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 주칠칠은 자신의 전신을 다 드러내 보이면서까지 어떻게 해명해보려 했지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답답하여 소리쳤다. "나도 몰라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한 손을 번쩍 들어 그 여자의 옷깃을 부여잡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말해봐! 당신 어떻게 여자가 된거지?" 그 여자가 슬픈듯이 말했다. "저는 본래 여자였어요." "누가 너를 바꿔치기 한거지?" "아가씨께서 계속 제 옆에 계셨는데 제가 어떻게 바꿔치기를 당할 수 있었겠어요?" 주칠칠은 분기가 탱천하여 노갈을 터뜨렸다. "솔직히 얘기하지 못하겠어? 내가 네 년을...... 네 년을......." 주칠칠은 그 여자의 한쪽 팔을 붙잡고 비틀기 시작했다. "이래도 말 못 하겠어? 왕련화가 어떻게 네 년을 바꿔치기 한 거지?" 그 여자가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 일 없어요. 절대 없어요." 주칠칠은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그녀가 또 대갈을 터뜨렸다. "그래도 솔직히 말 못 하겠어?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면 이 손을 내가 부러뜨리고 말겠어." 그 여자가 울먹이는 소리로 처량하게 말했다. "제발 손을 놔 주세요. 제발, 제발 놔 주세요." 주칠칠이 냉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열 명에 아홉 명 정도는 아픔을 못 참는 법이야. 나도 여자야, 내가 너에게 더 고통을 가하기 전에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 여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좋아요, 말 하겠어요. 제발 이 손 먼저 놔 주세요. 말 하겠어요." "빨리 말해라. 왕련화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너를 바꿔치기 했는지, 빨리 솔직히 말해봐!" 그 여자가 울먹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바로 어제 저녁에......." 그러나 그녀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휙휙'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일어나며 소털처럼 가느다란 다섯 개의 독침이 그 여자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그 여자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한 번 훌떡 뒤집더니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져버렸다. 아주 독한 암기였다. 그녀는 아주 빠르게 죽어버렸던 것이다. 주칠칠은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대갈을 터뜨렸다. "누구냐? 누가 손을 쓴거지?" 웅묘아는 이미 몸을 날려 사람들 속을 헤집고 다니며 독침을 날린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흉수를 찾는다는 것은 바다 속에서 바늘 하나를 찾기 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그 독침이 어느쪽에서 날아왔는지 조차도 몰랐다. 군중들이 어수선하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주칠칠은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나 그 고소충이라는 사람은 여전히 히히 웃을 뿐, 조금도 이러한 소란에 당황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도리어 느긋하게 웃으면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가씨께서 그렇게 조급해 하셔도 소용이 없소. 어떻든 모든 일은 언젠가는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는 법이오. 아가씨께서 지금 조급해서 당장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이 일을 해결하는 데에는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오." 심랑이 나섰다. "이 분 형씨께서 말씀하시는 게 맞소." 주칠칠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에요. 저는 환장해 죽겠는데. 어떻든 당신들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이때 한 사람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렇지만 나하고는 상관이 있소." 이렇게 말을 한 사람은 바로 그 주루 주인이었다. 주칠칠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는 순간, 움찔하더니 즉각 몸을 날려 주루 주인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며 방성대곡하며 말했다. "형부, 형부, 저 사람들이 나를 괴롭혀요." 그 주루 주인은 바로 주칠칠의 셋째 형부였던 것이다. 중원 무림계에 거상(巨商)으로 알려진 육상도주범분양(陸上陶朱氾汾陽)이었던 것이다. 그의 점포들은 양자강 이북 모든 성, 모든 현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그 점포들은 주칠칠이 갖고 다니는 그 귀걸이로 언제라도 돈을 꺼내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주칠칠은 형부의 가슴에 엎드려 계속 어리광을 부렸다. 그는 그녀가 이 몇 달 사이에 처음으로 만났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몇 달 사이에 당했던 모든 억울함과 괴로운 일들을 형부 앞에서 어리광스럽게 털어놓고 한바탕 울고 싶었다. 범분양은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듯 부드러게 말했다. "그래, 맞아. 이들이 모두 처제를 괴롭혔구나! 이 형부가 처제 대신 분풀이를 해줄까?" "심랑 저 사람...... 저 사람이......." 범분양은 주칠칠의 어리광을 받으며 말했다. "그래! 심랑, 저 친구는 상당히 나쁜 녀석이야. 우리 저 녀석을 아는 체도 하지 말자." 범분양은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며 주칠칠을 위로했지만 심랑을 향해서는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아마도 주칠칠은 자기에게 맡기라는 모양이었다. 심랑이 범분양의 속뜻을 왜 모르겠는가! 심랑도 웃음을 머금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이곳의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범분양은 주칠칠의 어깨를 껴안으며 말했다. "저 사람들이 처제를 괴롭혔으니 우리 저 사람들을 더이상 아는 체 하지 말고, 집으로 가도록 하세." 범분양은 한 손으로 주칠칠의 어깨를 껴안은 채, 사람들을 헤치며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 주칠칠을 토닥거리며 그 자리에서 빠져 나갔다. 군중들은 어수선하게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이 자리를 빠져 나가는 것을 아는 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개방 제자 한 명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들쪽으로 뛰어와 가볍게 허리를 굽히고 예를 한 다음 웃으면서 말했다. "폐방에서는 이미 마차를 준비하였습니다. 범 대협께서 혹시 필요하지 않으신지......?" 범분양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나를 알고 있다니 고맙군. 그럼! 자네에게 신세 좀 질까?" 그 개방 제자가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신세라니오?" 그 개방 제자는 입을 오무려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두 명의 개방 제자가 한 사람은 마차를 몰고, 한 사람은 말 고삐를 잡은 채 그들쪽으로 다가왔다. 개방 제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마차와 말이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범 대협께서는 말을 타시고 싶은지, 아니면 이분 아가씨와 더불어 마차를 타시려는지요?" 범분양은 약간 머뭇거리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칠칠 처제는 마차를 타도록 하게. 나는 말을 타겠네. 말을 타야 주위도 좀 살펴보고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사실 범분양은 처제와 한 마차 속에 들어가 마차를 탄다는 것이 주위의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형부가 된 입장에서 처제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상대를 해야만 할 대상인 것이다. 웅묘아는 결국 그 여자를 죽인 흉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속이 상한 듯 다시 대나무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며 입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나 웅묘아가 평생 제일 미워하는 것은 이처럼 숨어서 암기나 날리는 쥐새끼 같은 녀석들이야. 만약 그 녀석이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라. 흥, 흥!"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웅 형, 너무 그렇게 속상해 하지 마시오. 언젠가는 그 녀석이 반드시 당신 손에 잡힐 날이 있을 것이오." 웅묘아가 한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녀석이 도대체 누군지도 모르고 있지 않소?" "웅 형, 어떻게 그를 모른단 말이오?" "그렇다면 심 형, 당신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거요?" "왕련화의 부하들이 입을 막기 위해 그 여자를 죽인 게 아니겠소? 다른 사람이 그 여자를 죽일 이유가 있겠소?" 웅묘아의 얼굴색이 변하며 분기탱천한 듯 말했다. "그러면 이 사람들 속에도 왕련화의 부하들이 있다는 거군요?"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내가 이미 왕련화 그 친구는 그렇게 가볍게 볼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한 적이 있지 않소? 내 생각에 어쩌면 중원 무림계의 각지에 모두 왕련화의 부하들이 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웅묘아가 이를 깨물면서 말했다. "언젠가는 내가 그 쥐새끼들을 하나하나 모두 잡아서 본떼를 보여주고 말거요. 아! 지금 당장 본떼를 보여줘야 할 놈은 바로 김불환 그 놈이군요." 그는 김불환의 목덜미를 끌고와서 놀랍다는 소리로 물었다. "심 형께서 방금 김불환의 다섯 곳의 혈도를 제압해 놨소?"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녀석은 너무 교활하기 때문에 다시 도망갈까봐 제가 약간 손을 썼소." 웅묘아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대단한 솝씨요. 번쩍하는 순간에 다섯 곳의 혈도를 제압하다니......." 이때 전공태가 갑자기 그들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두 분께서는 그 녀석을 어떻게 처치하실 생각이신지요?" 웅묘아가 그 말에 답했다. "이 녀석은 더할 수 없이 나쁜 놈이오. 우리 두 사람만 이 녀석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교 대협마저도...... 참, 교오와 화사고는 어디로 갔죠?"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교 대협이 방금 한령에게 한 수 진 것이 그의 무림계에서의 지위로 보나, 그의 성격으로 보나 어떻게 이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었겠소? 방금 어수선한 틈을 타서 아무도 모르게 슬쩍 이곳을 빠져나가 버렸소." 웅묘아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심 형, 당신은 교 대협이 빠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거요?" "사실 보긴 했지만 도저히 말릴 수는 없었소." 전공태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런 점이 바로 심 대협께서 남을 헤아려 주시는데 뛰어난 점이 아니겠습니까?" 잠깐 사이를 두었던 전공태는 다시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심 대협께서는 저희 개방 제자들의 마음도 헤아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씀드려서 김불환 그 녀석을 저희 폐방에게 넘겨서 처치하도록 해주십시오. 좌 장로께서 그 녀석의 손에 죽었고 폐방 제자를 위협하여 방주의 자리를 꿰어차려고 한 이상, 폐방 제자들은 모두 폐방의 법규대로 그 녀석을 처치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심랑이 말했다. "본인의 생각도 그렇소. 귀방이 마땅히 법규대로 처치해야겠지요. 다만......." 전공태가 물었다. "심 대협께서는 혹시 다른 어려운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오. 다만 나는 먼저 그 녀석에게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 "만약, 폐방의 제자들이 듣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저희들은 자리를 피해 드리겠습니다." 심랑이 재빨리 만류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심랑은 손을 들어 김불환의 세 곳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김불환은 눈을 뜨고 크게 숨을 불어내쉬 더니 한스러운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심랑, 심랑! 나 김불환이 재수가 없구나. 또 네 녀석을 만나다니......." 심랑이 말했다. "김불환, 너는 백비비 아가씨를 도대체 어디로 데려간 거지?" 김불환이 큰소리로 말했다. "심랑, 솔직히 말하겠는데 나 김불환은 비록 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호색한은 아니오. 그년이 내 눈에 찰 리가 있겠소?" 심랑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김불환 당신은......." "그 년을 납치한 것은 바로 왕련화의 뜻이었소. 왕련화가 그년을 어디로 데려 갔는지는 나도 모르오. 어떻든 왕련화 그놈이 그녀에게 좋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오." 웅묘아가 냉소하면서 말했다. "왕련화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네 녀석이 그렇게 왕련화를 욕할 수 있을까?" 김불환이 말했다. "내가 무엇이 겁나서 욕을 못한다는 거요? 지금 나도 그놈을 죽이고 싶소.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그놈은 주칠칠이 데려가 버렸소." 웅묘아가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주칠칠이 왕련화를 구해냈다는 거요?" 김불환이 말했다. "심랑, 아! 심랑, 솔직히 말하자면 심랑 당신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것이오." 이어서 그는 왕련화가 어떻게 부상을 당했으며, 자기가 어떻게 왕련화를 죽이려 했으며, 주칠칠이 바로 그순간 어떻게 나타나 그를 구해갔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주칠칠의 재물을 탐해서 왕련화를 죽이려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을 좋게만 얘기를 하였고, 아울러 주칠칠을 나쁘게 그들에게 인식시키도록 얘기하려고 애를 썼다. 심랑이 신음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왕련화는 정말로 주칠칠의 손에 떨어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갑자기 여자로 변할 수 있었던 거지? 정말 사람을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드는군." 웅묘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내려는 듯 애쓰면서 말했다. "음, 주칠칠은 틀림없이 한 발자국도 왕련화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놈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오. 나도 친히 잠잘 때마저도 왕련화를 그녀의 눈밖에 떼어놓지 않고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소. 두 사람은 심지어 한 방에서 잠을 잤소." 여기까지 말하던 웅묘아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자기의 머리를 탁 치면서 말했다. "아, 그랬구나!" 심랑이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웅묘아가 말했다. "어젯저녁, 주칠칠이 나를 길거리에 떼메다 놓을 때 왕련화 혼자 그 방에 남아 있을 짧은 시간이 있었소. 그렇지만 그때 내가 직접 주칠칠이 왕련화의 여러 곳의 혈도를 제압하는 것을 보았는데. 혹시 다른 사람이 왕련화 그 놈을 구해갔다면 몰라도......." 심랑이 말했다. "왕련화가 주칠칠 손에 떨어졌다는 것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지 않소?" 웅묘아가 말했다. "김불환을 제외하면 그렇지요." 김불환이 재빨리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큰소리로 말했다. "왕련화는 지금 내 껍질을 벗기고 싶어할 정도로 나를 미워하고 있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를 도와줄 수 있단 말이오?" 웅묘아가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내가 네놈의 말을 믿을 것 같은가? 그러면 주칠칠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말을 마친 웅묘아가 눈을 들어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주칠칠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애석한 듯 말을 했다. "아, 주칠칠도 가버렸군. 심랑, 아니 심 형! 어떻게 그녀를 그대로 가게 놔뒀던 거요?" 심랑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그녀 형부에게 넘겨 주었을 뿐이오." 웅묘아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만약 그녀에게 다시 무슨 변고라도 발생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웅 형, 당신은 범분양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단 말이오? 그 사람은 매사에 더할 수 없이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오." 웅묘아가 실소를 하며 말했다. "그건 사실이오. 그날 내가 그 친구를 그토록 화나게 만들었는데도, 그 친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하고 직접 싸움하는 것을 피했소. 그처럼 조심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렇게 큰 부자가 되었겠지요."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주칠칠을 그 친구에게 건네준 이상, 우리는 마음을 놓아도 될거요." 웅묘아도 웃으며 말했다. "그처럼 조심스러운 친구라면 길을 갈때도 그렇게 빨리 달려가거나 그러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지금 쫓아간다면 어쩌면 따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오." 심랑이 아직 그 말에 대답을 하기도 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어떤 사람이 끼어들어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은 방금 마차를 타고 빠져 나갔소. 아마 쫓아가기가 어려울 거요."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범분양, 그 친구 과연 부자다운 데가 있군. 우리하고 같이 이곳까지 왔는데 어느 사이에 사람을 시켜 마차를 준비시켜 놓도록 하다니 말이오." 심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친구가 사람을 시켜 마차를 준비시킨 것이 아닐거요. 그 친구는 어젯저녁부터 방금까지 나하고 쭉 같이 있었소. 한 번도 내 옆에서 떠난 적이 없었소. 어쩌면 개방 형제들이 그들에게 마차를 준비해 주었을지도 모르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친구가 누구의 마차를 타고 떠났든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소? 어떻든......." 이때, 전공태가 갑자기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폐방은 조사(祖師)의 유언을 받들어 마차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심랑이 가볍게 신음소리를 내며 얼굴색이 확 변했다. "큰일났소!" 웅묘아는 지금까지 심랑이 이렇게 당황한 기색을 드러낸 적을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심랑이 다급하게 말했다. "여기에는 어떤 계략이 숨어있는 것 같소. 어쩌면 또 왕련화 그 친구의 수작일지도 모르오." 웅묘아가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또 왕련화란 말이오?" "어떻든 빨리 그들을 쫓아가도록 합시다." 웅묘아는 김불환을 전공태의 면전으로 밀어젖히며 말했다. "이놈은 당신께 맡기겠소. 그렇지만 조심하시오. 까딱 하다가는 그 녀석이 또 도망을 갈 것이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심랑과 더불어 그 자리에서 번개처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주칠칠은 마차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으나 마음은 더할 수 없이 어수선했다. 그녀는 도대체 왕련화가 어떻게 여자로 변할 수 있었는지 그 까닭도 알 수 없었으며, 심랑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심랑, 아! 심랑......." 범분양이 탄 말은 바로 마차 옆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의 꼿꼿하게 앉은 신체와 넘쳐 흐르는 기개는 어슴프레한 별빛아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하기에 족했다. 주칠칠은 속으로 탄식하며 생각했다. (셋째 언니는 정말 복도 많아. 그런데 나는...... 나는 명이 박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멍청하다니...... 분명히 왕련화를 사로잡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녀석이 다시 도망가게 만들어 버렸으니.......) 이때 범분양이 웃으면서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제는 곧바로 집으로 가서 언니를 만나 보도록 하게. 언니는 처제가 집에서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이 되어서 사나흘 동안 음식도 먹지 못했다네." 주칠칠이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지금 뚱뚱하게 살이 찌기 시작했는데 며칠 굶었다니 도리어 잘된 것 아니겠어요?" 범분양이 대소하며 말했다. "하하! 그렇지, 그렇지. 그 말도 맞아. 그렇지만 처제는 그런 말을 제발 언니 앞에서는 하지 말아. 언니는 지금 뚱뚱하다는 말을 듣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하고 있으니까. 누가 언니더러 뚱뚱하다고 말한다면 언니는 아마 목숨을 걸고 덤벼들걸세." 그는 다시 가볍게 탄식을 하고나서 말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여덟째 처남은......." 주칠칠이 실성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덟째 동생의 일을 알고 계세요?" 범분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것도 심랑, 심 형이 나에게 얘기해줬네. 그렇게 똑똑한 애가...... 어쩌면...... 다만 제발 무사하길 바랄 수밖에......." 형부의 입에서 여덟째 동생 불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주칠칠의 마음은 또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불쌍한 아이, 불쌍한 내 동생, 도대체 지금 어디에 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그 일을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신가요?" "내 생각에는 아직 모르고 있을 걸세. 누가 그 일을 말씀 드리겠는가? 제발 모르고 계시기를 나 자신도 바라고 있을 뿐이야." 주칠칠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요, 제발 아버지께서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게 나을 거예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제가 반드시 동생을 찾아내고야 말겠어요." 범분양이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처제에게 얘기해줄 재미있는 얘기가 있네. 다섯째 처남 말일세, 최근 그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지고 있어. 얼마 전 대동부(大同府)에서 도박을 했던 것 같은데 한 번에 오십만 냥이나 땄다 그러지 뭔가? 대동부 사람들이 모두 주오 공자(朱五公子)가 오면 대동부의 은자를 모두 가져가버린다고 말을 한다네. 그리고 우스운 것은 태행산(太行山)의 산적 두목 이노대라는 친구가 다섯째 처남의 돈을 어떻게 해보려 하다가 도리어 돈을 몽땅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귀 두 쪽 마저도 도박으로 잃고 말았다네. 그리고 소굴에 숨겨둔 은자 이천 냥 마저도 다섯째 처남에게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네. 얼마 전 언니의 생일 때 다섯째 처남이 한쌍의 순금 송아지를 보냈는데, 언니가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 했지. 생일이 지난 다음에 그 금송아지를 저울질해 보았는데 꼭 이천 냥 남짓 하지 뭔가?" 주칠칠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저는 셋째 언니의 생일도 잊고 있었군요." 범분양이 더욱 흥미진진한 듯 말했다. "그리고 큰 처남은 말일세......." 주칠칠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말했다. "제발 큰오빠 얘기는 하지 마세요. 큰오빠는 언제나 운이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나를 제외하고 모든 형제들이 다 운이 좋잖아요. 나 혼자만...... 나 혼자만......." 범분양이 웃으면서 말했다. "처제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주씨집 일곱째 아가씨의 이름은 최근 강호상에 아주 널리 알려지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비록 내가 처제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었지만 처제의 강호상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모두 하나하나 소상히 알고 있다네." 주칠칠이 말했다. "그래서 형부가 심랑에게 물어본거군요, 그렇죠?" 범분양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다만......." 주칠칠이 냉소를 하고 범분양이 하려는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형부께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제 일은 심랑 그 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다음부터는 제발 그 사람에게 나에 대해서 묻지 마세요. 그 사람을...... 그 사람을 나는 알지도 못해요." 범분양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좋네, 좋아. 처제가 심 형을 모른다면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타고 있던 말이 갑자기 미친 듯이 위로 펄쩍 뛰어 올랐다. 범분양은 깜짝 놀라 두 다리를 꼭 조였다. 그러나 말은 미친 듯이 옆길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주칠칠이 대경실색하여 부르짖었다. "형부, 형부!"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타고있던 마차의 말도 미친 듯이 앞을 향해 질주해나갔다. 주칠칠은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부르짖었다. "마부, 당신...... 당신!" 그러나 마차를 모는 개방 제자는 마부석의 조그마한 창을 통해 마차 안을 들여다 보고는 음흉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 무슨 일입니까?" 주칠칠은 분기가 탱천하여 소리쳤다. "눈이 멀었어요? 기다려요. 우리 형부께서......." 말을 몰던 개방 제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의 형부께서 약을 잘못 먹었나보군요? 그리고 그 말도 마찬가지구요. 미친 말에 미친 사람이라 하하! 아주 보기 좋군요. 저들을 기다려서 뭐한다는 거죠?" 주칠칠의 입에서 금방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마부가 통쾌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 나를 모르시겠소?" "당신, 당신 누구야?" "자세히 보시오, 내가 누군지......." 그 마부는 손을 들어 얼굴을 한 번 쓱 문질렀다. 그 속에서 나타난 것은 아, 왕련화 또 왕련화였던 것이다. 주칠칠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갑자기 두렵고 놀랍고 조급한 마음에 미칠 것 같았다. 그녀가 부르짖었다. "당신, 이 악마. 바로 당신이었군요!" 왕련화가 다시 히죽거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주 아가씨, 놀라셨소?" 주칠칠이 마차 밖으로 목을 빼서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범분양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차문을 열고 밑으로 뛰어 내리려고 했으나 그 마차문도 열리지 않았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주 아가씨, 얌전히 있으시오. 이 마차는 특별히 제조한 것이오. 아가씨는 뛰어 내릴 수 없을 것이오." 주칠칠은 노갈을 터뜨렸다. "이 악마! 네 녀석을 죽이고 말겠어."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마부석쪽에 난 조그만 창으로 안을 살피고 있는 왕련화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손목이 도리어 왕련화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주칠칠은 두 발로 미친 듯이 벽을 걷어찼다. 그러나 역시 그 마차는 특별제조된 것이었다. 마차의 사면벽은 모두 강철판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벽을 걷어찬 주칠칠의 발이 오히려 얼얼하게 아릴 뿐이었다. 왕련화는 도리어 밖에서 헤헤거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 제발 얌전히 있으시오. 내 부상이 아직 완쾌되지 않아서 나도 힘을 쓸 수가 없는 상태요." 주칠칠이 날카롭게 외쳤다.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죽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 좋은 사람은 목숨이 짧고 불행한 일이 계속 이어진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소? 나같이 나쁜 사람은 오래 살 수 있는 법이오." 주칠칠이 온갖 힘을 다해 몸부림쳤으나, 그의 맥문이 왕련화에게 사로잡혀 몸에 점점 기력이 빠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왕련화의 입술이 그녀의 손에 가볍게 입맞춤하는 것을 느꼈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예쁜 손이로군. 하얗고, 부드럽고......." 주칠칠이 노갈을 터뜨렸다. "이 악마, 내가......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마차 벽에 부딪쳤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져 정신을 잃어버렸다. 심랑과 웅묘아가 범분양과 주칠칠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갑자기 도로 옆 수풀 속에서 처참한 말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힐끗 바라보고 즉각 몸을 날려 수풀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곳에는 범분양이 우두커니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며 그의 옆에는 한 필의 말이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심랑이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범 형,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범분양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당했소! 또 당했소!" 웅묘아가 조급히 물었다. "뭘 또 당했다는 거요? 빨리 말해 보시오." 범분양이 다급하게 물었다. "당신들은 주칠칠을 보았소?" 웅묘아가 대경실색하면서 말했다. "당신과 같이 있었던 게 아니오?" 범분양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웅묘아와 심랑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동시에 범분양을 쫓아 달려갔다. 웅묘아가 참지 못하고 범분양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주칠칠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요?" 그러나 범분양은 한 마디도 하지않고 급히 앞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심랑과 웅묘아도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쫓아갈 도리밖에 없었다. 세 사람의 안색은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밤은 점점 깊어 갔으며 하늘에는 별빛이 반짝거릴 뿐,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 길에는 사람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갑자기 그들이 달려가고 있던 길가에 마차 한 대가 뒤집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차를 끌던 말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범분양은 한달음에 그 마차쪽으로 달려가 벌컥 하고 마차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나 마차 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웅묘아가 쫓아와 물었다. "이 마차가 바로 그녀가 탔던 마차요?" 범분양은 맥이 빠진 듯 한숨을 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참이나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범분양은 탄식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부친을 뵐 면목이 없소. 그리고 또 그녀의 셋째 언니에게도 면목이 없소. 또 당신들 심 형, 웅 형 두 분께도 미안하오." 웅묘아가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과연 사태가 심상치 않군요? 도대체......." 갑자기 심랑이 말했다. "이게 뭔지 보시오." 마차의 문틈새에 얇은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웅묘아는 심랑의 손에서 그 종이를 뺏아 들고 살펴보았다. 종이에는 다만 몇 글자가 쓰여 있을 뿐이었다. "심랑! 헛수고를 했구려. 가인(佳人)은 이미 사라졌소. 심랑,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의 능력에 탄복을 하지만, 나 왕 모를 만나면 당신이 언제나 당할 수밖에 없소." 그 종이에 쓰여진 글을 읽던 웅묘아가 대갈을 터뜨렸다. "미치겠군, 또 왕련화 그 녀석 짓이야." 범분양이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면서 말했다. "악마 같은 녀석, 과연 수단이 뛰어나군. 나 마저도 그녀석 꾀에 넘어갈 줄이야." 웅묘아가 날카롭게 말했다. "쫓아 갑시다."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왕련화 그 친구가 마차를 버리고 말을 타고 간 까닭은 바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소. 그리고 말을 탄 이상, 꼭 이 길로 갔다고 얘기할 수도 없소. 워낙 교활한 친구이고, 또 그 소굴이 천하 각지에 흩어져 있으니 도대체 어디로 쫓아간단 말이오?"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그만 둬야 한다는 거요?" 심랑이 담담히 말했다. "조금 생각해 봅시다. 좋은 방법이 있을 거요." 그는 손을 뻗어 가볍게 마차를 툭툭 치면서 깊은 생각에 골똘히 잠겨들기 시작했다. 주칠칠은 정신을 차리는 순간, 머리부분이 뼈속까지 저려오는 차가움을 느꼈다. 그녀가 손을 들어 머리부분을 만져보는 순간, 머리부분에 얼음 주머니가 얹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얼음 주머니를 집어 던지며,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이불에 덮여 있었던 것이다. 왕련화의 사악한 눈이 멀찌감치 앉아서 웃음을 띤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칠칠은 침상에 드러누운 채 이불로 바짝 몸을 감싸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악마, 이 악한! 이 호색한! 돌려줘, 내 옷 돌려줘!"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떤 사람이 가르쳐주었는데 여자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여자의 옷을 몽땅 벗겨버리는 것이라고 얘기하더니만, 하하! 과연 그 방법은 아주 뛰어난 효과가 있군!" 주칠칠은 얼굴을 붉히고 이를 부드득 갈면서 말했다. "언젠가는 내가 네 녀석을......." 왕련화가 웃으면서 그 말을 가로채서 말했다. "언젠가는 당신이 내 힘줄을 뽑아내고 내 가죽을 벗기겠다는 얘기죠? 맞소? 하하! 그 말은 너무 많이 들었소. 그리고 어떤 때는 나도 간혹 남이 내 힘줄을 뽑아내고 내 가죽을 벗기는 재미가 어떨까 한 번 당해 봤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소.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오늘까지 그런 사람은 없었소." "네, 네 녀석은...... 네 녀석은......." 그녀는 침상에 엎드린 채 방성통곡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왕련화를 때릴 수도 없었고, 그와 싸워 이길 수도 없었고, 욕설을 퍼부은다 해도 왕련화가 전혀 반응이 없는 이상, 그녀는 방성통곡을 터뜨릴 수밖에 더이상의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통곡하면서 한손으로 계속 침대를 내려쳤다. 왕련화가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여유작작 말했다. "손을 너무 높이 들지 마시오. 손을 들 때마다 내가 보아서는 안 될 부분으로 자꾸 내 눈이 가고 있소." 주칠칠은 이제 손 마저도 들 수 없었다. 왕련화가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불쌍한 사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주칠칠이 날카롭게 외쳤다. "내가 불쌍하다면 제발 나를 죽여 주세요." 왕련화가 안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죽일 수 있겠소? 나는 당신에게 좋게 대해주고만 싶소." 주칠칠이 부르짖었다. "아, 하나님! 당신은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잘 생각해 보시오. 내가 당신을 알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을 괴롭힌 적이 있소? 당신은 나를 때리고 싶어하고, 나를 죽이고 싶어 하지만 나는 다만 당신을 가볍게 쓰다듬고 싶어할 뿐이오." 주칠칠이 더욱 큰소리로 통곡하면서 말했다. "하느님, 아 하느님! 당신은 어째서 이런 악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나를 괴롭히는 겁니까? 나를......."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그렇소. 나는 바로 당신을 괴롭히는 악마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오. 당신이 내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려고 해도 빠져 나갈 수 없소. 반항하려 해도 반항할 수 없을 것이오. 이것은 천명이오. 하늘의 명령인 것이오. 어떠한 사람도 이 명령을 바꿀 수는 없소." 그는 웃으면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주칠칠이 누워있는 침대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주칠칠은 몸을 도사리며 이불로 몸을 꼭 감싼 다음, 침대 모퉁이까지 물러가 왕련화의 그 번들거리는 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겁에 질려 울려고 했으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도대체,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 왕련화가 히죽거리면서 말했다. "잘 알면서 물어볼 필요가 있소?"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그녀쪽으로 다가왔다. 주칠칠이 날카롭게 외쳤다. "멈춰요!" "만약 내가 멈추기를 원한다면 일어나서 나를 껴안으시오. 그러면 내가 멈춰설 것이오. 그 방법을 제외하고는 어쩌면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오." 간계가 많은 사람 웅묘아의 찌푸렸던 얼굴이 활짝 펴지며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과연 왔소!" 심랑, 웅묘아, 범분양은 여전히 꼼짝 않고 숨어서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로 미루어 보아, 그곳에 나타난 사람은 결코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 소리와 더불어 말발굽 소리도 어지러이 섞여 들려왔다. 사방이 죽음과 같은 적막감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는 더욱 또렷이 들려왔다. 웅묘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주먹을 서로 마주 비비며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나직한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심랑! 과연 심랑이로군! 정확히 그들이 오리라는 것을 알아 맞췄으니......." 그러나 심랑의 얼굴은 더욱 신중하게 가라앉아 갔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벌써 오다니...... 정말 생각 밖이로군." 웅묘아가 그 말을 듣고 물었다. "그들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으면서 생각 밖이라니 도대체 무슨 얘기요?" "그들이 오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소." 웅묘아가 얼굴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건 또 무슨 얘기요?" 심랑이 천천히 말했다. "개방 대회가 아직 끝나지 않았소. 그리고 이곳은 개방 대회장으로 가는 과정에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이오. 그들이 온다면 마땅히 개방 대회가 끝나서 사람들이 전부 흩어진 다음에 와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또 개방 대회가 끝나기 전에 온다고 해도 이처럼 왁자지껄 시끄럽게 조금도 거리낌 없이 올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소." 웅묘아도 심랑의 말을 듣고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저녀석들이 사람 숫자를 믿고 간이 커져서 저러는 게 아니겠소? 범 형, 내 말이 맞지않소?" 그러나 범분양은 가볍게 신음소리만 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왁자지껄하던 소리는 이미 그들 앞에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들은 다섯 사람에 두 마리의 말이었다.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면서 엎어진 마차를 바로 뒤집더니 말을 끌어다가 마차에 잡아 맸다. 그중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두목은 과연 두목다운 데가 있어. 멀찍이 앉아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처럼 정확히 알아 맞추시다니 말이야." 다른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옛날 얘기를 듣지 못했나? 뛰어난 장수는 천 리 밖에 진을 치고서도 적을 이긴다는 그런 말을 말이야. 내가 보건데 우리 두목은 그들 옛날 명장들 보다도 더 뛰어난 것 같애." 세번째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누가 아니래? 옛날의 그 명장들은 비록 장막 안에서 천 리 밖의 싸움을 이길 수 있었지만 여전히 머리깨나 썩혀야 이길 수 있었을거야. 그렇지만 우리 두목은 집안에 앉아서 계집을 끼고 히히덕거리면서도 이처럼 멀찍이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알아맞추고 일을 깨끗이 처리하시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야!" 다섯 사람은 기분이 좋은 듯 왁자지껄 떠들며 마차를 끌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갔다. 그들은 사방에 이상한 점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주위를 기울이지 않는 듯하였다. 심랑 등이 이 처럼 은밀하게 숨어있지 않고 나무 그늘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누군가 자기들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웅묘아가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말했다. "빨리 쫓아 갑시다." 그러나 심랑이 한 손으로 뛰쳐 나가려는 그를 막았다. "우리는 쫓아갈 수 없소." 웅묘아가 곧 얼굴에 이상하다는 기색을 드러내면서 물었다. "우리가 이 고생을 하면서 여기서 이렇게 기다린 게 무엇 때문인데 쫓아가면 안 된다는 거요? 그들이 이렇게 왔는데, 우리가 쫓아가지 않는다면 도대체...... 뭐 어쩌겠다는 거요?" 심랑이 설명했다. "저들을 쫓아가는 일은 범 형 혼자서 책임져 주시오." 웅묘아가 눈을 크게 치뜨면서 말했다. "그럼 우리 두 사람은 뭘 하자는 거지요?" "우리 두 사람은 개방 대회가 열렸던 그곳으로 가 봅시다. 빨리 가야 할 것 같소.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그곳에는 아주 큰 사고가 발생했을 거요." 웅묘아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어떻게 그런 일이......?" 심랑이 침중한 소리로 말했다. "범 형께서는 저 마차를 따라 가다가 그들이 어디까지 가는지만 알고 돌아 오시오. 결코 경거망동 하지 마시오. 이곳에 와서 우리가 돌아올 때를 기다려 주시오. 서로 의논을 해본 다음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합시다." 범분양이 말했다. "알았소. 심 형께서는 안심해도 좋소. 분부한 대로 하리다." 웅묘아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 점은 범 형께서 안심해도 좋소. 심 형은 당연히 당신이 자신의 말을 따라 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소. 그렇지 않다면 심 형이 어떻게 나더러 가라 하지 않고 범 형더러 쫓아가라 하겠소? 그런데 개방 대회장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개방 제자들이 있고, 또 수백 명이나 되는 무림 고수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오. 왕련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수작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믿을 수가 없구려." 심랑이 말했다. "바로 그 점이오. 모든 사람들이 왕련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수작을 부릴 수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왕련화는 걱정하지 않고 수작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오. 그 점이 바로 왕련화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오. 사람들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점을 공격하는 그러한 장점 말이오." 웅묘아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소.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그들이 모두 장님이나 귀먹어리, 벙어리가 아닌 다음에야......." 겨울밤의 살을 에일 듯한 차가운 바람을 타고 술기운이 심랑과 웅묘아의 코끝으로 불어닥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개방 대회 장소에까지 이르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일진의 술 향기가 코속으로 스며듬을 느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웅묘아의 손은 또 허리에 차고있는 술 호로병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입으로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개방 제자들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구두쇠짓을 하더니만 이렇게 손님을 청했을 때는 술대접까지 할 줄 알다니? 정말 몰랐군?"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웅 형의 뱃속에 있는 술벌레들이 다시 꿈틀대는 모양이죠?" 웅묘아가 말했다. "꿈틀대다 뿐이겠소? 술이 먹고 싶어 죽을 지경인 것 같소." "그렇지만 내가 보건데 개방의 술은 먹지 않는 게 좋을 듯하오." "먹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심랑은 가볍게 탄식을 할 뿐, 더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더 빨리 신형을 날려 개방 대회장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엉성하게 지은 대나무 울타리와 휘황한 횃불들이 그들 두 사람의 눈으로 들어왔다. 울타리의 틈새로 울타리 안에는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변고가 일어났다는 거요? 보시오. 얌전히 앉아서 술들을 마시고 있지 않소?" "그렇게 생각하오?" "만약 무슨 변고가 있었다면 그들은 당연히......."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더이상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웅묘아는 그순간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조용히 대나무 울타리 속에 앉아 있었으나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사람의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조용했던 것이다.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울타리 안에 앉아 있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다니......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도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술을 마시고 있으면서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니...... 지나친 조용함은 이미 불길한 예감을 갖게 하기에 족했다. 웅묘아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 나가 대나무 울타리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들어 사방을 쓸어보던 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멍청히 서버렸다. 대나무 울타리 안에 있던 수백 명의 무림 호걸들은 이미 모두 죽은 시체로 변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입에 흰 거품을 물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탁자 위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탁자 위에 있던 음식들은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술병과 술잔들이 어지러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술이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단 말인가? 한참을 멍청하게 서 있던 웅묘아가 달려들어 한 사람을 붙잡아 일으키고는 코끝에 그의 손가락을 대봤다. 그리고 또 한 손으로는 맥박을 짚어 보았다. 한참을 맥박을 짚던 웅묘아의 얼굴색이 크게 변하며 실성한 소리로 부르짖었다. "중독이오."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과연 내가 생각한 대로요. 술에 독이 있었소." 웅묘아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이들은 수십 년 동안 강호를 종횡한 사람들이오. 어떻게 중독을 당할 수 있다는 거요?" "방금과 같은 그러한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누구든 속시원하게 술 몇 잔을 들이키기를 원할 뿐, 술 속에 독이 들어 있으리라고 꿈에라도 생각할 수 있었겠소?" 웅묘아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맞는 말이오. 나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결코 술 속에 독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오." 찬바람이 불어와 횃불을 널름거리게 했다. 그 널름거리는 횃불은 그곳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창백하고 일그러진 얼굴을 비춰 주었다. 그 모습은 말할 수 없는 처참함과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기에 족했다. 웅묘아가 갑자기 또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심 형, 자세히 살펴보시오. 이 사람들의 앞가슴이 전부 풀어 헤쳐져 있소." 심랑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중독되어 쓰러져 있는 몇 사람 앞으로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 앞가슴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가슴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들이 중독된 다음에 이미 그들이 갖고 있던 모든 물건을 강탈당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웅묘아가 분에 찬듯 소리쳤다. "사람을 죽이고 재물까지 빼앗아가다니...... 나쁜 녀석들이군! 정말 나쁜 녀석들이야!"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뼈도 뱉지 않고 통째로 삼켜버리는 것이 왕련화의 일관된 행동이 아니었소?" 웅묘아가 한숨을 불어내며 말했다. "심 형, 심 형이 보기에는 이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을 것 같소?" 심랑이 몇 사람을 더 살펴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만약 해독약이 있다면 구할 수는 있을 것이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독에 중독되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소." 갑자기 두 사람은 그곳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자기들을 노려보고 있다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동시에 뒤로 몸을 홱 돌렸다. 과연 거기에는 부릅뜬 두 눈이 그들을 뚫어질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분노의 기색이 가득차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지금까지 그처럼 분노에 가득찬 눈을 본 적이 없었다. 그를 바라보던 웅묘아가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전공태요!" 전공태는 중독되지 않고 혈도를 제압당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 있던 곰보 딱지 하나 하나는 모두 번쩍이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에 가득찬 빛이었다. 여기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그는 전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 웅묘아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술을 마시지 않아서 좋은 때도 다 있군?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했었는지 물어보도록 합시다. 어쩌면 이 친구는 자초지종을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가 말을 하는 동안 심랑은 이미 전공태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전공태는 꿈틀대며 일어서더니 팔을 펴보고 다리를 몇 번 들어올렸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심랑이 말했다. "전 형, 도대체 어떠한 일이......?" 전공태가 얼른 그 말을 가로채고 허리를 약간 굽히며 말했다. "나는 괜찮소. 두 분이 도와주셔서 고맙소." 그러나 '고맙소' 하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공태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는 수십 개의 번쩍이는 빛이 동시에 쏟아져 나와 심랑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전공태도 미친 듯이 심랑을 향해 덮쳐 들어갔다. 수십 개의 암기가 그의 손에서 나오는 순간, 그 암기는 빠르고 표독스럽게 심랑에게 덮쳐갔다. 심랑은 전혀 경계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전공태는 심랑에게 독수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랑은 암기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번쩍 몸이 솟구쳐올랐다. "미쳤소?" 암기가 비록 번개처럼 빨랐으나, 심랑의 움직임은 암기보다 더 빨랐다. 사방을 가득 메우고 심랑을 공격해 들어오던 암기들은 심랑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웅묘아의 신형이 번쩍하는 순간, 그는 이미 전공태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번개처럼 손을 뻗어 전공태의 두 어깨를 부여잡고 그를 자기 앞으로 홱 돌려 세웠다. 전공태는 또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입에서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심가 놈, 나는 네 녀석이 정의를 아는 영웅인줄 알았다. 그런데 네 녀석이. 네 녀석이. 인면수심의 짐승일 줄이야. 아니, 네 녀석은...... 네 녀석은...... 짐승보다도 못한 놈이야!"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네 놈이 짐승이다! 심 형께서는 네 목숨을 구해줬는데, 너는 그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하다니...... 네 녀석이, 그래도 사람이란 말이냐?" 전공태도 질세라 부르짖었다. "심랑만 아니라 웅묘아 네 놈도 짐승이다. 죽여라! 어떻든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고, 또 네 녀석들이 나를 죽여서 입막음을 하고 싶을 테니까. 손을 쓰려거든 빨리 써라!"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이놈, 미쳤군, 미쳤어!" 심랑이 신중하게 물었다. "전공태,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 우리가 왜 당신을 죽여서 입막음을 하려한다는 거요?" 전공태가 여전히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우리 개방은 네 놈을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네 녀석이 술에 독을 탈 줄이야...... 우리 개방 제자만이 아니라 이 무림 호걸들을 모두 해치고 나아가...... 나아가 그들이 갖고 있던 금은보화까지 모두 겁탈해 갈 줄이야......." 웅묘아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소리쳤다.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무슨 개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 도대체 누가 술에 독을 탔다는 거지? 누가 겁탈을 해갔다는 거지?" 전공태가 대갈했다. "네 놈과 심랑이 하는 짓거리를 내가 혹시 잘못이라도 봤다는 거냐?" 웅묘아는 화가 나서 더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손을 번쩍 치켜들어 전공태의 따귀를 세차게 후려갈겼다. 그러나 그의 손을 심랑이 얼른 옆에서 부여 잡았다. 심랑은 화를 눌러 참고 얼굴을 부드럽게 가라 앉히며 말했다. "전 형, 생각해 보시오. 만약 우리가 이 사람들을 해쳤다면 무엇때문에 다시 이곳에 나타났겠소?" 전공태가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네 녀석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이곳의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살펴보러 온 것이겠지. 만약 누가 살아나서 네 녀석들이 한 짓거리들을 발설한다면 네 녀석들이 더이상 강호상에서 행세하지 못하게 되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그걸 확인하러 온 것이 아닌가?" 심랑과 웅묘아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 가슴에서는 자신들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왕련화의 짓거리라는 것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왕련화는 자기가 이러한 짓을 해놓고, 도리어 심랑과 웅묘아의 모습으로 분장하여 이곳에 나타나 그들의 물건을 겁탈해갔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짓거리를 심랑과 웅묘아에게 뒤집어 씌었던 것이다. 이순간 심랑과 웅묘아는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만약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눈으로 직접 자신과 웅묘아가 그들의 물건을 겁탈해가는 것을 보았다면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을 해친 사람이 심랑과 웅묘아라는 생각을 추호도 바꾸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심랑과 웅묘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전공태를 죽여서 입을 막아버리는 일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전공태를 죽인다고 해서 그들에게 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그리하여 그들은 전공태를 죽일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은 누구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했다. 전공태가 또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죽여라!" 웅묘아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귀찮다는 듯 말했다. "이 멍청한 사람, 정말 당신을 죽여버리고 싶소." 전공태가 광소를 터뜨렸다. "죽이고 싶다면 빨리 죽여라. 왜 머뭇거리는 거지?" 웅묘아가 말했다. "그것은...... 그것은......." 그는 갑자기 발을 들어 땅바닥을 힘껏 쿵 내려 밟더니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왕련화, 나쁜 녀석. 이 나쁜 녀석. 이렇게 나를 괴롭히다니." 심랑이 탄식을 했다. "왕련화, 왕련화! 과연 대단한 친구요." 웅묘아가 답답한 듯 말했다. "심 형, 심 형마저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모르겠단 말이오?"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일은 신선이 나타난다고 해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이때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울리며 세 사람이 말을 몰고 급히 달려왔다. 그 세 필의 말의 속도는 대단히 빨라 순식간에 이미 대나무 울타리 밖에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말에서 세 명의 흑의 대한이 뛰어 내리더니 손에 세 개의 큰 동으로 만든 찻주전자를 들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웅묘아가 대갈을 터뜨렸다. "네 놈들은 도대체 누구냐?" 세 명의 대한은 심랑과 웅묘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앞장 선 사람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집 공자께서 이곳에 중독된 사람이 있음을 알고 저희들로 하여금 와서 구해내라고 명령을 내리셔서 왔소." 웅묘아가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의 공자라는 사람은 혹시 왕련화가 아닌가?" 그 대한은 얼굴색도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바로 그렇소." 웅묘아가 대갈을 터뜨렸다. "나쁜 녀석, 감히 이곳에 나타나다니." 말을 마치는 순간 그는 그 세 명의 대한에게 덮쳐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몸을 움직이는 순간, 또 심랑이 그의 팔을 잡아 만류했다.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심 형, 왜 나를 막는 거요?"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웅 형, 지금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단 말이오?" 웅묘아는 눈을 들어 중독되어 사방에 쓰러진 사람들을 한 차례 훑어 보았다. 지금 이순간 그가 만약 손을 써서 그 대한들을 죽여 버린다면 누가 그들을 구해준단 말인가? 그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심랑이 눈을 들어 그 대한을 쳐다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자네집 공자께서는 어떻게 여기에 중독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단 말인가?" 웅묘아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맞소, 왕련화는 도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자신이 중독시킨 게 아니라면 말야?" 그 대한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공자께서는 혹시 인면수심의 짐승 같은 녀석이 독수를 쓸까봐서 걱정이 되셨기 때문에 벌써 저희 형제로 하여금 이곳에 와서 살펴보도록 명령을 하셨던 거요."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를...... 네 이 녀석, 이 녀석......." 그 대한이 말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 급하오...... 두 분께서 고의로 시간을 끄는 것은 이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뜻이오?" 전공태가 처참한 소리로 애걸을 했다. "심랑, 웅묘아 부탁이오, 제발 부탁이오. 이 사람들을 살려주시오. 이 사람들은 모두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이오. 당신들도, 당신들도 부모 형제가 있지 않소?" 웅묘아는 이미 분통이 터져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후에는 틀림없이 자신과 심랑을 뼈에 사무치게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그들은 자신들의 결백함을 그들에게 증명해 보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왕련화가 이 무림호걸들의 입을 빌어서 심랑과 자신의 악명을 세상에 널리 퍼지게 하려는 악독한 계책을 꾸몄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떻게 이 세 명의 대한에게 그들을 구하지 말도록 한단 말인가! 왕련화의 이러한 수법은 이 무림인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것보다 더 악독한 수단이었다. 심랑이 천천히 말했다. "좋소. 당신들은 빨리 저들을 구해 주시오." 웅묘아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심랑이 묵연히 말했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사라질 수밖에......." "사라진다고?" 심랑이 처연히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사라지지 않고 이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바란다면 아마 곤란한 일이 발생하게 될 거요. 그때에는 우리가 사라지려고 해도 사라지지 못할까 두렵소." 세 명의 대한은 얼굴 가득 득의한 기색을 떠올리며 천천히 동주전자의 물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중독된 사람들의 입에 흘려 넣었다. 심랑과 웅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대나무 울타리를 빠져 나왔다. 전공태의 악의에 찬 저주가 그들 뒤에서 들려왔다. 웅묘아가 처연히 말했다.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그대로 사라진다면 저 수많은 사람들을 중독시키고 물건을 강탈해 갔다는 악명은 그대로 우리가 뒤집어 쓰게 되오. 그 죄명은 우리가 황하에 들어가서 씻어낸다 해도 다 씻어내지 못할 것이오. 심 형, 왜? 왜 나를 말렸소? 차라리 나는 죽을지언정......." 심랑이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웅 형과 나 두 사람이 죽는 것은 아까울 게 없소. 그렇지만 그 사람들마저 우리랑 같이 죽게 만들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나는 차라리 씻을 수 없는 악명을 뒤집어 쓸지언정, 차라리 천하인들로 하여금 나를 저주하고 미워하게 할지언정 먼저 그들을 구해놓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소." 웅묘아는 부드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며 소리쳤다. "왕련화! 아 나쁜 자식, 왕련화 그 녀석은 틀림없이 개방은 이미 자신이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바로 이러한 계책을 생각해 냈던 것이오. 그 녀석은 그 사람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나서 그들의 목숨을 구해준 거요. 그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우리 두 사람에게 복수를 하게 만들려는데 있는 거겠지요. 어떤 사람이든 그녀석은 조금이라도 이용할 가치가 있기만 하다면 결코 그것을 그대로 두지 않으니 정말 악독한 녀석이오!" 심랑이 천천히 말했다. "만약 심장의 악독함과 수단의 독랄함을 논한다면 왕련화 그 친구는 천하무쌍이라고 할 수 있소. 내가 보건데 쾌락왕마저도 이 점에 있어서는 왕련화보다 뛰어나지 않을 거요." 여기까지 말을 하던 심랑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입가에는 또 엷은 미소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웅묘아는 심랑의 그 웃음을 보며 도리어 짜증을 냈다. "하느님 맙소사! 심 형, 당신은 이런 순간에도 웃을 수 있단 말이오? 우리는 왕련화 그놈에게 번번히 당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렇게 큰 죄명까지 뒤집어 썼는데...... 심 형, 심 형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오? 이러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니?"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왕련화 그 친구는 사사건건 우리를 괴롭혔지만, 이번에는 그 친구가 우리에게 괴롭힘을 당해야 할 거요. 그리고 어쩌면 이번 일은 그의 치명상이 될지도 모르오." 웅묘아가 놀란 토끼눈을 하며 물었다. "어떤 일이오?" "그는 자신의 꼬리를 우리에게 잡혀서는 안 되었소." 웅묘아가 참지 못하고 말을 잘라서 물었다. "무슨 꼬리요 ? 무슨 꼬리란 말이오?" "바로 그 마차가 그의 꼬리요. 우리가 그 꼬리를 잡은 이상, 우리는 그를 찾아낼 수 있으며 우리가 그를 찾아낸 이상, 그를 완전히 우리 손에 잡아 넣을 수가 있소. 그가 비록 아무리 우리를 여러 번 괴롭혔다고 해도 이제 우리에게 잡히면 그도 끝장이오." 웅묘아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심 형, 당신은 과연. 과연! 남에게 굴복할 줄도 모르고 남이 쓰러뜨릴 수도 없는 그러한 사람이오. 지금의 상황이 그렇다면 빨리 범분양과 약속했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그래서 왕련화 그 녀석의 꼬리를 잡도록 합시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범 형과 만나서 왕련화의 꼬리를 잡을 필요까지도 없소." 웅묘아는 또 깜짝 놀란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얘기요?" "왜냐하면 왕련화의 또다른 꼬리가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오." "도대체 어...... 어디에 있다는 거요?" "웅 형, 나를 따라 오시오." 그는 몸을 날려 대나무 울타리의 횃불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을 따라 대나무 울타리를 반 바퀴 돌아가더니 세 마리의 말이 있는 좌측 편까지 바짝 다가갔다. 웅묘아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심 형께서는 저 세 명의 대한이 나오면 그들 뒤를 쫓아 가자는 거요?" "저 세 사람은 여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거요. 만약 그들을 기다려야 한다면 차라리 범 형을 기다리는 게 더 빨를지도 모르지. 또 저 세 사람은 이미 이곳에서 우리를 만났기 때문에 자기들이 꼬리가 밟힐까봐 틀림없이 조심하게 될 거요. 어쩌면 자신들의 소굴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겠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다면 심 형이 말하는 왕련화의 꼬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요?" 심랑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바로 이곳에 있소. 웅 형께서는 보고만 계시오." 말을 마친 그가 손을 번쩍 드는 순간, 두 개의 조그마한 검은 물체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는 이미 손에 두 개의 조그마한 돌 조각을 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심랑의 손에서 날아간 두 개의 돌 중 하나는 고삐를 끊었으며, 다른 하나는 첫번째 조각이 말 고삐를 끊는 순간 말 궁둥이를 세차게 때렸다. 심랑은 마치 눈에도 등을 달아 놓은 듯 이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말의 고삐를 끊었으며 궁둥이를 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은 불의의 습격을 받고 울부짖으며 몸을 돌이켜 미친 듯이 뒤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때 대나무 울타리 안에 있던 대한 중 한 사람이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친놈의 짐승! 너무 많이 먹인 탓이겠지?" 그들은 누구도 이것이 심랑의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다만 정신없이 사람들의 입에 약물을 흘려넣기에 바빴을 뿐 누구도 말이 도망가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랑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 말이 바로 왕련화의 꼬리요. 쫓아 갑시다!" 웅묘아는 아직까지 얼굴에 의아한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심랑을 따라 연기처럼 그 뒤를 쫓아갔다. 웅묘아는 심랑의 뒤를 따라가면서야 비로소 심랑의 의도를 깨달은 듯 얼굴에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렇군. 말은 원래 길을 아는 짐승이지! 저 말은 틀림없이 자기 마굿간으로 돌아가겠지. 우리가 저 말의 마굿간만 발견하게 된다면 왕련화의 소굴을 발견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라는 얘기군."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말을 쫓아가는 것이 사람을 쫓아가는 것보다 훨씬 쉽지 않겠소?" 웅묘아는 기쁨에 들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 과연 심 형답소!" 심랑과 웅묘아는 말과 충분한 간격을 두고 쫓아가고 있었다. 웅묘아는 여전히 앞가슴을 풀어 헤치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밤바람이 그의 가슴으로 세차게 몰아쳐와 철판과 같은 가슴은 칼날과 같은 바람을 맞받아 발갛게 달아 오르고 있었으나 그는 즉각 왕련화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도리어 가슴이 뜨겁게 달아 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웅묘아가 방금까지 느꼈던 분노는 이미 바람에 씻긴 듯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웅묘아 특유의 활발하고 호방하고 기개가 넘치는 붉은 심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웅묘아는 기쁨에 겨워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며 공중제비를 돌아 심랑의 앞에 내려섰다. 심랑이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웅 형, 내가 만약 아들이 있다면 그 아들이 웅 형과 같은 남자였으면 좋겠소!" 여자의 마음 중원의 배는 추위와 서리를 맞기 때문에 달고 즙이 많다. 마치 남해의 바나나와 서역의 메론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침을 흘리게 하는 그러한 뛰어난 과일이었다. 이때 심랑과 웅묘아가 달려가고 있는 전면에 배나무 과수원이 눈에 들어왔다. 배나무 과수원에는 몇 채의 초옥이 있었는데 그 초옥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 초옥들은 배나무 과수원을 지키는 사람들의 처소인 듯하여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쫓아가고 있는 말들은 곧장 그 배나무 숲을 향해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웅묘아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왕련화 그 녀석의 초소가 바로 이곳이란 말인가......?" "아마 틀림 없을거요." 그 말은 배나무 과수원 밖에까지 곧장 뛰어가더니 초옥 앞에서 뛰던 걸음을 멈추었다. 말이 앞발을 쳐들고 가볍게 울부짖는 순간, 초옥 안에서는 두 인영이 번쩍하더니 초옥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 몸놀림의 빠름과 건장한 신체로 보아 결코 과수원지기는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말이 한 마리만 돌아온 것을 발견하는 순간, 얼굴에 놀란 기색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서로 몇 마디 상의를 하더니 한 사람은 다시 초옥 속으로 들어가고, 한 사람은 말을 끌고 초옥 뒤로 돌아갔다. 웅묘아가 말했다. "그렇군. 틀림없이 여기겠군." 심랑이 말했다. "말을 끌고 집뒤로 돌아간 사람이 돌아 오거든 곧바로 쫓아 들어가도록 합시다." 웅묘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쫓아 들어간다구요? 먼저 이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는 게 좋지 않겠소?"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웅 형께서는 지금 '평소에는 신중하다 못해 답답할 정도로 신중을 기하던 심랑이 오늘은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게지?'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오?" 웅묘아가 실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맞소. 내가 꼭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심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왕련화 그 같은 인간을 상대하는 데는 아무리 신중하게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소. 차라리 정면으로 충돌하여 번개처럼 일을 해치우는 게 나은 법이오. 그 녀석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릴 때 우리가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거요." 웅묘아가 박수를 치고 낮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그 방법이 내 입맛에도 맞소." 그들이 이렇게 주고받는 동안 말을 끌고 초옥 뒤로 돌아갔던 그 사람이 돌아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불빛이 새어 나오는 순간, 그 사람은 그 문 안으로 한 발짝 들여놨다. 이순간, 심랑과 웅묘아가 번개처럼 그 뒤로 다가갔다. 심랑은 아직 그 장한의 뒤에 도착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 신속하게 그 장한의 머리 뒤의 옥침혈(玉侵穴)을 눌렀다. 그 사람은 한 마디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스르르 쓰러져버렸다. 웅묘아는 오른쪽 다리를 번쩍 들어 문을 거세게 내질렀다. 그리고 주먹을 번쩍 들어 문을 열어준 대한을 후려쳤다. 그 대한은 깜짝 놀라 두 손을 들어올려 웅묘아의 주먹을 막아냈으나 순간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리며 그 대한의 두 팔이 완전히 부러져버렸다. 그 대한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비명소리가 입밖에 나오는 순간 웅묘아는 또 주먹을 들어올려 그 대한의 아랫턱을 세차게 내갈겨 버렸다. 그 집 안에는 문을 열어준 대한 외에도 다섯 명의 대한이 더 있었다. 그들은 마침 탁자에 빙 둘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돌연한 변고에 깜짝 놀라 동시에 모두 일어섰다. 다섯사람 중 한 사람은 손을 뻗쳐 앉았던 의자를 집으려 하였으며 한 사람은 손을 옆으로 돌려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었고, 한 사람은 앞에 놓였던 탁자를 집어 들려 하였으며, 또 한 사람은 벽으로 뛰어 들어가 창을 뽑아 들었고, 한 사람은 주먹을 쳐들고 웅묘아에게 덤벼들었다. 웅묘아의 호랑이 발톱 같은 손이 번쩍하는 순간, 그는 이미 주먹을 들고 자신에게 덤벼들었던 장한의 팔목을 마주 잡고 왼손으로는 그 장한의 뒷머리를 잡아 오른손으로 잡은 주먹을 그 장한의 벌린 입속으로 어거지로 쑤셔 넣었다. 그 장한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두 눈만 멀거니 뜬 채, 주위를 휘번덕거릴 뿐이었다. 탁자를 들려던 장한은 탁자를 채 들어 올리기도 전에 한 사람이 자신쪽으로 날아온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누가 날아온다고 느끼는 순간, 웅묘아는 그 장한의 머리통을 잡아 자신의 주먹을 입에 처넣은 장한의 머리통과 세차게 부딪히게 만들어 버렸다. '펑'하는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은 모두 그자리에 사지를 늘어뜨린 채 쓰러져버렸다. 칼을 뽑아들었던 장한은 칼이 아직 칼집에서 나오기도 전에 팔굽이 저려오고 어깻죽지가 저려오고 목 뒷덜미가 저려온다고 느끼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 자리에 벌렁 쓰러져버렸다. 심랑은 왼손으로 칼을 뽑던 대한의 세 곳 요혈을 제압한 다음, 오른발을 들어 의자를 들어 올리려던 대한을 세차게 걷어차 버렸다. 창을 뽑아들려고 벽쪽으로 달려갔던 장한은 갑자기 우당탕하더니 주위가 조용해짐을 느끼고 이상하다는 생각에 창을 뽑기도 전에 뒤로 고개를 돌려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는 한쌍의 반짝거리는 고양이처럼 생긴 눈이 '히히' 웃으면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가 깜짝 놀라 뽑으려던 창을 잊어버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펑!펑!펑!'하고 여러 대를 내려 갈겼으나, 상대방은 여전히 히죽거리고 웃으면서 꼼짝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도리어 상대방의 앞가슴을 내려갈긴 자신의 손이 뼈가 부서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을 뿐이다. 그 장한은 이를 악물고 사력을 다하여 발을 들어 고양이 같이 생긴 눈을 가진 장한을 걷어찼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눈앞이 캄캄해지며 무엇인가가 눈을 가려버렸다. 그리하여 그가 발길질을 하긴 했으나 도대체 어디에 했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는 너무나 기가 막혀 비명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웅묘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통쾌하군, 통쾌해!" 심랑은 이미 연기처럼 집 안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웅묘아도 바짝 그 뒤를 쫓아서 뛰어 들어갔다. 이때 한 사람은 아궁이 옆에 쓰러져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의 한쪽 다리는 바닥에 놓여 있었고 한쪽 다리는 아궁이 위에 걸쳐져 있었다. 심랑은 또 이미 세번째 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웅묘아도 바짝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웅묘아는 문옆에 한 사람이 쓰러져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장한은 손에 칼을 들고 있었으나 그 칼은 벌써 서너 토막으로 동강이 난 채였다. 심랑이 다시 뒤쪽에 있는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웅묘아가 말했다. "심 형, 나에게도 일거리를 좀 남겨 주시오." 웅묘아가 그 주방으로 뛰쳐 드는 순간, 주방에서 한 사람이 번쩍 밖으로 뛰어 나왔다. 무엇이 주방에서 뛰어 나온다고 느끼는 순간, 웅묘아는 주먹을 쳐들어 번개처럼 그 물체를 내려쳤다. 그러나 그 물체는 번쩍하는 순간 웅묘아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웅묘아가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웃음소리와 더불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는 원래 눈이 좋은 법 아니오? 나도 못 알아본단 말이오?" 웅묘아가 몸을 돌려 바라보자 그의 뒤에는 심랑이 웃음을 머금은 채 서 있었다. 웅묘아가 겸연쩍은 듯 웃으면서 말했다. "난 또 누가 이렇게 빠른 신법을 갖고 있나 했지. 알고보니 심 형이었구려." 심랑이 말했다. "주방 안에는 아무도 없소." 웅묘아가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왕련화는......?" "틀림없이 밀실이 있을 것이오. 왕련화는 그 밀실에 있을 것이오. 빨리 찾아 봅시다." "틀림없이 그럴거요. 빨리 찾아 봅시다. 그 녀석이 도망가기 전에......." 심랑은 그들이 들어간 첫번째 집을 한 바퀴 빙 돌아본 다음 다시 두번째 집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 두번째 집도 샅샅히 살펴보고는 다시 처음 살펴봤던 첫번째 집으로 돌아와서 한 바퀴 또 둘러 보았다. 웅묘아는 심랑의 뒤를 쫓아 집을 둘러보며 계속 물어댔다. "찾았소, 못 찾았소? 밀실이 있소, 없소?" 심랑이 마침내 돌아다니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못 찾겠소." 웅묘아가 조급한 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죠? 혹시, 혹시 그 녀석...... 여기에 없는 것 아닐까요?" 심랑이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갑자기 큰 걸음걸이로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웅묘아도 그 뒤를 따라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심랑은 아궁이 앞에 선채 유심히 아궁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한참 아궁이를 살펴보던 심랑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떠올랐다. 심랑이 말했다. "바로 여기요." 웅묘아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어디 말이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도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웅묘아가 말했다. "틀림없을 거요. 틀림없이 여기요." 커다랗고 넓직한 부뚜막 위에는 세 개의 솥을 얹어 놓는 아궁이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솥이 없었고 두 아궁이에는 큼직한 가마솥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그 두 개의 가마솥 중 하나는 기름때가 가득 묻어 있었으나 다른 가마솥 하나는 아주 깨끗했다. 심랑은 그 깨끗한 가마솥을 잡고 옆으로 비틀면서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과연 그 가마솥이 아궁이에서 빠져 나오자 거기에는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 웅묘아가 기쁨에 들떠 소리쳤다. "그 녀석, 아주 은밀하게도 만들었군." 왕련화 그 악마가 바로 이 지하 통로 끝에 숨어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웅묘아는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심랑은 망서리지 않고 지하통로로 환희에 들떠 들어서고 있었다. 웅묘아는 평상시에 심랑이 매사에 아주 조심스럽고 세심한 주위를 기울이는 것을 보고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순간 비로소 심랑의 담력이 누구도 미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심랑을 쫓아서 재빨리 지하 통로로 들어섰다. 그리고 가볍게 중얼거렸다. "심 형, 오늘에야 비로소 당신의 담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신이 이미 지하의 한 밀실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 밀실은 매우 우아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사방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비단으로 커텐을 드리운 나무 침상이 놓여져 있었는데 마치 부잣집 아가씨의 규방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그렇다면 왕련화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 밀실에서 왕련화는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커텐은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반투명한 커텐을 통해 침상 위에는 이부자리가 단정히 정리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 침대는 며칠 동안 아무도 사용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웅묘아와 심랑은 그 침상 앞에 서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표정에서 그들이 느끼고 있는 답답함과 실망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였다. 심랑은 벌레 십은 얼굴이 되어 고개를 쳐들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틀렸소, 아무래도 내가 틀린 것 같소. 왕련화 그 녀석이 이곳 말고 또다른 비밀 소굴을 갖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소." 웅묘아는 심랑을 알고부터 지금까지 심랑이 이처럼 속상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자신 비록 매우 답답하고 실망하고 있었으나, 심랑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억지 웃음을 띠며 위로했다. "심 형, 한 번 실수했다고 그렇게 의기소침해할 필요는 없지 않소? 어떻든 왕련화 그 녀석은 조만간 심 형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오." 심랑이 암담한 기색으로 말했다. "오늘 그 녀석이 빠져 나간다면, 이후에는 어쩌면......." 그는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길게 탄식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웅묘아는 어떻게 심랑을 위로하면 좋을지 몰라 그냥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그 밀실을 두 바퀴 느릿느릿 걸어서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화려하고 우아한 가구들과 부드러운 향기를 뿜어내는 침대가 들어왔다. 그는 참지 못하고 한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왕련화, 그 녀석. 그 망할녀석. 세상에 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악마일 뿐 아니라 색마이기까지 하군. 어디를 가든 이렇게 화려한 침대를 꾸며 놓는 것을 잊지 않다니."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으며 생각할수록 분통이 끓어올라 마침내 큰소리로 외쳤다. "먼저 이 침상을 부셔놓고 나서 봅시다. 분풀이를 좀 해야 될 것 같소." 그는 한달음에 침상 앞으로 달려들어 손을 뻗어 침대 언저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일진의 '끽끽' 하는 소리가 침상 밑에서 계속하여 들려왔다. 그는 침대를 들어 올리려던 것을 즉각 멈추고 두 귀를 곧추 세우고 정신을 집중했다. 심랑도 얼굴이 활짝 펴지며 기쁜 기색으로 다가왔다. 그도 온 정신을 집중하여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깝게, 그리고 점점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웅묘아가 나직히 물었다. "혹시 그 녀석이 오고 있는 것일까?" "틀림없이 그럴거요. 그랬으면 좋겠소." 갑자기 '끽'하는 소리가 들리며 침대가 움직이는 듯하였다. 심랑은 그 밀실이 자기들이 들어온 이후에 조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곧 웅묘아의 소매를 잡아 당겨 커다란 옷장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웅묘아가 의아하다는 기색을 띠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왜 숨는 거요? 그 녀석을 사로 잡아야 되지 않겠소?" "먼저 그 녀석의 비밀을 들은 다음에 손을 써도 늦지 않을 것이오." "그렇고 하지만......."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랑이 재빠르게 그의 입을 틀어 막아 버렸다. '끽'하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더 들리고 침대가 옆으로 밀어 젖혀지며 두 사람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 한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손 좀 놓아요. 숨 좀 돌리게요." 웅묘아의 부르쥔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바로 주칠칠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이 웃으며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당신과 같이 예쁜 여자는 모든 남자가 한 번쯤은 안아 보고 싶어하는 것 아니겠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놓아줄 수 있겠소?" 그 음탕한 웃음소리가 웅묘아의 귀에 들려오는 순간, 웅묘아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분노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왕련화, 그 악마 같은 녀석이 나타났던 것이다. 왕련화가 길게 숨을 불어쉬며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망할 녀석. 진짜 망할 녀석이군.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꼭 그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다니. 우리의 중요한 일을 망쳐 놓다니......." 주칠칠이 길게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흥, 나는 당신이 심랑만 겁내는 줄 알았더니 범분양 마저도 겁을 내고 있었군요. 범분양이 나타나자 마자 이렇게 빨리 도망을 치다니. 당신,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웅묘아와 심랑이 서로를 마주보고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의 표정에서 두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범분양이 만약 이곳을 찾아낼 수 있는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 친구랑 같이 이곳에 올 걸 그랬구나.......) 또 그들의 귀에 왕련화가 히히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범분양을 겁낸다고? 헤헤. 나는 다만 범분양 뒤에 심랑과 그 더럽고 욕심 많은 들고양이가 쫓아오는 줄 알고 약간 꺼려했을 뿐이오." "아, 이제보니 당신은 그들 두 사람을 두려워하는군요. 이제야 비로소 바른 말을 하는군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상 그들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건 아니오. 그들은 어쩌면 이미 내 부하들에게 가로 막혀서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를 걸? 우리는 지금 조용한 곳을 찾아서 우리 두 사람만의......." 주칠칠이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채고 다급하게 말했다. "아야, 당신 손이 여기......." "내 손은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소. 내 손은 마땅히 아가씨와 같이 있을 때 가야만 할 곳으로 정확히 갈 것이오." 주칠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먼저, 먼저 손을 치우세요. 제발!" "당신은 이미 나에게 시집오겠다고 대답하지 않았소?" "그렇지만, 그렇지만......." 주칠칠의 목소리가 돌연 더할 수 없이 달콤하고 교태스러우며 부드럽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당신이 먼저 내 혈도를 풀어줘야 하지 않겠어요?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내가...... 이렇게 당신 말을 잘 듣고 있는데, 그래도 내가 도망갈까 겁내는 거예요?" 왕련화가 말했다. "솔직히 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소." 주칠칠이 계속 부드럽게 말했다. "어떻든 나는 이미 당신 사람이 되지 않았어요? 절대로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아직까지는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소. 그렇지만 조금 지나면 당신은 완전한 내 사람이 될 것이오. 그때 당신이 나에게 시키는 일이든, 부탁하는 일이든 나는 당신말 그대로 해줄 수 있을거요." 주칠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응, 아야!" 심랑의 두 주먹도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웅묘아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두 손을 쳐들어 옷장문을 내리치는 순간, 옷장문은 산산조각이 나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왕련화의 놀람에 찬 비명소리와 더불어 얼굴이 사색이 되어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왕련화는 몸에 속옷만 입은 채였다.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진 왕련화는 재빨리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어 웅묘아를 향해 내던졌다. 웅묘아는 두 눈에 핏발이 선채 왕련화가 던지는 의자를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맞받았다. 의자는 웅묘아의 머리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러나 웅묘아는 곧장 왕련화쪽에게 덮쳐들며 소리쳤다. "왕련화! 죽어봐라!" 왕련화는 번개처럼 빠르게 사 장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 공격에도 웅묘아는 본 척 만 척 곧장 왕련화에게 덮쳐드는 것이었다. '퍽퍽', '팍팍' 하는 몇 번의 소리가 들리며 왕련화가 공격한 사 장은 모두 웅묘아의 어깨와 가슴에 정확히 맞았다. 그러나 웅묘아도 한 손으로 왕련화의 목을 부여 잡았다. 만약 평상시에 왕련화의 사 장을 받을 경우, 죽지 않으면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왕련화는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십 할의 기력 중 이할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왕련화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숨이 막혀 캑캑 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웅 형, 웅 형......." 웅묘아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살고 싶다는 거냐?" 웅묘아는 주먹을 번쩍 들어 왕련화를 향해 세차게 내리쳤다. 만약 그 주먹에 맞았다면 무쇠로 만들어졌다해도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무서운 기세였다. 그러나 갑자기 웅묘아의 옆에서 손이 하나 번쩍 나타나더니 가볍게 웅묘아의 내리치는 손을 옆으로 밀어 젖혔다. 그에 따라 웅묘아의 내리치던 기세는 유야무야 와해되어 버렸다. 비록 간발의 차이였지만 왕련화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웅묘아가 노한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심 형, 왜 나를 막는 거요?" 심랑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그를 살려 두시오. 나는 저 녀석에게 물어볼 게 많소. 지금 저 녀석이 우리 손에 떨어진 이상, 저 녀석이 하늘로 날아갈 것 같소, 땅 속으로 들어갈 것 같소? 잠시 참아 주시오." 웅묘아가 표독스럽게 왕련화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나는 이 녀석을 지금 당장 산산조각으로 갈갈이 찢어놓고 싶소." 그는 왕련화의 목을 움켜잡았던 손을 놓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뒤에는 머리가 완전히 풀어 헤쳐진 주칠칠이 서 있었다. 두 손은 이부자락을 꼭 감아쥐고 두 눈으로 그를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백치의 표정 그것이었다. 웅묘아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칠칠, 당신...... 당신......." 그는 말을 잇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다시 더이상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의 전신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며, 부르쥔 두 주먹의 손톱은 얼마나 힘껏 주먹을 부르쥐었던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심랑은 이미 왕련화의 혈도 일곱 곳을 제압한 다음 눈을 돌려 주칠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인 듯 아닌 듯한 이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비록 그것이 웃음이라 해도 그것은 상당히 씁쓸한 웃음이었으며 처참한 웃음이었다. 한참이 지나서 심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괜찮소?" "나는...... 나는......." 그녀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는.......'이라는 소리뿐이었다. 심랑이 또 한참 동안 꼼짝않고 서 있더니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소. 당신이 왜......?" 주칠칠이 갑자기 통곡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마치 예리한 칼날이 그녀의 살갗을 파고 드는 듯, 그녀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드는 듯 애처롭게 날카롭게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심랑 당신은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응당 알고 있어요." 심랑이 중얼거렸다. "내가 응당 알고 있어야 되는 거요?" 주칠칠은 손으로 침대를 내려치며 외쳤다. "당신은 알고 있어요. 당신은...... 당신은 알고 있어요." 웅묘아는 주칠칠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갑자기 대갈을 터뜨렸다. "칠칠, 방금까지는 울지 않더니 왜 지금 우는 거요?" "나는...... 당신, 당신......." 웅묘아는 비록 이를 깨물고 있었으나 그 목소리는 여전히 떨려 나오고 있었다. 웅묘아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보면 울음이 나온다는 거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가겠소. 우리가...... 우리가 가겠소. 칠칠, 당신과...... 당신과 저 녀석이...... 저 녀석이......." 주칠칠이 날카롭게 외쳤다. "웅묘아! 너무하는군요. 그런 말을......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하다니......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에요? 만약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나는 다만, 다만 시간을 끌려고 그랬던 거예요." 웅묘아는 마침내 길게 탄식을 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심랑이 천천히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사실 당신은 다른 방법도 있었소." 주칠칠이 말했다. "그래요, 다른 방법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나는 복수하고 싶었어요. 나는, 나는 다시 당신을 보고 싶었던 거예요." 심랑은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주칠칠이 얼른 그 말을 가로채고 날카롭게 외쳤다. "믿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심랑이 처연히 말했다. "믿소." 주칠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심랑, 당신은...... 당신은 저를 용서할 수 있다는 건가요?" 심랑이 단호히 말했다. "용서할 수 있소." 심랑의 용서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주칠칠은 통곡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주칠칠이 부르짖었다. "당신이 방금의 내 모습을 보고 매우 괴로웠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 저를 때려도 좋고 욕을 해도 좋아요. 그렇지만 제발 부탁이에요. 제발 나에게 그렇게 냉담한 표정만은 짓지 마세요." 심랑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냉담하게 대했소?" "내가, 내가......." 그녀의 심장은 갈갈이 찢어지는 듯했다.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심랑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면서 말했다. "옷을 입으시오." 혈도가 풀리는 순간, 주칠칠은 곧장 심랑에게 달려들어 심랑의 목을 끌어 안았다. 그녀의 몸에는 아주 얇은 속옷만 걸친 채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그러한 자기 자신을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심랑을 끌어 안고 비통하게 울기 시작했다. 심랑은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차갑게 내려다볼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그러고 서있던 심랑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손을 놓으시오." 주칠칠이 말했다. "심랑 너무 하는군요. 너무 하는군요. 정말 나를 용서할 수 없다는 건가요?" "내가 이미 용서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지만, 그렇지만 당신의 지금 태도는......."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거요? 내가 어떻게 해주면 당신이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거요? 사실 당신은 남에게 용서를 구할 만큼 큰 잘못을 한 것도 없지 않소? 당신은 잘못한 일이 없지 않소?" 주칠칠이 부르짖었다. "당신은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마음 속으로는...... 나를 책망하고 있잖아요.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구요. 하느님, 내가 죽었어야 하는건데. 그렇지만 심랑! 나는 죽어도 그냥 죽지는 않을 거예요. 반드시 당신이, 당신이 나를 죽이도록 만들고 말거예요." 심랑은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당신을 왜 책망한다는 거요? 그리고 당신이 왜 죽겠다는거요? 내가 당신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 아니오? 당신은 진작부터 내가 이렇게 당신을 대하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소?" 주칠칠이 부르짖었다. "몰라요, 저는 몰라요. 저는 다만, 심랑 당신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만 알아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심랑, 그렇죠? 그렇죠?" 심랑이 차갑게 말했다. "이 손을 놓으시오." 주칠칠은 심랑의 목을 껴안았던 손을 풀고 눈물을 닦은 다음, 이를 깨물며 말했다. "좋아요, 심랑. 당신이 뭐라고 얘기하든 나는 이미 당신의 짝이 될 자격이 없어진 거겠죠? 나는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심랑이 여전히 차갑게 말했다. "빨리 옷이나 입으시오." 주칠칠이 갑자기 번쩍 몸을 날려 벽에 걸려 있던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더니 심랑에게 집어 던졌다. 심랑은 어쩔 수 없이 날아오는 칼을 받아 들었다. 주칠칠이 날카롭게 외쳤다. "심랑!" 심랑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는 팔을 활짝 벌린 채 가슴을 불쑥 내밀고 심랑의 손에 들려있는 검의 날카로운 끝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심랑이 가볍게 손을 떠는 순간, 그 검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주칠칠도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쓰러진 채 비통하고 처참하게 울어댔다. 누구도 그녀의 그 처참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는 몸을 떨며 울어댔다. 심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웅 형, 범 형이 이미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소. 내가 그를 구하러 가야 되겠소. 웅 형께서는 여기서 지키고 계시오. 내 곧 돌아오리다." 그는 훌쩍 앞에 가로놓여 있는 침대를 뛰어 넘어 침대 밑에로 나 있는 지하통로로 빠져 들어갔다. 웅묘아가 급히 외쳤다. "심 형, 기다리시오. 나도, 나도 가겠소." 그러나 그가 몸을 돌려 지하통로를 바라보는 순간 이미 심랑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밀실의 벽에는 동으로 만든 등불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그 등불은 아주 밝게 타오르고 있었는데 펄렁거리는 불빛이 웅묘아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웅묘아는 생각하고 있었다. (심 형, 너무 냉정하군요? 당신이 왜 그렇게 냉정한지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소.)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통곡하는 주칠칠을 바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왕련화가 갑자기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심랑! 아! 심랑! 당신은 비록 나의 가장 큰 적이지만 나는 당신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구려.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렇게 냉정하게 대할 수 있다니...... 그 점은 확실히 나 왕련화가 당신보다 못 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될 것 같소." 웅묘아가 날카롭게 말했다. "닥쳐라!" 왕련화가 말했다. "웅묘아!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웅 형 당신도 주칠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소. 당신의 방금과 같은 격한 행동과 분통터뜨리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깨달은 거요. 다만 아쉽게도 당신과 나는......." 웅묘아가 대갈을 터뜨렸다. "닥쳐라! 한 마디만 더하면 네 녀석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말테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좋소. 그만 두지요. 나는 다른 사람의 비밀을 말해서는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소." 그는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얘기를 하면서도 몇 마디를 더 보태는 것이었다. 그런 점은 과연 왕련화가 일세의 효웅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왕련화를 제외하고 이러한 상황 하에서 누가 지금의 그처럼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인가? 이때 주칠칠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울음소리를 멈추고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이 침대쪽으로 걸어가 옷을 하나씩 들어서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은 듯 웅묘아도 왕련화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웅묘아는 고개를 숙이고, 감히 그녀를 마주 쳐다볼 수도 없었다. 아니, 웅묘아는 주칠칠의 그 가련한 모습을 마주 쳐다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칠칠이 도리어 웅묘아 앞에 다가오더니 천천히 그 앞에 큰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웅묘아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칠칠, 뭐...... 뭐하는 짓이오?" 주칠칠이 처연하게 말했다. "웅묘아, 당신은 저에게 너무 잘해 줬어요. 그렇지만 저는...... 저는...... 지금 제 심정은 천하의 모든 남자들 중 당신 한 사람만 알았었으면 싶어요. 그렇지만 아쉽게도, 아쉽게도 이 세상에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잖아요?" 웅묘아가 그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칠칠, 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가......." 주칠칠이 말했다.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 웅묘아 당신의 마음을 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저는 다만 제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에요." 웅묘아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웃음소리와 더불어 그는 손을 뻗어 주칠칠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큰소리로 얘기했다. "칠칠, 더이상 얘기할 필요 없소. 이것도 매우 좋소. 어떻든 나는 칠칠 당신의 친구가 아니오? 나 웅묘아가 평생에 당신과 같은 아름다운 여자를 친구로 맞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오. 내 평생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고 얘기할 수 있소." 주칠칠이 처연히 탄식하면서 말했다. "웅묘아 당신은 과연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이 세상에 웅묘아 당신과 같은 사내 대장부가 몇 사람이나 있을지 그게 의심스러워요. 저는 다만, 다만 웅묘아 당신이 제 오빠였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칠칠, 아예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나를 당신의 오빠로 생각하는 게 어떻겠소?" 주칠칠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웅묘아, 그 말...... 그 말 정말이세요? 저를, 저를 당신의 여동생으로 받아 주시겠어요?" "그것은 내가 꿈에도 바라는 바이오." "아, 웅묘아! 아니, 오빠! 너무, 너무 기뻐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쳐들어 웅묘아를 바라보던 그녀의 머리가 또 밑으로 수그려지며 웅묘아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웅묘아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나 입에서는 도리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 그는 손을 뻗어 주칠칠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주칠칠이 말했다. "오빠, 잊지 마세요. 저는 영원히 오빠의 동생이에요. 이 다음에 제가, 제가 혹시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오빠는 반드시 용서해 주셔야 되요." "그거야 당연한 얘기지, 그런 얘기는 그만 두어라." "오빠, 고마워요." 그순간, 주칠칠의 몸이 갑자기 웅묘아를 향해 부딪혀 나가더니 번개처럼 손을 들어 웅묘아의 가슴 앞에 있는 자궁(紫宮), 신봉(神封), 기문(期門), 보랑(普廊) 네 곳의 혈도를 짚는 것이 아닌가! 웅묘아는 꿈에도 주칠칠이 자기에게 손을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혈도를 제압당한 후에 바닥에 쓰러지고서도 도대체 주칠칠이 자기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왕련화도 깜짝 놀라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웅묘아가 말했다. "칠칠, 이게...... 이게 무슨 짓이냐?" 주칠칠이 말했다. "오빠, 저는 오빠의 동생이에요." 웅묘아가 노한 소리로 말했다. "동생이면 이렇게 오빠를 대해도 된다는 거냐?" "오빠, 제발 화내지 마세요." "화내지 말라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데도?" 주칠칠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빠께서 방금 대답하셨잖아요? 제가 어떠한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저를 용서하시겠다고." 웅묘아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하는데 내가 어떻게......."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제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였어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말해봐라." "제가 이렇게 한 것은 왕련화를 데리고 이 자리를 빠져 나가기 위해서였어요." 웅묘아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나서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왕련화 저 녀석을 데리고 가겠다고? 그러면, 칠칠 네가...... 네가 저 녀석을 구해주겠다는 거냐?" "저 녀석을 구해주겠다는 게 아니고 다만 데리고 가겠다는 거예요."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구해주려는 것이 아닌 이상 무엇 때문에 데리고 가겠다는 거지?" "그것은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녀는 갑자기 처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왜냐하면 그 까닭은 아직 오빠께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웅묘아가 노한 소리로 말했다. "칠칠 미쳤구나, 너 미쳤구나. 틀림없이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주칠칠이 소리쳤다.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저도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밖에 할 수가 없어요."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다니? 틀림없이 후회할 것이다." 주칠칠이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웅묘아가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를 잘못 봤구나. 내 자신을 탓할 수밖에...... 심랑, 아니 심 형에게 미안할 뿐이다." 주칠칠이 단호히 말했다. "언젠가는 오빠가 저를 잘못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이때 왕련화의 얼굴에는 이미 기쁜 기색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왕련화가 그들 대화에 끼어들면서 말했다. "어떻든 내가 주칠칠 당신을 잘못 본 것은 아닌 것 같소. 당신은 그래도 내 생각을 많이 해주는 편이니 말이오!" 그러나 왕련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칠칠이 왕련화 앞으로 달려들더니 손을 들어 세차게 왕련화의 따귀를 십여 차례 내갈기는 것이 아닌가! 왕련화의 얼굴은 그에 따라 즉시 벌겋게 부어 올랐으며 당황한 표정으로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칠칠 이게...... 이게 무슨......." 주칠칠이 이를 깨물며 말했다. "왕련화 똑똑히 들어라. 그렇게 기분 좋아 할 필요는 없어. 네 녀석이 심랑의 손에 떨어진다면 기껏해야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겠지. 그렇지만 네 녀석이 내 손에 떨어진 이상, 네 녀석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고야 말겠어." 웅묘아가 대갈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라! 그 녀석이 네 손에 잡힌 적이 없었단 말이냐? 그렇지만 그 녀석은 네 손에서 아주 안전하게 도망을 칠 수 있었어. 내 생각에는 칠칠 네가 내 혈도를 풀고......." 그러나 주칠칠이 그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번 만큼은 지난 번과 달라요." "다르다고? 뭐가 다르다는 거냐?" "오빠, 저는 제가......." 웅묘아가 대갈을 터뜨렸다. "닥쳐라! 다시는 나더러 오빠라고 부르지도 마라. 더이상 오빠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도 않다." 주칠칠이 처연히 웃으면서 말했다. "오빠, 제가 오빠에게 면목이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밖에 할 수가 없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왕련화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웅묘아는 밖으로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볼 뿐이었다. 그는 심장이 가슴에서 터져 나올 듯하였다. 이때 주칠칠이 갑자기 왕련화를 내려놓더니 다시 웅묘아 쪽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손을 뻗쳐 웅묘아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는 것이었다. 웅묘아가 대갈을 터뜨렸다. "비켜라! 손 치워!" 그러나 주칠칠은 웅묘아의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유유히 말하는 것이었다. "오빠, 웅묘아! 정말 미안해요. 제 일평생 가장 미안하게 느끼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저는 평생 오빠를 잊지 못할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려 한 방울 한 방울 웅묘아의 얼굴에 떨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주칠칠이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왕련화를 끌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문밖에서 그녀의 고통에 찬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주칠칠의 눈물은 웅묘아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려 곧장 목에까지 흘러갔다. 맑고 차가운 눈물 방울은 짭짤하고 달콤한 맛을 느끼게 했다. 웅묘아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아려오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주칠칠이 미친듯 달려서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림과 동시에 자신의 심장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는 큰소리로 외쳐댔다. "주칠칠! 돌아 오시오, 돌아와!" 그러나 주칠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갈 뿐이었다. 그녀가 왜 이러한 짓을 하는지, 왜 이렇게 해야만 되는지 웅묘아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으며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그는 다만 큰소리로 부르짖을 뿐이었다. "여자들, 여자란...... 여자란...... 이 세상의 여자들은 모두 십팔층 지옥에 떨어져 버려야 되!" 그는 지금 이순간 비로소 여자들이란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동물들인가를 알 것 같았다. 웅묘아가 중얼거렸다. "내가 바보야, 정말 바보야. 심 형이 돌아와서 이러한 내 모습을 보고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면목으로 다시 심 형을 만나지?" 그러나 그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자리에 가만히 드러누운 채 심랑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약 두세 잔의 차를 마실 시간이 흐를 동안, 웅묘아의 머리에는 별별 생각이 다 스쳐갔다. 홀연 심랑이 제발 다시 돌아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도 했고, 또 빨리 심랑이 돌아왔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한참을 어지러이 이생각 저생각을 하던 웅묘아는 마침내 일진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발자국 소리는 심랑이 쫓아 들어간 지하통로 쪽에서 들려 오는 것이 아니고, 밀실의 위쪽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발자국 소리는 심랑의 발자국 소리가 아님이 분명했다. 웅묘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누구냐?" 주칠칠의 반란 이때 세 명의 대한이 미친 듯이 웅묘아가 누워 있는 밀실쪽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동주전자를 들고 개방 대회에 참석했다가 중독된 무림호걸들을 구하러 갔던 세 명의 대한들이었다. 세 명의 대한이 다시 돌아와 집안에 있던 동료들이 죽은 모습을 보자 그들의 눈은 이미 벌겋게 핏발이 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웅묘아를 보자 세 사람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동시에 웅묘아에게 달려들었다. 웅묘아는 순간 얼굴색이 변했으나 갑자기 크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앞장서서 웅묘아에게 달려들던 대한이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개 같은 자식! 바로 네 녀석이 저지른 짓이지?"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그렇소. 세 분 정말 때맞춰 잘 왔소." 그 대한이 노갈을 터뜨렸다. "그렇게 죽기가 소원이란 말이냐?" 웅묘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정말 한시 바삐 죽는 게 소원이오." 세 명의 대한은 웅묘아의 이러한 반응에 도리어 멍청해진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 사람은 틀림없이 무슨 계략이 있다고 느낀 듯 자신들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씩 움찔 물러서는 것이었다. 웅묘아가 말했다. "세 분께서는 왜 빨리 손을 쓰지 않는 거요?" 앞장 선 대한이 말했다. "개 같은 자식, 그렇게 빨리 죽고 싶단 말이냐?" 웅묘아가 광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그렇소. 솔직히 말하면 이 어르신은 빨리 죽고 싶어 미칠 지경이오. 비록 당신들 같은 짐승 손에 죽는 것이 가치없는 일이긴 하지만 살아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다고 생각하고 있소." 다른 한 명의 대한이 끼어 들었다. "이 녀석은 미친 것 같소." 다른 한 사람의 대한이 말했다. "그래, 틀림없이 미친 것 같군."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망할 자식들, 왜 빨리 손을 쓰지 않는 거냐? 심랑이 돌아오게 된다면 그때는 손을 쓰려고 해도 너희들이 오히려 죽게 될 것이다." 세 명의 대한은 심랑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가볍게 몸을 부르르 떨며 서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심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앞장섰던 대한이 마침내 차갑게 말했다. "좋다. 네 녀석이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라면 이 어르신께서 네 소원을 풀어주마." 웅묘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소. 이 웅 어르신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맛봤지만, 죽는 재미 만큼은 아직 맛보지 못했소." 그 대한이 휙하는 소리와 더불어 옆에 차고 있던 검을 빼들고 곧장 웅묘아를 위에서 밑으로 내리쳤다. 검광이 번쩍하는 순간 처참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비명소리에 이어 또 두 번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울려나왔다. 비명소리가 가라앉았을 때 바닥에 쓰러진 것은 웅묘아를 내리치려던 세 명의 대한들이었으며 웅묘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누운 채였다. 심랑이 돌아왔던 것이다. 심랑의 옆에는 전신에 피범벅이 된 범분양이 서 있었다. 웅묘아는 탄식을 내뿜으며 눈을 감아버렸다. 그는 다만 손이 자신의 전신을 여기저기 가볍게 툭툭 두드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혈도가 풀리는 순간, 그는 이를 깨물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심랑이 아무 소리 하지않고 가벼운 미소를 띤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웅묘아가 발을 구르며 말했다. "좋소. 심 형, 물어 보시오." 그러나 심랑은 가볍게 웃을 뿐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도리어 만면에 경악의 기색을 띤 범분양이 질문을 던졌다. "웅 형, 도대체 어떻게......." 그러나 심랑이 얼른 범분양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웅 형, 먼저 술이나 한 모금 마시지요." 웅묘아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술 호로를 들어올려 벌컥벌컥 몇 모금을 삼켰다. 범분양이 또 참지 못하고 물었다. "웅 형 도대체 어떻게......." 그러나 다시 심랑이 그 말을 가로채고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어떻든 우리가 제때에 도착해서 다행이었소." 그 모습을 보고 웅묘아가 갑자기 크게 소리쳐댔다. "심 형, 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지 않는 거요? 왜, 왜 안 묻는 거요? 주칠칠과 왕련화가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내가 왜 그 모양으로 누워 있었는지를 왜 물어보지 않는 거요?" 심랑이 미소를 띤채 웅묘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웅 형, 당신이 무사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됐소. 다른 일이야 대수로울 게 있소?" 웅묘아가 날카롭게 따졌다. "그렇지만 나는......." 심랑이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웅 형, 당신은 이미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을 것이오. 그리고 기력이 매우 쇠잔해졌을 것이오. 지금 웅 형께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쉬시는 게 좋을 것이오. 웅 형이 당했던 일들은 모두, 모두 내 잘못이었소. 방금은 내 마음이 너무도 어수선해서 웅 형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웅 형 혼자 여기에 남겨두고 간 내가 잘못이었소. 웅 형께서는 너무 탓하지 마시기나 바라오." 웅묘아는 도리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이 지나서 웅묘아는 고개를 쳐들고 장탄식을 하더니 말했다. "내가 심 형 당신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도리어 심 형 당신이 내게 용서를 빌다니...... 주칠칠, 왕련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이러한 큰 일을 심 형 당신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도리어 먼저 내가 무사한지부터 걱정을 하다니! 나, 웅묘아가 심 형 당신과 같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는 것은 내 평생에 가장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소. 내가 더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나 웅묘아는 내 생명을 심형 당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을 것 같구려." 범분양이 밀실 안을 몇 바퀴 왔다갔다 하더니 여전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도대체 왕련화 그 녀석은 어디에......?" 심랑이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주칠칠이 한 짓일 거요." 범분양이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심 형의 말씀은 주칠칠이 왕련화를 구해갔다는 거요?"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그런 것 같소. 웅 형, 그렇지 않소?" 웅묘아가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여자란...... 여자들이란!" 웅묘아는 얼굴을 붉히면서 방금 일어났던 일을 낱낱이 두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범분양은 웅묘아의 말을 듣고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이 지나서 비로소 중얼거렸다. "여자란, 여자란...... 이 세상에 만약 여자가 없었다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웠을까?" 심랑이 신음하면서 말했다. "주칠칠이 또 왕련화를 데려갔으니, 또 어떤 일을 저지르려는 건지 도저히 짐작을 할 수가 없구려." 범분양이 말했다. "심 형, 당신도 도대체 주칠칠의 속마음을 모르겠다는 거요?"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세상에 누가 여자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남자가 있겠소?" 심랑은 천천히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세 명의 대한 중 한 사람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몸뚱아리를 걷어찼다. 몸뚱아리를 걷어차인 그 대한은 옆으로 몇 바퀴 구르더니 벌떡 일어나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한 발짝을 떼어놓는 순간, 웅묘아의 오른손이 번쩍하더니 그의 따귀를 세차게 후려쳤으며 그 대한은 또 원래 드러누웠던 자리로 뒷걸음질쳐 물러섰다. 심랑이 말했다. "꼼짝말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으시오."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꼼짝이라도 한다면 네 녀석을 당장 박살내고 말테다." 그 대한은 손을 들어 웅묘아에게 얻어맞아 부어오른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심랑이 말했다. "얌전하게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한다면, 네 녀석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네 녀석의 동료 두 사람도 살려주마. 네 녀석은 내가 네놈들을 죽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금 내가 너희들의 혈도만 짚지 않았겠지!" 그 대한은 눈을 들어 두리번거렸다. 대한의 얼굴에는 이미 두려움과 굴복하는 기색, 그리고 심랑의 말을 수긍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대한은 여전히 겉으로는 차갑게 내뱉았다. "네 놈이 무엇을 물어보든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다만, 다만......." 심랑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다만 어떻다는 거냐?" "다만 당신이 나에게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면 몰라도......."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또 무슨 짓을 하겠다는 거지? 네 녀석은......." 심랑이 미소를 머금은 채 웅묘아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웅 형, 그 친구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해주시오." 그 대한이 말했다. "고맙소." 대한은 천천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장검을 집어 들었다. 웅묘아는 대한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목숨을 걸고 자신들에게 덤비려는 의사인 줄 알고 그 대한에게 덮쳐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 대한은 검을 집어 들더니 '휙휙' 휘둘러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명의 동료를 죽여 버리는 게 아닌가? 대한의 이러한 행동은 웅묘아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웅묘아가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 그 대한은 손에 들었던 검을 팽개치고 한숨을 몰아쉰 다음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이 두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소? 내가 말을 했다가는 이 두 친구가 밀고를 할 것이고, 그러면 내 목숨은 없어진거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웅묘아가 이를 깨물면서 말했다. "나쁜 자식, 정말 응큼하군." 대한이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내 입에서 왕련화에 대한 비밀만 알아내면 되지, 내가 응큼하든 진실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오?" 범분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녀석, 정말 왕련화의 부하가 되기에 충분한 녀석이군!" 그 대한이 가슴을 치켜들며 말했다. "무엇을 물어 보려는지 빨리 물어 보시오." 심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방금......." 그 대한이 얼른 심랑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방금 내가 이미 그 개방 대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모두 구해냈소. 지금쯤 그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이 갈 곳으로 가버렸을 거요. 그리고 그들은 모두 왕련화에게 감격하여 왕련화가 죽으라고 해도 달갑게 죽을 마음일 거요." 심랑이 다시 물었다. "그 사람들 중에 혹시 김불환이 있었소?" "김불환? 김불환은 보지 못했소." 웅묘아와 심랑이 서로를 마주보고 깜짝 놀란 기색을 떠올렸다. 웅묘아가 탄식을 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녀석이 또 도망갔군." 심랑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더니 다시 물었다. "그러면 백비비란 아가씨는......?" 그 대한이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은 혹 바람에 쓰러질 듯 가냘퍼 보이는 아가씨를 말하는 거요?" "그렇소. 바로 그녀를 말하는 거요. 그녀가 지금 어디에 갇혀있소?" "그녀는 본래 이곳에 갇혀 있었소. 다른 사람하고 같이 말이오. 그녀와 같이 갇혀 있었던 사람은 듣건데 쾌락왕의 수하 중 무슨 사자(使者)라고 하는 것 같았소." 심랑의 얼굴색이 급히 변했다. 심랑이 다그쳐 물었다. "그 사자라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소?" "그 친구는 늙은 부인네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말하는 것은 남자 같았소. 그래서 우리 동료들이 그 녀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지어 도박까지 걸기도 했었소." 웅묘아가 재미있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자였소, 여자였소?" 대한은 바닥에 침을 '퇴'하고 뱉더니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남자라는 쪽에 돈을 건 친구들이 돈을 잃었소." 웅묘아가 말했다. "그렇다면 여자라는 얘기로군." "여자라는 쪽에 돈을 건 친구들도 돈을 잃었소." 웅묘아는 멍청한 표정으로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얘기요?" 그 대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었소. 바로 양성인(兩性人)이었소." 웅묘아가 대갈을 터뜨렸다. "닥쳐라! 허튼 소리." 그 대한이 다시 침을 '퇴'하고 바닥에 뱉더니 말했다. "그런 요사스런 녀석에 대해서는 나도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소."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쾌락왕도 참 이상한 사람이로군.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사람을 써서 천하의 미녀들을 끌어 모으려 하다니......." 심랑이 주위를 둘러보고 싱긋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이 여기에 갇혀 있었는데 왜 보이지 않는 거지?" "그 두 사람은 벌써 도망갔소." 심랑과 웅묘아가 동시에 소리쳤다. "도망갔다고?" "그렇소. 바로 그 요사스러운 녀석이 백비비라는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간 거요." 웅묘아가 한 손으로 그 대한의 목덜미의 옷깃을 부여잡고 노갈을 터뜨렸다. "허튼 소리! 그 녀석의 재주로 어떻게 왕련화의 손아귀에서 도망을 갈 수 있었단 말이냐? 흥, 그 말은 삼척동자도 믿지 못할 것이다." "손, 손 좀 놓으시오. 숨이 막혀 죽겠소. 거기에는, 거기에는 당연히 까닭이 있었지요." 웅묘아가 움켜잡은 손을 느슨하게 풀어주며 말했다. "무슨 까닭이냐? 빨리 말해봐라." 대한이 숨을 돌린 다음 말했다. "그것은 우리집 왕 공자께서 고의로 그들을 도망가게 해줬기 때문이오." 웅묘아의 얼굴에 이상하다는 기색이 떠오르며 얼른 반문했다. "고의로 도망가게 했다고? 왜 그랬지?" "왜 그랬는지를 우리 같은 밑에 것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소?" 웅묘아가 노갈을 터뜨렸다. "나는 네 녀석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네 녀석은......." 그러나 심랑이 얼른 웅묘아의 말을 가로채서 말했다. "웅 형, 그 친구를 놓아 주시오. 그 친구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소." 웅묘아는 이 녀석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왕련화가 애써서 그 녀석을 생포했다가 무엇 때문에 그들을 고의로 도망가도록 놔줬다는 거요? 왕련화가 미쳤다는 거요? 어떻게 이 녀석의 말을 믿을 수가 있지요?" 심랑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속에는 왕련화만 아는 다른 음모가 있겠지요. 어쩌면 왕련화가 고의로 쾌락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그를 놓아 주어서 뒤를 밟아 쾌락왕의 행적을 찾아내려는 그런 음모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겠소?" "그러면 심 형이라면 어떻게 하겠소?"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왕련화 같은 인간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겠소? 다만 백비비가 다시 쾌락왕 손에 떨어졌다니...... 이제 더욱 비참한 경우를 당하겠군." 웅묘아가 한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두 눈을 뜬채 그녀를 구해내지도 못하고 쾌락왕 손에서 희롱당하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한다는 거요?" 심랑이 고개를 쳐들고 한참 생각에 잠겨있더니 천천히 중얼거렸다. "일이 갈수록 꼬이는군. 갈수록 첩첩산중이니." 웅묘아가 물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나는 다른 생각, 다른 생각이 없소. 지금 나는 다만 상쾌하게 목욕이나 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하루 푹 쉬고 싶을 뿐이오. 아무 것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오. 충분히 쉬고 난 다음에 다시 모든 일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소." 범분양이 말했다. "심 형께서 휴식이 필요하시다면 저희 집으로 가시는 게 아마 제일 좋을 겁니다." "고맙소. 즉시 갑시다." 대한이 목청을 높여서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하지요?" 심랑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가고 싶은데로 가시오. 웅 형, 그 친구를 놓아 줍시다. 그 친구는 비록 좀 간악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한 말을 저버려서야 되겠소? 왕련화에게 이러한 부하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에게는 이로울테니까." 육상도주 범분양은 과연 중원의 대부호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한 진성(晋城) 한곳에만도 그는 세 곳에 점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 곳 모두 사업이 아주 잘 되는 편에 속했다. 범분양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이곳에 갖고 있는 세 곳의 점포 중에 가장 큰 것은 분기전장(汾記錢莊)이라는 금전 거래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심 형께서 쉬시기에 가장 편한 곳은 영양주루(迎陽酒樓)라는 객점일 겁니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다만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싶을 뿐이오." 범분양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분기포장(汾記布莊)이라는 옷감을 매매하는 점포입니다. 그렇지만 그곳은......." "그 점포에 침대가 있소?" "당연히 있지요." "침대만 있다면 아무데고 좋소." 웅묘아가 물었다. "그 곳에 술도 있소?" 범분양이 실소를 날리며 말했다. "당연히 있지요." 웅묘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술만 있으면 되었소." 세 사람이 길 모퉁이를 돌았을 때, 곧 분기포장이라는 금색 글씨의 간판이 태양빛에 번쩍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점포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들은 점포의 문이 꼭 닫힌 채임을 볼 수 있었다. 범분양이 가볍게 이마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갈수록 게을러지는군. 나쁜 인간들......." 그는 손을 들어 대문을 두드렸으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만 크게 울려나갈 뿐 안에서는 아무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범분양이 드디어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쁜 인간들, 전부 죽었단 말인가?" 몇 번 더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던 범분양이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 번쩍 발을 들어 힘차게 문을 내찼다. 그에 따라 문이 약간 깨어지며 틈새가 드러났다. 그러나 그 문은 매우 단단히 만들어진 듯 그의 그 세찬 발길질에도 부서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범분양과 웅묘아는 그 갈라진 문틈으로 점포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점포 안에는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심지어 계산대에서도 사람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옷감을 쌓아두는 선반은 텅텅 빈 채였다. 웅묘아가 실소하면서 물었다. "내가 보건데 이곳에는 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옷감들도 없는 것 같소. 범 형의 사업이 너무 잘되는 것 아니오? 그렇기 때문에 범형이 그렇게 큰 부호가 될 수 있었던 것 같구려." 웅묘아의 조롱하는 듯한 말에 범분양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틀림없이 무슨 변고가 생긴 것 같소.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때, 그 점포의 옆집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범분양을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머뭇거리며 다가와서 웃음을 띠고 말했다. "세 분께서는 혹시 누구를 찾고 계신지요?"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누구를 찾다니오? 이 양반이 바로 이 점포의 주인이오. 모르시겠소?" 그 사람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 이제보니 범 어르신이셨군요. 그렇지만 범 어르신께서는 사업이 너무 잘 되시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 정도나 이곳에 오셨지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얼른보고 알아 뵙겠습니까? 저는 바로 이 옆 상점의 주인인 장조귀(張朝貴)라고 합니다." 범분양은 그 사람의 중얼중얼 하는 소리가 더이상 듣기 싫다는 듯 더 말을 하려는 그 사람의 말을 가로채서 물었다. "혹시, 우리 상점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고 계시오?" 그 장조귀라는 사람이 말했다.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제 한밤중에 갑자기 마차 몇 대가 와서 점포 안에 있는 모든 옷감들을 실어가 버렸어요. 아마 제가 생각컨데 점원들은 다시 물건을 구하려고 밖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랑, 웅묘아, 범분양은 이미 그 앞을 총총히 떠나가고 있었다. 범분양의 미간은 더욱 잔뜩 찌푸려졌으나 웅묘아는 도리어 곁에서 농담을 하고 있었다. "사업이 아주 잘 되는 모양이군요. 물건들이 하룻밤새에 전부 팔려 나가다니......? 범 형, 당신은 기뻐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소?" 범분양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일반적인 거래였다면 어떻게 한밤중에 그 거래가 이루어졌겠소? 내가 보건데 틀림없이 여기에는 무슨 까닭이 있는 것 같소." 심랑도 역시 두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어제 밤중이라...... 어제 밤중......." 세 사람이 다시 두 번이나 길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분기전장이라는 금전 거래소의 간판을 볼 수가 있었다. 범분양이 큰 걸음걸이로 앞서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평상시 사업이 그렇게 잘되는 분기전장 역시 문이 꼭 닫힌 채였다. 그 문 속에서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분기전장의 명성은 중원 각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누구든,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 분기전장에서 발행한 전표만 손에 들고 있다면, 천하 어디를 가든 모두 통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기전장이 발행한 전표는 언제라도,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주,야를 가리지 않고 전표만 갖고 가면 곧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그처럼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열려 있어야 하는 분기전장의 대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사태가 상당히 엄중함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웅묘아의 얼굴에 나타났던 농섞인 웃음도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범분양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한달음에 문앞으로 뛰어가 큰소리로 소리쳤다. "수성(守城), 빨리 문을 여시오." 마침내 분기전장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검소한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고 있는 중년이었다. 그 중년은 범분양을 보자마자 얼굴에 기쁜 기색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바로 범분양의 오른팔격인 그의 당형(堂兄), 범수성(范守城)이었던 것이다. 범분양은 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벼락처럼 뛰쳐 들어가 대갈을 터뜨렸다. "수성,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이 문은 닫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어버렸소? 분기전장의 명성을 당신 손에서 망쳐놓고 싶은 거요?" 범수성은 손을 밑으로 내린 채,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점은 나도 알고 있소. 다만......." 범분양이 다시 노발대발 했다. "은자가 부족했다면 우리가 전장의 명예을 걸고 다른데서 빌려올 수도 있었지 않소? 하물며 우리 점포에서 발행한 수표는 이 점포에 있는 사만 냥 은자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범수성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나도 알고 있소. 그렇지만...... 어젯저녁 점포 안에 보관되어 있던 사만 냥 은자를 전부 가져가 버렸을 뿐 아니라 이 성 안에서 빌릴 수 있는 돈은 전부 빌렸소. 그 돈마저도 모두 가져가 버린 거요." 범분양은 얼굴색이 변하면서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우리 점포에 그렇게 큰 고객이 있었다는 거요? 누군가 일부러 우리 사업을 망쳐 놓으려고 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소? 우리가 발행한 수표를 모두 모아와서 현금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소?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나는 생각이 나지 않는구려." 범수성이 말했다. "외부인이 우리 점포를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오." 범분양이 물었다. "외부인이 그러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다는 거요?" 범수성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점포에 와서 은자를 가져간 것은 일곱째 아가씨요." 순간, 범분양의 얼굴에 경악의 기색이 떠오르며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서 그 자리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또, 또 그녀야. 또, 또 칠칠이야." 범수성이 말했다. "일곱째 아가씨가 와서 은자를 요구하는데 내가 어떻게 안 줄수 있었겠소. 아가씨는 은자만 가져갔을 뿐 아니라 분기포장에 있던 옷감들 마저도 전부 가져가버렸소. 내가 그 까닭을 물었지만, 그녀는 눈을 치뜨고 나를 노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범분양이 고개를 푹 떨어뜨리면서 말했다. "일곱째 처제가 나를 죽이는군." 웅묘아와 심랑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얼굴색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랑이 범수성에게 물었다. "일곱째 아가씨가 직접 와서 돈을 달라고 했소?" "만약 그녀가 직접 오지 않았다면 나도 그렇게 돈을 쉽게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오." 웅묘아가 말했다. "그녀 혼자 온 거요?" 범수성이 웅묘아의 모습을 보고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음, 한 사람이오." 웅묘아가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녀 혼자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들고 갈 수 있었다는 거요?" 범수성이 냉랭하게 말했다. "은자가 있는 이상, 마차를 고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소?" 범분양은 쉴새없이 탄식을 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일곱째 처제가 말썽꾸러기라는 사실을 깜빡 했었군. 지금 처제 손에 그렇게 많은 은자가 있고, 거기에 또 왕련화도 곁에 있으니...... 아아, 또 어떤 큰 일을 저지를지......?" 범수성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우리 점포에서 은자를 가져간 것은 그렇다 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옷감까지 가져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소.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그녀가 하루에 팔구십 번 옷을 갈아입는다 해도 그렇게 많은 옷감이 필요하지는 않을 텐데......." 웅묘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왕련화의 행동도 사람들로 하여금 짐작하지 못하게 하는 바가 있지만, 주칠칠의 행동은 더욱 한 수 더 뜨는 것 같군. 나 웅묘아는 정말 그녀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군." 순간 범수성이 갑자기 크게 부르짖었다. "당신이 바로 웅묘아요?" 웅묘아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웅묘아요. 혹시, 혹시 나를......?" 범수성이 한숨을 쉬고 재빨리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그런 건 아니오. 다만, 다만 일곱째 아가씨가 편지 한 통을 남기면서 나에게 웅묘아, 웅 대협에게 전해달라고 했소. 나는 귀하가 웅 대협인 줄 모르고......."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내 차림이 어떻게 대협이라는 칭호를 들을 수 있겠소?" 범수성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더니 웅묘아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일곱째 아가씨가 재삼 당부하기를, 이 편지는 반드시 웅 대협에게 전해줘야 한다고 얘기했소. 그리고 웅 대협 혼자만 보도록 전해달라고 했소. 그렇지 않다면 아가씨가, 아가씨가 나에게 본떼를 보여 주겠다고 했소." 웅묘아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 아가씨가 매우 겁이 나는 것 같은데?" 범수성의 얼굴이 금방 붉게 달아오르며 입 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웅묘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얼굴을 붉힐 필요까지 없소. 솔직히 말하건데 당신만이 아니라 나도 그녀가 상당히 무섭소.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사람 중 그녀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말을 마친 그는 편지 겉봉을 훑어 보더니 편지를 찢어서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웅묘아의 안색이 갑자기 변해갔으며 웃음이 얼굴에서 사라져 버렸다. 범분양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도대체 뭐라고 쓰여 있소?" 웅묘아는 심랑을 힐끗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랑이 웃으면서 물었다. "혹시 편지에 나를 비방하는 내용이 쓰여 있는 게 아니오? 그래서 웅 형께서는 내가 그 편지 내용을 아는 게 미안한 게 아니오?" 웅묘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허허...... 그것은......."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웅 형, 당신은 매우 정직한 사람이오. 주칠칠 그녀는 웅 형이 편지를 나에게 보여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소. 그래서 편지에 나를 난처하게 하는 글들을 써 넣었겠죠. 그녀가 궁극적으로 노렸던 것은 내가 그 편지를 보고 속이 상하는 거였소." 웅묘아가 가볍게 한숨을 불어내며 말했다. "편지에는 심 형 당신을 저주하는 내용만이 아니라 또 하나 상당히 놀라운 소식이 있소."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오빠, 저는 왕련화의 입에서 쾌락왕이 이미 관내(關內)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지금쯤 태행산(太行山) 좌측 부근에 있는 듯해요. 그리고 오빠께서는 제발 제가 하는 말을 명심해 주세요. 심랑이라는 인간은 상당히 이기적이고 무정한 거짓 군자예요. 오빠께서는 제발 그런 인간과 가까이 사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배반을 당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쾌락왕에 관한 소식도 제발 그 인간에게 얘기해 주지 마세요. 그 인간이 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 제가 속이 다 후련할 거예요. 동생 칠칠 드림." 범분양이 그 편지를 훑어보고 나서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만약 처제의 글씨체를 몰랐다면 이 글은 되먹지 못한 남자가 쓴 글이라고 오해하기 쉽상이겠군. 도대체 이게 어떻게 아직 시집도 안간 규수가 쓴 글이라고 할 수 있겠소?"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글이 조리있고, 매우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소 ? 마치 직접 마주 앉아서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갑자기 주칠칠이 지금까지 저질렀던 골치아픈 사건들에 생각이 미치자 웃음을 싹 거두고 크게 소리질렀다. "맞소. 주칠칠 그녀는 여자다운 데라고는 한 구석도 없소. 차라리 강도 비슷하다고 하는 게 더 옳바른 표현일 거요." 심랑의 안색은 신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글이 조리가 있든 없든, 남자가 쓴 글인 듯 하든 여자가 쓴 글인 듯 하든, 그녀가 전하는 소식은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소. 쾌락왕이 이미 관내에 들어왔다니...... 우리는 앞으로의 행동에 상당히 조심해야 할 것 같소." 웅묘아가 탁자를 내리치면서 말했다. "관내에 들어왔다면 더 잘된 것 아니오? 우리는 원래 그를 찾아나설 생각이 아니었소? 지금 그가 직접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고 있으니 우리가 헛된 발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됐으니 더 좋은 것 아니오?"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 같소." 응묘아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뭐가 간단하지 않다는 거요?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안 이상......." 심랑이 그의 말을 가로채서 말했다. "비록 우리가 현재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만 왕련화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고 있소. 그리고 주칠칠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도 모르고 있고." 웅묘아가 큰소리로 말했다. "왕련화, 주칠칠의 일은 잠깐 잊어버리면 될 것 아니오?"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두 사람의 일은 잠깐 한편에 접어둘 수 있지만, 웅 형과 나 두 사람만의 힘으로 어떻게 쾌락왕을 제압할 수 있겠소? 그리고 쾌락왕이 데리고 있는 부하들은 어느 하나 절정의 고수들이 아닌 사람이 없소. 그들을 경시해서는 큰 일이 날 것이오." 범분양이 즉각 그 말을 이어서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쾌락왕 수하에는 사대 사자의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쾌락왕을 언제나 수행하고 있는 삼십육기(三十六騎) 또한 무공이 뛰어나지 않은 자가 없다고 들었소." 웅묘아가 크게 부르짖었다. "알고보니 당신들은 그 인간을 겁내고 있군. 좋소, 좋아! 쾌락왕이 나타나기 전에는 모두 그를 찾아가겠다고 큰소리 치더니만, 진짜 나타나니까 이제 모두 두려워서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요?"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웅 형, 누가 도망간다고 그랬소?" "도망가지 않으려면 당장 태행산쪽으로 가도록 합시다." 심랑이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더니 천천히 말했다. "태행산쪽으로 가는 것은 상황을 보아하니 피할 수 없는 것 같소. 그렇지만 내가 먼저 웅 형께 한 가지 반드시 다짐을 받아야 될 일이 있소." 웅묘아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넘쳐 흐르더니 금방 그 말을 받았다. "내가 언제 심 형의 부탁을 져버린 적이 있던가요?" "좋소. 그렇다면 웅 형께서는 태행산에 도착한 후에 비록 쾌락왕의 행적을 발견한다 해도 내가 동의하기 전에는 결코 경거망동을 해서는 안 되오. 이 점, 약속할 수 있겠소?" 웅묘아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좋소. 한 마디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합시다." 범분양이 말했다. "심 형, 저도......." 심랑이 말했다. "제가 보기에 범 형께서는 그곳에 가지 않는 게 좋을 듯하오." 범분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비록 무공은 뛰어나지 않지만 그렇게 담이 작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는......." 심랑이 얼른 범분양의 말을 가로채서 말했다. "내가 어떻게 범 형을 담이 작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소? 다만, 내 생각에 쾌락왕이 이번에 예상밖으로 이렇게 빨리 관내로 들어온 것은 다른 까닭이 있다고 생각되오. 나와 웅 형은 태행산으로 가서 도대체 무슨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려 하는 것뿐이오. 쾌락왕 일당과의 생사를 건 대결은 그렇게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되오. 그렇기 때문에 범 형께서는 이곳에 남으셔셔 우리를 후원해 주시기 바라오. 그러면 제가 뒷걱정을 안 해도 되겠지요. 또 주칠칠과 왕련화의 행적이 오리무중이니 범 형께서는 그 점에 대해서도 이곳에 남으셔서 계속 수소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행방이 묘연한 이상 제가 어떻게 마음을 놓고 쾌락왕과 정면대결을 할 수 있겠습니까?" 범분양이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심 형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심 형의 말씀대로 따를 수밖에요." 웅묘아는 오른 주먹을 왼손바닥에 비비고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쾌락왕, 아! 쾌락왕! 나 웅묘아가 마침내 네 녀석을 볼 수 있게 생겼구나. 도대체 네 녀석이 삼두육비를 가진 인간인지, 얼마나 대단한 재주가 있는지 한 번 두고 보기로 하자. 나 웅묘아도 그렇게 호락호락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마." 악마의 소굴을 찾아가다 자고이래로 태행산은 영웅호걸이 출몰하는 지역이다. 그 웅장하고 험준한 산맥은 얼마나 많은 영웅호걸들을 배출하고 울렸는지 모른다. 웅묘아는 허리에 찬 술 호로병에 달콤한 산서(山西)의 분주(汾酒)를 가득 담고, 심랑과 더불어 태행산 산 기슭과 여러 봉우리들을 이틀 동안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쾌락왕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웅묘아의 술 호로의 술은 거의 바닥이 드러난 상태였다. 웅묘아는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사람의 그림자는 고사하고 귀신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데, 어디에 쾌락왕이 있다는 거요? 혹시 우리가 그 말썽꾸러기에게 속은 건 아닌지 모르겠소." 심랑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태행산맥은 산세가 험준하고 산맥이 연이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이 매우 넓소. 태행산 부근은 그 넓이가 몇천 리나 되오. 그리고 그 속에 은밀하게 숨을 수 있는 곳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세어볼 수도 없소. 우리는 겨우 이틀을 찾아 다녔을 뿐인데, 어떻게 이 태행산 지구를 전부 돌아다녔다고 할 수 있겠소?" "그렇지만 쾌락왕 일행은 틀림없이 그 수가 상당히 많을텐데, 어떻든 바위틈새 같은 곳에 숨어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이틀 동안이나 돌아다녔는데, 그들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 아니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들 일행의 숫자가 많은면 많을수록 행동은 자연히 더 조심스러워지게 마련이오. 우리도 인내심을 가지고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차라리 나 심랑과 웅 형이 태행산 부근의 산수 구경을 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돌아다녀 보면 어떻겠소?" 웅묘아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심 형과 태행산맥을 돌아본다는 것은 참 운치있는 일이오. 그렇지만......." 말을 마치지 않고 그는 허리에 찬 호로병을 두들기더니 다시 길게 숨을 불어쉬고 그 옆에 있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술이 없는 이상, 나는 한 걸음도 더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소." 그들이 발걸음을 멈춘 것은 태행산 수천, 수백 개의 봉우리들 중 하나의 꼭대기 부근에 있는 절벽 앞이었다. 찬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와 웅묘아의 열어젖힌 앞가슴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으며 심랑의 장삼 자락을 휘날리게 하고 있었다. 웅묘아는 바위에 걸터 앉은 채 장삼 자락을 흩날리며 안개가 가득한 절벽 저쪽 편을 바람을 맞받고 서서 바라보고 있는 심랑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웅묘아는 심랑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절세의 귀재이며, 동시에 옥을 깎아 만든 듯 반듯하고 빛나는 얼굴,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무공, 하늘을 찌르는 의기, 바람을 맞받고 서 있는 심랑의 모습에서 웅묘아는 심랑의 그러한 모습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이나 심랑을 멍하니 바라보던 웅묘아가 중얼거렸다. "심 형, 당신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쩌면 웅 형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오." 웅묘아가 말했다. "이 천하에 심 형의 내력을 아는 사람이 있소?" "어쩌면...... 그렇지만 한 사람도 없다고 얘기할 수도 없겠지요." 웅묘아가 길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만약 다른 사람의 내력이 이렇게 은밀하다면, 누가 그 사람하고 친구가 되기를 원하겠소? 그렇지만 심 형 당신은 그런 일반인들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뭐가 다르다는 거요?" "이상하게도 나는 심 형이 비록 심 형 자신의 출신 내력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 않지만, 출신 내력을 숨기는 데에는 그만한 고충이 있다고 생각되오. 그리고 아울러 이상하게도 심 형이 그것을 속이는데 대해서 기분이 나쁘다는 그런 감이 일어나지 않소. 이상하게도 심 형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심 형 자신을 믿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소."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웅 형, 고맙소." 웅묘아가 또 말했다. "또 심 형의 웃음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대체 가늠을 못하게 하는 이상한 매력을 갖고 있소. 비록 심 형은 매우 명랑하게 웃지만, 나는 이상하게 심 형의 웃음에서 심 형의 괴로움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소. 심 형은 왜 자신의 괴로움을 속시원하게 털어놓지 않는 거요?" 심랑은 가볍게 웃을 뿐, 더이상 웅묘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여전히 절벽 맞은 편을 바라보기만 했다. 웅묘아도 더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심랑의 모습만 바라보았다. 절벽에서 부는 바람은 더욱 세차게 그들쪽으로 휘몰아쳐 왔다. 갑자기 심랑이 가벼운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웅 형, 저것을 보시오. 저게 뭐요?" 심랑의 말을 듣고 웅묘아가 고개를 돌려 심랑이 손가락질 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웅묘아는 흐릿한 안개 사이로 그 절벽 밑에 조그마한 분지가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분지에는 역시 눈이 쌓여 있었으며 그 눈 위에는 어지러이 말 발자국과 마차 바퀴 자국이 나있는 듯하였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 다른 물건들도 있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웅묘아는 그 물건들이 어떤 물건들인지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심랑이 웅묘아를 돌아보고 말했다. "내려가서 살펴 봅시다." 말을 마치는 순간 그는 절벽에서 공중으로 뛰어 오르더니 옷깃을 날리며 신선처럼 천천히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웅묘아가 대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대단한 경공이오. 나도 한 번 해봅시다." 그는 이를 악물고 역시 앉았던 바위에서 벌떡 일어나 절벽 밑으로 뛰어 내렸다. 그러나 그가 절벽 밑으로 뛰어 내리는 순간, 마치 자신의 발목을 밑에서 잡아 당기는 듯 더이상 자신의 신형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는 중심을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밑에서 잡아 당기는 듯한 힘은 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순식간에 '펑'하고 절벽 밑 조그만 분지에 나동그라졌다. 심랑이 다가와 물었다. "다쳤소?" 웅묘아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 웅묘아는 무쇠로 만든 사람이 아니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내 궁둥이가 무엇에 찔린 것 같은데?" 그는 쓰러졌던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궁둥이로 고개를 돌려 살펴보았다. 그의 궁둥이에는 조그마한 못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그것을 빼내서 살펴보자 그것은 닭의 날개뼈인 것 같았다. 그 닭의 날개뼈는 얼음 구덩이에 굳어서 딱딱해 있었으며 웅묘아의 떨어지는 기세에 그대로 웅묘아의 궁둥이 살 속을 파고 들었던 것이다. 웅묘아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재수없군. 그런데 이곳에 어떻게 닭 뼈가 있는 거지?" 심랑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닭 뼈만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물건들도 더 있을지 모르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분지를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과연 그들이 보았듯이 그 분지에는 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차 바퀴자국도 나 있었고, 불을 피우다 남은 잿더미와 깨어진 그릇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웅묘아가 그릇 조각의 하나를 집어들고 살펴보며 말했다. "이것은 술잔 조각이오." 심랑이 말했다. "이 그릇을 보건데 이 술잔은 상당히 비싼 거요. 아무리 부자라 해도 이렇게 비싼 술잔을 이곳까지 들고와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소?" "그렇지만, 누군가가 이곳에서 이 술잔으로 술을 마시고 나서 여기에서 부셔버렸기 때문에 이 조각들이 여기에 남아 있는 것 아니겠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때 심랑이 갑자기 발밑에서 물건 하나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웅 형, 이것을 보시오." 웅묘아가 그 물건을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귀걸이임을 알 수 있었다. 그 귀걸이는 매우 세밀하게 가공이 되어 있었으며 거기에는 용 눈알만한 진주가 달려 있었다. 그 진주는 아주 부드러운 빛을 뿜어내는 귀한 것인 듯하였다.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귀걸이 하나만으로도 보통 집안 일 년 생활비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소."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바라본 다음 더욱 빨리 앞으로 달려 나갔다. 불과 몇 걸음 달려가지 않았을 때, 그들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 눈밭 위에 수십 개의 큰 국대접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구멍들은 깊이가 수 척에 달하는 듯하였으며, 구멍과 구멍 사이는 적어도 일 장 남짓이 될 듯하여 보였다. 웅묘아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심 형, 이것은 또 뭐요?" 심랑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보건데 틀림없이 그들이 야영할 때, 천막을 치기 위해서 박아놓은 지렛대 자국인 것 같소." 웅묘아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큰 구멍을 뚫을 수 있다니, 그 지렛대는 보통 민가의 기둥들보다도 훨씬 더 크겠군. 지렛대 하나의 크기게 이렇게 크다면 그 장막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을까?" 심랑이 신중한 소리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 몽고 왕후(王候)의 장막이라도 이처럼 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이곳에서 하룻밤 지내기 위해 이렇게 거대한 장막을 치다니......."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멀거니 쳐다 보았다. 비록 서로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 가슴 속에는 흐릿하게나마 한 사람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호방하고 기세가 대단한 사람, 그 사람은 쾌락왕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웅묘아가 중얼거렸다. "주칠칠이 과연 우리를 속인 건 아니었군. 쾌락왕 그 녀석이 드디어 이곳까지 나타났군." 심랑이 신중하게 말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 녀석은 삼십육기를 거느리고 왔을 뿐만 아니라 많은 처첩도 데리고 온 것 같소.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것으로 보아 어쩌면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들어온 것 같소." 웅묘아가 이를 깨물면서 말했다. "그 녀석이 다시 돌아가려 해도 어쩌면 돌아가지 못할 것이오." 심랑은 하늘 높이 걸려 있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있더니 중얼거렸다. "김무망도 같이 왔는지 모르겠소." 쾌락왕은 과연 쾌락왕이었다. 그렇게 호방하고 기세가 대단한데도 자기의 행적을 감쪽같이 지워 버리다니 말이다. 심랑과 웅묘아가 마차 자국과 말 발자국을 쫓아서 한참 달려나가 그 분지에서 빠져 나왔을 때, 갑자기 그 자국들이 기적처럼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마차 자국과 말 발자국이 나있는 곳을 쓸어서 그 흔적을 덮어 버린 자국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웅묘아가 중얼거렸다. "과연 여우 같은 녀석이로군. 그렇게 대단한 세력을 가지고 들어 왔으면서도 남에게 종적이 발각되는 것을 숨기다니. 그리고 이처럼 인적이 드문 곳에서도 남에게 발각될 것을 미리 염두에 두어 자신의 흔적을 없애 버리다니......."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쾌락왕과 같은 인물은 그 행동거지에 있어서 한 가지의 실수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오. 비록 그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종적을 찾아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처럼 자신의 행적을 교묘하게 숨겼을 것이오." 웅묘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귀신이라도 보았다는 거요?" "쾌락왕 같은 인물은 어디를 가든,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자기의 행적에 대해서,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감을 느끼게 만들고 싶어하는 거요.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리송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게 만드는 거지요." 웅묘아가 이를 부드득 갈면서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인간들은 의심병이 깊다고 얘기하는 거로군. 그런 인간들은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마저도 약간의 수단을 부리는 법이로군."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바로 그렇소!" 웅묘아가 고개를 숙이고 눈 위를 이리저리 거닐면서 살펴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그렇지만 눈을 쓸어서 그들의 흔적을 지운 모습도 발견할 수 없소. 이러한 상황 하에서 그들은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지도 않았을 텐데......." 심랑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사람은 자기가 밟았던 발자국을 밟고 돌아갈 수 있겠지만, 이처럼 많은 말과 마차가 있는데 다시 그 자국을 통해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그렇다면 그 많은 마차와 말들이 왜 갑자기 이곳에서 없어졌다는 거요?" "이러한 상황은 내가 한 번 겪은 적이 있소. 바로 그 고묘 밖에서요. 그때 사람들은 자기의 원래 발자국을 밟고 돌아갔소." 웅묘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산 위에서 발생한 일이오." "그렇소. 그래서 나도 그 점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거요." "글쎄 말이오. 그래서 이상한 거요. 그들이 땅 속으로 꺼진 것도 아닐 테고....... 말과 마차가 다시 자기의 발자국을 밟고 돌아갈 수도 없고 땅 속으로 꺼지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하늘로 솟아 올랐단 말이오?" 심랑은 예리하게 눈 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강렬한 햇빛이 눈을 비치자 그 햇빛은 마치 보석처럼 반짝반짝 그 빛을 반사했다. 웅묘아가 심랑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심 형, 내가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도 없는데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살피는 거요?" 심랑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한참 동안 더 살펴보더니 천천히 물었다. "어쩌면 그들이 어떻게 사라진 건지도 대충 알 수 있을 것도 같소." 웅묘아의 얼굴에 깜짝 놀랐다는 듯한 기색이 드러나며 말했다. "도대체 무엇을 발견했다는 거요?" "웅 형, 보시오. 이 눈 위에는 아무 이상한 것도 발견할 수 없소. 바로 그거요. 이 눈 위에서 아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그 자체가 의심스러운거요." 웅묘아가 눈썹을 찌푸리며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맙소사. 심 형, 그게 무슨 말이오?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보시오." "웅 형께서는 이 눈이 이상하다는, 혹은 특별하다는 점을 발견하지 못했소?" 웅묘아가 전후좌우로 훑어 보았으나 여전히 바닥에 쌓인 눈에서는 아무런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눈 위에는 조그마한 나뭇가지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다만 씁쓸하게 웃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이 눈위에 만약 특별한 점이 있다면, 어쩌면 내 눈이 잘못 되어서 발견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소." 심랑이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웅 형, 웅 형은 지금 여기에 있는 이 눈이 너무 깨끗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웅묘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듣고보니 너무 깨끗한 것 같기도 하오." "웅 형, 이미 눈이 그친 지 사나흘이 되었소.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있는 눈들도 이미 이곳에 내린 지 사나흘이 지났다고 할 수 있소. 비록 이곳이 깊은 산중이라고는 하지만 내린 지 사나흘이 지난 눈이 어떻게 이렇게 깨끗할 수가 있겠소?" 웅묘아가 말했다. "음, 확실히, 확실히 그렇소." "웅 형, 이제 알 수 있겠소?" 그러나 웅묘아는 여전히 씁쓸하게 웃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 도대체 심 형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얘긴지 이해가 안 되는구려. 도대체, 심 형, 나를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 좀 해 보시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 생각에는 이 눈들은 사람들이 이곳에 부려놓은 거요." 웅묘아가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이곳에 부려 놓았다니오?" "그렇소. 그들은 이곳에 남겨진 말 발자국과 마차 자국을 먼저 깨끗이 쓸어낸 다음 다시 다른 곳에서 눈을 날라다가 이곳에 부려놓은 거요." 웅묘아가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탁 치더니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나쁜 녀석, 이런 잔재주를 피우다니......." 겨울해는 짧았다. 순식간에 황혼 무렵이 되어 버렸다. 심랑과 웅묘아는 이미 서너 개의 산봉우리들을 이리저리 찾아 헤매고 다녔다. 웅묘아는 고양이 같이 둥글고 밝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조그마한 단서라도 찾아 보려고 애를 썼으나 단서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하늘에는 별이 뜨기 시작했으며 밤은 깊어갔다. 웅묘아가 길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또 하루가 지나 가는군. 아무 한 일도 없이, 또 하루가......." 심랑이 힘주어 말했다. "오늘은 아직 완전히 지나가지는 않았소." "그렇지만 날이 이미 저물지 않았소?"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날이 저물었다고 잘못된 점이라도 있소?" 웅묘아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환한 대낮에도 쾌락왕 그 녀석의 종적을 찾아낼 수 없었는데, 날이 어두웠으니 어떻게......." 심랑이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채서 웃으면서 말했다. "밝은 날에 찾지 못했으니 어쩌면 어두운 밤에는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오." 웅묘아는 눈을 부릅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 당신은 나 웅묘아를 정말 고양이로 생각하는 거요 ? 밤이 되야만, 캄캄한 곳에서만 비로소 눈이 더 밝아지는 고양이로 생각하는 거냐구요?" "쾌락왕이 아무리 잔재주를 많이 피운다고 하지만 날이 어두워지면 등불을 피우지 않겠소?" 웅묘아는 비로소 심랑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박수를 치며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군, 날이 어두워야 더 쉽게 찾을 수 있겠군. 그 녀석이 등불만 피워놓게 된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겠지. 그 녀석의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이렇게 어두운 밤, 깊은 산 속에서 자신이 피워놓은 등불빛을 감춘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은 다시 용기를 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바람은 점점 수그러 들었으며,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광대한 산 속에서는 마치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웅묘아는 자기 자신의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정적이 싫어 중얼거렸다. "우리가 혹시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닐까?" 다시 약 차 한 잔 마실만한 시간을 앞으로 걸어갔을 때, 갑자기 심랑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으면서 말했다. "웅 형, 저걸 보시오. 저게 뭐요?" 웅묘아는 심랑이 손가락질 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등불빛!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등불빛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웅묘아는 더이상 심랑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등불빛을 향해 달려갔다. 심랑도 바짝 그의 뒤에 붙어서서 달려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웅 형, 쾌락왕 같은 녀석을 상대하는데 있어서는 결코 경거망동을 해서는 안 되오!" 어둠 속에서 보는 불빛은 멀리 있는 것인지 가까이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얼핏 봤을 때는 그 불빛이 매우 가까운 듯하였으나, 아무리 달려도 그 불빛은 여전히 그만한 거리에 있는 듯하였다. 그들이 산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 불빛은 비로소 그들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 불빛은 거대한 청석 위에 놓인 채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등불빛은 마치 귀신불처럼 펄럭펄럭 반짝이고 있었으며, 청석(靑石) 위에 남아있던 눈은 누가 쓸었는지 깨끗이 쓸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사방에는 귀신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쥐죽은 듯한 고요함 속에서 웅묘아의 심장은 터져나올 듯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애써 자신을 진정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그 등불빛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등불쪽으로 바짝 다가갔을 때, 그 등잔도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등잔은 황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웅묘아가 이를 깨물며 말했다. "망할 녀석, 등잔마저도 황금으로 만들다니. 그런데, 그 녀석이 이곳에 등불을 놓아 두다니 또 무슨 수작을 하려는 거지?" 심랑의 안색이 신중하게 가라앉았다. 심랑이 천천히 말했다. "생각컨데 등불빛은 우리에게 남겨준 거요." 웅묘아가 접근해 들어가던 발걸음을 우뚝 멈춰서며 고개를 돌려 심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에게 남겨준 거라니오? 그러면 이게 함정이란 말이오?" "만약 이렇게 보잘 것 없은 함정으로 우리를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사람은 쾌락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오." 웅묘아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쾌락왕과 같은 효웅은 결코 상대방을 그렇게 낮게 평가하는 법이 없소." 웅묘아가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옳은 말이오. 특히 상대방이 심랑인 상황에서야! 비록 그 녀석이 심 형 당신을 보지는 못했지만, 심 형의 이름은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오.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잔재주로 심 형을 제압하려 했다면 쾌락왕이야말로 진정한 바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웅묘아가 갑자기 또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심 형, 그 녀석이 어떻게 심 형과 내가 그 녀석을 찾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이상하지 않소?" 심랑이 신중한 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그 녀석은 매사에 신중한 녀석이라서 이미 산 기슭에 매복을 숨겨 놨었는지도 모르오. 그리고 어쩌면......." 웅묘아도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든 내가 먼저 가서 저 등불을 살펴보고 나서 다시 말합시다." 웅묘아는 심랑과 더불어 태행산 속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모든 말을 심랑의 말에 따라 행동했으나, 더이상 원래의 성격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심랑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화살처럼 등불쪽으로 날아갔다. 황금으로 만든 등잔 밑에는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간단히 몇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심랑, 나를 찾는 건가? 좋다. 이 길을 따라서 오도록 해라." 이렇게 간단히 몇 글자가 쓰어진 옆에는 아주 상세하게 그린 지도가 있었으며, 아울러 그 길들이 어디로 통하는지 또 어떻게 그 길들을 건너가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야영지 장소마저도 정확하게 표시해 놓고 있었다. 웅묘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대답하긴 대단한 녀석이로군. 우리가 찾지 못할까봐 이렇게 지도까지 그려서 보내 주다니......."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 녀석의 행동은 정말 추측하기를 어렵게 하는군." "그렇지만 이 지도도 가짜인지 모르지 않소?" 심랑이 한참 생각에 잠겨있더니 말했다. "가짜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소. 그 녀석이 고의로 이 지도를 남겨서 우리가 자신을 찾지 못하게 엉뚱한 곳으로 가도록 유도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녀석은 보기에 우리를 겁내는 것 같지는 않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되오."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소. 그렇기 때문에 이 지도는 사실일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오." 웅묘아가 신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이 지도가 만약 진짜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 지도에 그려진 길을 따라서 가게 된다면 그 녀석은 가만히 앉아서 각종의 함정을 만들어 놓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의 계획대로 포획 당하지 않겠소? 우리는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는 격이 되지 않겠소?" 심랑이 한숨을 불어내며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오." 웅묘아가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비록 그런 위험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 지도에 그려진대로 쫓아가지 않을 수도 없지 않소? 이 지도에 그려진 길로 가지 않는다면 또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한다는 거요?" 심랑이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그 점이 바로 쾌락왕 그 녀석이 대단하다는 점이오. 그 녀석은 벌써 우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요. 이 점만 보더라도 우리가 그 녀석에게 기선을 제압당하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소." "정말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는군. 이 지도 그림대로 따라 갈 수도 없고,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고...... 나는 이 지도를 발견했을 때 일이 매우 쉬워졌다고 생각했소. 그렇지만 갈수록 더 복잡해질 줄이야......." 심랑이 말했다. "세상의 일은 그런 일들이 적지 않은 것 같소. 생각할수록 더 복잡해지고 걱정이 많아지는 일들이, 그래서 결국 그 일을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은 법이오. 그리고 어떤 일은 원래 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도 도리어 자신도 모르게 그 일에 성공하게 되는 일도 적지않소. 우리가 알고있는 이 세상의 많은 위대한 인물들의 위대한 일들은 어떤 것은 그 인물들이 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결국 자신도 모르게 해치운 일들이 많소." 웅묘아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계속 고개를 주억거리고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말이오, 아주 좋은 말들이오. 심 형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정말 뜻밖이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가 중요한 문제요. 심 형이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소?"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간단히 생각하도록 합시다." 웅묘아는 얼굴에 기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심 형 생각이 그렇다면 더이상 생각하지 말고, 이 지도에 그려진대로 그 길을 따라서 가도록 합시다. 나는 원래 심 형에게 무슨 일을 만났을 때는 먼저 깊이 생각해본 연후에 행동하는 것을 배웠었는데, 지금 또 심 형에게서 생각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는 생각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사실을 배웠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웅 형, 하나는 기억해 두시오. 어떤 일을 만났을 때는 먼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오. 그래야만 비로소 어떤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법을 말이오." 웅묘아가 한참 생각에 잠겨있더니 마침내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맞소. 심 형 말이 맞소." 거짓 쾌락왕 심랑과 웅묘아는 지도(地圖)에서 가리키는 대로 말을 타고 한 시진(時辰) 동안을 더 달려갔다. 어두운 산들의 그림자 속에서 갑자기 밝게 빛나는 등불이 보였다. 불빛이 매우 밝은 것으로 보아 등불은 결코 하나가 아닌 듯 했다.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이 밝은 등불 속에 거대한 천막이 우뚝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웅묘아는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 지도에 따르면 이 곳은 아직 '쾌락왕'(快樂王)의 주둔지가 아닌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 저 천막이 있는 것을 보니...... 이게 대체 어찌된 노릇이지?" 심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심 형, 또 오래 생각하고 싶은가 보군요." "하하하! 바로 맞췄소. 어차피 오래 생각해 봤자 소용없을 테니 더 애쓸 필요가 없겠지?" "이 사람이 저지른 사건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예측할 수가 없게 만드니 이 사람의 무서움을 가히 상상할 수 있겠어......." 이때 갑자기 저쪽에서 한 점의 불빛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웅묘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쪽에서 사람이 오고 있소." "후훗, 이렇게 사람이 왔으니 우리도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둡시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될 수 있으면 머리를 쓰지 않는 것이 좋지요." 심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빛은 이미 그들과 이 장(二丈)도 채 안 되는 곳에 도착했다. 높이 쳐든 횃불 아래 금의(錦衣)를 입은 대한(大漢)이 서 있었다. 웅묘아가 큰소리로 물었다. "너는 쾌락왕의 문하냐?" "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네!" 심랑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쾌락왕의 명을 받고 우리를 영접하러 온 것인가?" "네!" 대한은 대답을 하고 돌아서더니 큰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비록 빠르지는 않았지만 결코 느린 것도 아니어서 어느 정도의 무공 기초가 되어있는 듯 했다. 웅묘아는 목소리를 매우 낮게 깔고 말했다. "이 자의 무공이 어떨 것 같소?" "웅 형이 보기에는 어떻소?" 웅묘아가 장담했다. "삼 초 안에 그를 쓰러뜨릴 수 있소." "아마 삼 초도 필요없을 것 같소."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군. 쾌락왕의 부하 중에 어떻게 저런 멍청이가 있을 수 있지?" 심랑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제까지 웅 형과 내가 이해할 수 있던 점이 모두 몇 건이나 됐었소?" 웅묘아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언젠가는 꼭 모든 것을 밝혀내고 말 거야!"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 거대하고 화려한 천막이 벌써 눈앞에 나타났다. 천막 입구에는 주렁주렁 주렴이 늘어져 있었다. 이 주렴은 유리, 수정, 녹옥(綠玉), 산호, 마뇌, 진주와 기타 각종 이름조차 모를 보석들로 짜여져 있었다. 바로 이 보석 주렴이 불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고 다채로운 빛을 발하면서 사람들의 눈을 황홀하게 현혹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주렴 뒤에 존재하는 그 사람과 또 그 사람과 관계된 모든 전설들. 그것은 이 주렴보다 더욱 다채롭고, 더욱 아름다우니, 사람의 이목을 현혹하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이곳에 도착하자 웅묘아는 전신의 털구멍이 열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마치 작은 칼처럼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웅묘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웅묘아야! 웅묘아야! 쾌락왕도 어차피 사람이 아니더냐? 이렇게 떨어서야 네가 무슨 사내 대장부란 말이냐!) 웅묘아는 대한이 주렴을 들추기도 전에, 또 심랑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곧장 들어가서는 크게 소리를 쳤다. "쾌락왕! 나 웅묘아가 방문하러 이렇게 왔소!" 그의 목소리는 결코 작지는 않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천막 안에는 사람은 커녕 귀신조차 볼 수 없었으니까. 빛이다! 천막 안의 사면에 걸려 있던 보석으로 된 주렴들로부터 빛이 발했다. 호랑이 가죽으로 덮어 씌운 의자, 금빛 수(繡)를 단 방석, 수정으로 만든 탁자, 산호로 만든 주렴, 페르시아 담요...... 등등, 천막 안에 놓여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술이라면 사양하지 않는 웅묘아가 가장 만족해하면서 말했다. "수정 탁자 위에는 각종 진귀한 과일들로 꽉 차있고 금으로 된 잔 속에는 미주(美酒)가 가득차 있으니 누구라도 이곳에 오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황홀해 할 것이야."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갔지? 갑자기 그가 사라졌나?" 웅묘아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 대한의 멱살을 잡고는 무섭게 물었다. "쾌락왕은 이곳에 없느냐?" "네!" 웅묘아가 대갈했다. "왜 우리를 영접하러 나오지 않았지?" "네!" "그는 대체 어디 있느냐?" "네!" 웅묘아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네! 네! 네! 네 놈은 '네'라는 말밖에 모르느냐?" "네!" 웅묘아는 분통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네 놈이 또 다시 '네'라고 대답한다면 네 놈의 목을 비틀어 버릴테다." "네!" 웅묘아는 이제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는 대한을 들어올려 밖으로 내던지면서 말했다. "네 놈의 머리는 정말 돼지냐?" 금의 대한은 멀리 내던져지면서도 여전히 '네!'하고 대답했다. 한참 동안 '와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주렴 사이를 지나 '펑'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그래도 그의 입에서는 변함없이 '네'라는 대답이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가! 웅묘아는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지만 한편으로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이런 자는 정말 목을 매달아 죽여야 해!" 심랑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를 매달아 죽여도 그는 그저 '네'라고만 대답할 거요." "쾌락왕은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하려고 기껏 '네' 밖에 말할 줄 모르는 놈에게 우리를 영접하게 했나? 대체 무슨 속셈일까?" "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서 이 곳은 분명 쾌락왕이 손님을 대접하는 곳이요." "손님을 대접하는 곳이라구요? 설마 그가 우리를 손님으로 대접한다는 건 아니겠지요?" "하하하! 그는 아마 우리를 이곳에서 하룻밤 푹 쉬게하여 충만한 체력으로 그를 만나게 하려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웅묘아가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그가 그런 인심을 쓸 리가 없소." 심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어떻게 인심이라 하겠소? 단지 그는 우리에게 과시하고 있는 거요. 즉, 그는 우리 정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말이지. 우리의 체력이 아무리 충만해 있어도 그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웅묘아가 한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놈 쾌락왕, 나 웅묘아가 언젠가는 네 놈이 후회하게 해줄 테다." 그는 눈을 돌려 탁자 위에 놓인 좋은 술과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우리 아예 왕창 먹어 치웁시다. 그의 신분으로 설마 술에다 독을 타지는 않았겠지요?" "그가 만약 다시 웅 형이 생각지도, 예측하지도 못한 일을 저지른다면 웅 형은 어떻게 하겠나?" "하하하......, 그 점은 심 형이 안심해도 좋소. 나 웅묘아는 비록 다른 재주는 없지만 술 속에 독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는 금방 알 수가 있지...... 다년간 강호를 누비면서 배운 재주라고는 바로 이것 밖에 없소."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웅 형이 여태 독살당하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군요!" 요리는 가득했지만 두 사람은 순식간에 깨끗히 먹어 치웠다. 웅묘아는 입을 닦고는 곧 쓰러져 쿨쿨 잠이 들었다. 심랑 역시 많이 먹고 많이 마셨지만 이 시간에, 그것도 이곳에서 마음놓고 잠을 청하기란 정말 힘이 들었다. 웅묘아가 달콤하게 잠을 자는 것을 보면서 심랑은 한편으로는 부럽고도 우스웠고 또 한편으로는 그가 매우 귀여웠다. 잠들은 웅묘아의 모습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어린애와 같았다. 심랑은 잠든 웅묘아의 모습에 넋이 나갔는지, 아니면 무슨 생각에 골몰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는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주렴 밖에서 누군가가 가볍게 불렀다. "심 공자!" 부르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심랑은 이미 주렴 밖에 서 있었다. 금의 대한(錦衣大漢)은 그가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지라 질겁을하며 세 걸음을 물러서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심랑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나를 불렀나?" "네! 네!" "왜지?" 금의 대한은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입술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희 대왕께서는...... 심 공자와 단독으로 만나 뵙기를 원하십니다." "하하! 이제 보니 '네'라는 말 외에 다른 말도 할 줄 아는군." 금의 대한은 고개를 더욱 낮게 숙였다. "심...... 심 공자께서는 승락하시는 겁니까?" "내가 어찌 승락하지 않겠는가?" 금의 대한이 기뻐하며 말했다. "심 공자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실 소인은 매우 걱정했습니다. 심 공자와 아까 그 웅......." "하하하! 내가 만약 그와 함께 간다 하더라도 자네 대왕께서 날 만나지 않는다면 역시 소용이 없잖는가?" "과연 심 공자다운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곧 자신이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했던지 급히 말을 멈추면서 고개를 숙였다. "심공자께서는 소인을 따라 오십시오." 심랑은 쾌락왕의 안배를 매우 신임하는 듯, 웅묘아가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도 결코 큰 문제가 안 된다고 확신을 한 듯 금의 대한을 따라갔다. 얼마를 가자 앞에서 두 명의 사내가 작은 가마를 들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의 대한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웃으면서 말했다. "심 공자께서는 가마에 오르시죠!" 심랑이 주저하지 않고 가마에 올라타자 곧 두 사내는 나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약 밥 한끼 먹을 시간을 달렸을까, 갑자기 음악 소리가 길게 울려퍼지며 들려왔다. 가마에는 주렴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러나 심랑은 가마 속에 앉아서 단 한번도 주렴을 들치고 밖에다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음악 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들려왔다. 갑자기 가마가 멈추자 가마 밖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 공자의 행차신가?"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가마는 우리가 들고 갈 테다. 너희들은 이제 일이 없으니 물러가라!" 이어서 가마가 다시 들려지고 스무 걸음 쯤을 더 갔다. 갑자기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한 줄기 향기로운 내음이 주렴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심랑은 여전히 꿈쩍도 않고 앉아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그를 밖으로 청하지 않는 한 영원히 가마 안에 있으려는 듯했다. 가마 밖에서 그 소녀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물었다. "심 공자, 잠드셨나요?" 현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리면서 한 소녀가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저리로 가세, 저리로 가세, 가서 꽃을 찾으세. 저리로 가세, 이리로 가세, 그리고 금빛 술잔으로 술을 마시세." 이것은 바로 '왕자의 노래(王者之歌)'였다. 심랑은 드디어 가마에서 내려왔다. 이곳은 매우 화려하고 넓은 천막이었다. 이 안의 모든 시설들은 너무나 화려해서 도저히 인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심랑에게 이곳의 시설들이 대체 어떠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그는 아마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눈앞에는 온통 절색의 소녀들로 가득찼으니 다른 것들을 살필 겨를이 어디 있었겠는가? 암담하면서도 혼을 삭히는 듯한 등불 아래 날씬한 몸매를 경사(輕紗)로 둘러싼 이삼십 명의 소녀들이 그들의 긴 머리채를 흩날리면서 하얀 맨발로 있었다. 몽롱한 경사로는 결코 이 미소녀들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들의 아름다운 몸매를 더욱 신비롭게 돋보이도록 하여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호피로 된 요 위에 비스듬히 기대고 가볍게 옥수를 들어 관현악기를 다루거나 아니면 손으로 아름다운 뺨을 받쳐 들고는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또 노래를 부르면서 몸을 날려 춤을 추니 경사가 휘날렸다. 춘광에 반사된 소녀들의 백옥 같은 피부는 보는 이로 하여금 단번에 혼백을 빼앗아버려 자제할 수 없게 하였다. 다른 오륙 명의 소녀들은 작은 탁자 주위에 둘러 앉아 금잔에 미주(美酒)를 약간씩 따라서 마시고 있었다. 탁자 뒤의 한 소녀는 눈빛이 약간 풀어진데다 가슴도 반 이상이 노출된 것이 이마 위에는 이미 봄바람이 가득찼다. 바로 그녀의 무릎 위에 한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심랑은 단지 그 사람이 머리에 쓴 왕관만 보았을 뿐 그의 진면목은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심랑은 꿈쩍도 않고 서서 단지 얼굴에 미소만 띠었웠다. 모든 소녀들은 그의 훤칠한 모습에 넋이 나간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를 돌아 봤다. 수없이 많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그를 향해 추파를 던졌다. 심랑은 전혀 개의치 않고 누가 그를 보면 그도 상대방을 바라봤다. 갑자기 가늘고 부드러운 다리가 그의 면전에 뻗쳐왔으나 그는 눈썹도 찡그리지 않았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이때, 낮은 탁자 뒤에서 갑자기 낭랑하게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취하면 미인의 무릎에 눕고 깨어나면 무적의 검을 드니 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느냐! 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느냐!" 심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통쾌하고 통쾌하니 과연 쾌락이구나!" 낮은 탁자 뒤의 그 사람이 크게 웃었다. "좋아, 좋아! 자네가 심랑인가?" "그렇소."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물론이오." 낮은 탁자 위로 그 사람이 손을 내밀자 탁자 뒤의 요염한 미희가 즉시 금잔을 올렸다. 그 손은 하얀 것이 마치 여자의 손과 같이 길었다. 중지에는 기이(奇異)한 모양의 자금(紫金)으로 된 세 개의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등불 밑에서 반짝이면서 빛을 발했다. 손에 금잔을 쥔 그 사람은 낭랑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기왕 자네와 내가 이렇게 만났으니 함께 한 잔 하세!" "좋소이다." 심랑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춤을 추던 미희가 뱀 같은 허리를 틀면서 그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에게 두 손으로 금잔을 올렸다. 그리고는 봄바람 같은 미소를 보내며 낮게 신음하듯 말했다. "심 공자, 드세요!" 심랑은 금잔을 받자 마자 단숨에 들이켰다. 낮은 탁자 뒤에 있는 사람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과연 심랑이야. 자네는 술에 독이 들어 있을지 겁나지 않는가?" "후후후! 이렇듯 대단한 영웅께서 반기시고 또 이렇듯 아름다운 여인이 주는 술인데 독이 들어있다 해도 나 심랑은 거절할 수가 없군요." 그 무희는 은근히 그의 품에 안기더니 추파를 던지며 목소리를 부드럽고 길게 뽑았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금잔을 받아 들자 가볍게 웃더니 허리를 틀어 춤추며 가버렸다. 술보다 더욱 취하게 하는 한 가닥 향기만 심랑의 품 속에 남겨놓은채....... 낮은 탁자 뒤의 그 사람이 다시 웃었다. "좋았어. 사람들은 심랑이 평소 소심할 정도로 너무 조심성이 많다고들 하던데 이처럼 호기로울 줄은 미처 몰랐네. 과연 본왕(本王)의 무희들조차도 한눈에 반할만 하군." "과찬의 말씀이시오." 낮은 탁자 뒤의 그 사람은 낭랑하게 웃더니 갑자기 일어나 앉았다. 흐릿한 등불 밑에서 보이는 것은 단지 거꾸로 처진 짙은 눈썹과 불타는 눈빛, 양미간 사이의 한 가닥 칼자국으로 그것은 그 사람의 살기를 더욱 북돋았다. 그의 여자 같이 아름다운 손은 옷깃 밑까지 늘어진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나 그 반짝이는 두 눈은 심랑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그것은 한쌍의 새파란 눈이었다. 심랑도 그를 노려봤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심랑의 눈길은 그 사람의 짙은 눈썹, 칼자국, 아름다운 수염으로 더듬어 내려갔는데...... 그가 바로 쾌락왕이 아니라면 또 누구이겠는가? 쾌락왕은 웃음을 멈추더니 한 자 한 자 똑똑히 말을 내뱉었다. "심랑, 이번에는 자네가 틀렸어." "틀렸다고?" 쾌락왕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 금잔의 술에는 독이 들어 있었네." 심랑의 몸이 미미하게 떨리는 듯하더니 되물었다. "독이 들어 있었다구?" "독도 보통 독이 아닌 극독이지. 이 세상 천지에서 본왕 말고는 해독제를 구할 수가 없어. 한 시진 안으로 그대는 독이 퍼져 죽을 것이야." 심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래도 그대를 군자로 대했는데 이렇듯 소인배일 줄이야!" 쾌락왕은 미친듯이 웃어댔다. "그대가 본왕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애를 쓴 것은 분명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인데 본왕이 그대를 죽이는 것이야 당연한 일 아닌가?" "나를 이런 식으로 죽이고도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이 무섭지 않소?" "남들이 어떻게 알겠나? 본왕 외에 어느 남자가 감히 이 소혼장(銷。帳)에 들어 올 수 있겠는가? 자네가 곧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처럼 좋은 구경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어쩐지 당신 휘하의 사사(四使)와 삼십육검이 이 곳에 없더군." "바로 그 때문이지."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나 심모도 즐기고 죽어야겠군." 갑자기 심랑은 한 무희를 잡아끌더니 품 안에 안고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 내게 말해 주겠느냐?" 그 무희는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전...... 전......." "오! 네 이름이 '전전'이구나!" "아...... 니......." "뭐? '아니'라고도 불린다고?" 무희는 온 몸의 맥이 다 풀린 듯,두 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음 속으로는 너무도 놀라고 무섭고 울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여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쾌락왕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자 대노했다. "심랑, 이미 죽음이 눈앞에 와 있는데 초조하지도 않느냐?" "하하!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진데 초조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너...... 넌...... 왜 목숨 걸고 덤비지 않느냐?" "어차피 곧 죽을 텐데 당신을 죽여서 뭐하려고?" 심랑은 다시 무희를 끌어안고는 연달아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전전 아, 아니야, 내 말이 맞지?" 쾌락왕은 두 눈에 불을 킬 뿐, 기분이 영 말이 아니었다. 여태껏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심랑과 같은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심랑이 더욱 즐겁게 웃자 그 무희도 심랑의 우스개에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또 그녀의 귓가에다가 계속 뭔가를 중얼거리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쾌락왕이 갑자기 한 손으로 탁자를 치면서 말했다. "심랑, 내 말 듣게." "또 무슨 일이오?" 쾌락왕은 품 속에서 조그만 곽을 하나 꺼내 보였다. "자네 잘 보게. 이것이 바로 자네의 해약일세." 심랑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단지 응답만 했다. "응?" "자넨 이것을 원치 않나?" "물론 원하오. 하지만...... 당신이 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부질없는 것이오." "만약 자네가 원한다면 방법이 있기는 하지." "무슨 방법이오?" "자넨 본왕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내기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소문으로 들었소." "좋네, 본왕과 내기를 해서 만약 자네가 이긴다면 이 해약은 곧 자네의 것이 되는 것이네." "아하!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그런데 어떻게 내기를 하는 것인지?" "본왕의 목숨과 자네의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일세." "내 목숨은 이미 당신 손 안에 있는데 왜 같은 조건을 내거는 것이오?" 쾌락왕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본왕의 재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만약 재물을 내기에 건다면 재미가 없어. 오히려 이렇게 내기를 해야 훨씬 자극적이지." "하하! 정히 그렇다면 좋소. 내기를 합시다." 쾌락왕은 곧 흥분으로 눈을 빛내며 손뼉을 쳤다. "검을 가져오너라!" 보검이다! 검집은 녹옥으로 장식됐고 검날은 새파란 빛이 돌며 반짝였다. 이 검은 하나의 성과도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보검이었다. 심랑은 검을 받아들고는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자기도 모르게 찬사를 연발했다. "좋은 검이야! 그야말로 입김으로도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고 쇠를 흙처럼 밸 수 있는 보검이야!" "하하하! 과연 물건을 볼 줄 아는군......." 쾌락왕은 다시 매섭게 말했다. "본왕은 이곳에 앉아 꼼짝도 않을 테니 그대는 손에 든 그 검으로 나를 세 번 찌르게. 만약 본왕을 찔러 죽일 수만 있다면 이 해약 뿐만 아니라 이곳의 모든 것들도 다 그대의 소유가 되는 것이지." "만약 찌르지 못한다면?" "흥, 찌르지 못한다면 당연히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심랑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좋소, 이번 내기는 매우 재미가 있겠는데?" "물러서라!" 쾌락왕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여태껏 새하얗게 겁에 질려 있던 무희들은 대 사면(赦免)을 받은 듯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랑은 오른손에 검을 쥐고 왼손으로는 가볍게 검날을 쓰다듬으면서 뇌까렸다. "검아, 검아! 오늘은 절대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쾌락왕은 원래의 자리에 단정히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심랑을 노려 보는 벽록색 두 눈에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작렬하는 듯한 화염이었다. 심랑이 손으로 검신을 치자 검은 용의 울음소리를 냈다. 이 용의 울음소리와 함께 보검은 용의 화신이 되어 앞으로 찔러갔다. 이 신룡과 같은 검세는 섬전(閃電)과 같이 빨랐다. 심랑이 검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검법은 역시 심랑답게 시원스럽고 수려하면서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쾌락왕은 과연 검을 피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오히려 자신을 찔러오는 검을 향해서 몸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 쾌락왕은 아마 미쳐버려서 마치 심랑의 손에 죽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그가 왜 심랑의 손에 죽으려 할까? 심랑의 검은 높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도저히 돌이킬 수 없었고 또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만 갈 뿐 돌아올 수가 없었다. 가슴은 이미 검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 웅묘아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심랑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비빈 후, 몸을 일으키며 심랑을 불렀다. "심랑...... 심랑......!" 부르는 소리는 점점 높아졌지만 응답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웅묘아는 한달음에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 바람에 주렴이 떨어지면서 옥구슬이 '또르륵' 구르는 듯, 음악소리를 내며 땅에 쏟아졌다. 주렴 밖에는 야색(夜色)이 짙어가고 있었고 달빛도 대설(大雪)에 반사되어 하나의 은빛 세계를 이루었다. 하지만 심랑은...... 심랑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웅묘아는 이미 반 정도 술이 깨어 발을 동동 굴렀다. "심랑아, 심 형, 이 멍청한 친구야! 간다면 간다고 내게 말이라도 하고 가야지, 설마 내가 죽은 듯이 취했었다는 말인가?"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중얼거렸다. "아냐, 심 형은 일처리를 절대로 이렇게 허술하게 하지 않는데 혹시...... 혹시 쾌락왕에게 유인된 것일까? 설마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웅묘아는 갑자기 머리가 터질 듯하여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 나갔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이것도 아냐, 심 형이 만약 당했다면 쾌락왕이 나를 그냥 놔뒀을 리가 없잖아? 하물며 심랑과 같은 인물이 그리 쉽게 남에게 당할 리가 없어!" 이제 앞으로 가야 할까? 아니면 뒤로 가야 할까?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사방을 바라보면서 망연자실할 뿐, 어디로 갈지조차 정하지를 못했다. "가만, 설마 이곳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웅묘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에게 그저 기다리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는 참지 못하고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기다리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웅묘아는 한숨을 내쉬고 발을 차면서 천막 안으로 돌아갔다.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술과 안주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심랑이 썼던 젓가락도 여전히 그 곳에 놓여져 있건만 심랑만은...... 심랑아! 심랑아! 너는 대체 어디에 있느냐? 웅묘아는 천막 안을 왔다갔가 하면서 초조함에 뜨거운 솔뚜껑 위에 놓인 개미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원을 그리며 돌았을까. 우연히 그는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그제서야 웅묘아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역시 심랑이 편지를 남기고 갔군. 내 눈은 왕방울처럼 크기만 했지 제대로 보는 것이 없으니 장님이나 다를 바 없어." 봉투의 겉면에는 과연 '웅묘아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웅묘아는 급히 봉투를 찢고 편지를 꺼내어서 단번에 훑어 내려갔다. 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 편지는 심랑이 남긴 편지가 아니었다! 편지를 남긴 사람은 다름 아닌 주칠칠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주칠칠이 이곳에 와 있었을까? 편지의 서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오빠! 아마 이 편지를 읽고 있을 즈음이면 난 이미 죽은 뒤일 것이에요." 이 한 마디는 웅묘아로 하여금 대경실색(大驚失色)케 하였다. 더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 다음의 말이었다. "오빠! 하지만 제가 바로 심랑의 손에 죽게 되리라는 것은 전혀 모르실 거예요! 그러나 절대로 심랑을 탓하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은 다 저 혼자서 꾸민 계획이니까요. 전 일생 동안 별로 미련을 가질 만한 것이 없었어요. 저의 오직 한 가지 소원이라면 심랑의 손에 죽는 것이었지만 한스럽게도 심랑은 결코 저를 죽이려 하지 않았어요. 전 어렸을때 부터 제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가질 수 있었지만 심랑만은 그럴 수가 없으니 정말 미워죽을 지경이에요. 전 결심 했어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의 손에 죽을 거예요. 그가 저를 죽이려 들지 않으려 해도 전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가 저를 죽이도록 할 테니까요." 여기까지 읽은 웅묘아는 발을 구르며 욕을 퍼부었다. "이 실성한 계집애 같으니라구, 미친 계집애, 어떻게든 심랑이 너를 사랑하게 만들지 왜 죽이게 하려는 거야......." 그는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지금 제 계획은 이미 성공을 했어요. 심랑은 저를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됐으니까요! 난 셋째 형부로부터 많은 돈을 얻었고 또 많은 천을 얻어왔어요. 그 은자로는 많은 사람들을 고용했고 그 천으로 많은 옷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혔지요. 여기까지 읽으면서 오빠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이 계집애가 대체 뭘 하려는 거야?' 하고 말이에요." 웅묘아는 한심스러운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그래, 맞다. 지금 매우 궁금하게 생각한다. 요 계집애가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을 갖고 있는 거야?" 편지의 내용은 계속됐다. "오빠! 오빠는 영원히 알아내지 못할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한 것은 단지 제 스스로가 쾌락왕으로 분장하여 심랑의 최대의 적으로 행세하려는 것이죠. 왕련화가 곁에 있으니 전 그 누구의 모습으로든 변하고 싶은 대로 분장을 할 수 있어요. 비록 왕련화가 나쁜 사람이긴 해도 분장하는 기술 만큼은 일품이거든요. 더구나 심랑은 한 번도 쾌락왕을 본 적이 없는 데다 그저 '인의장(仁義莊)'에서 얼핏 들은 정도의 모습만을 알고 있으니까요. 전 왕련화에게 저를 그 모습대로 분장시켜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 다음에 저는 왕련화로부터 이미 쾌락왕의 행방은 알아냈다고 오빠에게 편지를 남겼지요. 그러면 당신들이 분명 쫓아 오리라는 것을 계산해 놓았거든요. 과연 당신들은 쫓아 왔더군요. 지금 저는 심랑과 얼굴을 맞대고 있어요. 저는 지금 그의 최대의 적이므로 그는 저를 죽일 기회가 생긴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테고 전 반드시 그 기회를 제공하겠어요. 아마도 지금쯤 그는 이미 저를 죽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저의 계획은 완전히 성공했으니 이제는 여한이 없어요. 제가 여태까지의 사정을 낱낱이 오빠에게 털어놓는 이유는 당신을 제 친오빠로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오빠가 그토록 저를 잘 대해 주셨으니 비록 제가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오빠에게 감읍( 泣)할 거예요.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예쁜 부인을 얻으세요. 적어도 심랑의 미래의 부인보다 십 배는 예뻐야 해요. 그래야 제 분이 풀리니까요. 안녕히 계세요, 오빠.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여동생 칠칠 올림." 이 오륙 장의 편지는 매우 어지럽게 쓰여졌는데 뒤로 갈수록 점점 글씨는 휘갈겨 쓰여졌으며 마지막 두 장은 눈물 자국으로 온통 번져 있었다. 주칠칠이 이 편지를 쓸 때의 그 심정은 어땠을까? 지금 이 편지를 다 읽은 웅묘아의 심정은 어떤가?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손에 편지를 쥔 채 넋나간 듯이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웅묘아는 지금까지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고 그 자신도 영원히 눈물을 흘리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물은 그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어쩐지 여태까지의 그 많은 일들이 앞뒤가 맞지를 않더라니, 이제보니 이 계집애의 장난이었군. 주칠칠아! 주칠칠아! 그렇게도 똑똑한 네가 어째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니?" 똑똑한 사람일수록 바보스러워지기 시작하면 그 어떤 바보보다 더 바보가 된다는 것을 웅묘아는 모르고 있었다. 그는 멍청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튕기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크게 소리 질렀다. "주칠칠아! 네가 심랑에게 이미 죽임을 당했다면 내가 뭣하러 이곳에 앉아 있을까?" 그는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 나가며 크게 외쳤다. "심랑아! 심 형! 제발 죽여서는 안 되오...... 절대 죽여서는 안 돼......." 그가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봤자 심랑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대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죽을 힘을 다해 앞으로 뛰어갔다. 심랑은 분명히 공격을 할 거야! 심랑은 쾌락왕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하루,이틀 해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반드시 사정없이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쾌락왕이 주칠칠임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웅묘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다급해지자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그저 심랑이 아직도 손을 쓰지 않았고 또 그전에 자신이 막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심랑과 주칠칠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는 황폐한 산에서 미친 듯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소리 질렀다. "심랑아! 심 형! 제발 죽여서는 안 되오...... 절대 죽여서는 안 돼. 그 사람은 주칠칠이야! 만약 손을 쓰게 되면 당신은 분명 평생토록 후회하며 살 거야...... 평생토록 후회하며 살 거야." 심랑의 검은 곧장 앞으로 찔러갔다. 웅묘아는 아직 도착하지도 못했으니 막을 방법이란 전혀 없다. 그런데 높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돌이킬 수 없고,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만 갈 뿐 되돌릴 수 없었던 심랑의 검끝이 약간 떨리더니 갑자기 위로 치켜 올랐다. 쾌락왕의 가슴엔 분명 차디찬 검끝이 닿았는데도 순식간에 허전해졌다. 심랑은 벌써 세 걸음 뒤로 물러서서 검을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미소짓고 있었다. 깜짝 놀란 쾌락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 신은 아직 두 번의 기회가 남......." "그만 됐소, 연극은 이젠 끝났으니......." "뭐...... 뭣이라구? 뭐라고 했소?" "후훗...... 주칠칠. 당신이 주칠칠인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소?" 주칠칠은 몸을 한 차례 떨고는 한동안 넋을 잃은 듯하더니 갑자기 탁자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으로 탁자를 치면서 한탄했다. "난 왜 이리도 기구한 명을 타고 났을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으니......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니......." 심랑은 그녀의 우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가볍게 그녀의 머리결을 어루만졌다. "바보, 왜 죽으려는 거요?"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 주칠칠은 목이 메인 소리로 답했다. "내가 왜 죽고 싶지 않겠어요? 이제 더 살아서 무슨 재미가 있다구? 심랑! 심랑! 당신에게 아직 조금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다면 어서 날...... 죽여요!" 심랑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양심이 남아 있다면 어째서 당신을 죽여야 하오?" 주칠칠은 다시 한 차례 몸을 떨더니 확연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몽롱하게 눈물이 머금은 눈으로 심랑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미칠 듯한 기쁨이 담겨져 있었는데 완전히 믿지는 못하겠다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 "당...... 신, 당신 설마 이미......" 심랑도 그녀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뜻밖에도 끝없는 부드러움과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심랑의 마음도 강철로 만든 것은 아닌 것 같소." "몰라, 앙!" 그의 이 따듯한 미소에 주칠칠은 심랑의 품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진정 행복한 시간이었다. 진실한 사랑이 드디어 상대방의 사랑을 얻어냈으니 비록 과정은 힘겹고 어려웠지만 힘겨웠던 만큼 그것은 더욱 고귀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의지하니 더이상 말은 필요가 없었다. 이때, 한 사람이 미친 듯이 달려오면서 숨을 크게 헐떡이며 내지르는 절규가 들려 왔다. "심랑...... 절대 죽이면 안 돼...... 그 사람은 주칠칠이야, 주칠칠이라구." 다급하면서도 목메인 절규와 함께 웅묘아가 미친 듯이 뛰쳐 들어왔다. 주칠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녀로 하여금 심랑의 곁에서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심랑 역시 꿈쩍도 안 했다. 그는 차마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웅묘아는 너무 놀라서 얼이 빠져 서 있었다. 주칠칠은 부끄러워하며 소리쳤다. "오빠!" "넌...... 주칠칠이냐?" "네!" 주칠칠이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아직 죽지 않았구나!" "물론 아직 죽지 않았죠." 주칠칠이 애교스럽게 웃었다. 웅묘아는 눈길을 심랑에게로 옮기면서 물었다. "심 형, 공격하지 않았소?" "물론 안 했지." 웅묘아는 뒤로 반 걸음 물러서더니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멍청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파안대소를 했다. 너무나도 기뻐서 못살겠다는 것 같았다. 주칠칠은 그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숙이면서 물었다. "오빠! 뭐가 그리도 우스워요?" "하하하! 긴 수염을 기른 한 늙은이가 작은 새처럼 백면서생의 품에 안겨 있는데 이보다 더 우스운 모습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주칠칠은 부끄러움에 손까지 붉어졌다. 이제는 아무리 떨어지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심랑의 품 속에서 나와야 했다. 가발과 가짜 수염을 전부 떼내고 또 그 불가사의할 정도로 교묘한 인피면구를 벗자 그녀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등불 아래에서 주칠칠은 예전의 그 교태롭고 거만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웃음이 되살아 났는데 거기에다 부끄러운 표정을 짓자 더욱 귀여웠다. 웅묘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내 여동생이군. 전혀 변한 곳이 없어...... 단지...... 단지 지금 너의 눈이 어째서 녹색이지?" "제가 한 가지 마술을 보여 드릴께요."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을 때는 다시 원래의 그 맑은 호수와 같은 눈망울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주 얇은 녹색의 물체가 놓여져 있었다. 웅묘아는 크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이게 뭐지?" "후훗...... 이것은 '유리'라는 것으로 별로 흔하지 않은 물건인데 폐르시아의 상인으로부터 산 것이지요. 이 물건은 정말 이상하다고 할 수 있지요. 완전히 투명인데다가 대단히 비싼 물건이에요. 이 얇은 것 두 개에 수천 냥의 은자를 들여야 했으니까요." "이것도 왕련화가 생각해 낸 귀계(��計)냐?"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웅묘아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의 변장술은 정말 하늘을 울릴 정도로 기묘하니 만약 속사정을 몰랐다면 절대로 너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후훗...... 하지만 우리의 심랑은 알아차렸어요." "흥, 우리의 심랑이라......? 하하하...... 아주 득의양양해서 웃는구나. 하긴 그럴만도 하지. 심랑과 같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 누구라도 득의양양해 할 것이야." 그는 다시 심랑을 보며 웃으면서 물었다. "심 형, 이번에도 다시 한 번 당신에게 탄복했소. 대체 당신은 어떻게 그녀인 줄을 알아차렸소? 정말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주칠칠도 역시 감탄을 했다. "그래요, 저도 정말 영문을 모르겠어요. 저 자신조차 거울을 보고 한 점의 허점도 찾을 수 없었지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어요. 듣자하니 모든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체취가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들킬까봐 일부러 온몸을 향기롭게 하느라고 단향을 피웠을 뿐만 아니라 춤추는 여자들의 몸에서도 향기가 풍기도록 했었지요. 심랑, 내 말이 맞죠?"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과연 그 여자들은 매우 향기롭더군." 주칠칠은 발을 구르며 짐짓 화를 냈다. "몰라요....... 몰라요, 오빠, 심랑이 또 저를 못살게 굴어요." "그가 어떻게 너를 못살게 괴롭혔다는 거지?" "아까 심랑은 일부러 그 여자들과 아주 낯뜨겁게 입을 맞추질 않나, 지금은 또 저렇게 약을 올리고 있잖아요...... 저 이는......." 갑자기 주칠칠은 심랑의 손을 잡아 끌고는 깨물었다. 웅묘아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잘 물었다. 정말 잘 물었다. 그가 너를 어떻게 알아봤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면 또 물어라. 아주 세게 물어라, 괜히 마음 아파하지 말고." 심랑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처음 의심이 갔던 점은 바로 그 천막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였어." 웅묘아가 놀라워 하며 물었다. "심 형은 벌써 그때부터 의심을 했단 말이오?" "쾌락왕처럼 일세를 풍미하는 인물이라면 수하들을 훈련시키는 것 또한 얼마나 엄격했겠어? 그런데 천막 진지를 치우면서 어떻게 그토록 많은 흔적을 엉성하게 남겼겠가?" 주칠칠이 배시시 웃었다. "저는 일부러 그 물건들을 당신들에게 남겨 준 것인데 잘난 체 하다가 오히려 사족( 足)을 그린 꼴이 됐군요." 두번째로 의심이 간 점은 바로 바위 위에 남겨 둔 초청장이었어." 응묘아가 물었다. "어느 점이 의심이 갔다는 말이오?" "그 종이에 쓰인 글씨는 너무도 악필이었고 또 문체도 별로 통하지도 않았어. 쾌락왕의 수하 중에는 재능있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을 텐데 설마 이런 초청장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겠소?" "아, 그래 맞아, 그런데 왜 그때 말하지 않았소?" "그때는 나도 그리 크게 의심하지 않았소. 하지만 금의 대한을 보고난 뒤에야 비로소 난 거의 반 정도 진짜 쾌락왕이 아니라고 확신했지요." 주칠칠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었나요?" "하하,그런 것은 없었고 단지 그가 옷을 잘못 입었다는 점이오." "옷을 잘못 입었다니오?" "그가 입은 옷은 너무 새것이었거든? 생각해 봐요. 쾌락왕은 천 리나 되는 먼 거리에서 중원으로 들어왔으니 온통 먼지를 뒤집어 썼을 텐데 수하나 하인 주제에 어찌 새옷을 입을 수 있었겠는지? 더구나 신발조차도 새것이더군." 주칠칠이 웃으며 말했다. "아! 내가 그 점을 생각 못했군요." "그래서 나는 몰래 그 자의 옷깃을 약간 들춰 봤소. 과연 그 안에는 '분양포장(汾陽布莊)'이라는 표시가 있었지. 이거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 것 아니오?" 주칠칠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당...... 당신은 그때 이미 내 신분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요?" "하하,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감히 마음놓고 저 웅묘아와 술을 마셨겠소?" 주칠칠은 얼굴을 붉히면서 앵두 같은 입술을 깨물더니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다. "당...... 당신은 정말 능구렁이에요." "사실 말하자면 왕련화의 변장술은 정녕 하늘을 울릴 정도로 정교하고 전혀 허점이 없었소. 그대의 말투 또한 아주 잘 어울렸고......." 주칠칠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많이 노력하고 연습했어요." "하지만 난 이미 대강은 눈치를 챘기에 그대가 아무리 분장을 잘 했어도 난 허점을 다 볼 수가 있었지......." 그는 잠시 미소를 짓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더구나 내가 춤추는 여자의 손을 잡을 때 그대의 그 화난 모습이란 정말...... 그래서......." 주칠칠은 쏜살같이 그의 품 안에 안기더니 교태를 부리면서도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다시 말해 봐요...... 다시 말해 봐요......." 웅묘아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보니 내 여동생은 질투쟁이였었군." "후훗, 이제 알았소? 왜 여태까지의 모든 사건들이 앞뒤가 맞지 않았는지?" 심랑의 말에 웅묘아가 약이 오른 듯 말했다. "요 계집애가 당신은 속이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이토록 골탕먹이다니, 방금 내가 그 편지를 봤을 때의 심정은 아무도 모를 거요. 정말이지 한달음에 날아오고 싶은 심정이었다구요." 주칠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한 발 늦었어요." "늦었다고?" "좋은 구경거리를 놓쳤으니까요." 웅묘아는 더욱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무슨 구경 거리? 설마 방금 너희 둘이서 더 진한 장면을 연출." 주칠칠이 샐쭉거렸다. "피, 피, 피!" 웅묘아가 다시 물었다. "그게 대체 뭔데?" "오빠한테 묻겠는데요 심랑이 검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웅묘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없지. 그는 남들과 싸울 때도 전혀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주칠칠은 입술을 질끈 물더니 말했다. "하지만 전 조금 전 그 모습을 봤어요." 웅묘아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다그쳐 물었다. "검술이 어떻든?" 주칠칠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역시 심랑처럼 시원스럽고 재빠르고 대범하면서도 보기좋고 귀여웠지만 또 그 반면 대단히 무서운 것이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웅묘아는 배꼽을 쥐고 웃기 시작했다. "정말 낯간지럽지도 않고 부끄럽지도 않느냐? 이렇게 아부를 하다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칠칠은 과일을 집어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 행복이 넘치는 시간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지나가 버렸다. 주칠칠은 교태를 부리며 새 개의 큰 금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이리로 가세, 저리로 가세, 그리고 금빛 술잔으로 술을 마시세. 자, 마셔요." 웅묘아도 손뼉을 쳤다. "좋아, 한 잔 마시자." 세 사람은 단번에 술잔을 다 비웠다. 웅묘아는 미처 숨도 돌리기 전에 또 소리를 질러댔다. "다시 한 잔 마시자. 오늘은 취하지 않고는 끝낼 수 없어." "오늘 비록 즐거운 날이긴 하지만 왕련화가......." "안심하세요. 왕련화는 도망칠 수 없어요." 웅묘아는 왕련화의 이름을 듣자 곧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 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주칠칠이 눈알을 굴리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맞춰 보세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그는 바로 이 천막 안에 있어요." 웅묘아는 안색이 변했다. "그가 이 천막 안에......." 두 사람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둘러봤지만 천막 어디에도 왕련화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웅묘아가 중얼거렸다. "설마 이 작자가 투명술을 배운 것은 아닐 테지?" 주칠칠이 '피식'하고 웃었다. "어디에 앉아 있는지 자세히 보세요." "상자잖아......." "설마 네가 왕련화를 이 상자 안에 가둬놨다는 말은 아니겠지?" 주칠칠은 자지러질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을 이제는 믿겠지요?" 웅묘아는 손벽을 치며 포복절도(抱腹絶倒)했다. "멋있어, 멋있어, 정말로 대단히 멋있어." 주칠칠은 몸을 구부려 술잔으로 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왕련화, 지금 우리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느냐? 우린 지금 너무나 기쁘단다." 웅묘아도 술잔으로 상자를 두드렸다. "감히 우리를 상대로 맞서다니, 네 놈이 사람만 해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와 함께 웃고 있을 텐데. 이젠 네 놈도 깨달았겠지? 사람을 해치는 일은 안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갑자기 심랑이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큰일났다!" 주칠칠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물었다. "뭐가 큰일났다는 거지요?" "이 상자는 빈 거요!" "이 상자가 어째서 빈 것이에요? 또 저를 놀리시려는 거죠?" "상자에 사람이 들어있다면 절대로 이런 소리가 날 리 없소." 주칠칠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절대로 빈 상자가 아니에요. 분명히 내가 직접 왕련화를 이 상자 안에 집어 넣었는 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일어서서 상자를 열자 과연 상자는 빈 것이었다. 주칠칠은 대경실색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앗, 왕련화...... 왕련화가 어째서 보이지 않지?" 심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이곳에 가둔 후 자리를 비운 적은 없었소?" "전...... 전...... 한 번 나간 적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곳을 지키는 사람을 뒀었어요." "누구요?" "내가 고용해서 쾌락왕의 부하로 변장시킨 사람이었죠." "결국 그랬었군. 그자들이야 돈의 체면을 봐서 쾌락왕의 수하로 분장을 했었으니 역시 돈의 체면을 봐서 왕련화를 풀어준 것이야." "하...... 하지만 왕련화에게는 은자가 없는......." "왕련화의 몸에 비록 은자는 없었겠지만 그는 세 치도 안 되는 혀로 죽은 사람도 살릴 정도의 뛰어난 언변이 있지. 더구나 그들 화류계의 여자들이 어떻게 그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않았겠소?" 주칠칠은 한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돼지 같으니라구...... 제가 가서......."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밖으로 뛰쳐 나가려 했다. 그러나 채 밖으로 뛰쳐 나가기도 전에 갑자기 온 몸에 힘이 빠진 듯 쓰러져 일어서지를 못했다. 심랑과 웅묘아는 동시에 앞으로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등불 밑에서 본 그녀의 안색은 전혀 혈색을 찾을 수 없었다. 웅묘아는 영문을 몰라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전...... 전 이상하게 몸이 괴로워요, 이상하게 눈을 뜰 수가 없어요, 전...... 전......." 그녀의 말끝이 점점 흐려지더니 갑자기 고개를 떨구고는 더이상 깨어나지 않았다. 심랑은 심각하게 말했다. "어서 이 곳을 떠나야겠어." 웅묘아는 놀랍고도 이상해서 물었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이지?" "분명 왕련화가 술에 미약을 넣었을 거요......." "하지만 아까는......." "그 놈은 내가 주칠칠을 죽이는 것을 보려고 일부러 약기운이 늦게 발작하는 미약을 썼을 것이오. 독성이 늦게 발작하는 독일수록 해독하기는 더욱 어렵지." 웅묘아가 한탄했다. "이 악적을? 우린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요?" "우리도 독성이 발작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아! 난 정말로 주칠칠이 이렇게 경솔하게 일을 처리할 줄은 몰랐어. 그렇지 않았다면 난 그 술을 마시지 않았을 거야."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벌써 주칠칠을 안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천막 밖에는 의외로 한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있었던 남녀들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디론가 가버리고 보이지 않았으며 길을 막는 사람들도 없었다. 웅묘아가 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린 이제 어디로 가지?" 심랑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왕련화는 필시 우리가 산을 빠져나가는 길을 찾을 거라고 생각할 거요. 그러니 우린 그와 반대 로산으로 들어가는 길로 가는 것이......." 웅묘아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심 형이 가고있는 이 길은 오히려 산을 내려가는 길이 아니오? 심 형은 방금 산으로 들어가 왕련화의 의표를 찌른다고 해놓고는 어째서 또 이 길로 가......." 심랑이 말허리를 자르면서 설명했다. "왕련화는 너무 생각이 깊어서 분명히 이 두 가지 상황을 고려하고 있을 거요. 그러나 난 한 층을 더 높혀서 역시 산을 벗어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소." 웅묘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세번째 층이나 첫번째 층이나 다 마찬가지로 산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오? 이해할 수가 없군. 도대체 머리를 쓰는 일은 정말로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두 사람은 이때 걸음을 빨리 옮겼지만 이상하게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경공을 펼쳐도 그들의 몸은 전처럼 그렇게 기민하지가 못했다. 웅묘아가 탄식을 했다. "정말로 무서운 미약이군. 기력이 갑자기 사라진 듯하니, 다행히 왕련화가 밖에서 기다리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우린 정말 끝장 났을 거요." 심랑이 냉랭하게 말했다. "웅 형과 난 아직 미약의 독성이 발작하지를 않았으니 그가 어찌 감히 우리에게 덤빌 수 있겠소?" 웅묘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한참을 또 걸었다. 두 사람의 걸음은 점점 느려져서 마치 발에 천근이나 하는 무거운 돌을 매달은 듯했다. 심랑은 비록 웅묘아보다 공력이 심후했지만 그가 천막에 들어갔을 때 이미 주칠칠과 함께 먼저 한 잔을 마셨었기에 이 두 사람의 독이 함께 발작을 한 것이다. 그때 만약 심랑이 주칠칠이 쾌락왕으로 분장했다는 사실만 몰랐어도 감히 그 술을 마시지는 않았을 텐데. 아! 사람은 너무 똑똑해도 안 된다니까! 웅묘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만약 왕련화가......." 심랑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만약 왕련화가 우리를 저지한다면 그때는 우리도 정말 끝장이야." "그나마 그가 이곳에 없어 다행이지. 제발 그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멀리서 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 이제 오셨소?" 이것은 바로 왕련화의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는 분명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느릿하면서도 부드러워 마치 손님을 좋아하는 주인이 오랫동안 못 본 친구를 환영하는 듯했지만 웅묘아와 심랑의 귀에는 마치 청천벼락과도 같은 소리였다. 두 사람은 크게 놀라면서 동시에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그들 앞에는 거대하고 넓다란 바위가 있었고 그 위에는 단정하게 앉은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는데 별빛과 설광(雪光)을 받아 희미하게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왕련화, 바로 왕련화가 아니고 또 누구이겠는가! 다시 왕련화의 웃음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은 이제서야 도착하셨군요. 본인은 여태 기다리고 있었소. 자, 자, 이 바위 위에는 푸짐한 안주와 좋은 술이 준비되어 있으니 어서 올라와서 나와 함께 한 잔 합시다." 웅묘아는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 악적! 난...... 난 네놈을 갈기......." "만약 귀하께서 본인의 머리를 원하신다면 어서 올라오시오. 그럼 내 쌍수로 올려 바치겠소." 웅묘아가 다시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네가 올라오라면 내가 못 올라갈 것 같아서 그러느냐? 누가 네놈을 두려워 할 것 같으냐?" 그는 소리치며 앞으로 달려갔지만 그만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왕련화가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귀하는 아마도 술에 취했나 보군. 어째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거요?" 웅묘아가 다시 덤비려고 하자 심랑이 그를 제지하면서 가볍게 질타했다. "물러서시오!" 그는 웅묘아를 잡고는 몸을 돌려 앞으로 뛰어갔다. 왕련화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두 분께서는 가시려는 거요? 멀리 전송하지 않겠소." 웅묘아는 고개를 돌리고는 분통을 터뜨리면서 욕을 했다. "네 이 악적놈아, 언젠가는 네놈을......." 갑자기 발을 또 헛디뎌 하마터면 심랑까지도 함께 쓰러질 뻔했다. 왕련화가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부디 조심해서 가시오. 제발 넘어지지는 마시지요. 단지 내 계산에 의하면 두 분은 아마도 일곱 걸음 이상은 걷지 못할 것이오." 심랑은 이를 악물고 앞을 향해 걸었다. 어찌된 노릇인지 두 사람이 아무리 전력을 다해 걷고 또 걸어도 여전히 삼 장(三丈) 밖으로는 나가지를 못했다. 왕련화는 계속 웃어댔다. "일곱 걸음이오. 자, 하나, 둘, 셋, 넷......." 그가 미처 다섯도 세기 전에 웅묘아가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심랑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 역시 발걸음을 멈췄다. 왕련화가 물었다. "아니, 당신은 어째서 계속해서 걷지 않으시오?" 심랑은 몸을 돌려 약간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왕련화, 이번엔 당신이 이겼소." "하하하......, 겸손의 말씀이오. 귀하께서는 아직도 웃을 수 있을 정도니 과연 당신은 대단하시오. 과연 내 평생 만나 본 이들 중 가장 훌륭한 적수였소. 단지 안타까운 것은 다시는 나와 겨룰 기회가 없다는 것이오. 내년 오늘에는 내 반드시 향기로운 꽃과 좋은 술을 준비하여 그대의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주리다." 심랑이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절대로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오." 왕련화는 미친 듯이 웃더니 물었다. "절대로 못 죽인다구......? 왜?" "이유는 없소. 어쨌든 당신은 날 절대로......." 웃음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심랑은 쓰러졌다. 왕련화는 훤칠한 몸을 길게 일으킨 후 하늘을 향해 광소를 날렸다. "심랑아! 심랑아! 너는 결국 드디어 나 왕련화의 손에 죽고 마누나...... 이제 심랑이 죽으니 이 세상에는 더이상 나 왕련화의 적수가 없을 것이다." 왕련화는 서서이 웃음을 멈추더니 몸을 기울여 심랑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다시 말문을 열었다. "심랑아! 심랑아! 넌 어떻게 내가 널 죽이지 않는다는 걸, 절대 죽이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 하늘은 비록 밝아왔지만 아침 안개가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주칠칠은 비록 깨어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나른하고 무기력하여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이 미약은 정말 지독한 약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몽롱하게 등잔불이 보였다. 등불은 마침 그녀의 눈을 비추고 있었기에 그녀는 눈을 뜨려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갑자기 마음 속으로부터 전율이 일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자신의 몸 밑을 더듬어 보았다. 다행히 그녀의 옷은 무사히 그녀의 몸에 잘 입혀져 있었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녀의 가장 소중한 것도 아직 잃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왕련화, 비록 밉고 싫은 악적이긴 했으나 그래도 그런대로 자존심이 있었던지 남이 기절해 있는 틈을 이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진정으로 색을 탐하는 자들은 다들 그렇다. 즉 여자가 기절해 있는 틈을 타 그녀의 몸을 빼앗는다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는 일이라 여기는 것이다. 주칠칠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 내쉬기도 전에 문득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자신의 목이 조여옴을 느꼈다. (이런 멍청이, 나 주칠칠은 정말 멍청이야. 그토록 당했으면서도 아직도 그렇게 조심성이 없이 일을 처리 하다니. 이는 나 스스로를 해쳤을 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큰소리로 외쳤다. "심랑......! 심랑......!" 그녀는 심랑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다행히 웅묘아를 발견했다. 이 곳은 창도 없고 문도 없는 방이었다. 웅묘아는 마치 고양이처럼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서는 꿈쩍도 않은 채 깨어나지를 않았다. 주칠칠은 안간힘을 써서 웅묘아가 있는 곳까지 기어가서는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웅묘아는 입술을 약간 실룩거리면서 마치 뭔가를 십는 듯한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음냐, 맛있다...... 음냐, 맛있다......." 주칠칠은 다급한데다 화가 나자 이를 악물었다. "식충이, 죽는 마당에 아직도 먹는 타령이라니. 어서 일어나세요......." 그녀가 웅묘아의 입을 쥐었는데도 그의 입은 여전히 실룩거렸다. 주칠칠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두 번이나 그의 뺨을 갈겼다. 갑자기 웅묘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주칠칠은 탄식했다. "아직도 먹는 타령이에요? 사람이 곧 죽을 이 마당에......." 웅묘아는 눈을 크게 뜨고는 한참 동안 넋이 나간 듯이 가만히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파왔다. 웅묘아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면서 물었다. "여기가 어디지? 우리가 왜 이런 곳에 와 있는 거야?" "흥, 기절은 내가 먼저 했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심랑은? 심랑은 어디 있지?" 주칠칠은 목이 메었다. "그것은 제가 묻고 싶은 말이라구요. 심랑은 대체 어디 있죠? 당신들은......." "내가 쓰러졌을 때 심랑은 아직도 서 있었어. 하지만. 하지만 왕련화가...... 왕련화가......."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나중에는 단지 '흥흥'대는 콧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주칠칠이 황급히 물었다. "당신들이 왕련화를 만났다구요?" 웅묘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응, 하지만...... 하지만 그와 마주쳤을 때 우리는 이미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게 됐을 때였어." 주칠칠은 다급히 물었다. "심랑은요? 설마 그도......." 웅묘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 주칠칠은 마치 뺨을 세게 얻어맞은 듯, 온몸은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휑한 두 눈만 멀뚱거리며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정말로 왕련화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말인가요?" 웅묘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크게 틀리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심랑이 여기에 없는 것을 보니 그는 아마 빠져나갔을지도 몰라요." 웅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겠지만 심랑 만큼은 언제나 방법이 생겼고 또 그 누구보다도 꾀가 많았지." "그는 또 우리를 구출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낼 거예요." "물론이지, 암, 물론이고말고. 그는 분명 금방 우리를 구출해 줄 거야. 왕련화는 그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지. 단, 오직 심랑만 보면 마치 쥐가 고양이를 만난 듯 했었어. 하하하하...... 하하하......." 그의 입은 비록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전혀 기뻐하는 기미가 담겨져 있지 않았다. 갑자기 주칠칠은 웅묘아를 덮쳤다. 그리고는 멱살을 잡고 목이 메인 소리로 물었다. "거...... 거짓말, 심랑이 빠져나가지 못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거죠?" 웅묘아는 억지 웃음을 흘렸다. "그는 빠져나갈 수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왜 여기에 없겠어?" "그가 이곳에 없는 것은 바로 그가...... 그가......!" 주칠칠은 갑자기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왕련화에게 해를 당했기 때문이에요." "아......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그랬을 거예요. 왕련화는 그를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어요. 이제 그가 왕련화의 손에 잡히고 말았으니 그를 다시 놓아줄 리가 만무하지요. 안 그래요? 내 말이 맞지요?" 그녀는 웅묘아를 잡고는 죽을 힘을 다해 흔들어 댔다. 웅묘아는 그녀의 거센 흔들림을 당하면서도 부리치지도 않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이 그의 두 뺨 위로 흘러내릴 뿐이었다. 심랑은! 아마 지금쯤 이미 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컸다. 왕련화는 절대로 그를 놓아줄 리가 없다. 주칠칠은 찢어질 듯이 통곡을 했다. "하나남! 어째서 제게 이토록 가혹하십니까?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그의 사랑을 얻었는데 또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시다니. 저보고 어떻게 견디라고. 어떻게......." 웅묘아가 갑자기 느릿하게 말했다. "이건 하나님 탓이 아냐, 남의 탓도 아니고......." 이 말투는 매우 느릿하고 침중했다. 그러나 주칠칠에게는 이 말이 뾰쪽한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했다. 그녀는 몸을 한 차례 떨더니 천천히 손을 풀며 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 자 한 자 내뱉듯이 말했다. "맞아요,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바로 제 자신, 제 자신을 탓해야 했어요." 웅묘아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그를 해쳤어요. 바로 제가 그를 해친 거라구요." 그녀는 마치 넋나간 듯이 계속해서 그 말만을 반복했다. 얼마쯤 했을까, 몇십 번...... 아니 아마 몇백 번을 했을까?" 그녀는 웅묘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등불 아래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친듯한 기색이 완연했다. 손에는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를 비수를 쥐고서는 '까르륵' 웃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해친거야...... 내가 그를 해친거야......." 순식간에 비수로 자신의 어깨를 찔렀다. 웅묘아는 깜짝 놀랐다. "칠칠...... 그만 멈춰!" 주칠칠은 깔깔거리며 비수를 뽑았다. 선혈이 흐르면서 그녀의 옷을 붉게 물들였지만 그녀는 아무런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그를 해친거야......." 또다시 비수로 찔렀다. 웅묘아는 혼비백산하여 그녀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술을 많이 마셨기에 중독도 가장 심한지라 아직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눈만 멀뚱히 뜬 채 주칠칠이 스스로를 칼로 찌르고 다시 또 찌르고 하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미칠 듯 절규했다. "칠칠......그만...... 제발 그만 멈춰라! 제발......." 이때였다. 갑자기 그들 뒤의 벽이 갈라지면서 문이 나타났다. 곧 하나의 인영(人影)이 뛰어들어와 번개같이 주칠칠의 손을 잡았다. 인영은 머리를 매끈하게 묶었는데 멋드러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온몸을 분홍색의 비단장삼으로 둘러 쌌는데 불빛이 반사되어 빛을 발했다. 웅묘아는 안색이 처참하게 변하면서 외쳤다. "왕련화!" '땅'하는 소리와 동시에 비수가 땅에 떨어졌지만 주칠칠은 여전히 실성한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왕련화가 그녀의 손을 잡아도 전혀 반항하거나 발버둥치지 않았다. 왕련화는 웅묘아를 보며 싱글싱글 웃음지었다. "귀하는 푹 주무시었소?" 웅묘아가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이 악적놈, 어서 그녀를 놓아라, 어서 놓아 줘. 그녀의 손가락 하나 건들지 못한다!" "하하하......, 네, 분부대로 하죠. 본인은 절대로 그녀의 손가락 하나 건들지 않을 것이오. 그저 그녀의 열 손가락에 손을 댈 뿐이지." 하면서 오히려 주칠칠을 덥석 안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웅묘아는 눈을 찢어져라고 부릅 떴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날 바라보지 마시오. 당신은 날 미워할 이유가 없소." 그는 주칠칠의 얼굴을 만지작 거리더니 다시 웃었다. "그녀도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소...... 당신들은 심랑을 미워했어야 했소. 당신들은 이처럼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지만 당사자인 그는 어디 당신들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것 같소?" 웅묘아가 엉겁결에 물었다. "그......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물론 죽지 않았소." "그......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왕련화가 크게 웃어댔다. "그는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를 보게 된다면 당신들이 아마 분통이 터져 죽을 것이오." 웅묘아가 소리쳤다. "헛소리 그만해. 넌 우리에게......." "당신들이 믿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소. 아! 어쩔 수 없이 당신에게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겠군......." 왕련화는 손뼉을 두 번 치면서 불렀다. "어서 오너라. 이 분 웅 대협을 부축해 일으켜라!" 곧 요염한 옷차림을 한 두 명의 소녀가 미소 지으며 들어오더니 웅묘아를 부축했다. 그 중 한 소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정말 무겁네." 다른 한 소녀가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 "이래야 진정한 사내대장부답지." 왕련화가 크게 웃었다. "이 사람이 너희들 마음에 든다면 맘대로 입을 맞추든지...... 음! 그래, 아주 세게 입맞춰도 괜찮다...... 하하하...... 하지만 너희들, 그의 코는 부러뜨리지 말아라!" 웅묘아는 웃고, 만지고, 입맞추고, 물어뜯는 두 소녀에게 들려 지하실로 갔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붉은 연지가 번져 있었다. 그는 초조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 됐지만 그래도 심랑을 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했다. 심랑아! 심랑아! 넌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주칠칠은 왕련화의 부축을 받으면서 더욱 얌전해졌다. 얼굴에는 오히려 배시시 웃음까지 띠었는데 이 웃음은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하였다. 그녀는 심랑의 소식을 듣자 곧 이런 웃음을 띠기 시작했는데 왕련화조차도 더이상 감히 볼 생각을 못했다. 지하 통로를 한참 동안 걷자 곧 작은 방이 나왔다. 이 방에는 탁자도, 의자도, 침대도,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벽에 네 개의 작은 나무인형이 걸려 있었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네 개의 나무인형이 보이죠? 이 나무인형들을 비켜놓으면 곧 네 개의 작은 구멍이 보일 것이오. 바로 이 작은 구멍을 통해 당신들은 심랑을 볼 수 있을 것이오. 하하하하. 바로 심랑을 말이오." 그의 웃음소리는 매우 가벼웠지만 웅묘아에게는 귀를 찌르는 듯 들렸다. 왕련화가 다시 말했다. "당신들, 마음 푹 놓고 보시오. 심랑이 당신들을 보지는 못 할 테니까. 왜냐하면 이 벽의 반대 편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 작은 구멍이 마침 벽화 속 사람의 눈알이거든...... 하하하, 그 벽화는 정말로 묘한 그림이지. 그보다 더 묘한 것은 없을 정도지만 안타깝게도 당신들은 그것을 볼 수가 없군." 웅묘아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냉소를 날렸다. "음화같은 것은 나도 수없이 봤어." 왕련화가 크게 감탄했다. "과연 웅 형께서는 총명하시군요. 벽에 그려진 그림이 춘궁도(春宮圖)라는 것을 금방 알아 맞추다니. 하지만 심랑이 온통 이 춘궁도로 싸여진 방 안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웅 형께서는 추측하실 수 있겠소?" 주칠칠은 덜덜 떨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앞으로 뛰쳐 갔지만 결국 다시 왕련화에게 잡혔다. 주칠칠은 입술을 깨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 당신은 우리더러 보라고 하지 않았나요?" "물론 보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조급할 것은 없잖소?" 웅묘아가 물었다. "그럼 대체 뭘 기다리는 것이냐?" "심 형은 지금 매우 편하게 지내고 있는데 두 분께서 그를 방해할까봐 걱정이 되는 군요. 내 심 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두 분에게 잠시 실례를 범해야겠소." 그는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여 주칠칠과 웅묘아의 아혈(啞穴)을 눌렀다. 웅묘아는 화가 치밀어올라서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으나 왕련화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작은 나무인형의 머리를 한쪽으로 비끼자 벽에는 과연 네 개의 작은 구멍이 보였다. 왕련화가 가볍게 웃었다. "이것은 당신들이 원해서 보는 것이니 보다가 분통이 터져 죽어도 내 탓은 아니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비켜주었다. "자, 보시오." 왕련화의 말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웅묘아와 주칠칠의 눈은 작은 구멍에 붙어버렸다. 그들은 과연 심랑을 볼 수 있었다. 벽 반대편의 방 안은 비록 보석과 같은 빛은 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물건들의배치가 적재적소에 놓여있는 것이 아주 안락하게 꾸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랑은 가장 편안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아주 부드러운 비단 옷을 입고는 부드러운 가죽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금잔이 들려 있었고 옆에는 경사(輕紗)를 걸쳐입은 절색의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아주 달콤한 미소를 띠고 그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호박색의 좋은 술이었다. 하지만 웅묘아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피처럼 보였다. 웅묘아와 주칠칠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주칠칠은 입술을 질끈 물어서 이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웅묘아도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입 속에서는 '끼끼'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그들은 입술은 움직일 수 있었지만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만약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분명히 동시에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심랑, 이 빌어먹을 심랑아! 우리는 네가 걱정이 되서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는데 네놈은 여기서 이렇게 호강을 하고 있을 줄이야!' 심랑은 정말로 호강을 하는 듯했다. 그 소녀가 그에게 술을 따라 주면 그는 다 마셨고 그 소녀가 또 그의 입에다 과일을 물어다 주면 그는 그것을 먹었다. 웅묘아와 주칠칠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 때 두 사람의 눈에는 연기가 날 듯이 불이 일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은 서로 달랐다. 주칠칠이 하려는 말은 이랬다. (심랑! 당신이 이렇게 호색한일 줄은 미처 몰랐어요. 당신의 이렇듯 욕정어린 웃음이란....... 당신은 왜 죽지 않았죠?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텐데요.) 웅묘아가 하려는 말은 또 달랐다. (심랑아! 알보고니 네 놈도 술통이었구나. 지금 이런 때에도 술을 마시다니......네놈이 비록 얄밉기는 하지만 주량 하난 꽤 크구나.) 두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말은 이렇게 달랐지만 그들이 느끼는 분노는 똑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미처 의심하지도, 묻지도 못한 점이 있었다. 즉, 왕련화가 왜 심랑을 죽이지 않았을까? 왕련화는 왜 심랑을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런 대접까지 할까? 이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소녀는 손이 저릴 정도로 술을 많이 따랐다. 그러나 심랑의 안색에는 전혀 취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비록 빨랐지만 심랑은 그녀보다 더 빨리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소녀가 드디어 가볍게 탄식을 했다. "당신의 주량은 정말 대단하세요." "응?" "어떻게 이리도 주량이 센지 정말 불가사의군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항상 나를 취하게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자연히 주량이 이렇게 좋아졌다오." 그 소녀가 '까르륵'대며 웃었다. "예쁜 여자라면 누구라도 그녀를 취하게 하고 싶어했겠지만 당...... 당신은 여자도 아닌데 누가 당신을 취하게 하고 싶었겠어요?" "아름다운 여자야 물론 남자들이 그녀를 취하게 하려고 벼르는 위험이 있겠지요. 하지만 만약 그녀들이 남자를 취하게 하려고 벼른다면 대단히 무서운 일이 아니겠소?"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요.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 앞에서는 절대로 술을 거절하지 못하니까요." 심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거절하지 않고 술이 오는대로 마시는 거요." 그 소녀는 애교띤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면서 끈끈한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을 취하게 만들기는 정말 어렵군요." "하지만 그대를 취하게 만들기는 아주 쉽겠지?" 그 소녀는 눈알을 한 번 굴리더니 입술을 질끈 물고는 웃었다. "어떤 여자들은 비록 취했다고는 하지만 취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어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지요. 반면 어떤 여자들은 비록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오히려 취한 것과 다름없기도 하거든요?" "참으로 묘하군, 묘해. 과연 여자가 여자를 더 잘 안다더니...... 그런데 그대는 어느 쪽에 속하는 것일까?" 그 소녀는 심랑에게 추파를 던지면서 마치 곧 물이 떨어질 듯이 한 자 한 자씩 천천히 내뱉었다. "그...... 그건 상대방이 또 누구이냐에 따라 달라지죠. 어떨 때는 아무리 취해도 취한것 같지 않지만 또 어느 때는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이미 취해 있거든요. 바로...... 바로 오늘처럼......." 주칠칠은 들으면 들을수록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 소녀가 입술을 질끈 물자 주칠칠도 역시 입술을 질끈 물었다. 하지만 두 여인이 입술을 물은 모양은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여자들이 남자들 앞에서 입술을 질끈 물을 때는 보통 죽도록 밉거나 아니면 죽도록 사랑을 할 때, 또는 남자의 뺨을 치고 싶거나 뺨에다가 뽀뽀를 해주고 싶을 때이다. 그 소녀의 눈에서 뭔가가 떨어질 듯했고 주칠칠의 눈에서도 뭔가 떨어질 듯했는데 주칠칠의 눈에서 떨어지려는 것은 눈물이었다. 하지만 그 소녀......그녀의 눈에서 물이 떨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아내 앞에서는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주칠칠은 당장이라도 들어가 그 소녀의 눈알을 빼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야들야들한 그 소녀의 몸이 곧장 심랑의 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주칠칠은 당장 뛰쳐들어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싶었다. 그녀를 끌어내어 통째로 시궁창으로 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시궁창에 있는 사람은 오히려 주칠칠이었으니...... 그녀는 지금 온몸이 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도리없이 그 소녀의 몸 전체가 심랑의 품 속에 안기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심랑은...... 이 나쁜 사람은...... 이 양심도 없는 사람은....... 오히려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바로 이때 주칠칠은 막 눈을 감으려했지만 또 도저히 감을 수가 없었다. 밉고 분통이 터져 미치기 일보직전에 그녀의 구세주가 나타났다. '띵띵'하며 패물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청아하면서도 듣기좋게 들려왔다. 이어서 은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이 소리는 패물이 부딪치는 소리보다 더 듣기가 좋았다. 이 웃는 소리만으로도 이번에 오는 여자 또한 절색이 분명함을 미리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난향 같기도 하고 사향 같기도 한 향기까지 동반하여 사람의 혼백을 빼앗아 가기에 족했다. 심지어 주칠칠도 이 작은 구멍으로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주칠칠은 더욱 조마조마했다. 한 소녀만으로도 미칠 지경인데 또 한 명이 오고 있으니 어떻게 될 것인가. 심랑은 아마도 이 여우들에게 완전히 현혹돼서 차마 죽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제 누군가가 왔으니 두 눈에 온통 요기가 꽉 찬 이 소녀는 더 이상 심랑의 품 속에 있지는 못하겠지. 과연 그 소녀는 심랑의 품 속에서 빠져나왔다. 마치 놀란 토끼처럼 애교스런 웃음도 이미 사라졌다. 마침내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이건 마치 선녀가 들어오는 듯했다. 그녀는 뭘 입었을까? 뭘 쓰고 있을까? 그녀의 뒤에는 몇 사람이 오고 있을까? 그들은 또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주칠칠은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웅묘아는 더더욱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은 지금 들어온 사람에게로 빨려들어 갔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빛이 발하는지 모든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했다. 이렇듯 요염한 빛을 사방으로 발하는 선녀는 뜻밖에도 바로 왕련화의 어머니였다. 심랑은 옷을 좀 떨치더니 가만히 웃으며 양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왕 부인......." 왕 부인도 웃음을 머금고 인사했다. "심 공자......." 두 사람은 마치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이 오늘에서야 만난 듯, 혹은 오늘 처음 서로 인사를 하고 겸손하게 대하듯 마주보고 앉았다. 주칠칠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약간 떨어져 앉았기 때문이다. 그 소녀는 다시 술주전자를 들더니 이번에는 아주 얌전하게 심랑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황송하군요, 정말 황송하군요." 왕 부인이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심 공자께서는 염향(染香)에게 그렇게 겸손할 필요가 뭐 있나요?" "염향이라...... 과연 좋은 이름이군, 좋은 이름이야. 벌써 난실에 들어선 느낌이군요. 과연 인간세상의 선녀인 왕 부인과 함께 오래토록 있다보니 자연히 온몸에 향기(香氣)가 전염(傳染)되는가 봅니다." "심 공자의 언변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시군요." 그녀의 웃음은 비록 매혹적이었지만 자태는 매우 정중했다. 사람의 혼을 빼앗을 듯 유혹적이었지만 막상 가까이 하려 할 때면 그녀의 자태는 감히 근접을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그녀는 깊은 뜻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염향 이 계집애도 참으로 귀여운 애죠...... 심 공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화려한 봉황 곁에 어찌 까마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그녀가 술주전자를 들고 있을 때면 본인은 약간 두려울 뿐이지요." "염향아, 아까 심 공자께 술이 취하시도록 권했느냐?" 염향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말없이 옷자락만 만지작 거렸다. 왕 부인은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가볍게 꾸짖었다. "넌 분명히 내가 심 공자와 대사(大事)를 논의(論��)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 감히 심 공자를 취하게 하려고 했느냐? 심 공자께서 만약 정말로 취했다면 어찌될 뻔 했느냐?" 염향은 대답을 안 했지만 오히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분명히 부인께서 제가 취하도록 술을 먹이라고 그녀에게 시켰으면서 어찌 부인께서는 그녀를 혼내는 것이오?" 왕 부인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럴까요?" "제가 취하면 말하기가 훨씬 수월할 테니까요." "왜죠?" "향기로운 술에 옥과 같은 미인이라면 모든 남자들의 의지를 연약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것이오. 만약 본인의 의지가 약해지면 부인은 날 부리기가 훨씬 쉬울게 아닌가요?" 왕 부인은 겸연쩍게 웃었다. "심 공자께서는 과연 총명하시군요. 아무도 심 공자를 속일수가 없겠어요. 하지만 심 공자께서 이렇게 총명하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백방으로 손을 써 이곳으로 모셔왔으며 이렇게 대화를 나누겠어요?" "왕 부인께서는 제게 의중(意中)을 들켰는데도 전혀 부인을 하지 않으시니 과연 고명(高明)하십니다...... 하지만 부인께서 이토록 고명하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가 이 시간에 여기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왕 부인은 더욱더 달콤하게 웃기 시작했다. "련화가 공자를 모셔오는 과정에서 매우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심 공자에게 사과를 드리지요." "저는 벌써부터 부인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길은 험하고 선녀의 일면은 더욱 보기 어려웠으니 만약 왕 공자가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다시 부인을 뵐 수 있었겠습니까? 부인께서 제 대신 왕 공자께 저의 사의(謝意)를 전해 주십시오." 왕 부인은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어쨌거나 심 공자께서는 조금 놀라셨지요?" "저는 이미 이곳에 오면 반드시 선녀같으신 부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더구나 왕 공자께서는 절대로 저를 해칠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왜 놀라겠습니까?" 왕 부인은 은방울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련화는 일을 하는데 있어 항상 멋대로지요. 그런데 공자께l서는 어떻게 그가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나요?" "그 이유는 제가 아직은 이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지요. 큰 일을 도모吉이는 부인께서 어찌 쓸모있는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결국 두 사람은 동시에 웃기 시작했다. 왕 부인의 교태가 가득 담긴 웃음은 만인을 매혹시킬 듯했고 심랑의 웃음 역시 소녀의 가슴을 울렁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웅묘아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 두 사람은 과연 막상막하니 서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군.) 심랑 외에 감히 누가 왕 부인의 언변을 당해낼 수 있고 왕 부인의 매혹적인 웃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만약 웅묘아 심랑이었다면 그는 아마 말조차도 꺼내지 못 했을 것이다. 주칠칠은 내심 이를 악물었다. (저 늙은 여우가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을 갖고 있는 것일까? 왜 저렇듯 심랑에게 웃음을 보내는 것이지? 설마 저 여자도 심랑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심랑은 드디어 웃음을 멈추고는 왕 부인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그는 천하의 모든 남성들이 감히 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눈을 주시 하면서 서서히 말했다. "이제 저와 부인이 피차 서로를 이해하게 됐군요. 부인께서는 무슨 분부가 있으시면 말씀해 보시지요." "분부란 말은 좀 감당할 수 없네요. 단, 공자께 드릴 청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부인께서는 저를 이용해서 한 사람을 상대하려는 것 아닌가요?" "과연 공자께서는 저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군요...... 맞아요. 저는 바로 공자의 힘을 빌어 한 사람과 대적하려는 거예요. 그 사람은 바로.....," 심랑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허리를 잘랐다. "쾌락왕?" "그 사람 이외에.... 그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감히 공자를 이곳까지 모셨겠어요?" "하지만....아드님께서는 이미 천하의 기재인데다가 본인조차 그의 적수가 아닙니다. 게다가 부인까지 계시지 않습니까? 부인께서는 어찌하여 저까지 필요로 하시는 지요? 제가 할수 있는 일은 아드님도 다 할 수 있는 일일 텐데요." "련화가 비록 약간 좋아하기는 하지만 어찌 감히 공자의 만분의 일에 미치겠어요? 더구나 이번 일에 관한 한 그는 절대로 참여할 수 없어요." "무슨 일인데요?" "쾌락왕의 능력은 공자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죠?" "조금은 알고 있죠." 왕 부인은 탄식을 했다. "그 사람은 비단 여우같은 간교함만 있을 뿐 아니라 사자나 호랑이 같은 용맹함까지 갖추고 있어요. 이런 사람과 겨룰 때는 머리나 힘으로는 결코 당해 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부인은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약점을 갖고 있기 마련이죠. 쾌락왕 역시 사람임에는 분명하기에 예외는 아니지요. 우리가 그를 이기려면 반드시 그의 약점을 중점적으로 공격을 해야 할 겁니다." "그도 약점이 있다니, 혼치 않는 일이군요." "그 사람의 약점은 좋게 말하자면 '재능있는 사람을 목숨처럼 아낀다'라고 표현할 수있고, 안좋은 말로 하자면 '아첨을 좋아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어쨌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그에게 투신한다면 그는 절대로 문전박대 (門前薄待)는 하지 않을 거예요." "세상 모든 것은 들통이 날지언정 아첨만은 들통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요. 쾌락왕도 역시 남에게 아첨받는 것을 좋아하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식객이 있을 리가 없겠죠." 왕 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바로 그래요. 하지만 그의 밑에 비록 식객이 많다해도 진정으로 걸출한 인물은 하나도 없어요...... 즉 공자처럼 걸출한 사람 말이오. " "부인께서는 저더러 그의 식객이 되라는 말씀이신가요?" 왕 부인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공자께서는 좀 억울하시겠지요. 그러나 어차피 저와 공자의 대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즉,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요?" "부인은 저에게 쾌락왕 곁에 있으면서 첩자 노릇을 하라는 것이군요. 하지만 이러한 일에는 저보다 아드님께서 훨씬 더 적격자일텐데요." "이 일은 절대로 련화가 해서는 안 되요." "네?" "왜냐하면...... 왜냐하면.......," 심랑은 크게 웃었다. "왜냐하면 그 일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죠?" 왕 부인은 길게 탄식을 했다. "공자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저의 뜻을 완전히 무시하시는 거예요. 제... 제가 어찌 공자께 위험한 일을 시킬 수 있겠어요? 저는 련화를 위험에 빠지게 할지언정 공자를 위험에 빠지게 하지는 않아요." "네?" "사실 이 일은 련화가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이지요. 비록 기지(奇智)야 공자보다는 못 하겠지만 억지로 쓸만은 해요. 그러나 그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심랑이 물었다. "무슨 문제인가요?" "쾌락왕이 그를 알아보거든요." 이 말을 듣고는 심랑은 자신도 모르게 안면이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 공자의 역용술은 천하무쌍인데...." 왕 부인은 웃음을 머금고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련화의 역용술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만약 련화가 역용을 한 후에 하루종일 공자와 함께 있는다면 공자께서는 그를 끝까지 못 알아볼까요?" "그렇군요. 제가 알아볼 수 있다면 쾌락왕도 물론 알아볼 수 있겠지요." "바로 그래요... 그리고 비록 련화가 둔하지는 않지만 그를 대신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가 않지요. 공자, 당신 외에는 세상에서 이 일을 해낼 사람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쾌락왕 밑에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죠?" "김무망(金無望)이오." 왕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은 공자와 교분이 매우 두터우니 결코 당신을 폭로하지는 않을 거예요." 심랑은 매우 감탄을 했다. "부인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군요. 하지만.... " "하지만 당신과 별로 교분이 두텁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거지요?" "바로 그렇소. 주사(酒史) 한령(翰伶)과 색사(色史)강좌사도(江佐司徒)도 있소." "그 두 사람은 이제 영원히 쾌락왕의 얼굴을 보지 못할 거예요," 심랑은 얼굴의 근육을 실룩거렸다. "그들도 나처럼 부인의 손에 잡혀있는 것이오?" "단지 자이가 있다면 공자는 저의 귀빈이시고 그들은 내 죄수라는 것이죠." 심랑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있소." "공자께서는 어떤 일이 궁금증이다는 거죠?" "부인께서는 분명히 쾌락왕이 제게도 적이라는 것과 제가 그 자를 꼭 죽이려 한다는 것도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어째서 꼭 부인의 분부에 따라야 한다는 거죠? 괜히 절차만 복잡하게 하는 것이 아닌지요." 왕 부인이 대답했다. "그건 바로 당신이 쾌락왕을 대적하는 방법이 나와는 다르기 때문이오." "네?" "내가 만약 공자를 이곳으로 모셔오지도, 공자와 맹약( 約)을 맺지도 않았다고 해봐요 그렇다면 공자는 일단 기회만 주어지면 분명히 쾌락왕을 그냥 죽이고 말겠지요, 그렇죠?" "당연히 그럴 것이오. 설마 부인께서는......" "저는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얼굴에 감돌던 매혹적인 미소와 그 유혹적이던 추파가 갑자기 서릿발 같은 비수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녀의 눈길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자 한 자씩 천천히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쾌락왕이 살아 있으면서 그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이 하나 하나 쓰러져가는 것을 지켜보게 할 거예요. 아주 천천히 그에게 타격을 주는 것이죠." 그녀는 탁자를 '탁!' 소리가 나게 치며 매섭게 말했다. "난 그자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을 거예요. 왜 그자를 그냥 죽여준다는 거죠. 그것은 너무 관대한 처사라구요." 그녀에게서는 웃음이 사라졌고 방 안은 서리가 내린 듯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원한이었다! 이 얼마나 깊게 사무친 원한인가? 이 얼마나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원한인가? 그녀를 바라보는 심랑은 마치 넋이 빠진 듯했다. 이 왕 부인은 대체 어떻게 해서 쾌락왕과 그토록 깊은 원한을 맺게 된 것일까? 대체 그것은 어떠한 원한일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왕 부인은 다시 상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웃음은 마치 화사한 봄날의 꽃처럼 세상의 모든 향기와 따스함을 회복시켰다. "이제 심 공자께서는 모든 의문점이 풀렸겠지요?" 심랑도 다시 미소지었다. "만약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면 제가 멍청이지요." "만약 심 공자 같은 분이 저를 위해 쾌락왕 곁에 계셔 준다면 전 쾌락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감시할 수 있을 거예요." 심랑이 말을 받았다. "그렇게 된다면 그가 무슨 일을 꾸민다고 해도 부인께서는 미리 그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겠지요. 그가 비록 하늘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결코 한 가지 일도 성사시킬수 없을 겁니다." 왕 부인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바로 그것이에요." "왕 부인과 같은 적을 두었으니 그는 아마도 전생에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것도 다 심 공자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성사사가 되는 거죠." 그녀는 매혹적인 눈길로 심랑에게 추파를 던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심 공자께서는 승락하시는 거죠?" "제가 감히 어떻게 거절을 할 수 있겠소?" "아마 거절할 수 없을 걸요?" 심랑이 호탕하게 웃었다. "기왕에 거절을 할 수 없다면 기꺼이 승락을 해야겠지요." 왕 부인은 생글거리며 잔을 높이 들었다. "공자께 감사드리는 뜻에서 소첩이 공자 대신 한 잔을 마시겠어요. 그리고 우리의 성공을 미리 자축하기로 해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음지었다. 왕 부인의 달콤한 웃음은 그렇다 치고 심랑의 웃음 또한 매우 기쁜듯이 들리자 웅묘아는 정말 분통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내심 이를 갈았다. (정말 심랑, 저 자식이 저렇게 기개가 없을 줄이야. 왜 거절을 할 수 없다는 거야? 설마 그녀에게 먹힐까봐 두려운 것인가?) 만약 입장을 바꿔 심랑이 웅묘아였다면 그는 죽어도 승락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에게 억지로 일을 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그 어떠한 일이라도 말이다. 사실 심랑은 우선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주칠칠은 웅묘아보다 더 심통이 났다. (저 늙은 여우가 호칭까지도 바꿨네. 저렇게 묽은 것이 스스로를 '소첩'이라고 부르다니. 그리고 또 심랑보고 '우리 어쩌구 저쩌구. 우리'하면서 알랑대는 꼴이라니 정말 두 눈뜨고 못 보겠네. 어쩐지 왕련화의 얼굴이 그렇게 두껍더라니, 알고보니 그의 엄마 얼굴은 그보다 열 배는 더 두껍군.) 탕부(蕩婦)와 성녀(聖女) 왕 부인은 심랑에게 술 한 잔을 대신 마시겠다고 하고는 실지로는 세 잔이나 마셨다. 이 세 잔의 술은 그녀의 뺨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미간에도 춘색(春色)이 감돌았다. 웅묘아는 이 광경을 보고는 더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즉, 심랑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혹시 계책이 있어서가 아닐까? 왕 부인이 그를 놓아준 후 그가 관외로 가면 그 누가 그를 제지할 수 있겠나? 즉 승락한다는 것은 곧 승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겠지.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 왕 부인이 그가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총명하지가 않고 오히려 멍청하다고 느낀 것이다. 웃음소리와 함께 왕 부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소첩은 비록 술기운을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오늘은 반드시 심 공자와 함께 밤새 통음(痛飮)하고 싶군요...... 한 삼일 낮, 삼일 밤 동안 마신 뒤 소첩이 공자를 전송하죠." "전송?" "네! 이제 삼일 후면 공자께서는 곧 경천동지할 대사를 이루기 위해서 멀리 관외로 떠나시니 소첩이 어찌...... 소첩은 이 삼일간을 더욱 뜻깊게 간직하고 싶군요." 그녀의 눈빛 속에 담긴 춘의(春意)는 정말 술보다 더욱 사람을 취하게 했다. 그러나 심랑은 그녀의 눈을 주시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녀의 눈빛 속에 담긴 끈끈한 의미를 모르는 듯했다. 그는 단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 그냥 이렇게 떠난단 말인지요?" "물론 그냥 가는 것은 아니죠. 소첩은 벌써부터 공자의 행색을 당당하게 하려고 준비를 해놓았어요." "전 아직 쾌락왕의 행적을 모르고 있는데......." 왕 부인은 그의 말을 끊었다. "그건 공자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첩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봐요. 공자께서 될수록 빨리 쾌락왕을 만나게 해드리지요." "그를 만나면 또 어떻게 해야 하오?" 왕 부인이 간드러지게 웃었다. "공자께서는 혹 내숭이라도 떠는 거예요?" "똑똑한 체 하기도 바쁜데 뭣하러 내숭까지 떨겠습니까?" "이처럼 출중한 인품에다 또 강호에서 별로 낯설지 않은 공자를 쾌락왕이 본다면 어찌 보물단지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공자를 놔주려고 하겠습니까?" "쾌락왕이 반드시 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는 말인가요?" "그야 물론이죠. 큰 일을 도모하려는 사람은 절대로 공자님과 같은 인물을 놓치지 않아요...... 쾌락왕이 만약 공자를 그냥 보낸다면 그는 결코 진짜 쾌락왕이 아니죠." 심랑이 눈을 깜박였다.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 공자께서는 당연히 쾌락왕의 심복이 되시는 거죠." "꼭 그럴래야 할까요? 그가 만약 저를 신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죠?" 부인은 생긋이 웃었다. "공자와 같은 분이 어떻게 신임을 얻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진주가 아무리 흙 속에 섞여 있다고 해도 빛을 발하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심랑이 크게 웃어제꼈다. "부인께서는 저보고 모수(毛遂)가 스스로를 천거한 것처럼 하라는 것이군요?" "다만 그 모수(毛遂)가 어찌 공자와 비견될 수 있겠어요?" "좋습니다. 이제 부인께서는 마지막으로 남은 딱 한가지 일만 말씀을 해주시지요." 왕 부인은 매혹스런 웃음으로 물었다. "무슨 일 말인가요?" "부인께서 그냥 저를 놔줄 리는 없겠지요? 부인께는 분명 제가 관외로 나가서도 절대로 부인의 뜻을 거역못하게 할 계책이 이미 서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어떤 방법인지 맞춰 보세요." "내 비록 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세상에 극히 천천히 발작하는 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독을 잘 쓰는 사람이 이 독을 쓰게 되면 심지어는 독을 언제든지 지정한 날짜에 발작하게 조작까지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결국 중독된 사람이 지정된 시각에 그 해약을 먹지 못한다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고. 이는 마치 묘강(苗疆)지방의 여자가 쓰는 고(蠱)와 매우 흡사한 것이죠." 그는 계속 이어서 말했다. "이런 독약은 어쩌면 벌써 내 뱃속에 들어 있는지도 모르죠." "공자께서는 당금(當今)의 국사(國師)이신데 소첩이 어찌감히 그러한 수단으로 공자를 대하겠습니까? 소첩이 만약 그런 식으로 공자를 대한다면 이는 비단 공자만을 얕본 것 뿐 아니라 저 자신조차도 얕본 것이나 다름이 없죠." "그렇군요. 이 세상에 독을 쓰는 선녀가 있을 리는 없죠. 먼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다시 계속해서 말씀해 보세요." 심랑은 좀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부인께서는 비록 스스로는 관외(關外)까지 저를 따라오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사람을 시켜 저를 감시하고 심지어는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게......." 왕 부인은 요염하게 웃으면서 심랑의 말을 막았다. "지금 그 방법의 좋고 나쁨을 떠나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에 그 누가 심공자를 감시할 수 있겠어요? 소첩이 아무리 둔하기로서니 설마 그런 아둔한 방법을 쓰겠어요?" "혹시 부인께서는 저더러 죽음의 맹세를 하라는......." 왕 부인은 다시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맹세지요. 만약에 남자의 맹세를 믿는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는 평생토록 상심하며 살거예요." 심랑은 박장대소했다. "부인께서 바로 그 장본인이 아니십니까?" 왕 부인은 가볍게 그를 흘겨 보았다. "지금 모습이 상심해하는 것 같아 보이나요?" "그렇군요. 항상 남을 상심케하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는 상심하지 않죠." 결국 두 사람은 또다시 서로 마주보며 웃었는데 두 사람의 웃는 모습에는 과연 상심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웅묘아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또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심랑 이 녀석아! 지금 이런 처지에 그녀와 그렇게 웃을 여력이 남아 도느냐? 심랑아! 심랑아! 너는 자신이 총명한 줄 알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이 너를 어떻게 대할지 전혀 모르고 있지 않느냐?) 사실 그는 왕 부인이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 몰라 더더욱 초조했다. 주칠칠은 이제 분통이 터지기보다는 마음이 아팠다. (항상 남을 상심케하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는 상심하지 않는다...... 좋아요, 좋아. 심랑, 당신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군요. 뜻밖에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니 이제야 당신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어요.) 사실, 심랑이 대체 어떠한 사람인지는 그녀도 모르고 있었다. 술기운은 더욱 짙어만 갔다. 부인은 깔깔대며 웃었다. "설마 심 공자께서는 이런 둔한 방법 외에는 제게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부인께서는 계략이 너무 뛰어나시니 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군요." "소첩이 설마 공자를 협박할 리가 있겠어요? 공자를 감시하기보다는 공자 스스로 하시기를 원하는 것이죠. 그러면 소첩이 감시하거나 협박을 할 필요가 없구요." 심랑이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아......! 그것을 미처 생각 못했군요." 왕 부인은 더더욱 매혹적인 웃음을 보냈다. "공자께서는 잊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잊은 척 한 것이겠죠." "하지만 부인께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에게 마음 속으로부터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왕 부인의 달콤한 웃음은 이제 아예 뼛속으로 스며들 것만 같았다. 그녀는 섬섬옥수로 가볍게 머리를 만지작 거렸는데 그녀의 그 섬섬옥수...... 그 부드러운 머리결...... 그 절세의 자태만으로는 그 누구도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나이를 잊게 할 지경이었다. "그야 물론 쉽지 않다는 것을 소첩은 알고 있죠. 하지만 얻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진귀한 것이죠. 특히 여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답니다." "그것은 옛말이죠." "옛말은 늘 옳았죠, 안 그래요?" "그것도 역시 옛말이죠." 왕 부인은 교태를 부렸다. "진귀한 것일수록 진귀한 것으로 맞바꿔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심랑의 대답은 여전했다. "그것도 역시 옛말이군요." 그는 연달아 세 번을 똑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전혀 안색을 바꾸지 않았다. 왕 부인도 연속 세 번을 들었는데도 마치 아무 일이 없다는 듯했다. 밖에서 듣고있던 웅묘아가 오히려 화가 나서 욕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옛말은 무슨 놈의 옛말!) 왕 부인의 웃음 섞인 말소리가 들렸다. "강호에서 가장 얻기 어려운 것으로서 진귀한 물건으로는 모두 세 가지가 있는데 어떤 것들인지 알고 있나요?" "그건 아마도 옛말이 아닌 듯하니 들어보질 못했군요." "생각해 보세요...... 그리 옛말은 아니니까." 심랑은 한참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소림사 장경각(藏經閣)에 소장된 달마신경(達摩神經)이 혹 그 셋 중의 하나가 아니오?" "소림사가 비록 무림 제일문파라고는 불리워지지만 소림사 스님들의 무공은 기껏해야 '평범'하다는 평 밖에는 못 들어요. 여태껏 천하제일의 고수를 배출한 적이 없었어요. 이것으로 볼 때 소림사에 대한 각종 소문들은 단지 소림사 스님들이 괜히 신비스럽게 꾸민 것 뿐이겠지요. 사실, 실제로 그러한 경이 있는지조차 의문이며 그 경 안에 정말로 무상(無上)의 무공심법(武功心法)이 들어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가 없는 노릇이죠. 그러니 그것은 아니오." "소림사의 신경조차도 낄 수가 없다구요?" 왕 부인은 확언했다. "낄 수 없어요." "그렇다면 다른 무공비급들은 더더욱 낄 수 없겠군요." "무공비급은 죽은 것들이에요. 이 세상에서 과연 몇 사람이 비급에서 무공을 배웠을까요? 무공을 배우는 데에 있어서는 지혜, 의지력, 경험, 그리고 시간만이 절세의 무공을 익히는 진정한 요소이지요. 그런데도 무지한 세상 사람들은 늘상 이러한 무공비급에 대한 각종 전설에 미혹되고 있지요. 특히나 그 무적화상(無敵。尙)의 무공비급은 비급 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에게 해로운 비급이었죠." 그녀가 한 말은 비록 여태까지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각종 전설들을 전부 번복한 것이지만 사실상 매우 합당하게 표현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심랑조차도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심랑이 감탄하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과연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생각을 하시고, 또 다른 사람들이 감히 못하는 말을 하시니 갑자기 저의 아둔한 머리가 시원해 집니다. 만약 과거에 천하영웅들이 이러한 원리를 조금이라도 일찍 깨달았다면 결코 황산지회(黃山之會)와 같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며 오늘날의 무림 역시 이러한 국면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과연 부인의 지혜는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군요." "소첩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아첨이었는데 오늘 공자의 칭찬을 들으니 그 무엇보다도 기쁘군요. 어디 다시 알아 맞춰 보세요." 심랑은 또다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맞았소, 운몽선자(雲夢仙子)의 운몽령(雲夢令)은 가는 곳마다 무림군웅들이 모두들 고개를 숙이니 아마도 그 셋 중의 하나일 것이오." "공자께서는 또 소첩에게 아부하시는 군요. 설사 소첩이 옛날의 운몽선자라고 할 지라도 공자님의 말씀을 들어서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그 운몽령은 단지 사람을 겁주는 것에 불과하니 결코 보물로 취급할 수는 없어요." "역시 아닙니까?" "단지 폐철에 불과할 뿐, 절대 아니에요." 심랑은 천천히 말했다. "그럼...... 옛날에 전(展)대협이 사용하시던 고철검은 그냥 폐철이 아닐테니 그것은 낄 수 있겠지요?" "검도 역시 죽은 물건이에요. 비록 천하 제일의 병기이긴 하지만 만약 보통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다면 폐철하고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그녀는 웃으며 염향을 가리켰다. "염향의 손에 만약 간장이나 막사와 같은 명검을 쥐어준다고 해서 당신을 이길 수는 없잖아요?" 심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맞소, 그것도 역시 낄 수 없군요." "소첩이 말한 세 가지 보물은 보통 사람들이 갖게된다 해도 소용이 있는 것들 이에요. 또 그래야 진정한 보물이 되는 것이지요." "부인께서 말하는 보물이란 혹 산 것이 아닌지요?" 왕 부인은 눈을 굴리더니 미소지었다. "하나는 죽은 것이고 나머지 둘은 산 것입니다." "술을 좀 마시면서 영감(靈 )을 얻어야겠군요." 염향이 곧 술을 따르자 왕 부인은 심랑에게 술을 권했다. 심랑은 한 잔을 마시고는 갑자기 손뼉을 치더니 말했다. "맞아, 옛날에 고씨(高氏)성의 세가(世家)가 남긴 억만대의 재산이오. 이것은 비록 보통 사람들이라도 얻게 되면 왕족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평생 부귀를 누리고 살 수 있으니 아마도 그 셋 중의 하나겠군요." "결국은 공자께서 하나를 맞추셨군요...... 맞았어요, 고씨 세가의 재산은 바로 강호인들이 몽매에도 그리며 찾는 것이죠. 그럼 나머지 살아있는 둘은 뭐죠?" 심랑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살아있는 것이라...... 살아있는 것이라. 혹시 장백산 왕의 말이 아니오?" "틀렸어요." "그렇다면 혹시 신포 구남의 개가 아니오?" "틀렸어요." "혹시 백수산장(百獸山莊)의 호랑이...... 혹시 새과로(賽果老)의 검은 노새...... 천산적가장(天山狄家莊)의 신응(神鷹)은 아니오?" 왕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틀렸어요...... 틀렸어요...... 다 틀렸어요." "혹시 운남(雲南) 오독교(五毒敎)의......." 왕 부인은 손으로 코를 막으며 소리쳤다. "아이고, 그만 말하세요. 그것들은 듣기만 해도 징그러워 토할 것 같은데 어떻게 보물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심랑은 한탄을 했다. "이젠 정말로 더이상 댈 것이 없군요. 강호의 수많은 명금이수(名禽異獸)들의 이름을 다 불렀는데 그래도 다 아니라시니 더이상 생각나는 것이 없소."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금수(禽獸) 뿐인가요?" "그. 그럼 또 뭐가 있죠?" 왕 부인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이 있잖아요!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요?" 심랑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실소를 흘렸다. "사람이라...... 그렇군요, 사람이 있었군요." "이제는 알 수 있겠죠?" 심랑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더욱 맞출 수가 없군요. 세상에는 기라성 같은 기재(奇才)들이 많은데 하물며......." 왕 부인이 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좋아요, 소첩이 가르쳐 드리죠. 고씨 세가의 재산 외에도 두번째로 진귀한 보물은 바로 옛날의 심천군(��天君)...... 심천군의 손이에요." 심랑의 얼굴 근육이 약간 경련을 일으켰다. "손...... 심천군의 손이라구요?" "그래요. 심천군의 손은 담소하는 동안에라도 산을 무너뜨리거나 집을 쓰러뜨리 듯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파멸시킬 수 있었어요. 게다가 어떤 정교하고 불가사의한 물건이라도 만들 수가 있었지요. 심천군의 손이 약간만 가서 닿으면 강호의 어떠한 일이라도 전부 변할 수 있죠." 심랑은 넋이 나간 듯 듣더니 꼼짝도 않고 중얼거렸다. "심천군...... 의 손...... 아! 좋은 손이군." 술잔을 들더니 단번에 들이켰다. 왕 부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세번째 물건이 가장 진귀한 보물이죠." 그녀도 술잔을 들더니 역시 단번에 다 마시고는 매혹적인 눈길로 심랑에게 추파를 던졌다. "아직도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세 잔을 연달아 마시고는 얼굴이 붉게 물들면서 눈을 가늘게 떴는데 삼십 잔을 마신 뒤에도 그녀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세 잔을 마실 때와 전혀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심랑은 그녀를 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부인 자신이 아닙니까?" 왕 부인의 은방울을 구르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이번에도 공자께서 맞추셨군요." 옆에 있는 염향의 요염하고 혼을 앗아갈 듯한 눈빛만으로도 이미 뼈가 녹아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왕 부인과 비교하면 그건 단지 죽은 물고기에 불과했다. 염향의 눈은 이미 주칠칠로 하여금 그 눈알을 파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켜 놓았다. 그런데 지금 왕 부인의 교태는 그녀로 하여금 숨도 못 쉴 정도로 분통을 터뜨리게 했다. 주칠칠은 같은 여자인데도 왕 부인의 눈길을 보자 어찌된 일인지 온몸이 떨리며 주체를 할 수가 없어 서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왕 부인은 바로 그 눈빛으로 심랑을 바라보았다. "공자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강호에서는 수많은 남자들이 나를 가까이 하려고 하다가 죽었어요. 그들은 비록 죽었지만 전혀 유감을 나타내지는 않았죠." 그녀의 말소리는 매우 느릿하면서도 달콤한 기가 넘쳐 끈적거렸다.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그것은 바로 소첩이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죠. 단지 무공의 기교만 거의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 나의 다른 한면의 기교는 무공보다 십 배 이상 더 높다는 거예요." 심랑은 혀로 입술을 적시고는 술잔을 들어마셨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나에게 협조하기만 한다면 난 어떤 남자라도 신선의 경지로 이끌어 갈 수 있어요. 그에게 전혀 느껴보지 못한 쾌락을 안겨 줄 테니까요." 염향은 붉게 물든 얼굴울 숙이면서 배시시 웃었다. 왕 부인이 꾸짖었다. "넌 왜 웃느냐? 이것도 일종의 예술이다. 지고무상의 예술인 것이다. 난 원래 외롭게 살아온 여자이지만 바로 이것 때문에 이토록 높은 무공을 얻게 됐고 또 오늘날의 이 모든 것을 이룩하게 된 것이지. 누구든지 내 몸과 한 번만이라도 접촉을 하게되면 절대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야." 심랑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왕 부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또한 수없이 많은 남자들과 수없이 많은 이름난 남자들이 다시 한 번 선경에 도달하고 싶어서 모든 것을 다 바쳤지요. 무릎을 꿇고는 내게 기어와서 부탁을 했지만 지금......." 그녀는 심랑을 바라보았다. "지금 난 이 진귀한 몸뚱이를 당신의 마음과 교환하고자 하오. 내 생각에 이것은 아마도 공평한 교역(交易)이라고 여겨지는데......." 심랑은 갑자기 넋을 잃은 듯 전혀 꿈쩍을 하지 않았다. 그도 비록 적지않게 음탕한 요부들을 보아왔지만 이 왕 부인과 같은 요부는 처음 본 것이다. 그녀는 지금 입으로는 가장 음탕한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이나 자태는 너무도 성결했다. 그녀의 요구가 터무니없는 교역이었지만 그녀의 태도를 보니 마치 아주 일반적인 장사를 하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탕부(蕩婦) 중의 성녀(聖女)이며 또한 성녀 중의 탕부였던 것이다. 왕 부인이 다그쳤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죠? 설마 안 믿는 것은 아니죠?" 이렇게 말을 하면서 그녀는 갑자기 손을 올렸다. 곧 그녀의 옷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옷을 벗으면서도 자태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 세상에서 옷을 벗을 때도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는 여인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또 그 누가 옷을 벗을 때의 자태야 말로 남자들로 하여금 가장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는 것을 아는가? 드디어 그녀의 몸은 심랑 앞에서 완전히 벗겨졌다. 미끈한 어깨에 풍만하고 영롱한 가슴, 한 손에 쥐일 듯한 가느다란 허리, 날씬하고 길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다리하며 그 정교한 발은......! 그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성녀와 탕부의 혼합체인 것이었다. 그녀의 몸은 비록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그녀의 표정은 마치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것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나신(裸身)만으로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할 수 있는 여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심랑이 더듬거렸다. "난...... 난...... 난......." "저는 제 몸을 당신에게 바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저도 당신의 마음을 영원히 제게 주시기를 원해요. 저는 당신이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맛보지 못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보증하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당신에게 시집 가겠어요." 웅묘아는 마음 속으로 크게 부르짖었다. "안돼, 안돼, 절대로 안돼!" 주칠칠은 마치 추풍낙엽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던 왕련화의 모친이 심랑에게 시집을 가겠다니, 이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비단 웅묘아와 주칠칠 뿐만 아니라 왕련화조차도 안색이 변했다.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돼!) 왕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 공자, 승락하시겠지요?" 모든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죽인 채 심랑의 대답을 기다렸다. 심랑은 뚫어지게 왕 부인을 주시했다. 입가에는 점차 그의 특유의 나른하고 멋드러진 미소가 감돌았으나 약간은 냉소적이었다. "정말로 내게 시집 온다는 것인가요?" "그야 물론 정말이죠, 당......." "좋소!" 이 '좋소'라는 말은 마치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웅묘아, 주칠칠, 왕련화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충격을 받아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왕 부인도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 "당신 정말 승락하시는 건가요?" "그야 물론 정말이죠. 혼인대사를 어찌 어린애 장난처럼 여기겠소?" 왕 부인은 한참 동안 심랑을 주시했다. 입가에는 서서히 그녀 특유의 요염하고 사람의 심금을 흔드는, 그리고 약간은 음탕한 교태가 섞인 미소가 번졌다. "전 당신에게 다시 한 번 묻고 싶어요." "이제 당신은 내게 어떤 말도 할 수 있는데 겨우 한 가지 질문이 문제가 아니죠." "당신이 승락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승락할 줄은......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빨리 승락하는 거죠?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나요?" 심랑은 젓가락을 들어 새우를 하나 집어 들었다. "난 왕련화를 내 아들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승락을 했을 텐데, 하물며 거기에다 당신까지......." 이렇게 말하던 심랑의 손이 갑자기 움직였다. 젓가락은 새우를 잡은 채 유성처럼 날아가 왕련화가 들여다 보고 있는 작은 구멍을 꿰뚫고 들어갔다. 왕련화는 이미 충격에 넋이 나간 상태였는데 또다시 젓가락이 날아 들자 피할 틈이 없었다. 새우는 그의 얼굴에 정확히 명중하면서 그의 얼굴은 온통 지저분하게 얼룩졌다. 심랑이 통쾌하게 웃어제꼈다. "왕련화, 여태껏 잘 봤겠지? 이제 난 네 아버지가 됐는데 그래도 안 나올테냐?" 왕 부인도 따라 웃었다. "나도 당신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당신은 처음부터 내가 그들이 몰래 보고, 듣고 있는 것을 알게 했지. 그래야 누군가가 몰래 듣고 있다는 것을 아는 상황에서는 말을 신중하게 하게되고 당신에게 승락한 것도 번복할 수 없게 될 테니까." "난 바로 당신이 주 아가씨 앞에서 이런 말들을 하기를 바랐어요. 그녀로 하여금 당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녀는 겉옷을 걸쳤다. "다만 웅묘아의 눈요기만 시켜준 듯하군요." "당신이 만약 몸을 돌린다면 그는 더욱 만족스런 눈요기 감을 얻을 것이오." 왕 부인은 요염하게 말했다. "어차피 난 이미 그를 아들로 삼았으니 어머니의 등 정도 보여주는 것도 별 상관은 없겠지요. 더구나 난 앉아 있었으니까요." "이제 그들을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겠지요?" "누가 감히 당신의 말을 거역하겠어요?" 그녀는 곧 땅에다 대고 가볍게 밟자 갑자기 아무런 소리도 없이 벽이 중간에서 갈라지면서 양쪽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심랑은 웅묘아와 주칠칠을 만나게 됐다. 얼굴에는 온통 분노의 빛을 띤 웅묘아, 그리고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된 주칠칠, 그리고 왕련화도 있었다. 그는 비단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그의 난처하고 낭패해하는 표정은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설사 자신의 바지를 벗어 주고서라도 보기를 원했을 것이다. 주칠칠은 몸은 비틀비틀 거리면서 한 발짝 한 발짝씩 심랑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입술은 비록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그 비통함과 원망이 담긴 눈빛은 만 마디의 말보다 더 날카로웠다. 웅묘아도 비틀거리면서 한 발작씩 심랑에게 다가갔는데 밖으로 드러낸 이빨은 마치 심랑을 질근질근 한 입에 십어 삼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왕 부인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두 분은 여기에 앉으시죠." 주칠칠과 웅묘아는 갑자기 허리가 저려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저 앉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지만 눈길만은 여전히 심랑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심랑이 웃으면서 청했다. "련화 형께서도 어서 이리로 앉으시지요?" 왕 부인이 가볍게 탓했다. "아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련화 형이라고 하나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되겠소?" 왕 부인은 눈알을 한 번 돌리면서 생각했다. "화아야, 어서 아저씨께 인사 올려라!" 심랑이 중얼거렸다. "아저씨라......잠시 아저씨가 되는 것도 괜찮지......." 왕련화가 어기적거리면서 한 발짝씩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어떤가는 보지 않고도 상상이 갈 것이다. 심랑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직 절은 안 해도 되네. 단지 몸을 굽히는 정도의 인사면 족하지." 왕련화는 당장에라도 서있던 자리에서 탁자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만약 지금 왕련화가 화가 치밀지만 않았어도 벌써 참지 못하고 크게 한바탕 비웃었을 것이다. 왕 부인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아저씨의 말씀이 들리지가 않느냐?" "저......저는......."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굽혀 인사를 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에게 배를 맞아서 몸을 굽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랑은 그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질(賢侄)은 마음 속으로 지금 나를 벌써 죽여버리지 못한 것을 상당히 후회하고 있을 거야, 안 그런가?" 왕련화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전......전......." 왕 부인이 애교를 부렸다. "그는 아직도 어린 아이인데 당신이 그애와 똑같이 그러실 필요가 없잖아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며칠 전만 해도 그에게 살려달라고 했었는데 이제는 그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듣게 되다니, 내가 만약 당신 같은 마누라를 두지 않았다면 어떻게 지금처럼 될 수 있었겠소?" 왕련화가 갑자기 웃어댔다. "심 아저씨, 당신은 일부러 소질(小侄)을 화내게 해서 암암리에 이 혼사를 깨뜨리려는 생각이시죠?" 그는 한번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심 아저씨, 당신은 틀렸어요. 소질은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심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다음에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또한 제가 좋아서 부르는 것이니까요...... 모친께서 심 아저씨 같은 인재에게 시집을 갈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해도 모자라는 마당에 어찌 화를 내겠습니까?" 왕 부인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내 착한 아이로구나. 그래야 착한 아이지." 심랑 역시 맞장구를 쳤다. "과연 착한 아이로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니 이제 강호를 풍지박산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이오." 그는 표면적으로는 왕 부인과 같이 기쁘게 웃고 있었지만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왕련화야, 왕련화야! 네놈은 과연 단수가 높은 놈이구나.......) 왕 부인이 살짝 눈짓을 하자 주칠칠과 웅묘아는 수하들에게 들려 나갔다. 그들은 비록 말은 할 수가 없었지만 그들이 보여 준 무언의 분노는 이 세상의 그 어느 부르짖음보다도 더 무서웠다. 또 그들의 무언의 비애(悲哀) 역시 이 세상 그 어느 울부짖음보다도 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무언의 원한과 원한에 사무친 눈빛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심랑은 조용히 그들이 들려나가는 것을 바라다 볼 뿐, 전혀 동요된 느낌이 없었다. 그의 입가에는 웃음도 없었지만 분노의 기색도 없었다. 이제 방 안에는 심랑과 왕련화 그리고 왕 부인만이 남았다. 왕 부인은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 화도 나지 않고 괴롭지도 않은가요?" "내가 왜 화를 내고 괴로워야 해야 하오?" "그들은......." "난 당신이 그들을 잘 대해 주리라는 것을 잘 알고있는데 뭣 때문에 화를 내겠소? 더구나 그들은 죽은 것도 아니고 당장에 죽을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괴로워 하겠소?" 왕 부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전 사실 당신이 화를 낼까봐 걱정을 했는데......." "응?" "저는 당신의 머리가 이리도 냉정하게 잘 돌아갈 줄은 미처 몰랐어요. 내가 당신과 같은 사람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모르실 거예요."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나를 칭찬하지 마시오." 왕 부인은 은구슬이 굴러가는 듯이 요염하게 웃고는 심랑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이제 그들은 가버렸어요." "응." "염향마저 갔어요." "응." "내가 왜 그들을 다 내보냈는지 아시겠죠?"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마도 나와 중요한 일을 상의하려는 것이 아니겠소?" 왕 부인이 다시 추파를 던지면서 매혹적으로 웃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심랑은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모르겠소." "당신 괜히 모르는 척 하시는군요." 심랑이 눈을 깜박거렸다. "혹시 당신과 나의......." 왕 부인은 교태를 부리며 고개를 숙였다. 왕련화가 끼어 들었다. "소질도 언제쯤에야 아저씨에 대한 칭호를 바꿀 수 있나 정말 궁금합니다." 심랑이 대꾸했다. "날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매우 만족하고 있네." "하지만 소질은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그 날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구요." 세상에, 그가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다니, 그것도 전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말이다...... 그의 심보가 흑연탄처럼 시커멓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심랑은 그런 말을 듣고도 오히려 똑같이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맞장구 쳤다. "그래,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언제가 좋겠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아예 오늘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밤이라...... 너무 급한 것 같군." "그럼...... 내일은요?" 심랑이 웃으며 물었다. "자네 모친과 내가 급하지 않는데 자네가 왜 그리 급한가?" "속담에도 '황제는 급하지 않는데 오히려 내시가 조급해 한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소질이 보기에는 내일이 가장 좋을 듯하고 모레는...... 비록 약간 늦은 감이 있지만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군요." "내일은 좋지 않고 모레도 그런대로 괜찮지가 않아!" "다 싫다고요?" "그래." 왕 부인은 그때까지도 마치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서 못 들은 척 하고 있었다. 그녀도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고는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은 이제 삼 일 후면 떠나야 해요. 난 비록 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삼 일 안으로 일을 모두 끝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그래야...... 저도 안심을 할 수 있겠구요." "이삼 일 안으로는 안 되오." 왕 부인은 안색이 약간 변했지만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럼 언제쯤에?" 심랑은 미소를 지으면서 또렷하게 말을 내뱉었다. "바로 당신의 남편이 죽으면." 결국 왕 부인의 안색은 크게 변하고 말았다. "내 남편?" "그렇소. 내 비록 남의 첩이 되는 기분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과히 좋지는 않으리라 보오. 그래서 나도 '남자첩'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소."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웃음은 때로는 불안을 감출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남자첩이라니오? 세상에 당신도 그런 말을 할 줄 알다니.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한 여자도 물론 두 남자를 거느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제게 어디 남편이 있다는 거죠?" "당신에게 남편이 없다구?" "없어요." 심랑이 웃으며 왕련화에게 눈길을 한 번 주더니 다시 말했다. "그럼 저 아이는......." "비록 남편이 있었지만 이미 죽은 지 오래 됐고 저도 그를 잊은 지 오래 됐어요." 그녀는 매혹스러운 웃음으로 심랑을 바라보면서 계속 말했다. "당신같이 총명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즉 저 같은 과부는 소녀보다도 더 부드럽고 소녀보다도 더 친절하고 아는 것도 더 많다는 것을 말이죠. 물론 남자를 시중 드는데 있어서도 소녀보다 더 잘하지요. 그래서 총명한 남자들은 다들 과부를 아내로 얻고 싶어하는데 당신은 원치 않은가요?" "물론 나도 원하고 있소. 단지 안타까운 것은...... 당신은 아직 과부가 아니라는 것이오." "당신은 내 남편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요? 맙소사, 이제보니 당신이 나보다도 내 남편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다는 말인데 그를 만난 적이 있었나요?" "내 비록 그 '노선배'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를 알고는 있소." "그럼, 그가 대체 누구죠? 어디 한 번 말해 보세요." "그는 예전에는 시옥관(柴玉關)이라는 이름을 가졌었으나 지금은 '쾌락왕'이라고 불리지." 왕부인의 정체 흥농산에 대해 들어 봤나요?" "혹시 서북청성(西北靑城)이라고 불리우는 곳 아니오?" "맞았어요, 난주 부근의 산은 전부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곳이라서 황량하지요. 하지만 이 흥룡산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우거진 숲이 사방에 둘러있어 가히 서북 제일의 명산이라고 할 수 있죠." "흥룡산이 쾌락왕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요?" "당신은 흥룡산에 '삼원천(三元泉)'이라는 샘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내가 흥룡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소." 왕 부인은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럼 지금 제가 가르쳐 드리죠. 당신은 또 하나의 지식이 느는 거구요. 이 삼원천이라는 샘물은 돌 틈에서 흘러나와 좌,우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내려오죠." "좌,우 양쪽이라면 단지 두 갈래의 길 밖에 안 되니 '이원(二元)'일 텐데 어째서 '삼원'이라는 것이죠?" 왕 부인은 살짝 그를 흘겨보더니 짐짓 화가 난 척했다. "아직 내 말이 다 끝나지 않았잖아요!"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 두 갈래길의 샘물은 곧 석조(石槽)를 거쳐 궤짝 같이 생긴 수궤(水櫃)로 흘러 들어 가지요. 이 수궤에는 세 개의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 샘물은 다시 이 구멍을 지나 다시 반원형의 연못으로 흘러가고 그다음에는 다시 또 청석(靑石)으로 된 꼭지를 거쳐 다른 석조로 흘러들어 가고요. 이 석조에도 작은 구멍이 있어서 샘물은 바로 이 작은 구멍을 거쳐 깊은 담(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죠." 심랑이 감탄하며 말했다. "대단히 복잡하군요." "비록 이렇게 복잡하기는 하지만 이 몇 번의 여과를 거치면서 담으로 흘러 들어가니 담 속의 물은 맑기가 거울 같고 맛도 향기롭고 달아서 가히 서북(西北) 제일의 샘이라고 할만 합니다." "이 샘물이 쾌락왕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강호에서는 단지 그가 술을 좋아한다는 것만 알지 그가 또 다른 취미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죠." "다도(茶道)를 말하는 거요?" "맞았어요, 옛날에 그와 함께 지낼 때는 매년 함께 금산(金山)으로 올라가서 그 곳 천하 제일의 샘물로 차를 끓여 마시곤 했지요. 그는 저녁에는 술을 마시고 아침에는 차로 해장을 했어요. 한 번 갔다하면 거의 보름 동안을 그곳에서 지내고 돌아왔는데 이 보름 동안에는 그는 모든 일을 뒤로 미뤘어요." 슬픈 옛추억을 되새기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렇듯 슬픈 옛일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데 그토록 차가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녀의 표정에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심랑이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금산으로 다도를 즐기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겠군요." 왕 부인은 마치 그의 말을 못들은 듯이 계속 말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는 곧 두 사람을 흥룡산으로 급히 보냈죠. 당신은 그들이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내 비록 그들 두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은 다도에 능통하고 다른 한 사람은 술을 조제하는 데에 능통할 것 같군요." "당신은 과연 총명하시군요, 척하면 통하니까요." 그녀는 계속 말했다. "그 두 사람 중 하나는 이등룡(李登籠)이란 사람인데 그는 원래 세가(世家)의 공자였지만 지금은 몰락한 상태죠." "모든 세가의 공자들은 다도(茶道)에 능통하죠." 왕 부인이 크게 웃었다. "이번에는 당신이 틀렸어요. 그는 비록 차를 음미하는 것은 즐기지만 차를 끓이는 데에는 별로 능통하지 않아요." 심랑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하지만 그에게는 춘교(春嬌)라는 애첩이 있는데 다도의 대가랍니다. 차를 끓이려면 우선 차와 물이 좋아야 하지요. 차를 끓이는 물의 온도 또한 무시 못하는 점이고...... 심지어는 차를 끓이는 화로나 장작, 주전자 등 모두가 수준급이어야 하는 거예요." "부인께서도 상당한 수준인 것 같군요." 왕 부인이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돌아온 후에는 우리 함께 금산에 가요. 모든 잡일들은 잊어버리고 아주 멋지게 며칠 동안을 즐겨요. 그때 가서야 내가 정말로 수준급인가 아닌 가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심랑이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금산에? 그곳에는 난 가고 싶지가 않소." "왜죠?" "그곳은 이미 다른 사람과 함께 간 곳이 아니오?" 왕 부인은 요염하게 웃었다. "아이참, 당신...... 당신 혹시 질투하시는 건가요?" "맛있는 차를 마시기도 전에 질투부터 하는 것도 좋지." 방 안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라고는 없는 데다 어느 순간엔가 왕 부인도 이미 가볍게 심랑의 품으로 기대어 있었다. 좋은 술안주에 좋은 술, 몽롱한 불빛과 절세의 미인이라......! 심랑은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아까의 왕 부인이 마치 성녀와 탕부의 혼합체라고 한다면 지금은 반쪽 성녀의 부분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녀는 섬섬옥수로 가볍게 심랑의 머릿결을 만지작거리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또 한 사람은 '초명금(楚鳴琴)'이라고 하는데 술을 잘 빚을 뿐만 아니라 술을 조제하는 방법도 잘 알지요. 즉, 각종 다른 술을 한데 섞어서 아주 절묘한 맛을 내는 기술인데 그 색깔하며 성분은 추호도 틀림이 없어야 하지요. 그는 단지 몇 가지의 평범한 술을 가지고도 순식간에 매우 특별한 술을 조제하는 기술이 있어요." "그 사람은 매우 풍류를 아는 인물이겠군요." "난 비싼 비용으로 그 두 사람을 초빙하여 그들로 하여금 흥룡산으로 가서 '쾌활림(快活林)'을 차리게 했어요. 이 '쾌활림'에서는 비단 좋은 차와 좋은 술을 팔 뿐만 아니라 그 정원의 아름다움이나 강남에서 불러들인 스무 명의 절세소녀들이 아름다운 노래와 절묘한 춤으로 맞이하니 필요할 때면 다른 일도 할 수가 있는 거죠."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내가 그곳에 간다면 아마 돌아오고 싶지 않을 것 같소." 왕 부인이 은근하게 목소리를 뽑았다. "아닐 텐데요. 그곳에는 내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나서 방 안에서는 약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왕 부인의 가벼운 음성이 들렸다. "다시 열흘이 흐르면 당신은 나를 만나게 될 거예요." "열흘...... 열흘이라...... 이 열흘은 아마도 내게는 긴 세월이 될 것이오." "당신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 바로 '환희왕', '쾌락왕', '쾌활왕' 등의 이름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준 것일 뿐, 당신은 절대 그에게 그런 호칭을 쓰지 말아야 해요." "그렇다면 날보고 그에게 '노선배'라고 부르라는 말이오? 아야!" '아야!'하는 소리가 뭘 뜻하는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다시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르자 왕 부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서야 당신이 여태껏 내가 생각했던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어요. 난. 난 염향에게 당신을 잘 감시하라고 해야 겠군요." "당신은 오히려 염향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 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소? 아야!" 다시 '아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심랑아! 심랑아! 그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누가 그대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대는 정녕 세상 모든 일에 그토록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는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왕 부인은 백옥 같은 손으로 벽옥(��玉)의 술잔을 들었다. 술잔을 심랑의 입술까지 갔다대면서 왕 부인은 힘없이 시를 낭송했다. "낭군께 술을 권하니......." 흥룡산은 관 내에 있었다. 서북쪽의 명성에서 이 흥룡산까지 백여 리 길은 온통 산간벽지인데다지라 비록 봄이라고 하지만 전혀 봄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산간도시를 지나 흥룡산 기슭에 도착하자 갑자기 천지가 바뀌었다. 모든 것이 푸르르고 싱싱하니 마치 조물주가 봄이라는 계절을 아예 이곳으로 옮겨놓은 듯 했다. 하지만 이 곳은 여전히 흥룡이 아니다. 흥룡산의 서쪽에는 서운(棲雲)이라는 명산이 있었다. 이 두 산 사이에 작은 강이 흐르고 있어 천연의 미를 더했고 두 산 사이에 놓여져 있는 구름다리는, 이름하여 '운룡(雲籠)'인데, 그 기세(氣勢)또한 진정 용과 같았다. 서운산은 빼어나게 수려한데다 군계일학처럼 구불구불하게 구비지었다. 신불을 모시는 신전이 많았고 동굴이 많다보니 절도 역시 많게 되자 오히려 산의 영기를 많이 빼앗아 갔다. 그것은 마치 시골 소녀가 비단옷을 입은 것과 같다. 비록 아름답지만 속되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까. 동쪽의 흥룡산은 산세가 무척 웅위(雄偉)하였다. 마치 영웅적 기개가 충만한 천하의 대장부처럼 모든 세속적인 사람들을 발 아래에 둔 모습이었다. '쾌활림'은 바로 이 두 산이 만나는 기슭에 있다. 이것은 산세를 의지하며 건축한 정원이었다. 정원은 청록색의 빛으로 뒤덮여 있으며 작은 시내는 그 속을 가로 질렀다. 길 양쪽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치렁치렁 늘어진 것이 매우 탈속적이었다. 언뜻 봐서는 단지 청록색의 산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자세히 순록의 버드나무가 가지런히 길게 서있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곧 꼬불꼬불한 작은 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이어서 알록달록 정교하게 지어놓은 몇 채의 누각이 이 청록색의 산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것은 바로 소녀가 옆머리에 꽂은 꽃과 같고 또한 영웅건에 박힌 진주와도 같은 것이다. 황혼이었다. 석양이 지는 중에 산의 노래가 들려왔다. 길게 땋은 머리를 한 두 소녀가 미소띤 얼굴로 부르는 노래였다. 그들은 석양을 밟으면서 꼬불꼬불한 산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그들의 손에는 작고 정교하며 고아(高雅)한 주전자가 들려져 있었다. 주전자에는 새로 받은 샘물이 가득했고 그들의 마음 속에도 봄날의 즐거운이 가득했다. 입고 있는 상큼한 붉은 옷처럼 그들의 얼굴에도 상큼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이런 소녀들이 벽록색의 산 중을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은 정말로 한편의 시와 그림이었다. 그들의 눈은 빛을 발했는데 마치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흥분하는 것 같았다. 왼쪽의 소녀는 마치 봄날의 샘물 같은 눈을 가졌고 오른쪽의 소녀의 눈은 영롱한 진주와 같았다. '춘수(春水)'는 갑자기 노래를 멈추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물고는 미소를 지었는데 눈은 마치 석양이 지는 산을 바라다 보는 듯했지만 기실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명주(明珠)'는 그녀를 흘깃 보더니 갑자기 간드러지게 웃었다. "요 계집애야, 지금 네가 뭘 생각하는지 난 다 안다." 춘수가 대꾸했다. "뭐? 설마 언니가 내 뱃속의 회충이라도 되나?" 명주가 웃으면서 그녀를 꼬집자 춘수는 항복을 했다. 갑자기 명주는 손을 춘수의 넓은 소매 안으로 집어 넣었다. 춘수는 허리를 피지 못하고 웃으면서 숨을 헐떡거렸다. "착한 언니,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 명주도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용서해 줄 수는 있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 봐. 지금 그를 생각하고 있는 거지?" 춘수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물었다. "그...... 그가 누군데?" 명주의 손이 다시 춘수의 소매 안에서 꿈틀거렸다. "요 계집애, 이래도 시치미를 뗄 거야? 어디 보자." 춘수가 자지러지며 외쳤다. "안 그럴께, 다신 안그럴께....... 우리의 명주 언니 입에서 나온 '그'는 바로...... 바로 오늘 도착한 공자야!" "다시 말해 봐. 아까 바로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지?" "네...... 네...... 어서 손을......." "좋아, 이제 솔직히 말했으니 용서해 주겠어." 춘수의 얼굴은 석양처럼 붉었다. 그녀는 주전자를 내려놓더니 길가에 앉아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눈을 가늘게 뜨면서 온몸이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지며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명주는 춘수를 살짝 흘겨 보았다. "요 계집애, 네 모양을 보니 아무래도 춘심이 동했나 보구나?" 춘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부 다 언니의 그 망할 손 때문이야." 명주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 손이 어때서? 만약 그의 손이었다면......." 이 말을 하던 그녀도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봄이다. 아, 과연 봄이로구나! 춘수가 힘없이 말했다. "그 분 공자께서는...... 아! 세상에 어느 여자가 그런 분을 그리지 않겠어. 그에게 눈길을 한 번이라도 준 여자치고 어느 누가 그를 잊을 수 있겠어!" 그녀의 말투는 흡사 신음에 가까웠는데 비록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마치 꿈 속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잠꼬대하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특히 그의 웃음은...... 명주 언니, 그가 웃는 모습을 주의해서 봤어? 정말 사람 미치게 한단 말이야. 그는 어쩌면 그렇게 웃을까? 난 그의 웃는 모습만 생각해도 난....... 밥조차 넘어가지 않는단 말이야." "그의 웃는 모습은...... 난 미처 주의하지 못했는 걸." "거짓말, 또 거짓말 하네, 언니가 그에게 차를 따라줄 때 그가 언니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 언니는 아예 주전자까지 놓쳐버려서 물을 온통 뒤집어 썼잖아. 내가 못본 줄 알지?" 명주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요 계집애, 너...... 너......." "그렇게 부끄러워 할 게 뭐 있어? 그분 같은 남자니 우리 뿐만 아니라 남자라면 도가 튼 우리의 춘교(春嬌)이모조차도 그를 처음 본 순간에 홀딱 반했잖아!" 명주가 드디어 '픽'하고 비웃었다. "내가 보기에 넌 지금 마치 그를 한 입에 삼키고 싶어 안달하는 것 같구나. 괜히 우리 이씨 아저씨 얼굴을 새파랗게 질리게 하지 말아라." 춘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난 정말로 세상에 그렇게 귀여운 남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야. 그 웃는 모습하며 그 눈, 그 나른하면서도 모든 일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그의 표정은...... 아!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구나." 명주가 길게 탄식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잖아!" "언니는 그 무슨 '향'이라는 아가씨를 말하는 거야?" "응, 그래 염향이지." 춘수는 입을 삐죽거렸다. "흥, 고년이 어떻게 감히 그 분의 짝이 될 수 있겠어? 그년의 그 입을 봐. 하루종일 입꼬리를 쳐들고 잘난 척하는 표정하며, 마치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하며, 정말 보면 구역질이 날 지경이야." "하지만 그녀가 매혹적인 것은 사실이잖아......." "뭐가 매혹적이야, 아무리 봐도 내가 보기에는 썩은 여우로 밖에는 안 보이던데."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허리를 틀며 말했다. "우리 자매의 어떤 점이 그녀보다 못 하겠어? 특히 언니, 언니의 그...... 긴 다리는 그가 한 번 봤다면 분명이 홀딱 반해 미쳤을 거야." 명주는 얼굴을 붉히면서 짐짓 그녀를 나무랬다. "요 계집애, 너 언제 내 다리를 봤다는 거지?" 춘수가 낄낄대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날, 언니가 목욕을 할 때, 난 밖에서 몰래 들여다 봤는데 마침 언니가 막...... 아야, 그 모습 정말 멋있던데, 내 눈은 복도 많단 말이야." 명주는 '몰라'하는 소리와 함께 덮쳤다. 춘수는 물주전자를 들고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쫓고 쫓으면서 아주 빠르게 뛰었지만 물주전자의 물은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이 때 산 언덕 위의 울창한 수풀 속에서는 마침 일남일녀가 속닥거리며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마치 남이 엿듣기라도 할까 걱정되는 듯이 두 사람은 매우 낮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 했다. 남자는 약 사십을 막 넘은 듯한 중년인데 차림새는 마치 소년 같았다. 보라색의 장삼(長衫)에다 보라색의 두건(頭巾), 두건에는 또 벽록색의 비취가 박혀 있었다. 허리에는 벽록색의 비단끈이 둘러져 있고 비단끈에는 벽록색의 담뱃대가 걸려 있었다. 훤칠한 몸매에 긴 얼굴을 한 그는 눈은 감은 듯 뜬 듯, 계속해서 하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종일토록 잠을 못잔 사람 같았다. 여자도 중년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남자의 눈길을 끌만한 자태가 남아 있었다. 눈썹 꼬리나 눈가에 언제나 남자들을 설래게 하는 자연스러운 끼가 있었다. 석양 아래에서 그녀는 확실히 아름다왔지만 이런 아름다움은 마치 전적으로 남자들만을 상대하기 위한 무기나 마찬가지이니 비록 그녀가 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조화(造花)일 뿐이었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마치 사방에 누가 있나 찾는 모습이었다. 그 남자는 여전히 하품을 하면서도 나른하게 말했다. "난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할까 하고 있었는데 왜 이런 곳으로 끌고 오는 거야? 이제는 우리도 늙은 노부부가 됐는데 아직도 젊은 애들 흉내라도 내려고? 이런 곳에서 한바탕 하자는 건가?" 그 부인은 비록 얼굴을 붉히지는 않았지만 짐짓 수줍은 표정을 지으면서 나무랬다. "당신은 온종일 그런 생각말고는 하는게 또 뭐가 있나요?" 그 남자는 가늘게 뜬 눈으로 말했다. "이게 뭐 나쁜 생각인가? 당신은 언제나 원했잖아. 어제 저녁에도 난 이미 지쳐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데도 당신은 그래도 또 원했잖아." 그 부인은 발을 동동 굴렀다. "내 착한 낭군이시여, 남은 초조해서 미칠 지경인데 당신은 아직도 농담할 여유가 있나요?" 남자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물었다. "뭐가 그리 초조하다는 거지?" "당신은 아직도 입만 벌리면 밥이 나오고 손만 벌리면 돈이 나오는 줄 아는 도련님인 줄 알고 계시지만 당신이 지금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모두 남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잘 지내고 있잖아." "잘 지내고 있었으니까 제가 초조한 거예요. 당신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해 보세요. 그 심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뭣하러 왔겠어요? 그 머나 먼 천리 길을 단지 놀러왔을 리가 만무하잖아요." 그 남자는 다시 한번 하품을 했다. "왜 그냥 놀러 오지 못하지?" "아이, 당신은 천성적으로 막힌 사람이야!" "내가 막힌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당신을 마누라로 삼았겠어?" 부인은 더욱 발을 구르면서 답답해 했다. "당신이 막힌 사람이 아니라면 그 많던 재산을 어떻게 날렸겠어요. 당신은 아직도 눈치 못챘어요? 그 심이란 사람이 여기에 온 것은 바로 왕 부인이 보내서 이 '쾌활림'을 인수하러 온 것일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가 온 이유를 물엇을 때 계속 딴소리로 얼버무렸잖아요." 그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부인이 한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지난 날, 우리가 고생하던 일들을 잊었나요? 난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요. 다시는 그런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가 우리의 밥그릇을 깨뜨리려고 왔다면 우리도 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잖아요."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그 심이란 사람은 절대 그런 사람으로 안 보이던데." "당신이 사람 볼 줄 안다구요? 당신이 사람을 볼 줄 안다면 예전에 벌써 남에게 사기를 당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당신이 어서 그에 대응할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난...... 내가 방법을 강구하겠어요." 그 남자가 또 한 번 하품을 하자 곧 콧물이나 눈물이 흘러나올 듯했다. 그는 담뱃대를 꺼냈다. "좋소, 나의 옥황상제여, 당신이 방법을 강구해서 그를 대적하고 싶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구려. 단지 바람이나 피워서 날 멍청이로 만들지는 말고." 부인은 끝이 뾰쪽한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톡톡 치며 웃었다. "당신은 원래부터 멍청했어요." 그 남자는 담배를 한 모금 마시더니 곧 힘이 솟는 듯이 갑자기 부인의 가는 허리를 안고는 그녀의 얼굴을 물었다. "내가 이렇게도 힘이 장사인데도 당신은 감히 나를 멍청이로 취급하다니. 만약 당신의 힘을 완전히 탈진시키지 못한다면 나 또한 풍류공자 이대소라고 할 수는 없지." 그는 부인을 안고는 곧 땅바닥으로 눕히려 하자 그녀는 탕소(蕩笑)를 날렸다. 그녀는 가볍게 미는 듯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서는 안 되요. 여기서는 안 되요......." 입으로는 '안되요'라는 말만 연발할 뿐 한 손은 이미 '밀치는' 것에서 '끌어 안는' 것으로 변했다. 갑자기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부인은 그때서야 정말로 그를 밀쳐냈다. "명주와 춘수가 왔어요. 어서 손을 놓으세요." 이대소가 거친 숨을 쉬면서 말했다. "저 두 바람둥이 계집년이 오면 어때서? 저들도 우리가 이러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자....... 어서 빨리......." 그 부인은 뱀처럼 매끄럽게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춘수와 명주도 그들을 보자 더이상 서로 쫓는 것을 멈췄다. 그 부인은 머리틀을 잡으며 숲 속에서 나오더니 곧 가볍게 나무랬다. "요 미친 계집들아, 너희보고 물 떠오라고 했는데 여태까지 어디에 있다가 이제서야 나타나는 거냐?" 춘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춘교 이모, 명주 언니가 나를 못살게 굴어요." 이번에는 명주가 소리질렀다. "아이고, 요 계집애가 그래도 내가 못살게 굴었다고 하네. 넌 계속 바보 같은 소리를 했잖아. 그리고 또......." 이때 이대소가 뒷짐을 지고 걸어 나오면서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또 뭐지?" 명주는 살짝 혀를 내밀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라면 어서 가서 찻물이나 끓여라." 춘수는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어르신께서 왜 역정을 내시는지 알고 있어요. 바로 우리가 어르신네와 춘교 이모의 일을 방해......." 그녀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깔깔거리면서 도망쳤다. 이 숲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면 곧 세 칸의 작은 집이 나타난다. 녹색으로 된 벽에 자죽(紫竹)으로 된 휘장의 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문은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명주와 춘수는 이곳으로 뛰어오자 갑자기 발걸음을 늦췄다. 춘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그 부채꼴의 문을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저것 봐,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는데 벌써 문을 닫았잖아. 저들이 안에서 대체 뭘하고 있을까?" 명주가 얼굴을 붉히면서 욕해댔다. "저 음란한 불여우 같으니, 정말 음란한 불여우 같은 년이야." 춘수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언니도 그녀를 나무랄 것 없어. 만약 입장을 바꿔 언니가 심 공자의 시중을 든다고 해 봐. 아마도 문을 더 일찍 닫을 걸? 만약에 내가 시중을 든다면 아마 삼일낮 삼일밤 동안 문을 안 열어도 상관없을 거야." 명주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요 계집애야, 넌 밥도 먹지 않을 거니?" "밥? 밥 먹는 것이 대순가?" 갑자기 춘수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명주가 말렸다. "요 계집애야,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몰래 보려고 그러지?" 춘수는 손가락으로 입에다 십자를 그리면서 작게 속삭였다. "쉿! 조용히 해, 우리 같이 보자!" "난 싫어, 난 안 볼 테야." 그녀의 입은 '싫어'라고 했지만 그녀의 발은 창문을 향해 다섯 발자국을 걸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얇은 장삼에 얇은 신을 신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소년이 걸어 나오면서 말했다. "난 또 들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두 분 아가씨였었군." 춘수와 명주는 갑자기 몸이 굳어 버렸고 눈도 넋을 잃었다. 몸은 나무토막처럼 그 곳에 서 있었고 눈은 빨려가듯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소년이 웃으면서 말했다. "물 길어 오느라고 수고 했군요. 내가 도울 일은 없소?" 명주가 겨우 대답했다. "감...... 감사합니다, 심 공자님. 괜...... 괜찮아요." "저녁이 다 되면 수고스럽더라도 아가씨가 나를 다시 한 번 불러줘야 겠소." "네......." 간신히 대답한 명주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나는 듯이 달려갔다. 춘수도 곧 뒤따라서 달려갔는데 한 십여 장 정도 달리더니 춘수가 물었다. "언...... 언니는 왜 뛰는 거야?" "난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어. 그...... 그 사람이 그렇게 날 바라보는데,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봤다가는 기절할 것만 같았어." 춘수는 한탄을 했다. "언니는 그래도 말이라도 할 수 있어 괜찮았지. 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 언니는 기절할 것 같다고 했지만 난 벌써 기절한 상태라구." 심랑은 미소지으며 그녀들을 눈으로 멀리 보내고는 곧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그와 수놓은 침상에 비스듬히 앉은 염향만이 있었다. 염향은 더욱 예쁘게 치장을 했다. 화려하면서도 탈속한 차림이었다. 그 부드럽고 편한 옷차림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그녀의 자태는 타고난 대가집 규수나 부잣집 맏며느리 같았다. 어느 누가 감히 그녀를 다른 사람의 시녀라고 상상이나 할 것인가! 그녀 자신도 이미 그 점을 잊은 듯 했다. 그녀는 장미꽃즙으로 물들인 예쁜 발가락으로 침상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자고있는 하얀 고양이를 놀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도 마치 고양이의 눈처럼 심랑을 노려 보았다. "저 두 계집을 보세요. 당신 때문에 미치기 일보직전이라구요. 당신은 겨우 오늘 아침에 이 곳에 도착했을 뿐인데도 이 모양이니 며칠 지나면 아마 큰일 나겠어요." "응?" 염향은 그의 나른하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미소를 보더니 또 길게 탄식을 했다. "사실 저도 거의 미치기 일보직전이에요. 당신은 알고 있나요?" "응? 뭣 때문이오?" "그것은 바로 당...... 당신은 정말로 이상한 남자예요!" "난 내 자신이 아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어디가 이상하다는 것이오?" "당신이 이상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이상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내가 어떻게 이상하오? 내 코가 이상한가, 내 눈이 이상한가, 아니면 내 눈썹이 눈에까지 났는가, 아니면......?" "당신의 눈이나 코는 전혀 이상이 없지만 당신의 마음이......." "내 마음이 또 어디가 어때서?" "남들의 마음은 다 살로 만들어졌는데 당신의 마음은 쇠로 만들어 졌으니까요."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쇠저울이라도 삼켰다는 말이오?" "그럼 제가 묻겠어요. 당신이 쇠심장이 아니라면 왜 떠날 때 주 아가씨한테 한 마디 인사도 하지 않았죠? 저는 정말 제가 그녀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더군요." "어차피 떠나야 한다면 인사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소? 인사는 내가 돌아가서 하면 훨씬 더 좋지 않소?" 염향이 눈을 깜박거렸다. "당신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쳐요. 하지만...... 하지만 이곳으로 오면서 당신은 줄곧 앉아만 있었어요. 한 번도 창 밖으로 내다보거나 뒤볼아 보지도 않았어요. 당신이 심장이 쇠로 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내가 만약 창 밖을 내다보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난 이곳으로 올 수가 없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안본 것뿐이오." "좋아요. 이번에도 당신 말에 일리가 있다고 해요. 하지만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 난 당신 곁에서 잤어요. 그런데도 당신...... 당신...... 당신은 한번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어요. 이래도 당신의 심장이 쇠로 만들어 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심랑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안 건드리면 그대가 나를 건드리면 될 것 아니오?" 염향이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당신을 건드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당신은. 당신은 정말로 송장 같아요. 당신. 당신. 당신은 정말로 이 고양이만도 못해요......." 그녀가 발끝으로 고양이를 가볍게 치자 그 고양이는 '야웅'하면서 그녀의 품 속으로 뛰어 들었다. 염향이 말했다. "당신은 왜 이 고양이처럼 하지를 못하죠?" "그렇게는 못 하겠소. 그 고양이는 암컷이거든!" 염향은 몸을 뒤집어 일으키더니 눈을 크게 뜨고는 심랑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한참 동안을 노려보다가 결국에는 길게 탄식을 흘렸다. "심랑아! 심랑아!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군요." "나도 나 자신을 이해 못하는데 당신이 모르는 것이야 당연할 수밖에......." "당신 같은 사람을 두고 왕 부인께서는 어떻게 마음을 놓으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녀가 마음이 안 놓이는 것은 오히려 그대일 것이오." 염향이 한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그런 말씀 마세요. 당신은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나요? 흥, 난 안 믿어요. 당신은 분명히 그녀를 속이고 있는 거예요. 나는 반드시 당신의 속셈을 폭로하고 말겠어요." 심랑이 물었다. "그녀가 나를 속였다면 그녀의 속셈을 폭로해 주겠소?" "그녀가 당신에게 뭘 속였다는 거죠?" "쾌락왕의 문하 중에 그 남자 같지도 않고 여자 같지도 않은 사자(使者)가 있었소. 그가 분명히 백비비(白飛飛)를 데리고 도망갔는데 그녀는 왜 아직도 그들이 그녀에게 감금되어 있다고 말했을까? 설마 그녀가 일부러 그들을 쾌락왕의 곁으로 돌아가게 해서 내 신분을 폭로시키려는 것이오? 그렇다면 그녀의 목적은 단지 나와 쾌락왕이 사생결단을 내게 하는 데에 있다는 건가?" 염향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당신의 추측은 매우 기발하지만 틀렸어요." "어디가 틀렸다는 거요?" "당신은 매우 총명하잖아요?" "총명한 사람도 가끔 매우 둔할 때가 있소." "그 음양인이 비록 도망은 갔지만 부인은 당신을 속이지 않았어요. 부인께서 그 음양인이 절대로 쾌락왕의 얼굴을 못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렇게 될 거예요." "이미 도망을 갔는데 왜 못보게 된다는 것일까?" 염향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도망간 사람이 때로는 죽어 있을 때도 있죠." 관외(關外)의 풍류인사(風流人士) 심랑은 손바닥을 마주 잡았다. "아! 알겠소. 그 음양인은 처음부터 중독되어 있었기에 쾌락왕을 만났을 즈음에는 죽을 거라는 말이지. 그건 마치 사람들이 인의장에 들어가자 마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오." "네?...... 네......" "그녀가 그렇게 한 것은 바로 백비비를 쾌락왕의 수중에 넣어 두려는 속셈이었군." "이제는 완전히 알겠나요?" 심랑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는데 그녀는 왜 백비비를 쾌락왕에게 넘겨준 것이오? 설마 옛날에 구천(句踐)이 서시(西施)를 부차(夫差)에게 갔다 바쳤던 것을 흉내내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죠." 심랑은 또다시 탄식을 하였다. "단지 안타까운 점은 백비비가 너무 순결한 아가씨라는 것이오." 염향의 눈이 갑자기 동그렇게 커졌다. "그녀를 좋아 하시나요?" "그녀를 좋아하면 안 되오?" "되요...... 되요." 염향은 갑자기 교태를 부리며 웃기 시작했는데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였다. 심랑이 계속 말했다. "나도 알고 있소. 당신들은 그 누구도 믿지 않지. 심지어 당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초명금과 이등룡 부부에게조차도 아직 모든 일들을 밝히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우리가 왜 왔는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그들 자신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으니까." "그들이 만약 알고 있다고 해요. 그 누가 그들이 이 비밀을 쾌락왕에게 누설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겠어요? 특히 그 춘교는...... 흥! 누구든 그런 여자를 믿는다면 반드시 재수 없는 일이 생길 거예요." "그대는 어떻소?" "알아 맞춰 보세요." "난 그대를 믿소." 심랑은 갑자기 문으로 몸을 날리면서 한 손으로 문을 열어 제쳤다. 춘교가 문 밖에 서 있었다. 저녁은 푸짐했으며 술은 이름 그대로 달콤하고 감미로웠다. 초명금은 술을 조제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명의가 신중하고 엄숙하게 진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온 정신을 술잔에 몰두했다. 그의 옷은 비교적 되는 대로 걸친 것이었고 머리도 봉두난발( 頭難髮)이라 이대소의 옆에 서자 꼭 이대소의 하인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냉랭하고 웃음기가 전혀 없는 그의 얼굴에는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얼굴만 본다면 오히려 이대소가 그의 하인 같았다. 심랑은 그를 바라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난 귀하를 보기 전에는 이렇게 생긴 사람일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소. 내게도 술꾼인 친구가 있는데 귀하와는 전혀 틀리군요." 추명금은 차갑게 말했다. "난 술꾼이 아니오." 심랑은 눈매를 약간 치켜 올렸다. "네?" 이대소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초형은 비록 술을 조제하는 데에는 능하지만 술맛을 볼때 외에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죠." 심랑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초 형께서는 술을 드시지 않으시면서 조제는 왜 하는 것이오?" 초명금의 말투는 여전히 냉랭했다. "술을 마시는 것과 조제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오. 술 마시는 것은 단지 유희일 뿐이지만 술을 제조하는 것은 예술이오. 단지 몇 가지 보통 술로서도 성품(聖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제일 큰 즐거움이오. 그것은 마치 화가가 갖은 색채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오. 귀하께서는 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소?" 심랑은 그의 말을 음미하더니 갑자기 손뼉을 치며 웃었다. "절묘한 이론이오, 정말로 절묘한 이론이군요." 춘교도 교태를 부리면서 끼어들었다. "그는 원래부터가 절묘한 사람이지요." 이대소는 술을 마실 때면 언제나 정신이 없었다. 한 잔, 또 한 잔 하면서 계속해서 정신없이 마셔대느라 그는 춘교의 발이 탁자 밑으로 해서 이 '절묘한 사람'의 바지 속으로 집어넣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심랑은 봤다. 이대소는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빠르기는 했지만 쓰러지는 속도 또한 느리지 않았다. 자연히 그는 춘교가 손을 탁자 밑으로 해서 심랑의 옷소매 속으로 넣는 것 또한 봤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염향은 봤다. 그녀는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정말로 아깝군요." 춘교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아깝다는 거죠?" "사람이 단지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발만 있으니 너무 모자란 것 같아서요. 예를 들어 만약 춘교 아가씨가 만약 당신에게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발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춘교의 얼굴이 아무리 두껍다해도 이 빈정거림에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달아올랐다. 염향은 계속해서 빈정댔다. "춘교 아가씨,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는 거죠? 혹시 취하셨나요? 음, 분명히 취했을 거예요. 우리도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군요." 그녀는 한 손으로 심랑의 옷소매를 잡아 당기더니 결국에는 심랑을 끌고 나갔다. 심랑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대...... 그대는 왜......." "당신은 잊지 마세요. 난 지금 당신의 아내역을 맡고 있는 거라구요. 큰 마누라라도 좋고 작은 마누라라도 좋아요. 누구든 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금방 들통나요." 심랑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을 아내로 두지 않은 것이 다행이오." 심랑과 염향이 함께 나가자 춘수가 뒤에서 욕을 퍼부었다. "음란한 여우 같으니라구, 그 새를 참을 수 없었나?" 춘교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리더니 춘수를 나무랐다. "누가 너보고 끼어 들라고 했느냐? 어서 어르신네를 방 안으로 모셔라!" "어르신네는 오늘 밤은 깨어나지 않을 거예요. 이모께서는 안심하세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는 곧 명주와 함께 이대소를 부축해서 연기처럼 달아났다. 춘교는 약이 올라 이를 악물었다. "요 깍쟁이가...... 요 깍쟁이가......." 그녀의 첫 '요 깍쟁이가'란 말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두번째로 한 '요 깍쟁이'란 말투는 매혹적이면서도 요염했는데 맨 처음 말한 것은 춘수를 나무라는 말이었지만 두번째로 한 말은 바로 초명금을 지칭한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입으로는 '요 깍쟁이'라고 말했지만 몸은 벌써 초명금의 품 속에 인겨 있었다. 초명금은 냉랭하게 그녀를 쳐다 보았는데 마치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 했다. 춘교가 교태를 부렸다. "뭘 보세요? 처음 봐요?" "처음 봤소." "아이, 당신은 양심이 있나요? 당신은 내 몸 구석구석을 수백 번도 더 봤잖아요?" 초명금은 냉소를 쳤다. "하지만 당신의 진면목은 오늘 처음 봤소." "오늘 당신은 얼음만 잡수셨나요? 왜 하는 말마다 냉기가 돌아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당신은 남자라면 무조건 다 좋아하는 거요?" 춘교은 '픽'하고 웃었다. "당신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 대신에 질투하기를 좋아하는 군요. 당신은 바보예요. 내가 그 사내에게 추근거리는 것도 다 당신을 위한 것임을 왜 모르세요?" "나를 위해서라고? 흥!" "지금까지 우리 세 사람은 여기서 아주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이제 그 자가 이 곳에 왔어요. 우리가 그 자를 이곳에서 몰아내지 않는다면 당신......, 당신은 조금도 초조하지 않으세요?" "당신이 바람을 피우고 싶을 때면 언제나 핑계가 많았었지." "하지만 당신은 안심하세요. 그 심가는 이미 염향, 그 불여우에게 꽉 잡혀 있어서 내가 유혹을 한다 하더라도 희망이 없어요." 초명금은 비웃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아주 실망이 크겠군." "내 첫 계획은 실패했지만 다행이 아직 두번째 계획이 있으니까요." "설마 그를 강간할 계획은 아니오?" "난 그를 죽이려고 해요." 초명금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를 죽이다니, 당신이 감히? 왕 부인이 알게 되면 당신은......." "그야 물론 내가 직접 죽이는 지는 않지요." "당신 날 시킬 생각은 아예 마시오." "어머나! 난 당신이 사람은 커녕 개미 한 마리 못 죽인다는 것을 잘 알아요." "당신은 누구를 시키려는 것이오?" 춘교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내일 누가 이곳에 오는지 잊었나요?" "당신은......쾌락왕을 말하는 것이오?" "네, 쾌락왕말고 그 누가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겠어요? 심가가 쾌락왕에게 살해된다면 그 누가 감히 그를 위해 복수한다고 나서겠어요?" "쾌...... 쾌락왕이 왜 그를 죽이려 하겠소?" 춘교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한테 다 방법이 있으니 당신은 안심하세요. 당신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나만을 안아 주세요. 꼬옥 안아주면 줄수록 좋아요. 음, 이래야 내 착한 아이죠!" 염향은 줄곧 심랑의 손을 잡고 있다가 잠깐 손을 놓고 문을 열었다. 금방 고개를 돌리니 심랑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그녀는 약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이를 갈면서 그를 기다렸다. 달빛은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와 마치 쪼개진 은자처럼 온 방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갑자기 창문이 열리더니 은색 달빛이 심랑을 들여보내 줬다. 염향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전 이제서야 비로소 아내가 집에서 밤늦도록 남편을 기다리는 심정이 정말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남편 노릇은 더욱 하기가 어렵지. 잘못하면 마누라가 금방 바람을 피우니까. 특히 남편이 자주 술을 마신다면 그의 마누라는 수없이 많은 바람을 피울 것이 아니겠소?" "당신 말대로라면 당신은 어서 웅묘아에게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해 줘야겠군요. 그 술꾼이 결혼을 한다면 아마 그의 마누라는 날마다 바람을 피울걸요?" "결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여자를 곁에 두지 않는 것이 가장 좋소." "왜죠? 여인이 독사라도 되나요?" 심랑은 한탄을 하였다. "여인이란 비록 독사는 아니지만 모두가 괴물이오." "괴물이라구요? 여인의 어디가 그리도 이상한가요?" "여인들은 평소에는 부드러울지 모르지만 일단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뺐는다고 판단했을 때는 금방 표범보다 더 사납고 독사보다 더 악랄해 지거든?" 염향이 '쳇!' 하고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 아까 나가서 귀신을 봤어요? 무슨 헛소리예요?" "아까 나가서 귀신은 보지 못했지만 재미있는 귀신얘기는 들었지요." 염향이 앉으면서 얼굴을 붉혔다. "아이고! 알고보니 당신은 엿들으러 갔었군요? 당신. 뭘 들었나요?" "여인이여....... 아! 여인은 어째서 이런 일들에 대해서 이다지도 흥미를 느낄까? 안타깝게도 내가 들은 내용은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소." 그는 담담히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난 단지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엿들었을 뿐이오." 염향이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춘교인가요? 그 여편네가 미쳤나?" "사실 이건 그녀를 탓할 것이 아니지. 우리가 온 뜻을 시원하게 밝히지 않은 이상 그들이 두려움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 만약 여인들의 의심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염향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좋아요, 그녀가 대체 어떻게 당신을 죽이려는지 두고 보겠어요." "그녀는 물론 직접 손을 쓰지는 않을 것이오." "누가 손을 쓰더라도 상관 없어요. 어차피......." "쾌락왕이 손을 쓴다면 어떨까?" 염향은 자지러질 듯이 놀랐다. "쾌락왕이라구요?" "쾌락왕이 내일 여기에 온다고 하오." "이...... 이를 어쩌죠? 내 당신의 이름을 그에게 말하지 안 했었는데, 심랑!...... 아! 쾌락왕이 만약 심랑이라는 이름을 들어 알고 있다면 모든 일이 망쳐질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침대에서 뛰어 내리더니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심랑이 물었다. "지금 어디를 가는 거요?" "어디라니오? 물론 그녀를 죽이려 가는 거지요." "내 말은 전혀 틀리지 않지! 여인은 누가 그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금방 표독하게 변한다니까, 춘교도 그렇고 그대도 역시 마찬가지야!" 염향이 안타까워했다.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면 설마 그녀가 우리 계획을 망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그녀는 어떤 계획도 망치지는 못해요." "어떻게요?" "그녀에게 방법이 있다면 내게는 방법이 없을라구?"" "당신에게 무슨 방법이 있는데요?" "나도 여태껏 어떻게 쾌락왕에게 접근해야 하나 하고 걱정을 했었는데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한다면......." 갑자기 그는 말을 멈추었다. 심랑은 그대로 침상에 쓰러지더니 이불을 덮고는 잠을 청했다. 염향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서 말하세요, 어서 계속 말하라니까요." "안돼오, 절대로 천기(天機)를 누설(漏泄)해서는 안 되지." 염향이 아무리 캐어 물어도 소용없었다. 그는 이미 잠이 들어 버렸으니까. 그는 정말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염향이 아무리 밀쳐도, 흔들어도 깨지 않는 것이 정말로 죽은 듯이 잠이 든 것이다. 결혼을 한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잠 들은 척하는 방법이야 말로 여인을 상대하는 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무리 표독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이 방법에 대해서는 역시 뾰족한 대응책이 없는 것이다. 염향은 아무리 손으로 흔들고 발로 차고 또 입으로 욕을 해댔으나...... 그녀도 역시 힘이 부칠 때가 있는 법이고 그녀 또한 잠을 안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심랑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면 숲은 처아한 아침 이슬로 치장을 하고 그 의를 새들이 날며 지저귄다. 심랑은 뒷짐을 진 채로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모처럼 한가롭기도 하고 또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의 마음 속에 비록 천만 가지의 고민이 쌓여있다 할지라도 겉으로는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갑자기 매우 급한 말발굽소리가 숲 속을 가로지르며 들려왔다. 심랑이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꽤나 일찍도 도착하는군." 그는 몸을 틀어 번개같이 나뭇가지를 밟고 올라 나뭇잎 사이로 내려다보니 두 필의 말이 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말 위의 기사는 금색꽃으로 수놓은 청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맞바람이 불자 어깨 뒤로 검자루가 반쯤 노출이 됐는데 검자루의 붉은 수가 바람에 날려 춤추는 듯 펄럭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과연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 두 사람의 기마술은 매우 뛰어났다. 그들은 이 길에 대해서 매우 익숙한 듯 곧장 숲을 가로질러 이등룡 부부가 거처하는 작은 누각쪽으로 달려갔다. 춘교는 벌써 돌아와 있었는데 마침 비단손수건을 흔들면서 누각 위에서 수인사를 나누었다. 심랑은 멀리서 계속 바라보았다. 기사가 말에서 내리자 춘교도 누각에서 내려와서는 얘기를 나누고 웃고 하더니 무슨 말을 했는지 갑자기 기사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 중 한 사람은 마치 매서운 표정으로 외쳤다. "정말인가?" 춘교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기사는 돌연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는 방향은 바로 심랑이 거처하는 곳이었으나 심랑은 바로 그 길목에서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두 기사가 분명 쾌락왕의 '급풍삼십육기(急風三十六騎)' 중의 두 사람이라고 판단을 했다. 과연 이들의 기마술은 무척 뛰어났으며 모두가 영준한 소년들인데다 걸음걸이나 몸짓으로 볼 때 결코 무공도 약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심랑은 아직도 춘교가 도대체 이들에게 뭐라고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들은 점점 더 가깝게 접근해 왔다. 심랑은 그들이 나무 밑으로 다가왔을 때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두 분은 사람을 찾고 있소?" 그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동시에 뒤로 물러서면서 검을 빼들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들의 동작은 완전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추호의 차이도 없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쳤다. "누구냐?" 그들은 곧 비스듬히 나뭇가지에 기대어 앉은 심랑을 발견했다. 연약한 나뭇가지는 아침 바람을 타고 흔들흔들 거렸고 심랑의 몸은 나뭇가지를 타고 흔들흔들 거렸으니 마치 언제라도 곧 떨어질 듯했지만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쾌락왕의 부하들도 물론 사람을 볼 줄 알기에 이것이 바로 무슨 경공인지를 알았다. 두 사람의 안색은 약간 변했지만 결코 놀란 표정은 짓지 않았다. 심랑도 내심 이들을 칭찬했다. (과연 강한 대장 밑에는 약한 부하가 없다는 말이 맞군.) 이 두 사람의 나이는 한 스물 두세 살 정도다. 모두가 오똑한 콧날에 큰 눈을 가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옷차림 또한 똑 같았다. 금빛 수를 놓은 망토에 비단으로 된 옷, 가슴에는 한결같이 '자동호심경'이 걸려 있었다. 단, 이 자동호심경 위에 쓰인 글씨만이 틀렸는데 왼쪽 기사는 '칠(七)'이, 오른쪽 기사는 '팔(八)'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 급풍삼십육기에는 과연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심랑이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급풍기사 양반들, 과연 영준하게 잘 생겼군." 칠호 기사가 무섭게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두 분이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라면 그 사람이 바로 나 올시다." 두 기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검을 받쳤던 손이 어느새 검자루를 쥐고 있었다. 급풍 팔호 기사가 무섭게 소리쳤다. "네가 바로 우리 대왕을 찾고 있는 사람인가?" 심랑은 내심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난 또 춘교가 그들에게 뭐라고 말했나 했더니 내가 쾌락왕에게 시비를 건다고 말했군. 아! 하긴 아주 간단하게 싸움을 붙여 놓고 남의 칼을 빌어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그리고 확실히 효과적이고. 단지 이상한 것은 어째서 여인은 항상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가장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까? 그녀가 이렇게 마음대로 지어댄 말이 내가 온 목적을 바로 맞췄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여인이란 정말로 영감의 동물인가?) 심랑은 내심 웃지도 울지도 못했지만 입으로는 큰소리쳤다. "내가 만약 '아니오'라고 한다면 두 분은 믿지 않을 것이고 내가 '그렇소.'라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믿지 않을 테니 진실여부는 당신들의 판단에 맡기겠소." 그 두 사람이 다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말했다. "좋아, 아주 좋았어." 그들은 갑자기 돌아서더니 가려고 했다. 매우 뜻밖의 행동이었기에 심랑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때, 돌연 '칙, 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개의 짧은 화살이 그들의 금빛 수를 놓은 망토 속에서 나와 곧장 심랑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 두 화살의 날아오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지만 심랑은 비록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볍게 손을 휘저어서 두 화살을 손에 넣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이토록 과중한 선물은 감히 받을 수가 없소이다." 그가 손을 한 번 떨치자 두 화살이 두 기사를 향해 날아갔는데 그 기세는 올 때 보다 더욱 강했다. 두 기사는 몸을 틀어 뒤로 물러서서 '챙'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두 화살은 그들이 이미 검을 뽑아 든 위치까지 계산에 넣었는지 '땅'하며 그들의 검끝에 명중했다. 그들의 검끝은 떨리면서 비파처럼 울어댔다. 검의 울음 속에서 두 가닥의 검광이 갑자기 하늘로 치솟더니 한 자루의 검은 곧장 심랑의 다리를 향했고 다른 한 자루의 검은 심랑이 앉아있는 나뭇가지를 향해 공격해 왔다.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급풍십삼식(急風十三式)'은 과연 듣던대로 대단하군."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그가 앉아있던 나뭇가지는 부러졌지만 그의 다리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 심랑은 아주 태연하게 다른 나뭇가지로 자리를 옮기고는 급풍무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급풍기사들은 더이상 웃을 수 없었다. 둘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뭇가지 위의 이 사람은 그들보다 훨씬 고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쾌활문의 급풍십삼기는 언제나 전진만 있을 뿐, 후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아직 백전백승의 '급풍십삼식' 중에서 일초식 밖에 쓰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발끝으로 땅을 차더니 재차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검광이 무지개처럼 좌,우로 나뉘어져 번개같이 심랑의 가슴과 등을 노리고 공격해 왔다. 심랑의 몸이 갑자기 아래로 가라앉더니 교묘하게도 두 가닥의 검광 사이로 빠지면서 두 손으로 그들 두 사람의 발을 받쳤다. 심랑은 땅으로 내려섰는데 급풍기사는 심랑에 의해 나뭇가지로 올려졌다. '화락'하는 소리와 함께 한 무더기의 나뭇가지가 그 둘에 의해 부러졌다. 두 사람은 매우 당황했지만 결코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두 가닥 남색의 검광이 나뭇잎 속에서 곧장 아래로 찔러왔다. 검광의 기세가 매우 거세고 빠르며 악랄하면서도 정확했다. 하지만 심랑은 이번에는 검광 사이를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검광이 땅에 떨어지자 그는 아까 앉아있던 자리에 도로 앉아서는 미소지었다. "다음에 다시 올 때에는 새 망토가 나뭇가지에 긁히지 않도록 조심하게." 급풍기사는 크게 포효하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들은 위아래로 여덟 차례를 휘둘렀지만 심랑의 옷자락하나 건들지 못했다. 오히려 급풍무사의 망토만 갈갈이 찢겨져 완전히 조각이 나버렸다. 두 사람은 온통 땀투성이가 됐고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다. 두건은 이미 풀잎으로 꽉 찼으며 신발도 심랑에 의해 벗겨져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여전히 그에게 덤볐다. 심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탄했다. "좋았어, 과연 남자답군." 이번에는 그들이 몸을 날리기도 전에 갑자기 아래로 몸을 날렸다. 급풍기사는 깜짝 놀라며 검을 휘둘렀다. 두 검은 여전히 절도있게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전일후(一前一後), 일좌일우(一左一右)로 독사가 굴에서 나오듯 회전하면서 공격해 왔다. 이 검법이야 말로 그들의 진정한 실력이었다. 검법이 변화막측하고 검빛이 난무하니 그들이 공격하는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심랑은 그들의 방향을 가늠할 필요가 없었다. 심랑이 두 손을 합치자 두 자루의 검이 손에 끼워졌고 '카락'하는 소리가 두 번 났다. 곧 정교하게 만들어진 두 자루 검이 네 조각으로 부러졌다. 심랑이 손을 펼치자 그의 손에 끼워졌던 두 개의 부러진 검끝이 날아가면서 '칙칙'하는 소리와 동시에 그들 두건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아무리 악랄하더라도 이젠 더이상 공격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부러진 검을 손에 쥔 채 넋을 잃고 심랑을 바라보았다. 자신들 나이와 비슷한 이 젊은 사내가 어떻게 이런 신출귀몰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심랑도 부드러운 미소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더 싸우겠소?" 급풍기사는 서로 마주 보더니 동시에 말했다. "그만 싸우겠소." "그만 싸우겠다니 그럼 가보시오." "우리들은 이제 가겠소." 그 둘은 졸지에 검을 거꾸로 하여 자신들의 목을 향했다. 심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몸을 번쩍이자 '땅'하면서 두 자루의 부러진 검이 땅에 떨어졌다. 급풍기사가 목쉰 소리로 물었다. "당...... 당신은 왜 막는 거요?" "실패하면 죽는다. 과연 쾌락왕의 부하들은 오만하기가 강철 같군." 급풍기사가 매섭게 부르짖었다. "검이 존재하면 사람도 존재하는 것이고 검이 부러지면 사람도 함께 죽어야 하는 법, 이것이 바로 우리의 규율이오." 심랑이 미소를 짓더니 말을 받았다. "하지만 두 분은 먼저 당신들 주인의 의향을 물어 보시오. 오늘 '심랑'이라는 사람에게 패했다고 말씀 드린다면 당신들의 대왕도 그대들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오." 급풍기사들은 다시 한 번 눈빛을 교환하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좋소, 심랑!" 그들은 동시에 몸을 날려 곧장 달려 갔다. 심랑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한 번 죽음에서 살아나면 다시는 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원리는 누구에게도 마찬가지야." 먼동이 트면서 햇살은 비스듬히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염향의 그 성숙되고 풍만하며 또 원시적인 욕망이 감도는 몸뚱이를 비췄다. 그녀는 거의 전라의 모습으로 이불을 껴안고는 침상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는데 마치 그 침상과 그녀 자신을 찢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랑이 들어와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백설처럼 하얗고 적나라하며 뭔가 갈구하는 몸을 마치 나무토막이라도 보는 듯, 아무런 표정도 없이 염향을 깨웠다.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군." 염향은 매혹적인 눈을 가늘게 떴다.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당신은 장님이 아니겠죠? 남자가 지금 같은 초대를 거절한다면 그는 송장일 거예요." "요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면서 그대는 아직도 내가 송장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오?" 염향은 갑자기 침대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이불을 땅에 팽개치고 죽으라고 밟으면서 이를 갈았다. "이 송장...... 송장......!" 심랑은 앉아서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염향이 한탄을 했다. "당신은 정말로 송장만도 못해요. 당신은...... 사람도 아니에요." "이제 그만 나를 미워하고 어서 예쁘게 치장이나 하지. 쾌락왕이 곧 올 텐데 듣자니 그는 미녀의 초대를 절대 거절 않는다고 하더군요." 염향은 갑자기 몸을 떨었다. "그...... 그가 정말로 오나요?" "그는 아마 예상보다 더 일찍 올 거요." "당신이 어떻게 알죠?" "그들의 부하인 급풍기사들을 방금 내가 만나고 오는 길이오." "아! 춘교가 그들 앞에서 당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심랑이 물었다. "그대 생각엔 그녀가 말을 했을 것 같소?" 염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어떻게 말했나요?" 심랑은 아무 말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오히려 염향에게 물었다. "그대가 만약 쾌활왕으로 하여금 나를 죽이게 하려면 그대는 쾌활왕에게 어떻게 말하겠소?" 염향은 눈을 깜박이더니 즉시 대답했다. "난 그에게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그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이라고 말하겠지요.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 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히 당신을 죽일 테지요." 심랑은 손뼉치고 웃으며 말했다. "결국은 같군. 그녀도 여인이고 그대도 여인이니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은 자연히 다 같을 수밖에. 여인이 생각해내는 것은 영원히 간단하면서도 가장 유효적절하고 또 가장 악랄하지."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요?" 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서 손해볼 것은 없잖겠소?" "이 죽일 년, 쾌락왕이 그 말을 듣는다면 당신을 그냥 놔둘 리가 없을 텐데요." "그들은 물론 나를 그냥 두지 않았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를 그냥 놔줄 수밖에 없었소. 나는 이미 그들을 돌려보내 쾌락왕에게......." 염향이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이 심랑인 것을 알게 되면 쾌락왕은 당신을 그냥 놔둘 리 없잖아요. 그는 분명히 당신을 죽이려 할 거예요." 심랑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가 왜 나를 죽인단 말이오?" "이 바보, 당신은 당신의 명성이 얼마나 자자한지 모르고 있나요? 쾌락왕의 정보가 얼마나 영통한데 당신의 이름을 모르겠어요?" "들었으면 또 어때서?" "심랑이 쾌락왕하고 대적한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난 바로 그래서 알리려는 것이오." "당신...... 당신 미쳤어요?"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만약 내가 그와 대적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도 이미 내가 인물인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그는 분명 실력있는 사람을 먼저 매수하려고 시도할 것이고 매수하는 것이 실패했을 경우 비로소 손을 쓸 테지."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그에게 매수당하지 않을 거잖아요?" "어째서 그렇소?" "그는 분명히 당신이 매수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심랑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매수를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내가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란 말인가? 현 강호에서 누가 나 심랑만큼 욕을 먹는 사람이 있지? 당신마저도 내가 정말로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나쁜사람인지 단정할 수 있을까?" 염향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당신...... 그러니까......." "그대마저도 단정을 할 수 없는데 쾌락왕이 어떻게 단정을 하겠소? 그는 당연히 시도를 할 것이야. 그가 시도를 한다면 또 분명히 성공을 할테고." 염향은 결국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안 돼요. 이런 방법은 너무 위험한 모험이에요." "그런 사람을 상대하려면 모험을 안할 수 있겠소?" "나도 그런 사람을 상대하려면 이런 비상수단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심랑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대는 나를 걱정할 필요가 없소. 난 죽지 않으니까." 염향이 발을 동동 구르더니 한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당신을 걱정한다구요? 웃기지 마세요. 당신. 당신 죽는 게 제일 좋아요. 그것도 말 다섯 필로 온몸이 찢기면서 죽는다 해도 난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릴거예요." 심랑은 파안대소를 하였다. "미녀에게 이토록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지. 단지 다른 남자들이 이런 느낌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 그는 갑자기 몸을 튕기더니 문을 열어 제꼈다. 춘교가 문 밖에 서 있었다. 심랑이 크게 웃으면 말했다. "당신은 이번에도 우리보고 식사하라고 부르러 왔소? 지금 밥을 먹기에는 좀 이르지 않은지?" 춘교는 선채로 몸이 굳어 버렸고 얼굴도 빨개져 있었다. (이 녀석의 귀가 어쩌면 이리도 밝지? 설마 전생에 고양이었나?) "나도 왜 이렇게 내 귀가 밝은지 이상할 때가 있어요. 아! 귀가 너무 밝아도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죠. 잠을 자다가도 다른 사람의 소리에 수시로 잠이 깨거든요?" 심랑의 이 말에 춘교의 얼굴이 더욱 빨개지면서 말을 더듬었다. "전...... 전 단지 보러......." "뭘 보러 왔다는 거요? 혹시 내가 죽었나 안 죽었나 말이오?" "심...... 심 공자께서는 농담도 잘 하시네요." 심랑은 더욱 크게 웃었다. "그렇소, 난 너무 농담을 잘하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을 하거든요? 하지만 난 절대로 죽지 않아요." 춘교가 딴청을 부렸다. "음...... 음...... 심공자...... 향 아가씨께서는 간밤에 잘 주무셨나요?" 염향은 짐짓 웃음 띤 표정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우리는 물론 잘 잤죠. 오히려 춘교 아가씨께서는 간밤에 잠을 잘 못잔 듯하군요. 얼굴 좀 보세요. 눈두덩이까지 까맣게 됐네요. 아! 너무 무리해도 좋지 않아요. 가끔은 잠을 잘 자두는 것이 좋아요." 춘교는 말로는 상대방에게 지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쥐구멍이 있으면 얼른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손님이 이미 다 도착을 했나 본데 춘교 아가씨도 어서 가서 접대 준비를 하시죠. 이렇게 우리한테만 신경을 써주시니 부담이 됩니다." 춘교는 기다렸다는 듯이 급히 대답을 했다. "네, 네, 네, 갈 때가 됐군요." 심랑이 말했다. "혹시 춘수 아가씨를 불러 줄 수 있겠습니까? 이곳을 구경하려 하는데 우리의 안내를 부탁하고 싶군요." "네, 그러죠.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녀는 감히 돌아 보지도 못하고 허리를 틀며 갔다. 염향이 크게 웃으며 외쳤다. "춘교 아가씨, 조심해서 가세요. 괜히 허리 다치지 말고요. 허리를 다치면 상심할 남자가 한둘이 아닐 테니까!" 춘수의 심장은 계속해서 두근반 세근반 하면서 뛰었다. 그녀의 심장은 심 공자가 그녀를 찾는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뛰고 있었다. 심 공자께서 그녀를 불러 함께 이 근처를 구경하자고 하다니,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그런데 하필 그 '여우'도 함께 간다니......' 그녀는 왜 배가 아프지 않을까.' 춘수는 얄미워서 계속 이를 갈았다. 청초한 숲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시원한 바람은 녹색의 대지 위를 쓰다듬었고 조각난 햇빛의 그림자들은 땅 위를 뛰어다녔으며 새들의 지저귐은 마치 음악처럼 울려퍼졌다. 춘수는 몽롱한 상태에서 심랑이 한 마디 물으면 한 마디 대답을 했다. 그녀는 그저 이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 그들 외에 제 삼자가 있다는 것을 잊고 싶을 뿐이었다. 갑자기 숲 밖에서 마차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마차 일행이 언덕 아래를 내려오고 있었다. 이 마차는 칠흑 같이 검고 빛나는 것이 마치 흑옥으로 만든 듯했다. 마차 자체에 별로 특이한 장식은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기세가 대단했고 매우 호화스러웠다. 마차를 끄는 말도 가는 귀, 긴 다리에 위풍이 당당했다. 발걸음도 무척 가볍고 크면서도 안정되었는데 한눈에 그것은 대초원의 명마임을 알 수 있었다. 마차를 이끄는 마부는 보라색 비단옷을 입고 가볍게 말고삐를 잡고는 유유자적하게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전혀 마차를 모는 것 같지 않았는데도 마차는 매우 안정되고 빠르게 달렸다. 이로보아 매우 뛰어난 마부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마차 앞에는 여덟 필의 말이 달리고 있었다. 그 역시 좋은 말이었는데 그 위에 앉아있는 남색의 옷의 대한은 보기에도 우람하고 기세가 등등하여 좀 실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심랑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혹시 쾌락왕의 행차인가요?" 춘수가 냉랭하게 웃었다. "쾌락왕이라구요? 흥, 쾌락왕이 올 때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요란하죠. 이렇게 조용하지가 않아요. 향 아가씨는 쾌락왕을 너무 얕보지 말아요." 염향이 상관않고 다시 물었다. "그가 쾌락왕이 아니라면 누구지?" "내가 말해도 향 아가씨는 모르는 사람일 거예요."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한 번 말해 보시오." 춘수는 금방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의 성은 정(鄭)씨인데 모두들 그를 정난주(鄭蘭州)라고 부르죠." 염향은 내심 춘수를 욕했다. (요 불여우 같은 년, 내가 물을 때는 대답도 않더니 심랑이 물으니까 냉큼 대답하는 것 좀 봐. 어디 두고 보자.) 심랑이 말했다. "아, 정난주......! 그 사람의 신분은 어떻소? 대단한 기세인데." 춘수가 답했다. "듣기로는 정주(鄭州) 세가(世家)의 공자라고 하는데 난주 부근의 과수원은 반 이상이 그 집안의 소유이며 재산이 천만에 이르러 거의 나라와 맞먹는 거부라는군요." "음......!" 마차가 지나간 지 얼마 안 되어서 길에는 또 먼지가 일기 시작했다. 이번 마차 행렬은 아까 정난주보다 기세가 더 위풍당당했는데 두 대의 큰 마차에다 열여섯 필의 말이 달리고 있었다. 황금마차는 반짝이며 눈부신 빛을 발했다. 말등자, 바퀴, 고삐와 재갈, 그리고 마부의 손에 쥔 채찍 손자루 등등이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금의를 입은 대한들은 '팍팍'하는 소리와 함께 채찍을 날렸다. 그들은 가슴을 펴고 배를 내밀고는 의기양양하게 계속 큰소리를 지르면서 갔다. 심랑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는 아마 금을 칠할 수 있는 곳은 전부 금칠을 한 것 같군. 단, 얼굴에도 금칠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아마 절 안의 신상(神像)처럼 됐을 텐데, 정말 안타깝군." 춘수가 '픽'하고 웃었다. "그 사람의 금은 확실히 너무 많아요." 심랑이 물었다. "이 자는 또 어떠한 신분이오?" "이 사람은 원래 노새를 모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러다가 갑자기 몇 개의 금광을 발견하게 됐지요. 금을 한 차 한 차씩 집으로 운반했고 결국 그의 원래 이름인 주쾌각(周快脚)에서 하늘이 부(富)를 내렸다 해서 주천부(周天富)로 고쳤지요." 심랑은 실소를 흘렸다. "과연 졸부였군." 염향이 눈썹을 찡그렸다. "어쩐지 멀리서부터 악취가 풍겨오더라니......." "졸부의 기세는 평소에는 크게 보이지. 하지만 진정한 세가(世家)와 비교한다면 마치 원숭이가 용포(籠袍)를 입은 것처럼 전혀 어울리지가 않아." 춘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원숭이가 아니라 고릴라 같아요." 한 무리의 고릴라 행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마 사람들이 더 올 것 같군." 심랑의 말에 춘수가 덧붙였다. "오늘 최소한 여섯, 일곱 무리가 올 거예요." "응? 또 어떤 사람들이오?" "물론 세가가 아니면 거부(巨富)들이죠. 예를 들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멀리서부터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이 말들의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눈 앞에 와 있었다. 말 위에는 한결같이 청색 두건을 한 대한들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 이상하리만큼 검소한 차림이었다. 염향이 물었다. "이들도 세가나 거부란 말인가요?" 춘수가 답답하다는 듯 냉소를 쳤다. "물론이죠. 그들의 옷은 비록 초라하지만 내력은 대단해요. 단지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실수죠." 심랑은 그들의 대화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한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의 옷은 일행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지만 단지 그의 기개만은 크게 틀렸다. 비록 그가 그와 꼭 같은 차림을 한 육백 명의 사람들과 섞여 있다고 해도 누구나 그를 단번에 알아볼 것이다. 천성적으로 타고 난 그의 기개는 만 명 중에서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심랑이 어깨를 들썩이더니 감탄을 했다. "대단한 사나이군. 저 사람의 기개는 웅묘아와 좀 닮은 데가 있어." 춘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고양이가 아니라 용이에요." "용이라구요?" "그의 성은 용(籠)인데 어느 누구도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어요. 누구든지 그를 보면 모두들 '용두목(籠頭目)'이라고 부르죠." "응? 이 사람의 신분은 또 뭐지요?" "황하(黃河) 상류에서 물건을 운반하려면 반드시 뗏목을 사용해야 하지요. 황하의 모든 뗏목을 바로 이 용두목이 관리해요. 용두목의 허락없이는 누구도 감히 황하를 함부로 지나갈 수 없죠." "황하는 물살이 빨라서 그곳에서 뗏목을 조정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목숨을 내건 자들이요. 이들은 모두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지." 염향이 참견했다. "그가 부하들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역시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아요. 먼저 그의 무공은 차치하고 옷차림에서부터 벌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죠. 누구든지 자신은 고기를 뜯고 남들은 뼈를 핥게하는 사람을 두목으로 섬기지는 않죠." "이런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두목'의 재질을 타고 난 사람들이오. 웅묘아도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이지." 염향이 묘하게 웃었다. "웅묘아라, 웅묘아! 당신은 툭하면 웅묘아, 웅묘아 하는데 그도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지금쯤 이미 주칠칠하고 한데 붙었을 지도 모르잖아요?" 심랑은 안색이 굳어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대처럼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줄 아는가?" 염향은 자신도 모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언제나 미소만을 짓던 심랑이 이렇게 얼굴을 굳힐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다. 또 굳어버린 그의 얼굴이 이토록 무서울 줄도 미처 몰랐다. 춘수는 옆에서 손뼉을 치고 싶었다. 다행히 이때 멀리서 또 누군가가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십 명의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녹색의 가마가 나타났다. 이들 수행원들은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었는데 모두들 붉은 옷과 녹색 옷을 입고 있었다. 나이가 스물다섯 이상 되어 보이는 사람은 없었고 대부분이 십칠팔세의 소년소녀들이었다. 이들 소년소녀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희희낙낙하면서 어떤 이는 입에 뭘 넣고 십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먹을 것을 쌌던 종이들을 맘대로 땅에다 버렸다. 그 큰 가마 안에서도 계속해서 종이를 버려댔다. 가마 안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함께 희희낙낙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한 가마 안에 마치 대여섯 명의 사람이 들어 있는 듯했다. 이들을 보자 춘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이 골칫거리들도 여기에 왔을까?" 심랑이 물었다. "이들은 또 어떤 사람들이오?" "이 자들은 모두가 돈많은 집에서 낳은 골칫덩어리들로 난주지방에서 온종일 개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 패지요. 비록 큰 사건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작은 사건들은 부지기수로 쌓아놓으니 건달이나 깡패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자들이죠." "하지만 저 녹색 비단천으로 만든 가마는 나라에 공적이 있는 사람만이 탈 수 있는 가마인 듯한데 가마 안에 탄 사람은 혹 벼슬아치가 아니오? 그런데 어째서 이들 망나니들과 함께 어울리는 거요?" "이 가마 안에 탄 자는 골칫거리 중에서도 가장 심한 골칫거리지요. 그의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도 온종일 이들 개망나니들과 갖은 짓을 다 했어요. 그러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는 엄청난 재산만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무슨 지휘사(指揮使)라는 관직까지도 계승을 받아 저렇게 더 난리를 피우는 거죠." 심랑이 한심스럽다는 듯 내뱉었다. "한 마디로 집안 망칠 놈이군." 춘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난주에서 이 자에게 당한 피해는 상당히 심했어요. 낮에조차도 이자 때문에 아가씨나 젊은 새댁들은 감히 길을 다니지 못했고 누구든지 '소패왕(小覇王)'이란 말만 들어도 모두가 구르듯이 도망을 가지요." "이걸로 봐서는 이 부근의 모든 세가나 거부들이 오늘 다 모인 듯한데 이 사람들이 어찌 이리도 공교롭게 동시에 이곳에 모인 것이오? 혹시 약속이라도 한 것이오?" 춘수가 답했다. "이들은 모두 쾌락왕이 초청한 거죠." 심랑이 눈썹을 치켜 세웠다. "아니 그들이 쾌락왕과 무슨 관계라도 있소?" "아무 관계도 없어요. 쾌락왕이 이들을 초청한 것은 단지 노름을 하기 위해서죠. 쾌락왕은 매번 이곳에 오면 언제나 이들과 노름하는 것을 빼놓지 않아요." 심랑이 실소를 하였다. "그래, 나도 쾌락왕이 도박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은 들었소. 그럼 이 사람들 외에 또 누가 그와 함께 노름을 하죠?" "쾌락왕은 매우 공정하게 노름을 해요. 그래서 모두들 그와 도박하기를 좋아하죠...... 심 공자, 당신도 흥미가 있으면 한 번 참가해 보세요." 심랑이 눈빛을 반짝였다. "내가 빠질 수는 없을 것 같군." 점심을 먹은 후 심랑은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갑자기 요란법석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소리, 말의 울음소리, 바퀴소리, 상자를 운반하는 소리....... 각양각색의 수많은 소리가 거의 반 시진 동안 들려왔는데 마치 십만대군이 이곳에 주둔하는 듯했다. 염향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쾌락왕이 왔어요!" "맞아, 이 사람이 오니까 과연 천지가 뒤집힐 정도로 시끄럽군." "우리...... 우리는 어떡하죠?" "기다리는 거요." "잠깐, 그냥 이대로 기다린단 말인가요?" "그가 이곳을 못 찾아 올까봐 걱정되오?" 그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염향은 끊임없이 방 안을 왔다갔다 하였다. 마치 뜨거운 솥뚜껑 위에 있는 개미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이미 수백 번을 왔다갔다 했지만 쾌락왕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심랑의 앞으로 가서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를 쳤다. "당신은 송장처럼 그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을 거예요?" "휴식을 충분히 취해야 쾌락왕과 대적할 수가 있소." 염향은 자지러질 듯 놀랐다. "당신은#당신은 설마 그와......." "그래, 나는 그와 한판 붙으려는 것이오. 단지 결투가 아니라 도박을 하자는 것이지. 왕 부인이 준 은자를 이제 써먹을 수 있겠군......." "하지만...... 하지만 당신은 지금......." "그래서 내가 이렇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오. 도박은 결투보다 더 기력을 소비하는 것이니까. 한바탕의 큰 도박은 생사를 건 결투와 전혀 다를 바가 없고 도박장에서의 심리전은 변화무쌍하고 예측불허하니 결투보다도 더 위험하고 자극적이라오." 염향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당신은 혹시 일부러 그에게 져주려는 건가요? 그래서 그것을 아첨하는 빌미로 삼아 그의 눈에 들려는 건가요?" "난 절대로 그에게 질 수 없소. 내가 그에게 진다면 난 그의 눈에 전혀 값어치가 없는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도박이 비록 돈으로 노름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지혜와 힘을 겨루는 것인데 이러한 결투에서 내가 만약 진다면 그가 어찌 나를 눈에 들어 하겠소?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어찌 나를 매수하겠소? 내가 매수할 가치가 없다면 아마 그는 금방 내 목숨을 취할 것이오." 그는 미소를 짓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 나는 도박판에서 반드시 그에게 통렬한 일격을 가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될 뿐만 아니라 내 목숨조차 결코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오." "당신...... 당신이 이길 승산은 얼마나 되나요?" 심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없소." 염향은 기가 막혔다. "당신은 전혀 승산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그에게 도전을 하다니, 그러면서도 전혀 긴장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있다니......." "내가 긴장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는지를 어떻게 알고 있소?" "하지만 적어도 당신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아요." "만약 당신에게 들킬 정도였다면 내가 어떻게 남들하고 도박을 하겠소? 도박판에서는 승패가 순식간에 수천 번도 더 변하는데 만약 침착함을 잃으면 나 자신조차도 잃게 될 것이오." "당신은 색골인 줄만 알았더니 술꾼에다가 노름꾼이었군요?" 갑자기 문 밖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 공자께서는 이곳에 머물고 계십니까?" 염향은 몸을 떨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왔어요!" 심랑은 벌써 문을 열고 있었다. 금의를 입은 한 영준한 소년이 손에는 빨간 초청장을 들고 문앞에 서 있었다. 그는 약간 몸을 굽히고는 물었다. "귀하께서 바로 심 공자이십니까?" "바로 맞았소. 귀하께서는 쾌락왕의 부하시겠군요." 금의 소년은 눈빛을 반짝이며 재빨리 심랑을 한 번 살피더니 윗몸을 숙이며 말했다. "소인은 바로 쾌락왕 휘하의 급풍 제 십팔기입니다. 대왕의 명을 받아 심 공자께 소식을 전하려고 왔는데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발을 반 걸음 앞으로 내밀고 손에 든 빨간색의 초청장을 눈썹 높이로 치켜 올리면서 번개 같은 속도로 내밀었다. 이 동작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예의를 차린 것이었지만 실은 권법 중의 살수(殺手)인 '거안제미(擧案齊眉)'를 가미한 동작으로 만약 심랑이 실수를 한다면 당장에 창피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심랑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듯이 손을 모아 포권하고 답례했다. "형씨께서 수고가 많으십니다." 심랑이 포권을 한 손을 가볍게 위로 받치는 듯했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이 소년의 손에 꼭 쥐여져 있던 초청장이 이미 심랑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금의 소년의 안색이 약간 변하더니 뒤로 세 걸음 물러서서 몸을 굽혔다. "심 공자께서는 과연 비범하십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초청장을 펼치자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밤 자정에 약소한 주안상이 마련되 있사오니 귀하의 왕림을 기다립니다. 기나긴 밤, 식사 후 여흥도 많이 준비 되었사오니 회답을 부탁합니다." 위에는 칭호도 없고 아래에는 서명도 없었다. 심랑은 한눈에 전부 훑어보았다. "수고스럽지만 대신 쾌락왕께 심랑이 꼭 참석할 거라고 전해 주시오." 금의 소년은 다시 한 번 심랑을 보았다. 그는 존경스런 눈빛을 흘리면서 몸을 굽혔다. "네!" 그는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돌아갔다. 염향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자정? 이 괴물은 사람을 초대해도 꼭 그런 시간에 한다니까? 설마 남들이 정신없이 졸 때를 틈타서 이기려는 건가?" "그러니 나는 지금부터 더욱더 열심히 휴식을 취해야 하니 그대는 절대 나를 방해하지 마시오." 지금부터 자정까지는 약 반 시진의 시간이 남았다. 심랑은 충분히 잠을 잤고 통쾌하게 목욕을 한 후 가장 깨끗하고 가장 가볍고 또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 다음 깨끗한 비단 수건에 왕 부인이 준 거액의 은표(銀票)를 잘 싸고는 허리에 찼다. 그는 스스로를 자세히 한 번 훑어 본 후 아무런 흠이 없다고 판단했다. 정신도 매우 맑았으니 심신이 모두 가장 좋은 상태임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진한 차를 한 잔 따르고는 가장 편한 의자를 골라서 앉았다. 아주 천천히 차를 음미하면서 조용히 다가올 그 자극전인 결전을 기다렸다. 염향은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당신이 이토록 유유자적한 것을 보면 정말 탄복스럽군요. 당신은 아무렇지 않겠지만 나는 초조해 죽겠어요!" 그녀 역시 아주 세세하게 치장을 하고 있었다. 몸에는 아름다우면서도 대범한 비단을 걸쳤고 온몸은 온통 향기에 휩싸였으니 아무리 장님이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절세의 미녀라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녀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심랑이 질까봐 두려웠다. 심랑이 진다면 어떻게 하나? 그녀는 또 참지 못하고 안달을 했다. "심랑, 제발 좀 알려 주세요. 대체 얼마의 승산이 있는 건가요?" 심랑은 눈을 감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쾌락왕의 도박방식을 보기 전에는 어떻게 말할 수가 없소." "적어도 반 이상은 있겠죠?" "아마 그럴 것이오." 염향은 간신히 안심할 수 있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단지 십만 팔천 냥 밖에 없는데 쾌락왕의 밑천은 분명히 나보다도 훨씬 많을 거요. 밑천이 많은 것도 역시 승산의 일 할을 차지하는데......." 염향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럴줄 알았다면 좀더 많이 가져오는 건데." "꼭 그럴 필요는 없소. 단지 쾌락왕으로 하여금 내가 대체 얼마의 밑천을 갖고 있는지 모르게만 한다면 그도 경솔히 전력을 다하지는 않을 것이오. 하물며......." 그는 잠시 미소를 짓더니 계속 말했다.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한밑천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후 다시 쾌락왕하고 생사를 건 결전을 벌이면 될 것이오. 정난주와 용사해는 매우 약을 것 같지만 주천부와 소패왕은 아마도 맛있는 반찬이 될 것이오." 염향이 '픽'하고 웃었다. "맛있는 반찬? 당신이나 제발 좋은 반찬이 되어서 남에게 먹히지나 마세요." 창문 밖을 내다보니 두 개의 궁사등롱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심랑은 옷을 털더니 곧 몸을 길게 일으켰다. "갑시다. 우리를 대접하려는 사람이 왔소." '철취헌(綴翠軒)'은 쾌락왕이 여기서 여름을 지낼 때 머무는 행궁이었다. 자연히 온 쾌활림 중에서 가장 호화롭고 정교하며 또 가장 넓은 곳일 수밖에 없었다. 철취헌 밖에는 등불이 휘황찬란했지만 무척 조용했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도 전혀 안보였다. 단지 어두운 곳에서 가끔씩 건장한 그림자가 왔다갔다하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철취헌 안에는 이미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송강의 농어, 양청호의 게, 정해의 새우, 강남의 자라......, 사실 이 모든 것이 한시 한군데로 모이기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렇게 동시에 상 위에 오르다니...... 이것은 정말로 신화와도 같았다. 역시 심랑의 예상대로 탁자에는 고기음식이 없었다. 하지만 심랑이 의외로 느낀 것은 내부가 매우 간결하고 아늑하여 추호도 가식적으로 꾸민 흔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탁자 위에는 금잔과 같은 잔들은 없었으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자기(瓷 )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물도 있었다. 심랑은 갑자기 주칠칠이 쾌락왕으로 변장했던 것이 생각이 나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리고는 내심 감탄했다. (이것이야 말로 쾌락왕의 기풍이구나. 그녀가 흉내낸 것은 모두가 졸부의 그것에 불과해.) 탁자 옆에는 팔 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심랑은 한눈에 '용두목' 용사해를 발견했다. 그는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온통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도 마치 군계학립(群鷄鶴��)인 듯 상당히 비범했다. 용사해의 옆에는 짧은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몸이 약간 뚱뚱하여 생활의 윤택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간단하고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몸에도 별로 눈에 뛰는 특별한 장식이 없었다. 단지 앞에 놓인 코담배통)은 검푸른 색이 돌며 상당히 비범해 보였다. 심랑은 생각도 할 것 없이 이 사람이 바로 그 '정난주'란 사람임을 알았다. 세가의 공자는 역시 세가의 공자다운 기풍이 서려 있었다. 정난주의 옆에는 전혀 틀린 자가 한 사람 앉아 있었다. 그의 몸에는 장식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는데 모든 물건들의 가치는 절대로 천금 이하는 아니었다. 언뜻 보면 그 사람은 마치 전재산을 온통 몸에다 달고 다니는 가난뱅이처럼 보였는데 본인은 오히려 득의양양하여 안하무인격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랑은 이 자가 바로 그 졸부인 주천부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옆에는 머리 전체가 장식으로 싸인 여자가 기대어 있었다. 그녀도 주천부와 마찬가지로 전재산을 몽땅 머리와 손에 걸지 못해 안달이 난 듯했다. 그녀는 왜 목이 부러질 걱정을 안 하는 걸까? 그녀는 비록 몸은 주천부에게 기대고 있었지만 눈은 계속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유혹하는 눈길을 도처에 부렸다. 비록 못 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저속하고 음탕한 자태는 단지 '창녀'라는 간판만 달면 완전했다. 심랑은 내심 웃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맞는 말이군. 저 주천부의 재주에는 역시 저런 여자가 어울려.) 다시 그 옆을 보니 '소패왕' 시명이 있었다. 그는 많아야 십팔 구 세쯤 됐는데 눈두덩이는 움푹 패여졌고 비록 작지는 않은 눈이지만 전혀 생기가 없어 종일토록 잠을 못잔 얼굴이었다. 그가 입은 옷은 그래도 주천부보다는 눈에 덜 거슬렸다. 그의 곁에도 역시 여자가 있었는데 이 소녀의 옷차림은 주천부의 여자보다 더욱 놀랄 지경이었다. 그녀는 조끼만 입었는데 하얀 두 팔과 하얀 가슴이 모두 노출됐으며 계속해서 팔찌가 딸랑딸랑하고 소리를 냈다. 그녀는 기껏해야 십오육 세밖에 안 되 보였는데 얼굴은 온통 화장품으로 뒤범벅을 해놓았다. 게다가 비취로 만든 담뱃대를 물고서는 코로 계속해서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이것은 틀림없는 '여자깡패'였다. 심랑은 도저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 소녀는 오히려 탁자 옆의 빈 의자를 치면서 그를 불렀다. "이봐, 친구. 이리와서 앉아!" 심랑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맙소, 하지만......." 그 소녀가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뭐야? 이 의자 위에는 불도 없으니 당신 엉덩이를 태우지는 않을 텐데 뭐가 무섭다는 거지?" 심랑은 어쩔 수 없이 눈 딱 감고 그 옆에 앉았다. 그 소녀는 염향을 보더니 '하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안목도 상당하군. 이런 류의 사내는 매우 수줍음을 타는 듯하지만 사실은 모두 한가닥들 하지. 내 어리다고 결코 어리게 보지는 말게. 난 그래도 경험이 당신보다는 많을 거야." 염향은 정말이지 그녀의 따귀를 갈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 소녀는 심랑의 어깨를 쳤다. "나는 하원원(夏沅沅)이라고 해. 동료들은 나를 '여패왕(女覇王)'이라고 부르지.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내 애인 '소패왕'이야. 당신 이름은 뭐지?" "심랑이라고 하오." "심랑이라. 좋군. 당신이 상당히 맘에 들어." 그녀는 소패왕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이봐, 이 친구를 우리 패거리에 끼우면 어떨까? 내 생각 어때?" 소패왕은 이때 정신집중하여 자금(紫金)조각으로 탁자 위에다가 탑을 쌓고 있었는데 그녀가 툭치는 바람에 탑은 '우루루'하고 무너졌다. 소패왕은 그제야 비로소 심랑을 한 번 보더니 마지못해 말했다. "음, 괜찮군. 단, 맷집이 좋다면 막내로 삼지. 이봐, 알겠어? 여자가 있으면 먼저 덤빌 수 있지만 동시에 매가 있으면 먼저 매를 맞아야 한다." 용쟁호투 심랑은 웃으면서 소패왕에게 말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난 매맞는 것은 견딜 수가 없소이다." 하원원은 입꼬리를 한쪽으로 치켜 세웠다. "흥, 알고 보니 겉만 번지르르 했지 별것 아니었군." 용두목은 심랑이 들어올 때부터 줄곧 예리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잔을 높이 들더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심 공자께서는 혹시 중원에서 오시지 않았소?" 심랑도 잔을 높이 들고 웃으면서 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비록 중원에서 왔지만 이미 예전부터 용 형님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오늘 직접 만나 뵈니 과연 소문대로 비범하시군요." 용두목은 '하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겸손해했다. "별 말씀을......." 그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는 뚫어질 듯이 심랑을 바라보았다. "내가 듣기로는 중원에 '심 공자'라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소. 그는 혼자서 '삼수랑(三手狼) 뢰추황'을 꺾었고 또 오대산 천룡사의 천법 대사와 겨루어 한 달도 안 되어 전 중원 무림에 이름을 떨쳤다고 하는데...... 혹 그대가 바로 그 '심 공자' 아니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어깨를 들썩이며 안색이 변했다. 소v패왕마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고 주천부의 입도 크게 벌어졌다. 심랑은 '하하하' 하고 웃으며 겸손해했다. "별 말씀을......." 옆에 앉아 있던 쾌활림의 주인인 이등용과 춘교는 동시에 잔을 높이 들었다. 춘교가 옆에서 거들었다. "지금 이곳에 계신 분들은 모두가 유명인사들이죠. 단지 대왕께서 몸이 불편하셔서 손님들을 직접 대접하시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군요. 여러분께서 먼저 몇 잔을 드신 후 그 분을 찾아가 뵙도록 하시지요." 사람들은 함께 잔을 높이 들었다. 하원원은 다시 심랑 곁으로 다가가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였다. "이봐, 당신 이제 보니 한가닥 하는 것 같군. 만약 나와 함께 있고 싶으면......." 그녀는 이렇게 속삭이며 한 손을 탁자 밑으로 넣어서 심랑의 다리를 더듬으려고 했다. 그러나 심랑의 다리를 만지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의 손에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정말 뜨겁고 끈적이는 큰 새우였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뜨거웠고 또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하지만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잔을 높이 들어 술을 마시고 있으니 대체 누가 한 짓인 줄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하원원은 결국 벙어리 냉가슴 앓는 꼴이 됐다. 심랑은 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누가 한 짓인 줄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염향은 그 곳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별다른 내색은 없었지만 입가에는 한 가닥의 득의양양한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주천부가 갑자기 술잔을 놓으며 물었다. "이 분 심 동생도 도박을 좋아하는가?" 그는 굵고 짧은 손을 내밀어 끼고 있는 촌스럽게 큰 비취 반지를 심랑의 눈 앞에 흔들었다. 심랑은 일부러 못 본 척하고 단지 미소만 지었다. "도박을 싫어하는 남자는 아마 많지 않을 겁니다." 주천부는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했다. "맞았어. 도박이란 때로는 여자를 갖고 노는 것보다 더 재미가 있지. 그렇지 않은가?" 그는 비취 반지를 낀 손을 더욱 크게 흔들면서 손뼉을 쳤다. 심랑은 여전히 그것을 못 본 척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어떤 여자인가에 따라서 달라지죠. 집에 처박혀서 빈대를 잡는 한이 있더라도 그 옆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여자가 있으니까요." 용사해는 매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고 정난주도 미소를 지었다. 몇 사람은 저절로 주천부의 곁에 앉은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천부는 그들이 왜 웃는지도 모르고 따라 웃더니 곁에 있는 여자를 단숨에 끌어 안고는 물었다. "동생, 내 여자는 어때? 괜찮은가?" 그 여자는 말을 막 끝내려는 주천부의 벌어진 입에 큰 새우를 집어 넣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심랑에게 유혹의 눈길을 던졌다. 심랑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괜찮고 말고요. 너무 절묘하군요."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모두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주천부의 얼굴 두껍기가 노새라 하더라도 이번 만큼은 창피한지 얼굴이 돼지간의 색으로 변했다. 그는 '퇴'하고 새우를 내뱉었다. "이 화냥년아. 이 어르신네께서 돈으로 네 년을 샀는데 네 년은 오히려 날 망신만 당하게 하다니." 주먹이 날아가자 그 여자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여자는 곧 일어섰는데 벌써 얼굴이 부어올라 있었다. 그녀는 울고불고 욕을 퍼부었다. "그래, 난 창녀다. 네 놈은 뭐 잘난 줄 알어? 내가 언제 공짜로 네 돈 받았냐? 매번 네 그 더러운 손이 내 몸을 만질 때면 난 그저 토하고 싶었다구!" 주천부는 길길이 날뛰면서 큰소리로 욕했다. "이 화냥년아, 네 년의 입을 찢어......." 이때 다행히 이등용이 그를 말렸고 춘교도 그 여자를 끌어 당겼다. 그 여자는 아직도 울고불고 큰소리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네 놈은 뭐가 잘났어? 내게 돈을 쓰려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줄을 서고 있어. 네 놈만 있는 게 아냐. 다음에 또 근질거려도 다시는 날 찾지 마!" 그 여자는 울며 욕하며 돌아가면서도 여전히 살랑살랑 걸었다. 주천부는 치미는 화를 주체 못하고 숨을 거칠게 내쉬고는 탁자를 내리쳤다. "화냥년, 내 고추를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네 년을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용두목이 갑자기 탁자를 치며 매섭게 외쳤다. "좌석에는 아직도 여자 손님이 있으니 말조심 하시오." 주천부는 즉시 태도가 물러지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네! 네! 다음부터는 절대로 고추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심랑은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지만 여전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를 주시하던 정난주는 감탄을 했다. "심 공자께서는 이리도 젊으신데 이렇게 수양이 깊을 줄은 미처 몰랐소." "귀하께서는 과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심 공자의 수양이 이렇듯 깊은 것을 보니 '도(賭)'에 관해서도 아마 상당히 높은 경지에 오르수있을 것 같군요. 잠시 후, 가르침을 기다리겠소." "물론 당연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소패왕 시명도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이곳에 늘 오고 싶었지만 꼰대가 죽지 않으니 내가 올 차례가 안 됐었지요. 이제서야 겨우 오게 됐는데 이곳에서는 보통 어떤 도박을 합니까?" 춘교가 질문을 받았다. "대왕께서는 '패구(牌九)'를 좋아 하시는데 가장 자극적이라고 늘 말씀 하시죠." 소패왕이 말했다. "패구가 주사위보다 재미는 없지만 그런대로 하겠소." 용두목이 큰소리로 웃으며 물었다. "젊은이는 자주 동전 던지기를 하나 보군?" "동전 던지기는 애들이나 하는 놀이죠. 그걸 안한 지 이미 몇 개월이나 됐어요." 용두목이 웃음을 참으며 비꼬았다. "아! 몇 개월이라, 과연 오래 전이군." 심랑도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약간 웃음을 머금었다. 갑자기 금의 소년이 큰 걸음으로 들어왔는데 바로 아까 초청장을 전했던 그 급풍기사였다. 그는 포권(抱拳)을 취하며 물었다. "여러분께서는 식사를 다 마치셨는지요?" 주천부가 대답했다. "술은 단지 서막이고 도박이야말로 본론이지." "대왕께서는 벌써 기다리고 계십니다. 식사를 다 마치셨다니 이제 저를 따라오시지요." 심랑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현세에 가장 전기적인 인물을 곧 보게 되리라는 기대에 온몸의 피가 더욱 빨리 도는 듯했다. 안쪽에 있는 방은 매우 작았지만 그대신 정교했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고 천정에는 매우 이상하게 생긴 큰 등이 걸려 있었다. 그 등은 이미 순백색의 종이에 둘러싸여 불빛이 다른 곳은 비출 수가 없었다. 사방이 어두컴컴하니 그 불빛은 유난히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 강렬한 불빛은 녹색 담요를 깔아 놓은 원탁에 비춰지고 있었는데 녹색 담요는 사방이 금테로 고정되어 있었다. 탁자 주위에는 몇 개의 넓고 큰 편안한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고 빛이 반짝이는 동으로 만든 둥근 난간이 보였다. 탁자 위에는 상아로 만든 패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상아에 정교하게 조각해서 만든 두 개의 주사위가 있었다. 이 외에도 한 쌍의 손이 있었는데 매우 투명하고 정교한 것이 마치 상아를 깎아 만든 듯했다. 기다란 손가락은 녹색 담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손톱은 매우 청결하고 윤택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무명지에는 고전적이고 수공이 정교한 자금(紫金)으로 된 세 개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반지는 불빛을 받아 사람을 위압하는 빛을 발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쾌락왕의 손이었다. 하지만 쾌락왕의 몸과 얼굴은 컴컴한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심랑은 집중해서 자세히 들여다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강한 불빛을 발하는 등불 때문에 단지 흐릿한 얼굴과 반짝반짝 빛나는 한 쌍의 눈만 볼 수 있었다. 이 한 쌍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것은 음침하고 예리하며 감히 맞대고 볼 수 없는 눈동자였다. 만약 당신이 봤다면 당신의 심장을 당장 멈추게 했을 것이다. 정난주가 가장 먼저 들어가서는 몸을 굽히고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대왕께서는 그동안 편안하셨습니까?" 그러자 부드럽고도 조용하며 또 느릿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러나 형용할 수 없이 사람을 선동하는 힘이 있는 음성이 담담한 웃음소리와 함께 들렸다. "좋소.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그는 서서히 난간 안으로 걸어가서는 쾌락왕의 옆 의자에 앉았다. 용사해도 포권을 하며 낭랑하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그동안 편안하셨습니까?" 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좋소.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용사해도 난간 안으로 들어가서는 쾌락왕의 다른 쪽 옆에 앉았다. 주천부는 바로 따라 들어가더니 역시 웃으면서 포권을 취했다. "오늘 대왕의 운수대통을 바랍니다." "음, 앉게." "네, 앉겠습니다." 그는 들어가더니 정난주의 옆에 앉았다. 소패왕도 많이 정중해진 표정으로 몸을 굽히면서 말했다. "대왕께서는 그동안 편안하셨습니까?" "그대가 시장군의 자제인가?" "네, 제가 장남입니다." 여패왕 하원원이 끼어 들었다. "저는 시장군의 큰며느리가 될......." 그 음성은 냉랭하게 변했다. "도박을 안 하는 사람은 난간 밖으로 나가라." 하원원이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제가 여자라고 얕보지 마세요. 저도 도박을 하면 절대로 남자보다 못하지는......." "여자하고는 도박 안한다." "왜죠? 설마 여자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쾌락왕의 뒤에서 손이 하나 나오더니 허공으로 하원원을 향해 누르자 그녀는 곧장 밖으로 밀려갔다. 그녀는 아연실색하며 노래진 얼굴로 얌전히 일어나 난간 밖으로 나갔다. 너무도 놀라서 더이상 거들지를 못했다. 심랑은 내심 크게 놀랐다. (이 사람은 내공이 대단하군. 내공기법 중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진기를 이러한 경지까지 연마를 하다니. 혹시 이 자가 기사(氣使)아닐까?) 곧 생각을 떨치고는 포권을 하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편안하셨습니까?" 심랑은 고개를 들 필요도 없이 사람을 압박하는 한 쌍의 눈이 그를 뚫어질 듯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얼마 후 그 음성이 천천히 또박또박 물어왔다. "귀하가 바로 심 공자인가?" "황송합니다." 그 한 쌍의 눈은 다시 한참 동안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좋아, 아주 좋아, 앉게." 결국 심랑도 자리에 앉았는데 공교롭게도 쾌락왕의 맞은 편에 앉게 됐다. 말할 것 없이 염향은 난간 밖에 얌전히 서 있었다. 갑자기 그 한 쌍의 손이 '탁'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그러자 곧 두 명의 금의 소년이 한, 두 척 길이의 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가 열리니 뜻밖에도 사람이 튀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자는 두 척도 채 안 되는 난장이었는데 다른 보통 난장이처럼 뚱뚱하고 징그러운 모습이 아니라 가느다란 사지와 몸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그의 머리는 약간 컸지만 영활한 두 눈과 얇고 민첩한 입은 결코 밉지가 않았다. 그는 하얀색의 부드러운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색의 옷과 신발을 신었으며 손에도 하얗고 깨끗한 장갑을 꼈는데 너무나 정결하여 그에게는 티끌조차 앉으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상자 속에서 사람이 나오다니......, 심랑조차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백의를 입은 난장이는 탁자 위에 엎드려서 사방에 대고 절을 하고 있었다. 그런 후, 그는 몸을 일으켜 눈을 깜박이면서 말했다. "오입을 하려면 예쁜 여자와 해야 하고 노름을 하려면 공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공정하고 안 하고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지요. 이 작은 요정이 여러분들께 특별히 시중을 들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말재주도 대단히 좋았다. 심랑은 내심 생각했다. (그러니까 쾌락왕은 남들이 속임수를 쓸까봐 특별히 이 난장이를 시켜 패를 씻게 하는 구나.......) 작은 요정은 패를 사람들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 "여러분, 이 패는 진짜이며 전혀 표시를 하지 않았으니 친히 확인하기 바랍니다." 중인들은 동시에 입을 모았다. "볼 필요가 없소." "소인이 매번 패를 섞은 후라도 누구든지 소인더러 다시 패를 섞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소인이 속임수를 쓰는 것을 발견하시면 주저없이 저의 손을 잘라 주십시오." 용사해가 웃으며 말했다. "대왕께서 가장 공정하게 도박을 하신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돈을 거시기 바랍니다. 은자, 황금, 팔대전장에서 발행하는 은표라면 모두 괜찮습니다. 진주, 보석도 당장에 값을 쳐드리지만 외상만은 절대로 사절입니다." 용사해가 말했다. "그 규칙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소." 작은 요정이 다시 눈을 깜박였다. "패를 섞는 것은 소인이지만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여러분이 하시는 겁니다. 대왕께서 선을 보는 것 외에는 여러분들께서 번갈아 주사위를 던지는 겁니다." 심랑은 다시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과연 빈틈이 없겠군. 누구든지 속임수를 쓸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쾌락왕이 도박만은 공정하게 하는군.) 작은 요정은 두 개의 손가락으로 아주 능숙하게 패를 섞었다. 먼저 정난주가 은표 한 장을 가볍게 상 위에 놓았다. 소패왕은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좋소, 난 정 형님과 같이 이곳에 걸겠소." 그는 자주 먹을 것을 집던 손으로 한무더기의 자금덩이를 전부 내밀었다. 갑자기 쾌락왕의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어서 도로 집어넣고 가라." 소패왕은 갑자기 멍청해지더니 안색이 변했다. "왜, 왜죠? 설마 이 금이 안 좋다는 것입니까?" 쾌락왕의 그 예리한 두 눈은 아예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그와 말하는 것조차 귀찮은 듯했다. 쾌락왕의 뒤에서 싸늘한 말소리가 들렸다. "금은 괜찮은데 네 손이 너무 더럽다." 그 느릿한 음성은 냉막하며 어색한 것이 마치 일 년에 몇 마디 밖에 하지 않아 혀가 굳은 듯하였다. 그 사람은 말하는 것보다는 손이 훨씬 빨랐다. 잠시 멍청해 있던 소패왕은 곧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손이 더럽다구? 손이 더러운 것이 무슨 상관이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도박을 하기 위함이지 누구 손이 더 깨끗한가를 시험하러 온 것은 아니잖소?" 그가 말을 막 끝내자 마자 갑자기 뒤에서 한 손이 나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몹시 놀라며 반항을 하려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갑자기 무기력해지면서 닭 목아지를 잡힌 듯 허공 높이 들려졌다. 어색한 목소리가 꾸짖 듯 외쳤다. "가라!" 소패왕의 몸은 이 "가라!"하는 소리와 함께 곧장 날아가더니 '펑'하는 소리와 동시에 멀리 문 밖에 떨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이 사람이 언제 소패왕의 뒤로 갔고 또 어떻게 손을 썼는지는 비단 소패왕 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눈들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패왕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곧장 달려갔다. 이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호흡소리가 소가 숨을 쉬는 것처럼 매우 거칠어졌다. 쾌락왕이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여러분께서는 저 가증스런 흉물 때문에 기분을 잡치지 마시고 계속 하시오." 작은 요정은 양손으로 주사위를 떠받치고는 정난주의 앞으로 갔다. 그의 왜소한 몸체가 넓은 탁자 위를 걸어다니는 것이 마치 꼭두각시의 요정 같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주사위를 두 손으로 머리 위까지 높이 떠받들었다. "정 대인께서 먼저 개시를 하시죠." "고맙소." 드디어 작고 귀여운,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행과 불행, 쾌락과 고통, 심지어 이 사람들의 생과 사를 판가름하는 주사위가 마치 여인의 손처럼 하얗고 섬세한 정난주의 손에서 흘러나와 기나긴 밤, 도박의 문을 열었다. 주사위는 옥과 같이 정교한 접시 위에서 굴러갔다. 수많은 긴장과 흥분한 눈들이 굴러가는 이 주사위를 주시하느라 조금도 깜박이지 않았다. 주사위가 드디어 멈췄다. 일곱 점이었다. 작은 요정이 큰소리로 외쳤다. "일곱 점이니 먼저 '천문(天門)'의 패요." 정교하게 만든 두 개의 골패가 비취로 만든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에 밀려 심랑의 앞으로 왔다. 심랑은 두 패를 가볍게 두 겹으로 모았다. 위의 패는 여덟 점으로 '잡팔(雜八)'이었다. 심랑이 두번째 패를 펼쳐보자 두 점이었는데 그것은 '지(地)'였다. 그 두 개의 빨갛고 동그란 원점은 이 세상 그 어느 미녀의 눈동자보다도 사랑스러웠다. 지패와 잡팔을 합치면 곧 '지강'인데 좋은 패이다. 심랑이 미소를 지으니 마치 그 두 개의 붉은 점도 그에게 미소를 보내는 듯 했다. 작은 요정이 큰소리로 외쳤다. "선은 '아(娥)'와 다섯 점의 배합인 '장구(長九)'이므로 상하는 먹고 천문(天門)에는 물어줍니다. 천문에 이천 냥이오." 은표와 은자는 순식간에 먹히고 물어주었다. 심랑은 따온 천 냥을 다시 천문에 걸었다. 그의 패는 이번에는 '천패(天牌)'였다. 이것은 완전무결한 천패로서 모든 도박꾼들이 꿈에서도 그리는 패였다. 작은 요정이 큰소리로 외쳤다. "선은 '매화(梅花)'와 아홉점의 배합이니 또다시 '장구'이므로 역시 상하는 먹고 천문에는 물어줍니다. 천문에게 이천 냥이 갑니다." 그의 목소리는 비록 컸지만 형용할 수 없이 딱딱하고 단조로워졌다. 이 단조로운 소리는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이어졌다. 주사위는 접시 위를 계속 굴러 다녔다. 골패들도 녹색 담요 위에서 밀고 당겨지면서 대량의 금, 은, 은표들이 신속하고 아무런 감정 없이 먹고 먹혀 들어갔다. 심랑은 연속해서 다섯 번을 이겼다. 그가 거는 액수 역시 이미 배로 뛰어 올라 벌써 만 육천 냥이 됐다. 심랑 뒤에 있던 염향의 두 눈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천부는 불안한 듯이 의자에서 꿈틀거렸다. 핏발이 선 그는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눈빛으로 심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만 냥을 잃은 상태다. 용사해와 정난주도 잃었는데 비록 표정은 태연한 듯했지만 손에는 이미 약간의 땀이 배어 있었고 패에는 더 많은 땀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어둠 속의 예리한 두 눈은 여전히 냉막하고 무정한 채로 심랑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사위는 여덟 점이 나왔다. 작은 요정은 큰소리로 외쳤다. "여덟 점이오. 자, 선의 패를 보겠습니다. 천문은 만육천 냥을 걸었습니다." 선은 가볍게, 그리고 아주 태연스럽게 두 장의 패를 펼쳤다. 그것은 한 쌍의 '인패'였다. 이미 천패와 지패가 다 나왔으니 이제는 인패가 가장 높은 지고무상한 패였다. 사방에서 길게 실망하며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난주는 슬그머니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손의 땀을 닦았다. 그는 또 잃었다. 다른 사람들도 잃었다. 단지 심랑만 남았을 뿐이다. 심랑은 여유있게 패를 펼쳤다. 그것은 '사이'와 일 점의 배합으로 바로 '지존패(至尊牌)'였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탄식하는 소리가 이제는 경미한 소동으로까지 번졌다. 작은 요정이 큰소리로 외쳤다. "선은 '대인패(大人牌)'이므로 상하는 먹고 천문에는 물어줍니다." 그의 딱딱하고 단조로운 어조는 어느새 떨리기 시작했는데 '지존패'야 말로 도박꾼들이 몽매에도 그리는, 그러나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신기한 패였다. 지금 탁자 위에는 아직도 여덟 장의 패가 남아 있었다. 작은 요정은 숨을 들이 쉬더니 말했다. "다시 시작하겠으니 여러분은 어서 돈을 거십시오." 용사해가 입을 열었다. "지존패가 나온 후에는 거렁뱅이가 없다고 하니 나도 천문에 걸겠소." 그는 보지도 않고 은표를 천문에다 걸었다. 주천부도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맞소, 천문에는 끝발이 섰으니 나도 거기에 걸겠소." 정난주는 미소지으며 심랑을 바라보았다. 심랑은 오히려 은자를 도로 찾아오면서 단지 오백 냥만 남겼다. 정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선은 삼 점을 잡았고 용사해는 공문(空門)이었다. 심랑이 가볍게 패를 펼치자 '장삼(長三)'과 '판등'이 배합된 '망통'이었다. 작은 요정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듯 큰소리로 외쳤다. "선이 삼 점을 잡으니 상문에는 물어주고 천문은 먹습니다." 주천부의 안색은 마치 돼지 간처럼 변했다. 눈으로 정난주가 은자를 집는 손을 보면서 계속 소리 가날 정도로 이를 갈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이번에도 '천문'에 걸겠소." 용사해가 말했다. "좋소, 나도 다시 한 번 걸겠소." 대량의 은자가 천문으로 몰렸다. 그래도 심랑은 여전히 오백 냥만 걸었다. 이번에 천문은 '홍두사륙'과 '잡팔'이 배합된 아홉점인데 좋은 패였다. 하지만 선은 '호두'와 '잡팔'이 배합된 '장구'였다. 작은 요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장구는 단구(短九)를 먹으니 천문도 먹고 싹쓸이요." 주천부의 이마에서 콩알만한 땀들이 '뚝뚝' 떨어졌다. 도박은 어쨌거나 계속해야 하는 것이었다. 선은 다섯 번을 연달아 천문을 먹었다. 주천부는 이미 삼만 구천 냥을 잃었고 용사해도 이만 냥을 잃었지만 심랑은 단지 이천 오백 냥만 잃었다. 저쪽에 있던 정난주는 작은 수확을 거둬 이제는 본전도 찾고 따고 있었다. 하지만 주천부와 용사해가 목표를 다른 곳으로 돌려 돈을 걸자 심랑은 다시 또 '천강'이라는 패를 얻었다. 이번에도 그는 육천 냥을 걸어서 이긴 것이다. 그 후, 심랑의 이 육천 냥은 반시진 동안에 칠만 사천 냥으로 변했다. 아까 그가 잃은 이천 오백 냥을 제외하고 십만 이천 오백 냥을 더 딴 것이다. 이제 심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이미 선망이나 질투의 그것이 아닌 경의적인 존경의 눈빛으로 변했다. 도박꾼들의 눈에는 승자만이 신의 아들이오, 하늘의 교자(驕子)였다. 좋은 패를 쥐었을 때야 비로소 인생의 최정상을 맛보는 것이다. 이제 심랑은 중인들의 눈에는 초인이요, 운명의 주재(主宰)이다. 왜냐하면 그의 지혜와 본능은 이미 운세를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빛은 완전히 심랑 한 사람에게만 집중된 듯 했다. 주천부의 몸은 계속해서 미끄러져 내리더니 결국 녹초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경을 읽듯이 계속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십일만오천 냥, 십일만오천 냥......." 정난주는 위로하듯 말했다. "귀하께서는 오늘 끝발이 안서는 듯하니 좀 쉬는 것이 어떻겠소?" 주천부가 큰소리로 대들었다. "난 그래도 하겠소. 자, 천문에 삼만 냥을 걸었소." 그가 삼만 냥의 은표를 꺼낼 때 자루가 뒤집어졌다. 그것은 이제 비어 있었다. 용사해는 갑자기 일어서면서 '하하하하'하고 웃었다. "난 이제 좀 쉬어야 할 것 같소. 더 잃다가는 내 형제들이 다음 달에는 술조차 제대로 못 마실 것 같군요." 그는 옷을 털고는 큰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심랑은 또다시 감탄했다. (과연 다르다. 깨끗하고, 통쾌하고, 또 멋지게 잃는군. 진정 천백 명 형제들의 두목답다.) 그는 다시 건 돈을 모두 회수하더니 단지 천 냥만 걸었다. 패가 펼쳐지자 작은 요정이 큰소리로 외쳤다. "선은 '매화패'이니 싹쓸이오." 주천부는 '뚝뚝' 떨어지는 땀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그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듯, 한참 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갑자기 몸에 있는 보따리를 풀더니 목걸이, 귀걸이, 코담뱃대 등을 몽땅 탁자 위에 쏟으면서 쉰 목소리로 물었다. "현금은 다 잃었는데 이것들은 얼마에 쳐 주겠소?" 작은 요정이 한 번 보더니 말했다. "오만오천 냥이오." 주천부는 땀을 닦았다. "좋소, 오만오천 냥을 전부 천문에 걸겠소.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그가 걸면 이기고 내가 걸면 지다니.... 자, 내가 패를 보겠소 " "맘대로 하시오." 심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자신은 한 냥도 걸지 않았다. 주천부는 떨리는 손으로 패를 쥐고는 한참 두리번거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패를 봤다. 갑자기 그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그가 쥐고 있었던 패도 탁자 위에 떨어지며 뒤집어졌다. 그것은 바로 '홍두'와 '매화'가 배합된 '망통'이었던 것이다. 어둠 속의 두 눈동자는 주천부를 조용하고 싸늘하게 바라 보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그를 부축해서 데리고 나가라. 이등용,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주도록 해라! " 난간 밖의 이등용은 즉각 몸을 굽히면서 대답했다. "네" 쾌락왕이 물었다. "정 선생은 어떻습니까?" 정난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약간 땄습니다." "그럼 잠시 쉬겠습니까? 난 심 공자와 단둘이 겨루고 싶군요." 정난주는 기꺼이 찬성했다. "저도 마침 물러서서 두 분의 용쟁호투와 같은 대결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앞게 쌓인 약 산이 냥의 은자를 작은 요정의 앞으로 내밀었다. "약소하지만 이것은 소 형제의 사탕값으로 쓰시게." 작은 요정은 한쪽 다리를 꿇고 말했다. "고맙게 받겠습니다. 정 선생께서는 겨우 몇천 냥 밖에 다시 못했는데 저에게 사천 냥씩이나 주시다니, 계속 이렇게 간다면 소인은 내년쯤 예쁜 색시를 얻을 수가 있겠습니다." 정난주는 유쾌하게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쾌락왕이 청했다. "정선생께서는 함께 계셔 주시죠." 정난주는 다시 생각하더니 허락했다. "좋습니다. 제가 두 분을 위해서 주사위를 던지죠. 오늘 밤의 도박은 이제서야 시작이군요, 아까의 놀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심랑은 여전히 여유있게 앉아 있었다. 그의 손은 아직도 따뜻하고 건조했다. 그도 정난주의 말에 수긍이 갔다. 진짜 경천동지할 도박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오늘 밤 그의 적수는 오직 쾌락왕 일 뿐이며 쾌락왕의 적수도 역시 심랑 외에는 없었다. 비록 그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십만 냥의 밑천을 땄고 이 십만냥의 자금은 그에게 이할의 승산을 더해줬다. 그러나 그의 적수는 너무도 강력했다. 아직까지도 그를 공격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맞은 편에 앉은 저 사람은 마치 절대 지지않는 도박의 신 같았다. 그의 냉정함과 침착함은 너무도 빈틈이 없었던 것이다. 서른 두 장의 빛나는 골패가 다시 가지런하게 쌓였다. 쾌락왕이 심랑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서로 맞서서 노름을 하는데 내가 선을 해서는 안 될 것 같군, 안 그렇소?" "대왕께서는 과연 공정하시군요." 만약 두 사람의 패가 똑 같은 점수일 경우 선이 이긴다면 그것은 심랑이 손해를 보는 것이다. 비록 이런 상황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쾌락왕은 이런 이점조차 벌고 싶지 앓았다. 쾌락왕이 말했다. "번갈아 선이 되는 것도 불편한 점이 있소. 내 생각에는 우리 두 사람이 먼저 액수를 정한 뒤 완전히 동등한 위치에서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합시다." "대왕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쾌락왕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혹시 그렇게 겨루는 것이 너무 따분하다고 느끼지 않소?" "따분하다니오?" "그렇게 겨룬다면 단지 운만 겨룰 뿐, 전혀 기교 부릴 틈이 없으니 비록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너무 무료할 것이오." "대왕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겨루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쾌락왕은 형형한 눈빛으로 심랑에게 압박을 가하며 말했다. "패는 죽은 것이지만 거는 돈은 산 것이오. 패는 비록 변화를 일으킬 수 없지만 거는 돈의 액수는 변화를 줄 수 있단 말이오. 변화만 있다면 그 이상 재미있는 것은 없을 것이오." "돈의 액수를 어떻게 변화시킨다는 말씀인가요?" "먼저 서로가 패를 본 뒤에 쌍방은 거는 돈의 액수를 배로 높일 수 있는 것이오. 만약 상대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패를 볼 필요도 없이 지는 것이오. 또 상대가 좋은 패를 갖고 있다면 역시 돈을 배로 높일 수 있는 것이고 돈의 액수는 계속해서 높아질 수 있는데 쌍방이 더 이상 올리지 앓거나 한쪽이 기권할 때까지 하는 것이오. " 그의 눈에 한 가닥 교활한 미소가 스치더니 다시 서서히 말을 이었다. "이렇게 대결을 하면 그대 손에 만약 큰 패가 쥐여져 있을 경우 돈을 더 많이 딸 수 있는 것이고 만약 나쁜 패일 경우라고 해도 결코 꼭 잃지만은 않을 것이오. 그것은 그대가 적당하게 액수를 높일 수만 있다면 상대의 점수가 그대보다 높아도 상대는 기권을 할 수 있으니까." 심랑이 손뼉치면서 크게 웃으며 탄복했다. "절묘하군요. 정말로 절묘합니다. 이렇게 하는 도박은 행운 외에도 지혜와 기교, 그리고 침착성을 겨루는 것이고 더우기.... " "맞소,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은 바로 자신의 표정에서 절대패의 내용을 읽을 수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오. 물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상대의 패가 어떤지를 알아 내야 하고... . " "이 방법은 과연 재미 있군요. 정말로 재미있겠어요." 주위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정난주도 역시 감탄했다. "이러한 방법은 매우 독창적이어서 이전에는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방법입니다. 저도 각종 도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대왕께서 또다시 도박의 새로운 전례를 세우셨습니다." "도박판은 마치 전쟁터와 같소. 도박판에서는 쌍방이 서로 심리전을 펼쳐 상대를 속여야 하오. 이 방법은 마치 무림 고수들이 겨룰 때처럼 기우와 기교, 지혜, 경험이 하나도 빠짐이 없어야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야 지는 사람이 진짜로 지는 것 아니겠소?" 정난주가 다시 찬사를 퍼부었다. "대왕께서는 절정 고수이신데다 심 공자도 약하지 않은 듯한데 오늘 두 분이 이렇게 맞서게 되다니.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이는 저희들의 큰 수확이며 눈복이 터진 것입니다." "심 공자께서 이의가 없다면 우리 이제 시작합시다." "거는 돈의 액수가 수시로 증가를 할 수 있다면 맨 처음 밑천의 액수를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매번 협의를 거쳐야 한다면 너무 시간을 낭비하게 될 테니까요." 쾌락왕은 약간 생각을 하더니 액수를 걸었다. "오천 냥이 어떻소?" "좋습니다." 주사위가 던져지고 패를 돌리니, 모든 사람들의 눈은 더욱 크게 떠졌다. 거액의 돈과 신기한 도박 방식, 그리고 막강한 맞수. 심랑의 눈은 흥분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미소는 더욱 매혹적이고 우아해 보였다. 그의 두 손이 가볍게 패를 펼치자 일곱 점이었다. 일곱 점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는 패를 덮더니 자신의 얼굴을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기고는 쾌락왕을 바라 보았다. 쾌락왕도 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빛나는 눈빛은 추호의 변화도 없었다. 곧이어 쾌락왕은 그 완전무결한 손으로 한 무더기의 은자를 내밀면서 가벼운 말소리를 흘렸다. "만 냥 걸었소." 만 냥이라.... 결코 작은 액수는 아니었다. 혹 그의 수중에 여덟 점 이상의 큰 패가 있단 말인가? 아니면 상대를 겁주려는 괜한 허세인가? 심랑은 약간 멈칫하더니 은표 두 장을 골라내면서 말했다. "만 냥에다 다시 만오천 냥 걸었소." "좋아, 나도 삼만 냥 걸었소." 삼만 냥이다. 쾌락왕은 아무런 주저없이 삼만 냥을 걸었다. 이번에는 아마도 허세가 아닌 정말로 큰 패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일곱 점은 결코 좋은 패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심랑은 서서히 손을 내밀어 그의 패를 죽이려 할 참이었다. 막 손을 내밀려는 그 찰나, 그의 생각이 갑자기 변했다. 이것은 단지 그만의 육감일 뿐, 결코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는 죽지 않고 오히려 한 다발의 은표를 내밀며 느긋하게 말했다. "삼만 냥이오. 패를 펼칩시다." 쾌락왕은 뚫어질 듯이 그를 노려 보더니 그의 패도 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대가 이겼소." "하지만 저는 일곱 점입니다." 쾌락왕이 천천히 패를 펼치니 일점이었다. 사방에서는 경미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일 점으로 감히 그렇게 큰 돈을 걸다니 ! 그리고 일곱 점 가지고 상대방의 패를 보려 했다니 ! 이는 전부 다 불가사이한 일이었다. 심랑이 첫판을 매우 멋지게 이겼는데 이것이 바로 승부의 관건 인지라 염향의 얼굴에는 웃음지이 활짝 폈다. 정난주는 탄복하면서 두번째 주사위를 던지고 패를 돌렸다. 심랑이 패를 살짝 펼쳐보니'천패 (天婢)'였다. 그것은 완전무결한 천패였으니 그에게 또다시 행운이 돌아온 것이다. 행운의 여신은 오늘 밤 특별히 그를 돌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추호도 내색을 않고 쾌락왕을 바라봤다. 쾌락왕도 전혀 내색을 안했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혹시 그가 겁을 먹고 있는 것일까? 심랑은 이번이 상당히 얻기 어려운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너무 많이 걸면 상대방이 겁을 먹고 도망갈 테고 그렇다고 너무 적게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야 했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흐른 후, 심랑은 드디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오천 냥을 걸겠소." 이 액수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아주 알맞은 액수였다. 그는 상대방을 종잡을 수 없게 하여 그도 겁을 먹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는 것이었다. 쾌락왕은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생각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만오천 냥에 다시 삼만 냥을 걸었소." 심랑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쾌락왕이 드디어 미끼를 물었던 것이다. 그는 손끝으로 비단같이 매끈한 골패를 느끼면서 짐짓 생각하는 척하더니 말했다. "삼만 냥.... 삼만 냥에 다시 오만 냥을 걸겠소." 쾌락왕은 잠시 생각 하는 듯했는데 자신이 이미 함정의 가장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만 냥에다 다시 오만 냥을 걸었소." 그는 드디어 함정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심랑은 갑자기 주변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을 느꼈다. 상대가 함정에 빠져 들어갔으니 이제 남은 일은 그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너무 빨리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으로 족했다. 이것만으로도 상대의 기를 완전히 꺾고 이후로는 승승가도를 달릴수 있으니 너무조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드디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만 냥은 여기 있소. 패를 봅시다. " 쾌락왕은 찬성했다. "좋아..... 좋아....." 심랑은 가볍게 패를 펼쳤다. "천....." 거의 동시에 그는 상대방의 패를 봤다. 그것은 뜻밖에도 '지존패'였다. 천하무적의 지존패! 사방에서는 탄성과 함성을 억지로 자제하고 있었지만 그 소음이 한데 모이자 자연히 소리가 커졌다. 지금 심랑은 천신만고 끝에 딴돈을 도로 전부 잃었다. 형세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쾌락왕이 상승세를 탓으니 심랑은 얻어맞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는 매우 힘든 상황인 것이다. 그가 다시 이기려면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며 침착하게 절호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아니면 그는 오늘 밤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 과연 다시 기회가 돌아올까? 기회가 왔을 때, 과연 그는 그것을 잘 이용할 수 있을까? - 제5권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