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색마열전 시작하면서...... 1/5 ────────────────────────────────────── 포르노그라피 무협! 강호에 일곱 명의 색마가 있었다. 여자들 속에 탐서랑(貪書郞). 남자들 속에 만음요화(萬陰妖花). 미동들 속에 용양도인(龍暘道人). 시신들 속에 취화비도(取花飛刀). 환자들 속에 혼음사의(混陰邪醫). 전설 속에 무산음호(巫山陰虎). 꿈 속에 몽중마령(夢中魔靈). 이제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정파에서 핍박받고 사파에서 무시당하는 설움을 깨고 진정한 색마들의 조직을 결성하기 위하여! 그 난장판에 홀로 떨어진, 세상에서 가장 순진한 사나이 소운비(蘇雲 飛)! 그를 타락시키는 자가 색마영웅회의 지존이 될 수 있다는데... 야하되 어둡지 않은 상큼한 농담 한마디. 그 속에 엿보이는 동양의 성 의식! 작가 진산의 두 번째 실험, 무협으로 엮어 내는 세상 이야기. < 글을 시작하면서... > 첫 번째 책을 쓸 때는 사실 또다시 쓰고 싶어질까 하는 우울한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글쓰는 일이 힘들더군요. 그런데 힘들지 않은 일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 또한 참 묘한 일입니다. 적당한 긴장과 보람, 그리고 부끄러움... 이런 것들이 일의 즐거움이라 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을 쓰게 됩니다. 무협은 여러 가지 혐의를 가지고 있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협을 쓰는 사람들, 혹은 즐겨 읽는 사람들이 애써 못 본 척 지나치 려고 하거나 아니면 자조하듯이 더 큰 소리로 말하는 저질, 외설, 삼 류... 이런 혐의들 말입니다. 그 혐의들 가운데에 저는 소위 '외설'이라는 부분에 주목해 보았습니 다. 요새는 노골적으로 포르노그라피를 표방하는 소설들이 문단의 중심 무 대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가장 진보적인 글쓰기의 한 모델로 이야 기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무협의 성애 장면 묘사는 사실 몇몇 작품을 제외 하고는 지극히 고전적이며 봉건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설'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결과,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지만 가장 압도적인 것이 '성애 장면이 작품과 무관하게 등장한다.'는 것과 '남녀관계가 불평등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사실 어쩌면 그 당시의 중국에서는 일부다처가 당연했을지도 모릅니 다. 그리고 강호인들 세계라는 것이 남성 중심의 사회다 보니, 거기서 영웅이라고 말하는 조건들 중에 '여색을 밝힌다.'는 항목이 끼는 것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사소설에서 소설 속의 시대를 비추는 것만큼이나 소설이 읽 히는 당대를 비추는 역할도 중요한 만큼, 요즘의 남녀관계에 영향을 아니 받을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퍼뜩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도구나 장식 정도로 사용되던 성애의 문제, 이것을 전면에 내세운 소 설을 한번 써보면 어떨까? 강호의 사람들에게 성이란, 사랑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좀더 욕심을 내본다면 고대 중국에서 성이란 무엇이었을까? 일단 그런 질문을 가지고 이 책을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그런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은 사서(史書)가 아니고, 저도 옛사람이 아니기에 이 이야기 또한 옛옷은 입혔을망정 오늘을 비추려 합니다. 쓰는 것이 즐거웠던 것만큼 읽힐 때도 즐겁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진산 드립니다. 序章 원조 (元朝) 지정(至定) 연간(年間). 강호에 일곱 명의 색마(色魔)가 있었다. 첫째, 탐서랑(貪書郞). 한때 청성파(靑城派)의 문인(門人)이었다가 축출되었는데, 그가 울린 여자들만 모아 문파를 세운다면 능히 강호 최대의 방파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 무공이 독랄한 점에서 그는 만음요화를 따를 수 없었다. 둘째, 만음요화(萬陰妖花). 옥잡(玉 ), 즉 침상에서 쓰는 향로(香爐)를 무기로 쓰는 이 중년의 요 화는, 마음에 드는 미청년들을 납치하여 그의 뼈가 검어질 때까지 정 기를 빨아먹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나 그녀의 그와 같은 악행도 추잡한 점에서 따진다면 용양도인을 당 할 수가 없었다. 셋째, 용양도인(龍陽道人). 용양(龍陽)은 한나라 때 악명을 떨친 황제의 사내 애첩 용양군(龍陽 君)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그의 취미가 어떠한지를 단번에 보여 주 는 별호였다. 스스로 도인(道人)이라 칭하면서 사이한 방술(方術) 집단인 풍월도문 (風月道門)을 이끄는 이 남색가(男色家)의 악명이 높다지만, 취화비도 에 비한다면 차라리 영명(英名)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넷째, 취화비도(取花飛刀). 꽃을 취하고 난 뒤에 비도(飛刀)를 날리면, 꽃은 대궁이 잘리며 처참하 게 쓰러져 가고 남는 것은 찐득한 피뿐... 그는 자객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나 왜 그가 명문대파의 아가씨들을 겁탈하고 잔인하게 죽여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록 이 취화비도가 잔인하다 하나, 혼음사의만큼 비열하지는 못했다. 다섯째, 혼음사의(混陰邪醫). 강호의 여인들이여! 강호를 돌아다니다가 혹 부상을 당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의사에게 몸을 맡기지 말라. 염소수염의 의사에게는 더더군다 나 맡기지 말라. 그는 죽은 사람도 살릴 만한 명의(名醫)이기는 하나, 목숨을 구해 주는 대가로 그대의 정조를 빼앗아 갈 것이다. 그것이 강호 여인들 사이에 떠도는 금언이었다. 탐서랑, 만음요화, 용양도인, 취화비도, 혼음사의. 그들 다섯 명의 이름이 무섭다고 하나, 나머지 두 색마에 비하면 견줄 바가 못 되었다. 무산음호(巫山陰虎).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나 사람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천행성(四川行省:행성은 원나라 때의 행정구역 명칭) 무산(巫山), 그 사연 많은 곳에서 벌어졌던 악몽의 밤을... 무려 삼십 명의 강호여협(江湖女俠)들이 단 한 명의 악한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던 그 참극을... 그 일을 시작으로 강호에서는 숱한 여인들이 떼거지로 겁간(劫姦)을 당했고, 사고가 생긴 밤 그 일대에는 댓잎이 우수수 떨어질 정도로 우 렁우렁한 호랑이 울음 소리가 진동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무산음호의 전설이었다. 마지막, 몽중마령(夢中魔靈). 사실 그는 사람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는 꿈속에 나타나 정혈을 고갈시키는 정사를 며칠이나 한 뒤, 상대 의 기력을 다 빨아먹고 사라지는 몽마(夢魔)였다. 혹자는 몽중마령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다만 귀교(鬼交:꿈속에서 귀신 과 교접하는 병)의 과장일 뿐이라고도 했다. 하나, 처녀들의 방에 그 몽중마령이 다녀간 다음에 반드시 남는 뚜렷 한 혈흔(血痕)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기에 이 몽중마령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컸다. 사람이라면 잡을 수 있고 고수라 해도 싸워 볼 수는 있으나, 유령인 듯 유령이 아닌 듯한 이 색마는 잡을 수도 싸울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곱 명의 색마가 강호의 도리를 어지럽히고 있는 터에, 더 욱 기가 막힌 소문이 퍼졌다. 그들 중 다섯 명의 색마가 모월 모일 모시에 모처에서 회합을 개최하 여 색마들의 모임을 결성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덕을 아는 호한(豪漢)들은 가슴을 쳤고, 의를 아는 지사(志士)들은 혀 를 내둘렀다. 천하가 몽고족의 발굽 아래 짓밟힌 지 오래인데, 이제 하잘것없는 음 적(淫賊)들마저 모여 제 목소리를 높인단 말인가! 하나 움직임이 비밀스러우니 어찌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이며, 설사 쫓는다 해도 다섯 음적의 무공이 기이하니 어떻게 징벌할 수 있을 것 인가... 소문은 바람처럼 퍼지고,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만 갔다. 제1장 맹서(盟誓) 물에는 빛깔이 없다. 붉은 등(燈)을 들고 들여다보면 붉은빛이요, 푸른 등을 들고 들여다보 면 푸른빛일 뿐이다. 달이 휘영청 뜬 밤은 온통 달빛이며, 매화락(梅花 落) 만발한 날은 매화빛인 것이다. 강절행성(江蘇行省) 진회하(秦淮河)의 물빛은 그래서 찬연한 오색이라 말할 수 있었다. 강의 양쪽에 즐비한 유곽(遊廓)들로부터 새어나오는 휘황한 불빛들이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오색 영롱한 강물 위로 배들이 떠다녔다. 진회하에 떠 있는 배는 그 자체가 하나의 큰 기루(妓樓)였다. 지붕이 달려, 비가 오는 날에도 연회를 열 수 있는 그 배들은 붉은 등을 내걸 어 한량들을 유혹한다고 하여 홍등선(紅燈船)이라고 불렸다. 가기(歌妓)들의 노랫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붉은 등 아롱 진 배들이 마치 살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유유하게 움직여 가는 풍경은 인세(人世)의 것이 아닌 듯했다. 그러하기에, 세상이 몽고족의 깃발 아래로 들어간 지 어언 수십 년이 흘렀지만 진회하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오직 한 곳, 귀회루(鬼會樓)를 제외하고는. 귀회루의 본래 이름은 선회루(仙會樓). 한때는 진회하에서 내로라 하는 큰 기루였다. 하지만 십 년 전부터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면서 장사가 영 되지 않다가, 마침내는 인수하려는 사람조차 나타나지 않아 한낮에 보아도 을씨년스러운 폐가(廢家)로 변하고 만 것이다. 이제는 이름조차 '귀신들이 모이는 집'로 바뀌고 만 그곳. 하나 담이 큰 사람이 있어 그곳을 이따금 들여다본다면, 귀신이 아니 라 버젓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 * * 빠악! 소운비(蘇雲飛)의 이마 한가운데에 주먹만한 돌멩이 하나가 명중했다. 미처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뜨끈한 피가 미간을 적셨다. "어서 저리로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돌을 던진 매정한 사부(師父), 진파파(眞婆婆)가 길길이 날뛰며 카랑카 랑한 목소리로 호령했다. 하나 소운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진파파가 소금 가마니를 지고 강으로 들어가라 해도 들었을 그였지만, 단 한 가지 문제에서만 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바로 사매(師妹) 진설영(眞雪嶺)에 관련 된 문제였다. 원래는 외출을 한다고 인사드리려고 온 것뿐이었다. 한데 뒤뜰에 들어 선 순간, 피범벅이 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주저앉아 있는 사매의 모 습을 보게 되었다. 깜짝 놀란 그가 설영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바로 사부 진파파가 던진 돌멩이가 그의 이마에 날아든 것이다. "당장 네 방으로 돌아가! 어서!" 진파파는 소운비가 말을 듣지 않자 재차 호령했다. 하나 소운비는 대 꾸하지 않고 사매를 향해 시선을 꽂았다. "괜찮으냐, 설영?" 다리를 베이기라도 한 것일까. 설영의 오래된 무명치마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상한 것은 설영이 아파하는 기색은 없이 다만 당황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고 있는 점이었다. "너, 너 이놈!" 소운비가 자신을 싹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진파파는 경악했다.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게 되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법이다. 진파파가 지금 바로 그런 상태였다. 평소 늘 대들던 녀석이 그렇게 한다면 별로 놀라지도 않았으리라. 하 나 고분고분하던 자식이 느닷없이 반항을 하면 어머니들은 십중팔구 기절하게 되는 법이다. 진파파는 기절하지는 않았다. 대신 돌멩이가 아니라 자신의 손발로 소 운비를 직접 응징하기 위해 주먹을 치켜 들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비록 쭈글쭈글한 노파라고는 하지만 무공의 달인. 그 주먹과 발에 맞 으면 소운비는 뼈도 추리기 힘들 판이었다. 하나 소운비는 물러서려 하지 않았고, 진파파도 사정을 봐줄 태세가 아니었다. 그때, 비로소 정신을 차린 진설영이 몸을 돌려 앉으며 소운비를 향해 외쳤다. "난 괜찮아요, 사형(師兄). 어서 그러니 사부님 말씀을 들어요. 어서!" "다친 게 아니야?" "아니에요, 걱정 말고 어서 가요." 사매의 말이라면 강을 끌고 와서 소금 가마니를 적시라 해도 들을 소 운비는, 그때서야 등을 돌리고 뒤뜰에서 물러났다. "저 녀석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움을 담은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는 진파파에게는 한마디 무뚝뚝한 인사말만이 남겨졌다. "해당원(海棠院)에 다녀오겠습니다." "나가서 아예 들어오지 말아라!" 쩌렁쩌렁한 진파파의 음성이 귀회루의 황폐한 정원 구석구석에 피어 있는 메마른 들풀들을 뒤흔들었다. 유월 보름날. 다른 날보다 유독 소란스러웠던 귀회루의 아침 풍경이었다. 십 년 전. 금릉 뒷골목에서 우연히 만나 친남매처럼 사는 두 고아가 있었다. 한 아이는 남자였고 한 아이는 여자였다. 어느 날 두 명의 고아는 다 죽어 가는 노파 하나를 다리 밑에서 발견 했다. 노파는 빌어 온 나물과 밥으로 죽을 끓여 정성을 다해 간호한 지 보름 만에 깨어났지만, 지난 일은 하나도 기억 못하고 다만 자신의 성이 진 씨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하나 노파는 분명 무공의 고수였다. 그것도 손가락을 튕겨 십 장 밖의 나뭇잎을 떨굴 정도의 고수였던 것 이다. 노파는 생명을 구해 준 대가로 두 아이를 제자로 거두었다. 본래는 여 자아이만을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여자아이가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자아이를 덤으로 끼운 것이다. 대신 노파도 조건을 내걸었다. 남자아이는 제자로 거두되, 무공을 가르 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기로 약속을 하고, 세 사람은 사제지간이 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지만, 정말로 노파는 남자아이에게 단 한 수의 무공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가르치기는커녕, 가슴이 패이도록 상처를 줄 뿐이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괴롭히듯이... 달아오른 이마의 상처는 차가운 물수건으로 식힐 수 있지만, 마음 깊 은 곳에 입은 상처는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가 없었다. 미친 노파를 사부로 모시고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운 비처럼 참고 사는 것이 버릇이 된 젊은이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대체 세상에 어떤 사부가 이토록 자신의 제자를 미워할 수 있을까? 그 것도 죽을 뻔한 자신을 살려 주어 그 인연으로 제자가 된 사람을. 진파파처럼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또, 대체 어떤 제자가 십 년 동안 무공이라고는 한 수도 가르쳐 주지 않고 오로지 부려 먹기만 하는 사람을 사부로 모시고 살 수 있을까? 소운비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러기가 힘들 것이다. 아니, 소운비라 해도 만일 사매 진설영이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이 말 뿐인 제자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소운비는 만일 자신이 나간다면 진설영 역시 따라나오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지금껏 참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무공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좋았다. 어차피 그는 무공을 익 힐 수 없는 사슬이 있었다. 비록 자신에게는 박정한 사부였지만, 진설영만큼은 양딸로 삼을 정도 로 애지중지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운비는 좋은 마음으로 지금까 지 버텨 왔다. 한데, 방금 전의 일은? 사매의 치마를 흠뻑 적신 그 붉은 피... '설마 사부가?' 처음 만났을 때 죽을 정도로 머리를 다친 상태였던 사부는, 과거의 일 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때때로 광기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광기가 사매를 다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소운비는 불안했다. 불길한 느낌은 그의 온몸을 죄어 왔다. 하나, 언제까지 그런 생각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일을 나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끼이익- 낡지만 거대한 귀회루의 문이 힘겹게, 아주 힘겹게 열렸다. 그리고 안쪽에서 나온 것은 거의 회색이다시피 한 낡은 백의(白衣)를 걸친 소운비였다. 문이 비록 크다고는 하지만 젊은 남자의 힘으로 단번에 열지 못할 정 도의 것은 아니었다. 하나 소운비는 그것을 아주 힘겹게 열고서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휴우, 날씨가 덥구나." 손 그늘을 만들며, 이글대는 태양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소운비의 품 에는 낡은 백의만큼이나 오래된 비파(琵琶) 하나가 안겨 있었다. 비록 낡았을망정 공들여 손본 흔적이 역력한 비파였다. 그는 그 비파를 다정하게 한번 쓸어 주었다. "자, 오늘도 부탁한다." 그리고는 황량한 귀회루를 등뒤로 하고 나루터 쪽을 향해서 발을 옮기 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걸음... 지켜보는 나무들조차 숨을 죽일 만큼 위태위태한 걸음걸이였다. 걷기조차 힘든 병약한 몸. 그것이 바로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의 소운비로 하여금 무공을 익힐 수 없게 만든 운명의 사슬이었다. * * * 격색마서(檄色魔書). <천인공노할 다섯 명의 음적들이 우리 강절행성 경내(境內)로 들어왔 다는 소문이 있다. 이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너무나 분하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중원 천하가 처해 있는 운명을 생각해 보라. 어린아이라도 몽둥이를 잡고 한족 부흥(漢族復興)을 위해 힘쓸 시기에, 그들 색마들은 음란한짓으로 공공연히 사람들의 정신을 어지럽히고...> 귀회루의 강 건너편은 말 그대로 유흥가였다. 아직은 한낮이라 술손님 보다는 장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그 거리의 한편에 사람 들이 몰려 있었다. 흙벽에 붙은 커다란 방(榜)을 보기 위해서였다. "뭐야? 무슨 이야기야?" "난리라도 났나? 몽고족 황제가 죽기라도 했다는 소식이야?" "쉿! 말조심하게." "색마들이라니,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자네 못 들었나? 요즘 소문이 자자하다던데..." 수군대며 서 있는 사람들의 벽 사이로 비파를 든 소운비가 지나갔다. 그만이 오직 그 방의 내용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강절행성 무림인 일동은 그 색마들을 발견하는 즉시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걸어 정의의 이름으로 징계하리라...> '격색마서'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는 그 방은 이와 같은 섬뜩한 말 로 그 끝을 맺고 있었다. "요즘 강절행성 곳곳에 이런 격문이 나돈다던데..." "아니 이런 걸 붙였는데도 몽고 병사들이 가만 둔다던가?" "그럼 어쩌겠나? 강절행성 무림인들이 한두 명이라야 잡아다 족치지." "그건 그렇겠구먼. 한데 이 색마들이 도대체 뭔가? 이야기 좀 제대로 해보게." "으이구, 그저 '색' 자만 들어가면 눈이 뻘게 가지구서는... 자, 들어 봐!" 사람들은 무더운 여름 날씨에 좋은 소일거리가 생겼다는 듯이 떠들어 댔지만, 소운비에게는 색마들이고 한족 부흥이고 아무런 흥미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 문제는 오직, 그가 지금 향해 가고 있는 해당원과 거기서 해야 할 일,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받게 될 보름 치의 밥값뿐이 었다. 다만 오늘은 진설영이 흘린 피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그의 마음이 좀더 어지러울 따름이었다. 그는 한눈 파는 법 없이 똑바로 커다란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렇기 때문에 한 늙은 거지가 멀찌감치에서 자신을 유심히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비파공자(琵琶公子)가 나타나셨네!" "어머, 오랜만이구나!" 해당원이라고 하면 진회하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기루이다. 한데 소운비가 들어서자마자 그 해당원 안이 온통 떠들썩해졌다. 술손 님을 기다리며 화장을 다듬던 기녀들이 그를 따뜻하고도 요란하게 맞 아 준 것이다. 비파공자란 이따금 노래를 팔러 나타나는 운비에게 그녀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좀 일찍 왔지요?" 매번 겪는 일이지만 아직도 분 냄새 요란한 여인들의 환영을 받는 것 이 어색한 소운비는 엉거주춤 비파를 안고 구석 자리로 향했다. "요샌 손님이 많을 때라 해지기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하는걸. 밥은 먹 었어?" 기녀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춘월(春月)이 다정스럽게 물었다. 소운비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먹었느냐는 말에 아니라고 대 답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닌 경우는 반도 되지 않았다. 춘월은 그의 손을 잡아 끌고 기루의 가운데로 나왔다. "자아, 그럼 시작하기 전에 우리들을 위해서 노래나 한 곡조 불러 봐." 그리고 그녀는 장난스럽게 운비의 뺨을 톡 건드리며 덧붙였다. "잘만 불러서 우리들의 기분을 돋우어 준다면 노래 값은 듬뿍 줄 테니 까!" "그래, 그래! 노래를 불러 봐!" 다른 기녀들도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운비의 얼굴은 서산으로 지는 해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좌중의 주목 을 받는 것보다도 방금 춘월의 그 사소한 손장난이 그를 더 쑥스럽게 만든 것이다. "그럼, 못 부르는 노래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가조각(假爪角)을 들어올렸다가 다섯 개의 현 위로 부드럽게 내리그었다. 낡은 모양에 걸맞지 않게 청아한 현의 울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 그는 이미 부끄러움만 타는 청년이 아니었다. 귀회루를 나설 때 떠올랐던, 오늘 꼭 불러 보고 싶었던 노래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맹진강 가에 있고 [家住孟津河] 문앞이 바로 맹진 어귀라오 [門對孟津口] 항상 강남 가는 배가 있어 [常有江南船] 집안 안부를 편지로 묻는다오 [寄書家中否] 그대는 고향에서 오셨으니 [君自故鄕來] 고향 소식 아시겠지요 [應知故鄕事] 떠나올 때 우리 집 창문 앞에 [來日綺窓前] 매화가 피었던가요 [寒梅著花未] 그럼요, 매화는 이미 피었고 [已見寒梅發] 새 우는 소리도 들었다오 [復聞啼鳥聲] 걱정스러운 것은 봄 풀이 [愁心視春草] 계단 앞까지 자랄 것 같았소 [畏向階前生] 노래가 끝났다. 하나 장난스럽게 노래를 청했던 기녀들 중 누구도 손 뼉을 치지 않았다. 그녀들은 제각기 사연을 가지고 고향을 떠난 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년이 되는 처지였다. 그런 그녀들에게 운비가 부른 노래는 애간장을 녹이는 독약과도 같았다. 술자리에서야 해실해실 웃지만 서러운 팔자 탓에 일단 싸움이라도 붙 으면 독살맞기 그지없어지곤 하는 진회하 기녀들. 그들의 고개가 숙여 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 다. 마지막 현을 퉁겨 낸 다음, 운비가 미안한 듯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가 여러분들의 기분을 너무 울적하게 만들었나 보군요." 제일 울적한 낯빛을 하고 있던 춘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일들 시작하셔야 하는데 힘이나 빠지지 않으셨는지..." 거듭 미안해 하는 운비를 향해 춘월은 누나가 동생에게 보여 줄 법한 미소를 던지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고향에 있을 가족 생각을 하니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 겠다는 각오가 서는데? 안 그러니, 얘들아?" 마지막 말은 주변의 다른 기녀들에게 묻는 소리였다. 기녀들은 비로소 우울한 안색을 거두며 대답했다. "그럼요, 언니!" "비파공자께서 정 미안하다면 술손님들이 오기 전에 신나는 노래나 더 불러 달라고 해요!" 운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가조각이 이번에는 좀더 힘차게 현을 그었다. 올해 열아홉 살. 소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자라 버렸고, 청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풋냄새 물씬 풍기는 진회하의 비파공자, 소운비의 노랫소 리를 따라 진회하의 하늘에도 둥그런 보름달이 떠올랐다. 둥그런 달이 암천(暗天)의 가운데에 치솟았을 때쯤에야 소운비의 일은 끝났다. 그는 물먹은 솜처럼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해당원을 나섰다. "휴우..." 그는 한숨을 내쉬며 번잡한 유곽을 따라 쭉 뻗은 대로를 바라보았다. 이 길을 밟아 가면 그 끝에 나루터가 있다. 거기서 쪽배로 강을 건너 고 거기서 다시 얼마인가를 더 걸어가면 선녀 같은 사매와 마귀 같은 사부가 기다리는 그의 집, 귀회루가 있었다. 이렇게 한번씩 외출할 때마다 그는 만일 자신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 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자신은 노래를 팔면서라도 어디에서나 먹고 살 수 있을 테니 걱정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부의 구박과 학대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을 것 이 아닌가. 자신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사부는 보기 싫은 놈이 없어졌기 때문에 기뻐할 것이다. 밥값을 벌어 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긴 했지만, 사실 일부러 고생을 시키려고 그 일을 맡긴 것이지 사부 자신이 돈 벌 재주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리 라. 자신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설영은 울 것이다. 그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설영이 우는 장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탈출에 대한 짧은 공상은 끝나고 말았다.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행복해진다 하더라도 불행해지는 한 사람이 진 설영이라면, 운비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돌아가자, 쓸데없는 생각 그만 하고...' 잠깐 동안 해당원 입구에서 망설였던 소운비는 밤이라 더욱 혼잡한 진 회하의 거리로 내려섰다. 아침에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비파는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아침에 나올 때와 반대로 그의 품속에는 두둑한 돈주머니가 숨겨져 있 었다. 소운비는 이렇게 돈주머니를 안고 사람이 혼잡한 속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하나 그 속을 걷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밤의 진회하 거리는 사람의 바다였다. 마주 오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 딪힐 때마다 소운비의 몸은 휘청거렸다. 하나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길을 걸었다. 그 모습은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가랑잎 하나처 럼 흔들려 보였다. 나루터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그 가랑잎은 크게 충격을 받고 말았다. 사람들의 무리를 거의 빠져 나갔을 때쯤, 늙은 거지 하나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그를 향해 부딪혀 온 것이다. "조심하십시오, 영감님!" 자기 몸도 가누기 어려운 소운비였지만, 나이든 사람에게는 예의를 지 킬 줄 알았다. 늙은 거지는 소운비의 부축을 받고는 미안해 하며 머리 를 긁었다. "젊은이, 장수(長壽)할 걸세!" 술 취해 꼬부라진 목소리로 한마디 던지고 늙은 거지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소운비는 그 거지의 뒷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장수라... 오늘은 돈을 번 데다가 노인의 축복까지 받았으니 운이 좋다 고 해야겠군.' 아침의 우울한 기분은 떨어 버리고 약간은 힘이 난 걸음걸이로 소운비 는 나루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쪽배를 모는 사공이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주며 물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군. 그래, 오늘은 좀 많이 벌었나?" "다른 때랑 똑같아요." 소운비는 돈주머니가 든 가슴팍을 툭 쳐 보이며 사공의 쪽배로 올라섰 다. 소운비를 태운 쪽배가 강 건너편을 향해 떠난 뒤, 늙은 거지는 누런 이를 드러내고 흐뭇하게 웃으며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헤헤, 비실비실거리는 젊은 놈! 노래 값을 톡톡히 받아 온 모양이니 털기엔 딱 좋지.' 해당원에 들어갈 때부터 소운비를 줄곧 미행했던 그 늙은 거지는 득의 양양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하나 다음 순간, 그 거지의 미소는 경악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의 품안 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 * * 그는 낮에 힘겹게 열고 나왔던 귀회루의 대문을 한밤중에 다시 밀고 들어갔다. 부서질 듯한 달빛을 받은 황량한 귀회루의 풍경이 그의 시선에 스산하 게 파고들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아름드리 정원수들이 군데군데 파수를 서고 있 었고, 그 나무둥치 아래에는 꼬치꼬치 비틀린 가랑잎들이 떼죽음당한 시신들처럼 쌓여 있었다. 때는 늦여름. 아직 낙엽이 질 때가 아니지만, 보살피는 사람이 없는 정원의 나무들 은 이토록 허무하게 끝물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 이런 집일망정 지붕 있는 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따금 소운 비에게는 감격스러울 때가 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의 생활은 그야말로 호화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잠자리는 이슬을 피할 길 없는 다리 밑, 밥은 거칠고 쉬어 가는 것, 옷 은 다른 사람이 버린 것. 생계를 위해서 구걸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소매치기를 하고... 씁쓸한 추억에 잠겨 있던 소운비는 소매치기 시절을 생각하며 피식 웃 었다. 아까 그 거지 영감은 지금쯤 얼마나 당황해 하고 있을까? 지금 비파를 타는 이 파리한 손가락이 아홉 살 무렵에는 금릉 거리에 서는 그래도 꽤 알아주는 꼬마 소매치기의 손이었다는 사실을 그 노인 네는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소운비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있다면 비파를 타는 것과 소매치기 실력 뿐이었다. 열두 살 때 풍각쟁이 노인에게 배운 비파 솜씨는 지금 그에 게 밥을 먹여 주었고, 일곱 살 때 살아남기 위해 익힌 소매치기 솜씨 는 지금 그에게 밥값을 지키게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매를 지켜 줄 수가 없지.' 자신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그가 그런 생각 을 하고 있을 때, 문득 달빛 아래에서 한 개의 그림자가 번뜩였다. 명색뿐인 사부, 진파파였다. "운비!" 파르스름한 달빛 아래에 진파파의 백발이 빛나 마치 귀신처럼 음산해 보였다. 소운비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나를 따라오너라." 한밤중에 사부와 진설영이 머무는 곳으로 소운비를 불러들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운비는 왠지 긴장되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사부의 방에는 진설영이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피묻 은 옷은 갈아입은 채였다. 어디 특별히 상처를 입은 것 같지도 않고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나 분명히 달랐다. 소운비는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가 예전의 사 매 진설영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소운비와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진설영은 은은하게 얼굴을 붉히며 고 개를 돌렸다.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소운비는 도무지 그 이유를 짐작 할 수가 없었다. "앉아라." 진파파가 싸늘하게 말하며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소운비가 앉자 마자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네 사매에게 천계(天癸)가 왔다." 소운비는 눈을 멀뚱하게 뜨고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늘이 정한 시 기[天癸]'가 왔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진파파는 소운비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으로 여겨지자, 다시 한 번 말했다. "반( )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 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반'이라는 말을 들어 본 일도 없었다. 안 그래도 신경질적인 사부의 말투에 점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너는 월사(月事)도 모르느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 월사? 달마다 일어나는 일?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소운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파파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세상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는 생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경수(經水)는? 월객(月客)은? 이렇게 말해도 모르겠느냐?" 소운비는 고개를 재삼 재사 흔들었다. "규칙적인 흐름이며[經水], 매달 오는 손님[月客]이라는 것이 대체 무 슨 뜻입니까? 그게 사매와 무슨 상관입니까?" 진파파의 울화통이 마침내 치밀고 말았다. "야, 이놈아! 너는 열아홉 살이나 되어서 월경(月經)이 무엇인지도 모 른단 말이냐?" 하나 소운비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대체 달마다 반복되는 규칙[月經]이라는 것이 뭡니까?" 이쯤 되자 진파파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린아이들이 이성에 대해 알아 가는 것은 부모의 교육이나 주변 친구 들을 통해서이고, 그 다음이 책을 통해서이다. 하나 소운비는 어린 시 절 부모를 잃었고 그런 책을 읽을 기회도 없었으며, 친구라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하니 이성의 일에 대해 알 리가 만무했다. 진설영은 여섯 살 때부터 진파파를 통해 남자란 모두 도둑이며 조심해 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소운비에게는 그런 기회마저 없었던 것이다. '이놈이 멍청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어디 보자, 옳지! 그렇게 물어 보면 되겠구나.' 진파파는 짐짓 점잖은 얼굴을 하고 목소리를 깔며 물었다. "운비, 네 나이가 지금 열아홉이지?" "예." "그러니까 한 열여섯쯤에 말이다, 혹 밤에 잠을 자다가 옷을 더럽혔던 적이 없었느냐? 꿈에 여자 요괴가 나타나 너를 괴롭히고 나서 말이 야." 소운비는 잠시 과거를 떠올려 보는 듯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다시 저었다. "없었습니다." "하!" 진파파는 기가 막혀 혀를 찼다.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그 무렵에 겪는 몽정(夢精)조차 하지 않았다니, 이야기가 이쯤 되면 거짓말도 지독한 거짓말쟁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어딘가 잘못된 병신이라 여겨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이놈이 정말 남녀 간의 일에 대해 이렇게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일 부러...?' 소운비의 진심을 간파하기 위해 머리를 쓰면서 진파파는 끙끙대기 시 작했다. '이놈이 진심일까, 거짓일까? 속이 보이질 않으니 도저히 알 수가 없구 나. 음, 음... 아이고, 아이고 머리야!' 별안간 진파파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십 년 전 머리를 다친 이후로 조금만 생각을 열심히 하면 골통이 아파 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통증이 오고 난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 다. "우으음..." 끙끙대던 진파파는 마침내 구슬땀을 흘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으으... 아이고, 아이고! 머리가 아프다! 아파!" 진설영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부의 앞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가볍게 쳤 다. 파악! 진파파는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잠시 동안 숨을 헐떡거 렸다. 소운비는 그런 그녀를 측은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십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그랬다. 완쾌된 뒤에 자신의 본명과 문파를 기억해 내려고 머리를 쓰다가 똑같 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던 것이다. 겨우 기억난 것은 '진'이라는 자 신의 성뿐. "사부님, 그러니까 너무 한 가지 문제로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키는 진파파에게 진설영은 혀를 차며 말했다. "음... 그래, 알았다." 진파파는 한참 만에야 몸을 바로하고 소운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 사매는 이제 더 이상 너의 소꿉동무 도 아니고 어엿한 여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남녀가 일곱 살이 넘어 도 함께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너희들의 나이는 벌써 이렇게 찼다. 하 니, 앞으로 너희 둘은 내 말을 명심하도록 해라." "무슨 말씀이신데요?" 먼저 물은 것은 진설영이었다. 진파파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멍하 니 진설영과 소운비의 사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입을 열 어 말했다. "둘 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두 사람은 영문을 모르는 채 그 말에 따랐다. 진파파는 눈으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며 손으로 가리켰다. "조금 더 떨어지거라, 그래 조금 더, 조금만 더." 사부의 명에 따라 두 사람이 좁은 방안에서 약간씩 움직여 거리를 벌 려 나갔다. "그래, 됐다!" 진파파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욱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너희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느냐?" "세 걸음 정도예요, 사부님." 진설영이 대답했다. 진파파가 그 말을 받았다. "세 걸음." 마치 주문처럼 사부는 그 말을 반복했다. "그래, 세 걸음이다. 잘 들어라. 너희는 앞으로 절대로 이 거리 이상 가까이 서서는 안 된다." "예?" "죽을 때까지 세 걸음 이상 가까이 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알아듣 겠니?" 소운비와 진설영은 당황하여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 얼굴만 마주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자 진파파는 카랑카랑하게 외쳤 다. "만약 내 앞에서 그러겠다고 맹서하지 않으면 너희들의 사부는 이 자 리에서 콱 죽어 버리고 말겠다. 어쩌겠느냐!" 협박도 이런 협박이 없었다. 진설영은 그만 왈칵 짜증이 났다. '사부는 가끔 발작을 하더니 이제 완전히 머리가 이상해지고 말았구 나! 나는 운비 오라버니와 평생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이게 웬 시답지 않은 소리람?' 그녀는 비록 일시적인 말이라고 해도 그런 맹서는 하고 싶지가 않았 다. 행여 그 맹서 때문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한단 말인 가? 왠지 불길한 느낌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치밀어 올랐다. "사부님, 그런 말씀 마..." 한데, 소운비가 그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말씀대로 할 테니 고정하세요." 진설영이 원망의 눈빛을 보냈으나 소운비는 괜찮다는 손짓으로 답했 다. 소운비라고 사부의 제안이 기분좋을 리는 없었다. 하나 아무리 운비와 설영 두 제자가 진파파와 맺은 사제 사이가 좀 괴이하다고 하더라도 사부는 사부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살아 온 정이 있는 것이다. 사부가 말을 듣지 않으면 죽겠다고 하는데 매정하게 그러라고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진파파는 소운비를 향해 눈을 빛내며 거듭 말했다. "정말이겠지? 절대로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겠지? 만일 네가 이 맹서 를 어긴다면 네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천지 신명에게 대고 맹서해라."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지신명께 맹서합니다. 앞으로 사매에게 세 걸음 이상 다가가지 않 겠습니다." "설영아! 너도 맹서해라." 소운비가 이미 맹서를 했는데, 자신이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 었다. 진설영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말했다. "천지신명께 맹서합니다. 앞으로 사형에게 세 걸음 이상 다가가지 않 겠습니다." 진파파는 그래도 믿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별안간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 사부에게는 특별한 묘술(妙術)이 있어, 거짓 맹서를 하는 사람은 맥을 짚어 보면 알 수가 있다. 운비는 이리 가까이 오너라." 소운비가 다가가자 진파파는 짐짓 의원이 진맥을 하는 것 같은 표정으 로 소운비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맥을 잡는 듯 그의 팔목을 지그시 누르더니 이번에는 아랫배 쪽으로 손을 가져 갔다. "몇 군데를 더 만져 보아야 알겠구나." 사부는 아랫배 쪽에도 한번 손을 대고 이어 등과 목, 마지막으로 발바 닥을 각각 한번씩 눌렀다. 진맥이라고 하기에는 좀 은은한 아픔이 느껴져 왔으나 소운비는 꾹 참 았다. "됐다. 이제는 너를 믿을 수 있다." 진파파의 얼굴에 그때서야 웃음기가 떠올랐다. "오냐! 오늘에서야 너희들의 사부는 제자를 기른 보람을 느끼는구나." 진파파는 손짓으로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히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내일 잠시 어디를 좀 다녀오겠다. 어디에 가는지는 돌아와서 이 야기를 해주마. 너희는 나에게 한 맹서를 잊지 말고, 설사 내가 하더라 도 꼭 세 걸음 이상을 떨어져 있거라."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운비에게 진설영은 은근한 원망의 눈초리를 던져 보냈다. '정말? 정말 나한테 세 걸음 이상 다가오지 않을 거예요, 사형?' 하나 소운비는 다만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 맹서는 깰 수가 없겠군.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일은 사매가 불행해 지는 것이니까...' 다음날 진파파는 정말 새벽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진파파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소운비와 진설영은 한 지붕 아래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유월. 진회하는 무덥고도 흥청대는 여름이었다. 제2장 회합(會合) "사형! 정말 이럴 수 있어요?" 진설영의 눈에 언뜻 비친 것은 눈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확실하진 않 았다. 다음 순간 진설영이 소운비로부터 등을 돌렸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 걸음의 거리는 의외로 멀어서, 짙은 속눈썹 끝에 달린 물방울이 눈 물인지 이슬인지 단번에 구별해 내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사형, 정말 그 맹서가 나보다 중요해요?" 등을 돌린 진설영이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 왔다. 소운비는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질문이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아니,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오히려 너무나 쉽고 명명백백했다. 하나 상 황이 상황인 만큼, 그는 그 명백한 대답을 쉽사리 할 수가 없었다. 사부가 집을 비운 지 사흘째였다. 저녁 무렵 두 사람은 황폐한 뜰을 거닐었다. 꼭 세 걸음의 사이를 둔 채였다. 한데 진설영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주저앉더니 비 오듯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운비는 그녀를 부축하는 대신 멀찌감치서 물에 적신 수건 을 던져 주었다. 그것이 진설영을 화나게 한 이유였다. 그래서 소운비는 진설영의 질문 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설영, 너라 고 아무리 이야기를 한다 해도 지금의 진설영은 그것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대신 소운비는 약간 쉰 듯한 음성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맹서는 맹서니까." 진설영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죽더라도 사형은 맹서 때문에 세 걸음 이상 다가오지 않겠다는 말이군요." 비스듬히 보이는 진설영의 얼굴은 어두웠다. 아랫배의 통증보다 마음 의 상처가 더 깊은 듯했다. 진설영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운비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어둑어둑해져 가는 하늘보다도 더 우울했다. 삼 일 전의 일이 두 사람 사이를 더욱 멀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그것은 단지 세 걸음의 거리만이 아니었다. 이윽고, 진설영이 고개를 들더니 애써 웃음띤 얼굴로 물었다. "좋아요, 사형. 오늘 저녁에 강 건너에서 불꽃놀이를 한다던데, 난 구 경하러 가고 싶어요. 같이 가지 않겠어요?" "나도 가고 싶구나. 하지만..." 소운비는 머뭇거렸다.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은 그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바글바글한 사람들 틈에서 두 사람이 과연 세 걸음 이상 을 떨어져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진설영은 이미 질문할 때부터 그가 그렇게 나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하겠지요? 좋아요. 저 혼자 다녀올게요. 너무 늦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진설영은 소운비가 뭐라고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일어나서 대문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은 어쩐지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름을 부르다 삼켜 버린 소운비. 그 역시 주먹을 굳게 쥐고 그 자리 에 멈추어 섰다. 그렇게 해서 황량하게 넓은 귀회루 안에는 소운비 혼자만이 남게 되었 다. * * * 어둑어둑하던 하늘이 곧 검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먹구름이 달을 삼 켜 버리는가 싶더니, 가느다란 빗줄기가 허공에 그어지기 시작했다. 툭... 투투툭... 소운비는 방문을 열어 놓고 바깥 풍경을 보면서 비파를 손질하고 있었 다. '우산도 가져 가지 않았을 텐데...' 마음이 영 좋지가 않았다. 비가 내리니 불꽃놀이도 없을 것이다. 빨리 들어왔으면 좋으련만, 화가 나서 나갔으니 일찍 들어올 리 없다. 우산을 가지고 마중을 나갈까 하다가 그는 그만두기로 했다. 같은 우 산을 쓰고 세 걸음 떨어져 있는다는 것은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 별로 세지도 않고, 곧 그칠 것 같군.' 소운비는 신경을 비파 손질 쪽으로 애써 돌렸다. 그 비파는 비록 낡았지만 그에게는 각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부가 그에게 준 유일한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진파파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물건은 이 비파와 보검 (寶劍) 하나였다. 보검은 자루 부분에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문양이 새 겨진 것이 여간 값져 보이지 않았지만, 비파는 그저 소리가 잘 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제자를 받아들이는 기념으로 진파파는 진설영에게는 보검을, 소운비에 게는 이 비파를 준 것이다. 아마도 소운비에게는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았겠지만, 진설영의 기분을 고려해서 선심을 쓴 것이리라. 소운비는 요 며칠 씁쓸했던 심정을 어루만지듯 비파를 쓸어 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현을 퉁겼다. 티잉...! 비 내리는 고적한 공기 속으로 비파는 서글픈 소리를 토해 냈다. '비파행(琵琶行)이나 한번 뜯어 볼까?' 소운비는 가조각을 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한데... 없었다. 방금 전에 꺼내 놓았던 가조각이 온데간데없는 것이다. 방안은 불을 켜지 않아 캄캄했다. 소운비는 캄캄한 방바닥을 장님처럼 더듬으며 가조각을 찾았다. 툭! 갑자기 방 깊은 구석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무엇인가가 튀어나와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가 찾았던 가조각이다. 가조각이 아무리 발처럼 생겼다고 하지만 저 혼자 걸어서 어둠 속에 숨는다거나, 또는 어둠 속에서 툭 튀어나올 리는 없었다. 누군가가 있 는 것이다. 소운비의 등줄기에 소름이 쭈욱 돋았다. 자신은 방문 앞에 앉아 있었 고, 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한쪽에 창문이 있기는 하지 만, 아무려면 그리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이걸... 차, 찾나?" 어둠 속에서 그르렁거리는 듯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정말, 웬 사람이 있구나!'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소운비의 뇌리에 떠올 랐다. 어쨌거나 여기는 귀신이 모인다는 귀회루가 아닌가? '침착하자, 침착하자!' 소운비는 애써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거, 거기 있으니 하, 한번 집어 보게." 어둠 속의 목소리는 더듬더듬 소운비에게 말을 걸어 왔다. 특별한 적 의는 없어 보였다. 소운비는 천천히 가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떨리는 손이 가조각에 막 닿은 순간, 어둠 속에서 꼬치꼬치 말라 비틀어진 손 하나가 뻗어 나왔다. 슈우욱! 그 손은 번개가 번쩍이는 듯한 속도로 소운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를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순간 무엇 인지 강렬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허어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던 소운비의 비명은 꼬치꼬치 마른 또 하나의 손에 의해 막혀 버리고 말았다. 팍! 파바바박! 무엇이 어찌 되는지도 모르는 짧은 순간에 소운비는 자신의 몸 여러 군데가 그 깡마른 손가락에 눌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마치 사흘 전 사부가 자신을 진맥할 때와 같았다. 다르다면 이번 경우가 훨씬 거칠고, 또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뿐 이었다. "흐으... 흐흐흐..." 삽시에 소운비를 제압한 그 깡마른 손의 괴인은 키득키득 웃어댔다. 그리고는 소운비를 방바닥에 눕히고 마치 감상이라도 하듯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어둠 속이기 때문에 괴인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나 희번덕거리는 두 개의 눈동자만은 분명하게 비쳤다. '무슨 짓을?' 입을 열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된 소운비가 당황하고 있는 순 간, 갑자기 깡마른 손 두 개가 그의 옷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운비는 가슴팍에 따끔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괴인이 느닷없이, 다짜고짜로 그의 밋밋한 가슴팍에 붙은 젖꼭지를 콱 깨문 것이다. "으헉?" 아파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던 것은 소운비인데, 소리는 괴인이 냈 다. '사람을 깨물다니! 말로만 듣던 식인귀로구나!' 소운비는 절망했다. 살아날 방법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나마 위안 이 되는 것은 사매가 다행히 외출했다는 사실뿐이었다. 한데...? "남자로군!" 어둠 속에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났다. 이어지는 말소리 는 방금 전처럼 더듬거리지 않고 튀어나왔다. "젠장할! 곱상하게 생긴 데다가 양기(陽氣)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남장여자인 줄 알았더니 입맛만 버렸구나. 넌 도대체 누구냐? 풍월도 문 패거리냐?" 어둠 속의 괴인은 마치 소운비가 자신을 속이기라도 한 것처럼 따져 묻다가 갑자기 혀를 쯧쯧 찼다. "아혈(啞穴)을 제압했으니 대답을 할 리가 없지. 자!" 다시 한 번 깡마른 손이 소운비의 목 뒤를 쳤다. 그러자 갑자기 목구 멍이 시원해지면서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자, 이제 대답할 수 있지? 너는 풍월도문에서 온 거냐?" 재차 다그쳐 묻는 그 목소리에 소운비는 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당신이야말로 누구요? 왜 남의 집에 함부로 침입해서 사람을 덮치는 거요?" "집이라고? 너는 이 귀회루가 네 집이라고 말하는 거냐?" "그렇소." "귀회루가 집이라니, 네놈은 귀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나는 가난해서 이곳을 집으로 삼고 있소. 만일 당신이 강도 짓을 하 기 위해 들어왔다면 잘못 짚었소. 여긴 가져 갈 만한 게 아무것도 없 소." 대화가 이어질수록 소운비는 침착해졌다. 혼란스러워진 것은 소운비를 다그쳐 묻던 괴인이었다. "흠... 그럼 네놈은 풍월도문 패거리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며, 그저 여 기에 사는 사람이라 이거냐?" "그렇소." "이곳에 다른 사람도 있느냐?" "없소!" 소운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만일 사매와 사부도 같이 사는데 지금 외출하고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이 괴인은 또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랐다. 괴인은 잠시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생각에 잠긴 듯했다. 방 바깥에서는 빗줄기가 임종을 맞은 노인의 숨소리처럼 가늘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일단 네놈은 나와 함께 가야겠다. 방해받아서는 안 되니까 말이지." 괴인이 몸을 일으키며 소운비를 들쳐 업었다. 괴인의 체구는 소운비보 다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솜뭉치를 드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이었 다. '무엇을 방해한다는 말이지? 이자는 남의 집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무 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걸까?' 소운비는 손에 비파를 쥔 채로 괴인의 등에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 따라가게 되었다. 하나, 그렇게 절망적인 심정만은 아니었다. 괴인은 소운비의 몸을 완전히 제압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건망증 탓인지 방금 풀어 주었던 아혈을 다시 제압하는 것은 잊고 있었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소리를 지르리라.' 소운비는 그것을 한 가지 희망으로 삼고 있었지만, 과연 그 소리를 듣 고 누군가 자신을 구출하러 올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마당으로 내려선 순간, 소운비는 희미한 빛에 어른거리는 괴인의 얼굴 을 마침내 볼 수 있었다. 가느다란 염소수염이 달린, 오십대의 중늙은이였다. 그리고 아까 맡았던 강렬한 냄새의 정체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 것은 약재(藥材) 냄새였다. 귀회루는 명성을 날리던 기루답게 규모도 크고 건물도 여러 채였다. 그 중 가장 중심에 서 있는 본각(本閣)은, 쇠락해 버린 지금에 와서 보 아도 혀가 내둘러질 만큼 웅장했다. 소운비를 비롯한 세 사람은 귀회루 안에 머물면서도 그처럼 호화로운 본각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청소하기 편한 별각(別閣)의 작은 방 세 개만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소운비는 귀회루 안에 살면서도 그 본각을 둘러본 적은 드물었다. 지금 염소수염의 중늙은이가 소운비를 업고 바람처럼 달려가는 곳은 다름아닌 바로 그 귀회루 본각이었다. 중늙은이의 발은 하도 빨라서 마치 땅에 닿지도 않는 것처럼 여겨졌 다. 소운비는 거꾸로 매달려 끌려가면서도 이 중늙은이가 보통 강도나 도 둑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도 사부님처럼 무공이 고강한 강호인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 고서야...' 슈아아아악! 중늙은이는 귀회루 본각 앞에서 몸을 거세게 흔드는가 싶더니 새처럼 솟구쳐 바로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지붕 위에 발이 닿는 소리조차 들 리지 않는 가벼운 동작이었다. 등에 매달린 소운비는 숨이 멎을 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어떻게 새처럼 날 수가 있단 말인가!' 소운비의 가슴속에서 절망의 농도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젠 소리를 지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와서 이 고수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있 겠는가! 중늙은이는 소운비를 소리나지 않게 살짝 지붕 위에 내려놓았다. 목도 돌릴 수 없는 소운비가 곁눈으로 힐끔 보니, 그는 지붕에서 기와가 허 물어진 틈을 찾아 그곳에 눈을 갖다 대고 있었다. "흐흐... 흐흐..." 지붕 아래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중늙은이는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소운비를 돌아본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저, 저 밑에 기가 마, 막힌 것이 있다. 너, 너도 보, 보겠느냐?" 그는 소운비의 의사는 확인하지도 않고 그를 끌어다가 지붕의 구멍에 눈을 갖다대게끔 했다. 소운비는 싫어도 그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맨 먼저 캄캄한 어둠만이 보였다. 하나 눈이 곧 그것에 익숙해지자 아 래쪽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저것은?' 소운비는 맨 처음엔 그것이 두 마리의 짐승인 줄만 알았다. 한 마리는 구릿빛이고, 다른 한 마리는 백옥 같은 흰색이었다.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더욱 대조적으로 보이는 그 두 마리의 짐승이 뱀처럼 엉켜서 뒹굴고 있었다. 하나 좀더 자세히 보자, 그것은 짐승이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구릿빛은 남자의 몸이었으며, 하얀 것은 여자의 몸이었다. 두 사람은 한 올의 천조각도 붙어 있지 않은 몸을 서로에게 마구 비벼대 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소운비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고개를 돌리려 해도 몸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비록 단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지만, 그의 본능은 그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외치고 있었다. 해당원에 드나들 때마다 외면했던 야릇한 그림들... 우연히 듣게 된 객 실의 신음 소리... 그런 것들과 지금 저 밑의 행위가 동일한 것임은 명백했다. 지금 그들도 그가 예전에 들었던 것 같은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아으으으으..."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이상하다...!'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싶어하면서도, 이상야릇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그는 눈을 감지 못했다. 하나 지붕에서 바닥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고 빛도 희미했기 때문에 정 말 어떤 상황인지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소운비의 옆에서 다른 구 멍에 눈을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중늙은이도 그 점이 아쉬웠던 모양 이었다. "음, 음... 어떻게 하지? 조, 조금만 가까이 가면..." 그는 뒤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더니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중늙은이는 별안간 소운비를 잡아채서는 다시 지붕 아래로 몸을 날렸 다. 뛰어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내려설 때도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리고는 본각의 벽을 세심하게 살피며 돌기 시작했다. 마치 벽에 난 금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여기다!" 마침내 찾던 것을 발견했는지 그가 기쁨의 탄성을 뱉었다. "기, 기루에는 으레 이런 곳이 있기 마, 마련이지. 바, 발견하기 힘들게 만들었지만, 나, 나의 눈을 속이기는 어렵다. 흐흐..." 말을 더듬거리면서도 그는 기쁨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람은 기분이 좋으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소운비는 어쩐지 이 중늙은이가 두렵다기보다는 재미있게 여겨졌다. 중늙은이는 조심스럽게 벽에 손을 대더니 안을 향해 밀었다. 그러자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벽이었던 것이, 안으로 쑥 밀려 들어가는 문 이 되었다. 스르릉... 그 안에서 시커먼 입구가 드러나자마자, 중늙은이는 소운비를 안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고 나자 문은 다시 밀려 나와, 감쪽같이 벽이 되었다. 기루라면 으레 있기 마련이라는 곳. 그곳은 밀실이었다. 중늙은이와 소운비가 들어간 밀실은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밀실이었 다. 말하자면, 다른 방을 엿보게끔 되어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소운비와 중늙은이가 들어간 밀실의 한쪽 벽에는 사람의 몸 크기만한 유리창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 아까 지붕에서 내려다보던 광경을 바로 앞에서 환히 볼 수 있었다. 앞에서 본 그 광경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 방안은 넓었지만 썰렁했다. 싸락눈처럼 쌓인 먼지. 휘장처럼 드리워진 거미줄. 몇 개 있는 탁자와 의자는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오직 하나 멀쩡한 가구라면 방 한구석에 놓인 커다란 침상뿐이었다. 바로 그 침상 위에 아까의 두 남녀가 누워 있었다. 방바닥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먼지투성이인 그 침상 위에서 두 남녀 는 몸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가까이서 보니 더 더욱 짐승 같았고, 피부에 번들거리는 땀 방울 하나하나가 손에 묻을 것처럼 느껴졌다. 소운비는 그것을 보고, 또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 소리를 들으며 분명 두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졌다. '저렇게 하다가 결국은 두 사람이 함께 죽는 것이 아닐까?' "헤, 헤헤... 헤, 헤헤...!" 한데, 중늙은이는 황홀한 표정을 하고는 수염 위로 볼썽사납게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운비는 추측해 보았다. '두 사람이 저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데 좋아하다니! 저 두 남녀와 이 사람은 아마도 원수지간인 모양이로구나.' 두 남녀는 사람이 들어온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지 자기들의 일에 열중해 있었다. 소운비는 잠시 머리를 굴려 그 까닭을 알아 냈다. '아, 아마도 이쪽에서는 유리처럼 저쪽이 환히 보이지만, 저쪽에서는 이쪽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해당원을 드나들면서, 언뜻 그런 유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비록 그것을 어떤 용도로 쓰는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흐, 흐흐... 네, 네놈은 나를 마, 만난 덕분에 조, 좋은 구경을 하, 하게 되는 줄 아, 알아라. 이, 이런 구, 구경은 어디 가서 돈, 돈을 주, 주고 도 하, 하기 어, 어, 어려울 것이다..." 과연, 소운비가 보고 있는 것은 돈을 주고도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소운비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두 남녀는 마치 곡예(曲藝)를 하는 것처럼 자세를 바꾸어 가며 앓고 (?) 있었다. 여자가 등을 대고 누운 채 두 손을 위로 뻗어 남자의 목을 껴안고 두 다리를 들어 남자의 등뒤에서 교차시키고 있었다. 남자는 두 손으로 여자의 목을 껴안고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 꿇어앉은 자세에서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염소수염의 중늙은이는 신이 나서 중얼거렸다. 마치 장기판의 훈수를 두는 듯한 태도였다. "자세가 좋군! 저것은 잠전면(蠶纏綿), 소위 비단을 감는 자세가 아닌 가...! 하지만 저것만 계속해서는 별 흥취가 나지 않을 텐데?" 중늙은이의 훈수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별안간 남자가 여자의 두 다리 를 들더니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려놓고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 다. 아까보다 훨씬 거칠고 투박한 기세였다. 중늙은이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무릎을 쳤다. "옳지! 드디어 야마약(野馬躍), 날뛰는 야생마의 자세로 바뀌었구나. 그 렇지, 그래야 제대로 하는 거지...!" 만일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는 직접 두 사람의 자세를 일일이 고쳐 주 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허, 저, 저러면 안 되는데! 오오... 저 여자의 대응이 매우 훌륭하구 나! 아, 아아...!" 온몸이 마비되어 두 눈만 깜빡이고 있는 소운비를 옆에 두고, 중늙은 이는 약에라도 취한 것처럼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위에 있는 남자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여인의 가슴팍 위로 떨어졌 다. 남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다른 세 사람은 언제쯤 도착할 것 같소?" 놀랍게도 그 말소리는 헐떡이는 사람의 그것답지 않게 침착했다. "꽤 늦겠지요. 따돌려야 할 적들이 많을 테니까요." 대꾸하는 여인의 음성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먼 사람이 지금의 소리를 듣는다면,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던 두 남녀와 방금 이야기를 나눈 두 남녀가 전혀 다른 쌍인 줄로 알 정도로 담담한 말투였다. 남자가 짐짓 걱정스러운 말투로 다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면 뭐라고 그러지 않을지..." "끼워 달라고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흡!" 대답 끝에 여인의 몸이 갑자기 뒤틀리며 잔뜩 억누른 숨소리가 비어져 나오자 밀실에서 지켜보던 중늙은이의 호흡도 따라서 가빠졌다. "아이고, 아이고... 더, 더 이상 못 참겠구나!" 별안간 중늙은이가 한쪽 옆에 던져 놓았던 소운비 쪽으로 몸을 홱 틀 었다. 눈을 번뜩이던 그는 소운비의 옷깃을 잡으며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어쩔 수 없다. 내가 풍월도문 패거리는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네 후원 (後園)이라도 좀 빌려야겠구나. 아이고... 나 죽네." 소운비의 몸이 중늙은이의 손에 의해 뒤집혀졌다. 소운비는 닥쳐 올 일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나 엎드려진 상태에서 갑자기 바지가 쑥 내려가고 둔부에 서늘한 바 람이 와 닿는 것을 느낀 순간,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본능이 요란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앗!" 소운비는 생전 처음 그렇게 요란한 비명을 질러 보았다. 단번에 목이 쉴 정도의 소리였다. 중늙은이가 갑작스런 반응에 놀라 허둥댔다. "아, 아니, 이놈이? 분명히 내가..." 소운비의 소리를 듣고 놀란 것은 그 중늙은이뿐만은 아니었다. 온 힘 을 다해 지른 그 비명은, 웬만한 말소리는 새어나가지 않게 되어 있는 밀실의 벽을 뚫고 한참 침상 위에서 기묘한 자세에 열중해 있던 벌거 벗은 남자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파도처럼 일렁이던 남자의 나신이 문득 멈추더니, 날카로운 눈매로 유 리 쪽을, 즉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울로 보이는 쪽을 돌아보았다. "누구냐!" 외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은 침상의 옆쪽으로 뻗어 갔다. 그곳에는 두 남녀가 벗어 놓은 옷가지가 있었다. 하나 그의 손이 집으려는 것은 옷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접선(摺扇:쥘부채)이었다. 한데 손이 접선에 채 닿기도 전에 남자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해야만 했다. 여자의 싸늘한 음성이 귓전을 때린 것이다. "멍청하긴... 계속해요!" 채찍에 맞은 개처럼 남자는 반사적으로 여자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면서도 여유있게 거울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은 하나의 시구(詩句)였 다. "새하얀 얼굴의 젊은이는 백호(白虎)를 타고, 초록빛 옷을 입은 처녀는 푸른 용을 타네." 여인은 잠시의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오인회(五人會)에 오신 분이시라면 그 다음 구절을 이어 주세요." 부드럽게 재촉하는 여인의 말에, 소운비의 일로 당황하던 중늙은이가 비로소 여유를 되찾으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힘을 준 그 목소리는 밀 실의 벽을 넘어 남녀가 있는 방안까지 울려 퍼졌다. "용과 호랑이 한데 얽히니 단번에 섞여 하나가 되네. 이것이 용호교접 도(龍虎交接圖)에 적힌 시의 다음 구절이오."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의원 나으리셨군요.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중늙은이는 대답을 돌려보냈다. "끼워 달라고 안 할 테니 계속 볼일을 보시오, 만음요화." 비로소 경계를 푼 남자가 몸을 더욱 힘차게 움직이면서 말했다. "별말씀을! 혼음사의께서 우리들의 자세를 보아 주신다면 영광이지요. 밀실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오십시오!" "헤, 저, 정말이오? 그렇다면 더할 수 없는 영광...!" 중늙은이는 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너무나 좋아하며 두 손을 유리에 댔다. 찌이잉... 유리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잠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중늙은이의 손 이 발갛게 달아오르자 곧 사방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의 키만한 그 유리는 산산조각이 나서 그 자리에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헤헤... 이, 이거 실례가 많소." 중늙은이는 소운비를 옆에 끼고 그 유리 조각을 와작와작 밟으며 남녀 가 있는 방으로 나왔다. "그럼, 계속하시지요." 그는 침상이 잘 보이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점잖게 말했다. 여자가 슬쩍 소운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동행이 있으시군요?" "저쪽 별각에 있던 어린 놈이오. 방해가 될지 몰라 아예 끌고 온 것뿐 이니 신경 쓰지 말고 어서..." "호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두운 방. 두 남녀는 침상을 뒤흔들고 한 사내는 넋을 놓고 그것을 구경하는 가운데 무더운 여름밤의 열기가 더욱 끓어올랐다. 비록 환히 보이긴 하지만 유리 하나로 가로막혀 있을 때와 지금은 얼 마나 큰 차이인가? 소운비는 정말 얼굴이 불처럼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혈도 를 제압당하지 않아 몸을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이 광경을 결코 끝까 지 볼 수 없었으리라. 하나 지금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본의 아니게 중늙은이와 마찬가지로 구경꾼이 되게 된 것이다. 그의 호흡은 정사의 당사자들보다 더욱 가빴고, 얼굴은 붉었다. 정욕이 발동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놀랍고, 미칠 듯한 충격을 받았을 뿐이었 다. 해당원 같은 큰 기루를 자주 출입하면서도, 그는 다만 기녀들의 농지 거리에 부끄러워할 뿐, 남녀 간에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한데, 목전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정사라니...! 소운비로서는 톡톡히 치르는 성인식이었다. 네 개의 눈까지 가세한 뜨거운 정사가 또 얼마나 이어졌을까? 느닷없이 여자가 남자의 허리를 바짝 잡아당겼다. "잠깐!" "뭐요?" "누가 와요!" "누가?" "이미 왔어요." 여자의 말끝과 동시에 날카로운 파공성이 두 개의 빛줄기를 따라 울려 퍼졌다. 쒸이이이잉! 빛줄기의 정체는 서슬 퍼런 비도(匕刀)였다. 두 개의 비도 중 하나는 정확히 여자와 남자의 육체가 결합된 지점을 향해 날아갔다. 나머지 하나는 한참 혼자 흥에 겨워 있는 중늙은이를 노리고 있었다. 여자의 허리가 잔뜩 구부러진 활시위처럼 휘었다. 아니, 휘었다 싶은 순간 바로 튕겨지고 있었다. 남자의 몸은 그 탄력을 받아 허공으로 날 았다. 짜아아악! 두 사람의 사이를 노린 비도는 헛되이 침상의 휘장을 가르며 날아갔 다. 중늙은이를 노린 비도는 공교롭게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소운비의 코앞으로 날아왔다. 소운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그 순간, 중늙은이는 어느새 품안에서 검은색 침통(鍼筒)을 뽑아 들고 있었다. 비도는 그 침통에 튕겨졌다. 여자의 벌거벗은 몸이 먼지투성이 침상 위를 바람개비처럼 굴러 갔다. 휘리리릭...!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서 낡은 이불이 그녀의 나신을 감아 갔다. 파앗! 다 감았다 싶은 순간 여자는 선뜻 몸을 튕겨 침상 위에 섰다. 낡은 이불이지만 미인의 나체를 살짝 감고 있는 동안은 비단옷처럼 보 일 수 있다. 여자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비도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사납게 외쳤 다. "취화비도! 예의가 없군요." 그녀의 짜증에 대한 냉랭한 답이 채화옥방의 입구 쪽에서 돌아왔다. "예의가 없는 쪽은 어디인가? 회합을 하자고 모인 것인지, 방사(房事) 를 논하자고 모인 것은 아닌 줄로 아는데?" 온몸을 검은 복면으로 가린 깡마른 사내. 이마 부분의 복면에 보일 듯 말 듯 새겨진 은빛의 꽃 문양. 그리하여... 소운비를 납치해 온 혼음사의. 벌거벗은 여인 만음요화.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남자 탐서랑. 마지막으로 비도를 날린 취화비도... 십 년 동안 외인이 찾아온 일이 없었던 귀회루에 하룻밤 사이에 네 명 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이름만 듣고도 오늘 귀 회루를 찾아온 손님들이 저 악명 높은 오대색마 중의 네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겁을 했으리라. 하나 소운비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 그 이름 들은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이름들도, 맨 처음 만날 때는 그렇게 생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 * 한 폭의 용호교접도와 한 장의 붉은 편지. 그것이 오대색마들에게 날아든 회합에 대한 첫 번째 제안이었다. 제안자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 다섯 명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편지의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 다섯 사람이 그 동안 강호에서 부당한 악명을 얻어 피해를 본 바 없지 않았소이다...> 그것이 정말로 부당한 악명인지에 대해서는, 다섯 색마들 중 그 누구 도 자신이 없을 것이다. 하나 어쨌든 간에 최근 들어 그들 모두가 곤 란을 당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취화비도나 혼음사의야 워낙에 남의 원한을 살 만한 짓만 하고 다녔기 때문에 별다를 바가 없지만, 나머지 세 색마의 곤란은 최근의 일로 비 롯된 것이었다. 탐서랑의 경우는 어쩌다가 건드린 파릇파릇한 처녀가 하필 남궁세가 (南宮世家)의 여식이었던 것이 탈이었다. 남궁세가의 현 가주 남궁세룡 (南宮勢龍)은 다혈질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는 최근 들어 술 한잔을 마음놓고 마시기 힘들 정도로 남궁세가에서 파견한 고수들 에게 바짝 쫓기고 있었다. 만음요화는 어찌 된 영문인지 개방( 幇)과 원한을 맺게 되었다. 그 자 세한 내막은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하무림을 종횡하는 개 방의 거지들은 만음요화의 화금궁(花錦宮) 인물들이 나타났다는 소문 의 꼬리만 들려도 정말 거지 떼처럼 몰려가 난리를 피우곤 했다. 들리 는 이야기로는 만음요화가 개방의 높은 인물에게 어떤 해코지를 했다 는 것이다. 그뿐인가. 다섯 색마들 중에 가장 세력이 크고 이름이 높은 용양도인 의 경우, 사이한 방술로 도가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하여 화산파(華山 派), 모산파(茅山派)를 비롯한 강호무림의 도가 계열 문파들이 모두 응 징의 결의를 세웠다는 소문이었다. 이러니, 이 시점에 그 누가 먼저 회합을 발의(發議)한 것이든 간에 그 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쫓는 자들의 귀와 눈을 피해 모임의 장소를 바꾸고 바꾸던 중에 드디 어 결정된 것이 바로 이 진회하의 귀회루였다. 번잡한 곳에 오히려 이목이 소홀하기 마련이라는 것은 현명한 자만이 알고 있는 이치. 진회하와 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 이토록 한적한 폐가 가 있다고 하니 그들로서는 적소(適所)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진파파나 소운비와 같은 무명의 인물들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 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던 것이다. * * * 화르르...! 자그마한 등롱을 중심으로 방안의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불빛 아래에 드러난 것은 어느새 의관을 다시 갖춰 입은 삼십대의 미장부 탐서랑과 중년미부(中年美婦) 만음요화, 그리고 초로(初老)의 혼음사의와 복면을 쓴 취화비도의 모습이었다. 소운비는 자신의 비파와 함께 그 옆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소운비 쪽 으로 싸늘한 뱀 같은 취화비도의 시선이 꽂혔다. "저자는 뭐지? 먼저 처리하고 시작하는 게 좋지 않나?" 그의 손에는 벌써 날카로운 비도가 들려 있었다. 하나 만음요화가 그 를 가로막았다. "중요한 모임을 시작하는데 피를 봐서는 안 돼요!" 취화비도가 코웃음을 쳤다. "피를 보지 않으면, 만음요화 그대가 저자의 정혈을 고갈시켜 죽이는 방법이 낫겠다는 말인가?" 아마도 만음요화가 소운비의 허여멀건한 얼굴을 보고 구미가 당겨 말 리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만음요화가 무엇이라 쏘아붙이려는 순간, 침상의 동무였답시고 탐서랑 이 나섰다. "회합이 끝난 뒤에 처리해도 되니 너무 신경 쓰지 맙시다." 혼음사의가 쐐기를 박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몇 군데 제압을 하면서 보았는데, 선천적 으로 양기가 너무 약해서 저 상태로 놓아 두면 우리 회합이 끝나기 전 에 죽을 놈이야." "정말인가?" "그래. 아, 오죽 양기가 느껴지지 않으면 내가 계집인 줄 알고 쩝..." 혼음사의는 뒷말을 얼버무렸지만, 듣는 이들은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취화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운비의 문제는 그쯤에서 일단락을 짓 기로 한 모양이었다. 대신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군. 용양도인은 뭘 하느라고 이렇게 꾸물대는 거 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묻는 말에, 만음요화가 빈정거리며 대꾸했다. "우리 중에 누가 가장 늦게 왔는지나 한번 따져 봐야겠군요." 복면 밖으로 드러난 취화비도의 길쭉한 눈에서 잠깐 빛이 번쩍거렸다. 하나 그 빛은 곧 삼켜지고 대신 말이 이어졌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어.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지." "이야기? 무슨 이야기?" 만음요화는 집요하게 빈정거렸다. 취화비도의 고개가 천천히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 "용호교접도를 받지 못했나?" "물론 받았죠. 설마...?" 대꾸하던 만음요화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설마 취화비도, 당신이 그 편지를 보낸 것은 아닐 테죠?" 탐서랑도, 혼음사의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취화비도의 가려진 얼굴을 응시했다. '취화비도가 오늘 모임을 주선했단 말인가?' 이미 전설처럼 되어 버린 무산음호와 몽중마령을 제외한다면, 취화비 도는 그들 색마들 중에 가장 괴이하고 신비스러운 인물이었다. 자객의 본성이 그렇듯이 늘 혼자 행동하는 그가 모임을 꾸렸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취화비도는 눈이 동그래진 두 사람을 돌아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일을 제안한 것은 용양도인. 나는 그와 이야기를 먼저 나누어 보았을 뿐." 그제야 다른 사람의 눈에서 의문의 빛이 사라져 갔다. 용양도인이라면 능히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인물로 여겨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욕심은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만음요화는 다시 취화비도를 향해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오라, 용양도인과 따로 만남을 가지셨다 이거군요. 호호, 그거 볼 만 했겠는데!" 꿈틀! 복면 아래 감춰진 취화비도의 얼굴 근육이 일그러졌다. 용양도인의 남색(男色) 취미는 너무나 알려진 사실. 만음요화의 말은 취화비도의 얼굴에 똥물을 끼얹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이야기였다. "만음요화!" 나지막하게 부르는 취화비도의 음성은 비수처럼 싸늘했다. 하나 만음 요화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왜요?" 취화비도의 시선이 이글거렸다. 더욱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음 성은 짐승의 으르렁거림과도 같았다. "함부로 성질을 긁지 마라. 내 취미가 꽃의 목을 따는 것임은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만음요화는 뭇꽃과 달라 취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 가 보군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비록 요란한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 기세는 창검의 교합에 못지않았다. 금방 싸움이라도 붙을 듯이 달아오른 공기. 하나 이번에도 취화비도는 참기로 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으르렁거리 는 듯한 음성이었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싸우러 오지 않았다.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눈초리를 세우고 있던 만음요화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네 사람은 비로소 정좌하고 앉으며, 본격적인 모임을 시작하였다. * * * 그 시각. 비가 와서 김이 빠져 버린 불꽃놀이 대신, 진설영은 엉뚱한 풍경을 구 경하게 되었다. 그것은 진회하를 가득 메운 인파 사이를 가르고 나오는 기괴한 행렬이 었다. "선인(仙人) 친림(親臨)!" 마흔 개의 꽃잎 같은 입술들이 일제히 열려졌다 닫히면서 똑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 인형처럼 똑같은 말을 외치면서 꽃가루를 뿌려 행렬의 앞을 선도하는 것은 마흔 명의 앳된 미동들이었다. "선인 친림!" "천상 천하에 오직 한 분뿐인 선인, 용양도인께서 친림하셨습니다!" 선인께서 친히 납시었다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인가 본데, 그들이 말 하는 '선인'로 짐작되는 사람은 행렬의 맨 끝에 네 명의 장한이 맨 사 인교(四人轎)를 타고 있었다. 그 '선인'의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진설영은 우울했던 기분도 잊 고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풋! 저런 사람이 선인?' 비록 신선을 직접 본 일이 한번도 없는 사람이라도 신선이라면 어떻게 생겨야 한다는 기준은 있을 것이다. 사인교 위의 인물은 비록 도사의 복장은 하고 있었지만, 신선의 기준에 조금도 가깝지 않은 얼굴을 하 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개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눈은 음흉하게 빛나며, 배는 주먹 을 꽂으면 팔뚝까지 박힐 정도로 튀어나와 있었다. 진회하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불꽃놀이보다 진귀한 이 행렬을 구경하 느라고 희희낙락했다. 사인교 위의 인물은 사람들이 저를 보고 비웃는 줄도 모르고, 되려 환 영하는 것이라고 여긴 듯 제법 손까지 흔들어 주는 것이었다. 진설영이 속으로 가만히 웃고 있는 동안, 좌우의 사람들 틈에서 이 행 렬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 왔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악명이 자자한 용양도인인가 보군. 무림인들의 서 슬이 시퍼런데 저렇게 대놓고 나타난단 말인가?" "저자가 나타난 걸 보니 나머지 네 색마도 여기 어디에 와 있겠는데?" 말하는 사람은 무림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으로, 목 소리에 약간의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하나 진설영에게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재미있구나. 돌아가서 사형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주면 좋아하겠는 데?' 저도 모르게 행렬을 구경하며 나루터까지 따라갔던 진설영은, 선두의 미동이 사공들을 부르며 하는 말을 듣고 더 이상 좋아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사공! 사공!" 다른 미동들이 여전히 '선인 친림'을 외쳐대는 동안, 그 미동은 뱃사공 수 명을 불러다 놓고 기세 좋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문주님께서 강을 건너고 싶어하십니다. 강 건너 귀회루 근처까 지 우리들을 태워다 주면 이 금을 모두 드리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설영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의 생각밖에 남 지 않게 되었다. 용양도인이 귀회루로 간다. 다른 네 색마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귀회루에는... 그녀가 남겨 두고 온 사형, 소운비만이 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설마...' 진설영은 품고 있는 보검을 단단히 쥐며 발걸음을 돌렸다. 만일 그녀가 좀더 여유를 가지고 상황을 지켜보았더라면, 요란한 용양 도인의 행렬을 미행하는 수십 명의 거지들을 볼 수 있었을는지도 몰랐 다. 제3장 납치(拉致) 취화비도가 예의 그 싸늘한 눈으로 다른 세 사람의 면면을 훑어 갔다. 자객의 눈은 자객의 가장 중요한 무기다. 그것으로 그는 사람을 꼼짝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며, 때로는 기세만으로 죽이기까지 해야 한다. 비록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무공이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 로 엇비슷하다고 하지만, 취화비도가 마음먹고 날리는 이 안공(眼功)의 한 수는 모두의 숨통을 적당히 조이며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모든 시선을 모은 뒤에야, 비로소 취화비도는 천천히 입을 열 었다. "우리들은 그 동안 부당한 대접을 받아 왔다."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하나 모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 고 있었다. 겉으로 표는 안 냈어도, 용호교접도의 제안을 받은 이래로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그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소위 정파의 인물들에게는 쓰레기 취급을 당했고, 사파인들에게는 경 멸을 받아 왔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소!" 탐서랑이 무릎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지난 몇 달 간 남궁세가의 인물 들에게 당한 수모가 문득 그의 가슴을 울린 것이다. 그는 내친김에 자 신의 생각을 우르르 털어놓았다. "사실 우리가 색을 밝힌다, 음양의 도리를 깬다 말이 많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결국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는 일일 뿐이오. 우리를 멸시하 는 자들도 다 그 부모들이 방사를 즐겼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며, 그들 역시 밤에는 남의 눈을 피해 그 일을 탐하지 않소? 세상 사람들 모두 가 하는 일을 단지 숨어서 하지 않았다고, 또는 조금 거칠게 했다고 해서 욕을 먹는 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오!" 혼음사의가 예의 중얼거리는 말투로 덧붙였다. "그렇지! 그렇게 즐거운 일을 못하게 말리는 것이 오히려 나쁜 짓이 야." 만음요화도 어느새 취화비도에 대한 적개심을 잊은 듯 끼여들었다. "정파의 계집들이 고결한 척하는 것도 더 이상 못 봐주겠어요. 비구니 니 여도사니 하는 것들이 밤에는 푹 젖은 속곳을 내다 빨면서 낮에는 여자의 계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꼴이란!" 그것이 시작이었다. 세 사람은 다투어 그 동안 색마라고 수모를 당해 야 했던 억울한 사연들을 털어놓았다. 강호의 일류고수들에 비해 무공이 결코 뒤쳐지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고수다운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차라리 산천초목을 떨게 만드는 마 두(魔頭) 취급이라도 해주면 좀 나을 테지만, 색마에 대한 세간의 평이 란 언제나 그보다 한 급 아래였던 것이다. "본 의원이 전에 건드린 그 아미파의 계집도 처음에는 좋다고 내 수염 을 잡아당겨 놓고...!" "개방의 거지 자식들은 또 뭐람! 사제(師弟)가 줄을 서서 한번만, 한번 만 하고 조를 때는 언제고 또 이제 와서...!" "남궁세가만 해도 그렇소! 딸년을 시집 보내기 전에 어차피 가르쳐 주 어야 할 일, 내가 시간을 쪼개 가르쳐 주었으면 고마워해야 할 일이 지!" 악다구니를 써대는 세 사람을 보며 취화비도의 차가운 눈이 슬며시 웃 고 있었다. 한참을 떠들어대고 나서야 세 색마의 기세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가슴에 품은 분노는 아직 식지 않았으나, 더 이상 정파의 인물들에게 퍼부을 욕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적절한 순간, 취화비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용양도인도 그대들과 마찬가지. 해서 그가 이 모임을 주창한 것 이다. 더 이상 색마라고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말끝을 채며 만음요화가 물었다. "무슨 뾰족한 방법이라도?" 취화비도가 천천히, 그러나 강한 힘을 실으며 대답했다. "색, 마, 영, 웅, 회(色魔英雄會)!" 그 말은 듣는 이들의 가슴팍에 날아가 박힐 것처럼 날카롭게 울려 퍼 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탐서랑이 느릿느릿 되물었다. "색마영웅회라고...?" "그렇다. 우리들도 정파에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결성하는 무림맹이나 흑도의 녹림맹 같은 모임을 결성하자는 말이지. 뭉쳐 있으면 결코 무 시당하지 않는다!" "하나 우리 다섯 명으로 어떻게 회를...?" "아니, 다섯뿐이 아니다. 사실 강호를 뒤져 보면 색을 밝힌다는 죄로 쫓겨다니거나 숨어 사는 무림인이 적지 않다. 우리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말하자면 대표적인 인물들일 뿐이다. 각각의 휘하에 있는 세력들, 그리고 모을 수 있는 강호상의 인물들! 게다가 어쨌거나 방술 과 장생불사술(長生不死術)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색마영 웅회의 깃발 아래로 들어올 수 있다. 더구나... 신비에 싸인 무산음호와 몽중마령까지 끌어들인다면...!" 냉랭한 취화비도로서는 드물게 긴말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동안 다 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도 빠른 계산이 오갔다. '만음요화의 화금궁과 용양도인의 풍월도문은 결코 세력이 적지 않다.' '잘만 하면 전중원의 기루와 유곽들도 손에 넣을 수 있다.' '은둔한 사람들과 전대의 고수들까지 끌어들인다면... 무림맹이나 녹림 맹을 능가하는 것도 결코 꿈이 아니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번뜩이는 것을 본 취화비도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 어 물었다. "어떤가? 해볼 텐가?" "나는 좋다!" 제일 먼저 대답한 것은 혼음사의였다. 언제나 몽롱하던 눈에 총기(聰 氣)마저 반짝거리면서. "나 역시 찬성이오." 두 번째로 말하게 된 것이 서럽다는 표정으로 탐서랑도 대답했다. "만음요화, 그대는?" 취화비도의 물음에 만음요화는 배시시 웃었다. "나 만음요화가 빠지고서 어떻게 색마영웅회가 결성될 수 있겠어요?" "그럼 모두 찬성이군!" 도장을 찍는 듯한 취화비도의 말 뒤에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앞날이 무궁한 거대 조직 하나가 방금 결성되었다는 감격에 겨운 그런 침묵이 었다. 이윽고, 탐서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자아, 희대의 모임이 만들어진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내가 한잔 사 겠소! 진회하에서 제일 유명한 기루로 갑시다!" 뒤따라 몸을 일으키는 혼음사의의 입가에는 벌써 침이 잔뜩 고여 있었 다. "잠깐!" 취화비도가 두 사람을 제지했다. "뭐요?" "아직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무슨?" "조직에는 우두머리가 있어야 하지!" 그렇다. 그것은 중요한 이야기였다. 아직 그들은 색마영웅회를 결성하자는 이야기만 했지, 그 외에 중요한 것들, 총회(總會)는 어디에 설치하며 분회(分會)는 어디어디에 둘 것인 지, 누가 사람들을 모을 것이며, 누가 법을 세울 것인지, 자금을 어떻 게 끌어들일 것인지 하는 이야기들은 꺼내지도 않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두머리를 뽑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일어섰던 탐서랑이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주(會主)를 뽑아야 한다는 말이로군요." 입가의 침을 닦으며 혼음사의가 말했다. "회주라고 하는 것은 너무 평범하군. 색마들의 모임이니 색존(色尊)이 라 부르는 것이 어떨까?" 색존. 그 말은 듣는 색마들의 귀를 매료시켰다. 탐서랑이 눈을 좌우로 굴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색존은 당연히 우리 다섯 사람들 중에서 나와야 하지 않겠소?" 취화비도가 차갑게 그 말을 잘랐다. "색마영웅회가 진정 힘을 발휘하려면, 회 안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 장 강한 자가 색존이 되어야 한다!" 혼음사의가 중얼거렸다. "강한 걸로 따지자면 무산음호나 몽중마령을 당할 사람이 있을까?" 그 말은 좌중에 다시 침묵을 가져 왔다. '일껏 회를 결성해 놓고 정작 옥좌는 다른 사람에게 준단 말인가...!' 색마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죽 쒀서 개 주는 일이었다. 기껏 꼬셔 둔 여자나 남자가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 것만큼이나 울화 통 치미는 일이 어디에 또 있을 것인가? 탐서랑이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그가 가장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 다. "색존은 색존다운 방식으로 선출되어야 하오!" 여섯 개의 눈이 그를 향해 쏠렸다. 그러자 탐서랑은 더욱 굳게 외쳤다. "그저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뽑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오. 물론 무공 도 중요하지만, 뭔가 다른 것이 하나 더 있어야 하오. 보시오, 협의를 표방하는 무림맹 놈들이라면, 그 맹주는 반드시 협의에서 으뜸이라는 자를 뽑을 것이오. 녹림맹도 마찬가지요. 가장 도둑다운 자가 맹주가 되는 거요. 하니 우리 색마영웅회도...!" "가장 색마다운 색마가 색존이 되어야 한다?" 만음요화가 두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대신해 주었다. 탐서랑이 그 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혼음사의는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으나, 탐서랑의 말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취화비도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냉정한 눈으로 탐서랑을 쏘아보며 물었다. "색마다운 색마를 무슨 방법으로 뽑는단 말인가?" 탐서랑은 그 얼음칼 같은 눈에 속으로 찔끔했으나, 겉으로는 한치도 물러섬 없이 대답했다. "우리가 오늘 머리를 합해 본다면 분명 좋은 방법이 생각날 것이오." 좋은 방법. 하나 탐서랑도 말을 뱉은 다음 순간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세상에는 구름처럼 많은 색마, 색한, 색녀들이 있고, 그들의 특기는 또 뭇별처럼 그 가짓수가 다양하다. 그들 다섯 사람만 하더라도 누구는 여자를 용모와 말재주로 현혹하여 취하는 것을 장기로 삼고, 누구는 취한 뒤 살해하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여자도 있고, 의원도 있으며, 심지어 남색가까지 끼어 있는 판에 그것들을 다 한꺼번에 잴 수 있는 절묘한 자[尺]를 어디에서 구한단 말인가? 네 색마는 일제히 입을 다물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일견 공정해 보이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잣대를 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든 것이다. 온 동네에 색마들의 모임을 소문이라도 내듯 요란하고 뻑적지근한 용 양도인의 행렬이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 * 용양도인의 뒤를 따라온 진설영은 귀회루 담 앞까지 와서야 한 떼의 거지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용양도인을 쫓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 다. 그리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 거지들도 위험한 자들인지, 아니면 위험한 것은 안에 들어간 무리 들뿐이고 이 거지들은 그들의 적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그냥 들어가서 사형만 구해서 나와야 할까?' 하나 거지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적이 너무 많았다. 비록 어린 아가씨지만, 진설영은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상황을 살피면서 좀더 기다려 보자!' * * * 용양도인은 입맛이 썼다. 본래 숨기고 숨겨야 할 모임이라는 것은 뻔히 알고 있었다. 하나 오늘 색마들의 모임을 주최하면서 그의 욕심은 색마영웅회의 회주, 즉 색존 의 자리에 있었다. 이야기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갈 것은 취화비도와의 사전 모의로 뻔히 짐작하고 있었고, 해서 이토록 거창한 행차를 준비한 것이다. 취화비도가 운을 띄워 놓은 뒤, 어떤 색마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용을 보이며 자신이 등장한다면 회주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 아니겠는가 하 는 것이 그의 용렬하고도 용렬한 속셈이었다. 신중해야 할 회합을 사방에 소문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행동이 얼마 나 멍청해 보일 것인가 하는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용양도인 이었다. 한데, 그 뻔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게 뭔가? 자신이 위엄있게 등장했는데도, 색존의 자리는 그 조건을 따지며 허공 에 뜬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 늦은 것이 죄니 어쩔 수 없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적당한 기 회를 보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저 독살스러운 만음 요화의 입이 무슨 핀잔을 줄지 몰랐다. 안 그래도 들어오자마자 '아주 적당들을 끌고 오지 그랬어요?' 하고 욕 을 먹지 않았는가 말이다. 용양도인에게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것이 있다면 다름아닌 여자였다. '여자가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세상에 저렇 게 매력적인 것들을 제쳐 두고 말이야!'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용양도인은 열려진 문밖에 다소곳이 시립하고 있는 마흔 명의 미동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와장창! 별안간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표창이 창문을 뚫고 날아들었다. 불시의 기습이긴 하지만, 그것은 색마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뭐냐?" 탐서랑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외쳐 물었다. 대답은 바깥쪽에서 돌아왔 다. "와아아아아아!" "색마들은 무릎을 꿇어라!" "강절행성 개방 분타가 너희들을 징벌하기 위해서 왔다!" 수십 명의 거지들이 바깥에서 목청을 돋우어 외치는 소리였다. 멀리서 지켜보던 진설영은 다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피식 웃음을 흘 릴 뻔했다. '저 거지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의 적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보군.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저렇게 밖에서만 소리를 지르고 있다니.' 개방의 거지들이 우습기는 색마들이 더했다. 강절행성 개방 분타라니! 개방 총타에서 왔다면 모를까, 일개 분타의 거지들이 감히 회합을 어지럽히다니! 가뜩이나 오랜 시간 잔머리를 굴린 탓에 짜증이 나 있던 색마들의 눈 에 살기가 떠올랐다. 탐서랑이 비웃음을 흘리며 모두에게 물었다.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까?" 혼음사의가 별안간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마침 잘됐군." "무슨 소리요?" 용양도인이 볼멘소리로 물었다. 혼음사의는 다른 색마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방법으로 색공을 겨룰까 고민을 하지 않았소? 지금 마침 제물들이 제 발로 걸어왔으니, 저 거지들을 상대로 한 번 색공을 겨루어 봅시다." 혼음사의의 제안에 반색을 한 것은 만음요화와 탐서랑이었고, 무덤덤 한 것은 취화비도였다. 용양도인은 아예 얼굴을 찡그렸다. "거지들을 상대로 색공을?" 그들의 반응이 그렇게 각자 다른 이유는, 무공이 아닌 색공의 방면에 서 자신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취화비도 쪽은 색공이라기보다는 그 저 잔인한 음행으로 색마의 명성을 얻었다는 쪽이 맞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용양도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동들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 을지 몰라도 저런 거지들은 다른 문제였다. 그런 이유로 찜찜한 표정을 짓는 용양도인을 만음요화가 밀쳤다. "자신이 없으면 저리 비켜요!" 용양도인은 발끈해서 외쳤다. "그대는 무슨 특별한 색공의 재주라도 가지고 있는가?" 만음요화는 코웃음을 치고는 모두에게 물었다. "내가 가장 먼저 재주를 펼쳐도 되겠지요?" 그녀는 굳이 동의를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만음요화가 나타나자 뜰을 메우고 있던 개방 사람들은 일제히 조용해 졌다. 기껏 쫓아와 시비를 걸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다섯 색마의 위명은 개방 의 일개 분타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컸던 모양이었다. 만음요화는 그들을 훑어보고는 빙긋이 웃으며 긴 소맷자락에 덮인 옥 수(玉手)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손을 내민 채 용양도인을 향해 끈쩍끈쩍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미동들이 조금 타격을 입어도 괘념치 않으시겠지요?" 아무리 절세가인이라 하더라도 여자가 자신을 향해 웃을 때면 용양도 인은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하나 그는 목젖까지 올라온 그것을 간 신히 집어삼키며 여유 만만한 표정을 가장하여 대답했다. "우리 애들은 색공이라면 이골이 난 몸들이다. 웬만한 것으로는 결코 타격을 입지 않을 터." 만음요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진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바닥이 투명해지더니, 다시 핏물이 비치듯 빨갛게 물들어가 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방의 거지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서는 가운데, 만음요화의 손바닥에 서 마침내 불그스름한 연기가 솟아 나와 손 주위를 감도는 것이었다. 붉은 연기는 마치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한 마리 독사와도 같 은 형세였다. 만음요화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한소리 날카로운 외침이 튀어나왔 다. "타!" 쐐애애앵! 그 소리와 함께 붉은 연기가 느닷없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허공 중 으로 퍼져 갔다. 진회하의 짙푸른 밤하늘에 그것은 마치 불꽃놀이처럼 영롱하게 퍼져 갔다. 바로 만음요화의 독문 무공인 혼혼색수(昏昏色手)였다. "커허어억!" "으으으으음...!" 그 순간, 귀회루의 정원 안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했 다. 잔뜩 긴장해 있던 개방의 거지들이 별안간 병기를 떨구고 땅바닥을 뒹 굴며 몸을 비비 꼬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독에 당했다거나 괴로워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개방의 거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뒤에서 구경하던 용양도인의 미동들까지 흐느적거리며 주저앉고 있었다. 거지들은 그래도 정파의 인물들이랍시고 이를 악물고 땅바닥의 풀을 쥐어뜯으며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하나 미동들은 모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서는, 바닥을 기어 다른 미동들을 향해 움직이려고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저어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입으로 온갖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아아, 이, 이리 와! 어서 이리 와." "아니야, 나한테로 와! 날 좀 쓰다듬어 줘...!" "으응, 못 참겠어! 문주 어르신! 문주 어르신! 저 좀 어떻게 해주세요." 그리고 신음하는 그들 위로 만음요화의 손바닥에서 나온 붉은 연기가 안개처럼 깔렸다. 그것은 분명한 최음약(催淫藥)에 의한 중독증세였다. 하나 예사로운 최 음약은 분명히 아니었다. 색공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다른 네 명의 색마들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용양도인은 저도 모르게 이마의 땀을 훔쳤다.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이 만음요화의 혼혼색수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호에는 최음약이나 사람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드는 온갖 술수가 있 지만, 그 효능이라는 것은 알려진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최음약들은 한 사람을 지독하게 중독시키거나, 또는 여러 사람의 마음 을 가볍게 흥분시키는 정도이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지독하게 중독시 키는 술법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더구나 중독된 자 들이 누구인가! 개방의 거지들은 그렇다고 쳐도, 색공이라면 남부럽지 않게 익힌 용양 도인의 미동 부대가 아닌가! 오십 평생을 색공에만 몰두해 온 용양도인으로서도 지금 당장 만음요 화의 수법을 능가할 어떤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하, 하지만 어떻게든... 계집 따위를 색존으로 모실 수는 없다.' 용양도인은 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색존이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만음요화만 아니 라면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쪽 옆에서 넋을 잃고 자 기 사타구니를 만지고 있는 저 얼빠진 탐서랑이나 혼음사의라고 해도 말이다. '어쩌지? 어쩌지?' 뒤통수로 용양도인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만음요화가 문득 뒤 를 돌아보더니 그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이젠 내가 색존이다'라는 표 정이었다. 용양도인에게 독약보다 무서운 것이 있다면 바로 여자의 웃음이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무공이 얼마나 높든, 체면이 아무리 소중하든 지금은 무조건 토하고 싶었다. 혼혼색수에서 흘러나온 적색무(赤色霧)는 소운비에게도 뻗어 갔다. 그 는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꼴을 보고 그것을 들이마시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나 가빠 오는 호흡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왈칵. "으으윽!" 한 모금 가득 적색무를 들이마신 소운비는 마비되었던 온몸에 찌르르 한 고통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 몸을 비틀었다. 그것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것처럼, 한 개의 인영이 바람처럼 만음요 화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사형! 정신차려요!" 적절한 틈을 기다리다 못해 뛰어든 진설영이었다. 소운비는 가물가물해져 가는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고, 진설영이 만음 요화를 향해 번개처럼 검을 휘두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맹렬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설영...! 많이 늘었구나.' 위급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소운비는 어쩐지 흐뭇해졌다. 그리고 이 상하게도 마비되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현상이 시작된 것은, 만음요화의 적색무를 들이마신 직후부터였 다. 촤라랑! 만음요화의 몸 주변으로 격렬하게 검을 휘두른 진설영이 몸을 허공에 서 뒤집어 뜰에 내려섰다. 그와 함께 잘려진 소맷자락 하나가 땅에 떨 어졌다. 진설영은 비록 만음요화를 뚫지는 못했지만 대신 소맷자락 한 귀퉁이 를 베어 낸 것이다. 만음요화의 눈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소맷자락을 잘렸대서가 아니었다. "네년은 어떻게 그렇게 멀쩡히 서 있을 수가 있지?" 사방에 자욱하게 깔린 혼혼색수의 적색무 속에서도 어떻게 나뒹굴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진설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만음요화가 혀를 찼다. "간교하게도 숨을 멈추고 있구나!" 용양도인이 뒤에서 외쳤다. "하, 하하! 만음요화. 그대의 색공도 저 소녀에게는 쓸모가 없군. 그래 가지고는 어디 색존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나?" 만음요화는 방향을 바꾸어 용양도인에게 대꾸했다. "나의 색공이 고작 이 정도인 줄 아시나요? 방금 보여 준 것은 최하급 의 수법이며, 이런 발칙한 계집을 위해서는 따로 준비해 둔 것이 있지 요." 한껏 독기가 오른 만음요화는 진설영을 향해 한껏 가슴을 내밀며 쏘아 붙였다. "덤벼라, 계집. 제 손으로 옷을 찢어발기고 가랑이를 벌리며 흐느끼게 만들어 주마."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번 진기를 끌어올려 혼혼색수를 전개했다. "타!" 그러자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적색무가 빠른 속도로 폭사되어 갔 다. 그 목표는 당연히 진설영의 가슴팍이었다. 진설영은 몸을 가볍게 흔들어 그것을 피하려고 했다. 한데 진설영의 바로 앞까지 쏘아져 나갔던 적색무가 별안간 기세를 꺾 더니 그녀의 주변으로 짙게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진설영은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은 그 공격에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 로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틀...! 진설영이 몸을 휘청이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만음요화가 신이 나서 웃어젖혔다. "어린 계집아! 중독이란 호흡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 공(毛孔)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야." 그녀는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너는 내 색공에 중독되었다. 이제 일 각 내에 남자 생각이 나서 피가 끓어 견딜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흐읍...!" 진설영은 온몸으로 퍼지려는 그 기운을 재빨리 내공으로 억제했다. 그 녀의 내공이 정순하여 즉시 억제는 되었으나, 몸 밖으로 몰아 내기 위 해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운기(運氣)를 해야 했다.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대책이 없는 곤란을 당한 것이다. '실수다...! 강호는 온갖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곳이라고 했는데, 내 가 그만 방심했구나...!' 진설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계집! 아직 아랫도리가 근질근질하지 않느냐? 네가 원한다면 이 자리 에 있는 모든 사내들로 하여금 너를 범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만음요화는 흐뭇한 표정으로 진설영을 뜯어보았다. 진설영이 온갖 힘 으로 버티고 있을 뿐, 어떤 발작 증세도 보이지 않자 만음요화는 천천 히 그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네가 아직 처녀라서 그 맛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이 언니께서 몸소 네 옷을 벗겨 주마." 그녀가 막 진설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었다. 터억...! 바닥으로부터 한 개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부인, 내 사매를 괴롭히지 마시오." 옷자락을 잡힌 만음요화도, 지켜보던 다른 색마들도 소스라치게 놀랐 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던 소운비였다. "이놈이?" 만음요화는 바로 아래의 그를 향해 혼혼색수를 날렸다. 퍼엉! "으음...!" 적색무에 가슴을 맞은 소운비는 충격으로 몸을 떨었으나, 그 충격은 곧 가시고 오히려 아까보다 더 힘이 났다. 그는 만음요화의 치맛자락 을 잡고 일어났다. "아니!" 만음요화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다른 사람들 은 나뒹굴기 바쁜 혼혼색수에 격중당하고도 오히려 일어나다니... 소운비는 비틀비틀 뜰로 내려섰다. 그가 내려가는 것을 아무도 제지할 수가 없었다. 만음요화는 너무나 놀라서였고, 다른 색마들은 내심 만음요화가 색공으로 독주하는 것을 견제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소운비는 약간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그 와중에서도 진설영으로 부터 세 걸음을 떨어지는 것은 잊지 않고 있었다. "부인, 이 사람은 내 사매입니다. 사매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만음요화의 귀에는 소운비의 그와 같은 말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떻 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혈도를 제압당해 꼼짝못하던 사람이 자신의 혼혼색수에 격중당하고 오히려 움직이다니! 당황하는 만음요화의 귓가에 좋아하는 용양도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통하지 않는군그래!" "이익!" 만음요화는 악에 받쳤다. 이 청년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색존의 자리도, 자신의 자존심도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온 힘을 끌어 모아 앞으로 쭉 내밀며 외쳐댔다. "타! 타! 타! 타!" 혼혼옥잡으로부터 연기들이 무수히 뻗어 나왔다. 그것들은 하나도 남 김없이 소운비의 가슴에 격중되었다. 소운비는 붉은 연기들에 격중될 때마다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물러서 지 않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들의 집입니다." 퍽! "어서 물러가십시오." 퍽! "어서요!" 혼혼색수에 담긴 힘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듯 오히려 점점 더 힘을 얻어 가는 소운비. 순간, 만음요화는 소운비에게 참을 수 없는 살의를 느꼈다. '이번에는 죽여 버리겠다...!' 색공으로 제압하는 것을 포기한 만음요화는 암암리에 살기를 실은 공 력을 운행했다. 이것에 격중된다면 비록 색공으로 제압하는 것은 아니나 이 괴물 같은 청년은 죽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만음요화는 가까스로 입가에 미 소를 띠었다. 그리고 외쳤다. "타아!" 소운비는 자신의 앞으로 쏘아져 오는 붉은 연기는 아예 볼 수조차 없 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뻔했던 그 연기가 각각 다른 방 향에서 날아온 네 개의 장력에 맞아 중간에 방향을 트는 것 역시 볼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한 느낌으로, 무엇인가 무시무시한 것이 쏘아져 오다가 중간 에 사라진다 싶더니 엉뚱하게도 십 장 밖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둥치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을 뿐이었다. "무슨 짓이에요!" 만음요화가 눈을 까뒤집으며 다른 네 명의 색마들을 향해 외쳤다. 여유로운 웃음조차 보이면서 용양도인이 대답했다. "얘기가 틀리지. 색존은 색공으로 뽑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청년 을 죽이면 무엇으로 색공의 우열을 가리려고 하는 건가?" 탐서랑도, 그 옆의 혼음사의와 취화비도도 그 말이 옳다는 듯이 고개 를 끄덕였다. 만음요화는 그만 온몸의 맥이 쭉 빠지고 말았다. "색공으로만 그 청년을 공략해 봐. 그래서 사추리를 움켜쥐고 흙바닥 에 뒹굴게 해보라구. 그러면 절대로 방해하지 않을 테니." 용양도인이 채근했다. 하나 만음요화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저 었다. "나는... 나는 오늘은 더 이상 할 수 없겠어요." 방금의 일격으로 그녀는 더 이상 혼혼색수를 운용하기 힘들 정도로 힘 이 빠져 버린 것이다. "그래?" 별안간 몸을 날려 소운비 앞으로 떨어져 내린 것은 탐서랑이었다. "그렇다면 이 몸이 한번 이 청년을 공략해 보기로 할까? 이 몸이 특별 히 제조한 이 단약을 먹게 되면, 칠십 먹은 노인네라도 벌떡 일어나 첩 셋을 끼고 춤을 추게 되지!" 탐서랑은 약갑을 꺼내 크게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운비가 뭐 라고 항변하기도 전에 번개처럼 그의 입에 그것을 털어 넣었다. 그리 고는 바로 이어서 소운비의 몇 군데 혈도를 점하기 시작했다. "약기운이 빨리 돌도록 좀 도와 주지!"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것이지만, 결과까지 그렇지는 못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 탐서랑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선 채로 혈도를 제압당한 소운비는 첩 셋을 끼고 춤을 추기는커녕 멀 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어허, 이상하군!" 탐서랑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소운비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중얼거렸 다. "정말 이상한데? 이럴 리가 없는데...!" 그는 지금 인간의 색정을 자극한다는 단약의 제조에는 천하 제일이라 고 자부하고 있었다. 한데 소운비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아혈이 봉 쇄되어 말을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여전히 눈은 맑고 또렷했다. "이상하군, 이상해! 당연히 눈이 충혈되고 호흡이 가빠지고 무엇보다도 그곳에 변화가 생겨야 하거늘...!" 중얼대던 탐서랑이 갑자기 이마를 탁 쳤다. "그렇지! 그럴 수도 있는 것을 내가 왜 확인을 해보지 않았던고?" 다음 순간 탐서랑의 손이 불문곡직하고 소운비의 바지춤으로 파고들었 다. '으웃!' 소운비의 얼굴이 처음으로 찡그려졌다. 열아홉 해를 살아 오면서 남에 게 인상을 쓰거나 고함을 질러 본 일이 없는 그였다. 하나 이 일은 정 말 참기 어려웠다. '사매로부터 세 걸음 떨어져 있기가 정말 다행이로군!' "어허, 거 참 이상하다!" 손을 빼낸 탐서랑이 더욱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상이 없는데, 이상이 없는데, 그것 참 이상하다!" 그때, 염소수염을 쓰다듬고 있던 혼음사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내가 살펴보지! 비키게!" 탐서랑은 맥없이 물러났다. 여전히 '이상하군, 이상하군' 하고 고개를 흔들어대면서. 신중하게 소운비를 진맥한 혼음사의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더니 모두 에게 말했다. "신통하군!" "신통하다니?" 반문한 것은 탐서랑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봤어. 이 청년은 본래 체질이 허약해서 양기가 다 른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아. 오래 못 살 뿐더러, 방사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처지지. 한데...!" "한데?" "이 나이까지 살아남은 것도 신기할 뿐더러, 최근에 무슨 일을 당했어. 뭐랄까...?" 자신만이 아는 전문적인 내용을 가지고 질질 끄는 그의 말투에 취화비 도가 신경질을 냈다. "이야기를 하려면 좀 시원히 제대로 하지!" 혼음사의가 찔끔했다. 무공이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 만을 전문으로 하는 자객이라는 존재는 늘 찜찜한 대상인 것이다. "뭐냐면, 어떤 종류의 점혈법에 당해서 그나마 희미하던 양기가 아예 사라져 버렸어." 만음요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렇다는 것은?" "즉, 연장을 달고 있어도 사내가 아니며, 어떤 경우에도 방사의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 하니, 다른 사람에게는 가공할 효력을 발휘할 혼혼색수가 이 청년에게는 겨우 양기를 조금 일으켜 주는 정도로밖에 되지 않은 게야. 해서 되려 나에게 제압당해 있던 몸이 움직일 수 있 게 된 게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게 된 색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신기한 느낌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만음요화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끝을 길게 늘였다. "이 청년은 쉽게 말해, 우리들과는 정반대의 체질이로군요." "그렇지. 어떤 수법에 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압한 사람의 수법 이 하도 고강해서 우리들로서도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는 걸...?" 혼음사의의 말이 끝나고, 색마들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취화비도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 "어떻게?" 용양도인이 반문했다. "아까 우리들은 어떤 사람을 색존으로 뽑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었나?" 다른 세 명의 색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양도인도 못내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또 남색가도 있으니 색공을 겨룰 공정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나?" 역시 네 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취화비도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 청년은 어떤 색공으로도 양기를 일으키지 못할 처지에 있다. 이 청년을 색마로 만들 수 있는 색공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천하 제일 의 색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혼음사의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당신의 말은 그럼 이 청년을 색마로 만드는 사람이..." "그렇다. 그 사람이 색존이 되는 거지, 어때?" 처음엔 대답이 없었다. 모두가 그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한지를 검토하 고 있는 것이다. 용양도인이 물었다. "저 청년으로 하여금 나와 같은 취미를 갖게 한다면 내가 색존이 되는 것을 인정하겠소?" 취화비도의 눈이 빙그레 웃었다. "색공에는 남녀불문. 어쩌면 여인과의 방사도 안 되는 사람을 남색가 로 만든다면 그것이 더 높은 경지라 볼 수 있을 테니, 당연하지." 탐서랑은 탐서랑대로, 혼음사의는 혼음사의대로, 만음요화는 만음요화 대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결론은... "좋소!" "나도 찬성이오!" "그렇게 하지." 이와 같은 시합에 대해 각자 나름대로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이 다. 하나 그 의견에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까부터 무릎을 꿇고 꼼짝을 안 하고 있던 진설영이었다. 다행히 이 색마들이 자신은 이미 혼혼색수에 중독되어 있다고 생각해 서인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진설영의 내공은 참으로 기초가 튼튼하고 정순한 것이어서, 그녀는 혼 혼색수의 적색무를 쐰 직후부터 그 독이 체내로 퍼지는 것을 막고 암 암리에 운기로 그것을 몰아 내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을 끌 면... 소운비는 그녀로부터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색 마들이 등을 돌리고 모여 앉아 쑥덕공론을 하고 있었다. '운기만 끝나면... 맹서고 뭐고 사형을 안고 도망을 치겠어.' 그녀의 경공술로 저 다섯 사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 수였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소운비는 자신을 둘러싼 색마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힘없이 눈동 자를 굴려 자신의 사매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안타깝게 그녀에게 외 치고 있었다. '사매, 나를 구할 생각은 하지 말고 네 몸부터 지켜! 어서 달아나...!' 두 사람이 주고받는 긴박한 눈의 대화는 알지 못한 채, 색마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자, 그러면 언제 판정을 내지?" "색마영웅회의 개파대전을 내년 이맘 때로 잡고, 그때까지 승부를 결 하기로 하지!" 색마로 태어나 최고의 영광인 색존의 자리에 오른다는 생각만으로 다 섯 사람의 호흡은 가빠지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별안간 혼음사의가 결연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내가 먼저 이 아이를 가르쳐 보도록 하지!" 파아앗! 혼음사의의 자그마한 체구가 번개처럼 소운비를 향해 덮쳐 갔다. 그는 순식간에 소운비를 낚아채서는 바깥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아까부터 미리 이런 계획을 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네 색마 중 누구도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소운비를 낚아챈 혼음사의가 진설영의 앞을 지나갈 때, 그녀는 막 운 기를 끝낸 참이었다. "안 돼!" 그녀는 보검을 들고 그 뒤를 쫓아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파앙! "어린 계집! 이번엔 이 정도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만음요화가 그런 그녀에게 일장을 날리고 소운비의 비파를 집어 들며 혼음사의를 뒤쫓아갔다. "다음에 다시 와서 너를 예뻐해 주마." 탐서랑이 이죽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이어 취화비도와 용양도인이 몸을 날렸다. 운기를 마치자마자 무리하게 움직이려던 터에 일장을 얻어맞고 만 진 설영은 다시 일어나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소운비를 불러댔다. "사형! 사형!" 혼음사의에게 사로잡혀 막 담을 넘어가던 소운비도 그녀를 보았다. 멀어져 가는 진설영의 모습은 마치 꿈결과도 같았다. 세 걸음이 아니라 좀더 가까이 있었더라면 사매는 그를 놓치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하나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세 걸음이...' 소운비는 희미해져 가는 의식의 마지막을 붙잡고 한탄했다. '천리(千里)가 되는구나!' 그는 죽음보다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 다섯 명의 색마들은 자기들끼리 소운비를 뺏 기 위해 화려한 싸움을 벌였다. 정신을 잃고 늘어진 소운비의 몸은 혼음사의에게서 용양도인의 손으 로, 다시 취화비도에게로, 탐서랑에게로... 폭풍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 종착점은 소운비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청년 소운비의 길고도 긴 악몽은 시작되었다. * * * 그날. 귀회루에서 있었던 오대색마와의 일전을 강절행성 개방 분타는 낙양의 총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천인공노할 다섯 색마가 저희 분타의 영역 안에 있는 귀회루에 집결 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인원을 모아 총력을 기울여 쳤으나, 그 들은 사이한 색술로 눈을 어지럽히고 달아났습니다. 이 와중에 한 사 람이 그들에게 납치되었는데, 생사는 불분명합니다. 제자들을 풀어 색 마들의 종적을 뒤쫓고 있으나, 다섯이 모두 갈라져 쫓기가 쉽지 않습 니다. 총타에서 사람을 보내시어 직접 추적을 해보신다면, 한 놈이라도 꼬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제4장 대법(大法) 하남행성(河南行省) 동백현(桐栢縣) 서남쪽에 산이 하나 있었다. 산 이름을 따서 현의 이름이 붙은 것인지, 현 이름을 따서 산의 이름 이 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산 이름 역시 동백산(桐柏山)이었 다. 옛날 우(禹)임금이 치수(治水)를 하려고 세 번이나 이곳에 들렸는데, 바람이 워낙 센 데다가 번개가 잦아, 돌과 나무가 울음 소리를 낼 정 도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이 요물의 소행임을 안 우임금이 화가 나서 그 요물을 잡았다고 하는 것이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동백산을 울리던 요물의 이야기도 한낱 전설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바람과 번개는 여전했다. 날씨가 변화무쌍하고 산세가 험한 동백산은 인근 사람들로서도 발걸음이 꺼려지는 험지로 남아 있었다. 어쩌다 할 수 없이 동백산을 넘어야 하는 경우에도, 사람 들은 경관(景觀)에 한눈 파는 법 없이 서둘러 그곳을 지나가곤 했다. 그런 동백산이니 만치, 그 중에서도 가장 깊고 험한 곳에 몇 겹의 장 애와 눈속임으로 가려진 거대한 석궁(石宮)을 쉽사리 남의 눈에 내놓 을 리가 없었다. 거대한 돌산 자체를 깎아 만들고 그 안에 온갖 기화 요초를 심어, 바깥 날씨야 어떻게 되든 일 년 열두 달 봄인 듯 꾸며 놓은 그 신비한 석궁은 그렇게 세인들의 이목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이 과연 인간인지 아니면 신선인지, 만일 인간이라 면 몇 명이나 살고 있는지,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 다. 다만 석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오직 하나의 통로, 옥(玉)으로 깎아만든 좁은 문 앞에 언제나 두 명의 백의소녀(白衣小女)가 나와 앉아 있는 풍경만이 석궁 안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그 소녀들 은 하나같이 귀엽고 싱싱했으며, 매일매일 얼굴이 바뀌었다. 그날, 석궁으로 들어가는 옥문(玉門)을 지키는 두 명의 백의소녀는 각 각 소옥(小玉)과 소혜(小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아아, 지루하구나!" 붉고 앙증맞은 입술을 벌려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것은 소혜였다. 미 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아름답다고 하는데, 과연 하품을 하는 모습조차도 묘하게 색정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소혜는 입맛을 다시더니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 하루 종일 지켜야 한다니... 이 일 은 너무 지겨워!" 멍하니 앞쪽을 바라보고 있던 소옥이 말했다. "그래도 반 년에 한번 돌아오는 일인데, 참아야지." 소혜는 입술을 삐쭉했다. "너는 지겹지 않니? 이 나이에 이러고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말이야. 꿈도 없는 게로구나?" 그리고는 다시 한번 크게 하품을 했다. 고양이 같은 기지개까지 곁들 여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옥 역시 보초를 서는 일이 즐거운 것만은 아닌 듯했다. 눈병과 하품은 금세 전염된다고 하더니 그녀 역시 입을 벌리 고 나른한 숨을 토해 냈다. "사실 나도 지겨워, 하아아아아암...!" 소옥의 입은 소혜보다 두 배는 컸다. 그 입이 동굴처럼 벌어지는 것을 소혜는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했다. 그리고는 진귀한 광경이라도 본 것 처럼 감탄했다. "너는 입이 참 크구나!" "얘는..." 소옥은 약간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하나 소혜는 말을 그치지 않았 다. 오히려 더욱 장난기를 담고 속살거렸다. "너, 그 이야기 들은 적 있니? 여자의 입이 크면 다른 것도 크다고 하 더라..." "뭐?" "정말이야. 소민(小悶) 언니한테 들은걸? 여자가 입이 크면 그것도 크 다고..." 소옥은 발끈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니?" "놀리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이야기야. 그게 크면 과히 좋지 않다고도 하더라." 소혜는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입 큰 것이 죄라고 소옥은 기가 막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했다. "난 입이 작잖니. 해서 저번에 삼랑(三郞)께서 말이야... 궁주님이 자리 를 비우셨을 때 고당원(高唐院)에서 갑자기 날 뒤에서 껴안으시는 거 야." 소혜는 그때의 광경을 생각하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리곤 말이지 내 귀에 대고 속삭이시는 거야. '넌 궁주보다 입이 작 구나? 느낌이 특별할 것 같으니 나한테 한 수 배워라...' 호호호 이러시 면서... 어쩌셨는지 아니?" 소옥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으나, 귀가 솔깃할 만한 소혜의 이야긴 지라 어쩔 수 없이 대꾸를 했다. "어쩌셨는데?" "삼랑의 손이 갑자기 여기로... 쑥 들어오잖겠어?" "어머! 정말?" "응, 정말이라니까? 그리고는 아휴... 말 마... 마구 주물러대시는데, 터 지는 줄 알았어." "그래서,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니?" "아아니!" "그럼, 뺨이라도 치고 달아났니?" "그것도 아니." "그럼?" 조바심이 난 소옥이 채근을 해대자, 적당히 뜸을 들이던 소혜가 배시 시 웃으며 말했다. "놀라서 어지러운 척... 하면서 내가 먼저 쓰러졌지, 뭐!" "어머나!" 소옥은 마치 자신이 당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귓불까지 빨갛게 물들 이며 탄식했다. 소혜는 꿈꾸듯 몽롱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넌 모를 거야... 그 느낌을... 삼랑께서 내 귓가에서 가쁘게 숨을 쉬시 는데 아휴... 난 무슨 숫소나 숫말인 줄 알았어. 어찌나 호흡이 거친지 곧 돌아가시는 게 아닌가 싶었어. 하지만 그건 아니더라구... 삼랑께서 내 앞섶을 손수 여시고... 이번엔... 이번엔 있지." "이번엔?" 되묻는 소옥의 목소리도 어딘가 몽롱했다. "손이 아니라... 아예 입으로... 아유 몰라!" 소옥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이야기를 하는 소혜도, 듣는 소 옥도 방금까지의 지루함은 까맣게 잊은 뒤였다. 시간을 때우는 데는 남을 험담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최고였다.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어?" "나도 몰라. 삼랑의 입이 거기를 막 헤매고 도는데 내가 제정신이었겠 니? 어찌어찌하다 보니 내 옷이 다 벗겨져 있었어. 그리고 삼랑께서도 바지춤을 내리고 막 내 위에 올라타시더니..." "그래서, 했니? 했어?" 소옥이 숨을 쌕쌕 몰아쉬며 다그쳤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방금 전까 지는 입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이야기를 술술 내놓던 소혜가 갑자 기 도리질을 하는 것이다. "몰라, 더 이상 이야기 안 할래." "얘! 지금 누구 약올리니? 빨리 이야기해!" 친구를 거의 애타게 만들어 놓은 소혜는 초승달 모양의 눈을 더욱 가 늘게 뜨며 속삭였다. "응... 하고 말았지." "어머나!"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결정적인 말을 들으면 놀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소옥은 소혜의 말을 듣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 며 비명을 올렸다. "어머나, 어머나. 너 그러면... 그러면...!" "호호... 축하해 주렴. 같은 백의(白衣) 항렬 중에는 내가 제일 먼저 그 일을 치렀어." 그녀들에게는 그 일을 일찍 치르는 것이 결코 부끄럽거나 숨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먼저 어른이 되었으므로 동무들의 부러움을 사게 된 다. 소옥의 얼굴에서도 처음에는 소혜에 대한 부러움이 잔뜩 스며 나왔다. 하나 부러움은 금세 시기와 질투로 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소옥 은 당장 입술을 삐쭉거렸다. "너, 겁도 없구나? 요새 궁주님이 삼랑을 가장 아끼시는 것도 모르니? 삼랑께서 네 머리를 올려 주셨다는 것을 알면 그분이 어떻게 하실까? 아마도... 네 머리를 잘라 버리실걸?"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하나 소혜는 조금도 근심하는 눈치가 아니 었다. "뭐가 어때서?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 일은 머리를 잘릴 만한 가치가 있던걸? 넌 아마 안 해봐서 모를 거야." 도리어 그녀는 소옥의 부아를 은근히 돋우는 것이었다. "너, 너 정말...!" 협박으로도 의기 양양한 소혜의 기를 꺾지 못한 소옥은 더욱 약이 올 랐다. "너... 아니 참!" 샐쭉샐쭉 웃는 소혜를 한참 노려보던 소옥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 지 동그란 두 눈을 빛냈다. 그리고 번개같이 소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슈우욱! 나긋나긋한 섬섬옥수로 펼쳐지는 금나수(擒拿手)는 춤사위처럼 보였다. 방비를 하지 않고 있던 소혜의 오른손 팔목이 그 춤사위 끝에 잡혔다. 소혜가 짐짓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아야, 너 왜 이러니?" "너 손목 좀 보자!" 소옥은 재빨리 그녀의 옷소매를 걷고 희디흰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그 곳에는 콩알만한 붉은 점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수궁사(守宮砂)라는 것이었다. 도마뱀을 그릇에 담 아 붉은 모래, 즉 주사(朱砂)를 먹여 키우면 몸이 붉게 된다. 일곱 근 의 주사를 먹인 뒤에 도마뱀을 잡아 절구에 넣고 수만 번을 찧어서 그 가루를 여인의 팔에 찍어 두면 죽는 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오직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해야만 그 점이 없어진다. 하여 그 점을 일컬어 수궁(守宮)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소혜의 팔목에 수궁사가 남아 있다는 것은 그녀가 아직 남자와 잠자리 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소옥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득의 만만하게 외쳤다. "그러면 그렇지! 너 나한테 거짓말한 거지?" 그제야 소혜는 소옥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며 까르르 웃었다. "호호...! 장난이야, 장난! 삼랑께서 그러시기에 쓰러지는 척하면서 몸 을 굴려 도망을 쳤지 뭐. 어때, 재미있었지?" "재미있긴? 이 계집애, 혼 좀 나봐라!" 그제야 얼굴을 푼 소옥이 마찬가지로 까르르 웃으며 소혜를 꼬집어댔 다. "아야, 아야! 아파, 얘!" 소혜도 지지 않고 소옥을 간질여댔다. 그날은 험악하기 그지없는 동백산의 날씨도 두 소녀의 장난질을 지켜 보느라고 본연의 임무를 잊은 듯 화창하기만 했다. 한참을 두 소녀가 그러면서 놀고 있을 때였다. 소혜가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바람 소리 같은 것을 들은 것이다. "잠깐만! 누가 와." 소혜가 들은 소리는 소옥도 듣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려 저 앞쪽을 주 시하던 소옥의 낯빛이 파랗게 변했다. "궁주님이야!" 바람처럼 달려와 소혜와 소옥 앞에 멈춘 것은 만음요화였다. 두 소녀 는 즉시 그녀 앞에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외쳤다. "천비(賤婢)들이 궁주님을 뵙습니다!" "오냐, 수고가 많구나!" 만음요화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소녀들의 뒤에 있는 옥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잡인들이 근접하는 기미가 보이거든 즉시 알려라!" 마지막 말소리가 들릴 때는 이미 그녀는 소녀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다 음이었다. 만음요화가 가버린 뒤에도 두 소녀는 넋을 잃고 그 자리에 굳어 있었 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옥이 입을 열었다. "너... 너 봤니? 그 사람?" "응...!" 소혜의 조그마한 입이 익을 대로 익은 석류처럼 벌어져 있었다. "삼랑보다 더 잘생겼네...?" 그 사람. 한 달 동안 궁을 비웠던 만음요화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소운비를 일컫는 말이었다. * * * 며칠을 잠들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그가 눈을 뜬 것은 코끝을 찌르 는 매캐한 향냄새 때문이었다. 눈을 뜨니 자신은 싸늘한 대리석 위에 누워 있었고, 머리 위에는 거대 한 세 개의 석조상(石彫像)이 마치 사람처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헉...!' 소운비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단지 목소 리뿐만이 아니었다. 팔도, 다리도, 목도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 았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동자뿐이었다. "시아자맹(視我者盲), 청아자농(聽我者聾), 감유도모아자반수기앙(敢有 圖謀我者反受基殃)..." 아니, 귀도 역시 기능을 하고 있었다.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주문 소리 가 들려 왔다. '여긴 도대체?' 그는 타는 듯한 갈증과 함께 자신의 처지에 대한 궁금증을 느끼며 눈 에 보이는 세 개의 채색된 석조상을 둘러보았다. 세 개의 석조상은 모두 여인의 모습을 본뜬 것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여인상은 어깨에서 반쯤 옷이 흘러내려 터질 듯한 젖가 슴이 드러나 있었다. 그 자태도 자태려니와, 그 눈이며 약간 벌린 입매 가 묘한 느낌을 주었다. 비록 돌로 된 형상이지만 소운비는 엉겁결에 눈을 돌리고 말았다. 왼쪽에 있는 여인상은 큰 검을 들고 호령하는 듯한 자세였다. 마치 전 장의 여장군처럼 몸에 걸친 것도 보석이 화려한 갑주(甲胄)였는데, 다 리를 벌리고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가 역시 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 다. '모두 이상한 여인상들이로구나!' 소운비는 그 조각상들을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해 진 정할 수가 없었다. 해서 그는 차라리 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눈 을 막 감으려 했다. 하나 가운데에 있는 여인상을 보는 순간 그의 눈은 오히려 크게 홉떠 지고 말았다. 어깨 위로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 다소곳하게 반쯤 감은 눈. 불상(佛像)의 손처럼 어떤 도형을 그리고 있는 가느다란 두 손. 양 옆의 두 조각상 사이에 있는 것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순 결하고도 성결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그런 여인상이었다. '어디선가...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인데?' 한참 동안 넋을 잃고 그 순결한 얼굴을 올려다본 뒤에야 소운비는 그 조각이 아주 어렸을 적 절에서 보았던 관음보살의 형상과 닮았다는 것 을 깨달을 수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진설영이 가지고 있는 보검의 손잡이에도 관음보살 문양이 새겨져 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조각상은 보살이 아니며 손에 들고 있는 것도 관음보살처럼 연꽃이 아니라 흰 조개껍질이라는 것뿐이었다. '관음보살의 아름다움은 지고지상의 것이라더니... 여기 이 조각도 그러 하구나!' 소운비는 그렇게 감탄하며 눈을 감았다. 비록 양 옆에서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조각상들이 자신을 훔쳐보고 있으나, 가운데의 그 성결한 여인상을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때, 주문을 외우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며 그의 귀를 찔렀다. "이제 세 분 성녀님들에게 이 제물을 바치옵니다. 부디 앞길을 열어주 시옵소서!" 소운비는 가슴이 뜨끔해지는 듯했다.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그 목소리는, 귀회루에서 만났던 그 옷 벗기 를 즐겨 하던 여인의 것이었다. 한데 제물로 바치다니...? '이 여인은 아마 사교(邪敎)에 소속되어 있는 모양이로구나. 나를 산 제물로 바치려는가 보다...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그렇게 상황판단을 내린 순간, 소운비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약하고 부실한 몸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서른을 넘 기기 힘들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이대로 질질 끌려다니며 사매의 짐 이 되는 것보다는 그것이 나을 수도 있다. 소운비는 잠자코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하나 다음 순간 벌어질 일을 예상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잠자코 기다리 는 것이 아니라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을 했을지도 모른다. 궁에 돌아오자마자 삼녀대전(三女大殿)에 의식을 올린 만음요화는 예 를 마치자마자 대리석 제단 위의 소운비를 노려보며 붉은 입술을 핥았 다. 그리고 좌우에 늘어선 열 명의 황의여인들을 향해 명령했다. "씻겨라!" 황의여인들은 지체없이 제단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소운비는 스무 개의 나긋나긋한 손들에 의해 마치 가벼운 이불처럼 들 려져 어딘가로 옮겨지게 되었다. * * * 화금궁 안에는 많은 여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남자도 살고 있었다. 이 많은 여자와 남자는 오직 만음요화 한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 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은 나이 어린 소녀들부터 나이 많은 할머니들까지 모두가 만음 요화의 제자였으며, 옷색깔에 따라 항렬이 구분 지어졌다. 암벽을 깨서 만든 천연의 궁전 안은 여러 가지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 는데, 각 지역마다 고당원이니, 양대루(陽臺樓)니, 운우별원(雲雨別院) 이니, 무산정(巫山亭)이니 하는 식으로 모두 성교를 빗댄 이름이 붙어 있었다. 화금궁 안에는 모두 백이십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만음요 화의 남자들이었다. 황제가 일후(一后) 삼부인(三夫人) 구빈(九嬪) 이십칠세부(二十七世婦) 팔십일첩(八十一 )을 거느린 예를 따라, 만음요화는 일후에 해당하는 일공(一公)만을 제외하고 삼부군(三夫君) 구랑(九郞) 이십칠세부(二十 七世夫) 팔십일정인(八十一情人)의 숫자를 맞추어 천하 각지에서 놀기 좋아하는 잘생긴 한량들만 모아다 놓고 자신만의 환락궁을 만들어 놓 은 것이다. 만음요화 개인을 위한 이 호화로운 후궁의 남자들은 저마다 좀더 그녀 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마치 안방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서로 질투까지 해댔다. 그 질투는 간혹 피를 부르는 싸움으로 번지기 도 했기 때문에, 후궁의 관리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황실로 치면 환관의 우두머리쯤 되는, 후궁의 관리자. 화금궁 내에서는 총관(總管)이라 불리는 그 사람의 이름은 추접파파 (秋蝶婆婆)였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저자를 요리해 색존의 자리에 올라야지!" 이번의 출행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긴 설명을 마친 만음요화는 긴 보 료 위로 몸을 비스듬히 눕혔다. 그녀의 좌우에는 옥으로 깎아 놓은 듯 이 잘생긴 청년 둘이 앉아 있었는데, 한 사람은 포도송이를 만음요화 의 입에 넣어 주고, 한 사람은 만음요화가 포도송이를 씹으면 재빨리 모시수건으로 턱에 묻은 포도의 육즙을 닦아 내었다. 만음요화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귀가 무릎에 닿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축 늘어진 흉측한 노파였다. 여태까지 만음요화의 설명 은 모두 그 노파, 즉 화금궁 총관 추접파파에게 들려 주기 위한 것이 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흉측한 음성이 애벌레 한 쌍이 붙은 것 같은 노파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저런,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궁주님께서는 어떻게 그 청년 을 요리하실 생각인가요?" "지금 목욕재계를 시키라고 황의(黃衣) 항렬 애들에게 시켜 놓았어. 곧 내가 가서 직접 방사의 즐거움을 가르칠 생각이야." 추접파파는 몇 개 남지 않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물론 궁주님의 뜻대로 되어야지요. 하나..." "뭔가, 총관?" 만음요화는 이 간계에 능한 노파 총관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았다. 그 녀는 자신을 키웠을 뿐 아니라, 세상사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은 사람 이었다. 무엇보다도 '늙은 생강이 맵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늙은 고양이가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로 추접파파는 말했다. "그토록 양기가 전무한 사람이라면 가르치는 방법도 좀더 숙고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군요." "좋은 방법이 있나?" "노신(老身)의 생각으로는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세 가지 단계?" 만음요화의 눈이 흥미롭게 반짝거렸다. 하기사 자신도 딱히 특별한 방 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처지였다. 혼음사의조차 혀를 내두른 체질이라 면, 보통 사내와는 다른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추접파파는 천천히, 입 안의 공기를 씹듯 말했다. "제일 먼저는, 우선 방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가르쳐야겠지요." * * * 소운비로서는 이토록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여 본 일이 단 한 번도 없 었다. 해당원을 드나들면서 기녀들이 간혹 그의 뺨을 만지거나 어깨에 손을 올리는 행동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곤 하던 그가 아닌가? 한데 지금은 그 정도의 행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황금으로 된 커다란 욕조 안에 눕혀져 있고, 마찬가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열 명의 여 인들이 함께 욕조 안에 들어와서 키득거리고 있지 않은가! 어찌할 바를 몰라 일단 '눈'이라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질끈 감았지만, '귀'와 '살갗'에 느껴지는 자극은 더욱 오묘했다. 첨벙... 첨벙...!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알맞게 데워진 물이 여인들의 움직임에 따라 일렁이며 그의 피부를 간질였다. "호호... 부끄러우신가 봐? 눈을 아예 꼭 감으셨네?" "귀여운 공자님, 눈을 뜨세요. 어서요!" 여인들은 깔깔거리며 점차 그를 향해 다가왔다. "아가씨들, 도대체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우리는 궁주님의 명을 받아 공자님의 목욕시중을 들어 드리려는 것뿐 이니 그렇게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몇 개의 매끄러운 손이 그의 몸에 닿는가 싶더니 별안간 물속으로 확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어푸! 어푸!"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그는 어쩔 수 없이 물을 먹게 되었다. 목욕물에 서는 은은하게 장미수(薔薇水) 냄새가 났다. "얘들아, 장난은 그만 치고 어서 일을 해야지." 여인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자, 그들은 또 까르르 웃으며 그를 둘 러쌌다. 한 여인은 그의 긴 머리를 물에 감긴 뒤 곱게 빗기고, 또 한 여인은 그의 손톱과 발톱을 다듬었다. 또 한 여인은 그의 귀를 후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여인은 각각 팔다리며 몸통에 매달려 수건으로 문지르 고 물로 씻기며 그의 목욕시중을 들어 주기 시작했다. 말이 목욕시중이지, 그것은 거의 노골적인 애무와 다름없었다. 허벅지 를 주무르던 한 여인의 손이 그의 다리 사이로 은밀히 파고들었으며, 발톱을 다듬던 여인은 느닷없이 그의 발가락을 입에 물고 빨아댔다. 머리를 빗기는 여인의 손길도 예사롭지 않았다. "기분이 어떠세요, 공자님?" 소운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몸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 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다. '이곳은 이상한 곳이다! 이 여자들도 정말 이상한 여자들이야! 비록 얼 굴은 해당원의 기녀들 못지않게 아름답지만 부끄러움도, 예의도 모르 는 사람들이야!'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여인들의 손길은 거침없이 그의 알몸 위를 질주했다. "이상도 하지? 이 공자님은 참 이상한 사람이로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여인들의 기세는 시들해졌다. 웬만한 사내라면 천하 제일의 군자라고 해도 벌써 몇 번은 자지러지며 여인을 탐했을 짙은 애욕의 시간이었지만, 소운비는 다만 곤혹스러워 할 따름이었다. 그가 궁형(宮刑)을 당한 환관이라면 모르겠지만, 분명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그녀들의 눈앞에 있지 않은가! 아직 흥분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것은 결코 보통 사람들에 뒤떨어지지 않는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한데 한창 때의 젊은이가 이토록이나 무감할 수 있단 말인가! "아가씨들, 제발 그만들 하시고 옷을 입으십시오. 저한테 이런 대접은 과분합니다." 소운비의 목소리에는 짜증 어린 기색마저 배어나왔다. 여인들은 그만 풀이 죽고 말았다. 반드시 이 청년을 흥분시켜 놓으라 는 궁주의 지엄한 명을 받았는데, 이행하지 못했으니 이 뒷감당을 어 떻게 하란 말인가? 그때였다. 한 줄기 듣기 싫은 음성이 욕실 안에 울렸다. "이제 다되었다. 그 공자님을 무산정으로 모시도록 해라." 총관 추접파파의 명령이었다. 흥분시키지 못한 데 대한 책벌의 기색은 없었다. 여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운비를 일으켜 세우고는 보송보송한 새 옷을 입혀 주었다. 소운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득 몸이 개운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혼음사의에 의해 제압당해 있던 것도 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인들은 화금궁 내에서 황의 항렬의 무공 소유자들로, 그들이 오랜 시간 그를 주무르고 만지고 한 것은 단순한 애무만은 아니었던 것이 다. 무산정이라고 하는 곳은 대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져 있는 가운데 고즈 넉하게 자리잡은 한 채의 정자였다. 무산각(巫山閣)이라고 하는 호화로 운 별각에 딸린 그 정자에 여인들은 소운비를 데려다 놓고 일제히 사 라졌다. 정자에 남은 것은 소운비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따뜻한 향차(香茶) 한잔뿐이었다. 소운비는 그 찻잔에 입을 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고민에 잠겼다. 그는 마치 기괴한 악몽 같았던 그날부터 오늘까지의 일을 곱씹고 있었 다. '그 다섯 사람은 나를 색마로 만드는 자를 우두머리로 모시기로 했었 다. 색마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들처럼 옷 벗 기 좋아하고, 또 부끄러움도 모르면서 남녀가 한데 어울리는 그런 짓 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로서는 그 정체 모를 '색마' 따위는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마도 다섯 사람이 이리저리 실랑이를 하던 끝에 만음요화라고 불리 던 그 여인이 자신을 낚아채서 데려온 모양인데, 이제 마비되었던 몸 도 풀렸고 하니 어떻게든 달아날 궁리를 해야 했다. 하나...! 정자 주변을 둘러싼 대나무숲을 둘러본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혼자 남겨진 것같이 여겼었지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로 하 여금 달아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적당히 몸을 드러낸 수십 명의 여 인들이 대나무숲 여기저기에서 파수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무공을 좀 익혔더라면... 여기서 달아날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련 만.' 그는 문득 단 한 수의 무공도 전수해 주지 않은 사부에 대한 원망을 느꼈다. 그리고, 가슴속 깊은 곳에 파묻어 두었던 의구심도 함께 솟구 쳤다. '그때 그 염소수염의 의원이라는 사람은, 내가 최근 누군가에게 제압되 어 양기를 모조리 잃었다고 했다. 혹시나...?'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매가 '천계'를 받던 날 자신을 진맥 하던 사부의 손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공자께서는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그의 상념을 깨운 것은 쪼글쪼글한 노파의 음성이었다. "헉..." 고개를 들어 그 노파를 바라본 순간 소운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 켰다. 늙은 여인이 보기 좋은 경우는 드물지만, 이렇게나 추할 수가 있 단 말인가? 귀가 크고 축 늘어진 데다가 몸 전체가 하나의 번데기처럼 쭈글쭈글한 이 노파에 비한다면, 비록 미치기는 했지만 사부 진파파는 미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누, 누구십니까?" 어느새 자신의 앞에 정좌하고 앉은 그 노파를 향해 소운비는 약간 말 을 더듬으며 물었다. 노파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손을 들어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물었 다. "노신의 귀를 보면 뭐 생각나는 것이 없으십니까?" 신기하게도 노파는 자신의 귀를 까딱까딱 움직일 수 있었다. 크고 축 처진 그 귀가 팔랑팔랑 움직이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글쎄요." 소운비는 나이 많은 사람을 보고 웃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기에 억지 로 그 웃음을 삼키며 대답을 피했다. 노파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노신의 이 귀가 마치 나비 같다고 하지요. 하지만 보시다시 피, 한창 때는 지난 나비라 추접(秋蝶), 즉 가을나비라고 부릅니다. 추 접파파라고 불러 주십시오." 자신을 소개하며, 추접파파는 제법 정중하게 소운비를 향해 고개를 숙 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 화금궁의 총관직을 맡고 있습니다. 행여 대접이 소홀한 것이 있다 면 지체 말고 저에게 명해 주십시오." 소운비는 지그시 추접파파를 보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대접은 잘 받았습니다만...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예, 말씀하십시오." "절 좀 내보내 주십시오." 추접파파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노신의 권한이 아닙니다. 궁주께서 모시고 온 분이시니 궁주님의 허락이 아니면 나가실 수 없지요." "궁주?" "공자를 여기까지 모시고 온 분이시지요." 소운비는 어렵지 않게 만음요화를 떠올렸다. 어차피 그녀에게 생포된 몸이라면, 그녀를 만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럼 궁주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추접파파는 간교한 웃음을 터뜨렸다. "궁주님은 쉽게 뵐 수 없습니다. 공자께서 어떤 조건을 갖추셔야 만나 뵐 수 있지요." "어떤 조건을...?" "불민합니다만, 노신이 가르쳐 드리는 것 몇 가지를 배우시면 됩니다." 소운비는 생각했다. 결코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다섯 명의 색 마들, 그 중 한 사람의 수하인 이 노파 역시 좋은 사람은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그 노파가 가르쳐 주는 것 역시 좋은 것은 아니리라. 소운비는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습니다." 하나 추접파파는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정말 싫으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면..." 노파가 대나무숲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대나무숲에 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아아악!"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어떤 물체가 튀어나와 소운비의 발치에 뒹굴었 다. "허억!" 소운비는 기겁을 했다. 그것은 아까 그의 몸을 씻겨 주던 소녀들 중 하나의 잘려진 머리였다. 소운비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추접파파가 다시 싱글거리며 물었다. "아직도 싫으십니까?" 소운비는 분노와 공포로 범벅이 된 눈으로 추접파파를 노려보았다. 노파의 손이 다시 한 번 올라갔다. "아아아악!" 또 한번 비명이 울리고, 대나무 줄기가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개의 인두(人頭)가 소운비의 발치에 나뒹굴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그래도 싫으십니까?" 추접파파의 의도는 명백했다. 자신들이 부리는 소녀들의 목숨을 담보 로 소운비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녀들은 소운비의 사람이 아니라 화금궁의 사람이었다. 세상에 자기 편의 목숨을 가지고 상대를 협박하는 이런 해괴한 경우는 없었다. 하나 추접파파는 소운비의 심성이 여린 것을 약점으로 삼아 이런 협박 을 가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전히 소운비가 대답을 하지 않자, 추접파파의 손이 다시 움찔거렸다. 소운비가 외쳤다. "잠깐!" "예에?" 추접파파는 능청스럽게 반문했다. 소운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배우겠소. 배우면 될 것 아니오?" 추접파파는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이고, 이렇게 쉽게 응낙해 주시니 정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 * * "공자께서 노신에게 배우셔야 하는 것은 방사에 대한 것입니다." "방사?" "모르십니까?" "처음 듣는 말이오." 추접파파는 소운비를 새삼스럽게 훑어보았다. 그 눈이 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런 한심한 놈'이라는 말이었다. 하나 그 말은 다만 눈으로만 하고, 추접파파는 팔십 평생 갈고 닦은 방사의 이론을 유장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방사는 다른 말로 성교(性交)라 하며, 그 뜻은 바로 합기(合氣), 즉 남 녀가 기를 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隋)나라 때 만들어진 <통현자 (洞玄子)>라는 비서(秘書)에 의할 것 같으면, 하늘에 의해 창조된 만물 가운데 인간이 가장 존귀하며, 그 인간을 번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성 교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본받고 땅을 본뜨 고 또 음을 다스리고 양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는 사 람은 자기 성을 배양해 수명을 늘릴 수 있으며, 그것의 참뜻을 놓치면 스스로를 해치게 되어 일찍 죽게 됩니다... 이제 좀 아시겠습니까?" 소운비는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하는 소리마다 무슨 뜻인지도 못 알아 들을 뿐더러 영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글쎄요..." 추접파파의 귀가 꿈틀거렸다. 그녀가 다시 대나무숲을 향해 손을 치켜 들려고 하자 소운비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잘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추접파파는 싱글싱글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공자의 공부에 보탬이 되도록 사람들을 부르 려 한 것뿐입니다." 추접파파가 아무렇지 않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대나무숲에서 네 명의 황의 여인이 달려나왔다. 추접파파는 그들을 향해 명했다. "펼쳐라!" 여인들은 소운비를 향해 등을 돌리더니 일제히 웃옷을 벗어 내렸다. 그러자 그녀들의 옥 같은 속살이 드러나며 하얀 등판이 눈에 들어왔 다. 한데 그 등판에는...! 여자는 눕고 남자는 그 위에 엎드려 서로를 조이듯 끌어안고 있는 그 림. 여자의 다리가 남자의 허리를 감고 있는 그림. 여자의 다리 사이에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여자의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그림. 여자가 누워서 위에 엎드린 남자의 등위로 두 다리를 올려놓은 그림. 이렇게 네 가지의 그림이 색깔도 선명한 문신으로 그녀들의 등판에 하 나씩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직접 보면서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놀라 입을 벌린 소운비를 보면서 추접파파는 득의 만면한 미소를 지었 다. 그리고 그 문신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설명했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성교의 가장 기본적인 네 가지 자세를 나타낸 것 입니다. 이것은 밀접한 결합, 이것은 단단한 결합, 이것은 노출된 아가 미, 이것은 기린의 뿔이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소운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이제야 '방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 지를 알 수 있었다. 바로 귀회루에서 보았던 탐서랑과 만음요화가 벌 인 일 같은 것이었다. 귓불까지 빨갛게 변한 소운비에게 추접파파의 흥에 겨운 설명이 덧붙 여졌다. "이 네 가지 자세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이 자세들을 응용하여 스 물네 가지 자세로 성교를 즐길 수 있다고 통현자 선생은 말씀하셨습니 다. 공자께서는 앞으로 칠 일 간 이런 것들을 배우시게 됩니다." "나더러 저런 그림처럼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놀란 토끼처럼 되묻는 소운비에게 추접파파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녀의 귀도 같이 덜렁거렸다. "공자께서는 선천적인 병과 후천적인 재난으로 인해 범인보다 양기가 극도로 허하십니다. 결코 범인들처럼 방사를 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 다. 하니 우선은 이론으로 배우시면서 보양을 위해 힘쓰셔야 합니다." "보양?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소운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날 저녁 식탁이 대신 하였다. 뱃속의 창자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정도인 들쥐 새끼의 꼬치 구이. 청대콩을 섞어 양념한 개미알 요리. 벌집 속의 애벌레를 기름에 튀겨 만든 봉용채(蜂龍菜). 거미를 잡아 식초에 담갔다가 기름에 튀긴 화지주채(花蜘蛛菜). 아직 피가 굳지 않은 뜨끈뜨끈한 여우의 생간. 소운비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기괴한 음식들은 소위 말하는 보양 식, 즉 남성의 정력을 키우는 데 쓰이는 것들로서 중원천하의 모든 보 양식들이 소운비 한 사람을 위한 식탁에 총집결한 격이었다. '이 많은 것들을 한 사람이 어떻게 다 먹는단 말이지?' 소운비는 기가 막혔지만,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한 그릇의 음식 을 남길 때마다 한 사람의 목이 달아난다고 추접파파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비단 그날 한 끼뿐만이 아니었다. 그 다음날부터 세 끼 모두에다가 사 이사이 간식까지도 그런 음식들로 먹어야만 했다. * * * 진파파는 흥겨운 발걸음으로 귀회루에 돌아왔다. 손에는 애지중지하는 제자 진설영에게 줄 선물을 들고서. 한데 진설영은 자신의 방에 없었다. 그리고 온몸에 미운 털이 박힌 소 운비 역시 눈에 보이지 않았다. 미칠 것 같은 불안에 사로잡힌 진파파는 귀회루 안을 이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간신히 본각 안의 한 방에서 진설영을 발견했을 때, 진파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머리칼과 옷이 흐트러진 진설영은 초췌한 모습으로 넋을 잃고 거기 앉 아 있었다. 자신이 하사한 보검은 그 옆에 뒹굴고 있었다. '설마, 이놈 운비가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은?' 불 같은 노여움에 휩싸인 진파파는 다짜고짜 진설영의 멱살을 움켜쥐 고 물었다. "운비는? 운비 그놈이 네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진파파가 진설영의 몸을 마구 흔들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말해라! 운비 그놈은 어디 갔느냐?" 한참 만에야 진설영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하도 흐느껴 울어서 잔뜩 쉬어 있었다. "사형은..." "그래! 그놈은 어디 있어?" "사형은... 납치되었어요." 진설영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너무나 의외의 것이었다. 넋을 잃은 진 설영을 간신히 달래서 들은 전후 사정은 더욱 기가 막힌 것이었다. 하나,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소운비가 납치되었고, 그들을 쫓아왔던 개 방 사람들이 해준 말로는 그 괴한들이 바로 강호오대색마라는 이야기 를 다 들었을 때, 진파파는 되려 속이 후련해졌다. 안 그래도 내쫓지 못해 안달했던 소운비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다. 진파파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친근한 목소리로 다시 흐느끼기 시작 한 진설영을 달랬다. "설영아, 울지 말거라. 운비가 그런 나쁜 놈들에게 납치되었다면 필경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니? 그만 기운을 차리고 이것을 좀 보렴. 네 사부가 무엇 때 문에 그 동안 집을 비웠는지 모르지?" 진파파는 진설영 앞에 들고 온 꾸러미를 풀어 보였다. 거기서 나온 것 은 귀하디귀한 녹용(鹿茸)이었다. "여자가 천계를 받은 몸이 되면 그때부터 더욱더 자신의 건강을 살펴 야 하는 법이란다. 이것은 이 사부가 성인이 된 너를 위해 인근 산을 다 뒤져서 잡은 사슴의 뿔이란다. 자, 어서 방으로 돌아가서 이것을 다 려 먹...!" 파악! 진설영이 진파파의 손을 뿌리쳤다. 녹용은 먼지구덩이 바닥에 뒹굴었 다. 진설영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악을 쓰기 시작했다. "싫어요! 사형 없이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어요! 사형이 돌아오지 않으 면 나도 죽어 버리겠어요!" "설영아...!" "사형을 찾아 주지 않으면 난 무공도 배우지 않겠어요! 나도 사부님 곁을 떠날 거예요! 정말이에요!" 진파파는 파랗게 질린 진설영의 얼굴을 보며 제자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설령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진설영은 자기가 뱉 은 말을 지키기 위해 무모한 짓도 서슴지 않을 만큼의 고집쟁이라는 것을 십 년 동안 가르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할 것인가... 이미 소운비는 사라진 뒤고 찾기도 묘연할 뿐더러, 가장 중요한 것은 진파파 자신이 그를 별로 찾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놈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서 운비 그놈을 죽여 버렸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진파파가 그렇게 이를 갈고 있는 동안 진설영은 악을 쓰다가 쓰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설영아! 설영아!" 진파파는 쓰러진 진설영을 부축해 안고는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서 뺨을 쳤다. 진설영은 힘없이 눈을 뜨고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원했다. "사부님... 그들은 사형을 가지고 무슨 내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 니 아직 죽이지는 않았을 거예요. 제발... 제발 사형을 찾아 주세요... 설영의 소원이에요, 네?" 수양딸로 길러 온 진설영의 눈물 어린 호소는 고목 같은 진파파의 가 슴을 진동시켰다. '그래! 어쨌거나 설영을 죽일 수는 없다.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진파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설영아! 일단 방에 가서 이 녹용을 달여 먹고 푹 쉬자꾸나. 내 일부터 운비를 찾을 수 있는 방도를 내보자." 진설영의 얼굴에 그제야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고마워요, 사부님!" "고맙기는. 사부된 도리 아니겠느냐?" 진파파는 말을 얼버무리며 바닥에 떨어진 녹용과 보검을 주워 들고 진 설영을 부축했다. "저... 사부님, 그런데..." 진설영이 무엇인가를 물으려 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뭐냐?" "아니, 아니에요. 그만 쉬고 싶어요." 진설영은 살포시 진파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방까지 돌아오는 길 내내 진설영은 피곤한 듯 사부에게 기대어 자신의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역시 사부님은 단순해... 울고 떼쓰면 어쩔 수 없이 져주시니까 말이 야.'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연기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하나 그 연기력으 로 사부를 나서게 만든 꾀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 다. '한데... 그때 그 의원의 말... 사형에게 알 수 없는 금제가 가해져 있었 다는 것... 설마 그때 사부님이 하신 것은 아니겠지? 설마...' 그녀는 모든 의문을 소운비를 찾은 뒤에 풀기로 하고 가슴속에 접어 두었다. 이렇게 하여 귀회루에 십 년 간 잠복해 있던, 세 사람만으로 이루어진 진파파의 문파는 본의 아니게 전원이 강호로 나서게 된 것이다. * * * "그가 온 지 보름이 넘었어. 한데 아직도 요리나 먹이고 춘화도(春畵 圖)나 보여 주면서 세월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궁주. 안 그래도 오늘 시험을 거친 뒤에 두 번 째 단계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두 번째 단계?" "이제 소 공자는 방사에 대한 기본 지식은 갖추었습니다. 제가 첫 번 째 단계에서 시간을 끈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원래 저 소 공자의 성격이 방사에 관심이 없다는 문제 때문입니다. 하니 그 성격을 뜯어고치고 그 일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색마로 만드는 선 결 조건입니다. 그리고 둘째, 성격과 체질이 그러하니, 소 공자는 필시 동정(童貞)의 몸. 일단 한번 양기가 트이면 이십 년 간 억눌려져 있던 원양진력(元陽眞力)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 힘은 다 른 사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마땅히 궁주님께서 소 공자의 동 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작지 않은 성취가 될 것입니다." "하... 원양진력을 흡수해 나의 성취를 높이고, 또 색존의 자리까지 얻 는다...? 그야말로 돌 하나에 새 두 마리를 잡는 격이지. 하나 제아무리 이론만 많이 알면 무엇 하는가? 그는 알 수 없는 힘으로 제압되어 있 어 결코 방사를..." "이제 그것을 본 궁의 의술로 치료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이단계입니 다." 소운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몰라보게 혈 색이 좋아진 상태였다. 화금궁에서 보름 동안 총력을 기울여 그를 보양시킨 결과였다. 하나 그의 마음은 혈색과는 반대로, 갈수록 우울해졌다. '방사'에 대한 공부는 놀랄 만큼 많이 발전한 것이 사실이었다. 본래 공부라고는 해보지 못한 그였지만, 몸이 약한 대신 머리는 좋은 탓인 지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사실 그가 아무리 둔재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하나를 못 외우면 한 목 숨이 달아나는 조건에서 어찌 빨리 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곳은 정말 소름 끼치는 곳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도망쳐야 한 다.' 날이 갈수록 결심이 굳어 가는 소운비였다. "공자,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여느 때와 같이 추접파파가 나타났다. 소운비는 소스라치는 가슴을 진 정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짐짓 웃음띤 얼굴로 인 사했다. "오셨군요. 오늘은 시험을 치르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추접파파는 비록 고목처럼 늙은 자신이지만, 해사한 소운비의 웃음을 보는 순간 왠지 심장의 고동이 빨라짐을 느꼈다. 처음 볼 때는 병색이 너무 짙어 잘 몰랐으나, 바탕이 잘생긴 얼굴이라, 건강해지자 송옥(宋 玉)이 한 수 양보할 만한 미남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왠지 다른 사내들과는 다른 부드러운 분위기가 어우러져, 이제 소운비는 만음요화의 후궁에 널린 백이십 명의 사내들 그 누구와 견주 어도 처지지 않을 만한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저기에 건장한 남성미만 갖춘다면...' 추접파파는 왠지 궁주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으로서는 빚기만 할 뿐 먹을 수는 없는 떡이 아닌가. 추접파파의 등뒤에는 세 명의 황의소녀가 서 있었다. 아마도 오늘의 시험에 소운비가 통과하지 못했을 때 희생될 제물들인 모양이었다. 소운비는 속으로 치를 떨었지만 그 표정을 감춰야만 했다. "자, 그럼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세 가지 질문에 답을 하시면 됩니 다. 첫 번째..." 추접파파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질문을 던졌다. "옥경(玉莖), 즉 남근(男根)의 움직임에는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소운비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늦으면 한 사람의 목숨이 달아난다. "모두 아홉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용감한 장수가 적진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좌우로 도리깨질하기. 둘째, 야생마가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듯 위아래로 요동하기. 셋째, 갈매기 떼가 파도를 타고 노는 것처럼 급 강하하다가 불쑥 상승하기. 넷째, 절구에서 곡식알을 쪼아 먹는 참새처 럼 깊은 공격과 얕은 공격을 재빨리 번갈아 하기. 다섯째, 큰 돌이 바 닷속으로 잠겨드는 것처럼 깊은 공격과 얕은 공격을 서서히 번갈아 하 기. 여섯째, 뱀이 동면하기 위해 구멍 안으로 들어가듯 천천히 밀어 넣 기. 일곱째, 놀란 쥐가 구멍 속으로 황급히 뛰어들듯 잽싸게 밀어 넣 기. 여덟째, 날랜 토끼를 잡은 매처럼 꾸물거리면서 천천히 일어나기. 아홉째, 커다란 배가 강풍에 맞선 것처럼 먼저 위로 올라갔다가 이어 서 아래로 내려가기. 이렇게 모두 아홉 가지입니다." 소운비의 청산유수 같은 대답이 끝나자, 추접파파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참으로 훌륭한 학생이었다. "교접을 시작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번째의 질문에 대한 소운비의 대답은 좀더 차근차근했다. "먼저 남자는 여자의 왼쪽에, 여자는 남자의 오른쪽에 앉습니다. 다음 으로 남성은 무릎을 꿇은 뒤 여자를 무릎 위에 앉힙니다. 그리고 그녀 의 허리를 쓰다듬고 몸을 애무하면서 귓불에 사랑의 말을 속삭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하나가 되면 서로 꼭 끌어안습니다. 두 육체는 서 로 밀착되고 입술도 서로를 누릅니다... 그리고..." 소운비의 말이 끊어졌다. 추접파파가 물었다. "왜요? 그 다음은 기억이 안 나십니까?" 추접파파의 손에 들린 나무지팡이가 치켜 올려지고, 두 번째에 서 있 던 황의소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소운비는 얼른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다만..." 추접파파는 음흉한 웃음을 띠고 그를 살살 달랬다. "부끄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계속 해보십시오." "그럼..." 소녀상은 여전히 소운비를 위로하는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 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소운비는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토록 아름답고 보살 같은 여인이 저 옆의 기분 나쁜 두 여인과 한 종족이라니... 그것도 그 중 가장 우두머리 격이라니... 소운비는 정녕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만, 저를 이곳으로 데려오신 까닭은...?" 추접파파는 뒷짐을 지고 소운비 주변을 빙빙 돌며 한참 뜸을 들였다. 그리고 어렵사리 입을 열어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지난 보름 동안 저에게 방술에 관한 기초적인 이론들을 사사(師事)했습니다. 하나 그것은 이론일 뿐, 공자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시험의 통과는 공자께서 그것을 몸소 실 천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를 때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 이 일을 어찌할 꼬... 어찌할꼬..." 소운비는 추접파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보름 간의 공부 로 일전에 혼음사의가 자신의 몸에 대해 설명한 의미를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하나 제 몸은..." "알고 계시는군요. 이해할 수 없는 힘이 공자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 것을 물리치지 않는 한, 공자께서는 제대로 시험에 통과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추접파파는 숨을 몰아쉰 뒤, 은근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소운비는 그제야 추접파파와 만음요화의 진실한 의도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만음요화는 나를 색마로 만들어 색존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이로 구나... 단지 방사에 관한 공부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젠 정말 그 것을 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소운비는 전에 색마 따위는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색마들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사매 와 헤어져서 사는 일이 싫었던 것이다. 하나 지금은 색마, 그 자체가 가장 싫었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삼아, 원하는 바를 성취하려는 이런 사람들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이 어떻게 좋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만일 거절의 '거' 자라도 꺼내는 날에는 또 몇 명의 소녀가 그의 앞에서 죽어 넘어 질지 모르는 일 아닌가? 추접파파는 그런 소운비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느물느물 물어왔 다. "거절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소운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다...!' 소운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추접파파가 기운차게 외쳤다. "그렇다면, 우리 궁의 삼녀금침회정대법을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추접파파의 말이 끝나자 대전 한쪽의 문이 열리고 세 소녀가 들어왔 다. 세 소녀는 삼녀상과 마찬가지로 한 명은 울긋불긋한 옷을, 한 명은 검 은 옷을, 한 명은 흰 옷을 입고 있었으며, 각각 손에 금침 수십 개를 들고 있었다. "옷을 벗기겠습니다!" 추접파파가 일갈하며 소운비의 몸 앞으로 지팡이를 뻗었다. 슈욱! 지팡이는 마치 뱀처럼 살아 움직이며 그의 웃옷을 순식간에 풀어 낚아 챘다. '어, 어?' 하는 사이에 소운비의 아랫도리가 세 명의 소녀들에 의해 벗 겨졌다. 그는 처음 화금궁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삼녀상 앞의 제단 위에 세워졌다. 다만 처음과 다른 것은 지금은 그가 부끄러운 알몸이며, 눕 혀진 것이 아니라 서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운기하라!" 추접파파가 세 소녀에게 명을 내렸다. 소녀들은 즉시 소운비의 주변을 둘러싸고 앉아 운기하기 시작했다. 소녀들이 운기하는 동안 추접파파는 소운비에게 엄하게 말했다. "공자, 내 말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 대법은 공자 자신의 의지가 무 척이나 중요합니다. 절대로 이 대법을 거부하실 생각은 무심결에라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대법은 실패로 돌아가고 공자의 목숨도 위험합 니다. 기를 되돌리는 수법이란 시전자의 의지보다도 피시전자의 의지 가 중요한 법이니까요."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이 과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넘고 싶었다. 소녀들은 무공이 아주 고강한 듯했다. 짧은 시간 후에 그녀들의 머리 위에 오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추접파파는 마치 전장의 장수라도 된 듯이 그녀들에게 호령했 다. "제일식! 황하순행(黃河順行)!" 파바바바박!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세 소녀는 번갈아 손을 놀리며 소운비의 머리 꼭 대기로부터 아래쪽으로 금침을 꽂아 갔다. 소운비는 첫 금침이 박히는 순간부터 온몸에 불이 꽂히는 것 같은 고 통을 느꼈다. 한데 금침이 목을 지나 척추를 타고 꼬리뼈까지 꽂힌 뒤... 한 소녀가 재빨리 그에게 있어 뿌리라 할 부분에 금침 하나를 박아 넣 는 것이 아닌가... 그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으음...!" 하나 소운비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물길을 열어라!" 추접파파가 호령했다. 세 소녀는 소운비의 명문(命門)과 생문(生門), 그리고 단전에 손을 대 고 진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운비를 감싸고 있던 불타는 듯한 고통은 서서히 시원한 느낌으로 변해 갔다. 언뜻 세 소녀들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것을 본 소운비는 그 이 름도 모르는 소녀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이 소녀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힘을 쓰고 있구나!' 그의 몸은 점차로 활기를 띠어 갔으며, 몸 구석구석에 시원한 물줄기 가 흐르는 듯했다. 그의 몸이 나아짐에 따라, 몸에 박혀 있던 금침들이 검게 녹더니 스르르 힘이 빠지며 제단 위로 떨어져 갔다. 흔히 의가(醫家)에서 이야기하기를, 인체 내에 생명의 흐름을 나타내는 선이 있으니 그것을 황하(黃河)라고 하며, 정상적으로 흐른다면 그것은 머리 꼭대기로부터 척추를 따라 생식기로 흘러 내려가는 것이라고 한 다. 방금 전개된 황하순행은 바로 그 원리를 따른 것이었다. 하나 사람의 정력과 관련된 힘은 그 반대였다. 정액은 황하의 흐름과 반대로 생식기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 꼭대기로 솟구치니, 이것 을 일컬어 황하역류(黃河逆流)라고 한다. "제이식! 황하역류!" 마지막 금침이 제단 위에 떨어졌을 때, 추접파파가 다시 한번 외쳤다. 그러자 세 소녀는 소운비의 몸에서 손을 떼고 다시 한번 금침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의 사타구니에서부터 거꾸로 척추를 타고 올라가는 방향이었다. 소운비의 몸은 다시 불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아까보다도 훨씬 극악한 고통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특히나 머릿속 어느 부분의 고통이 극심했다. 불에 달군 바늘로 지지는 듯한... 아니, 숫제 부젓가락을 두개골 속에 박아 넣고 지지는 듯한... 소운비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하나 그는 아랫입술이 터져 피가 나도 록 악물며 참았다. 그는 스스로를 북돋우기 위해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 고비를 넘기면...! 이 고비를 넘기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매 에게로!' 아까와 마찬가지로 소녀들은 그의 몸에 손을 대고 진기를 운용했고, 그의 고통은 약간이나마 덜어졌다. "마지막, 대하합일(大河合一)!" 외치는 추접파파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돌고 있었다. 그러자 세 소녀가 자신들의 옷을 일제히 벗어 던졌다. 그리고 그 백옥 같은 나신을 던져 소운비의 몸을 세 방향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녀들의 전신을 통해 거대한 강물 같은 힘이 소운비의 몸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 아아!' 소운비는 자신의 몸 속에서 무엇인가 거대한 짐승이 마구 요동치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그 짐승은 이제 곧 고삐를 끊고 소운비를 지배할 듯 날뛰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서, 아까부터 느꼈던 머릿속의 고통은 그 짐승을 제압하려는 듯 더욱 극렬하게 터져 나왔다. 소운비의 영혼은 몸 속의 짐승과 머릿속의 고통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 었다. 어떻게든 이 고비를 넘겨 보려는 그의 초인적인 의지가 간신히 그의 몸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이제 다되었다...! 마지막 고비만 넘기면 소 공자는 누구보다도 강 한...!' 희색이 만면하던 추접파파의 생각이 거기서 끊어졌다. "으, 으으...!" 별안간 소운비의 동공이 파랗게 빛나는 것이었다. 그리곤 머리를 움켜 쥐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소운비의 입에서 길고긴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 세 소녀의 몸이 그 에게서 떨어져 대전 바닥에 나뒹굴었다. 추접파파의 눈에 당혹의 빛이 물들어 갔다. '저, 저럴 수가! 저럴 수가!' 제단 위에 쓰러진 소운비는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도록 숨을 가쁘게 쉬었다. 머릿속의 고통과 몸 속의 짐승과의 싸움은 짐승의 패배로 끝난 모양이 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고도 그가 혼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 직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해서라도, 이 황당한 외출을 끝내고 사매에 게로 돌아가리라는 의지 때문이었다. "우우우웩!" "우허어억!" 하나, 소운비가 잡고 있던 그 단 하나의 의지도, 바닥에 뒹굴던 세 소 녀가 칠공(七孔)으로 피를 쏟으며 죽어 가는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놓 쳐지고 말았다. '돌아가야 한다...!' 그 말만을 뇌리에 새기며 그는 혼절하고 말았다. 제5장 수련(修練) "왜 실패했단 말인가. 틀림없다고 장담하지 않았었던가!" "송구스럽습니다. 너무 쉽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쉽게 보았다니!" "저는 소 공자의 정욕을 막은 수법이라 하기에 본 궁과 비슷한 류의 색공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한데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니오라, 불가(佛 家)나 도가(道家) 쪽의 정종(正宗) 수법입니다. 수십 년에 걸친 수양으 로 쌓은 정순한 힘이 내리누르고 있으니 결코 육신만을 제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결과는 어떻게 되지? 색존의 자리는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본 궁의 삼녀금침회정대법이 결코 허수아비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금 욕의 마음까지 완전히 몰아 내지는 못했지만 몸의 금제는 십분 풀렸습 니다. 하니 소 공자가 마음으로 원하여 합기를 행한다면 전처럼 불가 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면,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다!" "예?" "무엇을 놀라는가?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다는데!" "하나 궁주님,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노신의 추측일 뿐. 행 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긴말은 필요없다!" 소운비는 누운 채로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낯선 방이었다. 아니, 그것은 방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침상이라고 말해야 했 다. 붉은 비단으로 된 요가 마치 넘실대는 바다처럼 넓게 펼쳐져 있고, 그 위에 벌거벗겨진 자신의 몸이 천장을 보고 눕혀져 있었다. '으음...'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머리도 쇳덩이로 누르는 것처럼 아파 왔다. 무심코 머리 위쪽으로 손을 뻗으니 차디찬 물그릇이 잡혔다. 얼음을 넣어 차갑게 만든 꿀물이었다. 숨 한번 쉬지 않고 그것을 다 마셨을 때, 입 안의 쓴맛은 가셨다. 하지 만, 머릿속에는 그보다 더욱 쓰디쓴 영상이 떠올라 왔다. '그 소녀들은 나 때문에 죽어 갔다!' 온몸을 바쳐 자신에게 대법을 시전하던 세 명의 소녀들. 그리고 칠공 으로 피를 쏟으며 죽어 가던 그들. '아니, 그 소녀들은 나를 위해 죽으라고 그 노파와 궁주에게 내몰렸음 에 틀림없다!' 소운비는 이제 단지 슬퍼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그 소녀들이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따라서 그를 위해 죽을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로 하여금 그토록 무모한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은 곧 추접파파이고, 만음요화이며, 그들이 바로 살인자들인 것 이다. '난 나로 인해 다른 소녀들이 피해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참아 왔었다. 한데 그 결과로 또 세 명의 소녀가 죽고 말았 다!' 소운비는 똑바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난생 처음으로 이를 갈았다. 그리고는 다시 악 다물었다. '무엇이든지 참고 피해 가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이런 일을 당한다. 이 제는 그렇게 되도록 나를 팽개쳐 두지 않겠다.' 끼이익-! 그의 눈이 한번도 태워 보지 못한 노여움의 불길에 휩싸여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르륵... 사르륵... 그리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코끝에 전해져 오는 향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하나 소운비의 분노는 꺼질 줄 몰랐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옷자락 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죽은 듯 누워 있던 소운비는 갑작스레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사람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그것은 옷을 벗어 내리는 소리였다. 방문에서부터 침상에 이르는 곳에 겉옷부터 차례대로, 옷가지가 마치 발자국이 난 것처럼 하나씩 떨어져 있었다. 맨 마지막에는 여인의 가 장 마지막 속옷이 부끄럽게 똬리를 틀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한 개의 미끈한 나신이 도도하게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나신이었다. 바로 귀회루에서 익히 보았던, 그냥 본 것도 아니고 코앞에서 찐득찐득한 육신의 향연을 벌이는 것까지 목격했던 바로 그 나신이었다. 그녀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운비는 한동안 숨을 쉬지 못할 만큼 가슴이 떨려 왔다. 그것은 수많은 농부들이 달려들어 풍요롭게 갈아 놓은 기름진 대지와 도 같은 육체였다. 그저 음란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남자의 발 밑에 엎드려 애걸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녀는 짓밟히는 꽃이 아니라 짓밟기 위해 만인 위에 피어난 꽃과도 같았다. 결코 젊지 않은 육체. 하나 결코 시들지도 않을 것 같은 육체. 그것을 이렇게 코앞에 마주 대하고 있노라면, 고자라고 해도 숨이 멎 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음요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곽거병(藿去病)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아나요?"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후한(後漢)의 유명한 장군이었다고 하지요." 만음요화는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조각같이 희디흰 두 개의 나신이 붉디붉은 비단요 위에 나란히 자리잡 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사람 앞에 여신이 나타나 교접을 하자고 졸랐다고 해요. 한데 장군은 분개하며 거절했지요. 그러자 그는 병에 걸리더니 계속 악화되어 결국 죽고 말았어요. 왜 그랬는지 아나요?" 소운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입을 벌려 대꾸할 수가 없었다. 입 을 여는 순간, 만음요화의 짙은 체향이 밀려와 그의 숨통을 조일 것만 같았다. "여신이 나중에 말하기를, 곽거병은 양기가 쇠약해진 병에 걸려 있었 기에 자신의 음기로 그것을 보강해 줄 의도였는데, 그가 교접을 거부 했기 때문에 죽음을 초래한 것이라고 했어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만음요화의 몸은 천천히 기울어져 소운비의 코앞 에 달콤한 숨결을 내뿜었다. "당신은 곽거병처럼 어리석게 죽기를 바라나요?" 소운비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아니, 솜털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라나요?'라고 말할 때, 만음요화가 아주 부드럽게 그의 입술을 물었 기 때문이었다. 만음요화는 소운비의 입술을 지그시 물고는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약 하게 그것을 빨았다. 만음요화도 소운비도 눈을 감지 않았다. 소운비는 너무나 놀랐기 때문에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었던 것이 고, 만음요화는 그것을 즐기기 위해 감지 않은 것이었다. 소운비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하나 그뿐, 아무런 반항의 기색도 보이 지 않았기에 만음요화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됐다! 이자가 설령 천하 제일의 목석이라고 하더라도 이쯤이면 항복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다...!' 만음요화는 서서히 손을 들어 소운비의 반반한 가슴팍 위로 올려놓았 다. 하나 바로 그때, 소운비는 소스라치듯 그 손을 뿌리쳤다. "썩 꺼지시오!" 만음요화로부터 몸을 뗀 소운비는 분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만음요화 의 능숙한 기술에 막 몸을 맡기려던 순간, 그에게 떠오른 것은 죽어간 세 명의 소녀였다. 눈동자를 크게 뜨고 그를 쏘아보는 만음요화를 향해 소운비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 거대한 유혹의 덩어리 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당신은... 당신은 나를 이용하기 위해 세 명의 어린 소녀를 죽음으로 내몰았소...! 그러면서도 나를 위하는 척하는 것은 위선이오." 소운비는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입으로 그것을 내뱉기 시작했 다. "당신은 마녀요, 살인자요! 비록 아름다운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당신 은 추하기 그지없소. 당장 꺼지시오!" 소운비의 갑작스런 발악에 놀랐던 만음요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개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분노에 불타고 있었다. "발칙한...!" 두 개의 옥 같은 주먹도 꼭 쥐어져서 부르르 떨렸다. 생각해 보라. 화금궁 안에서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 단 말인가? "감히, 나에게..." 파아아앙! 옥 같은 주먹이 펼쳐지며 거기서 분노의 일장이 터져 나왔다. 그 일장 은 붉은 비단요를 찢고 그 속에 들어 있던 하얀 새털들을 방안 가득 날리게 만들었다. 소운비는 눈을 뜰 수 없었다. 만일 색존의 자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찢어진 것은 비단요가 아니라 소운비의 머리가죽이었을 것이고, 쏟아 져 나온 것은 새털이 아니라 그의 뇌수였을 것이다. 새털들이 가라앉아 갈 때에, 이미 만음요화는 방안에 없었다. 아직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음성만이 방안 가득 맴돌고 있었다. "내 반드시 네놈을 수백 수천 여자를 필요로 하는 색마로 만들어 주고 야 말겠다!" 추접파파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근 몇 년 간 궁 주 만음요화가 이토록 분노하는 것은 본 일이 없었다. "저자를 그에게 들여보내겠다!" "예?" 궁주의 분노를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추접파파가 반문을 한다는 것 은, 궁주가 하려는 일이 그만큼이나 엄청난 일이라는 증거였다. 하나 만음요화는 결심을 바꿀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어 보였다. 도도한 여인일수록, 자존심의 상처는 깊은 법이었다. 이제 소운비를 색 마로 만드는 것은 단지 색존이 되는 것 이상으로 그녀에게 중요한 목 표가 되어 있었다. "지하동부(地下洞部)를 열고 그에게 전언을 보내라!" * * * 소운비는 폭이 넓은 비단으로 눈이 가려진 채였다. 하지만 살갗에 와 닿는 싸늘한 느낌과 귓가에 울리는 물방울 소리는, 그에게 지금 자신이 와 있는 곳이 습기가 많고 침침한 장소일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대의 발 앞에는 천 개의 계단이 있소. 조심해서 내려가지 않는다면 목이 부러질 것이오." 등뒤에서 추접파파가 말했다. 그리고 노파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남들은 어떻게든 마시고 싶어하는 감로(甘露)에 침을 뱉다니...! 어리 석은 사람! 살아 나온다면 그대의 복이요, 죽는다면 그대의 업보이니 알아서 하시오!" 그리고 소운비의 등뒤에서 석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그긍- 콰앙! 큰 소리 뒤에 남는 정적은 더욱 괴괴한 법이다. 그 정적을 한참 동안 음미한 다음, 소운비는 천천히 발을 내밀어 보이 지 않는 앞쪽을 더듬었다. 아래를 향한 돌계단의 끝 부분이 발끝에 걸 리자, 그는 조심스럽게 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폭이 좁고 높아 눈을 뜨고 걷는다 해도 무척이나 위험한 것이 었다. 그는 눈을 가렸을 뿐 아니라 팔도 뒤로 결박된 상태였다. '하나... 둘...'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면, 섣불리 앞으로 내딛다가 비명 횡사했으리 라. '열셋... 열넷...' 하나 참는 것은 그의 유일한 장기. 그는 암흑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그렇게 숫자를 세어 나갔다. '백쉰넷, 백쉰다섯...' 계단은 지옥 끝까지라도 내려갈 것처럼 길기만 했다. 두 시진이 넘는 시간을 보낸 끝에, 그는 마침내 천 개째의 계단을 내 려설 수 있었다. 습기 때문에 중간에 몇 번 미끄러질 뻔한 것을 제외 한다면, 퍽 훌륭하게 처신한 편이었다. 하나 혼신의 힘을 쏟은 끝에 그는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다. 보름 동안 그의 체내에 쌓였던 보양식의 힘은 엉뚱하게도 천 개의 계단을 내려오 는 데 다 소모되고 말았다. 비록 천 개의 계단을 다 내려왔다고는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계단 은 천한 개일 수도 있고, 천세 개일 수도 있다. 그는 후들거리는 오른쪽 다리를 뻗어 앞쪽을 다시 한번 더듬었다. 걸 리는 것이 없었다. 이번엔 왼쪽 다리도 뻗어 보았다. 역시 없었다. '노파의 말이 맞았는가 보군...!' 그가 안도의 숨을 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려는 찰나였 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엉!" 별안간 사방 벽을 우렁우렁 울리는 거대한 짐승의 울부짖음이 그의 고 막을 때렸다. 소운비는 내쉬던 호흡 그대로 숨을 영영 놓칠 만큼 놀랐다. 짐승! 그것도 방금과 같은 엄청난 포효를 내지를 수 있는 짐승! 그것은 호랑이다. 호랑이 외에는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안에 호랑이가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공포였다. "크와아아아아앙!" 소리는 좀더 가까워져 왔다. 놈은 소운비의 냄새라도 맡은 것임에 틀 림없었다. 소운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달아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그 엄청난 이빨과 발톱, 그리고 빠르기로 무장한 야 생의 짐승 앞에서, 무공도 모르고 손은 묶인 데다가 눈까지 가려진 자 신이 달아난다면 어디까지 달아날 수 있으며 싸운다면 얼마만큼 싸울 수 있겠는가? '결국 만음요화는 나를 이렇게 죽일 생각이었구나!' 색마로 만들기 위한 숱한 시련을 겪느니 차라리 이편이 깨끗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로 결심하고 오히려 그 자리에 털썩 주 저앉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호랑이가 다가올 그 어딘가 를 직시하고 있었다. "크아아앙!" 울음 소리는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과연 맹수의 왕이라서인지, 그만 큼 접근했는데도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음...?' 이상한 것은 짐승이 다가온다면, 그것도 호랑이처럼 거대한 짐승이 다 가온다면 마땅히 풍겨야 할 노린내조차 풍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공격의 낌새가 풍기지 않았다. 한데 어느 순간, 놈이 으르렁거렸다. 아니, 으르렁거렸다고 생각한 것은 귀의 착각이었다. 놈은 거의 으르렁 거리는 듯한 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호랑이의 언어가 아닌 사람의 언어로. "왜 사내 놈이 온 거냐?" 그 말은,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을 때보다도 소운비를 오히려 더 놀라게 만들었다. '하면, 호랑이를 부리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소운비가 그런 생각으로 혼란스런 심중을 정리하고 있을 때, 그 사람 은 다시 한번 으르렁거렸다. "화금궁에 어린 계집이 떨어진 거냐? 어째서 계집을 들여보내지 않고 너를 들여보낸 거지?" 그 사람은 으르렁거리는 말투만큼이나 성미가 급한 것인지, 소운비의 대답은 들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저 혼자 흥분하여 답을 내리고 있었 다. "만음요화가 이렇게까지 나를 우롱할 생각이라더냐? 좋다, 내가 네놈 의 살을 발라 내서 그 우롱에 화답해 주마!" 쒸이잉! 이어 귓전을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울렸다. 마치 호랑이의 거 대한 앞발이 소운비의 안면을 향해 내리쳐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앞을 가린 비단천 안에서 소운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호랑 이에게 죽으나 낯 모르는 사람에게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아직은 그가 죽을 때가 아닌 듯, 서슬 시퍼렇던 바람 소리가 그 의 코앞에서 바로 멈추었다. "이건 뭐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다시 한번 들리더니 다음 순간, 소운비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단천이 거칠게 떼어졌다. "윽!" 천을 떼어 낸 손은 소운비의 얼굴에까지 결코 얕지 않은 상처를 남겼 다.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소운비는,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시력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윽고 그의 회복된 시야에 제일 처음 포착된 것은, 벌거벗은 봉두난 발(蓬頭亂髮)의 괴인이었다. 머리칼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나이를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구척장신의 거대한 체구에 산맥처럼 우람한 근 육이 맹수처럼 보였다. 벌거벗고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태도며, 두 다리 사이에 나무몽둥이 같은 연장까지 아낌없이 드러낸 품까지 사람이라기보다는 금수에 가까 워 보였다. 자세조차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한쪽 손은 땅을 짚고 있는 것이 짐승 과 흡사했으며, 머리칼의 장막 사이로 언뜻 보이는 두 눈은 맹수의 그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직 맹수의 오른쪽 앞발에 해당하는 것이 얼굴 앞으로 들려져 방금 소운비의 눈에서 떼어 낸 비단 쪼가리를 쥐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이라 는 증거로 보일 뿐이었다. 이글거리는 두 눈이 그 비단 쪼가리 위에서 무엇인가를 읽고 있었다. 글을 읽는 것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듯 뭐라고 입 속으로 중얼거리 며 반복해서 그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만음요화가 내 눈을 가린 천에 무엇인가를 써 보냈구나.' 소운비는 그렇게 짐작했다. 그리고 괴인이 그것을 읽는 동안 주변을 돌아보았다. 짐작했던 대로 그곳은 동굴이었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뚝 듣는 습기 찬 동굴. 소운비의 등뒤로는 방금 자신이 내려온 천 개의 계단이 까마득하게 휘 감아 올라가고 있었고, 앞쪽에는 끝이 보이지 않도록 구부러진 몇 개 의 작은 동굴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자신과 괴인이 서 있는 곳은 계단과 더 깊은 작은 동굴 사이의 공지 (空地)였다. 그리고 어디에도 호랑이는 보이지 않았다. "흥!" 이윽고, 괴인이 크게 코웃음을 치며 비단 쪼가리에서 눈을 뗐다. "건방진 계집! 나에게 협박을 한단 말이냐!" 괴인은 메아리가 울리도록 이를 갈았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소운비를 향해 물었다. "애송이! 너는 내가 만음요화 따위의 협박에 굴할 거라고 생각하느 냐?" 그리고는 또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혼자 말하는 것이었다. "잘못 보았다! 나는 결코 굴하지 않는다! 보아라, 만음요화!"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비단 쪼가리를 꾸깃꾸깃하더니 한입에 털어 넣었 다. 그리고는 그것을 무슨 육포라도 되는 듯이 씹어대는 것이었다. 소운비는 그 광경이 너무나 신기했다. 차라리 흙이나 나무를 먹는 사 람은 그러려니 생각할 수 있어도 비단을 먹는 것은 처음 보았다. 비단 이 보거나 만지기에 좋을지는 몰라도 맛까지 좋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한데 괴인은 그 비단을 몇 번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 큰 입을 쩍 벌리더니 동굴이 무너져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손이 자유로웠다면, 소운비는 귀를 막고 그 자리에서 굴렀을 것이다. 하나 그는 귀는 막지 못하고 구르기만 했다. 고막이 터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의 그 포효도 결코 호랑이의 것이 아니었음을. 오히려 바로 눈앞의 이 괴인이 인간 호랑이에 진배 없다는 것을. 소운비의 생각은 크게 울부짖은 뒤 다시 외치는 괴인의 말에서 확인될 수 있었다. "만음요화! 네가 무엇을 믿고 이러느냐? 내가 누구냐! 내가 누구야? 나는 무산음호(巫山淫虎)다. 나는 무산음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인간 호랑이의 두 눈이 소운비를 잡아먹을 듯이 노 려보았고 인간 호랑이의 앞발이 그의 머리를 격렬하게 내리찍었다. 소운비는 맥을 못 쓰는 노루처럼 그 앞에 쓰러졌고, 잠시 뒤 인간 호 랑이, 무산음호는 사냥감을 업고 숱하게 갈라진 작은 동굴들 중 하나 로 몸을 날렸다. 전설 속으로 사라져 간 줄 알았던 희대의 색마 무산음호! 그가 다름아닌 만음요화의 화금궁 지하동부에 갇혀 있을 줄이야...! 이렇게 하여 소운비는 강호칠대색마 중 여섯 명을 만나게 된 것이다. * * * 개봉(開封)에 있는 개방 총타(總舵)에 때아닌 무서리가 내렸다. 안 그래도 근 몇 달 간 좋을 것이 없었던 개방의 형편이었다. 칠십이 넘은 방주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누운 것이 그 원인이었던 것이 다. 거지들의 소굴이 절간처럼 조용해진 것은 전에 없는 일이었다. 한데 오늘,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백의개(白衣 )들부터 칠결(七 結) 장로들까지 모두를 씩씩거리게 만든 그 무서리는, 다름아닌 두 명 의 불청객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한창 익어 가는 여름날, 개방 총타를 싸늘하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귀 회루의 진파파와 진설영이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요?" 와병 중인 방주를 대신해 방 내의 일처리를 도맡아 하는 장로들 중의 우두머리인 규염개(�곭� )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 서 늙은 불청객에게 되물었다. 물론 성질대로 할 것 같으면, 그는 되묻는 대신 불청객들에게 철퇴를 안기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그가 아무리 강호에서 호인(好人)으로 소 문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근본이 거지인데, 거지 성질이 어디로 갈 리는 없었다. 게다가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는가! 아무리 방주가 와병 중이라지만 그래도 천하의 개방인데, 그것도 일개 분타도 아닌 총타인데 어디서 명호도 댈 것 없는 촌노파와 어린 계집 이 들어와서 들쑤시고 다닌단 말인가! 규염개의 손에 잡힌 죽장(竹杖)에 자연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규염개의 거지 성질을 최대한 억누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촌 노파의 손에 제압당한 채 끌려온 강절행성 분타주 섬전신개(閃電神 ) 였다. 섬전신개는 비록 강절행성 내에서만 이름난 인물이지만, 규염개와는 술친구일 뿐더러, 그 무공이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데 팔을 뒤로 꺾인 채 노파의 손에 붙들려 오만상을 쓰고 있는 품이, 아 마도 강절행성에서부터 여기까지 저런 꼴로 끌려온 모양이었다.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순순히 대답해 준다면 조용히 물러나리다. 하 지만 아니라면...!" '촌노파' 진파파는 말끝을 흐리며 섬전신개의 팔을 틀어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으드득...! 듣기에도 섬뜩한 뼈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섬전신개는 분타주의 체 면으로 간신히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고, 진파파는 그의 팔이 부러 지기 직전에 손에 힘을 풀었다. 둘러싸고 있던 개방 제자들이 분개하며 달려들듯 한 자세를 취했으나 규염개가 제지했다. 하나 그의 눈도 분노에 젖어 파랗게 빛나고 있었 다. '거지들 주제에 의리있는 척하는구만!' 진파파는 그들을 내심 비웃었지만, 걱정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은 아니 었다. 자신과 진설영은 백 명이 넘는 개방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 실 자신 한 몸뿐이라면 백 명이 아니라 이백, 삼백이라고 해도 걱정될 것이 없지만, 사랑하는 제자의 안위는 적이 단 다섯이라고 해도 마음 에 걸리는 문제였다. 소운비가 납치될 때 귀회루에 찾아왔었다고 하는 강절행성 개방 분타 에 쳐들어가서 분타주를 사로잡아 가지고 여기 개방 총타까지 오는 동 안, 진파파는 무리할 정도로 많은 머리를 굴려야 했다. 첫째, 어떻게 하면 진설영으로 하여금 자신이 소운비를 찾는 데 총력 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믿게끔 할 것이며, 둘째, 그러면서도 그 노 력을 헛되게 만들어 진설영으로 하여금 포기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점 이었다. 해서 그녀는 약간은 과장되게 개방 총타 전체를 대상으로 협박전에 나 선 것이며, 방금 섬전신개에게 가한 일종의 고문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한 그녀 나름의 시위 방식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설마 이놈들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알려 줄 리가 없고, 싸움만 붙겠지? 몇 번 그러다 보면 설영도 포기하게 되 리라...!' 겨우 분노를 삭힌 규염개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 당신이 알고 싶다는 것이 뭐요?" "당신네 개방은 천하에서 가장 정보력이 뛰어나다고 알고 있소."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새삼 상대를 칭찬한다고 해서 그 상대가 기분이 좋아질 리는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시오." "어떤 사람이오?" "나의 제자요. 열아홉 살이 된 사내자식이라오." 규염개는 기가 막혔다. 낙양에서 왕서방 찾기도 아니고 그저 열아홉살 된 사내를 어디 가서 찾아 달라는 말인가? "그것만으로는 정확치 않소. 좀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주변의 거지들을 향해 잔뜩 독기를 돋우고 있 던 진설영이었다. "나의 사형은 얼굴이 하얗고, 비파를 잘 타며 몸이 약해요." 그 설명은 진파파의 것보다는 나았으나 또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중 원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 중 얼굴이 검은 사람을 빼고, 또 비파 를 탈 줄 모르는 사람을 빼더라도 아마 낙양성 전체의 인구만큼은 될 것이다. 이 조리없는 두 노소의 이야기에 가장 답답했던 것은 아마도 사로잡혀 있는 섬전신개였던 모양이다. 그가 절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지기인 규 염개를 향해 말했다. "이 사람들이 찾는 것은 일전에 금릉 귀회루에서 색마들과 일전을 벌 일 때 무고하게 납치된 젊은이일세!" 그 말을 듣고서야 규염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사태가 어떻게 돌 아가는지 짐작이 되었다. '정말 한심한 촌사람들이군! 사람은 다른 놈들한테 뺏기고 엉뚱한 곳 에 와서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다니.' 아까까지 분노로 이글대던 그의 눈은 이제 약간은 측은한 빛으로 남루 한 옷차림의 두 노소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는 결정했다. 무슨 흉계를 가 지고 찾아온 악당들은 분명 아니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촌닭들이라 면 제압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그는 진파파를 향해 말했다. "그 젊은이는 오대색마 중 하나가 데려간 것으로 아는데, 어째서 개방 에 와서 따지는 거요?" 진파파는 말까지 낮추며 더욱 거세게 위협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개방은 천하에서 가장 아는 것이 많다고 하기에 이러는 것이지. 그 색마들의 거처 또한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잔소 리 말고 어서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라." 규염개가 다시 한번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좋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몸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움찔거렸다. "이것이오!" 개방 장로의 지위는 단지 인품만으로 얻는 것은 아니었다. 말을 끝내 기도 전에 그의 몸은 허공을 날아 진파파를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파 르스름한 죽장이 맹렬하게 찔러 갔다. 예상치 못할 만큼 빠른 공격이기는 했으나, 진파파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로잡혀 있는 섬전신개의 몸을 방패삼아 규염개의 죽장을 받 아치는 수법으로 그를 당혹하게 할 계산이었다. 한데, 규염개는 진파파가 생각한 것보다는 좀더 영리했다. 그는 진파파 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공중에서 몸을 틀어 진설영을 향해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는 진파파가 최소한 섬전신개를 제압할 정도라면 무공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어린 계집을 공격하는 것으로 노파의 마 음을 어지럽힌 뒤 일단 먼저 섬전신개를 빼돌려야 한다는 복잡한 계산 을 순식간에 한 뒤에 이러한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그의 계산은 실로 정확했다. 공격로가 바뀌자 가장 당황한 것은 진파 파였다. 진설영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다가 그만 발걸음이 뒤엉켜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그 위로 규염개의 맹렬한 죽장이 쏟아질 찰나였다. 진파파가 노하여 외치며 몸을 틀었다. "내 제자에게 손대지 말아라!" 하나 그녀는 제자를 구하러 갈 수가 없었다. "와아아아아!" 규염개가 진설영을 덮치는 순간,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개방 제자들은 진파파를 향해 벌떼처럼 달려든 것이다. 실로 손발이 척척 맞는 합공 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파아앙! 진설영의 주변에 흙먼지가 날렸다. 규염개는 진설영과 같은 어린 아가씨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기 때문 에 진파파에 대한 위협용으로 크게 허초(虛招)를 날린 것이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진파파의 눈을 멀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진파파 는 갑자기 섬전신개의 팔을 잡고 그를 짐짝처럼 위로 휘둘렀다. "으아앗!" 거구는 아니라고 하지만 녹록치 않은 몸무게가 나갈 섬전신개가 가벼 운 푸대자루처럼 노파의 손끝에서 돌아갔다. 섬전신개의 몸은 그 즉시 무기가 되어 달려들던 개방 제자들을 위협했다. 꽈당탕! "우악!" "어이쿠!" 진파파는 재빨리 개방 제자들의 무리 한가운데로 섬전신개를 동댕이쳐 버렸다. 그 틈을 이용해 진설영을 구하러 갈 의도였다. 하나 이것은 규염개가 바라던 바였다. 좀 다치기는 했겠지만 섬전신개 가 노파의 손에서 풀려난 지금, 그는 서둘러 진설영을 제압하고 노파 를 맞상대할 생각이었다. 하여, 이번에 진설영을 향해 쏘아져 가는 그의 죽장은 아까와 같은 허 초는 분명 아니었다. 젓가락이라도 들고 밥을 먹고 있을 때라면 천하 제일의 자객이 와도 두렵지 않다는 규염개의 죽장이었다. 그 가공할 공격 앞에 진설영의 커다란 눈망울이 크게 부릅떠졌다. 한데! 까가강! 한차례 맹렬한 소음이 울리고 난 뒤, 개방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目睹)하고 말았다. 규염개는 죽장을 내뻗은 자세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하나 그의 손에 남은 죽장은 반 토막뿐이었다. 나머지 반 토막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겁에 질린 듯 주저앉아 있던 진설영은 어느새 일어나 규염개와 대치하 고 있었고, 그 손에는 광채가 영롱한 보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뻔히 알 수 있는 상황. 규염개의 죽장 공격이 이 촌아가 씨의 일검에 무산된 것이다. 하나 누가 보아도 뻔히 알 수 있는 그 상황을 개방 제자들은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규염개가 누구인가! 천하를 주름잡는 개방의 제삼인자. 더구나 방주가 와병 중인 지금은 실질적인 제이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그가 이렇게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검과 죽장의 대결이었다고 하지만, 규염개의 죽장은 웬만한 검 에 쉽게 잘릴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개방의 누구라도 알고 있 었다. 한데 이런 결과라니...! 규염개 자신도 믿을 수가 없는 듯 더 이상의 공격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있는 찰나였다. 제자가 뜻밖에 발군의 실력을 보이자 진파파는 방금까지 당황했던 것 은 모두 잊어버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꼴 좋구나. 개방의 장로쯤 되는 인간이 어린아이를 위협하더 니, 게다가 몽둥이까지 잘려? 정말 꼴 좋다! 개방의 옹졸함을 알 만하 구나." 굳어 있던 규염개가 발끈했다. "무엇이 옹졸하다는 거지? 먼저 시비를 건 게 누구냐?" 진파파는 웃음을 멈추지 않고 이죽거렸다. "어린아이에게 지고서도 입은 살았구나. 개방은 장로를 말 잘하는 순 으로 뽑는가 보지?" 사람 좋다는 규염개, 강호에 이름난 호인 규염개. 그 규염개가 다시 분 노했다. 아까의 분노는 섬전신개를 위한 분노였지만 지금의 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차아압!" 그는 반 토막이 난 죽장을 들고 두려움없이 진파파를 향해 몸을 날렸 다. 진파파는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그를 맞이하기 위해 손을 내뻗고 있었다. 지켜보던 개방 제자들은 숨을 멈추었다. 이 격돌은 예사롭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규염개의 몸이 갑자기 뒤로 쭈욱 내밀린 것이다. 진파파의 공격은 아 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규염개는 마치 폭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뒤로 열 걸음 가량이나 물러서 서야 멈추었다. 그리고는 일그러진 얼굴로 한쪽을 바라보며 외치는 것 이었다. "소방주(少幇主)! 말리지 마십시오." 중인(衆人)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거기에는 이십대 중반의 영준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거지의 옷을 입 고 있으니 개방 사람임에는 분명하되, 거지라고 보기 힘든 당당한 기 품이 있는 젊은이. 이마에 두른 검은 영웅건(英雄巾) 아래 꿈틀거리는 듯 짙은 눈썹이 다부져 보이는 그는 순식간에 분위기를 압도하며 천천 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해 있는 진파파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보냈다. "귀인께서는 폐방(弊幇)의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멀찌감치 서 있는 진설영을 향해서도 예를 잊지 않았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무공이 낮아서가 아니라 경험이 적어서 당황했다가 얼떨결에 고수를 누른 진설영은 아직 그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고 개를 끄덕였다. 젊은이는 이어 준엄한 눈초리로 규염개를 보며 말했다. "장로께서는 일에 실수가 없으신 분이었는데, 오늘은 너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분들의 친인(親人)이 실종된 것은 우리 방 의 분타에서 일처리를 하던 와중에 일어난 일이니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지는 못할 것인데, 무조건 힘으로 누르려고 한다면 세상에서 우리 방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그건..." 규염개는 말을 잇지 못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개방의 소방주, 곧 다음 방주가 될 사람인 후개(後 )의 말은, 당금 개 방에서는 곧 방주의 말이었다. 더구나 지금 소방주의 말이 전혀 조리가 없는 것도 아니며, 자신이 '촌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큰 방파의 장로다운 대범함이 적었던 면이 없 지 않았던 것이다. 규염개는 호인답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방 내의 여러 가지 일로 제가 그만 신경이 날카로웠습니다. 소방주께 서는 엄히 문책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젊은 소방주는 더 이상 그를 다그치지 않고 그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진파파는 이 새로이 나타난 젊은이를 호기심에 어린 눈초리로 살피고 있었다. '허! 아까 저 거지를 밀어 낸 수법으로 보아 젊은 나이에 무공도 대단 한 데다가, 사람을 다루는 솜씨도 제법이로구나. 같은 젊은 사내라도 운비 그 녀석과는 달리 그럭저럭 쓸 만하군!' 그 '쓸 만한 녀석'이 진파파를 향해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저는 무옥(武玉)이라고 합니다. 강호에서는 삼목신룡(三目神龍)이라는 과분한 이름으로 저를 불러 주고 있지요. 귀인께서는 존성대명이 어찌 되시는지?" "나는 진파파라고 하오. 그리고 저기 내 제자는..." "진설영이라고 합니다." 진파파와 진설영은 그저 상대가 이름을 대니 이쪽의 이름을 밝힌 것뿐 이지만, 삼목신룡 무옥의 소개를 받은 것이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응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원 최대의 방파인 개방의 후개. 무림 후기지수 중의 으뜸이자, 하늘 을 놀라게 만든 무공의 기재. 삼목신룡 무옥이라는 이름은 그런 후광을 달고 있는 것이다. 그 삼목신룡 무옥이 진설영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보검을 보니 사문 내력이 깊으실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영롱한 서기(瑞氣)를 사방에 뿌리고 있는 진설영의 보검으로 미루어 볼 때, 남루한 행색은 혹시 신분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었다. 하나 그렇게 예의 바르고 에둘러치는 질문을 알아들을 수 있는 진파파 의 머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혹 알아들었다 해도 자신이 모르는 과 거의 일에 대해 어찌 남에게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진파파와 진설영이 대답을 못하자 무옥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두 분께서 찾고 계신 오대색마는 폐방에서도 심복의 우환과 같아 지 금 전중원의 제자들을 통해 찾고 있는 중입니다. 어떤 단서라도 발견 된다면 저희들과 함께 행동하실 수 있도록, 두 분을 본 방에 초대하고 자 하는데, 허락하시겠는지요?" 불청객을 정식 손님으로 초대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소운비의 행방 에 대한 단서가 발견될 때까지는 머물러도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규염개가 그 말에 불만이 없을 리 없었으나, 이렇게 많은 제자들 앞에 서 소방주의 결정에 반박할 수는 없어, 덥수룩한 수염 속에 입을 쑥 내밀고 잠자코 있을 다름이었다. 진파파는 그 말에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 로 응낙의 의사를 표명했다. 진설영은 왠지 망설여졌다. 소운비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젊은 남자, 그 남자의 존재가 그녀를 불안하게 한 것이다. 하나 그녀 역시 규염개 처럼 윗사람의 말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삼목신룡 무옥이 두 사람을 방 내로 안내하고, 진파파는 희희낙락하여 그 뒤를 따라갔다. '예의까지 바르군! 우리 설영이를 음충맞은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고 말이야.' 진파파로서는 드물게 마음에 들어 하는 젊은 사내였다. 하나가 미우면 모든 것이 밉고, 하나가 마음에 들면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그녀의 성격대로 별것이 다 좋게 보이기 시작했다. '삼목신룡이라! 별호도 멋이 있군. 한데 왜 삼목신룡일까?' 진설영은 웬일인지 얌전하게 몇 걸음 뒤에 떨어져 진파파를 따라오고 있었다. 삼목신룡 무옥과의 첫 만남은 막연하지만 불안한 느낌을 그녀에게 주 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예감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틀리는 법이 없기 마련이었 다. * * * 소운비가 가늘게 눈을 떴을 때, 동굴 안에는 희미한 초가 흔들리며 빛 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두 개의 눈동자. 바로 무산음호의 것이었다. "깨어났으면 벌떡 일어나라."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딘지 전보다는 기가 누그러진 듯한 말투였 다. 소운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무산음호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 했다. "너는 오늘부터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난데없는 말이었다. 소운비는 그를 향해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무슨 소리냐는 뜻이었다. 무산음호는 여전히 시선을 딴 곳에 두고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자꾸 안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칠 일 간은 단식수련으로 속을 비우고 오직 종유석(鐘乳石)에 서 받은 물만을 마셔라. 그리고 아침에는 내가 너에게 내공심법(內功 心法)을 가르칠 것이며, 낮 동안은 너 혼자 수련을 하고 밤에는 내게 그 성과를 보여라." 그리고 그는 턱으로 희미하게 가물거리는 초를 가리켰다. "이곳에는 태양이 없으니 저 초의 삼분지 일이 탈 때까지가 아침이고, 삼분지 이는 낮, 마지막 부분이 저녁 때를 알린다. 지금은 한밤중이니 내일 아침부터 시작하자." 소운비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것은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이다. 알지도 못하는 이 사람이 왜 갑자기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말 인가. 그것도 처음 만났을 때는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설쳐대던 사람이. 그의 어리둥절한 기색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갑자기 무산음호가 벌컥 화를 냈다. "나는 결코 만음요화의 협박이 두려워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나를 절 대로 만만하게 보지 말아라. 내가 누구냐?" 씩씩대는 그에게, 소운비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무산음호." "그렇다. 무산음호다. 나는 결코 두려워서 그 계집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는...!" 말끝에서 갑자기 힘이 빠졌다. 입 안에서 혀를 굴리던 무산음호는 다 시 퉁명스럽게 말을 끊었다. "아무튼, 내일 아침부터는 일찍 일어나는 거다!" 그는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동굴 구석으로 가더니 등을 돌리고 돌아누웠다. 그리고는 눈으로 확인도 하지 않고 한참 멀리 떨 어져 있는 촛불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피식...! 촛불은 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꺼지고 말았다. 캄캄한 어둠이 동굴 안을 점령했고, 무산음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더니 곧 소리내어 코 를 골았다. 소운비는 무산음호의 놀라운 솜씨가 마치 십 년 전에 보았던 사부의 솜씨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도 만만치 않은 고수로구나.' 그리고 방금의 대화에서 한 가지 추측이 가능해졌다. 만음요화는 소운비의 눈가리개에 어떤 글을 써 보내서, 자신이 지하동 부에 가두어 두었던 이 무산음호에게 모종의 부탁을, 아니 명령을 한 것이다. 그 부탁이란 아마도 아까 무산음호가 말했던 것과 같은 무공 을 자신에게 가르치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무산음호는 자존심 때문에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만음요화라 면 분명 어떤 협박을 내걸었을 것이다. 그 협박이 금방이라도 소운비 를 잡아먹을 듯하던 무산음호의 살기를 억누르게 만든 것이리라. 소운비를 기절시켜 놓고 무산음호는 많은 고민을 한 끝에 결국 수락하 기로 마음을 먹은 것임에 분명했다. 그리하여 진파파의 제자로 십 년을 보내도록 무공 하나 배우지 못한 소운비가 바야흐로 무공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소운비로서는 무공을 배운다는 것을 거부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귀 회루 시절과는 달리 몸도 많이 좋아진 상태이고, 또 무공은 추접파파 가 가르쳐 주던 방술처럼 거리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무공 을 좀 알아 둔다면 이 화금궁으로부터의 탈출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 가! 그런데 득이 된다면 소운비에게 득이 되지 결코 화금궁 쪽에 도움이 될 리가 없는 이 일을, 만음요화는 왜 하려고 하는 것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과 함께 십 년 동안 어깨 너머로 지켜보기만 했던 무공의 세계 에 비로소 입문하게 된다는 설레임을 안고 소운비는 잠이 들었다. 만일, 그가 강호에 대해 아는 것이 있어 무산음호의 전설을 들어 본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더라면 만음요화의 의도를 십분 짐작할 수 있었 을 것이다. 하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천하를 울리던 인간 호랑이의 이야기를 전 혀 알지 못했고, 그것이 또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제6장 출관(出關) 추접파파는 그렇지 않아도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코앞, 삼 장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궁주 만음요화의 침상이 있었고, 그 위에서는 한 폭의 적나라한 춘화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궁주는 정사를 벌이는 와중에서도 보고를 듣는다. 하나 그럴 때는 고 개를 숙이고 결코 시선을 드는 법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궁의 계율이 었다. 하지만 정사라는 것은 꼭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요란하 게 삐걱이는 침상 소리, 끈쩍끈쩍한 신음 소리, 살갗에 전해 오는 후끈 한 열기. 추접파파가 아무리 말라 비틀어진 노파라고 해도 왠지 아랫 도리가 젖어 오는 곤혹스러운 느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늘따라 궁주의 정사는 거칠었다. 그녀의 몸 위에 바짝 달라붙은 미 청년도 어쩐지 힘들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청년은 바로 요새 궁 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다는 구랑 중의 세 번째, 삼랑이었다. "이 객점의 음식맛은 제법 훌륭하구나. 설영아, 어서 들거라." 진파파는 희희낙락하여 말했다. 총타에 여인들을 머무르게 할 만한 장소가 없어서 그들은 삼목신룡 무 옥의 배려로 개봉부 내의 객점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따금 장로 규 염개가 와서 오대색마의 소굴을 찾는 자신들의 일이 어디까지 진척되 었는지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진설영은 젓가락으로 음식들을 쿡쿡 쑤시기만 할 뿐, 식욕이 없어 보 였다. 진파파는 고기라고는 처음 먹어 보는 사람처럼 신이 나서 씹어 대고 있었다. "거지들이 제법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이렇게 대접이 훌륭할 줄은 몰 랐다." 진설영은 사부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 들으며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 문득 진설영이 중얼거렸다. "저게 무얼까?" 창 밖으로 바라다보이는 관도(官道) 끝에서 뿌옇게 흙먼지가 일고 있 었다. 진파파도 그것을 바라보았다. 흙먼지를 일으키는 것은 한 대의 호화로운 마차였다. 여섯 마리의 눈 같이 흰 말들이 그것을 끌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마부가 없다는 사실 이었다. '훈련된 명마들은 마부가 없이도 움직인다더니, 굉장히 귀한 신분의 사 람들이 타고 있는 것인가 보다.' 진설영은 호기심을 느끼고 그 마차를 주시했다. 마차는 진설영과 진파파가 머무르고 있는 객점 앞에서 멈추었다. 점소 이 서너 명이 일제히 뛰어나가자, 마차의 휘장이 살짝 걷어지더니 화 복(華服)의 중년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부티와 귀티가 자르르 흐르며 눈썹이 하늘로 솟구칠 듯한 인상의 사내였다. "개방의 총타가 어느 방향인가?" 그는 달려나온 점소이 중, 한 사람에게 은전을 집어 주며 물었다. 점소 이의 입이 귀 밑까지 찢어져서는 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키자, 그는 휘장을 닫으며 말했다. "고맙군!" 말들은 앞발을 들고 기운차게 울부짖더니 점소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바람처럼 달려가 버렸다. "웬 사람들이 또 개방을 찾아가는 것일까?" 진파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댔다. 진설영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중년의 화복인이 휘장을 걷고 얼굴을 내밀 때, 그녀는 그 옆에 앉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자신과 비 슷한 나이 또래에 초록색 궁장을 입은 어여쁜 소녀였다. 틀어올린 머리채에는 옷과 같은 빛깔의 값진 보석장신구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귀걸이며 목걸이, 흰 손가락에 낀 반지도 모두 녹색이었 다. 병이라도 걸린 듯 얼굴은 창백했지만, 호화롭게 치장한 소녀의 모 습은 진설영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오래된 무명의 낡은 질감이 이처럼 싫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외모나 치장은 중요한 게 아니야! 나한테는 그보다 더욱 뛰어난 무공 이 있어.' 애써 자신을 위로하는 진설영이었지만, 그녀 역시도 열여섯 살의 소녀 였다. '저 마차는 아마도 개방을 찾아가는 손님인 모양인데, 그 무옥이라는 사람은 저 소녀를 보면 뭐라고 할까? 그도 남자인데 아마 미인을 보면 좋아하겠지?' 진설영은 다시 젓가락으로 음식을 쿡쿡 쑤시며 생각했다. '사형이라면... 사형이라면 아무리 예쁜 옷을 입은 여자가 있어도 절대 로 거기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힘이 나는 진설영이었다. * * * "정신이 들었느냐?" 소운비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려 온 것은 무겁게 가라앉은 무 산음호의 음성이었다.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려던 소운비는 자신의 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 넝마처럼 되어 거의 발가벗고 있는 것이나 다름 이 없었던 탓이었다. '설마...!' 발가벗고 있는 것이 놀라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녕 두려워한 것 은 혹시 이성을 잃은 사이에 자신이 무산음호처럼 소녀들을 겁간한 것 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얼른 주변을 돌아보았다. 열 명의 소녀들, 아니 열 구의 시체들은 보이지 않았다. 소운비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눈치챈 무산음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독한 놈이다." "...?" "견디기 어려웠을 텐데... 네 옷을 찢고 돌벽을 후벼 파며 견뎌 내더구 나." 소운비는 그제서야 찌릿한 고통을 느끼고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톱들은 형편없이 갈려 있었고 밑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하나 거기서 느끼는 고통보다도, 한 줄기 안도감이 소운비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다. '참아 냈구나...!' 소운비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안심하기 에는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너무 많았다. 소운비는 분노와 의문을 담은 시선을 천천히 무산음호에게 던졌다. "내가 익힌 내공의 이름은 태원옥호공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네 가 익힌 내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무산음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익히는 순간부터 체내에서 강렬하게 음기를 원하게 되고, 오 성이 넘 으면 그것을 걷잡을 수 없으며 십 성이 넘어야 간신히 그 기운을 조절 할 수 있게 된다. 조절이 가능하다면 이 이상의 신공은 천하에 없다."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치부를 들켰기 때문인지 무산음호는 소운비 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하고 있었다. 소운비는 천천히 물었다. "당신은 그것을 얼마나 익혔소?" "십일 성의 성취를 했다." "나는 그것을 얼마나 익혔소?" "이제 곧 오 성을 바라보고 있다." 소운비는 허공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만음요화! 정말 악랄하구나! 결국 나를 이런 함정에 빠뜨리다니..." "함정이라고만 말하지 말아라. 태원옥호공은 절세의 신공이다. 내공 방 면에서는 이만큼의 성취도 얻기 어려울 터..." 위로하듯 말하는 무산음호에게, 소운비가 갑자기 날카롭게 말했다. "절세의 신공? 그래 당신은 그토록 뛰어난 신공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 작 하는 일이 이런 곳에 힘없는 소녀들이나 유린해 죽이는 것이오?" "내가 원해서 하는 짓이 아니다. 말하지 않았느냐? 태원옥호공을 익히 면 막대한 음기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너 역시 마찬가지다! " 소운비는 발을 구르며 외쳤다.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겠소!" 무산음호는 으르렁거렸다. "내가 소녀들을 취하는 것을 보면서 너 역시 괴로웠을 텐데? 이번엔 참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고통은 더욱 심해진 다! 열 배, 스무 배로 그렇게 고통스러워도 네가 과연 참을 수 있겠느 냐?" 소운비는 결연하게 외쳤다. "나라면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렇게 목숨을 연명하지 않겠소!" 쾅! 갑자기 무산음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동굴 벽을 쳤다. 우루루...! 동굴은 무너질 듯 흔들리다가 한참 만에야 그 진동을 멈추었다. 그리 고 무산음호의 절규가 뒤따랐다. "나 역시 죽고 싶었다! 하지만 내 딸이, 내 딸이...!" 딸...? 소운비는 발광하는 무산음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 딸이 만음요화의 손아귀에 있다! 내가 자진이라도 한다면 그날이 바로 내 딸이 죽는 날이라고 했단 말이다!" 그렇게 외치고, 무산음호는 고개를 똑바로 쳐든 채 상처 입은 호랑이 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십일 성의 성취를 얻으면, 여자를 취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을 줄 알 았다. 세상에 태원옥호공만 존재했다면 그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하나 만음요화의 혼혼옥잡이 동시에 존재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광란이 가라앉은 뒤, 무산음호가 들려 준 이야기였다. -무산에서 기나긴 수련을 마치고 하산하다가, 나는 만음요화를 만났 다. 그녀는 나의 내공을 탐내서, 나에게 교접을 하자고 졸랐다. 내가 거절하자, 만음요화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병(魔兵), 혼혼옥잡으로 나를 중독시켰다...! 그 결과는 광란에 빠진 무산음호가 당시 무산에 들어와 있던 강호 여 인들 삼십 명을 겁간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그는 간신히 목숨을 연명할 수가 있었다. 만음요화는 무산음호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혼혼옥잡으로 괴롭혔 고, 그리하여 바로 천하를 울린 무산음호의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몇 년 만에 무산음호는 만음요화에게 사로잡혀 이곳에 갇히는 신 세가 되었으며 만음요화가 공급해 주는 소녀들을 취해 간신히 간신히 목숨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무산음호의 딸은...! -내가 태원옥호공을 익히러 산에 들어가기 전에, 정을 준 여인이 하나 있었다. 이름있는 기녀였는데, 내 피를 이은 딸아이를 낳고 죽었다. 내 가 만음요화에게 사로잡힌 후로는 그 아이를 본 적이 없다. 지금쯤 열 다섯이되었을 것이다... 만음요화는 그애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고 했다. 그애의 발바닥에는 붉은 점이 하나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소운비는, 무산음호가 소녀들을 겁간하기 전에 발바닥을 확인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산음호가 이러한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 대한 연민 의 정도 느낄 수 있었다. 하나 동정한다고 해서 그 행동까지 용납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소운비 자신이 그런 괴물이 되는 것은 더 더욱 용납할 수 없었 다. 그날부터, 소운비는 태원옥호공의 수련을 끊었다. 그리고 동시에 무산 음호와의 대화도 끊어지게 되었다. * * * "방 내로 모셔 오라시는군요." 규염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타고난 호인이라서인지 처음 만나던 날의 다툼은 씻은 듯 잊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오?" 진파파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설명했다. "실은 남궁세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쪽도 어떤 사정이 있어 색마 들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아마 우리들에게 필요한 어떤 정보를 가지 고 있는 모양입니다. 해서 소방주께서 두 분을 모시고 함께 이야기를 듣자고 하십니다." 어제의 그 호화로운 마차가 남궁세가로부터 온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진파파는 바라던 바와는 달리 일이 잘 풀려 나가는 것이 불만이었지 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이러다가 정말 운비, 그 녀석을 되찾게 되면 어쩌지?' 그녀는 미적미적 일어나며 진설영에게 말했다. "설영아, 어서 일어나거라." 한데 진설영은 어쩐 일인지 망설이고 있었다. 뒤로 감춘 그녀의 두 손 이 자신의 허름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진파파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때, 규염개가 두 개의 꾸러미를 내놓았다. "이것은 소방주께서 두 분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아래층에서 기다릴 테니, 속히 준비하고 나오십시오." 규염개는 진설영에게 자애로운 웃음을 보내며 방을 나갔다. 진파파는 얼른 그 두 개의 꾸러미를 풀러 보고는 경탄하며 외쳤다. "설영아, 이것 좀 보아라! 아주 예쁜 비단옷이로구나...!" 남궁세룡은 번뜩이는 눈으로 새삼 개방의 소방주를 관찰했다. 외모에 서부터 풍기는 기도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들은 이야기로는, 버려진 아이를 개방의 거지가 주워다 기른 것이 오 늘의 이 삼목신룡 무옥이라지 아마...!' 남궁세룡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지라고 하지만 개방의 소 방주라면 결코 그냥 거지는 아니다. 만일 그 일만 없었더라면...! 그의 눈은 옆에 앉은 자신의 딸, 남궁화련(南宮嬅蓮)를 향했다. 그 일 이 있은 뒤로 한참을 앓다가, 이제는 독기만 남아 새파랗게 눈을 번뜩 이는 외동딸이었다. '그 일만 없었다면... 이 젊은이에게 혼담이라도 넣어 볼 수 있었으련 만!' 하나 그 일은 너무나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 강호에 이미 모르는 사람 이 없었다. 딸의 인생은 이제 정상적인 행복을 취하기에는 이미 글러 버린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탐서랑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놈...! 찾아 내기만 한다면 이젠 내 손으로 목을 졸라 죽이리라!' 아니, 어쩌면 남궁세룡 자신이 힘을 쓸 필요도 없는지도 몰랐다. 남궁 화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처녀라면 그런 일을 당한 후에는 목을 매달거나 집 안에 틀어 박혀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나 남궁화련은 그렇지 않았다. 몇 달인가를 끙끙 앓더니, 이번에 남궁세룡이 친히 강호에 나 가겠다고 했을 때 벌떡 일어나 따라나온 것이다. -내 손으로 그놈을 잡아죽이겠어요! 그리고 만인 앞에서 떳떳하게 죽 겠어요! 어느 아버지가 딸이 자진하겠다는 것을 그냥 두고 보겠는가마는, 남궁 세룡은 그것을 허락했다. 딸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보다는, 죽 을 각오로라도 그 음적에게 복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두 분이 오셨습니다!" 규염개의 음성이 밖에서 들려 왔다. 무옥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 을 일으키자, 예의상 남궁세룡과 남궁화련도 일어났다. 들어온 것은 진파파와 진설영이었다. 아니, 그 두 사람은 어제의 두 사 람이 아니었다. 백발을 단정히 틀어 올리고 백설 같은 흰 비단옷을 차려입은 진파파는 마치 귀한 댁의 노부인처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진설영은...! 입술처럼 붉은 홍의(紅衣)가 유난히 그녀의 몸에 잘 어울렸다. 일체의 장신구는 달지 않았지만, 낡은 옷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그녀의 용 모가 날개라도 단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품에 안은 보검이 더욱 눈에 띄어, 그녀를 고귀한 무가(武家)의 자손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 두 분은 강절행성 귀회문(鬼會門)의 분들로서, 색마들에게 문파 사 람이 납치되어 그 종적을 쫓고 계십니다." 삼목신룡 무옥은 즉석에서 귀회문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내어 남궁세가 의 두 사람에게 진파파와 진설영을 인사시켰다. 남궁세룡은 처음 듣는 문파의 이름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가 결코 녹록치 않아 보였으므로 정중하게 대했다. 더구나, 자신이 남궁세 가의 가주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여겼다. 사실 진파파나 진설 영이 남궁세가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도 모르고 서. 소개를 마친 뒤, 그들은 회의를 시작했다. "최근 들어, 강호 전체에 괴사(怪事)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명문대가의 아가씨들이 흉수에게 죽임을 당하는가 하면, 이곳 개봉부만 하더라도 여염집 여자들이 말라 비틀어진 시체로 발견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 다... 잘생긴 청년들이 납치되고, 강호의 고수들이 음약에 중독되는 일 들, 이 모든 것이 다 색마들의 짓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삼목신룡 무옥이었다. "여기 남궁세가에서는 오대색마들 중에서도 특히 탐서랑을 추적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폐방에서는 만음요화를 쫓고 있습니다만... 색마들의 종적이 알려진 바가 극히 없어 조사를 하던 끝에, 하남행성 동백현 쪽에서 화금궁으로 짐작되는 소굴을 포착했습니다." 남궁세룡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도 개방에서 화금궁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 기 때문이오. 본 가의 사람들 역시 탐서랑의 종적을 쫓고 있던 중에 우연히도 화금궁이 동백산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 냈소. 그리고 탐서 랑 역시 그 근처에 있다고 짐작되오." 무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남궁세가와 폐방이 연합하여 화금궁을 치고, 그 뒤 탐서랑을 치 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귀회문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졸지에 귀회문주가 된 진파파는 짐짓 기품있게 말했다. "나쁠 건 없겠지요." "하면, 내일 아침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놈들이 낌새를 눈치채고 도 망을 치게 해서는 안 되니, 준비는 극히 비밀 리에 이루어져야 합니 다." 회의는 간결하게 끝났다. 무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손님들을 위해 폐방에서 간단한 대접을 하고자 준비했습니다. 따라오 시지요." 방 밖에서 기다리던 규염개가 손님들을 안내했다. 남궁세룡은 어쩐지 정체가 궁금해지는 진파파의 옆에 서서 걸으며 귀 회문은 언제부터 활동을 시작했느냐, 문도는 얼마나 되냐 하고 둥 말 들을 걸어 왔다. 진파파는 대충 그 대답을 얼버무리느라고 진땀을 흘 렸다. 녹의와 홍의로 더욱 대조되는 남궁화련과 진설영은 뚝 떨어져서 걸었 다. '저 소녀는 무엇 때문에 저렇게 쌀쌀맞고 말이 없을까?' 진설영은 궁금했지만, 구태여 다가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맨 뒤에 따라오던 무옥이 약간 발걸음을 빨리 해서 진설영의 옆 으로 다가왔다. 그는 진설영을 지나쳐서 앞으로 걸어가며 지나가는 말 처럼 한마디 던졌다. "붉은색이 잘 어울리는구려." 삼목신룡 무옥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지만, 진설영은 귀 밑부터 목덜미까지, 입고 있는 옷처럼 붉게 물들어 갔다. * * * 무산음호와 소운비 사이에 한마디의 대화도 없이 사흘이 흘러갔다. 사 흘째 되던 날, 마침내 먼저 입을 연 것은 무산음호였다. "고집을 피워도 소용없다. 지금부터 익히지 않는다고 해도 태원옥호공 은 너의 몸 속에서 자연적으로 성장해 갈 것이다." 소운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머뭇머뭇 망설이던 무산음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만이 너를 도울 수 있다. 네가 색마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마." 그제서야 소운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록 여전히 말은 없었지만, 소운비가 오래간만에 보인 반응이기에 무 산음호의 눈에도 생기가 돌았다. "대신,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어야 한다." 소운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부탁이니, 맹서니 그런 것들 때문에 한두 번 피해를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 무산음호는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 갔다. "앞으로 칠 일 후면 네가 이 동부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된다. 그러면 너는 바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나가거든... 내 딸을 찾아 다오." 부탁치고는 의외의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막막한 것이기도 했다. "딸을?" 소운비는 비로소 입을 벌려 무산음호에게 반문했다. "찾을 수 있는 증거는 발바닥의 붉은 점뿐이다. 그리고 누가 내 딸인 지를 아는 것은 만음요화뿐이다. 만음요화는 너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기 위해 애를 쓸 테니... 내 부탁은 네가 그녀의 말을 듣는 척하고 있 다가 틈을 보아 내 딸을 빼돌려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 는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 소운비는 무산음호의 두 눈을 깊게 응시했다. 거짓은 없어 보였다. "좋습니다." 그는 마침내 또 한 번 약속을 했다. 무산음호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펴 며 말했다. "내공 수련은 더 이상 하지 말아라. 오 성에 다다르면 걷잡을 수 없는 욕구에 휘말리게 된다. 대신 너에게 이제부터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태 원옥호공을 감소시킬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겠다!" 무릇 내공을 수련하는 자라면 그 내공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서만 수 련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내공을 감소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생 겼으니, 그가 바로 소운비였다. 그 무렵, 지상에서는 만음요화가 안달을 하고 있었다. "아직 한 달이 되지 않았는가?" "칠 일만 참으시면 됩니다, 궁주!" "시간이 더디기도 하군... 만일 다른 색마들이 그자를 뺏으러 오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아무튼 그자가 동부에서 나오는 즉시 나는 그와 혼례 를 치르겠다. 비어 있는 일공(一公)의 자리로 그를 달래 봐야지!" 만음요화의 두 눈이 불타 올랐다. 그 이유가 권좌에 대한 욕심 때문인 지, 아니면 다른 욕망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 * * "태원옥호공은 쓰면 쓸수록 그 힘이 증가된다. 너는 이것을 결코 오 성 이상으로 익혀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의 상태에서 내공 이 더 이상 증진되지 않도록 하는 구결을 알려 주겠다. 앉아라." 소운비와 무산음호 두 사람은 동굴 바닥에 마주앉았다. "나는 그 동안 너에게 다만 속성으로 태원옥호공을 전수해 주느라고 그 오묘한 내용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나 이제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무산음호의 말에 소운비가 항변했다. "나는 바로 그 태원옥호공을 버리고 싶을 뿐이오. 한데 왜 그 내용을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단 말이오?" 무산음호는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미 너의 몸은 태원옥호공의 구결에 따른 질서에 편입되어 있다. 그 저 거부한다고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묘리를 더욱 자세히 알아야 그것을 떨칠 방법도 알 수 있게 된다." 그제서야 소운비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무산음호의 이야기를 경청 하였다. 무산음호는 먼저 입을 여는 대신 손가락으로 동굴 바닥에 몇 개의 선 을 그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는 팔괘(八卦)와 육십사괘(六十四卦)에 대해 공부를 해본 일이 있느 냐?"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무산음호의 설명은 이어졌다. "끊어짐이 없이 이어진 이 선은 양(陽)을 의미하며, 가운데가 끊어진 이 선은 음(陰)을 의미한다. 이 두 개의 선이 서로 어우러져 세 줄 짜 리의 괘를 이루는데 그 개수가 모두 여덟 개다. 이것이 바로 팔괘이 다." 무산음호의 손가락이 팔괘의 그림을 하나하나 그려 보이며 그것들을 짚어 갔다. "팔괘에는 모두 의미가 있는데, 건(乾)은 하늘을 의미하며 곤(坤)은 땅 을 의미한다. 진(震)은 우레를 말하고 감(坎)은 물을 말한다. 간(艮)은 산을 뜻하고 손(巽)은 바람을 뜻하며, 이(離)는 불을 가리키고 태(兌) 는 쇠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여덟 개의 괘가 다시 서로서로 어우러져 여섯 줄짜리의 괘를 만들면 그 개수가 모두 육십네 개라 육십사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다음, 그는 감괘(坎卦)와 이괘(離卦)를 합해 그려 놓고 말했다. "그럼, 육십사괘 중에 이 괘의 의미를 너는 알겠느냐?" 소운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과 불이 합해졌다는 뜻인가요?" "괘의 의미를 표면적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렇지. 하지만 거기에는 더 깊은 뜻이 있다. 팔괘는 각각 하늘이니 불이니 하는 자연 현상을 가리 키는 것 이외에도 다른 의미들을 품고 있는데, 그 중 불은 남성을 가 리키고 물은 여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상당히 이치에 맞는 이야기인 것이, 잠자리에서도 남녀는 딱 그렇게 물과 불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잠자리에서?" "잘 생각해 보아라. 불은 쉽게 타오르지만 물로 쉽게 꺼지고, 물은 불 로 데워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쉽게 식지 않는다. 남녀가 합기 를 할 때 그 절정감에도 차이가 있는데 바로 이 불과 물의 차이와 같 다." "하아..." 소운비는 잘 들어맞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억지스러운 것 같기도 한 무 산음호의 설명에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잠자리에서뿐만이 아니다. 남녀의 성정(性情)도 역시 그와 같다 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말한 대로 감괘와 이괘는 불과 물을 나타내 는 동시에 남과 여를 말하기도 한다. 하니, 이 두 개의 괘가 합해지면 그 괘는 바로 교합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괘는 육십사괘 중에서 예순 세 번째의 괘로 그 이름을 기제(旣濟)라고 한다. 즉, 완성이라는 뜻이 다." 소운비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합을 의미하는 괘에 완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옛 선인들은 남녀 간의 교합, 음양의 화합이야말로 가장 완성된 힘이 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태원옥호공을 창시한 사람도 마 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산음호는 잠시 옛일을 회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태원옥호공은 사람이 가장 강해지는 길은 몸 안에 음양의 기운을 통 일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기본으로 삼고 있다. 하여 수련자가 남 자라면 자신에게 없는 음의 힘을, 여자라면 양의 힘을 끌어들일 수 있 도록 기초를 닦는 것이다. 오 성 이전까지는 몸 안의 잠력을 키우는 단계인데, 이때의 진전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일단 배우기 시작하면 단지 숨만 쉬고 있어도 그 공부가 저절로 깊어진다. 오 성을 넘으면 적극적으로 음의 힘을 수용하는 단계인데, 이때가 가장 격렬히 여인의 몸을 원하게 될 때이다. 그리고 십 성을 넘으면 그가 설령 남자라고 하더라도 몸 안에 자연히 음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 다." 소운비는 물었다. "한데, 왜 혼혼옥잡에 제압되는 것입니까?" 무산음호는 새삼 원한이 되살아나는지 이를 갈아붙였다. "그 마병은 사람에게 엄청난 양기를 퍼붓는 지독한 것이다. 사람이 양 기가 지나치면 그것 역시도 치명적인 것이 되어 칠공으로 피를 쏟는 다. 혼혼옥잡에 중독되어 둑을 넘은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양기는 태 원옥호공으로 균형을 잡은 음양의 힘을 무너뜨리는데, 양기가 치솟을 수록 음기를 더욱 보강해 균형을 잡아 주지 않으면, 나 역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해한 것으로 보이자 무산음호는 다 음 이야기를 이어 갔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이다. 현재 너의 몸 속에서 자라나기 시작 한 태원옥호공의 힘을 최대한 눌러 성장을 막는 것이다. 오 성을 넘으 면 미친 듯이 여자를 찾아 헤매는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태원옥 호공을 익힐 때는 황하의 역행으로 진기를 운용해 왔으니, 그것을 감 소시키는 방법은 그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소운비는 무산음호가 가르쳐 주는 대로 천주혈로부터 장강혈로, 용천 혈로부터 회음혈로 진기를 운용했다. 이 방법은 태원옥호공에 의해 증 진된 내공을 거꾸로 감소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태원옥호공은 일단 익히기 시작하면 그냥 내버려두어도 증진이 되기 때문에 이 방식으로 운기할 경우 간신히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 이다. "이것만 한다면 너는 결코 오 성의 수준을 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앞 으로 결코 내공을 쓰지 않도록 조심해라. 쓰는 순간 태원옥호공이 발 동하여 오 성의 선을 넘게 될 것이다. 일단 오 성을 넘고 나면, 그 뒤 로는 돌이킬 수가 없다." * * * 작별의 순간이 왔다. 천 개의 계단이 뻗어 올라간 공지 앞에서 무산음호가 갑자기 소운비에 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소운비는 그의 손을 맞잡았는데, 손에 문득 잡히는 것이 있 었다. 작은 단약이었다. 무산음호가 말했다. "만일 부득이하게 힘을 써서 태원옥호공이 오 성을 넘게 되거든 이 단 약을 먹도록 해라." "이것은?" "일 각 이내에 이 단약을 먹고 운기조식을 한다면 오 성에서 단번에 십 성으로 넘어설 수 있을 거다. 이 단약엔 태원옥호공을 폭발시켜 주 는 힘이 있다." 소운비와 무산음호의 눈이 마주쳤다. 간밤에 무산음호가 잠도 자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일이 떠올랐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무산음호는 쑥스러운 듯이 씩 웃었다.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서 내가 가진 비법으로 이 단약을 만들었다. 만일 지금 먹고 나간다 해도 금방 효과를 볼 수 있다. 어떠냐? 먹을 테냐?"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강한 무공이라 해도 무산음호가 전에 저질렀던 그런 끔찍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꺼려지는 것 이었다. "그럴 줄 알았지. 그러니 만일의 상황을 위해서 가져 가기만 해라." 약을 건네 주는 무산음호의 손길이 어쩐지 힘이 없게 느껴졌다. "글쎄... 이것으로 내가 죄값을 치를 수 있을지..." 그는 뜻 모를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믿을 만한 사람이야. 나처럼 의지 박약하지 않으니까...!" 소운비는 묵묵히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서 있었다. "내 딸을 부탁하고 싶어. 그래서 주는 거야. 강호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곳이니까... 만일 부득이한 사정으로 오 성의 공력을 넘게 되면 그 단약을 먹게. 빠른 시간 안에 십일 성에 다다르게 될 거야. 십 성을 넘으면 자신의 힘으로 음욕을 조절할 수가 있어. 단, 혼혼옥잡만 만나 지 않는다면 말이야...!" 무산음호는 불현듯 고개를 들더니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는 소운비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계단을 올라가게. 늦으면 추접파파가 수상하게 여길 거야. 얼마 나 성취했느냐고 묻거든, 오 성을 이루었다고 하게. 그리고 색마 시늉 이라도 좀 내보라구." 소운비의 손을 뿌리치며 무산음호는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동굴 안쪽으로 사라져 갈 때, 소운비는 무엇인가 그에게 못다 한 이야 기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천 개의 계단을 다 올라가, 돌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던 추접파파를 만 났을 때에야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소운비는 끝내 무산음호에게 사부라고 불러 주지를 못했던 것이다. 무산음호는 동굴 벽 틈에 몸을 숨기고 소운비가 걸어나가는 것을 묵묵 히 지켜보았다. 그의 모습이 천 개의 계단 위쪽으로 차츰 사라져 가자 무산음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저놈은 알까? 제 손에 쥐여 준 단약이 나의 본원진기(本源眞氣)를 뽑 아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나의 무공도, 생명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 다는 것을...?' 하나 무산음호는 결코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슴 속 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마치 젊은 시절, 무공의 성취를 이루고 무산을 내려오던 그날처럼... * * * "얼마나 성취했습니까?" "오 성을 익혔소." "하면, 어떠십니까?" "궁주에게 가서 지난 번에 못다 나눈 이야기나 해보자고 전해 주시 오." 화금궁은 갑작스럽게 잔치 준비로 바빠졌다. 마침내 비어 있던 일공의 자리가 주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제7장 오해(誤解) 화금궁의 바깥, 동백산 일대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센 비가 내 리고 있었다. 그 빗속에 번뜩이는 수백 개의 눈동자들... 산중의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화금궁의 흔적을 찾는 개방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이었다. 진설영도 그 속에 있었다. 우의(雨衣)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까지 전해 오는 냉랭한 습 기에 그녀의 입술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사부님은 어디로 가버린 거야?' 앞에 가던 사부의 종적을 놓친 것도, 시야를 막는 이 무지막지한 빗줄 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함께 온 개방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사방에 있을 텐데도, 진 설영은 마치 우막(雨幕) 안에 홀로 갇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때, 우막 저편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이걸 입어요." 진설영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장포(長袍)를 걸쳐 주는 그 손은 삼목신룡 무옥의 것이었다. 진설영은 이 두터운 우막이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가려 주기만을 바 랬다. "날 잘 따라오시오. 그렇게 가다가는 혼자 길을 잃겠소." 무옥은 등을 돌려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진설영은 머뭇머뭇 그 뒤를 따랐다. "찾고 있는 사람이 당신의 사형이라 했소?" "예." 처음으로 진설영이 무옥의 말에 대답을 했다. "단지 사형일 뿐이오?" 하나 되돌아오는 무옥의 질문이 진설영의 말문을 다시 막히게 했다. 과연 소운비는 그녀에게 단지 사형일 뿐인 것일까? 그 이상의 어떤 의 미가 있는 것일까? 전에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벗이고, 오빠이며, 의지할 수 있는 남자였 던 소운비. 하지만, 지금도 똑같은 것일까? 진설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빗속을 앞서 걸어가는 무옥 역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 보다 더 가슴 떨리는 중얼거림 하나를 남겨 놓았다. "그러길 바라겠소...!" 진파파는 누구보다도 먼저 화금궁으로 들어가는 옥문을 발견했다. 그 녀가 유달리 서둘렀던 탓이었다. '운비 이놈이 혹시 이곳에 있기라도 하면... 설영의 눈에 띄기 전에 내 쫓아 버려야 한다.' 그것이 진파파를 서두르게 만든 이유였다.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오늘도, 역시 두 명의 소녀가 옥문 입구를 지키 고 있었다. 하나 설령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두 소녀는 자신들의 코앞을 스쳐 번개처럼 옥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그림자를 결코 알 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 * * 화금궁 안이 온통 붉은색으로 장식되었다. 붉은색은 혼례를 의미한다. 해서 혼례를 홍사(紅事)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추접파파의 뺨까지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신랑의 예복을 입은 소운 비를 보고 좋아하는 것이다. "감축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추접파파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그렇게 말했다. 기분이 좋을 때면 으레 그러는지, 노파의 두 귀가 팔락거렸다. 소운비는 태연히 웃는 얼굴로 그 축하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 다. 그는 일단 만음요화와 단 둘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만 되면 뭔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데 이 여자는 어디에 있는 거지?' 동부에서 나와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그는 단 한번도 신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추접파파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소운비에게 신이 나서 말했다. "궁주님을 찾으십니까? 성미가 급하기도 하시지... 너무 그렇게 안달하 지 마십시오. 곧 뵙게 되실 겁니다. 지금 삼녀대전에서 기다리고 계십 니다." "삼녀대전?" "그곳이 신방이지요. 호호호... 자, 오른손을 내미십시오." 소운비가 무심코 손을 내밀자, 추접파파는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은 가락지를 끼웠다. "이건 뭐요?" "일공께서 궁주님과 첫 번째 교접을 끝내면 이 반지를 왼손으로 옮겨 끼웁니다. 그리고 만일 궁주께서 극도로 만족하신다면 금가락지로 바 뀌어지지요." 추접파파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옛날 황실에서 후궁들을 다루던 풍습이지요. 궁주께서는 스스로를 측 천무후(側天武后)와 같은 여황제로 생각하시기 때문에 황실의 법도를 많이 따르신답니다." 황실의 법도를 따른다고는 하지만, 남녀의 역할이 정반대로 뒤바뀐 것 이 아닌가. 소운비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첫 번째 교접은 매우 중요합니다. 귀하게 되실 분들이니 각별히 더욱 그렇지요. 자, 이제 노신을 따라오십시오." 비록 시늉으로만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치러 보는 혼례식이 다. 추접파파를 따라가면서 소운비는 붉게 치장된 아늑한 신방을 예상 하 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침내, 세 번째로 보게 된 삼녀대전에 도착하였을 때... 소운비는 기가 막혀 그 자리에 돌처럼 굳고 말았다. 화금궁 안으로 들어선 진파파는 사람들이 모두 한 건물로 들어가고 있 음을 알고 그 뒤를 따라갔다. '무슨 짓인가 벌이려는 모양인데?'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번개 같은 신법으로 대전의 앞쪽에 있는 거대한 여인상 뒤에 몸을 숨겼다. 여인상 앞의 제단 주변으로는 침상에 하듯이 붉은 휘장이 둘러쳐져 있 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꿈틀거리는 여인의 나신이 보였다. 진파파가 눈의 힘을 돋우어 그 여인을 보니, 진설영이 이야기해 주었 던 다섯 색마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정말 음란하기 짝이 없게 생긴 계집이로구나!' 그때, 대전 안에 모여 있던 화금궁의 여인들이 일제히 입구 쪽을 향해 환성을 질렀다. 진파파의 시선도 자연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 시선에 걸린 것은 바로 소운비였다. "이것이... 이것이 신방이오?" 소운비는 대전 안을 둘러보며 떠듬떠듬 물었다. 추접파파는 당연하다 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둘러싼 신방이라니! 소운비는 얼이 빠질 지경 이었다. 어떻게 그 여인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서 제단 앞까지 갔는지 모른다. 휘장이 걷혀지자 그 속에 앉아 있던 만음요화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여보... 이제 당신을 이렇게 부르겠어요. 이것은 제가 당신에게 드리는 선물이에요." 다소곳한 신부처럼 속삭이며 만음요화가 소운비에게 비파를 내밀었다. 귀회루에서 그녀가 챙겨 가지고 온 소운비의 비파였다. 비파를 받는 순간 소운비는 오래 전에 헤어진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 가웠다. 하지만 그 반가움을 즐길 틈도 없었다. "어서 와요, 사랑스러운 사람. 그 간의 성취가 어떠했는지 한번 알아봅 시다." "아, 저...!" "부끄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추접파파가 지팡이로 슬쩍 소운비를 떠다밀었다. 소운비는 몸의 중심 을 잃고 비파를 떨구며 제단 위로 쓰러졌다. 물컹...! 만음요화의 따뜻한 육체가 그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 열려졌던 휘장이 다시 닫혔다. "와아아아!" 대전 안에 있던 화금궁의 여제자들이 일제히 환호를 질러 올렸다. * * * 하필 오늘이 순번(順番)이라 궁주의 신방을 구경하지 못하게 된 두 명 의 백의소녀. 옥문을 지키던 그 두 소녀는 어지간히 재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비는 금세 두 소녀의 피를 씻어 내렸다. 마침내 화금궁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 낸 개방과 남궁세가의 사람 들이 두 소녀의 시신을 냉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젠 달아나지 못한다, 요녀!" 규염개가 뇌까렸다. "사부님이 보이질 않아요!" 맨 끝에 남아 있던 진설영이 당황하여 말했다. 그녀의 옆에 붙어 있던 삼목신룡 무옥이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대답했다. "무공이 뛰어나신 분이니 걱정없을 거요. 아마도 우리보다 먼저 안으 로 들어가신 듯싶소." 그래도 그녀의 얼굴에서 걱정이 가시지를 않자, 무옥은 목소리를 낮추 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되도록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시오." 그리고 무옥은 중인들을 향하여 외쳤다. "그럼, 들어가도록 합시다!" 두 눈에 분노의 불길을 담은 개방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소리없이 화 금궁 안으로 짓쳐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자, 이제 우리들만의 시간을 가지도록 해요." 만음요화의 손길이 그의 옷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옷은 그 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 저... 저...!" 각오는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당황스런 마음을 금할 길 없는 소운 비였다. 만음요화는 그가 주저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두 눈에 독기를 띠었다. "설마, 이 일이 싫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소운비는 질겁을 하며 부정했다. "무슨 말씀을! 절대로 그렇지 않소! 절대로!" 여기서 만일 만음요화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무산음호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것은 요원해지고 만다. 어떻게 해서든 이 고비를 넘겨야 했다. "단지 나는 방사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라...!" 소운비는 애써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어 만음요 화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뭉클... 세상에서 이토록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것이 있을까? 소운비는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한데 만음요화는 독기를 풀며 저 스스로 소운비의 손바닥 안에 자신의 가슴을 비벼대는 것이었다. "순서라니? 어떤 순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서 가르침을 주세요." 소운비의 등뒤에서는 진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음... 통현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일단은 우리 두 사람이 자리에 누워야 하지 않겠소?" 만음요화는 희색을 띠었다. "통현자의 규범대로 첫 방사를 치르실 생각이시군요? 좋아요, 일단은 눕도록 해요." 다음 순간 소운비는 만음요화의 팔에 이끌려 제단 위에 드러눕게 되었 다. 만음요화는 두 팔로 소운비를 끌어안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자, 이제 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소운비는 코앞의 이 열정적인 여인이 마흔도 넘는 요부라는 사실을 도 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말했다. "일단 그대는 먼저 똑바로 누워 팔다리를 쭉 펴시오." 만음요화는 좋아라고 시키는 대로 했다. 소운비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기 위해 천천히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바를 설명하겠소. 나는 이제 그대 위에 올라가 다리에 엎드려 몸을 마주 댈 것이오. 그리고 그대의 몸 속으로 들어가 기 위해 입구를 부드럽게 어루만질 것이오." "좋아요! 그렇게 하면 나의 계곡은 촉촉이 젖어 그대를 맞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어서 그렇게 해줘요!" "그러고 난 뒤 나는 커다란 돌이 깊은 계곡에 안겨 있는 것같이 하면 서 구천일심법(九淺一深法)을 행할 것이오. 아홉 번은 얕게, 한 번은 깊게 찌른다는 것이오." "아아, 듣기만 해도 좋아요! 어서 올라오세요!" "잠깐만 더 들어 보시오. 그런 뒤 나는 종횡으로도 찌르고 옆으로 끌 기도 하며 옆으로 밀기도 하고, 천천히 왕복하다가 빠르게 움직이고, 혹 깊게 하다가 얕게 하면서 한숨 돌린 뒤 기를 출입시키는 방식으 로..." 소운비가 진땀을 흘리며 설명을 계속하려 하자 만음요화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언제까지 입으로만 하실 거예요? 어서 이리 오세요!" 어쩔 수가 없었다. 소운비는 만음요화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나신 위 에 눕게 되었다. 만음요화는 소운비의 체중이 자신의 몸 위에 실려 오자, 그의 뺨을 어 루만지며 다정스럽게 속삭였다. "여보! 나는 숱한 남자들을 겪어 보았지만 오늘만큼은 마치 한번도 꿰 어 본 적이 없는 숫처녀가 된 기분이군요. 부디 살살 다루어 주세요." 만음요화의 능청에 소운비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허리 위 의 생각과 허리 아래의 생각은 다르기만 한 것인지, 그의 아래쪽은 어 느새 서서히 힘을 받아 가고 있었다. 아마도 사성의 태원옥호공이 그 힘을 발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이전에 삼녀금침대법 을 시행할 때보다는 많이 기세가 누그러졌으나, 여전히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허리 아래에서는 태원옥호공이, 허리 위에서는 진파파에 의해 제압된 힘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으음...!" 소운비가 이마를 찌푸리며 신음하자, 몽롱하던 만음요화의 두 눈이 다 시 의심으로 번뜩였다. '앗차!' 소운비는 더 이상 그녀를 의심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는 만음요화의 두 가슴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된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머릿속의 고통은 터져 나갈 듯이 치솟았고, 몸 속에 숨은 짐승의 욕망은 그보다 더 분출되었다. 그는 허리를 높게 들었다. 계곡의 입구는 흠뻑 젖어 열려 있었고, 소나무는 힘껏 가지를 뻗은 상 태였다. 이제 내리찍기만 하면, 모든 일은 끝나게 될 것이다. 그때, 대전의 바깥에서 요란한 외침이 들려 왔다. "침입자다!" 삼녀대전의 바깥쪽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만음요화의 남자 애첩 백이 십 명이었다. 침상에서야 천하무적이지만 무공으로는 속수무책인 그들이었다. 개방 의 고수들이 휘두르는 팔다리에 낙엽처럼 쓰러져 가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일뿐이었다. 하나 그래도 그들이 악착같이 침입자들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만음요화의 불 같은 성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방을 방해받는다면 그녀가 얼마나 화를 낼 것인가? 그리고 그 화가 나중에 누구에게 돌아올 것인가? 그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하나 역부족이었다. "자, 음녀는 저 안에 있소! 조금만 힘을 냅시다." 규염개가 사람들을 격려했다. 삼녀대전의 문이 열리는 것은 얼마 남지 않았다. "웬 소란인가?" 만음요화의 날카로운 질문에 대답한 것은 추접파파였다. "개방과 남궁세가에서 온 사람들인가 봅니다." 하나 만음요화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그들을 들어오게 해라! 화금궁의 이름이 헛되 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마. 화영금진(花營錦陣)을 펼쳐라!" 냉정하게 명령을 내린 만음요화는 허리를 들어올렸다가 멈춘 소운비에 게 다시 달콤하게 속삭였다. "여보! 걱정하실 것 없어요. 어서 일을 계속하도록 하세요. 나는 지금 흥분이 되어서 미칠 지경이에요." 소운비는 정반대였다. 그는 잠깐의 틈으로 이성을 회복한 상태였다. '이 여자와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야 한 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고 나면 무슨 방법이 생길 것이다...' 소운비는 미안한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안 되었구려. 나는 본래 겁이 많아 이렇게 외인들이 쳐들어오는 곳에서는 힘이 나지 않소. 보시오, 힘을 잃었지 않소?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으니 당신은 일단 적들을 퇴치하는 데 힘을 쏟도록 하시오." 만음요화는 도리질을 했다. "아니, 안 돼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 합기하고 말겠어요. 잃으신 힘은 제가 금방 되찾게 해드리지요. 자아, 편안하게 앉으세요." 소운비는 만음요화의 몸에서 엉거주춤 내려서면서 물었다. "무슨 방법으로 이미 빠져 나간 힘을 되찾게 한다는 말이오?" 만음요화가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대답했다. "음경지벽(陰莖 癖)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여인상의 뒤에 숨어 있던 진파파는 소운비와 만음요화가 벌이는 짓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소운비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그녀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혀를 찼다. '내가 저놈이 아무리 얌전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믿을 수가 없더니, 과 연 저렇게 음탕한 녀석이었구나!' 진파파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설영이가 더 이상 저놈을 찾아다니지 않도록 만들 수도 있겠 구나!' * * * 끼기깅-! "음녀는 어서 나와 무릎을 꿇어라!" 마침내 삼녀대전의 문이 열렸다. 하나 기세 좋게 뛰어든 개방과 남궁 세가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 굳은 듯이 멈춰 서고 말았다. 수백 개의 화살이 날아오고 창검이 번뜩였다고 해도 그들은 이만큼 놀 라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천 명의 여자들이 발가벗은 채 일정한 대형을 이루고 서 있는 광경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단지 벌거벗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서고, 다른 사람은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는 매달려 젖가 슴을 핥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쪽에서는 한 여인의 다리 사이에 두 여자가 달려들어 치태를 보이고 있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학 두 마리가 서로 목을 얽고 있는 듯 여인들의 몸 이 얽혀 있고, 가을철의 개가 흘레를 붙듯이 엎드린 여인의 등뒤에 다 른 여인이 올라탄 광경도 있었다. "이... 이런!"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여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춘화도와 같았 다. 대전의 맨 안쪽 가운데에 있는 붉은 휘장으로 둘러쳐진 제단 앞에 마 찬가지로 벌거벗은 노파가 서 있었다. 두 귀를 흉물스럽게 펄럭거리며 시든 가지 같은 두 개의 가슴을 아낌없이 드러낸 그 노파는 바로 추접 파파였다. 노파의 입에서 섬뜩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크흐흐흐, 어떠냐? 이것이 바로 본 궁의 화영금진이다. 화려한 진영의 다양한 전투대형이라는 뜻이지. 어디 한번 뚫고 와봐라!" 벌거벗은 여인들의 진이란 통과하기 어렵다기보다는 곤혹스러운 것임 에 틀림없었다. "얘야! 보지 말아라!" 남궁세룡은 이 흉악한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남궁화련의 얼굴을 가렸 다. 다른 사람들도 선뜻 진 속으로 뛰어들지 못해 망설이고만 있었다. 겁 이 나서가 아니었다. 벌거벗은 여인들과 싸움을 하다 보면 분명 살이 닿고 숨결을 나누게 될 것인데, 그것은 정파의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가 힘든 일이었다. '행여라도 나중에 음녀들과 희희낙락했다는 오해라도 사게 되면...!' 사람들이 모두 그런 생각으로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촤아앙! 진설영이 보검을 뽑아 들며 처절하게 외쳤다. "무엇을 망설이고들 계십니까? 이까짓 것이 두려워서 그러십니까? 흙 탕물에 손을 더럽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진흙 속에 숨은 괴물을 퇴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녀는 몸을 날려 화영금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삼목신룡 무옥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정감 어린 눈으로 진 설영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진 낭자의 말이 옳소! 오명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리고 무옥도 진설영의 뒤를 따라 화영금진의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개방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서로의 눈빛을 확인했다. "과연 그렇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주저해야 한단 말이오? 저것은 사 람이 아니라 짐승들의 진이오. 주저없이 깹시다!" "진 낭자와 소방주님의 용기를 본받읍시다!" 그리고 그들 역시 벌거벗은 여인들의 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진설영으로 하여금 물불 안 가리고 진 속으로 뛰어들게 만든 것은 제 단의 붉은 휘장 앞에 떨어져 있는 물건, 너무나도 눈에 익은 낡은 비 파라는 사실이었다. '사형...! 사형!' 그녀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화금궁 사람들의 나신 위로 과감하게 검을 내리그었다. "바, 바깥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가 본데...!" "상관없어요. 얼마 못 갈 싸움인걸요... 자,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음...!" '음경지벽'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소운비는 대경실색하여 자꾸 뒤로 물 러나려고 했지만, 만음요화는 먹이를 문 들개처럼 그를 놓아 주지 않 았다. "나, 나는 당신에게 이런 수고를 끼칠 수가 없소." 불에 데인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소운비가 도리질을 했다. 하나 만음 요화는 요지부동이었다. "호호, 너무 그렇게 미안해 하실 것 없어요. 저의 음경지벽이 끝나거든 당신께서 제게 외음지벽(外陰 癖)을 행해 주시면 되지요." 지( )란 혀로 핥음을 의미한다. 구태여 외음지벽이 무엇인지를 설명하 지 않더라도 그 뜻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소운비의 얼굴은 달아오른 정도가 아니라 숫제 불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자꾸만 파고 들어오는 만음요화의 얼굴을 피하면서, 그는 오직 한 가 지 소원만을 부르짖고 있었다. '바깥의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서 나를 좀 구해 주시오!' 화영금진과의 대결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겉모습만 기괴하고 음탕할 뿐 별다른 위력은 없을 것으로 짐작했던 화금궁의 여인들은 마치 교접 을 하듯이 팔과 다리로 죽자고 적들에게 매달렸다. 한 여인에게 잡힌 개방 사람이 당황하여 팔다리를 휘저으며 뿌리치려 고 들라치면 서너 명의 여인들이 그에게 매달려 땅바닥에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면 한 여인이 그의 콧구멍에 입을 대고 숨을 들이 마셨다. 쑤아아앙!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그 개방 사람의 눈이 허옇게 뒤집혔다. 진기 를 빨린 것이다. "계집들에게 결코 잡히지 말도록 하시오!" 규염개는 죽장을 휘두르며 주변 사람들에게 외쳤다. 하나 그도 여인들 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최대한의 능력이었다. 곤란을 당하지 않고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닌 여자의 몸으로 검을 바람 개비처럼 돌리며 짓쳐 나가는 선두의 진설영뿐이었다. 아니,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바로 뒤를 날듯이 쫓아가는 삼목신룡 무옥이었다. 퍼어엉! "아아악!" 그는 여인들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도 장력만으로 그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선두의 두 사람은 이미 화영금진을 절반 가량이나 뚫으며 제단으로 접 근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싸움이란 두 사람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옥은 뒤쪽에서 전혀 전진을 하지 못하고 있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한 순간 그의 눈빛이 우울해지더니, 달려드는 여인들을 향해 한차례 매서운 장력을 쏘아 내고는 바람처럼 진설영을 따라잡았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옆에서, 무옥이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소. 일단 후퇴하는 것이 나을 듯싶은데?" "안 돼요!" 진설영은 악을 썼다. "저 안에 사형이 있어요. 그를 구해야 해요!" 무옥은 진설영이 가리키는 붉은 휘장 안의 제단을 응시했다. 희미하기 는 하지만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무옥은 진설영의 절박한 얼굴을 의미있는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무엇인가 포기하는 것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사람은 구해 가도록 해야겠지!"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손을 내뻗어 막강한 장력을 쏟아 내면서 한소 리 우렁차게 외쳤다. "만음요화는 어서 나와라! 개방의 삼목신룡 무옥이 왔다!" "구, 궁주! 개방에서 왔다고 하지 않소? 만만한 적이 아닌 것 같으니 어서 나가서 그대가 상대를 해야...!" 하나 만음요화는 좀처럼 소운비의 몸에서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걱정 마세요, 귀여운 사람. 개방이 아무리 영명을 떨치고 있다고 하나 이 만음요화의 앞에서는 어린애에 불과해요. 그들이 왜 나를 이토록 잡으려고 하는지 아세요?" "글쎄?" 소운비는 어떻게든 만음요화에게 이야기를 시키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호호, 그들은 강호에 소문이 나지 않도록 무척이나 안달을 하고 있지 만 다 쓸데없는 짓이지요! 개방의 노방주인 백미노개(白眉老 )가 병 으로 앓아 누웠는데, 무슨 병인 줄 아세요?" 만음요화는 득의 만만하여 말했다. "바로 나와 교접을 하다가 채양보음술(採陽補陰術)에 당해 쓰러진 거 지요! 얼마나 창피한 일이겠어요. 정파의 고명하신 인물이, 그것도 죽 을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네가 그런 일로 쓰러지다니..." 소운비는 열심히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 그래서 저들은 당신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 거요?" "그런 이유도 있고, 또 백미노개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 나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자,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고..." 소운비의 정신이 다시 아득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저 뒤에서 화영금진에 휘말려 허둥대고 있는 동안, 진 설영과 무옥만이 제단 앞에 버티고 선 추접파파 앞까지 다다르게 되었 다. 추접파파가 키득키득 웃으며 귀를 펄럭거렸다. "젊은 연놈이 대단하구나. 네놈이 개방의 삼목신룡이냐? 안 그래도 궁 주께서 네놈을 만나고 싶어하셨다." "천하의 음녀가 무슨 일로 나를?" 무옥은 담담하게 되물었다. "너 같은 애송이는 일단 침상에서 궁주께 몇 수 가르침을 받아야 젖비 린내가 좀 가실 테니까 말이다." 무옥이 피식 웃었다. 그는 턱끝으로 붉은 휘장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 다. "만음요화에게 전해라. 내가 창녀를 고를 수는 있지만, 창녀가 나를 고 르는 법은 없다고 말이다." 추접파파의 두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 한마디로 네놈의 목숨은 이미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말이 끝날 때, 추접파파의 지팡이가 앞으로 쭉 뻗어 나왔다. 진설영과 무옥을 절묘하게 동시에 노리고 들어가는 수법이었다. "비키시오!" 무옥은 부드럽게 진설영을 밀어 냈다. 그의 손이 지팡이 끝에 살짝 휘 감기는가 싶었다. "절(折)!" 손목을 지팡이에 감은 무옥이 구결을 외치며 힘을 주었다. 우지끈! 그러자 이게 웬일인가! 추접파파가 반평생을 같이 해온 지팡이가 가운 데에서 뚝 부러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노한 추접파파는 마치 원숭이처럼 몸을 날려 무옥에게로 달려들었다. 축 늘어진 젖가슴이며 말라 비틀어진 사타구니까지 몽땅 드러낸 그 꼴 은 정말 추해 보였다. 무옥은 어깨를 흔들어 노파의 발광을 피해 냈다. 하나 발광처럼 보이 는 것은 겉모습뿐, 노회한 추접파파는 고개를 돌려 입 안에서 무수한 독침들을 뱉어 냈다. 슈슈슉! 거리는 너무나 가까웠고, 무옥도 진설영도 모두 그 독침의 영역 안에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갑자기 여인상의 뒤편에서 한 줄기 막강한 힘이 몰아쳐 왔다. 그 힘은 추접파파의 독침들을 모두 거꾸로 되돌리고, 추접파파의 몸까지도 나 동그라지게 만들었다. "크아악!" 자신이 뱉었던 독침을 하나도 남김없이 온몸으로 회수하고 만 추접파 파는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대전 바닥에 떨어졌다. "궁주...! 궁주...! 어서 기관을 작동하소서...!" 추접파파는 숨을 거두기 직전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그녀의 귀가 움 찔움찔하더니 멈추었다. 그것이 추접파파의 최후였다. 소운비의 사타구니를 파고들던 만음요화의 동작이 뚝 멈추었다. 방금 전까지 육욕으로 헐떡이던 여인의 얼굴인가 싶게, 그 얼굴은 싸늘했다. "이것들이...!" 그녀는 이를 갈며 말했다. "총관의 원수를 갚아 주마!" 만음요화의 손이 휘장 사이로 늘어진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소운비는 자신이 앉아 있는 제단의 아래쪽이 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추접파파를 물리친 그 알 수 없는 힘이 어디서 온 것일까 하고 무옥은 세 개의 여인상을 쏘아보았다. 그때, 제단이 별안간 변화를 일으켰다. 아랫부분이 스르르 밀려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위험하오!" 무옥은 기관이 발동되는 것을 감지하고 재빨리 진설영의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물러 나왔다. 하나 위험은 없었다. "저것은...?" 대신 제단 아랫부분에서 밀려 나온 석판(石版) 위에는 한 개의 작고 투명한 옥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바닥 위에 얹힐 정도로 작고 아름다운 그 향로의 아랫부분에는 석탄 이 들어 있었고, 위쪽에는 붉은색의 향가루가 쌓여 있었다. 침대에서 쓰는 향로, 즉 잡( )이었다. 만음요화의 명성을 떨치게 한 마물(魔物), 혼혼옥잡이 나타난 것이다! 혼혼옥잡이 나타나자, 화영금진을 이루고 있던 여인들의 동작이 뚝 그 쳤다. 그녀들은 부둥켜 잡고 있던 적들을 놓아 주고는 홀린 듯이 혼혼 옥잡을 향해 부복했다. 그 입 속에서는 하나같은 진언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시아자맹 청아자농 감유도모아자반수기앙...!" 간신히 여자들의 손에서 풀려난 개방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악에 받 쳐 그런 그녀들을 내리치려고 할 때였다. "저, 저걸 보시오!" 남궁세룡이 혼혼옥잡을 가리켰다. 혼혼옥잡의 뚜껑 위에는 네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으 로 네 개의 연기가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각각 푸른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그 연기들은 허공으로 퍼져 올라 가더니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었다. "저럴 수가...!" 네 가지 색의 연기는 차츰 형체를 이루어 갔다. 이윽고 푸른색은 용의 형상을, 흰색은 호랑이의 형상을, 붉은색은 주작(朱雀)의 형상을, 검은 색은 현무(玄武)의 형상을 갖추게 된 것이다. 연기로 이루어진 형상들에 어찌 생명이 있을까마는, 이 마물에게는 그 런 힘이 있는 모양이었다. "카아아아아악!" 제일 먼저 형체를 갖춘 푸른 용의 형상이 기괴한 울음을 토해 내더니 코앞에 있는 진설영과 무옥을 위협했다. 잡아먹을 듯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던 청룡은 갑자기 멈칫하더니 괴 롭게 숨을 토해 냈다. "카아아악!" 그리고 그 괴물은 더 이상 두 사람에게 접근을 하지 못했다. 대신 제단 앞에 도사리고 앉아 두 사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었다. 나머지 세 괴물은 함께 허공을 날아가 개방과 남궁세가의 사람들 위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으아앗!" 괴물들의 몸은 연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잡아먹을 듯이 다가와서는 사 람들의 몸 속으로 마구 흡수되어졌다. 연기에 닿은 사람들은 미칠 듯이 괴로워하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어떤 사람들은 눈과 귀와 코로 거무죽죽한 피를 토해 냈다. 양기가 과도하게 치솟아 그렇게 된 것이었다. 무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 낭자! 어서 가야겠소. 더 이상 끌면 피해가 너무 심하오." "안 돼요! 사형을...!" 연기로 이루어진 청룡은 기음을 토하며 접근을 불허하고, 붉은 휘장 앞쪽에 떨어져 있는 비파는 진설영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진설영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 세 개의 여인상 뒤에서 다 시 한번 바람이 불어 왔다. 그 바람이 이번에 공격한 것은 붉은 휘장이었다. 그것은 마치 우연 같았다. 봄바람에 펄럭이는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휘장이 젖혀지고, 그 안에 있 던 만음요화와 소운비의 모습이 드러난 것은. 사람이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진설영은 소맷자락으로 눈을 씻고 또 씻어 보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물론 사형이 만음요화와 함께 있을 수는 있었다. 어차피 색마들 중 한 사람에게 납치되었던 그이고, 그것이 만음요화가 아니라는 법은 없었 으니까. 하지만 만음요화와 함께 있는 사형의 모습이라면, 결코 흔들림없이 요 녀에게 대항하고 있는 것이라야 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이렇게 벌거벗은 모습으로 음녀와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은 아니라야 했다. "사형...?" 진설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사람이 사형은 아닐 것이라는 뜻이었다. 소운비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휘장이 걷어졌을 때 진설영만큼이나, 아니 진설영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소운비였다. 그는 손끝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하물며 입을 열어 지금의 상황을 변명할 수는 더 더욱 없었다. 만음요화는 흥미롭다는 듯이 두 사람 사이를 관찰하더니 다정한 태도 로 소운비의 목에 팔을 감았다. "여보, 외인들이 방해를 하는군요. 모두 쫓아 내버릴까요?" 그러더니 청룡을 향해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어서 잡인들을 물리쳐라!" 청룡은 진설영과 무옥을 향해 위협하듯 거친 숨소리를 뱉어 냈지만, 그 이상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상하군...?' 만음요화는 새삼스레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특별히 무슨 술법 을 쓰는 낌새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진설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그리고 그 안에서 울음섞인 절규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사형이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진 낭자!" 무옥은 몸부림치는 그녀를 잡았다. 진설영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사형이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몰랐어..." 진설영은 느닷없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무옥이 혼혈(昏穴)을 짚은 것 이다. 그는 진설영을 안고 제단 앞에서 물러섰다. 청룡이 위협적으로 그를 향해 달려들자, 무옥의 오른손에서 장력이 밀려 나왔다. 퍼엉! 장력은 청룡의 머리 부분을 흩어 놓았다. 그리고 흩어진 연기가 다시 모이기 전에 그의 몸은 대전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바람처럼 빠른 몸놀림이었다. "퇴각!" 무옥의 입에서 호령이 울려 나왔다. 그렇게 해서 진설영이 점점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동안 소운비는 한마 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혼혼옥잡에서 튀어나온 네 마리의 괴물에게 혼이 난 정파의 인물들이 부상자와 사망자를 부축해서 빠져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화금궁의 여인들이 그들을 쫓아 대전을 나가는 모습을 볼 때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대전은 텅 비고, 오직 만음요화와 자신만이 제단 위에 남게 되 었을 때, 소운비의 눈에서 뿌옇게 눈물이 스며 나왔다. 그는 그 액체가 뺨 위로 떨어지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설영...! 설영...!' 가슴부터 목까지 무엇인가 콱 틀어막히는 것 같은 슬픔이 그를 지배하 기 시작했다. 만음요화가 무슨 말로든 그를 위로하려 했으나 그에게는 아무것도 들 리지 않았다. 귀는 닫히고, 입은 다물린 채로 소운비는 자신만의 침묵의 세계로 빠 져 들기 시작했다. 제8장 상심(傷心) 근래에 들어 만음요화가 이토록이나 비참했던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이십 년 전 무산음호에게 거절당했을 때보다도 오히려 지금이 더욱 비 참한 심정이었다. 만만하게 생각했던 개방의 거지 놈들에게 총관 추접파파가 당했다. 게 다가 추적을 나갔던 화금궁의 제자들은 궁 바깥에서는 되려 놈들에게 반수 이상이 전멸당하고 간신히 궁으로 돌아왔다. 그것뿐이라면 만음요화의 입맛이 이토록 쓸 리가 없었다. 결정적인 문 제는 소운비였다. 자신이 애써 음경지벽의 기술까지 동원해 거의 반은 녹여 놓은 소운비 가 아니었던가! 한데 그 사매인지 뭔지 하는 계집을 보는 순간부터 돌 처럼 굳어 버리더니, 그 뒤로 지금까지 며칠 동안 식음도 전폐하고 한 마디 입도 열지 않는 돌부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저러다간 다 잡아 놓은 봉이 며칠 못 가서 죽게 될지도 몰랐다. 무산음호를 제압한 것처럼 혼혼옥잡으로 소운비를 중독시킬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뜻밖에도 소운비의 태원옥호공은 오 성을 넘지 않 은 상태였다. 순진해 보이는 놈이 자신을 속인 것이다. '태원옥호공이 십 성을 넘어야 혼혼옥잡으로 완전히 제압이 되는데... 지금으로서는...' 바깥에서는 일단 패배해 물러났던 개방 놈들이 하남행성 일대에 진을 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게다가 색존 자리를 노 리는 탐서랑이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 오고 있었 다. '이러다가 혼음사의나 용양도인, 아니 취화비도라도 찾아드는 날에 는...!' 궁의 제자들에게 엄명을 내려 화금궁으로 통하는 옥문을 굳게 폐쇄하 면서 경계를 시작한 지 벌써 며칠.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언가 방법이 있어야 한다...! 방법이!' * * * 방문이 열리고, 어제 왔던 그 백의소녀가 또 들어왔다. 손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죽그릇이 들려 있었다. "일공, 죽을 좀 드세요." 소운비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라붙어 껍질이 일어난 창백한 입술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간 정말 돌아가시고 말 거예요."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정말 안 드실 건가요?" 애처로운 소녀의 물음에는 돌조각이라도 마음이 흔들릴 것 같은데, 소 운비는 고개조차도 젓지 않았다. "그럼...!" 소녀는 죽그릇을 그 자리에 놓더니 가만히 일어나 소운비를 향해 절을 했다. 소운비는 그제서야 고개를 약간 움직여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백의소녀는 배시시 웃으며 서글프게 말했다. "궁주께서는 일공께 죽을 드리지 못하면 시중들 사람을 바꾼다고 하셨 어요. 오늘이 일공을 마지막으로 뵙는 날이에요." 소녀의 뺨 위로 구슬 같은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다. "비록 제가 잘 모시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지만, 일공께서 꼭 건강을 회복하시길 빌겠어요." 소녀는 얼굴을 가리고 방을 나갔다. 방바닥에 놓인 죽그릇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갔다. 소운비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벌써 아홉 번째의 소녀였다. 그즈음, 개방 총타 근처에 마련된 진설영의 임시 거처에서도 또 한 그 릇의 미음이 식어 가고 있었다. 마치 열병을 앓고 난 것처럼 초췌해진 진설영의 얼굴을 진파파는 안쓰 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상심할 줄은 몰랐구나...' 진파파는 자신의 행동이 어쩐지 후회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창백한 제자의 얼굴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강처럼 뻗어 있었다. "설영아, 제발 힘을 좀 내거라." 진파파가 힘없이 중얼거릴 때,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진파파가 내다보니 삼목신룡 무옥이었다. "웬일이시오?" 무옥은 정중하게 말했다. "진 낭자의 용태가 궁금해서 왔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들어오시오." 진설영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에 대한 경계가 많이 누그러진 진파파였 다. 소운비의 일로 상심하는 제자를 보고, 남녀 간의 일이 인력으로 막 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서일까... 아무튼 진파파는 무옥이 진설영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 켜 주었다. 물론 방문은 열어 둔 채였고, 방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뜰 에 서서 옆눈으로 힐끔힐끔 관찰하고 있었지만. 무옥은 침상 가에 서서 진설영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진설영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 무옥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보검은..." 무옥은 침상 옆에 세워 둔 진설영의 검을 가리켰다. "참으로 훌륭한 것이오. 아마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보검일 것이 오." 병 중의 여자를 방문해서 하는 말치고는 이상했다. "진 낭자." 무옥은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진 낭자가 그와 같은 보검을 지닐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 오." 진설영의 눈이 무옥을 올려다보았다. "또한 그런 보검을 지닌 여인은 이렇게 맥없이 주저앉아서는 안 되 오." 무옥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힘을 내시오. 장래의 여중제일인(女中第一人)이여!" 무옥은 몸을 돌려 방을 나갔지만, 천장을 올려다보는 진설영의 눈은 알 수 없는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잠시 뒤 진파파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들여다보았을 때, 진설영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죽을 주세요, 사부님." * * * 깜빡 잠이 들었던 소운비는 비파의 현이 퉁겨지는 소리에 눈을 뜨고 말았다. 침상 가에 놓여져 있던 소운비의 비파를 만지작거리던 백의소녀가 화 들짝 놀라며 그것을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그냥 궁금해서 만져 보았어요." 소운비는 가만히 눈동자를 옮겨 그녀의 발치에 있는 빈 죽그릇을 응시 했다. 죽그릇을 가져 온 것은 여태까지의 소녀들과 같은데, 어째서 빈 죽그 릇일까? 백의소녀는 소운비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혀를 살짝 내밀고 웃었다. "그것도 죄송해요, 실은 제가 다 먹어 버렸어요." 그녀는 종알거리면서 소운비의 옆에 와서 스스럼없이 앉았다. "일공께서 식사를 안 하신다고 궁주님께서 궁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단식령을 내리셨거든요. 너무나 배가 고팠어요. 그리고 또 비지 않은 죽그릇을 가지고 나가면 혼쭐이 날 테니까요. 전 그러긴 싫거든요." 소녀는 마치 새처럼 지저귀고 있었다. 소운비가 대꾸도 하지 않는 것 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제 이름은 혜와(惠 )라고 해요. 궁에서는 소혜라고 부르지요." 그녀는 빈 죽그릇을 들고 나가며 소운비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궁주님께 일공께서 죽을 드셨다고 말해도 되지요? 안 그러면 전 정말 맞아 죽어요." 그녀가 나가고 난 뒤에도, 방안에는 어쩐지 싱그러운 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소운비의 입가에 힘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설영을 닮았구나...!' 다음날도 소혜는 소운비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죽을 먹어 버렸다. 그리고는 혼자 종알종알 떠들다가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전 고아예요. 궁 안에 있는 여자들은 대부분 그래요. 기루로 팔려 갈 뻔한 아이들을 궁주님이 사 오시기도 했지요. 남들은 바깥에서 우리 궁주님을 뭐라고 욕을 하는지 몰라도, 저는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쨌거나 굶어 죽을 뻔한 고아들에게 밥과 잠자리를 주신 분 이니까요. -하지만 요샌 좀 지겨워요. 괜히 사람들도 많이 죽어 나가고, 궁주님 신경질도 이만저만이 아니구.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나가고 싶어요! -일공께서는 비파를 잘 타세요? 저는 늘 비파 타는 법을 배우고 싶었 어요. 비파 타는 모습은 멋있어 보이잖아요. 가르쳐 주시지 않겠어요? 침묵에 휩싸여 있던 소운비의 세계에 소혜라는 새가 날아들었다. 그 새는 무척이나 작고, 시끄러운 새였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사랑스럽기도 했다. 소혜가 드나든 지 칠일째였다. 그날따라 그녀는 유난히 소운비를 귀찮 게 해댔다. 미음을 한 숟가락 떠서 소운비의 코앞으로 내밀었다가 '안 드실래요?' 하고 묻고는 제 입으로 털어넣고, 또 한 숟가락을 떠서 내밀며 묻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귀찮아진 소운비는 벽을 보고 아예 돌아누웠다. 한동안 소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비파는 낡은 것처럼 보이는데 소리는 무척 잘 나네...? 줄도 그렇 게 질길까? 한번 끊어 봐도 돼죠?" 소운비는 벌떡 일어나 돌아보았다. 소혜가 날카로운 비수를 들고 막 비파의 현을 그으려는 찰나였다. "무슨 짓이야!" 몸 어디에서 힘이 났는지, 소운비는 번개처럼 달려들어 그녀의 손에서 비파를 빼앗았다. 비파는 그에게 귀회루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유일한 물건이 었다. 그런 것을 함부로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소운비의 느닷없는 움직임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소혜는 잠시 뒤 배시시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었네요." 그 말투에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소운비를 멈칫하게 만드는 그런 쓸쓸함이었다. 소혜는 먹다 만 죽그릇을 들어올리더니 사뿐사뿐 방문을 향해 걸어갔 다. 방문 앞에서 그녀는 소운비를 돌아보며 애써 명랑하게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내일부터는 다른 사람이 올 거예요." 그리고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그 사람은 살아서 이 방을 나가게 되길 바래요." 그녀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고 할 때, 소운비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무슨 소리지?" 억지로 돌려 세워진 소혜의 얼굴은 울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세요? 무정한 분. 벌써 아홉 명이나 이렇게 보내 놓 구선... 저에게 주어진 시간도 다 끝났어요. 이젠 제 차례예요." 소운비는 가슴 안에서 얼음 덩어리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방을 나가면 죽는단 말이냐?" "그래요." 소혜는 그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고, 소운비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모두들 그렇게 이 방을 나갈 때 슬픈 얼굴로... 미 련한 소운비! 만음요화가 어떤 여자인지를 잊었단 말인가?' 소운비는 입술을 악물었다. "만음요화가 너도 죽인다고 했느냐?" 소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소운비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설영을 닮은 아이인데... 설영을!' 소혜의 눈이 슬프게 빛났다. 그녀는 맥없이 고개를 떨구며 등을 돌렸 다. 저 문밖으로 나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그토록 천방지축이고 발랄했던 소혜의 뒷모습에 짙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순간, 숱한 갈등에 시달리던 소운비는 결심을 굳혔다. "소혜." 소혜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죽을 이리 가져 오너라. 먹겠다." 돌아보는 소혜의 얼굴에 서린 것과 같은 그런 기쁨을, 소운비는 결코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한번 문지르더니 자못 씩씩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혜와라고 부르세요!" * * * 혜와의 간호는 극진했다. 어린 소녀 같기만 하던 그녀가 소운비를 간 호할 때는 마치 어머니처럼 엄격하게 굴기도 하는 것이었다. "몸을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돼요. 세상에 하나뿐인 몸인걸요. 자기 몸 을 자기가 보살피지 않으면, 몸은 무척이나 화가 날 거예요." 훈계하듯 말하는 혜와의 모습에 소운비는 오랜만에 미소를 지을 수 있 었다. 그리고 그녀의 작고 귀여운 얼굴을 오랜 시간 들여다보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녀가 진설영을 닮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 다. 오히려 그녀는 다른 얼굴, 뚜렷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소운비가 한 번 보았던 어떤 얼굴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것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소운비의 몸은 완쾌되었다. "내일부터는 못 와요." "어째서?" 시무룩하게 말하는 혜와에게 소운비는 물었다. "일공의 몸이 다 회복되었으니까요. 내일 밤엔 궁주께서 오실 거예요." 소운비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죽어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진설영과 자신의 사이를 갈라 놓은 원흉이 아닌가! 소운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 것을 본 혜와는 얼른 말했다. "저도 그건 싫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이 궁 안에 있는 한 은...!"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이면 서 목소리를 한껏 낮추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달아날래요?" 소운비에게는 귀가 트이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달 아날 수 있단 말인가? 한데 철없는 혜와는 일단 '달아난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걷잡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줄줄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요, 달아나요!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예요. 일공께서도 이곳이 싫 잖아요? 저도 싫어졌어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좋은 생각?" "내일은 매달 한번씩 정기적으로 궁 밖으로 마차가 나가는 날이에요." "왜?" 혜와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궁 안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사러 가는 거지요." 소운비의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지나갔다. "정말인가? 어떻게 하면 그 마차에 올라탈 수 있지?" "그건 쉬워요. 마차를 몰고 나가는 사람은 황의 항렬의 소민 언니인데, 그 언니는 성격이 좀 게을러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지를 못해요. 그러 니 오늘밤에 마차의 점검을 마쳐 놓고 내일 새벽에 바로 출발할 거예 요. 오늘밤 마차의 점검이 끝난 뒤 몰래 타고 있으면 바로 나갈 수 있 어요." "요사이 궁의 경계가 엄해졌을 텐데?"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엄해진 만큼, 안에서 나가는 것에는 소홀하기 마련이지요. 어때요, 일공? 같이 나가실래요?" 소운비는 갑자기 엄한 얼굴로 말했다. "나와 같이 탈출할 생각이라면 너는 한 가지 버릇부터 고쳐야 한다." 혜와의 귀여운 눈이 동그래졌다. 긴장한 모양이었다. "뭘요?" "일공이라고 부르지 마라. 소름 끼치니까."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내 이름은 소운비다. 운비 오라버니라고 불러라." 그날 밤 소운비와 혜와는 몰래 방을 빠져 나가, 소민이 점검을 끝낸 마차에 올라탔다. * * * 어떤 곳에서는 검은 도(道)이며, 어떤 곳에서는 술(術)이라 불린다. 지금 허공에 수놓여지고 있는 검광(劍光)은 도라고 부를 수도, 술이라 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단연코 예(藝)였다. 화아앙! 화아앙! 계곡의 바람 같은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는 찬연한 검! 오랜만에 몸을 일으킨 진설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검을 들고 뜰 에 나와 검무(劍舞)를 추는 것이었다. 진파파는 그 모습을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진설영의 검무를 보고 있었다. 삼목신룡 무옥이었다. 진설영은 마치 허공 중의 그 무엇인가를 베어 내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베어 내고 싶은 것은 가슴을 에는 과거지사인지도 몰랐 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정말 베어 내고 싶은 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녀는 그 무엇인가를 베어 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마침내 멈추어 섰을 때는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휴우우...!" 진설영이 이마의 땀을 씻고 고개를 들었을 때, 삼목신룡 무옥이 가까 이 와서 서 있었다. 그의 눈은 기쁨의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구려." 진설영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도전적인 눈빛이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색마들을 치기 위한 계획을 세울 것이오." "어떤 계획인가요?" "이번에 만음요화를 상대하면서, 그들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점이 확인되었소. 남궁세가와 우리 개방에서는 전무림에 배첩을 돌려 격색 마회(檄色魔會)를 꾸릴 생각이오. 색마들은 자신들의 악행으로 인해 사 방에 많은 적을 만들었으니,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 킬 수 있을 것이오." "그럼, 내가 할 일은 무엇이지요?"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각파로 갈라져서 무림첩을 돌릴 것이오. 진 낭자도 한 파를 맡아 사람을 모아 주면 고맙겠소." 진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꼭 다문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야무지고 단단해 보였다. 무옥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할 듯하다가 입가에 한 조각 웃 음을 베어물고 돌아섰다. "잠깐만." 불러 세운 것은 진설영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무엇이...?" "왜 당신의 별호는 삼목신룡이지요?" 무옥의 얼굴에 언뜻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글쎄..." 그는 말끝을 얼버무리면서 돌아섰다. 삼목신룡 무옥을 만난 이래로 그가 대답을 회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젠가는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오." 천천히 걸어가는 삼목신룡 무옥의 뒷모습을 진설영은 한참 동안 바라 보며 서 있었다. 낭패였다. 동백산의 빗줄기가 너무나 거셌던 것이다. 마차를 타고 화금궁을 나올 때까지는 좋았다. 소운비는, 내친 김에 그 마차에 계속 탄 채로 동백산을 빠져 나가고 싶었다. 하나 혜와가 반대했다. 소민은 중간에 반드시 한번 마차를 점검할 것 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차의 속력이 줄어드는 곳에서 내렸던 것인데, 그곳은 아직 동백산 중턱이었고, 비는 억세게 내리고 있었다. 소운비도 몸이 좋지 않았거니와, 혜와의 걸음도 질퍽거렸다. 그때였다. 두 사람 다 흠뻑 젖어 앞을 분간하기도 어려운 때에, 혜와가 천운처럼 동굴을 발견한 것이다. "아유, 추워라...!" 혜와는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미리 준비해 온 방수포(防水袍)를 풀었다. 그 안에는 소운비의 비파와 몇 가지 비상식량, 그리고 화섭자가 있었 다. 동굴 안의 검불을 모아 불을 피울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혜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자락을 쥐어짜더니 이것으로는 안 되겠 다는 듯이 별안간 옷을 훌렁 벗어부쳤다. 소운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얼굴을 돌렸다. "무슨 짓이야!"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감기에 걸릴 것 같은걸요. 운비 오라버니도 어 서 옷을 벗어서 말리세요." "어떻게 그런...!" 혜와는 혀를 삐쭉 내밀었다. "치, 무슨 군자처럼! 보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말 그대로였다. 소운비는 혜와의 옷이 마를 때까지 돌아보지 않기 위 해 모닥불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았다. 그의 등은 타버릴 것처럼 뜨거워졌지만 앞쪽의 옷은 여전히 축축했다. 하나 결코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동굴 안에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혜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동굴 안에서는 소리가 왕왕 울렸다. 혜와의 음성은 마치 꿈속에서 들 려 오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옷을 마구 벗어댔는지 아세요?" "글쎄다." 소운비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혜와가 까르르 웃었다. "바보! 그건 오라버니를 믿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속옷만 걸친 몸으로 별안간 소운비를 뒤에서 껴안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앞에서는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어요. 안 그래 요?" 그녀의 행동은 분명 농염한 애무는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럼없는 장난 에 가까웠다. 하나, 그것이 오히려 소운비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는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쳤다. "그만, 어서 저리로 가! 어서!" 다섯 명의 색마들을 만난 이후로 소운비의 몸에 닥친 운명은 참으로 괴이한 것이었다. 그것은 음양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변화였고, 강한 양기와 극히 약한 양기 사이에서 천변만화하는 기연이었다. 맨 처음, 그의 몸은 날 때부터 허약하여 양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 도였다. 그가 만일 귀한 집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자손의 대가 끊어질 위기였던 것이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보양술이었 다. 한데 그토록 허약한 그의 몸에, 진파파가 어떤 금제를 가한 것이다. 그 금제는 그로 하여금 이성에 대한 욕구를 느낄 수 없게 만들고, 만일 그가 그것을 느낄 시에는 막대한 고통이 따르게 했다. 마치 삼장법사 (三藏法師)가 손오공(孫吾空)을 제압한 것처럼...! 추접파파는 그의 허약한 체질을 고쳐 주었고, 성에 대해 무지한 그를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강한 양기를 북돋우기 위해 삼녀금침회정대법 을 시행했는데, 이것이 진파파가 그에게 가한 금제와 맹렬하게 충돌을 일으켰다. 그 충돌의 결과로, 그는 육체적으로는 교접이 가능하나, 정신적으로는 교접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무지한 고통이 따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 다. 만음요화는 그런 그를 뒤바꾸기 위해 무산음호로부터 태원옥호공을 익 히게 만들었다. 사 성 가량의 태원옥호공을 익힌 소운비는 마음속에 두 개의 다른 심성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진파파의 금제에 의한 것으로, 교접에 대해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듯 아픈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원옥호공에 의해 생긴 것으로, 교접을 강렬히 원하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었다. 진파파의 금제가 아무리 심오한 것이라고 하나, 소운비 스스로가 익힌 태원옥호공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수준이 오 성을 넘지 않아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소운비 자신이 무엇을 바라느냐에 있었다. 그는 여태까지 단 한번도 스스로 원해서 여자의 벌거벗은 몸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 러므로 모든 고통의 원인을 자신에게 닥친 운명의 탓으로 돌릴 수 있 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두 개의 힘이 몸 속에서 맹렬히 싸우고 있는 것 외에도, 등뒤에서 따 스하게 안아 오는 혜와의 몸이 싫지 않다는 심정이 그를 더 괴롭게 하 고 있었다. 일단 이 봇물이 한번 터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 이었다. "응? 오라버니, 왜 그래요?" "아니, 아니야. 그냥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둬라." 하나 소운비가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릴수록, 혜와는 걱정어 린 목소리로 말하며 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래요? 어디 괴로우세요?" 소운비는 눈을 감고 열심히 자기 자신과 분투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운비! 이것은 색마들과 다를 바 없는 욕심일 뿐이 다. 나는 혜와와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이 아이를 건드린 다면 그것은 설영과의 일 때문에 저지르는 분풀이일 수도 있다...!' 소운비는 모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정을 느끼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 을. 때로는 십여 년을 함께 지낸 오누이 같은 사이보다도 만난 지 며 칠 만에 불붙듯이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 남녀 사이라는 것을... 혜와는 소운비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져서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 울상이 되었다. 그녀는 두 팔로 소운비의 머리를 힘껏 껴안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힘내세요." 그리고 그녀는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안는 것처럼 자신의 가슴에 소운 비의 머리를 기대게 했다. 이어, 보드라운 입술로 소운비의 이마에 맺 힌 땀을 핥았다. 그 순간, 소운비의 누르고 누르던 인내심도 바닥이 나고 말았다. "아...!" 혜와는 별안간 소운비가 고개를 들고는 자신을 힘차게 껴안아 오자 놀 라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비명이 터져 나오도록 소운비의 입술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혜와는 눈을 감았다. 소운비도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는 빗줄기가 더욱 거세게 쏟아져 내렸다. 소운비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그녀의 귓불을 쓰다듬었다. 그 손은 그녀 의 촉촉히 젖은 머리칼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비에 젖은 여자의 머리칼에서는 풋풋한 냄새가 풍겼다. 소운비는 크게 숨을 들이켜 그 냄새를 가득 마셨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칼의 냄새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의 입술에 아기처 럼 비벼지는 여자의 입술에서 풍겨 오는 달콤한 냄새보다 좋지는 않았 다. 그는 폐부 가득히 그 냄새도 들이마셨다. 그의 손은 혜와의 머리칼에서 스르르 흘러내려 그녀의 동그스름한 어 깨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빗물이 마르지 않아 촉촉히 젖 어 있었다. '꿈인 것 같구나...!' 이토록 숨막히는, 이토록 달콤한, 이토록 황홀한 순간이 어디에 있을 까? 소운비는 정녕 그 속에서 빠져 나오고 싶지 않았다. 혜와의 몸이 사르르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의 품안에 무게를 실어 기대이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여기까지만...!' 소운비는 그녀의 어깨를 으스러지게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천천 히 그녀에게서 입을 뗐다. 혜와 역시도 꿈결을 헤맸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몽롱한 두 눈이 어리 둥절한 듯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여기서 멈추는가 하는 표정이 었다. 소운비는 아까와는 달리 이상하게 침착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 치 몸 안에 가해져 있던 온갖 금제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놀라지 않았니?" 소운비가 다정하게 물었다. 혜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그만 하도록 하자." "왜요?" 순진하게 되물어 오는 그녀의 코를 소운비의 손가락이 살짝 건드렸다. "더 계속하다가는 내가 너를 그냥 두지 못할 것 같구나." 혜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두 개의 흰 조약돌 같은 주먹이 그를 때렸다. "운비 오라버니도 참..." 그때였다. 동굴 입구, 빗소리를 뚫고 한 줄기 음성이 들려 왔다. "보기 좋구나! 만음요화에게 많이 배운 모양인데 아직 색마의 경지에 는 이르지 못했어!" 소운비의 안색이 변했다. 그 음성은 귀에 익은 것이었다. 탐서랑은 그야말로 길에서 떡을 주운 격이었다. 만음요화가 소운비를 낚아채서 달아난 이래로, 얼마나 그 뒤를 쫓아 헤맸던가. 화금궁의 경계가 삼엄하여 감히 들어갈 생각을 못하고 동백산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쏟아지는 비라도 피할 생각으로 찾은 동굴에서 그토록 노렸던 소운비에다가 덤으로 꽃 같은 소녀까지 건지게 된 것이다. '저놈은 일단 때려눕혀 놓고 먼저 몸부터 풀어야겠다. 며칠째 산에서 지내느라고 음기를 쐬지 못했더니 이거 참 뻐근해서 원...' 탐서랑은 피식피식 웃으며, 떨고 있는 혜와와 그 앞을 가로막고 선 소 운비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는 원래 청성파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무공의 기초가 기이하지는 않 으나 제법 절도가 있었다. 그 절도있는 손발이 칠십이파검법(七十二波 劍法)을 권법과 각법으로 운용하여 소운비를 향해 작렬했다. 파바바바박! 소운비는 전신을 정신없이 얻어맞고 동굴 구석에 가서 나동그라졌다. "오라버니!" 혜와가 비명을 짜 올렸다. 탐서랑이 그녀를 낚아채서 바닥에 쓰러뜨렸 다. 그는 서둘러 아랫도리를 까내리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미안하오, 낭자. 원래 나는 풍류남아로 결코 여자를 강제로 취하는 법 이 없었는데, 오늘은 좀 사정이 급하구려." 그는 혜와의 전신 혈도를 점하여 꼼짝못하게 만들어 놓고는 꿈틀거리 는 소운비를 향해 이죽거렸다. "너는 만음요화에게 들어간 지 며칠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계집을 다루 는 방법이 고작 그것이냐? 잘 보거라. 이 선배가 운우의 도를 가르쳐 주마!" "안 돼!" 소운비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나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 았다. 얻어맞은 곳마다 근육이 마비된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 이다. 무공을 아는 사람에게 잔뜩 얻어맞는다는 것은 길거리의 싸움에서 몰 매를 맞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것이었다. 작은 힘으로도 사람을 삽시 에 꼼짝못하게 만드는 기술이 거기에는 담겨 있었다. 만일 사 성을 넘 는 태원옥호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소운비는 단지 움직이지 못하는 것 에서 끝나지 않고 피까지 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처럼 자신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왜 무산음호에게 단지 몇 수의 무공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 던가...! 이 지경이 되어서 혜와조차도 지켜 줄 수 없다니!' 그가 동굴 바닥을 뒹굴며 몸을 일으켜 보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 탐서 랑은 혜와의 두 다리를 벌려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보라구. 이것이 처녀의 고통을 가장 덜어 줄 수 있는 방식이지. 자 아...!" 탐서랑이 막 입궁(入宮)의 자세를 취할 때, 별안간 혜와가 까르르 웃었 다. 겁탈당하기 직전의 여자가 웃는 것은, 아무리 색마라 해도 섬뜩하기 마련이었다. 자연 탐서랑의 기세가 주춤했다. "왜 웃는 거지?" "당신이 혹시 오대색마 중 하나라는 탐서랑인가요?" "그렇다." 혜와는 다시 웃었다. "호호...! 나는 오늘 운이 좋아 기연을 만나게 되었구나! 호호호...!" 육욕으로 불타던 탐서랑의 두 눈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무슨 소리지, 그게?" 혜와는 똑바로 탐서랑을 쏘아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나는 화금궁 백의 제자 소혜다. 내가 궁 밖으로 나온 것은 궁주님의 특별한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만음요화의 제자라면 더군다나 뒤가 구린 탐서랑이었다. 만만 치 않은 색공의 소유자가 바로 만음요화 아닌가. 그 제자라면 결코 녹 록치 않을 터. 어떤 사술을 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 소 공자가 어영부영 궁을 빠져 나가게 내버려둘 우리 화금궁이 아 니다. 사실 궁주께서는 여간해서 말을 듣지 않는 소 공자의 동정을 떼 게 하기 위해 나를 보내 속이신 것이다. 궁주께서는 적당히 분위기를 만들어 그와 동침하고 다시 궁으로 돌아오라고 내게 이르셨다. 일단 한번만 자의로 교합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먼저 나서서 원 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야." 혜와의 말은 탐서랑보다도 소운비에게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소운비는 방금 귓전에 천둥 소리가 울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닐 거야. 혜와는 영리하니까 저자를 속여넘기려고 지어 낸 말일 것 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쩐지 자신이 너무나 쉽게 화 금궁을 빠져 나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의심이란 마치 정욕과 같아서 한번 둑을 무너뜨리고 넘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법이었다. 탐서랑은 혜와의 말에 약간 주춤했으나 곧 맞받아 쳤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너를 취하고 저놈만 데리고 이 산을 빠져 나가면 그뿐이다." 혜와는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고 쏘아붙였다. "바보 같은 놈! 내가 왜 기연을 얻었다고 말했는 줄 아직도 모르겠느 냐? 궁주께서는 소 공자의 원양진력을 내게 상으로 내리셨다. 본래 궁 주께서 취하시려고 한 것인데 내게 하사하신 것이다. 원양진력을 취할 삼녀채양보음술의 구결과 함께!" 그 말을 듣는 순간, 탐서랑은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듯이 혜와의 몸으 로부터 떨어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이 여자를 취하는 순간 애써 길러 온 공력 을 모두 빼앗기고 말 것이 아닌가? 방술을 닦는 자에게 그와 같은 낭 패는 없었다. "큰일날 뻔했군!" 탐서랑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혜와의 몸을 비켜 갔다. "할 수 없지. 일단은 저놈이라도 데리고 여기를 빠져 나가야겠다." 탐서랑은 투덜거리면서 고꾸라져 있는 소운비의 등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소운비의 몸은 힘없이 그에게 끌려왔다. "가자! 내가 너로 하여금 세상에 다시 없는 환락경을 맛보게 해주마." 비록 혜와에게는 낭패를 당했지만, 어쨌든 소운비를 차지하게 되었다 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탐서랑은 걸음을 재촉했다. 한데 그의 몸에 안기다시피 기대고 있던 소운비의 몸이 갑자기 그 자 리에 풀썩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사내 놈이 제 발로 서지도 못한단 말이냐?" 탐서랑이 비웃으며 다시 그를 일으키려고 하는 순간, 소운비가 몸을 굴려 동굴 바깥쪽으로 피해 갔다. "하... 저놈이!" 소운비가 감히 도망치려 한다고 생각하자, 탐서랑은 저도 모르게 헛웃 음을 터뜨렸다. 밖이라고 해봤자 바로 절벽이 아닌가! 하늘을 나는 경 공을 익혔으면 모르되 도망칠 수 없는 곳이다. 하나 굴러 간 소운비가 손을 번쩍 들어올리자, 탐서랑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손에 잡힌 것은 탐서랑의 독문병기인 왕모선(王母扇)이었다. "아, 아니? 저것이!" 그것은 탐서랑이 수년 간 공을 들여 만든 무기였다. 접선을 펼치면 복 숭아를 따고 있는 서왕모(西王母)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왕모선이라 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사천 당문의 여자를 꼬셔서 알아 낸 암기 제 조 기술로 제작한 여러 가지의 암기가 숨어 있음은 물론, 특별한 미약 을 장치해 여인 앞에서 슬슬 부치기만 하면 수십 년 수도한 여승이라 고 해도 스스로 옷고름을 풀게 만드는 효용이 있었다. 그로서는 여러 모로 아낄 수밖에 없는 물건인 것이다. 방금까지 자신의 품안에 있었던 그 접선이 어째서 소운비의 손 안에 들어가 있는지 탐서랑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소운비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와중에서도 침착하게 그를 향해 말했다. "어서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당신의 접선을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리고 말겠소." 탐서랑의 잘생긴 얼굴이 분노와 당황 때문에 일그러졌다. 자신의 독문병기를 남의 손에 빼앗긴다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무림인 에게 없다. 그것도 저런 나약한 애송이에게 말이다. "어쩔 거요? 던져 버려도 좋소?" 소운비는 접선을 든 손을 절벽 쪽으로 내밀며 외쳤다. "아니, 아니 잠깐만!" 탐서랑은 이를 갈아붙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놈...! 몇 걸음만 더 다가가면...!' 방금 전에는 방심한 상태라서 접선을 도둑맞았지만, 마음먹고 달려든 다면 소운비가 접선을 놓기 전에 낚아채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거리였다. 탐서랑은 항복이라도 하듯 두 손을 쳐들며 천천히 동굴 바깥으로 나섰 다. "물러나겠네. 오늘은 할 수 없을 것 같구... 차아앗!" 파아앗! 동굴을 나온 뒤, 소운비로부터 뒷걸음질을 쳐서 물러날 듯하던 탐서랑 은, 별안간 기합과 함께 몇 장을 단박에 뛰어 소운비 앞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소운비가 접선을 내다 버리지 못하도록 제일 먼저 손을 뻗어 그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탐서랑은 큭큭 웃으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놈! 팔목을 부러뜨려 버릴까 보다!" 한데, 그것은 바로 소운비가 바라던 바였다. 여인처럼 나긋나긋하기만 하던 소운비의 손목이 살짝 도는가 싶더니 거꾸로 탐서랑의 손목을 감 아 쥐었다. '이놈이?' 그 정도라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별안간 그 손아귀에서 밀려 나오는 막강한 힘은 탐서랑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대비도 할 수 없는 것이 었다. '이놈이 노리고 있었구나!' 탐서랑은 그제서야 소운비가 막강한 힘을 숨기고 자신을 잡을 수 있는 순간을 노려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버둥대며 절벽에서 물러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으으으으...!" 몇 발짝을 간신히 뒷걸음질쳤을 때, 소운비의 얼굴이 붉어지고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탐서랑은 서둘러 내공을 일으켜 그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구척거인에게 손목을 잡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만장절벽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마치 팔씨름이라도 하듯이 서로를 당 기고 있었다. 그 팽팽한 힘의 줄이 어느 한쪽으로 쏠린 것은 한 순간 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소운비는 우렁찬 기합을 토해 내며 탐서랑의 손목을 끌고 절벽 쪽을 향해 질주했다. "으아아악!" 땅바닥에 모질게 쓸려 가면서 탐서랑은 찢어지는 비명을 짜 올렸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지독스럽게도 왕모선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아득한 낭떠러지를 향해 소운비는 힘차게 팔을 휘둘렀다. "으아아아아!" 탐서랑의 몸뚱어리는 작은 조약돌처럼 그 낭떠러지 아래로 낙하했다. 그의 비명도 빗소리에 묻혀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져 갔다. "하아... 하아...!" 소운비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눈은 격정 때문에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아... 하아...!" 무공 초식을 모르는 소운비로서는 탐서랑을 상대하여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의 방심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 순간을 만들기 위해 소운비는 소매치기의 기술과, 몸 안에 남아있 던 태원옥호공의 힘을 이용했다. 태원옥호공을 쓰게 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선택이었다. "하아... 하아...!" 그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전신을 제압당한 혜와가 고개만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소운비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것이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막 오 성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 태원옥호공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묻겠다." 소운비는 숨을 고르며 가까스로 말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혜와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아까 탐서랑에게 했던 말이 사실이냐? 아니면 그를 속이기 위해서 한 말이냐?"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는 혜와가 '거짓말이었다'고 말하기를 바랬다. 설 령 그것이 진짜였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순간만큼은 거짓말이었다고 이 야기할 만큼 혜와가 영리하기를 바랬다. 하나 혜와는 그렇지 못했다. 고개를 옆으로 떨구며 그녀는 낮은 소리 로 대답했다. "사실이에요." "으으으..." 소운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악 다문 이빨 사이에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윽고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신음은 포효가 되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 태원옥호공 오 성의 단계에 입문하기 시작한 증거. 비 오는 산중을 우 렁차게 울리는 호랑이의 울음 소리였다. "크르르르...!" 한참 울부짖던 소운비가 으르렁거리면서 혜와를 돌아보았다. 그 눈은 야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두 손과 두 발을 이용해 그녀에게로 기어왔다. 혜와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탐서랑 이 제압한 혈도가 풀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소운비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혜와는 절망을 느 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한데...? 소운비가 움켜쥔 것은 그녀의 몸이 아니라 그녀의 머리맡에 있던 방수 포였다. 그는 허겁지겁 그 안에서 한 개의 작은 목갑(木匣)을 꺼냈다. 그 안에 는 그가 소중하게 간직한 단약이 들어 있었다. 무산음호가 그에게 주었던 단약이었다. '운비 오라버니?'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바라보았을 때, 소운비는 단약을 입에 털어넣 고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소운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머리 위에 영롱한 다섯 개의 원이 그 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 눈에서는 이미 야수의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태원옥호공의 십 성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제 그는 마음속의 정욕 을 다스릴 수 있었다. 다만, 태원옥호공에는 극성인 만음요화의 혼혼옥잡을 만나기 전까지 는...! 소운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느새 바깥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 비 온 뒤의 안개가 동백산 일대를 풍요롭게 감싸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는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만음요화의 혼혼옥잡을 만나서는 안 되는 몸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 외에도 이 동백산은 그에게 상처만을 준 곳 이었기에 결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갈 곳은 오직 한 군데뿐이었다. 비록 귀신이 나올 것처럼 황폐한 폐가이기는 하지만 정이 든 곳, 그가 어떻게 해서든 용서를 구하고 예 전의 삶을 되찾아야 할 귀회루뿐이었다. 혈도가 다 풀린 혜와는 동굴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있었다. 소운비가 일어난 뒤부터는 애처로운 눈길로 그를 쳐다볼 뿐,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소운비는 고개를 돌렸다. 한쪽 옆의 모닥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옷은 다 말라 있었다. 소운비는 옷을 들어 혜와 쪽으로 던져 주었다. 그리고 비파를 들고 돌 아서며 말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너는 나에게 행복을 주었었다. 아까의 인내는... 그 런 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보답이었다. 이제 피차 잊기로 하자." 소운비는 동굴을 나갔다. 그의 말이 동굴 안에 남긴 마지막 울림을 곱씹으며 혜와는 눈시울을 적셨다. 햇빛이 동굴 안에까지 뻗쳐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아까 폭우가 쏟아질 때보다 더욱 쓸쓸했다. 어차피 고아의 몸이었던 혜와. 궁주의 명령대로 소운비를 속였던 혜와. 그저 화금궁 안에서 조금씩 지위를 높이며 살기를 바랬던 혜와에게 그 것은 예상하지 못한 슬픔이었다. '나는...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화금궁으로 돌아갈 길도 막막해져 버 린 혜와였다. 그녀는 소운비가 던져 주고 간 옷에 얼굴을 파묻었다. 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갈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무엇인가 단단히 결심한 혜와는 자 리에서 일어나 동굴을 빠져 나갔다. 동백산 줄기를 따라 내려가는 혜와의 얼굴은 비록 초췌했지만, 단 하 나의 태양을 좇는 해바라기처럼 환한 빛을 띠고 있었다. * * * 소운비도, 혜와도 떠난 동백산의 동굴 어귀에, 한 쌍의 길쭉하고 섬뜩 한 눈동자가 나타났다. 은빛 꽃 문양이 새겨진 검은 복면으로 온몸을 감싼 사람. 바로 취화비도였다. 그의 눈은 뜻 모를 웃음을 토하고 있었다. "일이 뜻밖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군! 저자가 태원옥호공을 익혔을 줄이야...! 그분께서 아신다면 기뻐하실 것이다." 동백산의 하늘 위에는 다시 묵직한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제9장 분노(忿怒) 이제 열다섯 살쯤 되었을까? 그 덜 익은 나신에 골고루 기름이 발라져 있었다. 기름이 발라진 두 개의 나신이 고운 모래판 위에서 엉켜 있었다. "이야압!" "차아앗!" 낭랑한 기합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모래가 튀고, 하나의 나신이 다른 나신을 고꾸라뜨렸다. "잘했다!" 두툼한 손이 내지르는 박수 소리가 큰 방안에 울려 퍼졌다. 박수를 보 낸 것은 큼지막한 태사의에 벌거벗고 누운 용양도인이었다. 그의 몸은 태사의에 파묻혀 있었고, 그의 목은 어깨에 파묻혀 있었다. 오직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작은 동산처럼 솟구친 그의 출렁이는 배뿐 이었다. 그는 느긋한 자세로 자신을 위해 마련된 즐거운 여흥을 지켜보고 있었 다. 그 여흥이란 두 명의 소년이 알몸에 기름을 바르고 벌이는 씨름이 었다. 이긴 소년이 온몸에 모래를 묻히고 그를 향해 기어왔다. 용양도인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잘했다, 한초(閑草)! 너에게 상으로 무엇을 주랴?" 용양도인은 태사의 오른쪽에 있는 자그마한 황금코끼리상을 가리켰다. "저것을 주랴?" 한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제 고려에서 사들인 백년근 산삼을 주랴?" 한초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용양도인의 눈이 찡그려졌다. "욕심이 많구나! 그럼 대체 뭘 원하느냐?" 한초가 소녀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입을 벌려 말했다. "다른 것은 다 필요없습니다. 그저 도인을 오늘밤 모시게 해주세요." 함지박만한 입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용양도인은 입을 쫙 벌 려 너털웃음을 토해 냈다. 그가 큰 덩치를 흔들며 웃어대는 통에 태사 의마저 함께 흔들렸다. "우하하하하하, 귀여운 것! 오냐, 오늘밤에는 내가 오직 너만을 예뻐해 주마." 씨름에서 한초에게 패한 소년을 비롯하여 방안에서 용양도인의 시중을 들던 십여 명의 소년들이 일제히 말했다. "좋겠구나, 한초!" "도인 어르신, 우리들도 한초처럼 귀여움을 받고 싶습니다." 용양도인은 자신처럼 행복한 사람은 이 천지간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 을 했다. 이토록 어여쁜 소년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또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그 순간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열성을 다해 한초에 대한 부러움을 토로하던 십여 명의 소년들의 눈에 떠오르는 그 지루한 표정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한초의 얼굴에 나타난 역겨운 빛. '집이 가난해서 팔려 오지만 않았어도...!' '밤새도록 저 허연 돼지 아저씨를 핥아야 하다니, 한초야 너도 참 안됐 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살아야 하나?' 만족한 웃음을 실컷 터뜨린 용양도인은 은근한 목소리로 한초에게 말 했다. "자, 오늘은 더 할 일도 없는 것 같은데, 그만 잠자리에 들도록 할까?" "집어치우세요!" 뾰루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한초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용양도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놈이 간이 부었나?' "그만 좀 하세요. 보기 흉해요." 하나 이어지는 그 음성은 확실히 한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 른 소년들의 것도 아니었다. 용양도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태사의 바로 위쪽, 천장을 가로지르 는 대들보에 발을 걸고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는 흑의인. 용양도인에게 핀잔을 던진 것은 바로 그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을 보는 순간, 용양도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휘리릭! 흑의인은 대들보에서 떨어져 용양도인 앞에 내려섰다. 입고 있는 옷과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칠흑처럼 검고, 살결은 눈부시게 희며, 입술만이 피를 묻힌 듯 빨갛게 타오르는 그 얼굴. 한초나 다른 소년들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는 대단한 미소년이었 다. 흠이라면,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섬뜩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용양도인이 머뭇머뭇 말했다. "오, 오랑(烏郞)이구나. 언제 왔느냐?" 용양도인이 언제 미소년을 보고 이렇게 주춤거린 적이 있었던가? 단연 코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난 이 미소년 오랑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가 침을 흘릴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오랑은 용양도인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렸다.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애들이나 끼고 놀 시간이 있으세요? 색존이 되 겠다고 기세 등등할 때는 언제고... 야망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신 거예 요?" "아, 아니다. 나는 그저 좀 쉬려는 것뿐이야." 오랑은 한치의 변명도 용서하지 않았다. "돌아다니다가 개방의 거지들을 보았어요. 만음요화의 화금궁을 들쑤 셨다더군요. 하지만 완전히 부수지는 못했대요. 귀회루의 그 젊은 남자 는 만음요화가 가지고 있다면서요?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만음요화가 색존이 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어서 쳐들어가요!" 용양도인은 울상이 되었다. 귀회루에서 돌아온 이래 그가 화금궁에 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랴! 화금궁에는 세상에서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우글거 리고 있는데. "얘야, 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않느 냐? 나는..." 오랑의 검은 눈썹이 찡그려졌다. "여자가 뭐가 무섭다고 그러세요?" "무서운 게 아니라 싫다! 구역질이 나고 두드러기가 돋는단 말이야." 용양도인은 거의 울상이 되어 가슴팍을 벅벅 긁었다. 화금궁의 그 벌 거벗은 여자들을 생각만 해도 벌써 몸이 가려워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놈들도 다 안달이 나 있을 거야. 기다렸다가 혼음사의나 탐서랑 이 빼돌린 다음 내가 나서도..." 오랑은 가차없이 말했다. "기다렸다가 그렇게 꼴 보기 싫은 만음요화가 색존이 돼도 상관없으세 요?" 용양도인은 금세 풀이 죽었다. "그건 더욱 싫지." 오랑이 코웃음을 쳤다. "그것 보세요." 기세가 죽은 용양도인의 턱이 자기 배에 닿을 듯이 축 처졌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오랑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정 싫으시면, 나한테 맡기세요." "너한테?" 고개를 다시 반짝 들어올린 용양도인을 오시(傲視)하며, 오랑은 말했 다. "들리는 소문에 개방이 주축이 되어 격색마회를 꾸린다고 하더군요. 벌써 각파로 무림첩이 돌고 있대요. 이렇게 일이 어지럽게 돌아가다가 는 아무것도 못 건질 수가 있어요. 나에게 몇 명의 정예만 주면, 화금 궁으로 가서 그를 빼앗아 오겠어요." "정예?" "용양혈루단(龍陽血淚團)을 주세요." "흐으읍." 용양도인은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용양혈루단은 그가 가장 아끼는 소년 살수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이다. 한데 그것을 오랑에게 맡겨 보낸다면...? 설령 일이 성사되어 색존의 자리가 걸린 그 젊은이를 빼앗아 온다고 하더라도, 그때까지 그의 즐거움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건..." "싫으세요?" "아, 아니다!" 오랑은 잔뜩 일그러진 용양도인의 얼굴에 대고 노골적인 비웃음을 던 졌다. "흥!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준비하러 가겠어요." 그리고 그는 말총 같은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뒤돌아섰다. 방을 나가기 직전, 오랑은 용양도인을 돌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옷 좀 입고 다니세요. 아무리 다른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민망하지도 않으세요, 아버지?" 용양도인의 얼굴은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오랑, 그는 용양도인 스스로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생각하는 일의 결과 물이었다. 십오 년 전이었던가. 아직 본격적으로 남색에 빠지기 전의 일이었다. 재수없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일생에 딱 한번 여자를 품 어 보았었는데 그 결과가 열 달 뒤에 저토록 틀림없이 튀어나올 줄이 야! 미소년 취하기를 곰이 꿀단지 핥듯이 좋아하는 용양도인도, 제 아들한 테만큼은 어쩔 수가 없는 면이 있었다. 게다가, 천하의 남색가 용양도 인에게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난다면 어찌 되겠는가! 용양도인은 일이 그렇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용양도인은 오랑에게만큼은 꼼짝을 못했고, 그러하기에 오랑이 색존의 일을 핑계삼아 강호로 나가겠다는 것을 말 릴 힘이 없었다. '저놈은 왜 저렇게 제 어미를 닮았지? 어이구 내 팔자야!' 아무리 한탄해 보아도, 엎질러진 물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 * * 동백산을 벗어나 신양(新陽)으로 가는 인적없는 길 어귀. 이제 초가을로 접어들어 조금씩 짙푸름을 잃어 가고 있는 수풀 입구에 한 사람이 앉아 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소운비였다. '피곤하지가 않구나!' 동백산에서부터 이틀 길을 내내 걷고 난 뒤 처음으로 쉬는 자리였다. 그것은 경이로운 사실이었다. 조금만 걷고 나면 곧 죽어 넘어질 듯 피 곤을 느끼던 그의 몸이 아니었던가! '이런 것이 내공의 힘이라는 것인가?' 소운비는 피식 웃었다. 그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얻 게 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적당히 쉬어 가야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아직은 내공의 허공에 뜬 구름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소운비는, 마침 쉬기에 적당한 숲을 발견하고 막 까칠까칠한 나무둥치에 등을 기 댄 참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오랜만에 맞이한 휴식의 시간.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 여 자의 얼굴...! 소운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전에는, 그의 머릿속에 떠오를 여자의 얼굴이라고는 오직 하나뿐이었 다. 한데 지금 그가 무심코 떠올린 것은 그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마땅히 떠올렸어야 하는 것이 진설영의 얼굴이었다면, 지금 떠올 린 것은 혜와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얼마 같이 지내지도 않았었는데... 그리고 나를 속인 여자인데!' 혜와의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그의 입술은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마치 입술에도 감정이 있어서, 혜와를 생각하고 떠는 것처럼. '입맞춤 한번이 이렇게 지워지지 않는단 말인가?' 소운비는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져 보았다. 거기에는 아직도 혜와의 풋 풋한 사과 냄새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소운비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색마들을 욕할 것이 아니군. 육욕을 잊지 못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 가 아닌가?' 숨을 크게 한번 쉬어 그 번뇌를 떨쳐 버린 다음, 소운비는 숲 바깥의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앞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밭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밭의 주인으로 보이는 삼십대의 건장한 사내가 열심히 밭을 갈고 있었다. 햇빛에 그을린 검은 살갗과 꿈틀대는 근육 위로 흐르는 구슬 같은 땀 방울이 무척이나 건강해 보이는 사내였다. 잠시 뒤, 저쪽 편에서 한 여인이 광주리를 이고 걸어왔다. 사내처럼 햇 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얼굴로, 미인은 아니었지만 순박하고 동그란 눈매가 무척이나 귀여운 여인이었다. "여보!" 여인이 큰 소리로 사내를 불렀다. 사내는 일손을 멈추고 이마의 땀을 씻으며 아내를 돌아보았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 모습은 더욱 건강해 보였다. 두 부부가 광주리를 펼쳐 놓고 밭두렁에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 서, 소운비는 문득 부러움을 느꼈다. '정말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이는구나... 저렇게 살아 가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행복이 아닐까?' 명예도, 부도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밭 갈고 일하며 살아 가 는 두 부부의 모습은 신선의 팔자보다도 좋게 보였다. 소운비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여보, 올해는 어때요? 소출이 좀 많이 되겠어요?" 아내가 묻자 남편이 대꾸했다. "아무러면 내가 어머니랑 당신 입에 거미줄 치게 하겠어? 당신은 그런 걱정 말고 딴 일이나 해." 아내가 짐짓 뾰루퉁하게 말했다. "농사가 우리 일인데, 내가 그 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뭘 걱정한단 말 이에요?" 남편이 빙긋이 웃더니 말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빨리 하나 낳아야지. 그게 당신 일이야." 아내는 더욱 입을 삐쭉거렸다. "아들이든 딸이든 나 혼자 낳나요? 별꼴이야...!" 남편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그렇지. 당신하고 나하고 둘이 낳는 거지. 한데 단칸방에 어머니를 모 시고 살자니... 여보!"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 여기서 애나 만들까?" 소운비는 뜨끔해졌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는 나무에 가려 두 부부에 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내는 손바닥으로 남편의 등을 철썩 때리며 까르르 웃었다. "에구, 징그러운 소리...! 어서 밥이나 빨리 먹어요!" 하나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는 다짜고짜로 밭두둑에 쓰러뜨렸다. 단 단히 동한 모양이었다. "어머, 이이가...? 놔요! 누가 봐요...!" 아내는 입으로는 요란하게 반항했지만 몸은 밥그릇을 엎지 않을 자리 로 살그머니 옮겨 눕고 있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어머니도 빨리 손주를 봐야 좋아하실 거야." 남편의 말을 끝으로, 두 부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 게 훔쳐보게 된 소운비의 얼굴만 애꿎게 붉어지고 말았다. '봐선 안 되지...!' 소운비는 눈을 감았다. 숲에서 새 한 마리가 푸드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온통 조용했다. 두 부부의 속삭이는 소리만 이따금 들려 왔 다. "아유, 여보. 등이 아파요...!" "그럼 이쪽으로 와." 눈을 감고 두 부부의 소리를 듣고 있던 소운비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 다. 그것은 평화였다. 그는 남들이 벌이는 정사를 보기도 했고, 또 그 이론을 익히기도 했으 며 노골적인 유혹을 받아 보기도 했었다. 지금 이 두 부부가 벌이는 것 역시 정사였다. 하나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보아 왔던 것들처럼 추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남편처럼 건강했고, 또 그 아내처럼 순박한 정사였다. 소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저들은 화금궁의 여인들이나 색마들처럼 정사의 이론은 하나도 모르 지만 저렇듯 즐겁게 서로를 사랑하는구나!' 할 수만 있다면, 그릇된 육욕의 길을 걷는 색마들을 불러다 놓고 이 광경을 보게 해주고 싶었다. 보고 배우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한참 그런 흐뭇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호통 소리가 들려 왔 다. "이런 천하에 음탕한 연놈을 보았나!" 소운비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리고 숲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말에 탄 십여 명의 인원이 두 부부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두 부부도 소운비처럼 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 는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놀라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하나 소운비가 놀란 것보다 더 놀라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 운비는 두 부부를 둘러싼 십여 명의 사람들 중에서 한 여인을 발견했 기 때문이었다. 바로 진설영이었다. 개방 장로 규염개는 수염 끝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소방주의 명을 받들어 네 명의 개방 제자와 진설영을 대동해 사천 당문에 가서 격색마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몇 명의 고수를 초빙해 돌아가는 길이었 다. 빨리 총타로 돌아가기 위해 개방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까지 타 고 은밀한 길을 취해서 오던 중이었는데, 이런 낯뜨거운 풍경을 보게 되다니! 천하에 색마들이 횡행하다 보니 이런 산골의 무지렁이들까지 음행을 즐기게 된 것이 아닌가! 두 명의 무지렁이들은 벌써 자신들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아무도 안 지나갈 줄 알고..." 하나 그런다고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격색마회를 꾸리는 장 도에 선 지금, 사소한 음행도 그냥 넘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지금 사천 당문의 사람들까지 옆에 있으니, 이 기회에 격색마회의 기 강도 세워 둘 필요가 있었다. 아는 것 없는 산골 무지렁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안 든 것은 아니 었으나, 규염개는 싸늘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한 옆에 서 있 는 진설영에게 물었다. "진 소저, 이 연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두 부부로부터 시선을 외면하고 있던 진설영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대 꾸했다. "격색마회의 기율로 다스려야겠지요." 사천 당문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규염개는 자신을 수행해 온 네 명의 개방 제자들에게 명령했다. "음행을 다스리는 법을 집행해라!" "옛!" 각각 천(天), 지(地), 일(日), 월(月)이라고 이름붙여진 네 명의 제자들 이 일제히 대답하고 몽둥이를 들고는 두 부부를 둘러쌌다. 다른 사람 들은 뒤로 빠져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네 명 중 우두머리 격인 천개(天 )가 다른 세 사람에게 물었다. "음행에 대한 벌은 무엇이냐?" "박살(搏殺)!" 네 개의 몽둥이가 위로 치켜 올려졌다. 행색을 보아하니 무림 고수들인지라 반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용 서를 구했던 남편이 처음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보쇼! 대체 부부가 인적없는 곳에서 잠깐 부둥켜안았기로서니 그것 이 무슨 음행이란 말이오?" 천개는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 "본 회의 기율에는 환한 대낮에 다른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에서 벌이 는 짓은 음행이라고 나와 있다." 남편은 더욱 크게 부르짖었다. "그리고 기율이고 뭐고 당신네 사람들끼리 지키고 벌하고 하는 것이 지, 왜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는 거요? 이건 너무하잖소?" 퍽! 일개(日 )의 몽둥이가 남편의 등에 작렬했다. "아이구머니!" 아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너무하고 안 하고는 저승에 가서 따져라!" 그 뒤를 이어 네 개의 몽둥이가 두 남녀의 반쯤 벌거벗은 몸 위에 소 나기처럼 쏟아졌다. "어구구구! 사람 죽네...!" 남편은 그 와중에서도 아내가 덜 맞도록 그녀의 몸을 감싸안고 뒹굴었 다. 하나 사방에서 날아드는 몽둥이 찜찔은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적당히 하고 신양으로 끌고 가자. 사람이 많은 곳에서 격색마회의 대 의를 설명하고 공개처형하는 것이 좋겠다." 규염개가 제자들에게 말해서 몽둥이 찜질을 중지시켰을 때는, 이미 두 부부는 반죽음이 된 다음이었다. "그만들 해두시오!" 밭 옆의 수풀 속에서 소운비가 걸어나온 것은, 천지일월 네 제자가 두 부부를 잡아 일으켜 세우는 순간이었다. 소운비는 그 동안 갈등하고 있었다. 두 부부가 당하는 곤욕은 안타까 웠지만, 지금 뛰어나가서 진설영을 만나는 것이 좋을지 판단이서지 않 았던 것이다. 언젠가는 진설영을 만나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 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동안, 두 부부는 피곤죽이 되었고 결 국 소운비는 마땅한 대책도 없이, 다만 분노를 안고 숲에서 걸어나오 게 된 것이다. "웬 놈이냐!" 규염개는 눈살을 찡그리며 그에게 물었다. 한데 옆에 있던 진설영의 얼음 같은 표정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소운비는 진설영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이 사람들은 죽을 죄를 짓지 않았소. 설사 그것이 죄라고 하더라도 옷을 입히고 따끔하게 타이르기만 하면 될 일을 그렇게 힘으로 다스리 는 것은 더욱 나쁜 짓이오!" 규염개에게는 갓 스물을 넘었을까말까한 애송이의 호통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불안한 것은 허공에서 얽히고 있는 진설영과 그 애송이의 눈빛이었다. "아는 사람이오?" 규염개가 진설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손이 은밀히 움직여 네 명의 개방 제자들에게 소운비를 경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소운비는 그런 그들이 겁나지는 않았다. 그를 겁나게 한 것은 바위처 럼 무표정한 진설영이었다. "진 소저, 좋지 않은 인물이오?" 진설영이 계속 대답을 않자 규염개가 재촉해 물었다. 그는 사실 소운비와는 구면이었다. 하지만 화금궁의 혼전 속에서 그저 만음요화의 옆에 있던 사내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기 때문에 그 인상 이 깊게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진설영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소운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입술만 쳐다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냉정한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소운비는 온몸의 힘이 쫙 빠져 나 가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모른다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가 진설영의 말을 곱씹고 있는 동안, 진설영은 완전히 등을 돌려버 리고 말았다. 고개를 갸웃하던 규염개가 문득 얼굴을 굳혔다. "아, 그렇군! 저놈은...!" 그는 이제야 깨달은 듯 급히 네 명의 제자들에게 외쳤다. "화금궁에서 보았던 자다. 만음요화의 졸개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네 명의 개방 제자들이 두 부부를 팽개치고 일 제히 뛰어내려 소운비를 둘러쌌다. 하나 소운비는 그런 그들에게 일체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진설영을 절박하게 외쳐 불렀다. "설영!" 진설영이 잠시 멈칫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그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 다. 하지만 그는 그 착각에라도 의지하고 싶었다. "설영, 오해다! 모든 것은 오해야. 네가 내 말을 조금만 들어 준다면 그 오해를 풀 수 있어."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규염개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화금궁의 졸개가 진설영을 아는 척한다는 사실이, 그것도 뭔가 곡절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이다. 그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는 진설영에게 신중하게 물었다. "진 소저, 정말 모르는 사람이오?" 진설영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 사람은...!" 감정이라고는 한 점도 실려 있지 않은 차가운 음성이었다. "언뜻 화금궁에서 보았던 것 같군요. 탕녀의 애인인가 봐요." "설영...!" 진설영의 대답은 소운비로 하여금 더 이상 해명할 힘을 빼앗아 가 버 렸다. '석연치가 않군!' 규염개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그의 불 안은, 자신의 소방주에 대한 걱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럼, 이놈을 여기서 도륙내도 되겠소?" "뜻대로 하세요." 진설영은 약간 짜증을 내며 말을 몰아 길을 달려갔다. 그녀의 모습은 곧 뿌연 먼지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렇다면...! 설령 이 사람이 진 낭자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방주를 위해서...!' 모진 결심을 한 규염개는 네 명의 개방 제자들을 향해 외쳤다. "천(天), 지(地), 일(日), 월(月)! 놈을 해치우고 따라오너라!" 그리고 그는 사천 당문의 사람들과 함께 진설영의 뒤를 따라 말을 달 렸다. 진설영을 혼자 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데다가 소운비가 아주 약해 보였으므로, 네 제자의 실력이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고 판 단한 것이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절망한 소운비와 반쯤 시체가 되어 있는 두 부 부, 그리고 그의 목숨을 취하려는 천지일월 네 명의 개방 제자들뿐이 었다. 위윙! 위윙! 위윙! 위-윙! 네 개의 몽둥이가 휘둘러지는 소리가 공포스럽게 허공에 울렸다. 네 명의 적이 그를 둘러싸고 바람개비처럼 몽둥이를 돌려대고 있었다. 하나 소운비는 진설영이 자리를 뜬 다음부터 꼼짝도 안 하고 있었다. 네 개의 몽둥이가 자신을 때리건 말건, 그것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태도였다. '설영...! 너는 이제 내가 죽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내게서 멀어졌단 말이냐. 내게 단 한번의 기회도 주지 않는단 말이냐?' 그것이 마음의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도 할 수 없었던 네 명의 개 방 제자는, 그의 침묵을 일종의 사술로 이해했다. '색마들은 하나같이 무공이 기이하고 간교하니 조심해서 상대해야 한 다!' 한참을 빙빙 돌던 네 명의 거지들 중 천개가 불현듯 크게 고함을 질렀 다. "천!" 그 뒤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연달아 외쳤다. "지!" "일!" "월!" 소리를 따라서 네 개의 방위로부터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소운비는 그 때서야 눈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피하고 싶은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퍼버버벅! 네 개의 몽둥이가 고스란히 그의 몸에 작렬했다. "아니?" 놀란 것은 오히려 잔뜩 고민하여 공격을 감행했던 개방 사람들이었다. 놀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소운비가 전혀 몽둥이를 피할 생각 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네 개의 몽둥이를 일시에 맞고도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놈이 금강불괴(金剛不壞)라도 된단 말인가?' 그 의문을 확인도 할 겸, 그들은 다시 한번 소운비를 향해 몽둥이를 날렸다. 퍼버버벅! 여전히 소운비는 반항하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맞춘 네 명의 거지들은 초식이고 뭐고 생각지도 않은 듯 소 운비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퍼벅! 퍽! 퍽! 퍽! 퍽-! 몽둥이가 사람의 살을 두드리는 촉감이란 때리는 입장에서는 매우 상 쾌한 것이었다. '개 패듯 팬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개가 되어 가는 것은, 맞 는 사람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들이었다. 천지일월 네 거지들의 눈이 차츰 붉게 물들어 갔다. 그들은 때려도 때 려도 쓰러지지 않는 이 희멀건 한 사내에게 차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놈이 언제까지 버티는가 보자!' 네 사람이 더욱 기세를 올려 소운비를 두들겨 패고 있을 때였다. "여보! 여보오오!" 기절한 줄 알았던 촌사람의 아내가 남편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것이 었다. "안 돼요! 죽으면 안 돼요오오...! 으흐흐흑...!"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울려 퍼지자, 소운비를 후려갈기던 네 사람의 주의가 잠시 흩어졌다. 그들은 때려도 때려도 효과가 없는 소운비 대 신 그 두 부부에 대한 살의가 끓어올랐다. "에잇! 저 연놈들이 아직 확실히 죽지 않은 것 같군." "저쪽부터 끝을 내버릴까?"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는 순간, 소운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소운비는 아까와는 달리 그들 네 명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어디에나 쓰레기는 있다더니... 그러고도 당신들이 정파의 사람들이 오?" 잔뜩 분노를 억누른 그의 말은 네 명의 거지들에게 코웃음을 불러일으 켰다. 단지 맷집이 좀 특이하게 좋다는 것만 빼고는 아무 힘도 없어보 이는 놈이 무슨 오기란 말인가. "이놈! 아주 박살을 내주마!" 쌔애애앵! 제멋대로 휘두르는 거지들의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한데... 없었다. 몽둥이가 날아가는 소리만 있을 뿐 살아 있는 몸뚱이에 작렬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없었다. 네 거지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네 개의 몽둥이가 각각 두 개씩 소운비의 손아귀에 잡힌 것이다. "이, 이놈이?" 네 거지는 허둥거리면서 적에게 잡힌 몽둥이를 빼내려고 했지만 요지 부동이었다. 눈을 어지럽히는 초식으로 후려갈긴 것이 아니니 손으로 잡는다 해도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네 사람의 힘으로 그것 을 도로 뺏을 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것은..." 소운비가 네 거지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설영이 너희 같은 놈들과 같이 다닌다는 사실이다!" 퍼어어억!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무엇이라도 손에 잡힌 것을 부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그리고 그 바램을 안고 손아귀에 힘을 준 순간, 몽둥이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그리고 소운비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그만이 낼 수 있는 우렁찬 기 합 소리였다. "크아아아아앙!" "으악!" 네 거지들은 기겁을 하며 몸을 굴려 뒤로 물러났다. 소운비의 기합은 계속되었다. 그것도 몸부림과 함께...! "크허어엉! 크어허헝!" 아까는 때려도 때려도 움직이지 않는 바위 같더니, 이제는 미쳐 날뛰 는 것 같아 보이는 소운비의 모습은, 네 거지들의 소름을 쫘악 돋게 했다. "크르르...!" 소운비가 파랗게 빛나는 두 눈을 들어 그들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꺼져라... 당장 꺼져!" 천개가 문득 어떤 사실을 떠올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저놈은..." 그리고 그는 찢어지게 외쳤다. "무산음호다! 저놈은 무산음호야!" 두 번째로 무산음호라는 이름을 뱉어 내고 있을 때, 그의 몸은 이미 가랑잎처럼 구르며 달아나고 있었다. 다른 세 명의 거지들도 그 뒤를 따라 굴러 갔다. "무산음호가 나타났다! 무산음호가 나타났다!" 그들은 일제히 입으로는 떠들고 발로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빨리 뛰면서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으로 자신들의 내공 공부가 결코 하수가 아님을 자랑이라도 하듯 고래고래 고함을 지 르면서. 그들의 뒷모습을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쏘아보던 소운비가 그 분노를 가라앉힌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다음이었다. 분노가 가라앉자 동시에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고, 그는 그 자리 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으으음...!" 무리하게 힘을 쓴 탓인지 단전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치밀어 올랐 다. 그로서는 아직 자기 몸의 힘도 적절히 조절하기가 힘들었던 것이 다. 촌사람의 아내는 피투성이가 된 남편을 부둥켜안고 그 광경을 지켜보 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은은한 방울 소리가 들려 왔다. '뭐지?' 소운비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긴장을 풀지 않았다. 진설영과 규염개가 가버린 반대 방향에서 그 방울 소리의 주인공이 곧 나타났다. 분명히 두 발로 걷고 있는데도 마치 바람처럼 빠르게 소운비 앞으로 나타난 그 사람은 끝에 방울이 달린 지팡이를 짚은 중년의 단아한 비 구니였다. 이상한 것은, 비구니의 두 발이 맨발이라는 사실이었다. 맨발로 서슴없 이 걸어다닐 수 있는 여자는 중원 천지에 없다. 한데 그 비구니는 전 혀 거리낌이 없는 얼굴이었다. "이런, 쯧쯧... 대체 무슨 일을 당하셨소?" 비구니는 자애로운 얼굴로 피투성이의 부부와 소운비를 번갈아 바라보 았다. "남편이 죽을 것 같아요...! 제발 도와 주세요..." 말문이 트인 여인이 애원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비구니는 무릎을 꿇 고 앉아 그녀의 남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타난 사람이 나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소운비는 긴장이 풀 려 땅바닥에 몸을 눕혔다. 비구니가 품속에서 꺼낸 약갑으로 남편에게 몇 가지 응급조치를 끝내 더니, 아내의 상처까지 보살펴 준 다음 그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안심하시오. 외상은 심하나 치료하면 나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비구니는 소운비 쪽으로 걸어왔다. 한데, 그를 부축하려던 비구니의 손 길이 갑작스럽게 딱 멈추었다. "아니...?" 비구니의 눈은 갑자기 삼엄한 기운을 띠고 빛났다. 그 눈길이 머문 것 은 한 옆에 뒹굴고 있는 소운비의 비파였다. "너는... 도대체 네놈은 누구냐?" 소운비는 대답할 수 없었다. 비구니의 손이 그의 목줄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말해라! 네놈의 정체는 뭐냐?" 방금까지만 해도 자애롭던 비구니의 얼굴은 칼날 같은 살기를 띠고 있 었다. 소운비는 대체 그녀가 무엇을 추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희미하게 그가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비구니가 자신의 내공이 무산음호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추궁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 '이래저래 변명하기 힘든 처지에 빠지고 말았구나...' 소운비는 별로 저항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비구니의 손 길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비구니의 다른 손이 허공으로 치켜 올려졌다. "어서 대답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였다. "안 돼요!" 소운비가 앉아 있던 숲 쪽에서 여인의 외침이 들려 왔다. 온통 먼지투 성이가 되어 그 안에서 뛰쳐 나온 것은 혜와였다. * * * "이런 발칙한 것...!" 만음요화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혜와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두 번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배신이었다. '잡히기만 해봐라! 찢어 죽여 버릴 테다...!' 하긴, 곱게 돌아왔어도 혜와는 어차피 죽을 몸이었다. 혜와가 소운비와 동침하고 돌아왔다고 할 때, 그 몸 안에 흡수되었을 원양진력을 그냥 놔둘 만음요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흡수하고 죽이려고 했는데... 요년이 그걸 알아 버렸나? 분하구나! 분 해...!' 치솟는 분노로 씩씩거리며, 만음요화는 무산각으로 향했다. 제자들이 산중에서 발견했다는 다 죽어 가는 남자를 보기 위해서였다. 발견한 것이 여자였다면 결코 궁 안으로 들여놓으라고 할 만음요화가 아니었다. 잘생긴 남자라는 소리에 궁 안팎의 일이 복잡한데도 불구하 고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궁주님!" 남자를 보살피고 있던 녹의(綠衣) 항렬 제자들이 인사하며 뒤로 물러 섰다. "흐음...?"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만음요화는 눈이 휘둥그래 졌다. 그 사람은 뜻밖에도 탐서랑이었던 것이다. * * * 여덟 장의 꽃잎이 달린 거대한 연꽃. 그 연꽃 위에 누운 짙은 붉은색의 여체. 그 여체 위에 엎드린 흰색의 남자. 남자의 머리는 여자의 두 다리 사이에 있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기괴한 자세. 그리고 그 자세에서도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두 개의 성기. 두 개의 성기가 만난 지점에 새겨진 글자 '아(阿)'. 여덟 장의 연꽃잎과 어우러져 뻗어 있는 두 남녀의 팔과 다리. 두 남녀를 둘러싼 수십 쌍의 부처들. 아니, 부처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음란한 그것들. 환희불(歡喜佛)이라고 이름붙여진 그들이 벌이는 수십 종류의 치태들. 혹은 짐승과, 혹은 여럿이 붙들고 늘어져 허공을 향해 토해 내는 열락 의 표정들...!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 앞에 그가 부복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태원옥호공을 익혔을 때만 나타나는 호성(虎聲)을 질렀습니 다." 긴 보고를 마친 그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복면 아래 진면목을 여전히 감추고 있는 취화비도였다. "어떠십니까? 그 소운비라는 자에게 흥미가 가지 않으십니까?" 대답은 환희불의 그림이 가득한 벽으로부터 울려 퍼졌다. "그렇군...!" 마치 꿈속에서 들려 오는 것처럼 몽롱하면서도 기괴한 음성이었다. "계획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파에서도, 다섯 사람의 색 마들도." "어리석은 것들...!" 취화비도가 맞장구를 치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어찌하오리까? 대계(大計)를 시작하오리까?" "아직은...!"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는 마치 그림 속의 환희불들이 일제히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아직은 나의 아바드후티카가 열리지 못했다... 아직은...!" 취화비도는 바닥에 이마가 닿을 때까지 숙였다. "속하, 한마음으로 그 성취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려라!" 목소리는 음울하면서도 몽롱한 울림을 가득 싣고 취화비도의 머리 위 로 지나갔다. "나의 아바드후티카가 열릴 때까지...! 네 개의 성물(聖物)이 한 자리에 모일 때까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취화비도는 목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다시 한번 물었다. "하면, 그 소운비라는 자는 어떻게 하면 좋으리까? 일단은 수하를 붙 여 뒤를 밟게 해두었습니다만." 목소리는 잠깐의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주시해라...! 그는 어쩌면 나의 아바드후티카를 열어 줄 기연, 라사나 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기연, 라라나를 찾아라! 여자를 찾아 라!" "존명!" 취화비도는 그대로 바닥으로 꺼질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아바드후티카, 정화된 힘. 라사나, 남성의 힘. 라라나, 여성의 힘. 수십 장 아래 지하의 밀실에서, 밀교(密敎)의 비어(秘語)들이 오가고 있었다... 때는 원조(元朝), 순제(順帝)의 지정 연간. 몽고의 황실에서 라마교(喇 敎)의 의식들이 숭배받고 있던 시절... < 제1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