이 옷을 사오도록 했던 거예요." 왕련화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눌러 참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다른 시킬 일이 또 있으시오?" "내 모습도 다른 모습으로 분장시키세요." "아가씨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싶은 거요?" "나는 남자 모습으로 분장시키세요." 왕련화는 또 멍청해진 듯 우물쭈물 말했다. "어, 어떤...... 어떤 남자 모습으로 분장하라는 거요?" 주칠칠이 눈을 몇 번 굴리더니 말했다. "아주 우아하고 말쑥한 귀공자의 모습으로 분장시키세요. 그 모습을 보면 모든 여자들이 다시 한 번 보지 않고는 못배길 그런 귀공자의 모습을 말이에요. 당신이 알다시피 내가 말하는 방법이나 행동은 남자와 비슷하니까 별 이상은 없을 거예요." 왕련화는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차라리 역용술을 몰랐다면 좋았겠소." "만약 당신이 역용술을 몰랐다면 내가 진작 당신을 죽여 버렸을거예요." 주칠칠은 드디어 우아하고 말쑥한 귀공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는 거울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자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어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심랑, 아! 심랑! 만약 지금 당신이 나와 한 여자를 놓고 다툰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나에게 질 거예요." 그녀의 머리에 심랑의 생각이 떠오르자 잠깐 동안 떠올랐던 웃음이 사라지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길거리를 오가는 마차 소리와 말발굽 소리는 열려진 창을 통해 여전히 들려왔다. 주칠칠은 벌떡 일어서서 방문을 열어 젖히고 점원을 불렀다. 그에 따라 점원 한 명이 허리를 굽히고 얼굴에 웃음을 띤채 뛰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점원은 문 입구에 서있는 것이 남자임을 발견하자 깜짝 놀란 듯 우물쭈물 말했다. "공...... 공자, 공자의 병이 이미 나으신 모양이죠?" 주칠칠은 그의 말을 듣고 점원이 자기를 방금 이불에 둘러싸여 방 안으로 운반되어진 왕련화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내 병이 나아서 안 됐다는 거요?" 점원은 재빨리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는 다만 병이 낳으셔서 축하 드리려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침상에 누워있는 왕련화를 보더니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아, 방금 그 아가씨가 도리어 병이 들었군요." 주칠칠은 얼른 둘러댔다. "그녀가 병이 낫소. 그런데 이 객점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요?" "저희 객점은 장사가 매우 잘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며칠 동안은 평상시에 비해 손님이 특별히 더 많습니다. 심지어 공자께서 묶고 계신 이 방만 하더라도 어렵게 구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주칠칠의 얼굴에 긴장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점원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오?" "뭐 장사치들도 있고 지방의 하급 관리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그 인간들은 공자처럼 많은 교양을 쌓지 못한 사람들이라서 약간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 알았소. 가 보시오." 그 방에서 빠져나온 점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별 이상한 사람들을 다 보겠는데...... 도대체 저 두 사람은 어떻게 된거지? 병든 남자의 병이 그렇게 빨리 낫고, 멀쩡하던 여자가 또 그렇게 빨리 병이 들다니 말이야. 그리고 또 돈을 물처럼 쓰고...... 아이, 어떻든 내가 남의 일에 그렇게 상관할 바가 아니지. 은자를 이십 냥이나 받았는데 이상한 점이 있더라도 모른 척 해줘야지." 주칠칠은 점원이 나간 후 문을 걸어 잠그고 고개를 돌려 왕련화에게 물었다. "왕련화, 이곳에 갑자기 이렇게 많은 강호의 인물들이 나타난 것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무슨 큰 일이 발생할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죠? 말해봐요." 왕련화가 말했다. "나도 모르는 일이오." 주칠칠이 탁자를 내리치면서 말했다. "당신이 모른다구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강호에는 매일 많은 일들이 발생하죠. 그런데 본인이 어떻게 그 일들을 모두 안단 말이오?" 주칠칠이 코웃음을 쳤다. "흥!" 이때 주칠칠은 갑자기 또 한 가지의 일을 생각해내고 질문을 던졌다. "전영송 그들이 인의장에 들어서자마자 모두 동시에 죽었소. 도대체 그건 어떻게 된 일이죠?" 왕련화는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아, 그게 사실이오 ? 그러나 본인도 그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데......?" 주칠칠이 날카롭게 말했다. "왕련화, 당신의 짓이 아니란 말인가요?" 왕련화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본인은 지금 이미 아가씨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몸이오. 생사마저도 아가씨의 손에 달려있소. 아가씨가 본인에게 무엇을 시키든지 그대로 따를 뿐이고, 아가씨가 무엇을 묻는다면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솔직히 대답할 수밖에 없소. 그러나 아가씨는 본인도 모르는 일을 말하라고 하니...... 아가씨가 나를 죽인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구려."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흥, 언젠가는 당신의 입에서 모든 비밀들이 솔직히 나오도록 만들고 말거예요. 그렇지만 지금은 잠시 덮어두기로 하죠." 그녀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더니 또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소리를 질렀다. "점원!" 이번에는 점원이 아까보다도 더 빨리 나타났다. 점원이 웃음을 띠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가서 들것 하나를 구해오세요. 그리고 또 두 명의 힘센 여자를 구해다가 그 들것을 들도록 하세요. 내가 내 조카딸을 데리고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게 해 주어야겠어요." 점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점원이 사라진 후 왕련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조카딸이라고? 내가 당신의 조카딸이라고 한다면 너무 내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소? 차라리 당신의 누나나 동생이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겠소? 그리고 또 제일 좋은 건 당신의 처라고 말하는 게 제일 나을거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혹시 더 많이 믿지 않을까요?" 주칠칠이 노한 기색을 띠고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왕련화! 당신의 얼굴이 또 근질근질해지는가 보죠?" "내...... 내 말뜻은 다만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봐서 한 말이었소." "내가 당신을 내 손녀딸이라고 얘기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세요." 잠깐 말을 멈췄던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데 당신의 기해낭혈(氣海囊穴)을 짚어서 꼼짝을 못 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혈(啞穴)까지 짚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할거예요." 왕련화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주 아가씨께서 하시고 싶으신대로 하시면 되지 나에게 말을 해 줄 필요가 있을까요?" "당신이 만약 얌전히만 있는다면 당신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제일 좋은 방법은 눈알마저도 이리저리 굴려서 구경할 생각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똑똑히 기억해 두세요.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당신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 일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더 쉽다는 걸 말이에요." 점원이 구해온 들것은 조그맣고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불에 둘둘 말려진 왕련화가 그 들것 위에 비스듬히 앉자 두 명의 여자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 들것을 번쩍 들어 올렸다. 들것에 앉은 왕련화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왕련화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주칠칠은 속으로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왕련화야, 아! 왕련화! 남을 그렇게 괴롭히더니 이번에는 네 녀석이 씁쓸한 괴로운 맛을 좀 보거라.) 사실 왕련화는 떫더름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들것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 갔으며 주칠칠은 그 뒤를 따라서 천천히 쫓아갔다. 그 도시는 매우 번잡했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는데도 여기저기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왔다. 그리고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에는 과연 적지않은 무림호걸들이 섞여 있었다. 다만 주칠칠은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길거리를 오가는 무림호걸들의 얼굴에서 모두 기쁜 기색이 넘쳐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발생한다해도 결코 흉악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갑자기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길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왼쪽에 서있는 사람은 남자였는데 붉은 얼굴에 사자코, 짙은 눈썹에 큰 눈, 그리고 당당한 기세를 띤 전신을 붉은 옷으로 감싼 장한이었다. 오른쪽에 선 사람은 여자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키가 매우 작아 그 붉은 얼굴의 대한의 가슴께에까지도 차지 않았다. 그 여자는 키가 작아 고깃덩어리 같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에는 커다란 혹이 달려 있었다. 만약 그 붉은 비단옷을 입은 대한이 못생긴 남자였다면 그녀는 그런대로 참아줄만 했으나, 그 대한이 기세가 당당하고 훤칠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옆에 선 여자를 더욱더 초라하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자 자연히 길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놀랍다는 기색과 우습다는 기색이 동시에 나타났다. 그리고 두런두런 소곤대는 소리도 들려왔다. "어떻게 까마귀가 대붕의 짝이 될 수 있지?" 그러나 길거리를 오가던 무림인들의 얼굴에는 이 두 사람을 보자 결코 우습다는 기색이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을 알아본 무림호걸들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주칠칠도 그 두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웅사 교오와 교수란심 여제갈 화사고가 동시에 이곳에 나타난 거지?) 웅사 교오는 사방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수근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나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을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고개를 쳐들고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의 옆에 있는 화사고는 모든 마음을 교오 한 사람에게 기울이고 있는 듯 다른 사람이 그들을 보든 말든 수근대든 말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못생겼으나 그 차림은 이전에 비해 훨씬 단정해져 있었다. 특히 그녀의 얼굴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기쁨이 넘쳐 흐르고 있어, 지난 날의 그녀보다 훨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반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게 하고 있었다. 주칠칠은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보자 곧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기쁨이 바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도 심랑과 같이 있을 때 가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얼굴에 그러한 애정의 기쁨이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던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화사고가 교오와......!) 그녀는 속으로 놀라기는 했으나 그들 두 사람을 향해 마음 속으로부터 축복해 주었다. 화사고는 비록 미녀는 아니었으나 재녀였다. 재녀가 영웅을 짝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진심으로 축복했다. 그들 두 사람은 주칠칠 앞으로 곧장 걸어왔으나 주칠칠의 얼굴을 힐끗 한 번 바라본 다음, 그대로 지나쳐버렸다. 왕련화의 역용술은 과연 천하무쌍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가자 주칠칠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때 교오와 화사고는 마침 술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술집의 간판에는 열빈루(悅賓褸)라고 씌여 있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길거리에는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방금 술집으로 들어간 그들이 누구인지 아시오? 현재 무림계에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무림계의 칠대 고수에 끼어있는 사람들이오." "내가 어찌 모르겠소?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저 두 사람을 모른다면 장님이라고 밖에 할 수 있겠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저 두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그만 두시오. 몇 마디 더 했다가 괜히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좋지 않소." 주칠칠은 속으로 탄식을 하면서 생각했다. (칠대 고수의 이름이 과연 널리 알려지긴 했구나. 다만 애석하게도 이 칠대 고수 중에 김불환처럼 나쁜 인간도 끼어 있으니.......)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얼른 앞서가던 두 명의 들것을 든 여자에게 말했다. "우리도 열빈루에 가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해요. 수고스럽지만 아가씨를 부축해서 같이 올라가도 록합시다." 이때 왕련화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마치 이상한 인물을 발견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다만 그는 주칠칠에게 아혈을 제압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우연한 상봉(相逢) 열빈루는 주칠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주점이었다. 이미 백십여 명이나 되는 손님들이 앉아있어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 그들은 겨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웅사 교오와 화사고는 창가에 있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는 밖의 모습을 내다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언뜻 보기에도 그 자리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들 둘에게 양보한 듯하여 보였다. 주칠칠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교오와 화사고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다시 그녀를 힐끗 쏘아봤다. 그리고는 얼른 두 사람이 가볍게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주칠칠은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못 본척 큰 걸음걸이로 멀찍이 떨어진 구석 자리에 있는 탁자로 걸어가 앉았다. 왕련화는 두 명의 여자에게 들려서 주칠칠이 앉아 있는 옆에까지 날라져 왔다. 그들의 모습은 얼핏 보기에도 강호의 인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의를 하지 않았다. 이때, 주칠칠은 그녀들 옆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밀담을 나누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이 일이 이렇게 강호인들을 놀라게 할 줄은 생각지 못했구려. 심지어 저 두 분까지 왔으니 말이오." 주칠칠은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 모습이 매우 눈에 익은 듯하였으나, 도대체 어디서 만났던 사람인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붉은 입술에 하얀 이를 가진, 옷을 단정하게 입은 매우 잘생긴 젊은 남자였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일은 원래 작은 일이 아니었소. 내가 보건데 저 두 분 외에도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이 더 올 것이오. 그리고 그 사람들도 어쩌면 이 열빈루에 올 지도 모르오. 기다려 보시오. 내 말이 틀림없을 테니까." 그 소년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무림인들이 이 곳에 온 이상, 자연히 이 열빈루를 찾게 되겠지요. 비록 이 열빈루의 음식이 비싸고 맛이 없어도 이곳의 주인장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이곳을 들를 것이오." 찻잔을 입가에까지 가져갔던 주칠칠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암암리에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그들이 말을 하는 일이라는 건 어떤 일일까? 어떤 일이기에 이렇게 많은 강호인들을 이곳에 모을 수 있었다는 게지? 그리고 또 이 술집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지? 술집 주인도 강호상에 이름을 날린 호걸이란 말인가?) 주칠칠은 이리저리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 주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열 사람 중 여덟 사람은 강호 호걸들인 듯해 보였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비록 일반인이 입는 옷과 다른 점이 없는 듯했으나 그들의 표정이나 행동거지, 그리고 술을 마시는 모습은 강호 호걸들임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얼굴을 활짝 펴고 웃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굳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잘 생겼고,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매우 못생긴 사람도 있었다. 주칠칠은 한참을 두리번거렸으나 이상한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순간 그녀의 눈이 한 사람의 얼굴에 머무르는 순간 그녀는 그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핏 보기에 그 사람은 조금도 이상해보이는 점은 없었다. 술집에 가득찬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주칠칠의 눈길이 머문 그 사람의 모습은 가장 평범한 사람 중의 하나인 듯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렇게 평범하고 아무데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사람에게서 주칠칠은 평범하지 않은, 그리고 아주 기이한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도대체 그런 느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주칠칠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나이는 약 오십 세 전후인 듯해 보였다. 누런 얼굴에 가는 눈썹, 작은 눈, 그리고 염소 수염을 몇 가닥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몸에는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여우털로 짠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 사람은 장사가 제법 잘되는 장사치의 한 사람인 듯하기도 했다. 그 사람의 주량은 대단한 듯해 보였는데 주칠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을 본 것이 있다면 바로 주량이 대단하다는 그 점 하나 때문이었다. 그의 앞에 놓여있는 탁자에는 여덟 가지의 안주와 일곱,여덟 개의 술병이 놓여 있었으며, 그 숫자와 마찬가지로 일곱,여덟 개의 술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사람은 한 손으로 몇 가닥 안 되는 염소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다른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눈을 반쯤 내리감은 채 술맛을 음미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술을 홀짝거리면서 어떤 때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웃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다. 그 일곱,여덟 병의 술은 모두 다른 술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일곱,여덟 종류의 술을 한 잔에 쏟아부어 맛을 보면 매 가지가지마다의 술이 갖는 독특한 맛을 음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곱,여덟 개의 술잔을 따로 차려놓고 한 가지씩 맛을 보는 모양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 사람은 술을 좋아하며 술맛을 아는,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미워할 줄 모르는, 자기 자신에 도취해 사는 늙은이에 불과한 듯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주칠칠이 그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마음 속에서 혐오감과 두려움이 솟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 자신도 도대체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그를 한 번 바라보고 더이상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치 그 사람을 한 번 더 바라보면 어떤 불행한 재난이나 닥칠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주칠칠의 이러한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노인은 자기 앞에 놓여있는 술잔의 세계에 도취해 있었다. 이때, 왕련화도 그 노인을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상당히 기이하다는 기색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러한 왕련화의 모습을 본 주칠칠은 참지 못하고 아혈을 풀어주고는 낮은 목소리로 왕련화의 귀에 대고 물었다. "저 사람을 알아요?" 왕련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이순간, 갑자기 아래층에서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웃음소리에 이어서 어떤 사람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형님께서는 어디에 갔다가 지금에야 나타나십니까? 저희들이 아주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형님께서는 도대체 어디에서 혼자 재미를 많이 보셨는지...... 진작 저희들에게 연락이라도 주셨어야죠." 다른 한 사람의 호방한 웃음소리와 그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무슨 재미를 봤다는 거요? 이 몇칠 나는 파발마처럼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녔소. 만약, 양씨 둘째를 만나지 못했다면 자네들이 이곳에 있는 줄도 모를 뻔했소." 주칠칠은 그 사람을 보기도 전에 그 호방한 웃음소리와 말소리만 듣고도 아래층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피어 올랐다. 왕련화도 아래층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주칠칠과는 달리 주름이 패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웅묘아였던 것이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몇 사람이 가죽모자를 비스듬히 젖혀쓰고, 웃도리를 풀어헤친 장한들이 우르르 이층으로 몰려 들어왔다. 웅묘아는 그 사람들 속에 섞여 만면에 웃음을 띤채 그 장한들에게 휩싸여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을 본 점원들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돌았다. 그리고 몇 명의 점원이 서로가 눈짓을 교환하더니, 그 중 두 사람이 그 대한들 앞으로 다가섰고 나머지 한 사람은 뒤로 슬쩍 빠져 안채로 통하는 듯한 주렴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렸다. 주칠칠은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기리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웅묘아는 웃옷을 풀어 젖힌 채였고, 허리에는 여전히 그 호로병을 차고 있었다. 이때 그는 한쌍의 그 크고 둥근 눈을 들어 웃음을 띤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점원 한 명이 그의 앞으로 다가서서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을 띠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주점은 손님이 꽉 찼으니 여러분께서는 다른 집을 찾아 보시지요?" 웅묘아는 짙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면서 말했다. "저곳에 빈자리가 있지 않소?" 점원이 냉랭하게 말했다. "저 빈자리는 이미 예약이 된 자리입니다." 웅묘아의 옆에 서있던 키가 비교적 큰 대한이 노한 기세로 말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예약을 했다는 거요? 개 눈에는 개똥만 보인다더니, 우리를 무위도식이나 하는 시중잡배로 보는거요? 우리에게도 이 술집에서 술 마실 만큼은 충분한 은자가 있소?" 점원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은자를 갖고 계시다면 다른 집을 찾아보시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설혹 이곳에 빈자리가 있다해도 오늘 어르신들께는 술을 팔 수가 없습니다." 그 대한은 점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갈을 터뜨리더니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원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대한이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재빨리 그 공격을 피해 옆으로 빠져 나갔다. 그와 더불어 주위에 둘러섰던 점원들이 동시에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 대한은 소매를 걷어 부치고 두 눈을 부릅뜨더니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즉각 '펑!펑!' 하고 서로가 주먹질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란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칠 명의 점원들이 갑자기 동쪽으로 휙, 서쪽으로 휙 날아갔다. 그리고 어떤 점원들은 머리를 싸매고 밑에층으로 굴러 떨어졌다. 주칠칠은 속으로 박수를 치며 성원을 보냈다. (웅묘아, 더 세게 때려 주세요.) 주점을 가득 메웠던 호걸들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어수선한 수작에 주위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으나, 이순간 깜짝 놀란듯 수백 개의 눈이 모두 웅묘아의 몸에 쏠렸다. 웅묘아는 여전히 히죽거리고 웃으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직접 자리를 찾아서 앉도록 하지. 점원 녀석들이 시중을 들지 못하겠다면 우리가 직접 술이랑 안주를 갖다 먹으면 되지 않겠어. 어떻든 오늘 우리는 이 열빈루에서 꼭 술을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으니까?" 그를 에워쌌던 대한들이 동시에 웃으면서 말했다. "맞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이때 주칠칠의 옆에 앉았던 미소년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과연, 사내 대장부로군. 대단한 솝씨야." 그 말을 받아서 다른 한 소년이 말했다. "솝씨는 대단하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오늘은 저 친구 욕좀 보게 생겼는데......." 이때 이층 주점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모두 안채로 통하는 듯한 죽렴을 걷고 몇 사람이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웅묘아도 그들이 나타나자 빈 자리로 가던 걸음을 멈췄다. 왁자지껄하던 주점이 즉각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주칠칠은 그 옆자리에서 얘기하는 그 미소년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웅묘아는 결코 욕을 보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그녀는 죽렴을 걷고 나오는 몇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보는 순간, 얼굴색이 변했다. "아니! 셋째 형부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그때, 옆자리에 앉았던 미소년이 또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친구가 어떻게 오늘 이곳에 나타날 수 있었지?" 다른 한 사람이 그 말을 받았다. "확실히 신기한 일이로군. 비록 저 사람이 이곳 술집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이곳에 올까 말까한 사람인데. 나도 저 친구가 어떻게 오늘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려." 다시 미소년이 낮게 말했다. "저 친구가 이곳에 있는 이상, 말썽을 일으킨 저 젊은 친구는 틀림없이 욕을 볼 것 같군?" 그들이 말하는 저 친구라는 사람은 바로 그 죽렴을 걷고 나온 사람들 중 가장 앞장 서서 나온 사람이었다. 나머지 몇 사람은 그 사람을 중심으로 마치 봉황을 에워싼 참새들처럼 주위에 도열을 해 섰다. 그 사람은 키는 크지 않았으나 그 기세가 대단했다. 몸에 걸치고 있는 남색 장삼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기이하리 만큼 몸에 꼭 맞게 만들어져 있어 상당히 편한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는 젊지도 늙지도 않았으며 얼굴은 너무 희지도 검지도 않았고, 눈도 그리 크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감히 마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날카로운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 사람의 턱에는 짧은 수염이 나 있었는데 아주 깨끗하게 손질이 되어 있었다. 그 깨끗이 손질된 수염이 그 사람의 엄숙한 얼굴에 약간의 풍류의 냄새를 풍기게 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사람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아주 굳센 기상을 드러내주는 사람이었다. 이순간, 이처럼 기세가 대단한 인물이 나타나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 사람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두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말썽을 일으킨 젊은 소년이 틀림없이 욕을 보겠군.......) 그러나 웅묘아는 여전히 얼굴 가득 웃음을 띤채, 한쌍의 큰 눈을 들어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그 사람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왔지만 웅묘아는 전혀 관계치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남색 장삼을 입은 사람은 웅묘아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주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면서 아는 사람과는 몇 마디 수작을 건네며 웃음을 띠기도 했다. "친구들께서 어렵사리 오셨는데 제가 미리 마중을 못해서 죄송합니다. 다만......." 웅묘아가 크게 웃으며 그의 말을 가로채어 말허리를 잘랐다. "당신은 친구들이 당신에게 술 한 잔 대접하라고 청할까봐서 진작부터 안채에 숨어 버렸던 게 아니오?" 남색 장삼을 입은 사람이 웅묘아의 말을 못들은 척 하고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소홀한 점이 있다면 여러분께서 널리 양해를......." 웅묘아가 또 그의 말을 가로채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곳은 확실히 손님 접대에 소홀한 점이 너무 많소. 도저히 양해를 해드릴 수가 없구려." 남삼인이 또 말을 이었다. "여러분께서는 마음껏 술을 드시고......." 웅묘아가 또 그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옆에서 다른 사람이 시끄럽게 하고 있는데 어떻게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단 말이오?" 남색 장삼을 입은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웅묘아에 의해서 중단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화난 기색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천천히 눈을 웅묘아에게 돌렸다. 웅묘아가 말했다. "왜 나를 보는 거요? 모르는 사람이라서 이상도 하다는 거요?" 남색 장삼을 입은 사람이 말했다. "확실히 귀하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모르는 게 더 좋소. 아는 사람끼리는 싸움을 할 수가 없으니까?" 남삼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형씨께서 다른 일을 하시려면 어려운 점이 많겠지만 저와 몇 수 겨루는 것은 아주 쉽겠지요. 그렇지만 이곳에는 친구들이 가득차 있으니 아예 우리 두 사람이 밑으로 내려가서......." 웅묘아가 말했다. "구경꾼이 없는데 무슨 재미로 싸운다는 거요?" 마침내 남삼인이 안색이 약간 변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귀하는 시비를 걸러 오신거로군?"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점원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 왔으니 나도 당연히 받아줘야 되지 않겠소?" 남삼인이 앙천광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좋소이다. 본인은......." 웅묘아가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소. 이왕 주먹질을 할 바에는 당신의 이름을 알 필요까지야 있겠소?" 남삼인의 말소리에는 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단히 무례한 젊은이로군." 웅묘아가 대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다면 나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사람이오. 그러나 일단 누군가가 나를 한 번 괴롭히면 아마 그 사람은 일평생 나에게 시달려야 할 거요." 남삼인 곁에 서 있던 두 명의 대한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노갈을 터뜨리며 동시에 뛰쳐나와 네 개의 국그릇만한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내려가!?" '내려가'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과연 윗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두 대한의 무공은 약하지 않았다. 주먹 바람이 날카롭게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사람은 왼쪽에서 옆으로 쳐냈으며, 한 사람은 오른쪽에서 비스듬히 밑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 네 개의 주먹은 웅묘아를 꼼짝못하게 가둬버렸다. 그러나 웅묘아가 그들의 공격을 맞받는 순간, 웅묘아의 두 팔은 마치 무쇠로 만든 듯 두 팔에 부딪힌 두 대한의 주먹은 갑자기 무쇠덩이를 내리친 듯 마비되어 버렸다. 웅묘아는 그 기세를 타 그 대한의 나머지 한 팔씩을 잡고 그들이 앞으로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끌어당겨 뒤쪽으로 홱 젖혀버렸다. 그러자 그 두 대한의 팔구십 근은 족히 나갈만한 몸둥아리가 마치 줄 끊어진 연처럼 우당탕 소리를 내며 동시에 아래층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의 이 한 동작에 그곳을 가득 메웠던 무림호걸들은 얼굴색이 동시에 변했다. 심지어 웅사 교오와 화사고마저도 깜짝 놀라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웅묘아와 같이 왔던 패거리들은 웅묘아가 한 번에 두 대한을 떨궈버리자, 왁자지껄 갈채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귓전을 울리는 박수소리 속에서도 한쪽 자리에서 앞에 여덟 개의 술병과 술잔을 놓고 술맛을 음미하던 그 노인은 계속 술만 마실 뿐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웅묘아가 그 남삼인을 바라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소. 당신 차례인 것 같은데......." 남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장삼을 벗어서 차곡차곡 개어 그 옆에 서 있는 대한에게 넘겨 주면서 말했다. "공격하시오!" 생사를 건 싸움에서 남삼인이 이처럼 침착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틀림없이 그가 필승의 자신이 있기 때문인 듯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인간이 이처럼 침착해질 수 있단 말인가. 웅묘아가 그런 남삼인의 태도를 보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싸우려면 그냥 싸우도록 합시다. 무슨 귀찮은 예를 그렇게 차리고 있소? 당신은 지금 나를 한 주먹에 때려 죽이고 싶을텐데?" 그러나 남삼인은 여전히 표정을 변하지 않았으며 포권을 하며 말했다. "몇 수 가르침을 바라오." 웅묘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그렇게 귀찮게 구는 거요? 내가 이미 당신께 말하지 않았소? 다른 사람이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면 나도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이오. 당신이 만약 먼저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공격하겠소?" 남삼인이 말했다. "당신은 절대 먼저 공격을 할 수 없다는 거요?"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먼저 공격을 해서 싸움을 해본 적이 없소?" "정말이오?"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한테 거짓말을 하겠소? 하하! 내가 여기에 가만히 서있을 테니까 내 몸 어느 구석이라도 당신이 공격하고 싶은 데를 마음대로 공격해 보도록 하시오." 남삼인은 웅묘아의 전신 상하를 몇 번 훑어보더니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의 옷을 받아든 대한의 손에서 다시 그 장삼을 집어 들고 손을 펼쳐 툭툭 털어 접힌 옷을 편 다음 다시 입기 시작했다. 웅묘아의 얼굴에 이상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도대체 무얼 하는 거요?" 남삼인이 천천히 말했다. "나도 지금까지 싸움을 할 때, 먼저 공격해본 적이 없소. 당신이 먼저 공격하려 하지 않는 이상, 나도 먼저 공격할 수 없는 것 아니겠소? 우리의 싸움은 아마 이뤄질 것 같지 않소이다." 말을 마친 그는 포권을 하고 사방을 휘둘러보며 얼굴에 웃음을 띤채 말을 이었다.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시고 마음껏 드시고 마시도록 하십시오. 오늘 여러분께서 마신 술값은 전부 제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그가 나왔던 죽렴 뒤로 천천히 사라져버렸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곳을 가득 메운 모든 사람들이 생각도 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묘아만 멍청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가득 메운 모든 사람 역시 멍청한 듯 얼굴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묘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그곳에 있던 무림호걸들은 모두 근래에 보기 드문 큰 싸움이 벌어질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벼락 소리만 컸을 뿐 비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자리를 가득 메웠던 모든 사람들 중에 주칠칠은 그들 두 사람이 싸우기를 바라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들 둘 중 또 누가 지든, 누가 이기든 주칠칠의 마음이 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들 두 사람이 싸움을 하지 않고 서로 물러서자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우습기도 했다. (반드시 이길 자신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 그 성격은 여전하군.) 순식간에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던 주점이 또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졌다. 어떤 사람은 그들 둘을 비웃었고, 또 어떤 사람은 귓속말로 의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약간의 실망의 기색을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든, 공짜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웅묘아와 그의 패거리들은 마침내 탁자 하나를 에워싸고 둘러 앉았다. 그리고 그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술과 안주가 끊임없이 날라져왔다. 주칠칠은 눈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포권을 하고 옆자리에 앉은 그 미소년을 향해 말했다. "자, 한 잔 하시지요?" 그 소년은 깜작 놀란 듯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역시 마찬가지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드시지요." 주칠칠은 그의 얼굴에 나타난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고 속으로 우스웠으나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형씨께서 이곳으로 와서 한 잔 같이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소년이 우물쭈물 말했다. "그...... 그것은, 그것은 형씨의 친척분이 옆에 계시는데 제가 어찌 귀찮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칠칠이 말했다. "괜찮소. 저 애는 무슨 아가씨도 아니고 젊은 부인도 아니오. 솔직히 말하면 저 애는 근본적으로 여자라고 할 수가 없는 애요." 그순간 소년의 눈이 왕방울 만큼 커졌다. 그는 주칠칠 옆에 여자로 분장한 왕련화를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저게 여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이지? 저 사람 혹시 미친 사람이 아닐까?) 주칠칠은 그 소년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너무 우스워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입술을 깨물며 어렵게 웃음을 참고 말했다. "제 말은 내 조카딸이 지금은 비록 몸이 불편하지만 평상시의 성격이 꼭 남자 같다는 거요. 형씨께서는 어려워할 필요없소. 이곳에 와서 같이 한 잔 드십시다." 그 소년은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런 의미였군요?" 그는 눈을 들어 주칠칠을 몇 번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그의 눈에 남자로 분장한 주칠칠은 밉상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더 망설이던 그 소년이 마침내 포권을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청하신다면 제가 약간 실례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마주앉아 술잔을 들어 한 잔씩 마셨다. 주칠칠의 눈은 쉬지않고 그 소년을 살펴보고 있었다. 주칠칠의 눈에 그 소년은 수줍은 듯, 난처한 듯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 말을 했다. "형...... 형씨께서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신지......?"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형씨의 얼굴이 상당이 눈에 익은데 도대체 어디서 만나 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그 소년이 신음을 하면서 말했다. "아, 형씨의 대명이 어떻게 되시는지 말씀을 해주실 수......." 주칠칠은 눈을 몇 번 굴리고 나서 말했다. "본인은 심랑이라고 하오." 순간 그 소년의 얼굴에 깜짝 놀란 기색이 떠오르더니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형씨께서 심랑이란 말씀이십니까?" 그의 커다란 목소리는 도리어 주칠칠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녀는 얼른 웅사 교오와 화사고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그 주점은 왁자지껄 시끄러웠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으며 그들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사람도 없었다. 주칠칠이 비로소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말했다. "당신은 나를 알고 계시오?" 그 소년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제가 비록 심 상공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심 상공의 대명은 일찍이 듣고 있었습니다." 주칠칠이 말했다. "아, 내 이름이 그렇게 널리 알려졌다는 건가요?" 그 소년이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심 상공께서는 비록 허명을 탐하지는 않으시지만, 제 몇몇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오늘날 무림계의 제일 인물은 심 상공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심 상공을 직접 만나뵙게 되는 영광을 얻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군요." 어떻게 된 일인지 주칠칠은 심랑을 뼈에 사무치게 원망하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이 심랑을 칭찬하는 말을 듣자 기쁜 마음이 끓어 올랐다.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과찬이시오. 과찬이시오. 그렇지만 형씨의 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 그 소년이 말했다. "저는 승현(勝泫)이라고 합니다." 주칠칠이 말했다. "승현이라구요? 그렇다면 혹시 승가보(勝家堡)의 공자이신지?" 그 소년이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이름입니다." 주칠칠이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어쩐지 상당히 낯이 익어서 이상하다고 생각 했더니, 원래 당신은 승영(勝。)의 동생이셨구려. 형씨의 얼굴 모습은 확실히 형씨의 형님인 승영과 비슷한 데가 있소." 승현이 얼굴색을 변하면서 물었다. "심 상공께서는 저희 형님을 알고 계십니까?" 주칠칠이 말했다. "알지요, 알고말고요." 승현의 목소리에 기쁜 기색이 넘쳐 흐르면서 말했다. "제가 이번 승가보에서 나왔던 것은 바로 형님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심 상공은 천하의 일을 모르시는 게 없는 분이니 틀림없이 저희 형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주칠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갑자기 승영이 혹시 전영송 등과 같이 인의장으로 같으며, 전영송 등과 더불어 이미 인의장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얼굴을 역용한 후 얼굴색이 비록 변했다 해도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억지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대략 한 달쯤 전에 댁의 형님을 뵌 적은 있소이다만,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고 있소이다." 승현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제 형님께서 집을 나가신 지 이미 팔 년이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두 부모님께서 매우 걱정되셔서 저를 형님을 찾아오도록 내보냈던 겁니다." 주칠칠은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제가 보건데, 이곳에 무림호걸들이 많이 몰려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무슨 큰 일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도대체 어떠한 일인지 형씨께서는 혹시 알고 계시는지......?" 승현이 말했다. "이 일은 무림계의 큰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방의 방주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기 때문에 개방 제자들이 무림호걸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서 이곳으로 초청했던 거죠. 당연히 개방 방주를 선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그 일이었군요." 이 일은 왕련화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왕련화를 바라보는 순간, 승현의 눈빛이 수시로 슬쩍슬쩍 왕련화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소년은 이미 상당히 많은 말을 했다. 어떤 때는 얼굴에 기쁜 기색이 나타났으며, 어떤 때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나타났으며, 어떤 때는 웃고 어떤 때는 탄식을 했으나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얘기를 하든, 말을 할 때마다 그는 슬쩍슬쩍 왕련화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왕련화는 본래 풍류를 좋아하고 잘생긴 인물이었다. 지금 여자로 분장한 왕련화는 주점의 흐릿한 등불 아래서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할 만 하였다. 특히 왕련화의 수줍음과 분노와 난처함을 머금은 듯한 눈은 더욱 사람의 혼백을 빼앗아갈 듯 하였다. 그의 눈에는 난처함과 원망스러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왕련화의 그러한 모습을 훔쳐보는 승현은 점점 머리가 흐리멍텅해짐을 느끼는 듯하였다. 그러한 승현의 모습을 바라보는 주칠칠은 웃음을 참느라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녀는 평생 이처럼 어이없고 우스운 일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눈을 한 번 돌리고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승 형, 승 형이 보기에 내 이 조카딸이 어떻소?" 승현의 얼굴이 즉각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난처한 듯 기침을 해댔다. "그것은, 허허...... 그것은......." 그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처한 잔기침만 계속 해댈 뿐이었다. 주칠칠이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 내 이 조카딸은 나이가 적지 않은데 너무 눈이 높아서 여태까지 상대를 못 찾고 있소이다. 형씨께서 만약 기회가 있다면 혹시 내 조카딸의 짝이 될 사람이 있는지 좀 주위를 살펴봐 주시기 바라오." 승현이 얼굴을 붉히고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용기를 내서 말했다. "혹...... 혹시, 혹시 어떤 인물을 원하시는지......?" 주칠칠이 말했다. "첫째, 영준한 소년일 것, 둘째, 세가공자(世家公子) 출신일 것, 셋째, 아! 그렇소이다. 승 형과 같은 그러한 인물이면 충분하겠지요." 승현의 얼굴에 갑자기 기쁨과 부끄러워하는 듯한 기색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더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왕련화를 몇 번 힐끗 훔쳐 보았다. 왕련화는 난처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당장 주칠칠의 혀부리를 뽑아내고 승현의 두 눈알을 빼버리고 싶었다. 주칠칠은 허리를 굽힌 채 배를 감싸 안았다. 너무 우스워 눈물이 찔끔찔끔 삐어져 나왔으나 그녀는 웃음소리를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머리는 이미 탁자 아래까지 쳐박힌 채 키득거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한 사람이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랑! 심 공자!" 주칠칠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드는 순간, 펑! 하고 그녀의 뒷통수가 탁자에 부딪혔다. 그녀의 눈에서 별이 반짝였으나 그녀는 더이상 다른데 신경을 쓸 여가가 없었다. 얼른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웅사 교오가 창문을 열어 젖히고 창밖을 향해 크게 부르고 있었다. "심랑!" 순간 웅묘아의 몸이 마치 화살처럼 교오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승현이 이상하다는 기색으로 물었다. "심 상공은 이곳에 계신데 왜 저 사람들은 밖을 향해 심 공자를 찾는 거죠?" 주칠칠이 당황한 듯 얼른 우물거렸다. "그......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소? 승현이 말했다. "흠, 생각컨데 틀림없이 동명이인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주칠칠은 속으로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겠지요. 세상에 동명이인은 원래 많은 법이니까요." 그녀는 웅묘아가 이미 밖으로 뛰쳐 나간 이상 틀림없이 심랑을 끌고 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수시로 눈을 들어 계단쪽을 힐끗거렸다. 그녀의 심장은 펑펑 크게 뛰기 시작했으며, 금방 밖으로 터져나올 듯했다. 지금 그녀는 놀람인지 기쁨인지, 원망인지 저주인지 모를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주칠칠이 예상했던대로 과연 웅묘아는 심랑을 끌고 들어왔다. 두 사람이 이층으로 올라서기도 전에 이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심랑이 웃으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웅 형! 눈썰미가 대단하군요." 웅묘아가 웃으며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심 형을 발견한 게 아니오. 다른 사람이 본거요." 주칠칠은 이를 깨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쥔채 계단쪽을 똑바로 주시했다. (이 원수!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고 원망하지 않을 수도 없는 원수! 왜 또 당신이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요, 왜 또 내 앞에 나타났단 말인가요?) 그녀는 심랑의 머리가 계단쪽에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어서 그의 짙고 굵은 눈썹, 그리고 지혜를 담은 듯한 눈, 담담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나타났다. 바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미소가 나타났던 것이다. 사람은 모두 웃을 줄 안다. 그러나 어째서 그의 웃음은 주칠칠을 이렇게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일까? 주칠칠은 두 주먹을 부르쥐고 있었으나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두 주먹으로 심랑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영원히 떠올리지 못하게 뭉개버리고 싶었다. 심랑에 이어서 웅묘아가 나타났으나 김무망은 보이지 않았다. 김무망이 그들과 같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주칠칠의 주의를 끌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 심랑이 보이는 이상, 그녀의 머리에는 다른 생각은 더이상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술집을 가득 메웠던 무림호걸들의 눈은 모두 심랑에게 쏠려 있었다. 심지어 술맛을 음미하고 있던 그 노인의 표정도 약간 긴장한 듯한 표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웅사 교오가 심랑이 이층으로 올라서는 순간, 큰 걸음걸이로 다가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 공자께서는 아직도 이 교오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 교 대협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을 알아본 것도 바로 이 분이오." 교오가 웃으면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 공자께서는 당연히 제가 앉았던 탁자에 같이 와서 앉으셔야 될 겁니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장사꾼이나 됐으면 좋을 사람인 듯하오." 교오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비단 심 형을 제 자리로 모실 뿐만 아니라 당신까지도 같이 모시고 싶소. 만약 이 교오의 눈이 멀지 않았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사귀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친구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또 당신이 이미 심 공자를 알고 있는 이상, 당신을 꼭 사귀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오." 웅묘아도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좋소. 당신 자리에 가서 같이 앉읍시다. 어떻든 오늘 먹고 마시는 것은 공짜니까 어느 자리에 앉든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다만, 내 형제들이 오래 전부터 심 공자를 한 번 뵙기를 원했으니 먼저 그들에게 우리 심 형에게 술 한 잔씩을 권하도록 기회를 주도록 합시다." 교오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한 잔이오? 오늘 마시는 술은 공짜요.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인색하오?" 웅묘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그렇소, 그렇소. 내가 말을 잘못했소. 한 잔은 충분하지 않지요. 최소한 열 잔 이상은 권해야지요." 웅묘아와 같이 몰려왔던 패거리들도 그들에게 다가와 한꺼번에 우 하고 심랑을 에워싸고 화사고가 앉아 있는 쪽으로 몰려갔다. 그들의 소란에 술집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칠팔 명이나 되는 웅묘아의 패거리들이 서로 앞다투어 심랑에게 술을 권했으며, 웃음소리, 부르는 소리 등이 다른 사람들의 고막을 터뜨릴 듯 시끄럽게 왁자지껄 일어났다. 주칠칠이 갑자기 탁자를 내리치더니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를 모시고 가도록 합시다." 승현이 말했다. "형씨께서는 왜 갑자기 가시려는 거죠?" 주칠칠이 한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난 저런 인간들을 보기가 싫어요." 그녀는 입으로는 비록 저런 인간들을 보기가 싫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은 뚫어질듯이 심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심랑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를 악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시 두 여자를 재촉하여 왕련화를 부축하게 한 다음 큰 걸음걸이로 계단쪽으로 걸어갔다. 승현은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다가 갑자기 주칠칠쪽으로 달려와 물었다. "심 형께서는 어느 곳에 묶고 계신지요?" 주칠칠이 어떻게 그와 더이상 대화를 나눌 마음의 여유가 있을수 있겠는가 ? 그녀는 되는대로 대답했다. "바로 저 집. 가장 큰 객점에 묶고 있소." 말을 마친 그녀는 퉁퉁퉁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그 계단의 판자조각을 한 발로 짓뭉개버리고 싶었다. 승현은 멍청히 서서 사라져가는 주칠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심 상공이란 분은 성격이 괴퍅스럽기도 하군!" 갑자기 그는 이쪽 심 상공은 사라졌지만 저쪽에 여전히 다른 심상공이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그쪽을 살펴보았다. 그쪽의 심 상공은 이미 술을 열일곱, 여덟잔째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고, 심지어 그의 눈에는 조금도 술기운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으며 그 눈빛은 여전히 맑고 투명하고 날카로웠다. 주점을 가득 메운 강호 호걸들의 숱한 눈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호기심과 흠모와 찬미의 빛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연히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질투와 혐오스러워하는 표정도 보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어떤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든 심랑의 얼굴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악의에 찬 눈빛이 그를 바라보아도 그는 조금도 그것이 싫지 않았으며, 호기심과 흠모와 찬미의 눈빛으로 바라보아도 그는 조금도 득의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주위의 시선에 의기소침해하거나 득의하는 기분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심랑은 어떠한 상황아래에서라도 그리고 술을 많이 마셔도 언제나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의 정신을 영원히 맑게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상당히 흠모하고 찬탄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심랑은 그 자신이 볼때 그것은 일종의 고통이었다. 인간이 언제나 맑은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가 느끼는 고통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게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어떤 때는 약간은 어리숙하고 미숙한 면이 있어야 편할 때가 많은 법이다. 이순간 심랑은 기쁨에 차 크게 소리지르고 술을 마시는 웅묘아를 바라보면서 가슴 속에서 흠모의 마음이 끓어오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웅묘아는 어떤 때는 확실히 모든 일을 젖혀두고 자신에 도취되어 자기 기분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웅묘아가 즐거울 때는 그 자신이 폐부 깊숙이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즐거운 기색을 나타내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심랑은 그럴 수 있는 웅묘아가 부러웠던 것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기쁨에 차 환히 웃는 얼굴이었으나, 그의 가슴에는 쉬지않고 고통에 찬 사람의 그림자들이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주칠칠의 모습, 백비비의 모습, 그리고 김무망의 모습....... 주칠칠은 자신의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칠칠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다. 그는 주칠칠을 위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주칠칠에게 매정하게 대했던 것은 바로 그가 그녀에게 너무 많은 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아! 주칠칠이 어떻게 자신의 이러한 마음 씀씀이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백비비도 마찬가지다. 그 외롭고 연약한 아가씨는 지금 이순간 악마의 손에 떨어져 있다. 그는 비록 그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녀의 운명이나 장래를 위해 자기 자신이 타당한 도움을 주어야만 할 책임이 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녀에게 만약 불행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자신은 양심의 가책으로 상당히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 그녀를 악마의 손에서 구해내려 했으나 도대체 어디로 가서 어떻게 그녀를 찾아낸단 말인가? 그리고 김무망도 그의 곁을 떠나갔다. 김무망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떠나기를 원해서 떠나간 사람이다. 김무망과 같은 남자가 만약 떠나가기를 원한다면 아무도 그를 못가게 막을 수는 없었다. 심랑은 이미 김무망의 굳은 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의 곁에서 떠나가는 것을 억지로 막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몇 마디 물어보았을 뿐이다. "어느곳으로 가실 생각이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김무망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심랑은 근본적으로 김무망의 대답을 바라지도 않았다. 김무망의 마음 씀씀이를 심랑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무망은 자신이 불구가 된 이상, 더이상 심랑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심랑은 일반인과 다른 사람이었다. 심랑이 하고자 하는 일은 많고 책임 또한 막중하다는 것을 알고 김무망은 그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떠나갔던 것이다. 김무망, 그의 원한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갚아야 한다. 그는 비록 이미 불구의 몸이었으나 아직 그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었고, 완전히 못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혼자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해치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 혼자 경천동지할 일을 해치우려고 결심을 했던 것이다. 심랑은 그러한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의 풀어 헤쳐진 장발이 바람에 나부끼며 그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는 사라지는 김무망의 모습을 눈으로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김무망의 뒷모습에서는 옛날의 그 굳센 기상을 찾아볼 수도 없었으며, 그의 어깨도 약간 비스듬하게 치우쳐져 보였다. 심랑은 그러한 김무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아련한 슬픔을 느꼈다. 이러한 일들이 심랑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그가 이러한 괴로움 속에 언제나 빠져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심랑의 얼굴에 언제나 감돌고 있는 미소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웃음소리. 그를 둘러싼 웃음소리 속에서 추운 겨울밤은 아주 따뜻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웅묘아가 대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자, 심랑! 다른 사람은 모두 당신과 이미 건배를 했소. 나 혼자만 남았소. 나는 당신과 최소한 세 잔 이상은 건배를 해야겠소. 오늘 여기에서 심 형, 당신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려서 나 웅묘아가 생각할 수 있는 기쁜 일 중에 가장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있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이렇게 빨리 웅 형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소." 웅묘아가 물었다. "주 아가씨는 어디로 갔소? 그리고 김무망, 김 형은 또 어디로 갔소?" 심랑은 한참을 묵연히 앉아 있다가 술잔을 들어 고개를 쳐들고 단번에 입 속에 털어 넣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웅 형께서 차후에 자연히 알게 될 거요." 웅묘아는 더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들이 심랑 곁에 같이 있지 않게 된 사연에는 말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 일은 무림계의 큰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방의 방주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기 때문에 개방 제자들이 무림호걸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서 이곳으로 초청했던거죠. 당연히 개방방주를 선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그 일이었군요." 이 일은 왕련화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왕련화를 바라보는 순간, 숭현의 눈빛이 수시로 슬쩍슬쩍 왕련화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소년은 이미 상당히 많은 말을 했다. 어떤 때는 얼굴에 기쁜 기색이 나타났으며, 어떤 때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나타났으며, 어떤 때는 웃고 어떤 때는 탄식을 했으나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얘기를 하든,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그는 슬쩍슬쩍 왕련화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왕련화는 본래 풍류를 좋아하고 잘생긴 인물이었다. 지금 여자로 분장한 왕련화는 주점의 흐릿한 등불 아래서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할 만 하였다. 특히 왕련화의 수줍음과 분노와 난처함을 머금은 듯한 눈은 더욱 사람의 혼백을 빼앗아갈 듯 하였다. 그의 눈에는 난처함과 원망스러움이 베어 나오고 있었다. 왕련화의 그러한 모습을 훔쳐보는 승현은 점점 머리가 흐리멍텅해 짐을 느끼는 듯하였다. 그러한 승현의 모습을 바라보는 주칠칠은 웃음을 참느라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녀는 평생 이처럼 어이없고 우스운 일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눈을 한 번 돌리고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승 형, 승 형이 보기에 내 이 조카딸이 어떻소?" 승현의 얼굴이 즉각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난처한 듯 기침을 해 댔다. "그것은, 허허...... 그것은......." 그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처한 잔기침만 계속 해댈 뿐이었다. 주칠칠이 웃음을 애써 참고 말했다. "아, 내 이 조카딸은 나이가 적지 않은데, 너무 눈이 높아서 여태까지 상대를 못찾고 있소이다. 형씨께서 만약 기회가 있다면 혹시 내 조카딸의 짝이 될 사람이 있는지 좀 주위를 살펴봐 주시기 바라오." 승현이 얼굴을 붉히고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용기를 내서 말했다. "혹...... 혹시, 혹시 어떤 인물을 원하시는지......?" 주칠칠이 말했다. "첫째, 영준한 소년일 것, 둘째, 세가공자 출신일 것, 셋째, 아! 그렇소이다. 승 형과 같은 그러한 인물이면 충분하겠지요." 승현의 얼굴에 갑자기 기쁨과 부끄러워하는 듯한 기색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더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왕련화를 몇 번 힐끗 훔쳐 보았다. 왕련화는 난처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당장 주칠칠의 혀부리를 뽑아내고 승현의 두 눈알을 빼버리고 싶었다. 주칠칠은 허리를 굽힌 채 배를 감싸 안았다. 너무 우스워 눈물이 찔끔찔끔 베어져 나왔으나 그녀는 웃음소리를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머리는 이미 탁자 아래까지 쳐 박힌 채 키득거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한 사람이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랑! 심 공자!" 주칠칠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드는 순간, 펑! 하고 그녀의 머리가 탁자에 부딪혔다. 그녀의 눈에서 별이 반짝였으나 그녀는 더이상 다른데 신경을 쓸 여가가 없었다. 얼른 고개를 돌려 소리나는 쪽으로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웅사교오가 창문을 열어 젖히고 창밖을 향해 크게 부르고 있었다. "심랑!" 즉각 웅묘아의 몸이 마치 화살처럼 교오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승현이 이상하다는 기색으로 물었다. "심 상공은 이곳에 계신데 왜 저 사람들이 밖을 향해 심 공자를 찾는거죠?" 주칠칠이 당황한 듯 얼른 우물거렸다. "그......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소? 승현이 말했다. "흠, 생각컨데 틀림없이 동명이인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주칠칠은 속으로 박수를 치면서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겠지요. 세상에 동명이인은 원래 많은 법이니까요." 그녀는 웅묘아가 이미 밖으로 뛰쳐 나간 이상 틀림없이 심랑을 끌고 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수시로 눈을 들어 계단쪽을 힐끗거렸다. 그녀의 심장은 펑펑 크게 뛰기 시작했으며, 금방 밖으로 터져나올 듯했다. 지금 그녀는 놀람인지 기쁨인지, 원망인지 저주인지 모를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주칠칠이 예상했던대로 과연 웅묘아는 심랑을 끌고 들어왔다. 두 사람이 이층으로 올라 서기도 전에 웃음소리가 이미 들려왔다. 심랑이 웃으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웅 형! 눈썰미가 대단하군요." 웅묘아가 웃으며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심형 을 발견한 게 아니오. 다른 사람이 본거요." 주칠칠은 이를 깨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쥔채 계단쪽을 똑바로 주시했다. (이 원수!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고 원망하지 않을 수도 없는 원수! 왜 또 당신이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요, 왜 또 내 앞에 나타났단 말인가요?) 그녀는 심랑의 머리가 계단쪽에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어서 그의 짙고 굵은 눈썹, 그리고 지혜를 담은 듯한 눈, 담담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나타났다. 바로 자신을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미소가 나타났던 것이다. 사람은 모두 웃을 줄 안다. 그러나 어째서 그의 웃음은 주칠칠을 이렇게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일까? 주칠칠은 두 주먹을 부르쥐고 있었으나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두 주먹으로 심랑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영원히 떠올리지 못하게 뭉개버리고 싶었다. 심랑에 이어서 웅묘아가 나타났으나 김무망은 보이지 않았다. 김무망이 그들과 같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주칠칠의 주의를 끌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 심랑이 보이는 이상, 그녀의 머리에는 다른 생각은 더이상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술집을 가득 메웠던 무림호걸들의 눈은 모두 심랑에게 쏠려 있었다. 심지어 술맛을 음미하고 있던 그 노인의 표정도 약간 긴장한 듯한 표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웅사교오가 심랑이 이층으로 올라서는 순간, 큰 걸음걸이로 다가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 공자께서는 아직도 이 교오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 교오 대협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을 알아본 것도 바로 이 분이오." 교오가 웃으면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심공자께서는 당연히 제가 앉았던 탁자에 같이 와서 앉으셔야 될 겁니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장사꾼이나 됐으면 좋을 사람인 듯하오." 교오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비단 심 형을 제 자리로 모실 뿐만 아니라 당신까지도 같이 모시고 싶소. 만약 이 교오의 눈이 멀지 않았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사귀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친구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또 당신이 이미 심 공자를 알고 있는 이상, 당신을 꼭 사귀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오." 웅묘아도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좋소. 당신 자리에 가서 같이 앉읍시다. 어떻든 오늘 먹고 마시는 것은 공짜니까 어느 자리에 앉든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다만, 내 형제들이 오래 전부터 심 공자를 한 번 뵙기를 원했으니 그들에게 먼저 우리 심 형에게 술 한 잔씩을 권하도록 기회를 주도록 합시다." 교오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한 잔이오? 오늘 마시는 술은 공짜요.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인색하오?" 웅묘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그렇소, 그렇소. 내가 말을 잘못했소. 한 잔은 충분하지 않지요. 최소한 열 잔 이상은 권해야지요." 웅묘아와 같이 몰려왔던 패거리들도 그들에게 다가와 한꺼번에 우 하고 심랑을 에워싸고 화사고가 앉아 있는 쪽으로 몰려갔다. 그들의 소란에 술집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칠팔 명이나 되는 웅묘아의 패거리들이 서로 앞다투어 심랑에게 술을 권했으며, 웃음소리, 부르는 소리 등이 다른 사람들의 고막을 터뜨릴 듯 시끄럽게 왁자지껄 일어났다. 주칠칠이 갑자기 탁자를 내리치더니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를 모시고 가도록 합시다." 승현이 말했다. "형씨께서는 왜 갑자기 가시려는거죠?" 주칠칠이 한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난 저런 인간들을 보기가 싫어요." 그녀는 입에서는 비록 저런 인간들을 보기가 싫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은 뚫어질듯이 심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심랑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를 악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시 두 여자를 재촉하여 왕련화를 부축하게 한 다음 큰 걸음걸이로 계단쪽으로 걸어갔다. 승현은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다가 갑자기 주칠칠쪽으로 달려와 물었다. "심 형께서는 어느곳에 묶고 계신지요?" 주칠칠이 어떻게 그와 더이상 대화를 나눌 마음의 여유가 있을수 있겠는가 ? 그녀는 되는대로 대답했다. "바로 저 집. 가장 큰 객점에 묶고 있소." 말을 마친 그녀는 퉁퉁퉁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그 계단의 판자조각을 한 발로 짓뭉개버리고 싶었다. 승현은 멍청히 서서 사라져가는 주칠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심 상공이란 분은 성격이 괴퍅스럽기도 하군." 갑자기 그는 이쪽 심 상공은 사라졌지만 저쪽에 여전히 다른 심상공이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그쪽을 살펴보았다. 그쪽의 심 상공은 이미 술을 열일곱, 여덟잔째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고, 심지어 그의 눈에는 조금도 술기운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으며 그 눈빛은 여전히 맑고 투명하고 날카로웠다. 주점을 가득 메운 강호 호걸들의 숱한 눈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호기심과 흠모와 찬미의 빛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연히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질투와 혐오스런 기색도 보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어떤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든 심랑의 얼굴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악의에 찬 눈빛이 그를 바라보아도 그는 조금도 그것이 싫지 않았으며, 호기심과 흠모와 찬미의 눈빛으로 바라보아도 그는 조금도 득의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주위의 시선에 의기소침해하거나 득의하는 기분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심랑은 어떠한 상황아래에서라도 그리고 술을 많이 마셔도 언제나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의 정신을 영원히 맑게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상당히 흠모하고 찬탄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심랑은 그 자신이 볼때 그것은 일종의 고통이었다. 인간이 언제나 맑은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가 느끼는 고통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게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어떤 때는 약간은 어리숙하고 미숙한 면이 있어야 편할 때가 많은 법이다. 이순간 심랑은 기쁨에 차 크게 소리지르고 술을 마시는 웅묘아를 바라보면서 가슴속에서 흠모의 마음이 끓어오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웅묘아는 어떤 때는 확실히 모든 일을 젖혀두고 자신에 도취되어 자기 기분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웅묘아가 즐거울 때는 그 자신이 폐부 깊숙이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즐거운 기색을 나타내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심랑은 그럴수 있는 웅묘아가 부러웠던 것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기쁨에 차 환히 웃는 얼굴이었으나, 그의 가슴에는 쉬지않고 고통에 찬 사람의 그림자들이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주칠칠의 모습, 백비비의 모습, 그리고 김무망의 모습....... 주칠칠은 자신의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칠칠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다. 그는 주칠칠을 위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주칠칠에게 매정하게 대했던 것은 바로 그가 그녀에게 너무 많은 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아! 주칠칠이 어떻게 자신의 이러한 마음 씀씀이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백비비도 마찬가지다. 그 외롭고 연약한 아가씨는 지금 이순간 악마의 손에 떨어져 있다. 그는 비록 그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녀의 운명이나 장래를 위해 자기 자신이 타당한 도움을 주어야만 할 책임이 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녀에게 만약 불행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자신은 양심의 가책으로 상당히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 그녀를 악마의 손에서 구해내려 했으나 도대체 어디로 가서 어떻게 그녀를 찾아낸단 말인가? 그리고 김무망도 그의 곁을 떠나갔다. 김무망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떠나기를 원해서 떠나간 사람이다. 김무망과 같은 남자가 만약 떠나가기를 원한다면 아무도 그를 못가게 막을 수는 없었다. 심랑은 이미 김무망의 굳은 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의 곁에서 떠나가는 것을 억지로 막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몇 마디 물어보았을 뿐이다. "어느곳으로 가실 생각이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김무망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심랑은 근본적으로 김무망의 대답을 바라지도 않았다. 김무망의 마음 씀씀이를 심랑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무망은 자신이 불구가 된 이상, 더이상 심랑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심랑은 일반인과 다른 사람이었다. 심랑이 하고자 하는 일은 많고 책임 또한 막중하다는 것을 알고 김무망은 그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떠나갔던 것이다. 김무망, 그의 원한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갚아야 한다. 그는 비록 이미 불구의 몸이었으나 아직 그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었고, 그의 몸은 비록 불구였으나 아직 완전히 못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혼자,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해치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 혼자 경천동지할 일을 해치우려고 결심을 했던 것이다. 심랑은 그러한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의 풀어헤쳐진 장발이 바람에 나부끼며 그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는 사라지는 김무망의 모습을 눈으로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김무망의 뒷모습에서는 옛날의 그 굳센 기상을 찾아볼 수도 없었으며, 그의 어깨도 약간 비스듬하게 치우쳐져 보였다. 심랑은 그러한 김무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아련한 슬픔을 느꼈다. 이러한 일들은 심랑은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그가 이러한 괴로움 속에 언제나 빠져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심랑의 얼굴에 언제나 감돌고 있는 미소만 볼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웃음소리. 그를 둘러싼 웃음소리 속에서 추운 겨울밤은 아주 따뜻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웅묘아가 대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자, 심랑! 다른 사람은 모두 당신과 이미 건배를 했소. 나 혼자만 남았소. 나는 당신과 최소한 세 잔 이상은 건배를 해야겠소. 오늘 여기에서 심 형, 당신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려서 나 웅묘아가 생각할 수 있는 기쁜 일 중에 가장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있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이렇게 빨리 웅 형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소." 웅묘아가 말했다. "주 아가씨는 어디로 갔소? 그리고 김무망, 김 형은 또 어디로 갔소?" 심랑은 한참을 묵연히 앉아 있다가 술잔을 들어 고개를 쳐들고 단번에 입속에 털어 넣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웅 형께서 차후에 자연히 알게 될거요." 웅묘아는 더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들이 심랑곁에 같이 있지 않게 된 사연에는 말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임을 알았던 것이다. 일곱번째 술잔 웅묘아, 그는 진심으로 심랑을 좋아했다. 때문에 심랑의 아픈 마음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이때 웅사 교오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늘 심 상공께서 이곳에 온 것은 개방의 초청장을 받았기 때문이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우연한 기회에 이곳에 들렸는데 어제 저녁에야 비로소 이 일을 알게 되었소. 무림계에 이처럼 큰일이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어떻게 그냥 지날 수 있겠소? 그래서 비록 초청은 받지 않았지만 구경삼아 한 번 와 본 것이오?" 교오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구경삼아 와보다니오? 개방의 이번 일에 심 상공과 같은 인물이 왔다는 것은 개방인들의 체면을 크게 세워주는 일이 아니겠소? 동생, 그렇지 않소?" 화사고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쩌면 심 상공께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을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교오 오빠일 거예요. 인의장에서 헤어진 후에 오빠는 언제나 심 상공 생각을 가슴에서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어요." 심랑은 교오와 화사고를 번갈아 쳐다보앗다. 그들은 서로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심랑은 술잔을 들고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진심으로 두 분에게 축하를 드려야겠군요?" 화사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교오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맙소. 동생, 우리 심 상공과 건배합시다." 심랑은 건배하고 나서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나는 비로소 교오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이며, 가장 총명한 남자임을 알았소?" "내가 어디가 총명하다는 거요?" 화사고가 웃으면서 말했다. "심 상공이 당신이 총명하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다른 얼굴이 예쁜 여자를 찾지 않고 저를, 저를 찾았다는 얘기일 거예요. 사실, 당신이 나처럼 못생긴 여자를 찾았다는 것은 당신이 상당히 멍청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데?" 교오가 화사고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교오의 일생 중 가장 현명한 일을 한 것은 바로 당신을 찾아냈다는 사실이오. 현명한 남자만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오. 당신은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도 수십 배나 더 아름다운 여자요. 심 상공은 자타가 공인하는 총명한 사람이오. 내가 보건데, 심 상공이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당신을 칭찬하는 말일 것이오?" 화사고도 교오를 따스한 눈길로 쳐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들처럼, 총명한 사람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야 되겠군요?" 웅묘아는 웅사 교오와 같은 무림계의 호걸이 어떻게 화사고와 같이 못생긴 여자를 좋아하게 됐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비로소 교오가 화사고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교오는 이미 화사고가 다른 여인들과는 다른 훌륭한 점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일거일동, 일언일소는 모두 부드럽고 사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행동에는 일점의 가식도 없었으며, 조금의 교태도 없었다. 그녀는 비록 남자들처럼 호방하였으나 여자의 세심한 마음과 지혜로움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어떤 사람도 그녀 앞에서는 아주 편안한 마음과 솔직한 심정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그러한 여자였던 것이다. 마치 깨끗한 물이 세속의 때에 끼어든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그러한 여자였다. 그러나 주칠칠은 파도와 같이 수시로 변하는 여자였다. 한 남자가 그녀의 잔잔한 파도에 몸을 내맡기고 있을 때, 갑자기 큰 파도를 일으켜 그 남자를 갈갈이, 산산히 부숴버리는 거대한 파도와 같은 여자였다. 이때, 화사고가 눈길을 심랑에게 돌리며 웃으면서 말했다. "심 상공, 심 상공께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심 상공과 같이 계시던 그 아름다운 아가씨가 다시 심 상공께 걱정거리를 만들어 드린 모양이군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화사고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 상공과 같은 남자는 비록 마음에 걱정거리가 있어도 말씀을 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심 상공을 이해하는 친구분들이 이렇게 많은데, 만약 걱정거리가 있으시면 속시원히 털어놓고 말씀 하세요?" 화사고는 심랑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먼저 심랑의 마음에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랑은 화사고 이 여자는 평범하지 않은 여자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는 다시 술잔을 들고 교오와 화사고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시 두 분께 제가 술 한 잔 올려도 될까요?" 이때, 갑자기 웃음소리와 더불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에 계신 공자께서 주량이 대단하신가 보구려. 노부가 공자께 술 몇 잔을 권해도 되겠소?" 그 말소리는 웅장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았으며, 날카롭지도 않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웃음소리 속에서도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심랑은 고개를 돌렸다. 그 말소리는 바로 혼자서 일곱, 여덟 개의 술병을 놓고 일곱,여덟 개의 술잔에 술을 따라서 술맛을 음미하는 노인에게서 들려왔다. 사실 심랑은 이층으로 올라올 때 그 노인을 보았다. 그리고는 이 사람의 표정과 행동에서 기괴한 면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으나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신비스러움과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심랑은 이러한 사람일수록 그 내력이 매우 신비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는 은근히 이 노인이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마치 심랑의 속을 엿본듯 자신을 부르고 있지 않은가! 심랑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포권을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저를 이렇게 많이 생각해주시다니, 제가 어찌 말씀대로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노인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쪽으로 건너 오시는 게 어떻겠소?" 심랑이 말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웅묘아가 얼굴에 불평의 기색을 드러내며 낮은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저 늙은이 대단한 기세로군. 심 형, 내가 심 형과 같이 가도록 하겠소."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노인이 앉아있는 탁자쪽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 노인의 눈은 심랑만 바라볼 뿐, 웅묘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 노인이 천천히 말했다. "일어서서 맞아들이지 못하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그의 웃음이 약간 기괴하게 변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이어서 말했다. "왜냐하면 이 노부에게는 일어서서 공자를 맞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오. 이점 널리 양해 바라오." 웅묘아가 얼굴에 짜증스런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이유란 말이오?" 그러나 노인은 웅묘아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갑자기 장삼 자락을 들어올렸다. 장삼을 들어올리자 훌렁거리는 바짓 가랑이가 동시에 좌우로 너풀거렸다. 그는 두 다리가 없었던 것이다. 노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웅묘아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무슨 이유인지 노부가 더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보셨으리라고 생각하오?" 웅묘아는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어 우물쭈물 말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노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이제 만족하셨소?" "제가 경솔하게 군 점 제발......." 노인이 차갑게 그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이미 만족하셨으면 옆으로 좀 물러서 주시겠소? 노부가 귀하를 청한 기억은 없는데. 또 귀하께서 내 맞은 편에 같이 앉는다고 해도 상당히 무료하리라고 생각하오." 웅묘아는 곤혹스러운 듯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화도 내지 못하고 쫓겨날 때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군요. 이런 일은 내가 평생 한 번도 당해보지 못했던 일이오. 제가 앉지 못한다면 한쪽에 가만히 서 있는 건 괜찮겠지요?" "귀하가 가만히 서 있겠다면 나 또한 어쩔 수가 있겠소?" 그는 더이상 웅묘아를 쳐다보지 않고 눈길을 심랑에게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면서 한 손을 들어 심랑에게 앉도록 권했다. 심랑이 포권을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웅묘아는 같이 앉을 수도 그렇다고 그 패거리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서 엉거주춤 심랑의 옆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점원을 불러서 일곱 개의 술잔을 가져오게 하더니 심랑의 앞에 나란히 놓도록 하였다. 노인은 매우 즐거운 듯 얼굴에는 시종 온화한 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상공께서 그렇게 술을 좋아하시니 술에 대해서 잘 아시겠구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를 구할 수도 없는데, 술에 취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소이까?" 박인이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하하! 훌륭하오. 정말 훌륭한 말이오." 말을 마친 노인은 술병 하나를 들어 심랑의 제일 왼쪽에 놓여있는 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맑은 청색의 창백한 색을 띤 술은 마치 노인의 얼굴색과 흡사했다.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귀하가 술을 아는 이상, 먼저 이 술을 한 잔 권하고 싶소." 심랑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술입니다." 노인이 말했다. "무슨 술인지 맛으로 알아내실 수 있겠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 술은 부드러우면서 굳은 맛이 있고, 순한 듯하지만 매우 독한 기운을 띠고 있으니 마치 이른 봄의 북풍과 엄동설한의 차가운 바람이 같이 섞여 있는 듯하군요. 술 중에서 가장 독한 대국주와 죽엽청(竹葉靑)을 혼합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까?" 노인이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맞히셨소. 과연 상공께서는 술에 대해 잘 알고 계시군요. 죽엽청과 대취주의 성격은 비록 완전히 다르지만, 이 둘을 혼합해서 마시면 또 다른 특별한 맛이 있는 법이오." "그러나 어르신의 그 뛰어난 손재주로 잘 배합하지 않았다면, 술 맛이 이렇게 좋을 수는 없겠지요?" 노인이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상공께 솔직히 말씀드리면 노부는 일생 동안 술에 많은 공을 들였소. 그런데 오늘 비로소 상공과 같은 사람을 만나서 내 그 동안의 노력이 약간의 보답을 받는 듯하구려." 웅묘아가 그의 이러한 말을 듣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십니까? 두 가지의 술을 한 잔에 따라 붓는 것은 세 살짜리 어린애들도 전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자랑을 늘어 놓으시는거죠?" 그러나 노인은 그 말을 못 들은 듯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입가에 미소조차 띠며 말했다. "술을 모르는 얼간이들은 다만 두 종류의 술을 섞어 놓는 것은 상당히 쉽다고 생각하지요. 그런 얼간이들은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술들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떠한 술과 어떠한 술을 혼합해야만 비로소 신비한 맛을 내는지에 대해서는 꿈에도 알지 못하지요?" 웅묘아는 얼간이 소리를 듣자 가슴 가득 분통이 차올랐으나, 그 자리에서 발작을 할 수는 없었다. 심랑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문장은 하늘이 만들고, 우연한 기회에 글재주 많은 사람이 그 문장을 얻게 된다더니만, 어르신의 술의 조제 기법은 틀림없이 이러한 이치겠구려?"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그렇소. 어설프게 글자만 늘어 놓는다고 어떻게 아름다운 문장이 나올 수 있겠소? 고수와 평범한 사람이 지은 글은 그 차이가 한두 마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요. 문장이 이러하듯이 술 역시 마찬가지요. 글자는 반드시 고수들이 늘어 놓아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문장이 되듯이, 술 역시 마찬가지로 고수들이 조제해야만 비로소 신비한 맛을 낼수가 있게 되는거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치가 그러하다면 제가 다시 한 번 어르신께서 조제하신 술을 맛 볼 수 있습니까?" 말이 끝나자 마자 노인은 얼른 두번째 술병을 들어 심랑의 왼쪽에서 두번째 놓여있는 잔에 반 잔쯤 따랐다. 그 술은 호박색을 띠고 있었으며, 그 속에 또 은은한 파란색이 동시에 비춰 보였다. 그 색은 바로 노인의 눈빛색과 비슷하였다. 심랑이 술잔을 들어 마신 다음 또 찬탄하면서 말했다. "좋은 술이군요. 이 술은 혹시 강남여아홍을 주로 하고, 모태(茅台)와 죽엽청(竹葉靑)을 보(輔)로 한 다음 다시 몇 방울의 하약주(河藥酒)를 떨어뜨려서 조제한 게 아닌지요?" 노인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맞히셨소. 노부가 이 술을 조제하는 데에는 아주 많은 심혈을 기울였소이다. 그래 서 이 술에게 당 노부인(唐虜婦人)의 살수간(撒手間)이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심랑이 얼른 그 말을 받아서 웃으면서 말했다. "술맛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이름 또한 적절하게 붙이신 것 같군요. 이 술은 마실 때 시원하여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데, 마시고 난 다음에는 마치 불구덩이가 위 속으로 들어간 듯하니 그 맛은 확실히 당씨 일가의 암기에 맞았을 때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인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술을 조제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아름다운 색을 내야 한다는 점이오. 아름다운 색을 내기 위해서는 술과 술의 비율이 약간만 달라도 실패하게 되지요. 만약 이 술에 여아홍을 한 방울만 더 떨어뜨렸다면, 이 술은 당장 당 노부인의 발싸개라고 이름을 바꿔야 했을 거요. 그렇게 되면 마시지 못하게 되겠지요." 두 사람은 서로 의기투합한 듯 마주보고 크게 웃어제꼈다. 그 노인은 심랑의 세번째 잔에 술을 채우기 시작했다. 웅묘아는 더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어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슬며시 교오 등이 앉아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교오가 웃으며 말했다. "형씨께서 결국 돌아오시고 말았군요?" 웅묘아가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원래 기분이 좋기 위해서 마시는 것 아닙니까? 저렇게 복잡하고 신경을 쓰면서 술을 마시게 된다면 차라리 그런 술은 안 마시느니만 같지 못합니다." 교오가 대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사내 대장부는 한 대접, 한 대접 벌컥벌컥 술을 마셔야 시원한 법이오." "교 형께서 저를 그렇게 알아주실 줄은 생각도 못했군요. 자, 우리 한 잔 건배 합시다." 두 사람은 술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 둘은 입으로는 술을 마시면서 눈은 여전히 슬쩍슬쩍 심랑과 그 노인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부러워하는 기색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화사고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당신들 두 사람은 저 늙은이의 병 속에 든 술을 마시고 싶은 모양이죠?" 교오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누가 그 술을 마시고 싶다고 그랬소?" 화사고가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으니까 마시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는거겠죠?" 교오가 말했다. "바로 맞혔소. 마실 수 없는 술은 영원히 맛이 없는 법이오?" 웅묘아가 웃음을 띠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심 형은 확실히 복이 많은 사람이오. 그 사람은 여복이 많을 뿐만 아니라 먹을 복도 남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오." 화사고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심 상공이 그렇게 쉽게 저 술을 받아 마시고 있다고 생각하셔서는 오산이에요?" 웅묘아가 눈을 껌벅거리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오?" "심 상공이 저 몇 잔의 술을 마시는 데는 아주 많은 기력이 소모되고 있어요." 웅묘아는 기이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말했다. "아니, 저 노인이 심 형의 맞은 편에 앉아서 술잔에 술을 따라 놓으면, 심 형은 손을 뻗어서 술잔을 집어들고 목을 뒤로 젖히고 입 속으로 부어 넣을 뿐인데 무슨 기력이 소모된다는 거요?" "다른 사람이 심 상공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기 때문에 기력이 소모되고 있다는 거예요?" 웅묘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갈수록 모르겠군요?" 교오가 말했다. "웅 형께서만 모르실 뿐 아니라 나도 모르겠소?" 화사고가 웃으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저들 두 사람을 자세히 살펴 보세요?" 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웅묘아와 교오는 이미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순간 심랑은 다섯번째 잔을 비우고 여섯번째 잔을 집어 들고 있었다. 화사고가 말했다. "지금 심 상공께서 술잔을 들었죠?" 웅묘아가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렇소." 화사고가 말했다. "지금은요?" "지금은 저 늙은이가 술병을 들어 올렸소." "음, 계속 자세히 보세요." "지금, 저 늙은이가 술병을 천천히 술잔 쪽으로 옮기고 있소." "지금은 저 늙은이의 술병의 입구가 심랑이 들고 있는 술잔에 닿았소?" 교오가 말했다. "지금은 천천히 술을 따르고 있소." 화사고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아직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교오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무슨, 무슨 이상한 점이 있다는 말이오?" 웅묘아가 갑자기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그렇군. 저 늙은이의 동작이 아주 천천히 이루어질 뿐 아니라, 술을 따르는 건 더 천천히 따르고 있소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동안 저 늙은이는 심 형이 들고 있는 잔에 아직 술을 반도 따르지 못했소." 화사고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왜 술을 저렇게 천천히 따르고 있는지 당신은 알아내셨어요?" 한참을 쳐다보고 있던 웅묘아가 다시 말했다. "저 늙은이가 술을 따르는 손은 비록 아주 침착하지만, 그 옷깃은 바람에 나부끼듯 펄럭거리고 있소. 마치 술병을 든 그 팔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처럼 말이오?" 교오가 말했다. "그렇군요. 저 늙은이가 입고 있는 옷은 가죽 옷이라서 상당히 두껍고 무거울 텐데 웬만한 바람에는 옷깃이 저렇게 펄럭이지 않을 텐데 어떻게 된일인지 모르겠군요. 혹시 그의 팔이 심하게 떨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혹시?" 웅묘아가 이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저들이 전신의 기력을 다해서 술을 따르고 받고 있단 말인가요?" 화사고가 말했다. "다시 한 번 심 상공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웅묘아가 말했다. "심랑은 여전히 웃고 있소. 그 웃음은 상당히 씁쓸한 웃음이오. 그리고 그의 옷깃도 약간 떨리고 있소. 아니! 교 형! 심 형이 들고 있는 술잔을 보시오!" 교오도 실성한 기색으로 말했다. "심 형이 들고 있는 술잔이 이가 빠진 듯한데......?" 웅묘아가 말했다. "그 술잔은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한 것이었소. 그런데 지금, 저 늙은이가 들고 있는 술병에 눌려서 이가 빠진거요. 그리고 다시 저 술병을 보시오?" 교오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 늙은이가 들고 있는 술병의 입구가 이미 헤어져 있소." 화사고가 웃으면서 말했다. "잘 보셨어요. 두 분께서는 이미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셨겠죠? 저들 두 사람은 겉으로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서 술을 마시는 듯하지만, 사실상 암암리에 서로의 내력을 겨루기 시작한 거예요." 웅묘아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저 늙은이가 저처럼 심오한 내력을 가진 늙은이일 줄은 생각지 못했군요. 심랑과 내력을 겨룰 정도로 강한 내력을 가졌다니 확실히 생각 밖이오?" 교오가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보건데, 심 상공이 약간 우세한 듯하군요?" 웅묘아가 맞장구를 쳤다. "당연히 심 상공이 우세하겠지요. 그렇지만 심 형으로 하여금 저렇게 많은 기력을 소모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의 내력 또한 강호에 몇 되지 않을 거요?" 교오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오." 웅묘아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할수록 저 늙은이가 이상한 생각이 드오. 무공이 저처럼 높은데, 사람은 병신이고 또 우리가 도대체 그의 내력을 알아볼 수 없으니 말이오?" 교오가 말했다. "보건데, 저 늙은이와 심 상공 사이에는 틀림없이 깊은 원한 관계 비슷한 게 있는 것 같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두 사람이 만나자 마자 내력으로 저렇게 겨루겠소?" 웅묘아가 말했다. "그렇군요...... 음, 아니, 그렇지 않은 것 같소. 만약 저 노인이 심랑과 무슨 원한관계가 있다면 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도리어 얼굴에 계속 미소를 띠고 있는 거요?" 교오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음, 그 말도 맞는 것 같소." 그들이 다시 심랑과 그 노인쪽을 쳐다봤을 때, 마침내 술병과 술잔이 떨어져 나갔다. 심랑은 태연한 자세로 잔에 가득 부어진 술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술이오." 노인은 '텅' 하는 소리가 나게 손에 들었던 술병을 탁자에 내려 놓았다. 그 술병의 밑부분은 부서져 밑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러나 노인 역시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좋은 술이겠지요. 노부가 조제한 술은 뒤로 갈수록 그 맛이 더욱 특이하지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일곱번째 술은 틀림없이 더 대단하겠구려." "대단한지 대단하지 않은지는 한 번 마셔보면 알게 될거요." 말을 마친 노인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일곱번째 술병을 집어들어 천천히 심랑 앞으로 내밀었다. 심랑도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띤채, 일곱번째 잔을 들어 천천히 술병 쪽으로 내밀었다. 웅묘아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저 늙은이는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자기 자신의 내력이 심랑보다 못한 것을 알면서 왜 하필 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심랑의 손이 번쩍 뒤집히는가 싶더니 새끼 손가락으로 술잔을 손바닥쪽으로 굽히고 식지, 모지, 중지 세 손가락으로 그 노인의 손에 잡혀있던 술병의 목 부분을 잡아, 노인의 손에서 술병을 천천히 빼앗아왔다. 노인은 여전히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웃으면서 말했다. "상공께서 직접 술을 따르고 싶으신 거요?" 심랑은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옆에 있던 문을 열고 술을 창 밖으로 쏟아버렸다. 그러자 노인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면서 말했다. "상공, 도대체 무슨 짓이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르신의 이 일곱번째 술은 제가 도저히 받을 수가 없군요." 노인이 노한 소리로 말했다. "상공이 이미 앞의 여섯 잔을 마셨으니, 일곱 잔도 당연히 마셔야 되지 않겠소? 이렇게 노부에게 무례한 짓을 하다니...... 차라리 여섯 잔을 마시지 말았어야 되는 게 아니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마신 여섯 잔은 마실 수 있었지만, 이 일곱잔째는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인이 노한 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그 말은......." 심랑이 갑자기 번개처럼 몸을 날려 노인의 옷 속을 더듬었다. 노인은 돌연한 심랑의 행동에 깜짝 놀란 듯 실성한 소리로 외쳤다. "상공!" 노인의 놀람에 찬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심랑의 손에는 비취를 깎아 만든 듯한 조그마한 비취함이 들려 있었다. 이때, 이 주루에 있던 사람들은 화사고, 교오, 웅묘아 세 사람을 제외하고도 적지않은 사람들이 심랑과 이 노인의 수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심랑이 갑자기 노인의 옷 속을 더듬었을 때 깜짝 놀란 듯한 기색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더 놀란 사람은 그 노인인 듯하였다. 노인은 얼굴 표정이 크게 변하여 차갑게 냉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이 노부는 좋은 뜻으로 상공에게 술을 권한 것인데, 상공은 이 노부에게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할 수가 있소? 돌려 주시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돌려 드려야지요. 그렇지만......." 그는 천천히 비취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새끼 손가락으로 비취함 속에 있는 분홍색의 가루를 묻혀 술잔 속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술잔 속에서 녹아 들어가는 분홍색 분말을 보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말했다. "과연, 천하에서 그 짝을 찾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독약이로군!" 노인은 양손으로 탁자의 가장자리를 꽉 움켜쥔 채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상공! 도대체 무슨 말씀이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노인장께서 방금 이 무서운 독약을 일곱번째 술병 속에 털어 넣지 않았다면, 저는 당연히 일곱번째 잔을 마셨을 겁니다." 노인이 노한 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요, 상공?" 심랑이 웃음을 띠고 노인의 말을 가로채어 말했다. "노인장께서 방금 여러 번 저와 내력을 겨루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다만 저의 주의력을 그쪽으로 끌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겠지요? 만약 제가 아무 것도 모르고 노인장이 저와 내력을 겨루다가 못 당하는 척 손을 뗐을 때, 제가 약간 기쁜 생각에 일곱번째 잔을 마시게 됐다면 아마......." 그는 고개를 쳐들고 웃으면서 이어서 말했다. "아마 그랬다면 저는 영원히 여덟번째 잔은 마시지 못하게 되었겠지요." 노인은 안색이 변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이 노부는 상공과 원수진 일도 없거니와, 심지어 알지도 못하고, 상공 당신도 이 노부의 이름도 알지 못하지 않소? 그런데 내가 왜 상공을 해치려 했겠소?"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생각컨데, 노인장께서는 본인을 이미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본인도 노인장이 어떤 분인지 이미 추측을 하고 있었소." 이 말에 노인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반문했다. "상공이 나를 안다고요?" 심랑이 천천히 말했다. "관외지방에서 온 술사자......."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노인이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그에 따라 노인의 모발이 곤두섰다. 심랑과 그 노인의 대화를 웅묘아 등은 한 자도 빠짐없이 전부 들을 수 있었다. 교오가 깜짝 놀란 소리로 말했다. "저 노인이 쾌락왕의 네 사자들 중 하나인 주사(酒使)일 줄이야......." 화사고가 말했다. "우리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는데...... 결국 심 상공께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 있었군요." 웅묘아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세상의 어떤 일이 심랑을 속일 수가 있겠소? 아, 심랑! 당신은 정말 이 세상에 못하는 게 없고 모르는 게 없는 그러한 인물이란 말이오?" 이때 쾌락왕 주사의 한쌍의 눈은 비수처럼 날카롭게 심랑을 쏘아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심랑을 쏘아보던 노인의 눈빛이 점점 부드럽게 변해갔다. 그리고 곤두섰던 그의 머리털도 한 가닥 한 가닥 다시 원래대로 내려왔다. 얼핏 보기에 분노가 사그라져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랑이 웃음을 띠고 말했다. "제 추측이 틀렸습니까?" 노인의 입가에 얇은 웃음이 떠올랐다. 노인이 말했다. "대단하오. 틀리지 않았소!" 심랑이 말했다. "그렇다면 노인장의 대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노부는 한령(韓伶)이라고 하오." 심랑이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이름이군요. 옛날 유 령(劉伶)은 주 선(酒仙)이라고 불렸는데, 오늘 한 령은 주 사(酒使)가 되었군요. 제가 오늘 주사를 만나볼 수 있었다니, 정말 매우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한령도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다만 애석하게도 노부는 유령처럼 통쾌하게 술을 마시는 그러한 성격이 못 되서 안타깝소." 두 사람은 또 서로를 마주보고 크게 웃어제꼈다. 그들의 웃음에는 조금의 가식도 없는 듯하여 보였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주위에 가득 찼던 무림계의 호걸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멍청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교오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심 상공은 과연 대단한 아량을 가진 사람이로군. 저 늙은이가 몇 번이나 심 상공을 해치려고 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따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서로가 저렇게 마주보고 웃을 수 있다니 말이오." 웅묘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랑의 일거일동은 보통 사람은 도저히 그 진의를 알아볼 수가 없소. 우리들이 어떻게 지금 심랑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있단 말이오?" 교오가 말했다. "저 늙은이는 비록 허심탄회한 듯 웃고 있지만, 눈빛이 번쩍거리는 걸로 봐서 틀림없이 마음에 악독한 생각을 지금 하고 있을거요. 심 상공께서는 약간 조심하는 게 좋을 듯하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안심하셔도 괜찮을 거요. 심랑은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오." 화사고가 갑자기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큰일났어요!" 교오가 말했다. "무슨 일이오?" "보세요! 저 노인장의 두 다리, 두 다리......." 웅묘아도 깜짝 놀라며 화사고가 가리키는 쪽을 봤다. "그 노인에게 무슨 다리가 있단 말이오?" 그러나 웅묘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랑의 장소소리가 들리며 그 앞에 놓여있던 탁자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탁자 밑에서는 푸른색 광망이 번쩍하고 일어났다. 웅묘아는 이미 그 푸른색 광망이 한령의 바짓 가랑이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두 다리가 무릎 아래서부터 잘려나간 아래쪽에는 두 자루의 날카로운 검이 달려있었던 것이다. 두 자루의 검은 독을 바른 듯 퍼런색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말을 했지만 이미 두 다리를 들어서 탁자 밑에서 소리없이 심랑을 찔러 들어갔던 것이다. 만약 그 검에 묻은 독약이 조금이라도 심랑의 피부에 닿으면 순식간에 독이 발작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 상황이었다. 그러나 심랑은 마치 탁자 아래에도 눈을 달고 있었던 듯 한령의 다리가 움직이는 순간, 앉은 자리에서 평평히 뒷쪽으로 삼 척 가량을 물러났던 것이다. 한령은 다리로 심랑을 찔러 나가던 공격이 실패하자 두 손을 번쩍 쳐들어 탁자를 들고 심랑을 향해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 탁자를 쫓아 심랑쪽으로 달려들며 다리에 매단 검을 계속하여 찔러 들어갔다. 평상시 한령은 무릎 아래에 매단, 두 자루의 검으로 다리를 대신하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이었다. 이십여 년 간에 걸친 고된 훈련으로 그 두 자루의 독을 바른 검은 사실상 이미 그의 다리나 마찬가지로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 그가 다리에 매단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한광이 번쩍이며 검기가 사람의 폐부를 찌를 듯 날카롭게 뻗쳐 나왔다. 검을 단 다리를 쓰는 한령의 동작은 이미 천하 각문각파의 다리를 쓰는 법보다도 더 민첩했고, 그 날카로움은 어떠한 발길질보다도 뛰어나 보였다. 주루를 가득 메웠던 무림호걸들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했으며, 놀람에 찬 비명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웅묘아, 교오는 더욱 놀란 듯 일순간 안색이 변했으나 대갈을 터뜨리며 그들쪽으로 달려나갔다. 바로 이순간, 심랑의 몸이 한령이 휘두르는 검광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한령은 연속하여 칠 검을 차 들어갔으나 모두 실패하자 갑자기 손을 뒤로 돌려 창을 부수고 화살처럼 밖으로 뛰쳐 나갔다. 사랑과 증오 웅묘아, 교오 두 사람이 창가로 달려갔을 때, 무림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악독한 노인은 이미 사라지고 주루에서 일어났던 소동은 오랫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웅묘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심랑에게 말했다. "심 형, 왜 반격을 하지 않으셨소? 왜 그 녀석을 쫓아가지 않으셨소?" 심랑은 아무소리 하지 않고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김무망의 체면을 보아서 그를 한 번 놓아준 거요." 웅묘아도 한참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있더니, 마침내 길게 한숨을 불어내며 말했다. "그랬구려. 놓아줬어야 되었겠지요." 교오가 말했다. "옛말에 호랑이를 놓아주기는 쉽지만 사로잡기는 어려운 법이라 하였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 웅사(雄獅)가 있는데 그따위 호랑이가 겁이 나겠소?" 교오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본인이 만약 웅사라면 심 형은 응당 신룡(神籠)이라야 되겠지요." 웅묘아가 말했다. "당신들 한 사람은 웅사고 한 사람은 신룡이라면 나는 고양이라는 이름을 바꿔야 되지 않겠소?"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크게 웃어제꼈다. 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세 남자의 이러한 몇 마디 농지거리에 순식간에 방금 일어났던 흉악하고 불유쾌한 일들은 잊어버린 듯 얼굴색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이때 갑자기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미소년이 큰 걸음걸이로 주루로 올라와 곧장 심랑 앞으로 다가가 걸음을 멈추더니 심랑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심랑이 그 모습을 보고 얼굴에 이상하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형씨께서는......." 그 미소년이 얼른 말을 했다. "저는 승현이라고 합니다." 웅묘아가 말했다. "심 형의 얼굴에 꽃이 핀 것도 아닌데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살펴보는 거요?" 승현은 웅묘아의 말을 못 들은 척 다시 심랑의 위아래를 한 차례 자세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당신이 진짜 심랑이군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심랑이라구요. 그렇다면 형씨께서는 가짜 심랑이라도 보았다는 거요?" 승현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렇소이다. 가짜 심랑을 한 사람 보았소." 웅묘아가 큰소리로 말했다. "가짜 심랑을 보았다구요?" 승현이 말했다. "방금까지 그 사람은 이곳에 있었소." 웅묘아가 얼굴색을 변하면서 물었다. "그럼 지금 어디로 갔다는 거지요?" 승현이 말했다. "지금 이순간, 그 사람은 아마......." 말을 하던 승현의 눈이 반짝하고 빛이 났다. 승현은 갑자기 연약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그림자가 눈앞을 스치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웅묘아가 말했다. "말해 보시오. 왜 말을 하다가 그만두는 거요?" 승현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심 상공과 동명이인의 사람인지도 모르지요." 웅묘아가 말했다. "형씨께서 이미 말을 꺼내셨으니,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가 한 번 알아봐야될 것 아니오?" 승현이 말했다. "그것은......." 웅묘아가 한 손으로 그의 어깻죽지를 부여잡고 날카롭게 말했다. "말을 하겠다는 거요? 못하겠다는 거요?" 승현이 냉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나는 원래 말을 하려고 했었소. 그렇지만 지금 생각이 달라졌소. 말을 못 하겠다면 또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웅묘아는 눈을 부라리며 그를 바라보고 나서 갑자기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소, 좋소! 형씨도 과연 사내 대장부라고 할만한 사람이구려. 나 웅묘아는 형씨와 같이 고집이 있는 남자를 사귀는 것을 제일 좋아하오. 이리 오시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우리 먼저 술이나 한 잔 마시고 봅시다." 말을 마친 그는 정말 승현의 팔을 잡고 술을 마시러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교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실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저 고양이는 정말 재미있는 친구군."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무림계의 인물들이 만약 저 고양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사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할만 하오." 그들이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동안 이미 승현은 웅묘아에게 억지로 술을 석 잔을 얻어 마신다음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승현은 이미 주칠칠 등과 적지않게 마신 상태에서 다시 웅묘아가 건네주는 술을 급하게 석 잔을 받아 마셨기 때문에 그 발걸음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심랑이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손을 뻗쳐 그를 부축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승형께서는 다음부터는 저 고양이와 술을 급히 마시는 시합을 하지 마시오. 천천히 마시면 어쩌면 승형께서 저 고양이보다 더 술이 셀지도 모르오." 웅묘아가 대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승 형께서는 어느 대가집 규수도 아니고, 행세하는 집 며느리도 아니지 않소? 어떻게 천천히 한 모금 한 모금 술을 마신다는 거요? 시원시원하게 마셔서 취하면 취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면 쓰러져야 그게 사내 대장부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소?" 승현 역시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옳은 말이오, 옳은 말이오. 취하면 취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면 쓰러지는 게 사내 대장부의 행위라고 하겠지요. 그렇지만 지금 저는 술이 취한 것은 아니외다. 심 상공, 제가 술이 취한 것처럼 보입니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오, 승 형은 아직 술이 취하지 않으셨소." 승현이 말했다. "고맙소, 심 형께서는 과연 어리숙한 사람은 아니구려. 심 형! 제가 심 형께 모든 것을 말씀드릴 테니 안심하시오. 만약 심 형께서 가짜 심랑을 만나보고 싶다면 내일까지만 기다려 주시면 될 거요." 심랑이 말했다. "내일까지라구요?"" 승현이 말했다. "그렇소이다. 내일이오. 내일, 개방의 회합이 있는데 가짜 심랑은 틀림없이 그 모임에 참석을 할 것이오." 심랑은 승현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좋소이다. 내일 개방의 모임에서 보도록 합시다. 그 모임에서 저는 틀림없이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나보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을요." 승현이 말했다. "그럴 거요. 이번 개방의 모임은 틀림없이 대단하리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웅묘아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웅 형, 벌써 취하셨소?" 웅묘아가 대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나 말이오? 취했냐구요?" 승현이 말했다. "웅 형께서 아직 취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다시 가서 몇 잔 더 마셔 보도록 합시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내 속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 맞추시는 거요? 자, 갑시다." 승현이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 장소를 바꿔서 마시는 게 어떻소? 이곳은 어쩐지 이상한 것 같지 않소? 이미 술집이 빙빙 도는것 같지 않소? 아주 빨리 도는 것 같은데?" 이때 점원 한 명이 그들 쪽으로 달려오더니 대여섯 걸음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멈춰서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어느 분이 심랑, 심 상공이신지요?" 심랑이 말했다. "내가 심랑이오만......." 그 점원이 허리를 더욱 굽신거리면서 말했다. "본 주점의 주인 어르신께서 후원에 주안상을 준비해 놓으시고 심 상공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심랑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는 순간,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헤헤. 또 심 형 당신을 청하는 사람이 생겼구려. 심 형은 가는 곳마다 먹을 복도 많소이다." 승현이 말했다. "왜, 왜 나는 청하지 않는 거지?" 심랑이 한참 생각에 잠겨있더니 천천히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주인에게 전해주게. 호의는 고맙지만 심랑이 이미 술이 취하고 배가 불러서 더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고 말일세." 그 점원이 웃음을 띠고서 말했다. "저희 주인 어른께서는 심 상공께서 바쁘시더라도 한 번 꼭 다녀가 주십사고 부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저희 주인 어르신께서 심 상공과 반드시 긴밀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그렇다 합니다. 그일은 바로, 바로 주 아가씨라는 분과 관계가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주 아가씨라는 말이 점원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심랑의 얼굴색이 갑자기 굳어졌다. "아, 그렇소? 그렇다면 나를 안내해 주시오." 그 점원의 얼굴에 갑자기 밝은 웃음이 떠돌더니 다시 한 번 허리를 굽신거리고 말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렴 속으로 사라졌다. 교오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주 아가씨? 혹시 그 부잣집 천금 아가씨가 아니오?" 웅묘아가 말했다. "바로 그녀요. 혹시, 혹시 그녀도 이곳에 왔다는 건가요? 혹시 또 무슨 사건을 저지른 건지? 그녀가 이곳 주인과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건가?" 그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폈다하며 생각에 잠겼다. 주칠칠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눈을 부라리며 주루에서 곧장 객점으로 돌아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를 따라다니던 두 명의 여자가 나가자마자 텅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문을 닫고 문을 걸어 잠궜다. 왕련화는 눈을 멀끔멀끔거리며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칠칠은 방 안을 일곱,여덟 바퀴 돌더니 찻잔을 들어올려 입술에 대었다가 '펑' 하는 소리가 나게 찻잔을 방바닥에 내팽개쳤다. 왕련화는 여전히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의 눈에는 약간의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방 안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던 주칠칠이 갑자기 왕련화 쪽으로 다가와 한손으로 그의 혈도를 풀어주고 다시 돌아섰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서는 순간 의자 하나가 그녀 앞에 놓여있자 그녀는 발로 그 의자를 차버렸다. 그 의자는 그 기세에 멀찍이 떨어진 침대 위에까지 날아가 떨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발길질은 의자를 날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발에도 상당한 충격을 가했다. 그녀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굽혀 발을 문질러댔다. 왕련화는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피식웃었다. 주칠칠은 그가 웃자 눈을 부라리며 대갈을 터뜨렸다. "뭘 웃는 거지?" 왕련화가 말했다. "나는, 나는 하하......." 주칠칠이 말했다. "또 웃어? 또 웃어봐! 한 번만 더 웃는다면 정말로 그 승 아무개라는 녀석한테 네 놈을 시집보내 버리고 말테니까." 그러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 자신도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곧 얼굴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웃음을 얼굴에 떠올리는 순간, 심랑의 모습이 그녀의 뇌리에 스쳤기 때문이었다. 심랑의 그림자가 뇌리에 스치는 순간 그녀는 더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왕련화가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고생이오? 의자를 발로 차서 자기 발이나 아프게 하고...... 자신이 찾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그곳에서 빠져 나와서 가슴 아파하고...... 이것이 어찌, 어찌 자기 자신을 자기가 괴롭히는 짓거리가 아니겠소?" 그의 중얼거림에 주칠칠은 발딱 그에게 고개를 돌리고 날카롭게 외쳤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죠?" 왕련화가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다만 나 자신에게 물어보고 있는 거요. 천하의 남자들은 정말 모두 죽어 버렸는지...... 그래서 심랑 한 사람만 남았는지를 말이오. 최소한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이 천하에는 심랑보다 강한 남자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거요." 주칠칠이 왕련화의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번쩍 손을 쳐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쳐든 손을 그의 따귀를 내려치지는 못했다. 그녀도 속으로 자신에게 물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래. 천하의 남자들은 정말 모두 죽어버렸단 말인가? 왜, 왜 나는 심랑에게 이렇게 끌려 다니는 거지? 왜 그 사람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거지?) 그녀는 발을 구르며 큰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반드시 복수하고 말거야. 반드시, 반드시!" 왕련화가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천천히 말했다. "당신 혼자 힘으로 심랑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아마 어쩌면......." 주칠칠이 말했다. "어쩌면 어떻다는 거죠? 내가 복수를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는 건가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아니오. 당연히 복수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해야 되겠지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내가 가세한다면, 내가 당신을 위해서 어떻게 복수를 하는지 주도면밀한 계획을 짜준다면 그 일은 훨씬 더 쉬워지지 않겠소?" 주칠칠은 눈을 부릅뜨고 한참을 왕련화의 얼굴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한참을 왕련화를 쳐다보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으나 그녀는 가볍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마음의 갈등을 느끼는 듯하였다. 왕련화가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보건데 당신은 일시적인 분풀이할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일뿐 심랑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오. 그만 두시오! 심랑과 같은 사람과는 정면 대결을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을 거요. 당신은 왜 하필 그 친구에게......."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칠칠이 다시 노갈을 터뜨렸다. "누가 그 사람과 정면대결하는 것을 겁낸다는 건가요? 내가, 내가 한 번 그 사람과 정면대결을 해보겠어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아가씨에게는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다는 거요?" 주칠칠이 말했다. "나는, 나는......." 그녀의 눈빛이 번쩍하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원망하게 만들고야 말겠어요. 그 사람과 적이 되도록 만들고야 말겠어요." 왕련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 생각은 아주 좋은 방법이오. 그렇지만 당신은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심랑과 적이 되도록 만든다는 거요? 당신이 방금 주루에서 보았듯이 심랑은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서 환영을 받는 인물이 되어 있소." 주칠칠이 말했다. "흥,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어요." 그녀는 다시 일곱,여덟 바퀴 방 안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또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왕련화에게 몸을 돌려 눈을 빛내면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한 자 한 자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그 개방의 모임이라는 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당신은 틀림없이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그 내막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르지요." 주칠칠이 말했다. "말해 보세요." "좌공룡이 방주가 되고 싶어서 지금 미칠 지경이오. 그리고 내가 좌공룡에게 그가 방주가 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이미 약속을 했소. 그래서 좌공룡이 개방 제자들을 모두 이곳에 모이도록 지령을 내린거요." 주칠칠이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좌공룡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모습도 보이지 않잖아요? 당신? 헤. 당신은 지금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좌공룡을 도와준다는 거죠?"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좌공룡이 종적이 묘연해진 것과 내가 현재 이러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을 개방 제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소? 그들은 다만 개방삼로의 명의로 된 명령을 받고 사면팔방에서 이곳으로 모여든 것뿐이오." "그렇다면 개방 제자들 외에 이 모임에 초청을 받은 무림호걸들은 도대체 누가 초청을 한거죠?" "그것도 당연히 좌공룡이 초청한 것이오. 좌공룡이 개방 방주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한 것은 그가 일생 동안 가장 노심초사 기다려 왔던 일이오. 좌공룡은 당연히 천하의 무림영웅들을 모두 모아서 자신이 방주 자리에 오르는 것을 구경하게 하고 싶었던 거요." 주칠칠이 갑자기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왕련화가 말했다. "당신의 모습을 보니 당신에게 무슨 좋은 묘책이라도 생각이 났나본데?" 주칠칠의 눈에서는 과연 득의한 기색이 흘러넘쳤다.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왕련화,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내가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만약 그러한 생각이 들어 실행에 옮긴다면 당신보다 결코 못 하지는 않을 거예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도대체 당신에게 어떤 묘책이 있는지 한 번 말씀이나 해보시오." 주칠칠이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개방 제자들이 좌공룡의 명령을 받고 사면팔방에서 모두 이곳으로 즉각 모여 들었다는 것은 개방 제자들의 마음 속에 좌공룡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왕련화가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소." "그리고 방금 주루에서 본 무림호걸들을 비롯하여 심지어 칠대고수까지도 포함해서 모두 좌공룡의 초청장을 받고 불원철야로 이곳까지 모여들었다는 점에서 봐도 무림계에서의 좌공룡의 선망은 그런대로 상당히 높다고 얘기할 수 있을 거예요." "좌공룡은 지금까지도 강호 상에서 아주 대협으로 알려져 있소. 만약 강호상에서의 선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작고하신 개방의 웅(熊) 방주마저도 좌공룡보다 더 뛰어나다고는 얘기할 수 없을지도 모르오." "이러한 점으로 볼때 지금까지 강호의 호걸들은 좌공룡의 진면목을 모르고 있음이 틀림없어요. 강호인들은 모두 여전히 좌공룡을 대협으로써, 좋은 사람으로써만 생각하고 있는 거죠." 왕련화가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입을 닫기만 한다면 아무도 좌공룡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오." 주칠칠이 얼굴을 무겁게 가라앉히고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말했다. "만약, 지금 어떤 사람이 강호 호걸들에게 좌공룡이 이미 심랑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을 한다면 좌공룡을 위해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이 틀림없이 많을 거예요." 그녀는 비록 음험하고 잔인한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려고 애를 썼으나, 왕련화의 눈에는 그 표정이 우습기만 했다. 왕련화는 속으로는 웃으면서도 입으로는 도리어 큰소리로 찬탄하여 말했다. "대단하오, 대단한 묘책이오." "우리는 비단 좌공룡만 심랑에게 죽었다고 선전할 것이 아니라 단궁이나 구양륜도 모두 심랑의 손에 죽었다고 선전하는 거예요. 그러면 심랑에게 복수하려는 사람은 더욱 많아질 거예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대단하오. 갈수록 대단해지는 것 같구려." 갑자기 왕련화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결점이 있소." "무슨 결점이죠?" "애석하게도 좌공룡은 아직 죽지 아니한거요. 만약 좌공룡이 나타난다면......."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상당히 똑똑한 사람인줄 아는데 어떻게 이렇게 멍청해졌죠? 좌공룡이 나타나면 더욱 좋은 것 아니겠어요? 좌공룡 그 사람도 심랑에게 상당히 깊은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만약 좌공룡이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에게 약간 우리의 뜻을 말하고 자신이 심랑의 손에서 어렵게 도망쳐 나왔다고 말하고 단궁과 구양륜은 도망쳐 나오지 못해서 죽었다고 말하게 시키면 되지 않겠어요?" 그녀가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좌공룡이 직접 자신의 입에서 하는 말을 누가 믿지 않겠어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구려. 대단한 생각이오, 정말 대단한 생각이오." 그러나 말을 마치는 순간 그는 다시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믿어 줄 것 같소?" 주칠칠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소문을 퍼뜨릴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거예요. 이런 말을 우리가 직접 사람들에게 말을 할 필요는 없죠. 다만 한 사람을 시켜서 그러한 소문을 퍼뜨리게 하는 거예요." "음, 그것도 그럴 듯하오." "이러한 소문을 다른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 무림계에서 반드시 이름 꽤나 있는 인물이라야만 할 거예요. 그래야 그가 하는 말을 신빙성있게 듣게 되니까요." 왕련화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은 상당히 찾아내기가 어려울텐데."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벌써 이곳에 한 사람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왕련화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요? 아, 혹시...... 혹시 승 아무개를 말하는 거요?" "바로 그 친구예요. 승현 그 친구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 친구는......." "그 친구는 비록 무림계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소졸이긴 하지만 승가보는 무림계에서 그래도 꽤 명망이 있는 가문이라고 알고 있어요. 이러한 명망있는 가문의 자제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의심할 리가 없겠지요." 왕련화가 말했다. "그건 그렇소. 그렇지만 문제는 다만 그 친구가...... 그 친구가......." 주칠칠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약간의 잔재주가 더 필요하겠지요." 왕련화가 말했다. "그 친구에게 잔재주를 부린다는 거요?" 주칠칠은 왕련화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왕련화에게 말했다. "당연히 그 친구에게 약간의 잔재주를 부려야 되겠지요. 바로 미인계 말이에요." 왕련화는 당황한 듯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미인계를 쓴다고요? 당신 혹시 나를...... 나를......?" "바로 맞혔어요. 당신과 같은 아주 아름다운 여자를 쓴다는 거죠. 그 친구는 이미 당신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져있는 상태가 아니던가요? 당신은 기뻐해야 되는 게 아니겠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허리를 굽히고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왕련화는 화도 나고 조급한 생각도 들어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것은......." 주칠칠이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은 상당히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멋있는 신랑감을 찾아냈는데 당신은 나에게 약간의 고마움이라도 표시해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왕련화는 얼굴을 찌푸리고 눈을 크게 뜨며 더듬거렸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 녀석이 만약 나와...... 나와 혹시...... 혹시......." 주칠칠은 웃음을 참느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죠. 나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내가 어떻게 당신들의 일까지 간섭을 할 수가 있겠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방문을 벌컥 열고 큰소리로 불렀다. "점원! 점원!" 왕련화는 점원을 부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려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떻게 되어 먹은 여자지? 멍청하다고 생각할 때는 도리어 상당히 총명하고, 또 총명하다고 생각할 때는 도리어 그 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멍청한 짓거리나 하고. 방금 전까지는 화가나서 안절부절 못 하더니만 지금은 또 아주 저렇게 기분이 좋아서 들떠있고. 아유, 이런 아가씨는 정말 사람을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드는군. 그렇지만, 왜 내 눈에는 저 아가씨가 예쁘게만 보이는 거지?) 돈많은 공자의 부름에 점원은 번개처럼 주칠칠의 앞에 나타났다. 주칠칠이 말했다. "자네에게 시킬 일이 한 가지 있는데 혹시 할 수 있을까?" 점원이 재빨리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공자께서는 분부만 하십시오." 주칠칠이 말했다. "나에게 친구가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 성은 승씨일세. 바로 '승리'할 때의 승씨 말이야. 그리고 이름은 현이라고 하지. 내가 이미 그 친구가 이곳에 온 줄은 알고 있는데 도대체 어느 객점에 머무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네. 자네가 나 대신 찾아줄 수 있겠나?" 점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번개같이 달려가서 어느 객점에 묶고 계신지 알아보죠." "자네가 그 친구가 어느 객점에 묶는지 알아준다면 많은 상을 주도록 함세. 명심하게." 그 말에 점원의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가 굽어졌다. 그리고 계속 중얼거렸다. "걱정마십시오, 걱정마십시오." 그 점원은 연기처럼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돈이 많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더니 그 말은 틀림없는 말이었군. 왕련화, 당신은......." 이때 갑자기 한 사람이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자네 좀 기다리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자네 이 객점에 혹시 젊은 공자 한 분이 묶고 계신가? 아주 예쁜 아가씨를 대동하고 다니는 그런 공자 말일세." 그 사람의 목소리는 시각을 알릴 때 치는 종소리보다도 더 크게 울려퍼졌다. 그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는데 주칠칠의 귀에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주칠칠이 안색이 변하면서 말했다. "큰일났군 ! 저것은 웅묘아의 목소리인데...... 어떻게 그 사람이 이곳에 왔지?" 이때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 상공의 성은 심...... 심......." 주칠칠이 말했다. "아, 이것은 승현의 목소리인데......? 어떻게 저 친구가 또 웅묘아와 같이 있는 거지? 그리고 왜 또 나를 찾는 거지? 혹시......?" 이때 그 점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의 성은 도대체......?" 다시 승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일세. '승리'할 때 승 말이야." 점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알고보니 승 공자이셨군요. 잘됐습니다, 잘됐습니다. 심 공자께서 마침 승 공자님을 찾고 계십니다." 웃음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동시에 주칠칠 등이 묶고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칠칠이 대경실색을 하면서 말했다. "큰일났군. 모두 이곳으로 오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소. 목소리를 들어보건데 그 두 사람은 이미 술이 취해서 말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오. 절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오. 하물며 내 역용술은 웅묘아가 술이 취하지 않았다 해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오." "좋아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당신은 빨리 침대 위로 올라가서 자는 척 하세요." 그녀는 왕련화에게 달려들어 그를 안아 일으켜서 침대 위로 내팽개쳤다. 그리고 침대 밑에 떨어져 있던 이불을 끌어당겨 왕련화의 얼굴을 뒤집어 씌었다. 그리고 침대의 한쪽 구석에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들어올려 다시 왕련화의 전신을 덮어 씌웠다. 이때 승현은 이미 주칠칠 등이 묶고 있는 방문 밖에서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심 형, 심 공자! 승현입니다. 심 형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웅묘아와 승현은 과연 모두 취해 있었다. 심랑이 주루 주인의 초청을 받아 가고난 후 웅묘아는 다시 승현을 끌고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질세라 교오 마저도 그들에게 계속하여 술을 권했다. 결국 웅묘아는 술이 거나해지자 술병을 집어들고 주루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닥치는데로 사람들에게 술을 권하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술을 남김없이 모두 마셔댔던 것이다. 사람은 원래 술기운이 거나하게 올랐을 때 물을 마시듯 술을 마시게 되는 법이다. 그들은 흠뻑 취해 버렸다. 주칠칠이 문을 여는 순간, 짙은 술냄새가 훅하고 그녀에게 끼쳐 들어왔다. 주칠칠이 눈썹을 찌푸리는 순간, 웅묘아가 이미 승현을 뒤에서 떠밀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주칠칠이 그들을 바라봤을 때 그들은 이미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다행스럽다는 기분에 가슴을 내리 쓸었으나 입으로는 도리어 엉뚱한 말을 했다. "이분 형씨께서는 존대성명이 어떻게 되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가 있겠소?" 승현은 이미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그는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 친구, 이 친구는 바로 대명이 자자한 웅묘아라고 하는 분이오." 웅묘아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이다. 웅묘아! 곰 웅자에 고양이를 나타내는 묘아라는 뜻이죠. 야옹, 야옹! 바로 이러한 고양이 말입니다. 아주 큰 고양이지요. 하하......." 주칠칠은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아, 원래 고양이 형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웅묘아가 말했다. "이 고양이가 이번 공자의 방을 방문한 것은 바로 이 승 형을 위해서 매파노릇을 한 번 해볼까 하구요." 말을 하면서 그는 손을 뻗어 승현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리고 또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을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것이오? 말해 보시오." 웅묘아의 재촉에 승현은 더욱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히더니 말했다. "저는...... 저는. 하하, 저는......." 웅묘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소. 이 친구가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하는 모양인데 내가 대신 말하리다. 이 친구는 바로 공자의 질녀를 본 후부터 이미 제 정신이 아닙니다. 저더러 꼭 중간에 서서 일을 성사시켜 달라고 하도 간곡히 부탁하길래, 하하...... 제가 매파노릇을 좀 해볼까 하구요. 재미있지 않소? 하하하하!" 승현이 얼굴을 붉히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말한 게 아닙니다. 제가 부탁한 게 아니고 웅 형께서 직접 자기에게 맡기라고 얘기하고 저를 끌고 이곳까지 온겁니다." 웅묘아가 고의로 얼굴색을 변화시키면서 말했다. "뭐라고 말했소? 내가 승 형을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이라고 말했소? 승 형은 그럼 달갑지 않다는 건가요? 승 형의 마음이 그렇다면 내가 이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지요." 말을 마친 그는 재빨리 포권을 하며 말했다. "공자께 실례했소." 그리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듯한 몸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승현은 당황하여 재빨리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웅묘아가 웃으며 말했다. "어, 도대체 왜 이러시오? 왜 나를 잡아 끄는거요?" 승현이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웅 형, 제가...... 제가......." "도대체 내가 승 형을 잡아끌고 이곳에 온거요, 아니면 승 형이 나를 잡아끌고 이곳에 온거요?" "하하. 제가, 제가 웅 형을......." 웅묘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승 형, 결국 사실대로 말을 하고 말았구려. 승 형이 솔직하게 말을 했으니 내가 승 형을 한 번 봐 드리는지요." 그는 다시 주칠칠 쪽으로 몸을 돌려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제가 매파노릇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주칠칠은 한 손으로 아래턱을 가볍게 만지면서 고의로 우물거렸다. "그것은...... 그것은......." 그녀가 머뭇거리는 듯한 기색을 짓자 승현은 조급해져 얼른 주칠칠에게 애걸하듯이 말했다. "저는, 저는 총명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렇게 멍청하다는 소리도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쁜 짓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인품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크게 나쁘다는 평을 듣지 않았고, 또 나쁜 습관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의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고 웅묘아가 또 웃으면서 말했다. "승 형, 당신이 하는 그러한 말은 원래 매파가 하는 것이오. 승 형은 어떻게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자랑을 그렇게 늘어 놓고 있는거요?" 승현은 더욱 조급하여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웅묘아가 말했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사실을 말한다 해도 거짓이 되어버리는 수가 종종 있는 법이오." 승현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다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웅 형께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지, 이렇게...... 이렇게 훼방 놓으라고 웅 형을 이곳까지 모시고 온 것은 아닙니다. 웅 형께서는...... 웅 형께서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주칠칠은 웃음을 참느라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웃으면서 생각했다. (이러한 매파도 드물게 볼 뿐만 아니라, 이처럼 와서 구혼을 하는 사윗감도 정말 드물게 본다고 얘기해야 되겠군. 만약 내가 정말 질녀가 있다면 이러한 사람을 사위로 맞아들였다가는 어떠한 원망을 들을지도 모르지.) 웅묘아가 큰소리로 말했다. "좋소, 좋소. 더이상 시끄럽게 하지 마시오.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그가 자기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내 성은 웅이고 이름은 묘아요. 싸움은 져본 적이 없고 술은 지금까지 취해본 적이 없소. 그리고 나쁜 습관도 그렇게 많지는 않지요. 다만 공부를 좀 덜 했을 뿐이오. 나 같은 사내 대장부를 천하에서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소." 승현이 더욱 조급해져서 말했다. "웅 형, 웅 형...... 웅 형께서는 도대체 웅 형을 위해서 매파 노릇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저를 위해서 매파 노릇을 하시는 겁니까?" 웅묘아가 말했다. "당연히 승 형을 위해서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웅 형 자신에 대해서 왜 선전을 하시는 거지요? 웅 형 당신 같은 사람을 매파로 모시고 온 제가 실수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웅묘아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그건 승 형께서 모르는 말씀이오. 내가 승 형을 위해서 매파 노릇을 하는 이상, 당연히 내 자신을 먼저 약간 소개를 해야 되지 않겠소? 만약, 매파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면 그 혼사가 어떻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소?" 승현은 어리둥절한 듯 웅묘아의 말을 듣고 중얼거렸다. "그것도, 그것도 일리는 있군요." 웅묘아가 말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거든 한쪽에서 얌전히 있으시오." 이때 갑자기 주칠칠이 말했다. "좋아요." 웅묘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형씨께서는 이미 허락하시는 겁니까?" 주칠칠이 말했다. "좋아요, 허락했어요. 내 조카딸을 웅 형 당신에게 맡기도록 하겠소." 이번에는 웅묘아가 깜짝 놀란듯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 제게 맡긴다구요?" 승현은 더욱 깜짝 놀란듯 목소리마저 떨려나왔다. "아니, 웅 형께 맡긴다구요? 아니, 저는요...... 저는요?" 주칠칠은 고의로 얼굴을 차갑게 굳히면서 말했다. "웅 형과 같은 대장부는 이 천하에 쉽게 찾아볼 수 없소. 내가 조카딸을 웅 형 같은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로 시집을 보낸단 말이오?" 웅묘아는 머리를 긁적거리고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것은......." 승현은 발을 구르면서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이...... 이 노릇을 어떻게 하지? 이 노릇을...... 이 노릇을...... 웅묘아, 웅 형 당신...... 당신!" 주칠칠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더이상 참지 못하고 허리를 앞으로 굽히며 웃어제꼈다. 웅묘아가 말했다. "좋소, 내가 허풍을 떨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지금부터는 허풍이 아니오. 나 웅묘아 역시 그렇게 남들보다 뒤지는 사람은 아니오만, 승가 집안의 공자는 나 웅묘아보다 몇백, 몇천 배 더 뛰어난 분이라고 할 수 있소. 나 웅묘아는 승 공자의 머슴을 한다고해도 과분할 지경이오." 주칠칠은 웃느라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는 뛰엄뛰엄 한마디씩 말을 했다. "알고보니...... 알고보니...... 승 형이 웅 형보다...... 웅 형보다 더 뛰어나군요." 웅묘아가 말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승 형이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나오. 공자의 질녀를 승 형께 맡기는 게 타당하리라고 생각하오." 주칠칠이 또 고의로 한참을 머뭇거리는 척 하고나서 천천히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승 형께 맡기도록 하지요."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웅묘아는 벌써 그자리에서 기쁨에 넘쳐 펄쩍 뛰어 올랐다. 승현은 도리어 그자리에 멍청히 선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웅묘아가 탁하고 승현의 어깨를 내려치면서 말했다. "승 형, 기쁘지 않다는 거요?" 승현이 말했다. "기쁘지 않아요, 나는 기쁘지 않소!" 이렇게 소리친 그는 그자리에서 쏜살같이 몸을 돌리더니 문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리고 승현은 웃음소리와 더불어 다시 방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이미 술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웅묘아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좋소, 좋소. 그래도 승 형께서는 상황을 아는 친구로군. 매파 노릇을 한 나에게 술대접까지 할 줄 알다니 말이오."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매파에 대한 술대접은 없어서는 안 되는 거지요." 그녀는 두 개의 찻그릇을 가지고 오면서 말했다. "제가 먼저 매파에게 한 잔 권하지요." 승현이 말했다. "제가 먼저 권하겠습니다." 주칠칠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이미 내가 누군지 잊어버렸단 말이오?" 승현이 깜짝 놀란듯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움찔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웅묘아가 박수를 치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승 형께서는 잊지마시오. 지금 이순간부터 바로 이 분이 승 형의 미래의 처삼촌이라는 사실을 말이오. 어떻게 처삼촌과 다툴 수가 있겠소?" 승현은 그 말을 듣고 찻잔을 뺏으려던 손을 들어 자기의 따귀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조카가 잘못했습니다. 삼촌께서 먼저 권하시지요." 주칠칠은 터져나오려는 듯한 웃음을 참으며 승현에게 고개를 돌려 눈을 한 번 더 부라리고 나서 말했다. "이제 사람다운 말을 하는군." 그녀는 웅묘아에게 한 잔 가득 넘치게 따라 주고 자기의 잔에는 반 잔 정도 따른 다음 두 손으로 술잔을 잡고 웅묘아에게 말했다. "드시지요." 웅묘아는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였다. 다른 사람이 자기 잔에 술을 많이 따르든 적게 따르든 그는 더이상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주칠칠이 권하는 말에 웅묘아는 잔을 들어 고개를 뒤로 젖힌 다음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지금은 웅묘아가 마시는 것이 술이 아니라 오줌이라 할지라도 그는 마찬가지로 한 입에 털어 넣었을 것이다. 주칠칠은 계속하여 한 잔씩 웅묘아가 잡은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따르는 대로 마셔댔다. 한참 술을 마셔대던 웅묘아가 갑자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망할 녀석! 도대체, 도대체...... 네 녀석들은 도대체 누구지? 심랑은 도대체 어디에 있지? 누가, 어떤 녀석이 심랑이 나보다 더 강하다고 얘기했지? 웅묘아, 나 웅묘아가 천하 제일이야...... 자, 마시자! 마시자......."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쿵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는 듯 몸을 한 번 비틀더니 사지를 뻗은 채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더이상 꼼짝하지 않았다. 주칠칠이 쓰러진 웅묘아를 불렀다. "웅 형! 웅 형!" 그러나 웅묘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칠칠이 손을 뻗쳐 웅묘아의 눈앞에 대고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 곧 이어서 웅묘아의 가슴을 세차게 흔들면서 불렀다. 그러나 웅묘아는 눈도 뜨지 않고 신음소리 한 번 내는 법이 없었다. 주칠칠이 킥킥거리고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완전히 갔군. 이 고양이가 정말 완전히 갔어!"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승현은 이미 탁자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주칠칠은 눈썹을 찌푸리고 눈을 몇 번 굴린다음, 탁자에 있는 식은 차를 들어 승현의 목에 부었다. 승현은 먼저 손을 들어 차가운 찻물이 닿은 목을 몇 번 쓸어내리면서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속 주칠칠이 찬물을 부어내리자 어깨를 움츠리고 마침내 '아야'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펄쩍 일어났다. 주칠칠이 '히히' 웃으면서 말했다. "정신이 들었소?" 달콤한 꿈 속에 빠져있던 승현은 갑자기 목에 차가운 찬물을 뒤집어쓰자 신경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자 눈을 부릅뜨고 손을 번쩍 치켜들어 도대체 누가 자신의 목에 찬물을 끼얹었는지 내리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는 미래의 처삼촌임을 알아차리자 가슴에 끌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상대방을 치려고 치켜올렸던 손을 엉거주춤하게 가슴 앞으로 끌어들여 주칠칠에게 공손히 읍을 하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리고 험악하게 굳어있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이 동생이 깜박 잠이......." 그러나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주칠칠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했다. "동생이라고......?" 승현이 재빨리 주칠칠의 뜻을 알아차리고 말을 바꿨다. "아, 제가 실수했습니다. 동생이 아니고, 동생이 아니고...... 이 조카가...... 이 조카가......." 그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주칠칠은 비로소 얼굴을 펴고 웃으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하시게. 조카님은 이제 술이 깨셨나?" 승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근본적으로 술이 취하지가......." "설혹 술이 취했다해도 내가 이미 차가운 찻물을 부었으니 약간 정신이 들었을 걸세." "바로 그렇습니다. 예, 예......." 그는 다시 축축하게 젖은 목을 만져봤다.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자세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정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는 이순간 확실히 술기운이 많이 가셔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은데...... 제가 더이상 시끄럽게 해 드려서야......." "돌아 가시겠다는 건가?" "예. 이만 돌아갔다가 내일, 내일 다시 이 분 웅 형과 다시 와서 뵙도록......."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낸 듯 말을 했다. "그리고 혼례 문제에 대해서는 처삼촌님의 분부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칠칠이 갑자기 냉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혼례에 대해서? 그것은 아마 그렇게 쉽지 않을 걸세." 승현이 대경실색해서 물었다. "그렇지만 방금, 방금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집 사위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우리집을 위해서 한가지 일을 해야 하고, 또 강호를 위해서 몇 가지 일을 해야만 되는 법일세. 내가 그 일을 처리하는 능력을 보고나서 비로소 조카딸을 맡겨야 안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승현이 말했다. "원래 집안의 규칙이 그러시다면 어떤 일을 하면 될지 분부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내일 개방의 모임에 대해서 자네는 알고 있는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쯤 그 개방의 모임이 있는건가?" "해가 지고 나서 저녁식사를 하기 전, 그 사이입니다." "음, 그렇다면 자네가 이전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내일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도록 하게. 자네가 별 실수 없이 그 소식을 모임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자네는 그런대로 쓸만한 사람이라는 점수를 받게 될 걸세."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떠한 일인지......?" "내가 방금 그 주루에서 갑자기 나와버렸는데 왜 나왔는지 자네 혹시 짐작이라도 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것은 왜냐하면...... 심, 심......." "바로 그렇네. 내 이름을 도용하고 있는 그 심랑이라는 친구는 아주 악인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일세. 개방 삼로는 모두 그 녀석이 죽인 것이지. 그 녀석이 이렇게 나쁜 일을 저질렀는데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말을 들은 승현이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대경실색을 하면서 말했다. "그,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자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승현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 말했다. "그 일은...... 그 일은 너무, 너무 놀라운 일이라서...... 그리고 강호상에 미치는 영향도 너무, 너무 클 것 같아서...... 이 조카가 직접 그 증거들을 찾아내기 전에는, 이 조카가 확실히 제 눈으로 그러한 사실을 보지 않는 이상, 강호에 그런 말을 퍼뜨리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됩니다." 주칠칠은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생각했다. (무림세가의 자제라고 하더니만 과연 옳바르고 옳바르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는 하군.)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녀는 겉으로는 크게 노한 기색을 떠올리며 큰소리로 말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 심랑이라는 녀석은......." 승현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이 조카는 그 심랑이라는 친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거운 죄를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 친구에게 뒤집어 씌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점, 삼촌께서 제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칠칠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자네가 심랑 그 녀석을 위해서 변명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군. 자네는 자네의 형 가형이 어떻게 실종됐는지 알고나 있는가? 누가 자네의 형을 죽였는지 알고나 있으냔 말일세." 승현의 얼굴색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조급하게 반문했다. "가형이 이미, 이미...... 목숨을 잃었단 말입니까 ? 그게, 그게 혹시 심랑이란 말씀이십니까?" 주칠칠은 틀림없다는 듯 확신에 차서 말했다. "바로 그 녀석이네." 승현이 털썩하고 의자에 주저앉으면서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도저히...... 도저히 믿을수가 없군요." "좋네. 자네가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처음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얘기해 주도록 하겠네. 자네의 형과 새온후, 손통이 같이 중원에 도착했을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났네." 심랑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녀는 승현에게 승영이 어떻게 그 고묘에 들어갔으며 어떻게 사로잡혔고, 또 어떻게 다시 구출해 되었으며, 어떻게 낙양에 이르게 되었고 심랑이 다시 왕 부인의 손에서 그들을 구해냈으며, 심랑이 다시 그들을 인의장으로 보냈고, 또 그들이 인의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독이 발작하여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얘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원래 말재주가 좋았다. 그런데다가 이 모든 일들은 사실이었다. 말재주가 좋은 사람이 사실을 얘기한다면 당연히 논리정연하고 조목조목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승현은 주칠칠의 말을 들으면서 몸을 계속 가볍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손발은 이미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고 술기운은 이미 멀리 사라져버렸다. 말을 마친 주칠칠이 승현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몇 마디 덧붙였다. "자네는 총명한 사람일세. 내가 한 말이 진정인지 거짓인지 자네는 충분히 알아 들었으리라고 생각하네." 승현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제가, 제가 그 놈을......." "자네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심랑을 위해서 변명을 하고 싶은건가?" 승현은 갑자기 앉았던 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방문을 향해 뛰어나가려 했다. 주칠칠은 재빨리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부여잡고 말했다. "뭘 하려는 건가?" 승현이 말했다. "복수를 할 겁니다, 복수를요. 가서 심랑을 찾아서 반드시 복수를......." 주칠칠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심랑을 찾아가서 자네 마저도 죽고 싶다는 건가?" 승현이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부모 형제를 죽인 원수하고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는 법입니다. 제가...... 제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반드시, 반드시 그 놈을......." 주칠칠이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이보게! 자네의 무공으로는 기껏해야 심랑의 삼 초를 받아 넘기지도 못하고 심랑의 칼날에 자네의 목숨을 버리게 될 걸세. 자네가 그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목숨을 내걸고 심랑과 싸운다는 것은 너무 경솔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그렇지만, 제가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주칠칠은 눈을 몇 번 껌벅이고는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자네 집에 전부 애들이 몇 명이나 있는가?" "방금 말씀하신 형님하고 저하고 형제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반드시 형님의 원수를......." 주칠칠이 냉소를 하면서 그의 말을 가로채어 말했다. "자네의 형님이 이미 심랑 그 녀석의 손에 돌아가셨고 지금 자네마저도 가서 그 녀석의 손에 죽게 된다면 그건 바로 심랑 그 녀석의 뜻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승가보는 이 이후부터 대가 끊겨 누가 자네들의 복수를 해주란 말인가?" 주칠칠의 말에 승현은 정신을 차린 듯 털썩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다시 고개를 뒤로 젖히고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한 모습을 보고 주칠칠이 말했다. "복수를 하는 방법은 하나뿐이 아니네. 멍청한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걸고 정면으로 복수를 하려고 덤비는 법이지. 자네가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복수를 할 수 있다고 내가 보장을 하겠네." 승현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중얼거렸다. "저는 지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저는 다만...... 다만 삼촌의 말을 들을 뿐입니다." "좋네. 그렇다면 자네는 지금 곧 밖으로 나가서 심랑 그 녀석이 저지른 흉악한 일들을 개방 제자와 그리고 개방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곳에 모여든 무림의 호걸들에게 알려주도록 하게. 그러면 자연히 다른 사람이 자네 대신 복수를 해줄 걸세." 승현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제가......." 주칠칠이 다시 그의 말을 가로채어 말했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될 것은 심랑이 모르도록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된다는 점일세. 만약 심랑이 알게 된다면 자네는 자네가 다른 사람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영원히 하지 못하게 될 걸세." 승현이 침통하게 말했다. "알았습니다. 그 점,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서 이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꿇어 앉았던 자리에서 번쩍 일어서더니 방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주칠칠은 뛰쳐나가는 그를 가로막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득의한 기색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주칠칠은 침대 곁으로 가서 왕련화를 뒤집어 씌웠던 이불과 옷가지들을 걷어냈다. 왕련화는 여전히 그 자리에 웅크린 채 꼼짝 않고 있었다. 다만 그의 눈에도 주칠칠의 눈에서 나온 것과 같은 득의한 미소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그는 주칠칠보다도 더 득의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듯하였다.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을 들었어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들었소. 아주 잘했소, 아주 잘했소." "흥, 당신은 지금에야 비로소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겠죠?" "알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실도 더 알아냈소." "다른 사실을 더 알아내다니? 도대체 어떤 거죠?"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강호에 처음 나온 귀공자는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총명한 듯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모두 어리숙하며 그들을 속이는 것은 강아지를 속이는 것보다 더 쉽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는 탄식을 하고나서 이어서 말했다. "이전에는 나는 당신이 상당히 연약하고 쉽게 남의 꾐에 넘어간다고 생각했소. 그런데 당신보다도 더 연약하고 쉽게 남의 꾀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당신이 쉽게 사람을 속이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어떠한 사람도 더이상 나를 속일 생각은 버려야 될 거예요." 왕련화가 말했다. "당연한 얘기요. 어떤 사람이 감히 당신을 더이상 속일 수가 있겠소?" 왕련화의 말을 듣고 주칠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지으려 했으나, 득의한 기색은 숨길 수가 없었다. 특히 그녀의 눈에서는 득의한 기색이 아무리 어리숙한 사람이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흘러넘치고 있었다. 눈은 사람을 속일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가볍게 잔기침을 하면서 억지로 자기 자신의 기분을 숨기려고 하였다.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가볍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알았죠?" 왕련화가 말했다. "또 여자가 남장을 했을 경우,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 한두 가지 여자들만이 하는 동작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오. 그러한 동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지불식간에 나온다는 사실이오." 주칠칠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여자들만이 하는 그러한 동작을 했다는 건가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도 가끔 그런 모습을 보였소." "도대체 어떤 점이 그랬는지 말해보세요." "예를 들면 당신은 방금 손을 들어올려 머리를 쓸어 넘겼는데 그것은 여자들만이 하는 동작이라고 할 수 있소. 그리고 방금 당신이 뛰쳐 나가려는 승현을 붙잡을 때, 당신은 승현의 팔뚝을 잡은 게 아니고 승현의 옷자락을 잡았소. 이것도 여자들만의 동작이라고 할 수 있소." 주칠칠은 그제서야 깨달은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당신의 그 눈알은 예리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다시 어떠한 점을 알게 되었는지 또 말해 보세요." 왕련화가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어떠한 여자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이 매우 두려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 준다는 것은 좋은 일인데 뭐가 두렵다는 거죠?"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한 남자가 여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조상이 덕을 쌓은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그 여자의 사랑이 만약 한으로 변했을 때 그것은 아마 조상이 덕이 없는 때문일 것이오." 주칠칠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련화가 이어서 말했다. "옛말에도 있지 않소?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한도 깊어진다고 말이오. 사랑이 깊어질 때는 두 사람을 갈갈이 가루로 만들어서 하나의 덩어리가 되지 못하는 것을 원망스러워 하는 법이오. 그리고 한이 깊어질 때는 도리어 상대방을 갈갈이 찢어서 죽여 버리지 못해서 한스러워 하게 되는 것이오." 주칠칠이 마침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그 말은 맞았어요. 여자가 만약 어떤 남자를 원망할 때는 무서운 법이지요. 그렇지만 여자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만 하고 한을 갖지 않게 하면 두려울 건 없지 않겠어요?" 왕련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은 그렇소만 여자들의 사랑과 한의 차이는 백지 한 장보다도 더 가볍소. 하물며......." 주칠칠이 말했다. "하물며 어떻다는거죠?" 왕련화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물며 여자가 한 남자를 원망할 때는 그 남자를 갈갈이 찢어 죽이고 그 고기를 먹지 못해서 안달을 하게 되는 법이오. 그리고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할 때는 또한 그 남자를 가루로 만들어서 자신과 합치지 못해서 안달을 하게되고 상대방한테 관심을 갖고 상대방의 모든 것을 갖고 싶어서 안달을 하게 되는 법이오. 이 두 가지의 상황은 모두 상당히 남자를 괴롭게 하는 것이오. 여자로 하여금 자신을 원망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게 하는 그러한 남자만이 비로소 총명한 남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주칠칠이 한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웃기는 왜 웃어요? 당신은 중상을 입어서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자꾸 웃다가는 아마 제 명에 죽지 못할 거예요." 왕련화는 과연 잔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도 그렇게 득의양양해 할 건 없어요. 심랑도 비록 괴롭겠지만 당신도 그와 대동소이 할테니까...... 나는 비록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겠지만 도리어 당신을 뼈에 사무치게 원망할 거예요. 당신을 갈갈이 찢어 죽이고 싶도록 원망할 거예요." 그녀는 한편에서는 왕련화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우며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서 발을 들어 무엇인가를 펑하고 걷어찼다. 걷어차인 물건은 웅묘아였다. 웅묘아는 바닥에 쓰러진 채 꼼작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취해 있었던 것이다. 왕련화가 눈을 돌려 웅묘아를 한 번 슬쩍 훑어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당신은 이 고양이 새끼를 어떻게 처치할 예정이오?" 주칠칠이 말했다. "이 고양이 새끼는...... 흥!" "내일 녀석이 술에서 깨어나면 틀림없이 승현과 더불어 이곳에 왔던 일을 기억해 낼거요. 그리고 승현은 어쩌면 그에게 이미 당신도 심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을지도 모르오. 그렇다면 그는 틀림없이 심랑을 해치려고 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주칠칠이 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어떻다는 거죠?" 왕련화가 천천히 말했다. "후한을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서 이 기회를 틈타서 영원히 이 고양이 새끼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좋을 거요." 주칠칠이 갑자기 대갈을 터뜨렸다.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도 말아요. 당신은 내 손을 빌어서 당신을 적대하는 모든 사람을 죽이려 하지만 그건...... 당신 혼자만의 꿈에 불과할 거예요." 왕련화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것이오." 주칠칠이 말했다. "이 사람은 이 방에 들어올 때 이미 거의 인사불성 상태였어요. 내가 지금 그를 떼메고 나가서 밖에 아무 곳에나 내팽개쳐 버린다고 해도 내일 그가 깨어났을 때 오늘 이 방에서 일어났던 일은 더이상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왕련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꼭 그렇게 해야겠다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소?" 주칠칠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당연히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입을 꼭 다물고 있어야 되겠지요."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굽혀 웅묘아를 부축해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웅묘아는 다시 흐물흐물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주칠칠이 그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정말 고양이 같은 인간이로군." 입으로는 욕설을 퍼붓고 있었으나 손으로는 도리어 비단 손수건을 꺼내어서 웅묘아의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내고 그를 안아올려 문밖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 걸어가다가 또 몸을 돌려 왕련화를 바라보고 냉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아요. 얌전히 잠이나 자고 있어요." 그리고 손을 뻗어 왕련화의 두 곳의 혈도를 짚었다. 길거리에는 등이 드문드문 보이고 인적이 거의 끊겨 있었다. 그러나 어슴프레한 가로등 아래에는 삼삼오오 취한들이 어깨동무를 하거나 등에 동무를 엎은 채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어떤 취한은 술취한 소리를 하고 있었으며 어떤 취한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주칠칠은 웅묘아를 껴안고 객점을 나섰다. 그녀는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취한들과 자기에게 껴안긴 취한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남자들은 정말 이상한 동물들이야. 왜 이렇게 자기 자신을 마치 역질에 걸린 돼지새끼처럼 취하게 술을 마시는 거지? 왜 자기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거지?" 그렇지만 남자들은 또 언제나 여자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법이다. (왜 여자들은 술 속에 있는 진정한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주칠칠은 웅묘아를 껴안고 길거리의 어두운 구석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웅묘아를 아무렇게나 아무 곳에나 내던져 버릴 생각이었으나 또한편 웅묘아가 고생할까봐, 혹시 감기에 걸릴까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이때 갑자기 세 마리의 말이 길 한쪽 끝에서 주칠칠이 서있는 쪽을 향해 빠르게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주칠칠은 별로 그 말들에 주의를 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깊은 밤 저렇게 빨리 말을 모는 것은 틀림없이 범상치 않은 사건 때문에 그러리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그만이었겠지만, 그녀가 그쪽을 바라본 순간 그녀는 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앞에서 달려오는 말에 앉은 사람은 신체가 발랄하고 몸에 꼭 맞은 옷을 입었으며 입가에 검은 수염을 짧게 깎아 달고 있는 바로 그 아무하고나 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주루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달려오고 있는 말에 앉은 사람은 놀랍게도 바로 심랑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주칠칠은 멍하니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 있었다. 세 필의 말은 그녀의 앞을 바람처럼 스쳐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세 필의 말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 있었다. 그 말을 탄 사람들은 모두 아주 급한 일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들의 안색은 모두 신중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급히 말을 모느라 그녀에게 곁눈질 한 번 하는 사람도 없었다. 주칠칠은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서 있더니 비로소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군, 정말 이상해...... 그가 어떻게 심랑과 아는 사이지? 어떻게 심랑과 같이 있는 거지? 아! 그렇군! 틀림없이 그가 주루에 있었던 사람들 입에서 심랑이 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거야. 그리고 내가 심랑과 같이 있었던 사실은 이미 강호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그가 심랑에게 내 소식을 물어 보려고 심랑과 가까워졌던 것일거야." 이 일들을 주칠칠은 정확히 추측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르는 점이 여전히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도대체 심랑하고 무슨 얘기를 한거지? 두 사람이 이렇게 총총히 달리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밤중에 뛰어 나가는 거지? 도대체 그들은 어디로 가는 거지?"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주칠칠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발을 구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망할 인간, 왜 심랑을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는 거야? 내일 개방 대회에 심랑이 만약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애써서 생각해낸 그러한 계책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 그녀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녀는 더이상 웅묘아가 고생을 할까, 혹은 감기에 들까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어져 버렸다. 그녀는 웅묘아를 처마 밑에 내려놓고 말했다. "웅묘아, 당신께 미안해요. 그렇지만 당신이 너무 필요없는 일에 간섭했잖아요? 그리고 누가 그렇게 당신에게 술을 많이 마시라고 그랬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객점쪽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웅묘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 됐다는 듯 웅묘아에게 다시 다가오더니 몸에 걸쳤던 장삼을 벗어서 웅묘아를 덮어 주었다. 그러한 후 그녀는 총총히 다시 객점을 향해 종종 걸음으로 달려갔다. 웅묘아를 내려놓은 주칠칠이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갑자기 네 명의 흑의 대한이 맞은 편 집 처마의 그늘진 곳에서 번개처럼 나타나서 두 사람은 객점을 향해 달려가고 나머지 두 사람은 웅묘아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두 사람의 행동은 매우 민첩하고 표정은 매우 날카로왔다. 그 두 사람은 웅묘아의 앞에까지 다가서더니 웅묘아를 몇 번 이리저리 쳐다보고나서 그 중 한 사람이 웅묘아를 툭하고 발로 찼다. 웅묘아는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집었으나 여전히 꼼짝않은 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 사람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이 고양이 새끼를 하필 우리가 꼭 손을 쓸 필요가 있겠소?" 다른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두목이 명령한 것이오. 그것보다도 그 계집년과 같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심 성의껏 보살피라는 분부요. 두목의 명령은 틀림없이 어떤 까닭이 있기 때문일 거요." 그 사람이 말했다. "아예 이 녀석을 호숫가에 갖다 집어던져서 고기밥이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그것도 안 되오. 두목은 살아있는 놈을 잡아 오라고 했소." 그 사람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좋소이다. 이 친구를 떼메고 돌아갑시다." 그 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두목이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왜 이 두목은 특히 주칠칠에게 주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떠한 음모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일들을 주칠칠은 도저히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두 명의 대한은 신속하게 웅묘아를 떼메더니 곧 길의 맞은 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침 이순간 그 길의 맞은 편에서 수명의 술취한 대한이 고성방가를 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대한들은 매우 취한 듯 이미 발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었으나 그렇게 인사불성일 정도는 아닌 듯하여 보였다. 그 까닭은 그들의 노래를 그런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강호제일 유협은, 강호제일 유협은 바로 우리 큰형님, 큰형님 웅묘아...... 웅묘아." 이때 한 사람이 갑자기 노랫소리를 멈추고 나서 웃으면서 말했다. "저쪽을 좀 보게. 저쪽에 어떤 녀석이 우리보다 더 취한 녀석이 있는 것 같애. 다른 사람이 떼메고 가지 않나?" 다른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도 저 친구랑 비슷해. 누가 더 취하고 덜 취했다고가 없어." 그들은 '히히! 하하' 웃으면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그 두 명의 웅묘아를 떼메고 있는 흑의 대한은 귀찮은 일을 피하려는 듯 술취한 그 장한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을 스쳐가려고 했다. 그래서 한 사람은 길가의 우측 모서리로,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길가의 좌측으로 그들과 스쳐갔다. 그러나 두 쪽의 사람들이 스쳐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취한 중의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쳤다. "아냐 그게 아냐, 그게 아냐!" 다른 한 사람이 그 말을 받았다. "뭐가 그게 아니라는 거지?" 첫번째 말했던 취한이 말했다. "내가 방금 떼메어져 가는 사람의 얼굴을 흘낏 봤는데 어떻게 우리 큰형님과 그렇게 비슷할 수가 있지?"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네 놈의 눈이 어떻게 잘못된 거겠지." 첫번째 말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음, 하긴 그래. 내 눈이 어떻게 잘못된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이 또 말했다. "그렇지만 좋든 싫든 도대체 우리 큰형님인지 아닌지 확인은 해봐야 할 것 같애." 사람들이 술을 마셔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랐을 때는 그중 한 사람이 어떤 제안을 한다해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 두 대한이 떼메고 가는 사람이 도대체 그들의 큰형님인지 아닌지 확인해보자는 제안에 취한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거 좋지." 그와 동시에 그들은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웅묘아를 떼메고 가던 두 명의 대한은 그들이 쫓아오는 모습을 보자 약간 당황한 듯 두 사람이 서로 손짓을 교환하더니 그들도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 두 대한이 뛰기 시작하자 취한들은 더 빠른 속도로 그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분히 두 대한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멈춰라! 게 섰거라, 도망가지 말아라!" 그들이 소리를 질러대면 질러댈수록 그 두 명의 대한은 더욱 더 빨리 달아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돌덩이 같은 남자 웅묘아를 떼메고 있는 이상, 그렇게 빨리 뛸수는 없는 듯하였다. 그들이 길 모퉁이에 이르기도 전에 취한들은 이미 그들을 바짝 쫓아왔으며 순식간에 그들을 몇 겹으로 에워쌌다. 두 명의 대한은 용기를 내서 노갈을 터뜨렸다. "친구들! 무엇 때문에 길을 막는 건가?" 그러나 이때 그 취한들은 이미 웅묘아를 알아본 듯 분분히 소리를 질러댔다. "아, 정말 큰형님이군! 네놈들 우리 큰형님을 떼메고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빨리 우리 형님을 내려놔!" 어지러이 소리치는 속에서 일곱, 여덟 개의 주먹이 그 두 명의 대한을 향해 어지럽게 지쳐 들어갔다. 두 명의 대한은 손에는 사람을 들고 있어서 그들의 공격을 맞받아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웅묘아를 내려놨을 때 그들은 이미 취한들에게 수도 없이 얻어맞은 상태였다. 그 취한들은 비록 무공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그 주먹의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여기에 또 술기운까지 가세하여져 밥그릇만한 주먹으로 어지러이 두 대한을 내려쳤기 때문에 그 두 대한은 이미 눈두덩이, 입가 할 것 없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있었다. 그 두 대한의 무공도 높지는 않은 듯해 보였다. 취한들에게 어지러이 몇 주먹을 얻어맞자 이미 겁이 난 듯 반격할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고개를 바짝 숙이고 쥐새끼처럼 그들 사이를 비집고 도망을 쳤다. 취한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을 쫓아갔다. 그러나 이때 웅묘아가 갑자기 쓰러졌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꼿꼿이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대한들은 놀랍고 기쁜듯 그를 둥글게 에워싸고 그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큰형님께서는 술이 취한 게 아니셨군요?" 웅묘아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들어 퍽퍽 하고 좌우로 내갈겼다.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던 취한들은 모두 따귀를 한 대씩 세차게 얻어맞았다. 영문도 모른 채 따귀를 얻어맞은 대한들은 일순간 움찔 하였으나 곧 얻어맞은 자국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큰, 큰형님...... 저희들이 무슨 잘못을......?" 웅묘아가 화난 소리로 말했다. "흥, 따귀 한 대로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건가? 나도 차라리 몇 대 더 두들겨 패야 분이 풀릴 것 같은데......." 취한들은 울상을 짓고 말했다. "저희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웅묘아가 말했다. "네 녀석들은 내가 왜 취한 척 했는지도 몰라?" 취한들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웅묘아가 말했다. "내가 술취한 척 한 것은 그 녀석들이 도대체 어떤 녀석들인지, 그 녀석들의 소굴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 그랬던 거란 말이야. 그런데 네 녀석들이 내 일을 다 망쳐놨으니......." 취한들은 웅묘아에게 얻어맞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웅묘아가 말했다. "나한테 얻어맞은 게 억울하냐?" 취한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조금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형님께서는 마땅히 몇 대 더 때리셔야 될 것 같은데요?" 웅묘아가 말했다. "그래 알았다." 그는 다시 손을 번쩍 쳐들었으나 취한들의 따귀를 내리치지 않고 통 속에서 도리어 은자 몇 조각을 꺼내어 취한들에게 한 조각씩 쥐어주는 것이었다. 취한들이 말했다. "형님, 도대체 이...... 이것은 무, 무슨......." 웅묘아가 말했다. "네 놈들이 비록 몇 대 맞긴 맞아야겠지만, 그렇지만 내가 곤경에 처한 것을 발견하고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해냈으니 내 형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 내가 네놈들에게 술을 한 잔 사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어?" 취한들은 박수를 치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형님은 역시 형님이시군요. 형님 같은 분을 모시고 있는데 따귀 몇 대가 아니라, 아예 모가지를 내놓으라 한다해도 기꺼운 마음으로 내놔야 되겠지요." 왁자지껄 다시 떠들면서 그들은 웅묘아를 에워쌌다. 그러나 웅묘아는 그들의 모습을 한 바퀴 빙 둘러보더니 또 스르르 그 자리에 쓰러져내리는 것이 아닌가! 취한들은 대경실색해서 말했다. "형님, 혹시...... 혹시 부상이라도?" 웅묘아가 말했다. "헛소리 좀 작작하게. 누가 나 웅묘아를 부상시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다만, 다만...... 아이쿠...... 내 머리는 멀쩡한데 몸은 도대체 말을 듣지 않으니. 손, 다리가 느슨느슨한 게 꼭 닭 모가지도 비틀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일세." 취한들이 또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큰형님이 비록 아주 강하기는 하지만 그 술이라는 물건은 우리 형님보다 훨씬 더 강한 듯하네." 취한들이 다시 박수를 치면서 목청껏 노래를 불러댔다. "웅묘아, 웅묘아...... 비록 하늘이 겁나지 않지만, 비록 땅이 겁나지 않지만, 겁나는 것은, 겁나는 것은 술통이라네...... 술통이라네......." 웅묘아가 드러누웠던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그만 부르게. 그런데 내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자네들, 혹시 심 상공 보았나?" 취한들이 말했다. "심 상공께서는 방금까지도 형님을 찾고 계셨는데요?" "그렇다면 지금은......?" 취한들이 말했다. "지금은, 아! 아까 얼핏 보건데 심 상공께서는 이미 그 주루의 주인과 말을 몰고 어디론가 달려가던데요?" 개방 제자들 웅묘아가 대경실색을 하며 물었다. "말을 몰고 어디론가 달려갔다고? 아이고, 큰일났군! 정말 이거 큰일이로군. 그들이 왜 말을 몰고 갔는지, 또 어느 쪽으로 갔는지 알고 있느냐?" 취한들은 서로를 멀거니 바라볼 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 마침내 한 사람이 대답했다. "얼핏 보기에 사람을 찾아서 달려가는 것 같았어요." 웅묘아가 급히 물었다. "누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지?" "누구를 찾는지는 저희들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보기에 분명히 사람을 찾아서 달려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 세 필의 말은 저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웅묘아가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망할...... 망할...... 방금 들은 그 말발굽 소리가 틀림없이 그들이었을 것 같은데......." 그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 급한 말발굽 소리는 들었으나 주칠칠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듣지 못했던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술이 취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주칠칠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웅묘아가 말했다. "우리 지금 빨리 쫓아가도록 하자. 어쩌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형제들, 빨리 나에게 말 한 필을 구해다 주게. 빨리...... 훔쳐서라도 좋고, 빼앗아도 좋고, 사와도 좋으니까 빨리 한 필을 구해다 주게." 주칠칠은 총총히 객점으로 들어갔다. 이 며칠사이 객점의 대문은 밤새 활짝 열려 있었다. 주인은 주칠칠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첨하는 듯한 웃음을 띠며 아는 체를 했다. 그 뒤에 서있던 점원도 허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신거렸지만 주칠칠은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무슨 골똘한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숙이고 자기 방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답답하고 짜증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때 그녀의 등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가시는 상공께서는 잠깐만 제 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주칠칠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을 때 두 명의 흑의 대한이 큰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으며 얼핏 보기에도 별반 악의는 없는 듯하여 보였다. 그러나 주칠칠은 눈을 크게 흡뜨며 물었다. "나는 당신들을 모르는데 왜 나를 불러 세우는 거요?" 흑의 대한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저희들도 공자를 알지 못하지만 저희집 주인은 공자를 알고 계십니다." 주칠칠은 깜짝 놀라 물었다. "당신들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지요?" 그 중 한 대한이 말했다. "저희집 주인이 급한 일이 있어서...... 헤헤...... 급한 일이 있어서 공자를 찾고 계십니다." "급한 일이라니? 그게 무슨 일이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아니구요, 다만...... 다만 공자를 청해서 술 몇 잔을 권하고 싶다고......." 그 흑의 대한은 표독스럽고 날카롭게 생겼으나 말하는 것은 우물우물거리긴 했으나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주칠칠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술을 마신다구요? 이렇게 깊은 밤에 나를 찾아서 술을 마시겠다구요? 흥, 내가 보건데 당신의 주인이라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때 주칠칠은 갑자기 자기 자신이 역용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리고는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당신들의 주인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죠?" 그 대한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집 주인은 바로 구양(毆陽)......." 주칠칠은 깜짝 놀라며 날카롭게 물었다. "나는 구양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아는 사람이 없소."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희집 주인은 이(李) 공자를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에게 이 공자께 가서......." 주칠칠이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눈이 멀었소? 누가 이 공자라는 거요?" 대한은 주칠칠의 위아래를 몇 번 훑어보고는 자기 동료를 바라보면서 우물거렸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잘못 알았다는 말씀......?" 주칠칠이 노갈을 터뜨렸다. "멍청한 녀석들! 다음부터는 사람을 똑바로 알아보고 말을 걸어요. 알았소?" 두 명의 대한은 동시에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칠칠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두 대한을 어찌해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만 노려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입에서는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들이 터져나왔다. "허우대만 멀쩡하게 생긴 것들이 사람도 제대로 알아볼 줄 모르고...... 정말 눈이 삐었군." 그녀는 중얼중얼 욕지거리를 퍼부어대면서 걸어 들어갔다. 이때 몇 명의 여자들이 머리를 산발한 채 상체를 뒤로 젖힐 수 있는 등받이 의자를 붙들고 울며불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의자에는 흰 천이 덮씌어져 있었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이 아마 죽은 모양이었다. 부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매우 슬피 울고 있었다. 주칠칠은 눈썹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재수없군. 죽은 사람까지 보게 되다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옆으로 몸을 비껴서서 그녀들에게 먼저 지나가도록 하였다. 부인들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서 주칠칠 옆을 스쳐갔다. 그러나 이때 어떤 노부인이 코를 세차게 풀더니 손을 옆으로 홱 부리쳤다. 그러자 그 콧물은 그대로 주칠칠의 가슴께에 와서 철썩 붙어버렸다. 주칠칠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지만 그녀들이 너무나 슬프고 애닯게 울었기 때문에 오른발을 들어 쾅 내리밟고는 큰 걸음걸이로 자신의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다행히 방 안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 있지 않았다. 왕련화는 얌전히 침대에 누운 채로였다. 왕련화는 주칠칠이 웅묘아를 떼메고 나갈 때 수혈을 짚었기 때문에 아주 곤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주칠칠은 재빨리 왕련화에게 다가가 수혈을 풀어 주었다. 그녀는 가슴 속에 화가 잔뜩 끓어오른 상태에서 왕련화의 수혈을 풀었기 때문에 그녀의 손은 매우 매서웠다. 왕련화는 '아야!'소리를 지르면서 마침내 잠에서 깨어났다.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은 잠도 잘 주무시는군. 나는 밖에서 귀찮은 일만 당하고 왔는데......." 그녀는 왕련화가 잠을 자고 싶어 잠을 자고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그녀를 억지로 웅묘아를 떼메고 나가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괜한 화풀이를 왕련화에게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가 억지를 쓸 때에는 아무도 그녀를 달랠 수가 없는 법이다. 더구나 이순간 주칠칠의 화풀이에 왕련화는 어떻게도 해 볼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짓은 화풀이에 왕련화의 상세는 나아지지 않고 더욱 깊어졌으며 그 눈빛이 암담해져 신음소리마저도 내지 못할 지경에 빠져드는 듯하였다.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은 심랑이 방금 말을 타고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요?" 왕련화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내가, 내가 어떻게...... 어떻게 알 수 있겠소?" 주칠칠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일 만약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헛고생한게 되지 않겠어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요. 이처럼 큰 모임에 무림계의 모임을 그가 참석하지 않을 리가 있겠소?" 주칠칠이 한참 생각을 하다가 비로소 얼굴을 활짝 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겠군요. 당신이 지금까지 한 말 중에 그 말이 제일 제 맘에 들었어요. 좋아요. 당신은 매우 힘든 것 같은데 제가 자도록 해드리지요." "고맙소." 그는 다시 한숨을 쉬고 말했다. "잠자는 것 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해야 되다니...... 그리고 고맙다고 말을 해야 되다니...... 당신은 내가 불쌍하지 않소?" 주칠칠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더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구석자리에 있는 등받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부지불식간에 깊이 잠이 들어 버렸다. 주칠칠은 확실히 피곤했다. 한 번 잠이 들자 그녀는 떼메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왕련화는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실소를 날렸다. 그리고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머리를 손질하고 눈을 비빈 다음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대충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정리한 다음 방문을 열어 제꼈다. 그때 갑자기 한 사람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주칠칠은 깜짝 놀라 움찔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주칠칠이 놀람에 찬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뛰어들어온 사람이 바로 왕련화가 두 번 다시 보기도 싫어하는 승현임을 알았다. 승현은 뛰어 들어오던 자세를 안정시킨 다음 주칠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나 표정은 매우 초췌해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지난밤 한잠도 잠을 자지 못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주칠칠은 지난밤 그가 틀림없이 매우 분주히 여러 가지 일을 했으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곱게만 자란 귀공자가 밤새껏 이리저리 부지런히 돌아다녔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 "자네는 문밖에서 내가 깨어날 때까지 꼬박 기다렸단 말인가?" 승현이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제가 조금 전에 왔을 때 두 분께서는 곤히 주무시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감히 두 분을 귀찮게 해드리지 못하고......." 그는 말을 하다가 슬쩍 침대에 누워있는 왕련화를 바라보더니 또 우물쭈물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그만, 그만 문에 기대서 깜박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또 왕련화를 힐끗 쳐다보고 다시 주칠칠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이상하다는 듯한 기색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 이 조카딸은 병이 깊어서 밤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옆에서 간호를 해주어야 한다네. 그리고 이렇게 밖을 돌아다니면서 간호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귀찮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여기에서 잠을 자면서 저 애를 간호해 주곤 한다네." 승현은 주칠칠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하자 얼굴이 더욱 붉어져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예, 예. 당연히 그러셔야겠지요." 주칠칠이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부탁한 일은 모두 잘 처리했는가?" 승현이 비로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이미 처리했습니다. 저는, 저는 이 조카는 어젯밤 하룻밤 사이에 심랑 그 녀석이 해치웠던 잔악한 일에 대해서 오십칠 명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심랑 그 녀석은 결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잘했네. 듣는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 승현이 말했다. "개방 제자들은 그 얘기를 듣고 울화통이 터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며 심지어 어떤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터뜨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제자들은 곧바로 심랑을 찾아가서 복수를 하자고 아우성이었어요. 그러나 제가 그들에게 조금만 더 참았다가 오늘, 개방의 모임에서 천하 모든 무림호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다음 심랑에게 복수를 하자고 권했습니다." 주칠칠이 말했다. "개방 제자들은 그렇다치고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떻든가?" "개방 제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제 얘기를 듣고 모두 얼굴에 노한 기색을 드러냈지요. 어떻든 한 마디로 말해서 심랑 그 녀석이 오늘 개방의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기만 한다면 결코 온전한 상태로 그 자리를 빠져 나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주칠칠이 한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잘했네, 잘했어...... 그 녀석이 당하는 꼴을 빨리 보고 싶군. 정말 빨리 보고 싶어. 지금 도대체 몇 시나 됐는가?" 승현이 신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그 개방 모임이 개최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때 점원이 열려진 방문 틈으로 머리를 삐죽이 내밀고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손님들께서는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주칠칠은 의아하여 물었다. "식사? 아침이오, 점심이오?" 점원이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정오가 방금 지났습니다. 제가 여러 번 이곳에 왔는데 두 분께서 아주 곤히 주무시길래 깨우지 못했습니다." "아, 정오가 지나가 버렸다고? 참 시간이 빠르군." 그녀는 정오가 지났다는 말을 듣자 심랑을 곤경에 빠뜨릴 시간이 다가온다고 생각하고 기뻐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기쁘지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은 착잡하고 슬퍼지기만 했다. 주칠칠은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좋아. 얼른 상을 이리 들여오게." 점원이 사라지자 그녀는 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밥을 먹고 우리 밖으로 나가도록 하세. 승현, 자네는 배불리 먹어두게. 배가 불러야 비로소 힘도 생기고, 심랑 그 악당 녀석을 자네가 직접 처단할 수도 있을 테니까." 승현이 탄식 하면서 말했다. "애석하게도 이 조카가 손을 쓰기 전에 심랑 그 녀석은 아마 다른 사람들 손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겁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식사가 방 안으로 날라져 왔으며 어젯밤 왕련화를 부축해 돌아다니던 두 여자도 따라 들어왔다. 그 여자들은 왕련화의 식사를 옆에서 도와주기 위해서 따라 들어온 것이다. 왕련화는 밥을 한 입 삼키고 한숨을 쉬곤 하면서 꾸역꾸역 한 입 한 입 먹어갔다. 승현도 밥을 한 입 먹고 한숨을 쉬고 젓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멍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그는 가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기도 했으며 또 슬쩍슬쩍 왕련화를 훔쳐보기도 했다. 그러나 주칠칠은 이들의 행동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듯 게걸스럽게 음식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사실 주칠칠의 마음은 하늘만이 알 것이다. 그녀는 음식을 입에 집어 넣을 때마다 목구멍에 콱콱 걸려 넘어가지 않았고, 음식을 십는 맛이 마치 모래를 십는 기분이었다. 심랑은 곧 사람들에게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직접 그녀가 조작한 일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참 대단한 인간이야. 심랑이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말인가? 어떻든 그 사람은 내 손에 당하게 되었으니 내 자신이 기뻐해야 될 일이 아닌가?) 그녀는 생각을 하면서 얼른 구운 생선 토막을 하나 집어서 입으로 집어 넣었다. 그러나 그 생선은 너무나 썼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릴 만큼 생선은 쓰고 껄끄러웠다. 그녀는 갑자기 손에 들었던 젓가락을 탁자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큰소리로 말했다. "심랑! 아, 심랑! 내가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이상 난 당신을 죽여버릴 거예요. 내가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이상 이 세상의 어떤 여자도 당신을 갖도록 그냥 놔두지 않을 거예요." 승현은 깜짝 놀란듯 밥을 한 입 가득 문채, 고개를 쳐들고 주칠칠을 바라보았다. "삼촌께서는 지금, 지금 무슨 말씀을......." 주칠칠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실언을 알아차리고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오. 밥이나 빨리 먹게. 말은 가급적 적게 하는 게 좋은 걸세." "조카는 이미 다 먹었습니다." "자네는 사내 대장부이면서 어떻게 아직 시집가지 않은 아가씨들보다도 더 적게 먹는단 말인가? 흥, 밥 두 그릇도 먹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남의 집 아가씨를 넘본다는 건가?" 승현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더...... 더 먹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밥을 한 그릇 가득 퍼담더니 입 안에 가득 채워 넣었다. 심지어 반찬은 집어 먹을 생각도 않고 오로지 밥만 계속 입 안으로 쑤셔넣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추칠칠은 속이 상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이미 다 먹었으면 그만 먹을 것이지, 뭐하러 그렇게 어거지로 밥을 쳐 넣는가? 내 말은 다음부터 밥을 먹을 때는 남자답게 먹으라는 얘기일세." 승현이 밥을 입에 가득 문채 우물거렸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삼촌께서는 저에게...... 저에게...... ." 그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난처한 지경에 밥을 더 먹지도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식사는 주칠칠에게도 왕련화에게도 승현에게도 매우 괴로운 것이었으나 결국 식사는 끝낼 수 있었다. 식사를 물리고 승현도 왕련화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칠칠은 다시 방 안을이리저리 서성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은 초조한 기색으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승현은 그러한 주칠칠을 바라보며 더욱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멀찍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왕련화는 잠이 들었다. 그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이 들어버렸다. 그는 더이상 승현이 게슴츠레하게 자기를 쳐다보는 그 눈빛을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그 눈빛을 받는다는 것은 진정 괴로운 일이다. 시간은 이렇게 답답한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마음과는 아랑곳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주칠칠 뿐만 아니라 승현, 왕련화마저도 그 몇 시간이 일 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다. 주칠칠은 창을 열었다 닫았다 한게 이미 십여 차례가 지났다. 그녀가 열세번째 창을 열었을 때 마침내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짜증스러운 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시간이 덜 됐다는 건가?" 승현이 말했다. "대략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개방 모임이 어디서 이뤄지는지 자네는 그곳을 알고 있는가?" "어젯저녁 그곳에 직접 가봤습니다." "좋네. 자네가 가서 방금 들어왔던 그 두 여자를 불러오게. 우리도 준비해서 나가도록 하세." 승현은 당황한 듯 멀뚱히 침대에 누워있는 왕련화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도...... 그녀도 갈 수 있겠습니까?" 주칠칠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왜 갈 수 없다는 건가?" 승현이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렸다. "저, 이...... 이...... 이 조카는, 이 조카는 약간 불편할 것 같아서......." "뭐가 불편할 것 같다는 건가?" 승현이 말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텐데...... 그리고 상당히 번잡할 텐데...... 만약, 실수해서 그녀가 부상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흥, 아직 자네에게 시집을 간 것도 아닌데 뭘 그리 걱정하는가? 내 조카딸은 아직까지는 우리집 사람일세. 나도 걱정하지 않는데 자네가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네. 내가 있는 이상, 누가 내 조카딸에게 손을 댈 수가 있단 말인가?" 승현의 얼굴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렸다. "지당하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말을 마친 그는 재빨리 뛰어 나가 두 여자를 불러왔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부터는 이분 삼촌이 뭐라고 얘기하든 자기는 절대로 끼어들지 않겠다고....... 길거리는 어제 저녁보다도 훨씬 더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그리고 매 십여 호 간격마다 민가의 처마 밑에는 개방 제자들처럼 거지로 분장한 대한들이 있었다. 그들은 등에 대부분 서너 장의 마대를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개방의 집사의 일을 담당하는 제자들인 것 같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팔짱을 끼고 남의 집 대문 계단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있거나 서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길 좌우 양측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 이상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개방의 규칙이다. 그들은 오늘 개방의 모임에 참석하러 오는 무림계 인사들을 접대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지만 길거리에서 동냥이나 구걸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길을 묻는 무림인사들에게 그들은 모두 동쪽을 향해 손가락질해 보이고 있었다. 개방 대회는 동쪽 교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하였다. 주칠칠은 승현에게 길을 안내하도록 했다. 승현이 제일 앞에 서고 중간에는 두 명의 여자가 왕련화가 탄 들것을 들고 쫓아갔으며 주칠칠은 제일 마지막에 왕련화의 들것을 바짝 쫓아가고 있었다.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러한 차림을 보고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주칠칠이 부릅뜬 눈과 마주치면, 주칠칠의 그 흉악한 기세에 눌려 더이상 그들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들이 번화가를 벗어나자 개방 제자들은 더욱더 많아졌다. 이때 개방 제자 중 한 제자가 승현을 알아보고는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억지로 만든 웃음이었기 때문에 매우 어색했다. 그들의 눈빛은 매우 슬픈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아직 좌공룡이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굴려 주위를 둘러보고는 승현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고 난 후에는 자네는 가급적이면 우리와 같이 있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승현은 깜짝 놀란 얼굴로 주칠칠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나 주칠칠은 눈을 부릅뜨고 위협조로 그 물음을 무시해버렸다. "자네는 내가 하라는대로만 하면 되네." 승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탄식하며 말했다. "예, 말씀대로 하지요." 주칠칠이 또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말게." 말을 마친 그녀는 눈을 돌려 사방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웅묘아가 저기 있네." 승현도 눈을 들어 사람들이 많이 있는 쪽을 두리번거리다가 웅묘아의 모습을 발견해내고 얼굴에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제가 가서 모셔 오겠습니다." 주칠칠은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저런 술귀신을 데려다가 무얼 하겠다는 건가?" 승현은 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예, 그러면 그만 두도록 하지요." 이때 두 명의 개방 제자가 멀찍이서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측에 선 사람은 신체가 우람했으며, 얼굴은 곰보투성이었으나 등에는 여섯 자루의 마대를 메고 있었다. 좌측에서 오고 있는 사람은 나이는 많지 않았고 작달막한 키에 신체가 뚱뚱했으며 둥근 얼굴에 실실거리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어딘가 약간 모자라는 듯한 인상이었으나 그도 역시 등에 여섯 자루의 마대를 메고 있었다. 여섯 자루의 마대를 멘 개방 제자들은 개방 자체 내에서도 많지 않았다. 주칠칠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저 두 사람을 아는가?" 승현은 잘 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고 말고요. 저 두 사람은 지난날 웅 방주의 제자들이죠. 제가 듣건데 저 두 사람은 개방 중에서의 위치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개방 삼로 바로 밑에 해당 합니다." "저 두 사람의 이름이 뭔지도 아는가?" "왼쪽 사람은 편지새금전(遍地璽金錢) 전공태(錢公泰)라고 하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뭐였더라...... 소검소복신이라 하고 성은 고(高)씨고 이름은 소충(小蟲)이라고 합니다." 주칠칠이 실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소충? 참 재미있는 이름이로군." 이때 그들 두 사람은 이미 주칠칠 등의 면전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전공태가 가볍게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어젯밤 승 공자께서 알려주신 소식, 정말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주칠칠을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분께서는......?" 그들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칠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친구의 삼촌 되는 사람이오." 전공태가 의아스럽다는 듯 말을 얼버무렸다. "아, 삼촌......." 전공태는 이상하다는 듯이 주칠칠을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았다. 주칠칠이 말했다. "내가 너무 젊어서 이 친구의 삼촌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의미요?" 전공태가 허리를 굽히고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을...... 무슨 말씀을......." "당신들은 길을 안내하려고 온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좋소. 길을 안내해 주시오." 전공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리를 가볍게 굽히더니 한 손으로 그들 두 사람을 앞길 쪽으로 인도하는 시늉을 해보이며 말했다. "자, 가시죠." 그들은 원래 승현을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승현은 한 마디도 말을 하지 못하고 주칠칠이 승현 대신 말을 하는 것에 그들 두 사람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을 안내했다. 승현은 씁쓸한 웃음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개방 대회가 열리는 곳은 큰 논인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겨울이라서 추수는 진작에 끝나 버렸고, 논에는 눈만이 가득 쌓여있어 평평한 초원처럼 보였다. 북방의 시골에는 원래 대나무가 많기 때문에 개방의 제자들은 팔뚝 만큼 통이 굵은 대나무들을 잘라다가 눈이 덮인 이 논 위에 대나무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들은 매우 급히 일을 서둘렀던 듯 대나무 울타리는 아주 엉성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나무 울타리 안의 설비도 등나무 의자와 삐그덕거리는 탁자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대나무 울타리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기개가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대나무 울타리와 이들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우수꽝스러웠다. 대나무 울타리 밖에는 개방 제자들이 가득 있었는데 그들 중 어떤 제자들은 대나무 울타리 안팎을 오가며 기웃기웃 사람들을 보고 있었고, 어떤 제자들은 눈을 감고 태양빛을 쬐고 있었으며, 어떤 제자들은 겨울 햇살에 웃도리를 벗어들고 이를 잡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 매우 한가로운 듯 보였으나 사실은 그들 모두에게는 신중한 기색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백여 명이나 되는 개방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으나 서로 말을 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공태는 주칠칠 일행을 안내하여 대나무 울타리 북쪽에 앉게 하였다. 울타리의 북쪽은 당연히 울타리 내에서도 가장 윗자리였다. 그때까지도 고소충이라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헤벌쭉거리고 웃을 뿐이었다. 울타리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주칠칠은 그들을 못본 척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만하게 앉아있었다. 주칠칠 등 일행이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전공태가 얼른 포권을 하고 말했다. "세 분께서는 이곳에서 차를 드시고 계십시오. 저는 밖에 일이 있어서 그만 나가봐야 겠습니다." 전공태도 이미 승현의 삼촌이라는 이 사람이 상당히 상대하기에 껄끄러운 사람임을 알아차린 듯 재빨리 그 자리를 빠져 나가려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주칠칠이 도리어 전공태를 붙잡았다. "기다리시오." 전공태가 말했다. "귀하께서는 또 무슨 분부라도 계신지요?" "당신들은 저녁 시간에 이곳으로 사람들을 모이도록 하였는데 차 한 잔 밖에 대접할 수 없다는 거요?" 전공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져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있습니다. 차 말고도...... 몇 가지 안 되는 산나물 안주에 술도 있습니다. 충분한 준비는 하지 못했습니다만 여기에 앉아서 답답하지는 않도록 저희들이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충분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칠칠이 여전히 목을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흥, 그 정도라도 준비되었으면 족하오." 승현이 재빨리 웃음을 띠고 말했다. "전 형께서 다른 일이 있으시면 나가 보시지요." 지금까지 바보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던 고소충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으니까 여기에서 이 분들하고 같이 있겠소." 전공태는 고소충을 한 번 바라보고 씁쓸하게 웃으면서 총총히 그 자리를 빠져 나갔다. 주칠칠이 말했다. "좋소. 당신은 여기에서 우리 옆에 있으시오. 먼저 차를 좀 따라 주시겠소?" 고소충은 주칠칠의 말에 히히 웃으면서 차 세 잔을 따르고 나서 말했다. "드시지요." 그 대나무 울타리 안에 앉아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은 슬쩍슬쩍 이쪽을 곁눈질해 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쑥덕쑥덕 댔는데 얼핏 보기에도 그들은 주칠칠 등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 녀석은 도대체 누구지?" 그러나 주칠칠은 그들의 쑥덕 공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들어 아무 거리낌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나이가 모두 사십 남짓 해보였으며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기세가 대단했다. 얼핏 보기에도 그들은 모두 강호에서 행세꽤나 하는 인물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주칠칠은 그들 중 아무도 알만한 사람이 없었다. 웅묘아는 대나무 울타리 밖을 몇 바퀴 돌면서 대나무와 대나무 사이의 틈새로 울타리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주칠칠과 승현을 발견하고는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나 그들을 발견한 순간, 뒤로 슬쩍 물러서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저 녀석도 왔군. 그러나 심랑 그 친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지난 밤 밤새 내내 심랑 등이 달려갔다는 곳으로 쫓아가 찾아봤으나 어디에서도 심랑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때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웅묘아는 다시 대나무 울타리 밖을 돌면서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러던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렇게 멍청해졌지? 여기서 기다릴 필요가 뭐가 있어? 차라리 이곳으로 오는 길목에 가서 심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게 더 나을텐데......." 그는 한 번 생각이 들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다. 그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개방 대회가 열리는 입구의 길목으로 달려갔다. 그가 그 번화가에까지 다시 돌아왔을 때 길가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 개방의 초청에 응해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개방 대회가 열리는 곳에 도착한 듯했고, 몇 안 되는 개방 제자들만이 여전히 남의 집 처마 밑에 기대있거나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웅묘아는 길이 꺾어지는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만약 심랑이 온다면 틀림없이 이 길을 지나겠지." 웅묘아도 역시 팔짱을 끼고 다른 집 대문 계단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났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십여 개의 동전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웅묘아는 깜짝 놀라 물었다. "도대체 이것은...... 이것은......." 그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좀 귀찮겠지만 제발 다른 곳에 가서 서 있으시오. 우리 상점은 장사를 해야 되니까......." 웅묘아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곧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띠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하...... 나를 거지로 봤군.) 그가 자신의 행색을 훑어보자 그의 차림은 조금도 거지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어색한 듯 실소를 터뜨리면서 동전을 받아든 손을 다시 한 번 들어서 살펴보고는 돈을 건네준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하며 말했다. "고맙소." 그는 어슬렁 어슬렁 길가 맞은 편에 있는 포장마차로 가서 말했다. "동전 십 원어치의 술을 데워 주시오."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그에게 돈을 준 그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잣말로 탄식하면서 말했다. "거지들이란 정말 어쩔 수 없군. 돈이 생기기만 하면 저렇게 곧바로 술이나 마셔대니......." 웅묘아는 상당히 귀가 밝은 사람이다. 그의 이러한 중얼거림을 그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는 더욱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그가 주문한 술이 그의 앞에 놓여졌다. 그는 술그릇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리고는 큼직한 은자 한 덩이를 꺼내어 포장마차 주인에게 집어 던지면서 말했다. "다시 세 잔만 더 주시오." 그에게 돈을 건네준 그 사람은 웅묘아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멍청하니 있더니 고개를 흔들며 상점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가 상점 안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또 웅묘아의 귀에 들려왔다. "요새는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많고 이상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지 모르겠군?" 웅묘아가 네번째 잔을 전부 마셨을 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더욱 뜸해졌다. 이때 갑자기 개방 제자 한 사람이 길 입구에서 박수를 쳐댔다. 그러자 지금까지 남의 처마 옆에 기대어 서있거나 대문 입구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개방 제자들은 모두 박수를 치는 그 사람을 따라서 교외 쪽으로 달려갔다. 아마 개방 대회가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심랑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웅묘아는 매우 조급하여 중얼거렸다. "그 친구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지? 개방 대회에 오지 않겠다는 건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개방 대회를 그 친구가 어떻게 참석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이야? 그 친구는 분명히 몇 시에 개방 대회가 열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거지? 혹시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발생한 건가?" 이때 길가에는 더이상 무림 인사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길의 주점들과 상점들은 무림인사들이 갑작스레 몰려드는 순간부터 매우 바빠졌고, 혹시 큰 일이라도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지금은 무림 인사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에는 다시금 미소가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웅묘아는 도리어 조급함과 근심으로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몇 잔의 술을 더 들이키고는 가슴 속이 옷을 풀어헤쳤다. "만약 그 친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주칠칠은 대나무 울타리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오직 고소충만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가 이처럼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가시방석에 앉은 듯 당황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소충이라는 개방 제자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여전히 얼굴에 바보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주칠칠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이 계속 그렇게 웃고 있는 것을 보니, 무슨 기쁜 일이 있는가보죠?" 고소충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띤채 말했다. "그렇소이다." "무슨 일인지 저에게도 좀 말해 주실 수 있소?" "기분좋은 일이야 많지요. 보세요, 햇빛이 이렇게 따뜻하고 눈에 덮힌 천지가 이렇게 멋있고 또 손님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고...... 이러한 일들이 모두 기분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비가 올 때도 기분이 좋나요?" "그럼요. 당연하지요." "비가 올 때는 또 무엇 때문에 기분이 좋지요?" 고소충이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비올 때가 없다면 어떻게 태양이 나올 때 기분좋은 것을 알 수 있겠어요? 하물며 빗물은 초목을 더욱 신선하게 하고 영양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람 대신에 지붕을 깨끗이 씻어주잖아요?"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이 기분 나쁠 때는 없소?" "최소한 지금까지는 기분이 나쁠 때가 없었습니다. 이 천하에 가는 곳마다 저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하는 것들 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굳이 기분 나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당신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주칠칠은 멍청한 듯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실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군요."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그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상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심랑, 웅묘아, 김무망, 심지어 승현까지도....... 이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모두 그녀 눈에는 매우 사랑스럽게 보였다. 이때 갑자기 대나무 울타리 안에서 한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 대협이 오셨소." 주칠칠이 눈을 들어 그 사람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과연 교오와 화사고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교오는 주위를 향해 가볍게 코권을 하고는 큰 걸음걸이로 대나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에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듯하지도 않아보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곤 하는 것이었다. 대나무 울타리 안에 이곳저곳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포권을 하고 아는 척을 했다. 주칠칠이 말했다. "참 이상도 하군. 저렇게 거만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고소충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쁜 일을 하지만 않고, 마음만 올바르다면 그리고 그 행동이 정정당당하기만 하다면 비록 약간 거만하다고 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그 사람을 환영하는 법이오." "당신은 아는 것도 많군요." 고소충이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천만의 말씀...... 그렇지 않소이다." 이때 갑자기 대나무 울타리 밖에서 '딱딱딱!' 하고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고소충이 웃으면서 말했다. "사형께서 집합하라고 명령을 내리시는 것 같소이다. 나는 가봐야 될 것 같소." 주칠칠은 고개를 돌려 대나무 울타리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사방에 흩어져있던 개방 제자들이 한곳에 몰려들어 엄숙한 표정으로 가지런하게 열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전공태와 고소충이 개방 제자들을 거느리고 대나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백여 명이나 되는 개방 제자들은 대나무 울타리 중앙에까지 이르러 동시에 허리를 굽히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대단한 영광입니다." 말을 마친 그들은 동시에 눈이 덮힌 눈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주칠칠은 조급해져 중얼거렸다. "대회가 이미 시작됐는데 심랑 그 사람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것일까?" 웅묘아는 열한잔째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만약 이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계속해서 수십 잔의 술을 더 마셨을지도 모른다. 심랑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는 술을 빌려 답답한 기분을 해소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자 웅묘아는 손에 들었던 잔을 팽개치고 미친 듯이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달려갔다. 멀리서 세 마리의 말이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 말은 웅묘아의 앞까지 달려왔다. 말에 탄 사람은 과연 심랑과 그 주루의 주인이며, 그 주루에서 웅묘아에게 따귀를 얻어 맞았던 대한이었다. 세 필의 말 뒤에 또 마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웅묘아는 두 어깨를 활짝 펴고 그 쪽으로 뛰어가면서 크게 부르짖었다. "심랑! 심 형! 당신이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아마 내가 미쳐 죽은 꼴을 발견했을 거요." 심랑은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우고 말했다. "웅 형, 무슨 일인데 그렇게 허둥대는 거요?" 웅묘아는 웃으면서 주루 주인을 향해 말했다. "죄송하지만, 심 형을 저에게 약간 양보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심 형과 조용히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을 마친 그는 주루 주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심랑을 끌어당겨 멀찍이 떨어진 길모퉁이로 데려갔다. 심랑이 웃으면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거요?" 웅묘아는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젯저녁 심 형 당신은 도대체 어디로 갔던 거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웅 형 당신이 술 몇 잔을 마시고 곤드레만드레가 됐는데, 내가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있었겠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갔던 거요." 웅묘아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어젯저녁, 나는 아주 경천동지할만한 큰 비밀을 알아냈소." 심랑은 한 번도 웅묘아가 이처럼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얼굴색이 변하면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그 성이 승이라는 그 친구 말이오. 술 몇 잔을 마시더니 억지로 나를 잡아 끌고는 자기의 매파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친구와 더불어 그곳에 갔소." 그는 어젯저녁에 발생했던 일, 들었던 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심랑에게 말했다. 심랑은 얼굴색이 변하며 조급하게 물었다. "그 일들을 웅 형 당신이 직접 들은 거요?" "그들은 내가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취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내 앞에서 이런 말들을 했소. 그러나 사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은 취하지 않았었소. 오히려 그들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진짜 취해 버렸던 거요." 심랑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생각컨데 그 친구는 바로 승현이 말했던 심랑을 모방하는 가짜 심랑이겠구려." "그렇소." "웅 형이 보건데 그 사람은 누구일 것 같소?" "그 친구의 말하는 어조를 봐서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탄식소리를 내뱉었다. 그들 둘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진상이 밝혀지다 심랑은 길게 장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하다니...... 그렇게까지 하다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그러나 심 형,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진짜 주칠칠일 것 같소?" "생각컨데 십중 팔구는 그녀일 거요. 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웅 형이 들었던 그런 얘기를 도저히 할 수가 없을 거요." 웅묘아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말했다. "말하는 투로 보아서는 주칠칠인 게 분명한데 전혀 주칠칠 같은 구석이 한 가지도 없소." "웅 형 당신은 그때 이미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해 있었을 텐데 어떻게 똑바로 볼 수 있었겠소?" 웅묘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내가 그 방에 들어갈 때는 아직 그런대로 정신이 멀쩡했소. 그런데 그때 본 바에 의하면 그 친구는 십중 팔구는 주칠칠이 아닌 듯 하였소. 다만 이상한 것은 그 친구의 얘기를 듣고 보면 그가 주칠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얘기를 했다는 거요. 참 이상하지 않소?" 심랑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그녀는 어쩌면 얼굴을 뛰어난 기술로 역용했는지도 모르오." 웅묘아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녀는 역용술을 모르지 않소? 혹시......?" "혹시 왕련화라면 가능하지 않겠소?" 웅묘아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말했다. "심 형이 생각하기에는 왕련화가 그녀에게 역용을 해주었을 것 같소?" 심랑이 한 자 한 자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생각컨데, 웅 형이 보았을 때 침대에 누워있었다는 그 여자는 틀림없이 왕련화였을 거요." 웅묘아는 깜짝 놀란 듯 그자리에서 펄쩍 뛰면서 말했다. "불가능한 일이오. 절대 불가능한 일이오." 그리고 그는 또 순식간에 자기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하군. 그 여자가 왕련화라니. 왕련화 그 친구가 어떻게 주칠칠을 남자로 역용을 시키고, 자기 자신은 여자로 분장을 했던 거지?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거지?" 심랑은 생각하는 바를 천천히 설명했다. "아마도 왕련화는 주칠칠의 핍박에 못 이겨서 그렇게 했을 거요." 웅묘아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주칠칠이 왕련화를 핍박할 수가 있소?" "주칠칠은 어쩌면 아주 절호의 기회를 잡아서 왕련화를 핍박했던 것 같소. 어쩌면 주칠칠이 이미 왕련화를 자기 손 안에 장악하고 있는지도 모르오. 그녀가 왕련화에게 그렇게 모진 모욕을 당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도리어 자신이 당했던 모욕을 왕련화에게 돌려주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오." "듣고보니 그럴 것 같기도 하오. 틀림없이 그럴지도 모르오. 주칠칠이 왕련화를 장악하고 있지 않다면 왕련화가 그녀에게 역용을 해줄 리도 없을 것이고 그리고...... 주칠칠 그녀가 어떻든 심 형 당신을 어느 정도는 원망하고 있으니 당신에게 어느 정도 난처한 경우를 당하게 하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오."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바로 그거요. 그녀는 원래 개성이 강한 여자요. 그리고 자기 멋대로 하면서 자랐던 여자요. 이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생각나는대로 아무 일이나 해치울 수 있는 여자를 꼽으라면 틀림없이 주칠칠은 제일인자가 될 거요." 웅묘아도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일은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가 없을 것 같구려. 아무리 복잡한 일이라도 심 형 당신에게 가져만 가면 아주 간단한 일이 되어 버리니, 어떠한 일도 심 형 당신을 속일 수 없으니......." 심랑이 신중한 소리로 말했다. "웅 형은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어떤 조치라도 취해 놓으셨소?" 웅묘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의 장점을 나는 다른 것은 배우지 못했소만, 참는 것은 그런대로 배웠소. 나는 어젯저녁부터 지금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소. 심 형이 돌아온 다음에 심 형과 의논해서 일을 처리하려고 기다렸던 거요."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고맙소." 그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이어서 말했다. "웅 형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 것 같소?" 웅묘아는 잠깐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먼저 좌공룡을 찾아내야만 할 것 같소. 그리고 나서 그에게 이 일의 자초지종을 얘기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소. 나에게 좌공룡 그 친구가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 방법이 있소." 심랑이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웅 형은 어젯저녁 내가 어디에 갔었는지 알고 계시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늘이 알고 있겠지요." 심랑이 한 자 한 자 십듯이 말했다. "바로 좌공룡을 찾으러 갔던 거요." 웅묘아는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그 말, 정말이오?" 심랑이 그 주루 주인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바로 저 친구가 나를 데리고 갔던 거요." 웅묘아는 놀라움과 기쁨이 동시에 끌어오르는 듯 들뜬 소리로 말했다. "좌공룡 그 녀석을 찾아냈소?" "찾았소." 웅묘아는 섰던 자리에서 펄쩍 뛰면서 물었다. "그 친구, 지금 어디에 있소?" 그러나 심랑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더니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나를 따라 오시오." 그는 천천히 웅묘아를 데리고 그들 뒤를 따라오던 마차쪽으로 걸어갔다. 웅묘아는 기쁨에 겨워서 중얼거렸다. "잘됐군. 이렇게 하면 일이 쉽게 풀리겠군. 그 녀석이 이 마차 속에 있는 모양이지?" 심랑은 마차 앞까지 걸어가서 천천히 마차의 문을 열어 젖혔다. 과연 좌공룡은 그 마차 안에 있었다. 태양은 곧 서쪽 하늘로 떨어질듯 기울어가고 있었으며, 날은 점점 어두워가고 있었다. 어슴프레한 햇빛이 비스듬히 마차 안으로 비춰들어서 좌공룡의 전신을 비추고 있었다. 좌공룡의 얼굴은 이미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앞가슴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꽂혀 있었다. 그 비수는 앞가슴을 뚫고 들어가 등뒤에까지 뻗쳐 나와 있었다. 웅묘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물었다. "죽었소? 좌공룡 저 친구가 이미 죽었소?"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렇소. 내가 밤새 이리저리 돌아다녀 찾아낸 것은 그의 시체였을 뿐이오." "도대체, 도대체 누가 저 녀석을 죽인 거죠?" "나도 누가 죽였는지 제발 알 수 있었으면 좋겠소." "저 비수에는 주인을 나타내는 무슨 표시라도 있지 않겠소?" "저것은 좌공룡 자신의 비수요. 좌공룡을 죽인 사람은 좌공룡에게 자신의 비수를 꺼내서 앞가슴에서부터 깊게 찌르게 했던 거요. 그리고 보기에 좌공룡이 반항했던 것 같지도 않소.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때 좌공룡을 죽인 사람은......." 웅묘아가 심랑의 말을 가로채어 말했다. "틀림없이 좌공룡과 아주 잘 아는 사람이겠구려. 심지어 좌공룡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순간에 손을 쓴 모양인데.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겠소? 도대체 누가 좌공룡을 그렇게 안심하게 만들 수 있었소?" 심랑은 묵연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웅묘아가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좌공룡이 죽어버렸으니 일은 더욱 어렵게 되었소. 개방 제자들은 이미 모두 선입견이 있기 때문에 심 형 당신이 나타나기만 하면 목숨을 걸고 당신에게 덤빌 텐데 말이오." 심랑이 멍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심 형, 잠시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어떻겠소? 다음 기회를 봐서 개방 제자들에게......." 그러나 심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오늘 내가 개방 대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어쩌면 이후에는 더욱더 이 일의 진상을 밝히기가 어려워질지도 모르오." "지금 상황에서 당신이 만약 개방 대회에 참석한다면. 그리고 또 그들이......."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든 우리 먼저 대회 장소로 가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웅묘아는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탄식하고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한 친구야.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가 있다니." 정말 어떻게 해명할 수도 없는, 그것도 살인을 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게 된 상황이 되면 이 세상에는 그 누구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리라. 엄동설한에 얼어붙은 대지 위에 어떤 사람이 달가운 마음으로 앉아 있겠는가? 그러나 대나무 울타리 안의 빈터에 앉아 있는 개방 제자들은 조금도 얼굴에 귀찮아하는 기색이 나타나지 않았다. 날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으나 이미 십여 명의 마대를 한 자루 등에 걸머진 개방 제자 십여 명이 두 손으로 횃불을 높이 쳐들고 울타리 안으로 걸어 들어와 그 관솔 횃불을 대나무 울타리 기둥에 꽂아 넣었다. 주칠칠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왜 저렇게 멍청히 앉아만 있는 거지? 말도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편지새금전 전공태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아주 신중한 기색이 넘쳐 흐르고 있었으며, 얼굴을 가득 덮고 있는 곰보 딱지들은 횃불빛을 받아서 마치 동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우습다기보다는 도리어 장엄한 기색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사방을 향해 포권의 예를 하고 몇 번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폐방이 무림계의 영웅호걸들을 이곳에 모시게 된 것을 폐방의 상하 수천백 명의 제자들은 모두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폐방의 장로 세 분께서 모두 안 계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가 폐방을 대신해서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허리를 굽혀서 포권을 하고 군웅들에게 예를 올렸다. 대나무 울타리 안에 앉아있던 무림의 호걸들은 모두 한 마디씩 했다. "좋은 말이오." 또 어떤 사람은 말했다. "개방 삼로께서는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셨소?" 전공태가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방이 이번 여러분들을 이곳에 모시게 된 것은, 폐방의 방주를 선임한다는 목적 외에 원래 무림계의 호걸들과 오랫만에 한 번 만나서 지나간 일들도 얘기하고 허심탄회하게 교분을 나누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지금 이순간......."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지금 이순간, 저는 여러분들께 한 가지 슬픈 소식을 말씀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그곳에 앉아 있던 무림 인사들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했다. 그중 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슬픈 소식이라니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전공태가 처량한 음성으로 말했다. "폐방의 세 분 장로께서는 모두 이미 독수로 살해되었습니다." 그의 이 한 마디는 마치 큰 돌을 물에 던져 넣었을 때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대나무 울타리 안에는 갑자기 소동이 일어났다. 그 중 한 사람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전공태에게 다시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오?" 전공태가 처연한 소리로 말했다. "저도 이 소식이 제발 잘못된 것이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일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군웅들 사이에서는 쉴새없이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칠칠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꼼짝 않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전공태가 암연히 말했다. "폐방의 세 분 장로께서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폐방 방주의 자리는 잠시 비워두도록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전히 여러분들께 잠시 이곳에 머물러 주십사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탄식을 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폐방은 이미 여러분들과 기쁘게 지난 날을 얘기하고 교분을 쌓을 수 없는 돌발사태를 만났습니다만 여러분들께 폐방의 제자들이 동심협력하여 폐방의 세 분 장로를 살해한 흉수를 제거하는 모습을 보아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군중들의 웅성거림이 더 크게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큰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그 흉수가 누구요?" 전공태가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 사람은 곧 이곳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대나무 울타리 밖에서 일진의 냉소소리와 더불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친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수가 있다는 건가?" 전공태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누구요?"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한 사람이 이미 대나무 울타리의 동쪽 출입구를 통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횃불빛에 비친 그 사람은 허리가 굽고 등에 혹이 달렸으며 남루한 의상을 걸쳤는데, 얼굴이 보잘 것 없이 얽은 인물이었다. 그 사람은 비틀비틀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주칠칠은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더이상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지막하나마 놀람에 찬 비명을 질렀다. "김불환! 김불환 저 녀석도 왔구나!" 갑작스런 김불환의 출현에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전공태에게 느릿느릿 걸어간 김불환은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견리용위의 김불환이라고 하오. 생각컨데 여러분들은 모두 이 이름을 들어봤을 거요." 울타리 안에 있던 사람들은 김불환을 직접 만나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무림 칠대 고수 중의 한 사람인 견리용위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 있던 군웅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웅사 교오는 도리어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저 혐오스러운 인간이 도대체 뭐하러 온거지?" 화사고가 슬쩍 교오를 바라보며 가볍게 그를 툭 치면서 말했다.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가만히 보기로 해요." 이때 대나무 울타리 밖의 어두침침한 곳에서 세 개의 인영이 숨어들고 있었다. 전공태는 김불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는 비록 일이 난처하게 된 점에 대해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입으로는 도리어 김불환에게 말을 걸었다. "김 대협께서......." 그가 말을 몇 마디 더 꺼내기도 전에 김불환이 날카롭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김 대협이라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김 대협이라고 부른다고 어떻게 네가 나를 김 대협이라고 부른단 말이냐? 개방의 후배들은 어떻게 갈수록 이모양 이꼴이지?" 전공태는 어쩔 수 없이 끌어오르는 화를 눌러 참으며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선배께서는 어쩐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김불환이 노한 소리로 말했다. "개방 제자들이 갈수록 형편 없다더니만,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개방에 이처럼 큰 일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오지 않는단 말인가? 왜 그렇게 자네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나?" 전공태는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선배님, 당신은...... 당신은 폐방의 제자가 아니지......." 김불환이 그의 말을 자르며 노갈을 터뜨렸다. "자네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가? 자네는 내가 개방의 제자가 아니라는 건가? 하하...... 내가 개방에 들어올 때 자네는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걸세." 대나무 울타리 안에 있는 군중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화사고가 낮은 소리로 교오에게 물었다. "김불환 저 인간은 정말 개방 제자예요?" "개방 제자이긴 개방 제자요. 옛날 저 친구는 틀림없이 개방에 들어온 적이 있으니까.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무림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한 번도 자신이 개방 출신이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소.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여전히 개방의 옷이지만 사실상에 있어서 그는 이미 개방을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요." 화사고가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런 그가 지금 개방 제자라고 주장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교오가 냉랭하게 말했다. "흥! 저 녀석이 무슨 꿍꿍이 속이 있든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상, 저 녀석은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을 거요." 전공태가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약간 허리를 굽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 예.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미 어떤 사람이 김불환이 개방 제자라는 점을 전공태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김불환이 말했다. "몰라서 저지른 잘못은 죄가 되지 않는 법이다. 나도 자네를 더이상 책망하지 않겠네." 이때 고소충이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선배께서 오늘 이곳에 오신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신지요?" 김불환이 말했다. "흠흠. 자네들에게 뱀은 대가리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온 것일세. 본방의 수천 명이나 되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루라도 방주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본방은 최근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본방에 방주가 없기 때문일세." 고소충이 말했다. "그렇다면 선배께서 방주를 하시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김불환이 노갈을 터뜨렸다. "닥치게! 본방의 방주 자리를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세 분 장로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을 선출해야지." 고소충이 여전히 히죽거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출하지요?" "천하의 어떤 방파를 보더라도 방주를 선출할 때는 그 방 인물들 중에 강호에서 갖고 있는 명망이나 자질을 보고 또 무공의 높낮이를 기준으로 선출하는 법일세. 자네는 이러한 기본적인 도리도 모른단 말인가?" 고소충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더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김불환이 노갈을 터뜨렸다. "무슨 말인가?" 고소충이 말했다. "만약 강호상에서의 명망이나 자질, 그리고 무공을 논한다면 저희들이 어떻게 선배의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더이상 방주 선출을 위해서 왈가왈부 하기 전에 이미 방주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주칠칠은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고소충, 저 인간은 얼핏 보기에는 멍청해 보이는데 저 인간을 알수록 묘한 매력을 발하는데! 아마 김불환의 낯가죽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이렇게 정곡을 찌르는 말에는 그의 얼굴이 붉어지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그러나 김불환은 얼굴색이 붉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얼굴에 웃음까지 떠도는 게 아닌가! "자네, 말 잘했네. 아주 일리 있는 말일세. 만약 다른 제자들이 이의가 없다면 내가 자네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그는 애꾸눈을 들어 사방을 한 번 쓸어보고 나서 큰소리로 말했다. "개방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 이곳에 참석하신 분들 중에 본인이 개방의 방주가 되는데 대해서 이의가 있는 사람 있소이까?" 개방 제자들은 모두 눈을 들어 전공태를 쳐다보았다. 전공태는 멍청히 서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고소충만이 여전히 히죽거리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대나무 울타리 안의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무림인사들 사이에는 또 다시 가벼운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김불환이 대소하며 말했다. "이의가 없다면 본인이......."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대갈을 터뜨렸다. "누가 개방 방주를 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소. 다만 김불환 당신은 개방 방주를 해서는 안 되오." 김불환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나는 곳을 향해 노갈을 터뜨렸다. "지금 그런 말을 하신 분은 도대체 누구요?" "나 교오요." 말이 끝나는 순간, 웅사 교오의 그 거대한 몸뚱이가 공중으로 펄쩍 뛰어 오르더니 김불환이 서 있는 쪽으로 곧장 날아왔다. 그가 뛰어 오르는 순간, 휙 하는 바람소리가 일었으며 대나무에 꽂혀 있던 횃불들이 꺼질듯 출렁거렸다. 웅사 교오는 이미 김불환의 면전에 도착해 있었다. 자신이 방주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웅사 교오임을 안 순간 김불환의 얼굴색은 이미 변해 있었다. 그는 짜증스러운 듯이 말했다. "당신, 당신도 왔었군." 교오가 냉소하면서 말했다. "김불환 당신의 운이 좋지 않군. 또 나를 만났으니......." 김불환이 냉소하며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무슨 원수진 일이 있다는 거요? 언제나 내가 하는 일을 반대하고 나서니......." 교오가 차갑게 말했다. "천하의 간악하고 사악한 인간들은 모두 나 교오의 원수요. 당신처럼 자신의 일신상의 이익을 위해서 도의를 져버리는 인간이 개방의 방주가 된다면 무림계는 앞으로 영원히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오." 그러나 김불환은 여전히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이 일은 우리 개방의 일이오. 당신은 간섭할 자격이 없소." 교오가 대갈을 터뜨렸다. "어떻든 나는 간섭을 해야 되겠소." 김불환은 '부드득'하는 소리가 나게 이를 갈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전공태는 고소충을 한쪽으로 끌고가 낮은 소리로 원망을 하고 있었다. "자네 방금 왜 그 같은 말을 했나?" 고소충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미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이 김불환이 방주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걸세. 우리가 김불환 저 녀석이 하는 말을 반박할 수도 없고 우리의 무공으로 저 녀석을 제압할 수도 없는 이상 다른 무림계 인사가 나서서 막아주기를 바랄 수밖에 더 있겠는가?" 전공태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듣고 보니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고소충은 여전히 웃을 뿐이었다. 교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불환! 이 교오가 결코 당신을 난처하게 하자는 건 아니오. 다만, 개방 제자들이 모두 당신이 방주 자리에 오르는 것에 대해서 달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나 교오는 결코 이 일에 간섭을 하지 않겠소. 그렇지만 당신이 만약 당신의 그 알량한 몇 가지 재주를 믿고 개방 제자들을 위협하거나, 무림계의 공의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고자 할 때는 나 교오가 결코 당신을 그냥 둘 수 없소." 김불환이 그 말을 받고 재빨리 말했다. "본방의 제자들은 당연히 나를......." 고소충이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채고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선배님이 무공이 뛰어나고 무림계에서의 선망이 다른 사람들을 압도할 만큼 뛰어나다면 저희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선배님의 무림계에서의 명망이라는 것은 어쩌면......." 김불환이 그의 말을 가로채며 노갈을 터뜨렸다. "네. 네, 네 녀석은...... 네 녀석은 도대체 무슨 말을......." 교오 역시 노갈을 터뜨렸다. "김불환,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시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려면 소매를 걷어 붙이시오. 나 교오와 한 바탕 생사를 건 싸움을 해 봅시다." 교오의 말에 김불환은 분기탱천한 듯 소매를 걷어 붙이고 큰소리로 외쳤다. "교오! 네 녀석은 내가 네 녀석을 겁이라도 내는 줄 아느냐?" 이때 울타리 안에 앉아 있던 화사고가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김불환, 당신은 우리 교오 오빠를 두려워하고 있잖아요." 김불환은 사방에 둘러앉아 있는 무림계의 인사들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또 교오를 쳐다봤다.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는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다만......." 이때 갑자기 대나무 울타리 동쪽 편에서 음산한 냉소소리와 더불어 사람의 소리 같지 않은 이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소리는 천천히 이어지고 있었다. "김불환! 무엇을 겁내는가? 개방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간섭을 할 수 없는 법 아닌가?" 그 말소리는 비단 끊어질 듯 천천히 이어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숨이 곧 넘어갈 듯 상당히 무기력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그 말이 자기 귓전에서 들려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으며, 그 음산한 냉소소리는 다른 사람이 자기 귓전에 대고 찬바람을 불어넣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말소리와 음산한 냉소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며 동쪽 울타리의 윗쪽을 쳐다보았다. 어두침침한 빛속에서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꽂아놓은 동쪽 편 대나무 기둥 꼭대기에 언제부터인지 한 사람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눈이 밝은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노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봤던 주칠칠은 그 노인을 발견하는 순간 얼굴색이 변하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아, 저 사람이었군...... 저 사람은 바로, 바로 어제 그 주루에서 혼자 일곱,여덟 개의 술병과 술잔을 놓고 술을 마신 그 노인이 아닌가?" 승현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주칠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저 사람의 성은 한이고 이름은 령이오. 듣건데 저 사람은......." 이때 교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보니 당신이었군. 누가 당신한테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라고 했소?" 한령은 음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먼저 쓸데없는 일에 간섭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결코 쓸데없는 일에 간섭을 하지 않았을 것이오." 김불환이 손벽을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교오가 차갑게 말했다. "알고보니, 당신은 이미 김불환 이 녀석과......." 한령이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다만, 불공평한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반대를 하는 것뿐이오." 김불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오. 저 분은 나 김불환을 알지 못하오. 다만 교오 당신이 쓸데없는 일에 간섭을 하고 나서는 것을 보시고 비로소 강호에 정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나타나신 거요." 교오가 노갈을 터뜨렸다. "당신이 만약 쓸데없는 일에 상관을 한다면 나 교오가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소." 그는 사실 한령의 신분을 폭로할 수도 있었으며 동시에 한령이 어떤 이유로 김불환을 도우려고 하는지 그 이유도 폭로할 수 있었지만 교오는 불 같은 성격이었다. 그는 더이상 여러 말을 하고 싶지 않았으며 다만 눈을 부릅뜨고 이미 한령이 앉아 있는 쪽으로 뛰어 날아가고 있었다. 한령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소. 당신이 빨리 죽고 싶다니......." 이때 화사고도 노갈을 터뜨리면서 뛰어 들었다. "교오 오빠, 그 녀석이 다리에 매달고 있는 검에는 독이 발라 있어요. 조심하세요." 김불환은 박수를 치고 크게 웃고 있었으며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는 군웅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속에서 교오는 이미 대나무 꼭대기까지 뛰어 올라가 한령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의 웅사라는 별명은 과연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가 몸을 날려 한령 쪽으로 달려드는 순간, 그 모습은 마치 사자가 먹이를 가로채려 공중으로 뛰어오르듯 위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령은 여전히 그곳에 꼼짝않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교오의 무쇠와 같은 주먹이 마치 태산이 무너지듯 곧장 한령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바로 이순간, 한령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몸이 움찔하고 장삼이 펄럭거리며 푸른 빛이 번쩍하고 교오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왔다. 교오는 공격하던 기세를 멈추고 재빨리 옆으로 몸을 틀며 그 공격을 피해냈다. 그러나 한령의 다리에 매단 검은 원앙쌍비(鴛鴦雙飛)라서 일검이 공격해 온 후에 곧바로 또 공격이 이어졌다. 교오가 일검을 피해내는 순간, 두번째 검이 이미 그의 목덜미에 도착해 있었다. 두번째의 공격은 첫번째 공격보다 늦게 출발했으나 오히려 먼저 지쳐들어와 있었다. 한령은 이미 자신이 일검을 공격할 때 교오가 어떻게 피하리라는 걸 염두에 두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아주 독달하고 예리한 검법이었다. 그 모습을 본 군중들이 모두 얼굴에 대경실색하는 기색을 나타내 보였다. 화사고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놀람에 찬 비명을 질렀다. "교오 오빠!" 교오는 지쳐 들어갔던 기세 때문에 한령의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비록 억지로라도 다시 몸을 튼다면 균형을 잃어서 밑으로 떨어질 것은 불을 보듯 명약관화한 사실이며 그가 균형을 잃어 비틀거리는 사이에 한령의 날카로운 검이 다시 그를 공격할 것 역시 뻔한 일이었다. 교오는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이 죽는 방법 밖에 없는 듯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화사고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날카로와졌다. 그러나 웅사는 확실히 웅사였다. 그는 지쳐들어가던 상태를 움찔하고 두 다리를 모으고는 힘차게 대나무 울타리를 걷어 찼으며, 그 대나무 울타리에는 순식간에 큰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그는 그 구멍으로 재빠르게 뛰어 들어던 것이다. 그에 따라 그에게 지쳐들어오던 한령의 검은 자연히 허공을 긋고 말았다. 교오의 이러한 방법은 비록 뛰어난 방법은 아니었으나 죽음에서 도망쳐 나오는 아주 절묘한 방법이었다. 그의 이러한 방법은 무림계의 선배들이 전수해준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다만 웅사 교오의 일생 중 얻은 경험과 지혜의 결집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화사고의 놀람에 찬 비명은 기쁨에 찬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한령은 그 자신의 공격을 교오가 이런 교묘한 방법으로 피해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일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이어 교오를 뒤따라 대나무 울타리에 뚫린 구멍을 향해 쫓아 들어갔다. 교오는 발이 땅에 닫는 순간, 몸을 번쩍 뒤집어 뒤로 약 두 장 정도 물러나 중심을 바로 잡더니 재빨리 울타리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그에 따라 한령도 울타리 안으로 뛰어 들어와 하나의 탁자 위에 가볍게 내려앉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두 사람은 눈 한 번 깜박임 없이 서로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한령이 음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개방 제자들이 엉성하게 만든 대나무 울타리가 네 녀석의 목숨을 구해줄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약 이 대나무 울타리가 조금만 더 단단하게 만들어졌었다면 교오는 방금과 같은 한령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교오가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맞소. 만약 우리 두 사람의 무공을 비교한다면 나 교오는 마땅히 당신한테 항복을 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만 오늘 만큼은......." 그는 말을 하면서 두 손을 한 팔을 뻗고 한 팔을 오므려 무엇인가를 끼어 맞추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마쳤을 때 그의 손에는 이미 번쩍번쩍 빛이 나는 무기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봉 같이 보였으며, 그 길이는 대략 아홉 척 정도 되어 보였다. 그 봉은 횃불빛에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웅사 교오라는 이름을 무림계에 날리게 만들었던 청사봉(靑獅棒)이라는 것이었다. 웅사 교오가 청사봉을 손에 꺼내 드는 순간, 그곳에 모여있던 무림계의 인사들은 모두 흥분한 기색을 얼굴에 드러냈다. 그들은 이미 다시 한바탕의 엄청난 싸움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군웅들이 눈빛을 번쩍이며 그들 두 사람을 주시하는 순간, 교오가 사자 같은 노갈을 터뜨리며 한령에게 지쳐들어갔다. 청사봉은 푸른빛을 발하며 날카롭게 한령에게 쏘아져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는 군웅들의 눈에는 다만 빛이 이리저리 번쩍이며 혼백을 날릴 것 같은 띵, 땅하는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아무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두 사람은 이미 각각 오 초를 교환했다. 이때 한령의 몸은 공중에 떠 있었다. 오 초를 공격하고 난 후에도 한령의 몸은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제 육 초, 제 칠 초를 다시 공격해냈다. 원래 한령의 다리에 매단 검과 교오의 청사봉이 부딪히는 순간, 그는 그 기세를 빌어 공중으로 떠올랐으며 계속 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싸움을 지켜보는 무림계의 인사들은 모두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으나 지금껏 이처럼 이상하고 놀라운 검법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한령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망할 녀석!" 다시 한령의 다리에 매단 검과 청사봉이 부딪히는 순간, 한령은 갑자기 마치 연기처럼 위로 곧장 솟구쳐오르더니 교오가 뚫어놓은 대나무 울타리의 구멍을 빠져나가 버렸다. 교오는 대나무 울타리 꼭대기에서 차갑게 말하는 한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네 녀석이 이곳까지 올라올 담력이 있느냐 ?" 화사고가 조급하게 말렸다. "올라가서는 안 돼요. 그 녀석은 위에 있지 않고 틀림없이 그 구멍 옆에서 당신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교오가 두 어깨를 들썩 하더니 한령 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령이 빠져나간 그 구멍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손에 들고 있던 청사봉을 이용하여 곧장 위로 솟구쳐올랐다. 사람들은 동시에 또 그 울타리 밖으로 쏟아져 나와 그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그 대나무 울타리 꼭대기에서는 푸른빛이 이미 교오의 머리쪽에서 맴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싸움은 울타리 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땅 위에까지, 또 땅 위에서 울타리 꼭대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은 이미 생사를 건 혈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혼비백산하여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고일 정도로 치열한 것이었다. 수십 초가 지난 후 교오는 이미 기력이 쇠잔한 듯하여 보였다. 이때, 멀찍이 어두컴컴한 속에서 조용히 숨어 있는 세 개의 인영이 있었다. 그 인영 중의 첫번째 사람이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대단한 권법이로군." 두번째 사람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저 권법을 깨뜨릴지 생각이 나질 않는군." 세번째 사람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세상에 다시 깨뜨릴 수 없는 무공이 있단 말이오?" 첫번째 사람이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저 검법을 어떻게 깨뜨린단 말이오?" 세번째 사람이 말했다. "물러서는 척하면서 공격하고, 허초를 실초로 바꾸면 되오." 첫번째 사람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말했다. "아, 그렇구려. 만약 그런 방법으로 공격한다면 한령의 공격은 허공을 치게 되고 그의 몸은 땅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지겠구려." 두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가 밑으로 떨어진다면 다시 뛰쳐오를 수 있다 해도 한 걸음 늦게 되겠지요. 그의 검법은 신속한 것을 주로 삼고 있으니 만약 상대방이 공격을 천천히 하게 된다면 그 위력은 금방 반감되고 말거요." 첫번째 사람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교오는 그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 같소." 세번째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오." 두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렇다면 또 저 검법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이오?" 세번째 사람이 말했다. "한령에게는 천생의 적수가 있소." 두번째 사람이 물었다. "누가 그 천생의 적수라는 거요? 혹시 심 형을 말하는 거요?" "내가 아니고, 바로 당신이오." 두번째 사람이 한참을 있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구려. 내가 사용하는 무기가 바로 한령이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무기이겠구려." 세번째 사람이 다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있다가 당신은 이렇게이렇게 저렇게저렇게 하시오." "알았소." 첫번째 사람이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과연 묘책이오. 그렇지만 심 형께서는 어떻게 김불환이 좌공룡을 죽였다고 단정을 하시는 거요?" "만약 김불환이 좌공룡을 죽이지 않았다면, 김불환 저 친구가 어떻게 좌공룡이 죽었다고 단정을 할 수가 있겠소? 만약 저 친구가 좌공룡이 죽었다는 것을 단정할 수 없다면 어떻게 또 오늘 이곳에 나타나서 방주 자리를 탐내겠소?" 이때 교오는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성격이라서, 비록 전신의 기력이 다 소모되고 있었으나 사력을 다해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청사봉은 여전히 번쩍번쩍 빛을 내며 한령에게 지쳐 들어가고 있었다. 한령은 그 공격에 따라 뒤로 계속 물러서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은 한령이 물러섬에 따라서 이미 울타리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남쪽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군중들은 교오의 패색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과연 웅사로군! 대단하군, 대단해. 보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웅사 교오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소." 그들은 교오가 쉬지않고 공격을 해가는 것은 크나큰 판단 착오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검과 봉이 서로 부딪히면서 수시로 번쩍번쩍 하는 불빛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불빛은 싸움을 보는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히고 그들의 정신을 사로잡기에 족했다. 이때 갑자기 한령이 대소하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 초 내에 당신은 내 검 아래에 쓰러질 거요."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쌍검이 계속하여 교오에게 지쳐들어왔다. 교오는 재빨리 청사봉을 들어 그 공격을 가로 막았다. 검과 봉이 다시 부딪혀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령의 오른손이 허리께에 갔다가 다시 펴지는 순간 그의 손에는 갑자기 한 자루의 연검이 들려 나왔으며 그 연검으로 곧장 교오의 목덜미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교오는 꿈에도 그가 제 삼의 검을 감추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제 삼 검의 공격은 아주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교오의 두 손은 한령의 다리에 매달린 두 검의 공격을 막는데 급급했다. 이 세번째 검이 공격해 왔을때 교오는 피할 수도, 그렇다고 막을 여유도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군호들의 놀람에 찬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바로 이순간, 갑자기 멀리서 '멈춰라!'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며, 어떤 물건이 한령의 등 뒤로 빠르게 날아갔다. 그 자리에 있던 무림계의 군호들은 평생 이처럼 강경한 암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고, 이처럼 날카로운 암기의 수법이 있다는 것을 생각도 하지 못했으며, 이처럼 빠른 공격을 전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군호들의 놀람은 한령의 대경실색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령은 더이상 교오를 공격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암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듣는 순간, 암기는 이미 그의 등뒤에까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손에 들었던 연검을 뒤로 돌려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 순간 '땅'하는 소리가 나며 불꽃이 번쩍 일어났다. 한령의 손목은 이 조그마한 암기와 검이 부딪히는 탄력으로 마비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나서 대갈을 터뜨렸다. "암기로 사람을 공격하는 쥐새끼 같은 무리가 있다니, 어떤 놈인지 빨리 나와라!" 어둠 속에서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소." 웃음소리가 들리며 동시에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느끼는 순간 그 인영은 이미 한령과 교오가 싸우고 있는 울타리 밑에까지 도착해 있었다. 그 신법의 빠름이라는 것은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령은 이미 다시 가부좌를 틀고 울타리 꼭대기에 앉아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비록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그의 풀어 헤쳐진 옷과 헝크러진 머리, 그리고 별처럼 크고 밝게 빛나는 두 눈은 볼 수 있었다. 주칠칠이 실성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웅묘아가 나타났어." 승현도 중얼거렸다. "웅 형에게 저렇게 대단한 조예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군." 이때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 형께서는 잠시 쉬시지요. 이 젊은 술주정뱅이가 저 늙은 술주정뱅이랑 한바탕 해보겠습니다." 교오는 한동안 아무 말을 않더니, 고개를 쳐들고 장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좋소. 부탁하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화사고가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한령의 눈은 불이라도 뿜어낼 듯 매섭게 웅묘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친구가 또 하나 왔소이다. 뭘 그렇게 멍청히 앉아 계시는 거요? 공격하시오!" 한령은 표독스럽게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볼 뿐, 아무 말도, 공격하지도 않았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나더러 먼저 당신을 공격하라고 한다면 당신은 실망할 거요. 당신은 이미 그날 주루에서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남을 먼저 공격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거요." 한령의 눈에서 폭사되던 불빛은 점점 사그라들고, 차가운 눈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멀찍이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고소충이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저 사람이 이겼소." 여자 왕련화 주칠칠은 고소충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으로 그렇게 단정하는 거요?" 고소충이 말했다. "저 사람이 먼저 공격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저 사람이 이긴거요." 전공태가 말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령의 몸이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 들어오며 푸른빛이 번쩍하는 순간, 곧장 웅묘아의 목덜미를 향해 다리에 찬 검을 내질러왔다. 웅묘아는 하하하고 웃으면서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섰다. 한령의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고 오른발을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웅묘아는 반격하지 않고 다시 뒤로 세 걸음을 더 물러서며 손을 허리께쯤에 가져가 술호로를 찾고 있었다. 한령은 두 번의 공격이 실패하자 몸을 웅크리고 비스듬히 뒤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의 다리가 땅바닥에 닿는 순간 그의 몸은 다시 뛰어 올랐으며 푸른 검빛이 다시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 그가 사용한 것은 바로 원앙쌍비라는 초식이었다. 제 일검이 공격해 들어갈 때, 제 이검의 검빛은 이미 장삼 속에서 번쩍이고 있었던 것이다. 웅묘아가 대갈을 터뜨렸다. "좋은 공격이오." 이번에는 그는 더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호로를 쳐들어 곧장 한령이 뿜어내는 검을 향해 마주쳐갔다. 순간 '탕!탕!' 소리가 들리며 원앙쌍비검은 웅묘아가 손에 들고 있는 술호로에 적중했다. 한령은 검과 술호로가 맞부딪히는 힘을 이용하여 다시 공중으로 날아오르려 했으나, 그의 두 다리에 붙어있던 두 자루의 검은 술호로에 철썩 달라붙어 버렸다. 그 모습은 마치 그의 두 다리가 이미 다른 사람 손아귀에 잡힌 것이나 같은 형국이었다. 보통은 손에 든 무기가 다른 물건에 붙어 버렸을 때 그대로 무기를 놓고 손을 떼버리면 그만이지만, 한령의 그 두 검은 다리에 매달려 있어 몸의 일부분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놀랍고 당황함 속에서도 오른손에 들고 있던 연검을 들어 사벽화산(斜壁華山)이라는 일 초를 전개해냈다. 그러나 그 연검마저도 술호로에 철썩 달라붙어 버렸다. 웅묘아가 대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떨어지시오." 웅묘아는 호로를 힘껏 내팽개치려고 했다. 그에 따라서 한령이 땅바닥으로 내팽개쳐지려는 상황에 처했다. 이를 바라보는 군중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바로 이순간, 한령의 왼손이 갑자기 번쩍하더니 어느새 그의 손에 비수가 들려 있었다. 비수는 비스듬히 밑으로 내려쳐졌다. 그러나 그 방향은 웅묘아를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두 다리를 향해 내리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 다시 땅땅하는 소리가 나며 그의 다리와 웅묘아의 술호로 사이에 붙어있던 장검이 중도에서 싹뚝 잘려나갔다. 한령이 꺼낸 비수는 바로 무쇠를 진흙처럼 잘라내는 날카로운 비수였던 것이다. 술호로에 붙어 있던 검이 잘려 나가고 한령의 몸이 자유로워진 순간, 그는 공중으로 번쩍 솟구쳐오르더니 삼 장이나 멀리 튕겨져 날아갔다. 그리고 다시 몸을 한 번 번쩍하는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 일순간에 일어난 상황을 보는 무림계의 인사들은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줄을 몰랐다. 웅묘아도 멍청한 듯 멀거니 한령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서있던 웅묘아가 씁쓸하게 웃고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 녀석에게 네번째 검이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군." 이순간, 김불환은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알아차리고 그 자리를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빠져 나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웅묘아가 이죽거리며 그의 면전에 도착해 있었다. 김불환이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웅 형, 웅 형...... 대단한 무공이오." 웅묘아도 웃으면서 말했다. "본인과 웅 형은 원수진 일이 없다고 알고 있소만......." 웅묘아가 갑자기 앙천대소하면서 말했다. "김불환, 네 녀석이 그 교묘한 말재주로 내 손아귀에서 빠져 나간다 해도 오늘 이 자리를 온전히 빠져 나가지는 못할 텐데. 내가 설혹 오늘 네 녀석을 그대로 놓아 준다고 해도 심랑이 네 녀석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됐는데, 네 녀석을 곱게 놓아줄까?" 그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날카롭게 말했다. "개방 친구들은 들으시오. 좌공룡, 좌 장로 그분은 바로 이 녀석이 죽인 것이오." 갑자기 군중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리고 개방 제자들 사이에서도 갑작스런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불환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면서 부르짖었다. "웅 형, 당신...... 당신 나하고 원수진 일도 없는데, 어떻게...... 어떻게 나를 그렇게......." 웅묘아가 말을 자르며 냉랭하게 말했다. "내 말은 증거가 있소." 김불환은 순식간에 자기의 당황해하는 기색을 감추고 냉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증거? 꺼내 보시오, 도대체 무슨 증거인지......."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김불환, 네 녀석은 그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웠다고 생각했겠지? 하물며, 증거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겠지?" 김불환이 여전히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흥,흥, 하하......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려." 웅묘아가 광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김불환, 똑바로 들어라.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네 녀석은 그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웠다고 생각했겠지만, 한 사람이......." 김불환이 그 말을 가로채고 냉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모르는 사람을 매수해서 나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다면 그 꿈을 버리시오. 사람은 얼마든지 매수할 수 있는 법이니까......." "다른 사람은 증명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충분히 네 녀석이 한 짓이란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요? 한 번 만나 봅시다." "그 사람은 바로 좌공룡, 좌 장로 자신이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김불환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웅 형, 방금 뭐...... 뭐라고, 뭐라고 말씀하셨소?" 웅묘아가 날카롭게 말했다. "네 녀석이 좌공룡, 좌 장로 가슴에 찌른 그 비수는 좌 장로를 죽이지 못했던 거야." 갑자기 웅묘아가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키며 대갈을 터뜨렸다. "저기 저 분이 누군지 똑바로 봐라." 그에 따라 그곳에 있던 무림계의 인사들도 모두 웅묘아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쪽 대나무 울타리의 꼭대기에서 천천히 하나의 인영이 일어서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비록 그 인영의 얼굴 윤곽을 자세히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그의 옷차림은 틀림없이 좌공룡, 좌 장로였다. 군중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개방 제자들의 실성한 소리도 들려왔다. "좌 장로!" 김불환은 마치 철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청한 표정을 짓고 한참을 있더니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가짜야, 가짜야! 저건 가짜야...... 내 그 일격은 틀림없이 좌공룡 그 녀석의 가슴에 그대로 들어갔......."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말을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미친 듯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겠는가? 개방 제자들이 노갈을 터뜨리며 김불환을 향해 덮쳐 들어갔다. 김불환은 허둥지둥 대나무 울타리 꼭대기로 도망갔다. 그러나 그순간, 대나무 울타리의 남쪽 꼭대기에 서 있던 좌공룡의 몸이 밑으로 떨어지며 좌공룡 몸 뒤쪽에서 연기처럼 한 사람이 나타나 김불환이 도망가는 길을 가로막을 줄이야. 그 사람은 바로 심랑이었다. 심랑이 아직 손을 쓰기도 전에 김불환은 이미 다리에 맥이 빠진듯 흐물흐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이미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심랑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김불환은 울타리 꼭대기에서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주칠칠도 심랑을 보는 순간, 다리의 맥이 풀렸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끝났어, 또 끝났어......." 그가 애써 세운 계책은 심랑이 나타나는 순간, 이미 모두 실패로 돌아가버렸던 것이다. 승현도 멍청히 그 자리에 서서 중얼거렸다. "심랑, 아......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주칠칠이 날카롭게 외쳤다. "저 인간은 사람이 아니야. 귀신이야. 어떻게 이 세상에는 아무도 저 인간을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지? 다른 사람이 아무리 모든 방법을 다해서 저 사람을 괴롭히려고 해도 왜 어떻게 저 사람은 언제나 먼저 알아차려버리고 마는 거지?" 김불환은 이미 개방 제자들에게 사로잡혀 결박되어서 공터의 가운데에 꿇어 앉혀져 있었다. 군호들은 서로 토론하고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 입에서는 모두 한 사람의 이름만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심랑이라는 이름이었다. 주칠칠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탁자에 얼굴을 파묻고 방성통곡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를 깨물고 참았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쳐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심랑의 모습이었다. 그 초연한 듯한, 그리고 아무 때도 묻지 않은 듯한, 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그 미소만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이때, 웅묘아가 그녀의 면전에 다가와서 웃고 있었다. 주칠칠은 자신의 심장이 곧 뛰쳐나올 듯한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혼신의 기력을 다해 울부짖고 싶은 것을 억지로 눌러 참고, 웅묘아를 모른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그녀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괜찮소?" 주칠칠은 떨리는 심장을 애써 눌렀다. "당신, 당신은 누구죠? 저는 당신을 모르는데요."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우리를 모른다는 거요?" "이...... 이상한 사람들이로군. 내가 어떻게 당신들을 안단 말이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그들을 모른 척 하려고 해도 그녀의 목소리는 떨려나오고 있었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만 두시오. 뭘 더이상 숨기려 하는 거요? 당신이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나와 심 형은 속일 수가 없소. 당신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이 심 형을 속일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소?" 주칠칠이 말했다. "도,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나는 도대체 알아 들을 수가 없소." 웅묘아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내가 당신의 정체를 벗기기를 원하는 거요?" 주칠칠이 갑자기 몸을 틀면서 말했다. "이상한 사람이로군. 승현!" 승현이 그녀의 부름에 가까이 다가와서 웅묘아의 면전을 막아 서면서 우물쭈물 말했다. "웅 형, 이 분께서 웅 형을 모르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만 두시지요." 웅묘아가 승현의 아래위를 한두 번 쓸어보고 나서 갑자기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승 형, 승 형께서는 미래의 처삼촌을 도와드리기 위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요?" 승현이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우물거렸다. "저는, 저는 다만......." 웅묘아가 말했다. "승현이 만약 이 분의 조카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얘깃거리가 될 것이오." 웅묘아의 입에서 자기가 마음 속에 묻어두고 있는 사람의 얘기가 나오자 그는 정말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하며 차갑게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무슨 얘깃거리라는 거죠? 설마 제가 자격이 없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웅묘아가 말했다. "내가 보건데, 승 형은 확실히 자격이 없소." 승현이 노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웅 형은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건가요?" 웅묘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더욱 자격이 없소. 이런 미인을 나 웅묘아는 진짜 맞아들일 수가 없소." 승현이 차갑게 말했다. "아가씨 앞에서 웅 형께서는 말씀을 하실 때 약간 조심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웅묘아가 말했다. "승 형께서는 그 아가씨 때문에 나랑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승현이 말했다. "헤헤...... 싸움이라구요? 제가 웅 형을 겁낸다고 생각하시오?" 웅묘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하면서 말했다. "불쌍한 친구! 철저히 남에게 속고 있군." 승현은 화가 너무 나서 얼굴색이 창백해져갔다. 그리고 노갈을 터뜨렸다. "웅 형, 당신이 불쌍한 친구요. 당신이 남에게 속고 있소." 웅묘아가 말했다. "나 말이오? 하하...... 최소한 나는 남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이지는 않소." 그의 말에 승현이 깜짝 놀란듯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웅 형, 미쳤구려. 미쳤소. 어떻게 이 아가씨를 남자라고 말씀하신단 말이오?" 그 자리에 모여있던 군웅들도 왕련화의 그 아리따운 모습을 보고 모두 웅묘아의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을 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소곤소곤 귓속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웅묘아는 여전히 우습다는 듯 껄껄거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미쳤다구요? 내가 증거를 댈까요?" 승현이 대들 듯이 말했다. "만약 웅 형께서 증거를 댈수만 있다면 내 머리를 웅 형께 드리겠소." 웅묘아가 말했다. "나는 승 형의 머리통은 원하지 않소이다. 다만 술 몇 병을 사면 되오." 말을 마치는 순간, 그는 갑자기 몸을 번득여 승현의 옆으로 다가가 그 아리따운 아가씨 왕련화 앞에 이르더니 한 손으로 왕련화의 앞 옷깃을 부여잡고 말했다. "보시오,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와 동시에 찍하는 소리가 나며 왕련화의 앞가슴을 가렸던 옷이 찢겨져나갔다. 그러나 그순간 심랑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왕련화의 앞가슴을 가렸던 옷이 찢겨져 나가는 순간, 거기에 나타난 것은 남자의 평평한 가슴이 아니고 볼록한 여자의 가슴이었던 것이다. 보는 사람을 매혹시킬 것 같은 두 개의 붉으스레하고 볼록한 구슬 방울이 차가운 바람에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가 여자임을 발견하는 순간, 심랑과 웅묘아는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더 놀란 것은 주칠칠이었다. 주칠칠이 지금까지 데리고 다닌 여자는 분명히 왕련화였다. 그리고 왕련화는 남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언제, 어느 순간 여자로 변했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눈으로 왕련화가 자기 자신을 여자로 역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남자가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여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왕련화는 원래 여자였단 말인가? 불가능한 얘기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얘기다. 왕련화의 그 음탕한 미소와 표정, 그 눈빛...... 그것은 결코 여자의 눈빛일 수는 없었다. 특히 주칠칠 그녀 자신은 이미 왕련화의 애무와 포옹을 당해본 경험도 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일생 동안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몸서리치고 있다. 결코 왕련화는 여자일 수가 없었다. 주칠칠이 왕련화의 애무를 받았을 때, 왕련화의 포옹을 받았을 때 느꼈던 그 기분은 결코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줄 수 있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왕련화는 여자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주칠칠은 대경실색하여 비명을 질러댔다. 심랑과 웅묘아도 두 눈을 크게 뜬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승현은 대노했다. 그 자리에 둘러섰던 군호들은 어떤 사람은 놀라고, 어떤 사람은 분노의 표정을 짓고, 어떤 사람은 껄껄 웃어 젖히고, 어떤 사람은 고개를 돌리고, 어떤 사람은 고개를 내밀고 왕련화의 앞가슴을 쳐다보고, 어떤 사람은 앞으로 몰려들고, 어떤 사람은 뒤로 물러섰다. 그것은 혼란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혼란이었다. 그러나 왕련화, 그 여자는 도리어 통곡을 터뜨렸다. 그녀는 울면서 부르짖었다. "당신들, 스스로 영웅이라고 자처하는 남자들이 그렇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이 미친놈이 나를 이렇게 욕보이는 것을 보고만 있겠다는 건가요? 이렇게 병든 여자를 괴롭히는 이런 미친놈을 보고만 있겠다는 건가요?" 승현이 뛰어와서 한 손으로 웅묘아의 옷깃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당신, 당신...... 입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말해 보란 말이오!" 웅묘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나는 어떻게......." 두 사람은 서로 너무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승현은 갑자기 손을 들어 '펑,펑' 하고 웅묘아를 두들겨 팼다. 웅묘아는 승현이 때리는 대로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군중들은 어떤 사람은 박수를 치면서 외쳐댔다. "더 때리시오. 실컷 때려 버리시오." 웅묘아는 승현의 주먹에 반격할 수도 없고 그 주먹을 피할 수도 없었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채,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심랑, 심 형! 당신은 거기에 가만히 서서 내가 이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셈이오?" 심랑이 갑자기 주칠칠 면전으로 달려와서 말했다. "당신은 웅 형이 저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생각이오?" 주칠칠은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두서 없이 말했다. "나는, 나는......." 심랑이 말했다. "당신이 비록 나를 원망한다해도 잊지 마시오! 웅 형은 당신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고 당신을 구해내려 했던 사람이오. 웅 형은......." 주칠칠이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승현! 그만둬요!" 주칠칠은 그 자리에서 승현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승현은 웅묘아를 내리치던 손을 멈췄으나, 여전히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듯 날카롭게 말했다. "웅묘아, 두고 봅시다. 오늘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오. 웅묘아 당신......." 그는 고개를 돌려 주칠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녀석을 어떻게 처치하면 좋을지 말씀해 주세요." 그러나 주칠칠은 도리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두시오!" 승현이 이번에는 의외라는 듯 멍청하게 말했다. "뭐라구요? 그냥, 그냥 내버려 두라구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군중들도 의외라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그냥 내버려둬서는 안 되오." 주칠칠이 말했다. "내가 그냥 내버려두라면 그대로 내버려두는 거예요." 승현이 노갈을 터뜨렸다. "왜죠? 왜 그냥 내버려 두어야죠?" 주칠칠이 말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는 눈길을 돌려 심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웅묘아의 찌푸린 얼굴과 분노의 기색을 드러낸 채 웅묘아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길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이를 깨물고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잘 보세요." 말을 하면서 그녀는 머리에 썼던 모자와, 허리를 동여 맸던 허리띠, 그리고 몸에 걸쳤던 장삼 등을 하나하나 벗어서 땅바닥에 내 팽개쳤다. 사방에서 놀람에 찬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마침내 틀어 올렸던 머리를 풀어 헤쳤다. 그러자 길고 부드러운 머리가 구름처럼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벗은 장삼 속에는 허리를 질끈 동여맨 몸에 찰싹 달라붙는 옷이 나타났다. 그 옷은 아름답고 풍만한 아가씨의 신체를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게 드러냈다. 비록 그녀는 역용한 얼굴을 지워버리지는 않았으나, 이순간 장님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여자였던 것이다. 군중들 사이에서 다시 소동이 일어났다. "여자로군, 남자인줄 알았는데 원래 여자였어......." 승현은 벌린 입을 더욱 다물 줄 몰랐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당신, 당신이 어떻게...... 어떻게 여자일 수가......?" 주칠칠이 말했다. "왜? 내가 여자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요?" 승현은 여자 왕련화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주칠칠이 말했다. "내가 여자인 이상 이 사람은 당연히 남자이지요." 군웅들 중의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분명히 여자요. 그렇지만 저 사람이 남자라고는 증명할 수 없지 않소?" 주칠칠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나는 분명히 저 사람이 남자라고 말했어요." 군중들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분명히 여자요. 가슴을 보시오. 아무리 당신이 남자라고 얘기해도 소용이 없소." 주칠칠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그 사람은 분명히, 분명히......."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 사람은 분명히 왕련화였소. 그런데 어떻게 여자가 된거요? 사람이 바뀌었다면 당신은 진작에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오. 그런데 당신도 모랐단 말이오?" 주칠칠이 속상한 듯 짜증스럽게 말했다. - 제4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