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업(業)의 시작 2 장 진흙 속의 옥구슬들 장 깨끗한 패배(敗北) 장 밀천무영세가(密天無影世家) 장 개파대전(開派大展) 6 장 고개 드는 야망(野望) 장 궁가장(宮家莊)의 멸망(滅亡) 장 밀천문(密天門) 제 1 장 업(業)의 시작 1 밀실(密室).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이곳은 완벽하게 밀폐된 하나의 거대한 석동(石洞)이었다. 석동의 사방은 서가(書架)로 꾸며져 있었고 범인(凡人)은 평생을 가도 구경하지 못할 방대한 분량의 서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그 중앙.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석동을 희미하게 밝혀 주는 야명주(夜明珠) 불빛 아래, 한 노인이 한 평 남짓한 석단 위에 단정히 정좌해 있었다. 반듯한 이마 위로 정갈하게 빗어 넘긴 백발과 귀밑까지 길게 늘어뜨린 검미(劍眉)가 은색으로 반짝이고,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어딘지 모르게 굴강(屈强)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노인이었다. 또한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오는 기도(氣度)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으니, 흡사 태산(泰山)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웅후(雄侯)하며 장중(莊重)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양 눈가와 이마에 깊게 팬 주름살에는 감출 수 없는 고뇌(苦惱)와 아픔의 빛이 은은히 보이고 있었다. 누구인가? 이토록 장중한 기도와 은은한 고뇌의 기운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는 이 노인은.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듯 노인은 창백하기 그지없는 안색으로 입적한 고승(高僧)처럼 눈을 내리감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영원히 뜨일 것 같지 않던 노인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내심을 짐작할 수 없는 맑고 심유한 눈빛. 노인은 천천히 석동 안을 빽빽이 메운 책자들을 둘러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젊음과 청춘을 이곳 황궁무고(皇宮武庫)에 바친 지 어언 이십 년(二十年)! 천하 모든 무학(武學)의 최정수가 담긴 십팔만 칠천 육백 권의 무공비급(武功秘　)을 오늘에서야 완벽(完璧)하게 소화했다." 노인의 음성에는 은은한 감회와 감동이 묻어나고 있었으나 그 말의 파급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황궁무고(皇宮武庫). 중원 최대의 신비지(神秘地)인 그곳에는 천하(天下)의 모든 무학이 모여 있다고 전해진다. 그곳에 있는 비급 하나하나가 절세의 신공(神功)으로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익혀도 무림(武林)에서 명성(名聲)을 떨칠 수가 있으며, 만일 그 누군가가 그곳의 모든 것을 얻는다면 능히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황궁무고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무림인들이 황궁무고를 찾아 천하를 이 잡듯 뒤져 보기도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황궁무고는 찾을 수 없었고 그 존재는 영원히 신비(神秘)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한데, 노인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바로 황궁무고이며 그곳에 있는 무학을 모두 소화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중원 최대의 신비지인 황궁무고이며 또한 사방을 가득 메운 서책들이 모두 천하의 무학을 총망라한 무공비급들이었다는 것인가? 그때 노인은 자신의 발치께에 펼쳐져 있던 한 권의 두툼한 책자를 덮고 있었다. 검은 표지 위에 핏빛 글씨로 쓴 책의 제목이 섬뜩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천마경혼십전마예(天魔驚魂十全魔藝)〉 그것은 이 땅 위에 최초로 악(惡)을 심어 놓은 천마(天魔)가 이끌었던 중원 최고의 마(魔)의 집단, 마전(魔殿)을 이어 오게 만든 불멸의 비급이었다. 이미 실전된 지 오래인 것으로 알려진 그 비급이 바로 이곳 황궁무고에서 숨쉬고 있었다니 진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문천화비서(空門天華秘書) 대소림무전(大少林武殿), 도문제일기공(道門第一奇功) 대천혼검무(大天魂劍武), 사종천년일맥(史宗千年一脈) 구천혈사록(仇天血史錄)... 눈에 띄는 책자의 제목들은 하나같이 오래 전에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희대의 기서들이었으나 모두 노인의 옆에 겹겹이 쌓인 채 쓸모없는 것들인 양 나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노인이 말하기를, 그는 이곳 황궁무고에 있는 비급들을 모두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했다. 이 많은 광고절금(曠古絶今)의 무공비급들 중 하나를 익히는 데만 해도 십수 년이 걸릴 터인데, 노인은 무려 십팔만 칠천육백 권의 비급을 모두 익혔다는 것이다. 대체 노인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광오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모든 것은 신비 속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다시 두 눈을 내리감았다. 끓어오르는 감회를 안으로 삭이려는 듯했다. "이십 년... 길고 긴 각고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야망(野望)을 성취하기 위한 세월로는 결코 길다고 할 수는 없겠지." 자신에 대한 위안이었을까? 노인은 석동 안에서 보낸 이십 년의 세월보다는 가슴속에 품은 야망에 더 큰 비중을 두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밀실 안에는 다시 깊은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스르르릉... 한없이 이어질 것 같던 적막감은 채 일 각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석동의 한쪽 벽면에서 들려 오는 굉음에 의해 무참히 깨져 버리고 말았다. 벽면(壁面)이 열리고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는 강렬한 빛줄기가 황궁무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한 인영이 황궁무고 안으로 들어섰고 벽면은 다시 흔적도 없이 닫혀 버렸다. 찰나지간 태산이 움직였다. 그토록 굴강한 기운을 내뿜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을 것 같던 노인이 바닥에 몸을 던지며 석동 안에 들어선 인영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폐하(陛下)! 신(臣) 백리사헌(百里司獻), 폐하를 뵙는 광영(光榮)을 다시 갖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격동에 은은히 떨려 나온 노인의 음성이었다. 오체투지한 노인의 전면. 한 명의 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대략 오십 세쯤 되어 보이는 그 노인은 일신에 승천(昇天)하는 황룡(黃龍)이 생생하게 수놓인 금빛 곤룡포(袞龍袍)를 걸치고 있었다. 가슴까지 늘어뜨린 탐스러운 은염(銀髥)에 입가에는 만인을 포용하고도 남을 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반면에 왠지 함부로 범접치 못할 위엄을 은연중에 풍기고 있는 모습이 가히 만승지존(萬乘之尊)의 풍도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곤룡포의 노인은 발 아래 엎드린 노인, 백리사헌을 향해 격동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사헌, 수고 많았소. 드디어 해냈구려." 감격 어린 음성과 함께 곤룡포의 노인은 백리사헌의 어깨를 잡고 그의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짐은 믿었소. 짐이 눈을 감기 전에 경(卿)을 볼 수 있음을! 그리고 경이라면 꼭 해내리라는 것을..." 그러자 이제껏 심유 무심하던 백리사헌의 두 눈에도 세찬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 모든 것은 바로 폐하의 하해와 같은 성덕(聖德)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아니오. 짐은 알고 있었소. 이러한 일을 할 사람은 천 인에 단 한 사람, 바로 백리사헌 그대뿐인 것을 말이오."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백리사헌의 음성에는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충정의 기색이 가득했다. 한데, 그의 말투와 태도로 미루어 곤룡포의 노인은 범상한 신분이 아닌 듯하지 않은가? 진정 백리사헌의 말대로 눈앞의 노인은 당금의 천하를 굽어보는 황제(皇帝)란 말인가? 곤룡포의 노인은 자애로워 보이는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하하핫! 사헌, 그대에게 짐은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이십 년 전에는 그대의 가정(家庭)을 빼앗았고 이제는 또 그대의 청춘(靑春)을 빼앗았으니..." 자못 미안해 하는 그의 말에 백리사헌은 오히려 더욱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미신(微臣)이 듣기에는 너무도 송구하옵니다." "사헌...!" "신의 역대 선조들께서 그래 왔듯이 신 백리사헌 역시 폐하와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한목숨 바칠 것입니다." 덥석! 곤룡포의 노인은 치미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급기야 백리사헌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고맙소." "폐하...!" "이번 일만 성공으로 이끌어 준다면 그대 백리세가(百里世家)의 충정과 공덕은 대중원사(大中原史)에 길이 칭송될 것이오!" 잠시 격동의 순간이 감격스레 흐른 후, 곤룡포의 노인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백리사헌에게 내밀었다. "자! 이것을 받으시오. 허허헛, 짐의 대(代)에서 이것을 그대에게 직접 전하게 되다니 이는 짐의 크나큰 홍복(洪福)이 아닐 수 없구려." 그것은 찬연한 금빛 광채를 뿌리는 어인(御印)으로 밀봉된 한 통의 서찰이었다. 〈명(命).〉 그 한 글자가 서찰의 앞면에 웅휘한 필치로 적혀 있었다. 서찰을 건네 받은 백리사헌의 두 손이 부지중 세찬 떨림을 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오늘 같은 날이 오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했던가? 지난 이십 년간 뼈를 깎는 듯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백리사헌이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젊음과 청춘을 바친 이십 년의 세월. 그것이 마치 눈앞의 서찰에 모두 응축되기라도 한 듯 백리사헌은 조심스럽게 금빛 서찰을 펼쳐 들었다.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이 일시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중원무림(中原武林)을 개혁하라!> 서찰에 쓰여 있는 것은 그 한 줄이 다였지만 그 글이 담고 있는 의미는 도저히 평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느 누가 감히 중원무림을 개혁할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림이 생긴 이래 수천 년간 몇몇 사람들이 무림 위에 군림(君臨)하려는 마음을 먹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무림과 함께 살아갈 수는 있어도 그 위에서 군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굳은 표정으로 서찰을 바라보고 있는 백리사헌을 향해 곤룡포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역시 긴장한 듯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사헌! 경은 잘 알 것이오. 더 이상 짐의 설명이 필요없음을!" 그의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백리사헌은 다시 한 번 그 앞에 깊숙이 오체투지했다. "폐하! 미신은 신명을 다 바쳐 천명(天命)을 거행할 것입니다." "가시오. 그리고 두 번 다시 짐과 같은 비극(悲劇)을 겪는 황제가 이 땅 위에 나타나서는 안 됨을 명심하도록 하시오." 착각이었을까? 한순간 곤룡포 노인의 두 눈에 소리없는 아픔의 빛이 일렁인 것은. 꿇어 엎드린 백리사헌의 눈에도 동류의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고 그것은 곧 이어 뜨거운 충정으로 화했다. "폐하! 신 백리사헌, 죽음으로 명을 이행할 것입니다." 곤룡포의 노인은 그제야 굳어 있던 안색을 풀며 신뢰와 믿음의 빛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백리사헌을 응시했다. "고맙소. 짐은 눈을 감기 전에 그 날을 볼 수 있기만을 간절히 학수고대하고 있겠소. 다만 한 가지, 경과 함께 따뜻한 술 한잔 나누지 못하고 그대를 떠나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 아플 뿐이오." 이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안 백리사헌은 천천히 신형을 일으켜 노인 앞에 정중히 삼배(三拜)의 예를 올렸다. "폐하! 부디 만수무강(萬壽無疆)하옵소서. 신 역시 폐하를 다시 뵈올 날을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이어 백리사헌은 느릿하게 신형을 돌려 이십 년간 몸담았던 황궁무고를 떠나기 시작했다. 스르릉! 굳게 닫혔던 밀실의 문이 열리고 백리사헌은 밝은 빛무리 속으로 나아갔다. 점차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던 곤룡포의 노인은 백리사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사헌! 짐은 믿소. 경이 이 대업(大業)을 꼭 이루리라는 것을." 문득 그의 시선이 허공의 한곳으로 향했다. "하후돈(夏候敦)! 잘 보았느냐?" 흐릿한 어둠 속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곤룡포 노인 앞에 중년의 대한(大漢)이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한 자루의 검인 양 예리한 기도를 내뿜고 있는 그는 곧바로 노인 앞에 깊숙이 부복했다. 곤룡포의 노인은 그를 엄중히 바라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잘 들어라. 이 대업(大業)은 사헌 혼자의 힘으로는 벅찰 수도 있을 것이다." "...!" "너는 지금부터 그의 뒤를 따르며 그에게 최선의 도움을 도 록 하라. 하나, 절대로 사헌의 앞에 나타나서도 들켜서도 안 되느니라." 일의 중요성을 나타내듯 명을 내리는 노인의 안색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짐은 이번 일로 인해 사헌의 가슴에 조그만 상처도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명심하여 거행하겠습니다." 중년인, 하후돈은 혜지가 번뜩이는 눈을 반짝이며 한차례 깊숙이 부복대례를 취한 뒤 재차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밀실 안에는 다시 곤룡포의 노인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잠시 깊은 적막감이 감도는 가운데 노인은 한동안 석상처럼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노인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나직한 독백을 흘려냈다. "역대의 어느 제황도 못 했던 중원의 개혁! 누구나 그 마음은 있으되 힘〔力〕이 없었다. 그 결과, 대중원 속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별세계인 무림 때문에 정통(正統) 황실(皇室)이 위협받고 심지어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까지 잃을 뻔한 것이 몇 번이었던가?" 그렇다. 그것은 중원 가운데 무림이 생긴 이래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급기야 그것은 짐의 대에 이르러서는 돌이킬 수 없는 한(恨)과 통천할 분노의 화를 초래했다." 파르르... 노인의 안면이 비참하리만큼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이십 년 전, 만일 백리사헌이 없었던들 어찌 오늘의 황통(皇通)이 존재할 수 있었으며, 또한 나 홍희제(洪熙帝)가 여태껏 살아 남을 수 있었겠는가?" 홍희제! 이 곤룡포의 노인이 다름 아닌 대명(大明)의 제십일대(第十一代) 황통을 이어받은 인종(仁宗) 홍희제였단 말인가? 기실 언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역모(逆謀)와 반란(反亂)은 있어 왔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결과로 역사(歷史)는 급진적인 발전을 이룩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역사상 가장 통천 가공할 무림인의 대역모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역대 제황들 중 가장 치욕적이며 씻을 수 없는 통한을 겪어야 했던 비운(悲運)의 황제가 바로 홍희제였으니... 홍희삼년(洪熙三年)에 돌발한 엄청난 대역모는 홍희제를 역사상 가장 비참한 황제로 만들었다. 이른바 백일천하(百日天下)의 난세(亂世)! 그것은 후일 사가(史家)들에 의해 이렇게 기록되었다. －마신천제(魔神天帝) 종리허(宗里許)! 무림 십대문파(十大門派)를 초토화시키고 마도(魔道)의 힘을 하나로 모아 대역천(大逆天)의 장(章)을 펼치다. 일백 일 동안 황궁을 장악, 천하를 도탄에 빠뜨린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는 홍희제의 수연황비(羞蓮皇妃)와 비빈(妃嬪) 일곱 명, 그리고 도합 십이 명에 달하는 대군(大君)들과 옹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 참화의 와중에서 홍희제 자신은 금군어령총령(禁軍於令總嶺) 백리사헌과 그의 수하 백 명의 호위 속에 통분을 금치 못하며 피신하다... 그 치욕의 역사의 주인공인 홍희제가 바로 지금 황궁무고 안에 홀로 우뚝 서 있는 곤룡포의 노인이었으며, 또한 황궁무고에서 천하 모든 무학의 최정수를 연성하던 인물이야말로 그를 역경에서 구해 냈던 금군어령총령 백리사헌이었던 것이다. 지금 홍희제의 노안(老顔)은 이십 년 전의 통한이 되살아나는 듯 뼈아픈 고뇌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다시 침중하기 그지없는 음성을 내뱉었다. "짐은 알고 있다. 당시, 백리사헌이 천하제후들과 무림고수들의 힘을 얻으러 가지 않았던들 오늘의 짐은 있을 수 없음을...!" 그랬다. 당시 역부족을 느낀 백리사헌은 천하제후들과 정도(正道)의 무림고수들을 규합했고 백 일 만에 다시 황궁을 탈환하고 반역자를 처단할 수 있었다. "해서... 중원무림을 개혁해 두 번 다시 짐과 같은 비극을 겪는 황제가 나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홍희제의 두 눈은 이 순간 어느 때보다도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짐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천하의 무학을 총망라하기로 했다. 그리고 무공이 존재한다는 곳은 어디든 손을 뻗어 이십 년간 무학의 최정수만을 모았다! 천축(天竺), 묘강(苗彊), 해동(海東), 심지어는 바다 건너 동영(東瀛)까지..." 그런 홍희제의 집념이 응축된 곳이 바로 황궁무고였다. "또한 이 모든 광대한 기학(奇學)을 백리사헌으로 하여금 익히게 했고 마침내 오늘 그 결실을 보았다! 백리사헌, 그라면 충분히 이루어 낼 수 있으리라. 중원무림의 개혁...! 그만이 그 대업을 가능케 할 것이다." 중원무림의 개혁! 홍희제가 백리사헌으로 하여금 이십 년간을 황궁무고에서 머물게 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백리사헌에게 내려진 중차대한 임무였다. 홍희제는 비장함이 담긴 시선으로 서가를 빽빽이 메운 서책들을 둘러보았다. "이것은 이제 두 번 다시 나타나서는 안 된다. 무림은 오직 백리사헌에 의해서만 주도되어야 하고, 그만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홍희제는 불붙은 화섭자(火攝子)를 한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황궁무고를 둘러보고는 미련없이 천고절금의 무공비급들에 화섭자를 들이댔다. 화륵, 화르륵... 불길은 삽시간에 화섭자에서 비급으로 옮아갔고 곧 이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어느것 하나 세상에 나가면 경동(驚動)케 하지 못할 것이 없었으나 시뻘건 화마(火魔)에 의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불길 속에서 홍희제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향후(向後) 나뭇가지처럼 뻗친 무림은 단 하나의 성(城)으로 종결되어 황실에 예속된 일개 성으로 자리잡을 뿐이다. 무림성(武林城)! 짐은 그 성을 무림성이라 명명하리라...!" 무림성! 그 서막의 대서사시는 이렇듯 황제와 백리사헌이라는 한 인물에 의해 펼쳐지고 있었으니... 활활 타오르는 황궁무고는 차후 무림의 앞날을 예고하고 있는 듯했다. 이곳은 천중비(天中秘) 황궁무고였다. 2 "바람 속에 벌써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니 어느새 초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나 보군." 푸르른 창천(蒼天)이 눈이 시리도록 맑은 날. 한 줄기 미풍에 실려 창노한 노인의 음성이 잔잔하게 번지고 있었다.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가 앞을 다투어 만개한 아름다운 화원 한가운데, 아담한 전각이 한 채 우뚝 서 있고 활짝 열어 젖힌 이층 창가에 한 인영이 보였다. 하늘거리는 긴 수염을 바람에 날리며 한가로이 서 있는 그는 평범한 외모와는 달리 위엄을 갖춘 고귀한 기품의 노인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밝은 햇살에 드러난 그의 얼굴에는 짙은 병색이 완연했다. 사락... 다시금 불어온 미풍에 노인의 수염이, 은빛 머리칼이 가볍게 휘날렸다. 언뜻 노인의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허헛!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폭양(曝陽)이 한층 누그러진 것이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군. 안 그런가, 냉천(冷天)?"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자신의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마치 바위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는 한 중년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차갑다. 얼음을 깎아 만든 듯 그의 전신에선 연신 싸늘한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그의 표정 역시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냉기 속에 섞여 있는 극강(極强)의 기도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해 온 자만이 풍길 수 있는 것으로 한눈에도 중년사내가 가공할 고수임을 느끼게 했다. 이때 노인의 물음에 냉천이라 불린 인물의 눈빛이 한순간 흔들리는 듯했으나 곧 원래의 고요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이미 그 표정과 태도에 익숙한 듯 다시 시선을 푸른 창공으로 돌리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허헛! 저 푸른 하늘을 보니 칠 년 전의 그 악몽(惡夢)이 되살아나는군." 그의 두 눈에 한 줄기 회상 어린 광채가 스쳐 갔다. "냉천, 자네가 없었던들 저 푸른 하늘은 노부에겐 단지 묵천(墨天)에 지나지 않았을 걸세." 그 진심 어린 음성에 냉천은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고야 말았다. "속하, 그 말씀은 몹시 듣기 송구스럽습니다. 속하는 본연의 임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으나 그의 음성에는 다분히 노인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기운이 깃들여 있었다. 노인이 적이 자조 어린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허헛! 그것이 자네 본연의 임무라고...? 노부의 하잘것없는 육신 하나를 구하기 위해 냉가의 일곱 충혼(忠魂)과 본가의 십이가혼(十二家魂)을 잃었거늘..." 냉천은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을 나타내며 단호히 부인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자리에 가주(家主)님이 계신 것만으로 그들은 지하에서도 흡족해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허헛... 그렇던가? 결국 또다시 쓸데없는 넋두리로 노부의 얼굴에 금칠을 한 결과가 되고 말았군." 노인은 가볍게 너털웃음을 터뜨렸으나 웃음 속에 배어 있는 허망한 기운을 감출 수는 없었다. 노인과 냉천. 그들의 대화로 미루어 그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는 듯했다. 그때 노인이 천천히 냉천에게로 신형을 돌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한데, 중양절(重陽節)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했는가?" "오늘이 지나면 정확히 열흘이 남게 됩니다." "열흘..." 노인의 평범한 얼굴에 잠시 아쉬운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본가의 사대가신(四大家臣)이 천하를 헤맨 지도 어언 다섯 해가 지난 셈이군. 그들이 모일 중양절이 며칠 남았지만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결국 이 해도 이대로 넘겨야 하는가?" "..." "몸은 날이 갈수록 쇠잔해지기만 하는데... 윽! 쿨룩... 쿨룩...!" 노인은 말을 잇다 말고 돌연 고통에 찬 기침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오장육부를 모두 토해 내는 듯한 극심한 기침이었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기침을 하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기침을 터뜨릴 때마다 시뻘건 선혈이 배어 나왔다. 노인이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는지 신형을 비틀거리자 냉천이 급히 노인을 부축해 갔다. 노인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서 있고 싶지 않은 듯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괘... 괜찮네. 곧 가라앉을 게야... 쿨룩... 쿨룩...!" 그는 이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상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끄... 끝내 본가 천년(千年)의 맥(脈)은... 나 궁사(宮史)의 대에서 이대로 단절되어야 하는가? 죽어서도... 선조들께 지은 죄를 씻지 못한 채... 쿨룩... 쿨룩..." 한차례 기침과 탄식을 터뜨린 노인은 곧 침상 머리맡에 놓인 작은 목함을 열었다. 청량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지며 금빛을 발하는 한 알의 단약이 목함 속에서 드러났다. 영약(靈藥)임이 틀림없는 그것을 바라보며 노인, 궁사는 착잡한 시선을 빛냈다. "후유... 언제까지 이 자하신단(紫荷神丹)으로 모진 생(生)을 영위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사대가신의 고행을 생각하면 노부의 추한 모습을 다소나마 감추는 것이 그들에 대한 조그만 보답이 될 터..." 궁사가 무거운 탄식을 내뱉으며 금빛 단약을 입안에 털어 넣는 순간 그토록 극심하던 기침이 신기하게도 씻은듯이 사라지며 그의 노안에는 은은한 화색마저 감돌았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냉천의 차가운 얼굴에 한 줄기 안타까운 빛이 일렁였다.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린 탓에 궁사의 몸은 메말라 가고 기침의 빈도는 더욱 잦아지고 있었다. 더구나 요즘은 살고자 하는 의욕마저 점차 사그라지는 듯 보이는 것이 냉천으로서는 걱정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궁사의 병에는 약이 없는지라 그저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냉천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돌연 냉천의 안색이 재차 싸늘히 굳어지며 무서운 살기가 전신에서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누군가 오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문밖에서 공손하면서도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다. "속하들 사대가신이 가주께 인사드립니다." 궁사는 흠칫 노안을 굳혔다. '사대가신이...? 중양절이 되려면 아직 열흘이나 남았건만...' 그런 의혹도 잠시뿐, 그의 안색에는 일말의 기대와 흥분의 기색이 눈에 띄게 떠오르고 있었다. "오...! 사대가신, 어서 들어오시오." 궁사의 음성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냉천의 모습은 방 안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네 명의 노인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하나같이 나이를 추측키 힘든 신태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궁사를 향해 정중히 부복대례했다. "사대가신이 가주(家主)를 뵙습니다." 궁사는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수고들 많았소."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네 노인을 둘러보는 그의 눈에는 서운한 빛이 짧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허탕이었던가?' 사대가신이 빈손으로 돌아왔음을 안 궁사는 그만 허탈해지고 말았다. 지난 오 년 동안 사대가신은 궁사에게서 한 가지 명(命)을 받고 천하를 돌아다녔다. 그것은 그의 뒤를 이을 만한 천하기재(天下奇才)를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사대가신은 천하 각지를 돌아다녔고 매년 중양절에 돌아와 기재를 찾지 못했음을 궁사에게 보고하고 다시 길을 떠나기를 계속 반복했다. 하지만 언제나 중양절에 돌아왔던 사대가신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올해는 중양절보다 열흘이나 일찍 돌아왔다. 궁사는 그 이유를 기재를 찾았기에 빨리 돌아온 것이라 짐작했으나 사정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방 안에 들어선 사람은 사대가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감도 컸으나 궁사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소탈하게 웃었다. "허헛! 지난밤 꿈자리가 워낙 기이해 그대들을 몹시 걱정했는데 이처럼 모두들 무사한 것을 보니 기쁨을 금치 못하겠소. 해서... 노부는 마침 한 가지 결심을 하고 있던 참이었소." 궁사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맺혀 들었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대들에게 심려를 주지 않도록 이번에는 잡석이라도 정성껏 갈고 닦아 빛나는 대리석으로 만들 것을 말이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지라 그는 일말의 회한이 깃들인 시선을 돌려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순, 네 명의 노인은 한차례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이어 그 중에 눈밑에 붉은 점이 인상적인 노인이 정중히 입을 열었다. "속하 황충(黃忠), 가주께 외람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궁사가 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허헛! 황충, 그대가 언제부터 나와 이처럼 서먹한 사이가 되었소? 말해 보시오. 그대의 어떤 말이라도 경청할 것이니..." 황충은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속하, 일전에 하북(河北) 땅 북송림(北松林)을 지나던 중 너무도 우연히 가주께서 바라시던 기골(奇骨)을 지닌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찰나지간 궁사가 고개를 홱 돌리며 두 눈을 부릅뜨고 황충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황충!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아이를 찾았다면 그대가 이 자리에 데리고 왔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어찌나 아쉽고 서운했던지 그의 음성에는 은은한 노기마저 깃들여 있었다. 그러나 황충은 개의치 않고 차분히 음성을 이었다. "예. 속하는 당연히 데리고 왔습니다. 하나..." 황충이 말을 끝맺지 않고 말끝을 흐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궁사는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 "데리고 왔다고? 그렇다면 지금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잠시 주춤거리던 황충이 망설이는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노신은 이곳까지 오면서도 곰곰이 생각을 해왔고, 나머지 가신들 역시 이 문제는 오직 가주께서 직접 결정(決定)을 내리셔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때 황충의 옆에 있던 회의노인이 그의 말을 받아 설명을 이었다. "즉, 그 아이는 가주와 본가에는 적합치 않은 무림인(武林人)의 핏줄이며, 더욱이 천하인이 모두 손가락질하는 마도(魔道)의 길을 걷는 자의 후예(後裔)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나 그 아이의 천품(天品)이 천하에 다시없을 것이기에 황충이 거두어들인 것입니다." 이 순간 궁사의 눈빛은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무림인... 마도의 핏줄... 천하에 다시없을 천품...' 천하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기골을 지닌 아이를 찾아 헤맸던 사대가신이 마침내 찾아낸 천품을 지닌 아이. 뜻밖에도 그 아이가 무림과 관계가 있는 아이였으며 또한 마도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궁사는 머릿속이 혼란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이윽고 어느 정도 심중을 가라앉힌 궁사는 부복해 있는 사대가신을 바라보며 냉정히 염두를 굴리기 시작했다. '본가의 첫번째 율법(律法)에 위배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저들은 그런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내 결심을 굳혔다. '거기엔 필경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그 아이를 보고 난 연후에 결정해도 늦지는 않겠지.' 궁사는 나직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충, 그 아이를 데리고 오시오." "하오면...?" "다섯 해의 고행(苦行) 끝에 그대들과 만났고, 본가에 적합하지 않은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그것도 기이한 인연(因緣)이 아니겠소?" 사대가신의 굳어 있던 안색이 풀리며 한결같이 희열의 빛을 떠올렸다. 궁사가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들이 바라던 결정을 내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황충이 밖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여봐라, 그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너라." "예." 여인의 청아한 음성과 함께 방문이 열리며 한 명의 시비가 내실 안으로 들어섰다. 한데, 뜻밖에도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단지 그녀의 품에 비단 강보 하나가 소중히 들려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궁사는 또다시 안색을 바꾸었다. '아이가 아니고... 갓난아기...?' 그의 심중을 눈치챈 듯 황충이 설명했다. "그 아이는 태어난 지 불과 한 해를 넘기지 못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또한 자신의 출생(出生)과 부모(父母)가 누구인지도 모르며 아직 말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노신들이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입니다." 궁사는 묵묵히 비단 강보를 받아 안고는 강보에 싸인 아기를 바라보았다. "그대들의 뜻은 잘 알겠소. 하나, 이 아기의 재질이 어느 정도이기에 그대들이..."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헉! 이, 이것은..." 궁사의 입에서 부지중 터져 나온 부르짖음이었다. 아직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아기는 궁사의 품에 안긴 채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연신 방실거리고 있었는데 궁사의 시선은 그 아기의 얼굴에 꽂힌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기의 미간에 희미하게 떠올라 있는 백색과 청색의 두 줄기 선(線). 그것은 여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궁사가 신음하듯 경악 어린 음성을 내뱉었다. "천살마겁흔(天殺魔劫痕)..." 황충이 진중한 신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노신들 역시 그 아이가 하늘〔天〕과 땅〔地〕의 성체를 타고났기에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으음... 진정 놀라운 일이다. 전설로만 내려오는 천살마겁흔이 현세(現世)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니." 궁사의 경악은 좀체로 가라앉을 줄 몰랐다. 한편, 황충을 비롯한 사대가신은 궁사의 모습에 내심 일말의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모를 일이군. 천살마겁흔이 하늘이 내린 천품이긴 하나 단점도 없지 않거늘... 한데도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가주께서 저토록 격동하시다니.' 천살마겁흔(天殺魔劫痕). 이 체질은 하늘과 땅이 함께 탄생시킨 만고(萬古)의 걸작품이었다. 하늘의 성체를 받았기에 그 두뇌는 천하에 따를 자가 없으며 오성(悟性) 또한 천년에 한 번 날까말까 한 전설 속의 기골(奇骨)이었다. 그러나 땅의 시샘으로 단 한 가지, 무공을 익힐 수 없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는 체질이 바로 천살마겁흔이다. 따라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궁사가 이토록 격동하는 이유를 사대가신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사는 여전히 격앙된 감정 속에 빠져 있었다. '이것이 진정 하늘의 뜻인가? 천여 년 전, 본가를 세우신 조사(祖師) 이래로 다시 천살마겁흔이 본가에 나타난 것이...' 그랬던가? 궁사가 속해 있는 가문의 조사가 지금 그의 품안에 안겨 있는 아기와 똑같은 체질을 타고났었기에 그토록 격동했던 것인가? 한동안 들끓는 감정에 사로잡혔던 궁사는 이제 서서히 평정을 되찾아가고 있었으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방글거리며 웃고 있는 아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순간, 궁사의 입술이 결연한 기색으로 꾹 다물어졌다. '거두어들이리라!' 오랫동안 아기의 일에 대해 고심하던 그는 마침내 아기를 받아들이기로 용단을 내렸다. '세인들은 천살마겁흔의 체질이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 만일 그 체질을 지닌 자가 무공을 익힌다면 가공할 살인귀가 된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정 소름끼치는 일이 아닌가? 천살마겁흔의 체질에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니. 만일 그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크게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기를 바라보는 궁사의 두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빛살처럼 스쳐 갔다. '하나, 이 땅에 두 번 다시 조사님 대(代)의 전철을 재현해서는 안 된다!' 비사(秘事)! 그것은 아주 먼 옛날에 일어났던 일로서 지금은 오직 궁사만이 알고 있을 뿐,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벌써 오래된 일이었다. 생각은 길었으나 그것은 실상 바람이 궁사의 백발을 스치고 지나갈 정도의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궁사는 고개를 들어 사대가신을 응시했다. "황충, 이 아이를 얻게 된 경위를 자세히 말해 보시오." 그의 표정과 음성은 어느 때보다도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기나긴 세월을 궁사와 함께 생활해 온 사대가신은 충분히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천하에 다시없을 천품을 지닌 아이 때문에 가주께서 온통 심혼이 흔들리고 계신 것이다!' 한차례 염두를 굴리고 난 황충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노신이 알아본 바로는, 그 아이는 칠절마군(七絶魔君) 담석강(潭石江)이란 자의 둘째 아들로서 담천화(潭天花)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르르... 순간 궁사의 흰 수염이 눈에 띄게 경련을 일으켰다. "칠절마군 담석강..." 그 이름에 궁사는 다시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재차 그 이름을 언급하며 황급히 황충에게 물었다. "담석강이라면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마도의 절대고수(絶代高手)가 아니오?" 그렇다. 칠절마군 담석강. 그는 현 마도무림(魔道武林)의 대종주(大宗主)로 추앙받고 있는 자였다. 한데 천살마겁흔을 타고난 눈앞의 아기가 바로 그의 둘째 아들이라니. "그렇습니다." 황충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하나 세상에는 예외란 것이 있듯이 그의 평생기업인 마천루(魔天樓)가 하룻밤 새에 초토화되었으며 그 아기만이 노신의 손에 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 일이...!" "노신은 담석강 역시 만날 수 있었으나 그때는 이미 그가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었으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마도의 살아 있는 신(神)이며 마도 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칠절마군 담석강. 그에게 천하에 적수란 있을 수 없었다. 한데, 진정 믿을 수 없게도 그런 그가 참혹한 모습의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그가 세운 마천루는 하룻밤 새에 완전히 초토화되어버린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천하의 마도인들은 한결같이 울분과 통한 속에서 피를 토하며 흉수를 찾아 천하를 이 잡듯 뒤졌으나 달포가 지난 지금까지도 흉수는 찾을 수가 없었고 사건은 짙은 의문 속에 종결되고 말았다. "으음... 그렇다면 이 아기의 출생과 생존 여부는 그 누구도 모르겠군." 경악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궁사가 나직이 침음성을 흘리며 말하자 황충이 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궁사는 재차 시선을 아기에게로 돌렸다. 어느새 아기는 그의 품속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천진스러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아기를 바라보며 궁사는 내심 중대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어쨌든 이번 일은 철저히 비밀(秘密)로 시작하여 비밀로 끝을 맺어야 한다. 만일 이 아이가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는 날이면 무엇으로도 수습하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그의 노안에 어두운 그늘이 한 겹 드리워졌다. '설사 이 아이가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 해도 이 아이는 능히 재질 하나만으로도 천하를 뒤집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본가를 등에 업는다면 천하는 그 날로 혈우(血雨)에 덮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절로 진저리가 쳐지는 일이었다. 한데, 궁사는 왜 그런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담석강의 후예를 거두려는 것인가? 단지 천살마겁흔이라는 만고에 드문 기골을 지녔다는 사실이 욕심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만이 알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인가? 문득 궁사가 황충을 응시했다. "그러나 황충, 이 아이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꼭 한 명 더 있네." 황충은 이미 짐작이 간다는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노신이 이미 아홍(娥紅)이 이 방을 나서는 즉시 모든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게끔 조치를 취해 놓았습니다." 아홍. 바로 아기를 안고 들어왔던 시비를 일컬음이리라.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궁사는 가볍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그대들 사대가신은 노부가 꼭 이 아이를 거두리라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구려." 사대가신의 고개가 깊숙이 숙여졌다. "송구스럽습니다." "아니오. 그대들의 생각이 맞았소. 노부는 이 아이로 하여금 본가의 맥(脈)을 잇게 할 것이오. 하나 그대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오." 궁사의 안색이 신중하게 굳어 들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이제부터 나 궁사의 손자인 궁예린(宮譽麟)으로 불릴 것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오로지 무(無)로 끝남을 항시 염두에 두도록 하시오." "노신들 명심하겠습니다." 사대가신은 이구동성으로 답하며 더욱 깊이 부복했다. 잠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궁사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드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이 그의 동공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이번 일은 오직 무(無)에서 시작되어 무로만 끝나야 한다. 그러나 이 아이의 혈기가 역천(逆天)을 일으키는 날에는..." 궁사는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그의 전신이 한차례 폭풍(暴風) 같은 전율(戰慄)의 떨림을 보일 뿐이었다. 이 날은 하늘이 유난히 맑고 푸른 날이었다. 궁예린(宮譽麟). 그 이름으로 제이(第二)의 탄생을 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바로 천살마겁흔이라는 전설의 체질을 타고난 아이. 항차 이 일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것인가? 눈여겨볼 일이었다. 제 2 장 진흙 속의 옥구슬들 1 <대장! 무상한 것이 세월이라지만 유독 대장만이 갖는 고해(苦海)의 세월에 그 얼마나 심려가 크시겠소?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대장의 가장 충실하고 건실한 부하 비호(飛虎)가 대장을 고해의 세월 속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이처럼 필(筆)을 올리게 된 것이오. 다름이 아니고, 언제나 패배감 속에서 이를 갈던 대하성주(大河城主)의 외아들 관무상(關武相)이 드디어 각고의 고심 끝에 다시 등장했소. 결국 그가 나타남에 따라 전일에 한 번도 없었던 피해 또한 가중되었고 그 가장 큰 예로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이며 대장의 사지(四肢)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유사릉(流司凌)이 엄중한 상세 속에서 기식이 엄엄한 채 대장을 찾고 있소. 하나 그것보다도 더 중차대한 일은 유사릉이 혼미한 중에도 대장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는 것 같기에 이 글을 띄우는 비호 역시 본연의 직분을 팽개치다시피 하고 부리나케 달렸소. 동구 밖에서 심(心)을 굳히고 기다리겠소. 손비호(孫飛虎) 서(書).> 하나의 손이 한 통의 서찰을 들고 있었다. 급히 휘갈겨 쓴 듯한 서찰의 내용은 제법 격식을 갖춘 장중한 것이었다. "훗! 비호 이 녀석, 학당에 며칠 다녔다고 이젠 제법 문자까지 쓰는군." 문득 영롱한 음성이 부서지듯 허공으로 잔잔하게 퍼졌다. 소년(少年). 이제 불과 열세 살이나 되었을까? 정연한 이목구비에 백옥처럼 깨끗한 살결을 지닌 소년은 누구라도 한번 보면 다시는 눈을 떼지 못할 그런 모습이었다. 특히 보는 이의 마음을 온통 빨아들일 듯 신비한 마력을 지닌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그는 사방이 확 트인 정자(亭子)에 앉아 서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됐어. 며칠 동안 지루한 책들과 할아범들하고만 상대하고 있으려니 몹시 따분했는데." 소년은 서찰을 내려놓으며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푸르게 갠 하늘에 뭉게구름이 한가롭게 떠 있고 간간이 들려 오는 새들의 지저귐은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자 옆에 마련된 인공호수(人工湖水)에서 팔뚝만한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는 모습까지 포함해 그 모든 평화로운 정경은 마치 소년을 밖으로 유혹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날 이렇게 안에만 갇혀 있다는 것은 나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 틀림없어!" 낮게 중얼거리고 난 소년은 이어 총총걸음으로 정자를 벗어나 호수 옆에 있는 가산(假山)으로 다가갔다. "후훗, 분명 밖에는 할아범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겠지? 하나 어림없어. 이런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비밀 통로가 있으니까 말이야." 소년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울창한 수풀 한곳을 헤쳤다. 수풀 속에 교묘히 감춰져 있던 작은 동굴 하나가 시커먼 입을 벌리며 드러났다. "후훗, 그 누구도 모를 거야. 이 동굴이 담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줄은." 소년은 자신의 비밀 행각이 몹시 재미있는 듯 연신 미소 지으며 서슴없이 동굴 속으로 들어섰다. "지난 여름, 이 동굴을 뚫기 위해 그놈들과 밤잠도 자지 않고 고생한 보람이 이제야 나타나는군." 그 말을 끝으로 동굴은 안에서부터 다시 원래대로 감추어지고 사위는 다시 평화로움에 잠겨 들었다. 2 대하성(大河城). 이곳은 강서(江西)의 접경지로 교역하는 상인과 인파로 항상 북적거리는 대도시이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오의 춘양(春陽) 속에 대하성은 한창 흥청거리고 있었다. 그 중 우측의 저잣거리. 인적(人跡)이 뜸한 골목길로 막 접어들고 있는 한 백의소년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정자 아래에서 서찰을 읽고 있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그는 무엇을 찾는지 연신 사방을 살피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대체 유사릉이 얼마나 다쳤기에 비호 녀석이 그토록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나직이 중얼거리던 그의 검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한데, 비호 이놈은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기에..." 다음 순간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막 골목 끝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년 또래의 키 작은 소년. 그러나 그 몰골은 실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배를 불룩 튀어나오게 만든 헐렁한 옷, 크게 그려진 입과 새빨간 딸기코, 그리고 머리에 쓴 세모꼴의 모자가 영락없는 어릿광대의 모습이었다. 어릿광대 소년은 헐레벌떡 뛰어오다 전면에 우뚝 서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는 히죽 멋쩍게 웃었다. "헤헤헤... 대장, 미안해. 허씨가 얼마나 보채는지 간신히 빠져 나오는 길이야."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분장을 한 얼굴로 웃는 어릿광대 소년의 모습이 너무도 우스웠기 때문이다. "훗! 비호 이놈아, 그렇다고 그런 모습으로 나오면 너희들의 대장인 이 궁예린(宮譽麟)의 체통이 뭐가 된단 말이냐?" 사뭇 어른스러운 말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소년의 이름이 궁예린이란 말인가? 그것은 천살마겁흔을 타고나 신비의 노인 궁사에 의해 거두어진 아이의 이름이 아닌가? 시간의 흐름은 사람 마음에 따라 빠르게 느껴지기도 하고 느리게 느껴지기도 한다지만 어느새 십이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갓난아기였던 그 아이가 열세 살의 소년으로 자란 것이다. 궁사에게 거두어졌을 때가 한 살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세월이 참 빠르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어릿광대의 모습을 한 소년 손비호는 문제없다는 듯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염려 마, 대장! 내 이럴 줄 알고 미리 다 준비하고 있었지." 이어 그는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쓰윽 문지르며 입고 있던 헐렁한 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이제까지의 어릿광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제법 준수하게 생긴 소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눈에 치기가 가득한 그는 궁예린보다 한두 살은 더 먹어 보였다. 궁예린의 입가에 다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 여전하군. 그건 그렇고, 사릉이 얼마나 다쳤기에 이 호들갑을 떠는지 들어 보기나 하자." 말과 함께 그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손비호가 적이 난처한 기색으로 궁예린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그건 대장이 사릉이 녀석을 직접 보면 알게 돼. 그것보다 관무상 그놈이 이번에는 굉장한 준비를 한 것 같으니 철산(鐵山)과 표빈(標彬)도 함께 데리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철산과 표빈까지?" "응. 관무상이 이번에는 단단히 복수를 하려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 말에 궁예린은 곤혹스러운 시선으로 손비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표빈에게 가려면 족히 반나절은 실랑이를 해야 할 텐데..." 손비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것은 염려 마. 표빈에게 벌써 연락해 놓아서 지금쯤은 아마 사릉이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을걸?" 궁예린의 입가에도 한 가닥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 이미 철저히 준비해 놓았군." "헤헤... 빠르기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나말고 또 누가 있겠어. 안 그래?" 자못 자부심이 가득한 손비호의 말이었다. 그사이 그들은 어느새 규모가 제법 큰 대장간 앞에 이르러 있었다. 궁예린은 한차례 대장간을 살피며 손비호를 재촉했다. "그만 으쓱대고 어서 철산이나 불러라. 그 녀석도 네 목소리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땅! 땅! 땅! 대장간에서는 연신 쇠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었다. 활짝 열린 문 안쪽에서는 상의를 벗어 던진 우람한 체구의 청년이 쉴새없이 망치를 내리치고 있었다. 아니, 땀방울로 얼룩진 몸은 벌써 어른이었으나 굵직한 선을 이루고 있는 얼굴에 아직 치기가 채 가시지 않은 것을 보면 완전히 다 자란 성인은 아닌 듯했다. 소년의 옆. 역시 상의를 벗은 사십대의 중년사내가 소년이 내리치는 망치 밑에 시뻘겋게 단 쇠를 들이밀고 있었다. 얼굴은 물론 벌거벗은 상체까지, 보이는 곳이 모두 시커먼 털로 뒤덮인 털보장한이었다. 땅! 땅! 땅! 털보장한과 소년은 마치 신들린 사람들처럼 망치질에 온 힘과 정신을 쏟고 있는 탓에 손비호가 바로 근처까지 다가가도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다. "어이... 곰! 언제 봐도 너는 기운이 넘치는구나." 손비호가 문 앞에 서서 소리치자 소년은 그제야 망치질을 늦추며 손비호가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늦었냐?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소년이 말끝을 흐리며 힐끔 옆에 선 털보장한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안색이 험악하게 변한 털보장한의 입에서 대뜸 불호령이 떨어졌다. "기다리긴 누굴 기다려? 어서 일이나 하지 않고!" 불씨는 손비호에게로 튀어 갔다. "비호, 이 여우 같은 놈! 오늘 철산이는 나갈 수 없다. 얻어맞기 전에 어서 꺼지지 못하겠느냐?" 눈을 무섭게 부릅뜬 털보장한은 다시 소년, 철산을 재촉했다. "철산! 꾀부릴 생각 말고 어서 일이나 계속하도록 해라. 알았느냐?" "알았어요. 제길, 비호 저 멍청한 것이 대장을 데려오지 않고..." 철산은 몹시 화가 나는 듯 투덜거리며 쇠망치를 힘차게 휘둘렀다. 째앵...!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금속성이 마치 손비호의 멍청함을 질책이라도 하듯 그의 고막으로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손비호가 짐짓 낭패스런 모습으로 혀를 찼다. "허어, 그렇군. 결국 모든 원인은 털보의 대장간이 너무 잘되는 것에 있군그래." 이어 그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대장! 그냥 가야겠어. 철산이 오늘은 몹시 바쁘다는데." 찰나지간 털보장한의 털투성이 얼굴에 흠칫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궁 도련님이 여기에...?" 그의 독백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낭랑한 일성이 그의 등뒤에서 들려 왔다. "털보 아저씨, 오랜만이야. 그 동안 털들이 많이 자란 것 같아. 그것은 그만큼 심사가 편하다는 뜻도 되겠지?" 그 음성에 털보장한의 얼굴은 우거지상이 되고 반대로 철산의 얼굴은 활짝 펴졌다. "대장...!" 궁예린이 대장간 안으로 성큼 들어선 것이다. 그러자 이제껏 기세등등하던 털보장한은 왠지 일시에 풀이 죽어 엉거주춤 허리를 숙였다. "궁 도련님! 이곳엔 무슨 일로...?" 은근한 불안이 섞인 조심스러운 음성이었다. 궁예린은 점잖게 뒷짐을 지며 천천히 털보장한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음... 다른 게 아니고 철산이 잠깐 갈 곳이 있는데... 안 되겠지?" 털보장한은 더욱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 죄송하지만 오늘까지 꼭 마쳐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 오늘만은 어떻게..." 뜻밖에도 궁예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감이 굉장히 밀리는 것 같은데? 그래서 털들이 그렇게 많이 자란 모양이군." "...!" "알았어. 하지만 사람은 항상 바쁠 수만은 없지. 일이란 쉬어 가면서 하는 것도 묘미가 있거든. 내가 털보 아저씨의 일손을 좀 덜어 주도록 해볼게." 그때 손비호가 맞장구를 치며 나섰다. "대장, 아주 좋은 생각이야. 윗마을의 대장간은 파리만 날린다고 하니 공평한 것이 두루두루 좋은 일 아니겠어?" "아무렴." 궁예린은 짧게 대꾸하며 미련없이 신형을 돌려 대장간을 나섰다. 털보장한의 얼굴에 순간 크게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크, 큰일이다. 이 괴물들에게 잘못 보여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일전에 그 일만 해도...' 생각보다 그의 발이 더 빨랐다. 털보장한은 재빨리 궁예린을 앞질러 그를 가로막으며 한껏 밝은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철산이 필요하시다면 보내 드려야지요. 소인의 생각엔 혹시라도 철산이 도련님의 일에 폐나 끼치지 않을까 해서 드려 본 말씀일 뿐이었습니다." 궁예린의 얼굴에 그제야 빙그레 웃음이 피어올랐다. "고마워. 나도 언제나 털보 아저씨의 대장간이 성황을 이루길 바라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돼." "예, 예. 소인... 항상 잊지 않고 있습니다요." 궁예린은 뒤쪽을 향해 일갈했다. "철산! 이제 됐다. 가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철산은 대장간을 후닥닥 뛰쳐나왔다. "우헤헤... 대장, 요새는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어. 이 철산은 대장이 매일 왔으면 좋겠는데." 그를 따라오던 손비호가 털보장한을 힐끔 바라보며 핀잔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꾀부리지 마라, 이놈아! 너는 쇳덩이를 두드리는 기술을 이을 털보 아저씨의 유일한 소망임을 잊어서는 안 되니까." 다분히 털보장한의 말투를 흉내낸 손비호의 말에 철산은 그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깔깔거렸다. "예끼! 그러는 네놈은 곡마단의 재주를 이어야 하지 않고? 헤헤헤..." "헤헷, 그 말도 맞다. 이 비호가 없는 유랑곡마단은 생각도 할 수 없으니..." 그때 저만큼 앞서가던 궁예린이 그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녀석들아! 그만 떠들고 어서 따라오기나 해. 이러다간 해가 다 저물겠다." 동시에 그는 꺾어진 골목길로 들어갔다. "대장, 함께 가야 하지 않아?" "의리없이 혼자 가면 어떡해." 손비호와 철산은 부리나케 달려 궁예린이 사라진 골목으로 앞을 다투어 사라져 갔다. 멍하니 서 있는 털보장한의 모습만을 남겨 둔 채... 털보장한은 한동안 그들이 사라져 간 곳을 말없이 주시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기이하게도 노함보다는 미소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문득 털보장한의 미소가 너털웃음으로 화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허헛, 녀석들... 결코 밉지 않은 놈들이야. 더욱이 저 녀석들을 이끄는 궁예린, 그 아이는 저희 조부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니..." 어느새 음성마저 인자하게 변한 그는 느릿한 시선을 허공으로 옮겼다. 어느덧 춘양은 정중에서 서편을 향해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털보장한의 두 눈에 언뜻 회한처럼 보이는 광채가 스쳐 갔다. "이곳 대하성에 몸을 의탁한 지도 어언 일곱 해가 지났군. 한데도 철산, 그 아이의 전신에 꽉 막힌 응혈 기류를 뚫기는커녕 정확한 증세조차 모르고 있으니." 그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후유... 그것만 파훼한다면 철막(鐵幕)의 맥(脈)을 이을 수 있으련만! 또한 나 뇌운벽(雷運璧)의 통한도 풀 수 있으련만... 정녕 이대로 세사(世事)에 묻혀 버려야만 한단 말인가?" 주위의 공기는 그의 회한 어린 탄식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잠시 후, 대장간에서는 다시 쇠망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으나 아까와는 달리 그 소리에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한데 들었는가? 철막(鐵幕)! 쇠망치 소리에 묻혀 가고 있는 그 두 글자를! 세사에는 철(鐵)에 관한 설화가 한 가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철(鐵)의 강함을 아는가? 천하에서 가장 강한 기운이 한곳에 묻혀 있으니, 그곳을 일컬어 철막(鐵幕)이라고 하더라! 그러나 그뿐, 철막이 어디에 있는지 진실로 존재하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데 전설의 그 이름을 보잘것없는 대장간 주인인 털보장한 뇌운벽이 거론하고 있었으니. 뇌운벽,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3 탁! 타타탁! 일정한 속도의 경쾌한 음향이 연신 따사로운 봄볕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 음향이 들리는 곳은 대하성 저잣거리에 있는 한 정육점이었다. 육가방(六家方). 이곳의 규모는 비록 작으나 언제나 좋은 고기를 싼 가격에 취급하는 인심이 후한 곳이기에 서민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탁! 타탁! 탁! 지금 육가방 안에서는 한 노인이 판대 위에 수북이 쌓인 고기를 빠른 손놀림으로 다듬고 있었다. 대략 오십 세 가량에 눈꼬리가 밑으로 처진 그는 오(吳) 노인으로 불리는 이곳 육가방의 주인으로, 일신에 걸친 허름한 의복과 평범한 얼굴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를 눈여겨 살핀다면 필시 어떤 심상치 않은 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는 험한 일을 하며 살아온 사람답지 않게 깨끗한 얼굴과 마디없이 매끈한 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두 눈은 명경지수를 보듯 깊고 맑았으며 칼을 내리치는 솜씨 역시 일정한 편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일 예리한 안목을 가진 자라면 이 노인이야말로 비범한 웅위를 안으로 갈무리한 숨은 고인(高人)임을 금세 눈치챌 수 있으리라. 하지만 주로 서민들만 상대하는 그의 진실한 면모를 눈치챈 인물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문득 칼질을 하고 있던 오 노인의 손길이 뚝 멈추며 그의 시선이 출입구 쪽을 향했다. 세 명의 소년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준미한 미소년이 앞장을 섰고 덩치 큰 소년과 연신 치기 어린 눈동자를 반짝이는 작은 체구의 소년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순간 오 노인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어이쿠... 궁 도련님,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사릉이란 놈이 무척 기다리고 있습니다." 궁예린은 오 노인에게로 다가오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고 있어. 한데, 사릉이가 많이 다쳤다면서?" "예. 조금... 그러나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닙니다. 지금 백약사께서 돌보고 계시니까요." 궁예린은 은연중에 눈살을 찌푸렸다. '백약사 할아범이...? 그렇다면 생각보다는 심한 것 같은데.' 그때 오 노인이 재촉했다.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도련님." "응, 알았어." 궁예린은 찜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내실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 뒤를 마치 그림자처럼 손비호와 철산이 따랐다. 오 노인은 잠시 심유한 눈길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꼬마 대장부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이제 한바탕 일전이 벌어지겠군. 귀여운 녀석들!" 실내. 검소하게 꾸며진 단출한 방이었다. 그 한가운데 깔끔한 침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엔 한 소년이 누워 있었다. 콧등에 돋은 까만 사마귀가 특징인 그 소년은 대략 열다섯 살 정도로 보였는데 상체를 온통 붕대로 친친 감고 있었다. 그 옆, 분개 어린 시선으로 침상 위를 주시하는 날카로운 눈매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침상가에는 유생건을 쓴 백발의 노인이 뒷모습을 보인 채 상처를 입은 소년을 돌보고 있었다. "으음..." 침상 위의 소년은 괴로운 듯 연신 안색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날카로운 눈매의 소년이 위로의 말을 했다. "사릉, 조금만 참아. 이제 대장이 오면 그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톡톡히 보여 줄 테니." 그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무상, 그놈이 이렇게 치사한 짓을 벌이다니! 이 앙갚음은 반드시 배로 돌려주겠다." 유사릉의 상처를 돌보던 노인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녀석들. 하나 노부가 보기에 어쩌면 이번엔 궁 도령과 너희들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이를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사릉이 이렇게까지 다친 것을 보니." 그 말에 유사릉은 분노가 되살아나는 듯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아니에요. 백약사 할아버지! 그놈들이 치사하게 여럿이 덤비지만 않았어도... 윽!" 그는 고통에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다시 침상 위에 눕고 말았다. 날카로운 눈매의 소년이 항의하듯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요. 사릉의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는 언제 그놈들이 우리를 이기는 것을 봤어요?" "허헛, 과연 이번에도 그럴까?" 그때였다. "사릉,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낭랑한 일성과 함께 방문이 열리며 궁예린과 철산, 손비호가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사릉의 안색이 밝게 갰다. "대장! 어서 와. 백약사 할아버지께서 치료를 해주셔서 이젠 거의 다 나았어."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힘들게 앉았다. 그와 동시에, 유생건의 노인도 신형을 돌려 궁예린을 바라보았다. "허헛, 드디어 우리의 대장께서 오셨군." 드러난 노인의 얼굴. 귀밑까지 길게 뻗은 백미와 내심을 알 수 없는 투명한 눈빛을 지닌 노인은 진정 뜻밖의 인물이었다. 백리사헌. 중원무림을 개혁하라는 황제의 밀명을 받고 황궁무고를 나온 그가 놀랍게도 대하성에서 백약사라는 신분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때 그의 진실한 신분을 알지 못하는 궁예린은 그에게 초롱한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백약사 할아범, 정말 고마워. 언제나 우리 때문에 이런 수고를..." 백리사헌의 노안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허헛,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것은 궁 도령과 수하들을 위해 노부 스스로가 자청한 일인데. 그런 생각 말고 언제라도 노부를 부르거라. 노부는 항상 기쁜 마음으로 달려올 것이니." "백약사 할아범, 고마워." "백약사 할아버지, 고마워요.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겠어요." 궁예린을 비롯한 소년들은 한결같이 감격 어린 표정으로 백리사헌을 응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년 전, 이곳 대하성에 들어와 의전(醫殿)을 개업한 백리사헌은 신(神)의 솜씨라 알려질 만큼 신통한 의술을 발휘해 이름을 날리는 명약사였던 것이다. 대하성에서 만석꾼으로 잘 알려진 궁사는 하루 종일 걸어도 다 돌아볼 수 없는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동시에 온화한 성품을 지녔기에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궁사에게 하듯 그의 유일한 후계자인 궁예린에게도 깎듯한 대우를 해주었고 성안의 어디를 가나 궁예린은 작은 도련님으로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런 궁예린에게 다만 한 가지 근심이 있다면 지병을 앓고 있는 궁사에 대한 걱정이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는 궁사의 모습에 걱정스러워하던 와중에 백리사헌의 명성을 들은 궁예린은 가끔씩 찾아가 그에게 조언을 구하게 되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조부를 걱정하는 그가 대견스러웠던지 백리사헌은 성심성의껏 대해 주었다. 그리고 궁예린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에게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면 해결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낱 나이 어린 궁예린 일행을 아무 대가도 없이 성심껏 보살펴주는 그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타인의 눈에는 그것이 혈육 하나 없는 고독한 노인의 당연한 심정으로 비치고 있었는데 과연 그것이 백리사헌의 본심이었을까? 어쨌든 백리사헌은 이 순간 더없이 자애로운 시선으로 소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그는 궁예린을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궁 도령, 사릉의 말로는 석양이 지기 전에 관무상과 성하령(盛夏嶺)에서 일전(一戰)을 벌일 계획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궁예린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실이야." 백리사헌의 노안에 자못 걱정스런 기색이 스쳤다. "허어... 그렇다면 문제가 있겠군." "문제가...?" "그렇다. 노부가 사릉의 상처를 치료하며 느낀 것인데, 사릉의 상처는 권각법(拳脚法)의 무학을 익힌 자에게 당한 것이었다." 사릉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상체를 바짝 내밀었다. "그렇다면 관무상의 패들은 모두 그 권각법인가 뭔가 하는 무학을 익혔단 말이 되네요." 백리사헌은 묵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러니 너희들 모두가 간다 해도 그애들의 상대는 될 수 없다. 웬만하면 이번 약속을 취소하는 것이 나을 게야." 백리사헌의 말에 소년들은 암암리에 안색을 굳혔고 궁예린 역시 검미를 찌푸리며 심각한 상념에 잠겼다. '그래, 들은 적이 있어. 무학이라는 것은 매우 지독하고 잔인한 것이라고. 그래서 사릉이 저토록 심하게 다친 것이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궁예린은 아니었다. 그는 이내 고집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는 이길 수 있어! 백약사 할아범도 전에 봤잖아. 비호, 철산, 표빈, 사릉의 재주를! 무상이가 제아무리 무학을 익혔다 해도 우리를 이길 수는 없을 거야." 그 말에 손비호가 엄지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나섰다. "헤헷... 맞다, 대장! 그놈들이 까불면 이 비호가 하늘을 날아서 한 번씩 두들겨 주면 깨끗하지." 그러자 철산도 그 큰 주먹을 휘두르며 말했다. "그럼. 놈들이 까불 땐 나무를 뽑아 깨끗이 쓸어 버리면 돼." "대장! 절대 물러설 수 없다. 우리는 꼭 이길 거야." 나머지 소년들 역시 금세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궁예린의 뜻에 동조했다. 순식간에 돌변한 그들의 모습에 백리사헌은 적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 수 없군. 궁예린, 이 아이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놈들이니!' 그는 이내 미미하게 고개를 저으며 실소했다. '허헛, 하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노부 역시 지난 이 년 동안 이놈의 곁을 떠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이 아이들이야...!' 그렇다면 그가 이 년 동안이나 대하성에 머무른 이유는 바로 궁예린에게 있었단 말인가? 일순, 백리사헌은 나직이 헛기침을 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험... 과연 그럴까? 하나 노부의 생각은 너희들과는 다르다." 소년들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달라요? 어떻게...?" "만일 관무상, 그 아이가 권각법을 정말로 익혔다면 이번에는 교묘한 싸움을 걸어 올 것이 틀림없으니 대장과 너희들이 불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소년들의 얼굴이 또다시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래, 무상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어." 궁예린이 백리사헌의 말에 동의하는 듯 어두운 눈빛을 흩뿌리며 말했다. 소년들의 안색은 더욱 굳어졌고 방 안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백리사헌이 좋은 묘안이 있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재차 소년들을 돌아보았다. "어떠냐? 이 할아버지가 나름대로 약간의 권각법을 알고 있는데 배워 보겠느냐?" 찰나지간 소년들의 눈이 모두들 휘둥그렇게 떠졌다. "백약사 할아버지가...?" "권각법을...!"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백리사헌의 곁으로 모여들며 크게 소리쳤다. "와아! 가르쳐 줘요!" "그래요! 그것만 배우면 그놈들을 문제없이 물리칠 수 있을 거예요." 소년들은 벌써 싸움에서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으나 단 한 사람, 궁예린만은 은은히 눈살을 찌푸렸다. "할아범, 하지만 권각법은 무학이라고 했잖아." 그런 그에게서는 무공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진 인상이 짙게 풍기고 있었다. 애당초 그렇게 가르침을 받고 자라 온 듯했다. 백리사헌의 노안에 한 가닥 아쉬움의 기색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기막힌 녀석, 무공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의식적으로 피하려고만 하니...' 하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짐짓 가벼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노부가 알고 있는 것은 무공하고는 차원이 틀린 거란다. 이제부터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잡기일 뿐이니 무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궁예린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방긋 미소 지었다. "응, 그럼 됐어. 무학이 아니라면 린아도 배울 수 있어." "허헛, 한데 궁 도령은 왜 그토록 무학이 배우기 싫은 것이지?" 백리사헌의 물음에 궁예린은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이내 그는 곧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며 야무지게 입을 열었다. "좋아. 이것은 할아범에게만 이야기해 주겠는데... 무(武)란 원래 힘〔力〕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학을 익히게 되면 사람은 항상 강한 것에 얽매이게 되어 있어. 그것은 곧 끝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거든." "허,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린아는 무학이 싫은 거야. 린아는 내게 주어진 대로만 살고 싶어. 이것이 인간과 신(神)과의 약속이며 진정한 평화라고 생각해." 막힘없이 흘러나온 궁예린의 말. 그것이 과연 열세 살 어린 소년의 생각이란 말인가? 대체 궁예린의 지혜는 어느 정도에 도달해 있기에 모든 것에 달관한 사람처럼 말하는 것일까? 그때 다른 소년들은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궁예린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려워. 또 어려운 말을 해. 하긴 그러니까 우리들의 대장이 되긴 했지만." 백리사헌은 넋을 잃고 궁예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이가 정녕 열세 살밖에 안 된 소년이란 말인가? 이미 세상사의 이치를 깨달았단 말인가?' 그의 경악은 곧 불 같은 욕심으로 화했다. '천하에 노부의 기업을 이어받을 인물은 오직 이 녀석, 궁예린밖에 없을 것이다. 기다리리라! 이 녀석이 마음을 활짝 열고 무(武)를 받아들일 때까지...'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이 년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고 궁예린과 친분을 쌓은 이유는. 백리사헌은 궁예린을 본 순간 천하에 둘도 없는 그의 뛰어난 자질과 오성을 발견했고 그때부터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비록 열세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궁예린의 혜지는 이미 백년득도한 고승(高僧)의 생각과 맞먹을 정도였고, 그런 그에게 성급하게 행동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서서히 녀석의 마음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 진정에서 우러나 무학을 익히고자 할 때까지는.' 내심 염두를 굴리던 백리사헌은 사뭇 아무렇지도 않은 담담한 신색으로 궁예린을 응시했다. "하나 만약 궁 도령에게 무학이 필요할 때가 필연적으로 온다면 그때는 어찌할 건가?" 그러자 궁예린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만약 내게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학을 익히겠어. 그런 다음 목적을 이루고 나면 미련없이 훌훌 털어 버릴 거야." "그건 왜지?" "왜냐하면... 끝없는 욕망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야." 찰나간에 백리사헌의 안색이 급변했다. 내심 가슴 한구석이 뜨끔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이 녀석, 마치 노부를 질책하는 것 같군. 그러나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강(强)의 필요가 끝날 때를! 그것은 세상에 태어난 사내만이 지니는 야망의 끝임을...' 왠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백리사헌에게서 풍기고 있었다. 그 옛날 황궁무고를 나올 때의 그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 그때 그들의 어려운 대화에 싫증이 난 철산이 백리사헌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에이... 할아버지, 뭐예요? 권각법을 가르쳐 준다 하고는..." 궁예린이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그래, 할아범! 성하령까지 석양 전에 가려면 시간이 별로 없어." 그제야 백리사헌은 심중을 추스르며 껄껄 웃었다. "허헛, 염려 말아라. 우리의 대장이 질 수야 없지." 이어 그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소년들의 중앙에 섰다. "자, 지금부터 똑똑히 봐 두어야 한다. 두 번씩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말이다." 궁예린을 비롯한 소년들은 모두 두 눈을 빛내며 백리사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백리사헌의 손짓 발짓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광세기학(曠世奇學)임을. 그 순간 궁예린은 난생처음으로 무학과 대면하고 있었다. 제 3 장 깨끗한 패배(敗北) 1 성하령(盛夏嶺). 대하성 밖 남쪽으로 십여 리 가량 떨어진 곳에 뱀처럼 구불구불한 능선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 능선 위로 보기 드물게 넓은 초지(草地)가 펼쳐져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일컬어 성하령이라 했다. 때는 만물이 새로운 약동을 시작하는 초봄. 드넓은 평원을 연상케 하는 성하령에도 초목들이 파릇하게 돋아나 있었다. 또한 여기저기에 성급한 춘화(春花)들이 앞을 다투어 피어난 모습은 흡사 푸른 융단 위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어느덧 해는 서편을 향해 많이 기울어 있어, 사방은 온통 옅은 주홍빛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푸드득! 한 마리 야조(夜鳥)가 무엇에 놀란 듯 날개짓을 하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그때, 성하령 구릉 위에 다섯 개의 작은 인영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모습을 나타냈다. "하하하하!" "헤헤헷!"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왁자하게 떠들며 쾌활한 웃음을 날리는 그들은 바로 궁예린 일행이었다. 궁예린 일행이 막 구릉 위에 올라섰을 때였다. "호호호... 린아, 이제 오니? 내가 얼마나 기다렸다고." 돌연 연자색 경장을 걸친 갈래머리 소녀가 구릉 위에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을 맞이했다. 소녀(少女). 궁예린과 비슷한 또래로 미소 지을 때 양 볼에 깊게 패는 보조개가 깜찍한 미소녀였다. 더구나 보석처럼 빛나는 커다란 눈, 오똑한 코와 앵두빛 입술을 지닌 그녀는 몇 해 더 성장한다면 굉장한 절색의 미녀가 될 소지가 충분히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출현에 웬일인지 소년들은 마치 귀신을 본 듯 멍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궁예린은 뜻밖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소혜(小慧), 네가 여기 어떻게...?" 손비호 역시 멍한 얼굴을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이것은 철저한 비밀이었는데..." 그러자 소혜라 불린 미소녀는 우습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 다 아는 수가 있지. 너희들이 뛰어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별수있겠니?" 손비호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뭐? 부처님 손바닥? 크으... 죽여 주는군." 그러나 소혜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궁예린을 향해 말했다. "린아, 나도 데려가는 거지. 응?" 귀엽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양 볼에 또다시 매혹적인 보조개가 패고 있었다. 궁예린은 잠시 난처한 듯 입을 다물었으나 곧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네가 있으면 귀찮은 일만 생겨." 손비호가 이때다 싶은지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다. 대장! 지난번에도 저 계집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유사릉 역시 동감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혜가 있으면 방해만 되니, 아예 따라오지 못하게 해야 돼." "응. 나도 그때 털보 아저씨에게 얼마나 시달렸다고." 모두들 똑같은 의견인 듯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나섰다. 일이 이쯤 되자 소혜는 그만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며 울상을 짓고 말았다. "린아, 정말 나를 안 데리고 갈 거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모습이었으나 궁예린은 아예 시선을 외면해 버리며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대장은 부하들의 의견도 따를 줄 알아야 하니 너는 올 수가 없어. 자... 그만 가자!" 그가 소혜 곁을 지나 미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나머지 소년들 역시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혜를 지나 궁예린의 뒤를 쫓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악에 받친 듯 소혜는 입술을 꼭 깨물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좋아, 두고 봐! 나는 지금 너희들이 어디 가는지 알고 있어. 린아, 너희 할아버지에게도 그대로 이를 거고, 성주님께도 다 말해 버릴 거야." 말과 함께 그녀는 휑하니 신형을 돌려 구릉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그것을 어떻게..." "조, 조것이 정말..." 이번에는 다섯 소년들이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표빈이 날카로운 눈매를 빛내며 궁예린을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대장, 소혜를 데려가는 것이 좋겠어. 무상이가 이 일을 알면 우리 모두를 비겁하다고 놀릴 거야." 철산도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더구나 대장의 할아버지께서 오시게 되는 날에는..." 그는 생각하기도 싫은 듯 말꼬리를 흐렸다. 손비호와 유사릉도 아까와는 달리 침통한 얼굴로 궁예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궁예린은 매우 언짢은 기색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하는 수 없지. 여우 중에서도 백년 묵은 구미호에 속하는 소혜이니 뻔히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 거야." 그의 생각대로였다. 소혜는 마치 그들의 제지를 기다리고나 있는 듯이 아주 느리게 걸음을 떼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궁예린은 마지못해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좋아! 소혜, 너도 같이 가는 거다. 하나 조용히 따라오기만 해야 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혜는 그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호호호, 염려 마. 소혜도 대장 편이니까." 금세 환하게 밝아진 그녀의 모습에 궁예린은 씁쓸한 웃음을 베어물었다. '진정 못 당하겠군.' "호호호..." 연신 생글거리며 궁예린에게 매달리는 소혜를 바라보며 손비호가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쳇, 계집애가 커서 무엇이 되려고 허구한 날 사내들과 어울리려고만 그러는지..." 철산이 큰 덩치를 흔들며 쿡쿡 웃었다. "그래. 저런 애는 아마 커서도 남자들 틈에 파묻혀서 살아야 할거야." 소혜가 두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백날 오라고 빌어도 오지 않았을 거야. 흥! 자기들 주제를 알아야지." 그녀는 코웃음치며 찬바람이 일도록 싸늘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소년들의 앞에 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2 쿠웅! 쿵...! 언제부터인가 성하령을 뒤흔드는 굉음이 잇따라 솟구치고 있었고 그 가운데 철산의 우렁찬 대소가 굉음에 섞여 들려 왔다. "우헤헤... 무상, 그놈이 이런 치졸한 짓을 할 줄이야. 감히 우리를 뭘로 보고 이따위 함정을 만들어 놓은 거야?" 울창한 수목들이 앞을 막고 있는 수림 속. 궁예린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정말 지독하군.' 맨 앞에 서 있던 궁예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주위에 몇 개의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그곳에서 연신 썩은 오물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때 유사릉이 코를 벌름거리며 우측의 파란 풀이 깔린 초지를 가리켰다. "킁, 킁... 대장, 이번에는 저곳이다." 유사릉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자세히 보니 그곳의 풀들은 주위의 초지와는 색깔이 약간 달랐다. 철산이 기다렸다는 듯 크게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쾅 내리쳤다. "우헤헤... 사릉, 내게 맡겨라." 동시에 그는 자신의 옆에 있던 거대한 바윗덩이를 번쩍 치켜들었다. 능히 백여 근은 나감직한 바위를 그는 흡사 공기를 들어 올리듯 가볍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 광경에 궁예린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저 녀석의 힘은 갈수록 굉장해지는군.' 콰앙! 둔중한 음향과 함께 철산이 던진 바윗덩이는 그대로 초지로 위장된 구덩이 속에 박혔다. 또다시 코가 문드러질 듯한 악취가 수림 안을 진동했다. 벌써부터 코를 막고 있던 소혜는 그래도 냄새가 나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아휴... 냄새! 무상, 그 아이가 이토록 지저분한 아이일 줄은 정말 몰랐어." 표빈이 날카로운 눈에 은은한 분노를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은 오물이 담긴 구덩이를 파 놓고 진작부터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그때 여기저기를 살피며 연신 코를 벌름거리던 유사릉이 궁예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장, 이제 함정은 더 없을 것 같은데." 궁예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사릉. 그러나 함정은 또 있다. 땅에 없다면 틀림없이 하늘에 있을 것이다." 그는 이어 손비호를 바라보았다. "비호, 이번에는 네가 나설 차례다." 순간 손비호의 얼굴에 맑은 생기가 감돌았다. "헤헤, 기다리던 바다. 염려 마, 아주 깨끗하게 해치울 테니." 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비호는 어느새 신형을 날려 거목 위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쌔게 건너뛰기 시작했다. 허공을 날듯 날렵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 흡사 한 마리의 원숭이를 보는 듯했다. 궁예린의 입가에 부지중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 저런 재주를 유랑곡마단에서 썩히기는 정말 아까운걸.' 그리고 그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나머지 소년들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모두들 언젠가는 특기를 발휘해 크게 활약할 날이 오겠지.' 그랬다. 손비호를 비롯한 네 명의 소년들. 그들은 각자 한 가지씩 특출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체구가 남달리 거대한 철산은 몸집에 맞게 엄청난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힘든 일도 그가 있으면 거뜬히 해치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유사릉. 그의 특기는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것이었다. 유달리 발달한 후각으로 그는 공기의 흐름까지도 선별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오물이 숨겨져 있는 구덩이를 냄새만 맡고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손비호. 그는 이름처럼 날렵하고 빠른 몸놀림이 주특기였다. 곡마단에서 곡예로 기초를 다진 그의 빠르기는 가히 따라잡을 자가 없을 정도였다. 또한 남의 것을 슬쩍하는 신투술(神偸術) 역시 뛰어나 알 만한 사람들은 그가 다가오는 것조차 꺼리곤 했다. 마지막으로 표빈. 그는 남보다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단지 지금은 궁예린이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뿐. 이렇듯 네 소년들은 각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주로 궁예린을 물심양면으로 보필하고 있었으며, 또한 궁예린은 가장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뛰어난 혜지로 그들을 이끌어 나가는 대장 노릇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해내지 못할 일 또한 없었다. 궁예린이 힘차게 입을 열었다. "가자! 비호의 뒤만 따라가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야." 이어 궁예린이 앞장을 서자 소혜와 나머지 소년들 역시 기운차게 걸음을 떼어 수림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태양이 서천(西天)으로 비스듬히 기울 무렵. 궁예린 일행은 널따란 초원의 분지 위에 우뚝 신형을 멈추었다. 3 소년. 분지 저쪽에 우뚝 서 있는 그는 궁예린 또래의 소년으로 일신에 비단금포를 걸치고 있었다. 한눈에도 신분이 귀한 티가 역력한 귀공자(貴公子) 풍의 용모였으나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오만함은 좋지 않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관무상. 그가 바로 대하성주의 외아들인 문제의 소년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원래가 대하성주의 비호 속에 제멋대로 커 온 탓에 그는 안하무인격의 오만방자한 성격을 지녔다. 그럼에도 성주의 권세에 눌린 주민들은 나이 어린 그에게 마지못해 굽실거려야 했다. 그러나 궁예린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관무상 앞에서 당당했으며 심지어는 그의 삐뚤어진 성격을 바로잡으려는 노력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와 지혜를 겨루는 내기 놀이였다.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성미의 관무상은 흔쾌히 그 내기에 응했다. 하지만 무슨 내기를 하든 관무상은 궁예린을 이길 수가 없었고, 그 대가로 그는 궁예린의 지시대로 성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 채 일정 기간 근신을 하곤 했다. 덕분에 편해진 것은 대하성의 주민들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동안 성안에서 꼼짝도 않고 있던 관무상이 이번에는 먼저 궁예린에게 도전장을 보낸 것이다. 관무상은 성내 관인들의 자제인 다섯 명의 수하들을 거느린 채 그와 마주한 궁예린 일행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의 빛이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아무튼 대단한 놈들임엔 틀림없어. 며칠을 두고 은밀히 설치한 함정과 매복에 한 놈도 당하지 않다니.' 그럴수록 관무상의 가슴에는 불 같은 오기가 치밀었다. '오냐, 오늘은 기필코 네놈들을 무릎 꿇리고 말 테다.' 다음 순간 그는 입술을 앙다물며 궁예린을 향해 오만하게 소리쳤다. "궁예린! 내가 보내 준 선물이 어떠냐? 마음에 들었겠지?" 옆에서 듣고 있던 유사릉의 얼굴에 분노와 수치의 감정이 짙게 떠올랐다. 관무상 패들에게 당한 상처가 다시금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저 비겁한 놈! 치사한 수를 써 놓고는..." 유사릉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로 열을 올리자 궁예린이 그의 팔을 잡았다. "사릉, 기다려라. 어차피 오늘의 네 상대는 무상이 될 테니까." 그를 돌아보는 유사릉의 얼굴에는 기쁨의 기색이 서려 있었다. "고마워, 대장. 나는 사실 몹시 걱정했어. 내 상처 때문에 저놈을 비호나 철산에게 맡기면 어쩌나 하고 말이야." 말을 맺으며 그는 은은히 얼굴을 붉혔다. 기실 그는 관무상을 동료들에게 뺏길까 봐 자신이 먼저 뛰쳐나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자 손비호가 그를 돌아보며 핀잔을 주었다. "이런 쩨쩨한 놈! 그래서 너는 대장이 못 되는 거야." 유사릉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일 뿐이었다. 웃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궁예린은 다시 관무상을 응시했다. "관무상, 너의 선물은 물론 잘 받았다. 하나 우리도 너에게 줄 좋은 선물을 가져왔으니 섭섭하지는 않을 것이다." "호... 그래? 하나 오늘만은 뜻대로 잘 안 될걸."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궁예린의 담담한 대꾸에 관무상은 비위가 뒤틀리는지 미간을 좁혔다. "궁예린, 언제나 자신만만하구나. 좋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자!" "...!" "승패의 조건은 예전과 동일하다. 하나... 오늘은 그 조건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겠다." 궁예린은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라. 한 가지가 아니고 백 가지라도 우리는 받아 주겠다." 너무도 당당한 그 태도에 화가 난 관무상은 내심 이를 갈아붙였다. '얄미운 놈, 말싸움에서조차 언제나 내가 당하기만 하니...'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그 한 가지는 오늘의 승부에서 지는 쪽이 이곳에 자신들이 누울 구덩이를 파기 전에는 내려갈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떠냐?" 궁예린은 은연중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백약사 할아범의 짐작대로군. 권각법의 대결로 우리를 실컷 두들겨 준 다음 구덩이를 파게 하면 쉽게 내려갈 수 없을 것이니 밤을 이곳에서 꼬박 새우라는 수작이군. 하나 무상, 네 마음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어 그는 자못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시간이 별로 많지 않으니 어서 대결 방법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그는 관무상의 입가에 한 가닥 회심의 미소가 빠르게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권각법을...' 그가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 관무상은 자신의 수하들을 향해 영을 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가져오너라." "알았습니다, 소성주(少城主)!" 우렁찬 대답과 함께 헝겊으로 만든 몇 켤레의 장갑이 쏟아져 나왔다. 관무상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궁예린에게 보내며 설명을 덧붙였다. "궁예린, 나는 이제 나무칼 싸움이나 씨름, 진법(陳法) 따위에는 신물이 난다. 그래서 좀더 박력있고 남자다운 대결을 벌이려고 한다." "대결 방법은 저 장갑을 끼고 손으로만 싸우는 것이다. 시간 제한은 없지만 지금 내 수하가 그리고 있는 둥근 원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하겠다. 너의 의견은 어떠냐?" 관무상의 말대로 그들이 선 분지의 중앙에 한 소년이 둥근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말과는 달리 궁예린 측의 의견을 아예 무시한 일방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형식상 그의 의견을 물어 온 것은 일말의 양심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순간 궁예린은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손으로만 싸운다고? 백약사 할아범은 권각법이 발까지 사용해야 위력을 발휘한다고 했는데.' 그가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는 모습에 관무상은 오해를 하고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궁예린, 자신이 없으면 기권을 해도 좋다. 괜스레 사릉이처럼 얻어터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소혜가 궁예린의 곁으로 다가오며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린아, 그렇다면 이번 승부는 서로 치고 때리는 것이잖아? 그러다가 다치면 어떡하려고..." 궁예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손비호가 재빨리 나섰다. "너는 제발 끼지 좀 마라. 사내대장부가 하는 일에 계집애가 촐랑거리긴..." 소혜는 눈을 하얗게 흘기며 입을 삐죽거렸다. "칫! 네가 사내대장부라고? 쬐그만 게 웃겨." "쬐그만 게? 어이쿠... 저걸 그냥 콱!" 그때 관무상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궁예린, 아무 말이 없는 것은 대결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는 곧 자신의 뒤쪽을 향해 일갈했다. "악군(岳君), 네가 먼저 나가라." "알겠습니다." 다섯 명의 소년 가운데 몸집이 가장 뚱뚱한 소년이 앞으로 나서서 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장갑을 양손에 끼며 의기양양하게 궁예린 쪽을 바라보았다. 궁예린은 더 이상 생각에만 잠겨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먼저 철산을 바라보았다. "철산, 네가 나가야겠다. 처음부터 저들의 기를 꺾어 놔야 할 테니까." 철산이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헤, 염려 마. 저 뚱보놈 정도는 내 한 주먹감밖에 안 된다." 그가 원 안으로 들어와 느릿느릿 장갑을 끼는 모습을 보며 악군은 가소롭다는 듯 낄낄거렸다. "킥킥... 이 미련한 곰 같은 놈아. 어서 덤벼라. 너의 큰 체구를 깔아뭉개 주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퍽 소리가 나며 철산의 눈에 불이 번쩍였다. 어느새 악군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다. "이... 이런 쥐방울 같은 놈이..." 크게 분노한 철산은 솥뚜껑만한 손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웅! 휙! 그 큰 주먹이 휘둘려지자 주위의 공기는 진탕되어 요란한 파공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악군은 여유있는 미소를 흘리며 요리조리 철산의 주먹을 잘도 피했다. "어림없다, 이 곰아. 오늘은 그 동안 네놈에게 당한 복수를 이자까지 쳐서 해주겠다." 동시에 그는 철산의 주위를 돌며 빈틈이 보일 때마다 여지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퍽! 파악! 철산은 처음에 큰소리를 친 것과는 달리 악군에게 연신 얻어맞기만 했다. 금세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올랐다. 그리고 그럴수록 철산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하고 노기충천하고 있었다. "으... 이놈, 잡히기만 해봐라." 그는 부어 오른 눈을 부릅뜨고 무작정 주먹을 휘두르며 악군을 쫓아다녔다. 그런다고 이미 이성을 잃은 그에게 악군이 쉽사리 잡힐 리는 없었지만 철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궁예린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틀렸어. 백약사 할아범은 이것을 생각 안 했어. 놈들은 손으로만 쓰는 권법을 배운 거야. 하지만 우리가 배운 것은 발을 같이 사용할 때만 위력이 생기는 것이지.' 그는 부지중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더욱이 철산은 너무나 흥분하여 이성마저 잃고 있으니...' 그때였다. 지축이 흔들리는 둔중한 음향과 함께 철산이 끝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아무리 튼튼하게 생긴 그였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는 듯 악군의 손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철산이 다시 일어서려고 기를 쓰며 꿈틀거리는 모습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며 관무상이 궁예린에게 소리쳤다. "궁예린, 어떠냐? 저 곰이 다시 싸우겠다면 그러도록 해주겠다." 궁예린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철산은 졌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후훗, 좋지. 다음은 고웅(高雄)이 나가라." 관무상의 명령에 악군이 물러서고 이번에는 호리호리한 소년이 원 안으로 들어갔다. 간신히 신형을 일으킨 철산이 퉁퉁 부은 얼굴로 궁예린을 쳐다보았다. "대장... 나는 할 수 있어... 안 진단 말이야..." 궁예린이 단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철산! 기회는 또 있다. 이번엔 비호가 나가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비호는 재빨리 원 안으로 들어섰다. "대장, 염려하지 마. 나는 지지 않을 거야." 그를 바라보는 궁예린의 두 눈에는 신중함이 어려 있었다. "비호, 맞부딪쳐서는 안 된다. 피하면서 적의 힘을 뺀 후에 기회를 기다리는 거다. 알겠지?"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퍽! 퍼퍽! 손비호는 처음부터 신나게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몸놀림이 유달리 빨라서 능히 피해 다닐 수도 있건만 그는 왠지 오히려 상대에게 덤벼들어 얻어맞기만 했다. 그 때문에 손비호의 얼굴은 금세 피투성이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관무상은 자기 편이 계속 이기자 연신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후훗, 그 동안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나타나는군." 반면에 궁예린은 안타까움으로 속이 타 버릴 지경이었다. "저 바보 같은 놈! 시간을 끌며 피해 다니면 묘수(妙手)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결국 비호도 졌어." 소혜도 얻어맞기만 하는 손비호가 걱정스러운 듯 창백해진 얼굴로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린아, 어서 비호를 말려. 저러다 죽을지도 모르잖아." 연달아 지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에 실망한 궁예린은 자꾸만 달라붙는 소혜의 손을 귀찮은 듯 홱 뿌리쳤다. "너는 모르면 가만있어. 네가 뭘 안다고 나서냐?" 궁예린의 괜한 화풀이에 마음이 상한 소혜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흑...!" 그녀가 울먹이자 궁예린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실수다. 소혜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치질 않는데. 그렇게 되면 저들의 권법을 파악하는 데 지장이 생긴다.' 다음 순간 그의 눈빛과 음성은 전에 없이 부드럽게 변했다. "소혜야, 미안해. 우리 빨리 끝내고 홍화호(紅花湖)에 뱃놀이 하러 가자." "정말?" 소혜는 언제 울먹였느냐는 듯 활짝 웃는 얼굴이 되었다. '후유... 이제 한시름 놨군.' 궁예린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시 시선을 장내로 돌렸다. 손비호는 여전히 실컷 두들겨 맞고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끈덕지게 상대에게 덤벼드는 것이 진정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궁예린이 큰 소리로 외쳤다. "비호! 맞지만 말고 피하면서 싸우란 말이다." 손비호가 그 와중에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대장, 떠들지만 말고 잘 봐 둬라. 피할 수 있는 것은 나 비호뿐이잖아. 그렇다고 대장이 피한다면 돌머리들이 남아서 뭘 한단 말이야." 그 말에 궁예린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랬구나. 그러나 바보 같은 놈이야. 너는...' 그제서야 그는 손비호가 피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손비호는 지금 궁예린이 관무상의 수하들이 쓰는 권법을 파악하도록 일부러 시간을 끌며 자신을 희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퍽! 파팍! 손비호는 고웅에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계속 얻어맞았다. 덕분에 그의 얼굴은 형편없이 부어 오른 데다 핏물로 범벅이 되어 아예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그는 궁예린을 위해 끝까지 덤벼들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궁예린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뿌렸다. '왼주먹을 뻗는 순간 몸은 벌써 오른쪽으로 돌고 있어. 결국 발의 위치에 따라 손의 위치도 변하는군." 그는 눈을 빛내며 손비호를 때리는 고웅의 몸놀림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 줄을 모르고 고웅은 손비호를 때리는 재미에 흠뻑 취해 있을 뿐이었다. "으히히... 쬐그만 놈이 더 강단이 있다더니, 이놈을 두고 하는 소리였군." 관무상 역시 흐뭇한 미소를 연발하고 있었다. "후후후, 승부는 이미 정해진 것! 궁예린, 네놈은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그는 이제까지 궁예린에게 당하기만 했던 억울함이 이 한판에 후련하게 씻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일순간 궁예린의 두 눈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었다. '그것이다! 팔괘진(八卦陣)에 오행구궁(五行九宮)을 역(逆)으로 교묘히 바꾼 것이었어.' 고웅의 권법을 제대로 파악한 그는 지체하지 않고 손비호를 불러들였다. "비호! 네가 졌다. 그만 나오너라." 관무상도 지극히 만족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고웅, 수고했다. 너도 그만 물러서라." 그 말에 고웅은 득의만면하여 원 밖으로 나왔으며, 손비호는 처참한 몰골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손비호는 묵사발이 된 얼굴을 궁예린 앞에 불쑥 들이밀며 말했다. "대장, 내 얼굴이 어때? 알지? 비호의 복수를 대장이 대신해야 하는 거..." 그러고는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든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궁예린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라, 비호! 아주 쭉 뻗게 만들어 줄 테니." 확고한 자신감이 깃들인 그 모습에 손비호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씨익 웃었다. "헤헷! 역시 너는 우리의 대장 자격이 있어." 피투성이 얼굴에 떠올린 그 웃음이 너무도 끔찍해 차라리 웃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다. "녀석, 그 얼굴로 두 번 다시 웃지 마라. 꿈에 볼까 무섭다." 궁예린은 손비호에게 악의없는 핀잔을 준 뒤 이내 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나다." 그 말에 미리 원 안에 들어와 있던 약삭빠르게 생긴 소년이 쾌재를 불렀다. "잘됐다. 예린, 네가 내 상대라니. 너는 오늘 죽었다고 생각해라." "과연 그럴까?" 궁예린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 관무상은 자못 실망이라는 듯 유사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뜻밖인걸? 사릉은 이미 나에게 개처럼 터진 놈인데. 이거 오늘은 너무 싱겁게 끝나겠군. 궁예린, 네가 내 상대가 되기를 바랐는데..." 그러나 그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퍽! 파악! 벌써 싸움은 시작되고 있었는데... 이제까지와는 달리 이번에 개처럼 맞는 쪽은 바로 관무상의 수하였다. "헉! 어이쿠!" 궁예린의 손이 번뜩일 때마다 관무상 측의 소년은 어김없이 비명을 내지르며 휘청거리고 있었다. 더욱이 궁예린은 상대가 피할 곳을 미리 알고 그곳에서 기다렸다가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었으니 진정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삽시간에 관무상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예린, 진정 놀라운 놈이다. 우리의 수법을 그대로 따라 하다니. 오늘을 위해 우리는 열흘간을 고생했는데 놈은 단번에 습득하고 피할 곳도 완벽히 봉쇄하고 있다!' 그의 경악과는 반대로 궁예린 쪽에서는 기쁨의 환성이 요란하게 터지고 있었다. "야호! 대장 최고다." "대장! 아주 개구리가 무엇인지를 보여 줘라." 특히 손비호와 철산은 십년 묵은 체증이 일시에 내려가듯 통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승패를 예감한 관무상이 앞으로 나서며 궁예린의 싸움을 제지했다. "궁예린, 이번은 우리의 패배임을 인정하겠다. 이제 마지막 대결을 해보자." 그가 원 안으로 들어서며 눈짓을 하자 실컷 얻어맞은 소년은 고개를 푹 떨구며 밖으로 물러났다. '재수없군. 다들 이기고 나만 졌으니 성에 들어가면 고생만 남게 생겼다!' 소년은 참담하게 부어 오른 얼굴을 쓰다듬으며 입 안에 고인 핏물을 퉤, 뱉어 냈다. 반면에 손을 툭툭 털고 원 밖으로 나온 궁예린은 유사릉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사릉, 잊지 말고 내 말대로 해라. 너의 책임이 막중하니 침착하게 상대해야 한다." 유사릉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 저놈의 상판을 아예 뭉개 버릴 테니까." 원 안에 들어가 관무상을 마주한 그는 짙은 분노의 눈빛을 뿌렸다. "관무상! 각오해라. 먼젓번 빚을 이자까지 쳐서 갚아 주겠다." 관무상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흐흥! 용기는 좋다만 승부는 이미 정해졌다. 남은 것은 네놈의 이빨이 몇 개가 부러지는가 하는 문제뿐." 유사릉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나쁜 놈!" 휘익! 유사릉이 분노에 찬 일갈을 터뜨리며 그대로 관무상을 덮쳐 갔다. 그러나 관무상은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듯 여유있게 몸을 빼내며 웃음을 흘렸다. "후훗! 너희들은 나 관무상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군." 동시에 그가 한 팔을 교묘히 내뻗자 유사릉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안면을 격중당하고 말았다. 퍽! "윽! 이... 이놈이..." 유사릉이 신음성을 지르며 재빨리 허리를 뒤틀어 관무상의 공세를 피해 갔지만 관무상은 어느새 그림자처럼 그의 앞을 바짝 막아서고 있었다. "후훗,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세상에 길이 어찌 하나뿐이랴!" 퍽! 파악! "윽! 크윽..." 유사릉은 그토록 큰소리를 칠 때와는 달리 낭패한 기색으로 연신 관무상에게 얻어맞았다. 그 광경에 궁예린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틀렸어. 무상, 저놈이 다른 수법을 지니고 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이토록 빨리 드러낼 줄은..." 과연 관무상은 궁예린이 파악해 낸 수법이 아닌 전혀 다른 수법으로 유사릉을 열세로 몰아넣고 있었다. 궁예린은 유사릉이 또다시 당하는 것이 보기 싫은 듯 탄식과 함께 아예 등을 돌려 버렸다. '오늘 내기는 우리가 지고 말았어. 그것도 완벽하게.' 등은 돌리고 있었으나 그의 고막으로는 연신 유사릉의 신음 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궁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간 사릉만 더 피해를 보게 된다. 피하라고 시킨 자체가 무리였어. 패배를 시인하는 수밖에." 그가 싸움을 멈추기 위해 신형을 돌려 세울 때였다. "와아! 사릉, 잘한다. 아예 짓뭉개 버려라."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쳐라, 사릉!" 갑자기 들려 오는 함성. 그것은 분명 철산과 손비호 등이 내지르는 환호성이었다. 궁예린은 다급히 시선을 원 안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경악으로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원 안. 그곳에서는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손만 사용하기로 한 규칙에도 불구하고 유사릉이 손발을 모두 놀려 관무상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사릉에 맞서 관무상 역시 손발을 다 사용하고 있었으나 아까와는 달리 맥을 못 추고 연신 얻어맞으며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눈에도 상대가 안 되는 싸움임이 역력했다. "후훗, 이놈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권각법이라는 것이니 똑똑히 봐 두어라." 유사릉은 그 동안 당한 분풀이를 하려는 듯 손속에 조금도 인정을 두지 않으며 관무상을 사정없이 몰아쳤다. 퍽! 파파팍! "크헉..." 관무상은 연신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맞기만 했다. 그런 중에도 그의 얼굴엔 크나큰 놀라움과 불신 어린 의혹의 빛이 가득 떠올라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이놈이 언제 권각법을... 아니야. 이것은 뭔가 크게 잘못되었어. 환공(幻公) 숙부는 내가 익힌 권각법이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강한 수법이라 했는데...' 그러나 그가 어찌 알겠는가? 백리사헌이 전수한 간단한 권각법. 그것이 천하를 떠들썩하게 한 광세의 무학임을. 비록 내공이 없는 궁예린 등이 익혔다고는 하나 그것은 여느 무공과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가공할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문득 궁예린의 강경한 음성이 드넓은 초지 위에 울려 퍼졌다. "사릉, 그만 멈추어라." 유사릉은 의혹 어린 얼굴로 손발을 멈추며 궁예린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궁예린은 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관무상을 향해 입을 열고 있었다. "관무상, 이번 대결에서 우리가 패했음을 시인한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너를 대하성의 소성주님으로 깍듯이 모시겠다. 또한 우리는 이곳에 우리의 키만한 구덩이를 파기 전에는 성하령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궁예린의 입에서 나온 이 뜻밖의 말에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 이긴 싸움을 왜 졌다고 한단 말인가. 유사릉이 항의하듯 따져 물었다. "대장! 우리가 왜 져? 이번 싸움에선 내가 이겼는데도..." "그래. 그리고 나는 아직 싸우지도 않았잖아?" 묵묵히 서 있던 표빈 역시 궁예린의 말에 승복할 수 없는 듯 앞으로 나섰으나 궁예린은 완강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여러 소리 할 것 없다. 이번 결전에서는 사릉이 반칙을 해서 진 것이다. 그리고 표빈이 싸워 이긴다 해도 우리는 세 번을 졌기 때문에 패한 것이 된다." "...!" "지금부터 우리는 이곳에 우리가 들어갈 만한 구덩이를 판다." 유사릉과 손비호 등은 서로를 마주보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 말없이 나뭇가지 등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때 관무상은 수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궁예린 등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상처투성이로 매 맞고 이긴 것이라...! 후훗, 어찌 됐든 나는 이번에도 진 셈이군."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리던 그는 곧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나 역시 너를 누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앞으로 한 달 동안 성밖을 나서지 않겠다." 그는 수하들의 부축을 받아 힘없이 걸음을 옮기며 계속 말을 이었다. "궁예린, 한 달 후 다시 너를 찾을 것이다. 그때는 기필코 너는 이기겠다. 명심해라!" 긴 여운을 남기는 음성을 끝으로 관무상은 이내 분지 아래로 사라졌고 분지 위에는 이제 말없이 구덩이를 파는 궁예린 일행만이 남게 되었다. 문득 궁예린은 고개를 들어 관무상들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았다. '무상... 남의 위에 군림하는 아집만 가지지 않았다면 좋은 친구로 사귈 수 있을 텐데.' 석양이 점점 진홍빛으로 짙어 가는 가운데, 대결은 누구의 승리인지도 모른 채 아쉬움 속에 끝이 났다. 4 퍽! 퍼억! 어둠은 분지 위에 더욱 빨리 찾아드는 듯했다. 이미 주위엔 먹물을 풀어 놓은 듯한 짙은 어둠이 드리우고 있건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예린과 그의 친구들은 구덩이를 파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들었다. 그러나 연장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들은 아직 자신들의 허리께만큼도 땅을 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손비호가 궁예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대장, 구덩이를 파는 것도 좋고 약속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삽도 없고 또 어두워지니 내일 와서 마저 하면 안 될까?" 그 말에 모두들 같은 생각인지 일손을 멈추고 궁예린을 바라보았다. 소혜 역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린아. 비호 말대로 해. 내일 일찍 와서 하면 무상이도 모를 거야." 연신 어둠이 밀려오는 주위를 살피는 것이 그녀는 몹시 겁에 질려 있는 듯했다. 궁예린이 손길을 늦추지 않으며 매몰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사나이들의 약속은 대장부의 모든 것이야. 우리가 패한 이상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구덩이를 모두 파내고 가야 해." 견디다 못한 유사릉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신형을 일으켰다. "그러면 내려가서 삽이라도 가져오겠어." 궁예린의 정색 어린 시선이 그에게로 돌려졌다. "사릉! 잊었느냐? 패한 쪽은 분명 여기서 구덩이를 판다고 했었다. 그런데 내려가서 삽도 가져오고 쉬었다 한다면 그것이 어찌 사나이들의 약속이겠느냐?" "...!" "너희들이 정히 싫다면 모두 내려가도 좋다. 구덩이는 나 혼자 파겠다." 쿵! 파팍! 칼로 자른 듯한 음성을 끝으로 궁예린은 다시 묵묵히 땅을 파 내려갔다. 너무 고지식한 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은 한치의 빈틈도 없이 논리정연했기에 소년들은 일순 할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입을 열어 변명했다. "아냐, 대장. 누가 내려간댔어?" "그럼. 집에서 걱정할까 봐 그랬을 뿐이야." 손비호와 유사릉 등은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손으로는 땅을 파면서도 시선은 연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아직은 어린 나이의 소년들이었기에 빛 한 점 없는 외딴 곳에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궁예린이 이번에는 소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소혜, 너는 내려가도 돼. 네가 우리의 약속까지 이행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 말에 소혜는 짐짓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나도 땅을 팔 거야. 내가 그랬잖아. 소혜도 린아 편이라고." 그러고는 앙증맞도록 작고 흰 손으로 그녀는 땅바닥을 헤집었다. 그 모습에 철산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우헤헤... 소혜야, 이왕 땅을 파려면 내 것을 파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더 쉬울 텐데 말이야." 소혜가 입술을 귀엽게 내밀며 말했다. "치이... 싫어. 너는 곰처럼 크니까 더 오래 파야 되잖아." 손비호가 맞장구를 쳤다. "헤헷, 맞다. 그러나저러나 함 아저씨가 이 광경을 본다면 아마 기절초풍을 하시겠군. 옥 같은 딸이 사내애들 틈에서 손에 흙을 묻히며 밤을 새다니." 소혜의 얼굴은 다시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래, 아버지가 걱정하실 거야. 하지만 소혜가 약속을 위해 그랬다면 이해하실까?'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일에 열중하고 있는 궁예린의 옆모습을 살짝 훔쳐보았다. '알 수 없어. 어째서 린아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다른 것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건지...' 아직은 풋내 나는 열세 살의 어린 가슴이었기에 그녀는 그 미묘한 감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한편, 언제부터인가 어둠 속에서 이 모든 광경을 주시하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은은한 신광을 뿜어 내고 있는 그 눈은 투명하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문사건을 얹은 백발, 귀밑까지 뻗은 백미, 그리고 상대방을 압도하는 태산 같은 기운. 그는 바로 백약사로 변신해 있는 백리사헌이었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그는 시종 궁예린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궁예린, 진정 놀라운 녀석이군. 저토록 어린 나이에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니. 볼수록 기막힌 녀석이야.' 백리사헌의 탄복 어린 시선은 이어 궁예린 옆의 소년들을 하나씩 훑어 나갔다. '더욱이 그의 수하들인 저 네 소년 역시 보기 드문 옥석(玉石)들이다. 노부의 무학을 이처럼 빠른 시간 내에 습득할 줄은... 또한 각기 뚜렷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 장차 놀라운 힘을 발휘할 녀석들이야. 아직은 갈고 닦지 않아 빛이 나지 않고 있을 뿐.' 그는 다시 시선을 궁예린에게로 옮기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예린, 저 녀석에게 기필코 무학을 가르쳐야 한다. 천하에 노부의 무림(武林)을 이어받을 놈은 오직 저놈뿐이다." 그의 음성은 적이 낮아 들었다. "하나 저 아이의 강직한 성격에는 서투른 강요나 힘이 통하지 않는다. 서서히 무학의 묘리를 느끼게 하는 수밖에 없다." 백리사헌은 이어 어둠으로 물든 암천(暗天)을 올려다보며 가늘게 탄식했다. "예린... 저 아이가 관무상의 반만 되는 성격을 지녔어도 노부의 일이 훨씬 수월하련만...!"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사위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침묵에 잠겨 들었다. 제 4 장 밀천무영세가(密天無影世家) 1 "헉헉...!" 노인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발길을 재촉했다. 이미 전신은 핏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옆구리에서는 아직도 붉은 선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추적자들이 그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지금, 여기서 포기한다면 앞서 간 동료들에게 너무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상을 입은 몸으로 벌써 몇 시진을 달린 탓에 그는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추적자들의 손에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노인은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드넓은 초원으로 숨을 만한 곳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의 눈에 짧은 순간 안타까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있으면 그곳에 잠시 숨어 추적자를 따돌릴 생각이었던 그는 주위의 풍경에 그만 실망하고 만 것이다. 노인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노인은 다시 걸음을 우뚝 멈췄다. 노인의 전면. 한 백의인이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추적자라 생각하고 놀랐던 노인은 백의인이 아직 나이가 어린 소년인 것을 알아채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년은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열다섯 살쯤으로 보였고 훤칠한 키에 매우 뛰어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혜지가 반짝이는 두 눈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기이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부르르... 잠시 소년의 모습을 관찰하던 노인의 전신이 갑자기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이, 이럴 수가...! 닮았어... 마치 판에 박은 듯이... 오오! 마치 돌아가신 주군을 뵙는 것 같구나..." 이 순간 노인의 시선은 소년의 얼굴에 못박혀 있었다. 대체 소년의 얼굴이 누구와 닮았기에 노인이 이토록 놀란단 말인가? 그때 노인을 발견한 소년이 걸음을 멈추었다. 궁예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부상을 입은 듯 전신을 피로 물들인 채로 한 손으로 옆구리의 상처를 막고 있었다. 곳곳에 상처가 있었지만 그곳이 가장 심한 듯했다. 하지만 손으로 막는 것으로는 역부족인 듯 손가락 사이로 계속해서 핏물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또한 머리카락은 흐트러진 채 바람에 제멋대로 나부끼고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두 눈에서는 기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 눈으로 노인은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불과 이 년 사이에 궁예린은 대장부의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아직 얼굴에는 치기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건장한 체구와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이미 한 사람의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어른이었다. 궁예린은 의혹 어린 시선으로 노인을 주시했다. 그는 노인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전신을 떨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삐이익! 삐익!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돌연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일었다. 순간 노인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어렸다. "틀렸어...! 이토록 빨리 놈들이 쫓아올 줄이야... 결국 절혼백팔척사인(絶魂百八拓四人)들은 노부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모두 전멸하고 마는가?" 그 말과 함께 노인이 쓰러질 듯 신형을 비틀거렸다. 보다 못한 궁예린이 노인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노인장! 괜찮으십니까?" 노인의 혈안(血眼)에 한 가닥 탄복의 기색이 빠르게 스쳤다. '대단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겁에 질려 도망가기에 바쁠 텐데... 더욱이 저 모습은 보면 볼수록 주군을 너무도 닮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소군(少君)은 틀림없이 그때 돌아가셨으니까.' 궁예린은 쓰러지려는 노인의 신형을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노인은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 노부의 피에 젖은 몸을 만져서는 안 돼!" 그런 그에게서는 도저히 중상을 입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리서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궁예린은 노인의 강경한 말투에 재차 의혹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한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신형을 가누지 못하는 노인이 그의 도움을 거절하는 이유를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의아해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노인이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노부 역시 너의 부축을 받고 싶지만... 죄없는 너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구나!" 순간 궁예린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노인의 모습과 말투에서 그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노인의 뒤를 쫓는 자들이 굉장히 잔혹하면서도 무서운 사람들임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흠뻑 젖은 노인의 모습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궁예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노인의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노부... 너의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겠다..." 궁예린이 노인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도와 드릴 일은 없습니까?" 그 말에 노인은 잠시 궁예린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인지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 이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노부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느냐?" 노인은 품에서 검은빛이 도는 한 통의 봉서를 꺼내 궁예린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안탕산(安蕩山) 협곡에 살고 있는 금 노인을 찾아가 꼭 전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해 다오. 절혼백팔척사인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장렬히 죽었다고..." 절혼백팔척사인! 노인은 또다시 그 이름을 거론하고 있었다. 대체 그들은 누구이기에...? 궁예린은 노인에게서 봉서를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노인은 적이 안심이 된다는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웃음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겨우 입꼬리를 말아 올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고맙다." 그때였다. 삐이익! 삐익! 아까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다시 날카로운 호각성이 솟구쳤다. 노인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이야, 명심해라. 이 봉서에는 백팔 명의 혼이 깃들여 있음을...! 그리고 누구에게도 이것을 보여서는 안 된다." 궁예린은 봉서를 품안에 갈무리하며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정말 고맙다, 얘야..." 노인은 곧 신형을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놈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노부를 생각하는 마음에 거짓을 고해서는 안 된다. 너는 총명한 아이인 듯하니 내 말뜻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노인은 분지의 능선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부상을 입은 사람답지 않게 무척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궁예린은 노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궁예린의 표정은 진중하면서도 엄숙했다. 그가 묵묵히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휘르륵! 돌연 한 줄기 미풍이 스쳤다 싶은 순간, 어느새 그의 전면에는 십여 명의 인영들이 내려서고 있었다. 하나같이 섬뜩한 살기만을 내뿜고 있는 그들은 장대한 체구의 백의인들이었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로 인해 주위의 공기는 삽시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얘야, 혹시 상처를 입은 노인이 이리로 지나가지 않았느냐?" 문득 백의인들 중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궁예린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는 삼십대의 중년인. 분을 바른 듯 얼굴이 유독 흰 그의 머리에서는 머리카락을 묶은 은잠(銀簪)이 햇빛을 받아 연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궁예린은 그에게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으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조금도 망설임없이 입을 열었다. "아! 보았습니다. 귀신같이 피를 뒤집어쓴 악귀 말이지요? 그자는 저쪽으로 갔어요. 하지만... 노인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의인들은 마치 바람에 쓸려 가듯 궁예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일견하기에도 놀라운 경공이었다. 한데, 백의인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노인이 간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궁예린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들에게 사실을 곧이곧대로 알려 준 것일까? 그 순간 백의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궁예린의 두 눈에는 기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저것이 무공이라는 것이겠지? 할아버님의 말씀대로야. 무공을 익히면 서로 죽고 죽이는 피〔血〕의 윤회(輪回)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신 그 말씀이 맞아. 방금 은잠을 꽂은 사람과 쫓기는 노인도 피의 윤회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거야.'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조금 있다 그 노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이미 멀리 사라진 노인을 다시 볼 수 있다니. 그러나 그 의문은 곧 풀렸으니... 그가 일 각이나 걸었을까? 궁예린은 또다시 걸음을 멈추며 전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전면으로 보이는 거목 밑에 한 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예리한 검으로 무수히 난자당한 듯 처참한 모습의 그 시신은 바로 조금 전에 백의인들에게 쫓기고 있던 노인이었다. 그런데 그 참혹한 경황중에도 노인의 입가에는 희미하게 한 가닥 미소가 배어 있었다. 궁예린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이 노인은 나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이고 싶었던 거야. 그리하여 내 품속에 있는 봉서의 의미가 무척 크다는 것을 강조한 셈이지. 그러고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거야!' 그랬다. 노인이 자신의 시신을 궁예린에게 보인 것은 그에게 맡긴 봉서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노인은 그 봉서를 지키기 위해 궁예린으로 하여금 자신이 간 방향을 정확히 알려 주게 하고 백의인들의 이목을 오직 자신에게로 쏠리게 했다. 모든 것은 궁예린의 총명을 믿고 한 행동이었으며 궁예린 역시 그의 마음을 알고 백의인들에게 노인의 향방을 정직하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궁예린은 자신의 목숨은 물론 봉서를 무사히 지킬 수가 있었다. 문제의 봉서. 그것은 대체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궁예린은 한동안 암울한 신색으로 노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가슴속에는 무학과 무림인들의 세계에 대한 회의가 또다시 짙게 일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무거운 탄식을 내쉬며 노인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연장이 없는 탓에 거목의 주위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이용해 땅을 팠다. 그리고 잠시 후, 나무 밑에는 하나의 봉분이 생겨났다. 궁예린은 그 봉분을 내려다보며 내심 결심을 다졌다. '염려 마십시오, 노인장. 노인장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노인장의 부탁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파릇파릇 잎이 돋아나는 초봄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잠시 산책을 나왔던 궁예린. 운명은 그에게 또 하나의 인연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절혼백팔척사인. 그 마지막 희생자라는 노인과 궁예린의 만남은 후일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또한 노인의 뒤를 쫓던 백의인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2 파르르... 황촉불이 연신 가는 떨림을 일으키고 있는 이곳은 검소하게 꾸며진 하나의 내실이었다. 내실에는 별다른 장식 하나 없이 그저 몇 개의 가구만이 놓여 있었다. 한쪽 벽면에 놓여 있는 단출한 침상과 탁자 하나, 의자 몇 개가 방 안에 있는 전부였다. 그 단출한 침상 위에 한 명의 백의인이 앉아 있었다.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채 묵묵히 앉아 있는 그는 뜻밖에도 백리사헌이었다. 자신의 진정한 기도를 몸 속에 갈무리한 채 평범한 백약사의 신분으로 지낼 때와는 달리, 지금 그의 전신에서는 무상한 신위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가히 절대자의 모습이라 할 만했다. 두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으나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무심한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스슷... 돌연 한 가닥 연기처럼 백리사헌의 앞에 소리없이 솟아오른 한 백영이 있었다. 분을 바른 듯 희고 창백한 얼굴의 그는 다름 아닌 절혼백팔척사인의 마지막 노인을 추적했던 바로 그 중년인이었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백리사헌의 앞에 정중히 허리를 꺾었다. "성주님, 절혼백팔척사인의 마지막 인물 서문초(西門招)의 죽음으로 그들은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백리사헌에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음을 보고하는 그의 얼굴은 백리사헌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했다. 중년인. 그는 대체 백리사헌과 무슨 연관이 있기에 백리사헌을 성주라 부르며 이토록 공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인가? 또한 백리사헌은 백약사라는 신분 외에 또 어떤 신분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당연한 일이겠지. 과거는 과거로 묻혀야 할 뿐, 그것이 현실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백리사헌은 백의중년인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수고했다, 천우(天雨)!" 그 말에 천우라는 이름의 중년인은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속하는 할 일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백리사헌의 시선에 한 가닥 부드러움이 깃들였다. '녀석, 많이 컸구나.' 백리사헌이 아무 말이 없자 천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성주님, 그들이 모두 도착하여 성주님의 하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간 백리사헌의 노안에 기광이 스쳐 갔다. "그들이 벌써...? 알았다." 그가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자 천우는 한쪽으로 비켜서며 백리사헌의 뒤에 시립했다. 그러고 내실을 나서는 백리사헌을 호위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대전(大殿). 지극히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거대한 몇 개의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으며 천장을 비롯해 사방의 벽은 모두 값비싼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더구나 그 벽에는 하나같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풍스러운 장식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 대전의 분위기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전의 중앙. 하나의 태사의가 놓여 있었으며 그곳에 백리사헌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언제부터인지 은은한 기도를 풍기는 삼 인(三人)이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백리사헌이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동안의 결과를 듣고 싶군." 짧게 내뱉은 그의 음성에는 거역하기 힘든 위엄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자 그 앞에 부복한 삼 인 중 왼쪽의 회의인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공손히 입을 열었다. "속하, 성주님의 지시대로 천하십대문파(天下十大門派)와 이십팔 개의 보(堡), 방(幇), 세가(世家) 등을 돌며 명을 하달했습니다. 아마 지금쯤 각 파의 최대 배분을 지닌 자들이 최대의 경의를 갖추고 장강(長江)을 건너 무림성(武林城)으로 들어서고 있을 것입니다." 백리사헌은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시선을 그 옆의 인물에게로 옮겼다. 중앙의 인물. 그는 깡마른 체구에 백포를 걸친 사십대 중년인이었다. 그의 입술 역시 지극한 정중함 속에 천천히 열렸다. "속하 역시 성주님의 명을 완수했습니다. 천축(天竺), 묘강(苗彊), 남해(南海), 북해(北海)에서도 무림성의 위용을 보기 위해 장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백리사헌의 미소가 약간 짙어졌다. "위용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 성(城)을 탐색하러 오는 것이겠군. 그리고...?" 그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세 번째의 인물이 말문을 열었다. "속하... 그들을 맞기 위해 본 성의 철저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백리사헌은 그제야 만족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대체 그들의 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그들이 한결같이 거론한 무림성의 존재는? 무림성(武林城).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절강성(浙江省)의 무하평(無河坪)에 사상 전무후무한 거대한 성이 세워졌다. 온통 백색으로 꾸며진 그 성(城)은 일명 무림왕국(武林王國), 무림성으로 칭해졌다. 무림성은 출현하자마자 천하무림에 한바탕 돌풍을 일으켰다. 무림성의 별동부대인 무림어군(武林御軍)이 천하를 누비며 사마(邪魔)를 추구하는 방파(幇派)들을 모조리 제거(除去)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십오 년 전, 마도무림의 거성인 칠절마군 담석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래 이렇다 할 진전 없이 전전긍긍하던 마도는 무림어군에 의해 순식간에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자칭 천하무적임을 자랑하는 무림어군의 실력은 실로 막강했으며 그 당시 대적할 만한 힘이 없었던 마도인들은 저항할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마도의 무리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기 시작한 무림어군은 또한 어떤 분쟁이든 깨끗이 끝을 맺었다. －천하에 마(魔)란 있을 수 없다! 천하를 향해 광오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무림어군. 그들은 곧 이 시대의 법(法)으로 부각되었다. 마를 추구하는 마인들은 무림어군에 의해 차례로 제거되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깊이 은신하여 바야흐로 세상은 정(正)의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듯했다. 그러자 세인들의 이목은 이제 무림성을 세운 성주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대체 중원무림에 귀중한 평화를 가져다 준 위대한 장본인은 누구인가? 그 신비는 곧 밝혀졌다. 승천무황(勝天武皇) 백리사헌! 대륙천지를 종횡무진 활약하는 무림어군의 선두에서 자신의 애병 승천도(昇天刀)를 휘두르며 총지휘를 하는 그가 바로 무림성주라는 것이었다. 삼십오 년 전, 비운의 황제 홍희제를 도와 역사상 가장 가공했던 역모를 진압했던 그는 이제 정(正)의 기수로서 무림의 기라성 같은 인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중원무림에 평화를 가져다 준 보답으로 무림인들은 그에게 중원의 하늘, 중원천(中原天)이라는 위대한 칭호를 아낌없이 바쳤다. 중원천 승천무황 백리사헌. 그는 현 시대의 입지전적인 인물로 세인들의 우상이 되었고, 천하를 완전히 평정했다고 여긴 백리사헌은 마침내 만천하에 무림성의 개파대전(開派大展)을 선포했다. 누가 중원의 하늘인 그의 명을 거역하겠는가? 천하는 벌집을 쑤신 듯 들끓었으며 지금 이 순간 무림인들은 모두 무림성이 있는 절강성 무하평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무림성! 역사의 한 장(章)을 장식할 무림성의 시대가 그 화려한 막을 올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대전을 밝히고 있는 수많은 야명주 불빛 아래 드러난 백리사헌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정기 충만해 보였다. 그는 부복해 있는 삼 인을 차례로 돌아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수고들 했다. 너희들은 곧 그들을 맞을 만반의 채비를 갖추도록 하라." 조용하나 무상의 신위가 느껴지는 음성에 세 인물은 더욱 깊숙이 이마를 숙였다. "존명!" 그러고 그들은 이내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그대로 굳은 듯 있던 백리사헌은 창 밖의 암천으로 느릿하게 신형을 돌렸다. 암천의 묵빛 기운이 고스란히 그의 동공 속으로 파고들었다. "무림성의 개파대전, 그것은 곧 노부 백리사헌의 오십 년 전 생애였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대업을 이루기엔 길다고 할 수 없는 세월이지만..." 그의 음성에는 한 가닥 회한과 지극한 성취감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일순, 백리사헌의 두 눈이 강렬한 신광을 내뿜었다. "이제 모든 것이 무림성의 개파대전과 함께 끝날 것이다. 그 누구도 두 번 다시 노부의 아성을 넘볼 수는 없다. 향후... 무림의 모든 것은 무림성에서부터 뻗어 가지를 칠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 그것은 언젠가 황궁무고에 홀로 남은 홍희제가 내뱉은 말이 아닌가? －향후 나뭇가지처럼 뻗친 무림은 단 하나의 성으로 종결되어 황실에 예속된 일개 성으로 자리잡을 뿐이다. 무림성! 짐은 그 성을 무림성이라 명명하리라...! 이제 홍희제의 염원은 백리사헌에 의해 빛을 보게 되는 것인가? 3 문득 백리사헌의 입술이 열리며 위엄 서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천우! 무림성의 준비는 제대로 되었느냐?" 스슷... 음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앞에 천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합니다. 성주님의 명만 계시면 무림성 주위의 백 리 내에는 생(生)이란 찾아볼 수 없게끔 천라지망(天羅地網)이 겹겹이 펼쳐져 있습니다." 백리사헌의 안색은 적이 침잠해 들었다. "음... 노부는 되도록이면 무하평에 혈화(血花)가 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마치 스스로를 타이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한데, 그는 왜 개파대전을 앞둔 무림성에 죽음의 천라지망을 펼쳐 두는 것일까? 무언인가 생각난 듯 백리사헌은 눈빛을 빛내며 천우를 바라보았다. "밀천무영세가(密天無影世家)의 일은 어느 정도 진척되고 있느냐?" 밀천무영세가! 그 엄청난 이름을 그가 입에 담았다. 무림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하나의 시구(詩句)가 있었다. －거짓을 고하지 마라! 위선(僞善)을 감추지 마라! 재물(財物)을 탐하지 마라! 그것이 밝혀지는 날! 그대는 지옥(地獄)에 선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알려고 하지 마라! 진실(眞實)만이 우리를 부를 뿐이다. 그대의 진실과 선행(善行)이 밝혀진다면 우리는 그대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대중원(大中原)에 무림(武林)이란 이원천하(二元天下)가 태동하는 순간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생겨난 서림(書林)이라는 곳의 신화였다. 서림. 그것은 양민(良民)과 서민(庶民)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서림이란 두 글자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그 시구가 깊이 새겨졌다. 법(法)보다 주먹, 권력, 명예가 앞서는 광활한 대륙(大陸) 속에서 글을 사랑하고 땅을 소중히 여겨 온 힘없는 서림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할 마땅한 곳이 없었다. 바로 그때, 서림인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그들이 나타났다. 밀천무영세가(密天無影世家)! 하늘도 모르는 그림자 같은 세가(世家)라는 뜻이었다. 부와 명예, 권력을 모르고 분수에 맞게 착실히 살아가는 서림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들을 부른다면 그들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이욕, 권력, 명예 때문에 거짓을 고하고 그들을 이용하는 자는 어김없이 지옥 구경을 했으니... 귀신같이 사람들의 숨겨진 내막을 캐고 그 대가를 정확하고 신속히 처결(處決)하는 그들, 밀천무영세가는 서림인들에게 신(神)이요, 하늘〔天〕이었다. 혹자가 그들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밀천무영세가의 도움을 얻는 자가 무림인이라면 그는 능히 독패천하(獨覇天下)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누가 그림자들을 잡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현실성이 없는 소문일 뿐, 밀천무영세가는 무림의 일에는 조금도 간섭하지 않고 오직 서림의 일에만 관여했다. 그것이 오히려 밀천무영세가에 대한 신비감(神秘感)을 한층 더해 주었다. 그들이 무슨 이유로 서림에서만 활동하는지, 또한 밀천무영세가의 주인은 누구이며 수하는 얼마나 되는지,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 숱한 의혹과 궁금증을 남긴 채, 그들은 지금도 천하 구석구석에서 착실하고 어진 서림인들의 그늘에서 헤매고 있었다. 천우는 적이 당혹스런 기색으로 깊이 고개를 꺾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이렇다 할 진척이..." "으음, 알 수 없는 일이군. 천하에 잠마풍(潛魔風)의 이목을 피하는 곳이 이 대륙에 존재할 줄은..." "아직은 심려하실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밀천무영세가가 워낙 방대하고 더욱이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어 확실한 근거를 잡지 못했으나 무림성의 개파대전까지는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감에 찬 천우의 대답이었다.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 백리사헌은 밀천무영세가를 찾고 있는 듯한데... 무림의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서림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밀천무영세가를 백리사헌은 무슨 이유로 찾고 있는 것인가? 잠시 침묵하고 있던 백리사헌은 짙은 회한이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동안 무림성을 세우기까지 적지 않은 희생이 따랐지! 하나, 그것은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되는 것에 불과할 뿐... 그것을 위해 노부는 비밀리에 잠마풍을 조직하여 움직여 왔다." 이럴 수가! 잠마풍. 그곳은 이 시대의 최대 신비로서 숨어 있는 마(魔)의 바람이라 칭해지고 있는 곳이 아닌가? 밀천무영세가가 서림의 영원한 비사(秘事)이며 신비라면 현 무림에는 잠마풍이라는 풀리지 않는 신비가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마풍. 그들을 봤다고 나서는 자는 아직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을 본 순간 그것이 생(生)의 마지막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정(正)과 사마(邪魔)를 가리지 않고 잔인무도한 살수를 펼치는 잠마풍. 그들이 스쳐 간 자리에는 오직 죽음과 폐허만이 존재했다. 그런데 지금 백리사헌은 자신의 입으로 그 잠마풍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파의 대들보로 존재하는 그가 무슨 이유로 마(魔)의 조직을 암중에 거느리고 있단 말인가? 이 순간, 신월마저도 백리사헌의 말에 진저리가 쳐지는 듯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백리사헌은 신광이 번뜩이는 시선으로 천우를 똑바로 주시했다. "천우!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밀천무영세가를 기필코 찾아내라!" "존명 받들겠습니다." "노부는 느낄 수 있다. 밀천무영세가, 그들이 무림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노부 최대의 강적이 될 것임을! 아니, 어쩌면 노부의 상상 이상으로 미증유의 힘〔力〕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 "그 이유는 밀천무영세가의 뿌리가 천년의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말을 마친 순간 백리사헌의 전신에서는 살을 에는 듯한 무서운 살기(殺氣)가 서리서리 뻗어 나왔다. 천우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전신을 떨었다. '놀라운 일이다. 그 거센 풍파와 모진 인고 속에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던 성주님께서 유독 밀천무영세가를 거론할 때만은 저토록 격동을 보이다니! 대체 밀천무영세가의 힘이 어느 정도이기에...' 백리사헌의 엄중한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천우, 변수(變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지 못한 곳에서부터 비롯된다. 너는 이 점을 명심하여 밀천무영세가를 찾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예, 성주님." "어쩌면 그 일이 무림성의 개파대전보다도 더 큰일일 수도 있다." "명심 거행하겠습니다." 스슷... 한차례 깊숙이 허리를 꺾은 천우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없이 모습을 감췄다. 백리사헌의 심유한 시선은 다시 암천을 향했다. "노부는 그 동안의 노력과 고심 속에 천기(天氣)를 다소 짚을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노부의 운명과 상극을 이루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찰나지간 그의 눈에서 암울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것은 살(殺)의 괘였다. 곧 노부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 백리사헌. 당금 천하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그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노부는 찾기 시작했다. 노부에게 살의 괘를 들이댈 곳을! 하나 노부에게 칼을 들이댈 만한 곳은 천하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신비 속에 감추어진 밀천무영세가를 제외하고는." 그래서 그는 그토록 밀천무영세가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던가? 일순, 백리사헌은 또다시 엄청난 살기를 뿜어 냈다. "노부는 보리라! 절대(絶代)를 거부하는 밀천무영세가에 담긴 살의 괘를..." 그가 뿜어 내는 가공할 살기로 인해 주위는 삽시간에 질식할 것 같은 기운에 휩싸였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천하패업(天下覇業)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땅에 서림의 신화 따위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천하패업! 그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서림의 희망이며 영원한 신화인 밀천무영세가를 백리사헌은 제거하려는 것이다.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백리사헌은 서서히 야망의 화신(化身)으로 변신해 가고 있었다. 결코 길지 않은 봄날의 훈훈한 밤인데도 이렇듯 엄청난 비사(秘事)는 도처에서 무르익고 있었다. 어둠과 같이 은밀하게... 4 "쿨룩, 쿨룩...! 린아가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오늘따라 기침이 더한 것 같으니... 쿨룩!" 벽마다 군데군데 산수화가 걸려 있는 고아한 분위기의 정실. 은빛 휘장이 걷힌 침상(寢牀) 위에 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깡마른 체구, 창백한 안색에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병로한 노인이었다. 노인, 그는 다름 아닌 궁사였다. 십오 년 전, 궁예린을 후계자로 거두어들인 그는 지난 이 년 사이에 병이 더욱 깊어졌다. 원래부터 병이 깊기는 했으나 지금은 거동마저 불편한 상태가 된 것이다. 때문에 궁예린의 걱정은 한층 더해졌고 웬만한 일로는 궁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 궁예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의 곁에 붙어 서서 간호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 궁사가 일부러 밖으로 내보내 바람을 쐬게 한 탓이었다. 그때 궁사가 다시 심하게 기침을 터뜨렸다. "쿨룩... 쿨룩! 노부가 병석에 누운 지 벌써 이 년이 되어 가는군! 너무 길었어. 그러나 생각해 보면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창백하던 그의 노안에 한 가닥 화색이 감돌았다. "린아, 그 녀석은 노부의 기대 이상으로 커 왔고, 다행히도 녀석은 무학을 멀리하고 있으니... 하지만 녀석이 비록 무학을 익히지 못해도 남다른 지혜와 총명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어 궁가의 맥은 끊길 염려가 없지!" 그는 흡족한 듯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노부가 말년에 이르러 이런 홍복을 얻게 될 줄이야. 이제 노부가 죽기 전에 린아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는 일만 남았다." 궁사의 미소가 거두어질 무렵, 정실의 문이 열리며 궁예린이 들어섰다. "할아버님, 소손 돌아왔습니다." 궁예린의 모습을 본 순간 궁사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오! 왔느냐?" 그때 궁예린의 뒤를 이어 사대가신 중의 한 명인 황충이 내실 안으로 들어섰다. "가주님! 밀천무영이십육살(密天無影二十六煞)이 지금 대전에 모두 모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궁사는 황충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궁예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린아, 이 할아비를 좀 부축해 다오." 그 말에 궁예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오늘은 그냥 누워 계시는 것이..." 그러나 궁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허... 녀석! 괜찮다. 이 할아비가 금방 죽기라도 할 것처럼 야단이구나. 쿨룩, 쿨룩!"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는 심한 기침 끝에 한 덩이의 검붉은 핏덩이를 울컥 토해 내고 있었다. 새하얀 침상 위엔 금세 시뻘건 핏물이 번졌다. "할아버님!" 궁예린은 화들짝 놀라 급히 궁사를 부축했다. 동시에 그는 황충을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황 할아범! 어서 의원을 모셔 오시오. 할아버님께서 피를..." 그러자 궁사가 수건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힘겹게 웃어 보였다. "린아, 이 할아비는 곧 괜찮아질 것이다. 그보다 대전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어서 그곳으로 가자꾸나." 그러나 궁예린은 고개를 완강히 내저었다. "아닙니다. 지금은 할아버님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어서 의원을..." 순간 궁사의 노안이 엄하게 굳어졌다. "린아! 오늘따라 왜 이리 어리석게 구느냐?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너 역시 잘 알고 있거늘..." 궁사의 말에 궁예린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잠시 궁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그는 곧 침착함을 되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할아버님께서는 이곳에서 쉬고 계십시오. 오늘은 저 혼자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그러자 궁사가 말했다. "괜찮다. 이 할아비는 아무리 아파도 너의 훌륭한 모습을 지켜볼 테니... 물론 오늘도 예외는 아니지... 쿨룩...!" 그는 말하기조차 힘이 드는 듯 가슴을 부여잡으며 또다시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궁사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 궁예린은 안타깝고 애잔한 시선으로 조부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황충을 돌아보았다. "황 할아범, 할아버님을 잘 부탁하오." 황충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염려 마십시오, 도련님! 노복이 최선을 다해 모시고 있을 테니까요. 염려 마시고 일을 처결하십시오." 궁예린은 그래도 못 미더운지 한참이나 궁사를 응시한 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그가 방을 나서자 궁사는 그제야 힘들게 고개를 들며 낮게 중얼거렸다. "쿨룩, 쿨룩...! 녀석... 다 좋은데 너무 정이 많은 것이 큰 흠이야." 황충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부축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가주님. 도련님이 정이 많으신 것이 사실이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때는 오직 가주님과 함께 계실 때뿐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실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허헛, 그런가? 참으로 다행한 일이군. 자... 나를 좀 일으켜 주게. 린아의 자랑스런 모습을 보고 싶으니..." "알겠습니다." 황충은 곧 궁사의 야윈 몸을 부축하며 천천히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넓은 대전(大殿). 묵직하며 중후한 침묵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전 중앙의 높직한 태사의에는 궁사가 애써 고통을 가누며 비스듬히 앉아 있었고 바로 옆에는 궁예린이 자리해 있었다.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 궁예린에게서는 만인 위에 고고히 군림하는 군주와도 같은 눈부신 기태가 뿌려지고 있었다. 도저히 열다섯 살의 소년이라고는 보기 힘든 놀라운 풍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황충을 비롯해 네 명의 노인이 가슴에 '사(士)' 자가 새겨진 황의를 입고 시립해 있었다. 바로 궁가장의 사대가신이었다. 그리고 단 아래로 굽어보이는 곳에는 홍의와 청의를 입은 이십육 명의 청장년이 두 줄로 도열해 있었다. 청의를 입은 열세 명의 인물들은 우측에, 홍의를 입은 열세 명은 좌측에 서 있었다. 그들은 가슴에 각기 졸(卒), 상(象), 마(馬), 차(車)라는 글자를 새기고 있었는데 마치 장기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형상이었다. 이 순간 장내의 분위기는 지극히 엄숙하고도 숙연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궁예린의 엄중한 음성이었다. "모두들 자리하시오." 찰나지간, 우렁찬 대소성이 대전을 가득 메웠다. "감사합니다." "밀천무영세가의 밀천무영이십육살이 소가주님을 뵙습니다." 궁예린을 향해 한차례 깊숙이 허리를 꺾은 이십육 명은 그 자리에 좌정했다. 그들의 음성과 표정에는 진심 어린 충정의 빛만이 넘칠 듯 떠올라 있었다. 그 광경을 궁사는 흡족한 신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허헛, 녀석! 노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밀천무영세가는 저 녀석 린아가 있는 한 영원히 그 맥(脈)을 이을 것이니...' 믿을 수 없다. 이곳 궁가장이 서림들의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신화인 밀천무영세가였단 말인가? 더욱이 궁사가 그곳의 가주였다니. 그때 궁예린이 지극한 위엄이 풍기는 모습으로 장내의 인물들, 밀천무영이십육살을 둘러보았다. "그 동안 수고들 많았소. 차례대로 보고해 보시오." 그러자 우측의 청의인들 중에서 한 인물이 일어나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속하 밀영청졸(密影靑卒) 천군후(天君候), 보고드리겠습니다. 속하가 맡고 있는 호남성(湖南城)에서는 지난 백 일 동안 일곱 건의 청부가 있었습니다. 그 중 여섯 건은 속하 나름대로 처결을 하였으나 한 가지는 임의대로 처결하기가 난감하여 소가주님께 여쭙고자 하는 바입니다." 궁예린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여 수락했다. "말하시오." "예. 이 청부는 소악(小惡)이라는 인물의 청부로서, 그에게는 말년에 얻은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그 딸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 "그 딸이 얼마 전에 겁간을 당하고 피살된 시체로 강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궁예린은 은은히 미간을 찌푸렸다. "흉수(兇手)는 밝혀졌소?" "예. 속하가 조사한 바로는 그 흉수는 호남성주(湖南城主)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밀영청졸 천군후는 얼굴에 적이 곤혹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하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고 그가 당금 황족인 덕천왕(德天王)의 다섯째 사위로 이미 내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해서 그를 제거한다면 황궁이 개입될 것이기에 소가주께 해결책을 여쭙는 바입니다." 순간 궁사를 비롯한 사대가신들의 시선은 일제히 궁예린에게로 암암리에 집중되었다. '확실히 어려운 문제로군.' 궁사의 내심을 스친 생각이었다. '청부를 맡지 않으려니 본가의 전통이 깨어질 것이고, 그렇다고 황궁은 건드린다는 것은 중원을 발칵 뒤집는 일일 테니...' 그러나 궁사의 고심과는 달리 궁예린은 가볍게 미간을 좁힌 다음 이내 입을 열고 있었다. "잘 들었소. 한데 여러분은 본가의 가훈이 무엇인지를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인과응보(因果應報), 그것이 우리 세가의 천년 전통이오." 장내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의혹을 떠올렸다. '갑자기 가훈은 왜...?' '그것은 본가의 누구라도 알고 있는 것인데...' 그때 궁예린은 극히 준엄한 시선으로 천군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부를 맡으시오. 황궁, 황족이라고 해서 본가의 가훈을 위배하고 천년 신의를 저버리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단, 흉수에 대해 재차 완벽한 뒷조사를 한 후에 청부를 맡도록 하시오." 그 말에 천군후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천군후는 가슴속이 후련히 씻기는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 궁예린의 결정은 그 동안 권력에 대해서는 가벼운 징벌에 그쳤던 관례를 아예 뿌리째 뽑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인물들 역시 천군후의 마음과 마찬가지였다. 단 아래 좌정한 인물들의 신색엔 하나같이 희열의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소가주, 고맙소이다. 이제 밀천무영세가도 소가주 같은 분이 나서서 개혁을 단행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들은 혈기 넘치는 나이인 만큼 진보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궁사를 위시하여 사대가신 등 연로한 인물들의 마음은 전혀 달랐다. '끊고 맺음이 너무 정확해.' '으음, 근 일 년간을 지켜보았지만 소가주의 성품은 너무 강해! 그것이 본가에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렇듯 그들이 상반된 의견을 품고 있을 때 궁예린은 다시 장내를 돌아보고 있었다. "다음... 말해 보시오." 그러자 이번에는 좌측의 홍의인들 중에서 가슴에 '상(象)' 자를 새긴 중년인이 일어섰다. 그는 궁예린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뒤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속하 밀영홍상(密影紅象) 사강(史降)이 보고드리겠습니다. 속하는 하남성(河南省)에서 열여덟 가지의 청부를 맡아 처결했습니다. 한데 그 중 한 가지가 위선을 고한 거짓 청부였기에 소가주님께 하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밀천무영세가. 그들은 전해지는 바와 같이 비록 서림인들의 편에 서서 갖가지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고는 있지만 만일 그것이 교활한 거짓 청부일 때는 죽음으로써 그 대가를 지불해 왔다. 그리고 그 살인 명령은 오직 가주만이 내릴 수 있는 것이기에 사강은 궁예린에게 그 명령을 내려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궁예린은 자신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사강의 모습을 유심히 주시했다. 이어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사강, 그대는 그것이 거짓 청부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소?" 일순 사강의 위맹한 얼굴에 결연한 신색이 떠올랐다. "믿어 주십시오. 속하는 그 청부가 거짓이었음을 죽음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소가주님!" 그 말에 궁예린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대의 임의대로 처결토록 하시오." "소... 소가주...! 감사합니다." 순간 사강은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그 자리에 깊숙이 부복했다. 그때였다. 황충을 비롯한 사대가신들이 다급히 궁예린을 말렸다. "소가주! 그 처결은 상황을 다시 한 번 조사하신 후에 내리심이..." 그러나 궁예린은 완강히 고개를 저어 그들의 말을 막았다. "밀종사사(密宗四使)! 본 세가의 율법 사조(四條)를 알고 계십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만..." 사대가신, 즉 밀종사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끄덕이자 궁예린은 싱긋 미소 지었다. "그것이오, 율법 사조. 일단 가주의 명이 떨어진 것은 곧 밀천무영세가의 법임을 잊지 마시고 더 이상 나서지 마시오." 그 말에 밀종사사는 무거운 신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궁예린은 다시 사강을 응시하며 엄중한 음성을 이었다. "나는 사강의 전신에서 거짓이 없음을 느끼고 있소. 만에 하나... 이번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나 궁예린이 책임질 것이오." 황충은 그래도 미심쩍은 듯 적이 불만 섞인 음성으로 다짐을 했다. "소가주님! 이번 일이 본가의 천년 신의가 달린 일임을 알고 계시면서도 결정을 내리신 것입니까?" 그는 재고를 요청하는 것이었으나 그때 궁사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 역시 린아와 책임을 같이 짊어질 것이오." 그제서야 황충 등은 입을 다물며 묵연히 침묵했다. 그들은 궁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궁예린의 결정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은 곧 궁예린에게 밀천무영세가의 가주 위(位)를 내놓겠다는 뜻이었다. 궁예린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궁사를 바라보았다. '할아버님, 고맙습니다. 린아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니...!' 그런 그의 눈빛에 궁사 역시 부드러운 미소로 답해 주었다. '녀석... 그래, 소신껏 밀고 나가거라. 하나 너는 괘씸한 놈이야. 본가 천년의 율법을 뜯어고치려 하다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은 다정한 조손(祖孫)으로 되돌아가 따뜻한 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장내 인물들의 가슴속에는 뿌듯한 긍지가 되살아나고 있었으니...! 특히 그들은 궁예린에 대한 신뢰가 깊어 감을 부지중 의식해야 했다. '소가주, 감사합니다. 속하들... 결코 속하들에 대한 소가주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궁예린. 그는 이렇게 밀천무영이십육살의 가슴속에 새로운 지주로 부각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의연한 시선은 자신을 우러러보는 그들 밀천무영이십육살을 하나하나 훑고 있었다. '밀천무영세가는 그 동안 잘도 해왔어. 하나 그것은 엄격한 규율과 율법 속에서만 존속되어 왔지. 그랬기에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궁에 빠진 사건들이 많았던 거야.' 궁예린의 가슴속에는 한 가지 확고한 결심이 들어서고 있었다. '하나 나의 대(代)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뜯어고쳐야 해. 엄격한 규율만이 아닌 믿음으로... 믿음은 이해 관계의 존속보다는 책임의 존속으로 영위되니까.' 이것이 과연 열다섯 살 된 소년의 소신이란 말인가? 직접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일이었다. 이제 대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열기로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 비밀 회합의 의미는...? 그렇다. 대대로 농사꾼의 가문으로만 알려진 궁가장이 놀랍게도 전설의 밀천무영세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수년간 그래 왔듯이 그들은 백 일에 한 번 회합을 열어 가주에게 보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궁사가 병석에 누운 지 어언 십오 년. 그 동안 가주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그는 일 년 전부터 손자인 궁예린으로 하여금 자신의 일을 대신하게 했다. 그에게 대임을 맡겨 서서히 후계의 위치를 굳히려는 심산이었던 것이니... 일단 그 일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대전에서의 숙의는 다시 계속되었고 밤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신비와 비사만이 존재한 밤이었다. 5 여명이 온 누리를 감싸는 아침. 아직은 모든 것이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뿌연 운무가 몰려오는 창가에 앉아 궁사와 궁예린은 멀리 움터 오는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몹시도 대조적인 모습의 그들이었으나 어쩐지 그들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쿨룩, 쿨룩...!" 밤사이 더욱 초췌해진 궁사는 간간이 고통스런 기침을 뱉어 내곤 했다. 궁예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 보십시오. 저 혼자 할 수 있는데도 할아버님이 끝까지 앉아 계셔서 이토록 심해졌잖습니까?" 그토록 당당하던 위엄은 간데없고, 그에겐 조부를 걱정하는 어린 손자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다. 궁사는 괴로운 중에도 흡족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허헛, 그렇구나. 할아비가 괜스레 린아의 심기만 어지럽힌 것 같구나. 장한 녀석...!" 그는 깡마른 손을 내밀어 궁예린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 할아비는 한 가지, 너의 성격이 너무 강직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물론 그래서 밀천무영이십육살이 너를 따르는 것인 줄은 알지만..." 그의 음성엔 은근한 염려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궁예린은 강경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강한 것이 아니라 밀천무영세가가 더 강해져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더... 강해져야 한다고...?" "예."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궁예린을 바라보며 궁사는 기이한 눈빛을 뿌렸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천하 구석구석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밀천무영세가는 강하고 방대하다. 어찌 이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단 말이냐?" "저 역시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강함이지 안으로는 절대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안으로는 강하지 못하다고?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궁사는 궁예린의 말에 끌려들어 고통조차 잊은 채 다시 물었다. 그런 그의 노안에는 짙은 호기심과 흥미가 떠올라 있었다. 궁예린은 마치 오래 전부터 그 질문에 기다려 온 듯 망설임없이 말문을 열었다. "예. 그것은 즉, 밀천무영세가가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잘 짜여진 명령체제 때문이었으나 오히려 그 점이 밀천무영이십육살을 약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할아버님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밀천무영세가가 무서운 외부 세력의 침입을 받는다면 강하지 못한 그들은 무사할 수 없을 뿐더러 밀천무영세가의 조직은 한낱 무용지물로 화해 버릴 겁니다. 더욱이 침입하는 사람이 일을 벌여 놓고 교묘히 청부자로 위장한다면 명령체제가 우선인 밀천무영세가는 전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여 년 뿌리를 이어 내려왔기에 전멸의 가능성은 더욱 클 수도 있습니다!" 그의 논리정연한 말에 궁사는 일순간 넋을 잃었다. 한낱 호기심으로 물어 본 말인데 궁예린은 의외로 천여 년간 명맥을 유지해 온 밀천무영세가의 숨겨진 허점을 그대로 꼬집어 낸 것이었다. 그랬다. 궁예린의 말대로 밀천무영세가는 세상에 알려진 만큼 힘이 강하지 않았다. 그것은 즉 강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과도 통했다. 그러나 이제 궁예린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강해져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는 마음속으로 밀천무영세가를 강하게 만들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때 궁사가 정색을 하며 다시 궁예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린아! 너는 본가의 최대 율법을 모르느냐? 남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 한 우리도 남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더구나 이 할아비는 천하에 본가를 건드릴 곳은 그 어디에도 없음을 장담할 수 있다. 아니, 혹 있다 해도 그자는 스스로 패망의 길로 들어서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런 궁사의 노안에는 어느 때보다 강한 자부심이 충만해 있었다. 천년 맥을 이어 온 밀천무영세가의 가주다운 뿌듯한 자부심이리라. 그의 음성이 의미심장하게 이어졌다. "왜냐하면 밀천무영세가의 진정한 무서움은 아직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밀천무영세가의 진정한 무서움이란? 궁사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궁예린을 지그시 응시했다. "하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누가 본 세가를 치려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물욕과 권력, 부귀와 명예를 멀리하는 본 세가를 말이다." 그의 말은 일촌의 여지도 없는 듯 자신만만하게 들렸으나 궁예린은 아직도 석연치 않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건 할아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여 년 동안 진정으로 무서운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가장 먼저 치려고 결심할 곳은 밀천무영세가일 겁니다." 궁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장 먼저 본 세가를...?" 궁예린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밀천무영세가를 쳐야 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신화나 전설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지만 그것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 사실에 경악하고 놀랍니다. 그것은 즉, 밀천무영세가가 겉으로 드러난다면 엄청난 소용돌이가 휘몰아칠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궁사의 얼굴은 적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둘째는 무엇이지?" "둘째는 밀천무영세가는 서림인들 사이에 존재하지만 언젠가는 밖으로 나올 날이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서림의 신(神)으로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에 그들을 지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 "마지막 세 번째는 앞의 두 가지를 가정해 볼 때..." 궁예린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은 바로 힘입니다. 힘이 있기에 전설도 되고 신화도 생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누군가 무서운 야망을 품은 자가 있다면 가장 먼저 밀천무영세가를 치려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그런 이유로 인해 밀천무영세가는 위협받을 것이라고! 그래서 소손은 밀천무영이십육살에게 지금부터라도 그때를 대비해 자신을 지키라고 했던 겁니다." 궁사는 할말을 잃었다. 아니, 차라리 기가 막히는 느낌이었다. '이 녀석이... 진정 내 손자란 말인가?' 부르르... 부지중 그의 눈꼬리에 가는 경련이 일었다. '천살마겁흔... 그 오성이 이토록 뛰어날 줄이야...' 그 순간이었다. 경악에 휩싸여 있는 그의 뇌리를 번개같이 스치는 어떤 영감이 있었다. －훗날 본 세가가 무너짐을 예견하는 후예가 있다면 그에게 밀천여의묵봉(密天如意墨奉)을 기필코 넘겨주도록 해야 하느니라. 그것만이 밀천무영세가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은 밀천무영세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조사의 유훈(遺訓)이었다. 궁예린의 말을 듣는 순간 잊고 있던 그 말이 갑자기 궁사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었으니... '결국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밀천여의묵봉은 이 녀석을 위해 존재한 것이란 말인가?' 궁사의 두 눈이 재차 기이한 신광을 번뜩였다. '천살마겁흔... 그렇다. 본 세가를 세우신 조사 역시 천살마겁흔의 체질을 지니시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이 유시는 언젠가 천살마겁흔의 체질을 지닌 자가 본 세가에 나타날 것을 조사께서 미리 예견하시고 남긴 것...?' 그때 궁예린의 음성이 그의 깊은 상념을 깼다. "할아버님,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안색이 창백한 것이 어젯밤에 너무 무리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궁사는 짐짓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궁예린에게 말했다. "허헛! 아니, 아직은 괜찮다. 너야말로 피곤할 텐데 먼저 가서 쉬거라. 이 할아비는 잠시 이곳에 앉아 창 밖의 경치를 구경하고 싶구나." 잠시 궁사의 안색을 살핀 궁예린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할아버님!" "린아도 푹 쉬어라." 궁예린이 방을 나가자 궁사는 침상으로 천천히 걸어가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의 얼굴은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듯했다. 무언가를 한참 동안 골몰히 생각하던 궁사는 이윽고 결연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린아가 비록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그의 말이 맞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준비란 어느 때고 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지." 이어 그는 허공의 한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냉천! 너도 들었겠지? 린아의 모든 얘기를..." 순간 마치 유령처럼 한 인영이 궁사의 전면에 소리없이 나타났다. 석고상 같은 무표정한 얼굴에 냉막한 기운을 뿌리는 백의중년인. 그는 바로 암중의 인물 냉천이었다. 냉천은 궁사의 앞에 정중히 예를 취하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모두 들었습니다. 하나... 너무 심려하실 일은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설사 소가주의 말대로 본 세가를 치려 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본 세가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본 세가를 뿌리째 모두 뽑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음성은 무심했으나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은은히 드러나 있었다. 밀천무영세가. 그들은 대체 얼마만한 힘을 지녔기에...? 그러나 궁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 세상에는 예외라는 것이 있네. 또한 노부가 늙고 쇠약해지니 린아의 말이 더욱 실감나는 것 같군." "...!" 냉천은 묵묵히 궁사를 응시했다. 그런 그의 미간에는 한 가닥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가주님께선 이미 죽음을 예견하신 듯하다. 그토록 뛰어나고 호기로우신 분이 이렇게까지...' 그때 궁사가 모종의 결심을 굳힌 얼굴로 다시 냉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냉천, 오늘부터 자네는 린아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네. 내 말을 알겠는가?" '이미... 결심을 굳히셨다!' 냉천은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깊이 허리를 꺾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맙네. 자네가 노부의 심중을 이해해 주니..." 궁사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표정을 풀며 음성을 이었다. "자네는 이제부터 노부의 지시대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해야 할 것이네." 그 다음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만 궁사의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전음입밀을 펼치는 듯했다. 한동안 냉천에게만 들리는 은밀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궁사는 지시를 마친 듯 냉천에게 다짐을 주었다. "빠른 시일 내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시행해 주기 바라네." "존명!" 스슷... 냉천은 재차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나타났을 때처럼 소리없이 사라졌다. "...!" 궁사는 다시 혼자 남게 되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시선으로 창 밖에서 밀려드는 금빛 햇살을 바라보았다. "냉천... 끝내 본 세가는 자네의 신세만 지게 되는군." 밝은 희망처럼 서광이 밝아 오는 새 아침이었다. 제 5 장 개파대전(開派大展) 1 대하성의 북쪽 관도(官道). 양 옆으로 기름진 농토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농토가 끝나는 지점엔 울울창창한 수림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 어귀에는 객들이 쉬어 갈 만한 아담한 정자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따사로운 햇살을 막아 주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정자 아래에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고귀한 기품을 갖추었으나 병색이 완연한 백발은염의 노인과 황의노인, 그리고 한 명의 소년. 그들은 바로 궁사와 궁예린, 황충이었다. 세 사람의 앞에는 조촐한 술상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궁예린은 그 술상과 조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야! 대체 누가 오기에 지난 이 년 동안 문밖 출입을 안 하시던 할아버지께서 주안상까지 마련하고 기다리시는 걸까?' 그 역시 영문을 모르는 듯 의혹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입을 열어 궁사에게 묻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싶었던 것이다. 그때 초조한 안색으로 연신 관도의 끝을 살피던 궁사가 황충에게 물었다. "황충! 그들을 확실히 매수했는가?" 황충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한데, 어찌 그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분명히 길은 이 길 하나밖에 없거늘..." 궁사의 안색은 초조함으로 더욱 초췌해 보였다. 황충이 느긋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심려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속하의 생각엔 그들이 이토록 더디 오는 것은 자신들의 위세를 천하 구석구석에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인 것 같습니다." 궁사는 은근히 눈살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사람들... 그것이 어찌 위세인가? 뜻있는 무인(武人)들의 분노를 살 뿐이지. 공도(公道)를 지키는 무림어군이 이처럼 편협한 행동을 보일 줄이야...!"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무림어군. 그들은 바로 당금 무림의 지주인 무림성의 별동부대이며 천하의 대소사를 해결하는 대륙의 해결사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궁사가 기다리는 사람들은 바로 무림어군이었단 말인가? 황충이 고개를 끄덕이며 궁사의 말에 동조했다. "가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정(正)을 수호하는 무림의 선봉장이던 무림어군은 이제 서서히 권력과 명예 속에서 썩어 가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 정을 수호하는 깃발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니...!" "...!" "정(正)이란 무릇 자신들의 가슴속에 기둥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거늘... 더욱이 정이란 마(魔)가 존재하기에 눈에 보이기도 하는 것이지!" 궁사는 나직이 읊조린 후 말없이 앉아 있는 궁예린을 돌아보며 진중히 말했다. "린아, 잘 들어 둬라. 물〔水〕이란 원래 흐르게 내버려 두어야지, 그것을 일부러 막는다면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썩게 되어 있다. 흙탕물이 있기에 깨끗한 물의 가치를 느끼듯 세상의 이치 또한 그런 것이니라. 물론 우리 가문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겠지만..." 의미심장한 그 말에 궁예린은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심해 두겠습니다." "녀석..." 궁사가 대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가주님, 그들이 나타났습니다." 황충의 나직한 음성에 궁사는 안색을 굳히며 관도 저쪽을 응시했다.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극히 느리게 움직여 오는 세 대의 마차가 오십여 명의 위풍당당한 백의인들의 호위 속에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가슴에 금빛으로 '어군(御軍)'이란 두 글자를 새긴 백의인들. 그들은 바로 이 시대의 무불통지(無不通知)라는 무림어군이었다. 천하를 누비며 무림성에 대항하는 자들과 사마(邪魔)의 무리들을 제거하는 일을 맡고 있는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잡아들인 죄인들을 무림성으로 호송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옆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세 대의 마차에 바로 그 죄인들이 실려 있었다. 그때 궁사가 진중한 기색으로 황충에게 일렀다. "황충,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잠시만이라도 이곳으로 모셔야 할 것이네." "염려 놓으십시오.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았으니 그들은 틀림없이 이곳에서 쉴 것입니다." 황충은 자신있게 말한 뒤 정자를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궁사는 긴 탄식을 불어 냈다. "안타까운 일이군. 그를 이렇게 대면하게 될 줄은... 결국 강직한 성품이 그를 해친 것이니..." 이어 그는 궁예린을 돌아보며 당부를 주었다. "린아, 이제 이곳에 할아비 다음으로 너에게 가까운 분이 올 것이다. 너는 그분을 정중히 대해야 하느니라." 궁예린은 순간 의아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들었다. '할아버지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 그의 표정을 살피며 궁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녀석, 애써 알려 하지 말거라. 너도 그분을 보면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때였다. "하하하! 역시 형님이셨군요. 하긴 형님이 아니면 누가 이 대역죄인을 찾을 생각을 하겠소?" 호탕한 대소와 함께 한 인물이 정자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대략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칠 척 거구에 강철 같은 기도를 내뿜고 있었으나 멋대로 자란 수염과 어수선한 얼굴은 오랜 여독에 전, 피폐하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중년사내를 본 순간, 궁사는 경악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럴 수가! 대륙을 떨게 만들던 철검무적(鐵劍無敵) 사마혁(司馬赫), 자네가 이런 모습이 되다니..." 궁사가 진한 아픔이 배어 있는 얼굴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중년사내는 또다시 호탕한 웃음을 날렸다. "하하하! 형님, 이제 그것은 아득한 옛날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천하 정도(正道)의 공분을 산 대역죄인... 죄수일 뿐이지요." "...!" "그건 그렇고, 어서 술이나 듬뿍 따라 주십시오. 오랫동안 술 구경을 못 했더니 뱃속이 몽땅 말라 버린 것 같습니다." 그는 궁사의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빈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궁사는 마치 그대로 돌이 되어 버린 듯 아무 말도 없이 눈앞의 중년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중년사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지금 이 순간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철검무적 사마혁. 그는 한 자루의 철검만으로 대륙을 누빈 일대 풍운아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만 살겠다던 독불장군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으니, 천하 일이 곧 자신의 일인 양 남의 일에 간섭을 잘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대역죄인이 되어 무림성으로 압송되다니... 쨍그랑! 순간 철검무적 사마혁의 손에 들린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격정을 참지 못한 궁사가 그의 두 손을 와락 움켜쥔 까닭이었다. 궁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마 아우! 우형이 뭐라 했던가? 대나무가 간혹 세찬 바람에 휘어질 수도 있음을 왜 모르는가? 자네의 혈기가 수많은 젊은 혈기들의 싹을 자른다는 사실을 왜 모른단 말인가?" 사마혁의 두 눈에 불현듯 기광이 스쳐 갔다. "알고 있습니다, 형님! 하나 세상에는 저 같은 바보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궁사는 지극히 안타까운 표정을 떠올렸다. "이 사람아, 자네는 아직 젊어. 자네가 막기에는 이 시대의 물결이 너무 거세다는 말일세." 그러나 사마혁은 또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애써 말머리를 돌렸다. "하하하! 형님, 이미 끝난 일입니다. 마지막 가는 아우에게 끝내 술 한잔 안 주시렵니까?" 그 모습에 궁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어 그는 궁예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린아, 인사드리고 술을 따라 드려라. 장차 너의 빙부(聘父)가 될 분이니라." '빙부...!' 궁예린은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했으나 곧 그 말뜻을 헤아리고는 얼굴을 은은히 붉혔다. 이는 곧 장래 그의 장인 어른이 될 거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때 사마혁이 두 눈을 빛내며 궁예린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네가 궁예린이라고...? 그 깜찍한 어린 녀석이 이렇게 컸다는 말이냐?" 그러고는 궁사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형님! 이 못난 아우는 형님께서 그 약속을 잊어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사마혁은 다시 흡족함과 기쁨이 한데 어우러진 시선으로 궁예린을 돌아보았다. "하하핫, 사위! 이 잔에 철철 넘치게 따르게. 이 사마혁이 살아 생전에 사위의 술을 받는 홍복을 누리다니. 하하핫!" 잔을 내미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궁예린은 어렴풋이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맞아. 예전에 간혹 찾아오셔서 내 볼에 따가운 수염을 비비시던 바로 그분이야.' 그는 그제야 모든 것이 생각난 듯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털보 아저씨! 맞죠? 제가 어렸을 때 아저씨를 본 기억이 납니다." 찰나지간 사마혁은 두 눈을 번뜩 빛내더니 이내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핫핫, 과연 신동(神童)이다. 말도 못 할 때 나를 본 녀석이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다니. 맞다, 이 녀석아! 내가 바로 털보 아저씨다. 하나 이제는 너의 빙부이시다." "...!" "비록 내가 이렇게 됐지만 절대 내 딸을 울려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궁예린은 또다시 붉어지는 안색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얼른 술병을 들어 그의 잔을 채웠다.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궁사가 한층 누그러진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 사람아, 내 어찌 그 약속을 잊는단 말인가? 우형이 이곳에 나온 것도 다 그 약속 때문인데! 한데, 자네 여식은 아직 남해(南海)에 남아 있는가?" 사마혁은 술잔을 단숨에 비워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만다행한 일이지요. 결국 사마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는 추련(秋蓮), 그 아이뿐이니까요." 그는 다시 궁예린을 똑바로 주시했다. "사위! 우리 딸을 잘 보살펴 주어야 하네. 내가 없더라도 말일세." 무림의 대풍운아이며 독불장군이라는 그도 진한 부정(父情)만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하지만 궁예린은 사위라는 말이 어색하게만 느껴지는지 얼굴만 빨갛게 붉히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궁사가 다짐을 주듯 말했다. "린아, 사마 가문과 우리 가문은 이미 돌아가신 너의 부모님께서 너희들이 태어났을 때 정혼을 한 사이이니 훗날 추련이를 잘 보살펴 주어야 한다." 묵묵히 궁사의 말을 듣고 있던 궁예린은 그제서야 궁사가 왜 자신을 이 자리에 꼭 참석시키려 했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혹시 나중에 그가 거부할지도 몰라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며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한편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주시하며 사마혁은 내심 탄복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당찬 녀석이군. 저 녀석은 지금 제 할아버지의 의견보다도 자신의 의지로 나를 꿰뚫어 보려 하고 있다. 이제 불과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용(龍)의 새끼가 좁은 우물 안에서 자라고 있어!' 그때 궁예린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서고 있었다. "빙부님, 제 절을 받으십시오. 저는 사마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중한 음성을 흘리며 궁예린은 사마혁을 향해 공손히 대례를 올렸다. 그러자 사마혁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듯 기쁜 표정으로 크게 대소했다. "하하하! 형님, 보십시오. 우리 사위는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는 감격에 물든 얼굴로 궁예린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사위! 고맙네. 이 빙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네." 사마혁의 감격 어린 시선이 다시 궁사를 향했다. "형님, 고맙습니다. 우리 사위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 주시다니." 궁사가 막 무어라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황충의 다급한 음성이 그들 사이로 끼여들었다. "가주님, 시각이 너무 지체됐습니다.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궁사는 그를 향해 엄중히 말했다. "황충, 힘이 들더라도 그들을 잠시만 더 붙잡아 두게." "알겠습니다." 황충이 사라지자 사마혁은 안색을 고치며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형님, 소제가 무림성에 가담하지 않은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명심하십시오. 무림성주 승천무황 백리사헌은 무섭도록 냉철하고 완벽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주위에서 파생되는 잔가지는 모두 제거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는 이번 무림성 개파대전에서 중토가 뒤집힐 충격을 던질 것입니다." 단숨에 말을 마친 사마혁은 목이 타는 듯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러고는 다시 궁사를 의미심장하게 응시하는 것이었다. "형님은 모르고 계시지만 어쩌면 그는 밀천무영세가에도 이미 시선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궁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사마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그것이 소제의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지만...! 하나 소제의 생각으로는 그가 움직이기 전에 형님께서도 미리 준비를 해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궁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우, 그것은 아우의 기우가 틀림없네. 무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리 가문이 아닌가? 더욱이 남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 한 우리 역시 나설 수 없는 것이 본 세가의 첫째 율법이라네." "형님, 건드리기 전에는 나서지 않는 것과 만일을 대비해 준비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사마혁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을 때 다시 황충이 정자 앞에 나타났다. "가주님,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습니다." 사마혁은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하하! 잘 마시고 갑니다. 세상에는 아직 살아갈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역죄인이 쉬어 갈 곳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 그는 한차례 궁사와 궁예린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낸 뒤 미련없이 등을 돌려 정자를 나갔다. 그 뒤를 황충이 조심스럽게 따랐다. 궁사와 궁예린은 각기 착잡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사마혁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사마혁의 널따란 등은 이 순간 두 사람의 눈에는 한없이 좁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영웅의 뒷모습이 과연 그러할까? 사마혁이 사라져 간 곳을 바라보는 궁예린의 두 눈에 순간 이채가 스쳐 갔다. 그것은 무학(武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눈빛이었으며 힘없는 자들이 느끼는 분노였다. '어쩌면 나는 이제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다 보면 무(武)가 필요하고 힘〔力〕이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몰라...!' 무심코 궁예린을 돌아보던 궁사는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모습에 순간 흠칫했다. '이 애가 무공을...! 안 된다. 저주의 혈겁을 이 땅 위에 다시 재현시켜서는 안 된다!' 저주(詛呪)의 혈겁(血劫)! 그는 대체 무엇을 떠올린 것일까? 다음 순간, 궁사는 심중을 가다듬으며 궁예린을 향해 타이르듯 말했다. "린아, 잘 봐라. 저것이 무공을 익힌 자만이 가지는 무인(武人)의 슬픈 고집인 것이다. 힘보다는 덕(德)... 그것으로 세상을 다스릴 때 저런 비극은 생기지 않을 것이 아니냐?" 그러나 궁예린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신경과 시선을 오직 사마혁이 사라져 간 곳에 쏟은 채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해 있을 뿐이었다. 궁사는 그런 궁예린을 적이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다 다시 흙먼지가 일고 있는 관도에 시선을 주었다. '잘 가게, 사마 아우! 지금은 모르겠지만, 자네가 남긴 흔적이 이 순간의 파문 이상으로는 더 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네.' 덜컹! 덜컹! 사마혁을 실은 마차는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궁사의 식지 않는 불안감을 앙금처럼 깊게 깐 풍운아 철검무적 사마혁. 과연 그가 남기고 간 흔적은 쉽사리 지워질 것인지...! 따사로운 봄 햇살은 텅 빈 관도 위에서 춤추듯 너울거리고 있었다. 2 절강성 무하평. 원래 이곳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삭막한 평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불과 오 년 전, 그 끝없는 초지에 거대한 백색의 성이 건립되면서 무하평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무림성. 일명 무림왕국이라 칭하는 무림성의 존재로 인해 무하평은 부근 삼십여 리까지 성지(聖地)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천하인의 우상이며 입지전적인 인물인 승천무황 백리사헌의 빛나는 아성이며 이 시대 정도(正道)의 태산북두격인 무림성. 오늘날 백리사헌의 한마디는 곧 천하의 법이며 거역할 수 없는 천명(天命)이었다. 때문에 세상에 등장한 지 겨우 오 년 남짓 되었건만 무림성의 위세는 실로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오늘도 무림성은 층층 누각의 웅대한 위용을 뽐내며 눈부신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는데... 그 무림성을 향해 꾸역꾸역 모여드는 엄청난 인파들이 있었다. 승(僧), 도(道), 속(俗)이 한데 어울린 무수한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그들로 인해 무하평은 북적거리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무림성의 개파대전이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흘린 땀과 피〔血〕의 대가로 천하를 장악했고 그 앞에 나설 자가 없는 현 무림의 법이기도 한 무림성이 천하무림 위에 실질적으로 올라서는 기념비적인 날을 맞아 흰 대리석으로 만든 성문을 활짝 연 채 온갖 계층의 사람들을 쉴새없이 맞이하고 있었다. 한데, 착각이었을까? 정도무림의 위대한 거성(巨星)이 탄생하는 이 기쁜 날, 위엄있고 기품있어 보이는 몇몇 사람들은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미간에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무림성 내의 거대한 분지. 수십 개의 대형 천막들이 둥근 원형을 이루며 중앙을 향해 세워져 있었고 각 천막 안에는 산해진미가 차려진 원탁을 사이에 두고 신태 비범한 인물들이 자리했다. 모두들 하나같이 일문(一門)의 종주이거나 당세에 위명을 떨치는 일류고수들로, 이름없는 무림인들이나 그저 구경차 모여든 사람들은 천막 밖에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단 한 곳, 중앙에 설치된 목대 위를 향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정오가 다 되어 가는데도 목대 위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기이하게 여긴 것이다. 머리 위의 햇살은 점차 따가워지고 지루함을 견디다 못한 군웅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웅후한 내력이 담긴 음성이 군중의 머리 위로 메아리쳤다. "여러분! 지금부터 무림성 개파대전의 의식을 거행하겠소이다." 그와 동시에, 중앙의 목대 위에 선풍도골(仙風道骨)의 고고한 기품이 흐르는 한 노인이 올라섰다. 분지 안은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모든 이의 시선이 흰 옷자락을 표표히 날리는 선골도풍의 노인에게로 향했다. 장내를 한바퀴 둘러본 노인의 입술이 다시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노부는 무림성의 내성총관(內城總官)인 천학우사(千鶴羽士) 기운선(奇雲仙)이라 하오이다." 찰나지간 장내의 인물들은 크게 경악하여 저마다 분분히 소리쳤다. "저 어른이 천학우사라고...? 그분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분이라 들었는데..." "이럴 수가! 천학우사, 저분이 일개 내성총관이라니!" 경악과 의혹, 불신 등이 어우러진 소요가 장내를 들끓게 하고 있었다. 천학우사 기운선, 그가 누구인가? 전대의 고인(高人)으로 한 마리 학을 타고 하늘에서 생활한다는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던가? 그가 일신에 지닌 무공은 추측을 불허하며 해박한 지식 또한 하늘을 덮고도 남음이 있었기에 그가 탄 백학(白鶴)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팔십 년 전, 갖은 악행을 일삼고 천하십대문파에 봉산(封山)이란 치욕적인 수모를 준 혈악(血惡)을 천학우사가 하룻밤 새 초토화시킨 일화는 너무도 유명했다. 그런데 지금 그 신화 속의 인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무림성의 일개 내성총관이라는 신분으로. 군웅들은 한결같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시에, 천학우사와 같은 고인까지 휘하에 둔 백리사헌의 위세에 거듭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천학우사 기운선의 창노한 음성이 재차 장내에 울렸다. "의식을 거행하라!" 둥! 둥! 두웅...!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무림어군이 위풍당당하게 목대 앞으로 진군해 왔다. 눈이 부시도록 흰 백의를 입고 가슴에 금빛 글씨로 '어군(御軍)'이라는 두 글자를 새긴 그들의 출중한 기태와 눈부신 위용은 마치 하늘의 군대를 보는 듯했다. "아...!" "과연 일기당천, 천하무적의 무림어군이다!" 중인들이 모두 넋을 잃은 모습으로 무림어군의 등장을 지켜보는 가운데 목대 앞에 다다른 무림어군은 일사불란하게 좌우로 쫙 갈라지며 나란히 도열해 섰다. 뒤를 이어 오십여 명의 금동금녀(金童金女)들이 커다란 청동 향로를 안고 등장했다. 청동 향로에서 풍기는 향내음으로 장내는 순식간에 성스럽고도 엄숙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숨죽인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청동 향로를 안은 금동금녀들이 대 위로 올라 반원형을 이루는 순간. 둥! 둥! 두웅...! 또다시 힘찬 북소리가 세 번 울렸다. 그것이 신호인 듯 천학우사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쫙 벌리며 소리쳤다. "무림성은 오늘 이 시간을 통해 무림의 안녕과 법을 지키는 선봉장으로, 정(正)의 기수가 되어 살아 있는 힘의 상징으로서 무림에 동참할 것을 천지신명께 엄숙히 선언하는 바입니다." 그 순간 장내는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엄숙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천학우사는 장내를 향해 재차 엄중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 서약을 천하십대문파와 이십팔 개의 대소세가(大小勢家)가 증표로써 약속할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막 안에 자리하고 있던 수십 명의 신태 비범한 인물들이 목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열을 지어 나서고 있는 그들의 선두에는 승복을 입은 승인이 앞장서고 있었다.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주름진 노안, 깊고 투명하게 가라앉은 눈빛, 한 손에 선장(禪杖)을 쥐고 있는 그는 이마에 열 개의 계인(契印)이 찍혀 있는 노승이었다. 그를 알아본 중인들이 낮게 탄성을 질렀다. "대소림(大少林)의 장문인 경허성승(輕虛聖僧)이다!" "뿐인가? 무당(武當)의 장문인(長門人) 운선도장(雲仙道長), 청성(靑城)의 백운대사(白雲大士) 등 십대문파의 거목들이 모두 모였군그래!" 과연 중인들의 말대로 무림계의 십대 거목들이 경허성승을 필두로 차례로 나서고 있었다. 내심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목대 위에 열을 지어 나란히 서는 그들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어둡게 느껴졌다. 특히 경허성승의 노안은 더욱 그늘져 보였다. '아미타불! 이제 무림의 륜(輪)은 무림성에서 시작되어 그 끝을 장식할 것이다. 애초에 정(正)의 기수로 찬사를 보냈던 노납 자신이 이토록 후회스러울 줄이야. 아미타불...' 무당의 운선도장도 어딘지 허망한 눈길로 목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량수불... 승천무황 백리사헌을 능가하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 한 천하무림은 생존의 자유마저 무림성의 간섭을 받을 것이니...' 그들은 오늘에서야 백리사헌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느끼고 있었다. 또한 무림성의 선봉에 서서 사마(邪魔)를 치는 데 앞장섰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의 모습은 마치 무림성의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와도 같았다. 그들이 백리사헌과 손을 잡고 전 무림을 평정한 직후, 백리사헌은 돌연 무림성의 개파대전을 선언했고 그로 인해 천하십대문파와 이십팔 개의 대소세가들은 완전히 무림성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구나 그들이 무림성의 기반을 탄탄히 다져 놓은 탓에, 무림성은 이제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철옹성으로 화했다. 백리사헌의 말 한마디면 그들은 자신들이 설 위치마저 잃게 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무림성의 개파대전에 참석한 그들의 마음이 어찌 밝을 수 있겠는가? 목대 위에서 또다시 천학우사의 웅후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성주님 듭시오!" 찰나지간 바다가 갈라지듯 인파의 중앙이 좌악 갈라지고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천세(天世) 무림성!" "만세! 무림성...!" 그와 동시에, 무림어군들이 일제히 부복대례를 취했다. 중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갈라진 인파의 중앙을 응시했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이는 금빛 곤룡포를 걸치고 백리사헌이 목대를 향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태산을 보듯 고고한 위엄을 지닌 그의 전신에서 흩뿌려지는 엄청난 기도에 중인들은 절로 위축됨을 느꼈다. 이때 백리사헌의 뒤에는 한 쌍의 금동금녀가 앙증맞게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두 손으로 각기 금쟁반을 소중히 받쳐 들고 있었는데, 소녀의 쟁반 위에는 금빛 찬연한 금합 하나가, 소동의 쟁반 위에는 칼날의 윗부분이 톱니처럼 생긴 기도(奇刀)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바로 백리사헌의 수중에서 천하를 떨어 울린 바 있는 승천도(昇天刀)였다. 백리사헌은 지극히 위엄있는 모습으로 천천히, 부복한 무림어군의 앞을 지나 나란히 도열해 있는 십대문파의 장문인들과 이십팔 대세가의 장주들 사이를 통과했다. "성주를 뵙습니다." 백리사헌이 장문인들과 장주들의 앞을 지나는 순간 그들은 일제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인들은 일시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들이 언제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장문인들과 장주들이 백리사헌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곧 천하무림이 백리사헌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과 같았다. 다시 말해서, 천하무림이 오직 백리사헌 한 사람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이때 백리사헌은 걸음을 멈추며 여러 장문인들과 장주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허헛!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소. 노부는 이런 예를 받기에는 너무 부족하오이다." 나직하면서도 지극히 부드러운 그 음성에는 절대자의 오만이 아닌 겸허한 태도가 깃들여 있었다. 소림의 장문인 경허성승이 백리사헌의 말에 정중하게 답했다. "아미타불... 아니오이다. 천하에 성주가 아니고는 그 누가 감히 이처럼 거대한 웅자를 펼칠 수 있겠소이까?" 백리사헌은 재차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허허허! 말씀만이라도 고맙소이다. 여러 장문인들께서는 편히 본 성의 개파대전을 구경하시다 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오이다." 경허성승 등이 다시 허리를 숙여 보이자 백리사헌은 곧 그들 사이를 통과해 목대 위로 올랐다. 그가 목대 정중앙에 선 것을 확인한 천학우사가 낭랑히 외쳤다. "서약지례(誓約之禮)!" 그러자 경허성승이 조용히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미타불... 노납은 십대문파와 이십팔대세가를 대표하여 성주께 무림 정의를 지켜 주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무황령(武皇令)을 드리는 바입니다." 동시에 그는 미리 준비했던 삼각형의 푸른 깃발을 꺼내 들었다. 용(龍)의 형상을 한 황금 깃대에, 십대문파와 이십팔대세가의 이름이 푸른 깃폭에 새겨진 깃발이었다. "이 무황령이 꽂히는 곳에 십대문파와 이십팔대세가는 마(魔)를 응징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오이다." 경허성승은 깃발을 들고 목대 위로 올라 공손히 백리사헌 앞에 내밀었다. 무황령! 그것은 곧 천하무림이 백리사헌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실질적인 서약이 아니겠는가? 백리사헌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무황령기를 받아 들었다. "허헛! 고맙소. 무림성은 결코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노부 역시 여러분의 정성에 보답키 위해 약소한 예를 준비했소." 백리사헌은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소녀를 향해 손짓했다. 소녀가 앞으로 나서며 금쟁반에 받쳐 든 금합을 경허성승 앞에 내밀었다. 백리사헌의 음성이 이어졌다. "작은 성의이나 이것으로 그대들과 백리세가는 영원한 존속 관계를 가지게 되었음을 노부는 심히 기쁘게 생각하오이다." 소녀에게서 금합을 받아 들던 경허성승은 백리사헌의 말에 의혹을 느끼며 금합을 열어 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것은...!" 금합 속. 빛 바랜 고서(古書)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데, 그 맨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백리달마역근세수경(百里達磨易筋洗髓經)〉 달마역근세수경은 바로 소림의 최대 절예가 담긴 비급으로 이미 오래 전에 실전(失傳)된 것이었다. 더구나 그 비급이 실전됨으로 해서 지금 소림의 무학은 급격히 퇴보해 있는 상태였다. 한데 이 자리에 그것이 나타난 것이다. 더욱이 달마역근세수경의 앞에는 '백리(百里)'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선명한 글체가 원래의 빛 바랜 글씨와는 달라 누군가 새로이 써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허성승이 놀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소림의 개파조사가 저술한 비급이 나타났다는 사실보다는 비급 앞에 붙어 있는 '백리'라는 두 글자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경허성승은 적이 불안한 얼굴로 다음 고서를 들추어 보았다. 〈백리무극사상검경(百里無極思像劍經)〉 무극사상검경은 무당의 장삼풍 조사가 저술한 것으로, 역시 오래 전에 실전된 비급이었다. 그리고 그것 역시 이름 앞에 어김없이 '백리'라는 두 글자가 붙어있었다. 휘청! 경허성승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만 신형을 비틀거리고 말았다. '아미타불, 이런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어찌 선조들을 뵈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끝이다! 이런 모욕을 받으며 어찌 노납이 하늘을 우러러 숨을 쉴 수 있으랴?' 경허성승의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떠오르는 순간, 백리사헌이 지극히 엄중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장문인! 노부를 잘 보시오." 그러고 그는 허공 높이 신형을 띄우며 그대로 성문을 향해 날아가 성문의 왼쪽 대리석 기둥을 향해 한 손을 비쾌히 움직였다. 찰나지간, 한 가닥 검기(劍氣)가 눈부시게 번쩍이며 무엇인가가 대리석 기둥에 박혀 들었다. 언제 수중에 들고 날렸는가? 놀랍게도 대리석 기둥에는 승천도가 자루만을 남긴 채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었다. "아...!" "오오...! 어찌 저런 신기(神技)가..." 중인들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한결같이 입을 벌리며 탄성을 발했다. 허공을 밟는 기막힌 신법도 그러하거니와, 천하에 견고하기로 따를 것이 없는 대리석에 칼을 꽂은 그 내공(內功)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어느새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백리사헌이 경허성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생사(生死)는 장문인의 마음이오. 하나 장문인이 진정으로 대소림을 위한다면 훗날 저 기둥에 박힌 승천도를 뽑아 백리란 성을 지울 수 있기 바라오. 백리세가가 이곳 무하평에 존재하는 한 승천도는 무림성의 힘으로는 결코 뽑지 않을 것이오." 부르르... 경허성승은 백리사헌의 장중하기 그지없는 말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백리사헌, 이 사람은 지금 진정으로 중원을 생각하고 있다. 조금의 가식도 없이.' 그는 지그시 두 눈을 내리감았다. '부끄럽구나! 이자에 비한다면 노납은 하찮은 명예와 자존심으로 하마터면 대소림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뻔했으니...' 경허성승의 가슴속에는 이제 한 가지 확고한 의지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꺾으리라! 그리고 지금의 수치와 모욕은 노납 혼자 짊어지고 갈 것이다!' 수시로 급변하는 그의 안색을 바라보며 백리사헌은 다시 말했다. "장문인! 중원은 넓고 거대하오. 그것을 노부 혼자 떠맡기에는 너무나 벅찰 것이오." "...!" "오늘의 일은 그대들의 대(代)에서 끝날 것임을 약속하겠소." 그런 그에게서는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웅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경허성승은 재차 전신을 짓누르는 위압감을 느끼며 내심 크게 탄복했다. '거목...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거목이다. 하나 보여 주리라. 천여 년 동안 맥(脈)을 이어 온 대소림의 의지를...!' 그는 안색을 가다듬으며 백리사헌을 향해 정중히 입을 열었다. "고맙소이다, 성주. 승천도가 부러지지 않는 한 무황령은 언제까지나 존속될 것이오." 백리사헌의 입가에 한 가닥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노부의 뜻을 이해해 주신다니 고마울 뿐이오. 아무쪼록 다른 분들도 장문인과 같은 생각이기를 바라겠소이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장내로 시선을 돌리며 우렁차게 외쳤다. "여러 무림 동도들! 무림성의 기둥에 꽂힌 노부의 승천도는 여러분들을 기다릴 것이오. 언제라도 승천도를 뽑아 백리세가를 무너뜨리는 사람에게 노부는 천하대권과 함께 무림성을 이양하겠소." 백리사헌의 파격적인 선언에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넋을 잃었다. 천하대권... 무림성의 이양... 그것은 실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만일 그 같은 일을 해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단숨에 천하를 얻게 되리라. 그때 백리사헌이 천학우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성총관, 이것으로 오늘 개파대전은 끝을 맺으시오. 무림성의 취지는 충분히 전달되었으니." "알겠습니다." 천학우사는 공손히 대답한 후 장내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여러분! 무림성은 오늘부터 열흘간 문을 활짝 열고 누구나 귀빈으로 맞을 것이오. 이것으로 오늘의 개파대전을 끝마칠까 합니다."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환호성이 맑은 하늘에 드높이 울려 퍼졌다. "와아! 성주 만세!" "승천무황 천세! 무림성 만만세...!" "와아...!" 그 광경을 지켜보는 백리사헌의 얼굴에 재차 흡족한 웃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득 나직한 중얼거림이 독백처럼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웅(魔雄)이나 효웅(梟雄)으로는 천심(天心)이 안 따르며 간교하고 야비한 술책으로는 천하패업을 이룰 수 없다. 오직 진정한 영웅만이 천하를 웅패할 뿐이다...!" 한편, 옆에서 백리사헌을 바라보는 경허성승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정한 영웅지로(英雄之路)를 가고 있다. 그러나... 과연 향후 무림에서 백리 성주를 능가할 인물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것을 금할 수 없었는데...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인들은 그저 기쁨과 환호에 들떠 있을 뿐이었다. "무림성 만세...!" "승천무황 천세...!" 무림성의 개파대전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승천무황 백리사헌. 그 절대자(絶代者)의 위엄 어린 모습을 천하에 뿌리깊게 심어 놓으면서... 3 캄캄한 밀실.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그곳을 밝혀 주는 것은 오직 천장에 박혀 있는 야명주뿐이었다. 희미한 야명주 불빛 아래 두 개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금빛 곤룡포를 입은 백리사헌과 잠마풍주 천우의 모습이었다. 여전히 차갑고 무감각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천우의 머리 위에 꽂힌 은잠이 이 순간 야명주 불빛에 반사되며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문득 백리사헌이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어떠냐? 천우! 네가 본 군중들의 동태는?" 천우는 공손히 허리를 꺾으며 대답했다. "예. 작은 소요는 있었으나 모두 성주님의 신태에 탄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성주님께 많은 위압감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백리사헌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저어졌다. "노부의 말은 새외의 천축, 묘강, 북해 등의 이방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속하가 느끼기로는... 그들 역시 성주님의 기도에 두려움과 경외심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천우의 말에 백리사헌은 낮게 침음했다. "으음... 그랬더냐? 하나 그것은 너의 편견일 뿐이다. 노부가 본 그들의 존재는 상상 이상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 "특히 천축의 포랍존자(抱拉尊者)의 눈빛에서 이미 중원에 모종의 암계를 펼쳐 놓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무표정하던 천우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성주님, 포랍존자는 천축에서 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다. 그는 틀림없이 왔다. 또한 이미 새외 세력의 주인들과 화합을 가졌다." 백리사헌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단정을 내렸다. 그를 바라보는 천우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성주님의 말씀은 이제껏 한 번도 허언이 없으셨다. 그렇다면...' 천우의 심중을 읽은 듯 백리사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천우! 이번 개파대전의 뜻은 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천우의 두 눈이 번뜩 빛을 발했다. "그럼 성주님께서는 새외 이방세력의 회합을 위해...?" 새외 이방세력의 회합! 그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백리사헌은 엄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다. 노부가 알아본 바로는 이미 새외 이방세력은 중토에 골고루 퍼져서 독버섯처럼 싹이 트고 있었다. 그것을 방치해 두면 중원은 많은 피해를 당하고 말지도 모른다. 해서... 이번 기회에 그들의 세력을 하나로 합쳐 일거에 쓸어 버리려는 것이다." "하오나... 그들이 뭉친다면 힘이 그만큼 커져 본 성을 향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천우의 불안 섞인 물음에 백리사헌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점은 신경 쓸 것 없다. 경쟁자가 강한 만큼 중원 역시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부의 절대(絶代)는 강한 중원 위에 뿌리를 내려 만세까지 이어 가며 백리세가의 위엄을 상기시킬 것이다. 결코 나약한 중원 위에 모래성을 쌓아 허물고 다시 쌓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 순간 천우는 볼 수 있었다. 태산만큼이나 거대하고 웅대한 백리사헌의 진정한 모습을. 그리고 그 앞에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을... '이분... 그릇이 너무 크다. 결국 나는 하늘 밑의 산으로 만족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내심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백리사헌은 두 눈을 번뜩이며 천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천우,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노부는 강자를 원한다. 하나 야비하거나 교활한 술수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명심해라. 무림성이 천하인들의 모든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는 지금, 네가 아무리 노부의 수석제자이나 조건은 천하인 모두와 같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천우는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성주님의 말씀... 각골 명심하겠습니다." 잠마풍주 천우. 그의 진정한 정체가 백리사헌의 수석제자였다니. 그리고 그를 가리켜 수석제자라 함은 백리사헌에게 또 다른 제자가 있다는 뜻도 되지 않는가? 그때 백리사헌이 굳어 있던 안색을 풀며 말머리를 돌렸다. "한데... 밀천무영세가의 일은 어느 정도나 진척이 되었느냐?" 그러자 천우는 한 가닥 생기를 띠며 자신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들의 점조직이 드디어 밝혀졌습니다." 그 말에 이제까지 깊게 가라앉아 있던 백리사헌의 눈빛이 엷은 흥분감으로 물결치기 시작했다. "밝혀졌다고? 그곳이 어디냐?" 천우의 입술이 천천히, 그러나 힘있게 열렸다. "밀천무영세가를 막후에서 움직이는 곳은 놀랍게도... 바로 성주님께서 백약사의 신분으로 암행(暗行)을 하신 대하성의 궁가장이었습니다." 꽝! 백리사헌은 순간 뒤통수를 내리치는 엄청난 충격에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무엇이...? 궁가장이 밀천무영세가였다고..." 그의 입술을 간신히 비집고 튀어나온 말이었다. 승천무황 백리사헌. 무림의 위대한 영웅이며 절대자인 그도 이 엄청난 사실 앞에서는 초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우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확실합니다. 밀천무영세가의 수뇌들인 밀천무영이십육살은 백 일에 한 번씩 궁가장에서 회합을 가지며 그곳에서 천하 대소사를 결정짓고 있었습니다." "...!" 백리사헌은 잠시 동안 망연한 모습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어떤 것도 천우가 전하는 소식보다 그를 더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없으리라. 가까스로 심중을 추스른 그는 거의 신음에 가까운 나지막한 음성을 흘렸다. "으음, 이럴 수가...! 린아와 궁사... 두 조손이..." 절대자답게 그는 서서히 평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궁사...! 역시 예사 인물이 아니리라 짐작했었지만... 설마 밀천무영세가의 가주였을 줄이야...! 결국... 린아와는 연(緣)이 없단 말인가?" 궁예린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오 년을 투자한 백리사헌. 그의 노안에는 고뇌와 갈등의 빛이 짙게 서려 있었다. "하늘은 나에게 마지막 시련을 내리는구나. 설마 그 아이가 노부의 상극인 살(殺)의 괘를 지닌 가문의 소가주일 줄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암담한 시선으로 텅 빈 허공을 바라보았다. '린아... 그 아이를 생각한다면 이대로 지나칠 수도 있다. 하나 그 대신에 백리세가의 원대한 야망은 무림에서 끝을 내게 된다. 이것을 위해 노부의 전 생애를 바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의외로 백리사헌이 겪는 갈등은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그만큼 궁예린에 대한 그의 정(情)과 기대가 컸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 생애를 바친 야망을 포기할 정도로 백리사헌은 나약한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나, 궁예린도 야망도 그에게는 모두 똑같이 중요했다. 때문에 이 시대의 절대자인 그는 정(情)과 야망(野望)의 교차로에서 심한 번민을 느끼고 있었다. 한동안 밀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주위를 묵중하게 내리누르는 공기에 천우는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괴이한 일이군. 그토록 찾으시던 밀천무영세가가 드러났는데 성주님께선 왜...' 그가 내심 짙은 의혹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백리사헌은 모진 결심을 굳히며 그 어느 때보다도 엄중히 입을 열었다. "천우, 잠마풍의 모든 힘을 궁가장으로 집결시키도록 해라." 영(令)! 드디어 떨어졌다. "점조직은 점(點)을 연결시키는 수뇌들이 없으면 저절로 와해되는 것...! 공격 시간은 밀천무영이십육살이 궁가장에 모두 집결했을 때로 정한다." 말을 마친 백리사헌의 얼굴에서는 이제 번민이나 갈등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야망으로 이글거리는 절대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잠마풍의 목표는 궁가장의 생(生)을 철저히 말살하는 것...!' 지극히 심각한 백리사헌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우는 재차 의혹 속에 빠져 들었다. '갈수록 놀랍군. 그까짓 장원 하나 치는 데 아직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잠마풍의 전 세력을 집결시키다니.' 그러나 그 의문은 천우의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했다. 백리사헌의 한마디는 곧 거역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었기에 천우는 지체하지 않고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속하, 명을 받듭니다." 백리사헌의 고개가 단호히 끄덕여졌다. "가거라! 노부 역시 곧 뒤따를 것이다." 천우의 얼굴은 거듭 의혹으로 물들었다. '성주께서 직접...! 대체 밀천무영세가에 얼마나 대단한 힘이 숨겨져 있기에...' 계속되는 의문에 잠시 주춤하던 그는 이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존명!" 천우의 모습은 대답과 함께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었고 밀실 안에는 이제 백리사헌만이 홀로 남았다. 그는 복잡한 눈길을 들어 천장에 박힌 야명주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그 불빛에 밝게 웃고 있는 궁예린의 모습이 투영되듯 떠오르자 백리사헌의 입가에 순간 쓰디쓴 자조의 미소가 조용히 피어올랐다. "예린... 너는 끝내 노부에게 놀라움과 번민을 안겨 주는구나. 노부는 너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리사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실로 가공 무비한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밀실은 뜻밖의 놀라움과 충격의 여운을 간직한 채 죽음 같은 적막 속에 잠겨 들고 있었다. 드디어... 일〔事〕은 벌어진 것이다. 제 6 장 고개 드는 야망(野望) 1 <폐하! 노신 백리사헌은 폐하의 염원을 받들어 다행스럽게도 영을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길고 긴 나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 속에서 노신은 역시 한 인간임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인간은 언젠가는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해서, 노신은 돌이키기 싫은 지난날의 비극과 똑같은 일이 두 번 다시 황조(皇朝)를 얼룩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단단히 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곧 힘〔力〕과 덕(德)을 고루 갖춘 황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갖게 했습니다. 다행히 노신에게는 하늘의 천복(天福)인지 부끄럼없는 아들이 하나 있는 바, 그 아이를 폐하의 금지옥엽이신 성하공주(盛河公主)와 짝을 이루게 한다면 백리세가의 홍복이며 향후 중원천하를 위해 다시없는 일이 될 것이기에 이렇게 노신의 마음을 글월로 올립니다. 다만 성하공주께서 아직 유년하시고 노신 또한 중원을 정비할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다소의 세월이 필요한 바, 노신은 왕도(王道)의 길을 걷고 배우는 신의 자식놈을 더욱 채찍질하여 삼 년(三年) 후에 폐하를 찾아뵐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럼 다시 뵈올 날까지 옥체만강하시기 바랍니다. 백리사헌 경배(敬拜).> 부르르...! 장황한 글귀가 적힌 서찰을 들고 있는 창백한 손에는 세찬 경련이 일고 있었다. 정실 한가운데 놓여 있는 태사의. 두 마리의 용(龍)이 마주보는 형상을 새긴 그 화려한 태사의에는 지금 황룡이 수놓아진 황금빛 곤룡포를 입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청수한 노안에 가슴까지 탐스러운 은염을 늘어뜨리고 전신에서 만승지존의 위엄을 풍겨 내는 그는 바로 당금 중원의 황제인 홍희제였다. 이 순간 바람도 불지 않는데 그의 수염은 연신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옆, 한 자루의 검인 양 예리한 기도를 뿜어 내며 한 인물이 시립해 있었다. 언젠가 황궁무고에서 홍희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바 있는 하후돈이었다. 수중의 서찰을 와락 움켜쥐며 홍희제가 참담한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더니... 백리사헌, 그가 역심(逆心)을 품고 있을 줄이야...!" 그의 얼굴은 분노로 경직되어 있었다. 하후돈 역시 어두운 신색으로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폐하! 이제 와서 돌아보니 모든 것은 백리사헌의 무서운 야망에 의한 연극이었습니다. 그자가 은밀히 아들을 숨겨 둔 것도 바로 오늘을 위한 계획 중 하나였음이 분명합니다." 홍희제의 두 눈에 번쩍 기광이 스쳐 갔다. "그렇다면 혹 성무태자(成武太子)가 의문의 병으로 눕게 된 것도...?"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다는 기색이었다. 하후돈이 지극히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외람된 생각으로는 백리사헌, 그자가 이만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을 때는 이미 태자전하께도 무슨 술수를 썼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쾅! 홍희제는 자신도 모르게 태사의의 손잡이를 힘껏 내리쳤다. "안 된다! 어찌 그럴 수가... 백리세가가 어찌 황조를 잇는단 말이냐?" 분노가 극에 달한 듯 그의 두 눈엔 살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배은망덕한 놈! 지금 당장 금군어영친위대와 구문제독을 불러라. 무림성을 일거에 쓸어 버리고 말리라." 추상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그러나 하후돈은 왠지 머뭇거리며 난색을 띠는 것이었다. 이어 그는 극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이 입에 담기는 송구스러우나 그들을 부르지 않으심이 옳지 않은가 합니다." 홍희제는 흠칫하여 그를 돌아보았다. "하후돈! 그것이 무슨 말이냐? 어서 그 이유를 소상히 말하라. 만일 한치의 거짓이라도 있을 시엔 너부터 대역죄인으로 참하겠노라." 잠시 주저하며 말하기를 꺼리던 하후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실은 성무태자께서 병석에 누우신 후부터 조정(朝廷)은 분열(分裂)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무엇이? 분열을..." 홍희제의 노안이 이번에는 크나큰 경악으로 물들었다. 분열. 그것은 서로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당파싸움을 일컫는 말이 아닌가? 하후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구문제독 방허승(方許勝)은 휘송왕자(煇松王子)님을 옹립하여 막후에는 귀빈마마를 등에 업었으며, 금군어영친위통령은 다섯째 왕자이신 천무왕자(天武王子)님을 옹호하며 서로의 세력을 넓히려고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홍희제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무, 무엇이...? 그걸 어찌 이제야 말하느냐?" "그것은 신 역시 백리사헌의 뒤를 캐다가 뒤늦게 알아낸 결과입니다." "하면... 백리사헌 역시 황궁 일에 개입을...?" "그렇습니다. 신의 추측으로는 어쩌면 이 모든 일은 백리사헌의 안배에 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거의 확실합니다." "...!" "때문에 구문제독이나 금군어영친위통령에게 백리사헌을 제거하라 명하신다면 그들에게 이 기회에 병권을 움직여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게 하는 결과밖에는 안 될 것입니다." 홍희제는 주체하기 힘든 충격에 태사의의 팔걸이를 움켜쥐며 휘청거렸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실수로다. 짐의 생애에 도저히 씻지 못할 실수를 범했도다...!" 하후돈의 말. 그것은 홍희제에게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을 안겨 주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 사무친 한(恨)을 풀고자 했던 홍희제. 그는 자신을 대신할 만한 인물로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금군어령총령 백리사헌을 선택했고, 그에게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부었다. 백리사헌을 완벽한 최강의 인물로 만들기 위해 이십 년간 천하무학의 최정수만을 모아 황궁무고에서 백리사헌으로 하여금 광고절금의 비학을 연성케 했었다. 그렇게 해서 현재의 백리사헌을, 이 시대의 절대자를 탄생시켰건만... '중원무림의 개혁...! 그것이 짐의 소원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백리사헌, 그자가 짐의 목에 칼끝을 들이대다니! 결국 짐이 한평생 공들여 쌓은 탑은 한낱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했단 말인가?' 홍희제는 지극히 참담한 마음에 그만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배신(背信)도 이런 배신이 없었다. 그런 황제를 바라보는 하후돈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는 곧 입술을 깨물며 비장한 각오로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이 더 이상 아뢰옵기는 황송하오나... 신이 그 동안 무림을 돌아본 결과 중원무림은 무림인들 나름대로 영위해 나가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홍희제는 스르르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허탈한 신색으로 말했다. "하후돈, 개의치 말고 그대가 느낀 대로 말해 보라." "그것은 무림(武林)이라는 세계는 누구 한 사람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거기에 절대(絶代)라는 두 글자가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正)이나 사마(邪魔)...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결코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절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려야 했으며 정(正)이란 명목 아래 무수한 사도(邪道)와 마도(魔道)가 이 땅 위에서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 결과, 무림성이란 한 문파에 의해 무림은 무림 사상 최대의 희생을 치렀고 그 속에 피눈물과 통분을 금치 못한 자가 수도 없었습니다." 하후돈은 짧은 탄식을 흘리며 결론을 맺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백리사헌 한 사람만을 위한 일이었으며 또한 그에게 오늘날과 같은 욕심을 품게 만들기에 이른 것입니다." 진정 현 세태(世態)를 날카롭게 분석하여 정곡을 찌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구구절절이 뼈에 사무치는 그 말에 홍희제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후돈!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짐은 만고에 다시없는 죄인이 되었구나. 중원무림이 그토록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니. 무림을 좀더 조사한 후에 백리사헌을 보냈어야 했을 것을..." 홍희제의 노안에는 후회의 기색이 역력했다. 하후돈은 혜지 어린 눈빛을 빛내며 재차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모든 것은 지난 일인 줄 압니다. 이제 남은 것은 백리사헌의 야욕을 어찌 막느냐 하는 것입니다." 홍희제는 그늘진 얼굴을 설레설레 저었다. "틀렸다. 짐이 이십 년 동안 멀리는 천축에서부터 동영, 해동의 무공을 거두어들여 그 모든 최정수를 백리사헌의 한몸에 집약시킨 것을 그대도 익히 알고 있지 않는가?" "...!" "더욱이 황궁까지 이미 그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다면... 과연 그의 힘과 무공을 막을 자가 누가 있단 말이냐?" 맞는 말이었다. 하물며 천하무림까지 그의 수중에 있는데 그 누가 백리사헌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홍희제는 침통하게 말을 이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자업자득인 것을...! 짐이 뿌린 씨는 당연히 짐이 거두어야 한다." 만승지존 홍희제. 역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해 전 생애를 다 바친 노황제의 용안에는 지금 자조와 공허의 빛만이 그득했다. 문득 하후돈이 두 눈에 기광을 띠며 홍희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 했습니다. 중원천하에 결코 백리사헌의 상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바르르... 홍희제의 눈가에 한 가닥 격동 어린 전율이 일었다. "하면... 무림에 백리사헌을 상대할 인물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속하, 확실히 단정을 내릴 수는 없으나 무림에 내려오는 전설이 사실이라면 능히 백리사헌의 상대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설?"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하에 백리사헌을 상대할 곳은 오직 지옥무벌(地獄武閥), 그곳뿐입니다." "지옥무벌...?" 홍희제는 처음 듣는 이름에 의혹 어린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만일 무림인이 이 자리에 있어 그 말을 들었다면 필시 혼비백산하고 말았으리라. 2 지옥무벌(地獄武閥)! 피〔血〕와 죽음〔死〕만이 유일한 즐거움인, 지옥에서 온 마인(魔人)들의 집단. 전설(前說)은 천사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희대의 폭군이며 풍운아인 진시황제. 그는 말년에 자신의 영원한 아성을 이룩하기 위해 그 유명한 분서갱유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중원에 한한 것이겠는가? 그는 무림에도 은밀히 손을 뻗어 힘을 지닌 자의 씨를 모조리 말리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지옥무벌이었으니... 지옥무벌. 이 피에 굶주린 악마들에 의해 무림은 시산혈해의 수라장을 이루고 말았다. 단 백 일 동안에 시체가 되어 혈해(血海) 속에 누운 무림인이 만 사천 명이었으며 실종된 인물만도 사 만여 명이 넘었다. 뿐인가? 무림과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희생된 양민의 수가 무려 수만 명에 달했다고 했다. 무림 최악의 시대! 그것은 바로 지옥무벌이 존재한 시기였다. 지금도 무림인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소름끼치는 전율에 진저리를 치곤 했다. 특히 지옥무벌을 이끌던 지옥마제(地獄魔帝)의 이름은 두 번 다시 떠올리기를 꺼려할 정도였다. 지옥마제. 일명 죽음의 황제라 불리는 그는 철저히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모습이나 내력, 심지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도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오직 한 줄기 번뜩이는 섬광 속에 어김없이 혈화(血花)가 피어난다는 가공할 무공밖엔. 지옥마제. 그리고 그가 이끄는 지옥무벌. 그것은 하늘이 중원에 내린 혹독한 저주였다. 한데 어느 날, 지옥마제와 지옥무벌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천하를 누비던 죽음의 행진도 거짓말처럼 멈췄다. 무림인들은 믿을 수 없는 그 사실 앞에 오히려 어리둥절해 했다. 그 속에 하나의 소문이 빛보다 빠르게 중원천하를 휩쓸었다. 누군가 산천을 울리는 지옥마제의 처절한 절규를 들었다는 것이다. 피를 토하는 그 절규는... －크흑! 하늘〔天〕이여! 어찌 저주와 죽음을 저한테만 내리셨단 말입니까? 나는 나에게 내린 하늘... 당신의 운명을 거부하겠소. 이 땅에 나로 인해 태동한 지옥무벌은 나 지옥마제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겠소. 이것이 당신이 내린 운명에 대한 뚜렷한 거부가 될 것이오! 또한, 당신이 내린 운명을 뒤바꾸기 위해 나 지옥마제의 후예들은 이 땅이 끝나는 그날까지 나의 죄값을 천하 구석구석에 심어 놓을 것이오...! 이 처절한 통분의 절규가 사실인지 아니면 지어낸 말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 후로 지옥무벌과 지옥마제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또한 지옥마제의 후예라는 자 역시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그저 하나의 전설에 지나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 지옥무벌의 전설이 뜻밖에도 하후돈의 입에서 거론된 것이었다. 홍희제는 그 엄청난 전설을 들은 후, 얼마 동안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너무도 가공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간신히 심중을 추스른 홍희제는 하후돈을 바라보며 불신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하나... 그것은 전설일 뿐이지 않은가?" 하후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오나... 전설은 언젠가 깨어지는 법! 백리사헌을 상대할 곳은 오직 지옥무벌뿐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후예를 찾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홍희제는 더욱 침통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 '하후돈... 확률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야 하는 짐의 심정을 그대만은 이해하겠지!' 그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짐이 뿌린 씨는 반드시 거둔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설을, 지옥무벌의 후예를 찾는 수밖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 지금 홍희제의 마음이었다. 다음 순간 홍희제는 만승지존의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금빛 삼각 깃발을 하후돈에게 내주며 엄중히 명했다. "하후돈! 금후 그대가 나타나는 곳엔 짐 또한 출현하게 될 것이다. 찾으라! 대명(大明)의 운명이 그대의 두 어깨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고 지옥무벌의 후예를 찾도록 하라." 깃발에는 '천자령(天子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천자령! 황궁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는 지엄한 신물(神物). 소문에는 천자령으로 당금 황제에게까지 명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한데, 홍희제는 지금 하후돈에게 그것을 내주고 있었다. 하후돈은 무릎을 꿇고 깃발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며 말했다. "존명을 받들어 신은 목숨을 걸고 그들을 찾을 것입니다." 진정 목숨을 건 비장한 어조였다. 이어 그는 홍희제 앞에 아홉 번의 배례를 올렸다. "폐하! 부디 옥체보존하소서." 절을 마치고 난 그는 곧 소리없이 신형을 감추었다. 홀로 남게 된 홍희제는 비통한 탄식과 함께 의미심장한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하후돈...! 어찌 그대의 목숨만 사라지겠는가? 짐 또한 그대의 뒤를 따를 것을..." 침통한 기운이 호화로운 내전 안에 짙게 깔리고 있는 이곳은 대명의 핵심부인 황궁이었다. 3 파라라락!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한 적막을 깨고 있는 실내. 사방 오 장 넓이의 거대한 실내의 주위는 온통 서가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대부분이 문무(文武)의 최고봉을 엮은 비서(秘書)들이었다. 얼른 눈에 띄는 것만을 예로 든다 해도, 천고오대병서(千古五大兵書), 육도삼략(六道三略), 만상천혜록(萬想天慧錄), 천변의술총요(千變醫術總要), 제자백가(諸者百家) 등등... 하나같이 심오막측하여 난해하기 그지없는 책들이었다. 그러나 그 책들의 책장을 넘기는 손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청년(靑年)이라고 하기엔 아직 어린... 이제 막 소년의 티를 벗은 그는 일신에 밝은 청의를 걸친 십오 세 가량의 준미한 소년이었다. 반듯한 이마, 선이 뚜렷한 오관, 특히 맑고 투명한 두 눈엔 가늠하기 어려운 혜지가 넘칠 듯 서려 있었다. 그는 책의 내용에 깊이 심취해 있는 듯 단 한 번도 한눈을 파는 일 없이 독서대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과연 읽는다고 할 수 있을까? 소년이 책장을 넘기는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는 그저 그가 책장의 수를 헤아리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만큼 속도가 무척 빨랐다. 바로 그때였다. "대연실학론(大然實學論)! 그것은 이 아비도 난해하고 심오하여 중도에 놓은 책이거늘... 대견스럽구나." 깊은 적막을 깨며 감탄 섞인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미소년의 등뒤에서였다. 언제 들어왔는가? 한 명의 백의노인이 소년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노인, 그는 놀랍게도 승천무황 백리사헌이었다. 그를 발견한 미소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소자, 아버님께서 오신 줄도 모르고..." 그는 공손히 백리사헌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단지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뿐인데도 소년의 동작 하나하나에는 천성적인 위엄과 근엄함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 가히 예술이라 할 수 있는 존엄한 기품이 전신에 흐르고 있었다. 백리사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허헛! 괜찮다. 이 아비가 오히려 너의 공부를 방해한 것 같구나." "...!" "앉아라. 오랜만에 우리 부자가 대면을 하는구나." 부자(父子)! 그랬다. 미소년의 이름은 백리유정(百里流情)으로 그 누구도 모르는 백리사헌의 아들이었다. 기실 백리사헌은 아무도 모르게 남매를 두고 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그가 어째서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인지 그 까닭은 차차 밝혀지리라! 백리사헌 부자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아들의 품위있는 태도를 대견한 듯 바라보던 백리사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너의 신태에는 이 아비도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근엄한 기도가 배어 있구나. 장하다! 이토록 아비의 뜻을 잘 따라 주니 백리세가는 이제 만세까지 그 위엄을 이을 것이다." 백리유정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스럽습니다. 소자는 아직 더 배우고 익혀야 아버님의 기대에 미칠 것입니다." "허허허! 아니다. 기도 하나를 놓고 볼 때 너는 이미 이 아비를 능가했느니라. 오늘부터 너는 대명(大明)의 황제가 지키고 갖춰야 할 덕(德)과 위엄을 몸에 익히거라." 순간 백리유정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하면... 아버님께서는 이미...?'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백리사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아비는 이미 황궁에 너의 존재를 인식시켜 놓았다." "...!" "향후 삼 년 뒤, 너는 대명의 제십이대 황제로서 역대 그 누구보다 훌륭한 만고의 성군(聖君)으로 역사에 남아야 하느니라." 백리사헌. 그의 입에서 떨어진 한마디는 과연 실언인가, 광언(狂言)인가?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황제의 위(位)를 물려받게 하려는 그의 생각은 진정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었으나, 그의 한마디가 곧 이 시대의 법인 현 시점에서 어쩌면 그것은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버님의 말씀...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백리유정은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그의 미간에는 한 줄기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러나 백리사헌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밖은 한창 타오르고 있는 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야지. 아비는 오늘을 위해 일생을 바쳤으니까. 선택받은 인간들... 그들만이 특권을 누리는 세습체제가 대명을 추잡하게 만들고 있다. 서로의 욕망을 위해서는 혈족까지 이용하고 죽이는 오랜 폐습을 나는 환멸해 왔다." 노을은 이제 완전한 핏빛으로 서천(西天)을 집어삼키고 있었으며 그 속에서 백리사헌의 음성은 더욱 열기를 띠었다. "황제의 아들은 아무리 못나도, 악(惡)해도 황제가 되는 선택받은 황위(皇位)를 나는 반드시 뒤집고야 말겠다. 대명을 이끌 능력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그를 받들 것이고... 향후의 백리세가 역시 그것을 지켜 덕(德)과 위엄(威嚴)을 만세까지 남겨야 한다. 그것만이 이 아비가 중원을 사랑하고 아꼈다는 뜻이 될 것이다." 확고한 신념이 깃들인 단호한 어조였다. 노을 탓인가? 백리사헌의 모습은 지극히 장엄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 모습을 주시하는 백리유정은 착잡한 심경일 뿐이었다. '아버님... 당신은 위대한 분입니다. 하나, 아버님이 바라시는 시대는 이 시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암울한 신색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님은 시대를 잘못 타고나신 것입니다. 소자, 알 수 없는 불안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아십니까?' 백리유정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백리사헌은 아들의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계속 말을 잇고 있었다. "유정아. 너는 이 아비의 뜻을 받들어 네 자식들이 황위를 이어 갈 재목이 아닐 때는 가차없이 황위를 다른 인물에게 넘겨야 하느니라. 또한... 황제가 될 재목에게는 절대로 무(武)의 힘을 익히지 못하게 해야 된다." 백리사헌의 근엄한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황제는 오직 황궁에서만 존속해야 하고 무림은 무림인이 지켜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 아비 역시 무림성만은 백리세가가 아닌 다른 인물에게 넘기려고 하느니라." 이 얼마나 철저한 계획인가? 능력과 욕망을 함께 갖추지 못하게 하려는 철두철미한 계책이었으니... 어쨌든 백리사헌은 시대를 부정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다시 말해서, 시대(時代)를 넘어서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백리유정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각골 명심하겠습니다." 하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불안이 영글고 있었다. 무엇인지 아직은 확실치 않은 그 어떤 불안이... 백리사헌과 백리유정. 두 부자의 생각과 뜻은 이렇게 방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4 폭양(瀑陽). 그 어느 해보다 뜨거운 칠월 중순이었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 밤이 되었건만 날씨는 여전히 후텁지근하기만 했다. 별빛도 더위에 지친 듯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는 깊은 밤. 거대한 장원의 후원 쪽에서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이 엷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궁가장(宮家莊). 오늘은 바로 밀천무영이십육살이 궁가장에 모여 그 동안의 경과보고를 하는 날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모두가 잠든 이 늦은 밤을 택해 궁가장의 후원 한곳에 모인 채 궁사와 궁예린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슷...! 문득 바람결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 오고 뒤를 이어 어둠 속에서 궁가장을 향해 다가서는 무수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 같은 흑의를 입은 그들의 가슴에는 핏빛 글씨로 '풍(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魔)의 바람. 바로 잠마풍이었다. 하나같이 밀랍을 깎아 만든 듯 차갑고 무심한 표정에 전신에서 풍기는 잔인한 예기는 절로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전형적인 살수(殺手)의 모습이 바로 이러하리라. 흑의인들은 궁가장 근처에 이르러 주춤 기세를 늦추었다. 그러고 누군가의 명을 기다리듯 그들은 한 그루의 거목을 바라보았다. 궁가장 담 밑에 우뚝 선 고목. 그 아래에 백리사헌이 별빛을 받으며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잠마풍을 다스리는 천우가 공손히 시립해 있었다. 문득 백리사헌의 입술이 열리며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밀천무영이십육살이 모두 모였다고?" "그렇습니다. 밀천무영세가의 모든 것이 지금 궁가장에 있습니다." 천우의 대답에 백리사헌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장원을 나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한 명도 없다고...? 그렇다면 밀천무영세가의 사후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천우는 자신있게 입을 열었다. "그것도 완벽합니다. 점조직을 이루어 천하에 퍼져 있는 밀천무영세가의 수하들 이백이십 명은 모두 전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또한 밀천무영세가의 율법으로는 밀천무영세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밀천무영이십육살이 한 명씩 죽을 때마다 그 후인을 회합 속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에 저들이 모두 죽는다면 그 맥(脈)은 완전히 끊기고 마는 셈이 됩니다."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한 듯 천우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한치의 오차나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잠마풍은 일을 실행하기 전에 우선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그 후에 공격을 감행한다. 때문에 그들이 지나간 곳엔 언제나 죽음만이 존재할 뿐이고 살아 남은 자가 아무도 없기에 지금까지 잠마풍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천우의 보고에 백리사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 낮은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으음... 어쩌면 이번 일은 노부의 일생에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런 일로 남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무엇인가? 그의 마음을 이토록 무겁게 만드는 것은. 백리사헌은 궁가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 안에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예린... 그 아이 때문일까? 하나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부득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백리사헌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 노부는 보리라. 밀천무영세가에 담긴 노부의 상극, 살(殺)의 괘를!' 다음 순간, 그는 냉정을 되찾은 모습으로 천우에게 명령했다. "공격하라! 이 밤이 지나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존명!" 천우는 고개를 숙인 모습 그대로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바로 그때였다. 스슷! 스스스...! 잠시 주춤했던 흑의인들은 궁가장 안으로 연기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지상 최대의 명령인 백리사헌의 공격 명령이 떨어진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흑의인들은 신속히 궁가장 안으로 사라졌고, 얼마 안 있어 백리사헌만이 어둠 속에 홀로 남았다. 잠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묵묵히 궁가장을 응시하고 있던 백리사헌의 입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린아... 네가 이곳에 없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있기를 염원하는 이율배반적인 노부의 심정을 용서해 다오!" 그 말을 끝으로 백리사헌의 모습은 그곳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정(情)과 야망이 엇갈리는 그의 음성만이 오래도록 허공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이 밤〔夜〕.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제 7 장 궁가장(宮家莊)의 멸망(滅亡) 1 화르륵...! 황촉불에 밝게 일렁이는 실내. 궁예린의 부축을 받으며 궁사가 침상에서 힘겹게 일어나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 혼자서도 충분히 일을 처리할 수 있으니 할아버지께서는 여기 그냥 누워 계십시오." 궁예린은 적이 염려스러운 듯 조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궁사는 그 말에 껄껄 웃었다. "허헛! 그럴 수가 있나? 이놈아, 네 자신을 속이지 마라. 너는 이 할아비가 없으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아무 일도 못 하면서 그런 소릴하느냐?" 그는 비쩍 마른 손을 내저으며 궁예린을 재촉했다. "어서 가자. 그들은 먼 길을 온 사람들인데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예." 궁예린이 마지못해 대답하며 궁사의 신형을 부축할 때였다. "가주님,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들려 오는 다급한 음성과 함께, 한 인영이 그들 앞에 소리없이 모습을 나타냈다. 냉천, 바로 그였다. 그런데 언제나 싸늘하며 무심한 기운만을 풍기던 그의 얼굴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순간 당황의 기색이 역력했다. "냉천, 자네가 모습을 드러내다니...!" 궁사는 당혹과 경악이 어우러진 모습으로 낮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냉천은 밀천무영세가의 가주를 호위하는 인물로서 그 존재는 오직 가주만이 알고 있어야 하며 그 누구의 눈에도 띄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궁예린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을 알고 있는 냉천이 궁예린과 함께 있는 궁사 앞에 모습을 나타냈으니... "당신은...?" 궁예린이 냉천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 조부의 곁에 다른 누군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그는 갑자기 나타난 냉천의 모습에 놀란 것이다. 냉천은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듯 궁예린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였다. "인사드립니다, 소가주. 속하 냉천이라 합니다." "냉천...?" 궁예린이 나직이 되뇌이고 있을 때, 궁사는 심각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 된 일인가? 자네가 노부의 허락도 없이 나타나다니..." 냉천의 태도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것이다. 냉천은 다급한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궁사에게만 들리는 전음이었다. "가주님, 지금 본가의 주위를 심상치 않은 무리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속하가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그들은 바로 잠마풍이었습니다. 그들이 대거 공격을 감행하려는 것 같습니다." 찰나지간 궁사의 안색이 일변하며 그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할아버지...!" 옆에 있던 궁예린이 쓰러지려는 궁사의 모습에 놀라 경악성을 터뜨리며 재빨리 그의 신형을 부축했다. 궁사는 창백해진 모습으로 이마를 짚었다. '설마 잠마풍이 본가를 공격할 줄이야... 드디어 올 것이 왔단 말인가?' 그 역시 잠마풍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궁사는 일문의 종주답게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비장한 신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그는 신형을 바로잡으며 궁예린의 손을 이끌고 탁자 앞에 앉았다. "린아, 이 할아비는 괜찮다. 그보다도 지금부터 할아비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궁예린은 잠시 조부의 얼굴을 주시했다. 냉천이 나타난 그 순간부터 창백했던 그의 안색이 더욱 초췌해 보였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눈치챈 궁예린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궁사의 엄중한 음성이 이어졌다. "린아, 너는 지금부터 아무것도 묻지 말고 냉천을 따라 전에 이 할아비가 말했던 밀총(密總)으로 가거라. 그리고 본가의 율법에 따라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너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궁예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할아버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저에게도 말씀해 주십시오. 궁가장에 위험한 일이라도 닥친 겁니까?" 그 말에 흠칫 놀란 궁사는 궁예린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했다. 이미 궁가장에 변고가 닥쳤음을 눈치챈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궁예린은 단호히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소손 혼자 피할 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과 함께 할아버님 곁에 남아 있겠습니다." 하지만 궁사는 고개를 저어 사실을 부인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너는 그저 내 말을 그대로 이행하면 되느니라." 그리고 궁예린이 다시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이미 궁사는 냉천을 돌아보며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냉천, 뒷일은 모두 자네에게 맡기겠네. 그리고 내가 전에 말했던 것을 명심하기 바라네." 냉천의 무심한 언굴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냉천은 곧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궁사는 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어서 가게. 시간이 없으니... 그들 정도라면 본가의 절진(絶陣)도 얼마 못 버티네." "그럼..." 고개를 들던 냉천과 궁사의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뒤엉켰다. 무언의 대화가 그 시선을 타고 전류처럼 흘렀다. 그러나 그들의 심중은 너무나 상반된 것이었으니... －냉천! 자네는 노부의 뜻을 알 것이라 믿네. 명심하게. 만에 하나라도 린아에게 오늘의 혈겁을 보게 한다면 천하는 피〔血〕로 덮이게 됨을...! －가주님! 속하는 이날까지 궁가의 명(命)을 한 번도 어긴 적 없이 충성을 다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하나... 지금의 명령은 속하로서도 처음으로 거역하게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소가주께서도 알 권리가 있으며 밀천무영세가를 위해 복수할 의무도 있기 때문입니다. 냉천은 모르고 있었다. 천살마겁흔의 혈기가 역행을 일으킨 후 일어나는 무서운 결과를! 가공할 살인귀로 변해 천하를 피로 물들이게 된다는 사실을...! 그것은 오직 궁사만이 아는 사실이었고 그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궁사는 고개를 돌려 궁예린을 쳐다보았다. "린아, 어서 떠나거라." 그러나 궁예린은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한데도 궁사는 그것을 부인하며 자꾸만 그에게 떠나라고 재촉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궁예린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궁사의 모습을 주의 깊게 응시했다. 마치 이 순간의 이별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듯 그는 조부의 모습을 머릿속에 깊이 새겨 두고 있었다. 그때 냉천이 다가오며 그를 재촉했다. "소가주! 어서 가시지요." 언제까지나 궁사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던 궁예린은 냉천의 음성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애써 돌리며 냉천과 방을 나서는 순간, 궁사는 참을 수 없는 격정에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린아... 부디 맑고 티없이 자라거라. 천살마겁흔의 저주 따위와는 상관없이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 주르륵... 끝내 감고 있는 그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며 그의 주름진 얼굴을 적셨다. 창 밖에서는 밤이 더욱 깊어 가고 있었다. 궁가장 안의 넓은 초지. 인공호수를 끼고 있는 아담한 분지였다. 그곳에 언제부터인지 일단의 인영들이 그린 듯 우뚝 서 있었다. 정확히 이십육 명의 청, 홍의인들. 그들은 바로 밀천무영세가의 핵심 인물들인 밀천무영이십육살이었다. 그 순간, 그들의 안색은 비장하기 그지없었으며 수중에 들고 있는 갖가지 병장기들은 어둠 속에서 번쩍이며 날카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스스스...! 간간이 불어오는 미풍이 잔뜩 고조된 살기와 긴장을 한 번씩 뒤흔들며 지나가는데, 그 속에서 문득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잠마풍...! 그들이 무슨 이유로 본가를 친단 말인가?" 호숫가 옆 한 그루 고목 밑에서 암천을 우러러보고 있는 그는 밀천무영세가의 가주인 궁사였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백리사헌... 무림성의 성주이며 잠마풍의 암중 지배자이기도 한 그가 본 세가의 진실한 정체를 파악했단 말인가?" 궁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도, 본 세가는 그들에게 공격을 당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는 이 시대 최대의 신비 중 하나인 잠마풍이 바로 백리사헌의 하수인들임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결국 사마 아우의 예견이 맞았군. 하나 백리사헌, 그대는 크나큰 실수를 하고 있다." 궁사의 의미심장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것은 그대가 밀천무영세가의 잠재력을 너무 모른 것이었다. 이곳에 불과 삼십여 명이 있다 하나, 그대들에게는 삼천 명의 비중으로 남을 것이니...!" 암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서는 병자답지 않은 불굴의 투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밀천무영세가는 밟아도 꿋꿋이 되살아나는 잡초와 같다는 사실이다." 그때였다. "가주님! 밀천쇄옥구궁진(密天鎖獄九宮陣)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다급한 외침과 함께 궁사의 전면에 네 인영이 유령처럼 등장했다. 바로 황충을 비롯한 사대가신이었다. "영을 내려 주십시오." 궁사 앞에 고개를 숙이는 그들의 몰골은 진정 말이 아니었다. 일신에 걸친 의복은 무수히 찢긴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그 사이로 드러난 상처에서는 아직도 선홍빛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치열한 혈전(血戰)을 치렀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궁사의 두 눈에 일순 고통의 빛이 빠르게 스쳐 갔다. 이어, 그는 어두운 밤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별빛마저 사라진 지금 하늘은 온통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다. "밀천쇄옥구궁진이 이토록 빨리 무너졌다면... 승천무황 백리사헌이 직접 지휘를 하는 것이겠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지극히 장중하고 비장한 음성을 다시 발했다. "모두들 들으시오. 우리의 적(敵)은 이 시대의 최강자라 칭하는 승천무황과 죽음의 바람 잠마풍이오. 그들이 공격을 해왔다는 것은 곧 밀천무영세가의 멸문(滅門)을 뜻하는 것일 게요...!" 모두들 각오하고 있다는 듯 비장하며 침통한 신색들이었다. "이제 우리의 시대는 마지막에 이르렀소.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과제는 밀천무영세가의 진정한 무서움을 그들에게 깊이 인식시켜 주는 것이오. 또한 그것만이 우리의 다음 세대에 떳떳이 물려줄 유훈(遺訓)이기도 할 것이오." 잠시 말을 끊은 궁사는 한차례 숨을 가다듬은 뒤 나직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누구의 명도 필요없소. 그대들은 각기 지닌 바 최대한의 역량으로 마지막 투혼을 불살라 주기 바라오." 일순, 뜨겁게 부딪치는 시선들. 말은 없었으나 그들의 눈빛은 무서운 투혼으로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오늘 단 한 사람도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없음을. 그러나 후회는 없다. 다음 순간, "존...명!" 밀천무영이십육살은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궁사를 향해 마지막 대례를 올렸다. 스슷! 스스슷...! 그들은 곧 신형을 일으켜 사방으로 그림자처럼 흩어져 갔고 장내에는 이제 궁사와 사대가신만이 남게 되었다. 궁사가 사대가신을 돌아보며 불현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사대가신, 너무 침통해 하지 마시오. 우리 식솔들이 이렇게 한곳에서 죽을 수 있는 것도 하늘의 홍복이 아니겠소?" 그러나 황충은 지극히 침통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가주...! 노신은 오늘만큼 본 세가의 첫번째 율법이 잘못되었음을 통탄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머지 인물들 역시 피를 토하듯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터뜨렸다. "그렇습니다. 남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준비까지 하지 않았던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백리사헌... 그자가 오래 전부터 본 세가를 주시해 왔을 줄은...! 아니, 우리가 이렇게 한곳에 모여 있지만 않았던들..." 하나같이 통한에 사무쳐 비탄에 빠진 모습들이었고, 그 모습을 대하는 궁사의 가슴 또한 천 갈래 만 갈래 찢기는 듯했다. '미안하오... 노부는 이미 오늘의 일을 오래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소. 하나 그대들에게 알려 줄 수가 없었소. 그것은 오늘의 혈전에서 한 사람도 살아 나가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오!' 궁사는 은빛으로 잔잔히 물결치고 있는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밀천무영세가는 새롭게 탄생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의 혈사(血史)는 영원히 드러나지 않아야 될 것이오...!' 그가 잠시 회한에 젖어 있을 때였다. "으악!" "크아악...!" 몸서리치게 처절한 비명이 잇달아 밤의 정적을 찢기 시작했다. 그런데 괴이한 일은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벌어지면 당연히 요란한 소음이 들려 와야 하건만 주위는 비명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고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밀천무영세가와 잠마풍. 무림에서 그야말로 최극강을 자랑하는 그들은 어떻게 하면 상대를 단숨에 죽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혈전은 별다른 소리 없이 조용한 가운데 벌이지고 있었으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런 싸움이 오히려 더욱 처절하고 잔혹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그것은 궁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궁사는 암울한 기분을 달래듯 그의 마음처럼 어두운 암천을 바라보았다. "싸움의 승패는 이미 결정났다. 본 세가의 인물들은 남을 죽이는 일보다 살리는 기술이 뛰어났기에 백리사헌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잠마풍을 막아 내는 데는 무리다!" 궁사의 독백에 사대가신들은 그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그 동안에도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성은 간간이 솟구치고 있었다. "으악..." "크흑!" 페부를 도려내는 듯한 처절한 비명성에 밤공기는 연신 부르르 치를 떨었고 피〔血〕와 주검〔屍身〕을 철저히 은폐하려는 듯 암흑은 더욱 짙어져 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어디선가 한 줄기 피비린내가 풍겨 왔다. 2 "무서운 일이군. 밀천무영세가의 모든 인물들이 가공할 살수(殺手)의 무학을 지녔다니...!" 짙은 경악과 의혹이 뒤섞인 음성이 허공에 신음처럼 낮게 일었다. 궁가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백리사헌과 천우가 마치 두 개의 석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이 순간, 혈전장을 내려다보는 백리사헌의 얼굴에는 놀람의 빛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평소에는 무표정하기만 하던 천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한차례 격전을 치른 듯 천우의 몸에는 핏물이 배어 있었고 군데군데 의복이 찢겨 있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 멀리 동녘에서는 벌써 여명이 희뿌옇게 밀려오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오직 궁가장 한곳에만 시선을 꽂은 채 날카롭게 혈투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미 무수한 시체가 산을 이룬 가운데 흑의인들에 맞서 치열히 싸우고 있는 청, 홍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밀천무영이십육살이었다. 그들이 펼치고 있는 무학은 하나같이 가공 절륜한 것으로 죽음의 바람이라는 잠마풍조자 맥을 못 추고 처참히 쓰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밀천무영이십육살은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궁가장에 모인 잠마풍은 오늘의 혈전을 위해 전세력을 집결시켰고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닌 밀천무영이십육살이라 하나 수적으로 열세인 탓에 자연히 힘이 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천우는 은은한 경악성을 내뱉었다. "성주님의 선견이 없었던들 잠마풍의 신화는 오늘로서 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잠마풍의 전 세력을 동원한 백리사헌의 의도를 이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백리사헌은 무거운 얼굴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천우, 잠마풍의 신화는 이미 깨졌다. 불과 삼십여 명을 상대하기 위해 이미 삼백 명이 목숨을 잃지 않았느냐?" "...!" "더욱이 궁사와 사대가신은 지금 움직이지도 않고 있다." 천우는 은은히 얼굴을 붉혔다. "송구스럽습니다. 밀천무영세가의 잠재력이 이토록 클 줄은 미처..." "아니다. 이것은 너의 발전을 위해 한 번쯤 거쳐야 할 일이었다." "하오나... 잠마풍은...?" "잠마풍은 새 시대를 맞아 새롭게 정비하면 된다. 가자! 궁사를 대적할 사람은 오직 노부뿐이다." 동시에 백리사헌은 땅도 밟지 않고 허공을 미끄러지듯 움직여 갔다. 그 경이로운 광경을 응시하며 천우는 투명한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성주님께서 직접 잠마풍을 노출시키면서까지 나서시다니...!' 그때 백리사헌의 독백과도 같은 음성이 들려 왔다. "궁사... 그 역시 한 시대를 이끌어 간 영웅이었다. 만약 그가 무림에 존재했다면 노부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었으리라." 천우도 그 말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절대자가 겪어야 하는 숙명이겠지!' 그러고 곧바로 신형을 날려 백리사헌의 뒤를 따랐다. "으악...!" "헉!" 참담한 비명성이 잇달아 분지를 뒤흔들었다. 여명이 뿌려지고 있는 인공호숫가의 분지는 이미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고 있었고 그 속에서 사대가신은 악전고투를 치르고 있었다. 각기 검(劍), 도(刀), 창(槍) 등을 움켜쥐고 있는 그들의 손이 휘둘려질 때마다 장내에는 어김없이 비명성이 솟구쳤다. 그러나 잠마풍의 인물들은 동료들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비처럼 끊임없이 그들을 향해 덮쳐 들고 있었다. 이미 엄중한 부상을 입은 자들까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공격에 합세했다. 따라서 아무리 고강한 내력을 지닌 자라 해도 그 힘에는 한계가 있는 법. 사대가신은 계속되는 혈전으로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명이라도 더 제거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한편, 혈전장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궁사가 지그시 두 눈을 내리감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평소에는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감도는 것이 운공조식을 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의 사대사혈(四大死穴)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은... 놀랍게도 궁사는 건드리기만 해도 죽는다는 사혈에 금침(金針)을 꽂은 상태로 전신의 잠재력을 한순간에 끌어내는 수법을 운용하며 운공조식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윽...! 한 가닥 미풍 속에 백리사헌이 궁사의 전면에 내려섰다. 궁사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희미한 기광이 어렸다가 곧 씻은듯이 사라졌다. 궁사가 어떤 수법으로 운공조식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것이다. "그렇군. 노부가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군." 잠시 궁사를 바라본 그는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장내로 고개를 돌렸다. 돌연 악전고투 중인 사대가신들 속에서 외마디 경악의 외침이 터졌다. "헛! 백약사... 당신이...?" 그는 바로 황충이었다. 이미 혈인(血人)이 되다시피 한 그의 얼굴은 온통 경악과 불신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 일순간의 허점을 노리고 그의 등을 향해 짓쳐드는 한 줄기 섬광이 있었다. 번쩍!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황충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등줄기를 베이고 말았다. "우욱...!" 비틀거리는 황충의 등뒤로 시뻘건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런 그를 향해 백리사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궁예린으로 인해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 왔던 그는 궁가장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소, 황충. 노부 백리사헌이 바로 백약사이기도 했소." 담담한 그 음성을 들으며 황충은 흐려지는 눈을 애써 치떴다. "그랬었군... 처음부터... 범상치 않음을 느꼈건만..." 다음 순간, 황충은 혼신의 여력을 다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백리사헌을 덮쳤다. "안 된다! 백리사헌...!" 휘익! 황충이 막 허공으로 떠올랐을 때였다. 한 가닥 빛살 같은 검기(劍氣)가 또다시 황충의 등을 그어 갔다. 바로 백리사헌을 따라온 천우의 검이었다. "크윽!" 참담한 비명성이 황충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뒤이어 그는 피보라를 뿌리며 지면 위로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그러나 황충의 두 눈만은 통한으로 무섭게 부릅떠져 있었다. "가주님...! 속하... 먼저 불... 충... 을..." 바로 그때, 굳게 닫혀 있던 궁사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이미 정신이 혼미해져 가고 있던 황충은 그것을 보지 못한 채 핏물 속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눈을 뜬 궁사는 제일 먼저 눈앞에 있는 인물을 쳐다보았다.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백약사... 당신이 바로...!" 백리사헌을 본 순간 궁사는 흠칫 신형을 굳혔으나 곧 예의 담담함을 되찾으며 말했다. "그랬었구려. 당신이 백리사헌인 줄 진작에 알았어야 했건만..." 백리사헌은 내심 아연해졌다. '과연 밀천무영세가다. 잠마풍을 이끄는 것이 바로 노부임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니...' 그의 내심을 알 리 없는 궁사는 담담히 음성을 잇고 있었다. "고맙소. 노부를 이처럼 기다려 주시다니..." 말과 함께 그의 사대사혈에 박혀 있던 금침들이 소리없이 떨어져 내렸다. 백리사헌은 장중한 신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왠지 당신을 만나러 오는 것이 노부의 마지막 도리일 것 같았소." 그 순간 백리사헌은 가히 신장(神將)과도 같은 위엄과 기도를 뿜어 내고 있었다. 궁사는 그 기도에 내심 탄복하고 말았다. '역시 거목답다. 무림을 장악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었군!' 이어 그는 소매 속에서 눈〔雪〕처럼 하얀 소검(小劍)을 꺼냈다. 눈부신 백광(白光)이 서기롭게 사방으로 뻗치는 검이었다. "백리사헌, 이제 와서 이유를 묻고 싶지는 않소. 다만... 이 자리에 누가 남게 되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할 것이오." 지극히 엄중한 음성과 함께 궁사는 서서히 양발을 벌리고 서며 수중의 백검을 천천히 수직으로 세웠다. 번...쩍! 살갗을 엘 듯한 예기가 눈부신 백광과 함께 뻗어 나왔다. 백리사헌은 그 광경에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살일초(必殺一招)! 적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살수의 극강의 검초...! 그렇다면 밀천무영세가는 살수세가였단 말인가?' 그는 내심 깊이 침음했다. '으음... 노부가 밀천무영세가에 대해 너무 모른 것 같군!' 그러고 궁사에게 대적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근처를 둘러보다가 긴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미안하오. 노부의 애병(愛兵)은 다른 곳에 있으니 이 나뭇가지로 대신하겠소. 그러나 결코 얕보지 마시오. 승천도보다 더 날카로울 것이니...!" 백리사헌은 정중한 어조로 말한 다음 수중의 나뭇가지를 느릿하게 수평으로 겨누었다. 화르르릇...! 순간 그의 전신에서 뻗치는 무서운 살기에 주위의 공기가 파도치듯 휘몰아쳤다. 그 동안에도 주위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잠시 숨막힐 듯한 침묵이 흐르고 나직한 일성이 백광 속에서 흘러나왔다. "백리사헌, 조심하시오." 그와 동시에, 궁사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그대로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백리사헌을 덮쳤다. "차앗!" 백리사헌도 거의 같은 순간 신형을 날려 궁사와 맞부딪쳐 갔다. 츠...파앗! 귀청을 찢는 파공성이 일며 두 가닥 섬전은 허공에서 무서운 기세로 격돌했다. 채채챙! 츠파파파...!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무수한 불꽃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고 그 여세로 인해 엄청난 기류가 형성되어 주위는 세찬 돌풍에 휘말리고 말았다. 진정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격돌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이 어찌 된 것일까? 한순간 장내에 모든 소요가 가라앉으며 시간이 멈춘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자리를 바꾼 채 우뚝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백리사헌이 어깨에 긴 검흔을 남긴 채 핏물을 흘리고 있는 반면에, 궁사는 밀랍같이 창백한 안색으로 입가에 가느다란 선혈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너무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문득 백리사헌이 입가에 쓰디쓴 미소를 희미하게 떠올렸다. "궁 노인, 오늘까지 노부의 몸에 상처를 입힌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오." 궁사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패자(敗者)의 영광치고는... 큰 영광인 것 같소. 우욱...!" 일순 그의 입술을 비집고 검붉은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핏물은 백리사헌의 전신을 고스란히 덮어씌웠다. 뒤이어 썩은 고목이 무너지듯 궁사의 신형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서림의 신(神)이며 영원한 신화인 밀천무영세가, 그곳의 주인이 무참히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죽은 자의 얼굴치고 궁사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하고 담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백리사헌은 왠지 무거운 짐을 짊어진 느낌이었다. "궁 노인, 당신의 그 담담한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노부는 끝내 해답을 얻지 못하겠구려." "할... 아... 버... 지...!" 오장육부를 몽땅 토하는 엄청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분지 옆의 가산. 이미 오래 전에 냉천과 함께 떠난 줄 알았던 궁예린이 그곳에서 미친 듯이 절규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장난삼아 뚫어 놓은 동굴 속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외부 사이에는 모든 소음을 차단하는 투명한 유리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밖에서는 볼 수 없으나 안에서는 밖이 환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할... 아... 버... 지...!" 궁예린은 유리벽을 치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황충 등의 죽음에 분루를 뿌렸던 그는 끝내 조부의 처참한 종말까지 목격하고야 말았다. 울컥! 궁예린은 끝내 치솟는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그대로 혼절했다. 그 때문에 그는 궁사를 죽인 자가 백리사헌이라는 사실을 끝내 알지 못했다. 그가 확인한 것은 다만 그의 한없이 커다란 뒷모습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툭... 툭...! 혈기 치솟은 궁예린의 붉은 얼굴에 돌연 시퍼런 힘줄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새까맣던 머리가 마치 서리가 내리듯 하얗게 변해 가는 것이었다. 궁예린의 머리는 순식간에 새하얀 백발로 화했다. 그것은 바로 천살마겁흔의 혈기가 역행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궁사가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지금 궁예린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3 백리사헌은 궁사의 시신에서 돌아서며 장내를 훑어보았다. 이미 혈전은 끝나 있었다. 사대가신은 하나같이 처참한 몰골로 흥건한 핏물 속에 널브러져 있었으며 잠마풍의 세력 역시 거의 몰살을 면치 못했다. 불과 십여 명의 흑의인들만이 엄중한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신형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잠마풍의 주인인 천우 역시 여기저기 뼈가 허옇게 드러난 참혹한 모습이었다. 백리사헌의 안색은 지극히 무겁게 물들었다. "오백의 최정예가 불과 십여 명으로 줄어들다니... 그것도 심한 중상을 입은 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천년의 신비가 벗겨진 것에 비한다면..."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을 때 천우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성주님, 괴이하게도 궁 노인의 손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백리사헌은 순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랬군. 궁사가 그토록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예린, 그 아이가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었군!' 그의 두 눈엔 희미한 기광이 스쳤다.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가 이곳에 없다는 것은 오늘의 혈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고, 이 일은 잠마풍의 신화로만 남게 될 것이다. 다소 가슴은 아프더라도 궁가의 맥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어 그는 싸늘하게 식은 궁사의 시신을 한차례 돌아보았다. "궁 노인, 당신과의 인연은 린아의 생존으로 모두 끝날 것이오. 그것만이 당신에 대한 노부의 마지막 예우인 것 같소." 말을 마친 백리사헌은 천우를 향해 엄중히 일갈했다. "천우! 잠마풍의 신화가 두 번 다시 깨어져서는 안 됨을 명심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신형은 곧 비쾌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새벽 여명 속으로 점차 사라져 갔다. 천우는 격동이 물결치는 신색으로 이미 사라져 간 그를 향해 깊이 고개 숙였다. "고맙습니다, 성주님! 결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습니다." 밀천무영세가를 우습게 봤던 그의 실수를 백리사헌이 용서한 이상 잠마풍은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게도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졌다. 화르륵... 화악! 시뻘건 화마(火魔)가 궁가장을 뒤덮고 있었다. 찬연히 떠오르는 일륜(日輪) 속에서 그 광경은 섬뜩하도록 선연하고 붉었다. 이미 장내에는 살아 있는 자의 그림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불길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 무서운 기세로 번져 가고 있었다. 문득 그 불길 속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 왔다. "가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속하...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바로 냉천이었다. "소가주께서는 본 세가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의 한 맺힌 죽음이 너무나 원통하지 않습니까?" 그의 두 눈은 무서운 통한과 살기를 서리서리 내뿜고 있었다. 그런 채로 냉천은 불길 속을 돌아다니며 궁가장 식솔들의 시신을 한군데로 거둬들이고 있었다. "하셔야 합니다. 소가주께서는 꼭 오늘의 복수를 하셔야 하고말고요...!" 냉천은 그렇게 미친 듯이 지껄이며 불길 속을 이리저리 헤매었다. 잠시 후, 가산 밑에는 하나의 커다란 봉분이 세워졌다. 그 앞에는 냉천이 무서운 살광을 폭사하며 우뚝 서 있었다. "여러분들! 나 냉천은 약속하겠소. 백리사헌의 수급을 이 자리에 갖고 오기 전에는 냉천의 삶은 곧 죽은 것이 될 것임을..."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냉기로 인해 주위는 차가운 얼음이 깔린 듯했다. 그 순간이었다. "불이야...!" "궁가장에 불이 났다!" 밖에서 요란한 소음이 일며 사람들이 몰려드는 기척이 들려 왔다. 냉천은 천천히 궁예린이 있는 가산 쪽을 돌아보았다. "소가주! 똑똑히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소가주의 천형인 천살마겁흔, 이제 그 금제는 깨졌습니다." 그의 안색은 한순간 자조와 비감으로 짙게 물들었다. "냉천이 이렇게까지 소가주께 가혹하게 한 것은 훗날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냉천, 그는 천살마겁흔의 금제를 푸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일순, 냉천의 두 눈에 차갑디차가운 한광이 떠올랐다. "또한 냉천이 죽을 수 없음도 소가주께서는 꼭 아셔야 합니다. 기다릴 것입니다. 소가주께서 그곳에서 나오실 때를... 속하는 학수고대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냉천은 이내 차가운 기운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르륵...!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궁가장엔 시신이 타는 역겨운 냄새만이 진동했다. 궁가장이 의문의 화재 속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는 소문은 대하성 내에 빠르게 퍼졌다. 그 소문에 대하성 주민들은 한결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비명에 간 궁사와 궁예린을 애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이런 사소한 사건에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궁가장이 무림과는 전혀 무관했던 까닭이리라. 화마가 스치고 난 자리엔 단지 한 사람만이 남아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흐흑... 린아! 바보같이... 빠져 나오지도 못하고... 흑흑!" 함소혜. 언제나 궁예린의 뒤를 쫓아다니던 그녀는 불과 이 년 사이에 아름답게 성장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는 것도 모른 채 그녀는 단장을 찢는 듯한 구슬픈 오열을 터뜨리며 잿더미 위를 맴돌았다. 그 눈물에 하늘도 감동한 듯 장대 같은 빗줄기를 연 사흘 동안이나 내리 퍼부었다. 쏴아아아...! 한여름의 폭우였다. 제 8 장 밀천문(密天門) 1 꿈틀... 꿈틀...!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입가의 한 줄기 핏물이 선명하게 보이는 새하얀 얼굴은 눈썹도 머리카락도 모두 하얀색이었다. 바로 역행하는 혈기를 이기지 못해 혼절했던 궁예린이었다. 눈을 뜬 그의 동공은 이 순간 섬뜩한 청색 광망을 줄기줄기 뿜어 내고 있었다. "후후후... 죽이리라!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다." 사이하도록 새빨간 그의 입술에서는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살성(殺聲)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소 때의 궁예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천살마겁흔! 그 저주받은 신체의 금제가 드디어 궁예린의 몸에서 잠을 깬 것이다. 궁예린이 있는 곳은 사방이 온통 서책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석동이었다. 서책들은 모두 오래된 고서(古書)들로, 누렇게 빛이 바래 있었다. 신형을 일으키던 궁예린의 시선이 문득 석실 중앙의 석단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장의 양피지가 금합과 함께 놓여 있었다. 궁사가 그를 위해 안배해 놓은 것들이었다. "할아버지...!" 그토록 살기 충천하던 그의 얼굴에 언뜻 한 가닥 애잔한 기색이 스쳐 갔다. 암중인에게 어이없이 죽임을 당한 궁사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잠시 슬픔에 젖어 있던 궁예린은 곧 석단으로 다가가 양피지와 금합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는 먼저 양피지를 펼쳐 들었다. 그곳에는 궁사의 낯익은 필체가 가득 쓰여 있었다. <린아! 이곳은 본 세가의 역대 가주들께서 남기신 유품을 모아 둔 곳으로 밀총(密總)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곳 밀총의 문(門)은 삼 년에 한 번씩 열리게 되어 있느리라. 이제부터 너는 이곳에서 모든 잡념을 떨쳐 버리고 지혜와 덕을 쌓아 네 손으로 새로운 밀천무영세가를 이룩해야 할 것이다. ... 중략(中略) ... 이미 냉천이 너에게 설명했겠지만 너는 냉천을 곁에 두고 도움을 받도록 해라. 냉천은 본 세가 대대로 대(代)를 이어 내려오는 밀영자(密影子)의 임무를 지니고 있다. 그는 오직 본 세가의 가주 명령만 따르며 밀천무영세가의 부조리를 척결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 너는 그를 항시 곁에 두고 그의 신분은 너만이 아는 비밀로 지키도록 해야 하느니라. 녀석... 지금은 많은 궁금증과 의혹이 있겠지만 훗날 모든 것을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이 할아비는 믿는다. 너는 이 할아비보다도 더 강하고 훌륭하게 본 세가를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쪼록 밀천무영세가의 율법을 잘 이끌어 나가는 슬기로운 가주로서 역대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가주로 성장해 주기 바란다. 밀천무영세가 제삼십이대 가주 궁사.> 파르르...! 양피지를 쥔 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끝내 궁예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선 바보이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강하셨다면... 누구도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저는 강해질 겁니다.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반드시 복수를 하겠습니다." 번뜩! 그의 동공에 또다시 시퍼런 청색 광망이 살기와 함께 떠올랐다. 그 순간, 궁사의 꾸짖는 듯한 음성이 그의 고막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이놈아! 그것은 본 세가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나 궁예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을 때만 그 율법은 적용됩니다. 하지만 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밀천무영세가는 가만히 있었는데도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궁예린은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저는 힘을 기르겠습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힘을...! 할아버님과 밀천무영세가를 건드린 자는 모두 저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휘르르릇! 돌연 주위의 공기가 싸늘한 살기에 휘말렸다. 진저리가 쳐지도록 무서운 살기는 궁예린의 전신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이어 그는 양피지를 내려놓고 금합을 열었다. 번쩍! 순간 눈부신 묵광(墨光)이 금합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금합 속에는 소검 크기의 온통 시커먼 빛깔을 띤 묵봉(墨鋒)이 들어 있었다. '밀천여의묵봉(密天如意墨鋒)...!' 궁예린은 내심 부르짖었다. 그런 그의 뇌리를 스치는 냉천의 음성이 있었다. －소가주! 할아버님의 무학은 천하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펼치시지 않았을 뿐입니다. 또한 본 세가의 수하들 역시 천하에 손꼽히는 고수들입니다. 만에 하나... 할아버님께서 변을 당하신다면 소가주께서는 밀총 어딘가에 있는 밀천문(密天門)을 기필코 찾으셔야 합니다. 밀천문은 본 세가의 선대 조사께서 세우신 곳으로 밀천무영세가에 변고가 생기지 않는 한 열 수 없다는 유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밀천문을 열 수가 있는 열쇠는 오직 밀천여의묵봉뿐입니다...! 그것은 전일 궁사의 방을 떠나면서 냉천이 궁예린에게 들려 준 말이었다. 궁예린은 금합 속의 묵봉을 보는 순간 그것이 바로 밀천여의묵봉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궁예린은 조심스럽게 묵봉을 꺼내 손에 쥐었다. 따스한 온기가 그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다. 그것을 손에 든 채로 그는 사방을 에워싼 서가 앞으로 걸어갔다. "나에게 다른 것은 필요없다. 오직 무공만이 필요할 뿐.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밀천문을 찾아야 한다." 그는 서가의 여기저기를 세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별다른 점을 찾지 못한 그는 이내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때 그의 뇌리를 퍼뜩 스치는 냉천의 또 다른 음성이 있었다. －할아버님께서는 공(空)과 무(無)를 느낄 때에 밀천문은 보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밀총의 모든 것을 터득할 때 비로소 그 말에 담긴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궁예린은 두 눈을 빛내며 주위의 빽빽한 고서들 사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공(空)과 무(無)를 느낄 때... 그 뜻을 풀어야 해. 이 많은 서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어!" 그는 조급한 마음으로 서가를 뒤지고 또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상상한 것과 같은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내 뒤지기를 포기한 궁예린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공과 무...! 그것은 곧 마음속의 모든 것을 깨끗이 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이 많은 고서들을 다 읽고 마음을 깨끗이 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런 그의 눈앞에 조부와 사대가신의 처참한 광경이 어지럽게 스쳤다. 다음 순간 궁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안 돼! 여기서 물러서면 안 돼! 나는 한시라도 빨리 힘을 얻어 복수를 해야 해." 그것이 그의 진정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많은 서책들을 모두 읽고 깨우치라니. 궁예린은 그렇게까지 인내할 수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궁예린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두 눈을 빛냈다. "그래,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우선 무공이 적힌 책부터 읽는 거야." 그는 곧 서가에서 한 권의 고서를 골라 뽑아 들었다. 〈밀종검환류(密宗劍幻流)〉 그것은 세가(世事)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무공비급이었다. 아니,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소장된 모든 무공비급들이 모두 그러했다. 어쨌거나 궁예린은 성급히 책장을 넘겨 읽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안색은 더욱 하얗게 변해 갔으며 두 눈의 청광 역시 한층 짙은 광채를 발했다. 그것은 천살마겁흔이 지닌 특징으로, 일단 금제가 풀리면 전신에 살(殺)의 기운이 충만해지며 무서울 정도로 오성(悟性)이 발달한다. 때문에 어떠한 것이든 한번 보고 듣기만 해도 절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한번 책에 몰두하기 시작한 궁예린은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책의 내용에 점점 깊숙이 빠져 들었다. 밀종검환류! 이것은 전후반 세 초식씩 모두 여섯 초식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매 초식마다 극강의 쾌(快)와 살(殺)을 위주로 하는 패도적인 검초로써 일단 펼치면 도저히 거둘 수 없다. 제일초식, 폭세혼류(暴世魂流)! 일검(一劍)에 거대한 폭포의 물줄기를 양단할 수 있다. 제이초식, 참극도류(斬極刀流)! 일초식에 천삼백육십 번의 절묘한 변화가 담겨 있어 이것에 부딪치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제삼초식, 무형살류(無形殺流)! 전반 세 초식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초식으로 검초가 발출되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상태에서 상대는 양분되고 만다. 제사초식, 마혼세류(魔魂洗流)! 후반부의 일초식으로 마음만으로 공기를 가른다. 제오초식, 철혈류(鐵血流)! 후반부의 이초식으로 무엇이든 박살낸다. 제육초식, 극섬쾌류(極閃快流)! 후반부의 최정화로서 섬전벽력(閃電霹靂)과 같은 힘과 빠르기를 추구하는 쾌검이다. 밀종검환류가 지닌 그 엄청나고 패도적인 위력에 궁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안색을 굳혔다. 진정 살수만이 지닐 수 있는 쾌검초식이 아닐 수 없었다. '과연 밀천무영세가의 무학은 냉천의 말대로 천하무적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구나!' 내심 감탄성을 터뜨리던 궁예린은 다시 서책을 들여다보며 심오한 구절에 심취해 들었다.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두 눈에서는 무섭도록 짙은 광망이 폭사되었고 전신에서 뻗치는 살기에 주위의 공기는 진탕되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밀총에는 온갖 무공비급과 기관진법을 비롯해 불경(佛經)까지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한결같이 인세에 나가면 온 중토를 떠들썩하게 만들 비학들로, 궁예린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며 머릿속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궁예린은 애초에 결심했던 의도와는 달리 서가의 모든 책들을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섭렵해 나가고 있었다. 일단 책에 빠져 들자 그의 오성은 가공하리만큼 놀라운 신력을 발휘했다. 때문에 그는 거의 수만 권에 달하는 서책들을 한번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밀총 안에 마련되어 있는 자하신단(紫河神丹)을 복용하며 궁예린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책 읽기에 소비했다. 기실, 그 모든 안배는 궁사가 생전에 마련해 놓은 것으로 병이 깊어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음을 자각한 그는 자신의 임종에 대비해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다. 그것이 다만 잠마풍의 공격으로 시일이 앞당겨진 것뿐이었다. 오늘도 궁예린은 꺼칠한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석동에 들어온 지 불과 일 년 반 사이에 그의 모습은 변모해 있었다. 치기 어린 소년의 모습에서 건장한 체구의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눈에서는 짙은 청색 광망이 폭사되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눈빛이 간혹 예전의 맑은 빛을 되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수중, 한 권의 불경이 들려 있었다. 〈범밀자광혜경(梵密紫光慧經)〉 그것은 불가의 진경으로 부처께서 열반에 드신 순간을 수록했다는 불경이었다. 궁예린이 본래의 맑은 눈빛을 간혹 되찾는 것은 바로 그 불경의 힘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이미 읽은 수천여 권의 불경이 그의 뇌리를 맑게 해주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 이유로 궁예린은 잠깐씩 천살마겁흔의 기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천살마겁흔의 살기가 너무나 강해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천살마겁흔은 궁예린의 몸 속에서 그 잠재력을 무섭게 발휘했다. 무(武)의 길에 들어선 지 불과 일 년 반 만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당금의 일류고수 못지않은 무공 수위를 지니게 되었지만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궁예린이 서책에서 시선을 떼며 낮게 웃었다. "후후후, 공(空)과 무(無)! 그것은 바로 부처께서 해탈하실 때의 마음이었어." 이어 그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다시 책으로 향했다. "그것을 범밀자광혜경이 깨우쳐 줄 줄이야...!" 궁예린. 그는 드디어 공(空)과 무(無)의 오의를 깨우쳤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평생을 가도 깨우치지 못하는 것을 이토록 빠른 시일 내에 깨우치다니. 궁예린은 책을 덮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처께서는 해탈을 하실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으셨다.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하셨지!" 궁예린은 고서들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서가를 한차례 둘러 보았다. "그것은 곧... 지난 모든 세월을 버리라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서 바로 이곳 밀총의 모든 것을 없애 버릴 때, 밀천문은 새롭게 문을 여는 것이다! 단지 지금까지 대를 이어 온 밀천무영세가의 가주들은 선조들의 유물이라는 생각에 미처 그런 것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않았을 뿐!" 번뜩! 궁예린의 두 눈이 짙은 청광을 폭사했다. "그러나... 나는 한다. 과거 나약하기만 했던 밀천무영세가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다음 순간, 그는 가볍게 서가를 향해 한 손을 뻗었다. 한 가닥 미풍이 서책들을 스치자 서가는 금세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천년의 역사와 숨결이 불꽃 속에 어이없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섭게 이글거리는 불길을 바라보는 궁예린의 얼굴은 그저 무심하기만 했다. 더구나 놀랍게도 그의 주위에는 차가운 기류가 휘몰아쳐 뜨거운 불꽃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궁예린이 이곳에 들어와서 이룩해 낸 위대한 결과였다. 화르륵! 화륵...! 밀총의 모든 것은 연신 날름거리는 화마의 혓바닥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순간, 궁예린의 두 눈이 한곳에 이르러 무서운 청광을 번뜩였다. 무엇을 본 것일까?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불길 속. 이미 타 버린 서가가 있던 한쪽 벽에 무엇인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으니...! 2 글씨〔書〕. 불꽃으로 이루어진 글씨가 차츰 벽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제자야! 본 세가에 너와 같은 출중한 기재(奇才)가 탄생한 것에 노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겠노라. 하나... 반면에 노부는 분노를 금할 수 없기도 하다. 노부가 세운 밀천무영세가가 환란을 당한 것이 못내 통분스럽기 때문이다. 제자야! 밀천(密天)의 뜻은 이미 너를 통해 열렸다. 그러나... 네가 하늘의 저주를 받은 천살마겁흔이 아니라면 밀천문을 열지 말기 바란다. 밀천문은 오직 천살마겁흔을 위해서 만들어진 역천(逆天)의 문이기 때문에 저주의 맥을 타고나지 않은 자가 들어선다면 처절한 죽음을 면치 못하느니라!〉 불길은 서서히 꺼져 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불길로 만들어진 글씨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너는 밀천문을 열지 않아도 밀천무영세가를 다시 일으킬 무한한 힘을 이미 지닌 것이니라. 그러니 결코 천리를 거스르는 불행을 자초하지 말기 바라노라. 정히 밀천문을 열고 싶다면 너의 후예들 중 언젠가는 태어날 천살마겁흔의 맥을 타고난 아이로 하여금 노부와 연(緣)을 맺을 수 있도록 하기 바라노라!〉 글씨는 그렇게 끝을 맺으며 마지막 불꽃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글씨가 사라지고 드러난 시커먼 석벽에 새로운 글씨가 나타나고 있었다. 〈지옥광혼무경(地獄狂魂武經)〉 그 섬뜩한 글씨 아래로 다시 깨알 같은 글이 나타났다. 궁예린은 그것이 무공의 구결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석벽으로 다가가 그것을 읽는 순간 궁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극강의 패도무학(覇道武學)이 있다니...!" 그는 망연한 얼굴로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은 무공이 아니다. 만에 하나 이것이 펼쳐진다면... 그야말로 지옥 구경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무공구결을 습득해 버린 후였다. 번쩍! 그의 두 눈에선 시퍼런 살광(殺光)이 거의 광적으로 폭사되기 시작했다. 무공이 강해질수록 신체에서 뻗치는 살기 역시 무한해지는 것이 바로 천살마겁흔의 특징이 아니던가? "죽이고 싶다! 피〔血〕... 피가 보고 싶군...!" 궁예린은 주체하기 힘들 만큼 끓어오르는 살기에 나직한 살성을 내뱉었다. 이어 그는 글씨가 쓰여 있던 석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후후후! 결국 밀천문은 나를 위해 천여 년을 기다린 것이군. 역천이라... 대체 이곳을 만든 사람이 누구기에 이처럼 광오한 말을 했는지 빨리 알아보고 싶다." 밀천문. 그곳엔 오직 천살마겁흔의 맥을 지닌 자만이 들 수 있다 했다. 또한 궁예린이야말로 천고에 드문 그 저주의 맥을 지니고 있으니 밀천문은 바로 궁예린을 위해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스윽... 궁예린은 밀천여의묵봉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석벽의 어느 한 부분을 향해 다가갔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일 정도의 작은 구멍이 그의 눈에는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묵봉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둥근 구멍이었다. "하늘의 저주를 받은 천살마겁흔라고...? 이 사람은 나 궁예린을 너무 무시하는군." 그러나 궁예린이야말로 너무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무섭도록 빠르게 변모해 간다는 사실을. 궁예린은 둥근 구멍에 밀천여의묵봉을 끼워 맞추었다. 찰칵! 경쾌한 음향이 작게 울렸다. 꽈릉! 꽈르르...! 요란한 굉음이 석실을 통째로 울리며 석벽이 서서히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시커먼 암흑이었다. "훗, 무척이나 신비를 좋아하는 사람이군. 이제 들어가서 구경을 해주는 것이 천여 년을 기다린 것에 대한 보답이 되겠지." 궁예린은 짧게 실소하며 암흑 속으로 서슴없이 발을 내디뎠다. 그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서자 석벽은 다시 밀려와 원래대로 빈틈없이 닫혔다. 바로 그때였다. "우하하! 제자야, 드디어 노부는 오만하고 도도한 하늘〔天〕과 승부를 겨룰 수 있게 되었구나." 고막을 웅웅 울리는 앙천대성이 궁예린의 귓전을 강타하며 눈을 못 뜨게 하는 강력한 광채가 궁예린의 동공 속으로 파고들었다. 궁예린은 급히 눈을 감았다. 그때, 다시 엄청난 대소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제자야. 노부와 너... 우리 사제(師弟)는 오만한 하늘의 콧대를 눌러 버릴 것이다. 힘을 내라!" 그 음성은 궁예린의 뇌리를 세차게 두드려 대는 기이한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 궁예린은 전신 내부에서 뻗치는 원인 모를 살기에 부지중 두 눈을 번쩍 떴다. "허억!" 다음 순간 궁예린은 다급한 경악성과 함께 주춤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의 전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상(佛像)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금빛 칠을 한 금불들로서 눈부신 광채는 바로 거기에서 뻗쳐 나오고 있었다. 그 불상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달랐다. 분노와 슬픔, 증오와 저주, 폭소 등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온갖 표정과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감정이 모두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표정 하나하나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동질의 감정이 우러나게 만드는 기이한 마력이 있었다. "하하핫... 큭큭... 흑... 허억...!" 궁예린은 어느새 불상들의 모습에 따라 표정과 감정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웃고, 노하고, 저주하고, 울고, 살기를 띠고...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백팔번뇌마상(百八煩惱魔像)! 그것은 눈앞의 금불상이 세사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백팔번뇌마상이기 때문이었다. 불가(佛家)에서 이르기를 석가는 이 백팔번뇌마를 모두 이겨 냈기에 해탈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것을 이겨 내지 못한다면 그대로 심맥이 파열되어 죽는다고 했으니... 설혹 살아난다 해도 백치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불가의 최대 비공이 바로 백팔번뇌마였다. 궁예린은 백팔번뇌마상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미친 듯이 울고, 웃고, 분노했다. 이대로 간다면 심맥이 파열되어 죽음을 면치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예의 웅웅거리는 음성이 다시 그의 귀청을 때렸다. "제자야! 너는 저 오만한 하늘을 꺾어야 한다. 이겨야 한다...!" 그 음성은 쉬지 않고 눈부신 광채 속에서 궁예린의 고막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욱!" 궁예린은 극심한 심마(心魔)를 이기지 못해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 냈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궁예린은 잠깐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으으... 안 돼! 나는 죽을 수 없어... 쓰러지면 안 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주르륵... 실낱 같은 핏물이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일순간의 고통이 그의 가물거리는 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이미 밀총에서 수많은 불경을 터득한 그는 알고 있었다. 백팔번뇌마상의 기운에 쓰러지거나 자신의 의지를 잃는다면 죽음이 아니면 폐인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궁예린은 처참하게 죽은 조부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안 돼... 할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해...!" 그 끈질긴 내부의 싸움이 그의 감기려는 두 눈을 부릅뜨게 만들었다. 그러자 백팔번뇌마상의 모습이 더욱 확산되어 그에게로 다가왔다. "헉!" 궁예린은 다시금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혈기가 다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새하얗던 안색은 금방 시뻘겋게 물들었고 동시에 툭툭 불거져 나온 핏줄은 금시라도 터질 듯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또다시 궁예린의 얼굴은 웃고 찡그리고 노하고 분노하는 표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흉신악살(兇神惡殺)! 아니, 그 모습은 흡사 지옥의 야차(夜叉)를 방불케 했다. 그러는 가운데 궁예린의 내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처절한 사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백팔번뇌마상에서 뻗치는 광채는 점점 더 강렬해져 갔으며 그에 지지 않으려는 궁예린은 얼마나 깨물었는지 입술이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다. 예의 음성이 다시 그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백팔번뇌를 이기는 길은 그것을 모두 받아들여 소화하는 길뿐이다. 겉으로는 분노스럽지만 안으로는 웃어야 한다." 그 말의 뜻은 즉 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두 개의 마음〔兩心〕, 두 개의 서로 상반된 마음과 모습을 가질 때 백팔번뇌마상의 효력이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었다. "웃어야 해...! 울어야 해..." 궁예린은 신음처럼 되뇌이며 웃고, 울었다. 저주와 증오로 치솟는 분노는 가슴속에 삭이고 치솟는 살기와 혈기는 어금니로 짓씹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이변(異變)이 발생했다. 놀랍게도 궁예린의 새하얗던 백발이 서서히 새카만 본래의 색으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가슴속에 응어리진 천살마겁흔의 살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뜻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또 다른 마음과 싸우고 있는 궁예린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정신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벌써 칠 주야가 지났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궁예린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좌정하고 있었다. 비록 피로 얼룩진 모습이었으나 그의 안색은 지극히 엄숙하고 장엄했다. 모든 감정을 초월한 듯 무심하면서도 해탈한 모습이었다. 바로 백팔번뇌마상의 기운을 이겨 낸 결과였으며 실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범인이라면 도저히 이겨 낼 수 없는 백팔번뇌마상의 번뇌를 궁예린은 마침내 물리친 것이었다. 모든 것은 그가 천살마겁흔을 타고났기에 해낼 수 있는 일이었으며 또 그것이 천살마겁흔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이제 백팔번뇌마상은 더 이상 광채를 뿜어 내지 않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금불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순, 굳게 감겼던 궁예린의 두 눈이 뜨였다. 너무도 맑고 투명한 눈빛. 그토록 살기 충만하던 청광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후유... 믿기 힘든 사실이다. 내가 백팔번뇌마를 이겨 냈을 줄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는 궁예린의 눈빛은 고요했고 그의 가슴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강렬한 광채가 사라진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문득 그의 두 눈이 한곳에 고정되며 이채를 뿌렸다. 천여 년 신비가 살아 숨쉬는 밀천(密天)의 세계! 궁예린은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지금 천고에 다시없을 광세기연(廣世奇緣)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천연(天緣)! 오직 궁예린을 기다려 온 하늘의 뜻이었으니... 〈제 1권 끝〉 제 9 장 밝혀지는 비사(秘事) 10 장 무림출도(武林出道)1 장 두 사람의 우정(友情)2 장 진실(眞實)은 다시 어둠 속에 가려지고... 제 13 장 유리대벽루(流理大壁樓)4 장 여인을 다루는 확실한 방법 15 장 태동(胎動)하는 세력들 16 장 천예살군(天藝殺君)7 장 잠마풍의 멸문(滅門)8 장 술잔을 마주하고... 제 9 장 밝혀지는 비사(秘事) 1 넓은 포단 위에 한 명의 흑의노인이 조용히 정좌해 있었다. 분을 바른 듯 창백한 노안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베어문 반백의 노인이었으나 일신에서 신비로운 위엄을 내뿜는 것이 평범한 노인은 아닌 듯했다. 노인 앞에는 묵빛의 철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석실 안에는 노인과 검은 철괘뿐,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사방은 석벽으로 꽉 막혀 있었다. 석실 한가운데 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보는 궁예린은 내심 짚이는 바가 있었다. '저분이 바로 이곳을 설치하고 나에게 끊임없이 천둥 같은 음성으로 정신을 일깨워 준 분일 것이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그는 전신이 날아갈 듯 상쾌하며 내부에서 진기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내 몸이 깃털처럼 가볍군!' 그때까지도 궁예린은 자신의 신체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백팔번뇌마상의 마기를 이겨 낸 그 순간부터 그의 피부는 옥석(玉石)처럼 투명하면서도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또한 그의 신체는 백독불침으로 어떠한 마(魔)도 침입할 수 없게 변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무한한 잠재력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불멸의 신체로 화한 것이었다. 그때 궁예린은 노인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어르신의 거처를 무례히 방문한 소생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노인은 말이 없었다. '이분께서 몹시 심기가 상하신 모양이군!' 궁예린은 지레 짐작하고는 다시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소생은 밀천무영세가의 당대 소가주로서 본 세가의 부흥을 위해 부득불 어르신의 양해도 없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궁예린은 그제야 이상하게 느끼고 조심스럽게 노인을 주시했다. 그러고는 이내 씁쓸한 고소를 베어물었다. "그랬군. 이분은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어." 그랬다. 눈앞의 노인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시신으로, 다만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해 궁예린이 착각을 한 것이었다. 사실을 안 궁예린은 곧 노인의 발치에 놓인 묵빛 철괘를 바라보았다. 철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철괘의 윗부분에 깊이 파인 글씨를 발견한 것이다. 〈제자야! 우리 사제(師弟)의 연(緣)이 드디어 맺어졌구나. 그것은 또한 노부를 위대한 인간으로 새롭게 탄생시키는 뜻깊은 선물이 아닐 수 없구나. 이 사부가 죽은 위대한 인간이라면 너는 살아 있는 위대한 인간인 것이다. 아무쪼록 덕과 위엄으로 밀천무영세가를 훌륭히 이끌어 주기 바란다. 무오년(戊午年) 사월 초닷새 고경학(高景學).〉 글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궁예린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철괘에 새겨진 글을 쳐다보았다. "무오년이라면, 지금부터 천사백 년 전이 아닌가?" 그것은 즉 밀천무영세가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궁예린은 이내 숙연한 표정으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고 노인, 고경학을 향해 배례를 올리기 시작했다. "제자, 궁예린이 조사님을 뵙습니다." 비록 고경학은 사제지간임을 강조했지만 궁예린은 감히 그를 사부라 부를 수가 없었다. 그와 고경학 사이에는 무려 천사백 년이라는 시공의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궁예린은 고경학에게 조사에 대한 예를 올렸다. 궁예린이 세 번의 배례를 마쳤을 때였다. 쿠웅! 둔중한 음향과 함께 철괘가 저절로 열리며 무엇인지 모를 향긋한 냄새가 석실 안에 진동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제껏 말짱하던 고경학의 시신이 일순간에 한 줌의 재로 화했다. 이 모든 것은 극히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위는 어느새 철괘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백광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궁예린은 철괘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선 검은빛의 두툼한 책이 눈에 띄었다. 〈묵혼마혈록(墨魂魔血錄)〉 책의 겉장엔 섬뜩한 핏빛 글씨로 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책 옆에는 한 개의 구슬이 놓여 있었는데, 석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은은한 백광과 향기는 바로 그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철괘 안에 있는 것은 그 두 가지 물건뿐이었다. 궁예린은 책을 손에 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둠의 혼(魂)들이 피로써 기록한 혈사(血史)! 이것이 밀천무영세가의 모든 것이라니... 조금은 섭섭하군." 그는 책의 첫장을 넘겼다. 깨알같이 빽빽이 적힌 글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궁예린은 천천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읽어 내려가던 그였지만 나중에는 경악으로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과연 그곳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기에...? 〈하늘이 저주의 불씨를 이 땅에 내렸으니... 그것이 곧 천살마겁흔이노라! 나 고경학은 바로 저주의 숙명인 천살마겁흔을 타고 태어났다. 그것은 곧 비극의 씨앗이었고 이 땅 위에 혈겁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했다. 또한 나 고경학은 천존파(天尊派)의 맥을 이어받은 단 하나의 제자이며 장문인이었다.〉 거기까지 읽은 궁예린은 크게 경악하며 고개를 들었다. "밀천무영세가를 세우신 조사님이 나와 같은 천살마겁흔을 받고 태어나셨다니...! 더욱이 전설로 내려오는 살수들의 시조(始祖)인 천존파의 일맥이셨다니..." 그것은 또 하나의 거대한 충격이었다. 천존파! 무림이 생겨나는 순간 어두운 그늘에서는 살수가 탄생했고 그 살수들의 시조가 바로 천존파라는 전설은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천존파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세상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까닭에 그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었고 단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천존파의 일맥이 바로 밀천무영세가를 세운 고경학이라니... 궁예린은 도저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다시금 고개를 떨구고 부릅뜬 눈으로 서책에 쓰여진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내 나이 십오 세 때, 하늘의 저주는 드디어 나에게 주사위를 던졌다. 나의 사부이며 천존파의 전대 장문인이신 거화선사(巨華仙師)께서 처참한 죽음을 맞으신 것이었다. 그 죽음은 무림인들의 독(毒)과 협공을 이용한 비열한 암습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나의 혈기를 역천시키기에 이르렀고 나를 고금 무림에 다시없는 악인으로 만들었으니... 세인들은 모른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 터지며 무림 최악의 시대의 막을 연 것이 모두 나에 의한 것임을! 나 고경학의 치솟는 살기는 피를 본 이후부터 걷잡을 수 없이 극을 향해 치달았다. 오직 죽이고 피를 즐기는 것만이 나의 가슴을 트이게 했다. 진시황제는 이런 나에게 참으로 좋은 방패 역할을 했고, 나는 살인의 쾌감을 더 느끼기 위해 마침내는 지옥무벌(地獄武閥)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지옥마제란 명호를 붙이고 그 힘을 바탕으로 대륙을 온통 피로 적시기에 이르렀다. 이유는 없었다. 오직 죽이고 피에 흠뻑 취하는 것만이 내 지상 최대의 과제였으니까...〉 "지옥무벌...! 그것을 조사께서..." 궁예린의 온 전신은 경악으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들은 적이 있었다. 지옥무벌, 그들이 일으킨 현세 최대의 혈사(血史)를...! 그 때문에 무림은 사상 최악의 시대를 열었고 무림사에 다시없을 비극이 벌어졌음을...! 그들은 한마디로 대악마라 할 수 있는 지옥의 화신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궁예린은 강하게 부정했다. "이, 이럴 수가...! 아니야. 이것은 뭔가 잘못된 거야. 어찌 그럴 수가..." 하지만 시뻘겋게 충혈된 그의 두 눈은 묵혼마혈록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피의 살육이 천하를 휩쓴 지 백 일! 나와 지옥무벌의 손에 죽은 자는 무림인과 양민, 여인, 어린애들을 비롯해 이미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세 명의 불승(佛僧)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자칭 불가의 후예라며 달마대사(達磨大師)와 오목존자(烏木尊者), 탑달라마승(塔達羅麻僧)이라고 했다.〉 궁예린은 다시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분의 불승... 그들은 대소림사를 세우신 달마대사와 천축 포달랍궁의 시조인 오목존자, 그리고 변방에 라마교(羅麻敎)를 세운 시조 탑달라마승이 아닌가?" 그의 경악 어린 시선은 계속 책 속을 파고들었다. 연이어 밝혀지는 엄청난 비사(秘事)들이 그의 시선을 붙잡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가의 법력으로 나의 천살(天殺)의 기를 잠시 꺾기에 이르렀으나... 그들 역시 나에게서 엄중한 내외상을 입어야 했다. 하나 그것은 확실히 엄청난 변화였다. 살(殺)의 기가 약해진 순간 나는 내 죄가 얼마나 무섭고 큰 것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가 뿌린 씨는 내가 거두어들일 것을. 그 결과 나는 지옥무벌을 영원히 이 땅 위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어찌 지옥무벌과 내가 지은 대죄를 씻을 수 있으랴? 해서 나는 지옥무벌의 후예들 중 뛰어난 인재들을 엄선해 우리의 죄를 다소 씻는 의미에서 밀천무영세가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대마인의 후예인지도 모르고 밀천무영세가에 합류했다.〉 "그랬군. 밀천무영세가는 그런 연유로 세워진 것이었어." 궁예린은 잠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밝혀진 비사의 결말. 그것은 밀천무영세가의 전신(前身)이 바로 지옥무벌이며 그들의 후손이 천여 년간 서림의 기둥이 되어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해 왔다는 것이었다. 또한 밀천무영세가가 살수의 무공을 지닌 이유는 천존파의 일맥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궁예린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으음..." 궁예린은 낮게 침음하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또한 우리의 죄가 무림보다는 서민들에게 더 컸으므로 밀천무영세가는 서림에서만 존속되어야 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늘의 저주는 나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던 것이다. 세 불승의 법력으로 잠시 꺾인 나의 천살의 기도 백 일을 넘길 수가 없었다. 해서 나는 세 불승의 도움을 얻어 하늘의 저주를 푸는 길은 세사의 모든 번뇌를 이겨 내야 하는 것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즉시 나는 천살마겁흔의 뛰어난 오성(悟性)과 혜지(慧智)를 최대한 이용하여 하늘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백팔 개의 번뇌마상, 그것을 만든 것이다. 백팔번뇌마상이 완성되었을 때, 나의 전신의 기와 힘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백팔번뇌마상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내 몸 속에 있는 천살의 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제자야! 나는 결국 통한(痛恨)과 분노(忿怒)를 금치 못하며 심맥을 끊어야 했다. 다시 찾아올 천살의 저주(咀呪)가 두려웠던 것이다. 하나, 이 사부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이 글을 읽고 있을 너를 생각하면 지옥에서나마 한 가닥 위안을 가질 수 있다. 이 사부가 못 한 일을 너는 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너에게 천존파의 맥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디 이 사부가 못다 한 밀천(密天)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덕과 위엄을 남겨 놓을 수 있기를 바라노라! 고경학 절필(絶筆).〉 길고 긴 글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뛰어난 오성과 혜지를 지녔으며 한편으로는 하늘의 무서운 저주를 받은 신체, 천살마겁흔! 그것은 인세에 두 번 다시 태어나기 힘든 천고의 신맥의 모순된 일면이었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거늘... 2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궁예린은 이내 고개를 들어 고경학의 시신이 있던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조사님, 제자는 조사님의 유시를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진정 위대하셨습니다. 하늘을 이긴 이 땅 위의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의 신색은 엄숙하다 못해 장엄하기까지 했다. "제자 궁예린 역시 언젠가 나타날 하늘의 저주를 이겨 내기 위해 밀천무영세가를 영원히 존속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운명은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도 있다고...!" 그렇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열려 있다고 하지 않는가? 더구나 궁예린이 지니고 있는 능력은 천기조차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다면 궁예린은 충분히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궁예린은 다시 수중의 묵혼마혈록에 시선을 주었다. "이제부터 천존파의 맥을 이으려면 당연히 무공을 익혀야 되겠지." 이어 책장을 더 넘기자 '살수지도(殺手之道)'라 쓰인 힘찬 필치가 나타났다. "살수지도! 살수가 가야 할 길이라는 뜻인가?" 그는 낮게 독백을 흘리며 그에 관한 글을 읽어 내렸다. 〈살수가 냉혹하고 비정하며 차가운 인물이라는 것은 살수의 절정에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남들보다 다정다감하고 친밀하며 모든 것이 뛰어날 때, 진정 완전한 절대살수(絶代殺手)가 탄생하는 것이다. 냉혹과 비정은 승패를 겨루는 데에 국한되는 완전한 살수의 기본 초식을 말한다.〉 천존파! 살수의 시조인 천존파의 살수 이론이었다. 또한 그것은 이제까지의 이념을 무시하는 새로운 살수 이론이었다. 궁예린, 그는 새로운 무학을 접하자 가벼운 흥분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의 뛰어난 오성과 혜지는 이미 천존파가 뜻하는 개념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보검(寶劍)도 명장의 손에서만이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던가? 다시 또 한 장의 책장을 넘기는 궁예린의 손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살예십팔식(殺藝十八式)! 살(殺)의 기본은 모두 열여덟 가지 동작 속에서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첫번째, 살인사사예(殺人死四藝). 살예십팔식의 치명적인 살초로 네 가지의 죽음의 초식. 오직 죽음만이 존재한다. 두 번째, 살인사무예(殺人死武藝). 살인의 현란한 춤〔舞〕이다. 죽음도 하나의 예술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세 번째, 살혼사광기(殺魂死光技). 광란하는 해일을 보았는가? 살혼사광기는 일단 펼쳐지면 천지를 광란의 해일로 변화시킨다. 네 번째, 살예사사절(殺藝死四絶). 대우주의 변화에 근거를 두고 바람과 번개, 비〔雨〕, 구름〔雲〕 등의 현란한 죽음의 초식이 펼쳐진다. 다섯 번째, 살파천지예(殺破天地藝). 살예십팔식의 최후의 두 초식으로 하늘과 땅에 근거를 두고 일단 펼쳐지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파천(破天)의 위력을 발휘한다.〉 살예십팔식. 그것은 살(殺)의 모든 것을 예술로 승화시킨 광고절금의 살인초식이었으며 천존파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궁예린은 흥분에 떨리는 시선으로 자신의 우수에 들린 밀천여의묵봉을 주시했다. "밀천여의묵봉(密天如意墨捧)! 천존파의 기보(奇寶)인 이 밀천여의묵봉에 살예십팔식의 모든 것이 담겨 있을 줄이야." 궁예린은 묵혼마혈록을 읽음으로써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살예십팔식은 밀천여의묵봉으로 펼쳐질 때 비로소 그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또한 밀천여의묵봉이 열여덟 가지의 병장기로 변화무쌍하게 변한다는 것을. 그리고 궁예린은 시간도 잊은 채 살예십팔식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석실은 곧 묵빛 광채로 채워졌다. 그것은 궁예린의 살예십팔식이 점차 그 위력을 더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월은 말없는 침묵 속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3 휘이잉...! 세찬 한파(寒派)가 중원대륙을 매섭게 할퀴고 있었다. 어느덧 엄동설한의 겨울이 닥친 것이다. 하지만 대륙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는 것은 매서운 바람만이 아니었다. 그때 중원무림은 무림성에 의해 완전한 천하일통을 이루고 있었다. 사해(四海)와 구주팔황(九州八荒)에 나부끼는 것은 온통 무림성을 상징하는 깃발이었으며, 보이는 곳에는 모두 기세등등한 무림어군의 발길이 닿아 있었다. 유사 이래 이처럼 완벽한 일통은 없었으니... 정(正)과 사마(邪魔)가 모두 한 명의 절대자(絶對者) 의해 통치되고 있는 것이었다. 무림은 평화와 태평정국을 유지하게 되었고, 또한 언제나 흐르던 피의 수레바퀴도 멎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럴 뿐, 무림에는 알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짙게 깔려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처럼 무겁고 긴장된 기류(氣流)가... 그것은 단 한 사람이 천하를 움켜쥔 것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다. 그 인물이 정파이건 사파이건, 그에게 억눌려 지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겨울이 더욱 춥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쐐애앵! 그 어느 해보다도 매서운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이었다. 무하평. 이 시대의 절대자 백리사헌이 거하는 무림성이 위치한 곳이다. 천하인의 눈총이 쏠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림성은 위용을 자랑하며 무하평의 드넓은 대지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대전(大殿). 이른바 무림전(武林殿)이라 일컫는 드넓은 대전이었다. 그 대전의 상좌에 화려한 태사의가 놓여 있고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무림전은 금시라도 무너질 듯 짓눌린 분위기였는데... 그는 바로 이 시대의 절대자인 백리사헌이었다. 백리사헌의 전면에는 흑의무복을 걸친 청년이 부복해 있었다. 옆에 놓인 넓적한 도(刀)가 언뜻 눈에 띈다. 무림전 내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고요하고 심유한 눈빛으로 무심히 천장을 바라보는 백리사헌과 그의 앞에 부복해 있는 청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백리사헌이 청년을 바라보며 먼저 입을 떼었다. "상아, 너는 노부가 왜 너를 불렀는지 아느냐?" 무척이나 고요한 음성이었다. 그의 음성에 청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관옥같이 준수한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 십팔구 세 가량 되었을까? 꾹 다문 입술이 약간 도도하며 오만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청년, 그는 뜻밖에도 어린 시절 궁예린과 항상 맞수를 겨루던 대하성주의 아들 관무상이었다. 비록 예전의 치기 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어엿한 사내대장부로 장성했지만 관무상이 분명했다. 대체 그가 어떻게 백리사헌과 함께 무림성에 있단 말인가? 백리사헌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때 백리사헌의 음성이 재차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노부가 너를 부른 것은 너의 무공수련이 이미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관무상이 겸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사부님. 제자는 아직..." 찰나지간 백리사헌이 두 눈을 번쩍이며 관무상의 말을 잘랐다. "무상아! 이제부터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너를 거둘 때는 물론 노부와 너는 사부와 제자 사이가 분명했다. 하나 네가 무림성에 들어온 이상, 노부를 성주라 불러야 할 것이다." "...!" "노부를 사부라 부를 제자는 오직 한 명! 장차 무림성을 이어 갈 사람만이 가능하느니라." 관무상을 지그시 주시하는 백리사헌의 모습에는 태산 같은 위엄이 충만해 있었다. 그런데, 관무상이 백리사헌의 또 다른 제자였단 말인가? 이미 잠마풍주 천우를 제자로 두고 있는 그가 또다시 관무상을 제자로 받아들였다니... 정녕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백리사헌은 자신의 휘하에 몇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단 말인가? 백리사헌의 엄중한 음성에 관무상은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성... 주님...!" 백리사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한 일이다. 너희 사형들 역시 너와 마찬가지로 노부를 사부라 부르지 않는다. 때문에 너 역시 그들과 서로 사형사제라는 신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느니라." "...!" "노부는 너희들이 선의의 경쟁을 하여 당당히 노부의 가업을 물려받기를 바랄 뿐이다. 노부의 말을 이해하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백리사헌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노부의 예상대로 무공을 익히기에 천부적인 재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너의 사형들과 동등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차후 노부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 "각골 명심하겠습니다." 관무상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백리사헌은 다소 기분좋은 얼굴이 되어 껄껄 웃었다. "허헛! 그러고 보니 너를 부른 목적이 빗나갔구나. 상아, 너도 이제 현 중원의 정세에 대해 들었으리라 본다. 노부가 무림성을 세운 지 칠 년! 천하에는 무림성의 이목이 없는 곳이 없다." 백리사헌의 얼굴은 어느새 본래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상황일 뿐이다. 무림은 본 성에 대항하기 위해 세력을 길러 왔고 이제 하나의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노부가 그대로 방치해 둔 것에도 원인이 있느니라. 노부는 진정한 중원의 강자(强者)가 되기 위해 그들이 모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노부가 자신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백리사헌의 말. 그것은 강자만이 지닐 수 있는 고고한 자부심이었다. 관무상은 백리사헌의 말을 들으며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무림성! 나 관무상은 이 광대한 대륙에서 이분처럼 군림하고 싶었기에 문(文)의 길을 버렸다. 기필코 무림성의 모든 것을 위임받으리라!' 그의 입술이 다부지게 물리는 것을 보며 백리사헌은 그의 내심을 짐작한 듯 다시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사내는 무릇 야망이 있어야 진정한 사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야망이 치졸하고 교활할 때에는 단순한 욕망에 그칠 뿐이다." 야망(野望)과 욕망(慾望).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 차이를 미미하다고 여길 수 있으나 그 뜻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제 너는 노부를 대신해 중원으로 나가 너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해 보아라. 네가 중원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무림성의 천하 분타를 너의 마음대로 움직여도 좋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백리사헌의 말뜻은 곧 관무상에게 모든 대권을 이양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찰나간에 관무상의 전신은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의 내심을 겉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백리사헌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단, 기간은 일 년뿐이다. 그 일 년간으로 너의 능력은 평가될 것이다. 또한 네가 명심할 것은 너와 같은 조건 아래에서 너의 사형들도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무상의 뇌리에 퍼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나의 짐작이 맞는다면 이분은 오늘을 위해 본 성을 적대시하는 세력들을 놔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진정한 영웅의 모습인가?' 그는 절로 탄성이 나오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리사헌은 자신에게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의 움직임을 알면서도 가만히 놔둠으로써 무림성에 불만이 있는 세력들을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모이게 했고, 또한 제자들에게 힘을 부여하고 적대 세력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맡겨 손수 나서지 않고도 자신의 적을 없애게 했기 때문이다. 관무상은 왠지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태산처럼 거대하게 느껴지는 백리사헌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기에는 그의 야망이 너무 컸다. 관무상은 내심 이를 앙다물었다. '무상아, 힘을 내라! 너는 기필코 이분을 뛰어넘는 거산이 되어야 한다!' 다음 순간, 관무상은 대범하리만큼 침착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성주님! 저는 기필코 사부님이라는 말씀을 올릴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저는 결코 무림성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의 굳은 결심이 배어 있는 단호한 음성에 백리사헌은 적이 놀랐다. '이놈...! 노부의 눈이 결코 잘못되지는 않았군. 어쩌면 무림성의 다음 대는 이놈이 이끌어 갈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심을 감추며 백리사헌은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허헛! 그래야지. 노부는 노부를 능가하는 제자가 무림성을 이끌어 주길 바랄 뿐이다. 너에게 이틀의 시간 여유를 주겠다. 그 동안 네 눈에 드는 무림성의 고수 백 명을 뽑아 데리고 떠날 것을 허락하겠다." 관무상은 깊숙이 이마를 숙여 예를 취했다. "성주님의 보살핌에 감읍할 뿐입니다. 그럼 일 년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허헛! 노부도 그러기를 바라노라." 스슷! 관무상의 모습은 곧 흔적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떠난 대전에 홀로 남아 있던 백리사헌은 곧 전음을 펼치는 듯 가볍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그의 전면에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내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뒷머리에 꽂은 은잠이 유난히 빛을 뿌리는 그는 바로 잠마풍주 천우였다. "성주님! 속하 천우 대령했습니다." 자신의 앞에 부복해 있는 천우를 바라보며 백리사헌이 입을 열었다. "천우! 너에게도 이제 때가 온 것 같다. 노부는 이번 평가에서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을 무림성의 후대를 이을 후계자로 뽑을 것이다." 부르르... 천우는 가볍게 전율했다. 그가 백리사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이제 드디어 때가 왔고 그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한데, 백리사헌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천우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인가? 그는 천하에 공표한 것과는 달리 자신의 제자들 중에서 무림성의 후계자를 정할 작정이란 말인가? 이 년 전, 그는 무림성의 개파대전에서 이런 말을 했다. －천하의 누구라도 무림성의 후계자가 될 수 있소이다. 언제라도 무림성의 기둥에 꽂힌 승천도를 뽑아 백리세가를 무너뜨리는 자에게 노부는 천하대권과 무림성을 이양하겠소! 하지만 지금 그가 천우에게 한 말로 미루어 그럴 의도가 전혀 없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백리사헌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이미 너의 사제들은 모두 중원으로 나갔다. 너 역시 중원으로 나가 너의 역량을 맘껏 발휘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대답하는 천우의 음성은 격정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삼 년! 이제 드디어 때가 왔다. 그 동안 오늘을 대비해 중원을 조사했다. 선기는 내가 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로 그때, 백리사헌의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천우! 명심하거라. 너의 사제들 역시 노부가 공평을 기하기 위해 본 성을 적대시하는 이들에 대해 어느 정도 내막을 아는 수하들을 딸려 보냈다. 그러니 경거망동은 후회를 낳을 수도 있음을 새겨 두거라." 그의 내심을 정곡으로 찌르는 뼈있는 말이었다. 순간 천우는 일말의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보며 백리사헌은 다시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번 일이 너에게는 유리할 수도 있다. 그것은 네가 중원에서 활동하는 데 잠마풍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우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잠마풍... 그 힘을 나에게...' 그가 비록 잠마풍주로 있다고는 하나 그의 마음대로 잠마풍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잠마풍은 어디까지나 백리사헌의 뜻대로 움직이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백리사헌은 잠마풍을 움직일 힘을 그에게 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더없이 유리한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백리사헌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잠마풍은 노부가 너에게 특별히 사적인 부탁을 하기 위해 사용을 허락하는 것뿐이다." 천우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부탁? 이분이 나에게 사적인 부탁을...?' 어떠한 경우에도 명령만을 내릴 뿐, 부탁이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던 백리사헌이 아닌가? 평소와는 너무 다른 백리사헌의 모습에 천우는 내심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백리사헌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천우를 향해 던졌다. "이 아이를 찾아라. 잠마풍은 필히 이 아이를 찾는 데 사용해야 할 것이다." 펄럭! 천우 앞에 정확히 떨어져 내린 그것은 초상화가 그려진 한 장의 두루마리였다. 어느 한곳 나무랄 데 없는 준수한 용모의 청년. 특히 두 눈빛은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었으며, 전체적으로 존엄한 귀티가 흐르고 있었다. 두루마리에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은 바로 백리사헌의 아들 백리유정이었다. 그렇다면 백리사헌이 찾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백리유정이었단 말인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토록 그의 존재를 감추었던 백리사헌이 천우로 하여금 그를 찾게 한단 말인가? 천우는 초상화를 바라보며 의혹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백리사헌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잠마풍이 무림의 신비인 만큼 이 아이를 찾는 일 역시 신비여야 한다." 천우는 한층 더 의구심이 일었다. '대체 이 청년이 누구이기에...?'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감히 백리사헌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백리사헌이 스스로 말하지 않는 이상 그가 알아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백리사헌은 천우를 내려다보며 지극히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이 아이를 찾되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말고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털끝이라도 다치게 할 때는 너는 그 대가를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 부르르... 천우는 부지중 세차게 전율하고 말았다. '죽음으로...!' 백리사헌의 요구는 아무런 내막도 모르는 그를 의혹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천우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에 백리사헌은 한층 음성을 누그러뜨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노부의 명이라기보다는 부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떠냐? 해보겠느냐?" 천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이분은 나를 거두어 주신 분... 나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목숨을 바친들 무엇이 아까우랴?' 그는 곧 백리사헌 앞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속하...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백리사헌의 안색에 처음으로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이어 그는 진정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고맙다, 천우! 너의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명심하거라. 노부의 부탁과 네가 무림성을 이끌어 갈 강자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을!" 그는 결코 사사로운 일로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실수는 하지 않는 자였고, 천우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렇기에 당신은 더욱 커다랗게 저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순간 그는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각골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서야 백리사헌은 굳어 있던 안색을 풀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그만 나가 보거라. 기간은 일 년뿐임을 명심하고!" "존명!" 대답과 함께 천우는 나타났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대전 안에는 또다시 백리사헌만이 홀로 남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고 불현듯 그의 입술이 열리며 나직한 독백을 흘렸다. "유정, 그 아이가 이곳을 떠난 지도 벌써 백 일이 되었구나. 그 동안 천하 구석구석을 뒤졌는데도 그림자도 찾지 못했으니..." 백리사헌의 얼굴에는 절대자답지 않게 한 가닥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역시 자식을 걱정하는 한 사람의 아버지임에는 틀림없었기에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백리유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백리사헌은 무겁게 탄식을 내뱉었다. "흠... 천하를 손안에 쥔 노부가 말년에 얻은 아들 하나 바로잡지 못하다니...! 이대로 노부의 원대한 뜻은 꺾여야 한다는 말인가?" 백리사헌의 원대한 뜻. 그것은 자신의 아들인 백리유정으로 하여금 황통을 잇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뜻을 이루려는 중대한 시기에 백리유정은 무림성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자신의 종적에 대해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그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백리사헌은 비밀리에 백리유정의 행적을 조사해 봤지만 지금까지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연기처럼 감쪽같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상념에 잠겨 있던 백리사헌은 돌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이 일은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 노부가 해야만 한다. 그리고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 그 아이를 찾아야 한다." 허공을 주시하는 그의 두 눈에 신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훗날, 역사가 노부를 무어라 평한다 해도 하늘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노부가 부와 권력, 명예를 얻고자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을! 보다 나은 중원을 위해서라는 것을...!"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야망을 정당화하려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절대자의 강한 자부심일 수도 있었다. 이 순간 무림성은 백리사헌이 내뿜는 무거운 중압감과 위엄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제 10 장 무림출도(武林出道) 1 쌔애앵! 오늘도 매서운 한풍이 대륙을 강타하고 있었다. 대하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눈에 보이는 건 모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워낙 교통의 요지인 탓에 매서운 한파에도 불구하고 대하성에는 많은 인파들이 종종걸음으로 오가고 있었다. 대하성에서 우측으로 십여 리 가량 떨어진 곳. 을씨년스런 폐허가 있었다. 오래 전에는 꽤 위풍당당했을 거대한 장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폐허였다.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한 석조더미, 깨어진 기와... 모든 것이 비바람에 씻겨 퇴색했을 뿐만 아니라 온통 키 큰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그 폐허 한가운데에 초라한 석비와 함께 한 개의 커다란 봉분이 자리잡고 있었다. 〈불의의 참변을 당한 궁가장의 식솔들 여기 잠들다.〉 석비에는 처량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휘이잉! 스스스... 세찬 한풍은 연신 석비에 부딪쳐 오고 잡초들은 바람에 흩날리며 소리내어 울부짖고 있었다. 눈이라도 오려는지 하늘은 잿빛으로 잔뜩 흐려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석비 앞에는 한 청년이 그대로 굳어 버린 듯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 새하얀 백의를 걸친 준수한 용모의 청년. 그는 바로 궁예린이었다. 그가 드디어 밀천문에서 나온 것이다. 털썩! 일순, 궁예린은 봉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님! 소손 린아가 왔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춥고 쓸쓸하셨습니까?" 그는 목이 메어 제대로 말조차 이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주르르... 끝내 뜨거운 눈물이 그의 양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이없이 죽은 궁사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궁예린은 촉촉이 젖은 시선으로 봉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할아버님의 죽음을 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할아버님을 그자는 서슴없이 죽였습니다. 이제 린아는 복수를 할 것입니다." 궁예린의 두 눈이 칼끝처럼 매서운 살기를 뿜었다. "밀천무영세가를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꼭 보여 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에게 내린 하늘의 저주, 천살마겁흔은 모두 해소했으니까요." 그는 지난날 궁사가 왜 그토록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했는지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배려였으며 궁사의 깊은 사랑의 표시였다. 그때는 그것을 왜 몰랐는지 궁예린은 다시금 후회했다. "밀천무영세가는 영원히 이 땅에 뿌리를 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참변을 당하지 않도록 강한 힘을 기르겠습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할아버님,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할아버님을 이렇게 만든 흉수(兇手)의 수급을 이곳에 가져오지 않는 한 저는 결코 할아버님의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저의 마음... 할아버님은 아실 겁니다." 궁예린은 그것만이 그토록 자신을 사랑했던 조부의 애정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말없이 봉분을 바라보던 궁예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흐르던 눈물은 말라 있었다. "할아버님,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왠지 아시죠? 저는 하루라도 빨리 할아버님과 모든 식솔들의 혼을 위로해 드려야 하니까요!" 궁예린은 곧 봉분을 향해 크게 삼배를 올린 후 미련없이 신형을 돌렸다. "그 일을 끝마칠 때까지 저는 다시는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나직한 다짐과 함께 궁예린은 천천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르르... 기어이 잿빛 하늘은 흰 눈송이를 쏟아 내고 있었다. 궁예린은 궁가장을 돌아보지 않기 위해 애써 눈 내리는 하늘을 주시했다. 문득 그 속에서 냉천의 음성이 들려 오는 듯했다. －소가주! 속하는 절운협(絶雲峽)에서 소가주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절운협입니다...! 오열하는 듯한 그 목소리는 수년 전 냉천이 떠나며 남긴 한마디였다. 순간 궁예린의 전신에서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무서운 살기가 폭사되었다. "냉천... 그것을 어찌 내가 잊었겠소? 나는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소. 한시라도 빨리 밀천무영세가를 친 그 흉수들을 찾고 싶었기에 말이오!" 그랬다. 지금까지도 궁예린은 흉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궁사가 쓰러지는 순간 그는 치솟는 혈기에 혼절해 버렸고, 그가 본 것이라고는 백리사헌의 뒷모습뿐이었다. 더구나 잠마풍이 공격해 올 때, 궁사와 냉천은 모든 대화를 전음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궁예린은 밀천무영세가를 친 무리들이 잠마풍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진정한 흉수의 정체를 모르는 궁예린의 가슴은 터질 듯 답답하기만 했고 머릿속에는 오직 냉천이 있는 절운협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냉천, 지금 나 궁예린이 가고 있소. 부디 무사하기만을 빌 뿐이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궁예린의 신형은 이미 잿빛 하늘에 하나의 점으로 박혀 멀어지고 있었다. 휘이잉! 점점이 내리던 눈은 세찬 한풍에 휩쓸리며 폭설로 변하고 있었다. 2 북송림(北松林). 유난히 나무들이 북쪽으로만 치우쳤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북송림에 둘러싸인 협곡은 내리는 폭설로 인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 피어 있는 붉은 꽃. 그것은 혈화(血花), 피의 꽃이었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눈 덮인 협곡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인가? 돌연 한 줄기 한풍과 함께 협곡 안에 백의인영이 내려섰다. 궁가장을 떠나온 궁예린이었다. 그는 이내 흐르는 핏물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피〔血〕...! 강호 첫 출도에 피가 먼저 반겨 주는군." 그의 시선은 곧 핏물이 흘러내리는 출처를 따라 협곡의 위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세 구의 시신이 처참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검에 당한 그들은 정기 어린 모습의 준수한 청년들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으악!" 처절한 비명성이 아련한 금속음과 함께 궁예린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적어도 백 장 밖에서 들려 온 소리였다. 무공을 모르던 예전의 궁예린이었다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미미한 소리였지만, 이미 내공이 입신의 경지에 달해 있는 지금의 그에게는 그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궁예린은 짙은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현 대륙에서 피를 부르고 살인을 할 곳은 오직 무림성밖에 없거늘... 무림성이 무슨 일로...?" 그의 두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그래. 어차피 피 속에 던져질 내가 아닌가? 이왕 눈에 띈 것... 견문도 넓힐 겸 찾아가 보자." 다음 순간, 궁예린은 폭설을 뚫고 허공 높이 신형을 쏘아 올렸다. 분지(盆地). 산 속에 이런 분지가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드넓은 분지였다. 족히 이삼백 명은 들어섬직한 이곳에 또다시 혈화가 피고 있었다. 가슴에 '어군(御軍)'이라는 글자를 새긴 오십여 명의 백의인들. 그들이 둥글게 포진하여 이십 명의 청년들을 에워싼 채 분지 위에 위풍당당히 서 있었다. 포위에 갇힌 청년들은 한결같이 정기 어린 기상을 지닌 자들로 전신에 핏물이 배어 있는 것이 이미 백의인들과 한차례 접전을 벌인 듯했다. 날카로운 검에 잘려 나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상처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청년들은 이륜좌거를 필사적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이륜좌거에는 청수한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새하얀 안색, 심유한 눈빛. 선비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중년인은 절망에 가까운 눈빛으로 전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전면에는 백의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준수한 이십대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각진 턱이 굴강해 보이는, 패기만만한 청년이었다. 청년이 한 손에 도신이 넓은 도(刀)를 쥔 채 이륜좌거의 중년인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천기수사(天機秀士) 사유학(史儒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당신들 십인방(十人方)이 무림성에 두 번 다시 등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오." 그의 말로 미루어 청년은 무림성의 인물인 듯했다. 대체 십인방이 어떤 곳이기에 무림성에서 그들을 제거하려는 것인가? 그때 천기수사 사유학이라 불린 중년인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 그것은 무림성의 횡포요. 어찌 본 방이 무림성주에 등을 돌리고 적대한단 말이오? 본 방은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소이다. 공자께선 크나큰 오해를 한 것이오." 청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후훗! 천기수사, 무림성이 허수아비인 줄 알았소? 본 성은 이미 당신들 십인방이 십대문파의 최정예 세력임을 알고 있소." 일순, 사유학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가 그것을 아시니 더 이상 변명은 않겠소. 맞소. 십인방은 십대문파의 속가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소. 하나 이 모든 것은 각 파의 보존을 위한 것일 뿐이오. 그것이 어찌 무림성에 등을 돌리는 일이란 말이오?" "후훗! 천기수사, 끝내 연극을 하겠다는 것이오? 당신은 본 공자가 누군지 아시오? 본 공자는 무림성주의 두 번째 제자인 철혈도(鐵血刀) 단우엽(端羽葉)이오. 한데도 당신은 시치미를 뗄 작정이오?" 사유학의 안색이 가볍게 일변했다. '승천무황의 세 제자 중 둘째 제자... 그렇다면 이미 명(命)을...?' 백리사헌에게 세 명의 제자가 있다는 소문은 벌써 무림에 퍼져 있었다. 첫째 제자가 잠마도(潛魔刀)이며 둘째는 철혈도, 그리고 셋째는 풍광도(風光刀)라 했다. 그리고 그들의 무학은 이미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소문이었다. 한데, 그들 중 둘째 제자인 철혈도 단우엽이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잠시 당황했던 사유학은 곧 본래의 신색을 되찾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공자를 몰라뵈었구려. 하나, 분명 승천무황 백리 성주께선 누구의 도전도 받겠다고 하셨소. 그것을 위해 십대문파가 힘을 기른 것이 어찌 잘못이란 말이오?" 단우엽은 싸늘히 냉소를 띠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지는 않소. 하나 당신들 개개인이 도전하라고 했지 뒷구멍에서 힘을 기르며 기회를 노리라고는 하지 않으셨소. 성주님은 분명 선언했소. 무림에 십대문파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방파나 문파도 허락치 않는다는 것을...!" 그러고는 자신이 너무 시간을 끌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더욱 차갑게 안색을 굳히며 수중의 도를 치켜들었다. "천기수사, 너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 것 같소. 이제 결정을 내리시오. 무릎을 꿇고 십인방을 해체하겠소, 아니면 이곳에서 모두 죽음을 맞겠소?" 순간 사유학의 옆에 서 있던 청년 한 명이 분노를 참지 못한 듯 발끈하며 나섰다. "방주님! 어찌 이런 모욕을 참아야 합니까? 속하들은 죽음으로 사문의 명예를 지키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방주!" "무림이 아직 썩지 않았음을 보여 줘야 합니다." 나머지 청년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사유학은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안 된다! 무림어군이라면 모르나 철혈도, 저자가 있는 이상 무의미한 희생만 치를 뿐이다. 총타를 떠나 온 것이 이토록 큰 화를 초래할 줄이야...!' 천기수사 사유학, 그는 누구인가? 무림에 알려진 바로는 그의 두뇌를 따를 자가 없다고 했다. 다만 무학을 익힐 수 없는 체질로서 하체를 전혀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천하십대문파의 속가제자들로 이루어진 십인방의 방주직을 맡고 있었다. 십대문파의 장문인들이 그에게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십인방이 십대문파를 대표하는 은밀한 세력이라는 뜻이기도 했는데... 마침내 무림성은 십인방의 존재를 알아냈고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단우엽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때 사유학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재차 말문을 열었다. "단우 공자,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시오. 이곳에서 피를 본다는 것은 십대문파 모두와 맞선다는 뜻이 되오. 이 일은 백리 성주께서도 결코 찬성치 않을 것이오." 단우엽은 그 말에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후훗! 천기수사, 다 부질없는 말이오. 일 년... 그 동안은 성주께서도 절대 이 일에 관여하지 않으실 것이니 당신의 걱정은 기우일 뿐이오." 사유학의 얼굴이 침통하게 굳어졌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단우엽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음을 눈치챈 것이다. '결국 어쩔 수 없단 말인가?' 그는 이내 입술을 깨물며 나직이 일갈했다. "십방대사절진(十方大死絶陣)을 펼쳐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유학의 주위에 있던 이십여 명의 청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분지 위에는 순식간에 빈틈없는 진세가 펼쳐졌다. 단우엽은 싸늘히 웃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감이오, 천기수사! 당신이 무림성에 등을 돌리다니." 그리고 그 역시 뒤쪽에 서 있는 무림어군을 향해 벼락같은 일성을 날렸다. "모두 쳐라!" 쐐애액! 찰나간에 무림어군이 청년들을 향해 덮쳐 들고, 무서운 검기(劍氣)가 분지 위에 소용돌이쳤다. 그들의 공세가 채 이르기도 전, 다시 사유학의 위엄있는 음성이 들려 왔다. "좌우는 사절진(死絶陣)을, 전후는 백리진(百里陣)을 펼쳐라!" 그러자 이십여 명의 청년들은 일제히 검을 빼 들며 소리없이 자리 이동을 했다. 그 순간이었다. 채채채챙! 귀를 찢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며 시퍼런 불꽃이 검기와 함께 난무했다. 내리는 폭설이 검기와 살기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그 속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처절한 비명성이 연이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으아악!" "커흑!" 폭설 속에 때아닌 꽃이 피고 있는 것이었다. 피〔血〕의 꽃이... 3 단우엽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크윽!" "으아악...!" 잇달아 비명성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무림어군이었다. 그들은 십인방의 이십여 고수들이 펼친 절진(絶陣)에 부딪치며 처참히 죽어 가고 있었다. 분수처럼 뿌려지는 피보라, 그리고 무림어군의 시신들. 한눈에도 그들이 십인방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 수 있었다. 진정 가공스런 절진의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놀라운 일이다. 십인방의 힘이 이 정도일 줄이야...!' 비록 적이기는 하나 단우엽은 그들이 지닌 능력에 절로 감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오히려 전멸하는 것은 자신들 쪽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 되겠다. 시간을 더 끈다면 우리가 불리할 뿐더러, 십인방의 무리들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단우엽은 이내 우렁찬 대갈을 터뜨렸다. "멈춰라!" 그러자 무림어군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표정에는 한결같이 은은한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그때 사유학이 단우엽에게 말했다. "단우 공자! 본인은 이쯤에서 끝냈으면 하오. 더 이상의 희생은 원치 않소." 단우엽은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후훗! 끝내라고? 천기수사, 이미 십인방과 무림성은 같은 하늘 밑에 존재할 수 없게 되었음을 모르시오? 아무튼 대단하오. 현 무림에서 무림성에 대항하는 간 큰 자들이 있었다니." 이어, 그는 사유학에게로 서서히 다가갔다. "어쨌든 본인이 중원에 나온 보람이 있는 것 같소. 이 철혈도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말이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둠처럼 짙은 묵빛 광채가 사방으로 부챗살처럼 뻗어 나갔다. 단우엽이 수중의 철혈도에 본신의 진기를 주입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도 서릿발 같은 살기가 짙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유학은 적이 침통한 기색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끝내 피할 수가 없다면... 본인도 더 이상 피하지는 않겠소." 그는 이내 조용하나 위엄 서린 음성으로 명했다. "십리회천진(十里回天陣)을 펼쳐라!" 그 말에 십인방의 고수들은 원을 그리며 사유학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느리게 움직이며 돌던 그들의 움직임에 가속이 붙자 나중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빨라졌다. 휘르륵... 주위의 공기만이 마구 회오리쳐, 내리는 폭설을 분분히 치솟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강기(　氣)가 사방으로 엄밀하게 뻗어 나갔다. 펄럭, 펄럭...! 무림어군들의 옷자락이 한풍에 휘날리듯 펄럭였다. 그들은 전신을 조여 오는 매서운 강기에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때, 묵묵히 십인방 고수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단우엽이 눈빛을 굳히며 철혈도를 서서히 수직으로 치켜들었다. "천기수사, 조심해야 할 것이오. 본 공자의 도(刀)에는 눈이 없으니까." 싸늘한 음성이 끝난 순간 단우엽은 허공 높이 신형을 띄워 올렸다. 돌연 시커먼 묵광이 허공을 덮으며 십리회천진의 회오리를 덮쳐 갔다. 단우엽의 모습은 묵광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오직 철혈도만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검도술의 최극치인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십리회천진을 역(逆)으로...!" 찰나지간 사유학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말에 십인방의 고수들이 따르기도 전에, 묵광 속에서 단우엽의 득의 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훗! 이미 늦었소. 구궁(九宮)에 태극오행진(太極五行陣)을 합한 것으로는 본인의 도강(刀　)을 막을 수 없소." 그와 동시에, 묵빛 도광이 그대로 십리회천진의 회오리 강기를 갈랐다. "으악!" "크흑...!" 참담한 비명성이 허공을 울리고 곧 이어 시뻘건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러나 여전히 묵빛 도강은 그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천기수사! 본 공자도 더 이상은 피를 보고 싶지 않소." 단우엽의 싸늘한 일갈이 터졌다 싶은 순간, 더할 수 없이 빠르고 위력적인 한 가닥 도광이 이륜좌거에 앉아 있는 사유학을 향해 짓쳐들었다. 진정 전광석화와도 같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앗!" "방주님! 위험합니다." 사유학을 보호하며 절진을 펼치고 있던 십인방 고수들은 그 모습에 당혹성을 터뜨렸다. 그것이 문제였다. 잠시 그들이 기(氣)를 흐트러뜨린 순간 묵광이 스치며 그들의 육신을 사정없이 쪼개 놓은 것이다. 사유학은 안색을 급변시키며 재빨리 뇌리를 굴렸다. '이자의 무학이 이 정도일 줄이야...! 여기서 내가 피한다면...'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이자의 심기를 미루어 보건대 결코 나를 해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하늘의 뜻에 따를 뿐...!' 찰나간에 그는 많은 생각을 했고 그사이 단우엽의 날카로운 도광은 그의 백회혈 한 치 거리에 이르러 있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헉!" 돌연 단우엽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단우엽이 철혈도를 든 채 일 장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4 "후후... 형씨, 저항할 능력이 없는 불구자를 공격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장내에는 어느새 한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놀랍게도 궁예린이 사유학의 전면을 가로막고 선 채 싱긋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었다. 파르르... 순간 사유학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이럴 수가...! 이토록 닮은 놈이 있다니...' 무엇인가? 궁예린이 누구를 닮았다는 것인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궁예린은 그의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단우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단우엽은 철혈도를 늘어뜨린 채 망연히 궁예린을 마주보고 있었다.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낸 자를. '나의 철혈도가 튕겨 나가다니! 사부께서는 중원에서 철혈도를 완벽히 받아 낼 자는 불과 두세 명 정도라 하시지 않았는가? 한데, 이 약관의 젊은 놈이...' 경악에 찬 그의 눈이 궁예린의 수중에 들린 나뭇가지에 이르러 더욱 커졌다. '더욱이 철혈도를 막아 낸 것이 한낱 나뭇가지였다니...!' 그의 경악은 이내 크나큰 분노로 화했다. "누구냐? 네놈도 십인방의 조무래기냐?" 한낱 약관의 청년에게 당했다고 생각하자 단우엽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반면에 궁예린은 여유만만한 모습이었다. "후훗! 그런 것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소. 그저 지나가는 길에 형장의 솜씨가 너무 독악해 보여 염치없이 나섰을 뿐이오." 궁예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을 본 단우엽은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으... 이 소문이 만일 무림성으로 흘러들어 간다면 나는 끝장이다!' 그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너는 본 공자가 누군지 알면서 이 일에 개입하겠다는 것이냐? 지금도 늦지는 않다. 네가 구경만 하겠다면 너의 기백을 높이 사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없던 것으로 해주겠다." 그는 느끼고 있었다. 궁예린이 결코 자신의 하수(下手)가 아님을. 더욱이 십인방의 영재들 중 한 명이 아니라면 그는 무명인이 틀림없었다. 한데, 그런 궁예린과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그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겨도 수치요, 만일 진다면 크나큰 망신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단우엽은 적당한 선에서 궁예린을 떼어 버릴 속셈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궁예린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아...! 알고 있소. 형씨는 무림성주의 세 제자 중 두 번째, 이공자라는 것을." 단우엽은 더욱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미 오래 전부터 이곳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놀라운 놈...!' 궁예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 본인은 실망했소. 무림성이 불구자까지 죽이려 들 정도로 조잡할 줄은... 내가 소문에 듣기로는 성주께서는 대범한 영웅이라던데 그것은 헛소문인가 보오." 순간 단우엽을 비롯한 무림어군들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세상에 그 누가 이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무림성의 인물들을 바로 눈앞에 둔 채. 단우엽은 몹시 분노한 나머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네, 네놈이 감히..." 너무 화가 난 탓인지 그는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태연히 바라보며 궁예린은 이 순간 빠르게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무림성! 지난날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다. 하나, 나는 무학을 익힐 때부터 결심했다. 이왕 무인의 길을 갈 바에는 천하 최강을 이룰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백리사헌, 그와 맞부딪쳐야 할 것이다. 이 기회에 그의 무학을 견식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궁예린은 오직 그것을 위해 격장지계로 단우엽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단우엽은 잔뜩 독이 오른 모습으로 무섭게 궁예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단한 놈! 중원에 너 같은 놈이 있었음을 진작 알았다면 본 공자는 맨 먼저 네놈부터 찾았을 것이다. 어서 병기를 뽑아라! 본 공자를 욕하는 것은 봐줄 수 있지만 무림성을 우롱한 네놈은 결코 살려 둘 수 없다."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듯 그의 모습에서는 아까와 같은 이성을 잃은 듯한 태도는 씻은듯이 가셔 있었다. 대신 그의 전신에서 무서운 살기가 뿜어졌다. 궁예린은 내심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이 시대 절대자의 제자답군. 이자를 보아 백리사헌... 그 인물을 알 것 같다. 이미 무인(武人)이 지니는 도(道)가 완벽히 배어 있으니...' 그는 이제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진중히 입을 열었다. "좋소! 형장이 도(刀)를 사용하니 본인 또한 도를 사용하겠소." 다음 순간,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눈부신 광채가 사방으로 뻗쳤다. 단우엽의 철혈도에서 뿜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커먼 묵빛 광채였다. 열여덟 가지 병기로 변형시킬 수 있는 만능병기. 바로 밀천여의묵봉이 묵도(墨刀)의 형태를 갖춘 것이었다. '묵도를...' 단우엽은 내심 적이 놀랐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몰랐군. 네가 도에 일가견을 지니고 있을 줄은..." 그는 철혈도를 수평으로 누이며 두 발을 벌리고 섰다. 그의 전신에서 뻗치는 가공할 살기에 주위의 공기가 싸늘히 휘몰아쳤다. 궁예린은 부지중 흠칫했다. '속전속결을 내려 하는군. 하나... 단우엽, 그대는 착각을 하고 있소. 본인은 살수의 시조가 되는 천존파의 무학을 연성하고 있음을...!' 그는 담담한 기색으로 밀천도(密天刀)를 밑으로 내려뜨렸다. 그것은 너무나 허술한 자세로, 누가 보아도 허점투성이였다. '허허실실(虛虛實實)! 놈의 무학이 이미 정중동(精中動)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궁예린의 모습에 단우엽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그는 손안의 철혈도를 더욱 힘주어 잡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찰나지간 단우엽의 주위에 한층 엄밀한 살기가 무섭게 감돌았다. 장내에는 점차 숨막힐 듯한 살기와 긴장이 고조되었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두 사람을 주시했다. 그리고 한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우엽과 궁예린의 신형이 일시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곧장 서로를 향해 날아갔다. 차차창! 도와 도가 부딪쳤다. 단 한 번의 부딪침이었으나 무수한 금속음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하지만 중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허공에 무수히 퍼져 오르는 묵빛 광채뿐이었다. 마치 폭죽처럼 터지며 허공을 수놓는 묵빛의 불꽃들은 일대 장관이었다. 그리고 사위에는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궁예린과 단우엽, 그들은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우뚝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단우엽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을 뿐. 실상 그 순간 그는 치솟는 기혈을 진정시키느라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또한 철혈도를 쥔 그의 손아귀는 찢겨진 채 실낱 같은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놈의 내력이 나보다도 한 단계 위라니...!' 하마터면 그는 이번의 일전에서 철혈도를 떨어뜨릴 뻔했다. 확실히 궁예린의 무공은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단우엽과 마찬가지로 궁예린도 극도로 경악하고 있었다. '놀랍군. 밀종검환류(密宗劍幻流)를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막아 내다니...! 과연 중원은 넓군. 만약 밀천문에 들지 못했던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뻔했다!' 한편 그들만큼 아니, 그들 이상으로 놀라고 있는 인물이 또 한 명 있었다. 천기수사 사유학, 바로 그였다. '무서운 일이다. 대체 중원에 언제 저런 젊은이가...! 조금 전 단우엽이 펼친 필살초식은 본인이라 해도 저토록 쉽게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사유학은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일신에 무공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단우엽에 버금가는 가공할 무학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 되는데... 궁예린은 담담히 단우엽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우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담담한 그 모습과는 달리 그들의 주위엔 눈에 보이지 않는 살기가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폭설마저 그들의 주위에 이르러 튕겨 나올 정도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돌연 단우엽의 입에서 크나큰 일성이 터져 나왔다. "승천철혈십이광식(勝天鐵血十二光式)...!" 그와 동시에 그는 비쾌히 지면을 박차고 올라 쏜살같이 궁예린을 덮쳤다. 하늘도 일시에 박살낼 듯한 패도무비한 수법이었다. 전신을 쪼개 오는 통천 가공할 그 광경에 궁예린은 내심 비장한 결심을 했다. '으음... 지옥광혼무경(地獄狂魂武經)을 쓸 수밖에...' 지옥광혼무경! 그것은 밀천문의 석벽에 쓰여 있던 잔혹무비한 무공이 아닌가? 찰나지간 궁예린의 전신에서 엄청난 묵광이 폭사되었다. 그것은 곧장 무지개처럼 확산되어 단우엽에게 맞부딪쳐 갔다. 퍼펑! 차차창! 지축을 뒤흔드는 격돌음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함께 솟구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묵직한 신음성이 울려 퍼졌다. "욱!" 휘이이잉! 중인들은 한동안 휘몰아치는 세찬 기류에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잠시 후, 모든 소요가 가라앉으며 장내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궁예린, 그는 예의 담담한 신색과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진정 놀랍게도 단우엽은 깊게 파인 땅구덩이 위에 처참한 몰골로 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무참히 일그러진 얼굴로 궁예린을 쏘아보며 옆구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그곳에는 길게 상흔(傷痕)이 나 있었고 시뻘건 선혈이 샘물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쨍그렁! 단우엽은 끝내 한 손에 쥔 철혈도마저 맥없이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이런...!" "이럴 수가...! 이공자께서..." 무림어군들은 이 믿지 못할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승천무황 백리사헌의 진전을 이어받은 단우엽. 그가 일개 무명낭인에게 어이없이 참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때 궁예린은 천천히 단우엽에게 다가가 땅에 떨어진 철혈도를 집어 주었다. "형장, 좋은 승부였던 것 같소. 하나, 나는 개운치가 않소. 그것은 형장이 무인의 진정한 도로서 승부에 응하지 않았음을 느꼈기 때문이오. 기다리겠소. 귀하의 진정한 무공을 접할 날을..." 그 말에 단우엽은 더욱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내심으로 그는 궁예린의 말에 수긍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의 분노와 자만 탓에 수비가 없는 공격에 치우쳤을 뿐이었다. 그것은 천하에 승천철혈십이광식을 받아 낼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다시금 궁예린을 바라보았다. '한데 나는 오늘 또 하나의 하늘이 있음을 알았다. 멋진 놈! 비록적이지만 대단한 놈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궁예린에게 호감을 느꼈다. 자신을 꺾은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단우엽은 궁예린이 마치 자신의 오랜 벗처럼 여겨졌다. 그 생각을 하니 그의 입가에 절로 고소가 머금어졌다. "고맙소. 나는 오늘 귀공에게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소." 어느새 단우엽의 말투마저 변해 있었다. "나 단우엽이 천하에서 유일하게 탄복해 마지않는 두 번째 인물이 바로 귀공이오." 그의 진심 어린 음성에 궁예린은 빙긋 미소 지었다. "고맙소, 나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니! 나 또한 느꼈소. 무림성이 우연으로 절대(絶代)가 되지 않았음을..." 단우엽이 웃음으로 답했다. "나 단우엽은 꼭 다시 오겠소. 늦어도 일 년 안에 귀공을 다시 찾을 것이오." 그러고는 궁예린이 내민 철혈도를 받아 들고 미련없이 신형을 돌렸다. 그때 궁예린이 기광을 빛내며 그를 불러 세웠다. "형장,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찾을 수 있겠소?" 단우엽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나직이 웃었다. "후훗, 나는 보았소. 귀공의 두 눈에 가득 담긴 웅지를... 귀공은 일 년 안에 무림성 최대의 적으로 부각할 것이오. 그런데 못 찾을 까닭이 있겠소?" 말을 마친 그는 두 번 다시 멈춰 서는 법 없이 걸음을 옮겼다. 패자(敗者). 그 뒷모습은 언제나 초라한 법이다. 무림성의 이공자로 중원에 나오자마자 천하를 뒤덮을 젊은 혈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단우엽은 부상당한 옆구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의 뒤를 무림어군이 침통한 기색으로 따랐다. 문득 궁예린의 입술이 열리며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단우엽, 기억해 두시오.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죽일 것이오. 그것만이 내가 살 길이니..." 그때였다. 끼익! 끄륵...! 사유학이 이륜좌거를 움직여 궁예린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협, 본 방을 위험에서 구해 주신 데 대해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할지..." 진심 어린 정중한 음성에 궁예린은 그에게로 돌아서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괘념치 마시오. 소생 스스로가 나선 것일 뿐이니 방주께서는 그렇게 난감해 하실 것 없소이다." "하나, 이번 일로 소협이 무림성과 불구대천지원수가 된 것을 생각하면 죄스럽기 짝이 없구려." 궁예린은 낮게 웃었다. "후훗, 아니오. 이 일은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쳤어야 할 일... 방주께서는 죄스러울 것이 없소. 지금 생각하니 소생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었던 것 같소. 하나 이번 일을 좋은 경험으로 삼겠소. 그럼..." 그렇게 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고 이내 한 가닥 빛살이 되어 사라졌다. 사유학은 이 순간 정곡을 찔린 듯 가슴이 뜨끔함을 느끼고 있었다. '저 청년이 나의 심중을 꿰뚫었다니! 그럴 리가... 나는 조금의 허(虛)도 보이지 않았거늘...' 그때 궁예린의 전음성이 그의 고막으로 가늘게 파고들었다. "후훗! 방주, 또 하나 잊은 것 같소. 소생은 방주가 진정 그 이륜좌거를 타고 있어야 하는지 궁금할 뿐이오." 전음은 그렇게 끝이 났다. 사유학은 부지중 전신을 세차게 떨었다. '무엇이...? 대체 저 청년이 누구이기에 나의 비밀을...' 그의 안색은 돌처럼 굳어 있었으며 심유한 눈빛은 연신 잔경련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아직은 모든 것이 신비일 뿐인데... 휘이잉! 세찬 한풍은 연신 눈보라와 함께 피비린내를 몰아가고 있었다. 제 11 장 두 사람의 우정(友情) 1 겨울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폭설이 내린 뒤라 그런지 천지는 온통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흰 눈을 가지마다 수북이 얹은 울창한 거목림. 그 사이로 길게 뻗은 관도(官道)가 쌓인 눈 속에 어렴풋이 드러나 보였다. 이미 밤이 시작되고 있는 저녁 무렵이라 관도 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관도 저쪽에서 백의인영이 나타났다. 바람에 옷자락을 날리며 걸어오는 그는 바로 궁예린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검미는 잔뜩 찌푸려진 상태였다. "천기수사 사유학, 그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다. 그는 단우엽의 철혈도의 공세와 공격 부위를 이미 느끼고 있었으니... 만약 그때 내가 나서지만 않았던들 그의 심기를 짐작할 수 있었으련만..." 그가 단우엽의 공세로부터 사유학을 방어해 준 순간, 궁예린은 보았던 것이다. 의혹의 눈빛을 띠는 천기수사 사유학의 모습을. "살수의 무학을 터득한 나만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자의 전신엔 그때 무섭도록 팽창된 살(殺)의 기운이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었다. 그가 이륜좌거에서 일어나는 날, 무서운 살(殺)의 기운은 터질 것이다. 주의해 볼 인물이다. 놀랍게도 그런 자가 십대문파의 공동 책임을 쥐고 있다니..." 알 수 없는 불안이 궁예린의 심중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버렸다. "지금 그것을 생각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시급한 것은 이 추운 겨울 저녁에 어디에서 노숙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는 이미 어둠에 물들기 시작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득 그의 검미가 치켜 올라갔다. "후훗, 대단한 쥐새끼로군. 끈질기게 쫓아오다니! 이젠 확실해졌다. 진작부터 내 뒤를 쫓고 있었어." 그는 힐끔 자신이 지나온 관도 끝을 뒤돌아보았다. 관도 저 끝에 이제 막 나타난 청의인영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한눈에도 헐레벌떡 쫓아오는 기색이 역력했다. 궁예린은 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이하군. 분명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틀림없는데... 어째서 내 뒤를 줄곧 따라오고 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그저 길 가는 행인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청의인영은 근 한 시진 이상 그의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인적없는 이곳 관도에까지 나타났으니 궁예린을 뒤쫓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던 청의인영이 멈칫 걸음을 멈췄다. 궁예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그는 곧 망설이지 않고 궁예린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는 누렇게 뜬 안색에 유난히 점이 많은 추남형의 청년이었다.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던 궁예린은 직선적으로 물었다. "귀하는 무엇 때문에 소생을 그토록 따라오는 것이오? 소생의 등에 무엇이 묻어 있기라도 하오?" 청의청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헉헉... 아닙니다. 불초는 공자의 뛰어난 모습에 가까이 사귀고 싶은 마음에서 결례를 무릅쓰고 뒤따라온 것뿐이오." 일순, 궁예린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역용을... 교묘하군. 감쪽같이 속을 뻔했으니...' 그는 청의청년의 목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청년의 목 아래 부분이 새하얀 것으로 보아 원래는 피부가 흰 인물이 분명했다. 그러나 궁예린은 짐짓 시치미를 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귀하는 무공을 모르는 듯한데, 선비들은 좀체 무림인을 사귀려 들지 않소. 더욱이 귀하는 소생이 싸우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으니 대단한 호기를 지닌 것 같소." 청의청년은 그 말에 정곡을 찔린 듯 흠칫했다. 그랬다. 청의청년은 북송림에서 단우엽과 싸우는 궁예린의 모습을 몸을 숨긴 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송림에서부터 그의 뒤를 쫓았다. 청의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겠소. 처음부터 형씨가 눈치채지 못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니까." 궁예린은 청년의 솔직 담백함에 짙은 호기심과 함께 호감을 느꼈다. '대단하군. 전신에서 뻗치는 기도가 범상치 않다. 은연중 위엄과 중압감이 배어 있으니... 결코 예사 선비는 아닌 듯하군!' 궁예린은 탁 터놓고 말했다. "귀하! 소생을 사귀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이오? 소생은 글과 시(詩)에는 문외한이고 오직 피만을 부르는 무인인데 말이오." 청의청년은 생긴 것과는 달리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하하하, 친구를 사귀는 데 무인과 선비가 어디 있소? 소생은 공자의 그 하늘을 찌르는 호기와 기백을 흠모할 뿐이오." 궁예린이 씨익 웃었다. "후훗, 그렇소? 한데... 역용을 하고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기만이 아니겠소? 귀하가 정히 딴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 아니오?" 청의청년은 내심 경악했다. '대단한 안목이군. 나의 역용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이자는 첫눈에 간파하다니.' 그는 더 이상 궁예린의 이목을 속일 수 없음을 느끼고 이내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깜박 잊었소이다. 소생은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오. 하나 형씨 앞에서는 당연히 진면목으로 대해야 함을 잊었던 것 같소." 그는 소매로 얼굴을 쓱 문질렀다. 그러자 그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수려한 이목구비에 은은히 풍기는 존귀한 기품. 특히 두 눈빛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혜지로 가득했다. 진정 뜻밖에도 청의청년은 바로 백리사헌의 아들 백리유정이었다. 백리사헌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가 궁예린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때 궁예린은 그의 수려한 모습에 적이 감탄하고 있었다. '뛰어난 용모군. 역시 범상치 않은 가문의 자손이 틀림없다. 한데 남의 이목을 피해야 하다니... 무언가 신비에 싸인 선비로군!' 그는 더욱 호감을 느끼며 나직이 웃었다. "후훗, 귀하가 역용을 한 까닭은 혹시 천하 여인들의 극성이 귀찮아서가 아니오?" 백리유정은 관옥 같은 얼굴을 은은히 붉혔다. "그렇다면 형씨는 아예 얼굴을 헝겊으로 가리고 다녀야 하지 않소?" "하하핫! 귀하의 언변에는 못 당하겠구려. 내 잠시 귀하가 선비임을 잊은 것 같소. 하하!" 궁예린은 호쾌히 대소했다. 그는 어느새 눈앞의 청년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왠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오랜 지기를 만난 듯 푸근한 감정이 솟는 까닭이었다. 궁예린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는 자신의 궁금증을 백리유정에게 물었다. "한데 어째서 소생을 친구로 사귀고 싶은지 그 진정한 목적을 듣고 싶소." 그 말에 백리유정의 얼굴에 한 가닥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곧 표정을 고치며 한차례 사방을 둘러보았다. "형씨, 이곳은 얘기할 곳이 못 되는 것 같소. 마침 소생에게 약간의 술과 마른고기가 있으니 추위를 피할 곳을 찾은 후에 말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궁예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사방은 먹물을 뿌려 놓은 듯 어둠에 묻혀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리유정의 의견에 동조했다. 만남! 궁예린과 백리유정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서로의 가슴에 호감을 심어 준 채... 2 동굴. 인공의 흔적이 없는 천연동굴이었다. 타타탁! 세차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두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궁예린과 백리유정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한 병의 술과 마른고기 몇 점이 놓여 있었다. 이미 몇 순배의 잔이 오간 듯 백리유정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엔 흥분과 놀라움의 기색이 역력했다. '굉장하군. 무(武)만 뛰어난 줄 알았지 문(文) 역시 이토록 깊이 파고들어 있는 줄은... 결코 나에 비해 아래가 아니다!' 그는 지금 궁예린의 박학다식한 학문에 놀라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안목이 정확했다. 우연치 않게 단우엽의 뒤를 따른 것이 이런 뜻밖의 재인(才人)을 만나게 할 줄이야!' 궁예린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백리유정과 이제껏 나눈 대화로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었다. '애석하군. 무(武)를 겸비했다면 천하를 오시할 재질인데!'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감탄해 마지않는 가운데, 문득 백리유정이 입을 열었다. "예린, 나는 오늘 새삼 하늘이 높음을 깨달은 것 같네. 사실 그 동안 나는 나의 학문을 은근히 뽐냈다네. 그러나 자네를 본 순간부터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자만했는지 알게 되었네." 궁예린은 호쾌한 대소로 답했다. "하하하... 유정, 그게 무슨 말인가? 나 역시 자네와 똑같은 심정이니 서로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들은 이미 통성명을 하고 난 사이였다. 또한 나이가 비슷함을 알고 그저 스스럼없는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 친구. 그것은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한 후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고 의외로 짧은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짧은 만남으로도 이미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끼고 친구로 맺어졌다. 일순, 궁예린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한데... 유정, 이제 자네가 왜 역용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나?" 백리유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네. 하나 그 전에 자네에게 먼저 듣고 싶은 것이 있네." "말해 보게." "예린, 자네의 신분 내력이 몹시 궁금하네." 그 말에 놀란 궁예린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백리유정을 주시했다. '나의 신분 내력을...? 하나 밀천무영세가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혈육이라 해도 비밀을 지켜야 하는 율법이 있다!' 그는 왠지 백리유정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유정! 나를 이해해 다오. 그것만은 밝힐 수가 없구나!' 그의 표정이 밝지 않음을 깨달은 듯 백리유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린, 자네가 거북스럽다면 구태여 밝히지 않아도 되네. 나는 그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네. 자네 같은 인재를 키운 곳이 결코 평범치 않을 것 같기에..." 궁예린은 빙긋 웃어 보였다. "아닐세, 굳이 밝히지 못할 것도 없다네. 다만 나의 가문이 너무 초라해서 망설인 것뿐이지. 사실 나는 대대로 농사를 짓는 가문에서 태어났네. 그것도 대하성의 작은 궁가장이라네." 찰나지간, 백리유정의 안색이 일변했다. '농사꾼의 가문 궁가장! 그렇다면 언젠가 아버님이 말씀하신 밀천무영세가...?' 백리유정, 그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때 궁예린은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어 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궁예린, 그가 다름 아닌 궁가장의, 밀천무영세가의 소가주였다니...!' 백리유정의 뇌리에 언제나 탄식하듯 털어놓던 백리사헌의 음성이 스쳐 갔다. －후유... 유정아, 이 아비는 언제나 너를 보면 천하기재를 잃어버린 일이 생각나 못내 아쉽기만 하구나. －천하기재... 그가 누군가요? －그 아이는 대하성의 궁가장에서 자란 아이로, 사실은 서림의 신화인 밀천무영세가의 소가주였다. －...! －이 아비는 그들을 멸문시킨 것이 못내 부끄러움으로 평생 남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하나, 이 모든 것은 다 너를 위해서였다! 백리유정은 격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태연히 입을 열었다. "대하성... 괜찮은 고진명읍이지. 한데, 그곳에 자네를 키울 만한 훌륭한 가문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인걸." 그러면서 그는 궁예린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궁예린은 여전히 모닥불에 시선을 준 채 나직이 말했다. "그분은 훌륭한 분이셨네. 아마 천하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 걸세. 그분의 성함은 궁사라 하네. 그리고 나 궁예린의 자랑스런 조부이기도 하지." 그 말에 백리유정은 확신이 섰다. '궁사! 틀림없다. 그는 궁가장의 장주이지만 실제로는 밀천무영세가를 이끄는 주인이라고 했다. 예린이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천고의 기재였을 줄이야...!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늘〔天〕... 하늘의 뜻이리라!' 그의 눈빛은 암암리에 떨리고 있었다. 백리유정은 자신의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짐짓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궁사라면...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네. 그곳에서 존경받는 대인이라 칭하는 것을..." 궁예린이 낮게 웃었다. "후훗! 역시 자네는 선비라서 다르군. 나의 조부님을 알고 있다니. 그랬네. 그분은 존경받는 어른이었네. 나는 그분의 자랑스런 손자임을 자부했었네. 하나..." 궁예린의 두 눈에서 돌연 무서운 살기가 폭사되었다. "하나... 그분은 통한의 죽음을 맞으셨네. 유정, 자네는 모를 것이네. 힘〔力〕! 그것이 갖는 의미를! 힘은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릴 수도 있네. 또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수도 있다네." 그에게서 뻗치는 살기에 백리유정은 전율했다. "예린, 힘이 그토록 무서웠던가? 내가 알기로 힘은 무의미한 인간의 야망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궁예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그것은 그 일면만 본 것이고 실상 그 힘이 지닌 여파는 굉장하다네. 그 좋은 예로 바로 나 궁예린을 이렇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 않았는가?" 백리유정은 그의 말 속에 서린 무서운 결심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자네는 복수를...?" 궁예린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나는 꼭 조부의 복수를 할 것이네. 그래서 힘의 무서움을 입증하고야 말겠네. 검(劍)을 든 자는 검에 죽고 피를 뿌린 자는 피에 덮여 죽는 것이 대우주의 철칙임을 나는 보여 주겠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확고한 신념이 깃들인 음성이었다. 백리유정은 내심 무거운 탄식을 내뱉었다. '아...! 아버님... 당신은 너무도 무서운 적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으며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모든 것을 앗아 간 그들이 누구인가?" 문제의 핵심을 묻는 그의 음성은 은연중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궁예린은 무거운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석하게도 그들을 나는 보지 못했네. 당시 나는 조부와 식솔들이 핏물 속에 잠겨 갈 때 치솟는 혈기에 정신을 잃었으니까." "음..." "하나 곧 알게 될 것이네. 당시 그 참변에서 살아난 사람이 한 명 생존해 있으니 말일세." 백리유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생자(生者)가 또 있다고? 분명 아버님은 궁사의 손자인 천하기재만 실종되고 모두 죽었다고 하셨는데... 결국 세상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인가?'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안 된다! 예린과 아버님의 싸움을 막아야 한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백리유정이 그렇게 결심을 굳히고 있는 동안 동굴 안에는 후끈한 열기가 치솟고 있었다. 3 탁! 타탁! 궁예린이 꺼져 가는 모닥불에 몇 개의 마른 나뭇가지를 던져 넣자 모닥불은 다시 황금빛으로 밝게 타올랐다. 그는 모닥불에서 백리유정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유정, 이것이 나의 모든 것이네." 생각에 잠겨 있던 백리유정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예린, 미안하네. 내가 자네의 아픈 가슴을 건드린 것 같군." 궁예린이 미소 지었다. "후후, 미안할 것 없네. 내가 보기에 자네 역시 나 못지않게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백리유정은 내심 흠칫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후유... 사실 그렇네. 원래 우리 유씨 가문은 기관매복(機關埋伏)과 토목지술(土木之術)로 일가를 이룬 가문이었다네. 그 내막을 이야기하자면 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군." 유씨 가문! 기실 백리유정은 궁예린에게 백리라는 성을 숨기고 외자 이름인 유정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백리유정은 곧 적당히 꾸민 이야기를 궁예린에게 들려 주기 시작했다. 사 년 전, 무하평엔 전대미문의 대성(大城)이 건립되었다. 바로 무림성으로, 백리사헌은 이곳을 철옹성으로 만들기 위해 매복과 기관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그 일을 위해 그는 천하에 이름난 기관토목의 대가를 대거 동원했다. 그 중엔 유정의 일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리사헌은 이미 자신이 구상한 계획대로 기관의 대가들을 작업시켰다. 방대한 건설 작업이었으나 계획대로 일은 진행되어 일 년 만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무림성은 그 유명한 개파대전을 성대하게 치른 것이었다. 하나, 무림성 건설에 동원된 기관토목의 대가들은 작업이 끝나면서 한 채의 전각에 갇혀 살게 되었다. 전각의 주위는 백리사헌이 직접 펼친 특수한 기관매복으로 완전히 폐쇄되어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빠져 나가려 해도 그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마침 유정은 학문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백리사헌의 눈에 들게 되었다. 해서 그만은 따로 격리되어 그 누구도 모르게 백리사헌의 딸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물론 첩첩 감시 속 생활의 연속이었고 특히 그의 거처 주위에 펼쳐진 기진(奇陣)은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정은 백리사헌의 딸을 이용하여 그곳을 탈출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그러고는 강호로 나와 역용을 하고 고인(高人)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아직도 무림성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의 조부와 부친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뛰어난 무학을 발휘하는 궁예린을 만난 것이었으니... 백리유정은 설명을 마치며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미안하다, 예린!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나를... 훗날 용서해 주기 바란다!' 그때 궁예린은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하면... 유정의 조부와 나머지 기관의 대가들을 찾는다면 무림성의 모든 것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샅샅이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두 사람이 잠시 각자의 생각에 몰두해 있는 가운데, 모닥불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문득 백리유정이 고개를 들어 궁예린을 바라보았다. "예린, 자네는 현 무림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궁예린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스스럼없이 답했다. "이 시대의 절대적 아성이라 생각하고 있네. 또한 백리사헌... 그 사람은 진정한 영웅이기도 하지." 백리유정은 일순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고맙다. 예린, 네가 그처럼 생각해 주다니...' 부자(父子)의 정(情)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는 궁예린이 자신의 부친을 좋게 말하자 은근한 자부심이 솟구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궁예린은 검미를 모으며 말을 잇고 있었다. "하나 절대(絶代)란 그 어디에서도 있어서는 안 되네. 그것은 흐르는 물을 막으면 썩는 이치와 같은 것일세." 백리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사실이네. 하나 무림성이 있기에 현 무림에 혈풍(血風)이 덜한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은 인정하지. 그러나... 그런 명분 앞에 수많은 뜻있는 무림인들이 당하는 아픔을 어찌 생각지 않을 수 있나?" "...!" "이것은 잠시 동안의 평화일 뿐이네. 무림성의 아성을 놓고 야욕을 이루려는 무리들이 반드시 생길 것이고, 또한 그들은 무림성에 대항하기 위해 무서운 힘을 기를 것이 분명해." 궁예린은 적이 무거운 음성을 계속 이었다. "만일 무림성이 그들과 충돌하는 일이 생긴다면 전대미문의 혈겁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네." 그의 설명은 너무도 논리정연했다. 백리유정은 잠시 할말을 잃었으나 곧 자신에게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거목은 원래 바람을 많이 타는 법이니까..." "물론 당연하지." 궁예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피의 륜〔血輪〕은 시세의 흐름이네. 그 시세의 흐름 속에 영웅과 마웅(魔雄), 간웅(姦雄)이 생기고 또 사라지는 법일세. 그것이 무림이거늘... 무림성이 그 시세의 흐름을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네. 또한 그것은 그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네." 백리유정은 궁예린의 너무도 정확히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암울한 기색을 띠었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아버님은 시세의 흐름만은 정복할 수 없다. 그것은 또한 그 도도한 흐름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막을 수 없을 만큼 벅차기 때문이기도 하지!' 그는 새삼 감탄 어린 눈빛으로 궁예린을 응시했다. '예린, 너는 진정 대단한 놈이다. 나의 의표를 정확히 찌르다니... 그렇기에 나 백리유정은 아버님의 죄를 다소라도 씻기 위해 무림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역시 궁예린과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백리사헌의 곁을 말없이 떠난 것인가? 백리유정이 말했다. "예린, 자네의 말이 맞네. 무림성은 모든 것을 정복했어도 시세의 흐름만은 정복할 수 없을 걸세. 그 좋은 예로 여기 자네 궁예린이 그 시세의 흐름 속에 표연히 나타난 것처럼 말이네." 궁예린은 머쓱히 미소 지었다. "자네는 나를 너무 치켜세우는군. 나는 내 의견이 그렇다는 것뿐일세." 백리유정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예린. 나를 속이지 말게. 자네의 가슴에는 커다란 웅지가 심겨져 있네. 그것은 중토의 물줄기를 자네의 손으로 트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지. 어떤가? 내 말이 틀렸나?" 궁예린은 내심을 꿰뚫어 보는 그의 말에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훗! 숨기고 싶지는 않네. 자네 말대로 내가 무림에 뛰어든 이상... 나는 가문의 복수와 함께 그 일을 하고 싶네. 비록 무림성에 비하면 미미한 존재이지만..." 백리유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나 역시 자네의 일을 한몫 거들고 싶네. 이것은 비단 무림성에 갇힌 부친과 조부 때문만은 아닐세. 나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나 뭔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기 때문이네." 궁예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맙네. 자네가 도와 준다면 나 궁예린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진배없을 것이네." 백리유정은 은은히 얼굴을 붉혔다. "그런 과찬은 듣기 거북하군. 나는 힘없는 선비에 불과할 뿐인데." "아닐세.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힘보다는 뛰어난 지혜와 용기라네." 백리유정은 궁예린을 똑바로 마주 응시했다. 허공에서 그들의 시선은 뜨겁게 얽혔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굳게 움켜쥐었다. "거대한 바위에 계란처럼 부딪쳐 보는 것이다." "힘이 다해 부서지더라도 시도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두 기재의 의기는 이렇게 굳게 뭉쳐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백리유정의 가슴은 아픔과 고뇌로 꽉 들어차 있었다. '아버님! 용서해 주십시오. 소자는 이렇게라도 해야 아버님을 구원할 것만 같습니다!' 백리유정, 그는 궁예린의 신분을 안 순간부터 더욱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부친의 야망을 철저히 분쇄하기로. 또한 부친의 과오를 자신의 힘으로 조금이나마 씻게 되기를 바라며 궁예린을 돕기로 한 것이다. 궁예린과 백리유정은 한동안 신뢰 넘치는 시선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백리유정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예린, 나는 믿는다. 천하가 자네를 축원할 것을! 하나, 나는 억울하게도 들러리만 서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궁예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 그때가 되면 설사 중원을 달라고 해도 나는 흔쾌히 자네에게 중원을 주겠네." 순간적으로 백리유정의 두 눈 깊숙이 기광이 스쳤다. 궁예린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싫네. 그런 사치는..." 궁예린은 여전히 유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무엇을 달라고 하겠는가?" 백리유정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네. 어쨌든 잊지 말게. 내가 무슨 부탁을 해도 한 가지는 자네가 꼭 들어줘야 함을!" "좋네! 내 목을 달라 해도 친구를 위해서라면 쾌히 주겠네. 하하핫!" 궁예린은 아무 의심도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차후, 그 맹세로 인해 야기될 엄청난 일을... 제 12 장 진실(眞實)은 다시 어둠 속에 가려지고... 1 절운협(絶雲峽). 언제나 뿌연 운무에 둘러싸여 있는 그곳은 항항 축축한 습기가 감도는 까닭에 독물(毒物)과 독사들이 들끓어 세인들의 발길을 거부하는 금역(禁域)이었다. 궁예린은 절운협으로 향하는 소로로 접어들며 간간이 나뭇가지를 꺾어 표식을 남기고 있었다. 워낙 길이 험하고 복잡한 탓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궁예린은 뒤따라올 백리유정을 위해 나뭇가지로 표식을 해두고 있는 것이었다. "유정... 그와 같이 간다면 이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데." 궁예린은 씁쓸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예린, 곧 뒤따라 절운협으로 가겠네. 나는 우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신 부친의 친구분을 만나 봐야겠네. 그분의 도움을 얻는다면 필시 커다란 힘이 될 걸세...! 백리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오늘 아침 궁예린과 헤어졌다. "그에게도 하루속히 무학을 전수해 줘야 할 텐데 굳이 거부를 하다니..." 궁예린은 어느새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던 궁예린은 문득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한데, 유정 그에게는 어딘지 어두움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결코 가문의 비극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필시 말못할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가 어찌 알겠는가? 백리유정이 겪는 갈등과 고뇌를...! 궁예린은 잠시 의혹에 잠겼으나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쳤다. "생각지 말자. 언젠가는 모두 알려질 일... 나 역시 피치 못할 나의 신분만은 그에게 숨겼지 않는가?" 언덕을 지나 구릉 위에 완전히 올라선 궁예린은 순간 신형을 우뚝 세우며 은은히 긴장을 돋우었다. 그의 전면으로 온통 희뿌연 운무에 싸여 있는 절곡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냉천이 있는 절운협에 도착한 것이다. "냉천! 내가 왔소. 내가 왔단 말이오!" 격동에 찬 음성을 터뜨리며 궁예린은 곧 신형을 날려 짙은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협곡(峽谷). 마치 호로병처럼 생긴 그곳에 한 채의 장원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 세웠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장원은 거대하고 화려했으며, 또한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견고했다. 대체 이 험준한 금역에 누가 이런 장원을 지어 놓은 것일까? 장원 앞에는 방원 삼십 장쯤 되는 거대한 암반이 놓여 있었고 한 사나이가 그곳에 우뚝 서 있었다. 싸늘한 안색의 중년인. 석상처럼 싸늘한 냉기를 뿌리며 서 있는 그는 바로 밀천무영세가의 밀영자(密影子)로서 가주의 분신 역할을 하는 냉천이었다. 어느덧 협곡에도 황혼이 비쳐 들고 있어 희뿌옇던 운무는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냉천은 오직 전면만을 주시한 채 도무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듯 그의 시선은 협곡의 입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문득 냉천의 입술이 열리며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소가주...! 이대로 삼 년을 더 속하는 기다림 속에서 살아야 합니까?" 그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궁예린이었다. "밀천무영세가는 이대로 맥이 끊어져야 한단 말입니까? 어찌... 삼 년이 지났는데도 오시지 않는 것입니까?" 궁예린이 밀천문에 들어간 지 벌써 삼 년. 냉천은 그곳이 삼 년에 한 번씩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궁예린이 밀천문의 모든 것을 성취했다면 벌써 나왔어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그 기한에서 이미 여러 달이 지났건만 궁예린은 아직도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냉천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으며 불안마저 싹트고 있었다. '혹시... 그 동안 무슨 일이...?' 냉천이 이렇듯 불안한 마음을 가누고 있을 때였다. "아버님, 바람이 차갑습니다.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의 등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냉천의 뒤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파리한 안색에 마치 얼음을 대하는 듯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그 모습은 흡사 냉천의 젊었을 때 모습을 다시 보는 듯했다. 냉천은 고개를 들어 서천으로 뉘엿뉘엿 기우는 잔양(殘陽)을 바라보았다. "벌써 오늘도 하루 해가 속절없이 저무는군. 알았다, 그만 들어가자." 그는 부드러움이 담긴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막 신형을 돌리려는 순간, 돌연 낭랑한 음성이 냉천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냉천, 섭섭하구려. 그 동안 나를 잊었다니..." 찰나지간 냉천의 신형에 벼락같은 전율이 일었다. '이, 이 음성은... 나를 이렇게 부를 사람은... 바로...' 그는 자신의 염원이 지나친 탓에 초저녁인데도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행여 그 꿈이 깨어질세라 천천히, 신중하게 신형을 돌렸다. 그러고 그는 보았다. 눈부신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훤칠한 백의미장부를. "소... 소가주...!" 냉천의 두 눈은 부릅뜨인 채 크게 파랑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형을 무너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소가주!" 눈물이 냉천의 시야를 가리며 궁예린의 모습을 희뿌옇게 만들었다. 그가 아무리 눈을 깜박거려 궁예린을 바로 보려고 해도 눈물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궁예린은 냉천의 가슴 뭉클한 뜨거운 충정을 다시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소, 냉천. 나 궁예린이 돌아왔소." 어느새 그의 손은 냉천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냉천... 많이 상했구려." 수만 마디의 말보다 그 단 한 마디가 궁예린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냉천은 이제까지의 온갖 시름과 고뇌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신 그의 가슴을 채우는 것은 벅찬 감회와 한없는 기쁨이었다. '소가주! 이처럼, 이처럼 훌륭히 성장하시다니... 가주님! 보십시오. 당신의 훌륭한 손자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소가주께서 돌아오시기만을 천지신명께 빌었더니 이처럼 훌륭해지셔서 오셨군요." "고맙소, 냉천!" 궁예린의 음성 역시 치미는 격정으로 은은히 떨리고 있었다. 냉천은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청년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놈아! 어서 인사를 드려라. 장차 네가 모실 밀천무영세가의 소가주, 아니 이제부터는 가주가 되시는 분이니라." 그러고 이번에는 궁예린에게 청년을 소개했다. "가주, 이놈이 속하의 단 하나뿐인 자식놈으로 냉혼(冷魂)이라 부릅니다. 차후 많은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냉혼...!" 궁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냉천을 많이 닮은 그 청년을 바라보자 냉혼이 그에게 공손히 대례를 올렸다. "속하 냉혼, 가주를 뵙습니다." 그의 부친만큼이나 싸늘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어깨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분이 아버님께서 그토록 기다려 오신 소가주...! 자격이 있다.' 궁예린의 전신에서 뻗치는 비범한 기도와 신비한 매력에 냉혼은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고 있었다. 그때 궁예린이 엄중한 음성으로 냉혼에게 말했다. "일어나시오. 궁가가 어찌 당신들의 인사를 받을 수 있겠소? 이런 예는 내가 해야 할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소." 동시에, 그의 소매가 가볍게 흔들리며 한 줄기 강기가 냉혼의 신형을 떠받쳤다. 냉혼은 까닭모를 오기로 안간힘을 다해 그 강기에 대항해 봤지만 그의 신형은 맥없이 일으켜지고 말았다. '훗! 이분 앞에서 힘을 시험해 보려는 내가 어리석지!' 냉혼은 내심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냉천의 싸늘한 눈빛에 한 가닥 부드러움이 피어올랐다. '녀석... 고집과 오기는 꼭 이 아비를 닮았군!' 아무리 냉정한 그였지만 자식이 아비를 닮은 것에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냉천은 곧 궁예린을 재촉했다. "소가주, 어서 들어가시지요. 소가주를 기다리는 괴물들이 몹시 기뻐할 것입니다." 궁예린은 일말의 의혹을 띠었다. '괴물들? 하면 이곳에 냉천 부자말고 또 다른 인물들이 있단 말인가?' 그가 장원을 주시하자 냉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소가주,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냉천이 냉혼과 함께 장원을 향해 앞서 걸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궁예린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침통한 기운이 감돌았다. '냉천... 고맙소. 당신의 충성을 어찌 갚아야 할지...' 전일, 궁사가 그에게 냉천의 신분을 밝힐 때, 냉천을 바라보는 궁사의 눈빛에는 오직 따뜻한 애정과 믿음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냉천의 존재가 궁사에게는 크나큰 의지가 되었으며 또한 냉천이 밀천무영세가에 바쳐 온 충정이 얼마만한 것인지 능히 짐작케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충정은 이제 이대(二代)에 걸쳐 궁예린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절운협. 황혼빛에 물든 운무가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비단 불어오는 바람 때문만은 아니리라. 2 대전(大殿). 여덟 개의 굵은 석조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대전이었다. 장중한 위엄이 깔린 대전의 한가운데 자리한 태사의에 궁예린이 앉아 있었다. '누구일까? 오늘을 기다린 충혼(忠魂)들이 이곳에 있다니...' 대전 안에는 궁예린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냉천은 그를 이곳에 안내하고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냉혼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일 각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가주! 밀천무영이십육살이 가주님을 뵙습니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돌연 대전 문이 활짝 열리며 일단의 인영들이 들어섰다. 모두 서른 명으로, 그들은 태사의 앞에 이르러 좌우 두 줄로 서며 깊숙이 부복했다. 그 중 스물여섯 명은 열세 명씩 각기 홍의와 청의를 입고 있었고 가슴에 상(象), 차(車), 마(馬), 졸(卒) 등의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흡사 장기판을 연상케 하는 그 모습은 바로 밀천무영세가의 최정예인 밀천무영이십육살의 독특한 모습이었다. 궁예린은 넋을 잃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밀천무영이십육살이...?' 냉천이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와 공손히 입을 열었다. "소가주, 이제부터 소가주께서는 밀천무영세가를 이끄실 가주이십니다. 이들은 전대 가주께서 오늘을 예견하시고 밀천무영이십육살의 혈족들 중에서 극히 뛰어난 재질을 지닌 자들을 은밀히 엄선하여 이곳에서 훗날을 대비케 한 것입니다." 그 순간 궁예린은 다시 한 번 조부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님께서...' 냉천의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가주께서 조부께 말씀드린 것에서 은밀히 진행된 안배입니다." 그랬다. 언젠가 궁예린은 궁사에게 밀천무영세가의 약점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궁사는 곧 냉천에게 지금과 같은 대비를 해놓으라는 명을 내렸고, 냉천이 그것을 이행한 것이다. 때문에 궁사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궁예린에 대한 걱정없이 담담히 미소 지으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궁예린은 격동 어린 시선으로 깊숙이 부복해 있는 밀천무영이십육살을 훑어보았다. 모두가 영기 발랄한 청년들로서 전대 밀천무영이십육살에 못지않게 비범한 기도를 뿜어 내고 있었다. 궁예린의 가슴은 뿌듯한 자부심으로 뜨겁게 타올랐다. '그래, 밀천무영세가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곳에 다시 모여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대전 안을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밀천무영이십육살의 맨 좌우측, 가슴에 '사(士)'라고 쓰인 황의를 입은 네 청년이 부복해 있었다. 하나같이 신태 비범한 풍모에 출중한 기태를 갖춘 청년들이었다. "너... 너희들은..." 궁예린은 너무 놀라 말조차 이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냉천이 미소 지으며 황의를 입은 네 명의 청년에게 말했다. "사대가신, 이 자리에서는 마음껏 너희들의 회포를 풀어도 좋다." 순간 네 청년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소리쳤다. "대... 대장!" "대장!" 그들은 바로 어릴 적 궁예린과 어울려 놀던 철산과 손비호, 유사릉 그리고 표빈이었다. 저마다 특이한 재주와 개성을 지닌 그들, 궁예린의 수족과 같은 그들이 건장한 청년으로 변모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밀천무영세가의 사대가신이라는 신분으로. 궁예린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뿌연 물기가 차 오르고 있었다. 그들에 대해 냉천이 설명했다. "가주, 사실은 이미 전대 가주께서 사대가신의 재목으로 어린 시절부터 이들을 가주의 주위에서 움직이게 했던 것입니다. 하늘의 도움인지 이들 역시 가주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다음 순간, 궁예린은 더 이상 격동을 참지 못하고 신형을 날려 사대가신에게로 달려갔다. "이 녀석들! 네놈들이 사대가신이 되다니..." 궁예린과 사대가신은 허공에서 굳게 손을 잡았다. "헤헷! 대장, 운명은 바로 이런 것인가 봐." 손비호는 뿌옇게 눈물이 서린 채로 익살맞게 입을 열었다. 표빈 역시 격동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대장! 우리는 대장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대장, 철산은 믿었다. 결코 대장은 우리를 두고 먼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 바보 같은 계집애 때문에 우리는 한참을 슬퍼했다." 우직한 철산 역시 더욱 거대해진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렁그렁 눈물을 담고 있었다. 그의 말에 궁예린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한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배꽃같이 아름다운 소녀, 바로 함소혜였다. '소혜... 그녀만이 이 자리에서 빠졌군. 그때 내가 죽은 줄 알고 몹시 슬퍼했을 텐데...' 그때 철산이 사뭇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대장! 우리 다시는 이런 슬픈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궁예린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철산, 무척 변했구나. 네가 이토록 심각한 얘기까지 할 줄 알다니." 그러자 손비호가 예의 버릇대로 불쑥 끼여들었다. "헤헷! 대장, 말 마라. 이 무식한 놈을 이만큼 가르치느라 이 비호의 머리털이 다 빠졌다." 순간 대전 안이 밝고 유쾌한 웃음으로 떠들썩해졌다. "와하하하...!" "하하... 그건 비호의 말이 맞다." 궁예린과 네 청년들, 그들은 이 순간 신분을 떠나 순수한 옛 친구로서 회포를 풀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가슴 따뜻한 장면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냉천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심 다짐했다. '백리사헌! 이 밝은 웃음이 네놈의 모든 것을 덮을 때 너는 밀천무영세가의 무서움을 깊이 깨닫고 한없는 후회 속에 빠질 것이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다려라! 네놈의 그 모습을 보러 냉천이 갈 때까지...' 대전. 젊음이 약동하는 그 속에서 냉천은 수백, 수천 번을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3 화르륵... 황촉불이 밝게 타오르는 실내. 탁자를 마주하고 궁예린과 냉천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동안 실내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궁예린은 그 동안 가슴속에 품었던 의문을 냉천에게 물었다. "냉천, 말해 보시오. 당시 혈겁을 일으킨 놈들이 누구였소? 그리고 할아버님을 해한 흉수는 누구요?" 냉천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무서운 살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냉천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려야지요. 가주께서는 당연히 복수를 하셔야 하고말고요." 그의 눈에서도 증오와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놈들은 당금 천하에서 가장 지탄받을 인면수심(人面獸心)을 지닌 놈들입니다. 속하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냉천은 말을 잇다 말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새삼 궁가장이 초토화되던 그날의 일이 생각나는 듯했다. '인면수심을 가진 자들...?' 궁예린은 내심 의혹이 일었으나 묵묵히 냉천을 주시했다. 드디어 냉천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이 일은 가주께는 큰 충격일 것입니다. 놈은 바로 현 무림의... 헉!" 돌연 냉천은 말을 멈추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의 두 눈이 부릅떠지고 꽉 다문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냉천!" 궁예린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냉천에게 다가가 그의 신형을 받쳐 들었다. 이미 냉천의 안색은 파리하게 죽어 있었고 입으로는 쉴새없이 핏물을 뿜어 내고 있었다. "냉천! 대체 어찌 된 일인가?" 궁예린은 어찌 할 바를 몰라 냉천의 몸을 흔들며 부르짖을 뿐이었다. 그때 냉천이 부릅뜬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손가락을 까닥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놈들은... 현... 무... 림..." 그리고 다음 순간, 냉천은 맥없이 손을 떨구고 말았다. 숨을 멈춘 것이다. 너무도 창졸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궁예린은 잠시 멍하니 냉천을 바라보았다. 냉천은 채 말을 끝맺지 못한 것이 원통한지 눈조차 감지 못하고 빈 허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냉천의 죽음이 궁예린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 당혹과 경악의 빛이 크게 번졌다. "냉천! 안 되오! 죽으면 안 되오, 냉천!" 그는 절규하듯 부르짖으며 냉천의 신형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그때 그의 외침을 들은 듯 냉혼이 방문을 열고 번개같이 뛰어들어왔다. "아... 아버님!" 그는 다급히 냉천의 곁으로 다가와 절규와도 같은 통곡을 터뜨렸다. "아버님! 정신을... 정신을 차리십시오. 아버님...!" 그러나... 죽은 자〔死者〕는 말이 없었다. 궁예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냉혼! 절대 이곳을 떠나지 말거라!" 싸늘히 말을 남긴 그는 이미 밖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궁예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없다! 누가 감히 나의 이목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다시 신형을 날려 장원 밖으로 향했다. "누구든 도망 못 간다!" 그의 가슴엔 무서운 살심(殺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감히 그의 앞에서 냉천을 죽인 자를 궁예린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이미 짙은 어둠에 둘러싸인 절운협에는 운무만이 살아 있는 생명체인 양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이미 백여 장의 거리를 돌아본 궁예린은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뇌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에 아차 싶었다. "이런 실수를...! 흉수는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놈이다. 그것은 곧 주위에 숨어 있었다는 뜻... 결코 도망을 갈 수는 없었다." 궁예린은 다급히 몸을 날려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그와 냉천이 대화를 나누었던 별채의 바깥에는 잘 가꾸어진 화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불현듯 궁예린의 시선이 화원가에 놓인 커다란 자연석에 머물렀다. 그는 그곳으로 다가가 자연석을 한쪽으로 밀쳤다. 그러자 능히 사람 하나는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구멍이 드러났다. 그것을 본 궁예린은 얼굴을 굳혔다. "놈은 교활히 귀식대법(龜食大法)을 써 이곳에 숨어 있었다. 그것도 이미 오래 전에 침투한 것 같군. 누구인가?" 그는 암울한 시선으로 별빛조차 없는 암천을 올려다보았다. "놈은 궁가장을 괴멸시킨 흉수를 너무도 잘 아는 자다. 또한 나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냉천을 살해해 그의 입을 막은 것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궁예린은 냉천의 존재를 아는 자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밀천무영세가에 속하는 자라 해도 냉천에 대한 비밀을 아는 자는 오직 가주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그자가 누구이기에 아무도 모르는 냉천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인가? 결국 흉수를 잡지 못한 궁예린은 힘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별채로 들어서자 부친의 시신을 부둥켜안은 채 오열하고 있는 냉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크흑... 아버님!" 냉혼의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궁예린은 슬픔에 잠긴 눈으로 핏물에 잠겨 있는 냉천의 참혹한 시신을 바라보았다. "냉천! 당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당신이 이처럼 통한을 안고 간다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오? 오늘을 위해 혈루를 흘리며 달려온 나는 무엇이란 말이오?" 그는 몹시 허탈했다. 아니, 이제까지 그가 노력해 온 것이 모두 허사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천살마겁흔의 저주에서 벗어났건만 이제는 모든 비밀을 간직하고 있던 냉천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때였다. 돌연 궁예린의 두 눈이 번쩍 기광을 뿜었다. 냉천이 꾸역꾸역 토해 낸 선혈 속에서 한 마리 곤충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핏물과 흡사한 새빨간 곤충이었다. 크기는 겨우 엄지손톱만할까? 그것을 확인한 순간 궁예린은 크게 놀라 소리치고 말았다. "혈맥은잠고(血脈隱潛蠱)!" 혈맥은잠고! 그것은 묘강(苗彊)의 습지에서만 서식하는 희귀한 고(蠱)가 아닌가? 혈맥은잠고는 오직 인간의 피만을 흡혈한다. 그것은 맨 처음 피를 마신 자와 영(靈)이 통해 그자가 내린 명령대로 움직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혈맥은잠고는 심장을 파먹어 상대를 즉사시킨다고 했다. 때문에 너무 극악한 수법으로 알려져 무림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실전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오늘 궁예린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으음..." 궁예린은 무겁게 침음했다. '완벽한 죽음을 위한 준비가 이토록 철저하다니! 할아버님을 해한 흉수가 대체 누구이기에...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인가? 어째서 내게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단 말인가?' 그랬다. 정히 흉수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다면 차라리 궁예린에게 살수를 쓸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암중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 혈맥은잠고를 사용하는 수고까지 하면서 궁예린 대신에 흉수의 정체를 알고 있는 냉천을 죽였다. 궁예린은 좀체로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의문을 풀어 줄 유일한 장본인인 냉천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버렸다. 궁예린은 곧 심중을 추스르며 냉천의 부릅뜬 눈을 감겨 주었다. "냉천, 비밀은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오. 나는 약속하겠소. 천하를 뒤져서라도 밀천무영세가를 참극으로 몰아넣은 흉수를 꼭 찾아내겠소...!" 그는 굳은 얼굴로 여전히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냉혼을 돌아보았다. "냉혼! 부친께서 평소 한(恨)을 품은 인물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냉혼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침통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었습니다. 부친께서는 저와 밀천의 형제들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소가주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 낫다고 하셨으니까요." 궁예린의 안색은 침중해졌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밀천무영세가의 식솔들이 무참히 당했는데 이들이 무슨 힘으로 흉수들에게 저항하겠는가?' 바로 그때, 계속 이어지는 냉혼의 말이 그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한 가지...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것이 있습니다. 잠마풍(潛魔風)이라고... 그곳을 입에 담으실 때면 항상 무서운 살기를 보이셨습니다." 궁예린은 흠칫 안색을 굳혔다. '잠마풍! 이 시대의 마(魔)와 죽음〔死〕의 바람이라는 신비 세력...' 불현듯 그의 두 눈이 번쩍 섬광을 뿌렸다. '그렇다! 그날... 머리에 은잠을 꽂은 백의인이 흉수에게서 명을 받고 있었다!' 궁예린은 흥분과 긴장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궁가장이 참화를 당하던 날 석동에서 본 천우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그것을 내가 왜 진작 생각해 내지 못했던가? 어쩌면 흉수는 잠마풍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은잠을 꽂은 백의인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다!' 냉혼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나... 부친께서 입에 담으신 잠마풍은 현 무림의 극악한 마도집단이기에 분노를 금치 못하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 말에 궁예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분명 이 일엔 잠마풍이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을 찾는다면 흉수도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내심으로 말을 이었다. '은잠을 꽂은 백의인! 그 역시 기필코 찾아야 한다!' 잠마풍, 그리고 천우. 궁예린의 첫번째 목표는 이렇게 이어졌다. 문득 궁예린의 얼굴에 의혹이 일었다. '그러나 냉천은 밀천무영세가를 친 흉수가 나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잠마풍, 그들이 나와 친근한 관계를 갖지는 않았는데...' 그는 머릿속이 실타래가 엉킨 듯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냉천... 그대는 나에게 너무 어려운 수수께끼를 남기고 간 것 같소." 궁예린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그의 안색은 밖의 어둠만큼이나 어둡고 무거웠다. 4 하나의 봉분이 장원의 뒤쪽 산기슭에 세워졌다. 바로 비명에 간 냉천의 무덤이었다. 무덤 앞에는 갓 만들어진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궁가장의 충성스런 가혼(家魂) 여기 잠들다. 궁예린 립(立).〉 그리고 그 앞에는 궁예린과 백리유정이 나란히 서 있었다. 궁예린은 지금 막 백리유정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것이 냉천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이네. 하지만 나는 궁가의 충혼의 죽음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네!" 그러나 그의 내심은 백리유정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유정, 미안하다. 잠마풍의 일은 오직 나 혼자만이 알아야 하기에 숨길 수밖에 없었다!' 백리유정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내가 어떻게 자네를 위로할 수 있겠나? 하나, 혈맥은잠고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겠네." 말은 궁예린에게 하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오직 땅 속에 누워있는 냉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냉천이라고 했소? 미안하오! 하나,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한 부득이한 행동이었음을 이해해 주시오. 훗날 당신도 알게 될 것이오. 내가 왜 그랬는가를...'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냉천을 암살한 인물이 바로 백리유정이었단 말인가? 잠시 동안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몰두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가슴에 품고 있는 비밀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문득 백리유정이 궁예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예린, 이제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궁예린은 여전히 무덤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결연히 입을 열었다. "유정, 걱정 말게. 나는 이번 일로 인해 나의 웅지를 꺾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나에게 더 강한 채찍질을 해주는 것 같네." 백리유정의 안색은 참담히 일그러졌다. '예린, 너는 역시 강한 녀석이다. 그러나 이 일로 네가 무림에서 손을 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바람이다. 훗날 파생될 결과가 나는 한없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또 하나의 이율배반적인 마음이었다. 이제 부친인 백리사헌이 흉수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백리사헌의 야욕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인물은 천하에 오직 궁예린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였다. 궁예린이 천하를 위해 나서 주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소리없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부친과 친구를 동시에 아끼는 백리유정의 진정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백리유정은 그런 마음을 결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궁예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역시 예린, 자네답군. 이제 그만 들어가세. 자네의 침통해 하는 모습을 냉천은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니..." "그래야겠지." 궁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 백리유정과 함께 신형을 돌렸다. 산을 내려가면서 백리유정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결심을 확고하게 굳히고 있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나는 최선을 다해 무림성을 붕괴시키는 데 앞장설 것이다. 그것만이 아버님을 구할 수 있는 길이며 아버님의 뜻을 돌릴 수 있는 길이다!' 무림성의 붕괴! 백리유정은 그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맹세했다. "예린, 무림성을 붕괴시키려면 첫째로 무림성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네. 그러기 위해서 자네는 한 여인을 얻어야만 하네." 진중한 음성이 단아한 실내를 울리고 있었다. 찻잔이 놓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궁예린과 백리사헌은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백리유정이 꺼낸 이야기에 궁예린은 의혹을 드러냈다. "한 여인을...?" 백리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내가 무림성에 있을 때 알아낸 것은 그것 하나였네. 그 여인은 타고난 미모와 능력으로 무림성에 대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걸세. 단, 그녀가 모르는 것은 성주인 승천무황에 대한 것뿐이라는 소문이네." 궁예린은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면... 그녀는 무림성의 중요 인물과 모두...?" "그렇네.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모든 정보를 빼내고 있어 중원 최고의 정보통이라고 알려져 있다네." "어찌... 그런 일이..." 궁예린이 못 미더운 표정을 짓자 백리유정은 싱긋 웃었다. "하하하,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네. 대륙을 장악한 인물들이 천하절색인 꽃을 꺾고 싶지 않겠는가? 자고로 영웅이 계집을 마다하는 법은 없는 것일세." 영웅(英雄)이 미녀(美女)를 찾는다. 그것은 고금의 통칙이기도 하지 않는가? 궁예린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인이기에..." "후훗! 그 여인은 천생의 우물(尤物)이지. 자네도 소문은 들었을 것이네. 중원에 하나의 거대한 유리벽이 있다는 것을." 순간 궁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쳤다. "유리대벽루(流理大壁樓)!" 백리유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녀는 바로 유리대벽루의 주인인 유리화(流理花)이네." 유리화! 그것이 문제의 여인의 이름이었다. 기실, 중원엔 그 어느 곳보다 잘 알려진 명소(名所)가 하나 있었다. 유리대벽루! 바로 그곳이었는데, 삼층 건물이 온통 유리로 만들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안에서는 밖이 잘 보이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다는 신비의 유리성. 그곳은 중원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천하제일의 기루(妓樓)였다. 각 층마다 백 명씩 천하 미희들이 배치되어 있어 신분에 따라 출입할 수 있는 층수가 구분되기 때문에 평민이나 범인들은 아예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곳, 유리대벽루의 주인이 바로 유리화였다. 일명 천하제일화(天下第一花)라 불리는 그녀는 천상천하의 우물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당금 황제의 이복동생인 소천왕(小天王)이 원래 그녀를 애첩으로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염기(艶氣)가 워낙 대단하여 끝내는 소박맞아 쫓겨났다는 것이다. 그 분풀이를 하듯 유리화는 천하제일기루인 유리대벽루를 세우고 천하의 이름난 미희들을 모아 중원 최대의 환락지로 꾸몄다. 유리화와 유리대벽루의 명성은 곧 중원 각지로 퍼졌고 천하의 한량들이 유리화를 꺾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가까이에서 본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그녀와 일단 동침을 해본 사람은 영원히 유리화를 잊지 못한다는 소문이었다. 5 설명을 모두 듣고 난 궁예린은 잠시 망연해 있었다. '그런 여인을 나보고 얻으라고...?' 그때 백리유정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데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혈문(血門)이라는 마문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네." "혈문?" 처음 들어 보는 이름에 궁예린은 의아해서 되물었다. "그곳은 금시초문인데...?" 백리유정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나 역시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네만... 현 무림에는 그 동안 무림성의 아성에 도전하여 그 권력을 이어받으려는 세력들이 은밀히 움직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혈문이라는 문파이네. 하나 중요한 것은 그 혈문이 바로 석년에 마도 제일이며 마도의 대종주로 추앙받던 칠절마군 담석강이 이룬 마천루의 잔당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네." 칠절마군 담석강. 그는 바로 궁예린의 생부(生父)가 아닌가?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궁예린은 나직이 그 이름을 되뇌일 뿐이었다. "칠절마군 담석강...!" 왠지 그는 그 이름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정확히 말해 무언가 마음이 끌리는 느낌이었다. 그것을 두고 바로 핏줄이 통한다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궁예린은 워낙 그 이름이 쟁쟁한 까닭이라고 스스로 일축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백리유정의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날 마천루의 위세와 기업을 잇는다는 의미로 혈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네. 즉, 피로 뭉쳤다는 뜻이지." "하면 마도천하(魔道天下)를 위해...?" "그렇네. 그들은 무림성을 붕괴시키고 마도천하를 구가하려는 속셈이라네." 궁예린은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다. "대단한 기염이군." "하나 그것은 폭풍의 한 단계에 불과할 뿐일세." 백리유정의 말에 궁예린은 적이 안색을 굳혔다. "폭풍의 한 단계? 그렇다면...?" 그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로 백리유정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궁예린의 시선을 받으며 그는 현 무림 정세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현 무림의 정세는 그 동안 무림성에 억눌렸던 세력들이 일시에 들고 일어난 난세(亂世)이기도 하네. 물론 이 모든 것은 무림성이 드러나기 십 년 전부터 시작된 움직임이지만..." 궁예린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열심히 백리유정의 말을 경청했다. 이제까지 궁예린은 무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터라 무림의 정세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때문에 백리유정의 설명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백리유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여러 세력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곳은 방금 얘기한 혈문과 자네역시 알고 있는 십인방,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놀랍게도 중원의 세력이 아닌 새외와 묘강, 천축의 집합체인 삼목천(三目天)이라는 곳이네." "삼목천...?" 궁예린은 그곳 역시 금시초문이었던지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백리유정이 그들에 대해 설명했다. "삼목천은 천축의 포랍존자(抱拉尊者)와 새외의 새북사사천(塞北死四天), 묘강의 구지마령군(九指魔靈君) 도비수(陶飛水)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세력이라네. 그들이 무림성을 붕괴시키기 위해 힘을 합쳤다는 것이네. 한데, 중요한 것은 이미 삼목천의 마수(魔手)가 중원 구석구석에 퍼져 있다는 사실이네. 그것도 오래 전부터."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절대(絶代)를 자랑하는 무림성이 존재하는 중원에 이방인의 세력이, 그것도 미증유의 세력으로 폭풍을 일으키고 있다니. 궁예린은 은연중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일순, 그는 두 눈에 이채를 담고 백리유정을 주시했다. "그렇다면 무림성은 그들의 야욕을 미리 분쇄한 것이기도 하지 않는가?" 백리유정은 묵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할 수 있네. 승천무황은 이미 삼목천의 가공할 잠재력을 느끼고 기다리고 있는 셈일세." "기다린다고...?" "틀림없이 그는 기다리고 있는 것일세. 그것은 그가 진정한 강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지!" 백리유정의 확신 어린 음성에 궁예린은 내심 경악과 경탄을 동시에 터뜨렸다. '진정한 강자! 대단하다. 진정 최강자답군. 상대가 있는 강자... 그것을 느꼈기에 힘이 커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인가? 백리사헌, 그가 그 정도로 호쾌하고 대범한 인물이란 말인가?' 궁예린이 이렇듯 뇌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그의 심각한 표정을 바라보며 백리유정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예린, 자네 역시 먼 훗날 그를 보게 될 것이네. 자네가 웅지를 품고 있는 이상은. 그때가 오면 자네도 느낄 것이네. 나 유정이 왜 이토록 스스로를 왜소하게 느끼는지..." 궁예린의 가슴속에서 불끈 호기가 치솟았다. '겨뤄 보고 싶다. 모든 것을 떠나 무인(武人)으로서...!' 그는 진정으로 백리사헌과 호쾌한 한판 승부를 벌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그럴 것이라는 확신과 자신을 가졌다. 그때 백리유정의 음성이 그의 주의를 환기시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이것이 현 중원 정세의 모든 것이네. 또한 내가 무림성에서 얻은 모든 것이기도 하지." 궁예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고맙네, 유정. 무림성과 십인방, 혈문, 삼목천... 실로 기라성 같은 세력들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니 벌써부터 피가 끓는 느낌이네." 백리유정은 반짝 기광을 빛냈다. '대단한 호기로군. 천하에서 이런 호기를 뿌릴 사람은 오직 단 두 사람뿐일 것이다. 바로 나의 부친과 예린...!' 그가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궁예린은 힘있는 음성을 잇고 있었다. "승천무황 백리사헌! 나 궁예린은 모든 것을 떠나 무인으로서 그에게 존경을 보내는 바일세. 그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영웅일 것이네. 결국 지금까지는 진정한 강자의 상대를 만들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했다는 뜻이 되니까."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백리사헌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 말에 백리유정은 싱긋 미소 지었다. "예린... 그것을 아는 자네도 역시 영웅일 것이네." 궁예린도 씨익 마주 웃어 보였다. "후훗! 아직은 이르네. 영웅, 진정한 영웅은 오직 한 명뿐이네." "...!" "나 궁예린... 이 대륙을 놓고 그들 거대한 세력과 한판 승부를 벌일 것이네." 그 순간 궁예린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도는 흡사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만큼 강렬했다. 그는 백리유정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유정, 나는 믿네. 자네가 내 옆에서 도와 주는 한 승부는 나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그의 진심 어린 음성에 백리유정은 고개를 젖히며 낭랑히 웃었다. "하하하! 예린, 나는 힘이 무엇인지 모르는 선비일 뿐이네." 궁예린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자네는 이미 그들 모두에 대해 대략 조사를 하고 있지 않았나? 그것은 곧 상대는 나를 모르나 나는 상대를 안다는 뜻이네. 어떤가? 내 말이 확실하지 않는가?" 순간적으로 백리유정은 할말을 잃었다. '과연... 예리한 통찰력이군!' 궁예린의 눈은 정확했다. 기실 백리유정은 부친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혈문과 십인방, 특히 삼목천에 대해 은밀히 조사를 했고 그것을 지금 궁예린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궁예린은 나름대로 상념에 잠겨 있었다. '유정... 언젠가는 너의 모든 것을 털어놓기를 기다리고 있겠다. 너는 결코 평범한 선비가 아닐 것이다. 하나, 너의 진정한 우정만은 나 궁예린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는 백리유정의 충고를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렸다. '승부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기필코 한 여인을 얻어야 한다. 유리화, 바로 그녀를...!' 유리화! 문제의 관건은 바로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제 13 장 유리대벽루(流理大壁樓) 1 희다. 아니, 희다 못해 투명한 전각이 우뚝 서 있었다. 유리처럼 투명하고 흰 거대한 삼층 전각. 하나의 거대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유리대벽루(流理大壁樓)〉 바로 천하제일기루라는 유리대벽루였다. 이미 야심한 밤이건만 이곳은 더욱 찬란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불빛은 실로 장관이었다. 또한 층마다 호화찬란한 오색등이 장식되어 있어 보기만 해도 황홀한 환상에 빠질 듯했다. 그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구경이나 실컷 하자고 모인 구경꾼들이었다. 그러고는 유리대벽루에 들어가는 인물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렇듯 천하의 한량과 호색한들의 동경을 받고 있는 유리대벽루를 멋들어지게 만들고 있는 요소 중에 한 가지는 그곳이 천하팔대호(天下八大湖)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동정호(洞庭湖)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투명한 유리성이 마치 오작교와 같은 난간에 연결되어 수면에 떠있었다. 그 광경은 가히 천하명물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삼층 누각. 유난히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는 이곳은 유리대벽루의 주인인 유리화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지극히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으나 이곳에 와 본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으나 안에서는 밖이 잘 내다보이는 위치에 동정호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창이 나 있었다. 그곳에 지금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매미 날개와도 같은 망사의를 걸치고 있는 그녀는 대략 이십칠팔 세의 나이로,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 정갈한 이마, 그리고 먼 능선처럼 곱게 휘어진 아미와 적당히 솟은 콧날... 꽃잎을 문 듯 붉은 입술은 너무나도 육감적이었다. 더욱이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유난히도 반짝이는 것이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더욱 깊은 찬사와 탄성이 터져 나올 천하제일의 미녀. 그녀는 바로 이곳 유리대벽루의 주인 유리화였다. 나이 십팔 세에 소천왕의 애첩이 되었으나 유난히 강한 염기(艶氣)로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는 여인. 그리고 이제는 천하의 뭇 영웅들을 치마폭 하나로 휘두른다는 천하의 우물(尤物)인 그녀였다. 엷은 망사의는 한창 무르익은 그녀의 풍염한 육체를 고혹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순간, 유리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운 아미를 찌푸리고 있었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동정호의 수면에 떠 있는 수많은 배들 중에 가장 화려한 한 척의 유람선이었다. 어찌나 호화스럽던지 고관대작이나 왕후장상의 배일 듯싶었다. 문득 유리화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나직하면서도 청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괴이한 일이야! 열흘 동안 계속 한곳에 머물며 이곳을 주시하고 있으니... 분명 고귀한 집의 자손이거나 명문대가의 인물임은 틀림없는데..." 그녀의 두 눈이 영롱한 빛을 뿌렸다. 그것은 그녀가 유람선에 대해 짙은 호기심이 일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호화로운 유람선은 열흘 동안이나 유리대벽루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줄곧 유리대벽루만을 주시한 채. 또한 유람선 위에는 기골이 장대한 청년과 준수한 모습의 청년들이 공손히 시립해 있었다. '분명 지체 높은 인물이거나 상당한 부(富)를 지닌 자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을 거야!' 유리화의 그런 생각은 결코 무리가 아닌 것이, 선상에 시립해 있는 네 청년들은 모두 비범한 모습에 극히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람선 위. 네 청년들은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시립해 있었다. 비록 일신에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있었으나 그들은 궁예린의 그림자나 진배없는 철산과 손비호, 표빈, 그리고 유사릉이었다. 이때, 유람선 내의 한 선실에선 궁예린이 뒷짐을 진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언인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듯 그의 얼굴에는 곤혹의 기색이 역력했다. "후유! 묘책이 없군. 유리화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일단 성공했는데 그 다음이 문제이니..." 궁예린은 설레설레 고개마저 내저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여인에 대한 연구도 해둘 것을...! 여인을 다루는 법만 알았지, 마음은 어떻게 정복해야 하는지 도통 방법이 떠오르질 않으니 답답해 미치겠군." 그는 원망 어린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유정, 자네는 확실히 너무도 어려운 문제를 낸 것 같네." 마치 그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는 백리유정의 짓궂은 음성이 스쳐 가고 있었다. －하하하! 자고로 영웅을 사라지게 만든 인물은 여인임을 알아야 하네.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여인부터 정복해야 해! 더욱이 유리화, 그 여인은 무림성과 혈문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알아야 하네. 이 일은 자네에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올 일이니... 그녀를 완전무결하게 정복해야 할 것이네. 하하하, 자네가 부럽네. 님도 보고 뽕도 따게 생겼으니 말일세! 궁예린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대체 생면부지의 여인을 어떻게 완전하게 정복한단 말인가? 무엇으로 나의 존재를 유리화, 그녀의 가슴에 강렬하게 심어 주느냐 말이다!" 그의 언성은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다. 열흘 동안이나 그 문제를 가지고 고심하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부아가 치민 것이다. 그때 궁예린의 푸념이 밖에까지 새어 나갔는지 철산이 굵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장!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다." 철산은 여전히 궁예린을 예전의 칭호대로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나머지 세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궁예린의 명에 의해서였다. 궁예린은 조부와 궁가장 식솔들의 넋을 위로하기 전에는 결코 밀천무영세가를 입에 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망혼인(亡魂人)이라 칭했다. 혼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사대가신은 망혼사인(亡魂四人)으로, 밀천무영이십육살은 망혼이십육살이라 개칭했다. 그것은 밀천무영세가를 완전히 이루기 전에는 자신들의 혼을 절대 찾지 않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였다. 궁예린은 철산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을 느끼며 급히 입을 열었다. "방법? 철산, 무엇이냐? 어서 말해 보아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철산이 해괴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헤헷! 다른 것이 아니고, 내가 예전에 들은 말인데 여자와 북어는 두드릴수록 맛이 난다고 했으니 그저 마구 두들기는 거지 뭐!" 그 말에 궁예린은 기가 막힌 듯 할말을 잃었다. '크으... 철산에게 물어 본 내가 잘못이지!' 밖에선 손비호의 빈정거림이 들려 오고 있었다. "이놈아! 입이나 닫고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나서긴 왜 나서 갖고 대장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드냐?"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궁예린의 두 눈이 돌연 예리한 광채를 발했다. "매! 그것은 진저리쳐지는 일이 아닌가? 무릇 어떤 여인이라도 폭력은 싫어한다." 그의 얼굴은 점차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공포, 진저리쳐지는 공포로 저 여인의 가슴에 나의 존재를 심는 것이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유리화의 염기는 이미 극에 이르렀기에 무엇인가 색다른 경험을 음미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천생의 우물이기 때문이지!" 궁예린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찰나간에 그의 입에서 낭랑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됐다! 배를 유리대벽루에 대도록 해라." 그러자 선실 밖에서는 모두들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오직 철산만이 득의양양한 기색으로 우쭐거리고 있었다. "흐흣! 그것 봐라. 대장은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배는 쏜살같이 유리대벽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2 상아빛의 희고 고운 손이 한 장의 서신을 들고 있었다. 〈루주(樓主)! 소생은 열흘 동안 눈이 빠질 정도로 루주를 바라보았소.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유리뿐, 이제는 더 이상 루주를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소생의 눈은 부르터 진물이 흐르고 있소. 해서, 더 이상 루주를 쳐다볼 수 없게 된 소생의 몸은 루주 앞으로 달려가게 되었소. 부디 루주를 사모하는 소생에게 한 방울의 옥수(玉水)로써 소생의 눈과 마음을 씻어 주기 바라오!〉 그것은 기막히게 유치한 사랑의 편지였다. "호호호!" 유리화는 눈물이 나올 만큼 오래도록 웃고 또 웃었다. 이제껏 수많은 석학과 고인들의 손으로 쓰여진 연서만을 받아 본 그녀는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서를 읽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호호호! 대단한 가문의 자제나 위엄을 떨치는 고관대작들과는 너무도 상반된, 품위없는 연서야." 유리화는 자신의 상상이 빗나갔음에 더욱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편지가 열흘 동안이나 자신을 지켜본 유람선에서 온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간신히 웃음을 그친 유리화는 밖을 향해 말했다. "얘들아! 그 사람을 들여보내라.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인지 직접 만나 보겠다." 놀랍게도 까다로운 조건이 걸려 있는 유리화와의 대면은 이 순간 어처구니없는 연서 한 장으로 쉽게 통과되고 있었다. 유리화에겐 진정 색다른 것이 통하리라는 궁예린의 짐작이 들어맞은 것인가? "호호호, 대체 어떤 한량인지 궁금하군." 유리화는 아직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짙은 호기심과 미소가 한데 어우러지자 그녀의 얼굴은 한층 더 황홀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때 스르륵, 문이 열리며 한 백의미공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화는 웃음기를 거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미공자가 있다니...'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한동안 궁예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궁예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리화를 대하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마저 느끼고 있었다. '으음... 과연 유정의 말대로 천상천하의 우물이군!' 더욱이 얇은 망사 사이로 내비치는 풍염한 여체는 더욱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유리화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공자, 이 편지는..." 궁예린은 내심을 감춘 채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루주. 당신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소생이 필(筆)을 든 것이오." 무뚝뚝하게 느껴질 만큼 무심한 음성이었다. 유리화는 편지와는 대조적인 그의 태도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곧 본래의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와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진정 대단하시군요. 천첩은 오늘날까지 이처럼 거창한 연서는 받아 본 적이 없어요." 궁예린은 짧게 대꾸했다. "과찬이오." "호호호! 아니에요. 천첩은 이제야 느꼈어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계책이었음을...! 그런 면에서 당신은 천첩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 같군요." 유리화는 살짝 전신을 뒤틀며 교태 어린 몸짓을 했다. 망사의 속에서 풍만한 가슴이 흔들리며 무르익은 체향이 물씬 풍겨 나왔다. 궁예린은 재차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으... 죽여 주는군. 이런 미녀를 공포로 다스려야 하다니.' 그때 유리화는 연신 즐거운 교소를 터뜨리며 밖을 향해 명을 내리고 있었다. "호호호, 얘들아!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오셨으니 주안상을 최상품으로 준비해 올리거라." "예." 문밖에서 한 여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유리화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궁예린을 바라보았다. "호호호, 앉으시지요. 당신은 천첩의 마음을 잘 아시니 틀림없이 천첩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잘 아실 거예요." 궁예린이 말없이 자리에 앉자 유리화는 살랑거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달콤한 육향이 훅하니 궁예린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유리화의 감미로운 속삭임이 그의 귓전을 간지럽게 파고들었다. "오늘은 무조건이에요. 그 이유는... 천첩의 마음을 잘 아는 당신이니 그만큼 자신이 있으시리라 믿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광채를 띤 시선으로 그를 그윽이 올려다보더니 급기야는 그의 가슴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실로 아찔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궁예린은 와락 그녀를 품에 안고 싶은 욕망을 초인적인 인내로 극복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끝장이다!' 그는 이를 악물며 유리화에게서 슬쩍 신형을 떼었다. 그러고는 예의 무심하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루주, 이제 됐소. 당신의 모습을 보니 소생의 눈이 다 나은 것 같소. 내일 눈의 아픔이 사라지는 대로 이 시각에 다시 오겠소." 유리화는 자신이 텅 빈 허공에 기댄 것을 느낀 순간 그 음성을 들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안색은 대번에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무... 무엇이라고 하셨나요?"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여 물었다. 그러나 궁예린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태도와 음성으로 정확하게 말했다. "그럼 내일...! 루주의 말대로 소생은 확실히 루주의 마음을 알고 있소. 또한 자신도 있소이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신형을 돌려 문밖으로 성큼 걸어 나갔다. 유리화는 그대로 넋을 놓고 말았다. 이제껏 숱한 영웅호걸들을 대해 왔지만 그처럼 무뚝뚝하고 차가운 남자는 없었다. 아니, 그녀의 상식으로는 어떤 강심을 가진 사내라도 그녀 앞에선 촛농처럼 흐물흐물 녹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었다. 실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서를 보내 온 그 사내는 마치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유리화는 자존심이 상했다. 상해도 이만저만 크게 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 이럴 수가! 이 유리화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세상에 그런 말 뼈다귀 같은 녀석이 다 있담!' 유리화는 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타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루주님, 이 술상을 어디에 놓을까요?" 어느새 들어온 시비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시비의 손에는 푸짐하게 차려진 술상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보자 유리화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아무 데나 놔두거라!" 그녀가 빽 소리치자 시비는 얼른 술상을 내려놓고 방을 나갔다. 자칫 그녀의 화가 자신에게로 돌아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서서 방을 나서는 그녀의 입가에는 금시라도 터져 나올 듯한 웃음이 꾹 베어물려 있었다. '호호호, 정말 멋진 공자님이야. 천하에 저 콧대 높은 루주의 넋을 단번에 빼놓다니...!' 시비가 나가자 유리화는 술상 앞으로 다가가 술병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흥! 거지 같은 녀석. 고상한 척은 혼자 다하다니! 연서가 하도 애절해서 생각해 줬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내일 오겠다고?" 그녀는 홧김에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탁! 술병을 내려놓은 그녀의 얼굴은 금세 도화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한층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누구 맘대로...? 흥! 두 번 다시 내 방엔 발도 못 들여놓게 할 테다. 두 번 다시!" 유리화는 채 사그라들지 않은 분노로 쌕쌕거리다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언제 놔둔 것인지 한 장의 양피지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분명 궁예린이 남기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유리화는 급히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루주! 분위기란 기다림 속에서 더 뜨거워지는 것을 어찌 모르시오?〉 양피지엔 단 두 줄의 글씨만이 쓰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터질 듯 끓어오르던 분노의 감정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지고 대신 그녀의 가슴에 자리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호호호! 그래,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여인을 알아도 너무 잘 알고 있으니." 언제 화를 내고 욕을 했나 싶게 유리화의 표정은 백팔십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녀의 두 눈 또한 꿈을 꾸듯 몽롱해졌다. "괜찮아. 용모도 준수하고 색도(色道)도 알고, 더욱이 나의 마음을 불태우는 재주도 있어." 술기운 탓일까? 유리화는 전신에 꿈틀거리는 뜨거운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틀림없이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그런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밖을 향해 말했다. "청(淸)이야! 오늘부터 내일 이 시각까지 누구도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해라." "예! 알겠사옵니다." 시비는 문밖에서 대답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상한데? 분명 길길이 뛰어야 옳은데 말이야!' 분명 조금 전까지 유리화가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그녀는 나긋나긋한 유리화의 목소리에 내심 의아함을 느꼈다. "호호호, 멋진 공자야. 어서 내일이 왔으면...!" 유리화는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내일을 기다렸다. 더 정확히 말해 궁예린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었다. 천하제일화 유리화. 이 천생의 우물인 그녀가 단 한 사내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궁예린의 계획이 성공한 것인가? 3 쏴아아...! 물방울 쏟아지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 안. 유리화는 전신에 물을 끼얹은 후 욕조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욕조는 새하얀 대리석이었다. 하지만 유리화의 뽀얀 허벅지에 비하면 탁한 느낌이었다. 찰랑! 욕조에 담긴 맑은 물이 물결치며 향긋한 향취를 풍겼다. 유리화는 다시 한 발을 욕조 안에 들여놓았다. 곧 그녀의 허벅지가 물에 잠기고 신비의 삼각지대에 이어 크게 부풀어 오른 두 가슴을 지나 마침내 우아한 선(線)을 이룬 목덜미까지 욕조 속에 잠겼다. "아...!" 유리화은 두 눈을 스르르 감으며 나른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섬섬옥수로 물을 퍼 전신에 뿌리며 몸을 구석구석 닦기 시작했다. 참으로 눈알이 빠질 만큼 기막힌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무르익을 대로 익은 농염한 여체는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 황홀한 윤기를 뿌리고, 여인의 섬섬옥수는 스스로 전신 구석구석을 스치고 있었으니... 문득 유리화는 가볍게 젖가슴을 쓸어 내렸다. "으음..."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신음성이 터졌다. 굳게 감겨 있는 그녀의 두 눈에 하나의 얼굴이 투영되듯 떠올랐다. 바로 준미 절륜한 궁예린의 모습이었다. "그분이 오실 시각이 되었어..." 이제는 그를 부르는 호칭마저 바뀌어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얼마 후면 궁예린이 오겠다던 바로 그 시간인데... "아... 으음...!" 유리화는 전신을 쓰다듬으며 스스로 도취된 듯 연신 비음을 흘렸다. 그녀는 단 하루 만에 기다림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 부풀 대로 부푼 가슴을 간직한 채 깨끗이 몸을 가꾸고 있었다. 바로 궁예린과의 극(極)에 달한 만남을 기대하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욕실 문이 활짝 열렸다. "누... 누구냐?" 유리화는 환상에서 깨어나 화들짝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침입자는 아무 대꾸도 없이 그녀 앞으로 성큼 다가섰고 유리화의 크게 떠진 두 눈은 이내 안도의 빛을 띠었다. "아... 당신이셨군요." 그녀의 전면에 궁예린이 우뚝 서 있었다. 유리화의 황홀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그의 눈빛은 담담하기만 했다. 뚫어질 듯 주시하는 궁예린의 눈길에 유리화는 사뭇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이... 이곳은 당신이 올 곳이 아니잖아요." 동시에 살짝 나신을 비트는 것이 또한 기막힌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가슴은 이미 흥분과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렇다. 내가 왔다. 당신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당신! 내가 어째서 너의 당신이냐?" 궁예린의 입에서 뜻밖에도 얼음처럼 싸늘한 음성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욕조 속으로 들어섰다. "무, 무슨...?" 유리화의 얼굴에 크게 당황한 빛이 떠오르는 순간, 무딘 음향과 함께 그녀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아악!" 유리화는 얼굴을 감싸며 자지러지는 비명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팍! 퍼억! 궁예린의 주먹과 발은 무지막지하게 유리화의 나신을 치고 때리기 시작했다. "악! 아악... 왜...!" 유리화는 반항할 겨를도 없이 졸지에 매를 맞으며 연신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궁예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구타하는 일에만 열중해 있었다. 이유도 없었다. 그저 건드리기도 황송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체를 폭력으로 유린할 뿐이었다. 이것이 유리화가 그토록 꿈꾸며 기다려 온 색다른 일인가? 이것이 궁예린이 유리화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심어 주는 방법이었단 말인가? 유리화는 이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 세상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너무도 분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몸인 것도 잊은 채 벌떡 일어섰다. "왜... 왜 때리는 거야? 악!" 퍽! 파팍! 궁예린은 그녀가 입을 열 틈도 주지 않았다. 유리화의 전신에 쉬지 않고 손발을 작렬시키며 궁예린은 무심히 말했다. "유리화, 그대는 분명 색다른 것을 원하지 않았던가?" 그 말에 너무 놀란 유리화는 할말을 잊은 채 망연한 표정을 띠었다. '이... 이것이 색다른 것이라고...? 아니야. 이것은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야.' 그런 중에도 그녀의 머리와 가슴, 전신 곳곳에 궁예린의 주먹이 작렬하고 있었다. '악! 이러다간 맞아 죽겠다!' 다음 순간, 유리화는 비명과 함께 크게 소리질렀다. "악! 사람 살려...!"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와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밖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려 오지 않았다. 유리화의 귓전으로 궁예린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파고들었다. "후훗! 유리화, 고개를 들면 그 얼굴이 망가진다." 유리화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얼굴이...' 여인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던가? 더욱이 그녀는 얼굴을 밑천으로 유리대벽루를 이끌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얼굴을 감쌌다. '읍! 으읍...!' 그녀는 이제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두 손으로 소중한 얼굴을 감싼 채 떨고 있는 그 모습은 흡사 비맞은 강아지 같았다. 그런 그녀를 어느 누가 천하제일화라 할 것인가? 퍽! 퍼퍽! 궁예린의 무지막지한 폭력은 한참이나 계속되었고 유리화의 옥 같은 나신은 온통 시퍼런 피멍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미, 미친 거야. 이놈은 미쳤어... 오, 하늘이여! 제발 살려 주소서...' 유리화는 전신이 으깨지는 고통 속에서 내심 부르짖었다. 더 이상 고통을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고개를 들고 궁예린을 바라보았다. "으윽... 제발... 그만..."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악!" 유리화는 눈앞에 불꽃이 터지는 것을 느끼며 콧등을 움켜쥐었다. 주르륵...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유리화! 내가 뭐랬느냐? 얼굴이 망가진다고 하지 않았느냐?" 궁예린의 너무도 담담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유리화는 정신마저 가물가물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까지 매가 이토록 무서운 것인 줄 몰랐다. 급기야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무서운 공포만이 자리잡게 되었다. '나는...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으... 살려 주세요... 제발..." 궁예린은 여전히 손발을 쉬지 않으며 말했다. "염려 마라,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하나 너는 더 맞아야 돼." 그 말에 그녀의 전신에서 힘이 쫙 빠졌다. 더 이상 비명을 지를 기력조차 없는 그녀는 맥없이 나신을 늘어뜨렸다. '진짜 죽나 봐...' 그때, 궁예린의 움직임이 예고도 없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유리화의 전신을 뒤흔드는 고통도 일시에 멎었다. '살았다. 이제는 살았어...' 유리화가 내심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궁예린이 그녀의 축 늘어진 나신을 내려다보며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다시 오겠다, 유리화!" 그러고는 이내 욕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유리화는 전신이 부서지는 듯 되살아나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다시... 오겠다고...?' 그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공포의 충격을 안겨 주었다. "으음..." 그녀는 미처 신형을 일으켜 세울 틈도 없이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그 아름답던 나신엔 여기저기 피멍이 맺혀 있었고 코에서는 붉은 피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정 그것이 그녀가 기다린 놀랍도록 새로운 것이었는가? "대장! 어찌 여인을 그토록 무지막지하게 때릴 수가 있어?" 철산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궁예린을 새삼 주시했다. 궁예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후훗! 이것이 유리화, 그 여인에게 확실하게 나라는 존재를 인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철산, 네가 말했지 않느냐? 자고로 여자는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그 말에 철산은 그만 입을 다물고 궁예린을 마치 괴물 보듯 바라보았다. 그때 손비호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헤헷! 과연 우리 대장이다. 유리화, 그 우물은 이제 대장을 뼛속 깊이 새기겠군." 궁예린은 씨익 웃어 보였다. "훗! 비호, 아직 멀었다. 그녀에게 나를 확실히 인식시키려면." 순간 철산은 흠칫 놀란 기색을 띠었다. "헛! 대장, 그럼 또..." "당연하다. 중도에서 손을 뗀다면 아니 한 것만 못하니... 유리화의 마음에 이 세상 어디에 숨어도 나의 눈이 있음을 인식시켜 주겠다." 궁예린의 말에 이번에는 철산을 비롯한 네 명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이제 궁예린보다는 오히려 유리화가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유리화... 그녀는 이제 죽었다. 대장은 한번 한다면 꼭 할 것이니...' 4 여인에겐 비밀이 많다. 특히 귀중한 물건은 자신만이 아는 곳에 꼭꼭 숨겨 두기를 좋아한다. 유리화 역시 그런 여인 중에 한 명이었다. 석옥.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밀실이었다. 그러나 주위에 진열되어 있는 갖가지 보석들의 광채로 석옥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천하의 보석은 다 모아 놓은 듯 석옥 안에는 이름도 모를 온갖 보석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바로 이곳이 유리화만이 아는 은밀한 장소였다. 그 안에서 유리화는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얼굴에 안도의 기색을 띠며 낮게 중얼거렸다. "누구도 이곳만은 찾지 못할 것이다. 그 미친놈은 더욱 그렇겠지!" 이 순간 그녀의 몰골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전신을 흰 천으로 친친 감싼 그녀의 몸에서 오직 얼굴만이 흰 천을 감지 않은 유일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 역시 시퍼런 멍자국이 맺힌 채 수척하게 야위어 있었다. 이 며칠간은 그녀에겐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궁예린은 매일 어김없이 찾아와 그녀를 흠씬 때리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방을 옮겨도, 호위병을 세워도, 그는 어느새 귀신같이 스며들어 까무라칠 정도로 그녀를 두들겨 패고는 다시 귀신같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제는 낮과 밤 구별이 없었다. 아무 때나 불쑥 나타나 그녀를 구타했다. 공포... 궁예린이란 존재는 그녀에게 있어서 공포 그 자체였다. 그렇다고 천하에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녀는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생각다 못해 아침부터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이었다.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장소였기에. "아함...!" 마음의 안정을 찾자 그 동안 밀렸던 졸음이 한꺼번에 그녀를 찾아왔다. 사실 그녀는 근래 들어 잠도 제대로 못 이루었다. 물론 그것은 모두 궁예린 때문이었다. "설마 그 미친놈이 이곳까지는 찾지 못하겠지." 유리화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석실 바닥에 몸을 뉘었다. 순간 물컹하는 무언가가 그녀의 등에 깔렸다. 그 뒤를 이어 푸념 섞인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어이쿠! 여인의 등이 이렇게 쇠처럼 단단해서야... 좀 부드럽게 손을 봐줘야겠군." "아악!" 순간적으로 그 음성의 주인을 알아챈 유리화는 뛸 듯이 놀라 소리쳤다. "놀라기는..." 예의 담담하고 싸늘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리화는 등이 빠개지는 듯한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으... 어떻게 이곳까지... 아니야. 이것은 꿈이야...' 그녀는 불신 어린 표정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궁예린, 바로 그가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훗! 유리화, 너에게 나 궁예린이 어떤 사람인가를 철저히 보여 주겠다." 팍! 퍼퍽! 다시 시작되었다. 이 며칠 사이에 궁예린의 손에 익은 일이... 유리화는 전신을 덮치는 극렬한 통증에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악! 으윽...!'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더 피할 곳도 없었다. 유리화는 다시 되풀이되는 악몽을 꾸듯 참담한 얼굴로 매를 맞았고 궁예린 역시 습관처럼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구타했다. 잠시 후, 유리화는 반쯤 죽은 상태로 아예 사지를 뻗고 누워 버렸다. 궁예린의 매질이 끝난 것이다. "유리화, 오늘은 볼일이 있어 이쯤 해둔다. 그러나 곧 또 만날 것이다." 궁예린은 그 말을 남기고 소리없이 신형을 감추었다. 바르르...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화의 전신에 세찬 전율이 일었다. 궁예린이 남기고 간 마지막 한마디가 그녀를 다시금 공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었다. '또... 만난다고...? 차, 차라리 죽는 게 편하지...' 급기야 그녀는 머릿속에 그 말을 떠올렸다. 제 14 장 여인을 다루는 확실한 방법 1 툭! 투툭!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는 빗줄기가 동정호의 수면을 때리며 무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유리대벽루는 비에 젖은 채 환상적인 기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그 모습을 보고 죽음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이 펼쳐져 있다고 하겠는가? 기실 유리대벽루의 주위에는 무림의 고수들이 빈틈없이 매복해 있었다. 궁예린의 횡포를 참다 못한 유리화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고수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동시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혈문(血門)에 그럴듯한 서신을 띄워 구원을 요청했다. 이유는 단 하나, 살기 위해서였다. 그때부터 중원(中原)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다시 보고 싶은 기막힌 여인을 구하기 위해 무림의 고수들은 은밀히 유리대벽루로 모여들었고 유리대벽루는 순식간에 철옹성으로 둔갑했다. 화려한 침상 위. 유리화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떨고 있었다. "그놈이 왔다 간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 언제 또 나타날지..." 궁예린은 벌써 열흘째 발길을 끊고 있었다. 그 시기는 묘하게도 유리대벽루에 천라지망이 펼쳐진 때와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유리화는 그가 언제 어디서 불쑥 나타날지 모르는 공포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귀신이라 해도 이곳엔 나타날 수 없을 거야."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잠을 청했다. 지금 그녀의 방문 앞을 무림의 고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철통같이 지키고 있음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며. 그런데도 유리화의 두 눈은 은연중에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불안감을 떨치려는 듯 또다시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는 안심이 되지만...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또 문주(門主)께는 뭐라고 변명을 한담...!" 어느새 유리화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미친놈! 뜯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그놈 때문이야. 모든 것이..." 뿌드득...! 화를 참지 못한 나머지 그녀는 이를 갈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며칠 일이 바빠 안 왔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군." 돌연 싸늘한 음성과 함께 이불이 확 젖혀지며 꿈에도 못 잊을 얼굴이 유리화의 시야에 들어왔다. "악!" 찰나간에, 유리화는 억센 힘에 의해 침상 아래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픔보다 더 큰 경악과 공포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무수한 고수들을 제치고 궁예린이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을. 궁예린은 씨익 웃었다. "후훗! 그 동안 잘 있었나? 오랜만에 왔더니 더욱 예뻐졌군. 그럼 준비 운동부터 해볼까?" "헉!" 유리화는 숨넘어가는 비명을 내뱉었다. 그녀는 용수철처럼 튕기듯 신형을 일으켜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악! 사람 살려요!" 그러나 유리화는 이내 망연히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문밖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던 고수들이 모두 곤히 잠들어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이... 이런 멍청한 사람들..." 유리화는 다급히 한 대한을 흔들어 깨웠다. "이봐요! 일어나요. 괴물이 나타났단 말이야..." 대한은 그녀가 흔드는 대로 흔들릴 뿐, 잠잠하기만 했다. "후훗! 소용없다, 유리화. 그 동안 잠을 못 잔 것 같기에 푹 자라고 손을 써놓았으니까." 어느새 다가왔는지 궁예린이 히죽 웃고 있었다. "으악...!" 유리화는 기겁을 하여 미친 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죽어도 좋아! 저 미친 작자를 안 본다면 죽어도..." 그녀는 눈물까지 흘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어느덧 유리화는 시커먼 철문 앞에 이르러 있었다. 그곳은 시비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하는 뇌옥이었다. 유리화는 그곳이 어디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이익! 꽈앙...! 굳게 철문을 걸어 잠근 다음에야 유리화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헉헉... 제깟 놈이 이 만년한철을 뚫지는 못하겠지. 차라리 굶어 죽을망정... 이곳에서 안 나갈 거야." 실로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었으나 그녀의 결심은 곧 궁예린에 의해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뇌옥 안쪽에서 궁예린이 불쑥 나타나 말했다. "훗, 이제 오느냐? 사람을 그렇게 기다리게 하면 못쓴다." 유리화는 그 자리에 맥없이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귀신... 너는 사람이 아니야. 귀신일 거야." 그녀는 아예 넋이 빠진 듯이 보였다. 그러고는 끝내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흑...! 제, 제발 살려 주세요..." 눈물을 폭포수처럼 흘리는 그 모습은 너무도 애처로웠으나 그녀를 바라보는 궁예린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기만 했다. "허... 내 언제 너를 죽인다고 했더냐?" 그러자 유리화는 두 눈에 독기를 띠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차라리 날 죽여라! 이 악당! 흑흑...!" 궁예린은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좋지, 그렇게 맞다 보면 죽을 수도 있겠지." 유리화는 일순 망연자실해졌다. 이 사내, 궁예린에겐 눈물조차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더니 돌연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때리지만 않으면 무슨 말이든 다 들을 테니..."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그 도도하며 콧대 높던 유리화가, 뭇 사내를 치마폭으로 호령하던 그녀가 드디어 궁예린에게 굴복한 것이다. "무엇을 원하세요? 말씀만 하세요. 다 들을 게요. 모두 다요." 그녀는 공포의 매에서 해방되기 위해 궁예린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순간, 궁예린의 두 눈에 일말의 광채가 스쳤다. "그래? 하면... 너의 모든 것을 원한다. 너의 마음속까지도." 유리화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황급히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알겠어요. 아니, 하고말고요." "훗날 변심을 한다면...?" "그럴 리가 없어요. 절대... 믿어 주세요." 결사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그 모습에 궁예린은 처음으로 미소다운 미소를 보였다. "좋아! 믿는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니..." "고, 고맙습니다." "그럼 우선 첫번째 시험을 해보겠다." "명만 내리세요." "닷새 후, 다시 오겠다. 깨끗한 몸으로 기다리도록 해라." "알겠어요." 유리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궁예린은 미련없이 신형을 돌렸다. 유리화는 궁예린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동안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신의 긴장을 풀었다. "호오...! 이젠 괜찮겠지." 새삼 억울하고 분한 감정이 그녀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미친놈! 저 날강도에게 이대로 굴복해야 하다니..." 기가 막히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유리화는 반항하다가 또다시 맞을 일을 생각하니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도저히 궁예린에게 맞서거나 반항할 엄두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무슨 묘책이 떠오른 듯 두 눈을 빛냈다. "그래, 저놈은 내 몸을 탐냈어. 그렇다면 그 수법으로..." 그녀는 갑자기 기운이 솟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 방법밖에 없어. 우선은 저 날강도에게 몸과 마음을 주는 척하며..." 그 다음 말은 유리화의 가슴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그녀의 최후의 방법은...? "그 방법밖에..." 유리화의 음성은 뇌옥 안에서 섬뜩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2 봄〔春〕.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춘삼월이었다. 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는 동정호의 호반은 벌써 수많은 선남선녀들로 붐비고 있었다. 유리대벽루 역시 활기를 띤 자태로 여전히 그 화려함을 한껏 과시하고 있었고, 그 유리대벽루를 중심으로 한 수면 위에는 많은 유람선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유독 한 자리를 오 일간이나 지키고 있는 호화로운 유람선 하나가 있었다. 선미(船尾)에는 백의청년이 한가로이 낚싯대를 잡고 있었고, 그의 주위로 네 사람이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바로 궁예린과 망혼사인이었다. 궁예린을 바라보는 네 사람의 시선은 한결같이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다. '질렸다. 하나, 여인을 다루는 법 하나는 확실하게 배웠다!' '두들기는 것만이 최선의 비법임을 이번에 대장이 입증시켜 주었어!' 그들은 유리화를 굴복시킨 궁예린의 솜씨에 오래도록 감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궁예린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비호, 오늘까지 유리화를 찾은 자들이 몇이냐?" 손비호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지금 이 시각 또 한 놈이 들어갔으니 꼭 아홉 명째다." "아홉 명이라... 그 중에 무림성의 고수들은?" "세 명." "세 명? 그렇다면 나머지는 모두 혈문의 고수들이라는 뜻인데... 무엇인가 무척 바쁘게 움직이고 있군." 궁예린의 독백은 계속되었다. "움직이고 있어. 무림성과 혈문이... 확실한 것은 유리화만이 알겠군."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낚싯대 앞을 떠났다. "사릉, 오늘밤엔 네 코를 빌려야겠다." "코를...?" 유사릉이 부지중 자신의 코를 만지자 궁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유리화, 그녀는 틀림없이 고분고분 굴복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모종의 안배를 펼쳤을 것이니 네가 그 냄새를 맡아 줘야겠다." 유사릉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후훗! 그런 일이라면 언제든지 빌려도 좋다." 그때 철산이 시큰둥하니 입을 열었다. "대장, 나는 할 일이 없는가?" 궁예린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후후후, 녀석. 염려 마라. 곧 너의 힘이 필요할 테니." 손비호가 불쑥 끼여들었다. "대장! 혼자 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여우 같은 계집이니 다른 준비를 했을지도 모르지 않아?" 그 말에 궁예린은 짐짓 퉁명스레 면박을 주었다. "비호! 말을 빙빙 돌리지 마라. 위험은 없다. 먼젓번에도 유리화는 자신의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 삼류고수들만을 불러오지 않았느냐?" "쩝..." 손비호는 쓴맛을 다시며 내심 투덜거렸다. '에이, 눈치는...! 못 이기는 척 데려가면 어때서. 오늘이 진짜 좋은 구경일 텐데 말이야.' 그는 기실 궁예린을 따라 유리대벽루에 들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머지 철산과 표빈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궁예린은 오히려 번거로울 듯하여 모두의 동행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궁예린은 유사릉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자, 사릉!" 동시에 그는 날렵한 제비처럼 선상을 박차고 허공으로 올랐다. 한 줄기 포물선을 그리며 쏘아 가는 그 모습은 실로 눈부시기 짝이 없었다. 유사릉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 문득 나머지 세 청년을 응시했다. "후후후, 염려 마라. 내 다녀와서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 주마."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 역시 신형을 날려 유리대벽루를 향해 쏘아 갔다. 철산은 부러운 듯, 사라져 가는 유사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군 좋겠다. 나에겐 이런 일이 안 생기나? 대장보다 내가 더 확실하게 두들겨 줄 텐데." "크으... 이놈아! 주제를 알아라. 그런 방법도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 손비호가 핀잔을 주자 철산은 눈을 부라리며 그를 홱 돌아보았다. "비호! 너 말 좀 조심해라.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냐? 대장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지. 더욱이 때리는 일은..." 그는 한창 열이 나서 떠들다가 말꼬리를 희미하게 감춰 버렸다. 그의 주위에는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배 안에서 손비호의 푸념 섞인 핀잔이 다시 들렸다. "잠이나 자라! 너는 잠도 없냐?" 철산은 다시 한 번 힐끔 유리대벽루를 응시했다. "누군가... 좋겠다." 그는 미련을 가득 담은 채 천천히 선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3 내실. 여인 특유의 향취와 함께 은은한 방향(芳香)이 감도는 방이었다. 그 한가운데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진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앞에 유리화가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곱게 화장을 하고 머리도 궁형으로 우아하게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 덕분에 수척해진 안색과 시퍼렇던 멍자국이 감쪽같이 감추어져 있었다. 근래 들어 보기 드문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녀는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쯤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유리화가 불안한 시선을 문 쪽에 주었을 때였다. 때마침 방문이 열리며 궁예린이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화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자못 얼굴을 붉히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궁예린은 내심 미소 지었다. '후훗, 아주 고분고분한 새색시 같군!' 그는 전음으로 유사릉을 불렀다. "사릉, 이 방의 향기가 너무 진하다고 생각지 않느냐?" 그러자 모습을 감춘 채 은신해 있는 유사릉의 전음성이 가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대장, 나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가만있어 봐. 내가 그 근원을 찾아올 테니." "알았다." 궁예린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유리화에게로 다가갔다. "흠... 유리화, 아직도 나를 두려워하고 있군." 유리화는 불안한 기색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조심해야지. 저러다 언제 또 득달같이 달려와 사정없이 때릴지 몰라!' 그녀는 아예 시선도 부딪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궁예린은 나직하게 웃었다. "후훗! 천하의 뭇 사내들을 치마폭의 노예로 만든 천하제일화가 이렇듯 수줍어할 때가 다 있다니." 그가 술상 앞에 앉으며 불쑥 물었다. "너는 사내를 얼마나 아느냐?" 파르르... 유리화의 전신에 잔경련이 일었다.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리 묻는 것은 명백히 그녀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침묵을 참지 못한 궁예린은 싸늘히 호통쳤다. "사내를 얼마나 아느냐고 물었다!" 유리화는 제풀에 기겁을 하여 급히 입을 열었다. "모... 몰라요!" 궁예린은 그녀의 대답이 의외인 듯 되물었다. "몰라? 천하제일화가 사내를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 말과 함께 그는 유리화의 곁으로 바싹 다가와 앉았다. 유리화는 맹수 앞에 선 가련한 짐승처럼 연신 공포에 떨었다. 언제 또 주먹이 사정없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 그런데 정녕 뜻밖에도 궁예린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유리화, 사내란 결코 계집이 갖고 놀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잔인하고 무섭지. 또한 야망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다음 순간, 그의 손이 유리화의 윗옷을 거칠게 찢어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풍만한 육봉이 높이 솟아올랐다. 아직도 시퍼런 멍자국이 남아 있는 가슴이었다. "앗! 왜 이런..." 유리화는 무서운 생각에 자지러질 듯 놀라 소리쳤다. '서, 설마 또 때리려고...?' 그녀는 지금까지 궁예린의 분위기 조성 방법을 보아서는 그 생각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궁예린은 씨익 웃어 보였다. "후훗! 놀라지 마라. 색다른 여인에게 색다른 대우를 해주는 것뿐이니." 그는 곧 유리화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유리화는 황망중에도 술상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술을..." "후훗! 필요없다. 아직 나는 술의 힘을 빌려 여인을 대한 적은 없으니..." 궁예린은 침상으로 다가가 그곳에 유리화를 내동댕이쳤다. '억!' 유리화는 또다시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궁예린을 주시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편, 몸을 숨기고 두 사람을 바라보는 유사릉의 눈빛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햐! 대장은 역시... 언제 저런 재주를 익혔지? 마치 수십 번을 해본 것 같으니.' 그가 연신 감탄하고 있을 때, 궁예린의 전음성이 들려 왔다. "사릉, 아직 찾아내지 못했느냐?" 그 말에 유사릉은 퍼뜩 정신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직..." "딴생각은 말아라. 기회를 놓치면 천추의 한을 남길지도 모른다." 궁예린의 엄중한 음성에 유사릉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그 특유의 예민한 후각을 작동시킨 것이다. 그때 침상 위에서는 유리화가 옷을 몽땅 찢긴 채 적나라하게 나신(裸身)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란한 나신이었다. 팔등신으로 균형 잡힌 몸매에 들어갈 곳은 들어갔고 나올 곳은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꼭 알맞은 균형을 이룬 완벽한 몸매였다. 단지 흠이라면 백옥 같은 피부 군데군데 맺힌 멍자국뿐이었다. 궁예린은 잠시 유리화의 나신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남자의 혼을 빼기에 족한 육체군!' 그의 두 눈은 암암리에 미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찌 알랴? 살수(殺手)란 그 무엇에도 뛰어나야 함을... 상대를 죽이기 위해선 무엇이든 월등해야 한다! 살예십팔식의 살인사무예(殺人四武藝)! 그것이 바로 남녀의 정사(情事)에서 비롯된 것임을 남들은 알지 못한다!' 그랬다. 기실 살예십팔식을 창출해 낸 지옥마제는 여색(女色)을 광기에 가깝도록 좋아했었다. 그리고 살수란 무릇 어떤 것에도 월등해야 함을 안 그는 자신의 그 숱한 정사의 경험을 모아 가히 일절(一絶)이라 할 수 있는 살인사무예를 창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바로 현란한 살(殺)의 나무(裸舞) 네 가지를...! "아...!" 유리화는 침상을 꼭 붙잡은 채 전신을 뒤틀며 야릇한 비음을 흘렸다. 색정(色情)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그녀는 살아 남기 위해 궁예린을 유혹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에게 매를 맞았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궁예린을 유혹하고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오직 그것만이 그녀가 살 길임을 유리화는 느끼고 있었다. 궁예린은 부지중 가슴속이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유사릉의 다급한 전음성이 그의 고막을 두드렸다. "대장! 찾았다. 이 향은 바로 음지사혈고(陰地死血蠱)에서 풍기는 냄새다." 궁예린은 흠칫 안색을 굳혔다. '음지사혈고...! 아주 독한 마음을 품고 있군, 유리화.' 음지사혈고. 이것은 상대와 정사를 할 때 움직이는 고(蠱)로서 음지에서만 자란다. 여인이 마음만 먹으면 이 고는 남자의 체내로 들어가 양기(陽氣)를 모두 흡수해 버린다. 당연히 남자는 양기를 빼앗긴 채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원래 이것은 남자를 지키는 여인의 비방인 동시에, 여인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밀교(密敎)의 비전지술이었다. 한데, 그 실전된 지 오래된 비전지술을 지금 유리화가 암암리에 펼쳐 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궁예린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리화, 살인사무예가 무엇인 줄 아느냐? 정사를 하면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비법이 바로 살인사무예다. 결코 나의 기(氣)를 흐트러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유사릉에게 한 줄기 전음을 보냈다. "사릉, 이제 됐다. 그만 가 보거라." 유사릉의 대경한 음성이 들려 왔다. "가라고...? 이 기막힌 구경을 두고..." "사릉, 내 말을 못 들었느냐?" "아... 알았다, 대장." 유사릉은 내심 입맛을 다시며 방을 빠져 나갔다. '젠장! 일이 다 끝난 후에 알려 주는 건데...'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궁예린은 자신도 옷을 벗고 나신이 되었다. 그 모습에 유리화는 벌써부터 흥분이 되는지 궁예린을 바라보며 연신 비음을 흘렸다. "아... 어서... 당신 뭐 해요...?" 이미 그녀는 여인의 성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눈빛 또한 색정으로 발그레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흥분이 지나치자 음지사혈고가 무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음이 틀림없었다. '대단한 효력이군! 자칫하다가는 내가 재로 변하겠다!' 궁예린은 내심 혀를 내두르며 천천히 침상 위로 올라갔다. 일시에 황촉불이 꺼졌다. 그러나 사방이 은은한 달빛을 그대로 투영시키는 유리벽인지라 실내는 그래도 밝았다. "아아..." "으음..." 뜨거운 신음성과 호흡이 한데 어우러지며 실내는 서서히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사방의 유리벽이 달빛에 드러난 두 남녀의 모습을 그대로 반사시켰다. 살인사무예! 그것은 환상의 나무(裸舞)였다. 인간이 가장 희열에 들뜬 순간, 무아(無我)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그 동작을 합쳐 하나의 나무를 창출한 것이었으니... 천나무(天裸舞)! 하늘의 춤이었다. 이것이 펼쳐진다면 가히 하늘도 무너뜨릴 수 있다. 지나무(地裸舞)! 땅〔地〕의 모든 마(魔)들이 일어서서 움직인다는 광란의 춤이었다. 혈파무(血破舞)! 천지가 산산이 파괴되어 형체도 보존하지 못한다는 춤. 폭혈무(瀑血舞)! 수백 개의 그림자들이 한순간 분산되는 그 나무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유리화, 그녀는 수백 번 허공으로 올랐다 땅에 부딪치는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너무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4 꿈〔夢〕. 그것은 언젠가는 깨어지는 법이다. 유리화는 황홀한 꿈에서 깨어나 궁예린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참으로 기나긴 쾌락의 꿈이었다. "당신... 정말..." 유리화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듯 몽롱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대신에 궁예린의 넓은 가슴을 어루만졌다. 궁예린은 빙긋 미소 지었다. "유리화, 어떻소? 확실히 색다르지 않소?" "몰라요..." 유리화는 새침하게 잡아떼며 그의 가슴을 꼬집었다. 이 순간 그녀의 가슴에 맺혀 있던 궁예린에 대한 미움과 원한은 씻은듯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오히려 난생처음 느낀 만족감에 마냥 부풀어 있었다. 투명한 유리벽으로 달빛이 은은히 비치는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리화는 달콤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 도대체 누구죠? 이런 기술은 누구에게 배웠나요?" "훗! 무엇을 말이오? 당신을 때린 걸 말하는 것이오, 아니면 지금을 말하는 거요?" 궁예린의 능청에 유리화는 곱게 눈을 흘겼다. "아이... 몰라요. 짓궂긴...! 둘 다 말이에요." "두 가지 다 나 혼자서 터득한 것이라면 믿겠소?" 그 말에 놀란 유리화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인을 이분만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을 상대해 봤기에...'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궁예린에게 있어 여인을 경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녀는 궁예린의 매력에 흠뻑 빠져 들고 있었다. 궁예린의 품에 안겨 한껏 기분에 취해 있던 유리화는 돌연 대경실색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맛! 여봐요, 큰일났어요. 천첩은 당신의 몸에..." 궁예린은 씨익 웃었다. "후훗! 음지사혈고를 말하는 것이오?" 유리화의 얼굴은 아예 하얗게 변했다. "그... 그것을 어떻게..." "유리화, 그대는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궁예린의 표정과 음성은 너무도 담담했다. 유리화는 또다시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 맞아. 이분은 모르는 게 없었어!'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하나... 그것은 해약이 없는데..." 궁예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내가 이렇게 건재한 것을 보고도...?" 유리화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도대체 이 사람은...' 달랐다. 이제껏 그녀가 상대해 본 숱한 남자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눈앞의 사내만큼 완벽하고 절대적인 남자는 단언하건대 한 사람도 없었다. 유리화는 궁예린을 대할 때마다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몸과 마음으로 완전히 그에게 굴복당한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귀신이야. 그렇지 않고 어찌...' 그녀가 한동안 멍하니 있자 궁예린이 짐짓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유리화,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다시 매가 필요하오?" 순간 유리화는 뛸 듯이 놀라 소리쳤다. "아, 아니에요. 천첩은 다만..." "하하하, 농담이었소." "어멋! 짓궂으시기는..." 유리화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 내리며 궁예린의 탄탄한 가슴 위로 쓰러졌다. 탄력있는 여체의 감촉이 물컹하니 궁예린의 전신에 와 닿았다. 궁예린은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유리화, 나는 당신이 꼭 필요하오." 유리화는 마치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천첩은 약속을 지킬 거예요.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혈문과 무림성에 대해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을 듣고 싶소." 찰나지간 유리화는 흠칫 놀라며 상체를 일으켜 궁예린을 바라보았다. "그, 그것까지..." 궁예린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하하하, 말하지 않았소? 나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유리화는 마치 귀신을 보듯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체념을 한 듯 힘없이 말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군요." "그렇소. 그대가 혈문의 인물인 것도 알고 있소." "...!" 유리화는 새삼 그를 빤히 응시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저의 안전을 보장해 주실 수 있나요?" 궁예린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소! 유리화, 그대는 이제부터 나 궁예린이 지켜 줄 것이오." 동시에 그는 애정 어린 손길로 부드럽게 유리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실만이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이 사내... 이미 나의 마음은 미움이 컸던 만큼 급격히 사랑으로 변하고 있어!' 유리화는 생각했다. '마음과 육체... 이 모든 것을 이 사내는 철저하게 소유하기 시작했어...!' 유리화는 결심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알고 보니 당신은 그 때문에 나에게 접근했군요." "결코 부인하지는 않겠소." 궁예린의 솔직한 대답에 유리화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좋아요. 천첩은 그것을 탓하지는 않겠어요. 이미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마음먹은 이상... 지난 일은 제 가슴에 추억으로 남을 거예요." 궁예린은 가슴이 뭉클함을 느끼며 진심으로 입을 열었다. "고맙소, 유리화!" 유리화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느끼지 못한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셨어요. 이 일로 천첩은 당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겠어요. 다만..." 잠시 말끝을 흐렸던 그녀는 곧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잊지 마시고 천첩을 가끔 찾아 주시는 것으로 만족할 거예요." "리화!" 궁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겉으로는 여전히 화려하고 짙은 염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한층 성숙되어 순수함을 지닌 진정한 여인이 되었음을 궁예린은 느끼고 있었다. "유리화, 당신 역시 순수한 여인이었구려." 궁예린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등을 쓸었다. 유리화의 두 눈엔 어느새 뿌연 물기가 서리고 있었다. "그래요. 천첩도 여자예요. 단지 제 운명이 그렇기에... 혈문에서 나를 키웠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되었을 뿐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주는 궁예린이 너무도, 가슴에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유리화는 결연히 말을 이었다. "말씀드리겠어요. 당신이 무림성과 혈문에 대해 알고 난 뒤 어찌 할지 저는 상관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천첩의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주르르... 그녀의 눈에서 끝내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궁예린은 숙연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가능한 한 들어주겠소." 그것은 유리화에 대해 그가 느끼고 있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 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그의 진심이었다. 유리화는 눈물 젖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혈문의 주인인 마마대공(魔魔大公)을 죽여 주세요." 순간 궁예린은 흠칫했다. "혈문주 마마대공..." 유리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마마대공이 혈문의 문주는 아니에요. 그러나 그는 현재 혈문을 이끄는 혈군자(血君子) 담천후(潭天候)의 사부이며 실질적인 막후의 지배자죠." "혈군자 담석후...?" "예. 그는 십팔 년 전, 의문의 혈겁을 당한 마도대종주 담석강의 아들이에요." 궁예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대로... 혈문은 마천루의 현신이로군. 한데, 마마대공이 누구이기에...?' 궁예린의 의혹을 눈치챈 듯 유리화는 계속 말했다. "그것은 혈문 최대의 비밀이에요. 오직 담석후만이 마마대공을 알고 있으며 그 밖에 극소수의 인물들만이 어렴풋이 사실을 짐작하고 있을 뿐이죠." 그녀는 눈을 빛내며 뿌드득 이를 갈았다. "천첩이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이 모두 마마대공의 술수란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어요."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그녀는 또다시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궁예린은 뭐라고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인 역시 이 시대의 희생자였다. 지난날, 내가 좀 가혹했던 것 같군!'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유리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은 자책할 필요가 없어요. 만약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 천첩은 당신을 믿지 못했을 테니까요." "리화, 진정 부끄럽구려." 궁예린은 한없이 따스한 격정이 치솟음을 느끼며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제 15 장 태동(胎動)하는 세력들 1 사방이 꽉 막힌 석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희미한 야명주뿐이었다. 그곳에 돌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세 사람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단지 석실이 어둡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록 희미한 야명주 불빛이라고는 하나 세 사람의 모습을 밝혀 주기에는 충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은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가 워낙 심각하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하나같이 일대 종사(一代宗師)를 능가하는 묵중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은 황의를 걸치고 염주를 손에 든 노승(老僧)이었다. 허연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져 있고 심유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지녔다. 그리고 굳게 다물고 있는 입술이 다부진 인상을 풍기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의 우측에는 마치 강시(　屍)를 연상케 하는 깡마른 흑의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분을 바른 듯 창백한 얼굴에 눈매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마지막으로 노승의 좌측에 앉아 있는 이는 두 눈이 파랗고 머리카락이 노란 이국(異國)적인 용모의 노인이었다. 특이한 그의 모습에 한층 기이함을 더하는 것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그의 왼손이었다. 오른 손가락은 정상적으로 다섯 개인 것에 비해 왼손은 손가락이 네 개뿐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석실을 휘감고 있는 가운데, 문득 중앙의 노승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두 분은 이제 모든 안배와 포석이 그 절정에 이르렀음을 느낄 것이오." 흑의노인과 이국적인 용모의 노인은 말없이 눈빛을 번뜩이며 노승을 바라보았다. 노승은 그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기회란 한번 놓치면 좀처럼 오지 않소." 그 말에 흑의노인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며 말했다. "하면... 존자의 뜻은...?" "그렇소. 지금이야말로 우리 삼목천이 나서야 할 때요." 삼목천! 바로 천축과 새외, 묘강의 세력이 하나로 뭉쳐 이루어 낸 단체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석실 안에 모여 있는 이들이 삼목천을 대표하고 있는 자들이란 말인가? 그랬다. 눈앞의 노승은 천축 포달랍궁의 궁주이며 대라활불(大羅活佛)이라고까지 추앙받던 천축의 하늘, 바로 포랍존자 가미륵(加迷勒)이었다. 그리고 흑의노인, 그는 새외의 네 개의 하늘이라 일컫는 새북사사천의 첫째인 지옥천(地獄天)이었다. 마지막으로 아홉 개의 손가락을 지닌 이국적인 용모의 노인, 그는 묘강의 제일인자인 구지마령군(九指魔靈君) 도비수(陶飛水)였다. 이렇듯 천축과 새외와 묘강의 실력자들이 지금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다. 포랍존자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두 분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승천무황 백리사헌, 그자를 우리 삼목천의 힘으로 친다는 것은 불가할 것이 아니겠소?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의 안배를 해왔던 것이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다행히 백리사헌은 우리의 움직임을 확실히 모르고 있소." 포랍존자가 말하는 오늘의 안배, 그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포랍존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물론 그의 자신감이 지나치기 때문이기도 하오." 구지마령군 도비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존자,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을 다시 꺼낼 필요는 없소. 우리는 무림성을 중원에서 괴멸시키기 위해 이제껏 존자의 뜻에 따른 것이니..." "동감이오." 지옥천은 짧게 동의했다. 포랍존자는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고맙소. 그렇다면 노납이 단도직입적으로 우리의 행동 안(案)을 말씀드리겠소." 두 쌍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다시 포랍존자는 말했다. "우리는 이번에 취하는 행동으로 무림에 난세(亂世)를 부를 것이오." "난세를...?" "그렇소. 현 무림은 무림성에 억눌려 있는 상황이오. 또한 우리의 존재를 모르고 있기에, 바로 그 점을 이용하는 것이오." 석실 안에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긴장된 침묵이 감돌았다. 포랍존자는 재차 힘주어 말했다. "첫째, 무림성을 고립시키는 것이오. 천하에 퍼져 있는 무림성의 분타를 양면 공격하면 가능하오." "양면 공격을..." "그렇소. 다시 말해서 우리 삼목천과 혈문이 동시에 들고 일어나는 것이오. 그리고 그곳에 십인방의 움직임을 끌어들이는 것이오." 십인방까지...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때 지옥천이 무엇을 느낀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포랍존자를 주시했다. "하면 존자께서는 이미...?" 포랍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노납은 이미 그 일을 실행했소. 혈문과 십인방은 지금 움직이고 있을 것이오. 이번 일전(一戰)으로 무림성의 분타는 중토 전역에서 깨끗이 괴멸되리라 생각되오. 물론 십인방과 혈문, 그리고 삼목천에도 많은 희생이 따르겠지만 말이오." 이게 무슨 말인가? 이미 중원에서 암암리에 혈문과 십인방이 움직이고 있단 말인가? 혈문은 그렇다치고 어찌 십대문파의 최정예까지 동시에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인가? 도비수가 적이 염려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하나 백리사헌의 제자들은..." 포랍존자가 그의 말을 중도에서 자르며 말했다.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해 두었소. 그러나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백리사헌은 장시간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그것은 어디를 어떻게 쳐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오. 또한 중토에서 무림성에 억눌린 정사(正邪) 양도의 고수들이 십인방과 혈문으로 몰리기 때문에 더욱 공공연히 나서지는 못할 것이오." 분명 포랍존자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무림성은 사상 최악의 난관에 부딪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계획은 철두철미했고 완벽을 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모든 것이 그의 생각대로 진행될 것인지... 그것은 앞으로 두고 볼 일이었다. 삼목천! 이 암중 세력이 드디어 눈을 뜨고 태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무림성을 목표로. 밀실 안에서는 한동안 열기 띤 숙의가 계속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삼목천의 대화는 무게를 더해 갔다. 이것은 어딘지 모를 음습한 한 칸의 밀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2 혈풍(血風)! 무림에 때아닌 피의 폭풍이 몰아닥쳤다. 승천무황 백리사헌이 대륙에 절대(絶代)를 심어 놓은 지 어언 십여 년, 그 평화로운 침묵의 균형이 깨져 버린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그 동안 위장된 평화 속에 억눌렸던 세력들이 숨통을 트듯 일시에 일어났다. 대륙의 신화 무림성. 그곳은 서서히 피〔血〕에 젖어 들고 있었다. 그 영원한 강자의 깃발은 찢어지고 처절한 비명 속에 시신들이 천하에 쌓이고 있었다. 바로 중원 각지에 퍼져 있는 무림성 분타가 속속 괴멸되고 있는 것이었다. 무림성을 강타한 첫번째 혈풍! 그것은 바로 십인방에 의해 일어났다. 그들은 무림에 정(正)을 세워야 하며 천하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기치 아래 혜성처럼 출현했다. 하나같이 영기 발랄한 고수들로 이루어진 십인방. 그들은 또한 모두가 천하십대문파의 속가제자들로 이루어졌다. 그런 만큼 경천동지할 놀라운 무공으로 무림성의 분타들을 휩쓸고 있었다. 혈풍, 그 두 번째! 바로 혈문이 몰고 온 죽음의 피바람이었다. 석년에 마도천하를 구가하던 마천루의 후예들이 만든 가공할 문파로, 피〔血〕로써 일문을 이룬 그들은 무차별 살행으로 무림성의 분타들을 유린했다. 그리고 천하의 사마인(邪魔人)들이 기다렸다는 듯 혈문에 속속 뛰어들어 그 세력은 한층 더 확장되었다. 혈풍, 그 세 번째! 삼목천이 몰고 온 공포의 피바람이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기에 더욱 무서운 공포의 혈풍이었다. 알려진 것이 있다면 오직 중토를 구하기 위해 왔을 뿐이라는 소문이었다. 삼목천의 잔인무도한 마수(魔手)는 그 어느 곳보다 더 무섭게 무림성을 강타했다. 이렇듯, 괴이하게도 세 문파가 동시에 들고 일어나 대륙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천하에 산재한 수백의 무림성 분타들은 이 엄청난 혈풍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워낙 창졸지간에 불어닥친 탓인가? 무림성의 본성에서는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다. 그저 잠잠히 사태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천하인들은 숨을 죽였다. 오히려 푹풍전야의 고요가 더 무서운 것처럼 무림성이 침묵을 지키고 있음을 심상치 않게 여긴 것이다. －승천무황 백리사헌, 그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 그런 불안 속에 뜻있는 무림인들은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3 대전. 무겁고 긴장된 침묵이 감도는 곳이었다. 그곳에 지금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승(僧), 도(道), 속(俗)이 한데 뒤섞인 인물들로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기도와 기풍을 뿌리는 신태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바로 소림사의 경허성승을 비롯한 천하십대문파의 장문인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탁자의 맨 위쪽 상좌에는 이륜좌거를 탄 한 명의 청수한 중년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언젠가 궁예린과 만난 적이 있는 십인방의 방주 천기수사 사유학이었다. 그의 청수한 안색은 적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두들 침묵을 깨기가 두려운 듯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언가 할말이 있는 듯했으나 그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마침내, 소림사의 경허성승이 과감히 침묵을 깨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미타불...! 사 방주, 대체 이 일이 어찌 된 것이오? 노납들은 경악을 금할 수 없어 이렇게 부득불 달려왔소이다." 그의 노안에는 어둠과 불안이 교차되고 있었다. 그때 무당파의 장문인 운선도장이 강경한 어조로 경허성승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렇소. 무림성의 분타를 친 것은 천하에 극악무도한 사마(邪魔)의 무리들이 아니오? 한데, 지금의 형세는 십인방 역시 혈문과 삼목천에 가담한 것이니 이해할 수가 없소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루한 옷차림에 봉두난발을 한 거지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는 현 개방의 방주인 천취신개(天醉神　)였다. "그렇소이다. 우리의 취지는 무림성에 정면 도전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만약 백리사헌이 십인방을 주시한다면 십대문파는 끝장이 날 것이오." 좌중의 인물들은 그의 말에 모두 지극히 침통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십인방이 무림성을 갑자기 공격한 것에 대해 사유학을 추궁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이번 일은 사유학이 독단적으로 결행한 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사유학이 어두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 장문인들의 말씀은 사실이오. 본인 역시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생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소. 더욱이 삼목천, 그들까지 공개적으로 나설 줄은..." 경허성승이 짙은 의혹을 띤 채 입을 열었다. "방주, 대체 삼목천은 누구요?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무림성을 공격한단 말이오?" 모두들 같은 의견인지 의혹 어린 시선을 사유학에게로 집중시켰다. 그러나 사유학은 무겁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후유...! 본인 역시 그들의 출현은 짐작하지 못했소. 암중에 자리잡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전혀 알 수가 없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삼목천 역시 무림성의 권력을 탐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이오." 경허성승은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실로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졌소. 이런 시기에 십인방은 침묵을 지키며 사태를 관망해야 하는 것을... 무림성과 등을 돌리고 말았으니 장차 이 난국을 어찌 헤쳐 나가야 할지..." "무량수불... 그렇소. 십인방은 조금 더 사태를 관망해야 했소." 운선도장의 말에 모두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가 십인방이 무림성에 등을 돌린 것은 시기상조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유학은 고개를 무겁게 떨구며 말했다. "장문인들을 뵐 낯이 없소이다. 이 모든 것이 본인의 불찰이니..." 경허성승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사 방주는 할 일을 다하셨소. 이미 철혈도 단우엽이 나타났을 때부터 십인방은 무림성과 반목한 결과가 됐으니... 노납은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오." 그는 이내 시선을 돌려 좌중을 훑어보았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것이오." 운선도장 역시 묵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왕 물은 엎질러진 것! 또한 무림성과 언젠가 벌일 일전이 빨리 닥쳤다는 것뿐이오." 그때 청성파(靑城派)의 장문인 백운대사가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이런 한가한 자위나 하고 있을 때요? 잊었단 말이오? 혈문이 마천루의 현신임을... 노부의 생각에 혈문의 첫째 목표는 우리 십인방이 분명하오." 그 말에 모두들 전율을 금치 못했다. 사유학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이다. 본인의 생각도 바로 그것이오. 뒤로는 무림성을 두고 앞으로는 혈문에 맞서야 하는 것이오. 틀림없이 혈문은 지난날의 혈겁을 따지러 올 것이오." 그의 두 눈이 심상치 않은 기광을 내뿜었다. "아니, 보고가 틀림없다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일 것이오." 순간 좌중의 인물들은 일제히 안색이 급변하여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럴 수가...!" "혈문이 이곳으로...?" 사유학이 대답했다. "그렇소. 혈문의 문주가 바로 석년의 마도대종사인 칠절마군 담석강의 아들인 혈군자 담천후라는 것이었소." 중인들은 또다시 무거운 침음성을 내뱉었다. "담... 천후..." 운선도장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석년에 담씨 일가의 죽음을 확인해야 했건만... 화근을 남기게 될 줄이야...!" 경허성승 역시 침통한 표정으로 불호성을 터뜨렸다. "아미타불...! 십대문파가 어쩌다 오늘날 이런 지경을 당하게 됐는지..." 정녕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 그 옛날 마천루를 하룻밤 새 괴멸시킨 장본인이 바로 십대문파라는 것이었으니... 그래서 지금 이렇게 혈문의 보복을 염려하고 있는 것인가? 그때 사유학이 신념에 찬 표정으로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 장문인들께선 그처럼 심려하지 않으셔도 되오이다. 본인은 이미 적절한 대책을 세워 놓았소. 혈문이 섣불리 나선다면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타격을 입을 것이오." 그의 자신감에 찬 음성에 모두들 굳어 있던 안색을 펴며 눈을 빛냈다. '역시 천기수사다.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내다보고 대비하고 있었다니.' 십대문파 장문인들의 내심을 스친 감탄이었다. 사유학의 음성은 다시 장내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지금 십인방이 해야 할 것은 최선의 수비로서, 혈문과 백리사헌의 움직임을 관찰한 후에 행동하는 것뿐이오." 모두들 동감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허성승이 사유학을 향해 신뢰 어린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아미타불... 사 방주. 이 모든 것은 사 방주가 알아서 해주시오. 어차피 십인방을 창설하고 오늘까지 이렇게 유지시킨 것은 사 방주이시니..." 그것은 즉 십인방의 방주인 사유학을 믿고 그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하겠다는 뜻이었으며, 그의 어깨에 정파(政派)의 운명을 맡긴 것이나 진배없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의 막중함을 아는 듯 사유학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본인이 여러 장문인들께 간청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오. 아무쪼록 협조하여 본인을 도와 주시기를 바랄 뿐이오." 조금도 오만함이 없는 그의 겸손한 태도에 십대문파 장문인들은 탄복하며 사유학을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고맙소, 사 방주! 노납을 위시해서 십대문파는 방주를 힘껏 도울 것이오. 아미타불..." 경허성승은 사유학을 향해 정중히 합장의 예를 취했다. 십대문파는 이렇게 사유학을 중심으로 굳게 뭉쳤다. 머지않아 닥쳐 올 대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었으니, 그것은 혈문의 힘보다는 이 시대의 절대자인 백리사헌이 지닌 미증유의 힘 때문이었다. 이곳은 천애산(天涯山)의 한 협곡. 십대문파의 최정수이자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십인방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제 16 장 천예살군(天藝殺君) 1 천애산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바로 핏빛 혈의를 입은 수많은 인영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서 앞장서고 있는 자는 얼굴이 금빛을 띠고 있는 구십 세 가량의 노인이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눈썹과 머리카락, 두 눈까지 온통 금빛을 띠고 있었다. 더구나 노인의 두 팔은 정상적인 사람의 팔이 아닌 갈고리 형상의 금수(金手)였다. 일순, 노인의 두 눈에서 섬뜩한 금빛 섬광이 쏘아져 나왔다. "후후후, 십인방! 석년에 네놈들에게 두 팔을 잃고 도망쳐야 했던 살인혈도(殺人血刀) 금우비(金雨飛)가 다시 왔다. 결코 한 놈도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살인혈도 금우비! 그는 과거 마천루의 좌우호법 가운데 좌호법으로 칠절마군 담석강의 왼팔이었으며, 한 자루의 혈도(血刀)로 마도(魔道)를 평정한 석년의 절세고수였다. 마천루의 혈겁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지금 그는 혈문의 제자들을 이끌고 십인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유학의 예견대로 혈문이 마침내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스스슷! 마치 한 무리의 적무(赤霧)처럼 기척없이 움직이고 있던 혈문의 제자들은 돌연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막 하나의 협곡으로 들어섰을 때의 일이었다. "후후후, 혈문! 기다리고 있었다." 금우비의 전면에 한 사나이가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넓적한 도를 한 손에 든 채 오만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 준미한 청년. 바로 백리사헌의 세 번째 제자인 풍광도 관무상이었다. 금우비는 일순 흠칫했다. '어린 놈이 이처럼 가공스런 살기를 뿜어 내다니...' 그랬다. 이 순간 관무상에게서는 예사롭지 않은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금우비는 오랜 연륜을 쌓은 무림고수답게 자신의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꼬마야, 네가 혈문을 알고 있다면 그 무서움도 알 것이다. 네놈에겐 그 주둥아리를 잘못 놀린 죄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가벼운 형벌만을 내리겠다." 관무상이 꿈틀 눈썹을 치켜세웠다. "병신 같은 늙은이! 혈문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따위 헛소리는 지옥에나 가서 해라." 금우비의 두 눈이 섬뜩한 금빛 살광을 내뿜었다. '병신 같은... 늙은이...?'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두 팔이 잘려 불구가 된 것도 서러운데 그것을 가지고 그를 모욕하는 자를 금우비는 도저히 살려 둘 수가 없었다. 금우비가 막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관무상의 싸늘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살인혈도 금우비! 무림성은 불가침의 성역이다. 이제 그 대가를 보여 주겠다." 동시에 그는 한 손을 허공으로 치켜올렸다. 그의 신호에 무수한 파공음이 일며 사방에서 백의의 무림어군들이 속속 나타났다. 그들의 선두에는 모두 스물여덟 명의 금포노인들이 살벌한 기운을 뿌리며 서 있었다. 금우비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얼굴을 굳혔다. "무림성...! 네놈은 누구냐?" "무림성의 삼공자, 풍광도 관무상이다." "풍광도! 그렇다면 세 제자 중의 한 놈..." 금우비는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백리사헌에게 모두 세 명의 제자가 있고 하나같이 뛰어난 무학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 중에 세 번째 제자, 풍광도 관무상이 그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금우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득 그의 시선이 무림어군의 선두에 서 있는 금포노인들에게 고정되었다. '스물여덟 명! 그렇다면 무림이십팔숙(武林二十八宿)까지... 대체 이놈들이 우리가 이곳으로 오는 것을 어찌 알고 나타났단 말인가?' 그의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무림이십팔숙! 그들은 무림성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로서 서열 십위 안에 드는 인물들이었다. '문주(門主)와 함께 오지 않은 것이 왠지 잘못한 일 같군!' 금우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석년의 마도제일고수답게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전신에 더욱 짙은 살기를 떠올렸다. "후훗! 그렇지 않아도 금명간 백리사헌에게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제발로 찾아오다니. 잘됐다, 이 기회에 절혼백팔척사인의 원혼을 위로해 주겠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양 소매를 치켜올렸다. 순간 눈부신 금광을 뿌리며 갈고리 형상의 금수가 나타났다. "형제들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 버려라." 금우비의 입에서 대갈성이 터져 나오자 멈춰 서 있던 혈문의 고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도 일체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모습에 관무상은 내심 경악을 머금었다. '과연... 본 성의 분타가 괴멸당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군.' 그는 수중의 풍광도를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 "쳐라! 무림성에 거역한 자들의 말로(末路)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도록 해라!" 그리고 그 역시 신형을 날려 금우비를 덮쳐 갔다.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무림성의 이십팔숙들은 우렁찬 외침을 터뜨리며 분분히 신형을 날렸다. 그 뒤를 이어 무림어군들이 수중의 병기를 곧추세우고 혈문의 고수들에게 부딪쳐 갔다. 허공에서 백광(白光)과 핏빛 혈광(血光)이 맞부딪치며 무서운 파열음을 일으켰다. 계곡은 일시에 도기(刀氣)와 검기(劍氣)로 뒤덮였고 처절한 비명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화했다. 2 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그곳에서 경악 어린 시선으로 격전장을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다. "관무상! 그가 무림성의 삼공자일 줄이야..." "무상... 저놈이..." "저놈은 끝내 우리와 적이 되는군." 출중한 기도를 풍기는 다섯 명의 청년. 바로 궁예린과 망혼사인이었다. 어린 시절 그토록 아옹다옹하던 관무상의 모습을 발견한 그들은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망혼사인이 놀라움의 시선으로 계속 격전장을 주시하고 있을 때, 궁예린은 불현듯 자신의 허리춤을 만졌다. '그러고 보니 절혼백팔척사인의 마지막 노인이 남긴 부탁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군.' 그의 손은 이내 요대 속에서 낡은 봉서 하나를 꺼냈다. 전일 의문의 노인이 잠마풍의 천우에게 쫓기면서 부탁한 그 봉서였다. 궁예린은 그것을 요대 속에 간직해 놓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 그 노인이 말하던 금 노인이 바로 살인혈도 금우비가 틀림없을 것이다!' 궁예린은 품속의 봉서를 꺼냈다. 파앗! 궁예린의 중지에 의해 튕겨진 봉서는 섬전처럼 쏘아갔다. 분노에 젖어 있던 금우비는 흠칫 굳어진 얼굴로 손을 내밀며 외쳤다. "왠 놈이냐?" 그때 그의 귀에 궁예린이 전음이 파고들었다. "금우비, 서문초가 죽어 가며 당신에게 전해주라고 부탁한 서신이오." '서문초라면...?' 황급히 공력을 거두며 서신을 받아 든 금우비는 내심 놀라움과 당혹감에 젖어 들었다. 적엽비상(摘葉飛傷)의 놀라운 공력을 지닌 자의 음성치고 너무 젊었거니와, 벌써 몇 년 전에 죽은 서문초의 서신이 어떻게 그에게 전해졌는지 알 길이 없었던 탓이다. 금우비가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는 동안에도 계곡 안에선 여전히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으악...!" "크으윽..." 한 편의 몸서리쳐지는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상대의 심장을 검으로 찌르는가 하면 어느새 허리가 잘려 나가고 피분수가 허공을 현란히 수놓았다. "으하하핫! 모조리 죽여라! 무림성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 줘라!" 관무상의 우렁찬 대소성이 허공에 울려 퍼지고, 그의 풍광도는 좌충우돌 회오리를 일으키며 혈문의 고수들을 마구 도륙하고 있었다. 풍광도가 번뜩일 때마다 여지없이 수급이 날아가고 피보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진정 가공할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궁예린은 내심 은은한 경탄을 머금고 있었다. '관무상! 놀라울 정도로 강해졌구나. 패도적인 기질은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그때 살인혈도 금우비가 관무상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놈! 애송아! 너의 상대는 노부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하는지 보겠다." 그는 금빛 광채를 서리서리 뿜으며 관무상에게 미친 듯이 덮쳐 들었다. 그의 공격에 관무상은 장내를 휩쓸던 기세 그대로 금우비에게 똑바로 마주쳐 갔다. "으하하핫! 금우비, 염려 마라. 이제 네놈을 죽여 줄 것이니..." 다음 순간, 한 쌍의 금수(金手)와 풍광도가 맞부딪치며 무서운 불꽃을 일으켰다. 그 한 번의 부딪침으로 금우비는 어깨가 뻐근한 것을 느끼며 부지중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의 내심은 활화산 같은 분노로 들끓어 올랐다. '교활한 놈! 이놈의 심기가 이토록 잔혹스러울 줄이야...' 그의 생각대로였다. 관무상은 선기를 잡기 위해 곧바로 금우비를 상대하지 않고 혈문의 고수들을 무차별 도륙했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로 금우비가 이성을 잃는 순간 그와 맞선 것이었으니... 심기가 흐트러진 금우비가 자신의 무공을 제대로 발휘할 리 만무했다. 더욱이 관무상의 활약에 힘입은 무림성의 고수들은 사기가 충천해 있었고 거기에 무림이십팔숙의 엄청난 무공이 합세해 혈문의 고수들은 연신 밀리고 있었다. "크아악!" "으윽...!" 혈문의 고수들은 순식간에 삼분지 일이나 줄어 있었다. 궁예린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승부는 끝났다. 무림성, 과연 명불허전이군. 개개인의 무학이 최절정에 이르러 있다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관무상은 오늘의 혈전을 위해 무림성의 고수들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지닌 자만을 추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호법... 어서 문주님을... 잠마풍이... 문주님을..." 숨넘어가는 음성과 함께 피로 범벅이 된 인영 하나가 금우비의 전면에 떨어져 내렸다. "무엇이... 잠마풍이...?" 금우비는 대경하여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관무상 역시 금우비를 상대하다 말고 흠칫 신형을 굳혔다. "그들이 어찌...?" 그러나 정작 크게 놀란 인물은 따로 있었다. 절벽 위에 있으면서도 궁예린은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라 격전장에서 들려 오는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따라서 혈인의 목소리 역시 그의 귀에 생생히 들려 왔다. '잠마풍이... 드디어 나타났구나!' 그는 흥분된 얼굴로 망혼사인을 향해 소리쳤다. "가자! 이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궁예린은 이내 한 줄기 빛이 되어 조금 전 혈인이 왔던 방향으로 곧장 쏘아 갔다. 그 뒤를 네 명의 청년이 다급히 따랐다. 한편, 금우비는 어금니를 깨물며 관무상을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풍광도! 놀랍구나, 무림성이 잠마풍과 결탁을 하다니." 순간 관무상의 눈썹이 꿈틀했다. "금우비! 말 조심해라. 잠마풍은 무림성과 별개이다." 그러나 그의 내심 역시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魔)의 바람... 그들이 지나는 곳에는 오직 죽음뿐이 아닌가? 그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만약 무림성도 그 범위 안에 든다면... 안 된다! 막아야 한다. 사대신군(四大神君)은 나의 야망을 위해 필요한 존재들이다!' 관무상은 모르고 있었다. 잠마풍이 바로 그의 사형인 천우가 관장하는 세력임을. 때문에 그는 자신과 헤어져 혈문의 문주를 쫓고 있는 무림성 사대신군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금우비가 그를 쏘아보며 재차 소리치고 있었다. "풍광도! 우리의 승부는 훗날 다시 겨루자." 다음 순간, 금우비는 신형을 허공으로 띄우며 혈문의 고수들을 향해 외쳤다. "혈문의 제자들은 노부를 따르라!" 그 말에 혈의인들은 몰려왔을 때처럼 소리없이 계곡을 빠져 나갔다. 관무상도 급히 무림성의 고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십팔숙! 우리도 시급히 갑시다. 사대신군이 위험에 처해 있을지도 모르오." 그가 허공으로 신형을 띄우자 무림이십팔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무림성의 제자들은 모두 삼공자를 따르라!" 그들은 이내 신형을 날려 장내를 떠나기 시작했다. 다시금 잠마풍의 위세를 실감케 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 장내에는 역겨운 피비린내와 흥건한 핏물 속에 누운 시신들만이 남게 되었다. 3 "천극사절진(天極死絶陣)을 펼쳐 잠마풍을 막아라!" "장문인들께선 제자들의 등뒤 곤(坤)과 건(乾)을 맡아 주시오!" 사유학의 다급한 외침이 쉬지 않고 터져 나오고 있었다. 천애산 절봉의 넓은 분지. 오백여 명에 달하는 십인방의 제자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절진(絶陣)을 펼치고 있었고, 그 주위로 마치 유령처럼 절진을 포위한 채 파고드는 수많은 흑의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하나같이 '마(魔)'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바로 잠마풍의 무리들이었다. "흐흐흐... 잠마풍이 스치는 곳에는 오직 죽음뿐이다. 모조리 죽여라!" 이 시대 최대의 불가사의라 일컬어지는 잠마풍이 십인방을 기습해 일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잠마풍의 무리들이 스치는 곳에서는 섬광과 함께 반드시 처절한 비명성이 뒤따랐다. 연이어 솟구치는 피〔血〕의 기둥. 마치 유령처럼 움직이며 살수를 펼치는 잠마풍 고수들의 무공은 그야말로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반면에 그들과 맞서 싸우는 십인방의 고수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십대문파의 정예임에도 불구하고 잠마풍의 고수들이 워낙 강한지라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런 중에도 사유학의 지시는 계속 내려지고 있었다. "경허성승!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을 십리사절진(十里死絶陣)에 혼합해서 펼치시오!" "아미타불... 알겠소이다." "운선도장께서는 사상검진(四象劍陣)의 오행(五行)을 역으로 해서... 천취신개는 삼십육타구진(三十六打九陣)을 태극(太極)에 중심을 두고..." "무량수불...!" 십대문파는 모두 사유학의 지시에 정확히 따르고 있었다. 진(陣)의 중앙. 십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한가운데 이륜좌거를 탄 사유학이 자리해 있었다. 그는 연신 주위의 상황을 둘러보며 장문인들에게 신속히 영을 내렸다. "전력을 다하시오! 십인방의 사활이 이번 일전에 달려 있소." 사유학의 음성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정도(正道)의 맥(脈)인 십인방이 잠마풍의 악랄한 살수에 이대로 무너진다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기 때문이리라. "후후후... 가소로운 놈들!" 잠마풍의 무리 가운데서 득의양양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음침한 인상에 염소수염을 기른 육십 세 가량의 흑의노인이었다. 그는 한 손에 피가 흐르는 검을 쥔 채 잠마풍을 지휘하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마라!" 흑의노인의 음침한 일성에 잠마풍의 고수들은 더욱 무섭고 가공할 기세로 십인방을 유린해 들었다. "으악!" "크으윽..." 진저리쳐지는 비명성이 잇달아 터지며 장내는 쓰러지는 십인방의 고수들의 시신들로 가득 메워졌다. 사유학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십인방은 차츰 잠마풍의 힘에 밀리기 시작했다. "으음... 잠마풍이 이 정도일 줄이야..." 사유학의 얼굴은 침통하게 굳어 있었다. "하나같이 극강을 이루는 살수들로 구성되어 있다니..." 그의 말대로였다. 잠마풍의 무공은 필살일초의 가공할 살수무학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다. 십인방으로서는 불가항력이다...!" 사유학은 절망이 깃들인 탄식을 불어 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철산! 비호! 사릉! 표빈! 너희들의 모든 것을 발휘할 때이다. 잠마풍을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웅후한 대갈성이 솟구치는 비명 사이를 헤집었다. 순간 사유학의 두 눈에 섬전 같은 기광이 스쳐 갔다. '저 청년은...?' "후훗! 염려 마라, 대장! 모조리 죽여 준다!" "헤헤헤, 오랜만에 유감없이 솜씨를 발휘해 보겠다!" 우렁찬 대답 소리와 함께 장내에 네 명의 청년이 내려섰다. 바로 망혼사인이었다. 철산은 핏빛 도끼〔血斧〕를, 손비호는 소검(小劍)을, 유사릉은 철편(鐵鞭)을 그리고 표빈은 검(劍)을 들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각자의 병기를 왼손에 든 채 무섭게 잠마풍을 덮쳐 갔다. "크아악...!" "으윽!" 졸지에 기습을 당한 잠마풍의 고수들은 무참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망혼사인의 손속이 너무도 빨라 미처 손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잠마풍의 무공이 극쾌의 살수무공이라면 망혼사인의 무공은 이미 그 경지를 넘어선 신쾌(神快)의 것이었다. "잠마풍! 한 놈도 살아 나갈 수 없다!" 또다시 예의 싸늘한 대갈성이 터지며 한 가닥 묵광이 대기를 갈랐다. 밀천여의묵봉. 그것이 한 자루의 묵검(墨劍)으로 화해 허공을 긋고 있었다. "모조리 죽인다!" 궁예린의 얼굴은 이 순간 살심(殺心)을 그대로 드러내며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난날 궁가장에서 있었던 혈겁의 장면이 그의 뇌리에 떠오른 채 사라질 줄을 몰랐다. 재차 무서운 살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살예십팔식, 살예사사절(殺藝死四絶)!" 그 뒤를 이어 주위의 공기가 소용돌이치며 소름끼치는 음향을 발했다. 살예사사절, 대우주에 근거를 둔 필살의 초식이 펼쳐진 것이다. "풍(風), 살(殺)!" 궁예린의 손에 들린 묵검이 쾌속히 허공을 가르자 묵광의 소용돌이가 허공을 뒤덮으며 주위는 돌연 암흑 세계로 화했다. 그 가운데 육중한 묵광이 소리없이 밀려나가 잠마풍의 고수들을 덮쳤다. "크윽..." 잠마풍의 고수 십여 명이 한꺼번에 육신이 파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뇌(雷), 살(殺)!" 궁예린의 대성이 터지고 한치의 빈틈도 없이 가공할 묵광이 다시 잠마풍의 고수들을 강타했다. 그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신형을 무너뜨렸다. 쓰러지는 그들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 들어가 번개 자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살예사사절. 그것은 진정 통천 가공할 초식이 아닐 수 없었다. 잠마풍은 이 광세무학 앞에 속절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한편, 망혼사인의 활약도 그에 못지않게 눈부신 것이었다. "우히히... 잠마풍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철산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정확히 한 명씩 머리가 박살나고 있었다. 또한 쾌속한 몸놀림을 따를 자가 없는 손비호는 바람처럼 잠마풍의 무리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헤헷,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것을 실증해 주마!" 그의 소검은 잔인하리만큼 비쾌하게 상대의 가슴을 쑤시고 있었다. "헉! 이... 이렇게 빠른 검이..." 잠마풍의 고수들은 경악과 불신 속에 차례로 쓰러졌다. 표빈과 유사릉 역시 다른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독문병기를 사용해 잠마풍을 쑥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렇듯 궁예린을 비롯한 다섯 명의 청년들은 가히 신(神)의 무학으로 한 편의 장쾌한 혈전도(血戰圖)를 그려 내고 있었다. 그 광경에 십대문파의 장문인들과 십인방의 인물들은 넋을 놓고 있었다. 사태는 그들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히 역전되어 있었다. 무수한 잠마풍의 고수들이 다섯 청년들만의 무공으로 완전히 제압당한 것이다. "잠마풍이 저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대체 저들이 누구이기에...?" 십대문파의 장문인들은 한결같이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에도 궁예린은 묵검을 맹렬히 휘두르고 있었다. "우(雨), 살(殺)!" 쏴아아아... 하늘에서 피비〔血雨〕가 내렸다. 폐부를 토하듯 처절한 비명성이 연이어 터지고 궁예린은 좌충우돌 잠마풍 속을 꿰뚫고 있었다. "운(雲), 살(殺)!" 묵검이 구름에 스치듯 잠마풍의 고수들의 가슴을 헤집고 지나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동안 들려 오던 비명성이 뚝 그치고 그 자리를 침묵이 대신했다. 모든 상황이 진정되고 일목요연하게 드러난 장내에는 잠마풍 고수들의 시신 이백여 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생자(生者)는 없었다. 아니, 꼭 한 사람이 살아 남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바로 잠마풍을 진두지휘하던 염소수염의 흑의노인이었다. 4 '대체 저 어린 놈은 누구이기에...' 흑의노인은 충혈된 시선으로 궁예린을 주시했다. 이제까지 무림에 저런 자가 있다는 말을 그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저토록 놀라운 무공을 지녔음에도 아직 그에 대해 들어 보지 못했다는 것은 무림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흑의노인은 어떤 고인이 그를 가르쳤기에 약관의 나이에 저런 가공할 무공을 지닐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 순간 궁예린은 깨끗이 정리된 장내를 바라보며 나직한 독백을 흘리고 있었다. "잠마풍이 약한 것인가, 아니면 살예사사절이 강한 것인가?" 그는 처절한 주검들에서 회의적인 느낌을 받았다. 살예사사절의 위력이 이토록 무서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궁예린은 참혹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장내를 둘러본 그는 이내 유일한 생존자인 흑의노인을 바라보았다. '이자는 은잠을 꽂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걸음을 옮겨 흑의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말하라! 잠마풍을 다스리는, 은잠을 꽂은 자가 있는 곳을..." "그, 그것을 어찌..." 궁예린의 물음에 흑의노인은 놀라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 충격으로 그의 가슴에 난 상처에서 시뻘건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이제까지 신비에 가려진 잠마풍주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궁예린은 그에 관해 알고 있는 듯 확실한 인상착의를 대며 그의 행방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궁예린의 싸늘한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말한다면 당신은 통쾌하게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에게서 뻗치는 무서운 살기에 흑의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떨었다. '이놈... 대체 누구기에 이토록 가공할 살기를 내뿜는 것인가?' 그의 경악과 충격은 좀처럼 가실 줄을 몰랐다. 스윽! 흑의노인이 침묵을 지키자 궁예린은 묵검을 노인의 상처 입은 가슴에 겨누었다.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살점은 하나씩 잘려질 것이다." "...!" 흑의노인의 전신에 경련이 일었다. 그는 창백한 입술을 열어 더듬더듬 힘겹게 말했다. "노부는 아무것도... 할말이 없다. 그분이... 누구인 것을 모르니... 단지 명을 따를 뿐이다." 궁예린은 뚫어질 듯 노인의 눈을 주시했다. 공포와 절망감만이 가득했을 뿐, 어디에도 거짓의 증거는 보이지 않았다. '거짓은 아닌 것 같군.' 내심 확신을 한 그는 재차 냉랭히 물었다. "믿겠다. 그러면 그는 지금 어디 있는가?" 노인은 초점을 잃은 시선으로 궁예린을 마주보며 말을 잃었다. '살수, 그 냄새가 이놈의 몸에서 풍기다니! 그것도 고도의 훈련을 거친 듯하지 않는가?' 그는 궁예린의 몸에서 살수만이 풍기는 독특한 기도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살수의 길을 걷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궁예린이 그의 내심을 읽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봤다. 잠마풍은 본인에 비한다면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 흑의노인은 흠칫했다. '역시 그랬군. 어차피 죽는 것... 깨끗한 죽음을 바랄 수밖에.' 그는 결심을 굳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분은... 절운협으로 가셨다." 순간 궁예린이 안색을 일변시키며 소리쳤다. "절운협!" 바로 그때였다. "윽!" 돌연 흑의노인은 가슴을 파고드는 예리한 고통에 신음성을 발했다. 크게 경악한 궁예린이 자신도 모르게 노인을 향해 겨누고 있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준 것이었다. 절운협. 그곳은 바로 밀천무영세가의 가혼들과 백리유정이 있는 곳이 아닌가? 궁예린은 다급히 흑의노인에게 물었다. "왜 그곳에 갔느냐?" 흑의노인은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어서 죽여라. 노부는 할말을 다했다." 잠시 그를 바라본 궁예린은 천천히 말했다. "만약... 당신이 잠마풍의 인물만 아니었다면 살려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 순간, 묵검이 여지없이 흑의노인의 가슴을 쑤셨다. "윽!" 날카로운 통증에 흑의노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서서히 그 자리에 무너져 갔다. "하나... 너도 그분에게... 죽는다..." 노인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숨을 거뒀다. 그의 수하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죽음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궁예린은 검을 회수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잠마풍, 그들이 어찌 절운협에..." 그는 흑의노인의 마지막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그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까닭에 그는 이내 심중을 추스르며 망혼사인을 돌아보았다. "가자!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유정과 그들이 위험하다." 궁예린은 비쾌히 신형을 날려 장내를 떠나기 시작했다. "냉혼! 내가 갈 때까지 버텨 주기 바란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하나의 점으로 화하고 있었다. 그제야 철산도 도끼를 힘껏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우리도 빨리 가자. 대장이 깨끗이 쓸어 버리기 전에." 네 청년은 곧 점으로 화해 궁예린의 뒤를 쫓았다. 그 속에서 손비호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하하하! 곰아, 네가 아무리 빨라도 대장을 따라잡을 수는 없으니 네 도끼한테나 빌어라. 몇 놈은 남겨 달라고." 그리고 그들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십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여전히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들은 퍼뜩 정신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중원에 언제 저런 젊은이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무량수불... 실로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무공 경지였소." 그때 사유학이 생각난 듯 급히 말문을 열었다. "장문인! 바로 저 공자였소. 전날 철혈도를 꺾은 공자가..." 그 말에 모두들 또다시 경악했다. "오오! 바로 그 청년이..." "진정 놀랍구려." 사유학의 음성은 낮게 이어졌다. "만약 저 공자가 살성(殺星)이라면, 무림은 공전절후의 혈우(血雨)를 맞게 될 것이오." 그는 기광이 번뜩이는 시선으로 궁예린이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예상치 않은 대변수(大變數)가 나타난 것이오. 무적의 무공을 자랑하면서... 또한 그를 따르는 네 청년들... 본인은 보았소. 그들은 모두 왼손잡이였소. 그것은 그들의 무공이 살수에 기초를 둔 무학으로, 오직 죽음을 부르는 전율할 살초라는 뜻이오." "아...!" 중인들은 재차 경악과 경탄이 서린 음성을 내뱉었다. 사유학은 계속 말을 이었다. "본인은 문득 저 공자를 보며 이런 명호가 생각났소. 천예살군(天藝殺君)이라는. 그것은 여러 장문인들께서도 보셨듯이 저 공자의 살인은 마치 하나의 예(藝)를 보는 것 같기 때문이오." "천예살군..." 중인들은 나직이 그 명호를 되뇌이며 새삼 조금 전의 경악을 되새겼다. 그들의 뇌리엔 궁예린이 좌충우돌 활약하던 모습이 생생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경허성승이 합장을 하며 무거운 불호성을 터뜨렸다. "아미타불... 세존이시여, 부디 저 공자가 정도(正道)의 기수가 되기를..." 사유학은 언제까지고 궁예린이 사라진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간혹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궁예린. 드디어 그의 명호가 탄생되었다. 하늘의 예(藝) 같은 살인 솜씨를 발휘한다 해서 붙여진 명호. 천예살군(天藝殺君)! 중원 십팔만 리 대륙을 질타할 이름이었다. 천애산의 살육전을 기점으로 중원은 마침내 궁예린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제 17 장 잠마풍의 멸문(滅門) 1 석양(夕陽)이 천지를 섬뜩한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흡사 불길한 일을 예고하는 듯했다. 협곡 안의 넓은 광장은 오늘따라 유난히 붉었다. 그것은 선연한 핏물이 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크아악!" "으아악...!" 광장 안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각기 백의와 흑의를 입고 있어 멀리서도 뚜렷이 구별되는 인물들의 대접전이었다. 흑의인들은 가슴에 '마(魔)' 자를 새기고 있었다. 바로 잠마풍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는 백의청년들은 망혼이십육살이었다. 흑의인들에게 맞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지 그들의 전신에는 여기저기 베이고 찢긴 상처만이 가득했다. 그들이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곳. 기이한 진세(陣勢)로 서로 등을 맞댄 채 사방에서 밀려드는 백여 명의 잠마풍을 상대하고 있었다. 진세의 중앙에는 추남청년으로 역용한 백리유정이 경직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진세의 밖에는 백여 구의 시신들이 핏물 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시신들은 모두가 잠마풍의 고수들이었다. 그들도 망혼이십육살의 절진에는 어쩔 수가 없는 듯했다. 문득 백리유정이 진세 바깥을 주시하며 나직한 독백을 흘렸다. "천우... 당신이 이처럼 무모한 일을 벌일 줄은 몰랐소. 이대로 시각이 흐른다면 잠마풍과 이들 이십육 명은 양패구상(兩敗俱像)을 하게 됨을 모른단 말이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바로 잠마풍주 천우가 석양빛에 은잠을 반사시키며 서 있었다. 백리유정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절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놀람의 빛이 역력했다. '믿지 못할 일이다. 잠마풍의 힘 앞에서 반나절 동안 버텨 내다니! 중원에 이런 자들이 존재한단 말인가?' 뜻밖에도 그는 절운협에 밀천무영세가가 재현되어 있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하나같이 약관의 젊은 애송이들인데도 잠마풍이 백여 명이나 목숨을 잃은 데 반해 놈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그랬다. 오직 죽음만을 몰고 다닌다는 잠마풍이 이제 겨우 약관의 청년들에게 맥없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천우는 곧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사십대 후반 가량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뱀같이 차가운 인상에 코가 유난히 큰 매부리코의 사내였다. "호광(虎光)! 저 서생이 진정 본인이 찾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느냐?" 천우가 백리유정을 가리키며 묻자 매부리코의 사내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속하... 분명히 저 청년이 역용을 푸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괴이한 것은 또 한 놈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사내의 말. 그것은 바로 궁예린과 백리유정이 처음 만났을 때의 광경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때 백리유정의 진면목을 보았다는 것인가? 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침음했다. "으음... 너를 믿는다. 이 정도의 희생으로, 아니 잠마풍이 모두 전멸한다 해도 저 청년만 사로잡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천우의 중얼거림에 호광은 흠칫 안색을 굳혔다. '대체 저 녀석이 어떤 존재이기에...?' 호광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한 천우는 그 순간 허공을 바라보며 백리사헌의 당부를 떠올리고 있었다. －명심해라! 그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 아이만은 기필코 데려와야 한다! 그리고 이제 천우는 백리사헌의 명이 아닌 부탁을 이행하기 일보직전에 와 있었다. '이것으로 무림성에서 나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질 것이다!' 천우는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다시 장내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한 명의 백의청년이 한순간의 실수로 빈틈을 보이고 있었다. 기회를 놓칠세라 잠마풍 고수들의 검이 청년의 옆구리를 번개같이 쑤셨다. "크윽!" 청년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꺾고 말았다. 수십 개의 검이 쓰러진 청년에게로 한꺼번에 짓쳐들었다. "으윽...!" 청년은 다시 한 번 허벅지를 길게 베인 채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천우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승부는 끝났다. 저놈들의 괴이한 진(陣)이 무너진 이상 남은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그는 두 눈을 번뜩이며 확고하게 결심을 굳혔다. "무서운 놈들! 한 놈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한편, 백리유정은 이때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아... 중과부적이다! 망혼이십육살의 무공은 잠마풍의 누구보다 뛰어나나, 나를 보호하기 위해 너무 장시간 한곳에서 싸웠기 때문에 힘이 달리고 있다!' 그는 암울한 시선을 십 장 밖에 서 있는 천우에게로 돌렸다. '천우, 당신은 지금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음을 아시오? 물러가시오. 제발 물러가란 말이오!' 그것은 거의 절규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여기저기에서는 고통에 찬 신음성이 잇달아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망혼이십육살, 그들은 극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꽉 다문 입술에는 결연한 의지가, 두 눈에는 무서운 투지와 살기가 이글거렸다. '크윽... 이럴 수는 없다. 선대의 가혼들께서도 이들에게 당했는데... 우리까지 당할 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무서운 정신력만으로 굳건히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챙! 맑은 금속성이 천우에게서 일었다. 어느새 그의 수중에는 종잇장처럼 얇은 도(刀)가 들려 있었다. 그의 독문병기인 잠마도였다. 잠마도를 손에 쥔 채 천우는 천천히 망혼이십육살에게로 다가갔다. 살벌한 냉기와 살기가 삽시간에 주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백리유정은 마치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늪으로 꺼져 드는 느낌이었다. '아... 끝이다. 예린! 미안하다. 너의 수족들을 모두 잃어야 하다니...' 그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 모든 것은 나로 인해 비롯된 일...!' 다음 순간, 백리유정은 앞으로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멈추시오, 천우! 내가 가겠소!" 천우는 흠칫 놀라 부지중 우뚝 신형을 멈추었다. '천우라고...? 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나?' 그의 내심은 경악과 혼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이름은 고아인 자신을 거둔 백리사헌이 친히 지어 준 것으로 그 외에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때 앞으로 나서는 백리유정의 앞을 누군가 재빨리 가로막고 있었다. "안 되오! 유 공자께서 이러시면 우리가 어떻게 가주를 뵙는단 말이오?" 그는 냉혼이었다. 그 역시 전신에 검상을 입어 부상이 막중한 몸이었으나 표정만은 단호했다. 백리유정은 그를 바라보며 씁쓸히 웃었다. "냉혼, 비키시오. 나는 더 이상 당신들을 나 때문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소." 그러나 냉혼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오. 유 공자가 간다고 저들이 물러난다는 보장은 없지 않소? 우리가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하오." 그의 진심 어린 말에도 백리유정은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곧 알게 될 것이오. 어쨌든 나는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오. 또한 내 생각이 맞는다면... 잠마풍은 나를 목표로 하고 있을 것이오." "그것을 어찌..." 냉혼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백리유정은 그를 지나 서슴없이 절진을 벗어났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잠마풍 고수들의 검이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경악한 천우가 다급히 일갈을 터뜨렸다. "모두 물러나라!" 그는 백리유정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말라던 백리사헌의 말을 상기했던 것이다. 잠마풍의 고수들은 짙은 의혹을 띠며 마지못해 물러나고 있었다. 냉혼 역시 이 순간 의혹에 잠겨 백리유정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백리유정은 한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유유히 걸음을 옮겨 천우 앞에 이르렀다. 그는 천우를 똑바로 마주하고 섰다. "당신은 나를 데려가기 위해 왔을 것이오. 내가 갈 테니 이대로 돌아가시오." 천우는 재차 흠칫했다. '그것까지...?' 그는 안색을 싸늘히 굳히며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그러자 백리유정은 허탈함이 느껴지는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훗! 당신을 보낸 사람이 그것까지 물어 보라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천우는 내심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다 알고 있다! 누군가? 대체 이놈은 누구이기에 사부와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가?' 그러나 자신이 궁금해 하는 것을 백리유정에게 물어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싸늘히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다! 너는 어차피 나를 따라야 한다. 하나 이대로 갈 수는 없다. 그것은 잠마풍의 신화가 다시는 깨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내 장내를 향해 벼락같은 일성을 터뜨렸다. "놈들을 모두 죽여라!" "천우, 안 되오!" 백리유정이 대경하여 그를 가로막았지만 천우는 싸늘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것은 안 된다. 이놈들은 무서운 애송이들... 더 크기 전에 그 싹을 모조리 잘라 버려야 한다." 장내에는 다시 일대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망혼이십육살은 간신히 방어에만 급급해 있었으니... 백리유정은 그 광경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 내가 무학을 익히지 않은 것이 이토록 후회스러울 줄이야...'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2 "으악...!" "크윽!" 돌연 잠마풍의 고수들 사이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울리는 우렁찬 대갈성이 쩌렁쩌렁하게 일었다. "형제들이여! 나 궁예린이 왔다. 놈들을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어느새 나타났는가? 한 손에 밀천여의묵봉을 든 궁예린이 장내를 무섭게 휩쓸고 있었다. 이 순간 밀천여의묵봉은 족히 십 척은 될 만큼 길게 늘어나 있었다. 묵봉은 괴음을 발하며 사정없이 잠마풍 고수들을 덮쳐 갔다. "크아악..." 잠마풍의 고수들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지고 있었다. "와아! 가주께서 오셨다!"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궁예린의 모습에 망혼이십육살은 일제히 환호하며 사기 충천하여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다시 발동된 기진(奇陣)은 재차 잠마풍의 고수들을 맥없이 쓰러뜨렸다. "아! 예린..." 그 순간 백리유정은 안색을 펴며 탄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유정! 내가 왔다!" 궁예린이 비쾌히 백리유정의 앞에 내려섰다. "예린!" "유정...!" 그들은 기쁨이 어린 표정으로 굳게 손을 잡았다. 한편, 천우는 궁예린의 모습을 보며 안색을 일변시키고 있었다. '이놈! 모습이 몹시 눈에 익다!' 그때 장내에는 또다시 네 인영이 내려서고 있었다. 망혼사인이었다. "어? 멈춰라, 이놈들아! 내가 찍어 놨단 말이다." 철산의 음성에 이어 손비호의 해괴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헤헤헤... 늦었다, 철산! 빠르기로 말하면 나 비호가 아니겠느냐?"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무차별 살상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들 각자의 독문병기는 무섭게 잠마풍의 고수들을 휘감고, 베고, 찌르고, 쪼개어 갔다. "으악...!" "크헉!" 잠마풍의 고수들은 졸지에 맥없이 목숨을 잃었다. 천우는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그가 아연해 있을 때, 궁예린은 살기가 무섭게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천우의 은잠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이내 백리유정을 향해 싸늘히 말했다. "유정, 이곳은 위험하니 잠시 물러나 있게."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백리유정은 내심 흠칫했다. '예린!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그는 불안과 의혹을 가득 안고 뒤로 물러섰다. 반면에 궁예린은 천우에게 한 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귀하! 당신이 잠마풍을 이끄는 자가 틀림없구려." 찰나지간 천우는 굳은 얼굴로 궁예린을 응시했다. "기이한 일이군. 그것을 네가 알고 있다니." 황망중에도 그의 전신에서는 막중한 기도가 뻗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궁예린은 내심 감탄했다. '과연... 잠마풍을 다스릴 만하군.' 그는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재차 싸늘히 말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오. 귀하의 수하에게서 들었을 뿐이니." "무엇이! 그렇다면..." 천우의 얼굴에 처음으로 눈에 띄게 경련이 일었다. 무언가를 느낀 표정이었다. 궁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히도 당신의 짐작대로요. 십인방을 기습한 당신의 수하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저승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순간 천우의 가슴은 철렁, 소리나게 내려앉았다. '그들이 모두 죽음을...?' 그는 쉽사리 궁예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천하에 잠마풍을 제거할 세력이 과연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단언하건대 그럴 수는 없었다. 천우는 궁예린을 미심쩍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궁예린은 재차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믿어야 할 것이오. 이제 당신도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니." 동시에 그는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장내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선 일방적인 살육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크아악!" "으악!" 신출귀몰한 네 청년의 손속에 잠마풍은 철저히 도륙당하고 있었다. 철산의 도끼가 휘둘려질 때마다 어김없이 뇌수가 터지고 피분수가 솟구쳤다. 유사릉의 철편이 스치는 곳에서는 떨어진 살점과 팔다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실로 가공할 죽음의 쾌초였다. 백리유정은 장내를 지켜보며 착잡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천우! 이것으로 잠마풍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오. 당신은 어리석음을 범했소!'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들이 누군지 아시오? 바로 당신들의 손에 죽어 간 밀천무영세가의 후인들이란 말이오. 당신은... 그것을 알았어야 했소!' 인과응보.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리라. 천우의 얼굴은 차츰 무참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허언(虛言)이 아니다. 대체 이놈들은 누구이기에 이토록 가공할 살수를 펼친단 말인가?' 그는 이제야 궁예린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런 그의 등줄기엔 부지중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궁예린이 다시 싸늘히 말했다. "귀하! 나는 당신에게 한마디만 묻겠소. 그것을 말해 준다면 귀하는 살 수도 있을 것이오." 천우는 일순 멍해졌다. 누가 감히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절대자의 수제자이며 실상 무림성의 제이인자였다. 그에게 감히 이토록 광오한 말을 한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나 천우는 곧 냉정을 되찾으며 내심 자신을 타일렀다. '침착하자. 그래야만이 놈을 죽일 수 있다!' 그는 예의 싸늘한 신색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굉장한 배짱을 지녔구나. 천하에 잠마풍주에게 그런 말을 하는 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후후후... 좋다. 네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궁예린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 년 전, 귀하는 대하성의 궁가장을 피로 물들였소. 그때 궁가장주 궁사를 쓰러뜨린 인물에게 귀하는 명을 받고 있었소. 말해 보시오. 그가 누구요?" 그는 그 동안 가슴에 품어 왔던 의문을 단번에 털어놓았다. 부르르... 천우의 전신에 세찬 경련이 일었다. 그제서야 그는 눈앞의 청년이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그렇다! 그놈... 궁사의 손자인 궁예린, 그놈이다!' 천우의 안색은 일생 일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십 번 급변을 거듭했다. 그런데 이 순간, 백리유정의 얼굴 또한 무참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예린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니... 다행히 아버님을 보지는 못한 것 같은데... 하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바르르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천우! 제발... 비극은 이곳에서 끝나게 해주기 바라오.' 백리유정은 내심 간절히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의 심중을 알 리 없는 천우는 궁예린의 살기에 치를 떨고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질식할 것 같은 살기가 궁예린의 전신에서 뿜어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천우의 심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 어린 놈이 이토록 무섭게 성장했다니...' 그의 눈빛은 자꾸만 떨리고 있었다. 3 천우의 내심은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한없이 암울해지고 있었다. '사부! 당신이 밀천무영세가를 쳤던 것이 일생 일대의 실수였다는 것을 이제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 꼬마놈을 살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천우는 주위를 담담히 훑어보았다. 조용했다. 선연한 핏물은 내를 이루어 흐르고 있었고, 흥건한 핏물 속에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자신의 수하들이 누워 있었다. '당신은 위대했습니다. 밀천무영세가는 진정 무서운 놈들이었으니까요. 하나 당신은 완벽하지 못했고, 그 마음속에 정(情)의 그늘이 조금이라도 싹튼 것이 오늘날 위대한 당신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아십니까?' 천우의 자조 섞인 내심은 주위의 참담한 모습에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놈들은 바로 밀천의 후예들이었음을... 놀랍게도 당신이 남긴 한 알의 씨앗이 이렇게 가지를 치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것도 당신의 아성을 무너뜨릴 독버섯으로 말입니다.' 그때 궁예린의 싸늘한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어떻소, 귀하! 얘기해 줄 수 있겠소?" 천우는 고소를 머금으며 궁예린을 주시했다. "후훗! 우습군. 너는 내가 그것에 대해 대답을 할 것이라 보는가?" 궁예린의 입가에 다시금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는 않소. 그러나 나는 믿소. 그것은 귀하 역시 쇠로 만들어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오." 그의 음성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 라도 천우의 입을 열게 하겠다는 신념이었다. 천우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져 옴을 느꼈으나 여전히 고소를 멈추지 않았다. "후훗! 결국 너는 내가 네 손에 패할 것이라 장담하는군. 좋다. 모든 것은 네 뜻이 이루어진 후 따져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어금니를 힘껏 깨물며 허리춤에 감겨진 잠마도를 빼 들었다. 종잇장처럼 얇은 연도가 매서운 한광을 뿌렸다. 궁예린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놀랍군. 귀하도 도(刀)를 쓸 줄은..." 그는 아직까지 천우가 백리사헌의 수석제자인 잠마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백리유정의 전신에 다시 한 번 떨림이 일었다. '천우... 제발 입을 다물어 주시오...' 그가 입을 열 수만 있었다면 이처럼 크게 외쳤으리라. 백리유정의 가슴 졸이는 마음을 알았을까? 천우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도(刀)의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을 느끼기에는 무엇보다 괜찮은 병기(兵器)이지." 그가 자신의 애도를 손가락으로 튕기자 연도는 청아한 금속음을 발했다. 그 모습을 보는 궁예린의 표정은 너무도 담담했다. "그렇군. 역시 잠마풍은 살수(殺手)로 구성되어 있었군." 찰나지간, 그의 말에 천우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경직된 음성으로 궁예린에게 말했다. "그것을 느끼는 네게서도 역시 살수의 기(氣)가 풍기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군." 한편으로 그의 내심은 놀라움으로 가득 들끓고 있었다. '밀천무영세가는 역시 살수세가였군. 놀라운 발견이다. 사부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그는 내심을 갈무리하고 두 발을 수평으로 천천히 벌리며 담담한 음성을 이었다. "이제 더 이상 말은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무림은 힘〔力〕으로 말하는 곳이니..." 천우의 자세에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모든 것을 초월한 극고의 수련을 거친 살수의 기운이 천우의 전신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궁예린은 잠시 천우를 물끄러미 주시하며 내심 찬탄을 금치 못했다. '비록 적이기는 하나 잠마풍을 이끌기에는 아까운 재목이군!' 그러나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을 뿐, 궁예린은 곧 무서운 살기를 뿜으며 소매를 떨쳤다. '기필코 제거한다. 그러나 죽여서는 안 될 것이다. 흉수를 찾기 전에는.' 무딘 금속음과 함께 그의 손에 들린 밀천여의묵봉이 묵도로 변했다. '대단한 신병(神兵)을 지녔군!' 천우는 내심 탄성을 터뜨리며 수중의 도를 힘껏 움켜쥐었다. '나, 천우가 생애 최대의 강적을 만난 것 같군!' 잠시 주위에는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앙금처럼 짙게 깔렸다. 그 속에서 공기가 격탕되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한 줄기 백광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궁예린의 목 부위를 향해 짓쳐들었다. 순간적으로 궁예린의 두 눈이 기광을 번뜩였다. '극강의 초식엔 강(强)으로 대적할 뿐!' 궁예린은 내심 빠르게 염두를 굴리며 수중의 묵도를 번개같이 뻗었다. "살혼사광기...!" 번갯불 같은 묵빛 광망이 일며 백광에 부딪쳐 요란한 금속음을 터뜨렸다. 주위는 이제 허공에서 번쩍이는 묵광과 백광의 현란한 섬광 속에 파묻혀 제대로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우우우웅! 공기가 회오리치며 크나큰 파공음을 일으켰다. 살인사광기. 살예십팔식의 가공할 초식이 펼쳐진 것이었다. "으윽!" "헉!" 돌연 두 마디 묵중한 비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살수(殺手)의 최극치를 걷는 두 사람이었기에 한 번의 부딪침으로 승부가 결정난 것이다. 하지만 그 한 번의 부딪침이 주위에 끼친 영향은 실로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지면에 깊이 박혀 있던 수목이 모두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고 바위들은 멀리 날아가 암벽 깊숙이 박혀 있었다. 정적(靜寂). 너무도 고요한 정적이 서서히 주위에 밀려들고 있었다. 회오리치는 공기 속에 흩날리던 희뿌연 먼지가 가라앉자 곧 시야가 걷혔다. 그리고 드러나는 장내의 광경. 궁예린은 어깨 부위에 깊은 상처를 입은 듯 벌어진 옷깃 사이로 허연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상처에서는 꾸역꾸역 선홍빛의 핏물이 흘러나왔다. 반면에 천우는 오 장 밖 거목에 자신의 애도를 손잡이까지 깊숙이 박은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또한 그의 옆구리는 길게 그어져 폭포수 같은 선혈을 쏟아 내고 있었고 두 허벅지에 깊은 도상을 입어 쓰러질 듯 휘청이고 있었다. 심한 부상을 입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두 눈은 상처에 대한 아픔보다는 경악으로 부릅떠진 채 궁예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서운 놈! 십 성의 승천파라검기(昇天破羅劍氣)를 무사히 받아 내다니. 더욱이 나를 죽였으면 상처를 입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살리려 하다니... 그 어린 놈이 이토록 무서운 놈으로 변했다니...' 천우는 등줄기가 싸늘히 식어 옴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는 차디찬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신형을 떨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궁예린이 그의 가슴에 묵도를 들이대고 있었다. "귀하! 이제 귀하의 기회는 끝난 것 같소. 말하시오. 그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르오." 그의 차디찬 음성에 천우는 잠시 표정이 변했을 뿐, 중상을 입은 사람답지 않게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후후후, 궁예린이라 했던가? 분명히 말하겠다. 이 순간부터 나의 입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그는 스르르 두 눈을 내리감았다. 일순, 궁예린의 눈에 무서운 살광이 스쳤다. "훗! 그럴까? 나는 분명 내 자신에게 약속했다. 흉수를 찾기 전까지는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고." 싸늘한 음성과 함께 궁예린은 묵도를 들어 천우의 가슴을 천천히 내리그었다. 핏물이 묵도를 타고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스윽... 슥! 경미한 소음이 들릴 때마다 천우의 가슴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입술을 깨물며 감은 눈을 더욱 꼭 감았다. '사부, 이처럼 허무히 끝날 것을... 제자는 야망(野望)의 늪에서 허덕였나 봅니다! 후훗, 절대는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야 느꼈습니다!' 천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가 쌓아 올린 인생의 모든 것에 대한 회의가 배어 있는 미소였다. 언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패할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항상 남을 죽이는 위치에 서 있었던 그가 지금 이 순간 한 사람의 손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있었다. 그의 전신은 이제 자신의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천우는 눈을 꼭 감은 채 모든 고통을 참아 내고 있었다. 입을 열어 말하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것을...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백리유정은 천우의 표정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며 내심 격정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천우! 고맙소. 아버님이 잘하신 일이 있다면, 바로 당신 천우를 키우신 것일 겁니다.' 끝내 백리유정은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더 이상 천우의 참혹한 몰골을 지켜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우를 내려다보는 궁예린의 얼굴은 이 순간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자! 잠마풍이 이토록 대단하다니... 단순한 마(魔)의 바람이 이토록 거세다니...' 그는 잠마풍에 대해 새삼 새롭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틀렸다. 이자의 입을 열려고 하는 것 자체가 헛수고일 뿐이다!' 궁예린은 마침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묵도를 멈췄다.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천우에게 말했다. "귀하! 나 궁예린은 모든 것을 떠나 귀하에게 존경을 보내는 바이오. 잘 가시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궁예린의 묵도는 천우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헉!' 천우는 내심 헛바람을 들이켜며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눈은 극도의 충격으로 마구 흔들리며 궁예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부! 당신은 너무나 무서운 적을 남겼소! 이놈은 너무도 대단한 놈이오!' 궁예린이 묵도를 빼내자 천우의 가슴에서 피분수가 솟구치며 궁예린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러나 궁예린은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귀하! 그대가 잠마풍주가 아니었다면 그대는 무림에 하나의 기둥이 되었을 것이오." 그 말을 남기며 궁예린은 지체없이 신형을 돌렸다. "이 사람을 정중히 묻어 주거라!" 돌아서는 궁예린의 마음은 한없이 어둡기만 했다. '흉수!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며 입을 닫는단 말인가?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문득 그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궁예린은 일순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리고 하늘 저 끝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하나, 나는 기필코 찾아내겠다. 지옥 끝까지 가는 한이 있어도." 잠마풍주 천우. 그는 그때야 신형을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서서히 무너지는 그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사부! 당신은 나에게 사부이기 전에 아버지 같은 분이었소. 천우는 나를 키워 주신 은혜를 이렇게라도 다소 갚을 수 있어 흡족할 뿐이오!' 쿠웅! 끝내 천우의 신형은 흥건한 핏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한 가닥 미소를 베어문 채. 그의 시신을 바라보는 백리유정의 눈은 격한 감정으로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천우! 당신은 훌륭했소. 아버님의 수석제자로 그 소임을 다했으니까 말이오.' 당연히 한시름 놓아야 하건만 백리유정의 마음은 언제 비밀이 밝혀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 18 장 술잔을 마주하고... 1 사내들에게서 술〔酒〕을 빼놓는다면 그것은 사내와 여인(女人)을 떼어놓고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멋없는 일일 것이다. 조촐한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궁예린과 백리유정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비싼 술이 있는 것도, 화려한 안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넉넉한 정취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문득 궁예린이 단숨에 술을 들이켜며 몽롱한 음성을 터뜨렸다. "하하하... 술과 친구까지 있으니, 여기에 여인을 가미하면 금상첨화겠는걸." "후후후... 그러고 보니 네 녀석은 유리화, 그녀가 생각나는 모양이구나." 백리유정이 말을 받으며 무심코 던진 한마디였다. 한데, 궁예린은 그 말에 순간 가슴 한구석에 엷은 아픔을 느끼고 말았다. 유리화와 헤어질 때의 일이 생각난 것이다. 그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쓰디쓴 독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백리유정은 그의 잔에 다시금 넘치도록 술을 따르며 느물느물 웃었다. "후훗! 아무튼 너는 대단한 놈인 것만은 틀림없다. 내 이미 철산, 비호들에게 들었다만 혹시 전생(前生)에 여복(女福)을 주는 신(神)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던 게 아니냐?" 일순, 궁예린은 쿡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그놈들, 마구 떠벌리고 다닌 모양이군." 그는 넘치도록 채워진 술잔을 내려다보며 넉살좋게 다시 말을 이었다. "유정! 너도 말만 해라. 내 여심(女心)을 옭아매는 기막힌 묘수를 빌려 줄 테니." "잊어 다오. 그런 묘수는 너에게나 통하지 나 같은 놈이 썼다가는 뺨따귀에서 불이 활활 타오를 거다." 백리유정은 아예 손까지 휘휘 내저으며 만류했다. 그러고는 신기한 듯, 다시 술을 들이켜는 궁예린을 주시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네놈은 여러 방면으로 위대해. 능히 내 존경을 받을 만하지. 자, 그런 의미에서 한잔 받아라." 백리유정은 다시금 그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백리유정은 내심 기이한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궁예린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적절하게 행동했다. 무엇이건 그에게는 넘치거나 과한 것이 통하지 않았다. 백리유정은 그런 궁예린을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궁예린은 기이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그 점이 백리유정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깊은 내심일 뿐, 백리유정은 다시 궁예린과 술잔을 마주했다. 2 몇 순배나 술잔이 돌았을까? 궁예린과 백리유정 사이에는 유쾌한 이야기만이 겉으로 돌고 있었다. 한순간 술기운을 빌려서인가... 궁예린이 여전히 유쾌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유정, 나에겐 아직도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잠마풍!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을까 하는 점이다." 일순, 백리유정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어두운 그늘이 스쳐 갔다. '그래, 네가 그것을 물어 올 줄 알았다!' 처음 술상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궁예린은 어김없이 그 일을 입에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애써 담담한 시선으로 궁예린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 역시 거기에 큰 의혹을 느끼고 있다. 설마 그자가 잠마풍을 이끄는 풍주(風主)일 줄은..." 백리유정은 목이 타는지 술을 벌컥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유씨 가문의 눈에 들어 부친의 기관지술을 배우는 제자에 불과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런 엄청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는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따르고 그것을 손안에 움켜쥐었다. "그의 무서운 변화를 난 아직도 실감할 수 없는 기분이다." 그것이 백리유정이 간략하게 설명한 전후(前後) 사정이었다. 궁예린은 그런 백리유정을 바라보며 착잡한 심경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녀석... 거짓을 말하고 있어. 하나 나는 네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고 있다!' 궁예린은 진정으로 백리유정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렇다면 무림성에서 너를 찾기 위해 은밀히 잠마풍에 청부했단 말이군." 궁예린은 자신의 술잔을 응시하며 독백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확실한 건, 그럴 것이라는 가정뿐이지." 백리유정의 술잔을 쥔 손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예린! 더 이상 묻지 마라. 너를 더 이상 기만하고 싶지 않다!' 그는 아픔 가슴을 달래듯 술을 들이켰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돌연 궁예린은 크게 소리 높여 웃었다. "하하하, 네가 무림성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이것으로 증명된 셈이군. 이거 은근히 겁나는구나. 나까지 괜히 무림성의 표적이 되는 것은 아닌지..." 그는 너스레를 떨며 어깨를 자라처럼 움츠렸다. "훗! 말이 그렇게 되는가?" 백리유정의 입가에 쓴웃음이 흐릿하게 스쳤다. 그때 궁예린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건 그렇다치고..." 궁예린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중을 꺼내며 당면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유정, 너도 알다시피 현 무림은 혈문, 삼목천, 십인방의 출현으로 암중에서 무서운 암투가 예견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너의 고견을 듣고 싶구나." 백리유정이 그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녀석, 고견은 무슨... 내 짐작이 맞는다면 네놈은 이미 모종의 결의를 굳혔을 거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대신 대화의 심각성 때문인지 표정이 적이 굳어졌다. "훗! 유정, 네 눈은 속일 수 없구나. 나는 내 나름대로 이 어수선한 상황을 판단해 봤다." 백리유정은 술잔을 길게 들이켜며 말했다. "듣고 싶구나. 그 뒤에 나의 심중을 얘기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궁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생각은 이렇다. 현 무림에는 괴이한 기류(氣流)가 감돌고 있다. 그것은 혈문, 십인방, 삼목천, 무림성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물고 뜯으며 난투(亂鬪)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백리유정은 의외라는 듯 안주를 집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궁예린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맑은 기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것은 분명 난투였다." 궁예린은 단정을 내리고 목이 타는지 술잔을 벌컥 들이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혈문이 십인방을 공격하려 하자 무림성이 등장했고, 또 잠마풍까지 그 와중에 교묘히 끼여들었다." 백리유정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문제는 이 움직임이 내가 볼 때는 무림성을 고립시키려는 세 문파의 협잡이라는 사실에 있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 와중에도 가장 난처하고 어려운 것은 십인방일 것이다. 십인방은 본의 아니게 무림성과 등을 돌렸고, 안간힘을 쓰며 이권을 차지하려는 세력들의 틈바구니에서 천기수사에게 끌려 다니고 있다." 찰나지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백리유정의 얼굴에 아연함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는 막혀 있던 머릿속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 세 문파가 전혀 예기치 못한 시기에 무림성에 반기를 들었다. 물론 그 시각은 틀리겠지만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 궁예린이 대답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혈문, 십인방, 삼목천, 무림성은 은밀히 행동하는데도 서로를 환히 꿰뚫고 있고 서로의 목덜미를 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백리 성주의 움직임이다. 그의 움직임 여하에 따라 대세(大勢)의 흐름이 무섭게 급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옳은 말이다." 백리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말뿐만이 아니라 그는 내심으로 궁예린의 말에 수긍하고 있었다. '예린! 네 안목은 역시 나보다 한 수 위군. 맞다! 아버님께서는 이미 모종의 결단을 내리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결정은 설사 하늘이라도 막지 못할 것이다. 천우가 죽고 잠마풍은 멸문하고, 거기에 철혈도 단우엽마저 실종됐으니... 사태는 잠자는 사자를 자극하고 있다.'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으나 이 순간 백리유정의 머릿속은 수만 가지 생각들로 실타래처럼 뒤엉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터질 듯이 팽팽한 감정의 분출을 자제시켜 주는 것은 술〔酒〕의 위력이었다. 궁예린은 백리유정이 거푸 잔을 비우자 따라 주기에 바빴다. 그 동안에도 그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유정, 나는 매우 엉뚱한 놈이어서 만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 난투를 나름대로 풀어 보았다." 백리유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궁예린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물거리는 불빛 탓인가? 백리유정의 눈에는 그 미소가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비쳤다. 이윽고 궁예린이 입을 열었다. "현 상황을 종합해 볼 때, 혈문과 십인방, 그리고 삼목천이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된다면 지금과 같은 사태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순간 백리유정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손에 쥔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백리유정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가... 혈문은 마도천하를 부르짖으며 석년의 마도대종주의 위업을 떠받드는 인물들이고, 십인방은 정도(正道)의 총본산이며 더욱이 삼목천은 변방에서 세워진 세력이 아닌가? 어찌 그들이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단 말인가?" 그랬다. 그것은 누가 상상해 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무서운 일인 것이다. 궁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논리상으로는 분명 그렇다. 하나 세상에는 의외의 변수(變數)란 게 있는 법이다. 바로 지금의 나 궁예린처럼..." 그래도 백리유정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믿을 수 없다. 대체 누가 그런 엄청난 일을..." "유정! 나 자신도 너처럼 그 자체를 부정(不正)하고 싶다. 사실, 그것은 가정만으로도 두려운 일이니... 그것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그 암중의 인물은 진저리쳐지도록 치밀하고 무서운 두뇌의 소유자일 테니까." 어두운 불안의 그림자는 그의 가슴에도 있는 것일까? 궁예린의 얼굴에도 어둠이 짙게 드러워져 있었다. 백리유정은 술잔 속의 호박빛 액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비치는 그의 두 눈은 형용하기 힘든 번민과 불신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렇다. 또한 그 정도로 완벽한 인물이라면 아버님조차도 그의 심기에 지고 말리라!' 일단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백리유정은 숨조차 쉬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한 인간의 능력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저 가슴 밑바닥에서 앙금처럼 깔려 오는 정체 모를 불안감은 그를 쉽사리 놔주지 않았다. 3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백리유정은 이내 고개를 들어 궁예린을 바라보았다. "후후후, 너의 그 생각은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혈문이 마천루의 재현임을 잊었느냐? 네 생각대로라면 그자는 이미 마천루의 멸문지화 때부터 존재했어야 하고, 십인방의 모든 수뇌들을 사로잡을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하며 삼목천을 이루는 세 개의 세력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너는 그런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랬다. 한 사람의 심기로 어찌 그 일들을 한꺼번에 다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하나하나가 모두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들인데... 궁예린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물론 그런 인물이 존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가상이 아니고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 대세의 판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백리유정은 그만 할말을 잃었다. 단지 궁예린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듯 그는 침묵을 지켰다. 사실 지금까지 궁예린이 설명한 것에는 어떤 논리도, 반박도 통하지 않았다. 인간은 수많은 사고의 소유자이지만 주무기는 예감과 직감이다. 매사가 순리와 법칙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난세(亂世)의 경우, 인간은 더욱 예감과 직감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리유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욱이 예감이고 직감이고 간에 그것이 궁예린의 것일 경우, 백리유정은 그것이 거의 사실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부정해 봤자 그것은 스스로를 위안하고자 하는 나약함에 지나지 않았다. 백리유정은 내장이 터져 버릴 듯한 독주를 위장 속으로 쏟아 부으며 가만히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취기가 도는 얼굴로 궁예린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자의 다음 행동은 어떻게 나올 것이라 보느냐?" 궁예린은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간단하다. 그자가 이렇게 일을 벌여 온 것은 백리 성주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의 하나이다. 상대가 승천무황이기에 결코 경거망동할 수 없는 것이지. 이제 그자의 다음 행동은 백리 성주의 움직임에 달려 있다." 백리유정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빈틈없는 논리이며 설사 자신이라 해도 그의 추측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린... 어쩌면 나의 아버님께서는 그자보다 너를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그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천살마겁흔의 금제가 풀린 궁예린의 뛰어난 오성을, 하늘의 저주를 풀었기에 천리(天理)조차 능가하는 그 오성을...! 백리유정은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예린! 그자는 이미 너의 존재에 대해서도 시선을 돌렸을 것이 아니냐?" "당연하지. 해서 이번엔 내가 직접 시험물이 되어 볼 생각이다. 만약 내 짐작대로라면 불행히도 막후의 인물이 존재한다는 얘기가 되겠지." 일순 백리유정의 눈에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것을 내게 얘기해 줄 수 있겠나?" 궁예린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녀석!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 그 방법을 예견하고 네 고견을 듣고자 하는 게 내 목적인데... 어째 오늘밤엔 너답지 않게 멍청하구나, 하하하..." 백리유정은 새삼 가슴에 잔물결이 이는 것을 느꼈다. '예린... 네 뜨거운 우정에 내 가슴이 점점 가빠 오는 것을 너는 아느냐?' 궁예린이 그의 격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그 막후의 그림자가 있든 없든 내가 시도할 방법은 한 가지이다. 그것은 이 시대의 진정한 강자이며 영웅을 뽑는 것이기도 하다." 백리유정의 두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너는 이 일전에...?" "그렇다. 나는 이 일전에서 모든 가능성을 캐낼 것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늘고 상대의 힘〔力〕은 커질 뿐이니... 이 기회에 확실한 근거와 뿌리를 캐내야 한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 뿌리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중원에 깊숙이 박혀 있었을 것이다." 백리유정은 궁예린을 더욱 깊이 알아 갈수록 그 앞에서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그래도 자신의 재치가 천하에 내놓을 수 있을 정도의 것이라고 자부했는데, 궁예린을 만난 그 순간부터 그것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오늘밤에는 그 생각이 더욱 몸에 와 닿았다. 그때 궁예린은 지극히 굳은 표정으로 말문을 열고 있었다. "중원은 무림성의 존재에 대해 우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림은 무서운 파국과 함께 백리사헌이 아닌 다른 야심가의 손아귀에서 신음해야 했을 테니까."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어느 시대이건 영웅(英雄)과 효웅(梟雄)은 있어 왔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은 언제나 뒤에 가려지며 바람을 많이 타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백리사헌은 아직까지 지자(知者)들의 눈에 발견되지 않은 영웅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백리유정은 가슴이 뭉클했다. '녀석... 고맙다. 아버님의 진정한 일면을 제대로 보는 사람은 너뿐인 것 같구나!' 궁예린은 백리유정의 감개가 무량한 심경을 알지 못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무림성에서는 아마도 이번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것은 현 상황이 무림성에 기대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리사헌, 그가 진정한 강자라면 이 기회에 결정적인 승부를 지어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다시 보여 줄 것이다." 백리유정은 동감인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만일 백리 성주가 막후의 인물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건 오히려 죽을 쒀서 개 밥그릇에 부어 주는 낭패를 초래하고 말기 십상이다. 해서, 나는 그자가 무림성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혈문과 삼목천을 칠 생각이다." 묵묵히 듣고 있던 백리유정은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막후의 인물이 존재한다는 가상하에서의 일이 아니냐?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궁예린 역시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다. 혈문, 삼목천, 십인방이 서로 잇속을 노리고 화합할 수도 있으니... 그런 추측대로라면 나 궁예린을 놔둘 경우 또 하나의 백리사헌이 탄생할 것이 두려워 나를 눈엣가시로 생각하겠지." "그렇게 되면 네가 너무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냐?" 백리유정의 얼굴에서는 쉽사리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린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떤 상황이건 위험하긴 마찬가지이다. 다만 내 주위에는 삼십 명의 나의 분신 같은 형제들이 있다는 것을 믿고 한 번쯤 도박을 걸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궁예린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백리유정은 그의 웃음에 내심 수긍했다. 누가 들으면 분명 광언(狂言)이라고 단정할 일이겠지만 이곳에 모여 있는 밀천무영세가의 무리들은 분명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 '가능하다. 이들 삼십 명 모두 밀천무영세가의 핵심 인물들이 아닌가?' 궁예린은 그런 백리유정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유정! 만일 내가 천하를 정복할 야심을 품는다면 이들 삼십 명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나?" 그 말에 백리유정은 내심으로는 긍정했으나 겉으로는 장난스럽게 이죽거렸다. "후후, 믿지. 네가 하는 일인데 어련하겠는가? 하늘도 땅으로 바꿀 수 있는 네가 아니냐?" 순간 궁예린은 내심 미소 지었다. '후후후, 녀석!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이들 삼십 명이 곧 천하일 수도 있음을.' 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백리유정에게 말했다. "하하하! 녀석, 고맙다. 그래도 나를 알아주는 것은 역시 너뿐이구나. 하나 염려 마라. 나는 결코 내 선조들의 뜻을 거스르는 배은망덕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백리유정은 미소 지으며 묵묵히 궁예린을 응시했다. '믿는다. 그리고 아버님의 가장 큰 실수는 밀천무영세가를 건드린 것이었다. 그것은 그분의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실수이기도 할 것이다.' 거미줄 같은 혈연(血緣)으로 이루어진 밀천무영세가. 그들의 생명력과 결속력은 정말 질겼다. 잘라도 잘라도 다시 되살아나는 연체동물의 처절한 생명력처럼... 언젠가 궁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밀천무영세가 중 단 한 명만 남는다면 밀천무영세가는 이미 건재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때 궁예린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사실 나는 무림성을 누르는 강자가 되어 천하가 넓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절대(絶代)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더욱이 궁가장을 파괴한 흉수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한데 현 무림은 무서운 기류에 휩쓸리며 피를 원하고 있다." 궁예린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이 순간 그의 두 눈은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중원인의 피를 타고났음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내 눈에 비친 무서운 음모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백리유정은 그런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예린! 네놈이 있는 한 중원은 그 누구의 야욕의 대상도 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의 음성에는 진정한 믿음과 신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궁예린은 머쓱한 표정으로 짐짓 눈을 부릅떴다. "녀석... 치켜세우지 마라. 나는 정말로 우리의 후예들에게 자랑스런 얘기를 남기고 싶을 뿐이다." 그랬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궁사가 나약함을 보였기에 당한 그 쓰라린 교훈을 다시 밀천무영세가에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후예들에게는 강한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는 백리유정은 그의 말을 너스레로 받아들이며 웃어 넘겼다. "후후후, 놈! 자꾸 후손이니 후예니 하고 떠드는데, 대체 자식을 몇이나 낳을 작정이기에 그러느냐?" 궁예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거야 여자의 능력에 달린 거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몇 명의 여인을 얻느냐 하는 거겠지." "몇 명씩이나...?" "왜? 안 되느냐?" "놈! 네놈의 그 반질반질한 낯짝 때문에 평생 홀아비로 늙어 죽어야 하는 청춘들도 좀 헤아려 다오." "하하하하...!" "후후훗!" 두 사람은 언제 대중원을 놓고 심각한 심기(心機)를 벌였나 싶게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 제2권 끝 〉 제 19 장 대륙십자종횡진(大陸十字縱橫進) 20 장 음모의 주모자(主謀者)1 장 황궁비사(皇宮秘事)2 장 유리화의 죽음3 장 사마추련(司馬秋蓮)4 장 운명적인 해후(邂逅) 25 장 무너지는 야욕(野慾) 26 장 하늘과 인간의 차이7 장 가을비의 여운은... 제 19 장 대륙십자종횡진(大陸十字縱橫進) 1 "멍청한 놈들! 중원이 그토록 허약한 줄 알았더냐?" 분노가 극에 달한 듯 부복해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백리사헌의 두 눈에는 한광(寒光)이 번뜩이고 있었다. 드넓은 대전의 한가운데, 짙은 흑의를 일신에 걸치고 한쪽 어깨에 붕대를 친친 감은 관무상과 팔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 한 명이 백리사헌을 향해 깊숙이 부복해 있었다. 노인은 무림이십팔숙의 첫째인 초운비(草雲飛)였다. 그 역시 관무상과 마찬가지로 심한 부상을 입은 듯 전신이 상처투성이였고 안색은 해쓱했다. 백리사헌이 앉아 있는 태사의를 중심으로 대전의 좌우 벽면에는 화려한 부조를 입힌 유등이 요요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무림성의 위엄이 한순간에 떨어지고 단우엽, 그 아이조차 실종되어 버리다니..." 백리사헌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서릿발 같은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때마다 관무상과 초운비의 머리는 점점 바닥으로 향했으나 백리사헌은 꼴도 보기 싫은 듯 시선을 홱 돌렸다. 창가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하루 종일 맑은 날이었던지라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은 밝은 묵청빛을 띠고 있었다. '중원... 역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땅이군. 불과 사 년 만에 잠마풍을 멸문시키고 천우를 죽인 기재가 나타나다니.' 백리사헌은 적이 굳은 표정으로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예살군, 대체 어떤 놈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눈빛은 무겁게 침잠해 들고 있었다. '노부는 야망을 이루었으나 제자와 자식 농사는 철저히 망쳤다. 무엇 때문인가? 노부는 자신만만했었다. 내 손으로 키운 세 제자가 천하에 군림(君臨)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백리사헌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데, 첫째 제자는 참혹한 죽음을 당했고, 둘째는 실종되었다. 게다가 셋째는 혈문의 혈군자에게 호되게 당해 저 지경이 되었으니...' 그는 태사의에 얹은 손을 지그시 거머쥐었다. 일이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뭔가 틀어지고 있다. 백리유정, 그 아이가 모든 것을 버린 채 나갔고 십인방이 노부의 계획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더구나 삼목천은 암중에 무서운 힘을 감춘 채 기회를 엿보고 있다!' 흔들린다. 거칠 것이 없이 도도한 백리사헌의 가슴은 지금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천예살군이란 애송이가 의외의 변수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노안에는 수심이 자꾸 쌓이고 있었다. '하나, 그 무엇으로도 노부가 전 생애에 걸쳐 이룩한 치밀한 계획을 틀어지게 할 수는 없다. 이 모든 일은 때가 온 것뿐이다. 중원을 재정비해야 할... 사나운 바람이 불수록 거목은 굳건하다.' 백리사헌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웅후한 예기가 대전 안에 휘몰아치는 듯했다. 관무상의 전신이 경미한 전율을 일으켰다. '아... 사부께서 드디어...' 말없이 백리사헌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그는 백리사헌이 확고히 결심을 굳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뒷받침하듯 백리사헌의 중후한 음성이 대전을 울렸다. "무상! 즉시 무림성의 최정예를 선발하라. 성을 지킬 극소수의 인원만 남기고 모두 연무장에 집합시켜라!" 명(命)! 드디어 떨어졌다. 관무상은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존명!" 우렁찬 그의 음성이 길게 여운을 남기며 대전 안에 울려 퍼지는 순간, 이미 관무상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뒤를 곧 초운비가 따랐다. 백리사헌의 시선은 그들이 사라진 빈 자리에 지그시 고정되었다. 그저 강물처럼 무심한 듯 보였으나 실상은 마주보기 두렵도록 강렬한 예기를 안으로 갈무리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술이 열리며 다시 나직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무림사천왕(武林四天王)." 언제 나타났는가? 어느새 백리사헌의 앞에는 네 사람이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부복해 있었다. 실로 놀라울 정도로 쾌속한 신법을 구사하며 나타난 그들은 도무지 나이를 추측할 수 없을 만큼 늙은 노인들이었다. 서리가 내린 듯 새하얀 백발에 수십 결의 주름살로 뒤덮인 피부. 그러나 안개처럼 희뿌연 기운이 범상치 않게 그들의 노구를 에워싸고 있었고 또한 신광을 안으로 갈무리한 눈빛은 그들의 무공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짐작케 했다. "무림사천왕, 대령했습니다!" 그들은 이마에서 피가 솟구치도록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굴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림사천왕(武林四天王). 그들은 백리사헌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무림성 내에서도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지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왕(天王) 도예천(陶藝天). 지왕(地王) 무악군(武岳君). 인왕(人王) 사궁인(邪宮印). 혈왕(血王) 비제륜(飛帝輪). 이것이 그들의 명호와 이름이었다. 백리사헌은 그들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추상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천왕, 지왕은 동(東)에서 서(西)로... 인왕, 혈왕은 남(南)에서 북(北)으로 가라! 그대들이 관장하고 있는 사각(死閣)의 정예를 데리고 무림성의 앞을 막는 것은 가차없이 제거하라!" "존명!" 무림사천왕은 이구동성으로 외치고는 이내 그 자리를 떠났다. 명을 받든 이상 그곳에 오래 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 그들은 일체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무림사천왕이 떠나자 백리사헌은 다시 대전에 혼자 남았다. 그는 품속에서 하나의 신물(神物)을 꺼내 들었다. 일순, 주위는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무황령(武皇令)! 네가 필요할 때가 온 것 같군." 황금 깃대에 푸른 천의 삼각 깃발. 그것은 무림성의 개파대전 때, 십대문파와 이십팔 개의 대소세가가 합력(合力)하여 만든 중원 최대의 신물이었다. 백리사헌은 다시금 나직한 음성을 발했다. "천학우사! 들어오시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기다렸다는 듯이 청수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며 백리사헌 앞에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내성총관(內城總管), 성주의 명(命)을 받습니다." 무림성의 내성을 총괄하는 전대의 기인 천학우사였다. 백리사헌은 천학우사의 앞에 무황령을 던졌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청색기(靑色旗)는 곧 단단한 대리석을 꿰뚫으며 바닥에 내리 꽂혔다. "무황령...!" 그것을 본 순간 천학우사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렇소! 무황령이오. 노부는 무황령을 동원하지 않기를 바랐소. 그러나 현 무림의 시국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소." 백리사헌은 무거운 표정으로 천학우사를 보며 말했다. 천학우사의 안색이 가늘게 떨렸다. '어리석은 위인들! 그토록 우려를 했건만, 무림성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다니...' 누구를 말함인가? 그 동안에도 그의 안색은 수십 번 일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리사헌은 다시금 준엄한 명을 내렸다. "천학우사! 당신은 무황령을 지니고 십대문파와 이십팔대세가를 대동하고 혈문으로 가시오." 천학우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올 때가 온 것인가? 중원의 생사(生死)가 이 한판의 일전에 걸려 있다.' 그는 내심 가슴을 졸이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마음이 무거운 탓인지 돌아서는 그의 발길은 그리 경쾌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따라 그의 어깨는 한없이 아래로 처져 있었다. 천학우사가 막 대전 문을 나서려는 순간 백리사헌의 음성이 그를 붙들었다. "천학우사!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이 따를 것이오. 결코 노부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소." 그 말에 천학우사는 순간 신형을 흠칫했으나 이내 말없이 대전을 떠났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대전에 찾아든 것은 숨막힐 것 같은 정적이었다. 이제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며 백리사헌은 문득 고뇌 어린 나직한 음성을 발했다. "그 아이만은 부르지 않기를 바랐건만..." 그의 입에서 짤막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비(飛)! 너도 들어오너라!" 다음 순간, 창문에서 한 덩이 새까만 운무가 스며들어 백리사헌의 전면으로 몰려갔다. 그 뿌연 운무는 이내 사람의 형상으로 화했다. 청년(靑年). 이제 갓스물이나 되었을까? 네모난 턱에 강직한 모습을 지닌 흑의청년이 그 자리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청년을 바라보고 있는 백리사헌의 표정은 마치 봄날의 훈훈한 바람처럼 부드러웠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웅후한 기세(氣勢)를 떨치던 그가 청년에게만은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처럼 자애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청년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본 백리사헌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비(飛)! 노부는 너만은 부르지 않기를 바랐다. 하나 너를 부른 것은 그만큼 노부의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비는 묵묵히 백리사헌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체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엇입니까? 무엇이 당신에게 그토록 커다란 충격을 주었단 말입니까?' 백리사헌의 말을 계속 이어졌다. "검은 전신〔黑戰神〕을 노부의 거처로 불러라! 그곳에서 노부와 너희들은 삼목천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생사를 같이할 것이다!" 찰나지간 비의 어깨가 가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고 그는 곧 웅후한 일성을 터뜨리며 지면에 소리나게 머리를 박았다. "명을 받습니다!" 바로 그때 백리사헌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마... 소연이와도 작별 인사를 해두어야 할 게다." 그 말에 지금까지 무심한 태도로 일관해 온 비의 어깨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뿐, 비는 담담히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뿌연 흑무가 되어 대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던 백리사헌의 노안에는 한 가닥 우수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소연, 그 아이가 몹시 슬퍼하겠군. 하나..." 백리사헌의 눈에 일순 벼락같은 광망이 솟구쳤다. "하나, 이 아비는 너를 위해 비, 저 아이만은 기필코 살릴 것이다." 지금까지 베일 속에 숨겨진 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한 사람의 존재가 그의 입에서 언급되었다. 백리소연(百里素蓮). 백리사헌의 단 하나뿐인 딸이자 백리유정의 동생이었다. 그리고 비(飛)라는 신비청년에게 말하던 검은 전신. 그것 또한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던 백리사헌의 숨겨진 세력임이 분명한데... 과연 그들에겐 어떤 저력(底力)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백리사헌은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말하듯 나직이 독백을 흘렸다. "노부는 이 일전을 대륙십자종횡진(大陸十字縱橫進)이라 명명하겠다."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백리사헌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대전에서 사라졌다. 2 가냘픈 빗줄기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내리는 비 때문인지 꽃들은 더욱 진한 향기를 뿜어 내고 있었고, 꽃망울에 맺힌 빗물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꽃들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피어 있는 화원 한가운데, 새하얀 백강석(白鋼石)으로 지어진 팔각형의 아담한 정자(亭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한 여인이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내리는 빗물을 손으로 받아 다시 땅 위에 뿌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십칠팔 세를 넘긴 듯 보이는 그녀는 일신에 백의를 걸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도저히 이 세상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새까만 머리카락은 비단결처럼 윤기가 흐르고 그에 비해 반듯한 이마는 눈부시도록 새하얗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똑 솟은 코는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것이 적당히 균형을 갖춰 제자리를 찾은 듯 여인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여인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눈빛이었다. 그녀의 두 눈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신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각기 떨어뜨려 놓아도 아름다운 것이, 모두 모이니 한층 더 빛을 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문득 여인은 내리는 비를 받는 것도 지쳤는지 붉은 입술을 열어 나직한 음성을 발했다. "아이, 비 오빠는 왜 안 오신담. 연아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다니..."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이번에는 상큼한 아미를 곱게 찌푸렸다. "아버님은 연아가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모르고 틀림없이 비 오빠를 잡고 또 바둑을 두실 거야." 잠시 투정 섞인 말을 내뱉은 여인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정자 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흠칫 신형을 굳혔다. 그녀는 놀라움이 담긴 시선을 돌려 자신의 우측을 바라보았다. "누, 누구세요?" 분명 정자 안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건만 그녀는 그곳에 누가 있다는 듯이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대답이 없자 여인의 얼굴에 순간 공포가 어렸다. 자신의 후각에 사내의 강렬한 체취가 느껴지는데도 상대가 아무 말도 않자 그만 두려워진 것이었다. 여인은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그 체취의 근원지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전면. 언제 나타났는지 흑의를 걸친 청년이 만면에 침통함을 가득 담은 채 여인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비라는 이름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런데 백의여인은 눈을 크게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여인이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조물주의 얄궂은 장난이 아닐 수 없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앞을 보지 못하다니. 여인은 두려움을 가득 담고 다시 물었다. "그래요... 비 오빠, 맞지요? 비 오빠지요?" 자신의 말에 확신할 수 없는지 그녀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공포와 두려움이 그녀의 전신을 엄습했다. 비는 드디어 안색을 가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그렇소, 나요. 이제는 연매를 놀려 줄 수도 없겠구려." 순간 여인은 신형을 휘청거렸다. "아..." 상대가 누군지 몰라 두려움에 떨었던 그녀는 비의 대답에 그만 긴장이 풀렸던 것이다. 그녀의 모습에 비는 화들짝 놀라며 여인의 신형을 부드럽게 받쳐 주었다. "연매! 왜 그러시오?" 당혹감에 찬 그의 물음에 여인은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듯 비의 가슴을 새하얀 손으로 두들겼다. "오빠! 나빠요, 나빠. 연아가 얼마나 놀랐는데..." 그제야 연유를 안 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하하, 바보구려. 연매는 이곳에 오직 연매의 아버님과 이 오빠밖에 오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단 말이오?" 여인. 그녀가 바로 백리사헌의 숨겨진 딸 백리소연이었다. 천하를 오시하는 그도 자신의 딸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장애만은 고칠 수가 없었던지라 백리사헌은 이곳에 정자를 지어 그녀를 보살피며 어느 누구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오직 자신과 비만이 그곳에 드나들었다. 백리소연은 살포시 얼굴을 붉히며 비의 넓은 어깨에 몸을 기댔다. "그, 그래도..."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했다. 그런 그녀를 비는 웃으며 부드럽게 안았다. "연매! 걱정 마시오. 만일 누군가가 연매를 건드린다면 그자가 지옥에 간다 해도 쫓아가 잡아 올 것이오." 그의 음성은 백리소연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 백리소연은 가슴이 한없이 뿌듯해져 옴을 느꼈다. 여인에게 있어 자신을 사랑하고 지켜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다. 백리소연은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아이... 그것을 제가 모르나요? 벌써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들었는데요." 그녀는 살며시 얼굴을 붉히며 재차 입을 열었다. "오빠! 비가 많이 오나 봐요." 비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많이는... 연매가 시원하라고 내리는 세우일 뿐인데." 그 말에 백리소연은 보이지 않는 눈을 곱게 흘겼다. "아이... 오빠는 언제나 연매, 연매... 그것밖에 모르시나 봐!" 아름다웠다. 얼굴에 홍조를 띠며 비를 바라보는 백리소연의 모습은 마치 한 송이 꽃과 같았다. 그녀를 주시하는 비의 눈에 순간 강렬한 빛이 스쳤다. '연매... 당신은 나, 비의 모든 것이오. 내가 그대를 지켜 줄 것이오.' 오늘따라 비의 가슴은 백리소연에 대한 사랑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때 백리소연은 무엇이 생각난 듯 그의 품에서 신형을 빼며 비에게 물었다. "한데,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요? 이제 보니 오빠는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소매에게 좋은 말만 한 거군요." 찰나지간 비의 얼굴에 그늘이 스쳤다. '어찌... 연매의 이 천진한 마음을 잠시나마 아프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침묵에 백리소연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오빠! 무슨 일이 있군요, 그렇지요?" 앞을 보지 못하기에 오히려 예리한 감각을 지니게 된 것인가? 그녀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분명 예전의 그답지 않게, 나타난 순간에 자신의 존재를 밝히지 않고 말없이 그녀를 주시하던 그의 행동이 그녀의 불안감에 확신을 주었다. 그에 따라 그녀의 안색이 해쓱하게 변했다. 비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연매! 무슨 일은... 단지 이번에 아버님을 모시고 먼 길을 며칠 다녀오기에 그것을 상의하느라 늦은 것이오." 비는 고개를 돌려 정자 밖에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길지는 않을 것이오. 아버님과 이 오빠는 연매를 보고 싶기에 오래 떠나 있지는 못할 것이니..." 그러나 백리소연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오빠! 연아도 같이 가면 안 되나요?" "안 되오! 아버님께서는 이번 길이 너무 험하기에 연매가 고생할 것 같으니 안 된다고 하셨소." 비의 음성은 단호했다. 백리소연이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오빠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순간 비는 흠칫했다. "연아는 앞을 못 보지만 오빠의 얼굴을 그릴 수는 있어요. 지금 오빠의 가슴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요. 오빠는 연아의 곁을 떠나는 거예요, 그렇지요?" 백리소연의 직감은 예리했다. 비는 안색을 가다듬으며 부드러운 음성을 이었다. "연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소? 이 오빠는 연매와 며칠 떨어진다는 생각에 슬픔을 참지 못하는 것뿐이오." 그는 백리소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연아도 믿고 싶어요. 하지만 오빠가 영원히 내 곁을 떠나 버릴 것 같아요." 급기야 백리소연의 눈에 뿌연 이슬이 맺혔다. "바보, 연매는 바보구려. 아직도 이 오빠의 마음을 모른단 말이오?" 비의 음성에는 진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흑흑... 알아요. 믿고 싶어요. 그러나 유정 오빠는 그런 말을 하고서도 연아의 곁을 떠났잖아요." 슬픔이 복받친 탓인지 백리소연은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비는 백리소연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 주며 입을 열었다. "연매, 나는 유정 오빠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모르시오? 그것은 내가 연매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모른단 말이오?" 그러고 그는 그녀를 품안에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백리소연은 오늘따라 그의 넓은 가슴이 공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화원 한쪽에서는 백리사헌이 애잔한 시선으로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아, 걱정 마라. 비, 저 아이만은 너의 행복을 지켜 줄 것이다." 백리사헌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유정! 불효 막심한 놈! 아비의 뜻을 무참히 거스르다니... 끝내 나의 염원과 원대한 야망은 무림에서 끝을 내야 한단 말인가?" 시대(時代)를 뛰어넘은 대노웅(大老雄). 그는 끝없는 고뇌를 금할 수 없었다.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알아주는 사람이 이 땅에 없는 것이 그는 못내 안타까웠다. 3 번쩍! 눈을 멀게 할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 광채는 하나의 커다란 분지에서부터 쏟아지고 있었다. 묵빛보다 더 시커먼 광채. 그것은 정확히 백 명의 흑의인들에게서 뿜어지는 묵광이었다. 철갑, 철가면, 철신발. 그들의 복장은 모두 시커먼 한철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과 창, 도, 철퇴, 도끼 등 그들의 손에 들린 모든 병기가 모두 흑색이었다. 열 명씩 조를 지어 십대(十隊)로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문득 철가면 속에서 그들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전면에서 흑의인들을 향해 느리게 걸어오는 한 인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역시 전신에 칠흑 같은 흑의를 걸쳤지만 다른 흑의인들과는 달리 철가면을 벗고 있었다. 바로 비였다. 어느새 흑의인들 곁에 다다른 그는 흑의인들의 선두에 서며 주위를 한차례 훑어보았다. 유난히 넓은 묵도를 허리에 찬 것이 인상적이었다. 일순, 그는 침묵을 깨며 우렁찬 일갈을 터뜨렸다. "형제들이여! 이제 우리 검은 전신들은 우리들의 대부(代父)를 위해 나설 때가 되었소." 검은 전신. 그것의 실체가 바로 분지 위에 모여 있는 흑의인들이었단 말인가? 비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금 웅후한 일성을 터뜨렸다. "형제들이 철가면을 쓴 순간부터 우리의 임무가 끝나지 않는 한 우리 검은 전신 형제들은 영원히 이대로 죽어 갈 것을 나 비(飛)부터 시행할 것이오." 그러고 비는 옆구리에 낀 철가면을 얼굴에 썼다. 찰나지간 모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것은 이제 자신들을 지휘하는 대장이 철가면을 벗기 전까지 그 누구도 자신의 철가면을 벗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도, 비에 대한 원망도 일체 보이지 않았다. 비는 철가면을 쓴 채 다시 소리쳤다. "우리들은 이 시간부터 우리를 이렇듯 키워 주신 대부의 은혜에 죽음으로 그 은공을 갚을 것을 약속합시다." 그 말에 응답하듯 흑의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렁차게 외쳤다. "죽음으로 검은 전신은 대부의 앞을 지킬 것이오!" 백리사헌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그들의 진정한 마음이 그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고맙소, 형제들. 우리가 이렇듯 한마음 한뜻이라면 대부를 건드릴 자는 그 누구도 없을 것이오. 자, 갑시다." 비는 우렁차게 외치며 신형을 돌렸다. 그 뒤를 이어 분지를 울리며 검은 전신들은 걸음을 옮겼다. 검은 전신. 그들은 백리사헌이 천하에서 거두어들인 고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명 검은 무적군단(無敵軍團)이라 불리는 그들은 어떠한 것으로도 뚫을 수 없는 갑옷으로 전신을 감싼 불사신 같은 존재였다. 원래 백리사헌은 자신의 아들과 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창설했지만, 상황이 워낙 급박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 부름을 받은 일당천(一當天)의 무서운 무학을 지닌 검은 전신들은 지금 자신들을 키워 준 대부의 은혜를 자신들의 목숨으로 갚기 위해 백리사헌의 곁으로 가고 있었다. 제 20 장 음모의 주모자(主謀者) 1 밀실(密室). 그 한가운데에는 삼 인(三人)이 칙칙한 오단목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하나같이 무거운 안색을 띠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사위는 질식할 것 같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황의가사를 걸치고 한 손에 염주를 굴리고 있는 노승이었다. 언젠가 무림성의 분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던 인물, 바로 천축 포달랍궁의 궁주 포랍존자였다. 다른 두 사람은 새북사사천의 우두머리인 지옥천과 묘강의 제일인자인 구지마령군으로, 결국 밀실 안에는 삼목천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이었다. 이들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다시 한자리에 모였단 말인가? 문득 포랍존자가 굳게 다문 입술을 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 드디어 백리사헌이 결단을 내렸소." 순간 지옥천과 구지마령군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키며 불타는 시선으로 포랍존자를 주시했다. '그가 드디어...' '그자가... 기어이 밖으로...' 두 사람의 눈빛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포랍존자는 연신 염주를 굴리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우리의 긴 노력의 열매가 드디어 꽃을 피운 것이오. 백리사헌, 그는 이번에 무림성의 총인원을 중원에 내보내며 그것을 대륙십자종횡진이라 이름붙였소." "아, 대륙십자종횡진...!" "대륙십자종횡진!" 지옥천과 구지마령군은 동시에 신음 같은 탄성을 발했다. 포랍존자도 더 이상 흥분을 참기 힘든지 얼굴 가득 홍조를 띠고 있었다. "백리사헌! 그는 이번 대륙십자종횡진에서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타격을 받을 것이오. 그것은 그가 진정한 강자이긴 하나 영웅은 때에 따라서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오." 포랍존자는 한차례 지옥천과 구지마령군을 주시했다. "두 분은 노승이 왜 구태여 이런 말을 하는지를 십분 이해하실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이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옥천은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염려 마시오, 존자! 우리 삼목천은 결코 독보(獨步)로 중원에 군림하지는 않을 테니." 이번에는 구지마령군이 녹광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우리는 느끼고 있소. 중원은 우리 중 한 사람이 다스리기에는 너무 넓다는 것을." 포랍존자는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이다. 우리가 이렇게 한마음으로 뭉친다면 중원에 만세까지 삼목천의 이름을 빛낼 수 있을 것이오." 그는 고개를 돌려 지옥천을 바라보았다. "지옥천! 이번 계획에는 새북사사천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소이다. 백리사헌에 대항하는 노승의 계획은 이미 철저하게 펼쳐지고 있소. 하나..." 포랍존자는 잠시 말꼬리를 흐린 후 재차 입을 열었다. "지옥천도 알고 계시겠지만 당금에 의외의 변수가 생긴 것이 마음에 걸리오." "변수?" "의외의 변수...?" 지옥천과 구지마령군의 눈에 의혹이 일었다. 포랍존자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렇소이다. 두 분도 알고 계시겠지만 바로 천예살군이라는 약관(弱冠)의 젊은이가 변수가 되고 있소." "천예살군!" "그 애송이가..." 두 사람은 어이가 없다는 듯 포랍존자를 주시했다. 그리고 성미가 다소 급한 구지마령군이 입을 열었다. "존자(尊者)! 그놈은 이제 약관의 애송이에 불과하오. 더욱이 아무런 세력도 갖지 못했는데 그런 곳에 신경을 쓸 수는 없지 않소이까?" 지옥천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포랍존자는 구지마령군의 말을 부정하듯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만사는 불여튼튼이라 했소. 그놈이 아직은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했으나 무학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소. 때문에 만에 하나 무림성이나 십인방, 혈문 중 그 어디에 끼여도 우리에게는 이롭지 못하오. 더욱이 그자는 이미 어느 정도 노승의 목적과 삼목천의 계획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소." 지옥천의 날카로운 눈매가 번갯불 같은 광망을 폭출했다. "그럴 리가... 백리사헌도 모르는 우리의 계획을 그 애송이가..." "믿을 수가 없소! 어찌 그 하찮은 애송이가 우리의 완벽한 계획을 눈치채고 있단 말이오." 구지마령군도 불신에 가득 찬 시선으로 포랍존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포랍존자는 염주를 천천히 굴리며 나직하고 위엄에 찬 음성을 다시 발했다. "노승은 그가 우리의 계획을 눈치챘다고는 아직 말하지 않았소. 단지 그자의 오성과 심기가 특출하기에 준비를 하자는 것이오." 지옥천과 구지마령군은 포랍존자의 치밀함에 순간 할말을 잃었다. 포랍존자는 단호히 말했다. "노승은 지금까지 직감을 믿으며 모든 일을 해왔소. 그렇기 때문에 노승은 우리 삼목천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는 그를 기필코 죽여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소. 어쩌면 이번 일에는 혼신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오. 기필코 그자를 죽여야 한다는 신념뿐이오." 포랍존자의 음성은 밀실 안에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삼목천. 그들이 드디어 궁예린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2 두두두두... 중원 십팔만 리를 뒤흔드는 군마(軍馬) 소리에 천하는 발칵 뒤집혔고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우우... 드디어 무림성이 분노의 검을 치켜들었다! 풍운무림(風雲武林)! 경동천하(驚動天下)! 하루아침에 들이닥친 소문에 세상은 천지를 뒤흔드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름하여 대륙십자종횡진(大陸十字縱橫進)! 그것은 동서남북에서 대륙을 질타하여 치닫는 군마의 대장정(大長征)을 이르는 말이었다. 무림성의 삼공자인 관무상과 무림이십팔숙(武林二十八宿), 그리고 삼십육천강(三十六天　)을 선두로 사천 명의 최정예고수가 강소성으로 향하는 동시에, 백리사헌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신비의 사천왕이 각기 천오백 명의 최정예고수를 거느리고 동서남북을 질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대 기인인 천학우사가 마침내 무황령을 발동해 십대문파와 이십팔대세가를 앞세워 일제히 혈문이 은거하고 있는 마천령(摩天嶺)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두두두두... 대륙(大陸)을 위진시키며 밤낮으로 치닫는 군마의 행진은 무림성의 엄청난 위용과 함께 자존심이 무너진 백리사헌의 분노가 얼마나 거센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천하는 숨을 죽였다. 아니, 숨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거센 말발굽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마침내 시작된 피〔血〕의 대행진(大行進)! 분노의 검을 치켜들고 달리는 무림성의 대군마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무림성의 고수들은 이 싸움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오직 절대자에 대한 믿음, 그리고 충(忠)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승천무황 백리사헌. 그 이름은 그들에게 있어선 신(神)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 하나만으로 그들에게는 영광이며 축복이었다. 두두두두... 대륙십자종횡진! 그것은 이렇게 대륙을 뒤흔드는 거센 군마 소리와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3 중천에 뜬 해를 등지고 흠뻑 핏물을 뒤집어쓴 혈인 하나가 서하령(西河嶺)을 오르고 있었다. 반짝이는 햇살 아래 드러난 이목구비는 더없이 준수했으나 핏물을 잔뜩 뒤집어쓴 모습은 흡사 귀신처럼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궁예린, 그는 그 동안 악전고투를 치른 듯 전신의 의복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문득 그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역시... 모든 것은 내 짐작대로다! 삼목천과 혈문, 그리고 십인방은 지금 하나처럼 움직이고 있다. 십인방, 그들이 아무리 역용을 했다고 하지만 결코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조금 전까지 그를 공격해 온 자들은 분명 십인방의 고수들이 역용을 한 것이었다. 궁예린은 그들을 맞이해 일전을 벌였고,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들의 피를 흠뻑 뒤집어써야 했다. 그리고 그의 의복에 배어 있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며 서하령으로 향하고 있는 궁예린의 행로를 바닥에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유리화, 그 여인을 내가 얻은 것은 중원을 위해 큰 수확이었다. 만일 그녀의 정보와 이목이 없었다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으니까." 어렴풋이 암중 인물에 대해 눈치챘던 그는 마침내 모든 사실을 알아냈다. 유리화를 통해 그는 근래의 혈문과 무림성, 십인방 그리고 삼목천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많은 것을 생각한 끝에 그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 죽음의 천라지망이 펼쳐진 것을 안 순간 자신의 결론에 확신을 가졌다. 암중 인물이 확실히 존재하며 그가 뒤에서 혈문과 십인방, 그리고 삼목천을 조종하고 있고, 그들 세 문파는 단지 그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백리사헌... 당신은 결국 삼목천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소. 대륙십자종횡진, 그것은 당신의 모든 기업을 앗아 갈 수도 있을 테니까." 궁예린은 어느덧 서하령을 넘어 하나의 협곡에 도착했다. 양 옆으로 깎아지른 듯 솟은 절벽과 절벽 사이로 조그마한 길이 길게 뻗어 있었다. 궁예린은 계속 걸음을 옮기며 아무런 생각 없이 협곡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섬광 같은 이채로움이 반짝였다.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무수한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궁예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삼목천... 드디어 나타났구나. 하나 이들 역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경미한 파공음이 일며 무려 일백여 명에 달하는 인영들이 도처에서 나타나 그를 에워쌌다.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일사불란한 그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모두가 뛰어난 고수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후훗, 천예살군." "생각보단 무서운 놈이구나. 천라지망을 뚫고 이곳까지 오다니." "하나... 우리 손에 걸린 이상, 네놈도 끝장이다!" 극히 음사한 세 마디의 음성이 울리는가 싶더니 적백흑(赤白黑)의 색을 띤 세 덩이의 기류가 궁예린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는 각기 한 사람이 유령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궁예린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저들은 새외의 하늘인 새북사사천의 혈마천, 구유천... 거기다 무유천까지... 이럴 수가? 저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저들은 결코 소모품이 아니다!' 궁예린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새북사사천 가운데 세 명의 마인이 나타난 사실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혈마천(血魔天)! 적색의 운무로 뒤덮인 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빛 일색인 그의 전신에서는 소름 끼치는 혈무가 안개처럼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구유천(九幽天)! 그의 전신은 시커먼 묵광으로 먹물처럼 탁하게 뒤덮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검다 못해 차라리 푸르스름하기까지 한 피부는 비늘처럼 번쩍이고 있었으니... 그 소름 끼치는 모습은 흡사 하나의 숯덩이를 보는 듯했다. 무유천(無幼天)! 지옥유부(地獄幽府)의 화신(化身)인가? 잿빛 일색으로 혈색 하나 없는 창백한 안색에 피에 굶주린 듯 얄팍한 입술 그리고 뻥 뚫린 두 눈에는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다. 그는 흡사 생명없는 고루(　　)처럼 기분 나쁜 운무 속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막후의 음모자는 삼목천이었단 말인가?' 궁예린은 아연실색했다. '분명 새북사사천은 무림성에 대항해야 맞는 것이거늘... 이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서다니...?' 지금까지 암중 인물과 삼목천, 혈문, 십인방을 달리 생각했던 그는 내심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잘못 짚었다! 음모의 주인은 삼목천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인가? 이곳에 없는 지옥천과 포달랍궁주 그리고 구지마령군... 주모자는 그 세 사람 중 하나가 분명하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삼목천과 혈문, 십인방을 막후에서 움직이는 암중 인물이 제삼의 인물이 아니라 삼목천의 세 개의 눈 가운데 하나라니.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오랜 시간 십인방과 혈문에 침투하여 완벽한 계획을 꾸밀 수 있단 말인가? 그자의 심기가 대체 얼마나 가공스럽기에... 찰나간에 궁예린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가고 있었다. 그때 구유천이 시커먼 묵광을 번뜩이며 음산하게 말했다. "크크... 꼬마야, 너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어야 했다. 그것은 네가 더 큰 고통 속에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에 궁예린은 오히려 비릿한 조소를 날렸다. "후후후, 그렇소? 하나 구유천 당신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날 죽일 수 있겠소?" 그는 어깨까지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전부 다 당신과 같은 말을 했었소.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무엇인지 아시오? 그것은 바로 지옥이었소." "뭐, 뭣이...?" "이런 찢어 죽일 놈!" "터진 입이라고 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구유천을 비롯한 세 사람은 두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거친 살광을 내뿜었다. 그러나 그들은 분노하기보다는 내심 아연해 하고 있었다. '이놈이... 어떻게 우리의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인가? 기필코 죽여야 할 놈이다!' 그렇게 결심을 굳힌 그들 가운데 혈마천이 혈광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죽일 놈! 네놈은 그 주둥이를 잘못 놀린 대가가 어떤 것인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사로잡지 않고!" 그의 불 같은 호통에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일백여 명은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일도양단의 가공할 공세(功勢). 궁예린의 전신은 순식간에 그들의 그림자로 뒤덮였다. 궁예린은 안색을 굳혔다. '틀렸군. 유정 역시 십인방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것 같다. 어리석은 장문인들... 호랑이를 쫓으려다 사자를 끌어들이다니...' 그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그 순간, 구유천까지 대갈을 터뜨리며 합공을 가해 왔다. "쳐라!" 대기가 무섭게 진탕되며 엄청난 파공음이 일었다. 그 속에서 주위의 기암괴석들은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고 다시 엄청난 공세가 궁예린을 덮쳤다. 제아무리 초절정고수라 해도 간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는 공세였다. 그 몸서리쳐지는 합공 앞에서는 궁예린도 감히 태만할 수 없었다. 그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한 놈이라도 살려 둬서는 중원에 해가 될 뿐이다! 그것은 그만큼 중원인들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 속전속결로 저들을 없애 버리려면 도(刀)가 가장 적당하겠군!' 궁예린은 재빨리 품속에서 밀천여의묵봉을 꺼내 들었다. 그가 묵봉에 내력을 주입하자 경쾌한 음향이 일며 밀천여의묵봉이 하나의 묵도로 변했다. 때를 같이해 그를 향해 짓쳐드는 일백여 명의 손에서는 제각기 도기와 검기가 뿜어졌고, 주위 이십여 장 이내는 그야말로 천지혼돈의 충격에 휩싸이며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좋다! 죽고 싶다면 원없이 죽여 주마!" 궁예린 역시 피보다 짙은 살기를 내뿜으며 불끈 묵도를 움켜쥐었다. 곧 그의 신형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살인사무예(殺人死武藝)!" 궁예린이 허공을 울릴 듯 엄청난 일성을 터뜨리는 순간 마치 부챗살처럼 사방으로 현란한 도광이 퍼져 나갔다. 남녀간의 정사에 초식의 기초를 둔 살인사무예. 그 언젠가 유리화에게 펼친 그 나무가 이번에는 궁예린의 손에 들린 도에 의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흐느적거리듯 유유히, 그런가 하면 범〔虎〕처럼 매섭게 치닫고 성난 사자처럼 날쌔게 유영하며, 궁예린은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절로 눈을 의심케 하는 현란한 천나무(天裸舞). 그것은 하늘마저 어지럽히는 대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그 광경은 바로 피와 죽음을 부르는 지옥유부의 장송곡이었다. "아아악...!" "으윽!" 장내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4 "가거라! 쓸모없는 인간들은...!" 궁예린이 스치고 가는 곳마다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성이 터지며 시신이 산더미같이 쌓여 갔다. 모두가 오체분시되어 그들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피로 장내는 곧 혈해(血海)를 이루었다. 사방에서 비릿한 피내음이 진동하고 있었지만 궁예린은 일체 손속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피를 보는 것이 일생의 목적인 것처럼 궁예린은 살인사무예를 더욱 현란하게 펼치고 있었다. 아름드리 천년 거목이 맥없이 꺾여 나가고 거센 해일이 밀어닥치듯 암풍(暗風)이 격탕쳤다. 그에 따라 허공에 뿌려지는 것은 선연한 피보라요, 차가운 대지에 널브러지는 것은 썩은 짚단 같은 시신뿐이었다. "으으... 대체 이 무슨 경심 동백할 무공이란 말인가...? 으허헉!" 채 경악성도 발하지 못하고 널브러지는 시신들. 궁예린을 덮쳤던 인영들은 손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새북사사천의 삼천(三天)은 아예 눈이 뒤집힐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저토록 가공할 무공이 중원에 있었다니...?" "으으... 저것은 죽음의 살무(殺舞)다! 피해야 한다. 저 와중에 휘말리면 발도 못 붙이고 끝장난다." 그러나 그들의 경악성이 채 여운을 다하기도 전에, 갑자기 죽음 같은 정적이 사위를 휘감았다. 처절한 비명성도 없었고 대지를 진탕시키던 굉음도 더 이상은 들리지 않고 있었다. 다만 보이는 것은 피와 죽음... 땅을 적시는 시뻘건 핏물뿐이었다. 채 반 시진도 안 되는 사이에 궁예린의 일방적인 도륙전이 어느새 끝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궁예린은 허공에서 유유히 지면으로 내려서며 곧 경악하는 삼천 앞에 우뚝 섰다. "어떻소? 이제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겠소?" 그는 짧게 물으며 표정에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이 지닌 여유일 뿐, 새북사사천의 삼천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일백여 명도 넘는 수하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도륙되고 말다니...' 새북삼천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아무리 믿을 수 없다고 해도 현실은 엄연한 현실인 것을... "네놈같이 뛰어난 자가 중원에 있었다니..."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새북삼천은 새삼 궁예린을 다시 보며 진저리를 쳤다. 궁예린은 새북삼천을 똑바로 직시하며 냉혹한 일성을 내뱉었다. "이제 중원이 넓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오! 삼목천... 당신들, 새외 이방인들이 놀 곳은 새북뿐이오!" 삼목천이란 그 말에 새북삼천의 안색은 급격한 동요를 보였다. '그, 그것까지 어떻게...?' '무서운 변수다. 저놈은 백리사헌보다도 더 무서운 놈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내심은 충격과 경악으로 어지럽게 뒤엉키며 복잡하게 변해 갔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만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도 최절정무공을 지닌 절정고수들이었다. 더욱이 새외의 하늘로 떠받들리는 새북사사천이다. 이대로 새파란 애송이에게 당하고만 있다면 도저히 그들의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들은 냉정을 되찾으며 살광을 뿜어 냈다. '죽여야 한다!' '저놈이 있다면 우리의 대업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온 대업인가. 그런데 놈으로 인해 방해를 받다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새북삼천은 부지중 서로 눈짓을 나누었다. 죽여야 한다! 그 공통된 목적으로 서로의 의견이 통일되었다. 혈마천을 휘감은 혈무가 더욱 짙은 혈광을 발출하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구유천의 눈에서는 소름 끼치는 묵광이 이글거렸고, 무유천은 모골이 송연한 마광(魔光)으로 둘러싸여 갔다. 마침내 그들이 극성의 내공을 일으켜 암암리에 출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먼저 구유천이 싸늘히 말했다. "크크... 애송이 놈! 그런 헛소리는 지옥에 가서 지껄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솟아올랐다. 때를 같이해, 혈마천과 무유천 역시 신형을 비틀며 빛살처럼 솟구쳐 올랐다. 마치 세 줄기 바람인 양 기쾌한 그 모습은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새외의 기오막측(奇奧莫測)한 동작이었다. 순간 궁예린은 폐부를 찌르며 짓쳐드는 살기를 느끼고 묵도를 고쳐 잡았다. "후후후, 말이 좀 틀린 것 같다. 지옥으로 떠날 자는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 새북삼천이다. 너희들이야말로 중원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신형을 날려 운무 속으로 뛰어들었다. "후훗! 가소로운 놈!" "우리 셋이 합친 무형의 강기막을 뚫을 수 있으리라 여겼더냐?" 새북삼천의 음성이 강기막 속에서 울려 나왔다. 카카캉! 찰나지간 시퍼렇게 튀어 오르는 불꽃과 함께 날카로운 금속음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동시에 지극히 짤막한 신음성 한마디가 허공을 적셨다. "으윽...!" 궁예린, 바로 그의 목소리였다. 그는 한 움큼의 핏덩이를 토하며 오 장 밖으로 튕겨 났다. 강기막을 뚫으려는 순간 무형의 엄청난 반탄력에 튕겨 난 것이다. '너... 너무 방심했다! 저들의 힘은 지금 세 배나 됨을 모르고 평소의 공력만으로 뚫으려 했으니...' 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크흣, 어떠냐? 새북사사천은 무적이다. 이제 그걸 조금은 깨달았을 것이다!" 구유천의 득의에 찬 음성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 개의 강기막이 재차 궁예린을 덮쳐 갔다. 궁예린은 다급했다. '내력으로는 달린다. 그러니 가장 쾌속한 초식으로 끝장을 내야 한다. 최단시간에...' 결심은 한순간에 끝이 나고, 그는 곧 대기를 격탕시키는 우렁찬 일갈을 터뜨렸다. "살예사사절(殺藝死四絶)...!" "풍(風)... 우(雨)... 뇌(雷)... 운(雲)...!" 그 두 마디의 음성과 함께 궁예린은 번개같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의 신형은 허공에서 수십 번 뒤집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전신에서 묵광이 솟구치며 허공을 완전히 묵빛으로 뒤덮었다. 더구나 그 묵광은 그의 혼신의 내가공력이 실린 것이었다. 산천초목이 박살나며 주위 일백여 장에 있는 모든 것이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묵광은 혈무와 적무, 그리고 백무를 향해 일직선으로 맞부딪쳐 갔다. 살예사사절. 대우주의 오묘한 섭리와 변화에 기초를 둔 절예가 궁예린에 의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풍우뇌운(風雨雷雲). 바람과 비, 번개와 구름이 지닌 대자연의 힘. 그것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야말로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으윽...!" "헉...!" "크으윽...!" 극히 짤막한, 그러기에 비명인지 신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비음이 낮게 깔리며 새북삼천을 휘감았던 적백흑의 운무가 증기처럼 파훼되어 흩뿌려졌다. 운무 속에서 드러난 세 사람의 안색은 모두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고 한결같이 몸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피를 쏟은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궁예린 역시 검붉은 피를 쏟으며 새북삼천의 맞은편에 서서 몸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아... 새북삼천의 힘이 이토록 굴강하다니... 살예십팔식의 초식으로도 그들의 강기막을 뚫을 수는 없단 말인가?' 그의 수중에 들린 묵도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곧 그의 심중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하나의 증거였다. 5 적백흑의 운무는 그 순간 빠르게 원상태를 찾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흉맹한 기운을 뿌리며 강기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내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초식은 단지 일시적으로 강기막을 흩어 놓았을 뿐, 그것을 완전히 파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북삼천은 내심으로 크게 경악하고 있었다. '으으... 무서운 놈! 우리의 강맹한 힘을 받아 내다니...' '만일 우리가 합공을 하지 않았다면 놈에게 단 십 초(十招)의 상대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지만 이대로 포기할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내 새북사사천의 삼천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냉정을 되찾으며 더욱 짙은 살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크크... 각오해라, 애송이!" "이번에는 결코 요행이 없을 것이다!" 새북삼천은 다시 극성의 공력을 운용하며 신형을 쏘아 올렸다. 먼저의 공세와는 비견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극맹한 공세였다.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겠다는 그들의 굳은 각오처럼 그들이 뿌리는 강기막 역시 굴강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허공은 그들이 뿌리는 강기막으로 완전히 뒤덮였다.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궁예린은 절박했다. 아차하는 순간에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는 감히 태만할 수가 없어 재빨리 염두를 굴렸다. '살예십팔식의 모든 것을 담은 살파천지예... 만일 그마저 안 된다면 나 궁예린도 끝을 내야 한다!' 마침내 그는 하나의 승부수를 띄우고 있었다. '그렇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초식인 살파천지예로 승부를 내자!' 그의 두 눈에 순간 섬전 같은 기광이 스쳤다. 생과 사를 결정짓는 비장의 승부수가 그의 머릿속에서 구상되고 있는 것이었다. 한치의 방심도 있어서는 안 되고 일말의 허점도 보여서는 안 되는 비장의 승부수 살파천지예.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에 결정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허공으로 솟구쳤던 새북삼천이 궁예린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리꽂혀 왔다. 그들은 궁예린의 전신 사혈만을 정확히 노리는 악랄한 손속을 펼치고 있었다. "크흐흐흐... 이것으로 네놈도 끝장이다!" 허공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고 사정없이 지면으로 내리꽂혔다. 그뿐인가? 고막을 찢어 놓을 듯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려 퍼지며 무지막지한 강기막이 궁예린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동시에 그 여파는 사방으로 퍼져 나가 집채만한 암석을 그대로 박살냈고 암석은 가루로 화해 사방에 흩뿌려졌다. 만일 그 속에 사람의 몸이 휩쓸린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리라. 그런데 지금 궁예린이 그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무슨 의도에서인지 그는 자신을 향해 오는 강기막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살파천지예...!" 돌연 궁예린의 입에서 우렁찬 일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신형을 회전시키며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순간 허공에서 눈부신 묵광이 피어오르고 부챗살처럼 사위로 퍼져 나가는가 싶더니 곧 허공을 완전히 뒤덮었다. 광풍이 몰아쳤다. 천지를 휩쓸어 버릴 듯 몰아치는 거센 바람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맹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광풍의 파공음을 꿰뚫으며 다시 예리한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지면으로 내리꽂히는 묵광이 강기막을 뚫고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고 돌연 사위는 깊은 정적에 잠겨 들었다. 지금까지 그토록 몰아치던 광풍도, 눈부신 묵광도 그리고 적백흑의 운무도 씻은듯이 사라져 버렸다. 소리도 없는 죽음 같은 정적. 모든 것이 완전히 무(無)의 침묵 속으로 휘말려 들었다. 바로 그때, 자욱이 치솟은 흙먼지가 가라앉자 쓰러질 듯 휘청이는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묵도를 땅에 꽂은 채 간신히 신형을 지탱하고 있는 그는 바로 궁예린이었다. 입가에 흐르는 진득한 핏물. 그의 의복은 걸레조각처럼 갈가리 찢겨 있고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진정 무서운 상대였다... 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의 풀어진 시선이 머문 곳에는 새북삼천이 거의 죽음 직전의 상태로 고통에 떨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저런 애송이에게... 당하고 말다니...' 쿠웅! 그들의 신형이 썩은 짚단처럼 둔탁하게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전신이 쩌억 갈라지며 피분수가 용솟음쳐 올랐다. 이미 모든 혈맥이 끊긴 상태였던 그들은 시신조차 온전히 보존하지 못한 채 즉사했다. 궁예린은 재차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는 혼신의 힘으로 몸을 지탱하며 새북삼천의 시신을 잠시 바라보았다. '만일... 새북사사천이 모두 모였다면 결코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간담이 서늘한 일이었다. '삼목천, 그들 중 과연 누가... 어떤 방법으로 혈문과 십인방을 움직인단 말인가?' 궁예린은 의혹 어린 표정으로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두 눈에 기광을 번뜩였다. '천기수사 사유학! 그는 불구가 아님에도 이륜좌거를 타고 있었다. 만일 그자가 변장을 했다면...?' 부르르... 궁예린의 전신이 극심한 떨림을 보였다. 그는 경악에 찬 일성을 터뜨렸다. "혈문의 암중 실력자인 마마대공이 바로 그라면...?" 정녕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혈문의 실세와 십인방의 방주 사유학이 동일 인물이라니. 궁예린은 전일에 보았던 사유학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분명 그때의 사유학은 무학을 익히지 않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은연중에 묵중한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천기수사 사유학! 그자가 풍기는 고요함 속에는 무형의 기운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무서운 살(殺)이었다!' 그의 안색은 무섭게 경직되었다. '그런 인물은 오직 하나! 천축 포달랍궁의 궁주 포랍존자만이 지닐 수 있으리라. 그것은 수양을 극도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돌연 궁예린은 신형을 돌렸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고 있었다. '틀렸다! 만약 포랍존자가 그처럼 변신을 했다면 혈문의 문주 혈군자 담천후를 찾아도 소용없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까지 혈문으로 가는 중이었단 말인가? 궁예린의 표정이 갑자기 다급해졌다. '유정을 불러야 한다! 그리고 백리사헌, 그자에게 대륙십자종횡진을 철수시키도록 해야 한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순간적으로 수십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고 또 정리되었다. 마침내 그는 무거운 탄식을 불어 냈다. "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단 말인가? 삼목천, 혈문, 십인방을 움직이는 막후의 인물만을 생각하고 그 실체가 바로 삼목천임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의 얼굴은 뼈저린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무림성이 대륙십자종횡진을 하기 전에 짐작했어야 했건만... 이 일로 엄청난 희생이 생길 터이니... 시급히 가야 한다! 절운협으로. 밀천무영세가를 결코 움직이지 않으려 했건만..." 궁예린은 걸음을 빨리했다. 아니, 걷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달리고 있었다. 상처에서 핏물이 떨어지는 것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전신을 쑤시는 고통도 잊은 채 절박함에 쫓겨 내달리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중원에 알려진 삼목천의 힘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진정한 세력은 대륙십자종횡진이 끝난 후에 드러날 것이다.' 궁예린이 다급히 서하령을 빠져 나가 하나의 소로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신형이 흠칫 굳어졌다. 그의 피부 깊숙이 무서운 살기가 와 닿았다. 제 21 장 황궁비사(皇宮秘事) 1 '고수다. 살수만이 지니는 기(氣)를 한없이 뻗치고 있다니...!' 궁예린은 심중을 추스르며 전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의 앞에는 도저히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봉두난발의 괴인이 가슴에 한 자루의 청강검(靑剛劍)을 비스듬히 누이고 궁예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헐렁한 장포는 얼마나 오래됐는지 빛이 바래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괴인이 금방이라도 궁예린에게 출수할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궁예린은 긴장 섞인 표정으로 내심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삼목천에서 왔단 말인가? 아니면 혈문?' 바로 그때 괴인의 입에서 너무도 냉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귀하가 천예살군이라는 공자... 맞소?" 궁예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이미 오감(五感)을 터득했군. 하면 직업살수(職業殺手)?' 그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이제는 귀하의 정체를 말할 차례인 것 같구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누구의 청부를 받았소?" "하늘〔天〕!" 괴인의 대답은 짧고도 간단했다. 궁예린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하늘의 사주... 미치광이였단 말인가?' 그런 궁예린의 내심을 읽은 듯 괴인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깊게 알 것은 없소. 단지 미친 검이 지옥마제의 후예와 비검(比劍)을 하고 싶을 뿐이니..." 찰나지간 궁예린은 경악에 찬 시선으로 괴인을 쏘아보았다. '미친 검! 그렇다면 승부를 찾아 천하를 유랑한다는 검(劍)의 일인자 광풍비검(狂風飛劍)! 한데 이자가 어떻게 나의 내력을...?' 궁예린은 엄청난 충격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미 천여 년 전에 전설로 사라진 지옥무벌의 존재를 알고, 더구나 자신이 지옥마제의 후예임을 괴인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궁예린을 경악하게 했다. 그리고 그자가 바로 광풍비검이라는 사실 또한... 광풍비검. 그에 대해 밝혀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자루의 검에 목숨을 걸고 승부를 찾아 다닌다는 사실뿐,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소문에 의하면 그의 검술이 이미 신화경에 이르러 그 적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는 결코 살인(殺人)을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는 신비인(神秘人)이었다. 궁예린은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지금 쓸데없는 명예를 위해 싸울 때가 아니지 않는가? 한시바삐 절운협으로 가야 한다!' 그가 내심 이렇게 결단을 내렸을 때였다. "천예살군, 결코 피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대를 찾기 위해 사 년 동안 천하 구석구석을 헤맨 나요. 내 검을 실망시키지 않기 바라오." 광품비검은 어느새 싸늘한 살기를 뿜어 내며 청강검을 꽉 잡고 있었다. 일순간에 주위의 공기는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무형(無形)의 살기에 진처리를 쳤다. '나를 찾기 위해 사 년을...?' 궁예린의 눈에 의혹이 일었다. 광풍비검이 대체 무슨 이유로 그를 찾기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허비했단 말인가? 궁예린은 광풍비검을 바라보며 그가 단순한 무공광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의 전신에서는 일대 검종(一代劍宗)만이 지닐 수 있는 무형의 정기(精氣)가 한없이 뻗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단순한 협박만은 아닌 것 같군!' 궁예린은 새로운 눈으로 광풍비검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좋소. 한데 귀하는 무슨 근거로 내가 지옥마제의 후예라는 것을 느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순간 광풍비검의 봉두난발 사이로 예리한 기광이 뻗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고, 그 기광은 이내 그의 눈에 갈무리되었다. "그것은 공자가 내 말을 시인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소. 이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인가 하는 것이오." 광풍비검은 느리게 청강검을 뽑아 들었다. 청아한 음향과 함께 주위는 시퍼런 청광으로 물들었다. 궁예린은 씁쓸히 고소를 머금었다. '교묘하군. 결국 지옥마제의 후예임을 나 스스로 알려 준 것이 됐군!' 궁예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매를 떨치며 밀천여의묵봉을 꺼냈다. "훗! 귀하가 광검인 줄만 알았는데, 오늘 그 소문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 것 같소." 그가 밀천여의묵봉에 내력을 주입하자 묵봉은 한 자루의 묵검(墨劍)으로 변했다. "귀하는 조심해야 할 것이오. 나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귀하에게 속전속결을 펼칠 것이니..." 궁예린의 검을 보며 광풍비검은 흠칫 어깨를 떨었으나 곧 신형을 가다듬었다. "그러길 바라겠소. 나 역시 실망하기는 싫으니까." 광풍비검은 무심히 말을 받으며 청강검을 옆으로 비스듬히 뉘었다. 그 모습을 본 궁예린의 얼굴에 의혹이 스쳤다. '무엇인가? 가슴으로 공격을 막겠다는 것인가? 상대를 이기기 위한 필살의 검초만을 익혔지, 수비란 도통 없지 않는가?' 그랬다. 지금 광풍비검의 자세는 누가 보아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측면으로 몸을 비스듬히 누인 것은 쾌검을 펼치기 위해서는 더없이 좋은 자세이나 상대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만약 상대가 광풍비검보다 몇 배 뛰어난 검학(劍學)을 지니고 있다면 그는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상대방에게 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궁예린은 묵검을 힘껏 쥐었다. '그만큼 필승(必勝)의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경시해서는 큰코 다칠 수도 있겠군!' 주위는 질식할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궁예린에게서 뻗치는 기도는 광풍비검에게 무서운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대단하다. 지옥마제의 무학이 살수에 근거를 두고 있을 줄이야...' 광풍비검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치 억겁의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꼈다. 어느새 그의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았다. 채채챙! 병장기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터지며 궁예린과 광풍비검은 짧은 시간에 수십 번의 검초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궁예린과 광풍비검. 두 사람은 서로 해연히 놀라고 말았다. 한 번의 접전은 서로 근소한 차이로 끝난 것이다. 단, 광풍비검의 앞가슴이 반 치 정도 찢겨져 나풀거릴 뿐이었다. '놀랍군. 이 정도의 나이에 나의 검을 튕겨 내고 앞가슴의 옷을 베어 내다니.' '강한 상대군. 밀천무영세가의 무학으로 겨루었는데 대등을 보이다니.'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그런 내심과는 달리 광풍비검은 오히려 궁예린에게 조소를 날리는 것이었다. "훗, 실망했소! 전설의 지옥무벌이 이 정도의 무공 수준밖에 지니지 않고 있다니." 그 음성에는 다분히 비꼬는 투가 역력했다. 궁예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후, 귀하의 무공이 자부할 만하다는 것은 인정하겠소. 하나 시작은 지금부터이니 조심하시오." 그는 낭랑한 음성과 함께 천천히 묵검을 허공에 수직으로 세웠다. 궁예린이 내뿜는 기운에 주위는 순간 격한 파랑을 일으켰다. '역시 조금 전의 초식은 시험이었군.' 광풍비검은 내심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청강검을 으스러져라 꽉 잡았다. 그러고는 냉막한 음성으로 궁예린에게 말했다. "무척이나 독랄한 검초군." 그 순간이었다. "살인사무예(殺人死武藝)...!" 궁예린의 입에서 낭랑한 대갈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현란한 나무를 펼치고 있었다. 춤사위를 떨치는 그의 신형에서 묵광이 피어오르고, 이내 허공은 묵광의 엄밀한 광채 속에서 암흑으로 변해 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광풍비검은 그 가공할 위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곧 안색을 굳히며 청강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차앙! 맑은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궁예린과 광풍비검의 검이 맞부딪친 소리였다. 그 한 번의 맞부딪침으로 승부는 결정나고 말았다. 검과 검이 부딪친 순간 놀랍게도 광풍비검의 청강검이 허공을 날아 십 장 밖의 거목에 자루까지 박힌 것이었다. "으윽!" 그리고 그 순간 광풍비검은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마치 번개가 스친 듯 시커멓게 타 들어간 그의 가슴은 허연 뼈를 드러낸 채 선홍빛의 핏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싸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단 한 번의 검과 검의 부딪침을 도저히 격렬한 일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부상은 정도가 심했고 그의 기혈은 격하게 들끓고 있어, 광풍비검은 혼신의 힘을 다해 그것을 바로잡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어느새 궁예린은 묵검을 밀천여의묵봉으로 변환시켜 소매 속에 집어넣고 물끄러미 패자(敗者)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분명 자신이 패했음에도 광풍비검은 자신의 가슴에 드러난 상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정 괴변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간 가슴의 상처를 바라보고 있던 광풍비검이 궁예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공자! 이것이 분명 지옥마제의 무학이 맞소?"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상처의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궁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틀림없소. 지옥무벌의 살예십팔식의 한 초식이오." "아, 살예십팔식... 과연 명불허전이다!" 기이한 일은 연이어 일어나고 있었다. 심한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성은 갈수록 떨리고 있었으며 또한 궁예린에 대한 그의 말투도 변해 있었다. "공자, 잠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소?" 광풍비검의 음성에는 기대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궁예린은 그의 행동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던 터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소. 하나 지금은 당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소?" 그 말에 광풍비검은 가슴을 활짝 폈다. 그 때문에 가슴의 상처가 벌어지면서 선혈이 치솟았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후후, 염려 마시오. 이런 상처는 이미 수십 번도 더 얻은 것이오. 별로 대수로운 것이 아니오." 광풍비검은 곧 신형을 홱 돌렸다. "마침 우측에 조그만 석동이 있으니 그리로 갑시다." 그리고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지나는 자리에는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궁예린은 흡사 낮도깨비에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기며 그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필시 깊은 사연이 있음은 분명하건만... 그것이 무엇이기에 저토록 중한 상처를 입고도 오히려 기뻐하는 것 같으니...' 그것은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2 "공자, 이것을 봐 주시겠소?" 진중하고 묵직한 음성이 하나의 석동에서 울려 나왔다. 햇빛이 어슴푸레 비치는 조그만 석동에 궁예린과 광풍비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궁예린은 광풍비검의 진지한 음성에 무심한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순간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느새 광풍비검은 헐렁한 장포를 벗고 궁예린 앞에 맨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구릿빛 상체에는 수십 줄기의 검흔이 울퉁불퉁 튀어나와 광풍비검의 미미한 움직임에도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광풍비검이 그 동안 검을 겨루며 얻은 상처였다. '대단하군. 저 정도의 상처라면 이미 수십 번은 죽을 고비를 넘긴 것 같군.' 궁예린이 내심 아연함을 금치 못할 때였다. "공자는 이 상처가 오직 하나, 지옥마제의 무학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소?" 광풍비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 말에 궁예린은 다시 의혹을 느꼈다. '지옥마제의 무학을 찾기 위해...? 왜...?' 의혹은 산더미처럼 쌓여 갔으나 궁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소." 광풍비검은 잠시 궁예린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천천히 봉두난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고맙소, 공자! 이제 나 하후돈은 소임을 다한 것 같소."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자 겉모습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얼굴이 드러났다. 초로의 나이였으나 위엄있는 외모에 네모나고 각진 턱이 인상 깊게 보였다. 그의 성격이 굴강하고 강직함을 여실히 보여 주는 일면이기도 했다. 그는 바로 당금 대명(大明)의 황제 홍희제의 지엄한 명(命)을 받고 지옥무벌을 찾아 길을 떠난 하후돈이었다. "하후돈...?" 궁예린은 처음 듣는 그 이름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하후돈은 갑자기 자리에서 성큼 일어나 궁예린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으며 회한이 어린 한마디를 내뱉었다. "공자! 대명을 구해 주십시오." －공자! 대명을 구해 주십시오. 궁예린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대명...! 그렇다면 현 황실을...' 그는 내심 당혹감을 금치 못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잘 모르나 나에게 어찌 그만한 힘이 있겠소? 당신은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소." "아닙니다. 이 일은 오직 공자만이 할 수 있소이다." 하후돈은 쇠를 자르듯 단호히 말했다. "나만이...?" "그렇소! 넓은 천하에 백리사헌의 무학을 능가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지옥마제의 후예뿐이오." 궁예린은 다시금 경악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백리사헌? 당신은 현 무림성주 승천무황 백리사헌을 말하는 것이오?" 하후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역도는 실로 금수만도 못한 배은망덕한 가증스런 놈이오." '배은망덕...? 가증스런 역도? 필시 커다란 사연이 있는 것 같군.' 궁예린은 내심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자세한 얘기를 해주실 수 있겠소? 이 일은 소문만 갖고는 어불성설일 것 같소." 그러자 그 순간 하후돈의 두 눈에서 가공할 살기가 무섭게 폭사되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백리사헌이 눈앞에 있다면 검을 빼 들고 그에게 달려들 듯했다.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이 일은 소문이 아니오. 내 어찌 모든 것을 숨기겠소." 하후돈은 치솟는 살기를 간신히 억누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 아주 느리게 입을 열어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궁예린에게 말했다. 백리사헌이 중원을 개혁하기 위해 홍희제에게서 명을 받고 황궁무고를 나온 일, 그가 자신의 아들에게 황통(皇統)을 잇게 하려는 일, 그리고 현 황실에서 일고 있는 무서운 황위 다툼 등등...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3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 석동 안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경악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는 한 사람과 그를 지켜보는 다른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럴 수가... 백리사헌! 그의 야망이 그곳까지 이르렀다니...' 궁예린은 무딘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백리사헌이 무림을 장악할 때부터 그의 야망이 크다는 것은 능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황궁에까지 손을 뻗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때 하후돈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공자! 이것은 천자령(天子令)입니다. 이것이 나타나는 곳에는 황제께서 친히 거동하신 것과 같습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조심스럽게 받쳐 든 금빛 삼각 깃발이 놓여 있었다. 궁예린의 안색은 경직되었다. '천자령! 들은 적이 있다. 황궁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는 지엄한 신물(神物)이 아닌가?' 그랬다. 그리고 소문에는 천자령으로 당금 황제에게까지 명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지금 하후돈에 의해 궁예린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궁예린은 엄숙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천민, 궁예린! 천자령을 뵙습니다." 그 역시 중원인의 한 사람이었기에 황조의 신물 앞에 신하로서의 예를 취했다. 그것은 어떤 지위에 있는 자이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었다. 천자령을 들고 있는 하후돈 역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 이것을 받아 주시오. 이것은 결코 황제의 명이 아닙니다. 그분의 부탁입니다. 이것으로 부디 어지러운 황실을 바로잡아 복된 대명을 이루게 해주십시오." 천하를 한마디로 호령할 수 있는 당금 대명 황제의 부탁. 그 엄청난 말에 궁예린은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아... 황제께서 얼마나 고심을 하고 계신지 이것으로 여실히 나타나고 있군. 나 역시 중원인의 한 사람으로서 대명의 국민이 아닌가?' 그는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 앞에 숙연함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황실에는 황궁 나름대로 지켜져야 할 법(法)과 질서가 있다. 한 개인으로 황제의 위(位)에 오른다면 힘있는 자는 누구나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백리사헌과 궁예린. 비록 연배는 틀리나 커다란 야망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야망을 성취하려는 방법은 서로 달랐으니... 백리사헌이 시대를 앞서가려고 한다면 궁예린은 묵묵히 시세의 흐름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궁예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받겠소! 기꺼이 받아, 내 한목숨 바쳐 황실을 지키겠소." 드디어 그가 결단을 내렸다. 무림인으로 황실의 일에 끼여들지 않는 것은 오랜 세월 무림에 암중으로 내려온 규칙이었지만 그는 백리사헌의 야망을 꺾기 위해 그 규칙을 깨기로 결심했다. 부르르... 하후돈의 전신에 세찬 전율이 일었다. 천하를 돌아다니며 백리사헌의 야욕을 분쇄할 자를 찾아 헤맨 그의 노력이 오늘에서야 그 열매를 맺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석동 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드디어 대명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폐하!" 목이 메이는가? 그의 음성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끝내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궁예린은 내심 알 수 없는 호기가 불끈 치솟음을 느꼈다. '백리사헌, 보았소? 당신은 큰 잘못을 저지른 거요. 이런 충혼들이 대명에 있는 이상 대명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소!' 궁예린은 하후돈에게서 건네 받은 천자령을 으스러져라 힘껏 움켜쥐었다. 그 순간 하후돈은 궁예린 앞에 이마를 힘껏 박았다. "령주(令主)! 속하 하후돈, 한목숨 바쳐 령주를 위해 기꺼이 죽을 것입니다." 궁예린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후돈! 내 어찌 모르겠소? 황실의 충혼이기에 천자령 앞에서 기꺼이 무릎을 꿇는 것을... 당신은 진정한 열혈남아(熱血男兒)요!' 그는 내심 뿌듯한 감동을 느끼며 하후돈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시오. 당신의 도움이 있어야 황실의 암운(暗雲)이 걷힐 수 있기에 나는 기꺼이 당신의 도움을 부탁할 것이오." 궁예린이 보이는 겸손한 태도에 하후돈은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홍복이다! 이토록 어린 약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만과 아첨이 조금도 없으니... 천자령은 그 빛을 만천하에 뿌릴 것이다!' 하후돈은 궁예린의 부드러운 손길에 자신의 심정을 한마디 말로 대신했다. "감사합니다, 령주!" 그때 궁예린은 나직한 음성으로 하후돈에게 물었다. "말해 주시오. 향후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하후돈은 서서히 냉정을 되찾으며 공손히 입을 열었다. "령주! 천자령에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가공스러운 힘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그것을 알려 드리는 것이 속하의 임무일 것 같습니다." '가공스러운 힘?' 궁예린은 의혹이 일었으나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하후돈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하도 폐하께 들은 것에 불과하지만, 천자령은 황궁전사(皇宮戰士)들을 움직일 수 있는 지고한 신물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황궁전사...?" "자세히는 모르지만 황궁전사는 오직 황궁을 수호하며 천자령의 명을 받고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당시 대명제국(大明帝國)을 창건하신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께서도 황궁전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명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라는 신화만이 내려올 뿐입니다." "그런 일이..." 궁예린은 새롭게 밝혀지는 비사(秘事) 앞에 부지중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하후돈은 개의치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또한 이것은 황제만이 아는 황궁 최대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궁예린은 잠시 혼란에 빠져 들었다. '필시, 미증유의 거력(巨力)을 지니고 있을 것인데...' 그는 자신의 궁금증을 하후돈에게 물었다. "하면 황제께서는 천자령을 직접 사용하지 않으시고 어째서 굳이 나에게..." 하후돈은 그의 질문이 당연하다는 듯 궁예린을 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령주께서 의혹이 크실 것입니다. 그러나 황궁전사의 힘은 오직 황실에서만 유용할 뿐, 백리사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백리사헌이 황궁 내에서 공존하지 않고 무림에서 활동하며 역모가 아닌 합법적인 방법으로 황실을 접수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납득이 간 듯 궁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백리사헌만 막는다면 황궁전사가 구문제독부와 금군어영친위대 등을 제거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하가 령주를 찾으려고 천하를 헤맨 것입니다." "알겠소.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오." 궁예린은 단호히 말했다. 그러고 자신의 또 한 가지 의문을 하후돈에게 물었다. "한데 백리사헌에게는 분명 아들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랬다. 분명 백리사헌에 대해 현 무림에 알려진 것은 그가 독신이며 단지 세 명의 제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하후돈은 다시금 무서운 살광을 뿜어 냈다. "그것이 바로 놈의 무서운 계책입니다. 천하의 이목을 속이고 대의명분을 내세워 황실을 장악하려는 것이지요. 실상, 그놈에게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습니다." "아들과 딸...?'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궁예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백리사헌에 대해 새로이 인식했다. '백리사헌! 당신은 너무나 큰 거목인 것 같소!' 그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주시했다. '나는 이제야 느꼈소. 대륙십자종횡진, 그것이 당신에게 아무리 타격을 주어도 당신은 끄떡없을 거목이란 것을...' 궁예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강자! 그것을 추구하는 당신과 그것을 빼앗기 위해 일어선 나, 궁예린... 멋진 승부를 내봅시다.' 그의 눈은 강렬한 호기로 들끓고 있었다. '하나, 나 궁예린은 이 승패(勝敗)에 관계없이 당신을 거목이라 인정할 것이오. 당신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과감히 단행했기 때문이오.' 조그만 석동. 그 안은 지금 궁예린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제 22 장 유리화의 죽음 1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요, 경악이었다. －대륙십자종횡진의 대패(大敗)! 대륙은 그 거센 충격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어느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이 시대의 절대자 백리사헌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 그의 최정예고수들이 다른 자들에게 패하다니.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첫번째. 마천령(魔天嶺). 마도천하(魔道天下)를 부르짖은 혈문으로 간 천학우사와 십대문파, 이십팔대세가는 혈문과 삼목천의 합공에 대패를 하고 소수의 인원만이 살아서 무림성으로 돌아갔다. 가히 전 무림이 뭉쳤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들이 마도의 무리들에게 참패를 했다는 사실은 세인들에게 놀라운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두 번째. 동(東), 서(西), 남(南), 북(北)으로 대륙을 질타하던 무림사천왕! 그들 역시 혈문, 삼목천의 연합 세력에 대패를 면치 못했다. 더욱이 십인방이 공교롭게도 개입해 무림사천왕은 뜨거운 분루를 삼키며 무림성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세 번째. 무림성의 삼공자 풍광도 관무상이 이끄는 무림이십팔숙과 정예 사천 명은 그 반수만이 겨우 살아 남아 성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언제까지나 절대의 자리를 지킬 것 같던 무림성이 이토록 무참한 패배를 한 것이었다. 천하인들은 이 사실에 모두 공통된 한 가지를 느껴야 했다. 정(正), 사(邪), 마(魔). 그것이 한마음으로 뭉쳐 일어난 그 힘〔力〕의 저력을. 그러나 천하인들은 한편으로 숨을 죽였다. 그리고 이 시대의 절대자 백리사헌, 그의 다음 행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승천무황 백리사헌은 만인(萬人)의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거목이기에... 긴장과 전율 속에 그 해 봄〔春〕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2 초여름의 햇살이 호반로(湖畔路) 위로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곳은 천하팔대절경(天下八代絶景)의 하나인 동정호(洞庭湖)로 들어서는 관도이기에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또한 이곳은 절운협으로 통하는 교차로이기에 언제나 물건을 실은 마차와 말〔馬〕 등으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하늘의 해가 중천에서 서서히 기울고 있는 무렵. 분명 사람들로 북적거려야 할 시간에 관도는 너무도 조용했다. 마치 모든 시간이 정지한 듯 정적을 지키며, 간혹 풀벌레 소리만이 그 정적을 깨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관도 끝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햐얀 백의를 입은 준수한 미장부, 바로 궁예린이었다. 호반로를 따라 느리게 걸어오는 그는 상념에 잠긴 듯 굳은 표정이었다. '유리화! 그녀에게서 소식이 끊긴 지도 벌서 한 달이 지났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호반로의 끝을 주시했다. 이 길을 그대로 가면 유리대벽루가 나온다. 그는 호반로와 절운협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호반로의 끝을 바라보더니 이내 자위하듯 독백을 흘렸다. "어쨌든 아직은 유리대벽루의 소문이 요란하니 별일은 없겠지." 궁예린의 눈에 아쉬움이 스쳤다. "유리화에게 갔으면 좋겠지만 지금쯤 유정이 돌아와 있을 테니..." 그는 다시금 독백을 흘리며 한 발을 갈림길에 올려놓았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 그는 기이함을 느꼈다. '이상하군. 지금은 한창 붐빌 시간인데...' 의혹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순간 흠칫했다. 관도 저 끝에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한 대의 기마대가 나타난 것이다. 적어도 백여 장 밖의 뿌연 먼지 속이지만 궁예린의 눈에는 확연히 보였다. 펄럭이는 깃발을 휘날리며 느리게 다가오는 일단의 군마(軍馬)들. 그들은 무림성의 고수들이었다. 궁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무림성의 정예들이 대패하고 대륙십자종횡진에서 돌아오는 길이니 모두 발길을 끊은 것이군.' 그의 생각대로였다. 무림어군이 동정호를 지나간다는 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불똥이 떨어질까 두려워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동정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궁예린을 향해 다가오는 무림어군들의 모습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먼 거리를 달려오는 것은 둘째 치고 악전고투를 벌였음에도 패하고 돌아오니 사기가 떨어진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궁예린은 무심히 말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천하가 한 덩어리로 붙어 대적하는데 군마들을 뿔뿔이 분산시켰으니... 포달랍궁주! 실로 대단한 심기와 지혜를 지닌 인물이군. 처음부터 빈틈없이 완벽한 계획을 짜 놓았으니..." 돌연 그는 말끝을 흐리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것은... 무상! 관무상이 아닌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의 시선은 군마의 선두에 서서 무림어군을 이끌고 있는 그 또래의 청년에게 머물러 있었다. 무림어군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전신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리고 유난히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그는 무림성의 삼공자 풍광도 관무상이었다. 관무상, 그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궁예린은 먼 발치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바로 무림성에서 처음 혈문의 인물들을 공격하는 날. 그때 궁예린과 망혼사인,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가? 어린 시절, 비록 아옹다옹하는 사이였지만 그 때문에 더욱 잊을 수 없는 친구가 바로 관무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관무상의 곁에 다가가지 못했고 네 사람과 함께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한데, 지금 그의 앞으로 관무상이 일단의 무리들과 함께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군마의 선두에서 오던 관무상도 길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궁예린을 발견했다. "너... 너는... 예린, 궁예린이 아니냐?" 마상에 앉아 궁예린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가에는 미미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는 재빨리 말 위에서 뛰어내려 궁예린의 앞에 우뚝 섰다. "예린! 분명 네놈이 틀림없지?" 관무상은 궁예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음성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궁예린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무상! 궁예린이다." 그의 얼굴에도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전일, 그를 보았음에도 말없이 돌아섰던 일이 생각나서인가? 관무상에게 보여 주는 그의 미소는 환했다. 관무상은 궁예린의 두 손을 와락 부여잡았다. "하하하, 이놈! 믿고 있었다. 네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하하하핫..." "후후후, 녀석! 고맙다. 아직도 나를 잊지 않았다니." 관무상은 궁예린의 아래위를 예리하게 훑어보며 여전히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놈아! 잊을 리가 잊느냐? 그 어린 날의 소꿉동무를. 또한 네놈을 언젠가는 꼭 꺾기를 바랐기에 더 못 잊었다, 이놈아!" 그는 몹시 기쁘다는 듯 궁예린의 팔을 아래위로 연거푸 흔들었다. 그 모습에 궁예린도 가식없는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녀석! 아직도 그 고집은 여전하구나. 아프다, 녀석아. 이러다가는 내 손이 모두 떨어져 나갈 것 같구나." 관무상은 궁예린의 모습을 세세히 살피더니 멋쩍은 웃음을 보냈다. "녀석! 네놈은 결국 이토록 청출(靑出)한 선비가 됐구나. 끝내 나는 네놈과 힘을 겨룰 수 없게 된 것 같구나." 관무상은 못내 아쉽다는 듯 혀까지 끌끌 찼다. 그러나 궁예린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관무상의 입가에 스치는 득의의 미소를. 궁예린은 피식 웃었다. '내가 선비라고? 녀석! 지금은 너의 가슴이 쓰릴 것이니 다시 들출 것은 없을 뿐이다. 원래 네놈은 나에게 진 후에 몇날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곤 했으니.' 그랬다. 유난히 패기에 차 있는 관무상은 어렸을 때부터 지는 것을 너무도 싫어했다. 그런 그가 지금 패전의 고통을 가슴에 안고 무림성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때문에 궁예린은 굳이 관무상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훗! 어쩌다 그렇게 됐구나. 한데 너는 무림성에 입문한 것 같구나." 그는 관무상의 신분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그의 전신을 훑었다. 관무상의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도 그렇게 됐다. 다행히 무림성주의 눈에 들어서 그분의 제자가 되어 삼공자(三公子)라 칭하고 있을 뿐이다." 궁예린은 두 눈을 부릅떴다. "무림성의 삼공자... 그렇다면 네가 풍광도...?" "하하하... 녀석, 소문을 들었구나. 그렇다. 풍광도 관무상이 바로 나다." 관무상은 어깨와 가슴을 활짝 펴며 궁예린에게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내보였다. '예린! 내가 얼마나 오늘을 기다린 줄 아느냐? 네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구나.' 그는 뿌듯한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무림성의 삼공자라는 위치는 중원의 청년고수들이 꿈꾸는 선망의 자리가 아닌가? 궁예린은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녀석! 그럴 줄 알았다. 네놈은 원래부터 힘의 우위를 강조했으니." 그제야 관무상은 자신의 뒤에 선 기마대를 상기하고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지금이 웃고 떠들고 할 때인가? 선비에게 힘을 자랑할 때인가?' 그는 내심 자책을 금치 못하며 궁예린에게 말했다. "예린! 이거 미안하게 됐구나! 너와 그 동안의 회포를 풀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지금 몹시 바쁘니..." 관무상의 얼굴에는 진정으로 미안함이 가득 서렸다. 궁예린은 그런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부드럽게 웃었다. "후후후, 됐다. 너를 본 것으로 족할 뿐이다." "녀석! 네놈은 언제나 초연한 것은 변함이 없구나. 나 관무상이 네놈의 그 기개만은 영원히 이길 수 없을 것 같구나." 관무상은 호기롭게 입을 열며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수일 내로 무림성을 방문해 주기 바란다. 어쩌면 네놈에게 그 동안 진 빚을 그곳에서 몽땅 갚을 수 있을 것이니." 궁예린이 의아한 듯 그를 올려다보자 관무상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내가 어느 여인(女人)과 결혼을 하는 것이니. 너는 그저 축하해 주러 방문하면 된다." 그러고 그는 돌아서서 기마대를 향해 외쳤다. "자! 출발!" 관무상과 일단의 무리들은 다시금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말발굽을 울렸다. "예린! 꼭 와 주기 바란다. 나는 그 누구보다 네놈의 축하를 받기 원하고 있으니..." 이미 저만큼 멀어져 가는 무리들 속에서 관무상의 웅후한 음성만이 허공을 울리고 있었다. 궁예린은 내심 의아했으나 곧 피식 웃었다. "녀석! 그럴 나이가 됐지. 결국 너는 여인을 먼저 얻는 것이 나에게 처음으로 이기는 길이 될 것이다." 그의 미소 띤 얼굴에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하나, 어쩌면 그 이전에 우리 둘은 승부를 겨루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너의 사부를 꺾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우리는 어쩌면 피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궁예린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암울한 기분을 떨쳐 보려는 듯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돌연 그의 눈이 반짝 이채를 띠었다. 3 한 마리의 새하얀 영조(靈鳥)가 허공을 힘껏 비행하고 있는 것이 궁예린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것은... 유리화가 키우는 설영조(雪靈鳥)가 아닌가?' 그 순간 설영조는 절운협을 향해 무섭게 날아가고 있었다. '필경 유리화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군!' 궁예린은 내심 염두를 굴리며 소리 높여 휘파람을 불었다. 청아한 휘파람 소리가 허공에 울리는 순간 저만큼 힘차게 날아가던 설영조는 한바퀴 원을 그리며 궁예린을 향해 쏜살같이 내려왔다. 설영조는 곧 그의 어깨에 내려앉아 연신 부리로 궁예린의 뺨을 비볐다. 진정 눈처럼 새하얀 새였다. 잡털 하나 없었으며 깃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유리화가 손수 키운 그 새는 궁예린과 긴밀한 연락을 취할 때 그녀가 사용하는 전령조(傳令鳥)로 이미 여러 번 궁예린을 만났기에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설영조의 발에는 시뻘건 핏물이 묻어 나오는 혈서(血書)가 묶여 있었다. 궁예린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리며 불안감이 일었다. 그는 재빨리 설영조의 발에서 혈서를 풀어 두 손으로 펼쳐 들었다. <무... 무서운 일이... 있어요... 천첩은... 뇌옥에서... 당신을..��기다리겠어요...> 너무도 간단한 글귀였다. 그러나 정갈하게 쓰지 못한 그 혈서는 얼마나 상황이 급박한가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또한 글씨가 마구 어지럽게 휘날린 것으로 보아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공포에 휩싸여 있는지 궁예린은 느낄 수 있었다. 궁예린의 손에서 서신은 휴지처럼 구겨졌다. "유리화! 나 궁예린이 갈 것이오. 죽으면 안 되오. 당신은 나를 꼭 보아야 하오." 그는 오열 같은 음성을 터뜨리며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설영조도 날개를 치며 그의 뒤를 따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마! 예뻐라. 이리 와 봐라!" 호들갑스러운 여인의 음성과 함께 하나의 시뻘건 운무가 날아오르는 설영조를 낚아채는 것이었다. 푸드득! 설영조는 기겁을 하며 날개를 퍼득거렸다. 어느새 한 명의 홍의여인이 설영조를 손안에 쥐고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발랄함과 생기가 가득한 그 여인은 전신에 꽉 끼는 홍의를 입어 자신의 섬세한 몸매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대략 십육칠 세 정도 되었을까? 홍의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절색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영롱한 눈빛을 빛내며 손안에서 파닥거리는 설영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염려 마라! 너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러나 그녀의 손에 잡힌 설영조는 날아가려고 연신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마디 퉁명스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낭자! 그 새를 놔두시오. 그 새는 임자가 있는 새요." 궁예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홍의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순, 홍의여인은 궁예린의 모습에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대단히 잘생긴 공자야. 중원에서 처음 보는 사내야!' 궁예린의 준수한 모습에 그녀의 마음은 한순간 크게 격탕되고 있었다. 하지만 궁예린은 여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만 짜증이 나 약간 언성을 높였다. "낭자! 내 말이 안 들린단 말이오? 아니면 귀가 먹었소? 그 새를 놓아 달란 말이오!" 그 말에 홍의여인의 얄팍한 자존심은 무참히 뭉개지고 말았다. 그녀는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궁예린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이 새를 기르는 것인가요?" 아직은 탐색하는 듯 덜 가시 돋힌 음성이었다. 궁예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단호히 말했다. "내가 기르는 새는 아니지만 분명 임자는 있소." 그러자 홍의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코방귀를 뀌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흥! 그랬군요. 이봐요! 솔직히 이 새가 탐이 난다면 그렇다고 말하세요. 생긴 것은 멀쩡해서 엉큼하긴..." 그제야 궁예린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안 되겠다. 이 여인을 보아하니 녹록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지금 말싸움을 할 시간이 없지 않는가?' 그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무력으로라도...' 그 생각이 끝나는 순간 그의 신형은 빛살처럼 날아가 홍의여인의 가슴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궁예린의 손이 그녀의 육봉을 잡으려는 것으로 비쳐졌다. "어맛! 이봐요, 어디를..." 홍의여인은 그만 안색이 해쓱해지며 여인의 본능으로 자신의 가슴을 소중히 가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무서운 착각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왼손에 쥐여 있던 설영조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만 궁예린의 손으로 넘어갔다. 설영조는 곧 날개를 펴며 허공으로 쏜살같이 올라갔다. "낭자! 염려 마시오. 낭자의 몸에는 손 하나 대지 않았으니." 어느새 궁예린은 허공으로 솟구쳐 하나의 점(點)으로 화하고 있었다. 실로 이 모든 것은 눈 한 번 깜박이는 순간에 벌어진 일련의 행동이었다. 잠시 멍하니 넋을 잃고 있던 홍의여인은 그제야 사태를 깨닫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 응큼한... 남이 기껏 잡은 새를..." 그녀는 붉디붉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흥! 감히 남해선자(南海仙子) 사마추련(司馬秋蓮)을 희롱하다니. 결코 내 손에서 그 새를 훔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궁예린의 뒤를 따라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흥! 흥! 분명 나의 가슴을 희롱하려 했음이 틀림없어. 그것을 내가 빠르게 피했기에 망정이지... 기어이 잡아서 그 응큼한 손을 잘라 버릴 거야." 그것은 분명 그녀의 억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궁예린의 존재를 마음에 담았기에 그렇게라도 이유를 갖다 붙여 그의 뒤를 쫓을 구실을 만든 것이다. 어느새 그녀의 신형은 궁예린이 향한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한데 들었는가? 그녀의 이름을... 석년에 궁예린은 궁사와 함께 한 사내를 만난 적이 있었다. 철검무적 사마혁. 이 시대의 풍운아로 불리던 그가 무림성으로 압송되어 가면서 궁예린과 단 한 번의 만남을 가졌고, 그때 사마혁은 자신의 딸이 남해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그녀의 이름이 사마추련으로, 궁예린에게는 정혼녀(定婚女)가 된다는 사실도 말해 주었다. 남해선자 사마추련. 드디어 그녀가 나타났다. 궁예린과 기막힌 인연(因緣)을 만들면서... 4 유리대벽루. 석양이 물드는 시각이면 천하의 한량들과 풍류객들은 즐기기 위해, 그리고 구경꾼들은 유리대벽루의 휘황찬란함을 구경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든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 이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화려한 유리대벽루 안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리라. 철옥(鐵獄). 그곳은 바로 유리대벽루의 기녀들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철옥에 온통 진동하고 있었다. 그 철옥의 한구석에 한 여인이 섬세한 신형을 웅크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새하얗게 탈색된 얼굴. 그녀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두 눈을 꼭 감고 있었고, 걸치고 있던 옷은 너덜너덜 찢겨진 채 그녀의 희끗한 살결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가슴 사이에 소검이 손잡이만 남긴 채 깊숙이 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인의 하체는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 아래로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것으로 보아 무참히 윤간을 당한 듯했다. 진정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약한 여인을 어떻게 이토록 처참한 몰골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가슴에는 검을 꽂고 거기에 윤간까지... 여인은 죽은 지 오래인 듯 미동도 않고 있었다. 이미 피를 많이 흘린 것으로 보아 그 모습으로 오랫동안 방치된 듯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일순, 여인의 어깨가 가냘프게 흔들렸다. 아직 살아 있단 말인가? 여인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아... 안 돼... 그분이 오실 때까지... 만이라도... 눈을 떠야...��해..." 여인은 찢겨져 피가 나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유... 리화... 야... 너는... 눈을... 떠야 해... 눈을..." 여인은 가물거리는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유리화! 그렇다면 이 여인이 바로 천하제일화 유리화란 말인가? 대체 그녀가 무슨 이유로 이토록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단 말인가? 더욱이 사경을 헤매면서. "그... 그분이... 오실 때... 까지... 만이... 라... 도..." 그녀는 그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리화!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철옥 안으로 뛰어든 궁예린은 구석에 처박혀 있는 유리화를 발견하고 놀라 소리쳤다. 유리화의 안면이 꿈틀거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궁예린이 마침내 그녀 곁으로 온 것이다. '그분... 그분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봐야... 보고... 싶어...' 그녀는 힘겹게 눈을 떴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희끗한 그림자뿐이었다. 궁예린은 유리화의 처참한 모습에 분노를 일으켰다. '대체 어느 잔혹한 놈들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그는 유리화의 늘어진 몸을 품에 안았다. '내가 더 일찍 왔던들... 정녕 살릴 수 없단 말인가?' 그는 이미 유리화가 회생하지 못할 지경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궁예린은 희망을 걸고 싶었다. "리화! 나요. 궁예린이 왔소. 염려 마시오. 당신은 죽지 않을 것이니..." 궁예린은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짐짓 밝게 말했다. 유리화의 과거가 어떻든 그녀는 궁예린에게 있어 첫 여인이었다. 비록 사랑으로 만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존재는 이미 궁예린의 가슴에 깊이 못박혀 있었다. 유리화의 메마른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다, 당신... 기어코... 오셨군요..." "그렇소. 내가 왔소. 궁예린이 왔단 말이오." 궁예린은 힘주어 말했다. "누구요?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이오?" 그의 물음에 순간 유리화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누구를 떠올리는지 두 눈에 공포의 빛이 가득했다. "그... 그자예요... 너무나... 무서운 일이에요... 마마대공... 微? 십인방주... 이며... 삼목천의... 포랍존자... 였어요... 또.��혈문의..." 찰나지간 궁예린의 어깨는 세찬 전율을 일으켰다. '짐작은 했지만... 사실이 아니길 바랐건만...' 그는 이제는 확실해진 사실에 망연함을 금치 못했다. '아니길... 아니길... 바랐는데...' 그렇게 얼마를 되뇌이던 궁예린은 평정을 되찾으며 유리화를 내려다보았다. "고맙소, 리화! 결국 이 못난 내가 그대에게 죽음을 안겨 준 것이구려. 이 일에 깊게 개입하지 않았던들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을..." 그는 신음 같은 음성을 흘렸다. 유리화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아니에요... 천첩은... 당신을 위해...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자랑스러웠... 어요..." "리화!" 궁예린은 치솟는 격정에 겨우 그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입을 열었다가는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리화는 다시금 메마른 입술을 힘들게 열었다. "당신... 조심해야... 돼요... 포랍존자는... 돈황에... 수천 ?... 무서운 고수들을... 배치시키고... 기다리고... 있어요. 윽!" 그 말을 끝으로 유리화는 한사발은 됨직한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 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너무 놀란 나머지 궁예린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머릿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돈황에...?" 그는 이제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랬군. 무림성과 중원의 정예들이 서로 잔살(殘殺)을 벌이게 한 후 모조리 쓸어 버린다는 악랄한 계책을...' 궁예린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유리화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연신 핏물을 토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던 유리화의 얼굴에 돌연 붉은 홍조가 돌았다. 회광반조(回光反照). 그것은 죽음에 이르러 극히 한순간에 혼신의 힘이 빛을 뿌리는 것이었다. "리화! 당신은 진정 너무도 훌륭한 일을 했소. 중원은 당신의 고마움을 깊이 새길 것이오." 궁예린은 유리화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별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리화는 힘이 들어 잠시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며 말했다. "아니에요... 천첩은... 당신을 위해서... 사랑했어요... 천첩이..����?... 몸을... 버렸지만... 마음은... 당신에게... 모두... 줬어요..." "아오!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궁예린은 복받치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품안에서 그녀가 죽어 가는 모습을 빤히 바라만 봐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저주스럽기까지 했다. "당신... 저를... 사랑했... 나...요...?" 유리화의 눈은 이제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사랑했소. 나 궁예린은 당신의 깨끗한 마음을 한없이 사랑했소. 당신은 나의 첫사랑이었소."고... 마워요... 당신은... 좋은... 분이... 셨어... 요... 리화?��당신의..." 그때 유리화는 다시금 검붉은 핏덩이를 토했다. "리화!" 궁예린은 그 안쓰러운 모습에 눈물이 솟는 것을 겨우 참았다. 유리화는 흐릿한 그림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궁예린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리... 화는... 당신의... 손과... 발에... 매를 맞던... 때를... ��영원히... 가슴에 담을 거... 예요... 당신... 손을..." 궁예린은 내심 지난날의 아픔을 가슴 깊이 묻어 두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사... 랑... 했... 헉!" 유리화는 끝내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고개를 꺾었다. 한 많은 인생을 살았던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사랑하는 궁예린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가슴 뿌듯하게 여기며 숨을 거뒀다. 궁예린은 유리화를 가슴에 안으며 느리게 일어섰다. "리화! 마마대공 아니, 포랍존자는 기필코 내 손에 죽을 것이오. 당신은 그 대답을 듣고 가야 했소." 궁예린은 독백을 흘리며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된 유리화의 메마른 입술에 자신의 뜨거운 입술을 맞추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리화! 당신의 몸과 마음은 더 이상 이 더러운 곳에 있어서는 안 되오. 깨끗이, 아름답고 맑게 새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오." 그가 막 철옥을 나서려 할 때였다. 돌연 궁예린은 흠칫 신형을 굳혔다. 사마추련이 문밖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궁예린의 뒤를 따라왔던 그녀는 그 슬픈 광경에 그만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가련한 죽음 같아요..." 그 말을 하며 그녀는 급기야 구슬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궁예린은 그녀를 힐끔 주시했을 뿐,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나직한 독백을 흘렸다. "리화! 나는 영원히 당신을 못 잊을 것이오. 왜인지 아시오?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시작이 나를 아프게 하고 있기 때문이오." 궁예린은 지난날의 일들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왜 좀더 그녀를 다정하게 대하지 못했는지... 꼭 그렇게 심하게 대해야만 했는지... 그 생각이 궁예린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리대벽루! 이곳은 이제 중원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두 번 다시 유리화 같은 여인이 생기지 않도록." 궁예린은 이제 유리화가 없는 이상 유리대벽루도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쿠르르릉... 요란한 굉음과 함께 유리대벽루는 흔들리고 있었다. "앗! 유리대벽루가 무너진다!" "유리화를 구해라!" 요란한 소리에 놀라 유람선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은 삼층 누각이 동정호를 향해 기우는 모습에 다시 한 번 경악했다. 그리고 뜻있는 한량들은 저마다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천하제일화 유리화를 구하기 위해. 하지만 동정호는 순식간에 유리대벽루를 삼켜 버렸고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을 지켰다. 유리대벽루! 중원 최대의 명물로 명성을 떨치던 거대한 유리성은 이렇게 사라졌다. 유리화의 죽음과 함께 숱한 비사를 남기고서. 5 절운협은 언제나처럼 뿌연 운무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대는 운무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게 깔려 하나의 장원을 감싸고 있었다. 망혼장(亡魂莊). 바로 밀천무영세가의 후예들이 스스로 망혼인이라 자칭하며 기거하는 장원으로 그곳은 언제나 묵직한 침묵에 싸여 있었다. 궁예린은 창가에 서서 절운협의 울창한 수림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혹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단지 시선만 밖을 향하고 있을 뿐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의 뒤에는 냉혼이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공손히 시립해 있었다. 그 역시 궁예린과 마찬가지로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문득 궁예린의 입술이 열리며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냉혼! 이 일은 매우 엄중하다. 자신있는가?" 두 사람은 이미 한차례 대화를 나눈 듯했다. 그리고 냉혼에게 한 가지 명을 내린 궁예린이 재차 그 일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냉혼은 안색을 굳히며 단호히 말했다. "맡겨 주십시오. 속하는 결코 가주께 심려를 끼쳐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으음... 너의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하나 이 일은 너무나 엄중하다. 또한 비밀리에 처결해야 될 것이니 걱정이 되는군." 궁예린은 마치 신음하듯 독백을 흘렸다. "이 일은 내가 직접 처결해야 되는 것이거늘... 너에게 괜스레 부담을 주는 것 같구나." 그는 신형을 돌려 냉혼을 바라보았다. "냉혼! 믿는다. 대중원의 황실은 오직 너에게 달려 있다. 추호의 소홀함도 없이 하후돈과 협조를 해야 할 것이다." 궁예린은 냉혼에게 황실의 일을 맡긴 것인가? 실상, 궁예린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그 자신이 나서려 했지만 여건이 그렇지 못했다. 더구나 유리화에게서 포랍존자가 지금 어떤 일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게 된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밀영자 냉혼에게 대신 황실의 일을 부탁했다. 냉혼은 지체없이 허리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밀천무영세가의 위명에 추호도 부끄럼이 없을 것을 속하, 목숨으로 대신할 것입니다." 그의 자신감에 찬 모습에 궁예린은 적이 마음이 놓이는지 굳어 있던 안색을 폈다. 그는 부드럽게 냉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나는 네가 이번 일을 무사히 처결하리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니..." 냉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토록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모실 수 있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할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는 궁예린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음을 새로이 각오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밀천무영세가의 밀영자로서 생애를 마친 냉천을 떠올렸다. '아버님! 아버님의 자식으로서 결코 부끄럼없는 밀영자가 되겠습니다.' 궁예린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가거라! 밀천의 앞을 막는 자는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존명!" 냉혼은 궁예린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인 후, 곧 그의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궁예린은 다시 신형을 돌려 창 밖의 수림을 응시했다. "냉혼!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궁예린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그렇게 서 있었다. 제 23 장 사마추련(司馬秋蓮) 1 "유정! 이것이 백리사헌과 유리화에 대한 모든 것이다. 이제 너의 고견을 듣고 싶구나." 대전의 한쪽에 자리한 오단목 탁자에 궁예린과 백리유정이 마주앉아 있었다. 궁예린은 지금까지 절운협으로 오는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백리유정에게 말하고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백리유정에게 묻고 있었다. 궁예린이 눈을 빛내며 그를 주시하자, 백리유정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대전의 창 밖을 바라보았다. 궁예린의 눈에는 그 모습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실상 백리유정의 눈은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 황궁에서 이미 아버님의 야욕에 철저히 대처를 하고 있었다니! 이것이 하늘의 섭리인가? 그 무서운 전설의 지옥무벌이 예린의 선조(先祖)이며 그들이 밀천무영세가를 세웠을 줄이야...' 궁예린은 그에게 단지 우연히 지옥무벌의 유물을 얻어 그들의 후예가 되었다고 했지만 백리유정은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버님과 예린 사이에는 다시 한 겹의 장막이 더 깔리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은 한없이 어두웠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운명지어진 것처럼 백리사헌과 궁예린은 시작부터 엇갈리기 시작했다. 백리사헌이 궁가장을 멸문시킨 것이 일의 시작이었고, 그것이 눈처럼 커져 이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백리유정은 어느 쪽도 편을 들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요, 다른 한 사람은 그가 진정으로 마음을 주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그저 시간을 두고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백리유정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차피 시작된 일! 이제 나는 최선을 다해 기다릴 뿐이다!' 그는 내심 마음을 가다듬으며 궁예린을 주시했다. "그렇다면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궁예린은 이미 생각을 해둔 듯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포랍존자는 승천무황을 다시 끌어들여 중원인들끼리 서로 잔살(殘殺)을 벌이게 할 것이다. 그리고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린 후, 일격을 가하겠지." "으음... 그것은 그에게 최대의 확률이 되겠군." 백리유정이 그 말에 동감인 듯 수긍하자 궁예린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한 가지?" 백리유정은 반문했다. 그는 눈을 빛내며 궁예린을 바라보았다. 그가 생각해 낸 해결책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 그를 주시하며 궁예린은 싱긋 미소 지었다. "유정! 속이지 마라. 네 녀석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어떠냐? 우리 서로의 생각을 동시에 밝히는 것이." 백리유정은 피식 웃었다. "네놈에게는 언제나 내 마음이 몽땅 털리는구나. 좋다! 우리 이 탁자에 동시에 쓰는 것이다." 백리유정이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자 궁예린도 그렇게 했다. "알았다! 시작하자!"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찻잔에 우수를 적셔 오단목 탁자 위에 글자를 적었다. 그리고 각자 앞에 쓰인 글자를 바라보았다. 궁예린의 앞에는 '힘〔力〕', 그리고 백리유정의 앞에는 '합력(合力)'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쓰인 글자 수는 달랐지만 분명 같은 뜻이었다. 궁예린과 백리유정의 시선이 허공을 사이에 두고 힘차게 부딪쳤다. "후후후, 역시..." "너 역시..." 두 사람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으로 결정은 지어졌고 더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궁예린은 웃으며 탁자 위에 쓰인 글자를 소맷자락으로 지웠다. 백리유정은 감탄 섞인 시선으로 궁예린을 응시했다. '예린! 너는 갈수록 나를 탄복케 하는구나. 아버님의 야망을 알면서도 서로 힘을 모을 것을 쾌히 결단을 내리다니.' 그랬다. 백리사헌이 그를 이용할지 모른다는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궁예린은 결코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을 과감히 굳혔다. 그것은 오직 이방인에게 중원을 내어줄 수 없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백리유정은 신중히 물었다. "하나, 예린! 만약 승천무황이 이성을 잃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궁예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승천무황은 거목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진정한 강자(强者)의 길을 알기에 조잡한 술수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역시 대의(大義)를 분별하는 중원인이라는 점일 것이다." 백리유정은 궁예린의 확신에 찬 음성에 내심 감격했다. '녀석, 어쩌면 나보다 네놈이 아버님을 더욱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나!' 그러나 그는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채 궁예린에게 우려의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대로 승천무황이 따른다 해도 이 일은 지극히 은밀히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곳의 삼십 명으로 다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구나." 그것은 확실히 큰 문제였다. 망혼장의 삼십 명으로는 삼목천과 혈문, 십인방의 이목을 다 덮을 수는 없었다. 백리유정의 말에 궁예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할 수 있다. 아니, 너무 많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백리유정이 의혹 어린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자 궁예린은 미소가 가지시 않은 얼굴로 대전 밖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들어오너라!" 그리고 그 음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전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며 일단의 인영들이 들어섰다. "속하들, 대기하고 있습니다!" 절도있는 모습으로 궁예린 앞에 부복하는 그들은 각기 열세 명씩 홍의와 청의를 입고 가슴에는 상(象), 차(車), 졸(卒), 마(馬)라는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바로 망혼이십육살의 모습이었다. 그 옆에는 표빈과 철산, 사릉과 비호가 가슴에 '사(士)'라 쓰여진 황의를 입고 망혼이십육살과 마찬가지로 부복해 있었다. 밀천무영세가. 그들이 드디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것이다. 2 백리유정은 그들의 모습에 내심 경악했다. '밀천무영세가를 이번 작전에...' 그러나 지금까지 궁예린에게 밀천무영세가를 아는 기색을 일체 보이지 않았던 그는 그렇게 경악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겉으로는 그들 삼십 명의 모습에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흠! 마치 장기판을 보는 것 같군." 그의 말에 궁예린은 다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이제 십팔만 리 대륙은 하나의 장기판으로 축소되어 이들 삼십 명이 종횡으로 행동을 하며 삼목천의 이목을 막을 것이다." 그는 흡족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리유정은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가능하다. 밀천무영세가는 천하에 점(點)조직으로 뻗어 있다고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여기 있는 이들은 그들의 수뇌들이 아닌가? 이들이 움직인다면 삼목천은 분명 이목을 잃을 것이다. 그 후, 아버님이 그들을 차례로 친다면...' 결과는 뻔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포랍존자의 야욕은 철저히 무너질 수밖에 없다. 서림의 신(神)으로 불리는 밀천무영세가의 힘에 이 시대의 절대자라는 백리사헌의 힘이 가세한다면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이길 수 없으리라. 그자가 비록 포랍존자라 할지라도. 그런 백리유정의 내심을 짐작하지 못한 궁예린은 단지 그가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유정, 걱정 마라! 이들은 모두 자신이 가진 역량의 몇 배를 발휘할 것이니, 너는 지켜만 보면 된다." 그제야 백리유정은 시선을 궁예린에게로 돌렸다. "알겠다! 네가 그처럼 자신있게 말하니 믿겠다. 한데, 너는...?" "이번 돈황 토벌 길에는 철산과 표빈, 비호, 그리고 사릉만으로 충분하다." 궁예린은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겨우 저들 네 사람으로...!" 백리유정의 안색이 해쓱하게 변했다. '돈황에는 족히 수천 명이 집결되어 있을 텐데. 그것도 최정예들로만...' 하지만 궁예린의 음성은 너무도 담담했다. "그것도 네가 걱정할 일은 없다. 사람이 많이 간다면 놈들의 이목에 띌 염려가 있으니. 또한 이들 네 명은 모두 일당천(一當千)은 할 놈들이니 충분하다." 백리유정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누가 이 사실을 믿으려 하겠는가? 단 오 인이 수천 명을 상대하는 것을. 하나 이들은 밀천무영세가이기에 믿을 수밖에 없으니...' 그는 경이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궁예린을 주시했다. "아무튼 네놈은 대단하기는 대단한 놈이다. 기백, 호기, 배짱, 심기... 그 어느것으로 따져도 승천무황을 능가할 정도이니..." 그것은 그의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러자 궁예린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후, 하나 나는 그에게 하나 뒤지는 것이 있다." 백리유정은 의아해 하며 궁예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수십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그와 같은 야망(野望)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궁예린의 말에 순간 백리유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녀석! 정곡을 찌르는군.' 그러나 겉으로는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맞다. 만약 네놈이 승천무황과 같은 야망을 지녔다면 내가 먼저 네놈의 가슴에 검(劍)을 들이댔을 테니." "후후후, 녀석! 그렇게 된다면 나 궁예린의 가장 무서운 적은 유정, 네놈이 됐을 것이다." "하하하, 그렇던가?" "후훗! 그렇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진한 우정이 그들 두 사람을 끈끈히 이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궁예린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백리유정의 웃음 속에 진한 아픔이 배어 있음을. 한동안 대전 안에서 그들은 훈훈한 열기 속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비켜라! 비키지 않는다면 이곳을 모조리 불질러 버리겠다." 뾰족하고 앙칼진 음성이 대전을 쩌렁쩌렁 울린 것이었다. 그에 따라 대전의 훈훈한 열기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것은 분명 여인의 음성이 틀림없는데... 대체 누가 밀천무영세가의 현신인 망혼장 안에서 그처럼 무례한 행동을 저지른단 말인가? 3 "분명 이곳에 엉큼한 도둑이 있는데 왜 막는단 말이냐? 혹시 당신들도 한 패가 아니냐?" 앙칼진 음성은 계속해서 들려 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린 궁예린의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그 낭자가 틀림없다. 어떻게 이곳까지...' 그리고 그 순간, 홍의여인이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궁예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사마추련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유리대벽루에서 절운협까지 따라온 것이다. 사마추련은 가쁘게 숨을 내쉬며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궁예린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두 눈은 동그랗게 떠지며 그에게로 못박혔다. "흥! 당신, 본 낭자의 눈을 피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어느새 궁예린의 곁으로 다가온 사마추련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그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일순, 주위의 모든 시선은 사마추련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궁예린과 그녀를 신기한 듯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었다. 대체 그녀가 무슨 이유로 궁예린에게 그토록 화를 내는지 그들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궁예린이 핏대를 세우며 사마추련에게 소리쳤다. "낭자! 이토록 무례해도 된단 말이오?" 그의 추상같은 호통에 사마추련은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두 눈을 번뜩이며 반격을 가했다. "흥! 뭐예요? 당신, 지금 사람 수가 많다고 겁주는 거예요?" 그녀는 주위를 무섭게 훑어보며 두 손을 허리춤에 올려놓았다. 마치 덤빌 테면 덤벼 보라는 태도였다. 궁예린은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무참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으... 이거야 원...!' 그때 옆에서 사태를 주시하던 백리유정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낭자!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이오?" "당신은 누구예요?" 사마추련은 독기에 찬 시선으로 이번에는 그의 아래위를 훑었다. 그러자 백리유정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허! 굉장히 괄괄한 여인이군.' 그는 내심 쓰디쓴 고소를 베어물며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이 사람의 친구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이오?" "친구라고요?" 사마추련은 백리유정의 얼굴을 천천히 응시하더니 한층 누그러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흠... 보아하니 당신은 이 사람과는 좀 틀린 것 같으니, 말해 주겠어요. 똑똑히 들으세요." 그 순간 궁예린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궁예린을 무섭게 노려본 사마추련은 입에서 침까지 튕기면서 붉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예쁜 새를 도둑맞았단 말이에요. 그것도 평생 한번 볼까말까 한 아름다운 새를 말이에요." "새...?" 백리유정과 모두의 시선은 의혹을 가득 담은 채 일제히 궁예린에게로 향했다. 궁예린은 난처함과 다급함에 백리유정에게 구원이라도 청하듯 입을 열었다. "유정! 그 새는 바로 유리화가 기르는 설영조이다. 그것을 저 낭자가 잡았기에 내가 다시 찾은 것뿐이다. 한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달라붙으니..." 사마추련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뭐예요? 손쉬운 거짓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시는데, 좋아요. 그렇다면 그 새의 주인을 데려와 봐요." 그 말에 궁예린은 얼굴을 찡그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런 억지가... 낭자도 유리대벽루에서 보지 않았소. 그 가련히 죽은 여인이 바로 유리화란 말이오." 사마추련은 펄쩍펄쩍 뛰었다. "아니, 뭐라구요? 내가 유리대벽루라는 기루에서 봤다구요? 아이... 분해. 이봐요, 거짓말을 해도 그럴싸하게 해요. 어떻게 여염집 규수가 기루에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녀의 안색은 분노로 붉으락푸르락 일변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이고, 되게 걸렸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설영조를 그냥 주는 건데...' 궁예린은 그 점이 더없이 후회스러웠다. 그때 철산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지 궁예린에게 전음을 보냈다. "대장! 두들겨 패라. 여자에겐 그게 약(藥)인 것 같으니..." 궁예린은 고개를 돌려 철산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서 작렬하는 불꽃에 철산은 고개를 돌려 궁예린의 시선을 회피했다. 궁예린은 그런 철산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어이쿠, 이놈아! 그것도 여자 나름이다. 저 여인을 봐라. 기가 펄펄 살아 날뛰는데 손이라도 살짝 댄다면 그대로 게거품을 물 것이 아니냐?" 맞는 말이었다. 사마추련은 그 순간에도 능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기개를 궁예린에게 한껏 보여 주고 있었다. 철산은 고개를 돌렸으나 궁예린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또 다른 방법을 쓰려나? 잘 배워야지.' 오직 그것이 그의 주된 관심거리였다. 한편 백리유정은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를 베어물며 궁예린과 사마추련을 응시하고 있었다. '훗! 예린, 이 녀석에겐 여복(女福)이 줄을 잇는군. 이 여인은 예린을 가까이하고 싶은 것이군.' 백리유정은 비록 사마추련이 궁예린에게 화를 내고 있었으나 그것이 그녀의 본심이 아님을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궁예린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그다지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백리유정의 물음에는 순순히 대답하기까지 했다. 그 음성에 비록 노기가 배어 있었지만. 백리유정은 사마추련을 향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낭자! 그렇게 흥분만 하시지 말고 우선 이리로 앉으시지요." 그 말에 놀란 궁예린이 펄쩍 뛰며 말했다. "유정! 저런 여인을 일일이 상대했다가는 복장이 터진다. 어서 내보내라!" 그는 차라리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편을 들어주리라 생각했던 백리유정이 오히려 사마추련의 편을 드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사마추련이 두 눈을 샐쭉히 뜨며 말했다. "아니, 뭐 이런 사내가 다 있어.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더니, 엉큼하게 생겨 갖고 기루나 들락거리면서..." 그녀는 잠시 말을 끊으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내놔요! 내 새만 내놓는다면 이 더러운 곳에 있으라 해도 안 있을 것이니..." "더러운 곳...?" 궁예린은 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다만 속으로 끙끙 앓으며 그 기막힌 상황에 대처할 뿐이었다. '으... 차라리 힘으로 나선다면 어찌할 수 있으련만...' 그때 백리유정이 다시 나섰다. "아! 낭자, 우선 앉으셔서 차근차근 말을 하시지요. 내 친구는 원래 말주변이 없으니..." "흥! 좋아요. 어차피 내 새를 받기 전에는 안 물러설 것이니.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하며 이 귀신 같은 곳에 왔는데..." 사마추련은 궁예린을 쫓는 것이 힘들었는지 새삼 오만상을 찌푸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궁예린은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나 제멋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그저 아연하기만 했다. '이런... 날벼락도 유분수지.' 그런 그의 모습을 표빈과 사릉, 철산, 비호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후훗! 대장이 오늘 임자 만났구나!' '어째... 먼젓번에는 말도 안 되는 여인을 다루는 법을 써먹더라니.' '역시 여인에겐 정석(定石)을 밟아야 해.' 그러나 다음 순간, "헉...!" "허억!" 그들은 다급히 헛바람을 들이켜며 번개같이 시선을 외면했다. 그들의 마음을 눈치채기나 한 듯 궁예린이 무섭게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궁예린의 눈에서는 시퍼런 번갯불이 작렬하며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부하들 앞에서 자신의 꼴이 도무지 말이 아니었다. '이놈들... 마치 내가 동물원의 원숭이로 보이겠군.' 궁예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정, 난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구워 먹든 삶아 먹든 하거라." 그리고 그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궁예린은 싸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대전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찰나지간 사마추련은 기겁을 하며 일어섰다. "어멋! 저 사내가 또 도망을..." 지금까지 궁예린의 행방을 찾느라 고생했던 그녀는 지금 그의 뒤를 쫓지 않는다면 다시 또 언제 그를 찾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막 궁예린의 뒤를 쫓아 신형을 날리려 할 때였다. 백리유정이 방긋 웃으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낭자! 참으시오. 저 친구에게는 천천히 가도 늦지 않으니 우선 흥분을 가라앉혀야 낭자에게 이로울 것이 아니겠소." 일순, 사마추련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맛! 이 사람은 이제 보니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어. 난 몰라...' 백리유정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줄 미처 몰랐던 그녀는 이제 얼굴에 이어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었다. 그러고는 급기야 그 괄괄한 모습을 씻은듯이 지우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그곳에서 사라진 궁예린이 아마도 그 모습을 보았다면 지금 그녀의 모습을 부정하고 말리라. 귀신이 모습을 바꿔 그녀로 변신해 있다고. 그러고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눈을 부정하리라. 백리유정은 자신의 짐작이 맞자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훗! 짐작대로군. 앞으로 예린이 무척 혼나겠군!' 대전 안의 모든 사람들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저마다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잘하면... 저분이 우리 주모(主母)가 되시겠군! 금방이라도 폭풍이 몰아칠 것 같았던 대전은 한순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단지, 철산만이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4 <성주! 본인은 천예살군이라 부르는 무림의 말학 후배요. 그러나 중원(中原)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대륙의 한 사람으로 ...중략(中略)... 이에 성주께 협조를 구하는 바이오! 다름이 아니고, 현 무림에 교활하고 가증스런 음모가 조만간 터질 것이기에 본인은 부득불 필(筆)을 들었소. 그것은 성주께서도 이미 느끼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무림성의 대패(大敗)는 삼목천의 수뇌인 천축 포달랍궁의 궁주 포랍존자의 술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여기 그 자세한 내막을 밝히는 바이오. ...중략(中略)... 때문에 이제 본인은 돈황으로 그의 중추 세력(重樞勢力)을 토벌(討伐)하러 갈 것이오. 성주께서 중원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낀다면 감히 본인의 의견에 동참해 주리라 믿소. 아니, 본인은 믿을 것이오. 그렇기에 아무 걱정 없이 돈황으로 떠나는 것이오. 그것은 성주가 진정한 강자(强者)를 좋아하는 노웅(老雄)이기 때문이오. 끝으로 본인이 돈황에서 무사히 돌아온다면 성주를 찾을 것이오. 그 이유는 본인 역시 한 사람의 무인(武人)으로서 진정한 강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오. 그럼 성주의 건투를 빌며. 말학 후배 천예살군 서(書).> 그것은 한 통의 긴 작문으로 된 서찰이었다. 서찰을 들고 있는 손은 그의 감정을 대변해 주듯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 한 통의 서찰은 백리사헌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서찰에 적혀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아니었다. 서찰에 아무리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다 하나 그를 이토록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마치 명령하듯 그의 다음 행동을 당부하는 천예살군이라는 자였다. 천하에 누가 그에게 명령을 내린단 말인가? 백리사헌은 지금까지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그 자체를 부정해 왔다. 그런데 천예살군은 그의 확신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듯 당당히 백리사헌에게 서찰을 보냈다. 한동안 충격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백리사헌이 이번에는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진정한 맞수를 만났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그의 진심 어린 미소였다. "천예살군! 그가 누구이건, 이 넓은 천하에 노부의 상대는 바로 그자뿐인 것 같군." 다음 순간 그의 손에서 서찰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어느새 백리사헌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굳은 듯 무심한 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랬던가? 막연히 짐작은 했지만 포랍존자, 그자가 삼 문(三門)을 동시에 이끌 줄은... 노부가 그를 과소평가했군. 그토록 철저히 준비를 해왔으니 대륙십자종횡진이 대패한 것도 무리는 아니야." 그의 얼굴에 이번에는 씁쓸한 고소가 어렸다. 그는 시선을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너무도 푸르고 파랬다. 뭉게구름이 둥실 떠다니며 여러 가지 모양을 이루었다 흩어지곤 했다. 잠시 하늘을 주시하던 백리사헌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천우가 천예살군에게 죽고, 단우엽이 야망을 피우기도 전에 그에게 꺾인 것이 무리가 아니었군." 이제는 그 사실이 수긍이 가는 듯 그의 음성은 담담했다. 실상, 백리사헌은 처음 그 사실을 보고받았을 때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무공을 십 성 이어받았고, 백리사헌은 어느 누구도 그들을 쉽게 이기지 못하리라 자신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갑자기 무림에 나타난 천예살군은 그 일을 손쉽게 해냈고, 더구나 암중 세력인 잠마풍까지 멸문시키고 말았으니... 그 사실을 믿지 못했던 백리사헌은 오늘에서야 천예살군의 혜지와 무공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천예살군! 보고를 받기로는 아직 약관의 청년이라는데, 만나 보고 싶군. 아마도 그자는 무서운 변수로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의 얼굴에 한 줄기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가 이미 노부의 진정한 힘을 꿰뚫어 보고 있다니, 중원이 이토록 넓은 것인가? 아직도 대륙에 노부의 손길,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있었단 말인가?" 백리사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대륙은 천예살군이라는 자를 내세워 그에게 놀라운 충격을 안겨 주었고,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시켰다. 확실히 천예살군은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찰나지간 백리사헌의 눈에 강렬한 섬광이 번뜩였다. "천예살군, 노부는 믿는다. 그대는 이번 돈황 토벌 길에 노부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 것을." 주위의 공기는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운에 세찬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또한 노부 역시 그대의 기대대로 중원에 승천무황이란 존재를 재인식시킬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는 무림의 현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백리사헌은 이제 다시 무림에 나가 다시 한 번 승천무황으로서 위엄을 떨칠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무림을 사랑하는 중원인이었다. "노부는 그대의 명(命)대로 행동을 할 것이다. 이것은 노부 역시 중원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전 안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백리사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동안 상념에 잠기더니 돌연 나직한 독백을 흘렸다. "천예살군! 기다리겠다. 중원에 노부의 진정한 상대는 바로 그대뿐일 것이니... 그대 말대로 노부 역시 삼목천에 대비한 최후의 무기로 그 실체를 보여 주겠다. 결코 실망을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나직한 음성이 끝나는 순간, 이미 백리사헌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백리사헌, 대체 그는 침묵을 지키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그리고 삼목천에 대비한 최후의 무기는...? 대전은 그 모든 비밀을 간직한 채 다시 깊은 적막감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제 24 장 운명적인 해후(邂逅) 1 폭양(曝陽)이 관도를 뜨거운 불길처럼 무더운 열기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열기가 대륙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 아스라한 열기 속에 관도의 저쪽 끝으로부터 다섯 개의 작은 점이 나타났다. 궁예린과 그를 호위하는 네 명의 청년들, 그들은 궁예린의 오랜 지기이자 그의 분신과도 같은 망혼사인이었다. 관도 저 끝에 나타났던 그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뜨거운 폭염을 꿰뚫으며 빠르게 신형을 쏘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쁜 와중에도 궁예린은 연신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릉, 잘 살펴보아라! 틀림없이 그 여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니. 우린 그녀를 만나서는 안 된다." 궁예린이 유사릉에게 말하고 있는 여인은 바로 사마추련을 일컬음이었다. 유사릉은 코를 벌름거리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염려 마라, 대장! 내 코가 여인의 냄새를 맡는 데에는 이미 완숙한 경지에 들어서 있으니까." 그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철산이 거대한 입을 벌려 물었다. "대장! 나는 이해가 안 간다. 그 여인은 유리화보다 나이도 어리고 능구렁이도 아닌데... 까짓 것 몇 대 쥐어박으면 고분고분해질 게 아니야?" 그는 커다란 머리통을 세차게 가로저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인을 다루는 주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궁예린이 유리화를 다루는 방법을 본 뒤, 철산은 여인은 두들겨 패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또다시 궁예린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철산이 혼란스러운 듯 질문을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손비호와 표빈은 싱긋 웃었고, 궁예린만이 정색을 하며 그를 꾸짖었다. "철산, 이제부터는 입을 다물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번 길에 돌려보낼 것이니." 그 말에 철산은 순간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크, 대장은 한번 한다면 하는 성미이니 이 주둥이를 꼭...' 그는 더 생각하지도 않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궁예린의 말에 복종할 뿐이었다. 그때 궁예린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후유... 어쩌다 그런 괴물이 나타나서... 귀신같이 내가 있는 곳은 꼭꼭 찾아오니 정말...' 그랬다. 요 수삼 일 동안 궁예린은 사마추련을 피하려고 몇 번을 시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그의 행방을 알았는지 귀신같이 찾아내며 궁예린이 가는 곳마다 모습을 나타냈다. 지금도 궁예린은 사마추련이 나타날 것을 염려하여 유사릉에게 그녀의 내음이 나는 즉시 알리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사릉이 그것을 말해 주는 순간 다른 곳으로 내빼기로 그는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속력을 늦추지는 않아 곧 꺾어지는 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호호호!" 그들의 전면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짤랑짤랑한 그녀의 웃음이 다섯 사람의 귓전을 뒤흔들었다. "호호호, 이제 오면 어떡해요? 숙녀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것은 사내의 도리가 아니잖아요?" 관도 옆의 암석 위. 사마추련이 미소 지으며 궁예린과 다른 네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악! 저... 괴물이...' 궁예린은 순간 질색하며 무서운 눈으로 옆에 있는 유사릉을 돌아보았다. '설마 사릉이가 그녀의 내음을 맡지 못할 리가 없는데...' 유사릉은 고개를 돌려 궁예린의 시선을 피하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분명 아무런 냄새도 없었어." 궁예린은 두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 놈, 이제 보니 나를 놀려 주려고...' 그는 네 사람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 내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사마추련이 나타날 때마다 궁예린이 쩔쩔매는 모습을 재미있게 구경했고 이제는 아예 궁예린에게 그녀가 나타난 것을 고하지도 않게 되었다. 다시 한 번 궁예린이 사마추련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궁예린은 순간 차갑게 유사릉을 쏘아보고는 고개를 돌려 사마추련을 응시했다. 그러고 딱딱하게 물었다. "낭자! 대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거요?" 그는 비록 딱딱한 음성을 발하고 있었지만 내심은 울상이었다. 사마추련은 눈썹을 치켜뜨며 대답했다. "아니,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단 말이에요? 좋아요. 내 분명히 말해 주겠어요. 내가 당신을 쫓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예요. 바로 내 새를 돌려 받기 위해서라는 것을 당신이 정말 모르고 있었단 말이에요?" 궁예린은 답답했다. "낭자, 생각해 보시오. 이미 날아가 버린 새를 어디서 찾는단 말이오?" 사마추련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뭐예요? 당신도 분명 그 새가 주인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그 주인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그 새를 다시 부를 수도 있을 게 아니에요?" 그녀의 눈에는 예리한 빛이 싸늘하게 배어 있었다. 그것은 궁예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여인에 대한 질투였다. 이제껏 그녀는 궁예린과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나누어 보지 못했는데 그런 그에게 다른 여인이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너무 화나게 만들었다. "흥! 나는 당신 때문에 거짓말쟁이란 수치를 당했으니 그 새를 어서 불러 보세요! 그래서 새가 당신의 말을 들으면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할 테니 말이에요. 어서 빨리요!" 그녀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지독한 억지를 쓰고 있었다. 이미 날아가 버린 새를 어떻게 불러 낸단 말인가? 더욱이 유리화가 죽은 지금 그 새가 어디에 있는지 궁예린은 알지 못했다. 궁예린은 한동안 어이없는 분노를 느끼며 굳어 있다가 사마추련에게 물었다. "하면, 당신은 끝까지 본인의 뒤를 따르겠단 말이오?" 사마추련은 새삼스럽게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내가 소중하게 잡은 새를 훔쳐 간 사람이 누군데 내가 이대로 물러나겠어요?" 궁예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히 걸려 들었군. 돈황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으니... 그렇다고 이 자리를 피해 본들 어떻게든 또다시 찾아낼 것이고...' 그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손비호의 입가에 익살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궁예린을 툭 치며 말했다. "대장, 이렇게 된 이상 저 여인이 우리를 따라오건 말건 우리는 갈 길을 가기만 하면 되니 그만 가는 게 어떠냐?"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고 있던 철산 역시 손을 떼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비호 말이 맞다. 저 여자가 죽든 말든 우리가 알 게 뭐야?" 궁예린은 어이가 없어 내심 비명을 질렀다. '어이쿠, 이놈들아!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느냐? 옆에서 살려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칠 텐데. 더욱이 돈황까지 우리는 지극히 은밀하게 가야 하는데, 여인이 함께 간다면 한없이 불편할 것이 아니냐?' 극비리에 중원을 떠나 온 궁예린은 자꾸만 사마추련이 나타나서 소동을 일으키자 이제는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될까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궁예린의 귓전에 옷자락이 스치는 미세한 음향이 들려 왔다. 그가 시선을 동남방으로 꺾는 순간,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곧 이어 그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다음 순간 마치 환각처럼 두 개의 인영이 그들의 뒤쪽에 떨어져 내리며 경악에 찬 음성을 터뜨렸다. "아가씨, 대체 어떻게 해서 여기에 계셨단 말인가요?" 그들은 두 명의 괴노파였다. 사마추련과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두 사람은 앙상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카락은 새둥지처럼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고 백발이 성성한 머리 아래로는 뼈마디를 나무껍질로 싼 듯 볼품없이 깡말라 있었다. 그러나 두 눈에서만은 형형한 정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 점으로 미루어 두 노파는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들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들이 나타난 순간, 사마추련은 어찌나 당황했던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아니... 모모(母母), 어떻게 여기까지..." 손에 용두괴장(龍頭怪杖)을 짚고서 굽은 노신을 받치고 있는 두 명의 노파는 일순 다급하게 말했다. "아가씨, 어서 가시지요. 노신들이 아버님이 계신 곳을 알아내 왔습니다." "노신들이 얼마나 아가씨를 찾았는지 아세요?" 사마추련의 안색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이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아버님이 계신 곳을? 어디예요? 그곳이 어디예요?" 괴노파들은 순간 얼굴에 근심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아가씨, 아버님께서는 무림성의 철뇌옥(鐵牢獄)에 갇혀 계시옵니다. 더욱이 모습이 많이 상하셨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사마추련의 전신에 세찬 경련이 일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두 노파에게 나직이 반문했다. "무림성의 철뇌옥...? 아버님이 그곳에..." 어느새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노파가 전해 준 소식이 그녀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사마추련은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 없는 듯 급박하게 말했다. "모모, 어서 가요. 아버님을 어서 구해 드려야 해요!" 그녀는 이제 궁예린 일행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그들에게는 눈길 한번 안 주고 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어느새 그녀의 모습이 장내에서 멀어지자 두 명의 노파는 서로를 마주보며 중얼거리듯 탄식을 내뱉었다. "저렇게 성급하시긴... 그곳은 용담호혈(龍潭虎穴)이니 세세한 계책을 짜야만 하는데." 그리고 두 노파들 역시 다음 순간 바람을 일으키며 사마추련의 뒤를 쫓았다. 마지막 두 사람까지 떠나 버리고 잠시 멍해 있던 궁예린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사마추련을 염려하여 내쉬는 한숨이 아니라 그녀가 떠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안도의 숨결이었다. '후유... 다행이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반면에 그의 옆에 있던 네 사람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에이...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길 텐데, 가 버리다니...' '어디서 저런 볼품없는 괴상한 할멈들이 나타나서...' 그들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이봐요!" 돌연 앙칼진 음성이 들려 오며 놀랍게도 사마추련이 다시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왜 또다시...?' 궁예린은 얼굴색을 바꾸며 자신의 앞에 내려서는 사마추련을 주시했다. 사마추련이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흥! 당신 재수 좋은 줄 아세요. 본 낭자가 바쁜 일이 있어 가야 하니..." 경황이 없어 잠시 궁예린을 잊었던 그녀는 그 말을 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 궁예린은 다급히 말했다. "고맙소, 낭자. 내 잘 알았소!" 말과는 달리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가 떠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궁예린의 다급한 음성에서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사마추련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렇다고 좋아하지 말아요! 내가 아버님을 찾은 뒤 틀림없이 당신을 찾아갈 테니까요. 그때까지 당신이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것은 궁예린이 돈황으로 위험한 싸움을 벌이러 가는 것에 대한 그녀의 걱정 어린 충고였다. 하지만 궁예린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다시 그 자리를 떠나는 사마추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다짐하고 있었다. '어림없지. 이제 두 번 다시 그대는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 동안 그대가 어떻게 나를 찾았는지 그 원인을 규명할 테니까.' 그런데 다음 순간 그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완전히 그의 곁을 떠나자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함을 느낀 것이다. 비록 언젠가는 또다시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에 화들짝 놀란 궁예린은 다급히 그 감정을 부인했다. 그리고 문득 그녀의 신분에 대한 의혹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 낭자의 아버님이 누구이기에 무림성의 철뇌옥에 갇혀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저 여인의 신분 내력을 묻지 않았군.' 궁예린은 사마추련의 신분에 의문을 가지게 되자 더욱 경솔하게 행동한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그때 표빈이 멍하니 서 있는 그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대장, 사내의 가장 큰 매력은 조금 전처럼 여인이 뒤를 쫓아다닐 때 아니겠어? 그것이 사라졌을 때 사내는 별볼일이 없어지지." 궁예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흡사 세상사에 통달한 듯 막힘없이 줄줄이 늘어놓는 표빈의 말에 그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만 떠들고 어서 가자! 명심해라!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너희들의 신분을 다시금 생각해 볼 테니." 그는 한마디를 차갑게 쏘아 낸 뒤 앞장서서 신형을 날렸다. 손비호가 그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리며 소리쳤다. "대장! 생각해 볼 필요가 뭐 있어? 우리 망혼사인은 죽으라면 그저 죽어 지내는데." 표빈 역시 손비호의 뒤를 따르며 거들었다. "암! 가주님의 명은 천명(天命)이나 진배없으니까 여부가 있겠냐?" 그들 네 사람은 또다시 질풍같이 신형을 튕겨 내 궁예린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 버린 관도에는 뜨거운 열기만이 폭양의 위력 앞에 따갑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2 그늘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울창한 수림(樹林). 그 수림으로 이어진 협곡에 궁예린 일행이 들어서고 있었다. 여전히 쾌속히 신형을 쏘아 내는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빠른 신법(身法)으로 움직이고 있다 해도 궁예린은 만족할 수 없었다. "어서 가자! 서둘러야 한다. 무림성이 삼목천을 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돈황에 도착해야 하니까." 다른 네 사람을 독려하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던 궁예린은 다음 순간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그는 울창한 수림 속에서 금속이 거칠게 부딪치는 소리를 감지해 냈다. 물론 그 소리는 먼 곳에서 들려 오기 때문에 미약했으나 궁예린의 귀에는 생생히 들렸다. 그의 직감으로는 격렬한 전투에서만이 그런 소리가 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누군가? 이처럼 깊은 협곡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자들이...' 염두를 굴리면서도 그의 신형은 여전히 무섭게 질주해 가고 있었는데, 점차 병장기 부딪치는 음향이 크게 들렸다.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소리 속에 들려 오는 참담한 단말마의 비명이 듣는 이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있었다. "으아악...!" 그제야 그 소리를 들은 망혼사인은 흠칫했고 약속이나 한 듯이 궁예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궁예린은 담담한 표정으로 갈 길을 재촉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저런 일까지 일일이 상대하며 참견할 시간이 없지 않는가?' 그가 그처럼 생각하고 있을 때, 아득한 저쪽에서 냉막한 음성이 들려 왔다. "흐흐흐... 경허성승, 그리고 운선도장! 당당한 대소림사와 무당파의 장문인들인 당신들에게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을 것이오." 그 말에 궁예린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일행을 저지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숲 저쪽에서 낭랑한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말하시오, 당시 혈문을 친 주동자들을. 그것을 말한다면 당신들은 살아날 수 있을 것이오." 궁예린은 기광을 번뜩였다. '경허성승, 운선도장! 그 두 사람은 소림사와 무당파의 장문인이 아닌가? 한데 그들이... 그리고 지금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인물은 혈문주 혈군자 담천후가...' 동시에 궁예린의 눈가에 결연함이 어렸다. '안 된다. 막아야 해! 이것은 삼목천의 계략일 것이다. 혈문과 십인방을 더 손쉽게 움직이려는...' 그는 짧은 순간에 생각을 마친 뒤, 표빈을 향해 말했다. "표빈! 너는 사릉과 비호를 데리고 우측으로부터 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접근하도록 해라!" 그리고 이어 철산에게도 다급히 명했다. "철산은 나를 따르라!" 말을 마친 그는 재빨리 지면을 박차며 소리가 들려 오는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네 사람은 순간 의아했으나 곧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알았다, 대장!" 그리고 그들 역시 벼락같은 기세로 신형을 튕겨 냈다. 그들의 귓전으로 멀어져 가는 궁예린의 전음성이 울려 퍼졌다. "숲 속을 샅샅이 뒤져라! 필시 삼목천 놈들이 장난을 쳤을 것이니..." 궁예린의 신형이 차츰 멀어지자 그의 전음성 또한 점차 멀어져 가고 있었다. 3 널따란 수림 속의 공지에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장내에는 이십여 구의 시체가 처절하게 나뒹굴고 있었고, 그들 주위로 수많은 잡목들과 초목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어 얼마나 처절한 혈전이 그곳에서 치러졌는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혈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십여 명의 섬뜩한 혈의인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채 사력을 다하고 있는 자들은 상의를 벗어 구릿빛 상체를 드러내고 있는 승려들이었다. 한결같이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 그들은 바로 소림팔대금강(少林八大金剛)으로, 황의가사에 선승(仙僧)의 위엄을 풍기는 백미(白眉)의 고승이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당금 소림을 이끌어 가고 있는 소림사의 장문인 경허성승이었다. 그는 절박함 속에서 연신 불호를 외우며 팔대금강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팔대금강 역시 하나같이 중경상을 입고 있어 그들 모두는 실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흑색 도관(道冠)을 눌러 쓴 채 청강검을 들고 혈의인들에게 맞서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의 청강검은 무당파의 장문인만이 소지할 수 있는 무당파의 신물로, 그 검을 들고 있는 자는 바로 운선도장이었다. 혈의인들의 선두에는 한 자루의 검을 수중에 쥔 채 강맹한 호기를 내뿜는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의 외모는 궁예린과 너무도 흡사했다. 석년의 마도대종주 칠절마군 담석강의 첫째 아들 담천후, 바로 혈문의 문주 혈군자였다. 궁예린과는 친형제 사이였지만 아직은 그 비밀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담천후의 눈꼬리는 분노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더없이 날카롭게 치켜뜬 그의 시선은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끔씩 휘두르는 그의 손속은 그가 얼마나 분노에 떨고 있는지 대변해 주듯 일체의 인정도 보이지 않았다. 담천후의 입가에 득의의 살소가 피어올랐다. "후후후... 경허! 입을 열지 않고는 절대로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움켜쥔 장검이 허공에 일선을 그리며 무지개를 뿌렸고, 그것을 경허성승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피해 냈다. 하지만 그조차도 담천후의 쾌검을 완전히 피해 낼 수는 없어 황의가사의 한 면이 검날에 날카롭게 잘려 나갔다. 그 순간 경허성승은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혈문의 고수들이 자신들의 행방을 눈치채고 기습 공격을 감행했는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이들이 대체 어떻게 노납의 행동을 알고 있단 말인가? 오직 십인방의 수뇌들만이 아는 사실을...!' 그는 빠르게 염두를 굴려 보았다. '입에 담기에는 수치스럽지만, 십인방 내에 배신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미타불!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닌가? 십대문파의 우두머리들 중 누가...?' 찰나지간 또다시 단말마의 비명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크아악!" "허억...!" 팔대금강 중 두 명이 검날에 목이 꿰뚫린 채 뒤로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그 서슬에 선연한 피분수가 솟구치며 장내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때 운선도장이 간신히 일검을 휘두르며 경허성승에게 말했다. "장문인! 놈들이 이미 최정예로 만반의 대비를 한 점으로 미루어 오늘 이곳을 빠져 나가기는 틀린 것 같소!" 경허성승 역시 녹옥불장을 힘겹게 휘두르며 급히 대답했다. "노납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요! 하나, 어떻게 해서라도 향후의 더욱 큰일을 막기 위해서는 이곳을 빠져 나가야만 하오!" "그렇다면 장문인도 이미... 그 같은 생각을...?' 운선도장이 눈빛을 빛냈다. "아미타불! 불행히도 그렇소이다!" 경허성승은 불호를 외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아! 우리들 중에 배신자가 있다니... 십대문파의 앞날이 암담할 뿐이오!" 바로 그때 또다시 팔대금강 쪽에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그만큼 두 사람에게 적의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팔대금강 중 네 명과 두 명의 장문인뿐이었다. "흐흐흐... 장문인들! 죽음의 고통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똑똑히 음미하게 될 것이오!" 담천후의 음성에 이어 그의 장검이 뇌전을 일으키며 다시금 무섭게 작렬했다. "크아아악!" 그의 일검에 또다시 팔대금강 중 한 사람이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채 나가떨어졌다. "아미타불! 어찌 이토록 잔혹하게..." 경허성승은 말을 하면서 신형을 빼내려고 혼신의 진력을 쏟아 냈다. 그대로 그곳에 있다가는 배신자의 흉계에 빠져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포위망을 빠져 나가 위기를 모면하고 십대문파에 속해 있는 배신자를 찾아내 처단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사지(死地)를 벗어날 수 없는 상태였는데... 바로 그때 웅휘한 일성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멈추시오!" 진력이 담겨 있는 그 우렁찬 목소리에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고막이 파열되는 고통을 느끼며, 일시에 싸움을 멈췄다. "헉...!" "크윽...!" 4 장내로 내려선 자는 바로 궁예린이었다. 한순간 장내에는 짧은 침묵이 감돌았고 이내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경악성이 그 침묵을 깨뜨렸다. "천예살군...!" "아미타불! 천예살군이..." 어느 사이엔가 그의 명호는 중원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전일, 무림성 이공자 철혈도 단우엽을 단 일 초에 물리친 것을 비롯해 사유학과 십인방 인물들을 당혹케 한 그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무학은 세인들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동시에 그의 존재는 중원에 새로운 태양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한데, 바로 그 천예살군이 혈문과 십인방의 고수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혈전장에 나타난 것이다.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이 경악하는 것과는 달리 궁예린을 바라보는 담천후의 시선에는 아연함이 가득했다. '어찌 이토록 나와 닮았을 수가...' 닮았다. 궁예린과 담천후는 서로 풍기는 기도에서 차이가 날 뿐, 외모는 판으로 찍어 낸 듯 똑같았다. 그리고 담천후와 마찬가지로 궁예린 역시 그를 본 순간 자신과 꼭 닮은 그의 외모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혈군자 담천후! 놀라운 일이군. 이자의 모습이 이토록 나와 흡사하다니.' 그제야 경허성승과 운선도장도 궁예린과 담천후의 표정을 읽으며 내심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 보니 혈군자와 천예살군이...' "이토록 닮았다니... 마치 형제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이 무의식중에 내뱉은 음성은 궁예린과 담천후 사이에 묘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담천후는 내심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 넓은 세상에 어찌 닮은 사람이 없을까?' 그는 궁예린을 싸늘히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천예살군, 소문은 익히 들었다. 너도 이번 일에 한몫 끼고 싶은가?" 그 말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궁예린은 정신을 차리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후... 귀하가 혈문주 담천후이겠구려. 먼젓번에 좋은 선물을 받았소." 담천후의 짙은 검미가 꿈틀 움직였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 본인은 그 대가를 꼭 받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그 대가를 받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 새북사사천의 삼 인과 십인방의 고수들 그리고 혈문의 고수들이 천라지망을 펼쳐 궁예린을 궁지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그것은 두 번 다시 승천무황과 같은 존재를 키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궁예린은 손쉽게 혈문의 고수들을 물리쳤고, 담천후는 그 원한을 궁예린에게서 꼭 받아 내기로 결심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놈의 무공은 추측을 불허할 정도로 강하다. 새북삼천이 협공을 하고도 십 초식을 버틸 수 없었을 정도로... 지금 괜스레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 담천후는 내심 어금니를 꼭 깨물며 말문을 열었다. "본인은 네가 너의 갈 길을 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궁예린은 여전히 미소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는 주위를 힐끔 응시했다. "혈군자, 나 역시 결코 귀하가 십인방과 원한을 주고받는 것에 참견하려고 나선 것은 아니오." 담천후의 의혹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궁예린은 계속 말을 이었다. "다만 지금은 당신과 십인방이 반목을 하며 서로 잔살을 하는 것을 잠시 막고 싶기에 나선 것이오." 일순, 담천후의 눈에 싸늘한 한광이 스쳤다. "천예살군, 말을 돌려서 하지 마라. 그것과 그것이 무엇이 틀리다는 것이냐? 착각하지 마라. 나는 네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귀찮을 뿐이다." 그의 우수가 피 묻은 혈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런데도 궁예린은 여전히 태연히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후후후, 알고 있소. 하나 내 말은 당신들의 은원 관계는 잠시 미루어 달라는 것이오." 담천후는 다시 의혹의 시선으로 궁예린을 주시했다. '대체 이놈이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단 말인가?' 그 점은 경허성승과 운선도장도 마찬가지였다. 싸움을 말릴 생각은 없다고 하면서도 그 싸움을 잠시 미루라는 궁예린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궁예린은 다시 말했다. "지금 당신들은 한 마리 교활한 여우의 심계(心計)에 말려들었기 때문이오." 순간 그의 시선에서 강렬한 기광이 뿜어져 나왔다. "혈군자, 귀하는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을 이곳에서 만난 것이 혈문의 정보 때문이라 보시오?" 담천후는 지체없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 그 누구도 혈문의 이목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의 음성에는 혈문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궁예린에 대한 협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일에 끼여들면 그 역시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뜻밖에도 궁예린은 담천후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것은 인정하겠소. 그자의 심기에 나 역시 탄복하고 있으니 말이오." 궁예린은 잠시 말을 끊고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을 차례로 응시했다. 두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얼굴로 궁예린과 담천후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궁예린은 다시 담천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만약 그 모든 정보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짜여진 각본이라면... 당신은 어찌 생각하시오?" 그 말에 놀란 담천후는 부지중 강한 부정을 드러내며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없다. 누가 감히...!" 그 순간 궁예린은 단숨에 그의 말을 자르며 쇠를 끊듯 똑부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나 역시 그렇지 않기를 바랐소. 하나 불행히도 사실이었소. 그자는 바로 혈문의 막후 실력자이며 당신의 사부인 마마대공이오." 찰나지간 담천후의 신형이 처음으로 눈에 띄게 휘청거렸다. "그, 그것을 어떻게... 네가..." 마마대공. 그에 대해서는 혈문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을 뿐, 그의 존재는 일체 비밀에 붙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궁예린 역시 유리화에게서 그 사실을 듣지 않았다면 영원히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담천후에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궁예린은 굳은 표정으로 신중히 말했다. "또한 마마대공은 십인방의 방주인 천기수사 사유학이었으며 삼목천의 수뇌인 천축 포달랍궁의 궁주 포랍존자이기도 하오." 그의 말은 장내에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잠자코 두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의 신형은 무너질 듯 휘청이고 있었다. "어찌 그럴 수가... 시주, 말씀이 너무 지나치지 않소?" 경허성승의 안면은 파랗게 경직되었으며 음성은 마구 떨리고 있었다. 궁예린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스쳤다. "후후후... 믿기 힘들 것이오. 아니,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 것이오. 당신들은 이 땅에 천년 맥을 이어 온 정도(正道)의 기수들이니..." "...!" "하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오. 삼목천, 그들은 바로 오래 전부터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던 천축의 포달랍궁과 새북사사천, 묘강의 구지마령군의 연합체라는 것이오. 결국 혈문과 십인방은 그들 앞에 서서 중원의 무인들을 죽이며 무림성을 붕괴시키는 데 충실한 개〔犬〕가 되었던 것이오." 궁예린의 준열한 호통 소리에 담천후와 경허성승, 운선도장은 다시금 주체하지 못할 만큼 신형을 휘청거렸다. "삼목천! 그들이 바로..." "아미타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십인방은..." 궁예린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천년 무림의 자존심인 십대문파가 씻을 수 없는 대죄를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순간, 세 사람의 시선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궁예린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눈은 확실한 증거를 보이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궁예린을 죽이겠다는 무서운 뜻을 담고 있었다. 궁예린은 그런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측의 수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자들을 데리고 나오너라!" 그의 낭랑한 음성에 사방에서 희끗한 그림자가 번뜩였다. 그리고 어느새 궁예린의 옆에는 네 명의 청년이 양 옆구리에 축 늘어진 회의인들을 안은 채 흐릿한 미소를 띠며 서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장내에 나타난 그들 네 사람을 훑어보던 담천후는 철산의 옆구리에 몸을 맡긴 채 축 늘어져 있는 한 사람을 보며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 아니... 금 호법, 그대가 어찌..." 철산의 옆구리에는 놀랍게도 두 손과 얼굴이 모두 금빛으로 번뜩이는 노인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살인혈도 금우비. 바로 혈문의 좌호법으로 한때는 담천후의 부친인 칠절마군 담석강의 부하이기도 했다. 때문에 담천후는 부친을 모셨던 그를 언제나 경외심을 가지고 대해 왔다. 그런데 그가 궁예린의 부하인 철산에게 붙잡혀 장내에 나타난 것이다. 더구나 담천후는 지금까지 그가 혈문을 지키고 있는 줄로만 알았기에 놀라움은 한층 더했다. 궁예린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나 역시 놀랐소. 살인혈도 금우비가 삼목천의 간세였을 줄은..." 그 나직한 음성은 몇 배의 충격으로 담천후에게 다가와 그의 가슴을 세차게 내리쳤다. "금 호법이 삼목천의 간세라고... 어찌 그럴 수가...!" 담천후는 도저히 궁예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자신을 어린 시절부터 돌봐 주고 혈문의 복수를 위해 와신상담했던 금우비가 아닌가? 그런 자가 삼목천의 간세라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궁예린의 음성은 다시금 장내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렇소. 금우비 저자는 놀랍게도 이곳에 수만 근의 화약을 묻어 놓고 계획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서 이곳을 통째로 날려 버리려 했던 것이오." 운선도장과 경허성승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수만 근의 화약을...?" "아미타불... 무서운 일이..." 담천후는 너무 놀랐는지 멍하니 궁예린을 응시했다. 그는 궁예린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의 말이 모두 거짓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궁예린이 내보이는 증거에 그만 할말을 잃은 그는 그저 궁예린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철산! 이제 그자의 아혈을 풀어 줘라." 궁예린은 철산에게 명령하는 동시에 금우비에게도 싸늘한 일갈을 던졌다. "금우비, 허튼 짓을 한다면 전신의 뼈가 가루로 변한다는 것을 명심하오. 그대도 보다시피 철산의 힘은 가공스러운 것이니..." 철산의 좌수가 흔들리는 순간, 금우비의 목 언저리가 가볍게 떨렸다. 그 순간 담천후가 빠르게 금우비에게 다가섰다. "금 호법, 말을 해보시오. 대체 이 일이 어찌 된 일인지." 담천후의 시선에는 한 가닥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는 금우비가 궁예린의 말을 부정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금우비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너무도 당당히 말을 내뱉었다. "노부는 아무런 할말이 없을 뿐이다. 하나 네가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을 알았다 해도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곧 궁예린의 말을 시인하는 것과 같았다. 한순간 담천후의 안면에 세찬 경련이 일었다. 믿고 있었던 그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시인한 것이다. 담천후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경허성승이 떨리는 음성으로 금우비에게 물었다. "시주가 진정 삼목천의 간세라면 십인방의 방주 역시... 천기수사 사유학이..." "후후훗... 어리석은 놈들, 그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그렇다. 그분은 바로 포랍존자이시다." 금우비의 눈가에 한 줄기 자부심이 스쳐 지나갔다. "아미타불... 이런 엄청난 죄를..." "무량수불... 그럴 수가... 우리가..."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그만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서 있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담천후는 믿을 수 없는지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금우비, 당신이 어찌... 왜...?" 그때 궁예린이 말했다. "혈군자, 자세히 보시오. 그가 금우비인가를..." 그의 소매가 금우비의 안면을 스친 순간, 진정 놀랍게도 금우비의 얼굴 가죽이 벗겨지며 전혀 새로운 인물의 얼굴이 나타났다. 육순 가량의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노인이었다. 찰나지간 담천후의 입에서 또다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앗! 그대는... 절혼백팔척사인주(絶魂百八拓四人主)!" "흐흐흐, 그렇다. 노부는 척사풍 환우인이기도 하지." "그렇다면... 절혼백팔척사인들은 모두 너의..." 담천후의 음성은 거듭되는 경악에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궁예린의 눈에 반짝 기광이 스쳤다. '절혼백팔척사인! 그러고 보니, 전날 피 묻은 봉서를 이자에게 던져 준 것이 커다란 실수였다. 그 내용을 봤다면 이번 음모를 더 일찍 알 수 있었을 것을...' 궁예린, 그는 지난날 성하령에서 본 절혼백팔척사인의 마지막 한 명에게서 건네 받은 봉서를 애석하게도 무림성과 싸우고 있는 그를 발견했을 때 금우비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수년간 봉서를 보관하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의 내용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궁예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서야 그 봉서에 커다란 음모가 담겨 있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궁예린이 내심 금우비에게 봉서를 건네 준 것을 후회하고 있을 때, 담천후는 서서히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단지, 경악으로 흔들리고 있던 그의 눈에서 이제는 무서운 살기가 뻗어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환우인, 그렇다면 절혼백팔척사인의 죽음과 그 봉서의 내용은 계획의 일부였던가?" 금우비 아니, 환우인은 얼굴 가득 득의의 미소를 떠올렸다. "당연한 것이 아니냐? 그들의 죽음에 잠마풍이 잠시 협조를 해준 것뿐이었지." 그 순간, 담천후는 금우비에 대한 분노로 한층 더 짙은 살기를 띠며 이를 갈았다. "환우인, 말하라. 부친과 마천루를 괴멸시킨 장본인을... 그것만 얘기한다면 너에게 통쾌한 죽음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런 그의 모습에도 환우인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흐흣! 어리석은 놈, 이미 느꼈을 텐데 새삼 묻는 놈이 바보 같지 않느냐?" "그, 그렇다면...?" "그렇다. 존자께서는 이 일을 계획하시기 위해 네 부모와 마천루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환우인은 망연히 주저앉아 있는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행히 그 이용 도구가 저 바보 같은 십대문파와 이십팔대세가였지만..." 그 말에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의 얼굴은 더욱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하면... 괴서신(怪書信)의 주인이 바로..." 그때였다. "이 개 같은 놈! 내 어찌 네놈을 가만두랴?"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이 경악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분노가 극에 달한 담천후는 통한의 오열을 터뜨리며 환우인에게 검을 휘둘렀다. 다음 순간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피분수가 솟구쳤다. "으아악...!" 담천후의 검날에 환우인은 목과 전신이 양단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실로 비참한 최후가 아닐 수 없었다. 담천후는 환우인의 시신을 보며 한순간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신을 차렸고 허공을 올려다보며 비통함에 젖은 음성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담천후야, 너는 그 동안 무엇을 했단 말이냐?" 그의 시선에는 회한과 고통이 가득 배어 있었다. "원수! 그것도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를 사부라 부르며 그의 앞에서 재롱을 떨고 있었으니..." 그의 공허하고 침통한 부르짖음은 일순간에 주위를 암울하게 돌변시키고 있었다. 5 '기이하군. 저자의 절규가 내 가슴을 울리고 있으니...' 궁예린은 허공을 향해 부르짖는 담천후의 모습을 보며 내심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그의 고통이 자신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유라도 안다면 덜 곤혹스러울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궁예린은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담천후와 궁예린 두 사람은 분명 친형제간이었지만 혈겁이 있을 당시, 운명의 장난으로 그만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더구나 너무 어릴 때 일어났던 일이라 궁예린은 자신에게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알지 못했고, 담천후 또한 자신의 동생이 죽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궁예린에 대해서 일말의 의혹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담천후는 문득 고개를 돌려 망연히 충격 속에 빠져 있는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비록 흉계에 빠져 마천루를 멸문시켰다 하나 역시 그들은 실질적으로 마천루의 원수들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아직 채 원한을 풀지 못했던 터라 두 사람을 노려보는 담천후의 눈에는 증오와 살기가 가득했다. "그대들은 명심하시오. 본인이 다시 그대들을 찾는 날, 소림을 위시해 십대문파의 피로써 그 어리석음을 씻을 것임을..." 경허성승과 운선도장은 담천후가 내뿜는 살기에 부지중 전율을 금치 못했다. 담천후는 다시 시선을 궁예린에게로 돌렸다. 그 극히 짧은 순간에 그는 씻은듯이 살기를 지우며 대신 담담한 시선으로 궁예린을 대하고 있었다. "천예살군, 그대의 은혜를 가슴속 깊이 기억할 것이오. 본인은 그 말밖에 할말이 없소. 그것은 그대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지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오." 담천후는 비장한 음성을 마치며 주위에서 놀라움에 넋을 잃고 있는 혈문의 고수들을 주시했다. "너희들도 모두 똑똑히 듣고 보았을 것이다. 가자! 혈문을 기만한 놈은 그 누구도 살려 둘 수 없다." 다음 순간 그는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뒤를 이어 혈문의 고수들도 눈에 섬뜩한 한광을 띠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잠깐의 침묵이 장내에 무겁게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경허성승이 침통함이 배어있는 나직한 음성을 발했다. "시주, 십대문파를 대신해 노납은 그 고마움을 이렇게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음을 용서하시오." 그는 만면에 비감을 가득 담은 채 두 손을 합장하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궁예린은 담담히 말을 받았다. "아니오. 소생 역시 중원인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이방인에게 중원을 넘겨줄 수 없기에 나섰을 뿐이오. 지금 시급한 것은 장문인이 속히 십인방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이미 천기수사의 안배는 진행되고 있을 것이나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으셔야 할 것이오." 경허성승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의 안색은 더욱 침통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고맙소. 이 어리석은 십대문파가 모든 것을 끝낸 후, 오직 죽음으로 그 어리석음을 씻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럼..." 경허성승이 몸을 돌리자 운선도장 역시 침통함과 비장함을 지우지 못한 채 경허성승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두 장문인과 겨우 목숨을 부지한 팔대금강 중 세 명이 떠나자 장내에는 한순간 더욱 무거운 침묵이 짙게 깔렸다. 무엇인가? 궁예린은 모두가 떠난 장내가 무척 허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때 철산이 큰 머리통을 갸웃거리며 담천후가 사라진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다시 궁예린을 돌아보았다. "대장, 이상하지 않느냐? 혈군자가 대장을 닮은 것인지 대장이 혈군자를 닮은 것인지... 혹시 형제가 아닐까?" 철산의 말은 궁예린의 가슴을 크게 진탕시키기에 충분했다. '형제... 그를 보는 순간 강렬한 느낌을 받았으니...'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겠군. 그는 담씨고, 나는 궁씨가 아닌가? 이 넓은 세상에 닮은 사람들이 어찌 없으랴?' 궁예린은 내심 부정하며 담천후가 사라진 곳을 잠시 주시했다. 그러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철산과, 표빈, 사릉 그리고 비호를 바라보았다. "그만들 가자. 이러다가는 돈황에 도착했을 때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겠으니..."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궁예린의 신형은 이미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궁예린과 담천후가 닮은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철산은 벌써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궁예린의 모습에 놀란 나머지 흠칫했다. "그러면 안 되지. 그 먼 길까지 가는데 이 도끼의 위력을 꼭 보여 줘야 한다." 그러고는 누가 더 빨리 달리나를 내기라도 한 것처럼 번개같이 궁예린의 뒤를 따랐다. 일순, 표빈과 유사릉 그리고 손비호의 시선이 서로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그러자 철산의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 손비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저 녀석! 마치 살인에 미친 귀신 같으니... 돈황이 꽤 시끄럽겠어." 그 뒤를 이어 유사릉과 표빈도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운명의 장난으로 이루어진 궁예린과 담천후의 짧은 만남. 두 사람은 서로의 신상에 담겨진 비밀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다. 그 어떠한 의혹이나 의문도 품지 않은 채 그저 얼굴이 닮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과연 두 사람은 영원히 그 사실을 모르며 지낼 것인지... 제 25 장 무너지는 야욕(野慾) 1 태양이 이글거리는 팔월(八月) 초순. 대륙은 온통 뜨거운 열기로 뒤덮여 있었다. 승천무황 백리사헌!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무림성에서 나오지 않던 그가 마침내 성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대륙은 그의 등장에 다시 한 번 진저리를 쳐야 했다. '절대(絶代)'라는 두 글자가 근 사 년 만에 다시금 대륙천하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중원을 평정하기 위해 무림어군을 태동시켜 천하를 완전히 장악했던 그가 침묵의 묵시를 깨고 중원에 출도하면서 이번에는 새로운 위력을 천하에 드러냈다. 가공할 미증유의 거력(巨力)... 이름하여, 검은 전신〔黑戰神〕! 오직 전쟁을 위해 존재한다는 죽음의 사자들. 그들이 스친 곳에는 어김없이 죽음〔死〕과 피〔血〕가 뿌려졌다. 모든 것이 시커먼 철갑으로 이루어진 검은 전신들. 검(劍)과 도(刀)가 뚫지 못하는 불사신 같은 검은 전신들. 그들의 출현은 대체 백리사헌의 힘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세인들로 하여금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백리사헌은 그 검은 전신과 무림성의 최정예고수 일천 명의 호위를 받으며 언제 출현했는지 모르게 급작스레 중원을 강타했다. 2 싯누런 황사(黃砂)를 주위에 흩뿌리며 지축을 뒤흔드는 일단의 기마(騎馬)들. 폭양은 기마들의 기치창검(旗幟槍劍)에 그 빛을 잃고 있었다. 그 기치창검 옆에서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은 번쩍이는 병장기들과 어울려 한층 위맹한 기운을 뿌렸다. 무림성. 바로 이 시대 철(鐵)의 아성인 무림성이 넓은 관도를 빽빽이 메운 채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기마대의 선두에는 백리사헌이 은백색의 설추마에 몸을 맡긴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흰 영웅건으로 반듯이 묶은 반백의 머리가 그의 인상을 무척 강인하게 만들었다. 그의 우측에는 준수한 미장부가 입술을 질끈 다문 채 묵묵히 백리사헌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바로 무림성의 삼공자인 풍광도 관무상이었다. 그리고 백리사헌의 좌측. 검다. 묵빛 철갑, 철퇴, 철검, 철도, 철창 등등... 각종 병기를 번뜩이는 흑의철갑인들. 바로 죽음의 사자로 불리는 검은 전신들이었다. 검은 전신들의 선두에는 비(飛)가 백리사헌에게서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그의 곁에 꼭 붙어서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리사헌을 제외한 모두의 전신은 시뻘건 핏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오직 백리사헌 한 사람만이 새하얀 백의에 핏물 한 방울 적시지 않았다. 무림성을 떠나 온 그 순간부터 그들은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물론 그들의 피해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극히 미미한 것이었지만, 대신 그들은 상대방의 피를 모두 뒤덮어쓴 탓에 하나같이 핏물에 절어 있는 것이었다. 문득 선두에서 나아가던 백리사헌의 심유한 눈에 하나의 거대한 대산(大山)이 잡혔다. 백리사헌은 그 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나직한 독백을 흘렸다. "포랍존자! 노부 백리사헌이 가고 있다. 이제 그대는 느낄 것이다! 왜 노부가 그대가 이토록 강해질 때를 기다렸는지..." 너무나도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그의 좌우에서 앞으로 나아가던 관무상과 비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은 저 조용함이 끝나는 순간 거대한 폭풍이 불어닥칠 것을 예감했다. "이제 삼목천은 누구도 살아서 옥문관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모조리 쓸어 버릴 것이다!" 자조인가? 마치 자신에게 묻는 듯 백리사헌의 음성은 약간 높은 억양을 띠었다. 휘이이잉... 일순, 주위의 공기가 미미하게 파랑을 일으켰다. 그것은 결코 기마대들의 소음만은 아니었는데... 돌연 백리사헌의 심유한 눈에 한 줄기 탄복이 스쳐 지나갔다. "천예살군, 그 청년의 놀라운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본 성이 공격하는 삼목천의 은밀한 은거지마다 철저하게 고립시켜 놓다니..." 그것은 무림성을 떠나 온 순간부터 백리사헌의 머릿속에서 일고 있던 의문이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기이하게도 알 수 없는 힘이 은밀하게 백리사헌을 도왔고, 한편으로 그 힘은 적들이 도망칠 수 없게 퇴로를 차단해 버렸다. "노부는 느낄 수 있다. 이런 일은 천하를 손바닥처럼 움직일 때나 가능한 일임을... 노부가 그 동안 너무 중원을 주시하지 않은 것 같군." 백리사헌의 음성에는 짙은 경이로움이 스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일은 그의 생애 처음이리라. 그러나 그가 그 모든 일이 궁예린의 명을 받아 천하 구석구석에서 밀천무영세가가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일임을 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때 백리사헌은 대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천주봉(千柱峯)! 향후의 무림을 관장하는 열쇠는 바로 이곳이 될 것이다." 그곳은 바로 삼목천의 모든 세력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십인방, 혈문! 노부는 그대들이 다시 한 번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백리사헌의 나직한 음성이 허공에 울려 퍼지는 순간, 기마대는 넓은 관도를 벗어나 하나의 협곡에 들어서고 있었다. 십여 명이 나란히 선 채로 들어갈 만한 협곡으로 초목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기마대가 협곡 안으로 들어서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협곡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기마대가 협곡의 중앙을 막 지나칠 때였다. 갑자기 절벽 위에서 예리한 파공음이 터져 나오며 무수한 암기가 기마대를 향해 쏘아져 오고, 동시에 거대한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기마대를 덮쳤다. 실로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이었다. 찰나지간 백리사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위인들... 끝내 포랍존자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하다니..." 그의 입에서 나직한 독백이 흐르고 이어 그 음성은 추상같은 호통으로 변해 비에게로 날아갔다. "비! 네가 검은 전신들을 사방으로 분산시키며 길을 열어라!" "존명!" 비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깊숙이 허리를 숙인 후,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형제들이여! 모두 분산해서 길을 트시오. 앞을 막는 자는 모조리 제거하시오." 비의 입에서 크나큰 일성이 터져 나오자 검은 전신들은 사방으로 솟구쳤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으아악!" "앗! 독(毒)이다!" "허억...!" 돌연 무림성의 최정예고수들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과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런 공격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그들은 푸른 초지에 한치의 틈도 없이 깔린 독에 중독되어 죽어 가고 있었다. 그것을 신호로 다시 암기들과 커다란 바위들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미 무림성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실로 완벽에 가까운 기습 공격이었다. 삽시간에 무림성의 고수들이 피를 뿜으며 독에 녹아 버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리사헌의 입가에 순간 차디찬 미소가 피어올랐다. "끝내 스스로 화를 부른 일... 결코 노부를 원망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리사헌은 협곡이 울릴 정도의 쩌러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두 호흡을 멈추고 초지(草地)를 넘지 마라. 지금부터 각자 이곳을 통과한다." 그 순간 관무상은 허공으로 튕겨 오르며 대갈성을 터뜨렸다. "성주님이 명을 내리셨다. 오인차력대술(五人借力大術)을 펼쳐라.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그러자 무림성의 고수들은 다섯 명씩 짝을 지은 채 지면에서 오 푼 정도 떠올라 초지를 건너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은 각자 손에 들고 있는 검과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뿌리는 검광과 도광에 맞은 자들이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성을 터뜨렸다. "으아악!" "크악!" 허공으로 치솟는 피기둥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시커먼 묵영들이 그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검은 전신, 그들의 활약은 수림과 거산의 구석구석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은신해 있는 자들을 찾아내는 족족 그들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설상가상으로 관무상이 이끄는 무림성의 정예들은 마치 풍차처럼 회오리를 일으키며 협곡을 벗어나고 있었다. 회오리가 스치는 곳의 거암, 거목들은 산산이 부서지며 그곳에 은폐하고 있던 자들의 전신을 찢어 버리고 있었다. 아비규환. 지옥의 한 장면이 협곡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백리사헌은 관무상의 뒤에서 오연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방에서 핏물이 튀었으나 그의 전신에서 내뿜는 강기에 삼 장 밖으로 다시 튕겨 나가 백리사헌의 몸에는 한 방울의 핏물도 묻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백리사헌은 일체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무심한 표정으로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의 심유한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의 전면. 족히 천여 명은 넘을 듯한 승(僧), 도(道), 속(俗)의 무리들과 핏물에 전 혈의인들이 비장한 안색으로 병기를 번뜩이고 있었다. 십인방과 혈문, 삼목천이 합력한 세력이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다. 그때 백리사헌의 모습을 발견한 중앙의 회의노승이 중후한 음성을 터뜨렸다. "여러분! 모두 힘을 내서 싸웁시다. 이 기회에 무림은 자유를 찾아야 할 것이오!" 그러자 지축을 무너뜨리는 함성과 함께 그들은 앞으로 내달렸다. "와아...!" "과! 죽여라!" "무림은 누구의 독점물이 될 수 없다!" 마치 해일이 밀려들듯 그들의 기세는 하늘도 무너뜨릴 만큼 가공스러웠다. 그 동안에도 무림성의 정예들은 여전히 관무상을 중심으로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고, 상대방이 일제히 공격해 오자 그들을 향해 덮쳐 갔다. 그 뒤를 이어 검은 전신들이 사방을 에워싸며 그들을 공격해 갔다. 그 순간 백리사헌의 눈빛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천예살군! 그의 고심이 물거품이 됐단 말인가? 십인방, 혈문, 삼목천이 합력을 하다니... 결국 피할 수 없는 혈투(血鬪)가 됐군. 어리석은 위인들... 삼목천을 제거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충격을 줬지만..." 백리사헌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무림성에 도전하는 것은 만용임을..." 그의 나직한 음성이 끝나는 순간에도 처절한 비명성이 잇달아 터져 나오고, 하늘을 찢는 금속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크아악!" "으악!" 그 속에서 비의 차가운 살음이 터졌다. "검은 전신의 앞을 막는 자에겐 오직 죽음뿐이다!" 동시에 관무상도 삼 문(三門)의 합세 세력을 공격하며 살소를 터뜨렸다. "후훗! 이것이 무림성의 분노이다.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관무상과 비가 좌충우돌로 지나는 곳에는 승, 도, 속 구별없이 처참한 시신들이 나뒹굴었다. 삽시간에 장내는 무림성의 가공스런 위세에 지리멸렬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크나큰 불호성과 함께 굳건한 음성이 천둥처럼 터져 나왔다. "소림백팔나한진을... 십팔나한(十八羅漢)들은 중앙을 보호하라!" "혈문의 수하들은 사천개벽대진(死天開闢大陣)을 펼쳐라! 물러서지 마라!" 그러나 그 소리는 곧 관무상의 싸늘한 음성에 사그라들었다. "후후훗! 어리석은 위인들... 무림성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철의 아성일 뿐이다." 대신 참담한 절규성이 도처에서 터지고 있을 뿐이었다. "크아악!" "헉! 이토록 빠를 수가..." "윽...!" 지옥(地獄). 천주봉은 흡사 십팔층 지옥의 한곳을 방불케 했다. 시체는 산(山)을 이루고, 피는 강(江)을 만들고 있었다. 혈전장을 바라보는 백리사헌의 표정은 여전히 심유하고 조용했다. 그러나 간혹 그의 심유한 눈빛 깊은 곳에서는 세찬 격랑이 일어 그의 심정이 어떤지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포랍존자! 이토록 가증스런 잔살을 펼치다니... 어쨌든 대단한 인물임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이들의 가슴에 투혼(鬪魂)을 불러일으키다니...' 그는 죽음도 불사하며 덤벼드는 삼 문의 합세 세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살을 찌푸렸다. '서로의 명예욕과 이기심은 이미 이들의 이성을 잃게 하고 있으니...' 다음 순간 그의 눈에서 강렬한 기광이 폭사되었다. '하나, 무림성에 대항하는 자에겐 그가 누구이든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단호했다. 그 누구도 거역치 못할 위엄이 백리사헌의 전신에서 서리서리 뻗치고 있었다. "으아악!" "헉! 대체 이놈들이 사람인가?"으으... 인간도 아니다. 검은 전신, 이들은 악마(惡魔)다... 큭!" 그 같은 경악 속에 무림성에 반기를 든 상대들은 서서히 전멸하고 있었다. 3 대전 안에는 묵직한 침묵이 앙금처럼 짙게 깔려 있었다. 십여 명의 인물들은 얼굴 가득 침중함을 담은 채 한곳을 주시했다. 그곳에 청수한 중년인이 이륜좌거에 탄 채 자리해 있었다. 바로 천기수사 사유학이었다. 언제나 심기를 깊이 감추고 있던 그의 시선에 지금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직까지 그의 정체가 포달랍궁의 궁주 포랍존자임을 모르는 탓에 대전에 모여 있는 중인들은 그가 한껏 고심에 차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메마른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후유! 백리사헌, 그자의 힘이 그토록 거세다니. 결국 우리가 본 것은 그의 껍데기뿐이었음을 이제야 느꼈으니..." 그의 음성은 장내를 더욱 암울하게 침잠시키고 있었다. 그때 그 무거운 침묵을 더 이상 참기 힘든 듯 한 명의 혈의인이 의혹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사 방주! 대체 본문의 문주와 삼목천의 주인은 어찌 소식이 없단 말입니까?" 가슴까지 백염(白髥)을 길게 늘어뜨린 칠순의 노인. 그는 혈우비마(血雨飛魔) 손익(孫翼)으로 혈문주의 한 팔인 우호법(右護法)이었다. 손익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우측에서 의문이 일었다. "방주! 십대문파의 장문인들 역시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필시 변이 생긴 것이 틀림없소." 청수한 노안에 푸른 수실이 달려 있는 한 자루의 검을 어깨에 맨 그는 검화신군(劍花神君) 서웅(西熊)이었다. 일인검군(一人劍軍)으로 유유히 천하를 돌면서 풍류를 즐기던 그는 중원의 긴박함을 느끼고 미약한 힘이나마 돕고자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리고 대전에 모인 십여 명의 인물들은 모두 일문(一門)의 문주와 버금가는 위세를 지녔거나 자파(自派)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었다. 사유학은 그들의 말에 대답을 하려는 듯 심유한 시선을 들어 좌중을 차례차례 응시했다. "여러분들의 조급한 심정을 어찌 본인이 모르겠소. 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본인 역시 여러분들과 같은 심정이라는 것이오." 그 말은 사유학 역시 혈문주와 십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늦는 이유를 모른다는 뜻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알고 있지 않을까 희망을 걸었던 모두의 시선은 다시금 암울하게 변했다. 그때였다. 대전 문이 활짝 열리며 한 명의 피투성이 청년이 사유학의 이륜좌거 앞에 쓰러졌다. "방... 주... 그들이... 사관문(四關門)을 뚫고... 윽!" 힘겹게 입을 열었던 청년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만 고개를 꺾고 말았다. 워낙 부상이 심했던 터라 겨우 그 말만을 남기고 숨을 거둔 것이다. 일순, 모두의 안색이 홱 변했다. "사관문이 뚫렸다고...?" "이토록 빠른 시간 안에... 사관문을 지키는 자가 무려 천여 명이 넘거늘..." 모두들 백리사헌의 위력 앞에 대경실색을 금치 못했고, 그것은 사유학으로 하여금 대참변을 명(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으음... 사관문이 뚫렸다면 이제 남은 관문은 마지막 다섯 번째 관문밖에 없다." 사유학은 나직이 독백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섯 번째 관문! 그곳이 뚫린다면 백리사헌의 힘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 그는 시선을 빛내며 좌중을 빠르게 훑었다. "여러분! 이제 더 무엇을 생각하고 기다릴 수 없게 된 것이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모두가 한마음으로 마지막 관문을 방비하는 것뿐이오." 그 말에 좌중의 안색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이 일전에 중원의 억조창생의 자유가 달린 만큼 우리 모두는 죽음으로 그를 제거해야 할 것이오." 그 순간 모든 군웅들은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두 번 다시 백리사헌의 발에 밟힐 수는 없다!' '이것은 자유라기보다는 무인의 마지막 자존심일 뿐이다!' 군웅들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사 방주! 계획을 세워 주시오!" "우리는 죽음으로 무인의 기개를 이곳에 심을 것이오!" 그 비장한 각오가 서린 음성에, 사유학의 입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고맙소! 여러분, 우리는 모두 이 싸움에서 죽을지도 모르오. 하나, 우리의 기개만은 두 번 다시 중원에 일인천하(一人天下)의 아성을 세우게 하지 않을 것이오." 어느 누가 그토록 장엄한 음성을 내뱉는 사유학이 허구와 기만으로 가득 찼다 하겠는가? 대전 안에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팽팽한 기류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회오리 기류는 사유학의 일사불란한 음성과 함께 가공할 폭풍의 핵으로 퍼지고 있었는데... 4 백리사헌은 전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십 장 앞에 일천 명의 승, 도, 속인들이 마치 기러기 날개처럼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번뜩이는 검과 도 그리고 선장 등을 불끈 쥐고 비장한 각오가 서린 눈빛으로 백리사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히 드러났다. 백리사헌은 한동안 그들을 주시하더니 나직한 독백을 터뜨렸다. "으음...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건만..." 지금 그의 마음은 한없이 참담했다. 속시원히 사유학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혹시라도 그가 도망칠까 싶어 말조차 꺼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 이것을 밝힐 수는 없다. 그 이유는 포랍존자, 그가 이곳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니...' 백리사헌은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방법은 하나! 포랍존자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불가피하게 처절한 혈전(血戰)을 벌이는 것뿐이다.' 내심 결심을 굳힌 백리사헌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고 서서히 우수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무림성의 제자들은 저들을 모두 죽여라! 검은 전신은 사방의 퇴로를 막으며 공격하라!" 그의 웅후한 일성에 무림성의 정예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존명!" 불과 오백여 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들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수많은 혈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힘을 잃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전신들은 핏물을 흠뻑 뒤집어쓴 채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혔고, 보이지 않는 무서운 살기가 장내를 휩쓸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일성이 터졌다. "모두 죽여라!" 그 소리를 신호로 눈부신 섬광이 허공을 가득 메웠고 도, 검, 창이 뜨거운 폭양을 받아 날카로운 빛을 뿌렸다. "으악!" "크아아악!" 날카로운 검날에 베인 자들의 입에서는 참담한 비명성이 터지며 선연한 피기둥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백리사헌은 그 모든 광경을 기광이 번뜩이는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일전으로 무림성은 다시 조직을 정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천축, 묘강, 새외의 힘은 향후 수백 년간 회복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포랍존자가 제거되었을 때에 한해서이겠지만...' 일순 백리사헌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비! 노부를 따르라!" 그의 나직하고 위엄에 찬 음성이 긴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지자 처절한 비명과 피기둥 속에서 한 명의 철갑인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완만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백리사헌의 뒤를 따랐다. 비(飛). 검은 전신의 대장이었다. 5 끼르륵, 끼릭... 이륜좌거가 괴이한 금속음을 발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처절한 살육전이 훤히 보이는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사유학의 심유한 눈은 이 순간 현란한 기광을 뿌리고 있었다. "승천무황 백리사헌! 이것으로 당신과의 승부는 끝난 것 같소." 의미심장한 음성이 주위를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당신은 오늘의 이 결과가 자만에서 일어난 강(强)임을 절실히 깨달아야 할 것이오. 이로써 중원의 잠재력은 모두 사라졌소. 이제 남은 것은 천축사(天竺史),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중원 통일을 보는 것뿐이오." 그리고 그 순간 사유학의 얼굴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살이 뒤틀리고 머리가 변하고 코의 형태가 변했다. 마침내 드러난 얼굴. 사유학이었을 때와는 또 다른 심유한 눈빛을 지닌 그는 반듯한 오관을 지닌 노인이었다. 입가의 잔주름이 그의 성격이 패도적임을 짐작케 했다. 가슴까지 백염을 길게 늘어뜨린 그는 바로 천축 포달랍궁주 포랍존자였다. 그의 입가에는 흡족한 자부심이 한 줄기 바람처럼 스치고 있었다. "새북사사천의 지옥천과 묘강의 구지마령군... 그들이 돈황으로 간 것은 죽음을 부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천축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포랍존자는 천축의 힘을 이끌고 오라고 지옥천과 구지마령군을 돈황으로 보낸 것이었단 말인가? "지금 천축의 최정예들은 이곳으로 질주해 오고 있다. 거침없이..." 그의 음성에는 강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존자! 놀랍구려. 그대가 이처럼 잔혹하고 무서울 줄이야..." 웅휘한 음성이 문 앞에서 들려 왔다. "누... 누구...!" 찰나지간 포랍존자는 경악성을 발하며 튕기듯 이륜좌거에서 신형을 일으켰다. "역시 존자는 본모습을 하고 이륜좌거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보기에 좋구려." 그 음성은 다분히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포랍존자의 전신은 심하게 떨렸다. 언제 그가 그토록 경악한 적이 있었던가? 그가 그렇듯 놀라고 있는 것은 문 앞에서 들려 오는 음성에 가득 배어 있는 미증유의 거력 때문이었다. '이 음성... 설마... 그가...' 포랍존자는 내심 강하게 부정하며 아주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허억!"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헛바람을 들이켜고 말았다. 그의 동공에 하나 가득 잡히는 인물, 바로 승천무황 백리사헌이었다. 그는 입가에 조소를 담은 채 포랍존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대체 이자가 어찌 이 모든 것을...' 포랍존자의 심장은 빠르게 쿵쿵 뛰고 있었다. '노부는 완벽했는데...'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백리사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존자, 그대는 완벽했소. 노부까지 감탄할 정도로... 그대 말대로 노부가 그대를 너무 경시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소." 포랍존자는 백리사헌의 전신에서 흐르는 기운으로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느꼈다. '하면 누가...? 제삼의 인물이 있었다는 말인데...' 백리사헌은 그의 내심에서 일고 있는 의혹을 풀어 주었다. "그렇소. 그대와 노부는 제삼의 인물에게 깨끗이 졌소." "아니오. 그럴 리가... 당금 중원에 백리사헌, 당신을 능가할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못하겠소." 포랍존자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강하게 부정했으나 백리사헌은 적이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아니오. 중원은 넓소. 그대도 그 인물을 잘 알 것이오. 그자는 아직 약관의 청년으로 천예살군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소." "천예살군... 그가...?" "그리고 그는 지금 그대의 완벽한 계책에 최후의 공격선인 돈황으로 갔소." "돈황으로...?" 백리사헌의 말은 포랍존자에게 거센 충격을 안겨 주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곳. 그런데 어느새 궁예린이 그곳을 알아내어 돈황으로 향했다니. '그렇다면 노부는 여태껏 천예살군, 그의 손바닥 위에서...' 대라활불(大羅活佛). 천축의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자신이, 가히 천하제일의 심기를 지녔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일개 약관의 청년에게 당한 것이다. 그러나 포랍존자는 마지막 한 가닥 끈을 놓치지 않았다. "하나... 당신이 없는 천예살군, 그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돈황에서 살아 나올 수 없을 것이오." 그 말에 백리사헌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존자! 그대는 또 한 번 잘못 생각했소. 천예살군의 무학은 이미 노부를 능가하고 있소." "그, 그럴 리가...?" "그것을 그대에게 보여 주겠소." 백리사헌은 고개를 돌려 문밖으로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비! 그자를 이리 데려오너라!" 그리고 그 음성이 끝나는 순간, 시커먼 철갑인이 공손히 백리사헌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옆구리에는 시뻘건 핏물을 뒤집어쓴 혈인이 길게 신형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일순, 포랍존자의 안면이 크게 꿈틀거렸다. "아극... 네가..." 그의 경악에 찬 음성에 백리사헌은 침중한 음성을 흘렸다. "존자! 노부 역시 아니기를 바랐는데..." 그는 고개를 돌려 비를 바라보았다. "비! 그를 존자에게 내주거라!" 그러자 비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혈인을 포랍존자에게 내밀었고, 포랍존자는 황급히 혈인을 받아 그의 전신 대혈을 가볍게 눌렀다. "아극! 정신을 차려라. 어찌 된 일이냐?" 그의 벼락같은 일성에 정신을 차린 혈인은 눈에 띄게 경련을 일으키며 힘겹게 눈을 떴다. "아... 사부님... 무서운... 놈들... 형제들이... 모두... 그놈들에게... 윽!" 혈인은 뜨거운 핏덩이를 포랍존자의 가슴에 쏟으며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극! 정신을 차려라!" 아극. 그는 포랍존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로 돈황의 모든 일을 위임했던 자였다. 그런 그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상태로 혈인이 되어 나타나 겨우 한마디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포랍존자는 그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때 백리사헌이 담담히 말했다. "존자! 천예살군, 그를 수행한 부하가 몇인지 아시오?" 그 경황 속에서도 포랍존자는 그의 음성에 실려 있는 의미심장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백리사헌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단 네 명뿐이었다고 하오." 포랍존자는 곧 쓰러질 듯 신형을 휘청거렸다. "단 오 인(五人)이... 천 명이나 되는 최정예를..." 포랍존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거듭되는 충격에 그의 이성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대경실색을 금치 못한 사람은 비단 포랍존자만이 아니었다. 백리사헌은 포랍존자의 말에 놀라 그만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천 명이나 되다니... 대체 천예살군 그 청년은...' 그는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토록 그에게 강하게 다가오는 천예살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그의 굴강한 정신과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는 동안 백리사헌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조만간 그는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 사실에 강한 확신을 느끼며 백리사헌은 포랍존자를 돌아보았다. "존자! 이제 그대는 중원에 들어와서 피를 뿌린 그 결과를 느끼게 될 것이오." 백리사헌의 음성이 포랍존자의 귓전에 마치 천둥소리처럼 거세게 울렸다. '이대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화한단 말인가?' 포랍존자는 아득한 절곡으로 한없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천축의 천년 염원이 이처럼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다. 기회는 또 있다. 노부가 천축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는 안색을 굳히며 서서히 쌍수를 가슴에 모았다. "성주! 천축은 약하지 않소. 성주만 제거한다면 노부는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포랍존자의 손에서 강맹한 기류가 해일처럼 백리사헌을 향해 뻗어 나갔다. "존자, 이미 그대는 기회를 잃었소." 백리사헌은 웅후한 음성을 내뱉으며 서슴없이 쌍수를 밀었다. 두 줄기의 강기가 서로 맞부딪치자 엄청난 폭음이 터지며 실내의 가구들이 마구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번쩍였다 싶은 순간 이미 포랍존자의 신형은 창문을 뚫고 나가고 있었다. 백리사헌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쓰디쓴 고소를 베어물었다. "존자! 어차피 그대는 죽어야 하오." 그 나직한 음성과 함께, 묵직한 신음성이 터졌다. "으윽..." 제 26 장 하늘과 인간의 차이 1 "포랍존자! 네놈은 이대로 갈 수 없다." 분노에 찬 일성을 터뜨리며 창문에서 세 명의 인영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포랍존자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선홍빛 핏물이 그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연 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 그것은 날카로운 검(劍)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너, 너는 담천... 후..." 포랍존자는 옆구리에서 이는 고통보다 전면에 나타난 세 인물에 놀라 안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두 명의 노인과 혈의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궁예린에게서 모든 사실을 전해 듣고 달려온 경허성승과 운선도장 그리고 담천후로, 두 눈에 무서운 살기를 띠며 포랍존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포랍존자! 이 간악한 불구대천지원수! 네놈이 감히 부친을 해하고 본 공자를 기만하다니... 네놈의 뼈를 잘라 내고 살을 발라 낼 것이다." 담천후는 솟구치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아직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손에 든 채, 포랍존자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지고한 수양을 쌓은 경허성승이 얼굴 가득 살기를 띠며 허연 수염을 사뭇 떨고 있었다. "아미타불... 존자! 시주는 이 엄청난 대죄(大罪)를 오직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을 것이오." 그 순간이었다. 돌연 창 밖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려 왔다. "와아! 무림성 만세!" "성주, 천세!" "와아아아...!" 그것은 무림성이 이겼음을 알리는 승리의 함성이었다. 포랍존자의 안색은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끝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백리사헌의 장력을 받지 않을 것을...' 그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한 움큼 솟구쳤다. 묵묵히 그의 모습을 응시하던 백리사헌은 내심 생각했다. '존자! 그대는 아직 중원을 넘겨다보기는 멀었소. 이 광대한 땅은 그런 계책과 술수로는 다스릴 수 없음을 알아야 했소! 진정한 강자만이 중원에 그 뜻을 나름대로 펼 수가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는 미련없이 신형을 돌렸다. 바로 그때, 세 사람의 음성이 한없는 분노와 살심을 담은 채 포랍존자의 전신을 쓸었다. "아미타불... 세존이시여! 노납의 잔혹한 살계를 사하여 주소서." "포랍존자! 아버님의 혼(魂)을 위로해 드릴 것이다. 심장을 바쳐라!" "무량수불! 이 검은 십대문파의 한(恨)이 담긴 일검(一劍)이오." 실내에는 오직 작렬하는 섬광과 웅후한 기류만이 가득했고, 그 속에 포랍존자의 신형이 휩쓸리는 순간 요란한 굉음 속에서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으아악...!" 그 뒤를 이어 사방으로 피비〔血雨〕가 쏟아졌다. 일련의 움직임이 멈추고 일순간에 사위는 정적에 잠겼다. 담천후는 그 정적 한가운데 우뚝 선 채 아직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포랍존자의 심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버님! 보십시오. 이것이 불구대천지수의 심장입니다. 이제 이것을 아버님의 영전에 바칠 것입니다." 그의 나직한 절규는 실내를 처연히 울렸다. 경허성승은 갈가리 찢겨져 나간 승포를 걸치고 입가에 한 줄기 선혈을 흘리며 망연히 절규하는 담천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아미타불... 이제 노납에겐 어리석고 우매한 과오를 소림에 씻는 길밖에 안 남았군. 아미타불..." 그는 비장하게 불호를 외우더니 돌연 우수로 자신의 천령개를 내리쳤다. 퍽! 마치 수박이 깨지는 둔중한 음향이 터지며 경허성승의 머리에서 허연 뇌수가 튀고 사방으로 퍼졌다. 그리고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전신이 잘리고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죽어 있는 포랍존자의 시신 위로 경허성승의 시신이 무너졌다. 불가(佛家)의 자비. 죽으면 모든 것이 덮어진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 준 것이다. 운선도장의 입에서도 검붉은 핏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어 칠공에서도 선혈이 하염없이 솟구쳤다. 그러나 죽어 가는 그 순간에도 운선도장은 그윽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담 소협! 이것으로 십대문파가 구함을 받기만을... 바랄... 뿐이오..." 그 말을 끝으로 운선도장의 신형은 바닥에 널브러졌다. 백리사헌은 주위에 몰려드는 자신의 수하들을 응시했다. 불과 이백여 명의 생자(生者)들. 그들의 태반은 검은 전신들이었다. 관무상을 비롯한 일천 명의 고수들 가운데 살아 남은 사람은 불과 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도 성한 곳이 없이 전신에 모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백리사헌은 신형을 돌려 핏물 속에 처참히 죽어 있는 포랍존자의 시신을 주시했다. "야망! 그것이 끝난 뒤의 모습이 저토록 추악했던가?" 포랍존자의 죽음으로 철석 같던 그의 마음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노부 역시 야망이 끝난 뒤 남을 것은 저런 모습뿐인가..." 백리사헌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때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음성이 있었다. "그렇소, 성주! 천하는 그 누구의 독점물이 될 수 없소." 담천후는 시선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제야 석년의 아버님의 참뜻을 깨달았소. 왜 아버님이 그토록 강한 힘을 지니고도 마천루에만 만족하셨는지를... 나 담천후 역시 그 길만을 갈 것이오." 칠절마군 담석강. 그 역시 강자(强者)였으나 천하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오직 자신이 세운 마천루에 만족하며 한편으로 무림의 일부분인 마도(魔道)의 대종주(大宗主)로서 위엄을 떨쳤을 뿐이다. 담천후는 포랍존자의 죽음을 본 후에야 부친이 왜 그런 삶에 만족했는지 그 뜻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뜻있는 여운을 백리사헌에게 남기며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백리사헌은 물끄러미 담천후가 사라진 허공을 주시했다. 유난히 높은 하늘. 그 하늘을 보는 백리사헌의 눈은 일순간 빛을 가득 뿌렸다. '그것은 약자(弱者)의 변명일 뿐이다. 하늘은 누구도 어쩌지 못하지 않는가? 하늘〔天〕이 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꺾지 못하는 하늘이... 그것만이 진정한 강자의 길일 것이다.' 강자(强者)의 길과 하늘〔天〕. 그것이 일맥상통한단 말인가? 백리사헌은 그렇게 자위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굳게 잡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금이 간 석대(石臺)는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백리사헌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늘〔天〕은 하늘일 뿐, 백리사헌은 그저 미미한 존재의 인간(人間)임을... 천주봉.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결전(大決戰)은 이렇게 끝이 났다. 쌍방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낸 후, 무림성의 확실한 승리로 그 싸움은 끝을 맺었다. 이제 더 이상 승천무황 백리사헌이 이 시대의 진정한 최강자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2 중원 십팔만 리는 조용했다. 흡사 한차례 무서운 대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 찾아오는 고요함처럼. 천주봉의 대혈전에서 승리를 거둔 무림성. 그들은 천하 위에 군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켰다. 백리사헌은 무림성의 깊숙한 곳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기다리는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백리사헌의 고요한 은거에 천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대체 그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위세를 드러낼 것인지, 무엇을 어찌하려고 그토록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지 무림성의 움직임에 전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게 불안감과 침묵 속에 시간은 정확히 보름이 흘렀다. 가을〔秋〕. 그 뜨겁던 폭양도 한풀 수그러들어 이제 천하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맞이했다. 하늘은 너무도 높고 푸르렀다. 섬서성(陝西省). 옥문관(玉門關)으로 들어서는 중원의 최대 접경지인 이곳은 돈황과는 초원(草原) 하나를 두고 맞닿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가을의 서늘한 바람은 길게 뻗은 관도를 가볍게 스치며 어루만졌다. 문득 관도 저 끝에서 일단의 인영들이 땅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 인. 그들은 바로 궁예린과 망혼사인이었다. 미풍이 선두에 선 궁예린의 단아한 이마를 스치자 한 올의 늘어진 머리칼이 가늘게 떨렸다. 궁예린은 시선을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꼭 한 달 만에 다시 중원으로 들어서는군." 천주봉의 대접전이 있은 후, 보름 만에 궁예린은 옥문관을 넘어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궁예린은 우측의 철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떠냐? 철산! 이제는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겠느냐?" 그의 걱정 어린 음성에 철산은 한 팔을 허공으로 올리며 힘껏 뻗었다. "걱정 마라, 대장! 끄떡없으니... 억!" 철산은 기세 좋게 대답하다 인상을 찡그리며 왼팔을 거머쥐었다. 몹시 아픈 듯 굵은 눈썹이 역 팔 자로 엉키고 있었다. "어이쿠, 이놈아! 어째 너는 덩치값도 못 하냐? 다른 것들은 가만히 있는데 유독 네놈만..." 철산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팔을 가볍게 쥐어박았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성이 터지며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억!" 그때 그의 옆으로 다가온 손비호가 나직이 핀잔을 주었다. "이 미련한 놈아! 그것은 네놈의 부속품이 아니더냐? 멍청하긴..." "맞다! 저런 미련한 놈이 어떻게 우리의 대열에 끼였는지... 이것은 분명 괴변이 확실하다." 유사릉이 코를 벌름거리며 철산을 향해 눈을 흘기자 철산은 눈을 부릅뜨며 손비호와 유사릉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뭐라고? 이 개 뼈다귀 같은 놈들이... 제놈들을 구해 주려다 이 어르신의 소중한 팔을 다쳤거늘..." 철산은 궁예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이쿠, 대장! 앞으로 저 약골들과 절대 같이 다니지 않도록 선처를 해다오." 그는 울상까지 지으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궁예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철산! 어째서 저들이 약골이냐? 표빈과 비호, 사릉 역시 너를 구하기 위해 부상을 당하지 않았느냐? 이번 일은 서로가 상부상조했을 뿐이다." 그 말에 철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대장! 분명 대장도 보지 않았느냐? 내가 저 약골들의 목숨을 구한 것을..." 철산은 억울한 듯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층 더 구기고 있엇다. '후훗! 녀석들... 이번에 네놈들은 서로 느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그것 때문에 비록 부상을 당해 며칠 고생했지만, 영원히 가슴에 남을 것이다!' 잠시 미소 띤 얼굴로 그들 네 사람을 바라보던 궁예린은 돌연 고개를 돌려 전면을 응시했다. 그의 십 장 앞. 한 청년이 바람에 흑의장포를 날리며 우뚝 서 있었다. 궁예린보다 서너 살은 더 먹었음직한 청년. 그는 넓적한 도(刀)를 두 손으로 감싼 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철혈도 단우엽...!' 궁예린은 내심 경악 어린 탄성을 터뜨렸다. 그제야 단우엽을 발견한 다른 네 사람도 흠칫하며 그를 주시했다. '저놈이 어찌 이곳에...?' 그때 단우엽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 왔다. "천예살군, 축하한다. 돈황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을." "고맙소. 중원에서 우리 일행의 노고를 치하해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소." 궁예린은 나직이 말하며 단우엽을 응시했다. "귀하가 나를 기다린 것은 전날의 그 패배를 설욕하기 위함이겠군." 단우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이곳에서 삼 일을 기다렸다. 그대가 안 오면 돈황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궁예린은 내심 흠칫했다. '단순한 협박은 아니군. 전날의 패배가 이토록 큰 충격을 주었던가?' 그로서는 단우엽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단우엽에게는 그럴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무림성의 이공자로서 무림성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웅지(雄志)를 품고 중원으로 들어섰던 그가 당시 명호도 없던 무명 인물(無名人物) 궁예린에게 무참히 패하며 느낀 뼈저린 아픔을 궁예린은 알지 못했다. 더욱이 단우엽은 피 끓는 청년이었기에 그 아픔은 그에게 몇 배의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에 단우엽은 궁예린에게 설욕하기 위해 근 일 년이라는 시간을 바쳤고, 마침내 자신의 무공을 최절정까지 끌어올린 단우엽은 궁예린에게 도전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서늘한 미풍에 다시금 단우엽의 흑의장포가 펄럭였다. "어쨌든 고맙다. 돈황까지 들어서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으니." 단우엽은 당당히 말을 이으며 가슴에 품고 있던 철혈도를 두 손에 움켜쥐었다. "천예살군, 이제 내가 이곳에서 기다린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을 것이다. 뽑아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넓적한 철혈도에서 묵광이 뿜어져 나왔다. "대장! 이번에는 우리에게 맡겨 줘라!" 어느새 다가온 표빈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궁예린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표빈! 이것은 내가 시작했으니 나만이 끝을 낼 수 있다. 그러니 아무도 이 싸움에 나서지 마라." 궁예린은 소매 속에서 밀천여의묵봉의 꺼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들 명심해라. 이 싸움의 결과가 어찌 되어도 너희들은 아무도 나서지 말아야 한다." 일순간에 밀천여의묵봉은 한 자루의 묵도로 변해 궁예린의 손에 쥐여졌고 단우엽은 지그시 묵도를 주시했다. 궁예린은 묵도를 쥔 손에 불끈 힘을 주며 말했다. "귀하! 나는 이번 싸움을 끝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기길 바라겠소. 이것은 나에게는 하등의 의미도 없는 무의미한 접전이기 때문이오." 단우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나 역시 그대의 기개에 탄복하는 바이다. 누가 지든 앞으로는 이런 무의미한 접전은 없을 것이다." 그는 담담히 음성을 이으며 철혈도를 가슴에 비스듬히 세웠다. 그 모습에 궁예린은 내심 염두를 굴렸다. '많은 발전이 있었군. 필살일초식(必殺一招式)을 익히기 위해 각고의 고련을 쌓은 것 같다! 하나, 단우엽! 그대는 상대를 잘못 택했소. 내가 익힌 무공 역시 필살일초식을 전문으로 하는 살수(殺手)의 검초이기 때문이오.' 궁예린의 무공. 그것은 지옥마제의 무학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던가? 더구나 지옥마제가 남긴 살예십팔식은 살수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가공스런 살초이기도 했다.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궁예린은 지금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너무도 담담한 모습을 보인 채 묵도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반면에 단우엽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흐르고 철혈도를 힘껏 움켜쥔 그의 우수에는 땀이 흥건히 배이고 있었다. '무서운 놈! 먼젓번보다 더욱 완숙한 도(道)에 들어섰다. 그것은 그만큼 무학이 정심하단 것이 아닌가?'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미 나는 기(氣)에서부터 저놈에게 또 한 번 졌다. 저 평범함 속에서 놈은 무서운 기운을 내뿜고 있으니...' 단우엽은 약해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철혈도를 더욱 힘껏 쥐었다. '일 년! 아무 잡념 없이 오직 이 한 초식을 익혔다. 천우 사형도 이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바로 그때 한 가닥 미풍이 궁예린의 단아한 이마를 스치며 머리카락을 휘날리자 궁예린은 순간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찰나지간 단우엽은 내심 힘차게 부르짖었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우렁찬 대갈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천예살군, 간다!" 동시에 한 줄기 번개가 번쩍 허공을 그으며 궁예린의 목줄기를 무섭게 꿰뚫었다. 그 짧은 순간 궁예린은 눈을 감았다. '단우엽! 귀하는 매우 좋은 기회를 잡았소. 하나 내가 이미 심즉살 정중동을 익힌 것을 계산하지 못한 것 같소!' 궁예린이 눈을 감는 순간에 한 줄기 시커먼 묵광이 단우엽의 전신을 감쌌다. 단우엽은 자신의 묵도가 궁예린의 목줄기를 꿰뚫었다고 느낀 순간 무서운 불안감을 느꼈다. '눈을 감다니, 허실(虛實)인가? 아니면 도의 최극치인 심즉살 정중동을 터득했단 말인가?' 그의 불안은 바로 그 순간 현실로 나타났다. 단우엽은 돌연 자신의 두 손목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철혈도가 반 토막으로 부러져 나갔다. 챙그랑! 철혈도의 부러진 반 토막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모든 것은 멈추었다. 단우엽은 넋을 잃고 자신의 철혈도를 쳐다보았다. 땅에 떨어진 반 토막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만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옷깃을 적시며 지면을 덮는 핏물. 그것은 가슴에서 옷이 찢어지며 흐르는 핏물이었다. 단우엽은 느끼고 있었다. '단숨에 죽일 수도 있었는데... 분명 그의 도는 나보다 빨랐다! 천예살군! 끝내 내가 넘볼 수 없는 벽(壁)이었단 말인가?' 그때 궁예린의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단우엽! 다음에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도를 들지 않은, 친구로 만나길 바라겠소." 그러고 단우엽이 고개를 돌린 순간, 이미 궁예린의 신형은 저 끝에서 하나의 점으로 화하고 있었다. 다섯 개의 점. 그것은 곧 가물거리며 관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천예살군, 너는 멋진 놈이다. 나 단우엽은 너를 다시 만나게 될 때는 기꺼이 친구로 대할 것이다." 단우엽은 진심으로 탄복을 금치 못했다. 궁예린의 오연한 모습과 당당한 태도는 그로 하여금 한 번쯤 사귀어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도록 하기에 충분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 순간 단우엽의 가슴은 저 푸른 하늘처럼 넓고 컸다. 3 오색(五色)으로 단장한 낙엽들이 저마다 그 위세를 한껏 뽐내고 있는 가을. 산은 울긋불긋 채색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귀기스런 운무로 둘러싸인 절운협에도 가을은 찾아왔다. 절운협을 둘러싸고 있는 대산(大山)은 온통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유난히 홍엽(紅葉)이 많은 절운협이었다. 영원히 걷히지 않을 운무 사이로 하나의 장원이 드러났다. 망혼장. 밀천무영세가의 후예들이 지난 세월도 잊고 사는 그곳에 오늘따라 무거운 침묵과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오단목의 목조 기둥이 사방을 떠받치고 있는 커다란 대전에 감돌고 있는 기운은 바로 망혼장을 감싸고 있는 묵중한 긴장감이었다. 또한 대전의 좌우로 열세 명씩 날렵한 경장을 한 채 늘어서 있는 스물여섯 명의 청년들 역시 저마다 긴장과 굳은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중앙. 흑오단목 의자에 한 명의 백의청년이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바로 천예살군 궁예린이었다. 그의 뒤로는 망혼사인이 궁예린을 호위하며 서 있었다. 궁예린은 문득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백리유정을 돌아보았다. "유정! 무림성은 용담호혈이다. 이번 천주봉 결전에서 이미 무림성의 위세는 재삼 새롭게 드러났다. 그것은 승천무황이 또 다른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냐? 한데도 굳이 네가 따로 행동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심히 걱정스러운 일임을 왜 모르느냐?" 그의 음성에는 백리유정을 위하는 마음이 진지하게 흐르고 있었다. 대전 안에 그토록 긴장감이 감도는 것은 백리유정이 궁예린에게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궁예린이 무림성으로 가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밝히는 순간, 백리유정이 돌연 자신이 한 발 먼저 무림성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어떤 사람도 대동하지 않은 채 혼자서 무림성에 들어가겠다고 하니, 궁예린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백리유정이 용담호혈과도 같은 무림성에 홀홀단신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궁예린은 백리유정을 설득하려고 애를 썼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백리유정은 단호했다. 궁예린이 다시금 입을 열어 백리유정을 설득하려고 하는 순간 백리유정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궁예린을 응시했다. "예린! 그것을 어찌 내가 모르겠냐? 하나 이 일이 서로의 희생을 줄이는 것임을 다시금 강조할 뿐이다." 그 순간 백리유정의 눈에 짙은 고뇌가 스쳤다. '이 녀석, 무엇을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굳이 그 위험한 일을 단독으로 행하려는 의도가 무엇인가?' 궁예린이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백리유정을 바라보며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백리유정이 다시 단호한 음성을 발했다. "예린! 더 이상 묻지 마라! 네가 나를 위한다면 이대로 나의 행동을 묵인해 다오." 궁예린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 나직이 비음을 흘렸다. "으음... 알겠다. 하나 나는 네가 무모한 일을 벌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고맙다, 예린! 나를 이해해 주니..." 백리유정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 고마운 것은 바로 나다. 네가 우리 모두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지는 모르지만 너의 마음만은 잊지 않겠다." 궁예린과 백리유정의 눈빛이 한순간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예린, 조만간 너는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유정, 이 일 역시 너의 가슴에 숨겨진 의혹의 한 부분이었더냐?' 두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눈빛에서 상대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일순, 궁예린은 단호한 음성을 내뱉었다. "유정! 너의 말대로 나는 앞으로 삼 일 후, 무림성으로 들어갈 것이다. 부디 너의 신상에 아무런 일도 없기를 바라겠다." 백리유정의 전신이 미미하게 떨렸다. '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백리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는 기필코 너의 자랑스런 모습을 꼭 볼 것이다." 그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신형을 일으켰다. 그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백리유정이 막 대전의 문을 열어젖히려 할 때였다. "유정! 나는 꼭 무림성에서 너를 보기를 바란다. 만약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쩌면 무림성의 그 누구도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이다." 궁예린의 굳은 음성에 백리유정은 전신을 격동하며 신형을 돌렸다. "이것은 나 궁예린이 내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다." "예린..." 백리유정은 격정에 차 겨우 그 한마디만을 내뱉을 수 있었을 뿐, 여전히 전신을 세차게 떨고 있었다. －친구를 위해서 무림성을 피〔血〕로 씻을 수도 있다! 끈끈하고 진한 우정이 그 한마디에 모두 담겨 있었다. 백리유정의 눈빛은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예린!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너에게서 그런 우정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너에게 해주는 나의 마지막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백리유정은 끝내 한마디 말도 못 꺼내고 신형을 돌려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곧 무림성에서 있을 궁예린과 그의 수하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신만이 아는 고뇌를 한껏 거머쥐고 백리유정은 궁예린의 곁을 떠났다. 궁예린은 언제까지나 백리유정이 사라진 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유정! 나는 알고 있다. 이번에 너의 도움이 없었다면 삼목천의 음모를 부술 수 없었음을... 그리고 밀천무영세가가 이토록 완전할 수가 없었음을..." 그의 나직한 음성은 대전의 모든 사람들에게 똑똑히 들렸다. '가주님의 말씀 그대로다. 유정, 저 사람의 지혜는 놀라웠으니...' '백리사헌! 그의 모든 위험이 손쉽게 드러난 것도 유정 저 사람의 덕분인 것을...' 궁예린의 말에 동감하듯 모두의 얼굴에 수긍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너를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이 넓은 천하에 나의 마음을 받아 준 사람은 너 유정뿐이었다." 궁예린의 음성은 마치 칼로 자르듯 단호했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나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너를 위로할 것이다." 그는 굳은 얼굴로 창 밖의 하늘을 주시했다. "승천무황 백리사헌, 나는 알고 있소. 당신이 나를 기다리기에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백리사헌, 그가 지금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궁예린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그랬기에 당신의 고고한 자존심으로 절대자라 나서지 않음을..." 궁예린의 얼굴에 한순간 감탄이 어렸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당신을 새삼 존경하게 되었소. 역시 당신은 거대한 거목이었소. 그리고 지금 나는 당신을 더욱 꺾어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고 있소." 그는 눈에서 기광을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이 승부에 관계없이 당신을 존경하는 마음을 영원히 내 가슴에 간직할 것이오." 그것은 강자에 대한 예우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백리사헌의 모든 언행과 태도가 궁예린의 가슴에 깊은 탄복을 불러일으켰기에 하는 말이었다. "결코 당신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결정을 내렸소. 무림성의 성문에 꽂힌 당신의 승천도를 뽑기로..." 오래 전, 무림성의 개파대전 때 백리사헌은 성문의 기둥에 승천도를 꽂으며 한 말이 있었다. －승천도(昇天刀)를 뽑는 자가 노부의 대(代)에서 나타나기를 바라겠소! 그것은 곧 승천도를 뽑는 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것이었으나 그때부터 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승천도를 뽑아 백리사헌에게 도전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궁예린이 승천도를 뽑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었다. "승천무황! 당신은 결코 하늘이 아니오. 당신 역시 미미한 인간일 뿐이오." 궁예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하늘은 하늘이기에 영원히 무너질 수 없소. 하나, 당신은 인간이기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오." 4 꽃〔花〕. 꽃은 아름답다. 말〔言〕을 못 하기 때문일까? 꽃〔花〕. 꽃은 부드럽다. 서로 시기하지 않기 때문일까? 꽃〔花〕. 꽃은 유연하다. 듣지 못하기 때문일까? 꽃. 아무리 나쁘고 싫게 보고 들어도 그 한마디가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었다. 더욱이 물기를 듬뿍 머금고 활짝 핀 가을의 꽃은 더욱 아름답고 화사했다. 하나의 희고 섬세한 손이 붉은 꽃송이를 다듬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비 때문일까? 여기저기 축 늘어진 꽃들은 이미 시들하고 생기를 잃었다. 그러나 유난히 희어서 푸른 실핏줄이 은은히 비치는 섬세한 손이 꽃들을 스칠 때마다 꽃들은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그 섬세한 손의 주인은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여인임이 분명했다. 꽃과 여인. 그것은 떨어뜨려 놓으려야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인의 손은 꽃가지를 쳐내며 죽은 꽃잎을 잘라 내고 새로 핀 잎은 곱게 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온갖 화초가 가득 피어 있는 화원으로, 그 속에서 새햐얀 백의를 입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꽃과 같았다. 문득 여인이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응시했다. 순간 훤히 드러난 그녀의 용모에 주위의 꽃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여인은 그토록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도저히 필설로는 그 아름다움을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천하제일화(天下第一花). 아름다운 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그것만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설명하기에 꼭 알맞은 말인 것 같았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은 위로 틀어 올려져 궁형을 하고 있었고 단아한 이마는 마치 유리벽을 보는 듯했다. 그 밑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은 혜지를 담고 있었으며 오똑 솟은 코에 붉디붉은 입술은 보는 이의 심혼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여인의 붉은 입술이 사르르 열렸다. "아, 예린! 당신은 진정 이 세상에 없는 것인가요? 소혜가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나요?" 그녀의 안타까운 음성은 일시간 활짝 핀 꽃들을 파르르 주눅들게 했다. 한데 들었는가? 이 여인의 하얀 박속 같은 치아 사이로 흘러나온 이름을. 함소혜. 그 이름은 지난날 궁예린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말괄량이 소녀의 이름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그때의 그 말괄량이 소녀란 말인가? 여인, 함소혜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그래요, 예린! 당신은 이 세상에 없으나 소혜의 가슴속에는 살아 있는 거예요. 소혜의 몸은 다른 곳에 있어도 마음은 당신의 그림자로 가득 채워진 것을..." 그녀의 입술이 부드러움을 가득 띠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웃음 속에는 한 줄기 처연함이 배어 있었다. "당신도 기뻐해 주세요. 소혜가 이제 이만큼 커서 시집을 가게 되었으니까요! 당신도 잘 아실 거예요. 지난날 당신과 서로 지지 않으려 싸운 관 대형을 말이에요." 그렇다면 관무상과 혼인을 한단 말인가? "그 사람은 지금 훌륭한 모습으로 변했어요. 그러나 소혜에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아시겠지요?" 그녀는 하나의 꽃송이에서 꽃잎 하나를 땄다. "그분은 소혜를 너무나 기다리신 거예요. 이제 소혜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어요." 다시 또 하나의 꽃잎이 그녀의 손에서 아픈 비명을 터뜨리며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함소혜의 얼굴은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예린! 이 꽃잎들은 마치 여인 같아요." 무슨 뜻인가?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붉은 홍조와 꽃잎이 꺾인 것은...? 그때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의 등뒤에서 들려 왔다. "후후! 소혜, 무엇을 생각했기에 그토록 부끄러움이 가득 찼단 말이오?" 그 음성에 놀란 함소혜는 재빨리 신형을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곳에는 관무상이 미소 띤 얼굴로 함소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함소혜는 얼굴을 더욱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 오셨어요...?" "후후후, 지금 왔소.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당신의 그 붉은 모습의 의미를 봤을 텐데." 관무상은 못내 섭섭하다는 듯 혀까지 찼다. "아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매는 너무나 놀라서..." 함소혜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너무나 붉게 상기되어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관무상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담겼다. "후후후, 새로운 발견을 한 것 같군. 놀랐는데도 얼굴이 붉어지다니." 찰나간에 함소혜는 이제는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만큼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손을 꼭 쥐어 관무상의 넓은 가슴을 앙증맞게 때렸다. "아이... 몰라요. 사람이 어찌 이렇게 무안을..." "하하하하... 미안하오, 혜매!" 그 모습에 관무상은 급기야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두 손을 지그시 잡았다. "하하하, 혜매!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리다가는 혜매의 가슴을 안아 줄 내 가슴이 남아나지 않겠소." 함소혜는 관무상의 짓궂은 농담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멋! 당신..."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웠다. '너무 사랑스럽다.' 관무상은 내심 치솟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품에 안았다. "어맛!" 함소혜는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관무상의 넓은 가슴은 미미하게 떨고 있는 그녀의 신형을 부드럽게 포옹하고 있었다. "혜매! 나 무상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놈일 것이오." 관무상은 나직한 음성을 그녀의 귓전에 흘리며 가녀린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제 사부님께서는 이번 일만 처결하신 후, 우리들의 혼례를 성대하게 치러 주신다고 하셨소." 그 말을 듣는 순간 함소혜의 눈에 뿌연 물기가 스몄다. '아! 린... 당신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시나요? 백약사 할아버지가 이곳의 성주임을...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그분이...'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함초롬히 맺히고 있었다. '린! 이제 소혜는 며칠만 지나면 저 꽃잎 같은 모습이 될 거예요!' 그녀는 시선을 돌려 지면에 떨어진 시든 꽃잎을 주시했다. '소혜는... 무서워요. 당신의 모든 것이 소혜에게서 멀어질 것만 같아서...' 그녀의 눈물이 끝내 볼을 타고 관무상의 옷깃을 적셨다. 관무상의 눈이 한순간 빛을 뿌렸다. '소혜, 나는 알고 있다. 너의 가슴에 드리운 예린의 그림자를... 하나 너, 소혜만은 뺏기고 싶지 않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것이 궁예린에게 최초의 승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너 못지않게 소혜를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관무상은 함소혜를 안은 팔에 힘을 불끈 주었다. 영원히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듯. 함소혜는 그의 억센 팔 힘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음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린... 이것이 여인의 길이에요. 당신은 소혜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요. 너무... 멀리 말이에요...' 함소혜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제 27 장 가을비의 여운은... 1 절강봉(浙江峯). 대강남북(大江南北)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로에 서 있는 대산이었다. 지세가 험하고 거암과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험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산도 가을의 정취에 잔뜩 물들어 오색의 적엽을 온누리에 비추고 있었다. 무하평. 곡물들과 기초(奇草)들을 심어도 그 싹이 나지 않고 꽃이 피지 않는 불모지대(不毛地帶)이기도 한 그곳에 바로 무림의 절대자 승천무황 백리사헌의 아성인 무림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온통 새하얀 백강석으로 축조된 무림성은 오늘도 대륙을 오시하며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성문 양쪽에서 지키고 서 있던 여덟 명의 대한들은 일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전면을 주시했다. 그들의 앞에는 표정을 굳힌 다섯 명의 청년이 무림성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궁예린을 비롯해 철산과 표빈, 유사릉 그리고 손비호였다. '아직 약관의 청년들이... 겁도 없이...' '한 놈, 한 놈이 매우 비범한 신태를 지니고 있다.' 그들이 궁예린 일행을 보고 느낀 첫인상이었다. 그때 궁예린 일행은 성문을 떠받치고 있는 우측의 기둥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걸음을 멈춰라! 그곳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여덟 명의 대한들 중 텁수룩한 수염으로 턱을 가득 덮은 털보대한이 두 눈을 부릅뜨며 궁예린 일행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궁예린 일행은 털보대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성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털보대한의 턱수염이 일순 부르르 떨렸다. "이 건방진 놈들! 감히 어르신의 말씀을..." 그의 분노는 곧 행동으로 나타나 털보대한은 재빨리 궁예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 그가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막 위엄에 찬 일성을 터뜨리려는 순간, 궁예린의 조용하고 나직한 일성이 그의 입을 막았다. "물러서라!" 그의 음성에 실린 막강한 위엄에 털보대한은 자신도 모르게 신형을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가서 이렇게 전하라. 천예살군이 승천도를 뽑아 성주에게 간다고." 다시 이어지는 궁예린의 말은 털보대한의 전신을 휘청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처, 천예살군... 당신이...!" 그의 시선은 사뭇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백리사헌의 위엄에 찬 음성이 뇌리를 스친 탓이었다. －천예살군이라는 젊은 청년이 무림성으로 올 것이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서투른 짓을 해서 본 성(城)의 위엄을 추락시키는 자가 있다면 노부는 가차없이. 그가 누구이든 목을 벨 것이다! 그러나 대경을 금치 못한 사람은 또 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서 있던 일곱 명의 대한들. 그들의 안색도 이 순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행이다. 저들의 앞을 막지 않은 것이...' 다음 순간 털보대한의 태도는 백팔십도로 변했다. "예, 알겠습니다. 곧 전해 올리겠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가장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굽히며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성문 앞을 지키고 있던 일곱 명의 대한은 벌써 성안으로 나는 듯 보고하러 간 후인지라 성문 앞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후유! 살성(殺星)을 건드릴 뻔했으니..." 털보대한은 식은땀을 이마에서 닦아 내며 바람같이 성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역시 짐작대로 승천무황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군!' 궁예린은 내심 염두를 굴리며 손비호를 주시했다. "비호! 네가 저 승천도를 뽑아 오너라!" "내가...? 알겠다." 손비호는 잠시 의아한 듯 바라보더니 곧 대답과 함께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석벽에는 승천도가 손잡이만 남긴 채 깊숙이 박혀 있었다. 〈무인(武人)은 누구라도 승천도를 뽑을 수 있다!〉 〈그대의 도전(挑戰)을 쾌히 수락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 좌우 석벽에는 이런 글이 석벽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백리사헌이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새긴 것이었다. 궁예린은 다시 한 번 백리사헌의 호기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웅지와 기개가 저 글씨에서도 뻗치는군." 순간 주위를 새하얀 백광으로 물들이며 한 자루의 넓적한 도(刀)가 궁예린의 시선에서 빛나고 있었다. "대장!" 한마디 짤막한 음성과 함께 손비호의 두 손에서 궁예린의 손으로 도가 넘겨졌다. "승천도!" 궁예린은 부지중 독백을 흘리며 번뜩이는 시선으로 손 위에서 빛을 뿌리는 승천도를 바라보았다. 넓적한 날 위에 마치 톱날처럼 생긴 뾰족한 부분이 무척 날카로워 보였다. 마침내 백리사헌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승천도가 석벽에서 뽑힌 것이다. 찰나지간 궁예린의 눈이 매서운 기광을 뿌렸다. "승천도! 밀천여의묵봉과 멋진 대결을 보이길 바랄 뿐이다." 궁예린은 좌수에 승천도를 꽉 쥐며 성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네 사람이 조심스럽게 따랐다. 승천무황 백리사헌에게 한 발 다가서고 있는 것이었다. 2 투명한 유리창 사이로 찌푸린 잿빛 하늘이 꽉 들어찼다. 백리사헌은 뒷짐을 진 채 창 밖의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눈은 간혹 흔들리며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문득 그의 나직한 음성이 주위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무상! 그들이 그토록 강했더란 말이냐?" 다분히 분노에 찬 음성이 백리사헌의 등뒤에서 들려 왔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놈들은 이미 무림성 내의 모든 것을 세세히 알고 있었기에 그자들의 기습에 당했을 뿐입니다." 백리사헌의 뒤에는 흑의를 입은 관무상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흠! 그렇다면 무림성에 간세가 있다는 말이겠구나." 백리사헌의 음성은 여전히 묵직하고 조용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 성의 최대 험지인 철뇌옥이 그처럼 손쉽게 부서진 것은 간세가 있지 않고는..." 관무상은 말끝을 흐렸다. 백리사헌 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무상! 어쨌든 패배는 패배가 아니냐? 네가 간세를 미리 알고 준비했더라면 오늘날 이와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니더냐?" 분명 백리사헌의 음성에는 질책과 꾸중이 담겨 있어야 했건만 너무나 조용했다.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고 있는 듯 무심하기까지 했다. "그렇습니다, 사부님!" 관무상은 그 조용한 음성에 한없이 위축되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달리 백리사헌이 한층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무상! 너는 지금 이 순간까지 무림성의 삼공자일 뿐이다. 노부는 아직 너에게 사부라 부르지 말 것을 분명 말했지 않느냐? 차후 명심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관무상은 내심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천우 사형도 이미 죽었고 둘째 사형 단우엽 역시 실종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나 하나뿐이 아닌가? 사부에게 또 다른 후계자가 있단 말인가?' 그때 백리사헌이 천천히 독백을 흘렸다. "그들이 누구이건 노부의 아성을 건드린 것만으로도 한 명도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신형을 돌려 관무상을 응시했다. "무상, 너는 지금 곧 성의 모든 제자들을 연무장으로 모이게 하거라. 노부는 성내의 전 기관을 작동해 그자들을 섬멸할 것이다." 찰나지간 관무상의 전신이 흠칫 떨렸다. '사부께서 직접...' 그는 내심 생각을 굴리며 굳은 음성을 발했다. "존명!" 관무상이 이내 조심스럽게 그 자리를 물러나자 백리사헌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관무상이 사라진 곳을 주시하다 신형을 돌렸다. 잿빛 하늘은 이제 완연히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어느 누구든지 노부의 아성을 좀벌레같이 침입한 것은 노부를 기만한 것이다. 한 놈도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 백리사헌의 전신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내비쳐야 할 살기마저 보이지 않았다. 무형극살(無形極殺). 이는 살공(殺功)의 최극으로,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움직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3 그때 빗물이 유리창을 가볍게 때리며 내리기 시작했다. "천예살군, 자네는 노부가 자네를 위해 터득한 무형극살을 봐야 하네. 이것은 오직 자네만을 위해 쓸 것이니..." 백리사헌을 창 밖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는 천우와 잠마풍의 시신에서 무서운 것을 발견했네. 천예살군, 그대가 지옥무벌의 후예라는 것을..." 백리사헌, 그는 마침내 궁예린의 무공에 담긴 비밀을 알아낸 것인가?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지며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백리사헌의 음성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으로 노부는 자네가 무서운 살수의 쾌검법(快劍法)을 익힌 것을 알아냈고 무형극살을 창안해 냈네." 창 밖의 빗방울은 창문을 뿌옇게 흐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성주! 노신 천학우사입니다." 문밖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일순, 그토록 무심하던 백리사헌의 두 눈이 처음으로 급격히 흔들렸다. '괴이한 일이군.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 않던 천학우사가...?' 그는 내심 불안감을 느끼며 말문을 열었다. "들어오시오." 방문이 열리며 곧 천학우사가 안으로 들어와 백리사헌 앞에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백리사헌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오늘은 천학우사답지가 않소이다." 그는 이 전대 기인 앞에서만은 그를 존중해 말을 높이고 있었다. 천학우사는 안색을 침중히 굳히며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노신은... 이제 성주께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소이다." "허헛, 천학우사! 괘념치 마시고 어서 말씀하시오. 노부가 언제 천학우사에게 섭섭히 대하기라도 했소?" 백리사헌은 마치 다정한 벗에게 말하듯 친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천학우사의 안색은 더욱 침통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것을 어찌 노신이 모르겠소. 하나 그렇기에 성주에게 더욱 죄스럽기만 할 뿐이오." 백리사헌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불안이 가득 스치고 지나갔다. '필시 중대한 변고가 벌어졌다.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이...'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을 백리사헌이 이 순간 흔들리고 있었다. "말해 보시오, 천학우사! 대체 무슨 일이오?" "후유! 모든 것이 노신의 우매함이었소이다. 백리 공자가 나타난 기쁨에 그만 그곳을 비운 사이 공자께서 무림성의 전 기관을 파훼할 줄은..." "무엇이...? 유정, 그 아이가 이곳에 왔다고? 더구나 그 아이가 기관을...?" 백리사헌의 신형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정, 그 아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무엇 때문에...' 그는 떨리는 시선으로 천학우사를 주시했다. '실수다. 이자에게 백리유정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비밀은 비밀로 존재해야 했는데...' 끝없는 후회가 파도처럼 백리사헌의 전신을 휩쓸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성주님께 아뢰옵니다. 지금 연무장에서 천예살군이라는 청년이 승천도를 뽑아 들고 성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밖에서 공손한 음성이 들려 왔다. 백리사헌의 상체가 한순간 크게 흔들렸다. "천예살군이... 이런 시기에..." 그것은 거센 충격이었다. "그랬군. 이 모든 계획은 천예살군, 그의 명이었군. 막연히 짐작은 했지만... 이토록 무모한 행동을 안 하리라는 나의 예측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을 줄..." 그러나 백리사헌은 모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완벽히 이루어진 것은 자신의 아들 백리유정이 눈부신 활약을 했기 때문이란 것을. 천학우사의 노안 역시 백리사헌의 독백을 들으며 대경실색하고 있었다. '천예살군! 그가 그토록 대범하게 나올 줄이야...' 그때 백리사헌의 웅후한 음성이 천학우사의 상념을 깼다. "천학우사! 지금 곧 무림성의 모든 제자들에게 행동을 멈추라고 하시오. 노부는 쓸데없는 피와 희생을 원치 않소." "그렇다면...?" 천학우사는 두 눈에 강렬한 기광을 뿌리며 백리사헌을 주시했다. 백리사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노부는 천예살군의 도전을 받을 것이오. 만약 노부가 패한다면 무림성의 모든 힘은 천예살군을 당하지 못할 것이오. 결코 노부의 복수를 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들은 하지 마시오." 찰나지간 천학우사의 가슴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격정이 치솟았다. '성주, 이래서 노부는 당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소." 백리사헌은 다시 말을 이었다. "유정! 그리고 불쌍한 소연! 그 아이를 천학우사께서 잘 보살펴 주시오." "성주..." "허헛, 우사! 당신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노부는 만약을 얘기한 것뿐이니... 노부는 그 누구에게도 쓰러지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 순간 천학우사는 느낄 수 있었다. 한 인간의 마음에서 무너지는 갈등의 소용돌이를. '허허허, 나의 아들이 나에게 검(劍)을 들이댈 줄은...' 그 역시 자식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아버지였기에 아들의 배신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괴로워하는 백리사헌의 모습에 천학우사는 그만 가슴에 묻어 두었던 말을 자신도 모르게 터뜨렸다. "성주! 당신은 누가 뭐래도 이 시대 최고의 강자였소. 그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오. 노신은 당신 같은 사람을 옆에서 모신 것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을 끝으로 천학우사는 신형을 돌렸다. 아직 못다 한 이야기는 많았지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했기에 그는 그 자리를 쉽게 떠날 수 있었다. 백리사헌은 드디어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무림성이 오늘로서 중원에서 사라질 수 있겠군. 허헛! 노부 백리사헌이 이토록 나약한 모습일 때도 있었던가?" 그 말을 실내에 짙게 깔아 놓은 채, 백리사헌은 문을 나서고 있었다. 4 족히 수백 명은 들어갈 만한 커다란 분지 위로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그 속에 두 노소(老少)가 마주하고 있었다. 백리사헌과 궁예린이었다. 그들 두 사람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가득 서린 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한순간 백리사헌이 입을 열었다. "허허허, 너였더냐? 천예살군이 바로 너 궁예린이었단 말이냐?" "백약사 할아범! 당신이 무림성주 승천무황 백리사헌이라니..." 궁예린의 입에서도 놀람의 탄성이 터졌다. 문득 백리사헌의 시선이 십여 장 밖의 네 청년을 주시했다. "허허허... 철산, 비호, 표빈, 사릉! 네놈들 역시 이토록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했을 줄은... 놀랍구나." "백약사 할아버지...!" 그들 네 사람도 치솟는 격정에 전신을 떨고 있었다. 백리사헌은 시선을 네 청년의 좌측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굳은 안색으로 스물여섯 명의 청년들이 서 있었다. "그랬군. 노부는 이제야 알았다. 천예살군 너의 수하들이 바로 밀천무영세가의 후예들임을."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궁예린은 흠칫하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것을 어찌... 백약사 할아범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예전에 불렀던 칭호를 사용했다. 그것은 그가 지금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백리사헌은 그런 궁예린을 보며 쓰디쓴 고소를 머금었다. "녀석! 노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렇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역시 천리(天理)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구나. 예린아! 너는 석년에 너의 조부 궁사를 해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 순간 궁예린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 것을... 아신단... 말인가... 요...?" 그의 눈은 강렬한 기광을 줄기차게 폭사하며 백리사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백리사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노부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 흉수는 바로 노부 자신이니까!" 찰나지간 궁예린의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다, 당신이... 흉수...!"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렴풋이 느꼈다. '그렇다! 흉수의 뒷모습... 어찌 백약사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전날 잠마풍주를 제거할 때... 그렇구나. 그는 바로 백리사헌의 첫째 제자 잠마도였다!' 마침내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 지난날 안개 속에서 보았던 흐릿한 환영이 선명히, 너무도 선명히 궁예린의 뇌리에 박히고 있는 것이었다. 백리사헌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노부가 너란 존재를 너무 잊은 것 같구나. 천예살군의 그토록 뛰어난 혜지와 그 수하들의 완벽한 정보망을 이제야 느끼다니..." 궁예린의 얼굴은 침통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당신... 당신은 꼭 밀천무영세가를 무참히 제거해야 했습니까? 그러지 않았어도 당신은 야망을 충분히 펼칠 수 있었을 것이 아니오?" 궁예린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절규와 오열을 뿌렸다. "허허허... 그럴 수도 있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노부의 가장 큰 실수였지. 나의 아들이 나에게 검을 들이댈 줄... 허허허!" 너무나도 허전한 음성이 백리사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도저히 백리사헌이 말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말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이 사실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허허, 린아! 노부가 이 나이까지 가장 잘했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너 궁예린을 노부의 후계자로 찍은 것이다. 봐라! 너는 이렇게 훌륭히 노부 앞에 당당히 서 있지 않느냐?" 궁예린은 신음했다. "크윽, 성주! 당신은 그 사실을 밝히지 말았어야 했소. 나는 당신을 기필코 죽일 것이기 때문이오." 궁예린의 눈에 고뇌가 서리며 동시에 무서운 살기도 한없이 스미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백리사헌은 궁예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 너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노부는 너를 제거하기 위해 무형극살이라는 가공할 살학(殺學)을 터득했으니 말이다." 백리사헌의 우수에서 어느새 승천도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사 년! 노부의 애도가 너로 인해 노부에게 쥐여지게 될 줄은..." 백리사헌의 눈에는 회한이 가득 물결치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궁예린도 묵광을 번뜩이는 묵도를 손에 든 채 백리사헌을 주시하고 있었다. "성주! 당신 역시 조심해야 될 것이오. 나는 밀천무영세가의 무학으로 당신의 가슴에 검(劍)을 꽂을 것이오." 궁예린은 천천히 묵도를 가슴에 포갰다. "놀라운 일이군. 밀천무영세가가 지옥무벌의 후예일 줄은..." 이미 궁예린이 지옥무벌의 무학을 익혔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쉽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백리사헌은 부지중 경악성을 터뜨리며 승천도를 허공으로 치켜세웠다. 어느 한쪽이 승리한다 해도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가을비는 두 사람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강기에, 채 몸에 닿기도 전에 튕겨 나가고 있었다. 또한 주위의 공기는 암중에서 부딪치는 강기에 무섭게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회오리치는 기류에 휩쓸린다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았다. 궁예린은 묵도를 으스러지도록 부여잡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성주! 나는 당신의 가슴에 할아버님과 밀천무영세가 가혼(家魂)들의 원혼을 돌려줄 것이오!' 그것은 곧 백리사헌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그의 굳은 결심이자 약속이었다. 백리사헌은 내심 궁예린에게 부르짖고 있었다. '노부는 무형극살을 최대한으로 펼칠 것이다. 이것은 사소한 정(情)에 좌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자! 진정한 강자를 뽑는 것일 뿐이다!' 그 역시 승천도를 힘껏 잡았다. '아무쪼록 무형극살을 막을 수 있기를 바란다!' 찰나지간 궁예린의 낭랑한 일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살파천지예! 살파천(殺破天)...!"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흡사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그의 신형은 어느새 하나의 점으로 허공에 솟구치고 있었다. 살파천지예(殺破天地藝)! 살예십팔식의 전반 구초식을 집대성한 지극폭(地極暴)이 땅을 무너뜨리는 기학(奇學)이라면, 살파천은 후반 구초식을 모은 것으로 하늘조차 무너뜨릴 수 있다는 기학이었다. 한 초식의 쾌초에 무려 삼만 팔천육백(三萬八天六百) 번의 변화가 담긴 대륙이 탄생시킨 살(殺)의 극치였다. 바로 그 살파천지예, 살파천이 드디어 궁예린의 밀천여의묵봉에 의해 펼쳐지고 있었으니... "궁예린! 노부는 최선을 다할 것이니 조심해라!" 백리사헌의 웅후한 음성이 지축을 울린 순간, 그의 신형이 마치 팽이처럼 회전을 하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지반이 균열하고 십여 장 밖의 거각들이 마구 흔들렸다. 이것이 진정 인간의 무학이라 할 수 있는가? 허공에는 오직 묵광과 백광의 그림자만이 금속음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분지 안에 하나의 인영이 들어섰다. "예린! 그분은 나 백리유정의 아버님이시다! 손속에 사정을 둘 수 없겠느냐?" 참담한 침통성이 분지를 뒤흔들었다. 백리유정, 그가 드디어 이 결전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안색에는 침통함과 절망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이 비극을 막기 위해 그토록 고심했건만... 천학우사 그가 앞을 가로막지만 않았던들..." 일순, 철산, 손비호, 표빈, 유사릉은 이 사실 앞에 커다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유정... 그가 백리사헌의 아들이라니...' '백리유정이라니...' 그들은 새삼스레 침통한 절망감에 빠져 있는 백리유정을 주시했다. '그랬군. 그래서 무림성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던 거야...' 그들의 내심이 끝없이 이어질 때, 공지 안에는 백여 명의 흑영들이 내려섰다. 흑의철갑인, 바로 죽음의 검은 전신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비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백리사헌을 주시하고 있었다. "성주님! 어찌 저희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백리사헌을 위해 한목숨 버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그는 궁예린과 일전을 벌이고 있는 백리사헌을 향해 소리쳤다. 그때 그의 옆에 나타난 천학우사는 만면에 침통함을 가득 담고 허공의 백광과 묵광을 주시했다. "성주! 노신으로서는 이들의 충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실로 이 모든 상황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궁예린의 우수에 들린 묵도는 한순간 그 기세를 흠칫했다. '유정! 네가 백리사헌의 아들이었다니... 그렇구나. 너의 짙은 그늘에 담긴 고뇌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그 순간이었다. "헉...!" "으윽...!" 두 마디 신음성이 허공에서 터지며 사방으로 핏줄기가 무지개처럼 퍼져 나갔다. 그리고 분지는 거짓말처럼 적막을 찾았다. 5 궁예린의 어깨부터 가슴까지 길게 그어진 도흔(刀痕)은 허연 뼈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폭포수 같은 선혈이 하염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한편 백리사헌 역시 온전치는 않았다. 옆구리가 길게 그어져 뜨거운 핏물을 콸콸 쏟고 있었다. 양패구상.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라 할 수 없는 동패(同敗)를 이룬 것이었다. 백리유정은 고뇌가 담긴 시선으로 궁예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묵직한 침묵을 깬 것은 궁예린이었다. "유정! 너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구나." "그렇다, 예린! 나는 너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으로서는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백리유정은 백리사헌의 옆에 서서 얼굴 가득 침통함을 가득 감고 있었다. 그의 좌우에는 검은 전신들이 눈에 강렬한 기광을 뿌리며 백리사헌을 호위하고 있었다. 가을비는 이제 어느덧 부슬비로 변해 있었다. 문득 백리사헌의 입가에 쓰디쓴 고소가 피어올랐다. "그랬군. 어쩐지 너무 쉽게 노부의 아성이 무너졌다 했더니... 유정 네놈이 뒤에서 활약을 한 것이군." 그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아버지는 중원에 절대(絶代)의 아성을 세우고 그 아들은 부순다... 이것이 내가 바란 절대요, 아성이란 말인가? 허허허..." 그 웃음은 좀처럼 가시지를 않았다. "끝내는 자식놈 때문에 목숨을 구원받고..." 백리유정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처연한 눈길로 지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백리사헌은 상처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의 옆구리에서 선혈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오연히 궁예린을 주시했다. "린아! 노부는 이 순간 궁사, 그 늙은이가 한없이 부럽게 느껴진다. 하나 노부는 그 누구의 손에도 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 확신이다." 찰나지간 무딘 소음이 들리며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괴변이 일어났다. 백리사헌, 그가 자신의 승천도로 스스로 가슴을 꿰뚫은 것이다. "앗! 아버님!" "성주... 님!" 백리유정과 비는 대경을 금치 못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거역하기 힘든 음성이 백리사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모두 물러서라..." 백리유정과 비는 그 자리에 흠칫 섰다. "노부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기에... 쓰러질 수는 없다. 이대로 선 채로, 저 대륙을 굽어볼 것이다." 장내는 모두 숙연함을 띠고 있었다. 그 순간 백리사헌의 눈에서는 이미 초점이 풀리고 있었다. "비야! 너는 너의 형제들과 함께 무림을 떠나... 거라... 그리고 소연이를... 잘 부탁한다..." 백리사헌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성주님..." 비(飛), 이 충실한 사내의 눈에 뿌연 물기가 가득 서리고 있었다. 백리사헌은 이번에는 백리유정을 바라보았다. "아... 버님!" 백리유정은 보았다. 지금 이 순간 백리사헌의 시선에는 원망, 야망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오직 부드러움만 가득할 뿐이라는 것을. "녀석! 어쨌든 네놈은 훌륭했다. 이 아비를 무너뜨렸으니... 기억해 두거라... 이 아비는... 예린... 저놈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님을..." 백리사헌의 안색은 새하얗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동공에는 이미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다. "압니다. 아버님은... 강자셨습니다. 그것을 소자가 따르기 벅찼을 뿐입니다." 백리유정은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일순, 백리사헌의 입가에 한 가닥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은 이내 궁예린을 주시했다. "린... 노부는... 네놈을... 좋아했다... 너는... 알아야 한다... ��노부가... 이렇게... 죽는... 의미를..." 끝내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하고 백리사헌의 고개는 꺾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입가에는 한없는 미소가 스치고 있었으니... '성주! 아니 백약사 할아범! 린아는 알고 있습니다. 할아범은 이미 린아의 묵도 아래 심맥이 파열되었음을... 그것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자결하신 것임을...' 백리사헌은 마지막 순간에 궁예린의 눈에서 자신의 뜻이 통했음을 느끼고 미련없이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복수를 하지 마라! 너희들은 서로 예전과 같은 친구로 지내기를 노부는 바란다! 그 굳은 생각에 궁예린은 수긍하고 있었다. 6 백리사헌은 누구에게도 굽히기 싫었기에 선 채로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은 또한 한 시대(時代)가 끝나는 것이기도 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비는 천지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문득 궁예린은 백리유정을 부드러운 눈으로 주시했다. "유정! 우리 세대만은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떠맡지 말자. 절운협의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그러고 신형을 돌려 분지를 벗어났다. 그 뒤를 이어 철산, 표빈, 손비호, 유사릉과 이제는 새로이 탄생하는 밀천무영세가의 밀천무영이십육살이 궁예린의 뒤를 따랐다. 백리유정의 눈은 격정으로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린! 우리만은 다시는 이런 비극을 돌이키지 말아야 한다." 그의 떨리는 시선은 궁예린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언제까지나 응시하고 있었다. 궁예린이 막 성문을 나섰을 때였다. "린! 당신... 예린이... 틀림없지?" 한없이 떨리는 가냘픈 음성이 앞에서 들려 왔다. 궁예린은 어디선가 많이 귀에 익은 음성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의 시야에 여인의 모습이 하나 가득 들어왔다. 바로 함소혜였다. "소, 소혜..." 궁예린의 시선이 파르르 떨리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 맞아요... 당신은 예린이 틀림없어요." 순간 함소혜는 격정을 참지 못하며 궁예린의 가슴에 전신을 묻었다. "소혜, 그대가 어찌 이곳에..."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소혜는 지금 이대로... 이대로 있고 싶어요." 그 순간 쓸쓸히 성을 빠져 나가는 한 인물이 있었다. 관무상, 그는 입가에 쓰디쓴 고소를 베어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예린! 네가 천예살군이었을 줄은... 너무도 뜻밖이군. 결국 나란 놈은 너에게 그 무엇으로도 당할 수가 없었군." 그는 뿌옇게 흐려 있는 하늘을 응시했다. 얼굴을 간질이는 부슬비가 제법 차가웠다. "그래, 이 빗속에 모든 것을 씻어 버리는 것이다. 사랑도, 승부도... 이제 이 관무상은 아버님의 뒤를 이어 관(官)의 길을 걸으리라." 가을비는 참으로 많은 것을 남기고 있었다. 궁예린과 함소혜가 굳게 포옹하고 있는 그때, 웅후하고 탁한 음성이 궁예린과 함소혜의 아름다운 상념을 깨뜨렸다. "하하하, 사위! 자네가 내 딸을 두고서 그럴 수가 있나?" 그 뒤를 이어 질투와 오기가 담긴 음성이 들려 왔다. "흥! 아버님도 어찌 저런 바람둥이 사내와 정혼을 맺어 주셨죠?" 찰나지간 궁예린의 눈에 공포가 가득 드리워졌다. '악! 저 여자가... 또...' 그의 시선은 우측의 한곳에 못박혔다. 그곳에는 사마추련이 두 눈에 질투를 가득 담은 채 함소혜의 위아래를 맹렬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건장한 체구에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초췌한 중년인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철검무적 사마혁. 바로 사마추련의 부친이자 궁사의 의형제이며, 궁사가 맺어 준 궁예린의 빙부였다. 궁예린이 사마혁에게로 시선을 돌린 순간, 그의 눈은 급격한 파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빙... 빙부님, 살아 계셨군요." 그의 전신은 격정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에게 무학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 한 그를. 사마혁 또한 격정이 이는 듯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녀석! 네놈은 역시 잠룡(潛龍)이었구나. 형님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흡족히 눈을 감으실 것이다." 그는 한순간 부슬비가 내리는 허공을 주시하며 두 눈에 어린 뿌연 물기를 감추었다. '형님! 저놈을 보고 계십니까? 저 자랑스런 모습을...' 그는 이미 사마추련에게서 현재의 상황을 자세히 들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형님! 저 아이는 칠절마군 담석강의 아들 담천화가 아닙니다. 궁가의 가업을 이어받은 형님의 자랑스런 손자 궁예린일 뿐입니다. 또한 소제에게는 훌륭한 사위이기도 하구요. 이 모든 것은 형님 말씀대로 비(秘)에서 시작되어 비(秘)로 끝날 것입니다.' 사마혁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 모든 것에 대해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않기로 결심했다. 바로 그때였다. "흥! 저 엉큼한 사내, 그렇다면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시기만 바랐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눈이 뒤틀릴 사마추련의 입에서 드디어 가시 돋힌 뾰족한 음성이 터지고 말았다. 그 순간 궁예린은 흠칫 신형을 떨며 사마혁을 응시했다. "빙부... 님... 하면... 저... 여인이 바로... 사마추련으로... 저의..." 궁예린의 음성은 사뭇 떨리고 있었다. 사마혁은 어느새 내심을 가다듬으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다네. 자네와 어린 시절 정혼한 정혼처(定婚妻)로 나의 무남독녀 사마추련이 바로 저 아이네." 사마혁의 시선은 한없는 사랑을 담고 옆에 기세등등히 서 있는 사마추련을 응시했다. "저 아이가 기특하게도 이곳 철뇌옥까지 와서 이 못난 아비를 구할 줄은..." 궁예린은 그 사실 앞에 무서운 충격을 느꼈다. '으윽, 이런 무서운 일이... 저 여우가 나의 정혼처였다니...' 일시간에 궁예린의 안색은 새하얗게 변하며 마치 구겨진 휴지 조각처럼 일그러졌다. 그때 표빈과 유사릉, 손비호, 철산은 만면에 함빡 미소를 지으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대장! 아니, 가주님! 이제 본 세가는 저분 주모님으로 인해 더욱 강해질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자고로 안이 튼튼해야 밖도 튼튼한 것은 만고의 철칙이니까요." 그 순간 사마혁은 이미 저 앞에 나아가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하! 사위, 뭐 하나? 자네에게 한잔 얼큰히 대접받고 싶네. 내가 애지중지 키운 딸을 그냥 줄 수는 없지 않는가?" "흥! 그저 예쁜 계집들만 보면 헤벌쭉해서...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그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을 거야." 사마추련은 무서운 결심을 하며 궁예린을 흘겨보았다. '크으... 저 여우가 내 정혼녀라니... 저 여우가...' 궁예린은 그렇게 수백 번을 되뇌이며 채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사마혁의 뒤를 따랐다. 새로운 시대를 열 절대자는 이렇게 한 여인 앞에서 오금을 못 펴고 있었다. 가을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비가 그치면 밀천무영세가는 새롭게 힘찬 약동을 할 것이다. 다시는 힘이 약해서 당하는 일이 없는 강자들의 집합체로서, 그 맥을 이어 갈 것이다. 서림(書林)의 세계(世界) 속에서... 〈 大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