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팔부 <1> 서 문 이 책은 대만 작가 고룡(古龍)의 전기작(前期作)이라 할 수 있는 정통 무협소설 중의 하나이다. 고룡은 대만에서 와룡생 이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로서 1975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검객행>, <귀영쌍도>, <육소봉 전기>, <절대쌍교> 등의 많은 대작(大作)을 남겼다. 이 소설 비룡팔부(飛龍八部)는 자기 가족과 당문을 멸족시킨 무명도의 무리들을 찾아 원수를 갚아나가는 주인공 당승무의 일대기이다. 사천당문 당숙종의 아들 당승무는 자기 당문과 가족들이 이름모를 사람들에게 멸족을 당하기 직전에 혼자 구출된다. 그때 자기의 목숨을 노린 사람에게서 자기를 구해준 사람을 사부로 모시고 독공과 무술을 연마하던 중 사부가 무명도의 무리들에게 죽음을 당하자 원수를 갚기 위해 강호에 나오게 된다. 강호에 떠돌아 다니던 당승무는 무명도의 무리들과 대항을 하려는 여러 정의의 무림인사를 만나게 되어 무림맹을 창립하고 무림맹에서는 강호의 여러 문파와 손을 잡고 무명도와 격전을 벌이는 내용으로 당승무는 자기 암기와 염지천에게서 배운 무술로써 사부를 죽인 무명도의 무리를 찾아 원수를 갚고 끝내는 무명도의 전 무리들을 소탁함으로써당문의 원수까지 갚는다는 이야기이다. 당가보 사천(四天) 기주부(超州府)는 삼협 (三峽)의 서편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그만 하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팔진도(入陣圖)의 유적이 있고 동쪽에는 백제성 (白帝城)이 있다. 당가보 백제성은 동한(東漢)의 공손(公孫)이 촉(蜀)을 점거한 뒤에로 왕위에 오르면서 백제라고 칭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그는 이 계곡의 천연적인 요새만을 믿고 수십 만의 병사로 무(賣)를 부수려고 했다. 그러자 한(漢)의 광무제 (光武帝)는 그에게 재차 투항을 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극구 부인을 하다가 결국은 오한(吳漢)에게 패하고 말았다. 또 삼국시대에는 유비가 오(吳)를 토벌 하려다가 오히려 크게 패하여 이곳 백제성에 머물면서 분함에 못이겨 병이 났을 때 제갈공명을 만났던 곳이다. 또 근래 이백 년 동안에는 백제성의 이야기만 꺼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곳은 너무도 유명했다. 그것은 바로 강호상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서독(白帝西毒). 서독이라 함은 백제성 오봉강(五鳳崗)의 당가보(唐家堡)를 말하는 것으로서 기이한 독약과 암기로 천하를 휘어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백 년 이래 강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사천당문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당가(唐家)의 독약과 암기는 결코 외인에게 전해지지 않으며 제자들도 모두 당가의 자손들 뿐이었다. 또 그들 사이에는 기이한 규칙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딸이 성장을 하더라도 결코 출가를 할 수가 없으며 남자 쪽에서 그 당가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당가보에서 외성 (外性)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사위들 뿐이었다. 아울러 사천당문이 강호의 거친 세파 속에서도 이백 년이라는 역사를 그대로 지켜 내려온 것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무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역시 그들의 자손들이 선조의 명을 잘 받들어 결코 강호에 발을 들여 놓거나 강호의 어떤 변화나 분규에 끼어들지 않고 오직 초연한 자세만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주부의 북문 밖에는 울창한 고목들이 길 양쪽에 빽빽이 들어 서 있고 그 길을 따라 산허리를 향해 돌아가다 보면 오래된 절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은 회룡사(廻龍寺)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 절은 언제 지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풍문에는 강호에 떠다니는 화근거리 용(龍)을 진압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회룡사는 비록 지은지가 오래 되어 낡긴 했으나 지세가 워낙 첩첩산중에 있다 보니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절내의 승려들은 자연 평시에는 스스로 곡식을 지어 자급자족을 하는 실정이었다. 달이 유난히도 밝은 밤이었다. 승려들은 야간 독경을 마쳤으며 넓은 대전 안에는 한 개의 희미한 등불만이 주위를 어슴프레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대전 앞에는 백 년 묵은 늙은 계수나무가 좌우에 각기 한 그루씩 서 있었는데 밝은 달빛이 비치자 무성한 계수나무 잎 그림자가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고 있었다. 작은 사미승 하나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천천히 긴 층계를 내려올 때였다. 돌연 그는 정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하얀 그림자 하나가 유령처럼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미승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는 반사적으로 급히 두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서서는 마음을 굳게 다져 먹고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하얀 그림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유령과 같은 흰 그림자는 흰 옷을 입은 사람 같았다.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얼굴은 똑똑히 알아볼 수가 없었으나 목석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흡사 관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산송장과 같았다. 이토록 깊은 밤에 어느 누가 이 절간을 찾아오겠는가? 분명히 귀신이다. 사미승은 자기의 눈 앞에 흰 장삼을 바람에 날리면서 우뚝 서 있는 것이 귀신이라고 생각되자 온몸이 쭈삣해지면서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마구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어 그는 도저히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겠는지 몽유병자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뒷걸음질을 치면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자 그 하얀 그림자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것봐! 꼬마 화상!" 귀신이 말을 했다. 사미승은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도망을 가려고 애를 썼으나 발바닥이 그 자리에 붙어버린 것만 같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의 몸은 온통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으며 왕방울만하게 커진 그의 두 눈은 공포의 빛으로 가득찼다. "시……시주께서는…… 도대체 사람이옵니까? 아니면…… 귀…… 귀신이옵니까?" 그의 목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으며 금시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그 하얀 그림자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음산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말했다. "나는 지능(知能) 노화상을 찾고 있다." 사미승은 그제서야 그가 사람임을 깨닫고는 공포로 가득했던 빛을 약간 거두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마음을 안정시킨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시주께서는 노사부님을 아시옵니까?" 그러자 하얀 그림자는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빨리 가서 그를 불러내지 않고 뭘 지껄이는 거냐?" 사미승은 고막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겨우 어느 정도 진정시켰던 마음이 일. 시에 흐트러지면서 놀라 황급히 대답했다. "예…… 예…… 소승 곧 가겠습니다. 곧……." 하고 간신히 대답한 그는 이내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대전 뒤를 향해 달려갔다. 백의인의 두 눈은 얼음장보다도 더 싸늘한 빛을 발하면서 사미승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이어 사미승이 대전 뒤로 사라지자 그는 뒷짐을 진 채 태연자약한 큰 걸음으로 대전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얼마 있지 않아 대전 뒤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방금 뛰어갔던 사미승이 초롱불을 든 채 앞장 서 걸어왔다. 이어 그 뒤를 고상한 기품이 있어 보이는 노화상이 두 손을 합장한 채 뒤따라 나타났다. 그 노화상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의 빛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사미승은 백의인이 대전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자 황급히 발걸음을 멈추고는 백의인을 가리켰다. "노사부님…… 바로…… 저 사람이옵니다." 노화상은 백의인을 한 번 힐끗 보더니 곧 합장을 하면서 예를 취했다. "시주께서 이 몸을 보자고 하셨습니까?" 그러자 백의인은 노화상의 얼굴을 뚫어지라는 듯이 똑바로 주시하더니 냉랭한 어조로 반문했다. "당신이 바로 지능 대화상이오?" 지능 노화상은 그의 물음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여전히 태연하고도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사옵니다.!" 그러자 백의인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능 노화상은 물이 흘러가는 것 같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시주께서 이렇게 왕림을 해주신 데에는 필시 어떤 가르침이 있으실 테니 안으로 들어가셔서 차라도 같이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괜찮소. 여기에서 이야기를 해도 마찬가지요." 그들이 간단하게 몇 마디를 나누는 동안 사미승은 어느새 또 하나의 촛불을 밝혔다. 이때 지능 노화상이 고개를 돌려 사미승에게 분부를 내렸다. "일청(一情)빨리 가서 차를 가지고 오도록 해라!" 노화상이 말을 맺기가 무섭게 사미승이 나는 듯이 안으로 달려가 곧 두 잔의 차를 가지고 왔다. 차를 받아 든 노화상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곳엔 이제 할 일이 없으니 가서 자도록 해라." 그러자 사미승은 곧 공손하게 절을 하더니 아직까지 혐오감을 품고 있는 백의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부리나케 물러났다. 지능 노화상은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백의인을 바라 보았다. "시주께선 어떤 가르침이 있으시길래 이토록 늦게 왕림을 하셨습니까?" 백의인은 지능 노화상을 노려보듯 똑바로 쏘아보기만 하다가 천천히 그리고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가보의 그 법사는 바로 지능 노화상이 가서 참례 (慘禮)를 하신 것이오?" 그 질문을 받자 지능 노화상은 내심 가슴이 섬칫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노보주(唐老堡主)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보 중의 관리자가 빈사의 승려들을 초청하러 왔었습니다. 그리고 빈승더러 친히 가서 참배를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백의인은 냉랭하기만 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것은 대화상과 당승종(唐承宗)이 생전에 서로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그러니 그 고인이 서거를 했을 때 대화상께서 그를 위해 친히 참례를 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무언지 모를 가시가 박힌 것 같은 그의 말에 지능 노화상은 또다시 가슴이 섬칫해져 억지로 웃어 보였다. "씨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몸은 다년간 회룡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평시에 지방 어르신네들과 다소 왕래가 있었사옵니다." 그러자 백의인은 그를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냉랭한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그때 몇 명이나 가셨었소?" 지능 노화상은 그의 어조에서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언행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다. "빈승까지 합쳐 빈사에서는 모두 스물 다섯 명이 갔었습니다." 백의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듣고만 있다가 다시 담담하게 물었다. "올 적엔 모두 몇 명 이었소?" 지능 노화상은 그의 질문이 오히려 우습다는 듯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참례를 하러 간 사람이 모두 스물다섯 명이니 돌아올 때도 필시 스물다섯 명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백의인의 얼굴이 기이할 정도로 싸늘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아무런 억양이 없이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혹시 한 사람이 더 오지 않았소?" 그러자 지능 노화상은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지주께서는 농담을 잘 하시는군요.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이 더 늘어난다는 말입니까?" 백의인은 마치 지옥에서 나온 사자의 음성처럼 음흉한 목소리로 다시 묻는 것이었다. "대화상께서는 혹시 사미승 하나를 더 데리고 오지 않았소?" 그러자 지능 노화상은 너무나 급작스러운 말에 놀라움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만 외침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그는 곧 마음을 안정시켜 태연을 가장했다. "시주께옵선 지금 일청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는 저를 위해 통지를 하러 다니는 아이입니다. 북성(北城)의 이원외의 댁에서 내일 아침 빈사더러 범사를……" 그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백의인이 갑자기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소생은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 노화상은 가슴이 어느새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으나 겉으 로는 태연자약하게 대꾸 했다. "빈승이 언제 시주께 거짓말을 여쭈었습니까?" 백의인은 무섭게 그를 노려보며 정이라고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어조로 내뱉았다. "진실한 사람 앞에서는 결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은 바로 당승종의 외아들이오." 그 말에도 지능 노화상은 아무런 동요를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했다. "당노시주의 영식이 저와 무슨 연관이라도 있다는 말이옵니까?" 그러나 백의인의 냉막한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오직 두 줄기의 음산하고도 싸늘하기만 한 눈빛으로 노화상을 주시하면서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승종의 그 외아들이 사미승으로 가장을 하여 바로 대화상이 데리고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자 지능노상은 참는 것이 한계에 달했는지 마침내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빈승이 무엇 때문에 당노시주의 영식을 사미승으로 가장시켜 데리고 나오겠습니까?" 백의인은 의미심장한 냉소를 날렸다. "아마 당승종이 직접 노화상에게 부탁을 한 것이겠죠?" 그제서야 지능 노화상은 약간 불안해 하는 기색을 역력히 들어내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시주께서는 대체 누구이십니까?" 그러자 백의인은 다시 냉소를 하면서 냉담하게 대꾸했다. "내가 누구냐고 하는 것은 묻지 말고 어서 당승종의 아들이나 내놓도록 하시오." 그의 말 속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음흉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다음 순간 지능 노화상의 두 눈이 날카로운 신광을 발하는가 싶더니 이어 그는 합장을 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그렇다면 당노시주의 일문 열 셋이 죽은 것은 모두가 시주께서 독수를 내리신 것이란 말입니까?" 백의인은 부인하려 들지도 않고 오히려 냉랭한 웃음과 함께 반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소. 대화상께서는 당승종을 위해 나설 용의라도 있단 말이오?" 백의인이 말을 맺자마자 지능 노화상은 두 손을 합장한 채 연신 염불만을 외웠다. "선과 악에 대한 보복이나 보답은 각기 해야 할 사람이 있는 법인데 빈승이 무엇 때문에 그 일에 나서겠습니까?" 백의인은 태연하게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냉랭하기 이를데 없는 음성으로 내뱉았다. "만약 대화상이 당승종을 위해 나서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어서 그의 아들을 내놓도록 하시오." 그러자 지능 노화상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시주께서는 당노시주와 어떤 원한이라도 있으십니까? 겨우 십여 세 밖에 안 된 어린아이 하나를 무엇 때문에 놔주지 못하는 겁니까?" 다음 순간, 백의인의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져 올라갔다. "그렇다면 대화상은 그를 내놓지 않으시겠단 말이오?" 지능 노화상은 아까의 그 태연하던 모습과는 달리 말까지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빈승은 당노시주의 부탁을 받고 사람을 시켜 그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백의인은 사납게 눈을 부릅뜨더니 냉랭하게 소리쳤다. "어디로 보냈소?" 지능 노화상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뜨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것은 가르쳐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음 순간, 백의인은 잠자기 미친 듯한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대화상은 소림사가 뒤에 버티고 있다고 제가 손을 쓰지 못할 줄 아시오?" 지능 노화상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불문의 제자들은 무공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소림사나 저의 회룡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순간, 백의인의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져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어 그는 찬 바람이 일 것 같은 음성으로 내뱉았다. "당신이 보낸 사람은 이미 나의 손에 막혀 다시 돌아왔소." 지능 노화상은 기절을 할 것만 같았다. "아니, 시주께서는 저의 제자를 처치했단 말입니까?" 백의인은 그의 절규에 가까운 부르짖음에는 아랑곳 없이 음산한 웃음만을 띠었다. "원래 그 역시도 대화상의 제자였구려. 어쩐지 냄새가 난다 했더니……." 지능 노화상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백의인은 대답 대신 가볍게 손뼉을 세 번 쳤다. "딱! 딱! 딱!" 그러자 밖으로 통하는 쪽의 문이 열리면서 암백색의 장삼을 입은 두 사나이가 한 사람을 떠메고 나와서는 대전 위에 올려놓았다. 지능 노화상은 두 사람에 의해 들려져 나온 사람이 자기 문하의 제자인 일통(一通) 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의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볼 때 설사 그가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꼼짝도 않는 것이 매우 심한 내상을 입은 게 틀림 없어 보였다. 노화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껴 급히 염불을 외웠다. "지주께서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백의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영도께서 당승종의 아들을 어디로 보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의 부하가 일시적인 실수로 그만 죽였소." 하고 말하는 그는 사람 하나쯤 죽이는 것은 마치 개를 죽이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 같아 보였다. 지능 노화상은 자기가 아끼는 제자가 죽은 것을 알자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얼른 두 손을 합장한 채 염불을 외우고 나더니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시주께서는 정말 잔인하기 그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일진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대전 뒤로부터 똑같은 회백색의 장삼을 입은 사나이가 나타났다. 뜻밖에 나타난 그들을 보자 지능 노화상은 가슴이 섬칫해졌다. "절 내의 승려들은 모두 어디로 갔기에 이 사람들이 대전 뒤쪽으로부터 나왔지? 어째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까?" 노화상이 이렇듯 의아해 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회색 옷을 입은 네 사나이들은 대전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백의인을 향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백의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되었느냐?" 사무적인 어조로 백의인이 묻자 네 사람 중 맨 앞에 서 있던 사나이가 급히 대답을 했다. "회장주(回莊主)다 되었습니다." "모두 스물일곱 명입니다." 그러나 백의인은 급히 안색이 홱 달라지더니 냉랭하게 소리쳤다. "틀렸다! 이 회룡사에는 주지인 노화상까지 합쳐 모두 스물다섯명의 중과 두 명의 사미승, 그리고 세 명의 일꾼까지 합쳐 모두 스물여덟 명이 있어야 한다." 숨도 쉬지 않은 듯 단숨에 백의인이 그렇게 말하자 지능 노화상은 내심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보니 이 절에 대해 샅샅이 조사를 했구나…….' 맨 앞에 서 있던 회의인은 백의인의 책망에 몸둘 바를 몰라하며 대답했다. "소생이 전력을 다해 이 사찰을 샅샅이 뒤져 보았건만 스물일곱 명 밖에는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백의인은 싸늘한 눈초리로 지능 노화상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비꼬는 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대-상께서는 정말 영민하시군요. 제일 큰 제자로 하여금 일부러 내 부하들의 시선을 끌게 한 다음 둘째 제자로 하여금 당승종의 잡종 놈을 데리고 가게 하다니……." 몹시 모욕적인 언사였지만 지능 노-상은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백의인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냉랭하게 소리쳤다. "꺼서 이 자를 데리고 가도록 하라! 그리고 이 사람도 이젠 필요가 없게 됐으니 태워 버리도록 해라!" 그 소리를 들은 지능 노화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매섭게 부릅뜨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악독한 놈들, 보아하니 이 노승이 손을 써야만 하겠구나." 하고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즉각 일 장을 뻗어 백의인을 향해 격출했다. 노화상은 수십 년 간이나 수련을 쌓아왔기 때문에 공력이 심후하였으므로 분노에 찬 그의 벽공장(費空尊)은 매우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지능 노화상이 힘들여 뻗어낸 그 일 장의 벽공장이 전혀 그 위력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라 지능 노화상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노기에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 악독한 놈, 이 노승에게 어떠한 짓을 했느냐?" 그러나 백의인은 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단지 손을 약간 저을 뿐이었다. "어서 이 자를 데리고 가도록 하라." 그러자 두 명의 사나이가 대답과 동시에 즉각 노화상의 양쪽 옆구리를 하나씩 끼고 밖으로 나갔다. 이어 고색이 찬연한 사찰 내에서는 삽시간에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이내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절 내에 남아 있던 서른 명의 승려들은 자기네들의 생명을 구해줄 그가 끌려나가자 한 가닥 걸었던 나머지 희망마저 일시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마의 협곡 삼협 (三峽)은 천하에서 가장 기이한 곳이다. 삼협은 장강(長江)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쪽의 사천기문에서 시작하여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능협(西陵峽)이 그것인데 호북(湖北)과 선창(宣昌) 남율관(南津關)에 이르기까지 자그마치 그 길이가 약 백골십여 리나 되었다. 그 긴 강의 양쪽에는 험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물살은 말할 수 없이 빨라 어디 하나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배가 지나다니는 것을 별로 볼 수가 없지만 옛날에는 서천에서 중원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삼협 중 맨 앞에 있는 구당협은 광계협(廣理峽)이라고도 칭하는데 풍상협(鳳箱峽)과 기협과의 거리가 가장 짧은 곳이다. 하지만 양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서 험하기가 이를 데 없다. 겨울철이 되면 물이 줄어 들어 강물 밑의 암석이 모두 드러나면서 강 수면이 몹시 좁아 보인다. 그러나 여름과 가을철에는 물이 부쩍 불어나 거센 물살이 암초에 부딪쳐 소용돌이를 이루기 때문에 위험하기 그지 없다. 그러므로 이 삼협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였다. 지금은 마침 봄과 여름이 교차되는 시기라 삼협의 물이 불어날 때다. 거센 소용돌이를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손님을 가득 실은 채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 황장배(慌張背)에서 나와 보자탄(寶子觀)에 도착했다. 여기에 도착을 하니 수세는 점점 부드러워져 선실에 앉아 있던 이십여 명의 승객들은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닦고 있었다. 배가 모래사장에 정박을 하고 나자 날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배에 타고 있던 손님들은 바싹 긴장했던 마음들이 풀리자 곧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배가 정박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수부들이 밥짓는 것을 보지 못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승객이 선주를 향해 물었다. "이것 보시오. 선주, 우리가 처음 배를 탔을 때 당신네들은 하루 세끼 밥을 배에서 제공해 준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소? 그런데 날이 이렇게 어둡도록 왜 밥을 주지 않는 거요?" 선주는 약 오십 세 가량된 노인이었다. 기다란 얼굴에 찢어 놓은 듯이 위로 치켜 올라간 두 눈, 그리고 싯누런 이빨 등이 결코 기분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그는 선실 입구에 선 채 불도 붙이지 않은 담뱃대를 한번 빨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손님께서는 통 모르고 계시는군요. 지금은 불을 피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질문을 했던 사람은 어리둥절해 하는 얼굴로 그를 주시했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선주는 질문을 받자 태연자약하게 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배에는 많은 손님이 계신데 집을 나선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평안 무사가 아니겠소?" 선주의 말에 그 손님은 대번에 안색이 달라져 황급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안전하지 못하다는 말이오?" 선주는 여전히 선실 입구에 기대선 채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저 연기나 불빛만 없으면 최소한 살인왕을 끌어 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살인왕이라는 세 글자가 선주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자 겨우 안도의 숨을 쉰 승객들은 다시금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다 배를 정박한 거요?" 금방 누렇게 얼굴이 뜬 그 손님이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선주는 피식 웃더니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일대에서는 이곳이 가장 수세가 부드러워 지나다니는 배들이 정박을 하기에는 가장 알맞은 곳이오. 전번에 한 척의 배가 이곳에서 사고가 발생해 배에 타고 있던 삼십여 명의 승객들 모두가 칼 아래 귀신이 되고 말았소. 사람들은 모두가 살인왕의 부하가 저지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배는 매번 이곳에 정박했어도 단 한 번도 사고가 난 적이 없었지." 선주와 몇 마디를 나눴던 그 손님의 손은 어느새 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일단 한 번 만났다 하면 모든 것이 다 끝장나겠군요." 선주는 다시 한 번 불이 없는 빈 담뱃대를 아쉽다는 듯이 한 번 빨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살인왕의 부하들은 일단 사람을 봤다 하면 결코 살려 두지 않는 답니다. 하지만 저희 배에 타고 있는 손님들에 한해서는 그저 저의 규칙대로만 한다면 무사히 그 그물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선실 안에 있는 손님들은 대부분이 늙은이나 병약자, 그리고 부인과 아이들이었다. 지금 손님들은 모두들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 갈색 옷을 입은 노인이 있었는데 얼굴에다 수건을 뒤집어 쓴 채 깊이 잠이 들었는지 선주의 그런 말에도 여전히 들은 척도 않고 있었다. 그 갈의 노인 옆에는 두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몸에 광목 옷을 걸친 노인이었는데 보아하니 시골에서 갓 올라온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도 몸을 어떻게 가누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 가득히 초조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또 그 노인 옆에는 약 십오륙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소년 하나가 얼마나 씻지 않았는지 까만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으며 초여롬의 강바람은 출렁이는 물결과 함께 제법 거세게 불어왔다. 강 양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마치 사나운 맹수가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 같은 형상이었다. 스산한 분위기에 승객들은 모두들 배고픔조차 잊고 이 피비린내가 풍길 것 같은 밤의 무사를 빌었다. 바로 그때였다. 극도로 긴장된 배 위에 불이 번뜩하고 밝혀지는 것 같더니 선원하나가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것을 본 선실 내의 손님들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 급급히 소리쳤다. "이것 보시오. 선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이런 판국에 불을 켰다가 놈들이 보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요?" 이때 선실 뒤로부터 나온 선주는 손에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칼을 하나 들고 있었는데 횃불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살이 신비스러운 감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 자들은 이미 왔습니다." 그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선실 속은 당장에 벌집을 쑤신 것처럼 일진의 소동이 벌어졌다. 조금 전에 선주와 이야기를 나눴던 승객이 떨리는 음성으로 급히 물었다. "아니 누가 왔단 말이오?" 그러자 선실 안에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의 태연자약한 음성이 대답했다. "누구는 누구겠소? 살인왕 외에 또 누가 오겠소?" 질문을 한 사람은 그 말에 안색이 대번에 새파랗게 질리면서 선주에게 매달리듯 달라붙으며 호소했다. "선주, 당신은 칼이 있으니까 우리를 보호해 줄 수가 있을 것이오. 만약 당신네들이 우리에게 아무런 탈이 없도록 해준다면 우리는 나중에 반드시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선주는 사나이의 애원섞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해 할 필요는 없소. 손님들은 저희 배에 탔으니 의당 저희가 힘을 써야지요……." 바로 그때였다. 어느 사이에 나타났는지 뱃머리 양쪽에 강철로 만든 칼을 든 십여명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흠칫 놀란 승객들이 자세히 관찰을 하자 그들은 모두가 배의 수부들로서 삽시간에 선실을 에워싸며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바로 적들과 싸우기 위한 준비였다. 넓은 배 위에 단지 한 개의 횃불만 있어서 주위는 온통 캄캄했다. 선실 속에 웅크리고 있던 승객들은 단지 주위가 어둡고 고요하기만 할 뿐 아직 살인왕의 부하들이 오지 않은 것 같아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다. 배 위에는 정말 거짓말처럼 숨소리도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선주는 홀로 배에 서 있다가 잠자기 날카로운 신광을 발하며 선실을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 "지금부터 여러분들께서는 모두 모래사장으로 나가 계십시오!" 선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선주께서는 무슨 이유로 우리를 밖으로 나가라고 하는 것이오?" 그러자 선주는 신경질적으로 차갑게 내쏘았다. "하라면 하는 거지 웬 잔소리가 그리 많소! 당신네들이 모두 모래사장으로 나가야만 우리가 적과 싸울 때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게 아니오." 선주의 말에 조금 아까 이야기를 한 사람은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우리가 모래사장으로 올라갔다가 그곳에서 만약 살인왕을 만나서 어떻게 합니까?" 바로 그때였다. 선주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어두운 선실로부퍼 한 사람의 음성이 울려나왔다. "당신은 살인왕이 누구인지나 알고 그러는 것이오? 그는 바로 선주 자신이오." 누구의 입에서 나온지는 잘 알 수가 없었으나 일단 그 말이 나오자마자 선실은 삽시간에 벌집을 쑤신 것 같은 일대 소란이 일어났구. 그 중 용기 있는 몇 사람이 몰래 선주의 얼굴을 훔쳐보자 선주의 얼굴은 과연 무시무시할 정도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살인왕은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소. 만약 그가 배 위에서 살인을 한다면 최소한 핏자국을 남길 수가 있지만 만약 모래사장에서 사람을 죽인다면 백 명을 죽인다 하더라도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요. 그것은 모두 물이 깨끗이 씻어 주니까……."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그 소리를 듣자 삽시간에 소름이 쫙끼쳤다. 하지만 육지도 아닌 이런 곳에서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이때 문 옆에 서 있던 선주가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흐흐흐……친구의 말은 제법 맞는군. 여러분들은 강을 따라 내려갈 게 아니오? 조금 있다가 여러분들은 흐르는 물을 따라 가고 깊은 곳을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이오." 그의 음성에는 싸늘한 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만약 지금이 환한 대낮이라면 파랗다 못해 검게 질린 승객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승객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선주는 또 다시 재촉을 하기 시작했다. "자, 여러분들은 어서 모래사장으로 내려가시오. 여러분들은 아직도 굶고 있으니 어서 식사를 해야 할 게 아니오." 그가 여기까지 말하자 선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던 부녀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 또 정체불명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러분들, 잘 들으시오. 이 선실 안에서 누구든 고개만 내밀었다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니 꼼짝도 말고 앉아만 계시오." 그러자 선주는 그제서야 사납게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거 친구는 누구요?"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선주는 더욱 더 약이 달아 올라 손까지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놈들을 모두 끌어내라! 만약 거부하는 놈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죽여도 좋다!" 선주의 격한 음성에 이어 밖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즉시 네 명의 수하가 선실로 뛰어 들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발길로 걷어차며 소리를 질러댔다. "일어나라! 일어나. 너희들은 선주의 말도 못들었느냐?" 선실 안에서는 삽시간에 일대 소동이 일어나면서 승객들은 마지못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네 명의 수부 중에서 두 명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자리 푹 쓰러졌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두 사나이가 쓰러지자 나머지 두 사나이도 질세라 하고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진 것이다. 선주는 선실 밖에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자기의 부하들이 쓰러지자 즉시 어리둥절해졌다. 다음 순간, 즉 한 가닥의 놀라움의 빛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 갔는가 싶은 순간, 선주는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대체 선실 안에 어떤 친구가 암기로서 사람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돌연, "슉! 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선실 밖에 있던 다른 두 명의 수부가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마는 게 아닌가, 선주는 그 광경을 목격하자 너무도 다급한 나머지 자리에서 껑충 뛰어 오르며 살기띤 눈초리로 사방을 뚫어지게 살피기 시작했다. "이놈, 내 너를……." 그러나 그는 뒷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말았다. "슉! 슉!" 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 있던 두 명의 수부가 또 고꾸라졌기 때문이었다. 선주는 상대방이 누군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자기의 수하들이 여덟 명 씩이나 쓰러지자 놀랍기도한 한편 노여움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암중에 있는 적이라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고 보니 그는 억지로 치미는 화를 참으면서 수하들을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너희들은 어서 물러나라!" 하고 말을 한 다음 선실 안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제가 그만 실수를 하여 고인이 있는 줄을 몰라 뵈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하셔서 손을 거둬 주십시오." 그러나 선주의 부하들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대로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선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선주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지자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져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들! 귀가 먹었느냐? 왜 비키라고 했는데도 비키지를 않는 거냐?" 그가 미친 듯한 고함을 지르자 갑판 위에 굳은 듯이 서 있던 십여 명의 수부들은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몸이 비틀하더니 썩은 짚단 넘어지듯 일제히 쓰러졌다. 이렇게 되고 보자 큰 소리를 쳐대던 그의 주름진 이마에서는 어느새 콩알만한 식은땀이 비오듯 흘러 내렸으며 휘둥그래진 그의 두 눈에는 공포의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토록 기세 좋게 떠들어 대던 그가 갑자기 칼을 한 쪽에다 아무렇게나 내버리고 갑판 위에 털색 무릎을 끓고 말았다. "소인을 살려 주십시오. 제발 어르신네께서는 소인을 살려 주십시오…… 소인은……" 중얼거리던 그의 음성이 점점 미약해지는가 싶더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의 몸도 굳어져 다시는 펼 줄을 몰랐다. 선실 안에 있던 승객들은 뜻하지 않게 살인왕과 그의 부하들이 죽은 것을 보자 모두들 놀라 기절할 듯했다. 또한 그들 자신도 모르게 움츠린 몸에서는 식은땀이 비오듯 흘렀다. 그들은 모두가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이 꿈만 같았다. 한참 후에야 무거운 침묵을 깨고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배에 다행히도 대협이 한 분 계셨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삼협은 원래 항해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지날 수 없는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뒷일을 강구해 봅시다." 한 사람이 침묵을 깨자 뒤이어 또 한 사람이 즉시 입을 열었다. "이 중에 흑시 배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급히 반박조로 말을 받았다. "안 됩니다. 우리는 겨우 구장협을 지나왔을 뿐인데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 길이 험하기 때문에 설사 뛰어난 수부가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 힘으로 도저히 안 됩니다." 이때 또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는 약재를 팔러 다니기 때문에 그래도 이 길을 자주 왕래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매번 배를 타고 신녀묘를 지날 때마다 본 것인데 그곳에는 부두가 하나 있는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여기서 산만 하나 넘으면 바로 신녀모입니다. 거리는 약 이십 리 정도니까 아마 내일 아침이면 배를 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승객들은 그 소리를 듣자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좋아했다. 성미가 급한 어떤 사람은 당장에 신녀묘로 가서 배를 기다리자고 했다. 잠시 후 사람들은 횃불을 몇 개 더 켜들고 분분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에 있던 물건들은 모두 모래사장으로 옮겨졌으며 사람들도 모두 모래사장으로 내려섰다. 이어 이십여 명의 사람들은 줄을 지은 채 그 약재 상인을 앞장 세워 걸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대열 속에서 회색 옷을 입은 사나이들이 뛰어 나오더니 광목 옷을 입은 시골 할아버지와 어린아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오른쪽에 있는 사나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살펴보며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잠깐 멈춰라!" 유일한 생존자 두 사나이가 장승처럼 양 옆에 버티고 서자 시골 노인은 몹시 당황해 하더니 곧 어색하게 씨익 웃었다. "두 분 나으리께서는 이 늙은 것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험상궂게 생긴 두 사나이가 늙은 시골 영감과 어린 소년을 막아 선 채 무어라고 협박조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자 가뜩이나 두려움에 떨던 판이라 못 본 척하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급히 신녀모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까 이 두 사람의 옆에 누워 있던 갈의노인 하나만이 맨마지막으로 지나가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 사람이 있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친다. 오른쪽에 있던 사나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 훑어보더니 야멸찬 조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시골 영감 옆에 있는 소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애는 당신과 어떻게 되는 사이요?" 사나이의 입에서 소년과 관계되는 말이 나오자 시골 영감은 흠칫 놀라 가볍게 몸을 떨더니 연신 바보 같은 웃음을 만면에 떠올렸다. "예…… 이…… 이 아이는 제 손자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왼쪽에 있는 사나이가 다그치듯 물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오. 이 애가 누구라고요?" 시골 영감은 당황해 하는 빛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어조로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했다. "두 분 나으리, 이 애는 저의 손자인…… 아복(阿福)입니다." 오른쪽에 있던 사나이가 그 말에 눈을 찡굿하더니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흥! 늙은 것이 그래도 꽤 입이 무거운 편이로군!' 하고 말한 그는 별안간 손을 번쩍 쳐들더니 시골 영감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찰싹!" 억센 사나이의 주먹에 시골 영감은 이빨이 두 개나 부러져 피를 쏟으면서 비틀거리며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나 오른쪽에 있는 사나이는 조금도 동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협박조로 울러댔다. "어서 이야기해 보아라! 이 놈은 누구냐?" 시골 명감은 끽가 흐르는 입을 감싼 채 한쪽에 서서 울상을 지었다. "나으리…… 이 아이는…… 정말 저의 손자입니다." 노인이 한쪽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반면 당사자인 아복은 조그마한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조금도 두려워 하는 기색이 없이 야무지게 소리쳤다. "우리 할아버지를 왜 때리는 거예요? 제가 바로 아복이에요." 그러자 왼쪽에 있던 사나이가 물건 하나를 아복 앞으로 내밀면서 음흉하게 웃었다. "이게 너의 것이지?"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남색 강침(鋼針)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아복은 몹시 당황해 하더니 마른 침을 삼키며 급히 말했다. "이건 내것이 아니에요. 저는 모르는 거예요." 아복이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외치는 동안에도 시골 영감은 그저 아복이 다칠까봐 그의 손을 왁 움켜쥐고 급히 뒤로 두 발자국이나 물러서서는 허리를 연신 굽신거렸다. "나으리,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이 늙은 것과 어린 손자를 봐주십시오. 나으리, 제발……" 그러자 왼쪽에 있는 사나이가 매섭게 눈을 치켜 떴다. "지?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내가 이 당문천왕(唐門天王)의 문심침 (門心針)까지도 몰라볼 줄 알았느냐?" 시골 영감은 당황한 나머지 아복을 얼른 자기의 등 뒤에다 숨겼다. "나으리…… 나으리…… 이 침은 저의 손자 것이 아닙니다." 다음 순간 오른쪽에 있는 사나이가 노하여 발길로 노인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이 늙은 것아! 너는 저리 비켜라!" "아이쿠." 거센 사나이의 발길질에 시골 영감은 맥없이 나가 떨어졌다. 그러자 아복이 황급히 시골 영감에게로 달려가 그를 부축하면서 화가 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들은 어째서 이렇게도 몰지각하시오?" 아복의 그러한 외침에도 두 사나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오른쪽에 있는 사나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서면서 소리쳤다. "당문천왕침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당문의 후손 밖에 없다. 그러니 너의 이름은 당승무(唐繩武)일 것이다. 그렇지?" 그 말에 아복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조그만 가슴을 쭉 펴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내가 당승무라면 어떻게 할 셈이지요?" 하고 외친 그는 갑자기 왼손으로 구리로 된 침통 하나를 들어 올리더니 오른쪽에 있는 사나이를 향해 겨냥했다. "슉! 슉!" 하는 예리한 소리와 함께 두 줄기의 노란 빛이 발사되었다. 다음 순간, 득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나이가 오른손을 번쩍들어 울렸다. "탁! 탁!" 그러자 두 줄기의 천왕침은 거짓말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그의 들린 손 속으로 들어갔다. "흐흐흐…… 이 잡종 같은 것, 바로 너였구나……." 그의 손에는 원래 자석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천왕침을 그대로 흡수한 것이다. 천킁침을 손에 넣은 그는 비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아복의 어깨를 움켜 잡으려고 했다. 바로 이때였다. "어린 아이를 골리다니…… 이게 무슨 짓들이냐?" 하고 대갈일성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나타나 오른쪽에 있는 사나이를 향해 일 권을 격출했다. 그러자 오른쪽에 있는 사나이가 재빨리 옆으로 피하는 동시에 권세를 맞받았다. "흥! 친구는 무엇 때문에 남의 일에 나서서 참견하는 거지!" 이제보니 그 인영은 바로 아까 시골 영감과 어린 아이 옆에서 잠을 자던 갈의노인이었다. 그는 삿갓을 들어 올리더니 호기롭게 웃어 젖혔다. "하하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으례 세상 일에 참견을 하기 마련인 법. 내 눈에 거슬리는 일이면 나는 반드시 간섭을 하고야 만다." 이때 왼쪽에 있던 사나이가 선뜻 앞으로 나서면서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노고(老高)이놈을 나에게 맡겨라!" 하고 말한 그는 오른쪽에 있는 사나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왼손을 들어 앞으로 덮쳐가는 동시에 오른쪽 장을 갈의노인에게 격출했다. 갈의노인은 상대방의 공력이 이토록 고강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갈의노인은 도저히 막을 수 없다고 여겨지자 급히 몸을 피하며 다리로 상대방의 가슴을 힘껏 걷어 찼다. 이 일 격은 매우 맹렬하면서도 갑작스러운 것이라 왼쪽 사나이는 반사적으로 뒤로 두 발자국이나 물러섰다. "회심퇴(懷心腿)너는 과연 소림파의 문하로구나." 그러자 갈의노인은 황급히 부인하듯 소리쳤다. "나는 소림의 문하가 아니다." "흥! 네가 설사 소림의 문하라 할지라도 우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잠시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계속 무시무시한 공력을 가했다. 갈의노인은 쌍권을 연속적으로 돌리면서 격출해 냈다. 그는 입으로는 여전히 자기는 소림의 문하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소림파만이 전해지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두 사람이 격출해 내는 기세는 모두가 산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왼쪽의 사나이와 갈의노인이 무섭게 싸우고 있을 때 오른쪽의 사나이가 재빨리 몸을 날려 아복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순식간에 그의 맥문을 잡고 혈도를 찍었다. 이어 그는 시골 영감을 향해 날카로운 일 장을 격출했다. 그러자 시골 영감은 신음 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갈의노인과 왼쪽에 있던 사나이는 이미 이십여 초나 싸웠는데 갈의노인은 벌써 공격도 제대로 못하고 방어하기에만 급급해 있었다. 다음 순간, 왼쪽에 낀던 사나이가 천변괘월(天邊掛月)의 수법을 전개하여 다섯 손가락을 마치 갈퀴처럼 하여 갈의노인의 왼쪽 귀를 향해 휘둘렀다. 갈의노인은 도저히 피할 수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얼른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바람에 그의 머리에 쓰고 있던 삿갓이 훌렁 벗겨졌다. 그러자 상대방 사나이는 득의에 찬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이제보니 너는 바로 회룡사의 중놈이로구나." 갈의노인은 끽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자 식은땀을 비오듯 흘렸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묻어 있던 때가 벗겨지면서 본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참모습은 노숭이 아니라 중년 화상이었다.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낸 왼쪽 사나이는 더욱 미친 듯이 괴성까지 발하며 장풍을 날렸다. "펑!" 중년 화상은 간신히 그의 공격을 받아내기는 했으나 완전히 받지 못하고 어깨를 맞은 채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왼쪽 사나이는 더욱 기세가 등등하여 야수와 같이 날뛰었다. "내 이번에는 너를 천당으로 보내 주마!" 하고 말한 그는 일 장을 번개같이 내뻗었다. 이때 중년 화상은 자기가 입은 내상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전력을 다해 막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이를 악물면서 일 장을 휘둘렀다. "펑!" 하고 장과 권이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왼쪽의 사나이가 뒤로 두 발자국이나 물러섰다. 그러나 중년 화상은 약 일 장 가량이나 뒤로 물러서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으면서 시럴건 선혈을 토하며 기절을 해버렸다. 그러자 왼쪽 사나이는 그를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즉각 오른쪽사나이에게로 시선을 돌려 큰 소리로 물었다. "노고, 다 됐느냐?" 오른쪽에 있던 사나이는 대답 대신 시원간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하하하…… 벌써 다 되 었다." 그러자 왼쪽에 있던 사나이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자 이젠 그만 가 보세." 이어 오른쪽 사나이가 막 아복을 등에 메려고 할 때 갑자기 어둠 속으로부터 냉랭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두 사람은 그 소리에 흠칫 놀라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없었다. 성미가 급한 왼쪽 사나이가 먼저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냐?" 상대방에서는 여전히 냉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내 목소리도 못 알아 듣느냐?" 두 사람이 그 말에 놀라 얼른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수 장쯤 떨어진 곳에 있는 거대한 바위 밑에 사람 하나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캄캄한 밤이라 두 개의 반짝이는 눈만이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잠시 그 쪽을 뜰어지게 바라보던 두 사람 증에서 오른쪽 사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친구도 이 일에 참견하고 싶은가?" 그러나 그 검은 그림자는 여전히 움직이지도 않고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흐흐흐……설사 노부가 그 일에 참견한다 하더라도 직접 손을 쓸 필요까지는 없다." 왼쪽에 있던 사나이는 그 말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는 누구냐? 어서 이리 나와 나에게 얼굴을 보여라!" 그러나 검은 그림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날릴뿐이었다. "흥! 너희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다……." 그 말을 들은 오른쪽와 사나이는 기가 막히다는 듯 갑자기 미친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한 채 그는 맥없인 쓰러지고 말았다. 검은 그림자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키더니 싸늘하기 이를데 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 노부를 잘못 알았다. 이 노부는 일단 나를 안 사람은 어느 누구도 용서치 않고 죽인다……." 밝은 달빛 아래 비친 그는 검은 면포를 입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는 검은 두건이 씌워져 있었고 가슴에는 검고 기다란 수염이 바람에 날리고 있어 가뜩이나 신비로운 감을 풍겨주는 데다가 수중에 들린 불진(佛塵)마저 검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흑포노인은 천천히 먼저 쓰러진 오른쪽 사나이에게로 다가갔다. 땅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쓰러져 있는 그 사나이는 이미 온몸이 검게 변한 것이 죽은지가 오래 됐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아복 역시 그 사나이에게 혈도를 찍혔기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흑포노인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서서히 불진을 치켜 올리더니 돌연 아복의 몸을 향해 내려치려고 했다. 다음 순간,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 보던 그는 갑자기 이 소년을 죽이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을 하고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가 어린 아이 하나를 죽이는데 갑자기 생각이 달라진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 보기만 하던 그가 들어 올린 불진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살수가 아니라 아복의 막힌 혈도를 풀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복은 혈도를 제지당했기 때문에 비록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아까 발생했던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흑포인이 불진으로 혈도를 풀어주자 즉시 전신이 풀어지는 것을 느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네께서 저의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저는 어르신네께 절을 올리겠습니다." 하고 말한 그는 정말로 공손하게 흑포인을 향해 절을 네 번 했다. 그러자 흑포인은 싸늘한 신광을 발하며 아복을 주시했으나 내심으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얘야! 너는 정말로 당문의 제자냐?" "소인이 어찌 어르신네를 속이겠습니까? 소인 당승무는 바로 당승종의 사람입니다." 흑포인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노부가 들은 바로는 당문의 열 세 식구가 모두 피살 되었다던데 너는 어떻게 해서 도망나온 것이냐?" 나타난 원수 흑포인의 물음에 당승무는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더니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했다. "저의 아버지께서는 그날 밤 저더러 당숙의 집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당숙의 집에서 지낸 지 사흘째 되던 날, 당숙께서는 절더러 사미승으로 가장하여 회룡사의 노선배님을 따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노선배님께서는 다시 절더러 일진(一塵) 사형을 따라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고 말한 그는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등그라져 있는 중년 화상을 가리키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처음에 따라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나중에 일진 사형께서 저의 부모님은 모두 원수의 손에 돌아가셨고 또 원수들은 지금 혈안이 되어 저를 찾고 있으므로 자기는 노선배님의 명을 받고 저를 소림사까지 데리고 가는 거라고 설명를 해주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따라 나왔습니다……." 그러자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던 흑포인이 이번에는 시골 영감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그 노인은 누구냐?" "예, 일진 사형께서는 자기가 직접 저를 데리고 다니면 적에게 발견되기 쉬우니까 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저와 친손자인 것처럼 꾸미게 하고 일진 사형께서는 암중에 저를 보호한 것입니다." 흑포인은 그가 또박또박 대답하는 것을 보자 매우 흡족한 모양이었다. "네가 소림사로 가는 것은 나중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냐?" 그러자 당승무는 흑진주 같은 한 쌍의 눈을 빛내며 다시 대답했다. "일진 사형께서는 노선배님께서 소림사만이 저의 원수에 대적할 수 있기 때문에 저를 받아줄 수 있을 거라고 전해 주셨습니다." 그 말에 흑포도인은 갑자기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아마 소림사도 너를 보호하지는 못할 거다." "그렇다면 어르신네께서는 필시 소림의 화상보다 능력이 더 크실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어르신네를 사부로 모시겟습니다." 흑포인은 그 말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내가 너를 제자로 받아줄 줄 어떻게 아느냐?" 그러자 당승무는 고개를 번적 치켜들고는 나이답지 않게 의젓한 투로 대답했다. "만약 사부께서는 저를 받아주지 않으시려 했다면 저를 살려 주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흑포도인은 그 말에 매우 만족스러운 듯이 연신 수염을 쓰다음었다. "그렇다…… 세상에서 이 노부를 본 사람치고 아직까지 살아 남은 사람이 없다. 그런데 내가 너를 죽이지 않았으니까 물론 너를 받아 줘야지." 당승무는 나이가 어려 비록 선악을 구별할 줄은 몰랐으나 방금 이 흑포도인이 손도 쓰지 않고 상대방을 쓰러뜨린 것을 보고는 내심 매우 감탄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 판에 그가 지금 자기를 제자로받아주겠다고 하자 그는 금방이라도 나는 듯이 기뻐했다. "사부님, 제 절을 받으십시오." 흑포도인은 그의 절을 다 받고 나자 몹시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어젖혔다. "하하하…… 너는 복수를 하려면 반드시 좋은 사람을 찾아야만 한다. 물론 그것은 나 자신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천하의 고인 중에서 나와 상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지나지 않는다. 자, 이제 이 사부를 따라오도록 해라!" 그러자 당승무는 갑자기 잊었던 것이 떠올랐다는 듯 황급히 입을 열었다. "사부님, 그럼 일진 사형과 할아버지의 시체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당승무가 질문을 하면서 네 사람이 쓰러져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일진 사형과 시골 노인은 여전히 쓰러진 채 그 자리에 있었으나 두 사나이의 시체는 간 곳이 없고 단지 그 자리에 검은 물만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당승무는 몹시 기이한 생각이 들었으나 더 이상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고 묵묵히 앞서가는 흑포인을 뒤따라갔다. 두 사람이 모래사장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진 화상이 천천히 깨어났다. 잠시 운기 조식을 한 그가 사방을 둘러보자 당승무와 두 사나이는 간 곳이 없었다. "아…… 사분님, 죄송합니다. 이 제자는 최선을 다했으나 끝내는…… 부디 부처님의 자비가 내리시길……." 하고 중얼거린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자국씩 떼어 앞을 향해 걸어갔다. 당승무는 흑포도인을 따라 얼마나 걸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무수한 산을 넘도록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심으로 의아스러움을 금치 못하던 당승무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사부님, 어르신네의 댁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멀었습니까?" 그러자 흑포인은 잠시 발을 멈추고 먼 하늘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디.. "이 사부는 이 세상이 모두 집이니 일정한 거처가 없다. 하지만 이제 네가 나의 제자가 되었으니 일정한 거처 하나가 있어야 하겠구나……." "사부님께선 제자를 어디로 데려 가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이 사부가 전에 대파산(大巴山)을 지날 때 석실이 몇 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은 지세가 기이한 데다가 인적이 드물어 무공을 연마하기에는 최상의 곳이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당승무는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그곳은 놀기가 좋은가요?" 이 얼마나 천진스러운 질문인가! 흑포도인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산 위는 온통 복숭아 나무 숲이라 봄이면 아름다운 복숭아 꽃이 피고 여름이면 다 먹지 못할 만큼 많은 복숭아가 온 산을 뒤덮고 있다. 그래서 사부는 그곳을 도화요(桃花凹)라고 이름을 지었다. 여기서 약 반 시진만 가면 곧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당승무는 더욱 기뻤다. 두 사람은 얼마 걷지 않아 곧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이 도화요는 깊은 산 속에 있어 지세가 매우 은밀했다. 계곡 안에는 과연 몇 칸의 석실이 있었다. 두 사람이 석실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는 돌로 된 탁자와 의자가 있었고, 또한 옆에는 호롱불과 기름이 조금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전에도 이곳에서 수도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흑포도인은 나뭇가지를 한 아름 꺾어와 당승무와 함께 세 칸의 석실을 깨끗이 정리했다. 각기 방 하나씩 차지하고, 가운데 한 칸은 은거실로 사용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 일이 정돈되자 흑포도인은 당승무를 데리고 나가 온갖 야생 과일을 실컷 따먹게 했다. 다음 날 아침, 흑포도인은 당승무를 석실의 문 앞에 있는 평평한 초원으로 불러냈다. "얘야, 네가 전에 배운 것이 있으면 우선 한 번 해보도록 하려무나!" 그러자 당승무의 얼굴은 마치 수줍음을 타는 소녀처럼 새빨개졌다. "제자, 잘 하지 못합니다." 흑포도인은 그의 마음을 즉각 알아차리고는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이 사부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지 않고 어떻게 다른 무공을 배우려고 그러느냐?" 그 말에 당승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즉각 자기가 배웠던 권과 장을 시전해 보였다. 흑포도인은 신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그를 주시하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만한 나이에 그 정도를 할 수 있다니 그래도 괜찮구나." 당승무는 그 말에 어젯밤까지만 해도 무섭게 느껴졌던 그가 어느 때는 매우 자상하고도 부드럽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거의 아버지께서는 그날 원수가 찾아을 줄 알고 너를 미리 당숙의 집으로 피신시킨 것이다. 그런데 당문가전(唐門家傳)인 독법(毒法)과 몇 가지 암기법을 너에게 가르쳐 주었는지 모르겠구나……." 당승무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금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수 받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어머님께서는 저에게 침통 하나를 주시면서 호신용으로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흑포노인은 여간 섭섭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깝구나…… 아까와…… 만약 당문의 비전 독약과 노부의 독문기독(獨門奇毒)을 배합한다면 너는 천하무적이 될 수 있을 텐데……." 순간 당승무의 영특해 보이는 두 눈에서 기이한 빛이 번뜩였다. "그럼 사부님께서도 독약을 쓰십니까?" "헛허허허…… 노부의 일문은 독공(毒功)의 위주다. 넌 내가 손을 쓰지 않고 수 장 밖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보지 못했느냐? 독공을 하려면 우선 기초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 사부는 너에게 우선 내공법문(內功法門)을 가르쳐 준 뒤 삼 개월 후에 다시 약물 제작법과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말을 마친 그는 즉시 당승무를 데리고 석실로 들어가더니 내공을 전수시켜 주었다. 당승무는 원래 총명한 데다가 무림 일파의 종사인 당승종의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비록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아버지로부터 좋은 기초를 전수 받았었다. 그러한 당승무가 조용히 사부의 말씀을 경청하니 자연 빠른 시간내에 익힐 수가 있었다. 그날부터 당승무는 낮에는 무(武)를 연마하고 밤에는 공(功)을 연마함으로써 순식간에 반 개월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날씨는 점차 더워져 당승무는 입고 있는 솜옷을 그대로 입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날 무공을 연마한 뒤 그는 홀로석실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서 옷에 있는 실밥을 뜯고 속에 있는 솜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몇 번 솜을 끄집어 내던 그는 돌연 손끝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닿는 것 같아 얼른 꺼내 보았다. 그랬더니 그것은 뜻밖에도 한 장의 작은 종이를 접은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즉시 그 종이를 펴 보았다. 종아 위에는 몇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며 각 그림 밑에는 십여 종의 약명과 분량이 적혀 있었고 또 그 밑에는 깨알 만한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종이를 자세히 살펴보던 그는 그것이 바로 자기 가전의 독약과 암기임을 알아차리고는 몹시 기뻐했다. 그래서 즉각 솜을 모두 꺼내 자세히 살펴보자 모두 일곱 개의 종이 말이가 들어 있었다. 일곱 장의 종이를 손에 넣은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석실 안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사부님, 사부님, 솜옷 속에서 이런 종이를 몇 장 발견했습니다." 흑포도인은 그 말에 흥분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얼른 종이를 받아들고는 자세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지 종이 위에 적혀 있는 것은 아마 너의 가전에서 가장 무서운 몇 암기일 것이다. 이 사부가 듣기로 당문에서 무서운 암기 몇 가지는 자손대대로 물려받으면서 연마를 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천상의 신선이라 할지라도 이 몇 가지의 암기는 피할 수 없을 거다. 이 사부도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이제 이 종이를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구나. 몇 가지 암기에는 천공(天工)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배합한 약도 기묘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이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수염을 한 번 쓰다듬고는 진지한 태도로 다시 뒷말을 이었다. "이 약을 배합하는 것은 사부가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정교한 암기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아마 천하에서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고 말을 맺은 그는 일곱 장의 종이를 소중하게 소맷자락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부터 너는 본문의 무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공력을 삼개월 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동안 결코 딴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종이 몇 장은 잠시 보관하겠다." 이리하여 삼 개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자 당승무도 흑의도인에게 배운 권장도 어느 정도 익숙하게 다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내공도 많은 진전을 보았다. 두 사람이 정력을 쏟아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 또다시 반 년이 휙 갔다. 이 반 년 동안 흑의도인은 자기가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한 독공을 거의 전부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어느날 밤, 흑포도인은 당승무를 자기의 방 안으로 불러 들였다. "승무야, 네가 이 사부를 따라 무를 배운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그런데 너는 이 사부의 명호와 출신을 아느냐?" "제자 벌써부터 사부님께 이 점을 여쭈려고 했었으나 사부님께서 말씀이 없으시기에 감히 묻지를 못했습니다." 흑포인은 그 말에 빙그레 웃으며 당승무를 한참 동안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금 강호에서 이 사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니 너는 이 사부의 명호를 몰라도 괜찮다." 흑포도인은 처음에는 자신의 내력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 줄 모양이었으나 잠자기 무슨 생각에서인지 입을 닫아 버렸다. 당승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사부님 께서는……." "우리는 일 년이나 사도의 정을 가져 왔었다. 그런데 이렇게 헤어지면서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는 이유는 이 사부가 강호에서 악독한 사람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뜻밖의 말이었다. 당승무는 놀란 나머지 한동안 흑포도인을 잠자코 주시하더니 갑자기 털색 땅바닥에 끓어 엎드렸다. "사부님……." 흑포도인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젓더니 소매 안에서 일곱 장의 쪽지를 꺼냈다. "승무야, 일어나라. 그리고 이것은 네 가전의 비기이니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당승무는 오늘밤 사부의 태도가 이상한 것을 보자 내심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종이를 받아든 그는 불안해 하는 눈초리로 사부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닌 공력의 십중 팔을 너는 이미 터득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 몇 가지의 암기를 대신 제작해 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애석한 점은 네가 모든 것을 다 배운 뒤에 산을 내려가게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는 거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또 소맷자락 속에서 일곱 개의 동관(銅管)을 꺼냈다. "이것은 내가 너를 위해 제작한 일종의 독약이다. 너는 암기를 다 제작한 후에라야만 이것을 사용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의 암기를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은 현세에서 사마장홍(司馬長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설사 그를 찾았다 하더라도 그가 너를 위해 암기를 제작해 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이 사부는 너를 위해 여기 편지 한통을 준비했다." 하더니 다시 소맷자락 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건네 주었다. "너는 이 편지대로 행동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가 너를 위해 암기를 제작해 주거든 필시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 독약 다루는 일을 다시 연구하도록 해라. 그리고 일이 완전히 손에 익기 전에는 절대로 강호에 나가지 말아라." 당승무는 그의 말이 여간 의아스럽지 않았으나 감히 무어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해 둬야 할 것은 그 일곱 가지 암기는 독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라 어느 누구도 맞았다 하면 반드시 죽게 된다. 그리고 그 쪽지에 쓰여진 것처럼 그것은 해독법이 없으니까 사용하기 전에는 반드시 깊이 생각을 해서 써야만 한다."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면이다. 이걸 얼굴에다 쓰면 아무도 널 알아 보지 못할 것이다. 자 그럼 내가 산 밑까지 바래다 주마." 하고 말을 마친 그는 매미 날개처럼 얇은 가죽 가면 하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당승무는 그것을 받자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땅바닥에 털썩 엎드리더니 울먹이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부님…… 제자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산 밑으로 내쫓는 것입니까? 제자가 잘못한 점이 있으면 야단을 쳐주십시오. 그러니 저를 내쫓지는 마…… 말아 주십시오……." 여기까지 간신히 말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흑포도인의 팔에 매달려 대성통곡을 했다. 흑포도인은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민에 어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 어찌 평생 제자라고는 하나 밖에 두지 않은 너를 내쫓겠느냐? 이 사부는 원수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너더러 먼저 산을 내려가라고 한 것이다……" 흑포도인이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당승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마구 흑포도인의 얼굴에다 부벼댔다. "사…… 사부님, 그것은 또한 무슨 말씀이십니까?" 흑포도인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승무야! 이 사부는 오늘 저녁 무렵 나의 원수의 부하가 밖에서 몰래 숨어 이쪽을 관찰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죽였다. 아마 원수는 이미 뒤따라 왔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가전의 절학을 연마해서……." 여기까지 말하던 흑포도인은 갑자기 신광을 번득이더니 밖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구냐?" 그러자 밖으로부터 교태섞인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홋호호호……방장주(方掌主)께서 여기에서 무엇을 하시나 했더니 제자를 두셨군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몸매가 날씬한 중년부인이었다. 그녀는 짙게 화장한 얼굴에 흑진주같이 맑고 영롱해 보이는 눈을 타지고 있었다. 흑포도인의 눈에는 스산한 기운마저 서려 있었다. "신교교(申嬌嬌)잘 왔다. 삼 년간 나는 나를 본 사람은 반드시 돌려 보내지 않는다는 규칙을 하나 세웠다. 그리고 삼 년 전에 너의 일조(一爪)를 받고 만약 당문의 미독단이 없었더라면 노부는 아마 뼈다귀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당승무는 두사람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제자리에 선 채 더 이가 가까이 가려 들지 않았다. 요염하게 생글거리는 그녀에게 흑포도인은 다시 원한에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노부는 너 만미천호(萬尾天狐)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 그러나 만미천호는 조금도 두려워 하는 기색이 없이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호호호호……나는 명을 받고 죄를 범한 사람을 잡으러 온 것 뿐이니 구태여 싸울 필요는 없겠지……." 하고 말을 맺은 그녀는 갑자기 작은 삼각기 하나를 꺼내더니 가볍게 흔들었다. 다음 순간, "쏴! 쏴!" 하는 소리와 함께 여섯 개의 인영이 숲 양쪽으로부터 쏜살같이 나왔다 이어 그들이 부채꼴로 흑포도인을 둘러싸자 만미천호는 다시 삼각기를 흔들며 냉랭하게 소리쳤다. "가서 저놈을 끌어내라!" 그 순간, 분노의 빛을 얼굴 가득히 드러낸 흑포도인을 향해 여섯 명의 흑의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휘두르며 덮쳐갔다. 그들의 동작을 보건대 모두들 무공이 고강한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마치 벌려진 주머니처럼 흑포도인을 덮쳐들었다. 각기 공격하는 부위가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었다. 일단 공세가 발동되자 날카로운 검광은 마치 번개불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위축감을 주었다. 독인의 출현 흑포도인은 그들의 공격을 받자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보통 인물들이 아닌데…….' 하고 생각한 그는 즉시 커다란 소매를 펼쳐 유운비수(流雲飛袖)를 전개하여 사방을 휘감아 갔다. 다음 순간, 장검과 커다란 소매가 부딪치자 가벼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두명의 장검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원래 흑포도인의 소매 밑에는 한 쌍의 독살장(毒煞掌)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연속으로 두 번씩이나 빛이 번득이자 두 명의 사나이가 신음 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이어 흑포도인은 선 자리에서 단숨에 여덟 장이나 공격을 가하여, 나머지 네 사람으로 하여금 순순히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극히 순간적인 시간이었으나 잠시 여유를 얻은 그는 이어 상대방이 미처 반격을 가하기도 전에 재빨리 네 사람의 위로 몸을 날려 만미천호를 향해 덮쳐갔다. 그러나 네 명의 사나이들은 흑포도인의 무공이 이토록 고강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이어 일제히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네 사나이의 가느다란 남색빛 줄기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공중에 떠 있는 인영을 완전히 에워쌌다. 흑포도인은 몸을 공중에 띄운 채 이미 그들이 암기를 발사한 것을 알아채고는 재빨리 진기를 끌어 올려 커다란 소매를 독수리 날개처럼 펼쳤다. 그러자 그의 몸은 허공에서 또다시 위로 여덟 자 가량이나 떠오르는 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공중에서 날쌔게 오른손으로 만미천호의 얼굴을 향해 무서운 공격을 가했다. 만미천호는 그의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이 늙은 마두가 삼 년 동안 보지 못했더니 그동안 공력이 많이 정진되었구나……' 그러나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황급히 쌍장을 휘둘러 반격을 가했다. "펑!" 두 내가장력이 서로 부딪치자 즉시 회오리 바람이 일면서 사방의 나무와 땅바닥에 있던 흙먼지 등이 마구 날렸다. 만미천호는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몸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뒤로 칠팔 자나 물러났다. 한편 흑포도인은 몸이 땅에 달기가 무섭게 잽싸게 몸을 떠올리더니 일 장 밖으로 몸을 날렸다. 어느새 산발이 된 그는 옷자락을 바람에 날리면서 음침한 눈길로 만미천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그 순간, 네 명의 사나이가 다시 암기를 발하더니 검을 높이 쳐든 채 몸을 덮쳐왔다. 그러나 그들의 몸이 반쯤 공중에 떴을 무렵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는 게 아닌가. 그것을 본 만미천호는 가슴이 섬칫해서 즉시 옆으로 수 장쯤 물러서더니 품에서 조그마한 금색 종을 하나 꺼내 흔들었다. 이어 맑은 종소리가 울리자 흑포도인은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지……?' 그러나 흑포도인은 겉으로는 태연하게 빙그레 웃었다. "신교교,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그러는 거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숲 속으로부터 짐승의 올음소리 같은 포효 소리가 들리더니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번개같이 달려 나왔다. 마치 부상당한 맹수가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에 흑포도인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흉악한 맹수지?' 한데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온 것은 바로 흑의에다 검은 복면을 한 사람이었다. 단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두 쌍의 눈 뿐으로서 음침한 녹색빛이 발해지고 있었다. 경험이 풍부한 흑포도인이었건만 이토록 기이한 사람들은 처음 만나 보는 것이라 절로 소름이 오싹 끼쳤다. '저것들은 사람일까? 사람이라면 어째서 저런 야수 같은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일까…….' 이때 만미천호가 갑자기 싸늘한 조소를 띄더니 두 흑의인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 흑의인은 재빨리 몸을 돌리더니 소름이 끼칠 것만 같은 싸늘한 눈초리로 일제히 흑포도인을 응시했다. 다음 순간, 그들은 별안간 좌우로부터 덮쳐오더니 아무 소리도 않고 다짜고짜 장을 들어 내리쳤다. 이 두 사람의 신법은 신속한 데다가 기이하기 이를데 없었다. 흑포도인은 전혀 상대방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급히 몇 발자국 물러나 두 사람의 공격을 피했다. 두 흑의인은 일 격이 그에게 격중되지 않자 또다시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자 흑포도인도 즉시 소맷자락을 휘두르면서 내심으론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체 이 두 사람의 내력은 무엇일까……?' 그러는 동안 쌍방은 어느새 칠팔 초나 나누었다. 일이 이쯤 되고 보자 형세는 아까와 전혀 딴판으로 주위는 온통 먼지와 살기로 뒤덮였다. 흑포도인은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좀처럼 이 괴물 소리를 내는 두 흑의인을 간단히 처치할 수가 없었다. 두 혹의인은 마치 흑포도인과 큰 원한이라도 있는 듯이 매초마다 동귀어진의 살초를 전개해 왔다. 후포도인은 연속 독살장을 격출해냈건만 여전히 이 괴물 같은 두 사람을 격퇴시킬 수는 없었다. 극도로 화가 치민 그는 마침내 일 장을 휘둘러 왼쪽에 있는 흑의인을 향해 공격했다. 이 일 장은 매우 괴상한 것이라 왼쪽에 있던 흑의인은 피할 수가 없자 하늘 수 없이 장을 들어 응수했다. "펑!" 하는 소리가 올리면서 쌍장이 맞부딪치자 흑의인은 뒤로 다섯 보나 물러섰다. 흑포도인 또한 공력이 고명한 사람이었으나 흑의인의 장력에 크게 일 보 물러났다. 이어 흑포도인은 상대방을 유인하기 위하여 일부러 헛점을 드러난다. 아니나 다를까. 오른쪽에 있던 흑의인이 질풍처럼 달려오더니 그의 등을 향해 일 장을 내려친 것이다. 그러자 흑포도인은 속으로 냉소를 치면서 상대방의 장세가 몸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잠자기 몸을 돌려 일 장을 격출해 응수했다. 두 개의 장력이 부딪치는 순간 두 사람은 즉시 갈라졌으며 흑의인은 흑포도인의 장력에 밀려 뒤로 세 발자국이나 물러섰다. 흑포도인은 그들 두 사람과 연속으로 두 장을 겨루자 설사 계속해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위치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면서 한발한발 디딘곳에는 각기 약한치 정도깊이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이윽고 몸을 완전히 고정시킨 그는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그러나 그의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나지막한 포효 소리가 함께 두 흑의인이 다시 덮쳐왔다. 흑포도인은 그것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한편 재빨리 장을 들어 응수했다. '아니, 이들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흑포도인이 연마한 독살장이 격중되면 누구든 그 자리에서 즉시 죽게 된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은 일이 장 근처에만 있어도 중독이 됨은 물론 세상에서 가장 무공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것을 맞았다 하면 반드시 중독된다. 그러나 두 흑의인은 그것을 맞고도 잠시 동작만 멈추었을 뿐 다시 맹렬한 공격을 가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두 사람은 귀신이란 말인가. 갈포도인은 이상한 두 사람을 대하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럼 이들이 바로……."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전력을 다해 두 흑의인을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공력이 높아 둘을 상대하면서도 선기를 잡기는 했으나 괴물같은 두 사람을 처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 사람은 다시 어울려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흑포도인은 겨루는 동안 그들 두 사람의 내력에 관해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 두 흑의인은 중독이 안 된게 아니라 그들의 신체적 구조가 좀 특이하기 때문에 독이 침투되는 속도가 비교적 느리다는 것 뿐이었다. 일단 그런 사실을 알아차린 그는 더 이상 두 사람과 겨루지 않고 방어에만 치중을 하면서 힘을 저축했다. 두 흑의인도 공력이 높기는 했으나 몹시 초조해진 모양인지 미친듯이 덤벼들었다. 그들의 공격은 여전히 매섭기 이를 데 없는 것이라 한 번 제대로 맞았다 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무서운 것이었다. 만미천호는 제자리에 못을 박은 듯 서서 싸움을 방관만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그 싸움이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리하여 약 반 시간 정도가 지나자 두 흑의인의 공세가 점점 느려지는 것 같더니 발걸음도 매우 무거워 보였다. 그러자 흑포도인은 그제서야 숨을 길게 내쉬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옆으로 비키면서 두 사람을 향해 각기 가벼운 일 장을 격출해 냈다. 이 일 장이 격출되는 순간 두 흑의인은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만미천호는 묵묵부답으로 그 자리에 잠자코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흑포도인은 갑자기 미친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핫하하하…… 신교교, 네가 데리고 온 놈들은 모두 쓰러졌구나. 이제 그만 가보시지……." 그러자 만미천호는 표독스럽게 그를 쏘아보면서 외쳤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 쓰러졌다. 하지만 나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으니까 좀 더 있어야 하겠다." 그녀의 말 속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으나 흑포도인은 무엇이 우스운지 껄껄대며 웃었다. "핫하하하…… 지금 쓰러진 자들은 대체 누구냐?" 그러자 만미천호는 표독스럽게 쏘아보더니 냉랭하게 내뱉았다. "방장주의 도살장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내 어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너에게 덤비겠느냐?" 흑포도인은 그 말에 더욱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으하하하……, 신교교, 이 노부는 네가 이미 다른 어떤 것을 준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독살장의 해약은 이미 나만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너는 내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너를 공격했는지 아느냐?" "어디 한 번 들어 보자!" 만미천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자 흑포도인은 득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거는 영주(令主)이니 천하의 어떤 독문기독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부가 알기로는 단 한 가지의 해독약은 아직 너의 수중에 없다. 만미천호는 그 말에 가볍게 놀라는 것 같더니 곧이어 당치도 않다는 듯이 냉소를 날렸다. "흥! 그게 도대체 뭐란 말이냐?" 흑포도인은 짙은 화장을 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바로 당문의 칠절산(七絶散)에 대한 해독약이다!" 그 순간 만미천호는 뒬 듯이 흠칫 놀라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럼 그게 너의 손에 들어 있다는 말이냐?" 흑포도인의 차가와 보이는 얼굴에는 순간 음침한 빛이 떠올랐다. "후후후…… 이 노부는 비록 해약을 얻지는 못했으나 당문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칠절산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시험적으로 방금 너에게 공격을 했었다. 아마 네가 마신 칠절산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까 공중에서 그녀에게 공격을 가할 때 칠절산도 아울러 뿌렸던 것이다. 그 순간, 만미천호는 안색이 급작스럽게 변했으나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 또박또박 내뱉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흑포도인은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며 통쾌하다는 듯 큰 소리로 마구 웃어젖혔다. "핫하하하…… 아까도 말했듯이 이 노부를 만난 사람은 결코 내일을 넘길 수 없다. 내게 거울이 없는 게 유감이구나. 그렇지 않다면 나는 네게 자신을 비춰 보라고 할 텐데……." 흑포도인의 의미있는 말에 섬칫해진 그녀는 자기의 얼굴을 한 번 만져보았다. "내가 뭐가……." 그녀의 뒷말은 그녀의 손이 자기의 얼굴에 가 닿는 순간, 끊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광목처럼 뻣뻣한 데다가 마비가 되었는지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이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검고 윤기 흐르던 머리가 마치 마른 달처럼 한 웅큼 뽑혀졌다. 흠칫 놀란 만미천호의 얼굴에는 원한의 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방가야! 내 솔직히 말해 두지만 너는 방금 두 명의 독인(毒人)을 연속 이 장을 겨루었지. 너는 그걸로써 이미 중독이 되었다. 또 세상에는 그것을 치료할 약이 없다." 싸고 말을 마친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쏜살같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독인? 과연 그들은 독인을 만들어 냈구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황급히 석실로 뛰어들어가 호로병 하나를 꺼내더니 몇 알의 환약을 급히 입 안에 넣었다. 이어 그는 단정하게 정좌를 하고 앉아 운기 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눈을 부릅 뜬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으음, 독인…… 과연 해약이 없구나……." 하고 말한 그는 침중한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동안 흑포도인의 독살장에 의해 죽은 여덟 구의 시체는 이미 노란 액체로 변하여 홀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흑포도인은 신속하게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오더니 석실 앞 초원에다 깔았다. 이어 다시 석실로 들어간 그는 나뭇가지 하나를 당승무의 몸에다 가볍게 찍었다. 아까 그는 당승무가 두려움을 모르고 석실 밖으로 나올까봐 만미천호가 나타난 즉시 혈도를 찍었던 것이다. 당승무는 혈도가 풀리자 손과 발을 움직여 보더니 싱글벙글거리며 물었다. "사부님, 그 신가는 도망갔나요?" 흑포도인은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마 그녀는 내일 아침까지 밖에 살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석실 밖으로 나갔다. 당승무는 사부의 신색이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감히 묻지 못하고 잠자코 사부의 뒤를 따라 나갔다. 흑포도인은 석실을 나서자 초원 위에 쌓아둔 나뭇가지 위에 가서 심각한 표정으로 천천히 앉았다. 당승무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따라가 앉으려고 했다. "숭무야, 너는 거기에 서 있거라!" 막 자리에 앉으려던 그는 사부의 근엄한 말에 즉시 공손한 태도로 절을 하고는 경의에 찬 시선으로 사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흑포도인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숭무야, 이 사부는 너를 산 밑까지 바래다 줄 수가 없게 되었구나." 당승무는 사부의 말투가 어째 이상하다고 느껴 급히 물었다. "아니! 사부님, 왜 그러십니까?" 흑포도인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사부는 그들이 독인을 만들어 낼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은 바로 몸에 극독을 지닌 독인이었다. 그런줄도 모르고 나는 그들과 이 장을 싸줬기 때문에 중독이 되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당승무는 황급히 물었다. "사부님의 해독단(解毒丹)?" 그러자 흑포도인은 처량하게 웃었다. "독인의 독을 제거할 수 있는 해독은 이 세상에 없다. 승무야, 너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의 십중 칠팔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평소에 무�기를 쓰는 적이 별로 없지만 단 한 가지 흑옥불(墨玉佛)이 있다. 이것은 매우 회귀한 방신(防身) 무기로서 왕년에 내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것이다. 옥불 중에는 운불오십식 (雲佛五十式)이 숨겨져 있으므로 너는 그 그림에 따라 스스로 익힐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옥불은 내가 오랫동안 지니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발각되기가 쉬우니 너는 그것을 주머니를 만들어 넣고 다녀라. 그리고 절대로 필요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쓰지 말아라……." 이야기를 듣는 동안 눈물을 글썽이던 당승무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다그치듯 물었다. "사부님……대체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사부님을 위해 복수해 드리겠습니다." 몰려드는 탐색군 흑포도인은 스르르 눈을 내리감더니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승무야, 나는 이미 너희 당가의 칠절산으로 신교교를 죽였다. 그녀는 이 사부와 마찬가지로 내일 아침을 넘기지 못하므로 구태여 네가 복수할 필요도 없다……." 당승무는 사부가 내일 아침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을 하자 그만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사부님!" 하고 소리친 그는 곧 나무더미 위에 앉아 있는 사부에게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흑포도인은 흠칫 놀라 급히 소리쳤다. "서라! 절대로 내 몸에 닿아서는 안 된다!" 당승무는 그 말에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해 하다가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지금 죽지 않고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수십 년 간의 수련에 의해서다. 이제 내가 죽거든 너는 곧 여기다 불을 지르고 날이 새는 즉시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곧장 이곳을 떠나라……내가 죽더라도 절대로 시체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그 소리를 들은 당승무는 당황하여 급히 소리를 질렀다. "사…… 사부님……." 그러나 두 눈을 질끈 감은 흑포도인에게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어 단정하게 앉은 그의 입에서 한 줄기 검은 피가 흘러 내렸다. 그는 마지막 진기로 스스로 심맥(心販)을 끊어 자결한 것이다. 그것을 본 당승무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했다. 잠시 후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사부의 시체 앞에 공손히 절을 몇 번 한 그는 석실로 들어가더니 불씨를 가져와 나뭇가지에다 불을 질렀다. 얼마가지 않아 불길은 점점 거세어져 삽시간에 나무를 태워버렸다. 일 년 간이나 정이 들었던 사부를 하루 아침에 잃어버린 당승무의 심정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이젠 텅 빈 이 산에는 오직 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당승무는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자 새삼 설움이 솟아나 바위 위에 주저앉아 다시 한 번 대성통곡을 했다. 어느덧 당승무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나무 위의 불길도 수그러졌고 저쪽 산 위에는 먼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던 그는 아직도 타고 있는 사부의 시체를 보자 참지 못하고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으음…… 독인, 사부님을 돌아가시게 한 요물. 내 반드시 모조리 소멸시키고야 말겠다……." 이를 갈면서 중얼거리던 그는 곧 석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흑포도인이 자기를 위해 제작한 일곱 가지의 독약과 자기에게 남겨준 옥불, 그리고 옷가지 등을 챙겨 등에다 검어지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석실을 나왔다. 이때 날은 이미 다 밝았으며 나뭇가지에 붙은 불도 거의 다 꺼졌다. 강호를 누비던 노마두 흑포도인도 재와 항께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당승무는 불더미 안으로 걸어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사부님, 고이 잠드십시오. 제자 반드시 사부님을 위해 복수를 해드리겠습니다." 하고 그는 절을 몇 번 하더니 그대로 밖을 향해 걸었다. 막 계곡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두 사람이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 즉시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얼마가지 않아 두 사람은 계곡 입구까지 뛰어 왔기 때문에 당승무는 숨어서 그들을 자세히 살필 수가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비쩍 마른 데다가 키가 컸으며 얼굴이 말처럼 긴 사십 새 가량의 남자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말상을 한 사나이보다 조금 나이가 적어 보이는 보통 체격의 사나이로써 안색이 누르끼리한 데다가 턱밑까지 수염이 나 있었다. 계곡까지 뛰어온 두 사람 중 누르끼리한 사나이가 먼저 흥분된 어조로 소리쳤다. "도화림 (挑花林) 에다가 도화곡(桃花谷) 이라…… 보아하니 여기인 것 같군요." 말상을 한 사나이의 손에는 양가죽이 감겨져 있었다. "물론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우리 사형제가 십오 년 간이나 찾아 헤맨 끝에 오늘에서야 비로소 찾게 되었군." 숨어서 몰래 그들의 행동을 엿보던 당승무는 의아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십오 년 간이나 찾아 헤매다녀 여기에 온지 겨우 일 년전에 안 된 우리의 원수는 아닌 모양이로군…….' 이때 누런 얼굴을 한 사나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중간 석실은 영금실(營金室)이다. 이 계곡에 석실이 있어야 할텐데……." 말상을 한 사나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가볍게 말을 받아 넘겼다.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곡 중에 들어가면 발견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당승무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공부를 했기 때문에 웬만한 말은 다 받아들을 수가 있었으나 그들의 말은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말은 어찌 들으면 노래의 한 귀절 같기도 했다. 당승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이미 칠팔 장 밖에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당승무는 그것을 보자 호기심이 부쩍 일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몰래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경공술에 능통했는지 얼마 가지 않아 곧 석실에 도착할수 가 있었다. 누런 얼굴의 사나이는 멀리서부터 세 개의 석실을 알아보고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과연 여기에 있구나……." 그러나 말처럼 얼굴이 긴 사나이는 그와 대조적으로 비교적 침착했다. "우리 어디 한 번 들어가 보세요."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고는 각기 석실의 양쪽에 서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어 말상을 한 사나이가 검을 치켜든 채 조심스럽게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가더니 갑자기 번개처럼 석실 안을 향해 덮쳐갔다. 누런 얼굴의 사나이도 질세라 곧 뒤따라 들어갔다. 몰래 숨어서 그 광경을 살피던 당승무는 그들의 행동을 보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석실로 들어갔던 두 사람은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다시 뛰어나왔다. 이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던 말상의 사나이가 초원에서 한 자루의 장검을 집어들고는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누군가가 여기서 격투를 했었군……." 하고 말한 그는 다시 초원에서 연속 다섯 자루의 장검을 찾아내었다. "보아하니 여섯 사람이 죽은 모양이야. 누군지 여섯 사람이나 한꺼번에 죽일 수 있다니 무공이 매우 고강할 것이다……." 하고 말하던 그는 자기의 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몇 점의 검은 피가 묻어 있고 푸른 초원의 군데군데에 물에 젖은 듯한 흔적이 있음을 발견했다. "화… 화골단(化骨丹) 어쩐지 여섯 자루의 검만 있고 시체는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말상의 사나이는 장검으로 검은 피가 묻어 있는 초원을 뒤적거리다가 모두 여덟 군데에 피가 묻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제, 이 초원에서 모두 여덟 명이 죽은 모양이네……." 그러자 누런 얼굴을 한 사나이가 고개를 돌려 말상을 한 사나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사철…… 사형의 검……" 말상을 한 사나이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자기의 검을 내려다 보자 자기의 반짝이던 검의 끝부분이 어느 사이인지 검게 변해 있는 게 아닌가! 가슴이 섬칫해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극독……내 검에는 극독이 묻었네…… 아마 이 여덟 사람들도 도화랑군(桃花郞君)의 비실(秘室)을 찾아 왔다가 살해를 당했을 것이네. 그리고 이들을 죽인 사람도 분명히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러자 누런 얼굴의 사나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하기 말을 받았다. "설사 그가 옆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두 사람이 있는 이상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말상의 사나이는 그와 대조적으로 진지하게 눈까지 껌벅거려가며 말했다. "도화랑군의 비실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식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분명히 이 계곡에는 도처에 살기가 있을 것이네. 그리고 이 잿더미에도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우리는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하네……." 숲 속에 숨어 있는 당승무로서는 그들이 말하는 도화랑군이 누군지는 전혀 알 턱이 없었으나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도화랑군의 비실을 찾기 위한 것이라는 것만 알 정도였다. 한편으로 그는 이곳에서 일 년이나 살았기 때문에 풀 한 포기에 대해서도 매우 익숙했기 때문에 도화랑군의 비실이라는 말에 매우 의아스러워졌다. 그가 이렇게 생각을 하는 동안 말상의 사나이가 다시 수중의 장검으로 잿더미를 조심스럽게 뒤지기 시작했다. 당승무는 그가 잿더미를 함부로 뒤지는 것을 보자 속에서 뜨거운 피가 치솟는 것만 같았으나 두려운 나머지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 걸어 들어가더니 갑자기 번개처럼 석실 안을 향해 덥쳐갔다. 누런 얼굴의 사나이도 질세라 곧 뒤따라 들어갔다. 몰래 숨어서 그 광경을 살피던 당승무는 그들의 행동을 보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석실로 들어갔던 두 사람은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다시 뛰어나왔다. 이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던 말상의 사나이가 초원에서 한 자루의 장검을 집어들고는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누군가가 여기서 격투를 했었군……." 하고 말한 그는 다시 초원에서 연속 다섯 자루의 장검을 찾아내었다. "보아하니 여섯 사람이 죽은 모양이야. 누군지 여섯 사람이나 한꺼번에 죽일 수 있다니 무공이 매우 고강할 것이다……." 하고 말하던 그는 자기의 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몇 점의 검은 피가 묻어 있고 푸른 초원의 군데군데에 물에 젖은 듯한 흔적이 있음을 발견했다. "화……, 화골단(化骨丹) 어쩐지 여섯 자루의 검만 있고 시체는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말상의 사나이는 장검으로 검은 피가 묻어 있는 초원을 뒤적거리다가 모두 여덟 군데에 피가 묻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제, 이 초원에서 모두 여덟 명이 죽은 모양이네……." 그러자 누런 얼굴을 한 사나이가 고개를 돌려 말상을 한 사나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사형…… 사형의 검……." 말상을 한 사나이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자기의 검을 내려다 보자 자기의 반짝이던 검의 끝부분이 어느 사이인지 검게 변해 있는 게 아닌가! 가슴이 섬칫해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극독……내 검에는 극독이 묻었네…… 아마 이 여덟 사람들도 도화랑군(桃花郞君)의 비실(秘室)을 찾아 왔다가 살해를 당했을 것이네. 그리고 이들을 죽인 사람도 분명히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러자 누런 얼굴의 사나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설사 그가 옆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두 사람이 있는 이상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말상의 사나이는 그와 대조적으로 진지하게 눈까지 껌벅거려가며 말했다. "도화랑군의 비실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식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분명히 이 계곡에는 도처에 살기가 있을 것이네. 그리고 이 잿더미에도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우리는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하네……." 숲 속에 숨어 있는 당승무로서는 그들이 말하는 도화랑군이 누군지는 전혀 알 턱이 없었으나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도화랑군의 비실을 찾기 위한 것이라는 것만 알 정도였다. 한편으로 그는 이곳에서 일 년이나 살았기 때문에 풀 한 포기에 대해서도 매우 익숙했기 때문에 도화랑군의 비실이라는 말에 매우 의아스러워졌다. 그가 이렇게 생각을 하는 동안 말상의 사나이가 다시 수중의 장검으로 잿더미를 조심스럽게 뒤지기 시작했다. 당승무는 그가 잿더미를 함부로 뒤지는 것을 보자 속에서 뜨거운 피가 치솟는 것만 같았으나 두려운 나머지 감히 소리를 낸지 못했다. 이때 장검으로 잿더미를 뒤적거리던 말상의 사나이가 갑자기 나직한 비명을 지르더니 황급히 장검을 거두고는 검끝을 바라보았다. '과연 잿더미 속에 한 구의 시체가 있군. 그리고 이 사람은 이미 불에 탔으나 기독은 아직도 남아 있군.' 이제 보니 잿더미를 뒤적이던 그의 검 끝이 아까보다 더욱 검게 물들여져 있었다. 그것을 본 누런 얼굴의 사나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아마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을 한 모양이로군요." 그러자 말상의 사나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받았다. "바로 그 점이 이상하다는 것이네. 그는 무엇 때문에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을 했을까?" "보아하니 이 계곡에는 더 이상 사람이 없는 모양이군요. 그러니 우리는 빨리 그 도화랑군의 비실이나 찾도록 합시다." 말상의 사나이는 음산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지도에 그려진대로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네. 자, 그럼 시작하세." 하고 말한 그는 즉시 손에 든 양가죽을 펼치더니 자세히 들여다 보고 나서야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사제, 빨리 가 보게. 석실 오른쪽에 작은 연못 하나가 있는데 그 연못 옆에는 두 개의 돌의자와 한 개의 돌탁자가 있을 것이네. 그리고 그 돌탁자 위에는 바둑판이 새겨져 있을 거고……." 누런 얼굴의 사나이는 그의 말에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큰 소리로 외쳤다. "있습니다!" "좋아. 그럼 그 돌탁자를 잡고 힘껏 오른쪽으로 세 번 돌리고 나서 다시 왼쪽으로 한 번 돌리게." 누런 얼굴의 사나이는 아무런 군소리도 없이 그가 시키는대로 한 뒤에 다시 물었다. "됐습니까?" 말상의 사나이는 양가죽을 들여다 보고는 안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그 돌상을 서쪽을 향해 밀어내게!" 누런 얼굴의 사나이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곧 두 손으로 돌탁자를 밀자 돌탁자는 쉽게 약 세 자 가량 밀려났다. 그러자 그 밑에 하나의 동그란 철판이 나타났다. 누런 얼굴의 사나이가 막 그것을 바라보자 말상의 사나이가 급히 외쳤다. "밑에 동그란 철판이 있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철판을 열게. 그 속에 쇠고랑이 하나 있을 테니 그걸 힘껏 세 번만 끌어 올리게." 누런 얼굴의 사나이가 즉시 대답을 하고 나서 그 철판을 열자 그속에는 과연 쇠고랑이 하나 들어 있었다. 이어 그가 그 쇠고랑이를 힘껏 세 번 잡아당기자 갑자기 땅 속에서 일진의 가벼운 진동 소리가 들렸다. 놀란 그가 황급히 손을 놓자 동그란 철판은 순식간에 저절로 내려와서 도로 덮혀졌다. 그러자 돌로 된 탁자도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리더니 원상태대로 돌아갔다. 그것을 본 누런 얼굴의 사나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땀을 흘렸다. "만약 내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 손은 벌써 부러졌겠구나……." 이때 땅 속에서 들리던 진동 소리가 멎는 것과 동시에 석실 안에서 일진의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몰래 숨어서 보던 당승무가 호기심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석실 안을 들여다 보자 석실 중간에 있는 벽이 서서히 갈라지면서 까만 동굴이 하나 나타나는 게 아닌가! "저 동굴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도화랑군의 비실인가 보구나." 말상의 사나이는 동굴이 나타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마구 웃어 젖혔다. 바로 그때 누런 얼굴의 사나이가 마치 유령처럼 소리도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개사형, 이제 들어갈 수 있겠소?" 그의 음성이 들리자 말상의 사나이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갑자기 검을 휘둘러 번개같이 몸 뒤에 있는 누런 얼굴의 사나이를 향해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즉 누런 얼굴의 사나이는 입으로는 말을 맺으면서 검으로는 이미 말상의 사나이의 등을 내리찔렀다. 둘 다 공격이 약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건만 누런 얼굴의 사나이의 검은 말상을 한 사나이의 등골을 찔렀고 말상을 한 사나이의 검은 상대방의 아랫배를 찔렀다. "윽……으윽!" 말상의 사나이는 등에 칼이 꽂힌 채 앞으로 두 발자국 달려가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으음…… 네가 감히 나에게 독수를 쓰다니……." 말을 채 맺지도 못한 채 그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누런 얼굴의 사나이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서더니 아랫배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득의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네 놈이 혼자 독차지하려는 마음을 품은 줄 내 이미 알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 둘 중에 누구 하나는 죽어야 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자기의 아랫배를 내려다 보더니 금시 안색이 원망의 빛으로 바뀌어졌다. "독…… 독…… 네 놈의 검에……독이……." 원래 그의 상처는 깊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그의 배에서는 시커먼 피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비통에 찬 고함을 지르던 누런 얼굴의 사나이는 한 차례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몰래 숨어서 이 참극을 지켜보던 당승무의 두 손과 발은 온통 땀에 젖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나지막하면서도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이 이렇게 빨리 죽을 줄은 이 노부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 말소리와 함께 두 구의 시체 앞에 진한 녹색의 장포를 입고 허리엔 커다란 띠를 두른 깡마른 작은 노인이 나타났다. 당승무는 마른 침까지 삼켜가며 그 사람을 주시했지만 이 사람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노인은 천천히 몸을 숙여 땅바닥에 떨어진 양가죽을 줍더니 한 손으로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돌아섰다. 이어 그는 깊게 패인 두 눈으로 당승무가 숨어 있는 곳을 뚫어지더니 주시하더니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나와도 된다……." 숨어서 밖을 내다보던 당승무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온몸이 오싹해짐을 느껴 땅바닥에 찰싹 엎드린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녹포인은 눈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당승무 쪽을 주시하더니 가볍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네가 숨는다고 해도 내가 보지 못할 줄 아느냐? 허허허…… 이 노부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너를 제일 먼저 보았다. 자, 순순히 말할 때 어서 나와라!" 당승무는 그의 한 쌍의 눈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고 느껴지자 더 이상 숨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즉각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숲 밖으로 달려나갔다. "나오라면 나가지, 누가 무서워할 줄 아십니까?" 녹포인은 숲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이 뜻밖에도 어린 소년인 것을 보자 절로 어안이 벙벙해진 모양이었다. "이제 보니 넌 어린 소년이었구나. 너도 나처럼 도화랑군의 보물을 가지고 싶어 왔느냐?" 그러자 당승무는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저는 보물 따위엔 관심이 없으니 당신이나 들어가 보세요." 녹포인은 당승무의 말이 당돌하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음산한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여기에 오는 거야 모르겠지만 다시 나간다는 것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도화랑군의 밀실 너무나 뜻밖의 말이라 당승무는 흠칫 놀라 두 눈을 왕방울만하게 부릅떴다. "아니, 그건 어째서죠?" 녹포인은 감정이라고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건 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오직 나를 따라 저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당승무는 말을 받았다. "저는 보물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따라가죠? 저는 따라가지 않겠어요." 비록 어린 그였으나 그의 말 속에는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녹포노인이 그의 말을 듣고는 음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사람 몸체만한 나무를 향해 왼손을 가볍게 내리쳤다. "팍!" 가벼운 단 일 격이었으나 그 두꺼운 나무는 어이없이 부러지고 말았다. 녹포인은 쓰러진 나무에서 당승무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네 목은 이 나무보다 튼튼하냐?" 당승무는 눈 앞에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다소 겁을 집어 먹은 모양이었다. "제가 들어가지 않았다면 당신은 저를 죽일 겁니까?" 그러자 녹포인은 음침하게 웃으며 당승무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했다. "어쨌건 그저 네가 이 노부의 말을 순순히 듣는다면 노부는 너를 죽이지는 않을 뿐만 아니라 너에게도 좋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다시 갈라진 동굴을 들여다 본 당승무의 마 음에서는 강렬한 호기심이 일어났다. "좋아요…… 따라 들어가겠어요……." 녹포인은 그제서야 어조가 다소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너는 나의 명령에 철저히 따라야만 한다. 저 동굴 안에는 갖가지 위험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 노부가 너더러 나를 따라 오면서 내 명령에 따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위험에서 너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다." 당승무는 그 소리를 듣자 더욱 강한 호기심이 끓어 올라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의 말에 따르겠어요." 그러자 녹포인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음산한 미소를 날렸다. "너는 참 호기심이 많구나." 하고 중얼거린 그는 곧 석실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당승무도 그의 뒤를 따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어갔다. 석실 안에 있는 동굴은 몹시 어두워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으나 단지 그 동굴이 기다란 통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실로 들어온 녹포인은 먼저 양가죽을 펼쳐 놓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갑자기 돌을 하나 집어 동굴 속에다 던졌다. 그러나 속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다시 두 개의 돌을 던졌으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의미있게 씨익 웃더니 네 번째의 돌을 던졌다. 다음 순간 실로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즉 돌이 탁에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땅이 아래로 내려 앉더니 그위로 무수한 화살이 사방에서 마구 발사되는 게 아닌가. 그것을 본 당승무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이 속에는 함정이 많은가 보구나……." 잠시 후 화살이 멎자 녹포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보았느냐?" 하고 말한 그는 당승무의 대답도 듣지 않고 즉시 품에서 초를 하나 껴내 주었다. "참, 네 보자기 속에 무기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구나, 어서 꺼내라." 그 말에 당승무는 사부의 불진이 생각나 황급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보자기 속에는 무기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녹포인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혹시 너는 검을 쓸 줄 아느냐?" "……." "그럼 됐다. 나가서 검을 하나 주워 오도록 해라." 당승무는 급히 밖으로 나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검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골라 잡고는 다시 석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좋다. 그럼 이제 촛불을 붙여 네가 앞장을 서도록 해라." 그 소리를 들은 당승무가 그제서야 상대방의 저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위험한 곳이니까 날더러 길을 안내하라고 한 거로군.]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잠시 망설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럼 어떻게 가야 하지요?" "노부가 가르쳐 줄 테니 서슴치 말고 들어가라. 우선 왼쪽으로 세 발자국 들어가라." 당승무는 녹포인의 명령에 따라 촛불을 밝혀 들고는 동굴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가 막 두 번째 발을 내딛자마자 갑자기 뒤에서 일진의 우렁찬 소리가 들려오더니 석벽이 닫히고 말았다. 그러자 동굴 속은 대번에 지옥의 세계처럼 캄캄해졌으며 당승무가 출고 있는 촛불만이 희미한 빛을 발해 겨우 눈앞 일 장 정도의 거리 밖에 볼 수가 없었다. 당승무는 겁이 덜컥 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을 멈추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 동굴 문이 닫혔습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녹포인이 황급히 소리쳤다. "지체해서는 안 되니 잘 기억해 두어라. 여기서 세 번째 발자국을 딛자마자 즉시 오른쪽 벽 밑으로 달려가서 다시 세 발을 가야 한다." 녹포인은 그의 몸 바로 뒤에서 그를 바짝 뒤따르며 시시각각으로 지시를 했다. "앞으로 두 번 뛰어 넘어서 다시 옆으로 한 발자국 옮겨 중간에 멈췄다가 다시 앞으로 세 발자국 가라. 반드시 잘 기억해서 조금도 틀리게 가서는 안 된다." 당승무는 그의 수중에 있는 양가죽 위에 도법(走法)이 적혀 있음을 깨닫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그가 시킨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 통로는 넓고도 반듯했으며 조금도 수상해 보이는 곡선이 없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이곳에 무시무시한 함정과 살기가 서려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당승무는 계속해서 녹포인의 지시에 따라 약 한 시진 정도를 걸은 후에 드디어 통로의 끝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면서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석굴이 나타났다. 정면에는 거대한 석벽으로 사람의 키만한 동굴 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동굴 위의 커다란 현판 위에는 도화지궁(桃花之宮) 이라는 네 글자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호기심과 신비감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그에게 녹포인은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 당승무의 몸은 통로를 지나오는 동안 완전히 지쳐 식은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안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그는 얼른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곳은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 건가요?" "양가죽 위에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으니 아마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들어가라." 당승무는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되긴 했으나 여지껏 통로를 지나는 동안 신경이 예민해져 한 걸음 한 걸음에도 신중을 기했다. 일단 동굴 안에 들어서자 우물 같은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그 우물을 지나자 가운데에는 커다란 대청이 하나 있었는데 그 대청의 화려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양쪽 길에는 각기 여덟 명의 악기를 든 사람의 석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가 마치 산 사람이 악기를 켜고 있는 것처럼 정교했다. 두 사람이 앞으로 조금 더 걸어 가니 정면의 계단 위에 주렴이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 주렴은 모두가 콩알 만한 진주로 엮어진 것으로써 촛불이 비치자 눈이 부실 정도로 오색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 주렴 앞에는 주홍빛이 감도는 목패가 있었는데 그 뒤에는 경사경배라는 금박의 네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녹포인은 그 목패를 보더니 황급히 소리쳤다. "빨리 무릎을 꿇어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즉시 당승무의 뒤 가까이 오더니 위에서 그대로 덮쳤다. 이것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이었다. 당승무는 그의 고함 소리를 듣고 얼른 몸을 숙이려 하는 찰나에 녹포인에 의해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게 되었다. "쾅!" 갑작스럽게 쓰러지는 바람에 머리가 땅에 부딪치자 그는 머리가 아찔해지면서 코 끝으로 향그러운 향내를 맡을 수가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양쪽에서 갑자기 음악 소리가 울리는 것 같더니 그 음악 소리 속에 일진의 가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소낙비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조금전 암기가 무수히 날아드는 소리였다. 당승무는 암기로 유명한 당문의 출신이었으므로 즉각 소리를 알아듣고 땅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당승무는 자기의 몸을 덮치고 있는 녹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가 자기의 몸 위에 있었기 때문에 당승무는 몸을 보호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큰일났구나. 이 녹포인 때문에 많은 암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지만 만약 그가 이렇게 죽는다면 이 동굴 속에 나 혼자만 남을 게 아닌가……." 나이가 어린 그였기에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으나 너무도 무서운 나머지 입조차 떨어지지 않는 듯 했다. 이윽고 으악 소리가 멎자 암기가 날아오는 소리도 멎었다. 그와 동시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녹포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입고 있던 녹색 장포를 한 번 툭툭 털고는 긴 숨을 내쉬는 게 아닌가! "휴-무서운 암기로구나." 녹포인은 당치도 않다는 듯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어떤 암기가 감히 노부를 상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당승무가 급히 그의 녹색 장포를 살펴보자 과연 조금도 암기를 맞은 흔적이 없었다. 이어 주위를 살펴본 그는 대경실색을 할 정도로 놀랬다. 두 사람이 엎드려 있던 곳만을 제외하고는 온통 작은 못과 화살, 침 등의 암기가 무수히 꽂혀 있는 게 아닌가. 모두가 한결같이 싸늘한 푸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극독이 묻어 있음이 분명했다. 만약 그 중의 하나만 맞더라도 당장 죽게 될 것이다. 당승무는 갑자기 아까 녹포인이 냈던 비명 소리가 생각났다. "참 이상하다. 아까 그 소리는 분명히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이런 노인이 어째서 그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당승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녹포인을 주시했다. 그러자 녹포인도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소리쳤다. "묄 보고 있는 거냐?" "전 아까 당신의 비명 소리가 여자의 소리와……." 당승무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녹포인은 눈을 번득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는 이제 살고 싶지 않느냐?" 당승무는 그의 말에 놀라기에 앞서 오히려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가 그런 말을 한 것은 그리 큰 잘못도 아닐 텐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시는 겁니까?" 그 순간, 무섭게 표정이 달라진 녹포인이 갑자기 왼손을 쳐들자 은빛의 손이 나타났다. 이어 그는 칼처럼 예리한 손가락을 당승무의 앞에 내밀어 보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너 하나쯤 죽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당승무는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다…… 당신의 손은 은으로 만든 것인가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당승무가 뒤로 후퇴를 하자 대청 위에 걸려있던 주렴이 어느 사이엔지 저절로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이다. 대청 위에는 용이 새겨진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하얀 얼굴에 비단옷을 입은 중년 사나이가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은 채 눈에서는 파란 광채를 발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본 당승무는 흠칫 놀라 큰 소리로 외쳤다. "개청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녹포인은 그 말에 얼른 몸을 돌리더니 가지고 있던 촛불로 대청 앞을 비춰 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냐?" 당승무는 그가 촛불을 들어 안을 비춰보는 것을 보자 자기도 즉시 촛불을 들어 대청을 비췄다. 두 개의 촛불이 비취자 한결 밝아진 대청 위에 하얀 얼굴의 사나이가 여전히 웃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는 여덟 명의 아름다운 시녀가 거의 벌거벗은 채 투명하게 속이 들여다 보이는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여덟 명의 시녀들은 비단 얼굴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풍만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하며 모두가 선정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당승무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으나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 얼른 외면을 해버렸다. 녹포인 역시 외면을 하더니 대뜸 욕을 해댔다.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들이로군!" 그것은 기가 막힐 정도로 매혹적인 광경이나 이상하게도 불빛이나 음악이 전혀 없었다. 녹포인은 고개를 돌린 채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려 대청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기묘하게 번득이는 그의 두 눈은 무엇인가를 발견해 낸 것 같았다. 하얀 얼굴의 중년 사나이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미소를 머금은 채 미녀들의 춤을 구경하며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았다. 또한 여덟 명의 시녀들 역시 춤추는 동작이 일정했으며 한정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쳐다보던 녹포인이 대뜸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도 들어가 보자." 하고 말한 그는 자기가 먼저 한 손에 촛불을 든 채 계단을 통해 대청 쪽으로 걸어갔다. 당승무는 그의 뒤를 따르면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비단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바로 도화랑군입니까?" 도화랑군이라는 말에 녹포인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옷을 입은 사나이를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중얼거린 그는 대청문 앞까지 걸어가더니 다시 걸음을 멈추고 대청 위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의 행동을 살펴보던 당승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양가죽 위에는 이 대청의 지도가 그려 있지 않나요?" 녹포인은 냉랭하게 내뱉았다. "양가죽 위에는 단지 통로의 지도만 그려져 있다." "그럼 그 지도에는 이 대청 위의 함정에 관해서는 나타나 있지 않아요?" 그러자 녹포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네가 나한테 물으면 나는 누구한테 묻지?" 차고 중얼거린 그는 더 이상 말도 하지 않고 대청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것을 본 당승무는 약간 두려운 생각도 들었으나 곧 그의 뒤를 따라 갔다. 녹포인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대청의 중앙까지 걸어갔으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려하면서도 깨끗하게 꾸며진 대청에서는 여덟 명의 시녀들이 춤을 추고 있다가 방실방실 웃으며 두 사람을 마중했다. 반짝이는 눈동자에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그녀들은 한결같이 매끄러운 곡선의 몸매를 요염하게 흔들고 있었다. 특히 투명한 옷은 그녀들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당승무의 준수한 얼굴은 귀밑까지 붉게 상기되었다. 요물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아까 계단 앞에서 들려온 것과 똑같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녹포인은 흠칫 놀라더니 즉시 발걸음을 멈추고는 주위를 살폈다. 이때 돌연 음악 소리가 들려오자 단조롭게 춤을 추고 있던 여덟 명의 미녀들이 이번에는 음악에 맞춰 지극히 선정적으로 몸을 비트는 게 아닌가. 또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던 비단 옷의 사나이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마치 녹포인과 당승무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시녀들의 춤만 감상하고 있었다. 녹포인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지자 즉시 낮은 소리로 외쳤다. "빨리 물러나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가 막 뒤로 몸을 비키려 하자 여덟 명의 시녀들이 갑자기 흩어지더니 두 사람을 에워싼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앞에는 지금 풍만한 육체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은 두 사람을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곤두세우고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한참 나이의 젊은 사나이였다면 그녀들의 춤에 넋을 잃고 있다가 영락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이리라. 녹포인은 제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선 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크게 외쳤다. "빨리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날카롭게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는 즉시 오른손을 들었다. 다음 순간, 칼보다도 더 예리한 은빛 그의 다섯 손가락이 앞을 향해 그대로 내리 그었다. 그러나 정면에 있는 시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손을 쳐들더니 녹포인의 가슴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두 개의 손이 서로 맞부딪치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격해 오던 그 시녀의 한쪽 팔이 이내 부러졌다. 그러나 그녀의 팔에서는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았으며 피대신 한 줄기의 연기가 피어 오르더니 급속도로 녹포인의 얼굴을 향해 뿜어져 갔다. 그것을 본 녹포인은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다." 이제 보니 그들은 무엇인가에 의해 조정이 되어 움직이는 인형들이었다. 녹포인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호흡을 멈추는 것도 잊고 있다가 코끝에 이상한 향기가 스며오자 황급히 손으로 코를 감싸더니 그대로 앞으로 뒹굴었다. 이것은 너무나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승무는 녹포인이 쓰러지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등 뒤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껴 급히 고개를 돌려보자 한 시녀가 자기의 목을 향해 손을 휘두르는게 아닌가. 당승무는 암기 세가의 출신이었으므로 암기 무공의 기초인 암기 피하는 법을 배워왔기 때문에 더 생각할 여유도 없이 즉시 몸을 숙여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그 여덟 명의 시녀들은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고 연속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제 보니 그녀들은 녹포인이 땅바닥에 쓰러지고 나자 모두 자기에게로 공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숨돌릴 틈도 주지 않는 그녀들의 공격을 피해 내느라고 당승무의 몸은 온통 땀으로 흠씬 젖었다. 얼핏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녹포인을 보자 그는 어느 사이엔지 흐르는 물처럼 수 장 밖으로 밀려가 있었다. 녹포인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기어서 거기까지 간 게 아니라 밑바닥에 있는 철판에 의해 자동적으로 밀린 것이었다. 이제 보니 이 대청 안에는 당승무가 서 있는 곳만 바닥이 돌지 않을 뿐 그 인형들도 모두 바닥의 회전에 의해 진퇴를 거듭하면서 두손을 휘둘러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형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조종이 정교하다 할 지라도 사람처럼 섬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녹포인이 땅바닥에 드러 눕자마자 즉시 그들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회전하고 있는 바닥에 의해 현장에서 자동적으로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영리한 당승무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음을 느끼고 즉시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과연 효과가 드러났다. 바닥이 크게 원을 그리며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 그의 몸은 곧 인형과 같은 방향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이어 대청 오른쪽에 닿았을 무렵, 재빨리 밖으로 몸을 굴려 그는 바닥에서 빠져나와 녹포인의 옆으로 갈 수가 있었다. 다음 순간 즉시 몸을 일으킨 그가 고개를 돌려보자 그 여덟 명의 시녀들은 여전히 손을 휘두르면서 음악에 따라 쉬지 않고 춤을 추고 있었다. 당승무가 그들에게서 다시 녹포노인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녹포인 큰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당승무는 내심 크게 놀라 나지막한 소리로 외쳤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녹포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간신히 소리를 내었다. "나…… 나는 중독이 되었다…… 내 장포 내…… 오른쪽에 가죽주머니 하나가……." 당승무는 그의 말을 듣다가 답답하다는 듯 얼른 물었다. "해약이 있다는 말입니까?" 녹포인은 힘들여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약한 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어서…… 꺼내라……." 당승무가 그의 말을 따라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오른쪽 허리 부근을 만지자 과연 작은 주머니 하나가 있었다. 재빨리 주머니를 풀어보자 속에는 조그마한 약병이 무려 이십여개나 되었다. "어떤 병에 있는 것이 해독약입니까?" 그러자 녹포인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내뱉았다. "녹색 약병이다." 당승무가 그 말에 따라 하나를 꺼내자 녹포인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세 알을…… 나의 입에다 넣어라." 당승무는 신속한 솜씨로 즉시 녹색 환약 세 알을 꺼내 그의 입에 다 넣었다. 그러자 녹포인은 천천히 두 눈을 감더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 구부리고 앉아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던 당승무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신비의 노인은 몸집도 작은데 무엇 때문에 이토록 커다란 옷을 입고 다니는 걸까? 또 아까 그가 발한 비명 소리는 분명히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들고 있는 가죽 주머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가죽 주머니의 왼쪽 구석에는 금색으로 꽃이 수놓아져 있었으며 또 그 옆에는 주(珠)라는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당승무는 그것을 보자 이 사람은 분명히 여자로서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다는 확정을 짓게 되었다. "만약 이 사람이 정말 여자라면 몇 살 정도나 되었을까?" 이때 음악 소리가 멎는 것 같더니 춤을 추고 있던 여덟 개의 인형도 모두 동작을 멈추고 다시 비단 옷을 입은 사나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비단 옷의 사나이도 다시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의자에 가 앉았다. 순식간에 주위는 다시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녹포인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여 마시더니 서서히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당승무는 몹시 기뻐하며 말을 건넸다. "이게 다 완쾌되셨습니까?" 녹포인은 그 말에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갑자기 가벼운 경악의 소리를 지르더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리 와 보아라." "무슨 일이십니까?" "오라면 올 것이지 웬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그는 갑자기 오른쪽의 은색 손을 내밀어 번개와도 같이 당승무의 가슴을 움켜 잡으려고 했다. 순간 당승무는 미리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뒤로 반 보정도 물러서더니 수중의 장검을 뽑아 들고는 경운출수(輕雲出手)의 초식을 전개하며 소리쳤다. "아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쌍방의 동작은 극히 빨랐다. "창!" ,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당승무의 장검과 녹포인의 은색손이 서로 맞부딪쳤다. 그러자 당승무의 장검은 어이없게도 끝이 부러져 나갔다. 흠칫 놀라 몸을 뒤로 피하는 그에게 녹포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점점 다가왔다. 당승무는 부러진 장검을 손에 든 채 안타깝게 소리쳤다. "나는 당신의 목숨을 구해주기까지 했는데 당신은 이게 무슨 짓이오?" 그러나 녹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냉랭한 살기를 띄운 채 한발 한발 다가오기만 했다. 급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 그는 갑자기 부러진 검을 던져 버리더니 발을 멈추고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만약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가만 놔두지 않겠소!" 하고 소리치는 그의 들려진 오른손에는 검은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녹포인은 그것을 힐끗 쳐다보더니 차가운 어조로 내뱉았다. "독살장!" "그렇소. 독살장은 칠 보 이내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죽일 수가 있소. 내 비록 무공이 부족하기는 하나 세 발자국 이내에서는 당신과 함께 죽을 수가 있소." 그러자 녹포인은 과연 걸음을 멈추더니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너를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나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죽여야 한다는 거요?" 그러자 녹포인은 노기에 찬 일 성을 차갑게 내뱉았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즉시 널따란 녹색 장포 안에서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더니 땅바닥에 쏟았다. "쏴!"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가죽 주머니 속에서 주먹만한 것이 하나 굴러 나왔다. 그것은 새까만 동물로써 등에는 두꺼운 껍질을 쓰고 있었는데 배에는 발이 여섯 개나 달려 있었다. 게다가 머리는 넙적한 데다가 입은 날카로왔으며 온통 새까만 것이 꼭 고슴도치 같았다. 이상하게 생긴 그 괴물은 두 개의 녹두 같은 눈으로 당승무를 똑바로 쏘아보며 조금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당승무는 처음 보는 것이라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그저 녹포인이 자기를 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도 필시 무서운 독을 지닌 독물(毒物)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보는 괴물과 싸울 판인데도 자기의 수중에는 아무 것도 없어 잠시 걱정을 하던 그는 돌연 무슨 생각에선지 갑자기 보자기를 풀어 안에서 검은 옥불을 꺼내 들었다. 이 옥불은 사부가 그에게 호신용으로 쓰라고 준 불진이었다. 바로 그때, 그 검은 독물의 입에서 한 줌의 금빛 모래가 흩어져 나왔다. 당승무는 처음부터 그 괴물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래가 몸에 닿기도 전에 힘껏 두 발로 땅을 걷어차는 동시에 몸을 이 장 가량이나 솟구쳤다. 그 순간, 그는 무엇인가가 자기 몸을 뒤에서 잡아끄는 것을 느꼈다. 전광석화와 같은 위기의 순간에 모래는 그의 발을 따라 이 장 가량이나 뿜어져 울라왔다가 공중에서 누구에겐가 잡힌 상태로 있는 그의 몸을 격중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금빛 모래가 땅에 닿자 즉시 그 자리에서는 연기가 피어 오르더니 바닥이 까맣게 변해 버렸다. 당승무는 지금 자기를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건 상관하지 않고 힘을 뿌리치고는 땅에 내려섰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나를 해치려는 거요?" 그러나 녹포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단지 가벼운 소리만을 질렀다. 그러자 주먹 만한 괴물체는 갑자기 몸을 곤두세우더니 허공으로 솟아오르면서 당승무를 향해 다시 공격을 가해 왔다. 당승무는 놀라 황급히 흑옥불을 내둘렀다. 그 순간 괴물은 녹두만한 눈으로 혹옥불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무서운 모양인지 돌연 몸을 멈췄다가 번개같이 달아났다. 당승무는 그 모습을 보자 없던 힘이 새로 솟아나는 것 같았다. "어디 또 다른 괴물이 있으면 시험해 보시지요?" 그러자 녹포인은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있는 괴물을 발로 힘껏 걷어 찼다. "내 여지껏 애써 너를 키워 왔건만 이제 보니 아무런 쓸모도 없는 놈이로구나." 발에 걷어 채인 괴물은 몸을 잔뜩 움추리더니 다시 가죽 주머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눈살을 잔뜩 찌푸린 녹포인은 이번에는 소매 속에서 갑자기 단검을 하나 꺼내 들고는 당승무를 가리키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네 이놈, 어서 목을 내놔라!" 당승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드는 거요?" 녹포인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는지 분노에 찬 음성으로 외쳤다. "이유는 없다. 그저 너는 내 손에 죽기만 하면 된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막 단검을 들어 당승무를 찌르려고 했다. 그 순간, "그 이유는 내가 알고 있다." 하는 소리가 대청 위에 앉아 있는 비단 옷의 사나이 쪽으로부터 들려왔다. 흠칫 놀란 녹포인은 얼른 단검을 거두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외쳤다. "다…… 당신은 살아 있소?" "죽은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하겠나!"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단 옷의 사나이가 앉아 있는 의자 뒤로부터 사람 머리가 하나 나타났다. 그 머리 위에는 조그만 댕기가 땋아져 있었고 얼굴은 꼭 저처럼 작고 까무잡잡한 것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이제 보니 여지껏 말한 사람은 비단 옷의 사나이가 아니라 바로 이 사나이였다. 그는 약 오십 세 가량 되어 보였는데 몸에는 광목 웃을 걸치고 있었다. 노인은 비단 옷의 사나이 등 뒤로부터 천천히 걸어나왔다. 녹포인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거는 누군데 어디서 나왔느냐?" 그러자 작은 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나는 영감으로서 어디서 왔는지는 너희가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화가 치민 녹포인은 대뜸 단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너 죽고 싶으냐?" 그 순간 괴영감은 놀라 두 손을 황급히 휘둘렀다. "잠깐, 이곳에는 각종 기관이 설치되어 있어서 조금만 잘못해도 큰일이 난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비단옷의 사나이가 앉아 있는 의자 뒤로부터 네 개의 철창이 내려와 괴영감을 가두어 버렸다. 괴영감은 놀라 마구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큰일났군. 이젠 끝장이다." 당승무는 그 순간 아까 자기가 공중으로 떠올랐을 때 자기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사람이 오히려 난처한 신세가 된 것이다. 당승무가 급히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괴영감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젊은이, 움직이지 말게. 이 대청은 양쪽 담만 안전할 뿐 그 외에는 모두 위험하네. 나야 살 만큼 살았으니 상관이 없지만 젊은이가 장가도 못 가보고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나?" 그 소리에 얼굴이 붉어진 당승무는 얼른 다른 말을 둘러댔다. "이런 장치가 가동될 수 있다면 필시 원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는 장치도 있을 것입니다." 괴영감은 몸이 갇혀 꼼짝할 수가 없었으나 손만은 움직일 수가 있었기 때문에 철책 사이로 손을 마구 흔들었다. "이곳엔 장치가 없을 거네. 나야 기왕 이렇게 됐으니 굶어 죽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녹포인은 괴노인의 초라한 꼴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 젖혔다. "하하하…… 굶어 죽어도 마땅하다!" 그러자 괴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이보게, 젊은이! 그가 왜 아까 자네를 해치려고 했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긴장 녹포인은 두 발로 힘껏 땅을 내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는 정말 살고 싶지 않느냐!" 그러더니 탄궁을 꺼내 괴노인의 머리를 향해 통겨내는 것이었다. 이때 당승무가 즉시 소리쳤다. "무능력한 사람에게는 절대 손을 쓰지 마시오!" 녹포인은 코방귀를 뀌었다. "흥! 난 꼭 해야만 되겠다." 이어-. 하고 일 성이 일더니 한 알의 금탄이 노인의 머리를 향해 발사되었다. 동시에 노인은 자지러질 듯한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으와악……아이구 내 팔자야. 이대로 아주 죽게 되나 보구나.' "아이구……." 그리고는 머리를 밑으로 움츠리더니 즉시 의자 뒤로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의 몸은 두 개의 철책에 의해 꼭 끼어져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빠져 나갔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당승무가 즉시 당황해 하며 자세히 보자 그 노인은 두 손을 높이 쳐들더니 몸을 천천히 밑으로 움츠리며 첫 번째 철책을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이때 녹포인은 일탄이 빗나가자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다시 두개의 은환을 장정했다. 이어 그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한 번 흘린 후 노인의 손을 항해 발사시켰다. 이때 노인의 머리는 이미 빠져 나갔으나 두 손은 아직 빠져 나가지 못했으므로 여전히 두 손을 높이 쳐든 채 급히 소리를 질러 대었다. "와아아……그만 해라 그만 해. 내가 잘못했으니……." 그는 입으로는 비록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비명 소리를 질러대었지만 두 손을 가볍게 밖으로 돌리더니 발사되어 나간 두 알의 은환을 잡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노인이 재빨리 두 손을 밑으로 내리자 두 손도 즉시 철책 밑으로 빠져 나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철책을 꽉 잡은 채 몸을 위로 올리자 꼭 끼어 있던 두 발도 금시 빠져 나오고야 말았다. 노인이 머리를 뺄 때부터 두 다리를 빼서 완전히 빠져 나오기까지의 절차는 거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동작 하나 하나가 매우 숙련되어 거의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녹포인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골공이 뭐가 그리 희귀한 것인가?- 노인은 아까의 위급함은 다 어디로 갔는지 역시 빙그레 웃으며 능청스럽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누가 희귀하다고 했나? 이것봐, 낭자, 낭자는 칠태공과 도대체 어떻게 되는 사이인가?" 녹포인은 안색이 다소 변했으나 아까보다 더욱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흥, 낭자면 어때요? 내가 누구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상관하는 것입니까?" 이때 당승무는 놀라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이제보니 과연 그는 여자였구나." 동시에 노인이 싱긋 웃으며 매우 감회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칠태공이 세상에 계실 때 나는 그 분과 몇 번 만난 적이 있지. 아까 낭자가 입고 있던 녹포가 암기를 받지 않는 것을 보자 즉시 칠태공의 보(資) 옷이 생각나더군." 녹포인은 이번에는 표면에 나타날 만큼 크게 놀랐다. "당신은 우리 할아버지를 알고 계시단 말예요?" 그녀는 비록 노인으로 변장했지만 역시 강호 바닥의 물정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았다. 노인은 음흉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지. 나는 이 년 전에 태산 밑에서 칠태파를 만났는데 그때도 내가 먼저 인사를 했지. 그런데 최근 이 년 동안 그 어른을 뵙지 못했는데 잘 계시는지 모르겠군." 녹포인은 고개를 떨구며 힘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할머니께서는 많이 연로하셔서 집을 자주 나서지 않습니다." 노인은 매우 동정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럴 거야. 낭자의 할머니 같은 분은 벌써 집에서 편안히 쉬어야해. 하지만 나처럼 가난해서 먹고 살 것이 없는 자는 이 나이에도 강호를 굴러다니지 않을 수 없지." 녹포인은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 "어르신네께선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잘 알고 계시니 물론 명성이 매우 뛰어 나셨겠군요?" 노인은 녹포인의 이 말을 듣자 매우 기뻐하며 짧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나는 이름하여 소불이(簫不二)라고 부르지. 소불이라면 잘 모르지만 만약 나의 외호를 얘기하면 잘 알 것이다." 녹포인은 눈을 빛냈다. "한 번 말씀해 보셔요." 소불이는 수염을 배배 꼬아틀며 잔뜩 위엄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설상무영 백일당귀(雪上無影 白日撞鬼)" 당승무는 한쪽에 서서 암암리에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설상무영 백일당귀? 도대체 이런 외호가 어디 있을까?' 녹포인은 새삼스러운 듯 잔뜩 긴장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어르신네께서 바로 신투(神倫) 설상무영이십니까?" 소불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강호 친구들이 이 늙은 것에게 이 외호를 붙여준 것은 정말 멋있는 일이었지. 낭자, 낭자도 한 번 생각해 보게. 설상무영은 그래도 들어줄 만하며 마치 나의 경공이 천하를 날리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백일당귀 이 네 글자는 좀 듣기가 좋지 않지. 더구나 청천백인하에 나를 만나게 되면 마치 귀신을 만난 것과 같지. 사실 나 소불이는 한 번 말하면 그만이지 두번 다시 절대 말하지 않는 성미이며 또한 하루에 한두 번만 해서 먹고 마실 것이 충분하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다." 녹포인은 소불이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급히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저희를 따라 들어오신 것입니까?" 소불이는 매우 자랑스러운 듯 히히 하고 흉측스럽게 생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본래 장강이를 따라 온 것이다. 그들은 문을 열자마자 서로 잔살을 했으니 내가 어찌 그들에게 잘해 줄 수가 있겠는가?" 녹포인은 매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통로는 한 번만 발을 잘못 디디기만 하면 단번에 목숨을 잃게 되는데 어르신네께서는 도대체 어떻게 들어오신 것입니까?" 당승무는 내심 탄복을 하며 생각했다. '그렇다. 이 사람의 외호가 설상무영인만름 경공술이 매우 높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때 소불이가 손을 들어 주위를 쭉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매복 중에 그저 쥐가 지나갈 수 있는 곳이라면 물론 나도 문제없이 지나갈 수가 있지." 녹포인은 다시 물었다. "어르신네께서도 도화랑군의 보물을 찾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소불이는 다시 음흉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히……그것을 말이라고 묻느냐? 하지만 낭자는 안심하여라, 나는 다만 몇 가지만 가지면 된다. 그리고 낭자가 갖는 물건은 절대 빼앗지 않을 것이다." 녹포인은 내심 크게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물었다. "어르신네께서는 제가 무엇을 가지려는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소불이는 슬쩍 눈을 흘기며 다 알고 있다는 투로 얘기했다. "내가 왜 모르겠나? 도화랑군은 본래 칠태공의 사제였다. 그리고 또 도화랑은 왕년의 현음교주(玄陰敎主)의 관문(關門) 제자다. 음양교주가 살해를 당한 후에 모든 보물은 전부 그녀에 의해 운반되어 나왔다. 히히히…… 그들이 남겨놓은 물건은 자연히 남자가 갖기에는 안성맞춤인 것들이지." 녹포인은 즉시 경악의 표정을 지으며 소불이를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아…… 아니, 어르신네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소불이는 슬쩍 웃었다. "나는 그런 소식에 대해서는 매우 영통하다. 강호의 수많은 사람들이 도화랑군의 보물을 찾으려 했지만 이 몇 년 동안 찾아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 "하지만 저는 찾았어요!" 그러나 소불이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직 단정하기는 힘들다. 지난 십여 년 전에 종남산(終南山) 연운협산(連雲峽山)에서 한 채의 휘황찬란한 궁전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모두 도화랑군의 처소인 줄 알고 일시적이나마 온 강호가 떠들썩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간 적이 있었다." 녹포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급히 물었다. "그럼 어르신네도 가셨습니까?" 소불이는 생각하기도 지굿지굿한 듯 목을 움츠렸다. "그때 나는 다행히도 강남에 있었다. 만약 내가 그때 갔었더라면 지금까지 살 수 있었겠느냐?" 녹포인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소불이는 심중하게 표정을 굳히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그곳에 간 사람 중 최소한 백 명은 죽어갔다. 누구든지 그곳에 들어간 사람이면 모두 흑사병에 걸려서 길거리나 술집, 객점에서 아무말도 못하고 하나씩 죽어갔다. 그래서 나중에 화산파(火山派)의 당문 범운양이 친히 가서 조사해 본 즉, 궁전 안에 극독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즉시 사람을 시켜 그 동굴을 봉쇄하고 말았다." "그러면 그곳은 도대체 도화랑군이 은거한 동굴이었나요? 아니었나요?" 소불이는 검미를 약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들어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데 낸들 어찌 알겠나? 하지만 소문에 듣자하니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더군." 그러자 당승무가 저절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사방을 둘러보았다. "호…… 혹시 이곳에는 독이 없을까요?" 소불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다시 짧은 수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그거야 이제 몇 시진이 지나봐야 알겠지. 우리 세 사람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쓰러지게 되면 독이 있는 것이다." 녹포인은 잠시 유심히 주위를 살피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대청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역시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다시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이곳은 모두 함정으로 되어 있는데 어찌 이 대청 하나 뿐이겠느냐?" 녹포인은 눈을 반짝이며 매우 조급한 듯 다그쳐 물었다. "어르신네께서는 여기에 또 다른 문을 발견하셨습니까?" 소불이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흐응, 나는 이미 그런 것에 대해서 이제는 마두가 되었기 때문에 다소라도 알아낼 수가 있다." 녹포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재촉했다. "그럼 빨리 좀 찾아보세요. 이곳에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 소불이는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좁은 턱을 곤두세웠다. "너희들이 만약 싸우지 않았다면 내 벌써 찾아 내었을 것이다." 이어 그는 품에서 아주 가느다란 철사를 꺼내더니 손으로 똑바로 폈다. 소불이는 가느다란 철사를 연신 손으로 매만지며 마치 원숭이가 걸어가는 것처럼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면서 석벽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수중의 철사로 쉬지 않고 석벽을 두들겨 대었으면 그리고 때때로 귀를 갖다대어 무엇인가 열심히 들으려는 것이었다. 소불이는 이렇게 여러번 어지럽게 왔다 갔다 하면서도 함정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 과연 설상무영이라는 외호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당승무와 녹포인은 오른쪽 석벽 밑에 서서 노인의 행동을 숨을 죽인 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쯤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노인이 돌연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 었다. "이 대청은 그저 사람을 유인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출입문은 이곳에 있지 않아……." 녹포인은 도저히 못믿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곳에 없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소불이는 금시 침중한 표정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너희는 거기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마라. 내 밖에 나가서 알아보고 올 테니까." 그러더니 몸을 있는대로 움츠리더니 대청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녹포인은 잠시 무엇인가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돌려 나직한 목소리로 당승무에게 물었다. "이 노인의 막이 거짓말인지 아니면 정말인지 모르겠구나." 당승무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당신은 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녹포인은 즉시 두 눈을 부릅뜬 채 당승무를 바라보더니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그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냐?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냐?" 당승무는 그제야 말귀를 알아듣고는 당황해하며 급히 말했다. "그럼 내가 곧 뒤따라 나가 보겠소!" 그러더니 이어 급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녹포인이 나지막하게 불렀다. "잠깐!" 당승무는 즉시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무엇이오?" 녹포인이 채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당승무는 소불이가 경사궤배 목비 앞에서 몸을 숙이는 것을 보았다. 이어 소이가 도대체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일성의 가벼운 소리가 들리더니 일진의 한광이 번득였다, 그러자 독계들이 획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발사되는 것이었다. 순간, 목비 앞에 엎드리고 있던 노인이 갑자기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소불이가 기괴한 신법으로 어느 사이에 이미 몸을 한 덩이로 움츠려 목비 뒤로 몸을 숨겼던 것이었다. 당승무는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섬칫함을 느끼며 암암리에 크게 탄복했다. "이 독계들이 저토록 밀집한데 만약 나였더라면 필시 저 독계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바닥에서 발사된 독계는 그 수량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힘 또한 강하기 그지 없었다. 이것은 마치 거의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던 것이다. 당승무는 다시 자세히 그곳을 향해 바라보니 소불이는 여전히 몸을 움츠린 채 그 목비 앞에 엎드려 있었다. 당승무는 내심 이상하다고 느꼈으나 그가 거기에 엎드려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궁금증을 못이겨 발을 옮겨 나가려고 했다. 이때 녹포인이 급히 만류했다. "아마 나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당승무는 갑자기 달라져 버린 녹포인의 말에 매우 당황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탁-." 하고 또 다른 일성이 들려왔다. 이 소리는 그 소불이의 수중에 있는 철사가 무엇인가를 가볍게 쳐서 일어난 소리였다. 이 일 성이 터진 후 이어 계단 앞에 있는 우물안에서 일진이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녹포인은 잔뜩 긴장해 하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것은 또 무엇일까? 이 석벽 속에는 과연 함정이 수없이 많구나……." 그녀의 말이 막 끝나자 갑자기 굉장한 소리가 들리더니 대청 안에서 거대한 두 개의 우물이 솟아나왔다. 소불이는 그 우물이 솟아오르는 순간, 재빨리 대청 밖으로 물러났다. 당승무는 이제 도저히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묻고 말았다. "어르신네. 이 두 개의 두레박……." 그러자 소불이가 빙긋 웃으며 손으로 무엇인가 가리켰다. "후후…… 빨리 저것을 보게나!" 당승무와 녹포인이 즉시 가리키는 곳을 보자 그와 동시에 우물 안에서 온천물이 솟아올라 사방으로 흩날리는 것이었다. 더운 수증기가 공중에 포화되자 주위는 안개가 긴 것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당승무는 다시 물었다. "저 물에도 독이 있습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독이 있을 걸세." 그러자 녹포인이 당연한 말이라는 듯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독이 한다면 어르신네께서 무엇 때문에 피하겠나?" 소불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히죽이 웃었다. "어찌되었건 조심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야." 그때 솟아오른 온천물은 이미 멈추어졌고 땅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소불이가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손짓을 했다. "이제는 나와도 괜찮다." 소불이는 말하면서도 뒤뚱뒤뚱 거북하게 다시 걸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녹포인은 의심스러운 듯 두 눈동자를 굴리며 즉시 물었다. "아니, 어르신네께서는 우리더러 나오라면서 왜 도리어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의문의 목패 소불이는 웃으며 눈을 껌벅였다. "낭자, 낭자는 정말 의심이 너무 많군.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너희들이 나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녹포인은 앙칼지게 물었다. "그건 무엇 때문이죠?" "무엇 때문이냐고?" 소불이는 두 눈을 크게 뜨더니 히죽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 대청에서 계단 밑까지는 최소한 사, 오 장쯤 된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모두 함정으로 가득차 있는데 너희들이 나을 수 있겠느냐?" 녹포인은 새초롬하게 웃었다. "그럼 어르신네가 우리를 업고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에요?" 소불이는 수중의 철사를 곧게 펴면서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너희들이 내가 서 있는 곳까지 몸을 날리기만 하면 내가 너희들을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녹포인은 한 쌍의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물었다. "어떻게 내보낼 수 있다는 말이에요?"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물을 필요 없다. 어찌 되었건 나에게 방법이 있으니까." 녹포인은 노인을 잠깐 주시하더니 당승무에게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 가겠으니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녹포인의 말투는 극히 부드럽고 다정했다. 아무튼 소불이의 공력, 기지, 경험 등은 모두 녹포인보다 뛰어났다. 이 석벽 안에는 모두 그들 세 사람 밖에 없으니 소불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녹포인은 당승무와 합세하는 수밖에 없었다. 녹포인은 당승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가겠습니다." 그러더니 재빨리 몸을 날려 노인을 향해 덮쳐갔다. 소불이는 급히 몸을 약간 숙이더니 재빨리 소리쳤다. "절대 숨을 쉬어서는 안 된다!" 하고는 수중의 철사로 그녀의 발 밑을 가볍게 튕겼다. 소불이의 앞에서 녹포인의 신형이 막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대청밖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당승무는 그 광경을 보고 암암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당승무는 노인이 가지고 있는 철사는 매우 가늘고 연하여 튕기는 즉시 꺾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철사가 노인의 손에서는 마치 한 자루의 긴 창과 같이 사람을 멀리 날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정말 이러한 공력은 보기드문 회귀한 것이었다. 당승무가 넋을 잃고 생각에 잠겨 있자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 봐! 젊은이,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이번에는 자네 차례네!" 당승무는 급히 정신을 되돌리고 대답을 하더니 노인을 향해 급히 몸을 날렸다. 당승무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가느다란 철사에 의해 대청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당승무의 몸이 떨어진 곳은 바로 녹포인의 옆이었다. 당승무는 절로 고개를 내두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르신네의 수법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노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녹포인은 크게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노인은 어디에 있지?" 당승무도 갑자기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요? 제가 나을 때 노인은 아직 대청에 있었소." 그러자 녹포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가 그에게 속았군!" 당승무는 도대체 영문을 몰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엇을 속았다는 겁니까?" 녹포인은 사방을 다시 살피더니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그래도 너는 나의 이야기를 못알아 듣겠느냐?" 당승무는 도대체 영문을 몰라했다. "낭자께서 제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아니, 그것을 꼭 물어야만 하느냐?" 녹포인은 화가 나서 연신 씩씩거리며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는 아까 이미 문을 열어 놓았고 일부러 우리들을 속여 밖으로 내보낸 것이야." 당승무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랬을라구요." 녹포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 않다구? 도대체 그런 사람치고 좋은 사람 보았나?" 당승무는 다시 물었다. "그가 문을 열었다면 우리는 왜 보지 못했습니까?" 녹포인은 당승무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따지듯 말했다. "그가 들어 왔을 때 너는 보았느냐? 그가 문을 열어 놓으려고 했을 때 우리더러 보이게 열것 같으냐?" 당승무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 그건……," 녹포인은 매섭게 내뱉았다. "그것 저것 따지지 말고 빨리 나를 따라와!" 그러더니 재빨리 몸을 돌려 계단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때 당승무가 급히 녹포인을 불러 세줬다. "낭자, 잠깐만 멈추시오!" 녹포인은 몸을 돌리며 눈을 치켜 떴다. "무슨 일인가?" 당승무가 대청을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노인장께서 대청에 함정이 많다고 하셨는데 제가 먼저 가보겠습니다." 녹포인은 당승무를 찬찬히 훑어보며 의미있게 웃었다. "너는 대청의 함정들을 알고 있느냐?" 당승무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녹포인은 일순 싸늘하게 웃었다. "그런데 무얼 안다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이어 음흉스러운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녹포인이 급히 몸을 돌려보니 그 노인이 바로 자기의 등 뒤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녹포인은 절로 얼굴을 뜨겁게 달구며 무안한 마음에 버럭 화를 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소불이는 다만 히죽이 웃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히히히…… 나는 연신 여기에 앉아서 잠시 쉬었을 뿐이야. 그리고 너희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나 듣고도 싶었지." 녹포인은 마음이 뜨끔하는 것을 느끼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가 대체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설사 했다고 해도 노인장이 상관하실 수 있습니까?" 소불이는 여전히 쭈그리고 앉아서 주먹을 폈다 오므렸다 했다. "나는 다만 너희들이 나에게도 획득한 것을 나누어 줄지 그것을 알고 싶을 뿐이야." 녹포인은 의미있게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께서도 여기에 왔으니 물론 일부분은 있죠." 노인은 당승무를 훑어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낭자, 아직도 이 젊은이를 죽이려고 하고 있나?" "그게 무슨 뜻이죠?" 소불이는 그의 버릇인양 어깨를 들썩이며 눈을 껌벅였다. "낭자가 이 젊은이를 죽이지 않는다면 삼등분으로 나누어야 하고 만약 젊은이를 죽인다면 절반으로 나누게 되니 그 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녹포인은 당승무를 한 번 쳐다보더니 냉랭하게 대꾸했다. "나는 보물을 그렇게 귀중하게 여기지 않아요!" 소불이는 눈알을 한 번 굴리더니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나도 벌써 알았지." 녹포인은 여전히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무엇을 알았다는 거죠?" 소불이는 즉시 대답을 했다. "낭자가 진짜로 이 젊은이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는 당승무를 향해 눈을 껌벅이며 빙긋 웃었다. "이것 보게 젊은이, 내 말이 맞지?" 녹포인은 자기가 우롱당한 것을 알자 다시 발작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소불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밀며 가로막았다. "하하하……농담이다. 자, 이제 때가 되었다. 너희들 저 목비를 한 번 보아라. 우리도-들어갈 때가 되었구나." 두 사람은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보니 계단 앞에 쓰여져 있던 네 글자는 어느 사인지 익개사승 구로금고(益個斯昇 九鑑今古)라는 여덟 글자로 변해 있었다. 녹포인은 크게 놀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렇구나, 양가죽에도 저렇게 쓰여 있었어요. 이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소불이는 다만 땅에 쭈그리고 앉은 체 수중의 철사를 만지작거리며 별반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히히히……너희들은 내가 이곳에 쭈그리고 앉아서 정말로 너희들 말을 엿들은 줄 아느냐? 사실은 나는 바로 저 두 마디 글자 때문에 지금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녹포인은 급히 물었다. "그럼 생각해 내었습니까?" 소불이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한참 동안 생각한 결과 물론 결론을 내렸지." 녹포인은 재촉하듯 급히 말했다. "그럼 어디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소불이는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안돼. 나도 지금 골머리를 심하게 앓으며 고심한 결과 생각해 내었으니 나도 너희들을 좀 애를 먹여야겠다." 녹포인은 할 수 없이 씁쓸하게 웃으며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래도 생각해 낼 재간이 없는지 고개를 돌려 당승무에게 물었다. "나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구나. 너는 생각해 낼 수 있겠느냐?" 당승무는 나직하게 중얼거리기만 했다. "익개사승 구로금고……." 이어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나 역시도 모르겠군요." 그러자 소불이는 더욱 의기양양하여 조롱하기 시작했다. "여보게. 젊은이, 자고로 이런 수수께끼들은 곰곰히 생각해야 된다. 아마 몇 번만 골머리를 앓으면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당승무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 두 마디는 도대체 알 길이 없습니다." 당승무의 말이 끝나자 노인은 크게 기뻐하며 기세를 올렸다. "젊은이, 자네의 말을 들으니 이미 포기한 것 같군. 그럼 평생 동안 알려고 하지 말게." 녹포인은 입을 삐죽이더니 매우 못마땅한 듯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쳇,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그는 다만 속셈이 없기 때문에 생각을 못하는 것 뿐이예요."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짐짓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낭자는 저 젊은이를 편드는 것인가? 히히…… 이거 큰일났군요. 젊은 사람들끼리는 쉽게 합칠 수가 있지만 아니 그렇다고 이 노인을 한쪽에 버려둘 것이냐?" 당승무는 의미있는 그 노인의 말을 듣자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녹포인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입을 삐죽이며 다시 쏘아붙였다. "노인장께서도 아마 모르고 있는 게 틀림 없어요. 그렇지 않다면 여기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벌써 포기했을 것이에요." 소불이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엉? 누가 그러던가? 내가 생각해 내지 못했다고?" 녹포인은 팔짱을 끼며 쌀쌀하게 대꾸했다.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도화랑군의 보물을 찾으러 왔지. 쓸데없는 장난이나 수수께끼를 풀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노인장께서는 이미 생각해 내었으면 말씀하실 일이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까?" 노인은 보물이라는 두 마디를 듣자 절로 눈을 번득이더니 자기의 뒤통수를 치며 가가대소했다. "하하하……그게 틀림없어. 낭자의 말이 맞네. 알고보니 이렇게 간단한 것이군." 소불이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이어 능글맞게 웃었다. "자, 이 말은 어디서부터 해야 하나? 나는 원소광화등(元宵狂花燈)과 선비들의 수수께끼를 가장 좋아한다." 녹포인은 기가 막힌 듯 냉랭하게 웃으며 비꼬았다. '흥, 원소는 며칠 동안 도처마다 성문이 열려 있었고 방이 없었지요. 여인들 또한 구름처럼 운집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밀려가 노인께서 일하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이었으니 물론 좋아할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당승무는 이 노인의 외호가 신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가 지금 다시 녹포인의 비꼬는 말을 들으니 내심 매우 우스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소불이는 녹포인의 지금 이 말을 듣자 몹시 정색을 하였다. "아니, 낭자는 이 늙은 것을 정말 너무 얕보는군. 보통의 금은주보는 내가 손을 댈 만한 가치라도 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내가 전에 황실에 들어가 사흘 동안 돌아다니면서 나중에는 그저 황제의 비연호(鼻煙壺)만 가지고 나왔다. 아니 믿지 못한다면 내 보여줄 수도 있다. 그 비연호는 아직 내 몸에 있다. 또한 그 황실에는……." 소불이는 다시 의기양양해 침을 사방에 튀기며 얘기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승무가 말을 가로채며 말하는 것이었다. "노인장, 우선 먼저 이 여덟 글자의 뜻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소불이는 웃으며 순순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지. 우선 이 여덟 글자의 뜻부터 논하지. 아까 나는 이 두 마디 때문에 한참 동안 생각을 했으나 결과는 뻔했다. 도무지 무슨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어떤 영감이 불현듯이 떠올라 권염격이라는 책이 꺼꾸로 읽는 것이라는 걸 생각해 내었다. 그러자 과연 글씨의 뜻도 알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녹포인은 목비를 바라보며 한자 한 자 거꾸로 읽어 나갔다. "고금로라 숭사개…… 이게 무슨 뜻이죠?" 소불이는 킥킥거리며 도리어 반문을 했다. "이 목비에는 본래 경사제배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언제 이 여덟 글자로 변하였는가?" 녹포인은 총명한 눈알을 굴리며 얼른 대답했다. "아마 영감님이 아까 땅에 엎드려서 무엇인가 장치를 건드렸을 때 바뀐 것 같군요." 소불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쳤다. "맞아, 맞아, 이 여덟 글자가 바로 이 동굴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이다. 그러므로 이 목비를 본 사람이라면 살아남기가 힘들지.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다소 예민하여 목비를 따라 돌아설 때 숨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자네들과 얘기를 할 수 있었겠나? 그리고 또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겠느냐?" 녹포인은 귀찮다는 듯이 급히 말을 줏어 대었다. "노인장께서 그 목비 앞에서 무엇인가 하자 막에서 물이 치솟아 올라왔지 않아요? 그래서 노인장은 대청 안으로 피해 오지 않았어요?" 소불이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맞아, 맞아. 바로 그 두 개의 우물이야. 그러면 자, 다시 한 번 읽어 보아라." "고금로라 승사개……." 이때 가만히 귀를 귀울이고 있던 당승무가 갑자기 소리쳤다. "고정입구(古井入口) 생사각일(生死各一) 노인장, 제 말이 맞습니까?" 그러자 의외라는 듯 소불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당승무를 바라보며 천천히 웃었다. "오, 맞았네. 젊은이의 말이 틀림없네. 이 두 개의 우물이 바로 입구이며 하나는 생문(生門)이며 하나는 사문(死門)이지." 녹포인은 자기가 알아내지 못하자 화를 버럭 내며 투덜거렸다. "흥! 이제보니 이처럼 간단한 것이 속을 썩이다니……." 소불이는 다시 어깨를 들먹이며 녹포인의 눈치를 살폈다. "본래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내지 못하면 아마 평생 동안 골머리를 앓아도 모를 것이지." 녹포인이 우물을 향해 다가서서 안을 들여다 보니 우물 안은 컴컴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는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소리쳐 말했다. "이 우물은 깨끗이 말라 있어요? 소불이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우물 안의 물은 아마 아까 다 솟아오른 것 같군." 당승무가 안색을 약간 굳히며 물었다. "우리는 이 우물 안으로 내려가야 합니까?" 녹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입구라니 물론 여기로 내려갈 도리 밖에는 없지." 그리고 그녀는 다시 오른쪽 우물로 가더니 밑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역시 컴컴한 것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자 절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 우물 중에 생사가 각각 하나라니 도대체 어느 것이 생문이고 사문입니까?" 소불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우물거렸다. "생사의 차이는 직접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 녹포인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알아내어야 하지요?" 소불이는 우물을 쳐다보며 급히 물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기 전에는 호랑이의 무서움을 모른다는 이 말입니까?" 소불이는 잠시 침중하게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아마 들어갔다 하면 나오기란 힘이 들 것이다." 녹포인은 소불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두려우십니까?" 소불이는 히죽 웃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낭자, 일부러 나를 골릴 필요는 없다. 이 하늘 아래 내가 못 갈 곳이 어디 있겠느냐?" 시의(屍蟻) 녹포인은 사악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이제 우리 내려 잠시다." 이어 그녀는 우물 안으로 뛰어 들어갈 자세를 취했다. 소불이는 당황하여 만류했다. "잠깐, 내가 먼저 내려가 보겠다!" 녹포인은 흔들림이 없이 품에서 녹색의 모자를 꺼내 머리에 쓰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암기를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아요." 이번에는 당승무가 조용히 만류했다. "소노인께서는 많은 것을 알고 계시고 또 경험도 풍부하시니 어쩌면 유리한 단서라도 찾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낭자께서는 역시 소노인더러 먼저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녹포인은 두 눈을 번뜩이며 당승무를 바라볼 뿐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이때 소불이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 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젊은이의 말이 맞네. 아무래도 여기에는 내가 먼저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그리고는 급히 우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우물의 난간을 잡은 채 고개를 삐죽이 내밀며 의미있게 웃었다. "낭자, 안심해라. 우리가 세 등분으로 나누고자 한 이상 절대 나혼자 먹지는 않을 테니……." 이어 소불이는 그대로 우물 안으로 잠적해 들어가고 말았다. 녹포인은 잠시 후 고개를 숙여 우물 안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우물 안은 매우 깊습니까?" 그러나 우물 안은 컴컴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한참 후에야 소불이의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깊지 않다. 두세 장에 지나지 않아! 앗, 이곳에 통로가 하나 있군. 그리고 함정 따위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이제 내려오려면 내려오게. 공연히 그 위에 남아서 내 욕을 하지 말고!" 녹포인은 고개를 돌려 당승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말하는 녹포인의 말투에 당황해 할 겨를도 없이 두 사람의 몸은 우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우물 안에는 과연 물이 없었으며 깊이도 소불이의 말과 똑같았다. 그리고 앞에는 하나의 긴 통로가 뻗어 있었다. 녹포인은 촛불을 꺼내 들어 잠시 비추어 보더니 이 통로가 매우 음침하다고 느꼈다. 이때 소불이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 게 먼저 들어간 것 같았다. 녹포인은 긴장해서 굳은 얼굴을 돌려 당승무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나와 거리를 지켜야 합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당승무도 고개를 끄덕이며 짤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녹포인은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다. 당승무는 그녀와 약 팔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 갔다. 약 이십 장쯤 걸어가자 통로가 오른쪽으로 뚫려 있었다. 두 사람은 꺾어진 쪽으로 계속 앞으로 십여 장을 걸었다. 이어 통로는 다시 왼쪽으로 꺾어졌으며 앞에는 하나의 널다란 석실이 있는 듯했다. "아악-." 이때 갑자기 앞서 가던 녹포인이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얼른 몸을 돌려 뒤로 물러나더니 당승무의 품으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당승무는 그녀의 뒤를 따르다가 막 통로를 꺾어 드는 참에 갑자기 녹포인이 놀래 가지고 다시 뒤로 뛰어 오자 잠시 동안 무슨 영문인지 알지를 못했다. 당승무는 우선 급하게 손을 내밀어 녹포인을 잡으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녹포인은 고꾸라질 듯이 헐떡이며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더듬거렸다. "관…… 관이, 두 개의 관이 있어요. 귀신……." 당승무는 그녀의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내심 매우 우습다고 느꼈다. "노인은 어디에 계십니까?" 녹포인은 여전히 흥분을 누르지 못하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몰라요." 그때 멀리서 소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낭자, 무서워 하지 마시오. 당신이 본 귀신은 바로 나요." 그러자 녹포인은 즉시 화가 나 악을 쓰듯 말했다. "도대체 무슨 심보로 나를 놀라게 한 거죠?" 그러면서도 다시 두 사람은 통로를 걸어 들어갔다. 과연 석실에는 두 개의 관이 놓여져 있었으며 희미한 불빛 아래 보이는 광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소불이는 엎드린 채 왼쪽 관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음침하게 웃었다. 그 모습은 마치 관에서 금방 튀어나을 기세였다. "히히히……, 낭자, 내가 앞장 서서 가고 있는데 뭐가 그리 무섭소?" 녹포인은 매섭게 눈살을 찌푸리며 대들 듯 물었다. "노인장은 무엇 때문에 관에 숨어서 저를 놀라게 만드는 것이죠?" 소불이는 그 말에는 대답도 없이 옷의 먼지를 털며 관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지금 입구를 찾고 있는 중이야." 녹포인은 촛불을 들어 올려 사방을 살폈다. 이 석실 안에는 두 개의 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통로도 막힌 게 맨 끝에 도착한 것 같았다. 녹포인은 아무데도 통로가 없는 것을 보자 소불이를 향해 물었다. "그래 찾으셨어요?" 소불이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관을 들여다 보았다. "찾지 못했지. 하지만 입구는 틀림없이 이 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녹포인은 그 말을 듣자 절로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이곳은 사문입니까? 아니면 생문입니까?" 소불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신중하게 말했다. "그거야 이 관에 시체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해야 하오. 시체가 없으면 생문이고 있으면 사문일 테지," 녹포인은 다시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 그럼 관을 열어 볼 생각이십니까?" "그래야만 알 것 같소." 녹포인은 매우 꺼림칙 했지만 지금 이 마당에 와서 감히 반대를 하지 못했다. 그녀는 촛불을 높이 쳐든 채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소불이는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호령하듯 말했다. "자네들은 좀 멀리 떨어져 있게. 불의의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니까……." 두 사람은 소불이의 말에 따라 뒤로 몇 발 물러서더니 석실 밖으로 나갔다. 이와 반대로 노인은 한 발짝 다가서더니 두 손으로 관뚜껑을 잡은 채 암중의 내력을 운집시켰다. 소불이는 잠시 숙연히 있더니 즉시 크게 소리쳤다. "열렸다!" 그리고는 전력을 다해 관의 뚜껑을 들었다. "우지 끈 -." 하는 소리가 나며 관뚜껑이 열림과 동시 소불이의 몸은 즉시 한쪽으로 비켜졌다. 이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일이었다. 이때 돌연 텅, 텅, 하며 관의 뚜껑이 열림과 동시 한 구의 싸늘한 시체가 꼿꼿하게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녹포인은 즉시 놀라 비명을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당승무의 팔을 굳게 잡았다. 당승무 역시 크게 놀라 왼손으로 즉시 황동침통(資鋼針筒)을 꺼내더니 시체를 향해 발사했다. 순간, 일진의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천왕침(天王針)은 즉시 시체의 가슴에 명중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체는 관 속에서 그대로 꼿꼿하게 앉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시체의 입, 눈, 코, 귀 등에서 노란 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소불이는 즉시 몸을 숙이더니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외쳤다. "독염이다! 빨리 물러나라!" 소불이는 소리를 지르자마자 재빨리 왼쪽 관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녹포인은 고개를 돌리며 급히 당승무에게 일렀다. "나는 독을 무서워 하지 않으니 당신이나 빨리 도망가세요!" 이렇게 말한 녹포인은 모자 속에서 한 겹의 면사를 꺼내더니 얼굴을 덮는 것이었다. "나도 무섭지 않소." 당승무도 대꾸를 하자마자 품에서 조그만 병을 꺼내더니 그 속에서 두 알의 환약을 꺼내 코에다 쑤셔 넣었다. 이 두 마디를 주고 받는 동시에 독염은 벌써 그들이 서 있는 곳까지 살포되어 왔다. 녹포인은 면사를 쓴 채 두 눈을 깜박거리며 당승무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말 독화염이 무섭지가 않나요?" 당승무는 그 자리에 선 채 그녀를 향해 슬쩍 웃어 보였다. "이것 보시오. 아무렇지도 않지 않습니까?" 녹포인의 두 눈에는 기이한 광채가 떠올랐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의 문하죠?" 당승무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나의 사부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으니까." 녹포인은 입을 삐죽이며 코웃음을 쳤다. "흥! 세상에 제자가 사부의 이름을 모르는 데가 어디에 있다는 말이에요? 아마 귀신이라면 그 말을 믿을는지도 모르죠." 당승무는 씁쓸하게 웃으며 외면했다. "나는 정말 모르오. 나의 사부께서는 언제나 까만 도포를 입고 계셨으며 평시에 극히 말이 드물었습니다." 녹포인은 순간 얼굴에 가득 조롱의 빛을 떠올렸다. "호호…… 이제보니 당신은 수도사로군요. 어쩐지 무기가 불진(拂塵) 이라고 생각하였더니만……." 당승무는 녹포인의 비웃는 듯한 말투를 듣고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불진은 바로 제 사부님 것입니다." 녹포인은 순간 매우 당황해 하더니 급히 물었다. "아니, 당신의 사부도 오셨나요?" 당승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즉시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오. 제 사부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녹포인은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승무는 즉시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안 돼, 내 본명을 가르쳐 주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더니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즉시 대답했나. "내 이름은 아복이라고 하오." "아복?" 녹포인은 아복의 이름을 입 속으로 뇌까리더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당신은 성도 없습니까?"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없습니다." 녹포인은 반신반의하며 눈알을 굴렸다. "사람의 성이 없을 수도 있을까?" 그리고는 아복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대었다. "나는 주주(珠珠)라고 해요." 당승무는 녹포인의 대담함에 놀라며 급히 물었다. "성이 무엇입니까?" 주주는 고개를 휑하니 돌리더니 쌀쌀하게 대꾸했다. "흥! 저도 당신에게 가르쳐 줄 수 없어요!" 두 사람은 서로 얘기를 하느라고 독화염을 잊고 있었으며 또 관속에 앉아 있는 시체조차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독화염은 살포 속도도 빨랐지만 또 매우 빠르게 소각이 되었다. 연기는 이미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싹 걷히고 말았다. 이때, 소불이가 관 밑에서 기어 나오더니 두 사람을 보고는 가볍게 놀랐다. "아, 자네들은 물러나지 않았군." 주주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독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소불이는 관 밑에서 기어 나오더니 몸을 일으켜 옷의 먼지를 털었다. "낭자는 칠태공의 방독면을 썼으니 물론 독화염을 무서워하지 않겠지." 그리고는 다시 당승무를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젊은이도 독화염을 무서워하지 않는가?" 주주가 얼른 나서며 대신 대답했다. "이 아복은 자기 사부가 준 환약이 있답니다. 그것을 코에다 넣으면 괜찮다고 하더군요." 소불이는 여전히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은 칠보향으로서 그저 조금만 맡으면 즉시 중독되어 쓰러지는데 젊은이의 코에다 넣은 약은 도대체 무슨 약인가?" 당승무는 어색하게 씨익 웃었다. "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제 사부께서 남겨 주신 것입니다." "젊은이의 사부는 누구인가?" 주주가 다시 나섰다. "아복은 자기의 사부가 그저 까만 도복을 입고 있다는 것만 알 뿐 사부의 이름은 모른다고 합니다." 소불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가만히 입 속으로 읊조렸다. "흑포를 입은 도인이라……." 주주가 마침 생각난 듯 급히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도 칠보향을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소불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그냥 웃었다. "나는 그저 만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뿐이야." 이때 털썩-.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앉아 있던 시체가 다시 드러누웠다. 당승무는 그것을 보고는 매우 기뻐했다. "이제 보니 저 시체도 암기를 두려워 하는군요. 저 시체는 저에 의해서 드러 누운 것입니다."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미안하다는 듯이 어색하게 말했다. "저것은 나무로 만든 시체로써 조종에 의해 움직이며 사람에게 겁을 주는 것일세. 이제 자기의 임무가 끝났으니 자연히 드러 누울 수밖에 없지." 그러더니 다시 걸어가 왼쪽의 관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주주는 놀라며 급히 물었다. "그 관의 뚜껑도 열려는 거예요?"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손을 관에다 갖다 대고 있었다. "이곳에 전부 합쳐 관이 두 개 뿐인데 물론 열어 봐야지. 너희들은 독화염을 무서워하지 않으니 이제는 물러설 필요는 없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주주는 마음이 불안한 가운데도 자신있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우리는 모두 준비가 되었으니까요." 소불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두 손에 힘을 주어 관 뚜껑을 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뒤로 제끼며 급급하게 소리쳤다. "빨리 후퇴하라! 이것은 시의(屍蟻)다!" 주주는 이상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의가 무엇이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진의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관해서부터 한 메의 금색 벌레들이 세 사람을 향해 어지럽게 날아드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세 사람의 코에 시체의 썩은 냄새가 온 신경을 자극시켰다. 소불이는 다급해서 연신 소리를 질러대었다. "빨리 몸을 피하래도! 시의의 몸에는 극약이 있다! 절대 이것들에게 쏘여서는 안 돼. 특히 이것들은 시체를 파먹는 도깨비로써 사람의 골을 �가장 좋아한다. 그러니 절대 눈, 귀, 코, 입 등으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돼!" 그리고는 수중의 철사를 마구 휘둘러 얼굴을 보호하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당승무는 그 노인의 말을 듣고는 즉시 자기의 사부가 준 흑옥불을 꺼내 마구 휘둘렀다. 금색의 벌레들은 자세히 보니 금색 날개를 가진 개미들이었다. 이 금빛 개미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지더니 메를 지어 세 사람에게 덤벼드는 것이었다. 흐릿한 불빛에 비친 개미들의 행렬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주주는 얼굴에 면사를 쓰고 있었으므로 독기의 침입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이 개미들은 더욱더 두려워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주주는 마구 손을 흔들어 한 가닥의 은빛을 그려내었다. 그녀의 손에 달려 있는 한 쌍의 은수는 예리하기 그지 없었으며 또한 무기로도 사용할 수가 있었다. 한편, 당승무를 향해 덮쳐가던 개미들은 그의 흑옥불에 위축이 되었음인지 분분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개미들은 비록 당승무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또한 멀리 가지도 않고 한 곳에 운집한 채 그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당승무는 이 개미들이 자기의 불진을 다소 무서워하자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아마 내 수중에 있는 불진으로 이것들을 처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당승무는 즉시 불진을 위로 향해 내휘둘렀다. 그러자 과연 효과가 있었다. 불진이 지나간 곳에는 즉시 수십 마리의 개미가 떨어져 내려왔으며 나머지 개미들은 즉시 사방으로 흩어졌다.하지만 이 불진이 지나치자 다시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당승무가 두 번째 휘둘렀을 때는 어찌된 일인지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았다. 당승무는 갑자기 생각을 달리 바꾸며 즉시 소리쳤다. "소어르신네, 그리고 주주낭자, 빨리 뒤로 물러 나십시오. 저에게 이것들을 대응할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주주는 개미들이 자기의 손에 한 마리도 잡히지 않자 내심 크게 화가 나 있던 차에 그 소리를 듣자 급히 물었다. "무슨 방법이에요?" "낭자께서는 가면을 썼기 때문에 괜찮지만 소어르신네께서는 빨리 호흡을 멈추십시오." 당승무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미 왼손을 몸 옆에 달린 주머니 앞으로 넣더니 무엇인가 재빨리 위로 던졌다. 절정 당승무가 무엇을 던졌는지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공중에 가득 나르고 있던 개미들은 마치 순식간에 비오듯 우수수 떨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눈 깜박할 사이에 땅에는 금빛 양탄자를 깔아 놓은 것처럼 금개미들의 시체로 수북이 쌓였다. 주주는 그 모습을 보자 크게 놀랍고도 이상하여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엇을 던졌길래 이렇게 무서운가요?" 당승무는 아무 소리도 않고 재빨리 조그만 병을 하나 꺼내더니 한알의 환약을 소불이의 수중에 얹어 주었다. "어르신네께서는 빨리 이 약을 복용하십시오." 소불이는 호흡을 정지한 채 재빨리 약을 입으로 넣더니 단숨에 삼켜 버렸다. 그리고는 이어 놀란 눈초리로 당승무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가 사용한 것은 무형지독인가?"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었다. "어르신네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런 독가루는 무색무취, 극히 무서운 것입니다. 사부께서 저더러 가볍게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저는 이 개미들이 너무 흉악하기 때문에 이 무철의 독가루를 사용한 것입니다." 소불이는 매우 기뻐하며 당승무의 어깨를 두들겼다. "우리는 정말 자네 덕분에 무사했군. 만약 자네가 무형의 독가루를 사용하지 않았던들 이 독충들을 처단하기에 매우 힘이 들었을 것일세." 주주는 땅에 수북이 쌓인 금개미들을 바라보자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살을 심하게 찌푸리며 물었다. "소어르신네, 이것들이 바로 시의라는 것입니까?" "맞아, 이런 것은 묘강(苗彊)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시체의 골을 전문적으로 파먹고 살지. 그저 이것들에게 쏘이기만 하면 독이 발생해서 구제할 길이 없다. 평상시에 이런 것들은 시체에만 붙어 살고 있는데 정말 이렇게 날아들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주주는 속이 뒤집히는 것을 느껴 코를 주먹으로 막고 마구 발을 굴렸다. "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죠."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것들은 이미 죽었는데 무엇이 또 무섭다는 것인가? 우리는 빨리 입구를 찾아야 될 게 아니냐?" 주주는 개미들의 시체 속에 서 있는 채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저는 구역질이 나 견딜 수가 없어요. 빨리 이 개미들을 좀 치워 주세요."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빈정대었다. "후후……과연 여자는 여자로군. 이 개미들은 그저 냄새가 좀 심해서 그렇지 별 것 아니야. 사실 나는 많은 시체더미 속에 앉아 보았기 때문에 습관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아." 주주는 약이 바싹 올라 앙칼지게 소리쳤다. "아유, 그만하세요!" 소불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만하라면 그만하지. 나의 귀여운 낭자, 내가 구해 드리리라." 소불이가 수중의 철사를 두어 번 흔들자 개미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시체의 냄새를 맡았다 해도 절대 말을 하지는 말아야 한다. 말을 하면 할수록 더 나거든.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냄새는 코에 붙어 다니지. 헌데 이상한 것은 어느 때는 몸에 붙어 있는 것 같은데도 딴 사람은 느끼지 못하지만 낭자는 꼭 그 냄새를 잘 맡는단 말이야……." 주주는 약이 바싹 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 "왜요? 그게 어쨌다는 말이죠? 그래도 난 맡을 거예요!" 그러면서도 주주는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관 안의 시체는 이미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고 다만 하나의 까만 동굴이 보일 뿐이었다. 어쩌면 마치 돌로 된 계단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주주는 금시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과연 문이 있군요!" 당승무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두 개의 관에는 입구가 각각 하나씩 있으니 우리는 어느 쪽으로 들어가야 됩니까?" 소불이는 침중하게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이 두 개의 입구는 어쩌면 한 군데로 통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두 갈래의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 세 사람이 서로 갈라져 들어가자……." 주주는 소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바락 악을 썼다. "안 돼요! 우리는 같이 행동해야 돼요!" 소불이는 기가 막힌 듯 피식 웃었다. "함께 하자면 함께 하지. 어찌 되었던 이왕 여기에 들어왔으니 다 둘러 보아야지." 주주도 일순 화를 낸 것이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웃었다. "잔말은 그만 하시고 지금부터 우리 같이 들어가는 것이 어때요?" "마음대로. 어떻게 하든 결과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하지만 이곳의 함정을 나는 다소 알아." 그 말을 들은 주주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뻐했다.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웃었다. "다소 짐작은 간다. 내가 보기엔 이곳의 함정은 십중팔구가 새노반(塞魯班)의 사마기(司馬機) 술책에서 나온 것 같다." 주주는 그를 개의치 않고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 "그럼 우리는 오른쪽 관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키득대었다. "두 곳 다 왔다 갔다 해봐야지, 낭자는 여전히 시체의 냄새를 두려워 하니 내가 길을 안내하겠다." 그리고는 관 안으로 들어가더니 돌계단을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이어 당승무와 주주도 그를 따라 곧 밑으로 내려섰다. 관 안에 나 있는 통로는 매우 협소해서 한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가 있었다. 소불이는 천리화등을 들고 앞서 걸었다. 이 지하도는 산 한 가온데 나 있기 때문에 매우 음침했으며 또 오랫동안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분 나쁠 정도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 사람은 모두 손에 불을 들고 있었지만 수 장 밖은 여전히 볼 수가 없었다. 주주가 잔뜩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소어르신네, 이 통로에 함정이 없나요?" 소불이는 앞서 힘차게 걸어가며 대꾸했다. "안심해라. 내가 길을 안내하니까…… 그러나 만약 무엇인가 발견이 된다면 자연히 멈추게 해주겠다." 주주는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듯했다. "이 동굴은 이렇게 좁은데 함정에 걸렸다면 그때는 이미 늦어요." 그러자 소불이가 차근차근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함정의 설치에 대해 다소는 알고 있다. 천하에서 어떠한 함정일지라도 새노반의 사마기 만큼은 못하다. 새노반은 자기가 죽기 전에도 절대 자기 아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으며 낮에도 꺼내 본 적이 없었지. 그러나 나는 전에 몰래 대강 본 적이 있다." 주주가 웃으며 반문했다. "죽기 전에도 아들에게 전해주지 않고 낮에도 절대 보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새노반이 말하기를 절대 아들에게 보여 주지 않은 이유가 만약 천하에서 두 사람이 알게 되면 비밀이 지켜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랬다더군." 주주가 다시 물었다. "그는 또 무엇 때문에 낮에는 보지 않았어요?" "그 책은 천하무쌍이며 듣자하니 새노반의 선조 때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 왔다더군. 그래 그는 낮에는 남이 훔쳐 볼까봐 보지 않고 밤에 이부자리 속에서만 몰래 보았다더군." 주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불이를 추켜주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아니, 아들까지도 보여주지 않은 책을 어르신네는 어떻게 해서 보셨어요?" 소불이는 순간 매우 의기양양해 했다. "새노반이 죽기 전엔 나도 물론 보지 못했지.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 이 기밀은 그의 아들 손에 들어갔다. 아들 사마장홍은 어렸을 때부터 이 책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역시도 자기의 아버지를 따라 혼자서 이부자리에서 밤새도록 보았지. 다음날 그는 그 보물을 잊어버릴까봐 특별히 몸 안 살이 닿는 곳에 숨겼다. 나는 새노반과 별반 사귄 적이 없었지만 일부러 그가 죽었을 때 참배하러 가서 훔쳐낸 것이지," 당승무는 사마장홍이라는 이름을 듣자 내심 크게 놀랐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소불이는 앞을 한 번 살피더니 다시 이어 말했다. "그날 나는 그의 나무 뒤에 숨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키고 있다가 밤에 다시 몰래 돌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주주가 웃으며 물었다. "무엇 때문에 돌려주었어요?" "사실 나와 새노반은 원래 친구였다. 그러니 새노반이 배운 것을 나 역시 조금 알면 더욱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 "어르신네의 생각이 매우 좋으시군요. 그가 명성을 날릴 때 천하 부호들은 모두 그를 우러러 보아 천금을 주면서 함정을 설치하게 하였다니 그 어르신네는 마치 처가집에 가는 것처럼 마음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겠군요." 소불이는 통쾌한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지, 맞았다. 맞아……." "앗……." 소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발 밑이 움직이더니 바닥이 즉시 가라앉으며 큰 구멍이 생겼다. 소불이는 다급한 비명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밑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닥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즉시 회복되는 게 아닌가? 당승무는 놀라 크게 소리쳤다. "소어르신네! 어르신네!" 그러나 바닥은 다시 합쳐져 서로 맞닿아 있었으므로 노인의 소리는 조금도 들을 수가 없었다. 주주는 맨 뒤에서 따라왔으므로 당승무의 몸에 가리워져 보지를 못했다. 그녀는 급히 뒤쫓아 오며 물었다. "어르신네가 밑으로 떨어졌나요?" "떨어졌소. 어떻게 합니까?" "함정의 장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졌으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죠?" "우르릉……." 그때 돌덩이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바닥이 다시 뒤집히더니 노인의 신형이 쥐와 같이 재빨리 뛰어나왔다. 소불이는 몸을 채 곧바로 세우기도 전에 능글맞게 웃었다. "히히히,", 과연 바닥이 뒤집히는군." 이 말은 자기가 실수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붙어 있는 거미줄과 시퍼렇게 멍든 것으로 보아 필시 크게 곤욕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주주는 앞으로 다가서서 웃으며 빈정거렸다. "소어르신네, 이번에는 대포가 빵꾸 났군요." 소불이는 머리에 묻은 거미줄을 닦아내며 작은 눈을 부릅떴다. "나는 다만 일시적으로 방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금시 올라왔지 않느냐? 절대 대포가 아니다" 주주는 재촉을 했다. "그럼 빨리 가요" "이곳에 이러한 함정이 있으니 필시 다른 함정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소불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번에는 발끝으로 땅을 더디며 수중에 있는 철사로 바닥을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여기는 그냥 뛰어 넘어와라. 이것을 밟아선 절대 안 된다!" 두 사람은 그의 지시에 따라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이렇게 얼마쯤 가자 그들은 어느덧 통로의 끝에 달했다. 그 앞에는 하나의 널다란 층계가 장엄하게 뻗어 있었다. 소불이는 그 계단을 밟고 천천히 올라갔다. 그는 마치 장님처럼 철사로 층계를 하나 하나 두들기면서 올라갔다. 그런데 약 이십여 계단을 올라가던 소불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이상하다. 이곳엔 왜 함정이 설치되어 있지 않을까?" 그리고는 천리화를 들어 올려 벽을 향해 비추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 이곳은 벽등까지 걸려 있구나!" 이어 당승무와 주주는 눈앞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알고보니 이 널다란 계단 양쪽은 모두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일장 거리마다 등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소불이는 발을 빨리 움직이면서 벽에 있는 등에 모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돌계단은 즉시 환하게 밝아졌다. 주주는 재빨리 따라 가면서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어르신네, 다 도착했습니까?" "일단 들어 왔으니 물론 도착할 때가 되었다." 세 사람은 이미 계단 위까지 다달았다. 계단 위는 넓은 평지였으며 좌우에는 각각 네 개의 입구가 있었다. 그리고 정면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석벽이 있었고 그 가운데 육중한 주홍색의 대문이 있었다. 노인은 얼른 다가가 네 개의 등에 불을 붙였다. 곧 주위는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으나 두 짝의 대문은 바람 새어나갈 틈도 없이 꽉 닫혀 있었다. 소불이는 대문을 한 번 밀어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이 문은 안에서 잠겼군." 당승무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들어갈 수 없습니까?" 그러나 주주는 밝게 웃었다. "소어르신네께서 여기 계신데 안 열릴 수가 있겠나?" 소불이는 심히 기분이 좋은 듯 키득대며 물었다. "그 말이 맞네. 내가 이 문도 열지 못하고야 어찌 도둑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나?" 소불이는 쉬지 않고 문을 두들기며 수중의 가는 철사를 천천히 문틈으로 쑤셔넣었다. 당승무와 주주는 한쪽에 서서 호기로운 두 쌍의 눈을 굴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쿵……." 하고 일 성이 울리자 노인은 크게 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만면에 만족한 미소를 띄었다. 주주는 그가 땀을 비오듯 흘리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매우 힘이 드셨나 보죠?" "이 안에 채워져 있는 것이 천 근이나 나가는 것인데 물론 힘이 들어야지." 그러더니 힘을 내어 문을 밀었다. 과연 문 안에는 팔뚝 굵기 만한 쇠고랑이 떨어져 있었다. 당승무는 그것을 보자 크게 놀랐다. "소어르신네 손에는 가느다란 철사 하나 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 무거운 쇠고랑을 떨어뜨렸습니까?" 소불이는 가볍게 웃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도둑들의 능력이 아닌가? 다만 오늘은 큰 실수를 했다." "아니, 어르신네가 무슨 실수를 했다는 말입니까?" 소불이는 능글맞게 웃었다. "이런 것을 해먹고 사는 사람들은 문을 열 때 아무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까 철사가 가늘어 문고리의 무거운 중량을 이겨내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는데 이것이 실수가 아니라는 말인가?" 당승무는 혀를 내둘렀다. 이어 세 사람은 같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대문 안엔 열 장쯤 되는 넓은 편지가 있었는데 매우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양쪽의 꼬불꼬불한 난간에는 네 개의 주색등이 버티고 서 있었으며 화려한 꽃이 수놓아진 장문 등 모든 설비가 부자의 대청을 방불케 했다. 소불이는 조심스럽게 계단 위로 올라가 네 개의 등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일시에 대청 안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소불이는 한 쌍의 눈을 예리하게 굴려 사방을 자세히 살피고 나더니 마지막 중간 대청문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기금부터 너희들은 저만큼 떨어져 있거라. 내가 가서 문을 열 테니." 당승무와 주주는 그의 말에 따라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소불이가 대청문에 손을 대자 문은 의외로 순순히 열렸으나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밝은 불빛이 객청 안으로 스며들자 모든 설비가 화려하기 그지 없는 광대한 객청이 나타났다. 소불이는 다시 조심스럽게 객청 안으로 들어가더니 불을 밝혔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는 아무런 함정도 없으니 마음 푹 놓고 들어오너라." 주주가 잠시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곳은 어째서 함정이 없을까요?" 소불이는 웃으며 천천히 대꾸했다. "우리는 여기까지 오면서 모든 고난을 다 겪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세 사람 외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든지 함정에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누가 여기까지 들어을 수 있었겠나?" 당승무는 그래도 믿기지 않은 표정이었다. "설사 이곳까지 온 사람이 없더라도 이곳은 도화랑군이 보물을 숨겨둔 요지인데 더욱 무서운 함정을 만들어 놓아야 될 게 아닙니까?" 소불이는 웃으며 주위를 들러보았다. "너희들은 아마 객점의 시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승무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주가 이어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소불이는 슬쩍 웃으며 넓고 화려한 객점 안을 가리켰다. "이곳은 비록 도화랑군이 보물을 숨겨둔 곳이기는 하나 또한 그가 평시에 기거하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만인의 사람 중에 누구든 편안하게 살고 싶지 합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그러니 자기가 사는 곳에 함정을 만들어 놓으면 걸어다닐 때마다 조심을 해야 하니 이 얼마나 귀찮은 일이겠느냐?" 청천벽력 주주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네, 그래요. 도화랑군이 살고 있는 데는 물론 어떤 매복이 있을리가 없지요. 그러나 어르신네가 얘기 안하셨으면 우린 하마터면 잊을 뻔했어요." 그러자 소불이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히히…… 그러나 어떤 기관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주주는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당신은 여기에 기관이 없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또 기관이 있다는 말이에요?" 소불이는 작은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말하는 것은 무서운 매복 기관은 없지만 작고 정교한 기관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주주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어요." 소불이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청의 사방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여기 하나의 대청을 빼놓고 또 다른 문이 있는가를 자세히 보아라." 소불이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과연 소불이의 말이 맞았다. 여기는 하나의 호화스러운 대청을 빼놓으면 아무런 문도 없었다. 이것으로 보아 벌써 끝까지 당도했다는 증거였다. "어르신네가 말한 문은 어디에 있어요?" 소불이는 오히려 반문했다. "낭자, 낭자의 집에는 대청이 있나요?" "물론 있어요. 대청이 없는 집도 다 있어요?" "그럼 낭자가 집에 돌아간 후 대청으로 올라서서 내실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흥!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그것은 병풍 뒤로 해서 들어가지요." 소불이는 득의한 미소를 띠었다. "그럼 됐다." 주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르신네가 말한 문이란 바로 병풍 뒤에 있다는 것인가요?" "믿지 못하겠다면 한 번 가 보아라." 주주는 입을 삐죽거렸다. "쳇, 어르신네는 암기가 무서워서 나더러 앞장을 서라는 것이죠? 흥, 나보고 가라고 하면 못갈 줄 아세요?" 소불이는 매우 동정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낭자, 의심도 꽤 많군. 쯧쯧, 대체 누가 데려갈 것인지……." 그러자 주주는 발을 굴리며 몹시 억울해 했다. "놀리지 말아요!" 하고는 몸을 홱 돌리자마자 즉시 병풍을 향해 걸어갔다. 당승무가 급히 따라와서 말했다. "소인도 낭자를 따라가서 찾아 보겠습니다." 그러나 주주는 냉랭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누가 당신더러 따라오라고 했나요?" 당승무는 순간 당황해 하더니 곧 우물우물 따라갔다. 주주는 재빨리 병풍 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땅 속에서 일진의 가볍고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벽이 갈라지더니 하나의 통로가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주주의 밭 밑에서 가벼운 진동이 일어나더니 그녀가 밟고 있는 대청 바닥이 그대로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주주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을 당하자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그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당승무는 주주의 비명 소리를 듣자 몹시 놀랐다. "어르신네, 우리도 빨리 들어갑시다!" 하지만 소불이는 여유만만하게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거기에는 절대로 위험이 없을 터이니 소불이의 말이 막 끝나자 안에서 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와 보세요" 그러나 주주가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이미 두 사람은 병풍 뒤를 향해 달려갔다. 병풍 뒤에는 과연 별천지가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요지경이었다. 바닥은 깨끗하기가 마치 거울 같았고 통로의 양쪽에는 세 개의 유리벽 등이 있었다. 등에 불은 비록 켜 있지 않았지만 주주가 손에 화통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통로 끝에 하나의 문이 있었는데 주주가 바로 그 문 앞에서 기쁜 표정을 띄고 있었다. 소불이는 화통을 높이 들고 지나오면서 벽 등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참으로 오랫만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우린 결국 찾았구나." 등불이 진주 휘장에 비치고 거기에다 윤이 번쩍번쩍 나는 석벽의 빛까지 비치니 온 통로는 휘황찬란해 사람으로 하여금 눈앞을 현옥하게 하였다. 주주는 다람쥐같이 조르르 달려오더니 싱글벙글해 했다. "이 기관은 정말로 신기하군요. 단번에 저를 안에다 모셨으니까요." "이 늙은이의 말이 틀리지 않았지?" 하고는 한 손으로 턱 밑의 수염을 어루만지며 다시 말했다. "기관이 낭자를 단번에 안으로 모셨으니 이 집이 바로 도화랑군과 도화낭자의 거실일 것이다." 주주는 양쪽에 있는 네 개의 문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쪽의 네 칸의 방은?" 소불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흉흉한 빛을 띠었다. "저기가 아마 도화랑군의 보물을 감춘 곳일 게다." 그는 말하면서 수중의 철사로 휘장을 제치고 급히 안을 살폈다. 주주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와서 물었다. "당신은 왜 들어가지 않아요?" 소불이는 다시 휘장을 내려뜨렸다.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다. 안에는 다만 화장대와 요강 밖에 없으니 여기는 아마 도화낭자의 시녀가 기거한 방 같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나머지 세 칸의 방의 휘장을 차례로 걷으며 둘러보았다. "이 네 칸의 방은 모두 시녀들이 사용했던 방 같으니 우리는 도화랑군의 거실로 한 번 가보자." 소불이는 말을 끝내자마자 수중의 철사를 높이 들고 가운데 칸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주주는 그의 뒤를 바싹 따라가며 물었다. "여기의 시설은 아주 아담한데 아깝게도 왜 방문이 없지요?" 소불이는 씨익 웃었다. "누가 방문이 없다고 했느냐? 아까 낭자가 들어올 때 기관을 건드렸으니 그 방석판이 낭자를 문 입구까지 데려올 때 바로 이 방문 은 자동적으로 열리게 된 것이야." 주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여기의 기관은 정말 심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군요." 그러나 그녀는 일순 멍청해졌다. 한 눈에 확 들어오는 방 안의 시설은 정말 너무나 찬란한 것이었다. 주주의 집안도 강호상에서 매우 이름있는 집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방 치장에 비해서 그녀의 집은 정말로 형편없는 것이었다. 소불이가 등을 찾아 불을 붙였다. 이 한 칸의 넓고 호화스러운 방은 비록 전부 다 흙먼지에 덮여 있었지만 불빛에 빛나는 상아의 침대와 거울, 조각의 아름다움과 집안의 장식은 더욱 사람의 눈을 부시게 했다. 소불이는 눈을 반뜩이며 혼잣말인양 중얼거렸다. "노부는 온 천하를 돌아다니고 심지어 궁전까지도 가 보았는데 그러나 헛수고만 했구나. 지금 도화랑군의 집에 오니 이곳의 보물을 십분의 일만 얻어도 평생을 놀고 먹겠다. 그리고도 죽을 때에 금으로 만든 관도 짤 수가 있겠군." 주주는 그 소리를 듣자 가소로운 듯 피식 웃었다. "어르신네는 정말 돈에 미쳤군요. 그렇게 좋다면 마음대로 가져가세요." 그리고는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침상 옆에 하나의 문갑이 있었다. 그녀는 문갑 앞에 오더니 즉시 손을 내뻗쳐 서랍을 열었다. 당승무는 전에 소불이에게 주주가 어떤 물건 때문에 왔다는 것을 들었지만 지금 그녀가 얻고자 하는 물건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주주는 하나하나의 서랍을 전부 다 열심히 열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열어 제긴 서랍에서 주주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소불이는 꽃이 조각된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벌써 부자가 된 것처럼. 소불이는 주주가 열심히 서랍을 여는 것을 보고 느긋하게 물었다. "낭자 아직도 못찾았소" 주주는 속이 상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유, 속상해. 정말 이상해요. 서랍마다 전부 비었어요." 그 말에 소불이는 뜻밖인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빈 사람이라고?" "혹시 우리가 오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온 것이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 들어와?" 소불이는 이 말을 하고 나서는 즉시 강하게 부정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앞에 있는 두 개의 철문은 전부 다 안에서 잠겨 있어 밖에서 열었는데 어떻게 딴 사람이 들어왔겠나?" "그것도 틀린 말이에요. 안으로 잠긴 문은 안에서 잠그어야 합니다. 그러니 분명 사람은 있었어요." 소불이는 짧은 신음 소리를 연발했다. "음, 그렇구나. 사람이 있어야 한다. 설사 이 문을 잠근 사람이 있어 죽었다고 해도 시체라도 있어야 한다." 이어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철사를 들어 가리켰다. "우리 저 네 개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도화랑군의 보물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자." 지금 소불이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급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 둔탁한 소리가 나며 금색으로 조각한 문이 자동적으로 열렸다. 석실 안이 세 사람의 눈에 비쳤다. 하지만 석실 안은 아주 깨끗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불이는 기절할 듯이 놀라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으…… 끝났다. 끝났어. 과연 다른 사람이 먼저 와서 전부 다 운반해 갔구나." 소불이는 다시 급히 몸을 돌려 또 다른 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은 바로 그 앞에 서면 자동적으로 열렸고 물러 서면 자동적으로 닫혔다. 이 네 칸의 석실은 본래 도화랑군의 보물을 감추어 두는 곳이 틀림 없었으나 지금은 다만 하나의 텅빈 방으로 변하고 말았다. 소불이는 네 개의 문을 바라보며 허탈 상태에 빠졌다. 이어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의자에 다시 앉았다. "휴,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다니……." 주주도 낭패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르신네께서 보기에 여기에 들어온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같아요!" 소불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쓰디쓰게 웃었다.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 이 일은 수십 년 전에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고 또한 며칠 전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낭자가 내게 물어보면 나는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하느냐?" 주주는 완전히 속이 상해 토라졌다. "모르면 그만두세요." 이때 여태껏 가만히 있던 당승무가 끼어들었다. "소어르신네, 도화랑군과 도화낭자는 대체 무엇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산 속에 살고 있었습니까?" 소불이는 미심쩍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자네는 정말 모르고 있나?" 당승무는 고개를 저었다. "예, 소인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소인은 호기심 때문에 왔습니다." 소불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 이 늙은이는 재물 때문에 목숨을 걸었지만 자네같은 젊은이는 호기심 때문에 목숨까지 돌보지 않다니……." 소불이는 다음 순간 마른침을 삼키더니 주주를 향해 물었다. "낭자, 이 늙은이가 말을 할까?" 주주는 등을 돌린 채 쌀쌀하게 했다. "말하려면 하세요! 도화랑군은 나와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도 아니니!"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눈을 찡그렸다. "낭자와 그는 약간의 관계가 있지. 그러나 내가 꺼리는 것은 그와 너 두 사람의 교리(敎理) 비밀을 누설할까봐였다." 당승무는 암암리에 급히 생각했다. '그렇다면 주주와 도화랑군은 확실히 무슨 관계가 있었구나!' 주주가 등을 돌리며 물었다. "우리에게 무슨 비밀이 있습니까?" 소불이는 그냥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만 낭자는 얘기해도 괜찮다고 하기만 하면 된다." 말을 끝내고는 주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당승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옛날에 강호에서 전해 내려온 네 구절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당승무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니, 없습니다." 주주가 대신 나서며 말했다. "일문불출(一門不出) 이방쟁집(二幇爭執) 삼교구파(三敎九派) 강호불불(江湖佛佛)." 소불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쳤다. "그렇다. 바로 그 네 구절이니라. 이 네 구절은 비록 수십 년 전의 일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여전히 연대 관계를 잇고 있는 것 같다." 당승무는 심히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소인의 얕은 견문은 정말 창피스러울 따름입니다." "그것으로 자네를 탓할 수 없지. 자네는 자주 나돌아다니지 않았으니 모를 수 밖에……." 소불이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어" 말했다. "이 네 구절의 말을 풀이해 본다면 첫 번째의 일문불출이란 말은 바로 사천당문(四天層門)을 두고 얘기한 것이다. 사천당문은 독약 암기로써 강호에서 그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러나 아깝게도 당문의 자손들은 근 백 년 전 조상의 계시를 받고 전부 다 강호에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첫 번째의 말을 바로 일문불출이라고 그러는 것이지." 당승무는 소불이가 가문을 얘기하자 갑자기 자기 부모님의 참사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하마터면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지하실의 금관 소불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두 번째의 이방쟁집이란 바로 개방과 고죽방을 두고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 개방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타구봉(打狗棒)이고 고죽방의 제자들이 쓰는 병기는 청죽봉(靑竹棒)이다. 이 두 가지 병기는 분간하기가 어려워서 그들 두 방의 제자들은 가끔씩 잘 싸웠다. 그리고 세 번째의 삼교란 바로 마교(魔敎) 현음교(玄陰敎) 적신교(赤身敎)를 두고 얘기한 것이다." 소불이의 긴 설명을 듣고난 당승무는 매우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불이는 다시 이어 말했다. "도화랑군은 원래 마교도사 도번천의 둘째 제자였다. 그리고 또한 이 주주낭자의 할아버지인 칠태공의 소사제였다." 당승무는 순간 깜짝 놀라며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그녀는 마교의 한 사람이었구나. 마교의 사람들은 전부 다 불을 토할 줄 알고 검을 먹으며 또한 창칼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던데 주주도 할 줄 아는지.' 여기까지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주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주는 한낱 미천한 늙은이로 변장을 했으며 턱 밑에 또한 긴 수염을 내려뜨리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원래 면목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때 소불이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도화랑군은 사람이 몹시 풍류하고 준수하게 생겼기 때문에 옛날에 수많은 명문 규수들과 양당의 여제자들이 전부 다 그에게 반했다. 그래서 강호상에서는 그를 도화랑군이라고 불렀지." 소불이는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지루한 줄도 모르고 계속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강호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도화랑군이라는 이름은 온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강호에서 실종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도화랑군은 현음교에 이용을 당해서 도번천조사의 마교의 한 권 연공비급을 훔쳐 갔다고도 했고 또 다른 사람은 도화낭자도 자기 사부의 비급을 훔쳐 가지고 쌍쌍이 달아났다고 말했다." 소불이는 짧은 수염을 쉴 새 없이 어루만지며 계속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사실 그때는 현음교가 매우 부패한 해였다. 도화낭자는 바로 현음교주 음기후의 관문제자였다. 그래서 현음교의 창고는 전부 다 그녀가 관리했다. 나중에 가서 그녀의 사부가 죽자 도화낭자는 창고 안에 있던 진보비급을 전부 가지고 도화랑군과 함께 도망을 쳤었다." 당승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요." "생각해 보아라. 옛날에 현음교가 비록 부패했다고는 하나 도화낭자가 교주의 보물을 혼자서 독점했으니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있겠느냐?" 소불이는 여기까지 말하고 주주를 쳐다보았다. "하물며 마교 중에서도 가장 귀한 한 권의 연공비급을 잃었다고 하니 물론 도화랑군을 찾아야지, 이 두 사람은 구대 문파에서 가만 두지 않을 뿐더러 마교와 현음교의 사람들도 온갖 수소문을 다하니, 강호가 비록 넓다고는 하나 어떻게 몸을 감출 수 있겠느냐? 그래서 두사람은 할수 없이 이 산속에 숨은 것이었다." 당승무가 급히 물었다. "그런데 도화랑군의 나이는 지금 대략 몇 살쯤 되겠습니까?" 소불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아마, 팔구십 세는 되었을 거다." "그럼 그들이 아직 살았을지도 모르겠군요." 당승무는 원래 대단치 않게 말했던 것인데 그의 말을 들은 소불이는 갑자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렇지. 우리가 여기까지 올 때 앞서 있던 매복기관들은 전부 다 움직였다. 그것이 바로 우리 전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봐서 보물을 운반해 간 사람들은 분명히 기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이어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철문은 안에서 잠겼으니 절대 앞 문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또 다론 통로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까지 말한 소불이는 즉시 의자에서 뛰어 내렸다. "그렇다. 반드시 다른 출구가 있을 것이다!" 소불이는 잔뜩 기대에 찬 모습으로 쉴새없이 철사를 가지고 온 집안을 치고 다녔다. 그러나 구석구석마다 다 뒤졌지만 문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소불이는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면 출구는 여기에 없다는 말인가?" 주주가 오랫만에 입을 떼었다. "어르신네는 새노반의 기관 비급을 보셨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출구를 찾지 못하죠?" 소불이는 자부심이 강한 탓으로 주주의 경멸하는 듯한 말투를 듣자 즉시 눈을 부릅떴다. "누가 찾지 못한다고 했느냐? 출구는 집안에 없으니까 물론 찾을 수가 업지 않느냐?" 주주는 눈을 흘기며 쌀쌀하게 말했다. "우린 기관 매복 같은 것을 잘 모르니까 어르신네가 찾아내세요." 소불이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철사로 휘장을 걷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주주는 당승무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후후……그가 화가 났군요. 그럼 우리는 빨리 뒤따라 갑시다." 소불이는 저만큼 앞서 허리를 굽히고 통로를 따라 밖을 향해 찾아 가는 것이었다. 그는 통로 출구에 있는 청옥병풍의 뒤로 가서 귀를 바짝 대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탁타 치더니 갑자기 환성을 올렸다. "찾았다. 찾았어. 빨리 와라!" 당승무와 주주는 즉시 달려갔다. 소불이가 수중의 철사로 바닥을 가볍게 건드리자 즉시 일진의 음악 소리와 함께 지면 위에 있는 하나의 장판이 즉시 통로를 향해 미끄러져 들어갔다. 소불이는 주주를 바라보며 득의만면하게 웃었다. "아까도 낭자를 이렇게 데려왔지?" 주주도 가볍게 따라 웃었다. "도화랑군은 정말로 인생을 즐길 줄 아는군요. 방 안으로 즉시 모셔다 주는 것까지도 있으니……." 소불이는 그녀가 말을 할 때 수중의 철사를 가볍게 돌려 음악 소리를 멈추었다. 이어 그는 발뒤꿈치로 바닥을 힘껏 소리나게 쳤다. 그러자,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바닥이 갑자기 일어나며 하나의 검은 동굴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이미 통로 위의 등불에 반사되어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든 매끈한 계단이 아래를 항해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당승무는 암중으로 매우 감탄을 했다. 이 산 속은 정말 굉장하구나. 또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 하다니 주주는 기뻐서 어린애처럼 교성을 올렸다. "정말로 문이 있군요. 그런데 어르신네는 어떻게 발로 밟아야 매복 기관이 열린다는 것을 알았어요?" 소불이는 빙굿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세 사람은 각기 화통을 하나씩 들고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아래는 아주 넓은 석실이었다. 사방의 벽은 전부 다 우유빛 같은 옥석으로 만들어졌다. 이것만 보아도 이 백석이 이 산중에 있던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가져온 것임을 잘 알 수가 있었다. 이 한 칸의 석실은 깨끗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하고 안정된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석실의 가운데는 한 구의 금색관이 있었다. 그 관은 불빛 아래에서 매우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당승무는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또 하나의 관이 나타났구나. 그렇다면 출구는 또 다시 관 안에 있다는 말인가? 도화랑군은 기관 매복을 왜 관 안에다 설치를 할까?" 주주의 생각도 당승무와 같았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네, 이것은 하나의 금관이에요. 이것을 열어 볼까요? 어쩌면 출구가 관 속에 있는지도 모르죠." 주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뒤에서 하나의 냉막한 음성이 들렸다.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느냐?" 주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 여긴 과연 사람이 있었군요." 소불이가 얼른 몸을 돌리고 살펴 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허공에다 읍을 했다. "친구는 누구십니까?" 냉막한 음성은 차갑게 호령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대답은 않고 딴소리들만 하는 것이냐?" 소불이는 이 사람이 반드시 이 부근에 숨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몸을 감추어 도저히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눈동자를 굴리며 대꾸했다. "친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내려면 자기의 신분을 먼저 밝혀야만 하오." 냉막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너희는 벌써 나의 멸절신망(減絶神芒)의 아래에 있다. 그러니 노신이 기관만 누르기만 하면 너희는 즉시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 것이다." 냉막한 목소리가 자칭 노신이라 했으니 물론 할머니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자 소불이는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어 공손하게 읍을 했다. "원래 할머니이셨군요. 이거 매우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이곳의 간수이신가 본데……." 냉막한 목소리는 재빨리 말을 가로채며 쌀쌀하게 말했다. "내게 그렇게 다정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다. 너희가 노주인 앞에서 두 손을 묶고 무릎을 꿇는다면 노신은 아마 너희에게 편의를 다소 봐줄 것이다." 소불이는 그가 노주인이라 칭하는 소리를 듣자 즉시 금관을 향해 눈초리를 돌렸다. "도화궁주 심삼랑(沈三郞)의 영구." 금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소불이는 깜짝 놀라 마음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곳에는 한 구의 관 밖에 없는데 안에 들어 있는 자가 도화랑군이라면 도화낭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면서 소불이는 짐짓 놀라는 체 금관을 향해 음을 했다. "소제는 약속을 지키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심형께서는 이미 고인으로" 순간 냉막한 목소리가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너와 노주인은 서로 친구지간인가?" 소불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급급하게 물었다. "심철께선 돌아가신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십오 년."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벌써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군요. 소제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원수의 눈을 피했습니다. 심형께서는 한 장의 지도를 하사 하셨지만 소제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구요. 저는 작년에 겨우 원수가 죽자 약속을 이행하려 왔는데 그런데 심형께서는 벌써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소?" 소불이의 아무렇게나 말하는 소리는 정말 사실인 듯했다. 냉막한 음성이 조금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 노주인의 약속을 이행하려고 왔소?" 소불이는 여전히 침통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만약 심형께서 저에게 한 장의 지도를 주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이런 은밀한 산 속에까지 찾아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냉막한 음성은 반신반의했다. "그 말이 정말이오?" 소불이는 히죽 웃었다. "이 늙은이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지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지도는 심청의 친필이니 자세히 살펴 보시면 알 것입니다." "지도는 어디에 있느냐?" 소불이는 주주에게 고개를 돌리며 명령했다. "제자야, 그 지도를 꺼내거라."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전음의 술법으로 지시했다. "낭자, 빨리 그 한 필의 양피를 꺼내라. 그리고 그녀가 몸을 나타낼 때 너는 그녀의 정면을 막아라." 주주는 즉시 대답하고 허리를 굽히며 품 속에서 한 장의 양피를 꺼냈다. 그러자 왼쪽 첫 번째 벽에서 하나의 청의노파가 획 나타났다. "이리 가져오너라." 소불이는 내심 크게 기뻐하며 급히 재촉했다. "제자야, 빨리 갖다 바쳐라!" 주주는 여전히 공손하게 양피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청의노파 앞으로 걸어갔다. 바로 이때. 소불이가 갑자기 몸을 솟구쳐 날아가는 것이다. 그는 입으로 음흉스럽게 웃으며 지껄였다. "이 늙은이에겐 하나의 별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름하여 백일당귀이니라!" 소불이의 외호는 또 설상무영이라 그가 땅에 소복이 쌓인 흰 눈을 밟고 지나가도 그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가 없으니 소불이의 경공이 얼마나 높은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소불이는 가볍게 몸을 날렸을 뿐인데 어느새 본래의 자세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그는 손에 거무티티한 물건을 잔뜩 쥐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청의노파가 말한 멸절신망이었다. 주주도 소불이가 스치고 지나갈 때 즉시 몸을 한 바퀴 돌려 피하였다. 소불이의 이런 동작은 마치 전광석화처럼 빨라 청의노파는 사람의 그림자 한 번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자기의 수중에 있던 멸절신망만 뺏긴 것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크게 호통을 쳤다. "감히 노신의 앞에서 까불다니……" 순간, 청의노파는 즉시 한 줄기의 섬광을 소불이에게 내질렀다. 소불이는 급히 철사를 휘둘러 상대방의 초식을 받았다. "창, 창, 창" 하는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철사는 청의노파의 단검을 전부 떨어뜨렸다. 청의노파는 자신의 단검이 실패하자 얼굴에 잔뜩 살기를 띄고 마치 거센 파도처럼 소불이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이 일진의 맹공은 검식이 괴이할 뿐만 아니라 위력 또한 막강하여 소불이는 완전히 막지 못하고 상대방의 검광 아래 덮히고 말았다. 주주는 낮은 소리로 당승무에게 말했다. "이 노파의 무공이 아주 높군요."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말은 하지 않았다. 이때 청의노파의 목소리가 다시 온 석실에 울렸다. "이 늙은이야, 네가 노신의 몇 초를 받을 수 있는지 어디 보자? 그가 검을 휘두르자 즉시 한 줄기의 섬광이 날았다. 소불이는 피할 수가 없어 즉시 철사를 들고 막았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소불이는 즉시 두 발자국 물러나 이마의 땀을 씻으며 빈정거렸다. "형수님, 힘이 대단하시군요." 청의노파는 다만 냉소를 날리며 또 다시 덮쳐왔다. 소불이는 수중에 다만 하나의 철사만 들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점점 더 불리해졌다. 소불이는 피하는 것조차 점점 고역을 면치 못했기에 한 눈에 벌써 패배를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주주가 다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소노인께서 감당하시지 못하니 제가 가서 도와드려야겠어요!" 말과 함께 당승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쌍장을 휘두르며 협공해 갔다. 청의노파는 비록 소불이와 싸우고 있지만 다른 두 사람의 행동을 눈여겨 보고 있었으므로 즉시 또 주주를 향해 찔러갔다. 주주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쌍수를 동시에 발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상황은 전연 뜻밖이었다. 주주의 쌍장이 상대방을 격퇴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청의노파의 검식에 의해 흡수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소불이는 주주가 끼어드는 바람에 약간 안도의 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그것도 일순간에 불과했다. 상대방의 검세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고 여전히 급급하게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주주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쌍장을 더욱 빨리 휘두르며 즉시 십팔 초식이나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청의노파의 공력은 더욱 막강하여 이번에도 오히려 상대방의 반격을 받고 말았다. 지금 청의노파가 쓰고 있는 검법은 바로 천하 각 문파의 검법을 종합한 것이다. 그것은 비록 보기에는 혼잡하고 아무런 질서도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초식이 빠르고 변화가 무쌍하여 두 사람으로 하여금 도저히 추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검법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구대 문락의 협력에 의해 제압되어 수십 년 전에 강호에서 사라졌던 것이었다. 당승무는 이 광경을 보자 몹시 마음이 다급했다. 그 자신도 비록 검법을 사용할 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세 사람의 격투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승무는 약간 주시하다가 갑자기 대갈일성을 질렀다. "손을 멈추시오!" 하지만 그의 이 일 성에 주춤할 청의노파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중에 있는 장검을 더욱 빨리 휘둘러 갔다. 그러자 소불이와 주주는 당황해 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검광이 살벌하게 스쳐가는 가운데 청의노파가 낄낄대며 소리쳤다. "이놈아, 왜 떠드느냐? 노신이 이들을 처치한 다음에 네놈을 상대하겠다." 당승무는 그녀가 손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악독하게 공격해 들어가는 것을 보자 마음이 몹시 초조하였다. 당승무는 더 이상 고려하지도 않고 자기 사부의 흑옥불을 꺼내들고 덮쳐가려고 했다. 이때 소불이의 음성이 그를 가로막았다. "노제, 자네에게 독이 있는데 왜 사용을 하지 않느냐? 만약 조금 더 지체하면 이 늙은이와 낭자는 모두 그녀의 검 아래 부상을 입고 말 것이다" 철함노인 몹시 난감해서 어쩔 줄 모르던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사실을 잊었을까? 사부는 비록 무형의 독은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상황이 이렇게 급한데 어떻게 주저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즉시 독을 꺼내 들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할망구, 조심해라!" 하고는 손을 휘둘러 공중을 향해 튕겨 내었다. 청의노파는 젊은 나이의 당승무가 독을 사용하는 능수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해 냉랭하게 비웃었다. "이놈아, 너희 셋은 하나라도 빠……." 그녀는 원래 빠져나갈 생각은 말라고 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채 말도 끝맺지 못하고 그녀는 몸을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주주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큰 소리를 질렀다. "할망구야, 그래도 또 큰 소리를 치겠느냐?" 주주는 검을 휘두르며 청의노파의 어깨를 치려고 했다. 이때 소불이가 낮은 소리로 급히 만류했다. "낭자, 절대 부상을 입혀서는 안돼!" 이어 그는 다시 철사를 휘둘러 주주의 장검을 막았다. 주주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는 못마땅한 듯 물었다. "아까 우리는 하마터면 그의 손에 죽을 뻔했는데 어찌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있어요?" 소불이는 철사로 급히 청의노파의 혈도를 찌르고 나서는 당승무에게 지시했다. "노제, 지금 그녀에게 해약을 주게." 주주는 여전히 못마땅해서 투덜거렸다. "아니, 해약은 왜 줍니까?" "해약을 왜 주다니? 그럼 그녀의 늙은 목숨을 빼앗으려 그러느냐?" 당승무는 한 알의 환약을 꺼내 즉시 청의노과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청의노파는 정신이 들자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늙은 놈아! 너는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 소불이는 손을 흔들며 그냥 히쭉 웃었다. "어떻게 하다니요? 이 늙은 것의 제자는 당신에게 약간의 행동을 제지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 늙은이는 사실상 당신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습니다." 청의노파는 분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고함을 질러대었다. "이 늙은 놈아! 감히 노주인의 안식처에 와서 관을 열려고 하다니……내가 그만 실수를 해서 네놈들의 수작에 넘어가고 말았구나……." 소불이는 아까 빼앗은 한줌의 멸절신망을 청의노파 옆에다 놓았다. "이 늙은 것과 당신의 노주인과는 따지자면 그래도 옛날에는 안면이 좀 있었소. 그리고 이 낭자도 당신 노주인의 손녀가 됩니다." "그녀는 마교의 문하인가?" "그렇소." 그러자 청의노파는 갑자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래서 너희들이 여기를 찾아 왔구나!" 소불이는 매우 미안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공손히 말했다. "우리는 전부 다 남도 아니니 이 늙은이는 당신에게 한 가지의 일을 묻고자 합니다." 청의노파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모른다." 소불이는 그녀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서며 다시 말했다. "아니오. 당신은 알 것입니다. 이 늙은이가 묻고자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노주모께서 안녕하신가 하는 것이오." 청의노파는 그 말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를 왜 묻나?" 소불이는 즉시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도화낭자는 과연 죽지 않았구나!" 이어 그는 즉시 킬킬 웃으며 다그쳐 물었다. "당신의 노주모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의 노주모는 여기에 없다는 말이군." 청의노파는 이 말을 듣자 즉시 경악했다. "나는 노주모가 여기에 없다고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저 늙은이가 어떻게 알았을까? 소불이는 강호에서 노련하게 굴러먹은 터라 무슨 일이든지 직접 말하지 않고 테두리만 얘기해도 즉시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청의노파는 이제서야 소불이가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눈을 내리감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소불이 또한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 키득대었다. "말하기 실으면 그만 두시오. 이 늙은이에게는 열쇠가 있으니 우리는 혼자서라도 찾을 수 있소." 소불이는 말을 끝내고는 허리춤에서 한 묶음의 열쇠를 꺼내 청의 노인의 눈 앞에 흔들었다. 순간 청의노파는 두 눈을 부릅뜨고 크게 소리쳤다. "이 늙은이야! 너는 언제 노신의 열쇠를 훔쳐 갔느냐? 빨리 이리 내놓지 못해!" 소불이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계속 빈정거렸다. "히히". 서두를 필요는 없소. 우선 들어가서 찾아본 후에 다시 당신에게 돌려 주겠소. 그러니 당신은 여기서 푹 쉬시오." 그리고는 즉시 두 사람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 우리는 이제 가보자." 당승무와 주주는 그의 손짓에 즉시 따라갔다. 청의노파는 너무도 분한 마음에 어쩌지 못하고 욕설만 퍼부어 대었다. "이 늙은 놈아! 만약 네놈이 그 열쇠를 잘못 건드리면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소불이는 벌써 들어갔다. 당승무와 주주도 그녀의 말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따라서 들어가 버렸다. 이 좌우의 벽 사이에는 하나의 좁은 틈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축소를 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까이 가기 전에는 절대로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 좁은 틈을 타서 사오 장쯤 들어가니 통로는 즉시 넓어졌다. 그 한 칸은 마치 거실 같기도 하고 또 불당 같기도 했다. 중간 벽 있는 데는 하나의 나무 탁상이 있고 그 위에는 일 장 가량되는 관음대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불상 앞에 등불도 켜져 있었다. 그리고 탁상 위에 있는 작은 쟁반에 염주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아 청의노파가 심심하면 여기에 와서 염불을 외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또 석실 옆에 하나의 문이 안으로 향해 있었는데 아마 청의노파의 거실인 것 같았다. 게다가 오른쪽으로도 좌우 양쪽에 각기 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긴 복도인 듯 매우 어두컴컴했다. 소불이는 천리화등을 높이 쳐들고 앞장 서서 복도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복도의 양쪽에 늘어 서 있는 석실들은 전부 다 협소했다. 어떤 곳은 자질구레한 가구가 들어 있는 데도 있었고 그나마도 없는 방도 있었다. 세 사람이 복도 끝까지 오자 거대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 철문 위에는 어린애의 팔뚝 만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소불이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웃었다. "아마 여기가 출구인 것 같다." 입으로 말하면서 그는 열쇠를 꺼내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앞에 컴컴한 통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소불이는 약간의 신음 소리를 내며 화통을 높이 들고 그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두 사람도 이어 뒤따라 들어갔다. 세 개의 불빛에 비치는 통로 양쪽에는 각각 다섯 개의 철문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모든 철문마다 굳게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소불이는 이것을 보자 즉시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 "혹시 이 철문 안에 있는 것이 도화낭자의 보물이 아닐까?" 이어 제풀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럴 거야. 틀림없어. 도화랑군이 죽자 그녀는 매우 상심한 끝에 세상 살 맛을 잃어 버려 모든 보물을 전부 다 이 안에 넣어 두고 청의노파에게 지키게 한 다음 자신은 아마도 피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혼자 지껄여 놓고는 그는 키득대며 기뻐했다. "히히히……이것이 바로 부귀란 운명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소불이가 언제 부자가 되는가 하고 생각해 왔는데 뜻밖에 이런 재화가 이 늙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주주는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르신네, 당신은 부자가 되고 싶어 아주 미쳤군요." 소불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탐욕스럽게 말했다. "강호에서 횡재를 하여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어찌 이 늙은이 하나 뿐이겠는가? 그들은 부자가 되려고 할 뿐만 아니라 현음교와 마교의 연공비급을 얻어서 무림의 제일 고수가 되고 싶기도 하지." 주주는 소불이가 연공비급이란 얘기를 꺼내자 즉시 재촉했다. "그만 얘기하고 빨리 열어보세요? 소불이는 매우 기분이 좋은 듯 열쇠 꾸러미를 흔들며 첫 번째 석실의 문을 열었다. 불빛 아래 비치는 이 석실은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방 한가운데 또 다른 철책이 눈에 띠었다. 그리고 그 철책 안에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긴 노인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석실 안이 어둡기 때문에 앉아 있는 노인이 대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을 할 수 조차 없었다. 소불이는 짧은 비명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이상하다. 여기는 감방인가?" 이때 갑자기 앉아 있던 노인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누구냐?" 우렁찬 소리는 마치 천등과 같아 세 사람의 귀속까지 윙윙거릴 지경이었다. 소불이는 깜짝 놀라 즉시 물었다. "귀하는 내공이 매우 정심하군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연금을 당했습니까?" 그러자 노인의 눈에 섬광이 번쩍 하더니 이상하다는 듯 그는 다시 물었다. "너희는 요부의 수하가 아니냐?" 소불이는 고개를 흔들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닙니다. 아니오. 저희들은 다만 심심해서 들어 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냥 구경만 다녔을 뿐입니다." 하고는 문 가까이 오자 즉시 철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자 주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르신네, 저 사람은 누구인가요?" 소불이는 낮은 목소리로 투덜대듯 대꾸했다. "누가 알아?" "모르신다면 왜 묻지를 않았어요?" 소불이는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여전히 낮게 중얼거렸다. "제가 보기에 저 사람의 무공은 아까 그 할망구보다 수십 배나 더 고명한 것 같다. 그러니 귀찮은 일은 애당초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것이다." 당승무가 말했다. "저 노인장께서는 어쩌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니 우린 기왕에 왔으니 자세히 물어 보아야 합니다." 주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맞아요. 저 사람은 어두컴컴한 데 갇혀 있으니 우리 말고는 어느 누구도 그를 놓아 주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그의 내력을 알아 보고 놓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소불이는 고개를 흔들며 거부했다. "젊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일에 참견을 하는군." 그러나 주주는 굽히지 않았다.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이 아니고 정의를 위해서 입니다." 소불이는 할 수 없이 승낙을 했다. "좋아, 좋아, 정의라고 하자. 그럼 내가 가서 물어 보겠다." 이렇게 말한 그는 또 다시 통을 높이 쳐들고 들어갔다. "늙은 친구, 당신은 대체 누구요?" 그러자 꾸짖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노부가 누구이던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소불이는 웃으며 대꾸했다. "제가 이상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노형 같은 높은 무공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갇히게 되었습니까?" 노인은 냉소를 쳤다. "흥, 그것은 밖에 있는 두 명의 젊은이들이 너보고 물어 보라고 해서 그런 것이지?" 소불이는 깜짝 놀라 암중에 중얼거렸다. "이렇게 두꺼운 철문이 막혀있는데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이어 소불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저는 호의에서 묻는 것입니다." "홍, 네가 바로 소가냐?" 소불이는 더욱 소스라치게 놀랐다. "늙은 친구, 저를 아십니까?" 노인은 더 이상 대답하기도 귀찮은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노부는 남에게 들었다." 소불이는 흥분을 금치 못하며 더듬대었다. "친구께서 기왕 이 늙은이의 이름을 말했으니 저는 옹당 당신을 놓아 주어야 하겠군요." 이어 소불이는 철문을 열려고 하였다. "철문을 연다고 해도 노부는 살아서 여기를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소불이는 벌써 그의 말을 묵살하고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친구의 몸에 쇠사슬이 감기어 있다고 해도 저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지요." 당승무와 주주도 따라 들어갔다. 눈 앞에 보이는 노인은 땅에 앉아 있었는데 머리는 길어서 땅을 덮고 수염은 무릎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제일 경이한 것은 그의 양 어깨에 있는 뼈 사이에 각기 하나의 검고 육중한 철환이 감겨져 있다는 거였다. 또한 철환 뒤로 두 줄의 쇠사슬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땅속 깊이 파묻혀 있었다. 소불이는 이것을 보자 즉시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뼈를 뚫었군요?" 노인은 입맛이 쓴 듯 침중하게 말했다. "만약 이것이 쇠사슬이라면 노부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면철삼풍마동(緬鐵參風磨銅)으로 특수하게 주문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친구는 그녀와 대체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독수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대답 대신 매서운 눈초리로 소불이를 쏘아보았다. 상대방의 눈초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네가 알기로는 내가 누구인 것 같으냐?" 소불이는 이렇게 느끼자 상대방의 한 쌍의 눈이 예리한 단도와 같이 느껴져 절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저의 무례가……." 소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이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노부는 이름하여 염지천 (閻之良)이라 한다." 이 염지천이라는 세 글자가 소불이의 귀에 전해지자 그는 마치 청천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 당신이 바로 자의교주 염…… 지천……?" 이때 주주가 한 발 물러서며 한광을 번쩍였다. 그녀의 옆구리에서 정광을 발하고 있는 단도가 뽑혀져 나온 것이었다. 주주는 단도로 염지천을 겨누며 원한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다. 잘됐어, 당신이 바로 동사도주(銅沙島主)였구나! 이 늙은 도적놈아! 네놈은 나의 어머니를 죽이고도 모자라 다시 자객을 보내어 내 할머니까지도 죽이려 했지? 이놈아, 잘 걸렸다. 내 필히 너를 가만 두지 않겠다!" 그러나 염지천은 꼿꼿하게 앉아서 전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주주가 겨누고 있는 단도를 바라보았다. "낭자는 청상인(靑霜人) 한선자(韓仙子)의 문하 같은데 노부는 동사도주가 아니다. 아마도 낭자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 주주는 냉랭하게 냉소를 날렸다. "흥! 이 늙은 도적놈아, 그래도 시치미를 떼려고? 어림도 없다. 내 오늘 네놈을 죽이고 은 무림을 대신해 철저히 복수를 하겠다!" 염지천이 조금 높은 목소리로 준엄하게 물었다. "낭자의 영당은 대체 누구인가? 노부는 마교와 어떤 원한도 없으며 더구나 사람을 죽인 일도 없는데……." 순간, 주주는 무섭게 분노를 일으키며 치를 떨었다. "이놈아!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 이 마당에 변명은 무슨 변명이냐?" 임무 소불이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즉시 주주에게 말했다. "낭자, 내가 보기에는 이 일에 약간의 의문이 있는 것 같은데?" 주주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자기 자신도 염지천이라고 똑똑히 말했는데 가짜일 리가 없어요!" 이번에는 소불이가 주주를 달래는 입장이 되었다. "노인은 남에게 어깨뼈까지 뚫리고 여기에 연금을 당했으니 가려고 해도 아마 못갈 것이다. 그러니 우리 자세히 물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니, 무엇을 물어보려고요?" 소불이는 노인을 한 번 훑어보며 말했다. "만약 그가 동사도주라면 삼 년 전에 무림의 많은 고수들이 섬에서 실종이 되었으니 그것만 하더라도 물어보는 이유가 되지 않느냐?" 염지천은 전혀 알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소불이의 눈동자가 염지천을 예리하게 가늠했다. "당신은 정말로 자의교주 염지천입니까?" 염지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 천하에 동성동명의 사람은 비록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무림에서 염지천이라 불리우는 사람은 노부 한 사람 밖에 없네." 주주가 그것 보라는 듯 대뜸 나섰다. "그거 보세요. 그가 자의교주라고 시인을 하지 않아요?" 염지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노부가 자색옷을 즐겨 입기 때문에 친구들이 자의교주라고 칭했을 뿐이지 노부가 어떻게 진짜 교주가 되겠느냐?" 소불이는 눈을 부릅뜨고 몹시 경악해 했다. "그렇다면 삼 년 전에 동사도에서 자의문을 창립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는 말씀이오?" 염지천은 배까지 내려오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노부는 요부에 의해 여기에 감금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소불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 그렇다면 이상한데?" 그러자 오히려 염지천이 소불이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소형이 자세한 얘기를 해줄 수 없나?" 소불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물어물했다. "그 얘기를 하자면 매우 길어집니다.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에 각대문파들은 한 장의 청첩장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의교주 염지천이 동사도에다 자의문을 창립하려고 보낸 청첩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강호상의 각 문파들은 전부 다 참가했지요. 그리고 소림사(小林寺)에서 나온 사람은 나한당(羅漢堂)의 주지 지통대사(祉通大師)였고 무당파에서 참석한 사람은 천학도장(天學道長) 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문파들은 전부 다 문파의 장수가 아니면 문하제자들이었습니다." 염지천이 다시 물었다. "소형도 참가하였소?" 소불이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염교주는 아 늙은이가 섬에 가서 물건을 훔칠까봐 염려해서 제게는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제가 청첩장을 받았다면 아마 오늘 이렇게 여기에 서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염지천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그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살해된 것이 아니오?" 소불이는 고개를 저었다. "간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대회가 끝났을 때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자마자 구대 문파는 하마터면 마조에 의해 몰살될 뻔했습니다." "어째서?" "듣자하니 동사도에 참가한 사람들은 전부 다 대회장에서 염교주의 문하제자들이 각문 각파의 진산검법을 이전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한 그 제자들은 그러면서도 다른 각문 각파의 검법을 하나하나 전부 다 깨뜨렸다더군요. 이 한 수로 동사도주는 아마 구대 문파에게 겁을 주려고 한 것 같았지만 구대 문파 쪽으로 본다면 그들이 자기네의 진산무학을 훔쳐서 배웠고 더구나 그것이 그들에 의해 일일이 깨뜨려졌으니 구대 문파 쪽이 어찌 다급해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염지천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옛날에 현음교의 만검귀종검법이 천하 각문 각파의 정화를 포함하고 있으니 그들이 구대 문파의 검법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지." 그 말을 들은 소불이는 깜짝 놀라 크게 소리내어 물었다. "그렇다면 동사도의 문인들은 모두 현음교의 제자란 말씀입니까?" 염지천은 대답을 않고 다만 그 다음 말을 재촉할 뿐이었다. "소청은 계속 말씀하시오." 소불이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그리고 소림장문 지통대사와 무당장문 천승자가 나타나서 나머지 구대 문파를 집합시켜 대책의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동사도의 음모였습니다." "어째서 동사도의 음모라고 할 수가 있소?" 소불이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이어 말했다. "바로 동사도에 참가한 지통대사, 천학도장, 종남장문 종자기 등은 전부 다 동사도의 문인들이 변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구대 문파의 집합 장소에 나타나서 구대 문파끼리 서로 살생을 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음모가 홍채문주(鴻彩門主)에 의해 간파되어 즉시 제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데, 아까 소형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림 중에 많은 고수들이 섬에서 실종이 되었다고 했는데……?" 소불이가 다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동백대회가 끝난 후에 동사도가 적극적으로 다른 한 가지의 음모를 죄하고 있는 것을 홍채문파가 발견했지요. 그래서 많은 유명한 고수들이 함께 동사도로 갔습니다. 그런데 또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많은 절정 고수들이 동사도에 간 후부터는 마치 깊은 바다에 잠적한 것처럼 소식이 딱 끊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불이는 세 사람을 동시에 굽어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어 말했다. "다시 구대 문파의 장문인들은 홍채문주가 자기네들을 구해준 은덕을 갚으려고 즉시 구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또 괴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그곳은 옛날의 호화스럽던 궁전들이 모두 무너지고 또한 홍채문주만 실종된 것이 아니라 자의문의 제자들까지도 전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후에 다시 만나보지 못했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상한 점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양쪽이 격투를 벌렸다면 싸운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깨어진 기왓장들 뿐이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홍채문주가 사람을 이끌고 달려갈 때 섬 위에서 갑자기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아무런 근거도 없으니 믿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것은 무림 근래의 최대의 문제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때 당승무는 마음 속으로 크게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음, 원래 삼 년 전에 강호에서 그처럼 큰 일이 일어났었구나. 그렇다면 주주의 모친도 아마 동사도에 간 고수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염지천이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그 일은 과연 근래에 보기드문 이상한 일이군. 그런데 홍채문주는 어떻게 해서 동사도에 딴 의문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소?" "글쎄요. 그것 역시 강호상에서는 다만 그렇다는 전설만 남아 있을 뿐 대체 홍채문주가 발견한 의문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염지천이 두 눈을 무겁게 내리깔고는 마치 신음 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노부의 생각으로는 이 음모가 반드시 사람의 실종과 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소불이가 이어 말했다. "동사도는 이미 잿더미로 변했는데 어떻게 옛날의 음모를 조사해 낼 수 있겠습니까?" 염지천은 매우 억울한 듯 연거푸 탄식을 했다. "대체 어떤 자가 노부를 가장하고 강호에 풍파를 일으켰을까…… 휴, 그러나 노부는 아깝게도 이렇게 석굴에 갇혀 폐인과 마찬가지니…… 아깝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처량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말의 동정을 품게 했다. 소불이는 암중으로 생각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동사도는 염지천의 이름을 빌어서 자의문을 창립하고 그리고 진짜 염지천은 여기 이렇게 연금을 당하고 있으니…… 하지만 상대방이 염지천으로 가장한 데는 이것과 필시 최소한의 관계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불이는 다만 마음 속으로 생각을 하느라 염지천의 아깝다는 한 마디를 듣지 못하고 말았다. 주주의 모친은 당승무가 짐작한대로 동사도에서 실종이 되었다. 아까까지도 그녀는 염지천을 원수로 보고 있었지만 염지천이 여기에 갇힌지 십 년이 넘었다고 하니 생각을 달리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염지천을 매섭게 주시하고 있다가 이 아깝다는 한 마디에 즉시 의문을 표했다. "아니, 무엇이 아깝다는 말이죠?" 염지천은 순간 두 눈을 부릅뜨며 분노의 빛을 역력히 띄더니 다시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깝다는 것은 노부가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소불이가 말을 하려는데 주주가 급히 염지천의 말을 가로챘다. "만약 어르신네께서 강호에 나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만약 노부가 강호에 다시 나갈 수 있다면 내 몸소 동사도에 가서 그놈의 계교를 살펴보겠다." 이때 소불이가 경악하며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노형의 말씀은 동사도주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입니까?" 염지천은 의미있게 웃었다. "그 사람이 이십 년의 공로를 들여서 계획을 꾸몄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겠소?" 소불이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러나 동사도는 벌써 잿더미로 변했고 이삼 년 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가서 조사를 했어도 단서를 잡지 못했는데……." 염지천이 여전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것은 다만 하나의 속임수 밖에는 되지 않지. 만약 노부의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삼 년이 지나지 않아서 강호의 모든 각문 각파는 반드시 연속적으로 멸망을 하고 말 것이오." 소불이는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노형께서 그렇게 얘기하시니 아마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신 것 같군요." 이때 주주가 급히 끼어들었다. "저의 모친이 모함을 당했나요?" 염지천이 냉랭하게 고개를 저었다. "노부는 여기에 갇힌지 십 년이 넘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겠나?" 이어 주주를 똑바로 주시했다. "낭자의 모친 등의 사람들이 모함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얘기하기가 곤란……." 주주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즉시 물었다. "그렇다면 저의 모친께서는 아직까지 모함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이어 염지천은 소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형, 동사도가 잿더미로 변한 후에 강호에는 어떤 큰 변고도 없었소?" "처음의 이 년 동안은 흑백양도 간에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는 않았소이다. 그러나 몇 개월 간에 걸쳐 두 가지 큰 일이 발생했습니다." "무슨 일이 발생했소?" 소불이는 매우 깊이 생각하는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이 두 가지의 일이 거리는 매우 멀지만 그러나 노형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것은 대강 연관을 지어서 생각할 수가 있겠군요."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시작했다. "첫 번째의 일이 발생한 때는 작년 십이월 말경이었습니다. 그때 남해문의 장문이었던 양영공(梁令公) 부부와 그들의 유일한 딸이 원수들의 손에 의해 살해를 당하자 그후 사흘이 못가서 남해문의 십이대 제자들도 선후할 것 없이 전부 재난을 당했지요. 그들의 원수가 누구인지는 도무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두 번째의 사건은 금년 오월에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천당문의 장문인 당승종 일가 열세 식구들인데 모두 원흥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당했지요." 당승무는 자기의 집안 참사를 듣자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이때 주주가 나서며 한 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또 저의 할머니도 이름 모르는 도적에게 주화입마를 당했어요." "낭자의 할머니가 누구신데?" "저의 할머니는 바로 칠태파 예요." 염지천은 매우 놀랐다. "이제보니 낭자는 한선자의 영애였구나. 음, 그래서 한선자의 유명한 백보단수(百步斷首)의 청상인이 낭자의 수중에 들어 갔군." 염지천은 주주의 단검을 그래서 주위 깊게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노부가 알기로는 칠태파는 삼십 년 전에 문산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하던데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주주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무림사노(四老)인 제 할머니 정도로는 절벽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어요. 저의 할머니는 은퇴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부러 백 장 높이에서 뛰어내린 것이지요." 염지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칠태파의 무공은 벌써 화경(化境)에 접했는데 어떻게 해서 남에게 주화입마의 화를 입었지요?" 주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다만 할머니께 듣기를 금년 초순 어느 날 밤에 할머니가 정실에서 운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들어왔다고 해요. 보통 때 할머니의 정실에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해요. 저도 예외일 수는 없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의 신법은 극히 빨라서 할머니가 일어나려고 한 순간 벌써 가까이 다가와서 할머니의 어깨를 눌렀다는 거예요." 여기까지 말을 끝낸 주주는 그날의 일을 기억해 내려는 듯 두 눈을 굴렸다. "그 사람이 잔뜩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만 어깨에 무거운 힘만을 의식했대요. 그리고 그 사람은 다만 할머니더러 나이가 많고 여태까지 무림에 그 이름을 떨쳤으니 집에 그냥 있으라고만 했다는군요. 그 사람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깨가 가벼워진 것을 의식하여 고개를 들자 그때는 이미 그 사람은 번개처럼 문을 뚫고 달아나 버렸답니다. 그 자의 신법은 매우 놀라와 할머니가 쫓아갔을 때 그 사람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군요." 소불이는 매우 놀랍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낭자의 할머니가 마교의 노조종(老祖宗)인데도 그 사람은 달아날 수 있었다니……." 주주 역시 동의했다. "네, 그래요. 할머니께서 말하기를 암만 생각해봐도 그런 사람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고 해요. 심지어는 이미 죽은 무림 고수들까지도 생각해 보셨다고 해요." 염지천이 물었다. "그런데 낭자의 할머니께서는 어떻게 해서 주화입마를 당했다는 것인가?" "바로 그날부터 할머니는 몸이 점점 이상하다고 느끼셨어요." "어떻게 이상하게 느끼셨나?" 주주는 잠시 입을 깨물고 있더니 다시 이어 말했다. "할머니께서는 처음엔 다만 피곤하다고 느꼈을 뿐인데 나중에는 두 다리가 몹시 무겁고 평상시처럼 영민하지가 못했다고 해요. 그리고 반 달도 못되어서 두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 그제야 암수를 당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대요." 염지천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낭자, 할머니의 주견으로 당시에 조금도 발견을 못했었나" "게 할머니가 말하시기를 그 사람이 간 후에 즉시 조사를 했지만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요." 염지천은 짧은 신음 소리를 내며 무엇인가 짐작을 한 것 같았다. "낭자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도화랑군이 숨겨놓은 반 권의 마교 연골진경 때문인가?" 주주는 염지천이 이 뜻밖의 사실을 말하자 매우 놀랐다. "예, 저의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연골진경의 하권에는 수복현공(首復玄功)의 법문이 기재되어 있다고 해요. 할머니께서는 그것을 연마하기도 전에 아깝게도 도화랑군에게 빼앗겼어요. 그 후 저는 사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도화랑군의 행방은 영영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틀 전 무의식 중에 도화랑군의 소식을 듣고 따라 왔지요." 염지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낭자는 연골진경을 찾았는가?" 주주는 심히 억울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에요. 찾지 못했어요.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염지천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요부가 가지고 갔을 것이다." 이때 주주는 아까부터 궁금해 하던 것을 즉시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네는 아까부터 요부라고 하시는데 그 사람이 누구예요?" 염지천은 흘낏 주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도화낭자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 주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화낭자는 여기에 없는데 어디에 갔어요?" 염지천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요부는 현음교의 무학에 정통하며 공력 또한 벌써 화경에 달했으니 무림 중에 그녀를 대항할 만한 적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낭자가 그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아마 연골진경을 뺏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에요! 저의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꼭 찾아야 해요!" 그러자 갑자기 염지천이 안색을 매우 신중하게 굳히며 진지하게 말했다. "낭자, 노부에게 한 가지 교환 조건이 있는데 응답해 주겠느냐?" 생사의 거래 주주가 급히 물었다. "무슨 교환 조건인가요?" 염지천은 이 순간을 노렸다는 듯 재빨리 말했다. "만약 낭자가 노부에게 청상인을 잠깐 빌려준다면 노부는 낭자를 도와서 연골진경을 뺏아오면 좋겠다." 주주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도화낭자의 행방을 알고 있나요?" "모른다. 그러나 빠르면 삼 개월, 늦으면 일 년 안으로 노부는 반드시 그 요부를 찾을 수가 있다." 소불이는 속으로 급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듣자하니 한선자의 청상인은 쇠를 마치 두부처럼 자른다고 하였는데 그는 청상인으로 저 쇠사슬을 자르려고 하는 모양이군.' 사실 옛날 염지천은 선방의 둘째로 이름을 날리었다. 그러니 그의 무공은 첫째 아니면 둘째 가는 실력이었다. 이러한 신분이기에 그는 남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교환 조건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종용했다. "낭자, 이 조건은 괜찮으니까 빨리 대답하여라." 그러나 주주는 선뜻 응하지 않았다. "이 칼은 제 어머니의 것이니 어르신네께 빌려 줄 수는 없어요. 그러니 제가 당신을 대신해서 잘라 드리겠어요." 염지천은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낭자, 비록 낭자에게는 청상인이 있지만 그러나 노부 몸에 감겨있는 쇠사슬은 수십 가지의 금속으로 만든 것이니 낭자는 아마 자르지 못할 것이야." 주주는 피식 웃었다. "제가 자르지 못하는 것을 어르신네가 어떻게 자를 수 있나요?" 염지천은 그냥 웃었다. "낭자는 아마 시험해 보면 알 것이다." 주주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청상인을 한 번 훑어보았다. "저의 이 청상인은 암만 단단한 물건이라도 자를 수 있는데 하물며 이런 하찮은 쇠사슬을 자르지 못한다는 것은 믿지 못하겠어요." 주주는 칼잡이에 진력을 주입시켜 땅에 늘어져 있는 쇠사슬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챙-." 하는 소리가 나며 불꽃이 사방으로 튕기어 졌지만 그 쇠사슬은 끄덕도 없었다. 주주는 이 뜻밖의 결과에 소스라치도록 놀랐다. 그녀는 급히 자기의 칼날을 살펴보았으나 다행히도 칼에는 아무런 손상도 없었다. 소불이는 더욱 놀라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니, 이 쇠사슬은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한선자의 청상인으로도 자를 수 없는가?" 염지천은 보라는 듯이 싱긋 웃었다. "낭자, 이제야 내 말을 알아 듣겠지?" 주주는 그래도 믿지 못했다. "게가 자를 수 없는 것을 어르신네가 어떻게 자를 수 있어요?" 염지천은 재차 반문했다. "낭자, 아직도 믿지 못하겠나?" 주주는 몹시 미심쩍어 했다. "게 어머니가 저에게 청상인을 물려줄 때 말씀하시기를 이 칼은 그 분께서 옛날에 명성을 날렸던 명기라고 했어요. 그래서 평상시에도 늘 가볍게 사용해서는 안 되며 또한 남에게 빌려 주어서도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나 제가 자르지 못한 쇠사슬을 어르신네가 자를 수 있다면 빌려 주겠어요." 염지천은 쇠사슬을 흔들어 보며 자신있게 말했다. "노부가 낭자에게 청상인을 빌리는 것은 다만 교환 조건에 의해서이다. 그러니 만약 낭자가 노부의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리 자르던 못자르던 그것은 바로 노부 자신의 일이다." 주주는 수중의 청상인을 건네주며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르신네의 조건을 받아드리겠어요." 소불이와 당승무는 물론 믿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단도로서 주주가 자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그가 자를 수 있는지 심히 궁금하여 눈을 빛내며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염지천은 단도를 받자 예리한 칼날을 손으로 쓸며 새삼스럽게 장 탄식을 했다. "아…… 노부는 여태까지 남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없었는데 그러나 십 년 동안의 연금생활중에 햇빛 한 번 받아보지 못했으니 만약 자네들 세 사람이 아니었다면 노부는 이 산중에서 그냥 죽어야 할 것이다." 당승무는 그가 단도를 든 채 자를 생각을 하지 않자 급히 독촉을 했다. "어르신네께서는 할 말이 있다면 쇠사슬을 자르고 난 후에 말씀하십시오." 염지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쇠사슬을 자르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노부는 쇠사슬을 자르기 전에 십여 년 전에 연금당한 일을 회상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 말한 염지천의 두 눈에서 갑자기 사람에게 전율을 주는 한광이 뻗어 나왔다. 주주는 마음 속으로 잔뜩 벼르고 있었다. '아까 나는 전력을 다해도 끊지 못했는데 네가 어떻게 자르나 두고 보자!' 이때 청상인에서 갑자기 새파란 광망이 뻗어나왔다. 마치 가을밤의 초생달처럼 그것은 매우 차갑고 싸늘하였다. 순간, 소불이는 깜짝 놀라 급히 소리쳤다. "검기다! 빨리 물러나라!" 그러면서 재빨리 두 발자국을 물러나는 것이었다. 당승무와 주주 두 사람 또한 소불이의 말을 듣고 뒤로 물러가려고 하는 순간, 눈 앞이 번쩍하더니 동시에 날카로운 음향이 들려왔다. 이어 염지천의 우렁찬 웃음 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하하…… 당황할 필요는 없다. 노부가 어찌 너희들에게 상처를 입히겠느냐?" 주주가 자세히 보자 염지천의 어깨에 감기어 있던 두 개의 철환은 이미 이 전황석화 같은 순간에 완전히 끊어져 땅에 떨어졌다. 일이 이쯤 되자 주주는 일순 멍청해졌다. 그녀는 하마터면 자신의 눈까지도 믿지 못할 뻔했다. 이어 소불이가 얼굴에 경악한 빛을 띠며 신음을 했다. "오오……이 늙은이는 비록 강호에서 수십 년 간 돌아다녔지만 이런 것을 실지로 볼 줄은 정말 몰랐다." 염지천은 옷의 먼지를 털고 나더니 청상인을 주주에게 돌려주었다. "낭자, 보검을 거두어라." 주주는 단도를 받자 즉시 칼집에 넣었다. 그제야 염지천은 소불이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소형은 이 몸을 너무 과대평가 하셨습니다. 원래 따진다면 바로 도화요부에게 감사를 해야 합니다. 이유는 이십여 년의 연금생활로써 노부는 옛날에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검술요결을 착안해 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노부에게 그러한 공력이 있다고 해도 낭자의 청상인이 없이는 여전히 자유의 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처 말을 맺기 전에 갑자기 냉랭하게 소리쳤다. "누구냐?" 이어 밖에서 냉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다. 이 도적놈아, 감히 노신의 열쇠를 훔쳐서 문을 열고 들어가다니…… 그러나 너희들은 살아서 나갈 생각은 아예 말아라." 청의노파는 손에 멸절신망을 쳐들고 분노에 가득찬 얼굴로 문에서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가 실내의 상황을 보았을 때 즉시 안색이 변했다. 그와 동시 염지천은 대갈일성을 질렀다. "서랏?" 하며 그는 팔을 뻗쳐 격공점혈의 수법으로 일 장을 찔러갔다. "펑-" 청의노파가 뒤로 물러가는 바로 그 순간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한줌의 남색 광채가 실내에 격사되어 왔다. 소불이는 깜짝 놀라 급히 땅에 엎드리며 중얼거렸다. "이것은 현음교의 멸절신망이다." 그러나 주주는 급히 몸을 번득여 신속히 당승무의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염지천의 냉소가 울렸다. "흥! 이 늙은이가 어디서 감히……." 이어 즉시 그의 왼쪽 소맷자락이 펄럭이며 여러 사람의 동작들이 서로 엇갈리는 순간에 석실 안에서는 찢어지는 둔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소불이는 머리를 싸안고 땅에 엎드려 있던 참에 비명 소리가 들리자 즉시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그 한 줌의 멸절신망은 벌써 염지천의 소맷자락에 의해 전부 되살아나 청의노파의 몸에 맞았던 것이다. 다음 순간, 청의노파는 문 입구에 쓰러져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당승무는 위험했던 순간에 주주가 자기의 앞을 막아 주자 즉시 감격해서 얼굴을 붉혔다. "가…… 감사합니다." 주주도 일시적으로 얼굴을 붉히며 입으로 가벼운 일 성만 내었을 뿐이었다.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감탄해 했다. "이 늙은이가 듣기로 멸절신망은 너무나 악독해서 한 번 발사되면 막지 못한다고 하던데 그러나 염노형이 여기 있으니 앞으로 어떤 암기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염지천은 담담하게 웃으며 청의노파를 쏘아보았다. "저 노파는 원래 도화요부의 시녀로서 벌써 죽어 없어져야 했소!" 여기까지 말하고는 다시 주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 노부는 깜박 낭자가 입고 있는 옛날 영조의 천잠녹구를 잊어버릴 뻔했다. 낭자는 어서 그 면구를 한 번 벗어 보아라." 소불이도 앞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그렇다. 낭자, 우리는 이렇게 많은 고생을 함께 했는데도 이 늙은이는 낭자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어디 한 번 벗어 보게나." 당승무는 속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또한 이 낭자의 얼굴이 얼마 만큼이나 아름다울까를 생각하며 마음을 죄었다. 주주는 고개를 숙이며 망설였다. "제 얼굴은 아주 추합니다." 그러자 소불이가 어깨를 들먹이며 한 마디 거들었다. "한선자는 무림에 미녀로서 소문이 나 있는데 어찌 그의 딸이 추할 수가 있겠나?" 주주는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를 벗어 품에 넣고는 서서히 면구를 벗기 시작했다. 그러자 즉시 어깨를 뒤덮는 검은 머리카락과 흰 얼굴이 드러났다. 주주의 얼굴은 약간 둥그스름하면서 양 볼에 홍조를 띤 모습이 매우 사람의 눈을 부시게 했다. 그리고 한 쌍의 아름다운 눈에서는 말할 수 없는 영기가 배어나고 있었다. 주주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우면서 뭐라 말할 수 없이 사람의 시선을 끌게 만드는 어떤 매력 같은 게 있었다. 당승무는 주주의 그런 모습에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원래 그녀는 나와 비슷한 나이구나." 이때 소불이가 다시 히죽 웃으며 당승무의 어깨를 쳤다. "낭자도 면구를 벗었으니, 노제, 자네도 벗어야 되지 않겠나?" 주주는 소불이의 말을 듣자 깜짝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당신도 면구를 썼나요?" 당승무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주주는 몹시 화가 나서 앙칼지게 말했다. "좋아요. 만약 소어르신네께서 얘기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나를 끝까지 속였겠군요." 당승무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소인에게는 사실상 말 못할 큰 고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염지천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형제, 무슨 곤란한 일이 있다면 서슴치 말고 이 노부 앞에서 얘기해 보게." 당승무는 면구를 서서히 벗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인의 본명은 당승무라고 하며 선부께서는 바로 당승종입니다." 주주는 잔뜩 화가 나서 계속 쏘아붙였다. "원래 당문의 제자였군요. 그런데 흥! 뭐 아까는 아복이라고? 좋아요. 내 이후부터도 당신을 아복이라고 부르겠어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당승무의 영준한 모습에 가슴을 두근대었다. 염지천이 주의깊게 말했다. "자네의 집안은 모두 원수에게 살해를 당했는데 자네 혼자만 빠져 나왔는가?" "네." 염지천이 다시 말했다. "자네는 그 원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당승무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염지천은 당승무를 주시하며 의미심장하게 계속 물었다. "자네는 원수를 갚고 싶은가?" 그러자 당승무는 이를 갈며 매우 분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문 참사의 피맺힌 원한은 물론 갚아야 합니다!" 염지천은 침중하게 안색을 굳혔다. "자네의 부친은 일문의 존자로써 일신의 무공도 강호상을 종횡하였다. 게다가 당문의 독약 암기는 더욱 무림의 제일이라고 할 수가 있지. 그러니 무림에서 너의 부친과 겨루어 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자네 부친께서는 그 원수보다 무공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이 어떻게 원수와 대적을 하겠느냐?" 당승무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얼굴에 단호한 빛을 띄었다. "소인이 비록 원수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하나 소인은 그와 꼭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주주도 매우 깊은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아복, 저도 당신을 도와 드리겠어요." 그러자 염지천이 웃으며 당승무의 눈치를 살폈다. "형제, 만약 자네가 노부의 문하에 들어온다면 아마 몇 년 걸리지 않아 자네는 원수를 갚을 수 있고 또한 무림에 그 명성을 떨칠 수가 있을 거다. 그러니 자네는 이 노부의 문하로 들어올 생각은 없느냐?" 소불이가 키득대며 말했다. "노제, 염노형의 눈에 들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보통 복이 아니다. 그리고 노제가 필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염노형은 옛날에 선방에서 첫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던 사람이다. 당세의 무림에서는 염노형과 어깨를 겨루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무공이 더욱 높아졌으니 노제는 사부로 모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승무는 염지천을 향해 읍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어르신네의 은혜는 감사합니다만 거둘 수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소인은 벌써 사부를 섬긴적이 있기 때문에 다시 사부를 모실 수가 없습니다." 순간, 염지천은 경악을 하며 급히 물었다. "아니, 형제의 영사는 누구인가?" 당승무는 고개를 숙이며 송구스러운 듯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사께서는 벌써 돌아가셨습니다." 염지천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계제는 어째서 영사의 이름도 알지 못하나?" "소인은 정말로 그 어르신네의 이름을 모릅니다." 주주가 나서며 대신 들은 바를 얘기했다. "아복이 말한 그의 사부는 언제나 검은 도포를 입은 노도사라고 해요. 그리고 사용하는 병기는 하나의 불진이고 독을 쓰는 것을 주특기로 삼고 있다고 해요." 그러자 염지천이 눈알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혹시 옛날 사마천마 중의 탈혼장(奪魂當) 방통(方通)이 아닐까?" 순간, 당승무는 언젠가 만미천호가 자기의 사부에게 방당주라고 부른 것을 급히 생각해 내었다. 검적(劍跡) 염지천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천당문은 강호의 사람들과 별로 내왕도 없었는데 자네는 어떻게 해서 방통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나?" 당승무는 할 수 없이 처음부터 자기가 변장해서 이곳에 들어오게된 경의를 얘기하였다. 당승무의 얘기가 끝나자 소불이가 히죽 웃으며 어깨를 들먹였다. "히히히……그렇다면 자네의 사부도 이 도화랑군의 거처를 발견했지만 다만 입구를 찾지 못해 들어오지 못했군." 염지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탄복했다. "젊은 아이로써 사부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하고 말한 염지천은 이번에는 주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노부는 마교의 문하 제자들이 남의 무공을 연마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 두 사람의 무공가지고 강호를 다닐려면 아마 한 발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너희는 원수를 찾아야 하고 실종된 어머니를 찾아야 하니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느냐?" 이때 돌연 소불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혀를 찼다. "어휴! 아깝다. 아까와. 만약 이 늙은이가 사, 오십 세만 젊었더라면 벌써 제자로 삼아 달라고 간청을 했을 텐데……." 염지천은 송구스러워 하며 씁쓸히 웃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 제각기 뜻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하고는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내더니 다시 말했다. "아, 그렇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냐? 그것은 너희들이 노부의 기명제자가 되는 것이다." 소불이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렇다. 기명제자는 다만 명분만 있을 뿐 정식 문인이 되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마교의 규칙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소불이는 두 사람이 대답을 하지 않을까봐 즉시 눈짓을 했다. 당승무는 생각을 고쳐먹고 말했다. "그럼 어르신네의 성의에 따르겠습니다." 소불이는 한쪽에 서서 여전히 재촉을 했다. "노제는 허락을 했으니 빨리 절을 해야 될 게 아니냐?" 당승무는 어이가 없어 어리둥절해 했다. "아니, 기명제자도 절을 해야 합니까?" 소불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명제자는 비록 정식 문인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절은 물론 해야한다." 당승무는 그의 말에 따라 공손히 절을 했다. "제자 당승무 삼가 사부님께 절을 드립니다." 염지천은 만족한 듯 껄껄 웃었다. "오냐, 제자는 그만 일어나거라." 주주도 당승무가 일어나자 이어 걸어가 절을 올렸다. "저 용주주도 사부님께 절을 올리겠어요." 염지천은 소불이를 향해 매우 흡족한 듯 말했다. "노부는 여태껏 제자라고는 삼지 않았는데 오늘 갑자기 두 명의 제자를 얻으니 기쁘기가 한량 없구나." 그 말을 들은 소불이가 웃으며 슬쩍 물었다. "만약 염노형께선 마음에 있으시다면 이 늙은이도 거두어 주시렵니까?" 염지천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만약 노부에게 도둑의 기명제자가 있다면 노부는 도둑놈의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는 당승무와 용주주를 바라보았다. "노부는 평생 남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노부가 연금을 당해서 너희 셋이 나를 구해 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너희들을 제자로 거두려는 이유가 된다." 당승무는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원래 그는 남의 도움을 결코 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을 자기의 문하로 거두려고 했구나.' 염지천이 이어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 노부의 기명제자가 되었으니 응당 노부는 너희에게 무술을 가르쳐 주어야지." 용주주가 나섰다. "사부님, 마교의 규칙이 문하 제자들은 절대 남의 무공을 배우면 안 된다고 했어요." 염지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괜찮다. 너는 노부의 기명제자이니 전혀 남의 무공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만약 네 어머니를 찾으려면 노부의 검법을 배워야만 목숨을 유지할 수가 있다." 용주주는 좋아서 싱글벙글 했다. "사부님의 검법은 아주 무서운 것이예요?" 염지천은 빙그레 웃었다. "노부는 십 년 간의 연금생활을 통해 많은 검술의 정모함을 깨달았다. 비록 천하 제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강호를 종횡무진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소불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염노형의 말씀이 맞다. 지금 강호에 보기에는 매우 평화스러우나 속에는 수많은 살기가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삼 년 전의 괴변은 아직 여파가 사라지지 않고 더욱 암중으로 커지고 있지. 하물며 그 일은 너희와 깊은 관계가 있으니 너희는 어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느냐?" 그러자 용주주가 선뜻 앞으로 나섰다. "사부님, 제자는 배우겠습니다." "오냐. 옛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노부의 제자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노부는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노부는 너희에게는 가르쳐 주겠다." 당승무는 공손히 읍을 하며 감사해 했다. "사부님이 무공을 전수해 주시는 은혜, 제자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염지천은 주위를 둘러보며 약간 급히 말했다. "노부는 반나절 사이에 너희에게 열세 식의 검장을 가르쳐 주겠다. 앞으로 시간도 얼마 없고 하니 어서 거기에 앉아 먼저 노부의 검장의 요결을 들어라." 소불이는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염노형이 무공을 논할 때 저는 나가서 저 할망구의 시체를 치우고 나머지 석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염지천이 손을 내저었다. "소노형, 나갈 필요 없소이다. 몇 칸의 석실이 있는데 전부 비어있소. 지금 노부가 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검법은 비록 절학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만약 소노형께서 흥미가 있다면 다소 구경해도 괜찮소. 그리고 수중의 여의금사(如意金絲)에 대해서도 약간 이익이 있을 것이오." 이때 당승무는 속으로 크게 외쳤다. '아! 원래 여의금사였구나. 어쩐지 문을 열 수도 있고 열쇠를 따며 또한 병기로 사용할 수 있다 했더니 과연 그렇구나.' 소불이는 짐짓 호탕스럽게 웃어 젖혔다. "염노형께서는 저를 잘 봐주시는군요. 하하하……만약 이 늙은이는 한 수만 배워도 아마 강호에서 그 이름을 날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염지천은 고개를 흔들며 여전히 조급해 했다. "아니, 그렇지도 않소. 아무튼 노부에게는 별로 시간이 없으니 지금부터 다년간 연구한 검장 십삼 식을 설명해 주겠다." 당승무와 용주주는 그의 이 말을 듣자 즉시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자세히 듣기 시작했다. 소불이도 한쪽에 앉아서 염지천을 응시하며 조용히 들었다. 염지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부의 이 검장 십삼 식은 원래 검은 검으로 돌아가고, 장은 장으로 돌아가니 함병을 할 수가 없다. 이유라면 한 사람의 마음을 두갈래로 갈라서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오른손으로 검을 사용하고 왼손으로는 장을 사용하는 등 동시에 두 가지의 무공을 발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십 년 동안에 나는 각문 각파의 무공을 종합해서 연구해 내었다. 그러나 이 융합이 비록 천태만상을 다 종합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을 상대하는데 있어서는 마음이 내키는대로 사용할 수 있으니 강적을 만났다 하더라도 그 위력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너희들이 노력만 하면 그 안의 오묘한 점을 즉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세 사람은 이 검장에 이러한 위력이 있는 것을 알아 기뻐하며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염지천은 용주주의 청상인을 다시 빌려서 장검으로 계산하고 서서히 십삼 초식의 검장을 시전하였다. 그리고 또한 매 초식마다의 괴이한 변화도 낱낱이 설명해 주었다. 당승무와 용주주는 무공의 기초가 잘 닦아져 있었으며 또한 정신을 바짝 차려서 들었기 때문에 깨닫기가 쉬웠다. 소불이 역시 여의금사를 가지고 초식을 흉내내고 있었다. 이렇게 염지천은 반 시진을 소모하면서 십삼 초식의 검장 초식을 열심히 설명하였다. 이어 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 "다 기억해 두었느냐?" 당승무와 용주주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제자,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염지천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기억해 두었으면 되었다. 노부의 이 검장 십삼 식은 알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리고 그 안의 변화는 매우 익숙해야만 위력을 나타낼 수 있으니 아마 너희는 이후부터 천천히 연습만 하면 자연적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염지천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때 소불이가 구석에서 나오며 물었다. "염노형께서는 출구를 알고 계십니까?" 염지천은 앞서 나가며 대꾸했다. "그대들은 따라오기나 해라." 세 사람은 그의 뒤를 따라 나가 철문을 지나고 청의노파의 불당을 떠났다. 이때 소불이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여기 좌우에는 각기 두 개의 문이 있지. 만약 아까 우리가 왼쪽의 첫번째 문으로 해서 들어왔다면 아마 염노형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염노철을 만난 것은 정말 하늘이 정하신 일입니다." 염지천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만약 노부가 여기에 갇혀 죽는다면 이 넓은 강호는 아마 나쁜 무리배들에게 쑥밭이 될 것이다……." 소불이는 마음 속으로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지금 이 말을 들으니 그에게 무슨 많은 비밀이 있는 것 같다. 비록 우리가 무공을 전수받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를 구해 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쨌든 이 사람을 빠져 나가게 해서 온 강호에 화가 될는지 아니면 복이 될는지 정말 알 수가 없구나.' 이들이 지금 나가고 있는 통로는 앞으로 갈수록 꺾여 돌아가는 데가 많았다. 염지천은 맨 앞에서 총총히 걸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뒤에 따라가고 있는 세 사람은 달려가야지만 쫓아갈 수 있었다. 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 벌써 통로의 끝에 까지 왔다. 이윽고 염지천이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 "자네들은 전부 다 이리 오게나. 여기는 출구니까 노부와 같이 서있어야 한다. 그리고 절대로 경거망동을 해서는 안 된다." 용주주가 화통을 들고 사방을 비춰보자 염지천이 서 있는 곳으로 일 장 가량 되는 곳에 한 칸의 석실이 있었고 출입구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사방으로 굴리며 물었다. "사부님, 여기는 전혀 문이 없는데 출구는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염지천이 대답했다. "여긴 산 속이니 위와의 거리는 백여 장이나 된다. 그러니 위까지 올라가야만 출입구가 있다." 용주주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올라가지요?" "이 통로는 아마 도화랑군이 죽은 후에 만든 것 같다. 그리고 또한 옛날 사마기가 죽은 후에 만든 것이다. 그리고 사마기가 죽은 후에 도화요부는 새노반의 아들 사마장홍을 찾으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듣자하니 사마장홍은 몸소 오지 않고 다만 설계도만 그려서 보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중의 출구만은 그녀가 몸소 만들었다 고 전하지." 이 말을 들은 당승무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께선 내가 사마장홍을 찾아 암기를 만들려고 하는 것에 응하실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발 밑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돌연 석실에 진동이 일어나며 바닥이 위를 향해 치달았다. 어느새 화통의 불도 꺼지고 눈 앞은 캄캄한 어둠으로 변했다. 용주주는 깜짝 놀라 경악의 소리를 지르며 당승무의 품 안으로 쓰러지려 했다. 당승무도 당황해서 급히 그녀를 껴안았다. 이때 어둠 속에서 염지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균형을 잡고 잘만 서 있으면 된다." 여러 사람들은 균형을 잡고 나서야 발 밑에 밟고 있던 바닥이 위로 올라 간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 소리도 멎고 네 사람은 눈 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두 고개를 쳐드니 두 장 높이 정도에서 하나의 창문 같은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를 통해서 비쳐드는 햇빛도 볼수가 있었다. 소불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곳의 출구는 바로 나무 위에 있었구나." 당승무가 자세히 보니 약 일 장 가량의 넓이에 자기네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소불이가 말한 곳은 과연 나무 속이었다. 염지천이 급히 소리쳤다. "이제 우리는 나가자" 하고 몸을 날리더니 먼저 빠져 나갔다. 뒤이어 세 사람도 즉시 빠져 나왔다. 밖에는 완연한 밀림이었다. 또한 발 밑에는 푹신하고도 부드러운 낙엽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여기는 바로 늙은 고목들이 하늘을 찌르는 울창한 밀림이었다. 이들이 방금 빠져 나온 곳도 나뭇잎에 가려져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 태고의 정적에 잠겨 있는 밀림 속에 누가 도화랑군의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네 사람은 수북히 쌓인 낙엽들을 밟으며 한참을 걸어서야 겨우 숲속을 빠져 나을 수 있었다. 산봉우리들은 첩첩으로 싸여 있고 밝은 햇살이 비춰들고 있는 것을 보아 저녁 무렵이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었다. 염지천이 걸음을 멈추며 일동에게 말했다. "노부는 먼저 가보아야겠다." 그리고는 용주주를 쳐다보며 물었다. "노부는 너에게 빠르면 삼 개월 늦으면 일 년 안에 반드시 연골진경을 찾아 주겠다. 그런데 그것을 대체 어디에 갖다 놓아야 되느냐?" 용주주는 좋아서 입이 크게 벌어졌다. "사부님께서는 정말로 이 제자를 위해 연골진경을 빼앗아 주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염지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 "그러나 제자는 어디에 가야 사부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노부는 네가 주소를 하나 적어 놓으면 반드시 사람을 시켜 갖다 주겠다." 용주주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어 말했다. "그렇다면 우선 안회악서 천주산(天柱山) 아래 있는 농고파에게 갖다 주도록 하세요." "오! 그렇다면 더욱 좋지." 그리고는 몇 발자국 물러서더니 소불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소형, 그럼 우리는 다음에 만납시다!" 이어 말이 끝남과 동시 그는 번개처럼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소불이는 먼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정말 자의교주 염지천 같다……." 당승무가 급히 물었다. "왜 그렇습니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그가 정말 염지천이라면 동사도주는 또 누구란 말인가……." 그러자 당승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따지듯 물었다. "어르신네께서는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면서 왜 우리더러 사부로 삼으라고 독촉했습니까?" 소불이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그가 너희들에게 사부로 모시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나도 그랬다." "그리고 사실상 기명제자이니 다만 이름만 있을 뿐 정말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당승무는 여전히 날카롭게 물었다. "그런 사부도 사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정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소불이는 마냥 웃으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너희들이 절을 잘못하지는 않았다. 그가 너희에게 가르친 검장십삼 식은 확실히 절세의 기공이라 경시할 수는 없지." 용주주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네가 보기에 그분은 좋은 사람 같아요, 아니면 나쁜 사람 같아요?" 소불이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염지천이라는 위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원래는 극히 정화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일신의 무공은 극히 괴이하고 고심막측하지. 그리고 강호상에서 그의 출신 내력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래서 모든 명문정파의 사람들은 전부 다 그를 방문의 사람으로 보고 있지," 신비의 장원 그 말을 듣자 당승무는 시무룩해져 불쑥 내뱉았다. "다만 그의 사람됨만이 정파이면 됩니다." 소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삼 년 전에 나타난 동사도주 염지천은 매우 악독하여 강호와 무림인들에게 해를 끼치려 한 사악한 인간이었다." 당승무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어르신네께서 지금 말씀하신 뜻은 그가 바로 동사도주라는 말입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다. 이유는 동사도주는 벌써 삼 년 전에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용주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요." 소불이는 웃으며 말했다. "염지천은 원래부터가 하나의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손해는 보지 않을 테니 진짜던 가짜던 지금 따질 필요없이 차차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소불이는 일단 말을 끊더니 두 사람을 응시하며 다시 말했다. "우리는 산 속에 들어가서 비록 빈손으로 왔지만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였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어디로 갈 작정이냐?" 용주주가 말했다. "저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겠어요. 그런데 아복 당신은?" 그녀는 정이 듬뿍 어린 눈으로 당승무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당승무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당승무가 이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선사의 명령대로 저는 한 사람을 찾으러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사람은 효산에 살고 있다고 했으니 효산으로 가야겠습니다." 용주주가 말했다. "아니, 효산이 어디에 있어요?" 당승무는 소불이를 흘낏 보며 대답했다. "소인은 멀리 집을 나간 적이 없으니 효산이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소어르신네께 약간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합니다." 소불이가 말을 받았다. "효산은 하남 낙양성의 서쪽에 있다. 그런데 노제는 효산의 어디를 찾아가려고 하느냐?" 당승무가 짧게 대답했다. "소석윤(小石潤)." 용주주가 되물었다. "소석윤?" 소불이는 얼굴에 기이한 빛을 띄었다. "영사가 자네더러 효산의 소석윤에 가서 누구를 찾으라고 했나?" 당승무 역시 짧게 대답했다. "사마장홍." 소불이가 급히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를 찾나?" "저희 집에 한 가지 암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암기는 오직 사마장흥 한 사람만이 만들 수 있답니다." 소불이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음! 그러나 어렵다. 어려워. 사마장홍을 꼭 찾는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를 찾았다 해도 그것을 만들어 줄지는 정말 의문이다." 말을 끊고 약간 생각하더니 이어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이 늙은이는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노재와 함께 효산에 가겠다. 그리고 나는 사마장홍과 약간 교분이 있으니 그가 내 체면을 세워주는가 한 번 보아야겠다." 당승무는 매우 기뻐하며 얼른 예를 취했다. "어르신네와 동행을 할 수 있다니 정말로 감사한 일입니다." 용주주는 당승무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당신네들은 효산에 갔다 와서 또 어디로 갈 것입니까?" 당승무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소인은 행적을 아직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용주주가 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악서 천두산으로 오세요. 저의 할머니께서도 거기에 살고 계시니……." 당승무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띄며 즉시 숭낙했다. "소인이 효산에서 돌아올 때 여유가 있으면 낭자를 꼭 방문하러 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을 꼭 지켜야 해요." 이때 소불이가 히죽 웃으며 끼어들었다. "이 늙은이도 갈까?" 용주주는 얼굴을 붉히며 겨우 대답했다. "당신들은 꼭 함께 와야 해요."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잖게 말했다. "암, 이 늙은이도 꼭 가야 하고 말고. 그리고 몇 년간 칠태파를 만나지 못했으니 문안을 드리러 가야 한다. 후후…… 그리고 틈을 타서 낭자의 할머니에게 축하주를 좀 얻어 먹어야 되겠다." 그러자 용주주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라 발을 굴렸다. "꼭 그렇게 놀리시기예요?" 소불이는 시치미를 뚝 메었다. "아니, 놀리다니…… 이 늙은이는 다만 호의에서 했을 뿐인데……." 용주주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며 당승무를 쳐다 보았다. "듣기 싫어요. 저는 이만 가보겠어요." 용주주는 날씬한 허리를 돌리자마자 급히 산 밑을 향해 달아났다. 당승무는 주주의 떠나가는 모습을 보자 무엇인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이때 소불이가 그의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소제, 저 낭자가 어떤가?" 당승무는 얼굴을 붉히며 짐짓 모르는 체 했다. "무……무슨 말씀이십니까?"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다그쳤다. "낭자는 노제에게 첫눈에 반했는데 자네는 그렇게 모른척 할 텐가? 그렇다면 자네는 그 낭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군." 당승무는 얼굴을 붉히며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소불이는 그러한 당승무의 모습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다. 이 믿은 내가 책임지고 록 성사시켜 주겠다. 그러니 너는 걱정하지 말아라. 자, 그리고 우리는 거의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고, 또 아직 수십 리 길이 남았으니 서둘러서 칼리 가야 하겠다." 이어 두 사람은 급히 몸을 날려 산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느새 효산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밟고 있었다. 당승무는 이미 자기의 사부가 물려준 면구를 쓰고 이름도 왕아복으로 바꾸었다. 그러니 길에서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물며 그의 옆에 소불이 같은 노강호가 있으니 물론 남에게 발각될 리가 만무했다. 소석윤. 여기가 바로 효산 남록의 작은 촌락이다. 촌락은 다만 이십 내지 삼십여 가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동쪽에 하나의 작은 개천이 있는데 이 개천은 비록 깊지 않았으나 물이 마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바로 이 개천을 끼고 있는 곳에 커다랗고 웅장한 장원이 있었다. 이 거대한 장원이 바로 강호에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새노반 사마기의 저택이었다. 원래 이 저택은 전에 하나의 작은 집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 사마장홍이 이 토지를 빙가의 사람에게 팔아서 빙가라는 사람이 여기에다 커다란 장원을 세웠으니 이곳의 주민들은 그 장원을 이르기를 빙장이라고 불렀다. 이날 저녁 이곳에 도착한 소불이와 당승무는 빙장을 물어본 후에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길 위를 걸어가며 소불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사마장홍은 무엇 때문에 이름을 빙장이라고 했지? 그리고 이름을 바꾼 후 무엇 때문에 여전히 소석윤에 살고 있을까? 그것은 이름을 바꾸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를 찾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그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제 생각으로는 그의 장원 안에 반드시 어떤 매복 기관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남의 침입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야 물론이지. 이 늙은이가 그를 사귈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무 살 정도였다. 그때 사마장홍이 잠자고 있는 침상 위에는 언제나 많은 회한한 물건들이 장치되어 있었다. 사실상 그 집에는 사마장홍과 그의 아버지,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늙은이는 뒤에 있고 젊은 놈은 앞에 살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누가 문을 두들기면 젊은 놈이 나와서 열어야 되지 않나? 사마장홍은 어릴 때부터 술통이었으므로 술에 취하면 침상 위에 누워서 전혀 움직이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언제나 구조는 자동적으로 열리게끔 만들어 놓고 그 자신은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소불이는 열심히 말하고 당승무는 귀 기울여 듣는 순간에 어느덧 두 사람은 장원 가까이 왔다. 소불이는 다가가 굳게 닫혀 있는 대문을 두들겼다. 한참이 지나서야 안에서 무뚝뚝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냐" 소불이는 짐짓 위엄이 보이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형, 문을 여시오. 이 늙은이는 당신의 장주를 만나러 왔소!" 이어 대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그러나 완전히 열린 것이 아니고 약간만 열려 한 늙은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자 의외로 공손히 읍을 하며 물었다. "두 분께서는 누구를 찾으십니까?" 소불이 역시 공손하게 대답했다. "장주님을 좀 만나러 왔소이다." 늙은이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장주께서는 손님을 만나지 않습니다." 소불이는 만면에 미소를 띄며 말했다. "이 늙은이와 당신의 장주와는 구면의 사이요. 그러니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해도 이 늙은이는 이름만 들으면 만나줄 것이오." 그러자 늙은이는 약간 주저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칭호는 어떻게 되시는지?" "불이라고 하오." 늙은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약간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그럼 불이께서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소인이 들어가서 물어보겠습니다." "심려를 끼치겠습니다." 이어 늙은이는 대문 안으로 고개를 집어 넣더니 다시 대문을 닫았다. 그 다음, 일진의 발자국 소리가 총총히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소불이는 고개를 돌려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노제, 상황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어째서입니까?" 소불이는 더욱 낮은 소리로 말했다. "대문 안에 두세 사람이 들어 있었다." 당승무가 오히려 이상한 듯 반문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무엇이 이상합니까?" "사마장홍은 원래 이렇게 많은 사람을 고용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선사의 편지에는 빙장이라고 썼는데요……." 소불이는 침중하게 안색을 굳히며 나직이 말했다. "노부는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불이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문이 다시 열리고 뒤이어 아까 그 늙은이가 나와서 공손히 음을 했다. "두 분께서는 이제 들어 오십시오." 소불이가 웃으며 물었다. "당신네 장주께서 나를 만나시겠답니까?" 늙은이는 아무 소리도 없이 두 사람이 대문 안으로 들어온 후에야 문을 닫으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러나 늙은이는 두 사람을 어찌된 일인지 대청으로 안내하지 않고 왼쪽에 있는 한 측문을 거쳐 상방문 입구에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두 분께선 이리로 들어가서 앉아 기다리십시오." 소불이는 약간 망설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 이 상방은 하나의 작은 객실이었다. 그러나 아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마장홍은 가끔 가다가 여기서 손님을 만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늙은이는 두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다 주더니 다시 총총히 사라졌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한참을 앉아 있어도 사람이 오는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는 어떤 차라도 가져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소불이는 견디기 힘든 듯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아까 그 노인네가 아직 통고를 하지 않은 것 같군." 그의 말이 막 끝나자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세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소불이가 즉시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앞서 오는 사람은 검은 색의 비단장포를 입고 나이는 한 사십 되어 보였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두 사람도 같은 흑색의 장삼을 입은 중년 대한들이었다. 소불이는 순간 매우 괴이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맨 앞에 있던 사람은 불쑥 객실로 들어와서도 소불이를 한참 응시하더니 을을 하며 냉랭하게 물었다. "귀하께서 바로 불노형이십니까?" 소불이도 일어나서 같이 읍을 했다. "예, 그렇소만 그런데 노형께서는?" 사나이는 담담히 웃으며 여전히 차갑게 대꾸했다. "형제는 전포의(田布衣) 라고 합니다." 소불이는 순간 낮게 중얼거렸다. "흑의판관……." 전포의가 즉시 대꾸했다. "불노형께서는 비웃지 마십시오."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전노형의 명성은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정말 영광입니다." 전포의는 약간 표정을 바꾸며 다소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불노형께서는 형제의 잔호를 단숨에 알아 내시니 아마도 강호의 동료 같은데……." 소불이는 할 수 없이 이름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별말씀을…… 이 늙은이는 소불이라고 합니다." 전포의는 매우 뜻밖인 듯 크게 반색을 했다. "아니! 설상무영 소노형이라니……, 이거 정말 잘 만났소이다." 그리고는 이어 당승무를 응시했다. "그런데 이 분 형제께서는……?" 소불이가 웃으며 대신 대답을 했다. "왕아복이라고 합니다." 소불이는 일부러 당승무의 진짜 이름을 대지 않았다. 사마장홍의 별장에 의외로 흑의판관 전포의가 나타났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전포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내밀어 자리를 권했다. "소노형, 앉으십시오." 소불이는 천천히 앉으며 매우 궁금한 듯 물었다. "전노형은 항상 서북쪽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바람으로 이 중원에 오셨습니까?" 전포의는 음산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빗대어 물었다. "그럼 소노형은 항상 북오성에서 명성을 날리고 계셨는데 어떻게 해서 남쪽으로 오게 된 것입니까?" 두 사람은 전부 자신의 일을 말하기를 꺼려해서 말을 흐지부지 늘어 놓고만 있었다. 소불이는 담담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전노형께서는 지금 이 장에서 손님으로 계십니까?" 전포의는 마음 속으로 움찔하며 암중에 중얼거렸다. '이 늙은 도적놈의 속셈은 정말 무섭구나. 나는 원래 그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도리어 내가 저놈에게 물리게 되다니……' 전포의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복잡한 생각을 얼굴에 전혀 나타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불이는 또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 빙장주께서도 무림의 사람이군요." 전포의는 겨우 틈을 노려 잡고는 약간 멸시하는 투로 물었다. "아니, 소노형께서는 이곳의 장주를 모르십니까?" 소불이는 평소에 그 버릇대로 히죽 웃었다. "히히히……, 만약 이 늙은이가 그를 안다면 전첩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겠소?" 전포의는 갑자기 안색을 바꾸며 냉소를 쳤다. "아까 소노형께서 장주와 구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소불이는 여전히 웃으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아까 미리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벌써 쫓겨나 여기를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오." 전포의는 능청떠는 소불이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는지 약간 어조를 높여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돌려서 말하기를 싫어하오. 그러니 소노형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솔직하게 얘기해 주시오." 소불이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 늙은이는 특별히 빙장주를 방문하러 왔습니다." 이 말에 전포의는 이맛살을 크게 찌푸리는 게 매우 기분이 상한듯 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형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소노형께선 어째서 장주를 찾으시냐는 것입니다." "빙장주께서는 전노형더러 이 늙은이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습니까?" 전포의는 음산하게 웃었다. "그렇지는 않소. 형제는 다만 편의상 물어본 것입니다." "아니, 어째서입니까?" 전포의는 갑자기 껄껄대고 웃었다. "하하하…… 이유라면 저는 여기서 일 년 반을 살았지만 주인을 만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불이는 얼굴에 기이한 빛을 떠올렸으나 이내 히죽대며 웃었다. "히히……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여기에 왔으니 나도 이곳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그렇소. 이 장 안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없어도 하인은 있으니 그들에게 분부만 내리면 자연 이곳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그런데 전노형께서는 하인들에게 물어보지 않았습니까?" 전포의는 고개를 저었다. "장 안에 있는 하인들조차 주인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소불이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그런 괴이한 일이……." 소불이는 비록 입으로 괴이하다고 읊조리고 있지만 사마장홍의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한 추궁도 하지 않았다. 당승무는 전포의가 여기에서 일 년 반을 살아도 장주를 만나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자 몹시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또한 소불이가 쓸데없는 소리만 하는 것을 보자 더욱 초조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전포의가 갑자기 조급한 듯 급히 말했다. "형제는 지금 다행히도 소노형을 만났으니 한 가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소불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형제가 보기에는 소노형께선 이곳의 장주도 알지 못하는데 갑자기 찾아오셨으니 반드시 어떤 이유라도 있을 잣 같은데요?" 소불이는 온화하게 웃었다. "이유야 물론 있지요. 그러나 전노형께서는 제가 온 이유를 먼저 묻지 마시고 전혈 자신이 온 이유부터 밝히시오. 이 늙은이가 지금 보기에 전형은 빙장주와 별로 안면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더구나 일 년 반을 살았다고 하니……." 전포의는 원래 심기가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매우 무서운 적수를 만났다. 전포의는 입을 열기만 해도 소불이에게 당할 뿐 아니라 제대로 대답할 말도 찾지 못했다. 전포의는 암중으로 매우 쓰디쓰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뜻깊은 미소를 떠올렸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저는 원래 한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전형께서 찾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소노반 사마장홍." 전포의는 말하면서 음흉한 눈초리로 소불이를 깊이 관찰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소불이에게 나타난 반응은 뜻밖이었다. 소불이는 껄껄거리고 웃으며 반가운 듯이 말했다. "하하하…… 이런 우연이 어디 있을까? 이 늙은이도 사실은 소노반을 찾으러 왔는데……." 전포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소노형께서는 이곳의 장주를 소노반으로 보고 있습니까?" 소불이는 약간 멍청해 하더니 다시 껄껄대고 웃었다. "하하하……꼭 그렇다고는 할 수야 없지요. 이 늙은이와 사마장홍은 원래부터 알고 있는 사이요. 소노반은 비록 이 땅을 팔았다고 하나 노부는 그의 부친의 묘지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래서 늙은이는 다만 빙장주를 찾아서 그의 행방을 물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포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내심 당황했다. 이때 아까 그 늙은이가 걸어오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화청에다 술좌석을 마련해 놓았으니 전어른과 소어르신네는 어서 입석을 하십시오." 전포의가 상냥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노형, 그리고 왕아복께서도 가시지요." 이미 그는 즉시 몸을 돌리고는 밖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두 명의 흑의대한은 문 밖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불이는 그것을 보자 내심 짐작했다. '저 두 사람은 아마 우리가 간 후 뒤에서 미행을 하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그래서 얼른 당승무에게 눈짓을 보낸 후 함께 일어나서 전포의의 뒤를 따라갔다. 이들이 화청에 도착하자 그 두 명의 흑의대한은 과연 뒤따라 와서 좌우로 갈라서더니 화청 문 앞에 섰다. 화청에는 과연 푸짐한 술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의 늙은이는 청 안에서 분주하게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전포의는 손을 들어 호화스러운 좌석을 가리켰다. "소노형께서는 먼 곳에서 오셨으니 상석에 앉으십시오." 소불이는 예의를 찾지 않고 상석에 앉고 당승무는 소불이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전포의도 따라서 입석하는 것이었다. 늙은이는 세 사람을 둘러보며 공손하게 읍을 했다. "장주님께서 계시지도 않고 또한 이런 벽간산지서 별로 대접할 것도 없으니 세 분께서는 이해하시고 잡수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노인은 총총히 사라져 갔다. 소불이는 마음 속으로 매우 괴이하게 생각했다. 이 빙장은 거의 혹의판관 전포의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노인은 전포의의 사람 같지가 않았다. 소불이는 풍부한 강호 경험으로 이런 사실들을 잘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전포의는 소불이를 마주 대하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형제는 벌써 장 중의 오래된 손님이니 이 한 잔의 술은 형제가 소노형에게 바치는 것으로 하겠소."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단숨에 깨꿋하게 마셔 버렸다. 소불이는 마음 속으로 잔뜩 벼르고 있었다. '오냐, 이 술에 어떤 허튼 수작이 있다고 해도 나는 끄떡도 하지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매우 기분이 좋은 듯 히죽거렸다. "이 늙은이도 전형에게 한 잔 드리겠소." 이어 그 술을 마셨으나 술에는 별로 이상한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전포의는 술주전자를 들고 당승무에게도 따라주었다. "자, 왕노제. 우리도 한 잔 합시다." 당승무는 할 수 없이 그와 함께 한 잔을 마셨다. 전포의는 젓가락을 들고 입맛을 다셨다. "자, 이번에는 요리를 먹읍시다." 소불이는 두 사람이 마실 때 몰래 전음입밀의 술법으로 당승무에게 전했다. "노제, 술엔 이상이 없지만 요리를 먹을 때는 조심해라. 꼭 전포의가 집는 음식만 골라 먹어야 한다."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고 전포의가 집는 음식을 따라 자기도 집어 먹었다. 전포의는 이 광경을 보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여전히 미소를 쥔 채 술을 권하며 소불이와 극히 융합된 사이처럼 얘기를 나누었다. 당승무는 술을 마실 줄 모르기 때문에 다만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 벌써 얼굴이 뿜어졌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 면구를 쓰고 있었으므로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귀밑이 새빨개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소불이는 전포의가 당승무에게 자꾸 술을 권하는 것을 보자 매우 이상하게 생각되어 즉시 조사를 해보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소불이는 수십 년의 경험으로 술과 요리 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이 독은 비록 늦게 퍼지지만 독성은 매우 강한 것 같았다. 소불이는 깜짝 놀라 급히 당승무에게 전음입밀의 술법으로 전했다. "노제, 우리는 벌써 암산에 넘어갔으니 빨리 취한 척 엎드려서 내신호를 기다려라" 당승무는 그 말을 전해 듣자 즉시 신음 소리를 내며 의자에 엎드렸다. 소불이 또한 취한 척 혀꼬부라지는 소리를 냈다. "아니 노제, 취했느냐? 끄윽! 이 술은 정말 독한데……." 그리고는 그도 서서히 엎드렸다. 일이 이쯤 되자 전포의는 회심의 미소를 띄었다. "게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문 입구에서 두 명의 흑의대한이 즉시 달려왔다. 전포의는 쓰러진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끼 두 사람을 우리 마당으로 끌고 가거라!" 이어 두 명의 흑의대한이 대답을 하며 막 허리를 굽히려는 순간, 소불이가 소름이 오싹 끼치게 웃으며 일어났다. "흐흐흐흐…… 이 늙은이는 남의 부축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 하고는 갑자기 오른손을 번개같이 내뻗쳐 전포의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전포의는 약간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음산하게 웃었다. "후후…… 소노형께서는 과연 한 수를 남기고 계셨구려." 동시에 전포의의 오른쪽 어깨가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고 그의 왼쪽 손가락은 즉시 소불이의 맥문을 향해 찔러갔다. 이때 당승무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소불이의 웃음 소리를 듣자 즉시 몸을 날려 두 명의 흑의대한을 향해 덮쳐갔다. 오른쪽의 흑의대한은 그를 깔보고 냉소를 쳤다. "흥! 이놈도 엄살을 부렸구나"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당승무의 일 장을 향해 마주 대항해 갔다. 두 사람의 장세는 정말 번개와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흑의대한의 신색이 갑자기 싹 변했다. 당승무가 공격해 오는 일 장은 바로 자살장이었던 것이다. 흑의대한은 급히 손을 거두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쌍장이 일제히 마주쳐 불꽃을 튀긴 것이다. "윽-." 흑의대한은 비명 소리를 울리며 뒤로 수 보나 물러나 비틀거리더니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다음 한 명의 흑의대한이 이 광경을 보자 급히 단도를 뽑아 한 칼로 내리쳤다. 당승무는 이 일 격이 성공하자 매우 의기가 양양해 몸을반보가량 물리며 장을 휘둘러 사나이를 향해 덮쳐갔다. 흑의대한은 상대방이 맨손으로 자기의 단도를 막으려고 하는 것을 보자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순간, 갑자기 일진의 기이한 힘이 자신의 칼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러더니 즉시 칼이 옆으로 튕겨졌다. 이어 그의 몸도 급히 옆으로 튕겨나는 것이었다. 흑의대한은 비록 옆으로 피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의혹을 느끼며 뒤로 수십 보 물러났다. 그러나 어찌 다시 이 무서운 위력 앞에 덤빌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정말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이때 전포의는 소불이와 싸운지 몇 초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자기의 수하 두 명이 순식간에 젊은이에게 당한 것을 보자 즉시 두 초식을 공격해 내며 뒤로 물러나서 소리쳤다. "멈추어라!" 소불이는 지금 전포의와 수 초를 교환하는 동안 전포의의 무공이 자기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또한 자신은 내공에 의해 독을 몰아내어야 하니 남과 오래 싸울 수도 없었다. 소불이는 전포의의 대갈일성을 듣고 손을 멈추고는 히죽 웃었다. "전노형께선 어떤 가르침이 있습니까?" 전포의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기 두 명의 수하 중 한 명은 땅에 쓰러져 이미 얼굴이 회백색으로 변해 움직이지 않았고, 또 한 명은 비록 서 있었지만 호흡이 매우 거칠어 금방 질식할 것만 같았다. 전포의는 매우 놀라 당승무를 주시하며 물었다. "노제, 자네의 내력은 대체 어떻게 되나?" 소불이는 다만 히히 웃고 있었고, 당승무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소인이 황아복이라는 것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지 않소?" 전포의는 매우 의혹에 찬 표정으로 계속 물었다. "자네는 대체 어떤 무공으로 내 수하를 상하게 하였느냐?" 당승무는 서서히 오른손을 재들어 올리더니 냉소를 쳤다. "그럼 당신도 시험해 보겠소?" 전포의는 당승무가 쳐든 오른손이 자흑색으로 변한 것을 보자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자네가 연마한 것은 자살장인가?" "그렇소." 전포의는 더욱 침중하게 안색을 변화시켰다. "자네 사부님의 존칭은 어떻게 되는가?" 당승무는 여전히 냉소를 날렸다. "글쎄요. 가르쳐 줄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러자 전포의는 야릇하게 웃으며 달래듯 말했다. "노제가 만약 존사의 성함을 말한다면 혹시 내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서 그러는 것일세." 당승무는 더욱 냉랭하게 외면을 했다. "저의 사부는 한 번도 강호상에서 행동을 하신 적이 없으므로 제가 말한다 해도 당신은 아마 모를 것이오." 전포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계속 꺾이려 들지 않았다. "노제가 말만 한다면 나는 반드시 알 것이오." 당승무는 갑자기 태도가 변한 전포의의 행동에 경이를 느끼며 물었다. "아니, 어째서입니까?" 흑옥불 전포의는 당승무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재가 알고 있기로는 천하를 통틀어서 자살장(紫料掌)을 할줄 아는 사람은 두어 명 밖에 없다고 들었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당승무가 고개를 쳐들며 선뜻 물었다. "누구인지 한 번 얘기해 주실 수는 없겠소?" 그러자 전포의는 표정이 엄숙해지며 나직이 말을 받았다. "그 사람은 전에 저의 선배였소. 저는 그 어르신네의 좌우를 따라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또한 깨달았소." 말을 끝낸 전포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모습은 비할 데 없는 경건한 마음을 품고 있는 듯 했다. 당승무 역시 자기의 사부가 이미 세상을 등졌다는 것이 떠올라 가슴이 절로 아팠다. 당승무는 전포의를 힐끗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살장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말해야 되지 않소?". 전포의는 고개를 떨구더니 정색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의 그 선배님의 별호는 탈혼장(奪魂掌)이며, 성은 방(方) 이름은 통(通)……." 당승무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섬칫해옴을 느끼며 암암리에 생각했다. '사부께서는 자신의 성명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증할 수가 없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자가 사부님을 알고 있으니 필경 사부님의 흑옥불(黑玉拂)을 알아볼 것이다.' 이같은 생각이 떠오르자 당승무는 즉시 흑옥불을 꺼내 들더니 치켜 올리며 물었다. "당신은 이 물건을 알 수 있었소!" 전포의는 당승무가 치켜들고 있는 흑옥불을 보자 내심 생각을 했다. '과연 방당주(方堂主)의 문하였구나. 이놈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잘만 대해주면 내정을 알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전포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일부러 놀랍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소형께서는 과연 방선배님의 문하이셨군요. 그 어르신네의 흑옥불을 제가 어찌 모를리가 있겠소." 그는 다시 당승무를 향해 포권을 하며 허리를 굽혔다. "우리는 절대로 모르는 처지가 아니오. 또한 조금 전에 있었던 오해를 소형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해 주기 바라오." 한데 전포의의 이 말이 막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핑!" 하는 일 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쓰러지는 것 같았다. 당승무는 즉시 고개를 돌려 소리나는 쪽을 주시했다. 이어 자세히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소불이가 땅에 주저앉은 채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온몸을 심하게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소불이의 주름진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입을 크게 벌린 채 말조차 하지 못했다. 당승무는 몹시 당황해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악독한 놈! 소노대를 무엇 때문에 저렇게 만들었느냐?" 그러더니 수중에 들고 있던 흑옥불을 전포의를 향해 정신없이 휘둘렀다. 전포의는 재빨리 몸을 피하고는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소형! 잠깐 손을 멈추시오. 소노철께서는 저의 독문기독(獨門奇毒)에 맞았으니 나에게 해독약이 있소!" 당승무는 잠시 손을 멈추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꺼내지 않고 무엇을 하시오?" 전포의는 당승무를 향해 음산하게 웃었다. "소노형에게 약을 먹이는 대신 소형은 순순히 오라줄을 받으시오." 당승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날리며 다그쳐 물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묶인단 말이오?" 전포의는 안색이 약간 변하며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나는 더 이상 당신과 말할 시간이 없으니 빨리 결정을 하시오. 만약 소노형의 생사에 관계가 없다면 어서 손을 써보시오." 당승무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처럼 곤란한 일을 당해본 적이 없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나를 잡아간 후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오?" 전포의는 시선을 피하며 히죽 웃었다. "저는 두 분을 난처하게 할 생각은 없소.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을 한다면 물어본 후 깨끗이 놓아 드리겠소." 당승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사람과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물론 나를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겠지……. ' 여기까지 생각을 한 그는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무엇을 물으시려는지 모르겠지만 어서 물어 보시오." 전포의는 상대에게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노형에게 해독약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몰어볼 시간이 없소. 내가 소형에게 포박을 받으라는 것은 소노형을 살리게 되면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까봐 그러는 것이오." 당승무는 또다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생각을 했다. 이제보니 이 사람은 내가 자기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을까봐 그랬던 것이구나." 당승무는 이미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믿지 못하겠다면 어서 나의 두 손을 묶으시오." 전포의는 음산하게 웃으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소형은 과연 모든 일에 시원스럽군요." 전포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대청을 향해 손짓을 했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즉시 흑의 사나이가 대청으로 달려왔다. 전포의는 당승무를 한 번 바라보더니 네 명의 사나이들을 향해 곧 분부를 했다. "너희들은 어서 저 소형의 두 손을 묶어라." 두 명의 흑의 사나이는 곧 대답을 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밧줄을 가지고 즉시 당승무를 향해 걸어갔다. 당승무는 흑옥불을 조심스럽게 거두더니 손을 내밀었다. 전포의는 당승무가 순순히 포승을 받는 것을 보자 빙긋이 웃으며 몸을 돌려 또 다른 두 명의 흑의 사나이에게 분부를 했다. "저 소가란 사람도 같이 묶도록 해라." 당승무는 손을 묶인 채 몸을 돌려 전포의를 날카롭게 쏘아보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나를 묶은 후 소노대에게 약을 먹여 준다고 하지 않았소?" 전포의는 냉소를 치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렇소. 하지만 만약 내가 그를 묶지 않고 그가 약을 먹은 후 정신을 �차린 다음 소형이 두 손을 묶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저와 또 싸우려 할 것이 아니오?" 당승무는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다짐을 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물어본 후 틀림없이 풀어주어야 하오." "물론. 내가 모든 것을 완전히 물어본 후에 풀어 드리겠소." 전포의가 말을 하는 사이에 두 명의 사나이는 소불이를 의자에 묶었다. 전포의 역시 당승무가 재촉하기도 전에 품 속에서 자기로 된 조그마한 병을 꺼내더니 한 알의 약을 소불이의 입에 넣었다. 이어 그는 또 하나의 약을 꺼내더니 부상을 입은 두 흑의 사나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들고 가라는 명령을 한 후 의자를 꺼내 앉더니 당승무를 향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당승무는 전포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궁금한 듯 다그쳤다. "무엇을 물어보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서 물어 보시오." 전포의는 의자에 묶여 있는 소불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소노형의 독이 해제되지 않으면 소노형께서도 필시 대답을 하지않을 것이 아니오? 그러니 조금 후에 소노형이 깨어난 다음 물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새파랗게 변해 있던 소불이의 얼굴에 차츰 혈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불이는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깨어나지 않았다. 당승무는 참지를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물었다. "해독약을 복용시켰는데 왜 소노대는 아직까지 깨어나지 않는 것이오?" 전포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말을 받았다. "내가 모든 것을 묻고 난 다음에야 깨어날 것이오." 당승무는 여전히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당신은 소노대가 깨어나면 내가 말하는 것을 저지할까봐 그렇소?" 전포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당신들은 이미 나의 수중에 들어왔는데 내가 또 무엇을 두려워 하겠소?" 당승무는 그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자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느끼며 암암리에 손목에다 힘을 주어 보았다. 하지만 자기의 손만 아플 뿐 밧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승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이 밧줄은 도대체 무엇으로 만든 것이오?" 전포의는 득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언성을 높혔다. "당신들을 묶은 밧줄은 소의 힘줄과 대마초를 함께 해서 특별히 만든 것으로써 아무리 내공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풀 수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소." 당승무는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참으로 악독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군." 전포의는 빙긋이 웃으며 가볍게 탄식을 했다. "이것은 당신이 너무 어린 탓이지. 어찌 저를 탓하는 것이오?" 그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당승무를 향해 걸어갔다. 당승무는 그를 노려보며 즉시 크게 소리쳤다. "또 어떻게 할 생각이오?" 전포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당승무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빙긋이 웃었다. "혹시 소형은 지금 가면을 쓰지 않았소" 하며 전포의가 가까이 다가오자 당승무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나를 건드리지 마라!" 하지만 전포의는 재빠른 수법으로 당승무가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겨 버렸다. 이어 전포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냉소를 날리며, "가면을 쓰는 목적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데 소형께서는 나이도 어린데 무엇 때문에 가면을 쓰시오?" 당승무는 이를 갈아붙이며 반문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이 상관을 하오?" 전포의는 신비스럽게 웃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만약 저의 짐작이 틀림없다면 소형은 필히 내력이 깊은 사람일 것이오. 생각해 보건대 깊은 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본시 하늘과 땅을 두려워 하지 않는데 소형은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 가면을 쓰니 저의 생각 같아서는 비록 내력이 클 뿐만 아니라 모종의 일 때문에 원수의 화를 면하기 위해 가면을 쓴 것임이 틀림 없을 것 같소." 당승무는 그의 말을 듣자 크게 놀랐다. "당신은 참으로 교활하기 그지 없군요." 하지만 전포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이 몇 년 사이에 강호에는 매우 평정했으며 남해 곽가(南海郭家)와 사천당문(四川當門)의 두 사건 외에 다른 일은 전혀 없었소. 그렇다면 소형께서는 남해 곽가의 자제가 아니면 사천당문의 후손임에 틀림이 없을 것 같은데 소형은 도대체 누구요?" 당승무는 또다시 크게 놀라며 내심 생각을 굴렸다. '사부님께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남에게 사실대로 이름을 가르쳐 주지 말라고 하셨으니 절대로 이름을 가르쳐 줄 수가 없다.' 당승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나는 남해 곽가의 자제도 사천당문의 후손도 아닌 왕아복(王阿福)일 뿐이오." 전포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소형이 극구 부인을 하시니 우리는 이제 화제를 바꾸어 당신의 사부님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하는 것이 좋겠군." 당승무는 강호에 대한 경험은 부족했지만 결코 우둔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포의의 말을 듣자 즉시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거는 나의 신변에 대해서 물어보려는 것이 아니라 사부님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었구나. 하지만 나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다." 당승무는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당신은 나의 어떤 사부에 대해서 물어보려는 것이오?" 당승무의 이같은 물음에 전포의는 당황을 하며 이내 반문했다. "소형은 도대체 사부가 몇 명이나 계시오!" 당승무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선뜻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두 분의 사부가 있소." 전포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궁금한 듯 물었다. "소형의 사부 중 한 분은 방어르신네이고, 또 한 분은 누구시오?" 당승무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주저없이 말했다. "또 한 분은 바로 자의교주(紫衣敎主) 이오." 순간 전포의는 즉시 안색이 변하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재차 물었다. "소형께서는 방금 누구라고 했소?" 당승무는 전포의의 자세한 내력을 모르고 있었으며 다만 소불이에게 무림 중 대단한 인물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상대를 겁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당승무는 길게 탄식을 하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당신은 자의교주 염지천(閻之泉)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겠지요? 그 어르신네가 바로……" 전포의는 여전히 믿지 못하는 듯 다시 말을 가로챘다. "소형은 지금 염교주를 말하는 것이오? 그분이 무엇 때문에 소형을 제자로 삼았단 말이오?"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는 줄 아시오? 못믿겠다면 소노대에게 한 번 물어 보시오. 염어르신네께서는 나에게 검기까지도 전수해 주셨소." 전포의는 그의 말을 듣고는 반신반의하며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소형은 언제 염교주를 만났소?" 당승무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말을 받았다. "바로 며칠 전이었소." 전포의는 한동안 당승무를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염교주께서는 소형이 방어르신네의 문하라는 것을 알고 있소?"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물론 알고 있소. 도리어 나의 사부께서는 나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아 염어르신네께서 나의 흑옥불을 보시더니 사부님의 성이 방이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제자로 삼으셨소." 이 모든 말이 그야말로 어색함이 없이 청산유수처럼 당승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때 전포의는 당승무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으며 안색은 경악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다시 전포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그러더니 몸을 돌려 소불이의 곁으로 다가서며 그의 얼굴을 가볍게 두들겼다. 당승무는 방통을 사부로 모신지 겨우 일 년이 지났지만 독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방통과 거의 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포의가 소불이의 얼굴을 가볍게 치는 것을 보자 내심 놀라 즉시 소리를 질렀다. 전포의는 비록 손으로 가볍게 두들기는 것 같았지만 암암리에 수법을 썼으며 손에는 독약이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당승무로 하여금 가장 알 수 없게 하는 것은 자기와 소불이가 똑같은 술과 안주를 먹었는데 소불이는 중독이 되었고 자기는 어떻게 되서 중독이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전포의가 자기를 생각해서 독약을 넣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전포의의 독을 무서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당승무의 머리에 한 가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전포의가 사용하고 있는 독이 사부가 자기에게 가르쳐 준 방법과 똑같은 성질의 독약이라는 것이었다. 독을 사용하는 사람은 원래부터 자기 자신이 독을 절대로 두려워 하지 않는 법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은 수시로 손을 쓸 수가 있을 뿐 아니라 품 속에는 항상 하나의 해약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것이 상대방은 독약의 침해를 당해도 자기 자신은 침해를 받지 않는 이유였다. 전포의가 조금 전 술에 독약을 넣었지만 당승무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독약의 성질이 같기 때문에 그에게는 작용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당승무 자신도 해약이 있기 때문에 그에게 손을 묶일 필요가 없었을 게 아닌가? 당승무는 이제서야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크게 후회를 했으며 또한 자기 자신이 너무 어리석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의문의 모사 이때 소불이는 천천히 눈을 뜨고 당승무를 바라보더니 자기들이 지금 두 손이 묶여 친다는 것을 발견했음인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은채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전포의는 소불이가 눈을 다시 감은 것을 보자 음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노형! 정신을 차렸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처럼 눈을 감고 계시오?" 소불이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단호히 말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전포의는 좀 멋적은 듯 빙굿이 웃었다. "소노혈! 그러시면 안 됩니다. 왕노형이 이미 말을 했기 때문에 저는 다만 입증해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소불이는 눈을 반쯤 뜨고 당승무를 주시했다.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단 말이오?" 소불이는 과연 강호에서 늙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또한 소불이는 입을 열자마자 선기를 잡으며 당승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 위해서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전포의는 아니나 다를까 소불이를 바라보며 반문을 했다. "왕소형은 자신의 사부가 두 명이라고 했는데 소노형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소불이는 그의 말을 듣자 당승무가 자기의 진짜 내력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그는 확실히 두 명의 사부를 가지고 있소." 하지만 전포의 역시 만만치는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한 분은……." 전포의는 일부러 소불이의 말을 듣기 위해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소불이는 중독이 되었을 때 비록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두 사람이 했던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던 것이다. 소불이는 전포의의 말을 가로채며 급히 말을 했다. "탈혼장 방통……." 전포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탈혼장 외에 또 한 사람은 누구인지 알고 있소?" 소불이는 전포의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건데 전포의가 당승무의 사부가 두 명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물론 당승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한데 전포의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에게 다시 묻는 것이구나." 소불이는 전포의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또 한 분……? 허허…… 그 사부의 명성은 강호상에서 대단하오!" 소불이가 아직 누구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전포의의 누런 얼굴은 금시 하얗게 변했다. 소불이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당승무가 말한 사람과 틀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전포의는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분은 참으로……." 소불이는 전포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전노혈은 아마 그분을 알고 있을 것이오. 바로 삼 년 전 신비스럽게 실종이 되었던 흑영도주(黑影島主)가 오늘날 다시 강호상에 나타났으며 바로 그분이……." 그러자 무엇인가 생각을 하고 있던 전포의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소노형이 말씀하시는 것은 물론 거짓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소제는 또다시 알아볼 것이 있으니 두 분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전포의는 급히 몸을 돌려 계단 밑에 있는 흑의 사나이들을 향해 분부를 내렸다. "너희들은 어서 소노형과 왕소형을 서원(西園)으로 모셔라!" 네 명의 사나이는 급히 달려와 공손히 허리를 굽히더니 두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긴 난간을 한동안 걸어서 서원으로 들어서자 네 명의 사나이는 그들 두 사람을 한 채의 작은 집 문 앞으로 안내를 하더니 문을 열며 그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다. "두 분께서는 어서 들어가십시오." 소불이와 당승무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머뭇거리더니 결국 집 안으로 들어갔다. "펑!" 하는 일 성이 울리는가 싶더니 즉시 문이 닫혀 버렸다. 당승무는 몹시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대! 이 밧줄은 몹시 질겨서 아무리 힘을 써봐도 좀처럼 풀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됩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움츠리더니 당승무를 바라보며 침통하게 말을 받았다. "나는 젊었을 때 처음으로 사부의 곁을 떠나 실수를 밥먹듯이 하여 남에게 단단히 묶여 많은 매을 맞아 가면서도 조금도 조급해 하지 않았네. 그런데 이까짓 두 손쯤 묶였다고 해서 무엇이 대단한가? 또한 전포의는 분명히 자세하게 우리를 조사할 것이니 순순히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네." 당승무는 매우 불쾌하다고 느끼며 반발심이 솟았다. "당신은 도둑질을 하려다가 잡혀왔지만 나는 도둑이 아니란 말이오." 당승무가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소불이가 고개를 돌리며 전음입밀로 말을 꺼냈다. "노제! 아무 말도 하지 말게. 전가 놈이 지금 밖에서 우리의 말을 엿듣고 있는 것 같네." 당승무는 소불이의 말을 듣자마자 몹시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전음입밀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불이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시간으로 봐서 아직 멀었네. 우리는 소노반(小魯班)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밤에 행동을 하는 것이 더욱 편리하겠지." 당승무는 소불이를 쳐다보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소불이는 갑자기 한쪽 구석으로 다가서며 담에 등을 기대더니 빙긋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여보게! 자네도 좀 앉아 있게. 우리 잠시 쉬었다가 생각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당승무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은 채 땅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쯤 지났올까? 때는 이미 황혼 무렵이었으며 방안은 어두컴컴해 오기 시작했다. 이때 코를 골고 있던 소불이가 갑자기 두 눈을 뜨더니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야 때가 된 것 같네." 당승무는 자기의 손에 감겨져 있는 밧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걱정스러운 빛을 띠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밧줄 때문에……."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소 힘줄이 아니라 강철로 된 밧줄이라고 할지라도 나를 묶을 수는 없단 말이야." 그리고는 두 손을 쑥 빼자 자연스럽게 빠졌다. 마치 손을 물에 담갔다가 빼는 것 같았다. 소불이는 신속하게 몸에 밧줄을 풀더니 이어서 당승무의 밧줄을 풀어주며 나직이 말했다. "조금 후 사람이 밥을 가지고 올 때 우리 나가도록 하세." 당승무는 신기한 듯 손과 발을 한 번씩 움직여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무엇 때문에 밥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와야만 나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이곳 빙장(憑莊)에 무슨 수수께끼가 있을 것 같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정체를 나타내서는 안 되며 그래야만이 소노반을 찾을 수가 있네." 당승무는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며 궁금한 듯 물었다. "노대께서는 소노반이 장 중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반문했다. "소노반이 이곳 장 중에 있지 않다면 전포의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계속 있으면서 가지 않겠나?" 당승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중하게 물었다. "전포의가 여기에서 일 년 동안이나 살면서도 찾지를 못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소불이는 다시 정색을 하며 나직이 말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나가는 것을 남에게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이네." 바로 이때 밖에서 열쇠를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불이는 좀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급히 말했다. "어서 앉게. 누가 밖에 온 것 같으니……." 두 사람은 재빨리 앉았다. 이어 문이 서서히 열리더니 불빛이 보임과 동시에 두 명의 흑의 사나이가 음식을 들고 왔다. 소불이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저녁을 가지고 왔는가?" 두 명의 흑의 사나이는 소불이의 몸에 밧줄이 풀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는지 즉시 물러서려 했다. 이 순간 소불이는 손에 들고 있던 금사를 휘두르더니 번개와 같이 두 사나이 목을 향해 찍었다. 동시에 재빨리 몸을 날리며 문을 닫아 버렸다. 소불이가 몸을 일으켜서 문을 닫을 때까지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두 흑의 사나이는 혈도를 찍히자 말도 할 수가 없었으며 풀썩 주저 앉은 채 옴직이지도 못했다. 소불이는 두 사나이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두 분 참으로 수고했소." 그리고는 오른쪽 사나이의 손에서 밥상을 내리더니 당승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보게! 식기 전에 어서 식사를 하세!" 곧이어 소불이는 쭈그리고 앉아 먹기 시작했다. 당승무는 가볍게 발을 구르며 급히 말을 꺼냈다. "노대! 우리는 빨리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없이 먹고 있던 소불이가 당승무를 힐끗 쳐다보며 웃었다. "밥을 보내왔으니 우선 먹고 보세." 당승무도 그의 말에 할 수 철이 주저앉아 먹기 시작했다. 두 흑의 사나이는 눈을 뜬 채 그들이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소불이는 입언저리를 닦으며 일어서더니 멋적은 듯 빙그레 웃었다. "두 분 노형! 참으로 미안하게 됐소. 이 늙은 것과 저 사람은 잠시 일이 있어서 나가려고 하는데 두 노형의 옷 좀 빌려야겠소." 하고는 즉시 오른쪽 사나이의 옷을 벗겨 자기가 입더니 사나이의 두손을 묶었다. 당승무 역시 소불이가 손을 쓰는 것을 보자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또 한 명의 흑색 장한의 옷을 벗겨 갈아 입더니 단도(單刀)까지 한후 사나이의 손을 묶었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렸다. "자, 이제는 가볼까. 자네는 밥상을 들고 나를 따라오게." 그리고는 문을 열더니 한 손에 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당승무는 손에 밥상을 든 채 그의 뒤를 따랐으며 소불이는 다시 열쇠를 채우더니 뒤뜰을 향해 걸어갔다. 빙장에 있는 방은 모두 컸지만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으며 전포의의 부하들도 몇몇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또한 사방이 어두컴컴한 것으로 볼 때 마치 빈 집과도 같았으며 개의 뜰을 지나왔지만 한 사람도 보지를 못했다. 계속 뒤를 살피며 한동안 걷고 있을 때 소불이가 갑자기 불을 끄며 당승무를 끌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한동안 숨을 죽이고 땅에 엎드려 있을 때 일진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달빛 아래 간신히 보이는 그 사람의 체구로 보아 바로 빙장의 늙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매우 신중한 걸음으로 뜰을 지나 서쪽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소불이는 등불을 내려 놓은 다음 당승무에게 눈짓을 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당승무 역시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의 뒤를 좇아갔다. 서쪽문 밖엔 조그만 개천이 있었으며 주위에는 작은 집들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늙은 노인은 심상치가 않은 듯 천천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불이는 남의 뒤를 미행해 본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뒤를 따르면서도 암암리에 몸을 숨길 수가 있었으며 상대가 발을 멈추고는 즉시 당승무에게 손짓을 하며 숨도록 하였다. 늙은이는 아무도 따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느꼈음인지 다시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걸어가더니 급히 몸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소불이는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암중에 당승무에게 지시를 했으며 마치 번개처럼 몸을 날려 벽에 붙었다. 상대가 걸어가면 그들도 따르고 멈추면 그들 역시 멈췄다. 이렇게 되자 늙은이가 아무리 교활하다고 해도 자기의 뒤에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때-. 그 늙은이가 갑자기 몸을 쭉 펴고 좌우를 한 번 살피더니 마치 비호처럼 지붕 위로 몸을 날리며 즉시 사라져 버렸다. 소불이는 급히 몸을 돌려 당승무를 향해 나직이 소리쳤다. "어서 저 노인의 뒤를 쫓아라!"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즉시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주위를 살피자 하나의 까만 그림자가 십여 장 밖에 있었다. 소불이는 내심 놀라며 암암리에 생각을 굴렸다. '저 사람의 경공이 이처럼 대단한 것을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니였구나. 그가 노인 차림을 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여기까지 생각을 한 그는 즉시 몸을 날려 뒤를 쫓았다. 하지만 당승무가 소불이의 뒤를 따라 지붕 위로 몸을 날리고 다시 땅에 내려섰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당승무는 비록 소불이와 경공을 비한다면 차이가 많았지만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전력을 다해 쫓아갔다. 이때 숲 속에서 한 사람이 불쑥 나오더니 당승무를 향해 손짓을 했다. 당승무는 그 사람이 소불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급히 다가가며 물었다. "소노대! 그 노인은 어떻게 췄습니까?" 소불이는 입에 손을 가져다 대며 나직이 말했다. "조용히 나를 따라 오게!" 두 사람은 조용히 대추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숲을 지나자 앞에는 한 채의 초가집이 있었으며 대나무로 엮은 울타리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사람이 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 두 사람은 숲 옆을 지나 순식간에 그 집의 뒤로 다가왔다. 당승무는 소불이가 전포의를 찾으러 가지 않고 이 늙은이를 따라 온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노반이 바로 이 초가집 속에 숨어 있단 말인가?" 소불이는 울타리 곁으로 바짝 다가가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전음입밀로 말을 이었다. "여보게! 절대로 소리를 내서는 안 되네." 소불이와 당승무는 번개처럼 몸을 날려 집안으로 뛰어 들었다. 거기에는 마른 풀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스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바로 이때-. 소불이는 갑자기 쥐가 우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풀을 뒤적이는 등 마치 쥐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는 소리를 냈다. 당승무는 그러한 모습을 보자 매우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으나 소불이가 재빨리 어깨를 눌렀다. 당승무는 깜짝 놀라 즉시 처마 밑에 몸을 움츠렸다. 이때 방 안에서 가느다란 음성이 침묵을 깨뜨리며 들려왔다. "노정(老丁), 자네는 남의 일에 너무 간섭이 심하군. 두 마리의 좀도둑이 싸우는 것을 가지고 왜 그처럼 당황해 하는가?" 이어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삼십 년이란 세월을 흑의총관을 찾기 위해 보냈는데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나?" 다시 가느다란 음성이 약간 크게 들려왔다. "자네가 여기에 온 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 가는데 사마장홍(四馬長弘)을 찾았는가, 못찾았는가?" 노인의 기침 소리가 들리며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사마장홍이 장 중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많네." 가느다란 소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포의가 이미 장 중에 일 년 동안 살아오고 있다던데 사마장홍이 장 중에 있다면 전포의를 속일 수 있을까?" 노인은 다시 헛기침을 하며 말을 받았다. "전포의가 지금까지 가지 않는 것은 아마 사마장홍이 장 중에 있다는 것을 매우 믿고 있는 모양이네." 노인은 또다시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전포의를 발견한 것은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 정오에 또 다른 두 사람이 왔네." 또다시 가느다란 음성의 사람이 궁금한 듯 물었다. "자네는 그들 두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는 설상무영 소불이었고, 또 하나는 젊은 놈인데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매우 의심쩍었네." 가느다란 음성은 다시 다그치듯 물었다. "그 젊은 놈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노인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자칭 탈혼장 방통의 문하라고 하며 또한 염지천의 새로운 제자라고 하더군." 가느다란 음성의 사람은 가벼운 탄식을 했다. "그렇다면 염지천이 다시 나타났단 말인가?" 소불이는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짚더미를 헤치며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방 안에 있는 두 사람 중 하나는 늙은이였으며 가느다란 음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험상궂게 생긴 도인(道人) 이었다. 그는 남루한 도포를 입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큰 병을 하나 차고 있었다. 소불이는 깜짝 놀랐다. "하나는 랍탑도사 두경강(杜景康)이며, 그가 부른 노정이란 자는 이랑신(二郞神) 정수복(丁守福)이 아닐까? 그런데 이들은 무엇 때문에 소노반을 찾는 것일까……." 구독미향 랍탑도사 두경강과 이랑신 정수복은 홍채(鴻彩) 마녀의 수하에 있는 대장으로써 강호상에서의 명성도 낮지 않았다. 이때 방 안에서 들리던 두 사람의 대화가 갑자기 정지했으며 소불이는 즉시 몸을 수그렸다. 동시에 이랑신 정수복이 몸을 일으키더니 주위를 한 번 살폈다. "밖에서 바람 소리가 나는 것 같군." 두경강 역시 숨을 죽이며 밖의 동태를 살피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발자국 소리를 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이미 사방에 사람을 매복시킨 것 같소." 정수복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볍게 벽을 두들겼다. "향춘(香春)낭자! 밖에 동정을 좀 살펴보아라." 정수복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방에서 한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호법께서는 저더러 나가 대응하라는 것입니까?" 소불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생각을 굴렸다. "다행하게도 우린 벽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발각이 되지 않았구나." 소불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일 성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장노인! 빨리 나와서 오라줄을 받아라!" 이에 정수복은 두경강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자네는 지금 고함을 지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느냐?" 두경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때 다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장노인! 너는 귀가 멀었느냐?" 이윽고 정수복은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정수복은 다시 옆방의 벽을 두드렸다. "아향(阿香)이 깊은 밤에 누가 소리를 지르는지 가서 알아보아라!" 다시 옆방에 또 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가 곧 나가보겠으니 할아버지께서는 어서 주무십시오." 곧이어 일진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한 청의소녀가 문 앞에 나타났다. "누구세요? 도대체 누구신데 이 깊은 밤에 우리 할아버지를 찾으십니까?" 청의소녀가 연속 두 번을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청의소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방 안을 향해 소리쳤다. "할아버지께서 잘못 들으신 모양이예요. 문 밖에는 귀신의 그림자조차 없어요!" 그러나 청의소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싹! 싹!"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개의 까만 그림자가 날아들며 대문 양쪽에 와 붙었다. 두 개의 그림자는 바로 흑색기였다. 이 두 자루의 삼각 흑기는 까만 종이로 만든 것이며, 기에는 글씨는 커녕 아무것도 그려 있지 않았다. 정수복은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청의소녀를 향해 물었다. "아향! 밖에 아무도 없단 말이냐?" 문쪽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던 청의소녀가 가볍게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에요. 사람의 그림자는 없고 두 개의 흑기가 붙었을 뿐이예요." 이어 청의소녀는 문 옆으로 다가서며 손을 내밀어 흑기를 뽑으려 했다. 바로 이때, 일진의 냉랭한 기침 소리가 들려오더니 삼 장 밖에서 흑포를 입은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아향! 그 기는 뽑을 수가 없다." 어두운 밤중에 갑자기 기이한 흑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난 것만도 음산한데 그 자의 얼굴은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청의소녀는 날카롭게 쏘아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무엇 때문에 뽑지 못한단 말이에요?" 흑포인은 손짓을 하며 급히 말을 받았다. "빨리 가서 너희 할아버지를 불러내라." 청의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여전히 날카롭게 물었다. "저의 할아버지는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그런데 저 두 개의 흑기는 당신의 것인가요?" 흑포인은 그녀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바로 노부의 구혼기 (句魂旗) 이다." 소불이는 구혼기라는 소리를 듣자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청의소녀는 몹시 분한 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 깊은 밤에 이처럼 괴이한 기를 우리집 문에다 꽂는 것은 무슨 뜻이예요? 제가 당장 뽑아 버리겠어요." 말을 끝내자마자 청의소녀는 몹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두 개의 기를 부러뜨리고 땅바닥에 힘껏 던져 버렸다. 이때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소불이는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망산귀수의 구혼기에는 독약이 묻어 있기 때문에 강호상에서는 감히 만질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 청의소녀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렇지. 이 청의소녀는 이랑산 정수복과 같이 있는 것을 보니 그 문지기의 손녀임에 틀림이 없다." 흑포인은 음산한 눈초리로 청의소녀를 훑어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감히 노부의 면전에서 구혼기를 부러뜨리다니……참으로 대단하구나." 청의소녀는 여전히 날카롭게 쏘아보며 싸늘히 쏘아붙였다. "당신이 이 기이한 기를 우리 문에 꽃은 것은 우리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서인데 제가 잘못한 것이 뭐가 있단 말이예요?" 흑포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방 쪽을 바라보더니 나직이 물었다. "너의 할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나를 피하고 있느냐?" 청의소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매달 삼 전의 은자를 벌기 위해서 빙장의 일을 돌보고 있으니 밤에는 물론 주무셔야 하지 않겠어요?" 흑포인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한두어번 끄덕이더니 돌연 언성을 높였다. "급히 물어볼 말이 있으니 어서 가서 불러와라!" 하지만 청의소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저한테 얘기해 주세요." 흑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청의소녀를 똑바로 주시했다. "지금 너의 집에는 두 몇 명이 살고 있느냐?" 청의소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 명이 있어요. 할아버지와 저, 그리고 여동생이 하나 있어요." 흑포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너희들은 정말로 이 마을의 사람이냐?" 청의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맞아요. 우리는 계속해서 이곳에서 살아 왔으며 빙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씨예요. 누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아세요?" 흑포인은 여전히 음산한 눈초리로 청의소녀를 쏘아보더니 창백한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거는 손을 한 번 바라보아라! 무슨 이상이 없는지……" 청의소녀는 천천히 긴 장갑을 벗더니 고개를 숙여 바라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이 두 개의 흑기를 만졌을 뿐인데 무엇이 이상하다고 그런 소리를 하세요?" 청의소녀는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손에 독약이 묻을 리가 없었다. 흑포인은 냉소를 터뜨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노부는 너를 먼저 죽인 후에 너의 할아버지와 결단을 내겠다!" 이 말에 청의소녀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제보니 당신은 사람을 죽이려고 온 것이군요." 흑포인은 괴이한 웃음을 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어 흑포인은 청의소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순간……. 흑포인이 발을 움직임과 동시에 사방에서 칠팔 개의 유령과 같은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일제히 초가집을 향해 접근해 갔다. 이렇듯 흑포인이 초가집을 향해 칠팔 장 정도까지 다가갔을 때 갑자기 방 안에서 한 여자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그가 누구를 죽이기 위해서 왔나요?" 청의소녀는 여전히 흑포인을 주시하며 말을 받았다. "아마 할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은 모양이다." "흥!" 하는 냉랭한 숨소리와 함께 집 안에서 갑자기 까만 그림자 하나가 흑포인의 정면을 향해 비호처럼 덮쳐갔다. 흑포인은 손을 들어 막아내는가 싶더니 공세가 너무 맹렬했음인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방금 흑포인을 덮쳐간 까만 그림자는 바로 하나의 의자였다. 흑포인은 두 눈을 부릅뜨더니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으하하하하…… 보아하니 별 수가 없는 모양이구나." 방 안의 여자는 다시 깔깔 웃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호호호……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너의 머리통을 조개 버릴 것이니 그리 알아라." 곧이어 또 하나의 까만 그림자가 흑포인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갔다. 이어 흑포인이 손을 내밀어 일 장을 가하자 그 검은 물체는 즉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검은 물체는 음식을 볶을 때 사용하는 하나의 냄비였다. 그 냄비가 흑포인의 일 장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튀기자 초가집을 둘러싸고 있던 칠팔 명의 사나이들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더니 그 중 세 명이 그자리에 쓰러졌다. 소불이는 내심 크게 놀라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의외의 변화로구나!' 이때 흑포인의 두 눈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그는 곧 소맷자락 속에서 한 자루의 짧은 금도(金刀)를 꺼내 들었다. 칼등에는 일종의 작은 방울이 달려 있어 손에 쥐자 일지의 방울소리가 울렸다. "장노인! 너는 비겁하게 방 안에 숨어서 사람을 상하게 하다니, 나는 오늘 너를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때 집 안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번득이더니 청의소녀 옆에 십칠 팔 세 가량 되어 보이는 홍의소녀가 킬킬 웃으며 나타났다. "호호호…… 당신이 냄비를 부셔 당신의 부하들을 상하게 해놓고 누구를 원망하세요?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주무시고 계시며 설사 주무시지 않고 계신다 할지라도 당신 같은 사람들과는 겨루지 않을 거예요." 이때 청의소녀가 그녀를 흘겨보며 말을 받았다. "이 일은 네가 나설 필요 없으니 어서 들어가 잠이나 자거라!" 홍의소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흑포인을 유심히 주시했다. "저 사람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빼앗아 할아버지에게 드릴 생선 요리를 만들 때 쓰면 좋겠어요." 그리고 청의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거 사람이 비록 나쁘다고 할지라도 남의 물건을 함부로 뺏으면 홍의소녀는 입술을 삐쭉이며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누가 이곳에 와서 시비를 하라고 그랬나?" 청의소녀와 홍의소녀는 자기들끼리 얘기를 주고 받을 뿐 흑포인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시 흑포인이 껄껄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는 지금 너희들과 농담을 하고 싶지 않으니 빨리 가서 할아버지를 불러오너라!" 홍의소녀는 여전히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 언니가 할아버지께서는 주무시고 계시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구세요?" 이어 홍의소녀는 흑포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더니 손을 내밀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내놓으세요." 흑포인은 이처럼 나이가 어린 소녀가 손을 내민 채 자기를 향해 접근해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니, 뭐라고?" 홍의소녀는 좀 멋적은 듯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손에 있는 칼을 내놓으란 말이예요." 순간-. 홍의소녀는 몸을 갑자기 치솟음과 동시에 흑포인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들며 다섯 손가락으로 금도의 등을 짚었다. 흑포인은 크게 놀라 소리를 지르며 즉시 일 장을 격출해 냈다. 홍의소녀는 왼손으로 칼등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는 흑포인의 왼팔을 향해 내리쳤다. 흑포인은 금도가 상대에게 잡히자 급히 뿌리치려 했지만 금도는 마치 그녀의 손에 달라 붙은 듯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흑포인은 왼손으로 일곱 장이나 격출해 냈다. 하지만 홍의소녀 역시 일곱 장을 격출해 내며 기묘한 수법으로 막아냈다. 흑포인은 내심 놀라고 화가 치밀어 갑자기 오른손을 놓더니 뒤로 물러섰다. 망산일파는 비록 강호에서는 조그만 문파였지만 악독한 암기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으며 누구든지 망산암기에 적중되기만 하면 살아날 수가 없었다. 홍의소녀는 그의 금도를 차지하게 되자 더욱 맹렬히 공격을 가하며 상대로 하여금 암기를 전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때 망산귀수가 칼을 버리고 뒤로 물러서자 문 앞에 서 있던 청의소녀가 갑자기 소리쳤다. "너는 그의 암기를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흑포인은 검도를 버리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으며 홍의소녀는 내심 기뻤지만 웃지는 않았다. 이때 홍의소녀는 손이 마비되어 옴을 느끼며 금도를 즉시 땅에 떨어뜨렸다. 비룡팔부 2권 함정 그녀는 몹시 놀라 급히 고개를 숙여 손등을 보자 어느 사이에 흑포인의 암기에 적중이 되어 손등에는 바늘만한 독침이 꽂혀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홍의소녀는 여전히 흑포인으로 하여금 전혀 손을 쓸 기회를 주지 않고 일 장을 휘둘러 다시 그의 오른팔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흑포인은 급히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도 너희들은 할아버지를 불러내지 않겠느냐?" 이에 청의소녀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절대로 그럴 필요는 없소." 그러더니 검을 치켜올리며 일진의 쾌속하고 정교한 공격을 전개했다. 순간 갑자기 눈앞이 부시는가 싶더니 단숨에 그녀는 아홉 장이나 전개해 나갔다. 흑포인은 재빨리 금도를 휘둘러 아홉 장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여전히 공격을 가할 기회가 없었다. 그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저 두 계집년은 도대체 어느 문하의 사람이기에 이처럼 무서운 실력을 가지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흑포인은 진기를 끌어올리더니 뒤로 재빨리 물러섰다. 청의소녀는 여전히 그를 쏘아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은 무엇이든지 서슴없이 전개를 하시오. 내가 모두 받아줄테니 ……."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용형일식(龍形一式)을 전개하여 검과 사람이 한꺼번에 공격해 들어갔다. 흑포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노부가 너를 상하게 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그것은 나의 손을 뒤집는 것보다 더욱더 쉬운 일이다." 청의소녀가 흑포인곁으로 다가서기도 전에 흑포인으로부터 금도가 나오더니 칼등에 있는 방울에서 일련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을 안에서 가벼운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바람에 실려 살포되어 가는 게 아닌가. 참으로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청의소녀는 정신없이 덮쳐오면서 방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녀의 귀에는 방 안에 있는 랍탑도사의 전음입밀이 얼핏 스쳐갔다. "향춘낭자! 그의 구독미향(九毒迷香)을 조심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어서 호흡을 정지해라?" 청의소녀는 이미 완전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방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망산귀수의 암기였을 뿐이지 귀향(鬼香)은 아니었다. 청의소녀는 랍탑도사의 경고를 들었을 때 이미 괴이한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순간 그녀는 크게 노하더니 이를 악물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갑자기 내렸다. 이와 동시에 검끝은 망산귀수의 얼굴을 향해 찔러갔다. 청의소녀가 휘두른 그 일격은 참으로 쾌속하고도 정교하기 그지 없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흑포인이 검도를 채 휘두르기도 전에 청의소녀는 이미 구독미향을 안고 덮쳐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그가 놀랐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이처럼 맹렬한 청의소녀의 공력에 즉시 진기를 끌어올려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순간, 청의소녀가 들고 있던 검끝이 예리하게 내려지며 흑포인의 앞 부분의 흑포를 한 자 가량 찢어 버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흑포인의, 가슴은 청의소녀의 검에 의해 완전히 두 조각이 나버렸을 것이다. 이때, 일 장을 격출해 낸 청의소녀가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땅에 힘없이 쓰러졌다. 흑포인은 음산한 웃음을 터뜨리며 혼잣말로 쿵얼거렸다. "으흐흐…… 이 어린 계집아, 너에게 그 정도의 능력 밖에 없었단 말이냐?" 흑포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 어서 이 계집년을 끌고 가라!" 그런데 뒤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흑포인은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자기의 부하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여봐라! 모두 어디에 갔느냐?" 순간 초가집 앞에서 한 늙은이의 웃음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주어르신네! 무엇이 그처럼 급하시오. 여덟 분의 영고도(令高島)께서는 지금 이곳에서 차를 드시고 계시니 어르신네께서도 들어 오십시오." 이 말을 듣자 흑포인은 두 눈에 섬광을 번득이더니 궁금한 듯 다그쳐 물었다. "귀하는 어느 파의 고인이오?" 그러자 초가집 안에서 갑자기 불이 켜지더니 한 노인이 허리를 구부린 채 등불을 손에 들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참으로 송구스럽소이다. 이 늙은이는 장노실(張老實)이라는 사람으로 빙장의 문을 지키는 사람이오. 방금 저의 두 손녀가 몰라뵙고 죄를 지은 것 같으니 이 늙은 것이 대신 용서를 빌겠소." 노인의 손에 등불이 들려져 있었기 때문에 초가집 안의 상황은 희미하게 볼 수가 있었다. 흑포인의 여덟 명의 제자는 모두 방 안에 원을 그리고 앉아 있었으며 무슨 노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흑포인은 장노인을 무섭게 쏘아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바로 장노인이오? 그렇다면 노부의 문하들은 어떻게 했소?" 장노인은 등불을 치켜올리더니 히죽 웃으며 말을 받았다. "주어르신네께서는 자세히 보지 않으셨소? 어르신네의 문하들은 지금 저 방 안에 앉아 있지 않소. 다만 의자가 없어서 저렇게 맨바닥에 모시게 된 것을 용서해 주시오." 흑포인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귀하께서 참으로 고명하시군." 장노인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이어 말했다. "참으로 송구스럽소이다. 이 늙은 것은 다만 두 손녀를 위해 부탁 드릴 것이 있으니……" 흑포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가로챘다. "흥! 당신도 나와 겨루고 싶단 말이오?" 장노인은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허리를 굽혔다.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소? 주어르신네께서 두 소녀를 용서해 준다면 이 늙은 것은 죽으라 하면 죽겠소." 흑포인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한동안 장노인을 주시했다. 장노인은 아무리 보아도 보잘 것 없는 늙은이에 불과하지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노부는 당신에게 해약을 줄 수가 있소. 하지만 당신은 우선 노부 의 문하를 먼저 놓아 주시오." 장노인은 방 안을 힐끗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주어르신네의 여덟 문하들은 다만 혈도를 제압당했을 뿐이오. 그렇기 때문에 주어르신네께서 해약만 준다면 이 늙은 것이 즉시 여덟 분들을 순순히 놓아 드리겠소. "다시 장노인은 상대방이 말을 하기도 전에 히죽 웃으며 말을 계속 했다. "주어르신네께서는 일대의 종사(宗師)이며 뿐만 아니라 망산이 이곳에서 얼마 멀지도 않은데 저와 두 손녀가 이곳에 살면서 어찌 어르신네에게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흑포인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내뱉 듯이 말했다. "알았으면 됐소." "흑포인 역시 다년간 강호에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조금 전 청의 소녀와 싸울 때 이미 이 집의 사람들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린 소녀들의 무공이 뛰어난것으로 볼때 이 늙은이의 무공은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흑포인은 품 안에서 자기로 된 하나의 병을 꺼내더니 한 알의 환약을 던져 주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노부의 흑몽신망(黑夢神芒)의 해약이오. 입안에서 씹었다가 몸에 놔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장노인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받아 들더니 다시 땅에 쓰러져 있는 청의소녀를 가리켰다. "노신의 큰 손녀는 어르신네의 구독미향에 중독되었으니 어르신 ……." 흑포인은 그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품에서 또 하나의 병을 꺼내더니 긴 손톱으로 조금 떠서 청의소녀의 코에 집어 넣었다. 이윽고 흑포인이 몸을 일으키자 장노인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네, 참으로 감사할 뿐이오." "바로 이때 돌연 장노인이 흑포인의 선기혈(璇璣穴)을 향해 번개처럼 �찍어 갔다. 이 일지(一指)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으며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흑포인은 크게 놀라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진기를 끌어 올리며 일 자 밖으로 물러났다. 이것을 참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때 흑포인의 약가루가 청의소녀의 코에 들어가자 그녀는 재채기를 한 번 하더니 과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장노인의 품에 안겼다. 장노인은 즉시 약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향은 지금 그의 흑생침(黑生針)에 적중이 되었기 때문에 이 해약을 입에서 씹어 목구멍에 대고 있기만 하면 될 것이다." 장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펑!" 하는 일성이 들리며 흑포인의 몸이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이어 흑포인이 멈추기도 전에 그의 등 뒤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다시 그의 등을 향해 일 장을 격출함과 동시에 흑포인을 일 장 밖으로 밀어냈다. 흑포인은 사람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등에 돌연 일 장을 맞자 갑자기 괴이한 소리를 질렀다. 장노인은 흑포인이 땅에 제대로 서기도 전에 재빠른 동작으로 다가서며 빙긋이 웃었다. "주어르신네께서는 드러 누워 조용히 쉬는 것이 좋을 것이오." 순간 장노인은 그의 어깨를 향해 일 장을 격출해 냈다. 흑포인은 두 눈에 무서운 살기를 떠올리며 즉시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 노부는 절대로 당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오." 하고는 즉시 왼손을 높이 치켜 들어 일 장을 격출해 내자, 장노인이 일 장에 대응했다. 이때 다시, "펑?" 하는 일 성이 들리며 장노인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으며 흑포인 역시 등 뒤에서 일 장을 맞았기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거의 일 장 밖으로 물러났다. 바로 이때-. 흑포인의 등 뒤에서는 람탑도사 두경강이 나타나 그의 혈도를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우리 둘이서 너를 상대하고 있으니 너로서는 참으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흑포인은 다시 피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못한채 그자리에 힘없이 쓰러져 버린 것이다. 두경강은 재빨리 흑포인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노제!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세. 적들이 이들을 돕기 위해 꼭 올 것이네." 말을 끝내자마자 두경강은 그의 초가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장노인 역시 몸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전포의도 곧 올 걸세." 두 사람은 즉시 초가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으며 희미한 등불 역시 이내 꺼져 버렸다. 집 뒤에 숨어서 동태를 살피고 있던 소불이도 정수복과 두경강이 나타났을 때 이미 당승무를 데리고 대나무 울타리를 벗어나 집 오른쪽에 있는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당승무는 한동안 소불이를 바라보더니 참지를 못하고 나직이 물었다. "노대! 우리는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전포의가 아마 곧 이곳에 나타날 것이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적발되지 않기 위해서 숨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괜히 충돌이 생기게 되면 곤란할 테니까……." 당승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궁금한 듯 물었다. "조금 전 장노인과 도사 두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 두 사람은 홍채문의 호법들이다. 노인은 이랑신 정수복이며, 강호에서 으뜸가는 역용술(逆用術)의 고수지." 소불이는 주위를 한 번 살피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또한 도사는 랍탑도사 두경강이며, 그가 쓰는 무기는 허리에 차고 있는 철호로이네. 무공이 높지 않은 사람은 한 번 불기만 하면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져 버린다는 말이 있네." 당승무는 이 말에 흥미를 느끼며 다시 물어보려고 했으나 소불이가 입을 막았다. "쉬! 누가 오는 것 같으니 입을 다물게." 당승무는 즉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이 잠시 숨을 죽이고 있을 때 흑의판관 전포의가 네 명의 사나이를 데리고 급히 달려왔다. 초가집 앞에 도착한 그는 갑자기 발을 멈추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군. 주형이 여덟 명의 부하를 데리고 왔을 텐데. 한 명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 전포의는 본시부터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주위를 살펴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꺼냈다. "그 노인이 있는지 없는지 너희들은 어서 가서 문을 한 번 두드려 보아라." 전포의의 옆에 서 있던 한 사나이가 공손히 대답을 하며 문 옆으로 다가서더니 언성을 높여 물었다. "장노인! 우리의 총관께서 오셨으니 어서 일어나시오." 하지만 초가집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흑의 사나이는 참지를 못하고 더욱더 큰 소리로 소리쳤다. "장노인! 어서 일어나시오. 어서……." 하고는 흑의 사나이가 다시 문을 두드리려고 하자 문이 갑자기 열렸다. 흑의 사나이는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자세히 보니 방 안에 몇 명의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어슴프레하게 볼 수가 있었다. 흑의 사나이는 크게 당황을 하여 감히 앞으로 다가서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전총관님! 방 안에는 적지 않은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전포의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물었다. "어떤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흑의 사나이는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다가가더니 고개를 들이대 방 안을 유심히 살폈다. "초…… 총관님! 주교주 같습니다." 지금 흑의 사나이가 말하는 주교주란 바로 흑포인. 망산귀수 주우천(朱友泉)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그것은 망산일파를 유명교(幽命敎)라고 칭하기 때문이다. 전포의 역시 이 말을 듣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다가가더니 물었다. "혹시 네가 잘못 본 것이 아니냐?" 흑의 사나이는 손을 내리며 한 걸음 물러서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주교주와 그의 부하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소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자 전포의는 즉시 안색이 변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있을까?" 그는 다시 아랫턱을 만지작거리며 분부를 내렸다. "너희들은 잠시 뒤로 물러가 있거라. 그리고 내가 부르기 전에 절대로 움직이지 말아라?" 이어 전포의는 품에서 크기가 다른 한 쌍의 철필을 꺼내 들었다. 이것은 그가 온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독문 무기였으며 오른손에 쥔 장필은 판관필로써 혈도를 찍는데 쓰이며 왼손에 쥔 단필은 상대의 진기공력을 전문적으로 부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한 쌍의 철필로써 수많은 고수들을 제거해 왔으며 이때 문에 판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전포의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집 안을 주시하며 천천히 문 앞을 향해 다가섰다. 그는 차츰 접근해 가면서 두 귀를 곤두세웠으며 최고의 청각을 유지했다. 설사 수 장 밖에서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라고 할지라도 그의 귀는 속일 수가 없었다. 전포의는 문 앞까지 다가서더니 발을 멈추고 온 신경과 귀와 눈을 집중시켜 방 안의 동태를 살폈다. 실내는 비록 어두웠지만 똑똑히 볼 수가 있었으며 한 칸의 방에는 상이나 의자는 커녕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단지 방 안에는 여덟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으며 그 중에는 자칭 유명교의 교주인 망산귀수 주우천도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전포의는 내심 크게 놀라며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주교주는 운공 조식을 하고 있는 것 같군. 장노인은 간교하기 짝이 없는데 지금 여기서 또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장노인이 아무리 높은 무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지금 집 안에는 두 명의 소녀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서 망산귀수를 잡을 수가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여덟 명의 제자까지 잡혀 있다니……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이군.' 전포의는 아무리 생각을 해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섣불리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전포의는 여전히 철필을 양손에 들고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망 산귀수의 사도들을 유심히 살폈다. 쌍방은 모두 상대의 선제 공격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망산귀수는 여전히 움직일 줄을 몰랐으며 문 앞�에 서 있는 전포의 역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굳어져 있는 듯 했다. 소불이는 이러한 상황을 계속 주시하며 생각을 했다. '이 음세판관(陰世判官)은 과연 교활하기가 마치 여우와 같군.' 바로 이때-. 전포의의 외침 소리가 싸늘한 침묵을 깨뜨리며 들려왔다. "주형!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망산귀수에겐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전포의는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주형께선 어떤 부상이라도 당한 것이오? 만약 말을 할 수가 없다면 손을 한 번 들어 보시오?" 그러나 여전히 반응이 없자 전포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 거렸다. "참으로 이상하군. 이상해……." 전포의 역시 수십 년 동안 명성을 날렸기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자 더욱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때 전포의는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장필을 가슴에 대고 단필은 손에 꽉 쥔 채 천천히 방을 향했다. 왼발은 방 안으로 들이밀고 오른발은 여전히 밖에 디딘 채 방 안을 자세히 살폈지만 아무런 미상을 찾지 못했다. 전포의는 드디어 방 안에 들어섰고 조심스럽게 망산귀수의 곁으로 다가섰다. 이어 즉시 몸을 숙여 자세히 보자 그들 사도들은 모두 혈도가 찍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포의는 매우 놀랐으며 불길한 예감이 선뜻 머리를 스쳤다. '이것은 분명히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한 그는 즉시 좌우를 살폈다. 양쪽에 달려 있는 문에는 각각 하나의 휘장이 걸려져 있었으며 그 안의 상황은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예민한 청각으로 도 두 칸의 방에서 사람의 호흡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전포의는 실소를 머금은 채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설사 사람이 들어 있다고 할지라도 감히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전포의는 오른손의 철필을 왼손에 잡더니 오른 손으로 앉아 있는 한 사나이의 몸을 가볍게 내리쳤다. 그 일 장은 바로 내가(內家)에서 으뜸가는 해혈 수법이었다. 하지만 그 흑의 사나이는 몸이 잠시 흔들렸을 뿐 찍힌 혈도는 풀려 지지 않았다. 전포의는 내심 놀라며 다시 손을 들어 그 사나이의 대 혈을 연속적으로 때렸다. '아무리 혈도가 적중했다 할지라도 이번만은 풀리겠지…….' 하지만 그 사나이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으며 혈도 또한 풀리지 않았다. 전포의는 더욱 놀라 안색까지 변해 있었다. '도대체 무슨 괴이한 수법을 썼을까?'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몸을 날리며 원을 그리고 앉아 있는 흑의 사나이들의 머리 위를 지나 망산귀수를 향해 똑바로 덮쳐갔다. 설상무영 망산귀수의 곁으로 다가온 전포의는 한동안 그를 주시하더니 나직이 물었다. "주형!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하지만 망산귀수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으며 움직이지도 않았다. 전포의가 다시 망산귀수의 등 뒤에서 진기를 모아 혈맥을 누르며 제압당한 혈도를 찾으려 할 때-. 조금전 까지만 해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사나이들이 모 두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전포의는 무의식 중에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조금 전 까지만 해도 휘장이 내려져 있던 두 개의 문이 어느 사이에 닫혀져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 앞에는 하나의 흑의인이 버티고 서 있었다. 어렴풋이나마 그 사람의 얼굴과 옷차림을 본 전포의는 모든 것이 자기와 몹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볼수록 그 사람은 옷차림, 심지어 용모까지도 자기와 똑같아 마치 또 하나의 자신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전포의가 그 사람을 주시하자 그 사람 역시 전포의를 주시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일 장 정도가 되었으며 서로가 입을 열지 않았다 전포의는 내심 놀라며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망산귀수의 사도들도 강호상에서는 일류 고수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처럼 상대에게 가볍게 제압을 당하고 마치 석상처럼 앉아 있으니 이 사람의 무공은 틀림없이 높을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긴 침묵이 흘렀다. 이때 전포의가 먼저 음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하의 차림을 보니 형제 때문에 온 것 같은데……." 전포의는 몹시 불쾌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귀하께서 유명교주의 사도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아마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오. 하지만 무엇 때문에 형제로 변장했소?" 그 사람은 또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흉내를 냈다. 이 사람은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전포의와 흡사했다. 전포의는 흑영도의 흑의당 총관을 지내 오면서 수많은 격전을 치루어 왔지만 지금 이 사람처럼 자기의 흉내를 내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전포의는 더욱 화를 내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귀하께서는 저 때문에 오셨으니 달콤한 맛을 좀 보시오?" 말을 끝냄과 동시에 몸을 번개처럼 날리며 일 장을 격출해 나갔다.가짜 전포의는 여전히 그의 흉를 냈다. "귀하께서는 저 때문에 오셨으니 달콤한 맛을 좀 보시오?" 하며 그 역시 몸을 날려 마주쳐 갔다. 순간 -.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으며 전포의 역시 급히 내려서며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쌍방의 이 일 장은 막상막하라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전포의는 여전히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았으나 마음 속으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의 무공은 확실히 나보다 약하지 않구나.' 이때 가짜 전포의가 갑자기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음성을 낮췄다. "빨리 나에게 주시오." 전포의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물었다. "무엇을 달라는 말이오?" 가짜 전포의는 음산하게 웃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당신의 철필 외의 또 무엇이 있겠소." 전포의는 여전히 그를 쏘아보며 반문했다. "귀하께서는 저와 똑같이 변장을 했으면서 무엇 때문에 철필을 가져오지 않았소?" 가짜 전포의는 밖에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 했음인지 급히 말을 받았다. "음성을 좀 낮추시오. 나는 다만 임시로 변장을 했을 뿐이오. 만약 노형께서 한 쌍의 철필을 빌려 주시기만 한다면 더욱 닮게 보일 것이 아니오?" 전포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른팔을 치켜들어 그 사람을 향해 정면으로 찔러갔다. 바로 그의 철필이 나가는 순간 그는 갑자기 뒤에서 한 줄기의 지풍이 급습해옴을 느꼈다. 전포의는 급히 옆으로 피하며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한데 바로 그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쏴!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예리한 칼날이 양쪽에서 그를 향해 찔러 갔다. 전포의가 다시 몸을 피하며 뒤를 돌아보자 망산귀수의 몸 뒤에는 어느새 도포를 입은 한 도인이 나타나 있었으며 좌우 양쪽에는 손에 단검을 든 두 명의 여인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자 전포의는 들고 있던 쌍필을 좌우로 갈라 좌우봉원(左右逢原)의 초식을 전개했다. 순간 문 입구에 서 있던 가짜 전포의가 몸을 비호처럼 날리며 장풍으로 전포의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쳐 갔다. 전포의는 급히 몸을 돌리며 고개를 옆으로 피하더니 다시 오른손의 철필로 반격을 가해 나갔다. 왼쪽에 서 있던 여인은 이 기회를 틈타 전포의의 겨드랑이를 향해 찔러갔으며 오른쪽에 서 있던 여인 역시 그의 허리를 향해 쾌속하게 찔러갔다. 전포의는 몹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끼 네 사람의 실력은 모두 대단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이같은 생각을 할 순간,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 밑이 싸늘해옴을 느꼈다. 어느 사이에 그 여인의 칼에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전포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문 앞에 서 있는 가짜 전포의를 향해 번개처럼 덮쳐 갔다. 한데 몸이 날자마자 갑자기 오른쪽 무릎 부분에 통증이 일어나는게 작고 가느다란 암기에 맞은 것 같았다. 전포의는 입술을 깨물며 오른손의 철필로 천괴점원(天魁點元)을 전개하며 가짜 전포의의 머리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가짜 전포의는 몸을 약간 돌리며 빙긋이 웃었다. "철필을 나에게 주려고 그러는 것이오?" 가짜 전포의는 말을 끝내자마자 왼손으로는 전포의의 오른팔 맥 문을 잡아가며 오른손으로는 그의 가슴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이렇게 되자 전포의는 오른손을 상대방에게 잡혔으며 전력을 다 한 일 격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전포의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철필로써 상대방 의 미심혈을 찔러갔다. 그러자 가짜 전포의는 오른손을 뒤로 돌리고 전포의의 왼손을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이 한 자루는 필요가 없소." 말을 끝냄과 동시에 한쪽 발로는 전포의의 아랫배를 향해 찔러갔고 또한 왼손으로는 전포의의 맥문을 잡았으며 오른손으로는 신속히 철필을 뺏았다. 이 연속되는 동작은 마치'번개와 같았다. 전포의는 상대에게서 오른손을 아무리 빼려고 했지만 어찌된 일 인지 뺄 수가 없었다. 또한 상대방의 발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때 다시 검광이 번득이며 양쪽에 있던 두 여인이 전포의를 향해 찔러갔다. 전포의는 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오른쪽 무릎 부분에 통증을 느끼며 제대로 서질 못했다. 그는 그제서야 조금 전 상대를 향해 덮쳐갈 때 암기에 맞았던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전포의는 몸을 재빨리 돌리며 오른손의 철필을 가짜 전포의의 가슴을 향해 던졌다. 바로 그의 철필이 날아가는 순간 그의 뒤에서 유령과 같은 그림자 가 나타나더니 전포의가 몸을 날리기도 전에 지풍을 격출해 냈다. 이 일지는 전포의의 뒷통수를 적중시켰으며 지풍을 맞은 그는 즉 시 기절을 해 버리고 말았다. 랍탑도사는 계속해서 전포의의 혈도를 몇 군데 더 찌르더니 손짓을 했다. 곧이어 그는 전포의를 잡고 집 뒤의 토담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개처럼 몸을 날렸다. 두 명의 여인 즉, 청의소녀와 홍의소녀도 즉시 뒤를 따랐다. 이때 가짜 전포의가 일부러 냉소를 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장늙은이야! 어디로 도망을 치려 하느냐?" 토담이 무너지는 소리는 밖에 있는 사람들도 들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전총관이 부르지 않는 한 절대로 경거망동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감히 돌격해 들어가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전총관의 말투로 볼 때 매우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 같았다. 가짜 전포의는 두 자루의 철필을 거두며 망산귀수의 옆으로 다가 서더니 손을 쳐들어 제압당한 혈도를 향해 두어 번 내리쳤다. 하지만 그가 가짜 전포의라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망산귀수는 혈도가 풀리자 즉시 두 눈을 뜨고 가짜 전포의를 바라보며 포권을 했다. "고맙소. 전총관! 하지만 그 장가라는 늙은이는 잡았소?" 가짜 전포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가놈은 너무 교활해서 제가 집 안으로 돌격해 들어갈 때 벌써 토담을 무너뜨리고 도망을 쳤소." 가짜 전포의는 이어 재빠른 동작으로 여덟 명의 사나이들의 혈도를 풀어주며 물었다. "주형께서는 장늙은이의 내력을 알아냈소?" 망산귀수 역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늙은이의 두 명의 손녀들은 모두 비범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소. 조금전 그 두 명의 계집년은 원래 저의 손아래 부상을 입었었소. 하지만 저는 방 안에 누가 매복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따라 들어가다가 상대방의 암습을 당하고 말았소.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상대방의 내력을 알 수가 있었겠소?" 사실 장노인도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떤 거짓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짜 전포의는 마음 속으로 웃고 있었다. 제가 거짓말을 하기를 진작부터 바라고 있었다. 하하하……: 그러나 겉으로는 일부러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장노인은 소불이와 같은 패거리가 아닌 모양이오. 하지만 아깝게도 모두 도망을 쳐 버렸으니……" 망산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조금 전 제가 장노인과 겨루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습격을 한 사람은 아마 소불이일 가능성이 있소. 그의 별호는 설상무영이라고 하며 경공 또한 아주 높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뒤에다 가와 있었는데도 발견을 못하고 그만……" 여기까지 말을 한 그는 갑자기 음산하게 웃으며 언성을 높였다. "소가 늙은이야! 네가 아무리 도망을 친다고 할지라도 이 망산 파는 절대로 너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숲 속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있던 소불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참으로 큰 일이 생겼군. 랍탑도사 두경강 때문에 큰 화를 입은 것 같으니……' 이때 가짜 전포의와 망산귀수는 부하들을 데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당승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도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나?" 당승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중하게 물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시겠단 말입니까?" 소불이는 좀 멋적은 듯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다시 빙장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말을 들은 당승무는 깜짝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우리는 또다시 빙장으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소불이는 당승무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나직이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사마장홍을 찾지 않을 셈인가?" 당승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아스러운 듯 반문했다. "노대께서는 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소불이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히죽이 웃었다. "물어볼 필요 없이 나만 따라오면 될 것이네." 당승무는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가시죠." 두 사람은 즉시 숲을 빠져 나와 또다시 빙장으로 되돌아 왔다. 이어 소불이는 재빠른 동작으로 주위를 한 번 살피더니 비호처럼 몸을 날려 담 위로 뛰어 오르며 당승무에게 손짓을 했다. 당승무 또한 급히 몸을 날리며 소불이의 뒤를 따라 담을 넘어 들어갔다. 빙장 안에 들어온 소불이는 마치 자기 집이나 되는 것처럼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을 헤치며 얼마를 걸었을 때 그들 앞에는 한 작은 집이 나타났다. 소불이는 그 집의 문 앞으로 다가가는가 싶더니 즉시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승무 역시 그가 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가운데 뒤를 따랐다. 이 한 칸의 방은 별로 크지도 않았으며 벽 바로 옆에 책상과 의자 가 하나씩 놓여 있을 뿐이었다. 당승무는 마음 속으로 연신 이상하다고 느끼며 나직이 물었다. "소노대! 대체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소불이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여기가 바로 장노인의 방일세." 당승무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그쳐 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이곳에 왔습니까?"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늙은 것에게도 이유가 있어서 왔으니 물어볼 필요가 없네." 소불이는 다시 주위를 정신없이 살피더니 대들보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노제! 자네는 할 일이 있으니 저 대들보 위에서 휴식이나 취하라."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대들보 위로 급히 올라갔다. 그리고는 몸을 엎드린 채 고개를 숙이고 아래에 있는 소불이의 행동을 유심히 주시했다. 한데 소불이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옷 또한 입은 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더니 머리까지 파묻고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이때 당승무는 갑자기 소불이가 전에 길에서 자기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마장홍은 어릴 때부터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술에 취하면 침상 위에 누워서 움직이기를 싫어한다고 했다. 그래서 침상 위에다 어떤 장치를 해놓고 누가 문을 두드릴 때 다만 손으로 누르기만 하면 저절로 열린다고 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불이가 갑자기 일어나며 품 속에서 금사를 꺼내들더니 땅을 두드리기도 하고 가끔 허리를 굽혀 귀를 땅에 붙여 듣기도 했다. 당승무는 음성을 낮추며 궁금한 듯 물었다. "노대! 기관장치가 바로 이 집안에 있습니까?" 소불이는 급히 고개를 쳐들고 당승무를 향해, "쉬?" 하며 또다시 철사를 가지고 땅바닥과 벽을 향해 가볍게 쳤다. 바로 그가 오른쪽의 벽을 두드리고 귀를 대는 순간, 갑자기 몸을 굽히며 번개처럼 대들보 위를 향해 날아오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람이 온 것 같으니 소리를 내지 말게." 이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창문이 열리더니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창문을 뚫고 들어와 땅에 내려섰다. 이 사람은 몹시 어려 보였으며 키가 약 오 척 정도밖에 안되었고 몸에는 청색 경장을 입고 있었다. 또한 어깨에는 두 자루의 일 척 가량 되어 보이는 작은 검이 교차해서 둘러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청수했고, 나이도 많지 않은 것 같았지만 신법은 극히 빨랐다. 이때 그는 샛별 같은 두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오른쪽 벽 구석을 향해 달려갔다. 동시에 그는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들더니 허리를 굽혀 벽돌을 들었다. 그러자 하나의 어두컴컴한 지하 땅굴이 나타났다. 당승무는 그것을 보자 바로 조금 전 소불이가 자세히 살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승무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저기가 바로 출구였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소년의 몸이 갑자기 줄어드는가 싶더니 지하굴 속을 향해 빠져 들어갔다. 놀란 당승무가 고개를 돌려 소불이에게 말을 건네려는 순간, 갑자기 소불이가 그의 입을 막으며 전음입밀로 주의를 주었다. "입을 다물게!" 바로 이때, 방문이 스르르 열리며 하나의 그림자가 번개같이 날아들었다. 생포 이 사람은 흑의를 입고 있었으며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모든 것으로 볼 때 바로 흑의판관 전포의와 같았다. 전포의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들려져 있는 벽돌을 향해다가 가더니 빙그레 웃었다. "과연 여기에 있었구나!"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숨을 서서히 들이마셨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몸이 줄어들었으며 세 번을 들이마시자 완전히 어린아이로 변한 것 같았다. 이어 그는 땅굴을 향해 즉시 뛰어 내려갔다. 순간 소불이가 당승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여기에 남아 있게. 이 늙은이가 내려가서 내막을 알아볼 테니……." "이어 소불이는 조심스럽게 뛰어내리는가 싶더니 그 구멍에 발을 넣자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구멍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축골공(縮骨功)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들어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순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져 있던 벽돌이 자동적으로 닫혀 버렸다. 또한 땅굴 문이 닫힌 후부터 침상이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변화에 당승무는 이상하게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조금 전에 들어간 세 사람이 장치를 잘못 건드렸기 때문에 그같는 모양이지. 맞았다. 그 땅굴이 지하 통로가 아니고 바로 저 침상 이 입구였구나.' 이때 당승무는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침상 위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하지만 침상은 여전히 땅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며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눈 앞이 캄캄해지며 침상은 미끄러워 경사진 미끄럼틀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번개와 같은 속도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당승무는 순식간에 두 발이 땅에 닿았다. 동시에 눈 앞이 환해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 당승무가 서 있는 곳은 하나의 작은 방 같았다. 앞에는 작은 문이 하나 있었고 밖에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 문 밖에는 넓이가 두장 정도 되어 보이는 원형 통로가 있었으며 윤기있는 양쪽의 석벽은 몹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당승무는 원형 통로를 따라 한참 동안 걸어갔지만 하나의 문도 찾지를 못했다. 바로 이때 -. 갑자기 그의 머리 위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형! 어서 나를 내려 주게." 당승무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니 통로의 위에는 사각으로 된 하나의 새장 같은 것이 있었다. 또한 새장 안에는 삼 척 가량 되어 보이는 작은 사람이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바로 축골공을 해서 땅굴 속으로 들어갔던 소불이였다. 그러나 천정과 땅과의 거리는 약 삼 장쯤 되어 당승무로서는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노대! 어떻게 해야 당신을 내려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소불이는 벽을 가리키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철장을 조절하는 장치는 아마 벽에 있을 것이네. 그러니 자네는 어서 벽 사이에 무슨 이상한 물건이 있는가를 찾아보게." 당승무는 소불이의 말을 따라 벽을 한참 동안 살펴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당승무는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노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한데 당승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벽이 갑자기 갈라지면서 한 늙은이가 손에 단도를 들고 나타나 당승무를 가리키며 음산하게 웃었다. "이놈! 너도 들어왔구나. 어서 손을 내밀고 포승을 받아라." 이 사람은 조금 전 초가에서 토담을 쓰러뜨리고 도망을 친 늙은이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장늙은이는 원래 빙장에서 문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랑신 정수복은 사마장홍을 찾기 위해 소석윤(小石潤)에 도착한 후부터 흑의판관 전포의가 빙장 안에 잠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흑영도의 모든 사람들이 실종된 후부터 전포의는 흑영도의 흑의 총관으로써 삼 년 만에 처음으로 강호상에 모습을 나타낸 사람이었다 정수복은 물론 이런 기회를 놓칠 사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수복은 장늙인이의 집을 찾아가 백 냥의 은자를 주어 자기의 손녀들을 데리고 소석윤을 떠나게 했으며 자기가 장늙은이의 행세를 했다. 조금 전 전포의가 집안에 들어갔을 때 그는 랍탑도사에게 생포되었으며 지금의 전포의는 바로 정수복이 변장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장늙은이가 단도를 든 채 자기를 향해다가오는 것을 보자 급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입니까? 어서 소노대를 내려 주십시오." 장노인은 여전히 앞으로 다가서며 칼 끝으로 당승무를 가리켰다. "이놈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아무튼 여기에 들어온 이상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승무는 안색이 변하며 급히 말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빙장주를 만나기 위해서 왔습니다." 장노인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저장주가 땅 속에 있지도 않은데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들어왔느냐?" 당승무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오히려 반문했다. "그렇다면 여기가 바로 소노반 사마장홍의 거처인가요?"그러자 장노인은 대뜸 이맛살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이놈아! 쓸데없는 잔소리는 하지 말아라. 만약 포박을 받지 않겠다면 나에게도 생각이 있다." 장노인이 대답을 않는 것으로 볼 때 여기가 사마장홍의 거처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당승무는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철장 안에 있는 소불이를 가리켰다. "소노대께서는 사마장홍의 친구이니 어서 내려 놓으십시오." 그러나 장노인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아! 헛수작은 부리지도 마라!" 당승무는 암암리에 생각을 굴렸다. '할 수 없이 이 사람을 제압해야만 철장을 내려 놓을 수 있겠구나.' 당승무는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침중하게 물었다. "노인장께서는 저와 싸우실 생각입니까?" 장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직 나이도 어린 놈이 감히 노부와 싸우려 하다니……." 당승무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빙긋이 웃었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 번 시험을 해보십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의 장검이 손에 쥐어지며, "정!" 하는 소리와 함께 당승무의 가슴을 겨누고 있던 장노인의 단검이 다른 방향으로 튕겼다. 장노인은 이런 광경을 보자 너무나 뜻밖이라는 듯 빙긋이 웃었다. "과연 실력이 있었구나?" 이때 -. 장노인이 당승무의 정면을 향해 연속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당승무는 공격을 하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기만 했다 순간 당승무의 귓전에 한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형! 검을 쓸줄 알면서도 왜 사용을 하지 않는가?" 이 말은 바로 소불이가 한 것이며, 당승무는 이제서야 알았다는듯이 장노인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정말로 당신을 무서워 하는 줄 알고 있소?" 말을 함과 동시에 그는 급히 몸을 날려 장노인을 향해 덮쳐갔다. 장노인은 열세에 처해 있던 당승무가 갑자기 반격해 오는 것을 보자 진기를 끌어올려 들고 있던 단검으로 급히 막았다. 당승무는 일 초가 성공을 거두자 즉시 절학(絶學)을 전개했다. 그러자 검 끝에서 세 개의 그릇 만한 꽃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이 일 초는 하마터면 장노인의 앞가슴에 있는 여덟 개의 대혈을 모두 덮칠 뻔했다. 장노인은 단도로써 급히 앞을 보호하며 급히 물러났다. 당승무가 이 기회를 틈타 번개처럼 장검을 휘두르자 또다시 두 개의 그릇 만한 검화가 장노인의 좌우를 향해 습격해 갔다. 장노인은 급히 몸을 비틀어 왼쪽의 검세를 피하며 수중의 단도로 당승무의 앞가슴을 향해 덮쳐갔다. 장노인의 피하는 동작은 비록 빠르기는 했으나 그는 결국 당승무의 검에 맞고 말았다. "씨---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장노인의 왼쪽 어깨는 당승무의 예리한 칼날에 의해 옷이 찢지고 살에는 시뻘건 핏빛이 서렸다. 비록 피부만 조금 상했을 뿐 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노인은 대단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것은 참으로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이었다. 사실 당승무의 왼손의 검세는 다만 일 초의 허초였다. 이어 장노인의 단도가 다시 내리쳐 오자 그는 몸을 약간 피하 냉소를 쳤다. 그리고는 장노인의 공격해 오는 칼몸을 향해 번개처럼 내리쳤다. 이 일 초의 반격은 정말로 괴이했다. 바로 이때 -.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장노인은 손가락 사이가 찢어지며 단도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장노인은 급히 뒤로 물러서며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 함께 죽자." 장노인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손을 흔들며 앞을 향해 비호처럼 덮쳐갔다. 당승무는 다가가지 않고 다만 오른손을 쳐들 뿐이었다. "장노인! 만약 당신의 목숨을 뺏으려고 했다면 진작 빼앗았을 것이오." 순간 당승무의 오른손에 자흑색이 떠올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장노인은 이러한 상황을 보자 급히 손을 거두며 말을 잇지 못했 뿐 아니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흑살장……." 이때 철장 안에 있는 소불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제!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게." 당승무는 고개를 쳐들어 위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이 사람은 절대로 도망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장노인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승무 역시 급히 몸을 날리며 장노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얼마 후-. "씽!" 하는 소리가 들리며 당승무의 장검이 장노인을 향해 뻗쳐갔다. 장노인이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전에 당승무의 검이 번개처럼 뻗쳐가자 그는 재빨리 몸을 한 바퀴 돌렸다. 하지만 어느 누가 장노인이 벽에 부딪칠 줄 알았으랴? 이때 -. "씽!" 하는 소리와 함께 장노인은 벽에 기댄 채 더 이상 움직이지를 못했다. 당승무는 몸을 이리저리 번득이는가 싶더니 동시에 그의 앞으로 다가서며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그의 가슴을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 이런 상황은 조금 전과는 정반대였다. "장노인! 나는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소. 하지만 당신이 소노대를 내려 놓고 우리가 소노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장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좋아…… 내가 그를 내려주겠다." 당승무는 곧 벽을 어루만져 보기 시작했다. 당승무는 비록 강호의 경험은 없었지만 도화곡 안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여기의 매복 장치에 대해서 약간의 경계를 하는 것 같았다. 장노인이 당승무가 벽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급히 저지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 있던 철장이 떨어졌다. 당승무는 깜짝 놀라 급히 한쪽으로 피했다. 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참으로 큰일났군. 소노대가 아무리 경공이 높다고 할지라도 철 안에서는 발휘할 수가 없으니 삼 장 높이에서 떨어지면 죽지 않아서 부상은 입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한 그는 즉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버리고 철장을 받으려 했다. 이것은 참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당승무가 받으려 할 때에는 이미 철장이 떨어진 후였다. 하지만 다행한 것은 이 철장에 기관 장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떨어지다가 갑자기 멈출 수가 있어 서서히 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관 장치가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당승무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당승무는 급히 뒤를 돌아 장노인을 보자 그는 어느 사이에 안으로 도망을 쳤으며 벽에 있던 하나의 문도 닫혀져 버렸다. 당승무는 하는 수 없이 철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문이 없는 철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노대! 이 철장은 어떻게 해야 열립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열 수가 없을 것이네." 그러자 당승무는 검을 쳐들며 단호히 말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이 이 검으로 내려쳐야 하겠군요." 소불이는 또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검으로 끊을 수가 있었다면 나는 진작 나왔을 것이네." "아니, 이 철사는 절대로 끊을 수가 없단 말입니까?" 이어 진기를 끌어 올리더니 검으로 철장을 향해 내려쳤다. 하지만 그 철장에는 조금도 이상이 없었다. 소불이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내 말이 틀리기라도 했나?" 당승무는 철장을 만지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으로 만든 철사입니까?"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철로써 만든 것 같네. 보기에는 비록 가늘지만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보통 힘으로는 힘들지." 당승무는 약간 초조해지는 듯 발을 가볍게 굴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나올 수가 있단 말입니까?"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나직이 말을 받았다. "방법은 있어도 이 늙은이는 할 수가 없네." "무슨 방법인지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소불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바로 연철로 만든 톱으로 이 철사를 끊는 방법이지. 당승무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그쳐 물었다. "하지만 연철로 된 톱을 어디가서 구한단 말입니까?" 소불이는 다시 길게 탄식을 하며 대답을 했다. "소노반에게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당승무는 마음 속으로 곰곰히 생각했다. '왜 그처럼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을까? 만약 소노반이 톱을 빌려줄 생각이라면 무엇 때문에 당신을 철장 속에 가두어 두겠소.' 당승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 주주도 여기에 있었으면 좋을 텐데……." 소불이는 빙긋이 웃었다. "자네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군." 당승무는 그를 주시하더니 얼굴을 붉혔다. "소제의 생각으로는 그녀의 청상인만 있다면 이것을 자를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소불이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걱정할 필요가 없네. 이 늙은이는 굶어 죽지는 않을 테니까……." 만성극복 바로 이때 -. 벽 사이로 문이 빙긋이 열리며 장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장노인은 조금 전과는 달리 당승무를 향해 공수를 했다. 얼떨떨한 당승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 소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소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돈을 벌어 콧대가 높아진 모양이군. 장노인은 철장 옆으로 다가섰다. "제가 당신을 밀고 들어 가겠소!" 말을 끝내자마자 장노인은 소불이의 동의를 얻지도 않고 철장을 밀고 문 안을 향해 걸어갔다. 당승무는 상대방의 속임수에 넘어갈까봐 한 손으로 검을 치켜 들고 장노인의 뒤를 바싹 따랐다. 몹시 어두운 문 안에는 좁은 통로가 하나 있었다. 통로는 길지 않았으나 양쪽에는 몇 개의 작은 문이 있었으며 그 문들은 모두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장노인은 어느 사이에 하나의 나무문 앞에 멈추었다. 나무 문에는 하나의 휘장이 내려져 있었으며 그림자가 비치는 것이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당승무는 참지를 못하고 급히 물었다. "이제 다 왔습니까?" 장노인은 당승무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 안을 향해 말했다. "아란! 있느냐?" 말이 끝나자마자 약 십칠팔 세 가량의 소녀 하나가 급히 나오며 철장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저 사람이 바로 신투(神偸) 백일당귀(白日撞鬼) 인가요?" 장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잘 모르겠으니 소주인이 몸소 보는 것이 더 나올 것이다." 아란이 대답도 하기 전에 소불이가 나서며 말을 받았다. "신투는 천하에 하나 밖에 없는데 어찌 가짜가 있을 수 있겠소!" 소불이가 말을 하는 순간, 당승무는 뒤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바로 이때 -. 그의 양팔이 조여들며 그는 면으로 된 하나의 포승에 의해 묶여졌다 뿐만 아니라 고개를 돌리자 그의 목까지도 묶어 버렸다. 순간, 냉랭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이것 좀 보세요. 제가 그를 깨끗이 잡았어요." 당승무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라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 등뒤에 있는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얌전히 있기만 하면 심하게 굴지는 않겠어요. 또한 주인을 만난 후에 당신을 놓아 드리겠어요." 말하면서 문 앞에 서 있던 아란이란 소녀가 방 안을 향해 물었다. "소주인님께서 좀 보세요. 저 사람이 바로 소가성을 가진 신투인 가요?" 실내의 시설은 간단했으며 침상 위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누워 있었고주름진 얼굴과 움푹패인 두눈을 볼때 큰병을 앓고 있는 사람 같았다. 소불이는 이 사람을 보자 깜짝 놀라 급히 물었다. "소노! 왜 그러시오? 무슨 병에라도 걸렸단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침상 위의 노인이 급히 말했다. "맞다! 맞아! 장노인! 빨리 그를 놓아 주게." 장노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와 함께 온 젊은 놈은 흑살장을 할 줄 압니다. 그러니 절대 속임수에 넘어가지는 마십시오." 그러자 소노반은 안색이 약간 변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혹살장……? 그…… 그렇다면 당신은 탈혼장 방통이 파견해서 온 것이오?" 소불이는 몹시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소노!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당노제는 사천당문의 자 제인데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단 말이오? 그러니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어서 철장문을 여시오." 이때 소노반은 장노인을 바라보며 분부를 했다. "우리는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아는 사이이니 그를 믿고 어서 문을 열어 주시오." 장노인은 하는 수 없이 톱을 가지고 철사를 하나하나 끊었다. 소불이가 철장에서 나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자 아란이란 소녀가 손뼉을 쳤다. "원래 당신도 저의 할아버지처럼 크시군요. 저는 원래부터 그렇게 작은 줄 알았는데……." 소불이는 방긋이 웃더니 포에 묶여 있는 당승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낭자! 당노제를 놓아 주시오." 장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아란! 어서 놓아 주어라!" 아란이 당승무를 풀어주자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있는 소녀는 비록 시골 낭자 차림이었지만 얼굴은 몹시 예뻤다. 당승무는 비록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발악은 할 수가 없었다. "낭자! 참으로 멋있는 수법이었소." 아란은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소불이는 당승무를 바라보며 몸을 돌렸다. "노제! 우리도 들어가세." 방 안의 시설은 밖에서 보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간단했으며 하 나의 침상과 책상, 의자 밖에 없었다. 소불이는 침상 위에 앉아 토는 소노반을 향해 손짓을 했다. "노제! 이분이 바로 자네가 찾고자 했던 사마장홍이네." 당승무는 급히 공수를 하며 허리를 굽혔다. "소인 당승무, 사마노인장에게 문안을 드리옵니다. "소노반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불이는 침상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노제! 우리는 하루종일 걸어 다녔으니 자네도 의자에 편히 앉게!" 소불이는 한동안 소노반을 주시하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소노! 대체 무슨 병을 앓았기에 그처럼 형편이 없소?" 소노반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기독에 맞았소." 소불이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다그쳐 물었다. "무슨 기독에 맞았단 말이오?" 소노반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설명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방통이 저의 몸에다 수작을 부린 것 같소. 이것 때문에 매월 십육 일마다 한 번씩 발작을 하며 지금은 벌 써 삼 년이나 되었소." 소불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당신은 방통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그가 무엇 때문에 당신의 몸에 독을 썼단 말이오?" 이윽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던 소노반이 눈을 반쯤 뜨며 말을 꺼냈다. "바로 삼 년 전의 일이었소. 방통은 전포의를 시켜 저를 데려 오라고 했소." "그것은 자기들의 교주가 거처할 집을 짓는데 저에게 설계를 해 달라고 한 것이며 보수는 오천 냥의 황금이었고 반드시 자기들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소." 소불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방통은 당시 흑영도의 흑의당 당주였소. 또한 그 당시 강호상에서 흑영도가 무림의 구대 문파를 섬멸한다는 소리를 듣고 저는 승낙을 하지 않았소. 하지만 전면으로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일부러 대답을 해놓고 전포의의 눈을 피해 바로 여기에 숨었소." 그래도 소불이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방통이 당신의 몸에 독을 썼단 말이오?" 소노반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전포의가 올 때에 방통이 친필로 쓴 편지 하나를 가져 왔지요. 저는 그 당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반 개월이 지난 후에 갑자기 몸에 발작이 일어났소. 저는 그제서야 편지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날이 바로 십육 일이었소." 소불이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더니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 일 때문에 전포의가 당신의 장안에 기거하고 있었군," 소노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맞았소. 그는 저를 찾기 위해 일 년 전부터 이곳에 와 있었소."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나직이 물었다. "당신은 그와 한 번도 만나지 않았소?" 소노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나지 못했소. 설사 독이 올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림에 화를 끼치려고 하는 놈들에게 설계를 해줄 수는 없소."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폈다. "당신은 의원을 찾아 보지는 않았소?" 소반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장노인을 주시했다. "소용이 없소. 노인장이 저를 위해서 독을 푸는 몇 명의 전문의원을 찾았지만 소석윤에 오기도 전에 중독이 되어 모두 죽었소."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물었다. "혹시 다 낫지는 않았소?" 소노반은 두 손을 쑥 내밀더니 처량하게 웃었다. "이 손톱이 벌써 검게 변한 것을 보시오. 만약 소형께서 다음날에 오셨더라면 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오." 순간 소불이는 깜짝 놀라 언성을 높여 물었다.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소노반은 다시 장노인을 쳐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전포의가 장노인에게 말하기를 제가 당한 독은 만성극독(慢性劇毒)으로써 삼 년이 지나면 완전히 발작을 하고 만약 열 개의 손톱이 모두 검게 변하게 되면 한 달이 못되서 죽는다고 했다는군요."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노반이 당한 독이 방통이 시전한 것이라면 물론 삼 년 후에 죽을 것이라는 걸 알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방통이 당승무를 시켜 소노반을 찾아오라며 또한 제자를 위해 당문의 암기를 만들라고 했으니 당승무는 반드시 독을 제거할 수가 있을 것이다.' 소불이는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는 즉시 고개를 돌려 당승무를 향 해 입을 열었다. "노제! 사부가 준 편지를 꺼내게." 당승무는 잠시 머뭇거리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사마장홍은 사부를 몹시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내가 어떻게 편지를 꺼낼 수가 있겠는가!' 당승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소노반이 궁금한 듯 물었다." "노제! 존사가 누구시오?" 하지만 당승무는 소불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앉았다. 소불이가 머뭇거리고 있는 당승무를 바라보며 방긋이 웃었다. "편지를 꺼내도 괜찮네. "당승무는 할 수 없이 품 속에서 천천히 편지를 꺼내더니 소불이에게 건네주었다. 소불이는 편지를 받자마지 즉시 겉봉을 뜯고 쪽지를 꺼내 읽어 내려가더니 갑자기 껄껄 웃었다. "허허허…… 허허허…… 과연 이 늙은이의 추측대로 소노를 구할수가 있구나." 봉투를 뒤집자 과연 하나의 작은 봉지가 나타났다. 소불이는 급히 종이 봉지를 소노반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해약이니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어서 먹으시오!" 소노반은 이상하다는 듯 받기를 망설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소불이는 약봉지를 침상 위에 놓으며 히죽 웃었다. "조금도 꺼려하지 말고 어서 먹으시오. 해약 방법은 먹은 후에 내가 가르쳐 주겠소." 이때 문 밖에서 이 소리를 듣고 있던 장노인이 즉시 휘장을 제치 고 들어오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소어른! 만약 이 약이 주인님의 독을 제거할 수가 있다면 이 늙은이가 대신 큰 절을 해드리겠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장노인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소불이는 깜짝 놀라 급히 그를 일으켰다. "장노형! 이게 무슨 짓이오? 나와 소노는 어렸을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는데 어떻게 이럴수가 있단 말이오?" "예! 예!" 장노인은 급히 대답을 하며 차를 한 잔 따르더니 소노반의 곁으로 다가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 "주인님, 해약이 있으시다니 어서 드십시오." 소노반은 약을 차와 함께 마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약이 왜 이처럼 쓰지……." 소노반의 약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소불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좋은 약일수록 쓴 법이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있으면 속이 나을 것이오." 소노반은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이 약은 아마 당문의 해독약인 것 같소." 소불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태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당문은 비록 독약과 암기로써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아마 당신 의 독은 풀어 줄 수가 없을 것이오." 소노반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다면 이 약은 어디서 구한 것이오?" 소불이는 빙그레 웃으며 쪽지를 소노반에게 건네주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고 혼자만 보시오." 소노반은 급히 쪽지를 받아 들었다. 쪽지 위에는 다음과 같이 적 혀 있었다. "귀하께서 당한 독은 삼 년이 지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오. 그래서 특별히 제자를 보내 해독약을 보내 드리오니 더운 물과 함께 복용하 시면 됩니다. 그리고 제자에게 부탁한 일이 있으니 귀하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응답을 해 주시기 바라겠소." 이 편지에는 아무런 서명도 없었다. 소노반은 궁금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당승무를 향해 물었다. "당노제, 영사가 도대체 누구인지 말을 해주게." 당승무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은 채 소불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때, 소불이가 나서며 큰 소리로 말을 받았다. "탈혼장 방통……." 이 말을 듣자 소노반은 즉시 안색이 변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전 제가 먹은 해독약은 방통이 보낸 것이오?" 소불이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그가 보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뭐가 있겠소. 방통 외에 또 누가 당신의 몸에 퍼진 독을 풀 수가 있겠소?" 장노인은 깜짝 놀라며 몹시 화가 나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소어른, 당신과 주인은 수십 년 간 다정한 친구로 지내 오셨다면서 어찌 주인을 죽이려고 하십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돌려 장노인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장노형! 절대로 그런 오해는 하지 마시오. 소노가 조금 전에 먹은 것은 독약이 아니라 바로 해독약이오." 하지만 장노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언성을 높였다. "흥! 만약 주인님께 무슨 잘못이 일어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오!" 소불이가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소노반이 나서며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약을 먹기 전에 바로 방통이 보낸 것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독이 발작을 해 죽는 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먹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니 당신과 당노제께서는 어서 가시지요. 또한 저를 대신해서 방통에게 이 사마장홍은 은혜를 받지 않는다고 전해 주시오." 소불이는 좀 멋적은 듯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노!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오?" 소노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오히려 반문했다. "지금 제가 한 말에 틀린 데라도 있단 말이오!" 소불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흑영도를 위해서 온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소리를 하시오? 하지만 해독약은 방통이 보낸 것이 맞소. 또한 방통은 이미 흑영도에서 이탈을 하고 없으며 벌써 고인이 되었소." 이 말을 듣자 소노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 방통이 죽었단 말이오?" 소불이는 당승무를 힐끗 바라보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그는 죽었을 뿐 아니라 당노제의 말을 들어보니 흑영도의 사람 한테 죽은 것 같소." 소노반 역시 당승무를 쳐다보며 다그쳐 물었다. "당노제께서는 정말로 사천당문의 문하이오?"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당노제는 바로 당문의 장문인 당노보주의 자제이오." 소노반은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사천당문은 강호의 시비곡절에'끼어들지 않았는데 당노제께서는 무엇 때문에 방통의 문하로 들어갔으며 또한 저를 찾아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오?" 소불이는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나직이 물었다. "당신은 최근 강호상에서 발생한 두 가지의 큰 일을 모르고 있소?" 소노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땅 속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알 수가 있겠소."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두 가지의 일 중에 하나는 남해문(南海門) 양영공(梁令公) 부부가 살해당한 것이며 또 하나는 사천당문 당노보주의 열세 식구가 원수에 의해 피살당하고 당노제만 빠져 나온 것이오!" 말이 끝나자마자 당승무는 눈물을 글썽이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사마노인장! 소인의 피맺힌 원수를 꼭 갚게 해주십시오." 일초이식 소노반은 이 모습을 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였다. "노제! 어서 일어나게. 이 노부의 무공은 높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앓아오던 몸이니 어떻게 노제를 도와 줄 수가 있겠는가?" 소불이 역시 한숨을 내쉬며 언성을 높였다. "노제!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네. 우리는 소노반을 찾았으니 이제부터는 나한테 맡기게." 그러자 소노반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냉랭하게 물었다. "소형!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소불이는 당승무를 한 번 쳐다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그 얘기를 하자면 길어지지…… 하지만 우리는 흑영도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니 안심을 하시오." 하고 말한 소불이는 당승무에 대한 일과 자기가 어떻게 해서 그를 만나 여기까지 왔는가를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소노반은 얼마 후에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앓은 몸이니 아마 당노제를 위해 힘을 쓸 수가 없을 것 같소." 소노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란이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 들어왔다. "할아버지! 큰일났어요. 앞의 통로에 또 사람이 나타나서 문을 찾고 있어요." 장노인은 안색이 약간 변하며 침통하게 물었다. "몇 명이나 되느냐?" 아란은 생각을 하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잘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네 명쯤 되는 것 같았어요." 장노인은 한동안 묵묵히 있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아란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놈들이 어떻게 해서 들어왔단 말이냐?" "모르겠어요." 장노인은 또다시 당승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노제는 처음에 어떻게 해서 들어왔소?" 당승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불이가 웃으며 나섰다. "당노제는 바로 이 늙은이가 들어오게 한 것이오." 아란은 장노인의 곁으로 다가서며 급히 서둘렀다. "할아버지! 어서 그들이 문을 찾지 못하도록 나가 보세요."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낭자는 조금도 서둘 필요가 없소. 이 벽 안의 문은 이 늙은이도 찾지를 못했는데 어찌 그들이……." 소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아국의 음성이 들려왔다. "할아버지?" 잇따라 또 하나의 쉰 듯한 음성이 들렸다. "이 계집년아! 빨리 비켜라?" 소노반은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큰일났소. 문이 열렸으니 아국은……." 아란도 당황하여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가려고 했다. 이때 소불이가 앞을 가로막으며 급히 말렸다. "낭자는 뒤에 남아서 주인의 시중이나 들고 있으시오. 우리가 나 가 볼테니……." 이때 당승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을 받았다. "저는 밖에 나가서 장노인을 도와 주겠어요. "그리고는 급히 방을 빠져 나갔다. 이때 앞의 통로에서 소녀의 울음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놓아요?" 장노인이 이를 갈아붙히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내 손녀의 손을 놓지 않겠소?" 장노인의 손녀는 이미 그 사람들에게 잡힌 것 같았다. 하지만 통로가 좁은 데다가 장노인이 가로막고 있으니 문 앞의 상황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당승무는 참지를 못하고 장노인의 뒤로 바싹 다가서며 나직이 물었다. "장노인! 한 번 뒤로 물러서 보십시오." 장노인은 당승무의 무공이 자기보다 높다는 것을 알고 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아니, 아국이…." 당승무는 급히 그의 몸 옆을 스치고 아국의 뒤로다가 섰다. 과연 나무문은 열려 있었으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하나의 황삼(黃衫)을 입은 노인과 같았다. 황삼노인은 한 손으로 아국의 팔을 잡고 밖을 향해 끌었다. "다만 네가 얌전하게 나가기만 하면 노부는 절대로 너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겠다." 아국은 왼손으로 문의 안쪽을 잡고 발버둥을 쳤다. "빨리 놓으세요. 저는 나가지 않겠어요." 이 나무문은 한 사람이 드나들 정도로 비좁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국이 비켜서지 않는 한 당승무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당승무는 하는 수 없이 아국의 겨드랑이 밑을 이용하여 발초심사(撥草尋蛇)의 초식으로 황삼노인의 팔목을 향해 찔러갔다. 이 일 초는 비록 보통 초식이었지만 아국의 겨드랑이 밑에서 갑자기 날아가니 위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황삼노인이 아국의 팔목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차가운 빛이 괄목을 향해 찔러오는 것을 느껴 급히 손을 놓은 채 뒤로 물러섰다. 당승무의 이 일 초는 다만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앞에 있는 아국이 여자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당승무는 이제서야 자기의 팔이 아국 낭자의 겨드랑이 사이에 있고 얼굴은 상대방의 머리카락에 닿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황삼문사가 갑자기 손을 놓자 아국의 몸도 갑자기 뒤로 물러나며 당승무의 가슴과 부딪쳤다. 아국은 몹시 부드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급히 비켜섰다. 당승무 역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그녀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당승무는 아국이 비켜서는 틈을 타서 즉시 문 앞으로 다가서더니 앞을 똑바로 주시했다. 문 앞의 넓은 통로에는 모두 네 사람이 서 있었다. 조금 전 아국의 팔목을 잡고 있던 황삼노인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 중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은 키가 작은 흑의노인이었다. 흑의노인의 얼굴은 몹시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온몸의 근육은 굳은 듯했으며 두툼한 입술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흑의노인의 오른쪽 팔은 없는 것 같았다. 또한 흑의노인의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흑삼을 입고 있었으며 중년대한으로써 얼굴이 몹시 하얗고 하나의 철골랍선(鐵骨臘扇)을 들고 있었다. 또한 오른쪽의 한 사람은 바로 당승무가 잘 알고 있는 흑의판관 전포의였다. 사실 그는 가짜 흑의판관 전포의인 것이다. 조금 전 황삼노인은 당승무의 일 검에 의해 경악을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직 젖비린내도 채 가시지 않은 청년에 불과한 당승무를 보자 두 눈을 부릅뜨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앞을 가로막느냐? 어서 길을 비키지 못하겠느냐?" 말을 끝냄과 동시에 황삼노인은 몸을 번개처럼 날리더니 오른손으로 응조공(鷹爪功)의 금라수(擒拿手)로써 당승무의 검을 쥐고 있는 오른손을 향해 잡아왔다. 황삼노인은 조금 전에도 이 초식으로 아국의 팔목을 잡았던 것이다. 당승무는 원래부터 사천당문의 출신으로써 무공이 낮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 탈혼장 방통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그의 무학은 옛날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무리 강호의 일류 고수라고 할지라도 그를 제압하기에는 좀 힘이 들것이다. 이때 당승무는 황삼노인의 무공이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냉소를 치며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단검으로써 상대방의 안면을 향해 비호처럼 찔러갔다. 이 일 검은 비록 빠르지도 않았으며 보통과 같이 내민 것이다. 하지만 황삼노인은 정신없이 피하며 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것으로 봐도 황삼노인의 무공은 당승무에 비할 바가 못되는 것 같았다. 이때 -. 가운데에 서 있던 흑의노인이 돌연 나서며 황삼노인을 불렀다. "오(吳)형! 내가 상대할 테니 잠깐 물러나시오." 황삼노인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뒤로 급히 물러섰다. "예, 알았소." 흑의노인은 당승무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너는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는 것이며 이름은 무엇이냐?" 당승무 역시 그를 쏘아보며 냉랭하게 반문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뿐만 아니라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소?" 외팔이의 흑의노인은 좀 누그러진 듯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노부는 바로 여세진(呂世眞) 이라고 하오. 또한 일부러 사마노형을 만나기 위해서 왔소." 당승무는 강호에 많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여세진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바로 그때 -. 여러 생각을 하고 있는 당승무의 귓가에 소불이의 쉰 듯한 음성이 스쳐갔다. "노제! 이 사람은 원래 마교(魔敎)를 배반했던 사람이네. 그리고 이 사람의 외호는 음양수(陰陽手)라고 하네. 그의 왼손으로 연마한 것은 음풍장(陰風掌)이며 오른손으로 연마를 한 것은 잠양장(簪陽掌)이라는 것이네. 뿐만 아니라 이 두 가지의 무공은 모두 사문! 무공으로써 악독하기 이를 데 없지. 하지만 그의 오른팔이 누구에 의해서 잘려 버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아 있는 왼손을 조심하고 대로 되받아서 공격을 하지 말게." 음양수 여세진은 자기의 이름을 상대에게 알려 주었지만 상대방이 안색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자 빙긋이 웃었다. "노제께서는 혹시 이 늙은이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 그러나 노제께선 사마노형에게 말씀을 드리기만 하면 자연히 알 수가 있을 것이오."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탈하게 웃었다. "당신의 별호가 음양수라는 것을 내 어찌 모를 리가 있겠소." 그러자 여세진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원래부터 노제께서는 여세진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셨구려. 그렇다면 더욱 잘 됐소. 노제는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빨리 가서 사마노형에게 음양수 여세진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오!" 당승무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여세진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되오. 지금 사마노형께서는 기독에 맞았기 때문에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소.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소." 하지만 여세진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 사마노형께서 당한 독은 이 늙은이만이 풀 수가 있는 것이니 어서 가서 말씀을 드리시오." 당승무는 여전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사마노형께서 분부하시기를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소. 그런데 어찌 당신은……." 여세진은 약간 언성을 낮추며 말을 가로챘다. "노부는 다른 뜻이 아니라 사마노형을 위해 해약을 가져 왔으니 경우가 다르지 않소?" 당승무는 미간을 찌푸리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사마노형께서 말씀하시기를 독이 발작을 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흑영도의 해약은 받지 않겠다고 했소. " 그 말에 여세진은 안색이 약간 변하더니 불쾌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노제께서 가지 못하겠다면 어서 비켜 서시오. 이 노부가 직접 가서 만나볼 테니……." 당승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사마노인장께서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니 길은 절대로 비켜줄 수가 없소." 여세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다면 노제에서는 일부러 노부의 길을 막는 것이군." 당승무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문을 바싹 가로막으며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는 사마노인장의 거처로써 만나기가 싫다는데 무엇 때문에 그처럼 억지를 쓰시오?" 여세진은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이 노부는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사마노형을 꼭 만나보아야겠소. 그러니 노제는 길을 비키는 것이 좋을 것이오." 당승무는 여세진을 무섭게 노려보며 단호하게 물었다. "만약 내가 절대로 비켜줄 수 없다면……?" 여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노부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비켜주지 않겠다면 후에 이 노부를 무정하다고 하지는 마시오." 당승무는 냉소를 터뜨리며 언성을 높여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뚫고 나가겠단 말이오?" 여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웃었다. "노부가 모든 것을 다 말해도 비켜서지 않겠다면 할 수 없이 뚫고 나가야 하지 않겠소?" 하지만 당승무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태연스럽게 버티고 선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처럼 뚫고 싶다면 한 번 시험을 해보시오." 바로 이때 -. 여세진의 왼쪽에 서서 묵묵히 듣고 있던 흑의당의 좌총관 흑의수사(黑衣秀士) 육한생(陸寒生)이 갑자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더니, 당승무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주께서 하나의 젖비린내도 채 가시지 않은 놈과 상대를 하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소? 그러니 제가 저놈을 생포할테니 당주께서는 뒤로 물러서시오." 원래 방통이 흑영도에서 이탈한 후 음양수 여세진이 흑의당 당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여세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소. 육형이 어서 저 놈을 생포하도록 하시오." 말을 하면서 여세진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육한생은 허리를 굽히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섰다. "제가 꼭 저놈을 생포할테니 당주께서는 안심을 하십시오. " 하지만 당승무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들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육한생은 철골로 된 부채를 흔들며 앞을 향해 걸어왔다. 당승무는 초조한 빛을 금치 못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육한생!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라! 내 손에 있는 이 병기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고 해서 탓하지는 말아라?" 육한생은 지금 당승무를 뒤에서 소불이가 지시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을 보자 몹시 불쾌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기왕에 나를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고 어서 길을 비켜라!"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철골랍선으로 당승무의 어깨를 향해 번개처럼 쳐왔다. 당승무는 냉소를 치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흥, 이 앞뒤를 모르는 어리석은 친구야?" 육한생이 공격을 해오는 틈을 타서 그는 단검으로 철골로 된 부채의 끝을 향해 예리하게 찔러갔다. 순간, 육한생은 자기의 팔목이 시큰거림을 느끼며 잠시 물러섰다. 바로 이때, 하나의 차가운 빛이 육한생의 천돌혈(天突穴)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왔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싸움에 능숙한 흑의수사 육한생이라 할지라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일 검은 육한생이 부채를 찍음과 동시에 천돌혈을 향해 찔러간 것이다. 아무리 일 초 일 식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당승무의 검 끝이 육한생의 철골랍선과 부딪쳤을 때 육한생의 철골랍선은 진동을 일으켰으나 당승무의 검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혹시 당승무에게 두 자루의 검이 있었다면 하나로는 막고 하나로는 공격할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 당승무에게는 단 한 자루의 검밖에 없었다. 육한생은 당승무의 이것은 공격에 급히 뒤로 물러서며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고 서 있던 여세진 등 사람들도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육한생은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으며 여전히 냉소를 쳤다. "흥, 아직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꽤 실력이 있는 놈 같구나."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비호처럼 몸을 날리더니 연속해서 삼 초의 공격을 가하였다. 이 삼 초는 번개처럼 빨랐으며 또한 당승무의 중요한 대혈만을 골라 공격해 들어갔다. 육한생은 삼 초의 공격을 퍼부으며 상대방이 반드시 당황을 하고 뒤로 물러설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삼 초는 상대방을 격퇴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도리어 반격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하나의 차가운 빛이 육한생의 인후혈을 향해 예리하게 찔러갔다. 육한생은 하는 수 없이 또다시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타협 육한생은 연속 두 번씩이나 위험한 공격을 받아 뒤로 물러나게 되자 놀라운 한편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음 순간, 야수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내지른 그는 랍선을 휘둘러 당승무의 단검을 향해 내리쳤다. 이번에 그는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고 당승무의 손에 들려 있는 단검을 떨어뜨리기 위해 옆쪽으로 검을 내리친 것이다. 그러자 당승무는 재빨리 단검을 비스듬이 뒤집더니 기이한 초식을 전개하여 눈부신 검광을 일으키면서 재빨리 육한생의 좌우 두 장대혈(將臺穴)을 향해 찔러나갔다. 이 일 검은 매우 신비롭고 검도의 정석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육한생은 헛손질을 하게 되자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즉각 랍선을 거두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당승무는 추격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육한생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육한생은 외호가 흑의수사(黑衣秀士)로서 랍선을 가지고 강호에서 적지 않은 유명인물을 제거한 데다가 이십여 년 간을 마음대로 누비고 다녔다. 또한 그가 흑영도의 흑의당 좌충관을 없앨 정도의 실력을 보더라도 그의 무공은 알아줄만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젖비린내도 채 가시지 않은 어린 소년에게 세 차례나 걸쳐 망신을 당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강호에 나온 이후 처음 당하는 일이었으므로 육한생 자신이 크게 놀랐음은 두 말할 여지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견식이 넓은 음양수 여세진조차 놀라 안색이 홱 달라지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화가 극도로 치민 육한생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며 두 눈에서는 무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으나 감히 여세진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손을 멈추었다. 그러자 여세진은 앞으로 두 발자국쯤 다가서더니 한 손으로 수불을 쓰다듬으면서 음산하게 웃었다. "소형제의 검법이 이토록 조예가 깊을 줄은 몰랐군요." 당승무는 제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반문했다. "당신도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소?" 여세진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며 중얼거렸다. "만약 자네가 노교의 일 장을 받아낼 수만 있다면 노교는 서슴치 않고 즉시 이들을 데리고 물러가겠다. 소형제 어떤가?"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자기의 사부가 자기에게 자살장을 전수해 줄 때 자살장은 독이 비할 수 없이 강하기 때문에 천하에 막아낼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순간적이었으나 싸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 속으로부터 충동이 일어 말대답을 하려고 할 때였다. 그 순간, 그의 등 뒤로부터 소불이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게, 절대로 그와는 그렇게 할 수 없네." 그 말을 들은 당승무는 평소 그를 매우 믿었기 때문에 선뜻 자기의 주장을 고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미 문 앞까지 찾아왔으니 그들을 순순히 들여 보내지 않는 방법 이외에는 싸우지 않으려 해도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당승무가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소불이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얘야, 너는 지금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냐?" 그 말에 이어 이번에는 간신히 그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직하게 말했다. "빨리 나를 사부라고 불러라?"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나 당승무는 즉각 얼굴에 희색을 띠며 얼른 몸을 돌려 큰 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제자와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음양수 여세진입니다." 그러자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발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너는 그의 상대가 아니니 빨리 물러나라. 이 사부가 나가겠다." 그 말을 들은 당승무는 즉시 대답을 하고는 재빨리 여세진을 향해 말했다. "나의 사부께서 오셨으니 잠시 기다리도록 하시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즉각 뒤로 물러났다. 한편, 여세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속으로 생각을 굴리기에 바랐다. '제자의 검법이 저렇게 고강하니 그의 사부는 대체 누굴까?' 궁금해 하고 있는 여세진의 앞에 소불이가 즉각 나서더니 포권을 하며 웃었다. "여노대, 다년간 보지 못했더니 당주가 되었구려. 정말 축하하오." 여세진은 그를 보자 흠칫 놀라는 것 같더니 이내 음산하게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소노형이셨구려." "후후후… 우리 사도 두 사람은 바로 친구를 만나러 왔소." 소불이의 말에 여세진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연신 눈알을 이리 저리 굴렸다. "저 어린 것이 바로 노형의 문하란 말이오?" 그러자 소불이는 더욱 의기양양하여 대꾸했다. "그렇고 말고…… 저 얘가 나의 문하가 아니면 누구의 문하이겠소?" 여세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전포의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전형, 흑살장을 사용한 자가 바로 저 소년이오?" 전포의는 그 말에 당승무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급히 대답했다. "제가 보기엔 아마 저 소년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몸집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자 소불이가 한 마디 거들었다. "전노형의 말이 맞소. 저 제자는 지금 가면을 쓰고 있소." 여세진은 그 말을 듣자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반문했다. "너는 자칭 방통의 운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노형의 제자가 되었단 말이오?" 소불이는 그 말에 능청맞게 말을 받았다. "그럼 친구는 내가 스스로 옥황상제의 제자라고 한다면 믿겠소?" 여세진은 그의 말에 웃지도 않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천하를 통틀어 보아도 후살장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오직 탈혼장 방통 밖에 없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는 거요?" 그러자 소불이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큰 소리로 껄껄 웃어젖혔다. "하하하…… 천하의 무공은 대개 비슷한 것이오. 내 제자가 배운 것은 흑살장이 아니라 자살문의 자살장이오." 여세진은 반신반의하여 한동안 그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다가 돌연 차갑게 내뱉았다. "나는 그런 것에 관해서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소." 소불이는 히죽이 웃었다. "그럼 여노대께서 자살문의 검장쌍절(劍掌雙絶)을 한 번 보고 싶으시겠군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즉각 여의금사(如意金絲)를 꺼내더니 여세진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철사에서 가느다란 그림자가 무수하게 일어나더니 공기를 가르면서 곧장 여세진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적을 상대한 여세진도 방비에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의 철사는 마치 무수한 장검과도 같이 서늘한 검기를 뻗치면서 그에게로 날아오는 게 아닌가. 흠칫 놀란 그는 상대방에게 반격을 가할 여유도 없이 급히 왼쪽 소매를 얼굴로 막는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소불이는 외호가 설상무영(雪上無影)으로써 경신술로 강호를 누벼왔다. 그러하기에 그는 여의금사를 내두르면서 마치 한 줄기의 연기처럼 단숨에 여세진의 몸 옆으로 날아가 왼손으로 가볍게 그의 어깨를 쳤다. 이어 그는 괴이한 신법으로 다시 문 앞으로 오더니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하하하… 여노대, 아무 탈도 없소. 나는 그저 장난을 조금 했을 뿐인데……." 여세진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상대방은 실로 자기가 상상도 못할 괴이한 수법으로 자기의 어깨 늘 가볍게 친 것이다. 만약 상대가 정말로 손을 썼더라면 아마 그 일 장에 당장 목숨을 일었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간사하고 교활한 그였지만 무림 중에 자살 문이라는 무학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는 소불이를 멋적게 바라보았다. "소노형께서는 언제 이런 신수를 연마하셨습니까?" 그러자 소불이는 의기양양하며 어깨를 들석거렸다. "몇 년 전에 나는 태백산을 돌아다니다가 은연중에 삼백 년에 걸쳐 내려오는 자의문의 무공을 획득하게 되였소. 그래서 나는 서슴치 않고 즉각 그것은 연마한 거요." 여세진은 자부하는 그의 말과 태도에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느끼고 즉시 포권을 취했다. "이제보니 소노형께서는 이미 일문의 주인이 되셨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러자 소불이는 멋적게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별말씀을 아직 강호 구대 문파와는 비할 수도 없는 처지요." 여세진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전판관의 보고를 듣자하니 저 소년이 교주를 만나 검법을 하사 받았다 하던데 그게 정말인지요?" 그 말에 소불이는 껄껄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허허허…… 그것은 나와 전노형과의 농담이었소. 여노대께서는 그것을 진짜로 아셨군요." "저 역시 좀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삼 년 전에 흑영도가는 수난을 만나 교주와 주인, 그리고 섬의 모든 주민이 실종되어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이렇게 달려와 두 분에게 어디서 교주를 만났는가 물으려 했더니 그게 농담이었군요." '그렇다면 흑영도주는 아직도 행방불명인 모양이구나. 그럼 당승무와 내가 도화궁에서 놓아준 염지천이 바로 그 흑영도주가 아닐까?' 여세진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소노형께서도 사마노형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까?" 소불이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 여노협에게 솔직히 이야기하겠소 나와 소노(小魯)와는 의형 제 사이요. 우리는 이십 세 때부터 서로 알고 있었소. 그런데 나는 오늘날 작은 명성이나마 얻어 태백산에다 집을 지어 자살문의 근본을 이루려고 이렇게 일부러 달려와 소노로 하여금 빈문의 설계를 부탁하려는 것이오." 여세진으로써는 처음 듣는 소리라 호기심이 부쩍 일었다. "사마노형께서는 그것을 응하셨소?" 소불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소노는 지금 병세가 매우 풍하여 아마 살아나지 못할 것 같소." 그러자 여세진은 갑자가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제가 아까 올 때 이미 소노형의 영도(令徒)를 만들었소. 한데 나에게 사마노형이 당한 독을 제거하는 해약이 있다고 했는데 영도는 그것을 방지하더군요. " 그 말에 소불이는 대번에 희색을 띠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물론이요. 그럼 저를 안내해 주시겠소?" 소불이는 그 말에 갑자기 손을 내저었다. "잠깐, 여노대께서는 우선 그 약을 나에게 주시오." 순간, 여세진의 얼굴에 의혹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소노형께서는 저를 믿지 못하신다는 말이오?" 그러자 소불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여노대의 말을 누구보다도 믿고 있소. 하지만 나에게 따로 사정이 있소." 여세진은 잔뜩 미심쩍은 눈길로 그를 쳐다보면서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노형께서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그러자 소불이는 갑자기 그에게로 머리를 갖다 대면서 히죽이었다. "나는 여노대 당신도 역시 일이 있기 때문에 소노를 찾기 위해 은돈을 들였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 순간 여세진의 안색이 획 달라졌다. "노형은 그 말을 사마장홍에게 들은 것이오?" "혼수 상태에 빠져 있는 그가 어찌 얘기할 수가 있겠소? 나는 장(張)영감한테 이 말을 들은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여세진은 갑자기 태도가 달라져 냉랭하게 내쏘았다. "그럼 소노형께서도 사마장홍을 데려갈 생각이오?" "아니오. 나는 이미 솔직히 말했지 않소? 본문은 이제 갓 시작했기 때문에 당신네 흑영도처럼 오천 냥의 황금을 내놓을 수가 없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어깨를 한 번 움찔하더니 다시 뒷말을 이었다. "나는 단지 소노가 옛정을 생각해서 그 한 가지 설계도만 작성해 주기를 바라는 거요. 그러니 노형께서 들어가 그의 생명을 구하고 게다가 상까지 내리니 소노가 깨어난 뒤에는 어찌 당신네들을 순순히 따라가지 않겠소? 만약 그가 그대로 따라간다면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나는 당신네들과 상의를 하고 싶은 것이오.!" "그럼 소노형께서는 어떻게 하자는 것이신지……?" "어찌됐건 우선은 그를 깨어나게 해야 할 게 아니오? 그러니 내 뜻은 우선 나에게 약을 주어 소노가 깨어나면 먼저 나를 위해 도안을 그리게 해달라는 거요. 솔직히 말하자면 소노가 설계도 몇 장쯤 그리는 것은 누워 떡먹기라 길어야 하루 이틀이면 충분할 거요. 그런 뒤에 당신네가 다시 모셔가면 되지 않겠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세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소불이가 얼른 덧붙여 말했다. "내가 자의문을 계승하면 앞으로 여노대와 서로 합작을 할 수도 있는 일이니 이 일은 그저 우리가 합작을 시작한 것이라고 칩시다. 그러니 이제 해약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고 말을 마친 그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여세진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더니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이다. 여세진은 그가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도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신 경을 바짝 곤두세워 어깨를 몇 번 맞았다. 사실 소불이가 그의 어깨를 친 수법은 바로 염지천의 검장십삼식(劍掌十三式)이었기 때문에 그는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불이는 그것으로 상대방의 기를 꺾어 놓으려 했던 것이다. 과연 효과가 있어 여세진은 내심 크게 놀랐다. '소불이의 공력은 교주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아래에 있지는 않겠구나. 그러니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겠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즉시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사마노형께서는 완강히 거부를 하시는데 소노형께서는 그분이 우리를 따라오게끔 할 자신이 있소?" 그러자 소불이는 가슴을 문지르면서 씨익 웃었다. "나는 그저 그가 도안을 그려 준다면 나는 즉시 그에게 노형을 따라가라고 권하겠소. 아마 그는 나와 몇 십 년 사귀어 왔기 때문에 나의 말을 어느 정도 들을 것이오." 하고 말한 그는 갑자기 음성을 낮춰 나직하게 물었다. "만약 소노가 완강히 거부를 한다면 노형께서는 암암리에 그를 모셔갈 방법이 있소?" 여세진은 그 말에 두 눈을 휘번덕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소노형께서는 과연 일파의 장문으로 써 조금도 손색이 없군요. 전 정말 감탄했습니다……." 그러자 소불이는 의기가 양양해서 씨익 웃어가며 대답했다. "무슨 별말씀을…… 우리가 기왕 성심껏 합작할 바에는 철저히 해야 하지 않겠소?" 하고 말한 그는 두 손을 마주 비비대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날카롭게 신광을 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참!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군요. 제 생각엔 여노대께서는 먼저 올라가셔서 빙장에서 하루 이틀 쯤 쉬는 게 좋을 것 같소. 만약 그 약을 나에게 주는 것이 안심이 되지 않는다면 사람을 하나 나에게 딸려 보내면 될 게 아니오? 그래서 소노가 약을 복용한 뒤에 깨어나면 먼저 도안을 그리게 한 뒤에 다시 노형을 따라 흑영도로 가게 하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 같군요." 흑영도의 비밀 소불이가 말을 맺기가 무섭게 여세진은 황급히 소리쳤다. "흑영도로 가는 게 아니오? 그러자 소불이는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어쨌든 그를 어디로 모시고 가건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 교활한 여세진은 그가 사람을 시켜 같이 가자고 하자 속으로는 매우 기뻐하면서 겉으로는 허탈하게 껄껄 웃었다. "소노형께서는 일파의 장문이신데 어찌 안심이 되지 않겠소? 제 가 사람을 보내면 소식을 듣기도 좋을 테니 그 이상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소?" 말을 마친 그는 전포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전형이 소노형을 따라 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곧 사마노형으로부터 회답을 받도록 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하고 전포의가 공손하게 대답하자 여세진은 즉시 황삼노인과 육한 생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형, 육형, 그럼 우리는 올라 갑시다." 말을 마친 그는 곧장 길 중앙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소불이는 전포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전총관, 어서 들어 오시오." 전포의가 소불이의 안내에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자 소불이는 곧 큰 소리로 외쳤다. "장노형, 이 문은 어떻게 닫는 것이오?" "소나리께서는 그냥 안으로 들어 가십시오. 이 문은 제가 닫겠습니다." 그러자 소불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다시 당승무에게 말했다. "너는 문 앞을 지키고 있어라. 나는 곧 전노형을 모시고 들어갈 테니……." 하고 말한 그는 전포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통로를 지나자 몇 칸의 목실(木室)이 있는 문 앞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장노인은 소불이를 들여 보낸 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면서 나직하게 물었다. "소나으리, 전총관은 무엇하러 데리고 오셨습니까?" 그러자 소불이는 의미심장하게 히죽 웃더니 역시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내게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요." 하고 말한 그는 곧 전포의에게로 고개를 돌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다 왔소. 전총관은 나를 따라오시오." 이때, 아국이 손에 은칼을 든 채 목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소불이는 전포의를 앞세운 채 그녀에게 의미있게 눈을 깜박여 보이더니 광목으로 된 휘장을 올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전포의는 이 지하성에 처음 들어오는 것이었다. 밖에서 보던 크고 높은 태호석(太湖石)의 담벽에 비해 안은 너무도 간략했다. 또한 통로가 좁고 어두운 것을 보고 전포의는 내심 겁을 집어 먹었다. '사마장홍은 기관 설치에 정통한 데다가 소불이 또한 교활하기 그지없는 늙은이니. 나는 그들에게 속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하겠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소불이가 목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그는 곧 뒤따라 들어갔다. 방 안에는 조그만 등불이 켜져 있었고 소노반 사마장홍은 문을 등 진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약을 복용했는지 다소 몸이 나아진 것 같았다. 침상 옆에 서 있던 아란이 소불이를 바라보더니 반색을 하며 물었다 "소선배님, 그 도적들을 다 쫓으셨습니까?" 소불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소노반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노, 내 손님 한 사람을 모시고 왔네." 그 말에 소노반은 고개를 돌려 전포의를 바라보더니 안색이 획 달라졌다. "전총관, 무슨 일로 왔소." 소노반의 냉랭한 말소리에 아란도 전포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흠칫 놀랬다. "앗! 이 사람이 바로 전포의인가요?" 이때, 소불이는 재빨리 소노반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의자를 하나 꺼내 전포의에게 권했다. "전포의, 앉으시오." 하고 말한 그는 곧 고개를 돌려 아란에게 말했다. "낭자, 잠깐 나가 계시오. 우리끼리 할 말이 있으니까…" 그러자 아란은 소노반의 눈치를 힐끔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소불이는 만면에 엷은 웃음을 머금고 전포의를 향해 공수의 예를 취했다. "전총관께서는 소노를 찾기 위해 몇 달이나 갖은 노력을 기울였어도 끝내 소노를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 나의 덕분으로 이렇게 쉽게 소노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마음이 흡족하오?" 전포의는 그 말에 가볍게 당황해 하는 눈치를 보였다. "사실 제가 이 소석윤에 온지는 벌써 일 년이 넘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소불이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의미있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후……솔직히 말해서 내가 만약 노형의 뜻을 전혀 몰랐다 면 여세진을 타일러 노형을 이곳까지 모시고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뜻밖의 말에 전포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똑바로 주시하더니 곧 냉랭하게 웃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노형과 여당주가 서로 상의를 해서 이루어 진 조건인데 어째서 저를 끌어들이는 것이오?" 이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노반은 내심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소형은 매사에 빈틈이 없는 사람인데 전포의 하나를 데려온 것이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 이런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으나 꾹 눌러 창고 그는 여전히 침상에 기대 앉아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이때 갑자기 소불이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핫하하……, 제가 무슨 자살문의 문주이겠소? 내 말을 못믿겠다면 소노에게 물어 보시오. 내가 언제 그에게 나를 위해 설계를 해달 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는지……." 그 순간 전포의의 두 눈에 날카로운 한 줄기의 빛이 스치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당황한 어조로 황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소노형과 여당주가 말한 것은 모두 가짜였단 말인가요?" "핫하하하……그렇소. 그것은 가짜였소. 정 믿지 못하겠다면 소노를 한 번 보시오. 그의 기독은 이미 풀렸는데 또 무슨 해약이 필 요 하겠소?" 그 말을 들은 전포의의 안색은 극도의 경악에 잠겼다. "소노형,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그러자 소불이는 갑자기 정색을 했다. "내가 말한 것은 모두가 사실이오. 그런데 노형에서는 무엇 때문에 아직도 숨기고 있는 것이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노반은 매우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어 결국 참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소형 그러면 그는 전포의가 아니란 말이오?" 소불이는 천천히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본인이 말을 하지 않는데 내가 어찌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있겠소?" 그러자 전포의는 오히려 그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껌벅거리며 물었다. "소노형께서는 점점 이상한 말만 하시는군요. 제가 전포의가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소불이는 그 말에 답답하다는 듯 자기의 가슴을 쳤다. "아, 좋소. 당신은 전포의요. 내가 공연히 말을 많이 했군." 하고 말한 그는 두 번 다시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소노반에게 포권의 예를 취했다. "소노, 우리는 이미 몇 십 년 간이나사귀었으니 내 부탁하나를 들어주지 않겠나?" 그러자 소노반은 짐작가는 바가 있는지 이내 말을 받았다. "소형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혹시 당소형의 일이 아닙니까?" 소불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가 천 리 길을 달려와 자네에게 해약을 준 것은 어디까지나 자네의 일이니 나는 상관하지 않겠네." 그 말을 들은 소노반은 매우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박거려 가며 물었다. "소형, 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우리가 몇 십 년을 사귀어 오는 동안 내 언제 자네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던가? 하지만 이번만은 꼭 대답을 줘야 하네." 소노반은 심상치 않은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갑작스럽게 정색을 한 소불이는 차근차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것은 두 가지라고 볼 수가 있는데 공적인 것으로 자네 소노가 반드시 용기를 내어 나서야만 하는 것이네. 또 그것은 무림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지……." 이때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전포의는 그 말에 갑자기 신색이 획 변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요?" 소노반이 급히 묻자 소불이는 서슴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그리고 이것은 천하에서 오직 자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네. 그리고 나머지 사적인 이유는 바로 나 소불이가 자네와 수십 년 동안 사귀어온 정분을 생각해서 특별히 자네의 도움을 청하는 것일세." 소불이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자 소노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소불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넨 내가 이십 년 전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개봉(開封) 객점에서의 일을 알고 있겠지?" 잠시 생각에 잠긴 소노반이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머리에 온통 금장식을 한 할머니를 만 났었다고 했지요? 하지만 그 뒷일에 대해서는 모두 잊었습니다." "맞아. 그 노파는 머리를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장식했고 손에는 주홍색 칠을 한 작은 보물 상자를 하나 들고 있었네. 그리고 나는 부족한 경험으로 그 노파가 탄지 청의시녀 하나만을 데리고 있는 덴 도 아무도 손을 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미처 생각 못했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날밤 나는 몰래 그들의 옆방으로 숨어 들어가 창문 틈으로 그 방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그 노파는 등불 아래 앉아 상자 속에서 갖가지 진귀한 물건을 꺼내 가지고 노는 것 같았는데……." 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밖으로부터 아란의 음성이 들려 왔다. "노선배님, 옛날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밖에서도 들을 수 있게끔 큰 소리로 말씀해 주십시오." 소불이는 그 말에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보니 낭자도 밖에서 듣고 있었군. 좋소 큰 소리로 이야기 하겠소." 라고 말한 그는 다시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그 노파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는데 그 노파의 눈은 마치 날카로운 검과도 같아 그녀와 두 눈이 마주친 순 간,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네. 그래서 당황한 나는 급히 몸을 숙여 재빨리 담 위로 뛰어 올라갔네……"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은 그의 이야기를 듣느라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바로 그때, 그녀가 도둑놈이라는 차가운 음성이 들리는 것 같더니 갑자기 내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예리한 것이 내 등에 꽂혔네." 이때 밖에 있던 아란이 놀라 큰 소리로 물었다. "그게 뭔가요? 검이었나요?" "그 예리한 검 끝이 내 등 뒤에 꽂혔을 때 갑자기 한 구원자가 나타났네. 그는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 앉으면서 즉각 손을 들어 검은 물체를 발사시키더니 그 노파의 손에 있는 작은 검을 떨어뜨렸네. 그때 무엇인가가 내 몸에 떨어지길래 나는 그것을 급히 집어 들고 객점을 빠져 나왔는데 그 노략은 나를 쫓아오지 못했네……." 이때, 밖에 있던 아란이 휘장을 제치고 얼굴을 들이밀며 호기심에 찬 얼굴로 급히 물었다. "그 사람은 누구였나요?" "이제 내 말을 듣다 보면 자연이 알게 될 것이다. 집에 돌아온 나는 옷을 벗어 보니 등에 약세 치 가량의 칼자국이 나있었네. 만약 그때 그가 한 발자국만 늦었더라면 나는 벌써 죽었겠지. 그리고 내 손에는 약 한 치 가량의 허리띠가 들려 있었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란이 또 참견을 했다. "허리띠요?" "나중에 나는 나의 은인이 바로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홍채문주, 즉 여협인 홍채마녀라는 것을 알았지. 그녀는 비록 노파의 직검을 날려 보내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예리한 칼에 의해 허리띠 끊어졌던 것이네." 아란은 홍채문주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나 감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노반이 의아스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소형, 그 일과 저에게 도와 달라는 일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소불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물론 관계가 있네. 이것은 흑영도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이에 소노반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몇 십 년간 서로 사귀었기 때문에 절친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만약 소형께서 흑영도에 관해 이야기를 하신다면은 거절을 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 순간, 전포의의 눈에서는 한 줄기의 기이한 빛이 스치고 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소불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흑영도를 위해서가 아니니 내 말을 계속 들어보게." 하고 말한 그는 입술에 침을 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삼 년 전 홍채문주가 나타났을 때, 자의교주가 흑영도에서 자의 문을 창립한 것은 뒤에 무서운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네. 만약 그 일 이 성공한다면 온 무림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일세……." 그러자 소노반이 의아스러운 눈길로 그를 주시했다. "그게 무슨 음모입니까?" 소불이는 긴 탄식부터 하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까지 그 음모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네. 또 나 역 시 이 일은 최근에 알게 된 것일세." 하고 말한 그는 주위를 둘러 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 홍채문주는 당시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자 즉시 마교 중의 한선자(韓仙子)와 불역선생(不易先生) 양공기(陽公忌)그리고 곤륜 나리도인, 구육도사(狗肉道士) 풍삼(風三) 과천성 공손양(公孫讓) 악귀차오 등과 함께 흑영도로 달려갔었네. 그리고 거기로 달려간 사람들은 모두가 무림 중의 가장 으뜸가는 고수들이라 흑영도의 부하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결코 대응하기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네. 그런데 일행은 한 번 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를 않았네. 뿐만 아니라 그 흑영도의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지. 그 후 무림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되어 버렸소." 소노반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더 신비감과 함께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일과 소형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소불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있게 웃었다. "물론 관계가 있지. 이것은 온 세상이 놀랄 만한 커다란 일이고 또한 이 넓은 천하에는 오직 자네만이 그 임무를 수행할 수가 있네." 순간, 소노반은 자기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제가요? 농담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 일은 온 무림의 중대사인데 내가 어찌 함부로 자네와 농담을 하겠나?" 소노반은 그의 엄숙한 표정을 보자 결코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님을 알아차리고는 다급하게 다그쳐 물었다. "소형, 그럼 절더러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나는 여지껏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남에게 부탁을 해본 적이 없거니와 또 남에게 은혜를 입은 적도 없네. 단 홍채문주가 나의 생명을 한 번 구해준 것 밖에는 말일세. 그래서 나는 여지껏 이 일을 가슴 깊이 새겨 두었지만 아직껏 보답을 못했네. 그래서 이번에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바로 이 일 때문이네." 또 하나의 얼굴 당황한 소노반은 황급히 다그치듯 물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소불이의 두 눈은 소노반의 얼굴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이 수수께끼를 좀 풀어 주게." "소형, 저는 신선도 아니고 또 흑영도는 이미 엉망진창이 된 데다가 사람이 실종된지도 벌써 삼 년이 되었는데 제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찾겠습니까?" 소노반의 당황한 것 같은 말에 소불이는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내가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자네가 기관에 능통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네. 만약 자네가 믿지 못하겠다면 전노형에게 물어 보게. 그 역시 이 일 때문에 이곳을 찾아 왔으니까……." 소노반은 그의 말이 매우 이상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즉시 전포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전포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두 사람을 향해 포권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소노형, 그리고 사마노형, 저는 사실 전포의가 아닙니다." 그가 말을 맺자마자 소불이가 어깨를 들석이며 히죽이 웃었다. "나는 이미 당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수수께끼 같은 두 사람의 말에 소노반은 영문을 물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그럼 이 분이 전포의가 아니면 누구라는 말입니까?" 소불이는 여전히 바보처럼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에서 일흔 두 가지 얼굴로 변할 줄 아는 사람이 과연 누구겠는가?" 그 말에 소노반의 두 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왕방울만해졌다. "아니 그럼 이랑신(二郞神) 정노형이란 말입니까?" 전포의는 얼른 손을 내밀어 가볍게 얼굴을 문지르며 씨익 웃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바로 정수복(丁守福) 입니다." 하고 말한 그가 다시 얼굴을 한 번 쓰다듬자 젊은 전포의의 얼굴이 삽시간에 주름살 투성이인 노인으로 변했다. 이때 문 밖에 있던 아란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안으로 들이밀며 물었다. "누가 일흔 두 가지 얼굴로 변할 수 있나요?" 하고 말한 그녀는 전포의가 한 노인으로 변한 것을 보더니 눈이 토 끼 눈처럼 휘둥그레져 큰 소리로 외쳤다. "아국, 빨리 와봐! 사람이 갑자기 변했다?" 그 말이 끝나고 잠시 있다가 국도 고개를 들이밀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소불이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두 낭자, 결코 이 일을 발설해서는 안 되오." 이때 이불을 제치고 일어나 앉으려던 소노반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국낭자, 가서 차 두 잔만 가지고 오시오." 아국은 곧 대답을 하더니 두 잔의 차를 따라 올렸다. 소노반은 이어 정수복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하며 물었다. "정노형께서 이렇게 변장을 하신 것은 무슨 이유에서 입니까?" 정수복은 주름진 눈을 가늘게 뜨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어지지요. 하지만 대강의 상황은 이미 소노형이 거의 이야기 했습니다. 삼 년 전에 사람들이 흑영도로 건너 간 뒤에 그 섬은 곧 황폐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창립된지 얼마 안되는 자의문까지도 그때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강호에서는 필시 그 섬에 큰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갑자기 실종된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 만 아직까지 무어라 단정을 지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아국이 가지고 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떤 큰 변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섬에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적어도 한두 구의 시체는 발견되어야 할 게 아닙니까? 하지만 그 일이 발생한뒤 단 한구의 시체도 발견할수 없었을뿐만아니라 온 섬이 황폐하게 변한 것 외엔 쥐새끼 한 마리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진지하면서 사람의 뼈속 깊이 파고 들었다. "다시 말해서 그 섬의 사람들은 물론 나중에 찾아간 사람조차 마 치 하늘로 솟은 듯이 전혀 행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삼 년 간 빈문의 문하들이 사방으로 수소문해보았지만 끝내 아무런 단 서도 잡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술을 닦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일 때문에 저는 두형과 함께 수차에 걸쳐 흑영도로가 단 한 가지 의심가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 섬에는 결코 해일 등이 발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파도에 휩쓸린 자국이 없는 것으로 증명 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폭약이 터진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 딸은 집들은 어째서 한결같이 폐허가 된 것일까요? 이것은 어쩌면 기관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 한 가지 의문만 풀면 모든 의문도 따라서 풀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단숨에 말한 그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말을 계속했다. "여러 사람들이 연구를 한 결과 사람들은 사마노형이 기관에 정통하다는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서 노형을 초빙하여 흑영도로 가서 무슨 이상이 있는가 조사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소노반이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문께서 이번에 착수하려 하시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로군요. 또 어떤 기관이라도 일시에 모두 없앨 수는 없으나 이 일은 확 실히 저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군요. 흑영도로 가는 것이 귀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드라도 저는 역시 가보고 싶군요." 그러자 정수복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엔 상황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빈문에서는 처음에 노형을 모시고 흑영도로 가려던 계획을 이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소노반은 대번에 의아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그건 무슨 이유입니까?" 정수복은 옆에서 히죽이 웃고 있는 소불이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 개월 전에 소식을 찾아다니다가 바로 귀댁에서 진짜 전포의를 만났었습니다……." 그러자 소노반은 그의 말에 수긍을 표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벌써 왔었습니다. 그는 바로 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를 차지하여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정수복이 말을 이어 받았다. "전포의는 본시 흑영도의 흑의당(黑衣當) 우총관(右總管)이었습니다. 흑영도의 모든 사람이 실종된지 삼 년이나 되었어도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그를 만난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변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일 귀댁에 문을 지키는 장노형을 찾아가 그 보고 소석윤을 떠나라고 권한 뒤에 제가 그 대신 변장을 한 것입니다." 그 말에 소노반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보니 장영감으로 변장한 사람이 바로 정노형이었군요." 그러자 정수복도 악의 없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저도 장영감이 이곳의 농부인 줄만 알았었습니다." 소노반이 설명을 하듯 말을 이어 받았다. "장영감은 본시 이곳의 사람입니다. 그는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 가끔 장 일을 돌봐 주면서 선친께 몇 수의 권각을 전수받았지요. 그가 이곳의 사람이기 때문에 전포의는 그에게 전혀 의심을 품 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고 말한 그는 뒤이어 다그치듯 물었다. "그런데 정노형께서는 어째서 전포의로 변장을 하셨습니까?" 정수복은 한결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이곳에 나타났으니 혹시 그의 신상에서 흑영도에 관해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 만 그의 행동은 극히 은밀했기 때문에 이삼 개월 동안 저는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소노형 사도가 찾아와서 또 소노청의 영도가 자살장을 한 수 해보이자 전포의는 그를 방통의 문하라고 오인하고 저녁때 비둘기 한 마리를 날려 음향수 여세진을 불러온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세진이 오기 전에 미리 전포의로 변장했던 것입니다." 하고 말한 그는 전포의를 잡은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소노반은 잠자코 그의 얼굴을 주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정노형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저의 이 성보는 담만 완성했지만 모두가 단추로 조정하게 되어 있는 저의 독문 기술입니다. 그래서 설사 기관에 대해 익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알 수가 없는데 여세진은 어떻게 해서 연 것입니까?" 그러자 잠자코 듣고만 있던 소불이가 염소의 수염같이 생긴 수염을 한 번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소. 나도 그 점이 매우 의문이었소. 여세진은 황삼을 입은 오가라는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듣자하니 그는 토목 기관에 정통하다고 합니다. 의문은 바로 그 사람이던 것입니다." 그 순간, 소노반의 안색이 홱 달라졌다. "뭐라고요? 황삼을 입은 오가라는 노인…… 그는 바로 저의 사숙입니다." 뜻밖의 말에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아니, 자네에게 언제 사숙이 계셨나?" 소불이가 의아스러운 듯 급히 묻자 소노반은 약간 흥분된 어조로 대답했다. "선친께서는 동문의 사제가 한 분 계셨는데 성은 오(臭)가이고 이름은 사현(思玄)입니다. 황삼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칭 황삼객(黃衫客)이라고도 하지요. 듣자하니 그는 관외(關外)로 나가 근 삼십 년 간이나 아무 소식이 없다고 하던데 어떻게 해서 여세진과 함께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소불이가 설명하듯 말을 꺼냈다. "여세진은 그 당시 마교에서 내쫓겼기 때문에 발붙일 곳이 없어 그 역시 관외로 나갔던 것이네. 그의 음양수라는 외호는 관외로부터 전해져 온 것이네. 그리고 흑영도가 그를 위해 버티지 않았던들 그는 감히 관내로 들어오지도 못했을 걸세." 소노반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이윽고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세상에서는 저와 사숙 밖에 기관에 대해 능통한 사람이 없는 판에 사숙께서 그들의 손에 들어가셨으니 절더러 힘이 되어 달라 이 말이군요." 하고 말한 그는 갑자기 정수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참, 그런데 정노형께서 이번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수복은 뒷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흑영도가 멸망한 뒤에 이삼 년 간 강호는 표면상으로 보기엔 비 록 평정하지만 실은 많은 풍파가 일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흑 백양도의 유명거사들이 갑자기 은퇴를 하는가 하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 사람이 부지기수요. 사람들은 처음에 누가 강호에서 조종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이제 그것이 바로 흑영도의 사람들이 한 짓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노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이미 흑영도에서 기업을 건립했는데 강호의 사람들을 왜 없애는 것이지요?" 소불이가 옆에 있다가 한 마디 거들었다. "그건 밖의 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지 그 속에는 필시 비밀이 있을 것이네." 그러자 정수복이 얼른 말했다. "저는 빈문화 작은 주인의 명을 받고 본시 사마노형을 모시러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귀댁에서 전포의를 발견한 뒤 빈문 소주인께서는 곧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즉 저더러 노형께 천하 무림을 위해 오늘의 초청에 응하시라 권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소노반은 그 말에 날카로운 신광을 발했다. "그럼 귀문 소주인께서는 절더러 그들을 위해 힘을 쓰라는 것입니까?" 정수복은 고개를 끄덕이기에 앞서 신중을 기하느라 그의 눈치를 살폈다. "흑영도의 도둑들이 노형을 초청한 것으로 보아 분명히 은밀한 소굴을 경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불이가 옆에 있다가 망설일 필요도 없다는 듯 선뜻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말이 맞소. 소굴을 꾸미고 있는 것 외엔 결코 소노를 초청해 갈 필요가 없는 것이오." 정수복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빈문은 이미 소석윤 주위 수 십 장에다 적지 않은 매복을 설치했지만 교활한 전포의는 이삼 개월간 통 자기의 주위 사람과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소노반이 의아스러운 듯 눈을 빛내며 급히 물었다. "그럼 노형의 뜻은 절더러 그들의 소굴을 탐지해 내라는 것입니까?" 정수복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말하는 것이 마치 물이 흘러가듯 순조로왔다. "흑영도의 사람들이 실종되지 않았다면 필시 어디엔가 잠복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또한 빈문의 문주와 한선자 등도 실종되지 않았을 것이니 빈문의 소주인께서는 사마노형께 힘을 써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럼 저는 귀문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 겁니까?" 그 순간, 정수복은 상대방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들이 노형을 초청하는 것은 필시 총타에 기관을 설치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저희 소문주께서 바라고 계시는 것은 바로 그 설계의 도안을 사사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정수복의 진지한 어조에 소노반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매우 비밀이라 설사 제가 응하고 또 철저한 그들의 감시 하에서 도안을 훔쳐낸다 하더라도 반드시 가지고 나올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없습니다." 대답을 들은 정수복은 이미 생각한 바가 있는 듯 빙그레 웃었다. "아까도 제가 말했듯이 이곳은 사방에 이미 빈문의 사람들이 매복되어 있어서 그들이 노형을 어디로 모셔가든 단 소제만 알게 되면 노형과는 수시로 연락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자 소노반은 어조에 힘을 주어 근엄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저 역시 무림의 한 사람이니 힘자라는 데까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 말이 그의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정수복은 몹시 기뻐하며 그 자 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공손히 절을 했다. "사마노형처럼 광명정대하신 분이 계신다는 것은 무림의 행운입니다. 제가 빈문의 문주를 대신해서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원 별말씀을, 악을 보면 의당 손을 써야하는 법인데 보잘 것 없는 제 힘이 무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이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불이가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핫하하하…… 소노, 나는 자네가 이토록 시원한 대답을 할 줄은 미�처 몰랐네. 참, 자네는 흑영도로 가기 전에 우선 당소제를 위해 일을 좀 해주게." 소노반은 이 엉뚱한 말에 급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제가 당소형을 위해 무슨 일을 하라는 것입니까?" 소불이는 연신 바보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의 몸에는 그림이 몇 장 있네. 그러니 자네가 그를 위해 몇 가 지 정교한 암기를 만들어 주면 되네." 그 말에 소노반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당문의 암기는 원래 구조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부족한 저의 공구로는 제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소불이가 타이르듯 다시 말했다." 자네는 이름난 교장(巧匠)이 아닌가? 그러니 이 일은 꼭 자네가 해야만 하네. 내 이미 여세진에게 조건을 제시한 것도 있으니 며칠 이 걸려도 무방하네." 그 말에 소노반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아니 여세진과 어떤 조건을 약속했습니까?" 소불이는 익살스럽게 히죽이 웃어 보였다. "후후후…… 나는 전포의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동시에 자네가 나를 위해 도안 한 장을 그려준 후에야 자네를 내보내겠다고 했네." 하고 말한 그는 조금 아까 있었던 일을 다시 이야기해 주었다. "여세진은 나를 정말로 자살문의 문인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겠나? 하하하……." 암기제작 그 순간, 정수복의 얼굴이 의혹의 빛으로 뒤덮였다. "그럼 당소형은 소노형의 문하가 아니란 말입니까?" 소불이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노제는 사실 방통의 문하요. 나는 단지 여세진을 겁주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것이오." 하고 말한 그는 뒤이어 당승무의 내력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때 소노반이 재촉하듯 급히 입을 열었다. "일은 지체할 수 없는 것이니 소형께서는 속히 당소형으로 하여 금 저에게 그 도안을 빌려주게 하십시오." 그가 막 말을 맺었을 때 정수복이 다시 가면을 썼다. "제가 기왕 이곳에 들어 왔으니 다시 나가 보지 않으면 필시 여세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소노반에게 홍채문의 암호를 가르쳐 주고는 몸을 일으켜 작별을 고했다. 그러자 소노반이 황급히 말했다. "정형께선 그럼 여세진에게 저는 이미 승낙을 했으나 자살문을 위해 설계도를 하나 그려야 하니 사흘쯤 기다리라고 전해 주십시오." 정수복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곧 두 사람에게 포권의 예를 취하고 밖으로 나갔다. 방문까지 그를 전송한 소불이는 장영감에게 당승무를 불러 오라고 했다. 정수복이 밖으로 나간 뒤 장영감으로부터 안으로 들어 오라는 전갈을 받은 당승무는 당문의 천왕침통을 장영감에게 주고는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까지 가르친 후 뒷문을 지키라고 했다. 천왕침통을 받자 장영감은 몹시 기뻐했다. "이 일침이 있는 이상 어느 놈이고 근처만 와도 따끔하게 혼을 내 주겠다." 그 말에 당승무는 가볍게 씨익 웃더니 안을 향해 총총히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소불이가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소형, 빨리 오게. 소노반이 이미 자네의 암기를 제작해 주겠다고 승낙했으니 어서 그 도안을 꺼내게." 그 말을 들은 당승무는 몹시 기뻐하면서 탈썩 그 자리에 꿇어 앉았다. "사마어르신네께 감사를 드립니다. 소인은 이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즉시 품에서 일곱 장의 도안을 꺼내 두 손으로 공손하게 올렸다. 도안을 받아든 소노반은 한동안 자세히 들여다 보더니 돌연 탄식을 했다. "당문의 암기가 천하무쌍이라고 하더니 과연 이것은 모두가 지상 의 물건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만약 이 도안을 보 지 않았더라면 인간 세상에 이토록 기묘한 암기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데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일곱 가지 암기는 실로 복잡하고도 정교해서 전부 다 하려면 한 달이 걸려도 못 다할 것이오." 그 말을 들은 당승무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불이가 그러한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얼른 사정조로 이야기를 했다. "그럼 우선 급한대로 한두 가지 할 수 있겠나?" 그러자 소노반은 다시 도안을 몇 번이고 자세히 들여다 본 끝에 마지막 두 장을 가리켰다. "일곱 가지 중에서 단지 점두비망(點頭飛芒)과 검저비성(劍底飛星)만이 비교적 제작하기가 간단할 것 같군요. 아마 이틀이면 완성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검저비성은 지금 당소형이 사용하고 있는 보검을 약간 개조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리하여 당승무는 나머지 다섯 장의 도안을 다시 돌려 받고 대신 단검을 풀어 공손히 바쳤다. 그러자 소노반은 소불이를 향해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소형, 짓다가 만 집이라 방이 모두 다섯 개 밖에 없군요. 비좁게 방을 쓰다보니 천상 소청과 당소형께 같은 방을 쓰라고 해야겠습니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그의 말투는 진심에서 미안해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소불이는 허탈하게 웃어젖혔다. "헛허허…… 괜찮네, 우리사이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소불이가 웃는 얼굴로 말을 받자, 소노반은 곧 정색을 하며 말했다"그럼 저는 당소형을 위해 공작을 해야겠으니 두 분에서는 편히 쉬도록 하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두 장의 도안과 당승무의 단검을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즉시 문을 꼭 닫아 버렸다. 그것을 본 소불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그 아비에 그 아들이로군. 무슨 일을 하건 꼭 문을 저렇게 닫는단 말이야. "하지만 당승무는 그가 자기를 위해 암기를 제작하러 들어갔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소불이가 갑자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의미심장하게 히죽 웃었다. "당소형, 자넨 장영감의 손녀 중에서 누구를 좋아하나? 우리 그 들을 불러 이야기를 좀 나누는 게 어떻겠나?" 순간, 당승무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오르더니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을 본 소불이는 탁 밑의 수염 몇 가닥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 둘은 다 괜찮단 말이냐?" 바로 그때였다. 아국이 나무 쟁반 하나를 받쳐 들고 들어오면서 가볍게 눈을 흘겼다. "노선배님께서는 뒤에서 저희를 골리시는군요." 그러자 소불이는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당노제와 함께 두 낭자가 모두 꽃같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었소." 순간, 아국의 얼굴에는 수줍은 듯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수정처럼 반짝이는 커다란 눈으로 당승무를 슬쩍 훔쳐 보았다. 마침 당승무도 역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터라 네 개의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소불이는 연신 염소같이 작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낭자, 이 물만두 두 접시는 낭자가 만든 것이오?" 아국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수줍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께서는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두 분께서 시장해 하실까봐 아란에게 만들라고 하신 거예요. 그러니 빨리 드세요." 그러자 소불이는 만족스러운 듯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핫하하하……, 마침 배가 고팠었는데 잘 되었소. 할아버지는 지 금 계시오?" 그러자 아국은 빙그레 웃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 어르신네께서는 오늘밤 문을 지키셔야 하기 때문에 밤을 새 우실 거예요." 하고 말한 그녀는 곧 몸을 돌려 물러났다. 소불이와 당승무는 시장하던 참이라 체면 불구하고 마음껏 먹고 나서는 아국이 안내해 주는 오른쪽의 조그만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리하여 첫날밤은 무사히 지나갔다. 여세진은 아마도 가짜 전포의 정수복으로부터 소노반이 승낙했다는 말과 함께 사흘간 자살문을 위해 도안을 그린다는 보고를 받아 찾아오지 않을 모양인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아란이 그의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문을 지켰다. 장영감은 그녀에게 당승무의 천왕침을 주었기 때문에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즉시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정오 무렵, 소노반이 꼭 닫은 문으로부터 당승무의 단검을 들고 나오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하하…… 당소형, 노교가 하룻밤을 새워 이 검저비성을 완성 시켰소. 그리고 소형의 단검에다 마연(魔然)을 더욱 가했으니 얼마나 예리해졌는지 한 번 시험해 보시오." 옆에 있던 소불이가 연신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역시 자네야. 하룻밤 동안에 완성을 해내다니……." 그러자 소노반은 겸손하게 웃었다. "검저비성은 그래도 제작하기가 비교적 간단합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에 당소형을 위해 열두 개의 한성(寒星) 밖에는 제작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고 말을 마친 그가 단검을 꺼내 들자 과연 싸늘한 검광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 매우 날카로와 보였다. 당승무는 그것을 보더니 매우 기뻐 연신 감격해 하며 인사를 했다. 그때 한참 동안 검을 살펴보던 소불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급히 물었다. "소노, 그런데 검저비성은 어디에 들어 있나?" 소노반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세히 보십시오." 하고 말한 그는 검을 쥔 오른손을 휘둘러 선인지로(仙人指路)의 초식을 전개해 보였다. 순간, 차가운 한 줄기의 빛이 번득하는 것 같더니 한 점의 은성(銀星)이 검 밑에서부터 발사되어 문에 가서 꽂혔다. 실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이어 그가 오른손을 뒤집어 좌우봉원(左右逢源)을 해보이자 또 다시 아까와 같은 두 정의 싸늘한 빛이 날아가더니 품(品)자 형으로 문에 가서 꽂혔다. 그것은 콩알만한 크기의 한성이 문에 꽂힌 채 싸늘한 빛을 발했다 소불이와 당승무는 신경을 바싹 곤두세워 자세히 관찰해보았으나 그 한성이 어디에서 발사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암기와 검초가 동시에 전개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동시에 그것으로 막을 수는 없으며 더구나 검저비성은 발사될 때 아무런 소리도 없기 때문에 거기에다 독약까지 바른다면 설사 염라대왕이라 할지 라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소불이는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검저비성은 과연 무섭군. 소노, 자네 그것을 대체 어디다 넣었나?" 소노반은 빙그레 웃으며 문에 꽂힌 세 개의 한성을 뽑아냈다. "한성은 바로 이 손잡이 가림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한 그가 단검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손잡이 부분을 누르자 과연 손잡이 가림판 끝에 구멍이 하나 나타났다. 이어 그가 세 개의 한성을 넣자 그 구멍은 자동적으로 닫혔다. "바로 여기가 한성이 발사되는 곳입니다. 사용할 시에는 그 손잡이에 있는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즉시 한성이 발사되어 나갑니다. 아마 칠팔 보 거리 내에서는 능히 명중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양쪽에 각기 여섯 개씩 들어 있는데 시간이 모자라 더 만들지 못한 아쉽습니다." 그러자 당승무는 희색이 가득찬 얼굴로 얼른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열두 개면 충분합니다." 소노반은 단검을 당승무에게 건네주면서 빙그레 웃었다. "소형은 철물점에 가서 이것대로 더 만드셔도 될 것이오. 하지만 반드시 면철이라야 합니다." 옆에 있던 소불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네. 우리 며칠 후 자네를 데리고 철물점에 나가 이대로 열 개만 더 만들기로 하세. 그리고 독을 바르는 것은 천천히 하도록 하세." 하고 말한 소노반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서 자야겠습니다. 이따 밤에 또 점두비망을 만 들도록 하겠습니다." 당승무는 그 말에 송구스러운 듯 공손하게 말했다. "사마어르신네께서는 소인을 위해 밤잠도 주무시지 못했으니 돌아가 쉬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소노반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두 사람을 향해 인사를 하더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이틀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소불이는 소노반과 오랫동안 사귀어 왔기 때문에 공작실에 들어 간 그를 더 이상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일이 없어진 그는 자기의 운산무영(雲山無影)의 경공 구결을 당승무에게 전수해 주는 한편 강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날 저녁 무렵, 소노반이 점두비망을 완성시켰다. 그것은 하나의 납작하게 생긴 동갑(銅匣)이었으며 속에는 팔십 자루의 소털처럼 가느다란 비망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평시에는 머리카락 사이에 숨길 수가 있기 때문에 발견 기가 어려우나 가볍게 단추를 누르고 고개만 약간 끄덕이면 연속으로 비망이 발사되는 것이다. 당승무는 그것을 받아들자 몹시 기뻐해 하면서 연신 감사해 마지 않았다. 소불이는 그것을 보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탄식을 했다. "저렇게 정교한 것은 오직 사천당문의 정단(情檀) 암기세가나 소노반 같은 교장만이 만들수 있지. "그러자 담담한 어조로 소노반이 다시 말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건 제가 사천당가에서 들은 말인데 당가보에는 암기를 제작하는 노사전(老師傳)이 몇 분 계신데 그분들의 손재주는 결코 저보다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 소불이는 흠칫 놀라 탄성을 발하더니 암암리에 생각을 굴렸다 '당노제의 일문이 화를 입었을 때 그 암기를 제작할 줄 안다는 노사전 몇 사람도 함께 당한 게 아닐까? 만약 그 사람들이 누구에게 잡혀 갔다면 아마 당문 암기의 비밀이 누설되었을지도 모른다.' 소불이는 비록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으나 결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때, 아국이 마침 밥상을 들여 왔으므로 네 사람은 곧 식사를 시작했다. 이윽고 식사를 마친 소노반은 소불이와 잠시 무엇인가를 상의하더니 각자 방으로 돌아가 취침을 했다. 당승무가 잠결에 무심히 깨어났을 때 갑자기 한 여자의 놀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큰일났어요. 노주인께서 없어지셨어요!" 그것은 아국의 목소리였다. 당승무가 그 소리를 듣고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을 때 소불이가 어느새 일어났는지 당승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소형, 빨리 일어나게. 소노에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네." 말을 마친 그는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언제 나왔는지 장영감이 손에 칼을 든 채 씩씩거리며 말했다. "필시 그 여가 놈이 노주인을 납치해 갔을 것입니다. 내 당장 그 놈을 찾아가 생사를 겨루겠습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그를 소불이가 황급히 가로막으며 물었다. "장노형,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장영감은 칼을 쥔 손을 한 차례 심하게 부르르 떨었다. "노주인께서 실종되셨습니다. 내가 그 여가 놈을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장노령,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시오. 소노가 납치되었다면 우리도 조심을 해야 하오. 절대로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오." 장영감은 비교적 차분한 그의 음성을 듣자 조금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소나으리, 무슨 고견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러자 소불이는 멋적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도 소노가 어째서 납치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이때, 아국이 급히 한 마디 거들었다. "평상시 저는 밥을 할 때면 언제나 노주인께 먼저 물을 떠다 드려요. 그런데 제가 아까 물을 떠가지고 가보니 노주인께서 보이지 않아 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노주인님의 공작실로 가 보았지요. 그러나 그곳에도 역시 계시지 않아 할아버지를 깨운 거예요." 이야기를 듣고 난 소불이는 눈을 빛내며 급히 물었다. "아란낭자께서는 대문을 지키면서 소노가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셨소?" 그러자 아국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대답했다. "예, 아란이 그러는데 나간 사람도 들어온 사람도 없었다고 해요." 지하암굴 당승무가 약간 초조해 하며 물었다. "사마노장께서는 기관에 정통하시니 혹시 이곳에 따로 출입하는 암문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장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이 다섯 칸의 목방은 저와 몇몇 사람이 판 것이며 절대 딴 출입구는 없습니다." 소불이는 머리를 두어 번 힘껏 긁적이며 못내 아쉬워했다. "그렇다면 소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말이오?" 장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불이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자, 우리 먼저 소노의 방에 한 번 가봅시다." 그러더니 앞서서 소노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이어 소불이는 휘장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일 성을 지르며 코를 곤두세워 급히 어떤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장노인은 바로 그의 등 뒤에 서 있다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소나으리, 무슨 냄새라도 맡으셨습니까?" 소불이는 안색이 점점 침중해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누군가가 소노의 방에 들어왔었군." 장노인은 다시 물었다. "그게 누구일까요?" 소불이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 방 안에는 아직 미혼향(迷魂香)의 냄새가 남아 있소." 아국이 물었다. "미혼향이 무엇이에요?" "미혼향이란 강호의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일종의 약인 것이다. 그것은 그저 조금만 맡았다 하면 즉시 정신을 잃게 되는 것이다." 장노인은 다시 분노를 터뜨렸다. "과연 누군가가 몰래 들어왔었군." 아국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란이 대문을 잘 지키고 있었는데 사람이 어떻게 해서 들어왔을까요? 설사 들어왔다고 해도 어떻게 노주인을 납치해 갈 수 있었을까요?" 장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를 들어올 정도라면 노주인을 납치해 가기란 문제가 아닐 것이다." 소불이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에는 상관없이 혼자 방 안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방은 단지 여섯 평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사방은 나무로 되어 있어 한 눈에 방 안을 환히 볼 수가 있었다. 소불이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손으로 벽판을 두들겼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한 점이라곤 발견하지 못하자 그는 내심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어 몸을 숙여 침상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있다. 여기에 있다?" 장노인은 그 소리를 듣자 크게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정말입니까? 노주인께서는 거기에 계십니까?" "아니오. 이곳에 단지 구멍이 하나 있을 뿐이오. 그 사람은 땅굴을 파고 들어와서 소노를 데리고 간 것이 틀림없소?" 장노인은 등불을 높이 쳐든 채 몸을 숙이며 물었다. "소나으리, 땅굴이 큽니까?" "크지는 않소. 다만 한 사람만이 기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요." "그럼 우리 빨리 쫓아갑시다?" 소불이는 장노인을 만류했다. "잠깐, 우선 내가 들어가 보겠소." 소불이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움츠리더니 재빠르게 땅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장노인은 급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 소불이가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역시도 안으로 들어갔다. 아국이 급히 불러세웠다. "할아버지 잠깐, 소노선배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대책을 강구해 보세요?" 장노인은 동굴 안으로 기어 들어가며 말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마치 불을 끄는 것과 같다. 무엇 때문에 소나으리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느냐? 우리는 같이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더니 이어 땅굴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 방 안에는 당승무와 아국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들 두 사람은 얼마쯤 기다렸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국이 견디다 못해 입을 열었다. "이 땅굴은 도대체 어디로 통하는지 모르겠군. 그런데 할아버지 와 소노선배님은 왜 여태껏 소식이 없다지?" 당승무가 말했다. "이 땅굴은 위로 통하는 것이고 또 최소한 십 장 거리는 될 텐데 어찌 그렇게 빨리 올 수가 있겠습니까?" 아국은 그의 말이 맞다고 느끼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런 상태로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으나 두 사람은 영영 돌아 오지 않았다. 아국은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 정말 답답해 죽겠어요. 당소협님 우리도 들어가 봐요." 당승무는 급히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낭자, 잠깐?" 아국은 몸을 돌린 채 당승무를 쳐다보았다. "저는 그저 돌아 보기만 하고 즉시 나오겠어요." 당승무가 다시 말했다. "낭자,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장노인께서는 소노사와 같이 계시니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무엇을 발견해서 우리에게 통지랄 시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아국은 조급한 마음을 누르지 못해 연신 안달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더욱 가 보아야 해요. 단지 두 분 뿐이라서 손이 모자랄지도 모르는 일이 아녜요?" 당승무가 결심한 듯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가 보겠습니다. 낭자께서는 여기에 지키고 선 채 절대 떠나지 마십시오." 아국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소협께서도 가시면 안 돌아오실 것입니까?" 당승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상황으로 보아 어떻게 속단하기는 매우 어렵소. 어쩌면 땅굴을 나서자마자 적과 싸울지도 모르는 일이며 또 어쩌면 사마도장의 행방을 발견하여 일시 동안 손을 쓰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나간 후 만약 별일이 없으면 즉시 돌아오겠으니 여기에 지키고 계셔 서 소식을 기다리십시오." 아국은 한 쌍의 새까만 큰 눈으로 당승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외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도 당소협을 따라 가겠어요." 그러자 당승무는 당황해 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 말했다. "아란낭자께서 대문을 지키고 계시니 낭자께서는 이곳을 지키고 계셔야 합니다." 아국은 그래도 불안스러운 듯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만일 돌아오시지 않으면 저는 어떻게 하죠?" 당승무는 태연하게 웃으며 되도록이면 아국이 마음을 놓게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지도 않을 것이오. 저와 소노사 두 사람은 도화궁 안에서 수 없이 많은 어려움을 없었지만 모두 무사히 나왔소. 이번의 땅굴은 어떤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무섭겠습니까?" 아국은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인다는 듯 걱정스럽게 말했다. "나가신 후에는 빨리 돌아 오셔야 해요." 당승무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빨리 돌아 오겠소." 그러더니 그 역시 몸을 숙여 천천히 땅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 땅굴은 임시로 판 것이라 한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 도였다. 땅굴 안은 몹시 어두컴컴한데다 온통 진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안에서 기어나가려고 하니 그야말로 달팽이 걸음이었다. 당승무는 연신 초조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엉금엉금 얼마쯤을 기어가 보니 땅굴은 점점 위를 향해 깍여 있었다. 이렇게 해서 얼마를 더 걸어가자 앞쪽 시야에 은은한 빛이 비치었다. 바로 출구가 되는 곳 같았다. 당승무가 암암리에 안도의 숨인지 한숨인지도 모를 숨을 토해내며 가까이 가 보자 땅굴 밖은 어지럽게 나뭇가지로 교차되어 있었다 아마 밖은 숲 속인 것 같았다. 당승무는 출구로 바싹 기어가 귀를 곤두세워 밖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밖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자 그는 두 손을 밖으로 내밀며 고개와 몸을 동시에 내질렀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이어 탄성을 올리는 듯 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크, 또 하나가 나왔군." 이번에 당승무는 힘쓸 필요 없이 밖에 있는 두 사람에 의해 자연히 끌어 올려졌다. 당승무가 매우 놀라 사방을 휘둘러 보자 망산귀수는 삼 장 밖에 있는 나무 밑에 앉아 있었고 동굴 사방에는 귀두도를 든 여섯 명의 흑의괴도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었다. 숲은 매우 정밀했다. 비록 대낮이기는 하지만 역시 음침했으며 둘러 서 있는 사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승무는 내심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두 사람이 이들 손에 잡힌 것은 아닐까? 도대체 어찌된 일 인지 짐작을 할 수가 없구나." 이때 망산귀수가 당승무를 바라보더니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듯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이리로 끌고 오너라?" 당승무는 반항하지도 않고 순순히 끌려갔다. 하지만 그가 다섯 보도 채 가지 않아 그를 잡고 있던 흑의괴도가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하하하……." 당승무는 요란하게 웃으며 두 발로 힘껏 땅을 차며 밖을 향해 쏜 살같이 달려갔다. 이 갑작스러운 일에 망산귀수는 두 눈에 살기를 폭발하더니 즉시 몸을 일으켜 냅다 소리질렀다. "저놈을 잡아라!" 당승무가 몸을 날려 밖을 향한 순간, 질풍이 얼굴에 스치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눈 앞에 한 괴도가 나타나더니 그의 길을 막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다섯 병의 괴도들도 모두 칼을 든 채 당승무를 향해 에워싸기 시작했다. 당승무는 즉시 왼손을 휘두르며 자기 앞을 막고 있는 괴도를 향해 덮쳐갔다. 그 괴도는 수중의 귀두도를 채 내밀기도 전에 신음 소리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어이없게 쓰러졌다. 당승무는 마치 굶주린 이리처럼 몸을 활 모양으로 휘고는 쓰러진 괴도 위를 날아 급히 숲 밖을 향해 달려갔다. 나머지 다섯 명은 자기네 동료가 신음 소리 없이 쓰러지자 당승무가 암기를 쓴 줄 알고 급급히 반대로 물러났다. 이것은 거의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망산귀수는 당승무가 손을 들자마자 자기의 부하가 세 명이나 쓰러지자 매우 크게 노해 막 몸을 날려 덮쳐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쓰러져 있는 두 명의 괴도를 보았을 때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즉시 커다란 경련이 일었다. "무형지독이구나?" 당승무를 잡고 있었던 두 괴도의 얼굴과 손 또한 동시에 남색으로 변했으며 그들은 벌써 죽어 있었다. 망산괴수도 역시 독수의 명수이기 때문에 이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부하들이 급급히 쫓아가는 것을 보자 즉시 소리쳤다. "가까이 가지 말고 그를 그대로 보내주어라?" 당승무는 어젯밤에서야 소불이에게 망산귀수가 암기일도에 뛰어 난 사람이며 당문과 거의 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감히 상대를 하지 못하고 총총히 숲 밖으로 피한 것이다. 그가 숲 밖으로 피하자 은폐물이 없었기 때문에 목표물을 정확히 쏠 수가 없었다. 당승무는 다시 다른 숲 속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그것은 바로 망산괴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 숲은 매우 밀집하여 당승무의 몸 하나를 숨기기엔 매우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당승무는 긴장을 풀지 않고 삼엄한 경계를 하며 십여 장이 나 깊이 들어가서야 가지가 무성한 나무 위로 올라가 생각에 잠겼다. '이제보니 망산귀수와 여세진은 일당이었구나. 망산귀수가 출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마장홍과 소노사, 장노인 세 분은 모두 그들의 수중에 잡힌 것이 틀림없구나. 그렇다면 장차 이 일을 어찌 하면 좋은가!' 당승무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또 혼자서 강호를 다닌 적이 많지 않아서 이러한 곤란에 부딪치자 잠시 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혼자 얼마 동안 앉아 있다가 자기가 땅굴을 기어 나올 때 아국에게 금방 돌아가겠다고 한 일이 생각났다. '혹시 아국도 기다리다가 기어나오지 않았을까? 만약 나왔다면 그녀 역시도 그들에게 잡혀갈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한 당승무는 매우 조급해서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어찌 되었던 그만 돌아가 보아야겠다.' 이어 그는 나무에서 뛰어 내려와 한 손으로 검을 꽉 쥐고 한 손은 가슴에 올린 채 암암리에 독살장 공력을 운집하여 온 정신을 곤두세우고 천천히 땅굴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상대에게 발각될까봐 감히 발걸음을 빨리 하지 못하고 덤불에 몸을 숨긴 채 천천히 다가왔다. 당승무는 이런 상태로 얼마를 걸어갔는데도 망산귀수의 괴도들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나온 땅굴 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숲은 매우 밀집하여 비록 낮이긴 하지만 햇빛이 들지 않았으므로 매우 음침하여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거기가 여기 같고 여기가 거기 같았다. 당승무는 매우 조급하기 그지 없어 내심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혹시 방향을 잃은 것이 아닐까?" 즉시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살폈으나 자기가 오던 방향과 똑 같았다. 바로 이때 -. 갑자가 당승무의 뒤에서 일제히 바람이 일더니 하나의 예리한 한 광이 그를 향해 엄습해 왔다. 당승무는 일 년 동안 무공이 크게 진보되었으며 지금 그는 온 이 목을 집중시켜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즉시 눈치채고 몸을 한쪽으로 비키더니 수중의 단검을 질풍과 같이 휘둘렀다. "창!" 하는 일 성의 귀를 찢는 금속성이 울리더니 나뭇가지 사이에 파란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한 여인의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승무도 놀라 급히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누구요?" 그러자 아국의 놀랍고도 기쁨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소협이세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한 인영이 번득이더니 아국이 나무 뒤에서 뛰어 나왔다. 당승무는 손을 입에 대며 주위를 주었다. "쉿, 소리를 낮추시오." 아국은 앞으로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이 숲 속에 적이 있어요?" 당승무가 이상한 듯이 반문했다. "아니, 낭자께서 나올 때 망산귀수 사도를 만나지 못했소?" 아국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망산귀수? 망산귀수가 누구죠?" 아국은 생전 강호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망산귀수가 누군지 물론 알 수가 없었다. 당승무는 다시 물었다. "낭자께선 땅굴을 기어나오실 때 아무도 보지 못했소?" 아국은 고개를 저었다. "보지 못했어요? 제가 나올 때 밖에 사람의 그림자라곤 하나도 없었어요." 당승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의혹에 가득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들이 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연풍 아국은 침중한 당승무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당소협께서는 나오실 때 망산귀수를 보셨나요?"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불만인 듯 투덜거렸다. "그런데 낭자는 나무 뒤에 혼자 계셨소? 하마터면 낭자의 일 검을 받을 뻔했지 않소?" 아국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급히 변명했다. "누가 아무 소리도 없이 오시라고 했어요? 저는 소협이 아닌 줄 알았죠?" "그런데 나는 낭자께 땅굴을 지키라고 했는데 어찌 나오셨소?" 아국이 약간 뽀루퉁해 하며 말했다. "소협께서 아까 나가실 때 즉시 돌아오신다고 했는데도 오시지 않고 아란도 그만 적에게 잡혀가고 말았어요. 제가 만약 나오지 않았다면 저도 벌써 적에게 잡혀 갔을 거예요." 당승무는 크게 놀라 반문했다. "뭐라구요? 아란낭자가 잡혀 갔다구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대문에서 일진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마 아란이 침통으로 몇몇의 적을 상대했나 봐요. 나중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아란이 그들에게 잡혀 안으로 들어왔어요. 저는 일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 즉시 땅굴을 통해 나온 것이에요." 이어 아국은 당승무를 바라보며 앵두 같은 입술을 삐죽이며 화를 내었다. "저는 나와서도 당신이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했죠. 그리고 또 마음이 조급해서 숲 밖을 나가니까 사방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몇 명 있길래 허겁지겁 오다가 이렇게 소협을 만나게 된 것이란 말이에요." 그러나 당승무는 매우 조급했다. "아란낭자는 여세진에게 잡혀간 것이오?" 아국은 약이 바짝 올라 발을 구르며 쏘아붙였다. "내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듣지 않고 그저 아란, 아란 하며 아란 만 찾는군요." 그러더니 몸을 휑하니 돌려 버렸다. 당승무는 아국의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몹시 당황했다. "아국, 그건 오해요! 내 뜻은 그게 아니오?" 아국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코웃음을 날렸다. "흥! 더 말할 필요도 없어요. 아란은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가서 구하고 저는 할아버지나 찾으러 가겠어요? 그러더니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달려갔다. 당승무는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소리쳤다. "아국,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아국은 여전히 앞으로 걸어가며 소리쳤다. "싫어요! 듣고 싶지 않아요?" 아국은 비록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심 당승무가 쫓아와 잡으면서 부드럽게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당승무가 아국의 옆까지 뛰어왔다. "바로 낭자의 할아버지에 대한 일이오." 그러자 아국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물었다. "저의 할아버지가 어떻다는 것이죠?" 당승무는 숨을 돌리며 차근차근히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낭자의 할아버지와 두 사람은 여세진에게 잡혀 간 것 같소."아국은 크게 놀라 급히 물었다. "제 할아버지가 잡혀 갔다구요?" "그럴 가능성이 짙다는 말이오." 아국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어째서 그렇다는 말이죠?" "아까 나도 하마터면 잡힐 뻔했소."아국은 급해서 안달을 했다. "빨리 좀 말하세요! 아이 답답해라?" 당승무는 아까 자기가 당했던 일을 상세히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아국은 얘기를 다 듣고 나자 매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망산귀수는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그를 찾아가야 되지 않아?" 당승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갈 수가 없소." "아니, 무엇 때문이에요?" 당승무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소노사께 들은 얘기지만 망산귀수는 주우천이라 하며, 망 산파의 문주이며 일신의 공력은 매우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그의 사문 독암기는 더욱 유명하며 여세진과 손을 잡아 인원수도 매 우 많고 세력도 광범위한데 우리 두 사람만으로 더구나 이런 대낮에 어찌 그들을 상대한다는 말이오?" 아국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들이 소노사와 영조를 잡아갔으니 필시 빙장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둡기를 기다려야 아마 들어갈 수 있을 것이오." 아국은 당승무를 똑바로 주시하며 기대에 가득찬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노주인과 노선배, 할아버지 그리고 아란을 구해낼 자신이 있어요?" 당승무는 점잖게 웃었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소. 우리는 그냥 들어가서 묶여져 있는 끈만 풀어주면 될 것입니다." 아국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동안 어디 가서 무엇을 해야 하죠?" 당승무는 씨익 웃었다. "여기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여세진은 신의를 지키지 않은 사람이니 우리 단단히 그를 혼내 줍시다." "하지만 당신이 아까 말하기를 그들은 인원수가 많고 그 세력도 크다고 하지 않았어요. "당승무는 여전히 태평스럽게 싱글벙글 웃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낮을 말한 것이지 밤에는 무섭지 않소." 그리고는 말을 끊더니 다시 이었다. "밤에는 도처가 전부 어둡기 때문에 비교적 몸을 숨기기가 쉬우며 독을 사용하는데도 낮보다 훨씬 낫소." 이때 돌연 아국이 갑자기 탄성을 올렸다. "아참, 방소협께서는 침통을 가지고 계시나요?" 당승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없습니다. 그 침통은 제가 집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왕침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한 번에 한 자루 밖에 발사할 수 없어 적의 수가 많을 때는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이오. 참, 내게 분통이 하나 있는데 이 속에는 미혼약이 들어 있으니 사용할 때는 그저 바람이 부는 방향에 내휘두르면 즉시 약이 뿜어져 나와 사방의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러니 낭자가 갖고 있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국은 당승무가 자기를 위해 주자 놀랍고도 기뻤다. "이런 것을 어디서 얻었어요?" "이것은 선사께서 주신 것입니다. 미혼약은 마약에 속해 있는 것이며 독성이 강하긴 하나 포악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독약은 물론 그 독을 해제할 수가 있으며 사람의 생명에는 전혀 지장 이 없소. 그래서 포위한 적을 공격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것이지요.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것이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세 번 밖에 쓸 수 없다는 것이오." 아국은 매우 반갑게 그 분통을 받아들었다. 당승무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이 분통은 왼쪽 팔 밑에다 묶어야 하며 필요할 때 그저 휘두르기 만 하면 즉시 약이 품어져 나오게 되어 있소." 당승무는 어떻게 묶어야 한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국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하얀 팔을 드러내어 분통을 단단히 묶었다. 그녀는 다 묶고 나더니 당승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식사는 어떻게 해야 하죠?" 당승무는 싱굿 웃었다. "왜 배가 고플까봐 그러시오?" "아니, 사람은 철(鐵)이고 밥은 강(鋼)인데 우리가 하루종일 밥을 먹지 않고는 무슨 힘이 생기겠어요?" 당승무는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하하…… 그런 걱정은 안해도 좋소. 이곳에는 먹을 것이 수 없이 많으니까……." 아국은 숲들이 우거진 주위를 둘러보며 영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 말예요? 아니 이곳에 먹을 게 뭐가 있어요?" 당승무는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저도 전에는 몰랐지만 사부님과 황폐한 계곡에 살고 있을 때 읍내와는 매우 거리가 멀었으므로 사부님께서는 그때 제게 황정(黃情)을 캐먹는 것을 가르쳐 주셨소.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 약은 원 기를 크게 보충시켜 주며 오랫동안 복용하면 몸에 더없이 좋다고도 하셨소. "당승무의 말을 차근차근 듣고 있던 아국이 돌연 눈을 빛내며 물었다"그럼 약을 먹는다는 말씀이예요?" 당승무는 다시 덧붙여 말했다. "황정은 비록 약이긴 하지만 맛은 괜찮으니 삶아서 먹어도 되고 그냥 날 것으로 먹어도 됩니다." 아국은 그 소리를 듣고는 매우 신기해 했다. "그럼 그것을 어디에 가서 찾아야 되나요?" 당승무는 득의하게 웃었다. "이곳에는 황정이 많소. 아마 낭자가 일 년 반을 쉬지 않고 먹는 다 해도 다 먹지 못할 것이오." 그러면서 즉시 아국과 함께 황정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많은 황정을 파내서 배불리 먹었다. 아국은 처음으로 신기한 음식을 먹어보며 난생 처음으로 이성과 단 둘이 있었으므로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유쾌했고 얼굴에는 시종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하여 나무 밑에 앉아 아국은 당승무가 얘기하는 도화궁에 대해 매우 흥미있게 듣고 있었다. 보통의 일이 그렇듯이 청춘남녀가 같이 있을 때는 시간이 매우 빨리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이윽고 주위에는 어느새 서서히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얼마쯤을 지나자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당승무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 이제 갑시다." 아국 역시 그를 따라 일어서면서 수증의 장검을 한 번 쓰다듬더니 고개를 들어 당승무에게 물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 거죠?" 당승무는 옷에 묻은 덤불을 털어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저 내 뒤만 따라오시오. 모든 것을 내가 다 처리할 테니." 그러더니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낭자는 경공을 할 줄 압니까?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것은 문제 없겠죠?" 아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문제없을 거예요." 당승무는 그녀의 대답을 듣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습니다. 아무튼 그분들이 감금되어 있는 곳에 도착하면 낭자는 절대 내려와서는 안 됩니다. 제가 내려가 구할 테니까요." 아국이 채 무엇이라고 묻기도 전에 당승무는 틈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그리고 수시로 변화가 있을지 모르니 미리 계획을 짜도 필요가 없을 거요. 그러니 어서 가기나 합시다."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숲을 빠져 나오자 숲 밖에는 감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졌고 수목 사이는 매우 캄캄했다. 당승무는 앞장서서 걸어가면서 적에게 발견될까봐 단검조차도 꺼내들지 않았다. 두 사람이 빙장 가까이 왔을 무렵 당승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국은 갑자기 당승무가 멈추는 것을 보고 내심 이상하게 느껴 막 물어보려고 할 찰라, 일진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이어 두 명의 흑의 사나이가 어깨를 나란히 해서 자기가 숨 어 있는 곳을 향해 걸어 왔다. 두 사나이가 거의 일 장쯤 왔을 때 갑자기 당승무가 손을 내둘렀다 이어 두 사나이는 외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국은 그것을 보자 이상하게 느껴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도대체 무슨 수법을 쓴 것일까?" 이때 당승무의 나지막하면서도 또렷한 음성이 들렸다. "낭자, 빨리 행동합시다." 말이 그녀의 귀에 들어감과 동시 갑자기 당승무가 아국의 손을 잡고 어둠 속으로 달렸다. 그리고 재빨리 담 밑에 몸을 숨기더니 다시 말했다. "이 담은 최소한 두 장 이상은 될 테니 낭자는 빨리 진기를 끌어 올리시오. 그리고 같이 올라갑시다." 아국은 당승무가 자기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녀 또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고개만 끄덕이고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당승무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담 위로 뛰어 올라갔다. 당승무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앞의 지붕을 가리켰다. "자, 저쪽 지붕 위로 갑시다." 아국은 마치 순한 어린아이처럼 고개만 끄덕이며 당승무가 하자는대로 했다. 두 사람이 동쪽의 지붕 위로 몸을 날림과 거의 동시에 북쪽 지붕 위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쌍방의 거리는 겨우 십팔 장에 불과했다 당승무는 이미 상대에게 들킨 이상 피할 도리가 없어 급히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낭자, 엎드리시오. 빨리?" 하고 아국을 지붕 위에 밀치듯 눕히더니 두 발에 힘을 주어 그 사람을 향해 덮쳐갔다. 그 흑의 사나이도 적을 발견하자 즉시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덮쳐 날아왔다. 당승무는 그가 소리치지 못하도록 몸을 날리는 동시에 손을 휘둘렀다. 그 흑의 사나이는 덮쳐 오자마자 도중에서 중독되어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어 당승무는 상대의 시체가 땅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두 손으로 받아 들더니 어둠 속에 숨기고는 아국을 향해 손짓했다. 아국은 당승무가 상대를 쓰러뜨린 것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급히 뛰어갔다. 그러나 아국은 발을 잘못 디뎌 둔탁한 일 성을 내며 기와 한 장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당승무는 얼굴에 당황한 빛을 띠고 낮게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아국은 공포로 인해 얼굴을 굳히더니 흑의사나이를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사람은 죽었나요?" 당승무는 당연한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가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의 행방이 탄로가 날 게 아니오?" 아국은 잠시 입술을 깨물고 나더니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는 그만 가 보아요." 당승무는 다시 아국의 백설같은 손을 잡더니 어둠 속에 몸을 숨기며 지붕을 하나 단숨에 건너 뛰었다. 그러자 왼쪽 마당에 어슴푸레한 불빛이 눈에 띠었다. 당승무는 사방을 살펴보니 이미 자기네들이 장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어 그는 아국의 손을 놓더니 급히 몸을 숙이라고 일렀다. 그리고는 가슴을 지붕에 꼭 붙인 채 사지를 똑같이 움직여 옆으로 전진했다. 아국은 그의 뒤를 따랐으나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며 심히 긴장 해 있었다. 두 사람은 오른쪽 끝에 도착하자 즉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겨 뜰 안을 살폈다. 뜰은 하나의 널따란 화청이었고 불이 환하게 밝혀진 채 하나의 원 탁이 놓여져 있었다. 또 그 위에는 푸짐한 진수성찬에 일곱 사람이 앉아 담소를 하고 있었다. 다시 자세히 눈을 뜨고 보자 당승무와 아국 두 사람은 즉시 멍청해졌다. 그 수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소불이였으며 두 번째는 장노인이었고 세 번째가 청의소녀 아란이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손님이었으며 나머지 네 사람은 소노반의 사숙 황삼객 오사현, 흑의당주 여세진 그리고 가짜 흑의판관 전포의, 망산귀수 주우천이었다. 그리고 또 그들의 등 뒤에는 세 명의 흑의 사나이가 주전자를 든 채 공손하게 서 있었다. 계단 양쪽에는 십여 명의 흑의 사나이가 서 있었는데 왼쪽 여덟 명 은 망산귀수의 문하 괴도 여럿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장삼을 입은 채 당당하게 서 있었다. 화청에서는 큰 소리로 웃으며 담소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두 사람과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대체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아국은 자기의 할아버지 일행이 상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내심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잘하는군. 우리 두 사람은 숲 속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남의 상객이 되어 전혀 우리는 생각지 않고 먹고 마시니 정말 미칠 노릇이구나." 당승무는 다만 침착하게 두 눈을 뜬 채 자세히 살피고 있을 뿐 아무런 내색도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국은 당승무를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당소협, 우리는 가요." 당승무는 당황해 하며 즉시 물었다. "아니, 어디로 간단 말이오?" 아국은 심히 분한 듯이 토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할아버지 일행들은 모두 잘 있는데 우리가 구할 필요가 없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는 가야 할 게 아녜요?" 방해자 당승무는 그녀의 이 말까지 듣고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며 그녀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더욱 알 수가 없었다. "잠깐, 우리 좀 더 자세히 들어 봅시다." 아국은 매우 화가 난 듯했다. "술마시는 것을 처음 보나요? 먹고 싶으면 더 보세요. 난 먹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러더니 막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당승무는 크게 놀라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국, 당신은 짐작이 가지 않소?" "그럼 당신은 무엇을 알아냈다는 말인가요?" 당승무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저 곳과 거리가 멀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듣지 못하지만 나는 저 세 사람이 여태까지 한 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소. "아국은 화청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무엇 때문이에요?"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곧 혈도가 제지 당했다는 것이오." 아국은 놀라 급히 당승무를 쳐다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무엇 때문에 소노선배님과 할아버지를 상석에다 앉혔죠?" 그 물음에 당승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그리고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어 말했다. "내 생각 같아선 두 가지 가능성……." 아국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히 물었다. "어떤 두 가지 가능성이죠?" 당승무는 고개를 쳐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낭자, 주석을 한 번 살펴 보시오. 사마어른께서는 아니 보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필경 사마어른의 생사를 놓고 소어른과 낭자의 할아버지를 위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오." "그럼 또 한 가지는 무엇이죠?" 당승무는 날카롭게 주석을 내려다 보며 단언하듯 말했다. "그것은 소노사 등의 세 사람을 내세워 함정을 만드는 것이오." 아국은 숨실 겨를도 없이 급히 물어대었다. "그들이 함정을 만드는 것은 우리를 잡기 위해서인가요?"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가 저절로 굴러 들어오게 유인책을 쓰는 것이오." 아국은 금새 또 울상이 되었다. 당승무는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 우리는 기왕 왔는데 함정인들 뭐가 무섭소?" 아국이 당승무를 바라보니 그의 두 쌍의 눈은 날카로운 한광을 뿜어내는 게 밑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바로 이때 -. 여세진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은잔을 높이 쳐들고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두 분은 기왕 오셨으니 서슴치 마시고 이리로 내려 오십시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이에 당승무는 크게 놀라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음, 그리고 보니 여세진은 벌써 우리를 발견했었구나." 이때 아국은 더욱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당소협, 우리는 내려 가야 하나요?" 당승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여세진이 이어 말했다. "두 분께서는 한 번 보십시오. 아마 내려 오시는 것 외에는 지붕 위에 계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더니 손을 쳐들어 소리쳤다. "여봐라! 모두 일어나서 두 귀객께 자세히 보여드려라?" 여세진의 말이 끝남과 동시, 두 개의 밝은 빛이 두 사람을 향해 비춰왔다. 그러더니 양쪽에 이십여 명의 흑색경장을 한 사나이들이 활을 든 채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사나이들은 모두 화살을 장정해서 두 사람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당승무는 그것을 보고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과연 안배가 있는 함정이였구나'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즉시 아국을 슬쩍 치고는 일어서서 냉랭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려오라면 내려가지 무엇이 두렵겠소?" 그러더니 즉시 뜰 안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국은 겁이 나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내려가며 또 한 장의 기왓장을 떨어뜨렸다. 당승무는 고개를 돌려 아국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국, 나에게 가까이 서시오. 그리고 절대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되오." 아국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이미 계단 앞까지 다가갔다. 이들이 가까이 오자 왼쪽에 서 있던 여덟 명의 흑의경장을 한 사 나이들이 손에 귀두도를 든 채 두 사람을 재빨리 에워싸고는 행동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혀 손을 쓰지 않고 약간 떨어져서 두 사람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지금 당승무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으나 지붕 위에 있을 매는 궁수가 있었고 또 거리가 너무 멀어 독수를 전개할 수 없기에 내 심 매우 화가 나 있었다. 게다가 여덟 명의 흑의경장들의 행동을 보자 더욱 화가 치밀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너희들은 정말 죽고 싶으냐?" 말을 끝냄과 동시 그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국와 함께 태연히 계단 위로 올라갔다. 한데 두 사람이 세 번째 계단을 밟는 순간,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리더니 여덟 명의 사나이들 이 신음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모두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당승무는 안색 하나 변치 않고 마치 그러한 일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하게 여전히 계단을 밟으며 올라갔다. 순간, 여세진은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당승무를 쏘아보며 음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왕노제께선 무형지독에 매우 정통하시군……." 무형지독은 원래 자의문의 독문기독인데 여세진은 당승무가 흑살장을 전개하는 것에 벌써부터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당승무가 무형지독을 전개하는 것을 직접 보자 당승무가 탈혼장 방통의 전인이라는 것이 여실히 판명되었다. 당승무는 소불이 등 세 사람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무형지독을 정통했다면 어쩌시겠소?" 당승무는 말하는 동안에도 세 사람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며 혈도가 제압당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때 여세진이 음산하게 웃었다. "왕노제와 낭자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는 자진 투항하러 오신 것이오, 아니면……" 순간, 당승무는 여세진의 말을 가로채며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흥!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았소?" 여세진은 팔짱을 끼며 매우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왕노제, 계단 아래를 보실까요? 그들이 무형지독에 어떻게 되었는지……." 당승무는 얼핏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런데 여덟 명의 사나이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육한생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들어서더니 포권을 취했다. "형제 당주의 명을 받들어 저 두 분께서 빙장에 들어오실 때부터 뒤따라 왔습니다. 그래 당노제께서 무형지독으로 살인을 하셨지만 제가 모두 구했습니다." 당승무는 그의 말을 듣고 내심 크게 놀랐다. 이어 전에 사부가 하 던 말이 생각났다. '무형지독은 비록 천하의 기독이긴 하나 무림 중에는 적지 않는 사람이 그 독을 해소시킬 수 있다.' 이것을 생각한 당승무는 자기가 당문의 기독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매우 후회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냉랭하게 웃었다. "귀하께서 설사 무형지독을 풀었다 해서 또 어떻단 말이오?" 여세진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무형지독으로 이제 우리를 위협할 수 없으니 왕노제도 어쩔 수 없지 않소?" 당승무는 이제 최후의 수단으로 급히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당승무는 겉으로는 비록 담담했지만 마음 속에는 큰 파도가 일고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 소불이 등 세 사람은 모두 상대방의 수중에 있으며 또 상대방의 인원이 많기 때문에 세 사람을 구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전포의가 당승무를 향해 눈짓을 보내더니 동시에 전음술로 전해왔다. "소형제, 빨리 가시오." 한편, 여세진은 껄껄 웃으며 매우 통쾌해 했다. "왕노제, 존사께서 여기에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그러니 제 말대로 두 분은 어서 무기를 거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때 아국이 독기어린 음성으로 매섭게 물었다. "당신들은 제 할아버지를 어떻게 한 것이에요?" 여세진은 태연하게 웃으며 세 사람을 가리켰다. "낭자의 할아버지께서는 여기에 이렇게 편안히 계시지 않습니까? 낭자께서 소노반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기만 하면 즉시 할아버지를 놓아 드리겠소." 당승무는 암중에 소리쳤다. '그렇다! 이것들의 말하는 투로 보아 사마어른은 이들이 잡아간 것이 아니구나!' 아국은 눈을 크게 뜨며 울었다. "아니, 저희 노주인은 당신들이 잡아간 것이 아니에요?" 여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되물었다. "어떤 사람이 땅굴로 들어가 미혼향으로 소노반을 기절시킨 뒤 땅굴로 납치해간 것이 아닙니까?" 아국은 다시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그래요. 당신은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런데 왜 묻는 거죠?" 여세진은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음흉스럽게 웃었다. "흐흐흐…… 저는 오늘 이렇게 성대하게 차려놓고 두 분을 기다렸는데 두 분께선 사실대로 말씀하시지 않으시러 나 역시도 어쩔 수 가 없군요." 이때 당승무는 여전히 단검을 높이 쳐들고 있었으며 왼손에는 독살장을 운집하고 있었다. 여세진은 말을 끝낸 후 즉시 기침을 한 번 했다. 그러나 그 신호와 동시에 여지껏 술주전자를 들고 있던 세 명의 흑의사나이들이 갑자기 예리한 칼을 뽑아들었다. 여세진이 음산하게 웃으며 다시 기회를 준다는 투로 말했다. "어떻소? 두 분은 존사와 할아버지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소노반이 있는 곳을 대시오." 아국이 놀라 급히 부르짖었다. "빨리 손을 내려요! 우리 할아버지께 손대지 마세요?" 그러자 여세진은 눈을 번득이며 협박하듯 말했다. "낭자, 어서 말하시오?" 아국은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정말 몰라요. "이때 당승무가 크게 소리쳤다. "내가 알고 있소?" 그러더니 갑자기 단검을 휘둘러 앞으로 덮쳐가며 검과 장을 동시에 격출해 내었다. 여세진 또한 즉시 몸을 돌려 당승무의 검세를 피했다. 그러나 뒤이어 발견해낸 독살장은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본시 방통 수하의 부장주였으므로 흑살장의 무서움을 잘 알 고 있었다. 여세진은 감히 대응하지 못하고 넓은 소매를 휘두르며 단번에 역 도로 내찔러갔다. 그러자 덮쳐가던 당승무는 즉시 뒤로 물러났다. 당승무는 상대에 의해 밀려나자 화가 치밀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 늙은 것이 손이 하나 밖에 없는데도 이렇게 무서운 내공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구나.' 여세진은 다시 제 궤도에 돌아오며 얼굴에 살기를 띠었다. "왕노제께서 만약 다시 손을 쓴다면 노제가 생사를 불구하는 것으로 생각하겠소? 당승무는 일격이 실패하고 또 상대에 의해 뒤로 물러나게 되자 더 이상 손을 쓰지 못하고 즉시 검을 거두었다. "사마어른께서는 이미 당신들의 초청에 승낙을 하셨는데 당신들 은 그 신의를 어기고 사마어른을 납치해 갔소. 게다가 존사와 장노인 등까지 납치를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심보입니까?" 이때 여태까지 아무 말이 없던 망산귀수가 음산하게 웃으며 나섰다. "이놈은 아까 암중에 무형지독을 사용하여 저의 세 제자를 하마터면 죽일 뻔했는데 여장주께서는 더 이상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놈은 제가 잡아 가두겠습니다?" 여세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노형이 나설 필요가 없소이다."그러더니 당승무를 향해 매우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왕노제, 다시 한번 내 말을 잘들으시오. 이제는 더 이상 선택할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겠소?" 이때 아국이 대뜸 나서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우리는 정말로 노주인의 행방을 모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무엇으로 말하라는 것이죠?" 하지만 여세진은 아국은 상관하지 않고 여전히 당승무를 주시한 채 물었다. "왕노제도 모르오?" 당승무는 정색을 하며 그 역시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다만 어르신네께서 납치당한 사실만 알 뿐이오. 만약 당신들이 납치해 오지 않았다면 나 역시도 모르겠소." 여세진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당신들의 말을 믿겠소. 하지만 소노반이 진짜 납치를 당했다면 우리가 사실을 증명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오. 다만 여러분 들은 그 사실이 입증될 때까지만 이곳에 남아 있어야 괼 것 같소." 그 말에 당승무는 즉시 두 눈을 부릅뜨고는 소리쳤다. "대체 우리를 어찌할 참이오?" 여세진은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 방금 말했듯이 자살문과 적대시할 뜻은 없소. 그리고 장노인을 난처하게 할 뜻은 더욱더 없소. 다만 두 분은 지금 나와 잘 의논해서 우리 공평한 약속을 합시다." 당승무는 여전히 얼굴에 노기를 떤 채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약속이오?" 당승무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또 다시 그의 귀에 전음술의 소리가 전해왔다. "소형, 절대 약속에 대답해서는 안 되오?" 여세진은 교활한 미소를 띠며 달래듯 말했다. "노제, 우선 무기를 내리고 말합시다." 당승무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추호도 타협의 기미를 보이려 들지 않았다. "우선 말부터 분명히 해보시오?" 여세진은 음산하게 웃었다. "후후……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오. 내 지금 장노인과 손녀분을 놓아드릴 테니 왕사도께서는 잠시 이곳에 남아 계시는 것입니다." 당승무는 눈을 치켜뜨며 다그치듯 물었다. "아니, 어떻게 남아 있으라는 말이오?" "아주 간단합니다. 왕사도께서는 여기에 남으셔서 저의 귀빈이 되는 것이며 행동에는 조금도 구속을 받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잠시 두 분의 공력을 봉쇄해야 하오." 당승무는 순간 머뭇거렸다. "그…… 그건……" 이때 전포의의 목소리가 다시 귓전에 들려왔다. "그 조건을 승낙하십시오." 당승무는 암암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승낙하지 말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또 승낙하라고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바로 이때 맞은편 지붕 위에서 한 청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세진은 빨리 나와서 우리의 소문주를 맞이하여라!" 그 말에 여세진이 깜짝 놀라 즉시 지붕 위를 쳐다보자 어느 사이엔가 양쪽 지붕위에 두명의 청의사나이가 장검을 등에 맨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자기네 이십여 명의 궁수들은 어느 사이엔지 모두 이미 제거된 것이 아닌가? 육한생은 안색이 급변하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여세진은 즉시 육한생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지붕 위를 향해 공수의 예를 취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늦게 왕림하신 두 분께서는 대체 어느 방면의 친구입니까? 그리고 어찌 이곳에 내려오셔서 얘기를 하지 않는 것입니까?" 지붕 위의 두 사람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덜컹하며 대청 앞의 대문이 갑자기 크게 열렸다. 그리고 열린 대문으로 파란 피풍을 둘러 입은 사나이가 큰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 사나이의 안색은 불빛을 받아 금방 타오르는 듯했으며 눈 위로 치켜 올라간 눈썹은 두 자루의 단도와 같았다. 그의 나이는 약 삼십 장도로 보였다. 큰 걸음으로 걸어오는 사나이의 두 눈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광이 번득여 그 위풍에 장내는 일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역전 이 사람의 뒤로는 청의경장을 한 네 명의 사나이들이 장검을 거머 쥔 채 마치 그 사나이를 호위하듯 바짝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허리에 홍대를 두르고 있었으며 그들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보아 일신의 공력이 매우 높은 것 같았다. 여세진은 상대편의 네 사나이가 허리에 흥대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자 내심 크게 놀라 중얼거렸다. "아니, 홍채문의 사람들이……?" 그러나 당승무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사나이들을 보자 그 위엄에 위축이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여세진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반색을 했다. "하하하……이제보니 홍채문의 친구들 이었군요. 이것정말 실례했습니다." 그러자 파란 피풍을 입은 사나이는 성큼성큼 화청으로 들어서더니 여세진을 쳐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여기서 장난을 하고 있는 것들은 바로 동사도의 잔당들이었구나!" 그 말소리는 몹시 사람을 멸시하는 듯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멸을 느끼게 했다. 여세진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 사람의 말투는 매우 귀에 거슬리는데 대체 누구일까?' 여세진은 처음에는 당황해 하는 것 같았으나 이어 즉시 태연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귀하께서는 아마 홍채문의 소문주 같은데 존대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파란 피풍의 사나이는 매우 거만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통성명할 필요가 없소. 나는 다만 한 가지를 물어보려 왔을 뿐이오. 본문의 열세 명의 제자들이 효산 부근에서 연속적으로 실종이 되었는데 혹시 당신이 잡아온 것이 아니오?" 여세진은 짐짓 코웃음을 쳤다. "기문의 제자가 실종된 것이 이 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파란 피풍의 사나이는 여세진을 매섭게 주시했다. "효산 일대는 당신 여세진의 세력 범위인데 내 당신에게 묻지 않으면 누구에게 묻겠소?" 여세진은 음산한 눈빛으로 피풍을 입은 사나이와 청의경장 사나이들을 한 번 쓸어보더니 비꼬듯 말했다. "귀하께서는 많이 알고 계시군요." 파란 피풍의 사나이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내 당신과 사소한 얘기를 할 시간이 없소 본문 열세 명의 제자들을 당신이 잡았다면 빨리 내놓고 잡지 않았다면 아니라고 잘라 말 하시오?" 여세진는 교활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귀하는 저희들의 비밀을 매우 많이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지금 당신들을 범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 순순히 보내지는 않겠소." 여세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전포의, 육한생, 망산귀수 등의 사람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망산귀수가 번쩍하고 화혈금도를 뽑아 들었다. "여당주, 살기를 원하오? 아니면 죽기를 원하오?" 순간 파란 피풍의 사나이는 크게 노하여 눈썹을 매섭게 치켜올렸다 "너희들은 한꺼번에 덤빌 생각이냐?" 망산귀수는 입가에 냉랭한 비웃음을 흘렸다. "너 같은 어린 것을 대응하기란 지금 노부가 손가락 하나 까딱해도 과분한데 뭐 한꺼번에 덤비겠다고?" 사나이의 두 눈썹이 다시 무섭게 꿈틀거렸다. 이어 밤하늘에 한 줄기의 한광이 그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인지 모르게 손에는 예리한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지금 그의 이 동작은 번개처럼 빨랐으며 그가 어떻게 해서 검을 뽑아 들었는지 아무도 보지를 못했다. 사나이는 장검을 들어 망산귀수를 가리키며 냉랭하게 말했다. "늙은 것은 저리 비켜라!" 다음 순간 다시 한광이 번득이더니 망산귀수의 칼을 들고 있는 오른손을 향해 내질러 갔다. 여세진은 그가 검을 휘두르는 수법을 보자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의 수법으로 보아 제가의 번개검법이 틀림없구나?" 이어 여세진은 즉시 소리쳤다. "주형, 조심하시오" "창!" 여세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쇳소리가 들리며 한 가닥의 금빛이 하늘 위로 떠오르더니 대청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망산귀수의 수중에 있던 화혈금도가 이미 사나이에 의해 손에서 빠져나왔던 것이다. 이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 한 수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온통 넋이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망산귀수의 화혈금도가 이처럼 쉽게 적의 손에 의해 빠져나갈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당승무 역시 크게 놀라며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의 일 검은 마치 소의 뿔과 같아서 아무런 헛점을 찾을 수 없으니 정말 신기하기 그지 없구나?" 당승무는 암중에 중얼거리며 가볍게 아국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그것은 쌍방이 손을 쓰기 시작하면 자기네들도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소불이 등 세 사람을 구하자는 신호였다. 아국도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세진은 견식이 풍부한 사람이었지만 상대가 전개한 일 검의 내력을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감탄을 하며 즉시 소리쳤다. "노형, 잠깐 멈추시오. 물어볼 말이 있소." 이것은 거짓이며 망산귀소의 체면을 살려주자는 것이었다. 망산귀수의 손에서 이미 금도가 빠져 나갔는데 어찌 다시 접할 수 가 있겠는가? 이것은 보나마나 뻔했기 때문이었다. 망산귀수는 두 눈을 부릅뜬 채 피풍의 사나이를 쏘아보며 아무말 없이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여세진이 그 틈을 노려 날카롭게 꾸짖었다. "귀하는 홍채문주로써 어찌 진면목을 드러내 놓지 않으시오?" 당승무는 피풍의 사나이를 바라보며 의심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럼 이 신비의 사나이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말인가?" 사나이는 잠시 검을 거두더니 냉랭하게 웃었다. "하하…… 그것 쯤이야 내 못하겠소?" 그러더니 손을 들어 얼굴의 가면을 벗었다. 당승무는 이 파란 피풍의 사나이가 가면을 벗는 것을 보자 즉시 안색이 싹 변했다. 가면을 벗은 사나이는 칼날같이 날카롭게 올라간 짙은 눈에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며 붉은 입술에 새하얀 치아가 더없이 준수하게 생겼다. 나이는 많아야 이십삼사 세 정도였으며, 그 준수한 얼굴과 늠름한 풍채에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영웅의 기질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여세진은 처음에는 당당하더니 즉시 두 눈에 원한의 빛을 띠었다. 이어 그는 주위가 떠나가라 소리내어 웃으며 한 마디 내뱉았다. "으하하하……, 과연 제소협이군." 파란 피풍의 사나이는 낭랑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소. 여세진은 이 제갈명(諸葛明)에 대해 그리 낯설지는 않으오. 후후후……낮설지 않다 뿐이오? 이 한쪽 팔은 바로 제소협께서 제거시켰는데 내 어찌 잊을 수가 있겠소?" 그러더니 팔이 떨어져 나간 빈 소매를 펄럭여 보였다. 제갈명은 씨익 웃으며 비꼬았다. "여당주는 제게 예전에 진 빛이라도 갚겠다는 말이오?" 여세진은 잔혹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 비록 제소협과 과거에 관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며 내가 거느리고 있는 흑의당과는 아무런 원한이 없소?" 제갈명은 학의 꼬리 같은 눈꼬리를 치켜뜨며 냉엄한 어조로 물었다. "동사도가 무림을 위협한 것은 강호의 큰 공적인데 여당주는 동 사도의 흑의당 당주가 아니란 말이오?" 여세진은 음흉하게 웃었다. "그건 제소협께서 잘못 알고 있소이다. 동사도의 자의문은 삼 년 전에 이미 불가항변의 변괴가 생겨 뿔뿔이 헤어졌으며 지금은 거의 존재하고 있지 않소!" 그리고 말을 끊더니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저의 이 흑의당은 왕년의 흑의동인으로 조직된 것이며, 동사도의 자의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소?" 제갈명은 냉랭하게 웃었다. "여당주의 지금 말씀을 그 누가 믿겠소?" 여세진은 고개를 저었다. "저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조직한 이 흑의회는 강호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니 제소협께서도 들었을 줄로 알고 있는데?" 제갈명은 그 말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당주는 아직 제 물음에 답하지 않으셨소. 분문의 열세 명의 제자들은 당신들이 살해했소? 아니면 그냥 잡아갔소?" 여세진은 여전히 미소를 대며 딱 잡아 떼었다. "폐회는 각문 각파와 평화롭게 사귀고 있소. 그리고 귀문의 제자가 실종된 것과 폐회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이때 제갈명은 예리한 한 쌍의 눈으로 전포의로 변장한 정수복을 바라보고 있는게 이미 전음술로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이때 갑자기 제갈명은 얼굴에 기이한 빛을 띠더니 천천히 입을 떼었다. "여당주께서 이황 본문과 적대시할 뜻이 없으시다면 저 역시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겠소. 그러나 저 사람들의 혈도는 풀어 주시오." 그러더니 소불이 등 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세진은 삼 년 전에 제갈명이 전개한 천뢰지(天雷指)에 의해 한 팔을 잃었으므로 지금도 물론 천뢰지가 자기 음양수의 극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자기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제갈명의 적수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상대방엔 검을 신비스럽게 사용하는 당승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여세진은 여러 방면으로 생각하더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벌써 왕노제에게도 얘기했지만 사실 나는 저 세 사람과 아무런 악의도 없소. 하지만 또 제소협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 그 대로 이행하리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전포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 그들의 혈도를 풀어 주시오." 이때 당승무는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제소협의 일 검은 비록 매우 날카롭기는 하나 여세진은 공력이 심후하고 나머지 세 사람들도 모두 고수라서 상대를 해도 패하지는 않을 것인데 어찌 제갈명을 두려워 하는 것일까?' 당승무는 제갈명의 천뢰지가 여세진의 유일한 극수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원인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포의는 당주의 분부를 받자 즉시 공손히 대답하고 앞으로 다가가 소불이 등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장노인은 혈도가 풀리자 두 눈을 부릅뜨고는 두 손을 한 번 흔들 어 보이더니 갑자기 일어나서 크게 소리쳤다. "이놈, 여가야! 내 너를 없애야……" 그러다가 그는 일순 손을 높이 든 채 멈추어 서고야 말았다. 주석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중 낯익은 사람이 당승무와 자기의 손녀라는 것을 발견하자 어리둥절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것이다. 소불이는 혈도가 풀리자 상위에 차려 있는 술상을 보더니 침을 꿀꺽 삼키며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언저리를 아무렇게나 닦더니 히죽거리며 말했다. "장노인, 우리 우선 먹고 봅시다." 하고는 다시 요리를 한 젓가락 집어 입안에 넣더니 씹으며 제갈명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소문주, 구원해 주신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우선 좀 드시지 않겠습니까?"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웃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으니…… 그리고 여러분들도 이곳에 남아 있으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그러더니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밖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청의사나이들은 즉시 길을 비켜주더니 제갈명이 지나가자 다시 호위를 하듯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이때 소불이가 급히 일어서더니 상위에 있는 닭을 한 마리 집어 들고는 소리쳤다. "우리도 그만 가자!" 이어 그도 역시 제갈명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이어 장노인, 당승무, 아국과 아란도 일제히 뒤를 따랐다. 여세진은 음산하게 웃으며 슬쩍 물었다. "아니, 소노형. 어째서 벌써 가시는 것입니까?" 소불이는 닭의 뒷다리를 뜯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감사하오. 하지만 그만 가보아야겠소." 여세진은 할 수 없이 길을 비켜주며 소리높여 말했다. "제소협, 멀리 가지는 않겠소.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제갈명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냉랭하게 대꾸했다. "좋습니다. 여당주께서 기분이 좋으시다면 수시로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일행은 제갈명을 앞세워 빙장의 대문을 나섰다. 이때 제갈명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예리한 눈초리로 소불이, 장노인, 아국 등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세진은 세 분의 몸에다 장난을 했습니다." 소불이는 깜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난 전혀 느끼지 못하겠소이다." 제갈명은 눈을 치켜뜨며 냉랭하게 말했다. "동사문의 특기가 바로 암암리에 독을 내리는 것이오. 지금 여세진이 세 분의 몸에다 독을 내린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조그만 병에서 세 알의 환약을 꺼내더니 세 사람에게 건네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 환약은 천하의 기독을 전체적으로 푸는 것이오 그러니 어서 복용하십시오." 당승무는 그가 꺼낸 약병을 보고는 절로 탄성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당문의 벽독단(壁丹毒)!" 제갈명은 당승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것이 바로 당문의 벽독단이오." 제갈명은 소불이 등 세 사람이 벽독단을 복용하는 것을 보자 즉시 포권을 취했다. "그럼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어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하며 제갈명이 막 몸을 돌리려고 하자 소불이가 급히 불렀다. "소문주, 잠깐 기다리시오." 제갈명은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멈추어 섰다. "어르신네께선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습니까?" 소불이는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서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전노형의 암시를 받았는데 소노반은 여세진이 납치해 간 것이 아니랍니다. "제갈명은 두 눈에 기이한 빛을 번득이더니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네의 말씀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도 이미 수복형에게 들었습니다." 제갈명이 두 눈을 번득인 것은 자기가 정수복을 전포의로 가장시켜 상대의 조직 안에 투입시킨 것은 극히 비밀스러운 일인데 소불이 뿐만 아니라 전부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소불이의 말투로 보아 아마 정수복이 가르쳐 준 것 같았다. 제갈명은 소불이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다시 포권을 취했다. "소생, 아직 어르신네의 존함을 여쭈어 보지 못했습니다." 소불이는 제갈명의 공손한 태도를 보자 즉시 기뻐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몸 소불이라고 하오. 하지만 강호의 친구들이 외호를 백일당 귀라고 지었습니다." 제갈명은 생전 소불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으며 더구나 백일당귀라는 외호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정통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그저 흑도상의 이 삼류쯤 되는 각색(角色) 이라고 속단했다. 제갈명은 즉시 다시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소생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제갈명은 급히 몸을 돌려 청의사나이들을 거느리고 사라졌다. 소불이는 제갈명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제보니 홍채문의 소문주는 강호에 대해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이군." 장노인은 제갈명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나으리,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불이는 감정이 침중하게 변해서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소노반은 여세진이 납치해 간 것 같지 않으니 뭐라고 속단하기가 매우 어렵소이다." 장노인은 조급한 마음이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나으리는 우리 다섯 사람들의 영도자이니 무슨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소불이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보기에는 홍채문의 소문주 역시도 소노반 때문에 온 것 같소. 그리고 홍채문의 열세 명 제자가 실종되었다 하니 이것은 아까 정수복이 말한 그 매복되어 있는 사람이 한 소행이 틀림없을 것이오. 이것으로 보아 그 사람은 소노반을 납치해 갔을 뿐만 아니라 홍채문에 매복되어 있는 사람까지도 데리고 간 것 같습니다." 장노인은 매우 수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자 소불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엉뚱한 말을 끄집어 내었다. "하하하……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소노반이 서로 쟁탈을 벌이는 인물이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소이다." 장노인은 태평한 소불이의 태도에 답답해 하며 어쩔줄을 몰라 했다. "아니! 소나으리, 무슨 말씀이라도 좀 속시원히 얘기해 주십시오." 황의미녀 소불이는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장노형, 서두르지 마십시오. 저는 이 많은 복잡한 일을 해결한 다음에야 우리가 어디서부터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가 있소." 소불이는 말을 끊더니 손가락을 펴보이며 다시 말했다. "첫째, 소노반을 여세진이 납치해 간 것이 아니니 그는 아마 절대로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당승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소불이는 웃으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내 말의 뜻은 그가 사람을 파견해서 우리를 미행할까봐 그런 것이다." 그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둘째, 홍채문의 매복들은 전부 의문의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버렸다. 이 범인이 여세진이 아니라면 의문의 소행은 아마 반드시 소노반을 납치해간 사람들일 것이다." 장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소불이는 다시 말했다. "셋째, 귀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하에서 소노반을 납치해 가고 여세진을 감쪽같이 속이고 또한 홍채문파의 매복까지도 제거한 것을 보니 아마 한 사람의 짓은 아닐 것이오. 그리고 그 행적은 매우 신비스럽고 의문스러우니 그들이 사라질 때도 반드시 산 앞길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오." 장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생각을 해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산 뒤로 왔다는 것입니까? 하지만 산 뒤에는 길이 없는데……." 소불이는 의미있게 씨익 웃었다. "바로 그 점이오. 산 뒤에는 길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아주 여유 있게 소노반을 납치해 갈 수 있었소." 장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산 뒤로 해서 추격해 가야겠군요." "그렇지요. 홍채문파의 소문주는 산 앞으로 해서 쫓아갔으니 우리는 산 뒤로 갑시다. 그러면 혹시 무슨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는지 도 모르지요. "하지만 장노인은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그러나 여세진을 빼놓으면 또한 누가 노주인을 납치해 가겠습니까? 아무래도 저는……." 소불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약간 어조를 높여 다시 설명했다. "우리는 벌써 여세진과 협상을 했지 않소? 그리고 오늘이 바로 소노반이 그의 초청을 받고 가야 하는 날이오. 그런데 여세진이 무엇 때문에 그 많은 힘을 들여서 지하로 해서 소노반을 납치해 갔겠소? 그리고 소노반을 찾기 전에는 그 의문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장노인은 그제서야 급해서 말을 서둘렀다. "그렇다면 우리 빨리 추격합시다. 산 뒤의 지리는 제가 좀 알고 있습니다." 소불이는 장노인을 제지시켜며 주의를 했다. "잠깐, 여세진은 아마 사람을 파견해서 우리 뒤를 쫓을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뒷산으로 가더라도 지금 이런 방법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가야 합니까?" 소불이는 장노인에게 몇 마디 귓속말을 한 다음, 여러 사람들과 함께 소석윤을 나왔다. 그리고 장노인하고 손녀들과 헤어지는 틈을 잡아서 소불이와 당승무는 몰래 떠나갔다. 장노인은 아란과 아국을 데리고 평상시의 외출처럼 소석윤 마을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어 그는 문단속을 한 다음에 방 안에 불을 켜서 잠자리를 준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불이 꺼져 마치 그들은 정말로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소불이와 당승무 두 사람은 장노인과 헤어진 즉시 경공술을 시전해서 어둠 속을 달렸다. 하지만 약 일 리쯤 그대로 달려가다가 방향을 바꾸어 장노인의 숲 뒤에 숨었다.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장노인과 두 손녀가 집 뒤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와 숲 속에서 소불이와 당승무를 만났다. 일행은 그대로 어두컴컴한 숲 속을 정신없이 달렸다. 그리고 하나 의 작은 산을 넘어가서야 추격하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는 아국이 참 지 못하고 물었다. "소노선배님, 여세진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간 것을 알면서 왜 사람을 파견해서 뒤를 따르지 않죠? 그렇다면 우리를 그냥 놓아주는 것인가요?" 소불이는 숨을 돌리며 히죽 웃었다. "네 할아버지와 너희들이 집에 돌아가서 잠자는 것을 보면 소노반의 실종에 대해 초조해 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또 소노반이 실종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여세진은 아마도 너희의 행동만 잘 감시하면 문제없이 소노반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어찌 이 좋은 기회를 놓치겠느냐?" 아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노선배님의 말씀이 맞아요." 이때 장노인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소나으리,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깐! 지금은 아직 사경도 못되었으니 주위를 분간하기 힘들 것이오. 그래서 그들이 단서를 잡기엔 약간 어려울 것이니 지금 당신네들은 �먼저 십 리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오. 나는 여기서 날 이 밝은 후에 즉시 달려가겠소." 당승무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소노장께서는 혼자 여기에 남아 있을려고 하십니까?" 소불이는 즉시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그동안 지하 출구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무슨 단서를 발견할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거라." 장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동을 인솔했다. "그러지요. 그렇다면 노제와 손녀들은 먼저 가 있겠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그들은 즉시 헤어졌다. 산 뒤는 매우 험했다. 조잡한 산악의 기복 때문에 길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길을 잃기에 꼭 알맞았다. 장노인은 젊은 시절에 이곳에서 사냥을 했기 때문에 약간의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때는 깊은 밤이라 숲 속의 자란 풀들은 사람의 키를 덮으니 이들은 할 수 없이 위험한 협곡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당승무는 전에 방통의 진전을 받았고, 요사이는 또한 소불이의 가르침을 받아서 이런 길을 지나는데는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아란과 아국은 이런 험난한 길을 걸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가끔씩 비명을 울리곤 했다. 겨우 반 시진을 가서야 그들은 몇 개의 산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란과 아국은 벌써 땀에 흠뻑 젖는 등 지쳤기 때문에 일행은 계곡 옆에서 앉아 휴식을 취했다. 조금 지나자 날은 완전히 밝아졌다. 일행은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계곡의 물로 얼굴을 씻었다. 그러나 해는 높이 떠올랐는데도 여전히 소불이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행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바로 이 순간, 맞은편 숲 속에서 갑자기 하나의 인영이 마치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 인영은 순식간에 일동의 앞에 우뚝 섰다. 바로 소불이였던 것이다. 장노인은 반가운 마음에 급히 물었다. "소나으리는 어떤 단서를 발견해 내었습니까?" "소불이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숨돌릴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렇소. 어제는 지하 출구에서 독이 발라져 있는 소철산(小鐵山)을 찾았소. 그러니 소노반은 여세진에게 납치당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증명할 수 있게 되었소. 그리고 또한 북쪽에 있는 한 나무 밑에는 이쪽 방향을 가리키는 신호도 있었소." 장노인은 기쁜 빛을 띠며 즉시 앞으로 나갈 자세를 취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즉시 가야하겠군요." 소불이가 급히 소리쳤다. "잠깐, 아까 내가 보기로는 지하 출구에서 발견한 기호는 이쪽을 가리키고 있었소.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다시 여기서 기호를 찾아보아야 하오." 장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서 찾아 봅시다." 소불이는 장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사방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산허리 쫌에 있는 하나의 큰 돌 아래에 시선을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당승무가 가까이 다가오며 급히 물었다. "소노장, 암호를 발견했습니까?" 소불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거석을 한참 관찰하더니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상하다. 이 암호는 두 사람이 한 것 같은데……." 당승무가 다시 물었다. "방향이 다릅니까?" "아니다. 방향은 똑 같다." 이때 장노인이 가까이 다가오며 급히 말했다. "방향만 같으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갑시다." 장노인은 소노반의 신변을 매우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하여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불이는 할 수 없이 길을 인도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과연 교차로가 있는데 하나의 암호를 찾을 수 있었다. 소불이는 암호의 길을 따라 가면서 두 가지의 다른 암호를 발견했다. 하나는 정수복이 말한 홍채문의 암호였고, 다른 하나는 강호 사람들의 보통 기호였다. 홍채문의 암호는 거의가 전부 은밀한 데 감추어져 있었고 보통 암 호는 눈에 잘 띠는 곳에 있었다. 그러니 누가 지나가기만 하면 그 암호는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소불이는 이 암호를 보자 순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강호 사람들은 자기네 편만 알아볼 수 있도록 아주 은밀하게 암호를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암호들은 전부 다 눈에 쉽게 띠는 것이 아닌가. 이것에 다만 한 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 암호는 자기네들을 유인하려고 그린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들은 효산 산맥의 중심에 와 있었다. 인가는 약간씩 볼 수 있었고 푸른 산야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다시 일행은 그날 정오까지 쉬지 않고 달려 아마 백여 리쯤 갔다. 그리고 또 두 개의 산령을 넘자 지세는 더욱 험해졌고 사방은 전부 깎아지른 듯한 절벽 뿐이었다. 소불이는 다시 암호를 찾아 그 암호가 서북쪽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는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아마 여기가 종착역인 것 같다. 그러니 신중을 기해야 되겠다." 소불이는 사방의 지세를 살펴본 후에 일동에게 낮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벌써 다 왔으니 모두들 병기를 꺼내 만일을 대비한 후 나를 따라 오너라!" 아란과 아국은 이 말을 듣자 즉시 긴장을 느껴 아란은 한 손으로 검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침통을 꺼냈다. 아국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병기를 쥐고 마치 대적을 맞이하는 것처럼 사방을 살폈다. 소불이도 여의금사를 꺼내 들고는 발끝을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 가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원숭이를 보는 듯 했다. 소불이는 계곡 입구에 와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걸음을 멈추어라." 깜짝 놀란 장노인이 급히 발을 멈춰 보자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두 명의 청의대한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장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부르짖었다. "홍채문파의 사람 같습니다." 소불이는 즉시 앞장 서 걸었다. "빨리 가서 살펴 봅시다?" 계곡 안은 잡림이 무성하게 자라 사람의 무릎까지 왔다. 소불이는 잡림을 헤치고 두 사람의 곁까지 왔다. 두 명의 청의대한은 허리에 홍대를 두르고 있었고, 수중의 장검은 두 동강이 난 채 모두 목에 상처를 입어 보기에도 처참하리만큼 비참하게 죽어 있었다. 당승무는 장노인의 뒤에서 이 모습을 보고 즉시 소리쳤다. "바로 홍채문파의 문하입니다?" 그는 굽혔던 허리를 펴며 낮게 부르짖었다. "그렇다. 그 소문주는 벌써 우리보다 앞서 여기를 지나친 모양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죽은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으니 우리도 빨리 뒤따라 가자!" 일행은 급히 숲을 헤치고 십여 발자국을 갔을 때 또다시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이들 역시 모두 상처가 목에 있었다. 소불이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하고 더욱 걸음을 빨리 놀려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계곡 입구에 다다르자 풀 속에 또 두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소불이는 미간을 굳히며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홍채문파 소문주의 시종 여섯 명은 전부 다 피살을 당했구나!'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멈추고 위를 보자 산악 입구에 있는 하나의 암석에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제갈명 혼자만이 이곳에 들어올 수가 있다!' 소불이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다시 생각했다. '그렇구나. 이곳에 제갈명이 혼자 들어간 후 그 여섯 명의 시종은 모두 그 사이에 피살을 당했구나.' 소불이의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발견한 홍채문의 암호는 제갈명이 남긴 것이고, 나머지 암호는 바로 제갈명을 여기까지 유인하려고 남긴 것이었다. 소불이는 다시 급급히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필경 상대는 여기다 무서운 강적을 매복시키고 제갈명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제갈명이 제아무리 무공이 높다 해도 독 안에 든 쥐가 틀림 없을 것이다.' 소불이는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즉시 계곡 안을 향해 걸어갔다. 이 계곡은 마치 작은 산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여러 가지 암석들 이 길을 막고 있었다. 일행은 기복이 심한 암석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여러 가지 괴이하게 생긴 암석들이 많아서 앞을 보아야 겨 우 일 장 정도 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소불이는 암중으로 약간의 공포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정말 위험한 살세구나." 소불이는 내심 매우 경계를 하구 있었기 때문에 발걸음은 비록 느렸으나 그는 사방의 사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이렇게 일행이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을 걸어오자 벌써 협곡은 끝이 나고 시야가 확 트이더니 하나의 무성한 밀림이 나타났다. 소불이는 앞장을 서서 걷다가 무엇인가를 발견했는지 조심스럽게 외쳤다. "빨리 내 뒤를 따라 오너라?" 그러면서 급히 밀림을 헤치고 날아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급히 그 뒤를 따랐다. 밀림의 밖은 넓다란 잔디였다. 그런데 거기에 바로 제갈명이 장검을 옆에다 두고 무엇을 생각하며 서 있었다. 제갈명의 몸 뒤와 앞에는 여덟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는데 모두 허리가 두 동강이 나서 죽어 있었다. 땅에 뒹굴고 있는 병기들도 모두 부러진 것들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곡 안의 매복자들은 전부 제갈명에게 죽은 것 같았다. 소불이는 밀림에 몸을 숨기며 마음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상대는 제갈명을 여기까지 유인했으면 반드시 강적을 안배해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갈명의 실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이런 몇 놈의 조무라기를 보내 죽음을 당하게 만든단 말인가!' 이때 아국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 소문주께서는 아마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데요?" 장노인은 얼굴을 굳히며 손가락을 입에다 갖다 대었다. "쉿! 소리내지 말아라?" 장노인 역시도 아국의 말을 듣자 마음 속으로 생각을 굴려 보았다. '그렇다. 제갈명이 검을 놓고 서 있는 것을 보니 분명히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바로 그 순간 하나의 그림자가 산길을 따라 화살같이 날아왔다. 그 인영은 극히 빠른 신법으로 순식간에 벌써 풀 밖까지 달려 왔다. 여러 사람들이 신경을 곤두세워 자세히 보자 그 인영은 황의를 입은 아름다운 낭자였다. 그녀가 날아온 경공술만 보더라도 그녀의 무공이 어떠한가를 모두 짐작할 수 있었다. 소불이는 내심 크게 놀라 중얼거렸다. "아니! 저 낭자는 누구인가……." 이들은 모두 숲에 바싹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는 볼 수가 없었다. 소불이는 고개를 치켜들며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의 형세는 죄다 괴이한 일 뿐이구나. 가만 장노인과 나머지는 모두 여기에 있거라. 내가 나가서 살펴보고 올 터이니……." 소불이는 말을 끝내자 진기를 한 모금 끌어 올리더니 마치 한 마리의 뱀처럼 기어가는 것이었다. 그의 별호가 설상무영이니 그 또한 경공이 어떠한가를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었다. 이때 소불이는 제갈명과 약 삼 장 정도의 거리를 남겨 두고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움직이지 않고 굳은 채 정지했다. 계곡의 변 제갈명은 싸늘한 눈초리로 방금 날아온 황의낭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불이가 자기의 몸 앞 석 장 정도의 거리까지 왔어도 제갈명은 여전히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때 황의낭자는 자기의 모든 실력을 다 발휘해서 달려왔음인지 제갈명의 앞에 서자마자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을 심하게 요동시켰다. 제갈명은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황의낭자를 응시했다. "낭자, 혼자서만 왔소?" 동시에 황의낭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들은 전부 당신이 죽인 것이예요?"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황의낭자는 다시 새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정이 담뿍 담긴 어조로 물었다. "소협, 아직도 저를 기억하고 있어요?" 제갈명은 냉소를 치며 지나가는 말처럼 대꾸했다. "낭자는 자의문하의 나국영 낭자가 아닙니까?" 나국영은 즉시 기쁜 빛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저를 기억하고 계시다니 정말 기뻐요." 그리고는 문득 생각난 듯 급히 말했다. "제소협, 당신 빨리 이곳을 떠나세요?" 그러나 제갈명은 비웃는 듯한 경멸스런 표정을 띠었다. "흥! 낭자께서 악독한 암기를 매복시키고 나를 여기까지 유인한 이유가 바로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였소?" 나국영은 꼭 무엇에 쫓기는 듯한 모습으로 연신 뒤를 돌아보며 당황해 했다. "제가 그들에게 매복하라고 시킨 것이 아니예요. 아무튼 제소협, 빨리 이곳을 떠나세요." "그렇다면 누가 나를 여기까지 유인했소?" 나국영의 신색은 매우 초조했다. 그녀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묻지 마시고 빨리 가세요. 지금은 그것을 설명할 여유도 없거니와 늦으면 안 됩니다." 이때 소불이가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혹시 저 낭자의 뒤에 무서운 고수가 좇아오는 것은 아닐까?' 제갈명은 들은체 만체 하며 날카롭게 힐책했다. "나는 많은 힘을 들여서 겨우 동사도의 사람을 만났고 그리고 또 한 낭자께서도 염교주의 적전(嫡傳) 제자이니 나는 오늘 기필코 가르침을 좀 받아야겠소. 지금 내가 묻는 말에 분명히 대답하시오. 염교주는 삼 년 전에 무슨 수작을 부렸으며 또한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리고 또 동사도에 간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됐습니까?" 나국영은 연신 초조해 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어 그녀는 자루 뒤로 시선을 보내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 "제소협, 그만 하시고 저를 믿고 빨리 떠나시라니까요!" 그러나 제갈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 나를 빨리 가라고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요?" 나국영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지금은 뭐라고 말할 시간이 없으니 제발 제 말을 믿고 빨리 떠나세요." "낭자께서 저더러 자꾸 가라고 하는 이유는 어떤 무서운 인물이 뒤쫓아 오고 있다는 말이오?" 나국영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제소협, 제 말을 믿어 주세요." 그러자 제갈명은 갑자기 산 속이 떠나가듯 껄껄거리며 웃었다. "으하하하하……, 하하하…… 낭자의 호의는 매우 감사합니다만 염지천 자신이 몸소 온다고 해도 나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꼭 겨루어 볼 생각이오?" 나국영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몹시 떨고 있었다. "안돼요! 제소협,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급히 안색이 돌변했다. "앗! 왔어요. 빨리 가세요. 빨리……." 소불이는 그녀의 말을 따라 앞을 보니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흑색 가마를 멘 두 명의 대한이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소불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가마 속의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순간 나국영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제갈명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아아……벌써 늦었어요. 그러나 빨리 숲 속에 들어가 숨으세 요? 제갈명은 나국영이 잡았던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 제갈명은 사내대장부요. 절대 비겁하게 남을 피하지는 않소." 제갈명이 나국영의 손을 뿌리친 힘은 비록 세찬 것은 아니었지만 나국영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 그러자 나국영은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재빨리 숲 속을 향해 치달았다. 제갈명은 약간 미안한 듯이 나국영의 뒤를 눈으로 쫓으며 가볍게 탄식을 했다. 바로 이 순간, 옥색 가마는 벌써 숲 앞까지 왔다. 가마를 메고 왔던 두 명의 대 한은 가마를 잔디 중앙에다 내려 놓았다. 하지만 흑색 가마는 잔디에 내려 놓은지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소불이는 마음 속으로 크게 걱정을 하였다. '이 가마 속에는 반드시 기이한 물건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무슨 독물로써 제갈명을 살해할지도 모른다.' 소불이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제갈명은 숲이 떠나가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 제갈명, 여기에 왔으니 쓸데없는 짓은 삼가고 빨리 나오너라!" 그러나 흑색 가마 속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이 조용했다. 이 가마를 메고 온 두 명의 대한은 잔디에 일 장쯤 떨어진 암석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기네들의 임무는 가마를 메고 온 것 외에는 없다는 것 같았다. 제갈명은 여전히 가마 속에서 대답이 없자 즉시 버럭 화를 내었다. "가마 안의 사람은 잘 들어라! 만약 이번에도 나오지 않는다면 나 제갈명은 가만 두지 않겠다!" 이어 그는 수중의 장검을 높이 쳐들고는 큰 걸음으로 가마를 향해 걸어갔다. 소불이는 나무 뒤에 숨어 이 광경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니, 저런, 소문주는 정말 강호의 경험이 부족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를 제지하려던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갈잎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 갈잎 피리 소리는 음산하여 마치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것처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 처량하게 이어졌다. 이때 소불이가 깜짝 놀라며 귀를 곤두세웠다. '아니, 이 피리 소리는 대체 어디서 들리는 것일까!' 제갈명도 이상한 듯이 사방을 둘러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누가 감히 이 제갈명의 앞에서 장난을 하는 거냐?" 제갈명의 대갈일성이 끝나기도 전에 가마에서는 약간의 파동이 일었다. 그리고 가마 앞에 늘어져 있던 휘장도 들썩였다. 제갈명은 경악을 느끼고는 매서운 눈초리로 가마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무 뒤의 소불이도 숨을 죽인 채 이 광경을 주시했다. 이때 흑색 가마의 휘장이 서서히 새하얀 손에 의해 젖혀지고 머리 가 하얗게 센 청의부인이 가마 안에서 천천히 잔디로 걸어나왔다. 바로 이 순간, 제갈명의 반가운 음성이 온 산에 메아리쳤다. "어머니?" 그는 벌써 수중의 장검을 내던지고 청의부인 앞에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이것을 본 소불이는 암중으로 매우 기이하게 생각했다. '이 청의부인은 홍채문파도 아닌데 어째서 소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청의부인은 말씀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서서히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제갈명은 두 눈에 가득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소리쳤다. "어머님?" 소불이는 제갈명이 그녀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는데도 청의부인의 차가운 안색은 조금도 변화가 없고 게다가 또 오른손을 치켜드는 것을 보자 즉시 전음술로 외쳤다. "소문주, 조심……." 소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의부인의 손바닥이 즉시 제갈명의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 청의부인이 손을 쳐들 때는 매우 느렸지만 손을 내리칠 때는 매우 빨랐다. 제갈명은 다시 고개를 쳐들려고 하던 순간에 갑자기 머리가 천근 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 제갈명은 외마디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두 눈을 감더니 즉시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청의부인은 자기가 내려친 일 장이 자기가 한 소행이 아닌 듯 심지어 제갈명이 쓰러진 것도 모르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 그 귀신의 울음 같은 갈피리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의 소리는 부드러워 사람으로 하여금 평온한 마음을 갖게 했다. 청의부인은 그 피리 소리를 듣자 다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가 가마의 휘장을 제치고 서서히 안으로 들어가 휘장을 다시 내렸다. 소불이는 이 광경을 보자 몹시 기이하게 생각했다. '이 부인의 행동은 마치 저 갈피리 소리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 같군.' 동시에 암석 위에 있던 두 명의 대한은 즉시 빠른 동작으로 달려가 가마를 메더니 오던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그러자 장노인이 소불이 옆으로 다가오더니 낮은 소리로 물었다. "저 소문주도 그 부인에게 살해를 당했습니까?" 소불이는 침중하게 얼굴을 굳힌 채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오늘 일은 아주 기이한 것 뿐이니 우리 잠시 후에 얘기합시다." 이때 갑자기 숲 속에서 나국영이 뛰어나오더니 단숨에 제갈명의 몸 옆에 달려와 쓰러졌다. "제소협, 제소협…… 왜 제 말을 믿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나요? 제갈명, 제갈명……" "나국영은 미친 듯 울부짖으며 제갈명의 얼굴에다 자신의 얼굴을 비벼대었다. 소불이는 나국영의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 뛰어 나가려다가 나국영이 제갈명의 얼굴을 감싸안고 슬피우는 것을 보자 일시간에 몸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 제갈명을 껴안고 슬피우는 나국영의 등뒤에 하나의 남의인이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남색 장삼을 입고 있는 이 사나이는 나이가 약 이십오 세 안밖으로 보였고, 협소한 얼굴에 섬광이 번쩍이는 두 눈, 그리고 붉은 입술이 약간 영준하게 생겼다. 이 남의인은 나국영의 등 뒤에 서서 매우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치고 있었다. 소불이는 그 사나이를 보자 다시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나이도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무공이 벌써 삼승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것 같으니 대체 누구일까?'나국영은 한참동안 제갈명의 몸을 끌어안고 떠나려고 하다가 돌 연 뒤에 서 있는 남의인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즉시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제갈명의 목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급히 얼굴을 돌리고 눈물을 닦더니 억지로 침착하게 태연을 가장했다. "대사형께서는 언제 오셨어요?" 남의인은 냉랭하게 웃었다. "조금 아까……" 나국영은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그를 묻어 드리겠어요." 그러자 남의인은 크게 냉소를 날렸다. "흥! 셋째 사매는 정말 정이 많소이다. 이 제가놈은 당신과 어떤 사이오?" 나국영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급히 변명했다. "소매는 아까 그가 자기 모친의 손에 죽는 것을 보고 마음이 좀 아팠기 때문에 무덤이나 만들어 주려던 것이었어요." 그러나 남의인은 다시 냉소를 치더니 두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흥! 셋째 사매, 나를 속이려 하느냐?" 나국영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돌 눈에 감출 수 없는 당황의 빛이 서려 있다는 것을 남의인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아니, 소매가 무엇을 속였나요?" 남의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만약 사매가 이 제가놈을 짝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아까 이놈을 끌어안고 그리 슬피 울었느냐? 더구나 내가 등 뒤에 와 있는 것까지도 모르고 말이다?" 순간 나국영은 하얗게 질려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소…, 소매는 다만 그의 신세가 기구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예요." "그럼 사매가 아까 가마 앞으로 달려온 것도 그의 신세가 기구하기 때문에 그러느냐?" 나국영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였다. "아니예요. 저도 금방 왔어요." 남의인은 점점 무서운 얼굴이 되어 얼음장같이 싸늘한 눈매를 굴렸다. "흥, 내가 보지 못했을 줄 아느냐? 아까 네가 이 제가놈보고 빨리 떠나라고 했을 때 그가 네 말을 들었더냐?" 나국영은 이 말을 듣자 억지로 침착한 척하며 시치미를 떼었다. "무…… 무슨 말씀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남의인은 싸늘하게 눈을 흘겼다. "셋째 사매, 너는 외인과 내통하는 것이 본문의 어느 금계를 범했는지 알고 있느냐?" 나국영은 순간 움찔하며 뒤로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서더니 울음섞인 어조로 더듬대었다. "저… 저는 위배한 적이 없어요." 남의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음흉하게 웃었다. "그럼 좋다. 이 제가놈의 머리를 잘라서 어서 나를 따라오너라." 나국영은 이 말을 듣자 절로 몸을 부르르 떨더니 미친 듯 소리쳤다. "그는 벌써 자기 어머니의 손에 목숨을 잃었는데 대사형께선 무엇 때문에 그의 시체까지 가만 두지 않으려는 것입니까?" 남의인은 흰 이빨을 드러내며 사악하게 웃었다. "오냐,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러더니 그는 앞으로 썩 나서며 칼을 뽑았다. 이 순간 나국영은 안색이 마치 납덩이처럼 변하더니 제갈명의 앞을 막으며 애원했다. "대사형, 이러지 마세요. 제발 부탁이예요." 그러나 남의인은 보기에도 소름이 끼칠 만큼 냉막하게 웃었다. "너는 그래도 그의 앞을 막을테냐?" 나국영은 어느새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마주 쥐었다. "대사형, 사람이 죽으면 그 원한도 잊는 법이니 그의 시체만이라도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순간 남의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의 시체를 건드리지 않는 대신 내 조건을 들어 주겠느냐?" 나국영은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무슨 조건인가요?" 남의인은 나국영의 앞으로 한 발짝다가서며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흐…… 너도 잘 알 것이다." 본문은 남제자가 배반을 하면 두 눈을 뽑고 혓바닥을 자른 다음에 뱀으로 그의 심장을 뜯게 한다. 그러나 여제자가 배반을 할 경우에는 그녀의 무공을 제거하고 본문의 무사들에게 보내어 마음대로 농락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네가 만 일 내 조건에 승낙을 한다면 내 오늘 일에 대해선 눈감아 주겠다." 나국영은 그 소리를 듣자 수중의 장검을 빼들더니 앙칼지게 외쳤다. "듣기 싫어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남의인은 순간 움찔하며 두 눈을 찢었다. "넌 나와 싸울 작정이냐?" 나국영은 장검으로 가슴을 막으며 땅에 쓰러져 있는 제갈명을 원통한 듯이 내려다 보았다. "제소협, 이 나국영은 비록 당신과 한 번 밖에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당신이 모친의 손에 목숨을 잃고 저 또한 당신을 도와주지 못해 죽은 시체까지도 거둘 수 없으니 저도 당신을 따라 죽겠습니다." 나국영은 절절히 정에 사무친 말을 내뱉으며 장검으로 자기의 목을 그어갔다. 남의인은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광소를 터뜨리며 자기의 검으로 나국영의 검을 쳤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나국영의 검은 멀리 날아가고 그녀 역시 일 검을 맞아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남의인은 쓰러진 나국영의 앞으로 다가가며 음산하게 웃었다. "이년, 네년이 이 규율을 어겨 본문의 무사들에게 농락을 당하게 함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형제지간이니 좋은 먹이는 남에게 주지 않는 법, 나 대사형이 먼저 맛보는 것도 응당한 일이니라 대사형이 침을 흘리며 서서히 허리를 굽혀 나국영의 옷을 벗기려던 찰나, 하나의 가벼운 바람을 실은 어떤 물체가 남의인의 뒷통수를 향해 격사되었다. 남의인의 일신의 무공은 과연 높았다. 그는 비록 지금 음탕한 생각을 갖고 있는 중에도 여전히 경각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남의인이 고개를 숙여 그 물체를 받고보니 그것은 하나의 작은 돌이었다. 남의인은 화가 치밀어 급히 뒤로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어느 누가 감히 본 공자를 농락하느냐?" 그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아까와 같은 물체가 그의 측면에서 날아왔다. 남의인은 그것을 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으로 가볍게 날아오는 돌을 튕겨내었다. 이 한 수는 정말로 고명했다. 돌이 날아가는 속도는 올 때보다 더욱 빠르게 숲 속으로 되돌아 갔다. "악" 하는 숲 속에서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림과 동시 그의 몸도 숲 속을 향해 날았다. 여기는 무성한 밀림이었다. 그가 번개같이 숲 속을 훑어 보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의인은 자기보다 더욱 빠른 사람이 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비성의 일격 남의인은 무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심기 또한 극히 깊었다. 그는 숲 속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자 즉시 어떤 육감을 떠올리며 급히 되돌아 왔다. 남의인의 신법은 정말 바람처럼 빨랐다. 하지만 그가 밀림을 빠져 나와 되돌아 왔을 때 아니나 다를까? 이 무공이 높은 남의인을 멍청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눈 깜박할 순간에 그곳에 쓰러져 있던 제갈명과 나국영 두 사람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남의인은 싸늘한 눈동자를 굴리며 왼쪽의 밀림을 향해 크게 소리 쳤다. "지금 순식간에 두 사람을 운반할 수 있는 것을 보니 친구는 분명 고인 같은데 어찌 숨어서 몸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오?" "히히히, 공자나으리, 별 과분한 말씀을 다하십니다." 하며 갑자기 하나의 가느다란 음성이 남의인의 뒤에서 들려왔다 남의인은 다시 깜짝 놀랐다. 그는 분명 상대가 왼쪽의 밀림 속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남의인은 자기가 지금 절정고수를 만났다는 것을 즉시 알아 차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차가운 음성으로 외쳤다. "친구는 몸을 나타내어 왜 본공자를 만나지 않소?" 가느다란 음성이 다시 대꾸했다. "이 늙은이는 여기에 앉아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거늘 공자나으리께서 저를 보지 못했는데 어찌 이 늙은이를 탓하는 거요?" 말소리는 바로 나무 위에서 들려왔다. 남의인이 그 소리를 쫓아 올려다 보니 한 그루의 고목나무 위에 하나의 쥐눈을 가진 노인이 가느다란 고목나무 가지에 마치 말을 타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수중에는 가느다란 철사를 쥐고는 말을 모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남의인은 이 광경을 보자 비교적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귀하, 왜 내려오지 않으십니까?" 소불이는 그에게 가벼운 일별을 던지며 여전히 어깨를 들썩였다. "아니, 내가 내려가서 무엇을 하게?" 그러자 남의인은 눈썹을 곤두세우며 대뜸 차갑게 물었다. "당신은 나의 셋째 사매와 제갈명을 어떻게 했소?" 소불이는 들은체 만체 했다. "이 늙은이는 여기에 쭉 앉아 있었는데 공자나으리는 이 늙은이가 그들을 운반하는 것을 보기나 했소?" 남의인은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며 호통을 쳤다. "하하하…… 이 늙은이야!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너는 이 본공자가 누군지 모르느냐?" 소불이는 마치 무시하는 듯 그를 슬쩍 쳐다보며 대꾸했다. "공자나으리는 아마도 동사도에서 오신 것 같은데……." 남의인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즉시 소리쳤다. "그렇다!" 남의인은 입에서 이 세 마디를 뱉음과 거의 동시에 수중의 장검으로 한 줄기의 섬광을 그리며 소불이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소불이는 다만 짧은 신음 소리를 내며 준엄하게 꾸짖었다. "아니, 공자나으리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러면서 여의금사를 들어 급히 막았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남의인은 이 순간, 상대방의 보잘것 없는 철사가 하나의 무서운 철봉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검을 부딪치는 순간, 하마터면 자신의 장검을 손에서 날릴 뻔하였다. 남의인은 크게 놀라 즉시 허공에서 신형을 한 바퀴 돌려 일 장 밖으로 날아갔다. 남의인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즉시 다시 일 격을 가했다. "이 늙은이 받아랏!" 또다시 남의인의 몸이 허공을 나르자 소불이가 앉아 있던 나뭇가지는 무참히 여러 동강으로 갈라져 우박처럼 쏟아졌다. 이때 소불이는 그림자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히히히…… 말로 무서운 검법이군." 그의 음성은 여전히 공중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남의인이 눈을 치켜뜨고 자세히 살펴보자 소불이는 벌 써 다른 나뭇가지에서 여전히 본래의 자세대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남의인은 그 모습을 보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대갈일성을 지르며 치를 떨었다. "이 늙은 여우 같은 놈아! 어디 실력이 있으면 내려와 나와 정정 당당하게 겨루어 보자?" "흥! 그럴 필요까지 없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너의 실력 정도로는 이 늙은이의 제자와 붙으면 적격이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즉시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제자야, 빨리 나오너라."그러자 즉시 숲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당승무가 숲 속에서 날아왔다. 남의인은 나이가 이십 세 가량의 이목이 수려한 젊은이를 보자 한 눈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남의인은 매우 멸시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흥! 아직 애송이로군." 소불이는 여전히 나무 위에 앉아서 여의금사로 남의인을 가리키며 다시 외쳤다. "제자야, 자기의 사매까지도 건드리려고 한 놈에게 일체 사정 봐 주지 말아라?" 이때 당승무도 이 남의인이 동사도 문파의 대제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이 남의인이 동사도주 염지천의 적전제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소불이의 추측으로는 당승무의 기명사부인 염지천은 아무래도 동사도주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당승무더러 남의인과 겨루어 보라고 한 것이었다. 당승무는 땅에 내려서자 즉시 소불이에게 공손히 읍을 했다. "제자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차앙-." "하는 소리와 함께 당승무는 벌써 단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남의인도 소불이를 올려다 보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너희 사제 두 사람은 왜 한꺼번에 덤비지 않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당승무의 앞으로 다가섰다. "너, 조심해라?" 그와 동시에 남의인의 장검이 숲 사이로 비춰 들어온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공중에 섬광을 그렸다. 이 장검이 나올 때는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그러나 검끝이 당승무의 목전까지다가오는 소리는 바람을 가르는 듯 했다. 바로 이 일 검은 초음속이었다. 당승무는 상대방의 검이 목전 가까이다가오자 즉시 단검으로 맞받았다. 순간, "챙 -."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검에서 일시에 찬란한 불꽃이 튀었다. 남의인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교활하게 눈을 빛냈다. "흠, 좋은 검법이로구나?" 이어 당승무는 다시 남의인의 일 초를 받았다. "챙!" 하는 두 번째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두 사람 다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두 사람은 이 초를 교환하고 나서야 실력이 막상막하라는 것을 알았다. 남의인은 평상시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구대 문파까지 그의 한 눈에도 차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상대방이 자기와 막상막하를 이루는 것을 보자 벌컥 화를 내고는 바람을 가르는 무서운 소리를 내며 연속으로 절학을 시전했다. 그러자 당승무도 오른손의 검으로 상대방의 장세를 받아 즉시 왼손으로 삼 장을 내리쳤다. 당승무의 초식은 몹시 기이하고 매서웠다. 두 사람은 이렇게 벌써 십여 초를 교환했으나 그 누구도 승세를 잡지 못했다. 남의인이 시전하는 검세는 극히 기이하고 독랄했다. 그리고 검술 상의 공력 또한 당승무보다 깊고 오묘했다. 그렇지만 당승무는 검을 연마한 기간이 짧기 때문에 많은 변화를 응용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검과 장을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남의인의 깊은 검세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의인은 싸울수록 분통이 치밀어 올랐으며 그럴수록 더욱 살기가 뻗쳤다. 이어 수중의 장검으로 거센 파도처럼 쉬지 않고 당승무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이 연속적인 맹공은 과연 위력이 대단했다. "챙! 챙! 챙!" 하는 검이 세 번 연달아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당승무의 단검은 어느새 옆으로 튕겨나갔다. "얏! 죽어라!" 하는 남의인의 외침 소리와 함께 최후의 일 격이 당승무의 가슴을 향해 찔러갔다. 이때 안타까운 점은 당승무가 적을 대전한 경험이 적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검세가 상대방에 의해 봉쇄를 당하고 또한 상대방의 장검이 자기의 가슴을 향해 찔러오는 것을 보자 즉시 일 장을 휘둘러 쳐나갔다. 하지만 당승무의 지금 일 장은 당황한 순간에 아무렇게나 쳐나간 것이다. 그런데 이 무의식중의 일 장은 염지천이 전날 가르쳐 준 장법의 그것과 똑같았다. 또 당승무가 방통을 따라 일 년 동안 배운 것이 바로 이 수장(手掌) 공부였다. 그래서 이 일 격은 당승무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중에 흑살장력을 십성으로 끌어 올렸던 것이다. 이 일 장은 비단 염지천의 현묘한 장법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방통의 흑살장력까지도 곁들인 것이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남의인의 장검 가운데가 갑자기 부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남의인은 매우 크게 놀라 몸을 빙글 돌리더니 그 순간을 이용하여 일 격을 날렸다. 이때 나무 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소불이는 깜짝 놀라 절로 부르짖었다." 현음지(玄陰指) 바로 지금 두 쌍방의 간격은 칠팔 척 가량이었다. 당승무는 자기가 아무렇게나 격출한 일 장이 상대방의 장검을 부러뜨릴 수 있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당승무가 이 의외의 결과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상대방의 몸이 빙글 돌더니 일진의 예리한 지풍이 날아온 것이었다. 당승무는 급히 피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래서 당승무가 급히 다시 단검으로 비스듬히 공격해 들어갔다. 하나 그 순간, 그는 오른쪽 어깨가 마치 쇠망치에 얻어 맞은 것 같은 심한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당승무가 아픔을 참으며 다시 일 검을 격사해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당승무의 몸이 뒤로 벌렁 나가 떨어졌다. 이때 숲 속에 숨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아란과 아국은 즉시 안 색이 변해서 달려나왔다. 아란은 급히 당승무를 부축하며 부르짖었다. "당소협, 왜 그러세요?" 그러나 아국은 달려나오자마자 장검으로 남의인을 겨누며 악을 썼다. "이놈, 너도 한 번 죽어 보아라"이때 소불이가 아국이 남의인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급히 내려와 아국의 앞을 가로 막았다. "아국, 안 된다? 이것은 모두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지금 남의인은 부러진 장검을 들고 있었다. 그는 비록 일 격으로 당승무에게 부상을 입혔지만 그러나 그 역시 왼쪽 어깨에 당승무의 일 검을 맞아 선혈이 벌써 그의 옷자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남의인은 창백한 얼굴로 소불이를 응시했다. "귀하, 이름을 대시오?" 소불이는 이 위급한 경우에도 태연하게 키득대고 있었다. "히히히…… 너는 물론 자의문이겠지. 그러나 이 늙은이는 바로 자살문이다. 그러니 너는 빨리 없어지거라?" 순간 남의인은 냉소를 날리더니 마치 날으는 화살처럼 계곡 밖을 향해 급히 사라졌다. 아국이 매우 분한 듯 발을 구르며 항의했다. "아니, 소노선배님, 왜 저놈을 놓아줍니까?" 소불이는 다만 히히 웃으며 고개를 돌려 물었다. "참, 노제의 상세는 어떠한가?" 아란은 벌써 당승무를 편안하게 잔디 위에 앉혔다. 이때 당승무의 얼굴은 몹시 창백하고 몸도 약간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운공 조식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국은 매우 불만인 듯이 소불이를 향해 대들었다. "모두가 소노선배님 때문이예요. 도대체 남의 검법 노수(路數)를 보려고 당소협까지 부상을 입힐 필요가 없지 않아요?"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 남의인은 자의문파의 큰 제자다. 그리고 자의교주가 바로 전날 동사도주의 염지천이다. 그러나 당노제에게 검장 십삼 식을 가르쳐 준 사람도 바로 염지천이었다. 그런데 두 명의 염지천이 만약 한 사람이 아니라면 반드시 그 하나는 가짜가 아니겠느냐? 그래서 이 늙은이가 노제에게 그와 겨루게 했다. 그러니 어찌 이 시합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 그러자 아국은 약간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그럼 소노선배님은 그 사실을 알아냈나요?"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사람의 검법 노수는 완전히 달랐다. 그러니 한 사람에게 배웠다고 할 수가 없지. 그리고 남의인이 최후에 쓴 일 격으로 약간의 단서가 잡혔다." 여기까지 설명한 소불이는 문득 생각난 듯 사방을 살펴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나가라는 낭자는 어디에 있지?" 아국이 대답했다. "그녀는 벌써 갔어요." "아니, 뭐라고 그러지도 않고……?" 아국은 약간 새침해 하며 대답했다. "당소협께서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었는데도 그녀는 다만 한 번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말았어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장노인이 제갈명을 안고 숲 속에서 걸어나왔다. "이분 소문주께서는 아마 가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말에 소불이가 제갈명의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소문주의 지금 상황은 어떻소?" 장노인은 제갈명을 잔디밭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벌써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고, 가슴에만 약간의 체온이 있을 뿐입니다." 소불이는 얼굴을 침중하게 굳히고 아무말 없이 다시 당승무가 운 공하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때 당승무의 얼굴이 점점 흑갈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소불이는 깜짝 놀라 급히 물었다. "아니, 노제 왜 그러느냐?" 아국은 당승무의 옆에 바짝 앉아 고개를 저었다. "당소협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소불이는 아국을 향해 명령했다. "그의 안색을 살펴보아라." 그 순간 아국의 입에서 별안간 외마디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악!" 소불이는 급히 당승무의 앞으로 걸어가서 그의 안색을 유심히 살 폈다. 하지만 당승무의 호흡에는 별로 이상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당승무의 얼굴이 흑색으로 변한 게 무슨 극독을 맞은 것 같았다 "이상하다. 이것은 분명 독이 발작한 것이다. 그런데 현음지는 비록 음공에 속하지만 독공은 아닌데……." 이때 갑자기 아란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 소노선배님, 생각났어요." "무슨 생각이냐?" 아란은 눈망울을 굴리며 말했다. "아까 제가 당소협을 부축할 때 당소협이 품 속에서 하나의 자병을 꺼내더군요. 그러더니 한 알의 흑색 약을 끄집어 내었어요. 그래서 제가 꺼내드리겠다고 말했더니 당소협은 고개를 흔들며 독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그 약을 자기 손으로 입에 넣더니 먹었어요. 소노선배님, 그가 먹은 것이 독약은 아닐까요?" 아국은 독약이라는 말을 듣자 안색이 변해 길길이 날뛰었다. "그럼 넌 왜 진작 얘기를 않했느냐? 어째서 지금에야 얘기를 하느냐?" 아란도 안색이 질리더니 더듬대며 말했다. "저…… 저는 원래 당소협이 부상을 치료하는 약을 먹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까 소노선배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이 난 거예요. 아국은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소노선배님, 당소협이 독약을 먹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지요?" 소불이는 당승무의 얼굴이 갈수록 점점 더 굳어지는 것을 보고 그도 내심 당황했다. 이때 장노인이 이들 곁으로 걸어오며 두 손녀를 꾸짖었다. "쓸데없는 방정을 떨지 마라, 당노제가 왜 독약을 먹겠느냐?" 아국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럼 아까 먹은 것이 독약이 아니예요? 더구나 아란에게 독성이 있다고 만지지 말라고 했다는데……." 아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승무가 서서히 숨을 내쉬며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 모습을 보자 아란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아…."됐어요! 당소협께서 깨어나셨어요." 그러자 아국은 얼굴을 붉히며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원래 당소협은 독약을 먹은 것이 아니었군요." 그러면서 한 장의 면구를 건네주었다. "당소협, 이 면구를 쓰세요." 구구환원단 당승무는 면구를 받아 들자 익숙하게 다시 썼다. 그러나 소불이는 아무 말없이 한참 동안 그대로 당승무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때 당승무의 얼굴은 벌써 원래의 흥조띤 얼굴로 변하고 검은 기운이 가셨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소불이가 갑자기 웃으며 물었다. "하하하…, 노제, 자네가 먹은 것은 도대체 무슨 약인가?" 당승무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선사가 저를 위해서 만든 연공환약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상처를 치료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소불이는 웃음을 멈추고는 심각하게 물었다. "그것은 독약인가?"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재가 처음 무공을 수련할 때 선사께서 그 약을 주며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약은 아주 독하다고도 했지요. 이것은 또한 공력을 증가시켜 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 더러 한 달에 한 알씩만 먹으면 삼 년이면 완전히 독공을 연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삼 년이 지나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살 년 안에 부상을 입게 되면 한 알을 먹고 즉시 운공 조식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완전히 나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승무의 긴 설명이 끝났는데도 소불이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정말 여태껏 듣도 보지도 못한 사실이구나. 도대체 독약으로 상처를 치료할 수가 있다니……." 당승무는 자신있게 웃으며 다시 설명을 했다. "상처를 치료해 줄 뿐만 아니라 선사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몸안에 어떤 기이한 능력이 잠재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의 무공으로는 이 잠재해 있는 능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몇 종류의 독약은 이 잠재 능력을 자주 발휘시킬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독약은 비단 무공을 증가시켜 줄 뿐 아니 라 사람의 수명까지도 연장시킬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불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찬탄을 표했다. "일리있는 말이구나. 참, 존사께서 만들어주신 환약이 그런 힘이 있다면 당장 제소문주에게 한 알을 먹여 시험해 보자." 그러나 당승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저의 약환은 극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독공을 연마하지 못한 사람은 손가락 하나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아란낭자도 만지지 못하게 했지 않습니까?" 장노인은 땅에 쓰러져 있는 제갈명을 쳐다보며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소불이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제소문주는 오면서 길목에다 암호를 남겼으니 홍채문의 사람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오. 그러나 우린 비록 소문주를 치료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를 데리고 가야 합니다." 장노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나으리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그러더니 제갈명의 몸을 일으켜 안았다. "자, 그럼 우리는 가봅시다." 소불이는 앞서 걸으며 매우 안타깝다는 듯 길게 탄식을 했다. "휴……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로군……."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힘없이 계곡을 향해 걸어갔다. 당승무는 소불이의 뒤를 따르며, 그 역시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소노대, 제소문주는 정말 가망이 없습니까?" 그런데 소불이는 엉뚱하게 딴 말을 지껄였다. "아참, 아깝게도 남의 일 때문에 나낭자에게 물어보지 못하고 그 냥 보냈구나.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약간의 단서를 잡을 수가 있었을 텐데……." 당승무도 더이상 소불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소노대, 아까 제가 남의인과 싸울 때 그의 검법에서 약간 의 단서를 잡았습니까?" 소불이는 당승무의 등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노제, 안심해라. 너의 기명사부는 절대로 동사도주는 아니다." 두 사람은 이렇듯 몇 마디를 나누는 사이에 벌써 계곡 밖으로 빠져나갔다. 앞장 서서 계곡을 빠져 나오던 소불이는 갑자기 곡 밖에 있는 두 명의 청의대한을 발견했다. 그러자 일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하지만 자기네들은 아직도 남의 감시를 받고 있으니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할 수 없이 태연히 걸어나가야 했다. 이때 두 명의 청의대한은 장노인이 제갈명을 안고 나오는 것을 보자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런 다음에 여러 사람들을 쭉 훑어보더니 그들은 소불이가 우두머리라는 것을 짐작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불이에게 읍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여러분은 아마도 홍채문의 친구 같습니다." 그러나 소불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도리어 물었다. "두 분께선 어떤 가르침이라도 있으신지?" 왼쪽에 서 있던 청의인이 말했다. "저희는 부인의 명령을 받고 여기서 여러분을 기다린지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소불이는 순간 부인이라는 이 한 마디에 아까 가마 속의 청의부인 이 생각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신네 부인께서는 무엇 때문에 저희를 기다리는지?" 다시 왼쪽의 청의인이 말했다. "부인께서 저희에게 여기서 여러분을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당신네 부인이란 누구신지?" 왼쪽 청의인이 다만 가볍게 웃어 보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여러분들께선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이 말에 소불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부인께서는 어디에 계신지?" 이때 왼쪽의 청의인이 한발짝 물러나며 대답했다. "여기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계십니다." 소불이는 이미 강호의 능구렁이였다. 그는 상대가 병기를 차지 않은 것이 자기네에게 적의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약간 거만하게 두 사람을 훑어 보았다. "두 분은 어느 파의 친구요?" 이때 오른쪽의 청의인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친구께서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저희 부인을 만난 후에 물어보아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불이는 기분이 상한 듯 가볍게 코방귀를 뀌었다. "흥, 그럼 친구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왼쪽의 청의인이 다시 대꾸했다. "저희는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께서 가시겠다면 저희를 따라 오십시오." 말을 끝내자마자 두 청의대한은 어깨를 나란히하여 걸어갔다. 소불이는 할 수 없이 뒤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이 따라 가야겠군." 이때 저 만큼 걸어가던 오른쪽의 청의인이 고개를 돌리며 마치 어떤 다짐을 하듯 약간 날카롭게 소리쳤다. "우리는 이미 말을 전했으니 오시던 말던 그것온 여러분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두 사람의 걸음이 빨라졌다. 소불이는 결심한 듯 짧게 한 마디 내뱉았다. "자, 그럼 가자?" 소불이가 앞장 서 달려가자 당승무와 장노인, 아란과 아국도 각기 신법을 전개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길을 가면 갈수록 황폐한게 아까 올 때의 길은 아닌 것 같았다. 더구나 앞에 가는 두 청의대한의 걸음도 갈수록 빨라졌다. 그래서 소불이 등도 할 수 없이 진기를 끌어 올려 달리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사람들은 마치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십여 리를 달렸다. 그러나 앞에 가는 청의인들은 그래도 멈추려는 기색이 없이 계속 달리는 것이었다. 소불이는 그것을 보자 도대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진기를 끌어을리더니 단숨에 두 명의 청와인의 머리 위를 지나서 수 장 앞으로 떨어졌다. 소불이는 팔짱을 끼고는 히죽 웃으며 빈정거렸다. "두 분께선 그렇게 정신없이 서둘러 달리시니 너무 빠르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순간 두 명의 청의인은 꿈속에서도 소불이에게 그런 절묘한 경공이 있을 줄 몰랐다. 그들은 즉시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더니 왼쪽 청의인이 비교적 공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그저 명령만 받고 길을 인도할 뿐입니다. 그리고 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소불이는 상대가 온순해지자 짐짓 거만하게 물었다. "너희들 부인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 오른쪽의 청의인이 바로 앞의 숲을 가리켰다. "바로 저 앞의 숲 속에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그의 손짓에 따라 앞의 숲 속을 바라 보았지만도 대체 집이라고는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소불이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다만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제 다왔으니 길이나 인도하여라." 그러자 두 명의 청의인은 한 마디도 없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다 시 앞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에 당도했다. 그런데 소불이는 비록 무엇이라고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높이라고 암시를 주었다. 일행이 숲 속을 뚫고 들어가자 앞에 좁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그 길을 보자 한 눈에 임시로 숲을 다듬어 만든 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소불이는 진기를 잔뜩 끌어 올려 여의금사를 들고 숲 안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아무런 매복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상대방은 아마 함정을 만들어서 우리를 유인한 것 같다.' 소불이는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벌써 숲의 중앙까지 왔다. 그리고 또 여기에도 숲 속의 나무를 잘라내 하나의 공지를 만든 것이 있었다. 공지 가운데 하나의 천막이 쳐져 있고 문 앞에 휘장을 늘어뜨린 것이 무엇인가 매우 신비스러운 감을 주었다. 두 명의 청의인 중 한 사람아 갑자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천막의 휘장이 걷혀지고 한 사람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재빠르게 걸어나왔다. 이 노인의 왼쪽 눈썹 위에는 하나의 칼자국이 깊이 패여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로 외눈이었다. 노인은 나오자마자 소불이 등에게 공손히 읍을 했다. "부인께서 천막 앞에서 기다린지가 오래되었으니 여러분께서는 어서 들어오십시오." 말을 끝내고는 즉시 길을 비켜주었다. 노인은 비록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몹시 음산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소불이는 이 일을 몹시 괴이하게 생각하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 천막은 앞 뒤로 두 칸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앞 칸 중앙에는 하 나의 비단 침상이 놓여 있고, 그 침상 옆에 청의부인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의부인은 소불이를 보자 즉시 일어나 마중을 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거들떠 보지도 않고 곧장 장노인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제갈명을 주의깊게 응시했다. "제소협의 상세는 어떻습니까?" 소불이는 마음 속으로 다시 중얼거렸다. '이 소문주가 알고 있는 여자는 정말 적지 않구나.' 그러나 소불이는 겉으로 공손히 읍을 하며 대꾸했다. "부인께서는 대체 무슨 일로 저희를 만나자고 하셨습니까?" 하지만 청의부인은 흑백이 분명한 눈으로 소불이와 물음에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제갈명만 응시했다. "그의 상세가 이렇게 엄중한데 어서 침상 위에 내려 놓으시오." 이 비단 침상은 바로 제갈명을 위해 준비한 것 같았다. 장노인은 청의부인의 무례한 언동에도 아무런 말도 없이 제갈명을 침상 위에 내려 놓았다. 청의부인은 즉시 침상에 다가가더니 여러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섬섬옥수를 내밀어 제갈명의 품 속을 더듬었다. 소불이는 그녀와 제갈명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고 다만 공력을 끌어을려 옆에서 감시만 했다. 그는 만약 청의부인이 제갈명에게 가해를 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즉시 손을 쓰려고 그러는 것이었다. 청의부인은 제갈명의 가슴을 더듬고 나더니 갑자기 얼굴의 홍조가 싹 가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울음이 터질 듯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그…… 그는…… 이미 죽었어요." 이어 두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갑자기 두 무릎을 꿇더니 침상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아.…., 아…… 제소협, 당신은 너무나 빨리 갔어요. 제가 달려온 것은 당신에게 약간의 숨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고 온 것인데…… 이제는…… 이제는……." 청의부인은 몹시 슬피 목놓아 울었다. 그러자 아란과 아국도 마음 약한 여자이기 때문에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이리하여 천막 안은 즉시 처량한 분위기에 싸여 버렸다. 청의부인은 한참 목놓아 울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눈물을 닦으며 다부진 어조로 말했다. "제소협, 당신이 이미 숨을 거두었다 해도 나는 가져온 환약을 먹이겠어요. "말을 끝내자마자 청의부인은 품에서 호두만한 알약을 꺼내 껍질을 벗겼다. 그러자 그 속에서 하나의 복숭아씨만한 환약이 나왔다. 청의부인은 약을 꺼내고는 소불이 등에게 뭔가 몇 마디 하려다 말고 갑자기 환약을 자기 입에다 넣고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더니 재갈명의 입을 벌려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 허리를 굽혀 입 속의 환약을 제갈명의 입에다 넣어 주었다. 또다시 청의부인은 자신의 운기로 약이 억지로 목구멍을 넘어가게 만들었다. 이때 아란과 아국은 부끄러워 차마 그것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 순간, 침상 앞에 둘러 서 있던 사람들은 일종의 기이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소불이는 강호를 오랫동안 돌아 다녔으니 즉시 이십여 년 전 강호를 격동시킨 요상(療傷) 영약을 생각하고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구구환원단(九九還元丹)" 청의부인은 이 소리를 듣자 천천히 눈물이 글썽이는 얼굴로 소불이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먹여준 약이 바로 구구환원단이예요. 그런데 노인장께서는 이 약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소불이는 즉시 쥐눈을 치켜 뜨며 대답했다. "구구환원단이 바로 강호상의 요상영약이라는 것은 이 늙은이도 남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소이다." 청의부인은 그제야 안색을 바꾸며 침상에서 일어나 공손히 예를 취했다. "그리고 보니 잔첩이 딴 곳에 신경을 쓰느라 아직까지 노인장의 존대 성명을 여쭙지 못하였군요." 소불이는 목을 길게 뽑으여 매우 점잖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바로 소불이라고 하오. 그리고 내게는 하나의 아름답지 못한 별호가 있소. 그것은 바로…." 청의부인은 순간 깜짝 놀라며 소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즉 시 입을 열었다. "그럼 노인장께선 바로 강호상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신투 소어르신네이셨군요. 소어르신네, 이 잔첩의 실례를 널리 용서해 주세요." 소불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대었다. "허허…… 별말씀을…… 도둑놈이 신으로 변한다고 해도 천당에는 갈 수가 없지요." 아란과 아국은 이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승무와 장노인도 오랫만에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찌푸렸던 미간을 폈다. 소불이는 급히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이어 물었다. "참, 그런데 부인께서는 어떻게 칭하시는지요?" 청의부인은 즉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치며 대답했다. "잔첩은 이름하여 죽청청(公賣會)이라 합니다." 독피리 소불이는 그녀의 성이 죽가라는 것을 듣자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지금 강호상에는 죽가 성을 가진 사람이 별로 많지가 않소. 그렇기 때문에 부인께서도 반드시 고죽방(枯竹料)과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죽청청은 정색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의 바깥 어른인 죽중영(竹中英)이 바로 폐방의 방주예요."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당승무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저 여자는 남편이 있었구나. 또한 고죽방의 방주 부인이었군. 하지만 조금 전에는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갈명에게 입으로 약을 먹여 주었을까?' 이때 소불이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방주의 부인이셨군요. 귀방의 노방주는 이 늙은이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소. 그리고 조금 전 애꾸눈인 현단(玄丹)을 보았을 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소."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불이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또한 듣자하니 갈무구(葛無求)는 구구환원단(九九還元丹)을 평생 동안 열두 알 밖에 만들지 못했으며, 마치 조상처럼 모시고 있다고 하더군요. 뿐만 아니라 그는 귀방의 노방주에게 세 알을 주었으니 아마 지금 세상에서 귀방파만이 구구환원단을 가지고 있을 것이오." 죽청청은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귀방에도 지금은 다만 최후의 한 알 밖에 남지 않았어요." 죽청청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소불이를 주시하며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노인장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소불이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빙긋이 웃었다. "이 늙은이는 귀방의 방주에게 친히 둘은 적이 있소. 옛날에 신의(神醫) 갈무구는 구구환원단을 만들려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십팔 가지의 진귀한 영약을 얻었지만 꼭 한 가지 죽보(竹寶)를 얻지 못했었다고 했소. 그래서 그는 귀방에 죽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몸소 죽산에 가서 노방주에게 요구를 했으며 노방주께서는 그가 단약(丹藥)을 만든다는 소리를 듣고 귀방에서도 하나 밖에 없는 죽보를 즉시 주었다고 하더군요." 소불이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이후부터 두 사람은 막연한 친구 사이가 되었으며 당시 갈무구는 한 번에 최소한도 백 알 이상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알고 약을 만든 후에 귀방에게 사분의 일을 준다고 했었소. 하지만 열두 알 밖에 만들지 못하자 귀방에 세 알 밖에 주지 못했던 것이었소." 죽청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노인장의 말씀이 맞아요. 저도 남편에게 전에 들은 적이 있어요." 이어 소불이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중요한 일이라도 떠오른 듯 급히 입을 열었다. "소노인장?" 하지만 그녀의 말을 꺼내려 하던 입술이 갑자기 다물어져 버렸다. 그러자 소불이는 궁금한 듯 급히 물었다. "부인께서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시오?" 죽청청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소불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제가 소노인장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요." 소불이는 여전히 궁금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를 주시했다. "무슨 부탁인지 어서 말씀을 해보시오." 죽청청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소노인장 일행께선 제소협을 호송하였으니 반드시 제소협을 친구로 믿고 있었겠군요." 소불이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을 받았다. "그렇소. 이 늙은이의 목숨도 제소혐이 구해준 것이니 물론 친구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죽청청은 여러 사람을 한 번 바라보더니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삼 년 전, 사문이 대난을 당했을 때 제소협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저는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폐방도 바로 제소협이 간인의 음모를 폭로시켰기 때문에 다행히 보전하게 되었지요.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어제 저녁, 제가 받은 보고에 의하면 염대신(閻大宸)이 효산에 온 것은 음인을 시켜 제소협과 상대를 하게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소불이는 깜짝 놀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음인……!" 소불이는 비록 수십 년 동안 강호를 떠돌아 다녔지만 이런 이상한 이름은 처음 들었던 것이다. 죽청청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폐방의 수하가 탐지한 소식에 의하면 이 음인이란 아주 무섭다고 하더군요. 또한 아무리 절정 고수라고 할지라도 그를 만나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어요." 소불이는 아까 한 청의부인이 갈잎 피리 소리의 지휘에 따라 죽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였던 것을 생각하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등골이 오싹해옴을 느꼈다. 죽청청은 소불이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비록 그들이 보낸 음인이 대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지만 기왕 소식을 받았기 때문에 제소협에게 통지를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급히 달려 왔지만 때는 이미 늦었어요. 하지만 다행하게도 자의문하의 사람들이 염대신의 명령을 받고 물러가는 것을 제가 그 중 한 명을 잡고 심문을 해본 결과 제갈명은 벌써 음인의 손아래 당하고 또한 홍채문의 사람에 의해 구해졌다는 것을 알았지요." 소불이 등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죽청청은 손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까지 말한 것은 이번 일의 경과일 뿐 진짜 부탁은 다른 것이예요." 소불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부인께서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어서 말씀을 하시오. 만약 이 늙은이에게 힘이 있다면 반드시 도와 드리겠소." 죽청청은 빙긋이 웃으며 허리를 약간 굽혔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감사를 드리겠어요." 소불이는 좀 멋적은 듯 급히 손을 저었다. "부인! 그러지 마십시오. 무슨 일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오." 죽청청은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운 채 소불이를 응시했다. "노인장께서는 구구환원단의 이름을 알고 계시니 물론 원래의 명칭도 알고 계시겠군요." 소불이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빙긋이 웃었다. "이 늙은이는 확실히 모르고 있지만 원래 신의 갈무구가 그 당시 지은 이름이 바로 백초회춘단(百草回春丹)이라고 다른 사람들한테 들은 것 같소."죽청청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노민장께서는 백초회춘단의 효용을 아시나요?"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강호상에 의하면 중상을 입고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흘만 넘기지 않고 그가 만든 백초회춘단을 복용하면 살아날 수가 있다고 했소." 죽청청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였다. "맞아요. 하지만 아까운 것은 갈신의께서 이십 년 동안 명산대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십팔 가지의 영약을 찾았으나 원래의 목표보다는 두 가지가 모자랐다는 점이예요." 죽청청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귀방에 하나 밖에 남지 않았던 죽보였으며 바로 죽보는 전신의 골절을 통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예요. 또한 백초회춘단 중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환혼초(還魂草)이예요. 그것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효용을 가지고 있었으나 갈신의께서는 끝까지 그것을 찾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는 환혼초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구구환원단으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원래 그렇게 됐군." 죽청청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갈신의께서는 이름을 무구라고 하며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나한테 한 번도 부탁을 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선옹(先翁)께서 죽보를 받을 때에도 단약을 만든 후에 사분의 일을 드리기로 했었어요. 그것 때문에 그는 이 년 후 죽산에 와서 세 알의 구구환원단을 주는 동시에 선옹과 막연한 친구가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자주 죽산에 오고 있어요." 소불이 등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제가 한 말들은 모두가 폐방의 방주에게서 들은 것이예요. 그리고 후에 갈신의께서는 삼 년이 지나도록 찾아 오지를 않았나 봐요. 하지만 선옹이 돌아가시던 해에 그가 갑자기 죽산에 와서 선옹이 돌아가신 것을 알자 몹시 안타까와 했어요. 또한 갈신의께서는 쪽지 하나를 저의 남편에게 건네주며 영존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몹시 유감스러울 뿐이라며 하지만 이 종이 쪽지를 잘 보관해 두고 만약 이 다음에 구구환원단으로 효과를 보지 못할 때에는 즉시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대요." 소불이는 여기까지 듣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참지를 못하고 급히 물었다. "지금 부인의 뜻은 이 늙은이한테 갈신의를 찾으라는 것이오?" 죽청청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지금 이 숲 속에다 폐방의 고죽진법(枯竹陳法)을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아무리 강한 적이라 할지라도 쳐들어 올 수 없게 되어 있어요. 뿐만 아니라 원래 여기는 제소협의 상세를 치료하는 곳으로 쓰려고 했었지만 지금 제소협은 가슴에 약간의 열기가 있는 것 이외에는 온몸이 벌써 싸늘히 식었으니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구구환원단도 아마 효과를 보지 못할 것 같아요." 죽청청은 하나의 종이 쪽지를 꺼내더니 소불이에게 건네주며 침 중하게 이어 말했다. "이것은 갈신의께서 남기신 지도예요. 그리고 그는 바로 종남(終南)의 호로곡 안에 계세요." 소불이는 이 말을 듣자 선뜻 말을 받지 못하며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여기서 종남까지는 몇 백 리의 길이 되기 때문에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할지라도 사오 일은 걸려야 갈 수가 있을 텐데…… 하지만 지금 제소문주(諸小門主)의 몸이 벌써 식어가고 있으니 며칠이나 견딜 수가 있을지." 죽청청은 소불이가 주저하고 있자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발을 굴렸다. "노인장께서 보시기에는 제소협이 가망이 있을 것 같은가요?" 소불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종남에까지 가려면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할지라도 며칠이 걸릴 것 같은데…… 그동안 제소문주가…" 죽청청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말을 가로챘다. "조금 전에 제가 그에게 구구환원단을 먹였기 때문에 만약 그에게 조금의 숨이라도 붙어 있다면 아마 사흘 정도는 지탱할 수가 있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노인장께서 사흘 안에 호로곡을 찾게 된다면 가망은 있어요." 소불이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다. '나의 걸음으로는 사흘 안에 종남까지 가는 것은 문제가 없지.' 하지만 소불이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한두어 번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런 일이라면 이 늙은이가 힘껏 해 보겠소." 소불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당승무와 장노인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 네 분께서는 같이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소." 장노인은 소불이와 같이 갈 수 없음을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소노대께서 혼자 다녀 오십시오." 죽청청 역시 고개를 돌려 당승무 등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만약 세 분께서 할 일이 없으시다면 잠시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 어떻겠어요?" 이때 당승무가 나서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소인은 노대와 같이 가서 마중이라도 하겠습니다." 소불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따라 온다고 해서 별로 나쁠 것은 없으니 자네 마음대로 결정을 하게." 말을 끝내자마자 소불이는 죽청청이 준 지도를 품 속에 넣고 제갈명을 껴안더니 당승무를 향해 재촉을 했다. "지금 시간이 없으니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가도록 하세." 당승무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불이는 먼저 몸을 일으켜 천막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당승무 역시 급히 몸을 일으켜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후에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이들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며 천막에서 차츰 멀어져 갔다. 이때 죽청청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뒤를 따라오며 큰 소리로 소불이를 불렀다. "소노인장! 잠깐만 걸음을 멈추시오!"소불이와 당승무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죽청청이 급히 달려오며 숨찬 소리로 말을 꺼냈다. "소노인장! 조금 전 제가 준 그 지도는 갈신의의 친필이기 때문에 그를 만났을 때 증거로써 쓸 수가 있을 거예요." 소불이는 빙그레 웃으며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소. 그러니 부인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돌아가시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다시 종남을 향해 떠났다. 죽청청은 천막을 향해 걸어가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외 쳤다. "소노인장! 무사히 가세요. 저는 더 이상 마중하지 않겠어요." 지금 이들이 찾아가고 있는 종남산은 진령산맥(振鈴山脈)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 또한 이들은 조금도 지체하지도 않고 효산에서 서쪽을 향해 진령산맥으로 왔던 것이다. 이출이 효산을 떠나 진령산맥을 향해 가는 도중에는 험난한 계곡 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고비도 많았다. 하지만 제갈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어야만 했다. 두 사람은 제갈명을 껴안고 서쪽을 향해 걸어온지 사흘 째 되는 점심 때가 되어서야 종남산 아래에 당도할 수가 있게 되었다. 소불이는 걸음을 멈추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다 온 것 같군."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한 듯 물었다. "하지만 우리가 찾고 있는 호로곡은 어디에 있습니까?"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종남산의 직경은 약 팔백 리나 되며 크고 작은 계곡들이 수 없이 많기 때문에 계곡마다 이름이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우리가 찾아 야 하는 호로곡도 아마 갈신의가 직접 지은 이름일 것이니 우리는 지금부터 지도를 살펴보세." 소불이는 제갈명을 당승무에게 건네주며 품 속에서 즉시 지도를 꺼냈다. 지도 위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하나의 봉우리가 그려져 있었고 계곡 입구에는 작은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호로곡은 앙천평의 서쪽에 있다. 그리고 갈무구가 바로 여기에 은거하고 있다." 당승무는 제갈명을 안은 채 주위를 살펴보았다. 앞에 보이는 종남산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산수와 같고, 기암절벽이 웅장할 뿐 어떤 기이한 곳이라고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당승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다. 저렇게 많은 계곡들 중에서 어떻게 호로곡을 찾는단 말인가? 소불이는 지도를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갑자기 지도를 접어 품 속에 넣더니 제갈명을 다시 안았다. "노형! 우리 어서 가도록 하세." 당승무는 깜짝 놀라 바싹다가 서더니 다그쳐 물었다. "벌써 알아 냈다는 말입니까?" 소불이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갈신의의 이 지도는 늙은이가 그린 것보다 더 흐리멍텅한데 어떻게 지도에 따라 찾을 수가 있겠는가?" 당승무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물었다. "그렇다면 노대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우리는 모든 일을 운명에 맡기고 하나의 높은 봉우리 위로 올라 간 다음 이 지도와 같은 계곡을 찾아보세." 당승무는 소불이의 품에 안겨 있는 제갈명을 주시하며 가볍게 발을 굴렸다. "하지만 제소문주의 운명은 반나절 밖에 남지 않았는데……." 소불이 역시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가로챘다. "내가 보기에는 제소문주는 절대로 쉽게 죽을 것 같지가 않네." 말을 끝내자마자 소불이는 종남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으며 당승무 역시 뒤를 따랐다. 종남산의 괴인 소불이와 당승무 두 사람은 깊은 산 속과 계곡을 지나고 많은 고난을 겪어가며 종남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까지 가까스로 올라갔다. 또한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갈신의의 지도와 비슷한 계곡은 없었다. 어느 사이에 해는 서산에 걸치고 무심한 산림 속에는 차츰 어둠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비록 전력을 다해 종남산까지 달려 왔지만 오늘이 지나면 제갈명의 목숨도 끝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두 사람의 마음과 발걸음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 당승무가 걸음을 멈추고는 소불이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소노인장! 앞에 좁은 산 길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깊은 산 속에 도대체 무슨 길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소불이는 혹시 하는 마음에 급히 고개를 돌려 당승무가 손짓하는 쪽을 주시했다. 과연 멀지 않은 암석 사이에 하나의 길이 산세를 따라 꾸불꾸불 나 있었다. 길은 원래부터 사람이 만든 것이다.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급히 발길을 옮겼다. 산허리를 돌고 계곡을 향하는 길이었다. 그 왼쪽에는 하나의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가 있었으며 밤안개가 자욱했다. 소불이는 이것을 보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당승무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갈무구가 이 봉우리를 완전히 틀리게 그렸구나. 어떻게 되었던 우리는 결국 호로곡을 찾지 않았는가?" 당승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계가 노대의 앞장을 서겠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당승무가 앞장을 서더니 계곡을 향해 우거진 숲을 헤치며 걸어갔다. 소불이는 연신 주위를 살피며 웃음섞인 소리로 말했다. "정말 갈무구가 이 계곡을 가리켜 호로곡이라는 이름을 잘 지은 것 같군." 계곡 사이에는 개천이 구비구비 있었으며 시냇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곡이 과연 호로병을 닮았을까? 두 사람은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어느 사이에 계곡의 끝까지 왔다. 여기에는 과연 하나의 청석(靑石)으로 된 암자 같은 것이 있었으며, 사방은 대나무 울타리로 둘러져 있었다. 당승무는 대나무로 엮어 만든 대문 앞으로 다가서더니 큰 소리로 불렀다. "주인 계십니까?" 이때 안에서 하나의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대체 누구신데 이 밤에 찾아 왔소?" 당승무는 뒤에 서 있는 소불이를 한 번 쳐다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특별히 주인을 만나 뵙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잠시 아무 말도 없더니 다시 안에서는 쉰 듯한 음성이 들렸다. "당신들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찾아 왔소?" 당승무는 다시 소불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리는 주인께서 그린 지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쉰 듯한 음성의 사람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상하군. 이상해……." 잇따라 쉰 듯한 음성의 사람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좋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들어오시오." 당승무는 소불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즉시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마당은 좀 넓은 것 같았으며 배석이 깔려져 있었다. 마당의 양쪽에는 많은 화초들이 심어져 있었으며 이들이 걸어가 자 화초 사이에서는 무슨 괴이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문 앞에까지 왔지만 두 자의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져 있었다. 당승무는 참지를 못하고 가까이 다가서며 문을 두드렸다. "주인! 주인? 이때 안에서 다시 쉰 듯한 음성이 들렸다." 노부는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들은 힘을 조금만 더 주면 들어올 것이 아니오?" 당승무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다. '이분 갈신의께서는 참으로 괴팍스러운 데가 있는데!' 왼손으로 문을 밀어보자 과연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져 있던 문이 즉시 열렸다. 주위는 완전히 어둠으로 덮혀 버렸다. 뿐만 아니라 석실 안에는 등불이 켜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칠흑같이 어두웠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두 줄기의 섬광이 당승무를 쉬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소불이가 품에 안고 있던 제갈명을 당승무에게 건네주며 한 걸음다가서더니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저는 소불이라고 합니다. 사전에 인사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갈신의께서 용서해 주십시오." 소불이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안을 향해 들어갔다. 당승무 역시 제갈명을 안은 채 따라 들어갔다. 쉰 듯한 음성이 다시 가까이에서 들렸다. "좋소! 좋아…… 어서 들어 오시오." 순간 -. "탁!" 하는 가벼운 경음과 함께 방 안에는 불이 켜졌다. 이어 불빛 속에 하나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의자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난 다음 다시 앉는 것이 보였다. 백발노인은 두 사람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나직이 물었다. "당신네들은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 왔소?" 이 석실 안에는 하나의 의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주인이 앉아 있으니 소불이와 당승무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두 사람은 노형의 친필로 그린 지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백발노인은 빙긋이 웃으며 또다시 물었다. "당신네들은 혹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았소?" 소불이는 이상하다는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힘없이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백발노인은 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이상하군." 여기까지 말을 하던 백발노인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단호하게 물었다. "당신네들은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 노부를 찾아 왔소?" 소불이는 당승무가 안고 있는 제갈명을 가리켰다. "이 분이 바로 홍채문의 소문주 제갈명입니다. 이분은 사흘 전음인의 구유장(九幽掌) 아래 심한 부상을 입었지요. 하지만 가슴에 약간의 온기가 감돌 뿐 온몸은 이미 싸늘히 식었습니다." 백발노인은 정색을 하며 나직하게 물었다. "벌써 죽었단말이오?" 소불이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하게도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백발노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참으로 대단한 놈이구나."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원래 그대로 놓아 두었으면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백발노인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돼서 지금까지 살아있단 말이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당승무는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이 갈신의에겐 참으로 괴팍스러운 곳이 있구나.' 소불이는 제갈명을 힐끗 바라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다행하게도 길에서 고죽방의 부인을 만나게 되어 그녀가 가지고 있던 한 알의 구구환원단을 이분에게 즉시 먹였어요." 백발노인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랬었군." 소불이는 백발노인을 힐끗 쳐다보더니 좀 멋적은 듯 히죽 웃으며 말을 계속이었다. "당시 죽부인은 제소문주의 몸이 이미 식었기 때문에 구구환원단으로는 구할 수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죽부인은 노형께서 전에 남긴 한 장의 지도를 저에게 주시며 호로곡을 찾아가서 제소문주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소불이는 품 속에서 그 지도를 꺼냈다. 그러자 백발노인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이 노부한테 그를 구하라고 했단 말이오?" 소불이는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며 지도를 건네주었다. "이것은 전에 노형께서 약속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에 구구환원단으로써 효과를 보지 못할 때는 이 호로곡에 와서 노형을 찾으라고 하셨으니 ……." 백발노인은 소불이가 주는 지도를 받아들고 한 번 보더니 품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어서 그를 내려 놓도록 하시오." 소불이는 백발노인이 지도를 받아 품 속에 넣고 즉시 대답을 하는 것을 보자 졸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허리를 굽힌다. "노형! 참으로 감사하오." 제갈명을 안고 있는 당승무는 사방을 둘러보더니 백발노인이 앉아 있는 의자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자 주저하며 물었다. "이분을 땅에 내려 놓아도 괜찮겠습니까?" 백발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을 받았다. "물론, 땅에 내려 놓아야지. 어디 내려 놓을 만한 곳이 있겠나?" 당승무는 그의 말에 따라 제갈명을 땅에 공손히 내려 놓았다. 이때 백발노인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자기가 입고 있던 흑포를 벗어 제갈명의 얼굴에 덮어 준 다음 의자에 앉더니 당승무를 바라보며 손짓을 했다. "노제,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가까이 좀 와 보게." 당승무는 아무런 말없이 그의 말대로 걸어갔다. 백발노인은 손을 내밀더니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 왼손을 한 번 내밀어 보게. 이 노부는 자네의 맥박을 좀 봐 야겠네." 당승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갈명을 가리켰다. "노선배께서는 잘못 아셨습니다. 병을 치료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바로 저분입니다." 백발노인은 다시 빙긋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볼 것이 있어서 그러니 어서 내밀 어 보게." 당승무는 여전히 손을 내밀지 않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저의 맥박을 보는 것보다 제소문주의……." 백발노인은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가로챘다. "노부가 손을 내밀라고 하면 순순히 내밀 것이지 웬 잔말이 많은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소불이는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 제갈명의 몸을 살펴야 할 사람이 당승의 맥박을 보려고 하다니…….' 하지만 그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당승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노제! 노형께서 자네의 맥박을 보고 싶어하니 한 번 보여 주게." 당승무가 하는 수 없이 왼손을 내밀자 백발노인은 오른손으로 승무의 손을 잡은 채 잠시 있더니 다시 오른손을 요구했다. 당승무가 그의 말대로 오른손을 내밀자 백발노인은 잠시 쥐고 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맞았구나. 독공을 연마했으니…-.. "당승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급히 물었다. "소인의 맥박을 본 후에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십니까?" 백발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자네는 한쪽으로 물러가 있게." 당승무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지를 몰라 하는 수 없이 한쪽으로 물러섰다. 백발노인은 또다시 소불이를 향해 손짓을 했다. "당신도 이리 좀 와 보시오." 소불이 역시 비록 이상하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대로 걸어갔다. 백발노인은 소불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당신도 어서 왼손을 내밀어 보시오. "소불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자 백발노인은 또다시 그의 맥박을 잡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원래부터 당신은 독공을 연마하지 않았군." 소불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물론 독공을 연마하지 않았지요." 백발노인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렇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인데……?" 소불이 역시 알 수가 없다는 듯 급히 다그쳤다. "독공을 연마하지 않은 것이 무엇 때문에 이상하단 말입니까?" 하지만 백발노인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당승무를 가리켰다. "조금 전 들어올 때에 노제가 앞장을 섰는가?" 당승무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발노인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노부가 살고 있는 집안에는 수천 수만 가지의 독물을 키우고 있소. 이분 노제는 독공을 연마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독공을 연마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예 들어올 생각을 말아야 하오. 그런데 당신이 아무리 이 노제의 뒤를 따랐다 해도 어찌 조금의 상처도 없을 수가……." 백발노인은 숨이 차는 듯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의 무공이 눈을 밟아도 발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까지 도달했다면 모르겠으나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소불이는 깜짝 놀라는가 싶더니 히죽 웃었다. "노형의 말이 맞소. 이 늙은 것이 바로 설상무영입니다." 그러자 백발노인은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허허허…… 좋소, 좋아…… 설상무영 이곳은 너무나 좋은 것이오." 소불이는 백발노인의 말을 듣자 그에게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렸다. 순간 백발노인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소불이를 향해 번개처럼 일지를 찍어갔다. 이 일지는 너무나 뜻밖의 것이었으며 아주 기이한 것이었기 때문에 소불이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그의 일지를 맞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당승무는 이같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 성을 질렀다. "노선배님! 도대체 무슨 짓이오?" 백발노인은 당승무가 말하는 사이에 비호처럼 몸을 날려 소불이와 대혈을 십여 군데나 찍으며 검은 환약 한 알을 그의 입 속에 집 어 넣었다. 백발노인은 고개를 들어 당승무를 주시하며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노제! 조금도 서둘 필요가 없네. 노부는 이미 저 사람의 소음심경(小陰心經)과 위경(胃經)을 봉쇄했기 때문에 독약을 먹었지만 괜찮네."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 즉시 다그쳐 물었다. "노선배께서 소노대에게 먹인 것이 독약입니까?" 백발노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네. 이 독약은 노부의 독문 환약일 뿐 아니라 한 알로써도 백 마리의 호랑이를 독살시킬 수가 있지." 당승무는 몹시 화가 난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갈신의가 아닙니까?" 백발노인은 좀 멋적은 듯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라고 했지 누가 갈무구라고 했는가?" 당승무는 예리한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무엇 때문에 진작 얘기하지 않았소? 이렇게 되면 제소문주의 치료가 늦어지지 않소?" 백발노인은 땅에 누워 있는 제갈명을 바라보며 태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사람은 원래부터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이에 당승무는 이를 갈며 고함을 질렀다. "이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느냐?" 당승무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백발노인을 향해 번개처럼 일 장을 휘둘러 갔다. 이 일 장은 분노를 참지 못해 발한 것이었기 때문에 심성의 힘이 내포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손은 벌써 새까맣게 변했다. 백발노인은 이런 광경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허허허……. 자네는 독살장(毒殺掌)을 쓸 줄 알고 있었군." 백발노인은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당승무가 쳐온 일 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순간 -.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당승무와 일 장이 백발노인의 가슴에 정통으로 맞았다. 독충환혈(毒蟲換血) 하지만 백발노인은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승무가 세 발 자국이나 물러났다. 백발노인은 여전히 웃으며 태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성의 공력 밖에 없군. 하지만 강호상에서는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때 당승무는 백발노인이 자기의 일 장을 맞고서도 끄떡도 하지 않고 자기가 오히려 물러나게 되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승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단검을 뽑아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 나의 보검을 한 번 시험해 보아라?" 백발노인은 두 눈에 갑자기 섬광을 번득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손을 멈추어랏!" 상대방이 말을 하기도 전에 백발노인은 한 손으로 수염을 만지작 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자네가 노부를 죽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만일 내가 죽게 되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당승무는 몹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것입니까?" 백발노인은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노부는 이 천독곡(千毒谷)에 은거하면서 수십 년 동안 연구를 한 결과 하나의 천하무쌍한 독영단(毒靈丹)을 만들었지. 또한 그것으로써 그들을 구할 수가 있네." 당승무는 제갈명을 주시하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하지만 당신은 제소문주의 치료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오늘밤이 지나게 되면……" 백발노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는 벌써 갈무구의 구구환원단을 먹지 않았는가?" 당승무는 다시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구구환원단으로 완치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아닙니까?" 백발노인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구구환원단으로써 그를 구할 수 없다면 갈무구를 찾아서 또 무엇을 하겠나?" 백발노인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이 사람의 상세가 아무리 중하다고 할지라도 벌써 완치되어야만 했었네." 당승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굳어 있지 않습니까?" 백발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뿐 내상은 이미 다 나았네." 당승무는 그의 곁으로 다가서며 급히 물었다. "제소문주에게 아직 가망이 있다는 말입니까?" 백발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승무는 다시 다그쳐 물었다. "구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백발노인은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더니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이 사람이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환원초가 없기 때문이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환원초를 먹이기만 하면 살아날 수가 있지." 당승무는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환원초를 가지고 계십니까?" 백발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없네. 하지만 노부는 그가 깨어나기 전에 피를 독혈로 바꾸어 주어야겠네,"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큰 소리로 외쳤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백발노인은 제갈명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노부는 지금 그를 위해 피를 바꾸어 주고 있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한 번 가보게." 당승무는 자신도 모르게 제갈명의 곁으로 다가서더니 그의 몸에 덮혀 있는 흑포를 걷었다. 순간 -. 당승무는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것은 대체 무엇이지!" 원래 그가 흑포를 걷을 때에 제갈명의 손과 발, 그리고 얼굴에 검은 색의 벌레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백발노인은 득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저것은 노부가 키운 독충(毒蟲)이네. 그것들은 벌써 수십 년 동안을 노부의 몸에 있는 독혈을 빨아먹고 있었기 때문에 천하제일의 고수라 할지라도 그것에 물리면 꼼짝없이 죽게 되어 있네." 당승무는 안색이 약간 변하며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제소문주의 몸에 이렇게 많이 붙어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백발노인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지 사람은 환원초를 먹기 전에 벌써 죽을려고 했던 사람이지. 그렇기 때문에 노부가 그의 핏속에 극독을 투입시킨 후에 독영단을 먹이면 괜찮을 것이네. 또한 그가 깨어나면 노부처럼 하나의 기독을 가진 사람으로 완전히 변할 것이며, 뿐만 아니라 자네의 사부가 자네에게 가르친 독공은 삼 년이 지나야만 대성할 수가 있지만 이 사람은 하루 사이에 성공할 수가 있을 것이네." 당승무는 하는 수 없이 흑포를 다시 제갈명의 몸 위에 조심스럽게 덮어 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제소문주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백발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히려 반문했다. "물론 만약 그가 죽는다면 노부가 무엇 때문에 귀중한 독혈을 그에게 주겠는가?" 당승무는 다시 소불이를 가리키며 침중하게 물었다. "이분 소노대께서는 얼마나 있어야 깨어날 수가 있습니까?" 백발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분은 독충이 피를 바꾸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사흘이 있어야 성공할 수가 있을 것이네." 당승무는 궁금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재차 물었다. "하지만 선배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소노대와 제갈명 두 사람을 극독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백발노인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받았다. "노부는 천독곡에 은거한 지가 수십 년이나 되었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네. 그런데 마침 노부가 열흘 전에 독영단을 만들었는데다 당신들이 찾아왔으니 노부가 어찌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있겠는가?" 백발노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노부가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으니 자네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게." 당승무는 백발노인을 똑바로 주시하더니 급히 물었다. "무엇을 물어보시려고 하십니까?" 백발노인은 눈을 몇 번 껌벅이더니 단호히 물었다. "자네는 무공을 누구한테 배웠는가?" 당승무는 고개를 쳐들더니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탈혼장 방통에게 배웠습니다." 백발노인은 이 말을 듣자 안색이 변하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의 전인(傳人)이었군. 노부는 그를 잘 알 뿐 아니라 그와는 동문사제였지……" 그리고는 갑자기 말을 그치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노부의 추측으로 자네가 독공을 많아야 십 개월 밖에 연마하지 않은 것 같은데…… 또한 자네의 사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됐다는 말을 들었네." 당승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돌아가신지 이 개윌 밖에 안됐습니다." 백발노인은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나직이 물었다. "자네는 그가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알고 있는가?" 당승무는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힘없이 대답했다. "두 명의 독인에 의해 피살을 당하셨습니다." 백발노인은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급히 다그쳤다. "독인! 정말로 자네 사부가 두 명의 독인에 의해 죽었단 말인가?" 당승무는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두 명의 독인과 연속 몇 장을 주고 받다가 그들의 기독에 맞고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사부님께서 말하시기를 독인의 독은 해약이 없다고 했습니다." 백발노인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들 독인의 독은 해약이 없다고…… 천하에 또 다른 독인이 있단 말인가?" 백발노인은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물었다. "당시에 자네도 그곳에 있었는가?" 당승무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인은 당시 사부님에게 혈도를 찍혀 집안에 있었습니다. 그때 신교교라 불리는 여인이 몇 명의 독인을 데리고 찾아왔으며 사부는 그들과 몇 장을 주고 받더니……." 백발노인은 당승무를 한 번 쳐다보고는 가벼운 탄식을 했다. "자네에게도 약간의 공력이 있는 것을 보니 방통도 아마 독공을 완성했을 것이네. 그렇기 때문에 백독(白毒)이 침입을 할 수가 없었을 텐데…… 그리고 자네의 사부는 본문의 일에 대해서 얘기한 적은 없는가?" 당승무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없습니다. 소인은 사부님을 일 년 밖에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심지어 사부의 명호까지도 나중에야 알았던 것입니다." 백발노인은 당승무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자네는 본문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은가?" 당승무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지금 소인은 사문의 내력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노선배님께서 말씀해 주시겠다면 저는 물론 듣고 싶습니다." 백발노인은 빙긋이 웃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본문의 원래 이름은 이독문(二毒門)이라고 했으며, 강호상에서 나돌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 그리고 두 가지의 독이란 바로 사충(蛇蟲)과 초목(草木)으로 나눈 것이었네. 또한 하나의 제자 밖에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네의 사부 방통도 원래는 사숙(師叔) 의 문인이었네. 그리고 자네의 사부는 전문적으로 초목만 전개했으며, 노부는 사충일문(師蟲一門)만을 배웠지." 당승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비록 사부도 다르고 또한 각기 일문씩을 배우고 있었지 만 사문에서 규정하기를 무공을 배운 후에도 강호상에는 돌아 다니지 말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역대의 사조(師祖)들은 모두 깊은 산 속에서 은거 생황을 하고 있었지. 그러나 사부 때에 와서 사숙께서는 무공을 연마하시다가 실수를하여 독황에 의해 부상을 입고 돌아 가셨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통이 다른 사람의 유혹을 받고 아무도 모르게 산에서 도망을 쳤기 때문에 노부는 잠시 사숙의 초목 문을 물려 받았으며 사숙을 위해서 하나의 전인을 물색하고 있었네." 백발노인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당승무를 응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자네의 사부는 이십 년 만에 갑자기 돌아 와서는 노부에게 산에서 내려가라고 하더군. 그러나 이 노부는 단호히 거절을 했었지. 그런데 그가 다시 노부에게 사숙이 남겨준 한 권 의 초목경(草木經)을 달라고 하길래 노부는 또다시 거절을 해버렸지. 그랬더니 그는 몹시 화를 내며 노부와 싸우기 시작했었네." 당승무는 참지를 못하고 다음을 다그쳐 물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백발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당시 그의 무공은 노부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노부는 그의 일 장을 맞고 폐경에 부상을 입었으며, 하마터면 피를 토하고 쓰러질 뻔 했었지. 하지만 노부가 억지로 참으며 일곱 마리의 금선사(金線蛇)를 꺼냈더니 그는 무서워서 도망을 쳤다. 그후부터 그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노부도 폐경에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운기를 할 수 없게 되었었지, 하지만 십오 년 전 하나의 계곡에서 한 그루의 환혼초를 발견하여 노부의 병을 치료할 수가 있었지……." 당승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환혼초! 그 계곡 안에는 또 있습니까?" 백발노인은 대답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다시 말을 계속했다. "계곡 안에는 노부가 운귀(雲貴)에서 가지고 온 한 쌍의 비단 뱀이 있었으며 그것은 수십 장 정도까지 클 수가 있고, 또한 호랑이나 표범도 한 입에 삼켜 버릴 수가 있는 것이었네. 그런데 재수가 없게도 그해 커다란 산사태에 의해 숫뱀은 머리만 괜찮을 뿐 온몸은 상하고야 말았네." 백발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당승무를 주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한데 암놈이 숫뱀을 데리고 계곡 밖으로 가길래 노부는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뒤를 따라 갔었지. 그런데 암놈은 어느 골짜기에 이르러 숫뱀에게 연속해서 몇 잎의 풀잎을 따서 먹이고는 또다시 계곡으로 돌아왔네. 이튿날이 되자 숫뱀은 상한 곳에 다시 새 살이 붙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승무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급히 물었다. "그 풀잎이 바로 환혼초이었습니까?" 백발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받았다. "숫뱀이 다시 제모습을 찾은 것을 보고 노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한 잎을 따서 입 속에 넣고 씹었지. 맛은 몹시 썼으며 하마터면 혓바닥이 잘릴 뻔 했네.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삼키자 폐경에 입은 상처는 순식간에 완치되었으며 그제서야 그것이 바로 상처를 치료하는 성약이라는 것을 알았네." 여기까지 말한 백발노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시 계속했다. "노부는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고 잎을 완전히 다 따 먹었지. 그러자 다년간의 상처가 순식간에 다 나아 버렸네. 그래서 이튿날 다시 그 계곡을 찾아가 우연히 갈무구를 만났지." 당승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갈신의의 환혼초였군요?" 백발노인은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 당시 갈무구가 말하기를 수십 년 동안 명산대첩을 찾아 다니다가 겨우 종남산에서 두 그루의 어린 싹을 발견했다고 하더군." 당승무는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선배님께서는 갈무구의 무공을 알고 계십니까?" 백발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탈하게 웃었다. "갈무구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지. 하지만 결국 노부에게 제압을 당하고 한 잎의 환혼초를 뺏겼지." 여기까지 말을 하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더니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선뜻 입을 열었다. "자네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 노부는 여기서 수십 년 동안 살아왔지만 독사와 독충을 식량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준비한 음식이 없네." 당승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빙그레 웃었다. "소인에게 약간의 음식이 있습니다." 이때 소불이를 쳐다보자 그는 얼굴이 완전히 검게 변한 채 두 눈을 확 감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독이 발작하는 현상이었다. 당승무가 묻기도 전에 백발노인이 벌써 그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빙그레 웃었다. "바로 독성이 발작을 할 테니 그를 조금도 건드리지 말게. 오늘밤 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깨어날 것이네."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즉시 집 뒤를 향해 걸어 갔다. 이윽고 한참이 지나서야 백발노인은 한 권의 헌 책을 들고 오더니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어서 무릎을 꿇고 본문의 초목경을 받게." 당승무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노선배님……." 백발노인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히 말했다. "자네는 기왕 방사제의 문하였으니 나의 사숙의 유일한 전인이 되는 것이네. 그러니 노부는 사숙을 대신해서 초목경을 주는 것이니 자네는 바로 본문의 초목일맥(草木一脈)의 전인이 되는 것이네." 당승무는 그의 심각한 말에 하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초목경을 받았다. 백발노인은 갑자기 호쾌하게 웃어 젖히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허허허…… 노부는 결국 사숙을 위해서 전인을 찾았군. 그렇다면 노부의 이 사충문은 또한 누구에게 전해 주어야 하지?" 하고는 갑자기 몸을 돌려 총총히 안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조금 전에 가져왔던 책과 똑같은 크기의 낡은 책을 한 권 들고 왔다. "노부는 사충문 일맥도 자네에게 전해 주겠네." 당승무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백발노인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서더니 급히 다그쳤다. "무엇 때문에 거절을 하는가? 노부도 사숙을 대신해서 초목경을 수십 년 동안 보관했으니 자네도 장래에 노부를 위해서 하나의 전인을 찾아 주게." 백발노인은 다시 당승무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본문은 초목과 사충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노부가 이십 년 동안 연구를 한 결과 두 독에는 각기 장점과 단점이 있었네. 만약 서로 합해서 연마를 한다면 많은 이점을 얻을 수가 있네. 노부의 독영단도 바로 두 권의 책 속에 있는 것을 따라 연구해 낸 것이지." 그는 다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뼉을 쳤다. "노부는 천하의 기독을 모아서 독영단을 만들었으니 독인을 절대 무서워 하지 않네. 그러니 언제 시간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의 독인을 잡아서 시험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당승무도 아직도 그가 독인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자 내심 생각했다. '검술을 연마한 사람이 새로운 무기를 보게 되면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평생동안 독을 연마했기 때문에 독인의 얘기를 잊지 못하는군.' 당승무가 머뭇거리자 백발노인은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뜨며 언성을 높였다. "어서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가?" 당승무는 하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공손히 사충경을 받았다. "제자 대사백(大師伯)께 문안을 드립니다." 백발노인은 히죽 웃으며 나직이 울었다. "어서 일어나게! 자네는 노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당승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중히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백발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는 진작부터 이름을 쓰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곡영자(谷囹子)라고 부르게?" 당승무는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허리를 굽혔다. "제자,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곡영자는 당승무를 똑바로 주시하며 궁금한 듯 물었다. "하지만 자네 이름은 무엇이지?" 당승무는 다시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제자는 당승무라고 합니다." 곡영자는 고개를 한두 번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해서 방통 사제를 사부로 모시게 되었는가?" 당승무는 자기가 겪었던 일을 사실대로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곡영자는 그의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천당문이 연마한 것은 초목독약이었으며 자네는 사천당문의 제자였네. 뿐만 아니라 초목경을 보니 당문에는 일곱 가지의 악독한 처방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또한 칠절산(七絶散)이라하여 천하에서 해약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더군."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저의 가문의 칠절산은 확실히 일곱 가지 암기의 처방입니다. 그리고 제자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 곡영자의 두 눈에서 섬광이 번득였다. "그렇다면 어서 꺼내 보게?" 당승무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곱 장의 암기 모양을 꺼내더니 즉시 건네주었다. 곡영자는 급히 받아 들더니 하나씩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곱 장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그는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하하하…… 하하하…… 생각지도 않게 칠절산의 처방이 노부의 독영단과 비슷하군. 다만 칠절산을 맞은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며 노부의 독영단은 전문적으로 독을 제거하는 것이니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허허허… 이 일곱 가지의 처방은 참으로 신기하고 묘하기 때문에 본문의 많은 비밀 처방과도 많이 닳은 데가 있지. 그렇기 때문에 노부의 추측으로는 본문은 당문의 조상과 각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네." 이날 밤-. 당승무는 바로 이 한 칸의 작은 객실 안에서 소불이 등을 동반한 채 맨바닥에 앉아 운공 조식을 했다. 뿐만 아니라 곡영자 역시 혼자서 뒤에 있는 작은 집에서 운공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아무런 대화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사이에 날이 차츰차츰 밝아오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던 당승무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즉시 눈을 떠 보았다. 이때-. 앞에서 곡영자가 허리를 굽힌 채 제갈명을 뒤집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당승무는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며 궁금한 듯 울었다. "대사백님! 제소문주께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곡영자는 고개를 돌려 당승무를 한 번 쳐다 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노부는 벌써 그에게 독영단을 먹였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노부가 예상했던 바와 같이 세 잎의 환혼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것 같네." 당승무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침중하게 물었다. "대사백께서는 갈신의를 찾으려고 하십니까?"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찾아야만 하겠지. 하지만 소가 늙은이가 깨어나야만 갈 수가 있을 것 같네."당승무는 소불이를 쳐다보며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소노대께서는 얼마나 있어야 깨어날 수 있겠습니까?" 곡영자 역시 소불이를 바라보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노부가 그에게 두 번째의 독영단을 먹일 때엔 깨어날 수가 있을 것이네." 말을 끝내자마자 벌떡 일어서더니 품 속에서 하나의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는 한 알의 검은 환약을 꺼내더니 다시 허리를 굽히고 소불이의 입에 집어 넣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곡영자는 마치 바람처럼 소불이의 봉쇄된 혈도를 풀어 주었다. 순간 소불이가 갑자기 눈을 뜨는가 싶더니, "이"얏!" 하는 소리와 함께 곡영자의 안면을 향해 일 장을 치고 일어났다. 갑작스런 소불이의 공격이었지만 곡영자는 가볍게 몸을 피했다. "잠깐! 손을 멈추시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당승무가 소불이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소노대! 어서 손을 멈추시오?" 소불이는 그를 한 번 쳐다 보더니 손을 거두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벌써 날이 밝았나?"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웃었다. "소노대께서는 하룻밤 동안을 누워 계셨습니다." 이 말을 듣자 소불이는 깜짝 놀라며 급히 물었다. "그가 나의 혈도를 눌렀단 말인가?" 당승무는 옆에 있던 곡영자를 힐끗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대사백께서는 노대에게 두 알의 독영단을 먹였습니다." 그 말에 소불이는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주위를 살폈다. "도대체 누가 자네의 대사백이란 말인가? 그……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무슨 독을 사용한단 말인가?" 당승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곡영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노부 곡영자가 바로 당승무의 대사백이오. 하하하…… 당신은 한 알의 독영단만 더 먹으면 독공이 높아질 수가 있소." 소불이는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독공……? 대체 무슨 독공……?" 곡영자는 소불이의 손을 가리키며 빙긋이 웃었다. "당신은 어서 공력을 손바닥에 운집해 보시오." 소불이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전신의 공력을 손바닥에 집중시켰다. 순간 -. 소불이의 손바닥이 점점 커지며 자흑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손톱까지도 자흑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소불이는 다시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독을 맞았나……?" 곡영자는 여전히 웃으며 소불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독을 맞은 것이 아니라 당신도 오늘부터는 어떤 독이든지 무서워 할 필요가 없게 되었소." 소불이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제가 무엇 때문에 독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까?" 곡영자는 여전히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벌써 노부가 만든 독영단을 먹고 하룻밤을 쉬었기 때문에 전신의 혈맥과 오장육부가 모두 극독으로 바꾸어져 있을 것이오. 또한 이틀 동안 운공 조식을 더하면 물론 독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소불이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그랬다고 할지라도 믿지 못하겠는데……." 곡영자는 정색을 하며 소불이를 똑바로 주시했다. "아니, 당신은 왜 그처럼 믿으려 하지 않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당승무가 소불이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소노대! 지금 대사백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사실입니다. 지금 강호상에서는 무서운 독인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저의 사부님의 실력으로 도 그의 독에 맞아 죽었습니다. 어쨌든 대사백께서는 이십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독영단을 만들었고, 그것은 독으로써 독을 방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소노대께서는 이미 두 알의 독영단을 먹었으니 만약 한 알만 더 먹게 되면 독공을 연마하실 수가 있습니다." 소불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는가 싶더니 곡영자를 향해 다그쳐 물었다. "이 독공은 어떻게 연마를 해야 됩니까?" 곡영자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나직이 말을 받았다. "당신은 조금 전 두 번째의 단약을 먹었으니 다만 평상시와 똑같은 방법으로 운공 조식을 하면 될 것이오. 또한 내일 아침, 마지막으로 한 알만 더 먹는다면 웬만큼 성공을 할 수가 있다고 볼 수가 있소. 하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이틀 동안에 음식을 먹어서는 절대로 안될 뿐아니라 심지어 물을 먹어서도 안된다는것이오." 이 말을 듣자 소불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언성을 높였다. "좋습니다. 만약 세 알의 독영단을 먹은 후부터 극독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면 나는 어떤 일이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곡영자는 역시 매우 기분이 좋은 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노부의 독영단을 먹은 후 당신이 독인의 독을 견딜 수 있는지 없는지는 노부가 아직까지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장담할 수가 없소. 하지만 강호상의 일반 독에 대해서는 노부가 보장을 할 수 있소!" 소불이는 당승무를 바라보더니 다시 곡영자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 정도라면 괜찮으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말을 끝내자마자 소불이는 과연 땅에 앉아 운공 조식을 시작했다. 곡영자는 소불이의 이같은 행동에 웃음을 참지 못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는 된 것 같으니 우리는 어서 가도록 하세." 소불이를 바라보고 있던 당승무가 고개를 돌리며 급히 물었다. "직접 갈신의를 찾으러 가겠다는 말씀입니까?"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그렇네. 우리는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그에게 환혼초를 얻으러 가야만 하네." 이때 소불이가 갑자기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환혼초를 얻으러 가시겠다면 이 늙은 것도 함께 가겠습니다." 곡영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단호하게 말을 했다. "절대로 안되오. 당신은 바로 조금 전에 독영단을 먹었기 때문에 만약 반 시진 안에 운공 조식을 하지 못하면 살아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오." 소불이는 이 말을 듣자 안색이 변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독영단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줄은 미처 생각을 못했군." 그러자 곡영자는 소불이를 주시하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거짓말 같은 생각이 드시오?" 곡영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당승무를 데리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이 계곡 안은 전부 독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호법도 필요가 없으니 자네는 운기나 잘 하게." 곡영자가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하며 천독곡을 떠났다. 얼마 동안을 걸어 두 개의 고개를 넘자 갈신의가 그린 지도와 비 숫한 하나의 산이 나타났다. 당승무는 곡영자의 곁으로 바싹다가가며 궁금한 듯 물었다. "대사백님! 앞에 있는 산이 바로 앙천평(仰天坪)입니까?" 곡영자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종남산에는 크고 작은 줄기들이 수백 개나 되는데 앙천평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당승무는 좀 멋적은 듯 손을 머리에 가져다 대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제자가 말한 것은 갈신의께서 바로 여기에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하게 대답을 했다. "그렇네. 갈무구는 바로 저 계곡에 살고 있지." 봉우리 아래에는 과연 하나의 산길이 계곡을 향해 뻗혀져 있었다. 당승무는 이것을 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가 과연 호로곡이군. 정말 그가 그린 지도와 비슷한 것 같아." 이때-. 곡영자가 갑자기 안색이 변하여 급히 말을 꺼냈다. "갈무구가 이 계곡 안에다 진법을 펼친 것 같네." 당승무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다그쳐 물었다. "대사백께서 보기에는 무슨 진법 같습니까?" 곡영자는 여전히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계곡 안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저 나무와 바위들이 모두 인공으로 수정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작은 길 속에는 반드시 무서운 매복이 되어 있을 것이네." 당승무가 곡 안을 유심히 주시할 뿐 말을 하지 않자 곡영자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또한 한 걸음이라도 잘못 가게 되면 호로곡 속에 갇혀서 굶어 죽을 것이니 나무와 바위들을 깔봐서는 안 되네."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더니 침중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대사백님께서는 어떤 진법인지 알고 계십니까?" 곡영자는 빙긋이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무서운 진법을 설치했다고 할지라도 노부는 꼭 뚫고 갈 생각이네."당승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대사백님께서는 이 진법을 보시고 무서운 것이라 했지 않습니까?" 곡영자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갈무구의 진법이 비록 천하제일이며 다른 사람들이 막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 노부만은 저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당승무는 빙긋이 웃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대사백께서는 그의 진법을 깨뜨릴 수 있다 이 말이군요?" 곡영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히죽 웃었다. "진법을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은 노부가 아니네." 당승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그쳐 물었다. "대사백님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깨뜨릴 수 있단 말입니까?" 곡영자는 이때 소맷자락.속에서 온몸에 금빛을 발하고 있는 작은 꽃뱀을 꺼냈다. "바로 이것이지." 당승무는 그 뱀을 주시하며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뱀이 어떻게 진법을 깨뜨릴 수 있단 말입니까?" 곡영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설명을 했다. "사실 이런 진법은 사람만이 저지할 수가 있으며 동물에게는 소용이 없지. 하지만 사람은 감정이 있기 때문에 환상을 해도 동물들 은 생각하는 것이 간단하기 때문에 아무런 유혹도 받지 않기 때문이야." 당승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뱀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이 뱀에게 길을 인도하라고 해야겠군요." 그러나 곡영자는 금뱀을 소맷자락 속에 다시 집어 넣었다. "이 뱀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들어가서 살피어 보세." 긴장의 순간 말을 끝낸 곡영자는 차근차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자네는 앞장 서서 걸어가도록 하게. 노부는 천천히 뒤에서 진세를 살펴보며 가야겠으니……." 하며 당승무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을 했다. 당승무는 그의 조심스러운 행동에 별로 신경이 쓰여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모든 일에 있어서 초보자인 그로서는 도저히 진세라는 것의 참뜻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당승무는 아무 생각없이 성큼성큼 발을 옮겨 곡 안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숲은 매우 울창했다. 그는 이 무성한 밀림 지대를 이루고 있는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며 지세를 추측해보았다. 과연 갈신의가 이 계곡을 가리켜 호로곡이라 이름지은 것은 일리 가 있었다. 이 계곡은 입구가 호로병의 목 부분처럼 좁았고, 점점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져 정말 호로병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이렇듯 열심히 지세를 살피며 걷던 당승무는 문득 숲 속에서 자기 혼자 있는 것을 느꼈다. '아, 가만히 보니 나 혼자잖아? 그렇다면 대사백께서는 이 진세에 자기가 갇힐 것을 염려하여 미리 나를 보내 시험해 보려고 하는 모양이로구나…….' 당승무는 이런 생각이 들자 다소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러나 한창 부풀어 오르는 영웅심에 더욱 발길을 급히하여 계속 숲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가도가도 햇빛조차 제대로 스며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이 숲은 좀처럼 끝이 나지 않았다. 사방은 새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여 당승무의 숲을 헤치는 소리만 으시시하게 주위를 울렸다. 당승무는 어깨를 쭉 폈다. 그리고 계속 앞을 향해 기세당당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웬일인지 앞의 곡세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당승무는 이제야 끝이 다다랐나 싶어 더욱 걸음을 재촉하여 급히 내달았다. 그리고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눈앞이 환해지는게 산바람이 갑자기 얼굴로 들이닥쳤다. 순간 당승무는 정신이 번쩍 나 고개를 한 번 세차게 흔들고는 눈을 번쩍 떴다. 한데 실로 눈 앞에 벌어진 광경은 뜻밖이었다. 거기에는 바로 곡영자가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 서 있는 것이었다. "아니, 대사백께서는 벌써 오셨군요?" 두 눈이 휘둥그레진 당승무가 이렇게 묻자 곡영자는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노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네……." 당승무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순간 당승무도 정말 까무러질 듯 놀랐다. 여지껏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서 온 목적지가 바로 원점이었던 것이다. 당승무는 너무도 놀라운 나머지 제대로 입조차 열지 못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으랴. 영문을 모르는 그로서는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대사백, 대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러자 곡영자의 대답은 그로하여금 더욱 의아심을 감추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진세의 오묘한 점이다. 아마 갈신의는 자기를 찾아 오는 것이 싫어 곡 입구에다 진세를 설치한 모양이다. 이 전도진법(顚倒陣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자리로 돌아 오게 하는 진세다." 당승무는 강경하게 부정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제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곧장 앞을 향해 걸어갔는데," 곡영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는 진법을 모르면서 어떻게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장담 하나?" 하고는 다시 한 번 숲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음, 이제보니 이 곡 입구에는 별로 함정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진짜 무서운 매복은 필시 곡 안에 있을 것이다." 이 말에 당승무는 허탈 상태에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계곡 쪽을 바라보았다. 이어 다시 시선을 곡영자 쪽으로 돌리며, "대사백, 우리 어떻게 해야 되돌아 오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의외에도 곡영자의 대답은 자신에 차 있었다. "그건 간단하다. 다만 너는 노부를 따라 오기만 하면 되니까." 이렇게 말한 그는 미처 말끝도 맺지 않고 대뜸 몸을 돌려 곡 안은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당승무는 그의 호기로운 모습을 보자 조금 전까지의 불안감을 일 체 잊고 곧 뒤따라 갔다. 한데 밀림에 들어선 곡영자가 돌연 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이어 정색을 하며 당승무를 돌아보더니 나직이 주의를 주었다. "너는 노부의 발걸음물 잘 보고 디디도록 해라. 조금이라도 틀려 서는 안 되니 극히 조심하도록 해라." 당승무는 겁먹은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리고는 즉시 그를 따라 그가 오른발을 디디면 자기도 따라서 오른발을 내밀고 심지어 그가 몸을 기우뚱하면 자기도 즉시 몸을 기울이기까지 했다. 이렇게하여 그들은 오른발만 연속 세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러나 세 번째 발을 디디는 순간 당승무는 갑자기 눈앞이 아찔 해짐을 느꼈다. 마치 주위의 밀림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당승무는 깜짝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자세히 한 번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방의 나무들은 가만히 있는 게 조금도 움직인 기세가 없었다 이때 곡영자가 다시 낮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너는 그저 노부만 묵묵히 따라 오너라. 절대로 현혹되서는 안 된다."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이제서야 약간 수긍이 가는 듯 했다. "이제보니 나는 애당초 숲 속에 들어올때부터 발을 잘못 디디었구나. 어쩐지 되돌아 가는 줄도 모른다 했더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당승무는 묵묵히 곡영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과연 그들은 곧 밀림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어 얼마를 또 걸어가 그들은 또 하나의 숲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은 호로병으로 말하자면 아마 허리께 쯤인 듯 했다. 가면 갈수록 점점 지세는 좁아져 끝에 가니 거의 한 사람도 통과할까 말까한 좁은 길이 나타났다. 곡영자는 약간 주춤하더니 이내 걸음을 옮겨 곧바로 계곡 안을 향해 계속 걸어 들어갔다. 당승무는 부지런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 좁은 길에서부터 그들이 또 오륙 장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또 하나의 밀림이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방에는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었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분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는 몇 개의 구름 같은 작은 산들이 불룩 솟아 있었다. 한데 그 사이에 울타리를 대나무로 엮어 놓은 한 집이 있었다. 아마도 그 집이 갈신의의 거처인 듯 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이 곡 안의 배치는 놀라울 정도로 질서정연했다. 곡영자와 당승무는 놀라운 눈초리로 한동안 곡 안을 바라보다 시선을 떨구어 지세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그들은 꽃밭 사이로 좁은 황토길이 굽이굽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한눈에 이것이 산록 사이의 대나무 울타리 집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챌 수 있었다. 이것을 본 곡영자는 심각한 낯으로 유심히 꽃밭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때 당승무가 조용히 그의 옆으로 다가오며 나직이 물었다. "대사백, 바로 저 집이 갈신의의 거처입니까?" 곡영자는 멍청히 꽃밭을 바라볼 뿐 잠시 대답이 없더니 혼자 나직이 중얼거렸다. "갈신의가 어디서 저런 진법을 배웠지? 이 배치는 정말 너무 심오하고 또한 너무나 뜻밖이라……." 하더니 돌연 발을 움직여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꽃밭 입구에 당도한 그는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소맷자락에서 즉시 한 마리의 자그마한 뱀을 꺼냈다. 그 뱀은 찬란한 황금색을 발하고 있었다. 이어 그는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어 뱀에게 길을 인도하라고 지시했다. 그 금사는 주인의 지시를 받자 즉시 스르륵 꽃밭을 향해 꿈틀대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따라가자." 하는 곡영자의 말에 당승무는 조금도 지체없이 즉시 따라갔다. 한데 오륙 척 가량 기어가던 뱀이 돌연 멈칫하더니 신속히 뒤로 피하는 것이었다. 곡영자는 이 광경을 보자 깜짝 놀라 눈을 치켜 뜨고는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휘익!" 그러자 주춤하고 섰던 금사는 하는 수 얽는 듯 정면을 피하고 측면으로 다시 기어갔다. 하지만 그 금사는 단지 일 장 앞에서만 빙빙 돌 뿐 무슨 괴물이라도 앞에 있는 듯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려 들지 않았다. 곡영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어찌 하나 보려는 듯 그는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이윽고 한참을 멈칫하고 섰던 금사는 이제 어쩔 수 없는 듯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더니 다시 앞을 향해 기어갔다. 그러나 이내 다시 서는 것이었다. 당승무는 그러한 광경에 매우 의아했으나 곡영자가 온 신경을 기울여 금사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물을 수가 없었다. 금사는 주인의 독촉 아래 계속 앞을 향해 미끄러져 갔다. 그러나 삼 척 간격마다 정면을 피하고 한 바퀴 도는 게 마치 주인에게 원 안에 무슨 극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곡영자는 이미 약간의 단서를 잡은 듯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나직 이 중얼거렸다. "천하에 독사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나?" 이 말을 들은 당승무 또한 즉시 그 뜻을 알아차렸다. 지금 금사가 한 바퀴 도는 그 안에 어떤 무서운 것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곡영자는 평생 동안 독물을 연구하였지만 독사까지도 무서워하는 독이 있다는 것을 알자 경악하는 한편 기쁘기도 했다. 이어 무슨 생각인가 곰곰히 한 그는 즉시 금사를 불렀다. 그리고는 금사를 다시 소맷자락 속으로 집어넣은 후 고개를 돌려 당승무를 바라보았다. "너는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라. 노부가 먼저 가보고 올 테니까……." 하며 헛기침을 한 번 내뱉더니 논밭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금사가 빙빙 돌고 있던 곳으로 이 허리를 굽히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깜짝 놀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바로 거기에는 극히 희미하게 하나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난 또 이 안에 무엇이 있는가 했더니 한 사람의 발자국 밖에 없구나. 그런데 금사가 무서워서 도망을 치다니……." 이어 다시 삼 장 밖의 또 하나의 발자국으로 가까이 가 유심히 살펴보았다. 첫 번째 발자국과 두 번째 발자국은 전부 다 왼발이었다. 곡영자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살짝 그 발자국이 남긴 흙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코에다 갖다대고 자세히 맡아 보았다. 이 한 번의 맡음으로 원래 몸에 독이 퍼지지 않는 곡영자의 안색이 돌변했다. 이어 그는 또다시 약간의 흙을 입 속에 집어 넣었다. 이 모양을 본 당승무는 즉시 어리둥절 해졌다. "대사백, 무엇하고 계십니까?" 맛을 보던 곡영자는 점점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 "응? ……아무튼 소형제, 우리 들어가도록 하자." 당승무는 급급히 물었다. "무슨 단서라고 잡았습니까?" 곡영자의 대답은 단호했다. "단서를 잡은 것이 아니라 앞서 누가 인도했으니 우리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수없다." 당승무는 도대체 처음부터 어리둥절한 가운데 이곳까지 온 것이므로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대체 누가 길을 인도했다는 것입니까?" "독인!" "네? 독인이라구요?" 곡영자는 나직이 신음을 발하더니 이내 품 속에서 한 알의 독영단을 꺼내 당승무에게 건네 주었다. "독인이 지나간 데에는 전부 다 독기를 남기고 있다. 또한 금사까지도 감히 접근을 못하는 것을 보니 그의 독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너는 무공이 약하니 빨리 이 약을 먹어라. 아무튼 조심해서 독인과 맞붙지 않게 하거라." 당승무는 이 말에 문득 독인에 의해 죽은 사부가 생각나 급히 환약을 삼켰다. "대사백,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곡영자는 미리 생각을 해두었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물론 노부는 아직 독인을 보지 못하여 잘 모르겠다만 웬만큼 상대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될 수 있는대로 이 사람들을 생포해야 한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깊은 숨을 들이키고는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갈 길도 마련해 놓아야 한다. 들어갈 때 너는 우선 나무에다 표시를 해둬라. 노부가 만약 그 사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 때 내가 휘파람을 불 테니 그때 너는 즉시 숲 밖으로 도망쳐 야 하느니라." 이어 당승무는 뭐라고 말들 할 듯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곡영자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얘야, 그 소가 늙은이는 내일 아침에 또 한 알의 독영단을 먹어 야 독공을 완성할 수가 있으니 이 독영단은 네가 받아 두어라. 그리고 만약 내가 죽거든 그것은 우리 독문의 독공이 그보다 못해서 그런 것이니 차후로 비록 독공을 완성시켰다 해도 소가 늙은이와 너는 절대 독인과 상대하지 말아라." 하고 말하면서 그는 독영단을 꺼내 당승무에게 건네주었다. 당승무는 그 환약을 받아 들자 돌연 콧등이 찌릿해짐을 느꼈다. 이어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말했다. "대사백, 우리는 기왕 갈신의를 찾았으니 이틀만 더 기다리다 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곡영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은 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우리같이 독공을 연마하는 사람 이기독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무공을 익히는 사람이 무공비급의 소재지를 안 것과 같다. 그러니 내 어찌 가보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사실 노부는 너에게 어제 독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즉시로 뛰어가려고 했었다. 그리고 또 노부는 독이 침입 못하는 독공을 연마했으니 반드시 당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 너는 노부의 말만 기억해 주기만 하면 된다." "당승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 기억해 두겠습니다." 곡영자는 이러한 당승무를 씁쓸하게 웃으며 바라보더니 이내 발길을 돌렸다. "그럼 자네는 노부의 발자국을 잘 보고 따라 오너라." "말을 끝낸 그는 즉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독인처럼 지나는 데마다 전부 일 촌 가량의 발자국을 남겼다. 당승무 또한 지체않고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독공을 손바닥에 끌어올려 각 나무마다 가볍게 쳐 흑색 장인을 남겼다. 이들은 독인의 발자국이 미리 찍혀 있었기에 조금도 어려움 없이 꽃밭 사이를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돌연 앞서 가던 곡영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당승무에게 멈추라고 손짓을 했다. 당승무는 곡영자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어 무슨 사고가 발생했는지도 모르고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다음 곡영자의 진기전음술이 당승무의 귓청을 흔들었다. "너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그리고 무슨 일이 발생하든지 경거망동하지 말고 만약 노부의 휘파람 소리를 듣게 되면 그 즉시 오던 길을 되찾아 달아나거라." 당승무는 그의 말투로 즉시 그가 독인을 발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 그는 긴장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급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순간 곡영자의 몸이 이미 한 꽃나무 뒤로 들어갔다. 당승무는 일말의 호기심이 일어나 몰래 곡영자를 뒤따라 가서 허리를 굽히고 나뭇가지 사이로 밖을 내다 보았다. 과연 한 그루의 꽃나무 아래에는 아래 위로 흑의경장을 한 사람이 장검을 어깨에 메고 멍청히 서 있는 것이었다. 곡영자는 살그머니 그의 등뒤로 다가갔다. 이어 두 손으로 가슴을 보호하고 십 성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 흑의인의 몸뒤 오자가량 접근해 간곡영자는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긴장의 순간-. 곡영자의 양 볼에 파르르 하고 무섭게 경련이 일어났다. 막다른 골목 당승무는 이 광경을 보자 의아심을 금치 못했다. '지금 흑의인의 등 뒤 요혈을 찌를 수 있는데 왜 출수를 안하고 주저하고 있지?' 당승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순간, 곡영자가 갑자기 상대방의 완맥을 잡고서 억지로 뒤로 비틀었다. 그 순간 당승무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대사백께서는 왜 그의 혈도를 찌르지 않고 이런 우둔한 수법을 쓰지?' 이때 흑의인은 몸이 뒤로 비틀어져도 한 마디 신음도 내지 않고 반항하고 있었다. 그의 반항하는 기세로 보아 그는 무공이 매우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하나 곡영자 또한 만만치 알았다. 그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듯 잡고 잡힌 무언의 대결은 마치 시골에서 농부들이 씨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방불케 했다. 물론 흑의인이 두 팔이 잡혀 있으니 곡영자가 유리하였다. 어느덧 곡영자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러나 제일 다급하고 초조한 자는 당사자들이 아니라 바로 관전하고 있는 당승무였다. 그는 매우 긴장한 나머지 너무도 주먹을 꽉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 드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데 바로 이때-. 곡영자의 진기전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오너라?" 당승무는 그 소리를 들은 순간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급히 달려갔다. "빨리 나의 몸 뒤로 돌아와 나의 품 속에서 하나의 백색 난화가 그려진 옥병을 꺼내라." 하고 진기전음술로 말한 곡영자에게 당승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대뜸 반문했다. "한데 왜 이 사람의 혈도를 찌르지 않았습니까?" 곡영자의 다음 말은 매우 다급했다. "안 돼. 이 사람은 전신 혈도가 모두 굳어 있기 때문에 찌를 수가 없다. 심지어 그는 정신까지도 마비되었으니 미약으로 그를 기절시 키는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니 빨리 내 몸에서 약을 꺼내도록 해라." 당승무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빠른 동작으로 곡영자의 몸에서 옥병 하나를 꺼냈다. "이것입니까?" 그러자 곡영자는 깜짝 놀랐다. 그는 단지 당승무가 자기의 몸을 약간 스치는 것 밖에 느끼지 못했는데 벌써 그의 수중에 병이 들어 있으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너는 그것을 어떻게 해서 꺼냈느냐?" 당승무는 멋적은 듯 씨익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자의 수법은 소노대에게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병은 어떻게 쓰는 것입니까?" 곡영자는 그만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그는 도둑놈이었구나…… 이 수법은 확실히 고명하다." 하고 감탄을 하며 그는 돌연 진짜 목적이 생각나 기겁을 하고 말을 돌렸다. "아참, 중요한 걸 잊었구나. 이 약은 매우 독한 약이라 조심해서 다루도록 해라. 우선 호흡을 멈추고 손톱으로 그 미약을 약간 찍어서 이 자의 콧구멍에다 튕겨라." 이어 곧 당승무는 곡영자의 말대로 호흡을 멈추고 병뚜껑을 열었다. 병 안에는 짙은 황색의 가루가 가득 들어 있었다. 당승무는 조심스럽게 손톱으로 그 미약을 약간 찍어서 흑의인의 면전으로 다가갔다. 곡영자는 그의 일을 도와주려고 전신의 힘을 더욱 돋구어 억지로 뒤로 돌아간 흑의인의 손을 눌렀다. 그러나 담이 크지 않은 당승무는 약간 주저하는 듯 했다. 이윽고 용기를 내서 가까이 다가간 당승무는 돌연 그의 얼굴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대사백, 이 사람이 면사를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며 그의 면사를 벗기려고 했다. 순간 곡영자는 깜짝 놀라 급히 외쳤다. "안 된다! 빨리 튕기기만 해라? 그 말에 당승무는 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미약을 흑의인의 면사에다 튕겼다. "대사백, 이렇게 해도 됩니까?" 곡영자는 매우 긴장된 신색으로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된다. 이 번천산은 미약성수(迷藥聖手) 이청길(李淸吉)의 물건이다. 아무튼 이 자가 사람이라면 반드시 호흡을 할 것이다." 말하고 있는 동안 흑의인은 점점 반항하는 힘이 약해지더니 드디어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곡영자는 천천히 흑의인을 땅에 뉘었다. "무섭다. 무서워. 이 사람을 제압하려면 당장 죽이지 않는다면 매우 힘이 들 것이다." 당승무는 한동안 물끄러미 흑의인을 들여다 보더니 곡영자에게 옥병을 돌려 주며 입을 열었다. "대사백, 이 사람을 어떻게 하지요?" 곡영자는 약병을 조심스럽게 받아 쥐며 심각하게 대꾸했다. "이 사람은 노부에게 아주 필요하니 물론 데리고 가야겠다." 이렇게 말한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이어-, "한데 이 진법을 파괴한 사람은 이 자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고인이 갈무구를 찾았지?" 당승무는 옆에서 그저 눈만 말뚱거릴 뿐이었다. 애당초 그는 진세를 진짜로 모르기 때문에 지금 이 꽃밭이 남에 의해 깨뜨려졌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아무 영문도 모르는 체 곡영자의 뒤만 묵묵히 따를 뿐이었다. 곡영자는 비록 진법이 깨어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앞서서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약 차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그들은 벌써 꽃밭의 끝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순간 곡영자는 발을 우뚝 멈추더니 당승무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당승무는 즉시 그 뜻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가볍게 하여 급히 곡영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곡영자의 시선을 따라 꽃밭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많은 이름도 모르는 가지각색의 화초들이 잔뜩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꽃밭 저쪽에는 세 칸의 아주 깨끗한 초가집이 있었다. 그 초옥 안에는 하나의 돌탁자와 네 개의 돌의자가 놓여 있었다. 지금 그 돌의자에는 두 노인이 앉아 있었고, 옆에는 또 한 사람이 우뚝 서서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세 사람 중 맨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눈썹, 수염이 전부 하얗고 불그스름한 얼굴에 갈의를 입은 노인이었다. 또 그 옆에 있는 사람은 검은 수염의 청포노인이었는데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방문객인 것 같았다. 그리고 청포인 옆에 시립해 있는 주홍색의 작은 상자를 들고 있는 장정은 청삼대한이었다. 이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곡영자가 나직히 입을 열었다. "저 갈의노인이 바로 갈무구……." 당승무는 급히 다그쳤다. "그의 맞은편 사람은요?" "아마 진세를 과괴한 사람일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청포노인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제는 벌써 재삼 온 뜻을 설명하였소 그런데 장노형께서는 명(名)을 위해서도 아니고, 또 이(利)를 위해서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계시는 거요?" 그 뒤를 이어 갈무구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부의 환혼초는 노부가 수십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성공한 영약이지 한 상자의 보물이 아니오. 그러니 금산을 가져 온다 해도 절대 팔지 않겠소." 이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당승무는 무엇인가 짚히는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 청포노인은 갈신의에게 환혼초를 얻으러 온 것이구나. 환혼초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던데…… 그리고 저 사람은 사람 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먼 길을 달려 왔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갈신의는 왜 들어 주지 않고 거절을 하지?' 이때 청포노인이 냉소를 날리며 싸늘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좋소. 그렇다면 갈노형께서는 후회하지 마시오." 이렇게 말하는 청포노인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득였다. 그러나 갈무구는 외면을 하며 시선을 들어 먼 산을 바라 보았다. "후회할 일이 뭐 있소? 그리고 노부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으니 어서들 가시오." 하고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즉시 일어났다. 그러나 청포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청포노인은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갈무구를 바라보며 차갑기 이를데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갈노형, 좀 앉으시오. 내게 아직도 할 말이 있소." 벌떡 일어섰던 갈무구는 그 말에 마치 무엇에 흘린 듯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실 이 순간 겉으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이미 청포"인은 갈무구에게 한 수를 썼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갈무구의 안색이 이내 새파랗게 변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주시하고 있던 곡영자와 당승무까지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청포노인의 이 한 수는 정말 고명한데?' 당승무가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갈무구의 약간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흥, 설사 당신이 노부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노부는 절대 팔지 않겠소." 청포노인은 호탕하게 껄껄대고 웃었다. "하하하……갈노형, 잘못 생각했소. 형제는 원래 상부의 명령을 받고서 노형과 협상을 하러 온 것이오. 그러나 갈노협께서 팔지 않으시겠다니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이 한 상자의 보물은 갈노협께선 필히 거두셔야만 하오." 하고 말한 그는 길게 숨을 내뿜더니 고개를 돌려 옆에 시립해 있는 대한에게 분부했다. "하총관, 어서 그 상자를 갈신의께 드려라." 그러자 대한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이내 한 작은 상자를 갈무구의 앞에 있는 돌탁자 위에 놓았다. 그러나 갈무구는 그것을 전혀 쳐다보지도 않고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노부는 평생 동안 남에게 무엇을 요구한 적이 없소. 그러니 아무 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지고 가시오." 그러나 청의대한은 못들은 척 하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청포노인은 아까보다는 한결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노부는 억지로 사려고 하지는 않소." "그렇다면 이 물건들을 어서 가져가시오." 기회다 싶어 급히 대꾸한 갈무구의 야멸찬 말에 담담한 청포노인 의 그 다음 말은 실로 의외였다. "노부는 벌써 얘기했지 않소. 이것이 바로 노형의 손실을 보상하는 것이라고……." 갈무구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바짝 대들었다. "노부에게 무슨 손실이 있다고 그러는 거요?" 청포노인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며 시선을 내려 발끝을 바라 보았다. "노부가 여기에 오기 전 노부는 상부로부터 갈노형께선 당대의 신의이시니 필히 예의를 갖추라고 했소. 그리고 또한 온 뜻도……." 그러자 갈무구는 더욱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소. 어쨌든 노부가 환혼초를 재배 한 이유는 천생영약을 보존하려는 생각 때문이지 부자가 되려 한 것 은 절대 아니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나는 조금도 팔 수가 없소." 청포노인은 여전히 그의 말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제 할 얘기만 했다. "또한 상부에서는 갈노형께서 그 영약을 팔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절대 무력을 쓰지 말라고 했소. 그러나 최후까지도 노형께서 팔지 않겠다고 하면 전부 다 없애버리라고 하였소." 순간 갈무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뭐라고? 아니 당신네들은 노부의 환혼초가 어디에 있는지나 알고 있소?" 청포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야 물론 호로곡 안에 있겠지. 그러니 이 계곡을 평지로만 만들면 간단하지 않겠소? 후후후…… 아무튼 갈노형께서는 노부의 권고를 따라 이 한 상자의 보물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갈무구가 아니었다. 갈무구의 얼굴은 금시 칠면조처럼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어 그는 화를 벌컥 내며 자기 앞에 놓인 보물상자를 들어 청포노인을 향해 냅다 던지려 했다. "이놈! 너를 죽이겠다." 그러나 청포노인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 한 상자의 보물은 상부가 갈노형에게 배상하는 물건이니 물론 노형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소. 그러나 노부의 앞에서 던진다는 것은……." 이어 가볍게 일지를 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갈무구의 손에 들려 있던 보물상자를 안전하게 탁자 위로 내려졌다. "내가 다시 한 번 경고하겠소. 괜히 여기 남았다가 개죽음을 당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흥! 죽으면 죽었지 떠나지는 않겠다." 그러나 안하무인격인 청포노인은 이내 발길을 돌렸다. "하총관, 우리 이제 가도록 하자." 바로 이때 숲 속에서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곡영자는 자기가 서 있는 오른쪽의 숲에서 또 하나의 흑의복면인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곧 당승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총관의 몸에 무서운 화기가 있을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그를 잘 감시해라. 노부는 또 하나의 독인을 처리해야 하겠다." 말을 끝낸 곡영자는 즉시 번개같이 오른쪽의 숲 속을 향해 날아갔다. 이윽고 숲 속에 도착한 곡영자는 재빨리 품 속에서 난화가 그려진 병을 꺼내 손톱으로 약간 찍었다. 그리고는 신속한 동작으로 흑의복면인의 앞을 지나가는 순간, 그는 흑의인의 면사에다 재빨리 튕겼다. 다음 순간 그 흑의인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이 미약한 소리를 무공이 극히 높은 청포노인은 즉시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 "누구냐?" 그러나 하총관으로 써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다. 너는 한 번 가보아라." 하총관은 그 말에 즉시 숲 속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쓰러 진 흑의복면인이 보일리 없었다. "이상하다…" "어디로 갔지?"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방을 臺어 보았다. 한데 이때, 돌연 예리한 바람이 그의'뒷통수를 향해 날아왔다. 순간 깜짝 놀란 하총관은 급히 몸을 돌려 그 암기를 받아내었다. 그러나 이내 가슴이 뻐근한 것이 무엇에 부딪친 듯 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은 커녕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다. 이내 그가 손을 내려다 보니 방금 암기를 잡은 손에는 하나의 작은 돌맹이가 잡혀 있는 것이었다. 그는 돌연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봐, 내가 여기에 왔는데 누가 감히 암습을 가하는가?" 그러나 숲 속에선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하총관은 다시 숲 속을 걸어 들어갔다. 이때 다시 일 성의 싸늘한 음향과 함께 암기가 그의 뒷통수를 향 해 날아왔다. 이어 급히 잡아서 보니 이번에는 새카만 돌이었다. 그 다음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자기 손에 독이 묻어 있는 게 아닌가? 당황한 그는 급히 품속을 뒤져 무엇인가 꺼내려고 했다. 하나 당황한 그의 표정이 금시 경악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당……, 당주, 큰일났습니다?" 청포노인의 안색이 그 말에 급변했다. "무슨 일이냐?" 하총관 즉, 하원해는 거의 울상이 되어서 더듬거렸다. "당……당주님, 소인은 물건을 전부 다 잃어 버렸습니다." 청포노인이 대뜸 소리쳐 물었다. "어떻게 해서 잃어 버렸느냐?" 하원해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아까 더듬어 보니까 품 속에 있던 물건 이 전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순간 청포노인은 안색이 변하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모른다고 해놓고 왜 품속을 더듬었나?" 그 말에 머리를 숙이고 있던 하원해가 갑자기 머리를 치켜 들며 말했다. "소인은 아마 그 두 놈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청포노인은 또다시 안색이 변하며 큰 소리로 되물었다. "아니, 무엇이라고?" "아까 두 개의 돌이 소인의 뒷통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 돌엔 독이 있는데 소인이 그 독 있는 돌을 맞았으니 소인은……." 그러자 청포노인의 입에서 거침없이 욕이 튀어 나왔다. "이런 밥통 같으니라고……." "만약 당주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소인의 손바닥……." 청포노인은 하원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급히 물었다. "그놈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하원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청포노인은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밥통 같은 놈, 저리 가라?" 하원해는 연신 대답을 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예, 예. 그러나 당주님, 소인에겐 이제 해약이 없어졌으니 어떻게 합니까?" 청포노인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손을 흔들자 소매 속에서 하나의 작은 병이 튀어 나와 하원해에게 날아갔다. 하원해는 그 약병을 황급히 받아 뚜껑을 열고는 한 알의 주홍색 환약을 꺼내 입 속에 집어 넣더니 그 병을 품 속에 넣고 한 쪽으로 물러났다. 곡영자는 그것을 보자 당승무에게 나직이 일렀다. "하가 놈이 먹은 해약은 전문적으로 독인의 독을 푸는 해약 같으니 조금 있다가 자네가 저것을 훔치게."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말하는 동안 청포노인이 갑자기 두 사람이 숨은 곳을 향해 음흉한 웃음을 날리며 입을 열었다. "어느 고인이신지 좀 나오실 수 없습니까?" 곡영자는 그 소리를 즉시 일어났다. "자, 노부를 따라 나가게." 이어 두 사람은 함께 걸어 나왔다. 하지만 갈무구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므로 다만 멍청하게 돌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곡영자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매우 반갑다는 듯 말했다. <3권에 계속> 비룡팔부 3권 위배 "갈노형, 십여 년 간 못보았는데 당신의 진법은 정말로 고명하구려." 그러나 갈무구는 매우 싸늘한 표정으로 입맛이 쓴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흥! 고명하지만 당신네들은 이미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소?" 곡영자는 옆에 있는 청포노인을 가리키며 슬쩍 웃었다. "허허…… 웬걸요? 이분 노형께서 길을 인도하지 않았다면 노부가 어찌 들어올 수 있었겠소?" 청포노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한참 응시했으나 누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경이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두 분께서는 원래 아는 사이었군요. 노부는 향우춘(向友春)이라 합니다만 이 분 노형의 칭호는 어떻게 되시는지……?" 갈무구는 여전히 냉랭하게 부인했다. "노부는 그것을 모르오." 그러자 곡영자가 씨익 웃으며 느굿하게 말했다. "허허…… 이 늙은이는 다만 갈무구라는 인물만 알고 있으면 되오." 그러더니 향우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늙은이는 곡영자라 합니다." 향우춘은 강호상에서 이런 이름을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까와는 달리 냉소를 치며 거만하게 물었다. "형제의 두 명 수하는 노형이 처치했소" 곡영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이는 여기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귀하의 수하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향우춘은 눈을 싸늘히 흘기며 또다시 냉소를 쳤다. "흥, 여기는 당신 두 분 외에 아무도 없었는데 누가 했다는 말이오?" 그러자 곡영자는 두 눈썹을 곤두세우며 화를 버럭 냈다. "아니, 이거 왜 이러시오? 당신 누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오?" 향우춘은 평상시의 안광이 극히 높았다. 그는 비록 지금 곡영자를 심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당주인 자기의 신분으로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흥, 곡노형은 아마 이 노부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곡영자는 강호에서 돌아다닌 적이 없었기 때문에 향우춘의 내력을 살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그가 두 명 독인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자 그렇게 경시하지는 못했다. "당신은 향우춘이 아닙니까?" 향우춘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알면 되었다." 그러자 곡영자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노부도 벌써부터 알고 있었소." "오냐, 좋다." 차갑게 내뱉은 향우춘은 이어 하원해에게 지시했다. "하총관, 자네 가서 곡노형과 몇 초 겨루어 보게." 하원해는 그의 명령을 받자 즉시 걸어 가더니 돌연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당주, 횡포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죽이는 것을 원하십니까?" 그러나 향우춘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자네, 요량껏 해보게." 하원해는 다시 물었다. "출수하는데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으니 당주께서 규칙을 말씀해 주십시오." 향우춘은 대뜸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밥통아, 너는 전력을 다해도 상대방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하원해는 일순 얼굴이 붉어지며 기분이 좀 상한 것 같았다. "아니,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주께서도 소인의 무공을 보셨지 않습니까?" 향우춘은 더 이상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다시 소리를 질렀다. "잔소리 말고 빨리 가 털기나 해라!" 하원해는 그제야 군소리 않고 곡영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곡 늙은이, 당신은 아마 강호의 친구들에게 청의총관 하원해라는 이름을 익히 들었을 것이다."사람이 바로 나다." 곡영자는 피식 웃으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노부는 강호상에 나서 본 적이 없으니 물론 귀하의 이름을 모르오." 하원해는 매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하늘 높은 줄도 모르지……." 곡영자 역시도 더 이상 말하기가 귀찮은 듯 당승무를 돌아보며 주시했다. "자네, 가서 하총관을 좀 상대하게." 당승무는 즉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런데 대사백, 생포입니까? 아니면 죽입니까?" 당승무가 지금 한 말은 조금 전 하원해가 물은 말을 그대로 흉내낸 것이다. 그러자 곡영자도 역시 향우춘의 흉내를 내었다. "자네, 요량껏 해보게." 당승무는 다시 물었다. "출수하는데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으니 대사백께서는 규칙을 얘기해 주십시오." 곡영자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즉시 대답했다. "출수가 무거우면 하총관이 견디지 못할 것이고, 만약 또 가벼우면 간지럽기만 할 테니 출수를 할 때 약간의 사정을 봐주어 그에게 경고만 주게." 당승무는 자신있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자, 잘 알겠습니다." 하원해는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나 청의총관 앞에서도 감히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니 몹시 대담하구나." 당승무는 즉시 하원해의 앞으로 오더니 예를 취했다. "하총관, 병기로 시합할 것입니까? 아니면 권각(拳脚)으로 할 것입니까?" 하원해는 예를 취하기는 커녕 도리어 매우 거만하게 대꾸했다. "마음대로……." 그러자 당승무는 거만하게 대꾸했다. "저도 마음대로." 하원해도 순간 어조를 바꾸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 권각으로 합시다." 당승무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하총관께서 먼저 공격하십시오." 하원해는 눈을 싸늘히 빛내며 냉랭하게 조롱했다. "내가 먼저 공격을 한다면 당신은 아마 견디지 못할 걸?" 당승무는 하원해의 말을 모방해 대꾸했다. "제가 먼저 손을 쓴다면 총관 역시 받아내지 못할 것이오." 하원해 역시 고개를 저으며 그래도 손을 쓰지 않았다. "안 된다. 본 총관은 당신에게 선기를 주겠다." 당승무는 할 수 없이 선기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정 그렇다면 당신 조심하시오" 말하면서 발을 앞으로 내밀고는 왼손으로 일 초 청룡탐조(靑龍探爪)로 해서 그의 가슴을 잡으려 했다. 하원해는 순간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겨우 이따위 초식으로 본 총관과 겨루어 보려고 하다니 정말 가소롭구나!" 하고 말한 하원해는 몸을 돌려 약간 피하면서 왼손으로 막으며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갈퀴 모양으로 세우고는 당승무를 향해 찔러갔다. 하총관의 이 모습은 바보 같지만 그의 역공은 확실히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당승무가 발한 초식은 허식이었던 것이다. 당승무가 왼손을 뻗치자마자 벌써 몸이 날아가 하원해의 몸을 스치는 순간, 감쪽같이 오른손으로 신속하게 해약을 훔치고는 자기의 품속에 집어 넣었다. 하총관은 그것도 모르고 다만 당승무가 자기의 공격을 피한 것으로 알고 기고만장해서 뒤따라 갔다. 그리고는 즉시 당승무의 등을 향해 오른쪽 손바닥으로 쳐내어 갔다. 당승무도 즉시 몸을 돌려 그 일 장을 받아 내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하원해는 상대방의 무공이 자기와 쌍벽을 이루는 것을 보자 놀라 중얼거렸다. "이놈, 과연 실력이 있었구나……." 당승무는 씨익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대사백께서 저에게 사정을 봐주라고 하셔서 여섯 성의 힘밖에 쓰지 않았소이다." 이어 당승무는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오른손을 창날처럼 세우고 왼손은 반대로 꽉 펴서 잇따라 비스듬히 쳐나갔다. 그 일초이 식이 동시에 공격해 나가니 매우 기괴했다. 하원해는 원래 총관으로써 일신의 무공도 강호의 고수급에 낄 수 있었지만 도대체 이러한 기이한 초식은 일찌기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감히 막을 생각도 못하고 깜짝 놀라 연신 뒤로 물러났다. 원래 당승무는 손가락으로 검을 대신해 염지천이 가르쳐 준 검장십삼 식을 펼쳤던 것이었는데 이 일 초로써 하원해를 물러가게 만든 것이었다. 당승무는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다시 속공을 강구해 빗발치듯 하원해의 전신 요혈을 향해 공격해 갔다. 그러나 하원해는 어쩔줄을 몰라하여 연신 뒤로 피하기만 하는 것이었다. "멈추어라!" 이와 동시에 당승무의 왼손바닥이 하원해의 가슴을 쳐나갔다. 하원해는 놀라 급히 피하려고 하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당승무는 장을 거두며 친절하게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하총관, 일어나시오." 그러나 하원해는 벌떡 일어나더니 장검을 뽑아 들고는 심히 분한 듯 이빨을 갈았다. "좋다. 이놈 오늘 본 총관이 네놈을 꼭 죽이고 말테다!" 이때 향우춘이 대갈일성을 질렀다. "게 서지 못하겠느냐?" 하원해는 이 호통을 듣자 즉시 멈추어 서며 더듬거렸다. "당주님, 이 놈은 흑…… 흑……." 하원해는 원래 흑살장이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당승무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향우춘은 그렀지 않아도 자기의 위신이 깎여 노기가 충천해 있던차라 크게 꾸짖었다. "이놈, 입 닥쳐라!" 하원해가 안색이 변해 뒤로 물러서자 이내 향우춘은 당승무를 응시하였다. "노제의 무학은 정말 고명하오." 당승무는 단검을 손으로 쓸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별말씀을……." 이어 향우춘은 더 이상 당승무를 쳐다보지 않고 곡영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노제는 한쪽으로 물러나시오. 노부는 영사백의 고초를 시험해 보겠소." 그러나 당승무는 물러나지 않고 자신있게 대꾸했다. "저를 시험해 보아도 사부님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승무의 이 말은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격이었다. 게다가 향우춘은 이십여 년 전에 사대천마의 둘째로 그 이름을 날렸던 사람인데 어찌 당승무 따위를 눈에 두겠는가? 향우춘은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며 당승무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흥! 너의 호기는 비록 대단하나 노부는 후배와는 싸울 수 없으니 썩 물러가라!" 하지만 당승무는 여전히 물러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었다. 이때 곡영자가 당승무의 그런 행동을 보고 대소를 터뜨리며 달래듯 입을 열었다. "하하하……, 노제, 이분 향형의 말씀이 맞다. 너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네." 당승무는 그래도 못믿겠다는 듯 고집을 피웠다.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곡영자는 약간 어조를 높여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노제, 쓸데없는 고집은 그만 피우게. 사실 이 노부도 이 향형의 적수가 될 수 있을는지 장담을 못하고 있네." 말과 함께 곡영자는 당승무의 앞으로 걸어갔다. 당승무는 비록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물러가는 도리 밖에 없었다. 곡영자는 향우춘의 앞으로 몸을 돌리며 읍을 했다. "향노형 그럼 어떤 방법으로 겨루시겠소?" 향우춘은 곡영자를 자세히 가늠해 보며 입을 열었다. "형제는 장으로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말하는 순간에 그는 서서히 일 장을 내리쳤다. 이 일 장은 가볍게 날아 왔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런 위력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곡영자는 아주 침중한 안색으로 일 장을 왼손으로 막으며 짐짓 찬사를 보냈다. "향노형의 공영장(空靈掌)은 정말로 고명하구려." 그러면서 곡영자는 즉시 손바닥을 뒤집어 일 초를 공격했다. 이렇듯 두 사람이 일 초를 교환했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옆에 있던 당승무는 순간, 경악을 느끼며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지금 두 사람은 내력을 겨루고 있는 것이로구나. ' 이때 향우춘이 가볍게 콧방귀를 커며 시덥지 않은 투로 얘기했다. "곡노형의 안력은 정말로 고명하오." 을목신장 향우춘은 말하면서 갑자기 한 발을 내밀더니 오른손으로 연달아 세 초를 발했다. 이 세 초는 보기에 아주 가벼웠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곡영자의 대혈을 공격하고 있었다. 더구나 향우춘의 동작의 신속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당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세 초중 어느 일초가 먼저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당승무가 다시 중얼거렸다. "이 세 장은 동시에 세 곳을 공격하고 있지만 그러나 만약 내가 검장 십삼 식 중의 제 일곱 식의 한안화우(寒雁晝羽)를 쓴다면 일제히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왼손으로 그의 겨드랑이를 공격할 수 있다." 당승무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 곡영자는 원래 위치에서 한 바퀴를 돌더니 일 장을 격출했다. 이렇듯 일 장을 쓰는 동시에 연속적으로 상대방의 세 장을 전부 받아대고 말았다. 이때 향우춘은 이 세 장을 동시에 발한 것이었지만 전부 다 왼손으로 발했기 때문에 다소 전후의 차이는 있었다. 순간 두 사람은 갑자기 갈라서더니 각기 두 발자국씩 물러났다. 향우춘이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썩 훌륭한 일기삼청이오!" 곡영자는 그가 단번에 사문의 초식을 얘기하자 같이 웃으며 응수했다. "하하하……, 향노형의 안력도 매우 고명합니다." 두 사람은 이 두 마디를 교환한 후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의 상황은 아까와는 크게 달랐다. 두 사람은 신형을 번개같이 움직이던 연속적인 속공을 버렸다. 더구나 매초 식마다 전부 다 살기를 띠고 있었다. 당승무는 처음에 이 일 초일 식을 자기의 검장십삼식으로 어떻게 파괴를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상대방의 그림자도 찾을 수 얼어 마음 속으로 크게 느꼈다. '나는 비록 검장십삼 식을 배웠지만 공력이 약하기 때문에 향우춘 같은 고수를 만났다면 시전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십여 초를 교환했지만 승부는 나지 않았다. 이때 향우춘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잠깐, 멈추시오!" 그러자 장영과 인영은 전부 다 사라지고 두 사람은 원래의 위치대로 되돌아 왔다. 곡영자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융을 하며 물었다. "향노형,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십니까?" 향우춘은 얼굴에 비장한 빛을 띠며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노형은 형제가 수십 년 만에 만난 유일한 고수입니다. 그런데 노부에게는 어찌 일 초가 남아 있는데 만약 그 일 초도 효과가 없다면 노부는 진 것으로 인정을 하겠소." 곡영자는 향우춘이 침중하게 얘기하자 자기도 태도를 바꿔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좋습니다. 이 노부에게도 최후의 일 장이 있으니 노형께 가르침을 받아야겠소이다." 향우춘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아마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법일 것이오." 곡영자는 그 말을 듣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약간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이 늙은이가 알기로 우리에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는 없는 것 같소." 향우춘은 음산하게 웃으며 비꼬았다. "그렇다면 곡노형의 말씀은 겨루지 않겠다는 것이오?" 향우춘이 이 말을 한 이유는 곡영자가 말한 최후의 일 초가 다만 겁을 주려고 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곡영자는 향우춘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오. 이 늙은이의 뜻은 우리는 진짜로 겨를 필요없이 다만 각자의 최후 일 초를 발휘해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진 것으로 하는 것이 동귀어진의 방법보다 낫지 않소?" 향우춘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것도 괜찮군요." 곡영자는 뒤로 한 발 물러서더니 향우춘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그럼 먼저 향노형께서 시전하십시오." 향우춘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서서히 오른손을 들었다. 이 순간, 향우춘의 얼굴에 은은한 향기가 서리며 동시에 그의 오른손바닥도 청색으로 변하여 장심(掌心)에서도 푸른 기운이 내뿜어지는 듯했다. 이때 오른쪽 바위에 앉아서 쌍방의 싸움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듯 하던 갈무구가 향우춘의 장심을 보자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을목진기(乙木眞氣)이 말에 향우춘이 서서히 손을 거두며 매우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렇소. 형제의 이 일 초는 그 을목진기를 끌어올려서 무청을 유형으로 바꾼 을목신장이오!" 곡영자는 대소를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하하하…… 향노형께서 을목진기를 그런 경지에까지 연마했다면 무림에서 단연 손가락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늙은이의 것을 한 번 보십시오!" 향우춘은 자기가 이 절묘의 한 수를 시전했는데도 상대방이 물러가는 기색이 없고 다시 시전을 하려고 하니 극히 놀라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상대는 이것보다 더 무서운 초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향우춘은 날카로운 두 눈으로 곡영자의 몸을 매섭게 응시했다. 곡영자는 땅에서 세 개의 반짝이는 진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가볍게 굴려 다시 펴보이자 아까의 그 오색찬란하던 진주는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이 한 수는 곡영자가 독을 집중시켜 진주 안에다 몰아넣은 절학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장삼에 먼저 폭약을 칠해 놓고 문지른 것과 별다른 구별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향우춘은 매우 얕보는 듯한 표정으로 조롱했다. "흥! 이것은 다만 노형이 독에 대해서 좀 조예가 깊다는 것 뿐이지 무슨 공부라고 할 수가 있겠소?" 그러자 곡영자는 매우 불쾌한 듯이 대뜸 물었다. "아니, 이런 것은 공부로 치지 않습니까?" 향우춘은 냉랭하게 비웃었다. "흥, 노형의 이 한 수는 다만 독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오." 이에 곡영자도 따라 콧방귀를 뀌더니 대뜸 물었다. "노형이 보기에는 이 늙은이가 손에다 미리 독약을 발라 놓은 것 같소?" "그럼 그게 아니란 말이오?" 곡영자는 별안간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하하하하……향노형께서 이 곡영자를 잘못 보았소? 곡영자가 웃으며 말하는 동안 그의 수중에 있던 검은색으로 변한 진주가 곡영자의 장삼으로 다시 들어가자 놀랍게도 진주는 원래대로 찬란하게 빛을 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향우춘의 안색이 다소 변했다. 이어 곡영자는 다시 말했다. "향노형, 다시 잘 보시오!" 하고는 곡영자가 즉시 두 손을 들어 숨을 들이마시자 갑자기 그의 몸이 수척이나 더 커지고 그의 성성한 백발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곤두세워졌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곡영자의 두 눈에서 칠흑 같은 정광이 발사되었다. 이어 그는 안색이 점점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두 손을 펼치자 다시 검은 빛을 동시에 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곡영자의 피부는 얼굴, 머리, 손할것 없이 전부 검은색으로 광채를 띠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향우춘은 평상시에 쌓은 견학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그의 수하 중에서 두 명의 독인이 있지만 이렇게 사람의 온몸을 전부 다 검은 색으로 돌변시키는 무공은 일찌기 본 적이 없었다. 향우춘은 안색이 즉시 변해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이…… 이것은 도대체 무슨 사문의 공부인가?" 향우춘 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당승무까지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사백의 무공은 정말로 신의 경지에까지 다다랐구나. ' 곡영자는 향우춘의 앞으로 나서며 싱긋 웃었다. "향노형, 이 늙은이의 무공과 노형의 을목신장과 비교해 보니 과연 어떻소?" 순간 향우춘이 기겁을 하며 급히 뒤로 한 발 물러나더니 쌍장으로 가슴을 막았다. "노…… 노부가 졌소." 그러더니 급히 하원해를 향해 소리쳤다. "하총관, 가세!"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즉시 몸을 돌려 숲 밖을 향해 걸어갔다. 하원해도 자기의 당주까지도 상대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보자 즉시 뒤도 안 돌아 보고 뒤따라 갔다. 곡영자는 저만큼 내려가는 향우춘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향노형, 잘 가시오!" 갈무구는 여전히 한 쪽에 앉은 채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독공…… 천하에 이런 독공을 연마한 사람이 다 있었다니……." 곡영자가 시선을 거두어 갈무구를 바라보며 웃었다. "갈노형께서는 정말 견학이 높군요. 한 눈에 노부가 독공을 연마했다는 것까지 알아 맞추시니……." 갈무구는 곡영자를 흘낏 보고는 냉소를 쳤다. "흥! 그는 노부의 환혼초를 사러 왔는데 당신은 무엇하러 왔소?" 곡영자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갈노형, 이 늙은이는 당신을 위해 그 사람을 쫓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갈무구는 여전히 냉랭하게 대꾸했다. "흥! 폭력으로 쫓아내는 것을 보니 당신도 좋은 심보로 온 것 같지는 않소!" 곡영자는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갈노형, 이번에는 아주 틀렸소이다." 갈무구는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노부의 어디가 틀렸단 말이오?" 곡영자는 웃음을 거두며 침중하게 말했다. "이 늙은이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소. 그러나 나는 남의 부탁을 고 온 것이지 당신을 만나려고 온 것은 아니오." "그게 누구요?" 곡영자는 품에서 한 장의 지도를 꺼내 건네주었다. "당신 자신이 보시오." 갈무구는 지도를 받아 잠시 훑어 보더니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이것은 옛날에 노부가 고죽방에게 남겨준 물건인데 당신은 대체 어디서 이것을 얻었소?" "훔쳐온 것은 아니오." 곡영자가 고개를 흔들자 갈무구는 참지 못하고 당승무에게 눈길을 돌렸다. "노제, 혹시 이 사람은 고죽방의 사람이 아니오?" 당승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곡영자가 나서며 물었다. "갈노형, 이 지도를 고죽방에게 남겨준데는 어떤 이유라도 있습니까?" 갈무구는 순간 심각하게 안색이 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는 여태까지 남에게 조금이라도 부탁을 한 적이 없었소. 그런데 나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친구가 있었는데 아깝게도 그 친구는 내가 환혼초를 찾은 해에 죽고 말았지. 노부는 그 친구의 죽음을 추념하는 뜻으로 이 한 장의 지도를 남겨 모든 사람들이 구구환원단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 났다면 이 지도를 증거삼아 노부를 찾아오게 만든 것이오." 곡영자는 갈무구의 그 말을 듣자 매우 기뻐했다. "됐소이다. 노부는 바로 다른 사람을 대신해 이 지도를 갖고 갈노형을 찾으러 온 것입니다." "이 지도는 확실히 나 갈무구가 고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남긴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갈무구는 갑자기 곡영자에게 공손히 읍을 했다. "노형께서 기왕에 고인을"대신해 이 호로곡을 찾아오셨으나 이 갈무구가 귀빈으로 대접하지 못함을 널리 이해하십시오." "갈노형,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자 갈무구는 정색을 하며 지도를 흔들었다. "노부는 평생동안 다만 이 한 장의 지도를 고죽방에 남겨 두었소. 다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노부의 심원(心顧)이었소. 그러나 이번에 노형께서 이 지도를 가지고 왔으니 노부의 이 심원도 이제는 끝이 나나 보오." 그러더니 혼탁한 눈매를 굴리며 이어 물었다. "그런데 곡노형께서는 다른사람을 대신해서 약을 구하러 왔소이까?" 곡영자는 태도를 바꾸어 매우 심각하게 얘기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구구환원단을 복용했으나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뿐이오." 갈무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것쯤이야 매우 간단하오. 노부가 당신에게 한 그루의 환혼초만 주면 되는 것이오. 사실 정신이 혼미해 깨어나지 않은 사람은 한잎의 환혼초 만으로도 족합니다." 곡영자는 즉시 예를 취하며 매우 송구스러워 했다. 이어 곡영자는 당승무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자네 이리 와서 아까 그 물건을 갈노형께 꺼내 드리게." 그러자 당승무는 품 안에서 거위알 만한 노란 물건을 꺼내 석상 위에 올려 놓았다. 갈무구는 그것을 보자 즉시 안색이 변해 물었다. "아니, 당신도 노부의 환혼초를 사려고 그러시오?" 그 세 개의 물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금과 같았다. 그러나 이 세개의 물건을 진짜 값으로 따진다면 그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곡영자는 이 세 개의 물건을 갈무군가 금덩이로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허허허……, 이 물건은 아까 쫓겨간 향당주의 것입니다. 그런데 갈노형께선 이 물건의 내력을 아십니까?" 갈무구는 분명 금덩이로 보았는데 곡영자가 이렇게 말하자 도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노부는 잘 모르겠소." 곡영자는 담담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갈노형께서는 왕년에 강호 바닥을 많이 돌아다니셨으니 화신 나훤파(羅煊婆)라는 이름을 들으셨겠지요?" 갈무구는 순간 깜짝 놀라며 급히 되물었다. "화신 나훤파 말이오?" "그렇소. 이 세 개의 벽뢰탄으로는 능히 갈노형의 호로곡을 평지로 만들 수가 있지요." 그러자 갈무구가 안색이 싹 변하며 매우 섭섭한 듯 중얼거렸다. "노부는 그들과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이 호로곡을 없애려 한단 말인가?" 곡영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까 그가 자세히 얘기했지 않습니까? 기왕에 전부 쓸 수 없다면 한 그루도 남길 수 없다고 말입니다." 갈무구는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이해를 못하겠군." 이때 곡영자가 갑자기 생각난 듯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아마도 갈노형의 이 환혼초가 그들에게 깊은 위협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갈무구는 먼 데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힘없이 저었다. "환혼초는 사람의 머리를 맑게 하며 피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고 또한 인체 내의 모든 시들은 기능을 회복해 줄 수가 있어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영약이지 해약이라고는 할 수 없소." "그렇소! 바로 그점이지요. 환혼초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가 있다는 게 그들이 없애 버릴려는 이유입니다." 갈무구는 서서히 시선을 거두며 의혹에 찬 눈을 빛냈다. "노부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군."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갈노형께서 이 두 사람을 보시면 잘 알 것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당승무에게 턱짓을 하며 지시했다. "노제, 자네 가서 그들을 끌고 오게." 천독진법 당승무는 대답을 하자마자 꽃밭을 향해 걸어가더니 양쪽에 두 명의 흑의인을 껴안고 다시 돌아왔다. 갈무구는 그들 두 사람을 주시하며 궁금한 듯 물었다. "이 두 사람이 바로 향당주의 수하입니까?" 곡영자는 품 속에서 하나의 작은 병을 꺼내더니 한 알의 환약을 꺼내 갈무구에게 전해 주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갈노형께서는 저 사람의 맥박을 한 번 짚어 보시오. 하지만 노형은 먼저 이 약을 먹어야만 해가 없을 것이오." 갈무구는 환약을 받아들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것은 해독약 같은데……?" 곡영자는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갈노형! 노형은 과연 고명하군요. 지금 이들 두 사람의 온몸은 기독으로 덮혀 있기 때문에 이 약이라야만 풀 수가 있소." 갈무구는 곡영자를 주시하며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지금 기독에 중독이 되어 있단 말이오?" 갈무구는 조금 전 곡영자가 독공을 시전하는 것을 보고 이들 두 사람도 곡영자의 수하인 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곡영자는 좀 멋쩍은 듯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갈노형은 지금 오해를 하고 계시오. 이들은 늙은 것의 수하가 아니라 바로 흑영도의 부하들이오." 갈무구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침중하게 물었다. "흑영도에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같은 독인들을 키운단 말이오?" 곡영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이 얘기를 하자면 길어질 것 같소. 갈노형께서는 벌써 수 년 간 강호상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흑영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을 것이오. 이들 두 사람이 바로 흑영도 내에서 독으로 훈련을 시킨 독인들이오. 하지만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만약에 그들을 잘못 건드리기만 하면 즉시 독이 발작을 해서 죽게 되어 있소." 곡영자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계속 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늙은이는 평생 동안 독을 연마했지만 그들을 구하는 방법을 연구해 내지 못했기 때문에 갈노형에게 부탁을 하려 했던 것이오." 갈무구는 환약을 입에 넣은 후 한동안 맛을 보더니 갑자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환약의 배합은 아주 묘한 것 같군. 노부는 수십 년 동안 많은 약을 먹어 봤지만 이런 해독약은 처음 보겠소." 이어 그는 다시 곡영자와 당승무를 한 번씩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아니오. 이 약은 해독 할 수가 있소.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온몸이 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아마 이 환약의 힘으로는 그들이 독을 풀어줄 수 없을 것 같소."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맞았소. 이 환약은 다만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만 풀어줄 수가 있소. 그렇지만 그들 자신의 독은 풀 수가 없소." 갈무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은 말하지 않고 흑의인 앞으로 다가가더니 한 손으로 팔목을 잡고 한 손으로는 세 개의 손가락을 잡으며 맥박을 짚었다. 갈무구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다른 손을 바꾸어 잡고 서서히 눈을 감더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곡영자와 당승무도 옆에 묵묵히 서서 구경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약 반 시간이 지나서야 갈무구는 그 사람의 손을 놓았다. 그는 다시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또 다른 흑의인의 맥박을 잡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긴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일어났다. 이때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곡영자가 몹시 궁금한 듯 참지를 못하고 급히 물었다. "갈노형, 무엇을 좀 알아낼 수가 있겠소?" 갈무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노부는 비록 처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이처럼 괴이한 독은 처음 보았소." 곡영자는 갈무구를 주시하며 나직하게 물었다. "대체 어떤 독인지 말씀해 주실 수 없겠소?" 갈무구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이들의 몸에 있는 기독은 세상에서 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소. 지금 이들은 완전히 정신을 잃었소.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들이 중독이 되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점이오." 갈무구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만약 노부의 추측이 맞는다면 그들은 최소한 삼 년 동안은 음식을 먹지 않고 독물만 먹고 살았을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몸 속에 있는 독은 최소한 천 가지 이상은 될 것이오." 곡영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노부의 거처가 바로 천독곡이라고 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그들에게 천 가지 이상의 독물이 있다니……." 갈무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사실 노부의 처방으로써는 그들의 몸에 있는 독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소. 하지만 노부에게는 그들의 혼미한 정신을 풀 수 있는 한 가지 약초가 있소." 곡영자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그쳐 물었다. "한 가지의 약초란 바로 환혼초가 아니오?" 갈무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맞았소. 바로 그 약초이오." 곡영자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 젖히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이 때문에 그들이 갈노형의 환혼초를 모두 사가려고 한 것이군요?" 갈무구는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선뜻 말을 꺼냈다. "맞았소. 이들은 정신이 혼미해져야만 그들이 지휘를 받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가 있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정신이 맑아지는 날에는 아무리 온몸에 독치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위해서는 일을 해주지 않을 것이오." 이어 갈무구는 곡영자와 당승무를 바라보며 갑자기 공수를 했다. "두 분께서는 여기에서 잠시 기다리시오. 노부는 갔다가 곧 돌아오겠소."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초가집을 향해 걸어갔다. 얼마 후, 갈무구는 자기로 된 병을 들고 초가집 안에서 걸어나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는 이름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남한테 부탁을 한적이 없었소. 하지만 곡노형께서 고인을 대신해서 지도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노부는 원래 한 그루의 환혼초로서 빛을 완전히 다 갚을 생각을 했었지만 뜻밖에 곡노형이 노부를 구해 주셨으니 노부는 또 다시 곡노형의 은혜를 입고 말았소." 갈무구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남에게 부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또다시 남의 은혜를 입게 되자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듯 했다. 곡영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언성을 높였다. "갈노형!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갈무구 역시 손을 흔들며 두 개의 자기 병을 석상 위에 올려 놓았다. "이것은 노부가 직접 만든 환원단이오. 한 병에 백 알씩이 들어 있으며, 효과는 환원초와 마찬가지이니 이것을 곡노형에게 드리겠소!" 곡영자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 급히 말을 받았다. "갈노형께선 만들기도 힘이 드셨을 텐데 이 늙은이는 한 병만 받아도 과분하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한 병을 집어들더니 갈무구에게 주었다. "이 한 병은 갈노형께서 거두시오." 할 수 없이 갈무구는 약을 받아들더니 당승무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곡노형께서 전부 받지 않으시겠다면 이 한 병은 당노제에게 드리겠소." 곡영자는 할 수 없다는 듯 당승무를 바라보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어서 갈노형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게." 당승무는 대답을 하더니 앞으로 다가서며 포권을 했다. "갈노대,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어 당승무가 병을 받아 품 속에 넣으려는 순간, 갈무구가 갑자 기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허허허…… 노제, 두 알만 꺼내서 이 두 명의 독인들에게 넣어주고 효과가 있는가를 한 번 시험해 보게!" 당승무는 공손히 대답을 하며 병 뚜껑을 열고 두 알의 환원단을 꺼내더니 두 명의 흑의인에게 각기 한 알씩 먹였다. 갈무구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환원초는 원래 일 년생의 초목으로써 봄에 새싹이 나며 여름에 성장을 하여 가을과 겨울엔 시들어 버리지. 하지만 이 노부는 그 잎들이 그냥 시들어 버리는 것이 너무 아까워 환혼초가 제일 성장하는 여름과 가을 사이에 그 잎을 자르고 가루를 만들어 저장을 해둔지 약 십 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 두 병을 만들었네." 갈무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두 명의 흑의인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실대로 얘기를 하자면 한 알을 만드는데는 약 육 칠 개의 잎사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 효과는 하나의 잎보다 수십 배나 더 차지. 하지만 노부는 수십 년 동안 계곡 밖으로 나간 적이 없기 때문에 한 번도 시험해 볼 수가 없었고, 효과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고 있네." 당승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약병을 품 속에 넣으려는 순간 곡영자가 갑자기 소리쳤다. "조심하게. 그들이 깨어났으니……." 환혼단은 과연 신효가 있는 것 같았다. 두 명의 흑의인은 환약을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눈을 뜨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갈무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허허허…… 허허허…… 한 알의 효과는 과연 신선한 잎사귀보다 더 큰 것 같군!" 두 명의 흑의인은 그가 말을 하는 사이에 이미 일어서서는 이상한 듯이 연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두 분 노대께서는 또한 누구시오?" 이때 곡영자는 벌써 공력을 쌍장에 집중시키고 만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동은 투 사람이 입을 열고 말을 하는 것을 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노부는 곡영자라 하오. 또한 이분 노형은 바로 옛날에 강호상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던 갈신의 갈무구이오." 두 사람은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급히 공수했다. "원래 두 분께서 갈신의와 곡노대이셨군요. 참으로 실례한 것 같습니다." 갈무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물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하지만 두 분의 칭호는……?" 그때 오른쪽에서 있던 사나이가 먼저 허리를 굽혔다. "저는 점창(點倉) 갈비백(葛飛白)입니다." 갈비백의 별호는 추풍안(追風雁)이었으며 그의 사형 번천안(煩天雁) 백장청(柏長靑)과 함께 점창쌍안(點蒼雙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갈무구와 곡영자는 벌써 다년간 강호에 나가지 않았으니 자연적으로 그들의 명호를 알 수가 없었다. 갈무구는 갈비백을 바라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이제보니 갈장사는 노부와 같은 성을 가졌군. 그렇다면 갈장사께서는 점창대협 백장청을 아시오?" 갈비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백장청은 저의 사형입니다." 갈무구는 큰 소리로 웃어 젖히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이라고 할 수가 없군. 노부가 이십 년 전에 약을 구하기 위해서 점창에 갔을 때 사형인 백대협의 집에서 반 달간 묵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또 하나의 흑의인이 갈무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조봉춘(曹蓬春)이라고 합니다. 가문을 얘기하자면 노대께서도 아마 아실 것입니다." 갈무구는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더니 급히 물었다. "당신의 영존이 누구인지 어서 말을 해 보시오." 조봉춘은 다시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산서(山西) 조노복(曹老福) 입니다." 갈무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영존이 바로 쾌도왕(快刀王) 조대협이었군. 노부는 그의 이름을 들은지가 오래되었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소." 이때 갈비백이 나서며 나직하게 물었다. "저에게 한 가지의 의문이 있는데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갈무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급히 말을 이었다. "혹시 두 분 노대께서는 저희들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왔는지 알고 계십니까?" 곡영자가 그들을 주시하며 다그쳐 물었다. "두 분께서는 정말로 기억이 나질 않소?" 갈비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꿈에서 깨어난 것만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 속이 텅빈 것만 같고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옆에 있던 조봉춘이 나서며 한 마디 덧붙였다. "저도 동감입니다. 마치 아주 긴 세월이 지난 것처럼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갈무구는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엷은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은 모두 남에 의해 정신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독인으로 연마되어 있는 것 같았소." 갈비백은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다그쳤다. '개체 누구한테 당했단 말입니까?" 갈무구는 묵묵히 듣고 있는 곡영자를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은 모두 바로 곡노형께서 구했으며 노부는 다만 두 분의 정신을 맑게 해주었을 뿐이오. 하지만 이분 곡노형께서는 독에 대해서 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지만 두 분의 독은 제거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소." 이 말을 듣자 조봉춘은 안색이 변하며 곡영자를 향해 포권을 했다. "곡노대! 저는 무슨 독을 당했습니까?" 곡영자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대답을 했다. "조장사!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두 분께서는 독인이 된지 하루 이틀이 아닌 것 같소. 그렇기 때문에 노부는 일시적으로 무슨 독이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지만 두 분의 혼미한 정신이 벌써 회복이 됐으니 몸에 독이 있다고 할지라도 괜찮을 것이오. 그러니 노부가 며칠 더 연구를 해서 해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겠소." 곡영자는 다시 긴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중독되기 전 일들을 생각해 낼 수가 있겠소? 또한 노당의 추측으로는 독인으로 된 사람은 반드시 아주 많은 것을 볼 수가 있다고 하던데……." 갈무구가 곡영자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상대방이 비록 독인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오늘 환원단으로써 이분들의 혼미한 정신을 깨어나게 할 수가 있었으니 이분들은 아마 다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오. 허허허…… 노부가 십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환혼약이 과연 헛되지 않았군."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은 옛날의 추억을 되찾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았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약 한 시간 쯤이 흘렀다. 이때 조봉춘이 갑자기 고개를 들며 여러 사람들을 주시했다. "중독되기 전의 일들이 약간 생각이 납니다." 조봉춘의 말을 듣던 갈비백은 깜짝 놀라는 듯 했다. "대체 무엇이 생각난다는 말이오?" 조봉춘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전에 가부의 명령을 받고 흑영당에서 열리는 개산대전(開山大典)에 참가하기 위해서…, ." 조봉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갈비백 역시 생각이 난 듯이 손뼉을 쳤다. "맞았소. 저도 생각이 납니다. 저도 흑영도의 개산대전에 참가를 했었으며 그 후에는…… 음…… 그렇습니다. 저희는 섬에 갇혀서 한 사람도 빠져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또 흑영도의 짓이었구나. 그렇다면 사부를 살해한 것도 틀림없이 흑영도의 짓일 것이다.' 조봉춘이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당시 자의방주 방통은 각대 문파의 문인 제자에게 억지로 자의문에 투입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불복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알의 환약을 먹여 떠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저희 사형제 세 사람은 바로 흑영도에 투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명의 사형제는 당장에 죽고 저는 반노적(理老賊)에게 일 장을 맞고 그 자리에 기절해 버렸습니다. 그 다음은 저도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 사마천마 곡영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노부가 듣기로는 흑영도는 삼 년 전 천재에 의해서 완전히 침몰되었다 하던데……." 이 말을 듣자 갈비백은 깜짝 놀라며 급히 말을 가로챘다. "예, 흑영도가 삼 년 전에 없어졌단 말입니까? 만약 흑영도가 정말로 삼 년 전에 없어졌다면 저희 두 사람이 어떻게 무사할 수가 있었겠소?" 곡영자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마 두 분께서는 천재를 당하기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것이오." 갈비백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흑영도의 사람들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곡영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노부도 질 모르고 있소." 상대방이 말을 않자 그는 또다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계속 했다. "갈노제께서는 향우춘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소?" 갈비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말을 받았다. "알고 있습니다. 향우춘은 바로 사대천마(四大天魔) 중의 둘째입니다. 또한 사대천마 중 나머지 세 사람은 바로 공손수창과 연병문(年秉文) 그리고 방통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의교주 염지천의 수하가 되었고 흑영도의 황의, 청의, 백의 그리고 흑영당의 당주가 되었으며 향우춘이 바로 청의당주 입니다." 곡영자는 빙긋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두 분은 조금 전 향우춘을 따라서 왔소."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당승무가 갈비백을 바라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혹시 갈대협께서는 흑영도의 신가성을 가진 영주를 아십니까?" 갈비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꺼냈다. "잘 모르겠소." 갈비백은 다시 실소를 터뜨리며 말을 계속했다. "저는 비록 흑영도의 사람에게 삼 년 동안 제압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시간은 두 시간 밖에 없었소. 그렇기 때문에 신가성을 가진 영주가 있는지는 모르겠소." 당승무는 이를 갈아 붙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어디에 있던지 나는 반드시 찾아 내겠소." 이때 곡영자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갈무구를 바라보며 급히 말을 꺼냈다. "이 늙은이는 갈노형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소." 갈무구 역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어서 얘기를 좀 해보십시오." 곡영자는 웃으며 갈무구를 향해 한쪽 손을 내밀었다. "갈노형께서는 이 늙은이의 맥박을 좀 봐주시겠소?" 갈무구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곡노형, 아무렇지도 않은데 무엇 때문에 맥박을 짚어 보라고 하시오?" 곡영자는 옆에서 있는 갈비백과 조봉춘을 바라보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이 늙은이는 평생 동안 독을 연마해 왔을 뿐만 아니라 천하에." 아무도 나를 제압할 수 없다고 자부해 왔소. 하지만 오늘 짧은 삼 년 동안에 독인으로 된 갈, 조두분 노제가 올때에 이 늙은이가 기르고 있는 금뱀까지 이분들의 발자국만 봐도 무서움을 느꼈소.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독이 퍼 독한가를 갈노형께서 말씀해 보시라는 것이오." 갈무구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것 때문이었군. 하지만 맥박을 짚어서 가려내기란 힘이 들 것 같소." 갈무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곡영자의 왼팔을 잡았다. 이때 한참 동안을 잡고 있던 갈무구가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곡노형과 갈, 조 두 분은 비록 독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질적으로 다른 것 같소." 갈무구의 말이 끝나자마자 곡영자는 광분한 듯 급히 다그쳤다. "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갈무구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곡노형께서 연마하신 것은 독공이오. 또한 독은 모두 무공 안에 있기 때문에 일단 신공을 끌어 올렸다 하면 온몸에 퍼뜨릴 수가 있고, 한 �군데로 몰아낼 수가 있소. 하지만 갈, 조 두 분은 기독을 믿었기 때문에 독인이 된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무공과 결합할 수가 없으며 또한 마음대로 시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두 가지의 다른 곁과를 나타낼 수밖에 없소."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오." 갈무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갈, 조 두 분과 흑영도에 있는 모든 독인들은 다만 기독을 복용했기 때문에 온몸에 독이 있소. 그러니 만약 사전에 예방약만 먹으면 아무런 해도 없소. 하지만 곡노형께서 연마하신 것은 독공이고 또한 독이 무공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 마음대로 발할 수가 있소.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노형의 공력과 비슷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노형의 독공 아래 당할 것이오." 곡영자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표했다. "참으로 고명하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오." 그리고는 다시 갈비백과 조봉춘을 향해 포권을 했다. "노부는 여기에서 멀지 않은 천독곡에 살고 있소. 또한 두 분은 몸에 기독이 있으니 노부와 함께 천독곡에 가서 더 연구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갈비백과 조봉춘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곡영자는 다시 갈무구를 향해 공수를 하며 말을 꺼냈다. "이 늙은이는 이만 돌아가야 하겠소. 갈노형께서 만약 시간이 있으시다면 천독곡에 오십시오. 하지란 노부의 곡 안에는 독물이 있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만 하오." 말을 끝내자마자 품 속에서 세 알의 약을 꺼내 갈무구에게 전해주었다. "이것은 노부가 만든 괴독환이니 갈노형이 천독곡에 오실 때에 이 약을 먹으시면 독이 절대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갈노형께서는 받아 두시오." 갈무구는 받아서 품 속에 집어 넣더니 급히 말했다. "곡노형, 잠깐만 기다리시오. 노부가 곧 가서 환혼초를 가지고 오겠소." 곡영자는 고개를 설세설레 저으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조금 전 갈노형께서 주신 환혼단이 있으니 그만 두시오." 갈무구 역시 고개를 저으며 급히 대꾸했다. "아니오. 노형은 환혼초까지도 같이 가지고 가십시오." 갈무구는 상대방이 말을 하기도 전에 처마 밑에서 약삽을 꺼내더니 집 뒤를 향해 급히 돌아갔다. 이것을 보자 당승무는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이분 갈신의께서는 비록 괴팍스러운 곳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생각이 깊은 사람이구나.' 얼마 후에 그는 약삽과 환혼초를 담은 바구니 하나를 들고 걸어왔다.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약바구니를 땅에 놓더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바구니 안에는 아홉 그루의 환혼초가 있소. 한 그루는 고인의 후인에게 전해 주시고 나머지 여덟 그루는 곡노형이 보관하셔서 천독곡에 재배를 하시기 바라겠소. 이 물건은 천생영약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람의 보호가 있어야 하오. 게다가 이것은 노부가 십여 년 동안 재배를 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곡노형께선 잘 재배해 주시오." 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하나의 종이 쪽지를 건네 주었다. 종이 쪽지를 보자 곡영자는 불길한 느낌이 들어 급히 물었다. "갈노형! 이것이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갈무구는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며 길게 탄식을 했다. "노부는 조금 전 여러분의 몇 마디를 듣고 하나의 이상한 점을 발견했소." 곡영자는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다그쳐 물었다. "대체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갈무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반문했다. "삼 년 전에 흑영도에 갔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천재로 인해서 흑영도가 없어졌다고 하지 않았소!" 곡영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다시 말했다. "그렇소. 하지만 그것이 왜 이상하단 말이오?" 갈무구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제점이란 바로 여기에 있소. 만약 삼 년 전에 천재로 인해서 흑영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면 얘기할 필요도 없소. 하지만 삼 년 후에 흑영도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나타났고 게다가 그때 흑영도에 간 사람들이 모두 정신을 상실하여 독인으로 변했으니 이것이 바로삼년전 흑영도의 사람들이 한짓이라는 것을 알수 있지 않소?" 곡영자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치에 맞는 말이오." 갈무구는 여러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노부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당시의 실력으로 강호를 독패할 수 없을 뿐만 아씨라 구대 문파를 두려워 했기 때문에 일부러 천재를 가장했을 것이오. 또한 그들은 은밀한 곳에서 자기들에게 잡혀 있는 무림 고수들을 모두 이용하려고 독인으로 만들었을 것이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갈신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갈무구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그들이 삼 년이 지난 지금 강호상에 다시 나타났다 해도 조금도 무서워 할 필요는 없소. 하지만 그들은 환혼초가 정신이 혼미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마 향우춘을 보내 환혼초를 없애 버리려고 했던 것 같소." 곡영자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노형의 말씀이 맞는 것 같소." 갈무구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환혼초는 천생의 영약이기 때문에 재배하기가 매우 힘이 드오. 그렇기 때문에 노부는 십오 년 동안 열여섯 그루 밖에 키우지를 못했소. 뿐만 아니라 친구에게 노부를 위해서 여기에다 하나의 전도오행진법(顚倒五行陣法)을 만들자고 했었소. 그런데 그것도 헛되어 오늘 향우춘에 의해 가볍게 파괴되어 버렸소." 갈무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또한 그들이 계곡 밖에서 탐지를 한 기간은 하루 이틀이 아닐 것이오. 그리고 향우춘은 절대로 이 진법을 알고 있을 리가 없으며 필시 흑영도에 있는 어떤 사람의 지시를 받고 들아왔을 것이오. 향우춘은 비록 곡노형의 무공에 의해 물러갔지만 환혼초는 그들에게 극대한 위협을 주고 있기 때문에 이대로 물러가지 않을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노부는 여기에 남은 여덟 그루의 환혼초를 곡노형에게 부탁해서 천독곡에 재배하시라고 한 것이니 어서 받아 주시오." 곡영자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렇다면 갈노형께서도 이 늙은이와 같이 천독곡에 가서 며칠간 묵고 계시지요." 그러자 갈무구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 젖히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흑영도의 사람들이 비록 노부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노부는 절대로 호로곡을 떠나지 않겠소." 곡영자는 하는 수 없이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갈노형께서 그처럼 가시지 않겠다면 이 늙은이가 며칠 후에 다시 찾아와 노형을 만나 뵙겠소." 갈무구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도 곡노형이 찾아오는 것을 환영하오. 그리고 우리가 배운것은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원리는 똑같소. 다 같이 신농백초경(神農百草經)에서 나온 것이니 만약 같이 연구를 한다면 의학이나 해독 방면에 대해서 많은 발견을 할 수가 있을 것이오."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한 목소리로 그 말을 수긍했다. "사실 갈노형의 말이 맞소." 갈무구는 환혼초가 들어 있는 약바구니를 가리켰다. "노형, 저기에 있는 아홉 그루의 환혼초를 꼭 가지고 가도록 하시오." 곡영자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승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제 갈 때가 된것 같으니 자네는 어서 저 약바구니를 들게." 당승무는 허리를 굽혀 즉시 약바구니를 들었다. 곡영자는 다시 갈무구를 바라보며 급히 물었다. "이 늙은이도 그만 가봐야겠소. 하지만 노형에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 갈무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급히 말을 받았다. "무엇이든지 물어 보시오." 곡영자는 주위를 살펴보며 천천히 물었다. "갈노형께서는 평상시에 계곡 밖을 돌아다니시오?" 갈무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노부는 계곡 안에 있는 것도 완전히 모르고 있기 때문에 곡밖에 절대로 나가지 않소." 곡영자는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계곡 입구에 극독을 투입해 두겠소. 만약 노형께서 밖에 나가실 때에는 반드시 조금 전에 준 피독약을 먹기 바라오." 갈비백과 조봉춘 그리고 당승무 등 세 사람도 갈무구에게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드리고 나서 작별을 했다. 갈무구는 걸음을 멈추면 약간 언성을 높였다. "진법이 향우춘에 의해 파괴되어 버려 노부는 또다시 몇 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할 것 같으니 더이상 마중을 하지 않겠소." 이들 네 사람은 갈무구와 작별을 고하고 계곡을 빠져 나왔다. 이때, 곡영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갈노제! 자네들은 뒤로 몇 걸음 물러가 있게!" 갈비백 등 세 사람은 그의 말대로 몇 걸음 물러났다. 곡영자는 뒤를 돌아보며 소맷자락을 곡 입구를 향해 펄럭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여기에 남아 있거라, 노부가 사흘 후에 다시 와서 데리고 가겠다." 하고는 또다시 옆으로 걸어가더니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너희들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거라! 노부가 사흘 후에 데리고 가겠다." 그런데 곡영자가 소맷자락을 펄럭일 때마다 사오 줄기의 암광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소맷자락 속에서 나오는 물체들은 약 일 척 가량 되는 것 같았으나 공중에서 한 바퀴 돌기만 하면 즉시 보이지 않았다. 이 물체는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날으는 개미와도 같았다. 곡영자의 이같은 행동에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은 마음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분 노대의 몸에는 수십 가지의 독물이 내포되어 있었구나.' 천독곡을 향해 돌아올 때에는 당승무가 앞장을 섰으며 곡영자는 맨 뒤에서 계속 독충들을 놓아 보내고 있었다. 계곡 입구에 다다르자 곡영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얏!"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양소맷자락을 펄럭이며 허공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이 때-. 곡영자의 소맷자락 속에서 한쪽은 누렇고 한쪽은 검은색의 연막이 퍼져나오며 그의 몸을 따라 곡 입구에 있는 나무 위로 날았다. 곡영자는 땅 위에 사뿐히 내려서며 말을 꺼냈다. "이제는 쐈네. 수천 명이 온다고 할지라도 오는대로 쓰러질 것이다." 당승무는 그를 한동안 주시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독인도 제압할 수가 있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네. 하지만 나중에 투입시킨 두 가지는 특수한 독약을 혼합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중의 하나는 틀림없이 독인을 제압할 수가 있을 것이네." 갈비백은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곡노대의 독공은 참으로 고명하신 것 같습니다." 곡영자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 젖히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허허허…… 노부는 과거 십여 년 동안 독으로써 천하제일을 자부해 왔소. 하지만 두 분 노제를 만난 후 흑영도에도 노부와 비슷한 강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노부는 그와 겨루어 될 기회를 찾고 싶을 뿐이오." 하고 말하자 조봉춘이 곡영자의 곁으로 다가서며 급히 일을 열었다. "만약 곡노대께서 독인을 완전히 깨어나도록 할 수만 있다면 저희는 더 이상 흑영도를 무서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곡영자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했다. "이치에 맞는 말이오. 하지만 흑영도를 그처럼 쉬운 상대로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되오." 무당의 내간 곡영자는 다시 가벼운 탄식을 하며 말을 계속했다. "두 분께서는 그처럼 성급해 할 필요가 없소. 노부의 천독곡 안에는 흑영도와 상대를 하려고 하는 홍채문의 소문주가 상처를 치료하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두 분께서는 그와 합세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당승무가 나서며 이를 갈아 붙였다. "대사백님! 저도 흑영도의 무리들과 싸우겠습니다." 곡영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자네가 사부의 원수를 갚겠다면 노부도 토와 주겠네" 당승무는 다시 양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제자, 본문의 원수 역시 동사도의 무리들 같습니다."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천당문에게 감히 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때 틀림없이 흑영도의 짓일 거네." 잠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갈비백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곡영자를 향해 물었다. "이분 노제께선 사천당문의 제자입니까?" 곡영자는 당승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존이 바로 당문의 장문인 당승종(唐承宗) 당대협이오." 갈비백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당승무를 주시했다. "원래 노제가 바로 당대협의 자제분이셨군요. 또 한 분의 독문에 대한 전문가를 만나 참으로 영광이 아닐 수 없소." 당승무는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약간 붉혔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들 네 사람은 얘기를 주고 받는 사이에 어느덧 고개를 넘어 천독곡 앞에 도착했다. 곡영자는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이제 다 온 것 같으니 노부가 길을 인도하겠소."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앞으로 나서며 곡 안을 향해 몇 걸음 가더니 갑자기 안색이 변하여 급히 물었다. "우리 어서 가도록 합시다. 곡 안에 벌써 다른 사람이 침입을 한 것 같소." 그리고는 즉시 안을 향해 번개처럼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뒤에 따르고 있던 당승무 등 사람들도 그의 뒤를 따라 급히 달려갔다. 한편 곡 안에는 굳게 닫혀 있던 석옥문이 열려져 있었고 소불이가 손으로 두 무릎을 잡은 채 문 앞에 태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또한 그의 옆에는 한 자루의 송문장검(松紋長劍)이 놓여 있었다. 곡영자는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며 다그쳐 물었다. "소노형, 띠기에 누가 들어오지 않았소?" 소불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오히려 반문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습니까?" 곡영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곡 입구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었소. 대체 누가 다녀갔단 말이오?" 소불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나직하게 달을 받았다. "이 늙은이도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겠더군요. 조금 전 운공을 끝내고 밖에 나왔을 때 누가 감시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지요. 그 사람은 흑의복면으로써 이 늙은이가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않더군요." 이 말에 곡영자는 안색이 변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과연 독인이 나타났었구나. 흥! 흑영도의 독인들 외에 또 누가 감히 노부의 천독곡을 찾아올 수가 있단 말인가? 노부가 그들을 찾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먼저 노부를 찾아오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구나." 소불이 역시 이 말을 듣자 안색이 변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독인! 그렇다면 조금 전 그 흑의인은 흑영도에서 왔단 말인가? 음음…… 하지만 그 사람의 무공과 검법은 무당파 같더군요. 이 늙은이는 아무리 물어도 그가 대답을 않기에 화가 나서 즉시 싸우기 시작했지요." 곡영자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며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소노형께서는 어떻게 해서 그를 쫓아냈소?"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쫓아내다뇨? 이 늙은이는 그 놈과 십여 초를 싸웠지만 시종 승부가 나지 않았소. 그래서 이 늙은이가 그의 장검을 튕기어 내었지만 그놈은 검을 놓쳤어도 빈손으로 이 늙은이를 향해 번개처럼 덮쳐오곤 했소. 다시 이 늙은이는 그놈의 대혈을 수없이 찔렀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소. 고래서 이 늙은이가 하는 수 없이 살수를 쓰려고 하자 갑자기 곡 입구에서 두 마디의 예리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놈은 검도 찾을 생각하지 않고 즉시 도망을 쳐 버렸소." 소불이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송문검을 집어들고 보였다. "바로 이 검이 그놈의 장검이오. 곡노형께서 보시기에는 무당파의 것 같지 않소?" 곡영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검을 유심히 따라 오더니 도리어 반문했다. "이 검에는 독약이 묻혀져 있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소. 조금 전 이 늙은이는 그놈과 싸울 때 그에게 어깨를 약간 스쳤었소. 하지만 다행하게도 노형이 두 알의 독약을 먹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죽었을 것이오. 그런데 이늙은이가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당파의 문하가 무엇 때문에 검에 독약을 발랐는가 하는 것이오." 곡영자는 깜짝 놀라 그의 곁으로 급히 다가갔다. "노형이 어깨에 일 검을 맞았다니 어디 좀 봅시다." 소불이는 몸을 그의 곁으로 돌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약간의 피를 흘렸을 뿐이지 별다른 일은 없소." 하며 어깨의 옷을 벗자 과연 세 치 정도의 핏자국이 나타났다. 피는 이미 굳어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던 곡영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허허허…… 당신의 핏 속에 있는 독은 그의 검에 묻어 있던 독보다 훨씬 더 강한 것 같소. 허허…… 노부의 독영단이 그처럼 효험이 있을 줄은 정말 뜻밖이오. 그러니 소노명께서 성공을 한 것 뿐만 아니라 이 노부 역시 성공을 한 셈이오." 여기까지 말을 한 곡영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허허허…… 허허허……, 허허허……." 소불이 역시 빙긋이 웃으며 언성을 높여 물었다. "곡노형께서는 독영단이 독을 해독할 수가 있기 때문에 성공을 했다고 볼 수가 있지만 이 늙은이는 대체 무엇을 성공했단 말이오?" 곡영자는 웃음을 그치며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독공! 노부는 두 알의 독영단으로써 또 하나의 독인을 만들었단 말이오." 또다시 그는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이분은 바로 점창대협 백장청의 사제 갈비백 갈노제이고, 저분은 산서 쾌도왕의 자제분인 조봉춘 조노제이오. 뿐만 아니라 이 두분은 흑영도에 의해서 정신을 잃고 독인으로 되었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환원초로써 정신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온몸에 독을 가지고 있는 독인들이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 두 사람을 주시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스럽소." 갈비백은 허리를 굽히며 곡영자를 향해 물었다. "이분 노대께서는 대체 누구십니까?" 곡영자는 갈비백과 소불이를 한 번씩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진작 소개해 주어야 하는데 깜박 잊고 있었군." 이어 소불이는 갈비백과 조봉춘을 향해 공수를 했다. "백일당귀 소불이이라 하오." 갈비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웃었다. "아, 노대께서 바로 신투 설상무영이셨군요. 몰라뵙고 실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좀 멋적은 듯 히죽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기왕에 모두 독인이 되었고 또한 일행이니 너무 예의를 차리지 맙시다." 곡영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맞았소. 이제부터는 한 집안 식구나 다름이 없지 않소?" 그런데 말하는 그의 입 속에서 갑자기, "웅! 웅!" 하는 소리가 났다. 당승무는 이상하다는 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대사백님!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곡영자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만 내고 있었다. 얼마 동안 계속해서 소리를 내자 갑자기 이상한 소리와 함께 수만 마리의 검은 벌들이 곡영자의 머리 위에 집중을 했다. 이때 곡영자가 갑자기 계곡 밖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벌들 중의 이십여 마리가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곡 밖을 향해 날아갔고 나머지는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소불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급히 물었다. "곡노형께서는 이 검은 벌들로써 곡 안에 있는 무당파의 문하들을 추격하게 한 것이오?" 곡영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아니오. 노부가 돌아올 때에 호로곡에다 비록 몇 가지의 독물을 투입시켜 놓긴 했지만 일단 일이 일어나게 되면 알려줄 수가 없으니 이 벌떼들을 호로곡에 보내 순시를 하게 했을 뿐이오." 곡영자는 다시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며 손짓했다. "여러분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오. 노부는 제소문주에게 환혼단을 먹여야 하고 또한 몇 그루의 환혼초를 심어야 하겠소." 일행은 모두 그의 말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곡영자는 자기병을 꺼내더니 제갈명에게 한 알의 환혼단을 먹이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소문주는 지금 환혼단을 복용했으니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것이오. 그리고 노부는 그가 정신을 잃었을 때 이미 혈액을 독혈로 바꾸어 주었고 또한 두 알의 독영단을 먹였기 때문에 그의 극독은 노부와 비슷할 것이며, 그는 깨어나면 반드시 운공 조식을 해야만 할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소노형과 갈, 조 두 분 노제께서는 그를 위해 호법을 서 주고 노부는 곧 환혼초를 심으러 가겠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여기의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시고 어서 가 보십시오." 곡영자는 당승무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꺼냈다. "자네는 약바구니를 들고 노부와 함께 환혼초를 심으러 가세." 그리고는 곧 밖을 향해 걸어나가자 당승무도 약바구니를 든 채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이 한 칸의 석실에는 하나의 의자 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땅에 앉아야만 했다. 이때 제갈명을 주시하고 있던 갈비백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분 제소문주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당신들은 전에 그를 본 적이 있을 것이오." 조봉춘이 나서며 갑자기 말을 받았다. "이분 제소문주는 전에 흑영도에서 본 것 같습니다. 그때는 또 한분의 여자가 옆에 있던 것 같았는데……." 조봉춘이 말을 끝내기도 전엔 누워 있던 제갈명은 어느새 가슴에 기복이 있었으며 가끔씩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이것을 보자 소불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는 됐다. 됐어. 과연 제소문주께서는 깨어났구나." 제갈명은 눈을 시서히 뜨며 주위를 살폈다. 소불이는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급히 물었다. "제소문주! 좀 어떠시오?" 제갈명은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상한 듯 물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에 누워 있습니까?"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제소문주께서는 중상을 입고 조금 전에 깨어나셨으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조금 후에 하고 어서 운공 조식을 하시오." 제갈명은 자기의 머리가 평온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일어나 앉더니 운공 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소불이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갈비백의 옷자락을 잡고 집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갈비백는 할 수 없이 그를 따라 나오며 궁금한 듯 물었다. "소노형! 무슨 일이 있으시오?" 소불이는 그의 귀에다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누가 곡 안에 잠입해 들어온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요." 갈비백은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즉시 주위를 살폈다. "그럼 저의 눈에는 왜 보이지가 않습니까?"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이 늙은이가 강호의 경험에 의해서 느끼는 것이오. 또한 이 사람은 곡 안에 들어온 지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으니 노제는 물론 볼 수가 없을 것이오." 갈비백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중하게 대답했다. "제소문주가 운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석실 근처에 잠입을 하지 못하게 해야만 하오. 그렇기 때문에 노제가 즉시 들어가 조노제에게 석실을 지키도록 하고 적이 문 입구에까지 오지 않는 한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된다고 일러 주시오." 소불이는 다시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을 계속했다. "노제 또한 저기 보이는 고목나무 위에 올라가 적이 나무 밑에까지 오지 않는 한 절대로 몸을 나타내서는 안 되오." 갈비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궁금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노형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소불이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 늙은이는 나가서 살펴본 다음 될 수 있는대로 빨리 쫓아버릴 생각이오." 갈비백은 허리를 굽히며 급히 집 안을 향해 걸어갔다. 소불이는 집 주위에 두 그루의 고목나무 밖에 없었기 때문에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왼손에 장검을 쥔 채 숲속을 향해 연기처럼 몸을 날렸다. 이때-. 앞에 있는 작은 사잇길에 세 개의 검은 그림자가 바람처럼 나타났다. 소불이는 이것을 발견하자마자 오른쪽에 있는 하나의 큰 바위 뒤로 즉시 몸을 숨겼다. 세 사람 중 맨 앞에 있는 사람은 약 오십 세 정도 되어 보이고 차가운 표정과 하얀 수염을 내려뜨린 황색 장삼의 노인이었다. 또 뒤에 있는 사람 중 하나는 청색경장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또 하나는 황색경장을 하고 있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삼십 세 가량의 거한들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아주 조심스럽게 사잇길을 걷고 있었으며 황의노인은 한 걸음을 옳길 때마다 사방을 살피는 게 경솔한 빛이 조금도 없었다. 사잇길은 지금 소불이가 숨어있는 큰 바위 부근에까지 다다르면 끝인 것이다. 황의노인은 큰 바위 부근까지 오자 걸음을 멈추며 석옥을 주시하더니 청의대한을 향해 물었다. "자네가 쫓은 곡가란 늙은이와 본문의 두 명의 독인들이 확실히 이 곡 안에 들어왔는가?" 청의대한은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을 했다. "예! 그들은 틀림없이 이 계곡 안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소인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황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자네들이 데리고 온 진총관의 두 명의 무사가 바로 이 계곡 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죽었단 말인가?" 청의대한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대답을 했다. "예! 소인이 계곡의 입구에까지 오자마자 진총관이 남기고 간 한 명의 형제가 입구에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데 그는 소인에게 깊이 들어가지는 말라며 진총관이 데리고 온 독인 오호까지도 저 집의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독인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자기가 신호를 보내 물러나게 했었지만 독인 오호는 나올 때에 수중의 장검까지도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소불이는 이들의 말을 들으며 내심 생각을 했다. '원래 무당파의 문하에게는 .독인 오호라고 불렀구나. 그리고 그가 나와 싸울 때 들렸던 휘파람 소리는 구원의 신호였구나.' 황의노인은 청의대한을 바라보며 한숨 섞인 소리로 물었다. "진총관과 독인 오호가 나올 때에 그 곡가란 늙은이는 오지 않았는가?" 청의대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또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 계곡 안에는 곡가란 늙은이 외에도 또 하나의 무공이 극히 높은 사람이 있단 말이군," 청의대한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끄덕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의대한은 석옥을 주시하며 길게 탄식을 했다. "무당 천학자(天鶴子)의 수중에 있는 장검을 뺏을 만한 사람이 누구일까? 강호상에는 그럴만한 고인이 별로 없는데 종남산의 계곡 속에 그런 절정 고수가 있었다니……." 무명도 소불이는 이 말을 듣자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독인 오호란 바로 무당의 천학자이었구나……. ' 천학자란 바로 무당파의 당교인 천령자의 동문 사제였다. 그리고 천령자는 장문이란 직책에 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밖에 나가는 일이 극히 드물었으며 무당파의 모든 일과 연락은 모두 천학자가 대표를 하고 있었다. 천학자는 비록 무당파에서 둘째가는 실력자였지만 구대 문파 안에서는 극히 무게가 있고 또한 몇 안되는 고수 중의 한 사람이었다. 황의노인은 다시 두 명의 대한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여기에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무슨 극독을 뿌려 놓은 것 같네. 하지만 부영주께서 이미 신영주를 파견해 놓았으니 곡안에 비록 극독이 있다고 할지라도 무서워 할 것이 없으니 우리는 이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들어가세." 이 말에 이대로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소불이는 갑자기- "히히!" 하는 소리를 냈다. 발을 옮기려고 하던 황의노인은 갑자기 이 소리를 듣자 즉시 걸음을 멈추더니 주위를 살피며 큰 바위를 가리켰다. "자네들은 어서 저 바위의 뒷쪽을 수색해 보게!" 두 명의 대한은 즉시 대답을 하며 제각기 좌우로 해서 바위의 뒷쪽을 향해 달려갔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청의대한이 황의노인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급히 말을 꺼냈다. "총관 어른! 바위 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황의노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여전히 바위 쪽을 주시했다. "흥! 노부는 분명히 바위 뒤에서 나는 웃음 소리를 들었는데…… 그렇다면 노부가 잘못 들었단 말인가?" 청의대한은 바위 쪽을 바라보며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바위 뒤에는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황의노인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바위 부근의 잡초들은 왜 찾아보지 않았느냐?" 한데 황의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짤막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황의노인 뿐만 아니라 두 명의 대한들까지도 분명히 들을 수가 있었다. 웃음 소리는 바로 황의노인의 뒤에서 들려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하나의 공지일 뿐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몸 뒤에서 또다시 웃음 소리가 들렸다. 황의노인은 미리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듯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여전히 아무 것도 없었다. 황의노인이 고수를 만났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입을 열려고 하자 두 명의 대한들이 잡초 속에서 허리를 일으켰다. 순간 총관이라고 하는 황의노인의 어깨 너머에 확 풀어제친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한 사람이 나타나 입을 벌린 채 음산하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어느 사이에 해는 지고 서서히 땅거미가 찾아들고 있었다. 원래부터 어두침침한 계곡 안은 더욱 어두웠고 음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황의노인의 등 뒤에 귀신 같은 물체가 버티고 서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두 명의 경장대한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여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했다. "아-악! 귀신이다. 귀신……." 황의노인은 두 명의 대한을 바라보더니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귀신이 어디에 있다고 그처럼 떨고 있느냐?" 황의대한은 이 말에 다시 눈을 비비며 황의노인의 뒤를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어느 사이에 사라져 버렸는지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의대한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금 전 귀신 같은 물체가 서 있던 곳을 가리켰다. "귀신은 조금 전 총관 어른의 뒤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 같습니다." 황의노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하지만 아낙 것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화를 벌컥 내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지신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사람을 함부로 놀리다니……." 이때 청의대한이 나서며 급히 말을 가로챘다. "조금 전 피를 흘리고 있는 귀신을 저도 똑똑히 봤습니다." 이때 또다시 청의대한이 황의노인의 뒤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악! 귀신…… 귀신……." 또다시 귀신은 황의노인의 뒤에 나타났으며 황의대한도 똑똑히 보았다. 이번에 나타난 귀신은 얼굴이 몹시 창백했으며 큰 입을 벌린 채 금방이라도 덮쳐올 것 같은 기세였다. 황의노인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번개처럼 일 장을 쓸었다. 하지만 허공을 휘두른 듯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황의노인은 또다시 화를 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귀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황의대한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예. 복형제의 말이 맞습니다. 먼저 나타났던 것은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나중에 나타난 것은 얼굴이 몹시 창백했습니다." 황의노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투덜댔다. "자네들은 보았는데 왜 나는 보지를 못했단 말인가?" 청의대한은 자기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손짓을 했다. "분명히 총관 어른의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황의노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다시 말을 꺼냈다. "홍! 노부의 뒤에 숨어 있었다고?" 황의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진의 차가운 바람이 그의 목을 향해 불어닥쳤다. 이렇게 되자 황의노인의 안색도 크게 변했다. 그는 즉시 허리를 굽혀 앞을 향해 비호처럼 몸을 날리는가 싶더니 다시 돌렸다. 하지만 뒤에는 귀신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황의노인은 두 명의 대한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노부의 뒤에 누가 있느냐?" 바로 이때 "쌩!" 하는 차가운 바람이 또다시 그의 목덜미를 향해 스쳐갔다. 황의노인은 깜짝 놀라 다시 일 장을 휘두르는가 싶더니 앞을 향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인어 황의노인이 멈춰서자마자 일진의 차가운 바람이 또다시 불어닥쳤다. 황의노인은 지금 이것이 귀신이 하는 짓이 아니라 고수가 하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빙빙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돌아도 상대방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멈추자 또다시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렇게 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큰 바위를 중심으로 해서 돌기 시작했다. 황의노인이 계속해서 돌고 있을 때에도 계속 귀신 같은 그림자는 나타났다. 청의대한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안절부절 못했다. "큰일 났습니다. 귀신! 귀신을 만난 것 같습니다." 황의대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예! 예! 우리는 빨리 가도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황의 노인은 계속해서 돌고 있을 뿐 그들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황의노인이 바위 뒤로 돌아갔을 때 두 명의 대한들은 정신없이 도망을 쳤다. 그들이 도망치는 것을 보자 황의노인은 더욱 화를 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디로 도망을 치려 하느냐? 어서 서라!" 순간 허공을 가르는, "휭! 휭!" 하는 소리와 함께 황의노인은 급히 달리고 있던 황의대한의 머리를 향해 일 장을 내리쳤다. 이렇게 되자 황의노인은 도망을 치지도 못한 채, "으악!" 하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청의대한은 이 비명 소리를 듣자 즉시 몸을 돌렸다. 그러자 황의노인의 뒤에는 또다시 얼굴이 창백한 귀신이 나타나 입을 벌린 채 웃고 있는게 아닌가. 청의대한은 새파랗게 질린 채 황의노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은 당신과 아무런 원한이 없으니 제발 용서를 해주십시오." 황의노인은 이 말을 듣자 화를 벌컥 내며 고함을 질렀다. "이 노부가 죽이기라도 했단 말이냐?" 하지만 정의대한은 여전히 손을 싹싹 빌며 말했다. "소인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면 꼭 어르신네를 위해 향을 태워 드리겠습니다." 황의노인은 이를 갈아붙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느냐?" 말을 끝냄과 동시에 청의대한을 향해 일 장을 내리치려는 순간, 갑자기 몸을 비틀거리며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황의노인이 쓰러지자 청의대한은 자기가 종이 향불을 태워 주겠다고 한 말 때문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빙긋이 웃으며 큰 절을 했다. "당신이 소인을 용서해 주시면 소인은 반드시 돌아와서 향 종이를 태워 드리겠습니다." 청의대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가거라.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밤에 꼭 와야만 한다." 이것은 조금 전에 나타났던 귀신의 음성이 틀림 없었다. 청의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절을 했다. "소인, 잊지 않고 오겠습니다." 그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곡 밖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사실 귀신으로 변장한 사람은 바로 설상무영 소불이였다. 또한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그를 만나면 마치 귀신을 만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불이는 청의대한이 도망을 치는 것을 보며 득의양양하여 호쾌하게 웃었다. "허허허……, 허허허……, 감히 여기에 잠입을 하려고 하다니 그리고는 한 손으로 혈도를 찔린 황의노인을 들고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이때 나무 위에 잠복을 하고 있던 갈비백이 대소를 터뜨리며 내려오더니 소불이를 향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노형의 경공은 과연 신의 경지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이 늙은이는 약간의 잔재주를 부렸을 뿐인데 무엇이 그처럼 대단하다고……." 두 사람이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을 때 조봉춘이 소리를 듣고 달려나오며 물었다. "소노형! 한 놈을 잡았습니까?" 소불이는 황의노인을 가리키며 돌연 반문했다. "두 분께서는 이 사람을 모르겠소?" 갈비백은 조봉춘을 한 번 쳐다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저와 조형은 비록 흑영도의 사람들 틈에서 삼 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긴 했어도 정신이 혼미해 있었으니 어떻게 그들을 낱낱이 알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조봉춘이 나서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이 사람이 황의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황의당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흑영도의 사대 당주 중에서 첫째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공손수창이 아니면 아마 공손수창의 총관일 것입니다." 소불이가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았소. 조금 전 이 늙은이가 이놈들을 쫓아다닐 때 그 두 명의 수하들이 이 사람에게 총관이라고 부르는 것을 얼핏 들었소. 하지만 두 분께서는 그들의 총관이란 직책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계시오." 갈비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탈하게 웃었다. "게가 알기로는 당주 아래에 두 명의 총관이 있으며 각기 무사들을 데리고 있지만 직위는 별로 높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하며 세 사람은 큰 돌을 집 앞에 운반한 다음 주저앉았다. 소불이가 먼저 황의노인의 네 군데 혈도를 찌른 다음 그의 혼혈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황의 노인은 서서히 두 눈을 뜨고 세 사람을 주시하더니 급히 물었다. "당신네들이 본 총관을 잡았단 말이오?" 소불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히죽 웃었다. "아니오. 조금 전 노형이 곡 입구에 쓰러져 있는 것을 이 노부가 구해온 것이오." 그러나 황의노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날카롭게 물었다. "당신이 바로 신투 소불이요?"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다그쳤다. "맞았소. 하지만 노형의 존성 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황의노인은 소불이의 웃음 소리가 조금 전 귀신의 웃음 소리와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본 총관은 낙건훈(路建勳)이라고 하오. 한데 조금 전 귀신으로 변장을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낙건훈은 여전히 냉소를 머금은 채 다시 물었다. "좋소. 그렇다면 그 두 명의 독인도 당신이 잡아 왔소?" 소불이는 갈비백과 조봉춘에게 눈짓을 하며 급히 말을 받았다. "독인……? 이 늙은이가 바로 독인이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낙노형께서 한 번 보시오." 이어 소불이는 운공을 하더니 낙건훈의 장삼자락을 가볍게 만졌다. 그러자 장삼자락에는 즉시 하나의 검은색의 손자국이 나타났다. 소불이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태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는 그들의 정신이 혼미한 것을 보고 같은 독인으로써 하는 수 없이 그들의 몸 속에 있는 독을 제거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사히 깨어난 것이오." 낙건훈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궁금한 듯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들의 몸에 있는 독을 제거할 수가 있었다." 소불이는 빙긋이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 자살문의 비밀 수법이오. 그러기 때문에 낙노형께서 우리 자살문에 가입을 하시겠다면 더욱 환영을 하겠소." 소불이가 다시 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자 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으며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을 주시했다. "이 사람의 해독약으로 당신들은 정말로 깨어났소?" 조봉춘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경멸하듯 말했다. "흥! 낙가야. 흑영도의 독을 세상 사람들이 풀 수 없을 줄로 알았더냐?" 낙건혼이 빙긋이 웃자 소불이가 나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낙노형, 이 늙은이의 얘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믿겠소? 만약 지금이라도 노형께서 자살문에 가입을 하겠다면 절대로 늦지 않았소." 소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낙건훈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 젖히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무영도와 대적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소불이는 이 말을 듣자 두 눈이 휘둥그레져 급히 물었다. "낙오형께서는 흑영도의 총관이 아니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무영도의 얘기를 꺼내시오?" 낙건혼은 주위를 살펴보더니 냉랭하게 웃으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어차피 당신네들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본 총관은 사실대로 얘기를 해주겠소. 흑영도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 버렸소. 그리고 이 낙건훈은 바로 무영도의 총관이오." 소불이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 무영도! 이 늙은이는 그런 이름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혹시 노형께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낙건훈은 냉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을 때가 됐는데 본 총관이 왜 거짓말을 하겠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조봉춘이 갑자기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갈비백은 소불이가 벌써 상대방에게 유인 작전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려 암중에 그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소불이는 다시 갈비백과 조봉춘에게 눈짓을 하며 히죽 웃었다. "그렇지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소. 하지만 이 늙은이는 자살문을 창립해서 당신네들의 무영도 사람들을 찾아가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은데…… 허허……." 자살곡 소불이는 연신 히죽거리며 빈정대었다. "히히히…… 낙소형께서는 여기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낙건훈은 눈을 부릅뜨며 표독스럽게 쏘았다. "본 총관이 천독곡도 모르고 찾아올까봐 그러시오?" 소불이는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틀렸소. 낙소형이 만일 어제 오셨더라면 천독곡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오늘만은 아니오." "아니, 어째서?" 소불이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연신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오늘부터 이 늙은이가 이 계곡을 관리하게 되었으니 이름하여 자살곡이라 하오." 낙건훈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일순 멍청해졌다. 소불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만약 한 사람의 이름을 얘기하면 아마 당신은 알 것이오." 낙건훈이 급히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요?" "소불이는 갑자기 안색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은 사대 당주 중의 한 사람인 방통을 알 테지? 이 천독곡의 주인이 바로 그의 사형인 곡영자이시다." 낙건훈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 곡가는 어디에 있소?"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는 벌써 늙은이에게 잡혔지. 그래서 지금 집 안에 누워 꼼짝 못하고 당신과 같이 자살문의 포로가 되었다." 낙건훈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독기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원래 곡가를 찾아왔는데 갑자기 자살문이 되어 버렸다니 그 글자대로 너희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소불이는 주위가 떠나가라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겨우 너희 몇 명의 독인으로 이 늙은이를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으냐?" 낙건훈은 싸늘하게 냉소를 치며 쏘아붙였다. "흥! 본 총관이 보기에는 당신에게 하늘을 오를 수 있는 재주가 있다 해도 오늘밤 안에 꼭 죽을 것이오!" 소불이는 음산하게 눈을 흘겼다. "호…… 하지만 믿지 못하겠는데……?" 낙건훈은 입가에 교활한 미소를 띠었다. "뭣? 당신은 그래도 살고 싶소?" 소불이는 순간 두 눈썹을 곤두세우며 냉소를 쳤다. "흥! 어림도 없는 소리. 이 늙은이가 지금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들의 자의必주가 몸소 온다고 해도 아마 이 늙은이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낙건훈은 싸늘하게 웃었다. "후후.., 그러나 아깝게도 당신은 우리 교주를 만날 수 없을 것이오." 그 말에 소불이는 쥐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그렇다면 어느 무서운 인물이 온다는 말인가?" 낙건훈은 그 말에 대답도 없이 도리어 물었다. "당신 소대(簫大) 장문인(掌門人) 이 주지한 자살문의 인원수는 얼마나 되오?" 소불이는 느긋하게 웃으며 짧은 수염을 배배 꼬았다. "병(兵)이란 원래 정(精)이 귀한 것이지 딴 것은 필요가 없소. 이 늙은이는 원래 혼자서 장문인을 해먹고 있지. 그러나 지금은……." 그러더니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을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지금은 벌써 저 두 사람까지 합쳐 세 사람이 되었소. 그러니 만약 낙소형께서도 감행한다면 네 사람이 될 것이오." 의외로 낙건훈은 화를 내지 않고 정색을 했다. "잠깐, 내게 한 가지 방법이 있소." 소불이는 마음 속으로 매우 괘씸하게 생각했다. '좋다. 이놈, 원래는 내가 너의 허실을 탐지하려고 했는데 네놈이 도리어 나를 넘보려 하다니…….' 소불이는 암중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흥미가 있는 것처럼 과장했다. "무슨 방법인지 말해 보시오." 낙건훈은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우리 향당주가 곡영자의 손에 당할 때 곡영자가 방통의 사형이라는 것을 알았소. 그래서 긴급하 신호를 보내서 바로 오늘밤에 천독곡을 쑥밭으로 만들기로 했소. 그러나 지금 곡영자가 벌써 당신에게 생포를 당했으니 이제는 틀린 일이지요. 하지만 당신이 이몸에게 합세를 해주어서 곡영자를 내놓기만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자살곡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보장을 하겠소." 소불이는 다시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흥! 이제보니 네 놈이 공을 세우려고 그러는구나. 푸후……하지만 이 소불이가 누군데 감히 네 따위 놈의 협박에 넘어 가겠느냐?" 그러나 겉으로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짐짓 심각한 체 했다. "글쎄…… 이 일은 좀 고려해 볼 만한데……." 낙건훈은 살았다 싶어 어조를 높이며 소불이의 안색을 살폈다. "그렇다면 빨리 형제의 혈도를 풀어 주십시오." 소불이는 침중하게 안색을 굳히며 머뭇거렸다. "풀어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낙총관은 오늘밤에 과연 어떠한 인물이 여기에 올 것인가를 먼저 알려 주어야만 하오. 또한 얼만큼 무서운 인물인가를…… 이 늙은이는 그래도 일파의 장문인인데 그 사실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다면 이 늙은이의 자살문이 다시 강호에 그 체면을 세울 수 있겠소?" 낙건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꺼냈다. "그렇지요. 하지만 강호상에서 생존을 하려면 반드시 무명도의 지지를 받아야 하지요. 심지어는 구대 문파까지도 예외일 수는 없소. 그러나 소노형께서 저와 합세만 한다면 소노형이 강호에 발을 디딜 곳이 없을 것 같소?" 소불이는 낙건훈의 이 말을 듣자 구대 문파까지도 무명도와 몰래 내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불이가 깜짝 놀라 다시 자세히 물어보려는 순간, 갑자기 집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소불이가 깜짝 놀라 제지를 하려는 순간, 벌써 곡영자와 당승무가 집 뒤에서 돌아왔다. 낙건훈이 두 사람을 보자 대뜸 물었다. "저 두 사람은 누구요?" 곡영자가 큰 소리로 대꾸했다. "노부는 곡영자인데 당신은 누구요?" 순간 낙건훈은 소불이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두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다. "소불이, 너는 나를 속였구나!" 소불이는 태연했지만 곡영자를 향해 매우 아쉽다는 듯 말했다. "쯔쯧…… 곡소형께서 조금만 늦게 오셨더라면 낙총관의 모든 비밀을 알 수가 있었을 텐데……." 낙건훈이 심히 분한 듯 이빨을 갈았다. "소불이, 네 놈이 본 총관을 희롱하고도 성할 줄 아느냐?"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은 내가 잡아온 것이지. 하지만 이 늙은이가 당신을 놓아 준다면 당신은 이 늙은이를 가만 놔두지 않겠지?" 이때 곡영자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소불이가 천천히 말했다. "거 자가 말하기를 오늘밤에 무서운 인물들이 와서 이 천독곡을 쑥밭으로 만든다고 하는군요." 곡영자는 여전히 두 눈을 크게 뜬 채 물었다. "그게 누군데?" 소불이가 혀를 차며 나무라듯 대꾸했다. "글쎄, 그것을 물어보려던 순간에 노형이 왔으니 다 틀린 일이지요."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낙건훈의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노부가 물어 보겠다." 낙건훈이 냉소를 치며 외면했다. "흥! 본 총관이 말할 것 같으냐?" 이에 곡영자가 대소를 터뜨리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하하하……노부가 알기로는 꼭 말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낙건훈이 짧게 물었다. "고문을 하려고?" 곡영자는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낙건훈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급히 목을 뒤로 젖혔다. 소불이와 당승무가 놀라 급히 그의 목을 보니 그의 목에 대나무 젓가락 만한 두 마리의 금충(金蟲)이 기어다니는 것이 아닌가? 낙건훈은 온몸에 혈도가 찍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단지 고개를 움직이며 금충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두 마리의 금충은 목에서 얼굴로 기어갔다. 그리나 실날 같은 혓바닥을 내밀어 콧구멍과 귓구멍 모든 구멍마다 기어 들어가려고 했다. 이렇게 되자 낙건훈의 얼굴은 매우 창백해지고 이마 위에선 식은땀이 마치 낙숫물처럼 줄줄이 떨어졌다. 이윽고 악물고 있는 그의 입에서 찬을 수 없는 신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곡영자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떼었다. "낙총관, 얘기하겠소?" 낙건훈은 이제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은 여전히 굳게 다문 채 고개만 끄덕 였다. 곡영자는 이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호령했다. "이놈들아, 잠깐 가만히 있거라. 낙총관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내 알아 보아야겠다." 그러자 두 마리의 금충은 마치 곡영자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낙건훈의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동그라미를 그리며 휴식을 취했다. 낙건훈은 그제야 길게 안도의 숨을 내뿜으며 즉시 입을 열었다. "휴우…… 그럼 당신은 무엇을 물어보려는 것이오?" 곡영자가 한 발을 의자 위에 올려 놓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오늘 밤 너희들은 이 천독곡을 쓸어 버리겠다고!" 낙건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렇다면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냐?" "황의당주와 청의당주가 합쳐서 행동할 것이오." 곡영자는 냉소를 쳤다. "흥!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아니지. 공손수창과 향우춘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짧은 신음 소리를 내며 다시 심각하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네들은 아까 어떻게 해서 들어왔는가?" "물론 걸어서 들어왔소." 곡영자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노부가 묻는 것은 어째서 곡 안의 독물을 무서워하지 않느냐 그것이다." 낙건훈은 곡영자의 기세에 질렸음인지 순순히 대답을 했다. "오늘 낮에 전총관이 두 명의 무사를 데리고 오다가 얼마 못가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는 독물을 제거하는 약물을 가지고 왔다. "그것은 무슨 약물이냐?" "모르겠소." "그 약물은 어디 있나?" 낙건훈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갖고 있지 않소." 곡영자는 의자에서 한 발을 내려 놓더니 당승무에게 지시했다. "자네가 그의 몸을 수색해 보게." "네!" 당승무는 즉시 대답을 하고 낙건훈의 몸을 샅샅이 뒤졌으나 과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때 소불이가 음흉스럽게 웃으며 눈을 씰룩했다. "히히…… 낙총관, 사실대로 얘기해 보시지." 낙건훈은 차갑게 외면을 하며 시치미를 떼었다. "흥! 당신네들이 뒤져보지 않았소? 그런데 보다시피 없는 것을 나더러 어디에서 꺼내라는 말이오?" 그러자 소불이는 웃음을 거두며 서서히 낙건훈의 앞으로 다가섰다. "오냐, 너희들의 그 얕은 수작으론 결코 이 늙은이의 눈을 속이지 못한다!" 그러더니 낙건훈의 코 앞에 다가가 마치 심문하듯 하나하나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생각해 보아라. 이 곡 안에는 어디를 막론하고 전부 치명적인 동물이 있다. 그런데 낙총관, 당신은 총관의 신분으로써 약물을 가져와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줄 리가 있겠나? 하물며 또 아까 들어올 때 당신이 제일 먼저 앞장을 서서 들어오던데……?" 그러자 낙건훈은 갑자기 안색이 싹 변하며 급히 변명을 했다. "그…… 그러나 형제의 몸은 아까 저분 노제께서 뒤져 보지 않았소? 나…… 난 모르겠소이다!" 소불이는 음흉스럽게 웃으며 서서히 손을 뻗쳤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한 군데를 뒤지지 않았느니라." 말소리와 함께 뻗친 손으로 갑자기 낙건훈의 왼손을 잡더니 소맷 자락을 뒤집었다. 그러자-. 낙건훈의 왼쪽 팔 밑에 하나의 타원형으로 된 조그만 동관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소불이는 동관을 흔들어 보며 득의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것은 무엇인가?" 이어 곡영자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크게 호통을 쳤다. "이놈, 이번에도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면 두 마리의 금충에게 너의 칠공을 모조리 뚫으라고 하겠다." 낙건훈은 안색이 싹 변해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오. 형제에게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곡영자는 낙건혼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소불이에게 말했다. "소노형, 빨리 이리 가져와 보시오. 형제가 한 번 보아야겠소." 소불이는 동관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곧 곡영자에게 건네주었다. 곡영자는 그것을 받자마자 땅에다 대고 가볍게 눌렀다. 그러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동관의 끝에서 짙은 안개가 연기처럼 품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곡영자는 손가락에 그 약을 조금 발라 혓바닥으로 맛을 보더니 갑자기 안색이 홱 변했다. "이것은 극독한 살충 약물이다. 그런데 누가 만들었느냐?" 낙건훈은 이제 모든 사태가 사태인만큼 서슴없이 말했다. "이 약물은 관 부총영주께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 당마다 전부 몇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원래 흑석도의 사람들을 상대하려고 만든 것이기도 합니다."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그럼 관가의 내력은 알고 있나?" 낙건훈은 즉시 모를 답했다. "그는 교주가 몸소 청해온 자이니 형제는 통 알지 못합니다." 곡영자는 일순 얼굴을 심상치 않게 굳히며 냉랭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 그 관가 놈도 오느냐?" 낙건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부총영주께서 이미 신영주를 파견했습니다." 당승무는 낙건훈이 신영주라는 소리를 하자 검미를 불끈 세우며 급히 물었다. "지금 당신이 말한 신영주는 바로 신교교가 아니오?" 낙건훈이 일순 놀라 곧 수궁했다. "바로 그녀입니다." 그러자 당승무는 매우 분한 듯 이를 갈며 치를 떨었다. "대사백, 이 신가란 요부가 바로 사부를 살해한 장본인입니다."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음, 아직 서두를 필요는 없다. 그녀는 어차피 오늘밤에 온다고 하니 우리 그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자!"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낙건훈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신교교라는 요부는 독을 쓰는 것이 장기라는데 그게 정말인가?" 일인이역 낙건훈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떠올리지 않고 마치 남의 말하듯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렇소. 그런데 신영주의 외호는 만미천호요. 하지만 그녀는 원래 독을 쓸 줄 몰랐었소. 그런데 그녀가 부총영주를 의부로 삼았으니 지금은 벌써 독에 대해서는 완전한 능수가 되었을 것이오." 이윽고 곡영자가 더 이상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뻗치자 낙건혼의 머리 위에서 맴을 돌던 두 마리의 금사는 즉시 날아 그의 소맷자락 안으로 되돌아 갔다. 그러자 곡영자는 다시 낙건훈을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그렇다면 낙총관은 돌아가서 신교교더러 오늘 노부가 곡안에서 기다리겠다고 해라." 이어 그는 낙건훈의 사지 혈도를 풀어주고는 즉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자, 가시오." 이어 낙건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곡영자를 응시하며 매우 곤란한 듯이 머뭇거렸다. "곡노형께서는 형제와 혈도를 풀어 주었지만 약물을 가져 가셨으니 형제는 어떻게 가라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곡영자는 전혀 무표정한 얼굴로 딱딱하게 대꾸했다. "만약 노부가 너에게 이것을 되돌려 준다면 노부의 곡 안에 있는 독물은 다 죽고 말 것이다. 그러니 노부가 금사로써 너를 곡 밖에까지 바래다 주겠다." 곡영자가 말을 끝내자마자 소맷자락을 다시 흔드니 한 마리의 금사가 날아왔다. 낙건훈은 그것을 보자 아까 금사의 맛을 톡톡히 보았기 때문에 무서워서 연신 뒤로 물러났다. 이에 곡영자가 입으로 휘파람 소리를 내자 금사는 즉시 알아 들었다는 듯 밖을 향해 날아갔다. 곡영자는 그 모습을 쳐다보더니 다시 낙건혼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낙건훈은 금방 꿈 속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어리둥절해 하더니 금사를 뒤따라 갔다. 소불이는 더 이상 낙건혼을 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음, 오늘밤은 정말 힘이 좀 들겠는걸…… 날은 벌써 어두워지려고 하니 말이야. 그러니 우린 그만 들어가서 배불리 먹고 정신을 바싹 차려야 싸울 수 있겠다." 그러더니 갑자기 짧은 함성을 울리며 어조를 바꿔 말했다. "아참, 그리고 보니 또 한 가지의 일을 잊었구나!" 이에 곡영자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 "그들에게 독인말고도 음인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물어볼 것을 잊어 버렸다는 말이오." "음인? 무슨 음인?" "이 늙은이도 잘 모르겠소. 그것은 고죽방의 죽부인에게 들어서 안 것입니다. 천하제일의 고수들이라도 음인을 만났다 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합니다." 곡영자는 안색을 침중하게 굳히면서도 말만은 자신이 넘치게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환혼단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곡영자가 말하는 동안 당승무가 집 안에 들어가더니 군량을 가지고 나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곡영자는 당승무가 주는 군량을 받으며 그에게 물었다. "자네에게 있는 두 가지 암기에 아직도 독을 바르지 않았지? 그러니 빨리 가서 가져오게. 노부가 발라 주겠다. 그래야만 오늘밤엔 좀 통쾌하게 싸울 수 있을 테니까……." 당승무는 군량을 한 손에 든 채 물었다. "그럼 대사백께서는 금방 발라 놓으실 수 있읍니까?" 곡영자가 고개를 들어 당승무를 가볍게 흘겼다. "왜 믿지 못하겠느냐? 하하하…… 노부는 어떤 것이라도 손으로 만지기만 하면 즉시 독약 암기로 변한다. 그리고 또 내게 그런 실력도 없다면 어찌 천독수라고 칭할 수 있겠느냐?" 그때 당승무는 암중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음, 원래 대사백의 외호가 천독수라고 하는구나. ' 그리고는 즉시 집 뒤로 가서 절두비방과 검저비성 두 가지 암기를 가지고 나와서 두 통의 독분과 함께 대사백에게 건네주었다. 곡영자는 그것을 받아 잠시 살펴보더니 여러 사람을 향해 지시했다. "여러분은 잠시 여기에 앉아 계십시오. 노부는 약 반 시진쯤 걸려야 이 일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리고는 제 몫으로 받은 군량을 다시 당승무에게 넘겨주자 갈비백이 얼른 입을 열었다. "곡노인장, 군량을 드시고 가십시오." 곡영자는 가다말고 뒤돌아 보며 가볍게 웃었다. "허허…… 노부는 수십 년 동안 모두 독물을 식량을 대신해 왔소. 그러니 노부의 걱정은 말고 여러분들이나 많이 드십시오." 말을 끝낸 곡영자는 즉시 집 뒤로 돌아갔다. 조봉춘이 그 모습을 보고는 감탄을 했다. "곡노인장께서는 정말 기인이십니다." 소불이는 소량의 군량을 잘게 찢어 먹으며 말했다. "오늘 밤 적이 대거 침범을 해오는데 우리는 다만 몇 사람으로 대적을 해야 하니 반드시 한 사람이 열 사람 정도의 실력을 발휘할 수가 있어야 할 것이오. 그러니 이 늙은이가 보건대 우리는 사전에 먼저 안배를 해 두어야 할 것 같소." 갈비백이 맞장구를 쳤다. "그 말씀 지당합니다." 소불이는 의젓하게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고 나더니 다시 입을 떼었다. "그리고 상대방은 이미 살충 약물을 가지고 있으니 곡 안에 있는." 독물은 전부 쓸모가 없을 테니 어떻게 하던 우리는 곡 입구에서 적을 막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크게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여기는 하나의 입구 밖에 없으니 곡 밖에서라도 이곳을 엄수하기란 매우 쉬운 일일 것이다." 조봉춘은 수중의 군량은 언제 다 먹었는지 입가를 쓱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노인장의 묘계가 맞습니다. 그럼 이제 가 봅시다." 당승무도 따라 일어서며 품에서 환혼단의 약병을 꺼내 소불이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갈신의가 만든 환혼단입니다. 그리고 소노대께서 만약 독인이나 음인을 만나게 될 경우 될 수 있는대로 이 약을 그들의 입속에 넣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독인, 음인도 모두 우리편이 될 것입니다." 소불이는 약병을 받아들고는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제의 말이 맞다. 이따가 한 번 시험해 보겠네." 이리하여 네 사람은 소불이를 앞세워 곡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이들이 천독곡을 나서자 날은 벌써 어두워졌다. 소불이는 곡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 세워져 있는 두 개의 거석을 가리키며 갈비백과 조봉춘에게 말했다. "여기가 바로 곡 입구의 문호(門號)이니 두 분 노제께서는 이 돌위에 숨어 계십시오. 그리고 적이 이곳까지 들어오지 않는 한 절대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갈비백과 조봉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대답을 마치자 신형을 번쩍이더니 즉시 뒤로 사라졌다. 이어 소불이는 무당 천학자의 수중에서 빼앗은 한 자루의 장검을 당승무에게 건네주며 곡 입구에 있는 한 그루의 고목나무를 가리켰다. "이 징검은 노제가 잠시 보관하게나. 그리고 저 나무 뒤에 가서 숨되, 적이 이 나무 밑까지 오지 않는 한은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되네." 당승무는 대답 대신 의혹에 찬 두 눈을 굴리며 물었다. "그럼 소노대께서는?" 소불이는 슬쩍 웃으며 걱정말라는 듯이 말했다. "적이 나타나면 반드시 한 사람이 나서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사람수가 적으니 이 늙은이가 먼저 그들을 상대하고 조금 있다가 곡노형이 오면 그때 다시 결전을 하는 것이다." 당승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장검을 끼고는 단숨에 나무 위로 뛰어 올라가더니 나뭇가지에 걸터 앉았다. 소불이는 그 모습을 보다가 두 사람이 은신해 있는 거석을 다시 돌아본 후 자신은 사잇길을 따라 칠팔 장 앞에 있는 하나의 평탄한 언덕 위에 있는 돌에 가서 기대어 앉았다. 이때 날은 어슴푸레하여 주위의 사람들은 분명치는 않지만 사방의 경물은 다소 구분할 수가 있었다. 소불이는 때가 아직 벌었다는 것을 짐작하자 두 무릎을 껴안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가 졸기 시작한 후부터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소불이의 귀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소불이는 언제 졸았나 싶어 즉시 귀를 종긋하게 세우고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왔구나, 한 십 기 이상은 족히 되겠는데!" 그러면서 소불이는 몸을 약간 틀어 즉시 갈대 밭으로 굴러가서는 머리만 내밀고 탐지하기 시작했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십여 필의 말은 벌써 곡 밖의 공지까지 달려 나와서 멈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 위에서 십이 명의 청의대한이 날렵하게 뛰어 내렸다. 한데 맨 앞에 있는 말 위에는 한 사람의 청삼인이 아직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청삼인의 나이는 약 사십오 세 안팎으로 보였으며 입가에는 보기에도 날카로울 만큼 팔자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청삼인은 어두워지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말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오른쪽의 숲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말을 숲 속에다 매어 두고 우리도 숲에서 휴식을 취하자." 그 말에 따라 십이 명의 청의대한은 즉시 말을 끌고 오른쪽의 숲속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것처럼 또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전부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소불이는 그 모습을 보고는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이놈들은 필시 청의당의 무리일 것이다. ' 소불이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에 또 다시 이번에는 열세 필의 말이 달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황색경장을 한 사람들이었고 전부 어깨에다 검을 둘러메고 있었다. 이들의 앞에서 있는 사람들은 덩치가 작은 황의인이었지만 그의 두 눈에서는 흉흉한 광채가 뿜어져 나와 이리의 눈처럼 어두워오는 주위를 빛내고 있었다. 소불이는 이 광경을 보자 또 다시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의 놈들은 황의당의 무리들이구나. 그런데 낙건훈이 데리고 온 것이 아닌 것 같군.' 이때 황의인은 말에서 내려와 마치 무엇을 찾고 있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산석(山石)을 발견하고는 즉시 소리쳤다. "우린 왼쪽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말을 데리고 돌아가라. 아직은 시간이 이르다." 이에 소불이는 암중에 탄성을 올렸다. '아니, 그리고 보니 산석 위에 벌써 휴식할 곳을 암시해 놓았었구나.' 황의인의 지시가 끝나자마자 십이 명의 황의대한은 조금 전의 청의인과 똑같이 신속하게 말을 끌고는 사라졌다. 황의인은 뒷짐을 진 채 한참 서 있다가 곡 입구를 둘러보며 냉소를 날렸다. "낙건훈은 혼자서 창피를 당하고서 곡가의 일파를 그렇게 무섭게 설명을 하다니, 흥! 도대체 이 하나의 계곡이 뭐가 그리 무섭다는 말인가?" 황의인의 말소리가 끝나자 그의 귓가에 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갑자기 갈대밭에서 한 인영이 밖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황의인은 일순 놀라며 크게 소리쳤다. "누구냐?" 이어 그는 그 인영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알서 가는 사람의 신법은 극히 빨랐다. 황의인은 아까 그와 불과 일 보의 차이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상대방과 칠팔 장의 거리로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황의인은 대뜸 분노가 치솟아 또 다시 소리쳤다. "이봐, 서랏!" 그러나 앞의 사람은 못들은 체하며 다만 죽어라고 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의인들 어찌 놓칠 수가 있으랴7 그도 즉시 전력을 다해 뒤따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앞 뒤로 해서 달리다가 황의인이 신법을 다해 따라간 결과, 앞의 사람과 점차 거리가 가까와졌다. 이때 벌써 그들은 곡 입구를 벗어나 산 밑에까지 달려왔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악!"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앞서 달리던 사람이 마치 무엇에 걸린 것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때, 황의인과 그 사람과의 거리는 두 장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황의인은 그 사람이 넘어지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즉시 비응학사를 써서 그 사람을 향해 덮쳤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분명 땅에 쓰러져 있어야 할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황의인은 일순 매우 놀라 즉시 피하려고 하자 벌써 귓가에 음흉한 웃음 소리가 들리며 가승 앞 기문혈이 마비되더니 몸이 자기의 뜻과는 반대로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귓가에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죄송하게 됐소. 친구 혹시 다치지는 않았소? 그런데 친구가 입고 있는 장삼의 색깔과 질이 전부 다 좋은 것 같으니 이 늙은이는 이 옷이 잠시 필요해 빌려 입어야 되겠소이다." 이 사람은 말하면서 즉시 옷을 벗겼다 지금 황의인은 비록 혈도가 제압당하여 움직이지도, 말도 못하지만 귀로는 잘 들을 수가 있었다. 황의인은 속에서 불이 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또 다시 혼대혈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 밑에 한 줄기의 인영이 연기처럼 곡 입구로 날아와서 좌측을 향해 신형을 멈추었다. 그 인영은 덩치가 매우 작은 황의인이었다. 황의인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즉시 품 속에서 하나의 삼각황기를 꺼내 공중을 향해 세 번 펄럭였다. 그러자 눌 속에서 갑자기 십이 명의 황의대한들이 신속하게 한일자로 정렬을 하는 것이었다. 황의인은 마치 인원수를 세어보는 것처럼 하나하나 훑어보더니 즉시 입을 열었다. "본좌는 .지금 당주의 긴급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내일 저녁까지 소화산에 집합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황의인은 사람들을 제압하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이어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즉시 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 본좌에게는 다른 일이 있으니 조금 있다가 곧 뒤따라 가겠다." 십이 명의 황의대한들은 자기 상관의 명령을 받자 신속히 대답을 하더니 질풍처럼 산 아래를 향해 달려갔다. 황의인은 다시 황기를 펴들고는 오른쪽 숲을 향해 걸어가서는 공손히 읍을 했다. "저 청의당의 총관께서는 여기에 계십니까?" 이어 숲 속에서 즉시 대답 소리가 들렸다. "형제 진용(秦庸)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금형께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신지?" 말소리와 함께 한 청의인이 숲을 헤치며 걸어나왔다. 그가 걸어나오자 황의인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뜸 물었다. "진형께서는 부총영주의 지령을 못받으셨습니까?" 진용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 부총영주의 지령 말씀입니까?" "물론 관 부총영주시요." 진용은 일순 매우 놀라며 되물었다. "그럼 관 부총영주께서도 오셨습니까?" 황의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 지령이라는 것은 다만 신영주께서 남긴 암호입니다." 진용은 의문을 감추지 못하여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런데 신영주께서는 이경이 지난 후에야 오시기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황의인은 그 말을 듣자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소. 그런데 신영주께서 남긴 지령에는 이 일에 벌써 변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변화입니까?" "그 곡가란 놈이 벌써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진용은 매우 놀라더니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신영주께서는 벌써 와 보셨군요. 그런데 그 지령에는 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황의인은 약간 어조를 낮추며 매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그 지령에는 우리 두 당더러 속히 소화산 방향으로 가서 그 곡가놈을 추격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용은 무엇이 걸리는 게 있는지 약간 망설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지령의 암호는 어디에 있습니까?" 황의인은 다급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급히 말했다. "바로 산 밑에 있소. 그리고 이 일은 매우 긴급하오. 그런데 지금 진형이 믿지 못하겠다면 형제가 길을 인도하겠소." 진용은 황의인의 그 말을 듣자 걸음을 떼어 놓으며 대답했다. "금형의 말을 어찌 이 형제가 믿지 않을 수 있겠소? 다만 이 일은 매우 중대하기 때문에 형제는 그 암호를 보아 당주에게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빨리 가야만 하오." 두 사람은 총총히 산 밑을 향해 달려갔다. 진용은 그 사이에도 사방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다급하게 물었다. "금형, 그 지령은 어디에 있습니까?" 황의인은 어떤 나무를 손가락질해 보이며 대답했다. "진형, 저기를 보시오. 저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이 본문의 암호가 아니오?" 진용은 황의인이 손가락질한 곳을 항해 보다가 갑자기 겨드랑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이어 깜짝 놀라 급히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진용은 벌써 세 군데의 대혈에 찔려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마수괴 황의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흐흐…… 금총관 혼자서 누워 있으면 심심할 테니 자네도 같이 누워 있게나. 그리고 이 늙은이는 자네의 장삼도 좀 빌려야겠다." 황의인은 연신 어깨를 들썩이며 진용의 몸을 끌고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그 황의인은 진용의 옷을 벗겨 입고는 다시 산허리를 향해 달려갔다. 이어 그는 오른쪽 숲으로 가더니 청기를 꺼내 흔들며 급히 말했다. "여봐라! 부총영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빨리 소화산에 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시간은 날이 밝기 전에 그곳에 도착해야만 한다고 했다. 아까 황의당은 앞서 갔으니 너희들은 거기서 그들과 회합을 한 후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해라. 알겠느냐?" 십이 명의 청의대한들은 아까 황의당 사람들이 달려간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도 없이 급히 말을 몰아 산 밑으로 향해 달려갔다. 진용의 옷을 빌려 입은 황의인은 그들이 멀어져 간 것을 본 후에야 즉시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한참 닦더니 장삼을 벗었다. 원래 황의당 금총관과 청의당 진총관은 바로 한 사람인 소불이였던 것이었다. 두 패들은 모두 소불이의 연극에 의해 떠나갔다. 그리고 소화산은 이곳에서 일이백 리는 족히 걸리니 아무래도 그들은 오늘밤 안에 다시 이곳에 오지 못할 것이었다. 소불이는 매우 득의한 듯 오른쪽 숲으로 이 청색기를 나무에 달더니 진총관의 잔삼도 함께 걸었다. 그리고 또 다시 왼쪽 숲으로 가서는 똑같이 황색기를 달고는 역시 금총관의 장삼도 함께 걸었다. 이어 소불이는 또 다시 아까 그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편, 여태까지의 광경을 쭉 보아오던 당승무가 참지 못하고 나무에서 뛰어 내려 왔다. "소노대, 그들을 전부 보내 버렸습니까?" 소불이는 졸린 듯 하품을 길게 하며 히죽 웃었다. "히히히…… 속임수를 쓰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구만." 당승무도 따라 웃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묘계를 썼길래 전부 다 쫓아 보냈습니까?" 소불이는 순간 두 눈을 뜨며 득의한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건 바로……." 하더니 그는 말하려다 말고 당승무를 응시하며 미간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자네는 왜 내려왔나?" 이어 다시 힐책하듯 물었다. "노제의 임무는 제 일선을 방비하는 곳인데 어찌 그토록 경거망동하게 뛰어 내려오는가……" 당승무는 우물쭈물 대꾸했다. "소인은 혼자 나무 위에 있다가 심심한 나머지 소노대와 얘기좀 나눌려고……." 소불이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돼, 빨리 다시 올라가라! 저기를 보게, 그들이 벌써 왔지 않은가?" 소불이는 소리를 지르면서 산 아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나 당승무는 암만 보아도 사람의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소불이가 자기에게 거짓말을 한 줄 알고 놀리듯 물었다. "누가 왔는지 소노대께서는 보셨습니까?" 소불이는 산 밑을 바라보며 빠른 어조로 말했다. "아직 자세히는 보지 못한다. 이 사람이 오는 기세가 극히 빠르기 때문에……." 그는 갑자기 말을 끝맺지도 않고 당승무의 등을 떠밀었다. "노제, 무얼 하나? 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거라!" 당승무는 두 눈을 헤집고 암만 살펴보아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불이의 성급한 태도를 보자 즉시 나무 위로 올라가서 숨은 다음에 잎사귀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동정을 탐지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 다시 앉아서 졸고 있던 소불이는 어느 사이에 없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당승무는 의혹을 품으며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혹시 정말로 누가 온 것은 아닐까? ' 이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싹" 하는 파공음과 함께 두 줄기의 인영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당승무는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폈다. 두 인영 중 왼쪽에 있는 자는 황의를 입은 꼽추노인이었는데 얼굴이 몹시 불히면서도 어둠 속에서도 기이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턱 밑에는 백설 같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그의 두 눈은 화등과 같이 빛났다. 또 왼쪽의 청포노인은 바로 호로곡에서 곡영자의 독공에 의해 물러간 청의당주 향우춘이었다. '향우춘과 같이 온 꼽추노인이 바로 황의당주 막용장강 같다. ' 꼽추노인은 사방을 훑어보며 이상한 듯 중얼거렸다. "금불범과 진용은 벌써 왔을 터인데 어째 보이지가 않지?" 향우춘도 고개를 끄덖이며 대꾸했다. "그렇소.형제도 또한 일부러 진총관에게 일찍나오라고 일렀습니다." 꼽추노인이 눈을 빛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혹시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그럴리는 없을 것입니다." 이때 갑자기-. "에…… 에에취!" 하는 재채기 소리가 멀지 않은 잡초 숲에서 들려왔다. 향우춘은 급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 "게 누구냐?" 그러자 잡초 속에서 떠듬대는 말소리가 들렸다. "저…… 저입니다. 에…에취!" 그 사람은 대답을 하면서도 연신 재채기를 했다. 향우춘은 벌써 잡초 속에 쭈그려 앉은 사람을 보았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는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나오지 못하겠느냐?" 그 사람은 나직하게 대답을 하며 잡초 숲에서 걸어나왔다. 이때 당승무는 나무 위에서 암암리 웃고 있었다. 당승무가 웃고 있는 이유는 바로 소불이 때문이었다. 소불이는 평상시보다 키를 난장이처럼 절반이나 줄였으며 얼굴에도 역용약을 발라 꼭 누렇게 뜬 병자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향우춘은 소불이의 추한 몰골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소불이는 짐짓 공포스러운 빛을 띠며 말을 떠듬대었다. "소인은 왕노실이라고 합니다. 에……에취!" 소불이는 또 한 번 재채기를 하고 나더니 급히 코를 틀어막으며 말했다. 향우춘은 싸늘히 냉소했다. "흥! 지금이 어느 때인데 벌목을 하느냐?" 소불이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소인은 여기서 산을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향우춘은 소불이에게 겁을 주려는 듯 옆에 있는 암석을 손바닥으로 깨뜨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왕노인!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죽을 줄 알아라." 소불이는 즉시 무릎을 꿇고 넙죽 엎드리더니 애원을 했다. "나으리, 살려 주십시오. 소인의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만약 나으리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소인은 이 산 밑에 살고 있으니 저를 따라……." 향우춘은 소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럭 다시 소리를 질렀다. "잔소리 말아라. 너는 왜 잡초 속에 숨어 있었느냐?" 소불이는 여전히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은 단지 다른 사람을 위해 산을 지키러 온 것입니다." 에…에취! 그 사람은 소인에게 산을 지키라면서 세 푼의 은자를 주었습니다." 소불이는 품 속에서 은자를 꺼내 보이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소인더러 이 잡초 속에서 향가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순간, 향우춘은 눈이 커지며 대뜸 묻는다. "그 사람이 누구냐?" 소불이는 고개를 들어 향우춘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 사람이 소인에게 알려주기는 소불이라고 했습니다." 향우춘은 얼굴에 어떤 내색 하나 비치지 않고 덤덤하게 물었다. "그는 너더러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라고 했느냐?" "소인더러 향가에게 소식을 알리라고……." 향우춘은 한 걸음 나서며 손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노부가 바로 향가이니 어서 그 소식을 말해 보아라." 그러자 소불이는 쥐눈을 굴리면 향우춘을 자세히 가늠해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향가가 아니오." 향우춘은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어째서?" 소불이는 쭈글쭈글한 손을 펴 보이며 여러 가지 흉내를 내었다. "소어른께서 말씀하시기를 항가는 키도 나 정도 밖에는 되지 않고 또한 귀는 부채 같고 입은 토끼 입처럼 생겼다고 했습니다." 향우춘은 눈에 불똥을 튀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함부로 노부 앞에서 횡설수설을 늘어놓다니 어디 죽고 싶으냐?" 소불이는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소인의 말은 사실입니다." 향우춘은 주먹을 휘두르다 말고 약간 어조를 낮추었다. "오냐, 또 그런 소리를 하면 이번에 정말로 가루를 내버릴 테다. 그러니 소불이가 어떤 말을 전하라고 했는지 빨리 말해 보아라?" 소불이는 다시 대꾸했다. "소어른께서 이르시기를 만약 향가가 오면 즉시 곡 안으로 데리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들어가서 무엇을 하라드냐?" 소불이는 히죽 웃었다. "향가에게는 애비가 있는데 바로 곡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향우춘은 화를 벌컥 내며 크게 소리쳤다. "이놈! 너 죽을려고 환장을 했구나." 말하면서 그는 소불이의 따귀를 철썩 갈겼다. 순간, 소불이는 매우 놀라며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발에 무엇이 걸린 것처럼 앞으로 고꾸라지려고 했다. 한데 소불이의 이 한 수가 향우춘의 일 장을 피하였다. 막용장강이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는 음침하게 웃으며 지껄였다. "향노이의 일 장을 피할 수 있는 것을 보니 아마 강호상에 보통인물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너는 왕노실이 아닐 것이다." 이때 소불이가 갑자기 막용장강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귀하는 정말 고명하십니다. 정말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늙은이는 왕노실이 아니오." 막용장강은 벌써 소불이의 행동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래서 소불이가 다가온 것을 의자 급히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수없이 그는 수척 물러나며 물었다. "친구는 대체 누구요?" 소불이가지금쓴이 한수는 바로 염지천이 전수해 준 검장십삼식 중의 수법이었다. 더구나 지기에다 소불이의 독자적인 경공까지 곁들였으니 옛날의 사대천마의 우두머리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불이는 그가 수 척이나 물러나자 기분이 좋은 듯 히죽 웃었다 "히히히…, 이 늙은이는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백일당귀 소불이외다." 소불이가 허리를 한 번 흔들자 몸은 즉시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또한 얼굴을 문지르자 역용 피물도 전부 다 지워졌다. 막용장강은 소불이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소불이에게 설상무영이라는 칭호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십여 년 진에 이름을 날리고 있던 그가 어찌 소불이 같은 인물을 눈에 두겠는가. 그러나 상대방이 소불이라고 한 소리를 듣자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입으로는 여전히 담담하게 웃었다. "원래 귀하가 바로 신투 소불이셨군요. 이거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소이다." 소불이는 손을 내저으며 겸손해 했다. "원, 별말씀을." 그러나 막용장강은 갑자기 냉랭하게 물었다. "그런데 노부와 향노이의 문하 제자들은 전부 당신이 돌려 보냈소?" 막용장강이 물을 때 향우춘이 서서히 소불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막용형, 이 사람은 형제가 처치하겠소." 막용장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의 대답을 듣고 난 후에 얘기합시다!" 소불이는 짐짓 겁이 나는 듯 뒤로 연신 물러나며 변명했다. "아, 잠깐, 잠깐, 당신네들의 문하 제자가 들어온 것을 내 보았소이다. 그러나 이 늙은이는 그들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소." 막용장강이 짧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돈은?" "갔소." "어디로?" 소불이는 산 아래를 손짓해 보이며 말했다. "소화산으로 간 것 같소." 막용장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소화산에는 무엇하러 갔나?" 소불이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나 이 늙은이는 감총관에게 얘기를 들었을 뿐이오……." 소불이는 일부러 말끝을 흐리고 맺지 않았다. 막용장강은 소불이의 그런 태도에 매우 궁금해 하며 급히 물었다. "금불범이 대체 무엇이라고 했소?" 소불치는 막용장강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는 아마 신영주의 암호를 발견하고서 소화산으로 떠난 것 같소" 그러자 향우춘이 대뜸 나서며 물었다. "그럼 두 명의 사람들은 모두 그런 연유로 간 것이냐?" "아마 그럴 것이오. 그러나 이 늙은이는 그때 졸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겠소." 막용장강이 갑자기 대소를 터뜨리며 힐문하듯 물었다. "으하하하……. 그것은 전부 다 네가 한 짓이지." 소불이는 안색이 변해 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오. 소인은 정말 너무 억울합니다." 그러나 막용장강은 눈을 번득이며 심중하게 내뱉았다. "노부는 원래 너를 죽이지 않으려고 했다만 이 결과는 네가 초래한 것이니 어쩔 수 없다." 막용장강은 말을 하면서 재빨리 일 장을 쳐왔다. 그는 사대천마의 첫 번째로서 그의 공력은 이미 상승의 경지에까지 도달했다. 막용장강이 쳐낸 일 장에는 거센 파도와 같은 강기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소불이는 매우 신속하게 피하며 빈정거렸다. "이것이 바로 귀하의 추심장이오? 그러나 이 늙은이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데?" 원래 어느 누구든 간에 막용장강의 추심장에 맞으면 십중팔구는 살아나기 힘들다. 막용장강은 얼굴에 가득 살기를 띠며 공격을 가하였다. 소불이는 과 모습을 보자 즉시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큰일났군. 추심장 수혼지가 왔으니 이 늙은이의 목숨도 이젠 끝장이로구나! ' 소불이는 급히 자세를 바꿔 막용장강의 겨드랑이 밑으로 거북이처럼 빠져 나갔다. 이때 향우춘은 소불이가 막용장강의 일 장 일 지를 피하는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매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로 이 순간에 소불이가 자기 쪽으로 피해 온 것을 보자 득이한 미소를 흘리며 재빨리 일 장을 쳐갔다. 소불이는 급히 오른손을 쳐들며 소리쳤다. "아니, 이건 정말 너무하군!" 이어 즉시 높이 든 오른손으로 향우춘의 일 장을 맞받았다. 이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소불이는 갈지자로 세 발자국 물러났다. 향우춘 역시 기혈이 진동되어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일장천독 소불이는 고의적인지 몇 발자국 물러서더니 갑자기 박수를 치고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하하하……." 막용장강은 매우 기분이 이상한 듯 검미를 불끈 세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웃느냐?" 소불이는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더니 막용장강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당신 막용노제의 사람됨이 좀 낫기 때문에 일부러 놓아 주었다. 그러나 향노형은 마음씀이 좋지 않기 때문에 결국 혼이 났지." 향우춘은 방금 겨룬 일 장으로 자기의 장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소불이가 독공을 연마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향우춘은 별로 대수롭지 앉은 듯 피식 웃었다. "왜, 어째서 혼이 났다는 거냐?" 소불이는 근처 바위 위에 올라 앉더니 향우춘을 매우 동정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어째서냐고? 지금 이 늙은이의 수장에는 독이 있소. 그러나 만약 향노형께서 민지 못하시겠다면 어디 운기를 해서 한 번 시험해 보시오!" 그러면서 소불이가 오른손을 내밀자 어느새 그의 다섯 손가락은 전부 검은 색을 띠고 있었다. 막용장강은 소불이의 이 수장을 보자 즉시 경악했다. "흑살장!" 그러더니 즉시 고개를 돌려 향우춘에게 소리쳤다. "향노이, 빨리 운기해 보시오!" 이때 향우춘의 오른손은 이미 마비된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 말을 듣고 운기를 하자 즉시 지각을 잃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향우춘은 즉시 부르짖으며 소리쳤다. "과연 너의 수에 걸렸구나!" 막용장강은 냉랭하게 소불이에게 물었다. "소불이, 흑살장을 연마했으니 당연히 해약도?" 소불이는 바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 "저 늙은이가 연마한 것은 흑살장이 아니라 자살신공이오!" 막용장강은 서서히 소불이에게 다가가며 집어 삼킬 노려보았다. "흑살장이던 자살신공이던 빨리 해약을 내놓아라!" 소불이는 급히 바위에서 뛰어 내리더니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저 늙은이가 연마한 자실신공은 흑살장과는 달라서 해약은 없습니다." 막용장강은 얼굴에 완연한 살기를 띠었다. "당신은 닭을 죽여서 알을 빼낸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소? 알은 닭의 바로 몸 안에 있으리 닭을 죽이기만 하면 알을 빼내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소." 소불이는 얼굴에 난처한 빛을 띠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막용장강께서도 당신네들의 독인을 잘 아시지 않소? 이 늙은이의 자살신공도 당신네들 독인처럼 우리 장문인만이 그 해약을 가지고 있소." 그러더니 소불이는 두 손을 몸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이 순간, 그의 양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얼굴까지도 모두 검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막용장강은 마음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며 대뜸 걸음을 멈추었다. "그럼 당신의 장문인은 누구요?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자살문의 장문인은 원래 이 늙은이의 형님 소불이요. 그러나 형님께서 안 하신다고하여 이 늙은이의 동생 소불이에게 물려 주었지요. 그러나 동생도 안 받겠다고하여 결국은 이 늙은이가 물려 받았지요." 그러자 막용장강은 노기가 충천해 사납게 쏘아붙였다. "네 이놈, 너는 지금 이 노부를 놀리고 있는 게냐?" 이어 휭-. 하더니 막용장강이 매섭게 일 장을 쳐왔다. 그러나 소불이는 가볍게 피하며 조롱하듯 물었다. "막용노제, 노제는 이 늙은이의 독장을 무서워하지 않소?" 막용장강은 계속 손을 휘두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까짓 독장은 노부의 한 눈에도 들지 않는다!" 또 다시 그의 손에서 일 장이 뻗어 나왔다. 그러나 소불이는 급히 머리를 숙이고 신속히 지껄였다. "막용노제, 이 늙은이는 당신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맞붙어 싸우기가 싫어서 그런 것 뿐이오. 이유는 만약 우리가 일장을 맞받게 되면 당신의 추심장은 이 늙은이의 심맥을 끊을 수가 있고 이 늙은이의 자살신공도 역시 당신의 목숨을 거둘 수가 있기 때문이오!" 소불이가 말하는 순간에도 막용장강은 연속 다섯 장이나 쳐왔다. 소불이도 연속적으로 피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피해내기는 했지만 겉으로 약간의 강풍을 맞고 비틀거렸다. 그래서 암중으로 소불이는 감탄을 올렸다. '이 늙은 마두의 추심장은 정말로 신의 경지에까지 이루어졌구나, ' 이때, 막용장강도 역시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노부가 수십 년 동안이나 연마한 이 추심장으로 소불이 같은 도둑놈 하나를 처치하지 못하다니…….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용장강은 내심 화가 들끓어 올라 견딜수가 없었다. "소불이, 어디 네가 몇 장을 더 피할 수 있나 보자!" 막용장강의 말소리에 따라 그의 장력 또한 더욱 빨라지고 살벌해졌다. 그래서 소불이도 할 수 없이 여의금사를 꺼내 휘둘렀다. "장법은 이미 겨루었으니 지금 나는 검을 사용하겠소. 막용노제 조심하시오!" 소불이는 수중에 비록 가느다란 철사 하나만을 들고 있었지만 그 철사는 한 번 휘둘렀다 하면 즉시 바람을 갈랐다. 여의금사가 공중에 한광을 그릴 때마다 막용장강의 수장은 흐트러졌다. 이때 막용장강은 상대방의 철사에서 일종의 강렬한 검기를 느끼고는 즉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어 깜짝 놀란 막용장강은 소불이의 수중에 들고 있는 두 척 가량의 가느다란 철사를 보고는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여태까지 강호상에 존재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의문 병기를 전부 보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소불이가 들고 있는 가누다란 하나의 철사를 도대체 어떤 모양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막용장강은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일장을 다시 쳐갔다. 소불이는 키들대며 어깨를 실룩였다. "히히…… 왔구나!" 하면서 여의금사로 소영사횡(硫影斜橫)이라는 초식을 펼쳐 막고는 또 영원통비(靈猿通臂)를 써서 막용장강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내질러 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입으로 외쳤다. "막용노제, 이 일 장을 받아 보아라!" 이 일 초 초식은 바로 검장 십삼 식이었다. 여의금사가 쓴 소영사횡은 막용장강의 장세를 받고 왼손으로 쓰는 영원통비는 무학의 상규(常規)를 어기면서까지 일 장을 쳐갔던 것이었다. 이 무시무시한 검장의 위세에 눌려 막용장강은 피하지 못하고 즉시 오른쪽 어깨에 한 대를 맞고 말았다. 순간, 막용장강은 매우 놀라 급히 뒤로 팔 장 가량 물러나서는 소불이를 응시했다. "소노형, 과연 고명하오. 그런데 당신의 이 무형장법은 대체 어디에서 배웠소?" 소불이는 여전히 원래의 위치에서 히죽 웃었다. "히히…… 별말씀을, 이 늙은이의 지금 한 수는 염교주에게 배운 것이오. 그는 이 늙은이를 만나자마자 마치 친구처럼 대하면서 이 몇 수를 가르쳐 준 것이오." 그러더니 막용장강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물었다. "참, 막용노제께서는 염교주께 이런 얘기를 못들었소?" 막용장강은 소불이의 말을 덴지 못했다. 그래시 그는 무조건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못들었소." 소불이는 이해한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상한데……?" 소불이는 자기의 뒷통수를 긁적이더니 매우 미안하다는 듯이 즉시 사과를 했다.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소. 그런데 막용노제, 빨리 운기를 해보시오. 이 늙은이가 잠시 손바닥에 독이 있다는 것을 잊어 버리고 친구인 줄 알고 어깨를 쳐서 장난을 했는데 그러나 독으로 장난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소?" 막용장강은 이 말을 듣자 즉시 안색을 돌변해 감히 운기를 해보았다. 과연 그의 어깨는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막용장강은 즉시 두 눈을 부릅뜨고 심히 분한 듯 이빨을 갈았다. "이놈아, 노부가 비록 독을 맞았다고 해도 나는 먼저 네놈을 죽여야겠다!" 그러나 소불이는 그의 손을 피하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러나 벌써 늦었소. 막용노제는 차 한 잔 마실 시간 안에 즉시 독이 발작을 할 것이오." 막용장강은 이 말을 듣자 더욱 화가 나 어쩔 줄을 몰라하며 다시 소불이의 가슴을 향해 일지를 내질렀다.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계속 약을 올렸다. "이 늙은이는 다만 막노제의 추심장만 무서울 뿐 섭혼지는 하나도 무섭지 않소!" 소불이는 연신 지껄이면서 왼손을 칼처검 세워서 재빨리 쳐나갔다. 막용장강은 일 초를 맞받자 갑자기 자기의 공력이 약해졌음을 느끼고는 뒤로 세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그는 물러남과 동시 눈 앞이 흐려지고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가 없어 비틀거렸다. 소불이는 그 모습을 보자 다시 낄낄대고 웃었다. "히히히, … 노제, 좀 편안히 쉬십시오. 정 불편하면 이 늙은이가 잠시 부축해 드리지요." 그러나 막용장강은 과연 사대천마의 제 일인자답게 내공이 깊었다. 막용장강은 비록 극독이 발작했지만 그의 머리 속은 매우 말짱했다. 막용장강은 암암리에 진기를 한 모금 끌어 올리더니 갑자기 몸을 날려 일 장을 쳐나갔다. 소불이의 경각심도 아주 강했지만 갑자기 쳐오자 소불이는 어떻게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즉시 울며 겨자 먹기로 일 장을 맞받았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소불이는 저만큼 뒤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소불이는 다시 재빠르게 일어서더니 몸에 묻은 먼지를 털더니 곧 막용장강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바로 이때, 갑자기 누군가의 놀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막용장강과 향당주가 왜 저러지? 남한테 당한 것 같은……" 또 하나의 음성이 그의 의문을 뒷받침했다. "영주, 저 자는 바로 설상무영 소불이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음성은 매우 귀에 익었다. 첫 번째로 말한 사람은 여세진 같았고 두 번째는 전포의의 음성같았다. 소불이는 이미 그들임을 짐작하고 여의금사를 만지작거리며 몸을 돌렸다. "전총관의 말씀이 맞소. 이 늙은이가 바로 소불이요." 소불이가 몸을 돌려 보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한 십여 명쯤 되는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 중 맨 앞장에서 있는 사람은 문사차림을 하고 있는데 얼굴은 하얗고 수염은 기르고 있지 않았으나 안색은 얼음이 흩날릴 듯 냉막했다. 또 손에 하나의 부채를 품위있게 흔들고 있는 것을 보니 비록 체격은 작지만 우두머리 같았다. 그리고 그의 바로 뒤에서 있는 자가 외팔이 여세진이었고 또 그 뒤에 전포의, 주우천과 여덟 명의 괴도가 늘어 서 있었다. 앞장 선 백면무사는 막용장강과 향우춘 두 사람을 한 번 훑어보더니 소불이를 응시하며 물었다. "당신이 바로 소불이요?"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소만 그런데 귀하는 대체 뉘시오?" 백면문사는 서서히 다가오며 여전히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이 바로 막용당주와 향당주에게 독수를 했소?" "그렇소만……." 백면문사는 갑자기 싸늘하게 코웃음을 날렸다. "두 분 당주의 공력은 매우 고명하여 보통 독장으로는 절대 상하게 할 수 없을 텐데 그러고 보니 당신은 바로 독에 대해 아주 전문가라 할 수 있겠군." 백면문사는 말하면서 허리를 굽혀 두 사감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더니 품 속에서 한 개의 작은 옥병을 꺼내 두 알의 환약을 막용장강과 향우천에게 먹였다. 그러더니 소불이를 다시 돌아서며 냉랭하게 말했다. "본좌는 오늘 몸소 천독곡을 휩쓸려고 온 것이다. 그러니 빨리 포승을 받지 못할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우 여유있게 물었다. "그러나 이 늙은이는 노형의 이름도 모르고 어찌 포승을 받을 수 있겠소." 이때 여세진이 앞으로 나서며 음흉하게 웃었다. "소불이 네가 신영주도 몰라볼 때가 다 있느냐?" 이 말에 소불이도 깜짝 놀라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 자가 바로 만미천호 신교교란 말인가! '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태연하게 신영주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됐소이다. 이 늙은이는 비록 강호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고 살았지만 신영주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그 말을 들은 신영주가 싸늘하게 냉소를 날렸다. "흥! 지금 들어 두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지가 무섭게 곡 입구의 고목나무 위에서 갑자기 두줄기의 인영이 독수리처럼 날아 들어왔다. 하지만 신영주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태연한 눈빛으로 그들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막 날아 들어온 사람 중 한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회의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수중에 길고 짧은 두 자루의 보검을 들고 있는 이십 세 가량의 영준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이 두 사람은 바로 곡영자와 당승무였다. 곡영자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계곡이 떠나가라 우렁찬 음성으로 웃어젖혔다. "하하하…… 좋구나! 좋아, 오늘 노부의 천독곡에 이렇게 많은 귀빈들이 오다니……." 신영주는 다만 코웃음을 날리며 곡영자에게 거만한 투로 물었다. "흥! 당신이 바로 이 천독곡의 주인 곡영자요?" 곡영자는 신영주의 거만한 말투에도 아랑곳 없이 호인답게 웃었다. "허허…… 그렇소. 한데 귀하가 바로 이 천독곡을 쑥밭으로 만든다고 한 신영주요?" 신영주는 냉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때 여세진이 다시 음침하게 웃으며 한몫 끼었다. "후후후…… 소노형, 왕노제도 바로 이곳에 있으니 아마 홍채문주의 제소문주가 여기에 있겠지요?" 여세진은 아직도 당승무를 왕아복으로 보고 있었다. 당승무는 여세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불이에게 수중의 장검을 주었다. "소노대, 검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이어 신영주의 앞으로 날아가서 수중의 단검으로 신영주를 가리키며 거만하게 물었다. "당신이 바로 신교교요?" 이때, 전포의가 앞으로 썩 나서며 크게 호통을 쳤다. "이놈, 어째서 어린 놈이 신영주께 그토록 무례를 범하느냐?" 당승무는 전포의를 힐끗 쳐다보더니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음! 이 흑의판관은 정수복이 변장한 가짜인지도 모르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한 당승무는 전포의에게 시선을 거두어 신영주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바로 만미천호 신교교가 아니란 말이오!" 독과 독 이에 신영주가 당승무를 응시하며 물었다. "당신은 신교교와 무슨 원한이라도 있소?" 당승무는 눈을 번득이며 매우 비분에 찬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렇소. 선사의 원수를 갚으려면 반드시 그 요녀를 죽여야만 하오!" 신영주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의 사부는 누구요?" 당승무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아직 내게 누가 신교교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잖소!" "오호호호…… 호호……." 이때 온 계곡을 진동시키는 맑고도 차가운 웃음 소리가 신영주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바로 그날, 석옥 밖에서 들었던 웃음 소리와 동일하지 않은가? 당승무는 검미를 불끈 치켜올리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 요부! 바로 너였구나!" 그러자 신영주는 웃음을 그치고 차가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렇다. 본좌가 바로 신교교이니라. 그런데 너도 자신의 내력과 사부의 이름을 대야 할 게 아니냐?" 당승무는 돌연 얼굴에 쓰고 있던 면구를 벗어 던지더니 이빨을 갈며 분해 했다. "나는 당승무라고 한다. 그리고 나의 선사는 탈혼장 방통이니라. 이 요부, 이제야 생각이 나느냐?" 당승무가 가면을 벗자 그녀는 그제야 나이어린 영준한 젊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신교교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물었다. "원래 바로 네가 방통의 문하였구나. 음, 그런데 뭐 당승무라고!" 그렇다면 혹시 사천 당승종의 아들이 아니냐"" "오냐, 너의 말이 맞느니라." 그러자 갑자기 신교교는 키들대며 웃었다. "후후후…… 정말 잘 되었구나. 방통의 제자라도 내 물론 죽이겠지만 당승종치 아들이라니 더더욱이 살려둘 수가 없다!" 당승무는 한에 맺힌 눈빛으로 금시라도 상대를 집어삼킬 듯 기세가 등등했다. "요부, 잘 들어라. 이 당승무가 오늘밤 만약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이 마음 속에 응고된 울분을 풀지 못한 것이다!" 신교교는 싸늘히 냉소를 쳤다. "흥! 그럼 나는 오늘밤 너를 가만둘 것 같으냐?" 당승무는 단 번에 신교교의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좋다! 그렇다면 이 요부 빨리 병기를 뽑아라!" 이때 곡영자가 급히 만류했다. "노제, 잠깐!" 당승무는 얼굴에 비장한 빛을 띠며 말했다. "대사백, 제자는 몸소 이 요부를 죽이고 사부의 원수를 갚아 주셔야 합니다!" 곡영자는 미소를 지으며 낮은 어조로 말했다. "물론 그 점은 노부도 찬성한다. 그러나 노부에게는 아직 그녀에게 몇 마디 물어볼 말이 있으니 그리 서두르지 말아라." 이어 그는 신교교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영주, 먼저 한 마디 묻겠소. 노부와 방통의 관계를 알고 있다." 신교교는 가볍게 코방귀를 뀌며 쌀쌀하게 말했다. "흥, 그것 쯤이야 벌써 알고 있어요. 당신은 방통의 사형이며 독을 잘 쓴다는 것까지……, 그러니까 오늘밤 일부러 이렇게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겠어요?" 곡영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더니 이어 말했다. "노부가 듣자하니 당신들에게 관가 성을 가진 부총영주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도 역시 독을 잘 쓰며 또한 무명도를 위해 많은 독인을 배출했다고 해서 노부도 마침 그를 찾을려고 했소. 그런데 신영주가 마침 그의 수양딸이라니 더욱 더 잘되었소. 그러니 우리 서로 독기를 시험해 보지 않겠소?" 신교교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여세진이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며 그녀의 말을 급히 가로막았다. "신영주 잠깐만. 형제는 지금 명령을 받고 제갈명의 행방을 찾고 있소. 그런데 듣자하니 제갈명은 그날 죽은 것이 아니라 소불이와 바로 이 당가 두 놈이 구했다고 하며 또한 오늘 소불이와 당가 놈둘 다 여기에 있으니 필시 제갈명도 있을 것입니다." 신교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곡영자를 향해 물었다. "정말 홍채문의 제갈명은 당신의 곡 안에 있습니까?" 그러나 곡영자 대신 소불이가 대답했다. "그렇소. 제소문주는 엊그제까지도 곡 안에 있었소." "지금은?" "벌써 갔지요." 신교교는 의혹에 찬 눈망울을 굴리며 물었다. "그는 어디로 갔나요?" 소불이는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추스렸다. "나는 모르니 만약 신영주께서 제소문주의 행방을 알고자 한다면 단 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오." 그러자 신교교는 얼굴이 밝아지며 즉시 물었다. "그가 누굽니까?" 소불이는 히히 웃으며 신교교의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대답했다. "히히히……, 바로 제갈명, 그 자신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오!" 신교교는 순간 검미를 사납게 찢으며 발을 굴렀다. 아니, 소불이 당신까지 나를 놀리다니……." 소불이는 그녀에게 한쪽 눈을 슬쩍 감아 보이며 추파를 던졌다. "만미천호는 천생적인 요물이고 또한 예전에 많은 사람이 그대와 한 이불을 덮고 잤는데 이 늙은이가 농담 좀 하면 안 됩니까?" 신교교는 갑자기 요사스럽게 웃었다. "호호호…… 왜 너도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지고 싶으냐?" 그러더니 순간적으로 뾰족한 손가락을 세워 소불이의 코 끝을 행해 찔러왔다. 하지만 소불이도 이미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미끄러뜨려 신속히 옆으로 빠져 나갔다. "신영주께선 분명히 이 늙은이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군. 히히…." 소불이는 분명히 신교교의 일지를 피했다. 그러나 말이 끝나자마자 어깨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껴 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어느 사이인지 신교교의 지풍에 그어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옷자락에는 젓가락 정도 되는 굵기의 검은색 지혼이 남겨져 있었다. 소불이는 그것을 보고 내심 무척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히 혀를 찼다. "쯧쯧, 계집년의 손 속에 독이 있었구나." 신교교는 싸늘하게 웃으며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흥! 이 늙은 놈아, 이제는 가만히 앉아 죽음만 기다리고 있거라." 소불이는 키들대고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후후후……, 안심해라. 이 늙은이는 그 정도의 독 따위로는 절대 죽지 않는다." 곡영자는 신교교가 독을 사용하는 수법이 매우 고명한 것을 보자 짐짓 염려스러워 참견했다. "소노형, 그녀가 독을 사용하는 수법에는 노부가 상대하는 것이 낫겠소." 이때 당승무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튀어 나오며 급히 소리쳤다. "대사백, 이 요부는 다만 관가 놈의 수양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어찌 대사백께서 수고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자는 반드시 제 손으로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단검으로 신교교를 향해 겨누었다. "요부, 빨리 병기를 꺼내라!" 그러나 지금 신교교는 아까 소불이가 자기의 일지를 맞고도 끄덕없는 것에 매우 놀라고 있었다. 그런데 지간 당승무까지 검을 들고 뛰어 나오자 그녀는 수 보 물러서며 입으로 예리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갑자기 풀을 스치는 소리와 합께 오른쪽 숲에서 하나의 인영이 독수리처럼 날아들었다. 당승무가 놀라 그 인영을 자세히 보자 바로 그들은 흑의복면을 한 독인이었다. 이어 그는 매우 어리둥절했다. '이 독인은 과연 어느 문파의 고인일까? ' 당승무가 안중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신교교가 당승무를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가서 저놈을 죽여라……." 그러자 흑의인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어깨에 매고 있던 장검을 뽑아 당승무를 향해 일 검을 찔러갔다. 그러나 당승무는 흑의인의 일 검을 가볍게 피하며 도리어 신교도에게 다가갔다. "요부, 내가 찾는 것은 바로 너다? 당승무는 외치면서 즉시 신교교의 안면을 향해 찔러갔다. 신교교는 고개를 살짝 돌려 피하고는 일지를 찔러왔다. "흥! 너에게는 아직 그런 자격이 없느니라!" 당승무가 재차 상대방의 일지를 피하며 다시 공격을 하려던 순간, 그 흑의인이 갑자기 휘파람 소리를 내며 당승무의 뒷허리를 향해 찔러왔다. 당승무는 할 수 없이 단검을 들어 흑의인의 검을 막으며 왼손바닥으로 흑의인의 어깨를 항해 내리쳤다. "챙-." 하는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흑의인도 질 세라 일 장을 쳐갔다. "펑!" 하는 또 다른 소리에 이어 당승무는 뒤로 두 발자국이나 물러났으나 흑의인은 상체만 약간 흔들거렸을 뿐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러자 흑의인은 몹시 화가 난 듯 다시 검을 들어 당승무에게 덮쳐왔다. 당승무는 상대방이 중독에 의해 제정신을"앗긴 걸 알기 때문에 감히 살수를 쓰지 못했다. 그런 까닭으로 당승무는 사오십 초 가량을 싸우자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신교교가 또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오른쪽의 숲에서 연달아 세 명의 복면인이 나타났다. 신교교는 검은 부채를 들어 곡영자와 소불이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가서 저 두 놈을 처치해라!" 이어 두 명의 흑의인은 소불이와 곡영자 두 사람에게 걸어갔다. 곡영자가 대뜸 화를 내며 소리쳤다. "신교교, 만약 정말로 실력이 있다면 정신을 빼앗긴 독인을 보내지 말고 너 자신이 나오너라!" 그러나 신교교는 얼음장같이 싸늘하게 웃었다. "호호호… 네가 그들을 상대해 줄수 있으면 본좌는 즉시 나서겠다." 두 사람이 한 마디씩 교환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의 독인이 벌써 곡영자의 몸 앞으로 다가와서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곡영자를 향해 일장을 쳐왔다. 곡영자는 급히 픽했다. 그러나 그가 재빠르게 피했지만 일진의 광풍노도 같은 바람이 자기의 몸 옆을 스치고 지나 갔다는 것을 즉시 알 수가 있었다. 곡영자는 순간,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이 자는 대체 누군데 장력이 이렇게 웅후할까?" 흑의인은 일 장이 빗나가자 더욱 맹렬한 기세로 덮쳐왔다. 그러나 곡영자는, "이얍!" 하는 기압 소리를 지르며 왼손으로 상대방의 일 장을 받고도 추호도 물러섬이 없이 오히려 오른손의 두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현기혈을 향해 찔러갔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곡영자는 갑자기 자신의 손가락이 칼날에 찔린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상대방은 현기혈을 찔렸는데도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독벽화산이라는 초식으로 장을 칼날처럼 세워가지고 비스듬이 쳐왔다. 순간, 곡영자는 깜짝 놀라 급히 뒤로 피했다. 하나 독인은 또 다시 경공의 파열음을 터뜨리며 쌍장을 휘둘러 덮쳐 갔다. 지금 곡영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할 수 없이 정신을 바싹 차려 장풍을 휘둘러 상대하는 것이다. 이때 다른 한 사람의 독인이 소불이를 향해다가가고 있었다. 소불이는 벌써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신교교가 독인들을 지휘해 자신들과 싸우게 한 다음 그녀는 오른 쪽의 숲 속으로 물러가서 경과만 살피고 있는 게 분명히 그녀가 톡 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힘을 빼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소불이는 독인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도망을 쳤다. 하지만 독인은 이미 정신을 빼앗겨 명령대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소불이가 도망치는 것을 보자 즉시 뒤따라 가서 덮치기 시작했다. 독인은 땅에 두 발을 내딛자마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연속적으로 찔러갔다. 소불이의 경공은 이미 무림에서 제 일인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독인의 경공이 그렇게 높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것은 독인이 자신을 쫓아왔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는 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독인은 다시 공중을 날으며 한 발로 쓸어왔다. 소불이는 이에 급히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이것이야말로 소당퇴(掃堂腿)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소불이가 몸을 날리는 바로 그 순간에 독인의 쓸어오던 다리는 또 다시 소불이의 엉덩이를 향해 차오는 것이 아닌가? 이때 소불이의 몸은 허공에 떠 있으니 어찌 이것을 피할 수가 있으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불이는 어김없이 엉덩이를 채이고는 몸이 마치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러나 소불이는 아픔도 모르는지 혀를 끌끌 차며 몸을 두 바퀴 돌려 일 장 밖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또 만만치 않은 것이 그 독인이었다. 독인은 마치 백장노장같이 번개처럼 따라가 연속적으로 또 한 발을 내지른 것이다. 소불이는 숨을 돌릴 여유도 없이 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는 미처 반격할 여유도 찾지 못하고 땅에 데굴데굴 굴러서 단숨에 독인의 열여덟 발을 피하였다. 그리고 나서 기막힌 전술로 쌍장을 뻗어 땅을 팍 치더니 머리를 땅에다 처박고 두 발을 위로 세우고는 순식간에 독인의 머리 위로 넘어갔다. 그러더니 급히 소리를 질러 구원을 청하였다. "갈노제, 조노제, 빨리 도와주게!" 지금 소불이가 독인의 머리 위를 밟고 날아간 이 한 수는 정말 기묘하였다. 만약 소불이가 이 독인이 바로 삼 년 전에 통사도에 참가한 각파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한 수로 독일의 머리를 박살내고도 남음이 있었다. 소불이가 독인을 우롱하자 독인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소불이를 쫓아갔다. 이때, 옥 입구에 숨어 있던 갈비백이 대갈익성을 내지르며 뛰어 나왔다. 그러자 소불이는 즉시 소리쳤다. "두 분 노제께서는 이 자의 퇴법(腿法)을 조심하시오!" 소불이는 갈비백이 소리를 지르는 동안 당승무가 자기에게 준 한 병의 환원단을 꺼내 뚜껑을 열어 환약을 쏟아내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저들이 싸우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출수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환약을 입에다 집어 넣는다고 해도 삼킬지 모르겠구나!' 이 순간적인 찰나에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은 그 독인과 벌써 칠팔 초씩이나 싸웠다. 이 두 사람을 상대해도 그 독인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신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 찔러갔다. 지금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은 수중에 비록 검을 가지고 있지만 이때의 상황은 곡영자와 당승무보다 더욱 위험하였다. 소불이는 이 광경을 보자 급히 전음술로 소리쳤다. "두 분 노제께서는 그 사람의 정면을 막으시오!" 불뿜는 악전 하는 외침 소리와 함께 그는 즉시 두 사람과 싸우고 있는 독인의 뒤를 향해 날아갔다. 이때 신교교는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소불이를 도우는 것을 보자 입가에 처참하리만큼 싸늘한 냉소를 흘렸다. 그러더니 그녀의 옆에 있는 나머지 한 독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 독인도 즉시 소불이를 향해 날아갔다. 소불이 또한 독인의 뒤를 향해 귀신같이 날아가는 순간, 나머지 독인 역시 그의 뒤를 귀신같이 따라가 그의 등을 향해 일 장을 쳐갔다. 소불이는 이러한 상황에 즉시 뒤로 일 장을 뻗어쳤다. 이것이 바로 염지천이 가르쳐 준 검장 십삼 식의 용미휘풍(龍尾揮風) 이라는 절초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맹렬한 기세로 덮쳐가던 독인은 일 장에 의해 세발자국이나 물러났다. 그런데 이때 갈비백, 조봉춘과 싸우고 있던 독인은 우렁찬 기합소리를 내더니 단번에 조봉춘의 단검을 쳐서 날아가게 하고 두 손을 세워 그를 잡으러 갔다. 순간, 이 광경을 본 갈비백이 황급히 장검을 휘둘러 독인의 허리를 향해 쓸어갔다. 하나 조봉춘은 단검을 날리고는 힘없이 독인의 발 아래 쓰러져 굴렀다. 이어 갈비백이 포악하게 덤벼오자 독인은 한 발로 그의 검등을 차자 장검은 힘없이 손에서 빠져 날아갔다. 이번에 독인은 다섯 손가락을 갈퀴 모양으로 세워 발을 앞으로 내밀며 그의 가슴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갈비백은 급히 뒤로 피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몸은 벌써 상대방의 발에 채여 일 장 밖으로 날아가 두 번 다시 일어날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이때 다시 일어선 조봉춘은 이 광경을 보자 자신의 위험은 전혀 돌보지 않고 두 주먹을 들어 독인을 향해 쳐갔다. 한편, 소불이의 뒤를 공격하던 독인이 다시 일 장을 뻗어갔다. 그러나 그렇게 쉽사리 당하고 말 소불이가 아니었다. 상대의 일 격이 바로 등에 닿으려던 찰나, 그는 이미 피하였던 것이다. 독인은 소불이가 다시 자기의 일 장을 피하자 마자 소불이와 어떤 풀지 못할 크나큰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덤벼들었다. 소불이는 연신 뒤로 피하다가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의 검이 일시에 날아가고 상황이 매우 위험해진 것을 보자 독인을 버리고 즉시 갈비백의 옆으로 날아갔다. "갈노제, 좀 어떻소?" 갈비백은 몹시 괴로운 듯 억지로 일어나며 대꾸했다. "약간의 경상만 입었을 뿐 괜찮습니다." 소불이는 더 이상 말을 시키지 않고 당승무에게 받은 검을 건네주었다. "자 검을 받게!" 이때 조봉춘과 싸우던 독인이 갈비백을 향해 날싸가려던 순간, 조봉춘이 주먹을 휘두르며 날아오는 것을 보자 즉시 조봉춘을 장 밖으로 차내었다. 그런데 다시 소불이가 자기를 향해 덮쳐오는 게 아닌가. 이 독인은 원래 소불이와 싸웠었으나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그런데 소불이가 다시 자기를 향해 오자 두 사람을 버려두고 곧장 소불이를 향해 공격해 갔다. 마침 이때, 다시 소불이의 뒤로 네 번째의 독인이 추격해 오더니 일 장을 쳐왔다. 소불이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자 내심 매우 당황했으나 소불이 약은 두뇌는 능히 이 난관을 타파했다. 소불이는 이 긴박한 순간에도 여유를 보이며 앞에 있는 독인의 박과 뒤에 있는 독인의 일 장이 몸에 닿으려는 순간, 급격히 빠져나왔다.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소불이에게로 날아가던 공격이 두 독인끼리 부딪치고 말았나. 다음 순간, 두 명의 독인은 몹시 몸을 비틀거리며 수 보나 물러났다. 두 명의 독인은 수 되나 물러난 다음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 좀 다쳤다고 하나 조금도 물러서는 기색없이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소불이를 찾고 있었다. 이때 소불이는 곡영자와 당승무가 싸우고 있는 독인에 환혼단을 먹이려고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크쿵 흐흐……." 하는 괴소와 함께 아까의 그 두 독인이 벌써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공격을 해오는 것이다. 소불이는 매우 낭패한 듯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할 수 없구나. 한 놈을 처치해야 방법이 있겠군.' 그리고 즉시 여의금사를 꺼내 두 명의 독인을 향해 마주쳐 갔다. 이때 갈비백은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장검을 들고 소불이를 거들었다. 한편, 조봉춘도 자기의 단검을 찾지 못하다가 아까 소불이가 갈비백에게 준 장검을 들고 싸움에 가담하였다. 이 다섯 사람의 혼전은 정말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릴 정도였다. 두 사람의 독인이 쓰는 권각으로 발하는 바람은 돌덩이도 날아가게 할 정도이며 거기에다 소불이의 여의금사와 두 자루의 장검이 합치니 그 위세란 이루 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곡 입구에서부터 갑자기 한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긴 장삼을 입고 이 결투 장면을 잠시 싸늘하게 응시하더니 다섯 사람이 싸우고 있는 장소로 곧바로 걸어갔다. 두 명의 독인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서 옆을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소불이는 이 사람을 보고 기뻐서 크게 소리쳤다. "오! 제소문주, 빨리 이 늙은이를 대신해서 상대좀 해 주십시오!" 이 사람이 바로 곡 안에서 운공을 하고 있던 제갈명이었다. 제갈명은 소불이의 외침 소리를 듣자 즉시 날아가 재빨리 왼손으로 독인을 향해 낄 장을 내밀며 물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제갈명이 지금 쓰는 것은 칠보추운수로 그는 이 일 장으로 네 번째 나타난 독인들 향해 쳐 나간 것이다. 네 번째 독인은 제갈명이 새로 싸움에 가담해 오는 것을 보자 갑자기 오른손을 갈퀴처럼 해가지고 제갈명의 요혈을 향해 잡아갔다. 이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독인은 뒤로 수 보씩이나 물러났다. 소불이는 제갈명이 단번에 네 번째의 독인을 튕겨나게 하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소리쳤다. "갈노제, 노조제, 빨리 쓰러진 독인을 저지하시오. 그리고 지금 싸우고 있는 독인은 제소문주에게 넘겨 주시오!" 소불이는 세 번째 독인의 발이 매우 무서우므로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이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즉시 제갈명에게 넘겨주도록 한 것이었다. 갈비백과 조봉춘은 소불이의 말을 듣고는 즉시 방향을 바꿔 네 번째의 독인을 향해 덮쳐갔다. 땅에 쓰러진 그 독인은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덤벼오자 즉시 일어나 대항하기 시작했다. 소불이는 이번에 제갈명을 향해 소리쳤다. "제소문주, 이들은 모두 동사도의 독인이오! 그리고 그들 전부 옛날 개산대회에 참가했던 협의의 고수들이니 소문주께서는 그를 저지하시기만 하고 목숨엔 지장이 없게 하십시오." 소불이는 일단 여기서 말을 끝냈다가 제갈명의 뒤로 돌아가며 다시 말했다. "소문주, 그의 정면을 막아야만 이 늙은이가 해약을 먹일 수 있습니다." 제갈명은 그 해약이라는 것이 무슨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소불이가 앞을 막으라고 하니 정면을 향해 공격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독인은 급히 피하더니 이어 오른발로 쓸어왔다. 제갈명은 소불이의 암시대로 독인의 정면을 향해 맹렬하게 속공을 벌였다. 세 번째의 독인은 비록 퇴법을 특기로 하고 있지만 재갈명의 속공 아래에는 어쩔 수 없이 뒤로 후퇴하였다. 독인은 그 신지를 미혹당하고 또 입으로 말을 할 수가 없어 그 행동이 포악한 짐승처럼 돌변하여 이상한 소리를 질러대며 마음 속의 울분을 발산했다. 바로 이때, 다시 소불이가 낮은 소리로 지시했다. "소문주, 그 자의 정신을 정면으로 집중시키십시오. 이 늙은이가 지금 손을 쓸 테니까." 제갈명은 다시 소불이의 지시대로 연속 다섯 장을 번개같이 독인의 가슴 대혈을 향해 쳐갔다. 세 번째 독인은 제갈명이 갑자기 정면으로 공격해 오는 것을 보자 즉시 쾌재를 불렀다. 이유는 자기가 암만 발을 휘둘러도 상대방을 찰 수가 없었는데 지금 상대방은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는 좋아서 괴성을 연발하며 두 발로 차나갔다. 소불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독인이 입을 벌리는 순간이었다. 이때 소불이는 갑자기 세 번째 독인의 앞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눈깜짝할 사이에 한 알의 환혼단을 독인의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득의에 찬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이제 고문주께서는 그와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만 더 싸우면 됩니다." 소불이는 제갈명에게 이르고는 다시 갈비백과 고봉춘이 상대하고 있는 네 번째의 독인에게로 날아갔다. 세 번째 독인은 아까 자기가 광소를 터뜨릴 때 약이 자기의 목구멍을 넘어서 들어간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제갈명은 소불이의 말을 듣자 이미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제갈명은 독인이 두 발로 차온 것을 보자 대소를 터뜨리며 세 개의 손가락으로 독인을 향해 찔러갔다. 이 한 수는 제갈명이 전날 혁선 선불관과 바둑을 둘 때 바둑을 따먹는 수법에서 따온 것이다. 제갈명은 단숨에 독인의 오른발을 잡아 밖으로 내던지며 동시에 왼손으로 독인의 왼팔을 쳤다. "텅!" 하는 소리와 한께 독인은 실이 끊어진 연처럼 석 장 밖으로 날아가서는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러더니 아까 삼킨 환혼단의 효력이 몸에 퍼진 모양인지 땅에 처박혀서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게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듯 했다. 한편, 신교교는 갑자기 제갈명이 나타난 것을 보자 매우 놀라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제갈명은 분명히 그날 천영혈에 일 장을 얻어 맞았는데 어째 죽지 않았단 말인가…….' 또한 세 번째의 독인이 제갈명에게 일 장을 얻어맞고는 일어날 줄 모르는 것을 보자 더욱 놀라서 암중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거듭했다. '의부가 만든 저 독인들의 온 몸에는 전부 극독이 있는데 어째 이들은 한결같이 독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독인의 신지는 비록 미혹하다고는 하나 무공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독인을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 정신을 잃어버리지도 않을 텐데 어째서 저 세 번째의 독인은 석 장 밖에 떨어져서 일어날 줄 모른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도저히 실마리를 찾을 수 없자 옆에서 있던 여세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떼었다. "여당주, 우리 가서 어찌된 일인지 조사해 봅시다." 여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흑의판관 전포의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 이때 제갈명은 상대방이 쓰러져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소불이가 해약을 먹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흰 얼굴을 가지고 있는 문사차림의 사람이 자기 쪽을 향해 걸어오자 그는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동사도의 네 명의 당주는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은 누구일까? 더구나 저 자는 여세진의 앞에서 당당하게 걸어오는 것을 보니 신분이 낮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 지금 신교교는 가면을 썼으니 제갈명은 꿈에라도 알 수가 없었다. 신교교는 물이라도 얼릴 듯 싸늘한 눈초리로 제갈명을 응시하더니 이윽고 차디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흥! 제소문주께서는 제법 명이 길군요." 제갈명은 상대방이 자기를 쏘아보며 자기의 이름까지 알고 있자 몹시 의아해 했다. "귀하는 누구신데 이 몸을 알아보십니까?" 신교교는 냉소를 치며 딱 잘라 대꾸했다. "흥! 내가 누구이던 간에 제소문주께서는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신교교는 이 말을 마치자마자 두 번 다시 제갈명을 쳐다보지 않고 곧장 쓰러져 있는 세 번째 독인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제갈명이 갑자기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신교교의 앞을 막아 섰다. "서랏! 무엇하러 가느냐?" 신교교는 갑자기 제갈명이 자신을 제지하자 더욱 괴이하게 생각하며 눈썹을 잔뜩 치켜올리며 물었다. "흥, 나는 수하의 상세가 어떠한가를 좀 보러 가는 것인데 제소문주께서는 그것까지 참견을 다하십니까?" 제갈명이 신교교의 이 말에 대답할 말을 잃고 멍청해 있자 갑자기 그의 귓가에 소불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문주, 그들을 꼭 제지하시오. 쓰러진 독인은 앞으로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면 맑은 정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그들이 가까이 가는 것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제갈명은 소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다시 신교교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랏? 신교교는 매우 아니꼬운 듯 제갈명을 노려보았다. "무엇을 하시려고?" 제갈명은 준수한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리며 대꾸했다. "어쨌든 당신은 가지 못하오." 그러자 신교교는 찬바람이 일 듯한 냉소를 쳤다. "흥! 제소문주, 내 앞에서 큰 소리를 치지 마라. 내가 가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수로도 나를 막지 못한다!" 제갈명도 따라 냉소를 치며 신교교의 옆으로 비켜났다. "흥! 오냐, 정 못믿겠다면 내 앞으로 두 발자국만 걸어보아라!" 제갈명이 싸늘하게 비웃자 여세진의 옆에서 있던 전포의가 갑자기 진기전음술로 소리쳤다. "소문주는 조심하십시오. 이 여자가 바로 독을 잘 쓰기로 유명한 만미천호 신교교입니다." 원래 흑의판관 전포의는 이미 홍채문에 의해 납치를 당하고 여기에서 있는 사람은 바로 정수복이 변장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교교는 검은 부채를 흔들며 냉랭하게 웃었다. "오냐, 호호호……, 내 걸어 볼 테니 한 번 막아 보아라?" 하며 막 신교교가 한 발을 내밀어 걸으려고 할 찰나, "텅!" 하는 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과 싸우고 있던 네 번째 독인도 갑자기 땅에 쓰러지더니 일어날 줄을 몰랐다. 지금 이 사람은 조금 전에 세 번째 독인이 쓰러진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신교교는 깜짝 놀라 제갈명과 시비를 그만 두고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제갈명은 신교교가 갑자기 몸을 돌리자 급히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아! 이 요사한 계집, 어디로 달아나느냐?" 그러자 여세진이 음산하게 웃으며 제갈명의 안을 가로막았다. "제소문주, 학 말이 있다면 이 형제와 얘기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난무검영 제갈명은 갑자기 사기가 충천해 두 눈을 부릅떴다. "좋다. 오늘 내 당당히 너를 상대해 주겠노라! ' 그러자 여세진은 갑자기 안색이 굳어지며 얼굴에 원한에 사무친 빛을 떠올렸다. "제갈명, 똑똑히 들어라. 이나 여세진은 네놈의 일지를 맞고 한 팔을 잃어버린 지가 어언 삼 년이 흘렀으니 오늘은 기필코 그 이자와 함께 네놈의 두 팔을 거두어 가리라!" 그러자 제갈명은 두 팔을 여세진의 앞으로 내밀며 조롱했다. "하하…… 이 몸의 두 팔이 여기 눈 앞에 있으니 어디 실력이 있으면 가져 가보시오!" 여세진은 눈을 싸늘하게 번득이더니 품에서 한 개의 금색 태극권을 꺼냈다. "오냐, 노부는 여태까지 남과 싸울 때 병기를 쓴 적이 극히 드물지만 내 오늘밤은 병기를 써서 네놈과 싸우리라!" 제갈명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매우 경멸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 그렇겠지. 팔이 한 개 뿐이니 병기를 써야 마땅하겠지." 그러자 여세진은 급히 안색이 변하며 수치로 인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놈, 입 닥치고 어서 병기를 꺼내라!" 제갈명은 여세진의 입에서 욕이 튀어 나와도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허리에서 하나의 장검을 뽑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먼저 공격하시오!" 여세진은 수중의 태극권으로 수많은 금광을 유통시키며 싸늘하게 웃었다. "노부의 치 금권 안에는 수많은 오묘가 감추어져 있으니 조심해야 될 것이다!" 여세진의 말이 끝남과 동시 즉시 금영이 제갈명의 정면을 향해 날아왔다. 제갈명도 즉시 검으로 금영을 향해 찔러가며 다시 우롱했다. "여당주께서는 어떤 재간이 있던 마음대로 시전해 보십시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모두 팔이 시큰거려옴을 느꼈다. 더구나 두 사람이 일 초를 맞부딪쳤으니 신형은 서로 갈라져야 하지만 여세진은 또 다시 금권을 일으키며 제갈명의 좌우를 향해 시도해 왔다. 순간, 제갈명은 극히 놀라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삼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사이에 그의 무공이 이렇게 진전된 줄은 정말 몰랐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장검으로 좌우를 휘둘렀다. "챙, 챙, 챙." 하는 연 세 발의 마찰음과 함께 금권해 온 금영출 일제히 봉쇄했다. 여세진은 그것을 보자 의외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제소문주의 검법은 과연 옛날보다 크게 진전을 보았구나!" 말하면서 그는 다시 연속적으로 다섯 초나 공격을 했다. 제갈명도 똑같이 금영을 따라 휘둘러 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릴 뿐 검권이 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편, 신교교는 마치 연기처럼 두 사람의 앞에 날아가 세 번째 독인이 쓰러져 두 눈을 꼭 같은 채 움직이지도 않는 것을 보자 분노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어떻게 해서 이 독인을 상하게 했느냐?" 그러자 갈비백이 장검을 꽉 들고 눈을 부릅떴다. "신교교,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묻고 있는 것이오?" 신교교는 억지로 마음 속의 울분을 가라앉히며 검은 부채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 "물론, 당신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지." 그러자 조봉춘이 크게 입을 벌려 웃더니 싸늘히 냉소했다. "홍, 그렇다면 당신은 먼저 그 독인에게 왜 쓰러져 일어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나을 겁니다." 신교교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다부진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본좌는 먼저 너희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깨어났는가를 조사하고 싶다." 갈비백도 대소를 터뜨리며 같이 응수했다. "하하하…,", 그럼 저는 누가 이 사람들의 정신을 어떻게 혼미하게 만들었는지 그것을 묻고 싶소이다!" 신교교는 싸늘하게 웃으며 검은 부채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야 물론 본좌이니라." 순간, 조봉춘이 이빨을 갈며 분해했다. "요부, 과연 네가 한 짓이로구나!" 그러더니 순간적으로 일 검을 내질러 갔다. 그러자 신교교는 냉랭하게 웃으며 부채로 가볍게 일 검을 막더니 왼손가락을 구부려 튕겼다. "조봉춘, 넌 쓰러진다!" 이때 신교교의 왼손에서 뿜어져 나온 미약은 아무런 소리도 없으며 형태도 없어 상대방은 응당 쓰러져야 했다. 그러나 조봉춘은 환혼단을 먹었기에 열 두 시진이 지나지 않는 한은 체내에 여전히 약효가 남아 있으므로 미약이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다시 주위를 진동시키는 대갈일성과 함께 조봉춘은 또 다시 일 검을 찔러갔다. 신교교는 가벼운 파열음과 함께 조봉춘의 장검을 막고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런데 당승무와 싸우고 있던 첫 번째의 독인도 어느 사이엔가 소리도 없이 쓰러진 것이 아닌가? 신교교는 그것은 본 순간, 과연 무서운 요부답게 이 세 사람이 쓰러진 것은 소불이와 필연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바로 이때, 소불이가 다시 곡영자와 싸우고 있는 것을 보자 다시 망산귀수 주우천을 향해 목청껏 외쳤다. "주형, 빨리 소불이를 막으시오!" 조봉춘이 싸늘하게 냉소하며 그녀의 말을 일축시컸다. "개소리 말아라!" "창 …." 하면 다시 일 장을 쳐갔다. 신교교는 냉랭하게 코방귀를 뀌며 마치 어린 아이와 싸움을 하는것처럼 가볍게 피했다. "흥! 너의 몇수쯤으로 내가 무서워 할줄 알았더냐?" 신교교는 말하면시 부채로 맹렬한 속공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조봉춘은 비록 쾌도왕이지만 지금 수중에는 낯선 검이 들려 있기에 익숙하지 못했다. 게다가 신교교의 무공이 원래부터 조봉춘보다 높으니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신교교의 부채에 의해 방비만 할 뿐 반격할 틈조차 찾지 못했다. 그러자 갈비백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강호의 도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싸움에 가담하였다. 이때, 망산귀수 주우천은 신교교의 일성을 듣자 즉시 소불이의 뒤를 따라 호통을 쳤다. "이놈, 소가야! 게 섰거라!" 하는 말과 동시에 일 장을 쳐나갔다. 소불이는 다만 히죽 웃으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쯧…… 음풍장(陰風掌)! 과연 무서운데?" 소불이는 바로 주우천의 앞에서 몸을 번득였다가 어느 사이엔가 주우천의 옆을 스치고 내려가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히히…… 친구, 싸우고 싶으면 이 늙은이가 대신 상대를 찾아 주겠소!" 주우천은 상대가 이처럼 교활하게 신법을 전개하자 의외인 듯 놀라며 급급히 뒤로 물러섰다. 소불이는 목소리를 한껏 높여 당승무를 향해 소리쳤다. "어이 당노제, 여기 누가 자네와 싸우고 싶다고 하네!" 이때 당승무는 첫 번째 독인과 백여 초나 싸워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독인이 방금 쓰러졌기 때문에 잠시 땀을 닦은 후 신교교를 향해 덮쳐가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불이의 음성을 듣고는 즉시 소불이를 향해 날아갔다. 소불이는 망산귀수를 가리키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노제, 이 늙은 놈은 자네가 좀 상대하게." 그러더니 망산귀수를 향해 짐짓 미안하다는 듯 히죽 웃으며 말했다. "히히히…… 그럼 이 늙은이는 좀 가봐야겠소." 소불이는 말을 마치자 즉시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하지만 망산귀수는 일 척 반 가량이나 되는 화혈금도를 들고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흐…… 소가야, 네가 그렇게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소불이는 걸음을 떼려다 말고 두 눈을 찌푸리며 의아해 했다. "지 늙은이는 벌써 당신과 싸울 상대를 찾아 주었는데 왜 앞길을 막는 거요?" 소불이는 말을 끝내더니 다시 돌아서 가버렸다. 이어 당승무는 단검으로 수영사횡의 초식을 시전하며 소리쳤다. "소노대, 가십시오. 이 사람은 제가 맡겠습니다!" 당승무는 수중에 비록 한 개의 단검 밖에 들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일 격은 망산귀수를 뒤로 한 발자국이나 물러나게 했다. 이렇게 되자 망산귀수는 깜짝 놀라 마음 속으로 급급히 중얼거렸다. '아니 절은 놈이 어디서 이런 절묘한 검초를 배웠을까? ' 이렇게 암중으로 중얼거리며 여덟 명 괴도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 쳤다. "여봐라 저 소가 놈을 막아라!" 그러자 여덟 명의 괴도들은 즉시 유성처럼 소불이의 뒤를 향해 쫓아갔다. 하지만 소불이의 신법이 빠른 데다 원래 여덟 명의 괴도들과 오륙 장 정도의 거리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전혀 소불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덟 명의 괴도들은 악착같이 소불이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이때 소불이는 두 번째 독인의 몸 뒤로 가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벌떼처럼 쫓아오는 괴도들을 보더니 대뜸 수중에 들고 있던 여의금사로 독인의 등을 힘껏 갈겼다. 소불이는 애당초 독인의 뒤로 다가갈 때부터 이미 진기를 끌어올려 아무런 소리도 없이 다가간 것이다. 그러니 독인의 무공이 비록 고강하다고는 하나 지금 자신의 정신이 아니라서 반응도 늦고 또 곡영자와 악전고투를 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뒤에 사람이 왔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소불이에게 일 격을 맞자 아픔을 느껴 즉시 곡영자를 버리고 소불이에게로 몸을 돌렸다. 소불이는 바로 이점을 노렸던 것이다. 그는 독인이 돌아서기가 무섭게 다시 독인의 뒤를 향해 돌았다. 독인은 몸을 돌리자 자기 앞에 벌떼처럼 덮쳐오는 괴도들을 볼 수 있었다. 이때 그는 곡영자와 삼백 초나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아 벌써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있었다. 게다가 또 이번에 난데없이 일 격을 맞자 그는 즉시 분통을 터뜨리며 그 괴도들을 향해 일 장을 쳐갔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앞장 서서 달려온 한 명의 괴도가 찍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독인은 일 격이 성공하자 매우 기분이 좋은 듯 괴이한 소리를 연발하며 골장 일곱 명의 괴도를 향해 덮쳐갔다. 그러자 그 광경이란 실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호랑이가 양떼를 덮치는 것처럼 순식간에 일곱 괴도들을 땅에 때려 눕히고 말았다. 이것은 정말로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까지도 환성을 올리는 통쾌한 격투였다. 독인은 곡영자와 싸워 승부를 못 가리다가 여덟 명의 괴도들을 단숨에 처치하자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하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이때-. 소불이는 이 순간을 노려 수중의 환약을 즉시 독인의 입에 집어 넣었다. 한편, 제갈명과 여세진은 서로가 상승의 공력으로 이십여 초나 싸웠어도 여전히 승부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제갈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음, 할 수 없이 살수를 뻗쳐야겠군.' 제갈명은 순간, 덜미를 불쑥 치켜 올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여세진, 몇 초 더 받아 보겠느냐." 여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냉소를 날렸다. "오냐, 그 정도야 내 못받겠느냐." 이에 제갈명은 더 이상 입을 벌리지 않고 즉시 일 검을 찔러갔다. 제갈명의 반룡검은 찬란한 광채를 발하며 여세진의 금권을 쓸어갔다. 이때 여세진은 상대방 초식의 기이함을 알고는 적시 왼손에 쥐고 있는 태극권으로 가슴을 막으며 뒤로 세 발자국이나 후퇴했다. 제갈명은 따라가서 일 검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여세진, 쥐새끼처럼 도망가려고?" 여세진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며 음산하게 웃었다. "잘 왔다!" 하며 그가 왼손을 펼치자 태극권이 제갈명의 검광을 향해 마주쳐 나갔다. 다음 순간, "창"." 하는 맑은 음향이 날카롭게 들리더니 동시에 금권의 아랫 부분이 갑자기 갈라지며 검은색과 황색의 두 줄기 독수가 제갈명을 향해 뿜어 나갔다. 원래 여세진의 이 태극권은 안이 텅 비어 독수를 담고 있었던 것이었다. 제갈명은 이 상태에 접하자 급히 물러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은 채 왼쪽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그 두 줄기의 독수가 제갈명의 소맷자락에 닿자마자 즉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두 줄기의 독수는 땅에 떨어지자마자 피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금세 땅을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그러나 제갈명의 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제갈명이 입고 있는 장삼은 바로 호모모(虎毛毛)가 일부러 그를 위해 천잠사(天蠶絲)로 만든 옷이었다. 그래서 독검, 암기 같은 것은 무서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떠한 독수라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제갈명은 득의한 표정으로 냉소를 쳤다. "하하하…… 그 정도 가지고는 이 제갈명을 쓰러뜨릴 수 없느니라!" 그러더니 갑자기 싸늘하게 눈을 빛내며 여세진이 앞으로 다가갔다. "오늘밤 나는 네놈을 꼭 죽여야겠다!" 말을 끝냄과 동시 그는 재빨리 일 검을 휘둘러 갔다. 여세진은 급히 태극권을 제갈명에게 던지더니 볶을 교묘하게 뒤로 빼내었다. "쨍-" 하는 주위를 울리는 많은 금속성 소리와 함께 태극권은 제갈명의 일검을 향해 즉시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제갈명의 검세는 쉴사이 없이 밤하늘에 한 줄기의 은선을 그리며 여세진의 뒤를 추격해 갔다. 여세진은 이때까지도 꿈속에서라도 제갈명의 검술상의 조예가 검세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이때 그 사실을 알고는 매우 당황한 나머지 흑의당주라는 자신이 체면을 돌볼 겨를도 없이 일 장 밖으로 몸을 연신 구르며 꽁무니를 뺐다. 그러나 제갈명이 어찌 순순히 그를 가만 두겠는가-. 동시에 제갈명은 하나의 그림자를 허공에 그리며 그를 향해 덮쳐갔다. 이때의 광경이란 실로 말할 수 없이 빨라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어가는 식이었다. 그만큼 제갈명의 검세는 주위를 완전히 흡수시키는 막대한 위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앞에서 한 기다란 그림자가 여세진을 제치고 제갈명의 앞을 막으며 실로 눈 깜박할 사이에 일 장을 날려왔다. 순간, 제갈명은 누구라는 것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일진의 광풍노도 같은 장력이 일시에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 장력은 사람의 호흡을 틀어 막는 커다란 위세를 동반하고 있었다. 봉황검보 또한 이 일진의 강기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거대한 담벽처럼 앞을 철통같이 가로막았다 그러니 뚫고 나갈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제갈명의 장검에 부딪치자마자 장검은 즉시 그 탄력에 의해 되밀리어 왔다. 제갈명은 놀라 급급히 옆으로 피하여 자세히 보니 그의 눈 앞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어깨에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있는 한 남포노인이 있었다. 이 남포노인은 대추빛의 신색과 호랑이 같은 짙은 눈썹을 가진 위인이었다. 더구나 턱 버티고 있는 그의 위풍당당함은 가히 아까의 장력을 발휘하고도 남음이 있어 보였다. 제갈명은 이 노인을 보자 암중으로 크게 소리쳤다. '역시 그였구나! ' 그렇다. 이 남포노인이 바로 동사도의 총영주인 장한생(張寒生)이었던 것이다. 여세진은 자기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총영주인 장한생이라는 것을 알차 즉시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구해주신 은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놈이 바로 홍채분의 소문주인 제갈명입니다." 장한생은 다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대뜸 제갈명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이놈, 노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제갈명은 다시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며 쌀쌀하게 대꾸했다. "어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장한생은 차디찬 얼굴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고 이어 말했다. "좋다. 그런데 너의 모친이 섬에 있으니 네에미를 보고 싶다면 노부를 따르거라!" 제갈명은 자신의 모친 얘기가 나오자 안색이 돌변해 급히 거치른 어조로 물었다. "나의 가모를 어디다 두었으냐?" 장한생은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는 그때 너의 모친을 만나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때 보았다시피 섬에서 잘 지내고 있다." 순간, 제갈명은 그날 자기의 모친이 마치 무엇에 이끌리듯 시체처럼 움직였다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버럭 소리쳐 물었다. "당신네들은 가모의 정신을 혼미시켰지요?" 장한생은 다만 싸늘하게 웃으며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자네는 노부를 따라오면 알 수가 있지 않느냐?" 제갈명은 약간 마음이 동한 듯 그러나 미심쩍은 눈초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장한생은 제갈명의 눈치를 살피며 선선이 대답했다. "적어도 무명도의 총영주가 하는 말인데 어찌 책임 따위를 찾겠느냐?" 제갈명은 일순 침묵을 지키더니 머뭇거리는 어조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 같은 것이라도 없습니까?" 장한생은 히죽 웃어 보이며 궁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노부를 따라 성에 가서 서로 얘기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제갈명이 뭐라 다시 대꾸하기도 전에 전포의로 가장을 한 정수복이 진기전음술로 소리쳤다. "안 됩니다. 소문주, 속지 마십시오. 그리고 절대 그를 따라 가시면 안 됩니다." 순간, 장한생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전포의를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 무엇이라고?" 진기전음술을 시전하려면 반드시 내공이 매우 정심해야 음성을 실같이 가늘게 해 남의 귓속에 전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비록 옆에 있어도 엿들을 수가 없다. 그런데 장한생이 이 진기전음술을 듣자 그는 매우 놀라 암중으로 당황했다. '아니, 천이통(天耳通)을 연마한 사람만 남의 진기전음술을 엿들을 수 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이자의 무공은 정말 대단한가 보구나.' 정수복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급히 변명했다. "속하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한생은 노기를 터뜨리며 크게 소리쳤다. "본좌는 분명히 그와 얘기한 것을 들었다!" 정수복은 매우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속하는 정말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한생은 더 이상 정수복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다시 제갈명을 향해 다그치듯 물었다. "어때? 자네는 그동안 잘 생각해보았느나?" 제갈명은 이미 정수복에게 암시를 받은 터라 아까와 같은 조급함을 나타내지 않고 아주 여유있게 비꼬았다. "그러나 제가 생각해 보니 장총관께서는 다른 뜻이 있을 것 같군요." 장한생은 제갈명이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자 음산하게 웃더니 본색을 드러내었다. "후후후……그렇다. 노부가 너희 모자를 만나게 하는 유일한 조건이 바로 봉황검보(鳳凰劍譜)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제갈명은 싸늘하게 냉소했다. "만약 내놓지 않는다면?" 장한생은 매우 살기가 도는 듯한 미소를 흘렸다. "노부의 앞에서 자네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제갈명은 갑자기 안색을 굳히며 뒤로 반 보 물러났다. "저와 싸우시려고?" 장한생은 고개를 저으며 얼음장 같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후후……그보다 노부가 손을 대기 전에 포승을 받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순간, 제갈명은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만약 제가 총영주를 생포할 수 있다면 우리의 가모와 교환할 수 있겠군요?" 장한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문제는 네놈이 어떻게 무슨 수로 노부를 생포하느냐……." 제갈명은 가볍게 코방귀를 뀌었다. "홍, 당신을 생포하는 것이 뭐 어렵다고?" 그러더니 갑자기 제갈명은 몸을 비틀며 다가와 왼손으로는 허초를 발하면서 오른손의 세 손가락으로는 벌써 장한생의 단맥을 잡았다. 장한생의 공력은 이미 신의 경지에까지 이루어졌지만 갑작스러운 순간에 시전된 제갈명의 이 오묘한 수법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수법인가? ' 하지만 겉으로는 껄껄 웃으며 마치 얼굴에 날아온 파리를 날리듯 왼손으르 가볍게 밖을 향해 휘둘렀다. "하하하…… 이놈 과연 실력이 있구나!" 말하면서 그는 제갈명을 최소한 일 장 밖으로 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제갈명의 세 개의 손가락은 마치 집게처럼 더욱 힘있게 조여져 끄덕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장한생은 다시 암중으로 감탄을 올렸다. '삼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무공이 이렇게 진전되었을 줄은 미처 몰랐구나, ' 이렇게 생각하면서 얼마간의 힘을 더 들여서 제갈명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제갈명이 먼저 선수를 쳐 자기의 단맥을 잡고서 밖을 향해 던지는 것이 아닌가? 물론 제갈명은 장한생이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공력과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제갈명의 이 한 수는 장한생으로 하여금 두 발을 땅에서 떼게 만들었다. 하지만 제갈명은 장한생의 단맥을 잡았으나 던질 수가 없었다. 장한생 또한 그를 던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쌍방은 서로 다 속으로 놀라는 한편 감탄을 했다. 하지만 쌍방이 이런 식으로 내력을 겨룬다면 결국에 지는 것은 제갈명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갑자기 하나의 그림자가 장한생의 뒤로 날아가더니 손가락으로 번개같이 장한생의 등 뒤를 향해 찔러갔다. 그때 옆에 있던 여세진이 이 광경을 보자 벼락같이 대갈일성을 질렀다. "전포의, 너 미쳤느냐?" 그러면서 즉시 벽공장력을 발했다. 바로 그는 전포의로 변장한 정수복이었다. 정수탁은 제갈명이 단숨에 장한생의 맥문을 잡은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총격을 하지 못하고 내력을 기르고 있는 것을 보자 매우 당황해서 자신의 신분이 폭로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숨에 장한생의 뒤에 일지를 가했던 것이었다. 다음 순간, 정수복의 일지는 비록 장한생의 등을 찔렀지만 마치 어떤 날카로운 것에 찔린 것처럼 그는 손가락이 부러질 듯한 아픔을 느꼈다. 정수복은 아찔하여 마음 속으로 매우 놀란 순간, 장한생의 몸이 몹시 떨렸다. 그러자 두 개의 그림자는 마치 용수철이 끊긴 것처럼 앞 뒤로 갈라져 일 장 가량 튕기어 나갔다. 원래 제갈명은 세 개의 손가락으로 비록 장한생의 완맥을 잡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의 완맥에는 어떤 흡입력이 있는 것처럼 놓으려고 해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갈명은 어쩔 수 없어 땀을 뻘뻘 흘리며 내력으로 장한생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 갑자기 한 줄기의 거센 어떤 힘이 제갈명을 튕기어 나아가게 했다. 다음 순간-. "으하하…… 하하하…… 이놈, 양의현공(兩儀玄功)을 배웠다고 해도 그 정도 밖에는 되지 않으니 아무런 쓸모가 없구나!" 이어 장한생은 신형을 공중에 띄운 채로 한 발을 내질렀다. 지금 장한생이 쓰는 발길질은 매우 기묘하고도 빨랐다. 더구나 그가 취한 부위가 바로 제갈명의 기해혈이었다. 만약 제갈명이 이 기해혈에 일 격을 맞기만 하면 무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제갈명은 미처 위험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난석천공(亂石穿空)의 신법으로 급히 왼쪽으로 피했다. 그러자, 다만 일 초의 차이로 장한생의 발길은 그의 몸 옆을 아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장한생은 이 일 초가 실패하자 의외로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 이놈, 노부의 앞에서 감히 미꾸라지 같은 신법을 전개하다니 ……." 다시, "휭-" 하는 소리와 함께 일 장을 쳐왔다. 한편, 정수복은 그의 일지로 장한생의 등 뒤를 찔렀지만 반동의 힘에 의해 일 장 가량 튕기어 날아갔다. 이어 정수복이 막 몸을 가누자 여세진이 어느 틈엔가 날아와서 정수복을 응시하며 소리를 질렀다. "전총관 네 이놈, 감히 총영주께 기습을 하다니!" 그러더니 다섯 손가락을 칼퀴처럼 세워 가지고 정수복을 향해 덤벼왔다. "이놈, 너는 언제 홍채문과 손을 잡았느냐?" 정수복은 그의 장검을 향해 일지를 찔러가며 크게 소리쳐 웃었다. "하하하. …. 내가 동사도에 있을 때엔 여당주는 아마 관외에 있었을 것이다." 여세진은 눈을 휘번득이며 몹시 분해했다. "그렇다. 너는 물론 방통을 따르고 있으니 배반할 가능성도 컸었다." 정수복은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여당주, 잊지 말아라. 너도 방통이 끌어들인 사람이 아니냐? 만일 방통이 없었다면 염교주가 어떻게 너라는 인간을 알았겠느냐?" 여세진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대소로 얼버무렸다. "하하하…… 이놈, 노부가 너를 처치하지 못할 줄 알았더냐?" 여세진은 말하면서 정수복을 향해 다시 일 장을 쳐왔다. 정수복은 몸을 약간 비틀며 교묘히 손을 올렸다. "여세진, 이 전포의가 너를 무서워할 줄 알았더냐? 하하하…… 너는 이 전포의를 너무 가볍게 보았느니라!" 하며 정수복은 올린 손으로 여세진의 일 장을 맞받았다. 여세진은 마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가 수련한 것도 마교의 음풍투골장(陰風透骨掌)이라 맞받는 것은 극도로 위험했다. 하지만 정수복이 마주쳐 오는 것을 보자 암중으로 매우 가소롭게 생각했다. "아니, 이놈이? 내가 연마한 것이 음풍투골장인 줄 알면서 감히 맞받다니, 어디 그렇다면 네가 어떻게 막나 두고 보자!" 다음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똑같이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때 여세진은 상대방의 장력이 자기보다 약하지 않음을 알자 음산하게 웃었나. "후후후…… 이놈, 너는 원래 그래서 벌써부터 나 여세진과 싸우려고 했구나!" 그러나 정수복은 당연하다는 듯이 마주 웃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히히히…… 여당주,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형제는 당신 노형의 아랫 사람이니 평상시에도 방비를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여세진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오냐, 그렇다면 버릇을 고쳐주겠으니 이 노부의 몇 장을 더 받아 보아라!" 그러더니 연속적으로 다섯 초를 공격해 왔다. 이 다섯 초는 빠르기가 매우 놀라워 모두 동시에 발한 것 같았다. 그리고 각 초마다 전부 정수복의 요해대혈(要害大穴)를 노리고 있었다. 정수복은 뒤로 후퇴하면서 공격해 들어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여세진이 다섯 장을 쳐 온 사이에 그도 다섯 초를 반격했다. 여세진은 다섯 초를 연속 공격한 후에 수척 가량 물러나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멈추어라!" 정수복은 그 말에 즉시 손을 멈추더니 공손히 예를 취했다. "하하……, 당주께서 사정을 봐주시니 정말 감사하오." 여세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않고 정수복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고 나더니 서서히 입을 떼었다. "네놈은 전포의가 아니지?" 정수복은 짐짓 놀라는 체하며 정색을 했다. "당주께서는 정말 농담도 잘하십니다. 형제가 전포의가 아니라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여세진은 싸늘하게 웃으며 어조를 누구러뜨렸다. "귀하의 역용술은 과연 고명하오. 이 여세진까지 속였으니…." 그러다 돌연 여세진은 갑자기 말을 끊더니 마치 무엇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러나 나 여세진은 강호에서 수십 년이라는 세월을 굴러 먹었는데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까짓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으냐?" 정수복은 더 이상 속이려 들지 않고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 여당주, 과연 당신의 눈은 무섭습니다." 여세진은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숨쉴 틈도 없이 물어대었다. "오냐, 이제야 바른 말을 하는구나. 그렇다면 네 놈은 도대체 누구냐? 어서 내력을 말하여라!" 정수복은 아주 여유만만하게 씨익 웃고 나더니 얼굴을 닦으며 마치 상대의 가슴에 뚜렷하게 새겨 두려는 듯 한자한자 뜸을 들이며 말했다. "후후……, 형제는 바로 그 이름하여 정수복이라 한다오." 순간, 여세진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자기 딴만 아니라 모두가 수복의 변장술에 속아서 자기네의 모든 기밀을 누설시켰다니 그 놀라움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세진은 심히 분한 듯 침중한 신음 소리를 뱉으며 정수복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다. "원래 이랑신(二郞神) 정수복이었구나. 이제 와서 모든 것을 따진들 무엇을 하랴…,? 그러나……." 여세진은 말을 끊더니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정노형은 전총관을 어디에다 두었소?" 백초천독 정수복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전포의는 랍탑도사가 잡아갔으니 나는 잘 모르겠소." 그러자 여세진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정수복을 주시했다. "좋소. 정노형께서는 흑의당에 오랫동안 드나들었으니 이제는 가만히 놔두지 않겠소." 정수복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여 물었다. "가만 놔두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여세진은 그를 쏘아보며 이를 갈아붙였다. "죽여 버리겠다." 정수복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여당주께서 그렇게 나오신다면 아마 선택할 여지도 없을 것 같으니 알아서 하시오." 여세진은 가벼운 탄식을 한 번 하더니 그를 예리한 눈초리로 쏘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좋다. 자, 어서 와라!"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획!" 하는 소리와 함께 정수복을 향해 번개처럼 일 장을 쳐갔다. 정수복은 왼손으로 영운봉윌(迎雲捧月)의 초식을 전개해 여세진의 공세를 막고 오른손으로는 동시에 화중취율(火中取栗)이란 초식으로 그의 가슴을 향해 바람처럼 찔러갔다. 여세진은 광소를 터뜨리더니 정수복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여 단장으로써 다시 정수복을 향해 비호처럼 덮쳐갔다. 또한 오른발도 단장을 따라 연속적으로 질러 갔다. 두 사람은 모두 헛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벌써 오륙 초 씩이나 교환을 했지만 좀처럼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으며 막상막하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제갈명과 장한생 두 사람 역시 벌써 십여 초를 교환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갈명이 고전을 하는 것 같았다. 제갈명은 강호에 나온 이래 아무리 강적을 만났다고 할지라도 난석천공(亂石穿空)의 신법만 썼다 하면 마음대로 진퇴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신화가 사라진 것 같았다. 장한생은 다른 상대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의 장세는 번개같이 빨라 제갈명이 아무리 피해도 즉시 따라가서 내려치기 때문이었다. 한데 돌연, 제대로 공세를 취해 보지도 못하고 피하고만 있던 제갈명이 갑자기 "얏!"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한손으로 일지를 찔러 갔다. 이 한 수는 바로 천마녀 한선자(韓仙子)가 전수해 준 천뢰지(天雷指) 였다. 게다가 지금 제갈명의 공력으로 발휘를 했으니 그 위세야말로 과연 대단한 것이었다. 장한생은 마치 일지의 무서움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급히 몸을 피해 버렸다. 장한생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꺼냈다. "으하하하……으하하하…… 가소로운 놈 같으니…… 괴상망측한 무공을 다 배웠구나." 제갈명은 왼손으로 일지를 찌른 다음 오른손으로 검의 손잡이에 달려 있는 단추같은 것을 재빨리 눌렀다. 바로 이때-.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반룡검에서는 한광이 번득였다. 또한 순식간에 무수한 검광이 은빛 뱀처럼 사방으로 튕기어 나갔다. 이 일 초는 바로 청예요윌(靑電療月)이란 초식으로써 기세도 당당하게 장한샘을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게 하였던 것이다. 제갈명은 이 일 초가 성공을 하자 즉시 봉황검법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제갈명이 쓰고 있는 봉황검법은 마치 장강의 거센 물결처럼 쉴사이 없이 장한생을 향해 밀려들었다. 이 광풍노도와 같은 제갈명의 공세에 장한생은 당황한 나머지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이때-.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나고 있던 장한생이 등 뒤에 메고 있던 한 자루의 활검(闊劍)을 꺼내들고 막기 시작했다. 장한생은 차가운 눈초리로 제갈명의 검초를 응시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자네가 사용하는 것은 봉황검법인가? 아니면……." 제갈명 역시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렇소. 바로 봉황검법이오. 당신은 지금 도망을 쳐도 늦지는 않을 것이니 어서 도망을 치시오." 그러자 장한생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노부가 너를 무서워 할 줄 알았느냐?" 말을 끝냄과 동시에 활검을 움직이자 즉시 수천 개의 검광이 번득이며 제갈명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제갈명은 왼쪽으로 가볍게 몸을 피하며 순식간에 칠 초씩이나 공격해 들어갔다. 또한 각 초마다 심후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한생의 검법이 아무리 무섭다고 할지라도 제갈명의 봉황검법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장한생은 급히 그의 검초를 막아내며 생각을 굴렸다. '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후환이 무궁무진하겠는데……." 동시에 장한생은 살기를 일으키고 활검을 더욱더 재빨리 움직이며 자신의 평생 절학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이 일전은 참으로 불꽃 튀기는 접전일 뿐만 아니라 우열을 가릴수가 없을 정도였다. 또한 두 사람 주위의 삼 장 안에는 전부 건기로 덮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누구든 삼 장 주위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마 즉시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때, 나머지 몇 군데에서도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소불이는 번개 같은 수법으로 네 명의 독인에게 전부 환혼단을 먹였다. 또한 앉아서 운기 조식을 하고 있던 황의당주 막용장강과 청의당주 향우춘 두 사람은 이때 갑자기 운기 조식을 끝내고 일어섰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한 눈에 소불이를 볼 수가 있었다. 눈에 살기를 띠운 채 노려보고 있던 막용장강이 갑자기 허리를 쭉 펴고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들더니 대뜸 소불이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소불이!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목숨을 받쳐라!" 막용장강의 옆에 있던 청의당주 향우춘 역시 길고 좁은 장검을 뽑아든 채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소불이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여의금사를 만지작거리며 태연스럽게 물었다. "당신들은 두 명이서 나와 겨를 생각이오?" 소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막용장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쓸데없는 개소리는 하지 말아라! 너 같은 놈을 상대하기에는 이 노부 혼자서라도 족하다!"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옆에서 있는 향우춘을 가리켰다. "하지만 막용당주께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해놓고서 무엇 때문에 향당주를 데리고 오셨소? 사실 당신네 두 사람이 합수를 해서 이 늙은이를 죽인다고 할지라도 남들이 어떻게 알겠소?" 막용장강은 이 말을 듣자 화를 벌컥 버력 뒤를 돌아보더니 향우춘을 향해 손짓했다. "장주, 잠깐만! 이 늙은이에게는 아직도 할 말리 있다." 막용장강은 높이 치켜올렸던 장검을 내리며 몹시 불쾌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서 말을 해보아라!" 소불이는 향우춘에게 손짓을 하더니 히죽 웃었다. "향노형께서는 물러갈 생각도 하지 않고 여기에 남아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고 있지 않소. 이 늙은이는 또 다시 갑자기 일 검을 찌를까봐 안심이 되질 않소." 막용장강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더니 또다시 향우춘을 향해 손짓을 했다. "좋다. 좋아! 향노이, 어서 뒤로 물러가게." 소불이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꺼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오. 지금은 비록 물러가 있을지라도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다시 돌아올 수가 있지 않소." 묵묵히 듣고만 있던 향우춘이 이를 갈아붙이며 그를 쏘아보는가 싶더니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하시오?" 소불이는 향우춘을 한 번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알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소? 또한 당신의 검은 비록……." 향우춘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급히 말을 가로챘다. '거 이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것 같구나!" 소불이는 히죽 웃으면서 향우춘에게 손짓을 하더니 다시 막용장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것을 좀 보시오. 이 늙은이가 막용노형과 싸우기도 전에 나서지 않소." 막용장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향우춘을 향해 약간 언성을 높였다. "향노이!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물러가게." 향우춘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가려는 순간, 소불이가 다시 불렀다. "향노형! 이 늙은이가 할 얘기가 있으니 듣고 가시오." 향우춘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다시 돌아섰다. "또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나서는 것이오?" 소불이는 여전히 웃으며 태연스럽게 물었다. "향노형께서 물러간다고 할지라도 이 늙은이는 안심이 안 되오. 그렇기 때문에 이 늙은이가 상대를 하나 골라 줄 테니 한 번 겨루어 보지 않겠소?"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서 있는 곡영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곡노형! 가만히 서서 계시지만 말고 이 사람과 한번 겨루어 보시는 게 어떻겠소?" 이 말을 듣자 곡영자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분 향노형과 이 노부는 이미 겨루어 본 적이 있소. 그런데 어떻게 또 다시……."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아무리 겨루어 보았다고 할지라도 다시 한 번 겨루어 보는 것이 가만히 시 있는 것보다 낫지 않소?" 곡영자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묵묵히 서 있는 향우춘을 향해 천천히 말을 건냈다. "향노형! 한번 겨루어 보시지 않겠소?" 향우춘은 곡영자의 독공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먼저 겨루자고 했으니 청의당 당주로써 거절을 할 수는 없었다. 향우춘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곡노형의 뜻이 정말로 그러하시다면 좋을대로 하시오." 소불이는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렷다. "그렇다면 됐어…… 이 늙은이는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왼손으로 여의금사의 끝을 잡고 휘었다. 그리고는 다시 금사의 끝을 가볍게 놓자, "휭!"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의금사는 막용장강의 안면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 갔다. 소불이는 금사를 다시 잡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지금부터 겨루어 봅시다." 소불이의 수중에 있는 철사는 몹시 가늘고도 부드러웠다. 탄력 또한 강한 것 같았다. 막용장강은 소불이의 너무나 갑작스런 공격에 깜짝 놀라며 급히 뒤로 몸을 피했다. 소불이는 이런 광경을 보자 즉시 쫓아가며 공격을 시전했다. "막용노형께서 이렇게 예를 베풀어 주시니 이 늙은이는 실례를 좀 범해야겠소." 지금 소불이의 수중에 들어 있은 여의금사는 이 척 가량 되어 보이는 하나의 철사에 불과했지만 초식들은 모두 정묘하고 기이했다. 막용장강은 연속적인 소불이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에만 전념을 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반격할 여지도 없이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하지만 약 여섯 발자국쯤 물러섰을 때, 갑자기 장검을 휘두르며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챙! 챙!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소불이의 여의금사를 막아내며 미친 듯이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바로 이때, "쌩!" 하는 일 성과 함께 소불이의 왼손 장풍이 모여 막용장강의 어깨를 향해 무섭게 쳐갔다. 이 일 장은 참으로 빠르고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막용장강은 더 이상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이것을 보자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말을 꺼냈다. "막용당주! 무엇 때문에 피하시오. 무섭기라도 하단 말이오?" 소불이가 말을 끝내는가 싶더니".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의금사는 또 다시 상대방의 앞가슴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이에 막용장강은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생사는 돌보지도 않은 채 속공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불이는 검장 십삼 식의 초식을 시전하며 상대방과 여유 만만하게 대항을 했다. 이때, 향우춘은 곡영자의 독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과 검을 사용하여 시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곡영자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빙긋이 웃으며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노부는 지금까지는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병기를 사용해 본 적이 없으니 마음대로 병기를 쓰시고 발초를 하셔도 되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은 검을 사용하고 한 사람은 장을 사용하며 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편-. 신교교, 갈비백, 조봉춘 등 사람들도 벌써 삼백여 초 씩이나 겨루었다. 신교교는 원래부터 독을 잘 쓰는 여자였다. 하지만 갈비백과 조봉춘 두 사람도 원래 독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독을 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무공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교교가 쓰고 있는 한 자루의 흑접선은 마치 수천 마리의 흑룡이 공중을 날으는 것처럼 신기한 초식을 전개하여 상대방의 중요한 부분만을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추풍안 갈비백은 한 자루의 검으로 써 평범하고 가벼운 점창검법을 시전하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세 사람의 싸움은 비록 신교교가 조금 유리한 것 같았지만 그들을 격퇴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몹시 힘든 것이었다. 한편-. 당승무와 망산귀수의 싸움은 물론 당승무가 유리했다. 지금 당승무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염지천이 가르쳐 준 검장 십삼초식이었다. 또한 왼손으로는 흑살장을 산고 있으니 상대방은 물론 막아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망산귀수는 비록 강호상에서 일개 문파의 장문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연신 뒤로 물러나며 막기에 바빴다. 한편-. 생포령 정수복은 여세진과 아무 것도 들지 않은 채 맨손으로 싸우고 있었다. 여세진은 원래 마교의 출신이기 때문에 그의 독공은 실로 비할 데 없을 만큼 높았다. 하지만 정수복 역시 전에 홍채문의 좌우호법을 지낸 바가 있기 때문에 만만치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전은 어느 쪽의 결전보다도 더 치열할 뿐만 아니라 막상막하의 형세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일전이 아무리 치열하다고 할지라도 제일 중요한 격전은 바로 장한생과 제갈명의 싸움이었다. 전세는 다시 바뀌어 장한생이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제갈명이 봉황검법을 사용한 후부터는 그의 수중에 있던 반룡검이 마치 거센 물결처럼 계속해서 장한생을 향해 쳐갔던 것이다. 하지만 장한생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장한생은 흑영도의 총영주일 뿐만 아니라 당대 무림에서 첫째, 둘째가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장한생은 비록 반격을 하지 못하고 계속 물러서기만 했지만 그의 음흉한 눈초리는 쉬지 않고 제갈명의 검법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 그러나 장한생이 아무리 치밀하게 막는다고 해도 제갈명의 무서운 검풍을 막아내지 못하며 계속해서 물러서기만 했다. 제갈명은 더욱 의기양양하게 밀리고 있는 장한생을 쫓았다. 하지만 어느 누가 감히 생각이나 했으랴? 장한생은 제갈명의 검법을 쉴 사이 없이 주시한 결과 치명적인 약점을 찾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봉황검이 비록 강호에서 제일가는 검이라고 하지만 이 검법은 반드시 두 사람이 써야만 효과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명이 봉황검의 초식을 전부 쓴다고 할지라도 한쪽은 항상 비어 있었던 것이다. 제갈명의 상대가 약했더라면 헛점을 발견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호의 고수인 장한생이 그처럼 큰 헛점을 잡지 못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장한생은 그의 헛점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세밀한 곳까지 알아차려 암암리에 생각을 굴렸다. '이놈은 지금 몸을 비틀면서 공격하고 있어 검세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있구나…… 그렇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쪽에서 헛점이 생기고 말았군……. ' 이때, 장한생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허허허…… 이제부터는 노부의 공격을 받아라!" 말을 끝냄과 동시에 제갈명의 오른쪽을 향해 번개처럼 공격해 들어왔다. 봉황검은 원래부터 쌍검이 합심을 해야만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제갈명의 오른쪽은 그의 사촌 누이동생인 주설란이 배합을 이루어 주어야만 완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 계속해서 물러서고만 있던 장한생이 그의 오른쪽을 공격해 들어가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뒤로 재빨리 몸을 피해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제갈명은 형세가 갑자기 약해지더니 검법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제갈명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며 선기마저 장한생에게 빼앗겨 버렸다. 이런 상태로 팔구 초를 교환하자 제갈명에게는"게 불리해졌다. 장한생이 활검으로써 각 초마다 제갈명의 헛점을 노려 공격해 들어가자 그는 막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장한생은 호쾌하게 웃어젖히며 입을 열었다. "이놈! 어서 항복을 해라! 또한 병기를 버리고 노부를 따라 흑영도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제갈명은 그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더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언성을 높였다. "맞았다. 나는 흑영도에 꼭 가야만 한다. 하지만 절대로 병기를 버리고 잡혀가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처럼 쓸데 없는 소리를……." 장한생은 두 눈을 치켜뜨며 그를 주시하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이 버릇없는 놈아! 노부모도 있을 것이며 처자도 있을 텐데 이 노부의 검 아래 목숨을 잃는 것이 애석하지 않느냐?" 제갈명은 가벼운 탄식을 하더니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그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비록 당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당신 또한 깨끗이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오." 장한생은 그의 말을 듣자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는가 싶더니 다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너는 너 자신이 앞으로 노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니 더 이상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겠다." 사실 제갈명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자기가 아무리 봉황검을 쓴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의 적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얼마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갈명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하하하……, 으하하하……, 그런 개수작 부리지 마시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왼팔을 뻗더니 장한생을 향해 번개처럼 일지를 찔러갔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제갈명의 천뢰지가 장한생의 활검에 적중했다. 이것은 제갈명이 진기를 모았다가 일순간에 신응의 지력으로 찔려갔던 것이다. 이 뜻밖의 반격에 장한생이 들고 있던 활검은 갑자기 지풍에 의해 옆으로 튕기어 나갔다. 제갈명은 이 기회를 조금도 놓치지 않고 급히 반룡검으로 노용확주의 초식을 쓰며 상대방의 목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제갈명은 벌써 자신의 봉황검이 상대방에게 효과가 없음을 알아 차리고 가문의 섬전검법(閃電劍法)을 시전했던 것이다. 또한 제갈명은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찔러갔다. 장한생은 제갈명의 오른쪽의 헛점을 찾은 후 부터는 계속해서 오른쪽을 공격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갈명이 초식을 바꾸어 공격해 들어가자 그는 어리둥절했다. 이와 반면 제갈명은 즉시 오른쪽의 헛점을 보충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장한생은 제갈명의 속공에 의해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몸을 피했다. 사실 장한생의 무공은 제갈명보다 훨씬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명이 장한생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바로 봉황검법이었다. 하지만 봉황검법의 헛점이 이미 그에게 발각이 되어 .버렸으니 나머지 무공으로 어떻게 장한생과 대적할 수가 있겠는가? 제갈명은 자기가 뜻밖의 공격을 해야만이 상대방을 물러서게 할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섬전검법의 초식도 잠시 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또다시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장한생은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공력을 발휘하며 연달아 수초를 공격해 들어갔다. "노부의 검 아래 목숨을 잃기 전에 순순히 병기를 내놓지 않겠느냐?"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상대방에게 입을 열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갑자기 검에서 일진의 빨아들이는 힘을 작용시켜 제갈명을 안으로 몰아 넣으려고 했다. 제갈명은 이를 악문 채 하는 수 없이 봉황검법과 섬전검법을 섞어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 자신의 온갖 재주, 천뢰지, 금나수, 섬전장 그리고 또한 낙석천공의 신법까지도 모두 썼다. 이렇게 해서 제갈명은 억지로 장한생과 또 다시 십여 초 이상을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고수인만큼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이때 제갈명은 벌써 등골이 오싹하여 자신의 반항도 최후의 순간에까지 왔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다른 사람들 역시 상대와 불꽃 튀기는 현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제갈명을 도울 수가 없었으며 설사 도와준다고 해도 장한생의 적수가 될 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때-. 격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 위의 암석에 붉은 도포를 입고 키가 작아 보이는 늙은 노인이 하나 앉아 있었다. 이 도인은 얼굴이 몹시 희었으며 앞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또한 이 늘은 도인의 옆에는 십육칠 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하나의 낭자가 등에 쌍검을 메고 서 있었다. 이때 그녀는 샛별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제갈명이 싸우고 있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늙은 도인을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사부님께서는 전에 이 사람의 검법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몹시 불리한 것 같은데 무엇 때문이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던 늙은 도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이상한 것이 바로 그 점이야. 이 사람의 검법은 몹시 익숙한 같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 검법을 만든 사람이 기왕에 이처럼 묘한 초식을 만들었으면서도 어찌 이렇게 많은 허초를 남기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는 거다." 낭자는 격전장을 주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바로 저 검법을 사부님의 검법과 비교를 해보면 어떻겠어요?" 늙은 도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사람의 무공은 비록 강호를 종횡무진할 수가 있지만 저 사람의 검법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아까운 것은 그의 검법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 사부가 약간만 시정을 해준다면 반드시 천하제일의 검법이 될 수가 있을 텐데……." 낭자는 방긋이 웃으며 급히 말을 가로챘다. "사부님! 만약 사부님께서 그를 위해 조금만 보충을 해주신다면 그는 아마 몹시 좋아할 것이에요." 늙은 도인은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반드시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검법에는 비록 헛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찌 그가 이 검법을 사부에게 보여준다고 자신을 할 수가 있겠느냐?" 낭자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뜬 채 늙은 도인의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무엇 때문에 장담을 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사부님께서 그를 위해 조금만 더 보충을 시켜 주시면 더 좋지 않아요?" 늙은 도인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비법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에게 보이기를 싫어하지. 그렇기 때문에……." 늙은 도인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계속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 저 사람의 무공은 아주 복잡한 것 같은데…." 낭자는 격전장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예! 무엇이 그처럼 복잡하다고 그러세요?" 늙은 도인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제갈명을 향해 손짓을 하더니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저기를 잘 보아라! 자 사람은 마교의 천뢰지를 알고 있을 뿐만아니�라 악가의 섬전검법 또한 양공기(陽公忌)의 칠성둔(七星遁), 혁선(契仙) 선불관의 포풍착영까지도 할 줄 아는 것 같다." 낭자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이렇게 많은 무공을 알고 있으니 무공이 아주 높은 사람 같아요." 늙은 도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만약 이 중에서 한 가지라도 확실히 알고 있다면 일류 고수가 될 수 있지. 하지만 이런 것들로써 남포도인을 상대하려면 좀 힘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낭자는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다그쳐 물었다. "남포도인의 무공이 그처럼 무섭단 말인가요?" 늙은 도인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침중하게 말했다. "그렇다. 그 사람의 현문정종(玄門正宗)의 무공은 벌써 신의 경지에까지 다다랐지." 낭자는 늙은 도인을 힐끗 쳐다보더니 또다시 물었다. "사부님, 그렇다면 사부님과 그 사람과 비교를 해보면 어떻게 되지요?" 늙은 도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오히려 반문했다. "각기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느냐?" 낭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냉랭하게 물었다. "무공이란 원래 비교를 해보아야 할 것이 아니에요. 또한 제자가 묻는 것은 만약 사부님께서 그와 싸우신다면 누가 이기느냐는 것이에요." 늙은 도인은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허허허…… 허허…… 꼭 승부를 가려보라고 한다면 사부가 아마 좀 유리할 것이다." 낭자 역시 그제서야 웃으며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그렇다면 됐어요. 제자는 아무도 사부님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이때 늙은 도인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여 손짓을 했다. "큰일났구나. 아마 저 일 초를 받지 못할 것 같구나." 늙은 도인은 이어 하나의 돌을 집더니 힘껏 던졌다. 이때-. 장한생은 벌써 제갈명을 검영 안에 몰아넣고 갑자기 일 검으로 그의 어깨를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이 일 검은 기이할 정도로 빨랐으며 제갈명은 완전히 지쳐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제갈명의 어깨를 찔러가던 장한생의 검이 갑자기 튕기어졌다. 하지만 격렬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늙은도인이 한 짓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제갈명은 이 기회를 틈타 왼손으로 장한생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장한생은 주춤하며 바로 제갈명이 쳐온 것으로 알았고 제갈명은 장한생이 중도에서 갑자기 초식을 변경한 줄로 알았다. 이렇게 또다시 사오 초를 교환하자 제갈명은 차츰 검법이 혼란해지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장한생은 이것을 보자 광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허허허…… 이놈! 누워서 좀 쉬어라!" 순간-. "아-악!" 하는 일 성과 함께 장한생의 검은 제갈명의 겨드랑이 밑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바로 이때, 또다시 "챙!" 하는 소리가 들으며 장한생의 어깨가 움칠하며 검도 옆으로 비틀어져 나갔다. 또한 언덕 위에 있던 늙은 도인과 낭자도 어느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장한생은 몹시 불쾌한 듯이 중얼거리며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를 못했다. 그는 두 번씩이나 다른 사람에게 당했던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장한생은 제갈명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화를 벌컥 내며 외쳤다. "이놈, 노부는 원래 너를 생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꼭 죽여야만 하겠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제갈명을 항해 열두 검 씩이나 찔러갔으며 이 연속적인 속공은 모두 제갈명의 중요한 대혈만을 노린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제갈명이 약간의 헛점만 보였더라면 그는 당장 장한생의 검 아래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또다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챙! 챙! 챙!" 하는 열두 마디의 금속음과 함께 장한생의 검이 모두 옆으로 비켜나간 것이다. 장한생은 더욱 깜짝 놀라 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대체 어느 고인이기에 이 노부를 놀리려고 하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의 맑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호호호……, 바로 나예요." 순간, 어둠을 가르며 하나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날아왔다. 음풍투골 장한생과 제갈명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십육칠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소의소녀(素依少女) 였다. 장한생은 이것을 보자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조… 조금 전 노부의 장검을 튕기어 낸 사람이 바로 너란 말이냐?" 소의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긋이 웃었다. "물론, 제가 했지요." 그러자 장한생은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허허허…… 허허허…… 낭자! 노부의 일 검을 받아낼 수 있겠느냐?" 소의소녀는 그를 흘겨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믿지 못하시겠다면 시험을 한 번 해보시지요." 장한생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좋다. 자, 받을 준비는 다 되어 있겠지?" 말을 끝내자마자 장한생은 소의소녀를 향해 활검을 서서히 찔러갔다. 소의소녀는 여전히 웃으며 그를 주시했다. "호호호……, 잘 보아 두세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식지와 중지를 구부리더니 급히 튕겨 냈다. 소의소녀의 일지는 다만 허공을 휘두른 것 같았으며 지풍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별다른 묘계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장한생의 서서히 찔러오던 장검이 적시에 옆으로 튕겨 나갔다. 순간, 장한생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손을 멈췄다. "허허허…… 허허허…… 과연 뒤에는 다른 고인이 있었구나. 낭자! 어서 가 나오라고 해라!" 그러나 소의소녀는 맹랑했다. 이어,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장검을 뽑아 들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없다면 없는 줄 아세요! 그처럼 믿지 못하겠다면 우리 검으로써 겨루어 보면 알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는 다시 제갈명을 향해 손짓을 했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당신의 오른쪽을 막아준다면 저 사람은 아마 다시는 헛점을 찾지 못할 것이에요……." 말을 끝냄과 동시에 갑자기, "야-잇!" 하는 소리와 함께 장한생을 향해 번개처럼 일 검을 찔러갔다. 하지만 제갈명은 이 소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마음 속으로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장한생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이를 갈아붙였다. "허허허…… 좋다. 좋아…… 너를 처치한 다음에도 뒤에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가 보아야겠다."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활검으로 소의소녀의 검세를 가볍게 막은 다음, 오른손으로 수인이병(授人以柄) 이란 초식으로 검집을 사용해 소의소녀의 왼쪽 어깨 부분의 견정혈(肩井穴)을 향해 번개처럼 쳐갔다. 그와 일 초는 기이할 정도로 빨라 소의소녀는 그대로 당할 것만 같았다. 바로 이때, 제갈명은 그녀가 위기에 처하자 갑자기 대갈일성을 지르며 장한생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향해 황급히 공격해 들어갔다. 소의소녀 역시 왼쪽 어깨를 약간 비틀며 몸을 돌림과 동시, 장한생의 허리를 향해 예리하게 찔러갔다. 장한생은 원래 이 소의소녀를 생포하면 뒤에 숨어 있는 고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유인 작전을 폈던 것이다. 그러나 소의소녀가 단숨에 자기의 초식을 막아내고 반격을 해오는 것을 보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는 소의소녀의 발길질이 너무 기이했기 때문에 감히 경시를 못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제갈명의 검까지도 적시에 찔러와 장한생은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게 되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뒤로 반 보쯤 물러났다. 장한생이 뒤로 몸을 피하자 소의소녀는 제갈명이 향해 소리내어 웃었다. "호호호…… 어때요. 저의 말이 맞는 것 같지요?" 순간-. "쏴악-쏴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또 다시 장한생을 향해 비호처럼 덮쳐갔다. 소의소녀는 검세는 야릇한게 출수는 비록 빠르지 않은 반면 헛점을 예측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녀는 비록 두 초 밖에 공격을 하지 않았지만 자세는 연달아 일곱 번이나 바꾸었다. 이때, 장한생은 안색이 가볍게 변하더니 활검으로 급히 소의소녀의 검세를 막음과 동시에 세 개의 한광을 튕기어 반격을 시도했다. 이어 세 사람은 또 다시 치열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 소의소녀의 말이 확실히 맞는 것 같았다. 또 제갈명의 오른쪽을 그녀가 도와주고 있으니 상황이 크게 변했다. 소의소녀는 봉황검법을 모르고 있긴 했지만 최소한도 장한생의 부분적인 공세를 막아 줄 수는 있었다. 특히 장한생의 활검이 제갈명을 겨눌 때면 소의소녀는 갑자기 기이한 초식을 전개해 급습을 하는 것이었다. 소의소녀의 검법은 너무나 이상했기 때문에 장한생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장한생에게 제일 위협을 주고 있는 것은 소의소녀의 왼손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소의소녀의 공격은 비록 약했지만 장법만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제갈명과 소의소녀가 합수를 한다고 할지라도 장한생을 제압하기에는 좀 힘이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한생의 활검 아래 지탱하기에는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순식간에 세 사람은 벌써 이십여 초나 겨루었지만 평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때 장한생이 화를 벌컥 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좋다. 이놈들……." 말을 끝냄과 동시에 활검으로 동그라미를 그리자 갑자기 검에서는, 치-익!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또다시, "탁!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제갈명과 소의소녀의 장검이 마치 쇠가 자석을 만난 것처럼 가끔씩 달라붙었다. 장한생은 왼손을 서서히 치켜들며 고함을 질렀다. "이놈들! 노부는 너희들을 보내 줄 생각이니 단심하거라!" 이 때-. 장한생의 왼손 주먹이 확 쥐어지더니 점점 커지며 금색으로 변하는 것이 밝은 달빛 아래 환히 보였다. 순간, 장한생의 주먹이 날아오기도 전에 제갈명과 소의소녀는 벌써 괴이한 연기가 자기네들을 덮쳐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이 몹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좀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어서 버리고 물러가거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나의 부드러운 손이 자기의 손을 끌고 뒤로 날아가고 있는 것을 제갈명은 느꼈다. 순식간에 바람으로 변한 강기는 사방으로 날았다. 뿐만 아니라 검은 돌덩어리 같은 것들이 온 하늘을 덮었다. 제갈명은 소의소녀의 손에 끌려 가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장한생의 주먹이 금색으로 변하고 커지는 것은 도대체 무슨 무공일까? 또 누가 벌써 막아 주었단 말인가?' 순간-. 산악을 진동하고 흔들 것 같은 큰 소음이 고막을 찢어 놓기라도 하겠다는 듯 요란하게 들려왔다. 이 소리가 울려 퍼지자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던 몇몇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멈춘 채 소리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로 이때-. 흑영도의 총영주 장한생의 거대한 체구 앞에 하나의 키가 작은 홍포도인이 나타났다. 쌍방의 사람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자 모두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자그마한 홍포도인을 여러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포도인은 바로 흑영도주 염지천이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 이 홍포도인을 모르는 사람은 천독곡의 곡영자 밖에 없었다. 하나 그 또한 장한생의 번천금인을 상대방이 맞받는 것을 보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한생은 앞에서 있는 사람이 바로 상사인 염지천 염교주라는 것을 알아차렸는 듯 급히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말을 이었다. "속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교주께서 몸소 온 줄을 몰랐으니 그러자 홍포도인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여러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홍포도인이 한 번 훑어보자 장내는 즉시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어 황의당주 막용장강, 청의당주 향우춘, 그리고 흑의당주 여세진, 영주 신교교 등 사람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속하, 교주를 뵙겠습니다." 홍포도인은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더니 빙긋이 웃었다. "노부의 옛날 이름이 자의교주였으니 교주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여러분이 자칭 속하라고 하신다면 할 수 없지만 이 노부는 문파를 만들지도 않았는데 무슨 속하가 있겠소. 그리고 여러분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소." 이 말을 듣자 장한생은 어리둥절하여 홍포도인을 한동안 주시했다. "아니, 교주……." 홍포도인은 여전히 웃는가 싶더니 다시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노부는 자의교주 염지천임에 틀림이 없으나 당신네들의 주인 흑영도주는 아니오." 홍포도인은 생김생김이나 차림새가 교주 염지천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에 장한생도 하마터면 믿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번천금인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볼 때 교주의 무공보다 높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바로 이때" 여세진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이었다. "허허허…… 이놈! 감히 교주로 변장을 하다니…… 어서 나의 일 장을 받아 보아라!"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홍포도인을 향해 음풍투골장(陰風透骨掌)을 번개처럼 쓸어갔다. 장한생은 조금 전 그와 겨루어 보았기 때문에 그의 무공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지를 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홍포도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 어리석은 놈아! 그 따위 음풍투골장으로 노부와 상대를 할수가 있을 것 같으냐?" 지금 홍포도인은 마치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이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여세진의 일 장이 홍포도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마교의 음풍투골장은 바로 당문 중에서 제일 무서운 무공이었다. 음한이 뼈 속에 스며들 뿐 아니라 한 번 맞았다 하면 구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세진의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공력까지 곁들어 가슴에 적중시켰으니 아무리 단단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세진은 자기의 일 장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홍포도인의 불그스레한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쌍방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모두 혀를 내둘렀다. 이때, 홍포도인의 미소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여세진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세진은 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 같았다. 홍포도인은 여전히 도포자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으나 갑자기, "으악!" 하는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여세진의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왼쪽팔이 갑자기 끊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도 마치 거센 강풍에 날리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며 삼 장 밖으로 날아가는가 싶더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져 즉사해 버렸다. 여러 사람들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감치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여세진은 바로 홍포도인의 호신진기에 의해 진동이 되어 발악도 해보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여세진이 데리고 온 몇 명의 흑의무사들은 여세진이 쓰러진 쪽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한편-. 소의소녀는 제갈명을 끌고 오 장 밖으로 날아가서야 손을 놓았다. 제갈명은 소의소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낭자! 뉘신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참으로 감사하오." 소의소녀 역시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말은 받았다. "저의 사부님께서 당신의 검법을 보시고 완전하지 못한 데가 있다고 해서 저에게 도와주라고 하셨던 것이에요." 제갈명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존사께선 바로 흑영도의 교주이시오?" 소의소녀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급히 말을 받았다. "아니에요. 저의 사부님께서는 자의교주일 뿐이지 흑영도의 교주는 아니라고 얘기했지 않아요." 제갈명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해를 할 수가 없군." 소의소녀는 입술을 비쭉이며 냉랭하게 말했다. "이해를 하지 못하시겠다면 더 이상 참견하지 마세요. 또한 저의 사부님께서는 당신의 검법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보고 헛점을 보충시켜 주겠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갈명은 소의소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저의 이 검법은 원래부터 두 사람이 사용을 해야만 하는데……." 그러자 소의소녀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급히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그 검법의 헛점은 아주 많은 것 같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남과 싸울 때 상대방에게 만약 헛점을 잡히게 되면 큰 일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생각하셔서 저의 사부님께서는 당신에게 몇 초를 더 보충시켜 주신다고 했어요." 제갈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존사의 호의는 아주 감격스러우나 저의 검법에는 헛점이 없소." 소의소녀 여전히 입술을 비쭉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정말로 없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조금 전에는 무엇 때문에 그 사람에게 당하셨어요?" 제갈명은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조금 전에는 저 혼자서만이 시전을 했기 때문이오." 소의소녀는 여전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칠 뿐 말은 하지 않았다. 이때-. 홍포도인이 여세진을 처치한 다음 장한생을 주시하며 날카롭게 물었다. "귀하께서 흑영도의 총영주시오?" 장한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흑영도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 버렸소. 저는 무명도에서 왔소이다." 홍포도인은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흑영도에서 왔던 무명도에서 왔던 노부는 상관하지 않겠소. 하지만 귀하께선 돌아가서 그 가짜 염지천에게 한 달 안에 그 문파를 해산시키고 그들이 잡은 사람을 모두 석방시킨 다음 강호에서 깨끗이 은퇴를 하라고 하시오." 제갈명은 이 말을 듣고 혼자 생각을 굴렸다. '원래 흑영도의 자의교주 염지천은 가짜였구나……. ' 하지만 이때, 갑자기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큰 소리 치지 마라!" 말소리와 함께 한 패의 사람들이 두 개의 가마를 걸머진 채 나는듯이 달려왔다. 조금 전 여자의 음성은 바로 첫 번째 가마 속에서 들려온 것이다. 이것을 보자 장한생의 침울한 얼굴에는 다시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강영주! 참으로 잘 오신 것 같소." 이때 두 개의 가마는 어느 사이에 여러 사람들 앞에다 가와 멈추었다. 이어 앞에 있는 가마 속에서 흑색 옷을 입은 하나의 소부가 걸어나왔다. 흑의소부는 장한생을 향해 공수를 하며 허리를 굽혔다. "제자, 강석천이 총영주께 인사를 드리오." 장한생은 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서너 번 끄덕였다. "강영주! 예의를 차리지 마시오." 강석천은 역에서 있는 홍포도인을 가리키며 궁금한 듯 물었다. "한데 이 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장한생 역시 홍포도인을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람은 자칭 자의교주라고 하오. 하지만 이 노부가 보기에 누가 일부러 변장한 것 같소." 강석천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몹시 불쾌한 듯 언성을 높였다. "감히 교주로 변장을 하다니…… 이놈을 당장 없애 버려야겠구나." 그러자 장한생이 급히 고개를 돌려 강석천을 바라보며 전음입밀로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사람은 무공이 교주보다 더 높은 것 같으니 반드시 총영주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손을 쓸 수 있을 것 같소." 바로 이때-산 위에서 다시 또 몇 개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날아왔다. 봉황검 이때 정수복이 호쾌하게 웃어 젖히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허…… 허허허…… 됐소, 됐어. 소부인께서 오셨소……." 원래 몇 개의 그림자 앞에 앞장을 서서 달려오는 사람은 바로 초조한 빛을 띠고 있는 홍채문의 소문주 부인 주설란이었다. 주설란의 뒤는 네 명의 시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옛날 홍채마녀의 뒤를 따르던 네 명리 시녀들로써 영춘(迎春), 영풍(迎風), 영운(迎雲), 영월(迎月)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회색의 도포를 입고 허리에 하나의 호로병을 차고 있는 바로 홍채문의 좌호법 랍탑도사 두경강이었다. 이때 주설란이 단숨에 제갈명의 곁으로 다가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 제갈명은 깜짝 놀라 급히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아니, 설란! 당신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소?" 소의소녀는 그들 두 사람의 관계를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자 가슴을 바늘에 찔린 듯한 느낌이 들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소의소녀는 비록 제갈명이란 이름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마치 남이 자기의 수중에서 무엇을 빼앗아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때 만약 누가 그녀의 손을 잡았더라면 손이 얼음처럼 차갑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주설란은 남편인 제갈명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두도장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남에게 암산을 당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초조한 나머지 정수복의 암기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예요." 주설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피리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순간 제갈명은 전에 자기가 한 계곡까지 추격해 갔을 때 바로 이 피리 소리가 들리며 모친이 가마 속에서 걸어나왔던 일이 생각났다.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보니 하나는 흑의소부 강석천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에서는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제갈명은 주설란의 곁으로 다가서며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란! 어서 자보시오. 지금 저 가마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아마 어머님일 것이오." 주설란은 이상한 듯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꺼냈다. "예! 하지만 저 가마 속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 그러나 제갈명은 계속해서 그 가마를 주시하며 급히 다그쳤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어서 가보시오." 순간 피리 소리는 더욱더 급해졌다. 두 번째의 가마는 한 언덕 위에 놓여 있었다. 이때 첫 번째의 가마는 이미 한쪽으로 물러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마를 드는 네 명의 대한들까지도 멀리 피해 있었다. 필시 두 번째의 가마 속에는 어떤 위험한 물건이 있는 듯 했다. 어느 사이에 쌍방의 사람들은 모두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언덕 앞의 널따란 공지에는 다만 세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 한채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 세 사람은 홍포도인과 장한생, 그리고 강석천이었다. 지금 피리를 불고 있는 사람은 강석천의 수하 중 한 명의 시녀 같았으며 멀리 있었기 때문에 그 피리 소리는 더욱더 낮고 처량하게 들려 왔다. 이때 언덕 위에 있는 가마의 휘장이 서서히 걷혀졌다. 이어 안에서 청색 비단에 꽃무의가 그려져 있는 장포를 입은 궁중머리를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 여인은 가마에 내려서서도 여전히 석상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가마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바로 이때, 제갈명과 주설란이 그 여인의 앞으로 바람처첨 몸을 날렸다. 제갈명은 그 여인을 보자 마치 실성을 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한선자……." 원래 그 여인은 바로 홍채문주와 함께 흑영도에 가서 돌아오지 못했던 마교의 교주 천마녀 한선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비록 얼굴에 청색의 면사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자기에게 천뢰지를 배운 바 있는 제갈명을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선자는 여전히 하나의 석상처럼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때 제갈명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그녀는 시선을 갑자기 제갈명을 향해 돌렸다. 한선자는 한동안 제갈명을 주시하더니 갑자기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었다. 한선자는 조금 전 가마에서 내려올 때는 몹시 느린 행동을 취했었지만 지금 그녀의 행동은 마치 날으는 것처럼 민첩해 단숨에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때 한쪽에서 유심히 이를 주시하고 있던 홍포도인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물러나라!"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두 사람의 곁으로 몸을 번개처럼 날렸다. 순간 한선자는 두 사람의 앞으로 날아가더니 갑자기 번개 같은 수법으로 제갈명의 안면을 향해 일 장을 쳐갔다. 이 일 장을 겉으로 보기에는 몹시 부드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장세가 나가자마자 즉시 한 줄기의 한광이 그녀의 장풍을 따라갔다. "칙! 칙!" 하며 한광은 두 사람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가는 것이다. 순식간에 주위에는 벌써 한기가 감돌고 사람으로 하여금 질식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제갈명은 즉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쌍장을 밀었다. 한선자는 제갈명이 칠보추운수(七步推雲手)를 쓰는 것을 보자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즉시 제갈명과 함께 쌍장을 내밀었다. 이때-. 어느 사이에 홍포도인은 제갈명의 좌측으로 날아와서 한선자를 향해 일 장을 쳐갔다. 제갈명과 주설란이 사용한 것은 바로 아까 가문의 절예라고 볼 수 있는 칠보추운수였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공력으로 합수를 해서 보냈고, 또한 홍포도인까지도 적시에 옆에서 일 장을 격출했으니 당대 제일의 고수라고 할지라도 막기가 힘이 들 것이다.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제갈명과 주설란은 즉시 뒤로 일 장 반쯤 날아가서 몸을 가누었다. 이것은 한선자의 한기가 마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막처럼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홍포도인은 뒤로 물러서기는 커녕 어느 사이에 한선자와 팔 척의 거리를 둔 채 얼굴을 마주보며 버티고 너 있었다. 일 장 밖으로 물러선 주설란은 긴 한숨을 내쉬며 제갈명을 주시하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참으로 싸늘한 장풍인 것 같아요. 음…, 여걸! 염지천이 도대체 무엇 때붙에 도리어 우리를 도와주고, 또한 한선자는 무엇 때문에 도리어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에요?" 제갈명은 여전히 그들 두 사람을 주시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흑영도주는 자의교의 염지천이 아닌 것 같소." 이 달에 주설란은 깜짝 놀라며 그의 곁으로 바짝다가서더니 급히 다그쳤다. "자의교주 염지천이 흑영도주가 아니란 말이예요?" 제갈명이 고개만을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설란은 한선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저기에 있는 천마녀 한선자는 가짜인가요?" 제갈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를 갈아붙였다. "지금 저 여자는 진짜 천마녀 한선자요. 하지만삼년 전 흑영도에서 실종된 사람들은 모두 그들에 의해서 정신이 혼미되었소." 주설란은 이 말을 듣자 몹시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어머님도 그들의 수중에 있겠군요?" 제갈명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 내가 바로 모친의 수중에 당했었소." 주설란은 이 말을 듣자 안색이 홱 변하며 급히 다그쳐 물었다. "아니, 당신이 어머님에게 당했던 말이예요?" 제갈명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는 그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소."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주위를 훑어보더니 급히 서둘렀다. "우리는 이렇게만 있을 것이 아니라 장한생을 찾으러 갑시다." 주설란 역시 주위를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장한생은 과연 흑영도의 사람이 되어 버렸군요." 제갈명은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그들의 소굴은 흑영도에 있소. 그리고 장한생은 바로 사대 당주의 위에 있는 총영의 신분을 가지고 있소."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주설란과 함께 장한생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한선자와 홍포도인은 여전히 얼굴을 마주한 채 서로의 헛점만을 노리고 있었다. 장한생과 강석천은 두 장 밖에서 장내의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천독곡의 사람들은 한선자가 나타나자마자 흑영도의 사람들이 물러서는 것을 널고 즉시 자기들도 한쪽으로 물러섰다. 이렇게 되자 천독곡과 흑영도의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의 널따란 공지가 생겼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장내에 있는 두 사람이 진력을 완전히 끌어 올리며 일 격을 격출할 준비를 하고 있는 줄로 알았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은 심지어 호흡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침중한 안색으로 이 긴장된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제갈명과 주설란 두 사람이 장한생의 악에까지 날아갔을 때 갑자기. "펑! 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고 홍포도인과 한선자가 치열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제갈명이 반룡검을 뽑아 장한생에게 들이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장총관! 전에 당신이 나를 노신선에제 전도한 절을 봐서 당신이 속히 무명도에서 탈퇴하기를 바라겠소. 만일 내 말을 듣지 않고 부상을 입은 다음 후회하지 마시고……." 순간 장한생은 제갈명의 말을 가로채며 고함을 질렀다. "이놈! 감히 노부에게 훈계를 하려 하다니……." 이때 제갈명의 옆에서 있던 주설란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말을 가로채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우리가 산에서 내려올 때 부영주께서 분부하시기를 만약 당신이 마음을 돌리면 그냥 내버려 두되, 만약 불복을 하고 강호상에 계속 해를 끼치려고 한다면 우리 부부에게 깨끗이 정리를 하라고 했어요" 장한생은 이 말을 듣자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감히 너희 둘로써 이 노부를 어떻게 할 줄 아느냐?" 그 말에 주설란은 몹시 화가 나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반문했다.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처치하지 못할 줄 아시오?" 그러자 장한생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으하하하…… 이 계집년아! 함부로 큰 소리 치지 말아라! 너희들이 선우, 그 늙은 귀신의 진전을 물려 받았다고 할지라도 삼 년 동안의 수련으로써 감히 이 노부의 적수가 될 줄 아느냐?" 제갈명은 장한생이 선우도인을 가리켜 늙은 귀신이라고 하자 화를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장한생, 너 이놈! 너의 조부 삼 대는 모두 선부에서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노신선이 언제 너에게 섭섭하게 한 적이 있었느냐? 반격을 해놓고서도 욕을 하다니…… 참으로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이때 옆에서 있던 주설란이 제갈명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여보!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말고 우리 합수를 해서 당장 없애버리도록 해요." 장한생은 이 말을 듣자 참지를 못하고 이를 갈아붙이며 호통을 쳤다. "이놈들!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말을 끝냄과 동시에 활검을 뽑아 들고 주설란을 향해 일 김을 쳐갔다. 주설란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막았다. 제갈명은 주설란이 출수를 하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자기도 장한생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두 사람의 검세는 정과 반으로써 좌우를 협공했으며 또한 이들의 검세는 쌍룡이 물에서 치솟아 오르는 듯 무수한 광채를 발산했다. 장한생은 비록 무공이 높고 강호에서 싸운 경험이 많았지만 지금은 어느 것이 제갈명이 쳐온 것이고 또 어느 것이 주설란이 쳐온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장한생은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물러섰다. 주위는 제갈명과 주설란이 연속적으로 삼 초의 공격을 시도하자 산을 깎아내릴 듯한 살기로 가득찼다. 이때 이들 두 사람은 삼 초의 공격을 했지만 장한생은 벌써 뒤로 여덟 발자국이나 물러났으며 여전히 일 초의 반격도 가하지 못했다. 그는 이제서야 봉황검의 위력을 알아 마음 속으로 감탄했다. '봉황검이 천하 제일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도망을 치지 못하면 틀림없이 저 두 년놈에게 당하고 말 것이다…….' 동시에 갑자기 "이얏!" 하는 소리와 함께 장한생이 그림자로 변해서 허공을 항해 번개처럼 날았다. 이것을 보자 제갈명은 이를 갈아붙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 어디로 도망을 치려 하느냐?" 하고 말을 끝냄과 동시에 일 검을 휘두르며 장한생의 뒤를 추격해 갔다. 하지만 그는 이미 한발 늦었다. 장한생은 벌써 수장밖으로 날아간 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한 장한생이 떠날 때 외친 소리가 바로 그들의 신호였는지 파장강, 향우춘, 신교교, 강석천 등 사람들도 즉시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피자 당황을 하는 쪽은 제갈명과 주석란, 그리고 천독곡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자 당승무는 즉시 뒤를 쫓아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신교교! 어디로 도망을 치려 하느냐?" 그러나 옆에 있던 소불이가 급히 그를 말리며 앞을 가로막았다. "노제! 더 이상 쫓지 말게." 눈 깜빡할 사이에 무명도의 사람들은 모두 도망을 쳐버렸으며 한선자와 두 개의 가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선자는 홍포도인과 벌써 칠팔 장 씩이나 주고 받았다. 순간, "펑!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공지 안에서 제멋대로 뒹굴고 있었던 돌멩이들이 모두 사방으로 튀기며 현장엔 하나의 웅덩이가 파여졌다. 홍포도인은 깜짝 놀라 마음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현음교의 전세음공(轉世陰功)은 과연 무서운 것이구나…… 이 여자의 무공은 아무리 보아도 나만 못한 것 같은데 이처럼 강하고 무서운 장풍을 보낼 수가 있다니……." 생각을 하면서 홍포도인은 즉시 신법을 펼쳐 한선자와 맞붙는 것을 피했다. 이렇게 되자 한선자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다만 홍포도인의 뒤를 따라 일장일장 쉬지 않고 계속 공격을 할뿐이었다. 하지만 홍포도인의 신법이 너무나 기이하고 빨랐기 때문에 한선자가 아무리 속공을 시전한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적중시키지 못했다. 또한 이들 두 사람은 싸움에 정신을 너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장밖에 있는 무명도의 사람들이 벌써 도망쳤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이때-. 일진의 처량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곧 피리 소리가 끝나자 홍포도인을 쫓고 있던 한선자는 몸을 갑자기 멈추더니 두 팔을 내려뜨리고 마치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한선자가 손을 멈추자 홍포도인 역시 손을 멈추어 쌍장으로 가슴을 막고 경계의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피기 소리는 다시 처량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선자는 손을 쓸 생각은 하지 않고 멍청하게 서서 다만 어딘지 다르게 예치하고 처량한 피리 소리만을 듣고 되었다. 한선자가 이처럼 손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에 홍포도인은 하는 수 없이 쌍장으로 가슴을 막은 채 감히 경거망동할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여러 사람의 시선을 한 봄에 받으며 하나의 그림자가 마치 천마행공처럼 한선자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이 사람은 바로 소불이였다. 소불이는 한선가가 피리 소리를 듣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이 틈을 이용해 그녀에게 환혼단을 먹이고 날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은 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을 뿐이었다. 순간 이런 광경을 본 홍포도인이 급히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손을 멈추시오." 일문불출(一門不出) 순간 한선자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싸늘한 눈초리로 소불이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오른손을 번개처럼 휘둘러 그의 안면을 향해 찔러 갔다. 바로 이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소불이의 몸이 어느새 두 장 밖으로 날아갔다. 하나 소불이는 원래 무공이 높았기 때문에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그는 애당초 이상하다고 느껴 즉시 뒤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계속해서 뒤로 네 발자국 물러나서야 설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치 부상을 입은 사람처럼 가슴의 기혈이 계속해서 뛰고 있었다. 소불이는 마음 속으로 탄식을 금치 못하며 생각을 굴렸다. '나는 그녀와 싸우지도 않고 즉시 뒤로 몸을 피했는데 어떻게 해서 부상을 입었을까? ' 그리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암암리에 운기 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선자는 소불이의 유인 때문에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오른 듯 갑자기 여러 사람을 항해 번개처럼 날아왔다. 지금 여러 사람들은 그녀가 순식간에 소불이는 뒤로 물러나게 했기 때문에 벌써부터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또 다시 날아오는 것을 되자, 먼저 곡영자가 대갈일성을 기르며 일 장을 내밀었다. 정수복과 랍탑도사 둔경강 역시 지체하지 않고. 각각 일 장씩을 내뻗었다. 이것은 참으로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이었다. 이어 또 다시-.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곡영자, 정수복, 두경강 등 세 사람은 마치 거센 물결에라도 밀리듯이 뒤로 연달아 육 보씩이니 물러나서야 제대로 몸을 가누었다. 이들 세 사람이 뒤로 물러나고 있을 때 홍의_도인은 하나의 붉은 그림자로 변해서 왼손으로는 검결을 허공에 그리며 오른손으로는 가슴을 보호하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신없이 추격을 하던 한선자는 홍포도인이 자기의 앞에서 있는 것을 보자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당승무와 갈비백, 그리고 조봉춘 퐁 세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더니 나직한 소리를 내며 비호처럼 덮쳐갔다. 홍포도인은 한선자가 갑자기 자기를 버리고 그들 세 사람을 향해 덮쳐가는 것을 보자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세 분께서는 막을 생각을 하지 마시고 어서 몸을 피하시오!" 동시에 제갈명 역시 주설란의 몸을 툭 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설란!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어서 길을 막으시오!" 그리고 다음 순간, 당승무 등 세 사람을 향해 번개처럼 덮쳐가던 한선자의 앞을 두 개의 그림자가 유성처럼 날아들며 가로막았다. 정신없이 덮쳐가던 한선자는 갑자기 누가 자기의 앞을 가로막는 것을 보자, 즉시 옥같이 하얀 손으로 일 장을 휘둘렀다. 이렇게 되자 일진의 싸늘한 장풍이 우뢰와 같이 두 사람을 향해 밀려들었다. 순간 제갈명과 주설란, 두 사람은 동시에 호시탐탐 검막을 일으키며 한선자로부터 날아오는 장풍을 모두 물리쳤다. 한선자는 자기의 장풍이 남에 의해 저지당하자 화를 벌컥 내며 성난 야수같이 두 사람의 몸을 향해 비호처럼 덮쳐왔다. 하지만 제갈명과 주설란의 쌍검 합벽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호처럼 덮쳐오던 한선자는 술간, 음산한 검기가 피부에 닿는 것을 느꼈다. 지금 한선자는 정신은 비록 혼미했지만 검기의 무서움은 잘 알고 있었다. 이어 한선자는 몸을 주춤하더니 즉시 뒤로 후퇴했다. 어떻게 되었던 한선자의 정신은 혼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비록 물러나기는 했지만 또 다시 두 손을 갈퀴처럼 세워 가지고 사람을 향해 덮쳐오는 것이다. 이렇듯 한선자는 계속해서 세 번 씩이나 그들을 향해 덮쳐갔지만 모두 두 사람의 검기에 의해 뒤로 연신 물러났다. 이렇게 되자 한선자는 매우 분노를 느껴 그들을 갈가갈기 찢어 죽이려는 표정을 취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듯 멈추어 서 있었다. 제갈명은 이 광경을 보자 즉시 한선자를 향해 공수를 하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후배 제갈명과 주설란이 선배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한선자는 두 사람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노기띤 얼굴이 차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제갈명 역시 그녀를 주시하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삼 년 전의 저의 모친과 홍채문주……." 하는 제갈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른쪽의 숲 속에서 또 다시 처량한 피리 소리가 돌려왔다. 피리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가만히 서 있던 한선자가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또다시 무서운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또 다시 홍포도인은 적시에 큰 소리로 외쳤다. "두 분께서는 좀 조심해야 할 것 같소." 제갈명은 벌써 피리 소리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기 때문에 급히 주설란에게 암호를 보내 경계의 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제갈명은 갑자기 오른쪽에 있는 숲 속을 향해 외쳤다. "지금 숲 속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서 나와라!" 하고 말을 끝냄과 동시에 제갈명은 숲 속을 향해 계속해서 쌍지를 쳐 갔다. 이때 -. 오른쪽의 숲 속에서 들려오던 피리 소리가 갑자기 그쳤다. 따라서 한선자는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으며 바람이 빠져 버린 공처럼 두 눈에 품고 있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여러 사람들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산 밑에서 부터 또 다시 일진의 예리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한선자는 이 피리 소리를 듣자 즉시 몸을 돌리더니 이내 옷자락을 펄럭이며 피리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유성처럼 날아갔다. 그러자 홍포도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혼잣말로 쿵얼거렸다. "휴! 참으로 큰일날 뻔했구나. 만약 이 피리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더라면 그녀는 아마 더욱 발광을 했을 텐데……, 그렇게 되면 그녀를 없애버릴 수밖에 없었지……." 소불이는 곡영자를 향해 히죽 웃으며 말을 꺼냈다. "조금 전 곡노형께서도 한 수를 썼지요?" 곡영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오늘밤 상대방은 모든 준비를 해놓고 왔기 때문에 노부는 시종 독물을 방출해 내지 못했소. 하지만 조금 전 그 피리 소리가 너무나 예리했기 때문에 소금(小金)에게 가서 시험을 해보라고 했소." 지금 곡영자가 말하는 소금이란 바로 금뱀인 것이다. 제갈명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선자의 정신은 혼미한 것 같았는데 그처럼 무공이 높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소." 홍포도인 역시 탄식을 하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그것은 그녀의 완전한 무공이 아니오. 그것은 현음교의 일종인 강시공(彊屍功)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무공이오. 그렇기 때문에 전세대법이라고 하며 전세음공을 연마했다 하면 무공이 갑자기 평상시보다 수십 배나 더 높아지오." 제갈명은 그 말을 듣자 고개를 가우뚱거리며 궁금한 듯 물었다. "잘못 연마하면 죽습니까?" 홍포도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중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볼 수도 없소. 현음교의 전세대법은 방문 중의 강시공과 비슷하지만 사람은 죽지 않소."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여러 사람들을 훓러보더니 다시 제갈명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이 분 노제께서는……." 이때 소불이가 홍포도인의 곁으로 급히 다가시며 제갈명을 쳐다보더니 말을 꺼냈다. "제대협! 이 노부가 소개를 해드리겠소." 다시 홍포도인을 주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분께선 바로 옛날에 크게 명성을 떨쳤던 자의교주 염지천 염대협이오. 하지만 여러분께서는 이 분은 흑영도의 염교주가 아니니 오해를 해서는 안 되오." 제갈명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염지천을 향해 허리를 굽히자 소불이는 염지천을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이 분이 바로 홍채문의 소문주 제갈명입니다." 그리고 다시 제갈명의 옆에서 있는 주설란을 보며 머리를 긁적이며 히죽 웃었다. "이 분 여협은 노부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러자 정수복이 나서며 빙긋이 웃더니 말을 받았다. "이 분은 폐문의 소부인입니다." 소불이는 또 다시 히죽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음…… 반갑소. 허허…… 이 늙은이는 소불이라 하오." 주설란은 소불이의 모습을 보자 손을 입에 갖다 대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소불이는 또다시 곡영자와 갈비백, 조봉춘, 두경자 등 사람을 하나씩 소개했다. 그리고 염지천은 소의소녀를 가리키며 역시 소개를 했다. "이 아이는 노부와 제자 양수분(梁秀分) 이오." 하며 염지천은 양수분을 바라보더니 당승무를 가리기며 말을 계속했다. "얘야! 이 사람은 사부가 산에서 나올 때에 거둔 기명제자 당승무이다. 옛날 말에 먼저 들어온 사람은 선배고 해서 원래는 너의 사형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당승무의 나이는 지금 너보다 두 살 아래이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사제라고 부르도록 해라." 당승무는 양수분을 향해 공손하게 공수를 했다. "사형! 처음 뵙겠소이다!" 그러자 양수분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제……." 염지천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는가 싶더니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허허허……너희 두 사람은 하나는 남쪽에 있고 하나는 북쪽에 있지만 모두 피맺힌 원한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똑같이 우연히 노부의 제자가 됐지. 또한 이 노부가 알기로 너희들의 원수는 필시 노부의 이름을 사용하며 무림에 해를 끼치고 있는 흑영도주일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은 이 다음에 필히 힘을 합해서 원수를 꼭 갚도록 해야만 한다." 당승무와 양수분, 두 사람은 사부인 염지천이 자기네들의 원수에 대한 얘기를 하자 즉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소불이는 이 소의소녀의 성이 양가라는 말을 듣자 염지천을 바라보며 급히 말을 꺼냈다. "제노형! 이 분에선 혹시……" 염지천은 소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더니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그녀는 바로 남해(南海) 양영공(梁令公)의 외동딸이오. 그 남해일문은 참화를 당해서 모두 목숨을 잃었지만 이 여자 아이만은 살아났소. 또한 여기에 있는 여러 사람들만이 무명노와 대적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으니 여러분께서는 이 다음에 노당의 이 두 명의 제자를 잘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겠소." 제갈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흑영도의 사람들이 삼 년 동안이나 잠적을 해버린 다음 이번에 또다시 무명도로써 강호에 나타났기 때문에 아마 더욱더 무서워졌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염지천은 빙긋이 웃으며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네들은 흑영도의 사람들이 지난 삼 년 동안 정말로 잠적해 버린 줄 알았소? 하지만 이 노부가 알기로는 그들은 삼 년 동안 비밀리에 강호의 각대 문파를 모두 포섭을 한 것 같소." 이 말을 듣자 여러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소불이가 나서더니 급히 다그쳤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염지천은 얼굴을 침통하게 일그러뜨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노부가 두 달 동안에 걸쳐 조사를 해본 결과 알아낸 것이며 남해문과 사천당문의 참사가 바로 그 예지요." 이때 당승무가 눈물을 글썽이며 나직하게 물었다. "사부님! 그런데 저의 집안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참화를 당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염지천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옛날 강호상에는 일문불출(一門不出)이라는 한 마디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지. 그뜻은 바로 강호상에서 사천당문만이 엄격하고 강호에 나돌아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지. 하지만 무병도의 생각은 무림을 통일하려고 한 것이니 어떻게 사천당문을 그냥 내버려 둘수가 있었겠는가!" 염지천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뿐만 아니라 남해문도 사천당문의 경우와 비슷하다. 남해문의 사람들은 천남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며 역시 중원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었지. 하지만 무명도에서는 각문 각파를 섬멸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양영공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었겠느냐?" 제갈명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구대 문파는 어떻게 되었나요?" 염지천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강호에 나오지 않았던 사천답문과 남해문까지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은 무명도의 무리들인데 어찌 구대 문파를 그냥 내버려 둘수가 있었겠소." 제갈명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구대 문파는 삼 년 전에 이미 흑영도……."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염지천이 돌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 노부가 알기로 구대 문파는 삼 년 전에 벌써 그들의 수중에 들어간 것 같소." 염지천은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금 강호상에는 감히 무명도와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는 것 같으며 만일 있다 하더라도 이 노부와 여러분들 밖에는 없을 것 같소" 제갈명은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노선배님께서는 그놈들이 노선배님의 이름을 이용해가며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다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요?" 염지천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허허허……, 허허허…… 물론, 보고만 있을 수야 없지." 그는 또 다시 무거운 탄식을 하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할 뿐 아니라 그들의 뒤에는 또 다른 고인이 있는 것 같으니…… 노부는 이 두 달 동안 무명도와 대적을 하기 위해 친구들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절반 이상의 친구들이 없어졌소. 이제 그러니 무명도의 사람들과 정말로 대적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소." 이때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주설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선뜻 물었다. "그럼 흑영도의 뒤에는 또 다른 막후 인물이 있단 말인가요?" 염지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소. 노부가 알기로는 그 사람의 무공과 겨를 수 있는 사람들이 강호상에는 몇 안 되는 것 같소." 여기까지 말을 한 염지천은 제갈명과 주설란을 한 번씩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노부가 보기에는 자네들 부부의 검법은 참으로 무서웠소. 하지만 아깝게도……." 제갈명은 염지천이 더 이상 말을 않자 급히 다그쳤다. "노선배님께서는 강호를 평정하게 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또한 노선배님은 명성이 높기 때문에 만약 한 번 소리만 지른다면 각호의 호걸들은 반드시 동조를 하여 흑영도와 대적을 할 것입니다." 이때 옆에서 듣고만 있던 소불이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소문주의 말이 맞는 것 같소. 그렇다면 우리 염노형을 선두로 내세운 다음 하나의 문파를 만들고 무명도와 대적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 염지천은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말을 받았다. "여러분의 성의는 참으로 고맙소. 하지만 우리가 문파를 세워서 무명도와 대적을 한다면 바로 일문일파의 대결 밖에 되지 않소. 그렇기 때문에 문파를 세워서는 안 될 것이오." 대출범 소불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여러 사람들을 삥 둘러앉더니 나직하게 그의 말을 수긍했다. "맞습니다. 염대협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염지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노부가 보기에는 일개 문파를 세우는 것보다 아예 하나의 동맹을 맺는 것이 각문 각파의 인사들을 모이게 하는데 있어서 훨씬 유리할 것 같소. 또한 정사 양도의 인물을 모두 참가시킬 수 있지 않소." 이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정수복이 나서며 여러 사람들을 한번씩 쳐다보더니 의견을 물었다. "맞습니다. 우리는 무림에 정의 동맹을 하나 세운 다음 염대협을 맹주로 추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수복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염맹주! 염맹주!" 염지천은 여러 사람들을 향해 급히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안 되오. 안 됩니다. 지금 노부를 맹주로 뽑는 것은 너무 이르며 또한 노부는 맹주가 될 수 없소." 여러 사람들의 함성이 끝나자 제갈명이 나서서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서는 덕망이 높기 때문에 맹주가 되는 것이 마땅하니 너무 겸손을 차리지 마십시오." 여러 사람들은 제갈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다시 곡영자가 나서며 대소를 터뜨리더니 여러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무작정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모두 곡 안에 들어가 앉아서 자세한 상의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소불이는 여러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도 괜찮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곡 안으로 들어간 다음 천천히 얘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여기까지 말을 이어오던 소불이가 갑자기 주위를 살펴보며 가벼운 탄식을 하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늙은이는 이미 네 명의 독인들에게 환혼단을 먹였는데 어떻게 되어서 한 사람도 보이지 않지? 혹시 또 다시 무명도의 사람들에게 잡혀간 것이 아닌가……?" 갈비백 역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그들은 깨어난 후에 벌써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이때-. 숲 속에서 갑자기 약간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는 절대로 떠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기 있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숲 속에서 하나의 흑의인이 걸어 나왔다. 지금 이사람은 물론 조금전 네 명의 흑의인중 한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 씌어져 있던 복면도 어느 사이에 벗거져 있었다. 이 흑의인은 나이가 약 오십 세 가량 되어 보였고 얼굴이 몹시 창백할 뿐 아니라 턱에는 수염이 없었고 비록 몸에는 맞지 않은 흑의를 입고 있었지만 위풍은 당당하게 보였다. 소불이는 그 사람을 주시하며 내심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소불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두경강이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입을 열었다. "원래 언장문인이었군요. 참으로 반갑소이다." 소불이는 두경강의 이같은 행동을 보자 갑자기 가벼운 탄식을 하며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음…… 원래 이 사람이 바로 진주언문(辰州言門)의 장문인 언봉저이었구나, 그런데 그의 턱에 있던 수염은 다 어디로 갔지……?' 언봉저는 여러 사람들을 향해 공수를 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제가 바로 진주언문의 장문인 언봉저입니다." 언봉저는 또 다시 갈비백을 주시하며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침중하게 물었다. "이 분 갈형은 혹시 점창 맹가로써 저와 흑영도에서 만난 것 같은데 그렇소?" 갈비백은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더니 말을 받았다. "언장문의 말이 맞는 것 같소. 우리는 확실히 흑영도에서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소." 언봉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갈비백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저에게는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갈비백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든지 서슴치 마시고 물어 보시오." "저는 조금 전 숲 속에 앉아 아무리 생각을 해보았지만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소. 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다만 흑영도에 참가한 것 밖에 없소. 그렇기 때문에 혹시 알고 계시는지?" 갈비백은 조봉춘을 향해 손짓을 하며 말을 받았다. "저 분이 바로 산서 쾌도왕 조노복의 자제 조봉춘이라는 사람으로써 저와 함께 오늘에서야 깨어났소." 언봉저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그쳐 물었다. "두 분께서는 옛날의 일이 기억 납니까?" 갈비백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삼 년 전의 일이었소. 우리는 흑영도의 대회에 참가를 했을 때 그들에 의해 정신을 잃고 또한 그들이 독약을 먹였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독인이 되었으며 그들을 위해서 많은 죄를 저질렀지요." 언봉저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예! 그런 일이 있었군요." 갈비백은 곡영자를 바라보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신의 갈무구께서 호로곡에서 환혼초를 찾아 소노형께 주어 우리를 모두 깨어나게 했소." 언봉저는 빙긋이 웃으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많은 세월이 흘렀는가 했더니 벌써 삼 년이 흘렀군요." 하고는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불이를 향해 공수를 하며 공손히 말을 이었다. "소노형! 이렇게 구해주신 데 대해서 평생 동안 잊지 않겠소." 소불이는 약간 멋적은 듯 히죽 웃으며 그를 주시했다. "허허허,…", 왜 그런 말씀을 다하시오? 사람의 도리로써 했을 뿐인데……." 언봉저는 허리를 굽히며 또 다시 갈비백을 향해 물었다. "조금 전 제가 깨어났을 때 쌍방의 격전이 치열한 것을 보고서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었소. 그러니 갈형께서 설명을 해주십시오." 그러자 갈비백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불이가 히죽 웃었다. "허허…… 자세한 얘기는 곡 안에 들어가서 하도록 합시다." 천독곡의 주인인 곡영자가 여러 사람들의 앞장을 서서 걸어 들어갔다. 갈비백은 언봉저의 옆에서 걸으며 오늘밤에 일어났던 일들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제갈명은 자기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일들을 그의 애처 주설란에게 얘기해 주었다. 주설란은 너무나 감격을 한 나머지 소리없는 눈물을 흘렸다. "만약 제가 옆에 있기만 했었더라도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제갈명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님의 정신이 혼미해졌다고 하니 당신이 나와 함께 쌍검을 합벽한다고 할지라도 모친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주설란은 걱정스러운 빛을 띠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음인이 되어 버렸는데 어떻게 하지요?" 제갈명은 이를 갈아붙이며 침중하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힘을 합해서 무명도를 없애버려야 하오." 여러 사람들은 서로 얘기를 주고 받는 사이에 어느새 석옥 앞에까지 왔다. 앞서 걸어가던 곡영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여러 사람을 향해 공수를 했다. "집이 너무나 작기 때문에 하는 수 없어 여러분께서는 여기 잔디밭에 앉아야 하겠소. 허허…… 그리고 이 잔디밭은 깨일 이 늙은이의 수하들이 청소를 하기 때문에 벌레 한 마리 없을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시고 앉아도 될 것이오." 지금 곡영자가 말한 수하들이란 바로 몇 마리의 뱀이었다. 여러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예의를 가리지 않고 잔디밭에 앉아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때 소불이가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는 조금 전 무림에 동맹을 열기로 결론을 내렸으니 반드시 맹주 한 분이 있어야만 하는데 벌써 염대협께서 맹주가 되셨으니 이제는 이 결합에 대해서 하나의 이름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소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제히 싹수를 치며 환호성을 울렸다. 정수복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며 언성을 높여 물었다. "이 늙은이의 생각으로는 무림 정의맹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갈비백이 나서며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무림 정의맹이라는 말은 너무나 길기 때문에 우리는 아예 무림맹이면 무림맹, 정의맹이면 정의맹 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소불이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갈노제의 말씀이 맞는 것 같소. 늙은이가 보기에 우리는 원래 사악한 무리와 대결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정의가 아니겠소. 그렇기 때문에 무림맹으로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소." 여러 사람들을 또 다시 박수를 치떤 찬성의 뜻을 표했다. 그러자 염지천이 좌중을 둘러보며 빙긋이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림맹……? 이름은 괜찮은 것 같소이다. 하지만 이 노부는 맹주의 자리에 앉을 수가 없소." 염지천은 여러 사람들이 대답도 하기 전에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흑영도주가 이미 노부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무림맹에서 또 하나의 염지천이 나타났다 하면 아마 무림의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두 명의 염지천이 자기네들끼리 싸운다고 할 것이오." 지금 염지천의 말도 확실히 이치에 맞는 말이다. 여러 사람들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염지천은 또 다시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노부는 무림맹에서 탈퇴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암중에 무림맹을 위해 도와줄 생각이오. 그리고 또한 맹주의 직책에 대해서는 지금 여기에 아주 적합한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너무 걱정을 하지 마시오. 그 사람은 노부보다 훨씬 나을 뿐만 아니라……." 염지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러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때 소불이가 참지를 못하고 나서며 말을 가로챘다. "염노형께서 얘기하신 분은 대체 누구입니까?" 염지천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더니 여러 사람을 둘러보며 제갈명 부부를 항해 손짓했다. "노부의 생각으로는 이 분 제소문주께서 맹주가 되는 것이 제일 적당할 것 같소." 염지천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갈명이 황급히 일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노선배님!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염지천은 정색을 하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그러지 마시오. 무림맹의 맹주는 다만 여기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지 무슨 황제처럼 지낼 생각은 막아야 하는 것이오." 염지천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제갈명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계속 이었다. "그리고 노부가 이 분 제소문주를 추천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소. 첫째, 제소문주께서 이끄는 홍채문이 바로 당대 강호에서 유일하게 무명도와 싸울 수 있는 문파이기 때문이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더욱 확대시켜 무림맹으로 바꾼다면 더욱더 막강한 힘이 생길 것 아니오." 염지천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둘째, 노부는 오늘밤 제노제 부부의 검법이 천하 무쌍이라는 것을 알았소." 염지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노부가 조금 전에 얘기를 했다시피 흑영도의 뒤에는 또한 막후 인물들이 있소. 그렇기 때문에 그 막후 인물이 바로 원수가 되는 것이오. 그리고 또한 노부가 알기로 그 사람은 아마 당대 무림 중에서 그와 대적할 사람이 많아야 삼사 명 밖에 안 되오. 하지만 노부의 이와 같은 생각은 십여 년 전의 추측이기 때문에 지금은 어떨는지 확실히 모르겠소." 소불이는 염지천의 말을 듣자 갑자기 바로 염지천이 도화랑군의 본문 아래의 석실에 갇혔던 일이 생각났다. '혹시 무명도의 막후 인물들이 그의 연금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염지천은 또 다시 정색을 하며 제갈명을 주시했다. "하지만 노부가 보기에는 제노제 부부의 검법이 그들의 유일한 숙적인 것 같소." 염지천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러 사람들의 눈초리는 즉시 제갈명과 주설란 두 사람에게 쏠렸다. 그러나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염지천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렇기 때문에 노부가 보기에는 제노제가 무림 맹주로 되는 것이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을 하오." 이때, 소불이가 손뼉을 치며 급히 말을 받았다". "맞았소. 우리 무림맹의 맹주는 과연 제소문주가 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소." 옆에 있던 곡영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러분께서는 그렇게 결정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이 늙은이의 천독곡도 이제부터는 정의곡으로 이름을 갈겠소. 또한 내일 날이 밝으면 곡 밖에 깃발을 세우고 무림맹을 세우기로 합시다." 이때, 제갈명이 일어나 급히 손을 흔들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지금 저는 나이도 어리고 하기 때문에 절대로 안 됩니다." 언봉저가 먼저 나서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염대협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소문주께서 정말로 제일 적합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제소문주께서는 더 이상 양보를 하지 마시오." 또다시 정수복이 나서며 한 마디 덧붙였다. "이것은 한두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사양을 하지 마시오." 제갈명은 몹시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 여러분은 모두 무림의 선배로서 저는……." 그러자 한동안 듣고 있던 염지천이 다시 나서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제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마시오. 오늘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노제를 도와줄 것이오." 소불이는 염지천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선뜻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는 염노형을 무림맹의 총호법으로 정하는 것이 어떻겠소?" 여러 사람들은 소불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환호성을 지르며 동시에 말을 이었다. "좋소. 좋소. 염대협께서는 마땅히 우리의 총호법이 되셔야만 합니다." 염지천은 여러 사람들을 항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무림맹에도 총호법이 있단 말이오?" 소불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히죽이 웃었다. "허허…… 무명도에도 총영주가 있는데 우리 무림맹에 어찌 총호법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염지천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더니 여러 사람을 주시했다. "좋소. 좋아…… 그렇다면 노부가 총호법의 직책을 맡겠소. 하지만 여러분들께서도 직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소불이는 정수복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정노형에게 맡기어야만 하오. 정노형께서는 강호 문파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 어서 말씀을 해주시오." 정수복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이 늙은이가 보기에는 총호법과 몇 개의 호법을 더 세워야 할 것같�소. 또한 그 밖에 연락, 집사, 순찰 등 세 당을 설치해야 하고 연락당은 강호의 각 문파와 연락을 하고 집사당은 맹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처리하며 또 순찰당은 맹 안의 수비와 정찰을 하면 되는 것이오." 그러자 갑자기 소불이가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됐소, 됐어. 정노형께서 이미 말씀을 하셨으니 여러분의 뜻은 어떠하오?"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정수복의 제의를 통과시켰다. 소불이는 또다시 제갈명을 주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무림맹의 직책은 모두 결정이 됐으니 이제 맹주께서 한 사람씩 분배를 하십시오." 무림동맹 제갈명은 여전히 곤란한 듯 얼굴을 붉히며 여러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 추천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염지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빙긋이 웃었다. "본맹은 비록 각문 각파의 인사들을 모아서 세운 연맹이긴 하지만 각 당의 당주들은 맹주가 직접 추천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그러자 제갈명은 정색을 하며 침중하겐 말을 받았다. "노선배님의 말씀도 맞지만 여러분들은 모두 본맹에서 주축이 되는 분들이고 또한 소인의 선배님들이기 때문에 소인이 감히 추천할 수가 없으니 여러분께서 추천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염지천은 그제서야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그렇다면 노부가 할 수 없이 맹주를 위해서 대신 추천을 해 주겠소." 제갈명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급히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선 어서 말씀을 하십시오." 염지천은 여러 사람들을 한 번씩 바라보더니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말을 꺼냈다. "노부는 우선 곡영자, 소불이 두 분을 좌우호법으로 세우고 갈비백과 조봉춘, 두 분을 호법으로 임명을 하겠소. 또한 염노형께서는 전에 언문의 장문인을 지내셨으니 연락당의 당주가 되셔서 밖의 연락에 관해서 책임을 지시오. 그리고 정노형께서는 무게가 있으시니 본맹의 총관으로써 집사당의 당주를 역임하시고 두 노형께선 총순찰을 담당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이 말을 듣자 제갈명은 매우 만족해 하며 여러 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 주설란, 당승무, 양수분 등 세 사람만이 아무런 직책이 없다. 하지만 주설란은 남편인 제갈명을 따라 맹주의 부인이 되는 것이고 당승무와 양수분 두 사람은 사부인 염지천을 따라 다니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직책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불이는 제갈명과 여러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본맹의 총단은 어디에 세우는 것이 좋겠소?" 제갈명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곧 염지천을 향해 물었다. "노선배님! 어디가 제일 적당할 것 같습니까?" 염지천은 대답하기에 앞서 단호하게 못박았다. "본맹의 직책은 이미 결정이 되었으니 우리는 이 다음부터 직무에 대한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맹주께서는 다시 노선배라는 칭호를 써서는 안 됩니다." 하고는 정색을 하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노부가 보기에 우리 맹은 강호의 문파들과 연락을 해야 하니 총단을 그 가운데에다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기왕 무명도와 대적을 하기로 했으니 무명도와 뵐 수 있는대로 가까운 거리에 설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염지천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무명도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소. 하지만 섬이라고 했으니 반드시 바닷가에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총단은 금릉(金陵)이나 혹은 진강(眞江) 두 군데에 설치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갈명은 빙긋이 웃으며 여러 사람들을 향해 다시 물었다. "여러분! 또 다른 좋은 생각은 없으시오?" 그러자 정수복이 나서며 제갈명을 향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진강은 몹시 크기 때문에 그곳에다 총단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그리고 송강(松江)에 분단을 설치하고 바다를 감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불이가 먼저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염지천은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총단을 진강에다 설치합시다." 이때 곡영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허허허…… 기왕 여러분께서 진강으로 하시기를 원하고 있으니 이 늙은이는 이 천독곡을 떠나기가 싫어도 할 수가 없군요." 염지천 역시 따라 웃으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우리는 직책과 총단 지점을 결정했으니 이제 한 가지의 일밖에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한 가지 문제란 바로 무림맹을 여는 날의 날짜를 무림 동도들에게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제갈명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것은 빨리 할수록 좋을 것 같소.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생각으로는 지금이 벌써 십일월이니 우리는 내년 일월 일 일에 세우는 것이 좋겠는데 어떻소?" 염지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맹주의 의견대로 그렇게 결정하도록 합시다." 제갈명은 염지천을 향해 경의를 표한 다음 정수복을 불렀다. "감사하오. 하지만 정총관!" 정수복은 고개를 돌려 제갈명을 바라보며 허리를 굽혔다. "예,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계십니까?" 제갈명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총관은 날이 밝아 오는대로 도좌묘(倒坐廟)에 가서 홍채문의 몇 분 사형들에게 일제히 진강으로 가라고 하시오. 또한 우리는 내년에 문파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총관께선 친문의 사람을 데리고 진강에 가서 설치를 해도 괜찮소." 제갈명은 조금 전 염지천과 얘기를 나눌 때에는 쩔쩔 매는 모습이었지만 맹주로 추천이 된 후로부터 위풍이 당당했다. 염지천은 이런 제갈명의 모습을 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속하, 반드신 명령대로 하겠으니 안심하십시오." 제갈명은 또다시 언봉저를 불렀다. "언당주! 나에게 일이 있으니 언당주께서 어디 좀 다녀와야 할것 같소." 언봉지는 제갈명의 곁으로 다가서며 허리를 굽혔다. "대체 어떤 분부이신지 어서 말씀을 해주십시오." 제갈명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달을 이었다. "이 삼 년 동안 강호상은 표면으론 비록 아무런 풍파도 일어나지 않았소. 하지만 지금 무명도의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는 이 소식을 구대 문파에게 알려 주어야만 할 것 같소. 또한 본맹은 처음으로 세워졌으니 아마 그들의 오해를 살 것이 분명하오." 이어 제갈명은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언당주께서는 화산(華山)의 반당문인, 소림(小林)의 대통대사(大通大師)무당의 천령도장(天寧道長)등을 만나 본 후, 다시 노산(勞山)과 팔괘문(八卦門) 군데를 가셔서 본맹이 성립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시고 뿐만 아니라 그들보고 가맹하라고 전하시오. 또한 내년 일월 일 일에 벌어지는 성립 대연에 참가를 하라고 하시오." 언봉저는 급히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을 했다. "예! 맹주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제갈명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언당주에게 다녀오라고 하는 문파들은 모두 홍채문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노산의 사관주와 팔채문의 구양대협은 지금 흑영도와 매우 깊은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오. 그렇기 때문에 언당주께서 나의 이름을 대기만 하면 즉시 그들은 승리할 테니 언당주께서는 본맹이 개최되기 반달 전 쯤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요." 언봉저는 다시 허리를 굽히며 대답을 했다. "예! 어떤 일이 있어도 명령대로 하겠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때 주설란이 급히 일어서면 언봉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언당주! 당신에게도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언봉저는 고개를 돌려 주설란을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대체 무슨 말인지 지체하시지 말고 어서 말씀을 해보십시오." 주설란은 말을 끝내자마자 석옥의 오른쪽을 향해 걸어갔다. 언봉저는 비록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주설란은 여러 사람들과 오륙 장 정도쯤 떨어져서야 몸을 돌리며 말을 꺼냈다. "언당주께는 두 눈이 멀은 한 분의 고모가 계시나요?" 언봉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있습니다. 하지만 부인께서는 저의 고딘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주설란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대답을 하기 전에 언당주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요. 음…… 그것은 바로 귀문 안에 세 가지의 절수가 있다고 하던데 어떤 것인지 말씀을 해 주실 수는 없겠어요?" 언봉저는 가벼운 신음을 하며 침중하게 대답했다. "부인께서 물으신 세 가지의 절수는 분명히 폐문에 전해 내려오지 않는 비기입니다. 하지만 어머님께서 보존하긴 계시는 천랑권(天郞拳)과 선숙이 보존하고 있는 파풍권(破風拳)이 내려오며 나머지한 가지는 식전이 되었습니다." 주설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귀문에서 실전된 것이 혹시 주사지(珠砂指)가 아닌가요?" 이 말을 듣자 언봉저는 깜짝 놀라 즉시 반문했다. "아니, 부인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주설란은 빙긋이 웃으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저는 정, 두 두 분께 언장문인을 찾으라고 한 것이 벌써 삼 년이나 되었어요." 그러자 언봉저는 더욱 궁금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부인께서는 도대체 무슨 일로 저를 찾았습니까?" 주설란은 한동안 그를 주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귀문의 주사지를 언당주께 돌려 주기 위해서였어요." 언봉저는 이 말을 듣자 몹시 감격한 듯 급히 다그쳤다. "부인께서는 두 눈이 멀은 저의 부탁을 받으시고 그랬던 것입니까?" 주설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맞았어요. 바로 그분의 부탁을 받은 것이었지요." 주설란은 어떻게 해서 그의 고모를 만났으며 또한 어떻게 해서 주사지를 배웠다는 것을 언봉저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언봉저는 그제서야 안심이 된 듯 사실을 얘기했다. "원래 그렇게 되었었군요. 선부께서는 옛날에 저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세 가지의 절수가 실전될 것을 걱정한 나머지 이 세가지의 절학을 선모, 선숙, 고모 세 사람에게 남겼던 것입니다." 주설란은 언봉저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벌써 두 가지의 신법구결이 담겨져 있는 책을 품 속에서 꺼내 언봉저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제가 손수 써 놓은 두 가지의 신법구결이니 언장문인께서는 받아 주세요." 그러자 언봉저는 갑자기 주설란에게 무릎을 꿇으며 공손히 절을 했다. "부인, 저를 위해서 이렇게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여러 사람들은 일개 문파의 장문인이 갑자기 주설란을 향해 무릎을 꿇은 체 감사를 드리는 것을 보자 일제히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이 쪽을 주시하였다. 주설란은 이것을 보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급히 피하더니 언봉저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언당주, 이러지 마시고 어서 일어나세요." 하지만 언볼저는 사배를 드린 후에야 일어서며 다시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는 본문의 절학을 전해 주셨으니 일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말을 끝내가마자 언봉저는 주설란이 준 한 권리 책자를 품 속에 집어 넣었다. 이어 두 사람은 다시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언봉저는 좀 멋적은 듯 제갈명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꺼냈다. "맹주 부인께서는 폐문의 길전된 절학을 되찾아 주셨기 때문에 속하는 맹주에게도 심히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제갈명 역시 급히 예의를 차린 후 빙긋이 웃었다. "별 말씀을 다하시오.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어찌 그처럼 감사해 하시오." 여러 군협들은 원래 염지천이 제갈명 부부를 맹주로 세우려고 한 것이 다만 두명도의 숙적이 되기 때문에 추천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이 한 쌍의 젊은 부부는 기묘한 검법 외에도 마음이 몹시 정직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되자 여러 군글들의 마음 속에 일제히 제갈명 부부를 존경하는 마음이 싹텄다. 어느 사이에 밤은 가고 동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계곡 입구에서 몇 개의 검은 점이 곡영자를 향해 혜성처럼 날아왔다. 그것은 바로 곡영자가 기른 조그마한 검은 벌들이었다. 검은 벌들은 순식간에 곡영자의 곁으로 날아 오더니 수 장쯤 떨어진 곳에서 빙빙 도는 것이었다. 곡영자는 돌고 있는 검은 벌들을 주시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마치 벌들과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약 반 시진이 흐르자 곡영자가 갑자기 안색이 변하여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큰일났소. 어젯밤에 호로곡이 습격을 당했소." 순간, 소불이는 안색이 급변하며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갈신의께서는 어떻게 되었소?" 곡영자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아직 모르겠소. 노부가 어젯밤에 파견한 이십여 마리의 검은 벌중에서 다섯 마리만이 날아왔을 뿐이오. 또한 피들이 의고하기를 어젯밤에 호로곡을 습격한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극히 무서운 살충 무기를 갖고 있었다 하오." 이 말을 듣자 염지천은 깜짝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아니, 곡형이 기르고 있는 벌들은 말을 할 줄 안달 말이오?" 곡영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빙긋이 웃었다. "이 벌들은 다만 몇 가지의 극히 간단한 말 밖에 할 줄 모르지만 이 늙은이는 그들을 관찰해 보면 대략 어떻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지요. 또한 그들의 나는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말과는 비교할 수가 얼"요." 염지천은 여러 군협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허허허……, 참으로 대단하시오. 곡형은 그런 특기를 가지고 계셨으니 이 다음에 무명도를 상대할 때 이것으로 탐지를 하면 되겠구려." 이때 제갈명이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갈신의께서는 저를 구해준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좋으신 분이니 우리는 어서 가 봅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무명도의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구해서 진강으로 함께 간다면 이 다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때 염지천이 여러 군협들과 제갈명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일월 일 일까지는 아직도 두 달이 남았기 때문에 노부는 이 기회를 틈타 몇 명의 방주를 찾아 보겠습니다. 또한 제자 양수분은 두분 맹주께서 꼼 보살펴 주십시오." 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양수분이 염지천이 곁으로 다가서며 급히 입을 열었다. "저도 사부님을 따라 가겠어요." 염지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만은 설대로 안 된다. 맹주님과 맹주부님, 두 분과 함께 있는 것이 나를 따라서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좋을 것이다. 게다가 너의 당사제도 여기에 있지 않느냐? 사부는 연막이 되어서야 진강으로 가겠다." 말을 끝낸 그는 여러 군협들을 향해 공수를 하더니 급히 떠났다. 염지천이 떠난 후 정수복과 언봉저 역시 여러 군협들에게 인사를 드린 다음 떠나갔다. 이때 여러 군협들은 제갈명의 옆으로 바싹 다가앉아 먼저 갈비백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선뜻 입을 열었다. "맹주님께서 만약 분부가 있으시다면 속하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대사형에게 연락을 하고 본맹에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갈명이 대답도 하기 전에 조봉춘이 나서며 말을 이었다. "속하는 갈형처럼 가보를 본맹에 참여시키겠습니다." 그러자 제갈명은 두 사람을 한 번씩 주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지만 지금 본맹은 사람들이 모자라기 때문에 두 분께서는 반드시 본맹이 성립되기 반 달 전에 진강으로 돌아와야만 하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명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또한 갈형께서는 백대협께 저를 대신해서 문안을 드리고 조형은 영존과 네 분의 사숙들에게 문안을 좀 드려 주시오."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을 하며 급히 일어서더니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총총히 떠나갔다. 종남산의 암기 제갈명은 일어서며 여러 군협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필요 없이 어서 호로곡으로 갑시다." 이리하여 곡영자가 앞장을 서서 일행을 데리고 호로곡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주설란은 달수분과 논을 잡고 아주 다정스럽게 얘기를 주고 받으며 걷고 있었다. 하지만 양수분에게는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았다. 양수분이 몹시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자 주설란은 그녀가 단지 사부를 따라가지 못해서 이러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 일행은 천독곡을 떠난 얼마 안 되어 하나의 봉우리 아래에 도착했다. 이때 앞장을 꺼서 걷고 있던 곡영자가 손짓을 하며 말을 꺼냈다. "앞에 보이는 것이 따로 갈신의께서 계시는 호로곡이오. 이 산길은 이 늙은이가 살고 있는 천독곡과 몹시 비슷하기 때문에 전에 소노형께서 맹주님을 업고 이 늙은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었지요." 이 말에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여러 군협들을 향해 히죽 웃었다. "그것이 바로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오. 단약 이 늙은이가 아니었더라면 노형께서 어떻게 대무림맹의 대호법이 될 수가 있었겠소?" 곡영자는 이 말을 듣자 큰 소리로 웃으며 반문했다. "허허허…… 하지만 소노형께서도 만약 노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독공을 연마할 수 있었겠소?" 한데 독공 얘기가 나오는 순간 곡영자의 머리에 큰일 났다는 생각이 갑자기 스쳐갔다. 곡영자는 전에 제갈명이 겨우 이십 안 팎의 청년으로서 처자식이 없는 줄로 알고서 그에게 독영단을 먹이고 독혈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는 부인과 동침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여러가지 생각한 곡영자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여러 군협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러분! 여기에서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소노형과 급히 상의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소불이를 끌고 한쪽으로 걸어갔다. 여러 군협들은 모두 어리둥절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 두 사람을 주시했다. 소불이 역시 좀 당황하는 표정으로 급히 물었다. "곡노형! 대체 무엇을 발견했단 말이오?" 곡영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소노형! 이 일은 참으로 큰일인 것 같소." 소불이는 몹시 궁금한 듯 그의 곁으로 바싹다가서며 다그쳤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처럼 어려워 하오?" 곡영자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한쪽에서 있는 주설란을 힐끗 쳐다보더니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노부는 맹주에게 부인이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소불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빙긋이 웃었다. "혹시 노형의 딸을 그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오?" 곡영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지금은 그런 농담을 할 때가 아니오. 노부는 여지껏 홀아비에 불과한데 어떻게 자제가 있겠소?"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말을 받았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오?" 곡영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는 그 당시 맹주께 벌써 애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의 피를 바꾸어 버렸소." 이 말에 소불이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더니 갑자기 묘안이 떠올랐다는 듯 선뜻 입을 열었다. "음…… 그것은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오. 맹주 부인에게도 두 알의 독영단을 먹이고 독공을 완성시키면 되지 않소? 또한 우리가 무명도와 싸우려면 반드시 독인과 겨루어야 하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몇 명의 독공을 연마한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지 않소?" 곡영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소노형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소?" 소불이는 좀 멋적은 듯 어깨를 들먹거리며 반문했다. "왜? 이 늙은이의 말이 틀리기라도 했단 말이오?" 곡영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없이 말을 받았다. "지금 노부에게는 독영단이 하나도 없소." 그러나 소불이는 조금도 불안한 기색이 없이 오히려 히죽 웃었다. "곡노형께서 다시 만들면 그만 아니오?" 그러나 곡영자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독영단을 만들기 위해서 약재를 구하려면 최소한도 한 달은 걸릴 것이오."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말을 받았다. "어차피 우리의 무림맹은 내년 일월 일 일에 개최해야 하니 아마 한 달이면 충분할 것 같소." 그러자 곡영자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소노형! 갑자기 멍청해 지기라도 했소? 지금 맹주와 맹주부인은 젊은 부부로써 어찌……." 하지만 소불이는 여전히 히죽 웃으며 오히려 반문했다. "곡노형께서 한 번도 보지 못했단 말이오?" 곡영자는 더욱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 며 물었다. "소노형께서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있소?" 소불이는 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젊은 부부라고 할지라도 맹주와 맹주의 부인은 지금까지 한 번도 동침을 한 적이 없소." 곡영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분은 결혼을 한지가 벌써 삼 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소불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양수분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맹주부인을 바라보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이 늙은이는 주부인이 아직도 순결한 처녀의 몸을 지니고 있다고 장담을 할 수가 있소." 곡영자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소노형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소?" 소불이는 얼굴을 붉히며 침중하게 대답했다. "첫째, 맹주가 연마한 것은 아마 동자공(動子功)인 것이오. 둘째는 흑영도가 아직 섬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비록 부부란 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동침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오." 곡영자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맹주와 맹주부인 두 분은 아주 대단한 인물들이오." 소불이는 곡영자를 똑바로 주시하며 히죽 웃었다. "노형! 이제야 안심을 할 수가 있겠소?" 곡영자는 여전히 무거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하지만 노부는 맹주에게 설명을 해 주어야 되겠소." 두 사람이 말을 끝내고 봄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소불이가 갑자기 고목나무 뿌리 근처에 누가 목판으로써 암호를 남겠다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가더니 허리를 굽혀 관찰하기 시작했다. 소불이의 이같은 행동에 역시 몸을 돌리려다 말고 소불이를 항해 큰 소리로 외쳐 물었다. "소노형! 무엇을 발견하기라도 했소?" 소불이는 허리를 펴고 그를 주시하더니 손짓을 했다. "인것은 아마 종남파의 암호인 것 같소."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기는 원래부터 종남산이기 때문에 이 암호 역시 종남파의 사람들이 그린 것이 틀림없을 것 같소이다." 문득 소불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궁금한 듯 물었다. "곡노형, 여기에 종남파의 사람들이 가끔 옵니까?" 곡영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노부는 여기에서 수십 년 동안을 살아 왔지만 종남파의 사람들은 여지껏 한 번도 보지를 못했소." 곡영자의 말을 듣자 소불이는 더욱 이상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에서 갑자기 종남파의 암호가 나왔지?" 순간 곡영자는 두 눈을 번득이며 다그쳐 물었다. "그럼 노형이 생각하기에는 호로곡을 기습한 것이 종남파의 사람들이란 말이오?" 소불이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더니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종남파의 사람들이 했을 가능성도 있소." 제갈명 등 여기 사람들은 이들 두 사람이 하는 것을 유심히 주시하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돌아온 후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갈명 등 사람들은 더욱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때 곡영자가 품 속에서 하나의 자기병을 꺼내더니 몇 개의 알약을 털어내 군협들에게 각기 한 알씩 나누어 주며 말했다. "어젯밤에 노부가 이 계곡을 떠날 때에 벌써 극독으로 곡 입구를 완전히 봉쇄했었소. 그렇기 때문에 무명도의 독인들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소.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 늙은이가 준 이 알약을 입속에 물고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여러 군협들은 그의 말대로 약을 받아 입 속에 집어 넣었다. 이어 또다시 곡영자는 여러 군협들의 앞에서 곡 안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불이는 연신 주위를 살피며 걸었다. 과연 계곡 입구에 있는 암석 위에는 또 하나의 종남파의 암호가 새겨져 있었다. "곡노형! 저기에도 종남파의 암호가 있는 것 같소." 이 말을 듣자 곡영자 역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쪽 갈대 숲 속에 종남파의 암호가 아닌 자기가 기르는 검은 벌들이 죽어 있는게 아닌가. 검은 벌들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죽어 있었다. 곡영자는 이것을 보자 가벼운 탄식을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과연 나의 생각대로 그들은 몸에 일종의 독성이 강한 분통(憤筒)을 지니고 있구나." 하고 말을 끝냄과 동시에 갑자기 소맷자락을 흔들었다. 그러자 두 마리의 황금빛을 띠고 있는 작은 뱀들이 땅에 떨어지더니 앞으로 기어갔다. 제갈명 등 사람들도 이미 피독 환약을 먹었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곡영자의 뒤를 따랐다. 한동안 걸어가고 있을 때 곡영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숲 밖에 있을 때는 분명히 네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숲 속에 들어오자마자 두 사람으로 변했지?" 소불이는 그의 뒤로 바싹 다가서며 급히 물었다. "곡노형께서는 어떻게 네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오?" 곡영자는 앞에 기어가고 있는 금사를 가리키며 말을 받았다. "금사는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들어오며 발자국을 만나자마자 한바퀴 돌고 있소. 지금 이 숲 속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두 명의 독인이오." 소불이는 또다시 궁금한 듯 급히 물었다. "노형께서는 어떻게 독인이라는 것을 아시오?" 곡영자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노부의 이 두 마리의 뱀은 강렬한 독성을 지니고 있소. 하지만 무명도에서 나온 독인들은 더 무섭소. 그래, 금사는 그들의 발자국 가까이도 접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오." 소불이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숲 속에는 독이 있기 때문에 독인만이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구려?" 곡영자는 무겁게 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맞았소. 노부의 해약을 먹은 사람 외에는 아마 무명도의 독인만이 들어올 수가 있을 것이오." 소불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상대방은 벌써 노형이 숲 속에다 독물을 매복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던데……." 곡영자는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며 그의 말을 가로 챘다. "그럴 가능성도 있소. 어젯밤에 향우춘과 하원해 두 사람이 떠나 갈 때에 부근에 무슨 단서를 발견했을지도 모르오." 소불이는 이를 갈아 붙이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두 명의 독인을 발견했구려." 곡영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독인들의 정신은 혼미하기 때문에 갈신의께선 충분히 상대를 할 수가 있었을 것이오." 이때 소불이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곡영자를 주시하며 급히 물었다. "조금 전 노형이 말씀하시기를 숲 밖에 있을 때 네 사람이고 숲속에 들어 왔을 때는 두 명의 독인 뿐이라고 했지 않소?" 곡영자는 고개랄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분명히 숲 속에서는 두 명이었소." 소불이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음……그것은 그들이 벌써 노형의 독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독인을 이용해서 업혀 갔다는 얘기군요." 곡영자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맞았소. 그들은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_"" 그런데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어 곡영자가 다시 말을 꺼내려 하자 소불이가 급히 다그쳤다. "이 늙은이의 말이 틀리기라도 했단 말이오?" 그러나 곡영자는 대답을 않고 고개를 돌러 곤 안을 주시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두 명의 독인들은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 나오지 않지?"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히죽 웃었다. "곡노형! 주위를 자세히 살펴 보았소?"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탈하게 웃었다. "갈형께서 계곡마다 진법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이 길만 들어갈 수가 있소. 한데 이 길에는 그들이 들어간 발자국만 있을 뿐이지 나온 흔적이 없소." 이 말에 소불이는 여러 군협들을 주시하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허허허…, 그렇다면 들어간 두 사람은 갈신의에 잡혔을 것이 분명하지 않소?" 곡영자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도 않소. 노부가 알기로는 갈노형의 무공은 그렇게 고명하지 못하오. 게다가 그들은 무명도에서 단단히 준비를 하고 왔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만하게 생포되지는 않을 것이오."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엇 때문에 나오리 않았단 말이오?" 그러자 곡영자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받았다. "노부, 역시 바로 그 점을 알 수가 없소." 제갈명은 그들의 뒤를 따르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한편 주설란과 양수분은 낮게 얘기를 주고 받으며 뒤를 따랐으며 당승무는 두경강과 맨 뒤에서 따랐다. 그들 일행은 순식간에 숲을 지나 하나의 계곡 앞에 도달했다. 제갈명이 약간 큰 소리로 곡영자를 향해 물었다. "이제 다 왔소?" 곡영자는 고개를 돌려 제갈명을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 왔습니다. 이 꽃밭을 지나면 갈신의의 초가집이 나타날 것입니다." 곡영자는 두 마리의 뱀을 거둔 다음 앞장을 서서 곡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일행이 꽃밭 앞을 다다르자 곡영자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소불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꽃밭 속에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으니 여러분은 들어갈 때 반드시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따라와야만 하오. 또한 소노형께서는 특별히 마음대로 다녀서는 안 되오."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빈정대듯 말을 받았다. "이 늙은이는 견식을 넓히기 위해 반드시 시험을 해보겠소." 말을 끝내자마자 즉시 꽃밭 안을 향해 몸을 날렸다. 미인초 제갈명 등의 사람들은 곡영자의 말대로 그의 길을 따라 한 발 한발 매우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순식간에 그들은 꽃밭을 통과하고 갈무구의 초옥에 도착했다. 이때 해는 벌써 중천에 떠올라 곡 안의 갖가지 꽃나무들은 태양빛을 받아 더욱 찬란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갈무구의 집 안에 있는 석상 위에는 하나의 차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초옥의 대문이 반쯤 열린 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그 조용하고 적막함이란 흉가와 같았다. 소불이와 곡영자는 동시에 속으로 괴이하게 생각했다. '이상하다. 갈무구까지 다섯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어찌 아무도 보이지 않을까? ' 그러면서 두 사람은 즉시 초옥을 향해 덮쳐갔다. 제갈명은 소불이와 곡영자가 한 마디도 없이 달려가는 것을 보자 자기는 주설란과 양수분 두 사람을 데리고 집 앞에 섰다. 그리고 당승무와 두경강은 초옥의 양쪽으로 갈라서더니 곧 포위할 자세를 갖추었다. 이때 양수분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갑자기 소리쳤다. "맹주, 이 석상 위에 웬 글씨가 쓰여져 있는데요?" 제갈명이 그녀의 말대로 가보니 과연 석상 위에는 흑탄으로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곡노형이 찾아오실 때 노부는 이미 남에게 생포를 당했을 것이오. 그러니 노부의 단서 세 권은 곡노형께서 집 뒤에 있는 갈대 속으로 들어가서 가져 가십시오." 제갈명은 글을 다 읽자마자 다급히 소리쳤다. "아! 갈신의는 벌써 놈들에게 납치되었소." 제갈명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소불이와 곡영자가 집 안에서 뛰어나왔다. 소불이는 조그만 눈을 껌벅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어째서 한 사람도 없을까?" 제갈명이 소불이의 앞으로 다가오며 매우 격한 어조로 말했다. "갈신의는 벌써 그들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가 남긴 글이 있습니다." 곡영자는 매우 놀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어디로 해서 나갔다는 말인가?" 곡영자가 사방을 둘러보며 제갈명의 앞으로 걸어오자 제갈명은 석상 위의 글을 가리켰다. "이 글씨는 아마도 곡노형께 드리는 것 같습니다." 이 말에 곡영자는 석상에 적혀 있는 글을 찬찬히 읽어보더니 즉시 안색이 변했다. "갈노형은 노부와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남에게 납치를 당하면서까지 단서를 남겨 주다니…… 나 곡영자는 이러한 온정을 봐서라도 꼭 그를 구해내야만 하겠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다급한 어조로 재촉했다. "만약 갈신의가 무명도의 사람에게 납치를 당했다면 아마 모르긴 해도 무명도의 위세는 더욱 높아질 것이오. 그러니 곡노형께서는 빨리 가셔서 단서를 가져온 후에 즉시 추격해 갑시다." 제갈명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소노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곡노형께서는 빨리 그 단서를 가져와 그들을 추격하도록 합시다." 곡영자는 낭패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 어디에 가서 그들을 찾아야 하나?" 하고는 힘없는 걸음으로 집 뒤를 향해 걸어갔다. 이때 갑자기 소불이는 종남파의 암호를 발견한 것이 생각났다. 그는 암암리에 매우 이상하게 느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갈신의는 글씨를 이렇게 눈에 잘 띠는 곳에 늘어 놓았으니 상대방이던 우리던 전부 다 금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갈신의는 자기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약서를 이렇게 아무렇게나 폭로해 석상 위에 남길 리가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여기인 어딘가 의문이 있는 것이 틀림 없구나……." 그러면서도 소불이는 즉시 뒤돌아 갔다. 그리고 그가 막 갈대 숲에 다가갈 때 곡영자가 매우 반갑다는 듯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 원래 그들은 이곳에 있었구나!" 소불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즉시 따라가 보니 집 뒤의 갈대밭에 과연 몇 사람이 누워 있는게 보였다. 소불이가 막 그들을 확인한 순간, 곡영자가 신형을 날리며 땅에 두 발을 딛더니 갑자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오지 마라!" 곡영자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즉시 갈대밭에 쓰러졌다. 소불이는 순간적으로 일어난 이 광경에 즉시 걸음을 멈추고는 마음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 갈대 속에 어떤 매복이 있길래 저토록 무서운가?" 소불이는 조금 전에 소리친 곡영자의 대갈일성이 분명 자기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보낸 신호라고 생각했다. 또한 소불이는 갈무구가 석상에 남긴 글씨는 갈대 속에 쓰러진 몇사람을 유인하기 위해서 한 수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갈무구도 쓰러져 있고, 심지어 곡영자까지 할 말을 채 하지 못하고 쓰러진 것을 보고는 이 갈대 속에 무서운 독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즉시 짐작했다. 이때 제갈명, 당승무, 주설란, 양수분 네 사람이 이 경악의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왔다. 제갈명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매우 조급해 하며 풀었다. "곡노형께서는?" 소불이는 갈대 술을 가리키며 빠른 어조로 대답했다. "곡노형은 갈무구 등의 사람을 발견하고 달려가다가 갈대 속에 쓰러 졌소." 그러자 제갈명이 소불이의 앞으로 성큼 나서면 급히 물었다. "곡노형께서는 대체 어떻게 해서 쓰러 지셨습니까?" 소불이는 어깨를 움츠리며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갈대밭을 응시했다. "아마 갈대밭에 어떤 강렬한 독이 있는 모양이오. 곡노형은 갈대밭에 들어가 땅에 두 발을 딛는 순간 이 늙은이에게 한 마디의 소리만 지르고는 이내 쓰러져 버렸소." 이때 주설란이 새까만 눈을 굴리며 매우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그분께서 무어라고 소리쳤습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대꾸했다. "곡노형께서는 단지 오지 말라는 이 한 마디만 했을 뿐입니다." 주설란은 총명한 눈동자를 굴리며 자기가 짐작한 바를 얘기했다. "그분께선 벌써 독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우리에게 오지 말라고 한 것일 거예요." 소불이는 무엇인가 짐작한 바가 있는 듯 말끝을 흐렸다. "이 늙은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때 제갈명은 독이 있다는 말에 선뜻 접근을 못하고 사람들을 둘러보며 매우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갈대밭에 쓰러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당승무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있게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소불이는 깜짝 놀라 급히 당승무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노제, 안 되네!" 그러나 당승무는 벌써 십여 발자국이나 걸어갔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허리를 굽혀 무엇인가를 집어드는 것이었다. "이……, 이것은……." 하더니 당승무 역시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불이는 깜짝 놀라 뛰어가려고 했으나 순간 멈칫했다. 어떻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구하러 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제갈명이 매우 당황하여 사람들을 둘러보며 통탄을 했다. "이 갈대밭은 좌우로 몇 장 정도 뿐이 되지 않는데 우리는 사람을 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두 사람까지 당하고 말았으니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때 양수분이 갑자기 냉소를 치며 비웃었다. "흥! 이따위 갈대밭이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저렇듯 야단일까?" 제갈명은 건방진 그녀의 태도에 화를 내기 전!"li무선 반가운 음성으로 급히 물었다. "그럼 양낭자께서는 이런 독초를 알고 있소?" 양수분은 의미있게 웃으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저는 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약초를 다 알 수 있겠어요?" 여기까지 말하고는 제갈명의 진지하고도 조급한 신색을 보며 그녀는 다시 되물었다. "그런데 아까 당사형이 가까이 갔을 때 맹주께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나요?" 그러자 제갈명은 얼굴에 커다란 파문을 만들며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양낭자께서는 무엇을 보았다는 말씀이오?" 양수분은 선뜻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맹주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때 주설란이 옆에서 널다 참지 못하고 양수분을 달래듯 타일렀다. "동생, 그러지 말고 어서 말해 봐요. 이렇게 긴박한 순간에……." 주설란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양수분이 손을 쳐들며 높은 어조로 말했다. "아, 소호법님께서 알아 내셨어요!" 제갈명과 주설란이 그녀의 손가락을 향해 보니 소불이가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을 한 조각 찢어 입과 코를 싸매고는 서서히 갈대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제갈명은 알 듯하면서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뚱거렸다. "다만 입과 코만 막으면 된다는 얘기입니까?" 양수분은 다시 나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까 향사제는 갈 때 호흡을 멈추었기 때문에 십여 발자국 갈 수 있었어요. 그러나 당사제가 밖에서 무엇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것을 주워서 보느라고 입을 열었어요. 그래서 쓰러진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반드시 호흡만 멈추면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는 것이에요." 제갈명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했다. "과연 그렇군요." 이때 소불이는 어느 사이엔지 당승무를 안고 세 사람의 곁으로 되돌아 왔다. 제갈명은 급히 달려나가며 물었다. "당형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불이는 당승무를 땅에 눕히며 매우 근심이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독을 마셔서 정신이 혼미해진 것 같소." 제갈명은 고개를 숙여 당승무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갑자기 당승무가 수중에 하나의 천을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제갈명은 급히 외쳤다. "소노형, 당형제가 수중에 쥐고 있는 천조각에는 어떤 글씨가 쓰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소불이도 갑자기 어조를 높혀 매우 기발한 발견이라도 한듯 소리쳐 외쳤다. "당노제는 이 천조각을 발견했기 때문에 입을 열었던 것입니다." 소불이는 말하면서 당승무의 수중에 쥐여져 있는 천을 펼쳐 보았다. "이것은 갈무구가 쓴 것이군요. 갈무구 자신까지도 암기에 걸렸나 봅니다." 그러더니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요절복통을 했다. "하하하…… 우리가 오긴 잘 왔군요. 만약 우리가 오지 않았다면 갈무구는 이곳에서 영원히 누워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며 제갈명에게 천조각을 건네주었다. "자! 맹주, 보십시오." 제갈명이 천을 받아 들자 주설란도 고개를 내밀며 같이 들여다 보았다. 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미인초(迷人草)또한 개구미(開口迷)라고도 한다. 그리고 독성이 매우 독하니 절대로 입을 열어서 숨을 쉬어서는 안 된다. 만약 중독이 되었다면 기필코 환혼단을 먹어야 깨어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갈신의가 자기 옷을 찢어내어 쓴 것이었다. 제갈명은 천의 글씨를 다 읽기가 무섭게 급히 서둘렀다. "소노형께서는 지금 환혼단을 가지고 계십니까?" 제갈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불이는 품에서 벌써 하나의 약병을 꺼내 당승무의 입에다 집어 넣으며 기이하게 생각했다. '이상하다. 왜 갈신의의 수중에는 환혼단이 없단 말인가!' 이때 당승무는 환혼단을 먹자마자 즉시 두 눈을 떴다. 이어 일어나 앉으며 반가운 어조로 말했다. "소노대께서 구해 주셨습니까?" 소불이는 얼굴에 아무런 변화도 나타내지 않고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니, 이 환혼단이 노제를 구해 주었네." 이어 다시 갈대밭을 가리키며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노제, 자네는 이제 해약을 복용했으니 미인초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자네는 갈대밭에 들어가 곽노형과 갈신의를 구해내게." 이 말에 당승무는 땅바닥에서 일어나더니 즉시 가시 갈대밭을 향해 걸어갔다. 당승무는 환혼단을 먹었으니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아 쉽사리 갈대밭을 헤치고 들어가 곡영자와 갈무구를 안고 나갔다. 소불이는 두 사람을 받아 땅에 내려 놓으며 물었다. "갈대밭에 또 몇 사람이 있나?" 당승무는 굽혔던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안에는 네 사람이 있습니다. 두 명은 독인이고 한 사람은 청의총관 하원해, 나머지 한 사람은 얼굴이 바싹 마른 노인입니다." "그렇다면 노제가 가서 그들도 데리고 나오시게."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다시 갈대밭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소불이는 다시 두 사람에게 환혼단을 꺼내 먹였다. 잠시 후 곡영자가 먼저 눈을 뜨더니 일어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 무섭다. 무서워, 아까는 개구미를 발견하고 즉시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소." 뒤이어 갈무구도 일어나 매우 미안한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 늙은이는 곡노형께서 반드시 약초를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는데 생각지 않게 곡노형께서도 그만 당하고 마셨군요." 곡영자는 생각하기도 지겨운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개구미는 보통 묘강의 아주 깊은 곳에서만 자라는 것인데 어째서 이곳에 자라나오?" 그러나 갈무구는 땅바닥에서 일어나 옷의 먼지를 털며 단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불이는 매우 기이하여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 늙은이에게는 어떤 꿍꿍이 속이 있는 것 같군.' 세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 제갈명이 급히 다가와 읍을 하며 매우 반가운 듯 입을 열었다. "이분께서 바로 갈신의라고 합니까? 이거…… 지난 번에 약을 하사해 주신 은혜 정말 감사합니다." 갈무구가 깜짝 놀라 미처 어떤 대답을 찾기도 전에 곡영자가 제갈명의 소개를 했다. "갈노형, 이분이 바로 무림맹의 제맹주입니다. 지난날 노부와 당노제가 여기에 와서 약을 구한 이유가 바로 이분 맹주를 구하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더니 다시 주설란을 가리키며 소개를 했다. "또한 이분은 맹주의 부인입니다." 주설란은 매우 감격에 찬 어조로 공손히 예를 올렸다. "맹주를 구해주신 은혜 정말 감사하옵니다." 곡영자는 다시 소불이를 가리켰다. 한편 이때 당승무는 갈대밭 속에 있던 네 사람을 전부 다 구해 밖에 내려 놓았다. 소불이는 갈무구에게 예를 취한 후 즉시 당승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는 네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매우 놀라며 소리쳤다. "아니, 이 사람은 종자기가 아니냐?" 제갈명은 비쩍 마른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 노인은 바로 종남파의 장문인 종자기입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종남파의 사람이 아니라 동사도의 사람이 변장한 가짜입니다. 소불이는 이 말을 듣자 매우 경악했다. "아니, 맹주께서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셨습니까?" 하동쌍웅(河東雙雄) 제갈명은 팔짱을 끼고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서서히 입을 열었다. "삼 년 전, 구대 문파의 장문인이 동사도에 집합했을 때 동사도의 사람들은 음모를 꾸며 구대 문파를 섬멸하고 자기네들이 구대 문파로 변장을 하려고 했소. 그러나 이 일은 사전에 저의 모친께 발각이 되어 위험한 순간에 소림, 무당 양파들에게 알려서 폭로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때 또한 정수복에게 세면 약수를 준비하게 만들어 장문인의 얼굴을 씻겠다고 하니 종자기는 자기의 신분이 탄로 날까봐 매우 노발대발하여 떠나갔습니다." 소불이는 제갈명의 말을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원…… 괘씸하군. 그렇다면 이분 장문인께서는 좀 더 주무시도록 내버려 두어야겠습니다." 그러더니 이어 당승무를 향해 지시했다. "노제, 우리는 먼저 이 복면한 두 명의 얼굴을 보세." 당승무는 대답을 하고는 즉시 복면을 벗겼다. "이들을 알겠습니다." 소불이는 찬찬히 두 사람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두 사람의 나이는 사십 세 안팎 되어 보였고, 얼굴은 넙적하고 눈썹 또한 매우 짙으며 얼굴에 깊은 상처가 있는 것이 결코 좋은 인물들은 아닐 성 싶었다. 원래 동사도는 좋은 사람이던 나쁜 사람이던 동사도의 사람만 아니라면 전부 똑같이 독인으로 만들었다. 그래야만 그들은 정신이 혼미해 지각을 잃어 버리고 명령대로만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소불이는 찬찬히 그들을 훑어보고 나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저들은 바로 하동(河洞)의 쌍의보의(雙義堡義)으로써 하동쌍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들이 산세 일부에 떨친 명성은 결코 약하지 않지요. 이들은 또한 성질들이 매우 포악해 항상 나쁜 짓만 저지르고 다니며 사람을 죽여도 눈하나 깜빡이지 않는 흑도의 거물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해서 동사도의 수중에 빠졌을까요?" 말하면서 소불이는 두 알의 환혼단을 쏟아내어 즉시 먹이려고 했다. 그때 제갈명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급히 만류했나. "소노형, 이 하동쌍웅이 그런 악질적인 사람들이라면 모든 선량한 사람들을 생각해 인들을 구해주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소?" 소불이는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 맹주님의 말씀은 비록 맞지만 우리의 무림맹이 상대하려는 사람은 무림의 공적 무명도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이 무림 안에 있는 무명도의 사람들과 대적하는 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대적하는 사람들 속에는 흑도이건 백도이건 모두 포함되어 있으니 이 하동쌍웅은 비록 그 죄가 크다고는 하나 이들의 북오성에 있는 흑도상의 잠재력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제갈명은 마음 속으로 매우 언짢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소불이의 말이 합당하였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소노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소불이는 다시 그중 한 사람의 입을 열어 보더니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곡노형, 이리와 보십시오. 이 사람은 독이 심해 이빨까지 빠졌습니다." 곡영자는 소불이의 고함을 듣고 다가와선 자세히 살피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하…… 하하……." 소불이는 곡영자가 놀라기는 커녕 크게 도리어 웃자 기분이 나빠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신, 왜 웃는 거요?" 곡영자는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통쾌해 하기도 했다. "하하하…… 노부의 식골산은 과연 무명도의 독인을 제압할 수가 있었소!" 소불이는 여전히 기분을 풀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바로 곡노형이 숲 밖에 뿌려 놓은 독문을 두고 얘기한 것입니까?" 곡영자는 그제야 웃음을 멈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노부가 숲 밖에 뿌린 독문은 세상에서 극히 보기 드문 두 가지 기독으로써 만든 것이지요. 그리고 이 독의 특이한 점이라면 두 가지가 정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노부의 생각으로는 그중 한 가지 독이 바로 무명도의 독인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곡영자는 심호흡을 길게 하더니 다시 말했다. "아까 노부는 두 명의 독인이 숲 속을 지나온 것을 보고 하마터면 내 독에 자신도 잃을 뻔 하였소." 소불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독인은 죽었습니까?" "그렇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의문점이 있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의 몸이 보통 사람과 똑같이 뜨거우며 차디차게 굳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곡영자는 즉시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노부의 이 식골산은 이빨이 빠질 때가 되면 벌써 독성이 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무명도의 독인의 독은 피 속에 있으니 그들의 몸은 여전히 뜨거운 것이요. 다시 말해서 이 두 가지의 독성이 체내에서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몸에 온기가 남아 있다고는 하나 사실상 벌써 죽은지가 오래입니다." 소불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감탄했다. "과연 그렇겠습니다. 이 늙은이는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이어 소불이는 청의총관 하원해에게 환혼단을 먹여 주며 말했다. "이 하총관은 보다시피 죽음을 아주 두려워 하는 사람이오. 그러나 이 청이당의 지위는 역시 황의당과 맞먹습니다. 그러니 이 자는 필경 많은 기밀을 알고 있을 테니 우린 이 자를 반드시 진강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곡영자는 매우 그럴듯한 생각이라는 듯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과연 소노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따로 적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전백승은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명도의 사람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무명도의 몇 사람쯤은 알아 두어야 합니다." 곡영자는 의미있게 웃더니 제갈명을 향해 다시 말했다. "맹주, 어떻습니까? 그들이 깨어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쳐 본맹에 가입시키도록 하는 것이……?" 그러나 제갈명은 담담하게 웃으며 별다른 뜻은 나타내지 않았다. "글쎄요. 두 분 노형께서는 좋으실대로 하십시오." 곡영자는 앞으로 나서며 매우 자신있게 말했다. "이 일은 반드시 노부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이때 소불이가 생각난 듯 불쑥 물었다. "참, 그런데 이 종남파의 가짜 장문인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제갈명이 선뜻 대답했다. "우리가 내년 일월 일 일에 무림맹을 세운 후부터는 반드시 많은 일이 발생할 것이오." "그러니 그런 일을 처리하다 보면 자연히 종남산에 갈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으니 제 뜻으로는 이 기회에 종남파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이때, 쓰러져 있던 하원해가 두 눈을 뜨고는 여러 사람을 둘러 보았다. 곡영자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하가야! 깨어났으면 빨리 일어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그러나 하원해는 여전히 누워서 눈만 깜빡거릴 뿐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불이가 히쭉 웃으며 나서더니 하원해 대긴 대답했다. "히히히…… 이 늙은이가 그의 혈도를 찔렀소이다." 말하면서 그는 하원해의 어깨를 탁탁 하며 연속 두 번을 쳤다. "노형, 이제 그만 일어나 보시지." 그리고는 사방을 쓸어보고는 서서히 일어나 곡영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곡노형, 또 만났구려." 그러자 소불이가 대신 나서며 어깨를 들썩이머 대답했다. "이봐, 우리가 자네의 목숨을 구해 주었네." 하원해는 조그마만 몸집의 추한 늙은이를 대하자 그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당신이 바로 설상무영 소불이입니까?" 소불이는 하원해가 자기를 단번에 알아보자 매우 기분이 좋은 듯 어깨를 연신 으쓱였다. "그렇다. 그리고 이 늙은이가 바로 자네에게 환혼단을 먹여 깨어나게 만들었지." 하원해는 아까부터 두 명의 독인자 종자기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흡족한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저는 소노형께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소불이는 약간 멋적은 듯 어색하게 웃었다. "히히히…… 나에게까지 감사해 할 필요는 얹다. 이 늙은이는 다만 명령을 받고 일한 것 뿐이니까……." 하원해는 소불이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소노형께선 노부의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반드시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그 말에 언급을 회피하며 은연 중에 비꼬아 암시를 주었다. "자네는. 이미 깨어났으니 만약 가고 싶다면 우린 절대로 막지 않겠소." 하원해는 소불이의 속에 감추어진 뜻을 알아차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계곡 입구에는 벌써 독한 기독이 퍼져 있어 설사 노부에게 도망칠 뜻이 있다고 해도 능력이 없는데 그것을 아시면서 소노형께선 공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소불이는 어깨를 한 번 움찔하더니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이오?" 하원해는 다시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은 남의 지배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소노형께서 어떤 할 얘기가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말씀해 보십시요." 소달이는 킬킬대고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히히…… 이 늙은이가 당신을 구해준 이유는 딴 분亨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죽고 싶은지 살고 싶은지 그 한 마디를 물으려고 하는 것이오." 하원해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하찮은 미물도 살려고 하는데 어찌 사람으로 살기를 마다하겠습니까? 그러니 소노형께서는 어떤 조건이 있으시다면 서슴없이 노부에게 얘기해 보십시오." "히히…… 조건이란 없소. 단지 살고 싶다면 우리의 무림맹에 가입하는 것이고, 죽고 싶다면…… 히히……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오." 하원해는 두 눈을 굴리며 매우 어색한 표정을 지이 보였다. "그런데 노부는 무림맹이라는 이름은 한 번"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소불이는 순간 허리를 쭉 펴더니 매우 의젓하게 말했다. "우리 무림맹은 바로 천하무림의 정의를 위해 새로 조직된 단체요. 다시 말해서 무명도의 무리배들이 무림에 갖은 해를 다 끼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바로 잡고자 생긴 것이지." 하원해는 둘러선 사람들을 하나 하나 훑어보고 타더니 매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들 뿐이오?" 그러자 소불이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싸늘하게 냉소했다. "흥! 왜? 모자라는 것 같으냐? 그렇다면 너는 어젯밤 너희들이 몇 명이서 이 천독곡을 습격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느냐?" 하원해는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즉시 대꾸했다. "노부가 알기로는 황의당의 막용당주와 청의당의 향당주 두 분께서 책임을 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곡노형이 매우 독을 잘 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총영주의 수양따님인 신영주께서 달려가 협조를 하신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로 다시 물었다. "또 없느냐?" 하원해는 고개를 저었다. "노부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이것 뿐입니다." 소불이는 콧방귀를 뀌고 나더니 다시 말했다. "너희 총영주인 장한생과 또 한 사람인 강석천 영주도 달려 왔었다." 하원해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소불이는 짐짓 안 되었다는 표정으로 냉소를 치더니 대뜸 물었다. "흥! 그렇다면 자네가 보기엔 이번 싸움에서 누가 이긴 것 같으냐?" 그러자 하원해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약 총영주와 두 분 당주, 그리고 또 두 분 영주까지도 왔다면 눈 앞의 이 사람들은 커녕 구대 문파의 장문인 모두가 도착했다고 해도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늙은이의 말투로 보아 분명 이들이 이긴 것 같구나……. ' 하지만 겉으로는 뭐라고 할 수가 없어 아예 그는 입을 다물었다. 소불이는 하원해가 얘기를 하지 않자 자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알려 주마, 우리의 맹주와 맹부인께서는 봉황검으로 너희들의 총영주인 장한생을 도망치게 하였다. 그러니 나머지 몇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지. 심지어 네 명의 독인과 한 명의 음인까지도 데리고 갈 틈이 없었다면 오죽하겠느냐?" 하원해는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대체 어느 분이 무림 맹주이십니까?" 소불이는 제갈명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이 분이 바로 맹주이시며 옆에 있는 분이 그 부인이시다." 하원해는 적어도 장한생을 물리친 무림 맹주라면 아주 대단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갈명과 주설란이라는 것을 듣자 매우 가소롭게 생각했으나 자기의 처지가 처지인 만큼 공손히 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제소협과 주낭자이셨군요." 제갈명은 얼굴을 약간 상기시키며 멋적어 한다. "별 말씀을……" 소불이는 다시 하원해를 노려보더니 의외로 어조를 고치며 입을 열었다. "본맹의 총호법의 얘기를 한다면 하노형께서는 잘 알 것이오." 하원해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느 분입니까?" 소불이는 약간 뜸을 들이더니 곧이어 말했다. "우리의 총호법은 바로 자의교주 염지천이오." 이 자의교주 염지천은 바로 무명도 교주이며, 또한 하원해의 주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하원해는 어설프게 웃으며 곧이 듣지를 않다. "원, 소노형께서는 농담도 잘 하십니다." 그 말에 소불이는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눈썹을 곤두세웠다. "왜 믿지 못 믿겠느냐? 자네가 알기로는 자네의 교주가 염대협이라고 생각을 하나? 흥!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남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염대협의 이름을 남용한 것이다." 하원해는 비록 치심은 하고 있었으나 소불이의 말하는 태도를 보니 또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이때 제갈명이 나서며 소불이의 말을 뒷받침 했다. "소노형의 말씀이 맞소. 무명도주는 염노선배님이 강호에선 떨친 명성을 남용해 죄악을 저지르고 있으며, 그는 절대 진짜 염노선배님이 아니오." 하원해는 진지하게 얘기하는 제갈명의 말을 듣자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이었다. 제갈명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염노선배님께서 이번에 강호에 나온 이유는 무명도주가 그 분의 이름을 남용했기 때문이며, 또 강호의 동도들이 모두 마도의 해를 입는 것을 보다 못해 본맹의 총호법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총관께서는 무명도의 청의총관이시니 누구보다 무명도의 모든 악독한 행위를 잘 알고 계실 것이오. 그러니 하총관께서는 잘 생각해 보시길 바라겠소." 하원해는 물론 다소 동요가 되었으나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있는 듯 무거운 신음 소리만 연신 발했다. 소불이는 심술궂은 음성으로 재차 강요를 했다. "하총관, 잘 생각해 보시오." 하원해는 잠시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윽고 긴 한숨을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맹주를 따르겠소." 그러자 제갈명은 매우 반갑다는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무림맹은 하총관을 대단히 환영하오!" 소불이와 제갈명, 하원해가 서로 이렇듯 타협을 하고 있는 동안 곡영자는 이미 갈무구에게 무림맹이 성립한 경과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울한 하원해의 신색을 보자 갑자기 물었다. "하총관, 자네는 진정으로 우리 무림맹에 항복한 것이냐? 아니면 거짓으로 항복한 것이냐?" 순간 하원해는 얼굴을 들더니 급히 대답했다. "노부는 진정입니다." "그렇다면 이 알약을 먹어라." 곡영자가 말하면서 손바닥을 펴자 손에는 한 악의 검은 환약이 들어 있었다. 하원해는 갑자기 안색이 변해 뒤로 물러서며 편안한 어조로 물었다. "이…… 이것은 대체 무슨 환약입니까?" 곡영자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는 우리 무림맹에 가입을 했으니 이 알약을 먹어야 한다." 하원해는 여전히 불안스러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그럼, 노형의 뜻은 노부가 이 약을 먹어야 무림맹에 가입했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4권에 계속) 비룡팔부 <4> 종남삼협 이때 소불이가 갑자기 하원해의 어깨를 치더니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흐…… 바로 그렇소." 그러자 다음 순간, 하원해는 뒤통수가 갑자기 마비됨을 느끼며 입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쩍 벌어졌다. 그러자 곡영자는 이틈을 타 환약을 재빨리 하원해의 입 속으로 집어 넣었다. 하원해는 몹시 놀라며 즉시 구역질을 하더니 물었다. "노형께서 약을 노부의 입 속에 집어 넣었습니까?"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키득대었다. "히히히… 자네가 순순히 먹지 않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넣어야겠지." 하원해는 그제야 매우 낭패한 기색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했다. "그런데 이 약은 대체 무슨 약입니까?" 곡영자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부는 평생 동안 독을 연마했으니 네 생각에는 이것이 무슨 약 같으냐?" 순간 하원해는 안색이 싹 변하며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도…… 독약……." 그러더니 제갈명을 향해 읍을 하며 애조띤 이조로 말했다. "맹주, 노부가 지금 무림맹에 가입한 것에 만약 추호라도 다른 속셈이 있었다면 노부는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할 것입니다. 맹주……." 그러자 소불이가 웃으며 제갈명 대신 말을 받았다. "히히히…… 물론 독약을 먹었으니 곱게 죽을 리는 없지." 하원해는 이번에는 소불이를 바라보며 격렬한 어조로 애원했다, "그러나 소노형, 노부가 무림맹에 가입한 것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곡영자가 또 대신 나서며 빈정거렸다. "사람의 마음은 뱃가죽이라는 것에 가려 있으니 거짓인지 진실인지 어떻게 알겠나? 그러나 만약 진정이라면 이 늙은이는 자네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겠다." 하원해는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곡영자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노형, 그렇다면 해약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나. "물론 해약은 있지, 허나, 해약은 우기 무림맹이 정식으로 무림에 발족식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되겠다." 그러더니 땅에 쓰러진 두 명의 독인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물었다. "하노형, 저 사람들을 한 번 보시오. 무명도에서 나온 독인도 중독이 되어 죽지 않았소? 그러니 만약 하노형께서 서툰 수작을 부리겠다면 이 두 사람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하원해는 물론 두 독인이 바로 자기들의 부총영주가 몸소 독물을 식량으로 대신해 먹으면서 훈련을 시킨 것이기 때문에 천하의 어떤 독인이라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데려온 두 명의 독인은 이미 중독이 되어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원해는 이 상황을 보자 매우 겁을 먹어 선뜻 대답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러자 제갈명은 그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곡영자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곡노형께서는 갈신의와 얘기를 해보셨습니까?"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벌써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갈노형께서는 내년 정월 초하룻날 반드시 진강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제갈명은 매우 기뻐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럼 더욱 잘 되었군요." 이어 제갈명은 소불이를 향해 손을 들며 말했다. "자! 소노형, 우리는 그만 가 봅시다." "아니, 어디로 가자는 말씀입니까?" 제갈명은 씨익 웃더니 짧게 대답했다. "종남파!" 소불이는 제갈명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종자기를 응시하며 물었다. "맹주, 저 자를 깨어나게 할까요?" "아!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저 자를 데려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자 소불이는 어느새 종자기를 어깨에 둘러 멘 후 앞장을 섰다. "자, 갑시다." 이때 곡영자가 소형산(消形散)을 두 명의 독인에게 약간 뿌리자 두 구의 시체는 즉시 노란 물로 화해서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노란 액체가 천천히 땅에 스며들자 곡영자는 갈무구를 향해 읍을 하며 매우 섭섭한 듯 말했다. "갈노인장,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작별을 해야겠군요. 그리고 정월 초하루 전에 어떠한 일이 있다 해도 반드시 진강으로 와야 합니다." 갈무구도 따라 읍을 하면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알겠소이다. 이 늙은이에게 다른 피치 못할 일이 없다면 반드시 진강으로 달려 가겠소이다." 곡영자는 품 속에서 한 개의 사기병을 꺼내 갈무구에게 건네주며 상세히 설명을 했다. "이것은 어젯밤 노부가 꽃밭에다 뿌린 두 가지 독문 중의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독인을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증명했으니 노형께선 이것을 받으셔서 이곳에 미리 뿌리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독을 칠 일 간격으로 숲 속에 조금만 뿌려 주시면 계곡 안에 감히 뛰어드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갈무구는 약병을 받아 들고 매우 감격한 듯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감사하오, 노형!" 순간 곡영자는 대소를 터뜨리며 갈무구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하하…… 우리는 이제 매우 친한 친구인데 갈노형께서 새삼 이렇게 얘기하시면 또다시 남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갈무구는 다만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곡영자는 갈무구의 손을 잡아 흔든 후 품 속에서 한 개의 자색병을 꺼내더니 하나를 쏟아내어 하원해에게 건네주었다. "하노형, 이 약을 삼키시오." 하원해는 아까 억지로 독약을 삼켜 마음이 아직도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그래서 곡영자를 내심 무서워하고 있었는데 또다시 자기더러 약을 삼키라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조금 아까도 한 알을 삼켰는데 어째서 다시 먹으라는 것입니까?" 그러자 곡영자는 어이가 없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염려마시오. 아까 노형이 먹은 것은 만성독약으로 약 삼 개월 후에야 발작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해약이오." 순간 하원해는 좋아서 눈을 크게 떴다. "예? 무엇이라고요?" 다시 곡영자는 싸늘한 음성으로 마치 못을 박듯 또박또박 말했다. "후후후…… 아직 좋아하기는 이르오. 만약 이 약이 바로 노형께 먹인 만성독약의 해약이라면 무엇 때문에 쓸데없이 독약을 먹였겠습니까?" 하원해는 일순 다시 얼굴을 굳히더니 매우 불안스러운 듯 약간 상기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이 약은 무슨 해약입니까?" 곡영자는 빙그레 웃으며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노형은 아까 들어올 때 독인이 업고 들어왔으므로 괜찮았지만 지금 독인은 죽고 없으니 노형은 두 다리로 걸어 온전하게 나갈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니 해약을 먹지 않고는 도저히 그냥 나가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하원해는 곡영자의 손에 있는 해약을 마치 빼앗듯 얼른 받아 들고는 입 속에 집어 넣었다. 이때 갈무구는 집 앞에 서서 읍을 하며 이미 앞서 내려가는 일행에게 작별을 고했다. "제맹주, 주부인, 그리고 여러분 모두 잘들 가시오. 이 늙은이는 바래다 드리지 않겠소이다." 그러자 제갈명이 급히 예를 취하여 송구스러워 했다. "노인장께서는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이어 일행은 작별을 매우 아쉬워하며 갈무구의 초옥을 떠나 꽃밭을 가로질러 계곡 밖으로 걸어나왔다. 이 호로곡은 두 개의 뾰족한 산곡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그 이름처럼 호로병 같았다. 일행은 아무 말없이 산을 내려오다가 갑자기 숲 속에서 다섯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중에 세 명은 나이가 사십 세 안팎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젊은 남녀였다. 이들은 이 꿀 속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중독이 되어 쓰러진것 같았다. 일행이 아무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제갈명이 침중한 어조로 입술을 떼었다. "이 다섯 사람은 아마도 무명도의 후사(後捨)인 것 같습니다." 하고는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세 사람의 노인은 모르는 것 같았고 한 쌍의 젊은 남녀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 드는 것이었다. 이때 제갈명이 주설란을 향해 물었다. "여보, 이 두 젊은이들은 누구인지 모르겠소?" 주설란은 궁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도리어 물었다. "맹주께서 정말 기억이 나지 않으세요?" 제갈명은 조용히 고개론 저으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은 들지만 대체 어디서 보았는지 누구인지는 생각이 나질 않소." 주설란은 이내 대답했다. "이들은 바로 종남문파의 양홍훈과 요옥금 이예요." 제갈명은 그제야 생각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생각해 보니 그들이었군, 그렇다면 나머지 세 사람도 모두 종남파의 사람이겠군?" 그리고는 한참 동안 다섯 사람을 주시하더니 곡영자를 향해 말했다. "곡노형, 이들의 독을 풀어줄 수 있습니까?"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숲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아마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면서 그는 품에서 해약을 꺼내 각기 다섯 사람의 입 속에 넣었다. "하지만 이들이 이 늙은이의 두 가지 기독 중 어느 독에 중독이 되었는지 모르니 이 첫 번째 해약을 먹인 후 최소한 반 시진 후에 다시 두 번째 해약을 먹여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이들을 곡밖으로 운반한 후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 곡영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한 손에 한 사람씩 끼고는 숲 밖을 향해 걸어갔다. 이어 두경강도 두 사람을 들고 나머지 한 여자는 시녀 영춘이 안고 함께 곡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이렇듯 곡영자와 두경강 두 사람이 네 명의 사람들을 들고 숲 밖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누가 대갈일성을 질렀다. "서랏!" 곡영자가 놀라 고개를 쳐들어 보니 숲 밖에 이십여 명의 청색경장을 차려 입고 장검을 든 대한들이 서 있는 것이었다. 이 이십여 명의 대한들은 곡 입구에서 마치 부채와 같은 모양의 진세를 펴고는 숲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리고 부채형과 진세 앞에 한 남색도포를 입은 노인이 등에 장검을 메고 있었는데 노인의 나이는 약 오십 세 가량이었고 머리는 반백이었으며 그의 짙은 갈색 얼굴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곡영자는 노기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뜸 물었다. "당신네들은 누구요?" 남포노인은 이마에 힘줄을 세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라면 설 것이지 잔말은 웬 잔말이오!" 그러자 곡영자는 갑자기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하…… 노부가 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 말을 들어야 하오?" 이때 두경강이 나서며 급히 말했다. "곡호법, 저 자는 종남파의 가삼협(苛三灰) 가경성(苛景星)입니다." 남포노인은 한 사람이 의외로 자기 신분과 이름을 대자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렇소. 내가 바로 가모요!" 그러자 곡영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마치 아랫 사람을 대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신이 누구던 상관할 바가 못되니 빨리 길이나 비키시오!" 가경성은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들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네들이 종남파의 사람을 납치한 것을 보니 우리 종남파와 대적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겠군." 그러자 곡영자는 두 눈을 부릅뜨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노부는 이들을 숲 속에서 구해낸 것이오!" 그러자 가경성은 싸늘히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의 그 말을 누가 믿겠소7- 순간 곡영자는 화가 치밀어 조금 거치른 어조로 쏘아붙였다. "노부가 사람을 구한 것을 믿고 안 믿고가 당신들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두 사람이 몇 마디를 주고 받는 동안 소불이를 위시한 사람들이 따라왔다. 가경성은 소불이가 대사형까지 걸어지고 있는 것을 보자 더욱 화를 내며 대번에 장검을 뽑아들고는 소리쳤다. "여봐라! 이놈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잡아라!" 그러자 이십여 명의 종남 대한들은 동시에 장검을 쳐들고는 서서히 여러 사람들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때 제갈명이 손을 흔들며 일렀다. "곡노형, 소노형, 사람을 먼저 내려 놓으시오." 이 말에 곡영자와 소불이가 메고 있던 자들을 내려 놓자 두경강이 제갈명에게 읍을 했다. "저 자는 종남파의 가경성 가삼협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부르기를 유성추윌(流星追月) 이라고도 합니다." 제갈명은 공손히 읍을 했다. "가삼협,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갑습니다." 그러자 가경성은 일순 상대를 얕봤다는 듯 냉랭하게 물었다. "귀하는 대체 누구요?" 두경강은 제갈명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말했다. "이분은 바로 우리 무림맹의 맹주이십니다." 가경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림맹이라고? 노부는 여지껏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이 없는데…?" 두경강이 일순 안색을 상기시키더니 높은 어조로 다시 말했다. "우리 무림맹은 무림의 온 정의를 위해 천하무림 동도의 사람을 집합하는 연맹이오!" 그러자 가경성은 매우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날렸다. "그러나 나 가모는 천하무림 동도에 동맹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으며 또한 맹주란 더욱 들어보지 못했소!" 이때 곡영자가 앞으로 선뜻 나서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맹주는 우리가 내세운 것인데 당신이 들었던 못들었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요." 이렇듯 쌍방이 서로 험악한 말들이 튀어나오자 제갈명이 급히 만류했다. "아! 가삼협, 오해마십시오. 저는 제소……." 그러나 제갈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경성이 갑자기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귀하가 원래 홍채문의 제소문주이셨구려, 그런데 제소문주께서는 우리 장문인까지 납치를 하시니 우리 종남파와 대적을 하려고 그거는 것이오?" 제갈명은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삼협, 오해를 하셨습니다." 가경성은 순간 왼손에 쥐고 있던 두 개의 철호도를 굴리며 냉랭하게 비웃었다. "흥, 이래도 오해라고 한 수 있겠소?" 제갈명은 터지려는 분노를 지그시 누르며 대답했다. "제모는 곡 안에서 귀하의 문인들이 중독되어 있는 것을 보고 원래 귀파로 모셔다 드리려고 했소. 한데 뜻밖에 숲 속에서 다섯 명의 귀파 문인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가경성은 제갈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소문주께서는 기왕 본문의 장문인을 납치해 갈 뜻이 없으셨다면 저 다섯 사람까지 전부 여기다 남겨 놓은 다음에 가십시오!" 제갈명은 매우 난처했으나 어떻게 말할 도리가 없었다. "가삼협의 말씀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귀 장문인과 나머지 다섯 분은 기독을 당해 정신이 혼미해져 있어서 저희 곡호법께서 조금전 한알의 해약을 먹였으니 또 두번째 해약을 먹이려면 반드시 반 시진이 지나야 되오." 순간 가경성은 냉소를 쳤다. "흥! 그것은 여러분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종남파의 사람들은 절대 남의 해약을 먹지 않소!" "그러나 가소협, 이 두 가지 기독은 저희 곡호법만이 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경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풀던 못풀던 그건 우리 종남파에 달린 일이오!" 한편 곡영자는 가경성이 자기의 존재를 무시하자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흥! 뭐 이따위 늙은이가 다 있지? 그렇다면 노부의 해약은 구태여 자선을 베풀 필요가 없겠군." 하더니 제갈명을 향해 말했다. "맹주, 그들이 우리더러 참견 말라고 했으니 이 사람들이 죽던 말던 상관치 말고 그냥 갑시다." 그러나 제갈명은 고개를 흔들며 달래듯 타일렀다. "아니오. 곡호법, 사람의 목숨이란 매우 중한 것인데 어찌 그냥 갈 수 있겠소? 더구나 우리는 이들의 위급한 처지를 보았으니 구해주어야 되지 않겠소?" 순간 가경성은 갑자기 안색을 싹 바꾸며 대뜸 소리쳤다. "그렇다면 제소문주께서는 우리 종남파와 대적하러 온 것이구려?" 첩자 드디어 제갈명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쳐 물었다. "그렇다면 종장문인과 이 다섯 분의 기독을 종남파의 사람들은 풀 수 있다는 말이오?" 가경성은 더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딱 짤라 말했다. "그것은 우리 종남파의 일이지 당신네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그러지 않았소?" 제갈명은 매서운 눈초리로 가경성을 가늠해 보며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가삼협이 좀 의심스러운 데가 있는 것 같군요." 가경성은 순간 움찔하며 급히 물었다. "아니, 대체 뭐가 의심스럽소?" "가삼협께선 그들의 생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소." 그러자 가경성은 꼭 무엇을 감추려는 것처럼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내 벌써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종남파의 사람들은 절대 남의 약을 먹지 않는다고……." 제갈명은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그것이 귀파의 규칙이오?" "그렇소." 이때 소불이가 불쑥 앞으로 나서며 끼어 들었다. "맹주, 종남파의 이러한 규칙에 대해서는 이 늙은이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갈명은 소불이에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소호법,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소불이는 가경성을 한 번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종남산에는 많은 약재가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문파에는 특별히 약을 만드는 데가 있으며 그들은 비단 무공을 할 줄 알 뿐만 아니라 의술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강호에 나돌아 다닐 때는 항상 약을 준비해 다니며 또한 생각하기를 자기네들은 어떠한 고질병이라도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으니 바로 이것이 그들이 남의 약을 먹지 않는 이유입니다." 가경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노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갈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랬었구려." 가경성은 뒤로 한 발 비켜서며 말했다. "제소문주께서는 이제 다 아셨으니 어서 가보십시오." 제갈명은 그래도 매우 아쉬운 감이 있는 듯 순순히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은 다만 귀파에 전해 내려오는 명예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절대로 변경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경성은 다시 안색을 바꾸며 조금 노기띤 어조로 물었다. "지금 제소문주께서는 맹주의 신분으로 종남파의 전통을 바꾸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그……그런 뜻이 아니오……." "그럼 뭐요?" 제갈명은 가경성의 앞으로 다가서며 대답했다. "그러나 제가 비록 귀파의 중독된 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본 맹주는 종남파에 갈 생각이었소." 그 말에 가경성은 냉소를 치더니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흥! 제소문주께서는 어떤 가르침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귀파의 두 분 장노를 찾으려고 하오." 가경성은 별로 대꾸할 기분이 나지 않는 듯 신통치 않게 대꾸했다. "두 분께서는 오래 전부터 세상의 일을 묻지 않고 계신데 어째서 찾으려는 것이오?" 제갈명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오. 더구나 종남 이노(二老)께서도 세상의 일을 묻지 않으신다고 하시니 귀파의 오협들에게 직접 얘기 해야겠소." 그때 소불이가 어깨를 들석이며 다시 참견했다. "히히……하지만 종남 오협께서는 전부 여기에 계신데?" 순간, 제갈명은 기절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매우 놀란 듯 물었다. "그렇다면 이 분들이 바로 종남 오협인가요?"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자기를 가리켰다. "맹주께서는 이 분 종남 문인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어 그는 검은 수염을 기른 노인을 가리켰다. "이 분이 오협의 둘째인 육연생(陸運生) 육이협이시며 그리고…." 소불이는 또한 사십 세 가량의 중년인과 삼십오륙 세 가량의 대한을 가리켰다. "이 분은 넷째 양영태(揚水泰) 양대협이시며 저 분은 다섯 째 만오부(萬五夫) 만오협 이십니다."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더니 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이 이 분들을 깨어나시게 해야겠습니다." 그러자 가경성이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며 노기띤 어조로 말했다. "귀하께서 정 우리 종남파와 대적하시겠다면 나 가모도 여유를 봐드리지 않겠소." 이어 제갈명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가서 이 사람들을 잡아라!" 두 명의 대한은 즉시 대답을 하더니 제갈명을 향해 덮쳐 들어갔다. 이때 당승무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 나오더니 소리쳤다. "서랏!" 이어 당승무는 수중의 단건으로 즉시 하나의 원을 그리며 왼쪽의 한 대한을 찌르는 동시에 왼손으로 영원탐조(靈原探爪)라는 초식을 써서 오른쪽의 한 사람을 공격했다. 왼쪽의 대한은 장검으로 당승무의 단검을 맞받으며 냉소를 쳤다. "꺼져라!" 그러나 그의 일 성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그는 갑자기 자기가 내지른 단검이 허공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가슴팍에는 벌써 수 촌 가량의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어 그가 줄이 그어졌다고 느끼는 찰나, 옷이 걸레처럼 변해 바람에 나풀거렸다. 다행히도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으나 그것으로 대한을 놀래주기에는 충분하였다. 대한은 급히 검을 막으며 한쪽으로 피해 물러났다. 당승무는 기고만장해서 일 검으로 왼쪽의 대한을 물리치고 왼손의 일 장으로 동시에 오른쪽 어깨를 탁 쳤다. 오른쪽의 대한은 당승무가 검과 장을 함께 사용하며 기이한 초식을 전개하자 급히 몸을 돌려 장세를 피했다. 당승무는 일 격이 성공을 거두자 바람을 가르며 어느새 두 명의 대한 앞을 막았다. 두 명의 대한은 종남파에서도 고수급에 속했다. 그런데 싸우자마자 당승무가 벌써 선기를 잡자 매우 노기가 충천해 일제히 기합을 지르며 검을 휘둘러 덮쳐갔다. 이때 가경성이 음산하게 웃으며 비꼬았다. "흐흐흐…-제소문주께서는 과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오셨군요." 말하면서 가경성이 왼손을 휘두르자 즉시 다른 청의대한이 뛰어 나왔다. 가경성은 다시 제갈명을 향해 손을 들어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들을 포위하라!" 그러자 네 명의 대한은 즉시 네 방향으로 갈라져 제갈명을 향해 날아갔다. 이때 주설란과 같이 서 있던 양수분이 갑자기 날아오더니 소리쳤다. "맹주, 이 네 사람은 제가 처치하겠어요!" 제갈명은 네 사람을 한 번 훑어보더니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이 네 대한이 각기 네 군데의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니 필경 무슨 전법을 쓰는 것 같구나,' 여기까지 생각하자 제갈명은 갑자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양낭자, 이들의 연수합격(聯手合擊)을 특히 조심하십시오." 이때, 네 명의 대한이 갑자기 가벼운 휘파람 소리를 내자 네 자루의 장검이 동시에 네 개의 방향에서 공격해 왔다. 양수분은 그것을 보자 낮은 소리로,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맹주, 물러가 계셔서 제가 상대하는 것을 구경만 하세요?" 하면서 장검을 뽑아 그들을 향해 쓸어갔다. 순간, "챙, 챙, 챙," 하는소리와 함께 좌우앞 세군데의 장검을 일시에 튕겨 나가게 했다. 이어 다시 양수분이 손을 뒤집자 몸 뒤의 한 대한이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숨쉴 겨를도 주지 않고 염지천이 가르쳐 준 검장 십삼식으로 변화무쌍하게 진격해 갔다. 상대방 네 사람은 비록 종남파의 문하고수들이였지만 양수분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 양수분은 연달아 네 초를 격출해 네 사람을 각기 한 발씩 물러나게 하였다. 하지만 제갈명의 말대로 그들은 과연 연수합격에는 정통했다. 그들은 비록 무공으론 양수분의 적수가 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양수달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때 당승무와 싸우는 두 명의 대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분명히 당승무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데도 서로가 배합이 잘 되기 때문에 만만하게 패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편, 가경성은 상대방에서 다만 두 명의 어린 남녀가 나와서 자기편 여섯 사람을 막는 것을 보자 노해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너희들도 함께 달려나가서 장문인과 네 사형을 구해 내어라!" 그러자 이십여 명의 청의대한들은 두 사람이 각기 한 조가 되고 네 사람이 한 조를 만들어 제갈명 등의 사람들을 향해 포위해 왔다. 이렇게 되자 제갈명도 가만 있을 수가 없어 두경강을 향해 지시했다. "두당주, 당주께서는 영춘 등 네 사람을 데리고 저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기만 하시오. 그러나 절대로 종남파의 제자들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두경강은 앞으로 나서며 짧게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두경강은 대답을 끝내자마자 영춘 등 네 명의 시녀와 함께 검을 뽑고는 한일자로 신속히 분산되었다. 네 명의 시녀는 앞의 공지를 막고 두경강이 그 네 사람의 뒤에 섰다. 이때 제갈명이 다시 소리쳤다. "당형제와 양낭자는 이제 그만 돌아오시오? 당승무와 양수분은 제갈명의 목소리를 듣자 즉시 일 검을 내찔러 적을 뒤로 물러가게 한 후 즉시 돌아왔다. 이렇게 되어 당승무와 양수분과 싸우던 여섯 명의 대한은 적수가 없는 것을 보자 즉시 네 사람의 공격에 가담하였다. 이어 어느새 그들은 시녀들과 검을 맞부딪치게 되었다. "챙, 챙, 챙," 하는 어지러운 금속성 소리와 난무하는 검과 검, 신형과 신형들은 실로 누가 누구를 해치려 하는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때 당승무는 네 명의 시녀가 불리할까봐 즉시 달려가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자 제갈명이 미소를 지으며 만류했다. "당형제, 그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 구태여 도와줄 필요는 없소." 한편, 네 명의 시녀들은 각기 일 장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쌍검으로 마치 방파제처럼 이십여 명의 대한들을 조금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니 종남파의 공격이 제아무리 치열하다고 해도 어찌 감히 뚫고 들어올 수 있겠는가. 두경강은 비록 시녀들의 뒤에 서 있었지만 검으로 공격은 하지 않고 가끔씩 시녀들에게 위험이 있을 때 일시적으로 상대방의 장검을 튕겨 나가게 했다. 이때 아까부터 이 광경을 보던 곡영자가 갑자기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 두 당주와 네 분의 낭자들은 어찌 그리 힘들게 상대를 하시오? 이런 놈들은 그저 콩알 몇 개만 먹이면 즉시 쓰러질 텐……." 그러자 제갈명이 급히 나서며 반대했다. "곡노형, 안 됩니다. 우리는 절대 직접적으로 종남파와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소불이가 대신 나서며 의아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맹주께서는 어멓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앞으로 반 시진 후 곡노형께서 이 몇 사람의 독을 풀어준 후에 얘기하도록 합시다." 소불이는 냉소를 치며 매우 가소로워 했다. "흥, 종남파의 문하는 절대 남의 약은 먹지 않는데 이 사람들이 깨어난다고 해서 말이 통하겠소?" 제갈명은 고개를 저었다. "남의 약을 먹던 안 먹던 종남파에 대해 매우 피해가 큽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그들이 만약 무명도의 끄나풀이 아니라면 반드시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불이가 깜짝 놀라 급히 되물었다. "아, 그렇다면 저 가경성이 무명도의 끄나풀이라는 말씀이오?" 제갈명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다. "지금은 아직 모르나 그럴 가능성이 크오." 소불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아까 발견한 암호와 가경성의 수상한 행동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는 교묘히 발을 빼며 남의 손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었다. 가경성은 애당초 호로곡 안의 극독을 이용해 종남 사협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으니 만약 가경성이 무명도의 끄나풀이라면 종자기도 무명도의 사람인데 어째서 종자기까지 독살시키는가 하는 거였다. 한편, 이십육 명의 종남 문인들은 연속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격해 들어올 때 두 명이 아니면 세 명이 한 사람을 상대해서 상대방을 포위해 장문인과 그 사숙을 구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누가 알기나 했으랴? 네 명의 시녀들은 여덟 개의 장검으로 하나의 검막을 형성해 도저히 그들이 뚫고 들어올 수 없게 만드는 거였다. 종남 문인들은 비록 연수공격에 정통했지만 이 검벽에 부딪친 지금 각자의 싸움이 형성되기 때문에 도저히 애당초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가경성은 이 광경을 보자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장검을 뽑아서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꼭 무슨 후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 쌍방의 대결은 벌써 밥한 끼 먹을 시간을 초과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종남의 대한들은 네 명의 시녀들을 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경성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전부 물러나라!" 그 이십육 명의 문인들은 가경성의 호통을 듣자 즉시 손을 멈추고 물러났다. 가경성이 여전히 화가 난 채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바로 랍탑도사 두경강이오?" 두경강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걸어나와 읍을 했다. "빈도가 바로 두모입니다. 그런데 가삼협께서는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가경성은 갑자기 불 같은 분노를 일으키며 눈을 부릅떴다. "두 친구는 연속적으로 본문의 제자를 상하게 했으니 가모는 친구의 실력이 대체 어느 정도인가를 한 번 시험해 보아야겠소!" 그러나 두경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짐짓 시침을 뚝 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삼협, 그 무슨 말씀이오? 빈도가 언제 귀파의 문인을 상하게 했다는 말이오?" 고옥령전 가경성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두경강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종남파의 규칙은 바로 문하의 제자가 사부에게 검을 받은 다음 강호에 나왔을 때 검이 있으면 살고 검이 없으면 죽는다는 거요." 그런데 두친구께서 그들의 보검을 튕기어 날아가게 했으니 상하게 한 것과 무엇이 다르오." 하지만 랍탑도사는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종남파에는 규칙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소?" 가경성은 여전히 양미간을 찌푸린 채 이를 갈아붙였다. "두친구, 쓸데없는 잔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일 장을 받으시오!" 가경성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들고 있던 장검으로 세 개의 검화를 허공에 그리며 랍탑도사의 검면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순간, 랍탑도사는 급히 몸을 바꾸어 옆으로 피했다. 가경성은 재차 장검을 번개처럼 휘두르며 검과 함께 추격해 와서 번개처럼 찔러갔다. 순간, 랍탑도사는 이보환위(移步煥位)의 초식으로 황급히 옆으로 수 척 가량 몸을 피했다. 가경성은 그가 피하기만 하는 것을 보자 냉소를 치며 잠깐 손을 멈추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흥! 홍채문의 좌우호법은 피할 줄 밖에 모르는군." 그러자 랍탑도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빙긋이 웃었다. "가삼협! 지금 그 말엔 틀린 데가 있소. 소인이 지금은 무림맹의 순찰당 당주이오." 그는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시 말을 계속했다. "다시 말해서 맹주의 명령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할 수가 없지만 손을 한 번 썼다 하면 가삼협의 장검을 튕기어 내게 할 자신이 있으니 그렇게 아시오." 가경성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허허허……허허허……두친구, 쓸데없는 잔소리는 집어 치우고 정말로 실력이 있다면 어서 마음대로 발휘를 해 보시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갑자기 차가운 검세를 발하더니 단숨에 오 장의 주위를 차가운 검기로 만들며 바람처럼 덮쳐왔다. 이에 랍탑도사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귀하께서 그처럼 원하신다면 명령대로 하겠소."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오른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가경성의 찔러 오던 장검이 갑자기 허공을 가르며 튕기어 나갔다. 이어 가경성의 튕기어 나간 장검이 갑자기 한 바퀴 돌자 랍탑도사는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허허허…… 마침 잘 온 것 같구나." 하고 말을 끝냄과 동시에 또다시 손을 치켜올렸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모두 팔목이 시큰함을 느끼며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제각기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이어 또다시 두 사람은 검을 번개처럼 휘두르고 유성처럼 허공을 가르며 격렬한 싸움을 시작했다. 이때, 제갈명은 두 사람의 싸움을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가경성의 검법 중에서 헛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주설란은 제갈명의 옆에 바싹 다가서서 낮은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갈명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저 사람의 검법은 몹시 복잡할 뿐만 아니라 순수한 종남 검법이 아닌 것 같소." 주설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종남파의 사람이면서 종남 검법을 쓰지 않는다면 종남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겠군요." 제갈명은 여전히 두 사람의 싸움을 유심히 지켜보며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였다. "맞았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그 다음 주설란이 말을 꺼내려고 하자 양수분이 불쑥 나서며 궁금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주설란은 제갈명을 힐끗 바라보며 대답했다. "물론 무명도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네." 양수분 역시 싸우는 쪽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지금 저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검법은 확실히 종남 검법이 아닌 가요?" 주설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종남 검법은 맞는 것 같지만 그는 검법 안에 다른 문파의 검법을 많이 섞어서 사용을 하고 있네. 이것은 바로 두당주의 무공이 너무나 고강하기 때문에 단순한 종남 검법으로 이길 수가 없을 것 같기에 평상시에 배운 것을 사용해서 상대를 하는 것 같네." 이 말을 듣자 양수분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또다시 물었다. "무명도의 사람들은 각문 각파의 검법을 전부 다 사용할 줄을 알고 있나요?" 주설란은 양수분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네. 또한 구대 문파의 검법은 벌써 비밀이라고 할 수가 없지, 그리고 홍채문에도 아직 한 수가 남아 있으니 만약 흥미가 있다면 내가 언제 한 번 보여 주겠소." 양수분은 이 말을 듣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주언니! 참으로 고마와요. 꼭 한 번……" 한데 양수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랍탑도사의 비명이 들려왔다. 랍탑도사는 어깨에 일 검을 맞았는 듯 붉은 선혈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 있었다. 제갈명은 안색이 변하여 급히 고개를 돌렸다. "두…… 두당주께선 부상을 입은 것 같소." 랍탑도사 두경강은 가경성에게 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벌써 가경성에게 일 검을 맞고 부상을 입었지 않은가? 이때 랍탑도사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허허허…… 허허허…… 결국 정체를 드러냈구나." 가경성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흥! 무슨 정체……?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 치워라!" 그러자 랍탑도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날카롭게 꾸짖었다. "이놈! 나를 찌른 일 검이 종남파의 무공 같지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가경성은 냉소를 터뜨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천하의 무공이란 원래 한 군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전 내가 쓴 일 초는 바로 이 늙은이가 폐파의 종남 검법을 약간 변화시킨 것 뿐이다. 만약 네가 믿지 못하겠다면 다시 한 번 시험을 해보이겠다." 그러자 랍탑도사는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좋소. 소생은 가삼협이 종남 검법 외에 또 몇 수의 악독한 검법을 알고 있는지 한 번 보아야 하겠다." 가경성은 안색이 약간 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처럼 원한다면 소원대로 해주지……." 그가 말을 끝내고 다시 장검을 휘두르려고 하는 순간, 한쪽에 서 있던 제갈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가경성은 검으로 가슴을 보호하며 싸늘한 눈초리로 제갈명을 응시하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나서는 것이오?" 그러나 제갈명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랍탑도사를 향해 손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두당주! 이제 그만 물러나서 쉬도록 하시오." 랍탑도사는 즉시 장검을 거두고 허리를 굽혔다. "속하, 맹주님의 명령대로 이행하겠습니다." 랍탑도사가 물러가자 가경성은 제갈명을 주시하며 냉랭하게 물었다. "왜? 제소문주께서 직접 상대를 하고 싶소?" 이때, 주설란과 함께 있던 양수분이 나서며 대신 말을 받았다. "당신 같은 사람은 감히 맹주님과 겨를 자격도 없어요." 이에 가경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양수분을 노려보자 제갈명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가삼협! 우리는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을 것 같소." 가경성은 여전히 그를 노려보며 몹시 불쾌한 듯 다그쳐 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시오?" 제갈명은 몸을 돌려 손짓을 하며 침중하게 대답했다. "사형들께서 벌써 깨어나려고 하는 것 같소." 원래 가경성과 랍탑도사가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곡영자가 이미 중독된 사람들에게 두 번째의 해약을 먹였던 것이다. 가경성은 그것을 보자 안색이 변하며 단호히 말했다. "제소문주께서 아무리 숲 속에다 독물을 뿌린 후 또다시 해약을 준다고 할지라도 우리 종남파에서는 절대로 은혜를 받지 않소." 순간-. 육연생, 양영태, 양홍훈, 만소부, 요옥금 등 다섯 사람이 어느새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장문인인 종자기만은 여전히 혼미 상태에 빠져 있었다. 먼저 육연생이 이상한 듯 주위를 살피다가 가경성을 발견하고 급히 물었다. "가사제! 이 몇 분은 도대체 누군가?" 가경성은 제갈명을 향해 손짓을 하며 말을 받았다. "저 사람이 바로 홍채문의 제소문주 제갈명이오." 이 말은 들은 육연생은 안색이 변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귀하께선 바로 홍채문의 제소문주였군요." 육연생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볼 때 그는 홍채문에 적의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갈명은 속으로 가벼운 탄식을 하며 생각을 굴렸다. "삼 년 전에 종자기가 종남에 가서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종남파의 사람들이 본문에 대해 그렇게도 원한을 품고 있지……" 하지만 그는 내색을 하지 않고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진작부터 종남 오협들을 흠모하고 있었소." 그러나 육연생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물었다. "흥, 제가 독림에 쓰러져 있는것을 제소문주가 구해 주었단 말인가?"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말을 받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같은 무림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않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육연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종남파의 사람들은 절대로 외인의 치료를 받지 않소. 지금 제소문주께서 저를 구해주셨기 때문에 저는 개인적으로 감사를 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종남파에서는 절대로 은혜를 받지 않소." 이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곡영자가 차를 벌컥 내며 나서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좋다. 너희들이 노부의 해약을 먹지 않았다면 개들이 먹은 모양이구나." 순간, 육연생은 안색이 변하며 일어서려고 했으나 억지로 참으며 이를 갈아붙였다. "제소문주께서 저를 구해 주셨기 때문에 한 번 더 참겠소. 하지만 또다시 그런 소리를 하면 그때는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자기의 옆에 있는 양영태와 만소부 두 사람을 향해 명령을 했다. "우리는 곧 가야겠으니 너희들은 급히 가서 장문인을 부축하도록 해라." 양영태와 만소부 두 사람은 급히 일어서더니 대답을 하고 종자기를 향해 걸어갔다. 이때 제갈명이 급히 손을 흔들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두분! 잠깐만, 내 얘기를 들어 보시오." 그러자 양영태가 급히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부르시오?" 제갈명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문인은 바로 내가 구해냈소. 그리고 또한 숲 속에서 육이협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저는 그를 다시 종남파로 보내려고 했었소." 다시 육연생이 나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제소문주에게 수고를 끼칠 수가 없소." 하나 제갈명은 이에 아랑곳 않고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에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 육연생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오." 제갈명은 누워 있는 종자기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물었다. "육이협께서는 폐맹의 곡호법이 먼저 다섯 분은 깨어나게 하고 무엇 때문에 장문인은 깨어나지 않게 했는가 하는 이유를 알고 있소?" 육연생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제가 벌써부터 얘기를 했지 않소? 종남파는 절대로 남의 약을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당신네들이 폐문의 장문인을 구해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종남파는 이것으로써 만족하고 여러분과 원한을 맺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제갈명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을 받았다. "제가 얘기를 한 뜻은 절대로 그것이 아니오." 이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가경성이 몹시 귀찮은 듯 육연생을 항해 약간 찌푸렸다. "육이형! 지금 장문인께서 혼미해 있으니 그 사람과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마십시오." 제갈명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육대협, 저는 원래 몸소 종장문인을 귀파에까지 데려다 주려고 했었소. 그리고 또 매우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당신네 종남 오협들과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오." 그러나 육연생은 냉소를 치더니 언성을 높여 물었다. "그렇다면 제소문주께서는 폐사형을 잡아 두고서 조건을 교환하려는 것이었소?" 제갈명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으하하……… 하하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제가 직접 가려고 한 것은 귀파를 위해서 그랬던 것이오." 육연생은 고개를 돌리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폐파는 벌써 구대 문파에서 물러나 강호의 일에는 참견을 하지 않고 있으니 제소문주께서는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마시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급히 손을 흔들었다. "양사제! 만사제! 어서 가서 장문인을 부축하고 즉시 산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양영태와 만소부는 육연생의 말을 듣고 동시에 허리를 굽히며 급히 걸어갔다. 그러자 제갈명이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며 고함을 질렀다. "서랏!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가 감히 움직이려고 하느냐?" 순간,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종자기의 옆에 있던 양수분이 장검을 뽑아 들고 종자기의 가슴을 겨누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만약 누구라도 조금만 더 다가오기만 하면 나는 당장 이놈을 죽여 버리겠다!" 양영태와 만소부 두 사람은 이 광경을 보자 급히 걸음을 멈추며 육연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육연생은 안색이 변하며 제갈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소문주께서는 과연 무슨 뜻을 가지고 있었구려. 좋소, 무슨 조건이던지 어서 얘기를 해보시오." 바로 이때 가경성이 갑자기 품 속에서 하나의 금색으로 된 고옥령전(古玉令箭)을 꺼내더니 높이 쳐들었다. "이사형! 장문인의 영부가 여기에 있습니다." 원래 가경성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바로 종남파의 영부였던 것이다. 육연생은 사제가 장문인의 영부를 꺼내는 것을 보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사제! 장문인이 언제 자네에게 주었는가?" 가경성은 괴이한 웃음을 띠며 말을 받았다. "영부를 보면 장문인을 본 것과 같으니 이사형께서는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마십시오." 육연생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제자, 장문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종남파의 제자들은 가경성이 영부를 꺼내든 것을 보자 모두 공손하게 인사를 드린 다음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빼앗긴 옥령(玉令) 으쓱해진 가경성은 여러 사람을 둘러보며 언성을 높였다. "장문인이 말씀하시기를, 누구라도 남의 손에 잡혀 있을 때는 그의 생사를 생각하지 말고 적을 섬멸하라고 했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소불이가 이 말에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나섰다. "허허허……그 말은 아마 당신 혼자의 뜻일 것이오." 순간, 가경성은 안색이 약간 변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소불이! 여기에서 감히 쓸데없는 말을 하다니……."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빈정거리듯 말을 이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하지만 늙은이가 보기에 지금 당신 수중에 있는 고옥령전까지도 아마 내력이 분명하지 않은 것 같은데……." 가경성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육연생을 향해 옥령을 흔들며 단호히 말했다. "이사형! 이제 명령을 받으시오." 그러자 육연생은 가경성을 향해 공수를 하며 허리를 굽혔다. "예! 무슨 명령이든지 키서 내려 주십시오.!" 가경성은 소불이를 향해 손짓을 하며 이를 갈아붙였다. "여기 서 있는 소가놈을 백 초 안에 죽여라!" 하지만 육연생은 조금 전 소불이가 말한 가사제의 손에 쥐여져 있는 고옥령전이 장문인이 남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음에 서인지 소불이를 주시하며 주저하고 있었다. 소불이는 여전히 웃으며 가경성을 향해 물었다. "너는 닭털로써 옥령을 대신하고 또한 나를 죽여 입을 봉하려고 하는 것이냐?" 가경성은 육연생이 주저하고 있는 것을 보자 냉소를 치며 다시 수중의 고옥령전을 높이 쳐들었다. "이사형! 옥령의 지시를 받지 못하겠단 말이오?" 그러자 육연생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예! 곧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다시 소불이를 향해 말을 이었다. "소노형! 지금부터 조심을 하십시오." 이때 제갈명이 급히 두 사람의 가운데로 뛰어 들며 육연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육이협! 잠깐 기다리시오. 제가 한 가지 할 말이 있소." 육연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저는 지금 명령을 받고 행동을 하는 것이니 제소문주께서는 어서 물러나시오." 그러나 제갈명은 종남파의 사람들을 주시하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지금 한 가지의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급히 여러분과 상의를 좀 해야……." 하지만 소불이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짓을 보내며 말을 가로챘다. "맹주님! 더 이상 얘기를 해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육이협은 명령대로 백 초 안에 이 늙은이를 죽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만약 백 초 안에 이 늙은이를 죽이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옥령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제갈명은 소불이가 자기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을 보자 그에게 반드시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그러자 소불이는 손바닥에 침을 한 번 뱉은 다음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육이협! 당신은 나를 죽여야 할 의무가 있지 않소. 어서 주저하지 말고 덤비시오." 육연생은 여전히 머뭇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노형께서 먼저 공격을 하는 것이 어떻소?" 소불이는 손을 급히 흔들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절대로 안 되오. 당신은 백 초 안에 이 늙은이를 죽여야 하기 때문에 당신이 먼저 손을 써야 하오." 육연생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실례를 하겠소."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소불이를 향해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소불이 역시 히죽 웃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허허허…… 잘 왔다!" 하며 그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막은 다음 오른쪽 팔꿈치로 상대방의 공세를 막았다. 동시에 소불이는 이 기회를 틈타 뒤로 세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육연생의 공격하는 기세는 보기에는 비록 무섭고 날카로운 것 같았으나 그는 마음 속에 꺼림칙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온 신경을 다 기울여 소불이와 상대를 하려는 뜻은 없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거듭하는 사이에 원래의 서 있던 위치와는 좀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 소불이가 오른손으로 비발당종이란 초식을 써서 육연생의 왼쪽 귀를 향해 비스듬이 내리쳐 갔다. 바로 이 순간-. 소불이는 육연생을 향해 낮은 소리로 말을 건냈다. "육이협! 만약 의심나는 점이 있다면 어서 물어 보시오." 육연생은 이 말을 듣자, 주춤하더니 이내 머리를 움직이며 소불이의 일 장을 피했다. 또한 오른손으로 발운개무(撥雲開霧)란 초식으로써 상대방의 공격을 막으며 왼손바닥으로는 세여파죽(勢如破竹)이란 초식을 써서 앞으로 밀었다. 육연생은 머리를 피할 때에 가경성이 옥령을 가리며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육연생은 공세를 취하는 척하며 소불이의 곁으로 바싹 다가서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 전 당신이 가경성에게 한 말을 좀 해석해 주시오." 소불이는 손을 흔들며 더욱 낮은 소리로 반문을 했다. "해석할 것이 뭐가 있겠소." 말을 끝냄과 동시에 폐문추월(閉門推月)이란 초식으로 육연생을 향해 번개처럼 내려쳤다. 두 사람은 비록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공격과 수비를 조금도 낮추지는 않았다. 쌍장이 부딪칠 때마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펄럭이고 소불이는 또한 이 틈을 타서 일부러 뒤로 몇 발자국씩 물러나기도 했다. 이때, 육연생이 갑자기 호쾌하게 웃어젖히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소노형! 한 번 더 받아 보시오." 동시에 갑자기 몸을 비호처럼 날리며 일 장을 내리쳤다. 하나 육연생은 소불이의 곁으로 다가올 때에 이미 나직하게 물었던 것이다. "소노형! 노형의 말에는 도대체 무슨 뜻이 있소?" 그러자 소불이는 일부러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허허허…… 허허허…… 당신이 아무리 날카로운 공격을 한다고 할지라도 이 늙은이를 제압하지는 못할 것이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천왕탁탑(天王托塔) 이란 초식으로 과연 또다시 맞받았다. 육연생의 이 일 장은 보기에는 비록 맹렬한 것 같았지만 사실 오성의 공력 밖에 들이지 않았다. 소불이는 단숨에 그의 장세를 막아내며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이 늙은이는 호로곡에 오기 전, 곡 밖에서 귀파의 두 가지 암호를 발견했소." 육연생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나직하게 물었다. "암호는 장문인이 남긴 것이오?"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그를 주시하더니 오히려 반문했다. "육이협! 귀파의 장문인이 호로곡에 무엇하러 왔는지 알고 계시오?" 육연생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바로 장문 대사형께서 이 계곡 안에서 구구환원단을 발견했기 때문이오." 소불이는 여전히 히죽 웃으며 또다시 물었다. "육이협께서는 장문인이 누구와 같이 왔는지 알고 있소?" 육연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그것은 잘 모르겠소. 우리는 다만 다른 한 패거리들이 환혼초를 구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오. 그렇기 때문에 장문인께선 우리에게 날이 밝아도 오지 않을 때에는 여기에 와서 지원을 해달라고 했던 것이오."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귀장문인이 호로곡에 와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을 육이협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이구려." 육연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우리들도 사전에는 모르고 있었소. 하지만……." 그러자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궁금한 듯 급히 말을 가로챘다. "그렇다면 귀장문인이 호로곡에 갇혀 있다는 것을 누가 제일 먼저 발견했소?" 육연생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가경성을 힐끗 쳐다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가사제가 먼저 대사형의 쪽지를 발견했소." 이 말을 듣자 소불이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허허허…… 그렇다면 틀림이 없구려." 육연생은 더욱 궁금한 듯 다그쳐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말씀을 좀 해 보시오." 소불이는 여전히 웃으며 직접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재차 물었다. "종남의 사협들께서 곡 밖으로 같이 달려갔을 때 무엇 때문에 세분만이 숲 속에 들어오고 가경성은 숲 밖에 남아 있었소?" 이 말을 듣자 육연생은 갑자기 멍청해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우리가 사전에 미리 계획을 했기 때문이었소." "육이협께서는 전에 숲 속에 극독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육연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원래부터 저는 모르고 있었소." 소불이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육이협께서는 가삼협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았소?" 순간, 육연생은 깜짝 놀라며 약간 언성을 높여 오히려 반문했다. "예? 그렇다면 그는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이오?" 소불이는 직접 대답은 하지 않고 침중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육이협께서는 전에도 가삼협이 귀파의 영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소?" 육연생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입을 열었다. "가사제는 그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얘기를 한 적이 없었소." 소불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틀림 없구려. 귀파의 장문인과 육이협, 양사협, 만오협 등 여러 사람들이 기독을 당했으니 종남 오협 중에서 다만 가삼협만이 남아 있게 되었으니 장문인의 영부는 물론 그가 보관을 해야지……." 육연생은 무슨 뜻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하며 급히 말을 가로챘다. "소노형께서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급히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맙시다. 우리는 벌써 백 초 동안이나 싸웠으니 이 늙은이는 그만 가봐야겠소."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소불이는 수 보를 물러선 후 공수를 하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육연생은 소불이의 말을 듣고 의아함을 금치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가경성은 이사형이 백 초 안에 소불이의 옷자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가 물러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을 보자 안색이 변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사형! 옥령의 지시대로 못한 것은 무는 죄가 되는지 알고 있소?" 육연생은 갑자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가사제! 옥령을 들고 있었다고 해서 폐문의 규칙대로 사형을 징벌하려는 것이오?" 가경성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소제는 장문인의 지시를 받고 옥령을 보관하고 있소. 그리고 본문에서는 벌써부터 영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장문인이 친히 온 것으로 생각을 하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옥령이 소제의 손에 있어 소제가 대신 지시를 내렸을 뿐인데 안 될리가 있겠소?" 소불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 젖히며 언성을 높였다. "아, 그래서 당신은 장문인과 육이협 등 사람들을 독림 속에 들어 가도록하고 당신 혼자만이 숲 밖에 남아 있었구려. 또한 우리에게 사람을 구하지 말라고 한 이유도 당신이 옥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군." 하지만 가경성은 옥령을 꽉쥔 채 못들은 척하고서 있을 뿐이었다. 이때 육연생이 갑자기 길게 탄식을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마음대로 하시오. 가사제께서 기왕 옥령으로써 사형을 처벌한다고 하니 종남의 제자로써 옥령의 명령을 받아야만 하겠지……."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갑자기 손을 높이 쳐들며 자기의 천령(天靈)을 향해 쳐갔다. 순간, 제갈명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이 순간, 육연생의 올려졌던 손"1갑자기 멈추어졌다. 이어 육연생은 몸 옆에 갑자기 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느꼈다. 그의 치켜 올려졌던 손이 어느새 제갈명에 의해 잡혔던 것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은 제갈명의 외침 소리는 들을 수가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해서 수 장의 거리를 날아가 육연생의 손을 잡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이때 가경성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여 말을 꺼내려고 하자, 소불이가 어깨를 들먹거리며 나섰다. "지금 당신의 수중에 있는 옥령이 그렇게도 큰 위력을 가지고 있다니 이 늙은이에게 좀 빌려 주시오."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가경성을 향해 비호처럼 덮쳐갔다. 그 모습은 마치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옥령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와 동시에 가경성은 사람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단지 이상한 예감에 의해 일 장을 내밀었다. 순간, 누가 알았으랴! 그의 장세가 나갈 때 그를 향해 번개처럼 덮쳐오던 그림자는 벌써 유령처럼 사라지고 그의 일 장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가경성은 깜짝 놀라며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분명히 나를 향해 하나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날아 들었는데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왼쪽 어깨에 가벼운 충격을 느꼈다. 가경성은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돌려 뒤를 살폈다. 순간 -. 그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고옥령전이 갑자기 가볍게 튕기어 나가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게 아닌가. 가경성이 몹시 당황을 하여 몸을 급히 돌리자 저쪽에서 소불이가 오른손으로 옥령을 높이 쳐든 채 웃고 있는 것이다. "허허허…… 가삼협! 지금 옥령이 이 늙은이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이 늙은이가 대신 엄명을 내리겠다. 가삼협! 속히 무릎을 꿇어라!" 가경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소불이를 노려보며 이를 갈아붙였다. "소가야! 너는 죽으려고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허공을 가르며 소불이를 향해 번개처럼 덮쳐갔다. 소불이는 여전히 웃으며 가볍게 몸을 피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옥령을 무서워하지 않소?" 하고 동시에 소불이는 번개처럼 몸을 날려 도망을 쳤다. 가경성은 소불이가 갑자기 도망을 치는 것을 보자 한동안 멍청해지는가 싶더니 급히 뒤를 쫓아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소가야! 옥령을 뺏아 갔으니 이제부터는 종남파의 적이 되는 것이다!" 소불이는 정신없이 도망을 치며 역시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옥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조사가 직접 온 것으로 생각해 명령을 받아야 마땅한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무릎을 꿇지 않소?" 소불이의 별호가 설상무영인 것처럼 경공이라 하면 강호상에서 제일인자로 꼽았다. 그런데 가경성이 어떻게 그를 쫓아갈 수가 있으랴. 이렇게 되자 가경성은 이를 갈아붙이며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서지 않으면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 소불이는 이 말을 듣자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렸다. "좋다. 나는 지금 너희들의 옥령을 들고 있으니 나의 말에 거역을 할 때는 아예 살 생각을 하지 말아라!" 가경성은 소불이가 멈추어 서는 것을 보자 몹시 좋아하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만약 옥령을 돌려 주기만 하면 우리는 다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수 장을 날아 소불이를 향해 번개처럼 덮쳐갔다. 그리고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며 왼팔을 펼치자 두 개의 철환이 소불이를 향해 유성처럼 날아 들었다. 하지만 소불이는 가경성을 바라보며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허허허…… 그럴 줄 미리 알고 있었다. 당신의 외호가 유성추월이니 두 개의 철환이 날아오지 않는 한 이 늙은이는 안심을 할 수가 없지."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급히 몸을 비틀었다. 이때, "쌩쌩!" 하는 파공음과 함께 두 개의 철환이 그의 겨드랑이 밑을 예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사쾌 소불이는 또다시 어깨를 들먹거리며 가경성을 주시했다. "또한 이 옥령은 종남파 장문인의 상징이기 때문에 이 늙은이는 당신처럼 동문을 살해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줄 수가 없소." 하고 가경성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몸을 돌려 도망을 치려고 했다. 바로 이때-. 돌연 그의 앞에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 소불이는 이것을 보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더욱 놀란 것은 자기가 돌아서서 있을 때 그들이 자신의 몸 바로 뒤에까지 다가왔지만 자기가 모른 사실이었다. 소불이의 앞을 막고 서 있는 두 사람은 죽림을 쓰고 황삼을 입고 있으며 키가 그의 어깨 정도 밖에 되지 않은 늙은이들이었다. 두 사람은 차림새가 똑같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김새까지도 몹시 비슷했다. 또한 그들은 흰 눈썹에 흰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수중에는 제각기 한 자루의 붉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지팡이를 왼손에 쥐고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오른손에 움켜 쥐고 있었다. 마치 한쌍의 신선처럼 그의 앞길을 막고 우뚝선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불이는 비록 이들 두 사람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두 사람에 대해서는 전부터 많이 들어왔었다. 소불이는 두 사람을 매섭게 노려보며 암암리에 생각을 굴렸다. '왜문신(倭門神) , 바로 너희가 종남의 두 늙은이였구나…….' 이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몸을 날려 급히 두 사람의 사이를 뚫고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동시에 냉랭한 코웃음을 치는가 싶더니 왼쪽에 서 있던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남겨 두고 가거라? 또한 오른쪽에 서 있던 사람도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어디로 도망을 치려 하느냐? 어서 무릎을 꿇어라!"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에 서 있던 노인이 소불이의 옥령을 쥐고 있는 손을 향해 잡아왔고 오른쪽에 서 있던 노인은 지팡이를 높이 쳐들고 소불이의 무릎을 향해 번개처럼 쳐 왔다. 두 사람의 동작은 번개와 같았지만 소불이는 강호상의 유명한 늙은 도둑이다. 또한 도둑이 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사쾌(四快)를 완비해야만 된다. 사쾌란 바로 눈치가 빠르고, 생각이 빠르고, 손이 빠르고, 발이 빠르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불이는 벌써 자기를 막고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종남의 두 늙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부터 조심을 하고 있었다. 종남파가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은 바로 합수공격 때문이다. 특히 종남의 두 늙은이 중 하나는 왼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또 하나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으니 그들 두 사람의 합수공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두 사람의 사이를 뚫고 지나가려고 한다면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불이는 이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금 두 사람 사이를 뚫고 나가려 했던 것은 다만 헛초일 뿐이었다. 종남의 두 늙은이가 대갈일성을 지를 때 그는 벌써 허공을 향해 날으며 한 바퀴를 돌더니 그들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넘어간 것이다. 이렇게 되어 종남의 두 늙은이는 모두 헛치고 말았으며 어느 사이에 소불이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소불이가 지주공을 시전하는 술간,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허공을 가르며 유성처럼 날아 들었다. 소불이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던 검은 그림자는 바로 가경성이었던 것이다. 이때, 왼쪽에 서 있던 노인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가경성의 몸을 땅으로 내려 끌었다. 가경성은 이러한 상황에 급히 땅에 엎드려 큰 절을 했다. "제자, 이노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종남의 두 늙은이는 거들떠 보지도 앉고 또다시 소불이를 향해 비호처럼 덥쳐갔다. 이렇게 되자 소불이는 다시 종남의 두 늙은이에게 길을 막히고 말았다. 이어 소불이는 급히 몸을 움츠리더니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그의 몸이 움직이자마자 거센 바람이 불어 닥치고는 두 자루의 붉은 지팡이가 그의 뒤를 포위함과 동시에 갈 길을 막은 것이다. 소불이는 이렇게 되자 즉시 왼쪽으로 몸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몸을 피하기도 전에 상대방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왼쪽을 다시 막았다. 소불이는 또다시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었지만 과는 방향을 바꿀 때마다 붉은 지팡이에 의해 길이 막혔다. 소불이는 어리둥절해 하며 내심 생각을 했다. '종남의 두 늙은이는 과연 실력이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어느새 종남의 두 늙은이는 그의 좌우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돌연 소불이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두 늙은 노인을 향해 읍을 했다. "두 분께서 바로 종남의 두 노인이시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참으로 반갑소." 그러자 두 늙은이는 급히 자리를 바꾸는가 싶더니 왼쪽에 서 있는 늙은이가 말을 받았다. "맞았다. 우리가 바로 종남의 이노이다." 소불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암암리 생각을 굴렸다. '하지만 이들은 무엇 때문에 내가 조금 전 공수를 할 때 급히 위치를 바꾸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머리에 갑자기 한 생각이 스쳐갔다. '원래 이들이 위치를 바꾼 것은 바로 이 옥령 때문이었구나!' 순간, 왼쪽에서 있던 노인이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흥!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넘어간 것을 보니 재주가 대단한 모양인데 다시 한 번 시험을 해 보시오." 소불이는 좌우로 한 번씩 고개를 돌려 두 늙은이를 쳐다보더니 어깨를 들먹였다. "허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이 늙은이는 조금 전 두 분께서 오셨다는 것도 모르고 실례를 범한 것 같으니 용서를 해주시오." 하면서 그는 또 두 사람을 향해 공수를 했다. 그러자 종남의 두 늙은이는 과연 또다시 위치를 바꾸더니 오른쪽에 있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신의 그같은 예의를 바라고 있지 않으니 그만 두시오." 소불이는 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련 말을 받았다. "사람은 예의가 많을수록 좋은데 두 분께서는 어찌 이 늙은이의 예의를 탓하시오?" 그러자 오른쪽에 있는 노인이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으면 본문의 옥령을 어서 돌려 주시오." 소불이는 뒤로 반 보쯤 물러나며 침중하게 말했다. "두 분께서는 종남의 어르신네들이니 늙은이는 귀파의 옥령을 마땅히 드려야 하오. 하지만……." 순간 또다시 오른쪽에 있던 노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장 돌려주면 되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그처럼 주저하시오?" 소불이는 좀 멋적은 듯 히죽 웃었다. "하지만 이 늙은이는 맹주의 명령을 받들고 행동을 하기 때문에 우선 폐방의 맹주에게 드린 다음 두 분 노인에게 드려야 하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왼쪽의 노인이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어서 옥령을 내놓아라! 네가 순순히 내놓기만 하면 이 노부는 절대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 말에 소불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왼쪽에 있는 노인을 향해 물었다. "만약 드리지 않겠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순간, 왼쪽에 서 있던 노인이 이를 갈며 그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만일 순순히 내놓지 않겠다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소불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시 물었다. "당신네들의 규칙으로는 옥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장문인이 되지 않소?" 이때 오른쪽에 서 있던 노인이 나서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종남파의 사람이 되고 싶단 말이오?"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장문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이 늙은이는 서슴치 않고 종남파의 사람이 되겠소." 그러자 왼쪽에 있는 노인이 화를 벌컥 내며 고함을 질렀다. "죽으려고 환장을 했느냐? 그런 당치도 않은 개소리는 아예 하지도 말아라!" 소불이는 어이가 없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늙은이라고 할지라도 이 늙은이는 자살문의 장문인이오. 그런데 누가 거의 다 쓰러져 가는 종남파의 장문인이 되려고 하겠소?" 오른쪽 노인은 이 말을 듣자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서 주둥이를 닥쳐라! 너 같은 놈을 우리는 절대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 소불이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흥! 이 늙은이의 말이 틀리기라도 했소? 뿐만 아니라 당신 두 사람은 종남의 높은 신분으로써 어찌 귀파 안에 내간이 생긴 것도 모르고 있소?" 숱간, 왼쪽에 있는 노인이 깜짝 놀라 다그쳐 물었다. "당신은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소?" 소불이는 두 노인을 한 번씩 쳐다보며 허리를 약간 굽혔다.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할 시간이 없소. 죄송하지만 이 늙은이는 맹주에게 가봐야 할 것 같으니 두 분께선 할 말이 있다면 맹주에게 직접 하시오." 이때 오른쪽에 서 있던 노인이 약간 누그러진 음성으로 나직하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얘기를 자세히 하지도 않고 가려고 하시오?" 소불이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만약 이 늙은이가 가려고 한다면 두 분께서는 자신 있게 막을 수 있소?" 왼쪽의 노인이 냉소를 날리며 말을 받았다. "한 번 시험을 해보면 알 수가 있지 않소?"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다시 어깨를 들먹거렸다. "이 늙은이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야만 하겠소."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바로 그의 오른발이 움직이는 눈간, 종남의 두 늙은이의 붉은 지팡이가 동시에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소불이는 모르는 척하며 대갈일성을 질렀다. "두 분 노인께서는 이제부터 조심을 하시오! 이 늙은이는 꼭 듣고 나가야만 하겠소."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수중의 고옥령전을 무기로 대신한 다음 육정개산(六丁開山)이란 초식으로 종남의 두 늙은이가 들고 있는 붉은 지팡이를 향해 번개처럼 쳐 갔다. 이렇게 되자 그의 옥령이 완전히 휘둘러 나가기도 전에 두 자루의 붉은 지팡이가 즉시 사라지고 종남의 두 늙은이도 급히 뒤로 물러났다. 왼쪽에 있는 노인이 갑자기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너는 무엇 때문에 옥령을 병기를 대신해서 쓰느냐?" 하지만 소불이는 태연자약하게 걸어가며 두 노인을 힐끗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이 늙은이의 몸에는 한 가지의 병기도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것을 써야만 하겠소. 그러니 당신네들이 만약 이것이 행여나 손상될까봐 두렵다면 내 앞을 막아서지 마시오." 그러자 오른쪽의 노인이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바보 천치 같은 놈아! 노부는 반드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겠다!" 소불이는 여전히 히죽 웃으며 빈정거리듯 말을 받았다. "허허허…… 말만 그렇게 하고 실천을 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오른쪽의 노인은 이같은 광경을 보자 급히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소불이는 다시 걸음을 멈추며 두 노인을 향해 물었다. "두 분께서 기왕에 옥령이 손상될까봐 무서워서 이 늙은이와 겨룰 수가 없다면 함께 맹주를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소?" 왼쪽에 서 있던 노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반문을 했다. "지금 당신네들의 맹주는 어디에 계시오?" 소불이는 빙긋이 웃으며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손짓을 하더니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바로 저기에 있소. 사실대로 얘기를 하자면 우리 맹주께서 종남에 온 이유가 바로 당신들 두 분을 만나기 위해서였소." 그 말에 왼쪽의 노인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궁금한 듯 물었다. "당신네들의 맹주는 무엇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지 알고 있소?" 소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모르겠소. 아마 귀파의 일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소." 그러자 오른쪽에 있던 노인이 약간 불쾌한 듯 급히 다그쳤다. "당신네 맹주께서는 무엇 때문에 종남파의 일을 간섭하려고 하오?"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림맹은 천하무림의 안전을 위해서 존재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종남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면서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있겠소." 왼쪽에 있던 노인이 자기네들끼리 눈짓을 한 번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어찌 되었던 한 번 가봅시다." 이때 옆에 있던 가경성이 이것을 보자 깜짝 놀라며 급히 뒤를 따라와 앞을 가로막았다. "저 소가의 말을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왼쪽의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은 듯 소리쳤다. "너는 잠자코 있거라!" 그리고는 가경성을 옆으로 잡아 끌자 그는 벌벌 떨고만 있을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소불이는 몹시 기분이 좋은 듯 옥령을 흔들며 앞장을 서서 제갈명을 향해 걸어갔다. 종남의 두 늙은이는 소불이의 뒤를 따랐고 가경성은 두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제갈명은 이런 광경을 보자 급히 랍탑도사 두경강의 옆으로 다가서며 나직이 물었다. "두당주! 저기 오고 있는 두 명의 노인은 대체 누구지요?" 랍탑도사는 고개를 돌려 제갈명을 주시하며 낮은 소리로 대답을 했다. "저 사람들이 바로 종남의 두 노인입니다." 제갈명은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소호법은 종남의 두 노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니 우리 어서 가봅시다." 그러자 랍탑도사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호법은 원래 기지가 많은 분이니 우리는 여기에서 기다려도 될 것입니다." 이때, 과연 소불이가 히죽 웃으며 두 명의 노인을 뒤에 데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제갈명이 급히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더니 두 노인을 향해 공수를 했다. "무림의 후배 제갈명이 두 분께 인사를 드리오." 왼쪽의 노인은 이러한 제갈명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다시 소불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데 우리에게 인사를 하오?" 소불이는 다시 히죽 웃으며 곧 대답했다. "이 분은 바로 무림맹의 맹주이시오." 오른쪽의 노인은 이 말에 다시 제갈명을 훑어보더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흥! 아직 젊은 것 같은데……." 소불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나직하게 이에 반박했다. "우리 무림맹은 천하 무림의 안위를 위해서 일어선 것인데 나이하고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소불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육연생, 양영태, 만소등 세 사람이 어느새 종남파의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종남의 두 노인을 향해 인사를 드렸다. 왼쪽에 있던 노인이 나서며 제갈명을 주시하더니 다시 여러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들 물러가 있거라! 노부는 그에게 몇 마디 물어 보아야겠다." 종남파의 문하들은 이 말을 듣자 일제히 물러났다. 이때, 왼쪽에 있던 노인이 갑자기 땅에 쓰러져 있는 종자기를 바라보더니 안색이 변하여 언성을 높여 물었다. "당신네들은 무엇 때문에 폐파의 장문인을 잡았소?" 무명의 괴인 제갈명은 급히 손을 흔들며 빙긋이 웃었다. "그것은 절대로 오해이십니다. 귀파의 종장문인은 제가 호로곡 안에서 구출해 내었소. 그때 그는 미인초의 독에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지요." 그러나 왼쪽에 있는 노인은 여전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물었다. "당신은 수하를 시켜 본문의 고옥령전을 뺏으라고 했던 것을 보니 종남파와 대적을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그렇소?" 제갈명이 이에 대답하기도 전 소불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허허허…… 허허허…… 강호상에서는 종남의 두 분 노인이 구대문파 중에 겨우 남은 선배라고 하던데…… 또한 덕망도 높기 때문에 종남파의 자랑이라고 하던 것 같은데…… 생각지도 않게 이처럼 사리를 모르시다니……." 순간 왼쪽에 있던 노인이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뭐라고?"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조금 전 어떤 사람이 고옥령전의 권위를 떨쳐 동문의 사형제를 상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 늙은이가 다만 맹주의 명령을 받들고 옥령을 빼앗았을 뿐이오. 그리고 맹주가 그렇게 한 것에는 다른 뜻이 없었으며 다만 귀하들을 위해서였소."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갈명이 다시 나서며 소불이를 향해 손짓을 했다. "소호법! 두 분께서는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으니 어서 옥령을 돌려 주시오." 소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두 사람을 주시했다. "허허 …, 당신네들은 이제서야 저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알겠소?" 말을 끝내자마자 손에 꽉 쥔 채 흔들고 있던 고옥령전을 돌려 주었다. 왼쪽에 있던 노인은 침중한 안색으로 붉은 지팡이를 땅에 꽂더니 두 손으로 옥령을 받은 다음 품 속에 집어 넣었다. "노부 종남파를 대신해서 제맹주께 감사를 드리오." 제갈명 역시 급히 예의를 취하며 공손히 말을 받았다. "마땅한 익을 했을 뿐인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그러자 오른쪽의 노인이 제갈명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한데 여러분께서는 무슨 일 때문에 종남에 왔소?" 제갈명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종남의 두 분 노인을 오래 전부터 흠모해 왔기에 일부러 방문을 했을 뿐이오." 오른쪽에 있던 노인은 이 말에 소불이를 한 번 쳐다보더니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말을 똑바로 하시오. 조금 전 소가는 종남파의 일 때문에 왔다고 했소." 제갈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른쪽에 있는 노인이 다시 말을 계속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구려." 이때 제갈명이 소불이를 바라보더니 아직도 누워 있는 종자기를 향해 손짓을 했다. "소호법! 어서 가서 종장문인을 깨어나게 하시오." 소불이는 급히 대답을 하고 품 속에서 하나의 자기병을 꺼내 들더니 종자기를 향해 걸어갔다. 순간 오른쪽에 있는 노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기다리시오!" 소불이는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이 늙은이가 구할 필요가 없단 말이오?" 오른쪽의 노인은 소불이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종남파의 문인들은 절대로 남의 약을 먹지 않소." 이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곡영자가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허허허…… 미인초의 독에 걸린 사람은 하루 밤낮을 자야만이 깨어날 수가 있소. 한데 당신들은 우리의 약을 쓰지 않고 그를 깨어나게 할 수가 있을 것 같소?" 오른쪽에 있던 노인은 이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곡영자를 주시하더니 다시 제갈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모두 종남파의 일이오. 또한 깨어날 수가 없다고 할지라도 당신네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오. 그러니 제맹주께서는 할 얘기가 있으면 어서 해 보시오." 이 말을 듣고 제갈명은 내심 생각을 했다. '종남파의 규율이 엄하다고 하던데 정말이었구나. 심지어 두 분의 노인까지 이렇게 고지식하다니……' 하지만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소불이를 향해 명령했다 "소호법! 그렇다면 잠시 먹이지 마시오." 그는 다시 종남의 두 노인을 향해 말을 계속했다. "혹시 두 분 노인께서는 삼 년 전에 구대 문파가 집합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소?" 오른쪽에 있는 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노부는 당신에게 무엇 때문에 종남에 왔느냐고 물었지, 삼 년 전의 일을 묻지는 않았소." 제갈명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이 일엔 바로 종남파의 흥망이 달려 있소.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거기에서부터 얘기를 해야만 하오." 왼쪽에 있는 노인은 조금 전 옥령을 돌려 주었기 때문에 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어서 말씀해 보시오." 제갈명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삼 년 전에 강호상에서 자칭 흑영도주라는 사람이 나타났소. 그 자는 흑영도에서 자의문을 창립한다고 천하 무림 각문 각파의 사람들을 소집해서 자기들의 개산대전에 참가하라고 했었소. 그래서 귀파는 문하 제자 양홍훈과 요옥금 두 분을 보내 참가하였소." 제갈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가경성이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양홍혼과 요옥금 두 사람은 도중에서 홍채마녀에게 납치를 당했었소." 제갈명은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홍채문주가 바로 가모요." 이때 왼쪽에 있던 노인이 허연 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였다. "노부도 전에 장문인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소." 제갈명은 다시 무거운 탄식을 하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가모께서는 흑영도의 개산대전에 반드시 음모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암중으로 귀파와 화산문하 두 명을 납치해서 홍채문의 제자로 변장을 시켜 참가를 하였소. 그렇기 때문에 개산전에 참가했던 각대 문파의 사람들이 모두 흑영도주에게 잡혔다는 것을 알았소. 그리고 또 그 중에서 소림의 지통대사, 무당의 천학자 등 사람들만이 흑영도의 사람들로 변장을 해서 돌아갔다는 것도 알았소." 왼쪽의 노인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서너 번 끄덕이더니 다시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럼 이 일은 홍채문주만 알고 있다는 말이오?" 제갈명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소. 또한 지통대사와 천학자로 변장한 사람들은 모두 소림, 무당으로 돌아가서 흑영도의 대회에 참가한 구대 문파의 검법을 파괴한 일을 얘기했을 거요." 왼쪽에 있던 노인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급히 손을 흔들며,"잠깐! 혹영도의 사람이 변장을 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비밀을 얘기한단 말이오?" 제갈명은 미간을 찌푸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바로 흑영도 사람들의 음모이오." 왼쪽에 있는 노인은 제갈명의 옆으로 바싹 다가서며 다그쳐 물었다. "대체 무슨 음모가 있어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제갈명은 잠시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러니 한숨 섞인 음성으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이 얘기를 하면 구대 문파의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연합을 할 것이 아니오? 그렇게 되면 또한 소림, 무당 양파가 나머지 칠대문파의 우두머리가 되는 셈이지요." 왼쪽에 있는 노인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들의 중요한 목적은 대체 무엇이오?" 제갈명은 다시 무거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구대 문파의 장문인들을 모두 일정한 장소에 집합을 시켜 놓은 다음, 일 격에 섬멸을 해버리게 되면 가짜 천학자와 지통대사는 손쉽게 장문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왼쪽의 노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선뜻 반문했다. "그것은 다만 극히 소수의 문파에서 장문인을 파견했을 뿐이지 전부다 과격한 것은 아니지 않소?" 제갈명은 다시 가벼운 탄식을 하며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반 사실 구대 문파의 장문인들 중에는 이미 흑영도의 사람도 있었소." 그 말에 왼쪽에 있는 노인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급히 물었다. "구대 문파의 장문인 중에서 흑영도의 사람들이 대체 누구란 말이오?" 하지만 제갈명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안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구대 문파가 집합하는 것을 가모께서 사전에 알고 팔괘문의 구양대협과 노산 사관주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는 또다시 구양대협과 사관주에게 미리 소림파의 대통대사와 무당파의 천령자에게 알려주도록 했소. 그렇기 때문에 지통대사와 천학자 두 사람은 확실히 적이 변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왼쪽에 있는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 후에 일도 알고 계시면 어서 말씀 좀 해되시오." 제갈명은 옆에 있는 정수복을 한 번 쳐다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흑영도의 사람들은 원래 역용술에 정통했기에 가모께서는 벌써부터 정수복을 시켜 역용으로 지은 약을 준비해 놓고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모두 약물로 세수하라고 했소." 왼쪽의 노인은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맞았소. 그렇게 되면 적들은 도망을 칠 수가 없지." 제갈명은 그 노인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귀파의 장문인께서는 반대를 하셨소." 왼쪽에 있는 노인은 이 말을 듣자 안색이 약간 변하며 급히 다그쳤다. "본파의 장문인이 무엇 때문에 반대를 했단 말이오?" 제갈명은 여러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귀파의 장문인께선 그렇게 하면 구대 장문인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결과가 된다고 당장에 거절을 해버린 것이오." 이때 오른쪽에 있던 노인이 나서며 궁금한 듯 물었다. "맹주께서는 그 후의 일도 기억을 할 수가 있소?" 제갈명은 다시 한쪽에 누워 있는 종자기를 주씨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 사람들은 그 일 때문에 논쟁을 벌였었소. 이렇게 되자 귀하의 종장문인은 벌컥 화를 내며 가버렸지요. 비록 다른 몇 분의 장문인께서 그를 막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소."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가모에게 잡혀 억지로 얼굴을 벗겨보니 바로 흑영도주의 독인 염대신이 아니겠소? 뿐만 아니라 그는 대회의 막 후 인물이기도 했소." 제갈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남파의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변 했다. 하지만 가경성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종남파의 두 늙은이를 향해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맞습니다. 그 당시 장문인의 말과 행동은 옛날과 크게 다른 것 같았습니다." 제갈명은 이 말을 듣자 내심 놀랬다. '그렇다면 가경성은 무명도의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이때 왼쪽에 있던 노인이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가경성을 향해 물었다. "자네는 미리 알고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진짜 얘기를 하지 않았는가?" 가경성은 좀 멋적은 듯 시선을 피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그 당시 제자는 다만 이상하게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이어 왼쪽에 있던 노인이 다시 제갈명을 향해 물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소?" 제갈명은 다시 정색을 하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결국은 흑영도의 사람들이 호모로 변장을 해서 그를 빼앗아 갔소." 왼쪽에 있는 노인은 종자기를 가리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제맹주께서는 종장문인을 여전히 염대신이 변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제갈명은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이 벌써 삼 년이나 지났으니 잘은 모르겠소. 하지만 가모의 추측으로는……." 그리고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약간 언성을 높였다. "일이 매우 복잡하니 우선 종장문인을 깨어나게 한 다음 얘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왼쪽의 노인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두 눈을 반쯤 감더니 얼마 후에 입을 열었다. "좋소. 마침 노부도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있으니 그렇게 하시오." 제갈명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더니 소불이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소호법! 어서 종남의 장문인에게 약을 먹이도록 하시오." 소불이는 고개를 돌려 제갈명을 바라보더니 역시 큰 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우선 그의 얼굴에 묻어 있는 역용 약물을 닦은 후에 약을 먹이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제갈명은 그의 말도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여 종남의 두 늙은이를 향해 물었다. "두 분 노인의 뜻은 어떻소?" 왼쪽에 있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좋소. 그렇다면 제맹주께서는 역용 약물을 가지고 계시오?" 제갈명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소불이가 나서며 두경강을 바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두당주!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실력을 발휘해 보시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랍탑도사 두경강이 빙긋 웃으며 정수복을 힐끗 쳐다보더니, "하지만 저의 실력은 정노형에게 배운 것인데……." 말을 끝내자마자 품 속에서 하나의 백옥으로 된 작은 술잔을 꺼내더니 다시 허기에 차고 있던 호로병을 꺼내 잔에 부었다. 이어 또 하나의 작은 병을 꺼내더니 흰가루를 붓고 섞으며 여러 사람을 향해 말했다. "약이 완전히 녹은 후에야 쓸 수가 있습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술잔을 내려놓더니 호로병을 입에 대고 정신없이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불이가 두 눈이 휘둥그레져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지금 여러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 혼자서만 술을 먹다니…." 랍탑도사는 호로병을 입에서 떼며 소불이를 향해 빙긋 웃었다. "마시고 싶으면 조금만 마시십시오." "허허…… 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되오. 만약 술에 취해 남의 집으로 들어 갔을 때는 당장에 잡힐 것이 아니오?" 여러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리자 랍탑도사는 술병의 뚜껑을 열더니 종자기의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도포자락을 술잔에 담은 후에 종자기의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종자기의 얼굴에 아무런 이상도 없었으며 여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초조해진 랍탑도사는 도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종자기의 얼굴에서 즉시 얇은 인피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랍탑도사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놈! 인피면구(人皮面狗)를 쓰고 이 늙은이를 속였구나……." 말을 끝냄과 동시에 종자기의 얼굴에 덮혀 있던 인피면구를 벗겼다. 순간 주름살이 약간 있고 사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몹시 창백한 얼굴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 사람은 분명히 염대신은 아니었다. 랍탑도사는 그의 면구를 벗긴 다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술잔을 품안에 집어 넣더니 제갈명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속하 다행하게도 명령을 이행했습니다." 이때 왼쪽의 노인이 갑자기 가자 종자기를 향해 붉은 지팡이를 힘껏 내리치며 고함을 쳤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이 한 짓이었구나!" 이에 옆에 있던 육연생이 황급히 말리자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과연 종자기는 살해당한 것 같구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갈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의 생각으로는 귀극의 종장문인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러자 왼쪽에 있던 노인이 다시 무거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제맹주께서는 아마 살해 팡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밀폐된 음모 왼쪽의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는게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삼 년 전에 해를 당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살 수가 있다는 말이오?" 제갈명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야 간단합니다. 삼 년 전에 실종된 사람들은 전부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신이 혼미해져 남자는 독인이 되고 여자는 음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오른쪽 노인이 물었다. "그렇다면 영당께서는?" 제갈명은 그 말을 듣자 표정을 흐리며 침울한 어조로 대꾸했다. "가모께서도 아마 그들에게 당했을 것입니다." 한편 소불이는 세 사람이 이렇듯 서로 얘기를 나눌 때 육연생을 불렀다. "육대협!" 육연생은 소불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소노협께서는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십니까?" 소불이는 종자기를 향해 눈짓을 보내며 물었다. "육대협께서는 이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그 물음에 육연생은 조금도 거짓이 없이 정직하게 대답했다. "예, 그는 바로 선소경(鮮小卿) 이라고 합니다." 소불이는 즉시 다시 물었다. "그는 육대협과 동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다만 종남 오협만 알았을 뿐 선소경이 바로 육대협과 종문 사형제지간이라는 것은 몰랐었는데……." 육연생은 순간 약간 주저하더니 어쩔 수 없는 듯 입을 열었다. "원래 선소경은 저의 사제였습니다. 그러나 사십 년 전에 선사께 쫓겨났으니 폐파의 사람이라고는 할 수가 없지요." 소불이는 국연생은 난처해 하는 기미를 또는 등 마는 등 계속 끈질기게 물었다. "한데 육대협께서는 선소경이 쫓겨난 이유를 좀 상세히 얘기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육연생은 매우 곤란한 듯 머뭇거리며 좀체로 말을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그것은 좀……." 이때 가경성이 앞으로 나서며 딱 잘라 말했다. "그것은 본문의 일이니 남한테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오." 그러자 소불이는 약간 섭섭한 눈치로 육연생을 주시하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 얘기를 좀 해주시면 더 자세한 일의 전말을 알 수 있으련만…… 그리나 육대협께서 얘기하기가 혼란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어 종남 이노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지금 이 늙은이가 그를 깨어나게 할 테니 이노께서 한 번 물어보십시오." 그러자 왼쪽 노인이 나서며 손을 저었다. "아, 아직 서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더니 육연생을 향해 근엄한 어조로 일렀다. "연생, 노부는 이 분 소친구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자넨 이놈이 어째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었나를 자세히 얘기해 주도록 하게." 육연생은 대답을 하더니 의미있는 듯 애매모호한 눈초리로 가경성을 한 번 쳐다보고 나더니 결코 내키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선소경은 원래 셋째 사제였습니다. 그때 이 가경성 사제께서는 입문한지가 얼마되지 않았으며 또한 선소경은 가사제보다 한 살이 위라서 평상시에도 두 사람은 매우 잘 통했습니다. 그리고 가사제께는 바로 한 살 위의 누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선소경과 나이가 똑같았어요. 선소경은 가사제와 친한 관계로 자주 가사제의 집에 드나들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선소경이 가사제의 누님을 흠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가사제의 누님에게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같은 마을에 정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육연생은 차마 말하기가 곤란한 듯 가경성을 한 번 바라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선소경은 흠모한 나머지 가사제가 외출했을 때 가사제의 누님을 농락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가사제가 돌아와 선소경이 강간을 할 찰나에 보게 된 것이지요. 그래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결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가사제는 입문한 지가 채 일 년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물론 선소경의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소경은 가사제의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힌 후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다시 육연생은 말을 끊고 길게 한숨을 내뿜더니 이어 말했다. "그 후 가사제는 화가 난 나머지 이 일을 선사께 고했습니다. 선사께서는 이 얘기를 듣자 분노를 일으킨 나머지 본문의 규칙대로 간음한 자는 사형이라고 하시면서 선소경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사형과 저의 간곡한 부탁으로 선소경을 관대하게 처벌해 쫓아 보내셨습니다. 그때 선소경은 만약 종남파가 뒤집혀지지 않는 한 절대로 종남산에는 오직 않겠다고 악담을 퍼부으며 떠났습니다." 육연생의 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소불이는 일순 침중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박수를 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알았다. 알았어!" 오른쪽 노인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 무엇을 알았다는 말이오?" 그러나 소불이는 그 노인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제갈명에게 무엇이라고 귓속말로 얘기를 했다. 그러자 제갈명은 즉시 두경강에게 무엇이라고 일렀다. 다시 소불이가 명령을 받은 두경강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자 두경강은 아무 소리도 않고 산 아래로 질풍처럼 내닫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소불이는 다시 이번엔 곡영자에게 무엇이라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불이의 이야기를 듣고 곡영자의 얼굴에는 일순 의미모를 야릇한 미소가 흘렀다. 이때 종남 이노는 무엇이라고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저희끼리만 이야기를 하자 매우 이상함을 느끼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제맹주, 그런데 두친구께서는 대체 어디를 간 것입니까?" 제갈명은 슬쩍 웃어 보이며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무엇을 좀 조사하러 갔을 뿐입니다." 오른쪽 노인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제갈명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고는 시선을 돌려 선소경을 내려다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참, 그리고 제 생각으론 이 사람을 깨어나게 해서 이노께서 자세한 말을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왼쪽 노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좀 깨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때 소불이는 제갈명이 미처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벌써 환혼단을 꺼내 선소경에게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소경은 눈을 번쩍 뜨더니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자기 앞에 의외로 종남 이노가 서 있는 것을 보자 다른 사람은 미처 볼 겨를도 없이 급히 소리쳤다. "이…… 이노!" 오른쪽의 노인이 싸늘히 냉소를 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무릎을 꿇어라!" 말하면서 그는 지팡이로 선소경의 무릎 지기혈(地氣穴)을 향해 내리 쳤다. 그러자 선소경은 본의 아니게 두 무릎을 꿇고 매우 당황한 빛을 띠우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제…… 제자……." 오른쪽 노인은 선소경의 말을 들을 겨를도 없이 대뜸 소리쳐 물었다. "이놈, 선소경! 누가 너더러 장문인으로 변장해 오라고 한 것이냐? 똑바로 대렸다. 추호도 거짓이 있을시는 네놈은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라." 선소경은 이 말을 듣자 마치 청천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안색이 볼상사납게 변했다. 그러나 그의 교활한 성격은 다시 순식간에 진정을 되찾고 매우 여유있게 여러 사람을 한 번 쓸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흠, 이 선모는 교주의 명령을 받아 잠시 종남장문의 직책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오른쪽의 노인은 여전히 미간을 펴지 않은 채 계속 물었다. "그럼 장문인은 벌써 살해를 당했느냐?" 선소경은 이미 표정을 되찾을대로 되찾아 아주 여유만만하게 오른쪽 노인의 질문을 받아 넘겼다. "아니오. 그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염교주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종자기의 생사를 장악하고 있어야 이 선모가 여러분들로부터 안전하게 신변을 지킬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갈명은 내심 매우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원, 세상에 이따위 교활한 놈이 다 있을까?' 이번에는 왼쪽 노인지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흑영도주는 대체 무엇 때문에 너를 파견한 것이냐?" 하지만 의외로 선소경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아주 대담하게 그것도 하나 거침이 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종남파를 아주 강호에서 물러나게 만들려고 나를 파견했다고 하오." 왼쪽 노인은 억지로 분노를 눌렀지만 어조만은 날카로왔다. "그럼 또 다른 음모는 없느냐?" 선소경은 순간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매우 멸시하는 투로 대꾸했다. "이노께서는 이삼 년 동안 제가 종남파를 강호에서 물러나게 한것 외에 또다른 일을 저지른 것을 보았습니까?" 이때 소불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이노, 이렇게 묻다간 백날 가야 이 자가 순순히 사실대로 대답할것 같지 않습니다." 오른쪽의 노인은 선소경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나오며 짐짓 낭패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어 보아야 되겠습니까?" 소불이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오른쪽 노인과는 반대로 선소경의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두 분께서는 만약 사실을 알고 싶으시다면 아마도 이 늙은이가 몸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왼쪽의 노인이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러하면 소친구께서 직접 물어 보시오." 그러자 소불이는 갑자기 산 밑을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두당주께서 마침 돌아오셨소. 늙은이는 먼저 두당주의 소식을 듣고 나서 묻겠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소불이는 다른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급히 산 밑을 향해 달렸다. 이때, 과연 산 밑에서부터 랍탑도사 두경강이 번개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순간에 소불이는 두경강에게 달려가더니 그와 어깨를 같이하며 제갈명을 향해 걸어왔다. 두경강과 소불이는 무슨 말인가 연신 주고 받더니 두경강이 먼저 제갈명에게 얘기했다. "속하는 벌써 소호법께 얘기를 했습니다."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있게 웃었다. "오! 좋소." 이때 소불이는 가경성에게로 걸어가 싱글싱글 웃으며 마치 농담처럼 넌지시 물었다. "가삼협, 이 경악적인 소식을 듣고 싶지 않습니까?" 가경성은 흥미가 없는 듯 냉소를 치며 단호히 말했다. "만약 이 일이 종남파와 관계가 있다면 응당 이노께 먼저 알려야 하오." 소불이는 그의 단호한 태도에 매우 가소롭다는 듯 어깨까지 들먹이며 다시 물었다. "만약 이 일이 가삼협과 관계가 있다면?" 가경성은 그럴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나 가모는 강호상에 나돌아 다니지도 않는데 무슨 경악적인 소식이 있다는 말이오?" 소불이는 마치 사람을 놀리듯 연신 웃었다. "그러나 이 경악적인 소식은 바로 가삼협의 신변에 일어난 일인데도 듣지 않으시겠소?" 그러자 가경성은 마치 심한 모욕을 받은 것처럼 화를 벌컥 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아니, 나 가모에게 무슨 그런 큰 경악적인 소식이 있다고 이렇게 추근대는 것이오?" 소불이는 두 손을 들어 가경성을 제지하며 이번에는 매우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내 한 가지 묻겠소이다. 지금 가삼협의 집 안에는 삼협을 제외하고 또 누가 있습니까?" 가경성은 매우 어이가 없다는 듯 냉소를 쳤다. "흥, 아니 누가 있건 없건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소불이는 머쓱한 듯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이 늙은이는 그저 아무렇게나 물은 것인데……" 그러더니 소불이는 슬쩍 가경성의 눈치를 살피며 이어 말했다. "가삼협께서는 그렇게 화를 낼 필요까지야 없지 않소?" 그러자 가경성은 아무런 흥미도 없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비록 친척들은 많다고 하나 지금 나 가모는 단 혼자 몸 뿐입니다." 순간 소불이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되도록이면 평탄한 어조로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가삼협 가문에는 일남 일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잘못……." 순간 가경성은 크게 놀라며 소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우 화가 난 듯한 어조로 소리쳤다. "뭐요? 아니, 그것은 왜 묻소?" 소불이는 이왕 여기까지 말을 꺼낸 이상 조금도 물러서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가 여태까지 물은 이유라면…… 가삼협, 좀 듣기가 거북하더라도 참고 들어 주십시오. 이 늙은이가 듣기로는 가삼협의 부인께서는 삼 년 전에 돌아가시고…… 이어 가삼협의 딸 아이도 선후로 해서 죽었다는데 그것에 대해 가삼협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주위에 둘러섰던 사람들은 소불이에게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다. 마치 그 눈초리들은 무엇 때문에 이러한 짓궂은 질문으로 가경성의 아픔을 건드리냐 하는 듯 했다. 이때 가경성은 안색이 싹 변해 입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어 그는 마치 억지로 마음 속의 울분을 참는 양 입술을 확 깨물더니 악을 쓰듯 내뱉았다. "집 사람은 병 때문에 삼 년 전에 죽었으며, 아들은 홍역 때문에 죽고 딸 아이는 우물에 빠져 죽었는데 내가 무엇이라고 그 죽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운운할 수 있겠소?" 그러자 다음 순간 가경성은 두 눈을 확 감더니 마음의 흥분을 진정시키며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소친구께서는 이제 그만 얘기하길 바라오." 그러나 소불이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엇인가 캐내려 하는 의지같은 것이 그의 얼굴에는 잔뜩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저는 가삼협의 상처를 건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가삼협의 부인과 자녀를…… 여기에 무슨 석연치 않은 의문이 있다는 말입니다……." 순간 가경성은 소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려 버렸다. "제발 이제는 그만 두시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소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좋소. 이제는 가삼협께는 더 이상 묻지 않겠소. 그렇다면 내 이분 선노형께 한 번 묻겠소이다." 그러더니 소불이는 선소경을 매섭게 쏘아보며 따지듯 물었다. "선노형, 가삼협의 식구들을 당신이 죽였지요?" 일순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이 숙연해졌다. 여러 사람들은 이제야 소불이가 그토록 가경성에게 따지고 캐묻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종남의 하직 가경성이 획 몸을 돌리며 몹시 경악을 했다. "소친구, 당신 지금 무엇이라고 했소?" 그러나 소불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소경은 이미 체념한 듯 얼굴에는 조금치의 변화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잘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렇소. 소불이, 당신의 말이 맞소. 내가 쫓겨난 것은 바로 가경성 때문이오. 그래서 내가 그의 처자식을 죽였소. 하지만 이게 어째서 틀렸다는 말이오?" 가경성이 이 말을 듣자 분노를 금치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너였구나! 어서 모가지를 내놓아라!" 말하면서 그는 갑자기 손가락을 갈퀴처럼 세워 가지고 선소경의 머리를 향해 찍어갔다. 다음 순간, 곡영자가 갑자기 날아와서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만류했다. "가삼협, 잠시 참으시오. 이 사람을 지금 죽여서는 아니 되오." 하지만 가경성은 흥분한 나머지 아무 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듯 재차 덤벼들었다. "이놈, 죽어라!" 그러나 갑자기 그는 목덜미가 찬물을 만난 듯 싸늘해짐을 느꼈다. 마치 하나의 차가운 쇠사슬이 자신의 목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가경성이 깜짝 놀라 멈칫 서며 목덜미를 바라보니 지금 자기의 목을 감고 있는 것은 바로 한 마리의 금색 빛을 띠고 있는 가느다란 뱀이었다. 그래서 가경성은 더 이상 날뛰지 못하고 억지로 흥분된 마음을 눌렀다. 곡영자가 웃으며 입에 거품을 물고 씨근거리는 가경성에게 말했다. "그렇지. 가삼협께서 움직이지만 않으면 물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종남파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며 일순 분노를 느꼈다. 이어 오른쪽 노인이 두 눈을 부릅뜨며 대뜸 소리쳐 물었다. "친구, 이것은 대체 무슨 뜻이오?" 곡영자는 그냥 싱굿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노부는 다만 명령을 받고 일을 하기 때문에 노부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소이다." 그러자 왼쪽 노인은 오른쪽 노인을 향해 잠시 참으라고 한 다음, 선소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는 도대체 어떤 악독한 수법으로 가경성의 처자식을 죽였느냐?" 이때 소불이가 불쑥 앞으로 나서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또 이노께서 물으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이 늙은이는 무엇을 합니까?" 왼쪽 노인은 잊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아, 내 정신이 없구려. 자, 이제는 당신이 물어보시오." 그러자 소불이는 만족한 듯 씨익 웃으며 하지만 조금 미안한 듯 멋적게 말했다. "뭘요. 사실상 이 늙은이는 완전히 당신네들 파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더니 선소경을 향해 묻기 시작했다. "자, 그럼 선소경 당신은 가경성을 먼저 죽였소, 아니면 그의 처자식을 먼저 죽였소?" 순간 선소경은 어이가 없는 듯 소불이를 쳐다보며 두 눈을 굴렸다. "아니, 당신? 가경성이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오?" 그러나 소불이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내뱉았다. "호, 그래?" 갑자기 선소경이 대소를 터뜨리며 매우 원한에 사무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하하하……하하하…… 그렇지. 내 잊을 뻔 했소. 내가 가경성을 먼저 죽이지 않은 것은 그가 두 눈을 뜨고 버젓이 살아서 그의 처자식이 차례차례 죽어가는 것을 몸소 보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왼쪽 노인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런 천하에 다시 없을 악독한 놈 같으니라고!" 그러자 소불이는 왼쪽 노인에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금도 악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왼쪽 노인이 무엇이라고 말을 할 것 같은 표정을 무시하며 다시 선소경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선가 놈이란 작자는 정말 일생일대의 보기드문 바보같은 놈입니다." 선소경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어째서 본인이 바보같다는 말이오?" 소불이는 매우 동정한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아니, 당신은 정말 모르고 있소?" 선소경은 도대체 모르겠다는 듯 약간 짜증섞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러자 소불이는 슬쩍 웃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는 조심조심 말했으나 그 말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폐부를 콕콕 찌르는 듯한 말이었다. "이 늙은이는 이미 당신이 전에 무명도를 위해 잠시 종남파의 장문인이 되어 일을 했을 때 그것이 잘못되어 무명도로부터 파면당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아니, 파면만 당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당신의 머리까지 날려버릴려고 했다는 것도 알고 있소." 순간 선소경은 마치 집어 삼킬 듯 소불이를 주시하며 짧게 물었다. "그래서?" 소불이는 나직이 웃으며 귀신도 자기를 속이지 못한다는 투로 얘기했다. "그래서? 그렇다면 이 늙은이의 말이 틀렸다는 말이오?" 선소경은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럼 당신에게 어떤 증거라도 있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 물론이지." 선소경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물론이라고?" 소불이는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은근한 투로 물었으나 그것은 협박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왜 믿지 못하겠소?" 이번에는 선소경이 소불이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아, 물론이지." 그러자 소불이는 굽혔던 허리를 펴더니 마치 모든 사람이 들으라는 듯 또렷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좋다. 그렇다면 내 얘기해 주지. 당신은 종남에서 쫓겨나자마자 즉시 동사도에 가입했을 것이오. 아니 이미 가입을 했지. 그리고 당신은 종남파에서 쫓겨날 때 많은 교훈을 얻었기 때문에 처신이 조심하게 되어 자연 동사도주의 눈에 들어서 드디어는 자신을 종자기로 변장을 해 종남파의 장문인이 되게 만들었지." 그리고는 일순 말을 끊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이때 모든 사람들은 일시에 눈을 빛내며 도대체 어떤 말이 소불이의 입에서 떨어질 것인가를 기다리며 모두 긴장해서 숨을 죽였다. "그런데 동사도주가 당신을 파견한 주된 이유가 바로 당신으로 하여금 종남파의 사람을 하나 둘씩 제거를 하라는 거였지. 그러나 당신에게는 일말의 양심이라는 것이 살아 있어 당신이 종남파에 몸담고 있을 때, 이노의 깊은 애호를 받았기에 이노는 물론 사형제간의 우정도 매우 두터운 까닭에 가삼협의 처자만 죽이고 나머지에겐 차마 독수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선소경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을 했다. "그렇소." 이때 소불이는 가경성을 슬쩍 훔쳐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한 당신은 동사도에서 당신을 도와주라고 파견한 사람의 처자식까지도 다 죽였지. 그래 동사도는 당신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던 것이다." 이에 선소경은 조금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 사실을 다 알게 되었소?" 소불이는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며 영문을 몰라 하자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 그야 간단하지. 동사도에서 파견해 온 사람은 아마 부장문일일 거요. 그리고 그들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당신의 장문 신분을 그 파견한 자에게 넘겨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꾸밀 작정이었소." 이때 가경성이 자기 얘기가 나오자 급히 변명하려고 했으나 목에 금사가 감겨 있기 때문에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입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이놈! 소파야, 너 지금 무슨 허튼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그러자 소불이는 고개를 돌려 가경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봐, 정 시끄럽게 군다면 그 금사에게 너의 숨통을 끊어 놓게 만들 테다. 알겠느냐?" 가경성은 이 말을 듣자 절로 몸을 추스리며 과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불이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파견한 자는 동사도의 지시를 받고 원래의 선노형, 당신만 죽이려 하지 않고 공을 더 세울 욕심으로 나머지 사람들도 전부 다 숲 속의 기독에 걸려 죽이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매우 손쉽게 종남 오협을 죽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종남 이노까지 죽여 선노형이 지난 삼 년 동안에 하지 못했던 일을 자기가 단 하루만에 해낼려는 계획을 세웠지." 이때 오른쪽 노인이 이 소리를 듣자 벌컥 화를 내며 가경성을 쏘아보았다. "이놈, 가경성! 그 말이 정말이냐?" 그러자 소불이가 대신 나서서 히죽 웃으며 선노경의 앞에서 물러났다. "히히히……, 이노, 그것은 이분 선장문인께 그가 대체 누구인가를 물어보는게 나을 것입니다." 오른쪽 노인은 눈이 왕방울 만큼 커져 소불이와 가경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소친구, 그는 가경성이 아니라는 말이오?" 소불이는 여전히 웃으며 대꾸했다. "가삼협은 삼 년 전에 벌써 해를 당했으니 지금 이분 가삼협은 아마 동사도의 사람일 것입니다." 이어 오른쪽 노인이 가경성을 향해 채 물어보기도 전에 선소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그 말이 맞소. 가경성은 분명히 삼 년 전에 내가 죽였소. 그리고 지금의 가경성은 바로 도주문하의 다섯 째 제자 위여풍(威如風) 이오!" 순간 가경성은 안색이 싹 변해 어쩔 줄 모르고 심히 분해했다. "이……이놈! 선소경, 감히 배반을 하다니……." 그러자 선소경은 짐짓 가소롭다는 듯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내 벌써부터 염교주가 너를 파견해서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대로 얘기를 하자면 내가 여태껏 사형제를 죽이지 않은 것도 바로 너의 교주가 나를 그렇게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하.……" 말을 끝내고서도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선소경을 보자 가경성은 이제 끝장이 났다는 듯 뿌득뿌득 이빨을 갈았다. "이놈, 본문의 기밀을 누설시켰으니 너는 죽어도 마땅하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경성이 갑자기 왼손을 펼치자 수많은 은침이 빛을 발하며 선소경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선소경은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슴에 독침을 맞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바로 이 순간 가경성이 역시 땅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오른쪽 노인은 몹시 경악하여 가경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이자는 웬일인가?" 소불이가 히죽거리며 대꾸했다. "히히히…… 독을 삼켜서 죽었소." 이 말에 오른쪽 노인은 화를 벌컥 내며 매우 아쉬운 듯 위여풍을 노려 보았다. "생각지도 않게 이렇게 쉽게 죽다니!" 소불이는 당연한 듯 그의 목을 가리켰다. "그는 이미 금사에게 목을 졸려 있었으니 이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래 독을 삼켜 자결하는 수밖에 딴 도리가 있겠습니까?" 오른쪽 노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제갈명에게 읍을 하며 매우 감사해 했다. "제맹주께서 이렇게 우리 종남파의 위기를 구해 주셨으니 그 은혜 가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노부가 우리 종남 전체를 대표해서 감사를 드리겠소." 제갈명도 급히 따라 예를 취하며 말했다. "이노께서는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무림맹을 세운 목적이 바로 온 무림을 괴롭히는 무명도와 대항을 해 무림 동도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귀파를 위해 주었다는 것은 결국 우리 무림맹이 그만큼 적의 힘을 죽였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때 왼쪽 노인이 나서며 말했다. "참, 그렇군요. 우리 종남파도 무림 속의 문파이니 물론 무림맹에 가입해 무명도에 대항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맹주께서 만약 분부가 계시면 연락을 해주십시오. 이 종남 제자는 어디든지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제갈명은 매우 감격했다. "노선배님께서는 별 황송한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리고 저희 무림맹은 내년 정월 초에 진강에서 정식으로 창립을 선언하니 귀하께서는 그때 꼭 참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왼쪽 노인은 사람좋게 웃으며 쾌히 승낙했다. "하하하…… 좋소. 노부는 반드시 형제들을 데리고 약속된 장소로 가겠소." 제갈명은 크게 기뻐하며 다시 한 번 읍을 했다. "이노께서 그토록 쾌히 승낙을 해주시니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때 왼쪽 노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육연생!" 그러자 육연생은 급히 대답을 하며 총총히 걸어왔다. 이어 왼쪽 노인은 품 속에서 고옥령전(古玉令箭)을 꺼내 육연생에게 건네주었다. "나라에서는 하루라도 왕이 없어서는 안 되며,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문파에도 영도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자네가 대사형이 구출해 나오기 전까지 잠시 장문인의 직책을 맡고 있거라." 육연생은 대답을 하더니 즉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두 손으로 공손히 고옥령전을 받아서 품 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자 왼쪽 노인은 제갈명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자, 그럼 이분 제맹주께 인사를 드려라." 육연생은 제갈명을 향해 읍을 했다. "형제, 제맹주께 삼가 인사드립니다." 제갈명도 급히 한 발 다가가 읍을 했다. "형제 제갈명도 이후 육형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갈명이 다시 소불이, 당승무 사람들을 소개시키자 육연생도 자기의 형제들을 차례차례 소개시켰다. 이어 육연생이 여러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맹주님과 여러 노형들께선 종남에 오시느라 매우 힘드셨을 테니 잠시 폐파의 능소각(凌宵閣)에 가셔서 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자 제갈명은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육형의 호의는 매우 감사합니다만 본맹은 내년 정월 초에 창립을 하게 되어 이제 얼마의 여유가 없으니 우리는 빨리 진강으로 가야 합니다. 육형, 매우 죄송합니다." 육연생은 얼굴에 몹시 서운한 빛을 띠며 제갈명의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군요. 하지만 내년 정월에 형제들은 반드시 진강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제갈명도 같이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인 후 종남 이노와 육연생등의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는 곧 산 밖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산 아래를 다 내려오고 나서야 소불이가 불현듯 제갈명에게 나직이 말했다. "맹주, 맹주께 한 가지 긴요한 말을 할 게 있습니다."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계속 앞을 향한 채 대꾸했다. "어서 말씀해 보시오." 소불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에게는 사마장홍이라는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소석윤 빙장 지하실에서 실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늙은이가 그의 암호를 따라 쫓아가다가 제맹주를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맹주와 일이 얽히는 동안 그 일을 내버려 두었는데 이제 다시 기회가 온 것 같으니 그의 행방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제갈명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뜻 승낙을 했다. "그러시다면 열 일을 제쳐 놓고라도 가보셔야 되지 않습니까? 소호법께서는 어서 지체 마시고 가 보십시오." "맹주, 매우 감사하오." 이때 당승무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끼어 들었다. "맹주, 저도 소노대를 따라 가겠습니다." 그러자 소불이는 쥐눈을 부릅뜨며 짐짓 엄하게 꾸짖었다. "노제, 안 된다. 노제는 진강에 가서 맹주를 도와 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마장홍은 이 늙은이 혼자서라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당승무는 고개를 저으며 마치 어린 아이가 떼를 쓰듯 완강히 거부했다. "아닙니다. 소노대, 사마노인께서는 전날 저를 위해 이틀 밤낮을 꼬박 휴식도 취하지 않으시고 암기를 만들어 주셨는데 어찌 제가 그분이 잡혀가신 것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에겐 그 분을 구해야 할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추척만리 소불이는 당승무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할 수 없이 승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노제, 같이 가자." 이때 곡영자가 한 개의 동관과 세 개의 금색 알을 당승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노제, 이것을 가지고 다니면 위급한 사람을 구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당승무는 이 물건을 알고 있었다. 동관은 바로 무명도가 전문적으로 독물을 죽이는데 쓰려고 만든 멸독 분통이며 세 개의 금알은 바로 옛날 화신 나선의 벽뢰자였다. 그러나 당승무는 그 물건들을 받지 않았다. "아닙니다. 대사백, 제자는 벌써 독공을 연마했으니 이 물건들을 그냥 남겨 두셨다가 무명도를 상대할 때 사용하십시오." 이때 소불이가 당승무 대신 곡영자의 수중에 있는 분통과 한 알의 벽뢰자를 받았다. "물건은 이 늙은이가 받겠소이다." 그러더니 물건을 받아 품 안에 넣고는 이어 말했다. "이 벽뢰자는 옛날 화신 나선의 물건으로 강호에서 극히 보기 드문 희귀한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알만 가지고 갈 테니 나머지 두 알은 노형이 거두어 계시다가 무명도와 싸움을 할 때 쓰십시오."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알의 벽뢰자를 다시 품 안에 집어 넣었다. 이어 소불이와 당승무는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에 길을 떠났고, 나머지 사람들도 즉시 진강을 향해 치달았다. 며칠 후, 소불이와 당승무는 다시 효산 소석윤으로 되돌아 왔다. 이들이 이곳을 떠난지는 약 반 달 정도 뿐이었는데 소석윤은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겪은 양 그 산간에 살고 있던 많은 촌민들은 이미 한 사람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거대하고 찬란하던 빙장의 웅장한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다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부서져 버린 기왓장과 타다 남은 가구들 뿐이었다. 마치 옛날 동사도의 그 모습을 재연시키는 것 같았다. 소불이는 이 처참한 모습을 보자 참지 못하고 분노를 일으켰다. "음, 괘씸한 놈들. 이것은 분명히 무명도의 짓일 것이다." 당승무는 매우 숙연한 기분이 되어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다가 소불이가 매우 분해하자 영문을 몰라 물었다. "소노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소불이는 잿더미가 되어버린 빙장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흥분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아마 여세진이란 놈이 소노반이 사흘 후에 찾아간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실종된 것에 격분한 나머지 빙장을 태웠을 것이다." 당승무는 매우 놀라 빙장에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그렇다면 저 앞에 있는 인가들은 어떻게 되어 한 채도 없습니까!" 소불이는 격분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연신 씨근댔다. "촌락들도 전부 그놈이 태웠을 것이다!" 순간 당승무는 멍해지더니 이내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 "여세진 이놈, 다음에 만나게 되면 내 너를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 소불이는 바람에 날리는 재를 바라보며 묵묵히 있다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여세진은 비록 죽일 놈이지만 그러나 한 가지 일은 증명되었다." 당승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물었다. "그렇군요. 사마노인장은 여세진이 납치해 간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러나 당승무는 다시 어두운 표정이 되어 매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소노대, 무명도의 사람들이 납치해 간 것이 아니라면 찾기가 매우 곤란하지 않을까요?" 소불이는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렇기야 하겠지만 우리는 기왕 왔으니 납치해 간 놈이 누구인지 반드시 단서를 찾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소노대께서는 벌써 단서를 잡으신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순간 얼버무리더니 당승무의 손을 잡아 끌며 화제를 바꾸었다. "단서는 무슨 단서인가? 자, 노제 우리 차나 한 잔 마시러 가자." 그러나 당승무는 매우 이상한 듯 그 자리에 우뚝 서며 물었다. "아니, 어디에 가서 차를 마신다는 말씀입니까?" 소불이는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 찻집에 가야 차를 팔지 않나?" 당승무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폐허의 공지가 된 사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 근처에 찻집이 있습니까? 이렇게 잿더미고 변한 곳에 말입니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곳엔 없지. 그러나 성 안에 들어가면 있다." 당승무는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물었다. "겨우 차 한 잔 마시려고 성 안까지 들어간다는 말씀입니까?" 소불이는 돌아서 걸으며 마치 산천초목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말했다. "이렇게 우울할 땐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시름을 달래는 것도 인생의 낙이라 할 수 있지." 당승무는 이제야 소불이에게 반드시 무슨 꿍꿍이 속이 있어서 찻집에 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더 이상 묻지도 말을 걸지도 않고 소석을 떠나 낙령(洛寧)으로 향했다. 낙령은 하나의 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작은 현이었다. 성 안은 길이 좁아서 사람들의 왕래가 뜸했으나 다만 동쪽 길과 북쪽 성만이 좀 복잡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찻집과 술집 그리고 좀 규모가 큰 상점들이 전부 다 이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소불이는 성 안으로 들어와 당승무를 데리고 북쪽에서 동쪽까지 전부 다 돌아본 결과 낙령성에는 다만 하나의 객점과 두 개의 찻집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런데 소불이는 분명 찻집을 가자고 해놓고 객점을 들어갔다. 당승무는 저녁 때도 되지 않았는데 소불이가 객점에 들어가자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노대, 분명 아까 차를 마시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소불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마셔야 하지. 그러나 먼저 발 붙일 곳을 찾아야 되지 않겠나?" 이때 점원은 소불이가 들어가자 몹시 멸시에 찬 눈으로 힐끔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손님들은 독방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합숙을 원하십니까?" 소불이는 점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대뜸 물었다. "이곳에서 제일 좋은 방은 없느냐?" 점원은 매우 기가 찬 듯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아무렇게나 대답을 했다.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세 푼의 은자가 드는데요……" 소불이는 점원을 밀치듯 들어가며 말했다. "좋다. 안내하라!" 점원은 소불이의 행색으로 보아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흥, 너 같은 초라한 늙은이가 감히 제일 좋은 방을 찾다니……." 그러나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방을 안내하는 그였다. "손님, 이 방은 앞 뒤에 창문이 있고 또한 매우 넓어 편리합니다. 우리 객점 안에는 이 같은 방이 세 칸이 되는데 모두 전문적으로 관가의 귀빈만이 투숙하는 곳입니다." 소불이는 그 방이 눈에도 안 찬다는 듯 싸늘히 냉소했다. "흥, 겨우 이따위 방에 관가의 귀인이 투숙한단 말이냐?" 점원은 소불이가 점점 못마땅해 하는 것을 보자 몹시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니, 나으리께서는 지금 이 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 소불이는 점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밀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만 두어라. 비록 가히 좋은 방은 아니다만 방이 없으니 이 방을 쓰겠다." 점원은 다시 물었다. "손님들께서는 짐은 없는지요?" 그러자 소불이는 소맷자락 속에서 하나의 육중한 돈주머니를 땅! 하는 소리와 함께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짐은 없고 다만 이 하나의 돈주머니 밖에 없다. 이 안에는 적어도 칠팔십 냥의 황금이 들어 있다. 지금 이 늙은이는 이것을 갖고 다니기가 몹시 불편하니 너희 주인께서 보관을 좀 해 주셔야겠다." 말하며 소불이가 돈주머니를 열자 그 속에는 과연 한 백냥 가량의 황금이 들어 있었다. 점원은 이것을 보자 순간 멍청해지더니 그 태도가 갑자기 백팔십도로 바뀌었다. "손님, 어서 이리 앉으십시오. 제가 가서 차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소불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필요 없다. 우리는 찻집에 가서 마시겠다." 이어 품 속에서 한 덩이의 은자를 꺼내 점원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것은 자네가 넣어두게." 점원은 더욱 멍청해졌다. 이 한덩이의 은자는 적어도 두냥가량은 된다. 그는 꿈 속에도 생각하지 못할 이런 큰 거액을 더구나 이처럼 더럽고 초라한 늙은이가 줄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소불이는 돈을 받은 점원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당승무와 객점을 빠져 나와 북쪽 성에 있는 홍릉원(弘凌園)이라는 찻집을 향해 걸어갔다. 흥릉원의 문이 보이는 얼마 쯤의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소불이가 허리를 굽혀 신발을 신는 척 하더니 소맷 속에서 하나의 낡은 그릇을 꺼내 담 구석에 놓았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또다시 그 그릇 위에 하나의 대나무 젓가락을 올려 놓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 순간, 소불이의 동작은 정말 매우 빨라 다른 사람들은 그가 신발을 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뒤에 따르고 있던 당승무는 이 광경을 놓치지 않고 아주 자세히 보았기 때문에 매우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당승무는 대체 소불이가 어디서 저 낡은 그릇과 대나무 젓가락을 가져 왔는지 몰랐고 또한 그루 위에다 대나무 젓가락을 올려 놓은 그 의도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소불이는 다만 아무런 소리도 없이 일을 끝낸 다음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는 찻집을 향해 걸어갔다. 찻집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깨끗하고 넓은 계단이 었다. 아랫층의 손님들은 장사치나 무식한 사람들이었기에 매우 시끄러웠다. 소불이는 그들을 한참이나 훑어보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여 당승무와 이층 계단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층은 매우 조용했다. 하기야 이때는 벌써 늦은 오후였고 가장 손님이 없을 때이기도 했다. 소불이와 당승무가 한 자리를 찾아서 앉자 점원이 다가와 공손하게 물었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소불이가 대답했다. "향편차." 점원은 다시 물었다. "식사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조금 있다가 시키겠네." 점원은 굽신거리고 물러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주전자의 차와 한 접시의 과자를 가지고 왔다. 소불이는 찻주전자를 들고 당승무의 찻잔에 따라 주고 나서 자신의 찻잔에도 따랐다. 소불이는 당승무가 약간 얼빠진 사람처럼 안을 신기하게 둘러 보자 웃으며 물었다. "노제, 자네는 처음으로 찻집에 와 보았나?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몹시 신기해 했다.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자네의 사천에는 집 안에 찻집과 요리집이 있으니…… 그런데 사천 사람들은 밥을 먹지 않아도 되지만 차를 마시지 않고는 못 견딘다고 하더군." 당승무는 약간 아리송한 얼굴로 재미없게 대꾸했다. "차를 마시는 것은 갈증을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찻집을 찾아 마신다고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소불이는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찻집에 오는 것은 결코 갈증을 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노제는 찻집에 좀 많이 다니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말하면서 소불이는 차를 그냥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젓가락을 찻잔 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당승무는 아까 소불이가 찻집에 들어오기 전 낡은 그릇에다 젓가락을 을려놓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다시 소불이가 그 짓을 반복하자 매우 이상해 하며 물었다. "소노대,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소불이는 다만 싱긋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당승무는 소불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할 수 없이 더 이상 묻지 않고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소불이는 별로 초조해 하지 않으면서 계속 차만 마시는 것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말없이 같은 동작만 되풀이하는 동안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났다. 이때 계단 입구에서 하나의 죽포장삼을 입은 중년대한이 올라오더니 소불이를 향해 걸어왔다. 그 대한은 소불이를 발견하자마자 미처 소불이가 아는 척을 하기도 전에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바로 소불이의 옆에 와서 앉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불이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들고는 한 손으로 아랫턱을 받치며 그 사나이를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중년대한은 앉자마자 찻잔 위에 놓인 젓가락을 집어 내밀며 물었다. "노형, 무슨 일로 저를 찾았습니까?" 소불이는 그래도 아랫턱을 받치고 있던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며 짧은 신음만 내었다. 중년대한은 이 모습을 보자 깜짝 놀라며 공손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 어르신네께서 오는 줄도 모르고 정말로 소인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 있으신지……?" 이때 당승무는 갑자기 변한 그 대한의 태도를 보고 암암리에 이상하게 여기며 중얼거렸다. '아니, 대체 이 사나이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 소불이는 다만 그 대한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이 늙은이는 동쪽의 열래 객점에 묵고 있다." 대한은 연신 굽실거리며 대답을 하더니 신속하게 일어나 내려가 버렸다. 이에 당승무는 다시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째 한 마디도 없이 가버리지? 그런데 소불이도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천천히 차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소불이는 예리한 눈초리를 굴려 오른쪽에 장기를 두고 있는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깐, 소불이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급히 말했다. "노제, 우리 그만 가 보세." 당승무는 하도 심심해서 그의 말을 듣자 군말없이 즉시 일어났다. 소불이는 품 속에서 몇 푼의 동전을 꺼내어 상 위에 올려 놓은 다음에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찻집을 나서자 당승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노대, 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소불이는 부지런히 길을 걸으며 대꾸했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일 전 한 푼의 값어치도 없다. 왜냐면 그 놈은 도둑놈이니까." "네?" 당승무는 짧게 대답을 하더니 알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렇다면 소노대께서는 무슨 일로 그를 찾으셨습니까?" 소불이는 부지런히 길을 걷다가 당승무에게 시선을 돌려 싱긋 웃었다. "노제, 이 늙은이가 바로 그 도득놈들의 할아버지라는 것을 잊지 말게." 그제야 당승무는 갑자기 깨달은 듯 가벼운 탄성을 올렸다. "아! 그렇군요. 소노대께서는 그 사람더러 사마노인장의 행방을 알아내라고 명령한 것이군요." 소불이는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나도 찾지 못하는데 그들이 어찌 찾을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를 찾았습니까?" 소불이는 짧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약간 귀찮은 듯 대꾸했다. "그더러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 당승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소불이는 웃으며 당승무에게 일별을 보냈다. "노제도 아마 그를 알고 있을 것이다." 당승무는 궁금한 마음에 그 사람을 자기도 알고 있다는 말에 금세 두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네? 저도 알고 있다고요?" 오리무중 소불이는 잠시 숙연해 있더니 염소 수염을 배배꼬며 말했다. "노제, 벌써 잊었느냐? 그날 밤 우리가 장노인의 방 안에 숨어 있을 때 어깨 위에 장검을 메고 있던 동자가 벽돌을 옮기고 들어가자마자 이 늙은이도 뒤따라 가서야 지하성보를 발견했지 않았나?"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날 그 동자는 소노반의 사람도 아니고 또한 무명도의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또한 그날 밤에 한 번 보고 다시 만나지 못했으니 과연 어디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느냐?" 당승무는 침중하게 두 눈을 굴리더니 단언하듯 물었다. "소노대의 뜻은 그가 바로 사마노인장을 납치해 갔다는 말입니까?" 소불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소노대, 그렇다면 그 사람을 대체 어느 패거리의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까?" 소불이는 깊이 생각하는 듯 눈알을 굴리며 침중하게 내뱉았다. "그는 이 홍채문과 무명도 쌍방의 엄중한 감시 아래 소노반을 납치해 가고 또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을 보니 강호상에서 꽤나 유명한 패거리들 같다. 그리고 지금 이 늙은이의 생각으로 그들은 당시 홍채문과 무명도의 눈을 가릴 수는 있었지만 사람은 절대로 데리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사람이란 바로 사마노인장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까?" "물론 사마장홍이지. 그들은 그 당시 그 두 패의 눈을 속이느라 매우 급급하여 사마장홍을 데려가지는 못하고 성 안 어딘가에 숨겨 놓았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매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 정말 그렇군요." 소불이는 당승무가 철없이 좋아하자 싱긋 웃으며 다시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노제, 좋아하기엔 아직 이르다. 지금 벌써 반 달이나 지났으니 그들이 데려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당승무는 또 금시 풀이 죽어 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슨 수로 사마노인장을 찾지요?" 소불이는 걱정말라는 듯 당승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서 내 아까 그놈더러 찾으라고 한 것이 아니냐? 그 도둑놈의 눈이 매우 밝아 성 안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의 눈을 피할 수가 없다." 당승무는 감탄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소노대에겐 많은 수하들이 강호상에 분포되어 있군요." "왜 이 늙은이가 부하까지 둔 도둑 두목인 줄 아느냐?" 당승무는 소불이가 그렇게 달가와 하지 않는 것을 보자 약간 멋적어 하며 물었다. "소노대의 수하가 아니라면 어째서 그렇게 말을 잘 듣습니까?" 소불이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어떤 파처럼 그 조직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조사의 규칙에 따라 어딘가에 직업이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전부 도와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까 소노대께 매우 공손한 것 같던데요?" 소불이는 순간, 얕은 기침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이 늙은이의 족보가 그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까 내가 그 찻집에서 만진 것이 코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머리를 긁었다면 그는 아마 놀라 나자빠졌을 것이다."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호기심이 일어 눈을 반짝였다. "네? 대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소불이는 슬쩍 웃으며 얕은 기침을 몇 번인가 했다. "코를 만진 것은 그들의 선배란 뜻이고 머리를 긁는 것은 바로 도둑놈들의 조상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에 어느덧 객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점원은 소불이가 돌아온 것을 보자 즉시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이제 돌아 오셨습니까?" 하더니 점원은 소불이가 미처 분부를 내리기도 전에 방문을 열어주며 불을 켜 주고 이어 차를 날라오는 등 시중을 들기에 바빴다. "손님, 저녁 때가 다 되었는데 소인이 가서 준비할까요?" 소불이는 매우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제일 맛있는 것으로 가져오너라." 점원은 다시 물었다. "술은 무엇으로 드시겠습니까?" "화주(化酒) 쯤이면 괜찮겠지" 점원은 대답을 하고는 즉시 물러갔다. 다시 얼마되지 않아 소불이와 당승무가 준비된 음식을 먹기 시작할 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굵직한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소인 강칠(姜七) 입니다." 당승무가 그 소리에 얼른 문을 열고 보니 아까 찻집에서 만난 중년대한이었다.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강칠은 들어와 즉시 공손하게 읍을 했다. "이거 실례합니다." 소불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말을 건냈다. "오느라고 수고 많았네. 앉아서 한 잔 하지." "별말씀을 소인은 벌써 먹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소불이가 크게 웃으며 두개의 젓가락을 즉시 창 밖으로 날렸다. 그러자,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이어 소불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괘씸한 놈, 어서 이름을 대라!" 당승무는 창 밖의 사실이 궁금해 일어서려는데 소불이가 그를 제지하며 강칠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너 이놈, 이 늙은이가 누군지도 모르고 강호에서 굴러먹느냐?"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죽음을 선언하듯 말했다. "자, 똑똑히 기억해 둬라. 이 늙은이가 바로 소불이니라." 강칠은 이 소리를 듣자 놀라 즉시 무릎을 꿇었다. "이……. 이거 몰라 뵙고 정말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원래 소불이는 강호상의 도둑놈 중에서 배분이 극히 높았다. 그러니 지금 강호상의 도둑놈들은 전부 소불이의 제자와 손자뻘 되는 자들이었다. 소불이는 어조를 낮추어 타이르듯 말했다. "일어나라, 일어나. 나는 원래 내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밖에 있는 저놈 때문에 이렇게 되었구나. 자, 강칠 어서 일어나 앉아라." 강칠은 마지 못해 일어났지만 감히 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다. 소불이는 그런 강칠을 보고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자네를 부른 것은 한 가지의 일을 묻고자 함인데 자네 이렇게 서서 이 늙은이와 대화를 나누면 나중에는 이 늙은이의 목뼈가 굳어 버리지 않겠나?" 강칠은 이 소리를 듣자 암중으로 감탄을 했다. '저 분은 강호에서 그 이름을 날리는 도둑인데 이렇게 재미있는 구설까지 갖추고 있구나.' 그리고는 즉시 소불이의 옆에 앉았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점잖게 물었다. "자, 그럼 묻겠네. 자네는 이곳의 원주민인가?" '네, 그렇습니다." 소불이가 다시 물었다. "자네, 이 성 안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 강칠은 자신있다는 듯 즉시 대꾸했다. "예, 성안뿐만 아니라 성 밖 오십 리 까지도 훤히 알고있습니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물었다. "좋다. 그럼 이 일대는 누구의 세력 범위인가?" "여긴 누구의 범위에도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끄집어 내서 얘기한다면 망산파가 이곳과 가깝기 때문에 그들의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놈들은 여기에 잘 오지 않습니다." 소불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네가 여기의 두목이겠구만?" 강칠은 순간 얼굴을 약간 붉히며 겸연쩍어 했다. "소인은 본지에서 자리 잡고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형제들도 전부 다 낙양성에 있기 때문에, 하지만 무슨 일이든 분부만 내리십시오." "오, 그렇다면 더욱 좋다. 내 반달전의 일을 좀 묻고자한다." 강칠은 일순 눈동자를 굴려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렇습니다. 반 달 전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때 갑자기 많은 무림 인물들이 이곳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듣자하니 홍채문의 제문주도……." 소불이는 순간, 강칠의 말을 도중에서 끊으며 급히 물었다. "또 어느 패거리가 왔느냐?" 강칠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어 말했다. "자의문의 사람들도 온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순간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러나 강칠은 고개를 저었다. "그 다음은 잘 모릅니다." 소불이는 실망한 듯 입맛을 쓰게 다셨다. "그렇다면 성 안에 강호인이 투숙한 적은 없었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강칠은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의심할 만한 인물도 없었나?" 강칠은 몹시 안타깝다는 듯 그렇게 속시원히 대답할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듯했다. "여기는 단 하나의 객점 뿐이 없으니…… 아참, 그렇지 강호에서 약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여기서 며칠 묵은 적이 있습니다." 소불이는 순간 눈을 빛냈다. "자네는 그들을 알고 있나?" "모릅니다. 그때 그들의 일행은 모두 네 명이었으며 몇 개의 상자를 들고 있었습니다." 소불이는 강칠의 앞으로 얼굴을 바싹 갖다대며 다그치듯 물었다. "자네, 자세히 말해 보게." 강칠은 얼떨결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네 사람의 영도자는 왕마자(正痲子)라고 했으며 그리고 그의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왕요고라고 하며 또 두 명의 종업원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마자는 무공을 할 줄 아는지 한 번에 일곱 장의 벽돌을 깰 수가 있었으며 누이동생은 줄타는 것이 특기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두 명의 종업원은 다만 꽹과리를 치고 상자를 관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소불이는 무엇을 캐내려는 듯 잔뜩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던가?" "예, 사오 개의 상자가 있었는데, 그 중 한 개엔 옷가지가 들어 있었고 또 한 개에는 동물 즉, 원숭이 천산갑(穿山甲), 그리고 사람이 들어 있었습니다." 소불이는 믿기지 않는 듯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 안에 사람도 들어 있었다고?" 강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사실 그들 일행은 다섯 사람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원숭이와 같은 우리 속에 살고 있는 난장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던가?" 강칠은 약간 아쉬운 감을 내포하며 또한 동정하는 투로 말했다. "예, 그 얘기를 하자면 조금 안 된 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진짜 원숭이와 같이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체구는 비록 작았지만 생김은 아주 영준하게 잘 생겼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그를 좋아했답니다." 소불이는 약간 짐작이 가는 듯 눈알을 굴렸다. "그런데 그들은 어디로 간다고 하던가?" 강칠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당시 말하기를 장안에 간다고 했지만 소인은 그것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강칠은 이상하다는 듯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네께서는 왕마자 그들 때문에 오신 겁니까?" 소불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중하게 대꾸했다. "이 늙은이는 다만 사람을 찾으러 온 것 뿐이다. 어쩌면 그들과 관련이 없는지도 모르지만……." 강칠은 갑자기 어조를 높이더니 심각한 투로 얘기했다. "어르신네, 혹시 강호인이 한 짓 아닐까요? 그러니까 즉 자의문이나 홍채문과 같은… ,." 소불이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석윤 안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나?" "그렇습니다. 이상한 것은 바로 그점입니다. 우리는 십여 채의 집을 가보았는데 시체는 한 구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소불이는 이 말에 치를 떨었다. "이런 독랄한 놈들 같으니라고…… 소형산을 써서 시체까지 없애버리다니 내 이놈들을 그냥……." 강칠은 소불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만 번득이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네, 또 다른 분부는 없으십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매우 석연치 않은 대답을 했다. "없다. 그러나 이 늙은이가 알고자하는 것은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강칠은 두 손을 한 데 모으며 매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네에서는 대체 누구를 찾고 계십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암만 말해도 자네는 그사람을 모를 걸세." 강칠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소인은 이제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좋다. 가보아라." 강칠은 조용히 소불이에게 일례를 올리더니 다시 당승무에게 읍을 하고는 방을 나갔다. 강칠의 발자국 소리가 아주 멀어지자 당승무가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소노대, 사마노인장은 아마도 왕마자라는 일당에게 잡혀간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이 말에 눈을 크게 뜨며 급히 물었다. "노제,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나?"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을 서성였다. "소인은 그들이 가져 왔다는 몇 개의 상자가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이유는 만약 사람을 그 상자 어느 곳에 숨기기만 하면 딴 사람들은 누구라도 주의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소불이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떤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그들이 한 마리의 천산갑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도 아마 땅굴을 파기 위해서 데리고 다니는 것일 게다. 그리고 소노반을 납치해 간 지하 땅굴도 아마 그 천산갑이 한 짓일 것이다? 심야의 독충 당승무는 잠시 밑을 내려다 보았다. 이어 천천히 고개를 쳐들며 난처한 표정을 얼굴 가득히 띠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떠난 지가 벌써 반 달이나 되었는데 우리는 어디로 가서 그들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나 소불이의 표정은 여유작작했다. "아마 자네는 성동격서(聲東擊西)란 말의 뜻을 알고 있을 거네. 그것은 바로 수를 쓰는데 있어서는 가장 신묘한 거지. 다시 말해서 왕마자의 말로 장안으로 간다고 하지만 이 늙은이의 추측으로 필시 동쪽으로 갔을 것 같다는 거다." 여기까지 말한 그의 입가가 갑자기 굳어졌다. 이어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급히 당승무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큰일 났다. 빨리 가자." 당승무는 그에게 끌려 멍청히 걸어가며 벌린 입을 더욱 더 크게 벌렸다. "아니, 무슨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소불이는 미처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을 열어젖히며 단호하게 명령조로 말했다. "아무 소리 말고 따라오기나 해라," 당승무는 어안이 벙벙했다. 항시 괴팍스러운 소불이였지만 가끔씩 취하는 돌연한 행동에 항상 당승무는 넋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당승무가 그를 따라 객점을 나선지 얼마 안 되어 돌연 그의 시야에 저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구경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깜짝 놀란 당승무는 소불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앞서 그 인파 속으로 뛰어 들었다. 웅성웅성하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온 당승무는 그들 가운데 놓여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바로 강칠이었다. 이때 소불이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음, 우리가 한 발 늦었구나." 당승무는 이 말에 소불이를 슬쩍 훔쳐보았다. 소불이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시체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한 번 가서 살펴보자." 하며 쓰러져 있는 강칠의 옆으로 다가갔다. 강칠의 몸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로 소름이 오싹 끼치게 했다 새까맣게 변한 피부, 공포로 얼룩진 얼굴……. 이 모습을 보며 당승무는 절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소불이는 이 끔찍한 참상에도 조금도 동요되는 빛이 없이 천천히 손을 뻗쳐 그의 가슴을 만져보았다. 그의 가슴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소불이는 가슴을 몇 번 더듬어 보더니 시선을 그의 하체 쪽으로 옮겼다. 과연 그의 오른쪽 다리는 고무 풍선인 양 시커멓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밑을 따라 더 시선을 내려보자 그의 발등에 있는 조그만한 상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승무는 얼굴을 있는대로 찌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소노대, 이 자는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까?" "그렇다. 이 자는 극독무비한 추풍오소사(秋風烏燒蛇)에게 물린 것이다. 그런데 이 뱀은 광서지방의 깊은 산 속에만 있다 하던데……."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돌연 일진의 싸늘한 바람이 소불이의 뒷통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강호의 노련한 고수 소불이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순간, 소불이는 당승무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자, 이제 돌아가자." 하고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당승무의 어깨를 약간 밀며 날아오는 암기를 왼손으로 가볍게 막았다. 이어 손을 펴보니 그것은 가늘기가 쇠털 같은 하나의 가는 독침이었다. 이것을 본 소불이는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흠, 과연 묘인의 짓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그는 급히 사람들을 예리한 눈초리로 쓸어 보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를 찾아낸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잠시 동안 그렇게 서 있던 소불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당승무를 데리고 객점으로 돌아갔다. 물론 당승무는 소불이의 이러한 행동을 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묵묵히 소불이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할 뿐인 것이다. 어느덧 객점에 도착한 소불이는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방문을 열자마자 소불이는 대뜸 안색을 굳히는 것이었다. "누가 우리의 방에 들어 왔었구나." 당승무는 그의 뒤를 따라 걸어 들어가며 멀뚱멍뚱 사방을 둘러보았다. "노대께선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소불이는 잠시 눈썹을 곤두세우며 방 안을 주의깊게 살펴보더니 이내 히죽 웃었다. "이 늙은이가 그 정도도 모른 데서야 어찌 도둑의 할아버지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하며 성큼성큼 탁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 탁상 위에는 원래 하나의 종이 쪽지가 있었던 것이다. 소불이는 그것을 집어 들고서 급히 뜯어 보았다. '소형, 헤어진지 오래되어 벌써부터 뵙고 싶었소. 그런데 소형께서 마침 이곳으로 오셨으니 내일 저녁 사람을 파견하여 낙성 서문 앞에서 술좌석을 마련해 놓고 대접하도록 하겠소.' 고인(故人) 소불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고인이란 누구지?' 그러나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당승무는 이러한 소불이의 표정을 보며 나직하게 급히 물었다. "이 편지는 누가 남긴 것입니까?" "내일 저녁에 누가 저녁을 대접해 준다고 하네." 하고 말하면시 당승무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한데 바로 이때, "똑! 똑!" 하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소불이는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짧게 말했다. "들어오시오." 이어 삐익-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자는 다름아닌 바로 절원이었다. 소불이는 마음을 가라 앉히려 애쓰며 들어온 점원을 빤히 주시하였다. "이봐! 아까 우리가 나간 사이에 누가 들어 왔었느냐?" 점원은 이 말을 듣자 오히려 눈을 멀뚱멀뚱 굴렸다. "네? 무엇을 잃었습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멀거니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잠시 후에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다. 그냥한번 물어 본것 뿐이야……." 점원은 이상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슬금슬금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리고는 약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침묵 속에 흘러갔다. 이윽고 당승무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소노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소불이는 별 볼일이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가 편지에다 고인이라고 썼으니 아마 이 늙은이의 친구겠지." 당승무는 매우 흥미롭다는 듯 동그란 두 눈을 말똥말똥 굴렸다. "그렇다면 소노대께서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군요?" 소불이는 어디까지나 덤덤했다. "만나보면 알 수 있겠지……." "약속을 지킬 것입니까?" 소불이는 시선을 천정으로 옮겼다. "물론 지켜야지……." 당승무는 잠자코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을 하는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어 그는 돌연 무슨 생각이 났는 듯 심각하게 물었다. "저도 가야 합니까?" 소불이는 그 특유의 버릇으로 어깨를 들석이며 히죽 웃었다. "노제도 단서를 잡으러 온 사람인데 왜 가지 않으려 하느냐?" 그래도 당승무는 무언가 떨떠름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그의 편지에 제 얘기를 전혀 쓰지 않았지 않습니까?" 소불이는 또 히죽 웃었다. "노제는 이 늙은이의 제자로 변장을 해서 가면 된다." 그리고는 몹시 피곤한 듯 기지개를 길게 펴며 그대로 침상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이어 당승무도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 당승무는 벌떡 일어났다. 잠결에 그는 분명히 지붕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옆에서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소불이가 툭툭 치며 전음입밀로 말을 전해왔다. "노제, 소리내지 말아라." 그 말에 당승무는 조용히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다. '원래 소노대께서도 깨어 있었구나.'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들보 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서서히 침상 쪽으로 내려오는 게 아닌가. 당승무는 숨을 죽이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유심히 주시하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바로 하나의 주먹 만한 독거미였다. 소불이는 이 광경을 보자 즉시 멸독 분통을 꺼내 가볍게 눌렀다. 다음 순간,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독거미의 위에 뿌려졌다. 그러자 독거미는 금시 경련을 일으키며 땅에 떨어져 죽어 버리는게 아닌가. 당승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멸독 분통 안의 약은 정말로 무섭구나. 주먹만한 거미가 순식간에 죽어 버리다니…….' 당승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또 다시 스르륵! 하는 가벼운 음향이 귓가에 들려왔다. 이번에는 네다섯 마리의 커다란 왕지네들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불이는 다시 분통을 꺼내 힘껏 눌렀다. "치익-익!" 이어 탁!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토막인양 그 왕지네들은 힘없이 땅에 떨어져 버리고야 만 것이다. 다음 순간, 소불이가 침상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늙은이는 내일 아침 일찍 어디를 가야 하리 친구께서는 더 이상 장난을 하지 마시오." 하고 소불이가 호통을 치자마자 지붕 위에서 즉시 떠나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어 소불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당승무는 그의 이러한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소불이를 불렀다. "소노대……!" 그러나 소불이는 그를 외면하며 돌아눕고는 한 마디 불쑥 던졌다. "별일 없다. 내일 그들의 후인을 만나야겠으니 일찍 자라." 어느새 날이 밝았다. 소불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죽은 거미와 왕지네들을 보자기에 쌓아넣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준비와 숙박비를 지불한 두 사람은 발걸음을 급히 옮겨 낙양을 향해 떠나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해는 벌써 중천에 떠올라 벌써 정오가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때 쯤 이들은 이미 의양(宜陽)에 도착해 있었다. 이들은 몇 시간을 걸었기 때문에 몹시 피곤하여 객점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이때, 한 점원이 급히 이들을 향하여 달려왔다. 그리고 웃으면서, "어르신네께선 혹시 소어르신네가 아니십니까?" 소불이는 턱을 몇 번 주억거렸다. "그렇소만 당신은……." 점원은 만면에 기쁜 빛을 띠며 자기의 객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객점에선 벌써 술좌석이 마련되어 두 분을 기다리십니다. 두 분께서는 어서 저를 따라 오십시오." 말하면서 그는 앞서 한 객점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서 두 명의 점원이 쪼르르 나오더니 만면에 희색을 띠며 그들을 이충으로 안내했다. 이때가 바로 정각 열두시였다. 때가 때인 만큼 객점 안은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의양이 낙양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지나가는 행상인들이 전부 여기에서 쉬고 가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꽉찬 좌석 가운데 제일 좋은 좌석 하나가 비어 있었다. 점원은 그 좌석 가까이 걸어가더니 웃으면서 앉으라고 권한다. "어서 이곳에 앉으십시오." 이어 또 하나의 점원이 과일 차 등을 날라 주었다. 당승무는 뭐가 뭔지도 몰라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나 소불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히죽거릴 뿐이었다. "어떻게 되긴, 아마 이 늙은이의 친구가 우리를 위해서 술좌석을 마련해 준 모양이다……." 당승무는 그러한 소불이의 대꾸에 자못 신경질이 나는지 엉덩이를 들석이며 재차 물었다. "제 말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는가 하는 것이에요?" 소불이의 대답은 여전했다. "친구니까 그렇겠지……." 당승무는 그만 맥이 빠져 더 이상 물을 기력조차 잃었다. 이때 점원이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한 아름 안고 왔다. 소불이는 요리가 상에 내려지자마자 침을 꿀꺽 삼키며 젓가락을 들었다. "노제, 어서 먹어라." 하고 말하면서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릴 사이도 없이 즉시 먹기 시작했다. 요리는 배고프던 참에 먹어서 그런지 매우 맛있었다. 이윽고 다 먹고난 그들은 점원이 가져다 준 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이어 소불이는 점원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봐! 계산은 다 했나?" 점원은 허리를 납신 굽히며 대답했다. "예, 예, 나으리의 친구가 벌써 다 냈습니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덩어리의 은자를 꺼내 점원에게 주었다. 이어 배를 다 채운 그들은 슬슬 행장을 꾸려 다시 떠나기 시작했다. 한 저녁 때쯤 되었을까? 그들은 낙양성에 다다르자 한 삼십 쯤 먹어보이는 청의대한이 이들에게로 다가왔다. "소대협이십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렇소만……." 청의대한은 거무죽죽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소인은 명령을 받고 여기에서 기다린지 매우 오래 되었습니다." 소불이는 아무 소리하지 않고 그를 아래 위로 유심히 훑어보았다. 한참을 묵묵히 서 있는 그를 이렇게 주시하던 소불이는 짐짓 목소리에 위엄을 곁들어 점잖게 물었다. "당신의 주인은 뉘시오?" 그러나 의외로 청의대한은 망설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얘기할 수 없습니다." 소불이는 내심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주인은 어디에 있느냐?" 청의대한의 대답은 짤막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하고는 더 이상 군말 없이 소불이, 당승무 두 사람을 데리고 한 조용한 골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꼬불꼬불 걸어가던 그는 돌연 어느 검은 대문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그들을 돌아보며 제법 부드럽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하고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 몇 번 문을 두들겼다. 이어 곧 삐!-하는 소리가 나더니 대문이 열리고 한 흑의노인이 나왔다. "손님이 왔느냐?" 지하통로 청의대한은 공손히 대답했다. "네." 하고는 품 안에서 즉시 하나의 영패를 꺼내 보였다. 그러자 흑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묵묵히 한쪽 옆으로 피하였다. 청의대한은 이어 소불이와 당승무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들어가십시오." 두 사람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계단을 밟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닫혀졌다. 소불이와 당승무는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 청의대한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얼마쯤 걸었을까. 이들 앞에 또 하나의 육중한 검은 대문이 굳게 닫혀진 채 나타난 것이다. 이윽고 그 대문 앞에 선 청의대한은 문고리를 세 번 두들겼다. "탁! 탁! 탁!" 곧 이어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청의대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문 안에 두 분을 안내할 사람이 있으니 소인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끝낸 그는 즉시 물러갔다. 바로 이와 동시, 그 육중한 대문이 삐꺽 하고 열리며 한 흑의동자가 걸어 나와 부드럽게 말했다. "소인이 두 분을 인도하겠습니다." 하고는 총총히 안을 향해 들어갔다. 이때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안력으로서는 여전히 주위를 살펴볼 수 있었다. 문 안으로는 또 하나의 복도자 있었고 그 양쪽으로는 많은 꽃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소불이와 당승무는 어둠 속에서도 주위를 자세히 살피며 걸어갔다. 그들이 한참 흑의동자를 따라 걸어가자 그들은 자기들 앞에 또 하나의 붉은 대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소불이는 약간 기분이 언짢은 듯 아랫턱을 만지작거리며 흑의동자를 향해 퉁명스럽게 물었다. "자네 주인은 몸소 나와서 마중하기는 커녕 왜 문까지 굳게 닫아 놓고 있는가?" 그러나 흑의동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그리고는 그 붉은 문 앞에 도착하자 문고리를 잡고 두 번 두들겼다. 그러자 두 짝의 대문이 즉시 삐이걱! 하며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이어 흑의동자는 문 옆으로 비켜서며, "두 분께서는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소불이는 안을 바라보았다. 안은 매우 컴컴한 게 희미한 불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소불이는 이 거대한 집 안에 들어올 때부터 불빛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소불이는 도둑으로써 어둠 속에서 아주 단련이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단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지금 자기가 걷고 있는 이곳이 마당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방도 아닌 하나의 넓은 복도라는 것이다. 이때 흑의동자는 문 밖에 서서 들어가지 않고 이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즉시 탁!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앞은 거의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 걷기에도 몹시 불편을 주었다. 당승무는 뭐가 그리도 기분 나쁜지 걸어가며 투덜거렸다. "저 대문은 철문이었습니다." 소불이는 히죽 웃었다. "사부는 벌써 알았다." 순간, 당승무도 빙그레 웃었다. 소불이가 사부라고 미리 선수를 쳐 말한 이유는 당승무가 혹시나 잘못 입을 열까봐 하는 마음에서였다. 영리한 당승무는 이내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자기도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어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선 벌써 아셨다면 왜 서슴없이 들어 오셨습니까?" 소불이는 어깨를 으쓱 추스려 올리며 또 다시 히죽 웃었다. "사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들어온 것인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나?" 말하면서도 그는 연신 히히덕거렸다. 이 복도는 꽤 길었다. 그리고 매우 캄캄하여 옆 사람의 코 조차 구별 못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대화를 주긴 받으며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당승무는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검잡이를 확 쥔 채 경계의 태세만은 곡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약 열 발자국 정도 걸어가자 벌써 그들은 끝에까지 올 수 있었다. 소불이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러자 즉시 일진의 가벼운 소리가 들려오며 잇달아 또다시 일진의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면전을 때렸다. 눈치 빠른 소불이는 즉시 이것이 바로 하나의 기관으로 된 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새 열려져 차가운 바람이 문 안쪽에서부터 불어온 것이다. 그러나 이 안도 역시 어둡기 이를 데 없어 안은 들여다 보이지 않았다. 소불이는 그 앞에 서서 한참 망설이며 주저주저했다. 그가 주저하고 있는 것은 어둡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이 차가운 바람이 이상하게 때문이다. 소불이는 이 차가운 바람이 필시 지하실에서부터 불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문은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란 말인가. 소불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즉시 통을 꺼냈다. 그리고는 불을 붙이려는 순간,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희미한 불빛이 비춰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는 바로 지하통로였던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 곰곰히 생각을 한 소불이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 뒤에 있는 당승무를 끌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나. 반드시 내 발자국을 잘 보고 틀리지 않게 따라와야 한다." 말소리와 함께 소불이는 불빛을 향해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가물거리는 불빛 아래 하나의 작은 장화가 움직이고 있었다. 불빛은 아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을 들고 가는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조차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자그마한 장화와 녹색 바지로 볼 때 등불을 들고 가는 자는 여자임에 틀림 없을 것 같았다. 소불이는 이 점을 생각해 내고는 넌즈시 그 자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낭자, 우리 사도를 어디로 인도하려고 그러시오?" 그러자 가냘프면서도 낭랑한 음성이 그 말에 뒤이어 들려왔다. "우리 주인은 지금 화청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저는 두 분을 위해 길을 인도하고 있을 뿐이에요." 소불이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를 빛내며 무엇인가 캐어내려고 부드럽게 물었다. "낭자의 주인이 화청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이 늙은이를 이렇게 고생시키면서 빙빙 돌아서 오라고 하는 것이오?" 시녀는 낭랑한 음성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처음 여기 온 사람은 전부 다 이 길을 거쳐야 원칙이에요." 이 말에 소불이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원래 그들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방향을 혼동시키려고 이러는 것이구나.'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버릇대로 히죽히죽 웃을 뿐이었다. "또 내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낭자의 주인은 편지에다 자기가 나의 수십년 전 친구라고 했는데 이 늙은이는 늙어서 그런지 영 생각이 나지 않소. 혹시 낭자가 말해줄 수 있겠소?" 그러나 시녀는 나직이 웃을 뿐 대답을 회피했다. "그를 만나보시면 아실 것이에요." 그러자 소불이는 장난스럽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나 이 늙은이는 꼭 추측해 보고 싶은데?" 시녀의 대답 또한 맹랑했다. "그렇다면 혼자서 추측해 보세요." 이렇듯 대화를 나누는 순간, 어느새 그들은 다 내려온 듯 평탄한 평지를 밟고 있었다. 소불이는 이 길을 밟고 가며 미 집의 웅대함에 새삼 감탄을 올렸다. "아, 이 집은 정말 크구나, 이 늙은이가 생각하건대 낭자의 주인이 이런 거대한 저택을 갖고 있는 것을 보니 그는 강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호걸일 것 같군." 그러나 시녀는 피식 웃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틀렸어요. 우리 주인은 벌써 오랫동안 강호에 나가지 않았어요." 소불이는 내심 이제야 대답을 하나보다 생각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차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추측하기가 매우 힘이 들겠는데? 그런데 이 늙은이가 이곳까지 오면서 만난 대한들은 전부 다 절정의 고수들 같은데 낭자의 주인은 어디를 가서 그들을 물색해 왔소?" 그러자 시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자신의 곤란한 처지를 밝혔다. "그것은 얘기할 수 없어요.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면 주인을 만나서 직접 물어보세요. 기밀을 누설하면 방규대로 저는 사형이에요." 소불이는 이 방규라는 말을 듣자 새삼 이들의 조직이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당승무는 그저 묵묵히 소불이만 따라갈 뿐이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소불이가 돌연 이상한 발언을 했다. "당신네들의 이 지하통로에는 무슨 방들이 이렇게 많소?" 그러자 시녀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언성을 높여 반문했다. "아니, 당신은 볼 수 있나요?" 소불이는 히죽 웃었다. 사실 그가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지척을 헤아리기 어려운 어둠속에서 방을 발견할 수가 있겠는가. 소불이는 단지 슬쩍 떠본 것 뿐이었다. 그러나 상상외로 시녀의 말투는 그것을 승인하고 있는 듯했다. 이어 시녀의 질문을 받은 소불이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 늙은이는 다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오." 바로 이 순간, 등불이 갑자기 꺼져버렸다. 동시에 시녀의 낭랑한 음성이 다시 이들의 귓속으로 새어 들어왔다. "두 분께서는 어서 나가세요." 하는 소리와 함께 앞에 있는 대문이 서서히 열렸다. 순간, 시원한 바람이 천천히 불어와 그들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곳은 밖이었다. 어느새 이들은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이젠 완전히 밤이 되어 무수한 별들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이들은 시선을 돌려 여기가 어딘가 하고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자색 옷을 입은 두 명의 시녀가 이들을 향해 총총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허리를 납신 굽히며, "소녀들이 길을 인도하겠어요." 하고는 상대방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얼른 허리를 돌려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불이와 당승무는 일순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곧 뒤따라 갔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눈 앞이 환해지며 널따란 마당과 화청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소불이와 당승무는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에 그늘을 지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이때 두 명의 시녀가 두 사람에게 어서 계단으로 올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이어 그들이 계단을 올라서자마자 안에서부터 쉰 듯한 음성이 들려 왔다. "소노형, 잘 오셨소." 하는 음성과 함께 자색 얼굴에 눈썹이 짙고 뚱뚱한 자포인이 걸어나와 소불이에게 읍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소불이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생전 들어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뱃속에 구렁이가 너댓 마리를 들어앉은 소불이는 짐짓 반색을 하며 아는 체를 했다. "노형, 정말 너무하셨소. 노형은 혼자 화청 안에 편안히 앉아 이 늙은이 보고 어둠 속을 헤매라고 하다니……." 그는 자포인더러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하는 모습과 언사는 꼭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 같았다. 자포인은 소불이의 원망섞인 어조에 껄껄 웃음으로 답했다. "하하하…… 우선 안으로 들어갑시다." 소불이와 당승무는 그 말에 예의는 가리지 않고 얼른 화청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화청은 휘황찬란했다. 온통 비단으로 휘감은 화청은 어느 제왕의 방 못지 않게 호화스러웠다. 소불이와 당승무는 촌스럽게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 모습을 주시하며 자포인은 나직이 웃었다. 한참을 그렇게 둘러보던 소불이는 돌연 시선을 자포인에게로 돌리며 점잖게 물었다. "노형께선 다년간 강호에 나오지 않았다가 이번에 다시 나와보니 어떻소?" 그 말에 자포인은 깜짝 놀라 두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소노형께서는 벌써 알고 계셨소?" 소불이는 당승무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며 또 히죽 웃었다. "강호상의 일이라면 크던 작던 이 늙은이는 약간 알고 있소." 하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자포인은 대소를 금치 못했다. "으하하하…… 좋소, 좋아. 노형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은 내 벌써 알고 있었소." 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밖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요리를 올리도록 해라!" 그러자 칠팔 명의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화청 안의 좌석에다 술과 요리 등 진수성찬을 올렸다. 자포인은 껄껄 웃으며 술잔을 들며 건배했다. "소노형, 자 어서 듭시다." 과연 저택의 술좌석답게 상 위에 놓여진 음식은 진수성찬이었다. 고기와 술, 그리고 안주 등이 푸짐하게 놓여 있는 상 위에는 생전 보지도 먹지도 못한 음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었다. 소불이와 당승무는 눈이 휘둥그레져 자포인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네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포인은 술을 잘 마셨다. '그렇다. 이 자도 자색 옷을 입고 시녀들도 한결같이 자색 옷을 입었으니 아마 이 자는 옛날의 옥적랑군 심자귀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 소불이는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자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는 옛날의 옥적랑군 심자귀의 풍채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옛날의 옥적랑군 심자귀는 풍채가 당당할 뿐만 아니라 무공도 극히 높아 불과 스무 살 내에 한 자루의 자옥적으로 강호의 일류 고수에 속했던 그였다. 그런데 비록 많은 세월이 흘렀단 해도 지금 그에게 옛날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어 소불이는 그를 시험해 볼 양으로 짐짓 선수를 부렸다. "제자야, 어서 네가 심대숙에게 한 잔 따라 올려라."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필시 뭐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도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후배 심대숙께 한 잔을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벌어졌다. 그것은 당황해야 찰 자포인이 오히려 웃으며 그것을 맞받았기 때문이었다. "좋아, 좋아. 하지만 내가 주인이니 내가 먼저 노제께 따라드려야 마땅하오." 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따라주며 동시에 꿀꺽 마셨다. 역용술 이에 크게 놀란 자는 소불이였다. 어째서 자포인은 궁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일까…… 아무리 그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해도 소불이는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불이는 이렇듯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애쓰면서도 분위기에 휩쓸려 두서너 잔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꺼림칙한 것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이윽고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소불이는 길게 기지개를 펴며 자포인을 주시하였다. "노형,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 늙은이 사도를 불러 왔소?" 자포인은 소불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들이키던 술잔을 공중에 멈추며 소불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 … 아무 것도 아니오. 그저 형제는 소노형과 삼십여 년 간 만나지 못했기에 술을 함께 마시기 위해서 모셔온 것 뿐이오." 그러나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그의 말에 넘어갈 소불이가 아니었다면 소불이는 그의 웃음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여전히 정색을 한 채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 늙은이는 겉은 추하여도 마음만은 솔직하기 때문에 노형께서 만약 솔직히 털어놓지 않는다면 술 조차 같이 마실 수가 없소." 비록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속에는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자포인은 그의 이러한 태도에 짐짓 놀랐지만 여전히 미소띤 표정만은 지우지 않았다. "아,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술 안에 무슨 독이라도 집어 넣었다는 말씀입니까?" 소불이는 입이 밖으로 한 자쯤 나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것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 말에 자포인의 미소띤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당승무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불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의외로 소불이는 히죽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겸연쩍은 듯 어깨를 으쓱 추키고는 천천히 말했다. "이 늙은이가 너무 실례를 범한 것 같군요. 단지 노형의 행동이 매우 신비스럽기 때문에 그랬을 뿐이니 노형은 너무 이 늙은이를 탓하지 마시오." 하며 또다시 껄껄 웃었다. 자포인도 씁쓰레하게 웃으며 건성으로 턱을 주억거렸다. "그러나 저는 완전히 성의로 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소불이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물었다. "그리고 노형, 사실 이 늙은이는 여지껏 노형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소." 이 순간, 당승무도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자포인의 표정을 날카롭게 훔쳐보았다. 이 말에 자포인은 약간 놀란 듯했다.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형 자신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이 늙은이가 어찌 알겠소?" 그러자 자포인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데, 조금 전 소노형께서는 벌써 저의 성을 대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소불이는 당승무를 힐끗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이어 거무죽죽한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르고는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저 한 번 헛짚어 본 것이오. 그래야 남에게 헛점을 잡히지 않지요." 하며 또다시 히죽 웃었다. 그러자 자포인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젖혔다. "허허허……허허허……, 좋소, 좋아. 형제가 소노형에게 이미 헛점을 잡혔구려." 그러더니 돌연 웃음을 뚝 그치고는 이어 안색을 심중하게 바꾸며 말했다. "사실 소형은 바로 맞추신 거요. 제가 바로 심자귀외다." 소불이는 그 말을 듣자 돌연 손을 쳐들더니 심자귀의 어깨를 세차게 내리쳤다. 이어 껄껄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하하……과연 당신이었구려. 한데 어찌 그날의 그 당당하던 위풍은 전부 어디로 가고 지금은 이렇게 비개덩어리만 남았소?" 심자귀는 그가 때리는 대로 맞으며 자기도 빙그레 웃었다. "이것은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맞은 것입니다." 소불이는 이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그의 아래 위를 훑어 보았다. "으음, 그랬군. 한데 삼십 년 간 만나지 않았는데 노형은 언제 독물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소?" 이에 심자귀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이때 당승무는 지금 그가 말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그는 소불이의 경솔한 행동을 저지하려고 하자 소불이가 한쪽 눈을 찡끗해 보였다. 이어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것을 한 번 펴보시오." 하고 말하면서 보따리 하나를 심자귀에게 건네주었다. 심자귀는 얼떨결에 보따리를 받아들고는 만면에 매우 의아한 빛을 띠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소불이는 까칠한 뺨을 쓱쓱 문지르며 입가의 근육을 실룩거렸다. "풀어 보시면 아실 것이오." 그러나 심자귀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저주저하더니 결국은 풀지 못하고 시녀에게 분부했다. "얘들아, 이리 와서 이것을 한 번 풀어 보아라." 시녀는 그의 말에 곧 술주전자를 놓고는 보따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내 푸는 듯 하더니 깜짝 놀랐다. "으악!"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비틀비틀 옆으로 물러났다. 심자귀의 안색도 금시 새파랗게 변했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주시하고 있던 소불이가 히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낭자, 무서워 할 필요는 없소. 그것들은 전부 죽은 것들이오." 보따리의 속에는 어젯밤의 그 주먹 만한 독거미와 다섯 마리의 왕지네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심자귀는 그것들을 한참 주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소불이를 바라보았다. "이 몇 마리의 지네와 왕거미는 전부다 독물들인데 소노형께서는 이것들을 전부 어디서 얻었소?" 소불이는 순간, 두 눈을 번쩍 빛냈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도 표현하지 않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귀방의 물건이 아닌가요?" 심자귀는 말하는 상대방의 태도에서 금시 이것에 무슨 사연이 얽혀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가 있었다. 이어 그는 침중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귀방에서는 독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소." "그렇다면 이상한데?" 소불이의 이 말에 심자귀는 다소 기분이 나빴다. "소노형께서는 대체 어디에서 이 많은 독물들을 가지고 온 것이오?" 그러나 소불이에게는 대답이 없다. 그는 이 득물들의 주인이 필시 심자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심자귀의 태도로 보아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불이는 이 생각 저 생각 곰곰히 해본 끝에 결국은 모두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주는게 제일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은 어젯밤에……." 이렇게하여 소불이는 상세하게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심자귀에게 털어 놓았다. 분위기는 아까의 흥청거릴 때와는 달리 매우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윽고 이야기를 다 듣고난 심자귀는 자못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은 신음을 내뱉았다. "그것은 대체 누가 한 짓일까……?" 이때 그의 이러한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소불이가 갑자기 손을 품안에 넣더니 쇠털같이 가는 독침을 하나 꺼냈다. "이 침은? 이것도 귀방의 물건이 아니란 말이오?" 그러자 심자귀는 고개를 들어 한참 동안 물끄러미 독침을 주시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것은 묘인이 쓰는 입으로 부는 독바늘이오." 하고 말하면서 손으로 잡으려고 했다. 순간, 소불이는 깜짝 놀라 급급히 독침을 뒤로 빼냈다. "안 되오. 이 침에는 독이 묻어 있소." 하고 말한 소불이는 침을 술이 가득 들어 있는 술잔에 담았다. 그러자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그 맑은술이 침이 들어가자 갑자기 칙! 하는 소리를 내며 노란 연기와 함께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소불이는 안색하나 변치 않고 돌연 그 잔을 집어 들더니 꿀꺽꿀꺽 마시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본 심자귀는 그만 까무러칠 듯 놀랐다. "소노형, 그게 무슨 짓이오?" 뿐만 아니라 그 옆에 둘러 서 있던 시녀들까지도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당사자인 소불이는 여전히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후후후…… 이것이 바로 늙은이가 독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증거요.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몇 잔의 독주를 마시고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 또한 무슨 소리인가? 순간, 심자귀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그러나 소불이는 이러한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입술을 씰룩이며 빈정거렸다. "그러나 심소형, 안심하시오. 우리의 몇 십년 간의 교분으로 보아 이 늙은이는 절대 심소형을 나무라지 않겠소." 이 말은 바로 직접적으로 심자귀가 술 속에다 수작을 부린 것을 지적한 말이었다. 이때 연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던 심자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더니 갑자기 상을 향해 매섭게 일 장을 내뻗었다. "펑!" 다음 순간, 상은 완전히 뒤집히어 그 수북히 쌓여져 있던 음식들이 우르르 땅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우루루…… 꽝! 쨍그랑……!" 시녀들은 돌연스러운 변화에 진마다 급급히 물러섰다. 이어 심자귀의 호통이 터져나왔다. "이것은 누가 한 짓이지? 야, 너희들은 어서 주방으로 가서 주방장과 심부름꾼을 전부 데려 오너라!" 하며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시녀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두 명의 시녀는 겁에 질려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비실비실 뒤로 물러났다. 한데 갑자기 소불이가 이 두 시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낭자, 잠깐만!" 두 명의 시녀는 그 말을 듣자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낭자, 이리와 보시오." 동시에 소불이는 심자귀의 술잔을 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리고는 두 명의 시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낭자, 머리 위에 꽃은 비녀를 뽑아 술 안에 독이 있나를 시험해 보시오." 시녀는 그의 말대로 머리 위의 비녀를 뽑아 술잔에 담그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천천히 꺼내보자 아니나 다를까…… 그 은비녀는 어느새 흑색으로 변한 것이었다. 이것을 본 소불이는 침중한 표정으로 짤막한 신음을 내뱉았다. "음, 원래 목적이 심자귀였구나……." 물론 당사자인 심자귀가 놀란 것은 말할 필요 조차 없었다. 그는 치미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이를 빠드득 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봐! 어서 빨리 주방에 있는 놈들을 전부 잡아 오너라!" 하며 분을 이기지 못하여 파랗게 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소불이가 또다시 이를 제지했다. "낭자, 잠깐만." 두 명의 시녀는 이 말에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심자귀가 화를 벌컥 냈다. "소대협, 왜 그러시는 거요?" 소불이는 여전히 여유작작하게 히죽 웃었다. "만약 암암리 독을 넣은 사람의 목적이 심소형이라면 심소형께서도 그를 건드리지 말고 모른 척해야 합니다." 심자귀는 이 말을 듣자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려. 그럼 너희들은 가지 말아라." 잇따라 다시 소불이를 향해 말을 건냈다. "한데 이 술 속에 있는 독은 냄새도 색도 없는데 소노형께서는 어떻게 아셨소?" 소불이는 멋적게 빙긋 웃었다. "만약 이 늙은이가 그런 것도 모른 데서야 어찌 소불이라고 할 수가 있겠소?" 심자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 쑬 안의 독은 얼마 만한 시간이 지나서야 발작을 합니까?" "이 독약은 독한게 아니니 아마 조금만 지나면 약효가 날 것이오." 하고 말한 소불이는 품 속에서 곡영자가 준 해독약 한 알을 꺼내 심자귀에게 건네주었다. "심소형, 어서 이 약을 먹고 우리 계속 술을 마십시다." 심자귀는 환약을 받아 들고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속는 척 합시다." 이어 옆에 있는 시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명령을 내렸다. "우선 여기 엎어진 그릇를 대강 치우고 밖에 나가 사람들에게 아무런 명령을 받지 않는 한 들어오지 말라고 일러라." 시녀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대답을 하고는 곧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녀들은 다시 들어왔다. "분부대로 거행하였습니다." 심자귀는 턱을 두어 번 주억거리고는 곧 옆방으로 가 있으라고 손짓을 했다. 이윽고 시녀들은 물러가고 다시 화청이 조용해지자 심자귀는 창밖을 한 번 힐끗 내다보더니 짐짓 큰 소리를 내어 말했다. "소노형, 우리 한 잔 더 합시다." 소불이 또한 이에 맞장구를 치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안 되오. 이 술은 매우 센데요. 이 늙은이는 벌써 취했소." 하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길게 기지개를 한 번 펴더니 풀석 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당승무 또한, "사부님…… 사……." 하더니 앞으로 쓰러지며 상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심자귀는 깜짝 놀란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두 사람을 응시하였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지? 누가 술 속에다 수작을 부렸나?" 하면서 눈을 스르르 감으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더니 몹시 취한 듯 몸을 가누지 못하고 상 위로 엎어져 버렸다. 그리고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밖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그러자 쓰러져 있는 소불이는 내심 매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기네들의 행동이 남에게 간파된 것을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순간, 돌연 화청의 오른쪽에서부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노형께서 오셨는데 왜 나를 들어 보내지 않는 거요?" 이 말과 거의 동시에 계단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한 사람이 화청 안으로 들어왔다. 소불이는 쓰러져 있는 채로 눈을 가늘게 떠 방금 들어온 사나이를 훔쳐보았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청색장포를 걸치고 있는 그는 대추빛 얼굴의 중년사나이였다. 이 자는 소불이로선 생전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투를 들어보니 필경 나를 알고 있는 사람 같은데 대체 누굴까…,?' 이때 청포인의 놀란 음성이 소불이의 귓전을 때렸다. "이상하다. 심소형이 주량은 아주 큰데 어째서 취했을까?" 하며 심자귀를 일으켜 흔들었다. "심소형, 대체 왜 이러시오?" 그러나 심자귀는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청포인은 순간, 더욱 놀랐다. 이어 큰일났나 싶어 급히 큰 소리로 밖을 향해 외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동시에 심자귀가 눈을 번쩍 텄다. "금화상, 당신이 내 계획을 망쳐 놓았군." 하고 말한 그는 옆에서 축 늘어져 있는 소불이와 당승무를 깨웠다. "소노형 사도께서는 어서 일어나시오." 소불이와 당승무는 이 말에 지체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털며 일어섰다. 한편, 소불이는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청포도인이 금화상이라니 원래 금화상은 황하일괴(黃河一怪)라는 별명을 가진 자로서 어렸을 때부터 대머리인 것이다. 하지만 자기 앞에 있는 자는 그 용모부터가 다르지 않는가? 이때 청포도인이 심자귀를 이상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형제가 무슨 계획을 망쳐 놓았다는 것이오?" 심자귀는 웃으며 이에 대꾸하지 않고 옆방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금아, 은아, 이리 나오너라." 두 명의 시녀는 즉시 대답 소리와 함께 옆방에서부터 나왔다. "심나으리, 무슨 분부이신지……." "술을 가져오도록 해라." 이 말에 두 명의 시녀는 공손히 뒤로 물러 나왔다. 이때 소불이가 청포도인을 향해 읍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실례지만 이 분 노형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가?" 청포인은 껄껄 웃었다. "형제는 금화상이오. 변장했다고 해서 소노형께서는 몰라 보시는구려……하하하……, 얼마전에 형제의 목숨을 소노형께서 구해 주었지 않았습니까?" 소불이는 깜짝 놀랐다. '아니, 내가 언제 자기를 구해 주었다는 말인가?'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그는 한층 더 뜨는게 아닌가. "저는 소노형과 헤어진지 불과 칠팔 일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순간, 소불이는 기겁을 하듯 놀랐다. "옛! 칠팔 일?" 무명방파(無名幇派) 소불이의 멍한 표정을 보며 금화상은 빙긋이 웃었다. "소노형, 종남산 천독곡의 일을 잊으셨소? 그날 밤 만약 소노형께서 저에게 환약을 먹이지 않았다면 형제는 아마 오늘까지도 동사도의 독인으로 지냈을 것이오." 소불이는 그제서야 모든 내용을 알 수가 있었다. 바로 이 자는 얼마 전 천독곡에서 자기가 구해준 네 명의 독인 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 원래 그때 독인 네 사람 중 한 사람 언봉저만 남고 나머지 세 사람은 행방불명이 되었었다. 소불이는 잠깐 그때 일을 회상해 보고는 그를 향해 약간 머리를 숙여 보였다. "원래 세 분 중의 한 사람이 금소형이셨구려." 금화상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날 저는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깨어났지요. 그 당시 저는 뭐가 어떻게 돌아간 영문인지 하나도 몰랐기 때문에 잠시 숲 속에 숨어서 싸우는 광경을 구경했습니다. 그제서야 약간의 단서를 알아냈던 것이지요." 하고 말한 그는 숨을 가볍게 내쉬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잠시 싸움을 관전한 결과 소노형 쪽이 유리한 것을 보고는 노부는 조용히 물러난 것이지요." 이렇게 말을 끝낸 그는 좀 미안한 듯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소불이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사람좋게 껄껄 웃었다. "허허허…… 그랬었군요. 그런데 나머지 두 명의 독인은 누구신지 모르겠습니까?" 금화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것은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신법으로 보아 노부보다 훨씬 무공이 높은 것 같소." 이때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시녀가 술과 안주 등을 푸짐하게 가지고 들어왔다. 이윽고 푸짐하게 한 상이 차려지자 심자귀가 껄껄 웃으며 주인답게 술을 권했다. "자자, 얘기는 그만 하시고 소노형, 금노형 우지 술이나 마십시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조금 아까의 불쾌한 일을 잊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잔두 잔 돌려지자 이들 네 사람은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금화상이 먼저 입을 열며 심자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심소형, 아까는 어찌 땅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 했습니까?" 심자귀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쭈욱 들이키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누가 우리의 술 속에 독을 집어 넣었소." "예? 누구의 짓입니까?" 심자귀는 어이가 없는 듯 허공을 향해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시선을 내리깔며 짐짓 울분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누구의 짓이냐고? 흥! 만약 당신만 들어오지 않았다면 벌써 범인을 체포했을 거요." 하고 서두를 꺼낸 심자귀는 아까의 일을 상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금화상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한 번 다그쳐 물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으셨습니까?" 심자귀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아까 벌써 은아를 시켜 이 일을 초복에게 통지를 해서 조사해 보라고 했지요." 금화상은 대추빛 얼굴에 일말의 불안감을 떠올리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시선을 들어 심자귀를 바라보았다. "참! 그런데 심소형, 우리의 일을 소노형에게 얘기해 보셨소?" 하며 힐끗 소불이를 바라보았다. 이때 소불이는 인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나 하고 눈만 멀뚱멀뚱 굴릴 싹이었다. 그러자 심자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방금 얘기하려다가 일대 소란이 벌어져 그만 얘기하지 못했소." 이에 옆에서 듣다 못한 소불이가 불쑥 물었다. "아니, 두 분께서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두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금화상은 이 말을 듣자 약간 머뭇거리는 듯 턱을 쓱쓱 쓰다듬더니 이내 심자귀에게 시선을 돌렸다. "심소형, 소노형께서 기왕 물으셨으니 알려 주시오." 심자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불이를 향해 엷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소노형께서는 여기가 어디신지 아십니까?" 소불이는 어깨를 으쓱 추스려 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낙양이 아닙니까?" 그러나 심자귀의 말은 엉뚱했다. "물론 낙양이지요. 한데 노부가 물은 것은 여기가 누구의 저택인가 하는 것입니다." 소불이는 이 엉뚱한 말에 희끄무레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렇다면 여기가 당신 옥적랑군의 저택이 아니라는 말이오?" "그렇소." 소불이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대체 이들은 지금 무슨 속셈이 있어서 이렇듯 신비스럽게 행동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소불이의 급한 성격으로는 생각하는 것보다 차리리 속 편하게 묻는 것이 빨랐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의 저택이오?" 그러나 심자귀는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않고 상대방의 약을 바싹바싹 올렸다. "소노형께선 반드시 추측해 낼 수가 있을 것이오." 소불이는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낙양 총독 초대협……?" 소불이가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이 자를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십자도(十字刀) 초학고(楚鶴皐)는 조정의 총독이었다. 그는 누구든 강호의 영웅호걸을 전부 친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 낙양을 지나간다 하면 전부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며칠씩 묵으며 있게 했다. 그래서 소불이가 유독 그를 지적한 것이다. 한데 이 말을 들은 심자귀가 돌연 대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하하하……. 노부는 소노형께서 반드시 알아맞출 줄 알고 있소!" 이 웃음은 바로 이곳이 초학고의 집이라는 것을 승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불이는 자기가 말했으면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 늙은이가 걸어온 곳은 골목길이지 초대협의 저택 같지는 않았소." 심자귀는 빙그레 웃었다. "여기는 성과 별로 멀지 않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휘둘러 보았다. "이 늙은이는 초대협이 살아계실 때 몇 번 그 식구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돌아가신 후로는 그의 공자도 한 번 만나보지 못했소" 심자귀는 쭈글쭈글 잡힌 눈가의 주름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자제 숭생의 일신 무공은 그의 아버님을 능가할 정도로 높고 그의 누이동생 옥지도 무림의 일류 고수라 말할 수 있소." 이때 소불이는 얘기를 들으며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심자귀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돌연 불쑥 물었다. "한데 당신들은 이곳에 손님으로 와 있는 것이오?" 금화상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초공자께서는 벌써 여기를 우리에게 빌려 주셨소." 이때 돌연 소불이의 뇌리에 아까 시녀가 말한 기밀을 누설하면 방규대로 죽인다 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당신네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한 번 의문난 점이 있으면 풀지 않고는 못베기는 그였기에 소불이는 대뜸 다시 물었다. 한데 심자귀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소노형께서는 벌써 아시고 계시지 않소?" 소불이는 쥐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히히 하고 웃었다. "그것은 이 늙은이가 이곳의 시설을 보고 한 번 추측해 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오. 이 늙은이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어찌 무엇을 하고 있는 것까지 알 수가 있겠소?" 그러자 심자귀는 그의 재모에 감탄을 해 결국은 대소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으하하하하…… 과연 늙은 여우답구려. 노부는 그것을 진짜로 믿고 있었으니……." 이때 금화상이 옆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노부가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하며 계속 말을 이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화청 문이 열리고 머리가 하얗게 세고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윽고 심자귀의 앞까지 온 노인은 그를 향해 공손히 읍을 하였다. "노비 초복, 심대협께 사죄를 하러 왔습니다." 이때 소불이는 그의 외모를 유심히 뜯어보고 있었다. 이 노인은 비록 노비였지만 두 눈에서는 흉흉한 섬광이 뻗치고 있었고 허리에는 순 강철로 만든 한 자루의 담뱃대를 차고 있었다. 소불이는 대뜸 이 노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 늙은이는 분명히 고수일 것이다.' 이렇듯 소불이가 자기를 살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초복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변명을 하고 있었다. "노부가 아까 술에 독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 주방에 내려가 조사를 해본 결과 한 심부름꾼이 실종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 애는 들어온지 얼마 안된 애인데 아마 남에게 매수를 당한 모양입니다. 이 늙은이가 대신 사죄……." 하며 구부린 허리를 펼 줄 몰랐다. 그러자 심자귀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 이제 지나간 일을 그만 얘기하시오." 초복은 더욱 감격스러운 듯 두 손으로 그의 손을 확 잡더니 안색을 굳혔다. "그러나 이 늙은이는 꼭 그놈을 잡아 오겠습니다." 그러나 심자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되니 잠자코 있으시오." 초복은 황송하여 감히 고개 조차 들지 못하고 네네 하는 대답소리와 함께 물러갔다. 소불이는 그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이 늙은이는 외모는 성실한 것 같으나 눈초리가 음흉한 게 좋은 놈 같지 않다. 혹시 술 안에 독을 집어 넣은 범인이 저 자가 아닐까?' 소불이가 이렇듯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금화상의 컬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노형, 심노협과 노부가 왜 변장을 하고 다니는지 이유를 알고있소?" 소불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남의 이목을 피해서가 아니오?" "그렇소. 그런데 누구의 이목을 피하는지 아시오?" 소불이는 눈을 멀뚱멀뚱 굴렸다. "모르겠는데요?" 금화상은 짧게 대답했다. "무명도!" 순간 소불이는 무언가 둔탁한 망치에 뒷통수를 맞은 듯 아찔해짐을 느꼈다. "아니, 무명도에서 두 분을 찾고 있소?" 금화상의 표정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런 것이 아니오." 하더니 나직이 한숨을 발하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원래 저는 종남산에서 떠나오던 날 밤, 매우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소. 마침 그때 심형이 생각이 나 그곳으로 찾아가다가 우연히도 정주쌍협을 만나게 되었소. 그래 여러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끝에 무명도에 대항하기로 결론을 내렸지요." 소불이는 내심 자기네들과 생각이 일치한 데 대해 기뻐하며 얼른 물었다. "그래서 당신네들이 방을 하나 세웠구려?" 금화상은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직 준비 단계에 있소. 어쨌든 방을 세우려면 본거지가 필요하지 않겠소. 그래 우리는 낙양에 와서 초공자를 찾은 것입니다." 소불이는 그제야 일의 경과를 알 수 있었다. "그래 그가 허락했소?" 광화상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만약 초공자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셨다면 이 저택이 어떻게 우리의 총타로 될 수 있겠소?" 소불이는 그들의 재략에 암암리에 탄성을 올렸다. 이어 그는 쥐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네들은 대체 무슨 방을 세웠소?" 이에 심자귀가 옆에서 불쑥 나서며 대답했다. "아직 정식적인 명칭도 세우지 않았소." 그러자 소불이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어떤 한 가지 건의를 했다. "동사도는 무명도로 명칭을 고쳤으니 당신네들은 무명방으로 하시는 게 어떻소?"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던 소불이는 돌연 잊은 게 있는 듯 갑자기 정색을 하며 다시 물어왔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대체 무슨 일로 이 늙은이를 불렀소?" 심자귀는 힐끗 금화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며 주저하더니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들은 이 총타의 지하 조직을 소노반 사마장홍보고 설계를 해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입니다." 소불이는 이 말에 짚히는 바가 있었다. "과연 당신네들이 그를 데려왔구려." 그러나 심자귀는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배이협께서 소석윤에 달려갔을 때 이미 그곳은 완전히 잿더미로 화한 후였소." 그가 말한 배이협이란 바로 정주쌍협의 둘째 배천석이었다. 정주쌍협은 중원 무림에서도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이 말을 들은 소불이는 깜짝 놀랐다. 자기는 원래 소노반이 이들에 의해 납치당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이때 심자귀는 소불이가 대답을 않는 것을 보자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바로 배이협이 헛탕치고 돌아오실 때 두 분께서는 소석윤에 갔던 것입니다. 그래 노부들은 소노형께서 소노반과 친한 것을 알고 소노형에게 행방을 물어보려고 하는 것이오. 한데 노형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할 생각은 없으시오?" 그러자 소불이는 무슨 뜻에선지 갑자기 히죽 웃는 것이었다. "후후후…… 바로 찾았구나." 이 말에 심자귀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렇다면 소노형께서는 승낙하시는 겁니까?" 소불이는 잠시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쥐눈을 껌벅거리더니 중얼거리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원래 소석윤에 간 것은 소노반이 납치당한 것을 조사해 보려고 한 것이오." 금화상은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데 누가 소노반을 납치해 갔습니까?" 소불이는 힘없이 피식 웃었다. "이 늙은이가 알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소석윤에 갔겠소?" 하고는 길게 숨을 내뿜으며, "이 늙은이가 제대로 찾았구나 하는 것은 무명도에 대항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오. 그리고 우리는 오랜 친구 사이니까 한 마디 하겠는데………" 순간 심자귀는 눈썹을 곤두세우며 바싹 다그쳐 물었다. "말씀해 보시오." 소불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에게 어울리지 않게 엄숙하게 말했다. "지금 무림에는 하나의 무림맹이 있습니다. 무림맹은 강호의 각문 각파와 연합해서 무명도에 대항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무엇 때문에 또 하나의 방파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오?" 심자귀는 이 처음 들어보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림맹? 강호상에 언제 무림맹이란 것이 생겼습니까?" 소불이는 히죽 웃었다. "그것은 최근의 일이오. 강호에선 바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물론 당신네도 모를 것이오." 의거 금화상은 매우 놀라며 급히 되물었다. "그런데 소노형께서는 그 소리를 어디에서 들었습니까?" 그러나 소불이는 손을 들어 내저었다. "아,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부터 이 늙은이가 차근차근 경과를 얘기해 드릴 테니까요." 이어 소불이는 자기와 당승무가 함께 소노반을 찾았던 일, 그리고 실종된 연유, 또 제갈명의 부상과 무림맹의 창립, 종남파의 내간 등을 일일이 설명을 해주었다. 소불이의 긴 얘기가 끝나자 심자귀는 갑자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 매우 우스운 일입니다. 만약 소노형께선 이렇게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노부는 정말 믿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동사도를 세운 무리들은 가짜였구려. 진짜 염지천은 강호상에 나와 무림맹의 총호법이 되었는데…… 하하하…… 이렇게 우스운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더니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소노형께서는 지금 무림맹의 우호법이시니 더욱더 잘 되었소. 우리는 어떤 방안을 세울 필요없이 일제히 무림맹에 가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금화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심형의 말씀이 맞소. 우리 내일 다시 이 일은 상의해 봅시다." 이 밤. 소불이와 당승무는 화청의 오른쪽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시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이 세수를 끝내고 시녀가 갖다준 아침을 먹을 때 심자귀가 들어와 웃으며 말했다. "초공자께서 소노형이 오셨다는 소리를 듣고는 이른 아침부터 노부더러 소노형을 소개시켜 달라고 합니다. 지금 화청에 계시니 한번 만나 보십시오." 심자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밖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벌써 심노대의 뒤에 와 있습니다." 말소리와 함께 한 청삼을 입은 키가 큰 청년이 걸어 들어왔다. 청년은 생김이 영준할 뿐더러 희고 깨끗한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항상 띠고 있는 것이 명문의 귀공자 같았다. 청년은 소불이에게 공손히 읍을 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노부께서 설상무영 소대협이십니까? 저는 초숭생(焦嵩生)이라고 합니다." 소불이도 급히 예를 올리며 회답했다. "정말 반갑소이다." "이 늙은이는 낙양 소맹상(諾陽小盟嘗)의 이름을 익히 들은지가 오래 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당승무를 가리키며 소개를 했다. "그리고 이분 노제는 사천당문의 노장문인의 자제이며, 또한 자의교주 염지천 염대협의 기명제자이기도 합니다." 초숭생은 당승무를 바라보며 얼굴에 가득 미소를 떠올리고는 매우 반가운 듯 말했다. "원래 당형제였구려. 참으로 반갑습니다." 이때 심자귀가 이상한 듯 물었다. "아니, 당노제는 소노형의 제자가 아닙니까?"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어깨를 추스렸다. "그것은 다만 해본 소리에 지나지 않소. 이같은 늙은이에게 어찌 그런 제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당승무가 웃으며 참견했다. "그렇지만 저와 소노대께서는 이따금씩 그렇게 칭호를 합니다. 비록 소노대와 사도지간은 아니지만 저는 벌써 소노대를 사부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자 소불이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눈을 약간 흘겼다. "노제, 이 늙은이를 사부로 삼으면 평생 도둑질 밖에 배우지 못한다." 방 안의 사람들은 소불이의 이 말에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심자귀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자, 그럼 여러 사람들이 모두 화청에 모여 있으니 우리 이제 가봅시다." 이어 소불이와 당승무는 심자귀와 초숭생의 인도 아래 화청으로 들어갔다. 화청에는 네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화상과 정주쌍협, 그리고 초숭생의 누이동생인 홍모란(弘牡蘭) 초옥지(楚玉芝) 였다. 장주쌍협의 첫째인 정첩후(丁捷侯)의 나이는 약 오십 세 가량이었으며 네모진 얼굴에 꽃무의가 화려하게 수놓인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인 배천석(拜天錫)의 나이는 사십 세 가량이었고, 흰 얼굴에 수염은 없었으며 보통 체격의 장년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제일 눈을 끄는 것은 홍모란 초옥지였다. 초옥지는 나이가 적고 용모 또한 매우 어여뻤다. 그녀의 발그레히 홍조띤 얼굴은 마치 건드리기만 하면 금방 폭 터질 것 같았다. 또한 흑백이 분명한 크고 서늘한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 두 개의 영롱한 별빛을 바라보는 듯 했다. 그러나 제일 눈을 끄는 것은 그녀의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타는 듯한 붉은 비단옷이 초옥지의 몸에 꽉 끼어 그녀의 호리호리하고 매력적인 곡선을 나타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룩한 가슴에는 금실로 수놓인 한 송이의 모란꽃이 금시라도 활짝 피어날 것 같았다. 소불이의 일행이 들어서자 앉아 있던 네 사람은 동시에 일어섰다. 소불이는 원래 정주쌍협과 잘 알고 있는 사이였기 때문에 들어오자마자 읍을 했다. "정노형, 배이형, 매우 오랫만입니다." 또다시 그는 초옥지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아! 낭자도 안녕하시오?" 이때 초숭생이 급히 나서며 초옥지를 향해 꾸짖듯 말했다. "옥지, 빨리 소대협께 인사를 올리지 않고 윌 꾸물대느냐?" 그러자 소불이는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원 별말씀을…… 이 늙은이는 도둑놈 정도 밖에는 되지 않소이다." 이때 초옥지는 어깨를 들석이는 소불이의 조그만 체격을 보자 참지 못하고 피식 하고 웃어 버렸다. 이때 정첩후가 다가와 소불이의 손을 잡으며 매우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부가 심노형께 들은 바, 소노형께서는 무림맹의 우호법이 되셨다면서요?" 소불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송구스러워 했다. "정노형께서는 별 과분한 말씀을 다하십니다." 이때 초숭생이 나서서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며 자리를 권했다. "여러분, 모두 앉아서 얘기합시다." 그 말에 여러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심자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노형께서는 어젯밤에 형제와 금노형께 전부 다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노형과 초공자께서도 무림맹의 상황을 알고 싶어 하는군요." 정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불이를 쳐다보았다. "그렇소. 노부가 보기에는 제갈명은 나이도 어리고 홍채문주가 된지도 삼 년이 못되는데 어떻게 그런 직책을 맡을 자격이 있습니까?" 소불이는 빙긋 웃더니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입을 떼었다. "정소형, 잘 물었습니다. 본문의 제맹주께서는 봉황검을 쓸 줄 알뿐 아니라 무공 또한 극히 심오하고 높습니다. 그리고 삼 년 전에 소림 대통대사와 무당 천령자 두 사람까지도 구해준 적이 있기 때문에 무림에서 매우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최근에 종남파의 내간까지도 숙청해 주어 종남 이노까지도 제맹주를 극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소불이는 여기서 말을 끊더니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지금 구대 문파 중의 소림, 무당. 점창(點蒼) 종남, 영산(影山)과 팔괘문이 벌써 무림맹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문파 외에 홍채문, 청죽방, 산서쾌도문(山西快刀門) 신주언문(莘收言門)까지도 모두 무림맹에 가입을 했습니다." 정첩후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무림맹의 총호법과 동사도주의 이름이 같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불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즉시 설명했다. "그 이유는 바로 동사도주 염지천은 자기의 죄명이 과중함으로 남의 이름을 도용해서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 본 무림맹의 염대협은 바로 자기의 그런 오명을 밝히기 위해 무림맹의 총호법이 되신 것이지요." 이때 초옥지가 별처럼 빛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의아스럽다는듯 방울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듣자하니 염대협의 일신 무공은 극히 높고 고심막측하다고 하던데 왜 가짜를 잡으러 무명도에 가지 않습니까?" 소불이는 다시 초옥지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그러나 염대협께서는 가짜 염지천의 뒤에는 반드시 막후 인물이 있다고 해서 아직 가만히 있는 것이지요." 초숭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때 정첩후가 심자귀와 금화상 두 사람을 응시하며 물었다. "자, 그럼 두 분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심자귀는 순간 엄숙해지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노부도 이미 얘기드린 바와 같이 우리 몇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무명도와 대적을 할 수 없으니 우리도 함께 무림맹에 가입합시다." 초숭생은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지금 심대협의 말씀이 옳은 것 같으니 본인도 동의를 하겠습니다." 그러자 금화상은 정수쌍협을 응시하며 기대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자, 그럼 정노형은?" 정첩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매우 근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노부도 심노대처럼 무림맹에 가입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몇 사람은 강호의 각대 문파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니 이 몇 사람으로 무림맹의 환영을 받을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군요." 그러자 초숭생이 검미를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정대협께서는 걱정이 매우 많으시군요. 그것은 차후의 문제가 아닙니까?" 그러자 소불이가 갑자기 대소를 터뜨리며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그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본 무림맹은 다만 사악한 무리들과 대항하기 위해서 결합된 것이니까 정의심만 있다면 어느 누구든지 서슴치 마시고 가입하십시오." 이때 심자귀가 갑자기 흥분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그렇게 합시다." 그러면서 팔다리를 힘있게 움직이자, "끽! 끽! 끽!" 하는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와 합께 심자귀의 몸이 갑자기 일 척 가량 높아졌다. 이어 그는 즉시 얼굴의 면구를 벗었다. 그러자 즉시 옥적랑군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심자귀는 비록 나이가 오십 세 가량이었지만 머리만 약간 희끗할뿐 윤기가 흐르는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없었고, 윤곽이 뚜렷한 생김이 젊은 시절의 영준을 감퇴시키지 못했다. 소불이는 그의 진면목이 준수한데 내심 감탄을 하며 한편으론 영문을 몰라 물었다. "심노형, 대체 무엇하는 것입니까? 심자귀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노부가 여지껏 변장을 한 것은 다만 무명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무림맹에 가입하기로 결정을 했으니 그들을 피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금화상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심노대의 말씀이 매우 지당합니다!" 하고는 모자를 벗으며 여러 사람들을 엄중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우리는 모두 무림맹에 가입을 했으니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소불이는 매우 흡족해 손을 쳐들어 마치 자기네의 승리를 암시하는 것처럼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모두 장하오!" 초숭생은 그들을 보자 매우 감격한 듯 담담한 얼굴에 장엄한 빛을 띠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첩후가 매우 상기된 어조로 물었다. "소노형, 그런데 제맹주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소불이는 쳐들었던 팔을 그제야 내리며 대꾸했다. "제맹주는 아마 진강으로 가셨을 것입니다. 본 무림맹이 바로 내년 정월 초하루에 진강에서 발족을 하기 때문입니다." 초숭생이 갑자기 미간을 밝게 펴며 어떤 기대섞인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던 소대협, 제맹주께서는 반드시 이 낙양을 지나가시게 되겠군요?"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마 얼마 후면 여기를 지나가시게 될 것입니다." 초숭생이 크게 기뻐하면 좌중을 둘러보았다. "제맹주께서는 진강을 가시다가 이 낙양에 들리신다니 우리는 제맹주를 위해 무엇인가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더니 피간 쉬며 심자귀와 금화상 등의 사람들을 눈으로 쓸어보며 물었다. "제맹주를 이 지방의 인사로 모시는 것이 좋겠는데 여러분의 의향은 어떠십니까?" 그러자 먼저 금화상이 찬성을 했다. "초공자의 말씀이 맞습니다. 노부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소이다." 그러나 정첩후가 약간 불안스러운 듯 말했다. "그런데 과연 제맹주께서 오실는지 의문스럽군요." 이때 초옥지가 나서며 뽀루퉁한 어조로 쏘았다. "그가 만일 오지않는다면 그건 바로 우리를 얕본다는 증거이지요." 그러자 초숭생이 얼굴을 굳히며 즉시 초옥지를 나무랬다. "옥지, 쓸데없는 말은 삼가라." 그러더니 일어나며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노부는 지금 즉시 초복을 보내어 제맹주의 행방을 찾아보라고 이르겠습니다." 심자귀도 같이 일어서며 좌중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께서는 모두 찬성을 하시지만 지금 노부가 생각한 바로는 소노형께서 제맹주를 모셔오고 저희들은 사람을 파견해 제맹주를 마중나가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초숭생은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지금은 아직 제맹주의 행방도 자세히 모르는데 어찌 소노형께 수고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초복으로부터 제맹주의 행방을 알아보게 한 후 결정을 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하고는 더 이상 사람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탁탁 하고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러자 즉시 시녀가 나타나 문 앞에 부복하며 공손히 물었다. "공자님, 무슨 분부이시옵니까?" 초숭생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너 가서 빨리 초복을 불러오너라." 시녀가 명령을 받고 물러간지 얼마되지 않아 초복이 들어서며 공손히 읍을 했다. "공자, 무슨 일입니까?" 초숭생은 팔짱을 끼더니 상기된 어조로 물었다. "자네, 홍채문의 소문주 제갈명을 알고 있나?" 초복은 일순 눈을 깜빡이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즉시 대답했다. "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초숭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우 엄중한 명령을 내리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제갈명께서 지금 무림맹의 맹주가 되셨다. 그리고 며칠전에 종남산에서 진강에 가려고 길을 떠났으니 반드시 이 낙양을 지날 것이다." "그러니 자네는 사람을 파견해서 제맹주의 행방을 알아본 후 즉시 보고를 올리도록 해라." 불길한 선물 초복은 심중하게 안색을 굳히더니 즉시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총총히 방 안에서 물러갔다. 이때는 벌써 정오가 가까와져 있었다. 네 명의 시녀는 화청에 벌써 술좌석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초숭생은 몸을 돌리며 소불이에게 권했다. "소대협, 우리 어서 술좌석에 앉읍시다." 소불이는 좋아 어쩔 줄을 몰라 어깨를 연신 들석이며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여러 사람들이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네 명의 시녀들은 모두 술좌석을 떠나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술을 따라주었다. 이때 초숭생이 술잔을 높이 쳐들고는 좌중을 향해 말했다. "저는 주인된 입장으로서 먼저 소대협께 한 잔을 올리겠습니다." 소불이는 급히 술잔을 높이 쳐들며 웃었다. "하하하…… 매우 감사합니다." 하고는 각기 한 잔을 마시자 시녀들은 또다시 두 사람을 위해 술을 따라주었다. 초숭생이 다시 당승무를 위해 한 잔을 들다가 초복이 상기된 얼굴로 총총히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술잔을 내렸다. 이어 근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초복, 제맹주의 소식을 알아냈느냐?" 초복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없습니다." 초숭생은 약간 기이하게 느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일이냐?" 초복은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조금 전 누군가 심대협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초숭생은 그 말을 듣자 즉시 안색이 변했다. "아니, 무엇이라고? 심대협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았느냐?" 초복은 고개를 들지 않고 조금 풀이 죽은 듯한 어조로 말했다. "소인은 분명히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기를 심대협이 계시지 않는다면 공자님께 드려도 무방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편지 외에도 심대협와 공자님 두 분께 보내는 선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순간 심자귀가 나서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무슨 선물인가?" "예, 저…… 선물 위에는 심대협과 공자 나으리의 존함이 써 있었기 때문에 감히 뜯어보지 못했습니다." 초숭생은 나직이 한숨을 내뿜더니 곧 손을 내밀었다. "그 편지는 어디에 있나?" 초복은 대답하면서 품 속에 한 통의 편지와 다른 하나의 네모반듯한 종이 보따리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건네주자 편지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심대협, 자귀(自貴) 초공자 숭생 동친계(同親啓)" 하지만 편지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만 쓰여 있을 뿐 보내는 사람의 서명은 없었다. 초숭생은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며 편지를 심자귀에게 건네주었다. "심대협께서 뜯어 보십시오." 그러나 심자귀는 선뜻 받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공자께서 뜯어 보셔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 그는 의문을 감추지 못해 편지를 받아 뜯어 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두 분께 일골 가지의 선물을 드리니 기꺼이 밖아 주시기 바라겠소. 그러나 사흘 안으로 반드시 사람을 보내어 다시 거두어 가겠소. 심자귀는 편지의 내용을 다 읽자 실소를 금치 못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선물을 보냈으면 그만이지 어째서 사흘 안으로 다시 거두어 간다는 것인가?"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금화상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누가 보낸 것이오?" 심자귀는 여전히 실소를 금치 못하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때 소불이가 히죽 웃더니 어깨를 들먹이며 불쑥 한 마디를 했다. "그의 이 한 수는 심노형과 매우 비슷하군." 초숭생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참 이상하군. 편지에는 무엇을 가져 왔다는 소리를 어찌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때 초옥지가 호기심이 생긴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무엇인지 뜯어 보면 아실게 아녜요?" 하며 그녀는 선물을 집어 들어 뜯으려 했다. 그러자 초숭생이 급히 막았다. "잠깐 멈추어라!" 초옥지는 선물 포장을 뜯다가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 왜요?" 초숭생은 눈을 한 번 굴리더니 초복에게 밀었다. "초복더러 뜯어 보라는 것이 더 낫겠다." 그리고는 즉시 초복에게 분부를 내렸다. "초복, 자네가 뜯어 보게." 초복이 대답하며 즉시 포장을 뜯자 그 속에 하나의 네모진 상자가 나왔다. 초복이 다시 그 상자까지 열어 보자 상자 안에는 박달나무로 조각한 일곱 개의 사람 머리가 나왔다. 초복은 그것을 보자 매우 놀라며 급히 말했다. "공자, 상자 속에 사람의 머리를 조각한 물건이 나왔습디다." 금화상이 그 소리를 듣자 급히 물었다. "초복, 대체 누구의 머리를 조각한 것이냐?" 그러나 초복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소인, 감히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금화상이 약간 눈썹을 치켜뜨며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감히 아뢰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느냐?" 초복은 순간 고개를 들고 금화상을 주시하더니 매우 난처해 하며 입을 열었다. "이…… 이 안에 금대협의 머리가 들어 있습니다." 순간 금화상이 대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하하하…… 이 늙은이의 머리는 아직 이렇게 목에 달려 있는데?" 초복은 일순 얼굴을 붉히더니 매우 어색한 말투로 읖조렸다. "이…… 이 늙은이가 잘못 말했습니다. 이 안의 머리는 박달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금화상은 여유만만하게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하하하…… 좋아, 좋아. 이렇게 노부를 위해 조각까지 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거 매우 고마운 일이로구나!" 초옥지는 아까부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있다가 금화상이 대소를 터뜨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가까이 갔다. "어디, 어디 좀 봐요!" 하며 나무 상자를 받아 그 안에 있는 조각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제각기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 이것은 금화상님 것이고……." 또다시 하나를 꺼내 심자귀에게 건네 주었다. "또 이것은 심대협의 것이군요." 그러면서 그녀는 당승무만 빼놓고 전부 하나씩 임자를 찾아 주었다. 이 나무로 조각한 사람의 머리 크기는 꼭 복숭아씨만 하였다. 그것은 비록 꼭 닮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초옥지가 임자를 찾아주는 것을 보니 닮기는 비슷하게 닳은 것 같았다. 이때 당승무는 자기만 없고 모두 있는 것을 보자 약간 섭섭한 듯 초옥지에게 물었다. "초낭자, 그 안에 또 있습니까?" 초옥지는 고개를 저으며 그 나무 상자도 함께 흔들어 보였다. "이젠 없어요." 당승무는 멋적게 웃으며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았다. "그렇다면 보내는 사람은 나를 깔보고 있다는 것이로군." 그러자 초옥지가 웃으며 눈을 흘겼다. "어마, 당신은 아직 어린애잖아요?" 당승무는 뜻밖에 초옥지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오자 즉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초옥지도 말은 비록 이렇게 했지만 당승무의 나이가 자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자 그녀도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이때 심자귀가 .자기 머리조각을 들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가소로운…… 대체 이게 누구의 장난인가?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의미있게 말했다. "히히히…… 사흘 안으로 다시 거두러 온다고 했으니 설마 이 몇개의 나무 조각들을 가지러 오는 것은 아닐 테니……" 금화상은 이 말에 긴장된 듯 안색을 굳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우리의 머리를 거두러 온다는 것은 아닐까요?" 소불이는 재미있다는 듯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것 같소이다." 그러자 초숭생까지도 안색이 홱 변하며 긴장된 말투로 물었다. "초복, 편지를 갖고 온 사람은 어디에 있소?" 초복은 고개를 저었다. "벌써 갔습니다." 초숭생이 다시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그 자의 생김은 기억하고 있는가?" 초복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 사람을 생각해 내려는 듯 부지런히 눈알을 굴렸다. "그 사람의 키는 그렇게 크지 않았고…… 나이는 한 사십 세 가량 되었으며 제가 보기엔 아마도 심부름꾼 같아 보였습니다." 초숭생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도대체 누구라는 것을 그 자신도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잠깐 생각하는 듯 하다가 이어 물었다. "초복, 그 사람더러 누가 보낸 것이라는 건 묻지 않았나?" 초복은 즉시 대꾸했다.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기를 공자께서 보시기만 하면 금방 안다고 했습니다." 이때 금화상이 검미를 찌푸리며 끼어 들었다. "공자, 그만 물어 보시오. 그렇게 물어 보았자 백날 가도 알아낼 것 같지 않소." 소불이는 여전히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는 참견했다. "후후…… 사흘 안에 머리를 가지러 온다고 했으니 지금 조바심을 하지 않아도 그때 가면 자연히 누구인지 알 수 있겠지." 그러나 초숭생은 화가 난 듯 얼굴에 노기를 띠며 약간 높은 어조로 말했다. "그만 나가 있게." 초복은 즉시 허리를 굽혀 대답을 한 후 물러났다. 이때 정첩후가 갑자기 초숭생의 곁으로 다가오며 뇌까리듯 말했다. "그렇군요. 무명도에서 벌써 우리의 행동을 알아내었구려." 순간, 금화상과 심자귀는 이 무명도라는 세 글자를 듣자 마치 무서운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아니 두 사람 뿐만 아니라 화청에 있는 있는 사람들은 안색을 일시에 굳히며 긴장의 빛을 띠었다. 이때 정주쌍협의 둘째인 배천석이 이 무거운 공기를 깨듯이 침중하게 한 마디 내뱉았다. "지금 무명도에서 우리의 행동을 알아냈다고 해도 우리의 머리를 떼어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오!" 그러자 초옥지도 질 세라 앞으로 나서며 참견을 했다. "그래요. 지금 그들이 이따위 나무 조각 몇 개를 보내왔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러나 정첩후는 침중하게 고개 저었다. "아마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초숭생은 긴장한 표정을 풀며 본래의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되돌아 왔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인솔하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거기에다 신경을 쓰지 말고 어서 술이나 듭시다." 말을 끝내자마자 사람들이 아직도 머뭇거리는 것을 보자 먼저 자신이 한 잔 들이켰다. 그러자 소불이가 초숭생의 곁으로 다가오며 같이 동조를 했다. "초공자, 과연 희대의 영웅 호걸이시오. 자, 그럼 이 늙은이도 한잔 들겠소이다." 소불이 역시 술잔을 들더니 꿀꺽 소리를 내며 단숨에 들이켰다. 초숭생은 이어 뒤에 시립해 있는 시녀에게 분부했다. "이 몇 개의 나무 조각을 거두어 즉시 서재로 가져 가거라," 시녀는 즉시 대답을 한 후 나무 조각을 거두어 가져갔다. 그러나 소불이는 자기 머리 조각을 만지며 내놓기를 거절했다. "초공자, 제 것은 오늘 이곳의 기념으로 이 늙은이가 거두겠소이다." 초숭생은 웃으며 즉시 승낙했다. "하하…… 그것이야 어디 제 마음입니까? 소대협 마음이시죠." 소불이는 그 조각을 품 안에 집어 넣으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초공자, 매우 감사하오." 이들은 어색한 분위기에도 웃고 떠들고 하며 한나절이나 마셨다. 소불이는 원래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고 맹세를 했으면서도 지금은 취기가 돌아 제대로 걸음도 걸을 수 없도록 퍼마셨다. 소불이와 당승무가 객실로 돌아오자 시녀가 즉시 한 주전자의 차를 가져왔다. 소불이는 연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쉴새없이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녀가 물러가자 소불이는 갑자기 눈을 빛내더니 품 속에서 조각된 머리를 꺼내 당승무를 향해 내뱉듯 말했다. "결국 우리도 이 시비에 말려들고 말았구나." 당승무는 아까부터 소불이가 술을 너무 먹는데 대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의외로 소불이가 본래의 그 자신의 말투로 얘기하자 놀라 즉시 물었다. "시비?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소불이는 쥐눈을 크게 뜨고 차갑게 말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작자들이 무단히 일곱 개의 머리를 가져간다고 했으니 이것이 시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당승무는 좀 입맛이 쓴 듯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무명도의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기만 하면 이곳에 없다고 해도 반드시 우리를 그냥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불이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러나 이번에 무명도의 사람들은 이 늙은이를 잡아가는 대신 당노제는 놓아 주었네." 당승무는 순간 소불이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도리어 반문을 했다. "하지만 결국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소불이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다르다. 노제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당승무는 그래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는 그래도 생각이 나질 않는군요." 소불이는 눈을 껌벅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명도의 사람들이 노제를 놓아 주는 이유는 바로 자네가 이 늙은이의 제자로 행세를 했기 때문이네." 당승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 일곱 개의 머리를 대체 누가 만든 것입니까?" 이때 소불이가 갑자기 손가락을 입으로 갖다대며 어조를 낮추었다. "쉿! 노제, 누가 왔나 보다." 말소리와 함께 과연 복도에서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정첩후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얼굴에 가득 미소를 떠올리며 물었다. "소노형, 많이 취했습니까?" 소불이도 의자에서 일어나 웃으며 대꾸했다. "오! 정노형, 어서 앉으십시오. 취하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약간 어지러울 뿐이오." 최초의 희생자 그러나 정첩후는 무거운 창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더니 창 밖을 조심스럽게 응시하였다. 소불이는 비록 그를 가볍게 쓸어보았을 뿐이지만 그 모습이 마치 누가 엿듣기나 하는 것처럼 매우 신중해 보였기 때문에 소불이는 벌써 눈치를 채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음…… 이 정노대에게 무슨 커다란 걱정이 있는 것 같군.' 이윽고 정첩후는 심각한 얼굴을 애써 펴보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소노형께서는 이 일곱 개의 나무 인형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러고 보니 정첩후는 원래 이 나무 인형이 나타내고 있는 불길한 암시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소불이는 매우 태평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 늙은이는 퍽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첩후는 이 말을 듣자 무척 의외라는 듯 처음에는 깜짝 놀라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어찌할 수 없는 울분을 터뜨리는 것처럼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재미있소. 재미있지. 암…… 확실히 재미있는 일이오." 소불이는 순간 뭔가 지각을 잃은 듯한 정첩후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노형께서는 이 일에 대해 어떤 고견이라고 있으십니까?" 순간 정첩후는 깜짝 놀라며 얼핏 소불이를 쳐다보는 듯 하더니 이어 고개를 숙이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소노형, 노부는 바로 그 의심나는 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노형을 찾아온 것입니다." 소불이는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다시 물었다. "대체 어떤 점이 의심이 되십니까?" 그러자 정첩후는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노형, 우리의 일거일동은 전부 남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만약……" 정첩후는 더 이상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안색은 점점 더 침중하게 굳었다. 소불이는 마음에 어떤 무거운 부담같은 것을 느꼈다. "지금 정노형의 말뜻은……" 정첩후는 험상궂게 다시 안색을 변화시키며 마치 그 어떤 하기 싫은 말을 하듯 애써 말했다. "아마…… 아마…… 내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순간 가볍게 놀라 몸을 움찔하였다. "그가 누구입니까?" 정첩후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러나 노부는 다만 그런 예감이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불이는 형용할 수 없는 씁쓸하고도 무거운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초공자께도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안했소이다." 그러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초공자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에게 얘기를 한다 해도 어떻게 해결을 볼 것 같지가 않아서 이렇게 소노형을 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정주쌍협께서는 심노대와 금노형과는 수십 년의 친구가 되시는데 그들에게도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정첩후는 얼굴에 검은 구름을 드리우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소. 노부는 심노대 뿐만 아니라 금화상과도 수십 년의 교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노부는 정말……" 그러다가 갑자기 소불이를 응시하며 눈을 빛냈다. "참, 그런데 아까 술자리에서 소노형께서는 보셔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소불이는 일부러 모르는 척 하며 가볍게 놀랐다. "정노형,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노부는 모르겠습니다." 순간 정첩후는 정색을 하며 그러나 매우 기분이 나쁜 듯 격한 어조로 말했다. "노부는 여지껏 소노형을 친구로 보고 있는데 지금 소노형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저를 얕보시는 것입니까?" 소불이는 순간 당황해 하며 급히 태도를 바꾸었다. "아, 정노형께서는 무슨 말씀을 또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정첩후는 자기 말이 과했다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무엇인가 비밀을 털어 놓을 듯 입을 열었다. "그들은……." 그런데 갑자기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펑!" 하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소불이는 이 소리를 듣자 즉시 몸을 쥐새끼처럼 움츠려 번쩍 하는 순간에 문을 열고 나갔다. 이어 그는 저쪽 복도 끝으로 한 남색 그림자가 번개처럼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창문과 사오 보 가량 떨어진 곳에 어떤 그림자가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소불이는 즉시 다가가 그 인영을 살펴보았다. 그는 정주쌍협의 둘째인 배천석이었다. 소불이는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멍청해졌다. 복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배천석이라니 소불이는 순간 자기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불이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다시 살펴보니 배천석이 틀림이 없었다. 이때의 배천석은 얼굴이 창백하고 이미 몸은 빳빳하게 굳어 쓰러져 있었다. 소불이는 암암리에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소리가 나자마자 즉시 달려나왔는데 배천석이 순식간에 낯모르는 사람에게 살해를 당하다니, 이 흉수가 도대체 누구인가?" 이때 정첩후도 뒤이어 나오면서 이 광경을 보자 깜짝 놀라 소리쳤다. "배이제, 왜 이러고 있느냐?" 하고는 몸을 굽혀 급히 배천석의 몸을 살폈다. 소불이가 표정을 굳히며 침울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그는 이미 죽었소." 정첩후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배천석의 가슴을 만져 보았으나 그의 몸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디차게 굳어져 버렸다. 순간 정첩후는 넋이 나간 듯 입술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 경련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도가 심해지더니 결국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오열이 되어 터져나왔다. "배이제, 배이제,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아……아…… 자네가 독수를 당하다니…… 배이제, 흐흐흑……." 소불이는 처절하게 울부짖는 정첩후를 보고는 자기도 매우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노형, 노부가 하는 말이 좀 야속하다고 들릴는지 모르나 사람이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가 없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배이제의 상처를 보고 대체 누구에게 당했는지 조사를 해보아야 합니다." 정첩후는 통곡하는 중에서 과연 호걸답게 이성을 회복했다. 그는 소맷자락으로 눈두덩이를 한 번 훔치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노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말을 끝내고는 즉시 배천석의 상처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천석은 땅에 쓰러져 있었는데 피를 흘린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더구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또한 배천석은 상대방과 싸움 끝에 당한 것 같지도 않았다. 또 남에게 기습을 당했다고 해도 상처라곤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정첩후는 매우 견식이 넓기 때문에 그는 침중하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즉시 배천석의 몸을 뒤집고는 그의 옷을 찢었다. 그러자 과연 배천석의 등에 있는 영대혈에 하나의 커다란 지인(指印)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정첩후는 이것을 발견하자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과연 마의교가 한 짓이로구나. 그러나 마의교와 우리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렇게 배이제를 살해한다는 말인가?" 소불이는 고개를 저으며 신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마의교는 강호상에서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으니 배이협을 죽인 것은 마의교가 한 짓이 아닐 것입니다." 정첩후는 굽혔던 몸을 일으키며 분노에 이글이글 타는 눈알을 번득이며 완강히 거부했다. "아니오. 분명히 그들의 짓일 겁니다. 전에 앞서 노부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마의교주 사람들이 벌써 황하 일대에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가져온 선물을 묶어 보낸 것도 바로 상문결(常門結)로 묶었지 않습니까?" 그러더니 일단 말을 끝내고는 꼭 무엇인가 암시를 받은 사람처럼 침통하게 되뇌였다. "더구나 마의교의 사람들은 한 번 얘기를 꺼냈다 하면 반드시 실천을 하는 사람이며 우리 여섯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들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불이는 가볍게 냉소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홍, 그러나 이 늙은이는 마의교가 그토록 무섭다고는 믿지 못하겠소이다." 정첩후는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몹시 전율하며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최소한 배이제는 이미 죽었지만 저와 배이제는 틀림없이 죽을 겁니다." 그러자 소불이는 정첩후가 알지 못하게 눈알을 굴리며 암중으로 괴이하게 중얼거렸다. -정첩후는 중원 일대에 있을 때 무엇인가 암시를 받은 것이 틀림없구나." 이때 심자귀, 금화상, 초숭생 세 사람도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왔다. 초숭생의 안색이 변해 멀리 뛰어오면서 물었다. "배이협이 어떻게 되셨습니까?" 소불이는 배천석의 시체를 내려다 보며 침중하게 대꾸했다. "이미 늦었소." 초숭생은 즉시 안색이 싹 변했다. "소대협, 누가 한 짓인지 아시겠습니까?" 소불이는 배천석이 죽은 것이 마치 자기 때문인 듯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이 늙은이가 비명 소리를 듣고 나을 때엔 배이협께서는 벌써 독수를 당하고 쓰러진 뒤였습니다." "그런데 정노형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이협은 상문지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초숭생은 이 말을 듣자 표정이 싹 바뀌며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마의교가 한 짓인데 그들이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이어 심자귀와 금화상도 안색이 변해 마치 예측하고 있었던 일인 것처럼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과연 마의교의 짓이었구나." 순간 소불이는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암중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마의교를 이다지도 무서워 하는 것일까?' 하지만 겉으로는 짐짓 수긍을 하며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마의교는 정말 다시 일어나려는 모양입니다." 심자귀가 얼핏 돌아서더니 물었다. "소노형께서는 혹시 노산(魯山) 노계직(魯季直)을 알고 계십니까?" 소불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소대협은 소림의 속가(俗家) 장문인이 아닙니까?" "그렇소. 그런데 듣자하니 노대협의 대문에는 아홉 개의 마승(麻繩)이 걸려 있다고 하더군요." 소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심자귀가 말했다. "그 마승마다 전부 다 매듭이 지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의교의 암호로써 상문결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소불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소림의 방장(幇長) 대통대사의 사제인 노대협이 어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이미 죽었소." 소불이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노대협이 죽었단 말씀입니까?" 금화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죽은지는 벌써 칠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칠 일 안에 남양철조(南陽鐵爪) 주가구(周家口) 이화창(理花槍) 만복흥(萬福與) 허창일필(許昌一筆) 구양수(歐陽壽)도 전부 죽었습니다. 이 몇분은 한 지방의 패주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떻게 해서 함께 죽었는지 그 원인은 모르겠습니다." 이어 심자귀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또한 강호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마의교는 죽음의 통지를 보내는 것이 바로 이 사람의 머리를 조각한 나무 인형을 보내는 것이랍니다." 소불이는 그제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었군요." 이때 초숭생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즉시 시녀를 부르더니 명령을 내렸다. "가서 초복을 오란다고 전하여라." 시녀가 대답을 한 후 즉시 물러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초복이 달려오더니 배천석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매우 놀라 여러 사람들을 번갈아 보았다. "공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초숭생은 긴 말은 하지 않고 즉시 지시했다. "배이협이 남의 암수를 당했으니 하인에게 일러 관을 좋은 것으로 사서 매장하라고 하게." 초복은 배천석과 초숭생을 번갈아 보며 다시 물었다. "저 배이협의 가족에게도 알려야 합니까?" 이때 정첩후가 침통한 어조로 대꾸했다. "배이제에게는 가족이 없으니 알릴 필요가 없소." 초복은 대답 대신 허리를 굽히며 두 명의 장정을 시켜 배천석의 시체를 들고 나갔다. 이때 소불이는 초복이 남색 옷을 입은 것을 보자 즉시 조금 전의 남색 그림자를 생각했다. 하지만 아깝게도 그 흉수가 너무나 빨리 사라졌기 때문에 종잡을 수가 없어 그 자신도 단언을 내리지 못했다. 이때 초숭생이 갑자기 무엇을 생각했는지 급히 말했다. "참! 서재에 한 번 가보아야 하겠습니다." 심자귀도 생각난 듯 즉시 동의를 했다. "그렇소. 우리 서재에 가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여러 사람들은 즉시 초숭생을 앞세워 서재로 갔다. 서재는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매우 아담했다. 초숭생은 여러 사람들을 앉히고 나서 사동에게 지시했다. "초흥(楚與), 너 가서 첨향(添香)더러 오라고하여라." 사동은 즉시 대답을 하고 물러났다. 이어 한 청의시녀가 나타나더니 들어와서 초숭생을 향해 공손히 물었다. "공자, 무슨 분부이신가요?" 초숭생은 대뜸 물었다. "내 너더러 갖다 놓으라고 한 나무 상자는 어디에다 두었느냐?" 첨향은 즉시 손을 들어 가리키며 대답했다. "네. 저 진열장 속에 들어 있습니다." "좋다. 가서 꺼내오너라." 첨향은 대답을 하고는 서쪽에 있는 진열장 쪽으로 다가가더니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진열장을 열어 나무 상자를 꺼낸 후 즉시 초숭생에게로 가져다 주었다. 초숭생은 나무 상자를 받고는 뚜껑을 열더니 즉시 안색이 싹 변해 소리쳤다. "음, 과연 한 개가 없어졌구나!" 첨향은 그 소리를 듣자 마치 자기 책임인 것처럼 몹시 놀라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네? 분명히 진열장 속에 넣고 확 잠그었는데 어째서 한 개가 없어졌단 말씀입니까?" 초숭생은 침중하게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내가 너더러 거두어 넣으라고 할 때 분명히 몇 개이더냐?" 첨향은 즉시 대답했다. "분명히 여섯 개였습니다." 초숭생은 나무 상자를 첨향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럼 이것을 보아라. 지금 몇 개나 들어 있는지……?" 첨향은 나무 상자를 받고는 그 속을 들여다 보더니 즉시 안색이 싹 변했다. "아니! 이상하다…… 아까는 분명히 여섯 개였는데 어째서 한 개가 없어졌단 말인가?" 초숭생은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것이 없어졌는지 알겠느냐?" 첨향은 소불이와 당승무를 가리켰다. "네, 배이협과 소대협, 그리고 당소협의 것만 없군요." 독살 그러자 소불이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 늙은이의 것은 내가 갖고 있고 당노제의 것은 원래부터 없었다" 첨향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그렇다면 모자라지 않잖아요?" 초숭생이 고개를 저었다. "소대협의 것은 원래부터 이 상자에 넣어두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여섯 개가 있어야 맞다." 이때 정첩후가 안색이 변하더니 급히 소리쳤다. "아, 모자라는 것은 바로 배이제의 것이오." 첨향은 안색이 변해 어쩔줄을 몰라하며 대꾸했다. "그러나 소녀는 분명히 잠그어서 진열장……." 그러자 초숭생이 첨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로 막았다. "이제, 네가 참견할 일은 없다." 말하면서 나무 상자를 거두어 넣고는 서재 밑의 서랍을 열어 그 밑에서 두 통의 노란 구리침통을 꺼내 첨향을 초흥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사천당문의 황봉탈명침(黃峰奪明針) 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너희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서는 안 된다. 또한 만약 누구라도 이곳에 들어오는 자는 가차없이 이침으로 죽여도 무방하다 알겠느냐?" 첨향과 초흥은 동시에 대답하며 그 침통을 받았다. 이어 초숭생은 손을 들어 흔들며 말했다. "자, 지금부터 너희는 밖에 나가서 기다려라,. 우린 잠시 상의해야 할 일이 있으니……." 초흥이 나가면서 말했다. "소인이 가서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하며 첨향과 물러간지 얼마되지 않아서 차를 갖다 놓았다. 초숭생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배이협의 죽음은 마의교가 한 짓이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와 동시 그 나부 인형도 거두어 갔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들은 절대 거짓으로 그런 것은 아닐 것이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이후에 마의교를 대항해 어떻게 대책을 꾸몄으면 좋을지 기탄없이 얘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때 정첩후가 나서며 가득 비분에 젖은 표정으로 얘기했다. "마의교가 기왕에 찾아와 배이제를 죽였으니 나 정모는 죽어도 그들과 대항하겠습니다." 심자귀는 대답 대신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마의교의 사람들이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죽이려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정첩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는 그들과 아무런 원한이 없어도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데 그들에게 대체 무슨 목적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심자귀는 뭔가 가득 의문을 품고는 수긍하지 않았다. "바로 아무런 원한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목적을 노리고 있는 것이오. 아마도 사람을 죽여서 무엇인가를 얻을 게 있다든지 하는 그런……." 그러나 심자귀는 가벼운 한숨을 몰아쉬며 여전히 침통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가 알기만 한다면 일을 쉽게 해결할 수가 있을텐데……." 초숭생이 어림도 없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흠, 우리는 그 홍수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는데 그들의 목적을 어떻게 알 수 있겠소?" 이때 금화상이 오랫만에 웃으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간단한 일이오. 그들은 아직 나무 인형을 하나 밖에 가져가지 않았으나아마도 이 삼 일 안에 반드시 나머지를 가지러 을 것이오. 그러니 필히 그 기회를 노려야 합니다." 심자귀도 얼굴을 펴며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동조를 했다. "그렇지요. 금형의 말씀이 맞소이다. 배이협은 살해를 당했을 때 조금도 반항하지 못하고 당했으니 적이 그의 뒤에서 몰래 습격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함께 모여 있으면 아마도 탈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첩후가 말했다. "아, 그렇군요. 그러니 우리는 이후부터 모두 행동을 같이 해야 되겠습니다." 심자귀가 말했다. "물론이오. 그렇게 되면 무엇인가 꼭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에는 금화상이 말했다. "참! 우리들 중에 누군가 나간 사람이 없소?" 초숭생이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내 누이는 어디로 갔지?" 초숭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밖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여태껏 후원에서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배이협을 살해한 흉수는 잡았나요?" 말소리와 함께 날씬하게 옷을 차려입은 초옥지가 걸어 들어왔다. 초숭생은 초옥지의 태연한 모습을 보고 나서야 긴 안도의 숨을 내시며 대꾸했다. "아니, 잡지 못했다." 이때는 소불이가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실려던 찰나였다. 그러나 초옥지가 들어오자마자 그는 갑자기 신속히 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소불이의 이 한 수는 정말 놀라우리 만치 멋있는 것이었다. 소불이는 손에 아직 김이 올라오는 잔을 들고 있었는데 의자에서 일어나 문 밖까지 날아가는 순간에 찻잔의 물은 한 방울도 쏟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어떻게 문 밖을 나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거였다. 소불이가 문 밖에 나가보니 한 남의노인이 서 있었다. 남의노인은 바로 초부(楚府) 의 노관가(老管家) 초복이었다. 초복은 소불이가 문을 열고 나가자 소불이가 나가는 줄 알고 허리를 굽혀 즉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소불이는 찻잔을 들고 무안한 듯 빙긋 웃었으나 그의 머리엔 어떤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하하하…… 원래 밖에 있던 사람이 당신이었구려. 이거 아주 미안하게 되었소. 이 늙은이는 누가 밖에서 엿듣고 있는 줄 알았소이다." 말하면서 소불이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이때 초숭생이 따라 나오며 급히 물었다. "초복, 무슨 일이냐?" 초복은 태연하게 허리를 굽혀 방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노신, 공자께 아뢸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냐?" 초복은 다시 여느 날과는 특별하게 더욱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예. 무림맹의 제맹주께옵서 점심 때는 장모(長茅)에서 쉬시고 오늘 밤에는 승지에 도착해 묵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점심때는 틀림없이 이 낙양에 도착하실 것으로 보입니다." 초숭생은 방금 목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까닭에 담담히 물었다. "이 소식은 과연 믿을만 하냐?" 초복은 즉시 대답했다. "예. 이 소식은 손득록(孫得祿)이 장모에서 비학전서로 보낸 소식이니 아마 틀림없을 것입니다." 초숭생은 그제야 찌푸렸던 미간을 펴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오, 알았다. 자네는 즉시 승지로 사람을 파견하여라. 그리고 그들에게 수시로 한눈 팔지 말고 제맹주의 행동을 연락하라고 해라." 초복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소인, 잘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초복은 여전히 허리를 굽히며 시종일관 초숭생에게 말하는 동안 이상하게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물러갔다. 초숭생은 초복이 물러가자 사람들을 둘러보며 매우 들뜬 어조로 말했다. "제맹주께서는 내일이면 낙양에 도착한다고 하시니 우리는 지금 소대협 말고 두 사람의 대표를 뽑아 제맹주를 마중하러 갑시다." 금화상도 기뻐하며 즉시 맞장구를 쳤다. "그렇소. 공자의 말씀이 맞소. 하지만 노부의 뜻은 공자는 여기의 주인이시고 심노대에서는 우리 몇 사람의 우두머리가 되시니 제맹주를 맞는 익은 심노대와 공자 두 분께서 하시는 것이 합당할 듯 한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초숭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곳은 이미 우리 모두의 소유가 되었으니 저는 주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 생각은 심대협과 정대협 두 분께서 가시는 것이 더욱 합당하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나이도 어리고 여러분 선배께선 저보다 견문이 넓으시니 두 분께서 가 보십시오." 그러나 정첩후는 아까부터 줄곧 안색을 펴지 못하고 매우 우울한 기분으로 사양했다. "공자, 사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노부는 마음이 매우 편치가 못해 갈 기분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이때 초옥지가 나서며 참견했다. "오빠, 정대협께서 심기가 불편하신가 본데…. 그렇다면 오빠는 더 이상 사양하지 마세요." 그러자 초숭생은 눈을 부릅뜨며 짐짓 꾸짖었다. "뭐야? 너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게냐?" 심자귀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아마도 심낭자께서도 가보고 싶어 그러는 것일 겁니다." 초옥지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조금 토라진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요. 오빠가 가셔야 제가 따라갈 수가 있지 않아요? 그렇지만 정대협께서 가시면 제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어요?" 그러나 초숭생은 냉랭하게 코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흥! 하지만 설사 나와 심노대 두 사람이 간다고 해도 너는 가지 못한다." 초옥지는 그 말을 듣자 입을 토라져 삐죽였다. "흥! 저두요 오빠가 저더러 가지 말라고 막아도 저는 꼭 가고 말거예요." 초숭생은 다시 무엇이라고 초옥지에게 반대의 말을 하였다. 심자귀는 그런 두 사람의 실랑이가 언제 끝날지 몰라 그냥 소불이를 향해 나지막하게 물었다. "소노형, 그런데 제맹주의 일행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됩니까?" 소불이는 아까부터 자기가 찻잔을 들고 뛰어 나갔을 때 초복이 마치 문 밖에서 엿듣고 있었는 듯해서 시종 그 일의 실마리를 잡으려고 온통 신경을 그곳에다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얼핏 심자귀의 말을 듣지 못하다가 일행이 몇 명이냐는 소리만 듣고 즉시 정신을 차려 대답했다. "예, 이 늙은이와 제맹주간 헤어질 때 일행으로는 주부인과 양수분 낭자, 그리고 본맹의 좌호법인 곡노형과 총순찰인 두경강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두 합해 약 이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이때 초옥지는 초숭생과의 실갱이가 어떻게 끝났는지 그 분풀이의 화살을 소불이에게 돌리려는 듯 토라진 음성으로 따지듯 물었다." "그런데 소대협, 대협께서 얘기하시기를 주부인과 양수분 낭자, 그리고 곡가라는 사람과 총순찰 두경강, 제맹주 이렇게 다섯 사람뿐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째서 이십여 명이나 된다는 말씀이예요?" 소불이는 그런 초옥지의 기분을 알아차린 듯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히히……그러나 주부인 수하에는 네 명의 시녀가 있고, 또한 십여 명의 홍채문의 협객들이 있으니 이런 저런 사람을 합치면 거의 이십여 명이 됩니다." 이때, 첨향이 들어와 등불에 불을 밝혔다. 이들은 서로 의논하다가 담소하는 동안 날이 어두운 줄도 몰랐던 것이었다. 초숭생은 식당으로 가지 않고 첨향에게 저녁을 서재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여러 사람들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쉬지 않고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며 완전히 먹고 나서야 각자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소불이와 당승무가 저녁을 댁은 후 마당을 거닐다가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한 시녀가 다가서더니 공손히 예를 취하며 물었다. "두 분께서는 무슨 분부라도 계시지 않습니까?" 소불이가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소. 그러니 낭자도 가서 휴식을 취하시오!" 시녀는 다시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시다면 소녀는 과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두 분께옵서 만약 필요한 것이 있다면 소녀는 앞의 방에 있으니 언제든지 분부를 내려주세요." 소불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우러러 보더니 무엇인가 예감을 한 듯 침중한 어조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밤에는 아마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더니 당승무가 채 무엇이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당승무도 뒤이어 따라 들어가며 즉시 물었다. "지금 소노대께서는 마의교를 두고 얘기하시는 겁니까?" 소불이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곱 개의 머리 중 아직 하나 밖에 가져 가지 않았으니 오늘밤에는 아마 몇 개 더 가져갈것이다." 당승무는 순간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소불이는 쥐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즉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만, 내 가서 한 번 살펴보겠다." 당승무도 즉시 따라 일어섰다. "소노대, 저도 함께 갈까요?" 소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노제는 오지 말고 방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게." 소불이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작게 움츠리더니 통풍 장치가 있는 데로 교묘히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소불이는 남이 감시를 할까봐 방문은 물론 창문도 열지 않고는 통풍 장치가 되어 있는 곳을 이용해 지붕 위로 올라간 것이다. 소불이는 지붕 위로 올라오자마자 마치 한 마리의 기다란 뱀처럼 지붕을 타고 달렸다. 소불이는 약 두 개의 지붕을 지날 때 갑자기 밑의 복도에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지붕에 착 붙였다. 소불이는 그 그림자를 보고는 암암리에 냉소를 치며 잔뜩 별렀다. "흥! 내가 과연 때를 맞추어서 오긴 잘 왔구나!" 이때 그 긴 그림자는 소불이가 엎드리고 있는 진의 대문을 나지막하게 두들겼다. 그러자 집 안에서 어떤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백형이오? 어서 들어오시오." 그러자 그 그림자는 주위를 번개같이 살피더니 즉시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소불이는 이 광경을 보자 즉시 몸을 지붕에 착 붙힌 후 귀를 갖다대고는 저청지술(低聽之術)을 써서 엿듣기 시작했다. 방 안의 대화는 밀담을 하느라 비록 그 소리가 낮았지만 소불이는 듣기에 그리 거북함을 느끼지 않았다. 이때, 집 안에 있던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다 문제 있겠지요." 그러자 그 그림자는 염려 말라는 듯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한형, 안심하십시오. 조금도 문제 없습니다." 집 안의 사람은 더욱 어조를 낮추며 매우 심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소. 제갈명 일행은 내일 점심 때면 낙양에 도착할 것이오. 그래서 변노가 분부하기를 우린 오늘밤에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소." 이때 소불이는 암중으로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중얼거렸다. "아니, 저들이 말하는 변노란 도대체 누구인가?" 그 그림자가 다시 낮은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한형, 선제 행동을 취할 것입니까?" 집 안의 사람은 조금 전보다 더욱 낮추어 소근대듯 말했다. "지난 번에는 독을 썼는데도 수확을 얻지 못했으니 오늘밤 형제가 일러주기를 사람을 시켜 그의 찻속에다 미약을 집어 넣으라 일렀소. 그 미약은 우리의 절대 비밀 무기로써 물론 색깔도 냄새도 없으니 그가 암만 경험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아마 그것은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곳 행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소불이는 이 소리를 듣자 매우 다급해 하며 중얼거렸다. "저 자의 말투를 들으니 오늘밤은 옥적랑군 심자귀 같구나……." 화혈침 긴 그림자의 사람은 집 안의 사람을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저는 이후부터도 여전히 한형과 연락을 취해야 합니까?" 집 안의 사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주위를 한 번 살펴보더니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오늘밤이 지나면 백형께서는 직접 변노의 지휘를 받아야 할 것이오." 긴 그림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그쳐 물었다. "저는 변노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연락을 취한단 말이오?" 집 안의 사람은 정색을 하며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 변노에게 무슨 지시가 있을 때에는 창문에 반드시 흰색의 지인이 찍혀 있을 것이오. 그러면 백형께서는 베개 밑을 찾기만 하면 되오. 그리고 만약 긴급한 사태가 있을 때에는 백형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 엄지손가락과 식지로 턱수염을 세 번 만지는 사람의 지시를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집 안의 사람은 연신 사방을 살피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백형께서는 어깨를 치고 수염을 만지는 사람을 향해 언제 그렇게 하얗게 변했느냐고 물어 보아야 하며 그러면 그는 삼 년이 됐다고 할 것이니 그때 백형께서는 안심을 하고 지시를 받으시오." 긴 그림자의 사람은 포권을 하며 말을 받았다. "잘 알았소. 저는 꼭 한형의 말대로 한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집 안에 있는 사람은 다시 주위를 살피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좋소.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이기 전에 어서 가보시오." 그러나 그림자의 사람은 잠시 주저하며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선뜻 물었다. "만약 그가 쓰러져 있지 않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오?" 집 안의 사람은 이 말을 듣자 입가에 실날 같은 미소를 띠며 그를 주시하더니 반문했다. "혹시 그가 여전히 생생하게 있다면 백형을 보고 아마 깜짝 놀랄것이오. 그렇게 되면 백형께서는 그가 손을 쓰기만을 기다리겠소? 아니면……." 긴 그림자의 사람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한형! 잘 알았소. 이제 그만 가봐야겠소." 말을 끝냄과 동시에 긴 그림자는 벌써 대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이때, 소불이는 지붕 위에서 그 사람이 멀리 사라진 후에야 몸 일으키며 재빨리 몸을 날려 그림자의 사나이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긴 그림자의 사람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아주 태연자약하게 긴 복도를 지나 왼쪽에 있는 빈사(賓査)를 향해 걸어갔다. 소불이는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가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궁리하고 있었다. 지금 긴 그림자의 사람은 벌써 꽃밭을 지나 옥적랑군의 거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소불이는 더 이상 주저 않고 한 장의 면구를 꺼내서 쓴 다음 즉시 그림자의 사람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가더니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오른손으로 그림자 사나이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러자 그림자의 사나이는 깜짝 놀라며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번개처럼 휘두르며 공격을 하려는 순간, 소불이가 벌써 그의 앞에 내려섰다. 두 사람이 대면을 하자마자 소불이는 깜짝 놀랐다. 원래 이 긴 그림자 사나이의 뒷모습이 심자귀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그의 앞모습도 심자귀와 너무나 똑같았던 것이다. 소불이는 겉으로 태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암암리 생각을 굴렸다. '나는 네 놈이 어찌 대담하게 복도를 거니는가 했더니 심자귀로 변장을 했구나…….' 그림자의 사람은 자기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이상스러운 노인이라는 것을 보가 깜짝 놀라며 급히 물었다. "친구……." 소불이는 급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쉬! 절대로 말을 크게 해서는 안 되오." 긴 그림자의 사람은 즉시 알아차리고 경악을 금치 못하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귀하는 대체 누구시오?" 소불이는 자기가 조금 전 이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에 그대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왼손을 쳐들고 엄지손가락과 식지로 긴 수염을 세 번 만졌다. 긴 그림자의 사나이는 이것을 보자 즉시 입을 열어 물었다. "노인장의 수염은 언제 하얗게 변하셨소?" 소불이는 조금 전 자기가 들은대로 대답을 했다. "벌써 삼 년이 되었소." 그러자 긴 그림자의 사람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말을 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변노란 말이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쉬! 백형,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따라 오시오." 하는 소리와 함께 긴 그림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밖을 향해 급히 걸어갔다. 긴 그림자의 사람 역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의 뒤를 급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들 두 사람은 하나의 비교적 조용한 마당에 들어섰다. 마당 옆에는 정주쌍협 배천석의 영구가 놓여 있는 하나의 객청이 있었다. 소불이는 긴 그림자의 사람을 데리고 앞장을 서서 계단을 지나 객청 안에 놓여 있는 배천석의 관 앞에 다가가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긴 그림자의 사람은 소불이가 서 있는 것을 보자 몹시 궁금한 듯 물었다. "변노, 무슨 지시가 계십니까?" 소불이는 원래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조건 그를 여기까지 끌어왔던 것이다. 또한 여기가 조용하여 만약 싸움이 시작될 경우 발각이 되지 않게하기 위해서다. 이때 소불이는 그 사람을 한 번 쳐다보더니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관을 가리켰다. "백형,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저 관을 열어 보시오." 긴 그림자의 사람은 소불이의 명령을 받고 앞으로 바싹 다가서더니 손쉽게 뚜껑을 열었다. 긴 그림자의 사람은 소불이를 향해 다시 물었다. "변노, 또 다른 지시는 계시지 않습니까?"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명령을 했다. "관 안에 들어있는 사람인 누군가를 한 번 보시오." 긴 그림자의 사람은 다시 한 번 관을 들여다 보며 대답을 했다. "관 안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깜짝 놀라며 언성을 높였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관 안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말을 끝냄과 동시체 그는 그 사람의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긴 그림자의 사람은 소불이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관 안을 향해 손짓을 했다. 소불이는 그가 속임수를 쓸까봐 미리 왼손에 힘을 주입시키고 관속을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관 속에는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었다. 소불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군.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말을 끝냄과 동시에 갑자기 긴 그림자의 사람을 향해 번개처럼 일지를 찔러갔다. "친구, 친구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긴 그림자의 사람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양대혈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소불이는 급히 그 사람의 품 속에 있는 소지품을 모두 꺼내더니 자기의 품에 넣은 후 그 사람을 관 속에 집어 넣고 뚜껑을 닫아 버렸다. 소불이는 주위를 한 번 살피더니 바람처럼 객청을 빠져나갔다. 소불이가 빠져나간 후 객청의 대들보 위에서 두 사람이 급히 뛰어내렸다. 보통 체격의 사나이가 다른 사나이를 쳐다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원래 그였구나." 또 하나의 체격이 큰 사나이가 빙긋이 웃었다. "우리는 누구인지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오?" 말을 끝내자마자 두 명의 사나이 역시 객청 밖을 향해 바람처럼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이때 소불이는 어느 산위의 옥정랑군 심자귀의 거처에까지 와서 그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집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불이는 할 수 없이 의여금사를 꺼내 방문을 열고 들어간 후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집 안의 침상에는 과연 심자귀가 옷을 벗지 않은 채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소불이는 그것을 보자 곁으로 바싹 다가가더니 그의 머리를 흔들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심노대! 어서 일어나시오." 하지만 심자귀는 여전히 쓰러져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불이가 아무리 흔들고 불러 보았지만 심자귀는 깨어나지 않았다. 소불이는 즉시 상 위에 놓여 있는 물을 들고 심자귀의 옆으로 다가가더니 그의 얼굴에다 뿌렸다. 순간-. 쓰러진 채로 누워 있던 심자귀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소불이의 맥문을 잡고 냉소를 치는게 아닌가. "나는 소노형인 줄 모르고 있었는데 좀 안 되었소."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소불이의 팔꿈치 아래의 혈도를 번개처럼 찔렀다. 소불이는 급히 팔을 뒤틀며 약간 언성을 높혔다. "심노대!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이오!" 심자귀는 소불이를 무섭게 노려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소노형! 제가 말을 하지 않아도 노형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말소리와 함께 또 다시 소불이를 향해 번개처럼 일지를 찔러갔다. 소불이는 급히 몸을 피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만약 이 늙은이가 당신을 암살하려고 했다면 무엇 때문에 찬물로 깨어나게 했겠소?" 심자귀는 여전히 그를 노려보면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다면 노형은 무엇 때문에 방문을 열고 들어 왔소?" 소불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급히 말을 받았다. "이 늙은이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들어왔던 것이오." 하지만 심자귀는 여전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더니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흥, 당신의 마음을 대체 누가 알겠소?" 소불이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만약 이 늙은이가 또 하나의 심노대를 잡지 않았더라면 노대는 아마 잿더미가 되어 버렸을 것이오. 그런데 어찌……." 이 말을 듣자 심자귀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심자귀는 몹시 이상한 듯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소불이의 말을 가로챘다. "또 하나의 심노대라니……? 소노형께서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함부로 하고 있소?" 소불이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심노대! 당신은 지금 이 늙은이의 완맥을 잡은 채 고문을 하고 있는 것이오?" 이 말을 듣자 심자귀는 하는 수 없이 소불이를 움켜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소노형! 이제는 놓았으니 말을 할 수 있겠소?" 소불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심노대가 당했다는 줄로 알고 있었소. 그래서 이 약은 색깔도 냄새도 없는데 어떻게 알아 냈소?" 심자귀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어젯밤 누가 술에다 독을 뿌린 후부터 저는 주의를 하고 있었소. 그렇기 때문에 오늘밤 차를 가져온 소녀가 찻잔을 놓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을 했소. 또한 그녀가 방비를 하지 않은 틈을 타서 즉시 혼혈을 찌르고 쓰러뜨렸소." 소불이는 알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그녀를 무엇 때문에 쓰러뜨렸소?" 심자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녀를 쓰러뜨린 후에 차를 다시 시녀의 입 속에다 부은 다음 그녀와 혼혈을 깨어나게 했소." 소불이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심노대는 참으로 고명하오. 만약 찻속에 미약이 있었다면 그녀의 혼혈이 다시 풀어지고 깨어날 수는 없지요." 심자귀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맞았소. 시녀는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소." 소불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궁금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그 시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심자귀는 두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녀를 이미 다른 곳으로 보냈소."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소불이를 향해 선뜻 물었다. "여러말 할 필요 없이 지금 소노형께서 여기에 온 목적을 말씀해 보시오." 소불이는 어이가 없는 듯 실소를 머금은 채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바로 심노대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이 늙은이가 조금 전에 말을 하지 않았소?" 그러자 심자귀는 갑자기 냉소를 날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기다려야 하오." 소불이는 무슨 생각으로 하고 있는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얼마 후 소불이는 고개를 들고 심자귀를 바라보더니 침중하게 물었다. "그들을 만나게 되면 살아날 수가 있을 것 같소?" 심자귀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노형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시오?" 이때 소불이가 품 속에서 하나의 구리관을 꺼내더니 심자귀에게 건네주며 히죽 웃었다. "심노대! 어서 이것을 한번 보시오." 심자귀는 그것을 보자마자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이어 그는 공손히 받아들며 궁금한 듯 급히 물었다. "화혈침(花穴針)소노형께서는 도대체 어디에서 얻었소?" 소불이는 히죽 웃고만 있을 뿐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심자귀는 몹시 궁금한 듯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재촉했다. "소노형! 무엇을 그처럼 꾸물거리시오? 어서 대답을 좀해 주십시오." 소불이는 여전히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연 알고 있었구려. 이 늙은이는 또 하나의 옥적랑군 심자귀에게서 얻어온 것이오." 심자귀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하지만 소노형!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어서 자세히 좀 얘기해 보시오." 소불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한두어 번 끄덕이더니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이 말을 듣자 심자귀는 안색이 변하여 이를 갈아붙였다. "소노형! 그 집안에 들어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오?" 소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이 늙은이가 지붕 위에서 그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만도 큰 수확인데 어떻게 누구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소?" 심자귀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소불이를 향해 급히 외쳤다. "그렇다면 소노형께서 관 속에다 집어 넣은 백가 놈을 좀 보러 가는 것이 어떻겠소?" 소불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앞을 가로막았다. "안 되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되오." 심자귀는 다시 침상에 주저앉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엇 때문에 안 된단 말이오?" 소불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히죽 웃으며 반문을 했다. "만약 노대가 그것을 공개해 버리면 이 늙은이의 수고가 헛되는 것이 아니겠소?" 악독한 음모 심자귀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멍청해지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노형께서 자세히 말을 좀 해주시오."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백가라는 친구는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하오. 또한 이 늙은이가 그의 품 속에 있는 물건을 모두 꺼내 왔으니 심노대께서는 그들의 계획에 끼어 들어가 가짜 심자귀의 행세를 하시라는 말이오." 심자귀는 소불이의 이같은 말을 듣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다시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물었다. "지금 소노형의 뜻은 저에게 관 속에 누워 있는 백가로 행세률 하라는 말이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맞았소. 심노대께선 잠시 백가로 변장을 해서 그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시오. 그렇게 되면 그들의 뒤에 있는 변노를 찾을 수가 있지 않소?" 심자귀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소노형! 과연 지혜가 많으시오. 그렇다면 저는 지금부터 노형의 말대로 하겠소. 이제 더 이상 무슨 할 말은 없소?" 소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급히 말을 꺼냈다. "또 한 가지 이 늙은이가 얘기하지 않은 것이 있소." 심자귀는 정색을 하고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들었다. "소노형! 무슨 얘기인지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어서 해보시오."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름이 아기라 바로 배 둘째의 시체가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소." 이 말을 듣자 심자귀는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소노형!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소? 정말로 배 둘째의 시체가 없어졌단 말이오?"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설명을 했다. "조금 전 객청 안에 놓여 띤던 것은 분명히 빈 관이었고 이 늙은이는 백가의 혈도를 제압한 후 그를 그 속에 넣어 두고 이곳에 왔소." 심자귀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이를 갈아붙였다. "아마 배 둘째의 시체는 누가 훔쳐 갔을 것이오." 소불이는 다시 심자귀를 한동안 쳐다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약간 언성을 높여 물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심노대께서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지 앉소." 심자귀는 깜짝 놀라며 궁금한 듯 급히 다그쳤다. "예! 제가 무엇을 생각해 내지 못했단 말이오?"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 둘째는 아마 죽지 않았을 것이오." 심자귀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배 둘째가 정말로 죽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죽은 척 했단 말이오?" 소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이 늙은이도 확실히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어떻게 되었든 배 둘째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소." 심자귀는 소불이를 주시하며 궁금한 듯 물었다. "배 둘째가 죽은 후에 소노형께서도 조사를 해보지 않았소?" 소불이는 급히 손을 흔들며 가볍게 탄식을 했다. "심노대! 또 그런 쓸데 없는 소리를 하고 있구려. 죽은 사람은 금방 온몸이 완전히 식어 버리지 않소.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체온이 남아 있지요." 심자귀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급히 물었다. "하지만 등뒤에 있는 상문지의 자국은 대체 누구 것이란 말이오…" 소불이는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만약 그가 일부러 죽은 척하고 공범을 만들기 위해서 지인을 위조하는 것쯤이야 너무 쉬운 일이 아니오?" 심자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일은 복잡해지는 것 같소." 소불이는 다시 심자귀를 주시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허허허…… 조금도 복잡할 것이 없지 않소?" 심자귀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냉랭하게 물었다. "아니, 어찌 복잡하지 않단 말이오?" 소불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입을 열었다. "다만 적과 좋은 편, 이렇게 쌍방이 있기 때문에 우리 쪽에 서 있지 않으면 적이 되는 것이 아니오?" 심자귀는 고개를 쳐들고 가볍게 탄식을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좋은 편과 나쁜 편을 어떻게 구분할 수가 있겠소?" 이때, 소불이는 갑자기 심자귀가 고개를 돌리며 자기를 바라보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은 완전히 심노대에게 달려 있으니 뭐라고 할 수가 없소." 심자귀는 이 말을 듣고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려고 했다. 순간, 소불이가 갑자기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쉿!" 그리고는 심자귀를 향해 급히 손짓을 했다. "누가 온 것 같으니 노대께서는 어서 침상 위로 올라가시오." 심자귀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잠시 주저했다. "아니, 무슨일 때문에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시오? 누가 밖에 오기라도 했단 말이오!" 소불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급히 손짓을 했다. 하지만 심자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약간 음성을 낮추어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처럼 태연스럽게 서 있소?" 소불이는 빙긋이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이 늙은이는 원래부터 좋지 못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니 노대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획!" 하고 어느 사이에 대들보 위에 올라가더니 마치 쥐새끼처럼 달라붙었다. 심자귀는 혀를 내두르며 소불이의 말대로 침상 위로 올라가 숨을 죽였다. 얼마 후에 과언 일진의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 발자국 소리는 분명히 복도에서 들리고 있었으며 침실을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심자귀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소불이는 경공만 당대 무림에서 제일인 줄 알았더니 내공도 몇해 동안 만나지 않은 사이에 나보다 훨씬 높아진 것 같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 들려 오던 발자국 소리가 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순간, "똑! 똑! 똑!" 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심노대! 심노대! 벌써 잠이 들었소?" 심자귀는 그 목소리를 듣자 급히 침상에서 일어나 말을 받았다. "정형께서 이 어두운 밤에 웬일로 찾아오셨소?"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불을 켜며 문을 열었다. "그렇게 서 계시지만 말고 어서 들어오시오." 정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들어오더니 말을 꺼냈다. "저는 심형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소." 심자귀는 정첩후가 들어온 다음 문을 닫고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정형! 무슨 말인지 주저하지 말고 어서 얘기를 좀 해보시오." 정첩후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마의교에 관한 얘기를 좀 하려고 왔소." 심자귀는 급히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더니 궁금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다그치듯 물었다. "정형께서는 도대체 뭘 발견했다는 말이오?" 정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하게 물었다. "심형께서는 지금 초공자를 어떻게 보시오?" 심자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반문을 했다. "정형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니 어서 자세히 말씀 좀 해주시오." 정첩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서 조금 전 제가 말한 것은 초공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이오." 심자귀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선뜻 말을 받았다. "저는 협의의 인물로 보고 있소. 하지만 강호상에서는 교활한지 모르고 있소." 정첩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오. 심형께서는 잘못 보신 것 같소." 심자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다면 저의 생각이 틀렸단 말인가요?" 정첩후는 주위를 한 번 살펴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저는 그의 무공이 아주 높다고 믿고 있소." 심자귀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다그치듯 물었다. "무엇을 보고 그의 무공이 높다고 하는 거요?" 정첩후는 두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얼마 후에 다시 눈을 뜨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제가 첫날 여기에 올 때 그의 서재에서 만든 하나의 해골을 보았소. 뿐만 아니라 해골 바가지의 뚜껑 위에는 다섯 개의 아주 작은 지인이 찍혀 있었소. 그것이 바로 오음조(五陰爪)란 무공이오. 또한 무공을 연마하려면 반드시 아주 심후한 공력이 있어야만 할 수가 있소." 심자귀는 이 말을 듣자 빙긋이 웃으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하하…… 초공자의 별호가 소맹상이니 그의 문하에 방문좌도의 무사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소. 그것을 보고 배워서 한 것인지도 모르오." 정첩후는 다신 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저는 여기에 올 때부터 무엇인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소. 그렇기 때문에 유심히 관찰을 해본 결과 한 가지 비밀을 발견할 수가 있었소." 심자귀는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 다그치듯 물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을 발견했단 말이오?" 정첩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초부 안에는 밤마다 야행인이 출입을 하고 있었소." 심자귀는 그 말을 듣자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정형께서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 마의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소?" 정첩후는 잠시 주저하더니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는 원래 낙양(洛陽)에 있는 마의교의 사람만이 움직이지 않는 줄 알았었소. 하지만 저는 오늘밤에 또 하나의 비밀을 알아냈소." 심자귀는 또다시 궁금한 듯 깨우쳐 물었다. "무슨 비밀을 알아냈는지 어서 말해 보시오." 정첩후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하고 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심자귀와 정첩후는 말을 뚝 그친 채 긴장하여 귀를 기울였다. 순간, 밖에서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심노대! 잠이 들었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바로 소맹상(小孟償) 초숭생(楚嵩生)이었다. 심자귀는 즉시 일어서더니 문을 열었다. "초공자, 어서 들어오시오." 방문이 열리고 초숭생은 들어오다가 정첩후를 보자 급히 허리를 굽히며 말을 꺼냈다. "정대협께서도 여기에 와 계셨구려." 정첩후는 억지로 웃으며 같이 허리를 굽혔다. "어서 들어오시오. 도대체 잠이 오지 않아서 심자귀와 얘기 좀 나누려고 왔소." 초숭생은 좀 멋적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마침 두 분을 찾아서 무엇인가를 좀 상의해 보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된 것 같소." 심자귀는 자리를 청하며 빙긋이 웃었다. "공자! 할 얘기가 있으시면 앉아서 얘기하시오." 그러나 초숭생은 자리에 앉지 않고 방 안을 서성거리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저의 서재에서 조금 전에 무슨 일이 발생했소." 이 말을 들은 심자귀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을 받았다. "그것이 사실이오? 또 무슨 일이 발생했단 말이오?" 초숭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설명을 했다. "여러분이 떠난 후에 저는 즉시 돌아가서 불을 끄고 잠을 청했소. 제가 자고 있는 방과 서재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요. 그런데 잠이 채 들기도 전에 첨향의 처절한 비명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가보니 그녀는 벌써 죽어 있었고 진열장의 문은 열려 있었소. 그래서 저는 급한 김에 큰 소리로 초흥을 불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소. 이렇게 되어 저는 또 다시 문 입구로 가보니 초흥 역시 남한테 사혈을 제압당한 채 문 입구에 서 있는 것이 아니겠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정첩후가 나서며 궁금한 듯 물었다. "그 사람의 목적은 진열장 안에 들어 있는 단목인두를 거두어 가려는 것이었소?" 초숭생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맞았소. 그랬던 것 같았으나 그 사람은 다만 하나의 인두밖에 가져가지 못했소." 옆에 있던 심자귀가 안색이 약간 변하여 급히 물었다. "누구 것을 가지고 갔는지는 알고 있소?" 초숭생은 잠시 주저하더니 정첩후를 주시하며 가볍게 탄식을 했다. "음…… 바로 정대형의 것인 것 같았소. 하지만……" 정첩후는 이 말을 듣자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가로챘다. "흥! 하지만 저도 그렇게 쉽게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오." 초숭생은 만면에 걱정스러운 빛을 가득 띤 채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사람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으니 정대협께서는 조심을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소." 옆에서 듣고 있던 심자귀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섰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마의의 사람들을 당할 수가 없다면 집에서 잠이나 자야 하겠소." 정첩후가 일어서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앉아서 얘기를 나누시오. 저는 볼일이 있기 때문에 그만 가봐야겠소." 심자귀가 일어서며 그를 주시하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정형! 도대체 어디로 가시려고 이러시오?" 정첩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다시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들이 벌써 저의 단목인두를 가지고 갔으니 오늘밤은 아마 저를 찾을 것이 분명하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생각이오." 자리에 앉아 있던 초숭생이 다시 그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정대협! 잠깐만 기다려 보시오. 저도 마침 그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 왔으니 우리 함께 가서 조사해 봅시다." 그러나 정첩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저 혼자 가서 조사해 보아도 됩니다." 거화소천(擧化燒天) 말을 끝내자마자 정첩후는 고개를 돌려 보지도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초숭생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정첩후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심자귀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심형! 우리도 정형의 뒤를 따라가 보는 것이 어떻겠소?" 심자귀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정형의 무공으로는 별일 없을 것 같으니 우리는 서재로 가 봅시다." 말을 끝내자마자 두 사람 역시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어 문 앞에까지 걸어나오던 심자귀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소불이를 향해 진기전음으로 말을 이었다. "소노형! 정형은 소노형에게 맡겨야만 하겠소." 하고는 급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동시에 소불이는 가볍게 뛰어 내리더니 방문을 열고 정주쌍협이 거주하고 있는 서쪽의 마당을 향해 연기처럼 날아갔다. 이때 정첩후는 벌써 방 안으로 들어가 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삼경이 지나도록 적이 나타나지를 않자 정첩후는 초조한 기색을 띠며 방 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것 같았다. 소불이는 적시에 날아와 마치 쥐새끼처럼 담 위에 붙은 채 주위를 살폈다. 순간,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는 일진의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바로 이때-. 하나의 그림자가 문을 박차고 굴러나왔다. 또한 그 그림자의 뒤로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번개처럼 따라나오며 단검으로 정첩후의 목을 겨누었다. 정첩후는 강호상에서 일류 고수라고 할 수가 없지만 갑작스런 적의 습격을 받아 벌써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유명한 팔보극(八步戟)은 상대방의 검 아래 전개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 정첩후가 하는 수없이 왼손에 들고 있던 단극으로 상대방의 검을 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챙!" 하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정첩후는 상대방의 예리한 검세를 막아내며 상대방을 뒤로 한 걸음 물러나게 했다. 지금 정첩후와 상대를 하고 있는 사람은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순간, 검은 복면의 사람은 다시 정첩후의 정면을 향해 비호처럼 날아 들었다. 정첩후는 비록 그의 검세를 막아내기는 했지만 뒤로 한 발자국 물러 섰다. 하지만 검은 복면의 사람은 조금도 늦추지 않고 급히 달려들어 단검을 정첩후의 목에 겨누며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 정첩후, 당신도 이제는 죽을 때가 된 것 같소? 정첩후는 오른쪽 어깨에 심한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벌써 선혈이 소맷자락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쌍극을 쓰는 사람이 오른팔의 부상 때문에 왼손으로만 단극을 쥐고 있으니 무공은 절반이나 줄어든 셈이 되는 것이다. 정첩후는 상대방에게 이처럼 모욕을 당하자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를 갈아붙이며 고함을 질렀다. "이 무례한 놈! 오늘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겠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거화소천(擧文燒天)이란 초식을 전개하며 상대방의 단검을 힘껏 내리쳤다. 정첩후가 단극을 휘두르자마자 그의 귓전에 약간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형! 어서 상처를 치료하시오. 그리고 쌍극을 저에게 잠깐 빌려주시오."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쌍극이 어느 사이에 없어졌다. 정첩후는 깜짝 놀라 급히 뒤로 수척 가량 물러났다. 과연 자기가 원래 서 있던 자리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 사람의 체격은 소불이와 매우 비슷한 것 같았다. 하지만 생김새는 아주 괴이하게 생긴 육척 대한이었다. 이때, 그 사람은 정첩후의 쌍극을 움켜쥔 채 복면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한 정첩후는 금창약을 꺼내서 자기의 상처에 바르고 옷을 찢어서 상처를 감싸기 시작하였다. 복면인은 그 사람을 주시하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귀하는 대체 누군데 간섭이오?" 육척 대한은 복면인을 노려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복면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묻소?" 복면인은 여전히 냉소를 터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내가 꼭 너를 알아야만 되는 줄 알았더냐?" 육척 대한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는 무엇 때문이 물었소?" 복면인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좋다. 어찌되었든 너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육척 대한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도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데?"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단극으로 복면인의 검은 복면을 향하여 번개처럼 찔러갔다. 복면인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놈! 죽고 싶어서 단단히 환장을 한 모양이로구나!" 복면인은 몸을 비틀어 대한의 단극을 피하고 동시에 한 발을 내밀며 손에 들고 있던 단검으로 계속해서 세 번씩이나 찔러 왔다. 하지만 육척 대한 역시 복면인의 공격을 가볍게 막았다. 또한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복면인은 대한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이걸 막을수 있는 것을 보니 실력이 꽤 있는 모양이구나. 하하하…." 그러나 육척 대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복면인의 비유혈(臂儒穴)을 찔러 갔다. 이 일 초는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것 같았다. 순간, 복면인은 주춤하며 급히 단검을 거두었다. 하지만 육척 대한은 단극으로 또다시 하나의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번개처럼 공격해 들어갔다. 이 순간, 두 사람은 어느 사이에 위치가 바뀌었다. 복면인 역시 상대방이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자기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번개처럼 단검을 휘둘렀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불꽃 튀는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복면인이 쓰고 있는 초식은 악독하기가 그지 없었으며, 모두 육척대한의 급소만을 노리는 공격이었다. 육척 대한 역시 수중의 단극으로 상대방과 변화무쌍하게 벌써 오십여 초씩을 겨루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복면인의 검세는 악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복면 안으로 벌써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놈! 죽을 때가 다 된것 같구나. 어서 쓰러져라!"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손바닥으로 복면인의 왼쪽 어깨를 향해 번개처럼 후려쳐 갔다. 복면인은 육척 대한의 일 장을 맞았는지, "으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마치 부상을 입은 야수처럼 허공을 향해 치솟아 오르더니 바람처럼 담 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육척 대한은 황급히 몸을 돌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비겁한 놈아! 어디로 도망을 치느냐?" 말을 끝냄과 동시에 허공을 가르며 유성처럼 몸을 날렸다. 그러나 복면인은 냉소를 치며 수십 개의 은광을 날리며 담 밖을 향해 도망을 쳤다. 육척 대한은 은광이 자기를 향해 화살처럼 날아들자 급히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았다. 이때, "쌩! 쌩? 하는 소리와 함께 복면인이 날린 암기는 즉시 그의 몸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복면인은 어느새 종적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육척 대한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정첩후를 향해 말을 건넸다. "정노대! 받으시오." 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단극을 정첩후를 향해 던졌다. 그리고는 급히 몸을 돌려 발길을 옮겼다. 정첩후는 급히 단극을 받아들며 언성을 높였다. "여보시오! 저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으니 잠깐 기다리시오." 하지만 육척의 대한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첩후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하는 수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불을 켰다. 바로 이 순간, 누가 가슴에 일 장을 맞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첩후는 안색이 변하여 쓰러져 있는 사람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급히 흔들었다. "여보게! 배 둘째!" 지금 쓰러져 있는 사람은 분명히 정주쌍협의 둘째 배천석이었던 것이다. 정첩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배천석이 어떻게 두 번씩이나 죽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분명히 마의교의 상문지에 의해 죽었었는데…… 어떻게 또다시 여기에 와서 일 검을 맞고 죽었지…….' 정첩후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장탄식을 했다. "배 둘째! 정말로 남에게 살해를 당하고 말았구나!" 정첩후는 또다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소불이 그놈들이 배 둘째를 죽이고 또 무슨 악을 제거한다고…… 내 반드시 그놈들을 잡아서 모두 갈기갈기 찢어 놓겠다." 이때, 지붕 위에서 갑자기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뛰어내렸다. 그 그림자는 정첩후가 있는 방을 향해 걸어가더니 문을 두드렸다. 정첩후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돌리면서 소리쳤다. "누구시오!" "나요! 좀 실례를 하겠소." 하는 소리와 함께 육척 대한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첩후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급히 물었다. "귀하께서는 조금 전에 돌아가시더니 또 무슨 일이 있어서 왔소!" 육척 대한은 빙긋이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소.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왔소." 정첩후는 여전히 어리둥절하여 급히 말을 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으나 어서 말을 해 보시오." 육척 대한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무림맹은 무림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지 무림의 사람을 해치려고 세운 것은 절대 아니오." 정첩후는 이 말을 듣자 두 눈이 휘둥그래서 한동안 그를 주시하더니 다그쳐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귀하께서는 무림맹의 사람이란 말이오?" 육척 대한은 가볍게 웃으며 얼굴에 쓰고 있던 면구를 벗었다. "무림맹의 사람일 뿐만 아니라 바로 소불이요." 정첩후는 더욱 멍청해지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다…… 당신이 정말로 소노형이시오?" 소불이는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제가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소?" 정첩후는 급히 공수를 하며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조금전 제가 한 얘기, 소노형께서 이해해 주시오." 소불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빙긋이 웃었다. "허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그는 이어 쓰러져 있는 배천석을 가리키며 궁금한 듯 물었다. "하지만 배이협께서는 무엇 때문에 저렇게 하고 있소?" 정첩후는 무겁게 탄식을 하면 힘없이 말을 이었다. "배 둘째는 이번에 정말로 죽은 것 같소." 소불이는 조금 전 객청 안에 있는 빈 잔을 보았기 때문에 배천석이 죽지 않은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전에 죽은 사람은 가짜 배이협이란 말이오?" 정첩후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저는 소노형께서 마의교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리겠소. 저의 배 둘째는 분명히 가짜로 죽었던 것이오."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정첩후를 주시하더니 다시 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정첩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얘기를 하자면 저는 초공자가 마의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의심을 하기 시작했었소. 그렇기 때문에 저는 배둘째에게 죽은 척하고 암암리에 조사를 하도록 했소." 소불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노부는 배 둘째의 몸이 식은 것을 확인했었는데 정첩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 둘째는 전에 상서(湘西) 무릉산(武陵山)에서 한 분의 이상한 사람을 만나 거식대법을 배웠기 때문에 초공자 등 사람들을 충분히 속일 수가 있었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첩후를 주시했다. "그렇다면 정형은 어떻게 해서 이 늙은이를 의심하게 되었소?" 정첩후는 멋적은 듯 빙긋이 웃으며 반문을 했다. "소노형께서는 조금 전에 빈 관을 발견하지 않았소?" 소불이는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것을 정형이 어떻게 알았단 말이오?" 정첩후는 소불이를 잠시 주시하더니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참으로 우연이었소. 저는 오늘밤에 배 둘째를 관 속에서 꺼내 놓기로 약속을 했었소. 그렇기 때문에 제가 그곳에서 매복을 하고 있을 때 소노형께서 누구를 처치하는 것을 목격했을 뿐이오." 소불이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이를 갈아붙였다. "이 늙은이가 조금 전에 처치했던 사람은 바로 마의교 놈이었소." 정첩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궁금한 듯 물었다. "소노형께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죽여 버렸소?" 소불이는 급히 손을 흔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오. 이 늙은이는 그의 혼혈을 찔렀을 뿐이오." 정첩후는 다시 가볍게 탄식을 하며 또 물었다. "한데 소노형께서는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을 발견했소?" 소불이는 사실대로 오늘밤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이 말을 듣자 정첩후는 이를 갈아붙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악독한 놈들! 과연 음모가 있었구나." 소불이는 빙그레 웃으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는 당신네들이 무슨 방파를 창립한다는 것이 바로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던 정첩후가 또 물었다. "한데 마의교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이오?" 소불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마의교 역시 하나의 눈속임일 것이오." 정첩후는 정색을 하고 소불이를 바라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소노형의 말투를 들어보니 뒤에는 또 다른 어떤 인물이 있을 것 같은데……"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첩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소노형께서는 이것이 바로 무명도의 사람이 하는 짓이라고 보고 있소?" 소불이는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천천히 설명을 했다. "그것은 바로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마의교의 공포 수단을 이용하고, 먼저 하남지방에서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한 다음 여러 사람들에게 마의교가 되살아났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려고 하는 것 같소." 흑가면(黑假面) 정첩후는 표정이 굳어진 채로 머리를 두어 번 끄덕였다. "소노형의 말이 맞는 것 같소.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소불이 역시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우리는 먼저 그들의 배후 인물을 찾아야 하오." 정첩후는 소불이의 곁으로 한 걸음다가서며 다시 물었다. "소노형께서는 혹시 무슨 단서라도 잡았소?" 소불이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오. 우리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서 천천히 찾아낸다면 충분히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오." 정첩후는 그제서야 얼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도 여러분들과 함께 힘껏 해보겠소." 소불이는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반쯤 감고 있더니 선뜻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소. 아마 그것으로 그들의 정체를 밝혀낼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오." 이 말을 듣자 정첩후는 눈에 신광을 번뜩이며 급히 다그쳤다. "소노형에게 무슨 묘계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어서 말씀하시오." 소불이는 정첩후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 소곤거렸다. 정첩후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소노형, 그렇다면 우리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소불이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배천석의 시체를 가리켰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지체를 해서는 안되니만큼 빨리 배 둘째의 유해를 관 속에다 넣는 것이 어떻겠소?" 정첩후는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배천석의 시체를 들고 나갔다. 소불이는 밖으로 나와 지붕 위로 올라가더니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정첩후는 신속히 관의 뚜껑을 열고 먼저 백가를 꺼낸 다음 배천석을 집어 넣더니, 백가를 배천석의 위에다 올려 놓았다. 정첩후는 다시 관 밑에 몇 개의 조그만 구멍을 뚫고 관 뚜껑을 닫았다. 소불이는 그때 지붕 위를 건너 뛰어 자기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으며, 당승무의 코고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소불이는 이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로 갔지……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방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방바닥에는 찻잔이 깨어져 있었는데 만치 누가 방 안에서 싸운 것 같았다. 그러나 당승무의 침상은 가지런히 정돈이 되어 있는 게 자고 있었던 것 같지가 않았다. 이 점으로 봐서 분명히 누가 들어온 것 같았으며, 들어오자마자 당승무에게 발각이 되어 방 안에서 한 차례의 싸움을 벌인 것 같았다. 또한 방 안에 들어왔던 사람은 당승무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알아 차리고 도망을 쳤으며, 당승무는 쫓아갔을 것이다. 소불이는 여전히 방 안을 서성거리며 내심 생각했다. '당승무의 실력으로 볼 때 또한 그의 독공으로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열 명이 덜어 왔다고 할지라도 그의 적수는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소불이는 몹시 태연스럽게 의자에 앉아 오늘의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소불이는 갑자기 주위를 살펴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날이 벌써 밝은 것 같은데 당노제는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을까……." 말을 끝냄과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일진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소불이는 당승무의 발자국 소리를 듣자 빙긋이 웃으며 생각했다. '정말로 쓸데 없는 걱정을 한 것 같구나… 당노제는 경공만 나한테 못당할 뿐이지 나머지는 모두 나보다 강한데 어찌 실수를 하겠는가….' 이때 방문이 천천히 열리고 과연 당승무가 들어왔다. 소불이는 당승무를 보자 어깨를 들석거리며 히죽이 웃었다. "당노제! 대체 어디에 갔었기에 이제 돌아오는가?" 당승무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소노대께서도 돌아와 계셨군요." 말을 끝내자마자 검은 손바닥으로 소불이의 가슴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소불이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급히 당승무의 손을 잡았다. "당노제!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자네는 지금……." 당승무는 급히 그의 말을 가로채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당신의 정체를 밝히시오? 그러나 당승무는 소불이가 자기의 손을 잡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소불이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라 또다시 물었다. "당노제! 자네는 무엇 때문에 쓸 데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가? 어서 사실대로 말을 좀 해보게?" 얼마가 지나서야 당승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후유…, 이제 보니 정말로 소노대이셨군요." 소불이는 이 말을 듣자 멍청해지며 말을 떠듬거렸다. "아…… 아니, 그렇다면 가짜 소불이가 있단 말인가?"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갈아붙였다. "저는 지금 그놈을 쫓아가다가 놓쳤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소불이를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제가 비록 놓치기는 했을지라도 최소한도 그놈은 이미 중독이 되었을 것입니다." 소불이는 그제서야 웃음을 띠며 궁금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도 자네의 맥문을 잡았나?" 당승무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소노대께서는 어떻게 그것을 아십니까?" 소불이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허허허…… 이 늙은이는 다만 추측을 했을 뿐이네. 만약 그가 노제의 암기를 맞았다면 어찌 도망을 칠 수가 있겠는가? 또한 자네는 그가 중독이 되었을 것이라고 아까 이야기 했는데 그가 자네의 맥문을 잡지 않은 한 어떻게 중독이 될 수가 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만약 그럴지 않았다면 자네가 어찌 갑자기 이 늙은이가 자네의 손을 잡아도 그냥 내버려 두었겠는가?" 조금전 당승무는 소불이가 자기의 손을 잡아도 내버려 두었다. 왜냐하면 진짜 소불이는 독공을 연마했기 때문에 독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당승무는 소불이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소노대를 속일 수는 없군요."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늙은이가 아무리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직접 보지 못했으니 노제가 자세히 얘기를 해주기 바라네." 당승무는 불을 켜더니 침상 위를 가리켰다. "소노대! 침상 위를 보고 나서 얘기를 하도록 합시다." 소불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선뜻 입을 열었다. "조금전 이 늙은이가 조사를 해보았는데……." 소불이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침상의 가운데가 어느 사이에 새파랗게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소불이는 그것을 보자 깜짝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아니, 화혈침…… 저것이 창 밖에서 날아왔단 말인가?" 당승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숨섞인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바로 노대께서 가신지 얼마 안 되어 저는 누가 창문틈으로 안을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보기 위해서 창문 밑에 숨었지요." 소불이는 당승무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급히 물었다. "그 후에 그는 곧 화혈침을 발사했단 말인가?" 당승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야 빙긋이 웃으며 화제를 돌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늙은 여우…… 오늘밤에 너도 속았을 것이다." 소불이 역시 빙긋이 웃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맞았네. 오늘밤 우리가 돌아왔을 때에 계집년이 우리에게 차를 마시라고 했는데 차 안에 무슨 약이 틀림없이 들어갔겠지?" 당승무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혹시 그 시녀도……." 소불이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그의 말을 가로챘다. "물론 적의 일당이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시녀의 방에 가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한 번 살펴보게." 당승무는 고개를 들어 소불이를 주시하며 급히 물었다. "소노대께서는 대체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소불이는 다시 어깨를 들먹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완전히 경험일세. 시녀는 들어올 때에 계속해서 찻잔만을 주시하고 있었으니 의심이 갈 만도 하지 않겠는가?" 당승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던데요." 소불이는 방 안을 살펴보며 득의에 찬 웃음을 띠었다. "사실 그들은 계산을 잘못했었네. 우리가 극독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인데 어찌 그까짓 미약을 두려워 할 리가 있겠는가?" 여기까지 말을 한 소불이는 갑자기 웃으며 당승무를 주시했다. "노제! 쓸데없는 소리는 이제 그만하고 어서 조금 전의 얘기를 계속하게." 당승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은 뭐라고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즉시 창문으로 암기를 발사했지요.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록 방 안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자 천천히 문을 열어젖히더니 태연자약하게 들어오더군요. 그 사람은 들어올 때 손에 하나의 구리로 된 관을 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제가 어둠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일 검으로 그의 구리 관을 떨어뜨릴 수가 있었지요." 묵묵히 듣고 있던 소불이가 나서며 한 마디 덧붙였다. "노제가 그의 손을 자르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봐준 셈이지 당승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놈은 구리 관이 땅에 떨어졌는데도 아주 태연스럽게 자기가 사부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자세히 보았더니 그놈은 비록 소노대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말소리가 아주 다른 것을 보고 저는 가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승무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소불이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저는 일부러 놀라는 척하며 사부님께서는 왜 아직 주무시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놈은 자기는 조금전 야행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네가 잠이 들어 있기 때문에 자네를 깨우지 않고 나가서 살펴보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땅에 떨어진 구리 관을 주으며 그 구리 관이 야행인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혈침 같으니 자기에게 달라고 하더군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던 당승무는 지나간 일을 생각하고는 빙긋이 웃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참지못한 채 큰 소리로 웃어젖히고 귀하는 비록 소노대를 잘도 모방을 했지만 아깝게도 당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했지요. 저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번개처럼 그놈을 향해 찔러 갔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놈은 화를 벌컥 내며 사부까지도 물라본다고 큰 소리를 치더군요. 그래서 저는 소노대께서 오실 때가 되었으니 귀하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을 하면서 연속적으로 삼검이나 쳐 갔지요. 그러자 그놈은……." 당승무가 더 이상 말을 꺼내려 하지 않자 소불이는 급히 다그쳤다. "어서 계속해서 이야기해 보게!" 당승무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놈은 큰 소리로 고함을 치며 금라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그에게 손을 잡혀 주었지요." 묵묵히 듣고 있던 소불이가 나서며 말을 가로챘다. "그런데 그놈은 자네의 손에 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인가?" 당승무는 득의하여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제가 나중에 알려 주어서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제 말을 들은 그놈은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놓더니 문을 열고 급히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저는 즉시 그놈의 뒤를 따라갔지만 성 안의 지리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놓치고 말았습니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날이 밝을 때가 된 것 같으니 좀 자는 것이 어떻겠는가? 오늘은 또한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네." 당승무는 소불이를 주시하며 궁금한 듯 다그쳐 물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만약 이 늙은이가 모든 사실을 얘기해 주면 자네는 아마 잠을 자지 않을 것이네. 어서 휴식을 좀 취하게." 당승무는 하는 수 없이 더 이상 묻지 않고 신발을 벗고는 침상 위에 드러누웠다. 소불이 역시 하품을 한 번 하더니 옷도 벗지 않은 채 침상 위로 올라가더니 이불을 푹 뒤집어 쓴 채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나 당승무가 눈을 떴을 때, 화사한 햇빛은 창문에까지 비쳐들고 있었다. 소불이는 어느 사이에 일어나 있었으며 당승무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 빙긋이 웃었다. "이제 일어났는가? 초공자는 벌써 사람을 보내 서재에서 만나기로 하였네. 그러니 어서 세수를 하고 가보세." 당승무는 급히 세수를 하고 소불이와 함께 초공자의 서재로 갔다. 초공자의 서재에는 심자귀, 금화상, 정첩후 등의 사람이 벌써 와 앉아 있었다. 초숭생은 소불이와 당승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허리를 굽히며 반갑게 맞았다. "두 분께서는 시장하실 테니 먼저 아침을 먹고 난 다음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상의하는 것이 어떻겠소?" 소불이는 일부러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물었다. "어젯밤에 혹시 무슨 사고라도 일어났소?" 초숭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중하게 대답했다. "바로 어젯밤, 저의 서재에 있는 서동과 시녀 두 사람이 피살을 당하였소. 또한 단목인두까지도 없어졌지요." 소불이는 여러 사람들을 한 번씩 주시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어느 분의 것이 없어졌단 말이오?" 정첩후가 초숭생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을 했다. "바로 저의 것이 없어졌소." 초숭생이 다시 나서며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어젯밤에 두 명의 괴한이 후원으로 들어왔고 저의 누이동생에게 발각이 되어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었소. 그때 두명의 적은 대적을 하지 못하고 도망을 쳤으나 누이동생이 그들을 쫓다가 상대방의 흑살장에 맞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소." 초숭생은 소불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시 말을 계속했다. "누이동생은 지금까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바로 왼쪽 어깨에 맞은 것 같소." 소불이가 정색을 하며 초숭생을 똑바로 주시하더니 자신있게 웃었다. "여기에 흑살장을 치료하는 약이 있소. 만약 상처가 심하지 않으면 곧 나을 것이오." 하고는 품 속에서 세 개의 알약을 꺼내더니 초숭생에게 건네주었다. 초숭생은 두 손으로 공손히 나직이 물었다. "소대협! 이 약은 전문적으로 흑살장을 치료하는 약이오?" 소불이는 또다시 웃으며 어깨를 들먹거렸다. "아니오. 이것은 흑살장만 전문적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독상도 치료할 수 있소." 이때, 청의시녀 한 명이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초숭생은 시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약을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영약이니 어서 낭자에게 먹이도록 해라? 청의시녀가 약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나가자 초숭생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적은 침입을 해서 두 개의 단목인두를 가져갔을 뿐만 아니라 연속적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였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첩후가 나서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는 초공자에게 한 마디 물어볼 것이 있소." 초숭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첩후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저는 배 둘째의 영구를 고향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어떻소?" 초숭생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한데 정대협께서는 언제 떠나시려오?" 장원의 결의 정첩후는 여전히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고 대꾸했다. "형제는 오늘 떠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배 둘째를 고향에다 안치해 놓아야 좀 더 일찍 마의교와 싸울 수 있지 않습니까?" 초숭생은 매우 섭섭한 듯 그래도 포기를 하지 않았다. "오늘 제맹주께서 오신다고 하셨으니 정대협께서는 하루 이틀이 지난 후에 떠나시면 안 되겠소?" 하지만 정첩후는 한 번 마음을 먹은 이상 누가 무어라고 해도 결심을 꺾지는 않았다. "그러나 형제와 배 둘째는 생사를 함께 하는 의형제로써 저는 일찍이나마 배 둘째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는 것입니다." 초숭생은 여간 곤란하지 않다는 듯 검미를 약간 찌푸렸다. "그렇군요. 하지만 오늘 여러분들은 맹주를 맞이한다고 매우 바빠서 영구를 호송할 사람을 나눌 수 있을는지 모르……" 소불이는 초숭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른 말을 가로챘다. "아,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노제가 할 일이 없으니 당노제더러 배 둘째의 영구를 호송해 가라고 이르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정첩후는 몹시 기뻐했다. "아, 고맙소. 정말 고맙소이다. 소노형, 그리고 당노제, 매우 고맙소." 그러면서 정첩후는 몇 번이고 읍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당승무는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저는 뭐……." 이렇게 피어 일은 다음과 같이 결정을 보았다. 소불이는 심자귀, 그리고 초숭생 세 사람과 제갈명을 마중하게 되었고 정첩후, 당승무 두 사람은 명구를 호송하며 금화상은 초부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아침 식사를 끝낸 후- 몇 패의 사람들은 서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승무는 소불이가 배천석의 영구를 호송하게 해놓고 이렇다 할 한 마디도 하지 않자 자기가 대체 무슨 임무를 띠고 가는 줄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불이를 응시하며 수시로 눈짓을 보냈으나 어찌된 일인지 소불이는 전혀 모른 천하며 당승무의 시선을 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총관 초복이 와서 보고하기를 말을 준비시켰으니 소불이, 심자귀, 초숭생 세 사람에게 길을 떠나라고 한다. 그러자 당승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불이를 응시하며 물었다. "소노대, 제가 정대협을 따라 정주로 가는데 있어 혹시 어떤 분부라도 계시지 않습니까?" 소불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매우 귀찮은 듯 마치 나무라는 어조로 대답했다. "당노제는 처음으로 강호에 나오는 것도 아닌데 무엇을 그리 걱정을 하며 안달을 하는 것인가? 하여튼 자네는 그저 정대협이 이르는 말만 듣고 그대로 하기만 하면 되니 딴 생각은 말게." 당승무는 소불이의 이 막을 듣자 마음 속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 아마 소노대와 정대협은 사전에 어떤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로구나.' 이렇듯 그는 느끼는 바가 있었으므로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소노대." 이때 심자귀가 일어나더니 정첩후를 향해 읍을 하며 그러나 매우 섭섭한 어조로 말했다. "정노형, 우리가 먼지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바래다 드리지 못함을 널리 이해해 주시고 아무쪼록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정첩후도 즉시 따라 읍을 하며 얼굴에 근엄한 빛을 띠었다. "괜찮습니다. 심노형, 지금 형제는 배 둘째의 영구를 안치하는 즉시 달려 오겠습니다. 그래야 몸소 배 둘째의 피맺힌 원한을 제 손으로 풀 수 있지 않겠읍니까?" 이때 초숭생이 옆에 있다가 한 걸음 나서며 따라 읍을 했다. "지금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제맹주께서는 벌써 승지에 도착하겠다고 하니 미처 정대협을 바래다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이점 널리 이해하셔서 본 공자를 용서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정첩후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오. 초공자께서는 지금 제맹주를 맞이해야 하니 늦기 전에 어서 가보십시오." 초숭생은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소불이, 심자귀, 두 사림과 함께 떠나갔다. 그리핀 그들의 뒤에는 역시 말을 탄 초복이 뒤를 따랐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새 자간(磁簡)에 도착했다. 그러자 저쪽에시 한 사십여 세 되어 보이는 대한이 급히 달려와 초숭생을 향해 읍을 하며 공손히 말했다. "소인, 공자께 삼가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초숭생은 손을 들어 심자귀와 소불이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심대협과 소대협께도 인사를 올리거라." 대한은 다시 두 사람을 향해 공손히 읍을 했다. "소인, 심대협, 소대협 두 분에 인사드립니다." 그러자 심자귀와 소불이 두 사람도 즉시 함께 예를 취했다. 초숭생은 멀리 시선을 두다가 그들이 인사를 끝내자 즉시 물었다. "참, 그런데 맹주의 소식은 어떻게 되었나?" "예, 아까 의마(義馬)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벌써 의마를 지나셨다고 합니다." 초숭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다시 묻는다. "참, 그리고 여기의 준비는 다 되었느냐?" 대한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다 준비되었습니다." "좋다." 말하면서 그들은 커다란 장원으로 들어갔다. 대한은 몇 사람의 졸개를 데리고 대청으로 들어가더니 즉시 차를 가져오라는 분부를 내렸다. 심자귀가 소불이를 향해 말했다. "소노형, 지금 제맹주 일행은 아마 신안(新安)에서 휴식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의 뜻으로는 소노형께서 먼저 신안으로 가셔서 얘기를 해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소불이는 의미있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노대께서는 과연 모든 일에 준비성이 많군요." 그러자 옆에 있던 초숭생이 급한 듯 재촉했다. "소노대, 지금 뭐라고 한가하게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일각이 급하니 어서 신안으로 달려가 제맹주께 알리십시오." 소불이가 즉시 대꾸했다. "예,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앞서 가보겠습니다." 소불이는 두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부지런히 말을 몰아 달리니 이날 점심 때쯤 되어 신안에 도착했다. 소불이가 제갈명의 일행을 찾으러 신안의 큰 길을 한 바퀴 돌자 한 술집에 십여 필의 말이 묶여 있는 것이 보인다. 소불이가 이들과 헤어진지는 불과 며칠이었지만 묶여져 있는 말들을 보자 즉시 반가운 마음이 앞서 이 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가 이 층으로 급히 뛰어 올라가니 마침 제갈명과 주설란 등의 일행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때 두경강은 소불이가 이 층으로 올라온 것을 보자 몹시 반가와 즉시 소리를 질렀다. "소노형, 이쪽입니다. 이쪽이오!" 소불이도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웃으며 다가갔다. "이 늙은이 지금 가고 있소." 제갈명은 소불이가 혼자서만 오는 것을 보자 매우 의아스럽게 생각하며 물었다. "소호법, 오랫만이오. 그런데 어찌 혼자서만 오는 것이오? 당형제는 어디로 갔읍니까?" 소불이는 연신 싱글벙글하며 대꾸했다. "예, 제맹주께서는 무사하셨군요. 그런데 당노제는 일이 있어서 어디를 좀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늙은이는 맹주를 맞이하려고 지금 오는 길입니다."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소호법, 소노반의 행방을 알아내었읍니까?" 소불이는 제갈명의 이 질문에 조금도 섭섭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사람처럼 몹시 들떠 있었다. "소노반의 행방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뜻밖에 낙양에서 몇 명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본맹에 가입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늙은이는 먼저 맹주께 보고를 올리는 것입니다." 제갈명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소호법의 친구라면야 대환영을 해야 하지요. 그런데 대체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이때 곡영자가 대신 나서며 한쪽 눈을 껌벅였다. "맹주, 다시 물어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소노형의 친구들은 보나마나 소노형과 똑같은 사람들이겠지요." 곡영자의 이 말에 객점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일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소불이는 연신 어깨를 들먹이며 그 동안에 자기가 겪은 모든 경과를 자세히, 그것도 익살을 섞어가며 들려 주었다. 소불이의 말을 다 듣고 난 두경강은 오다가 들었던 말을 상기하며 그제야 의문을 풀은 듯 기뻐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도중에서 들은 노산 노계직과 남주철조 지효선, 구가구 이화창, 허창일필 만복흥, 변천 구양수 등의 사람들이 죽은 것이 바로 마치교가 한 짓이었구나!" 여기서 말을 끊더니 딴 사람이 말 할 겨를도 주지 않고 다시 말했다. "마의교는 옛날 중원에서 한창 그 번영을 자랑할 때 노계직이 중원의 인사로 연합해서 그들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런데 마의교는 지금에서야 그들에게 복수를 했군요." 그러나 소불이는 갑자기 얼굴을 침중하게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 늙은이가 보기엔 마의교란 단지 남의 눈을 속이는 속임수에 불과하고 그들의 배후에는 또 다른 음모가 반드시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동사도의 염지천이 염선배님의 이름을 남용하듯 말입니다." 두경강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몹시 의아심을 품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소노형의 말씀은 마의교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소불이는 자신이 없는 듯 확실한 단언은 내리지 못했다. "그것은 다만 제 생각일 뿐이지 아직 무엇이라고 확실히 장담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곡영자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지금 이 늙은이는 한 가지 곡노형께 도움을 청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곡영자는 소불이의 진지한 어조에 그를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노형께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나 서슴치 마시고 제게 얘기해 보십시오." 소불이는 곡영자에게 가까이 가서 무엇인가 낮은 목소리로 열심히 중얼거렸다. 이때, 옆에서 이 말을 들은 제갈명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소호법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일은 꼭 곡호법께서 맡으셔야 합당할 것입니다." 곡영자 역시 웃으며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고 막 그가 떠나려고 하자 제갈명도 따라 일어서며 급히 곡영자를 불러 세웠다. "곡호법, 식사는 하고 떠나셔야지요." 곡영자는 다시 돌아서더니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지금 늦으면 따라가는데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소불이가 키득거리며 곡영자의 말에 덧붙여 말했다. "곡노형은 독물로도 배를 충분히 채을 수 있으니 밥은 먹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때 양수분이 별안간 일어서며 따라 나섰다. "저도 가겠어요." 제갈명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낭자, 곡호법 혼자서 가도 충분하오. 그러니 양낭자는 우리와 함께 낙양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양수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고집을 세웠다. "그러나 여태껏 오는 도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낙양에 간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어요. 그러니 저는 곡노협을 따라 가겠어요." 소불이가 의미있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낙양에 가면 낭자를 상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 그리 섭섭하게 생각지는 마시오." 양수분은 그제야 할 수 없이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곡영자가 떠난 후, 여러 사람들도 식사를 마치고 곧 길을 떠났다. 이날 점심 때쯤 되어서 제갈명과 주설란, 소불이 등은 자간에 도착해서 심자귀와 초숭생, 둘과 만났다. 이때, 심자귀는 제갈명 부부를 만나자 그들의 나이가 몹시 젊은 것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매우 의심을 품으며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초숭생은 원래 다감하고 온화한 성격 때문에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므로 그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심자귀와 초숭생은 제갈명 일행을 장원의 객청에 인도하며 푸짐한 요리상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때 심자귀는 제갈명의 행동을 하나하나 눈에 넣고는 세심하게 관찰한 결과 곧 자기의 넓은 견식으로도 제갈명의 인물됨이 결코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심자귀는 마음 속에 품었던 일말의 꺼림칙한 감정을 털어버리고 무명도와 대항하기 위해 무림맹에 가입해서 무림의 정의를 위해서 싸울 것을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제갈명은 여러 사람들을 한 눈에 굽어보며 얼굴에 가득 기쁨의 빛을 띠고 입을 열었다. "심대협과 초공자, 두 분이 본맹에 가입하는 것을 심히 환영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모두 아시다시피 무림맹의 총단은 명년 정월초하루 진강에서 갖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 무림의 동도를 위한 일이고 정의를 위하는 일이니 모든 분들은 힘써 이 정의를 깨뜨리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더니 심자귀와 초숭생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두 분께선 지금 낙양에 몸을 푸고 있으니 그곳에다 분단을 설치하는 것도 매우 좋을 듯합니다." 그러자 초숭생은 제갈명 일행이 낙양에 들릴 뜻이 없는 것을 알았다. 그래 간곡히 부탁한 결과 같이 가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낙양 초부에 도착할 때는 벌써 황혼이 온 대지를 물들이고 있을 때였다. 일행이 문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금화상과 초옥지가 나와서 반갑게 영접한다. 이때 심자귀는 곧 두 사람에게 여기까지 온 경과를 얘기해 주고 초숭생은 누이의 상처가 나은 것을 보자 매우 기뻐하며 물었다. "옥지, 상처는 괜찮느냐?" 초옥지는 그 말을 듣자 생각난 듯 소불이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예, 오빠, 그리고 소대협의 약은 정말 좋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소불이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낭자도 새삼스럽게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초옥지는 볼에 보조개를 만들고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약은 대체 무슨 약이길래 그렇게 영험하죠?" 소불이는 헛기침을 하며 수염을 쓰다듬더니 익살띤 어조로 대꾸했다. "흠, 낭자가 복용한 것은 자살문의 자살장을 치료하는 영약입니다. 그러나 또한 강호상의 다섯가지 독창을 전부 다 치료할 수 있습니다." 초옥지는 몹시 의아스러운 듯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소대협께서는 그 자살장이라는 것을 하실 줄 아나요?"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뽐내듯 말했다. "이 늙은이가 바로 자살문의 장문인이니 물론 할 줄 알지요.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절묘하지가 못해서 탈이오." 사실 소불이가 그녀에게 준 약은 곡영자의 해독약이었다. 초옥지는 바로 그 해독약을 먹고 나았으니 그녀는 왼쪽 어깨를 독장에 맞았다는 결과가 된다. 이때 소불이는 어젯밤 정첩후를 습격한 복면인이 체격이 아주 작고 또한 자기의 독장이 그 복면인의 왼쪽 어깨에 명중한 사실을 생각해 내며 잠시 무엇인가 머리 속에 복잡하게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는 애써 실마리를 찾으려 들지 않고 그때 그때 생각나는대로 머리 속에 그 경과를 주입시키기만 했다. 단목인두(檀木人頭) 한편, 정첩후와 당승무는 배천석의 영구와 함께 그의 고향으로 떠나고 있었다. 이때 초부의 총관인 초복 또한 여덟 명의 장한을 데리고 호송을 하고 있었다. 일행은 낙양을 떠나 동쪽을 향해 쉬지 않고 갔다. 정첩후가 이 영구를 호송하고 가게 만든 것은 전부다 소불이의 제의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정첩후의 단목인두(檀木人頭)가 두 번째로 없어졌으니 다음에 희생을 당할 사람은 자연히 정첩후로 낙인이 찍힌 셈이었다. 마의교는 이미 두 번째로 죽일 사람을 선택했으니 그 목표물이 낙양에 있던 길거리 어디에 있던 죽일 것은 틀림 없는 일이었다. 소불이는 이미 또 마의교의 일원이 초부 중에 있는 사람과 틀림없이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한 정첩후가 배천석의 영구를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낙양을 떠난다면 초부의 사람들은 제갈명을 영접하기 위해 꼼짝할 수가 없으니 자연 중도에서 감히 습격을 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도적들은 당승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그가 정첩후와 행을 한다고 해도 도적들의 경계심은 전혀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만약 진짜로 도적들이 습격을 한다고 해도 당승무와 정첩후 두사람으로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호송인들 중에 마의교의 사람들이 끼어 있다면 마의교가 가만 있지 않을 거라고 또한 소불이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정을 당승무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으며 떠나기 전에도 소불이는 그저 정첩후의 지시대로 따르면 된다고 당부했을 뿐이었다. 이윽고 낙양을 떠난지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당승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대협,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리 서두르는 것입니까?" 정첩후는 당승무가 사천당문의 출신이라는 것과 그의 나이가 스무 살이 되지 않았다는 것만 알 뿐 평소에도 오가는 말이 없었으므로 당승무의 무공이 높은 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낙양을 떠나기 전에 소불이가 뒤따라 온다고 했으므로 정첩후는 당승무 따위가 있어봐야 오히려 거추장스럽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정첩후는 낙양에서 당승무를 마다하려다가 소불이가 떠맡기듯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행을 한 것이었다. 또한 정첩후는 당승무가 당문의 출신이니 비록 무공은 높지 않다 하더라도 당문 암기는 무림의 일절이라고 할 수 있어 소불이가 당승무더러 자기와 동행하라고 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때 당승무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자 그가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하여 되물었다. "아니, 소노형께서 형제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소?" 당승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소노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정대협의 지시만 받으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당승무의 말을 듣자 정첩후는 내심 느끼는 바가 있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니오. 어젯밤에 형제의 단목인두가 없어져 도중에서 적이 쫓아올 것이 분명하여 당노제더러 동행하라고 했을 뿐이오. 그런데 적이 습격을 한다 하더라도 노제는 그저 영구만 보호하지 출수할 필요는 없소이다. 저들은 다만 우리가 대적할 테니."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그 역시 마음 속으로 느끼는 바가 있어 더이상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잘 알았습니다." 하고는 말을 천천히 몰아 다시 정첩후의 뒤로 처졌다. 그러나 그는 매우 분하게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잔뜩 벼르고 있었다. '오냐, 나를 무시하다니…… 하지만 정가야, 어디 네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내 필히 두고 봐야겠다.' 영구를 호송하는 행렬은 빨리 달리지 않았다. 이들은 아주 천천히 말을 몰아 이날 저녁 때쯤에야 언사(偃師)에 도착했다. 그러나 영구가 있기 때문에 객점에서는 묵을 수가 없으므로 교외의 날은 절간에서 이들은 여장을 풀었다. 장한들은 영구를 절간 앞에 세워 두고 절간을 청소한 다음, 휴식을 취하였다. 해는 어느새 넘어가 대지는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절간에는 등불이 없는 탓으로 마치 검은 장막에 휩싸인 듯 칠흑같은 어둠이 주위를 휩싸고 있었다. 그리고 웬일인지 여덟 명의 장한들도 일시에 잠이 들은 듯하였다. 이때, 정첩후는 쌍극을 허리에 차고 묵묵히 달빛을 쳐다보며 뭔가 심상치 않은 듯 생각에 잠겼다. '만약 오늘밤에 습격이 없다면 소노형의 말대로 마의교의 사람들은 바로 이 초부 안에 있는 사람이 틀림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보같이 적을 가까이 두고도 우롱을 당한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더 이상 마음 속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계단을 힘껏 굴렀다. 그러자-. "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계단에 즉시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바로 이때, 한 냉랭한 음성이 밤 공기를 자극시킨다. "후후……정대협께서는 어쩐 일로 그렇게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정첩후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그의 뒤에 얼굴이 누런 한 흑의인이 음산하게 웃음을 띠고 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첩후는 흑의인이 얼굴에 번지는 미소에 섬뜩함을 느껴 급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귀하는 누구시오?" 흑의인은 냉랭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후후…… 물어볼 필요도 없지 않소?" 정첩후는 즉시 속으로 경악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바로 마의교의 사람이겠군," 순간, 흑의인은 사악하게 이빨을 드러내 마치 어떤 경고라도 내리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소. 바로 정첩후의 목숨을 거두어 가려는 것이오." 이때 정첩후는 자기가 이 흑의인과 큰 소리로 얘기를 받아도 당승무와 여덟 명의 장정들이 일어나지 않자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전부들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하기야 한 사람만 왔으니 구태여 이들을 깨울 필요도 없지만…….' 이어 정첩후는 즉시 쌍극을 뽑으며 흑의인을 향해 물었다. "귀하 혼자서 오셨습니까?" 그러자 흑의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비꼬았다. "정첩후, 안심하시오. 형제 혼자서도 충분하니……." 정첩후는 이 말을 듣자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급히 절 밖을 내다보니 과연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갑자기 정첩후는 화를 벌컥 내며 소리쳤다. "배이제는 바로 네놈들이 살해한 것이냐?" 흑의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마의교에서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살 수가 있겠소?" 정첩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자세를 싹 바꾸었다. "좋다. 이놈 병기를 뽑아라!" 흑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로 손을 돌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니!" 동시에 대들보 위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의 병기는 바로 여기에 있소? 정첩후가 대들보를 올려다 보니 그는 바로 당승무였다. 흑의인은 깜짝 놀라며 크게 소리쳤다. "네 이놈, 네놈의 짓이로구나!" 하며 그가 몸을 날리자 어느새 당승무는 땅에 내려섰다. 이미 몸을 날린 당승무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크게 외쳤다. "여기 있소!" 그러자 흑의인은 노기가 충천했다. "이놈, 죽어라!" 하며 연속으로 장풍을 날렸다. 그러나 당승무는 반격을 하지 않고 오히려 피하기만 했다. "친구, 싸우려면 자기의 병기부터 받은 후에 싸워야 하지 않겠소?" 그렇다. 지금 당승무의 수중에는 흑의인의 판관필(判官筆)이 들려져 있었던 것이다. 정첩후는 이 광경을 보며 넋잃은 사람처럼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때, 절간 밖에 있던 사람이 몸을 날려 들어오며 소리쳤다. "곽형은 물러나시오! 이 놈은 제가 상대하겠읍니다." 하며 당승무의 바로 측면으로 일 검을 휘둘러 왔다. 이 사람의 키는 조금 작은 편이었지만 수중의 장검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 넉 자 가량이나 되었다. 이때 정첩후가 썩 나서며 말했다. "이 정모가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하며 한운봉월(寒雲棒月) 이라는 초식으로 그 사람의 검을 막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정첩후의 쌍극이 채 뻗어나가기도 전에 당승무가 그 검을 막아서며 말했다. "하하…… 이런 두 명의 졸개들을 상대하는데 어찌 정대협께서 손수 수고하시겠읍니까?" 그러더니 아까 훔친 판관필을 흑의인에게 던져 주었다. "자, 이제 병기를 되돌려 받았으니 우리 잘 싸워 봅시다!" 말을 마침과 동시, 당승무가 자기의 단검을 뽑아 가볍게 휘두르자 이때 바로 찔러오던 작은 흑의인의 검과 함께 휩쓸려 어울렸다. 같이 덤벼오던 두 흑의인은 뜻밖의 이 광경에 멍청해졌다. 당승무는 흰 이빨을 들어내 씨익 웃으며 마치 조롱하듯 맨 처음에 나타난 흑의인의 어깨를 쳤다. "친구,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어서 덤벼보시지?" 흑의인은 순간적으로 나이 어린 소년에게 이 꼴을 당하자 왈칵 울분을 터뜨렸다. 이어, "이얍!" 하는 기합 소리를 내며 질풍처럼 덮쳐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작은 흑의인도 눈에 살기를 띠며 내뱉았다. "호, 이놈을 먼저 저승길로 보내도 괜찮지……." 하고는 그 역시 즉시 급습을 가해왔다. 먼저의 흑의인도 음산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한형의 말씀이 맞소이다!" 말하면서 흑의인은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맹공을 시전했다. 그러나 당승무는 아주 여유작작하게 대소를 터뜨리며 통쾌해 했다. "하하하…… 그래야 싸울 맛이 나지!" 하고는 즉시 그도 두 사람을 향해 속공을 벌이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한데 어울려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합이나 싸웠다. 당승무는 도저히 나이 어린 소년으로 짐작되지 않을 만큼 아주 노련하게 검장 십삼 식을 시전해 두 명의 흑의인을 연신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때 정첩후는 당승무가 바로 자기 앞을 가로막고 대항하기 때문에 도와주려고 해도 돕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세 사람이 용쟁호투처럼 싸우고 있기 때문에 도와주고 싶다고 해도 도울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윽고 작은 흑의인은 한참을 싸워도 승세를 바꿀 수 없음을 느끼자 즉시 품 속에서 한 개의 호각을 꺼내 세 번 불었다. 그러자-. 여지껏 태연하게 잠을 자고 있던 여덟 명의 장한들이 일시에 눈을 뜨며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들 중의 두 사람은 어느 사이엔가 불을 밝혀 놓았다. 여덟 명의 장한들은 칼을 뽑아 들고는 서서히 정첩후를 향해 포위해 들어갔다. 정첩후는 이 뜻밖의 광경에 영문을 몰라 즉시 소리쳤다. "무엇을 하는거냐?" 정첩후가 소리치자 여덟 명의 장한들은 깜짝 놀라며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작은 흑의인이 대뜸 소리쳤다. "무엇을 기다리느냐? 빨리 그 정가 놈을 죽이지 못하고!" 이 소리에 여덟 명의 장한들은 다시 정첩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정첩후는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좋다. 이놈들! 네놈들은 과연 마의교의 졸개들이로구나." 정첩후는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좌우봉원(左右逢源)이라는 초식으로 쌍극을 휘둘러 나갔다. 순간, 즉시 아홉 명의 신형들은 한데 어울려 치열한 결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5권에 계속) 비룡팔부 <5> 교고(巧故) 희미하게 비춰드는 달빛 사이로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신형들이 번쩍일 때마다 그에 따른 무기들도 급하게 떨어지는 유성처럼 바람을 가르며 번쩍였다. 지금 정첩후의 무공은 매우 고강하나 여덟 명의 힘센 장한들이 연합해서 그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유리한 입장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도 정첩후와 그들은 삼십여 초를 싸웠다. 하지만 이 여덟 명의 장한들은 정첩후를 쓰러뜨리지 못했고 정첩후 역시 패를 갈라 덤벼오는 그들의 연합 공격 때문에 한 명도 쓰러뜨리지 못했다. 하지만 역시 초조하고 걱정이 앞서는 것은 정첩후였다. 이렇게 한 명도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다가는 결국 나중에 힘이 빠져 굴복하게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당승무와 싸우고 있는 두 사람 중 작은 흑의인의 무공은 좀 높았다. 하지만 먼저 흑의인의 판관필도 약하지는 않았다. 지금 당승무는 여유만만하게 검장 십삼 식을 전개해 두 명의 흑의인과 싸우고 있다. 모두 백여 초나 싸웠어도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당승무는 벌써 유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살수를 쓰지 않았다. 이때, 또다시 복면을 한 두 명의 흑의인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앞에 나타난 자는 체격이 여자처럼 가냘프고 뒤에 있는 자는 체격이 우람하였다. 체격이 작은 흑의인이 절 안으로 걸어 들어 오며 매우 가소로운 듯 냉소를 날렸다. "흥,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이렇게 많은 무리로 어찌 저 두 사람을 처치하지 못하느냐?" 하더니 즉시 뒤에 있는 복면인에게 명령했다. "당신은 정가를 처치하시오. 나는 저 당가를 처치하겠소"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당승무를 향해 덮쳐갔다. 이어 그는 두 발이 땅에 채 닿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당승무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그러자-. "챙!" 하는 불꽃이 튀기는 두 검이 마주치며 당승무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고 그 흑의인은 뒤로 세 발 가량이나 물러났다. 흑의인은 세 발자국이나 물러서더니 신형을 곤두세우며 중얼거렸다. "실력이 좀 있구나!" 그런데 이 흑의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금 당승무와 싸웠던 두명의 흑의인이 갑자기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마치 때를 기다린 듯 정첩후와 싸우고 있던 여덟 명의 장한들도 갑자기 하나하나 쓰러졌다. 체격이 큰 흑의인은 이 광경을 보자 매우 놀란 듯 감히 정첩후에게 덤벼들 생각을 갖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때 체격이 작은 흑의인이 칼끝으로 당승무를 겨누며 날카롭게 물었다. "네가 독약 암기를 썼느냐?" 당승무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난 독약 암기를 사용하지 않았소." 체격이 작은 흑의인이 싸늘하게 코방귀를 뀌며 쏘아붙였다. "흥! 네가 사천당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당승무는 의외로 흑의인이 자기의 신분을 알자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다면 더욱 잘되었소. 이 사람들은 다만 중독이 되어 정신이 혼미할 따름이오. 그런데다 만약 내가 독약 암기를 사용했다면 아마 이들은 벌써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체격이 큰 대한이 대뜸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큰소리만 치지 말고 어서 당문암기를 한 번 더 사용해 보아라!" 당승무는 그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갑자기 웃으며 입을 떼었다. "후후…… 귀하는 먼저 복면을 벗는 것이 나을……." 당승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작은 흑의인이 갑자기 검을 휘두르며 체격이 큰 대한의 앞을 검으로 내리쳤다. 그 순간 큰 흑의인은 깜짝 놀라 뒤로 급히 물러났다. 작은 흑의인은 이어 검을 들어 올리더니 검끝을 예리하게 쏘아보며 냉랭하게 비웃었다. "흥, 당문 암기도 겨우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구나!" 원래 그는 검끝으로 벌써 당승무의 가늘기가 새털 같은 점두비망(點頭飛妄)을 낚아 채였던 것이다. 당승무는 의외라는 듯 눈꼬리를 치켜뜨더니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용케도 받아 냈구나. 그러나 다시 한 번 일 검을 받아 보아라!" 하는 대갈일성과 함께 검저비성으로 상대방의 인후를 향해 찔러갔다. 그리고는 동시에 왼손을 뻗어 작은 흑의인의 복면을 노렸다. 순간, "챙!" "찍!" 하는 서로 다른 음향이 밤 하늘에 섬뜩하리만큼 날카롭게 교차되었다. 이때 흑의인은 비록 당승무의 검을 막았지만 당승무에 의해 복면을 찢기우고 말았다. 작은 흑의인은 이런 다급한 환경에 처하자 급히 칼을 당승무에게 내던지며 담 위로 뛰어 올라갔다. 당승무는 흑의인의 칼이 화살처럼 날아오자 급히 막았다. 이때, 체격이 큰 대한도 따라 도망치려 하자 어느 틈에 정첩후가 날아와 소리쳤다. "이놈, 너는 그만 여기 남아라!" 체격이 작은 흑의인이 이 광경을 보자 급히 또 하나의 칼을 정첩후의 목을 향해 날렸다. 정첩후는 이 광경에 즉시 분노를 일으키며 오른손으로는 날아온 칼을 막고 왼손의 단극은 작은 흑의인을 향해 날렸다. 그런데 바로 이때를 이용해 체격이 큰 대한은 이미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정첩후는 더욱 노기가 끓어 올라 즉시 담 위로 올라 갔으나 이미 두 흑의인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정첩후는 매우 분한 듯 내려오며 세차게 땅을 굴렀다. "아깝게도 두 놈을 놓쳐 버리고 말았구나? 당승무는 어느 사이엔지 단검을 품에 넣고는 이마의 땀을 닦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정말 그 나이에 믿기 어려울 만큼 당당한 위풍이 서려 있었다. "정대협께서는 벌써 십여 명의 잔당들을 처치하셨으니 비록 두놈이 도망쳤다고는 하나 오늘의 결투는 대승이라고 한 수 있습니다." 정첩후는 매우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당노제,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요?" 당승무는 정첩후가 의외인 듯 묻자 순간 멍청해지며 물었다. "예? 아니 그럼 이 열 명은 정대협께서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정첩후는 어이가 없는 듯 그냥 웃어 넘기며 말했다. "당노제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려, 나의 이 실력으로 어찌 저 열 명이나 되는 잔당을 쓰러뜨릴 수 있겠소? 참, 그건 그렇고 오늘밤에는 정말 당노제가 아니었더라면 나 정모는 아마 벌써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그렇다면 이상한데…… 아니 도대체 누가 이들을 쓰러뜨렸을까." 그러자 정첩후는 갑자기 생각난 듯 손뼉을 탁 쳤다. "그렇군, 바로 소노형이 왔을거요." 이어 어둠 속에서 껄껄 웃는 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날아왔다. "허허허…… 바로 이 늙은이가 왔소이다." 정첩후는 소리난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소불이가 아니라 백발이 성성한 낯모르는 노인이라는 것을 알자 즉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소리쳤다. "귀하는 뉘시오?" 이때 당승무가 매우 반가운 듯 크게 소리쳤다. "아, 정대협, 바로 저의 대사백이십니다." 곡영자는 당승무가 미처 소개하기도 전에 앞으로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허허…… 이 늙은이는 바로 곡영자라 하오." 정첩후도 급히 허리를 굽혀 예를 취했다. "저는 바로 정첩후라고 합니다." 곡영자는 긴 수염을 한 번 쓰다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의 상황은 이미 소노형께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음, 그리고 아까 그 두 명의 흑의인은 제가 일부러 놓아준 것이오." 이 말에 당승무가 끼어 들며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대사백께서는 일부러 그들을 놓아 주셨습니까?" 곡영자는 순간 절간이 떠나가라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생각해 보아라. 노제, 만약 내가 그들을 놓아 주지 않았다면 수백 수만 리를 도망쳐도 아마 한 명도 이 늙은이의 손에서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대사백께서는 그들을 왜 놓아 주신 것입니까?" 곡영자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그들이 달아난 담을 올려다 보며 대꾸했다. "그들은 절대 도망치지 못한다." 당승무는 그제야 깨달은 듯 얼굴을 활짝 펴며 소리쳤다. "아, 그렇군요. 대사백께서는 그들의 몸에다 어떤 묘수를 부렸군요." 곡영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가 이제 초부에 도착하면 노제 자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첩후는 쓰러진 장한들을 내려다 보며 물었다. "곡노형,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이들의 중독은 약하여 정신이 혼미할 뿐이오. 그러니 날이 밝은 후에 당노제는 가서 마차를 빌려 이들을 전부 초부로 옮기도록 하게." 여기까지 얘기하자 곡영자는 갑자기 잊은 것이 있다는 듯 급히 물었다. "아참, 정대협께서는 혹시 이 안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까? 정첩후도 잊을 뻔 했다는 듯 뒷통수를 탁 쳤다. "참, 그렇군요. 지금 곡노형께서 얘기하지 않으셨다면 하마터면 잊을 뻔 했습니다." 이어 정첩후는 당승무에게 시선을 돌리며 지시했다. "당노제는 이 두 명의 흑의인이 변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아 보시오." "형제는 지금 아까 날린 병기를 찾아야 하니까……." 말을 끝내자마자 정첩후는 등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당승무는 그의 말대로 한 사람의 복면을 벗기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초복과 극히 비슷한 얼굴이 나왔지만 꼭 초복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이때 정첩후는 단극을 찾고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되었소?" 당승무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흑의인은 초복과 극히 비슷하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정첩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문제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것쯤이야 매우 쉽소." 그러더니 정첩후는 흑의인의 옷자락을 조금 찢어 침을 묻히더니 흑의인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닦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정첩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몇 번인가 다시 닦더니 몹시 화가 난 듯 닦던 옷자락을 집어 던졌다. "이놈의 역용술은 아주 고명하구나." "그러나 우리에겐 지금 세용약(洗容藥)이 없으니 본래의 면목은 볼 수 없을 겁니다."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이 깨어나면 직접 말하게 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때, 당승무는 여전히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물었다. "대사백님, 아까 그들의 몸에다 대체 무엇을 놓았습니까?" 곡영자는 빙그레 웃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뭐 별다른 게 있겠느냐? 노부가 놓은 것은 독 이다. 그런데 지금 독 이를 다시 거두었으니 이제 깨어날 것이다." 정첩후는 이 말을 듣자 매우 이상한 듯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길래 이까지도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흑의인이 두 눈을 뜨더니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정첩후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급히 흑의인의 혈도를 "후후…… 친구, 얌전히 있는게 신상에 좋을 것이다." 흑의인은 매우 분하다는 듯 원한에 사무친 눈알을 굴리며 냉소를 쳤다. "흥, 정가야, 너는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 정첩후는 흑의인의 앞에서 한 발자국 물러 나오면서 은근한 투로 대꾸했다. "친구, 미리 말하겠는데 좋게 대답만 한다면야 죽이지 않겠다." 흑의인은 악독하게 이빨을 갈았다. "그러나 나는 너를 꼭 죽이고 말테다!" 정첩후는 슬며시 웃었다. "친구, 다시 좋게 말하네만 우리의 손에 잡혔으니 허튼 수작은 않는게 좋을 걸세." 흑의인은 냉랭하게 코방귀를 뀌며 쏘아붙였다. "흥, 죽었으면 죽었지 대답은 못하겠다." 순간, 정첩후가 화를 버럭 내며 일 장을 내리치려고 하자 곡영자가 급히 그를 막았다. "정대협, 잠깐 멈추시오. 때리지 않아도 노부에게는 얼마든지 그의 입을 열게 할 수가 있소이다." 흑의인은 의혹에 찬 눈초리로 곡영자를 주시하며 대뜸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곡영자는 빙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노부는 바로……." 하나 말을 끝내지도 않고 갑자기 소맷자락을 휘두르자 한 줄기의 금빛이 꼬리를 물고 흑의인의 목에 감겼다. 그것은 바로 소금사였다. 금사는 흑의인의 목으로 기어 올라가더니 이내 그의 콧구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흑의인은 크게 놀라 몸을 비틀었으나 그는 이미 혈도를 찔렀기 때문에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두 눈만 크게 뜨며 소리쳤다. "빠…… 빨리 이것을 치워주시오. 마… 말하겠소!" 곡영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친구, 너무 그렇게 무서워 하지 말게. 그 금사는 노부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자네의 콧구멍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니까." 그리고 나서는 정첩후를 향해 재촉하듯 말했다. "정소협, 물어볼 말이 있으면 어서 물어보시오." 정첩후는 흑의인이 몹시 공포에 떨며 새파랗게 질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을 보자 매우 득의만면하여 물었다. "너가 바로 초복이지?" 흑의인은 이 뜻밖의 질문에 몸을 약간 떨더니 곧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 "저… 저는 초복이 아니라 한대규(韓大奎) 라고 합니다." 정첩후는 날카롭게 흑의인을 가늠해 보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너는 어째서 역용을 했느냐?" 흑의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오. 나는 역용을 한게 아닙니다." 정첩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안색이 침중해졌다. "그러면 당신네들, 즉 마의교의 주지는 누구냐?" 순간, 흑의인은 안색이 싹 변하더니 크게 당황해 했다. "저…… 저는 교중의 비밀을 누설시키면 죽고 맙니다……" 정첩후는 냉소를 치더니 곧 날카롭게 말했다. "흥, 좋다. 그렇다면 별 수 없군. 이 금사더러 너의 칠공을 뚫으라고 하겠다!" 그 말에 흑의인은 다시 놀라 몸을 움찔하더니 급히 소리쳤단. "바…… 바로 본교의 수령은 초공자입니다!" 정첩후는 냉랭하게 냉소를 치더니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오냐, 내 그럴 줄 알았느니라!" 이어 그는 매우 분한 듯 주먹을 불끈 쥐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그의 누이는!" 흑의인은 다시 대답했다. "공자는 본교를 세웠다는 것을 아가씨에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초복은 알고 있겠지?" 흑의인은 고개를 저었다. "초복은 옛날 십자도(十字刀) 초학고(超鶴高)의 수하인데 어찌 본교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정첩후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매섭게 눈알을 굴렸다. "친구의 말은 전부 사실인가?" 흑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오." "흠, 그렇다면 초복은 어찌 초부의 장한들이 바로 마의교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나?" 흑의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장한들은 전부 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오" 정첩후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한 무거운 표정으로 일순 침묵을 지키더니 곧 입을 열었다. "한데, 아까 도망친 두 사람은 누구요?" "예, 한 사람은 상(當)가라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곽(廓)가요. 그리고 이들은 전부 초공자의 수하들이며 본교에서는 팔대 호법 중에 인물들입니다." "친구는 교 안에서 대체 어떤 직책을 맡고 있소?" 그러자 흑의인은 말하기 거북한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키지 않는 투로 입을 열었다. "저는…… 본교 열두 명의 소두목 중의 한 사람으로 이 아홉 사람을 통솔하고 있습니다." 정첩후는 그 말을 듣고 나더니 갑자기 몹시 분노가 끓어오르는 듯한 말투로 대뜸 소리쳐 물었다. "그런데 당신네들이 배 둘째를 죽이고 또한 나 정모를 습격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흑의인은 매우 씁쓸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단지 명령만 받고 일을 하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남지방의 유력한 인사들을 제거하지 않는 한 본교는 일어설 수 없다고 말하셨습니다." 순간 정첩후의 얼굴에는 무서우리만치 싸늘한 빛이 흘렸다. 이어 그는 사람을 고문하는 것처럼 마치 피부를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듯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들여 말했다. "좋다. 악랄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런데 배 둘째는 바로 네가 죽였느냐?" 흑의인은 완강하게 부인했다. "아니오. 나는 죽이지 않았소." 순간, 정첩후는 갑자기 크게 분노를 터뜨렸다. "그렇다면 배 둘째를 누가 죽였느냐?" 흑의인은 일순 대답할 길이 막연한 듯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바…… 바로 초공자입니다." 흑의인의 이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정첩후는 다시 크게 분노를 터뜨리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오냐, 이놈, 두고 보아라! 내 반드시 그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하더니 다시 싸늘하게 웃으며 흑의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친구는 초숭생의 앞에서 지금 한 말을 다시 해 볼 용기가 있는가?" 흑의인은 쓰디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본교의 기밀을 누설시켰으니 벌써 죽어야 했소. 그러니 내게 용기가 있고 없고가 무슨 문제겠소?" 정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동정했다. "좋소. 친구 억울해도 좀 참으시오. 우리는 날이 밟은 후에 곧 떠나겠소." 이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흑의인의 얼굴에서 맴돌던 소금사는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번개같이 곡영자의 소맷자락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도중하차 흑의인은 매우 씁쓸하게 웃더니 말을 끝내자마자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다음, 정첩후와 당승무는 그대로 절간 바닥에 앉아 운기 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날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곡영자가 일어나 절간 안팎을 두루 살피고 있으려니 당승무가 일어나 나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사백…… 아직도 동이 트려면 먼 것 같은데 좀 더 휴식을 취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곡영자는 당승무를 돌아보지도 않고 여전히 절 마당을 거닐며 대꾸했다. "너와 정대협은 말이 있으니 빨리 갈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니 지금부터 가보아야 한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 때문에 잠이 갠 정첩후가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아니, 곡노형께서는 지금 저희와 함께 낙양으로 가시는게 아닙니까?" 곡영자는 시선을 돌리더니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낙양으로 가기는 가지요. 그런데 당신들은 말을 타고 가지만 노부는 걸어가니 나중에 그것이 어찌되겠소?" 정첩후는 의아스러운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우리에겐 많은 말이 있으니 곡노형께서는 마음에 드는 말을 골라 타고 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곡영자는 가슴을 덮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노부는 말을 탈 수가 없소이다." 이에 정첩후는 더욱 영문을 몰라 의아하게 느끼고 있는데 곡영자가 얕은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후후……지금 노부의 몸에는 최소한 수백 마리의 이가 있는데 그들이 심심하면 말을 물지 않겠소? 더구나 이 노부의 이들은 한 마리로 능히 한 마리의 호랑이를 물어 죽일 수 있으니 어찌 말이 성할 수가 있겠소? 아마 낙양까지 가자면 수천 수백 마리의 말이 있어도 모자랄 것입니다." 하기야 곡영자의 말이 맞았다. 곡영자의 온 몸에는 독이 있으니 아마도 독마(毒馬)가 없는 한은 천하에 그가 탈 말은 한 마리도 없을 것이다. 정첩후는 곡영자의 설명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곡노형께서 먼저 떠나십시오." 하자 곡영자가 갑자기 흑의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참, 그리고 이 사람들은 낙양 초부에 도착하기 전에는 절대로 깨어나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노부가 먼저 초부로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곧 뒤따라 낙양으로 오길 바라겠습니다." 곡영자는 뒤에 있는 사람들의 인사도 채 받기 전, 절 밖으로 날아갔다. 정첩후는 바람 속에 사라지는 곡영자의 뒷모습을 한동안 쳐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듯 말했다. "곡노형은 참으로 기인이십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당승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참, 그런데 당노제의 영사는 누구십니까?" 당승무는 엷게 웃으며 대꾸했다. "저에게는 두 분의 사부가 계십니다. 한 분은 탈혼장 방통이시며, 또 한 분은 저의 기명 사부이며, 또한 본맹의 총호법인 염지천이십니다." 정첩후는 당승무의 대답을 듣자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아…… 아니, 원래 탈혼장 방통의 제자였군요…… 어쩐지 노제의 무공이 높다고 했더니……." 당승무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 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완전히 밝아졌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식사를 끝낸 후 당승무가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정대협께서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이 가서 마차 한 대를 빌려 오겠습니다." 하고는 쏜살같이 절간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윽고 얼마 후-. 당승무는 어디선가 낡은 마차를 빌려서 끌고 왔다. 이어 두 사람은 정신을 잃고 있는 열 사람을 모두 마차에 싣고 정첩후는 다시 배천석의 영구를 호송하며 먼저 갔다. 당승무는 빌려온 마차에 마부와 함께 탔다. 찬란하게 햇빛이 내리비치는 산야로 두 대의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 그리고 말채찍 소리와 그에 따른 말울음 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은 어딘가 모르게 피로한 심신을 자극시켰다. 당승무는 이 마차의 진동에 몸을 내맡긴 채 이상하게 심신이 나른해지며 꾸벅꾸벅 졸음이 왔다. 이 졸음은 물론 잠을 자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당승무는 어떤 생각에 심취한게 아니라 재미있는 마차의 진동 때문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당승무는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당승무는 달리고 있는 마차가 속력이 점점 더 빨라지며 또한 마차 속이 뭔가 텅 빈 것 같으며 또한 매우 가볍다고 느낀 것이다. 당승무는 비록 노련한 강호인은 아니지만 소불이와 돌아다닌 경험이 그의 예감을 자극시킨 것이다. 순간-. 당승무는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크게 소리쳤다. "노형, 잠깐 마차를 멈추시오!" 하고는 다시 앞서 가는 정첩후를 향해 소리쳤다. "정대협, 잠시 마차를 멈추십시오? 그의 외침 소리와 함께 두 대의 마차는 일시에 정지했다. 당승무는 마차에서 뛰어 내리자마자 즉시 마차 안을 살펴 보았다. 순간, 당승무는 기절할 듯 놀랐다.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마차 안에는 사람은 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신을 잃고 있던 열 명은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져 그림자 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당승무의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있는데 정첩후가 영구에서 급히 뛰어 내려오며 소리쳐 물었다. "당노제! 무슨 일이 생겼소?" 당승무는 마치 넋잃은 사람처럼 정첩후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전부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러자 정첩후 역시 깜짝 놀라며 급히 물었다. "아니, 뭐라고? 그런데 당노제는 어떻게 해서 알아냈소?" 당승무는 자기가 실제로 일을 당했으면서도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소인은 마차를 타고 오면서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마차가 갈수록 속력이 빨라지고 또한 그 진동도 도를 더해 가며 뭔가 텅빈 듯하고 매우 가벼운 느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즉시 이상하게 느껴 마차를 멈추어서 뛰어 내려보니 벌써 사람들은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첩후는 마차 안을 날카롭게 훑어보더니 매우 분한 듯 이를 악물며 외쳤다. "그들은 저 뒷 창문으로 해서 도망쳤소!" 당승무는 몹시 의아스러운 표정이 되어 부르짖었다. "아니…… 대체 정신을 잃고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도망을 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정첩후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두 사람이 와서 한 사람이 안에서 던져주면 또한 사람은…… 밖에서 받고 이런 식으로 해서 탈출했을 것이오!" 당승무는 매우 조급해 하며 재촉했다. "정대협, 그렇다면 우리 빨리 추격해 갑시다!" 정첩후는 매우 씁쓸한 표정이 되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지금 추격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당승무는 매우 낭패한 표정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렇다면 정대협, 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정첩후는 당승무를 안심시키려는 듯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소. 그놈들은 그래도 초숭생의 졸개에 지나지 않으니 도망치게 내버려 두어도 초숭생을 잡을 수 있소." 그러더니 당승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노제, 마차에 오르시오. 우리 이 얘기는 우선 초부로 돌아간 다음에 의논하도록 하십시다."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 명의 적이 다 도망을 쳐 어차피 이 마차도 필요 없을 터이니 우리 그냥 돌려 보내도록 합시다." 정첩후는 돌아 서려다가 의미있게 웃었다. "아니오. 이 마부는 지금 이 상황을 보았으니 증인이 될 수 있소. 그러니 낙양에 데려가는 것이 나을 겁니다." 당승무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되었다. 이어 그는 매우 씁쓸한 기분을 가누지 못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자, 마부 그럼 갑시다. 이따 낙양에 도착하면 당신은 꼭 증인이 되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마부는 어찌된 일인지 한 마디의 대꾸도 없었다. 마부는 당승무가 다시 마차에 오르자 즉시 채찍을 휘두르며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를 달리자 마부는 담뱃대를 꺼내더니 불을 붙여 담배를 피웠다. 이렇게 되자 바로 바람을 앞에 받으며 달리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당승무로선 여간 곤란을 겪는게 아니었다. 담배 연기는 끊임없이 당승무의 얼굴을 휩싸 나중에는 눈물까지 흐르게 만들 정도로 담배를 피웠다. 그런-갑자기 당승무는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당승무는 기침을 하며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플까? 혹시 이 담배 연기 속에 어떤 미약이라도 들어 있는게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당승무는 번쩍 정신을 차려 앞에 앉아 있는 정첩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첩후는 이미 고개를 푹 숙인 채 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승무는 이러한 광경을 보자 이 마부가 바로 마의교의 잔당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급히 희미한 정신을 가다듬어 몰래 운기를 모아 체내에서 미약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때 당승무는 한 가지 기발한 죄를 생각해 내었다. 당승무는 마부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야릇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놈들, 어디 두고 보자. 도대체 어떻게 하는지 한 번 보자꾸나!' 그리고 나서 당승무는 좌석에 기대어 일부러 정신을 잃은 척했다. 과연-. 마부는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당승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음산하게 웃으며 갑자기 더욱 속력을 내었다. 지금 이 순간에 마부는 매우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나 당승무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얼마를 쏜살같이 달리자 마부는 돌연 넓은 길을 버리고 작은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당승무는 마차의 진동에 매우 재미를 느끼며 몰래 실눈을 떠보니 정첩후의 옆에 어느새 한 명의 흑의인이 올라앉아 말을 몰고 있었다. 하지만 정첩후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있는 것 같았다. 마차가 나무가 많은 좁은 길을 헤치고 달리니 자연 햇빛도 비치지 않았다. 지금 한낮은 되었을 텐데 길은 저녁처럼 어둑어둑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도 두 명의 마부는 매우 익숙한 솜씨로 교묘히 좁은 길을 헤치고 나갔다. 마차는 어느새 내리막길로 접어 들었다. 아마도 산 아래를 향해 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얼마를 또 그렇게 달렸을까? 어느 산-산신묘가 있고 잎이 울창한 한 그루의 커다란 고목나무 아래에서 두 대의 마차는 멈추었다. 그러자 산신묘 안에서 즉시 두 명의 흑의인이 마중을 나오며 소리쳤다. "셋째 사형,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당승무가 탄 마차의 마부는 바로 그들의 셋째 사형이 되는 모양이었다. 마부는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즉시 모자를 벗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물었다. "대사형께선 오셨느냐?" 두 명의 흑의인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아직 안오셨습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어제 많은 고수들이 왔다고 합니다." 마부는 헝클어진 머리를 여전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떠한 사람들이라드냐?" 흑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들은 바에 의하면 무림맹의 제갈명 부부와 그의 십여 명의 사람들이라 합니다." 그러자 셋째 사형이라고 불리운 사나이는 냉소를 치며 오랫동안 원한에 사무쳐 온 듯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흥, 난 또 누구라고…… 원래 그놈들이었구나. 흐흐흐…… 하지만 대사형의 실력으론 충분히 그놈들을 잡아올 수가 있을 것이다." 하더니 그는 손을 들어 당승무 등을 가리켰다. "저 두 놈들을 데리고 들어가자!" 그러더니 먼저 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두 명의 흑의인은 즉시 대답을 하며 당승무와 정첩후를 안고는 급급히 절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이어 다른 한 명의 흑의인이 채찍으로 영구차를 몰고 온 말의 궁둥이를 탁 치자 말은 뜻밖의 이 매질에 놀라 크게 울부짖으며 산 아래의 숲을 향해 질풍처럼 내달았다. 이 산신묘를 들어서면 밖에서 보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산신묘는 두 개의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마당과 뒷마당은 서로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두 명의 흑의인은 당승무와 정첩후를 들고 앞마당을 지나 뒤로 들어갔다. 다시 뒷마당에 들어서면 하나의 전우(殿宇)가 있다. 전우 안에는 커다란 관음대사의 석상과 또 하나의 팔선탁(人仙卓)과 그리고 몇 개의 의자가 질서없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놓인 상 위에는 하나의 찻주전자와 몇 개의 찻잔도 아울러 갖추어져 있었다. 복도 쪽에 있는 의자에는 보통 체격을 갖고 얼굴이 약간 누르스름한 중년대한이 위풍당당하게 앉아 묵묵히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때, 마차를 몰고 온 셋째 사형이라는 사나이가 어느새 검은 외투를 벗고 하나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장삼으로 갈아 입고 들어오더니 그 누런 얼굴의 중년대한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소제, 둘째 사철께 문안드리옵니다." 그러자 누런 얼굴의 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오냐, 그런데 두 사람은 데리고 왔느냐?" 셋째 사형은 즉시 대꾸했다. "예, 데리고 왔습니다." 둘째 사형이라 불리우는 사나이는 입가에 약간 싸늘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수고했다." 셋째 사형은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런데 지금 둘째 사형께 한 가지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둘째 사형은 웃음을 짓더니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뭐야, 빨리 말해 보아라." 셋째 사형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어 말했다. "정첩후와 이 당가 놈은 십여 명의 흑의인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듣기로는 그들을 낙양으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흑석도 둘째 사형은 두 눈에 기이한 광채를 띠며 셋째 사형을 향해 물었다. "이 흑의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셋째 사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저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둘째 사형은 주위를 한 번 휘둘러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 사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셋째 사형은 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받았다. "도중에 누가 구해 간 것 같습니다. 사형께선 무슨 일이라도……" 둘째 사형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자네는 어떤 사람들이 와서 구해 갔는지 봤는가?" 셋째 사형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띠며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예! 모두 세 사람이 온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세 사람은 맨 몸으로 온 것이 아니라 모두 얼굴에 면구를 쓰고 왔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수레 안에 있는 열 사람을 하나씩 하나씩 밖으로 던졌지만 저는 그들에게 발각이 될까 두려워 저지를 하지 않았지요." 둘째 사형은 여전히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그쳐 물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정첩후는 강호의 노장인데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인가?" 셋째 사형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둘째 사형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주위를 살펴보더니 혼잣말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되었던 그 두 사람을 잡게 됨으로써 초숭생도 사람을 내놓지 않을 수가 없게 되겠지……." 셋째 사형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서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 두 사람을 잡아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둘째 사형은 그들을 똑바로 주시하며 다그쳐 물었다. "정첩후는 그들의 두목 중의 한 사람 같은데 대체 무엇 때문에 소용이 없단 말인가?" 셋째 사형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무겁게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첩후의 말투를 들어보니 초숭생이 배천석을 살해한 것 같았소.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원한은 아주 깊기 마련이지요." 이 말을 듣자 둘째 사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 사이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그렇게 되었지?" 셋째 사형은 계단 밑을 바라보며 손짓을 했다. "만약 둘째 사형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한 번 물어 보시오." 둘째 사형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서너 번 끄덕이더니 계단 밑을 향해 큰 소리로 분부를 했다. "어서 데리고 오너라!" 둘째 사형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명의 흑의인이 즉시 정첩후와 당승무 두 사감을 끌고 객청 안으로 들어오더니 땅바닥에 눕힌 다음 급히 한쪽으로 물러섰다. 둘째 사형은 두 사람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셋째 사형을 향해 약간 언성을 높였다. "여보게 셋째! 저 두 사람에게 미혼 향을 맡도록 하였는가?" 셋째 사형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소제는 저 두사람의 무공이 높다는 것을 알아 미혼향을 맡고 쓰러지게 했소." 둘째 사형은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듯 두 눈을 반쯤 감고 있더니 갑자기 번쩍 뜨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저들에게 물어볼 말이 있으니 그들을 깨어나도록 하게." 셋째 사형은 급히 대답을 하더니 곧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때, 당승무는 주위에 네 사람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심 좋아하며 눈을 살며시 은 채 셋째 사형이 자기의 곁으로 다가오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어느 누가 알았으랴? 셋째 사형이란 놈은 여간 교활한 놈이 아닌 것 같았다. 셋째 사형은 당승무의 곁으로 바싹다가섰다. 그리고는 당승무의 눈까풀이 가볍게 움직이는 것을 보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승무 역시 그가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순간-. 당승무는 배의 반동을 이용해서 "획!" 하는 소리와 함께 셋째 사형을 향해 번개처럼 몸을 날리더니 검장 십삼 식의 금나수법으로 셋째 사형을 잡았다. 그러나 셋째 사형이란 자의 무공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셋째 사형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염지천의 검장 십삼 식을 피할 수가 있겠는가. 이때-. 셋째 사형은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채 당승무에게 오른팔을 잡혔다. 이렇게 되자 셋째 사형은 갑자기 음산한 미소와 함께 고함을 질렀다. "이놈! 내가 너를 잘못 본 모양이구나!"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왼손의 다섯 손가락을 마치 갈퀴처럼 구부리더니 당승무의 선기혈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당승무는 셋째 사형의 팔목을 잡고 나서야 그의 나이가 겨우 이십여 세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는 사십 세 가량의 중년인으로 보였다. 어찌 되었건 셋째 사형의 눈초리와 안색은 순식간에 변하고 또 변하는 것 같았다. 바로 이때-. 당승무는 목에 무엇인가 찔러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어 그는 급히 또다시 검장 십삼 식의 절초로써 셋째 사형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동시에 셋째 사형은, "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왼손이 축 늘어져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둘째 사형은 이같은 상황을 보자 안색이 크게 변하여 당승무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귀하의 실력은 대단한 것 같구려. 셋째 사제는 당신의 적수가 못되는 것 같으니 그를 놓아주시오." 당승무는 여전히 셋째 사형의 맥문을 움켜잡은 채 큰 소리로 대꾸했다. "친구는 말을 아주 쉽게 하는 것 같구려." 하지만 둘째 사형은 자리에 앉은 채 움직이지도 않고 당승무를 노려보더니 언성을 높여 물었다. "그렇다면 귀하께서는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오?" 당승무는 한 손으로 셋째 사형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정첩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이 정대협만 깨어나게 한다면 나는 즉시 놓아 주겠소." 둘째 사형은 이 말을 듣자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귀하께서는 그 한 가지 조건 밖에 없소?" 당승무는 둘째 사형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어서 정대협을 깨어나도록 하시오." 둘째 사형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으하하하…… 하하하…… 내가 하나에서 열 까지 세면 귀하는 그 자리에 즉시 쓰러지게 될 것이오." 하지만 당승무도 지지 않고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당신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니 어서 세어 보시오." 둘째 사형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당승무의 손을 가리켰다." "자신이 있다는 말이오? 그럼 어서 귀하의 손목을 좀 보시오."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순간, 셋째 사형의 손목을 잡고 있던 자기의 손목 위에 놀랍게도 오 척 정도 길이의 금색머리를 가진 하나의 지네가 붙여 있는 것이 아닌가. 당승무는 그제서야 조금 전 둘째 사형이 자기와 얘기를 할 때에 암암리에 독물을 날렸다는 것을 알았다. 이 금색의 머리를 가진 지네는 원래 천하의 독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승무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둘째 사형을 노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세어 보고 싶으면 세어 보라고 했는데 무엇을 그처럼 꾸물거리시오?" 둘째 시형 역시 당승무의 팔목에 붙어 있는 지네를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째 사형은 당승무가 그 지네를 보고서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놈이 무엇 때문에 독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의 동문 사형제들도 손에다 독물을 발라야만 그 지네를 만질 수가 있는데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그러나 둘째 사형은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천천히 열을 세기 시작했다. "좋다. 네 소원대로 세어 주마! 하나…… 둘…… 셋…… 넷." 둘째 사형이 열까지를 세지 못하고 넷까지 세었을 때였다. 돌연, "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 소리와 함께 쓰러진 것은 당승무가 아니라 금색 머리의 지네가 땅에 떨어져 죽은 것이다. 둘째 사형은 이런 광경을 보자 안색이 변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좋다. 좋아…… 이놈! 오늘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거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팔목을 흔들자 즉시 세 줄기의 흑광이 당승무의 얼굴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 들었다. 하지만 당승무는 원래 사천당문의 출신으로써 암기를 받고 던지는 것에 대해서는 가히 천하 제일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당승무는 둘째 사형이 던진 세 줄기의 흑광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태연스럽게 서 있었다. 그리고는 흑광이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왼손을 들어 가볍게 받았다. 그런데 급히 꽉 쥔 손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이어 급히 손바닥을 펴보니 세 줄기의 흑광은 분명히 받았다. 하지만 세 줄기의 흑광은 암기가 아닌 세 마리의 대추빛을 띠고 있는 마황이었다. 이때, 세 마리의 마황은 손바닥을 간지럽게 물고 있었다. 하지만 독공을 연마한 당승무가 어떻게 그까짓 마황을 두려워할 수가 있겠는가-. 당승무는 어이가 없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친구, 이런 장난을 자주 하시면 저를 놀리는 것 밖에 되지 않소." 말을 끝냄과 동시에 독공을 끌어 올리자 그의 얼굴과 손바닥이 차츰차츰 검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손바닥에 붙어 있던 마황마저도 어느 사이에 땅에 떨어져 죽어 버렸다. 둘째 사형은 이런 광경을 보자 안색이 변하여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도…… 독인…, 바로 무명도의 독인이었구나." 당승무는 득의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내가 연마를 한 것은 독공임에 틀림이 없으나 나는 절대로 무명도의 사람은 아니오." 말을 끝내자마자 셋째 사형을 잡고 있던 손목을 놓자, 다섯 개의 검은 손가락 자국이 그의 팔목에 선명히 나타났다. 동시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셋째 사형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둘째 사형은 당승무를 무섭게 노려보며 냉소를 터뜨렸다. "흥! 네놈이 무명도의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당승무 역시 그를 한 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절대로 무명도의 사람이 아니오." 둘째 사형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무명도의 사람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예주방(豫州幇)과 함께 있느냐?" 당승무는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듯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예주방이란 말이오?" 둘째 사형은 쓰러져 있는 정첩후를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바로 저기에 있는 정첩후도 예주방의 사람인데 귀하께서는 왜 모른 척하시오?" 당승무 역시 정첩후를 힐끗 쳐다보며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정대협께서는 무명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소." 그러나 둘째 사형은 다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소. 당신네들이 해약만 내놓는다면 나도 즉시 정첩후를 풀어주겠소." 당승무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좋소. 약속만 지켜 주신다면 서슴없이 드리겠소."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품 속에서 해약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둘째 사형이 갑자기 장갑을 끼더니 음산하게 웃으며 당승무를 향해 번개처럼 덮쳐왔다. 당승무는 급히 뒤로 수 척 가량 물러나며 큰 소리로 물었다. "아니, 당신은 무엇 때문에 약속을 어기시오?" 이때 둘째 사형은 갑자기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수중에는 검은 색으로 된 하나의 쇠로 만든 자를 들고 있었다. "이놈! 우리 흑석도(黑石島)에서 나온 사람들은 해약이 필요 없으니 우리는 무공으로써 정정당당히 겨루어 보자." 말을 끝냄과 동시에 둘째 사형은 급히 철자를 휘두르며 공격해 들어왔다. 지금 이 사람들은 모두 흑석도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당승무는 그들이 흑석도에서 왔던 백석도에서 왔던 조금도 개의치 않고,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을 뽑아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으면 진작 말을 할 것이지……." 당승무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둘째 사형을 향해 번개처럼 반격을 했다. 이때, 한쪽에 있던 두 명의 흑의인은 당승무와 둘째 사형이 싸우는 틈을 타서 즉시 셋째 사형을 어깨에 둘러멘 채 뒤로 물러났다. 당승무는 이런 광경을 보자 왼손바닥으로는 둘째 사혈의 견정혈(肩井穴)을 치고 한 손으로는 손짓을 하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내가 교환을 하려고 하는 인질인데 감히 누가 건드리느냐?" 하는 소리와 함께 일진의 금빛이 번쩍 하고 왼쪽에 있는 흑의인을 향해 격출되어 나갔다. 순간-. "으악!" 하는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왼쪽에 서 있던 흑의인은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이때, 둘째 사형은 왼손으로 당승무의 일 장을 막음과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들고 있던 철자로 당승무의 단검을 향해 번개처럼 쳐갔다. 순간,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당승무는 전신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손에 들고 있던 단검도 상대방의 철자에 의해 흡입이. 되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당승무는 둘째 사형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시하며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무공을 연마했기에 철자에 흡입력이 생기는 것일까…….' 당승무는 다시 둘째 사형의 왼쪽 가슴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둘째 사형은 지금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독을 무서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 장을 맞받음으로써 당승무의 무공이 자기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둘째 사형은 철자로 당승무의 단검을 막고 낭권유사(浪捲流沙)란 초식을 전개하여 마치 팽이를 돌리듯 몸을 돌리며 찔러갔다. 당승무 역시 왼손을 빙글빙글 돌리며 철자를 치고 단검으로는 속공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둘째 사형은 연속되는 당승무의 공세에 밀려 계속해서 뒤로 여섯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하지만 조금의 틈도 주지 않은 채 단검으로는 상대방의 눈동자를 흐리게 하고 왼손으로는 헛점을 이용해서 물밀듯이 밀고 갔다. 둘째 사형은 비록 흑석도의 고수였지만 당승무의 속공을 막기에는 좀 모자라는 것 같았다. 칠팔 초를 겨루자 둘째 사형은 다급한 나머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순간, 당승무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는가 싶더니 둘째 사형의 왼쪽어깨에 일 장을 명중시켰다. 이렇게 되자 둘째 사형은 숨이 갑자기 막히는 듯 급히 뒤로 몇 걸음 비틀비틀 물러났다. 바로 이때-. 면철한성(緬鐵寒星) 돌연 계단 밑에서 한 흑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이 오셨습니다."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치던 둘째 사형이 급히 걸음을 멈추며 당승무를 향해 외쳤다. "어서 손을 멈추어라!" 이 말을 듣자 당승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격을 멈추더니 급히 몸을 돌렸다. 과연 계단 옆에서 두 명의 흑의노인이 천천히 걸어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왼쪽에 있는 노인은 몸이 비대하고 키가 작아 보였으며 또 하나는 키가 크고 음산하게 보이는 노인이었다. 순간, 왼쪽에 있는 뚱뚱한 노인이 갑자기 당승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나가라!" 하는 소리와 함께 가벼운 바람이 당승무를 향해 불어왔다. 하지만 당승무는 몸을 약간 피하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날카롭게 반문을 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나가야 한단 말이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키가 작은 흑의노인의 장풍을 피했다. 오른쪽에 있던 흑의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승무가 피하는 곳으로 일 장을 번개처럼 쳐왔다. 당승무는 또 다시 피하며 단검으로 두 흑의노인을 가리켰다. "대체 이것이 무슨 짓들이오?" 그러자 키가 작은 흑의노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교주님께서 나가라고 할 때 나가지 않고 무슨 쓸데 없는 소리를 지껄이느냐? 이놈! 죽고 싶어서 단단히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이때, 안에서는 나이가 약 십오륙 세 가량의 황의동자가 나오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또 하나의 체격이 건장한 흑포노인이 따르고 있었다. 당승무와 일 장씩을 주고 받았던 두 명의 흑의노인은 이 사람이 들어오자 급히 좌우로 피했다. 체격이 건장한 흑포노인은 눈썹이 매우 짙을 뿐 아니라 두 눈은 마치 봉황의 눈 같았다. 또한 붉으스름한 얼굴에 가슴까지 내려오는 수염을 내려 뜨리고 있었다. 특히 그 노인의 흑포는 몹시 번쩍번쩍했으며 마치 무수한 금빛 모래�로 정교하게 만든 것 같았다. 이때, 둘째 사형은 흑포노인을 보자 땅에 엎드린 채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흑포노인은 두 명의 황의동자의 인도 아래 천천히 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둘째 사형은 땅에 엎드린 채 공손히 말했다. "제자, 사부님께 인사를 드리옵니다." 흑포노인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둘째 사형은 즉시 공손하게 땅에서 일어섰다. 흑포노인은 고개를 약간 돌려 당승무를 바라보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거기에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냐?" 둘째 사형은 당승무를 힐끗 쳐다보더니 나직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예주방의 사람으로써 사마장홍을 납치해 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노사제까지 잡아갔습니다. 이렇게 되자 대사형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두 사람을 인질로 해서 예주방의 사람과 교환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당승무는 이 소리를 듣자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우리도 그를 찼고 있는데 어느 누가 우리보고 사마장홍을 납치해 갔다고 한단 말이오?" 이때, 갑자기 키가 작은 흑의노인이 나서며 말을 받았다. "이놈! 교주 앞에서 함부로 큰 소리를 치다니……." 하지만 당승무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여전히 큰 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내 말이 틀리기라도 했단 말이오?" 키가 작은 흑의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자네가 바로 예주방의 사람인가?" 당승무는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저는 예주방의 사람이 아니라 무림맹의 사람이오." 키가 작은 흑의노인은 땅에 쓰러져 있는 흑의인의 시체를 가리키며 날카롭게 물었다. "저곳에 있는 사람은 자네가 죽였는가?" 당승무는 이맛살을 약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저는 당신의 문하인 둘째 시형이 독지네를 쓰고 마황을 썼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셋째 사형을 잡고 정대협과 교환을 하려고 했었소. 하지만 둘째 시형 약속을 어기고 갑자기 공격을 했기 때문에 저는 하는 수 없이 암기로써 저 사람을 죽였소." 이때, 흑포노인이 옆에 서 있는 황의동자를 한 번 주시하더니 쓰러져 있는 흑의인을 향해 손짓을 했다. 옆에 있던 황의동자가 급히 흑의인의 곁으로 다가서더니 그의 몸에서 하나의 한성(寒星)이란 암기를 뽑더니 두 손으로 받들어 공손히 흑포노인에게 건네주었다. 흑포노인은 암기를 받아든 다음 한동안 유심히 살펴보더니 당승무를 향해 물었다. "사천당문의 필절기독(必絶奇毒) 인 이 면철한성(緬鐵寒星)은 자네의 것인가?"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소." 흑포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또다시 물었다. "자네가 바로 사천당문의 제자인가?" 당승무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그렇소." 흑포노인은 당승무를 똑바로 주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천당문은 원래부터 강호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자네는 무엇 때문에 무림맹에 가입을 하고 또한 당문의 암기로써 노부의 문하를 살해했는가?" 당승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당문이 강호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남이 건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문에서도 남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오. 하지만 당문은 남에게 멸문의 참화를 당했으니 물론 원수를 찾아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소? 그렇기 때문에 제가 강호에 나온 것이며 무림맹은 어떤 방파도 아니오. 또한 무림맹은 동도의 정의를 결합하여 악의 무리를 소탕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오." 당승무는 다시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제가 당신의 문하를 죽인 것은 조금 전에 얘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만약 제가 독공을 연마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둘째 사형의 독지네와 마황 아래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그리고는 둘째 사형과 정첩후를 주시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저의 독문 암기는 한 번 맞았다 하면 해약이 없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저도 가볍게 손을 쓰지 않소. 하지만 저는 조금 전 그들의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또 정대협을 잡아가려고 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암기를 사용했었소. 그러나 만약 내가 살인을 하고 싶었다면 이 두 사람도 아마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오." 이때, 키가 작은 흑의노인이 나서며 고함을 질렀다. "이놈! 어디서 함부로 큰 소리를 치느냐!" 흑포노인이 빙긋이 웃으며 당승무를 향해 물었다. "노제의 말뜻은 노부의 문하들이 자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단 말인가?" 당승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둘째 사형을 주시했다. "저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소. 하지만 제가 그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있소." 흑포노인은 당승무를 바라보며 급히 다그쳤다. "도대체 어디에 무슨 증거가 있단 말인가?" 당승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제가 둘째 사형에게 한 자루의 독침을 날려서 그에게 경고를 해주려고 했었지만 그는 저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습격을 해줬소. 그리고 그 독침은 지금까지 그의 머리카락 속에 들어 있소. 만약 제가 그를 죽이고 싶었다면 그의 머리칼 속을 향해 날리지는 않았을 것이오." 당승무의 말이 끝나자마자 둘째 사형은 급히 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하나의 새파란 침을 꺼냈다. 흑포노인은 냉소를 터뜨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흥! 그렇다면 자네가 봐주었단 말인가?"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흑포노인은 둘째 사형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자기의 생명까지도 남의 손에 달려 있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남을 잡아두려고 했느냐? 어서 정첩후를 놓아주지 못할까?" 둘째 사형은 이 말을 듣자 얼굴이 창백해지며 허리를 굽히고 급히 대답을 하더니 정첩후에게 달려가 해약을 먹여 주었다. 둘째 사형인 해약을 먹인지 얼마 안 되어서 정첩후는 깨어났다. 정첩후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자 이상한 듯이 급히 일어서더니 당승무를 향해 걸어갔다. "당노제!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이때, 땅에 쓰러져 있던 셋째 사형도 다른 흑의인이 해약을 먹이고 깨어나게 했다. 순간, 흑포노인이 정첩후를 향해 손짓을 했다. "정대협! 당신은 어서 돌아가시오. 이분 노제는 노부가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에 좀 남겨 두어야 하겠소." 정첩후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급히 물었다. "하지만 귀하의 높으신 칭호는 어떻게 되시오?" 오른쪽에 있던 흑의노인이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정첩후! 교주님께서 가라고 하면 속히 갈 것이지 무슨 쓸데 없는 소리를 하고 있소?" 정첩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교주……혹시 저 자가 마의교주가 아닌가…' 그러자 정첩후는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허허허…… 나 정가는 강호상에서 이삼십 년 동안 돌아다녔지만 남의 명성에 눌려서 순순히 물러난 적은 한 번도 없었소." 흑포노인은 몹시 귀찮은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급히 말을 받았다. "노부가 바로 흑석도주이니 그렇게 알고 어서 물러가시오." 정첩후는 이 말을 듣자 전신이 갑자기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호상에서 이름을 날린지가 벌써 이삼십 년이나 되는 흑석도주가 갑자기 중원에는 무엇 때문에 나타났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흑석도는 북해에 있는 조그만 섬으로써 독물을 키우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흑석도의 돌들은 독물 때문에 모두 검은색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흑석도주는 하나의 신비스러운 인물이기도 했기에 강호상에서는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첩후는 마음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는 태연스럽게 웃으며 흑석도주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도주님을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오. 하지만 저의 이분 노제가 무슨 죄를 범했기에 도주께서는 그를 이곳에 남겨 두라고 하시오?" 이 말에 당승무는 입술을 지그신 깨물며 정첩후를 향해 손짓을 했다. "정대협, 어서 가시오. 이들이 저를 여기에 붙잡아 두려고 하는데 있어서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오." 정첩후는 당승무를 힐끗 보더니 다시 흑석도주를 바라보며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당노제…… 도주……." 이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키가 작은 흑의노인이 나서며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 무례한 놈아! 감히 도주의 앞에서 큰 소리를 치다니……" 당승무는 키가 작은 흑의노인을 살기띤 눈초리로 주시하며 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절대로 큰 소리가 아니오. 저를 여기에 붙잡아 두려고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오?" 이때, 흑석도주가 나서며 정첩후를 바라보더니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이분 노제는 조금 전 당문의 암기로써 노부의 문하 한 사람을 죽였소. 그렇기 때문에 노부가 그를 여기에 남게 해서 사천당문의 무공이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오." 정첩후는 이 말을 듣자 안색이 가볍게 변하여 당승무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당노제! 정말로 흑석도의 사람을 죽였는가?" 당승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힘없이 말을 받았다. "저는 본의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래서 그를 죽였소." 흑석도주는 당승무를 똑바로 주시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노제! 흑석도의 규칙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흑석도의 사람을 죽이면 흑석도로 잡아가서 독물을 먹여 죽이기로 되어 있소. 그런데 노제는 당문의 독공으로써 노부의 문하를 죽였으니 만약 노부가 자네를 잡지 않는다면 이 다음에 흑석도의 사람들이 무슨 면목으로 강호상에 나돌아 다닐 수가 있겠소?" 정첩후는 이 소리를 듣고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그렇다. 무림맹의 맹주는 벌써 낙양에 도착했을 것이니 내가 급히 달려가 구원을 청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흑석도주를 향해 공수를 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들의 규칙이 그렇다면 할 수 없구려. 하지만 당노제는 무림맹의 사람이니 제가 무림맹주를 불러와서 도주와 상의를 한 다음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소?" 흑석도주는 당승무와 정첩후를 한 번씩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지만 무림의 맹주가 허튼 수작을 부릴 때에는 이 노부도 가만 두지 않을 것이오." 이때 정첩후가 당승무에게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 그의 옆으로 바싹 다가갔다. 순간, 어디선지 약간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개 도주로써 어찌 후배들에게 그런 짓을 하시오?" 정첩후는 이 목소리가 바로 곡영자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흑석도주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으니 어서 모습을 나타내시오!" 순간, 흑석도주의 좌우에 서 있던 두 명의 흑의노인은 그가 분부를 내리기도 전에 벌써 두 줄기의 연기로 변해서 지붕 위를 향해 날아갔다. 바로 이순간, 갑자기 곡영자가 지붕 위에서 가볍게 뛰어 내렸다. 곡영자는 계단을 밟고 천천히 올라오며 흑석도주를 향해 공수의 예를 취했다. "도주! 실례를 좀 해야겠소." 바로 이때-. 조금 전 지붕 위로 몸을 날렸던 두 명의 노인 중에 키가 작은 사람이 다시 돌아오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이놈! 감히 노부와 숨박꼭질을 하려 하다니……." 하지만 곡영자가 도주의 앞에 서 있기 때문에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원래의 위치로 다시 돌아갔다. 흑석도주는 곡영자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넌지시 물었다. "노형은 대체 뉘시오?" 곡영자는 사방을 한 번 살펴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곡영자라고 하오." 흑석도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곡영자…… 그런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곡영자는 여전히 빙긋이 웃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하지만 도주께서도 한 가지의 일은 기억을 하고 있을 것이오." 흑석도주는 이 말을 듣자 궁금한 듯 급히 다그쳤다. "대체 무슨 일을 말이오?" 곡영자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허허허…… 빨간 연꽃과 하얀 연밥은 비록 다른 위치에 있어도 같은 뿌리에서 나는 것이오." 이 말을 듣고 흑석도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노형께서……." 곡영자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말을 계속했다. "천지만물의 모든 독은 그 안에 들어 있소." 지금 이들 두 사람이 하고 있는 말은 곡영자의 암호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은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몰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비록 모르고 있었지만 당승무만은 이것이 바로 곡영자의 암호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괴편지 이때 흑석도주의 두 눈에서는 신광이 번득이더니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노형은 초목이오? 아니면 사충이오?" 곡영자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그를 다시 주시했다. "허허허…… 허허허…… 두 가지 다 올시다." 흑석도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럴리가 없을 텐데……." 곡영자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늙은이가 두 가지 독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오." 흑석도주가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이 노부는 두 가지 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소." 곡영자는 빙긋이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도주께서 만약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 늙은이에게 실물이 있으니 보여 드리겠소." 흑석도주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곡영자를 쏘아보며 급히 말을 받았다. "좋소. 어서 꺼내 보도록 하시오." 곡영자는 좀 멋적은 듯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지금 늙은이는 가지고 오지를 않았소." 흑석도주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다그치듯 물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두고 왔단 말이오? 또 언제나 가져올 수가 있겠소?" 곡영자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도주께서 낙양에 오시는 기회가 있으면 이 늙은이가 물론 두 손으로 받들어 보여 드리겠소." 흑석도주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낙양에 있다면 더욱 잘된 것 같소. 그러지 않아도 노부는 낙양에 가서 무림맹주를 찾아 보려고 했었소." 곡영자는 다시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는 낙양 초부에 가서 도_주를 기다리겠소." 흑석도주는 갑자기 냉소를 터뜨리며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노형께서 속임수를 쓸 때에는 이 노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곡영자는 주위를 한 번 살펴보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물론이오. 하지만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흑석도주는 갑자기 곡영자를 향해 손을 저었다. "노형! 어서 돌아가시오." 곡영자는 당승무와 정첩후를 바라보더니 손짓을 했다. "여보게! 자네들도 노부를 따라서 함께 가세." 이때 흑석도주가 당승무를 주시하더니 냉소를 터뜨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흥! 정대협은 돌아가도 괜찮지만 이분 당노제만은 반드시 남겨 두고 가야 하오."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흑석도주를 노려보며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곡영자가 먼저 말을 가로채며 흑석도주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당승무는 이 늙은이의 사질이오. 그리고 도주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늙은이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놓아주기를 바라오." 이 말을 듣자 흑석도주는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곡영자를 주시하더니 다시 고함을 질렀다. "허허허…… 허허허…… 원래 노형께서 조금 전에 노부와 내기를 할 때에 두 가지의 독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 것이 바로 이놈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였구나." 곡영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는 이미 도주와 약속을 했으니 도주께서 믿지 않아도 좋소. 하지만 낙양에 가보시면 알 수 있지 않소?" 흑석도주는 여전히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냉랭하게 반문했다.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노부가 속을 것 같소?" 곡영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도주께서는 이 늙은이를 그처럼 믿지 못하겠소?" 흑석도주는 정색을 하며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우선 한 수를 보여 주시고 가면 간단할 것이 아니오?" 곡영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다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보여 주면 믿으시겠소?" 흑석도주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갑자기 입술을 비쭉거렸다. 순간-. "윙! 윙!" 하는 소리와 함께 파리보다도 더 작은 십여 마리의 금빛 벌들이 날개를 펼친 채 곡영자의 머리를 향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이 십여 마리의 벌들은 모두 금색으로써 곡영자의 머리를 향해 바람처럼 날아오더니 전후 좌우로 흩어지며 침을 쏘려고 했다. 곡영자는 이것을 보자 안색이 홱 변하며 음성을 높였다. "이 늙은이가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악독하기 그지 없는 금천사(金天使)를 사용하시오?" 흑석도주는 여전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금천사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군." 흑석도주는 가벼운 탄식을 하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금천사는 원래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독으로써 독으로 독을 상대해야만 하오. 또한 노부가 금천사를 보내는 것은 노형을 매우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오." 곡영자는 갑자기 벌컥 화를 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금천사는 확실히 무서운 독물이오. 하지만 이 늙은이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오." 원래 십여 마리의 금천사는 곡영자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만 있을 뿐 정말로 물지는 못했다. 이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흑석도주는 또다시 큰 소리로 웃어 젖히며 반문했다. "저것들이 지금 당신이 무서워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는 줄 아시오?" 곡영자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쓸데 없는 짓은 그만 하고 어서 물러가라고 하시오." 흑석도주는 곡영자의 머리 주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금천사를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노형께서는 두 가지의 독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하셨으니 실력이 있으시면 그들을 한 번 떨어뜨려 보시지 않겠소?" 곡영자는 두 눈을 치켜 뜬 채 흑석도주를 주시하며 부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도주께서는 이 늙은이가 저것들을 상대하지 못할 것 같으시오?" 흑석도주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력이 있으시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시험을 해 보시오." 곡영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언성을 높였다. "이 늙은이가 한 가지 아깝게 생각하는 것은 금천사가 희귀한 종자일 뿐 아니라 키우기도 힘이 들기 때문이오." 흑석도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시 금천사를 가리켰다. "노부가 노형에게 실력이 있으면 마음껏 발휘를 해보라고 했으니 이 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그들에게 공격을 하라고 명령을 하겠소" 곡영자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어서 공격을 해보라고 하시오." 흑석도주는 음산하게 웃으며 갑자기 손가락으로 곡영자를 가리켰다. 지금 흑석도주의 이 일지는 바로 공격 명령인 것이다. 이렇게 되자 주위에서 빙빙 돌고 있던 십여 마리의 금천사는 즉시 곡영자의 얼굴 위로 내려 앉았다. 하지만 금천사들은 곡영자의 얼굴에서 왔다갔다 하고만 있을 뿐 감히 물지는 못했다. 곡영자는 움직이지도 않고 똑바로 선 채 빙긋이 웃으며 낭랑하게 외쳤다. "이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어서 돌아가라고 하시오." 하지만 흑석도주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채 곡영자의 얼굴만 주시할 뿐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흑석도주의 옆에 서 있던 두 명의 흑의노인 중 키가 작은 노인이 참지 못하고 여러 사람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 도주 앞에서 감히 방자한 행동을 하다니…… 우리 힘을 합해서 일시에 저놈을 잡읍시다." 말이 끝나자마자, "이얏! 얏-."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 병기를 뽑아 들고 곡영자를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자 흑석도주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여러 사람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놈들! 어디서 함부로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느냐? 바로 이때- 곡영자의 얼굴에서 기어다니고 있던 십여 마리의 금천사가 갑자기 모두 땅에 떨어졌다. 흑석도주는 이런 광경을 보자 안색이 더욱 변하여 급히 한 마리의 금천사를 집어 손바닥에 올려 놓고 살펴보았다. 금천사는 심한 부상을 입은 것처럼 날지도 못하고 빙빙 돌기만 했다. 이렇게 되자 흑석도주는 고개를 숙이고 자세히 살폈다. 금천사의 허리에는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한 마리의 검은 이가 붙어 있었다. 흑석도주는 이것을 보자 경악을 금치 못하고 급히 물었다. "노형은 이까지도 암기로 쓸 수가 있으니 참으로 고명하오. 그런데 노형은 다시 금천사를 살아나게 할 수가 있소?" 곡영자는 그를 주시하며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허허허…… 사용할 수만 있고 다시 거두어 들일 수가 없으면 어떻게 독의 전인이라고 할 수 있겠소?" 말을 끝마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소맷자락을 흔들었다. 순간 땅에 떨어져서 빙빙 돌고 있던 십여 마리의 금천사는 일제히 날을 수가 있게 되었다. 흑석도주는 혀를 내두르며 당승무를 가리켰다. "노형! 어서 당노제를 데리고 가시오. 노부의 문하들은 모두 개죽음을 당했던 것으로 생각을 하겠소." 곡영자는 흑석도주를 향해 점잖게 공수의 예를 취했다. "도주! 참으로 고맙소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정첩후와 당승무를 향해 손짓을 했다. "여보게들! 무엇을 그처럼 주저하고 있는가? 빨리 가지 않고……." 흑석도주는 정색을 하며 곡영자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노형! 한 가지 기억해 둘 것은 오늘 밤에 낙양에서 만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곡영자는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알았소. 이 늙은이는 꼭 기다릴 테니 잊지 말고 오시오. " 이윽고 세 사람은 유유히 떠나갔다. 곡영자는 앞장을 서서 먼저 떠나갔다. 당승무와 정첩후 두 사람은 배천석의 시체가 실려 있는 영구 수레를 찾은 다음 이윽고 낙양에 도착했다. 어느 사이에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졌고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당승무와 정첩후 두 사람이 초부 앞에 다다랐을 때 급히 초복이 마중을 나오며 공손히 맞이한다. "정대협! 빨리 돌아오셨구려." 정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향해 손짓을 했다. "배 둘째의 영구 수레가 밖에 있으니 총관께서는 사람을 보내 보호를 하라고 하시오." 초복은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정첩후의 곁으로 다가가 다그치듯 물었다. "정대협께서는 정주(定州) 에 가지 않았습니까?" 정첩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도중에 사고가 일어나서 다시 돌아오고 말았소." 초복은 가벼운 탄식을 할 뿐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첩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또한 여덟 명의 장한들은 모두 적에게 잡혀 갔소." 초복은 이 말을 듣자 더욱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누가 잡아갔는지 알고 계십니까?" 정첩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대답한다. "바로 마의교의 짓인 것 같소."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초복을 주시하며 약간 음성을 높였다. "영구 수레가 밖에 있으니 총관께서는 어서 사람을 보내 지키고 있으라고 하시오." 초복은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급히 허리를 굽혔다. "예예…… 공자와 제맹주께서는 지금 서화청에 계십니다." 정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서화청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서화청에는 휘황찬란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위쪽의 가운데에는 무림맹의 맹주 부부가 앉아 있었고 사방 좌우에는 금화상, 심자귀, 초숭생 그리고 소불이 등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심자귀는 정첩후와 당승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급히 일어서며 반갑게 맞아주며 제갈명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정노대! 이제야 돌아오셨소? 이 분이 바로 제갈명, 제맹주이시오." 그리고는 다시 여러 사람들을 하나씩 소개해 주었다. 초숭생은 정첩후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정대협!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소?" 정첩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우리는 도중에 사고를 만나 이처럼 빨리 오게 되었습니다……." 초숭생은 깜짝 놀라며 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당했단 말입니까?" 정첩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바로 마의교의 사람을 만났지요."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소불이가 나서며 빙그레 웃더니 무릎을 쳤다. "과연 내 생각이 맞았구나……." 정첩후 역시 빙긋이 웃으며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소노형께서는 한 가지 생각을 못한 것이 있소."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궁금한 듯 급히 다그쳤다. "아니…… 내가 무엇을 잘못 생각했단 말이오?" 정첩후는 여러 사람들을 둘러 보며 냉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초부에서 보낸 여덟 명의 장한들은 모두가 마의교의 놈들이 었소." 초숭생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여 소불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아니, 정대협! 그것이 사실이오?" 정첩후는 당승무를 힐끗 쳐다보며 반문을 했다. "당노제가 여기에 있는데 제가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소?" 초숭생은 얼굴을 붉히며 갑자기 일어서더니 목청을 높였다. "어서 초복을 오라고 하시오!" 하지만 소불이가 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앉아 계시오. 정노대의 얘기를 완전히 듣고난 다음 생각을 해봅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심자귀가 나서며 한 마디 덧붙였다. "소노형의 말이 맞는 것 같소.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고 나서 결정을 하도록 합시다." 정첩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잠시 얘기를 해주었다. 정첩후의 말을 듣고 있던 초숭생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서며 언성을 높였다. "정대협! 그놈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소?" 정첩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힘없이 대답했다. "도중에서 모두 도망을 쳐버렸소." 초숭생은 정첩후를 똑바로 주시하며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도중에서 또 무슨 일이 발생했단 말이오?" 정첩후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당승무를 주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일들이 벌어졌었소. 하지만 저는 얘기를 하기가 싫으니 당노제가 얘기를 해 주시오." 당승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순간-. "모두 안심들 하시오. 아무도 도망을 칠 수가 없을 것이오." 하는 소리와 함께 곡영자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초숭생은 곡영자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데 남의 일에 간섭을 하시오?" 소불이가 급히 손을 흔들어 만류하며 초숭생을 한 번 쳐다보더니 곡영자를 가리켰다. "이 분이 바로 천독곡의 곡노형 곡영자이시오." 그리고는 여러 사람에게 일일이 소개를 해주었다. "곡노형! 열 사람의 행방을 알아냈습니까?" 곡영자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한 사람도 도망을 칠 수 없을 것이니 정대협께서는 안심하시오." 곡영자는 상대방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제갈명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했다. "나는 조금 전 돌아올 때에 주위에 독물이 포위된 것을 보았는데 혹시 흑석도주의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까?" 제갈명이 고개를 젓자 초숭생이 나서며 말을 받았다. "오늘 점심 때 누가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와서 사흘 안에 사마장홍과 정영 두 사람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중요한 길목을 봉쇄한 다음 들어갈 수는 있어도 나가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의 아래에 서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의교의 짓인 줄로 알고 조금 전 심노대와 소대협에게만 보여드리고 다만 맹주님에게는 보고를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제갈명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물었다. "흑석도의 사람들이 사마장홍을 찾고 있었군. 하지만 정영이란 누구요!" 여러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당승무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제가 흑석도의 둘째 사형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예주방이 사마장홍과 그들의 소사제를 납치했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정대협을 사로잡고 교환을 하려고 했던 것 같았습니다." 소불이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흥! 아마 또 무명도의 짓일 것입니다. 그들이 거짓 소문을 퍼뜨려 우리를 의심하도록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초숭생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정첩후를 향해 말을 계속했다. "정대협! 당소협께서도 흑석도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정첩후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드러난 정체 이때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당승무가 나서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흑석도의 미신향은 확실히 무서운 것 같았습니다. 소생이 비록 독공을 연마하기는 했어도 하마터면 그들의 미신향 아래 당할 뻔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여러 사람을 향해 자세한 경과를 설명해 주었다. 이때 심자귀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벌떡 일어서더니 소불이를 향해 물었다. "소노형께서 오실 때에 가지고 온 보따리도 아마 흑석도의 사람들이 한 짓이 아닌지 모르겠소?" 소불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급히 말을 받았다. "심노대! 이 늙은이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려고 하지 마시오. 그들이 찾는 것은 이 늙은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네들이오." 심자귀는 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맹주님과 곡노형이 오셨으니 다행이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소." 초숭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흑석도를 무서워 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마장홍과 그들의 소사제를 납치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데에 있습니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제갈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소. 될 수 있는대로 흑석도와 화해를 했으면 좋을걸 같은데…." 이때, 시녀들은 벌써 술좌석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정첩후는 이 틈을 타서 소불이를 복도로 데리고 가더니 자기가 흑의인을 고문시켰던 일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를 해주었다. 소불이는 정첩후를 똑바로 주시하며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 늙은이는 초공자가 마의교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장담할 수가 있소. 그리고 아마 한대규(韓大奎)라는 흑의인이 거짓말을 했을 것이오." 정첩후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물었다. "소노형께서는 또 다른 고견이 없으시오?" 소불이는 다시 어깨를 들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특별한 것이라고는 할 수가 없지만 약간의 단서는 알아냈소." 이때 금화상은 소불이와 정첩후 두 사람이 복도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자 급히 다가오며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두 분의 얘기를 들을 수가 있겠소?" 소불이는 금화상을 잠시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자리를 비켜섰다. "물론 들어도 괜찮소." 금화상은 두 사람을 각기 한 번씩 쳐다보더니 나직이 물었다. "하. 지만 두 분께서는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소?"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말을 받았다. "우리는 조금 전 어떻게 해야 흑석도의 사람들과 상대를 해야 할 것인지에 상의를 하고 있었소. 우리가 상의한 결과 곡노형이 독공을 연마하셨기 때문에 그들과 상대를 하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금노형, 당노제, 이 늙은이 亨이 독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흑석도의 사람을 상대하기로 했소. 또한 심노대, 정노형, 초공자 등 사람들도 마의교를 상대하고 맹주를 참가시키지 않을 것이오" 금화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두 분 생각이 옳은 것 같소. 하지만……." 금화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명의 시녀가 걸어오며 허리를 굽혔다. "공자께서 세 분을 입석 하시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은 시녀의 말을 듣고 화청 안으로 들어갔다. 심자귀는 소불이 등 세 사람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빙긋이 웃으며 나직이 물었다. "또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소?" 금화상이 나서며 정색을 하더니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우리는 노대에게 한 가지 일을 맡겨주기로 결정을 했소." 심자귀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형들 세 분께서 생각을 한 것이라면 물론 좋을 리가 없소." 이때, 심자귀를 주시하고 있던 정첩후가 나서며 말했다. "이것은 여러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라 나쁘고 좋고 할 것이 없소." 그리고는 조금 전에 결정을 한 대로 설명을 해주었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초옥지가 입술을 비쭉이며 선뜻 나섰다. "그런데 저는 무엇 때문에 할 일을 주지 않지요?" 초숭생은 그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너는 어젯밤에 수고를 했으니 좀 쉬고 있거라!" 초옥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절대로 안 돼요. 어젯밤에는 아무런 일도 없지 않았어요?" 초숭생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오늘밤에도 아마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옥지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끼어들었다. "아무 일이 없다고 해도 저에게 일을 주셔야 해요." 이때, 심자귀가 나서며 초옥지를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낭자께서는 총 순찰로써 사고가 발생한 곳마다 찾아가서 지원을 하십시오." 초옥지는 이 말을 듣자 마구 웃어젖혔다. "호호호……호호호…… 그 정도쯤은 되어야 할 것이 아니에요." 묵묵히 듣고 있던 제갈명이 여러 사람을 향해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흑석도와 마의교의 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힘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들도 도와주고 싶소." 초숭생이 나서며 약간 멋적은 듯 얼굴을 붉혔다. "맹주께서는 손님이신데 수고를 끼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저희들은 인원 수도 충분합니다." 이때 양수분이 나서며 갑자기 소불이를 향해 물었다. "소호법! 저와 약속한 것은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소불이는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시치미를 뚝 잡아떼었다. "도대체 무슨 약속인데 그러시오?" 양수분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신안(新安)의 주루에서 저와 약속하시기를 낙양에 가기만 하면 싸울 상대를 찾아준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소불이는 하는 수 없이 가볍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맞았소. 맞아…… 과연 전에 얘기를 했던 것 같소." 양수분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급히 다그쳤다. "그렇다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뭘 그렇게 주저하죠?" 소불이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동안 말이 없더니 얼마 후에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흑석도의 사람들은 독물을 잘 사용하기 때문에 좀 곤란할 것 같소." 양수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제가 흑석도의 사람들을 무서워 할 줄 알아요? 무명도도 저의 눈에는 들지도 않은데 그까짓 흑석도를 무서워 할 줄 아세 요?"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곡영자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양낭자! 흑석도의 사람들은 이 늙은이 때문에 왔소. 하지만 낭자께서 이 늙은이의 몸에 있는 이를 더럽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함께 가도록 합시다." 양수분은 이 말을 듣자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움추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싫어요. 그런 말씀은 다음부턴 하지 마세요." 제갈명이 빙긋이 웃으며 곡영자를 가리켰다. "양낭자께서는 곡호법의 몸에 있는 이를 무서워 하고 있는 것 같구려." 양수분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또다시 초숭생이 나서며 양수분을 향해 물었다. "양낭자, 저의 누이동생과 함께 총 순찰을 맡으시는 것이 어떻겠소?" 양수분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초옥지가 나서며 웃으며 대답한다. "호호호…… 좋아요. 그렇게 하겠어요." 두 사람의 일은 이렇게 해서 결정을 지었다. 여러 사람들은 이경 무렵이 되어서야 술좌석을 비우고 헤어졌다. 이때 금화상이 일어서며 심자귀를 향해 물었다. "심노대, 우리 이제 나가보는 것이 어떻겠소?" 심자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금화상과 함께 먼저 나갔다. 소불이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첩후와 당승무 두 사람을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정노대, 노대는 당노제와 모든 것이 잘 맞으시니 함께 가시오. 이 늙은이는 초공자와 함께 가볼 생각이오." 그리고는 당승무를 향해 전음입밀로 다시 말을 계속했다. "노제, 노제는 양낭자를 잘 감시해야 하네." 하지만 당승무는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물어보려고 했다. 이때 소불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초공자와 함께 떠나갔다. 당승무는 정첩후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정대협, 우리는 이제부터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정첩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 청에는 맹주와 총 순찰이 있으니 우리는 지붕 위에 올라갈 필요가 없이 뒤에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지키는 편이 좋을 것 같소." 당승무는 두어 번 머리를 끄덕이며 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맞았소. 정대협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첩후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당승무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선뜻 말을 꺼냈다. "노제, 다음부터는 정대협이라고 부르지 말고 정노대라고 부르게!" 당승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급히 손을 저었다. "안 됩니다. 그것은 안 되오." 정첩후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정주에서 나이가 많은 후배건, 적은 후배건 이 늙은이에게 정노대라고 하네. 그렇기 때문에 이 늙은이는 여러 사람들에게 정노대로 통하게 되었지, 그렇기 때문에 노제도 이 다음부터는 정노대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거네" 당승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수를 했다. "예! 다음부터는 꼭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면서 복도를 걸어나왔다. 이때 정첩후가 갑자기 당승무를 향해 낮은 소리로 물었다. "노제, 조금 전 소노형께서 노제에게 뭐라고 했었나?" 당승무는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대답했다. "소노대께서는 저와 농담을 했을 뿐입니다." 정첩후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지. 소노형은 평상시에는 비록 농담을 잘하지만 오늘 밤에는 절대로 농담을 하지 않았을 것이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소리를 했는지 한 번 얘기해 보게." 당승무는 잠시 주저하더니 정첩후를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소노대께서는 저에게 양낭자를 감시하라고 했습니다." 정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그 말은 아마 노제에게 양낭자를 보호하라고 한 뜻일 거네." 당승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양사형의 무공은 저보다 훨씬 높은데 어찌 저의 보호가 필요하겠습니까?" 정첩후는 이 말을 듣자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급히 물었다. "양낭자가 바로 노제의 사형이란 말이오?" 당승무는 정색을 하며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총호법의 기명 제자입니다." 이들 두 사람은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복도를 지나 후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 두 사람이 후원에 들어서자마자 꽃밭 쪽에 있는 복도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제일 조용한 것 같으니 우리는 여기서 얘기를 좀 합시다." 이때 정첩후는 이 음성을 듣자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금화상과 심자귀도 여기에 온 것 같구나…… 정첩후는 당승무에게 말을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복도에서 다시 심자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노형께서는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여기까지 데리고 왔소?" 정첩후는 확실히 강호상에서 늙은 사람다웠다. 금화상과 심자귀 두 사람의 대화 중에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정첩후는 당승무를 향해 눈짓을 하더니 바람처럼 몸을 날려 담 밑에 몸을 숨겼다. 당승무 역시 정첩후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급히 몸을 숨겼다. 순간, 복도 안에 있는 금화상의 쉰 듯한 음성이 들렸다. "사실 아무 일도 아니오. 저는 다만 아직 시간이 이르기 때문에 심철과 함께 산책을 좀 하고 싶었을 뿐이오." 심자귀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는가 싶더니 주위를 살펴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밤은 비록 조용하고 경치 좋은 것 같지만 우리 강호의 사람들이 즐길 수 있을 경치 같지는 않군요." 금화상은 빙긋이 웃으며 심자귀의 어깨를 두어 번 쳤다. "심노대께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무엇인가 못마땅한 것이 있는 것 같구려." 담 밑에 바싹 숨어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첩후는 이 말을 듣자 다시 생각을 했다. '원래 이 사람들은 감시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경을 하기 위해서 왔구나…….' 정첩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심자귀가 갑자기-. "아니!" 하는 일 성을 지르며 무엇을 발견한 것 같았다. 금화상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궁금한 듯 물었다. "허허허…… 심형! 어디가 잘못 되기라도 했단 말이오?" 심자귀는 금화상의 머리칼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급히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오. 저는 금노형의 머리가 하얗게 된 것을 보았을 뿐이오. 하지만 노형의 수염은 언제 그렇게 하얗게 변했소?" 금화상의 수염은 분명히 누런 색인데 어떻게 되어서 하얗게 되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벌써 삼 년쯤 된 것 같소." 순간, 정첩후의 머리에는 이상한 예감이 스쳐갔다. "암호…… 그들이 바로 마의교의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심자귀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급히 다그쳤다. "그렇다면 다…… 당신이…… 바로 변노…… 속하는……" 이 말을 듣자 정첩후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호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심자귀가 자신을 낮추어 속하가 되다니…….' 금화상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아니오. 저는 다만 변노와 지시를 받고 백형에게 전달을 할 뿐이오." 미인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첩후는 다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변노……변노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지금 금화상과 심자귀의 신분으로도 변노의 수하라니…… 그의 신분이 높은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어젯밤에 잡은 흑의인은 초숭생에게 수령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여기까지 생각을 하자 갑자기 소불이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초공자는 절대로 마의교의 사람이 아니오…… 아마 한대규의 말이 거짓이었을 것이오……" 순간, 심자귀는 음성을 낮추며 지극히 공손하게 물었다. "변노에게서 무슨 지시가 있었습니까?" 금화상은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았는지 심자귀를 향해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변노의 지시는 바로 제맹주의 곁에 있는 곡영자가 독을 잘 사용하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소. 또한 흑석도의 사람들은 원래 우리 때문에 왔다고 했소. 하지만 지금 곡영자가 흑석도의 사람을 상대하고 있으니 우리는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으면 된다고 했소." 심자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예 움직이지도 말라는 것이오?" 금화상은 다시 사방을 살펴보며 빙긋이 웃더니 품 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심자귀에게 건네주었다. "아니오. 우리는 변노의 지휘를 수시로 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만 하오. 그리고 이것은 소중히 간직하시오." 심자귀는 잠시 주저하는가 싶더니 물건을 받아 들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것은……." 금화상은 품 속에 집어 넣으라고 지시를 하더니 득의에 찬 웃음을 띠며 말을 가로챘다. "바로 청린전(靑燐箭)이오. 노형이 만일에 누가 소리나는 화살을 발사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즉시 그 자리에서 그것을 발사하면 되는 것이오." 심자귀는 이 말을 듣자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두서너 번 끄덕였다. "알겠소. 노형의 말대로 한 번 해보겠소." 금화상은 다시 주위를 살피며 급히 말을 꺼냈다. "좋소.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만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가도록 합시다." 순간-. 이때, 담 밑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첩후는 청린전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을 뿐만 아니라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청린전이란 바로 옛날 화기의 대가 화신나선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청린전에 맞기만 하면 즉시 몸이 불길에 휩싸여 완전히 탈 때까지는 아예 끌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정첩후가 아깝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금화상이 청린전으로 누구를 상대하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화상의 말투로 볼 때 암기를 발하는 사람은 바로 변노임에 틀림이 없었다. 또한 청린전을 발하는 사람도 한 사람 뿐인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변노가 누구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이때, 정첩후는 일이 다급함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즉시 당승무를 불렀다. "노제, 금화상과 심자귀의 대화를 노제도 들었을 것이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급하니 이 늙은이는 즉시 소노형을 찾아 상의를 좀 해야겠네. 그러니 노제는 소노형의 분부대로 양낭자를 감시하게." 당승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정첩후를 똑바로 주시하며 궁금한 듯 물었다. "하지만 이 일을 맹주에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까?" 정첩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이 늙은이가 소노형을 찾아가서 얘기를 하면 그는 암암리에 맹주에게 통지를 해줄 것이네. 하지만 만약 앞에 있는 객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적에게 발각이 될 것이네." 당승무는 사방을 살펴보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정노대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첩후는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즉시 어둠 속으로 소불이를 찾아 사라져 갔다. 당승무도 정첩후가 떠난 후에야 양수분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당승무가 후원으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꽃밭에서 하나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서랏! 누구냐!" 당승무는 이 말을 듣고 즉시 걸음을 멈춘 채 급히 몸을 돌리고 뒤를 살펴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당승무는 여전히 사방을 살펴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도대체 누구냐! 사람을 함부로 놀리려 하다니……." 당승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또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당승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급히 몸을 돌렸다. 이때-. 두 명의 청의소녀가 당승무를 겨눈 채 일 장가량의 거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당승무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두 분 낭자는……" 당승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왼쪽에 서 있던 청의소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닥쳐랏! 당신이 누군데 감히 여기에 들어왔느냐?" 당승무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담담하게 웃었다. "저는 당승무로써 순찰을 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소." 오른쪽에 있던 소녀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물었다. "흥! 순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있느냐?" 당승무는 다시 주위를 살펴보며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초부의 꽃밭이 틀림 없지 않소?" 오른쪽에 있는 청의소녀가 나서며 좀 누그러진 듯한 음성으로 반문을 했다. "초부의 꽃밭 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여기는 우리 아가씨의 거처인데 당신이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요?" 당승무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기도 전에 왼쪽에 있는 청의소녀가 나서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여기는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 당신은 다른 곳으로 가보세요." 당승무는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갔다. 그는 갑자기 소불이가 했던 말이 떠올라 급히 물러섰던 것이다. 다시 당승무는 연자약파(燕子掠波)의 초식을 전개해서 꽃밭으로 날아가더니 땅에 바싹 엎드린 채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주위는 칠흑 같이 어두웠기 때문에 비록 네 명의 순찰병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지만 그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하나의 누각 앞에까지 기어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쳐들어 보니 누각 앞에는 여덟 명의 청의소녀가 검을 꼬나쥔 채 지키고 있었다. 당승무는 서서히 누각을 중심으로 해서 측면으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지붕 위를 향해 연기처럼 몸을 날리더니 지붕 위에 엎드려서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 가닥의 불빛이 누각 안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불빛은 가운데에 있는 방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창문에 하나의 자색 휘장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방 안의 사정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누각의 화려함으로 볼 때 단번에 초옥지의 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당승무는 자세히 보기 위해서 이 층의 복도에 뛰어 올라 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아랫층에는 경비가 그렇게 삼엄한 데에 비해 이 층에는 아무런 방비도 없었다. 당승무는 방심을 할 수가 없어 문 입구까지 다가섰으나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감히 문을 열지도 못하고 다만 문 옆에 몸을 붙이고 문 틈으로 안을 살폈다. 과연 당승무의 생각대로 한 소녀가 등을 방문쪽으로 돌린 채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또한 그의 옆에는 한 명의 청의노부가 낭자를 위해서 화장을 해주고 있었다. 당승무는 지금 화장을 하고 있는 소녀가 바로 초옥지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당승무는 방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했다. 이때 초옥지와 청의노부는 모두 등을 밖으로 돌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당승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발자국 소리를 낮게 한 다음 살며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그는 급히 벽에 몸을 붙이고 왼쪽으로 한 발자국 한발자국 이동했다. 또한 당승무의 예리한 눈초리는 여전히 오른쪽의 화장대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자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당승무는 다시 왼손을 뻗혀 오른쪽 창문에 처져 있는 휘장을 제치고 그 안에 몫을 숨길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방 안에 커져 있는 등불이 엷은 휘장에 까지 완전히 비치지 않는 점이다. 휘장 뒤에까지 무사히 들어간 당승무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듯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두 사람의 대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초옥지와 청의노부 두 사람은 화장대 앞에 앉아서 분장을 하고 있을 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밤은 더욱 깊었으며 세 사람이 들어있는 방 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순간, 청의노부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초옥지의 앞으로 바싹 다가앉더니 급히 입을 열었다. "칠낭자! 됐어요. 이제는 완전히 된 것 같아요. 이 노파의 실력이 어떠세요?"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휘장을 젖히고 들여다 볼 수도 없는 일이다. 당승무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생각을 했다. '아니, 칠낭자라니…… 초낭자가 도대체 어떻게 되어 칠낭자로 되었단 말인가…… 참으로 모를 일이군…… 모를 일이야…….' 당승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초옥지가 청의노부를 바라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왕모! 왕모! 저는 이제부터 말을 해도 괜찮아요? 또 몸을 움직여도 괜찮겠어요?" 청의노부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만면에 득의한 웃음을 띠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물론, 낭자께서는 이제부터 무엇을 해도 괜찮을 것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초옥지는 즉시 앞에 놓여 있는 조그만 거울을 들고 앞 뒤를 쓸 동안 살펴보더니 만족스러운 듯이 방긋이 웃었다. "호호호…… 왕모! 조금도 헛점을 찾아볼 수가 없으니 실력이 아주 대단하군요. 왕모는 언제 이런 좋은 솜씨를 배워 두셨어요?" 이때, 당승무는 여전히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채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이 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변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청의노부는 약간 멋적인 듯 히죽 웃더니 다시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칠낭자!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다른 곳은 완전하다고 할지라도 목소리가 좀 다른 것 같아요." 청의노부는 상대방이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실, 젊은 낭자들처럼 목소리만 약간 낮추어서 얘기를 한다면 아무도 알아차릴 수가 없겠지……" 초옥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몸을 일으키며 방긋이 웃었다. "왕모! 밤이 깊은 것 같은데 얼마나 됐어요?" 청의노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아마 삼경쯤 되었을 것이에요." 초옥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청의노부를 한동안 주시하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벌써 삼경쯤 되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저는 그만 가봐야 할것 같아요." 청의노부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면사를 집어 초옥지의 곁으로 다가서며 급히 말을 꺼냈다. "칠낭자! 혹시 남에게 발각이 되면 큰일이니 이 면사를 쓰고 가시는 것이 좋겠어요." 초옥지는 면사를 쓰며 가벼운 탄식을 하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왕모! 하지만 여기의 일은 어떻게 해야 되지요?" 청의노부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초옥지를 주시하더니 다시 득의에 찬 웃음을 띠었다. "칠낭자! 안심하세요. 이 늙은 노파가 모든 준비를 할 테니까요." 이때 휘장 뒤에 있던 당승무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준비…… 도대체 무슨 준비일까…, 틀림없이 이 자들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무렵 초옥지는 방문 앞으로 걸어가더니 고개를 돌려 청의노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여기의 모든 일은 왕모께서 알아서 하세요. 저는 이제 그만 가봐야 하겠어요." 청의노부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말을 받았다. "이곳의 일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부디 성공하시길 빌고 있겠어요." 초옥지는 급히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내뱉듯이 말했다. "저는 심사형처럼 그에게 반하지는 않을 것이에요." 말을 끝마치는 것과 동시에 검은 면사를 쓴 초옥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청의노부도 방 안을 한 번 둘러본 다음 소리없이 웃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운을 닫고 복도를 향해 급히 걸어갔다. 당승무는 그들이 멀리 떠나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휘장을 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화장대 옆에 있는 탁상 위에는 여전히 촛불이 커져 있었다. 당승무는 자기가 더 이상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자 급히 나가려 했다. 순간, 그는 침상 위에 하나의 소녀가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승무는 이런 광경을 보자 지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소녀가 바로 양수분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또한 소불이가 자기에게 양수분을 감시하라고 했던 생각도 떠올랐다. '혹시 양사형이 그들에게 혈도를 제압당하고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되었던 한 번 가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는 급히 침상 앞으로 달려가 머리를 숙였다. 불청객 침상의 바로 앞에는 휘장이 이중으로 늘어 뜨려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침상 위는 몹시 어두웠다. 때문에 당승무의 예리한 눈초리로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당승무는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침상 위에 있는 사람은 바로 초옥지였기 때문이다. 당승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초옥지는 분명히 조금 전에 나갔는데 어찌 침상 위에 누워 있단 말인가?' 바로 이때 밖의 복도에서 갑자기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조금 전에 나간 청의노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찌되었건 노파를 따라 들어오기만 하면 되오." 당승무는 이 말을 듣자 다시 급히 휘장 뒤로 몸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할 수 없이 침상에서 물러났다. 이때 청의노부는 문 입구에까지 다다른 것 같았다. 순간, "획!" 하는 소리와 함께 당승무는 대들보 위로 몸을 날리더니 바싹 엎드린 채 몸을 숨겼다. 바로 이때, 청의노부는 하나의 장삼을 입은 사람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청의노부는 방 안을 한 번 살펴 보더니 창문에 쳐져 있는 휘장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휘장 뒤에 몸을 숨기고 내가 기침을 하면 즉시 출수하시오." 장삼의 대한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히 대답한다. "예!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까지……" 청의노부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챘다.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몸을 숨기시오." 대한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그녀의 말대로 휘장 뒤로 몸을 숨겼다. 청의노부는 그가 완전히 숨은 것을 보자 득의에 찬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다시 품 속에서 하나의 편지를 꺼내더니 탁상 위에다 올려 놓은 다음, 침상 옆에 앉았다. 다시 방 안은 차가운 침묵이 계속 흘렀다. 순간, 하나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청의노부는 급히 일어서더니 문 앞으로 다가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공자! 아가씨!" 이때 방 안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초숭생이었다. 방 안에 들어선 초숭생은 침상 위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분노의 빛을 띠며 청의노부를 향해 퉁명스럽게 물었다. "동생의 상처는 좀 어떠시오?" 청의노부는 고개를 떨구더니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대답한다. "적에게 부상을 입고 정신이 혼미해진 채 침상 위에 누워서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숭생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비통하게 말을 받았다. "아마 다른 사람에게 혈도를 찔렸을 것이오. 그런데 양낭자는 남에게 납치를 당했소?" 청의노부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설명을 했다. "예! 아가씨와 양낭자 두 분께서는 이 충으로 올라 왔었지요. 그래서 이 노파가 차를 준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을 때 아가씨께서는 그만두라고 하셨어요. 이 노파가 다시 계단 입구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아가씨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 소리를 듣고 이 노파가 급히 달려갔을 때 아가씨는 이미 쓰러져 있었고 양낭자는 하의 복면 흑의인이 껴안은 채 창문을 열고 도망쳤어요. 그 복면의 흑의인은 떠날 때에 상 위에 한 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제맹주에게 전해주라고 했습니다." 대들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당승무는 이 소리를 듣자 즉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청의노부는 틀림없이 마의교의 사람인 모양이다. 또한 초숭생을 유괴해 와서 휘장 뒤에 숨어 있는 사람에게 기습을 하라고 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자 그는 자기도 출수할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바로 이때, 당승무는 자기의 왼쪽어깨에 무엇이 깨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바늘에 찔린 것 같아 급히 고개를 숙여 보니 한 마리의 이가 붙어 있었다. 당승무는 이 이를 보며 급히 생각을 굴렸다. '아마 대사백께서 출수를 하지 말라고 하는 뜻이로구나……' 이때, 초숭생은 탁상 위에 있던 편지를 집어 품 속에 넣으며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또한 침상 옆에 앉아 있던 청의노부는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초옥지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공자님이 오셨어요. 제가 부축해 드릴테니 어서 일어나세요." 초숭생이 급히 손을 흔들며 만류했다. "그를 건드리지 마시오." 그러나 청의노부는 벌써 초옥지의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헤헤헤…… 헤헤헤……" 초숭생은 깜짝 놀라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유모! 무엇이 그렇게 우습다고 웃고 있소?" 청의노부는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 노파는 절대로 그녀의 유모가 아니오." 초숭생은 이 말을 듣자 안색이 돌변하여 다그치듯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마의교의 사람이란 말이오?" 청의노부는 초숭생을 날카롭게 쏘아보더니 초옥지를 가리켰다. "쓸데 없는 소리는 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이 동생을 살리고 싶다 면 가만히 있는 편이 좋을 것이오." 초숭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중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네들은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오?" 청의노부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흐흐흐……우리가 상대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제가란 놈이오. 그렇기 때문에 당신 남매의 목숨은 절대로 뺏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청의노부는 창문 쪽을 향해 갑자기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청의노부의 기침이 끝나자 마자 놀랍게도 초숭생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휘장 뒤에서 걸어나왔다. 초숭생은 깜짝 놀라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을 더듬거렸다. "다, 당신……." 초숭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휘장 뒤에서 나온 사람은 번개같은 수법으로 초숭생의 혼혈을 찔렀다. 그러자 청의노부는 또 한 명의 초숭생을 향해 손짓을 했다. "됐소. 됐어…… 편지는 그의 품 속에 있으니 어서 꺼내고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빨리 나가시오." 그 사람은 초숭생의 품 속에서 편지를 꺼내더니 자기의 품 속에 집어 넣은 다음 청의노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청의노부는 다시 초숭생을 일으키더니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당승무는 대들보 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침상 앞에 쳐져있는 휘장 때문에 확실히 볼 수가 없었으며 다만 경미한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전음입밀이 당승무의 귓전에 스쳤다.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밖으로 나오게." 당승무는 이 음성이 대사백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승무는 즉시 대들보에 발을 걸치게 하고 머리를 아래로 해서 거꾸로 매달린 채 침상 쪽을 주시했다. 침상 위에는 초옥지 혼자만 누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당승무는 이 안에 비밀문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급히 뛰어내렸다. 당승무는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 다음 꽃밭 속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이때, 당승무의 앞에 한 노인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당승무는 자기의 앞이 서 있는 사람이 대사백 곡영자라는 것을 알자 급히 달려갔다. "아니, 대사백님! 대사백께서 무슨 일로……." 곡영자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제서야 오게 되었는가?" 당승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꽃밭에는 순찰병이 있었기 때문에 경공술을 쓰지 못했습니다." 곡영자는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소노형이 벌써 천하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답설무흔(踏雪無痕) 초식을 자네에게 가르쳐 주었을 텐데 어찌 그들에게 발각이 될까봐 걱정을 하는가? 강호에 나오려던 담량이 커야 하고 모든 일에 조심을 해야 하지. 하지만 자네는 조심성이 너무 많은 것 같네." 당승무는 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받았다. "대사백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곡영자는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하지만 노부가 무엇 때문에 여기서 자네를 기다렸는지 알겠는가?" 당승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곡영자는 주위를 한 번 살펴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노부가 조금 전 자네를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아마 큰 일을 저질렀을 거네." 당승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하지만 초공자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잡혀 갔는데 대사백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구하러 가시지 않습니까?" 곡영자는 여전히 가벼운 탄식을 하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조금도 서둘 필요가 없네. 또한 노부가 여기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그 일 때문이었지." 당승무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말을 꺼냈다. "조금 전 제자는 금노대와 심자귀 두 사람이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곡영자는 당승무를 똑바로 주시하며 빙긋이 웃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노부와 소노형이 함께 심노형에게서 들었네" 당승무는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급히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심자귀가 얘기를 했단 말입니까?" 곡영자는 주위를 한 번 둘러 보더니 급히 말을 받았다. "심자귀는 절대로 적이 아니네. 자,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가세." 동시에 그는 서재를 향해 급히 몸을 날렸다. 서재에는 초숭생이 제갈명 부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갈명은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보자 빙긋이 웃으며 급히 말을 꺼냈다. "곡호법!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잘 오셨소." 곡영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 발생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당승무와 곡영자를 주시하고 있던 주설란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바로 양낭자께서 사고가 발생했어요." 곡영자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양낭자께서는 초낭자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초숭생이 나서며 말을 이었다. "제 누이동생은 방 안에 쓰러져 있었고 양낭자는 복면의 흑의인에게 납치당했습니다." 곡영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음…… 바로 마의교의 놈들이 한 짓이구나" 옆에서 듣고 있던 당승무 역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놈들이 감히 양사형을 납치해 가다니……" 당승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설란이 나섰다. "또한 그들은 맹주 혼자서 자기들과 만나자는 편지를 남겼어요." 곡영자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주설란을 향해 물었다. "그 자들은 맹주에게 어디로 오시라고 했소?" 옥영자는 여전히 제갈명을 주시하며 다그쳐 물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맹주께서는 정말로 혼자 가실 생각입니까?" 제갈명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의교의 사람이 혼자 오라고 했으니 혼자 가야 할 것이 아니오? 그리고 또한 그들이 약속한 장소가 용취이기 때문에 그들이 도중에다 벌써 무슨 매복을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마 만나주지도 않을 것이오."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 당승무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맹주께서는 무림의 안위를 한 몸에 지고 있는 신분인데 어찌 그까짓 마의교의 사람을 상대하는데 있어 직접 가시겠다고 하십니까? 이 일은 속하가 직접 가서 처리를 하겠습니다." 제갈명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절대로 안 되오. 마의교에서 나를 지명한 것을 보니 아마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오. 그러니 노제는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좋겠소." 제갈명은 다시 곡영자를 주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옥호법! 만약 흑석도의 사람들이 오면 좋은 말로 타협을 보는 것이 낫겠소."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득의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오늘 밤 낙양으로 오라고 했었습니다." 이때, 소불이가 들어오며 곡영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곡노형, 노형의 친구가 왔으니 어서 나가 보시오." 곡영자는 제갈명을 향해 포권을 하며 공손히 말했다. "아마 흑석도주가 온 모양이니 이 늙은이는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소불이와 함께 급히 밖으로 나갔다. 분노의 함정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간 뒤 제갈명이 초숭생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초형! 용취라는 곳은 도대체 어디에 있소?" 초숭생은 빙긋이 웃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맹주께서는 길을 잘 모르시고 계시니 저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소?" "절대로 안 되오. 우리는 약속을 어길 수가 없으니 초형께서는 위치만 가르쳐 주면 되오." 초숭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말로 설명을 하는 것보다 그림을 그려드리는 편이 자세할 것 같군요."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종이와 필을 준비하더니 약도를 그리며 설명을 했다. "진선제능(晋宣帝陵) 옆에 있는 이곳이 바로 용취입니다." 제갈명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알겠소. 시간이 늦을 것 같으니 이만 가봐야겠소." 이때 주설란이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여보! 조심하셔야 해요." 제갈명은 주설란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담담하게 웃었다. "우리가 무명도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어찌 그까짓 마의교를 무서워 하겠소?" 주설란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빛을 띠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방심을 하지 말고 더욱 조심을 해야 되요." 제갈명은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몸을 돌렸다. "잘 알겠소. 그렇다면 속히 다녀올 테니 당신이나 조심하시오." 말을 마치자 그는 옷도 갈아 입지 않은 채 즉시 밖으로 나왔다. 제갈명이 초부를 지나 북쪽을 향해 바람처럼 몸을 날리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일진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맹주!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갈명은 이 소리를 듣고 즉시 걸음을 멈추며 몸을 돌렸다. 이때, 좌호법 곡영자와 우호법 소불이 등 두 사람이 나타났다. 제갈명은 두 사람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급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처럼 급히 달려왔소?" 곡영자는 소불이를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극히 복잡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맹주께 보고를 하려고 왔습니다." 제갈명은 정색을 하며 다시 나직하게 물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니 그렇지 않으면……." "몹시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맹주님의 뒤를 따라 왔겠습니까?" 제갈명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바로 양낭자의 납치에 관한 일이오?" 곡영자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다만 그들의 음모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소불이를 바라보더니 말을 계속했다. "소노형! 노형이 먼저 말씀해 주시오." 묵묵히 듣고 있던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맹주께서는 사경까지 용취에 가셔야 하니 간단하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맹주께서도 아시다시피 단목인두에 대한 일이고 두 번째는 바로 백가라는 놈이 심귀자로 변장을 해서 우리를 속이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늙은이가 그놈을 잡아서 처치한 다음 심노대를 시켜 백가의 행세를 하라고 했지요." "세 번째는 바로 금화상이 적이었으며 그는 변노라는 자의 명령을 받고 청린전을 심노대에게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호를 보내면 무조건 쏴버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네 번째는 바로 곡노형이 목격을 하셨으니 곡노형이 말씀을 하시오." 곡영자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승무가 초옥지의 규방에 들어가서 겪었던 일과 청의노부가 가짜 초옥지에게 변장을 시킨 일 등을 말해 주었다. 또한 가짜 초숭생이 진짜 초숭생을 제압했던 일까지도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제갈명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안색이 약간 변하여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초옥지 역시 적의 한 사람이었구려."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빙긋이 웃었다. "초옥지가 적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무엇 때문에 당노제를 시켜 양낭자를 감시하라고 했겠습니까?" 소불이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바로 그저께 밤에 두 명의 마의교의 사람이 습격을 했었지요. 그 당시 그 중의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마치 여자 같았는데 그는 이 늙은이에게 독장을 왼쪽어깨에 맞았었지요. 그리고는 이틀날 아침에 이 늙은이가 일부러 해독약을 상처에 바르는 약이라고 그에게 먹였더니 즉시 완쾌되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녀가 마의교의 사람이라는 것을 즉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제갈명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곡영자가 나서며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젯밤 정첩후를 습격한 사람 중에도 체격이 작은 사람이 끼여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 늙은이 역시 그의 몸에 수작을 부렸기 때문에 아마 승인을 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갈명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마의교의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음모가 있기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소불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대답한다. "이 늙은이가 보기에는 아마 무명도의 사람들이 시켜서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갈명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소. 하지만 초옥지의 방에 있는 기관에 초숭생을 숨겨 놓은 것을 보니 양낭자 역시 아마 그곳에다 숨겨 놓았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소." 소불이는 빙긋 웃으며 그를 주시하더니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맞았습니다. 그들은 아마 함정을 만들어 맹주를 생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제갈명은 이 말을 듣자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함정이라고 할지라도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 소불이는 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급히 말을 이었다. "함정이던 아니던 맹주께서는 꼭 가셔야 됩니다. 그리고 이 늙은이가 그런 소리를 한 것은 맹주께서 어느 정도 준비를 갖추라는 의도에서였습니다." 제갈명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한 번씩 주시했다. "하지만 두 분 호법께서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소?" 소불이는 정색을 하며 어깨를 들먹거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맹주께서는 지체하지 말고 가보십시요. 모든 일은 이 늙은이와 곡노형에게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제갈명은 입술로 지그시 깨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가봐야겠소." 말을 마치자 그는 즉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때, 제갈명은 초숭생의 그려준 종이 쪽지를 보며 용취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순간, 길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 하나의 종이 쪽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제갈명은 급히 달려가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추운봉 아래에서부터 화살표를 따라 가시오.' 제갈명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추운봉 아래로 달려갔다. 과연 하나의 느티나무가 서 있었고 나무의 가운데 부분에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제갈명은 다시 주저하며 어디로 가야 되는지를 몰라 한동안 서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또 하나의 화살표가 서쪽의 작은 길로 향하여 그려져 있었다. 제갈명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화살표를 향해 달렸다. 어떻게 되었던 그가 가는 도중에 갈림길이 나타나면 반드시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가 화살표를 따라 약 반 리쯤 달려갔을 때 하나의 어두침침한 계곡이 나타났다. 제갈명은 거의 다 왔음을 직감하고 완전한 경계 태세를 갖춘 다음 계곡 안을 서서히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계곡은 적어도 반 리 정도의 길이는 되는 것 같았다. 제갈명은 아무런 매복도 만나지 않은 채 순식간에 계곡 아래까지 달려갔다. 제갈명은 다시 주저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가운데에 백석으로 깐 하나의 넓은 길이 있음을 발견했다. 제갈명은 다시 백석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백석길에는 삼 장 정도의 거리마다 몇 칸씩의 계단이 있었다. 길 양쪽에는 수백 년 씩이나 묵은 고목나무가 마치 유령처럼 흔들거리고 있었다. 제갈명은 한동안 멍청이 서서 생각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일까 좀 무시무시한 것 같군…….' 하지만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또다시 일 리 가량 걸어 들어갔을 때 좌우 양쪽에는 돌로 만든 사람과 말들이 무수하게 세워져 있었다. 제갈명은 이런 광경을 보자 마음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생각했다. '여기는 바로 오래된 묘가 있는 곳이었구나…… 하지만 누가 이처럼 웅장하게 만들어 놓았을까…….' 이같은 생각을 하며 제단 위로 올라서서 주위를 살펴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묘 앞에는 사람의 키보다 더 큰 하나의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바로 이때-. 제갈명의 등 뒤에서는 갑자기 음산한 웃음이 들려왔다. "흐흐흐, 흐흐흐" 심산유곡, 칠흑 같은 밤, 묘 앞에서 이런 귀신의 울음 소리가 들려오니 제갈명의 담량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갈명은 안색이 변한 채 급히 뒤를 돌아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제갈명은 분명히 음산한 웃음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한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자 제갈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 왔는데 귀하는 무엇 때문에 나타나지 않으시오?" 제갈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흐흐흐…… 흐흐흐" 하는 웃음 소리가 또다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제갈명은 그제서야 음산한 웃음 소리가 묘 안에서 들려 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갈명은 몸을 돌려 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귀하! 빨리 나타나지 못하겠소? 정말로 이렇게 사람을 놀리면……." 제갈명의 말이 끝나기로 전에 오른쪽에서 하나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에 있소이다……." 제갈명이 급히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다시 왼쪽에서 그 음성이 들려왔다. "나를 보지 못하시니 누구를 탓할 수가 있겠소?" 이때, 제갈명은 급히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확실히 고인을 만난 것 같구나……' 제갈명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고함을 질렀다. "으하하하……하하하…… 귀하는 무엇 때문에 일부러 신비스러운 척하시오?" 제갈명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에서 다시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좋소. 그렇다면 소원대로 해주겠소." 하는 소리와 함께 삼 장 밖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제갈명은 흑의인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바로 귀하께서 양낭자를 납치하고 저를 만나자고 했소?" 흑의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명이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저는 복면을 한 사람과 얘기를 하고 싶지 않으니 귀하께서는 어서 복면을 벗으시오." 흑의인은 여전히 음산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맹주께서 여기에 오신 목적은 저의 얼굴을 보기위한 것이 아니지 않소? 그렇기 때문에 제가 복면을 벗고 안 벗고는 관계가 없을 것이오." 제갈명은 여전히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주시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좋소. 그런데 양낭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소?" 흑의인은 고개를 흔들며 빈정거리듯 말을 이었다. "꼭 알고 있소? 아주 은밀한 곳에 있소이다." 제갈명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당신네들은 무슨 목적으로 양낭자를 납치했소?" 흑의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제갈명을 주시했다. "제가 그 이유를 말하면 제맹주께서 허락을 해 줄지 모르겠소." 제갈명은 여전히 언성을 높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저와 무슨 조건을 내세워 교환하겠단 말이오?" 흑의인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양낭자는 귀맹의 총호법인 염지천의 전인이기 때문에 무명도에서도 마침 그를 찾고 있었소.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를 무명도에 보내기만 하면 아마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오. 하지만 제가 제맹주를 먼저 청한 것은 바로 맹주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제갈명은 냉소를 터뜨리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 제모가 당신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단 말이오?" 하지만 흑의인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제맹주께서 찾고 있는 사람이 저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맹주께서는 아마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오. 또한 양낭자께서 계시는 곳은 저만 알고 있으니 만약 저를 죽이게 되면 양낭자는 아마 영원히 찾지 못하게 될 것이오." 제갈명은 하는 수 없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면 물었다. "흥! 좋소. 무슨 조건인지 어서 말을 해 보시오." 흑의인은 잠시 주저하는가 싶더니 선뜻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제맹주께서는 봉황검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 같던데…… 저의 조건은 바로 검보와 양낭자를 교환하자는 뜻이오" 제갈명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그녀를 보아야만 안심을 할 수가 있소.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 있소?" 흑의인은 다시 음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맹주께서 허락을 하겠단 말이오?" 제갈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흑의인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그녀를 보는 것도 좋지만 저는 반드시 당신의 혈도를 찔러야만 안심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소." 제갈명은 이 말을 듣자 안색이 변하여 급히 다그쳤다. "뭐라고?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 숨겼단 말이오?" 흑의인은 담담하게 웃으며 묘를 향해 손짓을 했다. "바로 이 묘 안에 들어 있소." 열리는 무덤 이때,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흑의인을 향해 번개처럼 몸을 날려 그의 견정혈(肩井穴)을 찔러갔다. 흑의인은 피할 사이도 없이 제갈명에게 견정혈을 잡혔으며 반항을 하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돈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제맹주! 양낭자가 우리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오." 제갈명이 아무 말도 않고 계속해서 노려보자 흑의인은 다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계속했다. "제…… 제가 이미 얘기를 했다시피 저를 죽여도……." 제갈명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흑의인을 잡고 있는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흑의인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제갈명의 앞에 무릎을 끊었다. 제갈명은 여전히 날카롭게 쏘아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어서 길을 안내할 테냐? 안할 테냐?" 흑의인은 등골이 오싹해 옴을 느끼며 말을 더듬거렸다. "하…… 하겠으니 제발……." 흑의인은 할 수 없이 제갈명을 데리고 묘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비록 남의 손에 잡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지만 복면에 가리워져 있는 두 눈에는 광채가 번득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갈명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제갈명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묘 앞에까지 다다랐을 때 제갈명이 흑의인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묘의 문은 어떻게 여느냐?" 흑의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묘비의 밑을 가리켰다. 제갈명이 다시 문을 열으라는 듯 손짓을 하자 흑의인은 즉시 허리를 굽혔다. 제갈명은 빙긋이 웃으며 그를 주시하더니 단호히 말했다. "귀하는 될 수 있는대로 얌전히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나의 금나수법은 나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풀 수가 없소. 또한 열두시간 안에 풀지 않으면 아무리 대라신선이라도 할지라도 당신을 구하지 못할 것이오." 하고는 흑의인의 견정혈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흑의인은 제갈명을 힐끗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미 당신의 수중에 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말을 끝냄과 동시에 석비 밑을 만지자 그 거대한 석비가 서서히 옆으로 움직이고 하나의 어두침침한 동굴이 나타났다. 제갈명은 동굴 안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다급히 물었다. "양낭자께서 바로 이 안에 있소?" 흑의인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안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제갈명은 여전히 동굴 안을 주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이 안의 크기는 얼마 정도 되는가?" 흑의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대답했다. "아래는 다만 방 한 칸의 크기 밖에 되지 않소." 제갈명은 다시 묘의 주위를 살펴보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또 다른 출입구는 없느냐?" 흑의인이 고개를 가로 젖자 제갈명이 다시 언성을 높였다. "좋다. 어서 앞장을 서라!" 흑의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화습자에 불을 켜더니 앞에 있는 계단을 따라 앞장을 선 채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다. 제갈명도 모든 준비를 하고 흑의인의 뒤를 따라 아래를 향해 걸어갔다. 이 계단은 층계가 약백 개 정도되는것 같았으며 지하로십오륙 장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계단 아래에는 한 칸의 장방형으로 된 방이 있었으며 넓이는 오장 가량 되었고 매우 어두웠다. 흑의인의 수중에는 비록 불이 들려져 있었지만 여전히 음산한 기분을 없앨 수가 없었다. 흑의인은 묘실 앞에 다가서자 즉시 큰 소리로 외쳤다. "양낭자! 맹주께서 오셨소." 순간. 어둠 속에서는 곧 나직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이때, 흑의인이 들고 있던 불이 꺼지고, "쏴-악!" 하는 소리와 함께 흑의인이 몰래 도망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제갈명은 화를 벌컥 내며 고함을 질렀다. "이놈! 어디로 도망을 치려 하느냐?" 그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흑의인을 향해 번개처럼 일 장을 쳐갔다. 순간, "윙!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묘 안이 진동하는 듯하더니 흑의인은 이미 종적도 없이 도망을 쳐버렸다. 이때, 양수분의 음성이 제갈명의 귓전을 스쳤다. "제맹주님! 빨리 저를 구해 주세요.- 제갈명이 이 소리를 듣고 즉시 묘실을 살펴보니 과연 묘실의 오른쪽 구석에 있는 하나의 기둥에 양수분이 묶여져 있었다. 제갈명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 달려갔다. "양낭자!" 양수분은 어둠 속에서 여전히 큰 소리로 외쳤다. "제오빠! 여기에 있어요." 양수분은 평상시에는 제갈명에게 맹주라고 불렀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두 사람만이 있었기 때문인지 대담하게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다. 제갈명은 그녀가 평상시에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는 그녀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녀에게 항상 어떤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제갈명이 양수분의 곁으로다가 서자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제오빠! 어서 좀 풀어 주세요."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둠 속에서 그녀의 팔목 근처를 매만졌다. 양수분은 제갈명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가벼운 탄식을 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오빠! 몹시 단단한 줄로 묶은 것 같아요." 제갈명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목을 더듬어 팔에 묶여 있는 줄을 끊었다. 양수분은 대답 대신 제갈명을 끌어 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아… , 제오빠? 제갈명은 가볍게 밀어 제치며 그녀의 가슴, 허리, 무릎, 발목 등에 있는 줄을 하나씩 끊었다. 양수분은 제갈명의 손길이 자기의 몸에 닿을 때마다 가벼운 신음을 했다. 제갈명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무서워하지 마시오. 내가 이렇게 옆에 있지 않소?" 이때 양수분은 제갈명을 더욱 팍 끌어 않으며 속삭였다. "저도 오빠가 꼭 구하러 오실 줄 알고 있었어요. 제오빠! 저의 마음 속에는 오직 오빠 밖에 없어요." 제갈명은 그녀의 뭉클한 젖가슴이 자기의 가슴을 억누르자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양낭자! 제발 이러지 말고 어서 나갑시다." 하지만 양수분은 더욱 요염한 자태로 제갈명을 유혹하며 귀에다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싫어요. 절대로 나가지 않겠어요. 어둠 속에서만이 오빠를 차지할 수 있지 않겠어요." 상대방이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제갈명은 양수분의 이같은 행동에 어리둥절하며 급히 말을 했다. "양낭자! 울지 마시오. 우리는 아직 함정에서 빠져 나가지를 못하지 않았소?" 이때 갑자기 일진의 기이한 향기가 스며 들었다. 양수분은 그의 말대로 울음을 뚝 그쳤다. 하지만 한 손으로는 여전히 제갈명의 목을 얼싸안고 또 한 손으로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제갈명이 향기를 맡았던 것은 바로 이 손수건에서 스며나온 것이었다. 양수분은 갑자기 웃으며 손수건을 제갈명의 코에 가져다 댔다. "호호호…… 오빠! 이 냄새 어떠세요?" 제갈명은 급히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양낭자! 제발 이러지 마시오. 부탁이오" 양수분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입을 열었다. "설…… 맹주부인에게 발각이 되면 어때요? 어차피 오빠는 저의 사람이 되었는데……." 아무리 마음이 강한 남자라도 할지라도 이같은 여자의 철저한 유혹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때, 제갈명은 마치 그녀의 사람이 되기라도 한 듯이 전신에 힘이 빠지며 땅에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사경이 지난 후 얼마 안 되어서 제갈명은 만면에 득이한 웃음을 띠고 낙양의 초부로 다시 돌아왔다. 또한 그의 뒤에는 양수분이 따르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후원으로 들어와 서재 입구에 도착했을 때야 초숭생을 만났다. 초숭생은 제갈명을 보자마자 왼쪽 귀를 만지작거리며 급히 입을 열었다. "맹주! 양낭자! 두 분께서는 빨리 돌아 오셨군요."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 턱을 만지작거렸다. "맹주께서 마침 잘 돌아오셨습니다. 곡, 소 두 호법께서는 이미 흑석도주를 마중하러 가셨습니다." 얘기를 주고받으며 제갈명은 벌써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방 안에 있던 주설란이 몸을 일으키며 반갑게 맞이했다. "매우 빨리 돌아오셨군요. 하지만 양낭자를 어떻게 그처럼 손쉽게 구출하셨어요?" 제갈명은 빙긋이 웃으며 옆에 있는 양수분을 주시했다. "그들은 원래 양낭자와 봉황검보를 교환하자고 했소. 하지만 나는 그들이 허술한 틈을 타서 일 격에 그 놈을 제압하고 양낭자가 있는 곳을 안내하라고 했다. 이렇게 되자 그놈들을 하는 수 없이 양낭자를 놓아 주었소. 하지만 나는 흑석도주가 오늘밤에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즉시 달려왔던 것이오." 주설란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수분의 곁으로 급히 다가가 손을 잡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 "동생, 몸에 별다른 부상은 입지 않았는가?" 양수분은 주설란을 주시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언니! 마의교의 사람들은 아주 나쁜 놈들이에요. 그놈들은 저를 납치한 다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경강이 급히 달려오더니 제갈명을 향해 포권을 했다. "맹주! 흑석도주께서 이미 도착하셨습니다." 제갈명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잘 알았소. 어서 나가 일을 서두르시오." 그리고는 다시 주설란과 양수분 두 사람을 향해 말을 계속했다. "우리도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나갑시다." 어느 사이에 사경도 반쯤 지났으며 대지는 여전히 적막할 뿐이었다. 낙양의 초부를 떠나 약 반 리쯤 떨어진 곳에는 하나의 넓은 길이 있었으며 양쪽에는 우람한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이때, 동백나무 사이를 뚫고 한 무리의 검은 말들이 나타났다. 이 한 무리의 말들은 모두 몽고산의 말들로써 하나의 잡털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마치 칠흑같이 새까맣다. 일행은 천천히 달리고 있었으며 모두 열세 필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말발굽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이 일행의 맨 앞에 달리고 있는 한 필의 말 위에는 머리에 금색아관을 쓴 흑포노인이 타고 있었다. 이 노인의 얼굴은 혈기가 왕성해 보였으며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과 짙은 눈썹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더욱 경악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가 몸에 걸치고 있는 흑포였다. 흑포는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고 정교한 무수한 보석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 흑포노인이 타고 있는 말의 곁에는 두 명의 황의동자가 좌우로 서서 천천히 따르고 있었다. 지금 금색의 아관을 쓰고 번쩍이는 흑포를 입은 채 일행의 맨 앞에 서서 가고 있는 사람은 강호상에서 아무도 만나보지 못했던 신비의 흑석도주였던 것이다. 또한 흑포노인의 뒤를 따르고 있는 열두 필의 말 위에는 흑석도주의 열두 명의 문하인이 타고 있었다. 이 행렬은 곡영자를 만나기 위해 낙양의 초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거대한 행렬이 사경이 지난 후 낙양성에 나타나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유령처럼 느끼게 한다. 이 행렬은 어느 사이에 동백나무 사잇길을 지나고 숲이 우거져 있는 길을 향해 들어서고 있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울 뿐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순간-. 숲 속에서 두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앞서 걷고 있는 흑석도주의 앞으로 느닷없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이때, 앞장을 서 가던 흑석도주가 멈추었으며 뒤에 따르고 있던 행렬도 일제히 멈추었다. 바로 이때, 숲 속에서 날아온 두 사람은 흑석도주의 앞으로 다가서며 포권을 했다. "무림맹의 좌호법 곡영자와 우호법 소불이가 도주의 이같은 왕림에 마중을 하러 왔소." 흑석도주 역시 말 위에 탄 채 급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마중?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저는 감히 감당을 못하겠소." 곡영자는 급히 손을 흔들며 뒤에 멈춰 서 있는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더니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도주께서는 엄연히 일파의 종사이신데 무엇 때문에 그처럼 겸손해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구려. 허허허……." 흑석도주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귀맹의 맹주께서는 사경이 되기 전에 용취로 가신 것 같던데 돌아오셨소?" 곡영자와 소불이는 이 말을 듣자 마음 속으로 섬칫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맹주께서 용취에 가신 일을 그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하지만 소불이는 겉으로는 웃으며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주께서는 과연 고인이오. 제맹주께서 용취에 가신 것까지 속일 수가 없으니……" 흑석도주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반문을 했다. "제맹주께서는 무림을 진동시킨 사람인데 그의 일거일동을 어찌 제가 모르겠소?" 소불이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며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초부 근처에는 반드시 흑석도주의 감시병이 매복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곡영자는 빙긋이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맹주께서 떠나실 때 이 늙은이와 소불이에게 먼저 도주를 접대하라고 했었소. 그렇기 때문에 도주께서 초부에 도착하는 즉시 제맹주께서도 돌아오셨을 것이오." 청죽사 흑석도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대답했다. "곡노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나는 비록 제맹주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오래 전부터 한 번은 뵙고 싶었소. 그래서 오늘 밤에 이렇게 일부러 방문하러 온 것이니 두 분 노형께 수고를 끼쳐야 하겠습니다." 곡영자와 소불이는 읍을 하더니 앞장 서서 인도했다. 그러자 흑석도주는 뒤따라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기세도 장엄한 낙양 초부는 이때 벌써 등불을 호화찬란하게 밝혔고 대문도 활짝 열어 젖히고 있었다. 그리고 문 앞의 계단 위에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시립해 있었다. 그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바로 무림맹주 제갈명이었고 그의 오른쪽에는 부인인 주설란이 기품있게 서 있었다. 주설란 다음에는 양수분과 초옥지, 그리고 그들 뒤에 영춘(迎春), 영풍(迎風) 영향(迎香), 영월(迎月)이라는 네 시녀가 마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듯 공손히 서 있었다. 또 제갈명의 왼쪽으로는 심자귀, 금화상, 정첩후, 초숭생, 두경강, 당승무 등이 서 있었다. 그리고 계단 좌우에는 이십여 명이나 되는 홍채문의 제자들이 갈라 서 있었다. 흑석도주 일행이 초부의 잔디밭 앞까지 오자 제갈명은 벌써 사람을 데리고 마중해 나왔다. 곡영자는 제갈명의 모습을 보자 즉시 입을 열었다. "도주, 폐방주께서 벌써 마중하러 나오셨습니다." 말하면서 소불이와 즉시 좌우로 갈라섰다. 흑석도주는 말에 급히 뛰어 내려 제갈명을 보자 자기가 상상한 것보다는 훨씬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경악과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이때, 제갈명은 벌써 가까이 다가와 포권의 예를 취했다. "도주를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흑석도주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제갈명의 말소리에 급히 예를 올리며 말했다. "이처럼 맹주의 마중을 받으니 저도 심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갈명은 활짝 웃으며 흑석도주의 팔을 잡아 끌었다. "도주께서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자, 우리 들어가서 차나 마시면서 얘기를 나눕시다." 이때 흑석도주의 뒤를 따르고 있던 일행도 벌써 말에서 내려와 일제히 제갈명을 향해 예를 올렸다. 제갈명은 흑석도주를 안내하여 초부 안의 대청으로 들어갔다. 곧 두 명의 청의시녀가 차를 날라오고 제갈명은 초부의 주인 초숭생에서부터 여러 사람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소개를 시켰다. 그리고 흑석도주는 주설란을 향해 예를 올리며 말했다. "부인, 제맹주를 도와 무림의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정말로 장한 일이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이때, 흑석도주의 날카롭고 예리한 눈이 다시 제갈명 부부를 스치고 지나가자 제갈명은 마음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제갈명의 눈은 높은 정기로 가득차 있고 매우 특출한 젊은 고수임에는 틀림 없으나 그의 부인인 주설란의 얼굴 피부는 다소 파리하고 일종의 표현할 수 없는 광채를 띠고 있었다. 그러니 주설란은 분명히 어떤 혈문내공(穴門內攻)을 연마한 것 같은데 어째서 제갈명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지 매우 의아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무엇이라고 지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제갈명이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고 물었다. "그런데 도주에서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흑석도주는 또 정신을 잃은 자기 자신을 책망하여 매우 어색해 하더니 여러 사람을 쓱 훑어보고 입을 열었다. "예, 형제는 한 가지의 일을 탐지하고자 중원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이어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 흑석도주의 사람들이 강호상에 나타나지 않는 사실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갈명이 여전히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귀하는 강호상에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강호상에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얼마 없지요." 흑석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엷게 웃었다. "그러나 폐도에서 독물을 키운다는 것은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흑석도주는 서서히 다시 입을 열었다. "폐도의 수십 년 간 키운 독물들을 자랑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지만 맹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천하 제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갈명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흑석도주는 갑자기 엷은 분노를 떠올리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제갈명은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급히 물었다. "아니 귀도에서 무슨 사고가 났습니까?" 흑석도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폐도에서 키운 독물들이 하룻밤 사이에 거의가 다 죽었소" 제갈명은 깜짝 놀라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도주께서는 독물에 대해 매우 정통한 분인데 어찌 하룻밤 사이에 다 죽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갑자기 흑석도주는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맹주께서는 이 몸을 매우 영험하게 보시는군요. 그러나 폐도의 독물은 정말 어이없게도 일거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소!" 제갈명이 급히 묻는다. "대체 누가 귀도의 독물을 독사시켰다는 말씀이십니까?" 흑석도주는 웃음을 거두더니 침중하게 내뱉았다. "제가 보기에는 바로 무명도의 짓 같습니다." 이때 곡영자는 소불이를 향해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지금 두 사람의 이런 행동은 즉시 흑석도주의 눈에 잡혔다. "곡노형, 혹시 어떤 단서라도 알아낸 것이 아닙니까?" 곡영자는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도주, 귀도의 독물들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죽지 않았습니까?" 흑석도주는 약간 놀라더니 즉시 대답했다. "예, 그렇소." 그러자 곡영자는 소불이를 향해 말했다. "소노형, 도주께 그것을 한 번 보여 드리시오."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품에서 하나의 분통을 꺼냈다. 흑석도주는 그것을 보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호법, 그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소불이는 가볍게 웃으며 분통을 흔들며, "도주께서도 한 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어떻게 시험을 합니까?" 그러자 곡영자가 말했다. "도주께서 갖고 계신 독물을 내보내시기만 하면 즉시 알 수 있습니다." 흑석도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말했다. "그렇다면 금천사 한 마리를 날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곡영자는 약간 망설였다. "하지만 금천사로 이 기독을 시험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런데 곡노형께서는 이 금천사로 어떻게 시험해 보시려는 것입니까?" 흑석도주가 자신있게 말하자 곡영자도 대답했다. "금천사를 공중에다 날리기만 하면 압니다." 흑석도주는 고개를 끄덕 였다. "잘 알겠습니다." 이때 소불이가 분통을 들어 올리며 크게 말했다. "자, 도주 잘 보십시오." 하며 분통을 누르자 칙! 하는 소리와 분통 속에서 어떤 안개 같은 가루가 금천사를 향해 살포되었다. 그러자 금천사는 마치 어떤 극성을 만난 것처럼 대뜸 죽어서 땅으로 떨어졌다. 흑석도주는 이것을 보자 즉시 안색이 변해 소리쳐 물었다. "대체 그 분통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그러나 소불이는 아무 대꾸도 없이 땅에 떨어진 금천사를 주워 흑석도주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도주, 귀도의 독물들이 죽은 현상도 이와 같은 상태였습니까?" 흑석도주는 금천사를 유심히 살피더니 매우 놀라운 듯 즉시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이었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은밀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틀림 없군요. 이 분통은 이름하여 멸독 분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분통의 출처는 바로 전날 무명도의 사람에게서 제가 훔쳐낸 것입니다." 흑석도주는 진상을 확실히 알자 갑자기 냉소를 치며 눈을 번득였다. "흥, 오냐, 과연 무명도의 짓이었구나." 소불이는 다시 설명을 보충시켰다. "또 들은 바에 의하며 무명도의 부총호법 관계자가 이 멸독 분통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명도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것을 한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흑석도주는 다시 분노를 터뜨리며 이를 갈았다. "이 무명도의 졸개들, 내 필연코 네놈들을 그냥 두지 않으리라!" 이때 제갈명이 두 사람 사이에서 끼어들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도주, 도주에서는 아직도 여기 오신 뜻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제갈명이 지금 무림맹주의 신분으로 흑석도주와 무명도를 상대하고자 한데 대해 얘기했으니 응당 진지하게 받아 들여야 할 텐데 화제가 딴 방향으로 흘러 몹시 불쾌했다. 흑석도주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되돌렸다. "오, 죄송합니다. 제맹주, 저는 그래서 사람을 파견하여 무명도의 소굴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동남 해안에서 한 달 간이나 수색을 벌였는데도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제갈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흑석도주의 사람들은 결국 찾을 수 없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흑석도주는 가볍게 냉소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흥, 그러나 저는 그들의 소굴이 아직도 동사도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제갈명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동사도에 두 번씩이나 가서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흑석도주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후후……제맹주께서는 육상의 영웅이기 때문에 해상의 사정은 잘 모르시겠지만 그러나 저는 섬에서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정도야 모르겠습니까?" 그러자 제갈명은 눈에 한광을 발하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도주께서는 어떤 단서라도 잡았다는. 흑석도주는 긍정적이라는 듯 싱긋 웃었다. "동사도의 사방 해저는 전부 암석으로 둘러쌓여 있는데 그러므로 그들이 만약 지하통로를 만들었다면 바다 속에 충분히 몸을 숨겨 남의 이목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동사도에다 전부 기초를 닦았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바다 속으로 숨는다는 말씀이오?" 흑석도주는 약간 알송달송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소. 그러나 제가 조사한 결과, 해저가 극히 의심스러웠소. 그래서 사마장홍을 찾아 동사도에 가서 조사해 보려던 것입니다." 이때 소불이가 능글맞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사마장홍은 바로 귀도에서 청해 가셨구려" 흑석도주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만약 폐도에서 청해 갔다면 제가 무엇 때문에 낙양에 오겠습니까?" 그러더니 초숭생을 향해 얼른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또한 저의 제자 정영과 소노반 사마장홍은 전부 예주방의 사람들이 청해 갔습니다." 이때, 심자귀가 급히 나서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도주, 그것은 오해입니다. 예주방은 우리들이 결정을 하기 전에 소노형께서 말씀하셔서 본맹과 함께 무명도를 상대하려고 무림맹에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외부에 대해서도 일체 어떤 말도 듣지 않았는데 어떻게 귀도의 제자와 사마장홍을 납치하겠습니까?" 그러자 제갈명도 옆에서 거들며 차근차근하게 말했다. "이분 사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마도 두 분께서는 무엇인가 잘못 판단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흑석도주는 자꾸 의미 모르게 웃으며 다시 초숭생의 안색을 살폈다. "지금 제맹주께서 하신 말씀을 의당히 믿어야 하지요. 그러나 형제 등이 조사해 본 결과 제자 정영과 사마장홍은 여전히 초부 안에 연금 당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갈명은 천만의 말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때 초숭생이 급히 나서며 당황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도주, 정말 그것은 오해입니다." 흑석도주는 갑자기 냉랭하게 냉소를 날랐다. "흥, 만약 저에게 사실을 밝힐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 어찌 제가 이런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초숭생은 안색이 변해 날카롭게 물었다. "그런데 도주께서 사실을 밝힐 만한 증거가 있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무엇입니까?" 흑석도주는 다시 냉랭하게 웃으며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흥, 저의 문하제자들은 공자 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아시다시피 독물을 지니고 있소. 그러니 귀부의 제자가 비록 연금을 당했다고는 하나 정영의 몸에 있는 독물은 벌써 그의 대사형에게 연락을 취하였을 것이 아니오?" 여기까지 얘기하고 그는 갑자기 누군가를 불렀다. "갈무구!" 바로 흑석도주 뒤에 시립해 있던 갈무구라는 사나이가 즉시 대답했다. "예, 도주님." 흑석도주는 마치 두고 보자는 눈빛으로 초숭생을 쏘아보며 갈무구에게 말했다. "너는 뱀을 보내 즉시 소사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도록 해라." 갈무구는 대답하자마자 한 마리 대나무 젓가락 같은 청죽사(淸竹蛇)를 땅에 내려 놓았다. 흑석도주는 제갈명을 향해 자신있게 말했다. "이 뱀이 바로 제자가 구해달라고 보낸 그 증거물입니다. 그래서 이 뱀은 정영이 연금된 곳을 꼭 알아낼 것이오. 그리고 제맹주께서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이 뱀을 따라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갈명은 웃으며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면 꼭 가야하고 말고요." 하고는 초숭생 등 사람에게 말했다. "초공자, 심형, 금형 모두 함께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일망타진 그러더니 제갈명은 앞장 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초숭생, 심자귀, 금화상 세 사람도 동시에 대답하며 뒤따라 갔다. 그러자 초옥지와 양수분 두 사람도 동시에 말하며 나섰다. "맹주님, 저도 가겠어요." 제갈명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제갈명은 대답을 끝낸 즉시 왼손을 쳐들었다. 그의 소맷 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터지는 동시에 그의 몸은 벌써 일 장 밖으로 날아갔다. 바로 이 순간, 심자귀, 초숭생, 초옥지, 금화상, 양수분 다섯 사람도 신속히 네 방향으로 날으면서 동시에 손을 쳐들었다. 이때 흑석도주는 그 모습들이 매우 이상스러워 크게 소리쳤다. "제맹주,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오?" 주설란 역시도 뜻밖인 듯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곡영자만은 태연히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도주, 별 일이 아니니 어서 자리에 앉으십시오." 이때 제갈명 등 여섯 사람은 일 장 밖으로 날아가고 나서 제갈명이 급히 품 속을 뒤지더니 즉시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소불이가 히죽 웃으며 소리쳤다. "히히히…… 맹주, 죄송하오. 물건들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말하면서 그는 품 속에서 하나하나 물건을 꺼내 모두 여섯 개의 원통을 꺼내 상 위에다 올려 놓았다. 제갈명은 싸늘하게 웃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흥, 오냐 네 놈이 훼방을 놓았구나!" 주설란은 도무지 영문을 몰라 하며 물었다. "소호법, 도대체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소불이는 여섯 개의 원통을 가리키며 물었다. "부인, 이 물건들을 모르시겠습니까?" 주설란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군요." 소불이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옛날 화기의 명가인 화신 나선의 청린전입니다. 듣자하니 이 청린전의 위력은 일 장 방원 안의 물건은 다 태워버려 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여섯 개의 청린전이 발사되었다고 하면 우린 한 사람도 살아날 생각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설란이 갑자기 안색을 변화시키며 제갈명을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면…… 저…… 저 분은…, "저 자는 맹주가 아닙니다." 주설란은 소스라치게 놀라 안색이 싹 변했다. "그렇다면 맹주께서는 적의 함정에 빠졌다는 말인가요?" 소불이는 여전히 웃으며 태연자약했다. "부인,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십시오. 아까 이 늙은이는 맹주에게 환혼단 한 알을 주었으니 제아무리 무서운 독약이건 마약이건 능력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맹주의 그 무공으로 적과 대항한다면 더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주설란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격동하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호법의 말씀이 맞군요." 바로 이 순간, 제갈명 등 여섯 사람은 문을 박차고 도망치려고 했다. 여섯 사람의 몸은 허공으로 막 떠오르자마자 즉시 외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심자귀만은 쓰러지지 않았다. 이때 흑석도주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될지 몰라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이오?" 소불이는 무겁게 안색을 굳히며 대꾸했다. "그들은 전부 마의교의 사람들입니다." 흑석도주는 긴급하게 놀라 물었다. "제맹주께서도 가짜란 말씀입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의교의 변장술은 매우 고명하지만 그러나 제맹주의 기도(氣度)만은 흉내낼 수가 없습니다." 주설란은 매우 경이로운 눈초리로 물었다. "그런데 소호법께서는 어떻게 알아내셨나요?" 소불이는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후후…… 아까 그가 들어오자마자 이 늙은이는 눈치를 채었습니다. 왜냐하면 제맹주의 기도는 정중하면서도 매력이 있는데 그놈은 그런 점이 없고 말도 함부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 늙은이는 수상하게 생각하고 그의 몸을 뒤진 결과 과연 이런 것이 나오더군요." 그러더니 심자귀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식은. 심형께써 알려 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유일하게 변장을 하지 않은 원래의 심자귀입니다." 이때 두경강과 당승무 두 사람이 돌아왔다. 소불이는 두 사람을 보자 급히 물었다. "두형, 수확은 어떻소이까?" 두경강은 즉시 포권의 예를 취하더니 큰 소리로 대꾸했다. "곡호법과 소호법, 두 분의 계획이 맞았습니다. 저와 당노제 두 사람이 조사해 본 결과 초복과 여덟 명의 영구차를 호송하던 장한들은 적시에 독의 발작에 쓰러지고 그 나머지는 전부 다 잡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후원을 수색할 때는 초낭자의 몇 명 시녀 때문에 청의 노부는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주설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상한 듯이 물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중독이 되었나요? 혹시 곡호법께서는 그들이 적이라는 것을 벌써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나요?" 곡영자는 소리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이가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어젯밤에 정노형을 습격한 놈들이 이 늙은이가 수작을 부린걸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이때 흑석도주는 매우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곡노형의 독을 사용하는 방법은 정말 신의 경지까지 이르렀군요." 곡영자는 다시 웃으며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도주께서는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한 집안 식구가 아닙니까?" 흑석도주가 입을 열어 무엇이라고 할 때 당승무가 홍채문의 무사들에게 가짜 제갈명 등을 끌어내라고 지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두경강이 주설란을 향해 포권을 하며 물었다. "부인, 이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작정입니까?" 그러자 주설란은 소불이와 곡영자를 향해 의견을 묻는 듯한 투로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내력을 잘 모르니 제생각으로는 초공자의 남매를 먼저 구해내고 결정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유라면 맹주께서는 아무래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그러니 저들을 먼저 연금한 다음에 맹주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면 어떨까요?"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저놈들은 전부 무명도의 패들 같군요." 흑석도주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소노형께서는 그들이 무명도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소불이는 엷게 웃으며 차근차근히 설명을 했다. "무명도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어째서 소노반을 납치하겠습니까?" 이것을 두고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격입니다. 그들은 소노반을 납치해 가고도 일부러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입니다." 흑석도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요." 이때 주설란이 매우 조급한 듯 재촉을 했다. "곡호법, 소호법, 우리는 어서 초공자 남매를 구하러 갑시다." 곡영자는 알았다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부인, 안심하십시오. 이 장원의 앞뒤, 전후 좌우는 이 늙은이가 벌써부터 손을 썼으니 적은 한 놈도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주설란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약간 초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소호법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이 장원 밑에는 지하통로가 있다고 하셨는데 바깥만 지키고 있으면 소용이 없을게 아니겠어요?" 이번에는 소불이가 나섰다. "그 점에 대해서도 안심하십시오. 이 늙은이와 곡노형 둘이 벌써 독을 뿌렸으니까요." 이때 곡영자는 흑석도주를 향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참, 이 늙은이의 수중에는 이독문(二毒間)의 역대 사조의 족보가 있는데 도주께서는 한 번 보십시오." 그리고는 당승무를 향해 지시했다. "노제, 초목경(草本經)을 꺼내라." 하고는 곡영자도 품 속에서 사충경(蛇蟲經)을 꺼내 상 위에 놓았다. 당승무도 품 속에서 초목경을 꺼내 상 위로 갖다 바쳤다. 흑석도주는 약간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곡노형, 이것은 귀문의 비밀인데 형. 제가 함부로 보아도 됩니까?" 곡영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주의 문하제자들이 초부 주위에다 독물을 뿌린 것을 보니 본문과 똑 같더군요. 그래서 이 늙은이가 비급을 제시하는 것이오." 하고 곡영자는 이미 떨어져 죽은 사충경을 뒤집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폐문에서 원래 그 독은 이두문이라고 합니다. 즉 또한 그 독은 사충과 초목을 두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하나의 제자밖에 거두지 못하는 규칙 때문에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지요. 그리고 이 늙은이가 배운 것은 사충문이며 당승무는 바로 이 늙은이의 사질이나 초목문의 사람이요." 하고는 손가락으로 쭈욱 족보의 이름들을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사충문의 역대 사조 이름들입니다. 도주께서는 혹시 귀도의 조사(祖師) 이름이 없는지 한 번 찾아 런십시오." 흑석도주는 이때 마음 속으로 매우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책을 받아 몇 장을 넘겼다. 바로 여섯 번째 장을 뒤집었을 때 기억에 새로운 이름이 있었다. '제 십이 대 사조 휘세영(暉世英) 강서 요주인.' 이라고 써 있는 그 이름 아래는 한 붉은 줄이 내려 처져 있고 두 사람의 이름이 또 적혀 있었다. 은장영(殷長榮)이라고 쓰여 있는 이름과 은장영의 아래에는 삼 년이 못가 떠나간다고 씌여 있었고 또 한 이름 원수우(袁守愚)의 아래에 뒤를 이음이라고 씌여 있었다. 흑석도주는 이 은장영이라는 세 글자를 보자 갑자기 어떤 벅찬 감격에 젖은 듯 잠시 동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유는 바로 은장영이 그의 고조부로서 흑석도를 창립한 시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조께서는 무예를 배운지 삼 년이 못되어 사문을 떠났으니 나의 실력이 곡영자보다 못할 수밖에 없구나.' 그러나 겉으로는 매우 정색을 하며 말했다. "과연 곡노형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이 뒤에 기재되어 있는 은장영이 바로 저의 선 고조부입니다." 곡영자는 순간,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며 매우 반가운 듯 말했다. "그렇다면 도주께서는 과연 본문과 관계가 있군요." 흑석도주는 약간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선 고조께서는 삼 년이 채 못되어 떠났으니 귀문의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지요." 그러자 곡영자는 정색을 하며 따지듯 말했다. "아니, 하루의 사부는 사부가 아닙니까? 영 고조께서는 본문 십이 대 아래에 입문하셨으니 본문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자 흑석도주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곡영자를 향해 공손히 읍을 했다. "그렇다면 소제 은천행(段天行) 사형께 인사 올립니다." 곡영자도 같이 예를 올렸다. "감사하오." 하고는 당승무를 향해 소리쳤다. "승무, 사숙께 인사를 올려라." 당승무는 즉시 대답을 하고 흑석도주에게 절을 했다. "제자 당승무 사숙께 인사 드리옵니다." 흑석도주는 감개가 무량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당승무의 손을 잡았다. "노제는 초목문의 유일한 전인이니 빨리 일어나게." 당승무가 일어나자 흑석도주는 열두 명의 문인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빨리 대사백께 인사를 올려라." 그러자 열두 명의 문인들은 동시에 곡영자를 향해 절을 올렸다. 주설란과 소불이, 두경강, 심자귀, 정첩후 등의 사람도 서로 입을 모아 축하를 했다. 곡영자는 매우 기쁜 듯 만면에 미소를 잃지 않고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우리 지금부터 사람을 구하러 갑시다." 흑석도주도 따라 일어서며 간청했다. "저도 사형을 따라 가겠습니다." 이때 소불이가 웃으며 그의 앞을 막았다. "두 분께서는 전부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도주의 문하와 초공자, 소노반 등의 사람들은 전부 다 지하실에 연금당해 있는 듯하니 몇사람을 보내 그냥 나오라고 하기만 하면 됩니다." 곡영자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소불이의 뜻으로는 어떤 사람을 보냈으면 합니까?" 소불이는 사람을 지적하기 전에 후선 자기가 생각한 바를 털어 놓았다. "첫째, 가는 사람은 반드시 매복 기관에 능통해야 합니다." "오, 그렇군요." 그러자 소불이는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그런데 이 늙은이도 기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오." 곡영자는 선뜻 승락을 했다. "좋소. 그렇다면 소노형도 함께 가십시오. 그리고 마의교의 사람들은 일부러 억제하고 있을지 모르니 심노형도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교묘히 속일 수가 있을 테니 말이오." 심자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자청했다. "좋소. 저도 가보겠소." 소불이는 히죽 웃고 나더니 다시 말했다. "그런데 도주의 문하제자들은 우골들을 잘 모르니 도주께서는 또 한 명을 보내셔야겠습니다." 흑석도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옆에 서 있는 갈무구에게 지시했다. "소노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갈무구, 너도 즉시 소노선배님을 따라가거라." 갈무구는 즉시 대답했다. "예, 알았습니다." 소불이는 다시 당승무를 가리키며, "그리고 노제, 자네도 함께 가야겠다." 여태껏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주설란이 약간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소호법, 네 사람으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소불이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모자라지 않습니다. 우리 네사람 중에는 독을 잘 쓰는 능수가 있는가 하면 또한 독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고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지하실이 용담호혈이라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소불이의 말이 끝나자 심자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길을 안내하고 가겠소." 즉시 네 사람은 주설란, 흑석도주 등을 향해 읍을 한 후 떠나갔다. 헛걸음 걸어가는 도중 소불이는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신중하게 물었다. "심노대, 이 늙은이가 보기에는 초낭자의 유모가 바로 적의 막후인물 변노(便老)같은데?" 심자귀 역시 생각해 온 의문이었다는 듯 수궁을 했다.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할망구는 늙은 여우처럼 매우 교활하여 우리는 절대 그를 얕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갈무구가 나섰다. "하지만 가사께서 이미 초부의 사방에다 독물을 뿌렸으니 그녀는 아마 도망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소불이가 가볍게 웃으며 부인한다. "노제, 그것은 이 낙양 초부를 너무나 얕보고 한 소리요. 이 초부의 마대에는 한 지하통로가 있는데 이 통로는 이 리(二로) 밖의 한 저택과 통하고 있소. 그러니 초부의 사방에다 독만 뿌려 가지고는 소용이 없네." 갈무구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금세 표정이 어두워졌다. "음, 그랬었군요." 네 사람은 서로 얘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 틈에 서재에 당도하였다. 심자귀가 진열장의 뒤로 걸어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만지작거리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책장이 갑자기 움직이며 단번에 한 통로가 나타났다. 그리고 문에는 녹색의 휘장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심자귀가 그 휘장을 손으로 젖히려고 하자 소불이가 즉시 두 눈을 부릅떴다. 심자귀는 그런 소불이의 암시를 즉각 알아차리고 휘장을 향해 갑자기 일 장을 후려쳤다. 그러자-. 휘장이 즉시 장풍을 타고 말려 올라가고 그 밑으로 한 쌍의 발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자 심자귀는 냉소를 날리며 소리쳤다. "귀하는 이미 꼬리를 드러냈으니 어서 정체를 나타내시지? 그러나 휘장 뒤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아무런 동정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이때 당승무가 대뜸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가서 잡아오겠습니다!" 하고 말과 동시에 달려나가 즉시 휘장을 잡아 찢어버렸다. 그러자, 한 칸의 아주 작은 방이 나타나며 한 명의 흑의인이 두 손으로 벽을 집은 채 등을 돌리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당승무는 약이 올라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놈!" 하고는 다시 그 흑의인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는 찰나, 소불이가 급히 제지를 한다. "노제, 건드리지 말게." 소불이는 크게 소리친 후 즉시 그 이유를 알려 주려는 듯 그 사람의 등을 가리켰다. "이 사람은 남의 암산을 당해 벌써 죽었네." 세 사람이 그의 말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그 사람의 등 뒤에는 몇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심자귀가 감탄인지 경악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노형의 눈치는 정말 빠르구려." 소불이는 그 말을 듣자 기분이 좋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후후…… 도둑놈이 되려면 응당 눈치는 빨라야지." 이때 시체를 자세히 관찰하던 당승무가 갑자기 놀라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 사람이 죽으면서까지 열 손가락을 벽 속에 찌른 것을 보니 무공이 대단하군요." 소불이는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는 무엇 때문에 죽으면서까지 쓰러지지 않으려고 벽에다 열 손가락을 꽂았을까…… 아, 노제 그의 시체를 눕혀 가슴팎에 무엇이 있나를 한 번 살펴 보게." 당승무는 소불이의 지시대로 시체를 벽에서 뗀 후 땅에 눕혔다. 그러자 심자귀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니, 이 사람은 바로 부총관 초녹(初祿)이 아닌가?" 소불이도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물었다. "이 자가 지하석실의 책임자요?" 심자귀는 얼굴에 신중한 빛을 띠더니 길게 탄식을 했다. "그렇습니다." 소불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벽을 보았다. 벽에는 과연 어떤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마의교와 망산괴수는 손을 잡고 아가씨를 벌써 이 글씨는 손톱으로 판 것으로 글귀를 채 맺지 못한 것이었다. 소불이는 이 글을 보자 치를 떨며 두 눈을 부릅떴다. "과연 무명도의 짓이었구나!" 심자귀가 물었다. '어떻게 해서 아십니까?" "망산괴수 주우춘은 벌써부터 무명도에 투입하였소. 그래서 초녹은 그 사실을 알고 마의교와 주우춘이 손을 잡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얘기한 소불이는 갑자기 안색이 침중해지더니 신음 소리를 냈다. "음, 그렇다면 제맹주도 아마 망산으로 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우춘 그놈은 매우 교활한 늙은 여우라 그의 소굴 또한 별 희안한 장치가 다 되어 있을 것이다. 제맹주는 아직 나이도 많지 않고 강호의 경험도 부족하니 혼자 달려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일 텐데……" 그러더니 그는 급히 당승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노제, 더 이상 내려갈 필요 없이 급히 총 순찰에게 알리게. 제맹주가 지금 망산괴수의 소굴에 있을지도 모르니 즉시 사람을 파견해 지원을 하라고." 당승무는 즉시 번개처럼 달려갔다. 소불이는 당승무가 사라지자 심자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심노대, 그럼 우리도 가 봅시다." 심자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벽을 몇 번 두들기니 즉시 음침한 소리와 함께 한 어두컴컴한 동굴이 눈 앞에 전개되었다. 심자귀는 허리에서 옥적을 뽑더니 한 손으로 화습자를 끼고는 앞장서 걸었다. 그러자 소불이와 갈무구도 그의 뒤를 따라 꾸불꾸불한 지하통로를 따라 걸었다. 이들이 더듬거리며 약간을 들어가니 즉시 하나의 넓은 통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 통로의 양쪽에는 몇 개의 갈림길이 제각기 출입구를 가지고 뻗어 있었다. 그리고 갈림길마다 전부 여덟 내지 아홉 칸의 석실이 잇달아 연결되어 있었다. 일행은 심자귀가 앞장을 서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두 개의 갈림길을 무사히 지나자 매우 이상하게 느꼈다. 이들은 오는 도중에 습격은 물론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첫째와 둘째, 갈림길의 석실은 전부 다 열어 보았건만 여전히 사람은 만나볼 수가 없었다. 이때 심자귀는 마음 속으로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 지하석실은 비록 크지 않아도 전부 다 부총관이 책임지고 있으며 또한 갈림길마다 이삼 명의 간수들이 있는데 어째서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러나 소불이의 생각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소불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지하석실은 벌써 남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납치해 온 소노반과 흑석도의 문인을 연금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에게 있었다. 이상하게도 죽은 사람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다시 두 번째의 갈림길에서 벗어나 세 번째의 갈림길로 접어들었다. 이때 갈무구는 갑자기 소사제가 파견한 청죽사가 소맷자락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거의 다 왔다는 것을 직감하며 문을 열었다. "소대협, 심대협, 폐사제는 아마 이 근처에 연금당한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그에게 눈짓을 던지며 슬쩍 웃었다. "그렇다면 길노제는 먼저 그를 구해내시오. 우리 계속 수색을 벌일테니." 갈무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돌아섰다. "알겠습니다." 하며 그는 소맷자락에서 청죽사를 꺼냈다. 청죽사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즉시 왼쪽의 세 번째 방울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갈무구도 즉시 뒤따라가 일 장으로 그 문을 후려 쳤다. 그러자 문은 즉시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원래 이 문은 잠그지 않고 그냥 닫아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갈무구는 한 손으로 천리화통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사제, 내가 왔다!" 하고 급히 안으로 들어가니 하나의 철장만 있을 뿐 사제라고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 눈에 이 철장 속에 소사제가 감금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유라면 소사제인 정형은 난장이였기 때문이었다. 청죽사는 철장 속까지 기어가서 주인이 없음을 보자 철장 안에서 그냥 사방으로 기어다니기만 했다. 갈무구는 즉시 휘파람 소리를 내어 청죽사를 다시 자기의 소맷자락 안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소불이와 심자귀도 몇 칸의 석실을 뒤져 보았지만 다만 초부의 시체 세 구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소불이는 갈무구가 힘없이 걸어나오는 것을 보자 급히 물었다. "영사제는 찾지 못했소?" 갈무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석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소불이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음, 그렇다면 모두들 망산으로 잡혀간 것이로군." 심자귀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있는 모든 석실을 전부 다 찾아야 합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이제 한 곳 밖에 남지 않았으니 남은 한 곳에서 무엇인가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 사람이 서로 갈라서 수색을 하고 만약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휘파람으로 신호를 합시다." 심자귀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고는 즉시 세 사람이 각기 갈라져 수색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이 곳에 있는 석실은 전부 다 수색을 마쳤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소노반 등의 사람들은 찾지 못했다. 심자귀가 얼굴에 수심의 빛을 띄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노형, 초녹이 벽에다 새겨놓은 글이 맞았습니다. 그들은 필경 소노반 등의 사람들을 데리고 망산으로 갔을 것입니다." 갈무구가 이상한 듯 물었다. "곡사백께서 아까 양쪽 사방을 독물로 봉쇄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저었다. "곡노형께서는 비록 독의 전문가이지만 그러나 무명도에도 독을 쓰는 능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예를 든다면 망산 주우천도 강호상에서 독약 암기로써 이름을 날리는 자요" 심자귀는 더 이상 논할 시간이 없다는 듯 화제를 바꾸었다. "자, 이제 더 이상 따져볼 필요도 없으니 빨리 갑시다!" 하고는 앞장 서서 통로를 걸어나갔다. 통로의 길이는 과연 이 리 가량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이 걸음을 빨리하니 순식간에 끝에 도착했다. 심자귀가 다시 벽 사이에 있는 문을 열고 나서자 두 사람도 곧 뒤따라 갔다. 그러자 어느새 그들은 아담하게 꾸민 어떤 객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심자귀는 사방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우리 이 방 안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를 먼저 수색해 봅시다!" 곧 세 사람은 이 거대한 저택을 이잡듯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결과는 과연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소불이는 예상한 대로라는 듯 쥐눈을 희번득거렸다. "음, 적이 벌써 원병을 청했군." 심자귀가 물었다. "아니, 어떻게 원병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소불이는 이 판국에도 가벼운 웃음까지 곁들이며 여유를 보인다. "제맹주와 초공자 등의 사람들로 변장한 적들은 곡노형의 독 때문에 쓰러졌고 또한 초복과 여덟 명의 장한들도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쓰러진 것이 아니오? 그런데 지금 그 변노라는 할망구는 곡노형이 뿌린 독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소노반 등의 사람들을 데려갔는데 만약 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그들을 데리고 빠져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이윽고 심자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우린 되돌아가 다시 작전을 결정합시다." 그들은 다시 통로로 내려와 초부로 되돌아 왔다. 화청에는 주설란, 흑석도주, 정첩후 세 사람만이 앉아 있었고 곡영자와 당승무는 망산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설란은 소불이를 보자 즉시 입을 열었다. "소호법, 아무 것도 찾지 못했지요?" 소불이는 놀라며 급히 되물었다. "부인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주설란은 상 위에서 종이를 집어서 건네주었다. "소호법, 그들이 보내온 서신을 한 번 보세요." 소불이가 종이를 받아 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제부인! 우리 쪽의 많은 사람이 귀속하들에게 잡혔지만 제맹주와 양수분, 초숭생 남매, 흑석도의 문하 정영, 소노반은 모두 본교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특별히 부인께 통지를 보내니 내일 오전에 흥릉다원(與隆茶園) 에서 인질을 교환하기로 하는 협상을 합시다." 소불이는 서신을 다 보고 나자 웃으며 물었다. "부인, 이 서신을 믿습니까?" 주설란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물론 믿을 수 없어요. 그래서 소호법께서 돌아오실 때를 기다려 제가 여쭈어 보려고 한 것이에요." 소불이는 싱긋이 웃으며 물었다. "부인은 별 과분한 말씀을…… 참, 그런데 곡노형과 당노제는 서신을 가져온 사람을 미행하러 갔습니까?" 주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곡영자가 걸어 들어왔다. 소불이는 그가 터벅터벅 신발을 끌 듯 들어오자 이상하게 생각하여 즉시 물었다. "곡노형, 미행하는 자를 놓쳤습니까?" 그러자 곡영자는 대뜸 화를 버럭 내었다. "아니, 누가 그래? 이 늙은이는 망산에 있는 그들 소굴까지 쫓아갔다가 달려갔소." "그런데 당노제는?" 곡영자는 객청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당노제는 거기서 감시를 하라고 했소!" 그러자 소불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낭패한 듯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잘못 되었는데……?" 곡영자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잔뜩 검미를 찌푸렸다. "어째서 잘못 되었다는 말이오?" 소불이는 점차로 더욱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은 곡노형의 미행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낙양을 한 바퀴 헤맨 후 망산으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직접 망산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곡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실소를 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일부러 이 늙은이를 유인해 갔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이번에는 주설란이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그런데 그게 어째서 잘못되었다는 말씀인가?" 소불이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물론 잘못 되었습니다. 그들이 부인에게 보내온 서신에는 단지 내일 흥릉원에서 만나 인질을 교환하자고만 했지 그들은 어디에다 감금시켰다는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무엇 때문에 망산까지 곡노형을 유인했겠습니까?" 주설란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과연 그렇군요……." 심자귀가 나서며 입을 떼었다. "그렇지만 아까 초녹이 벽에다 망산의 얘기를 쓰지 않았습니까?" 소불이는 심자귀의 말을 듣자 약간 생각하더니 갑자기 손바닥을 쳤다. "알았다. 그들은 내일 사람을 교환하자고 해놓고도 곡노형을 망산까지 유인한 이유는 바로 우리 전부가 망산으로 달려가기를 바라고 했었던 일이었다!" 심자귀는 소불이의 말뜻을 알아차린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리고 나서 그들은 망산에다 함정을 설치해 우리를 그들의 함정에 빠지면 초부로 달려와 자기네 패들의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는 속셈이 되는군요. 하지만 초녹이 남긴 글은……?" 소불이는 얼핏 그에게 시선을 던지며 대꾸했다. "그것은 아마 그들이 일부러 한 짓일 거요." 심자귀는 어떻게 할 줄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매우 초조한 듯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람들을 구출해 내야 되지 않습니까?" 속이고 속는 자 그러나 뜻밖에도 소불이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건 안 돼요. 내가 한 얘기는 그런 뜻이 아니오" 소불이가 다시 이렇게 말하자 곡영자는 답답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대뜸 물었다. "하지만 조금 전 소노형은 그들이 함정을 설치하고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들이 함정을 설치해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 그러나 그들 자신도 함정으로 우리를 감금시킬 수 없다 는 사실을 더욱 잘 알고 있을 기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또 다른 속임수를 쓰려고 하는 것이오." 심자귀가 물었다. "무엇입니까?" 하지만 소불이는 그의 물음에는 대꾸도 없이 주설란의 귀에다 무엇인가 몇 마디 했다. 그러자 주설란은 매우 기뻐했다. "소호법님의 말씀이 맞아요. 그러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죠?" 소불이는 히죽대며 어깨를 들석였다. "그거야 간단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들의 속임수에 빠진 척만 하면 됩니다." 맡을 끝내고는 다시 몇 사람에. 게 무엇인가 얘기를 했다. 심자귀는 금색 안색이 밝아지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 방법이야말로 정말 고명합니다." 곡영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런 계교는 소노형 한 사람만이 생각해낼 수 있을 겁니다." 흑석도주는 질 세라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거들었다. "소호법은 정말 강호의 기인이시구려." 이때 주설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서둘렀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우리는 빨리 가야 합니다." 하고는 뒤에 있는 시녀에게 즉시 명령을 내렸다. "영춘, 너는 가서 빨리 두형더러 나오라고 해라." 영춘이 대답을 하고 물러간지 얼마 되지 않아 두경강이 들어오며 물었다. "부인, 무슨 분부이신지요?" 주설란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적장들은 이미 초공자 남매와 소노반 등의 사람들을 납치해 망산으로 갔소. 우린 지금 즉시 망산으로 가야하니 두총관은 잡혀 있는 잔당들을 심대협과 정대협께 맡기고 함께 가야겠습니다." 두경강은 즉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부인." 그리고는 정첩후를 향해 말했다. "정노형, 열네 명의 적들은 전부 앞 방에 있으니 형제를 따라 오십시오." "알겠소." 두 사람은 총총히 밖으로 나갔다. 다시 얼마 되지 않아 두경강이 돌아오며 보고를 올린다. "적당들은 벌써 정노형께 넘겼습니다." 주설란은 즉시 객청 밖으로 나섰다. "알았소, 그럼 우리는 이제 갑시다." 이어 곡영자와 소불이도 따라 일어났다. 흑석도주도 동시에 일어나며 열두 명의 제자에게 매우 격분한 어조로 일렀다. "자, 우리도 함께 망산으로 가서 망산문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자!" 그러자 열두 명의 문인들은 동시에 힘차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흑석도주는 다시 주설란의 옆으로 비켜서며 약간 허리를 굽혔다. "부인, 먼저 가십시오." 주설란은 가볍게 웃으며 사양했다. "아닙니다. 도주님께서는 멀리서 오신 손님이니 먼저 앞장을 서셔야 하지요." 그러자 흑석도주는 더 이상 예를 차리지 않고 열두 명의 문인을 데리고 앞장 서서 밖으로 나갔다. 주설란과 곡영자, 소불이 두경강도 뒤따라 나왔고 그들 뒤에 있던 네 명의 시녀들도 즉시 줄을 지어 초부 밖으로 나왔다. 이들은 초부를 나서자 즉시 두 패로 갈라져 경공을 시전해 번개처럼 망산을 향해 달렸다. 한편, 옥적랑군 심자귀는 주설란과 흑석도주 등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시녀를 시켜 초부에 있는 모든 장한들은 전부 대청 앞으로 집합하라고 일렀다. "당신네들은 전부 이 초부 안의 사람들입니까?" 그러자 장한들은 즉시 일제히 소리쳐 "예, 그렇습니다." 심자귀는 이들이 모두 거침없이 대답하자 뒷짐을 지더니 다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좋소. 여러분이 모두 이 초부 안의 사람이라니 나는 믿고 여러분에게 한 가지의 사실을 알려 주겠소. 그것은 바로 놀랍게도 이 초부의 총관인 초복이 가증스럽게도 마의교와 손을 잡고 초공자와 낭자를 납치해 갔다는 말이오" 심자귀의 말이 끝나자 장한들 사이에는 즉시 동요가 일었다. 심자귀는 그들의 동요를 가라앉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당황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맹주 부인께서 사람들을 구하려 망산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 초부에는 나와 정노형이 남아 있으니 여러분께서는 평상시대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망을 보시기만 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적을 발견하면 신호를 보내십시오." 웅성거리던 장한들은 다시 힘있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심자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가리켰다. "좋소, 그럼 여러분께서는 돌아가 각자 자기의 자리를 지켜 주십시오!" 장한들은 즉시 일제히 대답을 한 후 각자의 초소로 돌아갔다. 심자귀는 그들이 재빨리 움직이자 극히 만족하게 웃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는 옥적을 만지며 앞으로 걸어갔다. 심자귀는 왼쪽 마당으로 가서 두경강의 밑에 있는 홍채문의 군사들을 보자 마음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구나. 어쩐지 홍채문이 강호상에서 이십여 년 간이나 명성을 날리는가 했더니 과연 이 무사들만 보더라도 잘 알겠구나. 참으로 훌륭한 수하들이다…….' 홍채문의 무사들은 심자귀가 오는 것을 보자 일제히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심자귀도 웃으며 그들에게 답례를 했다. 심자귀가 마음이 매우 흔쾌한 것을 느끼며 대청으로 들어가니 정첩후가 쌍주를 든 채 앉아 있었다. 정첩후는 심자귀가 들어오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심노대, 다 배치를 시켰습니까?" 심자귀는 약간의 흥분을 아직 누르지 못해 홍조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 배치를 시켰소. 그런데 지금 나는 평소부터 초부의 장한들을 보고 훌륭하다고 느껴왔지만 오늘 두노형이 통솔하는 홍채문의 무사들을 보고 과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과연 강호상에서 홍채문파가 이십여 년 간이나 이름을 날릴 만하더군요." 정첩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심형의 말씀이 맞소. 나도 벌써부터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정첩후는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날은 벌써 밝아오려고 하는데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아마 소노형의 추측이 틀린 것 같소." 심자귀가 무엇이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일진의 야릇한 향기가 풍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바로 앞의 턱에 걸려 있는 한 폭의 그림에서 흰색의 연기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심자귀는 이 광경을 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냉소를 치며 전음입밀로 즉시 정첩후에게 말했다. "정형, 때는 왔소. 빨리 쓰러지는 척하시오." 하고는 하품을 길게 하더니 서서히 땅으로 쓰러졌다. 정첩후 역시 그의 말을 듣고 하품을 하며 땅에 쓰러졌다. 지금 두 사람은 입에 전부 다 소불이가 준 환혼단을 물고 있기 때문에 미혼향 따위는 두려워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또한 고수답게 쓰러질 때도 즉시 일어날 수 있는 자세를 취하며 쓰러진 것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자 벽화가 움직이고 곧 하나의 구멍이 나타났다. 그러자 그 구멍에서 오십 세 가량의 얼굴이 네모지고 눈썹이 짙은 대한이 기어 나왔다. 이 사람은 꽃무늬가 수놓인 장포를 입고 허리에는 또한 띠를 매고 있으며 바로 정주쌍협의 정첩후와 똑같았다. 정첩후는 가만히 실눈을 뜨고 이 사람을 쳐다보다가 마음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나와 똑같이 변장을 했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여전히 실눈을 은 채 가짜 정첩후의 거동을 세밀히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때 가짜 정첩후는 땅에 쓰러져 있는 정첩후를 보더니 싸늘한 미소만 홀린 뿐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냥 밖으로 걸어나갔다. 정첩후는 이 광경을 보자 어리둥절하여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열두 명의 잔당들은 전부 상방 속에 있는데 구하려 가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가짜 정첩후는 밖으로 나가더니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자, 여러 형제들은 잘 들으시오. 지금이 사경이니 앞으로 일경만 지나면 곧 낙이 밝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때가 제일 적막한 때니 분명 마의교의 사람들이 아마 우리에게 잡혀온 자기 속하들을 구해 내려고 할 것이오. 더구나 아까 맹주 부인 등의 사람들이 앙산으로 갔으니 우리의 초부는 텅빈 것과 다를 바 없소. 그러니 여러분께 는 특별히 매우 신중을 기해 조심을 해 주길 바라며 또한 각자의 위치를 잘 지켜 함부로 떠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적이 나타나면 나와 심노대 둘이서 상대하겠으니 걱정을 마시오." 이때, 땅에 쓰러져 있는 정첩후는 이 소리를 듣자 마음 속으로 감탄을 했다. '다니 이놈 보게. 용모와 행동이 나와 똑같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똑같지 않은가?' 마당에 시립해 있던 홍채문의 문하인들은 정말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고 일제히 대답했다. 가짜 정첩후는 일장 연설을 마치자 즉시 대청 안으로 되돌아 오더니 구멍이 있는 곳을 향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자, 금모모(金母毛)리 나오시오." 그러자 구멍 속에서 초옥지를 위해 머리를 빗겨주던 청의노부가 나타났다. "신영주의 계책이 확실히 대담합니다. 그럼 우리는 시간이 없으니 빨리 사람들을 구하러 갑시다." 하고 두 사람은 즉시 오른쪽의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가짜 정첩후가 생각난 듯 묻는다. "변노도 그들에게 잡혀 갔습니까?" 금모모가 걸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고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변노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가짜 정첩후는 멋적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속하는 잘 모르겠습니다." 금모모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딱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묻지 마시오." 가짜 정첩후는 고개를 숙이며 즉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금모모는 심자귀의 옆에 오자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분한 듯 격한 어조로 소리쳤다. "우리는 이놈이 백소규인 줄 알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우리를 속이고 비밀을 누설시켰으니 내 이놈을 그냥……." 하더니 말도 채 맺지 않고 심자귀에게 즉시 발길질을 가했다. 심자귀는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반항도 못하고 발길 세차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금모모는 짧은 시간에 사람들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다행히도 심자귀에게 더 이상 발길질을 하지 않고 상방쪽을 향해 걸어갔다. 상방은 원래 잠그지 않았기 때문에 금모모는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방문을 열고 화습자를 켰다. "왕사주(王四柱) 빨리 따라 오시오." 그러자 가짜 정첩후는 즉시 뒤따라 갔다. 정첩후는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보자 즉시 전음입밀로 중얼거렸다. "심노대,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심자귀 역시 전음입밀로 말을 받았다. " 이 일은 과연 소노형의 뜻대로 되었으니 우리는 원래의 계획대로 실천합시다." 이때 상방으로 들어간 금모모는 즉시 가짜 초옥지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몸에 걸린 혈도를 풀어주었다. 가짜 초옥지는 눈을 뜨자마자 반가운 듯 즉시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들어왔어요?" 금모모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칠낭자, 신영주께서는 벌써 오셔서 지금 망산에 계십니다. 신염주께서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망산으로 유인한 다음에 그들이 떠나는 즉시 사람들을 구하라고 했지요." 가짜 초옥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정첩후를 주시했다. 그러자 금모모는 얼른 정색을 하며 꾸짖듯 가짜 정첩후에게 말했다. "왕사주, 어찌 향주를 보내고 인사를 않는 거요?" 그러자 가짜 정첩후는 멍청해지다가 다시 눈을 황소 눈알만하게 뜨고는 떠듬대며 물었다. "이…… 이 분이 바로 변노입니까?" 하고는 즉시 허리를 굽히며 다시 떠듬거렸다. "소…… 소인…… 왕사주, 향주께 인사드리옵니다……." 원래 이들이 말하는 변노는 젊은 낭자였다. 그녀의 진짜 신분은 바로 향주였던 것이다. "자,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이들의 혈도를 풀어 주시오." 그러자 금모모는 머리를 긁적이며 잊어 버렸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참, 얘기에 정신을 팔려 잊을 뻔했군요." 그러더니 가짜 정첩후를 향해 지시를 했다. "자 빨리 가서 저 사람들의 혈도를 풀어 주시오." 하면서 금모모는 가짜 양수분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생포 가짜 정첩후는 즉시 대답을 하고는 가짜 제갈맹, 초숭생, 금화상 등 여러 사람의 혈도를 일제히 풀어 주었다. 그러자 가짜 초옥지가 여러 사람을 향해 손짓을 했다. "더이상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갑시다." 옆에 있던 금모모가 급히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칠낭자, 잠깐만! 이 늙은이가 길을 인도하겠습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화습자를 높이 치켜 들고 앞장을 섰다. 금모모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가짜 초옥지가 심자귀와 정첩후 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말을 저었다. "이들 두 사람은 죽어 있는 것이오? 아니면 살아 있나요?" 금모모는 급히 몸을 돌리며 공손히 대답을 했다. "아마 미향을 맡은 것 같습니다." 하고는 동시에 가짜 초복을 주시하더니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손짓을 했다. "한대규! 자네가 가서 저들을 없애 버리게!" 가짜 초복이 대답을 하고 급히 달려가려고 할 때 가짜 초옥지가 나서며 손을 흔들었다 "잠깐, 말을 들어보시오." 금모모가 어리둥절하는 표정을 지으며 급히 물었다. "칠낭자, 이 두 사람은……" 가짜 초옥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을 가로챘다. "없애 버리기 전에 데리고 가서 얘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말한 그녀는 가짜 초복을 향해 분부를 하고 즉시 객청 밖을 향해 나갔다. 이때, 금모모가 초옥지의 뒤를 급히 따라가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칠낭자! 우리 지하통로로 해서 나가는 것이 어떻겠소?" 가짜 초옥지는 주위를 한 번 휘둘러 보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밖에 누가 오기라도 했단 말이오?" 금모모는 정색을 하며 나직하게 대답을 했다. "예! 밖에는 홍채문의 무사들과 초부의 장한들이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짜 초옥지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흥! 그까짓 놈들이 지켜봐야 土용이 없지…… 우리는 정면으로 떳떳하게 나갑시다." 금모모는 여전히 앞을 가로 막으며 급히 손을 흔들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날도 밝아오려고 하니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지하통로를 이용해서 간단하게 빠져나가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또 지하통로를 이용해서 나가는 것이 훨씬 빠르지요." 가짜 초옥지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금모모를 노려볼 뿐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다. 금모모는 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네 명의 장한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심자귀와 정첩후 등을 둘러멘 네 명의 장한들은 즉시 벽사이에 있는 틈을 향해 걸어갔다. 잇따라 금모모는 초옥지를 위해 화습자를 치켜들고 길을 비친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뒤를 따라 통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약 이 리 정도의 긴 통로를 순식간에 지나고 일행은 벌써 하나의 넓은 객실에 당도했다. 이때 가짜 초옥지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의자에 앉았다. 금모모는 가짜 초옥지를 주시하며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칠낭자! 날이 밝아오려고 하는데 우리는……." 가짜 초옥지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금모모는 좀 멋적은 듯 얼굴을 붉히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낭자! 신영주께서는……." 가짜 초옥지는 여전히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냉소를 쳤다. "흥! 신영주?" 금모모는 그의 말투를 듣고 즉시 신영주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금모모는 다시 빙긋이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 늙은이가 올 때에 신영주께서는 저에게 낭자를 구출해 낸 다음 속히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짜 초옥지는 여전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흥! 그렇다면 이곳의 책임자가 신영주란 말이오?" 금모모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반문을 했다. "아닙니다. 칠낭자께서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가짜 초옥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한두 번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에서 몇 가지 일을 물어 보아야겠소." 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쪽에 서 있던 가짜 정첩후를 불렀다. "여보시오. 왕사주!" 가짜 정첩후는 고개를 돌리며 급히 허리를 굽혔다. "예! 부르셨습니까?" 가짜 초옥지는 정첩후를 주시하며 언성을 높였다. "당신은 신영주를 몇 해나 따라 다녔소?" 가짜 정첩후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공손히 대답을 했다. "속하는 마의교의 문하로써 한 번도 신영주를 따라 다닌 적이 없습니다." 가짜 초옥지는 가짜 정첩후를 예리한 눈초리로 쏘아보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이놈! 내 앞에서 감히 거짓말을 하다니……." 가짜 정첩후는 급히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향주!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금모모가 나서며 한 마디 덧붙였다. "칠낭자! 왕사주의 말이 맞습니다. 그는 마의교의 사람으로써 한대규가 데리고 들어 왔었습니다." 가짜 초옥지가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머금은 채 가짜 정첩후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까지도 그에게 속았단 말이오? 그는 바로 신교교가 보냈으며 나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오" 금모모는 이 말을 듣자 한동안 멍청해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예? 신…… 신교교가……." 가짜 초옥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신교교, 그년이 무엇 때문에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 사람을 보냈지?" 가짜 정첩후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채 벌써 무릎을 끓고 있었다. "향주! 절대로……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가짜 초옥지는 눈썹을 치켜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닥쳐! 왕사주 너 이놈! 그렇다면 정말로 한대규가 너를 데리고 들어왔단 말이냐?" 가짜 정첩후는 한대규를 힐끗 쳐다보더니 허리를 굽신거렸다. "예! 예! 속하와 한대규는 전에 마의교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짜 초옥지는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더니 냉랭하게 물었다. "당신은 누가 나에게 그런 비밀을 밝혀 주었는지 알고 있소?" 가짜 정첩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급급히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가짜 초옥지는 맨 뒤에 서 있는 한대규를 가리키며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호호호…… 호호호…… 너의 비밀을 나에게 말해 준 사람은 비로 한대규다. 이제야 알겠느냐? 그는 자기 자신까지도 발각이 날까봐 미리 나한테 사실을 얘기해 주었다. 이놈! 그래도 거짓말을 하느냐?" 가짜 정첩후는 고개를 돌려 가짜 초복을 노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한형!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함부로 할 수가 있단 말이오?" 가짜 초옥지는 가짜 초복을 주시하며 언성을 높였다. "한대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서 말해 보아라!" 가짜 초복은 급히 무릎을 꿇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속하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바로 그저께 밤에 황사주가 말하기를 자기는 신영주께서 보낸 사람이라고 저에게 분명히 얘기를 해 주었지요. 뿐만 아니라 중요한 목적은 향주의 행동을 감시……." 가짜 정첩후는 여전히 가짜 초복을 노려보며 말을 가로챘다. "한대규!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있느냐?" 가짜 초옥지는 여러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왕사주, 너 이놈! 감히 내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다니…… 여봐라! 어서 저놈을 처치해 버려라!" 가짜 정첩후는 급히 손을 흔들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향주! 정말로 억울합니다. 너무나 억울합니다." 이때 가짜 정첩후를 주시하고 있던 가짜 금화상이 한 걸음 다가서며 그의 견정혈을 잡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놈! 그처럼 거짓말을 하고서도 무엇이 억울하단 말이냐?"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는 가짜 정첩후의 사혈(死穴)을 힘껏 찔렀다. 순간-. "으악!" 하는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가짜 정첩후는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가짜 초옥지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금모모를 향해 물었다. "금모모! 왕사주가 죽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금모모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영주께서 그처럼 비겁한 짓을 하셨으니 칠낭자를 탓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상삼성(尙三省)이 그를 단숨에 죽여 버렸으니 대체 무엇 때문에 칠낭자를 감시하라고 했는지 물어 볼 수가 없게 되었군요." 가짜 초옥지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어보나마나 신교교 그년의 수작에 불과하지……." 이때 가짜 금화상이 금모모의 곁으로다가서며 포권을 했다. "금모모, 용서하시오. 이것은 향주의 뜻이었지 저의 뜻은 절대로 아니었소." 금모모는 안색이 약간 변하였으나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사주가 죽은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시오?" 가짜 금화상은 빙긋이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더욱 잘 됐소. 하지만 듣자하니 왕사주는 당신의 수양아들이라 하던데……." 금모모는 표정을 굳히며 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상삼성! 당신은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가짜 금화상은 음산하게 웃으며 반문을 했다. "금모모……무엇 때문에 그처럼 화를 내시오? 당신이 왕사주를 수양 아들로 삼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무엇 때문에 저의 말이 틀린 것처럼 말하시오?" 금모모는 화를 벌컥 내며 날카롭게 물었다. "뭐라고? 너 외에 다른 사람도 알고 있단 말이냐?" 가짜 금화상은 멋적은 듯 가짜 제갈명, 초숭생 등 여러 사람을 가리키며 히죽이 웃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 보시오." 금모모는 급히 고개를 돌려 여러 사람을 향해 물었다. "여러분! 지금 상삼성이 한 말이 맞았소?" 여러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 가짜 초숭생이 웃으며 나섰다. "그렇소. 왕사주가 우리에게 친히 가르쳐 주었소." 금모모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이를 갈아붙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죽일 놈 같으니라고…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이고 다니다니…." 이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가짜 초옥지가 나서며 냉소를 날렸다. "금모모…… 신교교, 그년이 당신에게 무슨 호의를 베푼다고 하기에 나를 이용하려고 했었소?" 금모모는 이 말을 듣자 몹시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을 했다. "칠낭자! 대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가짜 초옥지는 여전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흥! 남에게 들었소." 금모모는 안색이 획 변하여 그녀를 주시하더니 다그쳐 물었다. "칠낭자께서는 남의 말을 믿고 이 늙은이와 상대를 할 생각입니까?" 가짜 초옥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뱉듯이 말했다. "그렇소.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하겠어요." 금모모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옥지! 이 늙은이가 너를 기르고 또 교주의 문하로 끌어들였던 일을 벌써 잊었느냐?" 여러 사람들은 그가 옥지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초옥지는 적이 변장을 한 것이 아니라 진짜 초숭생의 누이동생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때 초옥지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호호호…… 호호호…… 나는 초옥지가 아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가짜 초옥지는 얼굴에서 한 장의 얇은 인피면구를 벗었다. 순간, 금모모는 제맹주의 부인으로 변한 초옥지를 보자 멍청해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아니다…… 당신은……." 주설란은 소리없이 웃으며 금모모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바로 이 순간 객청안에 있던 여러 사람들도 제각기 면구를 벗기 시작했다. 원래 가짜 제갈명은 당승무가 변장을 했던 것이며 가짜 금화상은 소불이가 변장을 했고 두경강은 초숭생으로 변장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짜 초복은 홍채문에 있는 하나의 두목이 변장을 했으며 가짜 양수분은 영춘으로 변했다. 이때 쓰러져 있던 심자귀와 정첩후 두 사람도 즉시 일어났다. 여기다 여덟 명의 장한들까지도 홍채문의 무사들이 변장을 했던 것이다. 이때 금모모는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오른손을 즉시 품 속에 집어 넣더니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금모모의 행동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던 소불이가 히죽이 웃으며 나직히 반문한다. "금모모! 아무리 찾아보아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이 늙은이가 여기에 있는데 아직도 당신의 품 속에 있을 리가 있겠소?"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품 속에서 하나의 구공황봉침통(九孔黃峯針筒)을 꺼내 금모모에게 보이며 말을 계속했다. "이 물건은 아직도 독이 있는 것 같아 무명도를 상대할 때 쓸 생각이오." 그리고는 다시 히죽 웃으며 품 속에 집어 넣었다. 금모모는 하는 수 없이 가벼운 탄식을 하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네들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오?"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주설란이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으니 좀 앉으세요." 금모모는 잠시 주저하는가 싶더니 의자에 앉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 "무엇을 물어보려고 하시오?" 주설란은 정색을 하며 금모모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단호하게 물었다. "당신은 무명도에서 나온 사람이오?" 금모모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빈정거렸다. "후후후…… 그런 것을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옆에서 듣고 있던 두경강이 나서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늙은이야! 맹주 부인께서 물어 보시는데 어찌 그처럼 버릇없이 대답을 하느냐? 만약 한 마디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내가 가만 놔두지 않겠다. 알았느냐?" "흥!" 금모모는 두경강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을 뿐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구유곡 이때 주설란이 다시 금모모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초옥지를 흑영도주의 문하로 끌여 들였나요?" 금모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체념한 듯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소. 그는 교주의 밑에 있는 십여 명의 여제자 중에서 일곱번째였소." 주설란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녀의 오빠도 무명도의 사람인가요?" 금모모가 고개를 가로 흔들자 옆에 듣고 있던 소불이가 나서며 언성을 높였다. "잠깐! 저 늙은이가 또 거짓말을 하고 있소. 그는 원래부터 초옥지가 아니었소." 금모모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은 채 급히 물었다. "초옥지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이오?"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변노라고 했으니 변가가 있어야 맞지 않소?" 또다시 옆에서 듣고 있던 두경강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흥! 이 늙은이는 따끔한 맛을 보여주지 않으면 사실대로 얘기를 할 것 같지가 않구나" 이때 주설란이 금모모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금모모! 당신은 사실대로 얘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에요." 금모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시 말이 없더니 얼마 후에 선뜻 입을 열었다. "초옥지로 변장을 한 사람은 바로 변옥영(邊玉瑛)이라고 합니다." 주설란은 안색이 갑자기 변하여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진짜 초옥지는 어디에 있단 말이오?" "삼 년 전에 이미 죽었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심자귀가 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그렇다면 십자도 초학고 역시 당신네들이 죽였단 말이오?" 금모모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설란은 다시 궁금한 듯 물었다. "하지만 변옥영은 무슨 임무를 띠고 여기에 왔나요?" 금모모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나직하게 대답을 했다. "칠낭자는 하남지구에 있는 각문 각파의 행동을 감시하려고 왔소." "흥!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왔소?" 금모모는 갑자기 만면에 웃음을 띠며 언성을 높였다. "나 역시 명령을 받고 칠낭자를 협조하고 있을 뿐이오." 말을 끝냄와 동시에 열 손가락을 갈퀴처럼 세우더니 주설란의 앞가슴을 향해 번개처럼 잡아왔다. 금모모의 행동을 극히 빨랐으며 그녀는 주설란이 무방비한 상태에서 잡히게 되면 나머지 사람들도 하는 수 없이 자기를 그냥 돌려 보낼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설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금모모는 마음 속으로 환호를 올리며 생각을 굴렸다. '맹주 부인의 실력도 이제보니 별로 신통치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 그의 열 손가락은 허공을 잡고 말았다. 하지만 주설란은 여전히 금모모 앞에 태연스럽게 서 있었다. 이때, 금모모가 다시 공격을 하려는 순간 주설란은 벌써 그의 세군데 혈도를 찔렀다. 순간-.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금모모가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주설란은 여러 사람들을 향해 방긋이 웃으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이제는 됐어요. 자! 이렇게 있지만 말고 어서 가요." 여러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심자귀가 소불이를 주시하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소노형! 우리는 죽은 척하고 그들로 분장을 해서 망산으로 쳐들어 갑시다." 이때 주설란이 땅에 쓰러져 있는 금모모를 가리키며 여러 사람을 하나씩 주시했다. "하지만 대체 누가 금모모로 변장을 하지요?" 심자귀가 소불이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빙긋이 웃었다. "소노형! 노형의 체격이 이 노파와 비슷하오. 또한 제가 보기에는 금모모가 비록 변옥영의 녹하이긴 할지라도 사실 무명도에서 변옥영을 감시하라고 한 것 같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직위도 보통이 아닐 것 같으니 소노형께서 담당을 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 같소." 소불이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반문을 했다. "흥!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노파로 변장을 하지 않으려고 하오?" 심자귀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만약 저의 체격이 금모모와 비슷하다면 무엇 때문에 소노형에게 변장을 하라고 하겠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설란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호호호…… 호호호……소호법의 체격은 확실히 금모모와 비슷해요." "하기사 이 노파의 음성은 이 늙은이만이 흉내를 낼 수가 있지." 주설란이 손뼉을 치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말한다. "맞았어요. 소호법의 음성은 정말 똑같아요." 소불이가 좀 멋적은 듯 가볍게 웃자 심자귀가 나서며 한 마디 덧붙였다. "이것은 소노형의 본직입니다. 도둑이 되려면 첫째로 남의 흉내를 잘 내야만 하지요. 하물며 소노형께서는……." 주설란이 정색을 하며 급히 말을 가로챘다. "이제 그만 얘기를 해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말리 가도록 하고 소호법은 빨리 변장을 하세요" 소불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이 늙은이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노파로 변장하기는 처음인데 참으로 재수가 없으려니까……." 심자귀는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노파로 변장을 하는 것이 닭의 울음 소리가 개 짓는 소리를 내는 것보다 더 낮지 않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뱉듯이 말했다. "좋소. 좋아. . …, 당신도 나에게 언젠가는 혼이 좀 날 거요." 여기까지 얘기를 하고 소불이는 영춘을 한 번 쳐다보더니 노파를 향해 손짓을 했다. "낭자, 저 노파의 옷을 좀 벗겨 주시오." 영춘은 대답을 하더니 급히 금모모의 곁으로 다가가 남색 옷을 벗겼다. 이때 소불이는 품 속에서 한 장의 면구를 꺼내더니 금모모의 얼굴에 대고 역용 약물과 함께 한동안 문지른 다음 자기의 얼굴에 씌웠다. 또한 금모모의 두건을 벗겨 자기가 쓰고 비녀 등 물건들도 모두 자기가 지녔다. 금모모의 모습으로 변한 소불이를 한동안 주시하고 있던 심자귀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허허허…… 지금 소노형이 하고 있는 치장들은 적어도 수십 냥의 은자가 될 것 같은데 좋지 않소?" 소불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은 채 가벼운 탄식을 했다. "하지만 아깝게도 지금 내가 치장을 하고 있는 물건들은 모두 도금을 한 것이오." 하고 그는 자기의 장삼을 벗고 금모모가 입고 있던 남색 옷을 입었다. 소불이는 눈깜짝할 사이에 금모모로 변장을 했다. 그리고는 소맷자락과 장삼 등을 약간 잡아 내리고 몇 걸음 걸어가더니 주설란을 향해 쉰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노파가 부인을 위해 길을 인도하겠소." 여러 사람들을 소불이의 이같은 행동에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주설란은 또다시 심자귀, 정첩후 등 두 사람을 향해 말을 꺼냈다. "심대협, 정대협, 두 분께서도 다시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소불이가 히죽이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진짜처럼 행세 하려면 그들의 혈도를 찔러야 합니다." 주설란은 손을 흔들며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혈도를 제압당한 사람처럼 행세만 하면 되어요"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심자귀를 향해 말을 했다. "심노대! 만약 부인께서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늙은이는 즉시 당신의 혈도를 찔러 두서너 시간 동안 고통을 겪게 하려고 했소." 심자귀는 소불이와 주설란을 한 번씩 주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노형, 그 말은 틀렸소. 저는 금화상으로 변장을 해야 하고 정노형은 왕사주로 변장을 해야만 이치에 맞소."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일 때 주설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여러 사람을 향해 음성을 높였다. "그들에게 금모모를 지하 석실로 보내라고 해요. 그리고 우리는 어서 가도록 합시다." 이때 이미 날은 완전히 밝은 것 같았다. 주설란이 앞장을 선 채 일행은 망산을 향해 떠났다. 망산은 위치가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망산의 유명교주 주우천의 소굴은 뒷산의 구유곡(九幽谷)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은 지세가 험악했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가 극히 드물었다. 특히 유명교가 온 이후부터는 사람들이 감히 얼씬도 하지 못했다. 이때 금모모로 변장을 한 소불이가 앞장을 섰다. 소불이의 뒤에는 변옥영으로 변장을 한 주설란과 왕사주로 변장을 한 두경강, 가짜 제갈명으로 변장을 한 당승무, 초복 한대규로 변장을 한 홍채문의 두목, 양수분으로 변장을 한 영춘, 여덟 명의 장정들로 변장을 한 홍채문의 무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때, 소불이가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두루 살피는 순간, "쌩!"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돌맹이가 왼쪽에 있는 고목나무 위에서 일행을 향해 날아왔다. 소불이가 급히 받아 자세히 살펴보니 돌맹이는 하나의 종이로 싸여 있었다. 소불이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종이를 벗겼다. 그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조금 전 한 놈의 적당이 산 밑에서 달려오는 것을 보고 급히 잡았지만 그놈은 고문을 하기 전에 벌써 독을 먹고 자살을 해버렸소 그가 달려온 것으로 볼 때 아마 우리치 행동을 눈치챈 것 같으니 명심하시기 바라오. 또한 도주의 사도는 구유곡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원래의 계획대로 일을 하시오.' 이 쪽지는 바로 곡영자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나무 위에 숨어 남의 행동을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모습을 나타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불이는 빙긋이 웃으며 그 종이 쪽지를 주설란에게 건네 주었다. 이때, 주설란은 안색이 변하며 선뜻 받지를 않고 한참동안 주저했다. "누설이 됐을 가능성도 많지요. 하지만 초부 안에는 여덟 명의 장한 외에 또 다른 적당히 매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주설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나무 위를 힐끗 쳐다보더니, "곡호법이 나무 위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 바람에 적들은 아마 구유곡에 보고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에요."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만약 적이 달려와서 보고를 한다면 곡노형의 눈을 피할 수가 없지요. 하지만 비학전서로써 소식을 전한다면 곡노형도 아마 별 도리가 없을 것이오" 주설란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다그치듯 물었다. "만약 적당들이 이미 우리의 행동을 알아 차렸다면 어떻게 하지요?" 소불이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무조건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지요. 또 어차피 흑석도의 사람들이 곡 밖에서 매복을 하고 있으니 그들이 좀처럼 빠져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맹주께서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을까요?" 소불이는 진작부터 이 점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얘기할 수가 없었다. "맹주의 무공은 강호상에서 절세고수라고 할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독파 미약 등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부인께서는 무엇 때문에 쓸데 없는 걱정을 하십니까?" 주설란은 걱정스러운 빛을 띠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때 소불이가 갑자기 금모모의 음성으로 앞을 향해 소리쳤다. "누가 왔다 갔다 하느냐? 우리가 왔는데 속히 나오지 않고" 순간, 삼사 장 밖에서 갑자기 괴이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 칠낭자가 여기에 계시는데 감히 귀신의 흉내를 내다니…." 바로 이때, 삼사 장 밖에서 갑자기 두 명의 흑의인이 나타나더니 주설란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한다. "망산문하가 칠향주에게 인사를 드리옵니다." 주설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불이가 앞을 향해 손을 흔들어 명령을 내린다. "어서 길을 인도해라!" 두 명의 흑의인은 동시에 허리를 굽히더니 일행의 앞장을 서서 걸어갔다. 또다시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 두 명의 흑의인은 어두컴컴한 계곡을 향해 걸어갔다. 이 협곡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두컴컴하고 험한 것 같았다. 아만 두 사람의 흑의인이 길을 인도하지 않았더라면 일행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참을 걸어갔을 때야 협곡의 맨 밑에까지 다다랐다. 일행은 벌써 삼사십 장 정도의 아래까지 온 것이다. 곡 밑에까지 당도했을 때 양쪽의 절벽으로 되어 있는 하나의 널따란 길이 나타났다. 길이 평탄한 것으로 보아 손으로 만든 것 같았다. 절벽 위에는 숲이 우거져 햇빛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밝은 대낮이라고 할지라도 곡 밑은 여전히 어둡고 음산했다. 그리고 흑의인을 선두로 해서 일행이 약 반 시간쯤 걸어 돌아갔을 때, 하나의 원형으로 된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의 한 가운데에는 하나의 청석패주가 세워져 있었고 유명교란 세 글자가 옥색의 광채를 발하며 마치 도깨비 불처럼 높이 걸려 있었다. 비록 세 글자에서 발하는 빛은 미약했지만 주설란, 소불이 등 무공이 심후한 고수들에게는 마치 찬란한 햇빛처럼 보여 주위의 지세를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일행이 청석패주와 공지를 지나자 맞은편에 거대한 대문이 하나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문 입구에는 귀두도(鬼頭刀)를 치켜든 네 명의 흑의인이 굳게 지키고 있었다. 이때-. 두 명의 흑의인이 일행의 앞을 가로 막으며 길을 인도했던 흑의인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네들은 도대체 누구를 데리고 왔소?" 길을 인도했던 흑의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변향주가 오셨다고 어서 통보를 하시오." 문을 지키는 흑의인은 의심으로 가득찬 눈초리로 일행을 주시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네들은 그들의 신분을 확인했소? 길을 인도했던 흑의인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가로저을 때 소불이가 나서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칠낭자께서는 중원의 각대 문파를 감시하고 있는 사람인데 빨리 주교주를 나오라고 하지 않고 무엇을 그렇게 꾸물거리느냐?" 소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문이 갑자기 열리며 두 명의 녹색치마를 입은 소녀들이 등불을 켜들고 나타났다. 두 명의 소녀 뒤에는 한 명의 흑포를 입은 백면노인이 걸어나오며 포권을 했다. "변향주! 마중이 늦은 것을 용서하시오." 이때, 소불이가 금모모의 음성과 더욱 비슷하게 흉내를 내며 말을 꺼냈다. "교주님! 빨리 나오셨구려." 주우천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허허…… 금모모!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나는 여기에 누가 오기만 하면 즉시 알아낼 수가 있소이다." 그리고는 주설란을 향해 포권을 하며 공손히 말을 꺼냈다. "변향주! 가시지요." 주설란이 길을 인도하라는 듯 손짓을 하자 망산귀수는 급히 허리를 굽히며 앞장을 섰다. "그렇다면 제가 향주를 위해 길을 인도하겠소." 그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길을 인도하여 굴 속으로 들어갔다. 양쪽의 벽에는 전부 녹색의 등이 켜져 있었고 좌우 양쪽에는 십여명의 흑의인이 한 줄로 똑바로 서 있었다. 이 동굴은 험한 계곡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안에는 전부 녹색의 등불로 장식을 했기 때문에 더욱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망산귀수가 일행을 데리고 몇 개의 문을 지났을 때, 소불이가 참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주교주! 신영주는 아직도 여기에 있소?" 망산귀수는 고개를 반쯤 돌리고 소불이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예! 주화청 안에 계십니다." 이때, 일행은 벌써 원형으로 된 하나의 월동문(月洞門) 앞에까지 다다랐다. 망산귀수가 왼쪽에 있는 구리 문고리를 잡고 두 번 가볍게 두드리자 붉은 대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눈 앞이 밝아오는 것 같고 햇빛과 맑은 하늘이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치 북악에 또 하나의 별천지가 나타난 것 같았다. 하지만 푸른 하늘과 밝은 빛들은 모두가 그린 것이었으며 등불로써 만든 것이다. 심지어 꽃밭의 꽃들도 모두 가짜인 것 같았다. 주설란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망산귀수를 향해 물었다. "주교주! 참으로 잘 만들었군요. 저는 마치 굴 밖으로 나가는 줄로만 알았어요." 망산귀수는 만면에 득의에 가득찬 웃음을 띠며 자세히 설명을 했다. "저는 여기에서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습관이 되었지요. 하지만 귀빈이 오셔서 음산한 곳을 보게 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이 주화청을 만들어 귀한 손님을 접대하지요."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일행을 화청 안으로 인도했다. 이때, 화청의 상석에는 백면을 한 청삼문사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만미천호 신교교였던 것이다. 신교교는 망산귀수가 주설란 일행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주설란을 향해 물었다. "변향주! 무엇 때문에 이제서야 왔소?" 주설란은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변옥영이 영주에게 인사를 드리옵니다." 신교교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권했다.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으니 어서 앉으시오." 주설란은 더 이상 예의를 차리지 않고 오른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뒤이어 심자귀, 정첩후, 등 사람들도 일제히 인사를 드렸다. 신교교가 여러 사람들을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한다. "빠져 나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순간, 금모모가 신교교 옆으로 바싹다가서며 히죽 웃었다. "만약 영주의 철저한 계획이 없었더라면 칠낭자께서는 아마 지금도 빠져나오지 못했을 깃입니다." 주설란은 약간 멋적은 듯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주설란은 속하가 금모모에게 듣기로는 주설란 일행이 벌써 망산으로 달려갔다고 하던데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 소식이 없지요?" 옆에꺼 묵묵히 듣고 있던 망산귀수가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그들은 벌써 왔습니다. 다만 곡 안으로 섣불리 들어 오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설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급히 물었다. "그들은 여기를 찾지 못해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가요?" 망산귀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반문을 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뒤를 따라 구유곡으로 왔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찾지를 못하겠습니까?" 주설란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저는 왜 그들을 발견 못했을까요?" 망산귀수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모두 숲 속에 숨어 있는데 향주께서 어떻게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주설란은 갑자기 안색이 변하여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음……큰일났다. 우리가 오는 것을 발견했을 텐데……." 망산귀수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이었다. "허허허…… 우리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주설란은 이들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 계속 물었다. "주교주의 말을 들어보니 벌써 무서운 매복을 설치한 것 같은데……?" 망산귀수는 만면에 득의한 웃음을 띠며 가벼운 탄식을 했다. "저의 이 유명동부(幽冥洞府)는 매복을 설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일단 들어왔다 하면 빠져 나갈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주설란은 원래 구유곡의 배밑을 탐지해 내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지도 않게 소굴 안의 비밀을 여전히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주설란은 더 이상 추궁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소불이가 나서며 망산귀수를 향해 급히 물었다. "주교주! 이 늙은이가 보낸 몇 사람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망산귀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모두 음빙지옥(陰氷地獄)으로 보냈습니다." 주설란은 자기 남편을 걱정한 나머지 급히 다그쳐 물었다. "그 제가도 음빙지옥으로 보냈나요?" 망산귀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칠향주께서는 제가놈을 쓰러뜨리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그는 향주가 떠난 후에 저의 두 명의 부하를 제압하고 관 속으로 들어갔지요." 주설란은 깜짝 놀라 언성을 높여 물었다. "주교주! 자세하게 얘기해 주실 수 없겠어요?" 망산귀수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설명하기를-. "이 망산의 아래는 원래 몇 년 전에 메마른 하나의 개천이 있습니다. 또한 이 산으로 오는 데에는 몇 군데의 통로가 있으며 그 중의 하나는 바로 그곳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지만 제일 북쪽에 있는 하나는 흑풍안(黑風限)으로 통하고 있지요. 전에 지는 사람이 길을 잘 못 알고 흑풍안으로 빠질까봐 그길을 막으려고 했지요." 망산귀수는 여러 사람을 주시하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을 돌로 막는다고 할지라도 하룻밤만 지나면 흑풍에 의해서 하나도 남지 않고 날아가 버리곤 했지요." 주설란은 이 말을 듣자,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흑풍! 세상에 그런 곳이 있었다니……" 망산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전에 제가 듣은 말에 의하면 혹풍안에 바로 샘물이 솟아나는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샘물이 마른 후에 흑풍안으로 변했지요. 또한 항상 검은 연기를 뿜고 있으며 자정이 되면 흑풍이 더욱 더 거세어지고 강풍이 솟아나오며 이튿날 정오가 되어야만 없어지지요." 망산귀수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뿐만 아니라 그 흑풍의 위력은 아무리 단단한 암석 철벽이라 할지라도 한 번 휘말리기만 하면 즉시 가루가 되고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흑풍안에 빠졌다 하면 살아나올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주석란이 몹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그치듯 물었다. "제갈명은 흑풍안으로 잘못 빠져 들어갔나요?" 망산귀수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놈은 관 뚜껑을 열고 들어갔으니 반드시 흑풍안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주설란은 이 말을 듣자 마치 하늘에서 청천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눈 앞이 캄캄해지고 안색이 크게 변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소불이가 급히 전음입밀로 위로했다. "부인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주설란은 자기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급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순간, 옆에 있던 소불이가 망산귀수를 주시하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주교주! 제갈명은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는 것을 벌써 잊었단 말이오?" 망산귀수는 급히 손을 흔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아닙니다. 저…… 저는……." 소불이는 다시 냉소를 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주교주! 사람을 파견해서 수색을 해보았소?" 망산귀수는 신교교를 힐끗 쳐다보며 대답을 했다. "흑풍안의 검은 바람은 정오가 지나야만 완전히 사라집니다. 저는 이미 신영주에게 보고를 올렸지만 아직 시간이 안 되었기 때문에 감히 접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한동안 묵묵히 듣고 있던 신교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변향주!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정오가 지난 후에 수색을 합시다." 신교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명의 녹의시녀가 총총히 걸어오더니 망산귀수의 앞으로 다가서며 허리를 굽혔다. "교주님께 아룁니다. 밖의 상황이 이상한 것 같으니 나오셔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듣자 망산귀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밖에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이냐?" 녹의시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중하게 대답했다. "시녀도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벌써 뚫고 들어온 것 같습니다." 녹의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망산귀수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서더니 신교교와 주설란 두 사람을 향해 포권을 했다. "영주! 향주! 제가 급히 나가서 살펴보고 돌아오겠습니다." 소불이가 급히 손을 가로저으며 나섰다. "잠깐! 만약 교주 혼자서 안 될 것 같으면 저와 상삼성, 왕사주 또한 저기에 있는 여덟 명의 수하를 데리고 주교주를 따라가서 도와 주도록 하겠소." 그러나 망산귀수는 급히 손을 흔들며 빙긋이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들이 저의 구유곡에 들어온 이상 살아서 빠져나갈 수는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녹의시녀를 따라 총총히 걸어갔다. 이때, 신교교가 주설란을 주시하며 빙긋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변향주! 여기까지 오셨으니 이젠 면구를 벗어도 괜찮을 것이오." 주설란이 대답도 하기 전에 소불이가 냉큼 나서며 입을 열었다. "영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진짜 주설란 일행이 올 때에는 변장을 지우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또 일단 싸움을 하게 되면 그들도 자기편인지 아닌지 분간을 하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신교교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 호호호…… 맞았소. 맞았어…… 이치에 맞는 말이오." 순간, 망산귀수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망산귀수가 말을 하기도 전에 신교교가 먼저 물었다. "주교주! 지금 밖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소?" 망산귀수는 음산하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흐흐흐…… 놈들은 벌써 유명계를 뚫고 들어 왔습니다. 지금 저의 문하들이 그들을 매복으로 유인을 하고 있지만 거기는 음빙지옥과 가깝기 때문에 변향주 수하들의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음성을 높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전 상삼성과 왕사주에게 따라가 도와주라고 하지 않았소?" 신교교는 미간을 찌푸리며 음성을 높였다. "지금 음빙지옥에는 중요한 사람들이 많이 감금되어 있기 때문에 몇 명을 더 파견하여 엄호를 해야 하오." 이때, 옆에 있던 소불이가 주설란을 향해 즉시 진기전음을 속삭였다. "부인! 정오가 되기 전에 우리가 음빙지옥 안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구합시다." 주설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교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속하가 그들을 도와주러 가겠습니다." 신교교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망산귀수가 손뼉을 치며 나셨다. "변향주께서 친히 가시겠다면 더욱 좋습니다." 신교교는 망산귀수를 똑바로 주시하며 날카롭게 물었다. "주교주! 적이 유명계에 들어오기만 하면 손을 쓰지 않아도 가두어 놓을 수가 있다고 하지 않았소?" 지금 신교교의 말뜻은 변옥영이 무명도의 칠향주로써 중원 각대문파의 행동을 감시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보잘 것 없는 음빙지옥을 방비하느냐는 것이었다. 망산귀수는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공이 너무나 높기 때문에 유명계에 있는 매복으로써는 잘못하다가는 그들에게 뚫릴 것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변향주께서 몸소 나서 주시면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때, 심자귀는 망산귀수의 맞은편에 서 있있기 때문에 망산귀수가 갑자기 신교교에게 눈짓하는 것을 보았다. 심자귀는 급히 소불이를 향해 전음술로 말을 건냈다. "소노형! 주 늙은이가 신교교에게 눈짓을 건내는 것을 보니 무슨 속임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불이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신교교가 주설란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렇다먼 변향주께서 수고를 좀 해 주십시오." 이때, 망산귀수가 주설란을 향해 급히 허리를 굽혀 보이며 일어섰다. "제가 변향주를 위해 다시 길을 인도하겠습니다." 주설란은 여러 사람을 향해 손짓을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같이 따라 갑시다." 말이 끝나자마자 여러 사람들은 망산귀수의 뒤를 따라 일제히 화청 밖을 향해 걸어갔다. 음빙지옥 소불이는 주설란의 앞을 지나 망산귀수의 뒤를 바싹 따랐다. 망산귀수를 선두로 한 이들 일행은 복도의 오른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철문이 있었으며 문 앞에는 한 명의 녹의시녀가 똑바로 서 있었다. 녹의시녀는 교주가 오는 것을 보자 즉시 벽에 있는 등불을 받혀들고 망산귀수를 향해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주었다. 망산귀수가 등불을 받아 들자 녹의시녀는 즉시 문을 열었다. "획!" 순간, 일진의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안은 캄캄해지고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이때 망산귀수는 남이 묻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저의 유명동부는 화청 안에만 매복이 없을 뿐이지 다른 곳에는 모두 기관이 설치되어 있지요." 망산귀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에서는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들리며 대문이 벌써 굳게 닫혀 버렸다. 이렇게 되자 망산귀수의 손에는 비록 등불이 들려져 있었지만 여러 사람들은 여전히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이때, 소불이가 주위를 살펴보며 혼잣말처럼 쿵얼거렸다. "음산한 것을 보니 음빙지옥에 다다른 것 같은데……." "아닙니다. 아직은 좀 더 가야 됩니다." 소불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망산귀수의 손에 들려 있는 등불을 자리키며 말했다. "주교주! 등불은 이 늙은이가 들고 있는 것이 어떻겠소 망산귀수는 빙긋이 웃으며 여러 사람들을 주시했다. "누가 들고 있어도 이 정도 밖에는 밝지 못할 것입니다." 소불이는 망산귀수가 혹시 속임수를 쓸까 두려워 등불을 달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망산귀수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등불을 소불이에게 선뜻 건네주었다. 소불이는 등불을 받아 들며 나직이 물었다. "주교주! 지금 침범해 온 적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소?" 망산귀수는 고개를 가로 흔들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적들은 인원수가 많을 뿐 아니라 무공도 극히 높다고 합니다. 아마 주가란 계집년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자 소불이는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과 생각을 굴렸다. '도대체 누구일까?…… 혹시 흑석도주가 기다리다 지쳐서 쳐들어 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분명히 밖에서 기다리기로 약속을 했는데 무엇 때문에 벌써 유명계를 뚫고 들어 왔을까…….'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궁금한 듯 물었다. "유명계를 뚫고 들어온 놈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망산귀수는 득의에 찬 웃음을 띠며 대답하기를-. "모두 들어왔소." 소불이가 역시 빙긋이 웃으며 재우쳐 물었다. "벌써 매복 안으로 유인을 했단 말이오?" 망산귀수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언성을 높였다. "허허허……노부는 벌써 그들을 처치할수 있는곳까지 유인을 했소." 하는 소리와 함께 소불이가 들고 있던 등불이 갑자기 꺼졌다. 이렇게 되자 소불이는 몹시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주교주! 등불이 어떻게 되어서 갑자기 꺼졌지요?" 소불이는 말을 끝내자마자 동시에 오른손으로 망산귀수의 손을 향해 번개처럼 잡아갔다. 그러나 망산귀수는 어느 사이에 종적도 없이 피해 버렸으며 갑자기 오른쪽에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큰일났소. 금모모! 당신은 무엇 때문에 불을 꺼지게 했소? 여기는 등불이 없으면 길을 찾기도 힘이 들텐데……." 이때 소불이는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함을 질렀다. "주교주! 서지 못하겠느냐?"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그는 망산귀수를 향해 바람처럼 덮쳐갔다. 하지만 여전히 허공을 짚었으며 망산귀수의 음성은 또다시 왼쪽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노부는 여기에 있을 테니 당신네들은 천천히 걸어가시오." 소불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들 부드득 갈아붙였다. "주우천! 감히 노부 앞에서 허튼 수작을 부리려고 하다니……." 망산귀수는 어둠 속에서 음산하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당신이 불을 꺼놓고 무엇 때문에 노부를 탓하시오? 또 수작은 금모모 당신이 부렸지 왜 내가 부렸단 말이오?" 하지만 소불이는 길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 못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우천! 칠낭자도 여기에 있는데 무슨 짓이오?" 망산귀수는 여전히 음산하게 웃으며 반문을 했다. "칠낭자 등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있는데 길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소불이가 움직이지 않고 얘기를 하자 그 역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때, 소불이는 망산귀수가 자기를 함정에 유인하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뒤에 있는 일행에게 분부를 했다. "칠낭자! 당신네들은 가까이 오지 마시오." 그러나 얼마동안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소불이는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물었다. "칠낭자! 그 늙은이의 말을 듣지 못했소?"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심지어 망산귀수의 음성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소불이는 기민한 재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남의 함정에 빠지고 심지어 주설란 등 사람들을 눈깜짝할 사이에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정도의 기관 장치쯤이야 겁낼 것이 못된다는 듯 마음 속으로 비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하물며 소불이는 간호에서 유명한 도둑이었는데 어찌 천리화통(千里火筒)을 가지고 다니지 않겠는가? 또한 일행들 중에서 소불이만이 천리화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소불이는 마치 한 마리의 다람쥐처럼 신속히 몸을 옆으로 피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외호가 설상무영인 것과 마찬가지로 눈 위를 걸어가도 발자국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인데 어찌 그까짓 매복을 무서워 하겠는가. 지금 소불이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여기를 익숙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소불이는 매복이 있기 때문에 감히 천리화통을 꺼낼 수가 없었으며 수중에 쥐고 있던 등불을 던져 버렸던 것을 아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가볍게 오른쪽으로 몸을 피했을 때 즉시 그는 하나의 석벽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을 느꼈다. 소불이는 이 벽이 움직이지 않는가를 먼저 확인한 다음 또다시 왼쪽으로 유명처럼 신속히 달려갔다. 과연 일 장 정도 달려갔을 때 또 하나의 석벽이 나타났다. 이렇게 되자 소불이는 움직이는 벽이 앞 뒤 양쪽에 있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순간, 그는 뒤에 있는 석벽을 먼저 움직인 다음에 주설란 등과 합세할 것을 결심했던 것이었다. 이때 소불이는 뒤로 일 장 가량 날아갔으며 과연 하나의 철벽에 부딪쳤다. 소불이는 철벽을 움직이게 되면 반드시 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부딪쳤지만 움직이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다. 바로 이때, 그는 갑자기 일진의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소불이는 두 명의 적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생각을 굴렸다. '이놈들아…,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잘 왔다.' 소불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과연 두 사람이 즉시 양쪽으로 갈라져 서서히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때, 왼쪽에서 서 있는 사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금모모! 어서 당신의 정체를 얘기하시오." 소불이는 선뜻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속으로 생각을 했다. '이놈들이 들어올 때부터 조심스럽게 갈라지더니 또다시 목소리로써 유인하려고…… 그렇게 쉽게는 안 될 것이다…….' 소불이는 이런 생각을 하며 겉으로는 큰 소리로 외쳤다. "네놈들의 입을 찢어 놓은 다음 얘기를 들려 주겠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양 팔을 벌리고 일진의 강맹한 장풍을 보냈다. 소불이는 두 팔을 벌린 채 장풍을 보냈기 때문에 마치 그가 덮쳐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그는 손을 치켜 올렸을 때 귀로는 벌써 자세히 듣고 있었던 것이다. 소불이의 장풍이 날아감과 동시에 왼쪽에 있는 사람은 급히 피하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쌩!" 하는 소리와 함께 일진의 예리한 장력을 격출해 왔다. 소불이는 즉시 일종의 미향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고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흥! 내 앞에서 감히 미향을 쓰려 하다니…….' 소불이는 이같은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의 사이를 뚫고 나갔다. 두 사람은 금모모가 뚫고 나가려고 하는 것을 보자 또다시 미향을 내뿜었다. 소불이는 갑자기 몸을 멈추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들! 감히 나를 암산하려고 하다니……." 강호상에서는 누가 미향을 보내면 상대방은 즉시 호흡을 멈추어 야 한다. 하지만 소불이는 호흡을 멈추기는 커녕 즉시 욕을 퍼부었다. 순간, "아…… 이…… 상하다……." 하는 소리와 함께 소불이는 쓰러지는 흉내를 내며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향해 바람처럼 몸을 날리더니 상대방의 혼미혈(婚迷穴)을 찔렀다. 오른쪽에 있던 사람은 소불이의 일 장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으나 왼쪽에 있는 사람은 멋도 모르고 급히 물었다. "성공을 했소?" 소불이는 왼쪽 사람의 흉내를 내며 다시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그렇소. 그놈이 쓰러진 것 같소." 그러나 소불이는 즉시 살수를 쓰지 않고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서며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쓰러진 것은 그 늙은이가 아니고 바로 너의 패거리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소불이는 그 사람을 얼굴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하지만 그 사람도 무공이 낮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피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내가 그렇게 쉽사리 당할 것 같으냐?" 소불이는 즉시 그의 뒤를 쫓아갔지만 그 사람 역시 벌써 세 번씩이나 위치를 바꾸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기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설상무영 백일당귀라는 별명을 가진 소불이라는 점을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소불이는 상대가 아무리 몸을 피해도 바싹바싹 따라다니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멈추어라! 네놈은 뛰어보았자 벼룩이다." 그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피해도 상대가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오는 것을 보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몸을 멈추었다. 순간, 그는 등을 돌리는 동시에 소불이를 향해 오른손으로 번개처럼 일 장을 후려쳤다. 소불이는 그의 장풍이 예상외로 억세다는 것을 느꼈으며 즉시 철사장(鐵砂掌) 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불이는 그의 손바닥이 자기의 앞까지다가오자 즉시 오른손을 내밀어 번개같이 그의 완손을 잡았다. 그 사람은 뜻밖의 기습을 당하자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오른손을 잡힌 채 왼손으로 번개같이 또다시 일 장을 쳐왔다. 소불이는 그의 장풍이 다가오기도 전에 벌써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 주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소불이가 일부러 놓아준 것도 모르고 다시 일장을 쳐오려고 했다. "허허허…… 허허허……쓸데 없는 짓은 그만 하고 어서 완맥을 한 번 보시오." 그 사람은 즉시 손을 멈춘 채 자기의 오른팔을 치켜 들었다. 과연 대한의 오른팔에는 다섯 개의 검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대한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다. "아니, 독사장(毒沙掌)." 소불이는 여전히 큰 소리로 웃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허허허…… 확실히 독이다. 하지만 독사장이 아니라 자살장이다. 알았느냐? 친구는 한 번이라도 자살장을 본 적이 있나?" 대한은 즉시 혈도를 봉쇄하며 내뱉듯이 물었다. "당신이 나의 완맥에도 독을 묻혔으니 해약도 있겠지?"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냉랭하게 반문을 했다. "해약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보라고 하겠느냐?" 대한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에게는 도대체 무슨 조건이 있소?" 소불이는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노부의 자살장을 맞은 사람은 한 시간만 지나면 온 몸이 완전히 마비되고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죽게 되지. 강호에서 자살장을 풀 수 있는 사람은 노부 밖에 없다." 대한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다시 물었다. "당신은 금모모가 아닌가요? 설사 금모모가 아니건 맞건 간에 어서 해약과 교환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해 주시오." 소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빙긋이 웃었다. "그렇지…… 그것도 좋아…… 자네가 나를 데리고 나가면 한 알을 주고 또한 칠낭자를 찾게 해주면 또 한 알, 모두 다시 만나게 해주면 또 한 알, 음빙지옥으로 들어간 다음……." 대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자살장은 해약을 얼마나 먹어야 효과가 있소?" 소불이는 만면에 득의에 찬 미소를 띠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노파의 손가락 자국 하나마다 한 알씩의 해약이 필요하지…… 친구의 팔목에는 다섯개의 자국이 있으니 다섯 알을 먹어야 하지." 대한은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저는 주…… 주의 문하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소불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그치듯 물었다. "그렇다면 친구는 무명도에서 왔단 말인가?" 대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공손히 대답한다. "아닙니다. 저는 원래 마의교의 사람이었습니다." 소불이는 손짓을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좋다. 그렇다면 먼저 이곳을 빠져나가고 보자" 대한은 소불이를 주시하며 주저하더니 말을 믿지 못했다. "아…… 아니, 그…… 해약은……." 변신 대한은 무척 걱정스러운 듯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섯 알 다 주실 겁니까?" 소불이는 냉랭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여기를 나간 후에 한 알을 주고 또 이 할망구를 따라 같이 가야 나머지 네 알도 주겠다." 그러자 대한은 몹시 불안한 어조로 다짐을 받으려 했다. "실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소불이는 약간 언성을 높여 대꾸했다. '거는 언제 이 금모모가 일구이언 했다는 말을 들었느냐?" 그제야 대한은 안심이 된다는 듯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금모모께서는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러나 화통은 반드시 꺼버려야 합니다. 만약 위에 있는 사람에게 발각되면 매우 곤란하니까요." "알았다." 대한은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고 위로 뛰써 올라가서 왼손으로 왼쪽 구석에 있는 둥그런 뚜껑을 열고 즉시 빠져 나갔다. 원래 이 석실의 사방은 전부 다 철벽으로 되어 있고 다만 왼쪽 상단에만 하나의 구멍이 위로 뚫려져 있었다. 소불이는 지체하지 않고 즉시 수중에 들고 있는 화통의 불을 끄고는 뒤따라 빠져 나갔다. 그러나 밖은 여전히 캄캄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소불이가 몸을 일으켜 위를 향해 뻗치니 동굴. 피 천장이 손에 잡혔다. 괘한은 소불이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 순간. 대한은 갑자기 수중에 차갑고 단단한 물건을 쥐고 소불이 곁으로 엄습해 왔다. 대한은 그것으로 소불이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협박하듯 말했다. "금모모, 목숨이 아까우면 해약을 전부 다 내놓아라." 소불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한 알만 주기로 약속했는데……?" 그러자 대한은 약간 언성을 높히며 소불이의 허리에 더욱 더 압력을 가했다. "금모모, 당신 빨리 죽고 싶소?" 소불이는 여전히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자네, 왜 그러나?" 대한은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금모모, 당신은 자의교주의 칠공황봉침의 위력을 알고 있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었다. "알다마다. 그것은 강호상에서 제일 무서운 암기이며 거기에다 화혈침을 더 가한다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쯤은 파리 한 마리 죽이는 것보다 더 쉽다는 것도 알고 있지." 대한은 징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당신 말이 맞았소." 그러자 소불이는 단번에 화를 내며 대들었다. "그런데 자네는 무엇 때문에 이 할망구의 허리를 쿡쿡 찌르고 야단인가?" 대한은 안색을 싹 바꾸더니 눈에서 흉흉한 빛을 발산했다. "금모모, 그런 쓸 데 없는 소리는 집어 치우고 살고 싶으면 해약을 전부 다 내놓아라." 소불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는 건가? 우리가 무사히 나온 후에 먼저 그것도 한 알을 주기로 하지 않았나?" 소불이는 더 이상 말하기도 귀찮은 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 침통에는 적어도 일흔두 자루의 독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선 노귀는 자네에게 다만 스물한 자루 밖에 주지 않았지. 그리고 또 사실대로 얘기하지만 일흔두 자루의 독침이 있어야만 이 할망구를 제압할 수가 있다. 그러니 네가 가지고 있는 스물한 자루로는 어림도 없다. 더구나 그 스물한 자루의 독침도 벌써 이 할망구가 술법을 써서 옮겨 버렸으니 네가 수중에 들친 있는 것은 하나의 빈 통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대한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나는 믿지 못하겠소." "그러자 소불이는 가볍게 웃었다. "왜 믿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네가 한 번 시험해 보면 알 것이 아니냐?" 순간, 대한은 약간 미심쩍은 얼굴로 반신반의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로……." 소불이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힘있게 말했다. "그렇다. 네가 단추를 누른 후에 이할망구는 첫 번째 해약을 주겠다." 대한은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소불이가 말하는 순간 엄지 손가락으로 단추를 눌렀다. 대한의 침통은 소불이의 허리를 겨누고 있어 독침은 발사되었을텐데도 소불이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대한은 등골이 오싹해옴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금모모 당신 별일 없습니까?" 소불이는 가볍게 웃으며 기꺼이 대답했다. "물론, 그 침통은 빈통인데 이 할망구가 죽을 리가 있겠느냐?" 대한은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물었다. "정말로 당신은 술법을 써서 독침을 운반해 버렸소?" 소불이는 가볍게 코방귀를 뀌며 큰 소리로 힐문했다. "그럼 만약 이 할망구가 술법을 써서 운반하지 않았다면 너의 품속에 있는 스물한 자루의 독침이 왜 없어졌겠나?" 그러면서 소불이는 대한이 침통을 잡고 있는 왼손을 또 한 번 잡으며 말했다. "자, 이것은 첫 번째 약이다." 대한은 해약을 받자 눈이 휘둥그레져서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금모모, 감사합니다." 소불이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할 필요없다. 그런데 자네는 지금 다섯 알의 해약을 가지고도 모자랄 것이다." 대한은 깜짝 놀라며 급히 물었다. "아니, 왜 모자랍니까?" 소불이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약간 노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이 할망구가 술법을 써 너의 독침을 운반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벌써 너의 칠공황봉침 아래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자꾸 나를 의심해 황봉침까지 쏘았으니 내 너에게 약간의 징벌을 주고자 왼손을 또 잡았으니 다섯 알의 환약이 더 필요하지. 하지만 너는 지금 이 할망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내 반드시 너를 죽지 않게 해 주겠다." 하고는 마치 겁을 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자, 그럼 불을 켜서 왼팔의 손자국을한 번 볼테냐?" 대한은 크게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불을 켜게 되면 남에게 발각이 됩니다." 소불이는 암암리에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좋다. 그럼 우리 칠낭자를 찾으러 가자." 대한은 약간 진정된 어조로 물었다. "바로 변노를 두고 얘기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변향주 말이다." 소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앞뒤 양쪽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그러나 소불이는 벌써 이 소리를 듣자 십여 명 이상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벌써 다섯 장 안으로 접근을 해왔다. 순간, 소불이는 즉시 대한의 옷자락을 잡아 끌고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말했다. "누가 온 것 같으니 너는 각별히 조심해서 대답해라." 대한은 감히 거역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누군가가 묻는다. "아까 누가 여기서 얘기를 했느냐?" 그러니까 조금 전 소불이와 대한의 대화가 그들에게 벌써 발각당한 것이었다. 소불이가 대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대한은 공손히 대답했다. "저…… 기승(氣勝)과 조강(組强) 두 사람입니다." 음산한 음성이 다시 들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이름 말고 번호를 대라. 몇 번이냐?" 대한은 다시 급히 대꾸했다. "동자(同字) 삼호와 팔호입니다." 음산한 음성은 약간 높아지더니 화가 난 듯한 어조로 추긍한다. "왜 네가 대답을 다 하느냐?" 그러자 소불이가 나서며 매우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기형께 물었기 때문에 기형은 제 이름까지 보고를 한 것입니다." 약간 사이를 두더니 음산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좋다. 그전에 너희들은 아까 여기서 무슨 얘기를 했느냐?" 소불이가 다시 나섰다. "저희들은 바로 금모모의 얘기를 했습니다." 음산한 음성이 또다시 물었다. "금모모가 어떻게 되었느냐?" 소불이는 기승을 쳐다보며 히죽 웃더니 일부러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금모모의 무공은 우리 두 사람보다 더 고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칠공황봉침까지도 그녀에게는 소용이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음산한 음성은 계속해서 물었다. "금모모는 아직도 밑에 있느냐?" 소불이는 짐짓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벌써 죽었습니다." 음산한 음성은 매우 놀란 듯 급히 물었다. "아니, 어떻게 해서 죽었느냐?" 소불이는 대꾸하기가 곤란한 듯 약간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금모모는 성질이 매우 급한 까닭에 덮쳐 올 때 벽에 부딪쳐 죽고 말았습니다." 음산한 음성은 가볍게 코방귀를 뀌더니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었다. "명육(冥六)아까 그들이 이렇게 말하더냐?" 명육이라 불리운 사나이는 성이 명가이며 번호는 육번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순조님, 아까 저들은 금모모에게 해약을 달라고 한다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순조라 불리는 음산한 목소리의 사나이가 급히 물었다. "아니 명육, 왜 그러느냐?" 명육이 아무 소리도 않자 순조는 냉랭하게 코방귀를 뀌며 크게 소리 쳤다. "여봐라 불을 켜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좌우 양쪽으로 즉시 불이 밝혀졌다. 그러자 그 불빛 속에 무릎까지 내려온 홍포를 입고 여덟 자 수염을 기른 한 사나이를 볼 수가 있었다. 이 자가 바로 유명교주 주우천의 사대음조 중의 한 사람이었다. 순조는 불이 밝아지자 명육이 땅에 쓰러진 것을 알고 즉시 안색이 싹 변해 흥흥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러자 기승은 소름이 오싹 끼쳐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순조는 냉랭하게 웃으며 흉흉한 눈초리를 굴렸다. "너희 둘이 독침으로 명육을 죽였느냐?" 어째서 순조는 밝은 불 아래에서도 금모모를 동자 팔호로 보았느냐는 것 때문이었다. 기승은 기이하게 생각하며 얼굴을 돌려 소불이를 보자 하마터면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질 뻔했다. 놀랍게도 금모모는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게 귀신같이 조강으로 변장을 했던 것이다. 비록 그렇게 흡사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이런 불빛 아래서는 그 자신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가름해내기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기승은 다만 멍청하게 흡사 넋이 빠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소불이는 벌써 한 걸음 나아가 읍을 하며 입을 열었다. "순조, 통찰해 주십시오. 저희 두 사람은 독침을 벌써 다 써버렸는데 어떻게 해서 독침이 남아 명육을 죽이겠습니까?" 순조는 여전히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고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독침이 다 떨어졌다고? 그럼 어디 보자." 순조의 말과 함께 소불이와 기승은 즉시 침통을 건네 주었다. 순조는 그것이 빈 침통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되돌려 주며 아까보다는 약간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음, 그렇다면 총관에게 가서 스물한 자루의 독침을 더 받아라." 소불이는 갑자기 가벼운 일 성을 터뜨리더니 왼손 세 개의 손가락으로 신속히 순조의 가슴을 향해 하지만 순조도 어떤 남색빛이 자기의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았으며 소불이가 제지하는 것을 보았다. 이 뜻밖의 출현이 독침으로부터 순조의 목숨을 구하자 순조는 약간 안색이 변하더니 소불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 잘했다." 소불이는 세 개의 손가락으로 독침을 집고는 자세히 살펴보더니 순조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침통에서 나온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밑에서 올라온 것을 보아 금모모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순조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즉시 판관필을 꺼내들며 냉랭하게 웃었다. "좋다. 이 할망구, 어디 두고 보자. 자…… 자네는 나를 따라 내려가세." 하고는 구멍 밑으로 내려갔다. 소불이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더니 기승의 옆을 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너는 저들이 오지 못하게 막아라. 알겠느냐?" 소불이는 말을 마치고 즉시 지혈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기승은 이제야 금모모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금모모를 위해 걱정을 하게 되었다. 기승이 걱정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의 좌우 양 팔에 열 개의 자살장이 찍혀 있기 때문에 금모모가 약을 주지 않으면 자기는 죽고 말기 때문이었다. 이 사대음조는 전부가 세상에서 너무 많은 죄악을 저질러 관부(官府)가 이들을 쫓고 있으며 백도의 인물들도 사대음조를 잡아 죽이려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주우천의 문하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무공 역시 절대 팔대귀보다 약하지 않았다. 이제, 금모모가 순조를 따라갔으니 순조는 그의 정체를 알아내는 즉시 죽이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십여 명의 귀도들은 순조의 명령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그곳에서 서 있어 그들을 막을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기승이 마음을 조이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약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자 지혈에서 갑자기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기승은 그것을 보자 행여나 하는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지혈에서 나온 사람은 바로 순조였다. 이 순간, 기승은 눈 앞이 아찔한 것을 느끼며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이제는 완전히 끝장이 났구나. 금모모가 순조의 손에 죽었으니 남은 아홉 알의 해약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순조는 지혈에서 나자마자 음흉한 눈초리로 기승을 쏘아보았다. 기승은 그 눈빛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조는 무거운 걸음으로 기승에게 다가오더니 음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좌는 지혈에서 동팔호더러 지키고 있으라고 했으니 동삼호는 지금 나를 따라오너라." 기승은 이 소리를 듣자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이게 대체 어찌된 셈이지?' 그러나 영문을 모르면서도 기승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조는 말을 끝내자 즉시 어깨를 으쓱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기승은 꼭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그를 따르고 있었는데 자기가 지금 걷고 있는 것까지도 의심할 지경이었다. 등불을 든 두 명의 수하가 앞장을 서고 나머지 몇 명은 순조와 삼사 장의 거리를 유지시키며 뒤를 따랐다. 이렇게하여 그들이 무슨 장례 행렬을 하듯 한참을 걸어갔을 매순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기승을 비롯한 앞 뒤의 졸개들도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다시 또 다른 지혈을 발견했다. 순조는 졸개의 수중에서 등불을 받아들더니 지혈의 뚜껑을 열고 한참 동안이나 유심히 살폈다. 이윽고 그는 굽혔던 허리를 펴며 다시 분부를 내렸다. "너희들 여기 서서 한 발도 움직이지 말아라. 본좌가 지금 다시 들어가 살펴봐야겠다." 그러더니 등불을 들고는 즉시 지혈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기승이 등불을 들었던 두 명의 졸개들과 다시 차 한잔 마실 시간을 기다렸을 때 순조가 나오더니 몇 명의 졸개들을 향해 손짓으로 불렀다. "너희들은 이쪽으로 오너라." 그러자 칠팔 명이나 되는 졸개들은 즉시 한 마디도 없이 신속히 달려와 순조 앞에 섰다. 순조는 방금 자기가 나온 지혈 안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분부를 내렸다. "자, 본좌를 따라 내려가 놈들을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이자. 알겠느냐?" 졸개들이 일제히 크게 대답을 하자 순조도 더 이상 긴 얘기를 하지 않고 지혈 속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아홉 명의 졸개들도 속속 들어갔다. 기승은 약간의 기대를 걸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순조 혼자 내려가 손해를 보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제 약간은 기대도 있지만……' 하며 그는 도저히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해 자세히 들여다 보았으나 지혈 속은 이상하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승은 꼭 까까부터 자신이 귀신에 흘렸다고 생각하며 초조히 기다렸다. 다시 약 한 시간의 시간이 지나자 순조는 아홉 명의 졸개들과 함께 세 사람을 끌고 올라왔다. 끌고 온 세 사람을 기승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정첩후, 금화상, 초복 세 사람이었다. 순조는 세 사람을 끌어올린 후 손을 흔들며 명령을 내렸다. "자, 너희들은 전부 물러가 있거라1" 그러자 아홉 명의 졸개들은 세 사람을 끌고 일제히 물러났다. 순조는 들고 있던 수중의 등불을 옆에 서 있는 졸개에게 건네주더니 계속 전진을 한다. 기승은 주춤주춤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순조, 저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순조는 기승을 한 번 주시하더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본좌를 따라가 나머지 사람들을 또 잡아야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약간 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기승은 순조가 갑자기 금모모의 음성으로 말하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다…… 당……." 그러나 순조는 그가 말을 계속 하기 전에 급히 가로채었다. "동삼, 잔말 맡고 어서 본좌를 따르기나 해라." 기승은 할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세 번째의 지혈에 도착했다. 그때 순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명령을 내렸다. "좌십삼." 좌십삼이란 바로 좌순조의 휘하에 있는 십삼 호 번호를 가진 수하의 명칭이었다. 그러자 뒤에 있는 한 명의 졸개가 즉시 앞으로 나섰다. "예 순조님" 순조는 지혈을 가리키며 분부를 내렸다. "자네, 내려가서 그 안에 몇 명이 있는가를 살펴 보게." 졸개는 즉시 대답을 하고 뚜껑을 열려고 했을 때 순조가 갑자기 주의를 시켰다. "등불을 가지고 내려가야 되지 않나!" 졸개는 몸을 굽히다 말고 등불을 받아 다시 내려갔다. 졸개가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졸개는 허겁지겁한 표정으로 올라오더니 즉시 순조에게 보고했다. "아래에는 열세명이 있었는데 무공이 전부다 높았습니다. 속하는 지금 내려가자마자 그들에게 협공을 당해 간신히 도망쳐 나왔습니다…." 졸개가 다시 무엇이라고 더 말을 계속하려 하자 순조는 알았다는 듯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거라!" 졸개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더니 물러갔다. 순조는 다시 앞에 시립해 있는 아홉 명의 졸개들을 향해 손짓을 하였다. "아까 있던 아홉 명은 벌써 세 사람이나 잡아 내었으니 너희들도 본좌를 따라 내려가 놈들을 잡아내자? "알겠습니다." 졸개들이 대답을 하는 순간 순조는 벌써 지혈 속으로 뛰어내렸고 아홉 명의 졸개들도 줄을 지어 그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해서 얼마 지나지 않자 순조는 다시 세 명을 잡아 왔다. 순조는 매우 득의한 듯 연신 손을 내저으며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자, 이 세 사람은 뒤에 있는 자들에게 넘겨 주고 너희는 계속 나를 마라 수색을 하자!" 그러자 앞에 있는 아홉 명의 졸개들은 방금 잡아온 세 명을 뒤에 있는 아홉 사람에게 넘겨주고 다시 좌우로 열을 지어 전진을 했다. 기승은 도대체 아까부터 정신을 차리지 못해 불안한 마음과 초조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입을 열어 물어보려고 했다. 기승이 막 입을 떼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그의 귓가에 매우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의 해약은 본관의 몸에 있으니 아무 소리 말고 나를 따라와라." 이것은 분명히 금모모의 음성이었다. 기승은 깜짝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곤모모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순조를 보았다. 그러나 순조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어깨를 들먹이며 계속 걷고 있었다. 기승은 마음 속으로 귀신을 만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는 연신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계속 순조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이들은 어떤 하나의 빈 터에 도착했다. 기승이 그것이 빈터임을 확인하려는 순간, 갑자기 큰 소리로 이들의 앞을 막았다. "서랏!" 하는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유령 같은 인영이 번쩍하며 나타났다. 그것을 보자 순조는 대뜸 호통을 쳤다. "너는 누구인데 감히 본좌의 앞을 막느냐?" 그러자 즉시 호탕한 웃음 소리와 함께 어쩌면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핫…… 좌노형, 또 술에 취했소? 왜 자기의 자리는 지키지 않고 이쪽으로 오는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나의 커다란 그림자가 앞을 떡 막아섰다. 그 그림자 역시 머리에는 두건을 매었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홍포를 입고 있었다. 비록 밤이었지만 그는 눈썹이 매우 길고 수염 또한 고슴도치처럼 흉악한 형상이었다. 이때 기승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순조에게 나직이 일러 주었다. "우순조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순조는 매우 반가운 듯 크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하…… 우노형 이셨구려." 우순조도 역시 크게 웃으며 빈정대었다. "하하…… 정말 취했구려. 이나 노하(老賀)까지도 우노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원래 우순조의 성은 하가였던 것이다. 좌순조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대뜸 쏘아붙였다. "흥, 당신이 나에게 노좌라고 불러서 나 역시 노우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어째 잘못이란 말이오?" 우순조는 좌순조가 억지를 부리듯 말하자 정말 술이 취했구나 하고 생각하며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노형, 정말 오늘밤 정신이 없구려. 노형은 원래 성이 좌가이지만 형제의 성은 우가가 아니지 않소? 그러면시도 오늘 따라 매우 취해 억지를 부리는구려." 이때 좌순조는 아차하며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태연을 가장하며 여전히 냉소를 치며 불만의 뜻을 표했다. "흥,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상관치 않소. 다만 노형이 우순조이니 기어코 노우라고 부를뿐이오." 우순조는 더 이상 말하면 어떤 트집이 나올까 두려워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 알았소. 그런데 노형은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이끌고 여기까지 오셨소?" 좌순조는 양미간 사이에 음산한 빛을 띠며 대답했다. "후후…… 바로 노형을 찾으러 왔지요." 우순조는 약간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는 거요?" 좌순조는 사방을 둘러보더니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나는 원병을 청하려고 찾아왔소." 그러자 우순조의 얼굴에는 가벼운 경악의 빛이 스치더니 그의 수염까지 꿈틀거렸다. "아니, 그럼 그들의 무공이 매우 무섭다는 말이오?" 좌순조는 침중한 빛을 띠며 다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휴우…… 무서울 뿐만 아니라 하마터면 내 모가지도 날아갈 뻔 하였소." 우순조의 얼굴에는 다시 아까보다 짙은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또한 그의 두 눈동자도 어둠 속에서 신공을 발하듯 무섭게 번득였다. "음, 그렇다면 노형은 왜 교주께 보고를 올리지 않았소?" 그러자 좌순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매우 난처한 듯 대답했다. "아니, 내가 약간의 단서라도 잡아야 보고를 올릴 수 있지 않겠소? 그들은 정말 어떻게 된 자들인지 도무지 나도 그 내력을 종잡을 수 없었소." 우순조는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한데 고정되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좌노형의 실력으로도 그들의 무공 내력을 알아낼 수 없었다는 말입니까?" 좌순조는 어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내려가자마자 즉시 십여 명에게 포위를 당해 공격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 무공 내력을 알아낼 틈이 있었겠습니까?" 우순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좌순조의 말뜻을 알아차린 듯 슬쩍 물었다. "지금 좌노형은 나와 함께 가서 잡자고 하는 말이오?" 좌순조는 순간 그가 알지 못하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그럼 나더러 무엇을 도와 달라는 거요?" 좌순조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 뜻은 다만 그들과 싸울 때 노형께서는 구경만 하시면 된다는 말입니다." 우순조도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듯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러니까 바로 나더러 노형이 그들과 싸울 때 그들의 무공 내력을 알아내라는 말이군요?" "그렇소. 바로 그 뜻이오. 그렇게 해서 약간의 무공 내력이라도 알아내어 칠주께 보고를 올려야 곤란하지 않을 게 아니오?" 우순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허락한다. "좋소. 그럼 우리 함께 갑시다." 하고는 뒤에 있는 졸개에게 분부를 내렸다. "우일, 본좌가 갔다가 금방 올 터이니 넌 여기서 잘 지키고 있어야 한다." 우일이라 불리운 졸개가 즉시 대답하자 우순조는 좌순조를 향해 다시 물었다. "자, 갑시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소?" 좌순조는 즉시 대답했다. "예, 두 번째 지혈과 세 번째 지혈에 전부 다 놈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의 지혈에 있는 놈들의 무공이 좀 높지만 노형이 옆에서 도와준다면 별 탈을 없을거요." 그러자 우순조는 어이가 없는 듯 냉소를 터뜨리며 되물었다. "아니, 좌노형, 아까는 형제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소?" 좌순조는 금세 미안한 듯 멋적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그것은 만일이란 경우를 두고 얘기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주께 놀라움을 끼치지 않고 그들을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구나 만약 우리가 그들을 손수 잡지 못하고 교주께 도움을 청해서 그들을 잡았다면 우리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우순조는 그 말을 듣자 웃으며 즉시 찬성한다. "좋소, 옳은 말이오. 제가 기꺼이 도와 주겠소." 좌순조는 즉시 읍을 하며 낮게 웃었다. "고맙소. 나는 다만 감사할 따름이오!" "자, 가자!" 졸개들은 즉시 두 사람을 따라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 갔다. 이렇게 캄캄한 밤에 무슨 장례 행렬을 짓듯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은 줄을 지어 행진했다. 이렇게 한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좌순조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 우노형과 형제 두 사람으로 그들을 잔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우순조는 약간 기분이 상한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좌노형과 내가 그들을 잡을 수 없다면 교주께 보고를 올려 다른 고수들을 더 파견하라고 보고를 올리면 되지 않소?" 그러자 좌순조는 걸음을 멈추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나는 우노형의 명성을 손상시킬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우순조는 뜻밖의 말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다그치듯 물었다. "아니, 좌노형, 그게 무슨 말이오?" 지혜와 힘 좌순조는 키득거리며 웃더니 짐짓 말하기가 거북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히히…… 형제는 우노형이 그들을 상대하지 못할까봐 하는 소리요." 우순조는 원래 기분이 좀 나빳었는데 좌순조가 다시 이 말을 하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좌노형,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좌순조는 키득거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만약 우노형께서 믿지 못하겠다면 한 번 시험해 보시겠소?" 우순조는 여전히 노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격분해서 물었다. "무엇을 말이오?" '게가 아까 여섯 명을 잡았는데 그들을 데리고 노형이 한 번 시험해 보라는 뜻입니다." 우순조는 냉랭하게 코방귀를 뀌었다. "흥, 그럼 노형은 그들을 시켜 나를 한 번 시험해 보겠다는 뜻이오?" 좌순조는 히죽이 웃으며 어깨를 들먹였다. "히히히…. 아니오. 형제의 뜻은 단지 노형께서 그들의 알아내라는 말이오." 하고는 우순조의 앞뒤 양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우리의 형제들이 이렇게 앞뒤를 지키고 있으니 노형은 안심하시오. 그들은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니." 좌순조의 뜻은 물론 세 명의 죄인을 두고 얘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을 다시 음미해 보면 바로 우순조가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무섭게 암시하는 말이었다. 우순조가 앞뒤 양쪽을 보니 과연 사방에는 전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매우 불쾌하여 분노가 치밀어 대뜸 소리쳤다. "좌노형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바로 나를 골탕먹이려고 하는 짓이 아니오?" 좌순조는 갑자기 쉰 듯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원, 천만에 말씀을. 형제가 이렇게 하 는 뜻은 다만 우리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짓이지요." 이때 우순조는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변한 것을 보자 즉시 좌순조를 주의깊게 응시하며 물었다. "당신은 좌장생(左長生) 이 아니오?" 좌순조는 피식하고 싱겁게 웃으며 원래 좌장생의 목소리를 내었다. "누가 아니라고 했소?" 우순조는 아무래도 이상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아까 형의 음성이 좀 이상했는데……?" 좌순조는 다시 쉰 듯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아마 내 목구멍이 좀 이상해서 그런가 봅니다." 그렇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목구멍이 이상하게 되었다는 증거다. 그래서 우순조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순조가 좌순조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뒤로 갑자기 몇 사람이 전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왔던 것이었다. 우순조는 안색이 싹 변하여 급히 뒤로 물러났다. "좌장생. 그들은 대체 누구요?" 좌순조는 그를 향해 괴이하게 웃으며 싸늘하게 눈을 빛냈다. "내가 아까 얘기하지 않았소. 이들이 바로 내가 잡아온 여섯 명의 죄인이라는 것을." 우순조는 여섯 명의 죄인이라는 소리를 듣자 다시 살펴보니 다섯 명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즉시 한 명이 자기 뒤에다가 왔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돌리곤 했다. 때는 이미 늦었다. 이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벌써 일 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우순조는 눈 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껴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즉시 뚫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가 두어 걸음 나갔을 때 벌써 한 여자의 날카로운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돌아갓!" 하는 소리와 함께 재빠른 일 장이 그의 정면을 향해 후려쳐 왔다. 우순조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기네 졸개 중에 여자가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여자가 일 장을 격출해오자 냉랭하게 웃으며 왼손으로 그 일 장을 마주쳐 갔다. 우순조의 생각으로는 여자니까 감히 자기의 일 장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으악!" 하고 비명 소리가 앞뒤를 다투며 울리고 우순조는 연신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 의외의 결과에 우순조는 분통이 터져 부드득 이를 갈며 오른손으로 신속히 자기의 허리춤을 만졌다. 그러나 자기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채찍은 벌써 종적도 없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 좌순조가 이죽거리고 웃으며 그의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우노형, 채찍을 찾고 있소? 채찍은 여기에 있는데……." 우순조가 급히 좌순조를 보니 과연 자기의 채찍을 휘두르며 어깨까지 들먹이고 자기를 비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순조는 벌컥 화를 내며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좌장생, 너 미쳤느냐? 감히 적들과 내통을 하나니, 정말 죽고싶은 모양이구나!" 그러자 좌순조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태연하게 말했다. "노형, 당신이 입고 있는 옷만 벗어주면 나는 아무 일도 없다 것을 보장하겠소." 우순조는 다시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며 그를 향해 덮쳐갔다. "이놈, 감히……." 좌순조는 그 자리에서 서서 연신 키들거리며 웃었다. "우노형, 나는 잠깐 노형의 옷을 빌리자고 했을 뿐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시오?" 우순조는 의외로 좌순조가 피하지 않는 것을 보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즉시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놈, 죽어랏!" 하고 즉시 갈고리 같은 열 개의 손가락으로 좌순조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 었다. 우순조의 손가락이 막 좌순조가 쓰고 있는 머리의 두건에 닿으려는 순간, 좌순조는 살짝 머리를 돌리며 번개처럼 한 손으로 우순조의 허벅다리를 찔렀다. 우순조는 급히 피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그대로 허벅다리에 일 격을 얻어맞고 수 장 밖으로 날아가 땅에 곤두박혔다. 이 순간, 벌써 정신도 차리지 못한 사이에 서너 명의 그림자가 덮쳐왔다. 그러자 그들 중 아까와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냉랭하게 울렸다. "그를 생포하랏!"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일지가 찔러왔다. 일순간에 우순조는 다만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온 눈알을 멀뚱멀뚱 굴리며 보기에도 딱할 만큼 우리에 갇힌 호랑이 꼴이 되어 버렸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그러자 좌순조가 키득거리며 다가왔다. "히히…… 우노형, 얌전하게 있으시오. 지금 당신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 바로 무림맹주 제부인이오. 알겠소?" 우순조는 즉시 아까 자기에게 일 장을 내질러 오던 체격이 작은 흑의인을 응시하며 날카롭게 물었다.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오?" 다시 그 흑의인 대신 좌순조가 대답했다. "노형께서. 우리와 합작을 하기만 하면 우리 무림맹에서는 절대로 노형을 섭섭하게 대하지는 않겠소." 우순조는 둘러선 사람들을 훑어보며 이미 각오를 한 듯 의외로 순순히 나왔다. "나더러 어떻게 합작을 하라는 말이오?" 좌순조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후후…… 노청은 다만 우리를 음빙지옥으로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되오." 우순조는 매우 의혹에 찬 눈을 굴리며 물었다. "당신은 좌장생이 아니지요?" 그러자 좌순조는 약간 언성을 높히며 검미를 찌푸렸다. "어째서 아니라고 하오?" 우순조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노형께서는 비록 그와 비슷하게 변장을 했지만 그러나 절대 좌장생은 아니오." 좌순조는 여전히 검미를 찌푸린 채 대꾸했다. "그럼 아니라고 치겠소. 그러나 어서 음빙지옥이 있는 곳을 대시오." 우순조는 이번에도 순순히 대답했다. "음빙지옥은 바로 앞에 보이는 귀문관 안에 있소." 좌순조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다가 다시 우순조에게 시선을 돌렸다. "노형, 우리와 합작하기로 아까 말했소." 우순조를 고개를 흔들며 실소를 날렸다. "제가 합작을 하기로 했지만 들어갈 수는 없소." "어째서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오?" 우순조는 냉랭하게 웃었다. "기문관에 들어가려면 교주의 귀첩(貴帖)이 있어야 합니다." 좌순조는 매우 간단한 일이라는 듯 자신있게 말했다. "호관주를 납치하면 되지 않겠소?" 우순조는 깜짝 놀라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 되오. 그것은 더욱 가망이 없소." 좌순조는 일순 무겁게 한숨을 토하더니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한 번 시험을 해 보아야 되지 않겠소?" 우순조도 그길 밖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죠. 그리고 부인께서 저를 죽이지 않았으니 응당 여러분을 도와 드려야지요." 그러자 주설란은 가볍게 왼손으로 휘둘렀다. "고마워요. 자, 그럼 일어나세요." 이때 우순조는 갑자기 선선한 미풍이 자기 몸에 스쳐오는 것을 느꼈는데 어느 틈인지도 모르게 혈도가 풀어지자 그는 몹시 경악하여 마음 속으로 감탄했다. "가볍게 손을 흔들기만 해도 혈도를 풀 수 있으니 과연 보통 솜씨가 아니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즉시 일어나 주설란에게 읍을 했다. "감사합니다. 부인, 속하는 끝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좌순조도 수중의 채찍을 건네 주었다. "자, 그럼 노형도 노형의 병기를 받으셔야지요." 우순조는 채찍을 받자 즉시 허리춤에다 다시 찼다. "갑시다." 이번에는 좌순조와 우순조 두 사람이 앞장을 서서 걸었다. 열여덟 명의 졸개들은 여태껏 아무 말도 없이 압송하면서 뒤를 따랐다. 얼마 쯤 걷다가 좌순조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노형, 노형은 귀문관 안의 사정을 잘 알고 있소?" 우순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소. 이 귀문관 안은 호관주가 지키고 있는데 교주의 귀첩이 없는 한은 절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호관주? 호관주가 어떤 사람이오?" 우순조가 대답했다. "그는 바로 호조량(胡兆良) 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좌순조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음, 바로 옛날의 흑산묘(黑山描) 호불량(胡不良) 이라는 자로군" 우순조는 약간 놀라며 물었다. "노형께서는 그를 잘 알고 계십니까?" 좌순조는 앞으로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저었다. "잘은 모르오." 이어 그는 생각난 듯 다시 물었다. "참 그런데, 사대음조 중의 또 한사람은 누구요?" "음세총관 음천리(陰干里)요." 좌순조는 침중한 어조로 내뱉듯 말했다. "음, 그놈도 여전히 죽지 않았군." 우순조도 감개가 무량한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는 교주의 수하로 들어온지가 벌써 칠팔 년이나 되었소. 어떻게 생각하면 긴 세월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짧은 세월이었지만…." 말하는 도중 일행은 벌써 광장에 도착했다. 우순조는 광장에 들어서자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앞에 보이는 것이 바로 귀문관입니다. 하지만 우리 좌우순조들은 여기까지 밖에 오지 못합니다. 여기의 왼쪽은 좌형이 책임을 지고 있고 오른쪽은 바로 제가 지키고 있습니다." 좌순조는 그의 말에 따라 앞을 살펴보았지만 캄캄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귀문관엔 문이 있을 텐데……?" "예, 문은 천연 절벽에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으므로 자세히 보지않고는 잘 알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하며 다시 십여 장을 더 걸어가니 과연 절벽에 매우 교묘히 만든 검은 문이 있었다. 우순조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제가 지금 문을 열게 할테니 빨리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물을 다시 닫는다면 들어갈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알겠소." 우순조가 한 발 다가서며 석벽 위에 있는 고리를 잡으려고 하자 급히 좌순조가 제지한다. 우순조는 고리를 잡으려다 말고 돌아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내가 속임수를 쓸까봐 그러시오?" "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지금 나는 어떤 한 가지의 일을 생각해 냈기 때문이오." 하고는 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몇 마디 속삭였다. 우순조는 그럴 듯한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에 있는 기승을 향해 명령했다. "동삼호, 네가 가서 열라고 해라." 기승이 대답하는 순간 우순조가 그에게 다시 몇 마디 당부를 했다. "올라가서 고리를 잡아당기되 세 번을 틀리지 않게 잘 잡아 당겨야 한다." 기승은 즉시 대꾸했다. "알았습니다." 하고는 즉시 우순조가 가르쳐 준대로. 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삐꺽-." 하는 소리와 함께 석벽 위에 구멍이 생기더니 곧 못생긴 머리가 나오며 즉시 물었다. "너는 누구냐?" 기승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동삼호입니다." 석벽 안의 사람은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냐?" 기승은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관주께 좌우 순조가 왔다고 전해 주시오." 석벽 안의 사람은 기승의 뒤에 서 있는 몇 사람을 응시하더니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 언제 누구냐고 물었느냐?" 기승은 잊었다는 듯 뒤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좌우 순조께서 죄인을 잡아 왔으니 관주더러 점검을 해보라고 하시오." 그 사람은 기승과 몇 사람을 다시 휘둘러 보더니, "잠깐 기다리시오." 하고는 즉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좌순조는 벽 사이를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도대체 문틈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자 우순조는 마치 주위를 주듯 엄중하게 지시했다. "조금 있다가 좌노형은 조심해서 상대해야 합니다." 좌순조는 의미있게 싱긋이 웃어보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우순조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한 마디 다시 덧붙였다. "호조량의 솜씨는 대단합니다." 좌순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마 되지 않아 쇠가 바닥에 끌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하나의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좌순조는 이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경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 땅바닥에 철판을 깔아서 출입을 하게 만들었구나. 정말 놀라운 일인데……." 좌순조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벌써 관복 차림을 한 사람이 앞서 등불을 들고 나오자 그 뒤를 따라 온 얼굴에 밤송인 같은 수염을 기른 한 흑포인과 뒤이어 네 명의 흑의경장 대한이 나타났다. 이 흑포인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호관주인 것이다. 호관주는 생긴 모습이 마치 야산에 뛰어 노는 들고양이처럼 포악하게 생겨 두 눈까지도 고양이를 닳은 듯했다. 호관주는 좌순조의 앞까지 오자 생긴 것과는 달리 공손히 읍을 하며 물었다. "두 분께는 어떠한 자들을 압송해 오셨습니까?" 우순조가 즉시 대답했다. "듣자하니 무림맹의 호법들이라 합니다. 이놈들은 무공이 강하여 아까 만약 신영주께서 없었다면 교주님까지도 이놈들에게 당할 뻔했습니다." 호관주는 여섯 명의 죄인을 훑어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게 무서운 무공을 가진 자들인가?" 그는 다시 우순조에게 시선을 돌리어 물었다. "교주께서 이곳으로 압송하라고 지시를 하셨습니까?" 좌순조가 대신 나서며 대꾸했다. "예, 바로 이곳 음빙지옥으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호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뜻 길을 비켜섰다. "좋소, 데리고 들어 오십시오." 좌순조는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즉시 뒤를 향해 외쳤다. "자, 죄인들을 즉시 호관주께 보내라!" 졸개들은 즉시 대답하더니 여섯 명의 죄인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호관주도 즉시 자기 뒤에 서 있는 네 명의 경장대한을 향해 분부했다. "자, 너희들도 죄인을 인수하라!" 호관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좌순조는 깜박 잊었다는 듯 갑자기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참, 호형, 교주께서 또 한가지의 긴급 명령을 내리며 형제더러 호관주께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호관주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대뜸 소리를 질렀다. "좌혈, 어째 잊었소? 여기는 교주의 귀첩이 없는 한 누구도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오!" 좌순조는 갑자기 안색을 굳히더니 차가운 어조로 내뱉았다. "그렇다면 호형은 지금 제가 교주의 명령을 받고 왔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우순조도 덩달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아까 교주께서는 확실히 좌형께 호형에게 전달하라는 긴급 말씀이 계셨습니다." 호관주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하며 어째 예감이 이상하다고 느껴 뒤를 돌아보니 응당 죄인을 인수했으면 들어가야 한 자기 수하 네 명이 여전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즉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등 뒤 영대혈이 마비되고 말았다. 좌순조는 통쾌한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핫! 호형, 이것이 바로 교주의 명령이오. 자, 우리 이제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하고는 왼손으로 다정하게 호관주의 손을 잡은 듯이 꾸며 지하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우순조도 따라 웃으며 넌지시 한 마디 했다. "하하하……교주님의 귀한 심부름꾼이니, 우리들은 또한 이 길이 처음이니 호형께서는 아마 안내를 잘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일행들은 즉시 뒤따라 내려갔다. 좌순조와 우순조는 호관주를 납치해서 약 십여 계단을 쫓아 내려 가는 데 갑자기 오른쪽의 석벽 사이에 있는 하나의 작은 문에서 한 흑의인이 나타나며 소리쳤다. "관주, 문을 닫으시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한 명의 졸개가 그의 혈도를 찌르자 그는 즉시 쓰러지고 말았다. 우순조는 그 졸개가 어느 틈에 손을 썼는지 보지 못했으므로 내심 매우 감탄을 올렸다. "과연 무림맹에는 고수들이 많구나. 정말 놀랍구나." 좌순조는 그 흑의인이 쓰러지자 그 문을 가리키며 즉시 지시했다. "동삼호, 이 관주는 네가 지켜라." "속하는 어떻게 열고 닫는지 모릅니다." 자순조는 약간 검미를 찌푸리며 일일이 설명을 했다. "이것은 기관 중에도 제일 간단한 기관이다. 이 안에는 하나의 철록이 있는데 자네는 그것을 거꾸로 돌리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열고 닫을 수 있다." 그러더니 기승의 눈치를 살피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해약은 일이 끝난 후에 내주겠다." 기승은 좌순조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을 듣자 즉시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당신은 금모모가 아닙니까?" 좌순조는 소리없이 웃었다. "물론 아니지. 하지만 자네는 내게 해약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시키는 대로 충실히 일을 해 주기만 하면 되네." 하며 기승에게 전음입밀로 몇 마디 무엇인가 재차 당부를 했다. 기승은 금세 표정이 밝아지더니 즉시 오른쪽의 작은 문을 향해 들어갔다. 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다시 계단을 따라 쉬지 않고 백여 칸을 내려가니 한 칸의 넓은 석실이 일행의 앞을 가로 막았다. 넓은 석실의 가운데 긴 상이 놓여 있고 상 위에는 붓과 먹 등의 물건이 있었고 좌우 양쪽에는 병기와 몇 가지 죄인을 고문하는 도구가 놓여 있었다 여기가 바로 호관주가 평상시 일을 처리하는 곳이었다. 좌순조는 호관주를 상 앞에다 내려 놓으며 말했다. "자, 호노형은 여기에서 좀 쉬십시오. 나는 이제 끌고 다니기가 힘이 드니……." 그리고는 또다시 주설란을 위해 의자를 끌어 내었다. "부인께서도 힘드실 텐데 앉으십시오." 주설란은 원래 하찮은 졸개로 변장을 하고 있었다. 주설란은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저는 피곤하지 않아요." 그러더니 호관주를 가리키며 물었다. "소불이, 이 사람을 이제 어떻게 하죠?" 그렇다. 이때 소불이가 여태까지 금모모에서 좌순조로 변장을 했던 것이었다. 소불이는 눈으로 호관주를 가늠해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예, 지금 이 늙은이의 뜻으로는 호관주의 혈도를 풀어준 후 그가 우리 무림맹에 가입할 뜻이 있다면 살려주고 만약 그럴 마음이 없다면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나올 것입니다." 주설란은 두 눈썹을 약간 찌푸리더니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소법의 말씀이 맞아요. 그럼 호법의 뜻대로 처리하세요." 소불이는 고개를 돌리며 두경강을 향해 다시 물었다. "두노형은 어떤 고견이 없습니까?" 두경강은 의미있게 웃더니 넌지시 꼬집었다. "후후…… 당신은 순조이고 나는 한낱 졸개 밖에 되지 못하는데 어째서 감히 다른 뜻을 내보이겠습니까? 하하하……."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소리를 높여 물었다. 이때 당승무가 답답한 듯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소노인장, 이제 변장을 떼어도 되겠지요?" 소불이는 웃다 말고 즉시 눈썹을 치켜 떴다. "안 된다. 일을 완수하려면 아직도 멀었으니 계속 변장을 해나가야 한다." 당승무는 불만인 듯 한숨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우리는 이제 호관주도 벌써 잡았고 또 우리의 행적도 탄로가 났을 텐데 더 이상 변장을 해서 무엇합니까?" 소불이는 조금 언성을 높여 꾸짖듯 말했다. "그래도 안 된다. 이 이유는 조금 있으면 노제도 알게 될 테니 쓸데 없이 투덜거리지 말고 가만 있어라." 당승무는 소불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를 하자 심자귀를 향해 물었다. "심선배님께서도 그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심자귀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소노형은 약간 노련한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그 깊은 속을 추측해 낼 수 있겠나?" 이때 매우 오랫만에 정첩후가 나서며 한 마디 했다. "나는 정말 소노형의 기지에 탄복하고 있소이다." 그러자 두경강이 대소를 터뜨리며 다시 넌지시 말했다. "하하하…… 그렇군요. 그런데 소노형, 기쁘지 않소? 노형에게 탄복하는 사람까지 다 있으니." 그러나 소불이는 짐짓 엄숙하게 눈썹까지 찌푸리며 냉소를 날렸다. "흥, 나는 당신들과 쓸데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싶지 않소. 그리고 이 늙은이는 이제부터 진짜 해야 할 일을 좀 하겠소." 하고는 뒤도 한 번 돌아다 보지 않고 곧장 호관주의 앞으로 걸어가 일 장으로 그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호관주, 우리가 바로 무림맹의 사람이라는 것을 다 들으셨겠지?" 호관주는 이때 비록 혈도를 제압당해 있었지만 소불이 등 사람들의 대화를 다 들었다. 그는 혈도가 풀어지자 즉시 의자에서 일어나 팔다리를 움직여 보며 대답 대신 되물었다. "당신은 내가 도망갈 것을 두려워 하지 않소?" 소불이는 가볍게 웃으며 어림도 없다는 투로 얘기했다. "후후…… 호불량, 당신에게 그런 재주만 있다면 어서 도망쳐 보십시오. 내가 생각하기로는 당신이 여기서 두 발자국만이라도 도망칠 수 있다면 잘 도망친 것이오." 호관주는 소불이가 단번에 자기 이름 석자를 대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귀하는 누구요?" 소불이는 음산하게 웃으며 도리어 되물었다. "호관주가 보기엔 내가 누구인 것 같소?" 호관주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알 듯 모를 듯한 음성으로 더듬대며 물었다. "호…… 혹시 소불이, 소노형이 아니시오?" 소불이는 대뜸 광소를 터뜨리며 매우 통쾌해 했다. "으하하하…… 호관주의 기억력도 매우 대단하구려. 십여 년 전의 일을 다 기억하다니…… 그때 나는 당신에게 말하기를 만약 호노형의 이름을 호불량으로 바꾼다면 나 소불이와 당신은 형제를 맺겠다고 했었지요." 호관주는 매우 반가운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런데 지금 당신이 호불량이라고 부르니 나를 여태껏 호불량이라고 부른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는 즉시 소불이 당신이라고 생각해 낼 수 있었지요." "후후…… 그런데 지금 내가 한 말에 대해 호노형의 생각은 과연 어떠하시오?" 호관주는 약간 머뭇거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우린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불이는 우순조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하노형께서도 벌써 무림맹에 가입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노형도 본맹에 가입하기를 바라오." 호관주는 그 말을 듣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림맹? 저는 처음 듣는 소리인데?" 소불이는 어흠 하고 짧은 기침을 하더니 의젓하게 설명을 했다. "본 무림맹은 최근에야 창립된 파요. 이 뜻은 강호의 각대 문파와 연합해서 무명도와 대적을 하기 위해 창립된 파입니다." 호관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상한 점이 있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노형 등의 사람이 무슨 일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까?" "우리는 바로 사람을 구하러 왔소." "아니, 누가 귀문에 갇혔습니까?" 소불이는 약간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저의 친구 소노반 사마장홍과 흑석도의 정영, 그리고 본맹총호법의 여제자 양수분 낭자, 그리고 낙양의 소맹상인 초숭생 남매가 모두 이 음빙지옥에 갇혀 있소이다." 호관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빙지옥에 확실히 몇 사람이 감금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나는 잘 모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여기에 보내올 때 음총관께서 그들의 이름 대신 번호를 붙여 주었기 때문이지요." 이때 갑자기-. "뎅, 뎅, 뎅." 하는 가느다란 어떤 신호 같은 경종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소불이는 매우 기뻐하며 소리쳤다. "아, 과연 왔구나!" 호관주는 영문을 몰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누가 왔다는 겁니까?" 이렇게 묻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기승이 달려와 소불이에 보고한다. "주교주께서 신영주를 데리고 와서 관주더러 마중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호관주는 깜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엇이 교주라고?" 소불이는 호관주의 손을 잡아 끌며 엄중하게 타일렀다. "호형, 빨리 마중하러 나가시오. 그리고 실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알겠지요?" 하더니 기승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 너는 빨리 가서 문을 열어 드려라!" 기승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소노형, 그럼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소불이는 낄낄거리고 웃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호형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들어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자, 빨리 나가시오." 하고는 주설란을 향해 물었다. "신교교가 왔으니 부인께서 몸소 그녀를 상대해야겠습니다." 주설란은 야무지게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는 호관주를 따라 가겠어요." 소불이는 다시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엄명을 내리듯 일렀다. "그리고 심형, 정영, 또 당노제, 세 사람도 모두 호형의 수하로 변장을 해서 호형을 따라 가시오. 그리고 만약 신교교가 눈치를 채었다고 생각되면 아무런 내색도 내지 말고 일단 이 안으로 유인을 한 다음에 손을 쓰기로 합시다. 모두 알아 들으셨지요?" 정첩후와 당승무는 고개를 끄덕였고 심자귀는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잘 알겠소." 여섯 명의 죄인 소불이는 호불량을 주시하며 급히 서둘렀다. "호형! 조금도 지체할 필요 없으니 어서 가시오." 호관주는 하는 수 없이 주설란 등 네 사람을 데리고 위로 올라갔다. 소불이는 급히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더니 몸을 숨기라는 지시를 한 다음 불을 껐다. 이때 문이 서서히 열리고 호관주가 두 명의 졸개의 인도 아래 계단을 밟고 나갔다. 망산귀수의 뒤에는 백면을 한 청삼문사가 서 있었다. 또한 그의 좌우에는 두 명의 졸개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호관주가 망산귀수를 향해 급히 다가가더니 포권을 하며 허리를 굽혔다. "속하 호불량이 교주께 인사를 드리옵니다." 망산귀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신교교를 향해 손짓을 했다. "호관주, 어서 무명도의 신영주에게 인사를 드리시오." 호관주는 아직 신교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만미천호라는 이름은 전부터 들어왔던 것이다. "속하 신영주에게 인사를 드리옵니다." 그러나 신교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냉랭하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호관주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으나 욕을 하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이를 갈아붙였다. '오만한 계집년 같으니라고, 인사까지도 거절을 하다니……' 옆에 서 있던 망산귀수가 호관주를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호관주! 혹시 안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소?" "조금 전 좌순조가 여섯 명의 죄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망산귀수는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그쳐 물었다. "좌장생이 데리고 온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오?" 호관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섯 명의 죄인들에게는 이미 번호를 붙여 주었기 때문에 속하도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망산귀수는 길게 한숨을 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들은 대체 어디에 감금을 시켰소?" 호관주는 망산귀수와 신교교를 한 번씩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대답한다. "이미 음빙지옥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망산귀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갑자기 안색이 변하여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틀렸다! 틀렸어……." 호관주는 깜짝 놀라 암암리에 즉시 진기를 끌어올리며 다음 일에 준비를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급히 물었다. "속하가 한 일에 대해서 어디가 틀리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망산귀수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음총관이 노부에게 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속임수가 있을 것이오." 호관주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다시 물었다. "예! 하지만 무엇 때문에 저도 모르게 했습니까?" 망산귀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언성을 높였다.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앞장을 서시오. 이 노부가 몸소 가서 자세히 살펴보아야만 하겠소." 호관주는 망산귀수가 이렇게 신중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자 더욱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재차 물었다. "지금 음빙지옥에 갇혀 있는 그 여섯 명의 죄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봐 그러십니까?" 망산귀수는 급히 걸음을 옮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으니 우리 들어가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호관주는 급히 허리를 굽히며 앞장을 섰다. "그렇다면 교주님! 빨리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망산귀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두 번 끄덕이더니 신교교를 향해 손짓을 했다. "신영주께서 저의 앞에 서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교교는 예의를 차리지도 않고 앞장을 서서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이때, 푸 명의 졸개들도 급히 등불을 밝혀 들고 앞장을 섰다. 망산귀수가 신교교의 뒤를 따랐으며 호관주와 두 명의 졸개들은 망산귀수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밟고 내려간지 얼마 안 되어서 철문은 다시 닫혔다. 신교교가 앞장을 서서 가고 있을 때 어디선지 약간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우가 들어온 것 같으니 조심을 하시오." 신교교는 주저하며 급히 몸을 돌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입을 열었던 사람이 누구냐?" 뒤를 따르고 있던 망산귀수는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직하게 대답을 했다. "아무도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신교교는 역시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누가 전음입밀로 말을 한 것 같았는데……." 신교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상한 목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저 여우의 털은 괜찮은 것 같소. 우리가 잡아서 재미를 좀 본 다음 가죽을 벗겨서 팔아도 이삼십 냥의 은자는 충분히 받을 수가 있을 것 같은데……." 또다시 카랑카랑한 음성이 신교교의 귓전을 스쳤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소. 저 여우는 어떻게 되어서 저렇게 꼬리가 많이 달렸지." 또 다른 사람이 나서며 역시 전음술로 큰 소리로 웃어젖히더니 대답한다. "하하하……그렇기 때문에 저 여우의 별호가 만미천호라고 하지요." 또다시 쉰 듯한 음성이 말을 이었다. "만미천호라면 참으로 좋지, 하지만 결국 한 마리의 노린내 나는 여우일 뿐이오." 신교교는 들으면 들을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양미간을 찌푸린 채 연신 사방을 살펴 보았지만 자기의 일행 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발견하지를 못했다. 하지만 자기의 귓전에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볼 때 사 오명 정도 되는 같았다. 사실 이 몇 가지의 음성은 모두 소불이 혼자서 했던 것이다. 소불이는 지금 기관 장치를 조정하는 밀실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교교 등이 계단을 내려갈 때에 머리를 내밀고 신교교에게 전음입밀의 술법으로써 심리전술을 펼쳤던 것이다. 신교교는 과연 소불이의 계략에 넘어가 쉬지 않고 사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중 말소리의 출처를 찾지 못한 채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또 이상한 것은 그녀가 자세히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면 말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일대의 요녀 만미천호 신교교도 하는 수 없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신교교는 말소리의 출처를 찾아내지 못한 채 순식간에 백여 개의 층계를 밟고 내려갔다. 신교교의 일행이 계단을 완전히 내려섰을 때 오른쪽에서 갑자기 하나의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속하 하지청(賀志淸) 이 교주님을 뵈옵니다." 망산귀수는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몸을 돌렸다. 오른쪽에 과연 우순조 하지청이 네 명의 졸개들을 데리고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망산귀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하순조!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서 여기에 와 있소?" 우순조는 급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속하는 죄인을 보내기 위해서 왔을 뿐입니다." 바로 이때-. 망산귀수가 서 있는 왼쪽에서도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속하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목소리는 좌순조 좌장생의 목소리였다. 망산귀수는 또다시 왼쪽을 향해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왼쪽에는 네 명의 졸개들이 서 있을 뿐 좌순조 좌장생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때, 뒷쪽에 있는 통로에서 한 사람이 황급히 달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사람은 바로 좌순조 좌장생이었으며 그는 바지춤을 두 손으로 끌어올리며 급히 허리를 굽혔다. "속하는 신변에 무슨 일이 있어서 이제서야 교주님께 인사를 드리오니 용서해 주십시오." 망산귀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좌순조요?" 좌순조는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교주님! 제가 바로 좌순조 좌장생입니다." 망산귀수는 좌순조를 똑바로 주시하며 다시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여기에 와 있소?" 좌순조는 그제서야 옷마무리를 하고 공손히 대답했다. "속하 역시 죄인을 보내기 위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망산귀수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흥! 귀문관(鬼門關)은 본교의 금지 구역인데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의 명령을 받았기에 귀패도 없이 함부로 들어왔소?" 황순조는 이 말을 듣고 멍청한 표정으로 우순조를 주시하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 분명히 교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여섯 명의 죄인을 호송하라고 했는데……." 망산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우순조가 나서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교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여섯 명의 죄인은 중요한 인물들이니 좌순조와 함께 압송하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망산귀수는 화를 벌컥 내며 고함을 질렀다. "노부가 언제 당신들에게 죄인을 압송하라고 했단 말이오?" 우순조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나섰다. "조금 전 교주님께서 친히 지시를 하지 않았습니까?" 망산귀수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좌순조와 우순조를 한 번씩 주시하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노부가 당신들에게 귀패를 준 적이 있단 말이오?" 우순조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히려 반문을 했다. "예! 예! 교주님이 주신 귀패가 없었다면 호관주께서 이곳을 통과를 시켜 주었겠습니까?" 망산귀수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몸을 돌려 호관주에게 물었다. "호관주, 당신은 귀패를 본 적이 있소?" 호관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예! 속하도 조금 전 분명히 확인을 했습니다." 망산귀수는 도깨비에 흘린 듯한 표정으로 다시 몸을 돌려 우순조를 향해 물었다. "지금 그 귀패는 누가 가지고 있소?" 우순조는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이 좌순조를 가리켰다. "좌형께서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망산귀수는 다시 좌순조를 주시하며 손짓을 했다. "좌순조! 어서 꺼내 보시오. 이 노부가 직접 보아야겠소." 좌순조는 갑자기 머리를 긁적이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예! 하지만 조금 전 속하가 휴지로써 사용을 해버렸습니다." 망산귀수는 안색이 돌변하여 버럭 고함을 질렀다. "좌장생, 이놈! 함부로 노부를 놀리려 하다니……." 좌순조는 몹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말을 이었다. "만약 교주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속하가 구겨서 버렸으니 직접 가셔서 살펴보시지 않겠습니까?" 망산귀수는 이를 갈아붙이며 좌순조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이 개만도 못한 놈아! 귀패를 함부로 구겨서 버리다니……." 좌순조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용서를 빌었다. "예! 예! 속하가 죽을 죄를 저지른것 같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호관주가 나서며 말을 가로챘다. "교주! 진정하십시오. 여섯 명의 죄인들이 지금 여기에 있으니 교주께서 친히 불러 보십시오." 망산귀수는 검미를 잔뜩 찌푸리며 좌순조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좌순조! 죄수들은 어디에 있느냐?" 좌순조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로 저 안에 있습니다." 좌순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섯 명의 졸개들이 여섯 명의 죄인을 끌고 안에서 급히 걸어나왔다. 여섯 명의 죄인들은 혈도를 제압당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은 걸을 수만 있을 뿐 손과 입을 움직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망산귀수는 과연 강호의 노련한 고수답게 좌우 순조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여섯 명의 죄인들이 혈도를 제압당한 것을 보자 자기의 추측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신교교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망산귀수를 향해 물었다. "주교주! 좌우 순조를 믿을 수가 있겠나?" 망산귀수가 대답도 하기 전에 좌순조가 나서며 말을 받았다. "믿을만 하지요. 신영주께서 만약 속하에게 마음이 있으시다면 저는 천하에서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교교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더니 날카롭게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시오." 좌순조는 갑자기 큰 소리로, "허허허…… 앞으로 당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오."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좌순조는 신교교의 어깨를 향해 번개처럼 일 장을 가격했다. 하지만 이 일 장은 신교교를 놀려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힘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망산귀수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채 큰 소리로 외쳤다. "너는 금모모냐?" 순간-. 신교교가 냉소를 치며 좌순조의 완맥을 향해 번개처럼 반격해 갔다. 신교교의 일 장은 비록 빨랐으나 좌순조의 일 장을 막지도 못했고 오히려 그에게 어깨를 잡히고 말았다. 좌순조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금모모는 아니오. 소생은 좌장생이올시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망산귀수가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좌장생, 너 이놈! 죽으려고 환장을 했느냐?" 좌순조는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빈정거렸다. "저는 색에는 미친 사람입니다." 신교교는 일 장을 헛치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또다시 좌순조의 턱을 향해 일 장을 후려쳤다. "교주! 이 사람은 좌장생이 아니라……." 망산귀수가 대답도 하기 전에,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 있는 두 명의 졸개들이 즉시 장풍에 맞아 쓰러졌다. 또다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좌순조가 상체를 조금 움직이자 만미천호 신교교는 벌써 뒤로 두 발자국 가량 물러났다. 검저비성 신교교는 괴이한 웃음을 띠며 좌순조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어서 진기를 끌어 올려 체내에 이상이 있는가 한 번 살펴보아라!" 신교교는 무명도의 부총영주 수양딸로써 그녀 역시 독을 쓰는 명수였던 것이다. 심지어 탈혼장 방통 같은 독의 명수도 그녀의 독장에 맞고 죽어갔다. 그러나 그녀 역시 방통과 싸울 때에 얼굴을 망쳤기 때문에 항상 면구를 쓰고 다녔다. 하지만 좌순조는 금모모의 흉내를 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독을 한 번도 무서워 한 적이 없었소.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이것을 한 번 쳐다보시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칠흑 같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신교교는 안색이 변하여 여전히 큰 소리로 물었다. "흑살장! 너는 도대체 누구냐?" 이때 좌순조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의 뒤에서는 몹시 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바보 같은 년아! 오늘이 아마 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신교교의 뒤에는 한 명의 흑의 졸개가 단검을 치켜든 채 뜻밖에도 살기에 가득찬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신교교는 고개를 돌려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냉랭하게 물었다. "도대체 네놈은 나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느냐?" 졸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이를 갈아붙였다. "네년이 바로 나의 사부를 죽인 원수다!" 하지만 신교교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흥! 어느 놈인가 했더니 네놈이 바로 사천당문의 유일한 생존자였구나!" 당승무는 금방이라도 씹어 삼킬 듯한 눈초리로 신교교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그렇다! 이 개만도 못한 년아! 내가 바로 자의교주 염지천의 문하 당승무다!" 신교교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낭랑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호호호…… 방통을 죽인 사람은 바로 나다. 하지만 나는 명령을 받고 그를 죽였을 뿐인데 왜 나를 탓하느냐?" 그러나 당승무는 조금도 누그러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알았다. 그렇다면 사부를 죽이라고 명령을 했던 놈을 도대체 누구냐?" 신교교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흑의당주 방통이 배반 했으니 명령을 내린자는 물론 도주였겠지." 당승무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흥! 하지만 네년도 흥수 중의 한 사람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 네년부터 처치해 버릴 생각이다." 그러나 신교교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무서운 놈이구나. 좋다. 만약 네놈에게 나를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 호호호……호호호……." 당승무는 이만살을 잔뜩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닥쳐라! 이년!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무기를 꺼내라." 신교교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두서너 번 끄덕이더니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접선을 흔들었다. "이것이 바로 잠시 후에 너를 없애 버릴 무기이다." 이때, 당승무는 갑자기 단검을 앞으로 내밀더니 고개를 들어 허공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사부님! 오늘 제자 당승무가 사부님의 피맺힌 원한을 통쾌하게 풀어 드리겠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신교교가 또다시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호호호…… 호호호…… 하지만 네놈이 나의 양 다리 사이로 잘못 기어 들어오면 그때는 큰일 날 것이다." 당승무는 오른손에는 단검을 꼰아쥔 채 그녀를 노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쓸데 없는 개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일 장을 받아랏!" 말을 끝내자마자 당승무는 왼손을 밖으로 향하게 하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단검으로 쏴악! 하는 소리와 함께 신교교의 가슴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신교교는 철골접선으로 검세를 가볍게 막고 당승무의 왼손을 피하기 위해 급히 진기를 끌어 올려 뒤로 두 자 가량 다급히 물러났다. 그녀는 당승무를 한 번 쳐다보더니 갑자기 냉소를 날렸다. "흥! 과연 실력이 좀 있는 것 같구나." 말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접선을 급히 펴들었다. 순간-. "쏴악! 쏴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당승무를 향해 비호처럼 덮쳐갔다. 당승무는 두 눈을 부릅뜨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잘 왔다! 이년! 네년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겠다." 그리고는 몸을 피하지도 않고 상체를 약간 숙이더니 왼발로 신교교의 복부를 향해 번개처럼 질러갔다. 이때, 신교교는 얼굴을 붉히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버릇 없는 놈아! 감히 어디를 함부로 공격하느냐?"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급히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때 망산귀수는 두 명의 졸개가 갑자기 쓰러진 것을 보자 몹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했다. "어느 놈이 감히 노부의 문하를 암살했느냐?" 지금 이 석실의 사방에는 좌우 순조를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의 졸개들이 좌우로 해서 망산귀수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망산귀수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은 신교교의 실력으로 상대방의 졸개와 팽팽한 국면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 한 명의 졸개가 뛰어 들어오더니 망산귀수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주우천! 잘 들어둬라! 맹주 부인께서 친히 고수들을 데리고 오셨으니 어서 포박을 받아라!" 망산귀수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네놈들은 도대체 어떻게 할 속셈이냐." 이때, 한쪽에 서 있던 좌순조가 갑자기 나서며 말을 꺼냈다. "간단하다. 어서 포박을 받고 제부인의 선처를 기다려라!" 망산귀수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물었다 "만약 노부가 포박을 받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좌순조는 부드득 이를 갈며 고함을 질렀다. "그 자리에서 당장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다." 망산귀수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휘둘러 보더니 냉랭하게 물었다. "너희들은 많은 사람으로 나와 상대를 하려고 하느냐?" 좌순조는 손을 급히 흔들며 여러 사람을 가르켰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이 많은 사람중에서 당신이 상대하기 쉬울 것 같은 사람을 마음대로 하나만 고르시오." 그러자 망산귀수는 여러 사람을 둘러보며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렷다. "허허허…… 허허허…… 당신들이 노부의 유명계에 걸려 들지 않았다면 문제가 좀 다르겠지……" 좌순조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히죽 웃었다. "그까짓 당신의 유명계에 걸렸다고 해서 우리. 가 조금이라도 무서워할 것 같소?" 원래 좌순조는 소불이가 변장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구유곡의 사람들을 아직까지도 금모모로 알고 있었다. 이때, 망산귀수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실력이 비록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노부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한 살아서 유명동부를 빠져 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오! 소불이는 예리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면 부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그렇다면 네놈은 사로잡을 수밖에 없다." 이때, 망산귀수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여러 사람을 하나씩 훑어보며 급히 물었다. "조금 전 노청께서는 노부에게 아무나 골라서 상대를 하라고 했는데 그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가 있소?"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망산귀수는 즉시 소불이를 가리켰다. "좋소. 그렇다면 노부는 바로 당신을 골라서 단독으로 겨루겠소!" 소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좋소.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내가 이기면 어떻게 하고 지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망산귀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침중하게 대답했다. "만약 노부가 패하면 당신들 마음대로 하고 이기게 되면 즉시 노부를 보내줘야 하오."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망산귀수가 다시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며 궁금한 듯 물었다. "하지만 제부인이 누구인지 가르쳐 줄 수는 없겠소?" 소불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다시 반문을 했다. "어서 나와 싸울 것이지 무엇 때문에 물어 보시오?" 망산귀수는 여전히 여러 사람들을 주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하의 말은 믿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소." 이때,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망산귀수는 좀 멋적은 듯 빙긋이 웃었다. "제부인은 무림맹의 맹주 부인이기 때문에 믿을만 하지 않소? 또한 노부가 그를 찾는 이유는 참관자로 세우기 위해서요." 소불이는 고개를 돌려 주설란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웃었다. "부인께서 증인이 되셔야만 하겠습니다." 이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주설란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주교주! 안심을 해도 돼요. 좌순조의 말은 제가 책임을 지겠어요." 지금 주설란이 소호법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은 바로 망산귀수로 하여금 소불이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망산귀수는 주설란을 똑바로 주시하며 나직이 울었다. "조금 전 칠낭자로 변장을 했던 사람이 바로 부인이었습니까?" 그러자 주설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렇소. 하지만 당신은 무엇 때문에……." 망산귀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해서 귀문관으로 들어왔소?" 소불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허허허…… 허허허…… 주우천! 쓸데 없는 소리는 하지 말아라! 이까짓 도둑놈의 소굴에 우리가 언제까지 갇혀 있을 줄 알았더냐?" 망산귀수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소불이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좋소. 그럼 우리는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소?" 소불이는 손을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 아직 우리가 겨를 시간이 되질 않았소." 망산귀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은 채 나직하게 물었다. "결투를 하는 데에도 정해진 시간이 있단 말이오?" 소불이는 고개를 한두 번 끄덕이더니 신교교와 당승무를 가리켰다. "물론, 저분 당노제가 신교교를 갈기갈기 찢어 논 다음에 싸워도 늦지는 않소. 또한 교주는 이 기회를 틈타 무림맹에 항복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무명도를 위해 싸우다가 죽을지는 잘 알아서 결정을 하시오." 지금 망산귀수 역시 금모모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때, 만미천호 신교교는 벌써 자기의 모든 실력을 다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당승무에게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승무는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쉽게 신교교를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지금 당승무를 상대로 해서 싸우고 있는 신교교는 몹시 교활했으며 심지어 그의 무공까지도 악독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당승무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당승무가 검장 십삼 식을 사용할 때에는 그녀가 아무리 교활하다고 할지라도 어쩔수가 없는 것 같았다. 순간, 신교교는 갑자기 철골접선을 접더니 열여섯 개의 부채살에서 열여섯의 줄기의 은빛을 발산해 내며 당승무를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소불이가 당승무를 향해 크게 외쳤다. "당노제! 그녀의 백골침(白骨針)을 조심하게!" 지금 신교교가 사용하고 있는 철골접선의 열여섯 개의 부채살 안에는 각기 아홉 개의 침이 감추어져 있다. 또한 아홉 개의 침 안에는 모두 아홉 가지의 종류가 다른 독약이 묻혀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교교는 단숨에 철골접선에 있는 독침을 일제히 발사해 버렸던 것이다. 이때, 소불이의 외침 소리가 끝나자마자 당승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으하하하…… 하하하하…… 이까짓 독침은 조금도 무서워할 것이 못됩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왼손으로 허리춤에 흑옥불(黑玉拂)을 꺼내더니 허공을 향해 번개처럼 던졌다. 순간, "싹! 싹! 싹!" 하는 소리와 함께 당승무를 향해 날아오던 백골침이 일제히 흑옥불에 붙어 버렸다. 당승무가 다시 흑옥불을 흔들자 백골침은 일제히 땅으로 떨어졌다. "신교교! 나 당승무 앞에서 감히 독약 암기를 사용하려고 하다니…… 헤헤…… 이 개만도 못한 년아! 너도 사천당문의 암기를 받아랏!" 발을 끝내자마자 동시에 검저비성(劍底飛星)이란 초식으로써 신교교의 두건 위를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신교교의 머리 위에 있는 두건에 독침이 적중을 했다. 당승무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젖히며 고함을 질렀다. "으하하한…… 신교교! 암기란 원래 이렇게 쓰는 것이다. 알았느냐? 어서 오른쪽의 소맷자락을 한 번 살펴보아라." 과연 신교교의 소맷자락에는 세 개의 새까만 강침이 꽂혀 있었다. 당승무는 또다시 통쾌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으하하하…… 신교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독약의 암기로써 너를 죽일 수가 있지만 절대로 쉽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사로잡아 갈기갈기 찢어 사문의 원수를 꼭 갚을 것이다." 신교교는 두 눈이 충혈된 채 고함을 질렀다. "이 개만도 못한 놈아! 나역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생각이다." 말을 끝내자마자 철골접선을 버리더니 한 자루의 단검을 뽑아 들고 단숨에 당승무를 향해 비호처럼 덮쳐갔다. 당승무는 대갈일성을 지르며 재빨리 반격을 시도했다. 순간-. "챙! 챙!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신교교의 왼쪽어깨에서는 붉은 선혈이 샘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놀란 신교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단 위를 향해 도망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정면의 출로에는 다섯 사람이 버티고 서 있었다. 가운데에 지키고 있는 사람은 주설란이었으며 좌우에 있는 네 사람은 바로 홍채문의 시녀들이었다. 신교교가 달려오자 주설란이 날카롭게 외쳤다. "이년! 어디로 도망을 치려 하느냐?" 신교교는 이를 악문 채 검을 휘두르며 저지선을 뚫고 나가려 했다. "앞을 막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 걸음도 채 움직이지 못하고 그녀는 무명의 암기에 의해서 앞길이 막히고 말았다. 순간-. 그녀의 머리에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체구가 작은 여자가 바로 제갈명의 처 주설란이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그녀는 급히 걸음을 멈추며 주설란을 향해 다그쳐 물었다. "다…… 당신이 바로 주…… 주설란……." 복수 신교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설란의 좌우에 서 있던 두 명의 흑인 졸개들이 갑자기 뛰어나왔다. "여우 같은 년! 우리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원래 이 두 사람은 바로 홍채문에 있는 네 명의 시녀 중 영향과 영원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두 명의 시녀는 신교교를 가운데 두고 즉시 쌍검을 휘두르며 좌우로 해서 번개처럼 찔러갔다. 순간, 왼쪽에 있던 영춘과 영풍 두 시녀도 신교교를 향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신교교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계속해서 두 번을 막고 몸을 비틀어 옆으로 뚫고 나갔다. 하지만 이 석실의 오른쪽에도 사오 명의 졸개들이 서 있었다. 이때 앞에 서 있던 졸개가 갑자기 옥적을 꺼내더니 한 걸음다가 섰다. "심자귀가 여기에 있는데 어디로 도망을 치려 하느냐?" 심자귀는 신교교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옥적으로 공격을 해 들어갔다. 옥적랑군의 출수는 과연 비범한 것 같았으며 일 초의 공격 안에 수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신교교는 비록 치밀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심자귀의 무서운 공격에 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옥적랑군! 그정도의 실력에 내가 겁을 낼 줄 알았더냐?"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녀는 원을 그리며 즉시 삼 초를 공격해 들어갔다. 이때, 심자귀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허허허…… 나 심자귀가 네 년을 무서워 할 줄 알았더냐? 여지껏 너를 살려준 것은 바로 당노제를 시켜 네년을 죽이게 하기 위해서다."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옥적으로는 왼쪽을 쓰며 오른쪽으로는 그녀의 안면을 향해 연속해서 팔 초를 공격해 갔다. 팔 초의 공격은 끊임이 없고 신속무비 하였지만 신교교는 과연 노련한 마녀답게 심자귀와 십여 합을 겨루었다. 순간, 심자귀는 즉시 몸을 돌리더니 뒤에 있는 졸개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일제히 덤벼서 저 년을 생포해라!" 심자귀의 뒤에 서 있던 졸개들은 일제히 대답을 하더니 기세좋게 달려들었다. 이렇게 되자 신교교는 오랫 동안 싸우지 못하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심자귀는 더 이상 쫓아가지 않고 크게 외칠 뿐이었다. "신가야! 도망을 치고 싶으면 마음대로 도망을 치거라!" 신교교는 급히 뒤로 칠팔 보 씩이나 물러났지만 심자귀는 과연 쫓지 않았다. 이때 뒤로 물러서고 있던 신교교의 뒤에는 졸개들이 꽉 차 있었다. 석굴 안의 구석구석마다 졸개들이 지키고 있었으면 당승무만이 가운데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북쪽 역시 호관주와 좌우 순조가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망산귀수 주우천도 그들의 옆에 서 있는 것이었다. 신교교는 어리둥절하여 망산귀수를 향해 크게 물었다. "주우천, 너도 배반을 할 생각이냐?" 망산귀수가 온몸에 식은땀을 홀리며 대답을 하기 전에 소불이가 나섰다. 바로 이때 "쏴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소불이는 여의금사를 뽑아서 신교교의 어깨를 향해 번개처럼 던졌다. 신교교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네놈은 바로 소불이였구나."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일 때 신교교는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단검으로 소불이의 왼쪽 어깨를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하지만 소불이는 손에 들과 있던 여의금사로 가볍게 원을 그리며 그녀의 단검을 피하고 왼손으로는 번개처럼 신교교의 어깨를 향해 찔러갔다. 신교교는 소불이의 공격을 보고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이놈의 수법도 당승무의 수법과 똑같은 것 같구나…….' 그녀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왼손으로 일 장을 후려쳤다.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들르며 신교교는 출수가 늦었기 때문에 뒤로 대여섯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바로 이때-. "획!" 하는 소리와 함께 일진의 예리한 파공음이 그녀의 뒤에서 급습을 해왔다. 이 일지는 바로 주설란이 출수를 한 것이다. 신교교가 몸을 피하기도 전에 소불이가 정면으로 다가가며 크게 외쳤다. "신영주! 소생의 일 장을 더 받으시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검은 손바닥을 치켜들고 안면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갔다. 신교교는 깜짝 놀라 몸을 피하며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소불이 이놈도 흑살장을 할 줄 아는 모양이구나……' 지금 신교교는 앞 뒤로 협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정면 대결을 하지 못하고 왼쪽으로 황급히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피하고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 정첩후가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노부의 일 장을 다시 받아라!"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왼쪽 귀를 향해 예리하게 쳐갔다. 신교교는 급히 몸을 낮추어 정첩후의 장풍을 간신히 피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옆에 서 있던 두경강이 무쇠 같은 주먹으로 힘껏 후려쳤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은 신교교의 왼쪽 어깨를 명중시켰다. 원래 신교교의 왼편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신교교가 정첩후의 일 장을 피할 수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두경강의 일 권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신교교는 두경강의 일 권에 맞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오른쪽으로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가 비틀거리며 육칠 보도 가기 전에 심자귀가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향해 파도처럼 쓸어왔다. "으하하하…… 으하하하…… 여기도 있다." 신교교는 이를 악문 채 번개같이 땅에서 한 바퀴를 돌며 옥적 밑으로 피했다. 그러나 사방에서 포위를 하고 있던 여러 사람들은 벌써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원래 그녀와 팔구 장의 거리를 두고 있던 여러 사람들은 그녀와의 거리를 일 장 정도로 좁혔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신교교는 벌써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적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정멸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바로 주설란이었고 왼쪽에는 정첩후와 두경강, 오른쪽에는 심자귀, 위에는 소불이, 또한 사방 구석구석마다 몇 명의 무공이 심후한 졸개들이 일렬로 지키고 있었다. 이때, 당승무는 단검을 치켜 들고 멀지 않은 곳에서 신교교 자신이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신교교는 마지막 발악을 하기라도 하려는 듯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기왕 죽게 된 몸 어느 놈이고 지체하지 말고 덤벼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녀는 두 손을 치켜 올렸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손을 쓰지는 않았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녀의 구명절초였던 것이다. 신교교는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지만 무엇인가를 뿌리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뿌리고 있는 것은 어느 누구의 눈에도 볼 수가 없는 독분으로 만든 가루였던 것이다. 이 무형의 기독은 한 번 맡았다 하면 즉시 목숨을 잃게 되며 유효거리는 일 장 정도였다. 마침 상대방의 고수들은 모두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독을 뿌리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때, 신교교는 전신에 힘이 빠지고 등 뒤 부분에 무엇인가 찔러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불이는 벌써 여의금사로써 그녀의 영대혈(靈大穴)을 찔렀던 것이다. 소불이는 갑자기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신교교를 항해 크게 외쳤다. "신영주! 편히 누워서 좀 쉬시지…… 그까짓 무형기독은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알았느냐? 너도 한 번 생각을 해보아라! 우리는 네년이 관 부총영주의 수양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방비하지 않을 줄 알았더냐?" 소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신교교는 온몸에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며 땅에 힘없이 쓰러졌다. 이때, 옆에서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띠운 채 지켜보고 있던 당승무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녀의 앞가슴을 짓밟으며 고함을 질렀다. "신교교! 이제야 네 죄를 알겠느냐?" 말을 마치자마자 당승무는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번쩍 치켜 들더니 그녀의 가슴을 향해 찌르려고 했다. 순간, 옆에 서 있던 소불이가 갑자기 앞을 가로막았다. "노제, 잠깐 손을 멈추게!" 당승무는 의아스런 눈초리로 소불이를 주시하며 급히 물었다. "노인장! 이년에게 무슨 물어볼 말이라도 있습니까?" 소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문을 했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얘기할 것 같은가?" 당승무는 영문을 모른 채 여러 사람을 둘러보더니 다그쳐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소불이는 땅에 쓰러진 채 당승무의 발에 밟혀 있는 신교교를 가리키면 말을 가로챘다. "지금 신교교 이년의 몸에는 많은 물건이 있을 테니 우리가 가져야겠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자네가 이년을 피투성이로 만든다면 찾기가 좀 곤란할 것이 아닌가?" 소불이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두 손으로 신교교의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녀의 몸에서는 칠팔 개의 약병과 하나의 작은 은방울, 구리로 만들어진 호각, 금빛으로 된 하나의 영패, 구리로 만든 납작한 상자, 수건 등 여러 가지의 물건이 나왔다. 소불이는 득의한 웃음을 만면에 띠며 여러 사람을 둘러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췄어…… 악독한 년 같으니라고.' 그는 또다시 신교교의 얼굴에서 면구를 벗기고 그녀의 병기인 철골접선을 꺼내 자기의 품 속에 집어넣었다. 신교교의 면구가 벗겨지자 하나의 추악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때, 지켜보고 있던 심자귀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만미천호 신교교는 옛날에 강호상에서는 소문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었는데……." 이때 당승무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선사의 독분을 맞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허공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사부님, 이제서야 사부님의 피맺힌 원한을 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신교교의 몸을 향해 단검을 힘껏 내리찍었다. 또다시 그는 신교교의 몸을 열십자로 찢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붉은 선혈들이 사방으로 난무했으며 눈뜨고는 보지 못할 처참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당대의 요녀 만미천호 신교교의 운명은 여기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 소불이가 망산귀수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주교주! 이제부터 시작을 하겠소?" 신교교의 처참한 죽음을 지켜보고 있던 망산귀수 주우천은 마치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눈간, 그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급히 주설란을 향해 포권을 했다. "저…… 저는 무림맹에 항복을 하겠습니다." 주설란은 방긋이 웃으며 계속해서 떨고 있는 망산귀수를 주시했다. "좋아요. 주교주께서 진실로 항복을 하겠다면 우리 무림맹은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 이때 옆에 있던 소불이가 어깨를 들먹거리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부터 한 집안 식구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구려." 주설란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여러 사람들을 향해 말을 꺼냈다. "우리는 어서 음빙지옥으로 가서 사람을 구하기고 합시다." 이때, 망산귀수가 여러 사람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호관주를 향해 손짓을 했다.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호관주가 망산귀수를 향해 포권을 했다. "제가 부인을 위해서 길을 일도하겠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여러 사람의 앞에 서서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순간, 소불이는 품 속에서 화골단(化骨丹)을 꺼내더니 신교교의 시체를 완전히 누런 물로 만들어 버렸다. "여러분! 이제 우리도 변장을 벗어 버립시다." 말을 끝내자마자, 자기가 먼저 인피 면구를 벗었다. 주설란 등 사람들도 일제히 벗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망산귀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소불이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더니 원래 소노형께서도 여기에 계셨구려." 소불이는 또다시 어깨를 으쓱하며 겸손해 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역용 수법으로 논하자면 주노형이 제일이지요. 하지만 이 늙은이는 아직도 멀었소. 뿐만 아니라 이랑신 정노형 등은 칠십일 가지의 변장술에 정통을 했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두경강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의 역용술은 정노형에게서 배웠소. 하지만 소노형만큼 정통하지는 못하오. 또한 소노형께서는 심지어 금모모, 좌순조 등 두 사람의 목소리까지도 흉내낼 수가 있는데 제가 어떻게 소형을 능가 할 수가 있겠소?" 또다시 당승무가 나서며 소불이를 향해 빙긋이 울었다. "하지만 소노인장께서 아무리 똑같이 흉내를 낸다고 할지라도 한 번만 들어보면 알 수가 있지요." 소불이가 의아스런 눈초리로 당승무를 주시하자 그는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노인장께서는 얘기를 할 때마다 어깨를 들먹거리니 다른 사람이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어느 사이에 일행은 벌써 통로의 끝에까지 걸어나왔다. 석벽 사이에는 한 짝의 철문이 있었다. 호관주는 즉시 걸음을 멈추더니 양 손으로 문을 오른쪽으로 향해 밀었다. 즉시 하나의 입구가 나타났다. 두경강은 수하의 무사들을 시켜 갈림길이 있을 때마다 사람을 시켜 지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때, 주설란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호관주를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호관주! 여기가 바로 음빙지옥인가요?" 호관주가 고개를 끄덕일 때 소불이가 나서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소노반은 이 안에 갇혀 있으니 죽을 때가 다 된 것 같구나……." 바로 이때 호관주는 이미 등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으로 칠팔 보쯤 들어갔을 때 또 하나의 철문이 나타났다. 호관주는 다시 조금 전과 같은 수법으로 철문을 옆으로 밀었다. 철문이 열리는 순간 일진의 차가운 바람이 몰아쳐 왔다. 뒤를 따르고 있던 심자귀가 몸을 움찔하며 중얼거렸다. "아, 추워…… 과연 음산하고 추운 곳이로구나……" 이때, 망산귀수가 나서며 천천히 설명을 했다. "여기가 바로 땅 속에 있는 한기가 집결된 곳입니다. 폐파의 윗대 조사들께서는 연공정실(練攻靜室)로 썼지요. 하지만 후에 대음신공이 실전되었기 때문에 이 정실도 폐지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석실 안에는 네 개의 검은 석벽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주설란이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호관주에게 물었다. "감금된 사람들은 어디 있나요?" 호관주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등불을 치켜 올려 벽을 비추었다. 석벽 위에는 열 개의 쇠고리가 두 줄로 나란히 걸려져 있었다. 일망타진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당승무가 벽에 달려 있는 열 개의 쇠고리를 가리키며 궁금한 듯 물었다. "저 쇠고리는 도대체 어디에 쓰는 것입니까?" 호관주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에 있는 열 개의 쇠고리는 바로 진열장의 손잡이입니다." 당승무는 여전히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진열장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호관주가 대답도 하기 전에 심자귀가 나서며 말을 꺼냈다. "물론, 사람이 들어 있겠지." 심자귀가 말을 하고 있을 때 호관주가 벌써 하나의 진열장을 열었다. 과연 진열장의 안에는 한 사람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주설란의 안색이 헬쓱하게 변하여 다그치듯 물었다. "호관주! 진열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써 죽었습니까?" 호관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가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무명도의 미혼초를 먹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심장에 약간의 체온이 남아 있지만 죽은 사람과 다름이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음빙지옥에 넣어야 합니다." 주설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깨어나게 할 수가 있나요?" 호관주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주설란이 고개를 돌렸을 때, 소불이와 망산귀수 두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주교주와 소호법은 어디로 가버렸나요?" 이때, 여러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첩후가 나서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큰일났군…… 주우천, 그 놈이 도망을 치자 소노형께서 쫓아간 것이 아닐까?" 심자귀가 나서며 정첩후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두노형과 그의 수하들이 모두 밖에서 지키고 있으니 그는 절대로 도망을 치지 못할 것입니다." 호관주는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음빙지옥의 밖에는 또 다른 통로가 있습니다. 또한 두노형께서는 네 명의 무사만 남겼기 때문에 아마 그의 적수는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때, 당승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몸을 돌렸다. "제가 직접 나가 찾아보겠습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망산귀수가 급히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당승무는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주교주! 도대체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돌아오시오?" 망산귀수는 약간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노형께서 문 밖에 있는 다른 통로를 보려고 저에게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망산귀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여전히 언성을 높였다. "소노형께서는 저보고 먼저 돌아가라고 한 다음 혼자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심자귀가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물었다. "무엇을 하기 위해 나갔는지 노형도 모르고 있소?" 망산귀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말을 받았다.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가셨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이때, 주설란이 나서며 망산귀수를 향해 침중하게 물었다. "소호법은 원래부터 지혜가 많은 분이기 때문에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주교주, 지금 감금되어 있는 사람은 모두 무명도의 미혼약을 먹은 것 같은데 해약은 가지고 있나요?" 망산귀수는 가볍게 웃으며 나직하게 대답을 했다. "해약은 있지만 음총관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환혼초로서도 깨어나게 할 수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당승무가 급히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에게도 환혼단이 있습니다." 주설란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호관주를 향해 물었다. "호관주! 여기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은 모두 몇 명이나 됩니까?" 호관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나직이 대답했다. "모두 여섯 사람입니다." 당승무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어 보더니 다그쳐 물었다. "초공자, 양사형, 소노반, 흑석도의 정영, 네 사람 뿐인 것 같은데 어떻게 여섯 사람입니까?" 망산귀수가 다시 나서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금모모가 보낸 것이기 때문에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설란은 다시 사방을 살펴보며 여러 사람을 향해 말을 꺼냈다. "여기는 너무나 추운 것 같으니 우리는 여섯 사람을 일제히 끌어낸 다음 밖에 가서 구해줍시다." 호관주도 이 말에 찬동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다섯 개의 진열장을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끌어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첩후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금화상도 여기에 있었구나." 이때, 당승무가 꺼낸 사람은 여자인 것 같았는데 당승무는 그를 보자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주주……" 당승무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주설란이 궁금한 듯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주주라는 이 여자는 대체 누구인가?" 당승무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바로 마의교의 교주인 한선자의 딸 용주주입니다. 또한 총호법의 기명 제자이지요." 순간-. 일행은 벌써 여섯 사람을 껴안은 채 음빙지옥을 떠나 객청 안으로 다시 돌아가 여섯 사람을 땅에 내려 놓았다. 여섯 사람의 몸은 완전히 얼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구할 수가 있었다. 여섯 사람들의 몸에 온기가 스며들자 당승무는 환혼단을 품 속에서 꺼내더니 제각기 한 알씩을 먹였다. 하지만 소불이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주설란이 만면에 걱정스러운 빛을 가득 띠운 채 여러 사람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소호법께서 아마 뜻밖의 일을 당한 것 같군요." 심자귀가 빙긋이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부인! 걱정하지 마십시요. 소노형은 틀림 없이 무슨 목적이 있어서 가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주설란이 다시 여러 사람을 살펴볼 때 심자귀가 말을 계속 이었다. "만약 너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소노형은 벌써 돌아왔을 것입니다." 순간, 두경강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빙긋이 웃으며 나섰다. "부인!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만약 어깨를 들먹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분이 바로 소노형일 것입니다." 두경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러 사람의 뒤에 서 있던 망산귀수가 어깨를 들먹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망산귀수는 여전히 어깨를 들먹거리며 여러 사람을 향해 물었다. "여러분께서는 이 늙은이가 소노형을 살해한 것으로 의심을 하고 있소?" 심자귀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언성을 높였다. "흥! 거울을 하나 구해서 어서 얼굴을 비추어 보시오." 망산귀수의 뒤에 서 있던 당승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하하하……. 하하하…… 소노형의 눈동자는 검고 망산귀수의 눈동자는 파랗지 않소?" 그러자 망산귀수는 할 수 없다는 듯 따라 웃으며 혼잣말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주우천으로 변장하기는 정말 힘이 드는데……." 주설란은 대뜸 안색이 변하여 망산귀수를 향해 급히 물었다. "주우천을 죽였나요?" 지금 여기에 있는 망산귀수는 소불이가 변장을 한 것이다. 소불이는 다시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그 놈은 죄악이 너무 많아서 저절로 죽었습니다." 주설란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급히 물었다. "소호법!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그놈은 무림맹에 항복을 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음빙지옥에서 여러분이 소홀한 틈을 타서 도망을 쳤지요. 하지만 이 늙은이가 발견을 하고 급히 쫓아갔을 때 그놈은 갑자기 이 늙은이를 향해 일 장을 쳐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늙은이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일 장을 맞고 뒤로 두 발자국이나 물러났지요." 여기까지 말을 하던 그는 갑자기 여러 사람을 향해 히죽이 웃었다. "히히…… 여러분께선 누가 이겼는가를 생각해 보시오. 이때 두경강이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급히 다그쳤다. "노형!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 하시고 어서 말씀을 계속해 보시오." 소불이 역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늙은 여우 같은 놈이 감히 저를 향해 독장을 써 왔지요. 하지만 이 늙은이는 이미 곡노형에 의해서 완전한 독인이 되었는데 어찌 그놈의 독장을 무서워 하겠소." 소불이는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주우천은 독을 연마했을 뿐 완전한 독인은 아니었소. 그는 이 늙은이가 일 장을 보내자 무섭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급히 뒤로 물러서는 것 같았지요. 얼마 후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더니 힘없이 쓰러지더군요. 그래서 이 늙은이는 유명교의 교주가 한 번 되어 보려고 그 놈의 옷을 벗겨 이 늙은이가 입은 다음 또다시 그에게 화골단을 먹여 누런 물로 만들어 아주 없애 버렸지요. 하지만 당노제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군요. 허허허……." 순간-. 소불이는 급히 몸을 돌리더니 느닷없이 고함을 질렀다. "이보시오 귀하의 사부도 여기에 있으니 도망을 치지 마시오." 여러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보자 과연 흑석도주의 문하 정영이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이때, 흑석도주의 문하 정영이라는 자는 소불이의 음성을 듣고 급히 걸음을 멈추더니 소불이를 향해 물었다. "저의 사부님께서 정말로 오셨단 말입니까?" 소불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주설란이 나서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당신의 사부님도 벌써 무림맹에 가입 하셨어요. 우리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여기에 들어 왔으며 당신의 사부는 문하를 데리고 망산의 입구를 보호하고 있어요." 순간, 용주주와 양수분 등 두 명의 낭자도 깨어났다. 양수분은 눈을 비비며 부시시 일어나더니 주설란을 보자 갑자기 큰 소리로 물었다. "주언니? 도대체 여기가 어디예요?" 또한 주주도 당승무를 주시하며 갑자기 소리쳤다. "아…… 아니…… 안복……." 당승무는 당황하여 여러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주주…… 당신이 어떻게……." 하지만 당승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주주가 갑자기 소불이를 향해 날카롭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늙은 놈도 여기에 와 있었구나." 말을 마침과 동시에 용주주는 소불이를 향해 비호처럼 덮쳐갔다. 용주주는 순식간에 마교의 시풍조(施風組)와 검장 십삼 식을 사용하여 소불이를 잡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소불이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크게 외쳤다. (6권에 계속) 비룡팔부 <6> 유명동부(幽冥洞府) "빨리 손을 멈추시오! 이 늙은이는 망산귀수가 아니오." 용주주가 주저했을 때 당승무가 급히 나섰다. "주주! 저 분은 망산귀수가 아니라 소노인장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주설란과 양수분을 차례로 소개해 주었다. 잇따라 초숭생, 소노반, 금화상 등 세 사람도 깨어나 여러 사람들과 말을 나누었다. 금화상도 원래는 무명도의 독인이었지만 종남의 일전에서 소불이가 그에게 환혼 단을 먹여 깨어나게 했던 것이다. 금화상은 깨어난 후에 낙양으로 가던 도중 무명도의 사람들에게 협공을 받아 도리 없이 망산으로 잡혀 왔었다. 또한 초부 안에 있는 금화상은 바로 적이 변장을 한 것이다. 이때 소불이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두경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두노형! 남겨 둔 사람들을 데리고 오시오." 두경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서 있는 부하들을 향해 분부를 내렸다. "어서 가서 좌순조를 데리고 오너라! " 두 명의 부하들이 즉시 대답을 하고 가더니 한 명의 졸개를 데리고 왔다. 이때 소불이가 졸개의 혈도를 풀어 주며 빙긋이 웃었다. "좌노형! 실례가 많았소." 웃었다. 원래 좌순조는 소불이가 졸개로 변장을 시켰던 것이다. 좌장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불이가 또다시 우군조 하지청과 관주 호불량 두 사람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하노형과 호노형 두 분께서도 벌써 무림맹에 가입을 했소. 또 주교주도 이미 죽었으니 좌순조도 무림맹에 가입하시오." 우순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좌형! 소노형의 말씀이 맞소. 이것이 바로 새로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 그러니 좌형께서도 주저하실 필요가 없다. 좌장생은 우순조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진작 무림맹에 가입할 것을 결심했는데 무엇을 주저하겠소." 옆에 있던 소불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하나의 관복을 건네주었다. "허허허…… 이것이 바로 영웅의 본색이오. 좌형! 이것은 당신의 것이니 어서 받으시기 바라오." 좌장생은 주저하며 소불이를 주시하더니 반문하기를-. "저는 무림맹에 가입을 했는데 무엇 때문에 또다시 이런 옷을 입어야 합니까? " 소불이는 하지청과 호불량을 주시하며 어깨를 들먹거렸다. "하지청과 호형께서도 입고 있지 않소? 또한 여기는 여전히 여러분이 지키고 있어야만 무명도의 사람들이 신임을 할 것이 아니겠소?" 소불이는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설란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인께서는 여기서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이 늙은이가 가서 일을 처리한 후에 사람을 보내서 모시러 오겠습니다." 주설란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러 사람을 주시했다. "하지만 소호법께서는 사람을 좀 더 데리고 가세요" 소불이는 어깨를 다시 들먹거리며 말을 받았다. "이 늙은이는 음세귀(陰世鬼)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만약 그가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즉시 없애버릴 생각입니다." 소불이는 약간 쉬었다가 또다시 말을 계속했다. "음세귀 한 놈을 죽이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 없습니다. 하물며 좌노형과 우노형 두 분께서 동행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말을 끝마치자 소불이는 좌순조와 우순조를 향해 손짓을 했다. "자, 우리는 갑시다." 소불이가 막 한 발을 떼어놓으려던 찰나 계단 위에서 매우 다급하게 기승이 달려 내려왔다. 그는 소불이의 앞으로 오자 즉시 소리쳤다. "소대협, 남은 해약을 주지 않으실 겁니까?" 소불이는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해약은 벌써 다 주지 않았소? 사실 한 알이면 충분히 독을 풀 수가 있소. 그리고 내가 노형에게 한 말은 전부 거짓이었소.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팔목을 한 번 살펴보시오." 기승이 그 말에 따라 팔목을 걷어 보니 과연 까맣게 찍혀 있던 지인은 놀랍게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반신반의하며 재차 물었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 소불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물론 정말이오. 이제 노형은 본 맹에 가입해서 한 집안 식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늙은이가 무엇 때문에 노형을 속이겠소?" 그러더니 일단 말을 끊고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여기는 여전히 호관주께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시고 노형은 지금 우리와 함께 나가 나머지 몇 명 마의교의 사람들을 설득시키도록 합시다." 기승은 이제 걱정거리가 사라졌으므로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습니다." 소불이는 좌우 순조와 기승, 세 사람을 데리고 일제히 계단 위를 걸어갔다. 그들이 계단 위로 사라지자 호관주도 한 명의 심복에게 문을 간수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때, 주설란은 소불이가 간 후에 남편 제갈명의 생사에 마음이 몹시 불안했다. 주설란은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다 참지 못하고 호관주에게 물었다. "호관주, 지금 대략 몇 시간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 호관주는 주설란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던지며 대답했다. "아마 정오에서 조금 모자랄 것입니다." 주설란이 다급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점심때가 다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호관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약 반시간 후에야 점심때가 될 것입니다." 주설란은 호관주 앞으로 다가오더니 다급한 어조로 재촉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빨리 이곳에서 나가요." 호관주는 그제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주설란을 주시했다. "아니, 부인께선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 주설란이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자 당승무가 나서며 대답했다. "맹주께서 흑풍안에 빠지셨습니다. 그리고 주우천이 말하기를 그곳은 정오 때 한 시간만 나오거나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호관주는 그 말을 듣자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 아니, 맹주께서는 무엇 때문에 흑풍안으로 가셨습니까? " 당승무가 매우 분한 듯 읖조렸다. "바로 주우천이 맹주를 유인해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호관주는 급히 주설란을 주시하며 매우 놀란 눈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부인, 그렇다면 그는…." 주설란은 호관주가 매우 놀라며 무슨 말을 하려다 말자 갑자기 두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안타까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호관주, 맹주를 구할 수 없다는 말씀 인가요? " 호관주가 매우 낭패한 얼굴로 머뭇머뭇 대답을 하지 못하자 양수분이 나서며 염려 말라는 듯 위로했다. "주언니, 걱정 말아요. 맹주께서는 무림의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데 어찌 그리 쉽게 죽을 리가 있겠어요? 그러니……." 주설란은 양수분이 미처 말을 다 맺기도 전에 크게 고개를 저으며 더욱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하지만…… 주우천이 말하는 투로 봐서는 흑풍안에 한 번 빠지기만 하면 절대로 살아날 수 없다고 하던데……." 이때 호관주는 주설란에게는 차마 말을 못했지만 실은 속으로 크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음, 큰일났구나…… 흑풍안에 한 번 빠지기만 하면 신선도 살아나기가 힘들 텐데……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네 사람이 무거운 분위기에 쌓여 침중하게 약 반시간을 보내자 소불이는 기승을 보내어 주설란 등의 사람을 올라오게 하였다. 일행은 귀문관을 나서서 얼마 걷지 않아 벌써 서화청으로 되돌아왔다. 그러자 소불이는 좌우 순조 두 명과 한 명의 망산귀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을 데리고 일제히 마중해 나왔다. 여러 사람들은 망산귀수가 분명히 죽었는데 어떻게 해서 또 한 사람의 망산귀수가 나타났는가를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때, 소불이가 망산귀수를 향해 주설란을 소개시켰다. "이분이 바로 맹주 부인이십니다." 망산귀수는 주설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더니 공손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속하 음세귀가 부인께 인사드리옵니다." 음세귀는 바로 음총관이었다. 그도 눈이 약간 연록빛이 돌아 망산귀수로 변장하기에는 매우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주설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었다. "나는 누군가 했더니 바로 음총관이었구려." 그리고 기승이 다섯 명의 흑의대한을 데리고 와서 일일이 주설란에게 인사를 드리게 했다. 주설란도 그들에게 모두 예의로써 답했다. 소불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기분이 좋은 듯 너털거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이곳을 다시 옛날대로 만들어야 하오. 그러니 음노형은 계속 망산귀수로 변장을 해서 주지를 해야 무명도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 주설란이 나서며 물었다. "그런데 소호법, 우리가 신교교를 죽였는데 무명도에서 모를 리가 있겠어요? " 소불이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후후…… 신교교의 죽음은 우리만 알고 있으니 절대 이 비밀이 새어 나갈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늙은이도 곧 그녀와 적합한 사람을 찾아 신교교로 변장시키고 무명도로 들어가게 할 생각입니다." 주설란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뒤에 있는 양수분과 네 명의 시녀들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그럼 이들은 안 됩니까? " 소불이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 이 낭자들은 모두 마음씨가 착한데 어떻게 그런 악독한 만미천호로 변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말씀이지요." 주설란은 약간 난처한 빛을 띠며 물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찾아야 하죠? " 소불이도 곤란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군요. 가짜 신교교는 찾을 수 있지만 신교교로 꾸밀 사람을 찾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군요." 주설란은 한동안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아, 그래요. 만미천호와 같이 무공이 높은 자를 찾으려면 우리 흥채문파에도 한 사람이 있어요! " 소불이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다그치듯 물었다. "부인께서는 지금 호모모를 두고 얘기하는 것입니까? " 주설란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바로 그녀예요." 소불이도 즉시 표정이 밝아져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빨리 사람을 시켜 호모모를 모셔 와야겠습니다. 내가 어째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리고 지금 여유가 없으니 빨리 서둘러 모든 것을 정상대로 만들어 놓아야 무명도의 이목을 속일 수 있습니다. 부인께서는 빨리 명령을 내리십시오." 주설란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경강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렇군요. 빨리 서둘러야겠어요. 그럼 두 총 순찰께서는 어서 사람을 파견하세요." 그리고는 다시 소불이에게 재촉했다. "소호법,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리는 어서 흑풍안으로 들어가야지요." 소불이는 두 손을 내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인, 급히 서두르면 일에 지장이 많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곳을 나갈 때 금노형을 압송하는 척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만 밖에 있는 졸개들이 우리가 자기네 교주를 납치해 음빙지옥을 빠져나간다는 것을 알지요. 그리고 음세형은 이 흑풍안의 지리를 잘 아시니 우리와 함께 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주설란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욱 좋지요." 소불이는 다시 음세귀, 좌장생, 하지청 세사람을 향해 심히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세 분께서는 잠시 동안 참으십시오." 하고는 뒤에 있는 수하들을 향해 지시했다. "자, 세 분을 묶어라. 그리고 빨리 서둘러야 한다." 세 명의 수하는 소불이의 명령대로 음세귀를 비롯한 세 사람을 묶은 후 서화청을 나섰다. 서화청을 나서서 밖으로 나오는 도중에 소불이 등은 수많은 졸개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이 소불이의 일행이 자기네들의 교주를 인질로 한 것을 보자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주춤거리기만 했다. 이렇게 해서 일행은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유유하게 유명계를 빠져 나왔다. 소불이는 부하들더러 먼저 좌우 순조를 놓아주라고 명령한 후 음세귀를 향해 크게 호통을 쳤다. "이놈, 주가야. 너는 이제 우리와 함께 이 흑풍안으로 들어가자!" 하고는 음총관을 끌다시피 데리고 흑풍안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숲 속에서 흑의여인이 마중해 나오며 소리쳤다. "가사와 곡사백께서 전부 이 앞에 계시니 제가 대신 부인을 향해길로 인도하겠어요." 방금 나타난 흑의여인은 바로 흑석도 중의 다섯 제자인 흑낭자 초운랑이었다. 소불이는 그녀를 보자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하하하…… 이제야 바로 찾았구나!" 초운랑은 이상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소호법, 무엇을 찾았다는 말씀 인가요?" 소불이는 여전히 크게 웃으며 능글맞게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바로 낭자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이 늙은이는 어떤 적합한 사람을 찾으려고 애를 썼는데 이번에야 그 적합한 상대를 찾았소." 초운랑은 이 말을 듣자 내심 무척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러나 겉으로는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어 애써 화를 누르며 다만 입을 삐죽해 보이고는 길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초운랑이 갑자기 허리를 비틀고는 몸을 숨겼다. 주설란이 즉시 앞장 서 그녀를 따라 몸을 숨기자 나머지 사람들도 몸을 숨겼다. 그것은 하나의 넓은 암석이었다. 바로 초운랑이 그 암석을 넘자 갑자기 몸을 숨긴 것처럼 되었던 것이다. 이 암석은 경사가 져 넓게 가로막혀 있어 위에서 아래를 감시하기엔 매우 적합했다. 이 암석 뒤에 바로 일 장 높이가 되는 하나의 석팔이 있었는데 바로 그 석굴 안에 곡영자와 흑석도주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대제자인 길무구는 동굴밖에 서서 오사매가 주설란을 데리고 올라오는 것을 보자 즉시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곡영자도 급히 나오며 첫 마디부터 물었다. "부인, 사람을 구출해 내었습니까? " 주설란은 그를 보자 매우 반가 왔으나 곡영자의 물음에 대뜸 안색이 흐려졌다. "예, 모두 구출해 내었지만 맹주께서만 흑풍안 빠져서……." 그러자 곡영자는 크게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무엇이라고요? 흑풍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맹주께서는 무엇 때문에 흑풍 안쪽으로 갔습니까? " 주설란은 다시 노기가 끓어오르는 듯 냉랭하게 말했다. "바로 주 노귀가 유인했습니다." 그리고 망산귀수가 얘기해 주던 흑풍안의 사정을 다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주설란의 설명을 다 듣고 난 곡영자는 매우 다급한 표정으로 서둘렀다. "자, 정오가 다 되었으니 빨리 서두릅시다." 이때 소불이는 흑석도주에게 무엇이라고 한참 귓속말을 했다. 소불이의 말을 다 듣고 난 흑석도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초운랑을 향해 지시한다. "운랑, 지금 소호법을 따라가 그의 지시에 절대 복종을 하여라." 초운랑은 소불이와 흑석도주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사부님, 소호법을 따라 어디로 가야 합니까?" 흑석도주는 웃기만 할 뿐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다. '거는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주설란의 뜻으로는 당승무와 양수분, 소불이, 두경강과 정영만 데리고 가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용주주가 한사코 따라가기를 고집하고 소불이가 초운락을 데리고 가려고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들을 데리고 떠났다. 이들이 떠나기에 앞서 음총관이 땅에다 세 갈래의 길을 그리며 설명했다. "흑풍안 부근에는 조잡한 갈림길이 많습니다. 원래 그곳으로 가자면 하나의 통로밖에 없는데 그 길을 주우천이 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갈래의 길밖에 없으니 우리는 길대로 세 갈래로 나누어서 흑풍안에 도착하는 즉시 다시 회합하면 됩니다" 이윽고 이들은 세 갈래로 나누어졌는데 제 일대는 주설란과 음총관, 양수분, 용주주였고 제 이대는 소불이, 초운랑, 정영 세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당승무와 두경강이었다. 이 흑풍안은 일명 풍뢰동이라고도 불렀다. 흑풍안은 유명동부(幽冥洞府)의 북쪽에서 약 일 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제 일대인 음총관은 앞장서서 일행을 데리고 하나의 유곡으로 접어 들어갔다. 이들이 유곡까지 걸어갔을 때 그곳에는 큰 절벽 위에 하나의 어두컴컴한 동굴이 마치 한 마리의 독수리가 먹이를 기다리듯 입을 떡벌리고 있었다. 주설란은 동굴을 보고 매우 놀라며 감탄인지 경이인지 모를 탄성을 올렸다. "여기가 흑풍안 인가요 - 음총관은 시선을 동굴에 고정시킨 채 대답했다. '여기는 다만 입구일 뿐 진짜 흑풍안은 동굴 안에 있습니다." 지금 주설란은 지난밤이 새도록 제갈명을 찾지 못해서 그녀의 마음은 산란할 대로 산란해져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이때 어두컴컴하고 무시무시한 동굴을 보자 이 동굴 어딘가에 자기의 낭군이 쓰러져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느끼며 즉시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음총관이 급히 따라가며 만류했다. "부인, 잠깐만…… 여기는 갈림길이 많으나 흑풍안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단지 세 곳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만약 잘못 가면 시간만 낭비하게 되니 속하가 불을 켠 다음에 가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자 용주주도 나서며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래요. 불을 켜고 가는 게 나을 거예요. 이런 황량한 산 위에 어떤 무서운 독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음총관이 다시 말했다. "아니오. 그런 것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는 정오 때만 조용할 뿐이지 나머지 시간에는 아주 시끄럽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리 무서운 맹수라 해도 감히 다가오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는 등불을 켰다. 등불은 비록 미약했으나 이 동굴 안을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주었다. 동굴 속의 괴녀 소불이와 당승무도 등불을 켜고 음총관의 뒤를 따라 곡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이 동굴의 지세는 매우 기복이 심하여 이들이 이 장도 못 가서 즉시 왼쪽으로 급히 꼬부라지는가 하면 걸어가면 갈수록 더욱 컴컴하고 음침했다. 이들은 세 개의 등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그 세 개의 등불도 삼 장 정도의 거리밖에는 비치지 못했다. 하지만 약 열 장쯤 걸어가면 꼭한 번씩 좌우로 방향을 바꾸게 하는 균형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약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걸어가니 과연 눈앞에 세 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음총관은 갈림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지시했다. "자, 우리는 여기서부터 세 패로 갈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갈래길 중에서도 마치 나뭇가지처럼 수많은 길이 있으니 여러분께서는 반드시 제일 넓고 미끄러운 길을 따라가셔야 무사히 흑풍안에 도착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큰길을 쭉 따라가면 어두침침한 구덩이가 있는데 거기가 바로 흑풍안입니다. 그리고 또 알아둘 것은 누가 먼저 도착하던 간에 전부다 흑풍안의 공지에서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제 말이 너무 길었지만 전부 알아 들으셨겠지 요?" 소불이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자, 시간이 얼마 없으니 우리 세 패로 나누어 빨리 갑시다." 소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음총관이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며 발로 땅을 찍었다. "아, 여러분 잠깐만! " 소불이는 가려다 말고 돌아서며 급히 물었다. "왜 그러시오? " 음총관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부가 모래를 밟은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눈을 흘기며 짐짓 화난 듯한 어조로 말했다. "노형, 자꾸 겁주지 마시오. 여기가 어떤 귀하신 분의 집도 아닌데 그까짓 모래쯤 밟았다고 해서 무엇이 그렇게 큰일이 났다고 떠드는 거요?" 음총관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당신의 계산 착오요." 소불이는 웃음을 거두며 안색을 굳혔다. "아니, 어째서 계산 착오란 말이오? " 음총관은 빈정대는 듯한 소불이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매우 신중하게 말했다. "이 동굴 입구는 비록 흑풍의 위력이 미치지 않지만 그러나 정오 때가 아니면 당신네들 누구라도 이곳에 편안하게 서 있을 수 없소. 왜냐면 흑풍은 반드시 정오 때만 멈추게 되었으니 지금이 정오 때라 흑풍이 밀려가서 땅은 매우 미끄러울 것입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땅을 만져 보십시오. 그래서 지금 땅에는 아무 것도 없어야 하는데 내가 모래를 밟았으니 누가 우리보다 먼저 신발에 모래를 묻혀 들어왔다는 결과가 됩니다." 소불이는 음총관의 긴 설명을 듣고 나서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과연 그렇구려." 음총관이 다시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세 갈래의 길로 수색해 나가되 절대 남의 엄습을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주설란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소불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키득거리며 여유 만만하게 지껄였다. "만약 사람이 삼장안에 있다면 이 늙은이는 볼 수 없지만 코로 냄새는 맡을 수 있소. 헤헤…… 그렇다면 초낭자, 정노형, 우리는 이 길로 갑시다." 세 패의 사람들이 갈라져 막 각자의 길로 들어가려는 순간, 음총관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니다. 아무래도 모래 같지는 않은데……?" 하며 그는 등불을 땅에 대고 비치더니 깜짝 놀라며 사람들을 다시 불러 세웠다. "여러분, 잠깐만! " 소불이는 막 발걸음을 떼어놓다 말고 물었다. "노형, 또 무엇을 밟았습니까? " 음총관은 벌써 굽혔던 허리를 펴고 무엇인가를 집어들었다. "모래가 아니라 바로 쌀입니다." 그 말에 여러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욱 놀라 살펴보니 과연 음총관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쌀임이 분명했다. 소불이가 검미를 크게 치켜 뜨며 먼저 입을 메었다. "그렇다면 이 흑풍안에 누가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겠구려" 음총관은 쌀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가 밖에서 이 쌀을 운반해 온 것일까?" 이때, 두경강이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아, 그렇군요. 이 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면 바람을 피할 데가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소불이는 냉랭하게 코방귀를 뀌었다. "흥,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지." 두경강은 일순 기뻐하며 크게 소리쳤다. "그렇다면 맹주도 이 안에 있을 가능성이 많군요." 주설란도 이 말을 듣자 뛸 듯이 기뻐하며 재촉했다. "그래요. 우리 속히 들어가 봅시다! " 음총관은 두 사람을 제지시키며 엄중하게 말했다. "잠깐, 우리는 기왕 이런 발견을 했으니 이제 서로 갈라져 갈 필요 없이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 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두경강은 즉시 동의를 했다. "그렇소. 지금 적이 분명하지 않은 지금 우리가 사람을 분산시켜 힘을 줄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어 음총관, 소불이, 당승무 세 사람이 등불을 들고 앞장서서 들어가고 나머지는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이때 용주주가 아무래도 어두워 자신이 없는지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저에게 화통이 있는데 켜면 안 될까요? " 두경강이 급히 낮은 목소리로 만류했다. "낭자의 화통은 남겨 두십시오." 용주주가 다시 고집을 부린다. "지금 켠 등불은 너무 어두우니 제 화통을 켰으면 좋겠어요 두경강은 용주주의 뜻을 알았다는 듯 소리 없이 웃으며 다시 나직이 말했다. "이곳 유명교에서 희미한 등불을 사용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 불은 밝아야 오륙 장정도 밖에 볼 수가 없지요. 그러나 지금 만약 낭자의 화통을 켠다면 즉시 남에게 발각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노형 역시 화통을 켜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용주주는 그제야 깨달아 더욱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어두침침한 세 개의 동굴 안을 세 개의 등불은 땅에 떨어져 있는 백미를 따라 끝없이 나아갔다. 여러 사람들이 얼마쯤 가자 쌀알들은 갑자기 넓은 길을 버리고 어떤 갈림길을 향해 꺾여져 들어갔다. 거기서 다시 십여 보를 나가자 쌀알들은 갑자기 뚝 끊어졌다. 바로 이때 -. 어디선가 일진의 싸늘한 바람이 마치 거센 파도처럼 불어오더니 음총관이 들고 있던 등불을 꺼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음총관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급히 물러났다. 소불이도 그 광경을 보자 깜짝 놀라 다급하게 소리쳤다. "음노형, 왜 그러시오? " 그러자 소불이 역시 음총관과 마찬가지로 의문의 바람에 의해 뒤로 다섯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그 덕분으로 두 개의 등불도 꺼져 버려 두 사람은 하마터면 주설란과 맞부딪칠 뻔했다. 그러나 주설란이 엉겁결에 가벼운 장풍으로 두 사람의 몸을 세워 주고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두 분, 대체 무엇을 만났습니까? " 음총관은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괴……." 소불이가 다시 그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뒤를 이었다. "풍……." 주설란은 대경실색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요? 괴풍이라고요? " 음총관은 아직도 가슴의 격동을 누르지 못해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갑자기 아무 기척도 없이 바람이 불어 왔습니다. 마치 그것은 얼음을 얼리는 듯한 매우 차갑고 싸늘한……." 주설란은 그가 말을 잇지 못하자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게 무서운 바람이었나요? 그런데 어째서 저는 조금도 그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소불이는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얼른 손을 앞으로 내저으며 정색을 했다. "아닙니다. 만약 바람이 불어오지 않았다면 이 늙은이가 무엇 때문에 밀려 나왔으며 등불은 왜 꺼졌겠습니까? " 주설란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럼 장풍이었나요? " 음총관이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다. "아니오. 장풍 같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흑풍안에서 일어나는 바람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여기는 흑풍안도 아닌데 어째서 그런 바람이 부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정오 때라 흑풍안에서 바람이 불어올 리가 만 무인데……." 주설란이 어두운 앞을 바라보며 초조한 듯 한 걸음 떼어놓았다. "그렇다면 제가 가보겠습니다." 그러자 소불이가 즉시 낮은 목소리로 주설란을 만류했다. "잠깐만, 이 늙은이가 다시 한 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주설란은 강경하게 나섰다. "아니에요. 제가 가겠어요." 하고 그녀는 두 사람의 앞을 지나 겁도 없이 갈린길로 들어갔다. 주설란이 조심스럽게 십여 보를 걸어가니 과연 일진의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바람은 장풍 같지는 않았다. 주설란은 숨을 죽이며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마치 이 괴풍은 막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일제히 한꺼번에 거세게 밀어닥쳤다. 주설란은 괴풍이 갑자기 세어진 것을 보고 또다시 힘껏 밀려고 했으나 놀랍게도 괴풍은 언제 불어왔느냐는 듯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이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주설란은 일시에 멍청해져 손을 든 채 멍청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주설란은 이 괴풍이 바로 사람의 짓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주설란은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즉시 쳐들었던 팔을 내리며 냉랭하게 소리 쳤다. "대체 어느 고인이신 지 좀 만나 볼 수 없습니까?" 주설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즉시 싸늘한 여인의 음성이 동굴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저리 나가세요. 저는 절대 외부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주설란은 물러서지 않고 대담하게 소리난 쪽을 향해 서서히 걸어 들어갔다. 소불이 역시 이 흑풍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즉시 다시 불을 켜 주설란의 뒤를 따라갔다. 이어 다시 밝혀진 불들은 아까 까지도 칠흑같이 어둡던 동굴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주설란은 지금 상대방의 무공이 자기와 극히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는 감히 경거망동을 하지 못하고 사방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조심스럽게 전진을 계속했다. 이렇게 약 칠팔 보쯤 걸어갔을 때 갑자기 오른쪽 벽에서 다시 싸늘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서라! " 주설란은 내심 크게 놀라며 즉시 걸음을 멈추고 소리나는 방향을 향해 바라보았다. 소불이도 즉시 지체하지 않고 수중의 화통을 쳐들어 소리나는 방향을 비추었다. 원래 오른쪽의 벽 사이에 하나의 갈라진 틈이 있었다. 거기 흑색 복면을 한 청의여인이 한 자루의 장검을 쳐들고 갈라진 벽 틈에 서서 눈에 새파란 신광을 담고 주설란 등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설란도 지지 않고 매서운 눈초리로 청의여인을 주시했다. "당신은 누구예요?" 하지만 청의여인은 대답 대신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잔소리 말고 빨리 돌아가라!" 주설란은 그 여인의 신형을 가늠해 보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다만 사람을 찾으러 왔을 뿐이에요. '' 청의여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냉랭하게 대꾸했다. "저는 외부의 사람과 조금이라도 얘기하기 싫으니 빨리 나가세요. 그리고 당신네들이 사람을 찾고 있다면 딴 곳으로 가서 찾으세 요. 여기는 아무 것도 없어요! " 주설란은 지금 한 시가 급하였으나 청의여인의 말투를 들어보니 제갈명이 이곳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설란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물러나려는 순간, 소불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낭자께서 애써 우리를 쫓아내려는 것을 보니 어떤 낭군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군! " 청의여인은 그 소리를 듣자 갑자기 대노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죽일 놈! " 하며 즉시 지체하지 않고 일진을 날려 왔다. 소불이는 이 갑작스러운 일 격에 깜짝 놀라 급히 머리를 숙여 피했다. 그러자 주설란은 마음에 집히는 바가 있어 다시 말했다. "우리는 다만 사람을 찾을 뿐이니 이곳을 한 번 찾아보고 만일 사람이 없다면 즉시 물러나겠어요." 청의여인은 냉랭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에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다! " 이때, 소불이가 전음입밀로 주설란에게 속삭였다. "부인, 저 여인에게는 의심스러운 데가 많습니다." 주설란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냉랭하게 코웃음을 날리며 소리쳤다. "흥, 하지만 저는 한 번 보겠다고 마음먹으면 끝까지 보고야 마는 성미예요! " 청의여인 역시 냉랭하게 웃었다. "흥! 정 그러시면 내 손이 무정하다고 탓하지는 마세요." 주설란은 짐짓 가소롭다는 듯 소리 높여 웃었다. "호호호…… 그렇다고 내가 무서워 할 줄 알았더냐?" 순간, 청의여인은 눈에 새파란 신광을 뿜어냈다. "좋다. 믿지 못하겠다면 어서 시험을 해보아라? 주설란도 기다렸다는 듯 즉시 대꾸했다. "오냐, 내 원래부터 뒤져 볼 생각이었느니라!" 하고 주설란은 아주 대담하게 청의여인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러자 청의여인은 즉시 검을 휘둘러 왔다. 한편, 소불이는 주설란이 아무런 방비도 없이 더구나 검까지 뽑지 않는 것을 보자 즉시 소리쳤다. "부인, 조심하십시오! " 주설란은 싸늘하게 웃었다. "누구도 저를 상하게 만들 수야 없지요? 말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교묘히 여인의 일 검을 피했다. 이렇게 되자 청의여인은 의외라는 듯 다시 힘을 더해 일 검을 찔러 왔다. 주설란은 연기처럼 몸을 돌려 단번에 그녀의 옆으로 날아가 청의여인의 비유혈을 향해 빠르게 찔러 갔다. 이 한 수는 지극히 빠를 뿐만 아니라 수법 또한 매우 기묘했다. 피금 청의여인은 두 번째의 공격도 허사로 돌아가자 그녀의 복면 속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벌써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청의여인은 급히 뒤로 반 보 가량 물러나더니 자신이 앞에다 여유를 만들었다. 그러더니 -. "이얍! " 하는 고함과 함께 종남검법의 천도중화(天道中和)로 주설란의 심을 찌르고 무당검법으로 좌우봉원(左右逢源) 화산의 쌍성도하(雙星渡河), 청성의 천봉뢰우(千峯雷雨)노산의 자기동래(紫氣東來) 이렇게 다섯 초를 계속해서 공격해 왔다. 주설란은 이것을 보자 대뜸 안색이 변했다. "당신은 동사도주 염지천의 문하였군요! " 하면서, "챙 -." 하는 소리와 함께 벌써 등뒤의 장검을 뽑았다. 청의여인은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흥, 사람을 잘못 보았다! 나는 동사도의 사람이 아니다! " 주설란도 냉소를 쳤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속을 줄 아느냐?" 하고는 장검으로 청의여인의 가슴을 겨누며 추호도 양보할 수 없다 는 듯이 말했다. "흥, 네가 바로 동사도의 문하였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너의 소굴을 수색해야겠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한 가지 조건을 내세울 테니 잘 들어라. 너와 내가 일대 일로 싸워서 만약 네가 이긴다면 우리는 즉시 물러갈 것이고 내가 이기면 우리가 여기를 수색하기로 하는 것이 어떠냐?" 청의여인은 계속 냉소를 날렸다. "오냐, 내가 만약 패한다면 나는 여기서 자결을 하겠다? "아, 성급하게 자결할 필요는 없다! " 청의여인은 싸늘하게 눈빛을 빛냈다. "당신은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면서 즉시 주설란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청의여인이 시전한 검법은 아까의 검법과는 크게 달랐다. 주설란은 상대의 검법에 극히 강맹한 검풍이 뒤섞여 있는 것을 보자 마음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며 반격을 시도했다. 지금 주설란이 원래 생각한 것으로는 자기의 속공으로 비록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히지는 못하나 최소한 당황하게 만들 수는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청의여인은 그녀의 검법을 가볍게 흡수해 버렸다. 주설란은 분노가 치밀어 즉시 봉황검법을 시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의여인은 극심한 어떤 내력이 숨겨져 있는 듯 싸울수록 검풍이 더욱 더 강맹해 지기만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약 이십여 합을 싸우자 어느새 청의여인의 온 몸에는 흑기가 쉽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설란은 싸우면서 몇 번이고 틈을 타 공격해 들어갔으나 번번히 그녀의 강풍에 의해 제지되고 말았다. 두 사람이 다시 몇 합을 싸웠을 때 청의여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멈추어라! " 주설란은 즉시 손을 멈추며 넌지시 물었다. "무슨 얘기냐? " 이때 소불이는 두 여인이 잠시 손을 멈추는 군간, 정영에게 무엇이라고 속삭였다. 정영도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청의여인은 검을 버려두고 서서히 왼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는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청의여인은 손바닥을 쳐든 채 냉랭하게 소리쳤다.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 빨리 돌아가요! " 주설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순순히 돌아갈 것 같으냐? " 청의여인은 손바닥에 계속 검은 연기를 피우며 말했다. "만약 내 장풍이 나가기만 하면 당신은 반드시 죽을 거예요." 순간, 주설란은 검을 내리며 대꾸했다. -좋다. 그렇다면 검으로는 승부를 낼 수 없으니 우리 이제 장풍으로 싸우자! " 청의여인은 어쩐 일인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돌아가는 편이 나을 거예요." 주설란은 아까부터 의혹에 찬 마음이 더욱 도가 넘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졌다고 인정이 되면 잔소리 말고 즉시 비켜라! 난 기어코 들어가 봐야겠으니!" .그러자 청의여인도 단번에 분노를 터뜨렸다. "뭐라고? 그렇다면 내가 너를 무서워하는 줄 알았느냐? " 주설란은 소리 높여 웃으며 조롱했다. "호호호…… 그렇다면 어디 일 장을 뻗어 보아라! " 청의여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즉시 손바닥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함께 장풍을 격출해 왔다. 주설란도 즉시 장검을 거두고 쌍장을 가슴 높이로 치켜올려 맞받아 쳤다. 이때 두 사람의 거리는 약 여덟 자 가량이었다. 두 사람의 일 장은 서로 중간에서 맞부딪쳤으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내력이 부딪치자마자 두 사람은 즉시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그러자 청의여인은 얼굴에 매우 놀란 빛을 띠며 주설란을 주시했다. "당신, 정말로 저의 일 장을 받았나요? " 그녀의 말투로는 아마 믿을 수 없다는 것 같았다. 주설란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웃었다. "왜? 그렇다면 가짜 같으냐? "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한 작은 그림자가 청의여인의 치맛자락을 스치며 비호처럼 지나갔다. 청의여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누구냐? " 그림자는 그녀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일 장 밖으로 날아가서 땅에 내려섰다. 바로 정영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의외로 청의여인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튀어 나왔다. "아니, 너는 흑석도의 문하?" 원래 그녀는 정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영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에게 냉소를 날리더니 주설란을 향해 말했다. "부인, 맹주는 바로 동굴 안에 있습니다." 주설란은 이 소리를 듣자 즉시 안색이 변해 물었다. "그……그게 정말이오? 그런데 왜 나오시지 않지요? " 정영은 다시 말했다. "맹주께서는 지금 부상을 입고 누워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않으십니다." 주설란은 자기 낭군이 동굴에 더군다나 부상을 입고 누워 있다는 소리를 듣자 즉시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 나쁜 것,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 너는 내 남편을 어떻게 했느냐? " 순간, 청의여인은 안색이 싹 질려 멍청하게 주설란을 응시하더니 이윽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었다. "다…-당신이 바로 그 사람의 부인 인가요? " 주설란은 너무나 분노가 치민 나머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말도 분명치 못했다. "오냐……그…… 그렇다. 너는 내 남편을 암산했느냐?" 청의여인은 어느새 흥분을 누르고 평온을 되찾았지만 몹시 충격을 받은 듯 어떤 기대 같은 것이 그녀의 얼굴에서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부인, 그것은 부인의 오해입니다. 제대협께서 이 동굴 안에 들어오실 때는 흑풍이 매우 강한 때였어요. 하지만 제가 그 분을 구할 때는 벌써 중상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약을 먹인 다음 안정을 위해 일부러 그분의 혼혈을 찔렀습니다. 부인 제 말은 진정입니다. 부인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청의여인은 어떤 호소가 담긴 듯한 말을 끝내자 즉시 주설란을 데리고 갈라진 벽 틈으로 들어갔다. 제갈명이 이 청의여인에게 구출되기 전의 경과는 어떠했을까? 제갈명은 용취에서 양수분을 구출해 냈다. 양수분은 제갈명에게 구출되자 그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그러다 그려는 갑자기 요염하게 웃으며 품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더니 좋은 향기가 난다고 제갈명에게 맡아보라고 했다. 제갈명은 그 손수건을 코에다 갖다 대자마자 즉시 쓰러졌다. 사실 그는 환혼단을 먹었기 때문에 미향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정신을 잃고 쓰러진 척했다. 양수분은 제갈명이 쓰러지자 마치 굶주린 이리처럼 쉴 새 없이 그의 얼굴에다 입맞춤을 하며 매우 분한 듯 중얼거렸다. "셋째 언니가 어째서 너에게 그렇게 반했나 했더니 과연 멋있구나. 만약 신영주가 그때 몸소 오지 않았다면 나는 먼저 이 사람을 정복한 다음에 보내려고 했는데…." 이때 제갈명은 가벼운 경악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니, 신영주라고……? " 제갈명이 중얼거리는 순간 양수분은 깜짝 놀라 벌써 그의 몇 군데혈도를 찔렀다. 하지만 제갈명은 속으로 크게 냉소를 쳤다. "흥, 나는 태청심법(太淸心法)을 연마했는데 네가 몇 군데 나의 혈도를 찔렀다고 해서 나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제갈명은 속으로 냉소를 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양수분은 어떤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서서히 일어나 즉시 손뼉을 쳤다. 그러자 한 흑의인이 나타나서 공손히 물었다. "일곱째 향주, 무슨 분부이십니까?" 양수분은 쓰러져 있는 제갈명을 가리키며 엄숙하게 지시했다. "제갈명은 나에게 벌써 제압을 당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즉시 초부로 가야 하니 너는 이 사람을 유명동부로 보내라. 신영주가 기다리고 있으니……." 흑의인은 즉시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향주." 양수분은 돌아서려다 말고 잊은 것이 있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참, 그리고 또 제갈명이 올 때 누가 뒤따라 왔을지도 모르니 절대 앞길로 해서는 가지 말아라." 흑의인은 얼굴에 괴상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것도 속하 잘 알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진향주는 어디에 있느냐? 어서 이리 오라고 해라." 흑의인은 허리를 한 번 굽혀 보이더니 급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 한쪽에 있는 철문을 열며 소리쳤다. "진향주, 변향주께서 부르십니다." 그러자 제갈명은 다시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음, 변향주, 너는 바로 초옥지였구나. 그런데 진향주는 또 누가 변장했을까? 하고 가만히 실눈을 떠보니 철문 안에서 나오는 진향주라는 자는 자기와 똑같이 변장을 한 사람이었다. 진향주는 철문 안에서 나오자마자 냉랭하게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제갈명, 변낭자께 인사드리옵니다." 변향주는 요사스럽게 웃더니 진향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호호호……장난은 그만하시고 어서 우리는 초부로 갑시다." 진향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제 음성으로 말했다. "일곱째 사매, 수고가 많았소." 제갈명은 그들이 각기 변장을 하고 초부로 가려고 하자 즉시 일어나 한꺼번에 제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초부에는 소불이, 곡영자를 비롯한 강호의 노장들이 있으므로 안심을 하고 자기는 다음의 작전에 참가할 계획을 세웠다. 더구나 이들의 행동이 비록 교묘하다고는 하나 초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큰 착오를 일으킬 것 같지 않았다. 제갈명은 아까 양수분으로 변장을 한 변향주의 말투를 들어보니 신교교가 유명동부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를 유명동부로 데려가라고 했으니 양수분도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갈명은 이런저런 생각을 종합해 보며 자신은 그저 속은 척하고 누워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진향주와 변향주가 동시에 걸어나가고 흑의인이 두 사람을 전송하고 돌아오는 순간 제갈명은 벌써 일어나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친구, 우리도 이제 유명동부로 가 봐야 되지 않겠나?" 흑의인은 들어오려다 말고 깜짝 놀라 급히 뒤로 일 장 가량 물러났다. 하지만 그가 이미 제갈명의 신법을 따를 수 있겠는가? 흑의인은 뒤로 물러나 제대로 몸도 가누기 전에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고 어느 사이인가 제갈명이 벌써 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흑의인은 다급한 김에 즉시 왼손으로 제갈명을 향해 일 장을 후려쳤다. 그러나 제갈명은 피하지도 않고 냉랭하게 웃으며 정통으로 가슴에 맞받았다. 제갈명은 끄덕도 하지 않고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가볍게 흑의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후후…… 친구, 이 정도로는 아직 멀었네." 하고는 끌어당긴 손목을 다시 놓아주었다. 흑의인은 제갈명이 자기의 일 장을 맞고도 끄덕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손목을 놓아주자 즉시 멍청해져서 감히 반격을 하지 못했다. 제갈명은 그를 향해 다시 싸늘하게 웃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친구, 내 앞에서는 아마 얌전히 있는 것이 좋을 걸세." 흑의인은 아까 제갈명이 가볍게 잡았다 놓아준 손목을 몹시 아픈 듯 어루만지며 물었다. "당신은 이제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오? " 제갈명은 음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다만 내 물음에 얌전히 대답하기만 하면 되오." 흑의인은 눈을 두어 번 껍댁이더니 냉랭하게 다시 물었다. "당신은 내게 무엇을 물을 작정이오? " 제갈명은 흑의인이 대담하게 나오자 가볍게 웃으며 눈을 번득였다. "친구, 다시 한 번 말해 두겠지만 얌전히 있으시오. 만일 도망을 한다면 내 앞에서 열 발자국만 도망가도 매우 잘 도망가는 것이니까." 흑의인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는 소리와 함께 흑의인은 마치 쥐새끼처럼 교묘하게 어둠 속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리나 순간, 도망가는 그의 앞에 벌써 한 인영이 버티고 서며 큰 소리로 웃어젖힌다. "하하하…, , 친구, 내 말은 아마도 거짓이 아닐 텐데……." 그리고는 다시 흑의인의 오른손목을 잡았다. 제갈명은 다시 냉랭하게 말했다. "자, 친구, 나는 친구를 절대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 어서 얌전하게 대답하시오." 그리고 제갈명은 마치 죽음의 사자처럼 서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자, 말해라. 너는 마의교의 사람이냐? 아니면 무명도의 잔당이냐?" 흑의인은 엉덩이를 만지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저…… 저는 유명교의 사람입니다." 제갈명은 그의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음, 그렇다면 망산귀수와 너는 어떻게 되느냐? " 흑의인은 순순히 대답했다. "바로 저의 사부님입니다." 제갈명은 약간 놀라는 듯하더니 날카롭게 신광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군, 바로 팔대귀도 그 중의 하나구나. 그런데 아까 그 두 사람은 누구냐?" 뜻밖의 은인 흑의인은 몹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제갈명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자는 일곱째 향주 변옥영이고, 남자는 다섯째 향주 진소손(秦小孫) 입니다"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들은 둘 다 무명도에서 왔느냐? " 흑의인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제갈명은 다시 여유를 주지 않고 연거푸 물었다. "음, 그렇다면 신교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유명동부에 있습니다." 제갈명은 짐작한 대로 신교교가 유명동부에 있다는 말을 듣자 역시 양수분도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양수분도 그곳에 있느냐? " 흑의인은 낭패한 듯한 미소를 띠며 제갈명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오. 그녀는 벌써 음빙지옥으로 보냈습니다." 제갈명은 그 말을 듣자 즉시 두 검미가 불끈 곤두섰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물어 볼 것도 없다는 듯 흑의인을 일으켜 세웠다. "좋다. 그럼 이제부터 나와 함께 신교교를 만나러 가자." 흑의인도 더 이살 말하지 않고 제갈명이 일으켜 세우는 대로 순순히 일어서더니 벽에 걸어 둔 등불을 들고는 철문을 열고 즉시 어두침침한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제갈명은 그 뒤를 따르며 다시 한 번 위협을 가했다. "친구, 또 말하네만 만약 쓸데없는 수작을 다시 부리면 알아서 해라. 알겠느냐." 흑의인은 여전히 아무 대꾸 없이 앞장 서 걸어갔다. 이 통로는 어둡고 음산하고 기분이 나쁠 뿐만 아니라 꺾이며 경사진 데가 무척 많았다. 이렇게 험하게 반 리를 걸어가자 앞의 동굴에서 윙윙하는 바람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 왔다. 제갈명은 가뜩이나 기분이 우울해 있던 차에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음산한 소리는 무엇이냐? " 흑의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덤덤하게 대꾸했다. "바로 풍리동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반드시 이 풍리동을 거쳐야 신영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갈명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흑의인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그가 한참을 마치 땅을 걷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수렁 속을 걷는 것 같기도 한 기분으로 걷고 있을 때 통로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꺾였다. 두 사람도 따라 급히 꺾어 돌자마자 갑자기 일진의 강풍이 덮쳐 와서 흑의인의 등불을 꺼 버리고 말았다. 이때 갑자기 앞서 가던 흑의인이 등불이 꺼지는 순간을 이용해 도망치려고 했다. 제갈명은 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에게 일지를 날렸다. 이 일지는 바로 천뢰지(天雷指)로써 단숨에 흑의인을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사지를 뻗게 만들었다. 제갈명은 그가 죽자 이 동굴 안에 수없이 갈림길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후회를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제갈명은 혼자서라도 계속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동굴 안으로 휘감듯 불어오는 바람은 갈수록 맹렬해졌다. 더구나 바람을 한데 모아 날리는 듯한 음산한 소리도 갈수록 커지고 바람은 때로 싸늘하게 몸을 얼릴 듯하다가도 부드러운 미풍으로 변하는가 하면 갖가지 조화를 부려 마치 사람의 숨통을 끊어 놓는 듯했다. 하지만 제갈명은 심후한 내공으로 억지로 전진을 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얼마를 걸으니 통로는 또다시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였다. 바로 이때, 그의 몸 앞으로 거센 바람이 갑자기 휘몰아쳐 오더니 순식간에 그를 휘감아 버리고 말았다. 제갈명은 깜짝 놀라 즉시 쌍장을 밀어내었다. 하지만 이 괴풍은 회오리바람처럼 그의 몸을 휘감아 압박해 왔다. 제갈명은 어쩔 수 없이 괴풍에 의해 사오 보나 물러났다. 제갈명은 자신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자 마음속으로 매우 괴이하게 느꼈다. '동굴 속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은 회오리바람 같은데 바람의 조부는 어째서 이다지도 심할까? 어디 어떻게 되건 몸의 힘을 빼고 바람이 몰아쳐오는 대로 내 몸을 맡겨 보자.' 하고는 온몸에 힘을 빼고 모든 혈도를 전부 다 봉쇄한 다음 풍력에 의해 마음대로 밀리게 내버려두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또다시 십여 장씩이나 밀려났다. 여기가 바로 음세귀가 쌀알을 발견한 곳이었다. 이 일진의 회오리바람은 상대방이 저항을 하면 할수록 중심권으로 몰아넣었다. 그렇다면 온몸에 힘을 주입시키지 않으면 그 중심권에 단번에 휘말려 빙글빙글 돌게 되는 것이다. 제갈명은 십여 장 밖으로 밀려나자 즉시 온몸에 받던 압력이 적어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제갈명은 수십 년간 연마한 강기를 끌어 올려 바람을 맞받았다. 순간, "핑!" 하는 소리와 함께 제갈명은 벌써 이 장 밖으로 날아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캄캄한 동굴 안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제갈명은 밝은 빛이 눈앞에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제갈명은 그 빛을 두 눈 가득히 흡수하며 서서히 눈을 떴다. 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느낀 것은 온 사지에 힘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는 눈꺼풀까지 천 근이나 되는 돌에 짓눌린 것처럼 뜨기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때, 한 줄기의 뜨거운 기운이 그의 입을 통해서 서서히 온 사지로 강한 밀물처럼 감미롭게 엄습해 왔다. 이 일진의 기분은 마치 술을 깨게 하는 약처럼 제갈명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놀랍게도 어떤 아름다운 낭자가 그에게 입맞춤을 해서 진기를 주입시키는 것이 아닌가? 아름다운 낭자는 제갈명이 눈을 뜬것을 보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즉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래도 몸은 일으키지 않고 여전히 입술을 댄 채 계속 진기를 주입시켰다. 제갈명도 지금 자기가 중상을 입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급히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비록 눈을 감았지만 가슴은 몹시 두근대며 떨고 있었다. 제갈명은 이 낭자의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일순간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더구나 남은 진기로써 자기를 치료해 주고 있는데 어찌 눈을 뜨고 볼 수가 있겠는가. 이때, 두 개의 포개져 있던 입술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갈명은 어떤 감사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뜨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사지에 힘이 하나도 없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갈명은 자기를 구해 준 낭자의 모습은 알아볼 수가 있었으므로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낭자가 저를 구… 구하셨습니까? " 낭자는 매우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그러나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대협께서는 폭풍에 의해 중상을 입으셨으니 말하지 마세요. 위험하니까요" 제갈명은 낭자의 그윽하고 따스한 보살핌에 매우 감격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거운 그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자 청의낭자도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대협, 왜 그러시나요? " 제갈명의 얼굴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그는 매우 힘없는 목소리로 어떤 기억을 되살리듯 물었다. "나…낭자는 바로 나낭자가 아니시오…? " 그렇다! 이 청의낭자는 바로 동사도주 염지천의 셋째 제자 나국영이었던 것이다. 바로 음산에서 제갈명에게 몸을 피하라고 그렇게 애원하던 나국영이 어째서 이 음침한 동굴에 와 있다는 말인가? 나국영은 제갈명의 시선을 피하며 무척 민망한 듯 화제를 바꾸었다. "그만 얘기하세요. 저에게는 상처를 치료할 약이 없으니, 당신은 가만히 누워 있어야만 나을 수 있어요." 제갈명은 얼굴에 감동의 빛을 띠며 낮은 어조로 다시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낭자…,, 이렇게 나를 구해 주시니……." 나국영은 제갈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섬섬옥수를 들어 가볍게 그의 입을 막으며 나무라듯 살짝 눈을 흘겼다. "그만 하세요. 당신의 몸이 회복한 다음에 얘기하기로 해요." 하고는 단번에 제갈명의 혼혈을 찔렀다. 제갈명은 다시 아득한 꿈길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윽고 -. 제갈명이 다시 두 번째로 깨어났을 때는 이상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귓전에 울리고 어찌된 일인지 가느다란 빛만 어른거릴 뿐 여전히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이때 나국영이 부드러운 얼굴로, 그러나 조심스러운 어조로 가만히 물었다. "대협, 어떠세요? 좀 나으셨나요?" "예, 덕분에 많이 나았습니다." 하며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나국영은 갓난아이를 보살피는 어머니처럼 가만히 그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당신은 중환자니까요" 제갈명은 나국영이 옆에서 마치 자상한 아내같이 자기를 보살펴 주자 갑자기 주설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금쯤은 혈안이 되어 자기를 찾고 있을 아내 생각이 나자 그는 나국영이 자기를 친절히 보살펴 주고 있어도 마음은 조금도 편치 못했다. 제갈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용히 물었다. "낭자, 지금 몇 시진이나 되었을 것 같소?" 나국영은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어요. 지금 금방 날이 밝았으니 이곳에 불어오는 흑풍은 정오가 되어야 멈추어져요." 제갈명은 아까 자기가 그 흑풍 때문에 중상을 입었다고 생각하자 절로 탄식이 터졌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그토록 위맹합니까? " 나국영은 제갈명에게 시선을 돌리며 짐짓 안심하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 바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를 만큼 무서운 바람이에요. 정말 당신은 재수가 좋았어요. 당신이 만약 그 흑풍에 휘말려 들어갔다면 아마 뼈도 추리지 못했을 거예요." 제갈명은 다시 한 번 몸을 떨더니 생각난 듯 물었다. "정말, 무서운 바람이더군요. 참, 그런데 낭자는 왜 이런 무서운 곳에 살고 있습니까?" 나국영은 어떤 회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물었다. "대협은 우리가 음산에서 만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어요? " 제갈명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소. 그때 낭자는 저더러 가라고 그렇게 애원을 했는데 저는 가지 않아 하마터면 모친의 장 아래 목숨을 잃을 뻔했지요." 나국영은 제갈명이 말을 마치자 쓸쓸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그때부터 저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제갈명이 깜짝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아니, 무엇 때문이오? " 나국영은 말하기가 곤란한 듯 얼굴을 붉히다가 나지막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이유는 말하기가 매우 곤란하지만…… 대사형이 그때 제가 당신더러 도망가라고 한 장면을 목격하고 그것으로 저를 협박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제갈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아니, 그게 정말이오? 그는 대체 무엇으로 당신을 협박하고 있소?" 나국영은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이고는 겨우 더듬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저희 본문을 배반하는 사람 중 남자는 눈을 빼고 그 심장을 뱀에게 핥게 만들며 또 여자는 그 무공을 제거해 본문의 남자 무사에게 보내 마음대로 농락하게 만듭니다. 그것으로 대사형은 여태껏 저를 협박해 왔던 거예요." 제갈명은 크게 분노를 터뜨리며 눈을 번득였다. "저런 악랄한 동사도 놈들 같으니라고……." 나국영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매우 서러운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돌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목은 매우 넓기 때문에 저는 어디로 가든지 잡히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또 할 수 없이 사람의 인적이라고는 아주 미치지 못하는 깊은 산중에 들어와서 살아야 했어요." 제갈명은 그녀의 말을 듣자 매우 미안한 듯 감히 무엇이라고 위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낭자, 미안하오. 이나 때문에 낭자는 억울하게 되었구려." 나국영은 제갈명이 다정한 어조로 말하자 얼굴을 붉히며 두 눈에 말할 수 없는 연민의 정을 가득 담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당신 때문이라면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니 이보다 더한 고난도 참을 수 있어요." 제갈명은 나국영의 표정과 말투가 이상하게 변해 가는 것을 느끼자 급히 화제를 돌렸다. "낭자, 그래서 당신이 이런 험한 동굴까지 들어왔구려." 나국영은 그윽한 눈길로 제갈명을 주시하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그때 대사형의 손길을 피해 음산의 깊은 곳을 찾아 며칠을 헤매다가 우연히 하나의 동굴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무의식중에 그 동굴을 들어가 보니 많은 책이 쌓여 있더군요. 그 책 중의 한 권은 태음경(太陰經)이라고 하는데 바로 도기(道氣)를 연마하는 무공비급이었어요. 그런데 그 비급 안에 바로 이 흑풍안 얘기가 기재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태음기공을 연마하는 사람이 만약 흑풍안에 있다면 쉽게 연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국영의 긴 얘기가 끝나자 제갈명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낭자는 바로 여기서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구려." 나국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일 년 사철 중 오직 정오 때만 흑풍이 불지 않아요. 하지만 정오가 지나면 아무리 무공이 높은 자라도 들어 올 수 없으니 동사도의 추격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나국영은 생각난 듯 몸을 일으켰다. "참, 죽을 준비했는데 좀 드시겠어요? " 제갈명은 즉시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어나서 먹습니다." 나국영은 그 모습을 보자 급히 그를 제지했다. "안 돼요. 가만히 누워 계세요. 제가 먹여 줄 테니까요." 순간, 제갈명은 매우 난처한 듯 주저했다. "아니, 그렇게 되면 곤란한데……." 나국영은 갑자기 검미를 잔뜩 치켜 뜨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왜 안 돼요? 우리는 전부 무림 사람인데 무엇을 주저하는 거예요. 만약 제가 부상을 입었다면 당신은 제가 굶어 죽어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겁니까? 그러니까 제가 먹여 주는 대로 당신은 가만히 받아먹기나 하세요." 상심인(傷心人) 제갈명은 놀라 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낭자!" 나국영은 뒤돌아보며 쌀쌀하게 웃었다. "그만 얘기하세요? 죽을 가져올 테니까요." 하고는 벽 구석에 있는 작은 솥에서 한 그릇의 죽을 떠 다시 제갈명의 옆으로 왔다. "반찬이 없어서 단 것을 조금 탔으니 그냥 드세요." 하고는 한 숟가락을 떠서 자기의 입김으로 식혀 제갈명에게 권했다. 제갈명은 할 수 없이 얼굴을 붉히며 받아먹었다. 나국영은 어떤 표현할 수 없는 감미로움을 얼굴에 담고 몹시 들뜬 듯한 어조로 물었다. "맛있어요? " 제갈명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주 맛이 좋습니다." 나국영은 즉시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배가 고플 때는 무엇이든지 맛있어요" 얼마 안 되어 나국영은 제갈명에게 한 그릇의 죽을 다 먹이고 또 수건을 꺼내 부드럽게 그의 입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제갈명은 일순 당황하면서도 매우 감격해 했다. "나……낭자, 대체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나국영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보답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시면 돼요." 제갈명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괴로운 듯 눈을 감고 화제를 돌렸다. "나는 온몸을 다쳐서 움직일 수가 없는데 언제야 다 나을 수 있을는지……." 나국영도 매우 근심스러운 듯 같이 걱정을 했다. "당신은 바람과 싸워 온몸이 완전히 허탈 상태이고 또 내장까지 다쳤어요." "더구나 여기는 치료 약도 없고 제가 연마한 것은 태음내공이기 때문에 당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도 없군요. 그러니 별 수 없이 며칠 쉬었다가 체력이 좀 회복한 다음에 혼자서 운공 조식을 해서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제갈명은 그제야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나국영은 다시 급히 말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당장 운공 조식을 할 수 없어요. 지금 단지 제일 좋은 치료 방법은 바로 충분히 잠을 주무시는 것뿐이에요." 그러더니 제갈명이 미처 무엇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벌써 그의 혼혈을 찔렀다. 그 후로 시간은 점점 정오 때가 가까와졌다. 풍력도 점점 약해지고 나국영은 이 바람이 완전히 멈추기 전에 하산을 해서 쌀과 몇 개의 달걀을 사 가지고 왔다. 나국영이 오전에 하산을 한 이유는 바로 무명도의 무리가 제갈명을 잡아갈까 봐서였다. 그래서 바람이 완전히 멈추기 전에 나갔던 것이다. 나국영이 식품을 사 가지고 흑풍안으로 되돌아 올 때는 거의 정오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녀는 돌아가다 잘못하여 쌀을 흘려 그것이 음세귀에게 발견되었던 것이었다. 당시 장면은 바뀌어 주설란은 청의여인을 따라 벽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입구는 매우 좁았으나 그 안은 왜 넓었다. 여기는 비록 하나의 어두컴컴한 석실에 지나지 않았으나 나국영의 깨끗한 손길 덕분으로 아주 아담하고 고상해 보였다. 주설란은 석실로 들어서자마자 제갈명이 창백한 얼굴로 의식을 잃고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덮쳐 갔다. "여보! " 나국영은 깜짝 놀라 급히 주설란의 손을 잡으며 엄중하게 타일렀다. "지금 대협께서는 중상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절대로 그 분에게 어떤 충격을 주어서는 안돼요." 주설란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당신은 저분께 무슨 약을 먹였나요? " 나국영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두 알의 설연자를 먹였어요. 그리고 나서 그의 혼혈을 찔러 잠을 좀 자게 했어요." 주설란은 제갈명의 상세가 이토록 엄중할 줄을 몰라 도대체 어떻게 할 줄을 모르며 허둥대기만 했다. "저 분의 혈도를 풀어 주면 안 됩니까?" 나국영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제대협은 내공으로 풍력과 대항했기 때문에 진기를 많이 소모했어요. 그래서 비록 정신은 차렸지만 운기는 할 수 없지요. 그리고 제가 배운 것은 태음내공으로 이곳의 흑풍과 그 성질이 비슷하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 없어요." "하지만 부인의 내공은 극히 정심하니 빨리 데리고 가셔서 진기로 대협의 열두 경작을 뚫으면 아마 사흘 안으로 회복될 거예요." 이때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렇다면 맹주를 일단 낙양으로 운반하고 봅시다." 주설란은 매우 감격해 어쩔 줄 모르며 나국영에게 물었다. "그런데 낭자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 나국영은 기어코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듯 슬픈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저같이 세상을 등진 여자가, 더구나 이 흑풍안에서 속세와 등졌으니 아마 얘기하지 않는 것이 나을 거예요." 주설란은 할 수 없이 읍을 하였다. "그렇다면 저의 일례를 받으세요." 나국영은 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부인, 이러시면 안 돼요. 지금 정오가 지났으니 여러분께서는 바람이 일어나기 전에 제대협을 모시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자 두경강이 즉시 앞으로 나섰다. "속하가 맹주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리고는 침상 곁으로 가 제갈명을 일으켜 두 팔에 안았다. 주설란은 사람들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무한한 정이 어린 눈길로 나국영을 쳐다보았다. "성함은 모르지만 정말 고마웠어요. 언젠가 이 무림이 다시 평온해지는 날 한 번 찾아 뵙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어요. 낭자 안 녕히……" 주설란을 마지막으로 일행은 모두 석실 밖으로 사라졌다. 나국영은 그들이 전부 가 버리자 여태껏 억눌렀던 가슴속의 슬픔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로 제갈명이 누웠던 침상 위에 쓰러져 통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누구보다 순수했던 사랑을 바칠 수 있었던 정신이 있었으나 일시간의 슬픔도 인종으로 참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소불이는 일행을 먼저 떠나게 한 후 즉시 음세귀와 초운랑에게 무엇이라고 비밀리 얘기했다. 그리고는 곧 초운랑을 신교교로 변장시키며 그녀의 음성을 바꾸고 신교교의 흉내와 암기 쓰는 방법을 일일이 일러주고 나서야 소불이도 일행을 뒤따랐다. 음세귀 역시 망산귀수로 변장하고 신교교로 변장한 초운랑과 함께 유명동부로 되돌아갔다. 주설란 일행은 흑풍안에서 제갈명을 구출해 낸 다음에 다시 곽영자와 흑석도주와 화합을 해서 낙양 초부에 도착했다. 얼마 되지 않아 소불이도 즉시 뒤쫓아 왔다. 소불이가 도착하자 주설란은 몇몇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갈명의 혼혈을 풀어 주고 영풍과 영춘 등 시녀에게 일으키게 하였다. 그리고 주설란은 바로 남편의 맞은편에 앉아 손바닥을 맞대고 운공을 해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때, 용주주와 양수분은 방안에서 호법을 서고 당승무와 두경강은 밖을 지켰으며 소불이, 곡영자, 초숭생, 흑석도주, 심자귀, 정첩후, 소노반 등 사람들은 모두 서재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는 가운데 순식간에 사흘이 지났다. 제갈명과 주설란이 연마한 무공은 전부 태청심법(太淸心法)이었기 때문에 이 사흘의 치료로 제갈명은 거의 회복을 했다. 이날 오후, 호모모가 급작스럽게 달려왔다. 그는 제갈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 노발대발하며 이를 갈아 붙였다. "변옥영, 내 그 년의 사지를 찢어 놓고 말 테다! " 두경강은 호모모의 급한 성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더러 금모모로 변장한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호모모는 매우 기뻐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좋다. 내 금모모로 변장을 해서 무명도의 놈들을 실컷 골탕 먹이고 말테다" 호모모가 기분이 좋아 날뛰자 두경강은 다시 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모모, 안됩니다. 금모모로 변장을 해도 여러 사람의 행동과 잘 조화를 이루어야지 그렇게 혼자서 날뛰다가는 절대로 안 됩니다." 호모모는 웃음을 터뜨리며 짐짓 두 눈을 부릅떴다. "하하하……무엇이라고? 나는 그냥 얘기만 해보았을 뿐인데 무엇을 그리 겁내고 있소. 참, 그런데 괘씸한 년으로는 대체 누가 변장을 할 것이오?" 두경강은 따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소노형이 계책을 세웠으니 그가 결정을 해야 합니다." 호모모는 소불이라는 이름을 듣자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탄복을 했다. "음, 그렇군. 신투 소불이라는 이름은 이 할망구도 많이 들었소. 그럼 즉시 지금 그를 만나러 갑시다." 바로 이때-. "별말씀을…… 몸소 찾아 올 필요는 없소이다. 이 늙은이는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불이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어깨를 들썩이며 들어와 호모모에게 포권을 했다. "모모의 대명은 널리 듣고 있어 이 늙은이는 벌써부터 추앙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정말 영광입니다." 호모모의 최고 고질병이라면 바로 남이 칭찬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점이다. 호모모는 지금 소불이가 자기의 이름을 추앙한다는 소리를 듣자 좋아서 입이 대문짝 만하게 벌어졌다. "이 할망구는 첫 눈에 소호법이 지혜가 매우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내었어요. 그런데 이 할망구가 금모모로 변장하는데 어떤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 소불이는 여전히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그러나 아직 한 사람이 모자랍니다." 호모모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니 누구입니까? " 소불이는 즉시 대답했다. "자의문하의 다섯째 향주인 진소손입니다." 호모모는 여러 사람들을 훑어보며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아니, 그 자로 변장할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까? " 소불이는 애매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변장이야 아무나 하면 되지만 거기에는 까다로운 절차가 있지요. 첫째 그놈으로 변장을 하려면 무명도의 모든 사람을 잘 알아야 하며 또 둘째는 무공도 좨 높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은 바로 무명도의 열 명의 남자와 열 명의 여자를 합쳐 이십 명의 문하인들은 전부 다 구대 문파기 무공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파견하는 사람은 무공이 높아야 할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지모까지도 겸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섣불리 결정을 하지 못하는 거지요." 소불이의 말을 듣고 난 호모모는 키득거리고 웃으며 염려 말라는 듯 말했다. "히히히…… 그 점에 대해서라면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소문주께서 진강으로 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진강으로 달려갔습니다." 소불이는 즉시 안색이 밝아져 큰 소리로 물었다. "모모가 말씀하시는 사람이란 대체 누구입니까?" 호모모는 뽐내듯 웃었다. "바로 우리 소문주의 친구인 윤상(尹翔) 입니다." 그러자 소불이의 표정은 금새 또 어두워졌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오늘밤 안으로 적합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이때, 두경강이 나서며 체념한 듯 말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이 이 속에 있는 사람을 찾아야겠군요." 이날 밤을 기해 제갈명의 상처는 완전히 나았다. 제갈명은 회복되자마자 주설란, 용주주, 양수분과 함께 정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여러 사람과 상의한 결과 흑석도주의 둘째 제자인 전수심이 다섯째 향주 전소손으로 변장하기로 했다. 또 양수분은 일곱째 향주 변옥경으로 변장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밤, 진짜 금모모, 진소손, 변옥영을 끌어내고 그들로 변장한 호모모, 양수분, 전수심을 대신 집어넣었다. 이윽고 -. 밤 삼경쯤 되어서 진짜로 변장한 전수심이 먼저 혈로를 뜯었고 양수분, 호모모도 잇따라 혈로를 따라 지하실을 간수하는 두 명의 무사를 제압해 신속히 상삼섬, 왕사주, 한대규 등의 사람을 구출해 지하실을 뚫고 신속히 나갔다. 이때, 두경강과 정첩후, 초숭생이 무사를 데리고 달려와 짐짓 일대 혼전을 벌리는 척했다. 그리고 변옥영, 진소손, 금모모 등의 사람을 놓아주고 세 명의 적당은 죽이고 한대규만 다시 생포했다. 두경강이 한대규를 다시 생포한 이유는 바로 그가 이 초부 안에 무명도의 사람들이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한대규의 진술에 따라 초부 안에 매복해 있는 일곱 명의 적당을 적발해 그들 모두의 무공을 폐지한 후 은자들을 주어 새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고 떠나 보냈다. 그런 다음에 이 낙양 초부는 흑석도의 셋째 제자인 신추송(申秋松)이 남아 지키고 나머지는 모두 진강으로 달려갔다. 진강은 옛날에 경구(京口)라고도 했으며 또한 남서(南徐)라고도 불렀다. 여기 북고산(北固山)은 성의 북쪽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또 북고산은 두 개의 봉우리로 나뉘어져 있다. 앞의 봉우리는 바로 진강과 마주해 있고 삼면은 모두 물에 잠겨 있으며 또 남은 한 면은 바로 뒷 봉우리와 이어져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배경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북고산은 지금까지 명승고적으로 불리운다. 또 이 산 위에는 감로사(甘露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삼국 시대의 유비가 성혼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유비와 초친, 두 사람이 제각기 칼로 바위를 자른 시검석(詩劍石)도 있으며 또한 초부인이 쓰던 화장대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제갈명이 무림맹을 창립하기 전 그의 홍채문은 바로 북고산 한쪽의 분타에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이 분타는 하나의 장원이었다. 그것은 바로 산을 뒤로 하고강을 앞으로 두었던 매우 큰 장원이었다. 이전에 정수복이 이미 명령을 받고 흥채선자 문하의 대제자 주자기, 셋째 제자 서운장을 데리고 일제히 이 진강으로 무림 통합을 이룩하러 왔었다. 진강에다가는 수십 채의 호화찬란한 객실을 마련해 무림맹을 개단하는 날에 각대 문파의 장문인을 접대하는 곳으로 쓰려고 계획하고 있었고 뒷 봉우리에는 이미 몇 채의 큰집을 지었다. 그것은 모두 완성 단계에 있었지만 채 완성되지 않은 건물도 있었다. 제갈명 등의 일행이 북고산으로 달려 왔을 때 집들은 거의 완성되고 강변에는 세 척의 누선(樓船)이 완성되어 칠을 칠하고 있었다. 정수복은 여러 사람을 지휘하고 있다가 제갈명의 일행을 보자 즉시 마중해 나왔다. "속하 정수복, 맹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제갈명도 급히 말에서 내리며 인사를 받았다. "정노, 그 동안 수고가 많았소. 건물은 이제 완성 단계에 있군요" 북고산 총단(北固山 總壇) 정수복은 다시 허리를 굽히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전에 있었던 총단부는 그 건물에다 약간의 손직을 해서 벌써 완성되었고 또 뒷산에 새로 지은 집들은 본맹이 사람들을 위해 지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서운장의 감독 하에 일을 진행시키고 있으며 진강의 객청은 각대 문파의 장문인들을 위해 주자기가 감독하여 거의 완공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더니 다시 강변에 있는 두 척의 배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 두 척의 배는 바로 무명도를 상대하기 위해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속하는 선준신을 시켜 우리 무사들 중에서 수영을 할 줄 아는 사십 명의 사람을 뽑아 배를 모는 방법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제갈명은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노의 계획이 매우 훌륭하오." 주설란도 나서며 연신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매우 빨리 힘든 일을 처리하셨군요." 정수복은 칭찬의 말을 듣자 기뻐하면서도 얼굴을 붉혔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이어 일행이 정수복의 인도 아래 총단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한 인영이 나타나더니 제갈명의 팔을 잡고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제형, 이거 얼마 만이오?" 이 사람은 아래위로 청삼을 입고 매우 준수한 얼굴을 가진 율상이었다. 제갈명도 매우 반가워하며 같이 손을 맞잡았다. "윤청! " 윤상은 얼굴에 가득 반가운 빛을 띠며 다시 주설란을 주시했다. "하하…… 두 분께 축하를 드립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저는 축하주도 얻어먹지 못했으니……." 주설란은 얼굴을 붉혔으나 그녀 역시 매우 반갑다는 듯한 말투였다. "윤대가, 정말 오랜만이군요. 그런데 윤대가께서는 우리가 북악산으로 갔을 때 양노선배님께서 당신에게 삼 개월간 폐관을 하라고 하신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 당신은 삼 개월 후에 도좌모(倒坐模)라는 절에 와서 우리를 찾겠다고 해 놓고 어디를 가셨기에 삼 년 동안 소식이 없었나요?" 윤상은 약간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가사께서 말씀하실 때 삼 개월이라고 하셨지만 사실상 삼 년이 지난 다음에야 저는 폐관을 끝마쳤습니다. 그리고 즉시 도좌료에 갔더니 호모모께서 두 분께서 진강에 계시다고 하셔서 급히 또 이곳으로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찍 온 탓으로 제형께서 아직 도착하시지 않아 나는 그냥 여기서 지키고 있었지요." 제갈명은 다시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자, 윤형, 우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서로 인사나 나눈 다음에 회포를 풉시다." 일행은 모두 긴 복도를 지나고 다시 꽃밭을 지난 다음에 화청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제갈명은 곡영자, 소불이, 흑석도주, 심자귀 등의 사람을 일일이 소개시켰다. 여러 사람들은 윤상이 바로 양공기의 전인이라는 것을 알자 또한 그의 나이가 이십여 세에 불과한 데에 비해 어떤 출중한 정기가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시 얼마 되지 않아 주자기, 두금삽(杜錦揷), 서운장, 종취영, 선준신, 육기분, 세 쌍의 부부도 이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즉시 인사를 올렸다. 세월은 벌써 유수 같이 흘러 연말도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뒷산의 집들과 진강의 객청도 이미 완성이 되었고 두 척의 배도 벌써 칠을 끝내 강변에 정박하고 있었다. 한편, 두경강은 무명도의 무리들이 무리를 져 채 창단되기도 전에 대거 침입을 해올까봐 미리 흑석도주의 대제자인 길무구를 시켜 많은 수하를 거느려 두 척의 배에서 적의 침입을 감시하도록 했다. 초숭생은 심자귀와 정첩후 등 초부에서 데리고 온 삼십여 명의 장정과 금산사에서 기거를 했다. 그리고 주자기, 서운장, 선준신은 홍채문의 삼십여 명 무사를 데리고 초산(焦山) 심강각에서 기거를 하니 이들은 묘하게 대각선을 이루었다. 총단의 좌우 호법 곡영자와 소불이가 나머지 사람들을 두 패로 나누어 밤낮 감시를 하라고 엄명했다. 뒷산은 두금섭, 종취영, 육기분이 홍채문의 이십여 명 검녀(劍女)를 데리고 각각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윽고 며칠이 지난 후에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은 노산 통천관주(通文觀主) 사기량과 세 명의 문하인 노일청(勞一淸) 저승청, 육도청(陸道淸)이었다. 제갈명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인지 얼마 안 되어서 다시 산서(山西) 쾌도왕(快刀王) 조노복(曹老福)이 그의 아들, 그리고 네 명의 사제를 데리고 달려왔다. 제갈명 부부는 다시 그들을 위해 소개를 시키고 환영식을 마련했다. 또 얼마 되지 않아 당주인 언봉저도 적시에 돌아와 제갈명에게 이번 외출의 경과를 올리고 소림방장 대통대사와 무당장문 천령자도 친히 온다고 덧붙여 아뢴다. 그런 후 또 하루가 지나자 점창파의 장문인 번천안 백장청과 그의 사제인 추풍안 갈비백이 달려왔다. 그리고 화산파 운리비 기숙한이 그의 딸 기념구(紀念邱)와 또 기민(紀敏)을 데리고 속속들이 달려왔다. 이때, 청첩장도 없이 달려온 사람은 고죽방의 방주 죽중영, 죽청청 부부와 이십여 명이나 되는 고죽방의 형제들이었다. 제갈명은 고죽방의 사람들이 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전날 죽청청이 자기에게 구구환원단을 먹여 주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즉시 마 중해 나갔다. 제갈명은 그들의 앞에 서자마자 지극히 감격한 어조로 예를 취했다. "전날 죽부인께서 영단으로 저를 구해 주신 은혜에 재삼 감사를 드립니다. 더구나 이번에 두 분께서 친히 왕림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죽중영은 즉시 예의를 취하며 황송해 했다. "맹주께서는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폐방은 강호에서 그리 이름 있는 문파도 아닌데 맹주께서 이처럼 맞아 주시니 정말 영광입니다." 죽청청은 전날 제갈명에게 자기 입에 대고 약을 먹인 생각을 하자 몹시 얼굴을 붉혔다. "하나 만약 천첩은 만약 맹주의 도움이 없었다면 벌써 저승길로 갔을 거예요. 그런데 맹주께서는 그까짓 한 알의 미물을 가지고 이리 떠드시니 천첩은 정말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주실란이 죽청청의 손을 잡으며 매우 감사한 듯 몇 번이고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나 만약 언니의 구구환원단이 없었다면 아까 오늘의 이 같은 자리는 영원히 없었을 거예요." 이날 오후에도 손님들은 끊이지 않고 달려왔다. 오후에 맨 처음 온 사람은 종남 이노였다. 그는 몸소 장문인인 육연생, 양영태와 만소부 그 밖에 문하의 일행 등을 데리고 왔다. 그들의 동행에는 길무구도 끼어 있었다. 북고산에 이처럼 많은 손님들이 들이닥치니 온 산은 떠나갈 듯 시끄러 웠다. 이때 집사당의 총관인 정수복은 참가한 사람을 일일히 기억할 수가 없자 적이 한데 섞여 들어 있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세 치 가량의 비단띠를 주어 다른 사람과 식별하기 위해 가슴에 달게 만들었다. 이 비단은 모두 네 가지의 색깔로 나뉘어져 있었다 노란색의 비단에 검은 글씨로 문파의 이름을 새기고 사람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았다. 붉은색 역시 무림맹의 귀인이라고 검은 글씨로 썼을 뿐 이름은 없었고 분흥색은 일반 무림동도를 위해 이름까지 임시로 수놓았다. 다만 녹색은 무림맹 사람의 것이라 이름과 직책까지 수 놓아져 있었다. 정수복이 이처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니 적들은 감히 침입해 들어올 수 없었다. 이때 날짜는 정월 초하루와 사흘이라는 여유 밖에 없었다. 구대 문파에서는 벌써 다섯 파가 왔으나 소림, 무당, 아미, 청성네 파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림의 대통대사와 무당의 제자들이 모두 올 것이라고 친히 말했으니 반드시 올 것이다. 아미파는 삼 년 전부터 강호의 일에서 손을 떼었으니 올 리가 없으니 구대 문파 중 실제로 청성파만 참가하지 않는 셈이었다. 하지만 제갈명은 상상외로 이처럼 많은 문파들이 참가해 자기를 지지해 주자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은 단지 소림과 무당 두 파가 오기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인물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바로 무림맹의 총호법인 염지천인 것이다. 이튿날 -. 아침 새벽부터 북고산 아래 갑자기 회색과 남색 두 무리의 인마가 질서있게 나타났다. 그 회색은 화상들의 행렬이었는데 맨 앞에 있는 가마 위에는 나이가 약 육십 세 가량으로 보이며 장엄하고 위풍이 당당한 소림방장 대통대사가 앉아 있었다. 가마 뒤로는 역시 육십 세 가량의 노승 네 명이 준엄하게 따르고 있었다. 이 네 명의 노승은 바로 달마원의 주지 정통대사와 가람원의 주지 명통대사, 그리고 호법당의 주지 행통대사, 나한당의 주지 능통대사였다. 이들의 뒤로 다시 사십 명의 소림 정예의 고수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또 남색은 도사들의 행색이었고 그 남색들의 행렬에도 하나의 가마가 앞서 있었다. 그 가마 위에는 얼굴이 약간 야위고 몸도 약해 보이는 무당파의 장문인 천령자가 앉아 있었다. 가마 뒤에는 두 명의 도동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옥불을 들고 다른 사람은 장검을 들고 있었다. 다시 그들 뒤로 자의를 입은 오십 세 가량의 다섯 도사들이 등에 모두 장검을 메고 뒤따랐다. 이 다섯 명의 도사들은 바로 무당의 수석 법사돈이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장문인과 동배들인 삼십 명의 남포도사가 역시 뒤를 이었다. 무당파 역시 그들의 정예부대를 총동원한 것이었다. 이 사십 명의 소림 화상들은 다섯 개의 나한진(羅漢鎭)을 펼 수 있으며 또 삼십 명의 남포도사들은 여섯 개의 오행검진(五行劍陣)을 만들 수 있다. 이 두 패의 행렬들은 북고산령에 오자 즉시 무림맹 성립대전이라 현판을 보았다. 그들이 내심 어떤 위압감 같은 것을 느껴 가마를 세웠을 때 즉시 제갈명 부부와 곡영자가 영접을 하러 나왔다. 두 사람이 채 가마에서 내리기도 전에 제갈명이 먼저 포권의 예를 취하며 매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제모의 마중이 늦었음을 널리 용서하십시오." 대통대사가 먼저 가마에서 내려 두 손을 합장했다. "나무아미타불…… 제맹주께서 이렇게 친히 영접하러 나오시니 심히 감사하오이다." 이어 대통대사는 다시 말했다. "삼 년 전 동사도에서 헤어진 후 여전히 동사도의 소식을 못 들었는데 이번에 다시 그들이 무명도라고 이름을 바꾸어 나온다고 하니 우리는 무림맹에 참가해 다만 제맹주의 지시만 기다리겠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천령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폐파 역시 제맹주의 분부만 기다리겠소." 그러자 제갈명은 크게 기뻐했다. "두 분께서는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러더니 제갈명은 곡영자를 대통대사와 천령자 등의 사람에게 일일히 소개를 시킨 후 총단의 객청으로 맞아들여 담소를 나누었다. 이들이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휘방방주 유성추월 정개태, 강회대협 금안신조 관진산과 문하 제자들이 달려왔다. 바로 이때, 갑자기 한 무사가 언봉저에게 급히 달려와 아뢰었다. "저는 당호법(당승무)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산록 바로 앞에 열 한 사람이 왔는데 그들은 자칭 공동(共同) 삼선(三仙)의 탁진인(卓眞人) 낭진인(郞眞人) 유선고(柳仙姑)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다섯 명의 문하 제자인 육반산(六盤山) 대각사(大覺寺)의 방장인 구공대사(九空大師) 그리고 파양호(播陽湖)의 소라주주(小螺洲主) 비화검(飛花劍) 우전경(于傳經) 부부가 왔습니다. 그들이 와서 말하기를 제갈대협이 무림맹을 창단한다기에 특별히 참가하러 왔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당호법께서는 저를 시켜 보고를 올리게 하셨습니다." 언봉저는 무사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급히 당승무에게 가보았다. 과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당승무는 그들과 무엇인가 말을 하고 있다가 언봉저가 나오는 것을 보자 즉시 소리쳤다. "아, 이제 됐습니다. 언장주께서 나오셨으니까요." 언봉저는 포권을 취하며 공손히 말했다. "언봉저의 마중이 늦었음을 이해하십시오." 말하면서 그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을 가늠해 보니 두 명의 중년도인과 한 명의 중년도고가 서 있었다. 두 명 도민의 차림은 첫 눈에 봐도 사악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또 한 명의 도고는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한 자루의 검은 불진을 쥐고 있었는데 그녀의 목에는 사람의 해골을 작게 만든 것을 목걸이로 대신 걸고 있었다. 또 이들의 뒤로 네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서 있었다. 또 나머지 한 명은 나이가 약 오십 세 가량의 황포를 입은 구공대사였고 포의를 입은 부부는 남자가 약 사십 세 가량인데 매우 오만하게 생기고 여자는 삼십 세 가량으로 몹시 몸이 풍만한 여인이었다. 이 일행은 벌써 첫 눈에 보아도 좋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봉이가 나타나자 탁진인은 짐짓 공손히 예를 취했다. "아, 언장문이시구려. 이거 정말 실례가 많았소." 언봉저는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이 같이 예를 취했다. "별말씀을…… 저는 무림맹에서 연락단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빈을 접대하는 사람입니다." 탁진인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당승무가 갑자기 외쳤다. "언장주! 또 누가 왔습니다! " 언봉저가 즉시 고개를 쳐들고 보니 과연 몇 개의 인영이 달려오고 있었다. 언봉저는 다급히 소리쳤다. "어느 고인이신지 잠시 멈추실 수 없습니까? " 하지만 그 소리는 말발굽 소리에 짓밟혀 사방으로 흩어졌고 두 인영은 일진의 향기를 내뿜으며 순식간에 달려왔다. 그 인영은 꽃무늬가 수놓인 옷을 입은 두 명의 아름다운 낭자였다. 앞에 있는 낭자는 아름답게 생겼으나 인상은 매우 차가왔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있는 낭자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몹시 매력적으로 생겼다. 언봉저는 꽃같은 미인이 둘 씩이나 들이닥치자 몹시 당황했다. "두 분 낭자께서는 어느 문파에서 오셨습니까? ,, 앞서 왔던 낭자는 역시 그녀의 싸늘한 표정대로 냉랭하게 대꾸한다. "마교의 문하 희진진(姬眞眞)과 하가가(何嘉嘉)가 칠태파의 명령을 받고 본 대회에 참가하러 왔어요." 당승무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우 놀라며 소리쳤다. "언장주, 이 두 분 낭자는 바로 용사매의 사저가 되는 분입니다! " 하가가는 그 소리를 듣자 당승무를 한참 동안이나 뚫어지라고 내려다 보았다. 공동삼요 하가가는 얼굴에 어떤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리더니 불쑥 엉뚱하게 물었다. "용주주더러 사매라고 하는 것을 보니 당신이 바로 아복인 모양이군요? " 당승무는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아……아복은 그때 임시로 부른 이름이고 실은 당승무라고 합니다." 하가가는 이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당승무라? 하지만 주주는 매일 아복, 아복하고 부르던데요? " 당승무는 더욱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하가가는 그런 당승무의 모습을 보자 놀리듯 말했다. "여보세요. 아복, 우리는 제맹주를 좀 만나야겠어요. 우리의 냉면관음(冷面觀音) 이신 언니께서 그분을 몹시 보고 싶어 하니까요." 그러자 희진진은 냉엄한 얼굴에 한 줄기의 홍조를 떠올리며 소리쳤다. "하사매, 쓸데 없는 소리는 하지 말아라! " 하가가는 몹시 재미있다는 듯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머, 그렇다면 언니는 그 사람이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예요? ,, 회진진은 두 눈을 곤두세우며 헛 주먹질을 했다. "아니, 너 정말……." 그러자 희진진이 안색을 날카롭게 굳혀서 사람들을 노려보자 언봉저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갈까봐 급히 당승무에게 지시했다. "노제, 이 두 분 낭자는 맹주와 부인을 잘 알고 있으니 빨리 모시고 가게." 이때 또 다른 세 명의 노인이 두 낭자에 뒤이어 왔다. 이들은 언봉저가 두 낭자와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서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운중이교(雲中二嬌)가 간 후에 언봉저는 급히 세 노인에게 포권을 올렸다. "민노형과 두 분께서는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원래 이 세 명의 노인은 바로 배교총타주(排敎總舵主) 민장강(閔長江)이었으며 두 명의 장노는 언사고(顔師古)와 빙재법(憑在法)이었던 것이다. 이들 배교는 장강 상하류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규칙은 바로 남이 자기네를 건드리지 않으면 그들도 절대로 남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 북고산에 온 이유는 바로 언봉저가 청해서 온 것이었다. 민장강은 주름진 얼굴에 잔뜩 미소를 담으며 말했다. "저에게 약간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좀 늦었소이다." 이어 언봉저는 쌍방을 모두 소개시키고 그들을 데리고 빈환으로 갔다. 한편, 무단으로 들어온 공동삼선의 원명은 공동삼요(三妖) 였다. 이들은 전날 죄악을 많이 저질러 십여 년 간이나 은거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법 그럴싸한 명칭으로 판공대사와 파양호의 소라주주 부부를 동반해서 왔다. 이들이 온 목적은 이날밤 무명도와 합세를 해서 무림맹의 총단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탁진인의 문하 오운해와 주오, 낭진인의 문하 상대춘, 양건민, 이들은 이곳 북고산에 당도하기 전 벌써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북고산에 들어와서도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고 네 개의 분홍 비단만 받고는 허실을 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운해는 계집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까 하가가를 보자마자 첫 눈에 반해 침을 삼키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날이 어두워 오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오를 데리고 빈관을 나섰다. 주오는 그의 색골적인 성질을 알고 있는 터라 가기 싫은 듯한 표정이 었다. "대사형,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오운해는 음산하게 눈알을 굴리며 웃었다. "후후…… 여기는 심사제와 양사제더러 지키라하고 우리는 뒷 산으로 가서 좀 살펴보자." 주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 그러자 오운해는 화를 벌컥 내었다. "아니, 무슨 소리냐? 우리는 지금 적과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야단이냐? 그리고 뒷 산에도 누가 가서 지켜야 하니까 가자는 말이다." 주오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대사청께서도 어떤 쓸데 없는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그때 갑자기 오운해는 손가락을 입에다 갖다 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쉿, 누가 왔다." 주오가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한 명의 회의노인이 어깨를 휘적거리며 징그러운 인상으로 다가왔다. "두 분 협사에게 묻겠는데 뒷 산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오운해는 눈치 빠르게 상대방의 가슴에 비단 헝겊이 없는 것을 보고는 그 사람도 몰래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눈알을 굴리며 짐짓 위엄있게 물었다. "친구는 어느 파의 사람이오? " 노인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 늙은이에게는 아무 파도 없소." 오운해는 괴상한 눈초리로 노인의 아래 위를 가늠해보았다. "그러면 노형은 왜 아무 접대도 없이 무단으로 들어오는 거요? ,, 노인은 순간, 안색이 싹 질리더니 급히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아…… 아닙니다. 저…… 저는…" 하고는 몸을 움츠려 급히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자 오운해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 나를 무서워 할 필요는 없소. 우린 바로 공동 탁진인의 문하요." 노인은 도망가려다 말고 즉시 돌아서며 매우 기뻐했다. "그럼 우리는 전부 한 집안 식구군요. 이 늙은이는 바로……." 하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 그보다 두 분께서는 돌아가셔서 장주께서 오셨다고 영사께 알려 주시오." 오운해는 이 말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영당주,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노인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더니 몹시 중요한 기밀이라는 듯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앞 산에 있소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타날 수 없고 부총영주가 나타난 다음에야 일을 시작할 수 있소." 주오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궁금한 듯 물었다. "부총영주는 언제 도착할 수 있습니까? " 노인은 작달막한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잘 모르겠소. 하지만 당주께서 하시는 말을 들어보니 아마 얼마 후에 올 것 같습니다." 하고 노인은 두 눈을 한데 고정시키고 조용하게 두 사람의 시선을 모으게 했다. "그리고 부총영주가 오시면 아마 유성화포로 신호를 울릴 것이오" 오운해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노인은 말을 끝내자 빙그레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두 분은 어디를 가시는 길입니까?" 오운해는 무엇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뒤… 뒷 산에 볼 일이 있었어……." 노인은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렇다면 빨리 가보셔야지요. 하지만 영사께 보고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 이 말을 끝으로 노인은 믿기 어려울만큼 순식간에 숲 속으로 사라졌다. 오운해는 노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주오에게 시선을 돌리며 급히 재촉했다. "사제, 이 보고는 매우 중요하니 빨리 가서 사부께 보고를 올려라." 주오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는 지금 곧 가겠습니다." 돌아서는 주오의 뒤로 오운해는 다시 말했다. "빨리 갔다 오너라. 나는 뒷 산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주오는 돌아선 채로 대답하고 급히 산 아래를 향해 달렸다. 그런데 주오가 막 숲 속을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매우 반갑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거 공동문하의 주형이 아니오?" 주오는 깜짝 놀랐으나 자기 이름이 튀어나오자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오?" 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급한 목소리만 들렸다. "주형, 빨리 이 숲으로 들어오시오." 하지만 주오는 더럭 의심이 생겨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쏘아보기만 했다. 그러자 숲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명의 준수한 젊은이가 장검을 둘러 메고 가슴에는 비단 표시도 없이 주오를 향해 포권의 예를 취한다. "홍소붕(洪小朋)이 당주의 명령을 받고 주형께 서신을 전하러 왔습니다." 하더니 품에서 흰 봉투를 꺼내 주오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주위를 휘둘러 보더니 매우 황망한 어조로 말했다. "주형, 남이 보면 안 되니 빨리 이쪽으로 들어오시오." 하고 흥소붕은 먼저 자기가 나왔던 숲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주오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멍청하게 따라가다가 그만 그에게 혼혈을 찔리우고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사나이는 쓰러진 주오를 숲 속에다 끌어다 감추어 놓으며 가소롭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친구, 나는 홍소붕이 아니라 윤상이었다네." 한편 -. 오운해가 혼자 산길을 걸어가는 사이,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나 주오의 그림자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운해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다시 되돌아 가려고 했을 때 돌연 그의 귀에 어떤 청아한 여인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운해가 마치 이끌리듯 그 웃음 소리를 따라 들어가니 일진의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 갈수록 그의 코를 자극시켰다. 오운해는 색골인 그의 본능이 발작해 주오고 뭐고 기다릴 필요도 없이 즉시 다가갔다. 그때였다. 오운해가 그토록 침을 흘리는 하가가의 음설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호호…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다른 한 명의 여자가 대답했다. "영향이에요." 하가가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다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호호…… 그래요. 그런데 흥채 사녀의 명성은 강호에서 아주 크더군요." 영향은 수줍은 듯 낮은 어조로 말했다. "과장된 말씀이 군요." "그런데 올해 몇 살인가요?" 영향은 두 손을 가만히 한데 모으며 대답했다. "스물 한 살이에요." 하가가는 교태롭게 몸을 움직이며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보다 한 살 위군요. 그런데 마음 속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없나요? " 그러자 영향은 한데 모은 손을 더욱 꼭 쥐며 귓뿌리를 빨갛게 물들였다. "아이 별말씀을 다하세요." 어느새 달이 떠올라 두 여인에게 내리비치자 더욱 정취가 있어 지극히 아름답게 보였다. 하가가는 흰 얼굴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매우 정취가 깃든 얼굴로 읊조리듯 말했다. "다 같은 여자끼리 부끄러워 할 필요가 뭐 있어요? 듣자하니 홍채 사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가벼운 기침 소리가 들렸다. 영향은 고요한 밤에 기침 소리가 들리자 찔끔 놀라는 한편 어떤 일말의 노여움을 느끼고 대뜸 소리쳐 물었다. "게 누구냐? " 그러자 오운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불쑥 몸을 나타내었다. "오운해 입니다." 영향은 그의 모습을 보자 다시 분노를 일으키며 쏘아붙었다. "아니, 당신은 무슨 일 때문에 여기를 다 오는 거예요?" 오운해는 음험한 눈길로 하가가를 눈여겨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는 달이 하도 밝아 구경을 나왔던 길에 두 분 낭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영향은 냉랭한 얼굴로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이 뒷 산은 본문의 금기로써 남자 손님은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아실텐데요……? " 오운해는 여전히 탐욕스런 눈길을 굴리며 변명했다. 영향은 눈을 곤두세우며 따지듯 물었다. "그럼 당신은 본문의 성립대전에 참가하러 온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요? " 오운해는 모처럼 굴러온 떡을 놓치기가 아까운 듯 밑도 없는 말을 씨부렁거렸다. "아…… 아닙니다. 저는 이 대회에 참가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무림맹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고 하기 때문에 저는 뒷 산으로 온 것입니다." 영향은 이 뻔뻔한 사내의 터무니 없는 말에 화를 벌컥 내며 숲 밖을 향해 손을 가리켰다. "허튼 소리 말고 빨리 이곳에서 나가요! " 이때 하가가는 몹시 난감해 하는 오운해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영향을 향해 말했다. "낭자, 저는 이 사람을 잘 알아요." 영향은 뜻밖인 듯 눈을 치켜 뜨며 반문했다. "아니, 하낭자께서 이 자를 아신다고요? " 하가가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는 오운해의 얼굴을 살짝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 였다. "그는 우리와 함께 왔어요." 하가가는 입가에 마치 사람을 흘릴 듯한 싸늘하고도 요염한 미소를 흘렸다. "음, 그런데 아까 듣기로는 당신의 사부가 공동삼요라고 하는 것 같더군요." 오운해는 이 판국에도 정신이 있었던지 급히 부인했다. "아…… 아닙니다. 공동삼선이라고 합니다." 하가가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머, 요(妖)자라는 것이 그렇게 나쁜 건가요? 우리는 마교라고 해도 강호상에서 그 누구도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데." 오운해는 징글맞게 웃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까닭에 저는 아까 낭자를 보자마자 첫 눈에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되어 버렸지 않습니까? " 그러자 하가가는 깔깔대고 소리 높여 웃었다. "호호호…… 당신은 마교라는 본문을 알고 있나요? 우리 마교의 사람들은 전부 다 악귀를 쫓을 줄 알고 또 사람을 태울 수 있는데 당신은 이것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요?" 오운해는 그녀의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교태와 낭랑한 웃음 소리에 흘려 하가가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듣겠다는 듯 그녀의 앞으로 한 걸음다가섰다. '저는 다만 마교의 사람들이 칼과 불을 먹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은 없습니다." 하가가는 오운해를 흘려 집어삼킬 듯한 표정으로 다시 웃었다. "호호…… 한 번 보고 싶나요?" 하더니 재빨리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튕겼다. 오운해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뭐라고 입을 열려다가 갑자기 자기의 주위에 화염이 일어나자 깜짝 놀라 주춤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것이 하가가가 자기에게 시범을 보이려는 것인 줄 알고 여유있게 웃으며 물었다. "낭자, 이 불은 진짜 불입니까? 아니면 어떤 속임수로 일으킨 불입니까?" 하가가는 달빛을 받아 눈에 새파란 신광을 빛내며 요사스럽게 웃어젖혔다. "호호호, …, 이 개만도 못한 놈 같으니라고, 이것이 바로 본문 마교의 영화진(影火陣)이라는 것이다! 이놈아, 나 하가가가 지금 네놈과 농담을 하게 되었느냐?" 그러자 오운해도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러는 순간에도 사방의 화염은 사정없이 마른 풀더미를 태우며 계속 타들어왔다. 오운해는 공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타 들어오는 불길을 둘러보고 물었다. "낭자, 저는 낭자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대체 왜 이러십니까?" 하가가의 방금 전 애교에 넘치던 표정은 마치 강물에 배 지나간 자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어 그녀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흥! 너같이 못된 놈은 뜨거운 맛을 톡톡히 보아야 한다." 그러더니 입가에 얼음이라도 얼릴 듯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에게도 한 가닥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는 있지" 순간, 오운해는 갑자기 섬뜩한 감을 느껴 급히 자기의 몸을 더듬다가 안색이 싹 변했다. 오운해는 자기의 병기까지 없어진 이 마당에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구차한 삶의 미련을 느껴 볼품 없게 애원했다. "아…… 낭자, 어서 불을 끄고 저를 좀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영향이 싸늘하게 그 말을 일축시켰다. "흥! 그래도 살고는 싶은가 보구나.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살려 줄 수는 없다." 오운해는 다시 급급히 영향에게 시선을 돌리며 정말 비굴하리만큼 참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물었다. "무.. 무슨 조건이라도 있습니까? 낭자……." 심야의 변괴 영향은 오운해의 당황한 두 눈을 매섭게 주시하며 숨막힐 듯한 침묵을 약간 지키더니 힘들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부터 당신의 사부가 무명도와 내통한 경과를 자세히 설명하고 또 여기에 온 목적과 그 음모를 얘기하면 살려 주겠다. 하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을 때는 이 마화의 맛을 정말로 보여주겠다! " 이때 오운해는 벌써 뜨거운 불길에 못이겨 숨을 거칠게 내뿜으며 땀을 뻘뻘 흘렸다. "오냐, 그렇다면 빨리 얘기해라! " 오운해는 숨이 턱에 닿을 듯 연신 헉헉대었다. "가사는 무명도의 군자검(君子劍) 연갱문(年更文) 이오. 청을 받아 구공대사와 소라주주 부부와 함께 왔습니다." 영향은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럼 언제 손을 쓰기로 했느냐? 그리고 무명도의 사람들도 온다고 하더냐? " 오운해는 도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사의 말투를 들어보니 오늘밤에 아마 무명도의 사람들과 합세를 해서, 영향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그치듯 물었다. "알았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연락 방법은 어떠하냐?" 오운해는 정녕 목숨이 아까와 자기편의 모든 기밀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우리가 오기 전에 연당주께서 이미 일종의 약주(藥酒)를 보내 그것을 몸에다 바르기만 하면 즉시 자기 편인지 안다고 했습니다" 영향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자, 그럼 우리의 당주가 오면 지금 한 말을 다시 되풀이 하기 바란다. 그리고 얘기할 때 너는 다만 아무 것도 모르고 이용만 당했다는 것처럼 얘기하되 모든 죄는 너의 사부에게 떠맡겨 버려야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오운해는 매우 비굴한 표정이 되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한편, 나머지 두 명의 요도인 상대춘과 양건민은 바로 앞 산에서 허실을 탐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림맹 총단의 경비가 삼엄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곳은 다 돌아다녔지만 아무런 수확도 얻을 수 없었다. 양건민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강을 가리켰다. "셋째 사형, 소제가 보기에는 저 강변에 정박해 있는 두 척의 누선이 좀 의심스러운 것 같습니다." 상대춘도 아무 허실을 탐지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차에 그 소리를 듣자 귀가 번쩍 뜨인 듯 즉시 말을 받았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가서 살펴보자." 하고 두 사람은 다시 이곳 저곳 구경을 다니는 사람처럼 어물정거리다가 급히 기회를 타 산쪽 입구로 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막 나가자마자 당승무 등의 사람들이 달려와 만류했다. "여보시오. 형씨들 나가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는 앞 산에서 한첩자를 발견했는데 어쩌면 이곳으로 도망쳐 올지도 모르오." 상대춘, 양건민 두 사람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당승무가 벌써 자기 옆에 있는 열여섯 명의 무사에게 분부를 내렸다. "조금 있다가 만약 너희가 첩자를 발견하면 감시만 하고 절대 출수는 하지 말아라." 무사들이 일제히 대답하자 당승무는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그럼 두 분 노형께서는 저를 따라 오십시오." 당승무는 즉시 두 사람을 데리고 어떤 으슥한 곳으로 삼 장쯤 걸어갔다. 상대춘은 당승무의 뒤를 바싹 따르며 은근한 투로 물었다. "당형, 그 첩자는 누구랍니까? " 당승무는 계속 앞으로 걸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글쎄 자세한 것은 잘모르겠소만 아마 무명도의 사람일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가슴이 덜컥 떨어져 자신들도 모르게 얼굴을 마주보는 순간, 당승무는 갑자기 손을 치켜 올리며 급히 소리쳤다. "앗! 보시오. 첩자가 이곳으로 도망쳐 오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그의 손짓에 따라 앞을 보니 과연 하나의 인영이 산길을 따라 급하게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습을 보니 분명 누군가가 뒤에서 쫓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니 뒤를 쫓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그 인영은 벌써 그들이 서 있는 암석 아래까지 달려왔다. 비록 어두운 밤이었지만 밝게 비치는 달빛 아래 보이는 그 사람의 얼굴은 약간 청수하게 생기고 마부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양건민과 상대춘 두 사람은 첫눈에 벌써 이자가 무명도의 여섯째 향주 유소붕이라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은 이 유향주의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까지 이르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다급하게 누구에게 쫓기는 것을 보자 즉시 놀란 마음을 금치 못했다. 유소붕은 벌써 암석 바로 앞까지 허겁지겁 도망쳐 왔으나 그의 뒤 에는 여전히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다. 그는 정신없이 달리다가 갑자기 비명을 올리더니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다가 그는 앞에서 마치 누가 버티고 선 것처럼 또 비명을 올리며 방향을 바꾸었다. 상대춘은 언덕 위에서 이 광경을 보자 불안한 마음에 앞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형, 저 사람의 앞뒤로는 아무런 저지도 없는 것 같은데 어째서 도망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맴을 돕니까? " 당승무는 팔짱을 끼고 가볍게 웃으며 의외의 대답을 했다. "물론, 도망치지 못하지요." 두 사람은 암중에 배어 나오는 이 칼날 같은 의미심장한 대답을 듣자 등줄기가 오한이 든 것처럼 싸늘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이 감히 무엇이라고 더 묻지 못하는 순간에도 유소붕은 여전히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맴을 돌았다. 그러다 그는 결국 미친 사람처럼 마치 마지막 발악인지도 모를 괴상한 소리를 지르더니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당승무는 그 모습을 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됐습니다. 저는 이제 그를 사로 잡아야 하기 때문에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고 그는 번개처럼 암석을 타고 가더니 곧 두 명의 무사를 시켜 소붕을 총단으로 데리고 가라고 분부했다. 양건민은 아까부터 참았다는 듯 어떤 무거운 기분에 잠긴 어조로 나직이 물었다. "셋째 사형, 이게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상대춘은 계속 언덕 아래를 주시하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래도 어떤 매복이 있는 것 같다." 양건민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볼 수가 없었지요? " 상대춘은 침통하게 안색을 굳히고 마치 하기 힘든 말을 하는 것처럼 내뱉았다. "무서운 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눈으로 볼수 없는 것……." 양건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생각난 듯 급히 말했다. "참, 우리는 빨리 이 일을 사부님께 보고해야 되지 않습니까?" 상대춘도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렇다. 빨리 보고를 올려야지! " 두 사람이 급히 산길을 뛰어 내려갈 때 갑자기 뒤에서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잠깐만! " 상대춘이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보니 한 명의 바싹 마른 늙은이가 매우 당황한 표정을 하고 달려오면서 물었다. "두 분이 바로 공동문하 상대협과 양대협이십니까? " 상대춘은 그 늙은이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느쪘음인지 몸을 절반쯤 돌리다 말고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늙은이는 가까이 다가오며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은 묻지 마시고 다만 공동문하인가 아닌가만 대답하시면 됩니다." 양건민은 옆에서 그를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가 늙은이의 당황한 행동이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음인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가 바로 공동문하요." 그러자 늙은이는 매우 반갑다는 듯 품 안을 뒤지며 급한 어조로 말했다. "이 늙은이는 바로 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당신의 친구 오운해가 지금 뒷 산에 갇혀 있으니 두 분께서 빨리 영사에게 보고를 올려 그를 구하라고 하십시오." 상대춘은 이 낮도깨비 같은 늙은이가 갑자기 나타나 뜻밖의 말을 하자 꼭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영문을 몰라했다. "아니, 친구는 도대체 누구길래 그런 소식을 전하는 겁니까? " 늙은이는 다만 의미있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급히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두 사람은 그가 의미있게 웃으며 마치 누가 올 것을 겁내는 듯 황망하게 되돌아가자 영문도 모르고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둔 사람은 의외로 큰 수확이 있었다고 기뻐하며 즉시 탁진인과 낭진인에게로 돌아갔다. 낭진인은 그들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돌아필자 급히 물었다. "그래 무슨 소식이라도 있었느냐? ,, 상대춘은 미처 예를 차릴 겨를도 없이 즉시 대답한다. "예. " 원래 상대춘과 양건민은 바로 낭진인의 문하였다. "중요한 일이냐? " 상대춘은 다시 대답한 후 유소붕이 산에서 도망가지 못해 쓰러져 당승무가 잡았다는 일을 자세히 얘기했다. 낭진인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의 뒤에 확실히 뒤쫓고 있는 사람이 없었단 말이냐?" "예, 틀림 없이 뒤쫓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유향주는 마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뛰어 다녔습니다." 낭진인은 양건민의 보충 설명을 듣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데……?" 이때 탁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급히 서두룬다. "낭진인, 어디 그럼 우리 한 번 살피러 가봅시다." "그러면 셋째 사매에게도 통지를 할까요? " 탁진인은 몸을 돌리며 냉랭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건 필요 없소. 상대가 몇 사람 되지 않는데 우루루 몰려갈 필요가 있겠소?" 그러더니 상대춘을 향해 지시했다. '대춘, 너는 우리와 같이 가고 양건민만 여기에 남아 있거라." 곧이어 세 사람은 번개같이 뒷 산으로 향해 달려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뒷 산에 도착하여 사방을 살펴 보았지만 주위는 마치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고 싸운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어이없는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자 상대춘이 다시 생각난듯 갑자기 소리쳐 말했다. "아, 또 한 가지 대사백께 보고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낭진인은 힘들게 언덕까지 쫓아왔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해 화가 치밀어 오르던 차라 분노를 터뜨리듯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아까 한꺼번에 얘기하지 않았느냐?" 상대춘은 그 기세에 눌려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했다. "개사형도 뒷 산에 갇혀 있다고 했습니다." 탁진인이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아니, 그것은 또 누가 얘기를 하더냐? " 상대춘은 다시 언덕을 내려올 때 어떤 늙은이를 만난 얘기를 해주었다. 탁진인은 그의 말을 다 듣고나자 급히 두 눈을 번득였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느냐? 그렇다면 혹시 그놈이…." 낭진인은 늙은이고 무엇이고 따질 겨를이 없는 듯 급히 재촉했다. "개사형. 오운해가 갇혀 있다니 빨리 가봅시다." "좋소." 낭진인은 재차 확인을 하려는 듯 상대춘에게 다시 물었다. "예! 확실합니다." 이들이 즉시 산길을 거슬러 올라 갔을 때 갑자기 오운해의 황망한 음성이 들려왔다. "예, 예. 삼요입니다. 바로 공동삼요지요." 탁진인은 이 말을 듣자 마음 속으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다시 오운해의 음성이 들렸다. "예, 예.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탁진인은 다시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놈들은 내 제자를 잡아 지금 고문을 하고 있구나." 하고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해 덮쳐 가려고 하녀 낭진인이 급히 말했다. "개사형, 좀 더 살펴 본 후에 행동합시다." 탁진인이 애써 분노를 누르며 호흡을 가다듬었을 때 오운해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네, 사부님이 말씀하시기를 군자검 연병문의 말을 들으니 무림맹을 없애고 구대 문파까지 섬멸해 우리 공동파를 강호의 제일 문파로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탁진인은 분노를 참지 못해 두 주먹이 으스러져라 꽉 움켜쥐었다. "이… 이놈의 새끼를 그냥……." 오운해는 마치 어떤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지금 자기의 사부가 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입에서 나오는대로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오늘밤에 무명도에서 극히 무서운인물들이 달려와 저희와 같이 접응해 무림맹을 섬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명도에서 오는 사람들은 정신이 혼미해…" 탁진인은 들으면 들을수록 분노를 금치 못해 마음 속으로 잔뜩 벼르고 있었다. '이놈이 전부 다 얘기를 했구나.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놈 역시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 여기까지 중얼거리자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오운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곧 두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 유성처럼 단숨에 몸을 번득여 양쪽의 산길을 막았다. 그러나 막 몸을 나타내는 순간 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운해는 마치 무엇에 흘린 사람처럼 아무도 없는 데서 혼자 지껄이고 있었다. 탁진인은 그 모습을 보자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섰다가 소리쳐 물었다. "운해, 도대체 너 지금 누구와 얘기를 하고 있는 거냐?" 오운해는 자기의 사부가 물어도 인사는 커녕 쳐다보지도 않은 채 아까 한 말을 되풀이 했다. "예예, 삼요입니다. 공동삼선이 아니고 삼요입니다." 탁진인이 벌컥 화를 터뜨리며 호령했다. "이놈, 정신차려라!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냐?" 하고는 밤하늘을 가르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호되게 오운해의 따귀를 갈겼다. 그런데도 오운해는 아픔을 모르는 듯 다시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아, 얘기하겠습니다. 얘기하겠습니다." 탁진인은 일순 멍청해져서 내심 영문을 몰라 했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무림사노 낭진인도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탁진인을 향해 침중하게 물었다. "대사형! 혹시 미약에 의해서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 아닐까요? " 탁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오운해의 혈도를 번개처럼 찌른 다음 상대춘체게 객청으로 데리고 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한편 --. 양건민은 객청 안에 남아 있었는데 대사백과 사부가 간지 얼마 안되어 시녀들이 기름진 요리를 들고 들어오더니 양건민 앞에 공손히 내려 놓았다. 바로 이때 -. 문 입구에서 한 사람이 바람처럼 날아 들었다. 양건민이 급히 몸을 돌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대체 어느 놈이냐?" 객청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이 늙은이요. 한 가지 소식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 왔소." 지금 들어온 사람은 앞 산에서 만났던 몸이 허약하고 키가 작은 노인이었던 것이다. 양건민이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급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식입니까?" 늙은 노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딸을 꺼냈다. "음…… 당신의 형제들은 모두 실수를 저지른 것 같소. 또한 당신의 주오는 지금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빨리 가서 구해주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소?" 양건민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대사백께서는 이미 달려 가셨지만 사숙은 옆방에서 운기 조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늙은 노인은 가볍게 탄식을 하더니 내뱉듯이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는 그 소식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 왔을 뿐이니 이만 가봐야겠소." 말을 끝내자마자 노인은 포권을 하더니 다시 밖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사백과 사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양건민은 초조한 마음을 금치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때, 양건민의 뒤에서 갑자기 사숙인 유선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건민! 대사백과 사부는 어디로 갔느냐?" 양건민은 사숙이 들어오자 만면에 웃음을 띠며 급히 대답한다. "사숙, 마침 잘 오셨습니다. 지금 대사백과 사부님은 앞 산으로 대사형을 구하러 갔습니다. 조금 전 들은 바에 의하면 둘째 사형께서도 산 위에 있는 나무 위에 매달려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자 유선자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적이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양건민이 고개를 가로젓자 유선자는 급히 말을 재촉했다. "내가 산 위에 올라가 볼 테니 너는 여기에 남아 있어라!"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또다시 객청의 안쪽을 향해 큰 소리로 분부했다. "연병문! 어서 사부를 따라오너라!" 붉은 치마를 읽은 한 명의 소녀가 즉시 대답을 하고 과의 뒤를 따랐다. 산 위에는 하나의 팔각정이 세워져 있었다. 팔각정의 이름은 북고(北顧)라고 했으며 주위에는 매화가 심어져 있었다. 날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졌으나 팔각정의 안에는 몇 사람이 앉아서 장기를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내밀어 다섯 손가락도 볼 수 없을 만큼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지만 이들은 장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때, 왼쪽에 앓아 있는 사람은 생김새가 아주 청수해 보였으며 키가 작아 보이는 휴포도인이었다.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머리가 별로 없어 보였을 터 불그스레한 얼굴을 가진 꼽추인 것 같았다. 또한 넓은 황삼을 걸치고 있었으며 별로 없는 그의 머리가 하얗게 센것으로볼때 한눈에 칠십 세 가량 이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불그스름한 얼굴에 백발이 성성한 남포인이었으며 옆에는 쇠로 만든 빗자루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유선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유선자가 놀란 것은 바로 왼쪽에 앉아 있는 홍포도인이 바로 자의교주 염지천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가운데 있는 사람은 바로 무림사노(武林四老) 중의한 사람인 천산(天山) 부설옹(掃雪翁) 이 었다. 꼽추노인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겠으나 필시 대단한 인물일 것이라는 추측은 어느 누가 보더라도 직감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십여 장 밖에 있는 한 그루의 고목나무에는 과연 주오가 묶여 있었다. 이것을 본 유선자는 마음 속으로 급히 생각했다. '이것은 분명히 속임수일 것이다. 또한 지금 정 안에 있는 세 사람은 모두 무서운 인물들이기 때문에 만약 내가 섣불리 손을 깼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는 즉시 뒤에 서 있는 제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형은 지금 고목나무 위에 묶여 있으니 네가 가서 풀어 주어라. 팔각정 안에 있는 세 명의 늙은이가 만약 너를 저지하면 내가 상대를 하겠다. 알았느냐?" 연병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빠른 수법으로 고목나무를 향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연병문은 재빨리 나무 밑에 숨어서 고개를 내밀어 팔각정 안의 동정을 살피려고 했다. 순간 -. 오른쪽에 앉아 있던 곱추노인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년아!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 그놈은 노부의 사질이 묶은 것이니 아무 걱정 하지말고 구해 가거라. 또한 데리고 돌아가서 공등삼요에게 너희들이 온 목적을 남이 다 알고 있으니 쓸데 없는 짓은 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전해라, 만약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북고산(北固山)에서 떠날 생각은 아예 말라고 일러라!" 연병문은 급히 줄을 끊고 주오를 내린 다음 손에 묶여져 있는 줄까지도 풀어주었다. 꼽추노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멀리에서 음산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흐…, 석타자(石駝子) 대단한 말을 하고 있는데…" 하는 소리와 함께 공동삼요와 구공두타(九空頭陀)가 나타났다. 이때 유선자는 자기쪽의 사람들이 온 것을 보자 냉소를 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흥! 꼽추야! 나 유선자는 너의 실력을 한 번 보아야겠다." 하는 소리와 함께 유선자가 들고 있던 열세 자루의 유협도(柳莢刀)에서는 열세 줄기의 차가운 빛이 검화를 그리며 꼽추를 향해 날아갔다. 순간-가운데에 앉아 있던 백발노인이 큰 소리로 웃으며 외쳤다. "허허허…… 허허허… 두 분의 장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이 늙은이가 상대를 해주겠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맷자락을 펄럭이자 곱추노인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들던 열세 개의 유엽도는 즉시 그 노인의 소맷자락으로 들어 갔다. 유선자는 이 광경을 보자 분노를 금치 못하며 크게 외쳤다. "소설옹! 무엇 때문에 쓸데 없는 일에 간섭을 하느냐?"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해골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꺼내더니 번개처럼 던졌다. 이 목걸이에는 모두 일흔두 개의 작은 해골이 달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작은 해골 안에는 모두 독가루가 묻혀져 있었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에 도달하게 되면 칠공에서 독분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 장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순식간에 모두 썩어버리게 되어 있었다. 이번에 유선자가 일흔두 개를 한꺼번에 날린 이유는 바로 자기의 절예를 자랑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때 어둠 속에서 다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유선자! 감사하오. 이 물건들은 모두 이 늙은이가 거두어서 사용하겠소." 말소리가 끝나자마자 하나의 그림자가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더니 일혼두 개의 작은 해골들을 모두 받는 것과 동시에 다시 한 바퀴를 돌더니 유성처럼 사라져 버렸다. 공동삼요와 구공대사는 이 광경을 보자 기절초풍을 했다. 바로 이때-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산 아래에서 번개처럼 날아오더니 순식간에 팔각정 앞으로 다가갔다. 검은 그림자는 바로 청삼의 소년이었다. "마두(魔頭)가 벌써 앞 산에 나타났습니다." 팔각정 안에 있던 소설옹이 손짓을 하며 빙긋이 웃으며 부드럽게 말한다. "노제! 밖에는 몇 명의 요괴가 있으니 어서 정자 안으로 들어오너라." 청삼의 소년은 공동삼요와 구공두타를 한 번씩 주시하더니 싸늘하게 냉소를 날렸다. "후배는 즉시 볼 일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몇 놈의 요괴들을 후배가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비록 청삼소년의 나이는 어려 보였지만 말투를 들어볼 때 실력은 대단한 것 같았다. 소설옹이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허허…… 허허허… 젊은이는 과연 대단하군." 청삼소년은 팔각정 안에 있는 세 사람을 향해 포권을 한 다음 즉시 떠나려고 했다. 바로 이때 -. 구공두타가 한 걸음 다가서며 급히 손을 흔들었다. "잠깐!" 청삼소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냉랭하게 물었다. "흥! 무슨 가르침이라도 계시오?" 구공두타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고 또 누구의 문하냐?" 청삼소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퉁명스럽게 내 뱉았다 "당신 같은 요괴한테는 가르쳐 줄 수가 없는데……." 구공두타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놈!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사부의 이름을 대라! 너의 사부가 직접 와서 너를 데리고 갈 수도 있지 않느냐?" 청삼소년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나의 앞길을 막겠단 말이오? " 구공두타가 고개를 끄덕일 때 청삼소년은 그의 아래 위를 한 번 훑어보더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계속했다. "흥! 당신이 보기에는 마음대로 될 것 같소?" 구공두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크게 외쳤다. "물론! 너 같은 놈은 수십 명이 있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 청삼소년은 구공두타를 날카로운 눈초리를 쏘아보며 빈정거렸다. "직접 한 번 시험을 해보시지…." 구공두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를 갈아붙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 준비는 되었으냐? " 말을 마친 그는 청삼소년의 어깨를 향해 번개처럼 잡아갔다. 그러나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몸을 피했다. 구공두타가 계속해서 그의 손을 잡아올 때 청삼소년은 갑자기 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을 찔러갔다. 순간 -. "퍽!" 하는 소리와 합께 구공두타는 급히 뒤로 밀려났다. 깜짝 놀란 그는 큰 소리로 물었다. "앗! 금강저… 너는 대체 누구의 제자냐?" 청삼소년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확실히 보는 눈이 다르구나……." 구공두타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여전히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 쓸데 없는 소리는 말고 어서 누구의 제자라는 것을 밝혀라!" 청삼소년은 살기가 가득찬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귀하께서 금강저를 알면서 누구의 제자인지는 모르고 있소?" 구공두타는 어린 아이에게 조롱을 당하자 분통이 터졌다. "좋다. 이놈! 오늘 네놈을 용서치 않겠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렀다. 청삼소년은 가볍게 몸을 피하더니 왼손으로 지팡이의 끝을 향해 힘껏 밀어갔다. 구공두타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청삼소년은 갑자기 지팡이를 움켜 잡았다. 이렇게 되자, 구공두타는 온 힘을 다해 지팡이를 앞으로 밀며 위로 치켜 들었다. 하지만 청삼소년은 끄덕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때-. 구공두타는 상황이 불리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 구공두타가 잡고 있는 지팡이가 내공 주입으로 인하여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공동삼요는 감히 어쩔 수도 없는 처지였다. 지팡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불에 달군 것처럼 빨갛게 변했다. 이렇게 피자, 구공두타는 하는 수 없이 지팡이를 버리고 산 밑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삼소년은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산 아래를 향해 의젓하게 걸어갔다. 공동삼요는 겁에 질려 감히 저지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원래 이 청삼소년은 바로 폐문 삼 년을 마친 윤상(尹翔)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팔각정 안에 있던 흑포도인이 갑자기 걸어나오며 세 사람을 향해 히죽 웃었다. "세 분 친구께서는 이용을 당하면서도 어찌 뉘우칠 줄을 모르시오? 또한 무명도의 무리들이 간호에 해를 끼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지금 무엇 때문에 무림맹의 성립을 저지하려고 하시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세 사람은 일제히 산 아래를 향해 바람처럼 사라졌다. 세 사람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던 유선자가 탁진인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대사형! 그 사람은 흑영도주 같은데…… 대체 누구일까요? " 탁진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중하게 대답했다. "흑영도주와 생김이 똑같을 뿐만 아니라 무림맹의 총호법을 맡고있소. 또한 루영도주 염지천은 가짜라는 말이 있소." 유선자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대사형! 조금 전 저의 목걸이를 빼앗아 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탁진인은 주위를 살펴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무림맹의 요청을 받고 온 고수임에는 틀림이 없소." 바로 이때, 북고산 아래의 평탄한 큰 길에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움직이며 북고산 쪽으로 오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이때, 낭진인이 먼저 발견하고 두 사람을 향해 급히 물었다. "대사형, 저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탁진인은 그의 말을 듣고 아래쪽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가볍게 탄식을 했다. "다섯 개의 그림자를 보니 아마 가마 같군." 유선자가 나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림맹의 성립대회에 참가하러 오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때 다섯 개의 그림자는 이미 산 아래에 다다랐다. 최후의 기회 검은 그림자는 바로 다섯 대의 흑색 가마였으며 모두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속에 누가 앉아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또한 다섯 대의 가마는 각기 두 명씩의 흑의복면을 한 대한들이 들고 있었다. 이때, 열 명의 가마꾼들은 산 밑의 숲 속으로 다가가더니 일제히 가마를 내려놓은 다음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 무렵 웅장한 무림맹의 총단에는 여전히 휘황찬란하게 불이 켜져 있었지만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유선자가 사방을 살펴보며 탁진인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대사형! 혹시 무명도의 사람들이 온 것이 아닐까요?" 산 아래를 유심히 지켜보고 서 있던 탁진인이 고개를 돌려 유선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두고 봅시다." 유선자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급히 물었다. "무명도의 사람들이 가마를 타고 왔으면 왜 접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 탁진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섞인 음성으로 대답을 했다. "모르겠소. 이 다섯 대의 가마에는 아마 연당주가 말한 무적의 고수들이 들어 있을 것이오" 유선자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염지천은 우리보다 수백 배가 강한 고수들이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빠져 나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가마에서는 여전히 동정이 없었으며 무림맹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은 더욱 깊어가기만 했다. 바로 이때 -. 이때 멀리에서 일진의 웃음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들려왔다. 유선자가 급히 낭진인 옆으로 다가서며 말을 꺼냈다. "고수들이 또다시 나타난 것 같습니다." 낭진인은 안색이 변하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웃음 소리를 들어보니 우리보다 고수인 것 같은데……" 낭진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 웃음 소리는 갈수록 가까와지고 순식간에 산 밑까지 다다른 것같았다. 지금 큰 소리로 웃어젖히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남포를 입고 긴 수염을 가슴팍까지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어깨에는 장검을 메고 있는 위풍이 당당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때, 유선자가 가볍게 탄식을 하며 탁진인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사형! 지금 저 산 밑에 서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탁진인이 고개를 가로 저을 때 낭진인이 나서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 사람의 공력은 우리보다 더 높은 것 같은데……" 남포인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백영주는 어디에 있느냐?" 갑자기 일진의 극히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백가 계집년은 지금 무림맹의 총관 안에서 놀아나고 있으니 노형께서는 한 번 들어가 보시겠소?" 남포인은 목소리의 출처를 찾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지만 찾지를 못했다. "귀하는 도대체 뉘시오? " 카랑카랑한 음성은 또다시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당신은 나를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바로 노형이 무명도의 총영주라는 것을 알고 있소." 남포인은 사방을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노부가 바로 장한생이오. 당신은 뉘시오?" 카랑카랑한 음성은 다시 장한생의 귓전을 때렸다. "장한생! 오늘밤은 너의 마지막 밤이 될 것이다." 장한생은 띠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를 갈아붙였다. "어느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빨리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무림맹의 총단을 모조리 부셔버리겠다." 카랑카랑한 사람의 음성은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죽음 직전에서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소?" 바로 이때 -. 호쾌하게 웃어젖히는 웃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순간, 장한생의 앞에는 벌써 네 사람이 나타났나. 네 사람 중 가운데에 서 있는 젊은 남녀는 바로 무림맹와 맹주 제갈명과 그의 부인 주설란이었다. 두 사람의 왼쪽에는 좌호법 곡영자가 서 있고 오른쪽에는 연락당의 당주 언봉저가 서 있었다. 장한생이 살기에 가득 찬 눈초리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을 때 제갈명이 그를 향해 포권의 예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장총관이 오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환영을 하고 있는 바이오" 장한생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곡영자와 언봉저 두 사람을 향해 손짓을 했다. "흥! 조금 전 노부와 얘기를 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소?" 두 사람이 대답도 하기 전에 제갈명이 나서며 빙긋이 웃었다. "이분이 폐맹의 좌호법 곡영자이고 이분이 연락당의 당주인 언봉저요. 조금 전에는 저와 함께 있었으며 이제서야 소식을 듣고 장총관을 마중하기 위해서 나왔는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장총관께서는 아마 잘못 들었을 것이오" 하지만 장한생은 여전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노부에게 도전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구려." 제갈명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나직하게 물었다. "장총관께서는 무명도의 총영주라는 직책을 맡고 계시면서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처럼 어두운 밤에 폐방을 찾아오셨습니까?" 장한생은 표정을 굳힌 채 싸늘하게 반문을 했다. "노부가 한 가지 묻겠소. 지금 백영주와 유향주는 모두 당신네에게 잡혀 있소?" 제갈명은 두어 번 고개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나는 두 명의 첩자를 잡았다는 말을 들었소. 하지만 대체 누구를 잡았는지 모르고 있소." 장한생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너는 무림맹주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구를 잡았는지 모르고 있느냐? 정말로 한심한 노릇이구나." 제갈명은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담담하게 웃었다. "지금 본맹은 성립 직전에 놓여 있소. 또한 각당의 당주들도 제각기 할 일이 있는데 나라고 해서 할 일이 없겠소? 뿐만 아니라 매일각문 각파의 장문인들과 무림에 해를 끼치고 있는 무명도의 무리들을 어떻게 해서 없애 버릴까 하는 것에 대해서 밤새도록 상의를 하고 있었소." 제갈명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또한 첩자를 잡고 비천한 무리들을 없애 버리는 일은 바로 본맹의 순찰당에서 하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장총관께서 알고 싶다면 내가 주저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 알아보도록 하겠소이다. " 장한생은 비록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때, 제갈명이 고개를 돌리더니 뒤에 서 있는 한 명의 무사에게 분부를 했다. "너희들은 순찰당에 가서 두당주에게 조금 전에 생포한 두 명의 첩자를 데리고 오도록 일러라." 무사들은 즉시 대답을 하고 급히 허리를 굽히더니 황급히 달려갔다. 제갈명은 그 무사가 달려간 후에 장한생을 주의깊게 주시하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장총관! 총관에게 몇 마디의 얘기를 더 해주겠소. 무명도는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무림의 동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쳐 무림 내에 공분을 일으키고 있소. 또한 사악한 자는 반드시 멸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무명도는 얼마 안 되어서 멸망의 위기를 맞이할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장총관께서도 나쁜 무리를 위해 일을 하시지 말고 지금 이라도 무명도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장한생은 이 말을 듣자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제갈명을 노려보더니 고함을 질렀다. "이놈! 감히 노부를 훈계하려고 하다니…… 흥!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바로 네놈을 두고 한 말이었구나. 또 네놈들이 힘으로 무명도와 대적을 하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처해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주설란이 나서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장총관! 당신이 만약 이 충고를 저버린다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에요." 장한생은 여전히 독키에 가느다란 눈으로 그들을 주시하며 이를 갈았다. "노부가 무엇 때문에 쓸데 없이 후회를 하겠느냐?" 바로 이때, 총순찰 두경강이 장검을 든 경장대한들과 두 젊은 남녀를 데리고 왔다. 두경강은 제갈명을 보더니 급히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아뢴다. "속하 맹주님의 명령을 받들고 무명도에서 온 두 명의 첩자 백만천과 유소붕을 데리고 왔습니다." 원래 이 두 명의 첩자 중 남자는 흑영도주의 문하 유소용이었고 여자는 바로 부 총호법 음구낭(陰九娘)의 수하로써 영주의 직책을 맡고 있는 백만천이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얼굴은 몹시 창백해 보였으며 정신까지 혼미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눈동자까지도 흐려 있는 것 같았다. 이들 두 사람은 만약 두 명의 무사들의 부축이 없었다면 아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것 같았다. 장한생은 이들 두 사람을 주시하더니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여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 "유소붕은 가마꾼으로 변장을 해서 북고산에 들어왔으니 남에게 발각되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백만천은 다섯 명의 음인을 데리고 왔을 뿐만 아니라 피리만 불면 즉시 음인들이 가마를 떠나서 공격을 할 수가 있을 텐데 어떻게 잡혔을까…" 그러나 장한생은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앞에 서 있는 여러 사람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 놈들은 이 두 사람을 잡아서 무슨 짓을 했기에 이 모양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 두경강이 빙긋이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맹주님에게서 무명도의 사람을 잡았을 경우 즉시 모든 무공을 제거해 버리고 새 사람으로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 역시 무공을 완전히 제거했을 뿐이오." 두경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한생은 살기에 가득찬 눈초리로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이놈! 오늘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아라! "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오른손을 번쩍 치켜올리더니 두경강의 안면을 향해 번개처럼 후려쳐 갔다. 당금 무림 중에서 장한생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물었다. 이런 장한생의 일 장이 마치 광풍노도와 같이 무서운 폭음과 함께 날아갔다. 장한생의 무공이 얼마나 높은가는 이 일 장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이때 -. 옆에 서 있던 제갈명은 두경강이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까봐 오른쪽 손바닥을 칼날처럼 세워 허공을 향해 번개처럼 밀어냈다. 제갈명의 일 장은 조금도 바람 소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장한생의 거센 장풍과 부딪치자마자, "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굉음은 싸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멀리멀리 퍼져갔다. 장한생이 격출한 장풍은 마치 한 필의 베와 같았으며 제갈명의 일장은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그의 거대한 장풍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절단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장한생은 등골이 오싹해 옴을 느끼며 제갈명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네가 사용한 초식이 바로 본문의 다라엽도(多羅葉刀)였느냐?" 제갈명 역시 그를 주시하며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소. 장총관께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을 보니 과연 보는 눈이 다르오." 장한생은 궁금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본문의 다라엽도는 남궁노귀의 무학이 아닌 것 같았는데 너는 어디에서 배웠느냐? " 제갈명은 몹시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내가 어디에서 배웠건 간에 당신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시오?" 장한생은 갑자기 음산하게 웃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흐흐흐…… 네놈이 본문의 다라엽도를 연마했다고 해서 감히 노부를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제갈명은 정색을 하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장총관! 나는 장총관과 대적을 하고싶은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소. 그러나 나는 장총관께서 다시 무명도를 위해서 죄악을 저지른다면 가만히 보고만있지는 않겠소." 장한생은 조금도 굽힘이 없이 앙천대소를 터트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허허허…… 허허허…… 네놈이 무슨 재주가 길다고 노부의 일까지 참견을 하려고 하느냐? 또한 네놈에게 노부의 일을 참견할 만한 재주가 있을 것 같으냐? 그런 쓸데 없는 소리를 한 번만 더 하면…." 제갈명이 장탄식을 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장총관! 당신은 나의 얘기를 잘 들어 두시오. 우리 부부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맹세하기를 만약 무명도를 위해서 사악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무리를 보기만 하면 즉시 죽여버리기로 작정을 했었소. 만일 장총관께서도 저의 뜻을 끝까지 거절한다면 약간 곤란하게 될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제갈명의 말을 듣고 있던 장한생의 불그스레한 얼굴에는 차츰 검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두 눈에는 살기까지 떠올라 있었다. 제갈명의 말이 끝나자 장한생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 두 사람으로써는 노부 장한생을 절대로 어떻게 하지 못할것이다." 제갈명은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장한생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장한생! 내 말을 듣고 무명도에서 즉시 손을 떼기만 하면 나 제갈명은 네놈의 죄가를 더 이상 논하지 않고 살려 주겠다. 하지만 네 놈이 여전히 거부한다면 아마 띠 북고산이 너의 무덤이 될 것이다. 알았느냐?" 장한생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젖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허허허……좋다. 좋아. 이쯤 했으니 우리는 더 이상 쓸데 없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너희 두 년놈이 노부를 죽이기 전에 너희들 자신의 모가지나 노부가 떼어 버리지 않게끔 조심을 해라! " 제갈명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침착하게 대꾸한다. "장한생! 아직도 뉘우치지 못하겠단 말이냐? 내가 손을 써서 네놈을 죽여야만 정신을 차리겠느냐?" 장한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은 채 고함을 질렀다. "이놈! 쓸데 없는 개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손을 써라. 네놈이 손을 쓰기 싶다면 노부가 먼저 선수를 치겠다. 준비는 되어 있느냐?" 말을 끝냄과 동시에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더니 번개처럼 휘둘렀다. 순간-. "획! "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한 줄기의 파란 빛이 그의 손길을 따라 두 사람을 향해 쓸어갔다. 횡란천리 제갈명이 손을 쓰기도 전에 주설란이 냉소를 날리며 일 장을 번개처럼 휘둘러 장한생의 검광을 향해 끊어갔다. 제갈명은 주설란이 출수를 하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오른팔을 한 번 흔들어 반룡검을 뽑아들더니 장한생을 향해 예리하게 찔러갔다. 지금 두 사람은 장한생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서 협공을 누비고 다니듯 위력이 대단했다. 이것이 바로 북악 노신선에게서 배운 봉황검법이었던 것이다. 장한생은 전에 종남의 일전에서 쌍검 합벽의 위력을 경험한 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감히 깔보지 못하고 오른손으로 번개처럼 검을 휘두르며 즉시 두 사람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쳐 갔다. 제갈명과 주설란은 봉황검법을 배합하여 일 검 일 검 계속해서 쉬지 않고 마치 광풍노도처럼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삼 장 주위는 모두 번쩍이는 검광과 무서운 검기로 덮혀버렸다. 싸우고 있는 세 사람은 마치 세 마리의 용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았으며 다만 검광만 번득이면서 어두운 밤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어느 사이에 무림맹의 개최를 위해 강가의 객청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다만 멀리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뿐 감히 소리를 내거나 움직이지 못했다.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각대 문파의 장문인들도 침중한 안색으로 절묘한 검법을 주의깊게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 중에는 제갈명 부부를 위해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이때 -. "쨍그랑! "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의 차가운 검광이 십여 장 밖으로 유성처럼 날아감과 동시에 한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제갈명 부부는 장검을 빗겨든 채 태연스럽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도망을 친 사람은 바로 장한생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제갈명은 무엇 때문에 더 이상 쫓아가지 않는 것일까? 장한생이 십여 장 밖으로 날아가고 있을 때 숲 속에서 갑자기 한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장한생을 항해 독수리처럼 날아갔다. 지금 장한생은 공중에 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피할 수도 없었다. 순간 "퍽!" 하는 둔탁한 음향과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유성처럼 떨어졌다. 장한생을 향해 덮쳐갔던 사람은 바로 머리카락이 별로 없는 꼽추노인이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바로 조금 전 팔각정 안에서 염지천과 장기를 두고 있던 곤륜일괴(崑崙一怪) 석타자(石駝子) 였다. 그는 벌써 삼십여 년 간 강호상에 나타나지 닦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은 그가 이미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게 그가 북고산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장한생과 석타자는 이때 일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얼굴을 마주한 채 서 있었다. 이때, 석타자가 먼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 꼽추는 남의 부탁을 받고 여기를 지키고 걸으니 하늘을 날으는 새와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들까지도 절대로 통과시킬 수가 없소. 그러니 당신도 이 길을 택하지 말고 다른 길로 가도록 하시오." 장한생은 지금 입고 있던 도포가 완전히 찢어지고 긴 머리는 풀어져 마치 산발을 한 귀신과도 같았다. 그는 석타자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나직이 물었다. "당신은 대체 뉘시오? " 석타자는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었다. "허허허…… 당신은 나 석타자도 모르고 있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무명도의 총영주가 되었는지 참으로 의심스럽구려." 장한생은 그를 예리한 눈초리로 주시하며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쓸데 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어서 길을 비켜라! "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그는 석타자의 안면을 향해 번개처럼 일 장을 쳐갔다. 하지만 석타자는 가볍게 몸을 피하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이놈이 감히 선수를 치다니… 가소로운 놈 같으니 장한생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른손의 초식은 변하지 않고 왼손으로 다시 횡란천리(橫亂千里)라는 초식을 전개하며 석타자의 왼쪽 겨드랑이 사이를 향해 번개처럼 공격해 들어갔다. 석타자는 피하지도 않고 왼손으로는 위를 막고 오른손으로는 자기의 겨드랑이를 향해 쳐오는 장한생의 왼손을 힘껏 밀었다. 순간 -.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뒤로 각기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장한생이 갑자기 음산하게 웃으며 크게 외쳤다. "이 꼽추야! 일 장을 더 받아 보아라!" 말과 동시에 그는 석타자의 가슴을 향해 일 장을 가격해 갔다. 그러나 일 장이 나가기도 전에 그의 손에는 갑자기 금빛이 번득였다. 이때, 석타자의 귓전에 나직한 음성이 스쳐갔다. "석타자! 장한생의 번천금인(繁天金印)을 조심하시오." 석타자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젖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꼽추는 비록 가난해서 금으로 된 것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쇠로 만든 것을 내놓을 수가 있소."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즉시 장한생의 손바닥을 향해 번개처럼 찍어갔다. 석타자의 손바닥은 과연 무쇠처럼 새까맣고 번들거렸다. 순간, 어디선지 누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현무권(玄武拳)! " 바로 이때 "핑! "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각기 뒤로 세 발자국 씩이나 물러났다. 장한생은 자신이 석타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황급히 다른 방향을 향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석타자는 장한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허허허…… 장가야, 더 이상 모셔다 드리지는 않겠다." 순간, 석타자는 어느 사이에 숲 속으로 몸을 숨겨 버렸다. 장한생은 조금 전 석타자와 대적을 할 때 하마터면 내장이 파열되어 죽을 뻔 했던 것이다. 장한생이 강변을 향해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갑자기 우렁찬 웃음소리가 두 척의 누선 위에서 들려왔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한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장한생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이 사람은 바로 붉은 도포를 입고 체구가 작은 무림맹의 총호법염지천이었던 것이다. 장한생은 그를 보자마자 부드득 이를 갈며 큰 소리로 외쳤다. "또다시 네놈을 만나게 되었구나." 장한생의 거대한 체구에 비해 그의 앞에 서 있는 염지천은 너무나 작았다. 바로 이때, 장한생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뢰전교격(雷電交擊)의 수법으로 쌍장을 합해 염지천의 머리에서부터 발 끝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염지천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고함을 질렀다. "빈도는 옛날부터 여기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그는 허공을 향해 몸을 비스듬히 날리면서 장한생의 뢰전교격을 가볍게 피했다. 장한생은 일 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리더니 뢰전교격의 쌍장에서 이산진해(移出進海)의 수법으로 연결시켰다. 강맹한 장력은 마치 거센 파도가 밀려드는 것처럼 염지천의 몸을 향해 비스듬히 휘몰았다. 장한생의 장풍은 비록 강맹한 것 같았지만 염지천의 옷자락을 펄럭이게 했을 뿐 염지천이 다시 몸을 돌려 공격을 가한 장풍을 저지 시키지는 못했다. 장한생은 온 몸의 진기를 양팔에 끌어올리고 쌍장을 가슴 정도의 높이로 해서 앞을 향해 격출했다. 염지천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이제서야 좀 상대할 만하구나!" 하고 염지천 역시 쌍장을 곤두세워 일 격을 내뻗었다. 순간, 서로의 장력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두 사람의 몸은 일 격에 의해 즉시 갈라졌다. 장한생은 그와 쌍장을 마주칠 때 즉시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일진의 무거운 탄력이 자기의 팔을 따라 심장으로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심장(追心掌)." 경악의 소리와 함께 장한생은 급히 뒤로 세 발자국 가량 물러났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심장에서 일진의 격렬한 진통이 일어남과 동시에 기혈이 끓어올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모금의 붉은 선혈을 토해냈다. 원래 추심장을 연마한 사람은 손을 아무렇게나 휘둘러 상대방의 어느 부분을 맞추던 간에 즉시 그 진력은 상대방의 피를 따라 심장으로 스며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심장을 맞기만 하면 아무리 가볍다고 할지라도 중상은 입기 마련이다. 장한생은 자기의 상처가 중하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운공 조식을 하려고 했지만 강적이 앞에 있으니 감히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순간, 장한생은 갑자기 몸을 빙글빙글 돌리'년서 마치 회오리 바람처럼 서쪽의 사잇길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염지천은 더 이상 추격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다시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한편, 사잇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장한생의 귓전에 약간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디를 그렇게 급히 달려가시오." 이 사람은 바로 남포를 입고 백발에 흰 수염, 그리고 어깨에 쇠뎃자루를 둘러메고 있는 천산 소설옹이었다. 소설옹의 음성은 장한생이 가려고 하는 길의 앞쪽에서 들려왔다. 장한생은 그제서야 무림맹에서 벌써 여러 고수들을 사방에 매복시켰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때, 소설옹이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꺼냈다. "허허허…. 허허허…… 노부는 여기에서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제야 오셨소?" 장한생은 가슴이 덜컥 떨어졌으나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큰소리로 물었다. "흥!, 소설 늙은이! 당신은 또 무슨짓을 하려고 여기에 모습을 나타냈소? " 소설옹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미 독 안에 든 쥐와 같기 때문에 노부는 절대로 다른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겠소. 그러니 당신은 빨리 운기 조식을 하고 한 번 뚫고 나가 보시오." 장한생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이를 갈아붙였다. "이 늙은 놈아! 사람을 너무 얕보지 말아라! 나 장한생이 네놈 쯤 상대하는데 있어서는 운기 조식을 할 필요조차 없다"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쌍장을 모아 소설옹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장한생은 죽음을 각오한 터라 상대방이 맞던 맞지 않던 무조건 덤벼들었던 것이다. 소설옹의 작은 두 눈에서는 신광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허허허…… 죽음을 각오하고 덤비니 좀 무서운 것 같소." 그리고는 뒤로 두 발자국 가량 물러서면서 가볍게 장한생의 쌍장을 피했다.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소설옹의 쇠뎃자루는, "휙! "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을 쓸지 않고 괴이하게도 땅을 향해 쓸어갔다. 장한생은 소설옹이 몸을 피하자 연속적으로 쌍장을 휘둘러 갔다. 순간, 한 줄기의 거센 회오리 바람이 땅에서 위를 향해 몰아쳐 왔다. 회오리 바람 속에는 크고 작은 돌맹이와 무수한 모래들이 섞여있었다. 무수한 모래들이 몸에 맞아도 비록 다치지는 않는다 해도 크게 위협을 주었다. 장한생은 회오리 바람을 소설옹이 날려보낸 것을 알자 차츰 가까이 다가서며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소설옹은 지금 마치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비틀거릴 때마다 장한생의 공세를 피했던 것이다. 또한 소설옹은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쇠빗자루로 땅을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한생의 공력은 비록 고강했지만 쉴 사이 없이 휘날리는 흙과 먼지 때문에 도저히 상대방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소설옹은 괴이한 신공으로써 아예 상대방을 쳐다보지도 않고 갈수록 거세게 돌맹이와 모래 먼지 등을 날리는 것이다. 장한생은 비록 무공이 높았지만 거세게 날아오는 돌맹이와 먼지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반면 소설옹의 공격은 갈수록 빨라지고 거세어진다. 이런 판에 장한생이 두 가닥의 소맷자락으로 수많은 돌맹이와 모래를 얼마나 막아낼 수가 있겠는가-. 장한생의 마음은 다급했지만 계속해서 맞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양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수없이 날아 오는 돌맹이들은 빗발치듯 몸을 때리고 있었다. 비록 무수한 돌멩이들이 그의 몸을 쉴 사이 없이 때리고 있었지만 그의 몸을 상하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반격할 기회가 없으니 그의 마음은 더욱 더 조급해지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장한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갑자기 흙과 먼지들이 그의 입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소설옹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친다. "어서 가거라! " 소설옹의 외침 소리가 끝나자마자 한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무수히 덮친 모래와 돌맹이의 틈을 뚫고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면서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그는 바로 장한생이었으며 상대방의 쇠빗자루에 의해 허리를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에게는 자기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내가진기가 있었기 때문에 부상은 별로 심하지 않았다. 이미 장한생의 꼴은 말씀이 아니었다. 얼굴이 새까맣고 눈이 부었으며 몸에 입고 있는 남포까지도 돌맹이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기 때문에 마치 산발을 한 유령과도 같았다. 바로 장한생이 땅에 내려서는 순간-. "휙! " 하는 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사람은 바로 십삼 세 가량의 동자였다. 몸에는 하늘색의 경장을 입고 있었으며 등 뒤에는 두 자루의 단검을 메고 있는 준수하게 생긴 동자였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갈명 부부는 이 동자를 보더니 몹시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갈명은 이 동자가 장한생에게 불의의 습격이라도 당할까봐 걱정을 한 나머지 즉시 큰 소리로 외쳤다. "노제! 어서 몸을 피하게." 그러나 동자는 고개를 돌리더니 제갈명을 향해 빙긋이 웃었다. "제숙부님! 주숙모님! 저는 남궁각입니다. 이번에 제가 여기 온 목적은 명령을 받고 저놈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동자는 장한생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장총관! 아직도 저를 잊지는 않았겠지요?" 장한생의 최후 장한생은 남궁각을 살기에 가득찬 눈초리로 쏘아보며 언성을 높여 반문했다. "그렇다. 이놈아! 네놈이 바로 남궁각이라는 것을 노부가 어찌 잊었겠느냐? " 지금 장안생의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남궁각은 바로 북악 노신선의 증손자였던 것이다. 남궁각은 정색을 하며 여러 사람을 한 번 둘러보더니 날카롭게 물었다. "장총관! 제가 무슨 일 때문에 여기에 나타났는지 알겠습니까?" 장한생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알고 있다! 네놈은 죽으러 오지 않았느냐?" 남궁각은 냉랭하게 코옷음을 치며 품 속에서 하나의 백옥영부(白玉令符)를 꺼내더니 장한생 앞에 내밀었다. "노사형의 영부가 여기에 있으니 명령을 받드시오." 장한생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이놈 잘 들어 두어라! 노부는 삼 년 전에 회선부(會仙府)를 떠났으니 회선부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궁노귀의 영부는 노부에게 아무런 효과도 없으며 노부에게 산으로 다신 돌아오라는 말은 더욱 꿈같은 소리다. 하지만 네놈은 마침 잘 왔다. 노부는 절대로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니 노부를 따라 가지 않겠느냐?"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그는 오른손을 마치 독수리 발톱처럼 구부리더니 남궁각의 팔을 향해 번개처럼 잡아왔다. 제갈명은 이와 같은 상황을 보자 깜짝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장한생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장한생! 아직 나이도 어린 사람에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남궁각은 마치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오며 제갈명과 주설란을 향해 외쳤다. "제숙부님! 주숙모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절대로 저를 상하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장한생을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장한생! 당신은 내가 떠나을 때 노사형께서 무슨 당부를 하셨지 알고 있소?" 장한생은 자기의 일 격이 수포로 돌아가자 약간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물었다. "남궁노귀가 대체 너에게 무슨 부탁을 했느냐?" 남궁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를 주시하더니 언성을 높였다. "노사형께서는 진작부터 당신의 오만함을 알고 절대로 포박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소. 뿐만 아니라 노사형께서 당부하기를 만약 옥령을 거절할 경우에는 조금도 정을 생각하지 말고 당장에 처치해 버리라고 했소이다."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그는 장한생의 아랫배를 향해 번개처럼 일지를 찔러갔다. 장한생 역시 남궁각의 이같은 얘기를 듣고 양 손에 진기를 모아 남궁각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아직 나이도 어린 남궁각이 갑자기 선수를 치고 장한생의 기해혈(氣海穴)을 예리하게 찔러갔던 것이다. 순간 -. 장한생의 우람한 체구가 갑자기 일 장 밖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장한생은 마치 미친 야수처럼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여 정신없이 제갈명의 앞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이다. 제갈명은 장한생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장한생! 이놈! 어디로 오려고 하느냐?" 제갈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일진의 쥐꼬리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장총관! 걸음을 멈추어라! " 동시에 나이가 약 이십 사오 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명의 낭자가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 무림맹의 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날아왔는지 보지 못했다. 이때, 제갈명과 주설란은 그 낭자를 향해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후배 인사를 드리옵니다." 낭자는 가느다란 미소를 띄우고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두 분 노신선께서 당신 두 사람을 아주 훌륭하게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남궁각을 보내서 좀 배우라고 했어요." 제갈명은 다시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말을 받았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 원래 이 낭자는 바로 회선부 총관 고사선자(姑射仙子)였으며 흥채마녀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고사선자는 장한생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가볍게 탄식을 했다. "장총관! 저와 함께 노신선을 만나 뵈러 가요." 장한생은 눈물을 흘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체념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의 공력은 저놈의 천강지에 의해서 벌써 없어졌는데 다시 돌아가서 무엇을 합니까? 선자께서는 남궁 늙은이라 명령을 받고 저의 목을 떼어가기 위해서 오셨으니 제가 죽더라도 저의 시체를 거두어 줄 사람이 있게 되었구려." 장한생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처량하게 웃으며 갑자기 오른손을 치켜 올리더니 자기의 천령혈(天靈穴)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순간-. 장한생의 거대한 체구는 마치 썩은 고목나무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고사선자는 한동안 장한생의 시체를 주시하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제갈명을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일시적인 잘못 때문에 저토록 비참한 최후가 기고 말았군요. 제대협! 사람을 시켜 그의 시체를 좀 묻어 주시겠습니까?" 제갈명은 여러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예! 명령대로 하겠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무사들을 향해 장한생의 시체를 앞 산에 잘 묻도록 분부를 했다. 어느 사이에 남궁각도 달려와서 제갈명과 주설란 두 사람을 항해 인사를 했다. 주설란은 남궁각 곁으로 바싹 다가서며 손을 잡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각아! 우리는 삼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너는 키도 컸을 뿐만 아니라 무공 또한 몹시 높아진 것 같구나. 장총관의 무서운 공력으로써도 너의 일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무공을 일순간에 잃어버렸지 않았느냐? " 남궁각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주설란을 힐끗 쳐다보더니 나직하게 반문했다. "제가 장총관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떠나올 때에 노신선께서 가르쳐 준 한 수가 적중을 했기 때문입니다. 노신선께서는 저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그가 소홀한 틈을 타서 먼저 그의 기해혈을 찌르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저에게 어찌 그토록 대단한 실력이 있었겠습니까? "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제갈명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고사선자를 향해 공손히 말을 꺼냈다. "내일이 바로 무림맹의 성립 대회 날이니 선자께서도 참가를 하셔서 자리를 빛나게 해 주십시오." 고사선자는 급히 손을 흔들며 생긋이 웃더니 남궁각을 주시하며 겸손하게 말했다. "아니예요. 저는 노신선의 명령을 받들고 각이를 보호하여 장총관에 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왔을 뿐이예요. 그런데 뜻밖에도 장총관이 자결을 해서 없어졌기 때문에 저는 각이를 당신 두 분에게 맡기고 즉시 산으로 돌아가야만 해요." 옆에 있던 주설란이 고사선자를 똑바로 주시하더니 만류했다. "선자! 그렇게 급하시지 않다면 하루만 기다렸다가 무림맹의 성립 대회를 보고 가시는 것이 어떻겠어요?" 고사선자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소리없이 웃었다. "더 이상 붙잡을 필요는 없어요. 저에게 시간이 있다면 당신네들이 초청을 하지 않아도 제가 자진해서 왔을 것이예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허공을 향해 빗살처럼 사라져 버렸다. 제갈명과 주설란, 남궁각 등 세 사람은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무림맹이 성립되기 바로 전날 밤에 벌써 무명도의 총영주들을 처치해 버려 여러 군협들의 마음은 통쾌하기 그지 없었다. 고사선자가 떠난 후에도 제갈명 부부는 떠날 줄을 모르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여러 군협들은 혹시 또 다른 강적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바로 이때, 왼쪽의 숲 속에서 무림맹의 우호법 소불이가 어깨를 들석거리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소불이의 뒤에는 흑석도주의 문하 정영이 총총히 따르고 있었다. 또한 맨 뒤에 따르는 사람은 바로 무림맹에 투항을 한 바 있는 부총관 하원해였던 것이다. 제갈명은 소불이 등 사람들을 보자 즉시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소호법! 일은 어떻게 되었소?" 소불이는 주위를 한 번 살펴보더니 만면에 미소를 띠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모든 일은 뜻대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고개를 돌려 정영을 주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이번 일은 모두 정노제가 수고를 했습니다." 정영은 소불이의 곁으로 걸어오더니 제갈명을 향해 포권을 하며 빙긋이 웃었다. "소호법! 그것은 너무나 과장된 말씀입니다. 저는 다만 명령을 받고 가마 속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환흔단을 먹였을 뿐입니다. 또 사실상 그 다섯 사람은 모두 마치 넋이 빠진 사람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말을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제가 약을 먹일 때까지 조금도 반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갈명이 정영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나직이 물었다. "정노제, 그 다섯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정영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다만 악귀(惡鬼) 차오(車敖)와 소림사의 지통대사만 알 수가 있었을 뿐 나머지 세 사람은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소불이가 나서며 제갈명을 향해 물었다. "그들은 환혼단을 먹었기 때문에 조금 후면 깨어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예 그들을 안으로 옮겨 놓은 다음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제갈명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이때, 하원해가 숲 속을 향해 손짓을 한 번 했다. 즉시 열 명의 경장차림을 한 대한들이 두 사람씩 나누어 흑색 가마를 들고 무림맹의 총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영은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제갈명을 향해 포권을 했다. "맹주님! 만약 또 다른 분부가 없으시다면 저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제갈명은 정영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더니 가볍게 손짓을 했다. "노제! 수고가 많았네. 어서 돌아가게" 정영은 일례를 드린 후에 즉시 강변에 있는 누선을 향해 달려갔다. 제갈명의 부부와 곡영자, 소불이, 언봉저 등 사람들도 무림맹의 총단을 향해 되돌아 갔다. 한편, 산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공동삼요는 안색까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제갈명 부부의 쌍검 합벽은 아예 논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염지천, 석타자 등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자기들이 건드리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탁진인이 무겁게 탄식을 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무림맹의 실력이 대단한 것 같으니 우리는 아예 공동파로 돌아가서 강호에 발을 디디지 앉는 것이 상책일 것 같소." 낭진인이 그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대사형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유선자는 비록 마음 솥으로 불복을 하고 있었지만 감히 반대를 하지 못하고 두 분 사형을 따라 객청 안으로 되돌아 갔다. 파양(播陽)의 소라주주(小螺州主) 우전경(于傳經) 부부의 사람됨을 볼 때 그들은 결코 사악한 무리가 아니었다. 또한 휘방(徽賣)의 수령 유성추윌 정개태와도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였다. 정개태는 우전경 부부에게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한 다음 설명을 했다. "지금 무림맹에 참가한 문파만 해도 벌써 십오 개의 문파가 되는것 같소. 또한 듣자하니 맹주 부부의 쌍검 합벽은 가히 천하무적이라는 말을 들었소." 우전경 부부는 그의 말을 들은 후부터는 공동삼요와 더 이상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동삼요와 우전경 부부 외에도 몇 명 무명도의 앞잡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무림맹의 막강한 세력 앞에서는 감히 일을 저지르지 못했다. 무림맹이 성립되기 바로 전날 밤은 대체로 평온하게 지나갔다. 날이 밝자 무림맹의 총단에는 호화찬란한 깃발들이 여기저기 나부꼈다. 뿐만 아니라 문 앞에 걸려 있는 하나의 붉은 현판 위에는 무림맹의 성림 대회라는 글씨가 금박으로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무림맹의 성립을 축복이라도 해주려는 듯 찬란한 햇빛이 현판에 비치니 눈이 부셔서 쳐다 볼 수 없을 정도로 반짝인다. 대문 앞의 넓은 광장에는 열다섯 개의 각문 각파를 상징하는 깃발들이 세워졌다. 열다섯 개의 깃발은 소림, 무당, 마교, 흑석도, 홍채문 등의 것이었다. 그들의 기세는 마치 온 천하를 집어삼킬 듯했다. 광장의 앞에는 하나의 높다란 대나무가 세워져 있었으며 대나무 위에는 무수한 폭죽이 매달려 있었다. 불빛이 번쩍하는 순간-. "펑! 펑! 펑! 펑!"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폭죽은 하나씩 터지기 시작했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는 마치 천둥과 번개가 치는 듯 온 사방을 뒤 흔들었다. 무림맹의 총단에 있는 두 짝의 붉은 대문은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대회에 참가하는 각문 각파의 인사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폭죽 소리와 함께 벌써 한 패거리의 사람들이 대문 밖에까지 깔려있는 양탄자를 밟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맨 앞에는 종남의 두 늙은이, 그 뒤에는 천산 소설옹, 석타자, 염지천 등이 붉은 양탄자를 밟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대문 앞에 서 있던 집사당의 부총관 하원해가 빙긋이 웃으며 포권을 했다. "무림동도 여러분! 어서 입장하시기 바랍니다." 하원해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거센 물결처럼 문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그리고 대문의 앞에는 하늘색의 경장차림을 한 여덟 명의 무사들이 번쩍번쩍하는 장검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이 객청은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으며 집사당에서는 이미 좌석을 마련했다. 왼쪽에는 향불을 피우는 상이 있었고 상의 양쪽에는 모두 여덟 개의 가죽으로 만든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이 여덟 개의 의자는 특별 귀빈들이 앉는 의자였다. 먼저 대회장에 들어온 종남 이노, 소설옹 등 사람들이 의자에 앉았다. 또한 열여섯 개의 의자에는 노란 색의 비단이 씌여져 있었는데 이의자들은 바로 각문 각파의 장문인들의 자리였으며 지금은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세 줄로 된 의자가 있었으며 그것은 붉은 비단으로 쓰여져 있었다. 등은 대문 쪽을 향하게 되어 있었다. 이 붉은 좌석은 좀 높은 귀빈들의 좌석이었으며 옆에 있는 분흥색의 좌석에는 각대 문파의 제자들과 무림동도들의 자리였다. 뒤이어 붉은 좌석에는 연락당주가 안내를 해서 여러 귀빈들이 차례차례 앉았다. 붉은 좌석에 앉은 사람은 소림사의 주지 외에 공동삼요 중의 탁진인, 낭진인 또한 소노반 사마장홍, 갈무구, 옥적랑군, 정첩후 등이었다. 성립대전 뿐만 아니라 맹주부인 주설란은 고죽방의 방주부인 죽청청, 공동삼요 중의 유선자 등을 데리고 붉은 좌석에 입석을 했다. 곧이어 또 다른 일행이 대회장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맨 앞에 서서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십삼사 세 가량 되어 보이는 명의 동자였다. 이 두 명의 동자는 얼굴이 준수하고 체격이 비슷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하늘색의 경장, 등 뒤에 메고 있는 단검까지도 몹시 비슷했다. 두 명의 동자는 바로 흑석도의 정영과 어젯밤에 천강지로써 일거에 무명도의 총영주 장한생을 제거한 남궁각이었던 것이다. 두 명의 동자의 인도 아래 대회장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하늘색 장포를 입고 있으며 이십 세가 넘어 보이고 허리에는 옥띠를 두르고있는 무림맹의 맹주 제갈명이었던 것이다. 제갈명의 좌우에는 좌호법 곡영자와 우호법 소불이가 따르고 있었다. 이때, 특별석에 앉아 있던 다섯 분의 노인이 정중히 일어서고 붉은 좌석과 분흥 좌석에 앉아 있는 여러 군협은 일제히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제갈명의 뒤를 따라 입장을 하고 있는 열 네 개 문파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소림사의 방장 대통대사, 무당파의 장문인 천령자, 종남파의 장문인 육연생, 점창파의 장문인 번천안 백장청, 노산파의 장문인 통천관수 사기량, 화산파의 장문인 범숙한(范叔寒), 팔괘문의 장문인 구양반석, 신주 언문당의 장문인 언봉저, 마교의 대표 회진진, 배교의 총타주 민장강, 흑석도주 은천행, 괘도문의 총수령 조노복, 고죽방의 방주 죽중영, 휘방의 방주 유성추월 정개태 등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와 자기의 좌석 앞에 다가가 섰다. 이때, 단상의 왼쪽 구석에서 몸에 남삼을 입고 준수하게 보이는 이십 세 가량의 영준한 청년이 두 손에 붉은 대사를 받쳐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지금부터 무림맹의 성립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축포를 터뜨리겠습니다." 이 사회자는 비록 나이가 어린 것 같았지만 우렁찬 목소리는 맑으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거대한 대회장 안의 구석구석까지도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내공만으로도 이미 대회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군협들은 경악하고 있었다. 지금 대사를 읽어 내려가고 있는 이 청년은 바로 폐관 삼 년을 마치고 북고산으로 달려온 윤상이었던 것이다. 즉시 무림맹의 총단 대문 밖에 서서 대기를 하고 있던 두 명의 무사들이 세 개의 무쇠로 된 축포를 쏜다. "펑! 펑! 펑!" 거향과 함께 대회장 안에서는 즉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음악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윤상이 다시 소리를 높였다. "무림맹의 맹주께서는 자리에 오르십시오." 제갈명은 윤상의 말에 따라 가운데에 있는 황색 의자 앞에 섰다. 좌호법 곡영자와 우호법 소불이가 즉시 한 발자국 다가서더니 제갈명의 좌우로 섰다. 윤상이 또다시 우렁찬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열 네 개 문파의 장문인들께서도 속히 자리에 앉으십시오." 열 네 개 문파의 장문인들 역시 윤상의 말에 따라 제갈명의 뒤에 일렬로 정연하게 앉았다. 이때, 곡영자와 소불이 두 사람이 손에 들고 있던 붉은 초에 불을 붙였다. 다시 윤상의 우렁찬 음성이 넓은 장 안에 울려 퍼졌다. "어서 향을 태우시오! " 제갈명의 옆에 서 있던 곡영자가 한 묶음의 향을 제갈명에게 즉시 건네주었다. 제갈명은 향을 받아 든 다음 두 손을 높이 치켜 올렸다. 윤상은 엄숙한 장내를 한 번 둘러본 다음 우렁차게 외쳤다. "향불을 세 번 붙이시오! " 제갈명은 향로에 세 번 불을 붙인 다음 향로에 향을 꽃았다. 윤상은 또다시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크게 외쳤다. "술을 올리시오! " 곡영자가 상 위에서 술잔에 술을 가득히 따른 다음 제갈명에게 건네주었다. 제갈명은 술잔을 받자마자 술잔을 위로 치켜 올렸다. 윤상은 다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소리쳤다. "술잔을 세 번 올리시오! " 제갈명은 술잔을 위로 세 번 치켜 올린 다음 술을 땅에 뿌렸다. 윤상은 제갈명을 한 번 쳐다보더니 여러 사람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무림맹의 맹주께서는 여러 무림 동도들을 대신해서 천지신명께 세 번의 절을 올리시오. 그리고 여러분들께서도 기립을 해 주십시오." 제갈명은 열 네 개 문파의 장문인들과 함께 모든 형식을 끝냈다. 윤상은 또다시 제갈명과 열 네 개 문파의 장문인들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무림맹의 맹주께서는 대회에 참가한 열 네 개 문파의 장문인들과 피로써 맹세를 하기 바랍니다." 좌호법 곡영자는 즉시 상 위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냈다. 우호법 소불이도 동시에 금으로 만든 하나의 그릇을 받쳐 들고 제갈명 앞으로 다가갔다. 제갈명은 비수를 받아들고 자기의 중지를 가볍게 그은 다음 즉시 소불이가 들고 있는 그릇에 세 방울의 붉은 선혈을 떨어뜨렸다. 이어서 열네 개 문파의 장문인들도 차례대로 소불이가 들고 있는 그릇에 세 방울의 붉은 선혈을 떨어뜨렸다. 소불이는 열 다섯 사람의 선혈을 받은 그릇을 제단 위에 엄숙히 올렸다. 윤상은 또다시 대문 쪽을 바라보며 다시 여러 사람을 주시했다. "여러분! 온갖 수난을 겪은 후에 참가한 무림의 동도들을 진심으로 환영해 주십시오." 윤상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문 밖에서는 집사당의 총관 정노복, 부총관 하원해 등 사람들이 들어왔다. 또한 그들의 뒤에는 얼굴이 청수하게 생긴 존남파의 장문인 종자기, 체구가 우람하고 흉악하게 생긴 악귀 차오, 체격이 작아 보이고 늙은 과천성 공손향, 회색의 도포를 입고 있는 구육도사(狗肉道士) 풍삼(風三) 승복을 입고 있는 소림 나한당의 주지 지통대사, 금화상, 점창쌍안 추풍안 갈비백, 산서 쾌도왕 조노복의 아들 조봉춘 등 사람들이 입장을 하자 장내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정노복과 하원해는 여덟 사람과 함께 제단의 앞에까지 다가가더니 군협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섰다. 제갈명은 즉시 그들에게 다가가더니 하나씩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는 그들은 한 가운데에 서서 군협들에게 포권을 하고 허리를 굽히면서 장중하게 말을 꺼냈다. "여러 무림의 선배, 동도 여러분! 지금 제 뒤에 서 있는 이 여덟분은 온갖 수난을 겪은 후에 다행하게도 광명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덟 분의 내력에 대해서는 다년간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던 분들이기 때문에 제가 소개시키지 않아도 여러분께서 잘 알고 계실줄로 믿고 생략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고자 하는 것은 비록 이 여덟 분이 똑같이 흑영도의 마수에 빠지기는 했어도 각기 다른 세 가지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갈명은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제일 먼저는 종남파의 장문인으로 그는 종남각에서 쫓겨난 사제에게 해를 당했습니다. 두 번째는 소림사의 지통대사와 점창의 갈비백 그리고 쾌도문의 조봉춘, 그리고 금화상 이 네 분은 흑영도의 개산대전에 참가했을 때 술좌석에서 정신을 잃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풍삼, 공손향, 차오등 세 분이며 이 세 분께서는 흥채문주와 마교의 한선자의 요청을 받아 흑영도에 가셔서 돌아오지 않았던 분들입니다." 제갈명은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또다시 말을 계속했다. "제가 또 한 가지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그들이 마수에 마진 후에 당했던 일들과 무명도 내부의 조직력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명도에서 실제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어젯밤에 자결을 한 총영주 장한생이었으며 그의 아래에는 이 개조와 사 개당이 있습니다." 제갈명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이어 말했다. "먼저 사 개당을 얘기하자면 황의, 청의, 백의, 흑의당이며 명분상으로는 총영주의 소속으로 총영주의 지휘를 받고 있지만 사실상이 네 개의 당은 독립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개조에 대해서는 각기 부총영주 한 사람씩을 임명하여 영주를 보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갈명이 길게 심호흡을 한 딴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첫 번째의 일 개조는 독을 위주로 하며 책임자가 부총영주의 직책을 맡고 있으며 각문 각파의 사람들이면 무조건 독약을 먹이고 독인으로 만들어 버리지요. 또한 이 독인들은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리기만 하면 즉시 독이 발작을 해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여덟 분 중 종남 장문인, 지통대사, 갈비백, 조봉춘, 금화상등 다섯분이 바로 독인으로 된 바가 있습니다." 군협들은 그의 말을 듣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란 듯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대회장 안은 마치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제갈명은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며 위엄있게 막을 이었다. "또 일 개조의 부총영주는 바로 음구낭입니다. 이 사람은 또한 옛날 현음교의 잔당이었습니다. 삼 년 전 홍채문주와 한선자는 많은 무림 고수들을 초청했었지만 모두 음구낭의 수중에 빠져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지금 모두 음인으로 변했으며 음인은 독인보다 더욱 무섭다고 합니다. 온인은 평상시에는 마치 굳은 시체처럼 움직이지도 말할 줄도 모르며 누가 반드시 가마를 들어 주어야 갈 수가 있습니다." 제갈명은 고개를 돌려 세 사람을 향해 손짓을 하더니 침중하게 말을 계속했다. "음인들은 피리 소리를 듣기만 하면 즉시 바람처럼 행동을 할 수가 있고 무서운 공격을 펼치기 때문에 가히 천하 무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차오, 풍삼, 공손선배 등 세 분이 바로 옛날에 음인이 되었던 분들입니다." 여기까지 얘기를 하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세 사람에게 집중이 되었다. 제갈명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명도에 비록 독인과 음인이 있지만 여러분께서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게는 벌써 그것들을 파괴하는 방법이 있으며 그 증거로서는 여기에 있는 여덟 분 중 다섯 분이 독인이었고 세 분이 음인이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모두 제 정신을 찾았으며 이것이 바로 사악은 반드시 정의에 의하여 멸한다는 증거입니다." 여러 군협들은 제갈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보냈다. 제갈명은 손을 들어 저지시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삼 년 전 흥채문주와 마교 한선자께서 무림의 십여 명의 고수들과 연합을 해서 흑영도에 간 다음 돌아오지 않을 때에 저희 부부는 흥채문주의 명령을 받고 멀리 북악에 가서 무예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가 북악에서 내려와 흑영도로 달려갔을 때 흑영도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으며 섬 위에는 한 명의 적당도 없었습니다" 제갈명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무림에는 갑자기 자칭 무명도라고 하는 신비스러운 무리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이 바로 옛날 흑영도의 무리들인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실종이 된 것이 아니라 음구낭에 의해서 음인으로 변했으니 흑영도의 잔당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을 하고 약간 쉬며 또다시 말을 계속 연결시켰다. "공손선배 등 세 분에 의하면 흥채문주 일행이 배를 타고 흑영도에 도착했을 때 섬 위에는 검은 안개로 가득 차 있었으며 일행은 두패로 나뉘어져 수색전을 펼쳤지만 안개 때문에 방향을 일고 또한 정신까지 잃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대회장 안에 있던 군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제갈명은 신광이 번득이는 눈으로 대회장 안을 샅샅이 살펴보더니 갑자기 음성을 높였다. "흑영도의 무리들이 제아무리 독을 잘 쓴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당금 무림에서 독의일 인자인 본맹의 우호법 곡영자와 무림에서 유일한 독물을 키우는 흑석도가 우리를 일체 지원하게 되며 독인과 음인의 신지를 풀 수 있는 환흔단을 만드는 갈무구가 있습니다." 대회에 참가한 군협들은 계속해서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제갈명은 박수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지금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중대한 일을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대회장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으며 군협들은 제갈명을 주시하며 말을 기다렸다. 제갈명은 안색을 굳히며 큰 소리로 선포를 하기 시작했다. "본맹은 무림의 정의를 위해 무명도의 악한 세력을 하루 빨리 제거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열네 개 문파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본맹은 쉽게 성립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본맹은 사흘 안에 강호에 해를 끼치는 무리들을 소탕하려고 하니 여기에 계신 여러분께서도 모두 협조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말소리가 끝나자마자 자색의 좌석에 앉아 있던 종남 이노가 갑자기 일어섰다. 종남 이노는. 동시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어서더니 왼쪽에 있는 남궁좌가 먼저 우렁찬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우리 두 명의 늙은이는 종남산에서부터 맹주와 함께 흑영도에 가서 악의 무리를 소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폐파는 대리 장문인 육연생이 문하인들을 데리고 대회에 참가했으니 모두 할해서 맹주의 분부를 기다리겠습니다. 또한 본 종남파는 무슨 일이 있든지 무림맹을 위해 힘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남궁좌의 말이 끝나자 소림의 대통대사가 일어서며 쌍장을 마주한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남궁노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무명도는 강호에 죄악을 저지르고 있으니 마땅히 소탕을 해야 합너다. 지금 제가 데리고 있는 본사의 주지와 사십여 명의 호법 제자들도 맹주의 분부를 따라 사악한 무리들을 소탕하는데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이에 무당의 천령자, 고죽방의 죽중영, 흑석도주, 산서 쾌도문의 조노복 등이 일어나 맹주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심지어 원래 무명도를 위해서 일을 해오던 공동삼요, 우전경 부부등 사람들도 무명도를 없애기로 맹주에게 맹세를 했던 것이다. 뒤이어 여러 군협들은 손을 높이 치켜 올리며 팥이 행동을 할 것을 다짐했다. 대회장의 왼쪽에 서서 듣고 있던 윤상이 다시 소리를 높였다. "지금부터 선사(先師)를 하겠으니 여러분들께서는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폐허 윤상의 말이 끝나자 대회장 안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으며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군협들은 일제히 자리에 일어섰다. 제갈명이 앞으로 두 발자국 걸어나가자 좌호법 곡영자가 급히 다가서며 빨간 종이에 써 있는 선사문을 제갈명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흑영도는 무림맹의 창립에 불만을 품고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무림의 동도들을 연금하고 적장을 파견해서 각 무림의 문파들을 뒤집어 놓기 위해 벼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흥채문주와 한선자 등의 사람들도 그들의 음모를 폭로시키기 위해 흑영도에 달려갔으나 불행하게도 적의 간계에 빠져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갈명은 숨이 찬 듯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삼 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무명도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으며 중원의 정의의 인사들은 모두 그들의 마수에 빠져 독인이 아니면 음인으로 변해 무림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무림의 동도들이 어찌 두 눈을 뜨고 그들의 죄악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림의 평화를 위해 정의의 칼을 뽑아 흑영도의 나머지 잔당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섬멸해 버려야겠다는 것을 맹세하는바 입니다." 제갈명이 다 읽자 여러 사람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보내기 시작했다. "포로들을 대령하시오! " 순간, 대문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총순찰 두경강이 포승으로 묶은 젊은 남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두경강의 뒤에는 손에 번쩍이는 장검을 들고 있는 여덟 명의 무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일행이 가운데까지 왔을 때 두경강이 제갈명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말을 꺼냈다. "순찰당의 총순찰 두경강이 무명도의 백만천과 유소봉을 대령하고 명령을 기다립니다" 제갈명은 포승에 묶여 있는 두 사람의 남녀를 가리키며 분부를 내렸다. "어서 그들의 포승을 풀어 주시오" 두경강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무사가 나서며 두 사람의 포승을 급히 풀었다. 두경강은 백만천과 유소봉을 쏘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빨리 나서서 맹주를 뵙지 못하겠느냐? 이놈들!" 두 사람은 앞을 힐끗 쳐다보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더니 급히 허리를 굽혔다. "맹주님을 뵈옵니다." 무명도의 영주라는 직책은 사대당의 당주와 똑같다. 향주는 바로 염지천의 문하 십 남 십 녀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신분은 결코 낮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무공은 벌써 상실되었으며 한 번도 남에게 고개를 숙여 본 일이 없던 그들이 제갈명에게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제갈명은 정색을 하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 답례한다. "오늘의 이 대회는 홍채문과 열네 개 문파의 연맹으로써 무명도를 토벌하기 위해 성립을 하는 대회라고 할 수가 있소. 그리고 무명도의 총영주 장한생이 어젯밤에 자결을 함으로써 정의는 반드시 사악함을 이긴다는 증거가 되었소. 두 분께서는 기왕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쳤으니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새 사람이 퇴기를 바라겠소." 지금 백만천의 하얀 옷은 온통 흙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머리도 산발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용모 또한 몹시 초췌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새하얀 살결과 아름다운 얼굴을 감추지는 못했다. 백만천은 얼굴을 붉히며 여러 군협들을 향해 허리를 굽히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저의 이름은 백만천이며 올해 이십 칠 세 입니다. 전에는 무명도의 영주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어젯밤에 총영주와 함께 무림맹의 성립 대회를 파괴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무림맹에서는 저의 죄악을 추궁하지도 않고 무공만 제거했으며 새 사람이 될 기회를 마련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백만천의 쥐꼬리 같은 음성이 끝나자마자 군협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백만천의 뒤에 서 있던 유소붕이 앞으로 두 발자국 나서더니 군협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저는 유소붕이라 하며 나이는 스물 다섯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흑영도주 염지천의 문하로 들어가 향주의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보름 전에 명령을 받고 일꾼으로 변장해서 무림맹에 잠입한 다음 일거에 무림맹의 총단을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림맹에서 호의를 베풀어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으니 저는 이 자리를 빌어 공개적으로 흑영도에서 탈퇴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당장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군협들은 또다시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보냈다. 제갈명은 박수 소리가 끝나자 소리 없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두 분께서 새 사람이 될 것을 결심했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소." 제갈명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원해가 두 개의 붉은 봉투를 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서더니 공손히 건네주었다. 제갈명은 봉투를 받아 든 후에 다시 두 사람을 향해 말을 계속했다. "이것은 본맹에서 두 분을 위해 준비한 것이오. 여기에 삼 백 냥의 은자가 들어 있으니 두 분께서는 서슴지 말고 받으시고 여기를 떠나십시오." 백만천과 유소붕은 공손히 은자를 받은 다음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맹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제갈명은 급히 손을 흔들며 가볍게 웃더니 말을 가로챘다. "두 분께서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어서 가 보시오." 백만천과 유소봉은 연신 제갈명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윤상이 우렁찬 음성으로 외쳤다. "무림맹의 성립 대회는 여기서 끝마치겠습니다. 어서 축포를 올리시오." 대회장 밖에서는 계속해서 축포가 터지는 가운데 무림맹의 성립대회는 무사히 끝났다. 소설옹, 석타자, 종남 이노 등 각문 각파의 장문인들은 맹주인 제갈명에게 축하의 인사를 나누었다. 정오가 되어서야 무림맹의 총단에 있는 객청 안에는 오십여 군데의 술좌석이 마련되었고 이 성대한 축하연은 약 한 시진 가량이 지나서야 끝났다. 축하연이 끝난 후에 제갈명 부부는 각문 각파의 장문인들을 화청 안으로 초청해서 무명도를 소탕하기 위한 상의를 했다. 비밀 회의가 열리고 있는 화청의 주변에는 경비가 몹시 삼엄했다. 비밀 회의에 참가한 사람은 열네 문파의 장문인 외에도 총호법 염천을 비롯해서 좌호법 곡영자, 우호법 소불이, 연락당주 언봉저, 집사당주, 정수복, 순찰당의 두경강 등 사람이 참여를 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각대 문파의 장문인들은 아무에게도 회의 내용을 얘기해 주지 않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각기 빈관으고 되돌아갔다. 이튿날 무림맹의 총단은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그들은 벌써 무명도의 무리를 소탕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저녁, 강변에 있는 원래 두 척의 누선 외에 또다시 세 개의 돛이 달려 있는 두 척의 거선이 당도했다. 뿐만 아니라 또 한 척의 새까맣고 거대한 물체가 강가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 거대한 물체는 몸이 새까맣고 길이는 삼 장 가량 되어 보였으며 넓이는 일 장 가량 되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나무 상자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군협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거대한 물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무림맹이 성립된지 사흘이 지나고 천경절(天慶節)이 돌아왔다. 이날 새벽, 무림맹 총단의 문은 활짝 열어졌고 자 문파의 장문인들과 무림동도들은 일제히 객청 위에 집합했다. 하나의 명단(名單) 같은 것을 들고 있던 총호법 염지천이 여러 군협들을 향해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무림동도 여러분! 오늘이 바로 바다를 떠나 적을 토벌하는 날입니다. 본맹에서는 이미 여러분을 위해 배를 마련했으니 간단히 준비를 마쳐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곳을 테나 사흘 후면 흑영도에 도착할 수가 있으며 그곳에 도착을 한 후에야 결단을 내릴 수가 있으니 여러분께서는 순서대로 배 위에 올라가시기 바라겠습니다." 염지천은 다시 명단을 한 번 본 다음 큰 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제 일 선은 소림의 대통대사께서 통솔을 하시며 본맹의 주자기(周子奇)가 수행을 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통대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주자기는 정통, 명통, 지통, 행통, 능통 등 다섯 분의 대사와 사십 명의 수하들을 데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염지천은 소림파의 승려들이 완전히 대청을 나간 후에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게 이 선은 무당장문 천령자께서 통솔을 해주시고 본맹의 서운장(徐雲章)께서 수행을 하십시오" 무당파의 장문인 천령자는 포권을 한 번 한 다음 서운장과 함께 다섯 명의 법사, 삼십 명의 남포도사를 데리고 객청을 빠져나갔다. 염지천은 남아 있는 여러 사람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삼 선은 고죽방주와 쾌도문 조노대 두 분께서 공동으로 통솔을 하시고 본맹에서는 조봉춘이 수행을 하겠습니다." 고죽방주 죽중영 부부와 쾌도문 조노복 등 세 사람은 동시에 포권의 예를 취하고 밖으로 나갔다. 조봉춘은 네 명의 사제, 열두 명의 문인, 그리고 고죽방에 있는 이십여 명의 문하들을 데리고 뒤를 따랐다. 염지천은 다시 흑석도주를 주시하며 소리 없이 웃더니 말을 계속했다. "흑석도주께서는 제 사 선을 타시고 모든 배를 통솔하시기 바랍니다." 흑석도주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자 흑석도의 문하들은 일제의 그의 뒤를 따랐다. 흑석도주의 모습이 사라지자 염지천은 정수복을 향해 손짓을 한 번 하더니 다시 여러 사람을 주시했다. "본맹의 총단은 집사당의 당주 정수복께서 지켜 주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제히 맹주의 뒤를 따라 배로 올라가시오." 제갈명과 총호법 염지천의 인도 아래 천산 소설옹, 석타자, 악귀차오, 구육도사 풍삼, 종남, 이노, 당승무, 곡영자, 소불이, 두경강 등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무림맹의 총단을 떠났다. 여자들은 맹주부인 주설란을 선두로 해서 용주주, 홍채문의 네 명의 시녀 영춘, 영풍, 영향, 영월 등 여러 사람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일행이 총단을 떠나 강가에 다다랐을 때 소림, 무당, 고죽방 등 사람들은 벌써 누선 위로 올라갔다. 또 한 척의 검은 상자 같은 거선 위에는 세 개의 검은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세 개의 깃발들 중에는 파란 바탕으로 된 흑석도의 기가 펄럭이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볼 때 바로 흑석도의 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 한 척의 거선은 사방이 밀폐되어 있어 반드시 무서운 독물들이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이때 제갈명 부부는 일행들과 함께 제 사 선에 올랐다. 이 배는 네 척의 배 중에서 제일 큰배 였으며 배에는 상하 이 층으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백여 명이 승선할 수가 있었다. 집사당주 정수복은 무림맹에 있는 수십 명의 무사들을 데리고 강가에 나와 축포를 터뜨리며 처음 출범하는 이들을 위해 축하를 해주었다. 이번 흑영도를 소탕하는데 있어서는 총호법 염지천이 총지휘를 맡았고 흑석도주를 선봉장으로 임명했다. 소불이는 총 순찰, 언봉저는 총 연락, 두경강은 총관사(總管事), 집사당 부총관 하원해는 안내를 담당하게 되었다. 무림의 정예 고수들을 태우고 있는 다섯 척치 배는 호탕하게 진강의 하류를 향해 미끄러져 갔다. 이번에 안내를 맡고 있는 하원해는 전에 흑영도의 흑의총관이었던 것이다. 출행을 한지 사흘 째 되던 날 황혼 무렵, 벌써 흑영도를 볼 수가 있었다. 이때, 안내를 맡고 있는 하원해는 염지천과 소불이 등 두 사람을 데리고 뱃머리에 서서 흑영도의 형세를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염지천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속에서 청색으로 된 하나의 삼각기를 꺼내더니 허공을 향해 몇 번 휘둘렸다. 이때 맨 앞에 가고 있던 흑석도의 선봉선이 갑자기 방향을 동쪽으로 바꾸었다. 염지천은 다시 붉은 삼각기를 꺼내더니 조금 전과 같이 허공을 향해 몇 번 휘둘렀다. 왼쪽에 가고 있던 소림사의 대통대사가 인솔하는 배가 즉시 흑영도의 남쪽을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염지천이 또다시 백색 삼각기를 꺼내 휘두르자 오른쪽에 가고 있던 무당파의 배는 즉시 흑영도의 서북쪽을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맹주 제갈명이 타고 있던 배는 흑영도 북쪽을 향해 미끄러져 갔다. 다섯 척의 거선은 다섯 군데 방향으로 나누어서 흑영도를 포위하며 서서히다가갔다. 황혼 무렵의 거센 파도와 함께 다섯 척의 거선은 어느 사이에 흑영도의 모래사장에 다다랐다. 앞에 보이는 흑영도는 마치 폐허가 된 옛 성처럼 차가운 냉기가 감돌 뿐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겉으로 볼 때 삼 년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으며 무성한 잡초만이 온 섬을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날은 차츰차츰 어두워졌고 무림맹의 사람들은 다섯 개조로 나뉘어 수색을 하면서 전진을 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채 못되어서 지정된 지점에서 모두 회합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섬 위를 이 잡듯이 뒤져도 아무런 이상을 찾지 못했다. 총관사 두경강은 다섯 척의 배 위에 남아 있는 사람을 시켜 높은 지대에 십여 개의 천막을 치도록 지시를 했다. 소불이와 윤상, 당승무 등 세 사람은 사마장홍과 몇 군데의 험악한 곳을 조사하였기 때문에 제일 늦게 도착했다. 각처의 천막에는 벌써 등불이 켜져 폐허가 되어 버린지 오래인 흑영도의 밤을 휘황찬란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도처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가운데에 있는 하나의 천막 속에는 각문 각각의 장문인들이 들어 있었다. 제갈명 부부가 여러 군협들과 상의를 하고 있을 때 염지천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됐소. 됐어…… 소노형과 사마노형께서 돌아오셨으니 여러분께서 흑영도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사마노형의 대답을 기다리시오." 제갈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불이 등 네 사람을 맞으며 빙긋이 웃었다. "네 분께서 수고가 많았습니다. 우리 앉아서 천천히 얘기를 합시다. " 소불이가 빙그레 웃으며 사마장흥을 주시하자 그는 제갈명을 향해 포권을 하더니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제가 추측한 결과에 의하면 이 흑영도는 하나의 폐허에 불과합니다. 또한 흑영도는 거센 파도에 의해서 전복이 된 것 같았으며 삼 년 전에 흑영도가 갑자기 없어진 것도 바로 팍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천령자가 사마장흥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무명도는 여기에 있지 않다는 얘기가 되는구려?" 사마장흥은 쪼개진 벽돌을 상위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가 이 벽돌을 자세히 본 결과 흙과 모래를 섞어서 만든 것 같았으며 물에 닿기만 하면 즉시 갈라집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섬에 집을 지을 때 일부러 거센 파도에 의해 떠내려가도록 만든 것 같습니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염지천이 나서며 한 마디 덧붙이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전도 사마노형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소." 제갈명은 가볍게 탄식을 하고 염지천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다그치듯 물었다. "총호법께서 자세하게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설명을 해 주실 수 없겠소? " 염지천은 갑자기 호쾌하게 웃어젖히더니 여러 군협들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허허허…… 흑영도의 막후에는 또 한 명의 주모자가 모든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흑영도는 하나의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삼 년 전에 흑영도를 창립한 것은 다만 하나의 속임수로써 대회에 참가한 인사들을 일망타진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그들은 일망타진을 한 후에 변장을 하고 돌아가 각대 문파를 장악하려고 하다가 그 당시 흥채문주에게 적발이 됐었지요." 옆에서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있던 천령자가 궁금한 듯 급히 물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어디로 이사를 가 버렸다는 말이오? " 염지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마장흥이 나서며 나직하게 말을 받았다. "제가 조금 전 몇 군데의 폐허를 조사해 본 결과 흑영도의 건물을 지은 사람이 바로 저의 사숙 황삼객(黃杉客) 오사현(烏思玄)이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흑영도의 밤 이 말을 듣자 제갈명은 몹시 궁금한 듯 사마장홍을 똑바로 주시하며 급히 물었다. "하지만 오사현의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오?" 사마장흥은 두 눈을 반쯤 감고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옛날 사조께서는 선부(先父)와 사숙 두 사람을 제자로 거두었습니다. 사조께서는 선부에게는 정종토목(正宗土木) 의 학문을 가르쳤고 사숙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지하에 대한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의심을 하고 있는 점이 바로 흑영도가 없어지기 전에 무명도는 벌써 지하에 건축이 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사마장홍의 말에서 한동안 말없이 듣고 있던 대통대사가 나서며 다그치듯 물었다. "사마노형의 추측으로 무명도가 바로 이 흑영도의 밑에 있는 것 같소?" 사마장홍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여러 사람을 주시했다. "오늘은 벌써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볼 수가 없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무명도가 비록 여기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 같소. 그렇기 때문에 내일 날이 밝아 오는 대로 섬 위를 조사해 보면 약간의 단서를 잡을 수가 있을 것이요."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다시 제갈명을 향해 포진을 했다. "저는 맹주와 급히 상의를 좀 해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제갈명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이 급히 입을 열었다. "노형! 무슨 말이든지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어서 말씀해 보시오. " 하지만 사마장흥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여러 사람을 주시했다. "저는 남궁각과 흑석도주의 문하 정영의 도움을 좀 청하고 싶습니다." 제갈명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하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필요 하시다면 서슴지 말고 분부를 하시오." 사마장홍은 계속해서 허리를 굽혔다. 제갈명 역시 예를 취하며 천막 밖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 무사를 불렀다. "너희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가서 남궁각과 정형을 급히 찾아오너라" 무사가 명령을 받고 나간지 얼마 안 되어서 남궁각과 정영 두 사람이 들어왔다. 남궁각은 영문도 모르고 여러 사람을 휘둘러보더니 다시 제갈명을 향해 또 편한 음성으로 물었다. "맹주님!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불렀습니까?" 제갈명은 옆에 있는 사마장홍을 가리키며 가볍게 웃었다. "이 분 사마백께서 너와 정노제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불렀으니 안심하거라. " 남궁각은 또렷한 두 눈에 신광을 번득이며 사마장흥을 향해 급히 물었다. "사마백부! 바로 무명도를 찾는 일입니까?" 사마장홍이 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갈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각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사마장흥 곁으로 급히 다가갔다. "백부님! 정영, 그렇다면 우리 빨리 가서 찾도록 해요"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남궁각은 사마장흥의 옷자락을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다. 사마장흥은 급히 만류하며 가볍게 탄식을 하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노제! 그렇게 서둘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는 날이 밝은 다음에 출발을 하도록 하자." 뒤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흑석도주가 나서며 정영을 향해 분부를 했다. "영아! 너는 지금부터 사마 노선배님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알겠느냐? " 정영이 공손히 허리를 굽힐 때 소불이가 어깨를 들먹거리며 빈정거렸다. "두 분 노제! 사마 노선배님께서는 자네들에게 땅굴을 파라고 할 것 같은데……." 정영이 한동안 말이 없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선뜻 말을 열었다. "음… 사마 노선배님! 우리 배 위에는 한 마리의 천산갑(穿山甲)이 있는데 땅굴을 아주 잘 팝니다. 우리 그것을 데리고 가도록 해요." 사마장흥은 빙긋이 웃으며 정영을 바라보더니 손을 가로 흔들었다. "우리는 구멍을 찾으러 가는 것이지 땅굴을 파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산갑까지 쓸 필요가 없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제갈명을 향해 포권기 예를 취했다. "저에게는 할 일이 있어 먼저 가서 준비를 좀 해야겠습니다." 사마장홍은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남궁각과 정영에게 손짓을 했다. "두 분 노제!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어서 나를 따라 오게! " 이때, 아무 소리도 없이 듣고 있던 소불이가 윤상과 당승무 두 사람에게 눈짓을 한 번 하더니 즉시 따라 나갔다. 제갈명은 그들이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볍게 탄식을 했다. "오늘밤은 아마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하룻밤이 될 것 같소. 또한 내일 정오까지는 반드시 무슨 결과가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무림동도가 섬멸을 당하든가 아니면 이 마도가 섬멸…." 옆에 있던 염지천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허허허…… 허허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는 이번에 무림 각대 문파의 정예 고수들을 이끌고 왔으니 아무도 우리와 대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 남궁각과 정영 두 사람을 데리고 천막 밖으로 나온 사마장홍은 북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사마장흥의 바로 뒤에 따르고 있던 남궁각이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선다. "사마 백부님!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사마장흥이 걸음을 멈칫하며 앞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때 정영이 그의 왼쪽으로 다가서며 궁금한 듯 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혹시 무엇을 발견하기라도 했습니까?" 사마장홍은 고개를 가로 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정영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노선배님께서는 오늘은 날이 어두워져서 내일 날이 밝은 때에 라야만 찾을 수가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사마장홍은 긴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펴보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 늙은이는 한 가지 문제점을 생각했다. 그것은 날이 밝으면 찾을 수가 없고 어두워져야만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마장흥의 오른쪽에 서서 따라가고 있던 남궁각이 갑자기 다그치듯 물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밝은 낮에는 안 되고 이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찾으러 갑니까?" 사마장홍은 고개를 반쯤 돌려 그를 힐끗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지금은 바닷물이 완전히 빠져 버렸기 때문에 찾기가 좀 쉬울 것이다." 남궁각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이어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무명도의 무리들이 바로 암초 밑에 숨어 있단 말입니까?" 사마장흥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 장담을 할 수가 없지만 암초에는 몇 군데의 작은 구멍들이 깊이 파여져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 두 사람을 시켜 좀 찾아보려고 했을 뿐이다." 세 사람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북쪽에 있는 암초 쪽으로 걸어갔다. 사마장흥은 품속에서 하나의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더니 상자의 가운데 부분에 있는 한 가닥의 실을 뽑는다. 그리고 실의 한쪽은 정영에게 주면서 움직이지 말라고 한 다음 자기 자신은 실의 중간 부분을 잡고 입으로 숫자를 세면서 동북쪽으로 걸어갔다. 또 한쪽은 남궁각에게 주면서 움직이지 말라고 한 다음 서북쪽으로 가더니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아닌 것 같으니 다른 곳으로 가 보자." 그리고는 모래사장을 밟고 다시 동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남궁각과 정영 두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사마장흥은 다시 전과 같이 왔다갔다하면서 세어 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약 반시간이 지났을 때 세 사람은 벌써 흑영도의 동쪽에 다다랐다. 이때 사마장흥이 갑자기 하나의 암석 앞에 걸음을 멈추더니 허리를 굽히며 정영을 향해 손짓을 했다. "노제! 어서 와라. 이 밑에 땅굴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들어갈 수가 있겠느냐? " 정영은 사마장홍의 곁으로 다가서는가 싶더니 하나의 작은 동굴을 향해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정영은 동굴을 한 번 살펴보더니 사마장홍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 노선배님! 축골신공을 쓰면 들어갈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사마장흥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영은 급히 몸을 돌리며 굴 안을 향해 발을 옮겼다. 이때 사마장흥이 손을 흔들며 품속에서 하나의 화통을 꺼내더니 그에게 건네주었다. "잠깐! 이것을 들고 들어가다가 끝까지 다다르면 움직이지 말고 멈추어 있어라." 정영은 화통을 받아 들자마자 축골신공을 써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사마장흥이 암석의 구멍을 살펴보고 있을 때 정영의 음성이 들어왔다. "노선배님! 벌써 끝에까지 도착했습니다." 정영의 가느다란 음성으로 볼 때 동굴 안에 꺾여 들어가는 곳이 있을 것 같았다. 사마장홍은 가느다란 한숨을 토해 내며 즉시 큰 소리로 물었다. "끝의 삼 면이 모두 석벽으로 되어 있느냐?" 정영의 대답이 들려 오자 사마장홍은 다시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노제! 안에서는 일어날 수 있느냐?" 정영의 당황한 음성이 좁다란 굴 안을 울리며 새어 나왔다. "없습니다. 앉을 수는 있지만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륙 명은 앉을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마장흥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분부를 했다. "좋다. 어서 화통을 꺼내서 석벽 위에 쇠고리 같은 물건이 있나 한 번 찾아보아라." 정영은 사마장흥의 말에 따라 화통에 불을 들어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있습니다. 좌우 양쪽의 석벽에 모두 쇠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면의 석벽에도 달려 있고 머리 위에도 있습니다." 사마장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무엇인가 심각하게 생각했다. 정영은 계속해서 주위를 살펴보며 밖에 있는 사마장홍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노선배님! 어느 것을 잡아당겨야 합니까?" 사마장흥은 안색이 홱 변하여 즉시 굴 안을 향해 외쳤다. "안 된다! 안 돼……." 하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동굴 속에서 벌써, "끽! 끽!"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 왔다. 또 다시 정영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노선배님! 왼쪽에 있는 두 개의 쇠고리를 가볍게 잡아 당겼더니 벽이 즉시 뒤로 물러갑니다." 사마장홍은 어쩔 줄을 모르며 계속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당기지 말라고 했는데… 할 수 없군. 빨기 오른쪽에 있는 고리를 잡아당겨라! " 정영은 사마장홍의 초조한 음성을 듣자 즉시 오른쪽 벽에 달려 있는 고리를 잡아당겼다. 이렇게 되자 오른쪽에 있는 벽도 뒤로 물러나며 동시에 발 밑의 석판도 아래로 내려갔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극히 좁았던 통로가 두 사람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은 통로로 변했다. 동굴 안에 있는 통로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입구까지 커졌다. 사마장흥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가벼운 탄식을 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도 즉시 들어갈 수밖에 없지……." 옆에서 초조히 지켜보고 있던 남궁각이 사마장흥의 옷자락을 잡으며 다그치듯 물었다. "제맹주님께 달려가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사마장홍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남궁각을 끌고 즉시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정노제! 빨리 정면에 있는 고리를 잡아당겨라!" 정영은 사마장홍의 말대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석벽이 즉시 열렸다. 사마장홍은 즉시 머리 위에 있는 고리를 잡더니 온몸의 힘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양쪽에 있던 석벽이 다시 나오고 밑으로 내려갔던 석판 역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마장홍은 번개처럼 고개를 돌리며 정영과 남궁각을 향해 외쳤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라 " 정영과 남궁각 두 사람은 사마장흥의 뒤를 따라 황급히 문안으로 뛰어 들었다.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넓어졌던 통로가 즉시 원래의 작은 통로로 변했다. 바로 이때, 흑의경장을 한 두 명의 대한이 세 사람을 가로막았다. 왼쪽에 서 있던 흑의대한이 장검을 치켜들며 큰 소리로 물었다. "너희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느냐? " 사마장흥의 뒤에 서 있던 정영도 재빨리 등뒤에 메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사마장흥은 어느 사이에 알아차리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더니 앞에 있는 흑의대한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네들의 당주를 좀 만나러 왔소." 정영은 강호의 경험이 비교적 많았기 때문에 즉시 사마장흥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지만 남궁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쑥 말을 꺼낸다. "사마 백부님! 그들의 당주는 무엇 때문에 만나려고...." 사마장흥은 갑자기 점잖게 웃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허허……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정영은 남궁각이 다시 말을 할까 봐 급히 남궁각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왼쪽에 서 있던 흑의대한은 사마장흥을 한참 동안 훑어보더니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군데 감히 당주를 만나려고 하시오?" 사마장홍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냉랭하게 꾸짖었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소? 빨리 당주에게 가서 나 사마장흥이 왔다고 전해 주시오." 왼쪽의 흑의대한은 다시 남궁각과 정영을 가리키며 물었다. "사마장홍…? 그렇다면 두 명은 누구요? " 사마장홍이 검미를 잔뜩 찌푸리자 왼쪽에 있는 대한은 좀 멋적은 듯 오른쪽의 대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여기에서 이들을 지키시오. 내가 달려가서 보고를 올리겠소." 오른쪽에 있던 흑의대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왼쪽의 흑의대한은 안을 향해 달려갔다. 사마장홍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향해 속삭였다. "우리는 지금 적진에 침입을 했으니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얼마 안 되어서 조금 전에 안으로 들어갔던 대한이 나타났고 그의 뒤에는 흑색의 장삼을 입은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흑의대한의 뒤를 따르고 있던 장삼인은 사마장홍을 보자마자 허리를 굽히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흑의당의 총관 요극상(饒克祥)이 당주의 명령을 받고 사마노형을 마중하러 왔습니다" 사마장흥은 가볍게 웃으며 포권의 예로 답례를 했다. "요총관이 나오셨구려." 요극상은 남궁각과 정영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더니 몸을 돌렸다. "사마노형! 제가 길을 인도하겠습니다." 이 통로는 사오 장 정도 걸어가면 즉시 오른쪽으로 꺾어진다. 그리고 꺾이는 곳마다 두 명씩의 흑의대한들이 지키고 있었다. 일거양득 요극상은 사마장홍 등 세 사람을 데리고 여덟 번 씩이나 모퉁이를 돌아갔다. 사마장홍은 모퉁이를 돌아갈 때마다 석문이 있고 수직으로 문을 열고 닫을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통로를 따라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서 지형이 갑자기 넓어지고 하나의 큰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의 양쪽에는 모두 십여 명의 흑의대한들이 손에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요극상은 왼쪽에 있는 석벽 근처로 다가서더니 가볍게 세 번을 두드렸다. 그러자 석벽 사이의 문이 즉시 열린다. 요극상이 사마장홍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당주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사마노형께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들어가십시요." 사마장홍은 더 이상 예의를 차리지 않고 남궁각과 정영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 한 칸의 석실은 별로 크지 않았으며 몇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볼 때 작은 객청과도 같았다. 사마장홍 등 세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흑색 장삼을 입고 몸이 깡마른 한 명의 대한이 앞으로 다가서며 공손히 맞이했다. "사마노형!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갑소." 말투나 품위로 볼 때 그가 흑의당의 당주인 것 같았다. 사마장홍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흑의 장삼인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 육한생은 강호상에서는 흑의수사로 불리웁니다. 마당주(馬堂主)께서 서거를 한 후에 제가 흑의당을 맡고 있습니다." 사마장홍은 육한생을 향해 황급히 포권을 하며 가볍게 웃었다. "원래 육당주 이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소이다." 흑의수사는 그의 옆에 서 있는 남궁각과 정영을 가리키며 궁금한 듯 물었다. "앉으십시요. 그런데 저 두 분은 누구입니까?" 사마장홍은 주위를 한 번 살펴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바로 저의 제자입니다." 흑의수사는 두 사람을 잠시 주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권했다. "두 분 노제도 어서 앉게!" 사마장흥도 정영의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육당주의 분부시니 주저하지 말고 어서 앉아라! " 정영과 남궁각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사마장흥 말대로 의자에 앉았다. 흑의수사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사마장홍을 주시하며 선뜻 물었다. "무림맹에서는 각대 문파와 연합해서 대거 침범해 왔는데 사마노형께서는 무슨 일 때문에 저를 만나러 왔습니까?" 사마장홍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제가 조금 전 이 섬의 형세를 살펴본 결과 서북 양쪽에 있는 문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군데에 있는 문이 바로 귀당의 소재인 것 같았기 때문에 마당주를 찾아볼 생각을 했습니다." 흑의수사는 여전히 사마장홍을 똑바로 주시하며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하하하… 마당주는 비록 서거를 했지만 제가 똑같이 환영을 해주겠습니다." 흑의수사는 말이 끝나자마자, "찰칵! 찰칵! " 하는 금속음이 시끄럽게 들리더니 사마장홍 등 세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에서는 갑자기 쇠고리가 튀어나오더니 번개같이 허리를 감아버렸다. 동시에 발까지도 쇠고리에 감겨 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마장홍은 이 같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더니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육당주! 이 무례한 놈아! 네놈은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기냐? " 하지만 흑의수사는 조금도 이상한 기색이 없이 오히려 태연하고 나직하게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허허허…… 저는 노형이 여기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사마장흥은 살기에 가득 찬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좋다. 내가 속시원히 가르쳐 주겠다. 내가 온 뜻은 바로 무림안에서 무림의 각대 문파를 연합하며 일거에 무명도를 섬멸하기 위해서다. 또한 무명도의 총영주 장한생도 벌써 우리의 손아래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흑의수사는 조금도 누그러짐이 없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반문을 했다. "사마노형은 대체 누구를 설득하려고 왔소? 내가 세 살 먹은 어린아인 줄 아시오?" 사마장홍이 고개를 가로젓자 흑의수사는 다시 궁금해진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다면 사마노형께서는 무슨 일 때문에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사마장홍은 흑의수사에게 궁금증을 더해 주려는 듯 한동안 말이 없더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림맹에서는 비록 무림의 정예 고수들을 이끌고 무명도를 파괴하기 위해서 왔지만 성패의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다." 이 말을 듣자 흑의수사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사마노형께서 그런 실력이 있단 말씀입니까?" 하지만 사마장홍은 흑의수사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만을 말한다. "내가 추측을 해본 결과 무명도에 있는 사대 당주의 실력은 비록 높다고 할지라도 상당한 댓가를 치루어야만 무림맹과 맞설 수가 있을 것 같소." 여기까지 말을 이어가던 사마장흥은 갑자기 호쾌하게 웃어젖히며 그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했다. "허허허…… 허허허 …, 하지만 제가 계책을 쓴다면 이 흑영도를 피로 물들이지 않고서도 네 개당의 실력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릴 자신이 있소." 흑의수사는 안색이 약간 변하는가 싶더니 다시 냉정을 되찾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정말로 사마노형께서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사마장홍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눈을 반쯤 내리깔며 흑의수사를 주시했다. "자신이 있는 정도가 아니오. 이 건물을 만든 패사숙이 배운 학문과 내가 배운 학문이 같기 때문이지요." 흑의수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신있게 말을 꺼냈다. "설사 노형께서 이 건물에 있는 기관을 잘 알고 있다 할지라도 일거에 무명도에 있는 사대 당의 고수들을 죽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마장홍은 앙천대소를 터뜨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흑의수사를 한동안 주시하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육당주, 흐르는 물을 이용해서 일 천 명의 거대한 군대를 한 번에 몰살시켜 버렸던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소?" 흑의수사는 이 말을 듣자 안색이 마치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하여 힘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맞았습니다. 사마노형께서 몇 군데의 기관을 없애 버리고 바닷물을 끌어들이기 만하면 우리는 말 한 번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죽어야겠군요." 사마장홍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흑의수사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젖히며 큰 소리로 외쳤다. "으하하…… 하하…… 하지만 노형께서는 지금 우리의 손에 들어와 있으니 저는 즉시 당신을 없애 버려야겠소. 물론 저놈들까지…." 사마장홍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정영과 남궁각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는 흑의수사가 몸을 움츠릴 만큼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어리둥절하고 있는 흑의수사를 향해 물었다. "하하하하…… 육당주! 이까짓 쇠사슬에 나 사마장흥이 묶여 있을 것 같소?" 사마장홍의 말이 끝나자마자 놀랍게도 동여매고 있던 쇠사슬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사마장홍은 어느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흑의수사 앞에 섰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인 이런 상황에 흑의수사가 기절초풍하고 있을 때 남궁각과 정영 두 사람도 동시에 축골신공으로 쇠사슬에서 빠져나왔다. 흑의수사는 마치 놀란 토끼마냥 두 눈을 까뒤집어 뜨고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세 사람은 먹이를 눈 앞에 둔 야수처럼 품(品)자형으로 흑의수사에게 차츰차츰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흑의수사가 갑자기 소맷자락 속에서 한 자루의 철골접선을 번개처럼 꺼내들더니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었다. "어느 놈이든지 죽고 싶으면 더 가까이 다가오너라! 여기에서 나와 싸우려는 것은 자살 행위와 마찬가지다! " 하지만 사마장홍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흑의수사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허허…… 육당주의 말이 맞소. 여기는 흑의당의 지역이라 고수들도 많겠지요. 하지만 육당주 혼자서라면 여기는 나의 두 제자의 적수도 못될 것 같은데……." 그리고는 옆에 서 있는 남궁각을 향해 분부를 내렸다. "각아! 어서 육당주에게 너의 실력을 한 번 보이 주어라! " 남궁각은 즉시 대답을 하는가 싶더니 번개 같은 수법으로 흑의수사의 안면을 향해 천강지(天强指)를 날려 보냈다. 흑의수사는 남궁각의 번개같은 수법에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급히 옆으로 몸을 돌렸다. 맹렬한 지풍이 그의 몸 옆을 스쳤다. "펑!" 하는 무서운 폭음이 터졌다. 마치 하나의 화살이 석벽에 꽂히는 것 같았다. 흑의수사는 참지 못하고 급히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단단하기 그지 없는 석벽이 지풍에 의해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 이렇게 되자 흑의수사의 안색은 마치 얼굴에 파란색을 칠한 듯 새파랗게 변했으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더니 갑자기 오른쪽의 석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마장흥이 가볍게 웃으며 손을 가로 흔들었다. "육당주! 우리를 석실에 감금시키려고 그러시오? 하하하…… 하지만 내가 이 석굴에 들어오기 전에 벌써 기관을 부숴 버렸기 때문에 나 외에는 아무도 열 수가 없을 것이오. 심지어 대사숙 황삼객까지도 열 수가 없소. 왜냐하면 바로 사조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사숙이 아니라 나 사마장홍이기 때문이요." 흑의수사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석벽을 더욱 세게 두드렸으나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것 보시오 사마노형!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십니까?" 지금 흑의수사는 자신의 무공이 상대방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렸다. 뿐만 아니라 석실의 문도 닫혀져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부드럽게 말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마장홍은 잠시 흑의수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그의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육당주! 상의를 좀 할 일이 있으니 자리에 앉으시오." 흑의수사는 분통이 터져 미칠 것 같았지만 상대가 엄청난 고수이고 보니 그의 말대로 앉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을 상의하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어서 말씀을 해보십시오." 사마장홍은 그가 자리에 앉자 조금 전에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옛날 마당주가 살아 있을 때 저와 약속을 한 것이 있는데 지금 그가 없으니 육당주께서 지켜 주시겠습니까? 무슨 약속인지 말을 하기 전에 육당주께서 지켜 줄 수가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알고 싶습니다." 흑의수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얼마 후 그는 가느다랗게 탄식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봐야 알겠지요. 만약 마당주께서 하신 약속이 개인에 관한 일 이라면 아예 묻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흑의당 전체에 관한 일이라면 제가 지켜 드릴 수가 있습니다." 사마장홍은 옆에 있는 남궁각과 정영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빙긋이 웃어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좋습니다. 옛날 마당주께서는 저를 찾았을 때 저에게 무명도를 위해 일을 해 달라고 했었지요. 또한…." 흑의수사는 정색을 하며 그를 똑바로 주시하더니 급히 말을 가로챘다. "그 당시 사마노형께서는 허락을 하셨습니까? " 사마장흥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설레 저었다. "저는 그때 일하는 만큼의 보수를 달라고 했으며 제가 생각을 했던 것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허락을 하지 않았었지요." 흑의수사의 눈에서는 갑자기 신광이 번득이더니 몹시 궁금한 듯 언성을 높여 묻는다. "사마노형께서는 대체 얼마의 보수를 요구하셨습니까? " 사마장흥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가격은 마당주께서 정했으며 장기와 단기를 나누었지요. 장기란 죽을 때까지 일을 하는 것이고 달마다 백 냥의 황금을 주기로 했으며 단기는 여섯 달로써 매달 이 백 냥의 황금을 준다고 했었지요. 그래서 저는 구속을 받고 실지 않아 단기를 택했었지만 매달 이백냥의 황금이 너무나 적어서……." 흑의수사는 재빨리 사마장흥의 말을 가로채며 재우쳐 물었다. "그렇다면 사마노형께서는 도대체 얼마나 받고 싶었습니까? " 사마장홍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저는 매일매일 계산하고 하루에 최소한 오십 냥의 황금이 되어야만 하겠다고 했지요." 흑의수사가 이 말을 듣고 혀를 홱홱 내두르자 사마장홍은 소리 없이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물건이란 희귀할수록 비싼 법이지요. 제가 배운 학문은 저 외에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흑의수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하지만 영사숙 황삼객께서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사마장흥은 자기가 사숙인 황삼객보다 더 높은 학문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어깨를 으쓱대며 흑의수사를 향해 득의하게 웃었다. "폐사숙께서 배운 것은 지하에 관한 학문이며 내가 배웠던 것은 기관 장치에 관한 것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폐사숙께서 만든 기관은 제가 한 번 지나가기만 하면 즉시 모양이 바뀌어 버리지요. 그 예로 이 석실을 보면 알 수가 있지 않소?" 흑의수사는 아픈 곳을 찔렸기 때문인지 버럭 화를 내며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사마노형!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 하시고 대체 무슨 뜻으로 오셨는지 한 번 말씀을 해 보시오." 사마장홍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무림맹에서 무림의 정예 고수를 모아 흑영도에 온 것은 바로 무명도와 겨루어 보기 위해서이지요. 또한 제가 같이 따라온 이유는 바로 무명도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였소." 흑의수사는 약간 검미를 찌푸리며 여전히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노형께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바로 은자를 뜯어내기 위함이었소? " 사마장홍은 약간 멋적은 듯 흑의수사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시치미를 잡아떼었다.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무명도의 세력도 막강한데 내가 어떻게 은자를 뜯어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림맹의 세력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마 영원히 무명도를 찾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석상처럼 앉아 있는 정영과 남궁각을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되면 무림맹의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각기 갈라져서 돌아가게 될 것이며 무명도에서는 그들을 섬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기게 되지요." 정체불명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남궁각은 사마장홍이 무림맹을 팔아 버리려고 하는 것을 보자 분노가 치밀어 일거에 사마장흥을 없애 버리려고 했다. 사실 정영과 남궁각 두 사람에게 아무런 암시도 주지 않고 말을 했기 때문에 남궁각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궁각 옆에 앉아 있던 정영이 급히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흑의수사는 생각에 잠기기라도 하는 듯 눈을 반쯤 감은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얼마 후 그는 정색을 하며 사마장흥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무겁게 물었다. "사마노형께서 여기에 찾아온 것은 노형께서 알고 있는 무명도의 모든 비밀을 무림맹 사람에게 팔려는 것입니까? " 사마장흥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흑의수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을 꺼냈다. "그렇지요. 육당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만약 귀도에서 내가 알고 있는 무명도의 모든 비밀을 사가기만 한다면 아마 온 천하의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귀도를 찾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흑의수사는 마음 속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줄여 보자는 심산으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형께서 가격을 적당히 말씀해 보십시오." 흑의수사가 뜻밖에도 이렇게 나오자 사마장흥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한 나머지 빙그레 웃었다. "옛날 제가 마당주에게 제시를 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하루에 오십 냥의 황금을 받고 반 년 동안에 구천 냥의 황금이면 됩니다." 지금 사마장홍이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공갈 협박에 불과했다. 무명도의 모든 비밀을 무명도에게 팔겠다고 한 것은 구천 냥의 황금을 이들로부터 뜯어내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였던 것이다. 흑의수사는 그의 말을 듣자 입을 크게 벌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노형! 노형은 정말 돈에 환장을 한 것 같구려." 사마장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빙그레 웃는가 싶더니 다시 신중하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황금을 주어서라도 재난을 막아 보자는 얘기가 아니다. 만약 내가 무명도의 모든 비밀을 무림맹에 팔아 버린다면 아마 오늘밤이 무명도의 마지막 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구천 냥의 황금을 주어서라도 이런 끔찍한 재난을 막을 수 있다면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흑의수사는 마음이 끌리기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는 의심의 빛이 역력했다. "노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떻게 노형을 믿겠습니다." 사마장홍은 몹시 불쾌한 듯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단호히 말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되었던 육당주께서는 믿어야 하오. " 흑의수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탄식을 했다. "노형의 말투를 들어보니 구천 냥의 황금을 꼭 받아 가겠다는 것 같은데 ……." 사마장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 밖을 향해 손짓을 했다.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으니 육당주께서 만약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도주에게 한 번 물어 보시오." 흑의수사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자 무조건 사마장홍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몹시 중대한 일이니 노형의 뜻대로 도주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군요." 사마장홍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정영을 향해 속삭이듯 물었다. "혹시 노제의 몸에는 극히 가늘고 작은 독물이 있는가?" 정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마장흥은 나직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지금 무명도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에 자네는 독물을 육당주의 몸에다 붙여 따라가도록 하게! " 정영이 알았다는 듯이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사마장흥은 고개를 돌려 흑의수사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육당주!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가 보십시오." 흑의수사는 사방의 석벽을 둘러보더니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이 석실의 기관은 모두 노형께서 풍지박산을 내어 버렸는데 제가 어떻게 열겠습니까?" 사마장홍은 갑자기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손짓을 했다. "하하하하…… 육당주! 쓸데 없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열어 보십시오." 흑의수사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석벽 근처로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누르자 과연 문이 열렸다. "사마노형! 제가 갔다가 곧 돌아올 테니 노형께서는 여기서 잠깐기다려 주십시요." 사마장홍은 빨라 갔다 오라는 듯 급히 손을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육당주! 안심하십시요. 구천 냥의 황금이 제 손에 들어오지 입는 한 절대로 떠나지를 않을 것입니다." 흑의수사가 냉소를 날리며 밖으로 나가고 있을 때 정영은 그 틈을 타서 신속히 손짓을 했다. 그러자 정영의 소맷자락 속에서 하나의 극히 작고 검은 그림자가 흑의수사의 몸을 향해 날아가 붙었다. 잇따라 석문도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사마장홍은 정영을 향해 황급히 물었다. "노제! 지금 너의 몸에는 어느 정도의 독물이 있는가?" 정영은 사마장홍을 올려다보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위험성 있게 대답한다. "별로 많지는 않지만 노선배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만큼은 가지고 있으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사마장홍은 갑자기 정영의 어깨를 덥석 잡으며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아주 좋지. 지금 너는 한 마리의 독물을 보내서 네 사부에게 보고를 해라. 그렇게 되면 너의 사부가 즉시 맹주에게 보고를 올릴 것이다." 이때 남궁각이 그 소리를 듣자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사마 아저씨, 그렇다면 아까 육당주에게 얘기한 것은 전부 거짓말이었습니까?" 사마장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가 맹주를 팔아먹을 것 같으냐? 다만 이것이 대사숙의 지하 공장이 나보다 훨씬 고명하기 때문에 노제더러 독물을 흑의수사 몸에다 붙이고 따라가게 한 것이다. 그래야 무명도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지 않느냐? " 정영은 약간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하지만 여기는 바다 밑인데 어떻게 독물을 보내지요?" 사마장흥은 걱정 말라는 듯 엷게 웃었다. "공기통으로 보내면 간단하지 않느냐?" 정영은 금새 표정이 밝아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하며 즉시 손가락 크기 만한 한 마리의 소금사를 꺼내 땅에다 내려놓았다. 소금사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신속하게 석실 안을 한 바퀴 돌더니 어떤 석벽 틈을 통해 빠져나갔다. 한편, 소불이, 윤상, 당승무 세 사람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마장흥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들이 온 이유는 바로 사마장흥과 무명도가 싸움을 할까 봐 서였고 그래서 소불이 등은 시종 그들과 칠팔 장의 거리를 두고 뒤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장홍을 발견하기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불이는 과연 도둑놈의 왕자답게 이 어둠 속에서도 사마장홍의 행동을 낱낱이 볼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사마장홍 등 세 사람이 암석 밑으로 내려간 것을 보자 당승무는 매우 기뻐하며 소리쳤다. "소호법, 저들은 참 약군요." 그러나 소불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아니, 소노는 이번에 왜 또 저러지? 무영도의 출입구를 발견했다면 빨리 맹주에게 보고를 할 것이지. 고작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서 무슨 모험을 하려는 것인가? " 윤상은 이 말을 듣자 어떤 위험이 목전에 다가온 듯 급히 재촉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빨리 가 보아야 되지 않을까요? " 소불이는 침중하게 안색을 굳히더니 윤상의 앞을 손으로 막았다. "아니다. 우리는 잠시 기다려 보자." 세 사람은 암석 뒤에 숨어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을 기다렸다. 하나 그래도 사마장홍은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소불이는 뒤통수를 탁 치며 크게 실소를 터뜨렸다. "아뿔사, 소노는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 싸우려고 했구나! " 당승무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소호법님의 뜻은 그들이 벌써 실의 비밀을 알아냈다는 말입니까? " 소불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쁨인지 불안인지 모를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렇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아마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 같다." 당승무는 일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사마 노인장은 무엇 때문에 저 두 사람만 데리고 들어갔습니까? " 소불이는 멋적게 웃었다. 그는 무엇인가 소노반의 생각에 대해 짐작을 하고 있는 듯했다. "소노반의 무공은 얼마 안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을 데리고 간 이유는 첫째, 그들의 체격이 작기 때문에 마음대로 구멍 속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 남궁각의 일신의 무공은 벌써 북악 노신선의 진전을 얻었다. 그리고 정영은 흑석도가 제일 사랑하는 제자라 몸에 반드시 많은 독물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만약 무엇을 발견했다면 즉시 정영이 가지고 있는 독물을 꺼내 보고를 할 것이다." 당승무는 소불이가 태평하게 웃어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남궁노제의 무공은 비록 대단하지만 그들 세 사람만으로 어찌 그 많은 무명도의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소불이는 여전히 태평하게 웃으며 크게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서도 걱정 마라. 소노는 기관의 학문이 매우 깊어 적의 매복이 비록 많다고 해도 그가 약간만 손짓을 하면 아마 아무도 소노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윤상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암석 뒤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며 낮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가 봅시다." 소불이도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세 사람이 일어나 신속히 다가가 보니 과연 하나의 구멍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협소한 구멍으로 소노반은 커녕 남궁각과 정영 두 사람도 들어가지 못할 텐데 소노반은 대체 어떻게 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는 말인가? 윤상은 이 구멍에 어떤 조화가 있나 싶어 호기심을 발동시키며 흥미있게 말했다. "이거 정말 재미있겠군. 내가 한 번 들어가 볼까?" 하더니 즉시 그 구멍 주위를 가늠하며 빙빙 돌았다. 소불이는 잠시 그 구멍을 주시하고 있다가 윤상이 들어가려고 하자 즉시 만류했다. "아! 윤노제, 잠깐 우선 맹주에게 보고를 올린 다음에 결정을 하자." 바로 이때였다. 소불이가 막 말을 끝내자마자 해변가의 사방에서 갑자기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피어 오르는가 싶더니 점점 넓게 퍼져 순식간에 섬을 향해 덮쳐 갔다. 소불이는 그것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나며 소리쳤다. "치우독(恥尤毒) 안개! " 이어 그가 미처 말을 계속할 여유도 없이 섬 위에서 요란하게 북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각대 문밖에 아직도 밖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즉시 호흡을 멈추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이 순간에도 검은 안개는 더욱 신속하게 사면 팔방에서 일어나 중앙을 향해 마치 사람을 쉽싸버릴 듯 덮쳐왔다. "자, 우리도 빨리 돌아가자! " 소불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사람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제갈명은 이들이 황급히 뛰어 들어오자 급히 일어나 맞으며 물었다. "소호법, 이제 돌아오십니까? 그런데 사마노형께서는? " 소불이는 조금 놀란 듯 얼굴이 치켜뜨며 물었다. "아니, 맹주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 제갈명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총관이 소노반 사마장홍과 남궁각, 정영이 바닷가로 갔다는 소리를 들었소." 소불이는 의자를 찾아 앉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소노는 벌써 입구를 찾아 세 사람 모두 들어갔습니다." 이때 통천관주 사기량이 그의 옆으로 다가오며 크게 짐작한 것이 있다는 듯 물었다. "아, 그렇다면 무명도는 바로 이 동사도의 밑에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게 아닙니까? " 소불이 대신 제갈명이 나섰다. "그리고 또 치우독 안개가 섬에서 일어난 것을 보면 또 적당이 이 부근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소불이는 그보다 더 긴급한 문제가 있다는 듯 사기량의 말문을 열려는 것을 만류했다. "잠깐, 맹주 이 치우독 안개는 어떻게 상대해야 되지요? " 제갈명은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서성이다가 일시에 걸음을 멈추고 대꾸했다. "안심하십시오. 곡호법과 흑석도주께서 벌써 문하 제자들을 데리고 출동을 했습니다." 이때 갑자기 멀리서 일진의 금속성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통천관주 사기량은 얼른 소리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여러 사람들을 휘둘러보며 어떤 동의를 구하는 듯 말했다. "밖에서 싸움이 일어났나 봅니다." 그러자 구양반석이 얼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리 가 봅시다. 사형! " 그러자 제갈명이 급히 제지를 하며 정색을 했다. "안 됩니다. 구양대협, 다시 앉으십시오. 섬에는 아직도 독안개가 퍼져 있으니 함부로 다가서면 큰일납니다! " 제갈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아까보다 더욱 요란하게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불이는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음인지 의자에서 일어났다. "속하가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윤상도 따라 나섰다. "소호법, 저도 가겠습니다! " 그러자 이번에는 당승무가 정색을 하며 만류했다. "윤형 가시면 안 됩니다! " 윤상이 돌아서다 말고 어리둥절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무엇 때문에?" 당승무는 엷게 웃으며 대꾸했다. "소호법과 형제는 극독을 무서워하지 않으니 괜찮지만 그러나 윤형은 안 됩니다." 윤상이 약간 기분이 나쁜 듯 무엇이라고 덧붙여 말하려는 순간, 제갈명이 나서며 동조를 했다. "당형의 말씀이 맞소이다. 소호법과 그는 절대 극독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윤상은 제갈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쑥 내뱉았다. "저도 무섭지 않습니다 ! "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윤상은 몸을 날려 천막 밖으로 달려나갔다. 소불이는 즉시 얼굴에 황망한 표정을 떠올리며 당승무를 잡아끌었다. "자, 우리도 빨리 나가자! " 두 사람은 급히 천막을 빠져 나왔지만 윤상의 그림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소불이는 매우 난감한 듯 어깨를 들먹이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참, 윤노제의 고집은 정말 대단하군. 아무리 무공이 높다고 해도 극독과 상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 텐데 …." 이때였다. 바로 앞의 검은 안개 속에서 한 그림자가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소불이는 극히 빠른 동작으로 품 속에서 여의금사를 꺼내 한 발 다가서며 소리쳤다. "누구냐? " 그러나 검은 그림자는 이미 상대를 짐작했다는 듯 즉시 걸음을 멈추고 다급하게 물었다. "제맹주는 어디에 있어요? " 혼전 소불이는 이 갑작스러운 출현자의 질문에 어리둥절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상대방은 온몸을 검은 헝겊으로 바고 심지어는 얼굴까지 검은 복면을 한 여인이었다. 소불이는 도대체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낭자는 대체 뉘신데 맹주를 찾소? " 그러자 흑의여인은 가볍게 냉소를 치며 사람을 비웃는 듯한 말투로 도리어 물었다. "아니,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소대협께서는 어째서 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씀이에요? " 소불이가 그 말에 깜짝 놀랐으나 흑의여인은 다시 생각하려는 겨를도 주지 않고 매우 다급한 어조로 재촉했다. "그것은 차후에 따져도 됩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이 몹시 촉박하니 소대협께서는 빨리 저를 제맹주께 데리고 가주세요." 소불이는 흑의여인의 말을 다 듣고 나서야 매우 귀에 익었던 목소리라 생각하며 흑풍안의 나국영을 생각해 내었다. "당신은 나낭자요? " 흑의여인은 이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계속 독촉만 했다. "아무튼 제맹주께 빨리 안내를 해주세요. 조금이라도 늦으면 큰일을 그르치고 맙니다! " 소불이는 이 여인의 말과 행동이 몹시 다급한 것을 보자 더 묻기를 단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맹주께서는 천막 안에 계시니 늙은이를 따라오시오." 소불이는 즉시 흑의여인을 데리고 중앙에 있는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당승무는 이 흑의여인의 정체가 아직 불분명하므로 혹시 어떤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나 싶어 그녀의 뒤를 바싹 따라서 걸었다. 얼마 안 되어 이들은 천막에 당도했다. 소불이는 휘장을 들추고 들어서며 흑의여인을 돌아보았다. "자, 낭자 들어오십시오." 흑의여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소불이를 따라 들어갔다. 이때 천막 안에 앉아 있던 제갈명, 염지천, 사기량, 구양반석, 언봉저, 심자귀 등의 사람들은 소불이가 흑의여인을 데리고 들어오자 전부 이상한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었다. 소불이는 그대로 제갈명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분 낭자께서 맹주께 중요한 보고를 올릴 것이 있다고 합니다." 제갈명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읍을 했다. "낭자께서는 대체 누구신지……" 흑의여인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쓰고 있던 흑의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나국영의 얼굴이 일시에 나타났다. 나국영은 조금 전 다급해 하던 태도와는 달리 제갈명에 대하여 마치 그리운 사람이라도 만난 듯 그윽한 눈길로 그를 주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나국영이예요." 그러자 제갈명도 매우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아…… 나낭자였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나국영은 다시 복면을 쓰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저… 저는 염지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어요.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은 열 명의 문하 제자들을 전부 다 유린하고…… 정말 그는 사람도 아니예요." 제갈명이 퍽 안 되었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자 나국영은 눈자위를 손으로 훔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는 그와 싸우기로 결심하고 다방면으로 조사해 본 결과 염지천이 옛날에 동사도를 건축할 때 황삼객(黃杉客)을 찾아 지었다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알아내었어요. 그리고 또한 동사도가 십이 년마다 한 번씩 해일에 의해 침몰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그래서 그는 따로 여산에다 궁전을 세웠어요." 이때 염지천이 나국영의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며 물었다. "지금 나낭자의 말씀은 무명도가 바로 여산에 있다는 것입니까?" 나국영은 들어올 때부터 제갈명의 모습만 찾아 그와 얘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에게 묻는 사람이 꿈속에서도 치를 떨던 자의교수 염지천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자 갑자기 안색이 싹 변하여 뒤로 몇 발짝이나 물러났다. 나국영은 마치 심장이 멈추는 듯한 경악을 느끼며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입을 떼었다. "다…… 당신은…?" 제갈명이 급히 나서며 쓰러질 듯한 나국영의 몸을 부축했다. "나낭자, 놀라지 마십시오. 이분은 바로 본맹의 총호법인 염지천이십니다." 염지천도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노부는 절대 무명도의 염지천이 아니오. 예전에 낭자의 사부와 관계는 조금 있었지만 말이오. 그러나 안심하시고 말씀을 계속하십시오." 나국영은 제갈명의 부축을 받고 비로소 길게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래도 일순간 정신이 없었는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삼 년 전 해일로 동사도가 침몰한 후에 그 섬에 있던 모든 건물 따위는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다만 사대 당주가 지키고 있어요. 그 후로 염지천 부부와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음인과 독인들도 전부 여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더니 나국영은 아직 아까의 놀라움이 가라앉지 않은 듯 한숨을 한 번 길게 몰아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제가 섬 위에 도착했을 때 적당들이 치우독 안개를 발출시키는 것을 보았지요. 이 기회를 틈타 황, 청, 백, 흑 네 당의 당주들도 아마 독안개의 엄호 아래 대거 습격을 해 올 거예요. 하지만 지금 독안개는 용연향(龍涎香) 의해 거두어지고 사방의 싸움도 아주 치열하니 좋은 기회예요. 이곳에는 또 여산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통로에는 평상시 무사가 지키고 있지만 이 혼전 속에 빠져나가기란 그리 힘이 들지 않을 거예요. 지금 제가 맹주를 위해 길을 인도하겠어요." 제갈명은 네 당주들이 습격해 온다는 소리를 듣자 매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낭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밖의 상황을 좀 알아본 후에 나국영은 매우 급한 듯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며 재촉했다. "맹주, 시간이 촉박합니다. 만약 이 네 당주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도망쳐 여산에 가서 보고를 한다면 즉시 그 통로로는 들어갈 수 없을 거예요." 다시 제갈명이 무엇이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 두경강이 총총히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맹주님, 바깥의 독안개는 벌써 사라졌지만 적당들이 대거 습격을 해 와서 아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제갈명은 나국영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려다 말고 두경강을 향해 물었다. "그럼 상황은 대략 어떻소?" 두경강도 일대 혼전을 벌린 듯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쓱 문질렀다. "적당은 바로 네 군데 방향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네 당의 인마를 합쳐야 백 육 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중 황의당은 소림사의 승려들과 부딪치고 참, 막용장강도 나한�진(羅漢降)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의당은 점창, 종남 두 파가 서로 상대하고 있으며 백의당은 서쪽을 습격하다가 무당파를 만나 천령도장에 의해 백의당의 사람들을 모두 분산시켜 오행검진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흑의당 사람들은 거의 전부 전멸하다시피 하고 그 당주인 흑의수사 육한생은 도망쳤지만 곡호법과 흑석도주께서 부하를 이끌고 수색 중에 있습니다." 나국영은 흑의수사가 도망쳤다는 소리를 듣자 급히 제갈명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육한생은 아마 그 비밀 통로를 통해 여산으로 도망쳤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통로를 차단하기 전에 빨리 뒤를 쫓아야 합니다." 염지천 역시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심각하게 듣고만 있는 제갈명에게 독촉했다. "나낭자의 말이 맞습니다. 이곳의 싸움은 우리가 완전히 그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맹주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고 빨리 쫓아가십시오." 제갈명은 나국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소." 이어 다시 그는 염지천을 향해 물었다. "총호법의 생각으로는 몇 명 정도가 되면 좋겠습니까?" 염지천은 그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약간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입을 떼었다. "노부가 보기엔 이 동사도의 뒤에는 반드시 배우 인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 사람이 몰려가 보았자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염지천은 잠시 말을 끊더니 둘러선 사람들을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맹주와 부인께서는 곡호법과 윤소협, 또 당소협, 사기량, 구양대협 이렇게만 데리고 가십시오. 그리고 여인 중에선 부인께서 결정하셔서 색출해 내시고 맹주께선 나낭자와 먼저 가십시오. 노부 등의 사람들도 곧 뒤쫓아 가겠습니다." 제갈명은 크게 머리를 끄덕이며 곡영자와 윤상, 희진진, 하가가, 용주주, 흥채 사녀를 데려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다시 제갈명은 언봉저와 옥적랑군 심자귀에게 천막 안을 지키라고 명한 후 나국영에게로 돌아섰다. "나낭자, 이제는 갑시다! " 나국영이 대답 대신 나는 듯이 천막을 나서자 나머지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 일행은 맨 뒤에 따르고 있는 두경강의 여덟 명 경장무사까지 합치면 스물 다섯 명이나 되었다. 나국영은 천막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잿더미 가운데로 왔다. 이어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어떤 우물 옆으로 곧장 가더니 즉시 우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우물 안으로 잠적해 버린 것이 아니라 우물 난간에 두 발을 걸치고 머리를 우물의 안으로 하여 거꾸로 세웠다. 나국영이 우물 안을 더듬어 어떤 쇠고리를 잡아당기자 즉시 우물물이 밑으로 새어 들어가고 빈 우물이 되는 것이었다. 나국영은 몸을 돌려 우물 밖으로 뛰어나오며 즉시 소리쳤다. "자, 이제 이 우물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그러더니 다시 우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제갈명도 급히 뒤따라가 보니 우물의 깊이는 약 석 장 정도였고 물은 벌써 없었다. 그런데 이 우물은 밖에서 보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우물 바닥은 입구보다 넓어 십여 명은 충분히 내려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설란이 다음 선두로 해서 희진진, 하가가, 용주주 등의 여인들도 차례로 뛰어 내려갔다. 나국영은 우물 안을 살피더니 어떤 거석 앞에 몸을 굽혀 거석 아래에 있는 돌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그러자 즉시 어린애의 머리통만 한 구멍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여러 사람들이 감탄의 소리를 내기도 전에 나국영은 그 구멍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쇠사슬을 끌어당기자 놀랍게도 앞의 거석이 밑으로 내려가고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는 아주 컴컴한 동굴이 있었다. 나국영은 손에서 쇠사슬을 놓고 화통을 켠 다음에 앞장서서 걸어 들어갔다. 제갈명은 동굴을 보자 매우 놀란 듯 혀를 내둘렀다. "생각지도 않게 물이 가득 찬 우물에 이 같은 비밀 통로가 만들어져 있을 줄이야…." 주설란도 경이를 금치 못하면서도 힐책하듯 한 마디 했다. "만약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면 무슨 비밀 통로라고 하겠어요?" 나국영은 앞장서서 걸어가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독촉했다. "제맹주, 입씨름은 다음에 하시고 길이 아주 멀으니 빨리 가야 만해요." 제갈명은 소리를 듣자 즉시 뒤를 향해 말했다. "자, 여러분 빨리 갑시다!" 동굴의 넓이는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일 장 가량으로 조금 넓었다. 나국영은 앞장서서 얼마쯤 걷다가 갑자기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쫓아오던 사람들의 걸음도 전부 빨라졌다. 통로는 직선으로 뻗어 있기 때문에 비록 어두웠으나 달리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이렇게 그들이 일 리가 못되게 달려갔을 때 갑자기 하나의 석벽 앞을 가로막는다. 나국영이 예측하고 있었던 일처럼 석벽을 조심스럽게 두들기니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석벽이 천천히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석벽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일시에 밝은 빛이 한 눈에 들어와 눈부시게 했다. 그와 동시에 안에 있던 두 명의 홍의대한이 창을 꼬나 들고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구냐?" 나국영은 천천히 그들 앞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나는 셋째 향주다! " 그러자 왼쪽에 서 있던 흥의대한이 공손하지만 약간 언성을 높여 물었다. "향주, 통행부가 있습니까? " 나국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노기 찬 음성으로 꾸짖었다. "이런 버릇없는 놈들 같으니라구, 어서 길을 비키지 못하겠냐?" 그러나 흥의대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전히 길을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 나국영은 두 말 하기도 귀찮은 듯 갑자기 소맷자락을 펄럭여 즉시 두 줄기의 흑풍을 날려 두 흥의대한을 단번에 이 장 밖으로 날려 질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갑작스러운 풍력이 너무 강해 그들은 절로 숨이 막혀 죽어 버리고 말았다. 주설란은 그것을 보자 즉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언니, 그것은 흑풍안에서 연마한 흑풍장이예요? " 나국영은 다만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이더니 계속 그대로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통로는 일 장마다 전부 등불이 걸려 있기 때문에 화통이 없어도 앞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나국영은 마치 연기처럼 통로를 스쳐 갔고 뒤따르고 있는 사람들도 신법을 전개해 앞으로 달렸다. 이들이 이렇게 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리를 달려가자 눈앞에 또 하나의 석벽이 나타났다. 그러자 나국영이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문을 열자 또 다른 두 명의 흥의대한이 소리쳐 물었다. "누구냐?" 나국영은 얘기하기도 귀찮은 듯 흑풍으로 다시 두 사람을 후려 쳐버렸다. 그들이 이 장 밖으로 나가 떨어져 죽자 나국영은 고개를 돌려 여러 사람들을 향해 엄중하게 타일렀다. "이 비밀 통로에는 모두 다섯 군데의 관문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벌써 두 개의 관문을 통과했으니 앞으로 세 개의 관문만 더 지나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야 합니다." 말을 끝내고 즉시 십여 리를 달리니 과연 세 번째의 관문이 나타났다. 그러나 결과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나국영은 태음신공으로 두 명의 흥의대한을 죽여 버렸다. 이렇게 해서 네 번째, 다섯 번째의 관문도 무사히 통과하자 통로는 갑자기 위를 향해 펼쳐졌다. 평평한 길이 아니어서 빨리 달릴 수는 없었지만 일행은 신법을 최대한으로 전개해 경사진 곳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얼마 안 가서 통로의 끝에 도착했다. 나국영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다시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여기로 올라가면 여산입니다. 그리고 입구에는 오각정(五角亭)이 있고 바로 그곳에 오대살성(正大煞星)이 지키고 있어요. 이 다섯 사람은 염지천의 직속 심복들로써 매우 무서운 자들이니 우리는 나가자마자 몇 초로 이들을 일거에 해치워야 합니다." 제갈명이 즉시 대답했다. "알겠소, 낭자." 그리고 그는 여러 사람들을 향해 지시했다. "나낭자께서 통로를 열 테니 여러분들은 지체없이 뚫고 나갈 준비를 하십시오." 그가 말하는 도중에 나국영은 이미 문을 열어 찬 공기가 미처 들어 올 사이도 없이 몸을 날려 벌써 빠져나갔다. "누구냐? " 자의궁 나국영은 가볍게 날아오르며 정자 위에 살짝 내려섰다. "나는 바로…." 그의 이 말이 신호였던 것처럼 제갈명과 주설란 등이 쌍쌍이 뛰쳐나왔다. 제갈명은 뛰어나오면서 사방을 신속하게 살펴보았다. 자기네가 튀어나온 구멍은 이 정자의 한가운데였고 그 구멍을 다섯 명의 흥의경장 대한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바로 나국영의 앞에 있는 흥의대한이 가소롭다는 듯 냉랭하게 웃었다. "흥, 대담한 놈들이군. 감히 여기까지 오다니! " 흥의대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양반석, 곡영자, 소불이 등이 차례로 뒤이어 나왔다. 그러자 대한은 다시 냉랭하게 코웃음을 날렸다. "호오, 아주 많이 왔군. 그래!" 흥의대한은 뒤이어 나타난 사람들과 제갈명 등을 하나하나 쏘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순순히 포승을 받겠느냐? 아니면 시험을 해 보겠느냐?" 이때 나국영이 갑자기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고함을 질렀다. "허튼 소리 말고 빨리 꺼져랏! " 하고 나국영은 한 줄기의 흑풍을 맞은편 대한을 항해 휘몰아쳐 보냈다. 그러자 흥의대한은 큰 소리 칠만큼 실력이 있었던지 냉소를 치며 가볍게 몸을 움직였을 뿐인데 벌써 나국영의 일 장을 피해 내고 수중의 대작도(大斫刀)로 갑자기 비스듬히 쳐 왔다. 제갈명과 주설란은 뛰어 나올 때부터 두 개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두 명의 홍의대한을 막고 사기랑과 구양반석도 뒤이어 자기들의 적수를 찾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한 수 없이 가만히 구경만 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 오각정의 크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다섯 모서리에 전부 사람이 서 있으니 정자 안에는 사람이 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불이는 급히 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이 곳은 자리가 매우 좁으니 조금 있다가 올라오십시오!" 한편. 나국영의 일 장이 나가자마자 제갈명도 지체없이 장검을 뽑아 들었다. 이 다섯 홍의살성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속전속결 해야 만했다. 그러나 제갈명이 재빨리 장검을 뽑아 든 순간 갑자기 한 인영이 눈앞에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윤상이 어느 사이인가 뛰어 올라왔다. "이런 놈들을 상대하는데 있어 맹주께서 직접 손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 말과 함께 윤상은 그 흥의대한을 향해 일지를 찔러 갔다. 윤상은 일지를 뻗어 내자마자 왼손으로 일 장을 번개같이 공격해 갔다. 제갈명은 윤상이 출수한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물러났다. 이때, 주설란, 사기량, 구양반석 세 사람도 일제히 병기를 뽑아 흥의대한을 향해 공격해 갔다. 한편, 나국영이 뻗어 낸 흑풍장력은 흥의대한을 한 발자국밖에 물러나게 하지 못했다. 더구나 홍의대한은 나국영을 우습게 보았는지 대작도를 휘둘러 맹렬한 공격을 감행해 왔다. 이 순간에 윤상은 일지로 상대방의 미심혈을 찌르고 왼손으로 번개�같은 일 장을 뻗어 내자 상대는 극히 놀라 어쩔 줄 모르고 급히 뒤로 두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하지만 제갈명 등은 반드시 원래의 위치를 고수해야 하는 까닭에 적당을 정자 밖으로 밀어내지는 못하고 협소한 자리에서 맴을 돌뿐이었다. 한편, 사기량의 장검과 구양반석의 철괴는 전부 무림에서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두 명의 흥의대한과는 막상막하의 형세밖에 유지하지 못했다. 이때 주설란만이 봉황검법을 쓴 까닭에 그녀의 상대는 비록 고명하였지만 크게 당황을 했다. 하지만 그 흥의대한은 이빨을 갈며 악착같이 자기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려 했다. 만약 지금 각 개인의 무공을 논한다면 이 다섯 명의 홍의대한은 결코 이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자살자 하고 최후의 발악인 양 덤벼드니 일시간에 그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주설란 등의 사람들은 모두 오륙 초씩 공격했다. 그러자 다섯 명의 흥의대한들은 상대의 무공이 매우 고강함을 보자 은연중에 어떤 암호를 교환했는지 모르나 모두 동시에 기합 소리를 질렀다. "이얏!" 하더니 일제히 왼발을 내밀고는 힘있게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한 괴이한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다섯 모서리의 정자가 갑자기 주마등처럼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정자가 도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군협들은 무골이 비록 높았으나 마치 날으는 듯 돌고 있는 정자 안에선 자신들도 모르게 눈 앞이 어지러워지고 정신이 몽롱했다. 그것은 마치 일진의 어떤 몸을 뺄 수 없는 흡인력과 같고 또 거센 물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때 소불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마장홍과 할께 있었던 까닭으로 이 기관에 대한 학문을 약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불이는 이 오자정이 빙글빙글 도는 것이 흥의대한의 짓이 아니라 사마기의 걸작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또한 그는 이 돌고 있는 정자가 갑자기 멈추기라도 한다면 자신들은 즉시 정자 밖으로 나가 떨어져 크게 다칠 것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더구나 지금 정자밖에는 어느새 오대살성이 칼을 꼬나 잡고 버티고 있으니 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불이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즉시 제갈명을 향해 외쳤다. "맹주, 지금 우리는 극한 상황에 처해 있으니 빨리 시기를 장악해 일거에 이 정자 지붕을 날려 뚫고 나가야 합니다." 제갈명은 계속 돌고 있는 정자 덕분으로 옷자락이 마구 날렸고 그의 대꾸 소리도 바람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 정자는 쇠로 만든 것이라 아마 장력으로 날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점점 사태가 험악해 오는 것을 직감하자 매우 초조해졌다. 아무튼 지금 결과야 어떻던 한 번 부딪쳐 보아야 할 일이었다. "속하가 보기에는 다섯 개의 기둥만 빼놓으면 전부 쇠로 만든 것이 아닐 것이니 맹주께서는 한 번 시험에 보십시오!" 그러자 제갈명도 사태가 사태이니 만큼 어떤 행동이라도 감행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좋소. 제가 시험을 해 볼 테니 여러 사람에게 만약 지붕이 날아가면 그 즉시 빠져나가라고 일러주십시오! " 소불이가 즉시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제갈명은 소불이의 대답을 미처 들을 사이도 없이 즉시 태청현공을 끌어올려 가전의 칠보추운(七步推雲) 수법으로 서서히 위를 향해 내밀었다. 이 순간의 제갈명의 눈동자는 거세게 돌고 있는 정자의 움직임도 느끼지 못한 듯 다만 온 정신을 집중시켜 정자의 그 가운데 부분만 예리하게 노렸다. 그러자 다음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오각정의 지붕이 갑자기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제갈명은 자기의 이 한 수가 성공하자 그 기쁨을 맛볼 겨를도 없이 소리쳤다. "자, 여러분 빨리 내 뒤를 따르시오! " 고함과 함께 그는 벌써 정자 밖으로 몸을 날렸다. 정자 안에 있던 사람들도 벌써 소불이의 지시를 받은 터라 지체없이 제갈명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오대살성은 이 광경을 보자 놀란 입이 절로 벌어지고 다물 줄 모르는 순간에 제갈명 등 여덟 사람은 어느 사이인가 날아와 그 홍의대한들을 포위해 버렸다. 한편, 땅굴 속에 있는 사람들은 소불이의 통지를 받아 정자가 멈추지 않는 한 절대 나오지 않았다. 제갈명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즉시 본문의 기학인 다라엽도(多羅葉刀)의 초식으로 홍의대한을 향해 쳐갔다. 그런데 이토록 격렬하게 그의 장세가 나갔는데도 전혀 아무런 파공음이 일지 않았다. 다만 가벼운 일진의 미풍만 사람의 얼굴을 간지럽혔을 뿐이다. 그러자 일진의 이 미풍은 마치 한 자루의 무형의 칼처럼, "싹!." 하는 소리와 함께 홍의대한의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러자 붉은 선혈이 사방으로 피보라를 날리며 흩어졌다. 이 홍의대한의 무공은 그리 약한 편이 아니었으나 어김없이 제명의 일지를 맞고 즉시 머리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만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오대살성 중 나머지 네 살성은 기겁을 하듯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아무도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생각할 겨를을 만들기에는 이 갑작스러운 결과가 너무 충동적이었는지 몰랐다. 이때 윤상은 매우 안타까운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아니, 맹주께서 그를 일 장에 죽이면 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이러는 순간-, 주설란 역시 천외비홍이라는 초식으로 섬광을 번득이자 벌써 자기의 상대인 그 대살의 머리통이 떨어졌다. 벌써 두 사람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피바다 속에 나뒹굴었다. 나국영은 이때 두 대한의 머리가 잘라져 나가자 그녀 역시 더욱 강렬한 흑풍을 날려 상대를 향해 석권해 갔다. 흥의대한은 나국영의 공격이 갑자기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자 즉시 삼 장 위로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나국영이 싸늘한 냉소를 날림과 동시에 그녀의 흑풍은 벌써 뒤따라가 대한이 미쳐 몸을 돌릴 겨를도 없이 마치 실이 끊어진 연처럼 수 장 밖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 오대살성 중 세 명이 순식간에 죽음을 당하자 남은 두 사람은 크게 놀라 꽁무니를 빼려고 했다. 그러자 구양반석이 낭랑하게 대소를 터뜨리며 대갈일성, "으하하하…… 이놈, 어디로 도망치려는 것이냐? " 하며 벌써 뒤따라가 그의 두 발이 미쳐 닿기도 전에 철괴로 대한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으악 -."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흥의대한의 머리는 마치 파편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뿜어져 나오는 선혈도 마치 붉은 꽃이 동시에 피어나는 것 같았다. 사기량 역시 이 광경을 보자 호기가 생겨 그냥 세 자 정도의 장검을 던져 마지막 남은 흥의대한의 가슴을 꿰뚫어 버렸다. 그 홍의대한은 미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단번에 피를 토하고 즉사를 하고 말았다. 사방은 마치 피의 제전을 벌린 듯 여기저기 선혈로 얼룩져 있었고 어느 사이에 오각정의 회전도 멈추어져 있었다. 그러자 희진진을 선두로 해 하가자, 용주주, 홍채 사녀와 두경강이 데리고 온 여덟 무사들은 일제히 땅굴 속에서 빠져 나왔다. 하가가는 나오자마자 두 눈을 치켜 뜨며 윤상을 향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무사가 행군하는 데도 엄연한 군형이 있거늘 소호법께서 맹주의 명령을 받들고 땅굴 속에서 나오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당신은 명령을 어기고 나왔으니 당연히 그 규칙에 의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자 윤상은 얼굴에 가득 미소를 담고 공손히 공수의 예를 취했다. "예, 예. 여장군님, 너그러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하가가는 얄미운 듯 윤상을 흘겨보며 싸늘하게 거절했다. "흥, 안 돼요! " 하고 소리를 치다가 그녀는 자신도 멋적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어떤 표현할 수 없는 눈길로 윤상을 응시했다. 제갈명은 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윤상이 하가가를 흠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가가는 윤상과는 반대로 전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늘 냉담한 표정을 짓고 윤상에게는 아주 쌀쌀하게 대했다. 하지만 지금 제갈명은 하가가가 공연한 트집을 잡아 윤상에게 관심을 나타내자 내심 무척 기뻐했다. 윤상은 얼굴이 매우 밝아져 가끔씩 하가가를 정이 어린 눈초리로 응시하고 그녀는 그런 윤상에게 눈을 흘겼지만 푸 볼이 가끔 붉어진다는 것을 제갈명이 역시 놓치지 않고 보았다. 이윽고 -. 여산의 동서 양쪽의 봉우리가 벌써 이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여산은 온갖 괴석이 운집해 있고 봉우리는 나무와 풀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황량한 곳이었다. 더구나 부서진 오각정과 다섯 명의 처참한 시체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하리만큼 이상한 전율을 안겨다 주었다. 제갈명은 깎아지른 듯 높게 치솟아 있는 봉우리를 쳐다보며 나국영에게 말했다. "나낭자, 자의문의 소굴은 아마 산복(山腹) 안에 있는 것 같소." 나국영은 즉시 머리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서쪽의 봉우리를 가리켰다. "바로 서쪽 봉우리에 있어요" 소불이는 이상하게 주위가 조용한 것을 보자 두 눈을 굴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이 늙은이가 생각한 바로는 그들은 우리가 오각정을 부숴 버렸다는 사실을 안 것 같습니다." 나국영은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고 싸울 때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급히 서둘렀다. "싸우는데 너무 시간을 소비한 것 같아요. 제가 인도 할 테니 빨리 뒤를 따르세요." 하더니 다시 바람처럼 서쪽 봉우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제갈명 등의 일행은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서쪽 봉우리에 도착하자마자 숲 속에 있던 두 명의 홍포대한이 마중을 나왔다. "교주께서 무림맹의 왕림을 아시고 저희들더러 여기에서 기다렸다가 여러분을 위해 길을 인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나국영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쳐 물었다. "염지천은 산 속에 숨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길래 너희들이 나왔단 말이냐?" 왼쪽의 흥포인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교주께서는 지금 궁중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별다른 악의는 없으니 만약 여러분께서 의심이 나신다면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흥, 이제 죽을 때가 가까왔는데도 앉아서 아래라 저래라 한다는 말이냐? " 하더니 나국영은 대뜸 위맹하게 소맷자락을 휘둘러 흑풍을 날려 보냈다. 그러자 두 명의 흥포인은 즉시 좌우로 피했다. 그러나 약간 스쳤기 때문에 뒤로 두 발자국씩 물러났다. 제갈명은 나국영이 지금 불같은 분노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어떤 짓을 할지 몰라 급히 만류했다. "나낭자, 잠깐 손을 멈추시오. 자의교주가 치들더러 우리를 마중하라고 했으니 우리는 한 번 따라가 봅시다." 두 명의 흥포인은 뒤로 물러선 채 한참 응시하고 있다가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이 바로 제맹주요? " 제갈명은 매우 위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바로 제갈명이오." 제갈명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숲 속의 넓은 길에서 다른 일행이 나타났다. 그 일행의 앞장을 서서 오는 사람은 자의를 입고 장검을 찬 보기에도 늠름하고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바로 이 자가 염지천의 아들 염대신인 것이다. 그의 뒤로는 네 명의 흥포대한이 마치 호위하듯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한 눈에 벌써 무공이 높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염대신이 가까이 오자 두 명의 홍포인은 즉시 옆으로 물러서며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속하 소도주께 인사드립니다." 그러자 염대신은 과연 자의교주의 아들답게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제갈명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제형께서 무림의 맹주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금 가부께서 제맹주의 방문을 받아 친히 저에게 영접하라 하셨습니다." 제갈명도 같이 포권을 취하며 위엄 있게 미소를 지었다. "염청께서 이렇게 일부러 마중을 나오시니 매우 고맙소" 염대신은 인사를 받으며 제갈명 뒤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쓸어 보더니 약간 허리를 굽혀 보이며 옆으로 비켜나 길을 텄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왕림해 주시니 무엇이라 할 말이 없군요. 자,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길을 인도하겠습니다." 염대신이 다시 오던 길로 앞장서서 걸어가자 제갈명 등의 일행도 곧 뒤를 따랐다. 그들은 숲이 양쪽으로 우거져 어두운 길로 얼마쯤 따라가니 눈 앞이 갑자기 확 틔었다. 여기가 바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있는 그 봉우리 사이였다. 밖에서 보던 것과는 아주 판이하게 그곳은 넓고 평평한 공지였으며 바로 앞의 산록에 하나의 백석패루(白石牌樓)가 세워져 있었는데 바로 그 패에 자의궁(紫衣宮)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제갈명 일행은 자의궁이라는 이 세 글자를 보자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감개 같은 것이 뿌듯하게 되 살아와 약간의 긴장과 흥분마저 느꼈다. 도화랑군 염대신은 일행을 데리고 패루를 떠나 그 뒤의 오십여 계단이나 되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행은 말없이 다만 마음 속으로 어떤 경각을 느끼고 오십여 계단을 다 올라가니 염대신은 다시 왼쪽으로 꺾여 오십여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이들은 벌써 산허리께에 도착했다. 바로 눈 앞으로 보이는 평대에는 붉은 난간이 쭉 돌아가며 그 앞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정면의 석벽 사이에는 하나의 거대한 동굴이 있었는데 위에 걸려 있는 현판에는 아까 보았던 자의궁이란 세 글자가 써 있었다. 또한 동굴의 좌우 양쪽으로 사람 크기 만한 정교한 돌사자가 입을 쩍 벌린 채 위풍당당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듯 금방이라도 포효하며 덤벼들 것 같았다. 염대신은 넓은 길에서 이곳에 오기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계속 일행을 데리고 자색으로 칠한 두 개의 대문을 지나 곧장 산옥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지나니 넓은 길 같은 통로가 쭉 나 있고 양쪽으로 등불이 밝은 대낮처럼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십 보 간격마다 두 명씩의 홍의대한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이 통로를 지나는 동안 그곳을 지키고 있는 대한은 적어도 백여 명 정도는 될 것 같았다. 통로가 끝나는 길에 또 하나의 석문이 있고 석문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하나의 커다란 단상이 있었다. 염대신이 그 단상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그 위에 시 있던 흥포대한이 즉시 안을 향해 크게 외쳤다. "교주님께 아룁니다. 지금 제맹주 부부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이어 청 안에서 위엄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단상에 있는 흥포대한이 즉시 허리를 굽히며 말을 전했다. "교주님께서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염대신도 약간 비켜서며 손을 내밀었다. "제맹주, 들어가십시오." 제갈명은 구태여 예를 차리지 않고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두경강은 제갈명의 분부를 기다리지 않고 여덟 명의 무사에게 밖을 단단히 지키라 명한 후엔 끝으로 들어갔다. 제갈명이 군협들을 데리고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 가운데 두 개의 의자에 자의교주와 그의 부인이 위엄 있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뒤로 네 명의 궁장소녀가 서 있고 좌우 양쪽으로는 십여 명의 문인이 쭉 서 있는데 왼쪽의 다섯 명은 모두 같은 홍삼을 입고 어깨에 장검을 메었으며 오른쪽 다섯 명의 여인들은 똑같은 붉은 치마를 입고 허리춤에 장검을 차고 있었다. 제갈명 일행이 막 들어서자 염지천 부부도 동시에 일어났다. 염지천은 얼굴에 가득 온화한 미소를 띠며 공손의 예를 취했다. "제맹주의 왕림에 대해 매우 영광입니다." 제갈명도 같이 예를 취했다. "이렇게 맞아 주시니 감복할 따름입니다." 염지천은 그의 뒤에 둘러보고 서 있는 여러 사람들을 쓸어 보며 자리를 권했다. "자, 여러분 어서 자리에 앉으십시오." 제갈명이 즉시 왼쪽의 의자에 앉자 여러 사람들도 일제히 따라 앉았다. 염지천은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고개를 돌려 명령을 내렸다. "차를 가져오너라." 차는 미리 준비한 듯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열두 명의 궁장시녀가 일제히 차를 들고 나타났다. 염지천은 자기 앞에 놓인 차를 먼저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제맹주, 일행 여러분을 소개시켜 줄 수는 없습니까? " 제갈명은 염지천이 한껏 부드러우면서도 어떤 위압감을 내포하며 말하자 어쩔 수 없이 곡영자, 소불이 등을 일일히 소개시켰다. 그러나 나국영을 소개시킬 때는 성만 대었고 이름은 대지 않았다. 염지천은 이 복면한 여인에 대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으나 그녀가 설마 나국영이라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제갈명이 모두 소개를 끝나자 염지천은 갑자기 껄껄 웃으며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허허허… 내 듣자 하니 귀맹의 총호법이 자의교주 염지천이라고 하던데 어째 그는 맹주를 따라 오지 않았소?" 그러자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진의 쉰 듯한 음성이 그의 뒤를 이었다. "후후… 소인이 안 올 리가 있겠습니까?"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림맹의 총호법인 염지천이 나타났다. 이어 그의 뒤로 소설옹, 석타자, 종남 이노, 악귀 차오, 구육도사 과천성(過天星), 공손향, 대통도사, 천령자와 오대법사(五大法師), 흑석도주와 대제자 길무구, 둘째 제자 전수십, 점창자, 청죽방의 죽중영, 죽청청 부부, 화산의 범숙한, 배교 민장강, 정개태 등을 데리고 일제히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자의교주는 안색이 가볍게 변하여 벌떡 일어서서 짐짓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거 정말 힘들군요. 천하무림 호걸들이 전부 다 도착하였으니 어찌 대접해야 좋겠습니까? 아무튼 여러분 반갑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러자 악귀 차오가 두 눈을 부릅뜨고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이놈, 염가야! 너의 수하 황, 청, 백, 혹은 모두 죽은지 오래다. 그리고 오늘밤이 바로 너희 제삿날이다." 자의교주는 이 뜻밖의 일에 두 눈을 약간 치켜 뜨더니 이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차형, 그런 걱정은 두었다가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께서 기왕 여기까지 찾아오셨으니 제가 필히 상대를 해 드리지요. 하지만 지금 여러분은 어디까지나 저를 찾아오신 손님이니 우선 차나 먼저 드십시오" 하며 그가 손을 흔들자 궁장시녀들이 즉시 차를 가지고 나왔다. 자의교주는 다시 먼저 찻잔을 들며 여러 사람들을 의젓하게 둘러보았다. "자, 여러분, 어서 드십시오." 이때 총호법인 염지천이 대청 한 가운데 서서 여러 사람들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저는 여러 무림 호걸들 앞에서 염교주껜 한 마디 묻고 싶습니다." 염지천이 비록 무엇을 묻는 것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은 그가 진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그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총호법 염지천은 백설같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좌중을 한 번 휘둘러보더니 맨 마지막에 자의교주를 주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첫 번째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자의교주와 저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제 이름이 염지천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절대 자의교주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염지천은 일단 여기서 말을 끝내고 자의교주의 얼굴을 냉랭하게 주시했다. 그러나 자의교주는 전혀 표정을 변화시키지 않고 여유 만만하게 웃었다. 염지천은 다시 말을 잇는다. "그 이유는 바로 누군가가 형제로 변장을 해 자의를 입고 자칭 자의교주 염지천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의 이유를 더 보충시킨다면 저는 그 당시 어느 산 속 석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자의교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껄껄 웃으며 눈을 휘번득였다. "허허허…, 그 말을 누가 믿겠소?" 그러나 염지천은 대뜸 칼날처럼 두 눈썹을 곤두세우며 소리쳤다. "귀하가 누구인지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자의교주는 마치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는 것처럼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하…… 노부가 자의교주 염지천이라는 사실은 전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염지천은 일순 노기를 가라앉히며 되도록 이면 아주 냉철하게 사리를 따지고자 했다. "자의교주, 이것은 아주 무서운 음모인 것입니다. 아마도 이 음모는 이십 년 전에 꾸며져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자의교주는 뜻밖의 말이라는 듯 검미를 약간 찌푸렸다. 염지천의 이 한 마디는 어떤 말보다 그에게 약간의 충격을 준 모양이다. "그것이 무슨 음모인지 나는 모르오." 염지천은 주름진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교주께서는 다만 이 음모의 희생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음모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수밖에 없지요." 자의교주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흥분한 어조로 소리쳤다. "거짓말 마시오! " 염지천은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고 흥분한 그와는 판이하게 계속 사실을 피력했다. "이건 절대 거짓말이 아니오. 귀하는 비록 교주의 몸으로 있지만 모든 대권은 사실상 부인의 수중에 쥐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염부인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감히 우리 부부 사이를 이간질시키려 들다니" 그러나 염지천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번에는 여러 군협들을 향해 마치 설교를 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잘 들어주십시오. 이 일은 아마도 황산(黃山)대회가 시작되기 이십 삼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 저는 사실 이것은 큰 소리가 아니라 그 황산대회에서 일등은 할 수 없어도 이등은 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무공이 그렇게 낮지 않다는 증거지요. 그런데 그날 밤, 저는 제 자신도 모르게 납치를 당하여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산 속의 석실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속이 바로 이곳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의교주는 꼭 무엇을 감추려는 사람 모양 대소로써 얼버무리려 했다. "하하하……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오? 이것은 수년 전에 세운 건물인데 귀하께서는 이십 년 전에 이곳에 갇혔다니 말이나 될 법한 일이오?" 그러나 염지천은 자의교주의 말을 무시하며 다시 피력하기에 급했다. "제가 갇힌 곳은 한 호화스러운 석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방은 아무도 없이 저 혼자만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상위에 한 주전자의 서호용정(西浩龍井)과 약간의 과일이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은 제가 좋아하던 물건이었습니다." 염지천은 매우 당황해 하는 자의교주 부부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그들이 차마 자기를 만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에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제가 매우 이상하다고 느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어왔으며 차를 마시고 얘기를 좀 하자고 했지요. 저는 깜짝 놀라 석실의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객청 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숨소리를 죽여 가며 염지천의 열변에 귀를 기울였다. 넓은 객청 안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가끔씩 거칠게 내뿜는 숨소리와 염지천의 목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염지천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는 대뜸 누구냐고 소리쳐 물었지요. 그러자 상대가 말하기를 물어 볼 필요도 없으며 물어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하며 그가 묻고 싶은 것은 자기와 제가 합작을 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그것만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합작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자기의 지시대로 자포를 입고 황산대회에서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하며 또 저에게 여인을 선택해 결혼을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무림의 제 일인자로 만들고 싶다고 했지요. 그래서 그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다만 저의 성공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단숨에 말하자 염지천은 목이 마른 듯 입술에 침을 묻히더니 다시 계속했다. "저는 그 당시 그 사람의 말뜻을 못 알아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가 다만 저를 이용하려는 것은 바로 제가 항상 입고 다니는 자의 도포 때문에 말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옛날부터 자의도포를 입고 있었던 뜻은 바로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저의 이점을 이용해 많은 저의 친구를 끌어들일 심산이었습니다." 염지천은 잠시 말을 끊고 이번에는 천정을 올려다보다가 서서히 시선을 거두었다. 이 순간에도 자의교주 부부는 약간 안색을 변화시키며 여러 군협들의 이목 때문에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염지천은 그런 자의교주 부부를 싸늘하게 쏘아보며 말을 계속했다. "제가 그때 약간 눈치를 채고 거절을 했더니 그는 저를 어두컴컴한 석실에 가두고 쇠사슬로 묶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는 저와 똑같이 변장을 하고 황산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이때 갑자기 자의교주는 마치 객청이 떠나갈 듯 소리내어 웃으며 싸늘하게 냉소를 쳤다. "하하하…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누가 믿겠소?" 염지천은 여전히 그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꼿꼿한 자세로 대꾸했다. "교주에게는 그렇게 들릴 테지만 이 배후 인물이 바고 그 자였습니다. 지금 저는 그 자가 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교주의 정체가 누구라는 것은 알고 있소." 자의교주는 눈빛을 황망히 굴리더니 이왕 내킨 걸음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디 말해 보시오!" 이번에는 염지천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그 놈은 교주를 저로 변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저를 당신 부부에게 넘기고 도화궁의 석실에 가두어 버렸지요. 그러나 그 후로 도화궁의 두 주인은 밖으로 나가고 다만 한 명의 할망구만 저를 지키고 있었소." 이때 객청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혹시 자의교주 부부는 바로 도화랑군과 도화낭자가 아닐까?' 염지천은 이번에는 군협들을 향해 의미 있게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저는 비록 이 분 교주의 정체가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 여러분께서는 그가 누구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의교주는 냉랭하게 웃으며 의외로 순순히 시인했다. "노부더러 도화랑군이라는 것이군. 맞아, 그러나 너희는 너무 늦게 이 사실을 알았다." 그가 지금 한 말뜻은 바로 이 자의궁 안에 기관 매복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도 된다. 염지천은 대소를 터뜨리며 그의 말뜻을 일축시켜 버렸다. "하하하…교주께서 바로 도화랑군임에는 틀림없으나 염부인께서는 도화낭자가 아닙니다" 그러자 염부인은 짐짓 기가 막히다는 듯 냉랭하게 코웃음을 날렸다. 염지천도 따라 싸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자의교주를 응시했다. "옛날 황산대회 때, 교주 당신은 명령을 받고 제맹주의 부친과 사귀어 결국 그의 처제 육씨를 부인으로 삼았지. 그것이 바로 교를 조종하는 배후인물의 또 다른 음모였다. 당신은 맹주의 부인과 친척이 된 후에 즉시 황산대회에서 일등을 한 모용청동(摹容靑桐)을 사귀었소. 그러나 맹주의 부친과 모용청동은 선후로 해서 사라지고 염지천이 다시 말을 끊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염지천에게로 쏠렸다. 염지천은 마치 무엇인가 예언하는 사람처럼 명확한 사실을 하나하나 밝혀내었다. "그러나 도화낭자의 질투심은 매우 심해 교주께서 육씨를 가까이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소. 그래서 도화낭자는 계교를 써 육씨를 죽인 다음에 그녀로 변장을 했었소." 그러자 염부인은 갑자기 표정을 밝게 바꾸며 짐짓 냉소를 쳤다. "흥,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 염지천은 어이가 없는 듯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가소롭구나. 부인이 그 말을 한다고 해서 도화낭자란 것이 증명될 줄 알았소? 그때 도화낭자는 육씨를 살해했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듯이 비밀은 없소. 도화낭자가 죽은 지는 벌써 이십 년이 흘렀소" 그러자 염부인은 안색을 싹 돌변시키며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놈, 죽을려고 환장을 했느냐? " 하는 고함과 함께 몇 줄기의 오색 광채가 번개보다 더 신속하게 염지천을 향해 날아왔다. 염지천은 계속 대소를 터뜨리며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즉시 한 덩어리의 광기(狂氣)가 뻗어 나와 그녀의 광망을 일제히 대들보 위에 꽃히게 했다. 이렇게 되자 옆에 앉아 있던 자의교주도 안색이 싹 변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부인, 그 말이 사실이오? " 그러자 염지천이 대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소. 도화낭자는 질투심이 강한 뿐만 아니라 이십여 년 간 당신과 생사 고락을 같이 한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독약으로 당신을 제압하고 심지어 여제자까지 당신을 농락하게 만들겠소? " 자의교주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입을 열려고 하자 즉시 염부인이 말을 가로챘다. "교주, 저놈의 이간질에 속지 마세요." 자의교주는 두 눈을 험악하게 부릅뜨며 내뱉았다. "과연 너는 도화낭자가 아니었구나? 염부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요사스런 미소를 홀렸다. "교주, 당신에게는 미모의 여인들이 수없이 많은데 이제 그까짓 늙은 도화낭자를 생각해 무엇하나요? " 그녀의 이 말은 바로 자기가 가짜라는 것을 시인하는 결과였다. 자의교주는 이 말을 듣자 즉시 얼굴의 면구를 벗었다. 그러자 -. 즉시 그의 진면목이 나타났다. 그는 얼굴이 희고 용모가 매우 청수한 노인이었다. 그의 나이는 비록 칠십에 가까왔지만 여전히 젊은 날의 준수한 기풍을 엿볼 수 있었다. 염부인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 무슨 일이에요? " 교주는 이빨을 갈며 빠르게 염부인의 양어깨를 잡았다. "나는 교주가 아니라 도화랑군이다. 자, 말해 보아라. 대체 너는 누구냐?" 염지천은 결국 냉정한 자세로 몇 가지 사실을 밝혀 낸 끝에 결국 그를 설득한 것이다. 염부인은 태연하게 그대로 서서 소리쳤다. "아니, 교주 미쳤어요? 빨리 이 손을 놓으세요." 적색귀(赤色鬼) 도화랑군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양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힘껏 움켜잡으며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나는 어느 놈이 낭자를 죽였는지 꼭 알고 싶다. 그리고 너는 대체 누구냐?" 그의 일신의 무공은 벌써 무아의 경지에까지 다달아 있었다. 도화랑군은 두 손으로 염부인의 어깨를 힘껏 움켜잡고 단숨에 죽여 버리겠다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염부인은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웃어젖히며 싸늘하게 물었다. "호호호…… 당신은 정말로 교주를 그만두려고 하시나요? " 도화랑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염부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말했다. "흥! 당신은 정말로 제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가요? 그리고 " 주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이해가 가요. 하지만 무엇 때문에 도화요녀가 난 자식까지 버리려고 하세요? " 도화랑군은 여전히 염부인의 어깨를 움켜잡은 채 옆에 서 있는 염대신을 향해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소신! 이 여자는 너를 낳아 준 친어머니가 아니다." 염부인은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살기에 가득찬 눈초리로 그를 한동안 쏘아보더니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도화랑군! 당신의 생각이 틀렸어요. 그는 당신의 자식이 아니라……." 도화랑군은 이 말을 듣자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급히 말을 가로챘다. "아…… 아니 그렇다면 당신이 소신을 죽였단 말이오?" 지금 도화랑군의 손에 어깨를 잡힌 채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교만스러웠다. 염부인은 또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음산하게 웃었다. "호호호…… 아니에요. 나는 그를 절대로 죽이지 않았어요. 지금 그는 한 군데의 감옥에 갇혀 있을 뿐이지…" 도화랑군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 그녀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 요부! 네 년은 도대체 누구냐! 어서 말을 하지 못할까?" 그러나 염부인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냉소를 치며 생긋이 웃었다. "흥! 그렇게도 알고 싶은 가요? 소원이라면 서슴치 않고 가르쳐 드리겠어요." 순간, 그녀는 갑자기 양어깨를 쭉 펼쳤다. 도화랑군은 수십 년 동안 무공을 연마해 왔으며 당금 무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다. 하지만 바로 이때 -. 염부인을 잡고 있던 도화랑군의 손이 갑자기 미끄러져서 그는 그녀의 겉옷을 잡고 있을 뿐 그녀는 마치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갔던 것이다. 순간, 몇 마디의 태산을 진동시킬 만큼 우렁찬 고함과 함께 몇 개의 그림자가 유성처럼 날아드는가 싶더니 총호법 염지천, 과천성, 공손향, 석타자가 동시에 염부인을 향해 비호처럼 덮쳐왔다. 염지천 등 사람들이 그녀를 덮쳐 갔던 것은 도화랑군을 움직이는 막후 인물이 바로 신비스러운 염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제갈명과 주설란도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쌍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염부인의 신법이 번개처럼 빠르고 필요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막지는 못했다. 그녀는 여러 사람의 질풍 같은 공격을 피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도화랑군은 마치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격으로 멍청하게 서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적신교주(赤身敎主)… 적신교주……." 그렇다. 적신교주 금선둔영(金蟬遁影)만이 그의 손아귀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적신교주는 원래부터 많은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수시로 옷을 벗을 수가 있었다. 옛날부터 요방(妖榜)으로 불리우는 사람은 강호에서 두 사람밖에 없다. 하나는 바로 적신교주였고 다른 하나는 구유곡에서 당승무의에 무참히 죽어 갔던 만미천호 신교교였다. 여러 군혈들은 적신교주가 항상 묘강에서 활동을 하며 옛날 황산대회(黃山大會)에 참가하기 위해 중원에 나온 외에는 한 번도 중원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 뼈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염부인의 냉혹한 음성이 객청 안에서 들려왔다. "도화랑군! 너의 말이 맞았다. 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자의교주가 될 자격이 없어."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에서 일곱까지 세는 동안 너는 칠공에서 피를 토하고 먼저 죽은 도화낭자를 찾으러 갈 것이다." 염부인의 싸늘한 음성은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청 안에 있는 교주들은 어느 누구도 그녀의 음성이 어디에서 들려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도화랑군의 무공은 비록 신의 경지에까지 다다랐지만 이때의 그는 마치 실성을 한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염부인의 싸늘한 음성이 또다시 여러 사람들의 귓전을 스쳤다. "하나…… 둘…… 셋……." 염부인이 숫자를 셀수록 도화랑군의 안색도 차츰차츰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객청 안에 있는 고수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경거망동을 하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적신교주의 행방을 찾으려 하고 있다. 이 같은 도화랑군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염부인의 얼음장처럼 싸늘한 음성은 거침없이 들려온다. "넷…… 다섯…… 여섯……." 이때 도화랑군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며 사시나무 떨듯 온몸이 떨리고 식은 땀을 비오듯 쏟고 있었다. 드디어 -. "일곱……." 하는 소리가 끝나자 마자 도화랑군이 갑자기 -. "으악!" 하는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칠공으로 검붉은 선혈을 쏟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러 군협들을 몸을 움츠리며 식은 땀을 흘렸다. 염지천이 안색이 변하여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허공을 향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독고(毒蠱), 독고 때문에 목숨을 잃었구나." 도화랑군은 죽었다. 그러나 이십여 년 동안 자의교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가 죽어도 자의교는 멸망하지 않는다. 자의교의 모든 세력이 적신교주의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객청 안에는 무림의 정예 고수들이 모두 운집해 있었지만 소노반 사마장흥이 없었기 때문에 객청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적신교주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서도 기관 장치 안에 들어 있는 모두를 몰살시켜 버릴 수가 있었다. 옆에서 소불이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용주주가 침통한 빛으로 우울하게 물었다. "소호법! 혹시 찾아내기라도 하셨어요? " 소불이는 길게 한숨을 토해 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못 찾았소. 이 객청은 사마기(司馬機)가 설계를 했소" 용주주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귀엽게 웃으며 소불이를 가볍게 쳤다. "도화궁(桃花宮)도 사마기가 설계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소호법께서는 왜 찾지를…." 소불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급히 손을 흔들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반문을 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데 어떻게 이 늙은이의 실력으로 찾을 수가 있겠소? " 용주주의 옆에서 두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당승무가 선뜻 나섰다. "소노인장! 그렇다면 사마장흥도 모르고 있습니까?" 소불이는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소노는 알고 있지. 하지만 그놈도 정영과 남궁각을 데리고 가서 아직까지 돌아오고 있지 않으니 우리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 바로 이때 -. 적신교주의 냉랭한 웃음 소리가 어디선지 들려왔다. "호호호…… 그렇다. 너희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소불이가 갑자기 바람처럼 몸을 날려 손에 쥐고 있는 여의금사로 대들보 중에서 마치 혹처럼 돌출된 부분을 힘껏 후려쳤다. 순간, 소불이의 몸에 떨어지기도 전에 "스르륵! 스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가운데에 있는 석벽이 갑자기 열리고 궁중머리를 하고 붉은 장삼을 입은 반노부인(半老婦人)이 신발을 신지도 않은 채 나타났다. 이 반노부인의 나이는 약 사십 세 가량 되어 보였고 이마에 잔주름살이 있었지만 여전히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 여자가 바로 적신교주였으며 그녀는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눈초리로 소불이를 쏘아보며 냉소를 쳤다. "흥! 소가야! 과연 네놈은 보는 눈이 다르구나." 소불이는 몹시 불쾌한 듯 검미를 바싹 치켜세우며 이를 갈아붙이더니 고함을 질렀다. "이 요부야! 네년이 숨어 있는 곳을 내가 찾지 못할 줄 알았더냐?" 적신교주는 여러 사람들을 살펴보더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흥! 그렇게 되면 네놈은 더욱 빨리 죽을 뿐이다." 하는 외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한 줄기의 붉은 빛이 그녀의 앞에서 예리하게 번뜩였다. 바로 이때 -. 흑석도주가 소불이를 향해 객청이 들석할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소호법! 속히 물러나시오! " 그리고는 황급히 손을 흔들자 서너 줄기의 금빛이 소불이의 앞을 번개처럼 가로막았다. 소불이는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대들보 위를 향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이렇게 되자, 조금 전 소불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벌써 서너 마리의 금빛 지네가 허공에서 횡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금빛 지네들은 적신교주가 소불이를 향해 보냈던 붉은 색의 사갈(蛇蝎) 을 죽였던 것이다. 금지네는 사갈을 죽이고 또다시 흑석도주의 소맷자락으로 들어가 버렸다. 적신교주는 이 광경을 보자 독기에 서린 눈으로 흑석도주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네놈이 흑석도에 처박혀 있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흑석도주는 그녀의 표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더니 갑자기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허허허……허허허… 적신노부! 노부와 단독으로 나서서 싸울 자신이 있느냐!" 적신교주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은 채 여전히 상대방의 심장을 꿰뚫을 것 같은 독살스런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호호호……가소로운 놈 같으니라고…, 네놈은 나의 상대가 못된다." 그리고는 무엇을 기억해 내기라도 한 듯 황급히 몸을 돌렸다. "두 분 부총영주! " 적신교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좌우에서 남녀의 대답 소리가 동시에 들어왔다. 왼쪽에서 나오고 있는 노인은 흑색의 도포를 입고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손에는 백설같은 새하얀 불진(拂産)을 움켜잡고 있었다. 불진을 들고 있는 자가 바로 독으로써 이름을 크게 날리고 있는 관려자였다. 오른쪽에 궁장(宮裝)을 하고 나타난 요염하게 생긴 부인은 바로 음구낭이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삼 년 전 흑영도의 개산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을 모두 독인과 음인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적신교주는 여러 군협들을 한 번 휘둘러보더니 입가에 뜻 모를 미소를 흘렸다.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이 지금부터 시작하자! " 관려자와 음구낭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동시에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속하! 명령대로 이행하겠습니다." 하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품 속에서 삼각기를 하나씩 꺼내 들더니 허공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뒤이어 음구낭이 급히 몸을 돌려 큰 소리로 외쳤다. "영주는 어디에 있느냐?" 바로 이때 -.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어디선지 번개처럼 날아들더니 그녀의 앞에 다가서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속하, 신교교 두 분 부총영주를 뵈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초운낭(楚雲娘)이 변장을 한 만미천호 신교교였던 것이다. 제갈명 부부와 소불이 등 사람들은 신교교가 나타나자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관려자와 음구낭은 즉시 손에 들고 있던 삼각기를 신교교에게 건네주었다. 신교교는 급히 삼각기를 받아 들더니 검은 색의 깃발로 왼쪽에 있는 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왼쪽에 있는 문을 열어랏! " 그리고는 또 다시 하얀색의 삼각기를 오른쪽 벽을 가리키며 명령을 했다. "오른쪽의 문을 열어랏! " 소불이 등 사람들은 신교교가 이처럼 중대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자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하며 조금도 헛 눈을 팔지 않고 그녀의 행동을 샅샅히 주시했다. 신교교는 두 손을 좌우로 번개처럼 가르더니 손에 들고 있는 깃발을 좌우 양쪽의 석벽을 가리키게 한 다음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소불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다. '원래 저 깃발 위에는 자석 같은 것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문을 열 수가 있었구나…….' 바로 이 순간-. "스르륵! 스스륵!" 하는 소리가 들리며 좌우 양쪽에 있는 석벽들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벽이 열리자 두 개의 통로가 나타났으며 그 통로에서 두 패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왼쪽의 통로에서 나온 사람들은 십 오륙 명 가량 되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흑포와 복면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독인이었던 것이다. 오른쪽의 통로에는 모두 일곱 명으로써 여자 세 명과 남자 네 명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복장이 모두 다를 뿐만 아니라 모두 청색 면사를 쓰고 있었는데 이들은 바로 음인들이었다. 제갈명은 오른쪽 통로에서 나온 세 명의 여자를 보자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이 세 명의 여자는 바로 어렸을 때 제갈명을 키운 제부인과 친어머니 홍채선자 그리고 마교의 교주 한선자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갈명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주설란이 급히 손을 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여보! 조금만 참으세요." 그렇다. 이런 다급한 시기일수록 마음의 진격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때, "으악!" 하는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관려자가 입에서 한 모금의 검붉은 피를 토해 내며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적신교주는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변하여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큰 소리로 외쳤다. "관 부총영주! 왜 그러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펄쩍펄쩍 뛰며 붉은 장삼을 휘둘렀다. 적신교주의 장삼 속에서는 갑자기 많은 물건들이 땅에 떨어졌으며 그것은 독사와 사갈 등 독물들이었다. 이것들은 땅에 떨어지는 순간 꿈틀거리는 것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대부분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죽어 버렸다. 원흉 이때, 검붉은 피로 적셔져 처참하게 고꾸라져 죽어 있던 관려자의 몸이 갑자기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불에 타 죽은 한 마리의 개(犬)가 뻗어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도 세 마리의 금지네와 대나무 젓가락 크기 만한 두 마리의 붉은 뱀이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밖에 그의 시체가 있는 일 장 정도의 주위에는 한 줄기의 청록색의 불(火) 이 둘러싸고 있었다. 어느 누가 보아도 그 파란 불이 기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독으로 명성을 떨치던 사람이 갑자기 독에 의해 죽었으니 필시 다른 사람과 독으로써 겨루다가 죽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누가 그를 죽였는지 모르고 있었으니 군협들이 알기로는 흑석도주가 죽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또한 관려자 역시 흑석도주만을 경계했을 뿐 초목(草木)과 사충(蛇蟲) 두 가지를 겸비하고 있는 곡영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관려자가 직사를 하게 된 원인이 될 줄이야-. 그러나 적신교주는 흑석도주의 짓인 줄 잘못 알고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흑석도주 이놈! 내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 갑자기 한 줄기의 붉은 그림자가 흑석도주를 향해 번개처럼 날아왔다. 총호법 염지천이 깜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려 흑석도주를 향해 고함치듯 큰 소리로 외쳤다. "혈영신공(血影神功) 이다! 도주 조심하시오." 염지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객청 안은 상상도 못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이때 일곱 명의 음인들은 갑자기 적신교주를 포위 공격하고 열 여섯 명의 독인들은 갑자기 음구낭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제갈명과 소불이 두 사람은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초운낭이 신교교로 변장을 해 무명도로 갔으며 벌써 독인과 음인들에게 환혼단을 먹였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들은 비록 정신이 회복되기는 했어도 독인의 독과 음인의 현빙음공(玄泳陰攻)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순간 -. "윽 !" 하는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리며 흑석도주를 향해 날으고 있던 교주의 몸이 일곱 명의 음인에 의해 즉시 땅에 떨어졌다. 적신교주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음인들을 휘둘러보더니 벌컥 내며 신교교를 향해 냉혹하게 외쳤다. "신교교! 이들이 무엇 때문에 나를 둘러싸느냐?" 음인의 현빙음공은 바로 혈영신공과 극성이었기 때문에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초운낭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그녀의 화를 더욱 돋구어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호호호…… 부인 틀렸어요. 제가 누구인지 똑똑히 한 번 보세요."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얼굴에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즉시 벗었다. "이 요부야! 오늘이 바로 네년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이 일곱 명의 음인들 중에서 제부인, 흥채선자, 한선자, 목역선생(木易先生) 양공기(楊公忌), 라리도인(癩痢道人) 제갈단(諸葛丹) 등과 한 명의 키가 작은 노인을 제갈명은 알고 있었다. 이들 여섯 사람 중에서 키가 작은 노인이 바로 무림사노 중의 동정수(洞庭手) 였던 것이다. 또한 일곱 명의 음인과 초운낭이 진면목을 나타내자 열 여섯 명의 독인들도 즉시 흑색의 복면을 벗었다. 이 사람들은 바로 삼 년 전 흑영도의 황산대회에 참가했다가 잡힌 흑백(黑白) 양도의 사람들이었다. 바로 이때- 초운낭과 일곱 명의 음인, 그리고 열 여섯 명의 독인들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던 적신교주가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이 년놈들! 적신교주의 맛을 한 번 보아라!" 하고는 즉시 냉소를 머금고 있는 초운낭을 향해 쌍장을 바람처럼 휘둘렀다. 순간 -. 홍채선자의 장검이 어느 사이에 그녀의 어깨를 내리쳤다. 적신교주의 어깨에서 검붉은 선혈이 피보라를 이루며 사방으로 튕겨졌다. 라리도인도 갑자기 인지를 치켜세우더니 전개처럼 몸을 날려 신교주의 등을 찔렀다. "으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적신교주는 한 모금의 9진한 피를 토해 내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일어서더니 마치 풍차가 돌 듯 몸을 정신없이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적신교주의 몸에서는 무수한 비수, 화살, 자오정(子午釘), 매화침(梅花針) 뿐 아니라 독랄한 병기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며 마치 거센 회오리 바람에 의해 날리는 먼지처럼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이 암기들은 검은 색과 빨간색, 남색 등 온갖 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모두 악랄한 독이 묻혀져 있었다. 순식간에 이렇게 많은 암기를 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적신교외에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적신교주는 마치 몸에 수백 수천 가지의 암기가 붙어 있는 것처럼 그녀가 몸을 빨리 돌리면 돌릴수록 많이 날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러 군협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돌연 양공기가 앞으로 서며 벼락같이 외쳤다. "모두 물러나시오! 이 정도의 암기쯤이야 노부가 모두 거둬 드릴 자신이 있소! " 말을 마침과 동지에 암기 속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그리고 널찍한 소맷자락을 쉬지 않고 흔들어 대는 것이다. 순식간에 목역선생 양공기는 마치 분신술을 쓰는 사람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암기 속을 누비고 다녔다. 지금 양공기가 쓰는 신법은 바로 무림에서 절전된지 오래인 낙석천공이보변형신법(落石穿空移步變形身法)이었던 것이다. 수없이 날아오는 암기는 양공기의 몸에 닫기만 하면 즉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양공기는 자기를 썩은 동태 눈깔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적신교주를 주시하며 호쾌하게 웃어젖힌다. "허허허…… 허허허… 있으면 있는 대로 발사하여 보아라! " 그리고는 갑자기 소맷자락을 땅을 향해 서너 번 휘둘렀다. 즉시 괴상 망칙한 암기들이 우수수 땅에 떨어졌다. 적신교주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제치더니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좋다. 이놈! 물론 준비는 되어 있겠지?" 말을 끝마침과 거의 동시에 쌍장을 번개처럼 휘두르며 양공기의 가슴을 향해 찍어 왔다. 순간, 한선자가 벌써 마교 중에서 제일 독랄한 천뢰지(天雷指)로써 적신교주의 미심혈(尾心穴)을 향해 번개같이 찔러 갔다. 적신교주는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과연 정심한 무공의 소유자답게 뒤로 한 바퀴를 돌더니 다시 벌떡 일어섰다. 적신교주가 일어서자마자 앞에 서 있던 도인이 비호처럼 몸을 날려 두 발로 그녀의 아래턱을 걷어찼다. 그녀는 또다시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옆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제부인이 그녀의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소리쳤다. "이요부야! 내 동생을 죽인 댓가를 받아랏! " 그리고는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더니 적신교주의 가슴을 꿰뚫었다. "퍽!" 둔탁한 음향이 여러 군협들의 귓전을 스칠 때 염지천이 급히 나며 손을 흔들었다. "부인! 죽이지는 마시오! "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적신교주 가슴에는 검붉은 선혈이 마치 땅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콸콸 치솟아 오르고 있었으며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가고 있었다. 야심에 가득 찬 무림의 마녀가 악랄하게 버티다 결국 제부인의 손에 깨끗이 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이십여 년 동안 무림에 해를 끼쳤던 원흉마(元兇魔) 였단 말인가? 아니다. 그녀 역시 남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하나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아직도 피가 치솟아 오르고 있는 적신교주의 피투성이가 된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염지천이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깝다. 아까와… 적신교주의 뒤에는 또 하나의 막후 인물이 있는 것 같았는데 적신교주가 죽었으니 원흉을 어떻게 찾아야 한단 말인가?" 염지천의 옆에 있던 소림의 대통대사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합장을 하더니 염지천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무명도의 진상을 알아내고 자의교주 도화랑군과 적신교주가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했으니 막후 인물 또한 양 팔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오." 염지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막후 인물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자의교는 비록 섬멸이 되겠지만 제 이의 자의교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소." 제갈명과 주설란 부부는 자기를 길러 준 제부인 앞으로 다가서더니 무릎을 꿇고 공손히 절을 올리고 있었다. 제부인은 감격을 금치 못하는 듯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목 메인 음성으로 말했다. "얘야! 이 어머니는 초낭자에게서 벌써 다 들었다. 너희들은 결혼을 했다면서…… 빨리 가서 너의 생모를 뵙도록 해라! " 제갈명과 주설란 부부는 공손히 일어서더니 흥채선자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제갈명은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다시 흥채선자의 발목을 부여 잡고 절규하듯 통곡했다. "어머님! 어머님! 결국은 여기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불초 소자를 용서해 주십시요." 흥채선자는 복받쳐 오르는 기쁨을 억제할 수 없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했다… 자의교를 잘 파괴하였다…… 그리고 지금 너는 무림맹 맹주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쓸데 없는 눈물을 홀리지 말고 어서 일어나거라." 제갈명은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내며 주설란을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소림의 대통대사, 무당의 천령자, 사기량, 구양반석, 백장청, 악귀 차오 등 사람과 제부인, 홍채선자와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용주주가 급히 달려가더니 한선자의 품에 안겼다. 또한 열 여섯 명의 독인들도 제갈명 등과 인사를 나누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모처럼 만에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객청 안은 삽시간에 기쁨과 환희의 도가니로 변했다. 웃음 소리와 박수 소리가 끝없이 울려 퍼질 때 돌연, "윙! 윙!" 하고 객청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모으며 동쪽에 있는 석벽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석굴 안에 소노반 사마장흥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마장흥이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어디선지 검은 그림자 하나가 바람처럼 날아드는가 싶더니 간드러지게 웃는다. "호호호…… 선자! 염지천 부부는 처치해 버렸나요? 이 늙은이가 빨리 오지 못했던 것은 초낭자 때문이었소. 그녀는 이 늙은이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나에게 소노반을 만나……." 홍채선자는 몹시 귀찮은 듯 상을 잔뜩 찌푸리며 호모모를 쏘아보더니 날카롭게 꾸짖었다. "호모모! 소리는 무엇 때문에 지르느냐? 지금 객청 안에 누가 서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호모모는 얼굴을 붉히며 객청 안을 힐끗 쳐다보더니 멋적은 듯 고개를 숙였다. "이 늙은이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미처 살펴보지를 못했습니다." 이때 사마장홍, 남궁각, 정영, 양수분, 전수신(全守信) 등 여러 사람들도 밖으로 나왔다. 소불이는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사마장흥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가볍게 탄식을 했다. "소노! 두 분 노제까지 데리고 갔으면서 이제야 돌아오면 어떻게 하오? 우리는 하마터면 여기에 갇혀서 개죽음을 당할 뻔했소" 사마장홍은 소불이를 향해 미안하다는 듯이 허리를 한 번 굽히더니 다시 정색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노형! 저를 원망하지는 마십시요. 그 당시 저는 무명도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석굴 안으로 들어갔으며 정노제를 시켜 암기를 보내 도주께 알리라고 했었지요. 또한 상대방의 움직임이 그렇게 빠른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으며 비밀 통로를 찾아 제맹주에게 알리려고 했지요. 그러나 뜻밖에 육한생을 만나 그를 석실로 유인해서 감금시킨 다음 급히 달려왔습니다." 소불이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육한생은 지금 어디에 있소? " 사마장흥은 옆에 서 있는 양수분과 호모모를 한 번씩 바라보더니 소리 없이 웃었다. "저는 벌써 두 군데의 기관을 뒤집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오다가 호모모와 양낭자 두 분을 만나서……." 한동안 말없이 듣고 있던 호모모가 갑자기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흥! 만약 양낭자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심지어 이 노파까지 감금을 하려고 했지요" 이 말을 듣자 소불이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다시 표정이 굳어지며 궁금한 듯 묻는다. "석실 안엔 몇 명이나 감금되어 있소? 그리고 그놈들은 대체 어떤 자들이오? " 사마장홍은 두 눈을 반쯤 감고 생각을 하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나직이 말을 받았다. "몇 명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은 모두 자의교의 수하들인 것 같습니다." 사마장흥의 뒤에 서 있던 전수신이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며 소불이를 향해 허리를 굽히더니 말을 꺼냈다. "석실을 지키고 있는 십여 명의 졸개 외에 지하 석실에는 일혼 두 명의 지살(地煞)이 있으며 그들은 모두 대신기 수하들입니다." 초운낭이 나서며 한 마디 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맞아요. 적신교주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일흔 두 명의 지살 들에게는 특수한 무공이 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자세한 상황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소불이가 이 말을 듣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자 다시 사마장흥이 나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맹주께서 직접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석실을 완전히 막아 버리지는 못하고 문만 거꾸로 해 놓았을 뿐입니다." 한동안 묵묵히 듣고 있던 염지천이 사마장흥을 똑바로 주시하며 심각하게 말을 꺼냈다. "사마노형, 이 산의 중턱에 또 다른 비밀 통로가 있는지 한 번 잘 생각해 보시오." 사마장홍은 매우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제가 조사해 본 결과에 의하면 산 중턱에 있는 석실은 모두 선부께서 죽을 때가 되어서 설계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눈 앞에 있는 듯 하면서도 찾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염지천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갸우뚱거리기도 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영존께서 이 지하 석실을 만드는데는 최소한 이십여 년이 걸렸을 것 같은데… ,"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염지천이 또다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말을 계속했다. "영존께서 이 건물을 만들었으니 적신교주가 그를 가만히 놓아둘 리가 있었겠소? " 이 말을 듣자 사마장흥은 안색까지 변하여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적신교주가 선부를 독살시켰단 말입니까?" 염지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적신교주는 원래부터 독을 잘 쓰기 때문에 영존께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별 일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며칠이 지나면 독이 발작을 해서 죽음을 면치 못하지." 사마장홍은 이 말을 듣자 마치 실성을 한 사람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 망할놈의 요부, 만약 살아 있다면 당장 씹어 먹기라도 하겠다만." 염지천 역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다시 정색을 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사마장홍을 주시했다. "사마노형, 잘 찾아보시오. 만약 자의교의 막후 인물을 찾아 단숨에 없애 버린다면 문제가 다르지만 만약 찾지 못하게 되어 이십 년 후가 되면 강호는 오늘날보다 더욱 무섭게 변하고 말 것이오." 사마장홍은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여 이윽고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무섭습니까? " 혈영인마 염지천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 후 그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토해 내며 나직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이 노부를 협박했던 사람에게 반드시 무서운 음모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이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소. 또한 강호상에 반드시 참혹한 재난이 일어날 것도 알고 있었지만 결국 노부의 힘이 모자라 마두에 의해 도화궁의 석실에 갇히게 되었소. 하지만 원흉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꼭 찾아야 미래의 재난을 막을 수가 있소." 소노반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단호한 결심을 보였다. "총호법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얼마 후에야 염지천은 싸늘하게 굳혔던 얼굴을 온화하게 바꾸고 심각하게 말을 가로챘다. "아마 그 원흉만은 여기에 없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우리는 자세히 찾아보아야 하오." 소노반이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자신이 넘치는 음성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총호법님! 안심하십시오. 저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를 찾아내겠습니다." 염지천은 꾹 다물어진 입술에 잔잔한 미소를 흘리더니 사마장흥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안심하고 사마노형에게 맡기겠소." 사마장홍이 연신 허리를 굽히며 겸손해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소불이가 급히 서둘렀다. "소노! 빨리 갑시다. 나도 샅샅히 찾아 보았지만 단서 같은 것은 찾지 못했소." 사마장흥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리더니 소불이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소노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흑영도의 지하 석실은 제가 거의 다 알아볼 수가 있지만 선부께서 마지막으로 만든 곳은 확실히 찾기가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노형의 도움을 좀 청해야겠습니다." 소불이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머리를 가로젓더니 반문을 했다. "나 같은 것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소?" 소불이가 이렇게 겸손해 하자 사마장흥은 몸둘 바를 모르며 급히 손을 가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소노형께서 조금만 도와주면 됩니다." 소불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두 사람은 즉시 객청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사마장홍은 서쪽의 벽을 하나도 빠짐없이 손으로 만지면서 연신 혀를 찼다. 옆에서 사마장흥과 마찬가지로 벽을 조사하고 있던 소불이가 몹시 귀에 거슬리는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소노! 만져 봐서 없으면 그만이지 왜 혀를 그렇게 차시오?" 온 신경을 기울여 벽을 만져 보고 있던 사마장흥은 마치 놀란 토끼 마냥 깜짝 놀라며 말을 더듬거렸다. "저…… 저는 선부의 설계가 볼수록 기이하기 때문에 저도 모르고 그만…… 하지만 이 석벽은 적어도 십여 장의 넓이가 되는데 바늘 끝만큼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불이는 별로 걱정할 것이 못된다는 듯 계속해서 벽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런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시오? 산 중턱은 모두 천연 석벽들인데…." 사마장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걱정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선사께서 가르칠 때 좌우 양쪽의 석벽에 최소한도 하나의 입구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동쪽에 있는 문은 제가 조금 전 열었으니 서쪽에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도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 그러는 것입니다." 소불이는 검미를 치켜 올리며 벽을 서너 번 두드리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문이 바로 이 석벽에 있다는 말이오?" 사마장흥은 답답하다는 듯 약간 신경질적으로 객청을 가리키며 힘을 주어 말했다. "이것은 다만 일반적인 규칙일 뿐입니다. 이렇게 거대한 객청을 짓는 데는 최소한 여덟 개의 문이 있어야 합니다." 소불이는 무엇을 생각해 내기라도 할 듯이 눈을 깜빡거리며 동쪽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하지만 노형은 동쪽에 있는 문만 열었지 않소? " 사마장홍은 가벼운 탄식을 하더니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말을 받았다. "제가 아무리 보아도 동쪽 문 외에는 찾을 수가 없으니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두 사람은 마치 꿀 먹은 벙어리처럼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벽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쪽 벽을 이 잡듯이 찾았지만 조금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마장홍은 서쪽의 벽을 포기하고 다시 객청의 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 산의 중턱에 있는 객청은 완전히 궁궐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세로와 가로를 지르는 두 개의 대들보가 있고 대들보에는 화려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소불이와 사마장흥 두 사람은 가로지르는 대들보 위에까지 올라가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왼쪽을 살폈다. 이때, 사마장홍이 대들보의 양쪽 끝에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마장흥은 급히 걸어가 용의 머리에 앉더니 두 눈에 신광을 번득이며 소불이를 향해 손을 저었다. "소노형! 빨리 맞은편의 대들보 위로 올라가십시오." 소불이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하며 주저하더니 급히 물었다. "아니, 무엇 때문에 내가 대들보 위로 올라가야 한단 말이오!" 사마장홍은 여전히 손을 흔들며 자기처럼 행동을 하라는 듯 대들보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주저하지 말고 건너가서 저와 같이 용 위에 앉아 두 손으로 용의 머리를 껴안으십시오." 하지만 소불이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아무래도 미심쩍은 듯 재차 다그치듯 물었다. "그것은 또 무엇 때문이오?" 사마장홍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는 듯 몸부림을 치며 이맛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확실하게 단정을 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피간의 단서가 될 것 같습니다." 소불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꼿꼿이 선 채 손으로 흉내를 내며 궁금한 듯 또다시 물었다. "좋소. 이렇게 용머리를 껴안은 다음에는 9어떻게 해야 되오?" 사마장홍은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아무런 억양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 "용머리를 한 손으로 꽉 껴안고 용의 입 속에 손을 집어넣은 다음 제가 셋을 세면 온 힘을 다해 오른쪽으로 힘껏 잡아당기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반드시 행동을 같이 해야만 됩니다." 소불이는 대답을 하는가 싶더니 사마장흥이 앉아 있는 맞은편의 대들보를 향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9소불이는 날아가자마자 용 위에 앉아 한 손으로 용의 대가리를 들더니 다른 한 손을 입 속에 집어넣었다. "소노! 이제는 다 됐소." 사마장흥은 소불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왼손을 집어넣으며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갑자기 -. "윙! 윙!" 하는 소리가 객청을 뒤흔들며 객청이 아래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순간 -. "으악!"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사마장흥도 대들보 위에서 떨어졌다. 객청의 가운데에 서서 이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염지천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떨어지는 사마장홍을 두 손으로 받았다. 사마장홍의 왼손은 어느 사이에 무참하게 잘라져서 먹물 같은 검은 선혈이 콸콸 쏟아져 나오며 사방으로 튀었다. 염지천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여 안을 향해 황급히 외쳤다. "곡호법! 빨리 나오시오." 사마장흥은 힘없이 눈을 뜨더니 머리를 가로 흔들며 들릴 듯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끝장이 났습니다. 지하 석실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나온 것 같습니다." 원래 소불이와 사마장홍 두 사람이 용의 혀를 움직일 때 입이 갑자기 닫혀졌던 것이다. 소불이는 사마장흥보다 기관 장치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지만 입이 닫혀질 때 번개처럼 손을 빼 버렸다. 소불이의 행동은 마치 귀신처럼 빨랐지만 그 역시 약간의 껍질이 벗겨졌다. 땅에 내려오지 않고 대들보 위에 그대로 앉아 있던 소불이는 사마장홍이 떨어진 것을 보자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여 급히 소리쳤다. "큰일났다! 소노는 결국 자기의 아버지에게 물렸구나! " 그리고는 사마장흥을 향해 바람처럼 날아가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소노! 어떻게 됐소?" 곡영자와 갈무구도 황급히 달려나왔다. 이때 사마장흥의 안색은 먹물을 칠한 목각인지 사람 얼굴인지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로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한동안 넋이 빠진 사람처럼 지켜보고 있었던 염지천이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곡영자를 향해 맥없이 물었다. "곡영! 구할 수 있겠소?" 곡영자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하기가 난처한 듯 갈무구를 주시하더니, "이것은 관려자의 독문기독(獨門寄毒)으로 까마 신선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옆에서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불이가 갑자기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장치였구나. 소노! 당신의 피맺힌 원한은 내가 꼭 풀어 주겠소. 심지어는 나까지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구나." 그러나 소노반은 무림을 위해서 희생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부친인 새노반의 죽음보다는 훨씬 값진 것이었다. 소노반 사마장흥의 죽음으로 인해 객청 안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은 즉시 먹구름이 긴 것 마냥 불안과 초조로 가득 찼다. 객청은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지만 혹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될 줄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객청은 이십여 장 가량 내려가더니 갑자기 멈추었으며 정면에 있는 석벽이 갈라지고 하나의 석실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러자 군협들의 앞에 붉은 휘장이 나타났다. 축 늘어진 휘장의 안에는 몇 개의 섬세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희미하게 볼 수가 있었다. 바로 이때, 휘장 안에서는 갑자기 굵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누가 찾아왔는지 빨리 휘장을 걷어 보아라! " 굵직한 음성이 끝나자마자 여자의 냉랭한 대답 소리가 들리며 두 명의 소녀가 총총히 걸어나와 휘장을 걷었다. 실내에는 오색등이 걸려져 있었고 등불 또는 휘황찬란했다. 실내의 한 가운데에는 하나의 침상이 있었고 백발이 성성한 한 명의 노인이 반쯤 누워 있었다. 이 백발노인은 붉은 장포를 입고 있었으며 웃옷을 풀어 제치고 가슴을 활짝 드러내고 있었다. 백발노인의 좌우에는 붉은 실내복을 입은 다섯 명의 시녀들이 서 있었는데 그녀들은 노인의 다리를 주무르고 안마해 주고 있다. 백발노인은 휘장이 걷혀지자 옆에 있는 접시에서 하나의 조그만 물건을 집어 입에 넣더니 손을 빨았다. 노인은 몸을 반쯤 일으키더니 곁눈으로 여러 군혈들을 흘겨보며 말을 꺼냈다. "손님들이 왜 많이 온 것 같구려." 여러 군협들의 앞에 서 있던 염지천은 그 노인을 보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혈영인마(血影人魔)" 백발노인은 염지천을 살기에 서린 눈초리로 쏘아보며 빈정대듯 물었다. "염형! 뜻밖이지요?" 염지천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그의 행동 하나 하나를 빠짐없이 주시하더니 급기야는 냉소를 터뜨렸다. "흥! 벌써부터 당신인 줄 생각은 하고 있었기만……" 염지천의 뒤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석타자가 검미를 치켜세우며 고함을 치듯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돼지만도 못한 놈아! 네놈은 사십 년 전에 죽은 척 하고 있었구나! " 혈영인마는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약을 올리듯 냉랭하게 반문을 했다. "헤헤헤… 헤헤헤… 만약 내가 사십 년 전에 죽은 척 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없을 것이오." 혈영인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육도사가 갑자기 여러 사람을 향해 우뢰와 같은 고함을 질렀다. "여러분! 머리 위를 조심하십시오." 순간, 객청 위의 천정이 갑자기 갈라지고 수십 줄기의 붉은 광채가 서서히 내려왔다. 수십 개의 붉은 줄기는 칠십이 명의 빨간 대한들이었으며 그들의 양손이 붉은 것으로 볼 때 혈영신공을 연마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혈영신공은 또한 흡혈대법(吸血大法) 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바로 사문(邪門) 의 가장 악독하고 잔인한 무공이다. 어느 누구든지 흡혈대법을 연마한 사람의 양손에 닿기만 하면 즉시 피가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피를 빨리는 사람은 당장에 죽어 버리지만 상대방의 혈영신공은 그만큼 높아진다. 옛날 혈영인마가 아미산(峨嵋山)으로 가서 하룻밤 사이에 아미 삼노의 피를 빨아들인 적이 있다. 결국 후에 아미파의 장문인에게 발각이 되어 아미 삼노의 문하에게 포위 공격을 당했지만 결국 빠져 나왔던 적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혈영인마라는 자가 얼마나 악독하고 무서운 인물인가를 가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한편, 양공기는 기절초풍을 하여 뒤로 서너 발자국 물러서더니 말을 더듬거렸다. "혈…… 혈영대진(血影大陣)!" 혈영인마는 여전히 반쯤 누운 채 또 다시 옆에 있는 접시에서 과일을 하나 집어 입 속에 넣었다.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시는군." 석타자가 갑자기 군협들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들! 빨리 병기를 꺼내서 저놈들이 접근을 해 오지 못하게 합시다." 그러나 일혼 두 명의 혈살들이 한꺼번에 나타났으니 객천 안에 있는 무림의 정예 고수들도 단숨에 그들을 처치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얼마만큼의 댓가를 치루어야만 없애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객청 안에 구름처럼 모여 있던 무림의 고수들은 벌써 제각기 병기를 뽑아 들고 저들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천정의 대들보 위에서 갑자기 약간 쉰 듯한 음성이 들려 왔다. "노부는 이미 네놈들이 올 줄 알고 준비를 하고 있었느니라!" 순간, 대들보 위에서 갑자기 한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일흔 두 명의 혈살들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갔다. "으악! 으악! " 계속해서 들려 오는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일흔 두 명의 혈살들은 칠공에서 검붉은 선혈을 토해 내며 한 명도 남지 않고 고꾸라졌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다. 어느 놈은 가슴이 갈라지고 어느 놈은 두부 같은 골이 튀어나온 채 이리저리 나동그라졌다. 삽시간에 객청 안은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 이때 곡영자가 군협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혈살들의 몸에 닫지 않도록 조심해서 피하시오!" 재회 돌연, 땅에 무참히 쓰러진 일흔 두 명의 몸에서는 즉시 노란 연기가 치솟아 오르더니 몸이 차츰차츰 녹아 일흔 두 개의 복숭아씨 만한 해골로 변했다. 군협들은 이 일흔 두 개의 해골바가지가 바로 공동삼요 유선자의 목걸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누가 해골로 된 유선자의 목걸이 감으로 단숨에 일흔 두 명의 혈살들을 없애 버렸는지 모른다. 유선자의 해골로 된 목걸이에는 화혈단(化血丹)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한 번 맞기만 하면 즉시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혈영인마는 일흔 두 명의 혈살이 단숨에 섬멸되었지만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접시 위에 있는 과일을 집어먹고 있을 뿐이다. 얼마 후에야 혈영인마는 고개를 쳐들더니 쉰 듯한 음성으로 냉혹하게 물었다. "선(禪) 늙은이! 자의교에서는 당신을 귀빈으로 대접을 했는데 당신은 대체 어디서 이런 악독한 무기를 가지고 와 일혼 두 명의 목숨을 없애느냐? " 혈영인마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대들보 위에서 호쾌하게 웃어젖히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허허허…… 허허허…… 이 개만도 못한 마두야! 네놈이 지금까지 죽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노부가 일흔 두 명의 혈살을 죽인 것을 탓하느냐? 또한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강호가 얼마나 많은 해를 입어야 하는지 네놈은 알고 있느냐? 노부는 네놈들을 만나기만 하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고 작정했었다. 만약 네놈도 불복을 한다면 이 노부가 친히 네놈의 혈영신공을 시험해 보겠다." 바로 이때 대들보 위에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혈영인마가 있는 석실을 향해 번개처럼 날았다. 이 사람은 회색 장포를 입고 키가 작았으며 몸집이 비교적 비대한 노인으로써 석실 입구에 선 채 사팔뜨기 눈으로 혈영인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갈명은 그를 보자 얼굴에 함박 같은 웃음을 띠며 큰 소리로 외쳤다. "선 노선배님" 기선(碁仙) 선불관(禪不官)은 잠시 혈영인마로부터 시선을 떼고 제갈명을 향해 급히 손을 흔들었다. "당신은 지금 무림맹 맹주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니 가까이 오지 마시오. 나와 얘기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저놈을 처치한 후에 해야 하오." 혈영인마는 여전히 반쯤 누워서 선불관을 독기에 가득 찬 눈초리로 노려보고 음산하게 웃어젖힌다. "흐흐흐……흐흐흐…… 네놈 정도의 실력으로 노부와 겨루기는 모자랄 것이다." 순간, "푹!" 하고 입 속에서 우물거리고 있던 과일을 갑자기 선불관의 목을 향해 뱉았다. 선불관은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오른손으로 받았다. 그러자 그의 상체가 가볍게 흔들린다. "이놈! 피를 많이 할아 먹어서 그런지 힘이 좋아졌구나!" 혈영인마는 입가에 호기로운 웃음을 띠며 옆에 있는 시녀들을 향해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무엇하느냐? 저놈들은 꼴도 보기 싫으니 그만 불을 끄고 가자." 두 명의 시녀가 동시에 대답을 하더니 석실 입구를 총총히 걸어나와 다시 붉은 휘장을 내렸다. 기선 선불관의 뒤에서 여러 군협들과 함께 있던 구양반석이 객청 안이 정정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혈영인마! 오늘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는 철괴를 번개처럼 휘둘러 갈 때 염지천이 나서며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구양대협! 잠깐! "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구양반석의 몸과 철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석실의 바로 앞까지 날아갔던 것이다. 선불관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오른손을 옆으로 쭉 펴더니 구양반석의 철괴를 잡았다. "만약 이 휘장을 그렇게 쉽게 없애 버릴 수가 있었다면 나 선 늙은이는 벌써부터 손을 썼소." 구양반석이 경악을 금치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을 때 악귀 차오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원흉을 찾았으면 빨리 손을 쓰지 않고 무엇을 그처럼 주저하십니까? " 염지천이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무겁게 흔들었다. "차형! 적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서둘 필요가 없소." 악귀 차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음성으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흥! 당신네들은 사십 년 전의 혈영인마에 완전히 겁을 먹었군요. 심지어 이까짓 휘장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두 눈을 뜨고 그가 도망치게만 보고 있을 작정입니까? " 휘장 안에서는 갑자기 혈영인마의 고함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 왔다. "누가 도망을 친다고 했느냐?" 악귀 차오는 객청 안에 있는 고수 중 어느 누구도 움직이려 하지 않자 빠드득 이를 갈며 또다시 큰 소리로 외친다. "내 저놈을 당장…." 그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석실을 향해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는 휘장을 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휘장에 달라붙은 채 몸에서 파란 연기를 뿜어내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러 군협들은 이 광경을 보자 모두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파르르 떨었다. 제부인이 나서며 장풍으로 힘껏 밀어 보았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독에 대해서는 강호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흑석도주도 통한 표정을 지으며 여러 군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휘장은 문주천생기독(文蛛天生寄毒)으로 만든 것이니 함부로 건드리지 마십시오." 뒤에 서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종남 이노 중 남궁좌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남궁우를 향해 굳은 어조로 힘주어 말했다. "둘째! 이 휘장이 좀 이상한 것 같으니 우리 연구를 해서 시험해 봅시다." 남궁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산 소설공도 따라 나서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함께 하겠소." 무당의 천령자가 종남 이노와 소설옹의 앞을 막으며 장검을 뽑아 들더니 단호히 말했다. "잠깐! 이 일은 우리 무당파가 앞장을 서겠소.'' 그러자 천학자와 다섯 명의 법사들도 동시에 장검을 치켜들고 오행검진을 펼쳐 뚫고 들어가려고 했다. 제갈명이 갑자기 나서며 손을 급히 흔들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기다리시오! " 막 오행검진을 펼치려던 천령자 등은 급히 손을 멈추며 물었다. "맹주! 무슨 분부가 있습니까? " 제갈명은 검미를 곤두세우며 여러 군협들을 쑥 훑어보더니 부드득 이를 갈았다. "혈영인마는 극악무도한 원흉이라 우리 부부가 몸소 능지처참을 하겠소. 그러니 잠깐 뒤로 물러나 주시오." 이 말을 듣자 천령자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제갈명을 주시하더니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맹주께서는 무림을 영도해야 할 몸인데 어찌 함부로 모험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제갈명은 귀찮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반룡검을 치켜들었다. "명령이오!" 하고 주설란을 향해 눈짓을 하자 주설란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갈 때 염지천도 갑자기 장검을 뽑아 들었다. "노부도 함께 하겠소." 이때, 곡영자와 흑석도주, 남궁각, 제부인, 홍채선자 등 사람들도 일제히 달려왔다. 제갈명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리더니 염지천을 향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총호법! 엄호를 잘 해주기 바라오." 염지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명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주설란과 함께 세 발자국을 물러나 휘장의 수 척 거리에 서더니 휘장을 똑바로 주시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 그들의 두 눈에서는 칼날 같은 신광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번개처럼 검을 휘둘렀다. "싹! 싹! 싹!" 예리한 음향과 함께 석실을 가리고 있던 붉은 휘장은 즉시 추풍낙엽처럼 갈기갈기 찢어져 사방으로 떨어졌다. 제갈명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혈영인마를 노려보며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혈영인마! 썩 나와서 목숨을 바쳐라! " 혈영인마는 휘장이 순식간에 없어진 것을 보자 급히 몸을 일으키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경악의 빛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고함을 지른다. "흐흐흐…… 흐흐흐…… 네놈이 바로 저 늙은이들의 우두머리였구나. 좋아…… 내가 상대를 해주지……."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거대한 몸집으로 침상 위에서부터 번개처럼 날아오더니 붉은 피 같은 두 손으로 두 사람의 머리를 향해 잡아오는 것이 아닌가-. 혈영인마의 몸이 덮쳐 오자마자 즉시 한 가닥 피비린내가 코를 질렀다. 제부인, 흥채선사, 한선자, 양공기, 라리도인, 동정수, 제갈단 등 일곱 사람이 연마를 한 것은 모두 음인의 현빙음공이었다. 이 현빙음공은 혈영신공의 유일한 극성이었다. 제부인은 자식과 며느리의 안위를 걱정한 나머지 여섯 명의 음인과 함께 문주천생기독을 제거하는 즉시 제각기 상대를 하기 시작했다. 혈영인마가 느닷없이 제갈명 부부를 덮쳐 오는 것을 보자 일곱 사람은 동시에 고함을 지르며 혈영인마의 앞을 철벽처럼 가로막았다. 이 일곱 사람은 무림의 절정 고수들로써 힘을 합친 위력 또한 극악무비 했지만 혈영인마의 무공도 만만치는 않았다. "으핫핫-." 하는 웃음소리가 허공에서 들리며 혈영인마는 붉은 장삼을 날려 일곱 사람의 장력을 번개처럼 쓸어 갔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제갈명 부부를 향해 비호처럼 덮쳐 가고 있었다. 바로 이때 -. 남궁각이 제갈명 부부의 앞으로 번쩍 날아오더니 비호처럼 덮쳐 오는 혈영인마를 향해 천강지를 뻗어냈다. 제갈명과 주설란은 깜짝 놀라 급히 검을 번개처럼 잘랐다. 순간 -. "으악! "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리며 혈영인마의 오른팔이 여지없이 잘려져 나갔다. 혈영인마는 선혈이 낭자한 침상 위에 떨어지더니 즉시 도망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제갈명과 주설란을 벌써 천하무적인 봉황검법으로 혈영인마를 쫓아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리 그었다. 혈영인마는 얼굴과 몸이 완전히 피로 물들어 새빨갛게 변했지만 여전히 이를 갈며 두 사람을 노려보더니 옆에 있는 단추 같은 것을 눌렀다. 그러자 침상이 즉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제갈명 부부는 그가 도망치는 것을 보자 즉시 침상 위로 몸을 날려 같이 내려갔다. 얼마 안 되서 눈 앞이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혈영인마가 음산하게 웃으며 왼손으로 제갈명의 가슴을 향해 번개처럼 잡으려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혈영인마는 갑자기 자기의 오른팔을 움켜쥐고 충혈 된 눈으로 노려보던 제갈명의 장검이 그의 가슴을 향해 내리찍었다. 핏덩어리가 된 장검을 다시 뽑아 든 제갈명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혈영인마의 몸을 여지없이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혈영인마의 목, 팔, 다리 등이 붉은 피를 튕기며 떨어져 나갔다. 제갈명과 주선란의 검 아래 혈영인마는 죄 많은 인생을 비참하게 마친 것이다. 침상은 벌써 다른 한 칸의 석실 가운데에 다다랐으며 두 사람은 침상 위에서 뛰어내렸다. 석실 앞에 있는 두 개의 기둥 밑에는 한명의 바싹 마른 흑의인이 앉아 있었다. 주설란은 두 사람의 눈빛에 위엄이 서려 있는 것을 보자 즉시 검을 뽑아 들며 날카롭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오른쪽에 앉아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던 흑의인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제갈명은 잠시 주저하며 주설란을 한 번 쳐다보더니 급히 허리를 굽혔다. "저는 제갈명이오." 왼쪽의 흑의인이 계속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제갈명을 올려다보더니 다시 물었다. "음…… 혈영인마는 당신들이 죽였소? " 제갈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른쪽에 있는 흑의인이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허허허…… 허허허…… 통쾌하구나…… 통쾌해…… 이십 년만에 처음 겪어 보는 통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구나." 하고 그는 또다시 통쾌하게 웃어젖힌다. 하지만 왼쪽에 있는 노인은 제갈명의 얼굴을 계속해서 응시할 뿐 아무 말이 없다. 제갈명은 이 두 사람이 혈영인들에 의해 감금 당했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제갈명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른쪽의 노인이 일어나며 사방을 둘러보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우리 두 사람은 이곳에 감금된지 벌써 이십 년이 되었소. 두 분 께서는 혈영인마를 죽였으니 아마 마굴도 파괴해 버렸을 것이오. 그런데 여기는 도대체 어디요?" 이때, 갑자기 위에서 욍욍 하는 소리가 들려 오며 구멍이 하나 나타나더니 제부인와 홍채선자 등 사람이 먼저 내려왔다. 그들의 뒤를 이어 염지천, 곡영자, 소불이, 양공기, 한선자 등이 뛰어 내렸다. 염지천은 오른쪽에 있는 노인을 보자 무엇을 기억해 내려는 듯 눈을 깜박거리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불렀다. "모용(募容) 노형! " 제부인과 홍채선자도 마치 실성을 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봉지(鳳池)! 다 … 당신이었군요." 원래 오른쪽에 있던 사람은 황산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한 모용청동(慕容靑棟) 이었고 왼쪽은 바로 제갈명의 생부 제봉지(諸鳳池)였던 것이다. 제갈명은 봉지라는 소리를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주설란에게 눈짓을 하더니 급히 부친인 제봉지 악으로 다가서며 공손히 무릎을 끓었다. "아버님! 불효 자시의 절을 받으십시오." 제봉지는 복받쳐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들리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오냐…… 오냐…… 숙진(微眞) 능운(凌雲)당신들도 왔구려. 나와 모용형은 노마두에 의해서 이십 년 동안 개만도 못한 생활을 했으나 지금도 아마 살아나기가 힘들 것이오." 제갈명은 제봉지의 팔과 발목에 감겨 있는 쇠사슬을 부여잡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님! 이 면철로 된 쇠사슬 때문에 그러십니까?" 제봉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명의 입가에는 돌연 뜻 모를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는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 마십시오. 저에게 반룡검이 있습니다." 제봉지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다. 반룡검은 비록 쇠를 자를 수는 있지만 이 면철로 된 쇠사슬은 끊지 못할 것이다." 제갈명의 옆에서 쇠사슬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주설란이 제갈명을 향해 말을 꺼냈다. "여보! 우리 합력을 해서 검기로 한 번 시험을 해봐요."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봉지를 향해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아버님! 우리 두 사람이 합력을 해서 시험을 해보겠습니다." 제갈명과 주설란 두 사람은 두 발자국쯤 물러 나오더니 태청검결(太淸劍缺)을 운기해서 갑자기 제봉지의 두 손과 발에 묶여 있는 쇠사슬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순간 -. "쨍그랑!" 하는 금속 음향과 함께 제봉지의 손발에 감겨 있던 쇠사슬은 검기에 의해 보기 좋게 끊어져 땅에 떨어졌다. 모용청동이 호쾌하게 웃어젖힐 때 제갈명 부부는 조금 전과 똑 같은 수법으로 그의 손발에 묶여 있는 쇠사슬도 끊었다. 뒤이어 제갈명은 호기롭게 웃으며 여러 군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 모두 나갑시다." 여러 군협들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염지천은 혈영인마의 시중을 들던 다섯 명의 시녀를 잡아 객청을 원래 위치대로 회복시켜 놓았다. 군협들이 자의궁 밖을 나설 때는 날이 완전히 밝았다. 이때, 소불이가 산 마루에 있는 석문을 향해 손을 흔들자 네 개의 오리알 같은 노란 물건이 자의궁 안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바로 화신(火神) 나선(羅仙)의 벽력자(霹靂子)였다. "펑! 펑! 펑! " 천지를 뒤흔드는 무서운 굉음이 울려 퍼지며 자의궁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해맑은 바닷바람이 불어오니 군협들의 마음은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토록 악명 높던 악의 무리들이 완전히 제거되어 버리고 티 하나 없이 맑은 하늘에는 다시 찬란한 아침의 서광이 비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