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9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역자 서문 09/10 06:47 29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역자 서문 향을 사르고 검을 논하다 이 작품은 대만의 유명한 무협소설 작가 사마령의 [분향논검편 (焚香論劍篇)]을 완역한 것이다. 사령은 대만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으로 와룡생과 함께 무협 소설계의 양대산맥으로 칭 송되는 유명 작가이다. 특히 이 작품은 불교 사상을 작품 속에 잘 용해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는 명작이며, 대만의 중앙일보에 절찬리에 연재되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 작품의 주제는 한 인간이 정파 무예의 총본산인 소림사와 사파무술의 총화인 마교의 무예를 한몸에 익혀 파사현정의 대업 을 과연 성취할 수 있는가에 집중된다. 또 김용의 [천룡팔부]와 분위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 특이하 다. 매우 독특한 소재와 흥미로운 줄거리, 특히 심리전을 잘 묘사 한 이 작품을 감히 독자제현께 권해 드리며, 함께 변역해 주시 고 원본을 구해 주신 왕사성 선생님께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옮긴이 박영창 #3320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1.1.소림사 방장 대사 09/10 06:49 257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1.1. 소림사 방장 대사 대강(大江: 양자강을 말함) 남북에 명성을 떨친 고수, 쌍창(雙 槍) 허일산(許一山)이 세상을 떠난 지 십여 일이 지났다. 금릉 (金陵)에 자리 자리잡은 그의 집에는 조의를 표하러 온 사람들 이 문밖과 집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물론 이 사람들은 모두 각처에서 달려온 무림의 인물들이었다. 허일산의 죽음이 이토록 무림을 시끄럽게 만든 이유는 세 가지 였다. 첫째는 허일산의 무공이 매우 고강하고 교제가 아주 넓다는 점 이었다. 두 번째는 그의 장례식을 당금 무림에서 존경을 받는 천강수 가공량(柯公亮) 대협과 그의 부인이 주관하고 있으며 두 부부의 이름으로 부고가 돌려졌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허일산 이 비록 오래 전에 상처한 몸이었지만 슬하에 령주(靈珠)라는 딸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령주는 근 2년 동안 부친과 함 께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많은 일을 했는데 무공에 있어서는 가 전지학(家傳之學)을 이어받았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었고, 그림 도 잘 그리고 시도 잘 읊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색이 아주 뛰어나 국색천향(國色天香)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여서 무림 제일 미인(第一美人)의 아호(雅號)를 얻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림의 인물들은 허일산과의 교분, 당금 무림에서 숭앙을 받고 있는 가공량 대협 부부와 무림 제일미인이라는 허령주를 구경하 고 싶은 욕심에서 이번 장례에 참석했던 것이다. 천강수 가공량은 부인 곡홍영(谷虹影)과 함께 조의를 표하는 귀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이 며칠 동안 적지 않은 명가(名家)와 기숙(耆宿)들이 친히 찾 아왔는데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가장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들 두 사람은 바로 응장(鷹杖) 막대풍(莫大風)과 군산(君山) 현묘관(玄妙觀)의 석일학(石一學) 도인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당금의 명숙들로 근년에 강호에서 얼굴을 내밀 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친히 왕림해서 조의를 표하자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고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 다. 이날 정오 무렵이었다. 영당(靈堂) 안팎에 갑자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0년 동안 무 림에 명성을 떨쳐온 독각룡왕(獨角龍王) 응진(應眞)이 조의를 표하러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각룡왕 응진이라는 사람은 마음이 독하고 손 씀씀이가 악랄 한데다가 불 같은 성격을 지닌 사람이어서 그에게 꺾이고 욕됨 을 당한 명수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응진은 숭산 (嵩山) 소림사(少林寺) 출신인데도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짓을 잘했다. 때로는 속인의 옷차림을 하기도 하는데 소림사에서는 그를 전혀 간섭하지 않고 있어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매우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오늘 나타난다고 하자 모두들 이 괴걸의 참모습을 보려고 했던 것이었다. 영당에 애조를 띤 가락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몸에 가사를 걸 치고 머리에 승모를 쓴, 허우대가 우람한 화상이 영전 앞에 절 을 올리고 있었다. 바로 응진이었다. 그는 큰절을 한 번 올린 후에 몸을 일으켜 번갯불 같은 눈빛으로 사방에 서 있는 사람들 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응진 화상은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 큼지막한 입을 지니 고 있어서 은연중 위엄과 살기가 뻗쳐나오고 있었다. 그는 짙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상복을 입고 있는 허일산의 의아들 양진(楊晉)을 향해 물었다. [자네의 누이동생은 어디 갔는가?] 사람들은 그가 입을 열자마자 여자에 대해 묻는 것을 보자 고 개를 가로저었다. '이 땡초는 예의를 모르는구나.' 양진은 공손히 대답했다. [소제는 이미 사람을 보내 누이동생에게 응형이 오셨다고 전했 습니다.] 독각룡왕 응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의지할 사람을 잃었으니 불쌍하군.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원래 허상에 불과하다네. 이 세상에 태어나 늙어 병 들어 죽는 것은 세상 온갖 만물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네.] 사람들은 그가 조의를 표하러 와서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자 그 의 말이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응진이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 [소문에 들으니까 가형과 곡누님께서 장례를 주관하고 계시다 고 하던데 어째서 그분들이 보이지 않는가?] 양진은 대답했다. [가대협 부부께서는 막 나가셨는데 잠시 후에 돌아올 것이니 응형은 앉아 기다리도록 하시지요.] 이때 몇 명의 허씨 저택 사람들이 영당 안에 서 있는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어깨로 슬쩍슬쩍 밀거나 팔굽으로 손님들 을 가볍게 건드려 뒤로 물러서게 만들고 영당 앞에 빈터를 마련 해 놓았다. 별안간 양진은 커다란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응형, 우리 의부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당신은 잘 알고 계 시겠지요?]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두 사람이 안에서 걸어나와 양진의 양옆 에 붙어 섰다. 바로 당금 무림의 명숙인 응장 막대풍과 군산의 석일학 도인이었다. 막대풍은 언제나 손에서 응장을 놓지 않기 때문에 그의 손에 응장이 들려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군산 석일 학의 등뒤에는 장검이 달려 있었다. 일순 사람들은 긴장했다. 사실 독각룡왕 응진은 지난 10년 동 안 크고 작은 싸움을 백여 번이나 치루었는데 매번 승리하였다. 소문에 들으면 무공의 고강함에 있어서는 소림사에서도 으뜸으 로 꼽힌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늘 만약 싸우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응장 막대풍과 군산 석일학 두 사람이 비록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들이긴 하 지만 일대일로 싸워서는 응진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응진은 짙은 눈썹을 한데 모으고 입을 열었다. [자네의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양진은 크게 호통을 쳤다. [지금 천하영웅들 앞에서 양진은 한 가지 무림의 추악하고 악 독한 일을 선포하겠소. 우리의 의부님 허일산은 바로 이 고약한 화상 독각룡왕 응진의 손에 의해 돌아가셨소. 이 고약한 화상이 우리의 의누이동생 허령주를 사랑하고 사모했으나 끝내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 우리 의부님께 발각을 당해 꾸지람을 듣자 화가 나서 의부님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 일은 믿을 만한 증거가 있으니 결코 이 흉악한 자기 시치미를 떼지 못할 것입니 다.] 독각룡왕 응진의 이마 옆에 나 있는 밤톨만한 혹이 새빨간 빛 으로 변하고 두 눈에서도 살기가 감돌았다. 그는 날카로운 어조로 호통을 쳤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이 응진이 어찌 그와 같은 간악한 자일 수가 있겠느냐? 네가 만약 오늘 진상을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그는 원래부터 양진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양진이 마음이 좁고 성격이 변화 무쌍했기 때문이었다. 양진은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응장 막대풍과 석 일학 두 사람을 믿고 큰소리로 말했다. [응진, 당신은 십 년 전, 돌아가신 우리 의부님과 알게 되었 소. 그런데 어째서 작년에 나의 누이동생을 만나게 되었을 때 한사코 서로 남매로 호칭하자고 고집을 피웠소?] 응진은 냉랭히 웃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그는 소탈하면서도 오만한 데가 있어 속된 예의에 구속을 받지 않았 다. 다만 허령주와 매우 의기 투합했기 때문에 호칭을 바꾸자고 제안했을 뿐이고 그와 같은 일은 하찮은 일로 논쟁하고 싶지 않 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방의무림 호걸들은 응진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 고 양진의 말을 상당히 믿기 시작했다. 양진은 다시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진은 작년에 한 수의 시를 써서 우리 누이동생에게 준 적이 있는데 그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소이다. '열세 살 먹 은 여자와 열다섯 살 먹은 총각이 매일 만났네. 하지만 얼굴만 붉힐뿐 손도 잡지 못했네.' 그리고 또 두 마디의 구절은 다음과 같았소. '이별한 후 멀리서 서로 그리워하네. 눈이 쌓이고 달빛 이 흐르는 창문 앞에서 그리움을 편지에 담아 보내리.' 여러분, 생각해 보시오. 이 말이 어찌 화상이 노래하고 화답하는 시라고 할 수 있겠소?] 이때 안팎에는 사람들이 꽉 들어 차 있었다. 그러나 모두 강호 의 호걸들이라 시사지도(詩詞之道)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양진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풀어서 들려주자 대뜸 이곳 저곳에서 야유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독각룡왕 응진은 극도로 치미는 분노에 오히려 웃으면서 하늘 을 우러러 중얼거렸다. [황당하군. 너무나 황당한 일이야.] 양진은 계속해서 지적했다. [우리 의누이가 바로 살아있는 증인이오. 그녀가 지적하고 증 명하면 되고, 더 이상 왈가 왈부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나는 다만 여러 사람 앞에서 한마디만 묻겠소. 이번에 추악한 일을 저지른 후에도 마음속으로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소? 그런데도 감히 달려와 조의를 표한다니, 도대체 낯가죽이 너무 나 두껍군. 설마하니 당신은 우리 의누이동생이 감히 당신의 악 행을 증명하지 못하리라 생각하오?] 응진은 호통쳤다. [쓸데없는 잔소리는 작작하고 영주를 나오라고 해라.] 양진은 음흉하게 코웃음치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번에 커다란 변고를 겪자 실의에 빠져 있소. 내 어 찌 그녀로 하여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귀찮게 증언을 하라고 시킬수 있겠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증언한 적이 있소. 막 노선배님과 석 진인이 바로 우리 누이동생의 증언을 들은 분 들이외다.] 응장 막대풍과 석일학의 안색은 무겁고 엄숙했는데 그저 미미 하게 고개를 끄덕여 양진의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시인했다. 독각룡왕 응진은 이때 그만 놀람과 의아함에 잠기게 되어 그 두명의 무림명숙을 바라보았다. '저 두 사람의 무공이 고강하지만 내 적수가 못 된다. 그러나 그들은 함부로 나설 사람들이 아닌데 나선 걸 보니 허령주가 정 말 그와 같은 증언을 한 모양이로구나.' 그러나 그는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이번 일이 너무나 아리송하고 이상하여 일시 갈피를 잡을 수 없 는 심정이었다. 뭇 사람들은 그가 묵묵 부답인 것을 보자 그가 할 말이 없어서 그러는 줄로 여기고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양진은 호통을 쳤다. [응진, 더 할 말이 있소?] 응진은 비웃음을 담고입을 열었다.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네. 이 일은 틀림없이 음모이네. 나를 함정에 빠뜨릴 뿐 아니라 어쩌면 온 무림을 파멸시키려는 음모 일지도 모르네. 가형과 곡누님께서 돌아오신 후 그분들이 어떻 게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보는 수밖에 없겠네.] 양진은 그 말을 받았다. [여러 친구들은 모두 그의 말을 들었지요? 우리들은 조용히 가 대협께서 왕림하시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소이다.] 영당 안은 너무나 조용해서 바늘이 떨어져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독각룡왕 응진은 마음속으로 매우 초조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우뚝 서 있었다. 응장 막대풍과 석일학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고 응진을 주시하 고 있었다. 잠시 후에 영당 밖에 한 쌍의 중년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람들 틈으로 걸어들어 왔다. 중년의 남자는 몸에 하얀 대괘를 걸치고 있는 것이 무척 소박 하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얼굴이 단정하면서도 네모져서 절로 사 람을 누르는 위엄이 뻗쳐나고 있었다. 여인은 버들 같은 눈썹에 동그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으며 살 결은 희고 윤기가 나는 것이 비록 중년에 접어든 여인이었지만 그 미태가 아직 남아 있는 상태였다. 바로 대협 천강수 가공량과 부인 곡홍영이었다. 이들은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인심협골(人心俠骨)을 지닌 사람들로, 많은 분규를 해소시켜 왔기 때문에 명성이 혁혁하여 천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함께 걸어서 응진 앞에 이르렀다. 독각룡왕 응진은 곧 합장하고 인사를 했다. [가형, 그리고 곡누님, 마침 잘 오셨소.] 곡홍영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지 않았다. 가공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줄곧 밖에 있었으며 자네와 양진이 주고 받는 말을 모조리 들었다네.] 독각룡왕 응진은 일순 어리둥절해져서 곧 눈길을 옮겨 곡홍영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곡홍영은 외면하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 찰나, 독각룡왕 응 진의 가슴속에는 많은 지나간 일들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3321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1.2.소림사 방장 대사 09/10 09:13 392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1.2. 소림사 방장 대사 그가 떠올린 광경에는 이 한 쌍의 부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꽃 나무 앞에서 달빛을 받으며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도히 논하던 광경도 있었고, 유명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산천 을 배회하며 온 세상을 아래로 굽어보면서 휘파람을 내불던 광 경도 있었다. 그가 무림에 나선 이래 무공이나 인품에 있어서 유일하게 그를 탄복시킨 사람은 바로 이 한 쌍의 부부였다. 가공량은 천성적으로 성격이 소탈하고 의협심이 많은 사람이었 지만 한 가지, 너무 굳건한 것이 결점이었다. 곡홍영은 문무를 겸비한 재원이었으며 그들 두 사람과 한 방에 서 시를 이야기하고 검을 논하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응진은 가씨 부부가 그 자신을 위해서 보증인이 되어 줄 것이 며 여러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리라고 여겼었다. 한데 뜻밖에 그들은 놀랍게도 밖에 서서 양진이 자기를 모욕하는 말들을 그 대로 듣고서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울분이 치미는 것을느꼈다. 특히 곡홍영이 고개를 숙이고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역시 자기가 그와 같이 포악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 마음속으로부터 끓어오 르는 분노는 더욱더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가공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친형제처럼 사귀어 온 만큼 교분 은 결코 다른 사람들과 비할 바가 아닐세. 그러니 자네는 마땅 히 내뜻을 따르리라 생각하네.] 독각룡왕 응진은 들으면 들을수록 울화가 치밀어 '흥' 하고 코 웃음을 쳤다. 뭇 사람들은 가공량의 말을 듣자 그 말이 대인대의(大仁大義)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는 더욱 정의와 공 도(公道)를 지키겠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응진이 사늘히 코웃음치자 모두 분노해서 야유하 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었다. 가공량은 손을 들어 뭇 사람들이 소리치는 것을 저지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응진, 자네는 나에게 한마디의 대답을 해주어야 할 것이네.] 응진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광소를 한번 터뜨리며 손을 내 저었다. [하하하! 비켜나시오. 더 이상 나의 귀를 간지럽히지마시오.] 가공량은 마음속의 고통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안색이 일변 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사실 그는 정직하고 공평 무사한 사람으로 한번도 이처럼 모욕 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터였다. 거기다가 그는 응진을 마치 자기의 친형제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응진이 이때만큼은 반드시 얌전하게 자기가 한 말에 대답하리라 생각했 다. 응진이 여러 사람 앞에서 맹세코 그일을 자기가 한 짓이 아니 라고 말하면 그 역시 자기의 명예를 걸고 응진이 무고하다고 변 호하여 뭇 사람들의 의혹을 씻으려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응진이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자 그 같은 바람은 깨지고 말아, 그는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서서 가슴을 에는 듯한 고통 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응진이 그같이 추악한 일을 했으리라 믿지 않았지만 몸소 허령주로부터 증언을 들은 바 있었다. 응진은 오만 방자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 도 배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석일학은 장검을 뽑아들며 왼손으로 수염을 쓰다듬 고 입을 열었다. [응형이 무공이 고강하여 천하의 사람들을 안중에 두지 않는 모양인데, 빈도는 무림의 정의를 위해서 외람되나마 응형에게 몇 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응진은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얼마든지 덤벼 보시오.] 웃음소리와 더불어 그는 갑자기 오른손의 식지와 중지 두 손가 락을 내밀어 지극히 신속하고 재빠르게 석일학의 장검의 끝을 끼워잡았다. 석일학은 진력을 돋구어 뒤로 장검을 끌어당겼으나 장검은 털 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았다. 속으로 깜짝 놀라게 되었을 때 응진 이 어느덧 손가락을 풀면서 손을 움츠리더니 앙천 대소하는 것 이 아닌가. [허허허! 당신은 아직 멀었어!] 응장 막대풍은 오래 전부터 강호에서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그 만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응진이 그 같은 한 수를 펼치는 것을 보자 오늘의 싸움에서 자기가 석일학과 손을 맞추 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응장 막대풍은 즉시 호통을 쳤다. [이와 같이 사악한 자를 상대함에 있어서는 규칙이나 시비를 따질 것 없소. 석진인(石眞人)은 빨리 나서시오.] 그의 응장은 땅을 짚으면 가슴까지 오는 길이였다. 그 위에는 한 마리의 구리로 만들어진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상태로 조각되어 있었다. 독수리 부리에 해당하는 곳은 물론 예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뿐만 아니라 두 나래가 활짝 펼쳐져 드러난 깃털 또한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때 응장 막대풍이 응장을 거꾸로 들고 손으로 응장의 꼬리 부분을 쥐고 '휙'하니 응장을 휘둘러 쓸어쳐 왔다. 독각룡왕 응진은 왼손을 한번 떨쳐서 한 가닥 힘을 뻗쳐내어 응장을 받들듯이 하면서 옆으로 한 자 정도옮겨 알맞게 그의 몸 옆을 스치듯이 지나쳐 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오른손 은 그 수간 앞으로 뻗쳐지면서 다시 석일학의 손에 들린 장검을 빼앗으려고 했다. 석일학은 장검을 한번 떨치며 몇 점의 차가운 별빛 같은 광채 를 뿌려내며 응진의 손목과 팔뚝에 있는 몇 곳의 혈도를 뒤덮었 다. 응진은 검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오른손을 재빨리 한번 움츠렸다가 뻗치면서 주먹을 쥐고 쪼개내었는데 그 힘이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았다. 석일학의 검세는 대뜸 그 한 가닥의 권력(拳力)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산란해지면서 정체되어 다음의 변화를 펼치지 못했다. 응진은 단 한 쌍의 맨손만 사용해서 주먹을 뻗쳐내고 손으로 후려치는 등, 눈 깜짝할 사이에 석일학과 막대풍을 허둥지둥하 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응진의 소행을 멸시했지만 그가 그토록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고 탄복했다. 가공량은 응진의 무공이 고강하고 내공이 심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석일학과 막대풍이 크게 명성을 떨쳤지만 여전히 응진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이번 일의 시비 곡직을 판가름하기 전에는 두 분 명숙의 명성 이 땅에 떨어지도록 할 수는 없다.' 그는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응진, 손을 멈추게.] 응진은 왼손으로 장법을 펼치고, 오른손으로는 한 대의 주먹을 뻗쳐내 석일학과 막대풍 두 사람을 물러서로록 한 후 뒤로 몇 자 훌쩍 몸을 날리며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와의 교분을 돌본다면 즉시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 오.] 가공량은 안색을 굳혔다. [자네는 도대체 그와 같은 간악한 일을 저질렀는가, 저지르지 않았는가?] 응진은 곡홍영을 곁눈으로 한번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자 속으로 충격을 받아 격앙되어 날카롭게 외쳤다. [당신들이 상관할 필요 없소.] 가공량은 앞으로 두 걸음 나서면서 낭랑히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의 정과 의는 단절되었네. 나는 자네의 무공이 고강하고 나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네. 그렇기 때문 에 나는 막 선배와 석진인, 두 분의 협조를 받아 자네를 잡겠 네.] 석일학과 막대풍은 일제히 입을 열었다. [좋소. 우리 이 사람을 잡은 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그 순간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하면서 곡홍영이 어느덧 응진의 앞에 내려섰다. 응진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좋소. 당신도 함께 손을 쓰는 것이 옳을 것이오.] 곡홍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결코 당신이 그와 같은 사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믿지 않 아요. 하지만 여러 사람의 말은 금이라도 녹인다는 속담이 있어 요.] 응진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비켜나시오! 내 귀를 더럽히지 마시오.] 곡홍영은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손을 쓰지 않겠어요.] 독각룡왕 응진은 일순 흠칫했다. 그녀는 무공이 고강했다. 만약 그녀 한 사람이 더 많아지면 오 늘의 싸움은 승패가 이미 판가름 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손을 쓰지 않는다면 승부는 말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남편 가공량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는데도 그녀가 여 러 사람들 앞에서 이번 싸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니 응진이 어찌 놀라고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곡홍영은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에게 말해줘요. 그런 일이 었었어요, 없었어요?] 응진은 감정이 격앙되어 큰소리로 말했다. [없소.] 곡홍영은 말했다. [매우 좋아요…….] 그녀는 느릿한 음성으로 읊었다. [나의 마음은 하늘이 알리.] 그와 같이 읊으면서 그녀는 천천히 물러났다. 그들이 이와 같이 주고 받는 말을 모든 사람들은 들을 수 있었 으나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사이에 조금 도 남 부끄러운 데가 없고 진솔한 믿음이 깔려 있을 뿐이며 결 코 어떤 남녀지간의 사사로운 정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모두들 암암리에 다시 독각룡왕 응진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석일학과 막대풍은 곡홍영이 물러서자마자 즉시 앞으로 나서며 손을 써서 협공을 해왔다. 가공량 역시 일성을 대갈하며 공격해 왔다. 그의 별호가 천강 수라고 일컬어지는 만큼 장력은 지극히 무겁고 웅혼한 편이었 다. 응진이 손을 써서 막았으나 이미 조금 전처럼 마음대로 손을 휘두르는 모습을 엿보기가 어려웠다. 네 명의 고수가 목숨을 걸고 대결하자 영당 안은 세찬 바람이 소용돌이치게 되었고 그 기세가 놀라웠다. 네 명의 고수가 목숨을 걸고 대결하자 영당 안은 세찬 바람이 소용돌이치게 되었고 그 기세가 놀라웠다. 얼마 되지 않아 쌍방은 이미 수십 초를 주고받았다. 별안간 응 진의 왼손을 갈고리처럼 해서 막대풍의 응장을 와락 잡아챘다. 그러자 응장은 비스듬히 밀려나면서 공교롭게도 뻗쳐오는 석일 학의 장검을 막게 되었다. '창'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그 순간에 응진의 오른손은 어느 덧 가공량의 장세를 봉쇄하면서 왼손을 뽑아 질풍과 같이 쪼개 내었다. 이 일 초는 그야말로 우레가 치고 번개가 치는 것 같았 다. 가공량은 피할 겨를이 없어 즉시 진기를 잔뜩 끌어올려 두 손 을 뻗쳐내었다. 곡홍영 깊이 응진의 내력이 심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응진의 일 장이 가공량의 몸 어느 부위에라도 적중하게 된 다면 가공량은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게 되리라는 것 을 알고 그만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앗!] 독각룡왕 응진이 지니고 있는 무공의 고강함은 그야말로 세상 에서 보기 드물 정도였다. 싸움이 격렬하였으나 그의 이목은 여전히 그곳에 있는 여러 사 람들의 동정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 있었다. 곡홍영의 비명 소리에 그는 마음속으로 대뜸 너댓 가지의 상념 을 떠올렸다. 첫 번째의 상념은 그녀가 분명히 이와 같은 결과를 맞게 되리 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손을 써서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가 응진이 그와 같은 비열하고 치사 스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사 실이었다. 두 번째의 상념은 가공량이 죽게 된다면 부인인 그녀 역시 홀 로 살아 남지 못하리라는 점이었다. 세 번째의 상념은 응진이 전력을 다해서 일 장을 후려치지 않 는다면 반격을 받아 가공량의 천강수에 자기 자신이 상처를 입 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네 번째의 상념은 응진 자신이 설사 상처를 입는다 하더라도 즉시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되지 않는데, 가공량과 곡홍영은 자기에게는 형님이나 누님 같은 분이니 자기로서는 그들 부부를 돌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최후의 상념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장력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손바닥은 가볍게 가공량의 가슴에 있는 요혈을 두드리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가공량의 왼손은 그의 어깻죽지에 적중되었다. 이 때 '펑!'하는 소리와 함께 응진의 몸뚱이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옆으로 맴돌면서 저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그쪽에는 가공량 의 오른손이 장세를 펼쳐 그를 막고 있었다. 따라서 다시 '펑' 하는 소리가 일었다. 독각룡왕 응진은 휘청거리면서 곧장 뒤로 밀려나게 되었고 다 섯 걸음을 뒤로 내딛게 되었을 때에야 밀려나는 자세를 가다듬 을 수 있었지만 몸을 휘청거리는 것이 제대로 서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가공량은 응진이 자기에게 쏟아내렸던 장력이 거둬들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때에 두 손을 좌우로 쫙 뻗으며 막대풍과 석일학 두 사람의 공격을 막았다. 영당 안팎은 조용하고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응진의 몸에 집중되었다. 바로 이때 안채에서 한 사람이 달려나오더니 재빨리 응진의 곁 으로 달려와 손을 뻗쳐 그를 부축했다. 그 사람은 몸에 상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눈썹과 눈동자는 그린 듯 아름다웠고 자태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 다.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바로 쌍창 허일산의 외동딸 허령주이며 무림에서 공인하는 제일미녀인 것을 알아차렸다. 이 일은 뭇 사람들의 의표를 크게 찌르는 행동이라 가공량 부 부도 그만 놀라고 어리둥절해져서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져 한동안 다물지를 못했다. 독각룡왕 응진은 허령주가 자기를 부축하는 것을 보고 크게 호 기가 치미는 것을 느끼면서 왼팔로 허령주를 와락 밀어냈다. 그 는 허리에 힘을 주고 대뜸 똑바로 몸을 세웠다. 양진은 그제서야 날카롭게 외쳤다. [영주야, 너 미쳤느냐? 빨리 뒤채로 돌아가지 못할까?] 허령주는 양진이 호통을 치자 나직이 말했다. [응진 오라버니는 정말 영웅 호걸이세요. 만약에 아버님이…… 아…….] 그녀는 몸을 돌리더니 재빨리 달음질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말소리는 무척 나직해서 오직 응진만이 들을 수 있었 다. 가공량은 앞으로 두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이 가공량이 강호에 출두한 이래 나의 천강수에 적중된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 열 번째걸음에서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 었네. 그런데도 자네는 끄떡없는 것을 보니 자네의 공력의 심오 함은 실로 이 가공량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군.] 응진은 마음속으로 허령주가 미처 다하지 못한 두 마디의 말을 음미해 보느라고 가공량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양진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빨리 이 악적을 잡도록 해라.] 영당의 사방에서 각기 한 사람씩 대답을 하며 앞으로 나서더니 응진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손을 쓰 지는 못했다. 가공량은 그 같은 광경을 보고 크게 불쾌해서 호통을 쳤다. [물러서라.] 그 네명의 장한들은 감히 말 한마디 못하고 급히 뒤로 물러섰 다. 가공량은 다시 응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 스스로 결단을 내릴텐가, 아니면 우리가 공적으로 해결 해야 겠는가?] 무거운 침묵이 잠시 감돌았다. 응장 막대풍이 노하여 입을 열 었다. [이와 같이 거만하고 몰염치한 자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 소.] 그는 응장을 쳐들고 앞으로 두 걸음을 내디뎠다. 석일학 역시 입을 열었다. [막형의 말이 옳소이다. 더 말해봤자 득이 될 것은 없다고 보 오.] 그러면서 그 역시 검을 비껴든 채 앞으로 나섰다. 가공량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막지를 않았다. 바로 이때 멀리서 갑자기 불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미타불……] 이 불호 소리는 그렇게 우렁찬 편이 못 되었으나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불호를 듣는 순간 귀가 약간 윙윙거리면서 가 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막대풍과 석일학 두 사람은 손을 멈추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섰 으며 얼굴빛이 무척 무거워졌다. 석일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림의 도형(道兄)들이 달려온 모양이오. 그러나 어느 고승께 서 그와 같은 불호를 외쳤는지 모르겠구려.] 가공량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소림사에서 저와 같은 공력을 지니신 고승은 아마도 세 분밖 에 되지 않을 것 같소. 저 한 소리의 불호는 장경각(藏經閣)의 광자대사(光慈大師)나 달마원(達摩院) 수좌(首座) 광비대사(光 悲大師)가 외친 것일게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잔뜩 긴장했 다. 응장 막대풍과 군산 석일학 두 사람은 당대 무림의 명숙이었으 나 소림사의 일류 고수들과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등줄기에서 그만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몸에 황색 가사를 걸친 대화상이 사람들이 스 스로 틔어준 통로를 따라 성큼성큼 영당 안으로 들어왔다. 이 승려의 허우대는 매우 우람한 평이었으며 보상(寶相)이 장 엄했고 두 눈에서는 신비한 안광이 넘쳐르고 있었다. 그는 곧장 가공량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합장하고 인사를 한 후 입을 열었다. [소림의 홍법승(弘法僧)이 가 대협에게 인사드립니다.] 가공량은 아무 내색을 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답례하며 말했 다. [대화상께서는 별 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홍법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사의 방장(方丈)께서 대협의 유첩(諭帖)을 받아 보시고 즉 시 폐사의 광자, 광비 두 분 어르신과 네 제자를 데리고 달려 오셨으며 특별히 이 홍법에게 먼저 인사를 여쭈라고 하셨소이 다.] #3322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1.3.소림사 방장 대사 09/10 12:01 387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1.3. 소림사 방장 대사 사람들은 소림사의 방장인 광덕대사(光德大師)가 몸소 달려왔 다는 말을 듣고 오늘 아무래도 커다란 풍파가 일겠으며 좀처럼 쉽게 해결을 보지 못할 것 같다고 내다보고 하나같이 잔뜩 긴장 했다. 가공량은 안색을 엄숙히 하고 말했다. [이 가모는 귀사의 방장대사께서 몸소 왕림하시리라고는 생각 지 못했구려. 즉시 나가 맞아들이겠소.] 영당의 문밖에서 사람들이 한차례 소동을 일으키며 다시 통로 가 넓게 트이면서 몇 명의 화상들이 천천히 걸어들어 왔다. 앞장을 선 한 명의 노승은 얼굴이 만월(滿月) 같았고 둥근 눈 썹에 착한 눈매를 하고 있는 분으로, 인자하고 친절한 마음씨를 가진 노승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좌의 양쪽으로 두 명의 노승이 따라서 걸어들어 오고 있 었는데 왼쪽의 노승은 수척하고 왜소했으며 오른쪽의 노승은 허 우대가 크고 거무튀튀한 살결이었으나 그들의 눈썹은 모두 허옇 게 세어 있었다. 세 명의 고승들은 모두 회색의 승포를 걸치고 있어 흔히 볼 수 있는 화상들과 별다른 점은 없었다. 그러나 일거수 일투족에서 위엄이 절로 우러났다. 그들 두 노승의 뒤쪽으로 몸에 황색 가사를 걸친 세 명의 대화 상들이 따르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들어섰던 홍법승과 동등한 신분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가공량은 허리를 구부리고 절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림사 방장과 장경각주, 그리고 달마원주 세 분 대사께서 몸 소 이렇게 왕림해 주셨는데도 불초가 멀리 나가 영접하지 못한 점, 시로 좌가 크옵니다.] 홍법승은 이때 이미 세 노승의 등뒤로 물러선 후였으며 응진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는데 모든 사람들은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서 가까스로 무릎을 꿇을 때 쓰러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림사 방장 광덕대사는 합장하고 대답했다. [가 대협께서는 별 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오늘은 다행히 대협 께서 나서서 일을 처리해주셔서 노납(老衲)은 매우 고맙게 생각 하오.] 세 노승은 응진이 무릎을 꿇는 행동을 마치 못 본 듯했다. 그 러나 뒤에 서 있는 네 명의 대화상들은 모두 다 안됐다는 표정 을 지었다. 뭇 사람들은 소림사의 뭇 승려들이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는 했으나 또 한편으 로는 약간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원래 소림사 의 이 세분 노승으로 말하면 지위가 숭고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 그 누가 직접 그들이 무공을 떨치는 것을 한번 보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가공량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대사들께서는 덕망이 높으시니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자연 공평 하게 처리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눈초리를 응진에게 옮기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응진, 자네가 그 일 장에 실었던 내력을 거둬들이지 않았어야 했네.] 이 말을 듣자 모두들 응진이 조금 전에 손에 사정을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광덕대사는 속으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전부터 가공량이 대인대의한 협사라는 말을 들어 왔는데 그가 이렇게 솔직하니 과연 대인대의한 협사로구나. 하지만 응 진은 결코 그와 같은 비열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당 신은 응진의 진정한 지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응진이 입을 열었다. [세 분사형에게 이 소제가 인사를 드립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에 기운이 쭉 빠지는지 상체를 일으키지 못했다. 광덕 노방장의 좌우 양쪽에 서 있는 광자와 광비는 각기 커다 란 소맷자락을 사뿐히 흔들어 두 가닥 부드러운 경력(勁力)을 밀어보내 응진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광덕 노방장은 탄식하듯 말했다. [그만두자. 그만둬!] 뭇 사람들은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응진이 놀랍게도 소림 사 장문방장의 사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가씨 부부를 포함해 서모두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허우대가 크고 살결이 거무튀튀한 광비대사는 고개를 돌려 천 천히 사방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한번 주더니 즉시 입을 열었다. [소사제(少師弟), 우리 방장 사형께서 친히 산을 내려오신 이 유를 자네는 알고 있는가?] 응진은 공손히 대답했다. [소제는 우둔하니 사형께서 가르침을 베풀어 주옵소서.] 광비대사는 짙은 눈썹을 쫑긋 치켜올리더니 음성을 높여 말했 다. [방장 사형께서는 본래 광자 사형에게 유시를 내려 제자들 몇 명을 거느리고 산을 내려와 이번 일을 처리하도록 하려고 했으 나 이 우형이 한사코 동행하기를 고집하게 되자 방장 사형께서 는 자네의 이 광비 사형이 자기편 사람의 역성 들기를 좋아한다 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몸소 이렇게 나선 것이라네.] 그는 자기 자신을 말하게 되었을 적에 '나'라는 칭호를 쓰지 않고 '자네의 광비 사형'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와 같은 말투 속 에서 그는, 첫째로 두 분 사형에 대해서 불만스러운 뜻을 피력 했고 둘째로는 응진을 사랑하고 가깝게 여기고 있다는 정을 표 시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일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응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고 멍하니 넋을 잃고 그 사 형을 바라보았는데 호랑이처럼 쭉 찢어진 두 눈에 갑자기 눈물 이 어렸다. 광자대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광비, 이 우형의 화를 내는 성질은 이미 없어졌지만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여전하다네. 따라서 마음속의 고통은 자네와 비슷하다네.] 광비대사는 이 불법이 고심한 사형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와 같이 지정지성(至情至性)의 말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 던터라 극도로 감격한 나머지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소제가 잘못했소이다.] 광덕 노방장은 그들이 주고 받는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나직이 염불만 하고 있었다. 형세는 갑자기 긴장되었다. 석일학과 막대풍은 암암리에 운기 행공을 해서 경계를 했다. 이때 광비대사고 몸을 돌려 한 명의 대화상 손으로부터 선장 (禪杖)을 받아들더니 선장의 밑부분을 땅바닥에다가 푹 꽂았다. 선장의 꼬리는 대뜸 네모진 벽돌을 뚫고 반 자 깊이로 빠져들었 다. 곧이어 그는 손을 들어 선장의 머리 쪽을 눌렀다. 그러자 그 선장은 천천히 땅속으로 꽂히게 되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저 한자 정도만 땅바닥에 나와 있는 정도가 되었다. 반드시 내외공을 아울러 닦아 절정의 경지에 도달해야 유경(柔 勁)을 사용해서 선장을 땅속에다 박을 수 있는 것이었다. 대청 바닥은 지극히 견고한 편이었다. 강맹한 힘으로 잇따라 몇번 후려친다 하더라도 바닥이 꺼지는 현상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경으로 그와 같이 선장을 눌러 박았으니 그 공력이야 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가공량과 석일학, 그리고 막대풍 세 사람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놀람과 감탄을 느꼈다. '그의 이와 같은 공력과 조예로 보아 일대일로 싸워서 필적하 기 어려울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겠고, 설사 손을 합쳐 달려든 다 하더라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광덕 노방장은 나직이 염불을 외고 있었다. [사람이 백 년을 살면서 참지 못하고 성을 많이 내는 것은 하 루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성을 내지 않는 것만 못하더라. 사람 이 백년을 살 때까지 부지런하지 못한 것은 하루 동안 부지런히 신심(身心)을 갈고 닦으니만 못하더라. 사람이 백 살을 살 때까 지 마음껏 즐기고 놀기보다 하루 동안 마음을 비워두는 상태로 돌아간만 못하더라. 사람이 백 살을 살 때까지 마음의 분별력을 잃었다면 하루 동안 밝게 통찰하고 깨닫느니만 못하더라.] 광덕 노방장이 읊조리고 있는 것은 대법구경게(大法句經揭)였 다. 이 경전의 뜻은 바로 백 살이나 되는 나이를 먹도록 살아도 속세의 흐름에 따라 부침(浮沈)하게 된다면 하루 동안 깨닫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 광자대사는 불전에 정통한 만큼 모든 불전의 구절들을 다 외우 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 자 즉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생각을 해보았다. 광비대사는 앞으로 나와 손을 뻗쳐 응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서 큰소리로 말했다. [소사제, 사형은 자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네. 이제 자네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한마디만 그와 같 은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해준다면 이 사형은 손을 써서 자 네의 화풀이를 해줄 결심을 했네.] 이 말이 떨어지자 뭇 사람들은 한차례 소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지극히 긴장된 태도를 보였다. 석일학과 막대풍은 어느덧 성질을 누르지 못하고 한 사람은 천 천히 장검을 뻗쳐 들었으며 한 사람은 응장을 펴들었다. 오직 가공량만이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그 표정은 무겁게 굳어져 있 었다. 응진은 이때 소용돌이치는 격정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만약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게 된다면 즉시 하늘이 뒤엎 어질 것 같은 풍파가 일 것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입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런 일이 있다고 대답을 하면 광비화상은 이 자리에서 울화통이 터져 죽으려고 할 것이다.' 이때 그는 실로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라서 자기도 모르 게 눈길을 돌려 곡홍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곡홍영은 사뿐사뿐 걸어오더니 입을 열었다. [대사, 잠깐만!] 광비대사는 허연 눈썹을 치켜올리며 늠름하고도 위엄에 찬 태 도로 그녀를 바라보며 화를 내려고 하다가 상대방이 아리따운 부인인 것을 보고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누르고 냉랭 히 한마디 했다. [여시주께서 이 같은 시비의 장소에 계신 것이 적절하지 못한 듯하구려.] 곡홍영은 평소처럼 매우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비록 소사제를 무척 총애하시지만 소사제의 마음 을 알고 있는 분이라고는 할 수가 없군요.] 광비대사는 어리둥절해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곡홍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응진은 아량이 넓은 사람으로 죽고 사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사람이지요. 오늘은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으나 그는 차라리 이 억울한 누명을 썼으면 썼지 대사 께서 파계하면서까지 손을 써서 다른 사람을 위태롭게 하는 것 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광비대사는 한편으로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또 한편 으로는 끓어오르는 성을 좀처럼 누르기가 어려워 일시 어떤 결 정을 내리지 못해 눈을 돌려 광덕방장을 바라보았다. 광덕 노방장은 눈을 내리뜨고 합장을 한 채 입으로 중얼중얼 경을 읊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광덕 노방장이 어떤 법경을 읊조리고 있는지 제 대로 알아듣지 못했었는데 이때 만큼은 갑자기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광덕 노방장의 나직하고도 무거우면서 온화한 음성이 그의 귀 에 들려왔다. [생문범지(生聞梵志)가 부처님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기 위해 질문을 던졌더라. '불제자와 다른 사람이 무슨 차별이 있으며 또 어떤 공덕이 있는지요?' 부처님께서는 생문범지에게 말했더 라. '우리 출가한 제자들은 일이 잘못 되어도 걱정을 하지 않고 울부짖지 않으며 또한 미친듯이 날뛰지 않는다. 세찬 바람에 고 통을 당하게 되고 지팡이로 두들겨 맞으면서 못된 욕지거리를 듣게 된다 하더라도 참아내니 이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 이로다. 우리 제자에게는 바로 이와 같은 공덕이 있는 것이니 라.'] 이 한 토막의 구절은 잡아함경(雜阿含經)에 있는 글로 그 뜻이 무척 명백한 편이었다. 광비는 소림사 달마원의 수좌이니 자연 불경에 대해서 익숙했 는데 처음 몇 마디의 구절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그 구절을 뒤 이어 읊조리게 되었고 어설프게 어떤 다른 깨달음을 갖게 되었 다. 곡홍영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즉시 뒤로 물 러섰다. 사방에 늘어 서 있던 사람들은 소림사의 세 분 노승이 무척 이상야릇하게 여겨졌으며 좀처럼 그들의 다음 행동을 예측 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광덕 노방장은 바로 이와 같은 인연을 빌어 두 사제로 하여금 미혹에서 벗어나고 잡념을 떨쳐버린 후 대승불과(大乘佛果)를 수증(修證)토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윽고 광자대사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앞으로 나가더니 허리를 구부리고 선장의 위쪽을 거머쥐고는 조금도 기운을 들이지 않고 뽑았다. 이 한 수는 선장을 땅바닥에 꽂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가공량과 석일학, 그리고 막대풍 세 사람은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그의 공력은 아무래도 광비대사보다 더 뛰어난 것 같구나.' 석일학과 막대풍 두 사람은 각기 무기를 뽑아들고 앞으로 몇 걸음 나서서 광자대사가 도전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광자대사는 그들에게 고개를 한번 흔들어 보이고는 두 손으로 나누어 선장의 머리와 꼬리를 거머쥐더니 불끈 힘을 주 어 머리와 꼬리가 서로 맞닿는 하나의 커다란 무쇠고리로 만들 어 천천히 광비대사의 곁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광비, 이 고리가 바로 모든 법(法)일세.] 광비는 손을 뻗쳐서는 그 고리를 받아 자기의 목에 걸었다. 그 리고 합장했다. [사형, 정말 고맙소.] 양진은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리며 있었는데 이제 싸움이 벌어지 지 않게 된 것을 보고는 가슴을 펴고 나서며 소리쳤다. [영주 누이, 누이는 그대가 그날 밤 우리의 독문비전(獨門秘 傳) 오망주(烏芒珠)로 응진의 어깻죽지를 적중시킨 바 있다고 말했는데 그게 정말 사실인가?] 안채에서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영주의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요. 하지만 나는……] 양진은 그 말을 가로채듯 큰소리로 외쳤다. [불초는 당돌하나마 소림사의 여러 노선배님께서 조사해 볼 것 을 허락해 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원래 허씨 집안의 오망주는 강철관에 용수철 장치를 해서 암기 를 발사하는 것으로 지극히 위세가 강한 것이었다. 그 오망주는 독특한 창의성을 살려서 만든 것으로 사람의 몸에 적중하게 되었을 적에 즉시 일곱 알로 쪼개지는데 매 한 알마다 강철가시가 돋혀 있어 깊이 살 속으로 파고들기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상처를 입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 해 도 한 평생 검은 흉터가 남게 되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이 었다. 광덕 노방장은 양진의 말을 듣고 시력을 돋구고 바라보니 응진 의 왼쪽 어깻죽지가 약간 불룩해져 있었다. 바로 상처의 딱지가 앉은 현상이라 속으로 크게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 람들은 물론 그와 같은 시력이 없고 반드시 옷을 벗겨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광자와 광비는 전혀 응진이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질르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즉시 앞으로 달려 나가 옷을 벗겨 응진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려고 했다. 그런데 광덕 노방장은 천천히 입을 열고 그들을 말렸다. [옷을 벗기고 조사해볼 필요 없네. 노납이 그를 처벌할 방법을 이야기해 보겠는데 양시주가 만약에 그 처벌 방법에 불만이 있 다면 다시 논해 보세.] 광자대사와 광비대사는 크게 의아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양진은 두 손을 맞잡고 인사치레의 말을 했다. [그렇다면 대사께서 말씀을 해보시지요.] 광덕 노방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납이 천하영웅들 앞에서 응진의 두 다리를 때려서 분지르고 소림사로 데려가서 부러진 다리를 이어주지 않겠소. 폐사의 왼 쪽에 있는 벼랑 위에 하나의 나무로 만들어진 움막을 짓고 그가 기거하도록 하되 비바람만 간신히 피할 수 있도록 하겠소. 그리 고 밤낮으로 목에 저 쇠고리를 걸어 죽을 때야 벗겨내도록 하겠 소. 무림동도의 어떠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 벼랑 위로 올라갈 수 없으면 단지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 뿐이오.] 뭇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그만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와 같이 당하는 고통을 누가 견뎌낼 수 있겠는가? 차라리 당 장 이곳에서 칼을 품고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들 수군거렸다. 가공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으며 마음속으로 처량하고 참담한 심정이 되어 소맷자락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휘청거리며 안채로 물러가고 말았다. 광덕 노방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폐사의 아래위 모든 사람들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그를 통하여 악행을 하면 죄를 받는다는 사실을 천하 에 널리 알리려 하오.] 양진도 그가 그와 같이 이상야릇한 형벌을 생각해내리라고는 미처 짐작도 해본 적이 없는지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와 같은 처벌은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을 내리는 것보다 무겁 다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비록피맺힌 원한이 있다 해도 자기 로서는 덮어 둘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인사말을 했다. [모든 것을 대사님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광덕 노방장은 천천히 광자대사와 광비대사를 바라보았다. 광자대사와 광비대사는 모두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응진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진은 쓰디쓴 미소를 입가에 한번 띄우고는 나직이 말했다. [방장 사형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비호해주신 데 대해 정말 사 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광덕 노방장은 그 말을 듣고 무척 감개에 서렸다. '이 소사제는 식견이 뛰어남은 정말 당금 세상에서 그 짝을 다 시 찾아볼 수가 없구나. 광자와 광비 두 사제도 그에게는 미치 지 못하겠구나.' 그 즉시 그는 두 명의 제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가 응진을 부축해 일으키도록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직접 앞으로 나가 오른손을 내밀어 응진의 두 허벅지를 향해 허공을 격하고 일장 을 가볍게 후려쳤다. 응진은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데다가 뼈가 부러지자 그만 안색이 크게 변하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광덕 노방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납은 이제 허령주에게 한 가지의 무공을 봉증(奉贈)하고자 하오. 수일 안으로 그 무공을 연성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 려니와 만약에 그 누구든 감히 그녀를 침범한다면 틀림없이 죽 어 살아 남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그는 손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광비대사와 광자대사 및 네 명의 소림사 대화상들은 웅진을 떼메고 먼저 문을 나섰 다. 광덕 노방장은 안채로 들어가 허령주에게 무공을 전수한 후에 나왔다. 나오는 즉시 천하 무림 영웅호걸들의 전송을 받으며 표 연히 떠나갔다. #3323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2.1.소년 곡창해 09/10 14:53 327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2.1. 소년 곡창해 온갖 만물이 변천을 거듭하고 계절이 총총히 바뀌는 가운데 어 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쌍창 허일산이 죽고 응진이 소림사의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세인들의 기억에서 망각되고 말았다. 하남성과 안휘성을 잇는 넓다란 길 위에 자욱하게 먼지가 피어 오르는 가운데 행인과 수레, 그리고 두 필의 준마가 서북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한 필의 말에는 나이가 열두세 살 되어 보이는 사내애가 타고 있었는데 네모진 얼굴에 와잠미(臥蠶眉), 단봉안(丹鳳眼)을 지 니고 있어 준수하면서도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다른 한 필의 말에는 중년의 사내가 타고 있었는데 비록 경장 질복(勁裝疾服)의 옷차림은 아니지만 동작이 민첩하고 힘차, 첫 눈에 무공을 지니고 있는 인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때는 정오가 가까웠을 무렵이라 그 사내애는 이미 지치고 허기 에 맥이 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서 가고 있는 사 내는 쉬거나 점심을 먹을 의사도 없이 자꾸 앞으로 말을 재촉하 고 있었다. 사내애는 이빨을 깨물며 가슴을 펴고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는 말을 몰아 뒤를 쫓으면서 생각했다. '곽 대숙(藿大叔)은 일부러 나를 단련시키려고 하는가 보구나. 그렇다면 나는 결코 그에게 좀 쉬었다 가자고 부탁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지 않을 때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 곽 대숙이 우리 어머님과 아버님에게 내가 나이가 어리고 유약하여 조그만 고생 에도 견뎌내지 못한다고 일러바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다시 한 시진 가량을 두고 달리게 되었는데 이 두 필의 말이 아직도 재빨리 길을 재촉하고 있을 적에 멀리 맞은편에서 십여 필의 말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사내애는 눈을 들어 앞에서 마주 달려오고 있는 십여 필의 말 들을 바라보았는데 그 십여 필의 말과 사람은 붉고 하얀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말은 붉고 사람은 햐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히 먼 간격을 두고 있어서 얼굴은 모호하여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있었 다. 곽 대숙은 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기고 말을 세우더니 입을 열었 다. [창해(滄海) 현질(賢姪), 어제 우리들은 길을 달려오면서 도중 에 한 번밖에 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쉬지를 못했군.] 그의 말 속에는 약간 미안해 하는 빛이 서려 있었다. 창해라고 불리운 사내애는 어째서 곽 대숙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대답을 했다. [예. 그렇군요.] 곽 대숙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밤 우리가 휴식을 취하게 되었을 적에 나는 몰래 하나의 금낭(錦囊)을 현질의 안장에 달려 있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네. 그러니 현질은 그 금낭을 품속에다가 갈무리 하도록 하게.] 창해는 의혹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네.] 곽 대숙은 빙그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며칠 동안 현질은 지칠 대로 지치게 되었는데도 어젯밤부 터 오늘 이 무렵까지 바짝 길을 재촉하고도 견디어주니 정말 가 상하며 정녕 천하 제일 대협의 아드님에 부끄럽지 않네.] 창해는 솔직히 말했다. [대숙께서는 소질을 칭찬하지 마십시오. 조금 전 소질은 거의 지탱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이 금낭은……] 그러면서 그는 안장의 주머니에서 하나의 금낭을 꺼내 그 금낭 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다. 그의 곽 대숙은 무거운 음성으로 재빨리 당부했다. [빨리 갈무리하고 절대 남에게 알려주지 말게.] 그는 다시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십 여필의 말들은 이미 가까이 다가오게 되었다. 앞장 서서 달려온 사람은 비쩍 마른 사내였는데 두 눈을 굴릴 적에 광채가 사방으로 뻗쳐났다. 그는 곽 대숙을 발견하자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이더니 다시 자 세히 뜯어보고는 갑자기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곽 대숙 역시 말을 세우고 멈추어 섰다. 창해는 그의 뒤에서 곽 대숙의 앞쪽을 바라보았다. 십여 필의 말에 올라탄 사람들은 모두 흉악하게 생긴 사내들이 었다. 오직 가장 뒤쪽에 한 필의 말에 타고 있는 사람은 한 명 의 수려하게 생긴 나이 어린 동자였으며 나이는 자기와 비슷할 것 같은데 눈을 들어 이쪽 사람을 살펴보는 그 얼굴 모습이 매 우 귀여워 보였다. 창해는 그만 그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꼬마 형제는 정말 잘 생겼구나. 그려놓은 듯한 얼굴이로구 나.' 이때 그 비쩍 마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귀하는 무영도(無影刀) 곽군(藿軍)이 아니시오?] 그 말에는 그렇게 질문을 하면서도 좀처럼 믿기 어렵다는 뜻이 서려 있었다. 곽군이라고 불리운 곽 대숙은 안장가에 매단 녹색 칼집에 꽂혀 있는 커다란 칼을 두드리며 응수했다. [맞았소. 이 칼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소? 형제 역시 백주에 야 유신(夜遊神) 예충(倪沖) 당신과 마주칠 줄은 생각도 못했구 려.] 창해는 속으로 우습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의 별호가 야유신이니까 백주에 나타나면 어울리지 않 겠구나..' 그런데 저쪽의 그 아리따운 동자는 '킥' 하는 웃음소리를 내었 는데 그 얼굴 표정이나 태도가 화사하면서도 천진 난만한 것이 여간 귀엽지 않았다. 그러나 나머지 십여 명의 백의의 사내들은 모두 다 서릿발 같 은 얼굴을 하고 전혀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야유신 예충은 눈썹에 살기를 띄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형제는 평소 다른 사람이 나를 조롱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 소. 그러나 옛말에도 큰 이해도 없는 일에 죽을 둥 살 둥 싸운 다는 말이 있는데, 곽형은 이 형제를 따라 가시겠소, 아니면 반 드시 이 큰길에서 결판을 지어야 하겠소?] 무영도 곽군은 평소처럼 차분한 태도로 대답했다. [큰길에서 손을 쓴다는 것은 물론 적절하지 못하니 우리들은 좀더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것도 좋을 것이오.] 이들 두 사람이 서로 주고 받는 말에 있어서 예충은 말투가 매 우 오만한 편이었으며 마치 자기에게 승산이 있다는 식이었다. 반면에 곽군은 아무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그 깊이와 얕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국외자들은 그 누구도 그들의 대화에서 그 누가 이기고 지게 될 것인지를 가늠해 볼 수가 없었다. 예충의 뒤쪽에 서 있던 사내가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달리 장소를 찾을 것이 뭐가 있겠소? 그저 양쪽 길목에 사람 을 보내 지키고 있으면서 쓸데없는 사람들이 통과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이외다.] 예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 시진 안으로 두 패거리의 임지로 부임하는 관원들이 지나 가게 될 것이고 또 한 패거리의 표차가 이곳을 통과할 것이니 역시 귀찮은 일은 자초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저쪽 들판으로 말을 몰 았다. 곽군은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형제가 이번에 다시 강호에 들어서자 하남성과 안휘성이 이미 관가보(關家堡)의 관할에 놓여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가 있는데, 예형이 큰길을 오고 기는 사람들의 손바닥 들여다보듯 이 알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소문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구 려.] 예충은 이때서야 시선을 창해의 얼굴에 던졌다. 그는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정말 잘난 아니로군.' 그는 물었다. [이 애는 곽형의아들이오?] 곽군은 그 말에 대답을 했다. [그는 친구의 아들이오. 이 형제가 이번에 친구의 부탁을 받고 이 애를 어느 곳으로 데리고 가고 있는 중이라오.] 예충은 음침한 사람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는 역시 자기도 모르 게 놀람과 의아한 빛을 했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크게 내력이 있는가 보구나. 그렇지 않을 때 곽군이 분명히 이 예완 도상에 발을 디디게 된다면 살신지화 (殺身之禍)를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남의 부탁을 받아들였을 리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물었다. [이 아이의 성씨가 뭐요?] 곽군은 대답했다. [성은 곡(谷)이고 이름은 창해이외다.] 예충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사 람들을 모조리 떠올려보았으나 한 사람도 곡씨 성을 가진 사람 을 떠올릴 수 없었다. 이윽고 그는 냉소를 띠우고 입을 열었다. [정말 성이 곡씨오?] 곡창해는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물론 곡씨외다. 성씨를 그 누가 함부로 고친단 말이오?] 그는 늠름한 태도로 그 말을 했는데 위엄 있는 태도에 다른 사 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수려한 동자는 의아하다는 듯 커다랗게 눈을 뜨고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동자 뿐만 아니라 예충과 같이 노련한 강호인 역시 그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넋을 잃을 정도로 눈이 부시다는 생각을 하며 물 었다. [그렇다면 영존은 어느 분인가?] 곡창해는 대답했다. [저의 어머님께서는 저의 엄친의 명위를 말씀드리지 말라고 엄 명을 내리셨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자네에게 대답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겠군. 그런데 자네는 무공을 배운 적이 있는가?] 원래 그는 곡창해가 마상에 타고 있는 자세와 고삐를 잡고 있 는 손목이나 손가락에서 무공을 연마해보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었다. 곡창해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없어요. 만약 무공을 연마한 적이 있다면 이번에 외출을 하게 되었을 적에 어찌 곽 대숙에게 폐를 끼쳤겠습니까!] 그 수려한 동자는 그의 표정이 마치 어른처럼 의젓한 것을 보 고 그만 매우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킥' 하고 웃으면서 외쳤 다. [맞아요. 예 대숙은 너무나 우둔한 질문을 하셨어요.] 곽군은 이때서야 매우 주의 깊게 그를 한번 바라보았다. '예충은 관가보의 제일고수이며 생살대권을 쥐고 있다. 소문에 들으니까 관가보 안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예충에 대해서 두려 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저 아이는 어떤 신분이 길래 감히 그를 우둔하다고 조롱을 하는 것일까?' 곡창해는 그 동자의 우스갯소리를 듣게 되자 그만 동심이 일어 서 역시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상당한 간격을 두 고 포권을 해보이며 입을 열었다. [소형제, 자네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실 수 없게 는가?] 수려한 동자는 입을 가리면서 살짝 웃었다. [너의 그 모양을 보니 정말 우습다. 어른처럼 점잔을 빼야 되 는거니?] 곡창해는 여전히 의젓하게 대답했다. [자네는 아직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네.] 그는 킥킥거리고 웃으면서 그 말을 받았다. [너는 몇 살이니?] 곡창해는 대답을 했다. [열두 살, 용띠다.] 수려한 동자는 즉시 입을 열었다. [나는 열세 살, 토끼띠야. 너보다 한 살 위이니 나를 형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곡창해는 겉으로 보기에 크게 의젓하면서도 숙성되고 또한 얌 전해보이지만 기실 기지가 매우 뛰어나고 총명하기 이를 데 없 는 소년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을 해보는 즉시 수려한 동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빛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매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보다 나이가 많다면 내가 형이라고 불러도 마땅한 일이지. 그러나 천하에 상대방의 이름도 모르면서 형님이니 아 우님이니 하고 함부로 부르는 일은 없지 않은가? 자네는 내 말 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이 계속해서 연신 이야기를 주고받자 곽군은 그 모양을 보 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예충은 그와 크게 달리 안색 이 가면 갈수록 새파래지고 있었다. 수려한 동자는 일순 어리둥절해 하더니 말했다. [너의 말이 맞다만……하지만……] 곡창해는 그 말을 받았다. [하지만 자네는 이름을 가르쳐 주기가 거북하다는 것이 아니겠 는가? 그렇다면 그만두게나. 우리들은 인연이 있어 만나기는 했 으나 사귈 인연은 없다고 하세.] 나중의 두 마디는 그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기 때문에 말 뜻이 매우 간곡하여 매우 유감스럽다는 뜻이 서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수려한 동자는 일순 어리둥절해 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른들은 자꾸만 벽을 쌓아서 사람들을 떼어놓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너도 그와 같은 느낌을 갖지 않았니?] 곡창해는 엄숙하게 말했다. [자네의 말이 일리가 있네. 나도 종종 혼자서 이 세상의 많은 시비는 모두 다 그와 같은 무형의 담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네.] 곽군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곡창해를 한번 바라보았다가 그 수 려한 동자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희안한 일이군! 자네들은 나이가 어린데도 생각하는 것이 대 단히 많구만.] 예충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모두 허튼소리에 불과하지.] 그 음성의 냉혹함은 마치 얼음구덩이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이때 두 필의 말이 신속하게 되돌아와, 이곳에서 반 마장 정도 떨어진 곳에 넓게 평탄한 지대가 있는데 그들은 이미 그 부근의 사람들을 쫓아보냈다고 알렸다. #3324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2.2.소년 곡창해 09/10 17:13 294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2.2. 소년 곡창해 뭇 사람들은 즉시 그쪽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곡창해는 여러 사람들의 가운데 끼어 말을 달리고 있었는데 갑 자기 그 누가 등뒤에서 갑자기 그의 등을 후려치는 바람에 하마 터면 말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자세를 가다듬고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바로 그 수 려한 동자였다. 그 동자는 웃었다. [알고보니 너는 정말 무공을 연마하지 않았구나.] 곡창해는 그의 모양이 매우 짓궂고 지극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 어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 내가 자네들을 속여서 무엇하겠는가? 도 대체 자네의 성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디 살고 있는가? 이후에 내가 여가가 있으면 어쩌면 자네를 찾아가서 놀런지도 모르겠 군.] 수려한 동자는 갑자기 그러한 때가 그리워지는 듯 탄성을 질렀 다. [아, 친구가 있어 집으로 나를 찾아온다면 얼마나 멋있겠니.] 곡창해는 두 가닥의 새까만 와잠미를 찡그렸다. [자네는 여전히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네.] 그러자 그 수려한 동자는 조그만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곡형제, 절대로 나를 탓하지 말아. 저 사람을 보라구.] 곡창해는 그가 눈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예충이 악독한 시선으로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지라 즉시 수려한 동자에게 물었 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어째서 저토록 흉악한 얼굴 모습 을 하고 있지? 마치 금방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네.] 수려한 동자는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관가보에서 가장 흉악한 사람이며 눈 한번 깜박이지 않 고 사람을 죽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 나는 누구를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지만 저 사람만은 약 간 두려워하지.] 곡창해는 빙긋이 웃었다. [네가 저 사람을 두려워하는데도 우둔하다고 감히 조롱을 하는 것을 볼 때 만약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어떤 태도를 지 을것인지 상상할 수 있겠구나.] 수려한 동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내 성명을 소형제에게 이야기하면 저 사람은 반드시 나 를 죽이고 말 것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말을 할 수 없다고.] 곡창해는 그와의 간격이 매우 가까워져 있어 이때서야 가까스 로 그의 왼쪽 뺨에 붉은 사마귀가 나 있어 웃음을 지을 적에는 그 사마귀가 바로 보조개 가운데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볼 수 있 었다. 그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말했다. [원래 그랬었구나. 그렇다면 나는 더 묻지 않겠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어느덧 평탄하면서도 넓다란 풀밭 위 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러자 그 십여 명의 말을 탄 사내들은 갑자기 말을 탄 채 흩 어져 멀리서 하나의 커다란 원을 이루고는 예충과 곡창해, 그리 고 곽군 및 수려한 동자 등 네 사람을 에워싸는 것이었다. 예충은 몸을 홱 뒤집으며 말에서 뛰어내렸고, 곽군 역시 땅에 뛰어내렸는데 그 표정이나 태도가 무척 무거워 보였다. 곡창해는 말을 몰아 그들 중간으로 뛰어들며 물었다. [곽 대숙, 이분과 싸움을 하시려고요?] 곽군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시더니 대답했다. [우리들 사이에는 사사로운 원한이 있다. 오늘은 그야말로 좁 을 길에서 만나게 된 셈이니 부득불 무력을 사용해서 해결하지 않을 수가 없군.] 예충은 갑자기 손을 뻗쳐서는 곡창해를 움켜잡으려 들었다. 그 간격이 아직도 다섯 치나 되었는데도 곡창해는 어느덧 한 가닥의 커다란 힘이 자기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고 그만 거꾸 로 곧장 땅으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몸뚱어리가 미처 땅바닥에 부딪치기 전에 언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이 예 충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수려한 동자는 말을 몰아 질풍과 같이 달려오더니 손을 뻗쳐 그를 잡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곡창해가 떨어지는 기세가 너무 맹렬했기 때문에 나이 어린 동자는 미처 그를 제대로 꼭 잡을 수가 없어서 곡창해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한 번 붙잡아 주었기 때문에 그 떨어지는 기세가 태반이 해소됨으로써 곡창해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설 수가 있었 고 어쨌든간에 나가떨어지는 것은 면할 수가 있었다. 곡창해는 그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눈이 가물가물하지는 것을 느끼고 잠시 동안 누워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예충은 얼음과 같이 차가운 어조로 곽군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곽형이 그와 같은 수양을 쌓았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려. 정말 세상에서 보기 드물 정도요. 그러나 곽헝은 이 형제가 감 히 그의 어린 몸숨을 빼앗지 못하리라고 여기지는 마시오.] 곽군은 여전히 냉정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예형이 만약에 그의 한 목숨을 빼앗게 된다면 이 곽군은 친구 의 부탁을 저버리는 결과가 되겠지만 관가보 역시 얼음이 녹아 나듯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 것이오. 이 말을 믿고 아니 믿 고는 예형 마음이오.] 예충은 냉랭히 대꾸를 했다. [그렇다면 어디 두고보기로 합시다. 곽형의 무영도는 근년에 어느 정도로 익숙하게 연성했소?] 곽군은 커다란 칼을 뽑아들고 녹색의 칼집을 땅바닥에 내던졌 다. [예형의 경신법은 천하에서 무쌍인데 이 형제는 그렇지 않아도 칼이 빠른지 아니면 사람이 빠른지 시험해 보기로 했소.] 예충은 즉시 속을 한번 쳐들었다. 그러자 대뜸 두 명의 사내가 달려왔는데 한 사람은 거치도(鋸齒刀)를 안고 있었고 한 사람은 장검을 거꾸로 들고 있었다. 예충은 그들을 바라본 이후 곽군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이 사람들은 왕룡(王龍)과 왕호(王虎) 형제들이오. 이 사람들 로 말하면 관가보에서 이미 범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평을 받 고 있으니 곽형은 역시 소흘히 생각하지 마시오.] 왕룡과 왕호는 앞으로 나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무영도 곽군은 낭랑히 입을 열었다. [두 분이 가르침을 베풀어줄 것을 허락한다니 이 형제는 무척 영광스럽소. 다만 이 곽모의 무영도는 좀처럼 가볍게 펼쳐지지 않으니 일단 펼쳐지게 되면 반드시 죽음을 불러들이니 두 분은 역시 물러나는 것이 좋겠구려.] 왕룡과 왕호는 그 말을 듣고 냉소를 했으며 그들 가운데 왕호 가 입을 열어 응수를 했다. [형님, 우리들이 수년 동안 강호에서 떠돌아다녔지만 아직도 곽가라고 불리우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지 않았 소?] 왕룡은 그 말에 응수를 했다. [그렇다. 하지만 조금도 소흘히 할 수는 없다.] 곽군은 담담히 웃으며 큰 칼을 들어 두 사람에게 각각 한번씩 헛칼질을 해보였다. 손 씀씀이가 무척 신속하고 빨라서 두 번의 칼질 또한 다른 사 람이 한 칼을 펼치는 시간에 불과했다. 왕씨 형제들은 그의 칼날이 아직도 다섯 자의 간격을 두고 있 는데도 여전히 칼바람이 예리하게 뻗쳐와 얼굴을 아프도록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라며 '휙' 흩어져 좌우 양쪽에서 협공을 시 도해왔다. 이 한 쌍의 형제들은 무공은 각기 그 수법을 달리하고 있었다. 왕룡의 거치도는 흉맹하면서도 굳건하고 매서운 반면에 왕호의 장검은 음독(陰毒)하면서 이상야릇했다. 거기다가 그들은 이미 손을 맞잡고 싸움을 하는 데 숙달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력이 배나 증가되었다. 곽군은 큰 칼로 초식을 휘둘러 갑자기 공격을 했다가 갑자기 수비를 하는 등 왕씨 형제들로 하여금 허둥지둥 빙글빙글 돌아 가게 만들어 좀처럼 자기 옆으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몰아세웠 다. 곡창해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염치없군.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하다니, 곽 대숙, 더 싸 울것 없어요.] 곽군은 그러나 그를 아랑곳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곡창해는 정히 다시 부르짖으려고 했을 적에 그 수려한 동자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곡형제가 만약 그를 불러 그의 정신을 헷갈리게 된다면 목숨 을 잃을 우려가 있게 되지. 곡형제의 그와 같은 행동은 너무나 멍청한 거라구!] 곡창해는 그 말을 듣고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소형제, 가르쳐줘서 고맙네.]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집에서는 나를 아앵(阿鶯)이라고 부르지.] 예충은 이때 온 정신을 가다듬고 곽군의 도법과 공력을 지켜보 고 있었다. 그런데 곽군은 무영도의 절기를 아직도 펼쳐내지 않 고 있었지만 이미 공세에 밀린 왕룡과 왕호 형제들은 감히 곽군 의 곁으로 다가들지 못했다. 따라서 그 시퍼런 날이 눈부시게 빛나는 큰 칼은 강맹(剛猛)할 적에는 왕룡의 거치도보다 더했고 음유(陰柔)할 적에는 왕호의 장검보다 더한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씨 형제들이 만약에 손을 맞추어 항거함으로 써 많은 득을 보지 않고 일대일의 싸움을 벌이게 되었더라면 아 마 그들 형제는 각기 십 초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다. 예충은 정히 다른 사람에게 명령을 내려 왕씨 형제를 대신하라 고 하려다가 갑자기 다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생각을 바꾸었 다. '곽군은 수년 동안 만나보지 못하는 사이에 공력이 크게 증진 이 되었구나. 역시 왕씨 형제의 힘을 빌어서는 그의 내력을 소 모해야겠다.' 왕씨 형제들은 갑자기 일로(一路)의 기이한 초식을 펼쳐내었 다. 서로 손을 맞추어서는 매초식을 생각하지 못한 방향에서 공 격해 들어왔다. 삽시간에 그 공세에 밀린 곽군은 칼을 휘두르는 테두리가 점점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칼등과 칼자루마저도 모조리 사용해서 야 간신히 상대방의 공세를 막아낼 수가 있었다. 사방에 서 있던 흉악한 사내들은 모두 다 얼굴에 기쁜 빛을 띄 웠다. 곡창해도 이때만큼은 그와 같은 상황을 알아볼 수 있어서 크게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곽 대숙이 안 되겠군. 아영(阿英) 형제, 자네가 그들보고 싸 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어떤가?] 그는 아앵을 아영으로 들은 것이었다. 따라서 아앵 역시 그가 잘못 발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아. 다만 예 백부님의 말을 들을 뿐이 야.] 두 사람이 한참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갑자기 곽군은 일성을 대갈하더니 큰 칼을 번개같이 휘둘러 잇따라 두 번의 칼질을 쪼 개내었는데 그 누구도 어떻게 휘두르는 것인지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왕룡과 왕호는 일제히 뒤로 물러났는데 한 사람은 가 슴팍이 갈라져 있었고 한 사람은 머리의 반쪽이 잘려져 나간 상 태에서 똑같이 선혈을 뿜어내며 대뜸 땅바닥에 쓰러졌다. 두 명의 대한이 그들 곁으로 다가가 그들을 부축해 보더니 간 단히 한마디를 했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두 대한 모두 물러섰다. 예충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무영도는 범상하지 않은 데가 있군. 이번에는 풍개(馮愷)와 금선(金旋)이 나서서 손을 쓰도록 하게.] 곽군은 두 눈에 살기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저 두 분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소.저 왕씨 형제들은 물론 이 곽모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겠지만 이 곽모도 역시 그들의 행 적이나 출신에 대해서 남으로부터 들어본 바가 없었소.] 이때 한 사람은 키가 크고 한 사람은 키가 작은 두 사내가 몸 을 날려 곽군의 앞에 내려섰다. 키가 큰 사람이 바로 풍개였으며 손에 쌍구를 들고 있었다. 키가 작은 사람은 바로 금선인데 왼손에는 한 자루의 비수를 들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한 자루의 철척(鐵尺)을 들고 있었다. 쌍방은 한두 마디 인사치레의 말을 한 이후 즉시 손을 썼다. 이번의 싸움에서는 왕씨 형제들과 같이 격렬했던 점을 전혀 찾 아볼 수가 없었다. 쌍방은 모두 다 초식을 펼치지마자 거두어들 이곤 했다. 그러나 곡창해는 그 어린애 장난 같은 싸움에도 역 시 매우 걱정이 되었다. 예충은 곽군의 공력이 증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격을 하면서 상대방의 초식을 해소시키는 것이 더욱 정미 오묘한 것을 보고 는 자기 나름대로 그 이유를 가늠해 보았다. '어느 한 분의 고수에게 훈도와 지도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옛 날보다 한 수 더 뛰어나구나. 설사 내가 몸소 손을 쓴다고 하더 라도 반드시 이긴다는 장담은 할 수가 없겠다!' 따라서 그는 생각을 곡창해에게로 옮겼다. '저 녀석이 크게 내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곽군의 무공이 증진된 점은 저 녀석의 집안 어른 과 관계가 있을 것 같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한차례 하고 머리를 쓴 끝에 어느 정도 작정 한 바가 생겼다. 곽군은 수십 초를 공격하고 수비를 하느라고 적지 않은 힘을 소모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느껴야 했다. '예충이 아직도 손을 쓰지 않은 상태인데도 이미 이 지경이 되 었으니 오늘은 아무래도 재수가 없을 것 같구나.'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손에 든 칼을 잇따라 휘둘러 몇 수의 초식에 약간의 빈틈을 드러내었다. 아니나다를까 풍개와 금선 두 사람은 자기네들을 유인하는 것 인지를 모르고 서둘러서 공세를 취했다. #3325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2.3.소년 곡창해 09/10 17:14 336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2.3. 소년 곡창해 곡창해는 그만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아!] 아앵은 웃으면서 달래듯 말했다. [겁 먹을 것 없다. 겁을 먹을 것은 없어. 곡형제의 곽 대숙은 이제 이기게 될 거야!]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곽군은 어떻게 한 칼을 쪼개내었 는지 풍개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나가떨어지고 말 았다. 곽군은 몸을 빙글 크게 돌리더니 커다란 칼을 왼쪽 어깨 쪽으 로 부터 쪼개내었는데 또 한번 너무나 빠른 도법이라 그 초식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똑똑히 알 수가 없었다. 곧이어 금선의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왼손의 비수를 홱 내던졌다. '획'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비수는 곽군의 왼쪽 어깻죽지 뒤쪽 에 적중되었는데 그와 때를 같이 해서 금선은 그 자리에서 나동 그라지고 말았다. 두 명의 백의 대한들은 앞으로 달려나가 풍개와 금선 두 사람 을 살펴보더니 이미 죽었다는 보고를 한 이후 신속하게 물러섰 을 뿐이었다. 예총은곽군을 바라보며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곽형, 그래도 싸울 힘이 있소?] 곽군은 담담히 응수했다. [있다면 어쩔 테고 없다면 어쩔 테요?] 예충은 천천히 말했다. [만약에 다시 싸울 힘이 없다면 이 형제를 따라 관가보로 갑시 다. 그렇게 된다면 참혹한 죽음은 면하게 될 것이오. 만약 무릎 을 꿇지 않겠다면 이 형제는 부득이 몸소 나서서 손을 쓸 수밖 에 없소.] 곽군은 이미 어깨에 상처를 입고 있었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 기 때문에 다시 싸울 힘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자신의 몸 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곡창해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물었다. [우리 곡 현질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예충은 냉소를 띄었다. [원한에는 원수가 따로 있는 법이고 채무에는 빚쟁이가 있는 법이 아니오? 내가 당신을 찾는 것이 저 녀석과 무슨 상관이 있 겠소. 저 녀석은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오. 만약 그가 나이 어 려서 길을 잃을 염려가 있다면 이 형제가 사람을 보내 그를 호 송하리다.] 곡창해는 그 말에 불쑥 입을 열었다. [나는 가지 않겠소.] 예충은 냉랭히 말했다. [자네는 아마도 살기가 싫어진 게로군] 곡창해는 늠름한 기세로 말했다. [곽 대숙께서 위급하고도 어려운 처지에 놓였는데 내 어찌 혼 자 떠날 수 있단 말이오.] 무영도 곽군은 그를 달래듯이 말했다. [현질은 그냥 떠나도 상관이 없네. 이 사람들은 감히 나를 어 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네.] 곡창해는 당당히 입을 열었다. [곽 대숙께서는 이 조카의 나이가 어리고 철이 없다고 생각하 지 마십시오. 이 사람들이 이토록 흉악한데다가 곽 대숙이 이들 가운데몇 사람을 죽였으니 그들이 곽 대숙을 데려가게 되었을 때 어찌 곽 대숙을 살려줄 수 있겠습니까?] 아앵은 그 말을 받았다. [곡형제가 그의 뒤를 따른다고 해서 그의 목숨을 보존할 수 있 을까?] 곡창해는 여전히 뜻을 굽히기 않았다. [나는 비록 곽 대숙을 도와줄 힘이 없지만 오늘 만약 그를 버 리고 떠나게 된다면 정이 없고 의리 없는 사람이 될 것이네. 이 곡창해는 어릴 적부터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충효 절의(忠孝節 義)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를 한 바 있으니 차라리 목숨을 잃을지라도 정과 의리를 보존하도록 하겠소.] 그의 말은 매우 당당했으며 표정과 태도에는 늠름한 기상마저 넘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 그의 그와 같은 말들이 구구 절절 진심에서 울려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고 실로 그 뜻을 꺾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야유신 예충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찬사를 보냈다. [소형제의 뜻은 훌륭하군. 그렇다면 우리 함께 가도록 하세.] 곽군은 크게 감동되어 눈가를 붉히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 곽군은 한평생 강호에서 떠돌아다녔지만 오직 곡현질만이 대인 대의한 사람인 것을 알겠네.] 사방에 섰던 사납게 생긴 백의의 사내들도 하나같이 얼굴 표정 이 변했다. 곽군은 신속하게 냉정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현질이 굳이 나를 벗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게 된다면 세가지 불리한 일이 있네. 첫째는 자네의 쌍친을 이와 같은 강 호의 원한에 스스로 죽고 죽이는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고, 둘째 로 나 자신은 부탁을 저버리고 신의 없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며, 셋째는 자네의 앞길을 막는다는 것일세.] 곡창해는 그래도 한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충은 곽군이 첫번째의 이유를 들먹이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 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그 말에 일리가 있구나. 이 녀석의 내력이 수상하니 만약 그 의 부모가 이번 일에 개입하게 된다면 지극히 지혜롭지 못한 일 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방법을 강구해서 그를 달래 떠나도 록 하되 암암리에 사람을 보내 미행을 시키자. 그리하여 그의 내력을 알아내게 되었을 때에 결코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면 그 만이지만 만약 별 대단한 내력이 없다면 그의 목숨을 빼앗아버 리자.' 이와같은 결심을 하자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곽군은 한참 동안 권고했으나 곡창해는 여전히 그 말을 들으려 고 하지 않았다. 곽군은 예충이 그토록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을 보고 즉시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서 예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이 형제로서는 우리들 사이에 얽 힌 사연을 알려주어 곡 현질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하겠소.] 예충은 냉랭히 대꾸했다. [곽형은 스스로 사태를 봐서 처리하도록 하시구려. 이 형제는 그와 같은 쓸데없는 일에 상관하지 않겠소.] 아앵은 온 얼굴 가득 흠모하고 부러워하는 빛을 띄우고서 늠름 하니 위엄이 넘쳐나는 곡창해를 바라보았다. 이때 아앵의 마음은 무척 모순되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곡창해 와 함께 관가보로 되돌아갔으면 하는 욕심이 굴뚝 같았다. 그러 나 한편으로는 곡창해가 관가보로 발걸음을 들여놓기만 한다면 필경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걱정이 되었다. [곡 현질의 그와 같이 높은 의리와 두터운 정에 대해서 이 못 난 숙부는 몰치 난망(沒齒難忘)일세. 이 못난 숙부는 지금 흉악 한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관가보로 향하게 되지만 틀림 없이 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네.] 곡창해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곽 대숙께선 어째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지요?] 곽군은 대답을 했다. [관가보에서 나를 죽이려는 것은 내 몸에 있는 한 가지의 물건 을 가로채려는 것일세. 만약에 그 물건을 얻지 못하게 된다면 얻을 수 있는 그날까지 그들은 감히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이네.] 곡창해는 본래 기지가 뛰어나고 총명하며 눈치가 빠른 사람이 라 마음속으로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때 곽군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만약에 나를 믿을 수가 있다면 이대로 헤어져서 각자 떠나야 할 길로 떠나도록 하세.] 곡창해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속으로 짐작하는 바가 있어서 결심을 굳건히 했다. '곽 대숙이 말씀하시는 그 중대한 물건은 틀림없이 그 금낭일 것이다. 만약에 그 금낭이 곽 대숙의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나 는 물론 전심전력을 다해서 그 물건을 감추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그게 무슨 물건인데요?] 곽군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것은 하나의 금낭일세.] 곡창해는 일부러 놀랍고 의아한 얼굴을 지어보이며 부르짖듯 입을 열었다. [하나의 금낭이 몇 푼이나 나간다고 한 목숨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지요?] 곽군은 엄숙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현질은 당연히 나의 위인됨이 결코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더 더욱 자네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네.] 곡창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 물건을 찾아내게 된 후에는 역시 곽 대숙을 죽이려고 들 것이 아니겠소?] 곽군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 못난 숙부가 어찌 그와 같은 중요한 물건을 내 몸 에다 두었겠는가?] 곡창해는 잠시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모습으로 미루어 팔성(八成)쯤 믿게 된 것 같았다. 별안간 숲속에서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으악.] 뭇 사람들은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그 숲은 바로 큰길과 이쪽 넓다란 풀밭 사이에 위치하여 병풍 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야유신 예충은 미 리 그곳에다가 사람들이 건너오는 것을 막도록 경계하는 사람을 세웠던 것이었는데 그 비참한 비명 소리는 바로 망을 보는 사람 이 지른 소리였던 것이다. 사방의 백의 사내들은 예충의 손짓을 보더니 대뜸 네 명이 말 을 몰아 자기네 동료들과 따로 떨어져서는 질풍과 같이 숲속으 로 달려들어갔다. 무영도 곽군은 '획' 하니 말 위에 오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곡현질, 자네 스스로 몸을 보중하도록 하게.] 호통 소리와 더불어 그는 말을 몰아 네 사람이 빠짐으로써 빈 틈이 생겨난 쪽으로 말을 세차게 달렸다. 야유신 예충 역시 거의 동시에 말을 몰아 급히 쫓았다. 이때 이와 같은 사태가 창졸간에 일어난 것이었지만 곡창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함을 잃지 않고 일단 말 위에 오르더 니 거침없이 상반신 방향으로 질풍과 같이 말을 몰았다. 그런데 그 순간 세찬 화살 소리가 허공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울려퍼지게 되고 그를 태우고 있던 말이 대뜸 울부짖으며 땅바 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가 마치 북 소리처럼 뒤로 접근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곡창해는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바라보니 신속하게 자기 쪽으 로 말을 몰아 달려오는 사람은 아앵이 아닌가? 그는 마음을 놓았다. 그 순간 아앵은 몸을 옆으로 기울이면서 손을 뻗더니 대뜸 그를 잡고서는 말잔등 위로 끌어올렸다. 이 무렵에 관가보의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뉘어져 한 패가 숲속 으로 달려갔고 한 패는 예충을 우두머리로 해서 질풍과 같이 무 영도 곽군을 뒤쫓아갔다. 아앵은 혼자 말을 몰아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이때 예충은 멀리서 소리쳤다. [아앵, 조심해라! 숲속에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밤중에 본부를 침입했던 대적일 것이다!] 바로 그 소리가 멎기도 전에 다섯 필의 말이 숲속에서 달려나 왔다. 말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다란 창과 커다 란 극(戟)을 쥐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명의 백의의 기사들을 찔러서 말에서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다섯 필의 말은 갑자기 두 패로 나뉘어져서 세 필의 말은 예충 등을 질풍과 같이 뒤쫓았고 나머지 두 필의 말은 남아 있는 백 의 사내의 붉은 말 쪽으로 급격히 부딪쳐가는 것이었다. 그런데그들이 쥐고 있는 장창(長槍)과 대극(大戟)은 마상에서 휘두르게 되었을 때는 아무래도 득을 보기 마련이었다. 단 일 합에 다시 두 사람을 찔러 말에서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오직 한 명의 백의기사가 말머리를 돌려 도망을 쳤다. 곡창해는 힘껏 아앵의 가느다란 허리를 얼싸안고 얼굴을 그의 귀 밑에 갖다대었다. 그러자 코에 그윽하면서도 엷은 향기가 스 며들었다. 그는 속으로 실소를 했다. '아앵의 몸에서 어째서 향긋한 냄새가 날까? 꼭 여자애들처럼 말이다.' 아앵의 붉은 말은 매우 건강했다. 한차례 급히 달리게 되자 어 느덧 몇 곳의 부락을 지나서 큰길로 접어들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뒤쫓아오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어서 아앵은 잠시 말의 속도를 약간 늦추었다. 곡창해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누가 내 말을 쏘아서 죽였는가? 아앵, 자네는 보았는가?] 아앵은 대답했다. [우리편 사람들이야. 만약 내가 빨리 쫓아오지 않았더라면 아 마 두 번째 화살은 바로 곡형제의 몸에 적중되었을걸.] 곡창해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편은 흉악하기 이를 데 없군. 그런데 감히 그들을 건드리 는 사람이 있으니 정말 희한한 일이군.] 아앵은 그 말을 받았다. [우리 관가보는 이 예완 도상에서는 가장 세력이 크지. 그러나 최근 몇 달 동안 몇 건의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사고는 야밤에 우리 관가보로 정탐하러 뛰어드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어른들 은 나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지만 내가 볼 때 관가보에 나타난 사람들은 결코 만만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한 방파의 사람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 지.] 그는 눈길을 뒤로 돌려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이 지금 만약에 관가보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말머리를 반대쪽으로 돌려서 가야하는데 아마 그렇게 된다면 그 적들을 만나게 될거야.] 곡창해는 담담히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우리들은 우선 앞으로 나가자. 먼저 그 한 떼의 적들을 피하고 난 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세.] 아앵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옳다. 그런데 곡형제는 어느 곳으로 가려던 참이었 지?] 곡창해는 상댕방이 자기의 얼굴빛을 살필 수가 없었으니 정색 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아앵에게 알려준 이후에 아앵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서는 절대 안되네.] 아앵은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훗날 나는 난도 질 당해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네.]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네가 이와 같이 무거운 맹세를 하는 것을 보면 진심인 것을 충분히 엿볼 수가 있네. 내 자네에게 이야기하지만 우리 어머님 께서 나보고 숭산 소림사로 가서 사부님을 모시고 무예를 배우 라고 하셨다네.] #3331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3.1.비범한 소년의 기 09/11 06:20 305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3.1. 비범한 소년의 기지 아앵은 깜짝 놀란듯 입을 열었다. [알고보니 소림사로 가려고 했구나. 나는 네가 가는 것을 내버 려두지 않겠다.] 곡창해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왜?] 아앵은 반문했다. [멀쩡한 사람이 왜 고달프게 화상이 되려고 하는 것이지? 그리 고 그 말투가 뭐냐? 우리는 어디까지나 어린애들이니 서로 반말 을 하자. 자꾸 어른 흉내를 내면 너를 상대하지 않겠어.] 곡창해는 실소했다. [좋아. 이제부터 반말을 하겠다. 나는 화상이 되려고 가는 것 이 아니라 사부님을 모시고 무예를 배우러 간다.] 아앵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곡형제는 여전히 나를 속이려고 하는군. 소림사의 규칙은 소 림사로 들어와 출가를 하지 않으면 많은 절예(絶藝)를 전수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대. 이것은 그들이 백 년 동안 지켜온 규칙이 야.] 곡창해는 넌지시 말했다. [소림사에는 한 분의 고승이 계신데 그 고승으로 말하면 오래 전부터 우리 어머님과 절친한 친구지간이었어. 그래서 내가 이 번에 그분의 문하로 들어가려고 가는 길이야.] 만약에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다면 아앵은 틀림없이 그 말을 꼬투리 잡아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곡창해는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어 아앵은 그 말을 믿었다. 아앵은 즉시 입을 열었다. [곡형제가 황제 늙은이라고 하더라도 소림의 절예를 배운다면 반드시 삭발을 하고 출가를 해야 돼. 그들의 규칙은 수천 수백 년 동안 엄격하게 지켜져 왔으니 결코 곡형제 한 사람으로 인해 깨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걸.] 곡창해는 일순 어리둥절해져서는 물었다. [정말?] 아앵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종종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어. 그러니까 절 대 틀림이 없단 말이야.] 곡창해는 하늘을 우러러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 다. [만약에 규칙을 바꿀 수가 없다면 나는 부득이 출가하여 중이 될 수밖에 없어.] 아앵은 몸을 곡창해 쪽으로 돌렸는데 그 수려한 얼굴에 경악의 빛이 가득 차서 부르짖는 듯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니?] 곡창해는 늠름히 말했다. [부모의 명을 어찌 어길 수가 있겠어? 출가해서 중이 되는 것 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지옥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더라도 들 어가야 할 것이 아니겠어.] 아앵은 그가 의리를 중시하고 삶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떠올 렸다. 곽군에게도 그러한 태도를 취한 것을 보면 부모의 명령에 대해서는 결코 어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아 앵은 마음속으로 존경심이 우러나는 반면 우울해졌다. 곡창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불문(佛門)에는 크게 지혜로운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 분들까지도 기꺼이 출가하여 화상이 되는 것을 보면 이것에는 틀림없이 커다란 이유가 있을 것이며 결코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앵은 일순 어리둥절해지더니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정말 옳은 것 같군. 나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두 사람이 정히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앵은 놀 라서 소리쳤다. [야단났어. 적이 뒤쫓아왔다.] 그리고 황망히 말을 몰아 급히 달렸다. 뒤에서 두 필의 말이 그들과는 약 백 장의 간격을 두고 쫓아오 고 있었다. 곡창해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어렴풋이 그 두 사람은 모두 다 경장 질복의 대한이었으며 안장가에 장창이 매어져 있을 뿐 만 아니라 그 밖에도 등에 칼과 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들의 기마술은 매우 훌륭한 편이라 종종 큰길에서 벗어나 황 량한 지름길로 추격을 해오는 바람에 삽시간에 쌍방의 간격을 많이 좁혔다. 곡창해는 말했다. [당황해 하지 마, 그들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어.] 그는 아앵이 긴장하여 약간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던 것이다. 그로서는 어째서 이토록 담이 적고 두려움이 많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재빨리 큰소리로 그를 위로했다. 아앵은 아니나다를까 훨씬 침착해지게 되었고 말 고삐를 젖힐 때도 크게 여유와 능숙함을 보였다. 따라서 붉은 말은 속도를 점점 더하게 되었고 칠팔 마장을 달려가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다 시 적을 멀리 떨어뜨릴 수가 있었다. 곡창해는 암암리에 저 사람들의 추적에서 벗어나야 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마침 그의 눈에는 앞쪽에 몇 곳의 부락 들이 길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부락들은 모두 다 간격이 그렇게 먼 편이 아니었다. 곡창해는 즉시 좋은 계책이 떠오른 것을 느끼고 큰소리로 물었 다. [이 말로 얼마나 달려갈 수 있니?] 아앵은 대답했다. [곡형제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적지 않은 길을 달려왔으니 아 무래도 이제는 힘이 다 떨어지게 되었을걸!] 곡창해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끝내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이니 우리들은 차라리 제갈무후(諸葛武候)를 본떠서 공성계(空城計)를 펼치는 것이 어 떨까?] 아앵은 아무런 대책도 강구할 수 없는지 순순히 응했다. [곡형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구.] 곡창해는 즉시 아앵에게 가장 뒤쪽에 있는 부락 쪽으로 말을 몰도록 했다. 그 마을로 들어서니 사방은 무척 조용해서 좀처럼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다. 원래 이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 밭으로 나가고 없 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렸다. 곡창해는 기뻐서 약간 들뜬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침 보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들은 빨리 이 집 안으로 숨도록 하자.] 아앵은 걱정스러운 듯 되물었다. [말은 어떻게 하고?] 곡창해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 한 필의 말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니 바로 문 앞의 말뚝에 다가 매어놓도록 해.] 아앵으로서는 그가 어떤 계책을 펼치려고 하는 것인지를 제대 로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그 말에 따라 말을 말뚝에 매고는 곡 창해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 집은 바깥방과 안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바깥의 환한 방 왼쪽에는 바로 아궁이가 있었고 앞에는 하나의 커다란 물독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안방 쪽에서는 물건은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집안 사람이 막 안방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찾고 있는 모양이다. 곡창해는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가서는 아앵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숨길 만 한 곳을 찾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집 안은 덩그라니 거의 비어 있다시피해 서 몸을 숨길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곡창해는 그야말로 이렇게 운수가 사나우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으로 속으로 약간 걱정이 되었다. 이때 바깥에서는 어느덧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아앵은 놀라 안색이 변했다. 곡창해는 정세를 가늠해 보았다. 이미 다른 집으로 찾아들어 몸을 숨길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안채로 들어가 이 집안 사람을 놀라게 할 수도 없어 크게 초조해진 나머지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폈다. 이때 두 필의 말이 어느덧 이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두 필의 말에 올라탄 사내들은 붉은 말이 집 앞에 묶여 있 는 것을 보고 일제히 말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었다. 그 가운데 한 사내가 의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설마하니 그 계집애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말에서 내려 쉬고 있다는 것일까?] 이 사람은 목소리가 깨진 징처럼 무척 목이 쉬어 보였으며 귀 에 거슬렸다. 다른 한 사내가 생각해 보는 듯 입을 열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라면 적을 유인하는 계책일지도 모르지만 그 조그만 계집애가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있겠는가? 내가 보기 에 십중 팔구 일부러 말을 이곳에다가 묶어놓고는 그 계집애 자 신은 이미 다른 곳으로 도망을 친 것 같네.] 이 사람의 음성은 매우 뾰족하고 날카로웠으며 내경(內勁)이 충만했다. 그들은 서로 한번 쳐다보더니 일제히 말에서 몸을 날려 땅 위 에 내려서서 신속하게 그 집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이때 한 명의 농사꾼 아낙이 정히 신발 밑창을 꿰매고 있다가 그들이 흉신악살(凶神惡殺)처럼 달려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두 명의 사내들은 방 안으로 뛰어들자마자 사방을 살펴보았다. 방 안의 모든 사물을 모조리 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몸을 숨 길만한 곳이 없었다. 아궁이 앞의 크고 작은 물독에 바가지가 둥둥 떠 있는 것이 보 였다. 즉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안방 쪽으로 달려들어가 게 되었고 남아 있는 한 사내는 대뜸 그 아낙의 가슴팍을 움켜 잡고 다그쳤다. [두 꼬마가 어디에 숨어 있지?] 그 소리가 깨어진 징소리 같은데다가 얼굴마저 흉악해서 그 아 낙은 그만 놀라 벌벌 몸을 떨면서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을 뿐 대답할 바를 몰랐다. 다른 한 명이 안방에서 나오더니 물었다. [뒤에도 없는데 그녀는 뭐라고 하는가?] 아낙을 움켜잡았던 대한은 손을 놓았다. 그러자 그 아낙은 땅 바닥에 쓰러졌다. 대한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없다고 하는데 아마도 거짓이 아닌 것 같네.] 그는 화가 나는지 다리를 들어 그 아낙을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아낙은 저만치 굴러가게 되었고, 곧이어서는 '어이쿠 어이쿠' 하는 소리를 마구 질렀다. 음성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대한이 호통을 쳤다. [또 무슨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지르는 거야? 소리를 내지른 다면 단칼에 없애겠어.] 그 아낙은 재빨리 입술을 꼭 다물고는 감히 신음 소리 한번 뱉 어내지 않으려고 용을 썼다. 두 명의 대한은 서둘러서 그 집을 나갔다. 그들은 아앵등이 틀림없이 이웃에 있는 마을에 숨어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미처 말에 올라탈 사이도 없이 종종 걸음을 쳐서 걸 어들어 갔다. 이 무렵 아앵의 안색은 창백해져서는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곡 창해의 몸에 기대어 있었다. 곡창해는 두 손으로 바가지를 받쳐 들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물독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원래 좀도적들의 묘계(妙計)였는데 다급해진 나머지 곡 창해가 그 묘계를 한번 응용한 것인데 아니나다를까 효과를 본 것이었다. 물독의 밑바닥에 원래 맑은 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반신 은 모두 다 젖고 말았다. 그 집의 안주인인 듯한 아낙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멍청해졌 다. 곡창해는 재빨리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 정말 죄송하게 되었어요.] 그리고는 아앵을 끌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때 적이 타고 온 두 필의 말은 아직도 그 집 앞에 서 있었 다. 곡창해는 아앵을 돌아보았다. [우리들이 저 말을 데리고 간다면 그들은 우리들을 절대로 쫓 아오지 못할 것이다.] 아앵은 기뻐서 말했다. [그것 참 멋지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말의 고삐를 잡으려고 했다. 그 두필의 말은 모두 다 주인을 알아보는지라 낯선 사람들이 다가와서 자기네들을 끌고 가려고 하자 길게 울부짖으며 몸을 피했다. 아앵의 솜씨가 재빠르기는 했으나 겨우 한 필의 고삐만은 낚아 챌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곡창해는 서둘러서 부르짖듯 말했다. [빨리 가자. 말 울음 소리에 도적들이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이미 말에 올라탔다. 아앵 역시 번쩍 몸을 날려서는 같이 말 위에 올라타고 적이 타 고 온 말의 고삐를 그에게 넘겨주고 그 자신이 직접 말을 몰아 마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곡창해는 힘주어 말고삐를 꼭 쥐었다. 이렇게 되자 그 적이 타 고 온 그 말은 붉은 말의 뒤를 따라 달려왔다. 마을 밖의 큰길로 들어서자 두 명의 대한이 뒤쪽에 있는 마을 에서 달려나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앵은 기분이 좋은지 소리내어 웃었으며 마을 저쪽에서는 말 에 채찍질을 해서 자만치 달려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 니 한 필의 말이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쪽의 두 사람 역시 한 필의 말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달려가는 속도가 크게 약화되어있었다. 십여 리 길을 달려가게 되었을 적에 붉은 말은 몸에서 땀을 뻘 뻘 흘리는 것이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것 같았다. 곡창해와 아앵은 정히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느라 그만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도적들이 타고 온 말 고삐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고 그 도적이 타고 온 말은 그만 저쪽 황량한 들판으로 달려갔다. 아앵은 자기가 타고 온 말을 아끼느라고 그렇게 채찍질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 하게 이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두필의 말이 신속하게 이쪽으로 달려오 고 있었다. 곡창해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3332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3.2.비범한 소년의 기 09/11 07:55 326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3.2. 비범한 소년의 기지 [그들이 자기네들의 말을 찾은 모양이네. 앞쪽 멀지 않은 곳에 고을이 있으며 보기에 무척 번화한 것 같으니 틀림없이 한동안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이네.] 아앵은 안색이 창백해져 급히 말을 몰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타고 온 말이 죽든 살든 돌보지 않고 전력을 다해서 채찍질을 했으나 뒤에서 쫓아오는 두 필의 말은 점점 그 들과의 간격을 좁히고 있었다.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 은 저 멀리서 보았던 고을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곡창해는 아앵에게 골목길로 들어서도록 말해주었고, 그들은 그리하여 두어 번 모퉁이를 돌아서 나아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자기네들이 들어선 골목이 막다른 골목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 다. 두 사람은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게 되었다. 다급해진 나머지 아앵은 그만 울상을 짓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곡창해는 이빨을 깨물었다. [우리들이 말머리를 돌려서 나가게 된다면 틀림없이 뒤쫓아오 는 적과 딱 마주치게 될 것이니 부득이 다시 한번 더 몸을 숨기 는 수밖에 없다.] 아앵은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고 물었다. [그들이 또 속아 넘어갈까?] 곡창해는 힘주어 말했다. [반드시 그들이 속아넘어가도록 만들어야지.] 그는 즉시 말에서 내려 말을 사립 담장에가 묶었다. 그리고 사 립 담장 안쪽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돼 조심해야 돼. 말이 비벼대면 그 사립 담장은 즉시 넘어 지고 말걸.] 그 음성은 매우 맑고 카랑카랑한 편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안쪽 집의 창가에 한 명의 젊은 부인이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동자가 크고 민 활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매우 총명한 젊은 부인인 것 같았 다. 곡창해는 다급해서 말했다. [아주머니, 좀 도와주십시오. 우리들은 악인들에게 쫓겨서 이 곳까지 왔습니다만 숨을 만한 곳이 없군요.] 그 젊은 부인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일이 었었소? 그런데 그 악인들은?] 곡창해는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말했다. [거의 다 쫓아왔을 겁니다.] 젊은 부인은 차분히 말했다. [자네들은 잠시 이 안으로 들어와 있을 수 있지만 저 붉은 말 은 숨길 곳이 없을 것 같다.] 곡창해는 사립문을 밀고 아앵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대답 했다. [말은 상관이 없어요. 아주머니께서는 그저 우리들이 담장을 넘어서 저쪽으로 건너갔다고만 이야기해 주세요.] 그 젊은 부인은 두 명의 어린애들 가운데 한 명이 네모진 얼굴 에 커다란 귀를 가진 것이 퍽이나 위엄이 있고 늠름한 기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명은 그린 것 같은 눈동자와 속눈썹에 수려하기 이를 데 없 는 얼굴인 것을 보고는 속으로 귀여움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빨리 안으로 들어와. 아무쪼록 그 악인들을 속일 수 있기를 바란다.] 이때 그들 뒤를 쫓던 두 필의 말은 이미 이 고을을 가로질러 조금도 멈추지 않고 떠나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한 필의 말 이 이 고을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 말에는 두 사람이 타 고 있었다. 일찍이 그들의 눈에 띄었던 두 필의 말은 그들을 뒤쫓아서 잡 으려고 온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곡창해가 만약에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곧장 이 고을을 가로 질러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면 어쩌면 뒤에서 쫓아오는 추격병을 떨쳐버릴 수 있었을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 두 대한은 고을로 들어서게 된 이후 잠시 수소문을 한 끝 에 즉시 곡창해와 아앵이 뛰어들어간 골목으로 찾아들게 되었고 끝내는 그 붉은 말을 발견하게 되었다. 두 사내는 서둘러서 사립문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창문 주앞에 섰던 젊은 부인은 놀란 듯 소리쳤다. [어머머, 누가 감히 아낙네 혼자 있는 집으로 뛰어드는 거예 요?] 그러자 깨진 징소리 같은 소리를 내는 자가 노해서는 부르짖었 다. [제기랄, 호들갑 떨지 말아라.] 곧이어 음성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사내가 대뜸 그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소낭자(小娘子), 우리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냐?] 젊은 부인이 정히 입을 열려고 했을 때 깨진 징 소리와 같은 음성을 가진 대한이 급히 안으로 달려들어 오더니 호통을 쳤다. [더 말할 필요 없네. 그 두 꼬마는 틀림없이 이곳에 숨어 있을 것이네.] 젊은 부인은 깨진 징 소리와 같은 음성을 가진 대한이 흉신악 살처럼 집 안으로 달려들어가자 그만 안색이 대뜸 하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음성이 뾰족한 대한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소낭자, 당신은 어째서 안색이 크게 변하지?] 그의 두 가닥 눈초리는 마치 예리한 검처럼 매서워 그 젊은 부 인은 놀라 그만 가슴을 두근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역 시 거짓말을 잘 하는 편이라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띄우고 더듬 거리며 말했다. [이……이분 오라버니께서는 너무나 흉악하시군요.] 그 사내는 즉시 안색이 부드러워져서는 말했다. [이 친구는 성이 뇌(雷)씨인데 성질이 바로 우레와 같다네. 당 신네들 여인네들은 담이 적기 때문에 이 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태반이 겁을 집어먹게 되지……] 그는 킥킥거리고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는 성이 조씨야. 자네가 나보고 조오라버니, 하고 불러보면 어떨까.] 젊은 부인은 가쁜숨을 몰아쉬며 귀를 바짝 세워 안쪽 방의 기 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여전히 무섭 고 두려운 표정을 띠우고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부르려고 하 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와 같이 노닥거리고 있을 적에 뇌씨 성을 가진 대 한은 쿵쿵거리며 다시 달려나오더니 호통을 쳤다. [두 꼬마는 어디에 숨어 있느냐? 빨리 말해라. 그렇지 않을 때 나는 너를 한 칼로 내리치고 말겠다.] 조씨 성을 가진 사내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뇌형, 그러지 말게. 이 소낭자는 사리를 잘 판단하는 사람일 세.] 그는 얼굴을 돌리고 젊은 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그 애들을 보았는가?] 젊은 부인은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그 애들은 들어오자마자 저쪽 담장을 넘어서 달아났어요.] 조씨 성을 가진 사내는 이 젊은 부인에게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던 판이라 떠나기가 아쉬운 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는 여전히 얼굴에 매우 다급한 빛을 띄우고 말했다. [그들이 우리들을 한번 속였으니 이번에야 담장을 넘어서 도망 가는 것이 바로 이치에 합당한 일일세. 그런데 그와 같은 생각 을 그 꼬마 녀석이 한 것일까? 아니면 그 계집애가 생각해 낸 것일까?] 그 뇌씨 성을 가진 대한은 거칠고도 귀찮다는 듯 큰소리로 외 쳤다. [어느 애숭이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상관할 것이 있는가? 우리 들은 그 계집애를 잡는 것이 급선무일세.] 조씨 성을 가진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이 만약에 그 계집애를 잡아온다면 그야말로 큰 공을 한 건 세우는 것일세. 빨리 가세.] 그러더니 아낙네를 한번 탐욕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총총히 문 을 나서더니 담장을 넘어서 달려갔다. 이 젊은 부인은 성이 임(林)씨였는데 재빨리 안쪽의 방으로 달 려들어가 보니 한 명의 아리따운 소저가 온 얼굴에 생화를 꽂고 서 창가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임씨 성을 가진 젊은 부인은 약간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이봐요. 당신은 누구지?] 아리따운 소녀는 고개를 돌리고 '킥' 하고 웃었다. [우리들이에요!] 그 말 가운데 갑자기 그 처녀는 키가 반으로 줄어들게 되고 다 른 쪽의 기다란 치마 아래에서 바로 그 곡창해가 기어나오는 것 이 아닌가. 임씨 성을 가진 젊은 부인은 그만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와 같은 묘책을 생각해 내다니 정말 기특하군. 그런데 어째 서 머리에 생화를 꽂고 있느냐?] 아앵은 대답했다. [곡형제가 나의 머리가 너무 적어서 상대방 쪽에서 멀리서 볼 적에 대뜸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에 이 많은 꽃을 꽂아서 얼굴을 가리라고 해서 그렇게 했지요.] 임씨 성을 가진 젊은 부인은 조씨 성을 가진 사내가 던졌던 질 문을 떠올리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보니 그와 같은 생각들을 해낸 것은 이 남자애였구나. 내 가 보기에 이 남자애는 단정하고 의젓한 것이 크게 위엄이 있어 보이길래 그런 잔꾀는 이 계집애의 생각인 줄 알았지' 아앵이 이제 옷을 벗으려고 했다. 곡창해는 즉시 말렸다. [잠깐 기다려. 그 두 명의 악당이 돌아올 것이다.] 임씨 성을 가진 젊은 부인은 놀라 말했다. [그들이 이번에 돌아오게 된다면 틀림없이 자세히 수색을 하든 지 아니면 집 안에 두 여자만이 있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손을 써서 찝적거릴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그들이 당신들의 몸에 손을 대게 된다면 이 연극은 그만 들통이 나고 말 것이 아니겠어!] 그 말에 아앵 역시 놀라고 당황한 빛을 띠었다. 곡창해는 생각을 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께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이 돌아오게 되었을 적 에 십중 팔구 매우 총망스럽게 말을 찾아 이곳을 급히 떠나가게 될것입니다.] 아앵은 그와 같은 위로의 말을 듣자 미소를 띠었다. 임씨 성을 가진 젊은 부인은 의아한 얼굴이 되어 곡창해에게 물었다. [소형제, 자네는 어떻게 짐작을 할 수 있지?] 곡창해는 천천히 말했다. [그들이 길을 따라 수색해 나갔다가 조금도 단서를 얻지 못하 고 거리에 이르게 된다면 틀림없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볼 거예요. 저는 일찍이 두 필의 말이 우리 뒤를 바짝 좇 아온 것을 보았는데 그 악당들은 틀림없이 그와 같은 두 필의 말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아마도 우리를 접응하러 온 사람이 아닌가 하고 재빨리 돌아와 말을 가져가게 될 거예요.] 아앵은 외쳤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젊은 부인은 그가 조리 있게 설명하는 것을 보자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그렇게 잘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더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눈길을 돌려 아앵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그 두 명의 악인이 틀림없이 그러리라 생각하는가?] 아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모르겠어요.] 임씨 성을 가진 젊은 부인은 의아하여 물었다. [자네가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다니, 그것은 무 슨 까닭이지?] 아앵은 방긋이 웃었다. [이 곡형제의 말이 틀림없기 때문이지요.] 임씨 성을 가진 젊은 부인은 일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 러나 그녀는 곧 미소를 띄우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더니 곧이어서는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골목을 벗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곡창해는 아앵을 도와 바깥의 커다란 겉옷을 벗기고 다시 아앵 을 위해 머리에 꽂은 생화를 뽑았다. 아앵은 물었다. [내가꽃을 꽂으니 예뻐?] 곡창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엉터리, 남자가 어떻게 꽃을 꽂을 수가 있어?] 아앵은 입을 뾰로퉁하니 하고서 입을 열었다. [나는 매일같이 꽃을 꽂는데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이지?] 곡창해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네가 매일같이 꽃을 꽂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임씨 성을 가진 젊은 부인이 달려들어 오더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소형제, 정말 장해. 그들은 과연 떠나더군. 그러나 붉은 말마 저도 타고 가버렸다.] 그녀는 몇 송이의 좋은 꽃을 찾아내어 아앵의 머리카락에 꽂아 주며 그녀를 얼싸안고는 입으로 혀를 차며 칭찬의 말을 했다.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군.] 곡창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알고보니 여자애였군. 그러니까 매일 꽃을 꽂았지.]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과연 매우 아름답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태도는 매우 정중했다. 아앵은 그 말을 듣고 기뻐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우고 입을 열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를 예쁘다고 하지만 오직 네가 하 는 말만 듣기 좋구나.] 아앵은 기뻐서 연신 웃으면 물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나를 찾아와 함께 놀아주겠니?] #3333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3.3.비범한 소년의 기 09/11 09:07 319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3.3. 비범한 소년의 기지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반드시 찾아가지.] 임씨 성을 가진 젊은 부인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일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만약에 모두 이 한 쌍의 어린 사 람들처럼 진실하고 성실하다면 이 세상은 살맛이 날 것 같구 나.' 곡창해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나갔다. 그는 젊은 임씨 부인에게 몇 번이고 사의를 표하고서 그곳을 떠나갔다. 거리에 이르자 곡창해는 즉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가서 옷을 사입도록 하자. 네가 여자애의 옷차림을 하면 틀림없이 상대방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다.] 아앵은 그저 곡창해가 하자는 대로 했으며 전혀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 즉시 그들은 한 벌의 옷을 사서 집 모퉁이의 으슥한 곳에 가서 옷을 바꿔 입었다. 그리고 벗은 옷은 보따리에 싸서 여전 히 몸에 지녔다. 두 사람은 다시 거리로 나갔다. 곡창해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가 갑자기 아앵을 끌고 베를 파는 점포로 들어갔다. 이때 점포 안에는 베를 파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들은 이 두 어린 사람들을 보고 어른이 데리고 온 애들인 줄 알고는 별로 주의를 하지 않았다. 곡창해는 자신의 몸을 숙이고 아앵에게 바깥을 살피라고 했다. 삽시간에 세 명의 경장을 한 대한들이 거리를 지나갔는데 하나 같이 무기를 들고 있었고 그 표정들이 흉악하고 사납게 생겼다. 아앵은 살그머니 말했다. [만약에 네가 나보고 바깥을 살피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줄곧 말을 탄 사람만 주의했을 것이며 결코 저와 같은 흉악한 사내들을 바라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 짐작으로 그들은 틀림없이 말발굽 소리를 내게 된다면 우 리들에게 들키게 될까봐 말을 버리고 걸을 것이라 했는데 이제 내 말이 정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지.] 그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먼저 장소를 찾아서 몸을 숨기도록 하자. 나에게는 너를 집으로 돌려보내 줄 방법이 있다.] 아앵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으며 두 눈에는 무한한 감탄의 빛이 서려 있었다. 곡창해는 혼자서 바깥쪽으로 나가 한동안 살펴보더니 아앵을 불러 함께 골목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집 뒤쪽으로 돌아가 자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숲이 있었다. 곡창해는 사방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아앵을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혼자 숲속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에 아앵이 길을 따라 역시 숲속으로 걸어들어 왔다. 두 사람은 숲속에서 만나 한 무더기의 나무 덤불 안에 몸을 숨 겼다. 곡창해는 길게 숨을 몰아쉬고 나직이 말했다. [이제는 안심이다. 그러나 말을크게 해서는 안 될걸.] 아앵은 대답했다. [알았어……] 그녀는 '훗' 하고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는 우리 관가보에서 아버지와 예 대숙 두 사람만을 두려워 했단다. 그분들 이외에 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고 동쪽으로 가라 면 서쪽으로 갔고 나보고 앉아 있으라고 하면 나는 서 있곤 했 는데 내가 이토록 너의 말을 잘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곡창해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집에서 매우 착하게 굴었지. 하지만 나는 한번도 여자애 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해본 적이 없단다.] 아앵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아, 네가 나와 함께 있기 싫어한다면 그만두자.] 곡창해는 웃으면서 그 말을 받았다.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에 너는 잘 기억하고 있다 가 내 말이 다 끝난 이후에 입을 삐죽하도록 해라.] 아앵은 다시 순순히 대답을 했다. [그러지.] 그러는 그녀의 태도는 무척 유순했으며 또 지극히 자연스러웠 다. 곡창해는 천천히 설명하듯 말했다. [나는 여자애들과 함께 노닥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오직 너만은 예외다. 왜냐하면 너는 다른 여자애들과 다르니까 말이 다.] 아앵은 크게 기쁜 빛을 얼굴에 띄웠다. [어떻게 다르지?] 곡창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매우 의젓하게 입을 열었다. [첫째는 매우 예쁘다. 그리고 둘째 너는 결코 우물쭈물하지 않 는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나에게 매우 잘 대해주고 있다. 그리 고 네 번째로 나는 반드시 너와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앵은 웃음을 띄우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으며 마음속으로 전 혀 두려움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물론 그러한 그녀의 행동 이 곡창해에 대해서 지극히 신뢰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을 그녀 자신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곡창해는 질문을 던졌다. [너는 무공을 배운 적이 있느냐?] 아앵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기는 했었지만 아버님은 매우 불만이셔. 아버님께서는 아 버님의 그 수법이 나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나를 사촌 고모 님 댁으로 보내서 무공을 익히도록 하려고 해지. 그러나 어머니 께서 응낙을 하지 않으셨어……] 곡창해는 물었다. [너의 사촌 고모님은 또 누구니?] 아앵은 대답했다. [나 역시 그분의 이름은 몰라. 다만 그녀가 추혼낭자(追魂娘 子)라는 것만 알고 있는 뿐이야.] 곡창해는 혀를 내둘렀다. [그 별호는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그러면서 그는 매우 기민하게 바깥쪽을 살폈다. 아앵은 의아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설마하니 그 악당들이 이곳까지 우리들을 찾아오겠니?] 곡창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거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우리들은 역시 조심을 하는 것 이 좋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다른 일들을 이야기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상당 한 시간이 흐르게 되었을 적에 아앵이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져 서 입을 열었다. [누가 오고 있다!] 곡창해는 그녀의 조그만 손을 쥐고서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려워하지 마, 그 악당들은 아닌 것 같다.] 아앵은 정말 두려워하지 않고 귀를 쫑긋하니 세우고 세심히 들 어보더니 곧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정말 악당들은 아니로구나.] 곡창해는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에 악당들이 들어닥치는 것이라면 틀림없이 매우 발걸음 을 가볍게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니 오고 있는 사람은 이 부근 의 시골사람들일 게야.] 잠시 후 한차례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그 기척으로 미루어 모두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 가운 데 젊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은 말을 타고서 거리를 오락가락하니 정말 얼마나 위풍이 당당해요.] 다른 한 사람이 그 말에 대답했다. [요즘 세상은 갈수록 말이 아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또 흉기를 지닌 채 오락가락하면서도관부의 사람들에게 잡혀서 뇌옥으로 잡혀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말이 다.] 이 사람의 음성은 매우 늙수그레 했다. 젊은 사람은 다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십중 팔구 강도들이나 악당인 것 같아요. 얼굴의 그 표정만 보아도 첫눈에 알아볼 수가 있어요.] 젊은 사람의 말에 나이 많은 사람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 두 어린애를 찾고 있었다. 만약에 강 도들이 악당들이라면 어린애를 찾아서 무엇하겠느냐?] 젊은이는 '쉬'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그들이 강도나 악당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곧 우리들을 귀찮게 굴 거외다. 조금 전에 두 세 명이 숲이 있는 이곳으로 다가오려고 했는데 어쩌면 이미 우 리 등뒤에까지 와 있는지 모를 일이외다.] 곡창해는 그 순간에 아앵의 조그만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즉시 힘주어 잡아주었다.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위로를 해준 것 이었다. 지나가던 두 사람은 이미 그들이 있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으나 말소리는 여전히 바람결에 들려오고 있었다. 역시 젊은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아! 나는 한평생 말을 타고 여러 곳을 돌아다닐 생각은 말아 야지. 참, 그들의 복장은 매우 이상하더군요.] 그 다음 말은 이미 모호해져 잘 들을 수가 없었다. 곡창해는 마음을 써서 귀를 기울였으나 여전히 똑똑히 들을 수 가 없었다. 이때 날은 이미 황혼 무렵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숲속에서 거의 두 시진이나 오랫동안 숨어 있 었다. 아앵은 무공을 연마한 적이 있었으나 역시 나이가 너무나 어렸 기 때문에 이때에는 곡창해의 몸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곡창해는 지극히 참을성 있게기다렸으며 몸을 꼼짝도 하지 않 았다. 나이 어린 자가 짝이 놀라 깨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묵묵히 생각에 잠겨서는 조용히 되풀이 해서 그 두 명의 시골사람들이 그들 곁을 지나치게 되었을 적에 최후로 한 한마 디를 되뇌어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기쁜 얼굴이 되어서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바로 그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한 후에 아앵을 흔들어 깨우고 부드러운 어 조로 말했다. [너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자도록 해라.] 아앵은 매우 재빨리 정신을 되찾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 었다. [어떻게 돌아가?] 곡창해는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 방법이 있다. 내가 너를 큰길 쪽으로 데려다 놓기만 하 면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켜서는 숲속서 나갔다. 곡창해는 너무나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에 반쪽의 몸이 약간 짜릿해져 아앵의 부축을 받아 쓰러지는 것을 면할 수가 있었다. 아앵은 근심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너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데 어떻게 소림사까지 걸어가 니?] 곡창해는 늠름히 말했다. [나는 반드시 소림사로 가야 돼. 그렇지 않을 때 우리 어머님 은 옛친구에게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 거야!] 아앵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급히 물었다. [만약에 네가 화상이 된다 하더라도 나를 찾아오겠니?] 곡창해는 생각해 보고 나서 말했다. [내가 무예를 다 익힌 후 설사 화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너를 만나보러 찾아올 것이다.] 아앵은 근심스러운 얼굴빛에 기쁜 빛을 띄우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안심했다. 나는 반드시 재미 있는 물건들을 많 이 준비해 두었다가 네가 오기를 기다리겠다. 그리고 나는 기다 려서 네가 정말 화상이 되었는지 두고 볼 테다.] 곡창해는 그녀가 그에 대해서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위로의 말을 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화상이 되지 않도록 할게. 장래에 우리가 만나게 되었을 때에 나는 틀림없이 많은 일들을 너에게 이야기 해줄 수 있게 될 것이며 어쩌면 사흘 낮 사흘 밤을 두고 이야기 를 해도 다 끝내지 못할지도 모르겠구나.] 아앵은 얼굴 가득히 기쁜 표정을 짓고 그의 손목을 꼭 잡고 물 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곡창해는 다시입을 열었다. [그때는 우리 둘이 모두 다 장성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업 신여기거나 간섭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 들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서 마음 놓고 웃고 이야기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말을 하지 않았다. 아앵은 놀라서 물었다. [이제 우리들은 헤어져야 하니?] 곡창해는 어스름빛이 스며들고 있는 고을 쪽을 바라보며 대답 했다. [그렇다. 그러나 나는 너를 저 고을 안의 거리까지 데려다 준 이후에 헤어지겠다.] 그는그녀의 조그만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으며 속으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무한한 허전함이 끓 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앵은 항의도 하지 않고 얌전하게 그를 따라 고을 쪽으로 걸 음을 옮겨 놓았다. 그러나 그는 걸음걸이를 느리게 했다. 아마 도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묵묵히 고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골목길로 해서는 큰 거리 쪽으로 나섰다. 곡창해는 자기가 사내 대장부니까 꼴사나운 태도는 보이지 말 자고 작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서는 차분한 어 조로 입을 열었다. #3334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3.4.비범한 소년의 기 09/11 11:40 265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3.4. 비범한 소년의 기지 [나는 큰길 쪽으로 나가지 않겠다. 네가 큰 거리 쪽으로 나가 게 된다면 자연 너희들 관가보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복장과 마필들은 모두 다 이상하여 남의 시선을 끌게 되 어 있지 않느냐? 맞지?]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아앵은 흐느 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곡창해는 갑자기 앞길이 막막하여 어쩌면 중도에서 나쁜 사람 에게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영원히 관가보로 그녀를 찾아가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자 그만 콧날이 시큰해지 면서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앵은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오히려 흐느끼는 것을 멈추고는 놀라고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어. 아, 너 도 역시 그 어른들과는 다른 데가 있구나. 나는 그들을 좋아하 지 않는다구.]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도 그 어른들을 별로좋아하지는 않아.] 두 사람은 눈물에 시선이 모호해져서는 미소를 지으며 상대방 을 바라보았고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갑자기 한차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그들은 놀라 정 신을 차리게 되었다. 아앵은 기뻐서 말했다. [우리편 사람들이야. 나는 저 말발굽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있 어.]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빨리 나가봐. 이제는 같이 가주지 못하겠구나.] 아앵은 대답을 하고서는 신속하게 달려갔다. 십여 걸음 달려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그녀는 되돌아서달려왔 다. 마치 조그마한 나비가 날아갔다가 날아오는 것 같기도 했 다. 그녀는 옆으로 다가와서는 급히 물었다. [너는 반드시 나를 찾아와 주어야 돼.]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틀림없이 너를 만나보러 갈게.] 그 음성은 매우 굳건했다. 아앵은 골목길에서 빠져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곡창해는 한차 례 환호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곧이어서는 한차례의 지 극히 우렁찬 말발굽 소리가 신속하게 멀어져 갔다. 그는 이미 아앵이 자기편 사람들에게 돌아갔으니 이후에는 틀 림없이 안전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 역시도 그만 흐뭇해서는 미소를 띠우고 거리 쪽으로 걸어나가 국수를 사먹고 배를 채웠 다. 동시에 그는 다시 커다란 한 봉지의 건량과 한 자루의 예리한 단도(短刀) 그리고 약간의 잡다하게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그 리고 한 분의 얼굴이 충후하게 생긴 노인을 골라서는 다시 남양 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관도(官道)를 따라 다시 줄곧 서쪽으로 나가기만 하면 바로 남 양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번에 집을 나서게 된 이후 무영도 곽군도 그에게 어떻게 남 양으로 가야하는지를 누누이 들려준 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 에 그는 재빨리 다른 많은 잡다한 일들을 기억해 낼 수가 있었 다. 이날 밤 그는 바로 출발했으며 혼자서 길을 재촉했다. 그의 짐작으로 자기는 관가보와 관가보의 적 쪽에서 잡으려고 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곽 대숙의 금낭이 자기 의 몸에 있으니 반드시 안전하게 숨겨야만 곽 대숙의 부탁을 저 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코 어떤 사람에게도 잡혀서는 아니 되었다. 그는 이미 어떠한 사람이라도 관가보의 야유신 예충으로부터 자기가 전혀 무공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틀림 없이 그 자신이 밤중에 홀로 길을 가지 못할 것이고 더 더욱 큰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보리라는 점을 굳건히 생각해본 바 가 있었다. 그는 반드시 상대방의 의표를 찔러야만이 자기 쪽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하여 야밤에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큰길 쪽에서 멀리 떨어지기는 했으나 관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조만간 남양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계 산이었다. 그는 몸에 건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점심을 먹기 위해서 민가나 주막을 찾아들 필요가 없었다. 쉬고 싶은 적에는 나무 위로 올라가 밧줄로 자기의 몸통을 나 무에 묶고 잠을 잤다. 그리고 길을 갈 때에는 큰길을 피해 들과 밭을 가로질렀다. 이와 같이 며칠을 가자 무사할 수 있었으나 그는 이미 지칠 대 로 지치게 되었고 몸이나 옷차림이 무척 더러워지게 되었다. 그는 여짓껏 살아오는 동안 이토록 고생을 한 적이 없었다. 몇 번이나 그는 견디어내기 힘들다고 느끼기도 했다. 품속에는 충분한 노자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커다란 수레를 빌려 곧장 남양으로 향해도 안될 것은 없다는 생각도 들 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빨을 깨물며 그와 같은 유혹을 떨쳐 버리고 계속해서 두려움과 고통스러운 노정을 줄이기 위해 분투 했다. 다시 이틀을 가게 되었다. 이제 많이 수척해지고 거무튀튀해지 게 되었으나 근골은 점차적으로 튼튼해지고 강인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길고 긴 길을 가는데도 힘들고 피곤하다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처음 대낮에 쉬게 되었을 때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금낭을 꺼 내서 만지작거렸다. 그는 그 금낭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싶었다. 더욱이 그는 이 금낭을 위해서 이미 엄청난 대가를 치 른 만큼 더욱더 이 가운데 얽혀 있는 비밀을 알고 싶었다. 하지 만 그는 언제나 그와 같은 충동을 억눌렀다. 나중에 호기심이 점점 엷어지면서 다시는 그 금낭을 꺼내지 않게 되었다. 곡창해는 여드레를 걷고 또 걸었다. 놀랍게도 여행길은 순조로 워서 아무런 변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번 자기의 계획에 퍽이나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이날 해질 무렵에 그는 충분한 잠을 잔 이후 다시 길을 떠났 다. 몇 마장을 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한 가닥의 개울물이 그의 앞 을 가로막았다. 그는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그 개울을 첨벙대며 가로질렀다. 거의 맞은편 언덕에 도달하게 되었을 적에 우연히 고개를 숙이 고 물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물속에 비 춰진 자기의 모습은 비쩍 마르고 또한 더러워 처음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나의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바 로 내가 창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도 내가 이토록 고생한 일을 알게 된다면 나의 굳건함과 기지를 칭 찬해주실 것이다.' 그와 같은 생각에 그는 기분이 좋아져 앙천 대소했다. [하하하…….] 갑자기 그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갑자기 웃음소리 를 멈추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여전히 멎지를 않았다. 그는 후딱 몸을 돌리고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등뒤의 언덕 에 한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웃음소리는 바로 그 사람 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얼굴에는 전혀 웃음이 감돌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에 그는 결코 마음속 으로 기쁜일이 있어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웃음소리와 곡창해가 조금 전에 냈던 웃음소리는 매우 비 슷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틀림없이 일부러 사람을 희롱하려는 의도가 있음이 분명했다. 곡창해는 시력이 지극히 뛰어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언덕가에 서 쭈그리고 앉았는데 여전히 보통 사람들이 서 있는 벗보다 별 로 적지 않은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적어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머리가 하나 더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밖에도 그 사람의 머리카락은 새까맣고 얼굴의 살결은 고우 면서도 희었으며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가 도대체 늙은 것인지 아니면 젊은 것인지 짐작 하기가 어려웠다. 어찌되었든간에 그 사람의 온몸 아래 위와 표 정 그리고 태도에서 어느 하나 이상야릇한 기운을 띄지 않는 곳 이 없을 정도였다. 곡창해는 속으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저 사람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역시 길을 재촉해서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구나.' 이윽고 그는 머리를 되돌리고서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나갔 다. 다시 이삼 마장을 걸어가게 되었을 때에 머리 위에서는 한 떼 의 밤새들이 둥지로 되돌아가느라고 그의 머리 위 하늘을 날아 서 지나가면서 우는 소리를 내었다. 그의 등뒤 얼마 되지 않는 곳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곡창해는 무척 총명한 사람이라 즉시 그 괴인의 소행이라는 것 을 알고서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도 않았다. 한동안 새소리가 울려퍼진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여러 가지 기 이한 소리가 또 들려왔다. 늑대의 울음 소리와 호랑이의 포효하 는 소리, 그리고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까지도 들렸다.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어디서 그토록 많은 짐승 들이 뒤를 줄줄 따라는 것일까 하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놀라 자빠졌으리라. 곡창해는 줄곧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괴인은 혼자서 지치도록 날뛰다가 흥미를 잃게 되었을 때 에는 자연 제 갈길을 갈 것이다.' 그런데 곧이어 뒤쪽에서는 어린 젖먹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 려왔고 여인이 아이를 토닥거리며 달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런가 하면 한동안 지극히 팽팽해진 시위소리와 급격히 두드 려 대는 북 소리, 또 술을 먹이기 위해서 가위바위보와 같은 시 권(猜拳)을 할 때 내는 소리도 들려왔다. 잠시 후에는 다시 양군이 대치한 가운데 서로 돌진해서 육박전 을 벌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정말 별 희한한 소리가 다 들려왔는데 그 소리들이 모두가 정 말 그럴싸해서 지극히 박진감이 넘쳤다. 곡창해는 비록 성격이 침착하고 의연하며 굳건한 사람이었지만 몇 번이나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려고 했다.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많고도 기기 괴괴한 소리들을 낼 수가 있었는지 보고 싶었지만 호기심을 꾹 누르고 끝까지 돌 아보지 않은 것이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컴컴해졌다. 사면은 모두 다 황량한 들판이라 민가의 등불이나 행인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때 그의 등뒤에서 도깨비가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 숲에서 내지르는 비명 소리, 매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일정한 곳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들려 오는가 하면 저곳에서 들려 오곤 했다. 그리고 때때로 은연중에 사람이 처절하고도 매섭게 '사람 살려' 하고 큰소리로 부르짖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헤아려 본 후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지 않았는데 등뒤에서 여러 가지 기이한 소리들이 점점 사그러졌다. 그는 여전히 성질을 누르고 한동안 기다리다가 겨우 입을 열고 말했다. [나는 겨의 열세 살 먹은 아이에 불과합니다. 어느 분이신지 모르지만 설사 나를 놀라서 쓰러지게 해도 별로 대단할 것은 없 을 것입니다.] 그 말은 지극히 뾰족하고 날카로웠으며 힘에 차 있었다. 곡창해는 등뒤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빙그레 웃었다. '그는 대답할 말이 궁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떠나 갔을 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일곱 여덟 걸음을 나아갔다. 눈앞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마치 한 채의 조그만 산이 자기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 낌이 들어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원래 지극히 키가 큰 사람이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옷차림이 헐렁한 편인데다가 높은 갓마저 쓰고 있어서 마치 이 양간세상(陽間世上)에서 일반적으로 차려 입은 옷차림과는 다른 것 같았다. 곡창해는 애써 마음속의 공포심을 억제하고는 담담히 입을 열 었다. [백부님, 실례합니다. 저는 역시 저 앞쪽의 마을로 들어 가야 합니다.] 그 사람은 천천히 쭈그리고 앉았는데 그 쭈그리고 무릎을 굽히 게 되었을 때에 '후두둑 후두둑' 하는 소리가 잇따라 일었다. 마치 몇 년간 무릎을 꿇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 움직임이 매우 굳어 보였고 또 딱딱해 보였다. 그와 같은 소리는 야수가 뼈를 긁어 먹는 소리와 비슷했다. 곡창해는 약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여전히 커다 란 눈을 뜨고서는 앞쪽의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의 눈썹이나 눈 등 오관은 매우 청수(淸秀)하게 생겼는 데 애석하게도 일종의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딱딱하여 무서운 감을 안겨주고 있어 그 얼굴을 보고 난 이후 오히려 마음이 더 욱 거북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 명의 어른과 한 명의 어린 사람이 서로 대치한 상 태에서 상대방을 한동안 노려보고 있었다. 그 괴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한 꼬마로구나. 너는 노부가 너를 잡아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곡창해는 솔직히 말했다.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두려워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 가 슴을 내밀고 등을 똑바로 세운 것이지요.] 그 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한번 잘했다. 네가 만약 조금이라도 두려운 것을 승인하지 않았더라면 노부는 너를 무시했을 것이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노부는 평생 처음으로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아이를 만 나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너 곡창해이다.] 곡창해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입을 열지 못했다. #3343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4.1.알몸의 여인 09/11 17:50 281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4.1. 알몸의 여인 그 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는 조금 전에 천마묘음(天摩妙音)으로 너를 위협했으나 너로 하여금 조금도 고개를 돌리게 하지 못했다. 내가 마음속으 로 받은 충격과 놀라움은 지금 너의 마음보다 더 크다.] 곡창해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노……노인장께서는 어떻게 저의 이름을 아십니까?] 노인은 천천히 말했다. [노우의 성은 방(龐), 이름은 각(珏)이라고 한다. 일명 천마 (天魔)라고 불린다. 그까짓 조그만 일이야 궁금할 가치조차 없 지.] 곡창해는 그를 바라보았다. [소문에 들으니까 천마의 신통력이 엄청나게 커서 신선이나 부 처님과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노인장의 별호가 천마라면 바로 그 천마입니까?] 천마 방각은 몸을 일으키며 옷을 떨쳤다. [그렇다. 너는 노부를 따라가자.] 그가 옷을 떨치게 되었을 적에 세찬 바람이 소용돌이 치듯 밀 려옴에 따라 곡창해는 뒤로 몇 걸음 밀려난 후에 털썩 엉덩방아 를 찧고 말았다. 방각은 천천히 말했다. [일어나라.] 곡창해는 벌떡 뛰어 일어나면서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노인장께서는 저보고 어디로 가라고 명령하시는지요?] 천마 방각은 몸을 구부리고 그를 바라보더니 눈에 경이로운 빛 을 띠었다. [그건 우선 덮어두기로 하자. 노부는 먼저 너에게 한 가지를 묻겠는데 설마하니 너는 노부의 한수 무공에 대해서 탄복하지 않는단 말이냐? 만약 탄복한다면 어째서 조금도 배우고 싶어하 지 않느냐?] 곡창해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노인장께서 저를어여삐 보시는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 지만 불초는 부득이 노인장의 호의를 저버릴 수밖에 없군요.] 방각은 잠시 말이 없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무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부를 찾아뵙고 노부의 제자 로 들어오기를 간청하는지 아마 너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런 데 너라는 녀석은 그와 같은 복을 차버리려고 하니, 천하의 일 이란 정말 헤아리기가 어렵구나.] 곡창해는 겸연쩍은 미소를 띄우고 그를 바라보았을 뿐 아무 대 답도 하지 않았다. 방각은 가볍게 턱 밑의 허옇고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속으 로 아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성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무림에서 무공이 아주 월등한 인사들은 언제나 제자를 얻 기 어려운 고충을 맛보았던 것이다. 방각은 이미 백반(百般)으로 곡창해의 굳건함과 용력, 그리고 기지를 시험해 보았으며 거기다가 그의 천성적인 자질이 바로 한 평생 처음 보는 유일한 인재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었 다. 따라서 그는 곡창해가 자기를 사부로 모시고 무예를 배우고 자 하지 않기 때문에 성이 났다. 그는 수차에 걸쳐 물었으나 곡창해는 자기가 그를 사부로 모시 지 않는 이유를 대지 않고 그저 겨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방각은 이 녀석이 의연하기 이를 데 없을 뿐만 아니라 백절 불 굴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니 아무리 위협을 해도 먹혀들어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유 있는 태도로 말했다. [너는 우선 자세히 생각을 해보거라. 그리고 나중에 만나게 되 었을 때 다시 말하기로 하자.]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괴인은 이미 모습을 감추고 말 았다. 이번에는 곡창해가 크게 의혹을 느꼈으며 이해가되지 않아 속 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노인장이 나에게 강요를 하지 않다니, 이는 실로 뜻밖의 일이로구나.] 잠시 동안 그는 멍해 있다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 했다. 십여 리 길을 걸어나가게 되었을 때에 이미 주위가 컴컴하게 되었다. 이미 깊은 밤이 된 것이었다. 서늘한 바람은 숲과 황야 를 거치면서 높고 낮은 소리를 내어 듣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안 겨주었다. 그는 한곳의 숲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갑자기 앞쪽에 몇 점의 등불빛이 보였다. 곡창해는 대뜸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총총히 걸어서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갔다. 사실 그는 대담하고 마음이 굳건한 편이었으나 밤에 홀로 황야 를 걸어간다는 것은 그 고독과 처량함만 하더라도 그로서는 좀 처럼 견뎌내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다가 서 늘한 바람이 소리를 내고 불어닥치고 있어서 더욱더 무서운 분 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참아내었지만 등불빛을 발견하게 되었을 적에 그만 인적이 드문 골짜기에서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처럼 샘솟듯 기쁨이 솟아오르게 된 것이었다. 잠시 후에 그는 등불빛이 비추는 곳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러 고보니 등불빛은 한 나무 아래에 걸려 있었다. 등불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달려 있었는데 서로의 간격이 십여 장쯤 되었다. 그러나 집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암담한 등불 아래 한 사람이 서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멀리 서 볼 때는 똑똑히 보이지 않았으나 가까운 등불 아래 서 있는 그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뻣뻣하게 서 있는 것이 이상야릇 하고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용기를 내어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 사람은 몸에 백포(白袍)를 걸치고 있었는데 무척 헐렁하며 앞자락이나 소맷자락이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곡창해는 그와 같은 옷차림을 보고 그 하얀 옷이 상복과 비슷 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마침 공교롭게도 얼굴을 곡창해 쪽으로 향하고 있었 기 때문에 그 얼굴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는데 나이는 약 서른 살정도 되었고 눈썹은 옆으로 뻗쳐 있었으며 입은 커다란 것이 매우 흉악한 얼굴이었다. 두 손으로 자기의 목을 움켜잡고 눈망 울을 크게 뜨고 어둠이 짙게 깔린 황야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 다. 곡창해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고 마음속으로 뭐라 고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이 사람은 원래 자기 스스로 목을 졸라 죽으려고 하는 것이로 구나.' 바로 이때 그 사람이 슬쩍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곡창해는 깜짝 놀라 솜털이 모두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설마하니 이 세상에는 정말로 귀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일이 없겠지만 일단 귀신을 떠올리자 곡 창해 역시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다리가 벌벌 떨리는 것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나는듯이 달음질쳐 그 자리에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결코 귀신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없기 때문에 도망을 쳐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도망을 치지 않고 나무처럼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자기의 목을 조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곡창해는 갑자기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이 만약 귀신이 되었다면 온화하고 착한 귀신이 될 것 이며 어쩌면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이지금 보는 것처럼 이토록 흉악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가 제멋대로 생각하는 동안 몇 번이나 그 사람의 몸뚱아리의 여러 부분이 미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그 까닭 이 어디에 있는지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는 사방에 또 많은 등불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등불 아래 사람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설마하니 저 사람들도 모두 이런 모양일까?' 그는 본래 무림의 이름 있는 집안의 후손인지라 평소에 견문이 넓었다. 따라서 그는 갑자기 이 사람들의 자세가 기이하다고 생 각이 들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혈도를 짚혀서 죽은 것이 아 닐까하는 의문이 퍼득 떠오르게 되었다. 그 즉시 그는 용기를 내어 그 백의인(白衣人) 쪽으로 걸어갔 다. 그의 곁에 이르러서도 그가 아무 동정도 보이지 않자 마음 놓 고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졌다. 손에 만져지는 그 사람의 살갗에 서려 있는 체온을 느낄 수가 있었고 또한 근 육도 만져지는 것이 결코 죽은 사람처럼 뻣뻣해진 것은 아니었 다. 그는 물었다. [이것 보시오. 형님, 이게 어떻게 된 것이오?] 백의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곡창해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자는 여전히 저쪽 어둠 속을 노려보고 있은 뿐 전혀 움직이 려고 하지 않았다. 곡창해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구나. 소문에 들으니까 혈도를 짚힌 후에는 사람이 죽은 것처럼 뻣뻣해진다고 들었는데 그런 상태인가 보다.] 그는 손을 뻗쳐서 가슴팍을 만져보았다. 놀랍게도 심장은 뛰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이 점은 혈도를 짚힌 현상과 다른 점이었다. 그는 일순 어리둥절해졌으나 다행히 그는 다른 여느 애들보다 도 허우대가 컸기 때문에 귀를 백의인의 가슴팍에 갖다대고 정 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 백의인의 가슴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곡창해 는 한 가닥의 머리카락을 뽑아 백의인의 콧구멍 안에다 넣었으 나 역시 숨을 내쉬거나 들어마시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이와 같은 증상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히 죽은 것인데 어째서 때로는 움직이는 현상을 보이는 것일까? 그리고 또 어떻게 해서 체온이 남아 있게 된 것일까? 곡창해는 놀라고 의아하여 입을 딱 벌리고 뒤로 예닐곱 걸음 물러섰다. 곧이어 그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달음을 쳤다. 조금 전에 사라졌던 공포감이 다시 그의 마음속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다른 하나의 등불이 있는 곳에 이를 수 있었는데 그 등불은 나무 위에 매달려 있었고 등불 아래 또 한 명의 백의 인이 서 있었다. 백의인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이 백의인은 왼손은 주먹을 쥔 채 머리 위로 쳐들고 있었고 오 른손에는 한 자루의 단도를 쥐고 칼끝을 돌려 자기의 가슴팍에 갖다대고 있었다. 이와 같은자세는 역시 매우 무시무시했다. 곡창해는 이때 이미 귀신이나 강시 같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더 의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그 누가 사법(邪法)을 연마하고 있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사법을 연마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하 는 곳에 숨어서 자기의 동정을 엿보고 있다가 기회를 봐서 그마 저 사로잡아 사법을 연성하는 데 제물로 삼으려고 할지도 모른 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마음속으로 공포를 느꼈으나 여전히 그 사람의 곁으로 다 가갔다. 그 사람은 비록 얼굴이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창백했으나 미목이 청수한 젊은이였다. 곡창해는 손을 뻗쳐 그 소년의 오른쪽 손목을 잡고 힘주어 벌 리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 한 자루의 날이 시퍼런 단도를 떨어 뜨리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젖먹던 힘을 다 써도 그 백의의 젊은이의 오른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몸뚱이도 흔들리지 않았다. 곡창해는 그만 아연해서 몸을 돌려 다시 줄달음을 놓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다른 한 개의 등불 아래에 이르게 되었 는데 그 등불 아래의 백의인은 기골이 무척 장대한 사람이었다. 얼굴은 흉칙했으며 두 무릎을 반쯤 꿇고 있었는데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 때리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가 그의 앞에 이르게 되었을 적에 마침 그는 그의 주먹이 뻗 쳐오는 방향에 위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점에 대해서 는 별 생각도 해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형님, 형님도 말씀을 못하시고 또 움직일 수 없습니까? 아, 아무쪼록 그 누가 있어 나에게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 지를 알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편으로 손을 뻗쳐 흉칙한 백의인을 밀 었다. 갑자기 그 백의인은 눈을 한번 굴리더니 주먹을 미미하게 한두 치 정도 움직였다. 대뜸 한 가닥 세찬 힘이 곡창해의 몸으로 뻗 쳐와 충격을 주어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예닐곱 자 밖으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곡창해는 놀라 고통마저 잊고 몸을 일으켜 멍하니 백의인을 바 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분명히 몸에는 상승의 무 공을 지니고 있구나. 그런데 이와 같은 사람이 어째서 이처럼 황량한 곳에 켜 놓은 등불 아래 서서 이와 같이 야릇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 이때 그는 다시 첫 번째의 백의인을 떠올렸다. 그 사람의 심장 이 뛰지 않고 숨소리도 멈춘 것은 틀림없이 무공이 고강해서 스 스로 그렇게 해 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두 번째 백의인의 몸뚱아리와 팔 근육도 뻣뻣해지지 않았으나 손을 끌어당겨서 펼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뚱이가 한번도 흔들거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가 아랫도리에 공을 들 여 튼튼히 한 데다가 운기행공해서 신형(身形)을 안정시켰기 때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세명의 죽지 않은 사람들은 혈도를 짚혔을지도 모르나 모 두다 몸에 무공을 지니고 있는 인사인데 어떻게 이와 같이 이상 야릇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정말 그 누가 사법을 펼쳐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 마 음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이때 곡창해의 눈앞에 있는 백의인은 두 눈에 흉칙한 광채를 드러내면서 살기를 여지없이 뻗쳐냈다. 곡창해는 본래 매우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재빨리 그곳에서 물 러났다. 얼마 후에 그는 네 번째의 등불이 켜져 있는곳에 이르게 되었 는데 한 명의 여인이 그 등불 아래에 있었다. 나이는 이십 세 정도인데 몸에 넓다란 백포를 걸치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었으며 얼굴 모습이 흉악했다. 이 백의의 여인은 손가락 굵기의 대나무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 대나무는 두 그루의 나무에 가로로 걸쳐져 있었다. 비록 땅 에서 그렇게 높지 않은 곳에 위치했지만 백의의 여인은 그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한쪽 발끝으로 땅바닥을 딛고 있었다. #3344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4.2.알몸의 여인 09/11 19:38 299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4.2. 알몸의 여인 그 대나무가 그토록 여리고 가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절대로 그녀의 체중을 감당해 낼 수 없을 터이지만 이때에 그 대나무가 조금도 휘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백의의 여인이 한쪽 발끝 의 힘을 사용하여 자기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백의 여인은 얼굴에 고통스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자세로 너무나 오래 앉아 있느라고 매우 지친 모양이었다. 곡창해는 이번에는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서 일 장 정도 간격을 둔 채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누님, 당신네들은 어째서 이와 같은 고통을 감수하 고 있는 거지요?] 그녀는 눈망울을 한번 굴리더니 곡창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놀람과 의아한 빛이었으나 잠시 훑어보더니 증 오의 빛을 드러내었다. 곡창해는 그녀의 얼굴빛이 달라진 것을 보고 이미 잘못 되었다 는 것을 깨달은 나머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누님, 화내지 마십시오. 내가 재빨리 이 자리를 떠나지요. 그 러나 만약 누님이 괜찮다면 내가 몇 조각의 돌을 옮겨서 대나무 아래에 받쳐 드리지요. 그렇게 된다면 누님은 그렇게 피곤하지 않을 겁니다.] 백의 여인은 더욱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 곡창해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섰다. 이때 그녀가 호통을 쳤다. [게 서라!] 음성은 얼음과 같이 차가워 어떠한 사람도 듣자마자 그녀가 가 슴 가득히 사람을 죽이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곡창해는 감히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누님께서는 무슨 분부가 있으신지요?] 백의녀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너는 옷을 남루하게 입고 있지만 결코 가난한 사람의 자손이 아니다.] 곡창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여인의 시력은 정말 예리하구나.' 백의녀는 다시 질문을 던져왔다. [너의 이름은 뭐라고 하느냐?] 곡창해는 대답했다. [성은 곡씨이고 이름은 창해라고 하지요.]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하의 무림에는 곡씨 성을 가진 명가고수는 없다. 흥, 너는 혹시 파양 독룡(毒龍)의 문하가 아니냐?] 곡창해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파양의 독룡 장경(張鏡)은 바로 수십 년 전에 명성을 떨친 고 수이며 사파에서 저명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데 그녀가 어떻게 나와 그 사람을 연관시켰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의녀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혹시 금릉 음양선(陰陽扇)의 문하 제자가 아니냐?] 곡창해는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음양선 부평(符平) 역시 이름난 흉인(凶人) 가운데 하나이 지.'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의녀는 냉랭한 어조로 내뱉듯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구루산(勾漏山)의 제자구나.] 곡창해는 더욱 놀라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구루산의 흑수파(黑手派)는 바로 천하의 양대 사파(兩大邪派)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그는 너무 놀라고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흔드는 것을 잊고 말았다. 백의녀는 냉랭한 어조로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 을 지었다. [네 혼자서는 감히 이곳으로 오지 못했을 것이니 배후에서 조 종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람을 대라. 흥, 흑수파가 천하를 횡행한다고 하지만 우리 적신교(赤身敎)를 만나면 그저 도망치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말투는 무척 자만심에 차 있었다. 곡창해는 적신교와 흑수파가 바로 무림의 양대 사파라는 것은 알았지만 적신교가 바로 흑수파의 극성(剋星)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나는 흑수파의 제자도 아닙니다.] 백의녀는 냉랭히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문파의 사람이냐?] 백의녀는 냉랭히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문파의 사람이냐?] 곡창해는 대답했다. [나는 어떤 문파의 사람도 아니외다.] 백의녀는 다그치듯 물었다. [설마하니 너는 야밤에 길을 잃고 우연히 이곳까지 왔단 말이 냐?] 곡창해는 정색하고 대답했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고 이곳을 지나가던 길이었소. 누님께서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요.] 백의녀는 후딱 몸을 날려 어느덧 그의 앞에 서서 두 손으로 곡 창해의 두 팔을 거머쥐었다. 곡창해는 그 순간 팔의 뼈가 바스라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그만 온 이마에서 식은땀을 내쏟게 되었다. '내 팔뼈가 바스라지면 나는 숭산으로 가지 못할 것이다.' 그는 무심코 전신의 진력을 돋구어 대항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무공을 연마한 적이 없으니 어떻게 그 엄청난 힘에 항거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그만 고통에 식은땀을 콩알처럼 내쏟게 되었고 눈앞에는 불꽃이 마구 튀는 것이 금방이라도 견디지 못하고 기절을 하고 말것 같았다. 별안간 한 가닥의 뜨거운 흐름이 고미골(尻尾骨)에서 솟아오르 더니 삽시간에 독맥(督脈)을 뚫고 곧이어 전신의 경맥으로 흐르 는 것이었다. 이 한 가닥의 뜨거운 흐름은 마치 영성(靈性)을 갖춘 조그만 뱀처럼 그의 기경팔맥을 뚫고 나가게 되었는데 모두 다 거슬러 서 운행을 하는 것이고 혈도의 서열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 니었다. 뜨거운 흐름이 일단 체내로 스며들자 두 팔의 팔뼈에서 느껴지 던 고통은 즉시 훨씬 가벼워지게 되었다. 그 흐름이 기경팔맥을 모조리 돌게 되었을 때에 고통스러운 느 낌은 어느덧 반 이상 가셔지게 되었다. 곡창해는 이와 같은 뜨거운 흐름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희미한 웃음마저 드러내는 것이었다. 백의의 여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놓더니 오른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곡창해의 인당(印堂)에 갖다대었다. 곡창해는 그 순간 전신이 바짝 조여드는 것을 느꼈으며 모든 뼈다귀와 근락(筋絡)이 모조리 수축되는 것 같았다. 체내의 정 (精), 기(氣), 혈(血), 수(髓)가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빨려들 어가는 것 같았고 사지백해가 모조리 바짝 수축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저공포와 불안을 느꼈을 뿐이었지만 삽시간에 전신이 아프고 간지러웠다. 마치 정과 수가 이미 고갈돼 버린 것 같았다. 뼈와 살마저도 모조리 녹아서는 흡수돼 버릴 것 같았다. 이 무렵 곡창해가 마음속으로 느끼는 공포는 고통보다 몇 배나 더 심했다. 이와 같은 상태하에서는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르며 설사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난쟁이로 변하고 말 것 같으니 살아 있은들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다시 무심코 힘을 돋구어 맞섰다. 그 백의녀는 손가락 끝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흔들어대는가하 면 앞으로 밀었다가 뒤로 당기기도 했다. 곡창해의 머리 부분은 물론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임에 따라 움 직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몸 안 역시 한 번은 얼음과 같이 차 가워지고 한 번은 불과 같이 뜨거워지는 등 점차적으로 견디어 내기 어려운 고통이 찾아들고 있었다. 그는 지극히 굳세고 의연한 의지로 대항했다. 별안간 고미골에 서 다시 한 가닥의 뜨거운 흐름이 와락 솟아올랐으며 지난번의 노선(路線)을 따라 기경팔맥을 급히 뚫으면서 지나가는 것이었 다. 곡창해는 지난번에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은연중 그 흐름이 혈 맥 안으로 들어가 흐르는 노선을 기억하고 있었던 터라 일부러 그 한 가닥의 뜨거운 흐름이 빨리 돌고 돌도록 다그쳤다. 이 행동은 과연 효과가 있어서 그 뜨거운 흐름은 지난번보다 좀더 빨라지게 되었다. 한번 흐르고 난 후에 곡창해는 여전히 마음과 뜻을 이용해서 그 한 가닥의 뜨거운 흐름을 빨리 움직이도록 재촉하게 되었고 재차 그 흐름은 경맥을 따라 흐르게 되었다. 고통과 괴로웠던 느낌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으나 전신의 근골 은 여전히 수축되고 있었다. 곡창해는 한 번 또 한번 그 뜨거운 흐름을 운행시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몸뚱어리가 수축되는 듯한 느낌도 사 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원래 이때 그의 아랫배 쪽 에 있는 단전의 안에서 또 한 가닥의 뜨거운 흐름이 솟아올랐던 것이었다. 처음에 그 흐름은 먼젓번의 그 뜨거운 흐름에 붙어서 흐르더니 다시 단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좀 더 멀리 나가 게 되었고 세 번째는 두 번째보다 멀리 뻗어나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분명히 나중에 단전에서 끌어 올리게 된 뜨 거운 흐름이 차츰차츰 충만되고 강대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번 그 흐름이 기경팔맥을 돌고 나면 일종의 두둥실하니 자기 자신이 붕 떠오르는 듯한 이상야릇한 느낌과 더불어 무척 재미있고 몸이 개운해지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비단 멈추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두 눈마저 지그시 감았다. 그의 단전 안에서 솟아 올랐던 그 뜨거운 흐름이 어느덧 먼젓 번의 그 뜨거운 흐름의 줄기를 따라 기경팔맥을 통과하게 되자 사지의 백해의관절에서는 '우두둑,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매우 의아한 생각이 들어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그 백 의의 여인은 얼굴이 매우 처참하고 매서워져 있었다. 온몸에 걸치고 있던 옷을 모조리 발가벗고 통통한 육체를 드러 내고 있었는데 살결은 약간 까무잡잡한 편이었다. 아마도 본래 그렇게 흰 살결이 아닌데다가 적신교의 문하였던 만큼 종종 발가벗고 햇살을 쬐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았 다. 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그의 인당에 닿아 있었는데 그녀는 떼 어내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그러나 곡창해는 똑바로 서 있 었으며 조금도 그녀에게 끌어당겨 가는 느낌이 없었다. 그는 너무나 이상해서 뜨거운 흐름을 돌고 돌게 하는 것마저 잊고 입을 열었다. [누님은 어떻게 된 것이오?] 그녀는 나직이 코웃음인지 신음 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내 며 갑자기 뒤로 대여섯 걸음 물러서더니 두 다리에 힘이 빠지는 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곡창해는 전혀 남녀 정감에 대한 생각이 없었지만 옛날부터 선 현들이 가르쳐온 예의나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자는 벌 거벗은 몸으로 두 다리를 쫙 발리고 주저앉았기 때문에 사타구 니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인의 발가벗은 모습은 정말 볼상 사납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재빨리 그 한 벌의 하얀 옷을 집어들고 쪼르르 달려가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백의의 여인은 분연히 옷을 홱 걷어 내던지면서 노해 부르짖었 다. [너는 도대체 누구의 문하냐? 나는 네가 친절하게 구는 것을 싫어한다.] 곡창해는 그 하얀 옷을 들어 그녀의 몸을 가려 주었다. 원래 그는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싸우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렸기 때 문에 그녀와 똑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옷을 주워서 그녀에게 가려준 것이었다. 그는 매우 성실하고도 간절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젓번에 한 말은 한 자도 거짓말이 없었소이다. 누님께 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나로서도 어쩔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백의 여인은 말했다. [나 여약연(黎若姸)은 적신교에서 후기고수(後起高手)에 뽑히 는 사람이며 가장 뛰어난 재간은 바로 이 화양지(化陽指)라는 무공이다. 강호에 나선 지 2년 동안 얼마나 많은 무림의 고수들 이 나의 화양지에 목숨을 잃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너는 아무 일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의 원음(元陰)을 지극히 많이 흡수해 갔 다. 그런데도 네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하니, 누가 그 말을 믿겠느냐?] 곡창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나는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누님이 만약 믿을 수 없다면 그것 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녀는 곡창해의 표정이 지극히 진지하고 성실하며 간곡한 것 을 보고 그 말을 정말 믿기도 힘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다고 느 꼈다.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그녀는 몸을 일으켜 옷을 입고 입을 열었다. [좋다. 나는 이번 일을 분명히 밝혀내고야 말 것이다.] 곡창해는 두 손을 마주잡고 보였다. [실례된 점, 누님께서 역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만 길을 떠나가봐야 하겠습니다.] 여약연은 말렸다. [가지 말고 기다려.] 곡창해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누님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여약연은 다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가 어떻게 알아? 자네는 너무나 급히 서두르지 말고 내가 한동안운기 조식을 하도록 기다려줘. 아! 나는 결코 선택될 사 람이 못 되니 역시 단념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그만 한숨을 내쉬며 탄식해마지 않았다. 곡창해는 그녀의 의도도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급히 서둘러야 할 처지이기 때문에 즉시 입을 열었다. #3351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4.3.알몸의 여인 09/12 19:47 287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4.3. 알몸의 여인 [나는 언제나 날이 밝기만 한다면 길을 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로 누님을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소이다.] 여약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개수작하지 말아라. 날이 밝아오지 않느냐?] 곡창해는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 동녘 하늘에 희뿌연 서광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그만 놀라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내가 그녀와 더불어 실랑이를 벌인 지 꼬박 하룻밤이 지 났구나.] 그리하여 그는 길을 떠날 것을 단념했다. [그렇다면 나는 잠을 자야겠군요.] 사방을 살펴보니 왼쪽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올라가서 잠자기에 무척 알맞을 것 같았다. 그는 그 나무로 다가가 손과 발을 사용해서 기어 올라갔다. 여약연은 의혹스러운 눈길로 그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아서는 두 손을 한번 떨쳤 다. 그러자 몸에 걸쳐져 있던 하얀 옷이 벗겨지면서 땅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그녀의 알몸이 드러나게 되었다. 곡창해는 그녀가 옷을 입지 않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 느낀 나 머지 다시는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을 양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는 한 그루의 옆으로 뻗은 가지를 찾아서는 자기가 그 위 에 앉아 몸을 안정시킨 후 밧줄을 꺼내 자기를 나무등걸에 묶을 준비를 했다. 매일밤 그는 매우 튼튼하게 자기 자신을 묶을 수 있었으며 결 코 실수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날 밤은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가 묶어놓기만 하면 풀어지곤 하는데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는 성이 나서 더 묶을 생각을 하지 않고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그가 여약연 쪽으로 등을 돌리게 된 것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 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얼마 되자 않아 갑자기 등뒤에서 누군가 그를 왈칵 떠 밀었다. 그는 그만 땅바닥으로 곧장 떨어졌다. 떨어지는 순간 그는 여약연이 암산을 가했으니 이번에야말로 끝장이 났다고 판단했다. 별안간 떨어지던 기세가 멈추어졌다. 원래 왼쪽 발목에 밧줄이 묶여 있었다. 그는 그 나무에 데롱데롱 매달린 꼴이 되었다. 곡창해는 속으로 이것이야말로 길인천상(吉人天相)이고,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암산을 해도 부질없는 노릇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허리에 힘을 주고 몸 을 뒤짚어 나무가지 위로 올라서려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가 아무리 힘을 써도 허리에 힘 이 실려지지 않았다. 그저 헛되이 흔들흔들 그네를 타는 것처럼 왔다갔다 하기만 할 뿐 몸을 뒤집어 나무 위로 올라갈 수가 없 었다. 그는 이미 여약연이 옷을 제대로 입고 자기 앞에 걸어서 나타 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적에는 절대로 여약연 쪽을 바라보 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바가 있었다. 따라서 여전히 여약연이 타좌(打坐)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지 않았다. '네가 무슨 수를 써도 나는 네 알몸을 보지 않겠다. 이와 같이 매달려 잠을 자도 좋단 말이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매우 거북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신의 피가 모조리 머리에 모이고 어질어질해지면서 눈이 가물 가물하고 콧날이 시큰해져서 금방이라도 눈물과 콧물을 쏟아낼 것 같았으며 오장 육부마저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버텨내었으나 실로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단전에 있는 기운을 끌어올려 기 경팔맥을 고루 돌게 하려고 했다. 그는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단전의 뜨거운 흐 름을 끌어올리려고 했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 단전에서 뜨거 운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는 강인하기 이를 데 없는 심의(心意)로 그 뜨거운 흐름을 조종해서는 애써 운행을 시켰다. 처음 시작하게 되었을 때는 겨우 나타나자마자 다시 사그라들 었으나 몇 번 이와 같은 현상이 되풀이 되었다. 기경팔맥으로 운행을 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차츰차츰 안정이 되면서 마치 그 기운이 형체를 이룬듯 다시는 흩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겨우 솟아올랐는가 했 을때 다시 움츠러 들었고 단전에서 끌어올리기가 지극히 힘들었 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가까스로 한 곳의 맥을 통과 하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여약연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는 나뭇 가지 위에 뛰어올라 서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때에 얼굴을 거꾸로 한 채 서로 마주쳐다보게 되 었다. 그녀는 음흉한 웃음을 띠었다. [어떻게 된 것이지? 너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 잠자는 것을 좋 아하느냐?] 곡창해는 조금도 지지 않으려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누님도 나처럼 이와 같이 거꾸로 매달려서 잠을 자 보시겠소?] 여약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거꾸로 매달려서 내공을 연마하는 문파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군.] 곡창해는 이때라 생각하고는 재빨리 몸을 뒤집었다. 그러자 이 번에는 가볍고도 수월하게 나뭇가지 위로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는 발목에 묶인 밧줄을 풀고서는 천천히 땅바닥을 내려섰다. 여약연은 몇 번이나 손을 써서 그를 시험해 보려는 눈치였으나 끝내 참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곡창해가 땅바닥에 다 내려서자 넌지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먼저 몇 사람을 찾아본 후에 길을 떠나는 것이 좋겠 구나. 너는 감히 갈 용기가 있느냐?] 곡창해는 이 여자가 흉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녀 의 말을 쫓지 않는다면 때리거나 욕을 할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응했다. [좋소. 그들은 어디에 있소?] 여약연은 간단히 대답했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녀는 앞장 서서 갔다. 얼마 후 그들은 한 그루의 나무 아래 에 이르게 되었다. 석양 아래에 여전히 하나의 불이 켜진 영등(靈燈)이 매달려 있 었다. 등불 아래에 한 명의 백의인이 서 있었는데 두 무릎을 살짝 구 부리고 주먹을 쥐고 때리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기골이 장대했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흉칙했다. 곡창해가 받은 인상은 무척 깊었는데 바로 어제 밤 권풍을 쏟 아내 그로 하여금 예닐곱 자 밖으로 날아가엉덩방아를 찧고 나 가떨어지는 고통을 안겨준 바로 그 백의인이었다. 여약연은 두 눈에 불꽃 같은 광채를 드러내며 그 사람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달려들려는 눈치를 보였으나 망설이 며 앞으로 나서지를 못했다. 곡창해는 그 사람의 뒤쪽으로 돌아가 멀리 간격을 두고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여약연은 갑자기 그를 향해 부르짖었다. [곡창해, 너는 두려움을 느끼느냐?] 곡창해는 속으로 당당한 사내 대장부가 여자에게 어찌 무시를 당할 수 있겠느냐 하는 오기가 끓어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큰소리로 되물었다. [누가 겁을 낸다는 것이오?] 그리고 걸음을 옮겨서는 백의인 쪽으로 걸어갔다. 여약연 역시 천천히 그 백의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바로 그의 권세(拳勢)가 뻗쳐나는 방향을 맞아서 나가 고 있었는데 두 눈에는 싸늘한 광채가 사방으로 줄기줄기 뻗어 나는 것이 호의를 품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백의인도 두 눈에서는 흉칙한 광채를 쏘아내고 있었고 눈동 자를 떼굴떼굴 한두 번 굴리더니 별안간 몸을 돌려 곡창해 쪽을 향해 날카로운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이런 녀석 보았나. 알고보니 적신교의 교사를 받고 온 녀석이 로구나.] 그는 원래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서 때리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몸을 돌리자 그 자세는 여전히 원래 그대로였 고 주먹이 약간 바깥으로 몇 치 정도 움직이는 듯했다. 그 순간 대뜸 한 가닥의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힘이 질풍 노 도와 같이 뻗쳐났다. 곡창해는 그의 권풍에 한번 나가떨어진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 번에는 그가 몸을 돌려 자기 쪽을 향해 빙글 도는 기세가 신속 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급 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권풍은 정확하게 뻗쳐와 그를 후려쳤으 며 그는 대뜸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곡창해는 일 장 밖으로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머리가 먼저 땅에 떨어졌다. 그 백의인은 신속하게 몸을 돌리더니 다시 여약연 쪽을 향해 섰다. 여약연은 손뼉을 쳤다. [묘하군요. 묘해…….] 백의인은 노해 물었다. [뭐가 묘하다는 것이오?] 여약연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두 번이나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죽이지 못했어요. 솔직 히 말해서 나중에는 약간 의혹이 일더군요. 저 녀석에게 어떤 이상 야릇한 점이 있는지 궁금하게 여기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당신이 손을 써서 그를 죽였으니 그야말로 지극히 잘된 일 이 아니겠어요.] 백의인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그 말이 사실이오?] 여약연은 되물었다. [내가 당신을 왜 속이겠어요? 당신은 나 역시 실패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 아니겠어요.] 백의인은 노해 말했다. [잘하는 짓이군. 당신이 스스로 실패를 했다고 해서 나를 방해 하려고 하다니, 이 사흘 낮 사흘 밤 살아서 당한 고통을 내가 어찌 헛고생으로만 끝나게 한다는 말이오.] 여약연은 냉소했다. [노패(魯沛), 당신은 좀 총명하게 구는 것이 몸에 이로울 거예 요. 나는 뭐 사흘 낮 사흘 밤의 살아서 당하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나요?] 노패는 울화가 치밀어 버럭버럭 악을 쓰듯이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노해서 부르짖는 소리와 더블어 '휙' 하니 한 자루의 길이가 두자 반 정도 되는 섭선을 뽑아들었다. 여약연은 두 어깨를 흔들하더니 몸에 걸치고 있는 하얀 옷을 벗고 통통하면서도 약간 가무잡잡한 알몸을 드러냈다. 그녀는 발끝을 구부려서 땅바닥의 하얀 옷을 '휙' 하니 날려 자기의 수중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난 이후 그녀는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역시 안 돼. 당신의 사부 부평을 찾아와야 할걸? 그의 음양선이라면 어쩌면 어느 정도 두려움을 느끼게 될지 모르지.] 노패는 노해 대꾸했다. [큰소리는 작작 하지. 너무나 세차게 굴렸다가 혓바닥이 굳어 지게 될걸. 벌거숭이의 몸으로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 수는 있 지만 이 노패는 결코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바이지.] 그는 갑자기 얼굴에 노기를 띠우고 한 가닥의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네 교의 요혼(搖魂)과 탕백(蕩魄)이라는 두 여인을 불러 온다면 어쩌면 그녀들의 색상(色相)에 홀릴지 모르지만 당신은 안돼.] 여약연은 냉소했다. [그녀들은 본교의 양대 호법선자(護法仙子)인데 어찌 이름 없 는 자와 손을 쓰겠소. 당신은 싸울 테면 싸우도록 하고 잔소리 는 덮어두도록 하시오. 그러나 만약에 패하게 돼서 죽게 되었을 적에 내가 당신이 피로한 때를 틈타서 손을 썼다고 원망이나 하 지 말구려.] 노패는 일순 어리둥절해지더니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맞는 말이군. 당신은 감히 내가 기운을 회복한 후에 손을 쓸 용기가 있소?] 여약연은 기실 화양지를 펼쳐서 창해를 해치려다가 실패를 함 으로써 크게 원음(元陰)을 손상시킨 바 있었고 지금까지도 공력 이 미처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감히 손을 쓸 용기를 내지 못하 고 있었던 터였다. 따라서 노패가 그와 같은 말을 하자 그녀는 물론 대찬성을 표 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먼저 그 두 분의 동도(同道)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 지 않겠소.] 노패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크게 변해 눈빛을 빛내면서 노패의 뒤쪽을 주시했다. 노패는 무공 가운데서도 몸을 돌리는 수법에 가장 정통해 있으 며 그 수법의 재빠름은 천하에서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때 그는 이미 몸을 빙글 돌려 눈길을 던지게 되었는데 곡창 해가 이 장 밖의 땅바닥에 뻣뻣이 누워 있을 뿐 별다른 이상함 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의아하여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소?] 여약연은 대답을 하지 않고 되물었다. [내가 먼저 당신에게 몇 마디 묻겠는데 당신이 연마한 음양권 의 권력은 제 몇 층(層)에 도달했나요?] 노패는 잠시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을 했다. [제3층이오.] #3353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4.4.알몸의 여인 09/13 06:55 211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4.4. 알몸의 여인 여약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매우 좋아요. 들리는 말에 귀파의 음양권력은 모두 다 5층으 로 나누어져 있으며 제3층까지 연성하게 된다면 이미 사람의 내 장에 상처를 입혀서 땅바닥에 쓰러져 즉사하게 만들 수 있다고 들었어요. 당신의 지금 조예로는 만약에 무공이 대단치 않은 사 람이 그 음양권에 맞아서 일 장 밖으로 나가떨어지게 된다면 그 사람의 내장도 음양권의힘에 얻어맞은 나머지 썩어 문드러지지 않나요?] 노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소. 도대체 그와 같이 묻는 이유가 어디에 있소?] 여약연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파의 화양지는 모두 13절(十三節)로 나누어져 있으며 나 는 이미 10절까지 연성했기 때문에 이미 사람의 정혈(精血)을 빨아들여 내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수가 있어요. 우리 두 사람 이 이와 같은 경지까지 사문의 비예(秘藝)를 연성했으니 설사 무림에서 고수에 속하는 인물들과 맞닥뜨리게 된다하더라도 이 기지 못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에요. 그렇지 않은가요?] 노패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옳은 말이야. 옳은 말이야. 하지만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여약연은 음흉하게 웃었다. [별다른 것이 아니예요. 다만 우리 두 사람이 각기 절예를 펼 쳐낸 후에도 저 사내애의 목숨을 빼앗지 못하게 된다면 그야말 로 사람들이 깜짝 놀랄 일이 아니겠어요.] 노패는 깜짝 놀라 말했다. [물론이지.] 그리고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았다. 곡창해는 여전히 땅바닥에 드러 누워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노패는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그가 정말 죽지 않았소?] 여약연은 대답을 했다. [그가 원래는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조금 전 눈을 뜨게 되었으나 곧이어 머리를 저쪽으로 돌렸어요.] 노패는 알겠다는 듯이 그 말을 받았다. [저 녀석은 아마도 당신이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당신을 쳐다보지 못한 것 같군.] 여약연은 뽀로통해져서는 말했다. [당신은 말을 어디로 끌고 가는 거예요?] 노패는 그만 실소해서 말했다. [화내지 마시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당신은 역시 옷을 입는 것이 좋겠소. 옷을 입어야 내 눈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 같구려.] 여약연은 그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데 대해서 성이 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무슨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죠?] 노패는 순순히 대답했다. [우리들이 손을 쓰기 전에야 어쨌든간에 친구가 아니겠소? 당 신의 모습을 보자니 미안한 노릇이고 보지 않으려고 하자니 이 한쌍의 눈이 자꾸만 당신의 몸 쪽으로 옮겨지는구려.] 여약연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면 보면 될 것이 아니에요. 흥, 만약에 요혼이나 탕백 양대 호법선자가 이곳에 있었더라면 당신은 더욱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백의를 걸쳐 입었다. 두 사람은 일제히 곡창해를 바라보았다. 두 눈에 살기를 번쩍 이고 있었지만 그 살기 속에는 약간의 공포가 서려 있기도 했 다. 곡창해는 확실히 죽지 않았다. 그는 한평생 어떤 무공을 연마 한적이 없었다. 조금 전에 어떻게 노패의 음양권력을 맞고도 견뎌낼 수가 있었 는지 그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노패의 주먹힘에 얻어맞게 되자 대뜸 일 장 밖으로 날려 가게 되었는데 몸이 땅에서 붕 떠오르게 되었을 적에 또다시 한 차례 무형의 잠력(潛力)이 내장으로 재빨리 스며들게 되었고 그 바람에 그는 전신의 안팎이 모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몸이 붕 떠올라 아직도 땅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곡창해 의 강인하고도 의연한 의지에서 반항심이 불쑥 솟구쳐올라 즉시 전신의 기력을 다 써서 그 한 차례의 미친 듯이 엄습해오는 고 통을 억누르려고 했다. 그 찰나에 그는 이미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고 머리가 먼저 땅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는 먼저 경골(頸骨)이 부러지고 그런 후에는 충격을 받게 된 나머지 나가떨어져서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극히 이상했다. 그의 머리가 땅바닥에 닿는 그 순간에 단전 안쪽에서 번개와 같이 한 가닥의 따뜻한 흐름이 솟아올라 거꾸로 기경(奇經)으로 흘러들었으며 삽시간에 팔맥 (八脈)을 관통한 것이었다. 그의 단전에서 따뜻한 흐름이 솟아오르게 되었을 적에 몸에서 느껴지던 모든 고통이 경골과 충격을 받는 곳에서 모두 즉시 종 적이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땅바닥에 쓰러진 이후에도 여전히 눈을 감고 마음 을 다해 그 따뜻한 흐름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중에 눈을 번쩍 뜨게 되었을 때에 여약연의 나체를 발견하고 그만 혐오감을 느낀 나머지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여약연과 노패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말을 그는 똑똑히 들을 수 가 있었고 따라서 속으로 섬짓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 두 사람은 조금 전부터 무슨 이유로 그러했는지는 모르 지만 나를 죽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 손을 쓰게 된다면 틀 림없이 칼이나 검으로 나의 머리통을 자를 것이니 내 어찌 다시 살아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를 어떻게 하면 좋지?' 이어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이왕 항거할 수 없을 바에야 사내 대장부가 죽는다 하 더라도 약간은 영웅 기개를 보여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아버님과 어머님은 얼마나 명성이 자자한 호협(豪俠)들이신가? 내가 어찌 그분들의 영명(英名)을 떨어뜨릴 수가 있겠는가.' 이때 그는 아직도 여약연 이미 백의를 입은 사실을 모르고 여 전히 벌거숭이의 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그들을 등지고 벌떡 몸을 일으켰으며 몸을 돌릴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뻣뻣이 선 채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나를 죽이려면 얼마든지 손을 쓰도록 하시오.] 노패와 여약연 두 사람은 그가 시원시원하게 죽음을 받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지라 그의 말투가 너무 나 호방하고 전혀 겁을 내지 않는 것을 보고 오히려 놀람과 의 혹에 사로잡혀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방법을 강구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먼저 손 을 써서 곡창해를 죽이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패는 곁눈질로 여약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소저 만약에 화양지를 펼치신다면 이 형제는 눈을 닦고 소 저의 절예를 구경하겠소이다.] 여약연은 역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노형은 다시 그에게 한 대의 주먹을 먹이시오. 만약에 그래도 저 녀석이 여전히 죽지 않는다면 내가 손을 써서 다시 시험을 해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서로 미루기만 할 뿐 끝내 먼저 손을 쓰려고 하지 않았 다. 곡창해는 생각했다. '만약에 여전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서로 미루고 미루다가 최후에 가서는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에 어쨋든간에 한 사람이 나서서 손을 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 것이 아니겠 느가.'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듯이 말했다. [두 분은 천천히 상의를 해도 상관이 없소. 나는 잠을 잘 만한 곳을 찾아보겠소.]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았다.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한편 으로는 세심하게 뒤에서 들려올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뒤에서는 따라오는 기척이 없었고 여전히 원위치에서 말을 주고받고 있는 것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놀라움과 기쁨 에 얽히게 되었다. 고개를 쳐들고 앞쪽을 바라보니 황량한 들판에 정적만이 감돌 고 있을 뿐이었고 아침해는 아직도 떠오르지 않은 상태라 온 누 리의 만물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그들 두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일부러 이리 구불 저리 구불하며 걸음을 옮겨놓았다. 별안간 한 그루의 나무 아래에 한 백의인의 그림자가 망막에 비치게 되자 그만 깜짝 놀 라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원래 노패와 여약연은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아니고 바로 안색이 무서울 정도로 창백한 젊은 이로 생긴 것이 꽤나 청수했던 백의인이었다. 왼손 주먹을 머리 위로 쳐들고 있었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칼 끝으로 거꾸로 해서 바로 자기의 가슴팍에 갖다대고 있는 백의 인이었다. 그는 지난번 그 젊은이의 오른쪽 손을 펴서는 쥐고 있는 칼을 뺏앗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팔은 꼼짝도 하지 않 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는 조금도 앞으로 나가자 않고 살 그머니 그의 뒤쪽으로 해서 지나쳐 가려고 했다. 별안간 그 백의의 젊은이는 싸늘히 콧방귀를 뀌더니 오른손의 칼을 벼락같이 허리 아래쪽으로 뻗쳐내게 되었고 칼끝은 하나의 물체를 찔렀다. 그 물체가 땅에 떨어진 것을 보니 원래 한 알의 돌멩이에 불과 했다. 백의의 젊은이는 몸을 돌리고 곡창해를 바라보았는데 온 얼굴 가득히 분노의 빛을 띄우고 있었다. 곡창해는 극력으로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놀라움 을 억제하며 평소처럼 차분한 태도로 웃음을 짓고 두 손을 마주 잡아 보였다. [형님, 실례합니다. 소제는 마침 이곳을 지나던 참입니다.] #3361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5.1.네 명의 사파 고? 09/14 11:41 283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5.1. 네 명의 사파 고수 그 젊은이는 매서운 어조로 노갈을 터뜨렸다. [개 아가리 닥쳐라!] 곡창해는 원래 자기가 백의의 젊은이에게 잘못한 점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슴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두려움을 억제할 수가 있었다. 이때 그의 말투가 매우 거칠고 악독한 것을 보자 갑자기 성질 이 우러나 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큰소리로 맞섰다. [소제는 형님을 존중해서말을 한 것인데 당신이 그렇게 싫다 면 소제는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하지요.] 백의의 젊은이는 냉랭히 말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안 된다. 먼저 성명을 대라.] 곡창해는 그가 일신에 상승의 무공을 연성했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거기다가 손에 한 자루의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단도를 들고 있기 때문에 지금 자기가 도망을 칠래야 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간에 나는 독수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저 사람이 나 의 성명을 알고자 할 때 굳이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저 사람이 설사 나를 죽인다 해도 떨떠름해서 통쾌함을 느끼지 못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는 말하지 않았다. 백의의 젊은이는 다시 호통을 쳤다. [성명을 대란 말이다. 못 들었느냐?] 곡창해는 가슴을 펴고 응수했다. [물론 들었소이다. 나는 비단 성명을 대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망치지도 않겠소. 흥! 당신은 내 주장을 바꾸려는 생 각은 품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백의의 젊은이는 극도로 분노에 되려 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하하. 묘하군, 묘해. 나는 한평생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상대해 왔지만 아직까지 네 녀석과 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을 만 나본적이 없구나.] 곡창해는 일부러 눈길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그를 무시했다. 그의 얼굴 표정이 지극히 굳건한 것이 결코 어린 아이가 투정 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의의 젊은이는 단도를 허리에 꽂더니 주먹을 당겨보고 다리 를 뻗쳐보는 등 온몸의 근골을 펼쳐보더니 말했다. [이 사흘 낮 사흘 밤 겪는 고통은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내 솔직히 너에게 이야기하겠는데 설사 네가 훼방을 놓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얼마 더 지탱하지 못했을 것이다.] 곡창해는 두 눈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입으로는 묻고 있 었다. [당신들은 어째서 기꺼이 그와 같이 살아서 당하는 고통을 받 기로 한 것이죠?]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자 기의 아랫배에 극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 백의의 젊은이는 갑자기 발길질로 그의 아랫배를 걷어차 그 를 허공으로 차올린 것이었다. 곡창해는 몸이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이미 고통으로 머 리가 어지럽고 한 가닥의 숨마저 끊어질 듯 말듯한 상태에서 거 의 지각을 상실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몸뚱아리가 가장 높이 올랐다가 아래로 급히 떨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다리를 위로 하는 자세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전신의 피가 모두 다 머리에 모이게 되었다. 곡창해는 별안간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곧 이 전광 적 화와 같은 순간에 단전에서 한 가닥의 뜨거운 기운이 질풍과 같 이 솟아올라와 경맥을 통과하는 것이었고 삽시간에 격렬한 고통 과 어지러움증, 그리고 숨이 끊어질 듯 말듯한 느낌마저도 거의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의 머리통이 땅바닥에 거침없이 부딪치면서 '퍽' 하는 소리 를 내었다. 그토록 맹렬하고도 급하고 사나운 기세로 땅바닥에 박치기를 한 셈이었지만 경골이 부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되려 전신의 뼈마디가 느슨해지면서 지극히 쾌적하고 시원해지 는 것이었다. 백의의 젊은이는 냉소를 흘렸다. [흐흐흐……잘 가거라.] 그 소리에는 천성적인 잔혹함과 흉폭한 성질이 여실히 드러나 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미처 끝나기 전에 두 마디의 냉소가들 렸는데 그 냉소는 서로 다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 다. 아무래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았 다. 백의의 젊은이는 두 눈을 부릅뜨고 흉칙한 광채를 폭사하며 호 통을 쳤다. [게 누구냐?] 수장 밖의 나무 뒤에서 즉시 두 명의 백의인이 모습을 드러냈 다. 한명은 여약연이고 한 명은 노패였다. 그들은 옛날에 서로 만나본 적이 있기 때문에 백의의 젊은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스스로 실패한 것을 인정한 모양이구려?] 여약연은 냉소했다. [그래요. 우리들은 특별히 파양 장소룡(張少龍)의 절예를 구경 하러 왔어요.] 장소룡은 안색이 일변했다. [두 분이 가르칠 뜻이 있다면 이 형제는 자연 온 힘을 다해서 상대를 해드리리다.] 그는 상대방 두 사람이 모두 다 흉악한 사람들로 한 명은 적신 교의 고수이고 한 명은 음양선 부평의 제자로서 각기 독특한 비 예(秘藝)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일대일로 싸우면 그런대로 한번 싸워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된 노릇인지 손을 맞잡고 자기에게 도전을 해오는 것 같으니 이야말로 커다란 액겁이 코앞에 들이 닥친 셈이고 이 액겁에서 좀처럼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여약연과 노패는 이때 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손을 맞잡고 이 사람을 죽이게 된다면 그야말로 절묘 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아무래도 상대방에서 손을 잡을지 의문이구나.' 두 사람 모두 이와 같이 생각을 하고 있고 먼저 자기가 말을 한후에 다른 사람이 손을 맞잡을 것을 응낙하지 않는다면 자기 쪽에서 장소룡을 상대로 혼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꼴이 되지 않겠느냐 하고 염려했다. 여약연은 좀 기다려 보았으나 노패가 입을 벌리지 않는 것을 보고 즉시 말했다. [나의 뜻은 결코 당신과 손을 쓰려는 것은 아니에요.] 장소룡은 다시 의아함을 느끼는 한편 속으로 은근히 좋아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소저의 말씀에 어떤 현기(玄機)가 갈무리되어 있 는지 아무쪼록 이 형제가 알도록 말해주는 것이 좋겠구려.] 이와 같은 말을 하면서 그는 오늘을 무사히 보내고 자기의 기 력이 회복이 되었을 때, 또 상대방 두 사람이 연합을 하지 않는 다면 반드시 기회를 빌어 한바탕 겨루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 다. 노패는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바로 저 녀석 곡창해를 두고 하는 말이외다.] 그는 손으로 멀리 땅바닥에 쓰러져 꼼짝하지 않는 곡창해를 가 리키며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 녀석은 약간 이상한 재주가 있는 모양으로 우리들은 모두 더 저 녀석 때문에 큰일을 다 그르치고 말았소이다.] 장소룡은 '아' 하는 소리를 했다. 별안간 그는 자기를 암습했던 그 한 알의 돌맹이에 실린 힘이 강경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힘으로 미루어보아 결코 곡창해 같은 사내애가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이 두 사람이 출현한 것을 보면 틀림없이 이 자들이 수작 을 부린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 지만 그는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 질문을 한다는 것도 거북한 노릇이었고 질문을 던진 후에 그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다면 이후에 손을 쓰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와 같은 생각은 다만 그의 마음속에서 번쩍 떠올랐다가 사라졌 을 뿐이고 결코 그런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곡창해의 몸뚱아리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겨 우 입을 열었다. [이 형제의 발길질에 그는 걷어차여 죽고 말았는데 노형이 그 에게 약간의 재간이 있다고 하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려?] 여약연은 서둘러서 입을 열었다. [영존(令尊)이신 파양독룡 장경은 물에서의 재간이 천하에서 으뜸가는 이외에도 분파답랑(分派踏浪)이라는 각법(脚法)은 천 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지 않습니까? 소문에 들으니까 이 절기는 모두 구변(九變)이나 된다는데 장형은 몇 변까지 연마했나요?] 장소룡은 그녀가 본문의 절예의 심법에 대해서 손바닥 들여다 보듯 잘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날라는 한편 또한 감탄하 는 마음도 일었다. '역시 명문의 고수들은 견문이 넓어서 보통 사람과는 다르구 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형제가 우리 집안의 비전(秘傳)인 분파답랑 각법의 구변을 모 조리 배우기는 했지만 형제의 공력에 한계가 있어서 겨우 칠변 까지만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이외다.] 여약연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로 그거예요. 그러니 한 발길질에 저 녀석을 정확하게 걷어 찼지만 여전히 헛고생만 했을 뿐 아무런 공을 얻을 수가 없었다 는 거예요.] 장소룡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헛수고만 하고 공이 없었다니? 저 녀석은 아직도 죽지 않았단 말이오?] 노패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는 그저 죽은 척하고 있을 뿐이외다. 우리들은 옆 으로 다가가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그가 땅바닥에 떨어지 게 되었을 때 땅바닥에 닿는 그 즉시 재빨리 몸을 탁 뻗쳐 땅바 닥에 붙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소. 그의 몸에 마침 흡인력이 있 어서 지면에 딱 붙어버리는 것 같아 전혀 반발력에 의해 튕겨오 르지를 않았소. 만약에 이미 죽어버린 몸이라면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장소룡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만약에 노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녀석은 정말 죽지 않았겠 구려.] 그는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형제의 그 발길질에 전력을 발휘하지는 않았지만 황소나 준마 라고 해도 그 발길질에 적중당했다면 내장이 틀림없이 박살이 나문드러지게 되었을 것이외다. 물론 그의 내공이 금강불괴(金 剛不壞)의 경지까지 연성되었다면 이 형제의 그 발길질을 감당 해 낼 수가 있겠지요.] 여약연은 입을 열었다. [장형이 만약 믿을 수가 없다면 옆으로 다가가서 살펴보시오. 그러면 즉시 어떻게 되었는가 알 수 있을 것이외다.] 노패는 말했다. [나도 가서 살펴보겠소. 저 녀석은 정말 요상하기 이를 데가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꺼림칙한 의혹을 갖게 한단 말이오.] 장소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저 녀석이 만약에 죽지 않았다면 이 형제는 손에 들고 있는 단도로 그의 몸을 일곱, 여덟 조각으로 내어놓겠소. 그리고 나서도 저 녀석이 살아 남을 수 있는지 두고보겠소.] 세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가갔다. 그들이 아직도 곡창해와 대여섯 자 남겨놓고 있을 때 곡창해가 갑자기 머리를 돌리고 눈을 똑바로 뜨고 그들 바라보며 얼굴에 이상야릇하고도 신비한 웃음을 띄웠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 고 몸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의 그와 같은 행동은 매우 이상야릇했다. 장소룡은 그가 죽지 않은 것을 보자 그만 놀람과 의혹을 느끼 게 되었고, 따라서 또한 감히 경솔하게 앞으로 나가 칼을 휘둘 러 해를 입히지를 못했다. 그는 주춤 걸음을 멈추며 호통쳐 물었다. [왜 웃느냐?] 곡창해는 되물었다. [당신들은 짐작할 수 없단 말이오?] 그들 세 사람은 모두 다 자기가 무능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 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곡창해 무엇 때문에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노패는 성질이 난다는 듯 호통을 쳤다. [우리가 어느 겨를에 네가 웃음을 띄우는 이유까지 짐작할 여 가가 있겠느냐?] 여약연은 그 말을 받았다. [그래요. 이 녀석은 고약하기 이를 데 없으니 당신은 빨리빨리 손을 쓰세요.] 장소룡은 속으로 이들이 자기를 유도해서 손을 쓰도록 하여 위 험하거나 어려운 일에 부딪치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 하니 영 내키지 않았다. #3387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5.2.네 명의 사파 고? 09/17 14:02 304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5.2. 네 명의 사파 고수 따라서 그는 고개를 흔들며 사양했다. [이 형제는 오히려 그가 몸을 일으킬 것인지 일으키지 않을 것 인지를 두고 보겠소이다.]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말로 총명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지요. 생각해 보시 구려. 여약연의 화양지와 노패의 음양권력. 그리고 당신의 분파 답랑의 세 가지 절기로도 나에게 상해를 입히지 못했거늘 설마 한 자루의 단도로 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소? 하지만 ……]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그들을 바라보았으며 여전히 누워 몸 을 일으키지 않았다. 장소룡은 교활했고 지극히 참을성이 많은 편이었다. 이때 곡창해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을 보고 또 곡창해의 안색 이 그토록 자연스러운 것을 보고 더욱 경거 망동하지 못하게 되 었는데 그로 인해서 여약연과 노패 두 사람의 차도살인지계(借 刀殺人之計)에 빠져드는 것을 면할 수가 있었다. 그는 단도를 거두며 입을 열었다. [좋다. 이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시험해 보기로 하지!] 여약연은 답답한 표정으로 곡창해에게 다그쳤다. [하지만 어쨌다는 것이냐? 빨리 말을 해 보아라.] 곡창해는 사실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자기의 뛰어난 기지와 대 담하면서도 세심한 점으로 위기를 한걸음 한걸음 극복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그는 장소룡이 칼을 들고 다가오려고 할 때 너무 다급한 나머지 일부러 이상야릇하고도 신비한 분위기를 만든 것이었다. 그와 같이 애매 모호한 형세를 이용했던 것인데, 아니나다를까 장소룡이 칼을 거두어들이도록 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하지만이라는 소리는 완전히 시간을 끌자는 것 이었고 상대방의 반응이 어떤가를 보려고 한 것이었다. 여약연이 다그쳐 묻자 그는 즉시 대항할 방법을 찾아내고 눈살 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소이다.] 장소룡은 여약연을 총동질하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야단났구먼. 이 곡형제는 성질이 굳건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 에 하고 싶지 않은 말이라면 죽어도 하지 않을 것이오.] 별안간 노패는 걸음을 크게 옮기면서 어디론가 달려갔다. 여약 연과 장소룡 두 사람은 어리둥절해졌다. 여약연은 그를 불렀다. [노형, 무엇하려는 것이오?] 노패는 그들에게 손짓을 해보이더니 질풍과 같이 달려갔다. 장소룡은 노패의 그와 같은 거동이 자기의 계획을 완전히 망쳐 버리자 마음속으로 무척 성질이 끊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은 혹시 머리가 돈 게 아니오?] 여약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황연히 깨달은 바 있는 듯이 입을 열었다. [빨리 가서 황횡(晃橫)을 살펴보도록 해요……] 그러면서 그녀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장소룡은 '아' 하는 탄성을 지르더니 즉시 뒤쫓아가기 시작했 다. 삽시간에 그들은 사라지게 되고 곡창해 한 사람만 남게 되었 다. 곡창해는 벌떡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들의 종적 이 보이지 않자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도 정파의 인물이 없으니 그들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얻어맞는 수모를 겪은 것은 나의 재수가 없는 것으로 해야겠구나.' 그는 속히 이곳을 떠나야 다시 그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면 할 수 있으리라생각하고 걸음을 빨리 해서 달려갔다. 그런데 몇 장 나가지 못해 그는 후딱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의 내력을 캐내려고 하고 있으며 그런 후 에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 전에 갑자기 그들은 도 망치듯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 어느 누구도 나의 일을 마음에 두 지 않는 것 같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달려가 살펴보려 는 사람은 나보다 훨씬 중요할 게다. 다만 그들이 어째서 성급 하게 달려가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만약 중요한 약속이라면 결코 노패 한 사람만이 기억을 하고 있고 여약연과 장소룡 두 사람은 잊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호기심을 느낀 그는 한시바삐 이곳에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그들의 뒤를 쫓아 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보기로 작정했다. 이윽고 그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며 한동안 나가보았으나 여전히 세 사람의 종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만 주춤거리며 멈추고 궁리를 했다. '앞쪽의 그 몇 그루 오래 된 나무 저쪽에는 바로 어제 밤 내가 가장 먼저 본 백의인이 있었다. 내가 그를 노하게 해서 다시 그 에게 얻어맞거나 욕지거리를 당하는 천대를 당하지 않도록 하 자.' 그러나 다시 생각을 해볼 적에 여약연과 장소룡 그리고 노패 세 사람이 아무래도 그 사람을 보러 간 것 같았고 또 백의인의 성명이 황횡인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는 나무 그늘 아래에 이르러 의아한 얼굴로 사방을 살펴보았 다. 별안간 목 뒤쪽에 얼음과 같이 차가운 물건이 와 닿은지라 그 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재빨리 몸을 돌려 바라보니 바로 그 백의인이 자기 앞에 서 있 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의 얼굴 모습은 노패보다도 더욱 흉악했으며 그 한 쌍 의 세모꼴의 눈에서는 매서운 광채가 쏟아지고 있어 대하는 사 람으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는 한 손으로 원래는 곡창해의 뒷덜미를 누르고 있었던 것인 데 이제 곡창해가 몸을 돌리게 됨으로써 곡창해의 목을 움켜잡 은 자세가 되었다. 그와 같은 자세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곡창해는 재빨리 냉정과 기지를 되찾게 되었고 속으로 만약에 먼저 손을 써서 이 사람을 제압하지 않는다면 다시 또 괴로움을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갑자기 냉소를 띄우고 입을 열었다. [황형은 아마도 소제의 몸을 이용해서 무공을 연마하고자 하는 모양이구려?] 그 백의인 의아한 듯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어떻게 나의 성이 황씨라는 것을 알았느냐?] 곡창해는 갑자기 어제 밤에 여약연이 자기가 어느 문파의 제자 인가 묻게 되었을 때에 흑수파, 파양독룡 장경, 음양선 부평 등 삼개 문파를 들먹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 제 두파에 소속된 사람들은 있으나 흑수파의 사람만 보이지 않 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황횡은 틀림없이 흑수파의 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흑수파 고수의 이름을 무림에서 그 누가 모르겠소? 소제가 이 미 황형을 알고 있다는 것이 뭐 그렇게 희한할 것이 있겠소?] 황횡은 약간 어리둥절해졌으나 얼굴빛이 크게 누그러지게 되었 고 그 얼음과 같이 차갑고 시꺼먼 살결의 손바닥을 거두어들일 기미를 보였다. 곡창해는 속으로 좋아했다. '첫 번째의 관문을 무사히 넘긴 것 같다. 그러나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 이 사람 곁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 생각이 막 끝나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가슴팍아 바짝 조여 드는 것을 느꼈다. 마치 천 근이나 되는 커다란 물건을 가슴에 얹은 듯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황횡의 손바닥은 이미 가슴팍으로 옮겨져 가볍게 눌 러오고 있었는데 온 손바닥이 손목이 있는 곳까지 시커멓게 윤 기가 나고 있었다. 이어 그는 냉소를 띄우고는 입을 열었다. [이 녀석, 너는 도대체 누가 보내서 온 것이냐?] 말이 끝나자 그는 손바닥을 몇 푼 정도 움츠렸다. 곡창해는 대뜸 호흡이 탁 트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황횡이 자기에게 대답을 하라고 장력을 거둬들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흑수파의 절예는 과연 희한하면서도 무섭기 이를 데 없구나. 상대방을 벽에 기대 세우거나 나무등걸에 기대 세우지 않고, 그 리고 상대방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장력을 이용하여 상대방이 좀처럼 숨을 쉴 수 없도록 압박을 가하는구 나.' 그는 이와 같은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나려면 오로지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계책이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 는 슬쩍 생각을 굴린 결과 어느덧 계교가 떠올랐다. 황횡은 세모꼴의 눈에 흉칙한 광채를 더욱더 거세게 쏘아내며 호통을 쳤다. [누가 네 녀석을 보냈지? 빨리 말해라!] 곡창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이곳에 보낸 사람은 모두 세 사람이오.] 그 말소리와 태도는 엄숙했다. 황횡은 매우 놀람과 의아함을 느꼈다. 곡창해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황형은 그 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소?] 황횡은 대답했다. [물론 알고 싶다!] 곡창해는 빙그레 웃었다. [황형이 그렇게 솔직하고 명백하게 나오면 소제도 물론 말씀을 드려야 하겠지요. 그 세 사람은 바로…….] 그는 갑자기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 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가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툭툭 쳤다. 황횡은 한 어린애가 이토록 기지가 뛰어나고 계교가 많으리라 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조용 히 기다렸다. 그가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여 어지럽게 할까봐 걱 정이 되었던 것이다. 곡창해는 시치미를 뚝 떼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나는 아마도 그들에게 놀라서 멍청해진 것 같소이다. 그 들의 이름은 분명히 익숙한 것이었으며 입 안에서 빙글빙글 돌 면서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정말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구려.] 황횡은 달래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는 먼저 그들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야기해 보아라. 키가 크더냐? 아니면 키가 작더냐? 아니면 늙었더냐? 젊었더 냐?] 곡창해는 선뜻 대답했다. [그들은 모두 늙지 않았소. 그리고 한 명은 여자였지요.] 그러면서 그는 한편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하면서 한편 으로는 걸음을 옮겨 슬쩍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그 검은 손바닥이 매우 커다란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것 을 느꼈지만 이제 그 흡인력이 즉시 사라져 가까스로 몸을 마음 대로 옮겨놓거나 걸음을 옮겨놓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물론 황횡이 그의 심신을 흐트러 놓게 될까봐 그가 서 성이면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곡창해는 그럴싸하게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 다. [그렇구려. 그 가운데 한 명은 장씨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름은…….] 황횡은 귀를 기울이며 그의 말을 주의했다. 그런데 갑자기 곡창해는 나무 위로 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황횡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동시에 곡창해가 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 없어 호통을 쳤다. [너는 뭣하는 것이냐?] 곡창해는 하나의 줄을 꺼내 먼저 한쪽 끝을 자기의 발목을 묶 고 다른 한쪽은 튼튼하게 나무에 묶었다. 이와 같은 행동은 매우 이상한 것이라 황횡은 머리가 아플 정 도로 생각해봐도 도대체어떤 속셈에서 그러는지 짐작해 낼 수 가 없었다. 곡창해는 밧줄의 한쪽을 나무에 묶고 다시 입을 열었다. [황형은 어째서 소제가 다른 사람이 보내서 왔다고 생각하오?] 황횡은 노해서 말했다. [너는 아직 그들 세 사람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은 이목이 영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걸음걸이가 맥 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무공을 모르고 있으니 어떻 게 무림에 황횡이라는 자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느냐? 더 군다나 이 황횡은 강호에서 잘 떠돌아다니지 않은 사람이라 나 의 성명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몇 명 되지 않으니 네가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보내서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노릇이 지.] 곡창해는 말했다. [원래 그래었구려. 하지만 황형이 소제에게 그와 같은 문제를 묻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외다. 황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황횡은 누가 나를 보내왔을 것인지 생각해 낼 수가 있지 않겠소?] 황횡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곧 두 눈을 부릅뜨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이 이토록 총명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나는 정말 너를 과소평가 했구나.] 그는 속으로 줄곧 곡창해가 어째서 줄로 자기의 발목을 나무에 묶는 것이지 그 이유를 헤아리고 있었다. 곡창해는 서글픈 어조로 넌지시 말했다. [소제가 운명이 기구해서 금년에 겨우 열세 살인데 이미 온갖 세상의 풍경을 겪었으며 여러 차례 이미 한 발을 저승문으로 들 여놓기도 했었소.] 황횡은 차갑게 말했다. [지금도 너는 한 발을 저승문으로 디밀어 놓고 있는 셈이지. 빨리 그 세 사람의 이름을 말해라.] 곡창해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황형은 화를 내지 마시오. 소제는 남들에게 위협을 받아 이미 간이 콩알 만해진 상태라오. 만약에 황형이 좀 부드럽게 대해준 다면 소제는 어쩌면 기억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려.] #3388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5.3.네 명의 사파 고? 09/17 15:27 310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5.3. 네 명의 사파 고수 황횡은 노해서 말했다. [네가 감히 터무니없는 소리로 나를 속이려 든다면 나중에 너 의 껍질이 벗겨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걸.] 곡창해는 손을 내저었다.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지요.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지요.] 그는 안색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황형에게 말씀드리지요. 소제는 첫째로 그들의 성명을 떠올릴 수가 없고 둘째로는 그들의 성명을 말하기 싫소이다.] 황횡은 냉랭히 말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에게도 방법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나무 아래로 다가왔다. 곡창해는 부르짖었다. [말하리다. 말하리다!] 황횡은 싸늘히 말했다. [좋다. 말해보아라!] 곡창해는 넌지시 말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자야겠소. 향을 반 정도 피울 시간만 자 게 된다면 틀림없이 생각해 낼 수 있을 것 같소이다.] 황횡은 냉랭히 응낙했다. [나는 네가 수작을 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서 자거 라. 어서 자!] 곡창해가 막 눈을 감으려고 했을 때 황횡은 다시 물었다. [너는 먼저 끈으로 감은 이유를 이야기해 보렴?] 곡창해는 매우 믿기 어렵다는 듯이 되물었다. [황형은 이와 같은 줄의 쓸모를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이오?] 황횡은 성이 나서 싸늘히 코웃음 쳤으나 여전히 성질을 누르고 대답을 했다. [흥! 모른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곡창해라는 애숭이가 여간 의심스럽게 여 겨지지 않았다. 곡창해가 그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은 틀림없이 자기의 체면을 떨어뜨려서모른다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그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니 나중에 셈을 치르기로 작정했다. 곡창해는 설명하듯 말했다. [나는 언제나 나무 위에서 자지요. 그러나 종종 땅바닥으로 떨 어진답니다. 그래서 끈이나 줄을 찾아서 이와 같이 묶어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 머리가 깨지는 것을 막지요.] 황횡은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그 어느 누구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밧줄로 몸을 묶 는단 말이냐? 나를 조롱하기 위해서 줄로 발목을 묶고 나로 하 여금 이리저리 생각을 해도 짐작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 분 명하다.] 그런데 곡창해는 어느덧 눈을 감더니 코를 골기 시작했다. 향을 반 정도 피울 시간이 흐르게 되었을 때에 그는 정신을 차 리고는 눈을 비비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꿈속에서 그들을 보았지요. 한 사람은 적신교의 여약연 이고 한 사람은 노패였으며 또 한 사람은 바로 장소룡이었답니 다.] 황횡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 그들이냐?]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들이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아래쪽에서 한차례의 흡인력이 자기 몸으로 뻗쳐오는 것을 느끼고 대뜸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되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발목에는 밧줄이 매어져 이었기 때문에 겨우 넉 자 정도 떨어지게 되었을 때 대롱대롱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상 태로 정지하게 되었는데 머리는 땅바닥에서 다섯 자 정도의 높 이에 위치해 있었다. 황횡은 바짝 그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매우 흉칙한 얼굴을 했 다. 곡창해가 정히 몸을 바둥거리며 뒤집어서 나뭇가지 위로 올 라가려고 했는데 일진(一陳)의 흡인력이 그의 몸을 끌어당겨 꼼 짝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하나의 검은 거대한 손바닥이 눈앞에서 흔들거리고 그 의 귀에 황횡의 냉혹한 음성이 들렸다. [너는 그들의 성명을 이야기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한번 용 서해 주기로 하지.] 이 말에 곡창해는 그만 깜짝 놀라는 한편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가 이토록 수월하게 나를 놓아준다면 나는 오늘부터 나쁜 사람에 대해서 달리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게 되었을 때 황횡의 말이 계속 해서 그의 귀에 들려왔다. [나는 한평생 손을 쓰게 되었을 때 상대방의 시체가 온전히 남 도록 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가 솔직히 자백을 한 점을 감안해 서 오늘 너의 시체를 망가뜨리지는 않기로 했다.] 곡창해는 놀라면서도 웃고 말았다. 황횡은 그 모양을 보고 냉랭히 물었다. [왜 웃느냐?] 곡창해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별것 아니오. 다만 나는 내 자신이 너무나 바보스러워서 웃는 것이오.] 황횡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네가 바보든 바보가 아니든 별 차이가 없다.] 검은 손으로 곡창해의 가슴을 찍으면서 내력을 내쏟았다. 흑수파의 가장 정통한 일문(一門)의 재간은 귀수구혼(鬼手勾 魂)이라고 했다. 장력이 혈맥에 적중되기만 한다면 대뜸 현묘한 작용이 일어나 게 되는데 한편으로 마치 만 근이나 되는 커다란 바위가 몸뚱어 리를 내리누르는 것 같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물러나 피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손을 써서 격전을 벌임에 있어서 초식을 해소시키거나 막는 것 은 쉬워도 그 장력에 대항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흑수파는 천하의 양대 사파 가운데 하나로열거 되고 있으며 흑수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는데도 위명(威名)이 지극히 성한 편으로 강호에서 흑백이도 를 막론하고 손이 먹처럼 검은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그만 멀리 피하는 것이다. 곡창해는 이때 눈을 감았다가 곧이어 다시 번쩍 뜨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그 검은 손은 무슨 재간이죠?] 황횡은 대답했다. [너에게 알려주어도 상관이 없겠지. 이를 귀수구혼공(鬼手勾魂 功)이라고 한다.] 말이 막 끝나게 되었을 때 별안간 그는 곡창해라는 사내애가 무공을 모르는데 어떻게 해서 자기의 일 장을 찍는 위세를 견디 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퍼뜩 떠올랐다. 그런데 곡창해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정말 무섭군요. 하지만 여약연의 화양지와 노패의 음양권력, 그리고 장소룡의 분파답랑이라는 각법에 미치지 못할 것 같군 요.] 황횡은 노해 입을 열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곡창해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외다. 그들은 모두 다 나에게 일일이 한번씩 무공을 펼친 적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아무래도 당신이 가장 뒤떨어지는 것 같소.] 황횡은 날카롭게 말했다. [조만간 나는 그들의 어깨 위에 달려 있는 세 개의 머리통을 잘라내고 말 것이다.] 별안간 그는 다시 자기의 이미 십성의 공력을 쏟아냈으나 놀랍 게도 상대방 사내애의 혼백을 앗아가지 못한 것을 깨닫고 놀람 과 두려움에 얽히게 되었다. 별안간 세 방향에서 냉소가 들려왔다. 곧이어 여약연의 음성이 들려왔다. [황형이 이 소매의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아마 말처럼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을 거예요.] 왼쪽에서는 노패의 커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흑수파는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형제 역시 아무렇게나 남에게 업수임을 당할 그런 사람은 아니라오.] 이어서 장소룡의 음성이 들렸다. [황형의 말투로 미루어 볼 때 마치 생살여탈(生殺予奪)의 대권 을 쥐고 있는 것 같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소로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구려, 흐흐흐…….] 그들 세 사람이 일제히 대꾸를 해오자 황횡은 한편으로 두려움 을 느꼈고 한편으로 기쁨을 느꼈다. 그는 신속하게 앞으로 일 장 남짓 나가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니 여약연과 장소룡, 그리고 노패 세 사람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는데 얼굴에 살기를 띄우고 있었다. 그가 두려운 것은 그들 세 사람이 일단 손은 마주잡고 자기에 게 공격을 해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 기세는 그야말로 태산이 계란을 누르듯 절대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기쁜 것은 자기가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로 실패했음을 인정하 지 않을 수 없는 마당에 그들 세 사람이 뻣뻣하게 버티어 내게 된다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던 것인데 이제 그들 모두 다 본 래의 위치를 떠나 이곳으로 온 것을 보면 그들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기세가 자못 등등한데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울화 를 모두 다 이 형제에게 쏟아부을 참인 것 같구려. 이 형제는 비록 지친 몸이기는 하지만 폐파의 무공에 또 한 가지 좋은 점 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아마 잊지 않고 계실 거요.] 그는 냉소를 흘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흐흐흐, 여러분들은 비록 이와 같은 좋은 기회에 합심 협력해 서 형제를 죽일 마음을 품고 있겠지만 급히 서두를 것도 없으니 우선 이 녀석의 내력을 좀 알려주는 것이 좋겠구려.] 여약연과 장소룡, 그리고 노패 세 사람은 똑같이 속으로 생각 했다. '흑수파에서 정통한 무공은 바로 적과 동귀어진(同歸於盡)하는 절예이다. 만약에 우리가 손을 잡고 일제히 달려든다면 그는 어 찌됐든간에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과 동귀어진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손을 쓰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미리 그 를 격노시켜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일이 없 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을 했다. 따라서 그들 세 사람 의 안색은 약속이나 한듯이 누그러졌다. 그들 가운데 여약연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애숭이의 내력에 대해서 우리들도 모두 몰라요. 황형이 그 에게 귀파의 귀수구혼이라는 기공절예(奇功絶藝)를 펼쳐본 모양 이지만 아무래도 여전히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었던 모양인 것 같군요.] 노패는 말했다. [솔직히 황형에게 말하는데 우리들 세 사람은 똑같이 본문의 절기를 그의 몸에다가 펼쳤지만 시종 그를 죽일수가 없었다 오.] 장소룡은 입을 열었다. [이 애숭이 녀석은 매우 이상 야릇한 데가 있소. 황형이 해를 입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오. 이 형제는 이 녀석의 내력 과 이곳에 온 의도를 먼저 우리가 합심 협력해서 조사하여 밝혀 내야 하며 지금은 내분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 는구려.] 그 말에 황횡은 용기를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장형의 훌륭한 뜻을 이 형제는 이후 마땅히 보답을 할 것이 오.] 장소룡은 빙그레 웃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시오!] 여약연과 노패 두 사람은 그들 두 사람이 한패거리가 되는 것 을 보고 대뜸 경각심을 돋구었다. 여약연은 적신교와 흑수파와 원한이 크며 평소에 서로 용납하 지 못하는 형세였기 때문에 속으로 황횡과 장소룡이 합심 협력 해서 자기를 상대하려고 하는 데 노패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다면 목숨을 건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헤아려 보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녀는 생각을 굴린 후에 노패에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의 말을 들으니 저 녀석의 내력을 알아낼 방법이 있는 것 같군요. 우리들은 이 일에 지장을 줄 것이 아니라 우선 한 옆으로 비켜나 구경을 하는 것이 어때요?] 노패는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외롭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데 고 맙게도 여약연이 그와 같이 말을 해주자 재빨리 찬성을 표했다. 네 명의 사파 고수들은 두 패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막상 막하 로 대치하는 국면을 이루게 되었다. 별안간 한차례의 급격하게 울려퍼지는 말발굽 소리가 뭇 사람 들의 귀에 들려왔다. 칠팔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네 사람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으며 여약연과 노패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한편으로 물러나 관망하느라 일제히 걸음을 옮겨 이삼 장 밖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한차례 급격하게 울려퍼지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장 밖 저쪽의 평탄하고 넓은 초지 위로 일곱 필의 말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곡창해는 몸을 홱 뒤집어 나무 위로 올라가 자세히 바라보니 그 일곱 필의 말 가운데 네 필의 검은 말에 검은 옷을 입은 사 람들이 타고 있는 것이 마치 네 조각의 숯덩이가 구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머지 세 필의 말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경장 질복의 사내들 로 안장에는 기다란 무기를을 매달아 놓고 있었다. 그는 첫눈에 그 세 필의 잡다한 색깔의 옷을 걸치고 있는 대한 들이 바로 그날 관가보의 겹겹한 포위를 돌파했으며 그후에 다 시 죽자사자하고 뒤쫓아오던 그 패거리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검은 옷에 검을 말을 탄 기사들은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3391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5.4.네 명의 사파 고? 09/17 16:37 256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5.4. 네 명의 사파 고수 장소룡과 황횡 등은 담담하게 말을 타고 나타난 일곱 명의 기 사들을 한번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일곱 필의 말은 가까이 달려오게 되었고 그 가운데 한 명의 대한이 어느덧 너무 위에 앉아 있는 곡창해 를 발견하고 날카롭게 외쳤다. [바로 저 애입니다.] 일곱 명의 기사들은 얼굴에 흉악한 빛을 띄우고 있었으며 말을 곧장 몰아 곡창해가 앉아 있는 나무 아래까지 달려들어 오는데 그 어느 누구도 네 명의 백의인에 대해서 시선을 주지 않았다. 곡창해는 소리친 자가 그날 자기를 죽어라 하고 뒤쫓아왔던 두 사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란 나머지 나무 위에서 몸을 움츠렸다. 그 일곱 필의 말들은 모두 다 그의 발 밑에 도달해 있었는데 그 대한들의 키가 크고 손이 길어서 말 안장에서 몸을 세우기만 한다면 그를 붙잡을 수가 있었다. 한 명의 흑의를 걸친 기사가 냉랭히 코웃음치더니 훌쩍 안장 위로 올라섰다. 별안간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엄습해왔다. 그 검은 옷을 입은 기사는 재빨리 두 자 정도 몸을 솟구쳤으며 다리를 움츠리고 몸을 웅크리면서 재주를 훌쩍 넘었다. 그러자 칼빛이 번쩍 그의 발 밑을 스쳐 지나게 되었다. 그 흑의의 기사는 앞으로 예닐곱 자 정도 와락 달려나갔다가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 검은 말이 달려와 주었기 때문에 꼭 알맞게 그 안장 위에 올라앉을 수가 있었다. 나머지 세 명의 흑의인은 다투어 노갈을 터뜨렸다. 원래 암습 을 가한 사람은 바로 세 명의 경장 질복을 한 대한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들 일곱 명의 말을 탄 사람들이 갑자기 서로 내분을 일으켜 무기를 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는 것을 보고 오히려 장소룡 등은 크게 의아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뒤로 일 장 남짓 물러서서 그들이 무 슨 수작을 부리는지 구경을 하게 되었다. 칼을 휘둘러 암습을 시도했던 대한은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 다. [하하하! 흑삼방 삼성십팔숙(三星十八宿)이 모두 무공이 출중 한 인사라는 소문을 들었소. 여러분들이 십팔숙에 드는 사람이 니 비록 삼성의 혁혁한 위명에 비할 바는 못된다고는 하겠지만, 이 형제는 일부러 한 칼질을 시험해 본 것이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 형제는 매우 탄복하게 되었소.] 한 명의 흑의 사내가 노해 그 말을 받았다. [교활하게 변명을 한다고 해서 누가 믿을 줄 아시오. 당신네 기북(冀北) 은도부(銀刀付) 역시 하오문(下午門)의 방파가 아닌 데 어찌 암산의 수단을 펼쳐 몰래 공격을 하려한단 말이오? 천 하 영웅들이 비웃을까 두렵지 않소?] 곡창해는 그들이 그날 관가보의 사람들에게 암습을 가한 사실 을 떠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불쑥 그 말을 받았다. [맞소! 그들은 그와 같은 하류(下流)의 재간에 정통하니 당신 네 흑삼방은 반드시 조심을 해야 할 것이외다.] 은도부의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의 수척한 사내가 안장 곁에 매 달아 둔 기다란 창을 들어올리며 노해 입을 열었다. [애숭이 녀석이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구나.]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오더니 창을 들고 곧장 재빨리 찌르려고 했다. 그런데 한 명의 흑의 기사가 동시에 말을 몰아 달려오더니 손 에 들고 있는 기다란 채찍을 휘두르게 되었고, 그 채찍은 요란 한 소리를 내며 채찍의 끝으로 때맞게 커다란 창을 감아 몇 자 정도 끌어 당겼다. 그 바람에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기다란 창은 옆으로 뻗쳐 있 는 굵은 가지에 푹 꽂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두 패거리의 사람들은 서로 욕지거리를 하면서 침 을 튀기며 서로 곡창해를 데려가겠다고 논쟁을 벌였다. 별안간 한마디의 괴이한 냉소가 울려퍼졌다. 흑삼방과 은도부의 일곱 명의 대한은 모두 다 싸우고 욕지거리 하던 것을 멈추고 눈을 돌려 웃음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 명의 백의인들이 모두 다 이상야릇한 웃음을 띄우고 있었는데 그 표정은 무척 괴이하고도 무시무시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호에서 오랫동안 떠돌아다녀본 사람들이라 이때에 그와 같은 백의인들의 모습을 보자 그들 네 사람이 결코 만만하게 상대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노패의 괴이한 웃음소리가 가장 우렁찬 편이었는데 이때 그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호통을 쳤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울화를 풀지 못 해 어쩔 줄을 몰라하던 참인데 너희들이 잘 와주었다.] 황횡은 그 말을 받았다. [좋은 말이오. 우리들이 이 죽고 사는 것을 모르는 후레자식들 에게 화풀이를 하는 한편 그 바람으로 서로의 재간을 한번 겨루 어 보도록 합시다.] 여약연 역시 찬동을 했다. [훌륭한 생각이네요. 하지만 아깝게도 그들은 겨우 일곱 명밖 에 되지 않아요.]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처참한 비명 소리가 찢어 질듯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 필의 검은 말과 그 검은 말에 타고 있던 검은 옷의 기사가 함께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쿵'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땅바닥에 떨어진 후에 사람이나 말이 모두 다 뻣뻣하게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황횡은 탄성을 발했다. [장형은 매우 훌륭한 각법을 지니고 있구려. 내력이 곧장 말의 몸에까지 뻗치고 안장 위의 말등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충 격을 주어 죽게 했구려. 이 한 수의 각법은 그야말로 천하 무상 이라 할 수 있겠구려.] 그 흑삼방의 사람과 은도부의 사람은 다만 사람의 그림자가 번 쩍하니 달려왔다가 달려가는 것을 겨우 느꼈을 뿐 정말 똑똑히 보지도 못했는데 한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을 보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이 경악에 잠겨 있게 되었을 때에 바람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여약연이 어느덧 몸을 번쩍 일으키며 한 대한이 타고 있 는 말머리 위에 사뿐 올라서더니 은도부에 소속된 한 명의 경장 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찔렀다. 그 경장 대한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칼을 홱 뒤집듯 해서는 날을 세워 그녀의 손가락을 베려고 들었다. 그러나 그 칼이 중 간에서 갑자기 딱 멈추어 꼼짝을 하지 않았다. 원래 여약연의 화양지 지력은 이미 허공을 격하고 사람에게 상 처를 입힐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손가락이 그의 이마 와 몇 자의 간격을 두고 있었으나 지력은 이미 그에게 적중되어 그를 제어하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 그 경장대한은 몸을 휘청거리게 되었고 손에 들고 있 던 커다란 칼을 어느덧 땅바닥에 쨍그랑하고 떨어뜨리게 되었 다. 그리고 곧이어 그 대한이 타고 있던 그 말이 네 발에 맥이 빠진 듯 진흙으로 만든 말처럼 맥없이 주저앉는 것이었다. 여약연이 손가락을 거둬들이자 그 경장대한 역시 말안장 위에 서 맥없이 매달려 있었는데 전신의 뼈마디가 모두 녹아나고 없 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그의 얼굴 위에는 웃음이 감 돌고 있었다. 두 눈을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으며 한번 깜박이지 않았는데 바 로 웃음을 띤 채 그대로 죽어버린 것이었다. 황횡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하얀 옷을 펄럭이며 한 명의 흑 삼방의 사람과 말 앞에 내려서디니 왼손으로 가볍게 말의 머리 를 쳤다. 그러자 그 준마는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말 위에 타고 있던 사람은 재빨리 등자를 걷어차고 몸을 날려 땅 위에 우뚝 버티고 섰다. 황횡은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일 장을 뻗쳐내는 것을 네가 도망치든가 막는다면, 즉 죽지만 않는다면 한번쯤 용서를 해주겠다.] 그 흑의 대한은 손에 들고 있는 은도를 비스듬히 들고 응수를 했다. [불초는 기꺼이 고명한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황횡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오른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커 다란 소맷자락이 벗겨져 아래로 쳐지면서 손바닥과 한 토막의 팔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모두 시커먼 빛을 띄우고 있어 보기에 도 끔찍했다. 아마도 그 흑의 대한이 몸에 걸치고 있는 흑색의 장삼보다도 훨씬 검은 것 같았다. 흑의 대한은 그의 그 이상야릇한 기세에 그만 압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흑수파의 흉악한 명성을 천하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 는지라 그만 간담이 서늘해져서 전신에 지니고 있는 무공 몇 임 기 응변 능력이 부지불각시에 삼사성(三四成)이 약화되고 말았 다. 이때 황횡은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받아라!] 그의 몸이 흔들하는 곳에 어찌 된 노릇인지 어느덧 그는 흑의 대한 앞쪽 한 자도 되지 않는 곳에서 그 새까만 손을 불쑥 뻗쳐 내는 것이었다. 그 흑의 대한은 칼을 휘둘러 반격을 시도하고 상잔도법(傷殘刀 法)을 펼쳐야 요행히 목숨만은 건질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 나 흑의 대한의 정신과 혼백이 이미 무겁게 가해오는 공포에 질 린 나머지 칼을 들고 막으려 하면서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렇게 되자 그의 몸놀림이 황횡의 검은 손보다 늦어지고 말았 다. 황횡의 손이 그의 가슴팍을 찍는다고 느끼는 순간 거두어들여 지고 흑의의 기사는 일 장 밖으로 날아가더니 엎어져 꼼짝하지 못했다. 얼굴빛이 새까맣게 먹처럼 변해 있었는데 그 죽어있는 모습은 지극히 흉칙하고 공포스러웠으며 여약연의 화양지가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띄고 죽게 하는 모습과는 그야말로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곡창해는 적신교와 흑수파가 어째서 물과 불의 형세로 일컬어 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두 명의 죽은 사람의 모습이 지극 히 대조적인 것을 보고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 저 두 문파의 무공은 극단적으로 상반되며 선천적으 로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있으니 불과 물과 같은 형세를 이루고 있는 것도 이유가 있구나. 이제 겨우 네 사람만 남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한 사람도 목숨을 건지기가 어려울 것 같다. 아! 내 어찌 눈을 멀거니 뜨고 그들이 사람을 마구 잡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그와 같은 생각이 들자 즉시 밧줄을 풀고 자기 몸을 돌보 지 않고 나무를 타고 땅바닥 위로 내려섰다. 이때 겨우 남은 네 사람 가운데 두 명은 흑삼방의 이숙(二宿) 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은도부의 두 대한이었다. 그들 네 사람은 두 패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모두 다 똑같은 생 각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상대방의 두 사람이 먼저 도망을 쳐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어느 한쪽에서 도망을 치게 된다면 네 명의 백의를 걸치고 있 는 흉악한 사람들 뒤를 쫓아 추살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남은 두 사람이 그 기회를 타서 도망을 칠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 그와 같은 기대를 걸고 네 사람은 똑같이 말을 몰아서 길을 뚫 고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노패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더니 은도부의 한 명 대한에게 손 짓을 했다. [이리 오너라! 나는 주먹이 근질근질한데 네가 와서 나의 간지 러운 곳을 긁어주어야겠구나.] 말하는 소리는 지극히 듣기에 거북했다. 은도부의 그 대한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해지게 되었으나 끝 내 감히 반박을 하지 못했다. 곡창해는 땅바닥에 내려서자 그 대한이 바로 날 죽어라 하고 자기와 아앵을 쫓던 두 사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는 조금도 그 사내에게 감정이 없어서 큰소리로 부르짖듯 입 을 열었다. [노형님. 이 사람들을 살려주세요!] 노패는 흉칙하게 웃고는 호통쳐 물었다. [이 자들은 모두 다 너를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너는 어째서 이자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냐?] 곡창해는 늠름하게 말했다. [두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지요.] 노패는 의아한 얼굴이 되어 얼굴을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두 가지나 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냐?]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첫 번째 이유는 대인(大人)이 소인(小人)의 잘못 을 잊어준다는 것이지요.] 노패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너는 내가 대인이라고 느끼느냐?] 곡창해는 정색을 했다. [나는 키가 크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그 사람을 대인이라고 하 지 않아요. 훌륭하고도 커다란 뜻을 가슴에 품고 있고 품행 고 결한 군자야말로 대인이리고 생각하지요.] #3394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6.1/4 사파의 대종사 09/17 19:56 290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6.1/4 사파의 대종사 노패는 그 말에 머쓱해지더니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곡창해는 다시 설명을 했다. [두 번째의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모와 처자식이 딸려 있 어요. 만약 저 사람들이 죽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상심할 것 이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우리들은 같은 사람인데 어찌 서로 잔 인하게 죽인단 말이에요.] 여약연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세 가지 이유라고 해야 옳겠구나.] 곡창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소위 남의 부모가 상심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사람끼리 서로 해치는 것을 차마 못하는 것은 모두 다 똑같이 측은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맹부자(孟 夫子)께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다고 하시 지 않았어요] 장소룡은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하, 소곡(小谷)의 뱃속에 조금의 먹물이 들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 그러나 나는 솔직히 너에게 이야기하는데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험악하고 음독(陰毒)해서 무릇 모든 일에 대해 서 만약 먼저 선수를 써서 제압을 하지 않는다면 그만 그 사람 에게 제압을 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황횡은 입을 열었다. [장형의 말씀이 옳소. 소곡, 자네와 같이 줄곧 남을 도와준다 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라네. 이 후레자식들은 몸을 돌리기만 한다면 너에게서 얻은 득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너를 잡아가려고 할 것이다.] 곡창해는 어리둥절해졌으나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군요. 만약 내가 오늘 이들의 목숨을 구해 준다면 이들이 어찌 나를 해치려고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네 명의 백의의 흉악한 사람들은 모두 다 냉소를 흘렸다. 그러자 은도부와 흑삼방의 네 사람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곡 도련님께서 만약 소인 등의 목숨을 구해주신다면 이후 이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커다란 은혜에 보답하고자 노력하겠소.] 노패는 후딱 고개를 돌리더니 한 대의 주먹을 뻗쳐내었다. 주먹 바람이 '획' 하는 소리와 더불어 위세가 물 밀듯이 뻗쳐 갔는데 그 소리와 위세가 정확하고도맹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필의 준마가 그 주먹 바람에 맞아서 는 여덟 자 밖으로 날아가서 땅에 떨어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를 못했다. 여약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형의 음양권력은 그야말로 이 우내(宇內)에서 독보적이라 할 수 있겠군요. 내가 보기에 권력 가운데서 유경(柔勁)은 강력 (剛力)보다 한 가닥 더 빨라 먼저 말의 오장 육부를 박살내는군 요.] 노패는 어울리지 않게 겸손의 말을 했다. [부끄럽소이다. 부끄러워!] 그리고 눈을 돌려서는 말등에서 한쪽으로 떨어져 있는 대한을 향해 날카롭게 호통쳐 물었다. [네 뼈다귀가 저 말보다 더 튼튼하다고 생각하느냐?] 그 경장의 대한은 미미하게 몸을 떨며 대답을 했다. [도저히……비교가 안 되지요.] 노패는 코웃음치더니 고개를 돌리고 여약연과 장소룡, 그리고 황횡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 세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노패는 즉시 그들의 뜻을 알아차린 듯 입을 열었다. [소곡, 너는 이 사람들을 따라 가거라. 그러나 내 먼저 너에게 말해두지만 네가 속히 이 주위의 십 리 안에서 도망을 가야지 만약에 다시 그 안에서 우리들에게 걸려들게 된다면 조금도 사 정 없이 너의 목숨을 빼앗고 말 것이다.] 여약연과 장소룡, 그리고 황횡 세 사람도 이구 동성으로 그 말 을 지지했다. 노패는 다시 입을 열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 시간 안으로 십 리 밖으로 도망을 쳐야 한다. 이후에 네가 죽든 살든 우리들은 상관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겠다. 만약에 네 가 다른 사람에게 잡혀가서 고통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한다 하 더라도 그것은 네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놈들은 이름을 대고 떠나 라.] 곡창해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좋아요. 내가 만약에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그 것은 내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여러 형님들과 누님께서 는 안녕히 계십시오.] 말이 끝나자 그는 흑삼밤 쪽으로 가서는 입을 열었다. [두 분 형님은 나를 한동안 데려다주시지 않겠소?] 두 명의 흑의기사들은 재빨리 대답을 했다. [좋소.] 장소룡은 그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는데 흑삼방의 이숙인 한 사람은 이름이 전선(田旋)이라 했고 한 명은 비련(費蓮)이라고 했다. 그리고 은도부의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이조(李操)이고 한 사람은 번홍(樊弘)이었다. 전자는 바로 곡창해를 죽자사자 뒤쫓아왔던 바로 그 사람이었 다. 이때 곡창해는 비련과 함께 말을 타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의 성명을 댄 후에 일제히 말을 재촉해서 달리게 되었고 삽시간에 멀리 그곳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반 시진이 못되는 시간에 그들은 어느덧 십 리 밖으로 달려나 올 수가 있었다. 전선은 달리던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검은 말을 세우더니 입을 열었다. [노비(老費), 저 두 녀석이 우리 뒤를 바짝 쫓고 있는데 아무 래도 호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 않네.] 비련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은도부은 번홍과 이조 두 사람이 수십 장 밖에서 따라오고 있 었는데 이쪽에서 말을 멈추게 되자 그들 역시 말고삐를 잡아당 기고 말을 멈추고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비련은 바로 등뒤에 타고 있는 곡창해에게 물었다. [소형제, 자네는 어디로 갈 참인가?] 전선은 그 말을 받았다. [우리들은 자네로부터 목숨을 구원받는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 히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가 어디로 가겠다면 우리들 은 자네를 그곳으로 보내주겠네.] 곡창해는 잠시 생각해보고 나서 말했다. [나는 아직도 작정을 하지 못했어요.] 그는 전선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볼 수가 있어 속으로 역시 인심이 험악하다는 말을 되씹어보지 않을 수 없었 다. '장소룡은 세상 인심이 험악하고 간사하다고 했으며 또한 이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강호에서 떠돌아다닌 지 하루 이틀이 아니니그런 말에도 무슨 근거가 있을 것이다.' 이때 비련은 매우 성실하고 간곡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형제, 만약에 작정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저 앞쪽으로 나 가서 쉴 곳을 찾아보도록 하세.] 전선은 말했다. [저 뒤쪽에서 쫓아오고 있는 두 명의 녀석들은 좋지 않은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 형제들이 만약에 소형제를 위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가 세, 우리들은 자연히 자네를 위해서 모든 것을 안내해 주겠네.] 곡창해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이때 만약에 한사코 거절을 하게 된다면 오히려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이니 반드시 잘 생각을 해보고 계획을 세워본 이후에야 이들 곁에서 떠날 수가 있을 것이다.' 전선과 비련 두 사람은 그런 곡창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말을 몰아 질풍과 같이 곧장 동북쪽으로 나갔다. 곡창해는 분명히 서북쪽으로 달려가야만이 숭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와 같은 궁금증을 가슴 가득히 갈 무리 한 채 몰래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약 십 리 길을 달려가게 되었을 때 은도부의 두 사람은 이미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전선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새삼 제의했다. [우리가 급히 길을 재촉해서 타고 가는 말을 지치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네. 그 두 녀석은 아마도 우리들이 역참에 거의 다 도달한 것을 알고서는 아예 물러난 것 같군.] 비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가운데에는 수상한 점이 있네. 그들이 어떻게 둘째 나으리 께서 친히 앞쪽에 역참을 설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 가?] 곡창해는 물었다. [당신네들은 흑삼방 십팔숙이라고 했는데 그 삼성은 또 누구지 요? 그리고 둘째 나으리라면 삼성 가운데 한 사람인가요?] 비련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소형제의 기억력이 정말 훌륭하군. 남들이 겨우 한 번 삼성십 팔숙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기억을 하다니 말일세. 맞아. 둘째 나으리는 삼성 가운데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악성(惡 星) 공금구(공金鉤)일세. 큰 나으리는 독성(毒星) 용해(龍海)이 시고 셋째 나으리는 흉성(凶星) 이기(李祺)라네. 우리 십팔숙은 모두 다 큰 나으리께서 친히 훈련해낸 사람들로 강호에서는 위 명을 사방에서 떨치고 있으며 여지껏 한번도 좌절을 당한 적이 없다네.] 전선은 그 말을 받아 설명하듯 말했다. [소형제는 우리가 조금 전에 그 네 명의 흉악한 사람들의 일격 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들을 앝잡아보지는 말게. 기실 평소에는 그와 같은 사파의 고수들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매 우 드문 일이라네. 그러나 일단 만나게 되었다 하면 물론 당하 는 수밖에 없는 거지.] 그가 그와 같은 말을 할 때 얼굴에는 그만 소름이 끼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곡창해 역시 그 네 명의 흉악한 사람들이 사파의 고수에 속하 는 사람들로서 평소에는 좀처럼 강호에 얼굴을 디밀지 않고 일 반적인 무림의 인사와는 평소에 내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 으므로 전선과 비련 두 사람이 그런 일을 들먹이면서도 전혀 부 끄러운 빛을 띄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비련은 다시 이어서 물었다. [소형제, 자네는 그들과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가?] 곡창해 역시 상세한 경과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쩌다가 나에게 발 견을 당했지요. 처음에 그들은 모두 다 나를 죽이려고 했으나 나중에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그만두고 오히려 내 말을 듣 고 당신들을 놓아주기까지 했는데 나로서는 그 사연은 잘 알 수 가 없구려.] 전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소형제도 그들과 별다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옆에서 울 려퍼지면서 벼락같이 가까워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은도부의 이조와 번홍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 다. 뿐만 아니라 번홍은 큰소리로 외쳐 묻기까지 했다. [두 분은 소형제를 어디로 보내려고 하는 것이오?] 이조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앝은 수작이 통하지 않을 것이오. 쓸데없는 소리로 마구 지껄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우리 모두다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을 것이 아니겠소.] 전선은 냉소를 띠었다. [흥, 두 분이 소리소리 지르면서 기세 등등하게 나타나서 떠들 어대는 것은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묻고 싶소?] 비련은 그 다음을 이었다. [설마하니 길을 가로막고 빼앗아 가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하하하, 이 형제는 한평생 아직도 남에게 강탈당하는 맛을 본 적이 없소.] 네 사람은 서로 이유를 댔고 입으로 설전을 벌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번홍은 손을 뻗쳐서 안장 곁에 매단 기다란 극(戟)을 뽑아들고 는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만약에 나가고 물러가는 것을 분간하지 못한다면 이 형제가 손을 쓰는 것을 탓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한차례 '창창'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모두 다 무기를 뽑아들게 되었다. 번홍은 먼저 말을 몰아 전선에게로 달려들었고 이조는 한 자루 의 은도(銀刀)를 뽑아들더니 비련을 가로막았다. 몇 합을 겨루게 된 이후에 전선은 번홍의 기다란 극이 찔러 들 어오는 기세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상처를 입고 말아서 떨어지고 말했다. 그러자 번홍 역시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은도를 바짝 조이듯 하 면서 공세를 펼치는 것이었다. 비련은 빈틈을 타서 말을 몰아 도망치게 되었을 때 이조가 어 느덧 가까운 곳까지 쫓아와서 기다란 극으로 공격을 해대었다. 만약에 곡창해가 비련의 등뒤에 없었다면 비련은 이미 독수에 적중되고 말았을 것이다. #3398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6.2/4 사파의 대종사 09/18 12:41 284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6.2/4 사파의 대종사 이조는 기다란 극으로 비련을 찌르지 못하게 되자 방향을 바꾸 어 비련이 타고 있는 말을 공격했다. 다시 십여 장쯤 나가게 되었을 때에 기다란 극의 끝은 와락 말 의 엉덩이를 찌르게 되었고 그 바람에 말이 훌쩍 앞발을 쳐드는 바람에 비련과 곡창해 두 사람도 일제히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 게 되었다. 그리하여 쌍방은 땅바닥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비련은 두 손으로 한 쌍의 호수구(護手鉤)를 사용했는데 공력이 약하지 않 아 되려 이조로 하여금 연신 뒤로 물러서도록 공격을 가하는 것 이었다. 곡창해는 그 기회를 틈타서는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쳤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는 그들 네 사람이 자기에 대해 좋지 못 한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사람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사파의 인사들을 통한 스럽게 여겨왔지만 지금으로서는 자기도 모르게 존경심이 우러 나는 것을 금치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토록 고약하고 또한 배은 망덕하게 의리를 저버리는 도배들이 많으니 그들이 걸핏하면 자기와 한패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탓할 수가 없구나.] 그가 수마장을 달려가서 막 한 산자락을 돌아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세 필의 검은 말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말에 타고 있는 기사들은 하나같이 몸에 흑색장삼을 걸치고 있 어 첫눈에 흑삼방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앞장을 선 한 사람은 나이가 사십 정도 되었는데 체구가 우람 하고 얼굴 모습이 흉악했으며 오른손에는 하나의 두텁고 무거운 철패(鐵牌)를 들고 있었고 왼손은 소맷자락 속에 숨겨 놓고 있 었다. 그 대한은 갑자기 일성을 대갈했는데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울 릴 지경이었다. 곡창해는 냅다 고개를 돌리고 다시 줄달음을 놓았다. 그러나 눈깜짝할 사이에 다시 한 명의 말을 탄 흑색장삼의 사내에게 뒤 따라 잡히게 되고 길을 가로막히게 되었다. 그 흑의의 기사는 말 등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손을 뻗쳐서는 대뜸 곡창해를 움켜잡더니 그 즉시로 혈도를 짚고 가로로 말안 장 위에다 얹었다. 앞장을 섰던 그 우람한 체구의 기사는 흉칙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애가 바로 곡창해군. 어쨌든간에 우리들은 헛걸음을 하지 않은 셈이 되었네.] 곡창해를 잡은 흑의의 기사는 아첨의 미소를 지었다. [둘째 나으리의 복이 하늘처럼 크시어 매번 나섰다 하면 큰 성 과를 거두어 돌아가게 되는군요.] 다른 한 명의 기사가 이때 그 말에 이어 부르짖듯 말했다. [잘못된 것 같구려. 아무래도 노비(老費)의 비명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즉시 말을 몰아서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맞은편에서 한 필의 말이 질풍과 같이 이쪽 으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 말 위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쌍방이 서로 상대방을 알아볼 수 있는 간격까지 좁혀지게 되었 을 때 각기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흑삼방의 이쪽 영도자격인 우람한 체격의 대한은 노갈을 터뜨 렸는지 그 소리가 사방에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었다. 그는 외치 듯 말했다. [이 은도부의 두 녀석이 틀림없이 비련을 해쳤을 것이네.] 그러자 그 한 필의 말은 말머리를 돌리고 왔던 길을 돌아서 도 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흑삼방의 두 기사가 말을 몰아 일제히 달려나가 한 사람은 앞에서 한 사람은 뒤에서 그들의 앞뒤를 차 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번홍과 이조 두 사람은 부득이 도망치겠다는 생각 을 버리고 일제히 맞은편을 향해 두 손을 마주 쥐고 예를 했다. 번홍은 변명을 했다. [공 둘째 나으리께서 친히 왕림을 하셨으니 저 애는 별수 없이 둘째 나으리께서 데려가셔야겠군요.] 공 둘째 나으리라고 불리운 대한은 호랑이 같은 눈을 부릅뜨더 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본방의 제자인 전선과 비련을 어떻게 했느냐?사람 을 죽였으면 목숨을 바쳐야 하고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한다는 말 을 새삼스럽게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번홍과 이조 두 사람은 안색이 일변했다. 그들은 흑삼방의 삼성의 무공이 고강할 뿐만 아니라 모두 다 지극히 심보가 악독하고 손이 매서우며 성격이 냉혹하기 때문에 이때 절대로 공 둘째 나으리의 비위를 거슬려서는 안 된다는 사 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번홍은 억지로 차분한 태도를 짓고서는 입을 열었다. [어찌 둘째 나으리에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귀방의 전형과 비형 두 분은 곡창해를 탈취해 가려고 했기 때문에 저희들과 반 복하여 원수가 되었습니다만 지금 그들은 모두 다 상처를 입었 을 뿐 목숨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소이다.] 아니나다를까 얼마 되지 않아 전선과 비련 두 사람이 상처를 입은 몸으로 이곳으로 달려왔다. 흑삼방의 둘째 나으리인 공금구는 상처를 입은 전선과 비련 두 사람에게 번홍과 이조 두 사람의 몸을 칼로 몇 번 찍어 똑같은 정도의 상처를 입히도록 했다. 그리고 난 이후 공금구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못난 것들 같으니 빨리 기어서 돌아가 여(余) 늙은이 에게 전해라. 이후 일을 처리할 때 그의 다섯 아들을 내보내되 너희들과 같은 밥통들을 내보내 창피막심한 꼴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이다.] 이 몇 마디의 말을 대단한 모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홍과 이조 두 사람은 그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으나 감 히 화를 내지는 못했다. 그들이 막 말 위에 오르려고 했을 때 별안간 왼쪽 산등성이 위 에서 세 사람의 인영(人影)이 나타나고 세 마디의 냉소가 들려 왔다. 뭇 사람들이 눈을 들어서 그쪽을 바라보니 그들 세 사람은 어 느덧 급히 아래로 뛰어내리게 되었고 삽시간에 여러 사람들과 가까운 곳으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손을 뻗쳐서 곡창해가 타고 있는 그 한 필 의 말 꼬리를 움켜잡고는 입을 열었다.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네. 그렇지 않을 때는 일 장으로 후려쳐 죽이고 말겠네.] 다른 두 명 가운데 한 사람은 공금구의 말 앞에 섰고 또 다른 한명은 한복판에 우뚝 버티고 서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한 필의 말이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을 때에 그는 대뜸 손을 써서 공격할 태세였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다 똑같은 노란 비단으로 만들어진 장삼 을 걸치고 있었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반백이었다. 공금구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황산삼괴(黃山三怪)가 왕림하셨구려. 우리는 오랫 동안 만나보지 못한 것 같구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의 앞에 섰던 황삼의 괴인은 냉 랭히 입을 열었다. [서로 옛날의 교분을 내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고 다만 당신의 한마디만 기다리겠소.] 은도부의 번홍과 이조 두 사람은 속으로 좋아했다. '이 황산삼괴가 만약에 공금구와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된다면 곡창해를 다시 빼앗아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구 나.' 악성 공금구는 왼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가운데 놀랍게도 하나의 금빛 찬란한 예리한 갈고리가 드러났 다. 원래 그의 왼손은 이미 잘려져 나갔기 때문에 그는 평소 금구 를 자기 이름으로 삼아서 그렇게 부르도록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무공이 가장 무서운 점도 바로 이 금구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눈앞의 황산일괴는그가 금구를 뻗쳐내자 잔뜩 경계하며 천천히 손에 들고 있는 두 자 반 길이에 오리알 굵기의 강철관 으로 된 담뱃대를 쳐들었다. 공금구는 매우 못마땅한 듯 코웃음치더니 왼손의 금구를 허공 에 쳐들어 한 번 쫙 그어서는 세찬 파공성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애석하게도 우리 큰형과 셋째가 이곳에 없구려. 그렇지 않을 때 틀림없이 당신네들 삼괴와 한번 결전을 벌여서 흑삼의 삼성 이 고강한지 아니면 황산삼괴가 강한지 시험해 보았을 것이오.] 그의 이 말은 매우 맥이 빠져 있어 듣는 사람은 대뜸 그가 감 히 손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황산삼괴는 일제히 냉소를 흘리며 담뱃대를 들고 있는 사람이 그 말을 받았다. [언제가는 우리들이 높고 낮음을 판가름할 수 있겠지. 하지만 오늘만은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걸.] 그 말꼬리를 붙잡은 사람 역시 한마디 했다. [우리들은 거기에다가 그들이 타고 온 이 한 필의 말도 빌려야 하겠군.] 그 말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산자락 저쪽에서 두 필의 준 마가 불쑥 달려왔다. 마상에는 각기 한명의 나이가 삼십 정도 되는 젊은 장사가 타 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모습은 무척 비슷하게 생겼으며 얼굴빛 이 불그레한데다가 안장 곁에는 한 자루의 커다란 칼을 매달아 놓고 있었다. 두 필의 말은 갑자기 그들이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는데도 말발 굽 소리가 일지 않았다. 원래 두 사람의 말발굽에는 모두 다 두터운 베로 감아 소리가 나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일단 출현을 하게 되자 번홍과 이조 두 사람은 즉시 환 호성을 내질렀다. 공금구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두 분은 마침 잘 오셨소. 불초가 당신들에게 소개를 해드리지. 이 세 분은 황산삼괴이오. 대괴(大怪) 이분천(李奔 泉), 이괴(二怪) 진민석, 그리고 삼괴(三怪) 전경운(錢耕雲)이 라고 한다오.] 그리고 그는 얼굴을 돌려서 황산삼괴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 다. [새로 오신 이 두 분으로 말하면 은도부의 여가오웅(余家五雄) 으로 왼쪽 분이 여이랑(余二郞)이고 오른쪽은 여사랑(余四郞)이 라오. 여러분들은 한번 잘 사귀어보시구려.] 황산삼괴는 평소에 차갑고 오만무례한 행동을 거침 없이 해온 사람들이라 이때도 머리 한번 끄덕여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괴 진민석이 오른손으로 힘을 주자 그 검은 말이 울부짖으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여이랑이 날카로운 어조로 호통을 쳤다. [진형은 손을 쓰기 전에 한번 고려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이오.] 호통 소리 가운데 두 형제는 일제히 커다란 칼을 뽑아들었다. 그 동작이 신속하면서도 힘차 첫눈에 공력이 정순하고 도법에 독특한 조예를 쌓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삼괴 전경운은 두 눈을 실날처럼 가늘게 뜨고 냉랭히 입을 열 었다. [아니, 당신네들은 이번 일에 나서서 가로채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여이랑은 냉랭히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오. 이 우형제는 다만 여러분들이 그 곡창해를 사로잡은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고 싶을 뿐이 오.] 진민석은 형세를 한번 가늠해 보았다. '우리 형제 세 사람의 세력이 가장 크기는 하다. 그러나 만약 에 자극을 주어 상대방 두 패거리가 연합을 하게 된다면 역시 삼대삼으로써 꿀릴 것은 없다 하겠지만 우리 쪽에는 첫째로 곡 창해를 약탈해 갈만한 사람을 내세울 수가 없고 두 번째로는 상대방의 몇명의 부하들이 그 기회를 틈타서 곡창해를 데려간다 하더라도 우리들로서는 몸을 나누어 저지를 할 수가 없다. 그렇 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절대로 저들을 자극하여 손을 잡도록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는 잡았던 말꼬리를 놓았다. 그 검은 말은 대뜸 몸을 일으켰 다. 그리고 삼괴 진민석은 냉랭히 말했다. [자네는 내려오게.] 마상의 흑의 사내는 공금구를 한번 바라보았다. 공금구는 고개 를 끄덕여 그렇게 하자는 시늉을 하자 즉시 땅바닥에 뛰어내렸 다. 이렇게 되자 그 말에는 오직 곡창해만이 혼자 가로놓여 있게 되었는데 그의 혈도가 제압을 당한 만큼 뭇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을 하고 있었다. 진민석은 천천히 재차 입을 열었다. [저 애가 마땅히 그 누구에게 속하게 될 것인지 먼저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잠시 그가 한켠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 좋겠구 려.] 그러면서 그 자신도 걸음을 옮겨 물러섰다. 이윽고 곡창해가 실려 있는 말을 다시 아랑곳 하는 사람이 없 게 되었다. 황산삼괴 가운데 대괴 이분천이 담뱃대를 쳐들고는 입을 열었 다. [무림의 규칙은 각기 재간에 의거해서 일을 처리하는 것인데 여러분들에게 어떤 의견이 있는지 어디 한번 이야기들을 해 보 시구려.] 공금구는 세력이 가장 약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의 생각이 있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세 파가 이 녀석을 가운데 두고 다투고 있 소이다. 만약에 강호의 규칙에 따른다면 우리는 각자 한쪽에서 한 사람을 내보내 결투를 벌이도록 하되 어느쪽이든 최후의 승 자가 되는 쪽에서 저 아이를 데려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구려.] 그는 자기의 무공이 고강한 것을 믿고 그와 같은 제의를 한 것 이었다. 황산삼괴는 먼저 이구 동성으로 찬성을 표했고, 은도부의 여이 랑과 여사랑 역시 남 앞에서 약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응낙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3402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6.3/4 사파의 대종사 09/18 16:39 266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6.3/4 사파의 대종사 공금구는 훌쩍 몸을 날려 한복판에 내려서서는 자세를 가다듬 었다. 그러자 황산삼괴가 다가섰다. 공금구는 그만 어리둥절해져서는 물었다. [당신네들 가운데 어느 분이 손을 쓰실 것이오?] 대괴 이분천은 차갑고도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언제나 세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었으며 언제나 손 을 쓰게 되었을 때에는 세 사람이 한꺼번에 나서곤 했소.] 이괴인 진민석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여러분, 황산삼괴는 언제라도 세 사람이 함께 일을 처리했 소.] 공금구는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여씨 집의 형제들도 일제히 말에서 내리더니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공금구는 즉시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네들도 함께 덤벼들겠다는 것이오?] 여이랑은 그 말을 받았다. [그거야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소? 우리 형제들은 두 사람이 니 황산삼괴에 비하면 여전히 적지 않은 손해를 보는 것이외 다.] 공금구는 생각을 해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좋소. 그렇다면 첫 번째의 겨룸에 있어서 누가 먼저 손을 써 야 하겠소?] 황산삼괴와 여씨 집의 형제들은 그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을 보이지 않자 모두 다 속으로 놀랍고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매우 신속하게 추첨의 방법으로 차례를 결정하게 되었 는데 첫 번째는 황산삼괴와 공금구가 대결을 하는 것이었고 이 긴 쪽에서 나중에 여씨 형제들과 손을 쓰기로 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서 여씨 형제들은 속으로 기뻐했다. '쌍방이 불똥을튀는 듯한 결투를 벌이게 되었을 때 황산삼괴 가 설사 이긴다 하더라도 어쩌면 공금구에 의해 한 명쯤은 목숨 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두 번째의 대결에서는 이대이의 형세가 될 가능성이 큰데 이기게 된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 은 일이지만 만약에 형세가 불리하고 잘못되었을 적에는 부하들 에게 곡창해를 미리 사로잡아 가도록 하면 될 것이다.' 황산삼괴는 비록 득을 보게 되었지만 대명이 쟁쟁한 흑삼방 삼 성 가운데 하나인 공금구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조금도 소흘하 게 여기지 않고 각기 공력을 모조리 끌어 올려 손쓸 준비를 취 했다. 공금구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형제는 스스로 졌음을 시인하고 이번 각축전에서 물 러나겠소. 이번 대결에 있어서는 황산삼괴가 이긴 것이오. 그러 나 이 형제는 이곳에 남아서 도대체 어느 쪽에서 저 애를 데리 고 갈 것인지 구경이나 하도록 하겠소.] 그는 몸을 돌려서는 한켠으로 물러났다. 황산삼괴는 물론 그가 졌다고 시인하는 데 대해서 반대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여섯 개나 되는 눈동자는 일제히 여씨 형제들에게 쏠리게 되었다. 여씨 형제들은 체면불구하고 각기 커다란 칼을 받쳐든 자세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갔다. 쌍방은 일촉 즉발의 긴장된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별안간 전경운이 공격을 했다. 그들 황산삼괴의 무기는 모두 다 무쇠로 만들어진 담뱃대인데 이때 전경운은 춘잠자박(春蠶自 縛)이라는 일 초를 펼쳐 담뱃대로 질풍과 같이 여이랑을 치려고 들었다. 그러나 중도에서 갑자기 빙글 담뱃대를 돌려 오히려 여사랑을 공격했다. 이 일 초는 무척이나 이상야릇하고 악독하며 신속했다. 여사랑은 커다란 칼을 홱 뒤집듯 올리면서 상대방의 무기를 막 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곧장 대괴 이분천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여이랑이 칼을 들어 옆으로 비켜들고 여사랑의 몸을 후 려치려는 담뱃대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여씨 집 형제들이 보여준 이 한 수는 그들이 손을 맞잡고 공격 과 수비를 하는 데 뛰어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산삼괴 쪽에서 각개 격파하려는 계책은 좀처 럼 실현될 수가 없었다. 이때 진민석은 뒤에서 공격을 해들어 왔으며 질풍과 같이 여사 랑의 칼을 든 손목을 짚으려 들어 그 공격에 여사랑은 재빨리 칼을 거두고 초식을 중단했다. 그러나 그 순간 여씨 형제는 일제히 칼을 뻗쳐냈는데 그 위세 가 흉맹하기 이를 데 없었고 황산삼괴가 흠칫하는 그 순간에 어 느덧 그들의 싸움의 테두리 밖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황산삼괴는 신속하게 각자 자기의 위치를 찾아 버티고 섰으며 포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여이랑은 갑자기 크게 소리쳐 저지했다. [잠깐 손을 멈추시오. 공형이 이곳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아무 래도 마음속에 좋지 못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소. 이번 겨룸 에 있어서 만약 양패구상(兩敗俱傷)이 된다면 아무래도 저 사내 애는 가장 먼저 졌음을 시인한 사람의 수중으로 들어갈까 걱정 이오.] 공금구는 노해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대괴 이분천은 공금구를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여이랑을 바라 보며 말했다. [이랑의 말에 일리가 있소. 다시 상의를 한번 한 이후에 손을 써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사실 그는 여씨 집안의 형제들이 그들의 포위를 뚫고 그들의 포위에서 벗어나는 도법을 보고 이미 그들 형제의 무공이 위력 이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두 형제가 손발을 맞추어 죽자사자 공격을 해오게 된다면 아무 래도 황산삼괴 역시 겨우 한 사람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 보였 다. 그때 공금구가 손을 써서 도전을 해오게 된다면 공금구 휘하에 사람의 수도 가장 많은 편이라 곡창해는 틀림없이 공금구의 수 중으로 떨어지고 말 것 같았다. 이때 공금구는 자기의 계책이 실패한 것을 보자 즉시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흠! 황산삼괴는 사람의 수가 가장 많으며 그러한 유리한 조건 에서 득을 보려고 하는데 이 형제는 한사코 그들이 마음먹은 대 로 소원풀이를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여이랑,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리하여 여이랑은 즉시 말했다. [공형이 말씀을 하시는 대로 우리 형제들은 그 말씀에 따라 행 동을 하도록 하겠소.] 이윽고 형세는 다시 일변해 삼대삼의 국면을 이루게 되었다. 대괴 이분천은 입을 열었다. [좋소. 어느 쪽에서든 살아 남은 사람이 많게 되었을 때에는 저 사내애를 데려가도록 결정을 합시다.] 그는 손짓을 했으며 세 사람이 함께 상대방 쪽으로 달려들었 다. 눈 깜짝할 사이에 쌍방은 격렬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이번은 그야말로 생사가 달려 있는 큰 싸움인지 라 하나같이 전력을 대해 맞서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곡창해는 그들이 이랬다 저랬다 할 뿐만 아니라 갑자기 한편이 되는가 했을 적에 갑자기 적이 되는 등 완전히 이해 관계에 따 라 입장이 바뀌는 것을 보고 속으로 매우 그들을 멸시하는 마음 이 일었다. 그는 혈도를 짚히게 된 이후에 말안장에 걸쳐지게 되었기 때문 에 머리가 자연 아래로 드리워지게 되었는데 그 즉시 단전에서 한가닥의 뜨거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생각도 해볼 필요를 느끼지 않고 조금 전의 경험에 따라 마음과 뜻을 집중시켜 그 한 가닥의 뜨거운 기운을 서둘러 움직 이도록 했다. 순식간에 그 뜨거운 기운은 경맥을 뚫고 흐르게 되었고 대뜸 막혔던 혈도를 풀어놓고 말았다. 이와 같은 냉공심법은 매우 기이해서 처음 운행을 하게 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거꾸로 하고 머리를 아래로 향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곡창해는 흑수파의 황횡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교묘한 계책을 펼쳐서는 밧줄로 자기 자신을 거꾸로 매달았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거꾸로 매달리면 즉시 고통을 느끼게 되었 을 것이지만 곡창해는 오히려 온몸이 개운해질 뿐만 아니라 전 신에 일종의 형체 없는 힘이 오락가락 하면서 소용돌이 치 듯이 온몸을 돌고 도는 것이었다. 그는 말 안장을 꼭 잡고 말의 배를 꼬집었다. 그 검은 말은 아파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말발굽을 움직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싸우고 있던 여섯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몸놀림을 늦추었 다. 황산삼괴는 일제히 호통을 쳤다. [우리들이 승부를 결판내기 전에는 그 누구도 저 사내애를 쫓 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소.] 여씨 집의 형제와 공금구 역시도 혹시나 자기네들 부하들이 뒤 로 쳐지게 되어 그만 그 사내애를 잃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서로 의심을 하는 상태하에서 그 누구도 부 하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뒤쫓아가는 사람이 없었다. 곡창해는 검은 말에 실려 십여 장이나 나가게 되었으나 십여 장을 나가게 된 이후 그 말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 섰으며 그 가 아무리 할퀴고 꼬집어도 그 검은 말은 앞으로 나가지 않고 그저 목청껏 울부짖으며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곡창해는 고삐를 잡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나 말이 흉악한 성질을 드러내 머리를 돌려서는 자기의 손을 물게 될까봐 다시 는 더 꼬집을 수가 없었다. 싸우고 있는 여섯 사람들 가운데 공력으로 따질 적에 여씨 집 의 형제들이 좀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수시로 서로 엄호를 해주어 공력의 부족함을 채우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쌍방은 막상 막하의 기세를 올리면서 그야말로 하 늘과 땅이 침침하고 어두워질 정도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싸우고 또 싸웠다. 오십여 초를 싸우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부 상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모두 다 근골에 상처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계속해서 격전을 벌일 수가 있었다. 다시 한차례 싸움을 벌이게 되었을 적에 황산삼괴 쪽에서 우세 를 차지하게 되었다. 대괴 이분천은 혼자서 공금구를 상대하고 있어서 우세를 차지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괴 진민석과삼괴 전경운이 합력해서 여씨 집의 형제들을 상대함에 따라 이 무렵에는 어느덧 주동적 인 형세를 장악하고 공격할 때가 많았으며 수비할 때가 적어졌 다. 만약에 여씨 형제들이 연합하여 펼치는 공수지도(功守之道)에 정통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황산이괴와 삼괴의 담뱃대에 얻어맞 아 죽고 말았으리라. 정히 이들이 격전을 벌이게 되었을 적에 싸움의 테두리 밖에 갑자기 몇 사람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몇 사람이 언제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곳에 도달 했는지, 그 누구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가장 먼전 발견한 사람은 흑삼방의 사람들이었다. 전선과 비련 두 사람은 무심결에 눈길을 던지다가 그곳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되었고 또한 그들이 바로 네 명의 사파고 수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 두 사람은 대뜸 경악에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지 는 것을 느끼고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나머지 두 명의 공금구를 따라온 흑의기사들은 일제히 물었다. [누군데 감히 이곳에 와서 기웃거리느냐?] 은도부의 번홍과 이조 두 사람도 발견하게 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그만 삼혼칠백(三魂七魄) 가운데 반이 달아나 게 되었고 역시 전선과 비련 두 사람처럼 입술 한번 달싹하거나 소리를 내지 못했다. 격전을 벌이고 있던 여섯 사람들은 곁눈질로 보게 되었을 때에 사방 모퉁이에 각기 한 명의 백의인들이 서 있는데 그들 네 사 람 가운데 한 명은 여자였다. 그들 네 사람은 모두 다 일종의 이상야릇한 표정과 태도를 지 니고 있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강호에서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흘깃 보기 만 했을 뿐이지만 서로 말을 주고 받거나 할 필요가 없이 일제 히 손을 멈추고 뒤로들 물러섰다. 공금구는 한차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통쳐 물었다. [여러분들은 싸움을 도우러 온 것이오, 아니면 저 사내애를 쟁 탈하는 일에 역시 손을 내밀 뜻이 있는 것이오?] 네 명의 백의인들은 전혀 표정이 없었다. 표정과 태도들은 평 소에 무례하고 방자하기로 이름난 황산삼괴보다 더 더욱 차갑고 무뚝뚝했으며 거만했다. 대괴 이분천은 흘깃 본 끝에 이미 한 떼의 백의인들이 여러 사 람들과는 전혀 면식이 없는 사람들인 것을 볼 적에 곡창해를 두 고 벌이고 있는 각축전에 참가할 사람들이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그 즉시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손을 뻗쳐올 뜻이 있다면 반드시 이름을 대고 한 두 수 절기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오. 만약에 한마디도 하지 않 는다면 흥!] 동북쪽에 서 있는 백의인은 노패였다. 그는 대괴 이분천이 말 을 끝내지 않고 코웃음만 치는 것을 보고는 거칠게 되물었다. [만약에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지?] 대괴 이분천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때는 우리들이 네 분들을 죽은 사람으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탓하지는 못할 것이오.] #3501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6.4/4 사파의 대종사 09/25 19:20 291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6.4/4 사파의 대종사 노패는 '쳇' 하고 냉소를 흘렸다. [흥, 대단한 큰소리군.] 적신교의 여약연이 갑자기 느릿한 어조로 소리쳤다. [곡창해, 시치미 떼지 말고 이쪽으로 오너라.] 뭇 사람들은 그만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는 곡창해 쪽을 바라보 았다. 갑자기 그 사내애는 몸을 일으키고 편안한 자세로 말안장 위에 똑바로 앉는 것이 스스로 혈도를 푼 것이 아닌가. 이때서야 네 명의 백의인을 제외한 나머지의 사람들은 하나같 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곡창해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씨 누님,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지요?] 여약연은 성이 난 어조로 말했다. [이리 오너라!] 곡창해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저 사람들은 흉악하고도 간사하여 모두 이익을 보고 의리를 저버리는 자들이오. 나는 저 사람들과 이야기하기조차도 싫소이 다.] 여약연은 성을 냈던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나 역시도 이 사람들을 매우 싫어한 다.] 장소룡은 눈길을 돌려 전선과 비련, 그리고 번홍 및 이조 네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들 네 사람은 깜짝 놀라고 몸을 벌벌 떨면서 고개를 숙인 채 꼼짝을 못했다. 장소룡은 냉랭한 어조로 명했다. [당신네 네 명의 은혜를 입고 의리를 저버리는 자들은 이쪽으 로 와 보실까.] 전선과 비련 그리고 번홍과 이조 네 사람은 그의 무서운 수단 을 맛보았던 터라 감히 대꾸도 하지 못하고 전전 긍긍 하면서 재빨리 달려와 그의 앞에 줄지어 똑바로 섰다. 이때 그들은 죽음만 면할 수가 있다면 무슨 말이든지 듣고자 하는 판국이었다. 공금구와 여씨 집안의 형제들은 놀람과 의아함을 느끼고 일제 히 호통을 쳐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네 명의 그들 수하들은 그들의 명령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금구와 여씨 형제 등 세 사람이 멀쓱해진 나머지 부하들 곁 으로 달려와서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소룡은 그들이 입을 열기 전에 냉랭히 호통쳤다. [저리 꺼져!]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아래로부터 발을 들어 찼 다. 한 가닥의 막강한 힘이 마침 벽공장력(碧空掌力)처럼 공금구와 여씨 집안의 두 형제에게 물밀듯이 몰려들어 그들 세 사람은 그 만 일제히 뒤로 일 장이나 밀려나게 되었다. 장소룡이 이와 같은 솜씨를 한번 드러내게 되자 세 파의 여섯 명의 고수들은 모두 다 그만 대경 실색하고 말았다. 흑수파의 황횡은 훌쩍 몸을 날려 황산삼괴의 앞에 내려서더니 손을 들어 이분천을 찍으려 들었다. 이 일 장은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았지만 이분천은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느낀 나머지 담뱃대를 들어 막았다. 황횡의 그 검은 손은 담뱃대를 찍게 되었는데 이분천은 그 힘 을 이겨내지 못하고 상반신이 즉시 뒤로 젖혀지게 되었다. 진민석과 전경운 두 사람이 재빨리 손을 써서 두 자루의 담뱃 대를 이분천의 담뱃대에다가 걸고 일제히 내력을 쏟아내었다. 황횡은 호통을 쳤다. [꺼져라!] 손을 한번 왈칵 밀치자 황산삼괴는 일제히 휘청거리며 뒤로 밀 려났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백포를 걸친 사파의 고수들 이외에 그 어느 누구도 입을 딱 벌리고 두 눈이 경악할 정도로 크게 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즈음 뭇 사람들은 모두 다 오늘날 좀처럼 강호에서 얼굴을 디밀지 않는 사파의 고수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따라서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해서 오늘의 구연에 대응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황산삼괴는 다년간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은 사람들이라 따로 이 자기네들만이 쓰는 언어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 세 사람은 재빨리 은어를 써서 신속하게 의견을 교환했 다. 여씨 집의 두 형제는 역시 겪은 풍랑이 많지 않았던 만큼 여전 히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공금구는 호통을 쳤다. [흑삼방의 방도들은 모두 다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던지고 조 처가 내릴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네 명의 흑의기사들은 비련과 전선 두 사람을 포함해서 모두 다 손을 들고 있던 무기를 내던졌다. 이와 동시에 황산삼괴는 방향을 갈라 세 갈래로 나누어져서는 도망질을 쳤다. 마치 그물에서 빠져 나간 고기라고 할까, 아니 면 상갓집의 개라고 할까, 무척 신속하게 도망을 쳤다. 네 명의 백포를 걸친 흉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 몸을 날려 서뒤쫓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공금구는 속으로 후회를 했다. '내 자신의 판단이 이미 잘못 되었구나. 실제에 있어서는 한 걸음 먼저 도망을 쳐야만이 옳았는데 그만 때를 놓치고 말았구 나.' 여씨 집안의 두 형제는 여약연의 눈길을 받고 그야말로 진퇴 유곡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두 부하인 번 홍과 이조 두 사람도 이때는 흑삼방의 사람들을 따라서 손에 들 고 있던 무기를 내던진 후였다. 여약연은 냉랭히 웃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네 형제들은 이 몸이 한 수를 펼쳐야만족한단 말인가?] 노패는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안 돼오. 안 돼. 당신네 적신교의 재간은 정말 사람으로 하여 금 견디기가 어렵게 만들고 있소. 만약에 지금 그와 같은 재간 을 펼친다면 나는 한 걸음 먼저 떠나지 않을 수가 없구려.] 그는 반은 진지한 태도로 반은 상대방을 추켜올리는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다. 여약연은 칭찬이나 다를 바가 없는 그와 같은 말에 그만 흐뭇 해져서는 웃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설마하니 내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 겠어요. 노형이 만약에 음양권력을 펼치고 싶다면 얼마든지 펼 쳐보시구려.] 공금구와 여씨 집안의 두 형제는 백포를 걸친 흉인들 가운데 적신교의 고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는 속으로 섬칫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거기다가 음양권력에 뛰어난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도 틀림없이 흉악한 인물로 이름이 나 있는 음양선 부평의 문하 제 자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 두 사람이 손을 쓰게 되었을 때에 그 한 사람 은 손이 먹물같이 검은빛을 띄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흉악한 위 세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틀림없이 구루산에 자리잡고 있는 흑수파의 사람이고, 또 장소룡은 각법(脚法)이 무섭기 이를 데 없지만 어느 흉악하고 사악한 문파에 적을 두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노패는 껄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만두구려. 이 형제는 결코 자랑을 하고 싶은 뜻은 없소이다. 우리들은 역시 반드시 돌아가야 할 것이니 재빨리 깨 끗하게 처리한 후 길을 떠나기나 합시다.] 장소룡은 급히 그 말을 받았다. [노형의 말씀이 옳소. 그러나 그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저버 린 자들은 좀처럼 놓아줄 수가 없소이다. 우리들은 한 사람이 한 명씩 잡아서 그들에게 우리의 독문(獨門) 형벌의 수법을 맛 보여 주고 그들로 하여금 온갖 고통을 다 겪게 한 이후에 죽도 록 해야 할 것이외다.] 그가 하는 말은 매우 담담해서 보기에는 그들이 정말 은혜를 입고 의리를 저버린 사람들에 대해서 성이 나서 어떤 형벌을 줄 사람같지 않고 다만 그저 습관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 대해서 남다른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선과 비련, 번홍, 이조 네 사람은 그만 전신을 와들와들 떨 면서 온 머리에서는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여씨 집의 두 형제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여이랑이 입술 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 [사제[四第), 우리들은 결코 상대방의 적수가 될 수 없네. 하 지만 우리들이 어찌 은도부의 사람들이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 어가는 것을 보고도 나 몰라라 구경만 할 수가 있겠는가?] 여사랑은 고개를 한번 가볍게 끄덕였다. [둘째 형님의 말씀이 옳소이다. 우리들은 전력을 다해서 영광 스럽게 싸우다 죽는 것이 욕됨을 참고 구차하게 숨어서 사는 것 보다나을 것이외다.] 네 명의 백포인들은 그저 냉소를 띄울 뿐 그들 형제들을 아랑 곳하지 않았다. 황횡은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 네 명의 개종놈들은 들었느냐. 빨리 이쪽으로 와서 형 벌을 받도록 해라.] 여씨 형제가 큰칼을 일제히 쳐들었다. 그리고 여이랑이 호통을 쳤다. [번홍과 이조는 무기를 집어들어라.] 번홍과 이조는 나무로 깎아놓은 닭처럼 멍청해져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여사랑은 욕을 했다. [밥통 같으니라고!] 여약연은 당당히 여씨 집의 형제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네 형제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늙은 몸이 당신네들 의 뜻을 이루어주도록 하지.] 그녀는 걸음을 옮겨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몇 장 밖에 서 있던 곡창해가 갑자기 부르짖었다. [여씨 누님, 그 두 사람은 두 번 죽어 마땅하며 죽은 이후에도 이 세상 사람들의 욕을 얻어먹어야 할 겁니다.] 여약연은 그를 아랑곳 하지 않고 두 팔을 한 번 떨쳤다. 그러 자 몸에 걸쳐져 있던 백포가 대뜸 미끄러지듯 떨어지게 되었고 나신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자기가 한말을 기억하고 다시 재빠르게 백포를 걸쳤 다. 이 옷을 벗고 입는 동작은 지극히 신속해서 어떤 사람들은 미처 보지를 못할 정도였다. 여사랑은 역시 젊고 오기가 많은 사람이라 참을 수 없다는듯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왜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냐? 우리 형제들은 죽음을 두 려워하지 않은 호걸의 작품을 보였는데 되려 이 세상 사람들에 게 욕을 얻어먹어야 한다구?] 여약연은 말했다. [당신의 말에도 일리가 있군. 저 애숭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강호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굳센 사내들을 존경하지.] 곡창해는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며 냉소했다. [무공이 남보다 고강하지 못하다고 해서 항거할 수 없는 것이 뭐가 치욕적이오? 당신들은 평소에 선량한 사람들을 못살게 굴 고 재물을 약탈하며 사람들을 죽여온 한 떼의 날강도들에 불과 하며 인애(仁愛)와 예의가 어떤 것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오. 따라서 이와 같이 우둔하고 행실이 올바르지 못한 것을 수치로 알아야 할 것이외다. 내가 만약에 당신네들이었다면 천 번이라 도 자살을 하고 말았을 것이오.] 이와 같은 도리를 한 명의 도학지사(道學之士)가 말을 한다면 본래 희한할 것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어린애의 입에서 흘러 나오게 되고 또한 강도들에게 한 말인 것이었다. 그야말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모든 사람들은 그만 일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곡창해는 다시 격앙된 어조로 큰소리로 말했다. [사내 대장부는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마땅히 하늘을 우 러러 볼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할 것이오. 그런데 무공을 연마 했다고 해서 보통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그렇게 해서는 영웅호 걸이랍시고 뽐낸다니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소? 당신네들이 오늘 이와 같이 죽게 되는 것은 도리를 아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강도와 같은 우둔한 자들의 종말에 불과한 것이니, 그 누가 있 어 당신네들을 우러러보고 존경하겠느냔 말이오?] 그는 거침 없이 도도하게 말했으며 그 표정이나 태도가 늠름한 데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세우는 도리들은 뭇 사람들이 생각 지 못했던 점이기도 했다. 여씨 집안의 두 형제는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 소리도 하 지 못했다. 여약연은 웃으면서 욕을 했다. [이 애숭이는 정말 약간 사리를 알고 있군. 그러니까 대종사 (大宗師)께서 그를 높이 평가하신 것도 무리는 아니군.] 곡창해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여약연이 그와 같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대종사가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이미 이 네 명의 사파 고수가 달려와 자기를 구해준 것은 틀림없이 대종사의 명 을 받든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이로 미루어 그들 이 결코 감히 자기를 죽이지는 못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만 마음속으로 기뻐했을 뿐 얼굴에는 여전히 대 종사란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 여씨의 형제들이 손에 들고 있던 큰 칼을 내던지더니 맥 빠진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횡은 가장 먼저 입으로 매서운 휘파람 소리를 불어내었다. 그러자 나머지의 사람들도 휘파람 소리를 내며 그 소리에 응했 다. 갑자기 사람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번쩍이는가 싶게 되었을 때 에 곧이어 네 명의 사람들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는데 이미 시체 로 변해 있었다. 전선과 비련 그리고 번홍 및 이조 등 네 사람이 그들에게 죽음 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장소룡과 노패의 손에 죽은 전선과 비련 두 사람의 얼굴 모습 에는 특별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여약연과 황횡의 손에 죽은 번홍과 이조 두 사람은 여 느 사람과 달랐다. 한 사람은 두 눈을 약간 뜨고 있었는데 입가 에 웃음을 띄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이 먹처럼 새까맣게 변해서 흉칙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모양이 여간 가공스럽지 않았다. #3502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7.1/4 마교와 소림사 09/25 20:40 342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7.1/4 마교와 소림사 장소룡은 등 네 사람은 각기 한 사람씩을 죽인 후에 여전히 원 래의 위치로 되돌아가 섰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나 표정을 볼 때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곡창해는 마음속으로부터 이상야릇한 느낌이 솟아올랐다. 그러 나 일시에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꼬집어서 말하거나 이해가 되 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곡창해는 마음속으로부터 이상야릇한 느낌이 솟아올랐다. 그러 나 일시에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꼬집어서 말하거나 이해가 되 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여약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산삼괴가 언감생심 도망을 치다니 마땅히 그들의 목숨을 빼 앗아야 하는데 여러분들의 뜻은 어떠하오?] 노패는 그 말을 받았다. [물론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 은 세 사람밖에 되지 않소. 그러니 한 사람은 허탕을 치게 될 것이오.] 장소룡은 제의를 했다. [우리가 제비를 뽑아 결정을 내립시다. 어느 한 사람이고 헛물 을 켜게 되었을 때는 스스로 재수 옴 붙었다고 한탄하는 수밖에 더 있겠소?] 그들의 말투로 미루어 볼 때 그와 같이 사람을 추격해서 죽이 는 행동을 하나의 즐거운 일로 보는 것 같았다. 곡창해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조금 전에 그에게 불현듯 일어난 느낌이 갑자기 선명해지고 뚜렸해졌 다. 이 한 떼의 사파 고수들은 심보가 악랄하고 손이 매서울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크게 하늘의 호생지덕(好 生之德)을 어기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자들이 이토록 포악하고 잔인하다니, 장래 내가 무공을 연 마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이 사람들을 제재하여 결코 그들이 함 부로 사람을 마구 죽이고 횡행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겠다.' 이때 여약연은 곡창해가 머리를 흔드는 것을 보고 물었다. [너는 왜 고개를 흔드느냐?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해 보아라.] 곡창해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재빨리 궁리를 했다. '지금은 그들을 제재할 수 없지만 마땅히 다른 방법을 사용해 서라도 이 사람들이 몇 사람 덜 죽이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니겠 는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여러 형님들과 누님의 결정을 이 소제가 볼 적에는 그렇게 고 명한 편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황횡은 버럭 고함을 쳤다. [개수작 말아라. 어느 점에 있어서 고명하지 못하다는 것이 냐?] 곡창해는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이 입을 열었다. [말은 여씨 누님이 하라고 나에게 말했는데 황씨 형님께서는 나를 개수작 말라고 하시니 나는 그렇다면 말을 하지 않겠소이 다.] 여약연은 황횡을 한번 흘겨주었다. [그래 맞았어! 당신이 그를 욕하는 것은 나를 욕하는 것과 다 름이 없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장소룡과 노패 두 사람을 바라보며 그들의 의 견을 구하는 듯했다. 장소룡과 노패 두 사람은 모두 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 에 동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황횡은 정세가 잘못된 것을 보게 되자 그만 성질이 나는 것을 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말을 잘못한 것으로 해둡시다.] 여약연은 흐뭇한 웃음을 얼굴에 띄우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꼬마 녀석은 정말 귀엽기 짝이 없구나. 흑수파의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도록 하는 재간이 있으니 대단하다.' 재빨리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곡창해, 이야기를 해보게나.] 곡창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산삼괴는 바로 당신네들이 무섭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황급히 도망을 쳤소이다. 따라서 이치로 따져서 말할 때 여러분 들은 그들을 탓하지 말아야 할 것 같군요.] 황횡은 냉랭히 반박했다. [우리들은 평소부터 도망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저 순순 히 무기를 버리고 목숨을 바치도록 했을 뿐이며 이를 어기는 사 람을 죽여왔다.] 곡창해는 그 말을 받아 설명하듯 입을 열었다. [그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천하의 일이란 모두 다 사리에서 벗 어날 수가 없지요. 오늘 여러 형님들과 누님께서 너그럽게 생각 하시어 그저 네 명의 은혜를 입고 의리를 저버린 자들만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은 이상, 도망을 친 사람도 마땅히 가볍게 처리를 해야만이 옳을 것 같군요. 그렇지 않을 때 그저 여러 형님들이나 누님이 일을 처리함에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게 될 겁니다.] 장소룡은 질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애숭이 녀석은 나이가 어린데도 어떻게 저토록 치밀한 생 각을 할 수 있을까?' 노패는 불만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너의 의견으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그들을 용서하란 말이냐?] 곡창해는 속으로 재빨리 궁리를 해보았다. '이 자들은 결코 가볍게 황산삼괴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 이다. 만약에 노패의 말에 찬동을 하게 된다면 뱀을 그리다가 사족을 다른 격으로 되려 황산삼괴의 목숨을 해치는 결과를 낳 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이윽고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요. 만약에 수월히 그들을 놓아주게 된 다면 이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 형님들과 누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보게 되었을 적에는 모두 다 과감하게 도망을 칠 것이 아 니겠소? 그들을 찾아낸 후에 다만 그들의 한쪽 팔만 잘라내고 그들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다면 황산삼괴 는 여러 형님들과 누님이 법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본보 기가 될 것이고 모든 사람들은 함부로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사 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약연은 먼저 부르짖었다. [그거 묘하군, 그거 묘해!] 노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퍽이나 내 마음에 드는군.] 옆에 서 있던 장소룡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질투하는 마음이 이 제는 해치고 싶은 마음으로 변해서 미간에 자기도 모르게 잔혹 하고 냉혹한 살기를 떠올렸다. 황횡 역시 가슴 가득 살의를 품고 두 눈에 번쩍이는 빛을 발하 며 곡창해를 한번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리고는 얼굴을 돌려 공금구와 여씨집안의 형제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당신들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뭣 하는가? 이 나으리께서 너희 들의 개 같은 목숨을 빼앗아야만 하겠는가?] 공금구와 여씨 집안의 형제 두 사람은 재빨리 다투어 백의의 흉인들과 곡창해에게 인사를 한 후에 그곳을 떠나갔다. 여약연은 그들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당신들은 그 누구라도 감히 곡창해의 솜털 하나라도 다치게 한다면 그 일족을 주살하고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널리 퍼뜨려주기 바라네.] 그 소리는 멀리까지 퍼져나가 공금구와 여씨 집안의 두 형제는 모두 다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황횡은 불쑥 말했다. [나는 먼저 가겠소.] 그러더니 걸음을 성큼 떼어놓으며 신속하게 달려가기 시작했는 데 마치 한 가닥의 하얀 실날처럼 저 멀리 모습을 감추고 마는 것이었다. 여약연 등 세 사람은 상의를 한 끝에 여약연은 황산삼괴의 첫 째인 이분천을, 노패는 이괴 진민석을, 장소룡은 황산삼괴인 전 경운을 벌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임무가 나누어지자 노패와 장소룡 두 사람은 각자 자기네 갈길을 찾아 떠나갔다. 여약연은 곡창해에게 물었다. [곡창해, 자네는 어디로 갈 생각인가?] 곡창해는 천천히 말했다. [소제는 사부님을 찾아 모시고 무예를 배우려고 하는 참입니 다.] 여약연은 의아한 얼굴이 되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사부님을 모시고 무예를 배우겠다고? 그게 사실인가?]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입니다!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지요?] 여약연은 곡창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도대체 누구의 문하로 들어가겠다는 것인가?] 곡창해는 속으로 생각을 했다. '나는 어머님의 명령에 따라 숭산으로 달려가서 한 분의 고승 의 문하로 가 무예를 배우려고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을 그녀에 게 그대로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즉시 대답을 했다. [나는 소림사로 투신해서는 무예를 익힐까 하고 있습니다.] 여약연은 잠시 동안 생각을 해본 이후에 입을 열었다. [소림사는 천하 무술의 총집합소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지금 은 걸출한 인물이 없지. 윗대의 광덕 노방장 같은 분들로 말하 면 금년에 나이가 팔순이 넘어서이미 은퇴해서 수양을 하고 있 으며 절 안의 일에 대해서는 묻지도 듣지도 않는다고 하더군. 그리고 또 두 사람이 있는데 바로 광덕 노방장의 사제인 광자와 광비라는 두분인데 이들 두 사람은 본래 장경각과 달마원 장로 로서 무공이 정묘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하더군. 하지만 십 년 전 소림파의 제일 고수인 독각룡왕 응진이 추악한 일을 저지르게 된 이후 광자와 광비 두 승려는 바로 그 해에 수좌장로(首座長 老) 직에서 사퇴해서 뒷산에 은거하여 십 년 동안 모습을 드러 내지 않았다는데 아마도 이미이 인간 세상에 살고 계시지 않는 것 같네.] 그녀는 곡창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의 방장대사는 광덕의 수좌 제자인 홍경대사(弘經大師)인 데 소문에 의하면 불전에 정통하고 덕망이 매우 높지만 무공은 역시 장경각의 장로인 홍일(弘一)과 달마원의 수좌인 홍력(弘 力)보다 낮다고 하더군.] 곡창해는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나는 역시 소림사로 갈 것입니다.] 여약연은 담담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에게 가지 말라고 말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세한 상황을 이야기해줄 뿐이야. 사실 똑바로 알아야 할 것은 지금 소림사에서 오대고수라 일컬어지는 사람은 바로 홍경 방장을 포 함한 홍(弘)자 항렬의 다섯 명 승려라네. 그 가운데서 아무렇게 뽑아 내세운다 하더라도 나를 이길 사람이 없네. 속담에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에게 배워야 제대로 배운다는 말들이 있듯이 자 네가 고명하지 못한 사람에게 무예를 가르침 받게 된다면 성취 에는 한계가 있게 된다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 가?]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소제는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 지만 소제는 한평생 한 가지 일을 하겠다고 결심을 한 이상에는 한번도 도중에서 그만둔 적이 없답니다.] 여약연은 갑자기 얼굴 가득히 노기를 띄우고는 매섭게 외쳤다. [너 이 애숭이 녀석은 정말 천방 지축이로군. 너는 당금 세상 에서 어느 선배님의 무공이 가장 고강한지 알고 있느냐?] 곡창해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물론 너의 적신교 교주인 화예부인이 최고라고 하겠지.' 그러나 입으로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흔들어 보 였다. 여약연은 픽 웃었다. [호호호, 알고보니 너는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 그녀는 갑자기 성을 내었다가 갑자기 웃었다가 해서 곡창해로 하여금 그녀를 헤아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여약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너에게 알려주는데 당금 세상에서 무공이 가장 고강한 사 람은 일년 내내 해외의 한 커다란 섬에 살고 계시는 노선배님이 시다. 이 노선배님으로 말하면 매 칠 년 마다 중원으로 한 번씩 들어와 한두 명의 제자를 거두어 데리고 가 무공을 전수한단 다.] 곡창해는 놀람과 의아한 얼굴이 되어서는 탄성을 발했다. [아, 그것은 정말 소제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군요. 그와 같 이 무공이 고강하신 분이 누님들의 교주인 화예부인이 아니라니 …….]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철썩' 하는 소리가 났다. 여약연은 따귀를 때린 후에 온 얼굴 가득히 살기를 띄우고 냉 랭히 말했다. [이 대담한 새끼야, 감히 교주의 함자를 들먹이다니!] 곡창해는 대뜸 부친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적신교에서 누구든 지 감히 화예부인이라는 이름을 들먹이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살 신지화(殺身之禍)를 초래한다는 금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예부인은 비록 적신교의 교주라는 귀한 몸이 고 천하에서는 이 대 사파 가운데 하나의 우두머리이지만 강호 에서는 좀처럼 그녀의 이름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과를 했다. [미안하군요. 소제가 일시 머리가 맑지를 못해 귀교의 금기를 그만 어기게 되었군요.] 여약연은 그를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뜻밖에도 더 손을 쓰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나의 화양지로서도 너를 죽일 수가 없으니 너를 놓아줄 수밖 에 없군.] 곡창해는 그녀가 일부러 구실을 붙여 자기를 용서한다는 사실 을 알 수가 있었으니 그녀가 어째서 자기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 지 이해되지 않았다. 여약연은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는 나이 어린 사람으로서 그토록 많은 강호의 고수들의 추적을 받으니 본래 이상한 일이지. 거기다가 또 우리 교주의 함자까지도 알고 있다니, 도대체 자네는 어떤 사람인가? 부모는 누구인가? 나로서는 천하의 무림에서 어느 명가(名家)의 성이 곡씨인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군.] 곡창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소제가 만약에 명가의 제자라면 왜 굳지 사부님을 찾아 무예 를 익히려고 하겠소이까?] 여약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네 녀석은 정말 이상한 데가 많아. 천하에서 으뜸가 는 고인께서 자네를 제자로 거두어들이겠다고 해도 자네는 마다 하면서 그 한때의 헛된 명성만을 남기고 이 세상을 기만해 온 화상들을 찾아 가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곡창해는 그 말을 받았다. #3503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7.2/4 마교와 소림사 09/25 21:46 321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7.2/4 마교와 소림사 [소림의 고승들을 결코 헛된 명성을 남기고 이 세상을 기만하 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소제는 지금 비록 소림의 문하로 받아 들여진것은 아니지만 이 마음은 이미 소림사에 가 있소. 그러니 까 누님께서는 더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 누님께서 말씀하시는 노선배님은 바로 방각(龐珏) 노인 장이시군요. 그분은 나에게 그분의 별호가 천마(天魔)라고 했으 며 그 당시 저는 천마라면 신통력이 광대해서 선불(仙佛)과 별 다름이 없다고 했었지요. 그러니까 누님께서 그분을 천하에서 제일 가는 고인으로 일컫는 것도 당연합니다.] 여약연은 얼굴의 근육이 약간 굳어져 냉랭히 물었다. [이제 자네는 이미 알게 되었는데도 소림사로 가겠다는 것인 가?]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야지요.] 여약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네라는 녀석은 정말 귀여울 정도로 고집이 세군. 자네는 화 상이 되려고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자네는 화상이 되지 못할걸 세.] 곡창해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화상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화상이 되고자 결심을 하게 된다면 그 누구도 저를 말리지는 못할 것입 니다.] 여약연은 경고하는 투로 말했다. [우리 적신교의 두 분 호법께서는 오늘의 일을 아시게 되었을 때 틀림없이 소림사로 자네를 찾아가서 따질걸세.] 곡창해는 매우 놀라고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따지다니요? 나는 그녀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요?] 여약연은 내뱉듯 말했다. [죄를 지을 필요는 없지…….] 그녀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다만 그녀들이 자네가 노선배님의 눈에 들었다는 말만 듣기만 하더라도 그녀들은 결코 자네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네. 자네는 그녀들의 법호(法號)를 아는가?] 곡창해는 천천히 말했다. [지난번 노패 형님께서 누님과 만나게 되었을 적에 요혼(搖魂) 과 탕백(蕩魄)이라는 두 이름자를 언급하셨는데 누님께서는 그 녀들이 바로 귀교의 양대호법선자(兩大護法仙子)라고 하셨지 요.] 여약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녀들일세. 생각을 해보게. 그녀들의 이름이 얼마나 무 서운가? 남자라면 그녀들을 대하게 되었을 적에 그 어느 누구라 도 가슴을 설레게 되며 넋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없네. 지금 까지 진원(眞元)이 완전 소모되어 목숨을 잃게 된 사람이 부지 기수일세.] 곡창해로서는 사교의 채보교합지도(採補交合之道)에 대해서 전 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진원지기가 모조리 소모된다는 말입니까?] 여약연은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 [지금 자네는 아짐 남녀가 서로 즐기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 것 이네. 하지만 그녀들의 무서운 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네. 즉 자 네가 그런 점을 모른다 하더라도 똑같이 자제할 수 없다는 것일 세.] 그녀는 애매 모호하게 웃더니 다시 설명하듯 말했다. [나는 적신교에서 자질이 출중한 후기지수(後記之秀)에 속했으 며 어릴 적에는 매우 아름답게 생겼었지. 그러나 크면 클수록 매년 마다 일분(一分)씩 추악해지게 되었고 끝내는 지금의 이 모양이 되었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본교의 절예를 닦고 익히느 라고 온갖 정성과 고생을 다 했지만 겨우 화양지만 정통할 수 있었으며 그 밖의 색상(色相)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의 혼백을 미혹(迷惑)케 하는 재간에 있어서는 한평생 두 분의 호법선자를 따라갈 생각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네…….] 곡창해는 알듯 모를듯 했으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약연은 재차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방각 노선배님에게 제자로 거두어들여 주 십사 하고 청을 드리기로 결심을 하고 그 어르신을 찾아뵈었지 만 그 어르신께서는 어려운 문제를 내놓으시는 것이었네. 그러 니까 우리들에게 각기 한 가지의 자세를 취하고 서서 꼼짝을 하 지 말라는 것이었지. 어떤 외부에서 뻗쳐오는 소란이나 침범에 대해서도 아랑곳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었네. 그리고 우리들 네 사람 가운데 그 누가 가장 오랫동안 지탱할 수 있는지 두고 보았다가 그 사람을 제자로 거두어들이겠다고 했다네.] 곡창해는 그제서야 그들이 그토록 이상야릇한 자세로 서서 꼼 짝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해본 후에 두 손을 마주잡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나는 가 보겠소이다.] 여약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에 자네는 틀림없이 편안하게 숭산에 도달할 수 있 을 것이며 그 누구도 감히 자네를 다시는 더 건드리지 못할 것 이네.] 곡창해는 속으로 기뻐했다. '이번에 어머님의 명을 받고 집을 떠나 사부를 찾아 무예를 배 우러 나선 길에서 이 같은 커다란 파동을 겪기는 했으나 어찌됐 든간에 무사히 극복할 수가 있었으니 천만 다행이다. 이후부터 편안하게 숭산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니 인자한 어머님이 당 부한 바를 저버리지 않게 되었구나.' 그러나 그는잠시 동안 기뻐했을 뿐 곧 얼굴빛이 음울하게 변 했다. 마치 마음속에 커다란 근심을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 다. 그가 망연히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으며 심신(心神) 이 크게 오락가락 하는 것 같았다. 십여 장쯤 걸어나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바람 소리가 '휙' 하 니 일면서 한 사람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니 여약연이었다. 여약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두 가지 일을 알려준다는 것을 깜박 잊었군.] 곡창해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두 가지 일이라니? 무엇인가요?] 여약연은 담담히 대답했다. [첫 번째는 자네가 마땅히 나를 따라 노선배님을 만나 뵈어야 한다는 사실일세. 어찌됐든간에 자네는 그 어르신이 칠십 년 동 안 열 번이나 바다를 건너 중원에 잠입했다가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니까 말일세.] 곡창해는 재빨리 물었다. [그럼 두 번째의 일은 또 무엇인가요?] 여약연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두 번째의 일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닐세. 자네가 화상이 될 생각이 없다기에 내 미리 경고해 두겠는데 소림사의 절예는 대 부분 속가 제자에게 전수하지 않는단 말일세. 따라서 자네는 겨 우 수박 겉핥기의 재간밖에 익히지 못할 것이네.] 곡창해는 아앵마저도 자기에게 그와 같이 말한 사실을 떠올리 고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한번 부딪쳐 보지 않을 수가 없는 심정이외다.] 여약연은 그를 데리고서는 황량한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곡창해는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물었다. [여누님, 조금 전에 소림사의 제일고수인 독각룡왕 응진이십 년 전에 추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떤 일이오? 일개 화상에 지나지 않을 그가 어째서 독각룡왕이라는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려.] 여약연은 자기가 들은 바를 이야기했다. [이 일은 천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지. 십 년 전에는 바로 이런 일이…….] 그녀는 십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대강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 녀는 다시 덧붙여 설명을 했다. [응진은 그의 사형인 광덕 노방장에 의해 두 다리가 분질러졌 을 뿐만 아니라 뼈를 이으면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네. 그리고 는 바로 소림사의 옆 한곳의 벼랑 위에 한 칸의 오두막집을 짓 고 목에는 하나의 강철고리를 걸친 채 밤낮으로 혼자 앉아 세월 을 보내고 있다네. 어떤 사람들도 그 벼랑 위로 올라가 그에게 말을 걸 수 없게 되어 있다네.] 곡창해는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런 무서운 일이 있었던가요? 그분 응진 대사께서는 돌아가 시지 않았나요?] 여약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죽지 않았다고 하더군. 많은 무림의 인사들은 소림사 에 찾아가게 되었을 적에 멀리서 응진이 나무로 만들어진 오막 집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더군.] 그리고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와 같은 삶을 다른 사람들은 켤코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볼 수 있는 곳에서 그와 같은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치욕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 그 런데도 그는 여지껏 살아 있으니 정말 이상한 노릇이지.] 곡창해는 역시 그 말을 받아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이상하군요.] 그러는 그의 미간에는 근심의 빛이 더욱더 짙어졌다. 그가 왜 수심에 잠겨야 하는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약연은 곡창해의 그와 같은 표정을 읽지 못한듯 말을 이어 설명을 했다. [그는 다만 속가의 제자이며 응진이라는 두 자는 바로 그의 성 명이지. 그의 법호가 아니라네. 그의 이마에 혹이 달려 있기 때 문에 강호에서는 그를 독각룡왕이라고 칭했지.] 곡창해는 얼굴에 근심의 빛은 여전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고 물었다. [누님의 소림의 절예를 속가의 제자에게 전수하지 않는다고 하 지 않았소? 그 응진 선배님께서는 또 어떻게 소림의 제일고수가 되었지요?] 여약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나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일이라네.] 곡창해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허령주라고 하는 여자는 정말 예쁘게 생겼나요? 그녀는 지 금 어디에 살고 있지요?] 여약연은 곡창해를 한번 흘겨주더니 말했다. [너의 그 모습은 퍽이나 얌전한 사내애 같은데 역시 미녀에 관 한 말을 듣고 가만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군.] 곡창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무림의 제일미인라고 일컬어지는 허령주는 나의 미래 사부 가 되실 분과 관계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똑똑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을 했으나 여약연이 그저 자기에게 농담삼 아 하는 이야기고 결코 정말로 그가 다른 여인에 대해서 언급하 는것을 불쾌히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 고는 장계취계(將計就計)의 방편을 써서 일부러 꾸러기 같은 표 정과 태도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옛 성현들께서는 먹는 것과 여색을 가까이 하는 것이 습성이 라고 하지 않았나요? 불초는 나이가 어리지만 역시 인성(人性) 을 가진 사람이니 식욕과 색욕 이 두 가지 일에 대해서는 켤고 남에게 뒤떨어질 수가 없는 노릇이지요.] 여약연은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아라.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 래?] 기실 그녀 자신이 먹는 것과 여색을 탐하는 것은 습성이라는 구절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이 불쑥 나오는 대로 핀잔을 준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만약에 천하제일미인을 만나고 싶다면 곧장 바로 가면 될 것이네. 개봉부(開封府)를 지나게 되었을 적에 그녀를 찾아 보면 될 것일세.] 곡창해는 넌지시 말했다. [누님께서 그와 같이 가르쳐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러나 개봉 부라는 고장은 넓어서 아무래도 좀처럼 그녀를 찾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여약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예전에 우 연히 그녀에 관해서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교외의 어느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군.] 곡창해는 슬쩍 화제를 돌려서 물었다. [그 강호의 호걸들은 하나의 금낭을 위해서 죽어라 하고 저의 뒤를 쫓아오게 되고 곽 대숙은 관가보의 사람들에게 잡히기까지 했는데 그 금낭은 도대체 무엇인지 누님께서는 알고 있으신지 요?] 여약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강호의 쓸데없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금낭에 관해서 나는 아직 들은 바가 없다.] 그러다가 그녀는 곡창해의 걸음이 너무 느리다고 느꼈는지 손 을 뻗쳐 그의 겨드랑이를 부축해서는 진기를 끌어올리고 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곡창해는 그저 두 귓가로 바람 소리가 일게 되고 눈앞의 나무 들이 끊임없이 뒤로 밀려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뿐이었다. 막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나게 되었을 적에 여약연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앞을 손가락질 했다. [바로 저 석옥(石屋) 안에 계시니 자네는 혼자 그 어르신을 찾 아뵙도록 하게나.] 십여 장쯤 되는 곳에 한 채의 오래 되어 보이는 소박한 석옥이 산비탈의 한 조각 평지 위에 자리잡고 있었고 석옥의 사방에는 푸른 등나무 줄기가 가득 자라 있어 더욱더 고색이 찬연하고 우 아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곡창해는 여약연에게 두 손을 흔들어 보이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소맷자락을 들 어서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3504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7.3/4 마교와 소림사 09/25 23:04 311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7.3/4 마교와 소림사 잠시 후 그는 석옥 문 앞에 이르게 되었다. 나무문은 활짝 열 려 있었는데 석옥 안의 광선이 매우 충분해서 안을 환히 들여다 볼 수가 있었는데 몇 개의 꼭 필요한 가구들을 모두 다 훌륭한 상품의 홍목(紅木)으로 만들어져 있는 등 그 기세가 무척 고아 (古雅)해 보였다. 아관(峨冠)에 넓은 띠를 두른 노인이 창가에서 서서 창밖을 내 다보고 있었다. 밖에는 한 조각의 화원이 놓여 있었는데 가지각 색의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꽃송이들이 한창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노인은 키가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것 같았고 커다란 장포(長袍)는 더욱 키가 큰 사람으로 느껴지게 만들었 다. 곡창해는 그 노인에 대해서 충심으로 탄복해마지 않는 마음이 라 그 즉시 공손하게 허리를 구부려 절을 한 번 했다. 그러나 감히 소리를 내어서 그가 조용히 사색하고 있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잠시 후에 그 노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이미 곡창해가 문밖에 서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으 로 몸을 돌려 그를 발견하게 되었을 적에 전혀 얼굴에 이상한 빛을 띄우지 않았으며 가볍게 걸음을 옮겨 하나의 태사의(太師 椅) 위에 앉았다. 곡창해는 다시 절을 했으나 미처 입을 열기 전에 키가 큰 노인 은 입을 열었다. [얘야, 너는 이미 절을 하지 않았느냐? 들어와서 우리 이야기 를 나눠보도록 하자.] 그는 놀랍게도 곡창해가 일찍이 밖에서 절을 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곡창해로서는 매우 놀라워 하지 않을 수 없는 심 정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해볼 적에 그가 천마라고 일컬어지는 만큼 자연히 신통력이 대단할 터이니 자기가 등뒤에서 절을 올리게 된것을 알아차린 것도 별로 희한한 일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 겼다. 석옥 안으로 들어서자 지극히 시원해서 정신이 번쩍 들 지경이 었다. 키가 큰 노인 방각은 온화한 웃음을 띄우고 입을 열었다. [노부도 어릴 적에는 너처럼 대담하면서도 고집이 세었고, 총 명하면서 영특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비록 노 부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지극히 고뇌를 느끼도록 만들기는 했으 나 마치 옛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 을 갖게 하는구나.] 곡창해는 흠모하는 마음이 극도에 달해서 생각했다. '이분이야말로 일대종사(一代宗師)이시며 무림 고수의 풍도를 보여주는구나. 마음속의 불쾌한 점이나 실망한 점을 조금도 숨 기지 않으니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화제를 돌렸다. [대종사께서는 오랜만에 중원으로 한 번씩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번화한 고을로 들어가 놀지 않고 이같이 외지고 조용하며 사람이 없는 곳에서 머물고 계신지요?] 방각은 천천히 말했다. [노부는 이미 백 세가 넘게 살았는데 천하 어딘들 가보지 않은 곳이 있겠느냐? 하지만 노부가 이번에 중원으로 들어오게 되었 을 적에 본래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머물 작정이었다만 이제는 다시 생각을 바꾸어 곧 지옥도(地獄島)로 돌아갈 생각이란다.] 곡창해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지옥도라니요? 대종사께서 거주하시는 곳은 마땅히 금궁옥궐 (金宮玉闕)에 경루옥우(瓊樓玉宇)이어야 옳지 않겠습니까?] 방각은 웃었다. [너는 노부가 사교의 사람이니 틀림없이 극도로 호화스럽고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로구나. 사 교의 사람들은 물론 하나같이 그러하기는 하지만 무공을 일류의 경지까지 연성하게 된다면 그렇지 않다. 노부는 신심을 갈고 닦 으려고 지옥도를 택한 것이란다.] 그는 곡창해를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너처럼 천성적으로 굳건한 의지력을 갖고 태어난 애는 지옥도 로 가서 억지로 무공을 연마할 필요가 없단다.] 그 말에는 퍽이나 아쉬움이 서려있었다. 곡창해는 넌지시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많은 제자들을 거두어들이지 않았습니까?] 방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지만 그 지옥도는 너무나 고달픈 곳이다. 죽지 않 고 버티어낸다던가 도망치지 않는 사람은 실제에 있어서 정말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더구나. 만약에 크게 대충대효(大忠大孝) 한 인사가 아니라면 대간대악(大奸大惡)한 사람만이 그곳에서 간신히 머물 수 있을 것이다.] 곡창해는 황연히 깨달은 듯 말했다. [대종사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다해 그들의 의지와 의력(毅 力)을 시험해보신 것도 무리는 아니었군요.] 방각은 한숨 쉬듯 말했다. [노부는 섬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언제 다시 중원으로 오게 될 런지 알 수가 없단다.] 곡창해는 깜짝 놀라서는 고개를 쳐들었다. [어르신께서는 무공이 정순하시고 신체가 강건하시어 보기에 이백 세쯤 자시도록 사는 것은 문제될 것 같지 않습니다.] 방각은 그 말을 받았다. [이백 세까지 산다는 것은 감히 말할 수 없지만 백오륙십 세까 지 산다는 것은 켤코 문제가 없지. 하지만…….] 갑자기 그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곡창해는 이미 그의 가슴속에 은연중 어떤 비밀이 숨겨 져 있으며 그 비밀은 충분히 그의 목숨을 잃게 할 수 있는 위험 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것 참 이상한 노릇이구나. 설마하니 이 세상에는 놀랍게도 이 분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 사람이 그 사람의 원수이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자꾸 불안한 감을 느끼 는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느낀 그는 갑자기 불쑥 물었다. [대종사, 이 세상에서 대종사로 하여금 꺼리는 사람이 있으신 지요?] 방각은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곧 대답했다. [그 질문은 매의 재미가 있구나. 노부는 솔직히 너에게 이야기 해 주지.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한 사람을 매우 꺼리고 있단 다.] 곡창해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사람의 무공은 어르신보다도 고강합니까?] 방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부의 백 년에 걸친 수련에 비하면 훨씬 떨어지지.] 곡창해는 더욱더 의아한 감을 느끼고 물었다. [그렇다면 어르신께서는 어째서 그를 꺼려하십니까?] 노인은 허리를 펴고 가슴을 폈다. 그러자 척추골에서 잇따라 '우두둑, 우두둑' 하는 가벼운 음향이 일었다. 그런가 하면 그 의 두 눈썹이 높다랗게 치켜올려지게 되고 은연중 살기가 감돌 았다. 곡창해는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분은 틀림없이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된 모양이로구나. 그렇 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흉악한 심성을 드러낸 것이로 구나.' 방각은 잠시 동안 깊이 생각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노부가 길러낸 제자란다.] 곡창해는 놀람과 의아함에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 생각 밖이군요.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지요?] 방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는 나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많은 이상한 도리에 대해 서는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네.] 그의 미간에 떠올랐던 살기는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으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장래에 네가 그와 만날 기회가 있다면 방법을 강구해서 속히 도망을 쳐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라. 그렇지 않을 때 그는 너를 죽이고 말 것이다.] 곡창해는 담담히 말했다. [제가 그를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요.] 방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안 된다. 그는 마음이 지극히 좁은 사람이라 오로지 인재를 시기하는 생각만 있을 뿐이고 털끝만치도 인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단다. 일단 너와 같은 인품이나 근골이 뛰어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면 반드시 너의 생명을 빼앗고 말 것이 다.]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으나 기실 조금도 방각의 그와 같 은 말을 마음속에 새겨두지 않았다. 이때 방각은 다시 입을 열고 말했다. [기실 노부 역시 수십 년 전에는 그와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가 수십 년을 더 살게 된 이후에는 그의 기질이 바뀔지도 모 를 일이지.]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이제 할 말이 없는 듯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랫동안 침묵만이 흐르게 되었다. 이윽고 곡창해는 무거운 정적을 깨뜨리듯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 그만 가보아야 하겠습니다.] 방각은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았다. 곡창해는 그를 향해 허리를 구부리고 절을 했다. 그래도 방각 은 꼼짝하지 않았으며 망연히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곡창해는 그래도 그를 조금도 탓하지 않고 단정히 몸을 돌려 그 석옥에서 나오려고 했다. 방각은 갑자기 입을 열고 말했다. [노부는 너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다.] 곡창해는 깜짝 놀라서 생각했다. '나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니? 나 같은 것이 무엇인데 감히 대 종사이시며 천마라고 일컬어지는 저분이 나에게 부탁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와 같은 생각에 그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방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응낙을 해도 좋고 응낙을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그의 말소리는 매우 담담했다. 그러나 곡창해는 그가 일부러 담담한 태도를 짓고 있으나 기실 매우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느 낄 수가 있었다. 방각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일은 무공에 관한 일이지.] 곡창해는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대종사께서 저와 같은 어린 녀석을 어디에 써 먹으려고 하는지 상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무공 방면이라면 더욱더 그렇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방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아직도 누차에 걸쳐 살신지화의 커다란 액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내공을 기억하고 있겠지? 그것은 바로 우리 마교에 있어서 지고무상의 몸을 보호하는 대법(大法)일세. 마교의 모든 것은 사람된 도리와 사상, 그리고 행동 및 무공을 포함해서 어 느 하나 천지의 정리(正理)와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다. 천지간 의 만물은 모두 다 생장(生長)과 완정(完整)함을 추구하지만 마 교가 추구하는 것은 사망과 파괴란다.] 곡창해는 매우 엄숙하게 그와 같은 고심하면서도 현묘하며 또 한 속세에서 들어볼 수 없는 이론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방각은 다시 설명하듯 입을 열었다. [무공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정파의 무림 인물들이 무적의 경 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무도를 정수(精修)하여 강유병제지기(剛 柔병劑之氣)를 양성해야 한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죽이게 된다 면 반드시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어야 만 최고의 무공을 펼쳐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심령적인 영향을 받은 때문이지. 왜냐하면 그가 만약에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이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지 박살낼 수 있는 기세를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 다. 그러나 마교는 다르다. 무공을 연마하기 시작해서부터 잔인 한 살상을 능사로 삼게 되고 선악과 시비를 가리지 않고 단지 사람만 죽일 생각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무엇이든지 박살낼 수 있는 기세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지.] 곡창해는 숙연해졌다. [저는 대종사의 높으신 이론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 다.] 방각은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잘 알 수 있다면 됐다. 이와 같은 도리는 심오하기 이를 데 없으며 지금 천하를 둘러볼 때에 오직 너와 나 두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그는 재차 입을 열고 말했 다. [이제 우리들은 조금 전의 화제로 되돌아가자. 그것은 바로 네 가 배워서 익힌 그 내공심법은 완전히 천지의 도리와 상반된 것 으로 진기가 혈맥을 따라 흐르는 것도 모두 다 거꾸로 행해진 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을 하게 되었을 때에 몸을 거꾸로 물구 나무 세우듯 되지만 무공이 증진된 이후에는 몸을 물구나무 서 듯 거꾸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곡창해는 마음속으로 크게 망설여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마교의 절예인 호신내공 (護身內功)을 익히게 되었는데 지금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만 좋 을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방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배운 그 내공을 천마심공(天魔心功)이라고 하는데 고심 하고 무서운 갖가지 권공(拳功)이나 장력(掌力)일수록 두려워하 지 않는다. 이는 그 가운데에 일종의 서로 상극하고 제압하는 묘용(妙用)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너의 공행(功行)에 따 라 정해지는 것이다. 노부가 너에게 부탁을 하고자 하는 것은 이 천마신공과 관계가 있다. 응낙을 하고 아니 하고는 너에게 달렸지만 만약에 응낙을 하게 된다면 결코 그 언약을 저버려서 는 아니 될 것이다.] #3505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7.4/4 마교와 소림사 09/26 00:12 296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7.4/4 마교와 소림사 곡창해는 속으로 만약 자기가 처리할 수 없는 일이라면 딱 분 질러서 거절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따라서 그는 그와 같은 결심을 한 뒤라 즉시 천천히 입을 열었 다. [저는 키가 작은 사내애에 지나지 않지만 한평생 가장 약속을 중시해왔으니 일단 약속을 했다면 결코 저버리지는 않습니다.] 방각은 천천히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매우 훌륭하다. 노부 역시 너와 같은 사람을 깊이 믿어 의심 치 않는다. 이제 내가 어떻게 그 말을 설명해야 할 것인지 생각 을 해보겠다.] 그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곡창해는 약간 불안한 감을 느꼈다. 그가 부탁하고자 하는 일 이 틀림없이 매우 중대하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방각은 천천히 말했다. [네가 이번에 숭산으로 가게 되고 만약에 소림사의 화상들에 의해 제자로 거두어들여지게 되어 소림의 무상심법(無上心法)을 배운다면, 장래 우리 다시 상면을 할 때 소림사의 가장 고심한 무상의 내공구결을 노부에게 들려다오. 나는 그 무상심법이 노 부가 너에게 전수해준 천마심공과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인지를 알아볼 참이다.] 곡창해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자 이번 일이 매우 중대 해서 결코 어린애 장난하듯 약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낄 수 가 있었다. 그는 비록 무공을 연마한 적은 없지만 역시 명가의 후손답게 무림각파에서 제자를 거두어들이게 되었을 적에 본문의 심법을 함부로 누설시키면 안 된다는 금지 조항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천마 방각의 신분으로서도 소림사의 정통 내공심법을 알고자 하는 것을 볼 때 이 가운데의 관계는 틀림없이 이루 말할 수 없 이 중대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가 주저하며 난처하게 생각하고 있을 적에 방각은 재차 입을 열었다. [노부는 천하 각파의 무공 수법을 널리 알고 있으며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추측을 하고 연구를 해보았는데 오직 드물게 몇 파 의 무공수법만이 그 판의 내공을 최상승의 경지까지 수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림사는 바로 그중에 하나란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노부가 추측하고 연구하여 얻은 바, 이 몇 파 가운데서도 특 별히 소림파의 최고 심오한 내공심법이 노부의 천마심공을 거꾸 로 한 노선과 가장 근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 가 운데에 어쩌면 약간 차이가 나는 점이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조그마한 잔가지처럼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으니 마음에 새겨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곡창해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나자 어느 정도 상대방의 뜻을 헤아리게 되어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소림사 내공 무상심법의 구결을 들어보고자 하 는 의도를 혹시 다만 어르신께서 추측하고 연구해낸 심득(心得) 을 증명해 보자는 것이 아니신지요.] 방각은 웃었다. [정말 총명한 애로군. 노부는 정말 네가 노부의 마음속에 숨겨 둔 비밀을 짐작해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그 솥뚜껑같이 커다란 손을 내밀어 곡창해의 머리를 가볍 게 어루만졌다. 흐뭇하게 생각하고 귀여워하며 또한 아끼는 정 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곡창해는 정중히 말했다. [어르신의 신분과 성취로서는 물론 남의 문파의 내공을 바꾸어 연마할 만한 가치가 없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르신께서 틀림 없이 마음속에도 아직까지 어떤 의문이 있으리라고 짐작을 한 것이지요. 그와 같은 무학의 난제를 다른 사람들은 별로 대수롭 게 여기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지만 어르신께서는 크게 그런 사 람과 다르시죠. 만약에 의문을 가지고 있던 점에 대해서 어떤 확실한 대답을 얻지 못하게 된다면 절대로 마음이 편하지 않겠 지요.] 방각은 더욱더 크게 기뻐했다. [정말 희한한 노릇이군, 희한한 노릇이야. 노부가 백 살 남짓 살았지만 나를 아는 사람이 바로 자네 소형제일 줄은 정말 생각 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호칭을 바꾸어 곡창해를 소형제라 불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마음속으로 곡창해를 얼마나 높이 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곡창해는 늠름히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 저는 응낙하겠습니다.] 방각은 찬탄하듯 말했다. [소형제, 자네는 비단 근골이 아주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성격에 있어서도 많은 여러 가지 비범한 특질이 있군. 이후의 성취는 아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네. 노부는 먼저 자네에게 사의를 표 하기로 하지.] 그는 엄숙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마주잡고 절을 했다. 그 리고는 그는 깊이 생각하는 얼굴 모습이 되어 문앞으로 가더니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형제가 감히 그와 같은 중대한 승낙을 해주고 그 승낙에 대 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에 대해 이 늙은 형님은 마음속으로 여간 미안하지 않네.] 그의 말투는 갈수록 더욱 친절하고 다정해졌다. 곡창해는 담담히 말했다. [저는 어르신께서 암암리에 구원을 해주시고 흔쾌히 심공비결 을 전수해 주신 데 대해서 그야말로 보답할 길이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방각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나를 큰형님이라고 불러주었으면 가장 좋겠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태도는 매우 진솔하고 성실에 차 있었다. 곡창해는 선뜻 대답했다. [그러지요. 큰형님.] 방각은 고개를 돌리고 빙긋이 웃었다. [매우 좋아, 소형제. 이 늙은 형님은 지금 비록 신분이 무척 고귀하고 당금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위치에 있지만 천하를 둘 러 볼때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고 걸출한 인사라고 하더라도 어 느 누구 하나 자네와 견줄 수가 없네. 시일이 좀 더 흐르게 된 다면 자네의 성취는 틀림없이 대단할 것이며 켤코 이 늙은 큰형 님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니 그 점에 있어서 나는 무척 마음 이 놓이네.] 이와 같은 말을 듣고 곡창해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오 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웅지가 크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따라서 그는 머리를 번쩍 쳐들고 가슴을 폈다. 그 의기는 무척 호방해 보였다. 방각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세상은 넓고 넓어서 좀처럼 소식을 전 할 수가 없는 점이 있지. 따라서 우리들은 이번에 이렇게 헤어 지게 된다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게 된다네. 그렇기 때 문에 자네는 이 큰형님에게 약속한 일이 반드시 내 귀에 들어오 리라고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네.] 곡창해는 의연히 말했다. [소제는 기꺼이 지옥도로 가서 큰형님을 배알하겠으니 큰형님 께서는 아무쪼록 마음을 놓으십시오.] 방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첫째로 바닷길이란 모진 풍파를 무릅써야 할 위험이 있고 두 번째로 그 지옥도에는 위기가 사방에 도사리고 있어 좀처럼 걸 음을 옮겨놓을 수가 없다네.] 곡창해는 호기롭게 빙긋이 웃음을 띠었다. [소형제가 어찌 힘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려운 일에 몸을 도 사리는 사람일 수가 있겠습니까? 형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소 제는 틀림없이 자기가 한 말을 반드시 실천하고 말겠습니다.] 방각은 두 눈에 기이한 광채를 번쩍였으며 마음속으로 매우 감 동해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야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굳건하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소형제로군. 내가 이번 중 원에 들어왔던 길에 있어서는 어찌됐든간에 얻은 바가 크군.] 그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마치 무슨 일을 사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때로 두 눈썹은 잔뜩 모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기도 했다. 곡창해는 조금도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말없이 우 뚝 버티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략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나게 되었다. 그제서야 방각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뜨더니 입을 열었다. [내 조금 전 현기(玄機)를 헤아려 본 결과 이미 한 가지의 방 법을 강구해 내었네. 이제 내가 자네에게 하는 말을 반드시 명 심하도록 하게나.] 곡창해는 크게 흥분을 느꼈다. [큰형님께서 말씀을 하십시오.] 방각은 말했다. [어느 때든 상관이 없네. 자네가 일단 바다를 건너 지옥도로 찾아오겠다고 결정을 내리게 되었을 적에 반드시 먼저 황산(黃 山) 연화봉(蓮花峯)으로 한 번 가 주게나. 황산은 뭇 봉우리들 이 하늘을 뚫을듯이 즐비하게 솟아 있지만 이름이 난 봉우리로 는 서른여섯을 꼽을 수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연화와 천도(天都) 두 봉우리가 가장 높다네. 나는 옛날 연화봉의 허리께에서 하나 의 동굴을 발견했다네. 매우 그윽한 산허리 깊숙한 곳에 자리잡 고 있는 동굴은 지극히 넓어 수백 수천 명을 수용할 수가 있다 네. 동굴 입구는 절벽에 나 있는데 입구 바깥쪽에는 열두 그루 의 잣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 공교롭게도 입구를 막고 있 기 때문에 반드시 몸을 옆으로 해서는 절벽에다가 몸을 붙이듯 하고 몸을 움직여 들어가야만 동굴의 입구를 발견할 수 있다네. 이 동굴 안은 겨울철에는 따뜻하고 여름철에는 시원해서 매우 쾌적하다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곳을 버리고 사용하지 않기 로 했다네…….] 곡창해는 거기까지 듣게 되었을 때에 그만 아쉬운 빛을 얼굴에 드러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토록 수련하기에 훌륭한 곳을 버리고 사용하지 않고 되려 저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 한복판의 황량한 섬으로 가다니 이 늙 으신 큰형님께서도 정말 성질이 괴팍하구나.' 방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동굴 안에는 대청이 있고 방이 있으며 통로가 있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자네는 다만 끝까지 들어가게. 그러면 그곳에는 하나의 둥글게 생긴 월동문(月洞門)이 있을 것이네. 월동문을 나서면 빈터에 들어서게 될 것인데 맞은편의 벽에 일 곱 개의 문이 있을 것이네. 자네는 왼쪽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 는 문 안으로 들어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그곳이 유일한 생문(生門)일세. 그리하여 하나의 통로를 따라 걷게 되 었을 적에 한곳의 돌담장으로 간격을 두게 된 장소에 이르게 되 어 있는데 이 돌담장안의 장소는 지극히 넓어서 너 역시도 도대 체 얼마의 넓이를 가지고 있는지 헤아려보지 못했다네.] 곡창해는 찬탄을 발했다. [그야말로 황당하게 들리는 이야기로군요.] 방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네. 다른 사람이 자네에게 그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면 자 네는 좀처럼 믿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네.] 곡창해는 물었다. [그렇다면 큰 형님께서는 바로 그 동굴 안에서 소제를 기다리 겠다는 것입니까?] 방각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설명을 했다. [그 넓은 빈터에 이르게 되었을 적에 자네는 곧 미진(迷陣)으 로 들어서게 되는 것인데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좌이우삼(左 二右三)의 주법(走法)일세. 그것은 바로 매번 두 곳의 통로를 지나게 되었을 때에는 왼쪽으로 한 번 꺾어야 하고 다시 세 개 의 통로를 꺾게 되었을 적에는 오른쪽으로 돌아야 한다는 것일 세.] 그는 매의 거칠고 커다란 손가락을 들어 손바닥에 그려서 곡창 해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곡창해는 무척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방각은 그에게 어떻게 걸어들어가야 하는지의 방법을 꼭 외우 도록 하게 한 후 다시 이어 말했다. [그리하여 끝까지 가게 되었을 적에 한 칸의 넓다랗고 커다란 석실에 도달하게 된다네. 석실 안에는 한 구의 특별히 두텁고 무거우며 길고 큰 석관(石棺)이 한 얕은 구덩이 위에 놓여 있을 것이네. 그 앝은 구덩이는 바로 석관 정도의 크기이며 구덩이 위에 두개의 장석(長石)이 가로질러져 그 석관을 지탱하고 있는 데 만약에 그 장석을 뽑아버리게 된다면 석관은 꼭 알맞게 그 앝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네.] 곡창해는 온 정신을 모아 그가 서술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들 으면 들을수록 매우 이상야릇하게 느껴지는 한편 매우 흥미가 있었다. 그는 한편으로 그 석관의 쓸모를 점쳐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깜짝 놀라서는 입을 열었다. [큰형님께서는 소제에게 그 석관을 열어보라고 하시는 것은 아 니겠지요?] 방각은 말했다. [자네는 관뚜껑을 열어보아야 하네. 만약에 이 늙은 큰형님이 그 안에 누워 있다면 자네는 고생을 하면서까지 바다를 건너갈 필요가 없네. 만약에 내가 그 관 속에 누워있지 않다면 자네는 관 안에서 한 장의 지도를 찾아내게 될 것이고 그 지도를 따라 서 지옥도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이네.] 곡창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보니 그랬었군요.] 방각은 다시 입을 열고 설명하듯 말했다. [그 한 구의 석관은 보통의 관목과 크게 다르다네. 관 뚜껑은 결코 덮는 것이 아니라 홈을 파서 박아 넣도록 되어 있네. 그렇 기 때문에 반드시 두 손을 관 뚜껑에 갖다대고 수평으로 밀어야 열 수가 있다네…….] #3530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8.1/4 소림사의 제자 09/28 22:42 271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8.1/4 소림사의 제자가 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곡창해를 바라보았다. [소형제, 잘 기억했는가?] 곡창해는 정색하고 대답했다. [소제는 똑똑히 머리 속에 새겨 두었습니다.] 방각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아주 좋네. 자네가 소림사로 들어가게 된 후에 다른 것은 약 간 소홀히 할 수 있지만 반드시 소림사의 무적금강력(無敵金鋼 力)은 연성해야 되네. 그래야 그관뚜껑을 밀어젖힐 수 있네. 손을 쓰기 전에 반드시 석관의 밑에 있는 돌을 옮겨서 석관이 앝은 구덩이 안에 꼭 박혀들도록 해야 기운을 쓸 수 있을 것이 네.] 곡창해는 조금도 그 가운데의 오묘한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 었으나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 명심하겠습니다.] 방각은 말했다. [우리는 이만 헤어져야겠네. 아무쪼록 훗날 다시 한번 더 만날 수 있기를 바라네.] 곡창해는 속으로 자기가 나이 어린 동생의 신분이니 마땅히 큰 절을 올려 작별을 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땅바닥에 꿇어엎드려서는 공손하게 큰절을 행했다. 몸을 일으키게 되었을 적에 나이 백 세가 넘은 마교의 제일고 수는 두 눈을 멍하니 뜨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온 얼 굴 가득히 아쉬운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곡창해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 석옥을 나섰다. 마음속으로 이 번에 방각과 대면을 한 것이 마치 한 가지 매우 기이한 일을 겪 은 것이며 일생을 변화시키는 큰 일이라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느덧 그는 석옥에서 나와 십여리 길을 갔으나 여전히 여약연 을 만나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한 고을로 들어가 배를 채 우고 다시 그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고 곧장 소림사를 향 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차분하게 며칠을 걸었는데 길을 오는 동안 아니나다를까 다시는 그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곡창해는 어느덧 개봉부에 도착했다. 그는 좀 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허령주를 찾아가 보기로 작정했다. 이날 밤 그는 침대 위에서 이리뒤척 저리뒤척 제대로 잠을 이 루지 못했다. 마치 불면증에 걸린 것 같았다. 그의 나이 또래의 사람이 오랜 여행을 하게 되었다면 파김치처 럼 눕자마자 코를 골아야 옳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뇌리에는 시도 때도 없이 여약연의 말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소림의 고수인 독각룡왕 응진이 저질렀다는 그 추악한 일에 관해서 어째서 어머님은 아무 이야기도 들려주 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는 애써서 그 일을 이리저리 헤아려보느라고 그만 제대로 잠 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 이른 아침 그는 먼저 거리로 나서서 오고 가는 행인들 에게 수소문을 했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묻는 말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 으며 오히려 그에게 허령주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되묻는 것이 아닌가! 곡창해는 갑자기 좋은 영감이 떠올라 어느 한 표국으로 들어가 주인장을 만나 뵙겠다고 청을 드렸다. 한 사환은 그에게 자기네 주인을 무슨 일로 찾는가 하고 먼저 물었다. 곡창해는 가슴을 펴고 머리를 쳐든 채 냉랭하게 한마디를 했 다. [나는 관가보에서 온 사람이오.] 그 사환은 그만 깜짝 놀라더니 재빨리 그를 뒤에 있는 객청으 로 모셔서 자리에 앉도록 하고 자기 자신은 안으로 들어가 통보 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한 명의 체구가 우람한 오십쯤 된 노인이 대청 안으 로 걸어들어왔다. 곡창해는 즉시 몸을 일으켜 그를 맞으며 강호의 예의에 따라 포권을 하고는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표국주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는지요?] 그 붉은 얼굴의 노인은 약간 어리둥절해졌으나 역시 두 손을 마주잡아 보였다. [감당할 수 없구려. 이 형제는 제의(齊義)라고 하오. 아직까지 귀하에게…….] 그는 사내애가 관가보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관가보에서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해서 함부로 거드름을 피우지 못하 고 그에게 귀하라는 칭호를 쓴 것이었다. 곡창해는 재빨리 궁리했다. '이 며칠 동안 나는 많은 무림의 고수들에게 쫓겼는데 그와 같 은 사실을 표국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을 것 이다. 만약에 내 성명을 들먹이게 된다면 틀림없이 일을 그릇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는 소탈하고 거짓을 모르는 사람이라 성과 이름을 바 꿀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재빨리 궁리를 하면서는 상대방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 다. [소제는 기실 관가보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유신 예충 형과 잘 아는 처지이지요. 그래서 대담하게 그의 기호(旗號)를 빌리고자 한 것이니 이 점에 대해서 제노사(薺老師)께서는 용서 해주시지요.] 이와 같은 말은 그야말로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라 제의 같은 인물도 일시에 곡창해가 성명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깜박 잊을 정도였다. [저로서는 너무나 오랫동안 폐를 끼칠 수가 없군요. 그러니까 아무쪼록 제노사께서는 어떻게 하면 허령주 소저의 집을 찾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제의는 다시 한번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눈앞의 이 사내애가 여러 점에서 여느 사내애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 다. 자기가 강호에서 삼십 년간 굴러먹은 사람이었지만 아직까 지 이 애와 같이 솔직하고 영리하며 말주변이 뛰어난 인물을 만 나본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약간 마음이 흐트러지게 되었고 어느덧 수동적인 위치에 떨어져서는 불쑥 입을 열었다. [허소저는 북문에서 십 리쯤 되는 한 채의 백석루(白石樓)에서 살고 있다오. 귀하가 큰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십리장정(十里長 亭)에 이르면 오른쪽에 숲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을 것이니 그 길로 꺾어져서 들어가고 아란석(鵝卵石)을 깔아놓은 길을 따라 나가게 된다면 얼마 후에 산비탈에 서 있는 백석루를 볼 수 있 을 것이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그곳을 냉향루(冷香樓)라 고 하는데 사방에는 매화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어서 지극히 분 간하기 쉽소이다. 하지만…….] 그는 잠시 생각해보는 눈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귀하가 만약에 명을 받들거나 부름을받고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허소저를 만나보기가 힘들 것이외다.] 곡창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여인이니까 자연 함부로 남을 만나지 않으리라는 것쯤 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응수했 다. [소제는 알고 있습니다.] 제의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형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려. 허소저는 천하 에 이름이 알려져 있어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어디서든지 알아 볼 수 있는 일이지요.] 곡창해는 여유 있는 태도로 예를 하고 사의를 표했다. [제노사께서 가르쳐 주신 점 불초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며 이 호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은 매우 진지하고 간곡할 뿐만 아니라 깍듯이 예의를 다 하고 있었다. 제의는 갑자기 이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사내애가 퍽이나 흡 족하게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형제가 솔직히 한마디를 하겠는데 만약에 귀하의 나이가 조금 많은데 허소저에 관한 일을 물었더라면 이 형제는 결코 말 하지 않았을 것이외다.] 곡창해는 정중히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그 누구도 제노사를 탓하지는 못할 것입니 다.] 제의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정말 묘하구려. 허소저가 만약에 귀하를 만나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을 적지 않게 달랠 수 있 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려.] 곡창해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매우 우울하고 답답해 합니까?] 제의는 설명하듯 말했다. [그녀는 십 년 전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에 이곳에서 살았소. 이 형제는 비록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무림 제일미인이라는 명칭에 압도된 나머지 역시 무리들을 따라 그곳으로 가서 구경 을 하기도 했소. 귀하도 틀림없이 그녀가 매일 아침 저녁 두 번 에 걸쳐 천매곡(千梅谷)으로 산책을 나가는 습관을 알고 있을 것이외다. 더군다나 매호가 활짝 피게 되었을 때는 비바람이 몰 아쳐도 그 습관은 변하지 않았으며 십 년 동안 한결 같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외다.] 그는 여유를 두었다가 사내애가 매우 호기심과 갈망 어린 눈동 자로 그를 쳐다보며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눈치가 완연한 것 을 보고 그만 약간 흥분되어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정말 무림 제일의 미인이라는 명칭을 들을 만하다오. 얼굴 모습은 물론 몸매까지 모두 다 그야말로 꼬집을 점이 하나 도 없소이다. 유일하게 사람들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녀 가 한번도 웃는 얼굴을 드러내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외다. 따 라서 그 누구도 그녀가 방긋 웃게 되었을 적에는 어떤 모습인지 를 상상도 못하고 있는 편이라오.] 곡창해는 탄성을 발했다. [아, 십 년 동안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제의는 말했다. [이 형제가 알고 있는 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소저의 얼굴 모습을 본 후에 그만 넋을 잃게 되고 혼백이 나간 것처럼 남모 르는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는지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오. 이와 같이 넋이 빠진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친히 그녀를 위해서 아란석을 깐 길을 만들어주기도 했소. 그리하여 이 형제 가 다시 그곳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적에 그곳의 전경은 모조리 변해서 아늑하면서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화해 있더 구려. 그러나 가장 불쌍한 것은 그 사람들의 그와 같은 고심을 그녀는 조금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외다.] 곡창해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상대방을 바라보 았는데 두 눈에는 좀처럼 믿을 수 없다는 빛이 서려 있었다. 제의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 다. [이건 절대 거짓말이 아니오. 이 천하에서 아마도 언감생심 그 녀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고 공표할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외다. 왜냐하면 어떠한 남자라도 그녀의 절세적인 화용 월 태 앞에서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절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따라서 그녀는 켤코 그 많은 사람들이 넋을 빼앗기고 몰래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으며 두 손으로 그녀를 위해 넓고도 평탄한 길을 만들어주고 양쪽으로 매화나무를 심어서 길을 꽃밭 으로 만드는가하면 개울물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곳곳에 하 나같이 평탄하면서도 아름다운 잔디밭과 시원한 정자가 만들어 져서 그녀로 하여금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오.] 곡창해는 이때 실로 더 참을 수가 없어 벌떡 몸을 일으켜 두 손을 맞잡았다. [불초는 이만 실례를하겠습니다.] 제의는 처음 일순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았으나 재빨리 그가 서두르는 뜻을 알아차리고는 하늘빛을 한번 살펴보더니 말했다. [귀하가 만약에 좀더 빨리 달려간다면 그녀의 얼굴을 한번쯤은 볼 수 있을 것이외다.] 곡창해는 총총히 작별을 고하고는 그 표국을 나와서 온 힘을 다해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이 며칠 동안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체력을 갈고 닦은 데 다가 천마심법의 도움을 얻어서 근골이나 발힘이 특별히 강건해 져 있었다. 이때 그가 발검음에 잔뜩 힘을 주고 속도를 다해서 달리게 되 자 그 빠름은 실로 사람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겨우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되었을 적에 그는 큰길가 에 자리잡고 있는 십리장정이 세워져 있는 곳에 이를 수가 있었 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정자 뒤쪽은 바로 큰길 오른쪽으로서 정말 숲속으로 뻗쳐 있는 길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 길은 폭이 다섯 자 정도이고 길바닥에는 아란석을 모조리 깔아놓고 있었는데 매우 정제하고 평탄하게 깔아놓았기 때문에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걸리적거리 않았고 비가 올 적에는 더욱더 진창 길을 걷는 고생을 피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3549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8.2/4 소림사의 제자 10/03 20:35 277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8.2/4 소림사의 제자가 되다 곡창해는 즉시 그 길을 따라 나가게 되었고 숲속을 벗어나게 되자 갑자기 눈앞이 탁 트였다. 그러고 보니 하나의 돌을 깐 길 이 구불구불하게 산비탈 쪽으로 이어져 있었고 산비탈 쪽에는 한 채의 석루(石樓)가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사면 팔 방에는 모두 다 매화를 심어 매화 숲을 이루고 있었고 맞은편에 는 지세가 차츰차츰 낮아지는, 숲이 우거진 골짜기가 있으며 멀 리 보이는 산들은 마침 검은 눈썹처럼 무척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돌길을 따라서 걸어갔는데 얼마 후에 갈래길에 이르게 되 었다. 앞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구불구불하게 산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물론 이 길은 그 하얀 돌로 쌓여서 만든 누각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다른 한 길은 한 매화 숲속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지세가 아래 로 비스듬히 비탈져 있었다. 곡창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매화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매화 숲속으로 들어가자 그윽한 향기가 감돌았으며 피부 속으 로 그 향기가 스며들게 되자 심신이 상쾌해졌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그 길을 따라 달려가듯이 나 갔다. 이 매화 숲은 약 이십여 장의 깊이였는데 십 장 정도 걸어들어 가니 갑자기 숲속에서 누군가 호통쳐 물었다. [소형제는 어디로 가는가?] 곡창해는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길 양쪽의 숲속에 사람의 옷자락이 은근히 삐져나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이 나무 뒤 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질문을 누가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말투가 온화하고 또한 그를 소형제로 부른 것을 보면 켤코 억센 힘만 믿고 함부로 날뛰는 친구들이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아무렇게 두 손을 맞잡아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불초는 이곳에서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볼 수 있다기에 특별히 달려와 시야를 넓히고자 하는 바이외다.] 그러자 숲속에서 칠팔 명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그가 어린 나이에도 여인을 보려고 달려온 것 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먼저 입을 열었던 그 사람이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소형제는 얼굴 모습이 비범하고 언행이 범속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상당한 내력이 있는 사람 같군. 그러니 어서 숲속으로 가만히 들어오도록 하게. 허소저는 잠시 후에 이 곳을 지나게 될 터인즉 아무쪼록 그녀를 놀라게 하거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라네.] 곡창해는 대답했다. [귀하가 여러모로 가르쳐준 점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오이 다.] 그는 즉시 번쩍 몸을 날려 숲속에 있는 한 그루의 오래 된 매 화 나무 뒤로 들어섰다. 그러자 다른 한 그루의 나무 뒤쪽에서 갑자기 목쉰 음성이 들 려왔다. [이것이야말로 쇠신발이 닳도록 찾아다녀도 찾을 길이 없었는 데 만나보려고 하니 전혀 정성을 들일 필요 없을 정도로 수월한 노릇이군. 허허허!] 곡창해는 그만 속으로 뜨끔했다. '아마도 그 누가 나를 쫓아와 잡으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정히 이와 같은 생각에 미치게 되었을 때에 그 목쉰 듯한 음성 이 다시 울려퍼졌다. [조금 전에 말을 한 사람은 옥면판관(玉面判官) 여문준(呂文 俊)이 아닌가! 아직도 불초 박산조 유걸(劉傑)이라는 옛친구를 기억하겠는가?] 먼젓번에 입을 열었던 사람이 대답을 했다. [노조가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군. 정말 오래만일 세. 소문에 들으니까 노조는 온갖 방법을 다해서 한 수의 귀수 구혼(鬼手勾魂)이라는 절예를 익혔는데 그 목적은 바로 이 형제 의 목숨을 빼앗는데 있었다더군.] 박산조 유걸은 '휙' 하니 길로 달려나가 섰다. 그 사람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왼손은 손목에 있는 곳으로부터 잘려져 나가고 없었고 얼굴은 한 조각 의 검은 베로 가리고 있어 얼굴 모습을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길 위에 우뚝 버티고 서서 냉랭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네. 이 유모는 큰형과 셋째 동생을 모두 다 자네의 판 관필 아래에 상처를 입고 패하고 말았는데 이제 도대체 자네가 이 유모의 손 아래에서 몇 초를 견딜 수 있는지 두고봐야겠네.] 그러자 맞은편 숲속에서도 번쩍하니 한 사람의 인영(人影)이 달려나와서는 길 위로 내려섰는데 그 신법이 지극히 절묘했다. 이 사람은 키가 중키인데 손에는 기다란 모양의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이때 그가 그 보따리를 들고 한번 허공을 향해 떨치게 되자 보 따리가 풀어지면서 한 쌍의 판관필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 역시 검은 베로 가려져 있었는데 이때 그는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잘 되었네. 장말 잘 되었네. 불초는 십여 년 동안 이 천매곡 부근에 은거하고 있었지만 무공 연마를 한번도 중단한 적이 없 다네. 따라서 노조의 손을 빌어 십 년 동안 어떤 진보가 있었는 지 한번 시험을 해보기에 안성맞춤인 것 같군.] 곡창해는 옥면판관 여문준의 명성을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두 자루 판관필의 초식이 오묘하고 공력이 심후하여 무림 에서 퍽이나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고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박산조 유걸이라는 사람은 비록 흑수파의 비예인 귀수구혼 이라는 일초를 익히기는 했으나 만약에 겨우 삼초이식(三招爾 式)에 불과하다면 아무래도 좀처럼 이기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막 한데 어울러져서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했을 적에 수 장 밖에서 갑자기 그 누가 나직이 외쳤다. [허소저께서 돌아오고 계시네!] 여문준과 유걸 두 사람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삽시간에 팽팽 하게 맞서던 자세를 거둬들이고 신속하게 나누어 숲속으로 달려 들어가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허소저는 정말 이토록 커다란 마력을 지니고 있는가? 나는 반 드시 그녀가 어느 정도로 아름다운지 자세히 두고봐야겠구나.' 매화 숲속 안은 죽음과 같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얼마 후에 가느다랗게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와 노리개가 따그 락거리는 소리가 바람에실려 숲속까지 흘러들어왔다. 곡창해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두 명의 여자가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는데 뒤에는 한 명의 시녀 차림을 한 여인이 있었다. 앞서 오는 여인이 바로 허령주 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매우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머리와 몸에도 장 식을 하지 않고 있었고 다만 옥과 같은 손목에 하나의 벽록(碧 綠)색 팔찌를 끼고 있을 뿐이었다. 키는 중키인데 몸매가 날씬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일종의 고 귀하고 아름다운 풍모가 엿보였으며 그 풍모로 인해 그녀의 그 아리따운 자색과 용모는 더욱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옥과 같은 얼굴에는 지분을 바르지 않았으나 살결은 눈 처럼 빛이 났으며 입술을 붉었고 기다란 눈썹은 곱고도 길게 뻗 어 있으며 눈동자는 마침 점을 칠해 놓은듯 진정 이 세상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미녀였다. 곡창해는 나이는 어렸지만 그녀가 지극히 아름답다고 생각했 다. 더욱이 그녀가 두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있어서 더욱더 일 종의 원망스럽고 서글픈 빛이 뻗쳐나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야말로 애간장이 녹아난다고 할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 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둥근 돌들을 밟으면서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는 데 그 뒷모습은 마치 정면에서 보는 것처럼 매력적이었고 행동 거지나 풍도가 모두 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바가 있었다. 그녀가 숲속에서 벗어난 지 한참이 된 후에야 박산조 유걸은 가볍게 기침을 한 후 다시 몸을 날려 길 위에 섰다. 옥면판관 여문준 역시 몸을 날려 달려나왔으며 박산조 유걸의 맞은편에 우뚝 버티고 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본 채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유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에 온 지도 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자네도 이 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군.] 그는 손을 뻗치더니 얼굴에 두르고 있는 검은 베 조각을 드러 내고 거무튀튀하며 사나운 얼굴을 드러내었다. 옥면판관 여문준 역시 검은 베를 드러내게 되었는데 대단히 긴 그의 수염은 모두 다 하얗게 세어 있어 얼핏 보기에는 마치 외 로운 신세가 되어 강호에서 떠돌아다니는 사람처럼 보였다. 박산조 유걸은 그의 얼굴을 보더니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자네는 어쩌다가 그와 같은 모습이 되었는가?] 여문준은 한참 생각하더니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십 년 동안 집을 나서게 되었을 적에는 검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으며 평소에도 거울에 자기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 쳐보지 않았지만 여전히 나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네. 생각컨대 자네도 모름지기 어째서 이와 같이 변했 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드는군.] 숲속 사방에서 적지 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박산조 유걸은 얼굴에 흉악한 광채와 살기를 갑자기 누그러뜨 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물론 알고 있지, 물론 알고 말고.] 곡창해는 허령주의 뒤를 쫓아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아야 했 다. 즉시 그는 걸음을 옮겨 숲속에서 달려나갔다. 잠시 후에 그는 매화 숲속에서 달려나와 냉향루로 향한 길을 걷게 되었다. 길을 가는 동안 기화요초가 사방에 피어 있었으며 정자와 조그 만 다리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새소리와 개울물 이 흘러가는 소리까지 들려오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선경(仙境)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두루 찾으면서 쉴 틈 없이 감 상하여 즐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이때 성큼성큼 달려가고 있었는데 길은 구불구불하니 빙글빙글 돌면서 오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허령주의 뒷모습 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얼마 후에 그는 이미 냉향루 앞에 있는 넓다란 평지에 도달하 게 되었다. 하나의 하얀 돌을 깐 길은 꽃나무들을 가로지르게 되어 있었고 하얀 돌을 깐 길의 양쪽은 모두 다 싱그러운 잔디들이 파릇파릇 자라나 있는 풀밭이었다. 그는 사방을 한번 돌아보고는 하얀 돌을 깐 길을 따라 질풍과 같이 달렸다. 그리하여 그는 한곳의 원림(園林)을 가로지르게 되었는데 원림을 다 가로지르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원래 그 한 채의 백석을 쌓아서 올린 고루(高樓)가 앞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으며 고루의 앞쪽은 푸른 잔디밭이었다. 이 백석으로 쌓아올린 고루는 무척 정교하고 아름답게 지어졌 을 뿐만 아니라 형식이 고아(古雅)하여 마치 선녀가 살고 있는 곳 같았다. 이때 마침 황의의 나이 어린 시녀가 시렁 위에 앉아 있는 곳 같았다. 이때 마침 황의의 나이 어린 시녀가 시렁 위에 앉아 있는 한 마리의 앵무새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곡창해는 모습을 드러내게 되자 그 한 마리의 앵무새는 부르짖 었다. [손님이 오셨어요……손님이 오셨어요…….] 황의의 나이 어린 시녀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더니 사내애인 것 을 보자 웃었다. [당신은 누구죠?] 그녀는 매우 가냘프면서도 청초하게 아름다운 편이었으며 표정 이나 태도가 매우 천진한 것이 아직도 이 세상의 풍상을 겪거나 속세에 닳아진 여자애가 아닌 것이 틀림이 없어 보였다. 곡창해는 성큼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서는 무겁고도 정중한 얼굴빛을 하고 정색해서는 입을 열었다. [수고스럽지만은 위로 올라가서 귀주인에게 강남의 곡창해가 만나러 왔다고 통보를 해주시구려.] 그 예쁜 시녀는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이런 일은 일찍이 한번도 없었던 일이에요. 무릇 아가씨를 찾 아뵈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 잘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녀는 거절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었다. 그러나 눈앞의 십 여세 되는 사내애의 그 네모진 얼굴과 한 쌍의 새까만 와잠미와 단봉안에는 마치 지극한 위엄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 군다나 너무나 정중하고 의젓해서 감히 안돼요 라는 말을 할 수 가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총총히 몸을 돌려서는 누상으로 올라 갔다. 잠시 후에 네 명의 시녀 차림을 한 여자애들이 우르르 몰려 나 왔는데 모두 다 생긴 것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편이었다. 그녀들은 여전히 계단 위에 서서 멀리서 곡창해의 아래위를 훑 어보며 나직이 뭐라고 자기네들끼 이야기하고 있었다. 곡창해는 그녀들이 자기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털끝만치도 표정을바꾸지 않고 늠름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나중에 허령주를 만나보게 되었을 때에 무슨 말을 했으면 좋을까 하고 한참 궁리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 황의의 시녀가 달려오더니 입을 열었다. [저의 아씨께서는 도련님을 만나보겠으니 대청 안으로 들어가 셔서 기다려 달라는 분부십니다.] 곡창해는 두 손을 마주잡아 보였다. [고맙소이다.] 그는 두 눈썹을 즉시 잔뜩 모았다. 마침 가슴 가득히 근심이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 네 명의 시녀들은 이미 집 안으로 들어가 있었고 다만 그 황의의 시녀만이 남아 있었는데 곡창해가 그녀의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황의의 시녀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도련님께서는 어떻게 된 거예요? 혹시 몸이라도 불편하신가 요?] 곡창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가 시선을 돌려보니 그녀 는 매우 관심어린 빛을 눈에 띄우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지라 즉시 자기 마음을 털어놓았다. #3557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8.3/4 소림사의 제자 10/04 23:24 310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8.3/4 소림사의 제자가 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귀주인을 만나게 되었을 적에 무슨 말을 드려야 좋을지 몰라 걱정을 하고 있는 참이라오.] 그녀는 방그레 웃었다. [도련님께서는 특별히 만나뵈러 오셨는데 설마하니 소저에게 하실 말씀이 없으시려고요?] 곡창해는 말했다. [만약에 내가 말씀드릴 일이라도 있었더라면 걱정을 하지 않았 겠지.]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우선 먼저 그녀에게 허소저에 관한 일들을 물어보자. 그 렇게 된다면 어찌됐든간에 입에 올릴 화제를 찾을 수가 있지 않 겠는가?'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즉시 물었다. [귀주인을 찾아뵙는 손님들은 많소이까?] 황의 시녀는 공손히 대답했다. [거의 없을 정도예요.] 곡창해는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귀주인께서는 나를 만나볼 것을 허락했지요?]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겨우 대답했다. [쇤네는 그게 어떤 이유인지 잘 모르겠어요. 소저께서는 종종 어떠한 방문객도 만나보지 않을 테니 맞아들이지 말라고 분부를 했어요. 아 어쩌면 그녀는 도련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만나보려고 하는지도 모르겠군요.] 곡창해는 빙그레 웃었다. [아무쪼록 앞서서 안내를 해 주시구려. 귀주인께서 오랫동안 기다리면 실례가 되지 않겠소이까?] 황의 시녀는 놀람과 의아한 눈빛을 하고서는 그를 한번 바라보 았다. 그녀는 곡창해에게 어째서 또 이번에는 할 말이 없어서 걱정을 하지 않는가 하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곡창해의 위엄에 찬 모습에 압도당한 모양인지 감히 그 말을 내뱉을 수가 없어 그저 묵묵히 몸을 돌려서는 앞장을 섰다. 안내된 대청은 매우 우아하고 아늑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맞은편에는 한 폭의 원나라 때의 화가인 방종의(方從義)의 산 수화가 걸려 있었는데 구름과 나무들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 었다. 그 양쪽으로 대련(對聯)이 걸려 있었는데 매우 힘찬 붓글씨로 그야말로 용이 춤추는 듯 했다. 위쪽의 글귀는 내시일견번도수 (來時一見繁桃수: 찾아와 만나게 되었을 적에 복숭아가 익었다 는 뜻)이고, 아래 구절은 별후삼경벽해건(別後三驚碧海乾: 이별 후 세 번이나 놀라 푸른 바다가 마를 지경이라는 뜻)이었다. 곡창해는 그와 같은 글귀를 보고 생각했다. '이 한 폭의 중당(中堂)과 대련에는 똑같은 선가지기(仙家之 氣)가 넘치고 있다. 그림은 옛날의 명가의 솜씨니까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 한 폭의 대련에는 아래 위에 아무런 이름이 없으니 누가 기증한 것인지 모르겠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등뒤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누가 입을 열었다. [곡형은 벽에 그려져 있는 서화를 감상하는 것 같네요. 이로 미루어 결코 속인이 아닌 것을 알 수 있겠어요.] 그 말소리는 마치 꾀꼬리의 노래 소리처럼 귀에 와 닿을 때 퍽 이나 음성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곡창해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원래 주인께서는 이미 도달하셨군요. 실례지만 이 한 폭의 대 련은 유명한 그 분의 솜씨가 아닌가요?] 그의 등뒤에 서 있는 절색의 미녀는 얼굴에 약간 놀람과 의아 한 빛을 띄우고 입을 열었다. [맞았어요. 그것은 나의 절친한 친구가 기증한 묵보(墨寶)이외 다. 그런데 그대는 매우 침착하군요. 인기척을 듣고도 놀라 돌 아보지 않으니 정말 훌륭하군요.] 곡창해는 그제서야 서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다. [소제는 평소부터 왕자경(王子敬)의 위인됨을 흠모해 왔던터라 어떤 기척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답니다.] 허령주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사내애는 기우가 비범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어볼 때 에 무척이나 박학 다식한 것 같다. 그는 분명히 진(晉) 나라의 왕자유(王子유)와 장자경 형제의 고사를 들어 스스로 비유를 했 으니 나도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너무 속되지 않도록 해야겠구 나.' 왕씨 형제는 바로 왕의지(王義之)의 아들인 왕휘지(王휘之)와 왕헌지(王獻之)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휘지는 자가 자유이 고 헌지는 자가 자경이었다. 그들은 한방에 같이 있었는데 갑자기 집에 불이 나고 소란이 벌어지게 되었을 적에 왕휘지는 깜짝 놀라 불을 피하느라고 신 발도 미처 신을 겨를 없이 달려나갔으나 왕헌지는 여전히 태연 한 표정으로 천천히 좌우를 불러 하인들의 호의를 받으면서 걸 어가는 매우 범상한 태도를 보였던 바 세상에서는 이들 두 왕씨 가문 형제들의 일을 가지고 사람들의 신우(神宇)를 논하게 된 것이었다. 허령주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 다. [그대의 신우를 바라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대안도(戴安道)와 비슷한 감을 갖게 하는군요.] 곡창해는 크게 탄복해서 생각했다. '그녀 역시 진나라 인물을 내세워 예를 드는구나. 이로 미루어 볼 때 정말 박학 다식하며 외모가 청수할 뿐만 아니라 안으로는 슬기로움을 지니고 있으니 정녕 제일미인이라는 예찬에 부끄럽 지 않구나.' 원래 진나라 때의 대안도는 십여 살 때에 궁에서 그림을 그리 게 되었는데 장사(長史)가 그의 그림 솜씨를 보고 감탄을 했다. '이 아이는 비단 그림을 잘 그릴 뿐만 아니라 그림이 아니라도 끝내에는 명성을 날리게 되겠군나.' 그래서 허령주는 대안도를 곡창해에게 비유한 것인데 이는 바 로 곡창해의 재주와 식견이 비범하니까 끝내는 명성을 떨치게 되리라는 칭찬의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각기 상대방이 결코 속된 인물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고 똑같이 상대방에 대해서 경중(敬重)하는 마음 이 일게 되었다. 허령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그 절친한 친구분을 신선에 비교하고 있 지만 내 자신은 결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아, 저기를 보세요. 그는 아래 위에 서명도 하지 않았는데 저것은 바로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곡창해는 숙연히 말했다. [누님의 친구분은 정말 일대의 고인으로 정녕 흔적을 남기지 않았군요. 그만큼 흉금이 넓은 데 대해서 소제는 흠모해마지 않 는 바입니다.] 허령주는 이때 환한 미소를 지었는데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모 습은 눈이 부실 지경이라 사람이 감히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였 다. 곡창해는 즉시 자기가 찾아갔던 표국의 주인 제의가 아직도 그 녀의 웃는 모습을 보지 못한 데 대해서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다 는 말을 세삼 떠올렸다. 따라서 그는 다시 정중히 입을 열었다. [소제는 누님에게 한 가지 일을 여쭈어 보고자 하나 너무나 당 돌하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 다.] 허령주는 그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공자(公子)는 상관 없으니 말씀을 해보시지요.] 곡창해는 매우 정중하고도 의젓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누님께서는 웃으시니까 더 더욱 아름다운데 어떤 방법이 누님 께서 항상 입가에 웃음을 띄우도록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군 요.] 허령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고로 홍안 박명(紅顔薄命)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한평 생 우울하게 살다가 죽도록 운명 지어져 있어서 그 누구도 그 운명을 바꿔놓을 방법이 없을 거예요.] 곡창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제는 감히 찬성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어떤 일들은 보기에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 같지만 만약 굳건한 인내심으 로 견뎌내게 된다면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는 매우 거침 없이 말을 해대고 있었다. 마침 온갖 풍상을 겪은 사람이 경험에서 진리를 발견한 것 같다고나 할까? 허령주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빛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물었 다. [공자는 그 말을 믿나요?]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누님에게 말씀드리면 소제는 역시 시험을 해보아야 믿 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어머님이 때때로 소 제에게 가르치던 말씀이기 때문에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 없는 심정입니다.] 허령주는 잠시 동안 침묵하더니 겨우 입을 열고 말했다. [영당(令堂)께서는 틀림없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겠군요. 다만 공자의 학식이나 풍도만 보더라도 알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아! 내가 만약에 영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많 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을 거예요.] 곡창해는 그 말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네들은 원래 알고 있는 사이지만 당신이 예전에는 우리 어머니에게 어떤 특출한 점이 있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이로 미루어 볼 때 그 말이 역시 그저 마음내키는 대로 칭찬의 말을 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 같군.'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허령주가 다시 말했다. [나는 정말 영당처럼 아량이 넓고 견식이 뛰어난 여걸이 만약 에 나와 같은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었을 적에는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지 진정 알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녀는 다시 우울한 얼굴로 되돌아갔으며 재차 불행한 음영(陰 影)에 매몰되고 말았다. 곡창해는 몸을 일으키며 두 손을 마주잡았다. [소제는 이번에 찾아뵙는 중에 친히 누님께서 환히 웃는 모습 을 볼 수가 있었으니 그야말로 삼생유행(三生有幸)입니다. 이제 는 이대로 물러가고 장래에 다시 기회가 있으면 이곳으로 와서 인사를 드리도록 하지요.] 허령주는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자는 어인 일로 총총히 왔다가 총총히 가는 거지요? 그리고 또 언제쯤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군요.] 곡창해는 정중히 말했다. [소제는 어느 곳으로 가서 사부를 모시고 무예를 익힐 작정이 랍니다. 이번에 가게 된다면 십 년이나 이십 년 혹은 사오 년 만에 다시 강호에 뛰어들 수 있을지 예측하기가 어렵군요.] 허령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는 아직도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대뜸 입을 열자마자 십 년이고 이십 년을 찾지만 이 몸은 기실 늙어 광채를 잃게 되었 으며 고운 얼굴도 시들고 말았어요. 생각해 보면 이는 얼마나 무서운 노릇이에요? 아, 이 얼마나 외로운 청춘이냔 말이에요.] 곡창해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진정으로 그녀의 비애가 어떠한 것인가를 터득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 자기도 모르게 무한한 동 정심이 우러났다. 사실 그는 아앵과의 약속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그녀의 비애를 터득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아앵은 곡창해가 무예를 다 익힌 이후에 자기에게 찾아오라고 했을 뿐 전혀 시일의 길고 짧음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렇게 두고 볼 때에 아앵과 허령주는 얼마나 선명한 대조가 되는 가 말이다. 무한한 동정심을 느끼게 되자 곡창해는 그저 조금이라도 이 아 름답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을 위로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 했다. 문득 그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입을 열었다. [누님께서는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청춘이라는 것은 쉽게 시들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 결코 청춘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방 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허령주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어요.] 곡창해는 가슴을 펴고 입을 열었다. [소제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장래 소제가 다시 누님을 찾 아뵈러 올 때에는 틀림없이 두 손으로 주용단(駐容丹)을 바치겠 습니다.] 허령주는 잠시 동안 말이 없더니 한참 후에야 말했다. [무림에서는 정말 세상에 그와 같은 이보(異寶)가 있다는 말이 떠돌고 있지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와 같이 천지 조화를 무섭게 하는 보물 주위에는 온갖 재앙(災殃)들이 지키고 있다는 설도 있으니 공자께서 나에게 그와 같은 위로의 말을 해준 데 대해 이 몸은 이미 매우 고맙게 생각할 것이니 절대 그런 일을 마음속에 두지 말도록 해요.] 곡창해는 머리를 쳐들었다. [소제가 어찌 말을 하고도 지키지 않는, 신의가 없는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허령주는 일순 어리둥절해졌으나 곧이어 입을 열었다. [공자는 역시 그 일은 잊어버리도록 해요. 그렇지 않을 때 사 오년 후 다시 이곳을 지나게 되었을 때에 그 한마디의 말 때문 에 나를 보러오지 못하게 될 거예요.] 곡창해는 늠름히 말했다. [소제는 언제나 자기가 한 말을 태산과 같이 무겁게 여기어 한 번의 약속을 천금같이 중히 여긴답니다. 누님께서는 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소제는 이만 작별을 하겠습니다.] 그는 성큼성큼 냉향루에서 걸어나왔다. 화원을 지나게 되었을 때에 그는 황의의 시녀를 만나게 되자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황의의 시녀는 말했다. #3577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8.4/4 소림사의 제자 10/06 00:38 275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8.4/4 소림사의 제자가 되다 [도련님은 정말 대단하시군요. 우리집 소저께서는 이 몇 년 동 안 하신 말들을 다 합쳐보았자 조금 전 도련님과 한 말보다 적 을 거예요.] 이틀 후 곡창해는 어느덧 숭산의 기슭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곡창해는 흥분되어 산 위로 뛰어오르면서 부르짖었다. [나는 끝내 숭산 소림사에 도달했구나!] 훗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적에 아버지와 어머님에게 겪은 일들을 말씀드리면 틀림없이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 같다고 도 생각했다. 끝내 그는 소림사에 도달하게 되었고 산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 자마자 맞은편에서 오는 한 명의 젊은 화상과 맞닥뜨리게 되었 다. 그는 즉시 앞으로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수고스럽지만 소사부(少師父)께서는 귀사의 방장 대사에게 후 배 곡창해가 뵙고자 찾아왔다고 한마디 통보를 해주십시오.] 그 젊은 화상은 깜짝 놀란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다른 승려 들이 없는 것을 보고 입을 열고 물었다. [소시주는 어인 일로 우리의 방장을 만나뵙고자 하는 것이오?] 곡창해는 속으로 이 화상이 소림사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기 는 하지만 사부를 모시는 일을 말해주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중히 대답했다. [불초는 반드시 귀사의 방장대사를 직접 만나게 되었을 때에야 말씀을 드릴 수 있겠소이다.] 그 젊은 화상은 그의 언행에 예의가 있는 것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는 말했다. [소시주가 말을 하든 말을 하지 않든 상관이 없소. 어찌됐든 간에 우리의 방장을 만나보지는 못할 것이오. 내 솔직히 소시주 에게 말하는데 나도 본사의 승려이긴 하더라도 역시 좀처럼 방 장님을 뵈올 수 없다오.] 곡창해는 생각했다.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구나. 나와 당신의 처지 가 다른데 어째서 함께 묶어서 논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즉시 성실하고도 간곡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불초는 실로 중요한 일 때문에 반드시 방장대사를 만나뵈어야 하니 아무쪼록 소사부께서는 편리 좀 봐 주십시오.] 젊은 화상은 눈을 찌푸렸다. [소시주가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소시주를 데리고 지객(知客) 을 만나도록 해 주겠소. 오늘은 덕법(德法) 사부가 당직인데 그 분은 가장 착실하면서도 온화한 성격이기 때문에 한번쯤 만나뵌 다 하더라도 별다른 지장은 없을 것이오.] 그들은 함께 걸음을 옮겨 놓았다. 길을 가면서 이야기를 나눈 끝에 곡창해는 이 젊은 승려의 법 명이 명연(明緣)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소림사의 배분의 순서는 광(光), 홍(弘), 덕(德), 명(明)으로 이어졌다. 당금 방 장대사는 홍경대사로서 명연은 제사대(第四代)의 제자에 해당되 는 것이었다. 얼마 후 그들은 한 칸의 크고 깨끗한 법당 안으로 들어설 수가 있었는데 한 명의 얼굴이 점잖은 화상이 그 법당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중년 화상이 바로 덕법화상이었다. 명연은 그에게 곡창해가 한 말들을 대강 해주었다. 덕법화상은 그 말을 듣더니 놀랍다는 시선으로 곡창해를 바라 보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그 말은…… 그 말은 정말이란 말인가?] 곡창해는 속으로 이 대사는 말주변이 변변치 않고 사람됨이 얌 전한 것 같은데 어떻게 지객이란 직책을 맡을 수 있었는지 모르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재빨리 덕법화상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덕법화상은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소시주는 여기서 기다리시게. 소승이 먼저 총지객 (總知客)에게 말씀을 드리겠네.] 그는 급히 달려갔다. 곡창해는 빙긋이 웃으며 그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명연화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총지객은 바로 정수(正修)대사이시며 사람됨이 매우 무섭다 오.] 얼마 후에 덕법화상은 한 명의 미목이 청수한 중년의 승려를 데리고 들어왔다. 곡창해는 눈치 빠르게 앞으로 나가 절을 했다. 정수대사는 몇 마디의 말을 대강 묻고는 그가 홀로 소림사로 찾아오기까지 몇 천리 길을 달려왔다는 사실을 알고 덕법과 명 연 두 승려에게 곡창해를 선당(膳堂)으로 안내하여 식사를 들도 록 하는 한편 방장이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도록 조치를 내렸다. 점심 때가 지난 후 곡창해는 한 채의 선원(禪院) 안으로 안내 를 받았다. 정실에서 그는 한 분의 얼굴 모습이 준엄한 노승을 뵙게 되었는데 그 노승의 법호는 홍인(弘因)이라 했다. 바로 방 장과 같은 배분의 장로로서 신분이 매우 고귀하신 분이었다. 홍인장로는 곡창해에게 그가 찾아온 뜻을 물었다. [정수대사께서는 폐사방장의 사제가 되시는 곡시주는 반드시 사실대로 이야기해야만이 방장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이 네.] 곡창해는 그 말을 듣자 대답을 했다. [불초는 바로 저의 어머님의 명을 받고 이곳으로 와서 사부를 모시고 무예를 가르침 받고자 달려온 것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는 두 고승의 표정을 살폈다. 두 고승은 미미하게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곡창해는 다시 설명을 했다. [저의 어머님은 불초에게 귀사 제일 고수의 좌하(座下)로 들어 가라고 분부를 내리셨기 때문에 불초로서는 방장대사를 직접 만 나 뵙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홍인장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부를 모시고 무예를 익힌다는 것은 결코 장난이 아닐세. 자 네의 나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먼 길을 걸어온 것을 볼 때 얼마 나 열성이며 또한 의지력이 강한가를 짐작할 만한 일이네.] 곡창해는 속으로 크게 기뻐해서 공손한 얼굴 표정을 하고 귀를 기울였다. 홍인장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본사의 제자들은 반드시 계(戒)를 받고 출가를 해야 한다네.] 이어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계속 말을 했다. [자네는 나이가 너무나 어리어 불가의 뜻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으므로 출가하는 것도 적절하지 못한 것 같으니 역시 먼 저 초보적인 무공을 단련하여 자질이 어떤가를 본 이후에야 어 느 누구의 좌하로 들어가 제자가 되어 무예를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을 논할 수가 있게 될 것이네.] 곡창해는 속으로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자질이 너무나 뒤떨어진다면 상대방에서 어떻게 제자 로 거두어들이겠는가?' 동시에 그는 어쨌든간에 초보적인 무공은 갈고 닦아야 하기 때 문에 우선 먼저 그들의 마음에 들 때까지 기다려 다시 일을 추 진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은 그렇게 해서 결정을 보게 되었고 정수대사는 그를 데리고 그 선원에서 나가 선당에 있는 감리승(監理僧)인 덕광(德廣)에 게 맡겼다. 덕광대사는 신체가 우람하고 위인됨이 무척 거친 편 이었다. 이튿날부터 곡창해는 막일을 하기 시작했다. 막일이라고 하지 만 물을 기르고 장작을 패거나 나무를 해오는 일이었다. 곡창해는 한평생 이와 같은 일을 해본 적이 없었으나 이 무렵 에서는 이를 깨물고 그 일을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며칠 동안 그는 그저 간신히 자기에게 부여된 일을 끝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면 매일밤 온몸의 뼈마디와 근육이 시큰 거리고 아팠으며 너무나 지나치게 피로한 끝에 되려 잠을 제대 로 자지 못했다. 따라서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무척 수척해지게 되었다. 닷새째 되는 날 그는 천마신공의 운기법문(運氣法門)에 따라 조식을 했다. 이날 밤에서야 그는 겨우 쿨쿨 단잠을 잘 수가 있었고 이튿날 이른 아침 일어나게 되었을 때에 정신이 경쾌하면서도 힘이 넘 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일을 다한 후에도 피로를 모르게 되 었다. 물을 긷느라고 물통과 물지게를 지고 산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해도 전혀 힘들지 않았으며 자기가 부지런한 점을 알리기 위해 규정된 양보다 더 많을 일을 했다. 어느덧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달이 지나게 되었고 그는 이와 같 이 바쁜 생활 속에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만큼 생활이 단 순하게 되었으며 머리 속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물을 기르고 장작을 패거 나 나무를 해오는 일만을 했던 것이다. 그가 이토록 한마음 한뜻으로 부지런히 일만하게 되자 마교의 상승 내공인 천마심공은 매우 정순(精純)할 정도로 연성할 수 있었고 진기(眞氣)가 점차 응고되어 생각과 더불어 진기가 솟아 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몸을 거꾸로 하지 않아 도 자유자재로 진기를 운행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홍인장로와 정수선사는 줄곧 그를 부르지 않았다. 곡창해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착실한 편이어서 그 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다만 때때로 그는 어째서 그에게 초보적 인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을까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느덧 다시 달포가 지나게 되었다. 곡창해도 참을 수가 없게 되었고 스스로 혹시 자기의 자질이 너무나 뒤떨어지기 때문에 소림사에서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려 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날 그는 마음이 울적해진 상태에서 산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하게 되었는데 한참길을 가다보니 갑자기 자기가 길을 잘못 들 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쭉 훑어보니 원래 그 자신은 어느 덧 한 석곡(石谷)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정히 머리를 돌리고 그 석곡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을 적에 별안간 왼쪽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게, 이리 와 보게.] 곡창해는 속으로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곳은 사나운 호랑이나 고약한 짐승들이 없긴 하지만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인데 어찌하여 사람이 있는 것일까?' 더욱이 그 사람의 음성이 얼음과 같이 차갑고 어조가 무척 힘 찬것으로 보아 줄곧 다른 사람들을 부려먹는 데 습관이 된 사람 으로 산속에서 살고 있는 주민이 아니라는 것쯤은 단번에 짐작 할 수가 있었다. 곡창해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말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비탈 위쪽에 몇 조각 크기의 집채만한 바윗덩어리 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바위틈 사이에 한 사람이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햇살이 그의 몸을 비춰주고 있어서 그 사람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나이가 오십 정도 되어 보였는데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고 수염은 가득 자라 있었으며 몸에 걸치고 있는 하얀 장삼 은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있어서 이 사람이 비단 오랫동 안 머리를 감거나 빗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옷도 바꿔입지 못했 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곡창해는 감히 경솔하게 다가가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쳐 물었 다. [아저씨가 나를 부른 것인가요?] 그 사람은 냉랭히 되물었다. [너를 부르지 않았다면 누구를 불렀겠는가?] 곡창해는 그만 픽 웃었다. [옳아요. 내 질문은 너무나 우둔한 것이었어요. 실례지만 아저 씨께서는 무슨 볼 일이 있으신지요?] 그 사람은 두 눈에서 놀랍고도 의아한 빛을 쏘아내며 입을 열 었다. [자네는 산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아들이 아니군. 자네의 이 름은 무엇인가?] 곡창해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저의 성은 곡씨이고 이름은 창해라고 하며 다른 곳에서 온 사 람입니다. 아저씨의 성씨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 사람은 똑바로 곡창해를 굽어봤다. [다른 고장의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소림사에 투신해서 사부를 모시고 무예를 익히려는 사람이겠군. 나의 성은 오(吳)씨이고 이름은 외자로 현(顯)이라고 하는데 역시 타지에서 굴러온 사람 이라네.] 곡창해는 그 말을 받아 말했다. [그러나 오 대숙(吳大叔)은 소림사로 투신해서 사부를 모시고 무예를 배우러 온 것이 아니니 불초와는 크게 다른 점이지요.] 오현은 두 눈에 웃음을 띄웠다. [자네는 정말 재미있군. 자네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산속에서 겪어야 하는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군.] #3593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9.1/4 괴인이 일러준 10/07 19:50 293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9.1/4 괴인이 일러준 계책 곡창해는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불초는 오랫동안 지체할 수가 없답니다. 오 대숙께서 는 저에게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오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네. 나의 두 발은 이미 마비되어 며칠 동안 굶었어도 달려가 음식을 구할 수도 없고 더 더욱 이곳에서 떠날 방법이 없는 신세일세.] 그 사람은 온통 얼굴에 자란 수염을 깎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 표정이 어떤지는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고, 그저 눈빛으로 약 간 그의 생각을 엿볼 수가 있을 뿐이었다. 이때 그와 같은 애절한 비명과 같은 말을 듣게 되자 곡창해는 무척 비참하고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곡창해는 동정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 대숙께서는 아마도 저에게 오 대숙을 도와서 집으로 돌아 가게 하든가 아니면 오 대숙을 대신해서 전갈이라도 해달라는 것이 아닌지요?] 오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아닐세. 나는 한평생 이세상에서 떠돌아다닌 사람인데 돌아갈 집이 있겠는가? 전갈을 할 필요도 물론 없네. 나는 친구 한 사람 없는 사람이니까 말일세.] 곡창해는 본래 그 두 가지 일에 있어서 자기가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그와 같이 말을 하는 것 을 듣고는 그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말하지 않고 다 른 문제를 끌어냈다. [집도 친구도 없다는 것은 정말 희한한 일이며 저로서는 한번 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군요. 그렇다면 오 대숙께서는 틀림 없이 저에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좀 갖다주었으면 하는 모양이군요. 그런가요?] 오현은 연신 대답을 했다. [맞았네. 맞았어. 어떠한 것이든 상관이 없고 그저 먹을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일세.] 그렇게 말하는 그는 두 눈에서 기이한 광채를 쏟아내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곡창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듯 하더니 입을 열고 말했다. [어떤 음식들을 구해야 할까요?]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현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리 다가오게. 우리 한번 상의를 해보세.] 곡창해는 비탈길 위로 올라가서는 바위틈 앞에 섰다. 그제서야 그는 오현의 곁에 하나의 기다란 나무 기둥 같은 것 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한쪽은 땅에 닿아 있었고 한쪽은 위의 널따란 바위를 떠받치고 있었다. 곡창해는 그만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것은 무엇이지요?] 오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것은 내가 설치한 함정이네. 나를 해치려고 하는 사람을 상 대하려는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맹수들로부터 몸을 지키 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곳에는 야수들이 없더군.] 곡창해는 잠시 살펴본 이후 입을 열었다. [오 대숙께서 나무를 잡아당기면 위의 바위가 곧장 아래로 떨 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저것은 맹수들을 상대하는 데 는 가치가 있겠으나 악인을 상대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한 걸음 먼저 피할 수 있지 않겠어요?] 오현은 앙천 대소를 했는데 그 웃음소리는 매우 매섭고 무서웠 다. [으하하하…….] 한동안 웃음을 터뜨리더니 겨우 웃음을 거두고 곡창해를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간이 크구만. 놀랍게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다니, 아 정말 귀여운 녀석이로군.]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몇 마디의 말을 하더니 재차 입을 열었 다. [악인은 물론 한 걸음 먼저 피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내가 공 세를 취하지 않으면 모르되 일단 취했다 하면 방법을 강구해서 그를 끌어안게 될 것이고 그런 연후에야 저 나무를 쓰러뜨리게 될 것인데 그 악인이 피할 수가 있겠는가?] 곡창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 대숙도 바위에 치여 돌아가시지 않겠어요?] 오현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맞았네. 그러나 나는 이미 밑천을 건진 셈이니 조금 도 손해볼 것이 없지 않은가? 자네는 좀 다가와서 나의 몸을 좀 부축해 주게나. 나는 이 두 다리를 치료할 희망이 있는지 좀 알 아봐야겠네.] 곡창해는 자기 일처럼 느껴져 그의 몸이 더러운 것을 의식하지 않고, 재빨리 다가가 그의 겨드랑이를 부축하고 힘주어 그를 잡 아 일으키려고 했다. 오현은 제대로 설 수가 없자 길게 탄식을 하더니 곡창해의 손 을 붙잡고 말했다. [앉혀주게. 시험해 볼 것 없네.] 곡창해는 그의 손가락 힘이 기이할 정도로 세다는 것을 느꼈 다. 그리고 그 즉시오현이라는 사람의 두 손에 이토록 커다란 힘이 있다면, 마땅히 바위를 잡고 몸을 일으켜 두 다리를 쓸 수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부축해줄 필요가 없으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게 되자 그는 대뜸 오현이 일부러 구 실을 붙여 자기를 오현의 곁으로 다가오도록 속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자기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 것은 분명히 따로이 어떤 음모가 있는 모양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그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헤아려 보았다. 그는 자기가 반드시 한걸음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낼 수 있어야 그가 미처 손을 쓰기 전에 방법을 강구해서 해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재빨리 궁리를 하게 되었을 적에 귀에 오현의 처연하게 내쉬는 한숨소리와 더불어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두 다리는 결코 회복될 가능성은 없을 것 같군. 이 오현이 강호를 수십 년간 종횡(縱橫)해 왔는데 이제는 이와 같은 처지 에 빠지게 되고 말았구나. 비단 원수들이 좋아하게 될 뿐만 아 니라 친구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다투어 나의 곁에서 떠나가 지 않았는가 말이다.] 곡창해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좋은 영감이 떠올랐다. [오 대숙께서는 친구가 없다고 하셨지요?] 오현은 눈을 부릅뜨고 되물었다. [나에게 어째서 친구가 없다는 것인가?] 곡창해는 어깨를 으슥했다.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든 재물이 있고, 세력이 있게 되었을 적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친구가 되어 주지. 그러나 지금 나와 같은 몰골 이 된다면 그 누가 나와 친구가 되고자 하겠는가?]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았는데 그 모양이 무척 끔찍할 정도로 무서웠다. 곡창해는 벼락같이 전신의 털과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 꼈다. 그는 오현이 그와 같이 굶주리고 갈증을 느끼는 모습에서 상대 방이 자기를 가까이 다가오도록 꼬득인 것은 자기를 죽여서 피 를 마시고 살을 씹어 먹을 뜻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 았다. 그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으나 얼 굴에는 여전히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지으며 웃어보였 다. [알고보니 그랬었군요. 불초는 이 세상 일을 잘 모르기 때문에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군요. 하지만…….] 오현은 흉칙하게 한번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말이 너무 많군.] 곡창해는 담담히 말했다. [불초는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하던 참입니다. 오 대숙께서 지 금 목 마르고 배가 고프다면 어째서 저를 시켜 재빨리 새나 짐 승들을 잡아서 불에다 구워 배를 채울 생각을 하지 않죠?] 오현의눈동자가 이리 저리 굴렀다. 마치 그 계책이 통할 수 있을런지의 여부를 고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곡창해는 마음속으로 매우 긴장되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꽤나 좋은 생각이군.] 곡창해는 그 즉시 마음이 놓이게 되고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오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 조그만 여우는 나를 속일 생각은 그만두는 것이 좋 을걸. 너는 그 기회를 빌어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 아니냐?] 곡창해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게 되었다. 오현은 그의 표정을 보고는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는 듯 냉 소를 띠었다. [정말 교활하기 이를 데 없군.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를 상대하 게 되었으니 헛되이 마음 고생만 하게 되었군.] 그리고 그는 처절하고도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 웃음소리는 매우 흉악했다. 곡창해는 자기가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까지 간신히 숭산 소림 사에 도달하기는 했으나 독각룡왕 응진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 고 이 악인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고 생각하니 가슴 가득히 울분 이 치밀어올랐고, 그 울분을 쏟아놓을 상대가 없는지라 그저 하 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을 불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오현은 여유 있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의 기민함과 총명함, 그리고 용기로 볼 때에 실로 무림에 서 다시 만나보기 힘든 훌륭한 인재일세. 그러나 애석하게도 소 림사의 사람들은 눈은 있어도 눈동자가 없어 그만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 셈이지.] 곡창해는 숨을 몇 번 몰아쉬고는 성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나를 먹어치우겠다면 빨리 손을 쓸 것이지 웬 말이 그 렇게도 많으시오?] 오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봐라? 원래 네 녀석도 내가 네 녀석을 잡아먹고자 한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군. 나는 다만 네 녀석이 내가 네 녀석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만 알고 있는 줄 알았지! 그러나 이 제 더욱더 자네의 용기와 담력이 이 세상을 통털어도 보기 드문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오현으로서는 역시 탄복해마지 않는 바일세.] 곡창해는 골이 나서 쏘아붙였다. [당신같이 잔혹하고 의리 없는 자가 탄복하든 탄복하지 않든 나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소이다.] 오현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욕 한번 잘 했다. 자네를 속여서 다가와 나를 부축해서는 걸 음마를 시험해 보도록 해놓고 그 기회를 틈타서 자네를 잡았으 니 정녕 의리를 저버리는 행동이지.] 곡창해는 오현이 놀랍게도 자기 자신이 하는 욕을 잘 했다고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이렇게 더 더욱 할 말이 없어진 그는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곳에서 죽게 되는 것을 아버님과 어머님이 전혀 모르 고 계실 것을 생각하니 정말 속이 쓰리구나.' 오현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여러 점에서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군. 우선 지금 자네가 보여준 그와 같은 반응이 뭇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단지 자네의 출신만 하더라도 범속하지 않은 데 소림사로 달려와 무예를 배우겠다는 이 한 가지만 하더라도 나로서는 크게 이해할 수 없어 의혹을 느끼는 일일세.] 곡창해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 대숙이 그와 같은 점을알아본 데 대해서 저로서도 무척 탄복하는 마음이올시다.] 오현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말머리를 돌 렸다. [이제서야 나는 응진이 이 십 년 동안 살아서 당한 고통이 정 말 견디기 어려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네. 과거 그는 얼마 나 늠름한 호걸이었던가. 그러나 이 십 년 동안 마치 맹호가 감 금되듯 모든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지 않았는가 말일세.] 곡창해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오 대숙은 응선배님을 아십니까?] 오현은 대답했다. [그렇다. 하지만 그와 친한 사이는 아니야. 그의 일에 대해서 나는 가장 자세하게 알고 있지. 왜냐하면…….] 갑자기 그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곡창해는 크게 실망을 했다.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상대방의 말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 는데 말이 뚝 끓어졌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그는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 일 이 없도록 다그쳐 묻지를 않았다. #3594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9.2/4 괴인이 일러준 10/07 21:19 328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9.2/4 괴인이 일러준 계책 오현의 다섯 손가락이 갑자기 힘을 가중시키기 시작했다. 곡창 해는 팔뼈가 바스라질 것처럼 격렬한 아픔을 느꼈으며 자기도 모르게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오현은 냉랭한 어조로 다그쳤다. [너도 응진을 알고 있느냐? 네가 이 골짜기에 온 것은 그와 관 계가 있으냐, 없느냐? 빨리 말해라. 그렇지 않을 때 나는 네 뼈 를 부러뜨리고 말겠다.] 곡창해는 이때 갑자기 천마심법을 떠올리고 재빨리 운기조식을 하자 대뜸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상대방의 손아귀에서 자기 자신의 팔을 빼낼 수 있을런지 알 수가 없었 고, 더더욱 상대방이 입을 벌리고 깨물까봐 감히 경거 망동을 하지 못했다. 천마심법이 신기하고 오묘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곡창해는 어떻 게 그 진력을 운용하는 것인지 그 요결을 배운 바 없었고, 또 전혀 무공의 수법을 모르기 때문에 적의 손아귀에서 자기의 팔 을 뽑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지 않고그가 팔을 빼려고 시도를 했다면 오현은 깜짝 놀 란 끝에 급히 입을 벌리고서는 그의 숨통을 깨물었으리라. 곡창해는 한가닥 숨을 몰아쉬고 대답했다. [물론 응선배님과는 크게 관계가 있소이다.] 오현은 말했다. [흥, 정말 묘하게 되었군. 지금 소림사의 전 승려들이 모조리 달려들어 구원을 한다 하더라도 자네의 운명을 되돌려 놓지는 못할 것이네.] 곡창해는 대답했다. [소림사의 스님들이 나를 구하러 올 턱이 없지요.] 오현은 으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곡창해는 말했다. [제가 이 숭산의 소림사로 찾아온 것은 바로 응선배님의 문하 제자로 들어갈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뜻을 펼칠 수가 없었소이다. 다른 스님들은 나를 업신여기는 것 같았고, 그래서 매일 물을 기르고 나무를 해오던중 끝내 멋 모르고 이 골짜기에 들어서게 된 것이외다.] 오현은 '아' 하는 탄성을 질렀다. [아, 원래 자네가 말하고자 한 것은 그와 같은 관계였군. 자네 는 올바르게 파악한 것일세. 소림사에서는 오직 응진만이 제일 고수이고 천하무적이라네. 만약에 그에게 무예를 배우지 못한 다면 일찌감치 다른 문파로 투신하는 것이 훨씬 나를 것이네.] 그는 갑자기 깊은 생각 속에 빠졌다. 곡창해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오현은 깊은 생각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는 흉악한 어조로 물었다. [그의 추한 일은 천하에서 모두 알고 있는데 자네는 어찌하여 여전히 그의 제자로 들어가려고 했는가?] 곡창해는 잠시 생각해 본 이후 대답을 했다. [이것은 어머님의 뜻입니다. 그 어르신께서는 저보고 소림사로 가서 응선배님을 사부로 모시라고 했소. 그리고 저는 길을 오다 가 그분에 관한 옛날 일을 들을 수가 있었소.] 오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이 아이는 어머님의 명을 받들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부친은 이미 작고한 모양이로구나. 그의 어머니는 비록 무림에 몸을 담 고 있는 사람이지만 어쩌면 강호에 떠돌아다니는 사람들과 접촉 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응진이 다만 소림의 제일 고수라는 사실만 알았지 그가 일으킨 추문을 알지 못하는 가 보구나.' 그는 잠시 동안 생각해 본 이후에 겨우 입을 열고 물었다. [자네는 지금도 응진의 문하제자로 들어갈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가?] 곡창해는 쓰디쓰게 웃었다. [농담하지 마십시오. 내가 생각해도 소용없는 일이고, 생각하 지 않아도 소용없는 일이외다.] 오현은 넌지시 물었다. [만약에 내가 자네를 놓아서 살려주면 자네는 여전히 그럴 생 각이겠지?] 곡창해는 속으로 궁리했다. '그의 이 말은 무슨 뜻일까? 혹시 정말 나를 놓아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대답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소.] 그는 상대방의 얼굴 표정을 슬쩍 곁눈질하고는 갑자기 잘못되 었다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어머님의 명령을 어기기가 어려우니 이것이야말로 나 로서는 정말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이구려.] 오현은 천천히 말했다. [내 자네에게 알려줌세. 응진은 실제에 있어서 그와 같은 추악 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네.] 곡창해는 마음속으로 놀람과 기쁨을 함께 느끼고 말했다. [오 대숙께서는 나를 속이지 마시구려. 그 일은천하의 사람들 이 모두 다 알고 있으며 그 자신도 부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현은 자신 있게 말했다. [자네는 내 말을 믿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네. 그는 정말 결백 하며 무고한 사람일세. 그러나 그날의 그와 같은 형세하에서 그 는 근본적으로 부인할 수가 없었다네.] 곡창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 대숙께서는 어떻게 그가 무고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요?] 그는 겉으로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속으로 매우 긴장하 고 있었다. 오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그 함정은…….]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고, 잠시 생각 에 잠긴 후 겨우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일세. 자네는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인가?] 곡창해는 감히 다그쳐 묻지를 못했다. [오 대숙의 말투로 미루어 보아 거짓은 아닌 것 같군요. 저는 믿겠소!] 오현은 다시 질문을 던져왔다. [그렇다면 그를 사부로 모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곡창해는 갑자기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 사람이 그토록 많은 말을 한 것은 아마도 내 자신이 응진 선배님을 사부로 모시고자 하는 마음을 굳건히 하기 위한 것인 가 보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나가 응진을 사부로 모시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그는 생각에 잠긴 척 뜸 들이고 나서는 입을 열었다. [저는 물론 그분을 사부로 모시고 싶소이다.] 오현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되었네. 우리 한번 거래를 하는 것이 어떤가?] 곡창해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거래를 한다는 말이오?] 오현은 대답을 했다. [나는 자네가 응진의 문하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 주지. 그러나 자네는 응진으로부터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내어 이 곳으로 와서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일세.] 곡창해는 자세히 생각을 해 보았다. 이번 거래는 마음놓고 해 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즉시 입을 열었다. [좋지요. 그러나 오 대숙께서 저를 믿을 수가 있겠소?] 오현은 고개를 쳐들고 한참 동안 생각해 보더니 갑자기 손을 놓아주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를 믿을 수밖에 없네. 자네가 만약 나를 속인다면 나는 전혀 방법이 없네.] 이와 같은 변화는 곡창해로서도 정녕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 이었다. 그는 정말로 이대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치 고 싶었으며 영원히 다시 이 오현이라는 괴인을 만나고 싶지 않 았다. 이때 오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의 이 거래는 매우 공평하기 짝이 없어서 어떤 사람에게 도 상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니까 내 생각으로 자네가 틀림없이 약속을 지켜서 일을 해주리라고 믿네.] 곡창해는 말했다. [대장부의 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했으니 오 대숙께서는 얼마든 지 마음을 놓으셔도 좋소이다.] 오현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매우 좋네. 먼저 자네가 사부를 모시게 될 방법을 이야기하 지. 소림사의 규칙에 대해서 나는 모두 알고 있네. 그렇기 때문 에 자네가 만약에 순순히 예의를 갖추어 주지승을 만나서 찾아 온 뜻을 말하면 틀림없이 그들은 방법을 바꾸어 거절을 할 것이 네.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반드시 억지로 못된 짓을 해서 그들 로 하여금 저지할 방법이 없도록 만들어야 하네.] 이 몇 마디의 말을 듣고 곡창해는 크게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 꼈다. '상대방 역시 오랫동안 강호에서 떠돌아다닌 노련한 사람 같구 나. 입을 열자마자 요점을 말하는군.' 오현은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가 절로 돌아가는 즉시 불을 질러 절을 태울 준비에 착수 하도록 하게.] 곡창해는 대경 실색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그들 스님들은 모두 다 무공에 정통 해서 일단 손을 쓰게 된다면 나를 때려죽이고 말 것이외다.] 오현은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조금이라도 걱정할 것 없으니 안심을 하게. 자네에게 불을 지를 용기만 있다면 그들은 결코 감히 자네에게 독수를 쓰 지 못할 것이네. 사실 그와 같은 일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누 구든 자네가 어떤 사람의 교사를 받아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짐 작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반드시 똑똑히 알아내려고 할 것이 네.] 곡창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지르라면 불을 지르지요. 그러나 불을 지른 이후에는 어 떻게 하지요.] 오현은 설명하듯 말했다. [이 일은 지극히 엄중한 일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방장에게 어 떻게 조처할 것인지 지시를 내려주십사 하고 품하게 될 것일세. 그렇게 된다면 방장은 틀림없이 친히 자네를 불러 심문을 할 것 인데 그때 자네는 그에게 자네의 소원을 이야기하도록 하게.] 곡창해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방장대사께서 나의 부탁을 들어주리라고는 볼 수 없지요. 더 군다나 불을 지른 죄를 따지려고 들 것이 아니겠소?] 오현은 여전히 자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는 반드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응진은 방장의 사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그는 일파의 장문인인 만큼 자연 히 반드시 웃어른을 존경하는 본보기를 솔선 수범해 보이기 위 해서라도 그로서는 자네를 응진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없을 것 이고, 응진이 자네를 거두느냐 거두지 않으냐 하는 것은 그와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일세. 그의 생각으로 응진이 자네가 그토록 대담하고도 망령된 행동을 했다면 틀림없이 제자로 거둬들이려 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네.] 그는 득의에 찬 냉소를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흥, 그러나 소림사 방장대사는 이번에야말로 잘못 보게 된 것 이지. 응진은 자네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보기만 하면 반드시 거두어들일 것이네. 소림사에서는 모르지. 그의 눈만이 자네의 비범함을 알아볼 것이네.] 곡창해는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그만 오현이라는 사람이 지기(知己)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현은 다시 설명하듯 말했다. [자네가 불을 지를 때 반드시 별로 중요하지 않는 집을 찾아 손을 써야 하네. 만약에 장경각 같은 중요한 곳을 불지르게 된 다면 그야말로 살아 남지 못하게 될 것이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에게 부탁해서 알아보려고 하는 일은 두 가지의 방 법이 있네. 이 두 가지의 방법은 자네가 어느쪽을 택한다 하더 라도 통하게 될 것이네.] 곡창해는 물었다. [두 가지 방법 다 통할 수 있다고요?] 오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네. 그러나 이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매우 말하기 어렵 네. 그러니까 어느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는 반드시 자네가 스스 로 알아서 고려해야 할 것이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나는 이십 년 전에는 본래 강남(江南)에서 활약한 독행극도 (獨行劇盜)였었네. 몇 년 동안 재물을 약탈하거나 성품을 가로 채고 사람을 죽인 적이 수없이 많았다네. 그때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가공량이 갑자기 강남의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게 되었을 적에 나는 그가 틀림없이 나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생 각하고 즉시 못된 행동을 그만두고 잠적하여 이름마저 감추었 네. 다행히 그때 나는 이미 많이 저축해 놓았기 때문에 먹고 입 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네. 그저 매년 외출하며 먼 곳으로 가서 한 탕을 하기만 하면 다시 손을 쓸 필요가 없었네.] 곡창해는 물었다. [오 대숙께서는 가대협을 만나신 적이 있나요?] 오현은 대답을 했다. [물론 본 적이 있지. 그러니까 그가 아직 강남으로 돌아와 살 기 훨씬 전에 나는 일부러 북쪽으로 그를 찾아가 그와 무공을 인증(印證)한 바가 있네. 그때 나는 젊고 오기가 대단해서 무척 비범하다고 자부했었네. 그러나 겨루어본 끝에 가공량의 무공이 지극히 정심(精深)하고 천강수의 위력이 무궁하여 필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나중에 고향으 로 돌아와 정착하게 되었을 때 나는 감히 다시 사건을 일으킬 수 없었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악을 원수처럼 미워했기 때문에 나의 목숨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일세…….] #3601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9.3/4 괴인이 일러준 10/08 14:27 300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9.3/4 괴인이 일러준 계책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갑자기 하늘을 우러러 웃었다. [하하하…… 내가 어째서 그와 같은 일들을 자네에게 이야기해 야 하지? 어쨌든 그 일은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에 일어났네. 당시 나는 천중(川中)에서 한 탕을 한 후에 물건을 가지고 고향 으로 돌아오게 되었지. 그런데 집을 나선 지 오 개월만에 돌아 가는 몸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 그런데 집 문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마음 속으로 움직이는바 있어 즉시 문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네.] 곡창해는 망연해졌다. [그건 또 어째서였지요?] 오현은 대답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네. 사실 집 안에는 오직 마누 라 한 사람뿐인데 마누라는 젊고 아름다웠네. 그녀는 본래 강호 에서 떠돌아다니며 그녀의 부친을 따라 곳곳에서 무예를 팔아 밥을 빌어 먹었던 관계로 일신에 무공을 겸비하고 있었지. 그런 데 삼 년전 내가 악북(鄂北)으로 가서 한 탕을 하게 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그녀가 몸을 팔아 아비를 장사지내려고 하는 광경을 목격하였고,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적지 않은 은자를 주고 즉시 그곳을 떠나오고 말았는데, 뜻밖에도 한 달포쯤 지난 후 내가 성 안에서 산책을 하다가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고 이야기를 했다. [알고보니 그녀의 고향은 선성(宣城)이었네. 그녀는 영구를 모 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가까운 사람이나 친구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정히 방황하던 차에 나를 만나게 되자 매우 기뻐 했었네. 그래서 얼마 후에 그녀는 바로 나에게 시집을 와 내 마 누라가 된 것이지…….] 그는 먼 허공에다가 시선을 던지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이제 이야기는 본론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내가 그 당시 앞으 로 나온 문을 두드리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네. 첫째는 내가 언제나 하인들에게 반드시 문앞을 깨끗이 청소를 해두라고 했었는데 그때 보니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것 같았네. 그 리고 둘째로는 그때 갑자기 나는 그 전해 어느 날 밤 야행인(夜 行人)이 우리 집에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기억에 떠올렸기 때문 일세. 그 당시 나는 홀로 별실(別室)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야 행인의 기척에 술을 깨면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었 는데 칼을 가지고 뒤를 쫓아가 그 야행인의 왼쪽 어깨를 내려쳐 상처를 입혔었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옛날의 광경을 떠올리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숙취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머리는 여 전히 무겁고 맑지 못한 상태였지. 그래서 그 야행인이 도망치는 것을놓치고 말았다네.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자세히 조사해 보 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아낼 수 없었네. 그러다가 그날, 별안 간 가슴속으로부터 그 일이 떠올라 그 야행인이 출현한 방향이 바로 나의 침실에서 달려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일었던 것 일세. 따라서 그와 같은 두 가지 이유로 하여 나는 갑자기 온몸 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떠나고 말았다네.] 곡창해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가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 어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그 일이 응진과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설마하니 그와 같은 이야기가 응진이라는 사람이 바로 음탕하고 호색한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오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녁에 나는 야행인의 옷차림으로 바꿔입고 얼굴에 화장을 한 후 다시 검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야음을 틈타 집으로 몰래 들어갔었네.] 곡창해는 의아하여 물었다. [오 대숙께서 얼굴에 화장을 했다면 검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 릴 필요가 없지 않았나요?] 오현은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다년간 독행대도의 생애를 보내면서도 나 의 참모습이 시종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까닭일세. 생각해보게. 상대방에게 방법이 있어 나의 얼굴을 가린 검은 수건을 거둘 수 있다 하더라도 결코 검은 수건 아래의 얼굴이 여전히 가짜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강호에서 는 얼굴에 칼 흉터가 있는 독행대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고 나의 본래 얼굴 모습에는 기실 아무런 흉터가 없다는 사 실을 모르고 있었지.]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 대숙의 말씀이 옳군요. 다른 사람들은 결코 거기까지는 생 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현은 다시 말했다. [내가 몰래 집 안으로 잠입하게 되었을 적에 멀리 침실에 등불 빛이 은은히 새어나오고 어떤 남자의 모습이 침대가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네. 즉시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가까이 다가가 서 벼락같이 방문을 열어젖혔지. 한 사람이 툭 뛰어나오더군. 방문이 열리자 나는 똑똑히 나의 마누라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 던 것을 기억하고 있네. 툭 튀어나온 사람이 누구인지 자네는 짐작할 수 있겠는가?] 곡창해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일이 응진대사와 관계가 있다면 혹시 그분이 아니겠어요?] 오현은 안색을 굳혔다. [바로 맞추었네. 그자가 뛰어나온 것일세. 나는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노기를 품고서는 무기를 휘둘러 찌르려고 했지. 그 런데 뜻밖에도 응진의 무공은 고강하기 이를 데 없어 대뜸 손을 쓰자마자 내 장검을 빼앗아 갔네. 동시에 한 가닥의 암경(暗勁) 이 엄습해와 내 얼굴에 가린 검은 수건을 거두어 버렸네.] 곡창해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그만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당시 나는 이미 내 자신이 그의 적수가 도저히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는 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네. 그는 나의 얼굴에 흉터를 보고 이미 나의 정체가 독행대도라는 것을 알더 군. 그러나 수년간 나는 이미 종족을 감추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 년간 나쁜 짓을 하지 않은 것을 감안해 놀랍게도 나 를 놓아주더군.]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한 목숨을 건지게 되어 반 달이 지나게 되자 집으로 돌 아가 보았네. 이번에 나는 대낮에 본래의 모습을 하고 되돌아간 것인데 응진은 그때까지도 우리 집에 있더군. 그때 만나서야 가 까스로 마누라가 몸에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네…….] 그는 약간 맥빠진 어조가 되어서는 계속해서 말을 했다. [응진은 바로 사 개월 전에 그 고장을 지나다가 우연히 한 떼 의 무림인물들이 그 고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 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좋지 못한 사람들임을 알고는 그도 머물 게 된 것이고 밤중에 그들의 동정을 살피게 되었는데, 이날 밤 공교롭게도그 한 떼의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가서 노략질을 하 려고 했다는 것이었네. 나중에 처로부터 들으니까 그녀 부친이 임종시에 그녀에게 남긴 한 조각의 은엽(銀葉)이 불러일으킨 화 라고 하더군…….] 재차 그는 말을 멈추고 침을 삼키더니 무거운 어조로 다시 입 을 열었다. [그 은엽은 지극히 이름이 나 있는 숨겨진 보물과 연관되어 있 었기 때문에 그 한 떼의 사람들은 그 한 조각의 은엽을 강탈하 기 위해서 집 안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은엽을 바치라고 강요하 게 되었고 그녀는 저항을 하다가 중상을 입은 것인데 그때 마침 응진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군. 그 바람에 그 한 떼의 사람 들은 눈치 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게 되었고 응진은 나 의 마누라가 중상을 입고 있어서 급히 손을 써야 했기 때문에 그 한 떼의 나쁜 무리들을 뒤쫓아갈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 ….] 곡창해는 공손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여유를 두는 듯 하더니 오현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후로 응진은 매달 한 번씩 찾아와 우리 안 사람을 치료해 주었다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 마누라의 내장이 몇 가지의 장력에 상처를 입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홍발 자 관기(關祺)의 주사장(주사掌)과 독성(毒星) 용해(龍海)의 학 정권(鶴頂拳)이라고 하더군. 만약에 그가 밤낮으로 치료를 하게 된다면 일 년이 걸려서야 가까스로 완전히 회복할 수가 있는데 이와 같이 매달 한 번씩 치료해서는 반드시 삼 년이라는 세월이 걸려야 한다는 것이었네.] 곡창해는 불쑥 입을 열었다. [응진 선배님께서는 조금도 오 대숙이 바로 그날 밤의 야행인 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을 하지 않던가요?] 오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고 나 역시도 조금도 그런 기색을 비추지 않았다네. 나는 겉으로는 정당한 장사를 하는 사람이니 까 그 누구도 내가 유명한 대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내 마 누라도 모르고 있었다네. 나는 유심히 나의 처와 응진 사이에 어떤 애매한 일이 있어나 하고 살펴보았지만 조그마한 실마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네…….] 그는 고개를 쳐들고 곡창해를 바라보면서 다시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그날 내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적에 내 마누라는 이 미 평소처럼 걸음마를 할 수 있게 되었네. 몇 달이 지나게 된 이후에는 조금도 내상이 치료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네. 그렇 지 때문에 나는 완곡하게 응진이 매달 찾아와서 그녀를 치료하 는 것을 거절하고 말았다네…….] 말을 해놓고도 그는 약간 씁쓸한지 입맛을 다시며 다시 이야기 를 계속했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쳐 나는 그와 대면을 한 사이 이미 그의 입으로부터 적지 않은 무공의 상승(上乘) 요결을 훔쳐 배우게 되었네. 그리고 몇 년 동안 고생해서 연마를 한 끝에 나의 일신 에 지닌 무공은 몇 배로 정진하게 되어 이미 옛날에 비할 수 없 을 정도가 되었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두 달 전에 소림사로 달 려와 응진을 만나고자 했으나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네. 그래서 나는 크게 소란을 한바탕 벌이게 되고 끝내 겹 겹이 에워싼 사람들을 뚫고 나오게 되었는데 옛날의 재간 같았 더라면 결코 소림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네.] 곡창해는 근 반나절이나 걸려서 서론에 불과하던 이야기를 듣 고 있다가 이제서야 본론으로 들어가자 정신을 집중하고 귀를 바짝 곤두세우게 되었다. 오현은 천천히 입을 열고 말했다. [나의 처는 이미 삼 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죽고 난 후에 몸에 네 곳의 상흔을 발견하게 되었고 나는 그제서야 응진 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네. 그러나 나는 다 른 것은 마음에 두지 않고 다만 응진과 그녀 사이에 어떤 애매 한 관계가 있었느냐 하는 것을 알고자 했을 뿐이었네. 왜냐하면 그녀 부친이 그녀에게 준 그 은엽을 나는 본 적이 없었네. 그녀 의 말에 따르면 그 날 밤 이미 그 사람들에게 빼앗겼다고 하지 만 내가 응진의 입을 통해서 알아낸 자료들에 의하면 그 원수들 이 그녀에게 형벌을 가하고 있을 적에 응진이 달려왔다는 점으 로 미루어 그 사람들이 은엽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일세…….] 그는 잠시 동안 말 없이 생각해 보는 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 었다. [하지만 다년간에 걸쳐 되풀이해서 요모조모로 생각을 해본 끝 에 응진이 그와 같이 비열한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는 한평생 일을 처리함에 있어 광명 정대하고 소탈하여 세속 적인 예법에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오해를 불러일 으켰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그리고 예전에 나의 칼을 어깨 에 맞은 야행인도 결코 그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 네. 기실 내가 사용하는 도법은 비록 기이할 정도로 매섭고 빠 르다고 하지만 응진의 공력으로 미루어 볼 때 상처를 입을 리 없는 것일세. 물론 이는 근래 나의 무공이 증진한 후에야 가까 스로 깨달은 이치일세.] 곡창해는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와 같은 말을 저로서는 응진 노선배님에게 여쭈어 보기가 난처하군요.] 오현은 넌지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한 것일세. 하나 는 자네가 직접 그에게 그와 같은 일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이고, 다른 방법은 자네가 몰래 그의 몸에 지니고 있는 물건 을 뒤적여 그 물건들 가운데 한 조각의 은엽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그의 왼쪽 어깨에 칼에 의해 입은 상처가 있는지의 여부 를 살펴보라는 것일세.] 곡창해는 되물었다. [오 대숙께서는 그의 무공이 고강하기 때문에 그 한 칼에 얻어 맞을 리가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현은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그 가운데의 커다란 관건이 되는 것일세. 십 년 전 그는 허일산을 살해하는 일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허일산의 의자 양진은 소림의 여러 장로들 앞에서 허령주가 그때 독문의 암기인 오망주(烏芒珠)를 던져 흉수의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혔 다면서 옷을 벗기고 살펴볼 것을 주장했었지.] 곡창해는 물었다. [만약에 응진 선배님이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자 연히 옷을 들추고 살펴보았을 터인데 그는 그와 같은 요구를 거 절했습니까?] 오현은 천천히 말했다. [그는 결코 거절한 것이 아닐세. 그러나 그 당시의 소림방장 광덕대사는 응낙하지 않았네. 그 자리에서 응진의 두 다리를 분 질러 산벼랑 위의 움막집에서 세월을 보내는 처벌을 내리도록 결정해버렸지.] 곡창해는 망연해졌다. [그건 어째서지요?] 오현은 얼굴빛이 음침해지며 말했다. [그것은 바로 나가 응진의 위인됨이 광명 정대하고 소탈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를 의심하고 믿을 수 없는 까닭이 되는 것일세. 그의 왼쪽 어깨에는 틀림없이 상처를 입은 흉터가 있을 것이네. 광덕대사의 안력(眼力)이 얼마나 고강한가? 옷을 격하 고도 단번에 보고 알아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옷을 벗겨서 살펴보도록 하락을 하지 않았다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오망주 에 의해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고 과거 나의 예리한 칼에 맞아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하는 바일세.] #3605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1.9.4/4 괴인이 일러준 10/09 01:13 315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1권 9.4/4 괴인이 일러준 계책 곡창해는 물었다. [오 대숙께서는 저에게 그의 어깨에 있는 상처 자국을 보라는 것입니까? 만약에 오망주에 의해 상처를 입은 것이라면 그는 그 날 밤의 야행인이 아니겠군요?] 오현은 설명하듯 말했다. [오망주에 상처를 입으면 한평생 다섯 점의 검은 자국, 즉 흑 인(黑印)이 남게 되네. 만약 그렇다면 그 야행인은 물론 그가 아니지. 하지만 그 상흔은결코 오망주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닐 게야.] 곡창해는 가슴이 한차례 크게 뛰노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오 대숙께서는 어떻게 아시죠?] 오현은 냉큼 그 말을 받았다. [나는 물론 알고 있지. 왜냐하면…….]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재빨리 화제를 돌려서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자네는 묻지 말게. 자네는 그의 상 처 자국을 살펴보게 되었을 때에 두 가지 점을 기억해 두게. 첫 번째는 그것이 칼에 입은 상처이고 다른 기타의 원인에 의해서 형성된 흉터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일세. 그리고 두 번째로 그 상처의 각도를 살펴보아야 하네. 왼쪽 팔과 평행을 이루어야지, 옆으로 기울어지거나 삐뚤어진 것은 모두 다 나의 칼에 입은 상 처가 아닐세.] 곡창해는 신중히 말했다. [저는 도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조사를 해야 괜찮을런지 잘 생각을 해봐야겠군요. 그러나 조사를 한 후에 오 대숙께는 어떤 이득이 있지요? 그렇게 심력(心力)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하 는 것이죠. 만약에 저라면 바로 먼저 그 무슨 홍발자니 독성이 니 하는 원수들을 찾아서는 원한을 갚겠소이다.] 오현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자네도 생각을 해보게. 만약에 내 마누라가 정숙하지 못했다 면 내가 굳이 그녀를 위해서 원한을 갚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일세. 다만 조사해서 그가 그날 밤의 나의 칼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 다면 그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네. 따라서 자연히 은엽이 그의 수중에 있지 않다는 것도 증명되는 것이네. 그때 나는 한마음 한뜻으로 원한을 갚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응진 본인에 대해서도 뭐라고 말할 수 없 는 이득을 베풀어 줄 수가 있다네…….] 그는 눈에 흥분의 빛을 띄우고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알고보면 이 일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하지. 내가 한 사 람의 이름만 들먹이게 된다면 그는 십 년 동안 써 왔던 억울한 누명을 깨끗이 벗게 될 것이네.] 곡창해는 가슴속에서 크게 파도가 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야말로 정말 지극히 중대한 일이라고 느꼈다. 만약 그가 응진이 쓰고 있는 억울한 누명을 벗겨줄 수 있다면 그때 전체의 소림파 사람들이 모두다 그에게 사의를 표하고 존경을 표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는 천천히 물었다. [불초가 알아내어 돌아와 전해주는 소식을 오 대숙께서는 믿을 수가 있겠소이까?] 오현은 되물었다. [만약에 내가 자네를 믿을 수 없다면 어찌 자네에게 부탁을 하 겠는가?] 곡창해는 엄숙히 말했다. [오 대숙께서 그렇게 신임하시니 불초는 이제 절로 돌아가 보 겠습니다.] 곡창해는 소림사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오현을 위해서 약간의 음식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소림사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도 즉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생각을 하게 되었고, 오현의 말을 잘 검토해본 후 한번 모험 삼아 시험해볼 가치가 있다고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날 밤에 행동을 개시했다. 아니나다를까 오현이 예측했 던 대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곡창해는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잡히게 되었고 방장인 홍경대사 가 친히 불을 질러 절을 태우려고 한 까닭을 심문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심문은 한 칸의 정사(精舍) 안에서 거행이 되었는데 이 자리에는 세 사람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중앙 에는 홍경대사가 앉고 왼쪽에는 홍일(弘一)대사가 앉았으며 오 른쪽에는 홍력(弘力)대사가 앉아 있었다. 이 세 분의 대사들은 모두 육순의 나이였으나 보기에는 겨우 사오십밖에 되지 않은 듯 무척 젊어 보였다. 이 밖에도 총지객 정수선사와 감리승인 덕광대사도 있었다. 그 러나 그들 두 명의 화상들은 곡창해를 정사 안으로 압송하다시 피 데리고 들어간 이후에는 말없이 조용히 한켠으로 물러났다. 홍경대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좌는 이미 곡창해 네가 이 절로 들어오게 된 경과를 알아보 았다. 그들이 품하는 바에 의하면 네가 향적주(香積廚)에 소속 되어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으나 그런대로 조심을 하고 부지런한 편이었으며 한번도 실수가 없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젯밤에 갑자기 불을 지른 것은 어떤 연고인고?] 이 소림사 방장의 어조는 매우 온화하고 느릿했으며 무척 자상 한 편이었다. 곡창해는 조금도 그를 경시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으며 되 려 매우 존경하는 마음이 일었다. '이분이야말로 무림에서 모두 다 흠모해마지 않는 명문대파의 수뇌인물에 부끄럽지 않구나.' 그는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얼굴 표정과 태도에 드러내면 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본래 감히 무례하고 완악한 일을 하려는 생각이 없었습 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일찍 방장대사를 뵈올 수만 있었다면 저는 결코 그런 망령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른쪽 자리에 앉아있는 홍력대사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두눈에서 엄하고도 매서운 광채를 쏟아내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 전에 홍경대사는 조용히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어떻게 해서 하는 소리인지, 어디 천천히 설명해보도 록 하거라.] 곡창해는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천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달려온 것은 바로 응진 선배님 의 좌하로 들어가 무공을 갈고 닦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로 들어오게 된지 오래 되었으나 전혀 그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 며 응진 선배님의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부득이 그와 같은 하책(下策)을 써서 방장 대사를 놀라시게 했습니다.] 홍경대사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좌우를 돌아보더니 입을 열 었다. [사제들이 물어볼 말이 있다면 즉시 말들을 해보게나.] 홍력대사는 매서운 눈길로 곡창해를 바라보더니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는 아직도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결코 네 스스로 이곳에 와 서 무예를 배우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너에게 이곳으로 가라고 시켰느냐?] 곡창해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저의 어머님의 명령이십니다. 저의 어머님은 당금 천하에서 오직 응진 선배님의 무공이 가장 고강하고 인정이 많고 협의심 이 깊을 뿐만 아니라 정의감이 강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삼가 어머님의 명령을 받들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고생을 마다하 지 않았던 것입니다.] 홍력대사는 다시 더 그 일에 대해서 다그치지 않았다. 그 역시 도 오현처럼 곡창해의 어머니가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기는 하나 다년간 강호와 연락이 두절된 나머지 응진이 일으킨 추문을 모르는 모양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홍력대사는 다른 질문을 다시 던졌다. [어젯밤에 불을 지르라고 계책을 일러준 사람은 누구냐?] 그는 역시 노련한 인사다웠다. 곡창해는 크게 난처했다. 속으로 만약에 거짓말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웃어른을 기만하게 되는 것이고 만약에 사실대로 자백 을 하게 된다면 오현이 거북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침묵을 했다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응진 선배님을 배알할 수 있을런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 면 더없이 고맙겠습니다.] 그는 중간 자리에 앉아 있는 홍경대사에게 말을 한 것이었다. 홍경대사가 정히 대답을 하려 했을 때 왼쪽 자리에 앉아있던 홍일대사가 우렁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강호에서 많은 무림의 호걸들에게 추적을 당한 일에 대 해서 불좌는 이미 모두 알고 있다. 네가 만약에 결백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응진 사숙을 배알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라. 그러니 너는 역시 먼저 남들이 모르는 사연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곡창해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거나 이상하게 생각 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몸에서 그 금낭을 꺼내 두 손으로 바치 며 입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곽 대숙께서 저에게 갈무리하라고 준 물건입니 다. 소문에 들으니까 관가보나 은도부, 그리고 흑삼방 등의 사 람들은 모두 다 이 금낭을 얻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곽 대숙 과 저의 집안은 보래 대대로 사귀어온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번에 곽 대숙께서는 저의 어머님에게 저를 숭산까지 바래다주겠 다는 약속을 한것인데 뜻밖에도 중도에서 관가보의 사람들에게 저지를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는데 저로서는 이 금낭이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조금도 모릅니다.] 정수선사는 앞으로 나와서 그 금낭을 받아 홍경대사의 앞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그러자 홍경대사 손을 내저었다. 정수선사는별 수 없이 금낭을 든 채 한 옆에 시립해 섰다. 홍일대사는 질문을 던져왔다. [너는 줄곧 저 금낭을 열어보지 않았더란 말이냐?] 곡창해는 순순히 대답했다.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홍력대사는 입을 열고 물었다. [어째서 열어보지 않았느냐?] 곡창해는 늠름한 기상으로 대답을 했다. [곽 대숙께서는 저를 믿고 모든 사람들이 욕심을 내어 침을 흘 리는 물건을 부탁한 것인데 제가 어찌 그분의 기대를 저버릴 수 가 있었겠습니까?] 홍일대사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너는 신의를 지킨 사람으로서 사사로이 저 금낭을 보지 않은 것은 좋다고 하자. 그러나 지금은 너 한 사람을 위해서 저 물건 을 바친다는 것은 여전히 곽군(藿軍)의 부탁을 저버리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 곡창해는 정신을 가다듬고서는 대답을 했다. [세 분 대사께서는 강호에서 명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로서는 세 분 대사님 을 믿을 수가 있으며 또한 소림사라는 세 글자를 믿을 수가 있 기 때문에 그 물건을 바친 것이니 대사들께서는 마음대로 결정 을 내리십시오.] 홍경대사는 그의 대답이 전혀 막힘이 없고 또한 음성이 똑똑할 뿐만 아니라 한마디 한마디 말이 매우 적절하고 예의를 다 갖추 고 있어 곡창해에 대해서 새삼 따로이 봐야겠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홍일대사도 입을 열지 않았고 홍력대사 역시 말 을 하지 않았다. 홍경대사는 한동안 생각을 해보더니 손을 뻗쳐 그 금낭을 달라 고 해서 만져보다가 다시 정수의 손바닥에 놓으며 입을 열었다. [사제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홍일대사는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결코 범속하지않으니 반드시 사숙에게 보내서 사 숙께서 직접 만나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홍력대사는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이 아이는 대충 대의의 인사가 아니면 지극히 간악하고 교활 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응사숙께서 는 십여년 동안 좌절감을 느낀 끝에 세상의 일에 대해서 다시는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소. 그렇기 때문에 역시 이 아이를 사 숙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들 두 사람은 각기 찬반 양론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홍경대 사가 최후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홍경대사는 한참 동안 생각 잠겨 있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사숙께서는 웃어른이시니 이번 일에 대해서 응사숙을 속여 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그는 정수선사 쪽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수, 네가 먼저 가서 응 사숙조를 알현하고 이 아이를 만나 주실 것인지 그 여부를 여쭈어보고 오도록 해라.] 정수는 금낭을 곡창해에게 넘겨주고 총총히 정사를 나섰다. 그 러나 그는 얼마되지 않아 돌아와 품했다. [응 사숙조께서는 곡창해를 만나보겠으니 데려오라는 유시를 내렸습니다.] 홍경대사는 손짓을 해 보였다. [곡창해, 저 사람을 따라가도록 해라!] 곡창해는 크게 기뻐 정수선사를 따라 정사 밖으로 나갔다. 얼마나 많은 대전과 법당, 그리고 마당을 가로질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끝내 한 복도를 따라 걸어가다가 하나의 월동문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는데 정수선사는 그 즉시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여보게. 자네는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도록 하게.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통보를 함세.] 곡창해는눈을 들어 사방을 살펴보았다. 월동문 안에는 꽃나무 들이 무성한 것이 경치가 매우 아늑하면서도 우아했으며 때때로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동천 복지(洞天福地)로서 도를 닦는 사람들이 은거하기 아주 좋은 곳 이었다. 곡창해는 응진이 벌을 받아 홀로 절 옆에 있는 벼랑 위의 한 채, 활짝 터진 움막집 안에서 외로이 앉아 있다는 말을 들었는 데 이곳에 이르러 새들이 노래를 하고 꽃향기 그윽할 뿐만 아니 라 나무의 그림자들이 바람에 따라 일렁이듯 흔들리는 것을 보 게 되니, 듣는 소문과 크게 달라 그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정수선사는 총총히 달려나오더니 입 을 열었다. [사숙께서는 자네 혼자 들어가서 뵙도록 하라는 분부시네.] 정수선사는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곡창해는 정신을 가다듬고 월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제2권 계속> #3615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0.1/4 소림사에 나타 10/11 02:15 274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0.1/4 소림사에 나타난 두 소녀 눈에 비치는 것은 정제하게 다듬어진 꽃나무와 파랗고 싱그러 운 풀밭이었다. 그 가운데로 돌을 깐 길이 나 있었는데 돌을 깐 길을 따라 꽃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깊숙한 곳에 이르니 바둑알 을 바둑판에 내려놓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와 더욱 아늑하면서 도 운치가 있어 보였다. 곡창해는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가게 되었는데 얼마 후에 한 채의 정교하게 지어진 선원(禪院)이 나왔다. 선원의 문앞 오른쪽의 한 그루 오래 된 나무 아래 두 명의 승 려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 두 명의 승려들은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가까이 이르러서야 그 가운데 한 분은 연세가 무척 많으시지만 정신만 큼은 아직도 또렷또렷한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체구가 우람하고 네모진 얼굴에 키가 컸는데 보기에 기 껏해야 삼십 세 정도로 보였으며 눈을 깜박일 때는 사람을 압도 하는 위엄이 엿보였다. 그런데 이 승려의 이마에는 하나의 혹이 불거져 있어 첫눈에 바로 천하에 명성을 펼쳤던 독각룡왕 응진인 것을 알 수 있었 다. 이때 그는 정히 돌을 들고 깊이 생각에 잠겨 내려놓을까 말까 하는 상태에 있었다. 곡창해는 그래서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가 바둑알을 '딱' 하는 소리와 더불어 바둑판에 내려놓게 되었을 때야 앞으로 나 아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 입을 열었다. [불초 곡창해가 대사님께 인사 드립니다.] 응진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에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맞은편의 노승은 고개를 쳐들고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자네의 웅심(雄心)을 떨 쳐버리지 못했는가?] 응진은 천천히 말했다. [사형은 잘 모르시는구려. 소제가 이 아이를 오라고 한 것은 그저 잠깐 만나보자는 뜻밖에 없었소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아이는 크게 내력이 있는 사람이라 이 소제로 하여금 마음속으 로 매우 커다란 충격을 느끼도록 했으며 오래 전부터 우물의 물 처럼 잔잔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다시 커다란 파도가 이는 것처 럼 울렁거리는구려…….] 그 노승은 빙그레 웃었다. [자네는 어떻게 이 아이가 비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자네 는 그에게 눈길 한번 준 적도 없지 않는가?] 응진은 대답했다. [그의 음성이 우렁찬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바로 성격이 여느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천부적인 재질이 기이할 정도로 뛰어나군요. 그리고 열두 살 먹은 어린애에 불과한데 비 단 진퇴(進退)에 있어서 절차에 맞을 뿐만 아니라 예의에도 어 긋나지 않고 말씨 또한 우아하니, 지극히 교양이 깊다는 것을 알겠구려. 사형도 생각해 보시오. 이와 같은 아이를 가르쳐 낸 집안에서 어찌 소림사로 가 사부를 모시고 무예를 익히도록 했 겠소? 더군다나 소제의 문하로 들어가라고 했겠는가 말이외다.] 노승은 천천히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매우 일리 있는 말이로군.] 그는 조심스럽게 곡창해를 한번 눈여겨 주시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아이의 얼굴 생김새가 매우 훌륭하군. 와잠미에 단봉안을 지녔으니 그야말로 성을 내지 않는데도 절로 위엄이 솟아나는 기개를 크게 나타내고 있군.] 응진은 낭랑히 앙천 대소했다. [하하하…….] 그 웃음소리는 그야말로 구름이라도 뚫을 듯이 울려퍼졌으며 그 바람에 곡창해의 고막이 은근히 아플 지경이었다. 이 웃음소리를 듣고 곡창해는 응진이 지금 마음속으로 무척 흐 뭇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노승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사제가 이토록 즐거워하니, 거기에 어떤 사연이 있는가?] 응진은 웃음을 멈추고 있다가 대답했다. [있지요. 십 년 전 소제가 커다란 변고를 당하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 한 분의 홍분지기(紅紛知己)가 계셨는데 그분은 바로 천 하에서 으뜸가는 여걸이었지요. 그녀는 소제에게 '응진, 그 일 을 저질렀소?'하고 물었소. 소제는 즉시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 했지요.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두 구의 시구를 지어주었지요.] 노승은 천천히 말했다. [그것은 우리들이 도달하기 이전에 발생한 일이로군.] 응진은 대답했다. [맞았소이다. 그녀 자신도 원래는 당대의 고수였습니다. 만약 에 그녀가 그 한차례의 싸움에 가담을 하게 되었더라면 소제는 오늘까지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외다.] 노승은 물었다. [그녀는 바로 천강수 가공량 대협의 부인인 곡홍영이 아닌가?] 응진은 이제서야 눈을 돌려 곡창해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어조 로 입을 열었다. [얘야, 일어나거라. 곡누님이 바로 너의 생신지모(生身之母)이 겠지?] 곡창해는 몸을 일으켜 공손히 대답했다. [바로 저의 어머님이십니다.] 응진은 말했다. [좋아. 오직 곡누님만이 너와 같은 아이를 기르고 가르쳐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분 면전에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존경과고마움을 나타내지 못하 는 것이 한스러울 지경이란다…….] 그는 두 눈에 왈칵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 응진은 하늘을 두고 맹세하건데 틀림없이 너를 천하 무척 의 고수로, 천하에서 숭앙해마지 않는 대영웅, 대협객이 되도록 하겠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것은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지기의 온정에 만분의 일도 보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다.] 이와 같은 말은 그야말로 비분 강개한 말이었으며 또한 깊은 정과 의리를 담고 있었다. 곡창해는 감동하여 뜨거운 눈물을 글썽이게 되었으며 노승도 연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응진은 곡창해를 몇 번 더 훑어보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너와 같은 근골과 자질이라면 설사 옛지기의 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마 나는 가볍게 너를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곡창해는 대뜸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끼며 큰소리로 불렀다. [사부님!] 그렇게 부르짖는 그의 마음속에는 감격과 존경하는 마음이 가 득차게 되었다. 응진은 다시 조용한 어조로 질문을 던져왔다. [너는 집에서 무공을 배운 적이 있느냐?] 곡창해는 한편으로 눈물을 훔치고 한편으로 고개를 흔들어 배 우지 못했다는 시늉을 했다. 응진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을 내불었다. [아, 가형 역시 정말 훌륭하구나. 오직 그만이 누님과 같은 분 을 아내로 맞을 자격이 있다. 가형은 비단 너를 누님의 성을 따 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한사코 너를 내 문하 제자로 들여보내기 위해서 일신에 지니고 있는 절학을 너에게 전수하지 않았구나. 그것이야 말로 천고 이래로 보기 드문 영웅의 흉금(胸襟)이며 호걸의 마음씨가 아니겠느냐…….] 얼마 후에야 그들은 노승이 이미 말없이 자리를 뜬 사실을 알 게 되었다. 응진은 곡창해에게 그 노승이 바로 전임 장경각의 수좌 장로인 광자대사라고 알렸으며 광자대사의 천성이 매우 자상하니 장래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라고 타일렀다. 한참 후에야 응진은 그의 집안 형편을 묻는 것을 멈추었다. 동 시에 그는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흥분을 억제하고 눈을 감고 어떻게 무공을 전수할까를 깊이 생각했다. 그는 곡창해에 대해서 지극히 커다란 야심과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그는 흔히 보는 것처럼 제자를 거둬들이고 쓸데없는 시 간은 추호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응진은 먼저 한 명의 승려를 불러 곡창해를 데리고 그가 거처 할 곳을 마련하도록 했는데 곡창해가 거처할 곳은 바로 이 잠룡 원(潛龍院) 안 응진의 바로 옆방이었다. 소림사의 규칙은 매우 엄했으며 사람의 수가 무척 많은 편이었 지만 이러한 일들은 오직 요직에 앉아 있거나 신분이 숭고한 몇 명의 장로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곡창해가 전임 장경각 장로인 광자대사의 제자가 되었음을 방 장인 홍경대사가 전 소림사의승려들에게 선포했다. 이렇게 되자 곡창해는 홍경대사와 같은 배분의 인물이 되어 대 다수의 승려들이 그를 만나면 그를 향해 공손히 절을 했다. 응진은 방법을 연구하고 검토하기 위해서 사흘 동안이나 조용 히 앉아 시간을 보냈다. 나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 곡창해가 평소대로 아침 문안 인사 를 올렸다. 응진은 지팡이를 들고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얘야, 나를 따라서 너의 사백부님을 만나뵙도록 하자.] 그의 두 다리는 이미 부러져 있기 때문에 한 쌍의 지팡이로 걸 음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곡창해는 바로 사백부님이 전임의 장문인인 광덕대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마음속으로 크게 흥분되어 사부의 뒤 를 바짝 쫓아 걸음을 옮겨 놓았다. 얼마 후 그들은 한 채의 정사 앞에 이르게 되었다. 정사의 사방에는 파란 대나무들이 잔뜩 심어져 있었고, 산바람 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귀를 매우 즐겁게 하는 소리를 내곤 했다. 정사 안은 무척 평온하고 조용했으며 아침 햇살 아래 고색이 창연해 보였다. 응진과 곡창해가 막 문 밖의 마당으로 들어서게 되었을 때 집 안에서 늙수그레하면서 엄하고 힘찬 음성이 들려왔다. [응진, 그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게.] 곡창해는 무척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고 기뻐 앞으로 걸어나가 다가 하마터면 응진의 몸에 부딪칠 뻔했다. 그러다가 그는 깜짝 놀라서는 걸음을 멈추고 앞서 가던 응진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응진이 어째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으며 또 걸음을 정사 안으로 옮겨놓지 않는가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눈을 들어 바라보니 호탕하면서도 소탈하기 이를 데 없 는 사부님이 지금 얼굴 가득 멍한 빛을 띄우고 있을 뿐만 아니 라 눈동자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곡창해는 그만 놀라 정신을 가다듬고 왜 그러는가 생각을 더듬 어보았다. 응진은 이때 길게 장탄식을 불어내더니 입을 열었다. [아, 대사형, 소제는 사형이 한 갑자 이상이나 불심을 닦고서 도 사형의 지정지성(至情至性)의 성격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 을 줄은 몰랐습니다.] 문 안에서 힘찬 음성이 대답을 해 왔다. [소사제는 그와 같은 한가로운 말은 그만하고 그 아이를 데리 고 들어오게. 이 우형이 한번 만나봐야겠네.] 응진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지요.] 그의 두 눈에서 커다란 눈물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재빨리 소맷자락을 들어 눈물을 훔치고 곡창해에게 말했 다. [너는 내 말 속에 서려 있는 뜻을 이해하느냐?] 곡창해는 대답했다. [이 제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제자는 감동해서 참 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의 얼굴 표정은 그야말로 웃는 것인지 울고 있는 것인지 분 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응진은 좀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매우 훌륭하다. 그래야 나의 제자에 부끄럽지 않다. 내 너에 게 일러주지만 너의 대사백부님께서는 비단 무공이 이미 화경 (化境)에 접어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전에 정통하고 공력이 지극히 깊어 수십 년 이래 이미 기뻐하는 감정이나 성을 내는 감정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분은 오늘날 놀랍게도 급 히 너를 만나보겠다는 뜻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첫째로 네가 나 의 제자로서 장래에 나를 위해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 이고, 둘째로 그분께서는 이미 너의 자질이 속세의 인간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만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기쁨을 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벼락같이 하늘을 향해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웃으면서 그는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차려놓은 것은 무척 간단하고 소박했지만 매우 정결하 게 창문은 밝았고 탁자는 깨끗하니 먼지 하나 앉지 않은 상태였 다. #3705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0.2/4 소림사에 나타 10/15 02:27 288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0.2/4 소림사에 나타난 두 소녀 한 명의 노승이 가부좌를 틀고 목탑 위에 앉아 있었는데 몸에 는 청색의 베로 만든 승포를 걸치고 있었다. 두 눈썹은 눈처럼 허옇게 세어 있었으며 얼굴은 보름달처럼 둥 글어 첫눈에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자하고 가까이 하고 싶 은 마음을 우러나게 만들었다. 그의 눈초리의 신광(神光)은 크게 빛나고 있었으며 전혀 늙은 티를 보이지 않았다. 이때 그노승은 두 시선을 곡창해의 몸을 주시하며 매우 자세 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곡창해는 그의 시선을 받으면서 즉시 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 을 올렸다. 노방장인 방덕대사는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얘야, 일어나거라.] 지극히 기쁜 어조였다. 곡창해는 큰절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노방장인 광덕대사는 그를 목탑 옆으로 가까이 부르더니 손을 뻗쳐 가볍게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우리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이토록 훌륭한 아이가 우리 소림 문하로 들어오도록 점지하셨으니 이제 노납(老納)은 걱정 을 완전히 없애게 되었구나.] 응진은 간곡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쪼록 대사형께서는 홍은(洪恩)을 베풀어 이 아이가 기초 의 무공을 속성하여 본문의 무상비예(無上秘藝)를 전수하도록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노방장인 광덕대사는 잠시 동안 깊은 생각을 해보더니 손을 들 어 왼쪽을 겨냥했다. 왼쪽의 창가에는 하나의 조그마한 구리로 만들어진 징이 걸려 있었는데 이때 그의 지력이 그 징에 가서 적중되자 '꽝'하는 맑 은 음향이 울려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명의 승려가 문 밖에서 입을 열었다. [정신(正信)이 삼가 법유(法諭)를 받들고자 하는 바입니다.] 광덕대사는 천천히 말했다. [들어오너라!] 정신선사는 정사 안으로 들어섰는데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귀 를 가진 지극히 풍도가 있는 중년의 화상이었다. 그는 노방장인 광덕대사와 응진에게 절을 한 이후에 곡창해에 게도 허리를 구부리며 인사말을 했다. [정신이 사숙에게 인사드립니다.] 곡창해는 재빨리 반례를 했다. 응진은 옆에서 타이르듯 말했 다. [창해야, 너의 이 사질은 젊은 배분의 제자들 가운데서 십대고 수(十代高手)의 우두머리이다. 그들 열 사람은 불전에 씌여 있 는 십신(十信)을 기호로 삼아 하나같이 공력이 심후할 뿐만 아 니라 각기 자랑하는 절기를 지니고 있는데 모두 다 정(正)자 배 분의 제자들로 너보다는 한 배분 아래이다. 이 사부는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곡창해는 공손히 대답을 하기는 했으나 그들이 응진에게 어떤 좋은 있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노방장인 광덕대사는 응진이 제자를 가르치는 말이 끝나자 입 을 열고 지시했다. [정신, 너는 가서 빨리 광자와 광비 두 사람을 불러오도록 해 라.] 정신은 신속하게 명을 받들기 위해서 달려갔다. 얼마 후 한 명은 키가 크고 한 명은 키가 작은 노승 두 분이 들어왔는데 한 사람은 바로 광자대사로 곡창해가 이미 본 바 있 었다. 다른 한 사람은 광비대사로 체격이 우람하고 정신이 맑아 보였다. 그들이 정사 안으로 들어오자 그들의 사형인 노방장 광덕에게 인사를 했다. 광비대사는 곡창해를 몇 번 바라보더니 입을 열고 물었다. [대사형께서 유시를 내려 우리를 소집한 것은 어인 일이오?] 노방장인 광덕대사는 천천히 말했다. [응진이 나에게 이 애를 도와서 속성시켜 달라고 부탁을 하기 에 나는 이미 응낙을 했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사제들에게 나 의 한 팔의 힘이 되어주십사 하고 청하는 것일세.] 광자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속성의 첩경을 반드시 이용하여 그를 도와 근기(根氣)를 튼튼히 해야겠구려. 그렇지 않을 때 어느 해 어느 달에 가서야 성취가 있을 정도로 연마할지 모르겠소이다.] 광비대사는 웃었다. [사형의 명령이고 사제의 청이니 실로 거절을 할 수가 없군.] 곡창해는 매우 못마땅했다. '이 사백부님은 조금도 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 같구나. 만약에 이분 사백들이 사람을 무시하는 것을 그저 내버려두게 된다면 장래에 설사 어떤 성취를 이룬다 하더라도 여전히 나를 업신여길 것이다. 그러나 후배로서 그렇다고 입으로 반박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았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만 자기 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사 안의 네 분 고수들은 모두 다 그가 한숨을 쉬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응진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얘야, 너는 무슨 걱정이 있느냐?] 곡창해는 머리를 숙였다. [제자는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광자대사는 약간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 참 이상하구나. 어린 나이에 감히 못할 말이 무엇이란 말이냐?] 곡창해는 몰래 광비대사를 한번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자 네 분의 고승들은 대강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광비대사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얘야, 이야기해도 상관이 없다. 노납은 결코 탓하 지는 않겠다.] 그는 나이가 많았지만은 호방하고 솔직한 성격은 여전히 소년 들과 다른 바가 없었다. 곡창해는 갑자기 이 노화상의 위인 됨을 이해하게 되어 그만 후회를 하듯이 입을 열었다. [제자는 본래 광비 사백부께서 저를 업신여긴다고 생각하고 마 음속으로 불안을 느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서야 어르신께서 는 조그만 예의에 구애를 받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제자야말로 부질없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광비대사는 일순 어리둥절해졌다가 두 눈을 똑바로 떠서 곡창 해를 바라보더니 한참 이후에야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런 멀쩡한 녀석을 보았나. 너는 보기에 나보다도 더 노련한 것 같구나.] 그의 이와 같은 말에 노방장인 광덕대사 등은 모두 다 웃었다. 광비는 다시 입을 열고 말했다. [너의 그 사람을 알아보는 슬기로움을 보아서라도 이 사백부는 전력을 다해서 너를 훌륭한 인재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되겠 다…….] 그는 노방장 광덕대사와 한마디를 했다. [사형들, 우리 손을 쓰도록 합시다.] 노방장인 광덕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일으켜 뭇 사람 들을 데리고 한 칸의 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광비대사는 다섯 개의 방석을 꺼내 매화(梅花) 꼴로 배열하더 니 곡창해에게 한복판의 방석 위에 앉도록 했다. 광자대사는 한 권의 두루마리를 벽에다 걸었는데 바로 한 폭 의, 사람을 그려놓은 그림인데 정면과 후면으로 두 그림이 있었 다. 그 벌거숭이의 몸뚱이 위에는 한가닥의 붉은 선과 한 가닥 의 검은 선이 전신에 널리 퍼져 있었다. 노방장인 광덕대사 등 네 사람은 나누어 네 개의 방석에 좌정 했다. 이윽고 노방장광덕대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문의 무상 내공심법으로 말하면 지극히 정심박대(精深博大) 하고 위력이 무궁하며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천부적인 총기가 뛰어나고 품부(稟賦)가 탁월하고 기이한 인사라 하더라 도 반드시 십 년 이상 고된 수련을 쌓아야 한다. 이는 본문의 내공심법이 반드시 내외겸수(內外兼修)하여야 하기 때문인데, 만약 외공(外功)이 일정한 화후(火候)에 도달하지 않게 된다면 내공의 진경(進境)도 덩달아 정체되어 나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 다…….] 이와 같은 설명은 물론 곡창해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정중히 입을 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제자를 거두어들여 무예를 전수하되 각 자의 타고난 자질과 천품에 따라 각기 다른 입문의 법결(法訣) 을 전수하는 것이다. 본문에 승려들이 많고 그 가운데 내공에 심후한 경지에 달한 인사들이 적지 않게 있지만 입문의 법결이 정도(正途)를 밟지 못함으로써 끝내 일류 고수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곡창해는 공손하게 귀를 기울여 들었으며 노방장 광덕대사가 한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노방장인 광덕대사는 빙그레 웃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 네 사람이 손을 써서 너를 도와 입문(入門)의 제일 관(第一關)을 통과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번 수련은 그야말로 네가 십 년 동안 고된 수련을 쌓은 공력과 맞먹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납은 상세히 설명을 해줌으로써 네가 얻 는 것이 무척 수월하다고 해서 가볍게 보고 소홀히 생각하는 마 음이 생겨 장래에 너의 진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일류 고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응진은 다그쳐 물었다. [창해야, 잘 알겠느냐?] 곡창해는 공손히 대답했다. [제자는 잘 알겠습니다.] 노방장인 광덕대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네 사람은 본신(本身)이 갈고 닦은 공력을 너의 몸 안에 주입하여 한편으로는 너로 하여금 외공을 갖추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의 진기가 경혈(經穴)을 통과하고 스며들게 함으 로써 성취를 얻을 수 있도록 이끌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처 는 매우 수월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본사가 창립된 이래 아직도 이와 같은 선례가 없었느니라.] 사실 이와 같은 일은 사대 고수가 합심 협력해야 하고, 둘째로 는 반드시 훌륭하고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인재가 있어야 하며, 셋째로는 이와 같이 급히 성취를 이루게 하는 사람의 심성이 조 건에 부합하여 너무 쉽게 얻었다고 소홀히 하는 마음을 일으켜 되려 초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위(修爲)까지 방해가 되지 않도 록 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노방장인 광덕대사는 이어서 방법을 가르쳐주고 구결(口訣)을 논하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 벽에 걸린 사람의 도형 위의 붉고 검은 두 선은 바로 진기 (眞氣)가 나가는 노선이었다. 붉은 선은 소림의 무상심법의 정 확한 노선이고 검은 선은 가장 쉽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노 선이었다. 이와 같이 비교를 해 놓으므로 자연 일이 잘못될 염 려가 없었다. 설명만 하는데도 한 시진이라는 시간이 걸리게 되었는데 노방 장인 광덕대사의 음성이 끝나자 광자, 광비, 그리고 응진 세 사 람이 일제히 곡창해를 향해 손으로 짚는 시늉을 했는데 손가락 끝이 그의 몸과 반 자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곡창해는 그 순간 세 가닥의 뜨거운 흐름이 몸 안으로 주입되 는 것을 느끼고 정신이 번쩍 들면서 사지와 뼈마디에 힘이 가득 차는가 하면 근육과 골격이 팽창하고 뻗쳐나는 것이 신속하게 발전하고 생장(生長)을 거듭하는 것 같았다. 이미 노방장인 광덕대사의 손가락이 천천히 앞으로 뻗쳐났으며 한 가닥의 뜨거운 흐름이 다시 곡창해의 몸 안으로 흘러들고 모 든 기이한 느낌이 즉시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안정시킨 후 노방장 광덕대 사가 지시한 법결을 따라 실행했다. 이 구결의 법문은 간단한 것이어서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기억 할 수 있었지만 실천을 하려니까 매우 곤란했다. 일시 모든 잡념이 다투어 일었으며 곡창해가 아무리 애써서 정 신을 가다듬으려고 해도 몰려드는 잡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 다. 이것은 응당 있을 수 있는 현상이긴 하나 시간이 길어지자 곡 창해는 그만 왈칵 두려움이 치솟았다. 다시 한참 시간이 흐르자 곡창해는 도저히 심신을 가다듬고 잡 념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즉시 절망에 휩싸여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번쩍 떴다. 마침 그는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겨우 한나절 동안 앉아 있었을 뿐이며 지금쯤은 깊은 밤중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인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깜짝 놀란 나머지 이것이야말로 일대의 마장(魔障)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눈을 내려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운기조식에 몰두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사흘 밤낮이 지나게 된 후 그는 겨우 정자에서 정신을 되찾고 눈길을 벽에 걸려 있는 두루마리에 던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나흘의 밤낮이 흘러가게 되었고 광덕 등 사대고수들 은 모두 다 지력을 거두어들고 서로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 웃음은 큰 공을 이제 이룩하게 되었다는 데 대한 만족감이 었다. 그들은 모두 다 지극히 많은 진원(眞元)을 소모했다. 그렇기 때문에 응진은 감히 더 그곳에서 지체를 하지 못하고 즉시 곡창 해를 데리고 잠룡원으로 돌아옴으로써 사형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곡창해는 바짝 다그치는 공부에 압박을 받은 나머지 그야말로 숨돌릴 겨를이 없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이외에는 서둘러서 내외공(內外功)을 갈고 닦아야 했으며 잠시라도 다른 일을 생각 할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 개월이라는 시일이 흐르게 되었다. 어느날 응진은 말했다. [본사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 것 같아 이 사부는 잠시 너를 독 려하지 못한다. 반드시 움막 안에 홀로 앉아서 외부 사람이 이 사실을 간파하고 대사형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꾸짖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구나. 그렇기 때문에 너도 잠시 새로운 무공을 연 마하지 말고 다만 배운 것을 복습만 하면 될 것이다.] #3706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0.3/4 소림사에 나타 10/15 18:40 278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0.3/4 소림사에 나타난 두 소녀 곡창해는 감히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러 나 응진의 그와 같은 말은 그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맺혀 있던 의문을 떠올리게 했다. 과거 소림 방장 광덕대사가 무림의 군호들에게 응진을 오랜 세 월에 걸쳐서 움막집에 외로이 앉아 세월을 보내겠다고 말한 바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사부는 근본적으로 움막에 가서 앉아 있 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소림사의 노방장인 광덕대사의 신분이면 물론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곡창해는 그와 같은 조처를 좀처럼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감히 솔직하게 여쭈어 볼 수도 없고 해서 재빨 리 생각을 해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자도 움막으로 가서 사부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는 자기의 그와 같은 행동이 옛날의 규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었다. 응진은 이 나이 어린 제자가 마음속으로 그토록 많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 된다. 그 누구도 움막으로 갈 수가 없다. 지난 날에는 본 사의 바로 아랫대 배분의 십대고수들이 차례로 나를 대신해서 앉아 있었지만 그와 같은 행동은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만약에 제일류의 고수들이 들이닥치면 속이기 어려워지는 것이 다.] 곡창해는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사부님을 대신해서 움막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본문의 십신승 (十信僧)들인가요? 그들이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 니군요. 다시 좀더시일이 흐르게 된다면 제자가 사부님을 대신 해서 움막에 가 앉아 있을 것이니 그들에게 수고를 끼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응진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그와 같은 일을 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이 사부는 너에 게 걸고 있는 기대가 지극히 높다. 내막은 반드시 네가 절예를 다 연성한 이후에야 알려주겠다. 본문의 십신승은 언제나 가장 이 사부를 존경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십 년 전에 일이 발생하 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기꺼이 이 사부를 대신해서 그 움막집에 외로이 앉아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고통을 당하겠다고 했 다. 하지만 그들의 열성은 헛되지 않아 그런 관계로 인해서 모 든 사람들은 각자 한두 가지 절예를 연성하여 바로 아랫대의 제 자들 가운데서 십대고수들이 된 것이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본문의 아래위 사람을 따질 것 없이 모두 다 이 사부를 매우 사랑하고 지켜주려 하고 있단다. 광덕 대사형께서는 신분이 얼 마나 숭고하냐? 그러나 그는 이 사부가 결코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식언을 하면서까지 십신승으로 하여금 이 사부 대신 형벌을 받도록 하 고 있다. 이와 같은 혜안(慧眼)과 흉금은 정말 이 사부로 하여 금 극도로 우러러 보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구나…….] 여기까지 말하게 되었을 때 곡창해는 어찌됐든 간에 사부가 움 막집 안에서 외로이 앉아 형벌을 받지 않은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노방장인 광덕대사 등은 응진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 고 인정한 것 같았다. 이때 곡창해는 또 다른 한 가지의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것 은 바로 두달 전 뒷산 석곡에서 만난 오현이라는 사람이 응진 의 어깨에 있는 상처가 어떤 모양인지 알고 싶어하던 일이었다. 곡창해는 비록 총명한 사람이지만 역시 십여 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응진과 같은 으뜸 가는 노련한 강호인에게 끝까지 감추지 못하고 얼굴에 드러내고 말았다. 응진은 매우 의아하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갑자기 십분 엄숙한 얼굴로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얘야, 이 사부님의 십 년 전의 일을 너는 아마도 틀림없이남 들에게 들어본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솔직히 나에게 말해주려무나.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곡창해는 그만 깜짝 놀라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입을 열었다. [제자는 감히 함부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응진은 좀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너는 솔직히 나에게 이야기해 보려무나.] 곡창해는 천천히 말했다. [제자는 사부님께서는 조그만 예절에 구애를 받지 않은 대인대 의(大人大義)의 지사로서 결코 그와 같이 비열하고 치사한 일을 하지않았으리라고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매우 성실하고 진지해서 듣자마자 그 말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임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응진은 호탕하게 앙천 대소했다. [하하하, 매우 좋다. 이 응진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나.] 곡창해는 고개를 들고 의혹에 찬 시선으로 그의 왼쪽 어깨를 바라보며 속으로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후에는 다시 사부의 어깻죽지에 남아 있는 상처 자국에 관해서 들먹일 기회는 없게 되겠구나…….' 응진은 생각에 잠겨 있는 곡창해의 모습을 보았으나 아무런 표 시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더니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두 지팡이로 다리를 대신하고 있었으나 거동은 민활하고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 우람한 뒷모습이 원문 밖으로 사라지게 되었을 적에 곡창해 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부님의 어깨에 있는 상처 자국을 살펴볼 수가 없다면 사부 님의 침실로 가서 한번 수색을 해서 그 한 조각의 은엽이 있는 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오 대숙에게 약속한 바를 실 천하는게 되지 않겠는가.' 정히 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적에 응진이 어느덧 그의 앞에 모 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곡창해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응진은 얼굴이 미소를 띄우고 입을 열었다. [십 년 전 허일산의 의자 양진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 사부 의 어깨에 오망주에 의한 상처 자국이 나 있는지 검사를 해보자 고 했지만 대사형께서는 거절을 하셨지…….] 곡창해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는 다시 한번 깜짝 놀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 사부는 양진의 심술이 험악하며 그녀의 누이동생인 허령주 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음모가 성공을 하게 된다면 오직 그만이 가장 유리한 사람이 되 는 것이었다. 첫째로 그는 그 기회를 빌어서 그가 마음속으로 정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사람을 제거할 수가 있었고, 둘째로는 허일산의 가산을 완전히 그 자신이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양진이 상처 자국을 살펴보겠다고 하므로 나는 그에 대한 의심 을 지워버렸다. 생각해 보아라. 그때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 사 부의 어깨에 있는 상처가 오망주에의해서 남겨진 상처가 아니 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그가 나를 해치려는 음모는 완전 히 탈로날 것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당시 대사형께서는 상처 자국을 살펴봐야 한다는 조치를 거절하시고 말았단다…….]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어깻죽지의 옷자락을 내리고 한 가닥의 상처자국을 드러내었다. 곡창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가다듬고 바 라보았다. 그 상처 자국은 길이가 약 두 치 정도 되었으며 비스듬히 어깻 죽지에 걸쳐서 있는 것이 오현이 말한 대로 팔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처 자국이 비교적 넓은 편이고 가장자리 가 울퉁불퉁하니 정제하지 못한 것으로 볼 때에 첫눈에 칼이나 검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진은 어깻죽지를 어루만지며 설명을 했다. [이 사부가 강호에서 처음 나서게 되었을 적에는 천성이 활달 하고 모든 일에 구애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한 여자애에게 한 조각 살점을 물어뜯기고 말았다. 그때의 그 변고를 당한 후 에 이 사부는 행동을 훨씬 조심하게 되었지만 그와 같은 일을 대사형들에게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평소 그분들은 별로 주의 를 하지 않았으니 십년 전 양진이 상처자국을 살펴보자는 제안 을 하게 되었을 적에 대사형께서는 안식력이 월등히 고명하다보 니 옷을 격하고도 그곳에 상처 자국이 나 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가 있었고 그래서 결단코 거절을 하셨지.] 그는 옷을 다시 걸치고 말을 이었다. [이것 또한 대사형께서 스스로 자기가 한 말을 저버리고 십신 승들에게 내 대신 움막집 안에 앉아서 비바람을 맞게 한 이유가 되었단다. 왜냐하면 우리들이산으로 되돌아온 이후 대사형께서 는 깊이 생각한 후에 허일산이 결코 나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게 되었고 따라서 어깨의 상처 자국 또한 틀림없이 오망 주에 의하여 남겨진 상처 자국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 다. 그러나 그는 일시 잘못을 저질러 이 사부가 억울한 누명을 벗을 기회를 잃자 매우 괴로워한 나머지 십신승이 나를 대신하 도록 허락을 하시어 미안한 감정을 표시하려 하셨다. 하지마… ….] 그는 길게 말을 끌며 매우 정중한 표정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는 오직 너 한 사람만 이 친히 나의 이 상처 자국을 본 사람이며 그분들은 여전히 살 펴본 적이 없단다…….] 곡창해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동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대사백부 등과 사부는 정말 심심상인(心心相印)한 참된 지기 로구나. 천고 이래로 다시는 이 몇 분들처럼 그토록 마음이 통 하는 분들은 없을 것이다.' 응진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곡창해는 한동안 무공을 익히다가 약간의 음식과 맑은 물을 가 지고 절을 가로질러 뒷산 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후가는 그 석곡으로 들어설 수가 있었다. 석곡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오 대숙…… 오 대숙…….] 골짜기 안은 조용하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곡창해는 그 비탈 위의 바위틈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서 바라보 니 오현은 바위 위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곡창해는 그만 놀라 멍청해졌다 [오 대숙…….] 다가가서 그는 오현의 몸을 만져보았다. 오현의 수족은 얼음과 같이 차가웠다. 곡창해는 그만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계속해서 그의 맥박과 심장을 더듬어보았다. 오현의 가슴엔 아직도 한 가닥의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곡창해는 재빨리 그의 몸을 뒤집어 반듯하게 눕혔다. 오현의 두 입술은 갈라 터져 있었고 두 눈은 반쯤 감겨진 상태 였는데 눈동자가 이미 위로 뒤집혀 올라간 상태였다. 곡창해는 연신 그의 귓전에 대고 부르짖었다. 갑자기 오현은 한번 움직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곡창해는 재빨리 가지고 온 물을 몇 방울 그의 입 안에다가 흘 려 넣어 주었다. 오현은 혓바닥을 천천히 내밀어 핥더니 눈동자도 느릿하게 움 직였다. 곡창해는 머리에서 뜨거운 비지땀을 내쏟으며 긴장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오현은 입으로 모호한 음성을 뱉어냈다. 곡창해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부르짖었다. [오 대숙, 제가 왔어요. 오 대숙은 내가 하는 말이 들리나요?] 오현은 모호하게 말했다. [아, 자네였군…… 내가 자네에게 부탁한……일은…….] 곡창해는 재빨리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저는 친히 사부님의 어깨에 있는 상처 자국을 보았는데 오망 주에 의한 것도 아니고, 칼과 검에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고 그 어떤 사람에게 깨물린 나머지 한 조각의 살덩어리가 뜯겨져 나 간…….] 다 죽어가는 오현의 눈동자가 갑자기 한번 움직였으며 마치 빛 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그 눈동자는 위로 올라가면서 오현은 중얼거리듯 힘 없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잘 되었다……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곡창해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오 대숙, 죽어서는 안 돼요. 내 이제 가서 사람들을 불러와 오 대숙을 살리도록 힘을 쓰겠어요…….] 오현은 목에서 끌끌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후에는 겨우 말소 리를 낼 수가 있었다. [필요없네…… 쓸데없는 기력의 낭비일세……. 자네의 사부를 모함한 사람은 나와…… 와…….]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말았다. 곡창해는 똑똑히 이 무림의 고수가 이미 숨이 넘어갔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만 처연해지는 것을 금하지 못했다. 동시에 유감스 럽게 생각했다. 유감스러운 것은 자기가 이틀을 늦게 옴으로써 그의 입으로 자 기의 사부를 모함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게 되었기 때 문이었다. 겨우 그중에 한 사람이 오현이라는 것을 알아냈지만 오현은 이 미 숨을 거두고 난 상태라 비단 그날의 음모를 꾸몄던 자세한 사정을 물어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내세워 증인으로 삼 아 천하무림 인물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의혹을 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늘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움푹 구덩이가 파여져 있는 것을 발 견할 수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구덩이를 무덤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3708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0.4/4 소림사에 나타 10/15 23:15 273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0.4/4 소림사에 나타난 두 소녀 곡창해는 그를 돌 구덩이 안에 눕혔다. 오현의 몸에는 가죽 주머니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약간의 물건 들이 들어 있었다. 곡창해는 그 가죽 주머니를 풀어서 구덩이가에 놓고 돌덩이와 흙모래로 구덩이를 매웠다. 얼마 후에 그는 그 구덩이를 완전히 메꿀 수가 있었다. 이윽고 그는 가죽 주머니를 들었다. 갑자기 그는 오현에게는 이미 가까 운 사람이 없다는사실을 떠올렸다. 따라서 그가 남긴 유물들은 거두어줄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더욱더 오현을 위해 처량함과 괴로움을 느끼 고 동정의 눈물을 뿌린 후에 가죽 주머니마저도 흙 속에 묻어버 렸다. 절로 되돌아오게 되었을 때 이미 석양이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 다. 그는 절 옆에 있는 벼랑 위에 홀로 앉아 있을 사부님을 찾아가 서 만나고 싶었으나 감히 찾아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는 잠룡원에서 잠시 동안 무공을 연마했다. 그제서야 그는 심신을 가다듬을 수가 있었다. 이튿날이른 아침 체구가 우람하고 거무튀튀한 한 중년의 화상 이 곡창해를 찾아왔다. [소사숙(小師叔), 사숙조께서 유시를 내렸소. 그것은 소사숙이 앞쪽으로 가서 구경을 하라는 것이오.] 곡창해는 크게 기뻤다. [무슨 구경인가?] 그 흑화상(黑和尙)은 대답했다. [사숙조께서는 단지 나에게 말만 하면 소사숙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원래 소사숙도 모르고 있구려.] 이 화상은 바로 소림 십신승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들 열 사람은 곡창해와 가장 친숙한 편이었다. 이 사람은 정 호법(正護法)이라고 했는데 위인됨이 천진하다고 할까 좀 모자 란다고 할까, 사십이 넘은 사람이었으나 여전히 세상 물정에 대 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면서 잠룡원에서 걸어나와 길을 돌아 절 간 옆으로 해서 산문 밖의 넓은 마당으로 나갔다. 이때 이미 그 넓다란 마당 여기저기에 승려들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호법은 사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모두 달마원의 사람이로군. 그것 참 이상한데…….] 곡창해는 그 말을 받았다. [아마도 한바탕 붙을 모양일세. 그렇지 않으면 달마원에서 이 토록 많은 사람들을 내보낼 턱이 없지 않은가.] 정히 이야기를 하고 있을 적에 한 명의 체구가 약간 퉁퉁한 잿 빛옷의 승려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 승려는 얼굴이 둥굴고 눈망울이 컸으며 먼저 말을 걸기 전 에 웃기부터 했다. 첫눈에 성격이 해학적이고 우스갯소리를 좋 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헤벌쭉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헤헤헤, 소사숙, 이제야 오셨소? 나는 이미 갑갑증이 날 정도 로 기다렸다오. 아무쪼록 정말 한바탕 커다란 구경거리가 벌어 졌으면 좋겠소.] 곡창해는 재빨리 말했다. [그렇게 큰소리 지르지 말게.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감원 대사(監院大師)에게 고자질을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을 해야지 않는가…….] 그 둥근 얼굴의 승려는 혓바닥을 한번 쑥 내밀었다. [맞았소. 이곳은 잠룡원이 아니지. 내가 그만 깜박했군.] 흑화상 정호법은 어리둥절해져서는 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겁낼 것이 무엇이오?] 곡창해는 설명했다. [출가한 승려가 어찌 구경을 욕심내서 좋아할 수 있겠는가 말 일세. 그렇지 않은가?] 흑화상 정호법은 약간 승복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우리들은 역시 저만치 떨어져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좋겠구려.] 그들 세 사람은 함께 마당가에 있는 오래 된 나무 뒷쪽에 숨어 넓다란 잔디밭 마당의 동정을 엿보았다. 흑화상 정호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불퇴(正不退) 사형, 오늘 무슨 구경거리가 있는지 아시오?] 정불퇴는 실눈을 가늘게 뜨고 헤벌쭉 웃었다. [헤헤헤, 나도 모르겠네. 그러나 사숙조께서 놀란 움직임을 보 일 정도이니 아마도 내력이 틀림없이 대단할 것 같네.] 그들이 말하는 사숙조는 응진이었다. 곡창해는 자기도 모르게 눈길을 돌려 왼쪽에 있는 높은 벼랑 쪽을 바라보았다. 벼랑 위의 가장자리에는 하나의 움막이 세워져 있었고 어렴풋 이 그 움막 안에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곡창해는 광덕대사 등 네 사람의 고수가 진기를 주입해서 그의 경맥을 유통시켜준 이후에 시력이 이미 보통사람보다 월등히 좋 아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움막집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여전 히 그 움막 안의 사람이 몸에 한 벌의 흑의를 입고 목에 하나의 커다란 무쇠고리 같은 것을 걸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물론 이 무쇠고리는 그때 광덕 등 삼대 고수가 친히 허씨 집에 이르러 사건을 해결하려고 할 적에, 광자대사가 가지고 온 선장 을 꺾어서 둥근 고리로 만든 것이었다. 곡창해는 사부가 움막 안에서도 외부의 사람이 절 앞에 당도하 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목을 길게 빼고 멀리 있는 사부를 바라보며 사부님이 얼마나 분개하고 침통하게 여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기의 마음이 대뜸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 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호법은 한숨 소리를 듣고 그를 바라보았다. [소사숙은 지루한가 보구려. 보시오. 저기 그 누가 나는 듯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돌아와 무슨 소식을 전할 것 같구려.] 과연 한 명의 승려가 신속하게 절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이곳 저곳의 잔디밭에 흩어져 있던 승려들은 대뜸 넓은 터전 주위에 늘어서 있는 나무나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얼마 후에 길 입구 쪽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산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묘령의 여인들이었으며 옷차림이 화려했다. 한 사람은 비파(琵琶)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한 자루 의 옥으로 만들어진 퉁소를 들고 있었다. 그녀들은 웃음을 띄우고 천천히 잔디밭 위로 올라서더니 눈을 들어 사방을 살피는 것이 사람을 볼 수 없자 약간 놀람과 의아 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높은 벼랑 위에 세워져 있는 움막집을 바라보며 손가락질을 하며 뭐라고 조잘대기 시작했다. 그들 두 명의 여인 가운데 옥으로 만들어진 퉁소를 들고 있는 여인이 갑자기 퉁소를 입으로 가져가더니 불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옥으로 만들어진 퉁소에서는 애절하고도 구슬프며 맑 으면서도 하소연하는 듯 퉁소 소리가 바람을 따라 드높게 퍼져 나갔다. 곡창해는 정신을 가다듬고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그 옥으로 만들어진 퉁소로 불어내는 가락이 처량하기 이를 데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원망하듯, 하소연하듯, 흐느끼듯, 그리운 젓을 털어놓듯…….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집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만 외로운 마음이 가슴속으로부터 솟구쳐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는 즉시 저 여인이 사부 쪽을 향해 옥으로 만들어진 퉁소를 부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혹시 일부러 사부님에게 들려주려고 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같은 거둥은 사부를 모욕하는 짓이라고 느껴지고 대뜸 노 기가 용솟음치듯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순진한 정호법은 그 검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띄우고 있지 않았으나 정불퇴는 얼굴에 언제나 감돌던 웃음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매우 슬프고 처량한 표정이 아닌가. 곡창해는 그의 이상한 표정을 보았으나 자세히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쳐 정불퇴를 밀었다. [그녀들이 감히 퉁소 소리로 사부님을 방해하다니, 이런 일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정불퇴는 몸을 흠칫하더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대담한 요녀들 같으니, 감히 그와 같이 사람의 혼백을 뒤흔들 어 놓는 마음비예(魔音秘藝)를 펼치다니, 흥! 흥! 그녀들은 근 본적으로 우리 소림사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있구려.] 곡창해는 그제서야 퉁소소리에 다른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갑자기 다른 한 여인이 비스듬히 비파를 안고 '쩡쩡' 퉁기기 시작했다. 그 두 가지의 소리가 한데 합쳐지자 무한한 구슬픔과 처량함을 보태 일시 소림사 안은 참담한 분위기에 뒤덮이고 마는 것 같았 다. 바로 이때 산문 안쪽에서 한 명의 황의승려가 네 명의 중년화 상의 호의를 받으면서 천천히 걸어서 잔디밭으로 나왔다. 그 황의 승려는 바로 소림사 달마원 수좌인 홍력대사였다. 그는 나이 육순이 지났으나 무공이 정순하여 보기에는 겨우 사 오십 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퉁소 소리와 비파 소리가 멈춰지면서 퉁소를 들고 있는 여인이 소리내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호호, 본래 나는 소림사에서 우리들 자매를 업신여기고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사방에 적지 않은 사 람을 매복시켜 놓고 있었군요…….] 곡창해는 의아한 생각에 정신을 가다듬고서는 사방을 살폈다. 그제서야 그는 적지 않은 승려들이 이미 행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심신이 그 음률에 흩어졌기 때 문에 자기네의 모습을 감추지 못한 것 같았다. 첫 번째의 회합(回合)에서 소림사는 그만 열세에 몰리게 되었 고 그 두 명의 여인들은 깔깔거리며 웃어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들의 웃음소리에는 은연중 음탕하고 방탕한 기운이 서려 있어 모든 사람들은 그녀들이 결코 정파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홍력대사는 우렁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 소저는 일부러 출가인의 청수(淸修)를 방해하러 왔소?] 비스듬히 비파를 안고 있는 여인은 그 말에 대답을하기는 커 녕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저 멀리 벼랑 위에 세워져 있는 움막 집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앉아 있는 것이 바로 독각륭왕 응진인가요?] 그녀의 그와 같은 행동은 분명히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홍력대사의 등뒤에 서 있는 네 명 화상 가운데 두 명이 노기띤 눈을 부릅뜨고 그녀들을 바라보았으며 왼쪽에 서 있는 중년화상 은 날카롭게 외쳤다. [가사(家師)께서 하신 말씀을 당신들은 듣지 못했소?] 오른쪽 중년화상 역시 그 말을 받았다. [저 여인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너무나 사람을 업신여기는군 요. 그런데 사부님께서 이 제자들에게 손을 쓸 것을 허락해 주 실런지요?] 홍력대사는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희들이 한번 앞으로 나가보아라. 그러나 역시 먼저 예의를 갖춘 후에 손을 쓰는 것이 가장 좋겠다.] 두 명의 화상은 대답하고 앞으로 달려나왔다. 왼쪽에 선 화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승은 정정진(正精進)이라고 하며 이쪽은 우리 사제 정원(正 願)이오. 두 분 소저는 악기로 폐사의 청수를 방해하고 있소. 그러나 잘못을 깨닫고 사과한다면 소승은 결코 두 분을 난처하 게 만들지는 않겠으니…….] 손에 비파를 들고 있는 여인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적신교의 제자들이에요. 나의 성은 원(元)이고 이름은 옥(玉)이라고 하며, 이쪽은 우리 사매 유서(柳絮)예요… ….]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녀는 섬섬 옥수로 가볍게 한번 비파를 뜯 었다. 비파에서 한차례 잇따라 구슬을 굴리는 듯한 음향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그녀는 음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자매들은 적신교에 들어간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소림사 를 안중에도 두지 않아요.] 정정진은 이미 상대방에서 좋은 말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내다 보고 있었던 것처럼 이때는 오히려 처음에 띄웠던 노기를 거두 어 들이고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상대방 여인이 하는 말을 듣고 정정진은 웃으면서 입 을 열었다. [소저는 꽤 호탕한 말을 하는구려. 그렇다면 소승은 부득이 무 기로 두 분을 쫓아보내지 않을 수 없소.] 유서는 비웃듯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앞으로 나와 시험을 해보시지.] 정정진과 정원은 천천히 그녀들 앞으로 다가갔다. 홍력대사는 오래 전부터 전신교의 제자들이 손을 쓰게 되었을 적에는 틀림없이 옷을 벗고 벌거숭이의 몸이 되어 싸움에 임한 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터라 즉시 명령을 내려서 잔디밭 위의 뭇승려들이 절 안으로 들어가도록 명령을 내렸고 싸움을 구경하 지 못하게 했다. #3714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1.1/4 소림사에 도전 10/16 21:26 256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1.1/4 소림사에 도전하는 적신교의 요녀들 넓다란 잔디밭 위에는 몇몇 사람만 남았다. 곡창해는 사명을 받고 관전을 하러 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피할 필요가 없었다. 정정진의 키는 보통사람보다 작았는데 훤칠하게 버티고 서 있 는 유서 앞에 다가서게 되자 그녀보다도 한두 치가 작은 편이었 다. 유서는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화상, 당신은 너무나 길이가 짧군. 나는 긴 남자를 좋아하는 데.] 그 한마디의 말이 아름다운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듣는 사 람들은 이상야릇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정진은 안색을 굳혔다.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늘어놓았다고 해서 도움이 될 수는 없 을걸. 자, 조심하시오.] 그러면서 그는 손을 휘둘러 일 장을 쪼개내었다. 유서는 표연히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말했다. [무기를 뽑아들어요.] 정정진은 그녀를 한번 흘깃 쳐다보고는 응수했다. [소저는 우리 절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있는 모양이지만 소승은 신분을 여전히 돌보지 않을 수 없는데 어찌 함부로 무기를 사용 할 수가 있겠소.] 유서는 그의 말에 그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원옥이 옆에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화상은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지 마라. 그러다가 혓바닥이 뽑 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을런지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정정진은 그녀를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손을 휘둘러 유서를 향해 다시 일 장을 쪼개내었다. 유서는 허리를 흔들하더니 옆으로 두 자 정도 물러났으며 손에 들고 있던 옥소로 상대방의 옆구리에 있는 요해를 찌르려고 했 는데 그 손씀씀이가 음독(陰毒)하고 신속했다. 부득불 정정진은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은 삽시간에 어우러지게 되었는데 정정진 역시 적수공 권이었지만 장법이 면밀(綿密)하고 매력이 강경(强勁)했다. 유서의 퉁소로 펼치는 초식 역시 지극히 음독했으나 상대방의 테두리 안으로 공격해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쪽의 정원화상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저는 준비가 되었소?] 원옥은 요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소화상, 얼마든지 진입해 들어오시오.] 그 한마디 말에는 약간 음탕하고 외설적인 뜻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정원화상은 마치 못 들은 것처럼 성큼성큼 다가가 두 주먹을 쳐들더니 잇따라 뻗쳐내었다. 그 웅혼(雄渾)한 권풍이 상대방 옷자락을 펄럭이게 만들었고 기다란 치마가 뒤로 날아오르면서 한 쌍의 눈과 같이 흰 허벅지 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녀는 비파를 휘둘러 상대방의 권세(拳勢)를 봉쇄했다. 정원은 그녀의 옥과 같이 고운 허벅지를 마치 못 본 것처럼 두 주먹을 계속해서 잇따라 뻗쳐내는 것이었다. 원옥은 한편으로 방어를 하면서 한편으로 걸음을 옮겨 뒤로 물 러나 상대방의 주먹이 펼쳐내는 흉악한 예봉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몇 대의 주먹을 뻗쳐낸 데 불과했지만 그녀는 이미 상대 방의 무공이 웅혼하고 정묘하며 강호의 일반고수와 전혀 다르다 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뜸 그녀는 상대방을 경시하던 마 음을 거두고 암암리에 수법을 썼다. 그러자 그녀의 걸쳐졌던 옷이 갑자기 권풍에 말리면서 풍만하 고도 하얀 육체가 드러났는데 그 모습은 지극히 유혹적이었다. 정원화상은 눈살을 찌푸리며 갑자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모양이 흉하구려. 소저는 수치를 느끼지 못 하시오?] 원옥은 옷을 끌어당겨 가리는 척했으나 일부러 태반을 드러내 었다. 오히려 보일 듯 말듯한 것이 벌거숭이보다도 더욱 사람을 유혹했다. 그리고 그녀는 능청스럽게 응수했다. [화상, 당신은 세상을 잘 모르는 모양이니 쓸데없는 말을 함부 로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그러고 그녀는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만약에 대적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빨리 물 러서도록 해요. 나 역시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는않아 요.] 그 말에는 마치 그녀가 정원화상에게 정이라도 있는 듯한 말투 였다. 정원화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승은 당신에게 역시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충 고하는 바이오.] 원옥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더니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게 되자 드러나는 부위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한 폭의 지극히 요염하고도 사람의 심금을 뒤흔들어 놓는 모습 을 이루어놓았다. 그녀는 줄곧 상대방 쪽을 향해 다가왔는데, 마치 정원화상의 가슴팍에 뛰어들기라도 할 것 같은 태도였다. 정원화상은 그만 연신 뒤로 물러서야 했고 감히 손을 써서 맹 렬한 공격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자기 의 몸에 와 달라붙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이미 두 자 정도 되는 곳까지 육박해 왔으며 얼굴에 요염한 미소를 띄우는 것이 마치 매우 풍류를 잘 아는 여인 같았다. 별안간 그녀는 비파를 들어 질풍과 같이 쓰러지면서 신속하게 정원화상의 하반신 세 곳의 공격해왔으며 다른 왼손으로는 독사 처럼 정원화상의 가슴팍에 있는 요혈을찔러왔다. 정원화상은 일성을 대갈하더니 아래로는 한 발을 들어 걷어찼 고 위로는 두 주먹을 함께 뻗쳐냈는데 그 기세가 흉맹하고도 힘 차기 이를 데 없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후다닥 떨어지게 되었으나 각자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원옥은 이미 크게 가슴이 설래는 것을 느꼈다. 첫째로 상대방은 줄곧 음밀한 경계를 하고 있었고 심신이 털끝만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로는 상대방의 발길질이 무거워 비파에 맞기는 했으나 그 충격에 그녀의 손목이 시큰거 리고 아플 지경이었던 것이다. 저쪽의 유서 역시 갑자기 일 장이나 뒤로 물러섰다. 그녀 역시 일신의 절학을 다 펼쳐내었으나 여전히 상대방의 테 두리 안으로 공격해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급히 전략을 바꾸어서는 먼저 일 장 남짓 물러 섰다가 어깨를 한번 들썩였다. 그러자 그녀의 온몸에 걸쳐져 있 던 옷이 마치 뱀의 허물처럼 땅바닥에 떨어졌다. 적신교의 제자들은 모두 다 여자들이었다. 옷을 벗고 난 이후에 비단 전적으로 남자의 신심을 뒤흔들어놓 는 매력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공심법이 독특하게 전개됨으로써 전신의 살갗이 완전히 밖으로 들러나게 되었을 때 야 십성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적신교의 사람들은 적수를 만나면 옷을 벗지 않을 수 없었다. 원옥과 유서 두 여인은 처음 전적으로 상대방을 무시했기 때문 에 옷을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정진과 정원은 모두 다 소림사의 아랫대 배 분의 승려들 가운데서 손꼽히는 십대고수들이라 각기 절예를 지 니고 있어 그녀들처럼 사악한 무공을 갈고 닦은 지 얼마 되지 않고 또 경험이 없는 그녀들로서는 수월하게 이길 수가 없는 것 이었다. 따라서 지금 재빨리 옷을 벗는 것은 그야말로 분수를 아는 처 사라고 할 수가 있었다. 이 두 명의 벌거벗은 여인들은 모두 다 곡선이 영롱했고 살결 이 희었다. 거기다가 얼굴 모습마저 속되지 않아 확실히 천하의 남자들이 보게 되었을 적에 멍하니 넋을 잃을 만했다. 정정진과 전원 두 화상 역시 일순 어리둥절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정진은 즉시 정신을 차린듯 고개를 돌려 홍력대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고 물었다. [이 여인들이 너무나 보기 흉하군요. 혹시 모든 적신교의 사람 들은 다 이런 식으로 손을 쓰는 것이 아닌지요?] 홍력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너희들은 조심을 하도록 해라. 싸울 수 있으면 싸우 되 싸울 수 없을 때는 물러나도록 해라.] 정정진은 웃었다. [모두가 이 지경이라면 뭐 별로 신경 쓸 것 없겠군요.]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는 주먹을 휘두르며 잇따라 신속하게 권풍을 뻗쳐내는 것이었다. 정원화상 역시 조금도 뒤지지 않을 양으로 앞으로 나서면서 몸 을 돌리며 장법을 펼쳐 공격했다. 삽시간에 네 사람이 두 무더기로 나누어져 한 덩어리가 되어 돌아갔다. 원옥과 유서 두 여인이 이리저리 몸을 날리게 되었을 때에 몸 의 묘한 부분들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홍력대사는 두 눈을 잔뜩 찌푸리게 되었 다. 곡창해는 그와 같은 광경에 매우 넋을 잃고 보고 있는데 정불 퇴가 가볍게 정호법을 건드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소사숙의 심신이 뒤흔들려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닐까?] 정호법 역시 검은 얼굴에 근심의 빛을 띄었다. [나는 잘 모르겠네.] 곡창해는 이때 넋을 잃고 바라보느라고 그들이 주고 받는 말도 미처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원옥과 유서 두 여인은 정정진과 정원 두 화상의 위맹한 공세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때때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맞게 되었 고 연신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것을 주위의 승려들은 모두 다 들을 수 있었다. 홍력대사는 불호를 외치고는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제자들은 잠시 물러서게.] 정정진과 정원 두 승려는 신속하게 이 장이나 뒤로 물러섰다. 홍력대사는 즉시 입을 열고 말했다. [소저들은 폐사가 바로 출가인의 수도하는 곳이며 언제나 자비 를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오늘 소저들이 비록 폐사의 승려들 청수(淸修)를 훼방놓았으나 노납(老納)이 기꺼이 모든 책임을 질 것이니 두 분은 속히 이곳을 떠나가 주 시는 것이 좋겠구려.] 원옥과 유서 두 여인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옷을 집어서는 몸에 걸쳤다. 홍력대사는 선장을 가슴 앞에 세우고 전송을 하는 자세를 취했 다. 그러나 두 여인은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홍력대사의 그와 같은 자세를 아랑곳 하지 않았고 전혀 따날 빛을 보이지 않았다. 홍력대사는 당당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오늘의 이 형세는 보기에 이미 좋게 끝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나.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노납으로서도 별 수 없이 죄를 짓게 되겠구나.] 그리고 커다란 소맷자락을 떨치며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섰다. 원옥과 유서 두 여인은 노승이 친히 손을 쓰려고 나설 것이라 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그만 깜짝 놀란 나머지 잇따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으며 여유있는 표정은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그녀들은 홍력대사의 좌하(座下)에 있는 승려들도 이겨내 지 못하고 있는 판이니 그 어찌 배분이 높은 홍력대사의 일격을 받아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만 깜짝 놀란 나머지 꽃 같은 얼굴이 빛을 잃고 연신 뒤로 물러선 것이었다. 기실 홍력대사는 결코 손을 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첫째 로 그는 비교적 배분이 높은 편이었지만 정정진 등 십신승들이 응진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는 공을 세웠기 때문에 모두 다 똑같 이 몇 분의 장로들로부터 친히 절예를 전수받아 각기 장점으로 삼고 있는 특기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진정한 공력을 두고 따질 때 이 십신승들은 결코 홍력대사에 뒤떨어지지 않는 편이 었다. 그리고 둘째로 홍력은 원옥과 유서 두 여인이 감히 소림사로 뛰어들 수 없을 것이며 틀림없이 다른 고수가 뒤에 도사리고 있 다고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홍력대사의 짐작대로 원옥과 유서 두 여인이 연 신 뒤로 물러서게 되었을 때에 맑은 돌북 소리와 함께 그윽한 가락이 바람을 따라 사방으로 울려퍼지면서 한 줄기의 백의 여 인들이 사뿐사뿐 모습을 드러내어 넓다란 잔디밭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 한 줄기의 백의 여인들은 모두 여섯 사람이었는데 스무 살 정도로 보였다. 세 사람은 나누어 퉁소, 생(笙) 그리고 비파를 들고 잔디밭으로 들어서는 동안 계속해서 악기를 퉁기고 있었고 두 명은 향로를 들고 걸어 들어왔는데 향료에서는 연기가 모락 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들 다섯 명은 모두 무척 아름답고 요염한 편이었으며 키도 훤칠했다. 다만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백의 여인만이 생긴 것이 약간 거무튀튀했으며 얼굴 모습이 평범한 편이었다. 곡창해는 가볍게 곁에 있는 두 승려를 건드리며 말했다. [저것 보게. 저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여자가 바로 여약연 이데 내가 전에 그녀를 만나본 적이 있다네.]  #3731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1.2/4 소림사에 도전 10/19 21:00 275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1.2/4 소림사에 도전하는 적신교의 요녀들 정호법은 크게 기뻐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소사숙이 이미 그녀들의 미색에 홀린 줄 알고 걱정 을 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구려.] 정불퇴는 역시 한마디를 했다. [저 여약연이라는 여인은 생긴 것이 별로 아름답지 못한데도 그녀들의 교회에서 고수 대열에 끼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 녀의 실력이 가장 강한 것 같구려.] 그들이의논을 하고 있을 적에 저쪽 길 입구에서 다시 두 여인 이 나타났다. 멀리서 볼 때 그 두 명의 여인은 몸에 한 겹의 연 무(烟霧)에 뒤덮여 있는 것 같이 어렴풋이 높다랗게 틀어올린 머리와 훤칠하고도 곡선이 영롱한 몸매 및 눈과 같이 흰 살결을 볼 수가 있었다. 그녀들이 걸치고 있는 것은 마치 연무처럼 느껴지는, 가볍고도 엷은 나삼(羅삼)으로서 그저 형식적으로 몸을 가린 것에 불과했 다. 이 두 여인은 똑같이 걸음을 옮겨서 걸어들어 오고 있었지만 그녀들의 자태가 날렵하면서도 아름답기 이를데 없어 그야말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들은 겨우 그런 식으로 수십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보는 사 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도록 만들었으며, 은연중 뼈를 녹 이고 혼을 앗아가는 매력을 발산시키고 있었다. 정불퇴는 긴장되어 입을 열었다. [소사숙, 혹시 저 두 여인이 누구인지 아시오?] 그는 곡창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들은 틀림없이 적신교에서 가장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대 호법 요혼(搖魂)과 탕백(蕩魄) 이선(二仙)인 것 같구려.] 곡창해는 곡개를 끄덕였다. [정말 명불허전이로군. 그러나 나는 적신교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우리 소림사로 찾아와서 시끄럽게 구는 것은 도대체 어떤 목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네.] 정호법은 노기를 띄고 말했다. [맞았소. 적신교는 이대 사교 가운데 하나이오. 우리가 그녀들 을 찾아가 따지지 않는 것만해도 이미 매우 예의를 지킨 것인데 그녀들이 언감생심 소림사로 와서 시비를 벌이다니, 허허허… ….] 이때 잔디밭에는 그윽한 향기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그 향내가 무척 짙은 편이었다. 가락을 퉁겨내거나 불어내는 소리는 더욱 부드럽고 고와졌다. 원옥과 유서 두 여인이 불고 퉁기는 사람들에게 가담했기 때문 이었다. 홍력대사는 인자한 눈썹을 찌푸리며 눈길을 그 벌거벗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몸뚱어리에서 옮기며 속으로 크게 가슴이 서늘해 지는 것을 느꼈다. '오래 전부터 요혼과 탕백 두 사람의 자색과 요염함이 적신교 에서 이대 호법의 위치를 굳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 터 명성을 떨쳐왔으니 따지고 보면 이미 오십여 세가 되었을 것 이다. 그런데도 보기에는 겨우 스물 남짓한 묘령의 미녀들에 불 과하고 또 한편으로 지극히 매력을 지니고 있으니 이번 대결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내가 감당해 낼 수가 없을 것 같구나.' 요혼과 탕백 두 선자가 홍력대사와 이 장쯤 되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본래 상당히 우렁차던 가락이 갑자기 매우 가늘고도 미미해져서는 들릴 듯 말듯한 생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간혹 귓가에 스치는 음률이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적지 않은 마력(魔力)을 더하고 있었다. 홍력대사는 정신을가다듬고 심신을 안정시킨 후 시력을 돋구 어 바라보았다. 왼쪽의 미녀는 얼굴이 비교적 긴 편이었고, 왼쪽 눈썹 끝에 한 알의 붉은 사마귀가 있었으며, 오른쪽의 미녀는 얼굴이 비교적 둥근 편이었으며 오른쪽 눈썹 끝에 역시 한 알의 붉은 사마귀가 박혀 있었다. 두 사람의 키와 몸매는 모두 똑같았다. 이때 왼쪽의 미녀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웃음부터 띄워 입 안의 옥과 같이 희고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아마도 이미 우리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 리라 믿어요. 나는 바로 요혼선자(搖魂仙子)이고, 이분은 탕백 선자(蕩魄仙子)로서 지금은 폐교에서 호법의 직책을 맡고 있지 요.] 그녀의 음성은 지극히 부드럽고 나긋하면서 아름다워 귀를 즐 겁게 해주었다. 마치 규방에서 속삭이는 밀어(蜜語)처럼 사람의 혼과 마음을 마구 흔들어 울렁거리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홍력대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 전부터 명성을 익히 들었소이다. 소승은 홍력이라 하며 좀처럼 강호에서 떠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무척 견문이 좁은 편이외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소저들이 그와 같은 옷차림을 하 고 있으니 이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으로서는 진정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구려. 그런데 여러분들은 숭산에 왕림한 것은 어인 볼일이 있어서요?] 그가 말을 하게 되었을 때 요혼선자의 시선이 홍력대사의 등뒤 에 있는 정원과 정정진 두 승려의 얼굴에 던져졌으며 그녀들의 얼굴에는 미소마저 띄우고 있었다. 그렇게 특별히 도발적인 동작을 취하지 않았지만 한 가닥 다른 여인이 전혀 견줄 수 없는 미경(媚勁)이 남자의 혼백이라도 끌 어 가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홍력대사는 본래 그녀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자기를 쳐다보지 않는지라 나중에는 부득이 탕백선자를 향해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의 말이 일단 멈춰지자 탕백선자가 입을 열고 에메모 호한 대답을 했다. [볼일이 없으면 삼보전(三寶殿)에 오르지 않는다고 했소. 우리 들이 이번에 보산(寶山)으로 들어온 것은 물론 매우 중대한 일 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편으로 웃음을 띄고 추파를 던져왔 다. 절로 일종의 고혹적인 자태가 우러났으며 그 요염함은 결코 속 되지 않았다. 그 음성과 얼굴의 웃음이 견줄 수 없는 매력을 발산시키고 있 었다. 홍력대사는 왼손을 들어 가슴팍 앞에 합장하듯 세우고 오른손 은 왼쪽 소매 안으로 집어넣고 말했다. [소승은 기꺼이 소저가 왕림한 뜻을 듣겠소.] 탕백선자는 버들 같은 허리를 가법게 흔들거렸다. 홍력대사는 속으로 흠칫했서 암암리에 손톱으로 왼팔의 근육을 꼬집었다. 한차례의 격렬한 아픔이 전해져 대뜸 맑은 정신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이때 탕백선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폐교의 교주께서는 한번 귀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분을 만나 보고자 하는데 대사께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홍력대사는 그만 놀라서는 되물었다. [귀교주께서도 오셨소?] 탕백선자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호호호, 아니에요. 우리가 특별히 귀사의 그 중요한 인물을 모셔다가 폐교의 교주와 대면을 시켜드리고자 하는 것이지요.] 홍력대사는 그저 심신이 홀려서 아리송해지게 되었고 지극히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차마 못할 짓으로 느껴졌다. 그러 나 그는 분명히 지금 그녀가 미인공(迷人功)을 펼치고 있기 때 문에 자기 자신이 지금 그와 같은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도 알 고 있었다. 재빨리 그는 힘을 가해서 왼팔의 살을 할퀴었다. 손톱에 살갗이 찢어져 하마터면 한 조각의 살을 뜯어낼 뻔하게 되었는데 그제서야 격렬한 고통에 정신과 지혜가 대뜸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는 신속하게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정원과 정정진은 두 눈에 미망의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수십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서 불도를 닦아왔는데도 이 여인들의미인공을 감당할 방법이 없으니 십신승들이 어떻게 견 디어 낼 수가 있겠는가?' 생각은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낭랑한 음성으로 잇따라 세 번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이때 사방에서는 적지 않는 승려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 은 모두 다 홍력대사의 곁으로 달려왔는데 정원과 정정진을 합 해서 모두 다 열 명이나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키가 큰 사람도 있었고, 키가 작은 사람도 있었 으며, 못난 사람도 있었고, 잘생긴 사람도 있었지만 나이가 하 나같이 삼사십대였고 옷차림도 완전히 똑같았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의 오관이 단정하고 생긴 것이 수려하여 살 결이 희고 고운 화상이 입을 열었다. [제자 정신(正信) 등 십 명은 삼가 사숙의 법유를 기다리고 있 습니다.] 이 승려는 바로 십대 고수 가운데 우두머리인 정신이었다. 십신승들이 한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을 때에 언제나 그가 발 언을 하곤 했다. 홍력대사는 잇따라 몇 걸음 물러나더니 입을 열었다. [저 소저들은 모두 다 적신교 고수들이다. 오늘 이곳에 이르러 본사로 침입해 소란을 피우고 있는데 우리가 만약에 전적으로 무공과 많은 사람의 수로 그들을 격패시키게 된다면 그녀들은 마음속으로 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오늘 반드 시 본사의 호법이 되어 전력을 다해서 그녀들을 막고 저지하도 록 해라.] 요혼선자가 한차례 음탕하고도 요염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그 말을 받았다. [호호호, 대사 우리 이 한 떼의 여자들을 너무나 과소 평가하 는 것 같군요. 겨우 열 명의 혈기방강한 화상들을 내보내 우리 들을 막고 저지하려고 하다니…….] 탕백선자 역시 이어서 말했다. [아무래도 그 십 명의 승려들은 모두 다 만겁불복(萬劫不復)의 지옥안으로 떨어지고 말 것인데 대사께서는 그와 같은 조처를 하시고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어요?] 이 무렵 정신 등 십 여명의 사내들은 서열에 따라 한일자로 늘 어서서 뭇여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여차하면 손을 쓸 기세 였다. 열 명의 승려들이 서 있는 순서는 왼쪽에서부터 첫 번째가 정 신이고 두 번째가 정념(正念), 세 번째가 정정진, 네 번째가 정 혜(正慧), 다섯 번째가 정정(正定), 여섯 번째가 정불퇴, 일곱 번째가 정호법, 여덟 번째가 정회향(正廻向), 아홉 번째가 정계 (正戒), 열 번째가 정원이었다. 홍력대사는 그 십신승들이 한일자로 늘어선 뒤쪽에 요혼선자와 탕백선자가 보이지 않으니 훨씬 견디기 좋았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죄를 지어 마음이 불안한 것은 소승의 일이니 소저가 수고스 럽게도 걱정해줄 필요는 없는 것 같소. 소승이 유일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여러 소저들이 만약에 즉시 숭산에서 떠나면 폐사에서는 결코 여러분들이 오늘 이렇게 찾아와 소란을 피운 일에 대해서 따지지 않겠다는 것이오.] 요혼선자는 웃었다. [호호호, 대사는 정말 수월하게 말씀하시는군요. 그러나 나중 에 우리들이 가려고 할 때 대사께서는 좀처럼 우리들을 떠나보 내지 못할 것이에요.] 뭇여인들도 소리내어 웃었다. 홍력대사는 요혼선자와 탕백선자 의 말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그만 심신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끼 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그녀들이 정말 소문에 듣던 대로 무섭 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만약 정정 당당히 무공으로써 겨루게 된다면 패한다 하더라도 후회를 하지 않을 것 같고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 같 았다. 그러나 그녀들의 사문(邪門) 무공에 홀려서 정신을 차리 지 못하게 된다면 지극히 불미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즉시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그는 천천히 산문 안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잔디밭 위에는 이제 십신승과 여러 여인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곡창해는 속으로 연신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당장이라 도 그 스스로 십신승의 대열에 끼어들었으면 한이 없을 것 같았 고 여약연을 적수로 삼아 이 두 달 동안 연마한 무공을 밑천으 로 그녀를 상대하게 되었을 때에 그녀와 몇 초까지 겨룰 수 있 을런지 시험하고도 싶었다. 그는 신명이 나 있었지만 요혼과 탕백 두 선자가 여느 여인들 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었다. 사실 그는 요혼선자와 탕백선자가 겨우 몇 마디의 말만 했는데 도 수십 년간 무공을 쌓으면서 불도를 닦아온 홍력대사로 하여 금 놀라서 물러서게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가운데 무서움이 일게 되면 제대로 완전히 분석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무렵 뭇여인들이 불고 퉁기는 가락이 지극히 우렁차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요혼선자와 탕백선자는 발걸음을 가볍게 하여 십신승 앞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그녀들은 십신승의 얼굴 모습과 지니고 있을 제주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마치 군대를 사열하는 것 같기도 했 다. 십신승 가운데 이미 몇 명은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사실 요혼선자와 탕백선자는 공력이 정심(精深)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고혹적인 자태를 취하지 않더라도 어느덧 사람의 마음을 흐려놓는 심법을 펼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미혹공(眉惑功) 가운데 상승 수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정신의 면전에서 가장 저쪽에 있는 정원 쪽으로 걸음 을 옮겨놓고 차례로 훑어가더니 다시 정원 쪽에서 정신 쪽으로 되돌아왔다. #3736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1.3/4 소림사에 도전 10/20 03:38 298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1.3/4 소림사에 도전하는 적신교의 요녀들 그런데 십신승 가운데 그 어느 하나 자제를 하지 못해서 평소 의 자태를 잃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는 크게 뜻밖으로 느꼈으 며 의아한 얼굴로 서로 한번 쳐다보게 되었다. 요혼선자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동생, 이 화상들은 세월을 보내는 것이 매우 고달픈듯 하니 자네가 노래를 불러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탕백선자는 대답했다. [좋지요.] 그녀는 즉시 느릿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가사와 곡을 분간할 수 없었으나 사람의 심금 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듣기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남자의 마음이 근질근질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몇 마디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을 때에 한 명의 화상이 행렬 가운데서 한 걸음 내딛었다. 뭇여인들은 모두 다 크게 기뻐 화상을 바라보았다. 이 화상은 키가 여덟 자나 되었으며 머리는 말머리 만했고 살 결은 거무튀튀해서 첫눈에도 용력(勇力)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 대화상은 바로 서열에 있어서 다섯 번째인 정정화상이었다. 이때 그는 두 눈에서 예리한 광채를 쏟아내며 요혼선자와 탕백 선자를 째려보는데 그 표정과 태도는 노기를 터뜨리지 않는데도 절로 위엄이 우러나 보였다. 적신교의 여인들은 암암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원래 정정화상이 그녀들의 음탕한 노랫소리와 유혹에 이지를 상실해서 행렬 밖으로 나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인 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정정화상은 한 걸음 내딛고 두 선자를 훑어보더니 단전의 기운 을 끓어올리며 한 가닥의 법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그 소리는 그야말로 커다란 종이 길게 울려퍼지는 듯 사방의 산봉우리에 부딪혀 메아리 되어서 돌아오는데 그 성세(聲勢)가 지극히 위맹했다. 화상들 가운데는 이미 심신이 흐트러져 있는 화상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그와 같은 불호령을 듣게 되자 대뜸 맑은 정신을 되찾 을 수 있었다. 곧이어 정정은 입을 열었다. [불문의 정토(淨土)에서 당신네들이 못된 짓을 마구하도록 용 납할 수 없을 것 같소. 소승 정정은 이제 발벗고 나서서 조건을 제시하겠소. 첫째는 무공에 있어서 강약과 승패를 나누려면 즉 시 손을 쓰자는 것이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또 다른 한 조건은 귀교에서 만약 당네들이 닦은 사법이 천하 무림인사를 압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소승은 감히 여러분들과 황야의 조용한 곳으로 가서 당신네들 마음대로 사법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겠소. 그리하여 만약 소승의 정신이나 의지가 흔들 리지 않게 된다면 당신네들이 지는 것이외다. 이 두 가지 조건 가운데 당신네들이 하나를 선택한다면 그 즉시 실천에 옮기겠 소.] 그의 외모는 마치 살아 있는 나한(羅漢)을 연상시켰다. 요혼선자와 탕백선자는 견문이 넓은 사람이라 이 승려가 틀림 없이 정력(定力)과 수위(修爲)에 있어서 기틀이 잘 잡혀져 깊고 튼튼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따라서 그녀들 은 정정화상의 심신과 의지를 뒤흔들어 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한 채의 산봉우리를 뒤흔드는 것보다도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 각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은 서로 한번 쳐다보게 되었는데 서로 쳐다보 는 순간 뜻을 맞추었다. 요혼선자는 미소를 띄우고 정정화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화상은 우리들이 오랫동안 귀찮게 구는 것이 싫어서 그와 같이 속전 속결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오?] 정정화상은 대답했다. [맞았소. 출가인이 만약에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려고 욕심을 낸다면 어찌 산속으로 와서 조용히 불도 에 전념할 수 있었겠소?] 요혼선자는 달콤한 미소를 띄었다. [옳은 말이에요. 옳은 말이라구요! 대화상이 조건을 제시했으 나 나 역시 약간의 조그마한 의견을 제시해도 괜찮겠지요?] 정정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시오.] 요혼선자는 천천히 말했다. [이 두 가지 방법을 우리들은 모두 다 받아들이기로 하겠어요. 하지만 적수는 우리들이 선택하겠어요. 예를 들어 내가 당신을 점찍고 당신과 더불어 손을 써서 무공을 겨루고자 할 때 당신은 거절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정정화상은 가슴을 편 채 조금도 두려움 없이 말했다. [좋소. 소승이 틀림없이 상대를 해드리리다.] 탕백선자가 마치 바람 속의 수양버들처럼 한 화상의 앞으로 사 뿐사뿐 다가와서는 연신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호호호, 나는 이 스님을 조용한 곳으로 데려갈 사람으로 선택 하겠어요.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이 사람의 정력과 무 공이 심후한지 아니면 나의 매력이 더욱더 강한지 두고 볼래 요.] 뭇승려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 승려 쪽을 바라보았다. 탕백선자가 말한 화상은 십신승 가운데 서열이 둘째인 정념화 상이었다. 다른 화상들은 모두 다 탕백선자가 자기를 선택하지 않는 데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십신승의 우두머리격인 정신과 십신승 가운데 지혜로운 가장 이름이 높은 정혜 두 사람은 크게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것 을 금 할 수 없었다. '정념은 내공이 심후하고 수법이 정묘하여 무공으로 따질 때에 는 정정보다 더욱더 강하다. 그가 손을 써서 무공을 겨루게 된 다면 정정이 손을 쓴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다시 뒤집어 말한다면 정정은 십신승 가운데 정력(定力)이 가 장 강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로 하여금 탕백선 자의 내력을 시험해보도록 한다면 이기되 지지 않는 국면이 되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나오게 되자 그야말로 상대방 쪽에서는 장점 으로 이쪽의 약점을 상대하겠다는 것이니 그야말로 십신승으로 서는 완전히 우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었다. 병법(兵法)에서 지극히 중시하는 점은 그 장점을 잃는 자는 약 해진다는 말이 있고 자기 자신의 강함을 상실하게 된다면 약해 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뚜렷한 이치인데 지금은 비단 그렇게 되었을 뿐 만 아니라 이쪽의 약함으로써 상대방의 강한 점을 대응하게 되 었으니 이들쌍방의 적세가 승패의 기틀은 이미 손바닥을 들여 다보듯 환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혜화상은 재빨리 정신화상에게 눈짓을 하게 되었고 정신화상은 어찌할 수 없다는 듯 쓰디쓴 미소로 대답을 했다. 원래 정념화상이 이때 어느덧 성큼하니 행렬에서 한 걸음 나서 며 큰소리로 응했기 때문이었다. [매우 좋소. 소승은 기꺼이 이 몸으로 마법을 시험해보겠소.] 그가 일단 입을 벌리고 말을 했으니 다른 사람으로서는 끼어들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요혼선자는 요염한 눈길을 정신화상의 얼굴로 옮기고 입을 열 었다. [당신은 십신승의 우두머리격이니 나는 당신과 약속을 해야겠 구려. 만약에 우리가 이기게 된다면 당신은 반드시 책임을 지고 폐교주께서 만나보고자 하는 사람을 우리에게 넘겨주어 데려가 도록 해주어야겠소.] 정신화상은 잠시 망설이며 힐끗 정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리고 그의 암시를 받고서야 겨우 대답했다. [승패는 본래 병가의 상사이오. 무릇 무공을 겨루게 된다면 태 반이 승패를 가릴 수가 있기 때문에 소승은 먼저 방법을 생각해 보았소.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 쪽에서 지게 된다면 폐사의 한 사람을 당신네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만약에 우리 쪽 에서 이기게 되면 당신네 가운데 한 사람을 이곳에다 남기겠다 는 것이오?] 요혼선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이죠.] 정신화상은 매우 참을성 있는 태도를 보이며 느릿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출가인은 그저 외부의 사람들이 찾아와 훼방을 놓지 않기만 바랄 뿐이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이 기꺼이 이곳에서 떠나간 다면 폐사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찬동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 이외다.] 탕백선자가 한 송이의 구름처럼 표연히 정신화상의 앞에 내려 서더니 아름다운 눈동자를 동그랗게 부릅뜨고 일부러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터무니 없는 소리! 당신은 올바르게 상의할 수 있는 조건을 내세우도록 해요. 우리들은 당신과 쓸데없는 이야기나 주고받자 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듣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외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는 말할 것 없고 심지어 얼굴까지 거의 정신화상의 얼굴에 부딪칠 정도였다. 정신화상은 심지어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열기마저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신화상은 매우 침착하게 차분함을 잃 지 않았으며 전혀 당황하거나 어지러운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또한 뒤로 물러서지도 않은 상태에서 두 눈에 굳건한 광채를 쏘 아내며 그녀를 마주 보는 것이었다. 탕백선자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슬쩍 농담을 하듯 입을 열었 다. [보기에 당신은 퍽이나 준수하고 말쑥하게 생긴 사람인데 어찌 하여 화상이 되었지요?] 정신화상은 뚜렷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람에게는 각기 뜻이 있는 것이외다. 이 가운데의 학문은 심 오해서 소저와 같은 성색(聲色)으로 자만하는 사람으로서는 이 해할 수 없을 것이니 소승이 삼가 대답해 드리지 않는 점을 이 해하십시오.] 탕백선자는 그와 같은 힐난에 약간 성이 났다. 그리하여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흥, 잘난 척하지 말아요.] 정혜화상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건 근본적으로 논할 가치가 없는 것이외다. 소저에게 어떤 고견이 있는지 먼저 잘 생각해보고 입을 여는 것이 가장 좋겠 소. 그래야 소승들도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모르는 일이 없지 않 겠소.] 탕백선자는 몸을 꼬이듯 흔들면서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엷은 나사에 덮여 있는 몸체에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마력이 발산 되고 있었다. 그녀가 삐죽하거나 미소를 띄우는 것이 그토록 자연스럽고 예 뻐서 조금도 거칠거나 속되지 않고 또한 어색하지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신이 감히 말을 빙글 돌려 욕을 하다니, 당신의 이 름은 무엇이지요?] 정혜화상은 천천히 대답했다. [소승은 정혜라고 하오.] 탕백선자는 그의 넓다란 이마와 깊숙하고 밝은 눈동자를 보고 이미 그의 지혜가 초인적이라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이 말해봐요. 승패의 조건을 모름지기 어떻게 해야 옳은가요? 당신 역시 우리들이 이곳으로 놀러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정혜화상은 조금도 서두르거나 당황하는 빛이 없이 입을 열었 다. [소저에게 정말 성의가 있다면 소승은 대담하고 당돌하나마 하 나의 방법을 제시하겠소. 그것은 바로 당신네들이 만약에 대결 에서 지게 된다면 뭐 다른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즉시 이 산에서 떠나는 것이외다.] 요혼선자가 일 장쯤 떨어진 곳에서 그 말을 받았다. [그러지요. 그런데 당신네들이 지게 된다면?] 정혜화상은 천천히 여유 있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지게 된다면 다시 손을 써서 여러분들을 막거나 저 지하지 않겠소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폐사의 방장에게 자세한 사정을 품하고 방장대사께서 모든 결정을 내리 시도록 하겠소. 그리고 폐사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그것 은 우리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외다.] 요혼선자와 탕백선자는 서로 한번 쳐다보았다. 곧이어 요혼선자는 대답했다. [그러지요.] 정혜화상은 힘주어 다시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소이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동 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이 우리 열 사람이 한꺼번에 손을 써서 한바탕 격투를 벌이도록 합시다.] 탕백선자는 의아한 얼굴이 되어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정혜는 대답했다. [문비문(文比文)의 대결이라면, 피차 상처를 입히지 맙시다.] 탕백선자는 깔깔 웃었다. [호호호, 정말 무서운 인물이군요. 그렇게 하는 것도 좋겠지 요. 우리들은 본래 귀사와 깊은 원한을 맺고 싶은 생각이 없어 요. 어찌됐든 간에 쌍방에서 손을 닿는 것으로써 멈추도록 하고 사람에게 손상을 입히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 다. 즉시 먼저 무공을 겨루어보도록 하고 정정화상이 성큼성큼 걸 어서 나갔다. 손에는 방편산이 들려 있었는데 보기에 무척 위맹 해 보였다. 요혼선자는 지극히 가날픈 몸매에 고운 자태를 하고 있었는데 방편산을 든 정정화상과 비교해볼 때 너무나 유약(柔弱)해 보여 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야말로 정정화상의 일격도 감당해내 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3806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1.4/4 소림사에 도전 10/29 10:13 248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1.4/4 소림사에 도전하는 적신교의 요녀들 그녀가 꺼낸 무기는 두 가닥의 길이가 일 장 반쯤 되는 붉은 비단의 띠로서 폭은 한 자 정도이고 말단에 한 자루 반 치 정도 길이의 둥근 자루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 자루는 붉은 비단에 칭칭 감겨져 있어서 뾰족한 것 인지 둔탁한 것인지 그리고 어떤 재료를 써서 만든 것인지 알아 볼 길이 없었다. 정정화상은 말했다. [소저, 조심하시오.] 요혼선자는 웃으면서 응수했다. [당신은 얼마든지 들어와요.] 다른 사람은 그 소리를 듣고 모습을 대하게 되었을 때 차마 손 을 쓰기가 거북한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정화상은 정력(定力)이 심후하고 튼튼하기 이를 데 없어서 조금도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방편산을 들고서 다가서더니 '휙' 하니 방편산 을 들어서는 상대방의 천령개(天靈蓋)를 노리고 내리치려고 들 었다. 이 방편산의 기세는 위맹하기 이를 데 없이 바람 소리가 우렁 차게 사람들의 고막을 뒤흔들어 놓았다. 요혼선자는 속으로 이 십 여명의 승려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 도 솜씨가 범용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실로 상대방을 깔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대뜸 신형(身形)을 표연히 몇 자 정도 옮겨놓았고 곧이 어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두 폭의 붉은 비단 띠는 마치 두 마리의 기다란 뱀처럼 민활하기 이를 데 없이 움직이며 정정화상의 몸을 휘감으려 들 었다. 정정화상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방편산을 휘둘러 곧장 뻗쳐내 거나 옆으로 쓰러지는 등 맹렬한 공세를 잇따라 펼쳐냈다. 그는 자기의 호신기공(護身氣功)이 오묘한 효용이 있다는 것을 믿고 상대방 요녀의 비단 띠가 설사 자기의 몸을 감는다 하더라 도 자기는 기껏해야 나가 떨어지게 될 뿐 결코 상처를 입지 않 겠지만 반드시 그녀의 두 자루의 자루만 경계하기만 하면 된다 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공세를 취할 때가 많았고 수세를 취할 때 가 적었으며 방편산을 아래위로 흔들어대면서 더욱더 강렬하게 고막에 충격을 줄 듯한 바람 소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요혼선자는 감히 그의 예봉에 맞서지 못하고 줄곧 날렵하고도 표일한 신법을 써서 방편산의 테두리 안에서 이리저리 몸을 날 리면서 피하고 있었다. 두 폭의 붉은 비단띠는 줄곧 허공에서 춤추듯 흔들리고 있었지 만 일초반식을 좀처럼 펼쳐내기가 힘들었다. 정신화상과 정혜화상은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요녀의 명성이 우렁차기는 하지만 역시 방문좌도(旁門左 道)의 무공실력은 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구나.' 그러나 그녀의 그 표홀하고도 날렵한 신법은 그야말로 무학 중 에서 일절(一切)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에 신법이 신묘하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이미 정정화상의 방편산 아래에 당하고 말았으리라. 홀로 나무 뒤에 숨어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곡창해 역시 가 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기쁨을 느꼈으며 정정화상이 방편산으로 대뜸 그녀를 쳐서 쓰러뜨렸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무림의 세가에서 자라나고, 당금 대협으로 칭송받고 있는 가공량 부부 역시 일류의 고수인지라 그는 비록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고 하지만 듣고 보는 것이 무공에 관한 것 이기 때문에 안목이 일반의 무림인보다 고명한 편이었다. 거기다가 이번에 출가하여 사부를 찾아오는 동안 많은 일을 겪 었고 최후에 다시 소림사 여러 장로들이 그를 위해서 대법(大 法)을 펼쳐 진원을 주입하여 경혈(經穴)을 유통시켜 주었기 때 문에 그는 그야말로 십 년 동안 고된 수련을 쌓아 얻은 공력에 해당하는 능력을 지닐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위엄이 넘치고 의젖한 사내애는 수개월 전에 비하면 이미 달라진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연민의 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요혼선자가 저토록 가냘프고 연약하며 사용하는 무기도 유 연하게 그지 없는 것이다. 만약에 정정화상의 방편산에 얻어맞 게 된다면 반드시 몸뚱이는 피와 살을 분간할 수 없는 곤죽이 되어서 날아갈 것이고 뼈마디는 모두다 부러지는 처참한 꼴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어떻게 방법을 간구해서 그와 같은 참극이 벌어지는 것을 미리 방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관계가 중대했다. 그가 소림사에 투신한 지 얼마 되지 못했기 때문에 함부로 망령된 행동을 할 수가 없었 다. 정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적에 정정화상의 방편산을 휘 두르는 수법이 점점 갈수록 흉악하고 맹렬해졌으며 요혼선자의 몸뚱이를 완전히 방편산의 그림자 속에 가두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눈을 들어 요혼선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 굴에는 여전히 방실방실 미소가 감돌고 있었으며 여전히 상대방 의 그토록 흉악하고 맹렬한 공세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았 다. 곡창해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설사 담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기껏해야 침착하게 응전할 수 있을 뿐 여유 있듯이 웃음을 띄울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혹시 그녀는 달리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더욱더 조심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의 거리는 12장의 간격을 두고 있어서 만약에 곡창해가 소 림사 사대 장로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근본적으로 얼굴 모 습마저도 똑똑히 볼 수 없을 지경이니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상 대방의 얼굴 표정을 살펴본다는 것은 더 있을 수가 없는 노릇이 었다. 곡창해는 언제나 매우 세심한 편이었다. 요혼선자의 표정을 보고 난 이후에 그는 눈을돌려서 탕백선자 및 나머지 여러 여인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녀들은 모두 하나같이 안정되어 있었으며 전혀 긴장된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요혼선자에게 어떤 살수가 있는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은 그녀에게 이길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의 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곧장 나무 뒤에서 달려 나가 싸움터로 향했다. 여약연이 먼저 그를 발견하고 즉시 탕백선자에게 알려주는 모 양이었다. 탕백선자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마주오며 말했다. [형제, 어디로 가는 것이지?] 곡창해는 그녀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머리위에서 발 끝까지 한번 훑어봤다. 그러나 그의 표정과 태도는 침착하고 의젓해서, 상대방은 그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갖게 된 것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울 지 경이었다. 탕백선자는 한번 소리내어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호호호, 뜻밖에도 곡 소형제가 이토록 귀엽게 생겼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죠. 그런데 금년에 몇 살이지?] 곡창해는 대답을 했다. [불초는 열세 살이에요. 미안하지만 불초는 반드시 먼저 그들 에게 한 마디의 말을 해야겠으니 잠시 실례함을 용서해 주시구 려.] 그는 두 손을 마주잡아 보이고는 탕백선자 곁을 스칠 듯이 지 나쳐서는 곧장 뭇승려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탕백선자는 정말 손을 뻗쳐서는 그를 잡고 싶었지만 끝내 참고 움직이지 않았다. 곡창해는 승려 쪽으로 가게 되자 정혜화상에게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살수가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는 뭇승려들의 앞에서는 그야말로 소사숙의 신분이었다. 그들은 이 소사숙이 얼마 후에는 본사에서 가장 무서운고수가 되리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무척 존경하 는 태도를 보였다. 정혜화상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 다. [소사숙의 그 한마디가 꿈속에 떨어져 있던 사람을 단번에 놀 라 깨게 하는구려. 나머지의 여러 여인들이 저토록 침착한 것을 볼 때에 저 요혼선자에게 반드시 적을 제압하는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소이다…….] 그는 자시 생각해 보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나직이 말했다. [소사숙도 보았소? 상대방의 약점은 바로 부드러운 무기에 잔 재간이 있소. 그렇기 때문에 정정사제의 억세고도 힘찬 수법에 압도당하고 있지만 무림에서 강맹한 무공을 펼치는 사람이 비교 적 많소이다. 따라서 만약에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고 승리를 얻 을 수 있는 절예를 지니지 못했더라면 어찌 커다란 명성을 누릴 수 있었겠소.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살수는 틀림없이 저 두 폭 의 붉은 비단띠에 있을 것이외다.] 곡창해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나직이 말했다. [난 일종의 기이한 무공을 연마하여 몸을 보호할 수 있고 또 나이가 비교적 어리기 때문에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그녀들도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오.] 정혜화상은 마음이 놓이는듯 웃으며 말했다. [소사숙께서 손을 쓰시겠다면야 물론 가장 좋은 일이지요.] 그는 지모가 출중하고 머리의 회전이 지극히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이 소사숙이 경박하고 큰소리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오늘 전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싸움을 구경하지 말라 고 금지시켰지만 오직 곡창해만이 예외인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사실 곡창해는 어떤 꾀를 부리게 되었을 때는 정말 교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때 그는 발을 구르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감히 내가 못한다고? 그럼 굳이 한번 나서야겠네. 그 리고 자네들에게 어떤 방법이 있는지 두고보기로 하지.] 그는 몸을 돌려 싸움이 벌어지고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정혜화상은 그가 일부러 자기네편 사람들이 난처해지지 않도록 선수를 쳐 나이 어린 사람을 싸움터로 내보냈다는 힐난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부리는 수작이라는 것을 알고는 장계취계 (將計就計)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소사숙! 소사숙! 우리 좋은 말로 합시다!] 곡창해는 어느덧 싸움의 테두리 안으로 달려들어갔으며 다짜고 짜 그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마침 맞은편에서 정정화상의 방편산에 실린 내경(內勁)이 그 순간 정통으로 그에게 뻗쳐왔지만 그는 조금도 몸놀림을 정체하 지 않고 뛰어드는 것이었다. 정혜화상 등은 그와 같은 광경을 똑똑히 보고 마음을 놓을 수 가 있었다. 곡창해는 싸움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손을 뻗쳐 붉은 띠를 잡으려고 했으며 이와 같은 행동은 본래 무슨 초식을 펼치 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외공이 모두다 깊은 화후(火候)를 지니고 있었 기 때문에 다섯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몇 가닥 무형의 기운을 뻗 쳐내게 되었고 거기다가 손씀씀이가 너무나 빨라 탁하는 소리와 함께 그 가운데 하나를 움켜잡을 수가 있었다. 정정화상은 그만 어리둥절해져서는 재빨리 싸움의 테두리 밖으 로 몸을 날렸다. 사실 그는 오십여 초를 펼쳐 격전을 벌이는 중에 일신의 재간 을 한껏 펼쳐보았지만 겨우 주동적인 형세를 취득할 수 있었을 뿐 줄곧 상대방의 그 두 폭이나 되는 기다란 붉은 비단띠를 한 번 건드리지도 못했던 터였다. 그런데 그의 소사숙인 곡창해가 손을 쓰자마자 그 가운데 하나 를 움켜잡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공력은 실로 여지껏 들어보지 못한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에 소사숙인 곡창해가 위풍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우러나게 되어 몸을 날려 물러선 것이었다. 이때 요혼선자의 안색이 약간 변했으며 암암리에 내경을 붉은 비단띠에 뻗쳐내면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끌어당겼다. 그 순간 상대방의 손에서도 한가닥의 암경(暗勁)이 뻗쳐나오면 서 그녀의 내경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가. 요혼선자는 크게 불리하게 된 것이라 말할 수가 있었지만 그녀 가 수십 년간 정성을 들여 갈고 닦은 무공인데도 겨우 십여 세 에 불과한 사내애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놀라운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순간 다시 다른 한 폭의 붉은 비단띠가 번개같이 재빠르게 곡창해의 두 발을 휘감고 위로 끌어올렸다. 곡창해는 역시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기운을 뻗쳐내어 상대 방이 옆으로 끌어당기는 기세에 대항할 수 있었지만 그러느라고 그는 다른 힘을 나누어 쏟아내 상대방이 위로 끌어올리는 힘에 대항할 줄을 몰랐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뚱이는 일 장 남짓이나 허공으로 솟아오르게 되었고 곧이어 상대방에 의해 허공중에 매달린 채 재주를 넘어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 자세가 되었다. 요혼선자는 신법을 번개같이 움직이는 동시에 깔깔거리는 웃음 소리를 터뜨리는 가운데 어느덧 곡창해에게로 바짝 다가들어 왼 손의 자루를 옆으로 해서 곡창해 옆구리 아래쪽을 때리게 되었 고 오른손의 자루는 순식간에 어느덧 곡창해의 가슴팍에 있는 세 곳의 대혈(大穴)을 짚어버렸다. #3811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2.1/4 소림사의 사자 10/29 18:48 262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2.1/4 소림사의 사자후 뭇승려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똑똑히 보자 연신 호통을 터뜨리 며 육칠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달려나왔다. 오직 정혜화상만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서서 단전의 기운을 끌 어올려 호통을 쳤다. [여러 사형제들은 즉각 물러서시오.] 뭇승려들은 그만 아연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때 곡창해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 게 되었는데 머리가 땅에 먼저 닿게 되어 보기에 목뼈가 부러졌 을 것 같았다. 요혼선자는 끊임없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던지며 신속하게 두 폭의 붉은 띠를 곡창해의 발에서 풀더니 허공에 대고 휘두르 며 뭇승려들이 단번에 달려들 것 같은 형세에 대비했다. 정정화상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에 즉시 곡창해 의 곁으로 다가와 그 우람한 상체를 구부리고는 자세히 곡창해 의 상황을 살폈다. 그들은 조금전에 요혼선자가 손에 들고 있던 자루를 판관필로 사용하듯이 왼쪽의 자루로 곡창해의 옆구리 아래쪽을 후려치고 오른쪽의 자루로는 곡창해의 가슴팍에 있는 세 곳 요혈을 짚어 버린것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거기다가 쏟아낸 기운이 너무나 무거워 반드시 곡창해의 내장 을 후려쳐 중상을 입혔을 것이므로 도저히 구원하거나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혼선자가 어째서 그와 같은 살수 를 나이 어린 곡창해에게 사용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 에 그 당시 즉시 예닐곱이나 되는 화상들이 호통을 치며 달려나 오려고 했던 것인데 정혜화상의 우렁찬 소리에 저지를 당하고 만 것이었다. 정정화상은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비분을 느끼며 소사숙의 상황을 재빨리 살폈다. 곡창해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얼굴색은 평소처럼 붉고 윤기가 나는 것이 마치 갑자기 깊은 잠속에 빠져들어 깨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을 뿐이었고 내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일순 어리둥절하게 되었을 때에 그의 귀에는 모기와 같은 곡창해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무사하니 빨리 나를 안아서 우리 사람들 쪽으로 돌아가 세.] 그 소리가 귀에 들리게 되었을 적에 동시에 곡창해의 입술이 가만히 달싹이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그 말을 한 것이 틀림 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정화상은 어리벙벙해져서는 이해되지가 않았다. '요혼선자가 정순한 공력으로 후려치고 혈도를 짚었으니 본사 의 한 배분 위의 고승들마저도 반드시 그녀가 공격한 혈을 봉쇄 해서 무사하게 되리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더군 다나 소사숙은 입문한 지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찌 감 당해 낼 수가 있겠는가?' 그는 놀라서 어리벙벙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신속하게 손을 뻗 쳐 곡창해를 안고는 뭇승려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쪽의 여약연은 큰소리로 말했다. [저 애는 보통사람과 달리 좀처럼 죽일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호법선자의 손에서 도망치지 못할거예요.] 요혼선자는 뭇승려들이 달려들지 않자 붉은 비단 띠를 거두어 들이고 뭇여인들이 서 있는 곳으로 물러서게 되었는데 그 말을 듣고 오만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무공 바탕은 이미 매우 심후하게 다져놓은 터라 만약 시 일을 좀더 주게 된다면 일대 고수(一代高手)가 되는 것은 어렵 지 않겠어. 하지만 그의 복이 적어서 아마 이번에는 목숨조차 보존하기가 어려울걸.] 그녀들이 이와 같이 주고받는 말에는 무한히 기뻐하고 흐뭇해 하는 빛이 절로 나타났다. 마치 그녀들이 오늘 소림사로 쳐들어와 소란을 피운 목적이 바 로 곡창해를 죽이는 데 있는 것처럼 만족해 하는 것이었다. 이때 뭇승려들은 곡창해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데 정혜화상이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소사숙, 적은 소사숙을 볼 수 없소이다.] 곡창해는 즉시 눈을 떴다. 뭇승려들은 모두 다 마음속으로 부처님이 자비를 베풀었다고 소리쳐 무한히 기뻐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매우 곤혹스러 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혜화상은 곡창해가 눈을 뜨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입을 열 었다. [소사숙은 정말 기지가 뛰어나시는구려. 일단 그 요녀가 소사 숙에게 맹렬히 살수를 펼쳐내자 그녀들이 바로 소사숙을 죽이기 위해서 달려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소이다. 그래서 소사숙은 이미 중상을 입은 것처럼 가장하고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구 려. 이제 우리들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삼이 되었소이다.] 곡창해는 눈을 한번 깜박이더니 입가에 웃음을 띄우고 나직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 정혜화상은 천천히 말했다. [우리들이 여차하면 그녀들을 재빨리 돌려보내 불문의 성지가 소란해지게 되는 것을 면할 수가 있을 것이외다.] 그는 곧이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만약 소사숙에게 불문의 기이한 무공이 있어 몸을 보호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그만 놀란 나머지 하마 터면 간담이 찢어질 뻔했소이다.] 정혜화상은 탕백선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다시 싸웁시다.] 탕백선자 대답했다. [맞았소. 우리들은 아직까지 겨루는 것을 끝내지 못했소. 저 사내애가 불쑥 들어와 마구잡이로 방해를 놓는 통에 제대로 끝 내지를 못한 것이니 이제 우리들은 계속해서 무예를 겨루는 것 이 가장 좋을 것 같구려.] 정신화상은 안색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폐사제가 손을 쓰게 된 후 관찰해서 얻은 바에 의하면 요혼선자의 붉은 비단 띠에는 암암리에 일종의 약물이 숨겨져 있으며 만약에 그 약물이 몸이나 살갗에 닿게 된다면 독기운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소. 그와 같이 악독하 고도 사악한 무기가 어찌 정식으로 무공을 인증(印證)하는 마당 에 마땅히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소?] 이 몇 마디의 말에 요혼선자와 탕백선자는 그만 안색이 약간 변하고 말았다. 사실 그녀들의 무기는 모두 다 붉은 비단 띠이고 비단 띠의 묘 용은 언제나 비밀로 유지되고 있으며 부하는커녕 가장 친근한 사람들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밤 뜻밖에도 소림사의 승려들이 간파를 했으니 소 림사의 승려들의 안력이 실로 뛰어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태로 미루어 논해 볼 때에 이 승려들이 매 우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들로 다시 손을 쓰게 된다면 실로 득을 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신화상이 다가서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시주들이 만약에 다른 무기로 바꾸게 된다면 너무나 손해를 보게 되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만약에 무기를 바꾸 지 않는다면 소승들로 하여금 전력을 대해서 싸우지 않을 수 없 고 핍박하는 꼴이 될 것이고 그 결과는 틀림없이 참담해질 것이 외다. 그렇기 때문에 소승의 뜻은 먼저 귀파의 미공법력(迷功法 力)을 가르침 받고 싶소.] 뒤쪽에 있던 정정화상은 우렁찬 어조로 말했다. [이번의 대결은 마땅히 역시 소승이 나서야 할 것이오.] 탕백선자은 쓰러져 있는 곡창해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돌연 명을 내렸다. [우리는 이만 가자. 여러 대사님들, 다음에 다시 인사를 드리 러오죠.] 여러 여인들은 다투어 서애(西崖)에서 떠나가게 되었고 눈 깜 짝할 사이에 남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화상들은 크게 위안이 되는 것을 느끼며 이번의 겨룸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었다. 정념화상은 자기가 느낀 바를 피력했다. [적신교는 천하의 이대 사교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나 있는 만 큼 실로 명불허전이었소.] 정정화상도 자기가 겪었던 바와 느낌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녀들의 사법이 펼치면 펼칠수록 무서운 것을 보고 깊 이 더욱더 고명한 살수가 뒤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 했소. 그래서 부득이 항마거사대법(降魔祛邪大法)을 펼쳐 그녀 들의 심령에 상처를 입혀서는 놀라 물러나도록 했소이다. 이번 이 싸움을 치르고 난 이후 그녀들은 반드시 한동안 고된 수련을 쌓아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됐든 간에 화풀이는 한번 한 것 같구려. 사실 요녀들은 곡창해 사숙이 죽게 되리라 여기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기에 순순히 물러간 것입니 다.] 곡창해는 적신교의 여인들이 멀리 사라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즉시 본사의 방장인 홍경대사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그들은 상세한 상황을 품했다. 홍경방장은 홍일대사와 홍력대사를 한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입 을 열었다. [지금 각 대문파는 대부분이 세력이 약해지면서 인재들이 없기 때문에 요상하고 사악한 자들이 횡행하고 그들의 기개가 날로 높아가는 형편일세. 본사에서 오늘 이번 액겁에 적절히 대응하 지 못하고 그 한 떼의 요녀들이 본사 안으로 뛰어들어 뭇색상 (色相)을 드러내게 되었더라면 설사 나중에 그녀들을 쫓아보낸 다 하더라도 그녀들의 사악한 매력이 이미 본사 승려들의 가슴 속에 파고들어 영원히 몰아내기 어려워 후한이 무궁해졌으리라 는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네.] 홍일대사는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오대산(五臺山) 밀운도형(密雲道兄)이 편지를 본좌에 게 보내게 되었을 때에 오대파에는 한 명의 근골과 천부가 지극 히 훌륭한 제자가 있어 그야말로 오대파의 무상신공심법(無上神 功心法)을 갈고 닦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모으 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제자가 겨우 열너댓 살로 남녀의 일 을 몰랐는데도 여전히 적신교의 색상과 사법에 심신이 흐트러져 최상승의 신공심법을 갈고 닦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했었소. 그는 무당파의 한 명의 지극히 뛰어난 후기지수(後起之秀)가 적 신교에 의해 몸을 망가뜨리게 되고 명성이 땅에 떨어지는 치욕 을 당했다는구려.] 홍경방장은 곡창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제, 자네는 나중에 반드시 조심하고 근신해야만 될 것이네. 이제는 응진 사숙을 가서 뵙도록 하게나.] 뭇승려들은 다시 곡창해를 전후 좌우에서 호위하여 잠룡원으로 들어갔다. 응진대사는 이미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선탑(禪榻)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선탑은 넓다랗고 아늑하여 우아한 노천의 마당 한복 판에 놓여 있었다. 응진대사는 우르르 몰려든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오늘 치룬 모든 경과를 내가 이미 모조리 알고 있 네. 본래 본사의 사람들이라면 그 한 떼의 요녀들을 수월하게 이 산에서 몰아낼 수가 있지만 본사에서는 진정한 실력을 드러 내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으며 적으로 하여금 또 얼마나 되는 장로들이 이곳에 있는지 알도록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네 들을 내보내 요녀들을 상대하게 한 것이네.] 응진은 호기가 갑자기 끓어오르는 듯 길게 소리내어 웃더니 입 을 열었다. [하하하, 마두들 가운데 어느 하나 소림사 출신인 내 손 아래 곤두박질 치지 않은 자가 없었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깊숙한 마음 가운데 소림사라는 세 글자를 매우 꺼려하고 있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친히 나서 손을 써서 그 흉악하고 사악한 자들 을 일일이 제압하여 항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군.] 뭇승려들은 그의 호방한 태도에 감염이 되어 모두 다 흥분된 빛을 보였다. 곡창해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만약에 사존(師尊)께서 손을 쓸 수만있다면 그들이 어찌 감 히 본사를 침범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사존께서는 손을 쓸 수가 없는데 만약에 그들이 모조리 한 통속이 되어 달려오게 되었을 적에는 어떻게 하면 좋지요?] 그는 나이가 어린 것을 믿고 어떤 사람들이 감히 묻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입을 열고 물어볼 수가 있었다. 응진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맞다. 만약에 그 흉악하고 사악한 자들이 모조리 한통속이 되 어 서로 약속을 하고 본사를 상대하게 된다면 그 성세(聲勢)는 매우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 나와 너의 사백부님들은 모두 손을 쓰게 될 것이다. 귀찮은 것은 그 흉악하고 사악한 자들 가운데 겨우 한두 명만 찾아와 우리들이 전력을 기울여 상대할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자네들이 또한 대항할 수 없게 된다면 골치가 아 파지는 것이지.] #3816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2.2/4 소림사의 사자 10/30 06:06 261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2.2/4 소림사의 사자후 이야기는 일단 멈추게 되었고 뭇승려들은 물러가게 되었다. 응진은 그 즉시 곡창해를 데리고 광덕과 광자 그리고 광비 세 분의 장로에게 찾아가서는 그 일을 의논하고 계책을 마련하려고 했다. 소림사에서 배분이 가장 숭고한 몇 분의 장로들은 한동안 상의 를 하더니 다시 홍경방장, 홍일, 홍력 등 세 명의 대사를 불러 전반적인 계획을 의논하고 토론을 한 끝에 어찌됐든 간에 방법 을 찾아내게 되었다. 적신교에서 소림사로 쳐들어와 소란을 피운 날 이후 곡창해는 절 안 천여 명의 승려들 마음속에 이미 지극히 대단한 인물로 부각이 되었다. 그것은 십신승들이 그날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 언제나 그 날 만약에 곡창해가 그곳에 있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무사하게 그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강호에서 많은 소문들이 떠돌았다. 이와 같은 소문들은 퍽이나 사실과 동떨어지는 바가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주요 부분은 모두 다 소림사가 적신교에 의해 소란이 한바탕 벌어지게 되었음에도 전혀 손을 써보지 못하고 적신교의 여인들이 표연히 왔다가 표연히 떠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며칠 동안 소림사를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모두 다 무림에서는 퍽이나 지위가 있는 사람인데 찾아 왔을 적에는 모두 다 소문이 정말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매번 번거롭고도 무거운 무공을 끝내고 약간 휴식을 취하게 되었을 적에는 언제나 한 벌의 승려복으로 갈아 입어 소 사미 모습으로 변장을 해서는 객실 안을 오락가락했다. 그리고 누가 홍경방장과 홍일, 그리고 홍력대사와 이야기를 논 하게 되었을 때에는 언제나 세 대사의 등뒤에 시립해 서 있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시중을 드는 제자라고만 알았지 젊은 소사 미가 바로 소림사에서 전력으로 키우고자 하는 미래의 고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곡창해의 이와 같은 행동은 사부의 명을 받들어 행해진 것이었다. 응진은 첫째로 그에게 다년간 명성을 떨쳐온 무림의 인물들을 암암리에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둘째로 그 기회를빌어 무림에서 신분 있는 사람들이 서로 응대를 하게 되었을 때에 지 켜야 하는 예의를 배우도록 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그들이 주고 받는 말에서 강호의 상황을 좀더 이해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그리하여 십여 명이나 되는 무림의 명숙들을 만나보 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의 이름은 그가 이미 부모님께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런데 가장 그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은 오 대산 법화사(法華寺) 장로인 밀운대사였다. 이 고승은 나이가 육십이 넘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불과 사십 세에 불과해 보였으며 미목이 청수하고 얼굴이 곱고 희였다. 그가 하는 말들은 간결 명쾌했으며 한 가지 일을 논하는데 겨 우 두세 마디 말로 분명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소림사의 홍경방장 등 세 대사와 무척 오랜 세월을 두고 사귀어 온 지라 교분이 두터운 편이었기 때문에 강호에서 소문 을 듣게 된 후 일이 일어난 지 6개월 만에 소림사로 달려온 것 어었다. 그는 소림사의 당대 세 분 고승과 자리를 같이 해서 그 동안의 인사말을 나누고 난 이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강호에서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 비단 모든 사람들이 소림사에서 적신교의 침입과 소요를 한바탕 하게 된 후에도 전 혀 어떤 방법을 강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소림사에서 누군 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었소.] 그는 맑고 예리한 눈초리로 홍경방장 등 세 대사를 살펴보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소문에는 상처를 입은 사람인 누구인지 언급하지 않았으나 소승은 불현듯 폐사에 대한 옛날의 소문을 한 가지 떠올리지 않 을 수 없었소이다.] 홍경방장은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밀운대사는 빙그레 웃음 을 띄우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일에 관해서 일전에 소승은 이미 보내드린 서찰에서 언급 을 한 바가 있지만 세 분 도형의 면전이니 소승으로서는 감출 필요를 느끼지 않소이다. 하지만 함부로 말하기 매우 어려운 법 이지요. 소승이 이 세상을 알면 알수록 감히 세상 일에 대해서 단정하기 어려워지는구려.] 그는 무겁고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소승은 부득불 여러 도형들에게 삼가 말 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구려. 그것은 바로 적신교와 흑수파라 는 이대 사교는 아무리 자기네들끼리 싸움을 벌이고 서로 당연 하게 죽고 죽이지만 일단 그들이 정파의 문호(門戶)를 상대하게 되었을 적에는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다는 것이외다. 지난번 두 번의 경험에 의하면 매번 적신교의 제자들이 침범을 한 후에는 흑수파가 언제나 쳐들어와 소란을 피우는 것이었소이다. 소승의 짐작으로 적신교에서 책임을 지고 충분히 일대고수(一代高手)가 될 제자를 책임지고 궤멸을 하게 된 후에는 흑수파에서 그 결과 를 조사하고 알아본다는 협정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오.] 홍경방장의 얼굴에 두려운 빛이 일었다. [도형의 그와 같은 추측은 고명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폐사에 서는 물론 신중하게 이번 일을 주의하게 될 것이외다.] 이때 밀운장로는 곡창해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곡창해는 그가 이미 자기의 신분에 의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들이 논하는 것이 모두 다 무림에서 관계가 중대한 소식들이 었으며 소림의 세 대사가 그런데도 곡창해를 물리치지 않은 것 은 곡창해가 특별한 신분이 아니라면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된 노릇인지 모르지만 곡창해는 마음속으로 약간 불안 한 감을 느끼고 재빨리 궁리를 했다. '나는 일부러 귀머거리에다가 벙어리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것 이 좋겠구나. 그렇게 된다면 방장 사형이 나를 곁에 두고 이런 저런 일을 시킬 수가 있으며 중대한 일이라 하더라도 꺼려서 나 를 밖으로 내보낼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밀운장로는 매우 똑똑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회를 찾 아 매우 자연스럽게 내가 귀머거리에다가 벙어리라는 것을 나타 내야만 그에게 어떤 빈틈을 발견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기회가 없음을 난처하게 생각하고 또 다른 한편 으로는 홍력대사가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의 내력을 들춰내게 될 까봐 정히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있을 적에 문에서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곡창해는 신속하게 문앞으로 걸어가서는 한 가닥의 틈만 벌어 지도록 열고서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문밖에는 바로 소림사의 십대 고수 즉 십신승 가운데 하 나인 정혜화상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크게 기뻐서 즉시 정혜화상에게 눈짓을 하고는 이어입을 벌리고 '아' 하는 소리를 낸 후에 손으로 그에게 무슨 볼 일이 있느냐는 시늉을 했다. 정혜화상은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고 총명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이 알려진 만큼 반응 또한 신속하고 민활하여 즉시 입을 열 었다. [소사제, 밖에 귀빈이 왕림했기 때문에 지객 사형이 나보고 방 장대사에게 품하라고 하네 아 나는 자네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 을 깜박 잊었군…….] 홍경방장은 이미 곡창해가 밀운대사에게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벙어리로 가장을 하는 것임을 알아차릴 수 가 있었다. 따라서 홍경방장은 속으로 나름대로 헤아려 보는 것이었다. '밀운도형으로 말하면 득도한 고승이다. 곡사제는 어째서 밀운 도형에게 갑자기 의심을 품게 되는 것일까? 이 일은 퍽이나 한 번 음미해볼 가치가 있구나.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더 말을 해서 세심하지 못하고 입이 빠른 홍력대사가 알아차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홍력사제로 말하면 밀운도형과는 교분이 무척 심후한 편이니 어쩌면 불쾌하게 생각할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즉시 그는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그 방에서 나왔으며 한 칸 의 경당(經堂) 안에서 응장 막대풍을 만나게 되었다. 쌍방은 서로 수인사를 나눈 후 나누어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 응장 막대풍이 입을 열었다. [불초는 언제나 인연이 없어 찾아와 뵙지 못했는데 오늘 이렇 게 귀사를 찾아오게 된 것은 실로 당돌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 각이 드는군요.] 그는 신분이 무척 높은 편이었으며 명성 또한 쟁쟁했다. 그러 나 그 말투는 그토록 겸손하고 온화하여 홍력대사는 그에게 가 지고 있던 한 가닥의 감정이 대뜸 많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 다. 홍경방장은 그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막시주께서는 당금의 기인이사(奇人異士)이신데 오늘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주시니 소승으로서는 무척 영광스럽구려. 실례지 만 막시주께서는 어인 가르침을 베풀고자 하는지 궁금하구려.] 막대풍은 말을 빙글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불초는 십여 일 전 마침 볼일이 있어서 낙양(落陽)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강호에서 떠돌고 있는 적지 않은 소문을 듣고는 크게 놀라고 의아하게 생각했소이다. 그때 이미 찾아와서 여러 대사님들을 찾아뵈고 인사를 올리고자 했으나 뜻밖에도 갑자기 한 사람의 종적을 발견한 나머지 뒤를 쫓다보니 그만 며칠 늦어 져서 이렇게 평소에 품었던 소원을 풀게 된 것 같소이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그 자신은 믿고 있는 바가 있기 때문에 감히 그토록 대담하게 얼굴을 드러낸 것이며 동시에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귀사에서 발생한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더구려. 불초는 방법을 강구해서 그의 뒤를 따르며 은밀히 조사를 하지 않을 수 가 없었지요. 그리하여 이레 동안 적지 않은 곳을 가보고 끝내 최환이 흑수파에서 중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감히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게 된 것은 흑수파를 믿고 있기 때문임을 실증하 게 되었소이다.] 그리고 그는 안색이 더욱더 무겁고 엄숙해져서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가 조금도 꺼리지 바가 없기 때문에 조사를 하게 되었을 때 에 그가 이미 흑수파에 몸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가 있었소이다. 그러나 실제로 증명을 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 간과 기력을 소모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신 분을 실증할 수 있게 되고 또한 한 가지의 소식을 알아내어 특 별히 이렇게 달려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바이올시다.] 그는 은밀한 소식을 말하기 전에 먼저 눈을 들어 경당 안의 여 러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마지막으로 시선을 곡창해의 얼굴 로 던졌다. 그 순간 그는 약간 놀람과 의아한 빛을 띄웠다. 경당 안에는 다른 제자가 없고 오직 곡창해 한 사람만이 방장 의 시중을 들고 있으며 이 무렵에도 여전히 홍경방장이 곡창해 를 내보내지 않는데 대해 곡창해의 신분과 지위에 대해 크게 이 상한 것을 느낀 것이었다. 홍력대사는 이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 애는 타고난 벙어리이기 때문에 매사에 있어 그를 피할 필 요가 없소이다.] 응장 막대풍은 '아' 하는 소리를 질렀다. 겉으로는 상대방의 설명을 듣고 탄성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실 그는 그러한 점 이외에도 곡창해의 얼굴 모습이나 풍채가 당당하고 기우(氣宇)가 훤할 뿐만 아니라 평생 그가 가 장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 절친한 친구 가공량과 어느 정도 닮았 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타고난 병신이라니 속으로 그만 자기도 모르 게 약간 실망을 하게 된 것이었다. 홍경방장을 위시한 소림사의 세 분 대사는 모두 다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응장 막대풍은 그들의 뜻을 헤아려본 듯이 즉시 입 을 열고 말했다. [불초는 저 아이의 얼굴 모습이 범속하지 않아 마땅히 큰 그릇 이 될 인재로 보았소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잔질(殘疾)을 가지 고 있다니, 정말 애석한 느낌이 드는구려. 거기다가 저 아이는 나의 옛친구를 닮았기 때문에 불초가 주의를 하기도 했다오.] 이어 그는 무겁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되돌아가 다시 말을 이었 다. [불초는 흑수파에 몸을 담고 있는 고수들 상당수가 짧은 시일 안으로 귀사를 찾아와서는 소란을 피우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아 내었소이다. 빠르면 이 개월 안으로 들어닥치게 될 것이고 늦는 다하더라도 반 년 안으로는 찾아올 것이외다. 귀사에서는 물론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겠지만 불초가 아는 바로 상대방은 그들 자체의 고수들 몇 사람 이외에도 서량일괴(西凉一怪) 뇌오(雷 敖)를 초청해서 자기네들을 돕게 했다는구려. 그 사람들은 하나 같이 심보가 악독하고 수단이 매서운 자들인데 만약에 그들을 꼭 알맞게 상대해주려고 한다면 아무래도 먼저 준비가 되어 있 어야겠소이다.] 홍경방장은 재빨리 고맙다는 사의를 표했고, 홍력대사는 두 눈 을 감고 마치 무슨 어려운 문제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막대풍은 말을 이었다. [불초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이미 생각을 바꾸었소이다. 작 년에 가공량 형과 서신을 주고 받은 바가 있는데 그가 답장을 보내게 되었을 적에 역시 불초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하더군요.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모두 다 이제는 불문에 몸을 담게 된 대사가 그와 같은 추악한 일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별다른 뾰족한 대답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는 이 몇 마디의 말을 하고 난 이후 표정이 대뜸 훨씬 가뿐 해졌다. 마치 마음속을 짓누르고 있던 바위를 옮겨놓은 사람 같 았다. 그는 다시 좀더 명랑한 얼굴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3820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2.3/4 소림사의 사자 10/31 12:44 270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2.3/4 소림사의 사자후 [불초는 귀사에 대해 마음속으로 미안한 감을 갖고 있던 차에 최근 공교롭게도 그와 같은 일을 당하게 되어 고생을 무릅쓰면 서까지 은밀히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알아보았소이다. 그 최염왕 (崔閻王) 등은 무척 눈치가 빠르고 기민하여 불초가 온갖 지력 (智力)을 다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발각을 당할 뻔했소이다. 그리고 불초가 이번에 산 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에도 행적을 무 척 은밀히 해 상대방이 혹시나 알아차리게 된 이후에 어쩌면 시 일을 앞당겨 들이닥치거나 혹은 이후로 연기하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소이다. 그들이 앞당기거나 시일을 늦추게 된다면 귀사에서는 자연히 방비에 어느덧 소홀하게 되어 미처 손을 쓸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염려를 한 것이지요.] 홍경방장은 거듭 그에게 사의를 표했다. 소림사 세 대사는 모두 다 응진이 원래 그들의 마음속에서 여 전히 한 명의 광명 정대한 사내 대장부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무척 기쁘고 흐뭇하게 느꼈다. 얼마 후 응장 막대풍은 독수리 머리 모양의 지팡이를 든 채 살 그머니 소림사에서 떠나갔다. 그 이후 곡창해는 상황을 응진에게 품했다. 응진 역시 매우 기뻐했으며 그들 스승과 제자는 한동안 이야기 를 나누었다. 그런 후에 응진은 곡창해에게 그와 같은 바깥일로 인해서 심신 을 분산하게 되고 무공 연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라고 분 부를 했다. 최후에 이르러 그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애야, 네가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것은 네가 산에서 내려가 강호에 발을 딛게 되면 특별히 한 가지 일을 주 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아름다운 여자에 관한 것이 다. 사실 무릇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진귀한 물건들은 모두 다 많은 사람들이 빼앗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아름다운 여자애들도 예외는 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건드리면 여러가지 수단을 다해서 너에게 타격을 주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홍안화수(紅顔禍水)라는 말 이 있는데 실로 이것은 매우 옳은 말이기도 하다.] 곡창해는 기쁜 마음으로 성실하게 귀를 기울였으며 애써 사부 님의 그와 같은 경험에 관한 말씀을 각인시키려 노력을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견식이 뛰어난 바 있고 지혜가 출중한 면을 보였다. 난생 처음으로 집을 떠나 만 리 길을 걸어오면서 강호 바닥을 헤메이게 되었고 온갖 어려운 일을 다 맛보았는데 그 한동안 그 가 겪은 일들은 그에게 지극히 유용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 거의 지모에 노련하고 마음 씀씀이가 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응진대사는 최후의 결론은 곡창해가천성적으로 침착 온건하고 온화하여 사람에게 친근감을 안겨다주기 때문에 장래 강호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을 때에 옛날의 자기처럼 많은 원수를 갖지 않 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날 황혼 무렵 곡창해는 신공의 연마를 끝내고 잠룡원에서 떠나갔다. 그는 앞쪽으로 가보았는데 분위기가 매우 무겁고 엄숙한 것이 전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이미 응진으로부터 편리할 대로 일을 처리해도 된다는 허 락을 받은 바 있기 때문에 심지어 방장사형의 구속을 받지 않아 도 되는 몸이 된 것이었다. 그는 촌뜨기로 변장하고 절 밖을 둘러볼 생각으로 절 앞으로 달려나갔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소림사 앞 넓다란 잔디밭에는 평소에 승려 들이 오락가락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곡창해는 빙그레 웃고는 걸음을 옮겨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그 리고는 산을 내려가는 돌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 다. 겨우 십여 계단을 내려가자 한 가닥의 잿빛 그림자가 울창한 숲속에서 번쩍하니 달려나왔는데 똑똑히 보니 바로 중년의 화상 이었다. 그 중년의 화상은 합장을 하고 입을 열었다. [소사숙께서는 주의하셔야 합니다. 보고에 의하면 적이 곧 본 사로 들이닥쳐 소란을 피우리라는 것입니다.] 곡창해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고맙네. 내 자연히 알아서 조심을 하도록 하지.] 그 중년의 승려는 마음을 놓았다는 듯 빙그레 웃고는 다시 울 창한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때 종 소리와 북 소리, 그리고 범패(梵唄) 소리가 은연중 바 람을 따라 사방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우러 나게 했고 가슴이 확 트이는 듯한 감을 주었다. 얼마 후 그는 내공을 운기하여 촌뜨기 모습으로 얼굴 형태를 바꾸었다. 그리고 조용하고도 아늑하고 우아한 산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산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큰길이라 비단 폭이 넓은 뿐 만 아니라 모조리 석판을 깔아놓아서 아주 평탄했고 걸음을 옮 겨놓기에도 수월했다. 순간 갑자기 한 늙은이가 달려와 곡창해의 목을 졸랐다. 곡창해는 상대방이 어째서 아직도 세찬 힘을 쏟아 조르지 않는 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물었다. [나는 소숭(蘇崇)이라는 사람이다. 네 녀석은 방금 소림사에서 나왔지? 그렇지 않느냐?] 곡창해는 목을 끄덕이며 입으로 연신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 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튀어 나오며 꾸짖었다. [닥쳐라. 목숨을 살려달라고 외치는 노부는 성이 난다. 그래서 조금전에도 몇 놈을 죽였다.] 곡창해는 그만 노기가 가슴속으로부터 치밀었을 뿐만 아니리 악독한 마음이 간담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 사마외도의 흉악한 인물들은 정말 잔혹하고 악독하구나. 반항할 힘조차 없는 사람을 마구 살육하다니. 강호에서 일반적 으로 사람을 죽이고 화물을 약탈하는 날강도보다도 더 가증하여 모조리 주살해서는 이 세상의 해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겠구 나.' 정히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소숭이 어느덧 입을 열었 다. [소림사에서는 지금 어떤 동정을 보이고 있더냐?] 곡창해는 말했다. [그들……그들…….] 소숭은 냉소를 하더니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어 졸랐다. 곡창해는 그가 조르는 대로 그만 머리를 뒤로 젖히고 손발을 마구 허우적거렸다. 그들은 한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나 위삼이 너의 버릇을 가르쳐 놓겠다.] 위삼은 손을 들더니 칠흑과 같은 손바닥을 드러내어 곡창해의 얼굴을 후려쳐왔다. 동시에 그는 괴소를 흘리며 호통을 쳤다. [흐흐흐, 녀석. 똑똑히 보아라!] 이자는 흉악했다. 흑수파에서도 고수로 손꼽혔다. 원래는 황횡 의 사부였으나 나중에 황횡의 자질이 뛰어난 것을 보고 흑수파 의 교조인 누대역에 의해 황횡이 제자로 거두어들여지는 바람에 황횡은 배분이 위삼과 똑같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주의 총애 를 받고 위삼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흑수파의 교조 누대역은 별명이 도사(屠師)인데 태어날 때부터 성격이 잔인하고 한다는 짓이 모두 대역 무도하며 황당 무계한 일들이었다. 그는 황횡이 되돌아서서 옛날의 사부에게 명령을 내리고 이러 쿵저러쿵 하라고 지시를 하는 일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인정하 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황횡을 격려하여 위삼을 모욕하 여 웃음거리로 삼기도 했다. 이에 위삼은 흉악한 성질이 폭발하다시피해서 그만 흑수구혼의 무공을 펼쳐 곡창해를 후려쳐 간 것이었다. 장력이 쏘아지자 곡창해는 어느덧 그의 무공이 옛날의 황횡에 비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기뻐했다. 즉시 목을 졸려 손발을 허우적거리는 기세를 빌려 암암리에 일 장을 후려 쳤다. 위삼의 새까만 손바닥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면서 손바 닥에 실린 힘이 완전히 소숭의 몸으로 뻗쳐가게 되었다. 소숭은 흑수파에서 위삼과 지위나 공력이 대등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도 종종 알게 모르게 서로 다투거나 싸우 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벼락같이 장력이 자기에게엄습해오는 것을 느끼게 되자 속으로 섬뜩해져서는 재빨리 피한다고 피했 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곡창해의 목이 잡혀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하나의 허수아비를 잡고 있는 듯 전혀 힘을 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곡창해는 하반신이 흔들하는 순간 발끝으로 위삼의 옆구리 아 래에 있는 대혈을 감쪽같이 걷어찼다. 소숭과 위삼 두 사람은 각기 더듬거리며 대여섯 걸음 뒤로 물 러섰으며 소숭은 위삼의 장력에 상처를 입은 나머지 왼손을 그 만 풀게 되어 곡창해는 그만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위삼은 옆구리 아래의 요혈에 암습을 받은 나머지 전신의 공력 이 태반이 흩어지게 되고 내장마저도 상처를 입은 나머지 얼굴 에 핏기가 가셔지며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땅바닥에 앉게 되었 고 그 즉시 재빨리 운기조식으로 들어갔다. 이때 황횡과 장소룡, 그리고 노패가 나타났다. 그들은 이 광경 을 보고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와 같은 상황은 그야말로 위삼이 기회를 빌어서 소승에게 해 를 가한 것 같았고 소숭이 피하게 되었을 적에 손을 들고 있던 사람을 무기로 삼아 위삼에게 공격했던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 다. 그들로서는 조금도 빈틈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황횡은 노기 띤 웃음을 한번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잘한다. 당신네들끼리 먼저 반목하여 싸우다니 정말 창피막심한 일이로군. 내가 보기에 역시 교조 면전으로 나가 따 지는 것이 좋겠소.] 위삼과 소숭 두 사람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그만 깜짝 놀란 나머지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황횡은 그만 성이 나서 콧방귀를 연신 뀌며 앞으로 나가더니 대뜸 발을 들어서는 위삼을 걷어차 위삼의 몸뚱어리가 뒤집어지 도록 만들었고 다시 그는 소숭의 면전으로 다가서서는 손을 뻗 쳐 소숭의 혈도를 짚었다. 소숭은 감히 반항을 하지 못했고 그만 혈도를 그에게 짚히고 대뜸 쓰러졌다. 황횡은 그들 두 사람을 나누어 걷어차 길가에 있는 풀더미 속 으로 떨어지도록 만든 이후 장소룡과 노패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자들이 그토록 대담하고 망령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려. 두 분이 보고 웃으시겠소.] 장소룡과 노패 두 사람은 뭐라고 말을 하기가 매우 난처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곡창해는 천천히 풀더미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소숭에게 잡혀 있었기 때문에 소숭이 풀더미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그도 덩달아 풀더미 속으로 굴러떨어진 것이었 다. 이때 그가 몸을 일으키는 표정이나 태도가 무척 공포에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황횡은 횻악한 눈을 부릅뜨더니 호통을 쳤다. [이리 와!] 곡창해는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으면서 여전히 두 다리에 맥이 빠져서 힘없는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자기가 그럴싸하게 가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는 득의에 찬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장소룡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오늘 죽어도 억울하지 않겠지. 무림에서 얼마나 많 은 고수들이 우리들과 마주치고 헛되이 목숨을 버렸을 뿐인데 이 녀석은 놀랍게도 우리들로 하여금 크게 불리함을 당하게 했 단 말이오.] 노패는 물었다. [내가 그에게 일 장을 가하는 것이 어떻겠소?] 말속의 뜻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 같았지만 기실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대뜸 주먹을 쥐고 그대로 내지르 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전혀 몸을 움직이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노패의 주먹에 한 대 얻어맞은 곡창해 는 그만 이 장 밖으로 날아가게 되었고 잠시 풀더미 속으로 떨 어져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황횡 등 세 사람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십여 장쯤 나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나무뿌리에 앉 아서 등을 나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은 첫눈에 그가 바로 곡창해인 것을 알았다. 갑자기 장소 룡은 발끝으로 한 알의 돌멩이를 곡창해 쪽으로 날려보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돌맹이는 곡창해의 콧잔등에 적중되 었다. 곡창해는 크게 부르짖더니 눈을 뜨고서 코를 감싸쥐었다. 노패는 가장 승복할 수 없는 기분에 젖어서는 날카롭게 외치듯 말했다. [이런 녀석 보았나! 네가 만약에 몸에 절기를 지니고 있었다면 어째서 감히 손을 써서 한번 겨루어보지 못하지?] 곡창해는 몸을 벌떡 일으키기는 했다. 그러나 그 동작에 상처 를 입어서 몸놀림이 민활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장소룡은 몸을 흔들거리며 앞으로 다가서 냉랭히 입을 열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지?] 곡창해는 코를 감싸쥐고서는 더듬거렸다. [나는……나는…….] 장소룡은 왼발을 쳐들었다. 그러나 갑자기 왼쪽으로 또는 오른 쪽으로 두 번 흔들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가 어느쪽으로 발로 걷어차게 될 것인 지를 헤아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3824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2.4/4 소림사의 사자 11/01 10:53 225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2.4/4 소림사의 사자후 곡창해가 왼쪽으로 번쩍 몸을 날리게 되었을 때 꼭 알맞게 장 소룡의 발이 신속하게 그쪽으로 움직이게 되었고 '펑' 하는 소 리와 함께 걷어차인 곡창해는 이 장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 다. 황횡은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장소룡은 몸을 돌려 손을 뻗쳐서는 황횡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 었다. [이 형제는 결코 저 녀석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가 없는데? 황형은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할 것이 뭐가 있겠 소?] 황횡은 그 말을 듣고서는 부득이 다가가 살펴보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다시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들이 돌아서 돌계단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별안간 곡창해 가 다시 돌계단 위에 앉아서 머리를 감싸쥐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세 사람은 속으로 똑같이 이상한 노릇이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들 가운데 황횡은 앞으로 달려나가며 입을 열었다. [이것봐, 너는 도대체 누구냐?] 곡창해는 그저 신음 소리만 흘리며 부르짖었다. [사람……사람……사람 살려…….] 황횡은 성질을 누르고 다시 물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어째서 미친 척하는 것이지?] 곡창해는 그저 목청껏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지를 뿐 그가 묻 는 말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황횡은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이런 녀석 봤나! 감히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들을 희롱하다니 …….] 그는 덥석 손을 뻗쳐 곡창해의 어깻죽지를 잡고 들어올려 오른 손으로 흑수구혼의 수법을 써서 후려쳤다. 황횡의 무공은 그 동안에 크게 증진되어 있었다. 곡창해는 속으로 서늘해지는 감을 느껴야 했다. '흑수파는 역시 이대 사교 가운데 하나로 다른 흉악한 사람들 과는 크게 다른 바가 있다. 단지 이 눈앞에 있는 이들 세 사람 을 두고 논할 때 과거에는 공력이 막상 막하로 거의 비슷했으나 오늘날 황횡의 진도가 가장 신속하고 은연중 이미 일류의 고수 가 된 것 같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그는 자기의 원래 마공(魔功)으로 몸을 보호 하기 때문에 어떤 기문(奇門)의 무공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황횡 의 공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모험삼아 한 대 정확하게 맞아보려 고 한 것이었는데 역시 약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그 자신이 상대방의 일 장을 견뎌내지 못할까봐 걱정된 것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곡창해는 어느덧 삼 장 밖으로 나가떨 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의 모험 결과 역시 놀랍게도 평안 무사하다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그제서야 대종사이신 천마 방각이 전수해준 천마신공 이 정말 천하에서 으뜸가는 신공절학(神功絶學)이라는 것을 깊 이 깨달을수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십 여층의 돌계단 위 왼편의 소나무와 잣 나무 뒤쪽에서 '휙휙' 하니 두 사람이 달려나왔다. 황횡은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오른쪽에는 나이가 삼십 세쯤 되어 보이고 얼굴 모습이 매우 엄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생김새로 보아 평소 성격이 엄격하고 과묵하여 행동 이 근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한 벌의 남색 베로 만든 장삼을 걸치고 등뒤로 비 스듬히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그곳에 서 있었는데 그 기품이 매우 무거워 보여 첫눈에 내가 고수이며 결코 범상한 사람이 아 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나이가 스물쯤 된 젊은 화상인데 입술이 붉 고 이가 하얀 것이 생김새가 무척이나 풍류적이면서 준수했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빛깔이 파란 대나무 지팡이가 들려져 있었는데 그 굵기가 오리알만했고 길이는 다섯 자 정도였다. 그는 헤벌쭉 웃고 있었지만 두 눈에서는 분노의 빛이 흘러나오 고 있었다. 황횡 등 세 사람은 대뜸 이 젊은 화상이 타고난 소면호(笑面 虎)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소면호란 마음속으로 살기가 가 득 피어오르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빛을 띄우는 그런 사람을 두고 말하는 별명이었다. 노패는 호통을 쳤다. [네 녀석들은 이리 내려오너라. 나는 언제나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 손에 맥이 빠진 적이 한번도 없다.] 장소룡은 젊은 화상을 향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이 젊은 땡초가 음흉하기 이를 데 없군. 나는 너와 같은 부 류의 사람을 처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 두 사람은 그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겨 계 단에서 내려왔는데 그 거동은 지극히 침착하면서도 힘차 보였 다. 황횡 등은 모두 다 대가인지라 첫눈에 그들의 내공 조예가 지 극히 심후하기 때문에 결코 수월하게 상대할 인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두 자기도 모르게 내심 놀람과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소림사에 이들 두 사람을 내보내 응전(應戰)토록 하다니, 이 야말로 정말 만만하게 보아 넘길 것이 아닌걸.'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만심을 거두어들이고 일제히 뒤로 물 러났다. 장소를 넓혀서 손을 써서 싸우는 데 지장이 없도록하 자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을 알아 차리고 호기심에 몸을 일으켜 앉아 살짝 엿보았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속으로 역시 놀 람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 두 사람이 평지로 내려선 이후 황횡은 먼저 이름을 대고 다른 두 사람들도 차례로 자기의 성명을 댔다. 그리고 난 이후 에 그들 두 사람의 이름이나 법호를 물었다. 남색 장삼에 검을 메고 있는 사람은 냉랭히 응수했다. [졸개와 같은 못난 놈들에게는 아직도 우리들의 성명을 물어볼 만한 자격이 없다.] 그의 말은 얼음과 같이 차가운 태도와 조화되어 더욱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기 어려운 치욕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한데 젊은 화상은 헤벌쭉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땡초께서 선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악을 두려워하는 버릇이 있지. 당신들이 이 땡초의 손에 들린 대나무 지팡이를 이길 수 있을 때에야 이름과 성을 물을 자격이 있게 되지.] 노패는 크게 노하였다. [이런 죽일 놈들 봤나! 주먹을 받아라!] '휙' 하니 그는 주먹을 쥐고 남삼인(藍杉人)을 후려치려고 들 었다. 남삼인은 내력이 노패만 못한듯 두 걸음 더 많이 뒤로 물러서 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신속하게 장검을 뽑아들었다. 장소룡 역시 젊은 화상에게로 바짝 다가서게 되었는데 거의 그 와 같은 동시에 가전(家傳)의 각법(脚法)을 펼쳐서는 걷어찼다. 그러나 그 젊은 화상은 성큼하니 석 자 정도 물러서더니 손에 들고 있는 파란 대나무 지팡이를 휘둘러 왼쪽을 한 번 찍고 오 른쪽을 한 번 찍어 장소룡의 각법이 반쯤 펼치진 상태에서 부득 불 거두어들이지 않을수 없도록 만들었다. 장소룡의 가전무공인 분파답랑각법(分派踏浪脚法)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강호에 출도한 이래 한번도 상대방의 공격에 중도에서 펼쳤던 각법을 거두어들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을 당하게 되자 그는 크게 섬칫해짐을 느 끼고는 냉랭히 호통쳐 물었다. [정말 한두 수 지닌 모양 같은데 어디 다시 내 솜씨를 봐라!] 그러면서 '휙' 하니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두 발을 잇따라 신속하게 밟는 등 젊은 화상의 윗쪽 둘레 일 장을 뒤덮듯 했다. 젊은 화상은 재빨리 지팡이를 휘둘러서는 허공의 발걸음을 신 속하게 찍어냈다. 장소룡은 매번 발을 들어서 지팡이의 끝을 살짝살짝 짚으면서 몸을 날려 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신형(身形)을 허 공에서 계속 아래를 향해 공격하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은 보기에 무척 좋았다. 마치 마술을 선보이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은 바로 다른 한 사람의 머리 위 몇 자쯤 되는 곳에서 끊임없이 전후로 옮기거나 몰러나곤 했는데 전적으로 아래쪽에 있는 사람의 진퇴를 견뎌내고 있었다. 다른 한편의 노패는 천하에 명성을 떨친 음양권력(陰陽拳力)으 로 잇따라 그 남삼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는 상대방의 내력이 자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본문의 무기인 음양선(陰陽扇)을 뽑아들지 않았다. 한데 뜻밖에도 남삼인의 검법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었고 내력 또한 강경(强勁)했다. 삽시간에 검은 그림자가 산을 이룰 듯하 면서 그를 한복판에 가두어버리는 것이었다. 황횡은 그들의 싸우는 양을 지켜보더니 날카롭게 소리내어 웃 었다. [흐흐흐, 원래 소림사에서는 인재가 없어 당파와 오대파의 사 람들을 불렀군. 그러나 너희들 세 파가 합친다 하더라도 되지 않을 걸.] 그러면서도 그는 형세를 가늠해 보았다. 반드시 먼저 노패를 도와야지 그렇지 않을 때 노패는 틀림없이 상대방의 무당 내가 검법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만다는 것을 내다볼 수 있었다. 이때 곡창해는 황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밀운대사로부터 무당과 오대 두파에 한 명이 각기 자질이 아 주 뛰어난 제자를 거두어들인 바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러나 애석하게도 나중에 그 적신교의 해를 입어서 두 사람 다 두 파의 최상승 신공비예(神功秘藝)를 엿볼수 없다고 했는데 이 들 두 사람이 바로 무당파의 진가(秦嘉)와 오대파의 손제(孫濟) 이겠구나.' 이때 황횡은 노패의 옆으로 달려가더니 손을 써서는 진가를 향 해 일 장을 후려쳤다. 그의 귀수(鬼手)는 대단한 것이라 진가는 어쩔 수 없이 부득불 초식을 펼쳐 그 한 손을 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패는 그와 같은 기회를 얻게 되자 신속하게 한 자루 길이가 두 자인 섭선(攝扇)을 뽑아들고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황횡은 겨우 이 초를 펼친 이후에는 물러났다. 이때 그는 노패가 이미 상대방의 장검을 상대할 수 있게 된 것 을 보고는 즉시 눈길을 돌려서 장소룡의 정세를 살폈다. 장소룡은 처음 발차기로 상대방을 닥달하고 몰아세우듯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잇따라 스무여 번의 발길을 한 이후 여전히 상대방이 지팡이를 휘둘러 쳐오는 듯한 그물을 밟아서 깨뜨릴 수가 없었다. 이때 단전에서 끌어올린 한 가닥의 진기는 이미 점차 쇠약해지 고 고갈되어 갔으며 신법은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그 민활 한 움직임이 늦추어져 있었다. 황횡은 속으로 크게 놀라고 말았다. '무당과 오대에서 온 두 녀석이 이토록 무섭다니 정말 강적이 다. 오늘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서 이자들을 일찌감치 제거해버 려야겠구나.' 악독한 생각이 일단 머리를 쳐들게 되자 그는 후다닥 몸을 날 려서는 오대파의 제자 손제를 신속하게 공격했다. 손제는 촉망중에 냅다 뒤로 지팡이를 돌려서는 쓰러치듯 후려 쳐왔는데 그 재빠름이 번개와 같았다. 그 순간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황횡의 손바닥 한복판에 지팡 이는 적중이 되었고, 그 즉시 그는 힘주어 지팡이를 되돌려 재 차 장소룡을 상대했다. 이 일 초는 그야말로 번개 같았다. #3830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3.1/4 소림사에 대거 11/02 14:10 282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3.1/4 소림사에 대거 침입한 사파의 거물들 멀리서 보고 있던 곡창해도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크 게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황횡은 손바닥을 대나무 지팡이에 얻어맞기는 했으나 겨우 그 가 펼친 공세가 해소되었을 뿐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는 즉시 또 장법을 펼쳐 공격해 갔다. 손제는 이번에야말로 부득불 옆으로 몇 자 정도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 바람에 장소룡은 땅 위에 내려서서 한 가닥의 진기를 바랄 수 있었다. 그리고 허리띠에서 한 자루의 솜처럼 부드러운 칼을 뽑아들더니 허공을 향해 한 번 떨치자 그 칼이 대뜸 뻣뻣해지는 것이었다. 그는 칼을 휘둘러서는 손제를 공격해 갔다. 위쪽의 칼이 겨우 삼 초를 공격하게 되었을 때 아래쪽의 그의 발은 아마 다섯 번이나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원래 그의 가전무공은 역시 각법으로 특기를 삼고 있었다. 무 기를 사용하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각법을 위주로 하는 것이 었다. 손제는 일시 그의수법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 일로(一路)의 삼 엄하고도 은밀한 장법(杖法)을 펼쳐 그저 수비만 할 뿐 공격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곡창해는 손제가 하는 양을 보고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 었다. '무당파와 오대파의 무공이 그토록 정심(精深)하고 고묘(高妙)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구나. 오대파의 장로 밀운대사께서는 먼 저번에 그들 두 사람을 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이미 적신 교의 두 호법인 요녀에게 암산을 당해서 최상승의 정공심법(精 功心法)을 익힐 수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정말인지 아니면 거 짓인지 잘 모르겠구나.' 그는 무당파의 검객인 진가와 오대파의 제자인 손제 화상의 내 공이 심후하고, 검법이나 장초(杖招)가 모두 다 지극히 정묘한 것을 보고는 어떤 추측이나 억측을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느꼈 다. 무당의 검객 진가의 검법은 가면 갈수록 무서우면서도 날카로 워져서 언제나 기세 등등하여 상대방을 몰아세우니 노패는 패색 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쪽에서 싸우고 있는 오대파 손제화상은 황횡과 장소룡이 가 해오는 공격에 지팡이의 테두리가 점점 갈수록 축소되어 갔다. 곡창해는 자기가 가만히 앉아서 그들이 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 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즉시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길게 소리내어 웃으면서 어지러운 잡초더미 속에서 몸을 일으켜서는 성큼성큼 달려나왔다. 격전을 벌이고 있던 쌍방은 곁눈질을 했다. 진가와 손제는 곡창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상대방 세 사람을 희롱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황횡 등 세 사람은 다시 그 추악하게 생긴 시골뜨기 소 년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자 그만 하나같이 가슴이 쿵쿵 뛰는 것 을 느꼈고 얼굴빛마저 바뀌게 되었다. 황횡은 재빨리 귀수(鬼手)라는 악랄한 수법을 써서는 신속하게 이초를 공격해서는 손제화상으로 하여금 애써서 맞받아내지 않 을 수 없도록 했다. 그런 후에 그는 즉시 그 틈을 타서 테두리 밖으로 달려나오며 날카롭게 외쳐 물었다. [귀하와 방대종사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오?] 뭇사람들은 모두 다 얼굴빛이 움직이게 되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늦추게 되었다. 천마 방각은 근 백 년간에 걸쳐 천하사파에서 으뜸가는 인물이 었으며 심지어는 무림의 제일 고수라는 칭호까지 받는 사람이었 다. 그리고 사파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존칭 해서 대종사라 부르는 것이었다. 지금 나타난 이 시골뜨기 소년이 만약에 그와 연관이 있다면 물론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황횡은 최근에 몇 명의 사교 선배고수들 입으로 천마 방각의 호신신공(護身神功)이 가장 기묘해서 천하에 어떤 기이한 무공 의 위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갑자기 상대방이 누차에 걸쳐 걷어채이고도 전혀 상처 하나 입지 않는 것을 보고는 혹시 마교 문하의 고수가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곡창해는 즉시 큰길로 뛰어들었으며 괴소를 흘렸다. [헤헤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방 큰형님이 높이 사주신 덕택에 서로 형과 동생으로 지내는 사이가 되었소.] 이것은 본래 거짓말이 아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믿 으려고 하지 않았다.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나타난 사람이 사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크게 마음을 놓았다. 손제는 웃으면서 농담까지 했다. [시주는 마침 맞게 와주었소. 다시 한 걸음이라도 늦게 되었다 면 이 땡초는 그만 액겁을 당할 뻔했구려.] 진가는 급히 몇 번 검을 휘둘러 공격을 하고는 그 다음을 이었 다. [형씨는 혹시 소림사에 계시는 분이 아니오?] 곡창해는 한걸음 황횡의 앞으로 다가가며 입으로 대답을 했다. [불초는 바로 소림사의 속가제자이오. 두 분이 오늘 정의를 위 해서 손을 쓰신 데 대해서는 실로 뭐라고 고맙다는 인사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황횡은 용기가 다시 솟아나는 것을 느끼고 흉칙한 웃음을 띄웠 다. [좋아. 빨리 이름을 대라. 나는 너에게 얼마만한 재간이 있는 지 두고봐야겠다.] 곡창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히 말했다. [나 역시도 저들 두 분에게서 한 수 배우지 않을 수가 없구려. 잠시 그들처럼 성명을 대지 않겠소. 그리고 황가 당신이 나의 한쌍의 주먹을 이겨내기만 한다면 그때 자연히 알게 될 것이 오.] 그는 어느덧 신공을 잔뜩 끌어올려서는 신공을 돋구고 일 장을 후려쳤다. 이때 두 사람의 간격은 무척 가까운 편이었다. 황횡은 그의 그 일 장을 펼치는 무공이 평범하고도 소박하여 또한 거칠기까지 해서 언제라도 손을 뻗쳐서는 막을 수 있겠다 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곡창해의 장세(掌勢) 가운데 은연중 일종의 사람을 압 도하는 위력이 서려 있어 그와 같은 평범하고도 기이할 데가 없 는 일장으로 하여금 대항할 수 없는 초식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 다. 그는 최근에 공력이 일사 천리격으로 크게 진전을 보았기 때문 에 옛날과는 다른 바가 있었다. 그는 상대방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속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은 도대체 누구일까? 어째서 이토록 고명(高明)할까?'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재빨리 일 장이나 물러났다. 곡창해는 손을 거둬들이면서 웃었다. [겁낼 것 없소. 나의 기수식(起手式)은 그저 당신의 깊고 얕음 이나 강약을 시험해 보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고 아직 이 자리 에서 당장 격살할 생각은 없소.] 황횡은 본래 천성이 흉악하고 못 돼 먹은 작자로 그의 비꼬는 말에 참을 수가 없었는지 노갈을 터뜨렸다. [녀석아, 주둥이를 닥쳐라!] 두 어깨를 흔들하는 순간 어느덧 곡창해의 면전으로 다가간 그 는 재빨리 절목불일(折木不日)이라는 일 초를 펼쳐 손을 옆으로 쓸듯이 휘둘렀다. 그 순간 그의 손바닥은 칠흑과 같은 검은 빛깔로 물들어지면서 반짝반짝 빛나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 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곡창해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호통을 쳤다. [황횡, 감히 나와 장법으로 한번 겨루어볼 생각이 있는가?] 호통 소리와 더불어 그는 고개를 숙이고 상대방의 장초 테두리 밖으로 기어나가는 것이었다. 황횡은 상대방이자기의 손 아래에서 기어나가는 것을 보자 틀 림없이 자기의 초식을 깨뜨리는 수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때 그는 흉악한 성질이 크게 복받쳐 있던 참이라 자 기도 모르게 불쑥 외쳤다. [좋다!] 흑수파의 귀수구혼이라는 기이한 무공이 펼쳐지게 되면 적은 먼저 한 가닥의 힘에 빨려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 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곡창해는 머리를 숙이고 황횡의 장초 테두리 밖으로 기어나가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그는 독문기공(獨門奇功)을 두 려워하지 않는 것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더라면 결코 장초 대 장초로 맞받아치는 대결을 벌이겠다고 응낙을 하지는 않았으 리라. 두 사람은 신속하게 맞섰다. 밤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옷자락을 휘날리게 만들었고 밝은 달 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뭇사람들은 똑같이 눈앞이 환하 게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정히 손을 써서 겨루고 있던 네 사람도 모두 다 눈길을 돌려 곡창해와 황횡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바로 이때 그들은 일제히 일 장을 뻗쳐냈다. '퍽' 하는 소리가울려퍼지는 가운데 두 손이 서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순간 황횡은 크게 울부짖으며 잇따라 열두어 걸음을 물러났 다. 그는 그제서야 가까스로 몸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반면에 곡창해의 신형(身形)은 태산처럼 차분했으며 꼼짝도 하 지 않았다. 두 사람은 손을 쓰자마자 전력을 다 쏟아냈으므로 승부가 즉시 판가름나게 되었다. 소림사의 무적금강력은 역시 귀수구혼이라는 무공보다 훨씬 뛰 어난 편이었다. 이번 겨룸은 곡창해가 금후 일생의 공업(功業)의 기틀을 닦은 셈이라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소림사의 무상심법을 연마한 이래 처음으로 손을 써서 그 토록 엄청난 전과(戰果)를 올리게 되자 사문의 정심한 무공에 대한 신심이 더욱더 굳건해진 것이었다. 이때 진가의 장검과 손제화상의 파한 죽장이 일제히 적에게 적 중되었다. 노패는 상대방의 장검의 끝에 의해 아래턱에 있는 인영혈(人迎 穴)을 찔리고 말았다. 물론 장검의 끝이 겨우 반 치 정도밖에 찔러들어가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에는 겨우 찰과상을 입은 데에 불과했지 만 노패는 마음이 산란해지고 숨이 거칠어지면서 전신의 맥이 빠져 다년간 고생해서 닦은 공력이 순간적으로 태반이 쓰러지고 말았다. 손제화상의 죽장은 장소룡의 허리께를 후려치고 말았는데 장소 룡은 그만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오장 육부가 똑같이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 고 동시에 사지에 기운이 빠져 다시 싸울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손제의 독문수법에 내장을 격상 당한 것인데 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할 수 있었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황횡과 장소룡, 노패 세 사람은 도망갈 기회마저도없어지고 말았다. 마치 석상(石像)처럼 서서 꼼짝하지 못했고 암암리에 운기조식하여 공력을 끌어 모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는 그들이 아직도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이 있다는 것이 아 니라 그들이 만약에 급히 서둘러 공력을 돋구고 힘을 모으지 않 는다면 사지에 기운이 빠져 서 있을 수도 없는 형편이니 줄달음 을 놓아 목숨을 건질 생각은 더더구나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진가는 개성이 준엄한 편이었고 손제는 악을 원수처럼 미워했 다. 거기다가 마음속으로 이들 사파의 인물에 대해서 일종의 특 별히 뿌리가 깊이 박힌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와 같은 좋은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고 일제히 걸음을 옮겨 앞으로 다가섰다. 바로 이때 바람 소리가 '휙' 하니 일더니 곡창해가 어느덧 그 들과 상대방의 삼흉(三凶) 사이에 뛰어들면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만약에 불초를 도와 이 세 사람을 폐사로 압송해 가는데 도와주신다면 불초로서는 정말 고맙기 짝이 없겠소이 다.]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은 속으로 그 말이 지극히 타당하며 마땅 히 소림사로 보내 처리하도록 해야만이 옳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일제히 응낙을 했다. 그들이 정히 앞으로 나가 손을 써서 사람을 잡으려고 했을 적 에 황횡은 흉칙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흥! 소림사의 멸망이 눈앞에 닥쳤으니 너희들은 언제까지 의 기 양양해할지 두고보자. 장형과 노형 우리 스스로 갑시다. 이 들이 손을 쓰는 수고를 끼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소.] 그는 먼저 앞으로 걸어나갔다. 장소룡과 노패 두 사람은 이제 도저히 반항할 힘이 없다는 것 을 알고 부득이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곡창해 등 세 사람은 뒤에서 압송을 했고 절 앞의 잔디밭 위에 이르게 되자 불빛이 하늘을 찌를듯 밝혀졌으며 전체의 잔디밭을 마치 대낮처럼 밝혀놓은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잔디밭 사면에는 한 줄의 승려들이 서 있었는데 모든 승려들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그러니까 그 횃불은 모두 다 사십 자루나 되어 그 기세가 엄청난 것이었다. 황횡은 냉소를 띄우고 입을 열었다. [설사 소림사 전체 승려들이 모조리 뛰쳐나온다 하더라도 오늘 밤의 커다란 액겁에서 벗어나기는 힘들걸! 이와 같은 기세를 빌 려서 누구를 겁주자는 것인가?] 곡창해는 그와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무시해 버렸 다. 이때 산문 안에서 다섯 명의 승려들이 걸어나왔다. 한복판에 선 사람은 체구가 컸는데 바로 달마원의 수좌 홍력대 사였고 나머지의 네 화상은 바로 정혜와 정정 그리고 정불퇴 및 정호법이었다. 홍력대사는 눈길을 들어 곡창해 등을 슬쩍 바라보았는데 그 즉 시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이 정파의 제자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그들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예의를 갖춘 후 곡창 해에게 물었다. [소사제, 이 두 분은 누구이신가?] 곡창해는 대답했다. [소제는 이직도 이분들의 존성대명을 물어보지 못했군요. 그러 나 한 분은 무당의 명가이시고 또 한 분은 오대의 고인이십니 다.] 그는 지가와 손제 두 사람에게 소개의 말을 했다. [이분은 우리 사형이신 홍력대사외다.]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은 노승이 바로 소림사 달마원의 홍력이라 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모두 다 깜짝 놀라 절을 했으며 자기 네들의 성명을 댔다. #3838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3.2/4 소림사에 대거 11/03 14:56 277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3.2/4 소림사에 대거 침입한 사파의 거물들 한편으로 그들은 곡창해의 나이가 어린데도 배분은 매우 존귀 하니까 공력이 그토록 고강하여 단숨에 황횡을 격패시킨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횡 노패 그리고 장소룡 등 삼흉(三凶)은 눈을 들어 곡창해를 바라보더니 그만 깜짝 놀라서는 일제히 불쑥 부르짖었다. [알고보니 너였군.] 곡창해는 이미 본래의 얼굴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의 그 위엄 있는 얼굴 모습은 옛날과 별로 달라진 바가 없었 다. 그렇기 때문에 황횡 등은 첫눈에 그를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곡창해는 빙그레 웃었다. [불초는 바로 옛날에 서로 알게 된 정을 생각해서 당신네들을 본사로 데리고 와 조처를 취하려는 것이오. 그렇지 않았을 때 당신들은 지금쯤 이미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오.] 그는 곧 모든 상세한 상황을 신속하고도 명쾌하게 홍력에게 품 했다. 홍력화상은 정혜화상을 한번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눈짓을 했다. 정혜화상은 오늘 밤 뭇마두들이 대거 침범을 해오게 될 것이고 이제는 소림사가 수백 년 동안 처음으로 커다란 재난 및 커다란 액겁에 직면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소림사의 아래위를 논할 것 없이 모든 승 려들이 나서서 전력을 다해 상대를 해야만이 이번 위험한 고비 를 넘길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진단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사람 수와 그 사람들의 내력 및 소림사로 침범해올 때에 사용할 책략 같은 것을 알아내는 것 이 라고 판단했다. 그는 정불퇴 화상에게 눈짓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사존께 말씀드립니다. 소문에 들으니까 이 세 명의 흉악하고 사악한 도배들이 침범해오게 되었을 때 연도에서 이미 두 명의 시골 사람 목숨을 해쳤다고 하는군요. 지금은 주살하기가 거북 하다고 하겠지만 제자는 삼가 사존께서 분근착골수법(分筋錯骨 手法)으로 이자들을 제압해 놓도록 명령을 내려주실 것을 청하 는 바입니다. 그런 연후에 허공에다가 매달아 놓는 것이지요.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기이할 정도로 참담하여 감당하기 어렵 게 될 것이며 이 또한불가에서 말하는 인과 응보의 본보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이자들의 웃어른들은 얼마 후면 이곳 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그때 이 세 명의 흉악한 자들을 풀어놓 았으면 하는데 사존의 뜻은 어떠한지 잘 모르겠군요?] 소림사의 분근착골수법은 무림의 일절이라 할 수 있었고 고문 을 당한 사람들은 그 참혹함을 좀처럼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천하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들 삼흉은 억세고 악착 같은 데가 이를 데 없는 자들이었지 만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그만 놀라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정불퇴는 커다란 머리를 한번 흔들더니 둥근 얼굴에 장난끼 섞 인 웃음을 띄우고는 그 말에 대답하듯 입을 열었다. [넷째 사형의 그 계책은 고명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이와 같 은 흉악한 도배들에게 약간의 쓴맛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수히 해를 입은 억울한 혼백들을 위로할 수가 있겠소이까. 하 지만…….] 그는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와 같이 다르게 된다면 동피철골(銅皮鐵骨)의 사람 이라 할지라도 한 시진을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에 그때 적이 달려오지 않는다면 이 삼흉의 목숨을 잃게 하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곡창해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 즉시 그 말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도록 하지요.] 정혜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헌번 물어보는 것도 좋지요. 기실 이와 같이 흉악한 도배들에 대해서는 연민의 정을 베풀 필요가 없지요…… 소사숙께서 만약 에 물어보시겠다면 이들 가운데 한 명을 데리고 정자 곁으로 가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군요.] 곡창해는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옳아! 그 어느 누가 감히 나를 속이려 한다면 바로 그에게 본 사의 분근착골수법을 맛보여 주도록 하겠네.] 그는 먼저 노패를 잡아 몇 장 밖으로 끌고나가 물었다. [당신네 몇 사람은 혹시 먼저 달려와 염탐을 하려는 것이 아니 었소?] 노패는 망설이더니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알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네.] 그러나 고개를 끄덕여 곡창해의 짐작이 맞다는 표시를 했다. 곡창해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뒤에 올 사람들은 즉시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란 말이 아니겠 소?] 노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곡창해는 크게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이제는 충분히 시간 이 있어 자세한 사정을 캐물어봐도 된다는 것을 알고 생각해본 이후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사부도 틀림없이 한 몫을 거들겠구려.] 노패는 고개를 끄덕였다. 곡창해는 재차 질문을 했다. [그들은 당신네들이 돌아가 보고를 한 후에야 산 위로 오를 것 이 아니겠소?] 그는 노패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당신네들은 돌아가 품할 수가 없소. 그들이 언제 쯤 산위로 올라오도록 약정이 되어 있는 것이오?] 노패는 아무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해 보였다. 곡창해는 차례로 한 시진 두 시진 하는 식으로 물어본 결과 끝 내 약정된 시간이 날이 거의 밝을 오경 무렵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곡창해는 또 황횡과 장소룡을 데리고 와서 캐어물어보았지만 그들이 실토한 사실도 거의 다 비슷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아는 사실을 홍력대사에게 알렸다. 홍력대사는 이미 정혜화상의 계책을 들은 바가 있는지라 즉시 그 삼흉을 압송해서 절 안으로 데리고가 방법을 강구해서 적 쪽 의 사람 수와 그 사람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캐묻도록 했 다. 곧이어 잔디밭에 환히 켜졌던 횃불은 모조리 꺼지게 되었고 뭇 승려들은 모두 다 신형(身形) 숨겼다. 곡창해는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을 모시고 산문의 왼켠에서 환담 을 나누는 동시에 동정을 감시하게 되었다. 그는 본래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은 오늘밤 정세가 험악하고 소 림사에서는 이미 은밀히 계획을 짜놓고 있는 이 마당에 실로 전 형세를 이끌어가는 수뇌인물을 놀라게 하거나 번거롭게 하는 것 은 도리가 아니라고 해서 완곡하게 사절을 한 것이었다. 만약에 배분을 따지면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은 곡창해보다 한 배분 낮은 셈이었다. 그러나 곡창해는 한사코 서로 교분을 트자고 제의했고 그로 인 해서 끝내 같은 배분의 신분으로 상대방을 부르도록 했다. 진가는 곡창해에게 이번에 소림사에 오게 된 경과를 이야기했 다. [형제는 작년 강호에서 우연한 인연으로 손제를 알게 되었지 요. 피차 무척이나 의기 투합하게 되었고 또 사문과 사문 사이 에도 상당한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헤어진 이후에도 종종 소 식을 통해왔던 것인데 최근에 손제가 뭇사마들의 동정을 알아내 고는 특별히 이 형제를 불러서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외 다.] 그러나 그의 준엄하다고 할 얼굴에는 보기 드물게 감돌던 한 가닥의 웃음빛이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고 그의 입에서는 느긋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밤 공교로운 인연으로 먼저 곡형을 만나게 되고 동시에 곡형이 어여삐 보아주시어 친구가 돼주니 이 형제는 무척 영광 스럽게 생각하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마디의 말을 솔직히 드 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뭇사마들이 대거 보산(寶山)으로 침범을 하는 목표가 바로 곡형을 궤멸하는 데 있소이다. 곡형은 물론 절세적인 신공을 지니고 있어 틀림없이 사파의 뭇흉악한 자들의 의표를 찌를 수가 있겠지만 그 악명이 높은 흉악한 자들 은 각기 절예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무 공을 연마해 왔고 또한 모두 다 간계에 뛰어난 도배들이니 곡형 은 오늘 밤 아무쪼록 특별히 조심을 해야만 할 것이외다.] 곡창해는 두 손을 마주잡아 보였다. [진형이 솔직히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소제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오이다. 그런데 상대방에서는 어째서 전력을 다해 소제를 상해할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구려?] 손제가 그 말을 받았다. [적신교에서 귀사로 몰려와 소란을 피운 이후 정사(正邪) 양쪽 의 인사들을 막론하고 모두 곡형이 나중에 겪었던 일들을 알아 내려고 했소. 그러나 소림사 쪽에서 은밀히 비밀을 지켰기 때문 에 무림에서는 그 누구도 곡형에 관한 소식을 알아내지 못했소. 그렇기 때문에 사파의 뭇흉악한 자들은 일제히 곡형이 편안 무 사하리라고 인정을 하게 되었소. 그리고 최근에 뭇흉악한 자들 은 황산(黃山)에서 모임을 가지고 대거 귀사를 침범해 와서는 첫째로 곡형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되었는가를 알아내려는 것이 고 둘째로는 이번 기회에 일거에 소림사가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도적인 지위를 빼앗자는 것이외다.] 이와 같이 그들은 사경이 될 무렵까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 는데 손제는 나이도 젊거니와 마음마저 열성에 차 있기 때문에 끝내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곡형! 오늘 밤의 형세는 지극히 중요하오. 사파의 뭇흉악한 자들은 그야말로 온 힘을 기울여서 침범을 해올 것이오. 그러니 곡형은 역시 그 흉악한 예봉을 잠시 동안 피하는 것이 가장 좋 을 것 같구려.] 곡창해는 신중하게 생각하고는 말했다. [손형의 호의에 대해서 소제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사태가 그토록 심각하다면 소제는 가사(家師)에게 말씀을 드려 지시를 받도록 하겠소이다.]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은 모두 다 이구 동성으로 찬성을 했다. 그리하여 곡창해 혼자 절 안으로 달려들어가게 되었고 잠룡원으 로 곧장 찾아들게 되었다. 그런데 잠룡원의 응진이 기거하는 방에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 었다. 곡창해는 서슴지 않고 그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니 기예 가 비범한 응진대사 이외에 정혜화상 역시 그 방안에 있었다. 정혜화상은 한참 응진대사에게 적 쪽의 사람 수와 그 실력들을 품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혜화상이 알리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적 쪽에서는 황횡 등과 같은 약간의 선두에 서서 염탐을 하도 록 되어 있는 사람과 몇 명의 소식을 전달하는 졸개들 이외에도 고수의 사람수가 적지 않더군요. 흑수파의 부교주인 낭인(浪人) 여정(黎定)을 우두머리로 해서 흑수파의 야효(夜梟) 변광(邊 曠), 풍화진인(風火眞人) 경문(景文), 그리고 병왕 최환을 거느 리고있다고 하더군요. 이 이외에도 바로 우내(宇內)의 사교(邪 敎) 일류 고수인 음양선(陰陽扇) 부평(符平), 독룡(毒龍), 장경 (張鏡) 및 홍호자 관기(關祺), 모두 일곱 명이 되는데 수행하는 부하들이 모두 스물이 넘는다고 하더군요.] 정혜화상은 응진대사가 당금 무림의 무적 고수이며 이미 종사 의 신분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렇게 유명하지 못한 무리들이나 흉악한 사람들에 대해서 똑똑히 알지 못하리라고 여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낭인 여정이 거느리는 고수들은 흑수삼악(黑水三惡)이라고 일 컬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최염왕이 비교적 약한 편이지만 최 염왕은 간사하기 이를 데 없을 뿐만 아니라 간계가 가장 많은 자라 흑수파 교주 누대역의 신임을 받고 있지요. 그 밖에 홍호 자 관기 역시 억지로 한 다리 걸치고 있지만 따지고 볼 때 그는 아마도 최염왕의 무공과 비슷할 겁니다.] 정혜화상은 눈을 감고 잠시 동안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어 눈을 뜨고 물었다. [조사께서는 옛날 관기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응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나본 적이 없다. 그 사람은 흑도의 마두이고 이름을 떨친 지 오래 되었지만 평생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그렇게 지나치게 탐욕스럽거나 잔인하고 혹독하여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 다. 내가 잘 아는 몇 분의 절친한 친구들이 그를 상대해본 적이 있는데 모두 다 그의 무공이 고강하다고 탄복을 하더구나. 그러 나 네가 알아야 할 것은 그 몇 분의 절친한 친구들이 장경이나 부평 등을 만나게 되었더라면 틀림없이 살신지화를 당하고 말았 을 것이다.] 정혜화상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만 관기는 모름지기 여타의 사람들에 훨씬 못 미치지만 이미 십여 년간 관가보에서 떠나오지 않고 모든 크고 작은 일들 을 야유신 예충으로 하여금 관리토록 하고 있다가 이번에 갑자 기 관가보에서 나와 뭇흉악한 자들과 본사로 찾아와서 사단을 벌이는 것을 볼 때 만약에 뭇흉인들이 그가 하남성의 흑도맹주 (黑道盟主)라고 초청하여 그를 관가보에서 모셔내온 것이 아니 라면 바로 그의 무공이 크게 증진되어 어떤 무서운 무공을 연성 했을 겁니다. 따라서 제자는 그 사람을 상대함에 있어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응진대사는 크게 칭찬의 말을 했다. [너는 정말 지혜가 많은 사람에 부끄럽지 않구나. 그 말은 매 우 사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매번 관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될때 곡창해의 마음이 한번씩 쿵쿵 뛰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름답고 귀여운 아앵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로 관가보의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관기의 딸인지 아 닌지는 아직 곡창해로서도 모르는 일이었다. #3843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3.3/4 소림사에 대거 11/04 05:49 270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3.3/4 소림사에 대거 침입한 사파의 거물들 곧이어 응진은 곡창해가 달려온 이유를 물었다. 곡창해는 심신을 가다듬고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의 의견을 이야 기했다. 응진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너는 이미 본사에서 가장 힘을 쓸 만한 고수의 한 사람인데 그 어찌 숨어서 나서지 않을 수 있더란 말이냐? 오늘 밤 본사가 만약 우뚝 버티고 별 탈이 없게 된다면 너는 행장을 수습해서 즉시 산을 내려가 강호에 나가 활약을 하면서 경력을 쌓고 무예 를 더욱더 연마하도록 해라. 그리고 한편으로 천하에 본사에는 결코 후계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또 한편으로 는 나를 위해 일을 해다오. 그러니까 네가 이 사부의 원한을 씻 어줄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지 두고보자는 것이다.] 이어 그는 신속하게 화제를 오늘밤 적을 상대하는 일로 옮겨갔 다. [정혜! 너는 가서 방장 사질에게 오늘밤 적세가 너무 강하니 필요할 때에는 세 분 사형과 내가 그냥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 을 것이라고 해라. 그러나 역시 너희들이 억지로라도 상대해 내 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세 분 노사형이 그와 같은 생사 영욕(生死榮辱)의 장면에 뛰어드는 일을 면할 수가 있기 때문이 다.] 정혜화상은 머리를 숙였다. [그러지요.] 그는 고개를 쳐들었는데 이때 그의 눈에는 격분과 충동적인 광 채가 번쩍이고 있었다. 응진은 찬찬히 그의 얼굴을 뜯어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한평생 지혜를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일찍이 한번도 분 노의 빛을 띄운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 세 분 노조사에게 누를 끼칠 가능성이 있게 되자 그만 마음속의 중심을 잃고 마는구나. 그렇게 되는 것은 네가 사문의 웃어른들을 충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이지만 본사가 수백 년 동안 없던 커다란 액겁을 코앞에 둔 이 마당에 네가 할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심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어찌 격분과 충동에 사로잡혀 큰일을 그르치 는 일이 있도록 할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정혜화상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조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자가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방 안에는 이제 응진과 곡창해 사제지간만이 남게 되었다. 응진은 미소를 띄우고 입을 열었다. [얘야, 오늘 밤은 네가 정식으로 출도(出道)하는 매우 의미가 큰 날이다. 무릇 매사에 있어 반드시 근신하고 조심을 기하도록 해라. 그리고 가장 꺼려야 할 것은 교만 방자해지는 것이다. 더 구나 무릇 손을 써서 적을 상대로 하여 싸우게 되었을 때 물론 전력을 다 기울여야 하지만 토끼를 상대로 해서 싸울 때에도 반 드시 전력을 기울여야만이 일시적인 소홀과 세심하지 못한 점으 로 인해서 한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곡창해는 약간 들뜨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그와 같은 말을 듣자 마치 정수리 뒤에서 방망이와 더불어 호통 소리가 떨 어지는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게 되었고 재빨리 절을 하며 사부 님의 가르침에 사의를 표했다. 응진은 자기의 허벅지를 툭툭 쳐보이고 유감스럽게 말했다. [이 사부는 두 다리를 이미 못 쓰게 되었기 때문에 나서서 응 전(應戰)할 수가 없다. 나는 줄곧 공력이 심후해지게 되고 부러 진 뼈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에 언제든지 이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람의 힘이라는 것 은 역시 천지간의 자연적인 오묘한 이치를 어길 수는 없는 것 같구나. 나의 이 한 쌍의 다리는 아무래도 살아 있는 혈응(血 鷹)을 손에 넣어야 이을 수 있겠구나.] 곡창해는 소림사의 제자가 되고 나서부터 사부로부터 본문의 각종 영약이나 처방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한 약들 가운데 일종의 지극히 명귀(名貴)한 단약(丹藥)을 소양단(少陽丹)이라고 일컬었는데 이 소양단은 전적으로 혈응이 가지고 있는 영효(靈效)함을 위주로 해서 만들어진 상과성약(傷 科聖藥)이라는 사실을 천하에서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혈응은 바로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날짐승인데다가 순양지성(純陽之性)을 갖추고 있으며 한번 날았다 하면 만 리 길을 가고오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구경을 할래도 구경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수백 년 전 본사에 한 분의 득도한 고승이 있어 동해의 황량한 섬에서 한 마리를 포획하여 약으로 쓴 것인데 다른 약과 배합하 여 소양단을 만들었으며 그 소양단을 아직 다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두 번째 혈응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응진은 혈응의 이야기를 들먹인 끝에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품속에서 한 개의 옥병을 꺼내 곡창해에게 건네주었다. [이 병 안에는 모두 다섯 알의 소양단이 들어 있으니 잘 갈무 리 해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도록 하되 무당의 진가와 오대 의 손제에게 각기 한 알씩 약소하나마 사의를 표하도록 해라.] 곡창해는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서는 물러나서 산문 쪽으로 달려갔다.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은 모두 다 산문 왼쪽의 그늘 속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로 다가가 본문의 중보령단(重寶靈丹)을 꺼내 두 사람에게 한 알씩 꺼내주었다.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소림사 소양단이 기사회생 의 공효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모두 다 무척 기뻐했으며 신중히 갈무리했다. 이제 오경 무렵과는 아직도 약간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은 더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타좌(打坐)하여 운기행공을 했다. 날이 밝을 무렵에 한바탕 벌어질 대전(大戰)에 대비한 것이었 다. 곡창해는 사경 무렵에 어느덧 운기 조식에서 정신을 차리고는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손제와 진가 두 사람은 아직도 운기 조 식에 몰두하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몸을 일으켜 잔디밭 쪽으로 나가 보았다. 마침 한 사람의 그림자가 달려왔는데 바로 드러난 모습은 정혜 화상이었다. 정혜화상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사숙, 본사의 이번 겁난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하게 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게 하는구려.] 곡창해는 그를 한번 바라보았다. [오늘 밤 물론 매우 범중하고 아슬아슬하기 이를 데 없는 고비 를 만나게 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마저 그토록 긴장할 필요가 있겠는가?] 정혜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사숙께서는 잘 모르십니다. 본사가 무림에서의 지위는 태산 북두(泰山北斗)처럼 존귀하기 때문에 여러 모로 위치를 고려해 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이 모습을 드러내 침범을 하게 되 었을 때에 본사에는 하나의 커다란 빈 틈의 위기가 있게 됩니 다.] 이 말이 정혜화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예사 로 넘길 일이 아니었다. 곡창해는 깜짝 놀라 물었다. [어떤 빈틈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오?] 정혜화상은 음성을 더욱더 낮추어서 입을 열었다. [적 쪽에서는 두 명의 가장 무서운 사람이 이번 일에 참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흑수파의 교주 누대역과 적 신교의 교주 화예부인이오. 그들이 만약에 달리 어떤 음모를 꾸 며서 농간을 부리게 되었을 적에 소사숙께서는 본사에서 가장 걱정되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곡창해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소문에 들으니까 사교의 고수들은 모두 다 나를 노리고 들이 닥친다고 하던데 설마하니 그들 두 사람이 나를 노리는 것은 아 니겠지?] 정혜화상은 다소곳이 말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가정이지만 실제에 있어서 가장 걱정되는 사람은 방장대사 어른이십니다.] 곡창해는 그만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지 르며 하마터면 절 안으로 달려들어가 살펴보려고 했다. 정혜승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적 쪽의 사람들은 조그만 안배를 한다면 틀림없이 본사 역대 이래 적에 대응하는 절차나 단계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지요. 그렇게 된다면 바로 처음은 장경각과 달마원의 두 분 수좌대사 께서 무리를 이끌고 적을 막게 되는데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이르러서야 방장대사가 친히 나서게 되지요. 제가 적이라 면 틀림없이 이런 면에서 계책을 짜겠소이다.] 이와 같은 추측은 그야말로 정말 신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곡창해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맞았네. 그때 전 본사의 고수들이 모두 다 싸움터에 운집해 있을 터이니 방장대사께서는 오히려 혼자 남게 되시니 가장 약 한 상태로 남겨지겠지. 따라서 만약에 누대역이나 화예부인과 같은 고강한 인물들이 그 기회를 틈타 암습을 한다면 정말 두려 운 노릇이네.] 정혜화상은 천천히 설명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들이 설사 방장대사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단 소식이 새어 나가게 된다면 본사의 사람들은 틀림없이 마음이 크게 어지러워지게 될 것이고 적은 그 바람에 무수한 득을 보게 될 것이지요. 어찌되었든간에 오늘밤의 이 일역(一役)은 아마도 본사에서 가장 위태로운 겁난이 될 것입니다. 소사숙께서는 어 찌됐든 간에 적 쪽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때에 반드시 살 그머니 절 안으로 되돌아오셔서 방장대사를 접응(接應)하는 것 이 좋겠습니다.] 곡창해는 생각을 해보았다. 역시 오직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 았다. 적이 방장대사를 암습한다는 책략은 그저 이쪽에서 하는 추측 에 불과할 뿐이었다. 따라서 형세상 먼저 방장대사에게 품하여 방장대사의 불쾌한 감을 일으키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와 같은 말을 들으며 방장대사는 그와같은 말을 하는 제자 들이 오히려 자기를 무시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이 다. 한편으로 적 쪽에서 그와 같은 계책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곡창 해가 한번 절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다고 해서 대국(大局)에 별 다른 영향을 끼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상당히 오랜 기간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 데 이때 갑자기 한차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 왔다. 듣기에는 먼 곳에서 들리는 듯했으나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들 려오는가 하면 그 소리가 뾰족하고 높아서 듣기에매우 거북했 다. 그 소리를 들은 소림사의 승려들은 모두 다 암암리에 경계를 했다. 정혜화상은 즉시 암호를 한 뒤 총총히 그 자리를 떴다. 곡창해 역시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과 만났으며 또한 그들에게 잠시 후 자리를 비우게 될 것이라는 사 실을 이야기했다. 이때 근 백 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잔디밭 쪽에 서 있었는데 정 혜화상의 암호를 듣게 된 이후 각기 마음속으로 서른 번을 헤아 렸다. 그리고 서른 번을 헤아리게 되었을 때에 일제히 손에 들 고 있던 횃불에다가 불을 당겼다. 그 순간 잔디밭에 대뜸 횃불이 주위를 환히 밝혔을 뿐만 아니 라 환한 빛이 어두운 밤마저 붉게 물들여 놓은 것 같았다. 그 순간에 이미 적지 않은 사람의 그림자가 드러났다. 그들은 상대방 쪽에서 전혀 기척을 내지 않고 일제히 횃불에 불을 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따라서 모두 다 놀람과 의아한 빛을 띄웠다. 소림사의 뭇승려들은 모두 다 암암리에 정혜화상의 뛰어난 지 모에 대해서 감탄해마지 않았다. 이 서른 번 세는 시간이 정말 딱 알맞게 계산되었기 때문이었 다. 곧이어 산문 안으로부터 열두 명의 승려들이 출현했다. 앞장을 선 두 명의 승려는 잿빛 장포를 걸치고 있는 노승들이 었는데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비쩍 마른 편이며 한 사람은 허우 대가 늠름했는데 손에는 모두 다 염주를 들고 있었다. 그 나머지의 열 명의 화상들은 키가 작은 사람도 있고 큰 사람 도 있었으며 잘 생긴 사람들도 있었고 못난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소림사 정자 배분의 십대 고수인 십신승들이었다. 앞장을 선 두 명의 노승은 바로 장경각의 수좌인 홍일대사와 달마원의 수좌인홍력대사였다. 이 두 각원(閣阮)에도 약간의 고수들이 있었지만 모두 다 각기 직책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엄밀히 사원의 각처 중요 한 곳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밖으로 나서서 적을 맞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홍일대사는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그의 키는 작은 편이었으나 음성만은 우렁차고 고막을 진동시 킬 정도였는데 그의 공력이 정심한 것을 드러냈다 할 수 있었 다. 그는 불호를 외치고 나서 눈을 들어 상대방의 여러 사람들을 쓸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소승은 홍일이며 이쪽은 폐사제인 홍력이오. 삼가 여러분들이 왕림하시기를 기다린 지 오래 되었소.] 맞은편은 모두 다 일곱 사람인데 복장이 각기 달랐으며 얼굴 모습마저도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다만 한 가지 점은 공통되고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는데 그것 은 바로 그들 일곱 명의 사람들 가운데 오십이나 육십 정도로 나이 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복판의 헝크러진 머리에 맨발을 하고 얼굴 모습이 늑대 같은 키다리가 기이한 웃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흐흐흐, 본좌는 소림사를 이어갈 사람이 없고 그 성세마저도 옛날과는 크게 떨어진다고 하던데 정말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군. 오늘밤이 지나고 난 이후에는 알려지겠지.] #3852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3.4/4 소림사에 대거 11/05 07:40 298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3.4/4 소림사에 대거 침입한 사파의 거물들 사방의 뭇승려들은 모두 다 분노의 빛을 띄웠다. 그러나 그 흉 칙한 키다리는 껄껄 괴소를 몇 번이나 흘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 다. [하하하, 쓸데없는 말은 잠시 덮어두기로 하고 이제 우리들의 성명과 내력을 발표하도록 하지. 본좌 여정은 별호를 낭인이라 고 하며 지금은 흑수파 부교주의 직책을 맡고 있소.] 그는 깔보는 시선으로 사방을 돌아보았다. 뭇승려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 하나 놀람과 의아한 빛을 띄우 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소림사가 정말 명불허전으로서 뭇승려들의 담력이 뛰어날 정도로 훈련을 시켰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매우 은근히 화가 나게 되고 가슴 가득히 살기가 끓어 오르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는 먼저 손가락으로 왼켠에 있는 한 청색의 장삼을 걸치고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분은 바로 음양선 부평 형이오…….] 부평이라는 자는 옷차림이 매우 점잖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수척한 얼굴에는 전혀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죽은 사람 의 그것과 마찬가지라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돋도록 만들었다. 낭인 여정의 손가락은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 나 그의 손톱은 매우 뾰족하면서도 길어 마치 이리의 발톱을 연 상시켰다. 이때 그는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분은 독룡 장경 형이오.] 홍일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갑소.] 그는 낭인 여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명성을 떨친 지수십여 년이나 되는 이 횻악한 사람은 가슴팍 을 살짝 드러내고 있었는데 가슴팍에는 한 무더기의 새까맣고 거친 털이 수북하게 자라 있었고 얼굴은 울퉁불퉁하니 혹이 자 란듯 한데 그 혹들은 물고기의 비늘을 연상시켰다. 낭인 여정은 곧이어 한 명의 우람한 체구의 경장을 한 대한을 가리키며 다시 설명했다. [이분은 관가보의 보주인 관기 형이오.] 관기의 붉은 수염은 불빛 아래 분명히 드러났는데 천성적으로 그러한 빛을 타고 난 것인지 아니면 인공으로 염색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포권을 해 보였다. [이 형제는 다행히 여러 고인들의 뒤를 따라 야밤중에 귀사로 찾아와 시야를 넓히게 되었는데 대사들께서는 너무 나무라지 마 시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홍일대사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보주는 별말씀을 다하시오. 폐사는 본래 불문의 성지로서 인 간 세파의 시시 비비에 말려들고 싶은 생각이 없소. 다만 여러 분들이 멀리서 오셨으니 부득불 무리를 이끌고 영접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이다.] 낭인 여정은 흉칙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쓸데없는 소리! 당신들이 만약에 이 인간 세파의 시시 비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승복하고 고개를 숙 이고 졌음을 시인하고 맹세코 영원히 소림의 제자가 강호에 발 걸음을 들여놓도록 하지 않겠다고 하시오. 그러면 우리들은 즉 시 떠나가겠소. 노화상, 당신이 보기에 이 방법이 괜찮을 것 같 지 않소?] 뭇사람들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모두 다 노기가 끊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여전히 소림사의 법규를 엄히 지켜 그 누 구도 콧방귀 한번 뀌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홍일대사는 당당하게 웃었다. [그건 그저 나중에 기다려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고 아직 세 분의 고인을 소개하지 않았으니 소개하구려.] 낭인 여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 세 분은 모두 다 폐파의 고수들인데 이 사람은 야효 변광이오.] 이 사람은 생긴 것이 한 마리의 부엉이를 연상시켰다. 두 눈은 불빛을 받고 뜻밖에도 파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도사의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높다란 관에 상투를 틀고 있었으며 철패 자체의 두께가 대단해서 보기에도 그 무게 가 엄청 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모습은 매 우 가벼워 보였다. 이 도사는 바로 흑수삼악 가운데 한 사람인 풍화진인 경문이었 다. 그가 일부러 도사의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은 야릇한 분위기 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 사람 역시 흑수삼악의 하나인데 성명은 최환이라고 했 고 별호는 염왕이라 했다. 이들 유명한 흉인들은 하나같이 무림에서 이름만 듣고도 안색 이 변한다는 마두들이었다. 홍일대사는 분명히 형세가 매우 위태위태 하다는 것을 알았으 나 수십 년간 불경을 파고들며 공부를 한 사람인 만큼 정력(定 力)이 뛰어난 면이 있었다. 그는 즉시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폐사를 여러분들이 높이 사시어 이렇게 멀리서 찾아주시니 무 척 영광스럽게 생각되는구려. 그러면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찾아 온 뜻을 밝히시어 이 노납이 고려를 해볼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겠소이다. 그리고 완전히 일은 끝내야만이 할 수 있지 않겠 소.] 낭인 여정은 이빨을 드러내며 흉칙하게 웃었다. [쓸데없는 잔소리는 작작 하시오. 우리가 오늘 이곳에 오게 되 었을 때에 물론 좋은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오. 본좌는 당신에게 한 마디 묻겠는데 당신의 사제 곡창해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는 사람을 닥달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 실로 대하는 사람으 로 하여금 좀처럼 참기가 어렵도록 만드는 오만 불손함이 엿보 였다. 그러나 홍일대사는 여전히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폐사제를 만나보려고 한다면 어렵지 않는 일로 다 시 십 년만 기다리게 된다면 폐사제는 자연히 강호에 발을 들여 놓게 될 것이오.] 독룡 장경은 날카롭게 외쳤다. [내 당신에게 말하는데 오늘 그 녀석을 내놓는다면 만사를 덮 어 두기로 하겠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을 때, 흥! 흥…….] 홍일대사는 옆으로 시선을 옮겨 정혜화상을 한번 바라보며 미 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혜화상은 장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장 노시주는 아마도 영랑(令郞)이 돌아가 사태를 아뢰지 않는 일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장경은 얼굴에 살기를 떠올리고는 날카롭게 외쳤다. [그가 다년간 무예를 익혔는데도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까짓 아들을 데려다가 무엇에 쓰겠소.] 정혜화상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눈길을 부평에게 옮기고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 영고족(令高足)의 행방에 대해서 부 노시주는 관심이 있 으신지요?] 부평은 허리에 꽂았던 금칠을 한 섭선을 뽑아서 손에 쥐더니 '쫙' 소리가 나게 펼쳐서는 부채질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장형이 말 한번 잘한 것이오. 그가 만약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헛되이 심력을 기울인 셈일 뿐이오. 노부가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서 그 누구도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 네. 만약에 그가 있어 길을 막는다면 발로 걷어차서 물러나도록 하는 수 밖에 없겠지.] 이 말은 냉혹하고도 무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혜화상은 흑수파의 사람들이 황횡의 안위나 생사에 관해서 전혀 돌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낭인 여정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 시주도 두 분과 같은 심사이시오?] 낭인 여정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소화상, 무슨 그리 잔말이 많으신가? 본파의 신조는 강한 자 가 남고 약한 자가 죽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자력갱생 (自力更生)해야 하는 것일세. 이제 알아듣겠는가?] 정혜화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런 말이 나오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들을 사로잡힌 세 사람이 친히 듣도록 해준다면 그들은 어쩌 면 크게 후회해서 개과 천선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빙그레 웃고는 두 걸음을 앞으 로 내딛고 낭랑히 웃으며 말했다. [여 노시주의 신분은 범상하지 않소. 바로 당금 일대종파(一大 宗派)의 부교주가 아니시오. 그런데 여 부교주께서 감히 여러사 람들 앞에서 소승에게 참된 말로 한 마디의 대답을 해주실 수 있겠소?] 낭인 여정은 어리둥절해졌다. '이 화상은 약간 이상야릇한 데가 있어서 좀처럼 얕볼 수 없겠 구나.' 그는 눈길을 돌려서는 꾀의 전문이라 할 수 있는 염왕 최환을 바라보았다. 염왕 최환은 얼굴에 자신있다는 웃음빛을 띄우고 있었다. 낭인 여정은 그제서야 결심을 내린듯 괴소를 흘렸다. [히히히, 자네는 얼마든지 물어보도록 하게나.] 정혜화상은 즉시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과 같이 폐사에 들어닥치게 된 고귀한 신분의 고수들 가운데 또 어떤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는 것이 오?] 그와 같은 질문에 낭인 여정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염왕 최환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빛도 그만 얼어 붙는 듯했으 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낭인 여정은 자기의 체면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부득불 대답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세 분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네. 소화상 내 아예 이 야기가 나온 김에 자네에게 털어놓도록 하지. 이 세 분 가운데 한 분은 염명(艶名)이 천하에 알려진 화예부인(花예夫人)이고, 적신교의 교주일세.]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 꿀꺽하고 침을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른 두분으로 말하면 적신교의 이대 호법선자 요혼과 탕백으로 그들은 자네들이 만나본 사람이니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그는 연신 몇 번이나 침을 삼켰는데 틀림없이 그 두세 명의 인 간 우물(人間尤物)에 대해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홍력대사는 요혼선자와 탕백선자의 무서움을 구경한 적이 있는 지라 마음속으로 한차례 놀라서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것을 금하 지 못했다. '다행히 그 여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 지 않았다면 본사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태반이 그녀들에 의해서 혼백을 홀리고 말았을 것이다.' 정자 배분의 십대 고수들도 그녀들을 본 바가 있었다. 그런데 그 십대 고수들 가운데 정정 한 사람만이 정력(定力)이 탁월하 여 일시적으로나마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은 이외에 나머지 사 람들은 모두 다 속으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 다. 그들 역시 홍력대사와 마찬가지로 자기들 스스로 그녀들의 유 혹적인 마력을 좀처럼 감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다 는 것은 가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 나머지의 근 백 명이나 되는 소림사의 제자들은 더욱더 감당해내지 못하리 라. 정혜화상은 담담하게 웃음을 띄우고 입을 열었다. [그녀들이 설마하니 부끄러움을 타서 몸을 숨기기라도 했단 말 이오?] 낭인 여정은 뾰족하고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흉악한 웃 음을 띄었다. [별말씀을 다 하는군. 그녀들은 한평생 부끄러움이 어떤 물건 인지 모르는 분들일세. 본좌가 자네에게 이야기해 주지만 자네 들은 모두 본좌의 덕을 입어서 한바탕의 커다란 액란을 가까스 로 피할 수 있었던 것일세. 왜냐하면 그녀들은 어떠한 일이 있 더라도 본좌로 하여금 그녀들의 육체를 보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단 말일세.] 뭇승려들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하나같이 그 말을 진실로 받 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 낭인 여정이라는 사람은 천성적으로 여자를 밝히는 사 람이었다. 여인들이 그를 보기만 하면 살을 맞대지 않고도 그의 체내에서 발산하는 특이한 체취에 그만 정신을 잃어 버리고 만 다는 것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것은 그의 체질이 보통 사람과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정혜화상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벽별이 희뿌옇게 밝아온 지 제법 오래 된 모양이었으며 하늘 은 한폭의 희뿌연 빛으로 뒤덮여 있어 눈깜짝할 사이에 해가 솟 아오를 것같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잇따라 세 번 손뼉을 쳤다. 넓다란 잔디밭에 켜졌던 횃불들이 갑자기 꺼지면서 주위가 어 둠에 휩싸이게 되었다. 뭇승려들은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던져 버린 것이었 다. 근 백 명이나 되는 긴장을 한 승려들은 각각 계도(戒刀)를 뽑 아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내려서는 신 속하게 움직였다. 단지 눈 한번 돌렸을 시간에 그들은 이삼십 무더기로 나뉘어졌 다. 보기에는 매우 어지럽고 혼잡한 것 같았으나 기실에 있어서는 암암리에 오묘한 이치를 띄우고 있었다. 홍일대사는 마음속으로 매우 의아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본사의 나한대진(羅漢大陣)은 평소처럼 최후의 고비에 이르러 서야 펼치게 되는 것인데 정혜는 어찌해서 방장 사형이 나오시 기를 기다린 후에 나한대진을 발동하지 않는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느끼고 있는데 정회양 화상이 어느덧 우렁찬 음성으로 청했다. [제자가 기꺼이 나서서 싸워보겠습니다.] 홍일대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정회향은 성큼성큼 걸어 나 왔다. #3853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4.1/4 적신교의 여교 11/05 10:58 266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4.1/4 적신교의 여교주 정회향은 체구가 우람한 편이었는데 위풍 당당하게 빈터 한복 판에 들어서더니 손짓을 했다. [덤비시오.] 변광은 귀 따가운 냉소를 흘리더니 갑자기 몸을 날렸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덧 정회향의 면전에 내려섰다. 그 동작은 마치 부엉이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래를 펴고 날 아오르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이때 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정회향은정신을 가다듬고 상대방을 노려보며 우렁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심하시오.] 왼손을 흔들하더니 이어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며 맹렬히 격출 했다. 이 한 대의 주먹은 바로 충천포가식(沖天포架式)이었다. 그는 위력이 유난히 강하도록 펼쳤다. 야효 변광은 상대방의 주먹질이 이토록 평범하면서도 위력이 대단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몸을 흔들하더니 왼쪽으로 몇 자 정도 피했다. 정회향은 다시 한 대의 주먹을 날렸다. 여전히 충천포가식이었다. 이 한 대의 주먹은 너무나 빨라변광은 부득이 손을 써서 봉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번쩍 손을 뻗쳐내 쳐들면서 상대방의 주먹을 맞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주먹 힘이 와락 뻗쳐오며 그 대로 서 있지를 못하고 그는 몇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정회향은 풍차처럼 앞으로 나오면서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오 른손으로 몸을 돌리는 기세를 빌어 힘껏 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변광은 대여섯 걸음 충격을 받고 밀려나게 되었다. 이 정회향 화상은 소림사에서는 제이대 고수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나서게 되자 대명이 쟁쟁하며 흑수삼악 가운데 한 사람인 야효 변광을 공격해 연신 뒤로 물러서도록 만들었을 뿐 만 아니라 전혀 반격할 힘을 갖지 못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광경을 목격하게 된 뭇사파의 마두들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일변했고 속으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금 치 못했다. 야효 변광은 자기 자신이 이미 상대방 권로(拳路)의 범위 안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백수의 왕이라고 하는 호랑이도 흉맹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일단 함정에 빠지게 된다면 얻어맞기만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고 위 엄을 펼칠 수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야효 변광은 몇 번이나 부엉이가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절기를 펼쳐서는 상대방의 권법이 펼쳐낸 함정 밖으로 빠져나가 려고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회향은 언제나 그렇게 간단한 몇 수의 권로 를 펼쳤을 뿐인데 매번 적절한 시기에 다가와 후려치는 바람에 야효 변광으로서는 부득이 손을 뻗쳐서 막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시종 포위를 뚫듯 상대방의 권세 밖으로 벗어 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회향은 이미 연속적으로 열너댓 번의 주먹 질을 해대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것은 그저 변광의 정세가 겸연쩍게 되어 있어서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서 상대방의 권정에서 벗어난 후에야 반격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은 비록 열세에 몰려 있기는 했으나 별 상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효 변광은 자기가 고달프게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상대방의 권력이 가면 갈수록 강해지면서 연속적으로 뻗 쳐낸 십여 대의 주먹을 받고 보니 자기 자신이 이미 많은 공력 을 소모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공격을 당할 때는 전체적인 공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에 별로 느 끼지 못했지만 나중에 가서야 그와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 다. 그리고 이때에는 이미 한번 기운을 떨쳐보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그는 그만 깜짝 놀라 뜨거운 땀이 귀밑과 이마에 서 줄줄 흘러내리게 되었다. 뭇 사악한 마두들은 어느 하나 똑똑하고 눈치 빠르지 않은 사 람이 없었다. 암암리에 그들은 야효 변광이 온얼굴이 뜨거운 땀을 내쏟게 된 상황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흑수파의 부교주 낭인 여정이 그와 같은 광경에 먼저 한 마디 를 했다. [이상하군.] 그제서야 독룡 장경도 입을 열었다. [변형은 이미 기선을 제압당해서 억지로 버티는 국면에 빠져든 것 같소이다.] 음양선 부평은 그 말을 했다. [여형은 다른 사람을 내보내 변형을 교체시키는 것이 가장 좋 겠소이다.] 풍화진인 경문 역시 끼어들었다. [변광 형은 지모가 뛰어난 사람이오. 그가 가장 자랑하는 전도 음양(顚倒陰陽)은 아직 펼치지 않고 있소이다.] 그 말뜻은 변광이 어쩌면 일부러 적에게 자기가 약하게 보이도 록 움직이고 있지만 기실 암암리에는 살수를 숨기고 있으며 일 거에 적을 죽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풍화진인 경문으로 말하면 흑수파의 사람이었다. 그가 그와 같 이 말을 하자 다른 사람들은 다시 무슨 말을 하기가 거북해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을 때에 흑수파의 사람들을 경시했다는 혐의 를 받을 우려가 있는 것이었다. 정회향 화상은 반복해서 그가 정면으로 사용하는 충천포가식의 주먹을 되풀이해서 뻗어내었고 다시 또 손을 홱 뒤집으면서 몸 을 돌리며 일 장을 쓸어쳐 내었다. 이 마지막의 일 장은 그가 평생 고생해서 연마한 절예인 회신 장(廻身掌)이었다. 무릇 적이 등뒤에 떨어지게 되었을 적에 이 일 장을 펼쳐내게 된다면 고금을 통해 독보적인 일류의 고수 이외에는 그 어느 누 구도 피할 수가 없었고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하더라도 반드 시 손을 뻗쳐내서 막아야 했다. 그는 그러한 무공을 고생해서 연마한 지 이삼십 년 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전력을 다해겨루어 보는 것이었 다. 이때 그는 온 마음과 뜻을 그의 몸에다가 쏟고 있었기 때문에 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야효 변광의 진력이 쇠퇴하고 고갈돼 있는 상황을 그 자신이 십분 똑똑하게 몸으로 감지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마치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짐작하는 것과 마찬가 지였다. 그리하여 스물세 번째의 주먹을 쪼개내게 되었을 때에 야효 변 광은 손을 휘둘러 막았는데 권력이 뻗쳐오는 통에 그만 뒤뚱거 리며 뒤로 연신 물러서야 했다. 바로 이 순간 정회향은 몸뚱아리를 마치 풍차처럼 두 번 맴을 돌더니 오른손에 전력을 돋구고 질풍과 같이 쓸어내었다. 야효 변광은 적의 장세가 가면 갈수록 위세를 떨치고 훨씬 고 강해지는 것을 보자 속으로 깜짝 놀라 재빨리 한 가닥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자신도 전력을 돋구어 손을 써 막으려고 했다. 이 전광 석화와 같은 찰나에 낭인 여정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목구멍으로부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흘리며 서둘러 달려 나가 허공을 격하고 다섯 손가락을 펼쳐 움켜잡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싸움의 테두리에 있는 두 사람은 최후로 목숨을 건 일 격을 교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보다 역시 실날 같은 차이지만 빠르다 할 수 있었다. 쌍방의 장세가 막 부딪치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야효 변광 의 몸뚱아리는 그만 충격을 받은 나머지 땅바닥에서 윙하니 솟 아올라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일 장 밖의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 지게 되었다. 이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대가인 것은 말할 것도 없 고 설사 보통 사람이라 하더라도 야효 변광이 이미 참담한 대패 를 당했다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숨 이 끊어져 죽어버렸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낭인 여정은 까마귀 발톱과 같은 다섯 손가락에서 다섯 가닥의 암경(暗勁)을 뻗쳐내어서는 상당한 간격을 두고 정회향을 요격 했다. 이 한 수는 그가 한평생을 자랑해온 몇 가지 절기 가운데 하나 로서 크게 유명했으며 이름을 악수조(惡獸爪)라고 했다. 이 조력(爪力)은 여섯 자 밖까지 뻗쳤는데 사람이나 짐승을 막 론하고 그 조력에 움켜잡히게 된다면 대뜸 살이 갈라지고 근육 이 절단되면서 다섯 개의 조그만 구멍이 뚫리게 되는데 매우 깊 어 뼈를 볼 수 있을 정도이니 그야말로 이를 데 없이 흉독(凶 毒)한 것이라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조력을 뻗쳐내게 되었을 때에 한 명의 화상 역시 동시에 달려나와 주먹을 휘둘러 맹렬히 뻗쳐내었는데 그 권세는 곧장 그가 조력을 보내는 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낭인 여정은 순간적으로 세찬 기운이 옆으로부터 세찬 힘이 뻗 쳐오는 것을 느끼고 그만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면서 늑대 와 같은 손가락에다 다시 삼성의 힘을 더 가했다. 이렇게 된다면 상대방의 그 권력(拳力)이 한 자 정도 조력이 삐뚫어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앞으로 뻗쳐 곧장 정회향을 격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회향 화상은 아직 명이 다하지 못했는지 공교롭게도 그 자신이 야효 변광의 장력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옆으로 몇 자정도 잽싸게 물러서게 되었다. 저쪽의 변광은 참담한 대패를 당하게 되었으나 마지막 힘을 다 쏟았기 때문에 손에 실린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단 정회향에게 충격을 주어 뒤로 물러서게 했 을 뿐만 아니라 기혈이 끓어올라 급히 운기조식을 하여 가까스 로한 가닥의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한편 낭인 여정은 자기의 조력이 일단 저지를 받게 되고 또 약 간 방향이 틀어지게 되었는데 정회향 화상은 바로 그와 같은 찰 나에 몸을 날려 피했기 때문에 낭인 여정의 일격은 완전히 허공 을 후려치고 말았다. 그는 그 흉독(凶毒)하기 이를 데 없는 눈초리를 들어 그 승려 쪽을 바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 달려나서 그의 조력을 저지한 화상은 네모 진 얼굴에 커다란 귀 등 당당한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로 정자 배분의 십대 고수 가운데 우두머리격인 정신화상이 었다. 낭인 여정은 속으로 재빨리 궁리를 했다. '본좌의 이 일조(一爪)에는 무엇이라도 부숴버릴 수 있는 위세 가 있으며 수십 년간 쌓은 공력을 돋군 것이니 그 얼마나 강경 (强勁)하고 억센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저 화상의 권력에 한 가닥 같은 차이지만 정체하게 되었고 다시 충격을 받아 어느 정 도 삐뚫어진 것을 보면 저 화상의 일신에 지닌 조예는 결코 가 볍게 보아서는 아니 되겠구나.' 정신화상은 정신화상대로 속으로 생각을 했다. '저자의 낭조(狼爪)는 소문에 듣건대 무림의 일절이라고 하더 니 오늘 시험해보니 아니나다를까 명불허전이로군. 나 혼자서는 도저히 흉신악살(凶神惡煞)의 일조를 받아낼 수 없으니 반드시 한 사람을 찾아 접응(接應)토록 해야겠구나.' 그는 그와 같은 생각에 머리를 약간 움직이면서 정히 몸을 돌 려 자기 쪽 사람들을 살펴보려고 했다. 바로 이때 한 줄기 불호가 울려퍼지면서 곧이어 누군가 말했 다. [대사형, 저 여시주는 당금 일세의 고수이외다. 사형이 만약 혼자서 응전을 하게 된다면 승부는 둘째 치고 부교주를 얕보는 행동이될 것이니 틀림없이 사형과 손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 외다.]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십대 고수 가운데 정혜화상이었다. 이 화상은 총명함과 재치로 전 소림사에서 으뜸으로 손꼽히고 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기선(機先)을 통달하고 만상(萬象)을 자 세히 살펴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화상은 정히 생각을 굴리게 되었을 때 정혜는 이미 그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보고는 있다가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또다시 뭇승려들 가운데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키는 작고 몸은 여위었지만 두 쌍의 눈초리에서 뻗어나는 안광 이 유난히 날카로웠으며 입가에 난 두 가닥 주름은 이 사람의 심지(心志)가 매우 굳건하고 의연하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었 다. 어떠한 일이라도 그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면 아마도 제대로 해 내지 못하는 일이 없을 듯했다. 그는 앞으로 나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제 정원은 대사형에게 한 팔의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 정원화상은 서열로 일곱째였다. 그러나 십대 고수 가운데 가장 신분이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결코 그의 무공이 가장 약하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낭인 여정은 이때 낭호와 같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는데 그 소리 는 지극히 귀에 따가웠다. 사방에서 한 무더기 한 무더기의 화상들이 늘어서서 천천히 돌 아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 소리에 마음 이 흔들리고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마치 허약해서 좀 누워 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생각만 들 지경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별안간 한차례의 경을 치는 소리가 날카로운 음향으로 울려퍼졌는데 그 맑음은 마치 난봉(鸞鳳)이 재빨리 나 래를 펼쳐 참나무 숲을 가로지르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봉우리들을 뒤흔들어 놓는 것 같았다. 뭇승려들은 그와 같은 불경 소리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읊조리 는 내용이 바로 장아함경(長阿含經) 가운데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 한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부처님은 불법으로서 스스로 정신이 흐려진 것을 물리칠 수 있고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스스로 안정됨을 얻고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안정 됨을 얻도록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피안에 이르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피안에 이르게 했으며 스스로 해탈을 하고 다 른 사람으로 하여금 해탈을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고 스스로 죽음을 얻을 수 있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을 얻 을 수 있도록 했더라…….] 뭇승려들은 불경을 읊조리는 소리를 듣고 가슴속이 어느덧 맑 고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자세하게 불경 속에 서려 있는 뜻을 자세히 음미해 보느라고 그만 번뇌와 마음이 답 답해지는 것을 잊어버릴 수가 있었다. 그 낭호와 같은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눈이 가물가물해 지며 거의 쓰러지려고 했던 화상들도 모두 다 완전히 회복될 수 가 있었다. #3964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4.2/4 적신교의 여교 11/18 12:43 268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4.2/4 적신교의 여교주 낭인 여정은 두 눈에서 불을 토하듯 하여 그 법경을 을조린 화 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니 그 화상은 삼사십대였으며 얼굴 생김새가 매우 소 박해서 첫눈에 존엄한 인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정혜화상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부교주는 우리 아홉째 사제인 정계에 대해서 매우 흥미를 느 끼는 것 같구려? 감히 당돌하지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물 어볼수 있겠소이까?] 낭인 여정은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 젊은 화상이 불경을 을조리는 것도 역시 무공이라 할 수 있는가?] 정혜화상은 그 말을 분명히 알면서도 일부러 질문을 던졌다. [부교주의 그와 같은 말은 어떻게 하는 것이오?] 낭인 여정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입 안 가득 히 자라나 있는 뾰족하고도 기다란 이를 드러냈는데 그 모습은 매우 공포스러웠다. 그는 잔뜩 노기 어린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본좌는 다년간 갈고 닦은 내력을 휘파람 속으로 쏟아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탱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서 쓰러지도록 만 들 수 있네. 그런데 자네들은 전적으로 저 화상이 염불을 한 소 리에 가까스로 무사히 넘길 수 있었지만 그 염불 소리에 결코 내력이 실려 있지 않았으니 그것이야말로 전적으로 사법을 펼치 는 것이 아닌가.] 정혜화상은 웃었다. [언제 불문의 제자가 사법을 배운다는 말씀을 들었소? 부교주 가 그렇게 물으니 소승이 자세히 대답을 해드리리다. 조금전 정 계사제는 그가 평생 계율을 지키고 혼자서 터득한 공력으로 염 불하고 설법을 하여 동료 승려들로 하여금 마음속의 번거로움을 해소시켜 평상적인 상태로 회복시켜 준 것이오. 불문에서 이와 같은 항마수단(降魔手段)을 상승대법(上乘大法)으로 나열하고 있으며 성문승(聲聞乘)으로 칭하고 있소. 화엄경의 한 구절에도 명백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소이다. '상품십선 (上品十善)은 지혜로 도를 닦았지만 마음이 좁고 졸렬해서 삼계 (三界)를 두려워했는데 궐대(闕大)가 비애에 잠겨 있다가 그의 설법하는 소리를 듣고 깨우쳤기 때문에 성문승이라 하느니라.']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터득 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즉시 또 입을 열었다. [여 부교주는 비록 내공으로 그 소리를 몰아내어 사람을 기절 시키기는 하지만 그 소리가 오음(五音)에 들지 않고 전문적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번거로움과 초조함, 그리고 혼란을 위주로 하 기 때문에 실제에 있어서 사법지도(邪法之道)에 부합되므로 사 제가 성승문의 대법을 펼쳐 즉시 깨뜨린 것이었소.] 그는 비단 말재주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설명하는 것도 깊고 분명하였으며 태도와 어조에 있어서도 일종의 사람을 굴복시키 는 힘이 서려 있었다. 모두 다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것을 깊이 느꼈다. '저 낭인 여정은 불문의 성지에서 사법을 펼치니 어찌 패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낭인 여정과 같은 흉악하고 악랄한 사교의 고수는 이때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악독한 생각마저도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제 압당하게 되어 그만 어리둥절해지게 되었고 놀랍게도 걸음을 옮 겨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정신과 정원 두 화상 역시 따라서 뒤로 물러섰다. 곧이서 뭇승 려들 가운데 두 화상이 걸어나왔다. 한 명은 조금 전에 기세를 올렸던 정계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둥근 얼굴에 땅딸한 몸매, 그리고 얼굴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웃 기를 좋아하는 정불퇴였다. 이 정불퇴 화상은 거동이 매우 소탈했지만 정계화상은 매우 근 엄하고 딱딱해서 마치 도학자를 연상시켰다. 뿐만 아니라 표정 마저도 엄숙하고 또한 굳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불퇴와 정계가 함께 걸어나오자 두 가지 전혀 다른 전형적인 인물을 보는 것 같았다. 정불퇴은 희희덕거리며 웃었다. [헤헤헤, 가짜 늙은도사, 감히 나와서 진짜 화상과 겨루어볼 생각이 있으시오?] 그가 말하는 가짜 늙은 도사는 물론 풍화진인 경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뭇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것이 우스꽝스럽자 그만 모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풍화진인 경문은 발끈 대노해서는 낭인 여정에게 계수(稽首)의 예를 하고는 표연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 가짜 도사가 손에 들고 있는 철패는 정말 잘 알려진 무기이 며 그 이름은 풍화패(風火牌)라고 했다. 이 풍화패는 외문(外 門)에서 가장 악독한 다섯 가지 무기 가운데 하나로꼽히는 것 이었다. 정불퇴화상은 정계화상에게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계사제, 우리들은 이번에야말로 정녕 심보가 악독하고 손 씀 씀이가 매서운 자를 만나게 된 셈이오. 우리가 평소에 고생해서 연마한 팔보간선의 경신법을 지니고 있으니 나중에 불리하다 싶 으면 우리 집안 사람끼리 발걸음이나 겨루어 그 누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지 두고 보기로 하세.] 약간의 승려들은 모두 다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것은 정혜화상이 암암리에 명을 내려 그들에게 여차여차하여 상대방을 격노시키도록 하라고 당부한 것이었다. 정계화상은 한평생 엄히 계율을 지켜왔기 때문에 털끝만치도 헤픈 표정을 보이지 않는 사람인데 이때에도 근엄하고 딱딱하기 는 여전했다. 풍화진인 경문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극도로 치미는 분노에 되려 웃으면서 철패를 쳐들고는 호통을 쳤다. [이 도적 같은 땡초야. 주둥이만 살아서 떠벌리지 말아라. 이 산인(山人)께서 손을 쓰시겠다!] 정불퇴화상은 손에 들고 있는 방편산을 꼬나쥐며 헤벌쭉 웃는 얼굴을 했다. [음, 도사 나으리, 성질을 부렸다가는 몸을 헤치게 될 것이니 조심을 하도록 하고 성을 내지 않도록 하구려.] 정계화상은 한 손으로 선장을 들고 한 손으로 합장을 하고 여 전히 규칙에 따라 절을 하고 입을 열었다. [우리 말학후진(末學後進)은 오시주께서 가르침을 베풀어주시 기를 바라나이다.] 두 사람은 견주어 볼 때 더욱더 정불퇴화상의 고약한 점이 뚜 렷이 드러났다. 풍화진인 경문은 속으로 암암리에 생각하고 반드시 전력을 다 해 정불퇴화상을 죽여야 자기 가슴속의 한을 풀 수 있을 것이라 고 보고는 모질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철패를 쳐들자마자 먼저 정불퇴화상을 후려쳐 왔다. 이 일 초에는 무척 많은 변화가 갈무리 되어 있었다. 첫눈에도 정불퇴화상이 제대로 응수를 해주지 못하게 된다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세에 말려들고 말 것 같았다. 그런데 정불 퇴화상은 몸을 번쩍 날렸는데 그 신법이 지극히 신속했다. 풍화진인 경문 역시 아니나 다를까 범속하지 않은 데가 있었 다. 그는 철패가 번쩍하는 기세를 즉시 바꾸어 그림자처럼 따라붙 을 듯이 육박해왔다. 그러나 정계화상은 이때 이미 상대방을 공격해서적절한 타격 을 입힐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상대방이 들어온 것을 보고는 즉 시 선장을 뻗쳐서는 왈칵 철패를 찔렀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철패는 튀듯이 몇 자 허공으로 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풍화진인 경문은 속으로 흠칫했다. '정계화상의 선장에 실린 힘이 이토록 웅후하다니 실로 뜻밖이 로구나.' 그가 막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에 정불퇴화상이 번 개와 같이 달려 들어와 방편산에 강경(强勁)하고도 고막을 찢는 듯한 바람을 싣고 비스듬히 후려쳐 왔다. 풍화진인 경문은 그만 정불퇴화상의 신법의 신속함에 깜짝 놀 라서는 즉시 철패를 휘둘러 맞받으려고 했다. 바로 이 찰나 그는 기관 장치를 눌렀다. 이렇게 된다면 철패와 방편산이 서로 부딪치기만 하면 철패 안 에 갈무리 되어 있는 독화(毒火)가 즉시 뿜어지게 되는 것이었 다. 그러나 어쩌면 풍화진인 경문의 손에 들린 풍화패의 명성이 어 찌나 컸던지 정불퇴화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사람과 방편산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는 그의 옆을 스칠 듯하면서 지나쳐가는 것 이었다. 풍화진인 경문은 초식을 변경해서 추격하려고 했을 적에 다시 정계 화상이 선장을 휘두르면서 철패를 탁 퉁기는 바람에 철패 는 높게 튀어올랐다. 만약 풍화진인 경문의 무공이 정순하지 않았더라면 정계화상의 그 두 대 세차게 차올리는 수법에 이미 견뎌내지를 못했을 것이 다. 따라서 그가 악독한 마음을 막 품게 되었을 적에 정불퇴화상은 다시 유령처럼 덮쳐와 풍화진인 경문으로 하여금 반드시 먼저 정불퇴화상에게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핍박했다. 전국(戰局)은 바로 이와 같이 기이한 타법하에 이십여 초를 겨 루게 되었다. 정불퇴화상은 번개 같은 신법에 의지해서 갑자기 들이닥쳤다가 갑자기 물러서는 등 풍화진인 경문으로 하여금 모든 초식을 그 에게 펼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매번 언제나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선 정계화상이 풍화 진인 경문의 공세에 대항해 와서는 그 공세를 해소시키곤 했다. 음양선 부평은 곁눈질로 홍호자 관기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저와 같이 겨루는 수법은 정말 새로워서 재미가 있구려. 만약 에 이 형제가 나가서 싸우게 되었더라면 저렇게 귀찮게 질질 시 간을 끌면서 싸움을 벌이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외다.] 관기는 공손히 말했다. [부노사의 무공과 재지는 모두 다 보통 사람들이 엿보고 터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자연 따로이 오묘한 대책이 있겠지요. 그러나 불초는 진정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구 려.] 그는 칭호에 있어서 특별히 겸손하고 자기 자신을 격하시켜 음 양선 부평은 약간 의아한 얼굴이 되어 생각을 해보았지만 상대 방에 대한 적대감이 적지 않게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이 홍호자 관기는 강호에서 쟁쟁한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끝내 흑도의 효웅(梟雄)에 지나지 않았다. 은도부의 천건이나 흑삼방의 삼성 등 흑도 고수와 맞먹는 형편 으로 부평이나 장경 등과 같이 흉악하고 요상한 사람들과 어깨 를 나란히 하고 일어서거나 자리를 같이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홍호자 관기는 낭인 여정이 초청해서 동행을 한 사람이 라 부평이나 장경이라는 두 흉인도 뭐라고 말하기는 거북했지만 마음속으로 매우 불만스럽게 여기고 줄곧 관기에 대해서 짙은 적대감을 가지고 대했던 것이었다. 그는 또 관기가 무슨 인연으로 낭인 여정에게 중시를 받은 나 머지 초청을 받고 싸움을 돕기 위해 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말로써 떠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장경이 그 말을 받았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정말 이상야릇하고 희한한 재간들을 적지 않게 연성했구려. 노부는 오늘에서야 정말 자세하고도 똑똑하게 볼 수가 있겠구려.] 그 말뜻은 이미 자기가 나서서 풍화진인 경문을 도와주지 않겠 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불쑥 입을 열었다. [불초는 적신교의 교주를 위시한 세 분의 미녀들이 어째서 아 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 모르겠구려.] 그와 같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한평생 권모 술수로 천하를 종 횡했던 염왕 최환이었다. 그는 풍화진인 경문의 상황이 불리한 것을 보고 또한 부교주의 심신이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암암리에 형세를 살 펴본 결과 반드시 한바탕 혼전을 즉각 벌이도록 해야 자기네들 쪽에서 가까스로 우세를 차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가 낭인 여정은 일단 피비린내를 맡게 된다면 그 흉악하 고 야만적인 성격을 그대로 폭발시키기도 했다. 이는 역전승을 거두기 위한 중요한 한 수라 할 수 있었다. 만약에 부평이나 장경 등 두 흉악한 사람들이 잠시 동안 손을 쓰지 않게 되고 시기를 적절하게 파악하지 않게 된다면 이 가운 데의 효력이 크게 약화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화예부인과 요혼선자 및 탕백선자 를 들먹임으로써 부평과 장경 두 사람으로 하여금 화예부인의 그와 같은 천하에 독보적인 인물도 실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는 느낌을 안겨주어 자연스럽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그는 다시 말했다. [불초는 저 나한진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시험해 볼 기 회를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외다.] 이 염왕 최환이 어찌 소림 나한진의 무서움을 모르랴?] 음양선 부평은 깊은 생각을 해보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 진은 소림사의 호산지보(護山之寶)로 오묘하기 이를 데 없 으니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혼자서는 뚫고 들어가지 못할 것 이오.] 염왕 최환은 자기의 목적을 이미 달성했는지라 재빨리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저 나한진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니 만 약에 그 누구라도 손상을 입게 된다면 그야말로 무적 위험한 일 이 아니겠소?] 독룡 장경은 그 말을 받았다. [물론이오. 이 나한진이 만약에 일류 고수가 있어서 이끌어나 간다면 우리들 이쪽의 사람들이 이삼십 명 왔다고 하더라도 뚫 고 나가지 못할 것이외다. 다행히 소림사에는 지금 그와 같은 고수가 없어서 나한진을 제대로 이끌어나가지 못하고 있으니 아 마도 우리들을 가둬두지는 못할것 같소이다.] #3965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4.3/4 적신교의 여교 11/18 15:40 253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4.3/4 적신교의 여교주 그는 감히 진을 깨뜨린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겨우 진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만으로 만족해 하는 눈치였다. 염왕 최환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두 분 노사의 고견으로 지금 모두 마땅히 일제히 손 을 써서 진 밖으로 뚫고 나가야 하오, 아니면 계속해서 이곳에 서 남아 있어야 하오? 그게 알고 싶구려.] 독룡 장경은 입을 열었다. [만약 지금 진을 뚫게 된다면 주동적인 형세는 여전히 우리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자연히 훨씬 우리 쪽에 유리하게 될게요.] 음양선 부평은 나직이 코웃음치고는 그 말을 받았다. [흥, 그렇소. 장형 우리는 정말 너무 자만심을 가져서는 아니 될 것이오. 만약에 배를 뒤집히는 꼴을 당하게 된다면 너무나 부질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염왕 최환은 제의를 했다. [우리들은 일단 손을 쓰게 되었을 때 먼저 몇 명의 화상들을 많이 죽인 후 산문 안으로 뛰어들어가 소림사의 뭇승려들로 하 여금 간담이 찢어지도록 하는 것과 아울러 적신교주를 접응하는 것인데 여러분들의 뜻은 어떠하온지?] 부평과 장경 두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홍호자 관기는 이미 자기 나름대로 결정을 내리고 있는 터라 이때 서둘러서 달려나가 곧장 싸움 테두리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뭇승려 쪽에서는 즉시 두 사람이 달려나왔는데 그들은 바로 정신과 정원 두 승려였다. 쌍방은 동시에 빈터 한복판으로 달려오게 되었고 정신화상이 낭랑히 입을 열고 외쳤다. [관보주께서 가르침을 베풀 뜻이 있다면 그것은 형제가 상대를 해드리겠소이다.] 홍호자 관기가 손에 큰칼을 들고 갑자기 한복판으로 뛰어들더 니 '휙휙' 잇따라 너댓 번의 칼질을 가해 정계화상을 물고 늘어 지듯 했다. 이렇게 되자 풍화진인 경문은 전력으로 정불퇴를 상대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이미 한을 품은 지 오래 되었는지라 철패를 쓰러내게 되 었을 적에 맞닿는 부분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조각의 불꽃이 뿜여졌다. 정불퇴 화상은 빨리 피한다고 피했으나 등에 이미 일곱, 여덟 점의 불꽃이 떨어지게 되었고 대뜸 그의 등뒤에서 파란 화염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뭇승려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그만 대경 실색하고 말았 다. 풍화패의 독화(毒火)는 오래 전부터 흉악한 명성을 떨치고 있 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일단 그 불꽃이 한 점이로도 몸에 떨어지게 된다면 결코 살아날 기회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방법을 쓰 더라도 그 화염을 박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풍화진인 경문은 수시로 사람들에게 자기의 철패에 갈무리 되어 있는 독화의 무서움을 자랑하곤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철패에서 뿜어진 불꽃이 어떠한 물건 에 떨어지든 간에 꺼지지 않는 것을 목견한 바 있었다. 그 불꽃이 설사 돌이나 비위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하나의 지극 히 깊숙한 조그마한 구멍을 만들어 놓을 정도로 그 부분을 태운 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사람이나 짐승이 그와 같은 한 점의 불 꽃을 묻히게 된다면 그 불꽃에 의해 반드시 조그만 구멍이 뻥 뚫릴 정도로 타게 되는 것이니 그렇게 해서 어찌 사람의 목숨을 부지할 도리가 있겠는가. 정불퇴화상이 칠팔 점의 불꽃이 그의 등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에 정원화상은 어느덧 손에 들고 있는 선장을 휘두르며 풍화진 인 경문을 후려쳐갔다. 선장에서 일어나는 세찬 바람 소리가 고막을 뒤흔들어놓을 정 도로 기운이 가득 서려 있었다. 풍화진인 경문은 자기가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한 셈이라 그만 약간 게으름을 피우듯 멈칫거리게 되었는데 급기야 선장이 일으 킨 바람 소리가 몸에 엄습해 오게 되었을 때에야 깜짝 놀라서는 철패를 들어 막으려고 들었다. 그 순간 '창' 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퍼지면서 정원화상의 선장은 곧장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고 그 전체의 힘이 모조리 풍 화진인 경문의 철패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 순간 풍화진인 경문은 호구가 기이할 정도로 아픈 것을 느 끼고 철패를 제대로 거머잡지 못하고 그만 놓쳐서 땅바닥에 떨 어뜨리게 되었다. 정원화상 역시 다른 사람에게 한눈을 팔지 않고 곧장 선장을 질풍과 같이 휘두르면서 신속하고도 다급하게 계속해서 적을 공 격했다. 그의 입가의 두 가닥의 주름은 더욱 깊이 파이게 되었다. 그 주름은 그가 바로 이미 풍화진인 경문을 죽이지 않으면 손 을 멈추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기 도 했다. 그런데 정불퇴화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독화가 등뒤에 떨어지게 되었을 적에 즉시 옆으로 몇 걸 음을 옮기기는 했으나 등이 기이할 정도로 따가워 이미 불이 불 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정히 일반적인 방법에 따라 몸을 뒹굴어서 불을 끄려고 작정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정신화상이 무거운 어조로 호통을 쳤 다. [사제, 움직이지 말게!] 호통 소리와 더불어 한 가닥의 바람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 다. 바로 그 정신화상의 손에 들린 계도가 정불퇴의 머리 위로 떨 어지는 것이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설사 쌍방 이 생사를 같이 하는 친구 사이라 하더라도 그만 앞으로 슬쩍 몸을 날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그와 같은 싸늘한 칼바람은 바로 정불퇴화상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불퇴화상은 모질게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감고서 태 산처럼 버티고 서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칼빛이 번쩍하고 떨어지게 되었을 때에 정불퇴화상은 참담하게 신음 소리를 '끙' 하니 내뱉으며 몸뚱이가 앞으로 엎어지게 되 었는데 그 순간 그의 등뒤에는 선혈이 샘솟듯 흘러내렸다. 원래 정신화상은 그 한 칼을 바로 정불퇴의 등뒤에서 노리고 곧장 내려쳤던 것인데 그 결과 목부분이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 해서 곧장 허리께까지 옷자락과 살을 크게 한 조각 잘라내게 되 었다. 정신화상은 그 다음 순간 허리를 구부려 정불퇴를 얼싸안더니 신속하게 달음질쳐 물러났다. 뭇승려들은 그 한 조각의 계도에 의해서 잘라진 살조각이 땅바 닥에 떨어져서갑자기 남색 불꽃을 뿜어내는 것을 볼 수가 있었 다. 이 무렵 정신화상이 바로 정불퇴의 목숨을 구해주기 위해서 그 와 같이 흉악하고도 매서운 수법을 써서 정불퇴화상의 등뒤 전 체의 한 조각의 살을 떼어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 었다. 이와 같은 거동은 정말 수월한 것이 아니었다. 첫째로 도법이 기이할 정도로 정확해야 하며 한 푼 더 많이도 안 되고 한 푼 더 적어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반드시 의지가 굳건하고 의연하여 자기 자신의 도법에 십분 자신이 있어야 행할 수가 있는 일이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의혹을 느끼게 되고 주저하게 된다면 설사 도법이 매우 정확하다 하더라도 그만 영향을 받게 되고 실수를 빚게 마련인 것이었다. 뒤로 재빨리 물러난 정신화상은 이때 정불퇴를 네 명의 승려에 게 맡겨 떠메고 소림사 안으로 달려들어가 약을 바르도록 하고 는 자기 자신은 즉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순간에 전반적인 형세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적 쪽에 줄곧 손을 쓰지 않고 있던 음양선 부평과 독룡 장경, 그리고 염왕 최환이 모두 다 손을 쓴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느닷없이 공격을 했으며 사람을 죽였다. 그렇기 때문에 삽시간에 이미 한 무더기의 승려들이 그들에 의 해 격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 승려들이 죽은 모습은 지극히 참담했다. 모두 다 세 명의 마두들에 의해 잔인하게도 시체가 마구 찢어져 선혈을 사방에 뿌리고 죽은 것이었다. 홍일대사와 홍력대사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노기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정혜화상은 크게 분통이 여기는 한편으로 명령을 내려 나한대 진을 발동시키고는 재빨리 궁리해 보았다. (나는 마땅히 관기가 달려들게 되었을 적에 진법을 발동시켰어 야 옳았다. 이제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다만 저 흉악한 마두 가 손을 쓰게 되었을 때 어째서 그토록 잔인하고 악독하며 뭇승 려들의 시체를 마구 자르는 것인지 이 가운데는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한대진이 이미 발동되었으나 처음에는 위력이 강하지 못해 무척 산만하고 어지러워 보이기조차 했다. 그러나 뭇승려들은 떼를 지어서는 사방으로 분주히 오락가락하 고 칼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은 바로 불가에서 자비를 베풀어 세상을 구하겠다는 뜻을 따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진법이 강하지 못 해 적에게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쳐 과오를 뉘우칠 기회를 주 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나한대진은 역시 불문의 항마무상대법(降魔 無上大法)으로써 위력이 무궁 무진했다. 그 세 명의 흉악한 마두들은 비록 무공이 고강했으나 이미 마 음대로 사람을 살상하지 못했다. 낭인 여정은 줄곧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서 있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코를 연신 벌렁거리는 것이 점점 흉악한 얼굴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실 그는 조금 전 소리로 뭇승려들을 암산하려고 했으나 뜻밖 에도 정계화상이 성문승의 항마정법(降魔正法)을 쓰는 바람에 그의 사악한 무공이 해소되고 만 것이었다. 그 이후 정념화상이 묵묵히 심령을 써서 멀리서부터 상대방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낭인 여정은 심신이 얼떨떨해지면서 독 한 마음이 모조리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자꾸만 콧속으로 스며드는피비린내를 맡게 되었 다. 그는 언제나 피비린내를 맡게 되면 흉악하고도 거칠은 성격이 터지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흉악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 다. 따라서 정념화상은 심령적으로 역시 어떤 느낌을 받았기 때문 에 재빨리 전력을 돋구었다. 정혜승은 눈을 들어 흘깃 정념화상이 힘겨워 하는 표정을 읽고 즉시 그 까닭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원래 그들이 저와 같이 흉악하고 잔인한 수법을 쓰는 것은 바 로 낭인 여정의 야성을 격발하자는 것이었구나. 아! 내가 진작 이 점을 생각했더라면 상대방 쪽에서 저와 같은 한 명의 흉악한 마두가 싸움을 돕는 것을 감소시키고 적지 않은 힘을 약화시켰 겠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늦고 말았구나.' 이와 같은 해답을 가까스로 얻게 되었을 때에 정념화상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 정도가 높으면 따라서 마도 역시 크게 자란다고 하더니 이 못난 형은 이제 정말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게 되었네.] 정혜화상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모두 다 이 소제가 기회를 잃고 일을 그릇친 것이나 사형을 탓 할 수가 없지요.] 이때 이미 낭인 여정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이리의 발톱 같 은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포효하듯 잇따라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한 떼의 승려들에게 달려들었다. 정혜화상은 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사형제들, 일제히 덤비도록 합시다.] 이제 넓다란 잔디밭 위에는 그 누구 하나 그대로 서서 움직이 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백여 명의 소림 승려들이 만든 나한대진은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어서 마치 사오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 았고 곳곳에서는 칼빛이 눈부시게 번쩍이고 있었다. 이때 참담한 비명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풍화진인 경문이 땅바닥에 나가 떨어져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원화상은 소맷자락을 들어서 이마에 솟아난 뜨거운 땀을 훔 치고 입으로 한 소리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그는 또 선장을 휘두르며 다시 뭇승려들에 가세를 했다. 홍호자 관기는 여전히 정계화상과 겨루고 있었는데 한참 싸우 고 있었다. 홍호자 관기의 신형(身形)은 마치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흘러가 는 것처럼 사방으로 움직였으며 커다란 칼은 번개같이 번쩍이면 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반면에 정계화상은 불변(不變)으로 만변(萬變)에 대항했으며 언제나 원위치를 지키고 섰다. 그의 선장법은 딱딱하고 법칙에 얽매여 있어 보기에는 매우 둔하고 졸렬한 것 같았지만 전신을 보호함에 있어서는 여유가 있었다. 홍호자 관기는 사방을 한번 흘깃 살폈다. 뭇승려들이 어지럽게 오락가락하면서 칼빛이 싸늘히 빛나고 있 었다. 마침 공교롭게도 낭인 여정과 음양선 부평이 나누어 두 무더기 승려들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낭인 여정과 음양선 부평의 독수가 신속 하게 사면 팔방에서 돌아나오는 승려들에게 의해 해소되고 오히 려 소림사 승려들의 공세를 막느라고 황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3966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4.4/4 적신교의 여교 11/18 17:14 247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4.4/4 적신교의 여교주 '오래 전부터 소림사 나한대진은 불문의 지보(至寶)로서 깨뜨 린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구나. 자꾸 시 간이 흐르게 될 것 같으면 더욱더 이곳에서 빠져나가기가 어려 워질 것 같구나.' 이와 같은 생각이 들게 되자 그는 즉시 정계화상을 버리고 신 속하게 산문 쪽으로 달려갔다. 이때 나한대진의 위력이 아직도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진 안의 뭇 승려들은 그저 그 자신만을 지킬 수 있을 뿐 적을 곤경에 빠 뜨리지 못했고 또한 빈 틈이 많이 노출되고 있는 상태였다. 공교롭게 홍호자와 같이 진법에 깊은 연구를 한 대가를 만나게 되자 그 위력이 훨씬 더 약화되는 것 같았다. 따라서 홍호자 관기는 뭇 소림사의 승려들을 쉽게 헤쳐가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을 헤치고 산문으로 달려가 번쩍 몸을 날려 소림사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산문 안쪽은 정적과 어둠만이 감돌고 있었으며 여전히 불문의 평온과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홍호자 관기는 지세에 익숙한지라 신속하게 어둠 속으로 모습 을 숨겼다가 옆문을 통해서 절 안으로 돌아서 들어갔다. 이 무렵 소림사 안에는 대부분의 정선된 고수들은 대개 불려나 가 나한대진을 펼치고 있었고 나머지의 일부분은 나누어 절 안 각처의 중지(重地)를 지키고 있었으며 장경각을 지키는 사람들 의 수가 가장 많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장경각에 갈무리 된 경전이 지극히 많기 때문에 특별 히 적이 불을 질러 훼손하는 것을 반드시 방비해야 했다. 만약에 그토록 많은 경전들이 불타는 손실을 입게 된다면 그야 말로 보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 안의 승려들이 많기는 했으나 모두 다 무공이 평범한 사람 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 없는 살상을 피하고 또 면하기 위해서 특별히 선출한 이삼백 명의 승려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승려들은 모조리 명령에 따라 자기 방으로 들어가 편안히 쉬고 있었으며 그들은 자기 방에서 떠나면 안된다는 지시를 받은 것 이었다. 따라서 홍호자 관기는 얼마 되지 않는 몇 곳에 암암리에 세워 놓은 초소만을 피하면 되었고 얼마 후에는 무사히 소림사의 심 장 부위에해당하는 중지(重地)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는 한 높다란 담장 밖에서 걸음을 멈추고 몸을 세운 이후 귀 를 기울여 안의 동정을 엿들었다. 이때 안쪽에서는 약간의 기척과 말하는 소리가 바람에 따라 담 장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관기는 조심스럽게 한동안 주위를 살펴본 이후에 커다란 칼을 입에다 물고 가볍게 몸을 몇 자 위로 솟구쳐올려 두 손으로 담 장위를 잡고 몸을 담장에 찰싹 붙였다. 잠시 이후에 그는 천천히 위로 몸을 뽑아 올렸는데 머리가 약 간 담장위로 솟아나도록 하고 두 눈을 들어 안을 살폈다. 담장 안에는 하나의 마당이 있었는데 무척 넓고 마당이라 꽃나 무들이 이곳저곳에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등 무척 고아 하고도 조용한 곳이었다. 집 처마 아래의 넓다란 복도 저쪽에 네모진 잔디밭이 있었고 복도 기둥에 켜진 등불빛이 비춰지는 곳 안쪽으로 몇 명의 사람 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가운데 세 명은 여성이었는데 오직 한 사람만이 정제하게 옷을 걸치고 있었고 다른 두 명은 벌거숭이 나체를 드러내고 있 었다. 그러나 그녀들 두 여인의 살결은 그야말로 눈처럼 희였 다. 홍호자 관기는 그토록 상당한 간격을 두고서 바라보는데도 그 만 가슴이 설레면서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세 명의 여인들 앞에는 겨우 두 사람이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은 늙은이고 한 사람은 소년이었다. 늙은 사람은 잿빛 수염이 기다랗게 늘어진 잿빛 옷의 노승인데 소년은 속가의 소년으로서 매우 영기발랄한데다가 호랑이 등에 곰의 허리를 지니고 있었다. 두 명의 벌거숭이 여인의 손에는 각기 두 붉은 단봉(短棒)이 들려 있었는데 그녀들은 때때로 두 자루의 단봉을 서로 부딪쳐 서는 맑고 운율(韻律)있는 소리를 내었다. 긴 치마를 땅에 끌듯 하는 절색의 여인은 웃음을 띄우고서 맞 은편의 노승과 소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신네들이 순순히 굴복을 않겠다면 본 교주로서는 부득이 친히 손을 쓸 수밖에 없군요.] 기다란 눈썹의 노승은 천천히 말했다. [노납(老納)은 절 밖으로 걸음을 내딛지 않지만 오래전부터 화 예부인의 무공이 한 시기를 주름잡을 정도로 정심하고 절묘하다 는 말을 들었소. 만약에 부인께서 무공에만 의지해서 종파를 세 운다면 여전히 일파의 종주(宗主)가 되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어째서 그와 같은 사문(邪門)의 재간을 섞어서는 세상 사람의 비웃음을 받는지 모르겠구려.] 화예부인은 웃음빛을 갑자기 거두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대사는 소림사의 방장이시니 그 세력과 신분이 매우 숭고 하시어 이 세상의 많은 험악한 일들을 어찌 알겠어요. 이 세상 일은 대사께서 상상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그토록 측은한 모습을 보여 멀리서 훔쳐듣던 관 기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열려져 당장 다가가 그녀에게 몇 마 디 위로의 말을 던져주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나서고 싶었으며 만 번 죽어도 불사할 용기가 샘솟듯 치솟아올랐다. 이때 그는 아직 화예부인의 얼굴 모습이나 표정을 엿볼 수가 없고 그저 그 소리만 듣는데도 심신이 이토록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화예부인의 미공(迷功)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펼치는 것은 최상승의 심법이었다. 비단 미색으로 상대방의 욕념을 일으키게 할 뿐만 아니라 상대 방의 성격과 위인됨에 있어서 어떤 곳에 약점이 있는지 취득하 고는 이용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 소림사의 방장 홍경대사에 대해서 그녀는 홍경대 사의 정력(定力)이 지극히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미색으로서는 좀처럼 승리를 거두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의 위인됨이 자비스럽고 너그럽다는 것을 안 나머 지 갑자기 이토록 측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와 같이 상승의 미공대법(迷功大法)은 일단 상대방으 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이도록 성공을 하게 된다면 상대방의 욕념을 이용하거나 연민의 정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자 기 마음대로 공략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상대방의 마음이 움직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감정의 둑이 그녀에 의해 그만 무너지고 얼마 후 그 무너진 구 멍이 갈수록 커지니 끝내 그녀의 미정(迷情)에 빠져들어 헤어나 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홍경대사는 다년간 불도에 전념해 왔기 때문에 영태(靈台)에는 전혀 속세의 티끌 하나 묻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마음은 고목과 같아 전혀 정에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비를 갖고 있었으며 꺼지지 않는 불과 같았는데 이때 에는 아니나다를까 화예부인에 의해 급소를 적중당하고 만 격이 었다. 처음에 그는 혜안(慧眼)과 신통력(神通力)으로 그녀의 본래 모 습이 매우 아름답기는 하나 이미 나이가 들어 늙어버렸다는 것 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미 마치 막 자란 사내애가 사오십대의 아름다운 부인을 대하 게 되었을 적에 그 중늙은이의 모습이 아직도 그런대로 괜찮다 고 느끼지만 조금도 사랑하거나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연민의 정이 생기게 된다면 마치 맑디 맑은 거울에 한 겹의 운무가 씌워지듯해서 이미 참된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홍경대사의 눈에 비친 화예부인은 갑자기 한결 아름다워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더욱더 그녀가 동정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예부인은 매우 부드럽고 나약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 저는 일개 아녀자로 강호에서 발을 딛고 서는 것이 어찌 수월한 노릇이겠어요? 처음에는 정정 당당한 사람이 되려고 한 까닭에 되려 많은 능욕을 당했어요. 저는 아직도 기억하지만 한 번은 하루 사이에 차례로 세 명의 무공이 지극히 고강한 악인들 에게 폭행을 당했어요. 그때 저는 그만 죽고 싶은 고통에 사로 잡히게 되었고 천하의 모든 남자들을 죽도록 미워하게 되었지만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요. 나중에 저는 역시 미색과 몸 뚱어리로 남자들의 무공을 사취하게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 야 겨우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 에요.] 이와 같은 말은 지극히 측은하게 들렸으며 또한 지극히 극단적 인 색정의 자극이 서려 있었다. 홍호자 관기는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피가 끓어오르는 것 을 느끼고 하마터면 높다란 담장을 뛰어넘어 모습을 드러내고 화예부인에게 고운 말로 몇 마디 위로의 말을 던지고 싶은 충동 을 느꼈다. 홍경대사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온 얼굴 가득히 슬픔과 연민의 빛을 띄우고 속으로 생각했다. '선재(善哉)로다. 선재로다! 이 여인이 겪은 일들이 이토록 비 참하다니, 나중에 그녀가 무림에서 천도에 역행하게 되고 사교 의 우두머리로 변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구나.' 화예부인은 아름다운 눈동자에 놀랍게도 수정과 같이 맑은 눈 물을 가득 띄웠으며 표정이나 태도 또한 연약하고 측은하기 이 를 데 없는 모습이 되었다. 그녀는 가날픈 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도 저는 역시 전적으로 완전히 저 자 신의 주장대로 살아가지 못한답니다. 예를 든다면 이번에 귀사 로 달려와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것도 결코 저의 본심에서 우러 나온 것이 아니에요. 생각을 해보세요. 누대역이라는 그 악마에 게 어찌 반감을 살 수 있겠어요. 그리고 또 많은 무서운 인물들 이 저로 하여금 감히 그들의 말을 쫓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 는 거예요.] 그와 같은 말을 하면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어느 틈에 홍경 방장에게 가까이 다가들고 있었다. 그녀의 동작은 마치 연약한 여인이 피난처를 구하는 것처럼 사 람으로 하여금 전혀 경계하거나 꺼리는 마음이 없도록 했다. 만약에 정력(定力)이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홍경방장이 아니 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두 팔을 뻗어서는 그녀를 품속 에 끌어안고 위로의 말을 속삭여 주었으리라. 그녀가 손을 뻗쳐 암산을 할 수 있는 거리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에 곡창해가 갑자기 몸을 날리더니 그녀와 방장사형 사이에 끼어들어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장사형, 이 여인의 말에는 아무래도 거짓이 있는 것 같습니 다. 저 요혼과 탕백 두 여인은 때때로 냉소를 띄우고 있는 것이 마치 매우 의기 양양한 모습입니다.] 홍경대사 역시 득도한 고승이라 그 말을 듣고 대뜸 경각심을 일으키게 되었고 암암리에 신공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평소의 태 도를 되찾아 두 눈에서는 재차 지혜의 빛을 쏘아내었다. 화예부인은 백척 간두에 모든 공이 무너지자 울화가 치밀어 냉 소를 흘리면서 섬세한 손가락을 쳐들어서는 잽싸게 곡창해를 짚 으려 들었다. 그녀는 극도의 분노에 차서 손을 쓰고 있었으나 행동거지는 여 전히 매우 우아하고 매력적이었지만 이 손가락질에는 무한한 살 기가 서려 있었다. 그런데도 표면적으로는 마치 사랑 싸움을 하는 것처럼 사람으 로 하여금 경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했다. 곡창해는 화양지의 쓴맛을 본 적이 있었다. 나중에서야 사부 응진대사로부터 그 일문(一門)의 무공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화양지에는 십삼절(十三節)이 있는데 그 당시의 여약연은 겨우 십절까지 연마했을 뿐이었지만 충분히 주름을 잡을 정도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화예부인은 물론 이미 제십삼절의 최고의 경지에 도 달해 있었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지법은 그녀의 음성과 표정과 완전히 배합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었다. 무릇 남자들이 그녀의 손가락에 뒤덮히게 된다면 반항할 수가 없게 되고 되려 순순히 이마를 내밀어 그녀가 손가락으로 짚도 록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전신이 녹아나듯해 죽어버린다는 것이었 다. 곡창해는 이 가운데의 무서움을 똑똑히 알고 있었고 또 본래 천진함이 아직도 남아 있어 남녀의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소림사의 무상내공심법을 수련했고 또 여러 장로들이 공력을 키워주었기 때문에 민활하게 움직이는 심령(心靈)이 조 금도 제압을 받지 않았다. 이때 그는 사문의 비전기공(秘傳奇功)인 무적금강력을 휘둘러 서는 손을 들어 쳤다. 장력이 미치는 곳에 허공을 가르는 휘파람 소리가 이는 것이 그 소리와 기세가 위맹하기 짝이 없어 화예부인마저도 대경 실 색해서는 신속하게 일 장 남짓한 곳으로 표연히 물러서야 했다. 홍호자 관기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일성을 대갈했다. [교주, 두려워할 것 없소이다. 불초 관기가 왔소이다.] 그는 가슴 가득히 미녀를 지켜야 하겠다는 정에 분연히 높다란 담장을 뛰어넘어 화예부인의 곁으로 달려갔다. 화예부인은 마음속으로 불쾌한 감정이 치솟아올랐고 살기가 어 느덧 솟구려올랐으나 되려 매우 부드럽고도 고혹적으로 눈길을 돌려 방긋 웃었다. [알고보니 관 보주께서 왕림하셨구려. 소문에 들으니까 여정 형이 당신을 초청해서 동행을 한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구려. 그러나 지금 오직 보주 혼자 이 절 안으로 뛰어들었으니 이로 미루어볼 때 정말 뛰어난 절기가 있는 것을 알겠군요.] 홍호자 관기는 자기를 칭찬해주는 말이 절세의 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게 되자 그만 너무나 마음이 들뜨게 되고 기쁨에 넘쳐 몸까지 부르르 떨었을 뿐만 아니라 아래 턱의 그 짙은 붉은색 수염도 더욱 새빨갛게 변하는 것 같았다. #3980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5.1/4 강호 출도 11/20 02:21 252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5.1/4 강호 출도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인사치레의 말을 했다. [교주께서는 너무나 과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불초는 그저 몇 수 얄팍한 잔재주를 지니고 있는데 불과하며 어찌 교주님의 과찬을 감당할 수 있겠소이까? 저 소년이 아마도 곡창해인 모양 이지요?] 화예부인은 웃었다. [바로 그래요! 저 녀석의 솜씨가 범속하지 않으니 아무쪼록 보 주께서 힘껏 도와주시는 셈치고 빨리 주살하여 일에 지장이 없 도록 해주어요.] 관기는 허리를 구부렸다. [삼가 방지(芳旨)를 받들겠소이다.] 그가 정히 앞으로 나가려고 했을 적에 화예부인이 섬섬 옥수를 뻗쳐 그의 강철과 같은 굳건한 팔을 잡고 입을 열었다. [잠깐! 바깥의 사정이 어때요?] 관기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기운을 느끼고 그만 한 차례 가슴이 뛰는 것을 금치 못했으며 일순 어리둥절해졌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상대방 쪽에서 이미 나한대진을 펼쳤기 때문에 한창 혼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랍니다.] 화예부인은 '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 보주는 진법에 정통한 모양이군요?] 관기는 겸손의 말을 했다. [정통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쪽에 적지 않은 공을 들여 고생 해가면서 공부를 한 적은 있지요?] 그녀는 이때서야 황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원래 낭인 여정은 그가 배운 진법을 이용하여 나한대진에 대 항하자고 했구나. 그런데 이자가 혼자서 이 절 안으로 뛰어든 것은 어떤 까닭이 있는지 모르겠군?' 그녀는 이 가운데의 관계가 틀림없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가 있었다. 그렇지 않을 때 홍호자 관기가 어찌 낭인 여정 등을 버리고 혼자 달려왔겠는가? 다시 말한다면 홍호자 관기는 크게 명성이 알려진 사람이고 그 만큼 몸값이 나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만약에 어떤 중대한 원인이 없다면 감히 낭인 여정의 초청에 응하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녀가 가볍게 손을 내흔들자 요혼선자와 탕백선자가 즉시 행 동을 취했다. 그녀들은 네 폭의 붉고도 기다란 비단띠를 펼쳐서는 휘두르며 곡창해와 홍경대사를 휘감으려 들었다. 이 두 여인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몸통은 풍만한 편이었으며 교태가 뚝뚝 떨어지고 있어 손짓 발 짓에 한 가닥 사람의 심연을 움켜잡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때 곡창해가 일성을 대갈하며 질풍과 같이 앞으로 달려나오 더니 두 손을 쫙 벌리고는 그들의 손에 들린 붉은 띠를 잽싸고 도 세차게 낚아채려고 했다. 그는 비단 혼자의 힘으로 두 여인을 막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삼초도 겨루지 않아 한 폭의 붉은 비단띠를 움켜잡고 힘주어 당 기게 되자 어느덧 그때는 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 그의 공력은 지난번 그녀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보다 훨씬 증진되어 있었다. 두 여인은 가슴속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재빨리 연합의 초식을 펼쳐내었다. 화예부인은 겨루고 있는 그들을 힐끔거리며 관기를 한켠으로 끌고 가서는 나직이 물었다. [관보주, 당신은 솔직히 나에게 알려줘요. 무슨 연고로 소림사 와 맞서고자 하는 거지요? 내 틀림없이 당신을 도와 드리지요.] 관기는 완전히 그녀에게 넋을 빼앗기고 있는 터라 고개를 끄덕 였다. [불초는 물론 솔직히 모든 것을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이 무렵 요혼선자와 탕백선자는 손을 합해 곡창해를 상 대했으나 여전히 털끝만치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 쪽에는 아직도 한 분의 영도자인 소림사 홍경방 장대사가 아직도 손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예부인은 재간이 뛰어난 만큼 대담한 면도 있었고 심 지어는 믿는 것이 있는지 그런 불리한 정세를 전혀 보지 못한 척 개의치 않고 여전히 관기가 어째서 감히 소림사와 맞서는지 그 이유를 들으려하고 있었다. 사실 홍호자 관기는 망명도배의 출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 나 지금의 세력은 이미 상당히 강경해지게 되었고 집도 있고 재 산도 있는 몸이었다. 그러니 굉장히 중요한 원인이 없다면 위험 을 무릅쓰면서까지 뭇사마에게 빌붙어 소림사를 소란스럽게 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홍호자 관기는 매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솔직히 교주님에게 말씀을 드린다면 불초에게는 두 가지 원인 이 있기 때문에 소림사와 원한을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 부교주를 따라 이곳까지 왔던 것이지요. 첫 번째의 원인은 여부 교주가 친히 왕림을 하셔서 초청을 했으며 불초가 진법을 연구 한 데 대한 능력을 빌려서 소림사 나한대진을 상대하겠다는 것 이었는데 불초로서는 감히 거절을 할 수 없었지요.] 그는 잠시 말을 늦추었고 두 눈을 들어 한시도 화예부인의 아 름답고 고운 얼굴에서 떼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고 느껴졌으며 더욱더 넋을 빼앗기게 되 는 것이었다. 화예부인은 이와 같은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아온 경험이 있었 다. 거의 모든 남자들이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서 좀처럼 옮겨가지 못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 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신속하게 궁리했다. '이 홍호자는 분명 흑수파의 위세에 핍박을 받고 감히 오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안면 때문에 감히 진실된 말을 토해놓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두 번째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홍호자 관기는 때늦지 않게 말을 이었다. [두 번째의 이유는 못난 저의 딸년이 갑자기 집을 떠나간 이후 행방불명이 된 것이지요.] 화예부인은 크게 놀람과 의아한 감을 느꼈다. [따님이 실종된 것이 설마하니 소림사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요?] 관기가 막 입을 벌리려고 했을 적에 한 여인의 뾰족한 비명 소 리가 울려퍼지면서 그가 하려던 말을 멈추게 했다. 화예부인은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요혼선자의 손에는 두 폭의 붉은 비단띠가 모조리 사라지고 없 었으며 두 손으로 아랫배를 얼싸안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띄고 있었다. 이때 곡창해는 탕백선자 한 사람만 상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두 사람을 상대로 할 때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그는 손으로 치고 발로 차는 등 손짓 발짓하는 사이에도 위엄 이 넘쳐흘렀으며 감당하기 어려운 용맹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탕백선자는 이미 기다란 붉은 비단띠를 거두어들여 칭칭 자루 에 감아놓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한참 그 두 자루의 말단에 불쑥 불거져 있는 예리한 날을 찌르는 칼처럼 사용해서 적의 공 세에 대항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곡창해의 권법이나 각법의 위력이 놀라워 그야말로 무 엇이든지 부술 수 있는 기세를 거의 보여주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탕백선자는 겨우 몇 초를 대항했을 뿐 곧바로 아슬아슬 한 고비를 맞게 되었고 그저 자주 물러만 날 뿐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전혀 반격할 힘이 없는 것 같았다. 화예부인은 간드러진 웃음을 흘렸다. [호호호, 곡형제는 정말 뛰어난 인재로군. 독각룡왕 응진이 자 네를 제자로 거두어들여 상승의 무공을 전수해준 것도 무리는 아니군. 그러나 자네는 그저 여자들만 못살게 굴 뿐이니 그렇다 고 해서 어찌 영웅호걸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그와 같은 말을 하면서 그녀는 어느덧 사뿐사뿐 다가갔다. 곡창해는 그 모양이 매우 단정하고 의연하지만 기실 기지가 절 륜하고 온갖 계책을 다 짜내는 슬기를 지니고 있었다. 옛날 털끝만치도 무공을 모를 적에 아앵과 함께 적들에게 추격 을 당하는 난처한 곤경에 빠졌었지만 잇따라 기이한 꾀를 펼쳐 내어서는 적을 따돌리기까지 한 터였다. 화예부인은 바로 이런 점에서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의 몇 마디 이야기에다가 암암리에 미공(迷功)을 펼치게 된다면 설사 상대방을 흘려놓지는 못하지만 틀림없이 상 대방의 영웅적인 기재를 부추기게 되어 매서운 손찌검으로 꽃을 망가뜨리는 짓을 하기 어렵다고 느끼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손놀림을 조금이라도 늦추게 된다면 비단 수월하게 탕백 선자의 위기를 해소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녀 역시 상황에 따라 손을 써서 공격을 가하거나 진일보하여 미혼공(迷 魂功)도 펼쳐낼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곡창해는 마치 전혀 그녀의 하는 말을 듣지 못한듯 잇따라 두 대의 주먹을 뻗쳐내었다. 태산과 같은 권력의 충격에 탕백선자는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하 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곡창해는 정혜화상으로부터 화예부인이 어쩌면 암암리에 방장 사형에게 암습을 가해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즉 시 많은 문제점들을 고려해 보았고 또한 마음속으로 어느덧 결 론을 지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조금도 사정없이 적신교 요녀들을 죽이겠 다는 결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조금도 여인이 가엾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전신 을 발가벗었으며 또한 지극히 아름답고 매혹적인 요혼과 탕백 두 여인을 마주대하면서도 조금도 연민의 정을 느낄 수가 없었 던 것이었다. 따라서 화예부인의 그 몇 마디 말도 근본적으로 어떤 작용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는 상대방의 하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즉시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드러난 것으로 직감하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서 공력을 끌어올려 한 대의 주먹을 던졌다. 탕백선자는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손에 들고 있는 한 쌍의 예 리한 날을 교차하여 억지로 막았다. '펑'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녀의 그 풍만하고도 허연 동체는 땅바닥을 떠나 뒤로 일 장 남짓 날아가더니 흙먼지 위에 떨어져 다시 움직이지를 못했다. 화예부인은 곡창해의 살을 생체로 뜯어먹었으면 시원할 것 같 은 증오심이 복받쳐 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겉으로 전혀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몸을 흔들하더니 어느덧 곡창해의 앞길을 가로막고는 눈살을 찌푸리 며 말했다. [정말 심보가 악독한 사람이군! 설마하니 그토록 젊고 싱싱하 면서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서도 여전히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철벽 심장을 가졌던 것인가?] 곡창해는 처음으로 그녀와 정면으로 대적을 하게 된 셈이었는 데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귀로 그녀의 음성을 듣게 되자 그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고 연민의 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그녀가 정히 상승의 미혼공을 펼치고 있 다는 사실을 알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명불허전이로군.] 홍호자 관기는 노갈을 한번 터뜨리더니 번쩍 몸을 날려 곡창해 의 앞에 내려서며 날카로운 어조로 외쳤다. [이런 녀석 봤나. 감히 매서운 손찌검으로 사정없이 꽃을 짓밟 아 버리다니, 본 보주는 반드시 너의 그 개 같은 목숨을 빼앗아 야만이 가슴속의 맺혀진 한을 풀 수가 있겠다.] 아마도 화예부인의 미공에 영향이 미친 나머지 홍호자 관기마 저도 완전히 홀리고 만 모양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큰칼을 쳐들어 형형한 광채를 눈부시게 번쩍이면서 정히 몸을 날려서는 달려들려고 했다. 그 순간 그의 한쪽 팔이 눈과 같이 희고 옥과 같이 고운 손에 붙잡히게 되었고 곧이어 화예부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 자신이 그를 상대하겠으니 당신은 먼저 요혼선자를 도와 혈도를 안마해주어 중상을 입고 죽는 일이 없도록 해주어요.] 관기는 그녀에 대해서만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양순했 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려 달려가더니 아랫배를 얼싸안고 허리를 구 부리고 있는 요혼선자를 부축하는 한편 오른손의 큰칼을 발 앞 쪽의 땅바닥에 꽂고는 물었다. [어디에 상처를 입었소?] 요혼선자는 입으로 신음소리를 내뱉으면서 자기의 아랫배를 가 리켰다. 홍호자 관기는 눈길을 들어 그곳을 바라보는 순간 그만 자기도 모르게 멍청해지고 말았다. 원래 이 요혼선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기 때문 에 아름다운 곡선이 눈길을 던지는 그 순간 완연히 망막에 비치 게 된 것이었다. #5159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5.2/4 강호 출도 08/09 11:55 205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5.2/4 강호 출도 그렇지 않아도 이미 화예부인의 미공에 금제를 당해있는 터라 대뜸 마음 에 격렬한 충동이 일면서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한 순간 어리둥절했을 뿐 곧 그녀를 눕히고 손을 뻗어서는 그녀의 아랫배 상처 주위의 혈맥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공중의 추궁활혈수법(推宮活血手法)은 변질이 되고 말았다. 화예부인은 말했다. "정말 형편없군. 지금이 어느때인데 그런 속된 수작을 하다니……." 기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조금도 성을 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홍호자 관기가 그와 같은 반응을 보여준 것은 바로 그녀가 예측했던 대로였으며 그 녀로서는 정히 그와 같은 광경을 안배해서 곡창해를 고혹적인 함정에 빠뜨 리려고 하는 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곡창해와 홍경대사는 그만 그 계책에 말려서 그쪽으로 시 선을 옮겼다. 화예부인은 곁눈질로 그러한 움직임을 포착하고는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너희들이 설사 정력(定力)이 태산과 같이 굳세고 의지가 강하다 하더라 도 이번에는 반드시 욕념의 바다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미 득도한 신선 이나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반항하지 못하게 될걸.' 한데 곡창해와 홍경대사가 눈길을 그쪽으로 던지게 되었을 때에 그 홍호 자 관기는 화예부인이 뿌로통해져서 나무라는 소리를 듣고 대뜸 황송하기 짝이 없는 심정이 되어서는 몸을 뻗쳐 몇 자밖에 떨어져 있는 옷을 집어 펼 쳐서는 요혼선자의 몸뚱아리에 덮어씌웠다. 그리고 난 이후에야 정식으로 추궁활혈의 수법을 써서 주물러주기 시작했 으니 이렇게 되자 자연 전혀 고혹적인 광경을 엿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화예부인은 그만 성이 나서 발을 굴렀으나 그렇다고 해서 홍호자가 잘못 되었다고 꾸짓거나 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홍호자 관기가 그녀의 홀리는 수단에 너무나 빠져들었기 때문에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항거할 수 없는 마력을 느끼고 순순히 따르고 있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그가 경박하다고 성을 냈으니 홍호자 관기가 점잖은 태도 로 바뀐다고해서 나무랄 수가 없는 것이고, 또한 고혹적인 장면을 계속 보 여주도록 시도할 수 있는 수가 사라지고 말았다. 곡창해는 그 한 쌍의 와잠미를 찌푸리며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리고서는 낭랑히 호통쳤다. "부처를 모시고 있는 절간이라는 성지에서 어찌 요녀가 날뛰는 것을 용납 하겠는가? 받아라!" 그리고 '휙' 하니 일 장을 후려쳤다. 화예부인은 소맷자락을 들어 한 번 떨쳤다. 동시에 그녀는 소맷자락을 흔 들면서 손가락을 소매 그림자에 감추고 일지(一指)를 찍어내었다. 그녀는 이미 곡창해의 무서움을 구경한 바 있었기 때문에 이 한 번 소맷 자락을 떨치는 것과 일지를 찍어내는데 십성의 공력을 돋구었다. 이 순간 소맷자락은 강경하기 이를 데 없는 장력에 와락 밀려서는 오히려 뒤쪽으로 펄럭거리며 날았다. 그러나 그녀의 섬세하고도 옥과 같은 손가락에서 뻗쳐난 내경(內勁)은 마 치 예리한 검날처럼 상대방의 장력 안으로 파고들게 되었고 대뜸 그 한 가 닥의 웅혼한 장력을 해소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십성의 공력을 돋구었는데도 겨우 적의 장력을 해소시켰을 뿐 그 기세를 빌어 앞으로 나가면서 적에게 상처를 입힐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진정 놀라움 속에 섬뜩한 생각을 했다. '저 녀석이 이토록 훌륭한데 만약에 재빨리 제거하지 않는다면 장래에 저 녀석은 틀림없이 응진의 위치를 계승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의 그림자가 후다닥 나누어지면서 화예부인은 극상승의 이형환위(移 形換位)의 신법으로 일 장 남짓 뒤로 물러서더니 입을 열었다. "곡창해, 네 녀석은 감히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나와 손을 쓸 수가 있 겠는가?" 그 말이 한 교파의 우두머리인 화예부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은 보 통일이 아니다. 곡창해는 아직도 산을 내려가 강호에 발걸음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예 부인이 몸소 제안하는 도전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성취를 쌓았다는 것은 역시 스스로 자랑할 만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이때 홍경방장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교주가 폐사제를 매우 높이 평가하는 모양이지만 그의 무공이 아직도 성 취가 없는 상태에서 어찌 교주와 일대일로 맞서서 예리함을 다툴 수가 있겠 소?" 노화상은 신분이 존귀하고 숭고한 만치 어떤 말은 말하기가 거북했던 것 이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화예부인이 전적으로 무공에만 의지 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일대일로 싸울 수 있겠 느냐 하는 말을 내뱉었으리라. 화예부인 역시 더 말하지 않고 매혹적인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서 입을 열 었다. "좋아요. 이곳에서 손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지." 그녀는 두 어깨를 흔들하더니 어깨에 걸쳐져 있던 옷자락이 떨어지면서 고운 어깨를 완전히 드러냈다. 그녀는 정말 대단한 미녀였다. 탕백과 요혼 두 선자와 같이 요염하고 절세적인 미녀들이 완전히 벌거숭 이가 된 모습도 그녀의 두 어깨를 드러낸 매력에 견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홍경방장은 도행(道行)이 심후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고 운 어깨가 드러났는데도 못 본 척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곡창해는 그만 일순 어리둥절하게 되었고 가슴속으로부터 야릇한 느낌이 솟아올랐다. 사실 그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아직도 진짜로 풍류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화예부인은 그와 같은 철부지의 동자마저도 미망에 사로잡혀 넋을 잃은 듯 또 완전히 취한 듯한 태도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이었다. 곡창해와 같은 나이라면,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의 동자보다 아는 것이 훨씬 많은 편이니 어찌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곳에 있는 세 명의 남자들 얼굴의 여섯 개의 눈동자는 동시에 화예부인 의 몸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홍호자 관기가 가장 넋을 잃고 있었다. 곡창해는 가슴속이 야릇해지기는 했으나 그 즉시 다시 차분해져 파도가 죽은 듯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화예부인은 홍경방장이나 곡창해가 제압을 당하지 않고 되려 홍호자 관기 가 정신을 잃은 듯 또한 취한 듯 자기의 손발에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을 보고 속으로 놀라워 하는 한편 이가 근질근질할 정도로 증오심이 북받쳐 올랐다. 그녀는 요염한 눈가에 실날 같은 웃음을 띄우더니 별안간 허공을 격하고 일지를 홍호자 관기에게 찍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이 화양지는 무학에서 일절로 손꼽히는 절기였다. 곡창해가 수련한 무적금강력마저도 그녀의 일지에 해소되고 말았으니 넋 을 잃고 취해있는 듯한 상태에 빠져 있는 홍호자 관기가 어찌 감당해 낼 수 가 있겠는가? 홍경방장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교주가 함부로 살상을 일삼다보니 화가 자기편 사 람에게도 미치게 되었으니 이는 크게 불길한 일이외다." 그는 커다란 소맷자락을 잇따라 떨쳐서는 일진의 잠력을 급격하게 밀어보 내 옆으로부터 비스듬히 그녀의 지력을 가로막고 그녀의 지력이 종적도 없 이 사라지도록 해소를 시켜버렸다. 홍경방장은 이때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솜씨를 보인 것이지만 심후하기 이를 데 없는 공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만 셈이 되었다. 화예부인은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이들 두 사람이 만약에 일대일로 싸운다면 그런 대로 버텨낼 수 있겠지 만 만약에 손을 잡고 공격해 온다면 비단 내 자신의 일세위명(一世威名)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게 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무사히 소림사에서 나갈 수 가 없으리라.' 이와 같은 생각이 번쩍 머리에 떠오르게 되자 그녀는 즉시 먼저 전력을 다해서 곡창해를 상대해보리라 결심을 했다. 그렇게 해야만이 아직도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지 그 렇지 않을 적에는 즉시 이곳에서 도망을 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나직이 잇따라 소리 내어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짚고 손으로 후려치는 등 곧장 곡창해를 공격해 왔다. 그 한 벌의 의상이 어깻죽지 아래로 내려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언제 어느때라도 완전히 벗어질 것 같기도 했다. 곡창해는 즉시 손을 써서 막았다. 초식마다 소림사의 비전심법(秘傳心法) 으로 정묘하고 심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시에 고하를 분간하기 어려웠는데 두 사람이 격렬하게 싸우게 되었을 때에는 갑자기 토끼처럼 몸을 날리는가 하면 매처럼 떨어지는 등 재빠름이 질풍 노도와 같았으며 때때로 호수의 물처럼 정지하는가 하면 태산처럼 우 뚝 버티고 서기도 하는데 그 고요함에 처녀를 연상시켰다. 두 사람이 정히 결투를 벌이고 있는데 세 분의 노화상이 차례대로 그곳으 로 들어섰다. 홍경방장은 멀리서 합장을 하고 몸을 구부려 보였고, 그 세 분의 노승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서는 곧 홍호자 관기가 있는 곳으로 다가서더니 세모꼴을 이루어서는 홍호자 관기를 한복판에 두고 에워싸는 것이었다. 홍호자 관기는 전혀 이 노승들의 행동을 모르는 듯 여전히 시력을 돋구어 서 화예부인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때때로 기쁜 빛을 띄웠다가 근심의 빛을 띄곤 했다. 홍호자 관기와 맞은편에 마주선 노승의 생김새가 가장 장엄한 편이었는데 그는 한 가닥 슬픔과 연민의 웃음빛을 띄우고는 입을 열었다. "두 분 사제가 모두 친히 목격하듯이 화예부인은 정말 명불허전일세. 우 리가 불문의 혜력신공으로 이자의 마음속에 있는 마(魔)를 항복받으려 한다 는 것은 아무래도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네." 그러자 두 분의 다른 노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입가에 웃음을 띄었 다. 먼저 말을 걸었던 그 노승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들이 만약에 조금이라도 수단을 써보이지 않는다면 외간의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게 될 것이며 모두들 불문이 비록 넓다하나 이와 같 은 기이하고 요사한 무공을 제압할 길이 없다고들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말이 끝난 이후 세 노승은 일제히 염불을 하면서 범패 소리마저 드높 게 외쳤는데 그 소리가 무척 온화하고 느릿하게 귀를 즐겁게 해줄 지경이었 다. 잠시 시간이 흐르게 되었을 때에 홍호자 관기는 첨으로 눈길을 거두어들 이고서는 의아한 시선으로 세 분의 노승을 한 번 쳐다보더니 곧이어 깊은 생각 속에 빠져들었다. 그윽하고 나직한 범패 소리가 고즈넉하게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홍 호자 관기는 정신을 차린 듯 만 듯 넋을 잃은 듯 깨어난 듯한 상태에 놓이 게 되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한차례 나직하고도 무거우면서 무한한 자비를 띈 음성 이 그의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옛날에 구섬미국에 마인제자라는 사람이 있었더라. 그는 자기의 여자를 데리고 부처님 앞으로 가서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을 드리더라. '나 의 계집애는 얼굴이 곱고 잘 생긴 것은 이 세상에서 무상이라 할 수 있소이 다. 여러 나라 국왕과 호족이나 귀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와서 부탁을 했지만 나는 모두 다 거절을 했었지요. 오직 대인만이 유독 빛나 보이고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형편인지라 이 여자를 바치고자 하나이다.'" 그 말이 거기까지 울려퍼지게 되었을 때에 홍호자 관기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적신교주의 아름다운 얼굴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무상이라는 그 한 마 디의 말을 듣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구나.' 이때 그 나직하고도 무거운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부처님께서는 되물으셨도다. '이 여자의 어떤 곳이 좋다는 말이냐?' 마 인제자는 대답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또는 주위에서 본다 하더라도 그 어느 곳 하나 좋지 않은 곳이 없소이다.'" 홍호자 관기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을 했다. '맞았다! 화예부인 역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 곳 아름답지 않 은 데가 없다.' 그의 귓가에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더라. '미혹함에서 깨어나지 못한 육안이로구나. 내 가 지금 볼 적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느 한 곳 좋은 데가 없도다.'" 홍호자 관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불만스럽게 여긴 나머지 정히 입을 벌 리고 따지려고 들었을 때에 그 음성이 곧 이어졌다. "내 눈으로 그녀를 볼 때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있는데 머리카락이라는 것 은 털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또 코끼리나 말의 털도 역시 털이니라. 머리카 락 아래에는 해골이 있고 해골은 오직 뼈다귀에 지나지 않는데 백정의 집에 서 잡은 돼지머리도 역시 마찬가지니라. 머리 속에는 뇌가 있고 뇌는 진흙 같으며 지린내와 구린내가 역겹게 코를 찌르노라. 그리고 콧속에는 콧물이 있고 입 안에는 침이 있으며 오장 육부 모두가 비리니라.그리고 위장과 방 광에는 모두 다 똥오줌으로 가득 차서 썩는 구린내가 말할 수 없을 지경이 니라. 사지와 수족은 뼈와 뼈가 서로 이어져 있고 근육이 있어서 뻗칠 수도 있으니 가죽이 있어서 움츠릴 수도 있으며 숨소리에 따라 움직이니 나무로 만들어진 기관과 다를 데가 없더라." 홍호자 관기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에 어느덧 온몸에서 식 은땀이 흘러내렸다. From Sunburst #5160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5.3~4/4 강호 출도 08/09 11:57 426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5.3~4/4 강호 출도 그는 그저 한 절세의 미녀를 그와 같이 형용한다는 것은 실로 가련하고 무서운 일이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이때에 다시 그 말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 만약에 그 몸뚱어리를 떼어놓게 된다면 토막토막 나서 떨어지게 되 고 머리와 발이 낭자한데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으니 어떤 점이 좋고 또한 무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홍호자 관기는 그 순간 그 도리는 절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느껴졌을 뿐 만 아니라 도저히 반박하거나 변명할 여지가 없는지라 그만 다시 또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갑자기 다른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는데 우렁차면서도 낭 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색욕이라는 것은 굴레에 지나지 않으며 무릇 이에 미련을 두는 자는 스 스로 헤어나지를 못하니라. 색욕은 이 세상의 무거운 병환으로 한번 걸리게 된다면 곤고(困苦)함을 죽을 때까지 면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색욕이라 함 은 세상의 재앙으로 부딪치게 되었을 때에 그 어느 누구 하나 액운을 당하 지 않는 자 없느니라." 이어서 또 다른 부드럽고 온화한 음성이 들려왔다. "불경에서 가로되 무릇 색을 중시하고 기꺼이 그 종이 되는 자는 한평생 달리고 달려야 고생만 하게 되느니라." 홍호자 관기는 그 순간 한차례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땅이 흔들흔들해지 는 것을 느끼고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수 장 밖에서 한차례 낭랑하고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누군 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 여서 사형들께서는 크게 자비심을 베푸셔서 놀랍게도 그 사람을 끊임없는 색욕의 한복판에서 구해 저쪽 언덕으로 올려놓았으니 그야말로 기 쁘고도 축하할 일이로군요." 화예부인은 이때에 어느덧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고 막 속으로 정신을 집 중해서는 빈틈을 노리다가 일거에 적을 쳐 죽일 작정에 골몰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눈길을 돌려 소리가 난 곳 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쪽에는 한 사람이 몸에 승포자락을 걸치고 한 쌍의 지팡이를 발되신 사 용해서 서 있는데, 우람한 체구는 사람을 압도했고 그 호기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당금 무림에서 제일 고수라고 뽑혀지는 독각룡 왕 응진인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다시 눈길을 돌려서는 그 세 분의 노승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 세 분의 노승이 소림사 윗대의 고수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가 있었다. 그녀는 그 즉시 테두리 밖으로 신속하게 물러나서는 응진을 바라보며 입 을 열었다. "응대협께서는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귀하께서는 아마도 이미 완전히 치유가 된 것 같군요." 응진은 담담히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작작하시지. 나는 적신교 교주 화예부인이 어떻게 살아 서 이 절간을 빠져나갈 수 있을는지 두고 볼 참이오." 화예부인은 방긋 웃었다. "나에게 만약 자신이 없다면 어찌 감히 소림사의 복지로 들어와서 사단을 벌였겠어요?" 응진은 깊이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 당신은 도대체 그 어느 누구를 믿고 감히 우리 소림사를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오?" 화예부인은 되물었다. "이 세상에 그 누가를 당신은 가장 걱정하지요?" 응진은 놀라는 표정이 되어 물었다. "허령주를 말하는 것이오?" 화예부인은 화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신은 정말로 아직도 옛정을 잊지 못하고 있군요. 그렇기 때문에 즉시 알아맞힐 수 있었던 것이에요. 맞아요. 그녀는 이미 내 손아귀에 들어와 있어요. 내가 일정한 기간을 지나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 아가지 못한다면 자연 그 누가 있어 나를 대신해서 손을 써서 그녀를 죽이 게 될 거예요." 응진은 증오에 찬 어조로 말했다. "매우 악독하고 비열한 아낙네로군. 당신은 조만간 내 손에 떨어져 보답 을 받게 될걸."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하라." 화예부인은 품속에서 한 통의 사철을 꺼내 응진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 다. "그녀의 필적은 당신도 틀림없이 알아보리라고 생각해요. 이 편지는 바로 그녀가 내 구술을 받아서 쓴 것이니 충분히 그녀가 내 손아귀에 들어와 있 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나서야 화예부인은 홍호자 관기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때서야 그녀는 겨우 그가 기절해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발견 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홍호자 관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서는 중상을 입었으나 죽지 않은 요혼선자를 잡아 일으키며 호통을 내질렀다. "곡창해보고 길을 안내하도록 해줘요." 곡창해는 속으로 사부가 그녀의 암습을 두려워한 나머지 틀림없이 십중 팔구 그와 같은 조건에 응낙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미리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따라오시오." 쌍방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문을 나서게 되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잔디밭 위에 나한대진이 이미 거두어들여지게 되고 몇 명의 승려들만이 싸움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곡창해는 경과 상황을 알아본 결과 흑수파의 흑수삼악이 차례로 주살되었 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낭인 여정은 무력이 지극히 고강해서 끝내 음양선 부평과 독룡 장 경 등 세 사람이 소림사의 나한대진을 뚫고 도망을 쳐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었다. 저만치 나간 화예부인은 이때서야 곡창해에게 외치듯 말했다. "자네는 돌아가서 응진에게 물어보게. 만약에 내가 허령주를 석방하지 않 는다면 또 어떻게 하지?" 곡창해는 어리둥절해져서는 눈길 모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예부인은 방긋이 웃고 있었는데 암암리에 어느덧 사람의 혼을 빼앗고 뜻을 흔들어놓는 비예기공(秘藝奇功)을 펼쳐내고 있었다. 그녀의 미혼공은 이미 극상승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순전 히 색욕을 위주로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칠정 육욕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뚫고 들어갈 구멍이 없을 정도였다. 이때 곡창해는 그녀가 보여주는 태도가 매우 친절하고 사랑스럽다고 느껴 져 그녀에 대해서 전혀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는 천성적으로 한 가지의 장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감정과 이지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녀에 대해서 차마 반박하고 꾸짖는다는 것이 안됐다고 느 꼈지만 따져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늠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교주의 그 말씀은 틀렸소이다. 설사 우리 가사께서 지금 당장교주에 대 해서 어찌할 수가 없는 처지이지만 교주께서는 일파의 종주인 만큼 어찌 자 기가 뱉어낸 말을 저버릴 수가 있겠소?" 화예부인은 곡창해가 자기의 사람을 매료시키는 미공에도 여전히 정의와 의리와 도리를 따져 꾸짖어오고 또 태도가 그토록 엄정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일시에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슬쩍 말머리를 돌리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말 한 번 잘 하시는군. 자네는 역시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군. 사 실 나는 그저 응진으로 하여금 번뇌케 할 작정이었지. 정말로 말을 해놓고 도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네. 자네는 돌아가거든 내가 이미 길을 알고 있어서 떠났다고 해주게. 그리고 자네가 강호에 들어서게 된다면 나를 찾아와 줄 것을 잊지 말게나." 곡창해는 속으로 그녀가 자기를 그렇게 높이 사는 데 실례된 행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만약에 절을 떠나 산을 내려가 공적인 일을 보게 될 때에는 당연히 찾아 가 뵙고 인사를 드리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지요. 불초가 멀리까지 전송 하지 못함을 양해해 주십시오." 두 사람은 매우 예의 바르게 작별을 고했으며 말투마저도 매우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들 사이의 관계가 무 척 밀접하리라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곡창해는 절로 돌아가서 먼저 오대산의 손제 화상과 무당의 후기지수인 진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 나한대진이 펼쳐지게 됨에 따라 자기네들이 끼어들 틈이 없 는 것을 발견하고는 즉시 달려가 사로잡힌 황횡과 장소룡, 그리고 노패 세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뭇 흉악하고 사악한 사마들이 져서 물러나게 되고 또한 곡창해 및 방장대사마저도 나서지 않았는데 힘을 반쯤 써서 강적을 격패시킨데 대해서 무척 탄복하게 되었다. 곡창해는 그들을 만나게 되자 간단히 그들에게 화예부인이 소림사의 중지 로 침범을 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끝에 한 마디를 덧 붙였다. "소제는 아직도 가사에게 올려야 할 말씀이 있으니 빨리 가서 아뢰고 다 시 돌아와 두 분을 모시겠소." 그리고 손제화상과 진가 두 사람은 한 명의 승려를 따라 객사에 가 쉬게 되었다. 곡창해는 돌아가 응진대사를 만나 뵙게 되었는데 응진대사는 매우 근심이 많은 모습이었다. 모두들 그가 허령주를 걱정해서 그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전임의 노방장 등 세 분의 장로들로서도 뭐라고 말 하기가 어려운 문제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응진은 잠시 동안 생각을 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창해야, 너는 이제 재간이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룩하게 되었고 기지나 임 기 응변에 있어서 남만 못지 않기 때문에 이미 충분히 강호의 얄팍한 재간 을 맞상대해서 조금도 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 승을 위해서 산 을 내려가 한 가지 일을 해주기 바란다." 광덕 노방장이 그 말을 받았다. "창해는 이미 충분히 일반적인 강호 도사에서 활약하는 고수들을 상대해 내겠지만 일류의 사파 고수들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는 아무래도 노련미가 부족할 것 같네. 그 개인의 생사와 승패는 별문제가 아니지만 그 관계로 인 한 영향이 본사에 미치는 것이 크니 사제는 반드시 세 번 생각을 한 이후에 야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 좋겠네." 응진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대사형께서는 너무나 저 녀석을 귀여워하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와 같 이 많은 점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실 저 애는 소제가 옛날 산을 내 려가 강호에 뛰어들게 되었을 때보다 훨씬 강합니다. 더군다나 경력이나 경 험 같은 것은 사부 된 자가 전수할 수 있는 것이 못 되고 반드시 그 스스로 산을 내려가 강호에 뛰어들어 갈고 닦아야만이 가까스로 취득할 수 있는 것 이지요……."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영주 누이가 한평생 기구한 운명에 고달픈 생애를 보내게 된 것은 전적 으로 제가 누를 끼친 탓입니다. 지금 이미 중년에 접어들게 되었으니 그 심 정이 얼마나 외롭겠으며 더 더욱 요사(妖邪)한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니 그 괴로움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소제는 반드시 창해를 내려보내 그녀를 보호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매우 힘들고 외로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 를 이 산 위의 절간 안으로 데리고 와 거처하면서 본사의 보호를 받게 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녀를 안배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골치가 아픈 일이지요." 곡창해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자는 도리상 마땅히 사부와 근심 걱정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이번 일은 힘들고 괴롭기 이를 데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방법 이 없는 것도 아니니 사부님께서는 안심을 하십시오." 광비장로는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대단하다, 대단해! 이 애는 정말 온몸이 굳센 뼈다귀로 만들어 져 있어 응진 자네의 옛날 모습보다 더 뛰어나니 진정 귀엽군. 대사형, 더 말할 것 없소이다. 하산시키시오. 어쨌든 간에 틀림없이 우리 소림사의 명 성을 높이게 될 것이라고 믿소." 의논은 이에 이르러 일단락 되었다. 광덕장로와 광자 그리고 광비 두 노 승은 즉시 자리를 떴다. 응진은 곡창해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들었다. 잠시 후에 정혜화상이 친히 홍호자 관기를 압송해 들어와 방장 대사를 알 현했다. 홍경방장은 홍호자 관기에게 앉으라 하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홍호자 관기는 맥이 빠져 있었다. 틀림없이 화예부인에게 정식을 홀리게 된 이후 소림사의 세 장로가 신통력을 펼쳐서 정신을 차리도록 해 주었지만 원기를 크게 손상당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사실 이와 같은 상태는 격전을 치루면서 온 기운을 다 쏟은 것보다도 심 한 피로감을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홍호자 관기는 이제 완전히 제정신과 슬기로움을 되찾은 듯 예의를 차려 서 방장대사에게 인사를 한 이후 입을 열었다. "불초는 사람들에게 이용을 당해서 귀사로 달려와 소란을 피웠는데도 귀 사의 장로께서 구원을 해주시는 등 덕으로 원한을 갚으니 명문대파는 역시 너그러운 풍도를 지니고 있는 점 여느 문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겠 군요." 홍경방장은 겸손의 말을 했다. "관보주는 너무나 과찬이시오. 폐사의 아래위 모든 사람들은 그 저 속세 에서 벗어나 조융히 도를 닦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 다른 생각을 하지도 않 소이다. 그런데 관보주께서 폐사에 왕림하게 된 것은 또 다른 원인이 있는 지 모르겠구려?" 홍호자 관기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불초는 그저 귀사의 곡소형에게 제 딸년의 행방을 알고 있는지 없는지 한 번 물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 딸년은 한 달 전에 갑자기 실종되어 행방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불초는 그 애가 옛날에 곡소형과 함께 액난을 피해서 도망 다니느라고 서로 알게 된 인연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를 찾 아올지도 모르고 또는 그에게 소식을 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 것이지 요." 홍경방장은 이 중간에 남녀의 사사로운 정이 얽혔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터라 약간 난처한 감을 느꼈다. "그건 반드시 사람을 보내서 폐사제에게 한 마디 물어봐야겠구려." 그는 정혜화상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혜화상은 신속하게 달려나갔다. 홍경방장은 이어 다시 입을 열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노냥으로서는 당돌하나마 한 가지 묻지 않을 수가 없구려. 영애가 실종된 데 대해서 혹시 어떤 원인이라도 있지 않소이 까?" 홍호자 관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불초의 슬하에는 다만 그 애밖에 없기 때문에 평소에 너무나 총애를 한 점이 있지요. 그 애가 실종되기 전날밤 우리 부녀는 의견 차이로 불초에게 꾸지람을 당했습니다. 그 딸애는 정말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 터운지를 모른 철부지라 그만 홧김에 집을 나가게 된 점도 없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가 설사 홧김에 집을 나갔다 하더라도 불초의 강호 인사들과의 교 분 관계를 감안하고 볼 때에 결코 철저하게 한 달 남짓 알아보았는데 소식 을 얻어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불초는 한편으로 초조하고 근심이 되었으며 정녕 이해할 수 없는 의혹을 느끼고 있 던 참이었습니다." 옆 방에 말없이 도사리고 있는 곡창해는 눈짓으로 사부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는 본래 과거의 관아앵이 관기의 딸인지 아닌지 단정할 수가 없었던 것 인데 이제서야 확실히 알게 된 것이었다. 응진은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성지법을 써서 그에게 말했다. "이번에 네가 산을 내려가게 되었을 적에 이 책임은 중차대하니 역시 쓸 데없는 시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다. 역시 저 사람과 만나지 않 는 것이 좋겠구나." 곡창해는 평소 부모님이나 사부님을 똑같이 존경하고 있는 터라 응진의 말에 순순히 따르기로 작정을 했으며 그 자리에 앉아서 꼼짝을 하지 않았 다. 응진은 다른 문으로 걸어나가서는 마침 정혜화상에게 뭐라고 몇마디를 했 다. 정혜화상은 그 즉시 정실로 되돌아가 방장대사에게 품했다. "곡사숙께서는 이미 명을 받들고 산을 내려가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떠났 다고 하는군요. 응장로께서는 밤낮으로 곡사숙과 있었기 때문에 곡사숙이 관소저를 만나보지도 못했고 또한 어떠한 소식도 얻어들은 바가 없다는 것 을 알고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홍호자 관기는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 채 더 말하지 않았다. 홍경방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관보주는 아마도 이미 이 제자의 말을 들었으리라고 믿소이다. 노납이 보주를 위해서 힘을 쓰고 도움을 줄 길이 없는 데 대해 용서를 해 주시구 려." 홍호자 관기는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만약에 방장대사께서 허락을 하신다면 불초는 즉시 돌아가보겠습니다. 불초가 딸애의 행방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즉시 관가보를 해체하고 손을 씻 고서 은퇴를 하겠습니다." 홍경방장은 그가 이미 조건을 제시했는데 또한 그 조건이 자기의 기대에 부합이 되는지라 자연 그가 떠나갈 것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전송까지 해 주었다. 모든 일이 끝나게되었을 때는 이미 새벽녘이었다. 곡창해는 충분한 노자돈을 지니고 옷가지를 챙겨 봇짐을 만들어 객사로 나가 진가와 손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이미 소림사의 홍경방장을 만났기 때문에 곡창해가 곧 산을 내려 가 있을 처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즉시 그와 함께 산을 내려가겠다 는 표시를 했다.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게 된 이후에 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 고 함께 소림사를 떠나 풍운이 감돌고 변화가 많으며 강계가 판을 치고 험 악하기만 한 강호로 들어서게 되었다. 곡창해는 사명을 받들어 이번 임무에 대해서 누설하면 안 된다는 당부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할 일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다물고 들먹이지 않았다. 손제화상과 진가 두 사람은 물론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는데 이것저것 물 어볼 수도 없었다. 세 사람은 동행이 되어 꼬박 하루를 걷게 되었고 이튿날 다시 아침나절을 걸어 개봉부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함께 한 반점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세 사람은 모두 다 채식에 습관이 되어 있었고 또한 손제라는 이 진짜 출 가인을 위해서 몇 가지의 소채로 만들어진 음식과 국수를 시켜서 배를 채웠 다. 그들은 어젯밤 이미 개봉부에서 헤어지기로 상의를 했던 만큼 이때가 되 자 모두 다 이별의 서운함을 느끼게 되었고 손제는 항상 웃을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웃음을 잃고 말았다. 이 한 끼의 밥은 그야말로 이별의 아쉬움 속에 모두 다 맥이 빠진 상태에 서 배를 채웠다. 곡창해는 식사가 끝나자 값을 치르고 그 반점에서 나와 서로 절을 하며 작별을 고했다. 손제화상은 이별에 아쉬운 표정을 하고는 말했다. "곡형, 이번에 산에서 내려와 처리하려는 일은 매우 중대하고 힘들기 때 문에 그토록 비밀을 지키는 것 같소. 아무쪼록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 대뜸 성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오." 진가 역시 정중히 당부를 했다. "곡형이 이번에 일을 처리하게 되었을 때에 만약에 사람의 수가 부족하다 고 느낄 적에는 언제라도 지체하지 말고 무당산으로 사람을 보내서 한 마디 알리시오. 그러면 이 형제가 틀림없이 될 수 있는 한 빨리 달려가겠소." 손제화상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소제는 단기간 진형과 함께 있게 될 것이외다. 곡형이 만약에 사람을 보 내 통지를 하게 된다면 나 역시 즉각 그와 함께 달려가겠소." 곡창해는 매우 고마워서 허리를 굽혀 사의를 표했다. 그런 후에 세 사람은 아쉬운 작별을 고하게 되었고 곡창해 혼자 성북 쪽 을 향해 걸어갔다. 관도에서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그 즉시 오른쪽으로 꺾어 숲속으 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후 그는 멀리 산비탈 아래에 우뚝 솟아 있는 백석으로 만들어진 고 루(高樓)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루의 사방에는 모두다 매화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어 그 광경이 매우 맑 고 아늑하면서도 우아하고 운치가 있어 보였다. 곡창해는 산 위로 향한 돌길로 꺾어서는 한동안 걸었다. 들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위로 구불구불하게 뻗어있어 천하에 명성을 드날리고 있는 냉향루(冷香縷)로 통하고 다른 한 길은 산골 짜기 안으로 뻗쳐서 매화 숲을 가로질러 곧장 그 천매곡(千梅谷) 안으로 통 하게 되어 있었다. 이곳은 이미 옛날 왔던 길을 다시 찾아온 셈이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천 매곡으로 통하는 길에는 일 년 열두 달 허령주를 짝사랑하는 무림의 호걸들 이 나무 뒤에 숨어서 그녀가 매일과 같이 나와 산책을 하게 되었을 적에 한 번씩 훔쳐본다는 사실을 아직도 기억할 수가 있었다. 이 길은 무수한 매화나무 길을 가는 동안 좌우에 늘어서 있는 정자나 누 각 같은 것은 모두 다 허령주를 짝사랑하는 무림의 호걸들이 친히 손을 써 서 세운 것들이라 할 수 있었다. 허령주는 무림 제일 미녀의 칭호를 받기에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녀의 절세적인 용모는 더욱더 풍운을 질타하는 무림의 영웅호걸들이나 인사들로 하여금 하나같이 열등감을 느끼게 했으며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그 녀에게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뜻을 표시하지 못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산책을 나오곤 하지만 그녀는 물 론이요, 그 많은 나무 뒤에 숨어서 몰래 그녀를 훔쳐보는 영웅호걸이라 일 컬어지는 인사들의 청춘 역시 기척도 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이미 이곳에서 십이 년을 보냈다. 십이 년이라는 세월은 그녀에게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며 많은 사람들의 용모가 초췌해지고 머리카락이 반백이 되고 만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세월은 물 흐르듯 한데 어찌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번뇌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때 곡창해는 갈림길에 도달해서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는 냉향루 쪽으로 달려갔다. 얼마 후 그는 냉향루 앞에 있는 잔디밭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의 하얀 돌을 깔아놓은 길은 꽃나무 사이를 뚫고 곧장 냉향루 앞까지 뻗쳐 있었다. 이 백석으로 만들어진 누각의 형식은 고아(古雅) 한데다가 지은 것 또한 무척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정녕 선산(仙山) 위에 세워진 누각과 누각 안에서 살고 있는 아름다우며 청춘이 영원히 가셔 지지 않는 선녀를 연상시켰다. 곡창해는 냉향루밖에 조용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계단 위로 올라갔다. 별안간 왼쪽에서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왔다.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이 오셨어요!" 그는 돌아볼 필요도 없이 시렁 위에 앵무새가 부르짖고 있다는 것을 알았 다. '저 새는 아직도 살아 있구나. 이로 볼 때 누각 안에 살고 있는 사람도 틀림없이 그대로 살아있겠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낭랑히 부르짖었다. "허소저는 계신지요?" 그 말이 막 떨어지게 되었을 때에 냉향루 문에 한 사람이모습을 드러내 었다. 쌍방의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게 되었을 때에 똑같이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원래 곡창해는 그녀가 바로 냉향루에 서 시중을 들던 한 명의 아리따운 시녀인 것을 기억할 수가 있었다. 그날 그녀는 몸에 노란 옷을 입고 밖에서 앵무새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기 때문에 곡창해는 그녀와 몇 마디의 말까지도 나눈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 고운 시녀 역시 이 와잠미에 단봉안을 지닌 소년을 알아보았다. 첫째로 호랑이의 얼굴 모습이나 풍채가 당당해서 쉽게 기억할 수가 있었 고, 둘째로는 그가 십 년 동안 유일하게 허령주로 하여금 웃음을 띄우고 환 담을 나누었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곡창해는 두 손을 맞잡아보였다. "아가씨는 아직도 이 곡창해를 기억하시겠소? 그런데 실례지만 아가씨의 방명(芳名)은 어떻게 되시오?" 그 아리따운 시녀는 매우 기뻐서 말했다. "소비는 정향이라고 해요. 물론 곡공자를 알고 말구요. 마침 잘 오셨어 요." 곡창해는 걸음을 옮겨 냉향루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허소저는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았소?" 정향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공자는 어떻게 그녀가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몸이 약간 불편해서 반 개월 동안 문밖 출입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곡창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나는 바로 그녀의 일 때문에 달려온 것이오. 아가씨는 그녀가 적신교의 사람들에게 사로잡혀가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알고 있소?" 그 아리따운 시녀 정향은 본래 곡창해의 말을 믿고도 곡창해의 말을 액면 그대로 즉각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곡창해는 단숨에 적신교 사람들의 소행이라는말을 듣고는 그제서 야 깊이 믿어 의심치 않고 이야기를 쭉 했다. "그날 밤 소비는 바깥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소저의 방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나중에 들어보니 그녀가 어떤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약간 마음을 놓았어요. 그런데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니 그 낯선 여자는 매우 간드러지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하는것이었어요. '누이의 자질과 아리따운 얼굴로 볼 때 장 래는 틀림없이 본교의 제일 고수가 될 거네. 적신교에 누이동생이 있어서 이끌어나간다면 틀림없이 천하무적이 될걸.' 그러자 저의 집 소저가 하시는 말씀이 들렸어요. '수고스럽지만 언니께서 위의 귀교주에게 말씀을 전해주 세요. 소매는 마음이 이미 타다남은 재와 같은 상태여서 이 세상의 일에 대 해서는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예요.' 그러자 그 낯선 여인은 냉소 를 하며 입을 열었지요. '흥, 갑시다. 이제는 모든 일에 대해서 누이동생 맘대로 되지는 않을걸세.' 소저는 다소곳이 말을 하더군요. '소매 역시 반 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언니께서는 나에게 시간을 주어 몇 마디의 말이라도 시녀들에게 하도록 허락해 주세요. 그래야만 이후 에 많은 추측에 의한 말들이 강호에서 퍼지는 것을 막을 수가 있을 거에 요.' 그런 후에 그녀는 바로 바깥방으로 나와서는 저에게 말씀을 하셨지요. '나는 잠시 떠나 있겠으나 너희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옛날이나 평소처럼 행동을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내가 몸이 거북해서 문밖으로 산책마저도 나 가기 싫어 꼼짝하지 않고 있다고 말해주어라.' 소비는 매우 놀라 충격을 받 고서는 물었지요. '소저, 틀림없이 돌아오시겠지요?' 그녀는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는데 그 표정은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지요……." 거기까지 이야기한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곡창해는 눈썹을 꿈틀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소저는 진정 우리 사부님의 홍안지기이오. 그러니까 그녀는 우리 사부 님이 그녀를 무사히 갇힌 곳에서 빼내올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외다." 정향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공자(公子)의 사존께서는 누구시오? 아, 소비는 공자에게 알려드릴 것을 깜박 잊었군요. 그것은 이 년전 공자께서 떠나가신 후에 소저께서는 장래에 공자가 다시 오게 되었을 때는 반드시 매우 공경해야 하며 공자라고 존칭을 하라고 하셨어요." 곡창해는 역시 허령주 소저는 자기를 알아주는구나 하는 느낌을 가질 수 가 있었다. '그날 나는 그저 남루하고 떠돌이 같은 어린애에 불구했는데도 그녀가 나 를 높이 사다니 정말 기우(奇遇)로구나.' From Sunburst #5161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6.1/2 군웅들을 굴복 08/09 17:02 430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6.1/2 군웅들을 굴복시키다 그는 재빨리 허령주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이 일에 대해서 생각을 집 중시키고 궁리를 해보았다. '소문에 들으니까 적신교의 소굴은 소북(蘇北)의 서주(徐州) 일대에 있 다고 들었다. 그녀가 만약 적신교의 소굴까지 끌려갔다면 이토록 빨리 되 돌려 보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허소저는 얼마 후에 곧 돌아오게 될 것이외다. 내가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려야겠는데 아가씨들에게 편리할 지 거북할지 잘 모르겠구려?" 정향은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우리 누각에는 방들이 적지 않게 있어요. 공자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것이 조금도 거북할 것은 없어요." 그 즉시 그녀는 다른 시녀들에게 통지를 했다. 곡창해는 정향에게 물어본 결과 이 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원래 정향은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이미 뭇시녀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옛날의 몇 명이나 되는 시녀들 등은 나이가 이미 차서 모두 다 집으로 돌려보내 출가를 하도록 조처했던 것이었다. 곡창해는 냉향루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튿날 그는 문밖 출입을 삼가했다. 그는 머리 속으로 재빨리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허령주를 보호할 수 있 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단지 그녀를 보호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자기가 이곳을 떠나서 자기 사부의 오래 된 누명을 씻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튿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그는 식사를 한 후 무공을 연마했다. 그리 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점을 떠올리게되어 좀처럼 눈 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할 요량으로 냉향루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맑고도 차가운 달빛 아래 이 주위는 마치 선경(仙境)처럼 지극히 평온 하고 아늑하면서도 조용했다. 이때 갑자기 그는 어떤 좋지 못한 느낌을 받고 재빨리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바로 이때 숲속 사면 팔방에서 세차고도 예리한 한풍이 일어서는 그에 게로 엄습해 왔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이삼십 종의 각기 다른 암기들이 일 제히 그에게로 날아드는 것이었다. 이 이삼십 종의 암기들이 일으키는 바람 소리는 모두 다 크게 달랐다. 곡창해는 소림사에서 암기에 대한 공부를 했다. 사실 소림사의 무학이라는 것이 박대정심(博大精深)했기 때문에 그가 아는 것도 무척 광범위한 편이었다. 이때 그는 스무 가지나 되는 암기들 가운데 어떤 것은 독침과 독사 등 지극히 무서운 암기들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것은 독문(獨門)의 패도(覇 道)적인 암기로서 만드는 법이 매우 기이하고 특별하다는 것을 분간할 수 있었다. 그는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삼십 종이나 되는 암기들을 완전히 피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즉시 공력을 돋구고 손을 휘둘러 장력을 내쏟아 날아드는 암기를 쳐내는 한편 천마심법(天魔心法)으로 몸을 보호하고 혈 도를 봉쇄했다. 그는 재빨리 궁리했다. '어째서 이토록 많은 명성을 떨친 인물들이 일제히 이곳에 모여서는 나 에게공격하는 것이며 반드시 나를 사지에 몰아넣지 않으면 손을 멈추지 않겠다는 기세를 보이는 것일까?' 삽시간에 이 암기들 가운데 반은 그의 몸 여러 부위에 적중되었고 반은 그의 몸에 적중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모두 다 그가 도망칠 길을 봉쇄한 것이니 만큼 자연 땅 위에 떨어졌다. 그 순간 곡창해는 '쿵' 하니 뒤로 벌렁 쓰러졌다. 왼쪽 뒤꼍에서 나직한 냉소 소리가 들렸다. "흐흐흐, 설사 나의 친애비라 하더라도 내가 손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 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여러분, 우리들은 이미 성공했소. 그 러나 반드시 시체를 망가뜨려 놓아야 하오. 더욱이 그 얼굴 모습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알아차릴 수 있게 해서는 아니되오. 그러니까 손을 쓰기 전에 반드시 그에게 한 벌의 옷을 갈아 입혀 털끝만치도 흔적을 남기지 않게 될 것이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 적중된 암기가 무척 많아 아무래도 함부로 손으로 만지거나 닿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니 반드시 필(畢)씨 집안의 형제들처럼 절예를 지닌 사람만이 손을 쓸 수 있을 것같소이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을 했다. "필씨 집안의 형제들은 이곳에 있소이다." 필씨 집안의 형제들은 본래 장의사 집안의 출신으로 시체를 염하는 일 에 정통했다. 그러니까 제아무리 썩거나 극독이 묻어 있는 시체라 하더라 도 그들은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고 수의를 시체에 입히는 것이었다. 그들 형제들은 그 이후에 무림의 명가(名家)가 되었으나 언제나 그와 같은 집안 출신을 치욕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종종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인사들이 원한으로 서로 죽고 죽이 는 격전을 벌인 이후에 시체가 잘려지게 되고 썩게 되었을 때에 죽은 사 람의 집안에서는 예를 갖추어 그들 형제를 초청해서는 잔체(殘體)를 수습 하도록 했는데 그들 형제들은 털끝만큼의 어김도 없이 모든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것이었다. 이들 형제들 똑같이 키가 크고 손이 길었으며 왼손에는 하나같이 한 자 루의 두 자 길이의 굵고 짧은 철봉(鐵棒)을 돌고 있었다. 이 철봉이 바로 특별히 만든 도구인데 평소에는 무기로 삼을 수가 있고 시체를 수렴하게 되었을 때는 철봉 안에서 필요에 따라 갈고리나 조그마 한 삼지창 등의 도구를 뽑아내서는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막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때에 곡창해는 갑자기 '휙' 하는 소 리와 함께 붕하니 일 장이나 솟아올랐다. 그 자신은 허공에서 손을 뻗쳐 옆으로 나 있는 나뭇가지를 움켜잡더니 다시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비스듬히 쏘아져나가게 되었고 눈 깜짝할 사 이에 그만 종족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곡창해는 몸에 십여 종의 암기를 맞고 땅바닥에 쓰러진 이후에도 무사 히 겹겹한 포위망에서 벗어나 도망을 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변고는 너무나 느닷없이 일어났으며 불가사의한 일인지라 사 방에 매복해서 그를 공격했던 사람들은 그만 모두 다 어리둥절해지고 말 았다. 그가 삽시간에 사라졌는지라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설사 아직 도 찾을 수 있는 그림자나 종족이 있다 하더라도 이 한 떼의 무림고수들 은 너무나 놀라고 의아한 나머지 즉각 뒤쫓아가지 못했다. 맑고도 싸늘한 달빛이 눈부시게 고운 빛을 뿌려주는 가운데 이 삼십 명 의 사람의 그림자가 드문드문 어지럽게 옆으로 드리워져 있는 매화 숲속 에 출현했으며 숲속 한복판에 있는 넓고 텅빈 잔디밭 위에 모여들었다. 그들의 주위 땅바닥에는 약간의 암기들이 되쏘아내는 빛을 볼 수가 있 었다. 이 한 떼의 사람들 가운데 태반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다 무림에서 퍽이나 신분이 높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허령주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려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십여 년 이래 기들은 줄곧 얼굴과 머리를 감추고 있었는데 그들 이 일단 모습을 드러내자 신속하게 자기네들이 내던진 암기를 집어서 갈 무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한 명의 허우대가 큰 복면의 대한이 한쪽 손을 쳐들었다. 대뜸 모든 사람들의 주의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형형한 눈길을 들어 사방을 훑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이번에 손을 씀에 있어서 비단 독을 묻힌 암기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열 가지 이상의 독문의 패도적인 암기가 들어 있었소. 그리고 그와 같은 독문의 암기들은 각종의 호신기공(護身氣功)을 격파하 는 데 특히 탁월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 설사 천하에서 제일가는 고수라 하더라도 이와 같은 포위 공격을 당하게 되었을 적에는 그만 그 액겁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오. 따라서 여러분들도 나의 이와 같은 말에 이의가 없으리라고 생각을 하오……." 이 사람의 음성은 매우 웅장하면서도 우렁찼고 손짓을 하거나 행동거지 면에 있어서 무척 굳건하고 힘차 보여 첫눈에 호령에 익숙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군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분석에 찬동을 표했다. 그 복면대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나이가 어리니 설사 하늘이 내린 걸출한 인재로 온 세상을 통털어 다시 찾아보기가 힘든 인물이라 하더라도 시일의 제한을 받아 무 공이 제아무리 높다해도 금강불괴(金剛不壞)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 을 것이오. 그런데도 그는 놀랍게도 갑자기 몸을 일으켜 도망을 쳤으며 전혀 상처입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소. 이곳에는 식견이 탁월한 인사가 적 지 않게 있으니 우리 오늘 마음을 터놓고 이와 같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 해서 토론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뭇사람들은 조용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게 되었을 때 키가 작고 비쩍 마른 복면인이 나직하고 도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암기는 정말 위력이 엄청난 것이었소. 그러니 무공 이 이미 금강불괴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가까스로 견디어 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조금 전의 그 녀석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결코 그와 같은 경 지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이외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 가지 이유 로써 설명할 수 있겠소이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뭇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읽어본 이후에 야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석의 몸에 선의(仙衣)나 보갑(寶甲)과 같은 종류의 보물이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액겁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 이외다." 뭇호걸들은 모두 다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의논들을 했다. 그들은 거의 복면을 하고 진짜 이름과 얼굴 모습을 감추었지만 시일이 오래 흐르게 되자 어찌됐든 간에 한두 사람과 교분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 었다. 그 복면의 대한이 입을열었다. "형씨의 탁견은 과연 독특하고 오묘하구려. 맞았소. 그 녀석에게 보물 이 있어 몸을 보호하지 않는 한 어찌 그와 같은 액겁에서 벗어날 수 있었 겠오?" 키가 작은 복면인은 의기 양양해서 말했다. "어느 분이든 만약에 두 번째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면 이 형제는 기꺼 이 졌음을 시인하겠소." 그가 잠시 말을 멈춘 후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으나 그 누구도 입을 여 는 사람이 없었다. 틀림없이 두 번째의 이유를 아무래도 찾아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복면 대한은 언제나 영도자격인 지위에 살아왔던 사람인 모양으로 지모 로써 상대방을 이겨내지 안고도 자연스럽게 뭇사람들의 의견을 끌어내어 서는 결론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이때 그는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이번에 협심 합력해서 그 녀석을 포위 공격한 것은 허소저가 며칠 동안 얼굴 한 번 내밀지 않기 때문에 모두들 마음속으로 의혹을 갖 게 되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랐기 때문이오. 그런데 어제 갑자기 그 냉향루에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즉시 그 누가 손을 합해 그 녀석을 공격해서 죽여 없애자는 제의를 했었소……." 그는 뭇사람들을 쭉 훑어보더니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자 다시 말을 이 었다. "우리 솔직히 지붕에 달려 있는 창문을 열어놓고 분명히 말을 합시다. 만약에 허령주 소저가 정식으로 무림의 어떤 명성을 떨친 인물에게 시집 을 갔다고 합시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누구도 할 말이 없을 것이외다. 거기다가 그 누구도 그녀가 청춘 시절을 헛되이 보내고 처녀로 한평생을 늙어 죽는 것을 두고보지 못하는 심정일 테니까 그때에는 모두들 기뻐했 지 원한 같은 것을 품지 않았을 것이외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병을 칭 하고 나서지 않는 반면 내력이 불분명한 젊은 녀석이 그녀와 함께 같은 집에서 거처하고 있으니 우리들 중에 그 누구도 참을 수 없는 일로 받아 들였을 것이외다……." 그는 더욱더 무거운 어조로 재차 입을 열었다. "이제 형세는 우리들에 대해서 크게 불리하게 되었소. 왜냐하면 그 녀 석에게 보물이 있어 몸을 보호하고 있고 무공이 고강하다면 우리들이 흩 어지지 않으면 괜찮으나 만약에 홀로 떨어지게 되어 그 녀석을 만나게 되 었을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이길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와 같 은 재간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한도가 있는 법이니 만약에 실 수해서 해를 입게 된다면 너무나 가치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구 려." 이와 같은 말에 모든 사람들은 그만 안색이 변해서는 서로의 얼굴을 쳐 다보았다. 그들은 곡창해가 갑자기 도망칠 때 펼쳤던 신법을 똑똑히 보지는 못했 지만 곡창해의 무공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고 또한 보물이 몸을 보호하 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러한 곡창해와 싸움을 한다는 것은 도 저히 승산 없는 싸움으로밖에 여길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이와 같은 상의를 하고 있을 적에 곡창해는 바로 옆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모조리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 가지 여러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조차하지 못했으리라고 보여지는 일은 곡창해가 놀랍게도 그들 가운데 칠팔 명의 복면을 한 사람 들을 알아본다는 사실이었다. 원래 그는 어릴 적부터 부모를 따라 무공을 익히지는않았지만 한가하 게 되었을 적에 종종 부친 가공량과 어머니 곡홍영으로부터 무림의 인물 에 대하여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고 무릇 진짜 재간을 지니고 있 는 명가 고수들에 관해서 모두 다 언급한 바가 있었다. 사실 곡창해는 사람이 매우 총명할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또한 훌륭해 서 모조리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마음에 새겨둘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때 그 복면인들이 몸에 지니고 있는 무기들을 보고 그들이 그 자신들의 독문암기를 찾아 집어들게 되었을 때 그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 한 결과 칠팔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반면에 십여 명 내지 이십 명쯤 되는 복면을 하지 않은 무림 인물에 대 해서 그는 대체로 알아보지를 못했으며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겨우 두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은 복면을 하고 신분을 감추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다 무림의 명가 라는 대열에 낄 수 없다는 데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귀를 기울이면서 마음속으로 신속하게 한 가지의 계획을 세우고 검토를 해보았다. 미처 전반적인 계획을 분명히 세우기 전에 그 복면을 한 키가 작은 사 람이 입을 열었다. "이 형제는 즉시 이곳을 멀리 떠나갈 생각이외다. 어찌됐든간에 이곳에 는 이제 미련을 둘 대상이 없어지고 말았소이다." 그리고 나더니 그는 하늘을 우러러 길게 장탄식을 불어내었다. 그야말 로 마음속의 비분함을 그대로 드러낸 행동이었다. 그와 같이 심지가 깊고 지혜가 많은 사람도 이와 같은 참된 감정을 지 니고 있는 것을 보면 허령주가 그의 마음속에 어떠한 무게를 지니고 있는 지 짐작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뭇호걸들은 하나 같이 모두 다 감응이 된 듯 탄식하는 소리가 이곳저곳 에서 새어나왔다. 복면의 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야할 뿐이외다. 어느 분이든 떠나기로 결 심을 했다면 아직도 날이 어두운 이때 함께 동반을 해서 멀리 떠나도록 하시오. 그래야만 길에서 그 녀석의 암산을 받게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외다." 그의 말이 떨어지게 되자 즉시 열서너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기꺼이 즉 시 떠나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이들은 모두 다 복면을하지 않은 사람들인데 그 키가 작은 복면인은 뜻밖에도 그들과 함께 간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다. 열두세 명이나 되는 호걸들은 즉시 한 무리를 이루어 숲속에서 떠나갔 다. 그리고 얼마 후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끝내 사라지고 들리 지 않았다. 복면 대한은 키가 작고 야윈 복면인에게 두 손을 맞잡아보였다. "형제는 어째서 무리들을 이끌고 떠나가지 않으시오? 혹시 또 다른 의 견이 있는 것이 아닌지요?" 키가 작고 야윈 복면인은 대답을 했다. "별다른 뜻은 없소이다. 다만 여러분들의 뒤를 따라 허소저를 한 번 찾 아뵙는 동시에 그 녀석의 내력을 알아보았으면 할 뿐이외다. 여러분들도 혹시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겠소?" 그는 입을 열자마자 뭇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던 바를 간파했다. 따라서 뭇호걸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을 뿐이었지만 이에 부인하지 않는 셈이 된 것이었다. 그러자 한 명의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약수(若水) 형의 독금전(督金錢)은 비단 옛날보다 더욱더 교묘해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지략 또한 옛날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구려." "맞았소. 이 형제는 바로 독금전 진약수(陳若水)이외다. 여러분들도 복 면한 검은 베를 끌어내리고 솔직한 심정으로 서로 대면을 하는 것이 어떻 겠소?" 뭇사람들이 뭐라고 표시하기 전에 갑자기 바람소리가 '휙' 하니 일더니 잔디밭 위에는 한 사람이 나타났다. 뭇호걸들은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상체에 하나의 내의만 걸 치고 있어서 강건하고 튼튼한 두 팔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얼굴 역시 한 조각의 푸른 베로 가리고 있었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잠깐! 불초는 여러분들의 내력을 한 번 알아맞추어볼 뜻이 있소이다." 그 소리는 걸죽하면서도 쉰 듯한 것이 뭇호걸들은 처음 듣는 음성이었 다. 뭇호걸들은 모두 다 이상하게 느꼈으나 그 누구도 입을 열고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곡창해였다. 그는 일부러 목쉰 소리를 내서 뭇호걸들이 그의 나이가 얼마 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 었다. 그는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본 이후 손을 들어서 그 복면 대한을 손가락 질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분은 저쪽으로 가 주시구려." 복면 대한은 걸음을 옮겨서 한켠으로 갔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두고보자는 심산이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서게 되자 곡창해는 즉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신창(神槍) 양녕(楊寧)이오." 복면대한은 손을 뻗쳐 얼굴에 가린 검은 베를 끌어내렸다. "맞았소. 바로 불초이오!" 뭇호걸들은 모두 다 놀라 그를 주시했다. 명성이 지극히 쟁쟁하며 한때는 전국의 남북 표행에서 첫 번째 자리에 앉았던 신창 양녕이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 에게 사람을 이끌어가는 기백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곡창해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독금전 진약수, 옥면판관(玉面判官) 여문속(呂文俗), 박산조 유걸은 아무쪼록 이쪽으로 와주시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네들 세 분을 알고 계시니 더 알아맞출 필요는 없을 것이외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 세 사람은 걸음을 옮겨 양녕과 함께 섰다. 그리고 는 모두다 얼굴에 가렸던 검은 베를 벗었다. 나중에 두 사람은 이 년 전 곡창해가 처음으로 이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그들 두 사람이 손을 써서 싸웠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들이 누구 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곡창해가 그들을 알아보는 것도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었다. 더군다나 박산조 유걸은 왼손 손목이 있는 곳으로부터 잘려져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알아보기가 무척 쉬웠다. 곡창해는 다시 한 명의 체구가 우람한 복면인을 손가락질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걸음을 옮겨 한켠으로 가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섰 다. 곡창해는 다시 입을 열고 말했다. "혹시 철여의(鐵如意) 왕계(王繼)가 아니시오?" 그 사람은 검은 베를 내렸다. "이 형제는 귀하가 정말 알아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소이다. 진정 탄복 했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조에는 약간의 의기 양양한 빛이 서려 있었다. 곡창해가 그 자신을 알아본 것은 결코 이름 없는 도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곡창해는 또다시 일부러 몇 명의 복면을 한 몇 사람을 잠시 동안 살펴 본 이후 입을 열었다. "불초로서는 정말 이곳에 모두 다 명가 고수분들이 계시리라고는 생각 지 못했구려. 두 분은 이쪽으로 옮기시지요." 그가 가리킨 두 사람은 차례로 걸어나왔다. 체구는 비슷했으며 모두 다 비스듬히 한 자루의 큰칼을 메고 있었다. 곡창해는 천천히 지적했다. "두 분은 바로 은도부의 여씨오웅 가운데 두 분이 아니시오. 그런데 몇 째와 몇 째인지는 잘 모르겠구려." 여씨 형제들은 얼굴에 가렸던 검은 베를 끌어내렸다. 그들의 얼굴 모습 은 무척이나 비슷했다. 왼켠에 선사람이 입을 열었다. "형제가 가장 위이고 이는 셋째 아우이오."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보니 여대랑(余大郞)과 삼랑(三郞) 두 분이었구려. 불초는 다만 이랑과 사랑 두 분을 만나 본 적이 있소이다. 그런데 그들의 근황이 어떤 지 모르겠구려?" 여대랑은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었다. "우리 형제들은 이미 수년 동안 상면을 하지 못했소이다. 정말 이런 말 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웃으시겠지만 정말이오." 신창 양녕은 입을 열었다. "대랑은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소. 이곳의 어느 분이든 다년간 홀로 이곳에서 세월을 보내다시피 하느라고 오랫동안 집안 가족이나 친구 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당신네들을 보고 웃을 수 있겠 소." 곡창해는 고개를 끄덕했다. "그 말씀은 정말 지당하군요. 이 분은……." 그는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그러자 한 사람이 걸음을 옮겨서 한켠으로 가서 섰다. 곡창해는 다시 이어서 말했다. "노형은 틀림없이 일대검가(一代劍家)인 절검(節儉) 장중생(張重生)이 겠구려." 그 사람은 얼굴에 가렸던 검은 베를 걷어내고 차가우면서도 준엄한 모 습을 드러내었다. 나이는 대략 사오십 정도인데 턱 아래는 세 가닥의 검은 수염이 있어서 무척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만둡시다. 그만둬요. 귀하의 안력이 그토록 고강해서 이 형제의 원 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한데 대해서 마음속으로 느끼는 바는 실로 형언하기가 어렵구려." 이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한결같 이 그와 같은 심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곡창해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의 명성에 한계가 있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곡창해가 알아본 이후에 못난 자기 모습을 여러 사람들 앞에 드러내게 된다는 점이 거북살스럽기만 했던 것이었다. 이때 곡창해는 다시 한 사람을 가리켰다. "당신은 오행권(五行券) 팽재흥(彭再興)이시구려." 뭇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 사람을 주시했다. 모두들 오행권이라는 일파의 장문인마저 이곳에 있다니 그야말로 희한 한 일이라고들 생각하는것이었다. 곧이어 다른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 쪽으로 가서 섰다. 곡창해는 말했다. "이분은 개비수(開碑手) 두균이시구려." 아니나 다를까 추측이 들어맞았다. 따라서 이때 뭇사람들은 모두 곡창해가 틀림없이 무림의 명가이며 나이 가 결코 적지 않으리라고들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곳의 대부분 사람들은 모두 다 십이 년 전에 이곳에 와 있 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는 것은 짧은 시일에 떨칠 수가 있었고 또한 명성이 떨어지려면 하룻밤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십이 년 동안 얼굴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도 없었기 때문 이었다. 이때는 이제 두 명의 복면인과 세 명의 본래 얼굴을 가리지 않온 사람 만이 남게 되었다. 그 세 명의 얼굴을 가리지 않은 사람은 무림에서 앞서 서술한 사람들과 비교를 한다면 한 수 뒤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 세 사람은 상의를 한 끝에 일제히 한 옆으로 물러났다. 곡창해는 다시 그들 가운데 한 명의 복면인을 손가락질했다. "당신은 흑삼방의 삼성 가운데 하나인 흉성(凶星) 이기(李祺)이구려. 그렇지 않소?" 그 사람은 검을 베를 걷어냈다. "정말 고명하신 분이라는 것을 충분히 엿볼 수가 있겠구려. 그런데 귀 하는 어떻게 이 형제를 알아보실 수 있었소?" 곡창해는 웃었다. "당신의 오망주(五芒珠)와 백호정(白虎釘)이 바로 표시이지요. 옛날 악 성 공금구 형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으로부터 그런 암기에 관한 말씀을 들었소이다." 그의 이 말은 정말이기도 하고 거짓말이기도 했다. 정말이라는 것은 그 가 공금구를 만났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사실이고 거짓말이라는 것은 바로 그가 그 이후 독문들인 승려들이 한 이야기를 듣고서야 가까스 로 흑삼 삼성의 내력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한편으로 부모님이나 사문의 웃어른들의 입으로 무림의 정사 쌍방의 많은 고수들 및 나머지 명가 고수들의 성과 내력을 알 수가 있었 다. 그리고 둘째로는 자신이 직접 겪은 바도 있지만 또한 재차 독문인 승려 들의 입으로 최근의 고수들에 대한 상세한 상황을 알아낼 수가 있었던 것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독 곡창해만은 이름을 숨기고 잠적한 지 오래된 명가 의 고수들을 알아볼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최근에서야 강호에서 일어난 고수로서 여씨오웅이나 흑삼 삼성 등의 사람들을 알 수 있게 된 것이었 다. 이제는 겨우 한 명의 복면인만 남게 되었는데 곡창해는 잠시 생각해 본 이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에 당신이 허소저의 의형제인 양진이라고 한다면 첫째가 몸매가 다르고 둘째로는 양진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다른 사람과 섞여 있을 이유 가 없소. 오직 그만이 직접적으로 허소저와 면담을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오. 그러고 볼 때 당신은 허일산의 독문암기인 오망주를 사용했으니 양진을 제외하고는 오직 허소저 본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암 기인 고로 불초로서는 무척 의문을 느끼며 이해를 못하겠구려." 그 말이 떨어지게 되자 뭇호걸들은 모두 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생긴 것이 매우 왜소했다. 그리고 두 눈은 전혀 빛이 없어 졸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곡창해는 그의 눈동자를 대하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속으로 흠칫하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알고보니 관가보의 고수인 야유신 예충이었구나. 그가 관가보에서 떠 나왔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 다른 한 가닥의 단서를 드러낸 것은 바로 오망주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틀림없이 양진과 지극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다. 어찌됐든 간에 이 사람은 틀림 없이 하나의 커다란 관건이 될 것이다. 우리 사부님이 옛날에 다른 사람 의 모함을 받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데에 어쩌면 이 사람도 관계가 있 을지 모르겠구나.' From Sunburst #5163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6.2/2 군웅들을 굴복 08/10 17:23 410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6.2/2 군웅들을 굴복시키다 그는 곧 만약 자기의 신분을 그에게 알리게 된다면 어찌됐든 간에 백해 무익한 일이니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서 야유신 예충을 이곳에서 떠나도록 해야만이 자기의 마음속으로 품고 있는 계획을 진행시킬 수 있겠다고 생 각을 했다. 그러나 그 복면인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그가 알아맞추기를 기다리 고 있었다. 곡창해는 낭랑한 어조로 말했다. "어찌됐든 간에 친구는 허소저 쪽의 사람과 크게 관계가 있으니 불초가 알아맞추든 알아맞추지 않든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소." 그 말이 떨어지자 그 복면인은 갑자기 숲속으로 몸을 날렸고 군호들 가 운데도 몇 사람이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원래 곡창해의 그와 같은 한 마디는 꿈속에 있던 사람들을 깜짝놀라 정 신을 차리게 한 셈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정히 허령주가 새로이 좋아하게 된 사람을 상대 하려 하고 있는데 그 복면인이 그녀와 관계가 있다면 어쩌면 바로 그녀가 보내와 동정을 엿보게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간에 그를 죽이거나 사로잡아야 소식이 누설되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세 명의 복면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유명한 고수들 과 한데 어울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그 자 리를 떠나갔다. 잠시 후에 그 야유신 예충을 뒤쫓아갔던 몇 사람들이 차례로 되돌아왔 으나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곡창해는 되려 무척 기뻐했다. 왜냐하면 그는 반드시 예충의 목숨을 부 지하도록 했다가 이후에 그에게서 내막을 캐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잔디밭 위에는 모두 열두 사람이 남아 있게 되었는데 물론 그 안 에는 곡창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한복판에 에워싸인 상태였다. 틀림없이 모든 사람들은 그가 누구 인지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사람의 수를 헤아려 보았는데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오행 권 팽재흥이었고 나이가 가장 젊은 사람은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여씨 형 제가 가장 젊은 편이었다. 곡창해는 이윽고 천천히 재차 입을 열었다. "불초는 얼굴에 가린 베 조각을 내리고 중대한 일로 여러분들과 상의를 해야겠소이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들은 반드시 먼저 이곳 이외의 사람 들에게 한마디의 말도 누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먼저 해주시고 팽노사와 양노사 그리고 장노사 세 분이 책임을 지고 손을 합해 맹세를 어긴 사람 을 죽여주겠다는 약속을 해주어야겠소이다." 뭇호걸들은 모두 다 즉시 응낙을 했다. 맹세가 끝나게 되자 곡창해는 한 손으로 얼굴에 드리웠던 푸른 베조각 을 뜯어내었다. 뭇사람들은 한참 동안 시끌벅적소란을 피었으나 그 장본인이 바로 그 들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인 것을 보자 그만 또 분노를 느낀 동시에 의아 한 얼굴을 했다. 분노는 분명히 그의 손바닥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었고 이상 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나이가 그토록 젊은데 어떻게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흉성 이기는 흉칙하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신가? 우리들은 꿔다놓은 보릿자루들이 아닐세. 자네가 다 시 우리 포위에서 도망친다면 내가 가장 먼저 당신에게 승복을 하겠소. 단 당신이 도망치지 못하게 된다면 목숨을 남겨야 할걸." 곡창해는 늠름히 말했다. "그 말이 무척 옳소이다. 불초가 만약 여러분들이 에워싼 이 진 속에서 달려나갈 힘이 없다면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소이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신속하게 겉옷을 벗어던지고 건장한 윗몸을 드러 내었다. 그는 정중히 설명하듯 말했다. "불초의 몸에는 결코 몸을 보호하는 보의가 없으며 순전히 진짜 무공을 사용하여 여러분들과 겨루어 보겠소이다." 그는 옷가지를 내던지고 성큼성큼 걸어 장중생 쪽으로 걸어갔다. 철검 장중생의 손에 들린 장검이 한가닥 광채를 허공에 그으며 곧장 그 의 가슴팍에 있는 대혈을 노리고 찔러들어왔다. 곡창해는 오른손을 검의 광채 속으로 디밀며 상대방의 검을 잡으려는 한편 입으로는 칭찬을 했다. "과연 대검객의 신분이군요. 공력이 초절하외다." 그와 함께 그는 다섯 손가락을 갑자기 잡으려다가 갑자기 그었는데 그 움직임이 기묘하기 이를 데 없었고 놀랍게도 상대방은 그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일검을 억지로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 왼쪽에서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여씨 형제들이 두 자루의 은색의 커다란 칼을 양쪽에서 휘두르며 쪼개왔다. 곡창해는 호통을 쳤다. "휼륭한 도법이군!" 그러면서 두 손을 일제히 뻗쳐내었다. 두 가닥의 태산을 밀어젖힐 것 같은 세찬 기운이 뻗쳐나 대뜸 여씨 형 제들를 동시에 연신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서도록 만들었다. 뭇호걸들은 이와 같은 광경을 보고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고, 개비수 두균과 오행권 팽재흥은 각기 권박과 장초를 펼쳐 벼락과 같이 달려나오 며 공격을 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다 당금 무림의 명가여서 등한히 여길 사람이 아니 었다. 개비수 두균의 일 장은 순전히 양강(陽剛)한 기운이 넘치는 듯 '우르 릉, 우르릉'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정말 그 위세가 놀라웠다. 오행권 팽재흥의 주먹은 그와 반대로 허허실실 종잡을 수가 없었고 변 화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만약 그들이 손을 합친 이 한 번의 공세를 받아낼 수 있다며 충분히 무림을 진동시킬 것 같았다. 곡창해는 왼손으로 소림의비예심법을 펼쳐 수풍조일(隨風照日)이라는 일 초를 휘둘렀는데 장세(掌勢) 역시 허허실실하게 오행권 팽재흥의 주먹 을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아무렇게나 일 장을 쪼개내 두균 의 장력을 맞받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균은 놀랍게도 그에 의해서 몇 걸음이나 뒤로 와락 밀려나게 되었고 곧이어 팽재흥의 권로(拳路)마저도 그의 왼손이 펼 쳐낸 기이한 초식에 의해 완전히 봉쇄되어 뚫고 들어올 틈을 찾지 못했 다. 독금전 진약수는 평소에 지모가 뛰어나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적이 정말 솜씨가 고강하고 공력이 심후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보고 머 리를 돌려 신속히 철여의 왕계와 신창 양녕 그리고 흉성 이기 등 세 사람 에게 몰래 눈짓을 했다. 왕계와 양녕 그리고 이기 세 사람은 하나같이 경험이 풍부한 인사들이 었다. 그들은 그 눈짓을 받게 되었을 때에 독금전 진약수가 암기로 상대방을 한 번 시험해보고자 제의하는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만약 상대방 쪽에서 진정으로 다른 물건을 이용해서 몸을 보호하지 않 고 갖가지 패도적인 암기를 맞바로 맞고도 견뎌낸다면 이번 싸움은 더 계 속해서 싸워나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즉시 동의를 했다. 왜냐하면 곡창해는 막 두 손을 일제히 뻗쳐내서는 나누어 오행권 팽재 흥과 개비수 두균 두 사람의 날카로운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더욱이 개비수 두균의 그와 같이 위맹한 장력 역시 상대방의 장력에 밀 려 와락 밀려나는 것은 실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일이었던 것이 었다. 만약 그가 갖가지의 암기를 맞고도 끄덕이 없다면 그야말로 이미 금강 불괴의경지에까지 몸을 단련한 것이 드러난 셈이니 이 싸움을 계속할 필 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가 먼저 공세를 취했다. 그는 손을 번쩍 쳐들면서 세 점의 하얀 광채가 품(品)자 형을 이루고 격사(激射)했다. 곧이어 몸을 날려 달려들면서 칼을 휘둘러 맹렬히 쪼개왔다. 철여의 왕계는 손에 들고 있던 기형(奇形) 무기인 철여의를 들어 거의 동시에 옆으로 곡창해의 허리깨를 노리고 쓰러치며 공격해 들어왔다. 바 람 소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차고도 날카로웠다. 그러나 곡창해는 천마신공을 연성해서 어떤 독랄하고도 흉맹한 권장초 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었다. 동시에 조금전에는 부득이한 상황하에서 많은 여러 가지의 암기를 얻어 맞고도 전혀 탈이 없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그냥 무단히 상대방이 공격을 해오는 대로 몸을 내 맡긴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기의 장도(長刀)는 무 척 예리한데가 내경(內勁)이 잔뜩 실려 있어서 그 한 칼질이 몸에 맞게 되었을 때에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수도 있었다. 바위마저도 쪼개고 말 것 같은 칼날질인데 어찌 몸뚱아리를 그가 내리치도록 내맡길 수가 있겠는가. 순간적오로 곡창해는 몸을 뒤로 눕혔다. 그 기세는 지극히 세차고도 맹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등이 땅과는 한자 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넘어지던 자세가 멈추어지 는 것이 마치 한 조각의 나무토막이 비스듬히 땅바닥에 꽂혀있으며 그 각 도가 무척 적어서 뒷부분이 거의 풀밭에 닿을 정도였다. 이 바람에 세 대의 백호정과 장도 그리고 철여의의 공세는 완전히 허공 을 가로지르게 되고 말았다. 신창 앙녕이 번쩍 몸을 날려 앞으로 나서면서 두 자루의 창을 펼쳐 낼 듯 말 듯 하면서 우렁찬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귀하는 몸을 일으킨 이후에 다시 싸워도 늦지 않소." 곡창해는 본래 땅에 몸을 붙이듯 하면서 뒤로 몸을 날리려고 하던 참이 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즉시 한 가닥의 진기를 단전에 끌어올리며 몸에다가 힘을 주었다. 그의 몸뚱이는 굳건하니 뻣뻣한 자세로 똑바로 세워지게 되었고 두 발 은 여전히 원위치에 그대로 발을 딛고 서게 되었다. 양녕은 손을 들어 다른 사람이 공격하는 것을 막고 입을 열었다. "귀하는 이 한 수의 정통 철판교(鐵板橋) 무공은 틀림없이 소림사에서 전해진 무공일 것이오. 불초에게는 오 초의 창법이 있는데 귀하에게 가르 침을 받고자 하오." 곡창해는 늠름히 말했다. "양노사께서는 손을 쓰십시오." 양녕의 이 한 쌍의 강철창은 바로 양씨 집안의 양가창(楊家槍)의 적전 심법(嫡傳心法)이었다. 수백 년 동안 모든 사람들은 양가창이 바로 한 자루의 커다란 창을 쓴 다고만 알고 있었지만 기실은 이와 같은 쌍창의 비법이 암암리에 전수되 고 있었으니 이 비법은 한 번도 다른 성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전수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가 표행에서 제일고수로 추대되는 영예를 안게 된 만큼 그 명성은 혁 혁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사실 무림에서는 양녕의 신창(神槍)이 바로 진재실학(眞才實學)이며 일 반 표사의 명성이 대부분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져서 이루어진 것과는 다르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때 그의 쌍창이 움직이는 곳에 왼쪽으로는 치는 듯한 수법을 썼으며 오른쪽으로는쓸 듯이 쩔러왔는데 은연중 바람과 우레 소리가 일었다. 그러나 곡창해는 구혼탈백이라는 일 초를 써서 손으로 치고 발을 차서 가볍게 상대방의 그와 같은 한 대의 맹렬한 공격을 깨뜨려 버렸다. 쌍창 양녕의 안색은 무겁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왼손의 강창을 질풍과 같이 내리지르면서 오른손의 강철창으로는 힘을 주어 퉁기면서 너댓 개의 창날 끝모양을 떨쳐내더니 곡창해의 가슴 과 배에 있는 요혈들을 뒤덮듯이 찔러들어왔다. 이 일 초에는 거친 가운데 자세함이 서려 있었고 굳건함 속에 부드러움 이 실려 있다 할 수 있었다. 곡창해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그의 왼손으로 펼치는 초식이 날카로운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오른손으로 펼쳐내는 창법이 그토록 미세하면서도 정묘한 것이 마치 재주 많은 아낙네가 바느질을 하는 것 같으니 실로 신이 깃든 일 초이구나.' 이와 같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게 되었을 때에 그의 손은 이미 상대방의 초식을 깨뜨리는 수법이 펼쳐졌다. 이 순간 그는 춘거추래(春去秋來)라는 일 초를 펼쳤다. 역시 두 손의 수법이 서로 달라 한쪽은 굳건하고 한쪽은 부드러웠다. 양녕은 상대방의 오른쪽 손이 곧장 자기의 왼쪽 창을 잡으려들고 왼쪽 손은 자기의 오른쪽 창날 끝이 뻗쳐나는 것을 봉쇄하려고 한다는 것을 느 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자기간 만약에 초식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하나는 적을 즉시 창날에 꿰는 것이었고 둘째는 쌍창이 모두 다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정말 꿈에도 상대방 쪽에서 이와 같은 무서운 자로 긋는 듯한 수 법을 써서 자기가 자랑하는 창법을 상대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정말 감히 한평생에 쌓은 영명(英名)을 걸고 모험 을 하고 싶지 않아 옆으로 몇 자 정도 몸을 날리면서 쌍창을 거둬들였다. 뭇호걸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그만 입이 딱 벌어지게 되었고 눈이 부릅뜨여지게 되었다. 정말 믿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사실 무릇 무림 고수들이 다른 사람이 격투를 벌이는 것을 볼 때 어찌 됐든 간에 마음속에 쌍방을 대신해서 상대방의 초식을 해소시키는 등의 대응책을 생각해 보기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쌍창 양녕이 조금전에 초식을 펼쳐내게 되었을 때에 뭇 호걸들은 하나같이 곡창해가 반드시 한편으로는 뒤로 물러서면서 한편으 로는 손을 뻗쳐내서 해소를 시키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그는 신형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양녕의 쌍창으로 펼치는 초 식을 해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훌쩍 몸을 날려 피하도 록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의 이와 같은 기묘한 해소 수법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터라 그만 모두 어리둥절해지고 만 것이었다. 양녕은 벼락같이 물러났으나 다시 달려들면서 쌍창으로 두 가닥의 번쩍 이는 광채를 쏘아내며 두드리고 쓸었으며 걸기도 하고 찌르기도 하는 등 일 초를 펼치는 사이에 대여섯 자루의 강철로 만들어진 창날이 늘어나게 만드는 등 이를 데 없는 환묘(幻妙)한 초식을 펼쳤다. 그의 창법은 갈수록 기이해졌으며 일 초 일 초가 자꾸만 매서워지고 있 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가는 결코 전혀 자신없이 오 초라고 정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세 번째로 펼치는 양녕의 초식을 곡창해는 주먹과 손을 함께 쓰기는 했 으나 역시 힘들이지 않고, 다시 지극히 신랄할 제사초를 맞아야 했다. 신창 양녕이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그러면서 왼쪽의 강철 창으로 '삭' 하는 소리가 나도록 둥글게 원을 그 리면서 오른쪽의 강철 창으로는 벼락같이 그 둥근 원의 한복판으로 찔러 냈는데 시각적으로 아주 적절해서 바로 상대방의 눈초리가 순간적으로 깜 박할 때에 손을 뻗쳐낸 격이 되었다. 이 최후의 이 초는 바로 양가창의 비전쌍창법(秘傳雙槍法)의 정화(精華 (였으며 역시 신창 양녕의 한평생 공력의 집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 일 초를 겨우 예닐곱 번 펼쳤을 뿐인데 다만 한 번만이 상대방에 의해 해소되었을 뿐 그 나머지는 매번 펼쳐낼 때마다 언제나 적의 가슴팍을 찔러 즉시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었 다. 뭇호걸들은 예리하고도 날카로운 안력(眼力)에도 불구하고 겨우 싸늘한 광채가 번쩍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는데 창날의 끝은 이미 곡창해의 가 슴팍을 찌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수법과 속도는 그 누구도 피할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한다면 어떠한 고수라도 만약에 그가 전력으로 이 일 초를 펼치 게 용납했을 때에는 실로 대항할 방법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곡창해는 두 발을 움직이지 않고 위로 적의 창날이 찔러오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다. 뭇호걸들은 똑똑히 바라보게 되었을 때에 곡창해는 어느덧 강철창을 옆 구리에 끼고서 왼손을 뻗쳐내 일 장을 쪼개내고 있었다. 그는 소림사의 오대신공(五大神功) 가운데 하나인 무적금강력을 연습했 기 때문에 이 일 장의 위세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신창양녕은 형세를 감안해 볼 때 자기가 졌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 어 오른손에 들었던 창을 놓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만약 그렇지 않 을 때는 반드시 상대방의 일 장을 막아낼 자신이 있어야 했었다. 독금전 진약수는 줄곧 이와 같은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서야 가까스로 빈틈을 노리고 대뜸 손을 쳐들고서는 다섯 대의 싯누런 독금전 을 던졌다. 이때 곡창해는 한창 전력을 다해 양녕을 상대한 이후 장세를 막 쏟아냈 던 참이라 그 한 가닥의 기운을 뻗쳐내기만 했었지 거둬들이지 못했기 때 문에 정말 때늦지 않게 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삽시간에 다섯 대의 독금전은 모조리 그의 등뒤에 있는 각 요혈에 적중 이 되었다. 그 가운데 세 대는 바로 그의 벌거벗은 윗몸에 적중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 다섯 대의 독금전이 곡창해의 근육에 부딪치게 되자 다투어 땅 바닥에 떨어졌다. 군웅들은 분명히 장말 보물에 의지해서 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본 셈이 되었다. 이때 신창 양녕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들은 절대 손을 써서는 아니되오." 뭇호걸들은 그만 조용히 우뚝 버티고 서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신창 양녕이 호통을 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손을 쓸 생각을 한 사람이 없었다. 곡창해는 옆구리 아래의 강철 창을 신창 양녕에게 되돌려주고 여유있게 옷을 입었다. 얼마 후 그는 모든 옷차림을 똑바로 할 수가 있었다. 그의 나이는 매우 젊었지만 기질이 온건하고 위엄이 유난히 왕성한 것 을 엿볼 수가 있었다. 신창 양녕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다시 손을 쓸 필요가 없소이다. 왜냐하면 이 소협이야말로 소림사 응진장로의 제자인 것을 의심할 바가 없기 때문이외다." 뭇호걸들은 응진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자 모두 다 어리둥절해졌다. 사실 옛날 독각룡왕 응진은 천하를 종횡했었지만 적수를 만나지 못해 무림의 제일 고수로 칭해졌던 사람이었다. 그 이후 그가 소림사 윗대의 방장대사인 광덕장로의 사제로서 배분이 지극히 존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인데 지금 이 소년이 바로 응진의 문하제자라면 강호에서의 배분 또한 매우 높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 던 것이다. 거기다가 응진과 허령주의 관계는 남다른 데가 있기 때문에 응진의 문 하 제자라면 자연히 다른 사람들보다 그녀와 가깝다고 할 수가 있었다. 이 한 데의 무림 고수들은 모두 다 최근 무림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소 란이 일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사파의 고수들이 떼를 지어 소림사를 습격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간 사실에 관한 소문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곡창해의 이 름도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었다. 곡창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양노사의 안력은 정말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해마지 않으며 그토록 명 성을 누린 것도 알 만하군요." 신창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초는 옛날 영사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고, 그때는 강호에 나선 지 얼마되지 못해 기고 만장하여 천하의 인사들을 눈에 두지 않았소. 그 리고 급기야 영사를 만나게 되고 무공을 논한 나머지 다시 손을 써 인증 (引證)을 하게 되었소. 응진 장로의 무공은 정말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 는데 내가 가전의 창법을 모조리 펼치도록 유도해 놓고 신창무적이라는 일 초를 펼치게 되었을 때에야 나의 오른손 강철 창을 빼앗았었소. 그때 의 상황은 소협이 조금 전에 보여준 것과 똑같았소. 불초는 그후 크게 오 만 방자하던 태도를 버리고 조심을 기하기는 했으나 역시 적수를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소. 더구나 이 일 초 신창무적은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소협의 내력과 문파를 결코 잘못 짚을 리가 없는 것이외다." 곡창해는 자기의 이름을 알리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은 불초가 여러분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 전에 여러분들의 동의를 얻어 결코 오늘밤의 일을 이곳 이외의 사람들에 게 털끝만치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를 상의하게 된 것이외다." 독금전 진약수는 앞으로 나와 자기의 암기를 주어서 되찾아가며 입을 열었다. "곡형의 이미 금강불괴의 몸을 연성했으면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을 것 이고 감히 그 누구도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인데 어인 일로 우리들의 도움 을 바라는 것이오?" 이기는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소!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을 데리고 놀려는 것이 아니겠소? 형제는 그만 가봐야겠소." 곡창해는 두 눈썹을 곤두세웠다. 위풍이 늠름했으며 살기가 두눈에서 뻗쳐났다. 이기의 별호는 흉성(凶星)이지만 그의 위풍이 늠름한 표정과 태도에 그 만 주눅이 들어서는 감히 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철여의 왕계는 입을 열었다. "이형의 말씀에도 결코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곡형의 말을 분명히 한 이후에 다시 떠나도 늦지 않을 것이외다. 어찌됐든간에 우리들 은 이미 헛되이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으니 이 잠시 동안을 놓고 다툴 필 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신창 양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곡형께서 이야기를 해보시구려." 곡창해는 먼저 뭇사마들이 소림사에서 크게 소란을 일으켰던 일을 이야 기하고 마지막에 가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여러분들은 적신교의 화예부인이 어째서 감히 페사에 와서 사단을 일 으킬 수 있었는지 아시오? 원래 그녀는 이미 허소저를 인질로 사로잡아간 것이었소. 그러니까 그녀는 가사께서는 고인의 딸을 틀림없이 염려한 나 머지 감히 그녀를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고 내다보았던 것이지요." 뭇호걸들은 이때서야 허령주가 이미 실종되었다는 사실을알게 되었다. 그리고 모두들 며칠 동안 냉향루에서 걸어나와 산책을 하지 않은 것도 무 리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녀가 냉향루에 있지 않다면 곡창해가 냉향루에 거처한 다해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곡창해는 응진의 제자이니 설사 그녀가 여전히 냉향루에서 거 처하고 있다 하더라도 곡창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는 일이었 다. 모든 사람들은 얼굴에 근심의 빛을 드러내었다. 적신교는 일반의 적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적신교를 찾아가서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허령주가 그녀들의 수중에 들어간 이상 이번에 화예부인 이 패해서 수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홧김에 그녀를 죽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곡창해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아마도 틀림없이 허소저의 만전을 걱정하고 있겠지요. 불 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바는 어떻게 그녀가 무사히 적신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게 된 이후 어떤 장소로 옮 겨가 그녀가 은밀히 살 수 있되 다른 사파고수의 침범을 받지 않아도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외다." 뭇사람든은 다투어 자기의 의견들을 내놓았다. 최후에 신창 양녕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얻은 결론은 모두 네 곳이 매우 은밀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약수는 다른 계책을 제의했는데 더욱더 타당한 것 같았다. 그 것은 필씨 집안의 행제를 다시 불러온다는 것이었다. 앞서도 말한 바가 있지만 이 필씨 형제들은 장의사 집안의 출신이기 때 문에 전제나 남들을 위해서 시체를 거두거나 묻어 주곤 하는데는 출신입 화(出神入化)의 솜씨가 있어 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도 털끝하나 손상됨이 없이 처리를 하는가 하면 옷을 바꾸어 입혀주고 화장을 해주는 등의 일을 행함에 있어 그야말로 천하무쌍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들이 그 이후에 무림의 명가로 출세를 하게 된 것은 전혀 자기네들의 출신을 수치로 알지 않았고 또한 종종 무림의 인사들에게 두터운 사례를 받고 초빙을 받아가서는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진 시제를 염해주곤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진약수의 뜻은 그들 형제의 발자취가 천하에 안 가본곳이 없 을 정도이니 모름지기 가장 훌륭한 장소를 알아내어 허령주가 은거해서 화를 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뭇호걸들은 일제히 그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알고보니 박산조 유걸 이었다. 그는 낭랑히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 형제가 기꺼이 앞으로 달려가 필씨 집안의 형제들을 되불러오겠 소." 신창 양녕은 크게 기뻐했다. "유형이 출마한다면 필씨 집안의 곤중(昆仲)들을 쫓아가지 못할까 봐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겠소이다. 수고해 주시구려." 박산조 유걸은 즉시 경신법을 펼쳐서는 달려갔다. 그의 경신법은 평소에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던 터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 자진해서 그와 같은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곡창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소저의 안전 문제가 해결되기만 하면 불초는 마음놓고 대담하게 그 들 사교의 마두들과 싸울 수 있을 것이오. 이제 여러분들은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불초는 한 번 갔다 올 때가 있소이다." 그는 그 바람으로 신창 양녕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조금전 불초가 유일하게 알아보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지 불초가 이 부 근에서 한 번 알아봐야겠습니다." 말이 끝나자 그는 신속하게 숲속을 가로질렀다. 이때 달이 갑자기 뜬구름에 가려져서 사방이 대뜸 훨씬 어두워졌다. 그는 재빨리 매우 빠른 신법을 펼쳐 숲속을 돌아 달려갔다. 달려가는 동안 그는 귀와 눈을 아울러 사용해서 어떤 기척이 없는지 살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수마장을 달려가게 되었다. 갑자기 큰길 위 한 대의 화살이 날아갈 만한 저쪽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즉시 급히 뒤를 쫓아가게 되었는데 얼마 후에는 바로 그 사람의 그림자와 아주 가까운 곳까지 따라붙을 수가 있었다. 한 명의 키가 작고 비쩍 마른 사람의 그림자가 급하지도 않는 걸음걸이 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곡창해는 첫눈에 바로 그 사람이 그가 야유신 예충이 아닌가 하고 생각 했던 복면인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자는 조금 전 뭇호걸들에게 추적을 당한 바 있다. 그러니까 시간적 으로 계산을 해볼 때 아직 이곳에서 어물쩡거리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고 모름지기 칠팔 마장밖에 있어야 옳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일단 이와 같은 의심을 하게 되자 그는 잠시 얼굴을 내밀지 않기로 했다. 몰래 살펴본다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From Sunburst #5168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7.1/2 적신교에 잠입 08/11 09:15 423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7.1/2 적신교에 잠입하다 그 복면인은 수 장을 걸어나가는 동안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곡창해는 총명한 사람이라 대뜸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렇구나, 그가 겨우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는 누구를 기다리기 때문 이다. 이 점은 그가 뒤돌아보는 점만 보더라도 알 수가 있다. 그가 만약 에 다른 사람이 추격해오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얼마든지 황야를 가로지를 수가 있을 것이고 굳이 큰길을 이용하여 멀리서부터 다른 사람이 발견할 수 있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즉시 더욱더 성질을 누르고 그가 어떤 사람과 회합을 할 것인지 두고보자는 심산에서 성질을 꾹 참은 채 뒤를 따랐다. 암암리에 다시 십여 장을 달려가게 되었을 적에 갑자기 몇 번이나 올빼 미가 부르짖는 소리가 조용한 밤의 적막을 깨뜨려 놓았다. 복면인은 '휙' 하니 큰길에서 대뜸 몸을 날려 황야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한 으슥한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 러내어 그와 만나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심신을 가다듬고서는 삼 장 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었 다. 복면인은 그 사람 앞으로 다가가 나직이 물었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느냐?" 어둠에서 나타난 사람은 대답을 했다. "관기는 이미 관가보로 되돌아왔소. 소문에 들으니까 형님의 실종을 듣 고는 무척 중시하는 눈치였으며 그 말투 속에는 심지어 형님이 그의 딸애 가 실종된 것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빛을 슬쩍 비추기도 했 다오." 곡창해는 그 복면인의 말투 및 그와 같은 대화 속에서 이미 자기의 짐 작이 틀림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복면인은 바로 관가보에서 총관 노릇을 했으며 음모와 계책에 뛰어 난 사람인 한편 무공이 고강한 야유신 예충이었던 것이다. 그가 관아앵의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자 귀를 바짝 세우고 들어보았 다. 야유신 예충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관기는 다년간 나에게 무척 잘 대해주었네. 본래 나는 차마 그를 저버 릴 수가 없었지만 적신교와 흑수파의 뜻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부 득이 그를 희생시키고 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는 길을 택한 것일세."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동생이 된 내가 언감 생심 형님의 일얼 어찌 간섭하겠소만 아무래도 형님이 적신교의 요녀에게 넋을 잃고 여러 가지 남에게 말 할 수 없는 일 을 저지른다는 것은 잘못 되었다고 느껴지는구려." 야유신 예충은 노해서 벌컥 소리쳤다. "닥쳐라!" 그러자 상대방은 즉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야 야유신 예충은 음성을 낮추어 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령(阿齡)! 너는 내 친동생이니까 나는 너를 탓하지 않겠다. 만약 다 른 사람이 그와 같이 말을 했더라면 나는 조만간 그의 목숨을 빼앗고 말 것이다. 아! 그와 같은 일을 역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일단 여색에 빠지고 보면 좀처럼 그 스스로 헤어나기가 힘드 는 것이다. 아앵이 장래에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이 점에 대해서 나는 가장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 계집애가 언제나 귀여운 짓만 골라서 했 는데도 나는……." 근의 동생 예령(倪齡)이 입을 열었다. "그 애 역시 적신교의 여자들과 똑같이 변하지 않겠소. 그와 같이 예쁜 계집애가 그와 같은 결과를 맞다니 정말 애석하구려." 야유신 예충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지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관기가 관가보로 되돌아온 후에 무슨 이상한 거동은 보이지 않더냐?" 예령은 대답했다. "그는 일단 관가보로 돌아오자마자 모든 죄수들을 석방했소. 나는 그들 가운데 몇 명이 바로 그와 철천지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소. 그야말로 그와 같은 조치는 호랑이를 풀어 산으로 돌려보낸 것처럼 스스 로 번뇌를 불러들이는 일이 아니겠소?" 야유신 예충은 한참 동안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나는 알 수가 있다. 그의 그와 같은 조처는 그가 손을 씻고 은거할 뜻 이 있음을 비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강호에서 물러나게 되고 성명마저 감추고 은거를 한다면 그의 원수들도 그를 찾아내기가 무척 힘들 것이다. 물론 지금은 관가보가 존재하니 모든 원수들이 그 집으로 찾아갈 수가 있 겠지만 그가 은퇴하게 된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 무영도(無影刀) 곽군 역시 풀려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 겠구나?" 예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죽음의 뇌옥 속에 갇혀 있던 죄수였는데 자연히 석방이 되었 지요." 곡창해는 그와 같은 소식을 듣자 기뻐서 하마터면 눈물마저 흘릴 뻔했 다. 사실 그가 한사코 야유신 예충의 뒤를 따르게 된 것도 바로 무영도 곽군의 소식을 알아내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한 번 터지기 시작하자 관아앵이 실종된 까닭과 행방마 저도 파악하게 된 것이었다. 예령은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은 냉향루로 돌아가시겠소? 나는 정말 형님이 어째서 넋을 잃고 혼백이 빼앗긴 사람으로 과장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예충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너는 그 사람들이 넋을 잃고 실성하다시피 했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 가 이곳에 온 후에 그녀를 몇 번 보았지만 이미 그녀의 매력이 실로 놀라 울 정도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고 나마저도 참지 못하고 마음이 마구 뒤 흔들리고 뒤숭숭해지게 되었다. 양진과 같은 강호의 호걸이 그녀를 위해 서 죽음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는 등 갖가지 수단을 다 동원한 것도 무리 는 아니었다." 곡창해는 양진이라는 이름을 듣자 속으로 흠칫해서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관계는 밀접하구나. 아무래도 틀림없이 사부가 누명을 쓰게 된 일과 관계가 일을 것이다.' 그는 예령은 아마도 이미 그런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듯 화제를 돌 렸다. "그렇다면 나는 한 걸음 먼저 가겠소이다." 야유신 예충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좋다! 너는 우선 관가보로 돌아가 세밀히 갖가지의 소식을 알아보도록 해라. 장래에 너는 관가보에서 멀리 떠나올 기회를 포착하기가 매우 어려 울 것이지만 나는 또다시 네가 관가보에 남아서 나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 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네가 지금 관가보에 남아 있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포석이며 어쩌면 나의 생사에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 다." 예령은 다소곳이 말했다. "형님의 일이라면 내가 무슨 짓인들 다 하겠소. 하지만 그 일이 어째서 형님의 생사에 관계된다는 것이오?" 야유신 예충은 대답했다. "만약에 관기가 아앵이 나에 의해 집을 떠나오게 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모든 수단을 다 써서 나를 상대하려 할 것이다. 이 와 같은 원수는 엄청난 존재가 될 것인즉 만약에 진작 그의 동태를 알게 된다면 그만큼 승리를 얻을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너는 알겠 느냐?" 그의 동생인 예령은 느릿하게 말했다. "알겠소. 하지만 형님은 악독하고 매서운 수단으로 관기를 상대할 것이 오?" 예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만약 한사코 나에게 보복을 하려고 한다면 나로서도 한 걸음 먼 저 그를 죽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나는 좀처럼 목숨을 건질 수가 없다. 이것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예령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관기는 집에서 두문 불출하여 이 오랜 세월에 걸쳐 무공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그 깊이와 얕음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형님이 무슨 방법으로 그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이오?" 야유신 예충은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물론 협조자를 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다가 계략을 써서 함정을 파놓게 될 것이니 그가 나의 손바닥에서 벗어나리라고는 걱정하지 않는다. 흐흐흐! 그 소림의 응진 장로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이냐? 그의 무공으로 말하면 관기보다도 열 배 이상으로 고강하다. 그러나 가는 십 년 동안 그야말로 온갖 고통을 당하면서도 꼼짝 못하지 않느냐? 이로 미 루어볼 때 무공이 고강하다고해서 지략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다." 예령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소림의 응진장로는 바로 형님이 계책을 써서 그와 같은 고통과 모욕을 당하게 한 것이오?" 예충은 생각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약간 관계가 있을 뿐이다. 너는 그 일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아라. 네가 관가보로 돌아가게 된 이후 조그만 일이라면 나와 연락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약에 나의 생사와 관계되는 일이라면 양진(楊晉) 표국의 분점으로 가서 양진에게 통지를 하여라. 양진의 총표국은 금릉(金陵)에 설치되어 있지만 그 본인은 종종 개봉의 분점에 와 있다. 하지만 그의 행 적 또한 매우 은밀하기 때문에 너는 반드시 분점의 회계 장방인 왕(王)선 생을 찾아 그에게 금릉에서 온 손님으로서 양진을 뵙고자 한다고 말하도 록 해라. 이것이 우리들의 암호이니 왕선생은 즉시 너에게 어디로 가게 된다면 양진을 만날 수 있을런지를 이야기해 줄 것이다." 예령은 물었다. "만약 시간이 촉박하게 된다면 그에게 부탁해서 소식을 형님에게 전해 달라고 하면 아니 되겠소?" 예충은 그 잠에 취한 듯한 눈을 번쩍 뜨더니 입을 열었다. "절대 그래서는 아니 된다. 나는 그와 마음을 터놓고 사귀는 친구이지 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헤아리기가 어려우며 정세의 변화에따라 그 가 나를 죽여 입을 봉하겠다는 마음이 우러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너의 소식이 어쩌면 그에게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예령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형님, 도대체 형님에게 진심으로 믿을 친구가 없다는 것이오?" 예충은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사귀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같이 이기심이 강한 성격의 사람이 아 닌 자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화복(禍福)과 안위(安危)를 위해서는 종종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후 네가 친구를 하도 록 하고 차라리 내가 사람을 저버리면 저버렸지 다른 사람이 나를 저버리 게 하지 않겠다는 속담을 명심하도록 해라. 무릇 중대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너는 반드시 감정을 젖혀두고 냉정하게 그 가운데의 이해 관계를 고려하도록 해야 한다. 어찌됐든 간에 많은 일에 있어서 하나같이 희생은 따르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고비길에서는 네 자신이 즉시 결단을 내리고 먼저 선수를 써서 상대방을 제압하도록 해야 한다." 예령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소." 예충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냉향루로 돌아가지 않겠다. 나는 반드시 흑수파의 몇 사람과 회 합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그들이 나에게 어떤 사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될 것이고 즉시 달려와 그 젊은 고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려고 할 것이다." 예령은 물었다. "내가 형님의 도움이 될 수 있겠소?" 예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욕됨을 참고 묵묵히 오랜 세월을 기다렸으니 이제는 그가 반격할 시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너는 결코 이 일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장래에 그 원수가 보복을 하려고 했을 적에 너에게 누가 미치지 않도록 하겠다." 예령은 물었다. "그 원수가 누구지요?" 예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더 묻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다. 헤어지자." 곡창해는 예충이 꺼리고 경계하는 원수가 바로 그의 은사인 응진 장로 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훔쳐 들은 대화 가운데 그는 이미 적지 않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홀로 어둠 속에 앉아서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이때 그는 결코 풀을 건드려 뱀을 잡는 식으로 예충을 잡을 생각은 전 혀 없었다. 만약에 예충을 잡게 된다면 주범은 그 소식을 듣고 몸을 숨기 게 될 것인데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예충은 궁극적으로 은사를 해친 사람인지 아직까지는 감히 단 정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암암리에 다시 조사해서 어느 정도 확증을 잡아야 손을 쓸 수가 있는 일이었다. 어찌됐든 그를 찾거나 양진을 찾는 방법을 강구한다는 것은 급히 서두 를 필요가 없었다. 최후로 그는 자기가 첫 번째로 할 일은 서둘러 달려가 적신교의 소굴에 서 허령주와 아앵을 구해내는 것이라고 결심했다. 그리고 제이단계에 들어가서야 어떻게 은사가 옛날 간악한 사람으로부 터 함정에 빠지는 음모에 말려들게 되었는지를 철저하게 조사해봐야 한다 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숲 속의 빈터로 돌아갔다. 필씨 형제들도 이미 박산조 유걸에게 불려서 되돌아와 있었다. 필씨 형제 가운데 형은 이름이 외자로 명(明)이었고 동색은 백(白)이었 다. 두 사람 다 키가 크고 손이 길었으며 얼굴 모습도 무척 닮은 꼴이었 다. 곡창해는 그들과 만나서 인사를 나눈 후에 그들에게 사람을 숨길 수 있 는 비밀 장소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필명과 필백 두 사람은 길게 한동안 상의를 했다. 필명이 그에게 말했다. "기남(冀南)의 거록(鉅鹿) 지방 어느 한 곳이 매우 은밀하기 이를 데 없어서 허소저가 몸을 숨기는 데 사용하기에 적합합니다. 이곳에 계신 분 들은 모두 다 매우 명망 있는 명가 고수들이지만 역시 사람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미리 그곳이 어떠한 장소라는 것을 말하기가 거북하구려." 뭇호걸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조처가 매우 옳다고 여겼고 확실한 장소를 미리 말할 필요가 없다고들 했다. 지모에 뛰어난 독금전 진약수는 새로운 꾀를 내놓았다. "지금 우리편 사람들은 곡형 이외에 모두 열세 사람이니 차라리 이 사 람들을 두 패로 나누는 것이 좋겠소이다. 한 패는 전문적으로 허소저를 어떻게 신속하고도 은밀하게 거록으로 호송할 것인지를 계획하고 안배할 책임을 지는 것이외다. 그리고 다는 한 패거리는 적절하게 그녀의 거처 및 생활에 있어서 여러 가지 반드시 사용해야 할 물건들을 안배할 책임을 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는 것은 허소저가 한동안의 시일 안으로는 어떠 한 물건도 구입하도록 해서는 안 되고 또한 외부의 사람과 접촉을 할 필 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 두 패의 사람들을 나누게 된 후에 장래 첫째 패거리에 속하는 사람들은 허소저를 거록으로 보낸 후 허소저를 두 번째 패거리의 사람에게로 넘겨준 후 그곳에서 흩어져서는 은거하며 어떤 수상 한 흔적이나 현상이 없는지 살펴보고 어떤 조짐이 보이게 되면 알려줄 방 법을 규정해서는 통보하도록 하는 거지요. 그러나 첫 번째 패거리의사람 들은 허소저의 거처는 몰라야 하지요." 이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같이 안배를 한다면 은밀하기 이를 데 없을 것 같소만 기실 그토 록 긴장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독금전 진약수는 천천히 설명하듯 말했다. "이형은 내가 너무 조심한다고 못마땅한 모양이지만 상대방이 바로 대 명이 쟁쟁한 적신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오. 적신교에서 아무래도 한 사람 나타나게 된다면 우리들은 좀처럼 상대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이외 다. 이 형제의 추측에 의하면 곡형이 만약에 급히 허소저를 구출한 후에 다른 볼 일이 없다면 어찌 굳이 우리들에게 허소저를 보호하는 데 있어서 협조를 요구하겠소? 따라서 곡형이 있지 않는 곳에서는 안전문제를 특별 히 조심하고 고려해야 할 것이외다." 이와 같은 말은 사실이었다. 적신교의 무서움은 일단 강호의 인물들이 대부분 다 잘 알고 있지 않지만 이들 무림의 명가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 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지금 적신교와 맞서기 때문에 특별히 조심을 기하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독금전 진약수는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적신교의 무서움은 결코 무공에 있어서 우리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그녀들의 미혼공(迷魂功)이 지극히 무섭다는 것이오. 다른 사람들 은 내가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이 형제 자신만을 두고 말할 때 만약 그녀 들의 미혼함정에 빠지게 되었을 적에는 도저히 이 형제가 알고 있는 바를 털어놓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보는 것이오……." 그는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다시 재차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형제는 사람들을 두 패로 나눌 것을 건의하는 것이 오.그리하여 이 두 패의 사람들은 다만 사람을 넘겨주고 넘겨받게 되었 을 때에 한 번 접촉을 하고는 전혀 서로 왕래를 하지 않는 것이오. 그러 다가 곡형이 우리들에게 떠맡긴 임무를 완성하게 된 이후에 모두들 함께 거록을 떠나는 것이오." 흉성 이기는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소. 그럼 사람들을 어떻게 나눌 것이오?" 신창 양녕은 입을 열었다. "필씨 형제 이외에 나머지 열한 사람 가운데 세 사람을 뽑아 두 번째 패거리의 사람들로 삼고 나머지의 여덟 명은 모두 다 첫 번째 패거리에 속하도록 하는 것이오." 뭇사람들은 모두 다 동의를 표시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자기가 두 번째 패거리의 세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를 바랬다. 그렇게 되면 조석으로 허령주의 절세적인 용모와 자태를 볼 수 있으리 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사실 그와 같은 염복을 그 누가 갈구하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기꺼이 첫 번째 패거리의 사람이 되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 필명과 필백 두 사람 역시 허령주의 절세적인 자색에 넋이 빠진 사람들 이니 자연뭇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필명이 먼지 입을 열었다. "이 형제가 애시당초 은밀한 장소를 고려하게 되었을 때에 역시 이토록 많은 사람이 허소저와 함께 거주하면 틀림없이 거북하리라는 점을 고려해 보았소이다. 따라서 최후로 거록의 그 장소를 선택한 것은 허소저가 여러 사람들과는 따로 떨어져 만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외다. 사실 일을 이렇게 처리하게 된다면 모든 일에 있어서 훨씬 수월해질 것이 틀림이 없겠소이 다." 뭇호걸들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원래 그랬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 고 또한 두 번째의 패거리의 사람으로 선택이 된다면 되려 첫 번째 패거 리의 사람들처럼 자유롭게 성 안에서 왔다갔다 활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 했다. 따라서 이때는 누구도 두 번째 패거리의 인선에 뽑히는 것을 원하 지 않게 되었다. 곡창해는 자기의 의견을 피력했다. "불초는 대담하게 양노사와 두 노사, 그리고 진노사 세 분이 두 번째 패거리에서 책임져야 할 임무를 맡아주실 것을 청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들의 뜻은 어떠한지요?" 그는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양녕과 두균 두 사람의 무공이 비단 고강할 뿐만 아니라 무척 옳바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었 다. 진약수로 말하면 지모가 출중했기 때문에 또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었다. 이와 같이 그들 세 사람에다가 필씨 집안의 형제들을 합치면 허령주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모두들 곡창해의 의견에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그 즉시 필명이 암암리에 그 지방으로 찾아가는 방법을 곡창해에게 알 려주고 곡창해가 허령주를 만나보고자 할 때 직접적으로 찾아갈 수 있도 록 조처를 했다. 다시 말한다면 허령주는 일단 계획에 따라 그 어느 일정한 장소에 이르 러 거주를 하게 되었을 때 이 세상에서는 오직 곡창해 한 사람만이 그녀 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필씨 형제를 제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덟 명의 호송을 책임진 첫 번째의 패거리의 사람들은 성안에 흩어져 거주하게 되나 여전히 확실한 지점을 모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적 이 설사 그들을 사로잡는다 하더라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거록성 안에서 고저 모든 동정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 되 만약에 수상스러운 상황을 발견하게 되었을 적에는 그저 어느 지정된 장소에 신호만 해놓으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의 패거리에 소속된 다섯 사람들은 영원히 공개적 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다가 곡창해가 허령주를 인계받아서 데리고 갈 때에야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의논을 적절히 끝낸 그들은 갖가지 세부 절차도 매우 명백해 지도록 설명을 한 후에 길을 나누어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떠났다. 세 패거리의 사람들로 나누어졌는데 첫 번째 패거리의 사람들은 필씨 집안의 형제 및 양녕과 진약수 그리고 두균 등 다섯 사람이었다. 그들은 냉향루의 두 하녀와 수시로 필요하게 되는 옷가지를 가지고 곧 장 거록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모든 음식물을 구입하여 장기간 외출을 하지 않아도 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진약수는 이미 거록현에 도달한 후에 그곳에서 방법을 강구해서 두 명 의 믿을 만한 남자 하인과 두 명의 시녀를 구해서 그들 다섯 사람의 시중 을 들도록 할 계획도 세워 놓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은 하인이 직접 거리로 나 가 사오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도 않게 되는 것이었다. 두 번째 패거리의 사람들은 오행권 팽재흥을 우두머리로 한 여덟 명이 었는데 그들은 이미 어떻게 서주에서 허령주를 거록까지 호송할 것인가 하는 방법에 대해 상의를 했고 이미 적당한 타결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다 지극히 노련한 강호인이라 행적을 감추는 재주에 정통 했는데 상의를 한 끝에 여덟 명이 네 개의 역참으로 나누어 차례로 책임 을 지고 역참에서 다음 호송하게 될 사람들을 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적이 추격해 온다 해도 역참에서 사람을 바꾸어 호송하기 때문에 원래 호송을 했던 사람들은 일부러 수단을 써서 추격해오는 사람 들로 하여금 의심을 갖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천하에서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거록까지 쫓아올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일이 끝난 후에 모두 거록에 모 여 성 안이나 혹은 성 밖의 동서남북에서 거처하기로 했다. 세 번째 패거리의 사람은 곡창해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혼자 곧장 서주로 달려가게 될 것이고 서주에서 적신교의 소굴을 알아낸 후에는 혼자서 그들을 구할 작정이었다. 사람을 구하기만 하면 서주성 북문에 주야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 때 문에 즉시 구한 사람을 호송해 보낼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날이 밝을 무렵이 되었을 때 나누어 출발했다. 곡창해는 단장필마로 동쪽을 향해 나갔다. 길을 오는 동안 별다른 일이 없어서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에 서주 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적신교의 소굴에 관해서 강호에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 때 문에 적신교의 소굴을 찾아내는 것이 커다란 문제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곡창해는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었다. 그는 성 안으로 들어간 후에 객점에 투숙했다. 그런 후에 점소이를 시켜 한 통의 준비해온 편지를 이 고장에서 가장 크게 활약하고 있는 사해표국에 갖다주도록 했다. 얼마 후 점소이는 돌아오게 되었는데 사환은 편지를 전했을 뿐이라고 말했으며 저쪽에서 보내온 전갈은 없다고 했다. 곡창해는 한동안 휴식을 취한 후 옷을 바꿔 입고 밖으로 나섰다. 그가 막 시끌벅적한 거리에 이르게 되었을 적에 다부진 사내가 알게 모 르게 그를 슬쩍 건드렸다. 곡창해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겨놓았다. 얼마 후 그들은 한 조용한 골목길을 걸어가게 되었고 어느 집의 뒷문으 로 들어서게 되었다. 나이 약 오십 정도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곡창해를 상방(上房)으로 모셨다. 자리를 잡자 서로 수인사가 오고갔다. 그 오십쯤 된 사람은 바로 사해표국의 국주(局主)인 소량(蕭良)이었다. 위인됨이 똑똑하고 부지런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무공 또한 진전(眞傳)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명성이 무척 쟁쟁했다. 소량은 이미 소림사의 곡창해의 대명을 들은 바가 있는데 이때 갑자기 곡창해와 사귀게 될 기회를 갖게 되고 또한 표행에서 제일 고수로 추대받 고 있는 신창 양녕의 소개 편지를 갖고 왔기 때문에 그에게는 그야말로 매우 영광인 셈이었다. 소량과 양녕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십여 년간 소량은 양녕의 행방 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비단 신창 양녕의 친필로 된 서찰을 받아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림사의 곡창해와 사귀게 되어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수인사가 오고간 이후 곡창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양노사의 편지에 찾아뵈라는 방법이 쓰여져 있었지요. 실은 누를 끼치 게 될까봐 크게 걱정이 되어 부득이 신중히 처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이 다." 소량은 정중히 말했다. "그와 같은 안배를 한 데에는 틀림없이 깊은 뜻이 있을 것이외다. 소협 께서는 얼마든지 분부를 하시오. 이 형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결코 두 마디를 하지 않겠소이다." 그는 경력이 풍부한 사람이라 대뜸 이 가운데의 관계가 무척 크고 엄중 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곡창해가 이토록 조심을 하고 신중을 기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 일을 치루게 된 후에 그들의 교분은 더욱 깊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곡창해는 자기가 찾아오게 된 뜻을 간결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야기를 다듣고 난 소량은 자기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 "소협은 안심하시오. 이 형제가 책임을 지리다." 두 사람은 즉시 헤어졌다. 곡창해는 객점으로 돌아와 베게를 높이 베고 쉬었으며 온종일 외출을 하지 않았다. 밤이 이미 깊어지고 거리의 행인들이 드물게 되었을 때야 그는 혼자 거 리로 나가서 성 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했고 전체 성안을 한바퀴 돌다시피 하면서 방향과 길을 확인해 두었다. 이튿날 오후에 그가 객점의 방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막 투숙을 하게 된 손님이 뭐라고 문자까지 써가면서 투덜거리며 그의 방문앞을 지나가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곡창해는 그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곧장 객점 밖으로 나갔다. 큰거리로 나가게 되었을 때에 그는 그 다부지게 생긴 사내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전혀 아는 체하거나 인사를 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처리했다. 그 사내는 그를 데리고 지극히 번화한 거리로 가더니 어느 가게문 입구 에서 걸음을 한 번 멈추더니 몸을 돌려 거리를 가로질러 갔다. 곡창해는 걸음을 옮겨 그 가게의 문 입구에 이르러 가게 안을 들여다 보았다. 원래 한 칸의 전문적으로 연지나 화분, 그리고 여자들이 수예에 필요한 자료들을 구입하는 가게였다. 이 가게에 몰려든 고객들은 적지 않았지만 모두 아낙네들이었다. 그는 그 물건을 사는 아낙네들을 보지 않고 가게 안의 너뎃 명이나 되 는 사환들을 바라보았다. 대뜸 그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의 표정이 여느 사환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또 다른 사환들 역시 때때로 그 사환을 힐끔거리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From Sunburst #5169 홍춘식 (Sunburst) [사마령] 분향논검 2.17.2/2 적신교에 잠입 08/11 13:53 379 line 제 목: 분향논검편(焚香論劍篇) 지은이: 사마령(司馬翎) 옮긴이: 박영창(朴永昌) 차 례: 제 2권 17.2/2 적신교에 잠입하다 이때서야 곡창해는 그 물건을 사러 온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옷차림은 상당히 차려 입은 옷차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는 데 키가 크고 몸매는 날씬했다. 정말 훤칠한 모습은 다른 부녀들과 비교해 볼 때에 그야말로 닭때들 가 운데 두루미가 우뚝 버티고 서 있는 듯, 자태가 유난히 뛰어난 편이었다. 다시 그녀를 살피니 그녀가 무척 아름답게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지금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으나 여전히 일종의 미태(美態)와 탕의(蕩意)가 넘쳐나고 있었다. 따라서 객점 안에 물건을 사러온 모든 아낙네들도 죽어라 하고 그녀쪽 을 힐끔거리고 있었으니 남자들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곡창해는 첫눈에 그녀가 틀림없이 적신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무척 기뻐서 즉시 거리를 가로질러 맞은편 처마 아래 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감시를 했다. 원래 그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적신교가 모두 다 여자이므로 틀림없이 그와 같이 수예를 놓는 데 쓰는 바늘과 실은 물론이고 연지와 분을 파는 점포와 종종 거래를 하 게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일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 끝에 신창에게 그곳에서 매우 수완이 좋은 친구를 한 번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가 소량과 상면을 하게 된 후 소량에게 믿을 만하고 똑똑한 여인을 내보내 성 안의 모든 가게를 알아보도록 했다. 소량은 물론 신통력이 있었다. 그날로 그는 어느 점포에 그와 같은 단골이 있다는 것과 종종 물건을 사러온 여인네가 지극히 요염하고 화사하며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들 사이의 연락이 전혀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 까닭은 적신교가 여느 강호의 방파들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일단 어떤 사고가 생기게 되었을 때에 적신교에서 분을 풀기 어 렵게 되었을 때 틀림없이 사람을 보내서 곡창해를 도와준 사람을 조사해 내어 보복을 할 우려를 미연에 방지해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곡창해는 매우 참을성 있게 맞은편의 처마 아래에서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그 훤칠한 여자가 가게에서 나섰다. 그러자 한 대의 화려한 마차가 달려오게 되고 사환이 많은 물건을 마차 의 짐칸에 옮겼다. 그녀가 마차에 오르더니 동문으로 해서 성을 나서는 것이었다. 마차는 수마장을 가더니 다른 샛길로 접어들게 되고 얼마 후 강가에서 멈추었다. 이때는 수레를 버리고 배를 탔는데 이렇게 되자 뒤를 따르던 곡창해가 그만 난처해지고 말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 강물이 무척 구불구불했고 양쪽 언덕에도 갈대가 자 라고 있었고 나무들도 서 있어서 쉽게 종족을 감출 수가 있었다. 끝내 그 여자는 한 채의 장원 앞에 도달했는데 그 장원은 사면의 폭이 사오 장 정도 되는 냇물로 격리되어 있었고 육로로는 출입 할 수 없게 되 어 있었다. 장원 안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든지 헤엄을 쳐서 건너야 했다. 곡창해는 그 장원을 발견한 즉시 그곳을 떠나 성 안으로 돌아와 모든 준비를 했다. 밤에 그는 다시 장원 밖의 냇가에 이르렀다. 이경 무렵이 되었을 적에 그는 한 조각의 일 장 길이가 되고 한 자 폭이 되는 나무판대기를 물위에 놓고 내력을 잔뜩 돋구고 앞으로 휙 내밀었다. 나무판대기는 물위를 질풍 과 같이 미끄러지듯이 나아갔다. 그는 훌쩍 몸을 날려 냇물의 중간쯤에서 내려섰는데 마침 미끄러지는 나무판대기 위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는 한 발로 나무판대기를 딛었다가 그 순간을 이용해서 힘을 빌어 몸 을 솟구쳤다. 그러나 가는 일부러 좀더 발에 힘을 가해 그 나무판대기를 앞으로 밀었다. 그 나무판대기는 부력(浮力)이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겨우 조금 물에 잠겼을 뿐 여전히 미끄러져 앞으로 나갔다. 곡창해는 이미 한 걸음 먼저 장원의 언덕가에 내려서서 기다리고 있다 가 나무판대기를 꺼내들고 풀더미 속에 숨기고는 그 장원쪽으로 걸어갔 다. 이 한 채의 장원 주위에는 높이 반 장 되는 담장을 쌓아올려서 시선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가까이 가게 되면 오히려 담장 안의 장원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곡창해는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는 뭇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고 달빛은 그렇게 밝지 못해 부 연 빛만 보여주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즉시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대충 가늠했다. 나중에 나오게 되었을 때에 방향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첨으로 이와 같이 밤중에 행동을 하는 셈 이라 마음속으로 매우 낯선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 느낌이 한편으 로는 무척 그를 흥분시키기도 했다. 사실 이 세상은 확실히 우리가 흔히 보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바가 있 었고 결코 범속한 사람들이 상상할 수가 없는 세상이기도 했다. 이 세상은 바로 강호의 인물들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강호인물들은 신비한 밤을 주된 활동의 시간으로 삼았다. 따라서 강 호인물들이 지나는 곳은 통도대읍(通道大邑) 혹은 황산야령(荒山野嶺)을 불문하고 똑같이 정적이 그윽한 곳이었다. 그 그윽함과 정적 가운데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의 마음을 서늘케 하고 혼백을 뒤흔들어놓는 일들이 숨겨져 있는 것이었다. 곡창해는 꼼꼼히 이와 같은 기이한 느낌을 음미해본 후에 심신을 가다 듬고서는 장원의 당장을 따라 움직였다. 그는 지극히 신속하고도 빠른 속도로 장원의 담장을 따라서 한바퀴 돌 았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난 이후에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한 바퀴 돌게 된 이후에 그는 많은 일들을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장원은 네모꼴을 이루고 있고 그가 서 있는 곳은 바로 서북의 모퉁이라는 것 등이었다. 이 장원의 면적이 넓고 그토록 넓은 한 채의 장원에는 오직 하나의 대 문밖에 없다는 것 등이었다. 그는 약간의 시간을 소모하면서까지 담장 안의 상황을 엿보니 이 담장 안은 비록 아무런 단절 없이 전체의 장원을 에워싸고 있지만 담장 안쪽의 어떤 곳은 좁고도 탁 트인 골목인가 하면 어떤 곳은 외딴 채의 마당이었 고 또 어떤 곳은 그야말로 집이 바짝 담장벽에 붙어져 지어졌다. 만약 장원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을 때에는 담장 밑을 따라 장원을 한 바퀴 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따로 떼어놓은 방법은 매우 고명하고 오묘했다. 왜냐하면 아 무리 무공이 고강한 사람이라도 담장이나 지붕을 투시할 수 없기 때문이 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불규칙한 건축은 크게 적의 침입이나 혹 은 도주의 속도를 지연시킬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장원의 형세를 대략 파악하게 된 후에 그는 서남쪽 모퉁이로 달려가 그곳에서 담장 위로 올라갔다. 담장 안쪽은 바로 네모난 외딴 채의 뜨락인데 서쪽 머리와 남쪽 머리에 각기 하나의 문이 있었지만 꼭 닫혀 있었다. 이제 그는 두 개의 커다란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첫째는 이 장원 안을 적신교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지키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곳으로 말하면 바로 적신교의 근본중지(根本重地)라고 할 수 있고 적 신교는 바로 천하의 이대 사파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만큼 고수들이 구 름떼처럼 많아서 적의 침입이나 소란을 피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지만 결코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아 외부의 사람이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의 문제는 바로 그가 장원으로 들어간 후 어떤 방법으로 허령주 와 아앵의 행방을 찾아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교롭게도 어떤 사람이 환담을 나누는 가운데 그와 같은 문제에 언급을 하게 되고 그가 몰래 엿듣게 된다면 일은 그야말로 손쉽게 풀려나 가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요행이 항상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한편으로 생각을 하며 한편으로는 날카롭게 그 네모난 뜨락을 살 폈다. 별안간 그는 서쪽 머리와 남쪽의 담장 모서리에 각기 하나의 두자 높이 에 한 자 폭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화초가 있어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두 개의 구멍이 모두 다 땅바닥에 바짝 붙어있는 담모 서리에 뚫려져 있기 때문에 매우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이와 같은 발견은 음미를 해볼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곡창해는 애써 한동안 그 두 구멍이 뭐하는 구멍인가 하고 헤아려 본 결과 잠시 후에 확 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저 두 개의 구멍은 모두 다 명견이 출입하도록 뚫려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에 이 장원 안에는 한 떼의 지극히 무서운 맹견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은 맹견들은 저와 같은 구멍으로 끊임없 이 장원 안을 돌아가며 순찰을 돌아줄 것이니 사람들에게는 그만치 성가 시고 힘든 일을 면할 수가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담장을 타고 달 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신속하게 움직일 수가 있을 것 같구나.' 이렇게 되자 그는 감히 그 뜨락으로 표현히 내려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지붕 위로 뛰어오르자니 또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반 드시 서쪽이나 남쪽의 두 장원 안쪽에 있는 당장 위를 타고 건너야 했다. 그러나 곡창해는 그 자신이 강구해 놓은 방법이 있었다. 그는 결코 그 장원 안쪽에 있는 담장 위를 밟지 않고 또한 뜨락으로 내려서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 왜냐하면 안쪽에 있는 담장 위에는 어쩌면 방울이 달려있어서 사람이 밟게 되었을 때에 요란하게 울려퍼질지도 모를 일이며 만약에 뜨락으로 내려섰다가는 틀림없이 냄새를 남기게 되어 맹견들이 그 냄새를 맡을 수 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무더기의 검은 줄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하나의 손바 닥 크기의 강조를 꺼냈다. 이 하나의 강조에는 다섯 개의 발톱 같은 것이 달려 있어 마치 사람의 손을 연상시키는데 이를 뭉치면 매우 조그마한 뭉치가 되지만 펼쳐놓게 된다면 사람의 손바닥보다도 컸다. 강조의 끝부분에는 조그마한 고리가 있었는데 거기다가 검은 줄을 매고 난 후 약 대여섯 자 정도 되는 부분을 드리우고 머리 위로 들어올려 빙글 빙글 돌아가도록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강조는 그의 머리 위에서 신속하게 원을 그리며 돌게 되었 다. 곡창해는 이때 적절하게 기운을 쓰고 방향을 가늠하고 날았으며 너댓 장의 공간을 가로질러 벼락같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다섯 개의 예리한 발 톱이 저쪽의 지붕처마 끝에 걸리게 던졌다. 곡창해는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이 천둔신조를 잘 이용하면 천연적인 참호를 가로지를 수 있다고 했는 데 과연 그 말이 맞구나. 이 한 무더기의 검고 가는 끈만 조금만 이용해 봐도 이 정도이니 만약에 모두 다 풀어 놓게 되었을 때에는 백 수십 장은 되고도 남음이 있겠구나.' 그는 즉시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검은 줄을 당겨서 힘을 빌어 두둥실 몸을 띄웠다. 다음 순간 가는 마치 비조처럼 너댓 장이나 되는 공간을 가로지르게 되 었고 기척도 없이 저쪽 지붕의 가장자리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는 신속하게 천둔신조를 거둬들이고 몸을 구부리고 용마루 위로 올라 가 사방을 살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수한 지붕들이었다. 이어 그는 야행술(夜行術)을 펼쳐 단숨에 세 개의 지붕을 타고 넘었다. 앞쪽에 하나의 넓다란 화원이 보였다. 그 화원에는 꽃나무와 연못 그리 고 가산이나 정자 같은 것들이 세워져 있는데 가꾸어놓은 것이 무척 우아 한 것이 결코 속되지 않아 보였다. 그는 번쩍 몸을 날려 뛰어내려 화원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하나 의 석판을 깐 길을 따라 걸어갔다. 어느덧 넓다란 꽃과 나무들 사이를 지나 냇가에 이르렀다. 이 조그마한 내는 구불구불한데그 주위에는 약간의 누대와 집들이 있 었고 석판을 깔아놓은 길 막다른 곳에는 하나의 붉은 난간을 세운 돌다리 가 이 장 폭의 냇물 위로 걸쳐져 있어 이쪽과 저쪽을 빈틈없이 연결시켜 놓고 있었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만약 몸을 날려 냇물을 건너게 된다면 이 장 폭의 냇물 위를 가로지르게 된 후에도 일 장 정도 높이 솟아올라야 가까스로 나무 위를 뛰어넘을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을 적에 나무로 이루어진 담장에 부딪치게 될 것인데 이 가시 가 잔뜩 돋혀 있는 나무 담장을 손을 써서 잡을 만한 것도 없었다. 무공을 두고 논할 때 이 장 폭의 냇물 위를 가로지르는 것쯤은 그와 같 은 내가의 고수에게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장을 지난 이후에 다시 일 장 남짓 위로 솟구쳐올라야 한다 는 것이 극복할 수 없는 난문제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설사 극복해서 맞은편 쪽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몸뚱어리가 나무로 된 담장을 지나게 되었을 때에는 전적으로 완전히 기운이 빠지게 마련이었 다. 그때 만약에 매복한 사람이 있어서 갑자기 공격을 해온다면 부득불 두 눈을 멀거니 뜨고 상대방에게 몸을 내맡겨 죽음을 당하는 꼴이 될 것이고 저항하거나 피할 여지가 없었다. 고로 곡창해는 한 번 바라본 이후에 허공으로 가로질러 뛰어넘을 생각 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해본 후 다시 천둔신조를 꺼내 맞은편 돌다리 뒤쪽에 있는 한 그루의 높다랗게 솟아 있는 목란(木蘭) 나무를 겨냥하고 천둔신 조를 힘주어 휘둘렀다가는 내던졌다. 천둔신조는 허공을 나르게 되었고 강조는 한 그루의 옆으로 뻗쳐 있는 나뭇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곡창해는 잡아당겨 틀림없이 걸렸는가를 확인한 이후 천둔신조 이쪽 끝 을 잡고 몸을 날렸다. 그의 몸뚱어리는 허공에서 두 손을 교차로 이용해서 줄을 감아들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비스듬히 위로 육칠 장이나 멀리 날아서는 그 목란나무 의 옆으로 뻗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설 수가 있었다. 그는 천둔신조를 거두고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돌다리 위에는 틀림없이 이상야릇한 점이 있을 것이다. 설사 기관 매복(機關埋伏)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일종의 기묘한 경고장치가 설 치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에 일단 다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면 그 안 에 있는 사람들은 즉시 알아차리게 될 것이고 떼를 지어 달려나와 싸움을 걸어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암암리에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목적 을 달성할 수 없게 되리라.' 그 옆으로 뻗은 가지는 땅바닥과는 삼 장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었 다. 그는 그 가지에 숨어서 한참 동안 살펴보았다. 즐비하게 늘어선 집 안채에서는 등불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 고 어떠한 인기척도 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한복판에 있는 고루(高樓)에서만 등불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발 딛을 곳을 바라본 후 몸을 날려 달려갔다. 삽시간에 그는 몇 채의 지붕을 건너뛰어 그 고루에 도착할 수가 있었 다. 이어 그는 가볍게 몸을 날려 어느덧 제이층의 난간 안으로 뛰어올랐다. 이때 그는 어느덧 이 고루는 틀림없이 적신교 소굴의 중심요지(中心要 地)가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교주 화예부인이 이 중추적인 요지에 거처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이층에는 한 칸의 방에서만 등불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는데 그는 발걸 음을 죽이고 그 불빛이 새어나오는 방의 창문 밖으로 다가가 살그머니 방 안을 살펴보았다.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원래 그 넓다랗고 꾸민 것이 화려한 방 안에는 등불빛이 무척 밝았는데 한 장의 특별히 거대한 침대 위에 대여섯 명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정히 타좌(打坐)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다 온몸을 발가벗고 희고 부드러운 살결 및 풍만하고 사 람을 매료시키는 동체(胴體)를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 다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곡창해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다시 눈을 뜨고서 자세히 살펴보았 다. 대여섯 명의 벌거숭이 미녀들의 얼굴 모습이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았 다. 다시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니 그게 아니고 삼면의 사람의 그림자가 비춰지고 있었지만 기실은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 여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또 그 녀의 얼굴 모습이나 살결 및 선을 미루어보아 아마도 십팔구세의 나이에 접어든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하얀 가운데 붉은 빛이 감돌고 있어 그야말로 복사꽃처 럼 화사했으며 입술은 빨갛고 치아는 하애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곡창해는 기민하게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 즉시 그는 별 수상한 조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뻗쳐 가 볍게 창문을 약간 열어젖히고 몸을 옆으로 해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미 방 안의 가구들을 눈여겨 보아 두었던 터라 신속하게 병풍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침대 위의 벌거숭이 미녀는 전혀 그 누가 잠입한 것도 모르고 여전히 단정히 앉아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곡창해는 병풍 뒤쪽에서 아니나 다를까 하나의 문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이는 그가 짐작으로 그러려니 했던 것이었다. 이 나무문에는 바깥쪽에 전혀 빗장이나 자물쇠 같은 것이 없었다. 그는 시험 삼아 살짝 밀어보자 나무문은 손짓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손을 놓자마자 다시 퉁기듯 되돌아왔다. 원래 양쪽에는 밀어서 열어젖힐 수 있는 활문(活門)이 달려 있었고 밀 어서 움직이게 되었을 때에 전혀 기척을 내지 않았다. 그는 밖이 밝고 안이 어둡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에 문을 열고 엿보다가 등불빛이 쏘아져 들어가게 된다면 그 안에 만약에 사람이 있게 되었을 때에는 틀림없이 상대방 쪽에서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먼저 정신을 가다듬고 운기행공을 하며 귀를 문짝 에 갖다대고는 그 안의 동정을 엿들었다. 문 뒤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정히 위험을 무릅쓰고 문을 열어 살펴보려고 했 다. 바로 이때 갑자기 한차례 가쁜 숨소리가 바로 침대에서 들려왔다. 그는 병풍의 틈바구니 사이로 살펴보았다. 침대 위의 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 었는데 무척 가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팍도 금방 솟아올랐다가 내려갔다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두 젖꼭지마저도 마구 흔들리고 있어 지극히 강렬한 유혹력 을 발하고 있었다. 곡창해는 처음에 전혀 어떻게 된 노릇인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깜짝 놀라서 생각을 했다. '내공을 연마하게 되었을 때에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으니 혹시 주화 입마(走火入魔)되어 저와 같은 모습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그 벌거숭이 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흔들어대고 있었고 두 눈 에서는 물기를 머금고 있는 미태(美態)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입에서는 끙 끙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떠한 남자라도 그와 같은 소리를 듣게 되고 그녀의 음란하고 요염한 모습을 보게 된다면 결코 참고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곡창해 역시 사내인지라 대뜸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고 원시적인 본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하지만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고 욕념이 치솟아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굳 건하고 냉정한 이지 또한 살아 있었다. 그는 조금도 이지를 상실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와 같은 광경에서 원시적인 본능을 촉발(觸發)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신속하고도 빠르게 생각해 보았다. '저 여인이 갑자기 저러는 것은 혹시 내가 이미 방 안으로 들어선 것을 알고 미술(媚術)로 나를 유혹하여 함정에 빠지도록하려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생각이 들게 되자 대뜸 신공을 끌어올리게 되고 심신을 수습 해서 가다듬었다. 잠시 후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었다. 두 눈에 보이는 음란한 티와 귀에 들려오는 음탕한 소리는 마치 그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 같았다. 정히 그가 평소의 상태를 회복하게 되었을 때에 병풍 저쪽에 있는 문 안쪽에서 희미하게나마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깜짝 놀라서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내가 미색의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와 서 나를 잡으려 하는 모양이구나.' 그는 슬쩍 몸을 옆으로 세워 문곁에 바짝 붙어섰다. 그 발걸음 소리는 문밖에 와서 멈추어지게 되고 나무문은 문바깥쪽으로 열어젖히게 되었다. 곡창해는 문이 열려지게 되었을 때의 그 기세를 빌어 몸을 움직였다. 그 모양은 마치 그 자신이 바로 문에 풀칠을 해서 붙여놓은 종이 같았 다. 이 활문이 사람들에게 열어젖혀지자 두 명의 여자가 차례로 걸어나왔 다. 그녀들은 줄곧 병풍 밖으로 걸어나갔는데 문짝이 되퉁겨지게 되었을 때 에 그 문짝을따라 문 뒤쪽으로 돌아간 곡창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 다. 곡창해는 이때서야 상대방 두 여인이 결코 그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재빨리 문 저쪽을 살펴보았다. 정순(精純)하기 이를 데 없는 야안(夜眼)으로 즉시 문 저쪽은 하나의 어둠에 휩싸여 있는 통로라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원래 이는 다른 하나의 비밀문으로 이 통로를 통하게 되어 있었구나. 그러니까 그녀들이 이 문으로 출입을 하는 것으로 볼 때 또한 이 통로로 해서 드나드는 것이 틀림이 없겠군.' 이때 방 안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한 명이 간드러지고 화사한 음 성으로 입을 열었다. "에구머니나, 둘째 언니 저것 보아요. 아환(阿環)이 아무래도 열째 누 이의 자리를 매울 수가 없을 것 같네요." 다른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승급(昇級)에 있어서 가장 험난한 고비길이다. 저 애가 이 고비 를 넘기지 못한다는 것은 그렇게 이상할 것이 없다. 너는 본교의 십이금 차(十二金 ) 가운데서 아홉째 누이이니 본 바가 아직도 적다. 그러나 나 는 이미 십여 명이나 근골이 훌륭한 여자애들이 모두 다 이 관문을 통과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자 아홉째 누이라고 불리운 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관문을 생각만 하면 그만 마음이 서늘해지고 간이 콩알만해져요.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어요. 여러 음마(陰魔)가 교차하여 핍박을 하는 상 태에서 환상(幻象)이 잇따라 몰려들게 되거든요. 비록 간신히 이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기는 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볼 때에 여전히 소름이 끼 쳐요." 둘째 언니라고 불리운 여인은 그 말을 받았다. "그건 당연하지. 누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더냐? 우리들은 이점에 있어서는 역시 마음은 있지만 도움을 될 수가 없다. 나중에 나는 교주님 에게 품해야겠구나." 아홉째는 물었다. "설마하니 교주께서도 이 애들을 도와 이 생사대관(生死大關)을 통과할 방법을 도와줄 재간이 없다는 것인가요?" 둘째는 대답했다. "교주의 수위(修爲)가 이미 화경(化境)에 도달하여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지만 이와 같은 생사대관은 전적으로 개인의 천부와 공력에 좌우되는 것으로서 조금도 억지를 부릴 수가 없단다. 그렇기 때문에 교주도 이에 대해서는 아마 힘이 되어 주시지는 못할 것이다." 아홉째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틀림없이 그러리라고 믿어지는군요. 그렇지 않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은 교주가 총애하는 사람인데도 이 관문을 통과하려고 애를 쓰게 되었을 때 에 교주께서는 한 번도 들여다 보지를 않아요. 하지만 이 관문을 통과하 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홍안(紅顔)을 영원히 지니게 되고 미골(媚骨)이 모 여서 이루어지니 공덕이 원만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본문의 화 양지공이 크게 증진되지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좋은 이점들이 있으니 한 번 목숨을 걸고 도전을 해볼만한 가치가 있지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바로 이제 교주에게 가서 품해야 하나요?" <제3권 계속> From Sunbur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