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색마열전 2 권 제 10 장 의문(疑問) 제 10 장 의문(疑問) 반주검이 되다시피 한 남편을 단칸방에 눕힌 진진(珍珍)은 그제서 야 긴장이 풀렸다. 긴장이 풀리면서 함께 찾아든 것은 앞뒤를 알 수 없는 혼란이었다. 대체 오늘은 어떤 날이란 말인가?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재수가 없 는 날이 있을 수 있는가? 밭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새참을 갖다 주러 갔다가 늘 그랬던 것처럼 옷을 벗고 아이를 만들려는 판에, 느닷없이 나타난 말 탄 거지들에 게 이런 봉변을 당하다니. 게다가 그 거지들로부터 자기네 부부를 구해 준 것이나 다름없는 앳 된 젊은이는 별안간 호랑이 울음 소리를 내며 고꾸라지고, 이어서 구 급 약을 준 비구니는 그 젊은이를 죽이지 못해 안달을 하더니, 옷이 먼지 투성이가 된 예쁘장한 아가씨가 나타나 그 비구니에게 울며 매달리고...! 이웃집에 가려 해도 반나절 다리품을 팔아야 할 외진 곳에서 그저 시어머니 한 분과 남편을 봉양하며 살아 왔기에, 걱정이라면 천기 (天氣)가 좋지 않아 농사에 탈이 나는 것 외에는 없었던 진진은 오늘처 럼 엉망진창인 날을 겪어 본 일이 없었다. 외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여러 사람에게 들려 돌아오자 망령기가 있던 시어머니도 어이가 없는지 아까부터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뭐 라 혀 밑으로 중얼거리며 남편의 이마를 만져 보고 있었다. 진진의 몸도 쿡쿡 쑤셔 왔지만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이 집 마당에 서 있으니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시어머니는 손님 대접을 할만한 처지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송해서 이걸 어쩝니까? 집이라고 해야 방 한 칸뿐인지라 대접하 고 싶어도 할 곳이 없군요...!" 진진이 비틀비틀 마당으로 내려서자 사립문 안쪽에 모여 서서 무언 가 쑥덕공론을 하던 비구니와 두 젊은 남녀가 얼른 이쪽을 돌아보았 다. 진진의 말대로 집 안의 행색이 옹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실 방이 한 칸 더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들여놓는 것이 진진으로서는 불 안하고 꺼려지는 바가 없지 않았다. 비록 이 세 사람은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도움을 주었지만 분명 무림의 사람들이고, 자신들에게 행패를 부린 그 거지들과 같은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무림의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 까이 하지 않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이야기를 남편이 한 적이 있었 다.그리고 오늘, 그들의 행패를 진진 자신도 몸소 겪어 본 것이다. 진진에게는 앞의 세 사람도 은인이기 이전에 그저 두렵게만 여겨지 는 무림인들이었다. 게다가 저 비구니와 두 남녀 사이에는 무슨 은원이 있는 듯이 분위 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도 그저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비구니의 손아귀에 그 젊은이의 팔목이 단단히 잡혀 있는 것 이 아닌가? 청년의 얼굴은 하얗고 창백해 보였다. '고맙긴 하지만 머물 곳이 마땅치 않으니 그냥 가보아라' 하는 말 과 별다를 바 없는 진진의 이야기를 들은 비구니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 다. "빈니가 바깥어른의 상처를 다시 살펴보고 싶습니다만, 허락해 주 시겠습니까?" 진진은 어쩔까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구니들이란 본래 의술을 조금씩은 아는 법이다. 그들 식구의 형편으로는 의원을 부르기도 힘들 뿐더러, 사실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의원을 찾아갈래도 이틀은 꼬박 가야 했다. 비구니는 소운비의 손을 잡은 채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말릴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혜와는 울먹울먹하는 얼굴로 역시 그 뒤를 따라 갔 다. 해서 좁은 방안이 미여 터질 듯이 되고 말았다. 아까는 딱 죽는 줄로만 알았었는데, 이제는 그래도 끙끙 앓는 소리나 마 내고 있는 진진의 남편 이름은 장평(張坪)이었다. 장평의 몸을 살펴본 비구니는 낯빛이 무거워지더니 말했다. "목숨은 위태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 "예?" 진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이 되어 반문했다. "신(腎)을 상하셨군요..." 비구니의 음성은 나지막했지만, 진진의 귀에는 천둥 소리처럼 들렸 다. 신을 상하다니! 그럼 이 집안의 대는 여기서 끊어진다는 말인가! 그것은 진진에겐 남편이 곧 죽는다는 소리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보다 더 심한 충격을 주었다. 비구니는 약갑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주며 말했다. "이 약을 뜨거운 물에 갈아 마시게 하십시오. 이틀 정도는 괜찮을 것입니다. 하지만 빨리 의원을 모셔 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빈니도 여기까지밖에는...!" 멍하니 단약을 받아 들며 망연자실해 있는 진진의 얼굴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비구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한 부탁인 줄은 알지만 이미 해가 져서 갈 곳이 마땅치 않군요. 아까 보니 뒤쪽에 헛간이 있던데 거기서라도 하룻밤 머물 수 있을까요?" 진진은 망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구니와 두 남녀가 고맙다고 인 사를 하며 방을 나간 뒤 그녀의 눈에서 뿌옇게 눈물이 배어나왔다. 노망이 든 시어머니는 아기 같은 목소리로 칭얼거리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응? 응?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뻗은 거야? 저녁은 안 줄 거냐? 응? 응?" 끼이익! 헛간의 문을 닫은 뒤에야 비구니는 소운비의 손목을 놔주었다. 그의 몸은 냄새나는 짚더미 위에 던져졌다. "이제야 제대로 심문을 할 수 있겠구나." 그를 바라보는 비구니의 눈매는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냉엄하게 빛 나고 있었다. 혜와가 소운비를 부축하며 말했다. "너무하시는군요! 부상을 당한 사람인데...!" "별로 심하지 않은 내상이야. 그저 힘을 제대로 쓸 줄 몰라서 그렇 게 된 것일 뿐...!" 비구니는 코웃음을 치며 소운비 앞에 앉았다. 소운비는 혜와의 부 축을 뿌리치며 짚더미 위에 정좌하고 비구니와 마주했다. "대체 무엇을 물어 보시겠다는 겁니까, 스님?" "그대의 내력을 알아 보겠다는 거지." 소운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아 볼 것도 없는 내력일 뿐이오. 우연한 기회에 무산음호라는 분 의 내공 가르침을 받았을 뿐. 나는 무림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오. 만 일 그분에게 원한이 있다면... 나에게 그것을 갚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비구니가 자신의 내공 수법을 알아 보고 추궁하는 것이라 짐작한 소 운비의 대답이었다. 그는 진설영과의 재회 이후 모든 일에 대한 의욕을 잃고 있었다. 어차피 무산음호에게는 빚이 있으니, 그가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 을 대신 갚아 주어도 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빚을 갚 는 것은 아마도 목숨으로 해야 할 테지만. 한데 비구니는 그의 대답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더니 곧 정색을 하 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묻는 것은 너의 내공에 관한 것이 아니다. 너의 내공 수법 은 특이하기는 하지만 내게는 별 상관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저 것이다." 그리고 비구니가 턱짓으로 가리킨 것은 소운비의 비파였다. 어리둥절하기는 소운비도 마찬가지였다. "저것은 내 비파요. 한데 그것이 어쨌다는 거요?" 비구니는 소운비의 그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그의 얼굴 에 한 점의 거짓이라도 묻어 있는지 관찰하는 듯했다. "너는 정녕 저 비파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말이냐?" 소운비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 비구니는 다시 한번 으르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저 흉악한 물건을 이 자리에서 깨부숴도 너는 아무 이의가 없겠지?" 소운비는 그 말에 더욱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될 말씀. 저 물건은 비록 귀한 것은 아니지만 소생에게는 나름 대로의 사연이 있는 것이오. 함부로 할 수는 없소." 그러자 비구니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네놈은 저 비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비구니의 손이 허공으로 들려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혜와는 비구니가 소운비를 쳐죽 이려는 줄 알고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하나 혜와는 무릎 쪽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고 다시 그 자리에 주 저앉았다. 가볍게 지풍을 날린 비구니가 혜와에게 경고를 던졌다. "해치지 않을 테니 한쪽에 얌전히 앉아 있도록. 나의 일행들과 사 흘 후 이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그때까지는 참아 주어야겠네." 소운비가 비로소 혜와 쪽을 돌아보며 짐짓 화를 냈다. "쓸데없이 왜 나를 따라온 거냐! 어서 돌아가지 못해?" 그리고 다시 정중하게 비구니에게 말했다. "이것 보시오. 이 사람은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 조용히 돌려 보내시오. 나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소. 필요한 것은 나뿐이지 않 소?" 비구니는 소운비를 향해서도 손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둘 다 필요하니 달아날 생각은 말아라!" 새벽이 되었다. 비구니에게 제압당한 소운비와 혜와는 헛간의 벽 쪽에 붙어 꼼짝못 하고 누워 있었다. 비구니는 헛간 입구에 가부좌를 틀더니 눈을 사르 르 감고 앉은 채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혜와와 소운비는 마치 포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옴짝달싹을 못하고 서로 등을 대고 누워 있었는데, 잠을 자기는커녕 두 눈을 말똥말똥 뜬채였다. 혜와는 등으로 전해지는 소운비의 따뜻한 체온에 가슴이 두근대느라 고 잠을 못 이루는 것이었고, 소운비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생각하 느라고 그런 것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이상한 일만 일어나는 것이냐! 내게는...!'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간신히 만음요화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더니 이번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비구니 다. 이 비구니는 나쁜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만음요화나 다른 색마들 이상으로 그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그것도 소운비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체 저 비파가 뭘 어쨌다는 것일까...?' 소운비는 문득 한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저 비파는 사부의 것이었다. 한데 비구니는 비파를 알아보았다. 하 면 혹시 이 비구니와 사부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수록 그 추측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 갔다. '사부는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사부를 구했을 때 낭패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원한을 사서 치열한 싸움을 했 던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분명 이 비구니이거나, 아니면 비구니와 관 계된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사부를 찾아 내서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 고 할 것이고... 만일 그들이 사부를 찾아 낸다면...?' 사부는 물론이요, 그 제자이자 수양딸인 진설영 역시 결코 무사하 지 못할 것이다. 소운비의 생각이 진설영에게 가서 머물자, 밀물처럼 슬픔이 닥쳐 왔다. '사매는 나를 믿지 못했다. 내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설 령 세월이 흘러 사매와 나 사이의 오해가 풀리더라도 이제는 옛날처럼 좋 은 사이는 되지 못할 것이다...!' 소운비는 진설영과 자신의 사이에 흐르기 시작한 폭 넓은 급류를 느 끼고 있었다. 그것은 건널 수도, 좁혀 볼 수도 없는 그런 격류였다. '하나, 저 비구니가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나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들은 비록 나를 버렸지만, 나는 내 사부와 사매를 저버릴 수 없기 때 문이다...!' 소운비는 그렇게 마음을 굳히면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귀가 훨씬 예민해졌다.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가만 들어 보니 그것은 헛간의 벽 너머, 이 집 식구들이 자는 방에 서 들려 오는 소리였다. "여보, 괜찮아요?" "응...! 당신은 괜찮아?" 말투로 보아 잔뜩 숨죽여 하는 대화인데도 벽 너머에까지 들린다는 것은, 이 집이 얼마나 허술하게 지어졌는지를 말해 주었다. '이 부부는 나로 하여금 계속 엿보고, 엿듣게 만드는군...!' 소운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니는 어디 가신 거야?" "소피 보러 가셨나 봐요. 많이 아프지는 않아요?" "참을 만한걸...! 여보, 우리 말이야. 아들을 낳거든 무림인으로 만들 자구. 이거 어디 힘없는 놈은 억울해서 살겠어? 몽고 놈들은 몽고 놈 들대로 괴롭히지. 협객이랍시고 설치는 무림 사람들은 또 이렇게 걸핏 하면 사람을 쳐대지...! 농사꾼은 못해 먹겠어! 무술 잘하는 아들놈 하나 만 있어도 이런 일은 겪지 않을 거야." "흑... 그래요, 그래요..."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할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장평과 그것 을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는 진진의 대화는 소운비를 찡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소피가 아니라 큰 걸 보러 가신 모양인데? 옳지, 어디 이런 기회를...!" "아니. 여보, 움직일 수 있어요?" 진진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이지. 하지만 오늘은 내가 좀 상처를 입었으니 당신이 위로 올라와." "하지만 그 스님이 분명히..." "응?" "아, 아니에요." "시간없어, 이러다 어머니 돌아오시면 말짱 도루묵이야. 어서!" 장평이 채근하자 진진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따랐다. 좀 있으니 잔뜩 억누른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소운비는 장평이 지금 정사를 벌일 수 있는 것이 비구니가 준 약의 효과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토록 아들이 소원인 부부인데, 제발 이번에 아들이 생긴다면 좋 으련만!' 소운비는 마음속으로 두 사람에게 응원을 보냈다. "여보, 너무 그렇게 조심조심하지 마. 세게 해도 된다니까." "하지만 여보. 당신 상처가...!" "터지면 다시 싸매면 되지. 자, 어서!" "으으음!" 두 사람이 이따금 주고받는 대화는 후끈하면서도 끈쩍끈쩍했다. 소 운비가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등뒤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들렸다. 혜와였다. 얼핏 보니 혜와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도 저 대화를 듣고 있었구나.' 소운비도 왠지 쑥스러워졌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그녀가 자신을 따 라 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물어 볼 수도, 또 묻 는다 해도 대답을 들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색하게 등을 맞대고 벽 너머 다른 부부의 교성을 들으며 그들은 시간을 보냈다. 산을 올라가듯 씩씩대던 두 부부가 한참 만에야 그 정상에 올라 신 음을 멈추었다. 그 뒤는 나른한 한숨과 다정한 대화였다. "여보, 상처가 터졌어요." "괜찮아. 그렇게 심하지도 않은걸..." "제가 핥아 드릴게요." 그리고는 조용했다. 아마 노곤해져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두 부부가 조용해진 다음에야 소운비와 혜와도 잠이 들 수 있었다. 새벽이 밝아 올 무렵, 헛간 문을 지키고 섰던 비구니가 갑자기 눈 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은 헛간의 벽을 따라서 위로 올라가더니, 천장에 고정되 었다. 비구니의 귀가 쫑긋거리더니, 이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한 점 기척도 없이 들고 있던 선장을 옆으로 쭉 내밀어 헛간 문을 밀었다. 신기하게도 선장 끝에 달린 방울은 울리지 않았다. 문이 조금 열리자 비구니는 한 모금의 숨을 들이마시더니 바로 문틈 으로 몸을 날렸다. 번개처럼 밖으로 뛰쳐 나간 비구니의 몸은 그대로 헛간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도둑고양이치고는 덩치가 크구나!" 비구니는 막 지붕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 흑의복면인을 발견하고 냉 랭하게 쏘아붙였다. "어제부터 따라온 놈이렷다? 정체가 뭐냐? 저 아래에 있는 놈과 한 패냐?" 흑의복면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지붕 위로 올라온 비구니 를 보고 질린 듯 잠깐 주춤거렸다. 하나 다음 순간 그의 왼손이 품안 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호선을 그리며 은빛 광채 하나를 비구니 쪽으로 날렸다. 비구니는 마치 뒤로 쓰러질 것처럼 허리를 힘껏 젖혔다. 파앗! 비구니가 다시 상체를 바로 세웠을 때, 그 입에는 방금 흑의복면인 이 날린 표창이 물려 있었다. "네놈도 잡아 놓으면 쓸모가 있겠구나!" 비구니는 표창을 손에 뱉고 말했다. 흑의복면인은 웅얼거리는 듯 한 소리로 대꾸했다. "잡을 수 있다면 말이겠지." 흑의복면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표창을 잡은 비구니의 손에 서 회색의 연기가 퍼져 나왔다. 그것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피어올라 삽 시에 비구니의 전신을 감쌌다. 비구니는 깜짝 놀라 손 안의 표창을 떨구며 급히 호흡을 중지했다. 표창의 날 부분에서 갑작스럽게 피어올랐던 그 회색 연기는 나타난 것만큼이나 빠르게 꺼져 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흑의복면인이 사 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비구니는 발 밑의 표창을 선장으로 쿡 찍으며 뇌까렸다. "몽혼표(朦魂 )! 역시 그 일당이로구나!" * * * 아침 끼니를 마련하기 위해 해가 뜨기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던 진 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비명을 짜 올렸다. "어머니! 아이구, 어머니가 어디 가신 거지?" 간밤에는 뒷간이라도 갔는가 싶었던 노망든 시어머니가 아침이 되어 갈 때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열린 방문으로 장평이 상체를 내밀었다. "왜 그래? 엉? 어머니가 없어지셨어?" 노망이 든 것만 아니라면 그토록 걱정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 진은 발을 동동 굴렀다. "제가 찾아 보고 올게요." "나도 같이 가, 여보!" "당신은 운신을 하지 못하잖아요." 장평을 만류하며 진진이 막 사립문을 나서려 할 때, 헛간문이 열리 며 비구니가 나왔다. 안에서 대충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자신도 도와주 겠노라고 했다. 하나 그들은 사립문을 나설 필요가 없었다. "저, 저기 보이는 게 어머님 아냐?" 장평이 이 집을 향하여 뻗은 단 하나의 길 끝을 가리켰다. 거기에 허우적허우적 이쪽을 향하여 걸어오는 자그마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과연 장평의 노망든 어머니였다. 한데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 오십대의 남자 하나를 대동한 것이었다. "어이구, 어머니! 뭐 하러 나가 돌아다니신 거예요?" 울상이 된 진진이 자신의 가슴팍에까지밖에 안 오는 키 작은 시어머 니를 부여잡으며 맞이했다. 사람이 늙으면 도로 아이가 된다고,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밭고랑처 럼 주름진 얼굴 가득 띠운 미소마저 아이 같은 그 노친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아들이 아프다며? 의원이 있어야 한다며? 내가 밤에 찾으러 나갔지! 그래서 이렇게 모시고 오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노파는 뒤에 선 그 오십대의 사람을 가리켰다. 염소 수염 이 나고 역시 쪼글쪼글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진진은 시어머니의 노망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의원 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아마도 길에서 만난 아무나 붙들고 그저 끌고 온 것이겠지.' 한데 천만 뜻밖에도 그 사람은 장평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저 사람이 내가 봐야 할 환자요?" 진진은 기가 막혀 반문했다. "아니, 정말 의원이세요?" 염소 수염의 사내는 헛헛 웃었다. "그럼, 의원이고 말고. 내가 볼일이 있어 밤길을 재촉해 가다가 댁의 노모를 만났는데, 집에 급한 환자가 있다고 하시질 않겠소? 의술(醫術) 은 인술(仁術)이라, 아무리 내 볼일이 급하다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만 하겠소? 해서 이리 온 것이오. 어디 봅시다." 염소 수염의 의원은 아직 집주인에게 정식으로 청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방안으로는 들어가질 않고, 반쯤 일어나 있는 장평의 얼굴 을 쓱 보았다. "척 보니 아마도 신을 상한 모양이로군. 저런 병은 빨리 손을 보 지 않으면 안 되오." 진진은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정말 의원이시로군요!" 노망든 노파가 킥킥거렸다. "거봐! 내가 뭐라드냐? 그저 이 어미만 믿고 살면 되는 게야, 히히 히...!" 진진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예! 우리 어머니가 최고예요. 의원님, 누추하지만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제 남편을 좀 봐주세요." 진진은 서둘러 염소 수염의 사내, 혼음사의를 방안으로 모셔들였다. 밤이슬을 피하게 해준 촌사람들을 도와 주려고 나갔던 비구니는 노 망든 노친네가 의원을 데리고 와서 일이 해결된 것을 보고 다시 헛간 으로 돌아왔다. 소운비와 혜와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있었다. 혜와가 짐짓 눈 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것 봐요, 자비로운 스님. 잠은 다 잤으니 일어나게 해주기라도 하 세요. 언제까지 이렇게 드러누워 있어야 해요?" "조금만 더 기다려라!" 비구니는 별로 자비롭지 못한 투로 툭 대꾸했다. 그녀는 지금 바깥 의 상황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의원이라...! 하지만 눈에 너무나 사기(邪氣)가 흐르는군. 적일 것 같은데. 역시 이놈을 구하러 온 것인가? 약속한 날짜까지 그저 여기서 머무르려 했는데 아무래도 떠나야 할 것 같군...!' 혼음사의는 흐뭇했다.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굴러 들어온 복덩 이라든가, 길을 걷다가 황금을 줍는다든가, 빈 집에 황소가 들어온다든 가 하는 말들이 모두 자신의 지금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역시 마음을 착하게 쓰면 모든 게 복으로 돌아온다니까...!' 사실 요즘 혼음사의 자신을 쫓는 무리들의 추격이 하도 득달 같아서 밤길로만 다니던 참이었다. 만음요화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소운비를 빼앗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화금궁의 위치를 알아 내고, 그래서 간신히 근처까지 온 것이다. 화금궁이 있다는 동백산을 목전에 둔 참이라 어두운 밤길에 느닷없 이 나타나 '내 아들을 고쳐 줘요' 어쩌구 하는 노망든 노파쯤 한 주먹 에 쳐죽여 버리고 갈 수도 있었다. 한데 혼음사의는 너무나 동정심이 많아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가만 들어 보니 젊은 며느리가 있는데 울고 있다지 않은가? 다쳤 다는 아들보다도 그 젊은 며느리가 더욱 불쌍했던 것이다. '불쌍한 사람은 도와 줘야지!' 그런 마음으로 노파를 따라온 혼음사의였다. 그랬더니 과연 며느리 가 있을 뿐 아니라 제법 얼굴이 반반했다. 게다가 헛간에서는 웬 비구니 가 하나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비록 나이는 중년이지만 얼굴이 번듯 한데다가... 혼음사의는 비구니를 각별히 좋아했다. 오죽하면 호랑이도 때 려잡는다는 아미파의 비위를 건드리면서까지 그렇게 비구니들 뒤를 졸 졸 쫓아다녔을까. 게다가 이 향기는...! 혼음사의는 환자를 살펴보는 척하면서 코로 벽 너머 헛간 안에서 풍 기는 냄새를 맡고 있었다. '젊은 여자의 향기다!' 헛간 안에는 비구니말고도 다른 여자가 하나 더 있는 것이다. 탄탄해 보이는 시골 여자에, 좋아하는 비구니, 게다가 젊은 여인이 라...!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라 할 만했다. 혼음사의는 장평을 진맥하면서 머리 한쪽으로는 오늘 내려진 이 호 화로운 식탁을 어디서부터 요리해 볼까 생각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의원님, 어떻습니까?" 의원이라는 자가 눈을 지그시 감고는 묘한 표정만 지을 뿐 환자의 상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자, 초조해진 진진이 물었다. "흠, 어흠흠!" 혼음사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고는 헛기침을 해댔다. 그리고는 근엄하게 명했다. "아랫도리를 까시오." 의원이 하는 말치고는 좀 이상했지만, 어차피 병은 신에 든 것이 니 당연하기도 하다고 생각하며 진진은 시키는 대로 했다. "보아하니 이 댁에는 아이의 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려." 개방 제자들의 몽둥이에 심하게 얻어맞은 데다가 비구니가 준 약기 운이 떨어져 시커멓게 죽어 있는 장평의 아랫도리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혼음사의가 불쑥 말했다. 진진은 느닷없는 그 말에 의아해 하다가 불현듯 자신의 처지가 생각 나 울먹였다. "예, 의원님. 안 그래도 저희 집안의 소원이라고 해봤자 그저 아들 하나 보는 것입니다. 한데 몹쓸 놈의 몽둥이 찜질에 이이가 이렇게 되어서...!" "아마도 혼인한 지는 삼사 년이 되었을 게요. 안 그러오?" 진진은 문득 이 사람이 의원이 아니라 점쟁이가 아닌가 싶어졌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혼음사의는 수염을 쓰윽 쓸면서 말했다. "남정네 아랫도리를 보면 다 알 수 있는 법이오. 한데 이상하지 않소? 혼인한 지 삼사 년이 다 되었는데도 아이가 없다는 것은...!" 문지방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시어머니가 툭 끼여들었다. "그거야 며느리가 고녀(鼓女)니까 그렇지!" 진진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나 어차피 노망든 노친네의 말인지 라 별로 개의치 않으려는데, 오히려 의원 나으리가 진지하게 받아 치는 것이 아닌가? "무슨 말씀을! 댁의 며느님상을 보니 머리카락은 명주실처럼 가늘 면서 눈의 흰자위와 검은 자위가 뚜렷하고 살이 많고 뼈가 크지 않으니 아마도... 아, 아무튼 아들을 낳기에 아주 좋은 상입니다그려." 진진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처음 보는 의원 나으리가 어째 남의 부인에게 살이 많고 뼈가 크 지 않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진진은 아마도 의원의 공부가 깊어서 옷 위로도 사람의 체구를 알 수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지만, 혼음사의가 차마 하지 못하고 삼킨 말 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기절초풍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의 털도 가늘고 부드러워 그 맛이 기 가 막힐 것이다!' 혼음사의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무튼 결함은 바깥양반에게도, 또 부인에게도 없소이다. 있다면 다 른 데 있는 게지요!" "다른 데라구요?" "그렇습니다. 내 아주 이번에 치료하는 김에 이 댁에서 아들을 보 실 수 있도록 조처해 드리겠소!" 누워 있던 장평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 정말입니까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혼음사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장평을 내려다보았다. "한데 비용이 좀 많이 드오." 아무리 욕심없는 사람이라도 분수를 넘어서 소망하는 것이 있기 마 련이다. 장평네 집에서는 '아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좀 해주세요!" 장평과 진진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혼음사의는 안간힘을 써서 간신히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지려는 것을 막았다. 그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 "저, 정말이오? 내, 내가 무엇을 달라고 해도 해주겠다는 거지요?" 장평과 진진은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지방 에 앉아 있던 노파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벽 너머로 간간히 들려 오는 대화를 듣고 있던 소운비는 소름이 쭉 돋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말을 더듬는 것을 듣 고서 누군지 확실하게 기억이 났던 것이다. 그가 경악하고 있는 사이 비구니가 다가와 혜와와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하고 나와 함께 가자. 큰 소리를 내는 날에는 어쩔 수 없 이 살계(殺戒)를 열겠다." 비구니가 헛간의 문 쪽으로 두 사람을 끌고 가는데, 소운비가 역 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럴 수 없소." "뭐?" "저 안에 있는 의원이라는 사람은 아주 안 좋은 사람이오. 이대로 가면 이 집 사람들이 낭패를 당할 것이오." 비구니는 입술을 실룩이며 비웃었다. "우스운 놈이로구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너의 의협심에 속아 줄줄 알았느냐?" 그녀는 소운비의 해명 따위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헛간 문을 나 서려고 했다. 한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놈이?" 비구니의 손에 떨어진 이래로 단 한번도 반항하지 않고 있던 소운비 가 갑자기 용을 쓰며 그 자리에 버티고 선 것이다. "이대로 가면 안 되오!" 비구니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놈이 이렇게 힘이 셌던가?' 정말 나약해 보이는 겉모습만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힘이었다. 비구니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끌어당겼다. 하나 한 발짝도 딸려 오지 를 않는 것이다. '나에게 혈도를 제압당해 있으면서도 힘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경악한 비구니는 아예 혜와를 한쪽에 내던져 놓고 소운비만을 끌어 당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비구니는 발끈해서 본격적으로 내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소운비 는 자신을 잡은 비구니의 손에서 강력한 힘이 뻗쳐 오는 것을 느끼자 자 신도 방어를 하기 시작했다. 태원옥호공의 구결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비구니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나 소운비의 얼굴은 멀 쩡 했다.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해 볼까 했던 혜와는 소운비가 방안에 있는 사람을 꺼린다는 것을 눈치채고 조용히 두 사람의 내공 싸움을 지켜보 고 있었다. "자아...!" 막 열두 개째의 금침을 장평의 아랫도리에 박아 넣은 혼음사의가 흡 족한 미소를 띠며 손을 뗐다. 침을 꽂은 자리에서 금세 거무죽죽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사흘만 쉬면서 정양하면 될 것이오. 그리고 부인." 혼음사의는 은근한 목소리로 진진을 불렀다. 침이 박힌 자리를 신 기한 눈으로 지켜보던 진진이 대답했다. "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하여 앞으로 남편과 잠자리를 꼭 이 렇게 실천하도록 하시오." "예." "먼저 남편과 교합을 할 때는 반드시 달거리가 끝난 뒤 첫날과 셋째 날에 하여야 하오. 만일 넷째 날과 다섯째 날에 교접하면 딸을 낳게 되는 겁니다. 아시겠소?" "예? 예, 예." "그리고 잉태한 날 밤에 우물에 가서 그 주변을 세 바퀴 돌면서 다 음과 같이 주문을 외우는 겁니다. 자, 따라하십시오. 남자는 양(陽)이 요,여자는 음(陰)이다. 여자는 재앙이 많고, 남자는 상서로움이 많다." "..." "따라하십시오."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이다. 여자는 재앙이 많고, 남자는 상서 로움이 많다." "좋습니다. 이렇게 삼 일 간 우물을 돌면 설사 뱃속에 든 아이가 딸이라고 하더라도 아들로 바뀌게 됩니다. 틀림없습니다." 진진은 그저 믿는 도리밖에 없었다. 아들딸이야 하늘이 점지하는 것인데 저런 방법으로 과연 아들을 얻을 수 있을까 싶기는 했지만, 그 래도 의원이라면 자신들 같은 촌 무지렁이보다야 더 잘 알 테니 믿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생각한 것이다. "자 그러면...!" 설명을 다 끝낸 혼음사의는 손을 비비며 말했다. "헛간으로 가봅시다." 진진은 순순히 일어섰다. "예." 같은 헛간이라도 혼음사의가 말한 헛간과 진진이 들은 헛간은 하늘 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차마 어떻게 남편이 있는 곳에서 일을 벌이겠는가. 헛간으로 가 서 이 여자에다가 비구니, 그리고 젊은 여자까지 합쳐서 즐거움을 누려 보리라' 이것이 혼음사의가 말한 '헛간으로 가자'는 의미였다. 그에 비하여 진진이 생각한 헛간은... '아마 헛간에도 환자가 있는 것을 아시고 치료해 주겠다는 말씀인 가 보다! 참으로 덕이 깊은 의원이기도 하시지!' 아무튼, 두 사람은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그 헛간을 향해 발을 내 디뎠다. 비구니와 소운비 간의 내력 싸움은 이제 거의 막바지를 향해 치달아 가고 있었다. 바람도 없고 소리도 없는데 서서히 두 사람의 소맷자락이 부풀어오 르기 시작했다. '으으음...!' 비구니는 만만하게 보았던 소운비가 뜻밖에 자신의 십 성 공력에까 지 대항해 내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만약 두 사람이 손발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무공 초식으로 대결했다 면 소운비는 비구니의 일초지적(一招之敵)도 될 수 없는 상대였다. 하 나 팔과 팔을 붙잡은 상태로 겨루는 내공 싸움이라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소운비는 분노 때문에 더욱 힘이 솟았다. '이 비구니는 공명정대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 람들의 어려움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려 하다니!' 그는 머리 끝까지 솟구친 분노를 안으로 삼켜 힘으로 변화시켰다. 파아아악! 순간, 비구니의 가사 자락이 격렬히 펄럭였다. 그러면서 하얀 그녀의 팔이 송두리째 드러났다. '앗?' 비구니의 흰 팔에는 선명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본 소운 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관음보살의 문양이었다. 그것도 검을 든 관음보살의 문양이었다. 너 무나 눈에 익은, 진설영이 가진 보검의 문양! '어찌 된 일일까? 적이라면서 같은 문양을 쓰는 이유가 뭘까?' 소운비가 내공을 겨루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다급히 입을 벌려 그것을 물으려고 하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헛간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그리고 진진의 안내를 받은 혼음사의가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아앗? 너는?" 평소라면 혼음사의가 보고 반가워할 남자란 세상에 없었다. 하지 만 소운비는 예외였다. 혼음사의는 정말 기뻤다. 기뻐서 기절하고 싶을 정 도였다. 한눈에 비구니와 소운비가 내력을 겨루고 있는 것을 알아챈 혼음사 의가 재빨리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가 양쪽으로 뻗어 내며 두 사람에 게로 장력을 날려보냈다. 헛간 안의 짚더미가 그 바람에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가 훨훨 떨어져 내렸다. 그 위로 혼음사의에 의해 내상을 입은 비구니와 소운비가 주 저 앉았다. 바깥에서는 진진과 그 시어머니의 비명이 짜 올려졌다. 혜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혼음사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조, 좋은 일을 하면 보, 복을 받는군그래!" 혼음사의는 싱글싱글 웃으며 소운비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소운비 의 멱살을 틀어쥐는 것을 보고 비구니와 혜와가 동시에 외쳤다. "안 돼!" "안 돼요!" 혜와는 다만 입으로 외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비구니는 내상 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키며 선장을 혼음사의와 소운비 사이로 쭉 내뻗었다. 딸랑! 딸랑! 방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방울에도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분 노를 표현하는 소리일 것이다. "엇!" 혼음사의는 몸을 약간 뒤로 젖히며 손을 뻗어 그 선장을 잡으려고 했다. 한데 선장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혼음사의를 따라 휘면서 그 콧잔등을 호되게 후려패는 것이 아닌가? "어이구!" 혼음사의는 눈물을 찔끔 쏟을 지경이 되어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비구니는 그 틈을 이용해 선장의 끄트머리와 방울이 달린 손잡이 부 분을 잡더니 양쪽으로 쫙 당겼다. 그러자 선장의 손잡이 쪽이 쭈욱 뽑혀 나오며 그것은 한 자루의 협봉검(峽鋒劍)이 되었다. 비구니가 가진 선장의 아래 부분은 본래 검집의 구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혼음사의는 질겁을 했다. 검을 휘두르는 비구니란 소름이 끼치는 것이다. 그것은 벌써 한 달째 자신의 뒤를 집요하게 쫓아오는 아미파 의 비구니 떼를 연상케 했다. 내상을 입은 비구니는 한 손으로 가슴을 보호하며 한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폭이 좁은 검이 허공에 팔(八) 자를 그렸다. 단지 그것뿐인데 헛간 안이 온통 검광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어이쿠! 이건 생전 보도듣도 못한 검법인데그래?' 혼음사의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나 그의 눈은 날카롭게 비 구니의 빈틈을 파고들고 있었다. "타앗!" 혼음사의의 입에서 짧은 기합성이 나오더니, 그의 소매가 헛간 바 닥을 쓸어 갔다. 소맷자락에서는 만만치 않은 바람이 몰아쳤다. 그 바람에 다시 헛간의 지푸라기들이 눈 뜨기 힘들 정도로 허공에 떠올랐다. 혼음사의는 재빨리 손을 뒤집어 그 지푸라기들을 비구니 쪽으로 날려보냈다. 비구니는 가사 자락으로 그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한편, 지푸라기들의 바람 뒤에 혼음사의가 짓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검을 앞으로 곧추세웠다. 한데 지푸라기들 틈에 들어온 것은 혼음사의의 몸이 아니라 그가 쏘 아 낸 은침이었다. 갈색 지푸라기들 틈에서 은빛 침을 뒤늦게 발견한 비구니는 다급히 몸을 허공으로 띄워 허리를 젖히며 공중제비를 넘었다. 그리고 비구니가 다시 땅에 착지하려는 찰나, 혼음사의가 어느새 그녀 옆으로 바짝 붙어 서며 이죽거렸다. "이봐, 늙은 여중아! 가슴이나 한번 만져 보자!" 혼음사의는 정말로 가슴을 만질 듯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갔다. 그와 비구니 사이는 거리가 너무 좁아져서 비구니가 검을 휘두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한데 비구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배 바로 앞에서 검을 내려뜨렸다가 손목을 돌려 검으로 아주 좁은 원을 그렸다. 혼음사의의 손이 비구니의 가슴으로 접근하다가 손목이 잘릴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뒤로 물러났다. "쳇! 제법 수단을 부릴 줄 아는군그래!" 그래도 혼음사의는 포기하지 않고 비구니의 옆으로 돌아가며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로 양손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마치 끌어안기라도 할 기세였다. 이때 비구니는 그것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겨드랑이를 약 간 벌려 손이 들어오도록 해주더니, 혼음사의의 손이 겨드랑이 밑으 로 파고들자마자 힘을 주어 그것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는 바로 뒤 에서 자신을 끌어안다시피 한 혼음사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묘하게도 입을 약간 벌리고 혀를 내밀고 있었다. "옳지! 입을 맞춰 달라는 이야기이냐?" 혼음사의는 희희낙락하다가 비구니의 혀끝을 보고 기겁을 하며 팔을 빼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나 팔은 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비구니가 억 세게 그것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혼음사의를 기겁하게 만든 것은 비구니의 혀끝에 올려진 은침이었 다.바로 혼음사의가 아까 그녀에게 날렸던 은침인 것이다. 비구니는 아 마도 공중제비를 돌면서 그 침을 이빨로 물었던 모양이었다. 다급해진 것은 혼음사의였다. 바로 코앞에서 자신의 병기가 자신에 게 거꾸로 날아오기 직전이 아닌가! 게다가 그놈의 은침은 정확히 자신의 인중(人中)을 겨냥하고 있었다. 혼음사의의 은침에는 독은 발라져 있지 않았지만, 매우 정교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에 어디든 맞아서 이로울 것은 없었다. 전문적으로 혈 도를 점하는 침이니 만큼, 특히 인중에는 맞지 않는 것이 좋았다. 혼음사의는 고개를 돌려 그것을 피해 보려고 했으나 비구니의 머리 통이 그것을 막았다. 그리고 집요하게 혀끝으로 그의 인중을 겨냥하 고 있었다. 혼음사의는 거리가 너무 가까워 피할 도리가 없어지자 엉뚱한 수단 을 썼다. "이이익!"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쭈글쭈글한 얼굴가죽 이 더욱 찡그려지더니 입이 한쪽으로 홱 돌아갔다. 파앗!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비구니의 입을 떠난 은침은 인중을 아슬아슬하 게 벗어난 입술 바로 위에 꽂혔다. "으으윽!" 혼음사의는 고통을 참으면서 비구니의 겨드랑이에 갇힌 두 손을 빼 내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손은 두툼한 가사 속에 숨겨진 비구니의 젖가슴을 와락 움켜쥐었다. 비구니는 팔꿈치로 혼음사의의 가슴을 찍으며 재빨리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왔고 혼음사의 역시 비구니의 역습을 피해 얼른 몸을 날렸다. 검이 닿지 않을 거리까지 가서 척 뒤돌아선 혼음사의는 아픔도 무릅 쓰고 비구니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여자답지 못하게 사니까 젖통이 그렇게 작지!" "추악한 놈!" 화가 머리 끝까지 솟은 비구니가 검을 머리 위로 치켜 들며 달려들 었다. 한데 허공에서 비구니는 갑자기 정지하더니 맥없이 아래로 떨 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혼음사의는 킬킬거렸다. "어때? 유근혈(乳根穴)도 제법 쓸모가 있는 혈도가 아니냐?" "저놈이...!" 일시에 몸을 쓰지 못하게 된 비구니는 이를 갈며 검으로 땅을 집고 일어서려고 했다. 혼음사의는 재빨리 혜와 쪽으로 가더니 앙탈하는 그녀를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 소운비마저 나머지 한쪽 옆구리에 끼었다. "더 주물러 주고 싶지만 발악이 너무 심하군그래! 다음에 생각이 있으면 나를 찾아와라. 고독한 중 신세를 면하게 해주마. 나는 혼음사의 라고 한다. 크크크...!" 혼음사의는 비구니가 일어나기 전에 얼른 헛간을 빠져 나왔다. 헛 간 문 바로 옆을 지날 때 혜와는 간신히 손을 뻗어 땅에 떨어진 비파를 주웠다. 혼음사의가 바깥으로 나오자 기겁을 한 장평네 식구들이 방안에 모 여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혼음사의는 진진도 함께 데려갈까 하다가 양쪽 옆구리에 꽉 찬 두 남녀를 보고는 포기했다. '좋은 일을 베풀면 다 나중에 복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느니...!' 혼음사의는 한껏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 부인! 내가 시킨 대로만 하면 분명히 일 년 안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보게 될 것이오. 절대로 거짓이 아니니 믿고 시행하시오. 어 흠...!" 그때 헛간 안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놈! 당장 그 두 사람을 내려놓아라!" 그리고 예의 그 방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크! 저 비구니가 정말로 독하구나. 벌써 일어나다니!" 놀라서 펄쩍 뛰어오른 혼음사의는 그 기세대로 사립문을 벗어나 죽 어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가는 혼음사의의 두다리 사이에서도 방울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비록 사냥당한 짐승처럼 혼음사의에게 잡힌 몸이 되었지만 혜와의 마음은 편했다. 어쨌거나 또다시 소운비와 같이 가게 된 것이 아닌가! 그에 비해 소운비의 마음은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그 비구니는 처음의 내 예상과 다른 인물일지도 모른다. 왜 그 팔 에 설영의 검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을까...?' 소운비는 또 일이 꼬여서 그 진위를 캐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 었다. 혼음사의는 숨이 턱에 닿도록 뛰면서 중얼거렸다. "헤헤헤...! 이 꼬마야, 너는 이 어르신네의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을 행운으로 알아야 한다. 내가 네놈을 천하에 다시없는 정력가로 만들어 주마, 흐흐흐흐...!" 한참을 달리고 나자 더 이상 추적자의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 었다. 이렇게 하여, 소운비는 만음요화의 방중술, 무산음호의 태원옥호공을 거쳐 혼음사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가 이제부터 배울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결코 지나온 두 가지보다 쉽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제 11 장 동요(動搖) 개방은 술렁이고 있었다. 각파로부터 격색마회의 취지에 동참하려 는 고수들이 그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격색마회는 날이 갈수록 그 세력을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천하의 각 문파들 중 색마들 때문에 체 면을 구기거나 피해를 본 경험이 없는 파를 찾을 수 없다는 점과 둘 째, 개방과 남궁세가에서 은근히 이 회의 목적이 단지 색마들만을 척결하 는 것이 아니라 음탕함의 요새라 할 수 있는 당금 원의 황실에 대한 저항도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오랑캐 황실에 대한 불만이 쌓일 때로 쌓인 무림인들이다. 황제가 총신(寵臣) 합마(哈麻)와 어울려 밀교(密敎)의 비밀 의식을 거행하며 궁 안에 마련해 둔 비밀스런 방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난교 (亂交)를 즐긴다는 소문이 시골 구석구석까지도 알려져 있는 상황이었 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격색마회의 취지는 그런 황제와 황실에 불만을 품 고 있는 무림인들뿐 아니라 한족 누구에게나 공감을 살 수 있었다. 먼저 일을 시작한 개방과 남궁세가가 주축이 되어 각지에서 사람을 모으고, 모아 온 사람들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며 색마 토벌의 계획 을 세워 갔다. 한데,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격색마회의 사람들이 모여 든 개방 총타의 바로 코앞에서 '일'이 벌어졌다. 곱게 죽은 사람의 것이라 해도 시체는 본래 보기 좋지 않은 법이 다. 더구나 비참하게 살해된 사람의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세상에 쯧쯧...!" "저건 사람의 소행이 아니야!" 개방 총타 앞에 놓여진 시체를 둘러싸고 구경을 하는 사람들은 진저 리를 쳤다. 초가을이라 하지만 아직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지라 벌써 시체 주변에는 파리 떼가 들끓고 있었다. "비키시오!" "뒤로들 물러나시오." 갑자기 나타난 개방 제자들이 구경꾼들을 흩어 놓았다. 그리고 구경 꾼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일남일녀가 나타났다. 무옥과 진설영이었다. 두 사람은 시체 옆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눈살도 찡그리지 않고 그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발가벗겨진 여인의 시체였다. 입과 콧구멍으로 흘러나온 거무죽죽한 피. 온몸에 그어진 난자의 흔적. 차마 눈길을 두기 힘들 정도로 짓이겨진 아랫도리. 한눈에 보아도 간살(姦殺)임을 알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시체의 눈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그냥 눈알을 빼 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눈이 있던 자리에 지옥의 입구 같은 검은 구멍 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진설영은 숨을 죽이고 그 구멍을 주시했다. 두어 마리의 파리가 그 구멍을 열심히 드나들고 있었다. 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시커멓게 마른 구멍이었다. 뙤약볕에 말려 놓은 국수가락 같은 힘줄의 흔적이 얼 핏 엿보였다. 색마들이 날뛰기 시작한 이래로 개봉부에서 일어난 열세 번째의 간 살이었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흉수가 격색마회를 희롱이라도 하듯 직 접 시체를 개방 앞까지 날라 놓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흉수는 어젯밤 바로 이곳에서 희생자를 욕보이고 죽 인 것인지도 모른다. 불을 밝혀 두고 안팎을 경비하던 개방 사람들을 비 웃으면서. 시체를 관찰하던 무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설영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발견되었던 시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구려. 다만 여기까 지 시신을 가져다 놓은 것을 보니 명백하게 우리를 희롱하는 뜻이 담겨 있소." "누구의 짓이라고 생각하세요?" 끔찍한 시체를 앞에 놓고도 전혀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진설영이 물 었다. 무옥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확증은 없소. 하나 최근 천지일월이 무산음호의 재출현을 목격했 다고 했소." 무옥은 천지일월이 말한 젊은 남자가 분명 무산음호이거나 무산음호 의 제자일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진설영은 그 점에 대해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녀는 무옥 보다는 그 진상에 더 가깝게 서 있었지만, 굳이 말해야 할 이유를 찾 지 못한 것이다. '소방주의 말대로, 그... 가 정말 무산음호를 만나 제자가 되었을지 도 모르는 일이지.' 자신이 아는 소운비라면 결코 이렇게 사람을 죽일 위인이 되지 못한 다는 것은 애써 무시하며, 진설영은 편한 쪽으로 단정을 내렸다. "시체는 치우라고 하겠소. 들어가서 앞으로의 일을 상의합시다." 무옥이 먼저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진설영은 따라 일어서려다가, 다 시 한번 차디찬 시선을 시체의 눈구멍에 던졌다. '이상해. 다른 곳을 보면 죽은 것이 하루를 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저 눈이 있던 자리만은 바싹 말라 있을까? 마치... 오래 전에 죽은 시 체처럼 말이야.' 두 사람은 나타날 때처럼 사람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돌아갔다. 개방 제자들도 그 뒤를 따라갔다. 시체 주변에는 구경꾼들의 자그마한 속삭임들이 남았다. "저 새파란 아가씨가 개방의 장로 규염개를 일초에 격퇴했다지?" "신비한 문파의 후계자라더군. 일을 처리하는 모양새도 아주 서릿 발 같다던데?" "그래. 그래서 냉면검화(冷面劍花)라고 부른다던데?" "냉면검화라... 딱 어울리는 별호로군!" 우우우웅...! 시체 주변을 날아다니는 파리 떼들은 불길한 날갯짓을 요란하게 울 려댔다. * * * 소운비와 혜와 두 사람이 혼음사의에게 이끌려 당도한 곳은 동백산 과 줄기를 맞대고 있는 수복산(壽福山) 깊은 곳의 허름한 방 두 칸짜 리 초옥(草屋)이었다. 그것은 화전민의 둥지였다가 버려진 집으로, 혼음사의가 요 며칠 거처로 쓰던 곳이었다. 혼음사의는 두 사람을 그 중 작은 방 하나에 몰아넣더니 꼼짝도 할 수 없도록 쇠사슬을 가져 와 손발을 묶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옆 방으로 가버렸다. 바깥은 어둑어둑해져 오는데 촛불 하나 밝히지 않은 어두운 방안에 내동댕이쳐진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망연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운비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방바닥만 내려다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혜와는 그런 소운비를 힐끔힐끔 보며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소운비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왜 따라온 거야, 바보같이!" 그의 말투는 통나무처럼 무뚝뚝했지만, 혜와는 반색을 하며 얼른 대답했다. 어떤 질책이라도 침묵보다는 나은 법이다. "운비 오라버니가 걱정돼서요." 대답하는 혜와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소운비가 어둠 속 에서 고개를 들어 혜와를 바라보았다. "난 너를 잊겠다고 했어." "난 오라버니를 잊겠다고 한 일이 없는걸요." "화금궁으로 돌아갔어야지. 넌 화금궁의 사람이 아니냐?" "아니에요, 이젠." "그럼?" "운비 오라버니의 사람이에요." 당돌한 그 대답을 끝으로, 어둠에 휩싸인 방안에는 다시 침묵이 감 돌았다.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운비였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혜와의 눈동자와 그 당돌한 대답을 들으니 속으로 웃음이 날 지경이었 다. 얼마나 당돌한 소녀인가? 만일 다른 여자가 남자에게 '나는 당신의 것'이라고 대뜸 말한다 면 특이하게는 보일지 몰라도 결코 예뻐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한데 혜 와는 그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뻐 보이기까 지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식이었지.' 소운비는 혜와가 죽그릇을 들고 그를 처음 찾아왔던 일을 떠올렸 다. 생각과 동시에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숨을 죽이고 소운비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혜와도 따라서 웃음을 지 어 보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지만, 그 웃음으로 두 사람 사이를 막고 있 던 그 무엇이 스르르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혼음사의도 웃고 있었다. 그 특유의 비실거리는 웃음이었 다. '저놈이 만음요화의 손아귀에 그렇게 오래 있었으면서도 아직 제대 로 되지 못했단 말이야? 하나 신통하게도 몸은 다 고쳐 놓았더군...! 화 금궁에도 아주 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었어. 게다가 내력은 알 수 없지 만 몸 속에 막강한 힘이 숨겨져 있으니...' 혼음사의는 손에 잡은 작은 단지를 쓰다듬으며 헤벌쭉 웃었다. '그 정도 힘이면 한번에 최소한 오십 명의 여자를 상대할 수도 있 겠어!' 이제 문제는 힘이 아니었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 다. 하지만 혼음사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말은 두들겨 패서 억지 로 물을 먹일 수 있다. 사람이 말보다 힘이 셀 수만 있다면 말이다. 말에 게 물을 억지로 먹이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그럴 생각이 없는 사람 을, 특히 남자를 색마로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혼음사의는 자신이 있었다. 말에게 물을 먹이는 이치와 마 찬가지로 그 사람보다 힘이 세다면 무슨 일이든 시키지 못하겠는가? 그는 자신만만하게 작은 단지를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소운비와 혜와가 있는 옆 방으로 움직였다. "까아악!" 혜와는 있는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목 이 쉬어라고 소리를 질러댄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눈앞에 있는 저 꾸물거 리는 징그러운 벌레들은 물러날 리가 없었다. 벌레. 자그마한 단지 안에 담긴 꾸물거리는 벌레. 마치 송충이처럼 생겼 지만 결코 송충이는 아닌 벌레. 자색(紫色)의 몸뚱이에 초록색 반점, 그 리고 그 몸뚱이를 덮은 보드라운 연분홍색 털을 가진 그 벌레는 어른의 엄지손가락 정도의 크기였다. 한데 소름 끼치는 것은 그 벌레가 사람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코도 있고,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입술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부리부리한 두 개의 눈알을 가지고 있었다. 벌레들은 단지 안에 채워 진 새카만 모래 같은 것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그 부리부리한 두 눈으로 혜와와 소운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릇 앞에 앉은 혼음사의가 손가락으로 벌레들 을 쿡쿡 쑤시자, 엄지만하던 그 벌레의 길이가 갑자기 쭈우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두 배, 세 배, 네 배 가까운 길이까지 늘어나던 그 벌레는 노 여운 듯 눈을 부라리며 다시 원래의 길이로 줄어들었다. "으으음..." 혜와는 무섭기도 하고 속이 메스껍기도 한 듯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렸다. 혼음사의는 그 벌레들이 사뭇 귀엽다는 듯이 들여다보고 있 었다. "이 벌레는 인면자고(人面紫蠱)라고 하지. 귀하디귀한 놈을 내가 이 만큼 번식시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너희 두 사람을 위해 내가 특별히 인면자고를 베풀어 주마." 그리고 혼음사의는 인면자고 중 특별히 큰 두 마리를 양손에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또다시 그 벌레들이 늘었다 줄었다 하 기 시작했다. "이놈의 이름은 명명(明明)이고, 이놈의 이름은 소소(少少)다. 자! 아 가씨부터 고르시지." 혼음사의는 벌레를 든 손으로 혜와를 가리켰다. 혜와는 무엇을 고 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눈만 깜빡거렸다. "어떤 놈을 먹고 싶은지 고르란 말이다!" 그 말은 혜와뿐만 아니라 소운비도 기겁을 하게 만들었다. 보고 있 기만 해도 징그러운 벌레를 먹으라니! 하지만 혼음사의의 손끝에 달린 인면자고는 차츰 두 사람의 얼굴 위 로 다가왔다. 그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혜와와 소운비 두 사람은 혈도를 짚인 데다가 팔과 다리를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로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싫은가? 싫어도 할 수 없지. 이걸 먹어야 둘 다 풀어 줄 거니까 말이야!" 혼음사의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키득거리면서 먼저 한 마리 인면자 고를 혜와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인면자고는 그 위에서 몸을 늘였 다 줄였다 하면서 운동을 했다. 인면자고의 몸이 늘어나며 그것은 혜와 의 콧구멍 바로 앞까지 육박해 갔다. 노여운 듯이 눈을 크게 뜨고 혜와 를 노려보는 그 미물의 위협에 혜와는 턱을 와들와들 떨다가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자! 너부터 먼저 먹도록 해라." 혼음사의는 소운비의 입을 벌리고는 나머지 한 마리 인면자고를 그 안에 풀어 넣었다. 입 속의 살에 와 닿는 그 보드라우면서도 까실까 실한 촉감은 소운비를 거의 미칠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인면자고는 곧장 그의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살게 될 집의 입구를 검사해 보기라도 하는 듯 천천히 몸을 늘였다 줄였 다 하면서 소운비의 입 안을 돌아다녔다. 벌레의 촉감이 그의 좌우 잇몸과 입천장을 스치고 혀를 자극했다.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소운비 의 혀 밑에는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쐐애액! 사람의 침이 고통을 주는 모양인지, 인면자고는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놈은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했지만 소운비의 입은 혼음사의의 손 에 의해 단단히 막혀 있었다. 인면자고는 별수없이 안쪽으로 기어 들어 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몸을 줄였다 늘였다 하면서. 인면자고는 소운비의 목젖에 이르러 등으로 그 부위를 긁어댔다. 소운비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쓰디쓰면서도 노린내나는 맛을 남 기면서 인면자고는 점점 안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하는 그 벌레의 촉감이 식도를 지나 명치께를 거쳐 뱃속으로 완전히 꺼져 들어갈 때까지, 소운비는 전신으로 땀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몸 안쪽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느낌으로, 소운비는 알 수 있었다. 인 면자고가 뱃속에서 소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이 따뜻하다는 듯이 몸을 꾸부리고는 만족스럽게 꾸루룩거리고 있다는 것을. 인면자고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혼음사의는 혜와의 가 슴팍에서 그녀를 희롱하고 있는 인면자고를 들고 역시 혜와의 입을 벌 렸다. "싫어요! 싫어요!" 혜와는 온몸을 나무토막처럼 긴장시키며 그 손길을 거부하려고 했 다. 하나 불가항력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혜와는 울음과 함께 인면자고 한 마리를 삼켜야 했다. 나머지 인면자고들이 들어 있는 단지를 소중하게 천으로 덮으며 혼 음사의가 말했다. "이제 너희 둘은 어딜 가려고 해도 안 돼. 그 인면자고는 내가 만 드는 이 흑독사(黑毒沙)를 사흘에 한번씩 먹지 않으면 영양분이 부족해 서 몸을 작게 만들기 위해 두 마리로 분열하지. 거기서 하루가 지나면 네 마리가 돼. 다시 반나절이 지나면 여덟 마리가 되거든? 결국 일주일 이 못 가 몸 안에서 수백 마리의 인면자고들이 먹을 것을 찾아 살을 뚫고 나오게 된다. 거짓말 같거든 확인해 봐도 좋아. 내 곁을 떠나지만 않는 다면 흑독사를 계속 주지만, 도망을 치려고 한다거나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끝장이야. 알았느냐?" 혼음사의는 그 사실에 정말 자신을 가지고 있었던 듯, 두 사람의 혈도와 쇠사슬을 풀어 주고 일어났다. "여긴 사람이 찾아올 길 없는 깊은 산중이다. 여기서 내가 한 달 동안 네놈을 길들이겠다. 오늘은 푹 자도록 해라.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색마지로(色魔之路)를 시작하겠다." 두 사람을 내팽개쳐 둔 지저분한 방을 나서면서, 혼음사의는 아직 도 울먹이고 있는 혜와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한번 훑어보았다. 그가 혜와를 버리지 않고 데려와 소운비와 함께 인면자고를 먹인 이 유는 하나였다. 소운비라는 사람의 성격이 나약한 듯하면서도 고집 이 세서 분명 그 한 사람의 목숨만으로 위협해서는 될 성싶지 않았기 때 문이다. 계집의 목숨으로 위협을 한다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여겨졌 던 것이다. '저놈이 내 말을 잘 듣게 될 때까지는 저 계집을 가만 두겠다. 하 지만.. 흐흐흐..' 혼음사의는 다가오는 행복한 예감에 부르르 몸을 떨면서 방을 나갔 다. "흑...! 흑흑!" 방안에 남은 것은 촉촉한 혜와의 울음 소리뿐이었다. 얇은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어깨에 소운비의 손이 와 닿았다. 혜와가 고개를 들자 소운비는 말했다. "그것 봐라. 나를 따라다니면 앞으로 계속 이런 일만 당하게 될 거야." 그러자 거짓말처럼 혜와는 울음을 멈췄다. 뿐만 아니라 손으로 얼 굴의 눈물을 닦아 내기까지 했다. "미안해요, 운비 오라버니. 이런 일을 계속 당해도 좋아요. 오라버 니 옆에 있을래요." 암천(暗天)에 뜬 샛별처럼 반짝거리는 혜와의 눈동자를 보면서, 소운 비는 그녀의 어깨에 올려 둔 손에 힘을 주었다. 혜와가 천천히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대 왔다.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에 안으며 소운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뿐 아니라 이젠 혜와까지도 이 해괴한 운명에 휩쓸렸구나...!' 이불 한 장 없는 초라한 방이었지만 소운비의 품은 따뜻했고, 그 의 팔은 혜와의 작은 머리가 베기에 충분했다. 뱃속에 벌레 한 마리를 넣은 채였지만, 그래도 혜와는 행복했다. * * * <오래 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희대의 색마 무산음호가 다 시 동백산 인근에 출현하였다. 그는 자신의 무공을 위해 꽃 같은 수백 여인을 겁탈한 장본인이다. 전과는 달리 그는 채음보양의 술법으로 젊 은 청년의 모습을 한 채 활동을 벌이고 있는 바, 그림과 같은 생김새의 사람을 보면 각별히 조심할 것이며, 반드시 놈의 본거지를 알아 내어 격살하도록 해야 한다. 무림인으로서 그를 잡아죽이는 사람은 영웅의 소리를 들을 것이며, 무림인이 아닌 사람이 그 종적을 본 회에 알릴 경 우에는 응분의 보상이 돌아갈 것이다. 격색마회.> 궁벽한 사당 벽에 한 장의 방이 붙어 있었고, 그 앞에 비구니 한 사람이 서서 그것을 읽고 있었다. 바로 소운비를 핍박하던 그 비구니였 다. 이렇게 후미진 곳에까지 붙을 정도라면 상당히 중요한 내용임에 틀림 없다고 비구니는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 그려진 사람의 얼굴은 비구니로 하여금 격색마회가 찾 는 인물이 바로 자신이 찾는 인물과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 다. '과연 이자는 괴이한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구나. 하나 무산 음호라니...?' 비구니가 무엇이 미심쩍은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동안 그녀의 등뒤로 세 개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세 그림자가 아주 바짝 접근했을 때에도 비구니는 눈치채지 못하 고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세 그림자 중 하나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그제서야 비구니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보타문(普陀門) 삼대 제자 석명(釋明)이 세 사숙조(師叔祖)님을 뵈 옵니다!" 비구니는 황급히 그 세 그림자 앞에 부복했다.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필요없다. 그래, 네 사숙 공혜(空慧)의 소식 은 알아 내었느냐?" 세 그림자는 마치 한 사람처럼 입을 맞추어 물었다. 석명이라는 이 름의 그 비구니는 낯빛을 무겁게 깔며 대답했다. "제가 불민하와 중원에 나온 지 한 달이 되도록 그분의 소식은 알아 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단서를 잡았사온데..." "무엇이냐?" "사숙님을 해한 것으로 짐작되는 젊은 사내를 발견하여 이곳으로 데 리고 오려던 차에 그 일당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가 네 사숙을 해한 것을 어떻게 아는고?" 비구니, 석명은 지체없이 대꾸했다. "음곡비파(陰曲琵琶)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석명은 세 사숙조로부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꾸지람을 들을 각오를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그들로부터 새어나온 것은 깊 은 탄식이었다. "우리는 이번에 출관하면서 그래도 공혜가 최소한 음곡비파는 없애 버렸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데 그 마병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세상 에 남아 있다면, 그 아이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흉수를 만난 것이 틀 림없구나. 헛되도다...!" 석명의 얼굴은 더욱 무거워졌다. "차후 어찌해야 하오리까?"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이곳까지 오면서 우리 세 사람은 중원의 흐름을 눈여겨봐 두었다. 너무 전면에 나서지 말고 천천히 대세를 따라 가며 일을 풀어 가도록 하자. 일단은 공혜의 종적을 밟아 가 보는 것 이 중요하다. 가자!" 말이 끝나자, 세 그림자는 마치 물이 흐르듯이 움직여 갔다. 고개를 든 석명도 그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 * * 침침한 방안에도 아침햇살은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소운비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날 때, 이미 혜와는 일어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소운비의 비파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뭘 하고 있어?" 소운비가 묻자 혜와는 비로소 그가 깬 것을 알고 방긋이 웃었다. "오라버니, 이 비파에는 무슨 곡절이 있을 것 같아요." "곡절이라니?" "그 비구니가 비파 때문에 오라버니를 핍박하지 않았어요? 무엇인가 이 비파에 담겨진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비파는 내가 십 년 전부터 써온 거야. 소리가 잘 난다 는 것 빼고는 무슨 특별한 점도 없고...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이지. 아마 오해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참 동안 비파를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점을 찾지 못한 혜와 역시 확신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하지만 오해를 할 만한 무슨 건덕지라도 있어야 오해를 하지요. 이렇게 평범한 물건인데... 근데 이건 뭘까요?" 혜와의 손이 비파의 뒷면을 더듬다가 올록볼록한 부분에 머물렀 다. 거칠지만 무엇인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소운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그것? 비파를 만든 장인들이 간혹 비파에다 자신의 이름을 새 겨 놓기도 하지. 아마 음곡(陰曲)이라고 새겨져 있을걸?" 혜와는 웃었다. "세상에 무슨 사람의 이름이 음곡이에요? 제 생각에는 차라리 이 비 파의 이름일 것 같은데요?" "음곡비파라...? 그럴지도..." 두 사람이 비파 하나를 놓고 이런저런 추리를 하고 있는데, 바깥에 서 혼음사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일어났으면 어서 썩 나와라! 수업 시간이 다되었다." 소운비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혼음사의가 말하는 '수업'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일지는 화금 궁의 전례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것이었지만, 두 사람의 목숨이 걸 린 것이니 무턱대고 거부할 수만은 없었다. 그가 막 방을 나서기 직전에 혜와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운비 오라버니, 저 사람이 아무리 무리한 것을 요구하더라도 그대 로 하세요. 나는 운비 오라버니가 걱정돼요." "별 걱정을..." 소운비는 그렇게 대답하고 방을 나섰지만, 왠지 마음이 훈훈해지 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혼음사의는 마당에서 서성이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 에 잠겼는지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들여다보는 표정이 자못 진지했 다. 지금 같은 모습이라면, 초로의 점잖은 의원으로 보일 뿐, 그 누가 보더 라도 강호에 악명이 자자한 색마로는 보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를 따라오도록 해라.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그리고." 소운비를 향해 한마디 툭 뱉은 혼음사의는 방문 앞에 따라나온 혜와 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점잖던 그의 말투가 갑자기 헤실헤실 풀어졌 다. "저녁 때쯤 돌아올 테니 나, 낭자는 밥을 좀 차려 놓도록 하시오. 부 엌에 가, 가면 재료가 있으니까..." 그의 흐물거리는 말투에서 배어나오는 짙은 정념이 혜와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하나 혜와는 두 사람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혼음사의 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혼음사의는 소매를 휘휘 저으면서 먼저 초옥을 나섰다. 소운비도 서너 걸음 정도 떨어져서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이놈 봐라?' 초옥을 떠난 지 반 시진쯤 지났을 때였다. 혼음사의는 서너 걸음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소운비를 힐끔 돌아보며 내심 감탄했다. 지금 혼음사의는 팔자 좋은 늙은이처럼 소맷자락을 휘휘 저으면서 그저 빠른 걸음으로 내닫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의 명성 을 드높인 망번신요보( 蒜身拗步)를 호흡법과 함께 운용하고 있는 중이었 다.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뛰어 서도 쫓아오기가 힘든 것이 망번신요보였다. 호흡법과 함께 운용한다 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걸어도 결코 숨이 차지 않고 속도도 떨어지지 않 는 것이다. 한데 지금 소운비는 비록 얼굴이 붉어지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는 하지만 조금도 뒤처지지 않고 그를 열심히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그 것은 오직 하나, 소운비의 내공 공부가 결코 혼음사의에 못지않다는 사 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대체 어떤 기연을 얻었기에 이 정도가 되었을까? 이놈...!' 호기심이 후끈 달아오른 혼음사의는 어디까지 소운비가 버틸 수 있 는지 알고 싶어져서 더욱 발걸음을 빨리 했다. "헉...! 헉헉!" 소운비는 숨이 목젖까지 차 올라 헐떡이기 시작했다. 가파른 산길 을 타고 내려가는데, 앞장선 혼음사의는 무슨 날개라도 달렸는지 신선처 럼 훨훨 가볍게도 걸어간다.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렇 게 쫓아가기가 힘들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제 혼음사의는 무슨 심보인지 더욱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지 않은가? 소운비는 허파가 터질 것 같은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허억...! 허, 허헉!" 잠깐 사이에 혼음사의와의 거리는 예닐곱 걸음 정도로 벌어져 갔다. 걸음을 멈추고 싶어도 내리막길이라 이미 붙은 가속도가 그것을 쉽 게 허락하지 않았다. 소운비는 부지불식간에 어떻게 해서든 숨을 쉬 는 것만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해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자 연스럽게 무산음호가 일러준 구결대로 호흡을 하며 진기를 운용하기 시 작했다. 장강에서 천주로, 회음에서 용천으로...! 일 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신기하게도 호흡은 가라앉고 침착해지 며 발걸음도 더욱 빨라졌다. 거리는 순식간에 다시 서너 걸음 사이 로 좁혀졌다. 힐끔 돌아보는 혼음사의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소운비는 기뻤다. 자신의 몸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는 사실은 소운비처럼 병약한 시절을 보냈던 사람에게는 천금보화보다도 소중한 기쁨이었다. 그리고 혼음사의의 한걸음 뒤까지 바싹 붙으면서, 소운비의 마음속 에는 강렬한 희망 하나가 솟구쳤다. 이제 단지 자신의 한 몸뿐 아니라 뒤죽박죽으로 얽혀 버린 자신의 운명까지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힘에 대한 욕망이었다. 한 시진의 여정 끝에 두 사람은 산을 완전히 벗어나 사람이 사는 마 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혼음사의는 자신의 초옥이 심심 산중에 있기 라도 한 것처럼 허풍을 떨었지만, 사실은 이렇게 인가가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일을 나갔는지 늙은이와 아이들만 간간 이 보이는 그 마을은 신양현(新陽縣)의 외곽, 맹가촌(孟家村)이었다. "헉, 헉헉...!" 산에서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숨을 몰아쉬던 것이 소운비였지만, 도 착한 지금은 입장이 바뀌어 혼음사의 쪽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금 세 뒤떨어질 것 같던 소운비가 무슨 용의 내단이라도 먹었는지 용케 잘 따라오자 나이도 생각지 않고 너무 무리하게 내달린 탓이었다. "허어... 허어... 허어어음!" 숨을 몰아쉬던 것을 마치 헛기침이라도 하듯 애써 수습하며 땀을 닦 은 혼음사의는 이제는 완전히 자신의 호흡을 다스려 담담히 웃고 있는 소운비를 힐끔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녀석! 이제 보니 백 명도 문제 없겠구만." "뭐라 했소?" "아니다." 혼음사의는 고개를 돌리더니 혼자 터벅터벅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 갔다. 소운비가 그 뒤를 따라갔다. 조용한 마을 안에서도 특히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 들어간 혼음사의 는 품안에서 한 조각의 육포를 꺼내더니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 고는 서당에 공부하러 온 학동에게 글선생이 첫날 훈계를 하듯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내가 오늘 너를 이리로 데려온 것은 네놈이 방사에 대해 가지고 있 는 어리석은 편견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다. 잘 보아라." 혼음사의는 땅바닥에 내려놓은 육포가 무슨 고귀한 성전이라도 되는 듯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운비는 그 육포가 어떤 신묘한 변화라 도 일으키는가 싶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하나 육포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소운비의 코에 묘한 냄새가 풍겨 올 뿐이었다. 혼음사의가 거기에 어떤 향료라 도 처발랐는지, 보통의 육포에서는 나지 않는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 냄새는 어쩐지 그의 가슴 아래쪽을 두근거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잠시 뒤, 두 사람이 있는 골목 안으로 한 마리의 개가 나타났다. 육 포의 냄새가 그 개를 꼬드긴 모양이었다. 개는 다 큰 암캐로, 낯선 사람 둘이 골목에 서 있자 약간 으르렁거 리더니 조심스럽게 육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 새를 맡고는 덥석 입에 물었다. 일단 입에 물자 낯선 사람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 자리에 엉 덩이를 붙이고 앉아 육포를 질근질근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혼음사의는 개가 놀라지 않도록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 다. "저 육포에는 발정기의 암캐만을 꼬드길 수 있는 특별한 약을 발라 놓았지. 나는 다른 때에는 결코 춘약을 쓰지 않는다. 춘약으로 꼬드기 는 것은 하수(下手)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경우는 너에게 보여 주기 위 해서 특별히 약을 쓴 것이다." 보여 준다니? 무엇을 보여 준다는 말인가? 개가 육포를 먹는 것 은 결코 희귀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소운비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개는 육포를 다 먹고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때맞추어 골목 입구에 다른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새로 나타난 개는 뒷다리 사이에 검붉은 몽둥이 같은 연장을 달랑달 랑 달고 있는 젊고 건강한 수캐였다. 두 개가 서로를 노려보며 목을 긁는 듯이 으르렁거릴 때, 소운비는 혼음사의가 무엇을 보여 주겠다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싸움이라도 할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며 빙글빙글 돌던 두 마리의 개 가 점점 가까이 다가서더니 수캐가 암캐의 뒤에 서서 냄새를 맡기 시 작했다. 그리고...! '아니, 개가 흘레붙는 것이 무슨 구경거리라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 단 말인가?' 두 개가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기 시작하자, 소운비는 우습기도 하 고 낯이 뜨겁기도 해서 고개를 약간 숙였다. 얼핏 보니 혼음사의는 마 치 대단히 진귀한 광경이라도 보는 듯이 엄숙한 표정으로 두 개를 응시하 고 있었다. "야! 저기 보보(寶寶)네 개하고 이 노인(李老人)네 개가 붙었다!" 골목 입구를 지나가던 한 개구쟁이 어린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근처에서 놀고 있던 개구쟁이 네다섯 명이 와아아 하고 달려왔 다. 삽시간에 개구쟁이들에게 둘러싸인 두 마리의 개는 그래도 몸을 떼 지 않고 열심히 종족번식의 행위에 몰두해 있었다. 아이들은 씨름 응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이따 금 나뭇가지 같은 것으로 개들을 쿡쿡 쑤시기도 했다. 개들은 으르렁 거리면서 옆으로 피할 뿐,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개들을 둘러싸고 원을 그리며 뛰면서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불렀다. "보보와 이 노인이 사돈 맺었네. 가을에는 강아지가 나오겠네. 강아 지가 나오면 두 마리는 보보네. 두 마리는 이 노인네. 약해서 죽는 놈 은 뒷산에. 보보와 이 노인이 사돈 맺었네." 노래는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마침내 수캐가 사정을 마쳤는지 몸 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개의 몸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두 마리의 개 는 몸을 그대로 붙인 채로 비칠비칠 골목 바깥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 다. 아이들은 뜨거운 물을 끼얹어야 한다고 떠들어대면서 개들을 따 라 골목을 나갔다. 아이들과 개들이 사라진 뒤에 골목 안은 조용해졌다. 혼음사의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소운비에게 물었다. "자, 너는 방금의 광경을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 소운비는 기껏 개들이 흘레붙는 것을 보여 주고는 무슨 대단한 역사 (役事)라도 이룬 것처럼 들뜬 혼음사의의 모습이 매우 우습게 느껴 졌다. 해서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도 약간의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개는 과연 짐승이라 남이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그 짓을 하는구 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남의 이목을 생각할 줄 알고 또 예의와 법도 를 지킬 줄 안다는 점이오." 소운비는 그쯤에서 한번 숨을 몰아쉬고는 혼음사의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당신네 색마들과 다른 점이기도 하오." 소운비는 그쯤 되면 혼음사의가 반드시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 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할말은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 다. 한데 혼음사의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아니, 화를 내기는커녕 소운비를 반쯤은 비웃고 반쯤은 불쌍하게 생각하는 듯한 웃음을 띠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어리석은 편견을 가졌다고 한 것이다. 개뿐 아니라 고양이든, 돼지든, 산중의 왕인 호랑이든, 하늘을 나는 새든 간 에 모든 짐승은 그렇게 교미를 한다. 오직 사람만이 어둑어둑하고 보이 지 않는 곳에서 그 짓을 하고, 남들이 있는 곳에서는 마치 자신은 전혀 그런 짓을 하지 않은 양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자연스러 운 짓이냐? 아니다. 자연이라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부모가 분명 합방을 해서 자식을 낳아 놓고도 자식이 커서 방사에 대해 궁금해 하면 머리를 쥐어박으며 남녀대방(男女大防)의 예절만 소리칠 뿐이다. 방사라는 것은 본래 자식을 낳고 삶을 즐기면서 건강 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잘 알아야 하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알기를 꺼려 한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분명 혼음사의의 말이 궤변이라고 여겨지면서도, 소운비는 당장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 혼음사의는 수염을 쓰 다듬으며 한소리 더 이죽거렸다. "소위 정파의 인물이라는 것들이 우리를 색마라고 몰아붙이지만, 본래 색공이라는 것은 장수의 비결로써 연구되던 것이다. 그것을 가지 고 나쁘다, 나쁘다 하니까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게 된 것이다. 색 공을 익힌다고 해서 죄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궤변이오. 아무리 그 본래의 뜻이 장수에 있다고 하지만, 당신들은 단지 자신의 방사를 즐기기 위해 뜻이 없는 다른 사람들을 욕보이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하지 않소? 짐승들의 예를 들어서 하는 말인데, 그렇다면 개가 다른 개를 겁탈하는 것을 보았소? 호랑이가 다른 호랑이 의 정기를 빼앗고 죽이는 것을 보았소? 한 가지 그럴듯한 이유로 만 가지 죄악을 덮을 수는 없는 거요. 당신들은 분명 외도의 길로 빠져 있소." 혼음사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허, 그놈. 그래 너 말 잘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것은 누구나 못된 버릇이 있기 마련이고, 죄를 짓기도 한다. 강호의 사람들이란 정파 사파 할 것 없이 사람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강호인이다. 하 나 그렇다고 해서 강호인 모두를 살인자로 보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왜 유독 색공을 익혔다고 해서 우리만 그렇게 욕을 먹어야 하지? 소림의 중들도 사람을 죽이고, 개방의 거지들도 사람을 죽인다. 명문세가 놈들 도 기녀를 희롱하는데, 너는 그들이 살인자나 음적이라고 생각한 적 이 있느냐? 없지? 없지?" "없소." 소운비는 인정했다. 하지만 자신이 조금도 잘못 생각했다고는 여겨 지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편견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에게도 잘못은 있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외도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제대 로 된 색공을 익힌 색마가 되는 길이다." 혼음사의는 자르듯 말하고 몸을 돌렸다. "자, 가자. 내 말은 네가 이해했든 안 했든 이것으로 끝이다. 이제 가서 제대로 된 공부를 하기로 하자." 소운비는 혼음사의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 겨 따라가기 시작했다. 혼음사의의 궤변은 만음요화의 육탄공세보다도 더욱 그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가 혼음사의의 말에 일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소운비는 어쩐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혼음사의가 그를 인도한 것은 마을 어귀의 작은 목옥(木屋)이었다. "주인 있소?" 그가 큰 소리로 부르자,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삼 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어쩐지 나른하면서도 편안한 얼굴을 한 여인은 혼음사의를 보자 반색을 했다. "의원 나으리시군요! 어쩐 일이세요?"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지. 안으로 들어갑시다." 혼음사의는 여인에게 은밀한 눈짓을 보냈다. 여인은 옆에 서 있는 소운비를 한번 훑어보더니 가만히 웃으면서 두 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정갈하게 손질된 작은 뜰 안으로 들어서면서 소운비는 까닭 모를 불 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 * * 콧노래를 부르면서 식사 준비를 마친 혜와는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이제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혼음사의에게 강제로 잡힌 몸이 되어 시키는 대로 한 부엌일이지 만, 혜와는 참으로 즐거웠다. 다름아니라 그 밥을 먹을 사람이 소운비라 는 사실 때문이었다. '흥! 의원의 밥과 국에는 침을 뱉어 놓아야지. 어디 두고 봐라...!' 땅거미가 내렸는데도 나간 두 사람이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자, 혜 와는 몸을 씻기로 결심했다. 화금궁을 나온 이래 제대로 목욕을 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아쉬운 대로 큰 나무통에 물을 부어 놓고 그녀는 옷을 벗었다. 몸 에 물을 끼얹자 시원한 촉감과 함께 물방울들이 그녀의 둥그스름한 곡선 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얼굴도 만져 보았다. 화금궁에서처럼 좋은 화장품을 바르지도 못했고, 옷은 더러워질 대 로 더러워졌지만, 그녀는 자신이 지금처럼 예뻤던 적이 없다고 생각되었 다.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은 소운비라고 여겨졌다. 혜와는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몸을 씻었다. 부드러운 풀줄 기 같은 긴 머리카락도, 매끈하고 긴 목도, 동그란 어깨도, 솟아오른 가 슴도, 물이 고일 것처럼 움푹한 배꼽 언저리도, 허벅지와 종아리도, 그 리고 마지막으로 붉은 점이 있는 연약한 발바닥까지... 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막 젖은 머리칼을 말리고 있을 때, 혼음사의 와 소운비가 돌아왔다. "어서 오세요...!" 혜와는 반갑게 맞이했지만, 소운비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에 반해 혼 음사의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오라버니?" 걱정스럽게 부르는 혜와에게 소운비는 얼핏 웃음을 보이려고 노력하 는 것 같았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세 사람이 함께 밥을 먹는 동안에도 소운비는 계속 우울한 얼굴이었 다. 그 때문에 혜와는 자기가 침을 뱉은 밥과 국을 좋아라고 먹는 흘 음 사의를 보면서도 그다지 흥이 나지 않았다. "너희 둘은 저쪽 방에서 함께 자도록 해라. 대신 밤에 너무 시끄럽 게 소리를 내면 못 쓴다. 나도 끼워 달라고 할 테니까." 혼음사의가 그렇게 이죽거려도 소운비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옆 방으로 옮겨 갔다. 혜와도 그 뒤를 따라갔다. 둘만 있게 되자 혜와는 소운비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왜 그래요? 왜 그렇게 얼굴이 좋지 않으세요, 오라버니?" 몇 번이고 그렇게 재촉해 묻고 나서야, 소운비는 천천히 입을 열 었다. "별것 아니야. 다만 내가 싫어져서..." 혜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소운비는 주저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맹가촌에 가서 혼음사의가 나를 한 여인에게로 데려갔어. 그 녀가... 그녀가..." 소운비는 목소리를 뚝 떨구며 말했다. "그녀가 내 몸을 샅샅이 핥았어. 그것뿐이야." 소운비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혜와도 잠시 말을 잊었다. 아무리 그녀가 소운비에게 혼음사의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이야기했었 다 하더라도, 막상 그 이야기를 듣자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하나 잠시 뒤, 혜와는 애써 밝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겨우 그것뿐이에요? 그 정도를 가지고 뭘 그리 상심하세요? 오라버 니는 전에 궁주에게도 그런 짓을 당했었고, 또 앞으로는 더한 것도 배워야 할 텐데 그걸 가지고 이렇게 상심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혜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라버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혜와...!" 소운비가 안타깝게 말했다. "내가 이러는 이유는... 단지 그 여인이 나를 애무했기 때문만이 아 니야. 난... 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는 툭 털어놓았다. "내가 싫어진 것은, 그 여인이 내게 그러는 동안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야. 흥분했었다구." 혜와는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오라버니는 남자인걸요? 설 령 그 여인이 생면부지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몸은 몸대로 반응하기 마련이지요. 오라버니...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무엇을?" 고개를 들고 비로소 자신을 쳐다보는 소운비에게 혜와는 얼굴을 붉 히며 물었다. "만약에... 오라버니와 함께 있었던 것이 그 여인이 아니라 저였 다면...? 그래도 오라버니는 자신이 싫었을까요?" 소운비는 대답하지 않고 혜와의 얼굴을 응시했다. 물 냄새를 물씬 풍기는 그녀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소운비는 갑자기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았을 거야." 혜와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꿈 꾸는 것처럼 달콤했다. "그러면 혜와는... 기뻐요." 소운비의 가슴이 턱 막혀 왔다. 그것은 답답함이 아니었다. 아침에 집을 나가기 전에 혜와가 그의 가슴을 훈훈하게 한 것과 같은 감동이 었다. 그의 마음에 드리워진 우울한 그림자가 혜와의 작은 손에 의해 거두 어진 것 같았다. "혜와...!" 소운비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혜와의 눈 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비록 혜와가 아무런 변명없이 그를 따라 동백산을 내려왔다고 하지 만, 아직도 혜와에 대한 오해가 완전히 풀리지는 않은 소운비였다. 하 나 이 순간, 혜와가 그를 속이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오직 진솔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혜와는 두 눈에 물기를 가득 담고서 소운비의 팔 안으로 몸을 기대 왔다. 소운비는 동백산의 동굴에서처럼, 그녀를 힘주어 안았다. 한데 그 순간, 혜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으으음!" 그녀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을 굴렀다. "혜와...! 으윽!" 그녀를 부축하려던 소운비도 마찬가지로 아랫배에 격심한 고통을 느 꼈다. '이건?' 그가 의아해 하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혼음사의가 웃 음 띤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군. 오늘 먹어야 할 흑독사를 먹지 않아서 그래. 우리 명명과 소소가 발광을 하고 있을 테지? 자!" 혼음사의는 한 움큼의 흑독사가 담긴 종이 봉지를 방안으로 던져 넣 었다. 소운비는 방바닥을 기어 그 봉지를 잡았다. 그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혜와의 입에 흑독사를 넣어 주고, 그녀의 고통이 잦아드는 것을 본 뒤 자신도 먹었다. 혼음사의는 두 사람이 진정하는 것을 본 뒤 음산한 웃음을 남기며 방문을 닫았다. "잊지 말라구! 달아나면 끝이야. 죽어도 그렇게 흉한 꼴을 보면서 죽 고 싶지는 않겠지?" "으으음...!" 소운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혼음사의가 사라진 방문 쪽을 노려 보았다. 혜와는 아직도 방바닥에 누운 채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 었다. 반 시진쯤 잔통(殘痛)을 치르고 난 뒤에야 혜와는 숨을 고르더니 잠이 들었다.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져 주면서, 소운비는 다짐 하고, 또 다짐했다. '너를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할 수 없다! 절대로...!' 제 12 장 거래(去來) "하!" 만음요화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신기한 동물이라도 바라보 듯이 탐서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처음 화금궁에 왔을 때는 시체를 하나 들여놓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 죽어 가던 그였다. 놀랍도록 빠른 회복력을 보여 이제 몇 군데의 상처만 빼면 거의 나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의 탐서랑은 만음요화 앞에선 초라한 신세였다. 탐서랑은 무엇 하나 가지지 않은 상처 입은 몸으로 만음요화에게 구 함을 받은 것이고, 만음요화는 그의 생명의 은인일 뿐더러 생사여탈 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탐서랑은 만음요화가 '기어라'라 고하면 기어야 하는 신세인 것이다. 한데 지금 그의 태도는 무엇인가! 어떻게 그가 만음요화 앞에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당당하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방금 무슨 말을 했나요? 다시 한번 말을 해봐요." 만음요화가 근래에 들어 누군가에게 이만큼의 자비를 베풀었던 적은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이번 질문에 탐서랑이 얼른 꼬리를 내리고 용 서를 구한다면 용서를 해줄 마음의 준비까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만음요화가 요 며칠 사이 기분이 극히 좋아진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탐서랑은 전혀 눈치가 없었다. "나는 궁주의 혼혼옥잡을 빌리고 싶다는 거요." 이번엔 만음요화도 더 이상 코웃음만 칠 수 없었다. 나른하게 꿈꾸 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서서히 살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이것 봐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혹시 아시나요?" "전혀 모르고 있소만." 탐서랑은 정말로 몰라서인지, 아니면 약을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 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그럴수록 만음요화의 두 눈에서 피어오르는 살기 또한 짙어져 갔다. "잠자리 한번 같이했다고 해서 그 여자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 각하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인간들. 당신 같은 남자들을 가장 싫어하 지요. 비단 싫어할 뿐만 아니라 죽이고 싶어하기도 하지요." 만음요화는 말을 마치면서 서서히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바닥 은 이미 투명해져 있었다. 그리고 핏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혼혼색 수를 펼치려는 것이다. 이쯤 되면 탐서랑의 표정이 바뀔 법도 한데, 그는 전혀 그러지 않 았다. 오히려 다리를 꼬면서 몸을 뒤로 한껏 젖혀, 편안히 기대어 앉는 것이었다. "허허...! 성급하구려. 내 이야기를 좀더 들으면 좀 이해가 될 텐데 말이오." 만음요화는 그의 철판처럼 두꺼운 낯짝 속에 감추어진 속셈을 캐내 기라도 할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이 차가 식어 김이 사라지기 전에 내게 그 이유를 설명해 봐요. 그러지 못한다면 이유란 없는 것으로 생각할 테니까." 탐서랑은 만음요화의 앞에 놓여진 찻잔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미 그 잔에 담긴 차는 거의 다 식어 가는 형편이었다. 탐서랑은 혀를 쯧, 차고는 그나마 조금은 진지한 얼굴이 되어 이야 기를 시작했다. 짧은 시간 안에 상대를 설득하려면, 빙빙 돌리는 말솜씨 는 하등 필요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만음요화가 가장 관심을 가질 화제를 들이밀었다. "만음요화, 당신은 색존이 되고 싶지 않소?"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나는 당신을 색존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요." 그것은 더욱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만음요화는 바로 반박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탐서랑의 얼굴이며 말투가 너무 진지했던 것 이다. 그녀는 약간의 뜸을 들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비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면, 마치 그대가 나를 색존으로 만들 능력이라도 있 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탐서랑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말했다. "물론 있지." "어떻게...?" 그녀가 서서히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탐서랑은 한층 여유를 부리게 되었다. "당신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소?" "무엇을 말인가요?" "내가 그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죽지 않고, 회복 또한 이렇게 빠르 다는 사실 말이오." 만음요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신기하더군요. 하지만 그것과 이 이야기가 무슨 상관...!" 그 대목에서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새 삼스럽다는 눈으로 탐서랑을 훑어보았다. 그 눈에서는 이미 살기가 사 라지고 있었다. "설마? 당신... 설마 어떤 신공을 연성 중이라는 이야기는 아니겠 지요?" "하하하하하!" 만음요화가 그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탐서랑이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바로 그렇소. 귀회루의 오인회에 가던 길에 나는 사실 매우 희귀 한 비급을 얻게 되었지. 그리고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그것을 연성하고 있는 중이오. 아직 완성이 되지는 않았는데, 하마터면 그 새파란 놈에게 당해 죽을 뻔하지 않았겠소? 혼혼옥잡을 빌려 달라고 한 것은, 그 귀 물만이 나의 연성을 더욱 재촉할 수 있기 때문이오." 만음요화는 귀가 번쩍 트였다. 다섯 명의 색마들 중에 가장 별볼일없고 그야말로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기 바쁜 한량이라고만 생각했던 탐서랑이 기연을 얻었다니! 그가 보여 준 놀라운 회복력이 바로 그 기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것은 오대색마 간의 힘의 관계에 새로운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희귀한 비급이라면?" 탐서랑은 마치 절세의 비밀이라도 가르쳐 주는 것처럼 위엄있게 한 마디 한마디 잘라 뱉었다. "대락불사록(大樂不死錄)이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만음요화의 몸으로부터 힘이 쭉 빠져 나갔다. "그것은...!" 지고의 즐거움으로 불사의 방법을 연마한다는 <대락불사록>. 그것 은 분명 희귀한 비급임에는 틀림없었다. 만음요화 자신도 이야기로 듣기 만 했지 실제로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희귀하다고 해서 모두 뛰어난 무공인 것은 아니다. 아니, < 대락불사록>은 무공비급이라기보다는 장생술 쪽에 가까운 것이었다. 말하자면, 도가 쪽에서 연성하는 양생호흡법의 일종으로 무공 방면 으로는 큰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그 효용은 실로 뛰어나 신체가 마치 물처럼 회복력이 빠르게 되고 특히나 정력이 사람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 로 발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흥! 희귀한 것을 익히느라고 고생을 하셨는가 본데, 하지만 그것으 로 어떻게 나를 색존의 자리에 앉힐 수 있지요?" 만음요화의 싸늘한 대꾸에, 탐서랑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쯧! 아직도 못 알아들으시는구려. 날 잘 보시오, 만음요화." "뭘 보라는 거예요?" "약간 마르고, 또 얼굴을 바꾼다면...! 글쎄,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그 누군가와 착각할 만도 하지 않겠소?" 순간, 만음요화의 머릿속으로 번개가 지나가는 듯했다. "당신의 이야기는...?" "만약 그 젊은놈이 나 정도의 색술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러면 색마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을 쏘아보았다. 말보다 더 끈적끈적한 침묵의 계약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만음요화의 붉은 입술이 애벌레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그 안 에서 교소(嬌笑)가 터져 나왔다. "호호호호! 좋아요. 당신은 아랫도리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제법 머 리도 쓰는군요. 알겠어요. 나 만음요화는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하 지요." 탐서랑은 그제서야 가슴 깊숙이 삼켜 두고 있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미 식은 찻잔을 잡고 만음요화를 향해 들어올렸다. "약속의 의미로 이 잔을 비우겠소." 그는 재빨리 한 잔의 차를 마치 술처럼 꿀꺽 삼켜 버렸다. 만음요 화도 자신의 찻잔을 들고 단숨에 마셨다. 두 사람은 다시 얼굴을 마주보고 빙그레 웃었다. 탐서랑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슬슬 그다 운 웃음을 흘리며 만음요화의 옆 자리로 옮겨 앉았다. "어떻소, 만음요화. 계약이 이루어진 걸 축하하는 뜻에서 한번...!" "호호호...!" 만음요화는 자신의 목덜미를 감아 오는 탐서랑의 손길을 부드럽게 뿌리쳤다. 탐서랑은 고개를 찌푸렸다. "왜? 당신은 그전에 못 끝낸 글씨 쓰기가 아쉽지도 않소?" 탐서랑이 말하는 글씨 쓰기란 은어(隱語)로 교합을 일컫는 것이었다. 남성의 상징이 붓과 비슷하다고 해서 생긴 말인데, 탐서랑의 별호에 담긴 '붓글씨를 탐한다'는 뜻은 그런 이유로 붙은 것이다. 만음요화는 어느새 탐서랑으로부터 빠져 나와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 였다. 그녀는 교태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수놓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요." 수놓는 일, 그것 역시 교합을 일컫는 은어였다. 말은 끈쩍끈쩍하게 주고받았지만 이미 만음요화는 방을 나서는 중이 었다. "내일부터 내가 혼혼옥잡으로 당신의 수련을 돕도록 하겠어요. 오 늘은 이만."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방안에 야릇한 향기를 풍기며 감돌고 있었 다. 탐서랑은 입맛을 다셨다. '알 수가 없군! 저 탕녀가 대체 무슨 바람이 들었기에 벌써 며칠 째 교합을 거부하고 몸을 빼는 거지?' 그가 아는 만음요화라면 결코 글씨 쓰는 일을 거부하지 않을 여자였 다. 탐서랑은 부쩍 호기심이 치솟았지만, 만음요화의 뒤를 밟아 그 호 기심을 풀 만한 배짱은 없었다. 만음요화는 탐서랑의 방을 나선 후 발걸음도 가볍게 무산각으로 향 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냉철하게 앞으로 그녀가 취해야 할 몇 가지 행동들이 조립되기 시작했다. '가짜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진짜는 사라져야 하는 법. 본 궁의 살 수대를 사방으로 보내도록 하고... 개방에서 격색마회인지 뭔지 하는 떨 거지들이 모여 요란법석을 떨고 있다는데 거기에도 한번 쓴맛을 보여 주 어야 하겠고... 저 탐서랑이라는 작자 또한 완전히 믿을 것은 못 되 니 무엇인가 쐐기를 박아 두어야겠지.' 생각해 보면 할 일들은 많았다. 하나 지금 당장은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며칠 전 산중에서 만나 그녀가 궁으로 데려온 꽃 같 은 정랑(情郞)의 품에 안겨 만사를 잊고, 쉬고 싶을 뿐이었다. 그 정랑은 만음요화보다 훨씬 나이가 어렸지만, 그녀의 정염은 그 런 것에 개의치 않고 활활 타올랐다. 아니,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사내 보다도 더욱 그녀를 매료시키는 사람이었다. 무산각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녀의 얼굴에서는 계략의 표정이 사라져 갔다. 돌계단 아래에서부터 그녀의 숨은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 껏 숨을 몰아쉰 다음 무산각 안의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정겨운 목소리 로 말했다. "오랑! 제가 왔어요." * * * 낙매(落梅)는 이제 서른 살이다. 그녀가 서른 살이라는 것은 그녀의 육체가 서른 살이라는 것이다. 서른 살의 육체에는 서른 살만이 가 질 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그것은 기름을 흠뻑 먹인 오동나무처럼 길이 잘 든 육체였다. 만지 는 대로 소리가 잘 나는 악기와도 같았다. 물론 그녀 자신이 뛰어난 연주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젊은 육체에 열심히 공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젊은 육체는 잔뜩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조 금만 힘을 주면 툭 부러질 것처럼... 낙매는 그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의 육체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로부터 손을 뗐다. "휴우우...!" 마침내 그 사람, 소운비가 긴장을 풀며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여전하군요." 낙매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 역시 서른 살이었다. 젊었을 적 하남 땅에서는 명성 이 자자하여 이름난 대부호나 관리라면 한번씩은 품어 보려 했던 명기 낙 매답게 미태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지만, 세월의 잔주름이 눈가에 희 미하게 잡히기 시작하고 쓸쓸한 미소까지 지을 수 있는 서른 살의 얼굴. "내가 기루에 몸을 담았던 것이 열세 살. 그때부터 작년까지 십여 년을 그 바닥에서 뒹굴었지요. 내 옷을 벗긴 남자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예요. 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봤어요." "미안합니다." 소운비는 정녕 죄인이라도 된 듯이 고개를 숙였다. 낙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안할 일은 아니지요. 당신은 좀 특이한 것뿐이지, 나쁜 것 은 아니에요. 벌써 열흘이 되지 않았나요? 당신이 내 집에 와서 방중술 의 수련을 받기 시작한 지가... 한데 당신은 아직도 본론으로 들어가길 꺼리고, 오직 애무만을 거듭하고 있어요." 진실을 따지자면 낙매의 말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애무만을 거 듭하고 있는 것은 낙매이지, 소운비가 아닌 것이다. 소운비는 열흘 내내 수동적으로 낙매의 손길에 몸을 맡길 뿐, 그 자신은 어떤 행동도 하 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한 가지만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소운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낙매는 어린 남동생을 보듯 다 정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듣기에 따라서는 모욕적일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낙매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의원님의 부탁을 받았으니까요." "혼음사의와 대체 어떤 관계이시기에...?" "생명의 은인이시죠." 소운비는 믿을 수가 없었다. 혼음사의가 누군가의 목숨을 구해 준 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누군가가 아리따운 여인이며, 목숨을 구해 주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구해 주고 그 몸을 탐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를 생 명의 은인이라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알고 있어요." 무엇인가 반박하려는 소운비의 말을 낙매는 머리에서부터 뚝 잘라 버렸다. "그분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어 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분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은 변하 지 않아요. 뿐만 아니라 광아(光兒)의 은인이기도 하지요...!" 이름이 불려진 것을 벽 너머에서 듣기라도 한 것일까? 갑자기 옆 방 에서 자지러질 듯한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바로 낙매의 아기, 광아였다. 낙매는 벌떡 일어나더니 재빨리 옆 방으로 건너가 아기를 안고 얼르 며 다시 돌아왔다. 그 동안 운비는 옷을 챙겨입었다. 아무리 갓난아이 라고 하지만 그 앞에서 어머니와 이런 꼴로 앉아 있은 것을 보이고 싶 지는 않았다. 한데 정작 낙매는 별로 거리끼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낮은 소 리로 아기를 얼르며 토닥여 주고 있었다. 그 얼굴은 참으로 평화로워보 였다. 아기의 울음이 잦아들고 숨소리가 다시 고르게 되었을 때, 낙매는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병에 걸렸었어요. 화류계 생활 십수년의 결과로 얻은 몹쓸 병이었 지요. 누구도 고칠 수 없다고 했어요. 의원들도 그 병 이름은 모르지 요. 다만 기녀들이나 난봉꾼들이 많이 걸린다고 해서 화류병(花柳病)이라 고 하지요... 만일 그 병에 걸린 기녀가 아기를 갖게 되면, 그 아기는 태안에서 죽는다고 하더군 요. 하필 그때, 내 뱃속에는 누가 아버지인지도 모르는 광아가 들어 있었고... 하남의 명기 낙매도 이젠 다되었다고 사람들이 수군댔지요. 그 앞에서 비참하게 죽기는 싫어서 제 발로 기루 를 나왔어요. 주인은 잡지도 않더군요. 폐물이 되었으니까요. 며칠이고 걷기만 했어요. 사람이 없는 길로. 그대로 걷다가 엎어져서 죽는 곳이 바 로 내 무덤이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하도 낮고 조용해서,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이야 기가 비참했던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광아에게 들려 주는 옛날이야기 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쓰러졌다가 눈을 떠보니 바로 그 의원님이 나를 살피고 계시더군 요. 아마 처음에는 다른 의도로 그러신 모양이지만..." 그 대목에서 낙매는 배시시 웃었다. "나중에는 내 병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게다가 뱃속에 아이까 지 있는 것을 아시고는 나를 이 마을로 데려오셨어요. 빈집을 얻어 무 려 두 달 동안이나 나를 치료해 주셨죠." "어째서?" "의원으로서 난치병(難治病)을 보면 당연히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이 라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전 알아요. 그분께서 우리 모자에게 측은지심 (惻隱之心)을 느끼셨기 때문이라는걸요. 남들은 그분을 사의(邪醫)라고 하지만, 제게 있어서만 큼은 신의(神醫)이고, 인의(仁醫)세요." 운비는 잠결에 어머니의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광아를 물끄러미 들여 다보았다. 결코 고칠 수 없다는 화류병을 고쳐 두 모자를 구한 그 행 위는 부정할 수 없는 선행이었다. 하지만 그 선행이 다름아닌 혼음사의 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을 소운비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빌미삼아 부인께 이런 해괴한 짓을 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방중술을 가르쳐 주라는...!" 애써 혼음사의를 깎아 내리려는 소운비의 말을 듣고 낙매의 두 눈 언저리에 언뜻 분노의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니, 그건 공자께서 잘못 알고 계시는 거예요. 이것은 제가 원한거 예요. 생각해 보세요. 저는 의원님의 은혜를 너무나 갚고 싶었지요. 하지만 제겐 가진 돈도 없고, 어떤 특별한 능력도 없어요. 일생 동안 한 일이라고는 기방에 앉아 술을 따르고 잠자리 시중을 든 것뿐이지요.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로 은혜를 갚고 싶었어요.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 신 것은 의원님의 배려예요. 저는 결코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 다." 소운비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이 여인의 말대로 그녀 자신 이 원해서 한 일이라면 어떻게 혼음사의를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는 가! 오히려 여인의 손길에 저도 모르게 흥분하면서도 애써 그것을 감추고 군자인 척하려는 자신이 더 위선적이지 않은가. "제게는 이런 일이 직업이었어요. 더구나 공자는 젊고, 앞날이 창창 한 사람이지요. 무슨 연유로 그렇게 거부하시고, 또 무슨 연유로 의원 께서 공자에게 그렇게 방중술을 가르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 바램은 공자께서 자연스럽게 이 일을 받아들이셨으면 하는 거예요. 무조건 이런 것을 거부하는 것은 공자의 편견이에요." 소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혼음사의가 그에게 편견 운운했 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부인,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이 사람의 씨앗을 퍼뜨리고 살아 가는 데 방사가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나 사람은 짐승과는 달라서 오직 일생의 반려자로 선택된 한 사람과만 그 즐거움을 나누어야 하고, 또 그 즐거움을 나누는 데 있어서도 규범과 법도에 따라 지나침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혼음사의가 제게 가르치 려는 것은 이 사람 저 사람 가릴 것 없이 아무하고나 교접하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낙매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품안에 안긴 광아를 내려다보았다. "공자께선 지금 저를 보고 짐승과 같다고 탓하시는 것이군요...!" 한참 열에 들떠 설교조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소운비는 순간 당황했 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저는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아무나와 잠자리를 했어요. 그 것이 제 직업이었으니까요... 하긴 짐승 같다는 욕을 들어도 할말이 없 지요." 낙매는 씁쓸히 웃었다. "일생의 반려자라고 하셨나요? 하지만 일생의 반려자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알 수가 없을 거예요. 저를 찾았던 손님들 중에도, 정인 과 가슴 아프게 이별하고 홧김에 기방을 드나들게 된 사람들이 많았어 요. 물론 혼인식을 올리고 신방에 들 수 있을 때까지 욕심을 누르고 행동을 절제하면 되겠지만, 사람들의 인내심이란 보통 그보다 훨씬 약 하답니다." 낙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운비는 가슴 한구석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비록 철없던 시절부터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오 직 진설영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늘에 태양이 하나라는 사실처럼 확실한 것이었다. 하나 이런저런 사연으로 인해 그는 진설영 앞에 당당하게 설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고, 지금 그 의 옆에는 과거까지 팽개치고 자신을 따라 나온 혜와가 있다. "또 사람이 사는 일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서, 돈 있고 가문 있 는 사람이라면 모르되 혼인식을 제때에 올릴 수 없는 경우도 많아요. 그 럴 경우에는 야합(野合)을 피할 수가 없지요." 이어지는 낙매의 말에 소운비는 계속해서 혜와와 자신의 처지를 생 각하게 되었다. 그와 혜와.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천애 고아들의 만남이다. 설령 혼인식을 올린 다 하더라도 보아 줄 부모나 친척조차 없다. 결국 그들이 결합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야합에 그치고 말 것이 아닌가! 열흘에 걸친 농염한 애무보다도 더욱 소운비를 뒤흔들어 놓은 이야 기를 뱉어 놓고도 낙매의 얼굴은 평온했다. "제 말이 너무 건방지지요? 아무튼, 공자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얼 핏 보기에는 다 옳은 것 같아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입니다. 의원께 서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소운비는 그쯤에서 이야기를 끊었다. 더 이상 이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혼음사의는 어디 있지요?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보통 때 혼음사의는 이 집 정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낙매의 수업을 마치고 방을 나서면 함께 산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한데... "오늘은 혼자 돌아가셔야겠습니다. 의원께서는 아까 먼저 돌아가신 다고 하셨거든요." "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그가 먼저 돌아갔단 말인가. 먼저 돌아가야 할 특별한 일이 있다면 이야기를 해주었어야 하지 않은가. 만일 이야 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소운비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 "얼마나 되었습니까?" "예?" 갑작스럽게 큰소리로 외쳐 묻는 소운비의 목소리에 잠들었던 광아가 다시 깨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운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한 반 시진쯤... 어머나!" 쾅! 낙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운비는 방문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 다. '혜와!' 그가 가야 할 산등성이 쪽으로 불길한 먹구름이 퍼져 가고 있었다. 아침 일찍 소운비와 혼음사의가 초옥을 나서면 집 안팎을 청소하고 식사 준비를 해놓은 다음 목욕을 한다. 그것이 그즈음 혜와의 일과였 다. 뱃속에 들어 있는 인면자고에 대한 불안만 아니라면 혜와로서는 그 이상 만족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정인의 옆에 붙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러기에, 그녀는 비좁은 부엌 안에서 어설픈 목욕을 하면서도 연 신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었다. 또르르...! 그녀가 일어서자 어깨 위에서부터 물방울들이 굴러 내려갔다. 매끄 러운 피부 위에서는 물방울들이 스며들 틈도 없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구 태여 수건으로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하던가... 아무튼 혜와의 피부 또 한 그러했다. 젖은 머리칼을 정성껏 빗어 내리던 혜와는 일순 몸을 굳혔다. 누군 가가 자신을 은밀히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이 그 녀의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누구세요?" 그녀는 일부러 큰 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 큰 소리 후에 돌아오 는 막막한 정적이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자신이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재빨 리 부엌 안을 돌아보았다. 부엌 안에는 창문도 없다. 누군가 훔쳐볼 만한 곳이 있다면 오직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문뿐이다. '아직 돌아올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한층 불안해 하며 한쪽에 벗어 던져 둔 옷 쪽으로 손을 뻗었 다. '고것 참...!' 혜와가 불안한 시선을 던지는 문 너머. 혼음사의는 갈라진 문틈으 로 눈을 들이밀며 입맛을 다셨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입 안 가득히 침 이 고였다가 흘러내리면서 수염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여자란 언제나 훔쳐보는 존재였다. 문틈으로, 벽 사이 로, 어둠 속에서, 기절해 있을 때.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방심해 있는 여자의 존재란 그를 더없 이 흥분시켰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열흘에 걸친 낙매의 수업도 별다른 진전이 없어 혼음사의는 차츰 소 운비에게 진력이 나기 시작한 참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관심은 혜 와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오늘은 특별히 마음을 다잡아먹고 먼저 집으 로 왔는데, 부엌 안에서는 진경(珍景)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가 지금 문안으로 쳐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서만 서성이는 이유는 오직 하나. 행여나 혜와를 범하고 난 뒤에 소운비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에라...! 색존이고 뭐고 그냥, 확!' 문 안쪽에서는 혜와가 한 겹 한 겹 옷을 걸쳐 가고, 문밖에서는 혼 음사의가 들어갈까말까 망설이고 있는 찰나였다. '잉?' 혼음사의의 귀에 저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의 발소리와 숨소리가 파 고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혼음사의가 고개를 돌려 보니 멀리 수림 속으로 도깨비처럼 희번덕 거리며 달려오는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그는 구태여 달려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모습은 망번신요보를 달리면서 시전할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세상에서 오직 혼음사의만이 알고 있는 망번신요보를 최근 익힌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소운비였다. '이젠 혼자서도 제대로 하는군그래!' 혼음사의는 귀를 기울여 그 발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 다. 원래 가르쳐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열흘 동안 마을을 오가며 침묵의 경쟁을 하다 보니 자연 소운비가 혼음사의의 발걸음을 따라 배 우게 된 것이다. 걷고 있어도 뛰는 것과 같은 망번신요보를 뛰면서 시전한다면 얼마 나 빠를 것인가! 과연 소운비는 반 시진이나 늦게 출발했으면서도 바로 혼음사의를 따라잡은 것이다. '저 녀석! 저런 끈기로 색술을 연마하면 좀 좋아...?' 속으로 투덜대면서 혼음사의는 퍼뜩 부엌문을 부수며 안으로 뛰어들 어갔다. 방해꾼이 오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결정을 재촉한 것이다. "악!" 막 옷을 다 걸친 혜와가 찢어져라고 비명을 짜 올렸다. 혼음사의 는 불문곡직하고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어깨에 들춰 맸다. "자! 아무도 없는 호젓한 곳으로 가자꾸나." 혼음사의는 히죽히죽 웃으며 초옥을 벗어나 소운비가 오는 반대 방 향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목울대가 터져 나갈 정도로 숨막히게 달려 간신히 초옥이 눈에 들어 오게 되었을 때, 소운비는 저만치 혜와를 업고 달아나는 혼음사의를 보게 되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것만도 힘에 겨웠는데 다시 숨막히는 추격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하나 소운비는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얼마쯤인가 달아나던 혼음사의가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소운비가 아 직 쫓아오고 있는 것을 보고 '어 뜨거라' 하면서 더욱 속력을 내기 시 작했다. 파바바바바바바...! 파바바바바밧...! 쫓고 쫓기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산중에 울려 퍼졌다. 무언의 추격전은 무려 한 시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울퉁불퉁한 산길도, 발길에 채이는 나무뿌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멧돼지 처럼 씩씩대며 쫓고 쫓기는 일에 열중해 있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소운비가 문득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것 보시오, 의원 양반! 왜 그녀를 괴롭히는 거요? 제발 그만 좀 해두시오." 혼음사의가 달리는 와중에 고개를 뒤로 돌리며 대꾸했다. "내가 괴롭히긴 누굴 괴롭힌다는 거냐? 다 이 아가씨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을 하려는 거지." 도무지 얘기가 되지 않는 상대다. 하지만 소운비는 혼음사의가 말 대꾸를 하는 동안 약간 속도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기에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혜와는 내 정인이오. 건들지 마시오." "정인은 무슨 정인! 내가 계속 지켜보았다만 너는 그저 이 아가씨 와 한 방에서 잠만 잘 뿐 아무 짓도 하지 않던데, 그러고도 정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나쁜놈아!" "그건 내 사정이고, 그렇다고 당신이 마음대로 그녀를 괴롭혀도 되오?" 혼음사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소리를 빽 질렀다. "나는 그 동안 네놈한테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 참아 준 것인데, 네 놈이 도통 말도 안 듣고 진전이 없으니 화가 났단 말이다. 즐거운 일이 라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다! 나를 말리지 마라! 이건 다 나를 화 나게 한 네놈 탓이야!"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두 사람의 거리는 약 이십 보 정도로 좁혀 졌다. 혼음사의는 마지막 말을 뱉고 난 다음 숨을 한껏 몰아쉬고 더 욱 속력을 내서 앞으로 쭈욱 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은 초조해졌다. 혼음사의로 말하자면, 이렇게 도망만 다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딘가 일을 벌일 수 있을 만한 호젓한 곳으로 숨어야 하는데 뒤에 따라 붙는 저 진드기 같은 놈이 떨어지려고 하지 않으니 큰 낭패였다. 소운비로 말하자면, 자신이 어설프게 익힌 경신술로 혼음사의를 바 짝 따라붙을 수 있는 것은 젊음과 힘의 우세 때문인데, 언제까지 이렇 게 쫓아다니기만 해서는 혜와를 구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 록 초조해진 것이다. 추격전이 막 한 시진을 넘어섰을 때,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기회가 닥쳐 왔다. 혼음사의의 앞으로 길이 끊어져 버렸다. 수림이 약간 뜸해진 곳에 느닷없이 절벽이 나타난 것이다. 혼음사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뒤를 돌아보니 소운비가 반색을 하 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혼음사의는 약이 올랐다. 소운비는 분명 그 자 신보다는 약자였다. 왜 자신이 약자에게 쫓겨야 한단 말인가! '헹! 네놈이 계속해서 쫓아오려고 한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혼음사의는 어깨에 들춰 맨 혜와를 다시 한번 다잡았다. 그녀는 처 음엔 앙탈을 부리고 주먹질을 해대더니 어느새 축 늘어져 있었다. "하아아아압!" 혼음사의는 갑자기 긴 기합성을 토하면서 뒤로 돌아섰다. "그 자리에 서랏!" 갑작스런 혼음사의의 호통에 소운비는 우뚝 그 자리에 멈추었다. "네놈이 자꾸 쫓아오겠다면 아주 뜨끔한 맛을 보여 주지." 혼음사의는 음산한 웃음을 짓더니 품안에서 검은색의 침통을 꺼내 들었다. "이것은 내가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다. 이름은 생사맥결통(生死脈 訣筒)이라 하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물건이야. 한 번 맛을 봐라!" 생사맥결통을 쥔 혼음사의의 손이 한번 번뜩하자 그 안에서 가느다 란 묵광(墨光)이 소운비 쪽을 향해 폭사되었다. 추아앗! 소운비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몸놀림이 빨랐기 때문인지, 아니 면 혼음사의가 사정을 봐준 탓인지 묵광은 그의 머리꼭지 위를 아슬아 슬하게 스치고 지나가서 삼 장 뒤의 나무 둥치에 꽂혔다. 치이익...! 역겨운 노린내와 함께 들려 오는 소리에 소운비가 얼핏 뒤를 돌아보 니, 그 나무 둥치에는 길이 오(五) 촌(寸)쯤의 검은색 침 하나가 박 혀 있었다. 한데 그 묵침(墨鍼)이 오줌 눈 수캐처럼 몸을 부르르 떠는가 싶더 니 갑자기 폭발하는 것이 아닌가? 퍼어엉! 둘레가 어른의 팔 세 아름은 됨직한 나무 둥치가 순식간에 움푹 패 이면서 옆으로 기우뚱거렸다. "어떠냐? 사천 당문의 아이들도 내 생사맥결귀영폭침(生死脈訣鬼影 爆鍼)에는 혀를 내두르지. 한번 더 맛을 볼 테냐?" 혼음사의가 키들키들 웃으며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이번에 날 아온 침은 하나가 아니라 세 개였다. 소운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강호의 하류 암기 수법도 겪어 본 일이 없는 그가 혼음사의에게 대적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소운비는 다급한 대로 몸을 땅바닥으로 굴렸다. 그의 왼쪽 귀 바 로 옆에 세 개의 침이 꽂히더니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소운비는 반사적 으로 반대쪽을 향해 몸을 굴렸다. 퍼어어어어엉! 소운비는 귀 밑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침이 꽂혔던 자리 의 땅이 움푹 패인 것을 볼 수 있었다. 폭발의 여파로 날아든 돌멩이와 흙세례에 그는 귀 밑에 작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으하하하하! 으하하하하! 그놈 꼴 좋다!" 그 다음부터 혼음사의는 통쾌하게 웃어젖히면서 연신 침을 날렸 다. 소운비는 땅에서 몸을 일으킬 여유도 없었다. 퍼어어엉! 퍼어어어엉! 퍼어어어엉! 생사맥결귀영폭침은 독침과 폭탄의 효과를 하나로 합친 것이었다. 몸에 격중되면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격중되지 않더라도 폭발의 여력 이 미치는 곳에서라면 타격이 적지 않은 암기이다. 공격이 거듭될수록 소운비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몸을 굴 리면서 일어나는 흙먼지도 흙먼지려니와, 그의 몸을 둘러싸고 사방 삼 장 안에서 터져 나간 폭침의 독무(毒霧)가 눈을 따갑게 한 것이다. 그의 귀에는 오직 소나기 같은 폭발음과 혼음사의의 웃음 소리만이 들려 왔 다. 그 와중에도 치명상은 하나도 입지 않았으니 참으로 운이 좋은 일이 었다. 아니, 그것은 운이라기보다는 혼음사의의 배려라고 할 수 있었 다. 말이야 뜨거운 맛을 보여 주겠다고 했지만, 아직은 소운비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운비가 지금 당하는 꼴은 뜨거운 맛이라 고 해도 별로 틀릴 것이 없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굴러다 니며 독무 때문에 눈물, 콧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목은 매캐하게 꽉 막 혀 버리고... '응?' 한 순간, 소운비는 폭침의 공격이 뜸해진 것을 깨달았다. 아니, 가 만 기다려 보니 뜸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친 것이다. 그뿐 아니었다. 그친 것은 공격뿐 아니라 혼음사의의 웃음 소리도 함께였다. 등줄기가 싸늘해지는 느낌과 함께 소운비는 벌떡 일어났다. "콜록...! 콜록!" 독무를 손으로 헤치고 앞으로 나가 사방을 살펴보니, 과연 예상한 대로였다. 혼음사의도 혜와도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안 돼!" 소운비는 입술을 악물며 아까 혼음사의가 서 있던 자리를 살펴보았 다. 눈이 아찔해질 정도의 절벽 끝이었다. '이 아래로 떨어져 버렸을 리는 없다.' 소운비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일 혼음사의가 자신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이 막다른 길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면, 분명 자신의 옆을 지나쳤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 런 기척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정신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소운비는 신중하게 절벽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아까 폭침에 격중된 나무가 볼썽사납게 기울어져 옆의 거목에 기대 어 있었다. 그리고 몇 개인가의 바위들...! '틀림없다.' 소운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도박이었다. 혼음사의 정도의 무공을 지닌 사람이 자신이 정신 없는 틈을 타서 지나치지 못하리라는 법이 없다. 하지만 소운비는 그럴 수 없다는 쪽 에 패를 걸었다. '분명히 여기 어디에 은신하고 있는 거야.' 소운비는 숨을 쉬었다. 성질 급한 혼음사의가 일을 끝내기 전에, 어 서 이 상황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그것만이 혜와를 지킬 수 있는 길 이었다.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문득, 소운비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책상 앞에 앉아 꼼짝없이 굶 어 죽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잃어버린 모든 것, 그리 고 진설영을 떠올렸다. 사부 진파파도 떠올랐다. 많은 것을 얻지도 못한 삶이었고,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삶 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잃은 이유,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지 못한 이유. '힘이 없었기 때문이야.' 그는 힘만을 믿고 타인을 강압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런 것은 옳지 않다고 유생이었던 아버지는 철부지인 그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 주듯 말하곤 했었다. 하나 힘있는 자들을 경멸한다고 해서 힘, 그 자체까지도 경멸해서 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킬 힘은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소운비에게는 다른 사람의 경우보다 더 큰 힘이 필요했다. 소운비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바위 위로 올라가 섰다. 그는 산중의 모든 공기를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이 크게 숨을 들이쉬 고 또 들이쉰 만큼 큰 소리로 뱉어 냈다. "혼음사의! 내 말이 들립니까?" 산이 쩌렁거리며 메아리로 대꾸해 주었다. "내 말이 들릴 거라고 믿고 있소! 싸움은 끝났소. 당신이 이겼소!" 혼음사의로부터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지만, 소운비는 개의치 않고 외쳤다. 어차피 지금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당신에게 부탁하겠소. 그녀를 그대로 놔두시오! 대신 당신의 말에 따르겠소. 맹세하오!" 여전히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그는 목에 피가 맺히게 다 시 한번 외쳤다. "알겠소?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소! 이건 거래요! 당신을 색존으로 만들어 주겠단 말이오!" 아주 짧은, 그러나 소운비가 느끼기에는 천년처럼 긴 시간이 흘렀다. 기울어진 나무 둥치 뒤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일어났다. 실신한 혜와를 안은 혼음사의였다. 혜와의 옷은 거의 벗겨져 있었다. 혼음사의는 약간은 긴장된, 그러나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소운 비를 쏘아보았다. "진짜냐?"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음사의는 비로소 피식 웃었다. 득의 만만한 미소였다. "받아라!" 별안간 혼음사의가 혜와를 소운비 쪽으로 던졌다. 그녀의 몸은 새 털처럼 날아 그의 품으로 떨어졌다. "아직 손 안 댔다. 너무 약올라 하지 마. 그냥 약간 만져 보았을 뿐 이니까, 흐흐...!" 혼음사의는 수염을 한번 쓰다듬더니 다시 정색을 하고는 말했다. "자, 집으로 내려가자." 먼저 등을 돌리고 초옥을 향해 가는 혼음사의의 뒤로 혜와를 안은 소운비가 따라가고 있었다. 혼음사의는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소운비는 패자의 표정 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그의 얼굴에는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어떤 투지가 서서히 끓 어오르고 있었다. 제 13 장 결합(結合) 진설영은 피곤했다. 개방 총타 안에서 연일 벌어지는 밤샘 회의며 두 달도 못 되게 남은 영웅대회의 준비에 남보다 곱절로 뛰다 보니, 천하의 냉면검 화도 피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요새 약간이라도 짬이 나면 진파파에게서 상승검법을 전수받 고 있었다. 격색마회의 가동이 본격적으로 되어 색마들과 일대 회전을 치르 게 될 때 그 누구보다도 많은 적들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행복한 일이 없는 사람에게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은, 벌이 아니라 일종의 선물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동이 트기 전에 회의가 끝나, 그녀는 총타 안에 마련된 숙소 를 향해 총총걸음을 내디뎠다. 밤공기가 유난히 맑지 않았다면, 그래서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도 멀리멀 리 퍼져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피곤한 진설영은 그 희미한 소리 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응?'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벌레 소리인가 생각했었는데, 귀를 기울여보니 그 것은 아니었다. 우우우우우...! 개 짖는 소리도 아니었다. 미친 개라고 해도 그런 소리는 내지 않는다. 그렇 다고 근처에 늑대가 울 만한 곳도 없었다. 우우우우...! 귀를 기울이던 진설영은 문득 소름이 끼쳤다. 그것은 결코 짐승이 낼 수 있 는 소리가 아니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계속 귀를 기울여 보니 더욱 짐승 의 소리가 아님이 확실했다. '사람의 소리다!' 그렇다. 그것은 사람의 소리였다. 그것도 정상적인 상황에서 내는 것이 아니 라 무엇인가에 입이 틀어막힌 상태에서 토해 내는 절규 같은 것이었다. '개방 안에 죄인이 갇혀 있는 것일까?' 하나 죄인을 가두어 두는 뇌옥은 진설영이 지금 향하는 총타의 중심과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그리고 현재 개방의 뇌옥에 갇힌 죄수라야 방규를 어긴 제자들 정도지, 흉악한 무림공적 따위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진설영은 그렇 게 알고 있었다. 진설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동안, 소리는 뚝 끊어졌 다. 하지만 그녀는 더 듣지 않아도 소리가 난 곳을 알 수 있었다. 총타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잘 눈에 뜨이지 않는 곳. 열 명의 육결제자(六結 弟子)가 지키고 선 한 채의 돌집이었다. 눈을 껌뻑껌뻑하면서 졸고 있던 육결제자 하나가 다가오는 진설영을 보고 창을 겨누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진설영은 상대가 경계하지 않도록 두 손을 들어올리며 앞으로 다가갔다. "놀라지 마세요, 접니다." "아, 냉면검화 진 소저시군요." 육결제자는 진설영을 알아보고 창끝을 내렸다. 하나 무슨 이유에선지 긴장 한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진 소저?" 진설영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이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군요. 혹시 듣지 못하셨나요?" "그건..." 대답을 망설이는 육결제자의 얼굴에는 뚜렷한 당혹감이 배어 있었다. 진설 영의 의혹은 갈수록 커져 갔다. "괜찮다면, 안으로 좀 들어가 봐도 될까요?" "안 됩니다!" 뻔뻔하기까지 한 진설영의 요구에 육결제자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도리질을 했다. 진설영은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개방과 격색마회는 한집안이나 마찬가지고, 나도 한가족이나 마찬가 지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한가족에게도 숨겨야 한다면, 대체 무슨 사정이란 말예요?" 진설영의 집요한 추궁을 받게 된 육결제자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그 역시 냉면검화 진설영이 개방 상층부의 호감을, 특히 소방주 삼목신룡 무옥의 호 감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지키고 있는 이곳은 그런 진설영의 배경으로도 쉽게 허물어뜨릴 수가 없는 곳이었 다. 망설이던 육결제자는 마침내 단호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이곳은 방 내의 금지(禁地)라 접근이 불허되었습니다. 소저 께서는 모쪼록 양해해 주십시오." 진설영은 약이 올랐다. 아무리 냉막한 표정을 하고 다녀도 그녀는 역시 아 직 십대의 소녀였다. 갖고 싶은 것은 꼭 가져야 직성이 풀리고, 알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 내고야 마는 그런 나이였던 것이다. 그 나이가 가지고 있는 오기가 냉면검화로서의 냉정을 무너뜨렸다. 그녀는 용서를 구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육결제자의 옆 쪽으로 번개같이 몸을 날렸 다. "앗!" 두 사람의 수작을 지켜보던 아홉 명의 육결제자가 다급히 그녀를 막아 섰지 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물찬 제비 같은 유연한 몸동작으로 순식간에 돌 집의 입구에까지 섰다. "미안하군요. 나중에 소방주께 양해를 구할게요." 진설영은 혀를 낼름하면서 시커멓게 입을 벌린 돌집의 입구 안으로 몸을 던 졌다. 하나, 그녀는 어둠 속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튕겨 나오게 되었다. 그 안에는 뭔가 탄탄한 장벽 같은 것이 그녀를 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막아라!" 그 틈에 열 명의 육결제자가 진설영에게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진설영은 불 가불 가장 가까이 다가온 자들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는 재차 입구를 향 해 진입을 시도했다. 한데 들어서기도 전에 이번엔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까 그녀를 어둠 속에서 막았던 그 정체 모를 장벽. 아니, 장벽처럼 느껴졌 던 사람이 문밖으로 나와 선 것이다. "소방주!" 삼목신룡 무옥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그녀는 까닭 모를 부끄러움 을 느꼈다. 별안간 다른 방파의 비밀을 엿보려고 했던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철없는 것 인가 하는 쓰라린 후회가 밀려든 것이다. 하지만 부끄러움보다 더 강한 것 은 자존심에 입은 상처였다. 무옥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고 불렀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산처럼 거목처럼 버티고 서서 그녀를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질책하는 거야!' 그의 침묵을 그렇게 해석한 진설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한데... "나를 따라오시오." 무옥이 별안간 등을 돌리며 말했다. 그가 향한 곳은 방금 그가 나왔던 돌집 의 안쪽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던 진설영은, 이내 결심을 굳히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진설영보다 더욱 어리 둥절한 표정을 한 열 명의 육결제자뿐이었다. 침상은 정갈하고 넓었다. 거지들의 방파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나 그 침상 위에 누운 사람은 확실히 거지들의 방파에 어울리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해골처럼 깡마른 얼굴과 손발, 시커멓고 쭈글쭈글한 피부, 그 피부와 대조되 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흰 눈썹. 동공은 바늘구멍처럼 축소되어 멍하니 천장을 향해 고정되어 있고, 입술은 천년 전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같이 약간 벌어진 채 굳어 있었다. 그 노인의 몸 어디서 풍기는지 알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진설영의 머리를 아프게 할 정도였다. "궁금하다면 보시오." 진설영을 데리고 들어온 뒤 줄곧 벽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던 삼목신룡 무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이 사람은?" 진설영은 말끝을 떨며 물었지만, 그 시체 같은 노인의 흰 눈썹을 보면서 이 미 그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분이 바로 십만 개방 방도의 아버지, 백미노개(白眉老개)이 시오." 무옥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진설영은 왠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 는 듯했다. '개방 방주가 그저 와병 중인 것이 아니라 만음요화의 독수에 당했다는 소 문이 있더니...!' 진설영은 보아서는 안 될 치부를 보고 만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며 무옥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영준한 얼굴이었다. 앞모습이 그림 같다면 옆모습은 조 각과도 같았다. 그 얼굴에 드리운 우울한 상념의 그림자까지도 진설영의 눈 속에 아프게 박혀 왔다. "안 그래도 언젠가... 언젠가 진 소저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었소." 지금 무옥의 입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쓸쓸한 말투를, 진설영은 예전에는 결코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왜 삼목신룡이라 불리는지 알고 싶다고 했었지요?" 진설영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별호의 사연과 백미노개에 관한 이야 기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은 무옥이 무슨 이 야기를 하더라도 들어 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무옥이 진설영을 향해 똑바로 돌아서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 위로 올 렸다. 그리고 한번도 그의 이마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검은 영웅건을 서 서히 풀었다. 영웅건은 한 마리 검은 나비처럼 바닥 위로 나풀거리며 떨어 졌다. '헉...!' 진설영은 하마터면 비명을 터뜨릴 뻔했다. 그녀의 앞에 보이는 광경은 지금 침상위에 누운 백미노개의 몰골보다도 더욱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눈.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 개씩 가지고 있는 그 눈. 그러나 그 눈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다면, 그것만큼이나 기괴한 것이 없으리라. 삼목신룡 무옥의 이마 위, 지금껏 영웅건으로 가려져 있던 그 자리에는 세 번째의 눈이 드러나 있었다. 그 눈은 눈썹 아래 두 개의 눈보다 유독 크고 반짝였으며, 영물처럼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진설영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보기 흉하오?" 무옥은 피식 웃더니, 허리를 굽혀 영웅건을 집어 들었다. 등을 돌리고 원래 대로 영웅건을 묶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진설영은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킬 수 있었다. "고맙소. 비명을 지르지는 않아서..." 이마 위의 눈을 가린 무옥은 다시 돌아서서 그렇게 말했다. 무척이나 씁쓸 한 목소리였다. "한 아이가 있었소. 그 부모는 아이를 낳자마자 산에 버렸소. 왜냐하면, 아 이가 기형아였기 때문이오. 아이는 다행히 죽지 않고 어떤 사람의 손에 구 해져 그의 양아들로 키워졌소. 그 사람은 무림 방파의 어른이었기에 아이는 무공을 익힐 수 있었고, 기형아라는 놀림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했 소. 그래서 나이 스물을 넘기 전에 무림 최고의 기재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 소..." 무옥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나직하게 읊조리며, 생명없는 나무토막 같은 백미노개의 손을 지그시 쥐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는 알게 되었소. 의부(義父)는 단지 자신의 육신만을 살려 준 것이 아니라, 무공을 알게 함으로써 제이의 생명까지 주었다는 것 을... 그 의부가 독수로 쓰러졌을 때, 아이는 결심했소. 의부를 해친 자들을 세상에서 쓸어 버리는 것만이 은혜를 갚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무옥의 목소리는 갈수록 잦아들었지만, 진설영의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아 니, 단지 귀에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가슴속에까지 또렷이 파고드는 것이었다. "육신의 기형을 놀리는 말이었던 '삼목(三目)'은 이제 영광스런 별호로 바뀌 였소. 그 별호의 사연은 개방 안에서 쉬쉬하게 되었지만... 그대에게만은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소. 오늘 마침 기회가 되었구려..." 무옥은 씁쓸하게 웃고 돌아섰다. "그만 나갑시다. 의부는 이제 쉬셔야 하오." 뒷모습이 더욱 쓸쓸해 보이는 무옥이었다. 진설영은 다급히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말해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란 영영 없을지도 몰랐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진설영의 외침이 방안에 울리자, 무옥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 다. 진설영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세상에는 마음이 더욱 괴이한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 은 그에 비하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 나 역시 상관하지 않아요." 비로소 무옥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고맙소." 진설영과 무옥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떠난 방안. 통나무처럼 누워 있던 백미노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진동은 그의 손 가락 끝에서 절정에 달하더니, 해골 같은 손가락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우우우...!" 백미노개의 손가락은 무옥과 진설영이 나간 입구를 가리키며 더욱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입술 역시 무엇인가 이야기하려는 듯 삐뚤어지며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의 눈...! 그의 상징인 흰 눈썹 아래 퀭한 두 개의 눈동자가 분노와 공포로 범벅이 되 어 어둠 속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네가 정말 색마가 될 생각이라면, 한 달 안에 그리 되어야 한다." "어째서 한 달이오?" "사십 일 뒤 개봉부에서 격색마회의 영웅대회가 있다. 나는 너를 데리고 그 속에 들어가 그 위선의 무리들을 한바탕 휘저어 놓을 생각이다. 위세도 떨 치고, 적의 예봉도 꺾는 거지." "..." "왜, 내키지 않는다는 거냐?" "아니오. 약속을 했으니 반드시 해내겠소. 다만 조건이 있소." "조건?" "먼저, 낙매 부인과는 관계를 갖지 않겠소." "왜?" "그녀는 아이의 어머니요. 아이가 옆 방에서 자고 있는데 그 어머니와 그러 고 싶지는 않소. 그리고 어떤 여자라도 강제로 범하고 싶지는 않소. 기녀만 을 사겠소." "쳇! 돈도 많이 들고 별로 좋지도 않은데...?" "그래도 그렇게 하겠소." "흠...! 좋다, 뭐. 기녀에 맛을 들이다 보면 나중엔 유부녀든 과부든 가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조건이 있소." "뭐냐? 까다롭기는...!" "내가 한 여자와 관계할 때마다 당신은 내게 한 가지 무공을 가르쳐 주어야 하오." "뭐?" "싫소?" "...!" "싫은 거요?" "네놈이 호랑이 자식이 되려고 하는 모양인데...? 흐흐... 좋다! 대신 나에게 사부라고 불러라." "...!" "왜? 이번엔 네가 싫으냐?" "아니오. 그렇게 하겠소. 그리고... 또 하나, 마지막 조건이오." "슬슬 화가 나는데... 뭐냐?" "혜와를 풀어 주시오." * * * 혜와는 펄쩍 뛰었다. "전 가지 않을래요!" 펄쩍 뛸 뿐 아니라 발도 굴렀다. "죽더라도 여기서, 오라버니 옆에서 죽겠어요. 날 보내려고 하지 말아요! 제 발..." 그녀의 말끝은 애원조로 흐려져 버렸다. 그녀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서 소운비를 올려다보았다. "혜와." 소운비는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혜와를 내려다보았 다. "이번엔 어떻게 어떻게 그를 막았지만, 다음번엔 내가 지켜 주지 못할는지 도 모른다. 네가 떠나야 해. 안 그러면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어." "오라버니... 운비 오라버니...!" 소운비의 냉정한 말에 기세가 꺾인 혜와는 울먹울먹거렸다. 소운비는 그녀 앞으로 말없이 약사발을 내밀었다. "이것은 인면자고를 죽인다는 약이다. 어서 마셔라.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보고 별 탈이 없으면 그때 떠나라." 혜와는 마지막 앙탈을 부려 보았다. "저 의원이 거짓말을 한 거면 어떻게 해요? 하루이틀 효과를 보았다가 나중 에 재발해서 혜와가 죽으면요?"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혼음사의는 음탕하기는 하지만 이유없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는 않을 위인 이야. 너를 죽이는 것이 그에게 무슨 득이 되겠느냐? 하루만 지켜보면 된다. 어서 마셔." 혜와는 할 수 없이 약사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눈물을 섞어 약을 들이켰 다. 땡그랑...! 빈 약사발을 바닥에 떨구고, 혜와는 갑자기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 흑흑... 흑...!" 소운비는 눈을 감고 등을 벽에 기대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은 정말 애처로 워서, 계속 지켜보다가는 정말 보내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운비 오라버니...!" 한참을 울던 혜와가 그를 불렀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왜?" "아직도 혜와를 믿지 못하시나요? 왜 그렇게 저를 떼놓으려고 하시는 거예 요?" 소운비는 가슴이 아렸다. 혜와는 예전의 일 때문에 자신이 그녀를 떼어 놓 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오해를 풀지 않는다면, 혜와의 울음은 이곳을 떠나고 나서도 멈추지 않 을 것이다. "혜와...!" 소운비는 눈을 떴다. 그리고 혜와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 으면서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사람에게 세상에서 제일 귀중히 여기는 보물이 있다면, 누가 그것을 타는 불속에 내버려두려고 하겠어?" 눈물에 젖은 혜와의 눈이 비로소 기쁨의 빛을 띠고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오라버니한테 이 혜와가 세상에서 제일 귀중히 여기는 보물인가요?" 소운비는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혜와는 갑자기 그의 품안으로 몸을 던졌다. 소운비는 그녀를 두 팔로 마주 안았다. "오라버니! 운비 오라버니!" 혜와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그의 팔과 가슴팍에 마구 비비며 속삭였다. 소 운비는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다가...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보드라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게 되었다. 그녀의 뺨 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이 소운비의 입술이 천천히 그녀의 뺨을 향해 다가갔다. 혜와가 잠에 취한 사람처럼 눈을 사르르 감았다. 눈물에 젖은 뺨은 달콤하면서도 짭잘했다. 소운비의 혀가 그녀의 뺨에 또 하나의 자국을 내며 지나갔다. 그 궤적은 뺨에서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가다 가 코밑을 스치고 도톰한 입술 근처를 서성였다. 혜와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살그머니 턱을 들어올렸다.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완전히 포개졌다. 폭신하고도 매끄러운 아랫입술을 살그머니 깨물 때, 소운비의 코끝에 다시 한번 혜와의 풋풋한 향기가 번져 왔다. 그는 한 방울의 감로(甘露)를 탐하는 신선처럼 그녀의 입술을 빨고 또 빨았다. 감로는 끝없이 흘러나왔다. "아...!" 혜와가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살짝 흘렸다. 그 소리조차도 소운비에게는 머 나먼 타계에서 울려 오는 듯이 들렸다. 그는 어느덧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의 혀가 입술에서 그치지 않고 감로의 근원지를 찾아 파고들기 시작했다. 사람의 살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 중의 하나가 입 속일 것이다. 그는 상 아 같기도 하고 백옥 같기도 한 혜와의 고른 이빨을 혀끝으로 스치고 더 깊 숙이 전진해 그녀의 혀를 뿌리째 감아 갔다. 혜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의 두 팔이 소운비의 목을 조이듯 꽉 죄었 다. 어느새 혜와의 등과 허리를 감싸안은 소운비의 두 팔도 같이 죄어졌다. 팔로 서로의 몸을 감듯, 입 속에서도 두 개의 혀가 서로를 감고 요동쳤다. 혀끝이 혀끝을 건드리고, 그 동체가 서로를 감고, 끈끈하고 달콤한 타액이 경계를 허물며 서로의 입 속으로 건너갔다. 동백산의 동굴에서보다 훨씬 뜨겁고도 깊숙한 입맞춤이었다. 그들은 좀처럼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입맞춤을 끝내는 것도 두렵고, 또 입맞춤을 넘어선 그 무엇을 하기도 두려운 두 갈래 마음이 그들을 그 자리에서 머물 게 한 것이다. 마치 혀끝에 눈이 달린 듯, 두 사람은 서로의 입 속에서 보지 못한 것이 없 을 정도로 샅샅이 서로를 핥았다. 잇몸도, 입천장도, 입술 위에 새겨진 섬세 한 주름도...! 아무리 핥고, 빨고, 깨물어 보아도 입맞춤은 지루하지도, 지겹지도 않았다. 하나 긴 입맞춤은 반드시 그 다음의 진전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둘 중 누구 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혜와의 허리를 감았던 소운비의 손이 그녀의 옆구리 를 타고 올라가 잔뜩 부풀어오른 그녀의 가슴 어림으로 다가갔다. "아!" 숨막히는 듯한 혜와의 탄성이 울렸을 때, 비로소 소운비는 몽롱한 의식 속 에서 자신의 손바닥 가득 잡히는 혜와의 뭉클한 젖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번처럼 거기서 멈출 수 없었다. 혜와 역시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숨소리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거칠어져 있었다. 젖가슴은 옷 위로 만지는데도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촉감을 남김없이 전달해 주고 있었다. 처음엔 마치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듯이 살짝살짝 스치 듯 그것을 어루만지던 소운비의 손길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마침내 얇은 옷 너머에 꼿꼿이 선 혜와의 젖꼭지를 두 손가락으로 사 로잡았을 때, 혜와는 본능적인 부끄러움으로 몸을 비틀었다. 하나 그녀의 등 을 감싼 소운비의 팔이 난폭할 정도로 그녀를 꽉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소운비의 손이 그녀의 옷자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옷 위로 만져지던 젖가슴의 촉감도 천상의 구름처럼 부드럽지만, 맨살갗의 촉감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소운비의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그 느낌은, 그의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라 그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오라버니..." 무슨 말인가 하려는 혜와의 입을 다시 자신의 입으로 봉하며, 소운비는 그 녀의 몸 쪽으로 자신의 몸을 기대어 갔다. 그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이 원했기 때문인지 혜 와는 천천히 뒤로 넘어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녀의 몸 위로 소운 비가 올라왔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의 손놀림이 거칠어지고 빨라졌다. 그녀의 옷이 거칠게 풀어지고, 벗겨졌다. 젖가슴이 드러나고, 치마도 올라갔다. 잡아먹을 듯이 혜 와의 입술과 뺨을 빨아대던 그의 입술이 목을 타고 순식간에 내려가더니 덥 석 그녀의 젖가슴을 물었다. "오라버니!" 혜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때껏 소운비가 한번도 보여 준 일이 없는 거칠 고 야성적인 행동에 그녀가 놀란 것이다. "말하지 마!" 소운비가 짐승처럼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는 입술을 그녀의 젖가슴속에 파 묻고는 한편으로는 그것을 빨면서, 한편으로는 애원하듯 외쳤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혜와. 제발... 말하지 마...!" 차츰 그의 음성은 흐느끼듯 변해 갔다. 혜와의 젖가슴은 그의 침으로 범벅 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소운비는 그대로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참으려고... 참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그러니까... 말하지 마... 네 목소리를 자꾸 들으면 나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 혜와는 시키는 대로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몸 위에 누운 소운비의 몸이 차츰 가라앉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윽고,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킨 소운비가 한 순간에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얼른 그녀의 드러난 나신 위에 옷을 덮어 주었다. 시선은 한껏 피한 채로... "미안하다. 요즘 나는 정말 색마가 된 것 같아. 마치 짐승처럼... 나가서 자 마. 내일은 먼 길을 떠나야 할 테니 푹 쉬어야지." 소운비는 말을 마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막 문가로 다가갔다. 그가 문을 열 고 한 발을 밖으로 빼냈을 때, 혜와가 발딱 일어나며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소운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방을 빠져 나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오라버니, 혜와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고 했지요?" "그래..." 어차피 얼굴을 보려 해도 잘 보이지 않을 어둠 속에서 혜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시선을 떨군 채 낮게 중얼거렸다. "저는 그렇게 깨끗하게 살아 오지 않았어요. 아무리 철이 없었다고 하지만 화금궁 안에서 다른 남자에게 입맞춤당한 적도 있었고... 그래도 아직 백의 항렬이라 어떤 사람과도 동침을 한 적은 없어요. 그러니 오라버니..." 혜와는 땅속으로 꺼져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혜와의 간절한 부탁이니 오늘밤, 저를 오라버니의 아내로 맞아 주세요...!" 소운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진설영에게 세 걸음 안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진파파에게 받았을 때 보다도, 딸을 찾아 달라는 무산음호의 부탁을 받았을 때보다도, 색마가 되겠 다는 맹세를 혼음사의에게 할 때보다도 더욱 대답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싫으세요?" 혜와가 어렵사리 한번 더 물었다. 그래도 소운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그때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맹세, 지키기 힘든 맹세는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아끼고 위하겠노라고 다짐하는 사랑의 맹세라는 사실 을...! 혜와도 더 이상 재촉해 묻지 못하고, 소운비는 정신이 멍해져서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그때. 갑자기 벽 너머에서 찢어지는 듯한 호통이 들려 왔다. "아, 이 멍청한 놈아! 뭘 망설이고 있어? 당장 그러겠다고 해야지!" 혼음사의였다. * * * 혼음사의가 약재를 써는 작은 탁자가 두 사람의 방으로 옮겨지고, 그 위에 어디서 구해 왔는지 두 개의 초가 켜졌다. 그리고 조잡한 붉은 천 하나가 혜와의 머리 위에 덮여졌다. "자, 약소하지만 이것을 혼례라 생각하고...!"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신이 나서 들뜬 혼음사의가 혜와의 머릿단을 덥석 잡 았다. 이어 깜짝 놀라는 소운비의 머리칼도 잡았다. 그리고는 동아줄을 꼬듯 두 사람의 머리타래를 하나로 묶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음을 뜻하는 예식이었다. 혼음사의는 벌떡 일 어나더니 생사맥결통을 꺼내 번개처럼 흔들어댔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묵 침이 아니고 이십여 개의 금침이었다. 파바바바바박! 튀어나온 금침들은 낡은 탁자 위에 두 마리의 물고기 모양을 새기며 꽂혔 다. 본래 한 쌍의 금붕어는 혼인을 치르기 전에 교환하는 예물로서 다산(多 産)을 의미하는 것인데 혼음사의가 자신의 금침으로 이를 대신한 것이다. 그는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어안이 벙벙한 신랑과 신부를 돌아보았다. "자, 식은 이것으로 마치자구! 사실 식이 뭐가 중요하겠나? 이제부터 할 일 이 중요한 거지. 나는 나갈 테니까, 지금부터 제발 뒤로 빼지 말고 신랑과 신부로서 할 일을 하라구." 그는 이어 소운비의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비록 옥방이 조금 남루하긴 하지만 신부가 최상급이니 아쉬워할 것은 없 어. 그리고 잊지 말라구. 교합을 할 때는 여자를 조개껍데기나 쓰레기처럼 여기고 해야 오래할 수 있는 법이야. 사내가 사내답지 못하게 먼저 흥분해 버리면 금방 끝나 버려서 일생 바가지만 긁히게 되니까." 귀엣말을 마치고 막 방을 나서던 혼음사의는 문득 뒤돌아보며 비실비실 웃 었다. 그렇게 비굴해 보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절대로 엿보거나 엿듣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구!" 그제서야 소운비는 왜 그렇게 혼음사의가 신이 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혜와도 그 뜻을 알아차린 듯, 혼음사의가 나간 뒤 그녀의 얼굴 앞에 드리워 진 붉은 천 속에서 '킥' 하는 웃음 소리가 났다. 이상하게도 혼음사의의 관음벽(觀淫癖)이 그렇게 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저 혼례 때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두 사람을 가지고 장난치며 짓궂게 구 는 요방(鬧房)의 풍습처럼 정겹게 여겨질 뿐이었다. 삼경(三更)이 넘은 바깥에서는 산속의 밤이 낼 수 있는 온갖 소리를 내며 익어 가고 있었다. 찌르르... 찌르르... 호르륵... 호르륵... 소운비가 먼저 손을 뻗어 한데 꼬인 두 사람의 머릿단을 풀고 혜와의 어깨 에 손을 올렸다. 붉은 천이 가볍게 떨렸다. 소운비가 그 천을 들추어 벗기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상친(相親:신랑 신부의 대면)." 붉은 천이 거두어지자 그 안에서 더욱 붉게 달아오른 혜와의 얼굴이 나타났 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애틋한 마음과 따스한 정이었다. 아까의 격정은 어디로 갔는지, 그저 이렇게 바라만 보면서 이 밤이 새더라 도 후회없을 것 같은 태도였다. 한데, 옆 방에서 다시 훼방꾼 혼음사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느 밝은 여름날 저녁에 붉은 촛불 아래에서 초야(初夜)를 맞이하네." 그것은 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흥얼거림이었다. "신랑은 진홍빛 새[朱雀]를 꺼내고 신부의 옷 끈을 푼다. 맨발을 들고 옥 같 은 엉덩이를 어루만진다. 여자가 옥경을 쥐니 여자의 마음이 톡톡하고 남자 가 여자의 혀를 무니 남자의 마음은 어둡고 아득하다." "저런...!" 혼음사의로부터 들려 오는 노골적인 부추김을 들으며 소운비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혼음사의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정액은 흐르고 음수(淫水)는 솟구치니, 우뚝 솟은 외로운 봉우리와 같고 높 고 험한 산 같으며, 못은 그윽한 골짜기처럼 달아나는 닭의 혀를 움직인다. 여자는 베개에 엎드려 허리를 버티고 남자는 침상에 의지하여 무릎을 높인 다. 옥경은 곧바로 상하로 오고가며 좌우로 문지르고 찧는다. 양봉(陽峯)이 직입하여 해후하며, 음간(陰幹)은 금굉(琴紘)을 지나 곡실(穀實)을 닦는다. 엉덩이는 흔들리며 떠는 것 같고 옥경은 들어가서 메우는 것 같다." 아마 어디서 주워 들은 음란하고 조잡한 시구인 모양이었다. "그만 좀 하시오!" 참다 못한 소운비가 소리를 질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뻔뻔하기 이를 데 없 었다. "기다리기가 지루해서 하는 소리다. 내 입을 다물게 하려면 어서 시작해라. 여름밤은 짧단 말이다." 소운비가 뭐라고 대꾸하려고 막 입을 벌릴 때, 혜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신경 쓰지 마세요, 오라버니." 소운비는 그녀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언제까지 오라버니라고 부를 거야?" 혜와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뭐라고 해요?" "이제 혜와는 소(蘇) 부인(婦人)이 된 거야." 소운비는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한데 혜와의 입에 서 갑자기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저도 성(姓)을 가지게 되었군요..." 소운비의 손길이 문득 멈추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는 혜와의 성을 모르고 있었다. 하긴, 혜와 스스로 고아라고 이야기했으니 성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저를 데려왔던 죽은 화금궁 총관이 제 부모님은 어딘가 살아 있다 고 했어요. 너무 가난해서 저를 팔았다고... 오늘 그분들이 이 결혼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혜와의 목소리는 어느덧 촉촉한 물기를 띠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결혼하는 여인의 마음이란 이런 것인지, 평소에는 자신의 부모에 대해 조금 도 궁금해 하거나 서러워하는 일이 없던 그녀가 뜻밖에 여린 모습을 보이자 소운비는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그 당혹감은 금세 혜와에 대해 애틋한 정 으로 바뀌었다. 한참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혜와가 살며시 고개를 들며 소운비를 향해 속삭 였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오라버니. 저는 내일 이곳을 떠나서 제 부모님을 찾아보도록 하겠어요. 제 부모님 앞에서 우리 두 사람이 정식으로 인사드리 는 날까지 부부의 칭호는 미루기로 해요." 그것은 부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보다 더한 부탁이라도 지금의 소운비 는 들어줄 수 있었다. 소운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혜와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소운비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따스한 감사 의 표시였겠지만, 순간 소운비는 가슴 안쪽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혜와!" 소운비는 혜와의 허리가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한번 불이 붙기 시작하자, 그는 아까보다도 더욱 서두르기 시작했다. 입술은 입술을 찾아 헤매고, 한 손은 젖가슴을 파고들면서 나머지 한 손은 옷 끈을 풀기 위해 분주했다. 황망한 중에도 혜와는 잊지 않고 말했다. "불, 불을 좀..." 두 사람으로부터 세 걸음 가량 떨어진 곳에 혼음사의가 밝혀 두고 간 촛불 두 개가 타오르고 있었다. 소운비는 다급한 김에 그 자리에서 힘차게 숨을 내뿜었다. "훅!" 신기하게도, 촛불 두 개가 단박에 꺼졌다. 찰나지간에 방안 가득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는 남자보다도 여자가 더 흥분하는 것일까. 혜와가 쌔근거리며 소운비의 옷자락을 풀어 갔다. 소운비는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여인처 럼 속옷이 복잡하지 않은 남자가 나체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의 일이었다. 발가벗은 소운비가 이제 혜와마저 발가벗기기 위해 손을 뻗으려 할 때, 혜 와가 갑자기 뒤로 물러나더니 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잠깐만." 혜와의 주문에라도 걸린 듯, 소운비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혜와는 살며 시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운비의 앞에서 천천히 한바퀴 돌았다. 춤이라도 추는 것 처럼... 사르륵...! 한바퀴를 다 돌았을 때, 그녀의 저고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에 낙하 했다. 다시 한바퀴를 천천히 돌면서 그녀는 치마도 벗어 내렸다. 다시 한바퀴... 속옷들이 벗겨져 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스스로 빛을 내는 별처럼 혜와의 나신은 또렷이 윤곽을 드 러냈다. 소운비는 어린아이가 늦봄의 찬란한 낙화(落花)를 보듯이 그 광경을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마침내 모든 옷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녀는 그 자리에 다리를 오므리고 멈 추어 섰다. 그녀는 손을 위로 올려 틀어 올린 머리를 풀었다. 출렁...! 긴 머리채가 폭포처럼 흘러내려 어깨를 타고 동그란 젖가슴 위로 쏟아졌다. 그녀는 주저주저하면서 다리를 약간 벌렸다.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 여 주겠다는 듯이... 소운비는 그 순간 자신의 숨이 멎지 않을까 걱정되어 지레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혜와가 다리를 벌린 자세 그대로 자리에 앉고 있었다. 그녀가 앉는 곳에는 두 사람이 오늘밤 부부의 연을 맺을 낡은 이불이 깔려 있었다. "오라버니." 혜와는 그 이불 위에 등을 대고 누운 뒤 호흡을 고르고 소운비를 불렀다. "이리 오세요." 소운비는 그녀의 명에 충실하게 따르는 종복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 다. 그를 기다리며 부끄럽게 벌려진 백옥 같은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 * * 여인에게는 세 봉우리의 묘약이 있으니, 이것을 일컬어 삼봉약(三峰藥)이라 한다. 그 첫째가 여인의 타액(唾液)이며, 그 둘째가 젖가슴에서 나오는 유액(乳液) 이고, 마지막이자 가장 현묘한 것이 바로 여인의 비지(秘地)에서 솟아 나오 는 샘물이다. 한나라 때의 한 고인은 우연히 여인의 젖가슴에서 나오는 즙 을 빠는 방법을 배워, 이것을 거듭한 끝에 백팔십 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소운비는 이백살도 더 넘게 살 수 있을 것이 다. 그는 발가벗은 후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 혜와의 나신 위에 누워 그녀의 타 액을 원이 없도록 빨아들였다. 그리고 마치 더 자라려고 용을 쓰는 듯이 부 풀어오른 젖가슴도 왼쪽 오른쪽 할 것 없이 골고루 핥고 깨물고 빨았다. 그의 입술과 혀와 이빨이 젖가슴에 닿을 때마다 혜와는 비명인지 교성(嬌 聲)인지 모를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이제 소운비는 삼봉약의 마지막, 그 신비의 샘물을 향해 얼굴을 옮겨 가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에서 나는 체취는 남자와 다르다. 그가 도착한 것은 바로 여인의 체취가 한군데로 모인 듯한 계곡이었다. 그는 먼저 비지를 가리고 있는 수 풀을 손으로 헤쳤다. 혜와의 허벅지 근육이 순간 꿈틀거리며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그의 두 손이 그것을 눌러 버렸다. 혜와는 더 이상의 반항은 포기했는지 가만히 숨 을 쌕쌕거리며 천장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소운비는 먼저 그곳에 코를 댔다. 까끌까끌한 보호막 속에 보드라운 것이 숨어 있었다. 혜와가 놀라지 않도록 먼저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져 보았다. 놀랍게도 그 곳은 이미 충만한 물의 기운으로 적셔져 있었다. "눈을 감아요, 오라버니." 혜와가 속삭였다. 이미 충분히 어두운데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래."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소운비는 눈을 감고, 천천히 그곳에 입술을 댔다. 입맞춤 후에 어느새 말라 버린 그의 입술을 끈쩍끈쩍한 액체가 적셔 주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혀를 내밀었다. 혀는 그의 분신이 되어 그녀의 깊은 곳을 유영(遊泳)했다. 깊고 낮은 계곡. 도톰하게 솟아오른 언덕. 깊이를 알 수 없는 샘... 그는 눈을 감고도 모든 것을 보는 듯 했다. 밤새의 울음 소리 같은 신음이 혜와의 목젖에서 울려 나왔다. 소운비의 분 신인 혀가 그녀의 세 번째 봉우리를 탐색하는 동안, 샘물은 흐르고 넘쳐 좁 은 협곡을 지나 그녀의 엉덩이마저 적시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손을 뻗쳤다. 아직도 자신의 두 다리 사이에 머무르고 있는 소운비의 머리칼이 그 손에 잡혔다. 혜와는 그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그의 머리칼을 잡아당겨 위로 끌어올렸다. 더 이상 그곳을 희롱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무언의 항의였다. 소운비도 탐색을 마치고 그녀의 손길에 따라 위로 올라왔다. 두 사람의 눈 이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부싯돌처럼 부딪쳤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은 혜와뿐만이 아니었다. 소운비의 손이 혜와의 엉덩이 뒤로 돌아갔다. 그의 손도 그녀의 샘물로 젖 어 버렸다. 그는 한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두 개의 다리도 따라 서 들려졌다. 소운비의 나머지 손이 자신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손으로 들어올릴 필요 가 없을 정도로 고개를 쳐든 붉은 새가 먹이를 재촉하듯 맑은 침을 흘리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말을 생각할 만큼 여유가 없는 소운비였다. 그저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그리고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을 입 밖으로 간신히 꺼내는 것밖에는. "사랑해, 혜와." 그는 천천히 자신의 붉은 새를 혜와의 계곡 안으로 몰아넣었다. 새도 계곡 도 홍수가 지나간 뒤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 진입은 크게 어 려움이 없었다. 하나 혜와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상체를 약간 일으켰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소운비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안았다. "아아!" 붉은 새의 꽁지까지 모두 계곡 안으로 들어갔을 때, 마침내 혜와가 참고참 았던 신음을 토해 냈다. 소운비는 그녀의 신음이 그녀의 계곡 안에서 메아 리치는 것 같은 환청을 들었다. '이제부터야...!' 그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금궁 안에서 배우고 들었던 모든 것들, 낙매에게 겪었던 모든 사랑의 기술들이 굳이 외우고 되새기지 않으려 해도 이 순간 그의 몸 안에서 온통 쏟아져 나왔다. 그는 반쯤 몸을 일으킨 그녀를 살짝 밀어 다시 이불 위에 눕혔다. 돌덩이처 럼 단단해진 두 개의 젖가슴 위에 손을 얹고 허리를 움직이면서, 혜와의 몸 이 반응하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여자는 정사를 할 때 몸으로 말을 합니다.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 면 남녀가 함께하는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외토리 정사가 되고 말지요. 낙매의 말이었다. 처음엔 고통 때문에 몸을 굳히고 있던 혜와가 어느 순간 두 다리를 쭉 뻗었 다. -그럴 때는 음문의 윗부분에 자극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소운비는 허리의 움직임을 바꾸어 아래에서 위를 향한 공격이 아닌 좀더 위 에서 아래로 쓸듯이 몸을 비볐다. 혜와의 코끝이 촉촉해지며 땀이 배어나왔 다. 잠시 뒤, 혜와는 두 다리를 꼬며 신음을 흘렸다. 마치 아프다는 듯한 동작이 었지만, 소운비는 그 안에 담긴 숨겨진 말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계곡을 긁듯이 훑어 내렸다. 그의 응답이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혜와도 이제 서서히 용기를 내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산들바람에 흔들리듯이, 좌우로 약간씩뿐이었지만. 소운비는 그녀의 부름에 맞추어 좌우로 그녀를 깊이 공략해 갔다.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젖어 들어갔다. "아아!" 이젠 확실히 비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소리를 지르며 혜와는 별안 간 몸을 들어 소운비에게 매달렸다. -여자가 몸을 들어 남자에게 매달린다면, 그것은 쾌감이 지극한 데 도달 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거기서 멈추시면 안 돼요...! 낙매의 말대로, 소운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여자의 몸은 남자와 달라 한번의 정사에 한번의 만족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열 번의 정사를 거듭해도 단 한번도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여자이 고, 단 한번의 정사에도 수십 번 까무라칠 수 있는 것 또한 여자라는 사실 을 그는 숱하게 배운 것이다. 여자의 감흥이란 순전히 그녀 자신의 결심과, 남자가 쏟는 지극한 정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도. 그는 혜와가 단 한번으로 끝날지도 모르는 이 짧은 여름밤에 최상의 기쁨을 누리기를 바랬다. 더불어 그 자신 역시도. 소운비는 단단해진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더욱 속도를 높여 허리를 움 직여 갔다. 혜와의 신음은 이제 콧속에서부터 짧게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한 순간 그녀가 두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소운비는 더욱 깊숙 이 그녀의 속으로 자신을 담그었다. 더 깊이, 더 깊이.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한번씩 뒤로 몸을 빼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 었지만, 그 들고 나는 단순한 운동의 반복 속에 두 사람의 정신은 아득한 황홀의 바다로 빠져 들고 있었다. 이제 혜와의 입에서는 단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소운비보다도 더욱 격렬하게 아래쪽에서 허리를 움직 이고 있었다. 소운비 역시 오랜 시간을 달린 숫말처럼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뜨 거우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머리 꼭대기부터 발바닥까지를 관통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무더운 방안의 공기가 대장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 오, 오라버니...!" "혜... 와!" 소운비는 말끝에 고개를 숙여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처음 나누었 던 입맞춤이 봄날의 산들바람이라면 지금 두 사람이 나누는 것은 한여름의 거칠고 난폭한 태풍처럼 몰아치는 것이었다. 얼굴이 침투성이가 되고 뺨이며 입술이며 젖가슴에 이빨 자국과 손톱 자국 이 상흔처럼 새겨졌다. 갑자기, 혜와가 온몸을 쭉 폈다. 소운비는 자신의 배에 맞닿은 그녀의 배가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절정이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소운비는 혜와의 몸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 다. 쏴아아아...!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급류처럼 밀려 들어가는 육신의 소리가 들렸다. '혜와...!' 그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가고 그는 자신의 낙원과도 같은 따뜻한 육신 위 에 늘어졌 격정의 순간이 지나가고, 땀이 뚝뚝 떨어지는 소운비의 얼굴에 혜와의 부드 러운 손길이 다가왔다. 열정의 행위는 끝났지만, 서로를 어루만져 주는 손길 아래에서 애정은 아지 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햐아아!' 혼음사의는 감탄했다. 그는 자신이 몰래 뚫어 놓은 벽 틈의 작은 구멍으로 부터 눈을 떼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소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그였기 에 혜와와 소운비를 방안에 가둔 날부터 준비해 둔 구멍이었다. '역시 이것저것 배운 게 있어서 그런가? 처음 하는 놈치고는 잘하는구만. 아주 가능성이 있어.' 혼음사의는 자신이 정사를 치르기라도 한 것처럼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 다. 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랫도리가 끊어질 듯 뻐근해져 왔다. 지금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두말할 것도 없 이 옆 방의 소운비이리라. '에구, 부러워라!' 그는 입맛을 다시다가 못해 머리맡에 놓아 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쳇...!' 왠지 심술까지 끓어올랐다. 그저 여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런 것은 아 니었다. 지금의 소운비에게 혜와는 그냥 여자가 아니었고, 혜와에게도 소운비는 그 냥 남자가 아니었다. 천하의 색마라는 혼음사의가 보기에도 그러했다. '나한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문득 혼음사의의 입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그는 늙고 추레한 홀아비같은 꼬 락서니로 고개를 떨궜다.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은, 단순히 땀방울이 눈에 들어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에에잇!" 혼음사의는 별안간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방안의 선남선녀에게 들으 라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에에라! 아랫도리가 뻑적지근해서 참을 수가 없구나! 이 몸도 맹가촌 기루 에라도 가서 몸을 풀고 오겠다. 나는 네놈과 달라서 그렇게 금방 끝나지 않 을 테니 동이 튼 다음에나 오마!" 그 길로 혼음사의는 휑하니 맹가촌을 향해 달려갔다. 물론 그가 허겁지겁 달려가서 찾은 것은 여자가 아니라 술이었지만. "행복해요...!" 혼음사의의 야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나신을 포근하게 안은 두 남녀의 행 복은 깨지지 않았다. 혜와도, 소운비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부쩍 어른이 된 것 같았다. 혜와는 첫 정사가 끝나고 난 뒤 자신의 다리 사이를 깨끗한 흰 천으로 닦았 다. 그곳에는 피와 정액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소위 육대(六帶)라고 하는 그 천은 부부가 평생 사랑의 증거로 소중히 여긴 다고 하는 정표였다. 그녀가 머리맡에 그 육대를 접어 놓고 그것을 부끄러운 눈으로 흘끔흘끔 쳐 다보는 것을 소운비는 사랑스럽게 지켜보았다. "행복해?" 소운비는 그녀의 땀에 젖은 머리칼을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그녀의 겨드랑이 를 간지럼태웠다. 혜와는 까르르 웃으며 몸을 비틀었다. 한데, 소운비는 느닷없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타면서 그녀가 빠져 나가지 못하게 꽉 눌렀다. 혜와가 지레 몸을 틀며 웃어댔다. "간지러워요! 난 간지럼은 못 참아요!" 소운비는 그녀를 간질이는 대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혜와는 그의 눈에 서 다시금 타오르는 정열을 읽을 수 있었다. "또?" 그 짧은 말에 담긴 것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의 감정이었다. 그만큼 첫 번째 정사가 격렬하고 황홀하면서도 아팠던 것이다. 소운비는 그녀의 매끄러운 턱 선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혜와, 전에... 동백산에서 말이야." "네?" "탐서랑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삼녀채양보음술을 익혔다고." 왜 소운비가 그것을 묻는지 알 길 없는 혜와는 약간 불안한 심정으로 대답 했다. "그건... 그 사람을 속이기 위해 한 말이었는걸요." "아니... 숨기지 말고 대답해 줘. 그래도 혜와는 화금궁의 제자였으니까, 혹 시 기초적인 채양보음술이라도 익히지 않았나?" 혜와는 어두운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도 실행해 본 적은 없지만, 그 방법은 알아요. 궁의 제자가 되면 누구 나 그것부터 배우는걸요." "그거 나한테도 실행할 수 있어?" 혜와는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인 채양보음술은 말처럼 그렇게 쉽게 남자의 정기를 빨아들일 수 없 어요. 두 가지 경우에 가능하죠. 하나는 남자가 여자보다 정기와 내공이 약할 때, 노인과 젊은 여자가 교접하는 경우예요. 두 번째는 상대가 채양보음을 거부 하지 않을 때... 운비 오라버니는 나보다 내공도 강하고 젊은 남자니까..." 소운비가 그녀의 귀를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물었다. "만일 내가 채양보음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혜와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러면 가능... 오라버니!" 그녀는 그제서야 소운비의 의도를 눈치채고 발딱 몸을 일으켰다. "안 돼요, 그건!" "들어 봐, 혜와." 소운비도 몸을 일으켜 혜와와 마주앉으며 말했다. "이제 혜와는 내가 보살펴 줄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 부모님을 찾아 헤매 겠지. 강호는 위험 천만한 곳이라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내가 직접 혜와를 지켜 줄 수 없으니, 대신 내 힘이라도 주고 싶은 거야. 내가 익힌 태원옥호 공은 남자가 익히면 음기를 강렬하게 원하게 되니까 문제가 좀 있지만 여자 라면 자체 내에서 음기가 만들어지니까 상관없을 거야." "오라버니...!" "다 가져 가라는 것은 아니야. 나도 앞으로 무공을 익혀야 하니 반은 남겨 두어야지." "하지만..." 계속해서 거부하려는 혜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소운비가 속삭였다. "계속 싫다고 하면 혼을 내줄 거야." 혜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요?" "이렇게...!" 소운비가 부드럽게 그녀를 쓰러뜨렸다. 혜와는 거부하지 않고 그의 목을 끌 어안았다. "오라버니, 그럼 나도 부탁이 있어요." "무슨?" 혜와는 귓불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무어라고 속삭였다. 소운비는 눈을 찡그 리며 물었다. "뭐라고?" "아까... 오라버니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나도 하게 해줘요." 소운비는 너무나 재미있어서 그녀의 코를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이런! 부끄럽지 않아?" "채양보음술을 시행하기에 가장 좋은 자세가 그건걸요..." 소운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벌 렁 드러누웠다. "자! 마나님, 소인을 마음대로 취하십시오!" 그리하여... 주작(朱雀)은 미녀의 입 속에서 노닐고 미녀는 한 마리의 야생마 위에서 허 리를 젖히며 다시 한번 쾌락의 파도가 작은 방안에 몰아닥쳤다. 훨씬 더 능숙해지고 훨씬 더 감미로운 정사가 절정에 달했을 때, 혜와는 입 속으로 진언을 외우고 소운비의 아랫배를 두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소운비의 몸 속에서 삽시에 힘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 그녀의 입구로 빨려들 었다. 그래도 소운비는 행복했다. 노곤해진 몸을 기대이며 달콤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는 역시 행복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이(二) 할(割)의 공력밖에 취하지 못했어요. 용서하 세요...!" * * * 잠깐 눈을 붙였다 뗀 뒤에 아침이 잔인하게 찾아왔다. 이별의 아침이었다. 혼음사의가 어디서 구해 왔는지 적지 않은 은자까지 혜와에게 보태주었다. 혜와는 무엇이 좋은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부모를 찾다가 나중에 개봉부로 오라구. 격색마회가 열리는 날 거기서 재 회를 하지." 혼음사의가 말하자 혜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시간이 나면 잊지 말고 내가 가르쳐 준 구결대로 호흡을 해. 이 할 의 공력뿐이라지만 금방 늘 거야." 소운비가 그녀의 귓전에 속삭였을 때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건... 나라고 생각하고 늘 가지고 다녀." 소운비의 손에서 혜와의 손으로 비파가 넘어갔다. 혜와는 비파를 소중하게 감싸안았다. "오라버니, 몸조심하고... 사십 일 뒤에 만나요."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꼭 쥐었다가 놓고 돌아서서 산길로 접어들 때까지 그 녀는 조금도 우울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운비는 알고 있었다. 초옥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면, 그녀가 제일 먼저 할 일이 주저앉아 우는 것이라는 것을. 한참을 울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갈 길로 걸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도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걸을 수 있을는지 몰라?" 혜와를 눈으로 배웅하며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소운비 옆에서 혼음사의가 불쑥 지껄였다. "그렇게 해댔으니 말이야!" 심통을 부리듯 내뱉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혼음사의의 말에, 소운비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거야? 무공을 익히고 싶다며? 힘을 쓰고 싶으면 밥부터 먹자구!" 소운비는 심호흡을 했다. 혼음사의의 말대로 그는 무공을 익혀야 했다. 강해지기 위해서. 강해져서 혜와를 지키기 위해...!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제 14 장 점화(點火) "삼령주, 비화공(飛花公)이다." "교주께서는 출타 중이십니다." "알고 있다, 몽혼일도(朦魂一刀). 나는 소교주의 명을 받고 왔다. 대전을 열 어라." "교주께서는 출타 중이십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라. 소교주의 명은 시급히 이행되어야 할 사항 이다." 끼이잉-! 넓은 대전. 그 안에 가득한 칠흑 같은 어둠. 그 어둠의 사이사이로 입김을 토하고 있는 붉은 불빛. 붉은빛 아래 보이는 환희불들의 그림과 사람을 잡아죽이는 뱀 머리칼의 여 신상. 취화비도는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타아아앙! 그의 등뒤로 대전의 문이 닫혔다. '교주께서 안 계시니, 그래도 분위기가 좀 덜 살벌하군.'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움에 떨다가 오줌이라도 지릴 대전 안의 풍경을 둘러 보며 취화비도는 미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대전의 주인이 있을 때는, 그가 이 대전에 들어와 두 발로 서 있을 기회란 없었다. 이마와 무릎을 두 발 대신으로 삼고 끝없이 조아리고, 또 조아려야 했던 것 이다. 취화비도는 대전 안을 천천히 걸었다. 마치 주인이 없는 시간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온몸을 무엇인가가 찌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였다. 이 대전의 주인은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대전 자체가 자신의 힘을 대변하게 할 만큼 강하고, 또 두려운 존재였다. 취화비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힘의 열세를 느낄 때는 도리어 웃음만 나는 것이다. '쓸데없이 노닥거릴 것이 아니라 어서 일을 마쳐야 한다.' 그는 섬뜩한 눈초리를 한 뱀 머리칼의 여신상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신상은 상반신은 벌거벗겨져 있었으며, 아랫도리에는 천으로 된 치마가 걸쳐져 있었다. 취화비도는 그 치마를 들추고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그 안에서 붉은색의 목합(木盒)을 꺼내어 열어 보고 있을 때, 대전 안 을 둘러싼 불그스름한 빛무리 속에서 기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붉은빛들이 소리없이 한군데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인 장소는 취화비 도의 등뒤였다. 희끄무레한 빛들이 모이고 모이자, 그것은 마치 붉은색의 안 개처럼 보였다. 취화비도는 등뒤에서 일어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목합 안의 내용물을 검토했다. 이윽고, 그는 실망한 눈빛을 보이며 목합을 닫고 뒤돌아섰다. 뒤돌아서자마자 사람의 형상으로 모여든 붉은 안개를 발견한 그는 그 자리 에 딱 멈추었다. 그의 얼굴 중 유일하게 복면 밖으로 노출된 두 개의 가늘고 음산한 눈동자 가 그 순간 여러 차례의 변화를 일으켰다. 처음엔 숨막히게 놀라고, 이어 재빨리 그것을 수습하며 상대의 기색을 관찰 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판단하는 기민한 눈초리까지. 웬만한 사람이 보았다면, 취화비도가 붉은 안개를 발견하고 놀랐는지, 안 놀 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변화였다. 내면의 격동을 수습한 뒤 취화비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붉은색의 안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의 소리가 흘러나 왔다. "심계가 더 깊어졌군, 비화." 그 목소리는 취화비도를 칭찬해 주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그의 비밀스런 행 각을 추궁하고 있었다. 하나 취화비도는 그 말을 무시했다. "도착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혼자 오셨습니까?"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붉은 안개는 집요했다. "비화, 너는 삼령주 중에 가장 막내이고, 나 적무공(赤霧公)의 말을 귓전으 로 흘릴 처지가 아닐 텐데? 백혈공(白血公)과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교 주와 소교주의 총애를 받은 모양이구나? 응?" 붉은 안개는 천천히 움직여 취화비도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취화비도의 어 깨가 움찔거렸다. 하나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객담(客談)은 그만두시지요.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슈우욱! 붉은 안개 속에서 길쭉한 무엇이 튀어나왔다. 안개 그 자체보다도 더욱 붉 은 사람의 손이었다 그 손이 향한 것은 취화비도의 가슴팍 쪽이었다. 취화비도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하나 그는 반항하지 않기로 결심한 듯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파앗! 붉은 손은 비수처럼 뻗어 나가 취화비도의 가슴팍 옷자락을 틀어쥐었다. 그 안의 살과 함께. "이러지 마십시오." 취화비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가슴팍을 틀어쥔 붉은 손을 내려다보았 다. 붉은 장갑을 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붉은 손. 하나 그것은 분명 맨 살갗이었다. 손뿐 아니라 그 손에 연결된 굵은 팔뚝도, 그 팔뚝 위에 수북이 난 털까지 도 핏빛처럼 붉었다. "이러지 말라?" 붉은 안개는 푸들푸들 웃으며 반문했다. "교주가 안 계신 틈을 타 대전을 뒤지는 광경을 들키고도 이러지 말라? 어 디서 튀어나온 하극상이지? 응?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교단 내에 새로운 율법이라도 만들어졌나?" 붉은 안개의 추궁은 은밀하면서도 위협적이었다. 말을 끝내며, 취화비도의 가슴팍을 틀어쥔 붉은 손에 힘이 가해졌다. 취화비도가 처음으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소리쳤다. "적무공!" "흐흐흐흐흐...!" 붉은 안개로부터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웃음 소리가 커지면서 점차 안개가 흩어져 갔다. 그리고 취화비도를 잡은 손과 팔뚝에서 이어지는, 키가 큰 사내의 동체가 그 안에서 드러났다. 사내는 놀랍게도 벌거벗고 있었다. 팔과 마찬가지로 그의 전신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심지어 얼굴까지도. 붉은 얼굴에 붉은 턱수염이 사납게 자라나 있는 것을 빼면, 도무지 사람같 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 거칠게 내쉬는 숨결마저도 은은한 붉은빛을 띠고 있는 사내, 그가 바로 적무공이었다. "왜 아픈가?" 본신을 드러낸 적무공은 취화비도를 비웃으며 다른 팔도 뻗었다. 그 팔이 향한 것은 취화비도의 가슴팍이 아니었다. 사타구니 쪽이었다. "윽!" 취화비도가 급하게 비명을 토해 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눈빛에 강렬 한 살기가 떠올랐다. 그는 지금 무공이 약해서 참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 살기를 보는 순간 적무공은 틈을 주지 않고 그에게 바싹 다가섰다. 그리 고 붉은 숨을 끝없이 토해 내며 취화비도의 입에 대고 위협적으로 중얼거렸 다. "교단의 율법 사 조를 기억하고 있겠지? 하급자는 상급자의 취조에 저항할 수 없다. 나는 지금 너를 취조하고 있는 것이다. 말해라, 교주의 대전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나?"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적무공의 두 손은 취화비도의 가슴팍과 사타구니 사이 에서 뱀처럼 꿈틀거렸다. 하나 율법을 운운하는 그의 위협에 취화비도는 반 항을 포기한 듯, 순식간에 살기를 거두어들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소교주의 명령으로 경전(經典)을 가지러 온 것입니다. 소교주께서 필요로 하셔서요." 아까 여신상 밑에서 꺼낸 목합을 가리키며 취화비도가 설명하자, 적무공의 손길이 순간 멈추었다. "흠... 소교주께서? 갑자기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실 생각이신 모양이군그래." 늦추어지는 적무공의 손길에 취화비도는 한 순간 안도의 눈빛을 내보였다. 하나... "그렇지만 말이야..." 적무공의 붉은 입술이 한쪽으로 치켜져 올라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상관에게 그대는 너무 불손했어. 율법 삼 조를 어긴 것이 아닌가?" 늑대가 어린 양을 잡아먹고자 한다면 무슨 수가 있어도 잡아먹고야 만다. 취화비도는 계속해서 트집을 잡는 적무공의 의도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떨구었다. 적무공은 득의 만만하게 웃었다. "너에게 벌을 내리고 싶군!" 이어, 그는 취화비도의 몸에서 두 손을 떼며 단호하게 말했다. "옷을 벗어라." 취화비도가 발딱 고개를 들었다. 피할 수 없는 명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독기는 거두어지지 않았다. "안 벗을 테냐?" 적무공은 재촉했다. 그러자 무슨 생각에선지 취화비도의 두 눈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자조적이면서도 처절한 웃음이었다. "존명!" 취화비도는 날렵하게 바지를 내리며 대전의 바닥에 엎드렸다. 불그스름한 빛으로 가득한 대전 안에서 그의 하얗고 탐스러운 둔부가 묘한 느낌을 풍기며 빛났다. "흐흐...!" 적무공이 붉은 턱수염을 쓰다듬고는 천천히 그쪽으로 움직여 갔다. 복면 밖 으로 드러난 취화비도의 두 눈이 질끈 감겨졌다. "삼령주님! 일은 다 마치셨습니까?" 느닷없이 훼방 놓는 목소리가 있었다. 적무공의 붉은 동공이 천장을 향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대전의 수문장 몽혼일도가 거기 어딘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쳇...!' 적무공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대전의 수문장이 넌지시 경고를 하 는데 이곳에서 욕심을 채울 수는 없는 일. 적무공은 취화비도로부터 등을 돌렸다. "지금 나간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기색도 없이 취화비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잠시 후, 취화비도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 대전을 나갔다. 옆구리에 는 목합을 낀 채였다. 대전 밖 복도에서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목소리 하나가 그를 불렀다. "괜찮으십니까?" 취화비도는 걸음을 멈추고 그 목소리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몽혼일도! 왜 적무공이 와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 "왜 하지 않았나?" "묻지 않으셨습니다." 취화비도는 피식 웃었다. 더 이상 그 일로 몽혼일도를 다그칠 이유가 없었 다. 사실, 어쩌면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적무공이 와 있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알아라. 너는 목숨을 건진 것이 다...' 취화비도는 아무 소리 않고 복도의 끝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뒤 쪽으로 대전의 수문장 몽혼일도의 인사가 따라갔다. "살펴 가십시오, 삼령주!" 대전 안. 평소 교주가 앉던 여신상 앞의 큰 태사의에 적무공은 두 다리를 팔자로 벌 리고 깊숙이 앉아 있었다. '흠... 소교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하지만 못 알아 낼 것도 없지.'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허공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삼령주께서는 떠나셨습니다." 적무공은 허공으로 붉은 눈동자를 돌리며 별안간 킥 웃었다. "몽혼일도." "예." "왜 방해했지?" 대답이 없었다. 사실 적무공도 그리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이번엔 여우처럼 빠져 나갔지만...' 그는 다시 한번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몽혼일도! 너는 방금 한목숨 건진 것을 아느냐?" 허공에서 돌아온 것은 무뚝뚝한 음성이었다. "모르겠습니다만..." "둔한 놈!" 적무공은 꾸중하듯 말을 뱉었지만, 그 어조에는 둔하기 때문에 믿음직스럽 다는 느낌이 배어 있었다. "하긴 그런 너니까 수십 년 수문장으로 만족하겠지만..."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을 던지면서, 적무공은 자신만의 독백을 속으로 되뇌 었다. '하나 나는 이령주(二令主)로 만족할 수 없다. 소교주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아 내야겠다.' 적무공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삼령주는 일을 벌이고 나서 증거를 남겨 놓을 위인이 아니다. 그리고 증거 를 없앨 능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지. 그것이 너라 해도 말이다." 몽혼일도로부터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에 대한 이 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무응답인 것은 그 사내의 무신경을 설명해 주고 있었 다. 적무공은 천천히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이빨조차도 핏빛처럼 붉은색 이었다. "아무튼, 교주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몇 가지 일을 처리해야겠다. 목표는 세 가지. 소교주의 주변과 네 명의 색마들, 그리고 교주께서 라사나로 지목했다 는 그 사내 주변이다!" "하면?" "몽혼표를 날려라! 나 이령주 적무공이 책임지겠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도합 아홉 번의 절이 끝났다. 소운비는 혼음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흠! 어흠!" 혼음사의가 점잖게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는 영광으로 알아라. 우리 고의문(孤醫門)에서는 천하 제일의 기재가 아 니면 제자로 거두는 법이 없으니까." 인사로 던진 그 말에서 소운비는 처음으로 혼음사의가 고의문이라는 문파의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긴 세상에 부모없이 태어나는 자식이 없듯이 문파가 없는 무림인이란 있 을 수 없다. 혼음사의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들어라. 무의 극의는 소우주인 사람의 몸을 마음으로 다스리는 데 있고, 의(醫)의 극의는 인(仁)에 있다. 우리 고의 문은 의술과 무공을 병행하는 문파이니, 너는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에 도 부족함 없이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예." 소운비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지금 혼음사의가 하는 말처럼 혼음사의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은 없을 것이다. "질문 있느냐?" "한 가지 있습니다." "뭐냐?" "무의 극의와 의의 극의는 어떻게 통합니까?"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혼음사의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느닷없이 얼굴을 붉히며 호통쳤다. "시끄럽다! 나도 사십 년 전에 들은 얘기인데 어떻게 그 뜻을 깊이 알겠냐? 괜히 따지지 말고 그 말이나 외워 둬라. 너도 나중에 제자를 거두게 되면 무조건 그 말을 들려 줘야 한다." 열을 내놓고 나서는 자신도 민망했던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에... 네 사조 어르신께서도 내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었거든. 그무렵에는 나 도 꽤 영민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었는데..." 혼음사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아무튼, 우리 문파가 두 가지를 병행하고 있으니 제자는 필히 하나를 먼저 익혀야 한다. 너는 의술을 먼저 배우겠느냐, 아니면 무공을 먼저 배우겠느 냐?" 두 번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소운비는 대답했다. "무공입니다." "그럴 줄 알았지. 생각 짧고 성질 급한 놈들은 원래 그걸 선택하지." 졸지에 생각 짧고 성질 급한 놈이 되어 버린 소운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부께서는 그럼 뭘 먼저 배우셨습니까?" "당연히 무공이지." 혼음사의는 별로 민망해 하는 기색도 없었다. "좋다. 무공을 먼저 가르쳐 주지. 무공에도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우리 문파 는 내공을 기초로 하여 경신술을 익히고 장법을 수련한 뒤에 병기(兵器)에 들어간다. 그 동안 네가 어깨 너머로 내 망번신요보를 익혔다만, 이제부터는 정식으로 단계를 밟도록 하자. 먼저 너는 너의 내공을 버리고 사문의 내공 을 익혀야 한다." 여기까지 말한 뒤, 혼음사의가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혼음사의는 더할 나위 없이 사근사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사부가 너의 내공을 없애 주마. 결코 내가 가지려는 것은 아니다. 대신 너에게는 음음음음공(陰陰陰陰功)을 전수해 주마. 그 이름을 해석하자면 음 하고 음하니 음하며 음하도다, 라는 뜻이지.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등을 돌려 대라." 소운비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혼음사의는 냉큼 그의 뒤편에 앉더니 명 문혈에 두 손을 갖다 댔다. 진작부터 소운비의 내공에 대한 관심이 컸던 혼음사의였다. 사부라는 핑계 가 생긴 지금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한데 소운비로 말하자면, 전 같으면 태원옥호공을 버리지 못해 전전긍긍하 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힘은, 강해지기를 원하는 소운비에게는 유일한 무기였다. 순식간에 혼음사의에게 명문혈을 제압당하게 되자 반사적으로 장 강과 회음혈에서부터 두 개의 진기를 운행시켰다. 혼음사의의 음음음음공은 이름처럼 음유한 내공심법이었다. 그의 사문이 의 가(醫家)에 뿌리를 둔 터라 여느 문파보다 경혈의 움직임에 대한 연구가 발 달해 있었다. 소운비가 진기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혼음사의는 즉시 그가 익힌 내공심법이 보통과는 다른 운용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헹! 그런다고 내가 못 다스릴 줄 아느냐?' 혼음사의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양손으로 두 갈래 진기를 흘려 보내 소운비 의 몸 속에서 움직여 가는 두 개의 진기를 공격해 갔다. 그는 장강과 회음에서 나온 두 개의 진기를 나왔던 곳으로 들여보내 한군데 로 묶은 다음 자신의 것으로 갈무리할 생각이었다. 한데 묘했다. 크게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소운비의 진기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출발점으 로 돌아가는 것 같더니 갑자기 씻은 듯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쫓아갔던 혼음사의의 진기가 그 안으로 마구 쏟아져들어갔 다. 마치 커다란 빈 그릇에 물이 마구 부어지는 것처럼... 혼음사의는 기겁을 했다. 이런 현상은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전부터 소운비가 가진 내공 수위가 자신보다 높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었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기연을 얻었다거나 자신의 진기를 남에게 주는 미친 놈을 만나게 되면 불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하나 진기를 운용하는 데도 수련은 필요하다. 그것이 서툰 사람이라면 아무 린 큰 힘을 가지고 있어도 제대로 쓰지 못할 뿐 아니라 주화입마(走火入魔) 에 빠지기도 쉽다. 혼음사의는 수십 년을 단련한 진기 운용의 기술로써 소운비의 힘을 충분히 다스리고 뺏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나 혼음사의는 태원옥호공의 성질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으니, 그것은 가능하다면 언제라도 강렬한 음의 기운을 흡수하려고 드는 특성이었다. 음 음음음공이 가진 극음의 성질은 아주 좋은 먹이감인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고 굴에 들어갔던 자신의 힘이 도리어 굴 안에 갇히는 것을 느낀 혼음사의의 심정은 말 그대로 '어 뜨거라'였다. 그래도 수십 년을 수련 한 경험자답게 그는 재빨리 뒤로 손을 빼며 물러났다. '제기랄!' 혼음사의는 오만상을 찡그렸다. 잡아먹을 듯이 소운비의 등짝을 노려보았지 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 '할 수 없지!' 혼음사의는 입맛을 다시며 소운비 앞에 다시 정좌하고 앉았다. "에에... 이 사부가 특별히 용서하여 어디서 익혔는지 모르는 그 잡스러운 내공을 남겨 두도록 하겠다. 하면 오늘은 그만 하고 내일부터는 경신술을 기초부터 다시... 어?" '제자'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혼음사의 는 놀라 눈을 홉떴다. 소운비는 아까부터 진행하던 진기의 운용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힘으로 멈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동백산을 내려온 이래로 오늘처럼 정좌를 하고 앉아 내공을 수련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반개(半開)한 그의 눈이 오묘하게 빛나고, 그의 피부가 신비하게도 옥색을 띠며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혼음사의는 입을 딱 벌렸다. 소운비는 방금 혼음사의가 자신의 몸 안에 떨구고 간 힘을 자신의 것으로 갈무리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 안에는 또 하나의 음의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호랑이가 포효하며 그 힘을 향해 달려갔다. 음의 힘은 요동치며 저항하고 호랑이를 물려고 했다. 하나 호랑이는 형체를 갖지 않은 호랑이였고, 음의 힘은 형체를 갖고 있었다. 유형(有形)이 무형(無形)을 이기는 법은 없다. 마침내 저항하던 음의 힘도 호랑이에게 '멱'을 물리고, 그의 형체는 몇 방울 의 액체로 녹아 소운비의 체내로 흡수되었다. 혼음사의는 소운비가 환골탈태(換骨奪胎)라도 하는가 싶어 고개를 자라처럼 빼고 소운비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소운비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혼음사의는 하마 터면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방금 그의 눈에 보여진 소운비의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것을 찾아본다면 호랑이의 그것임에 틀림없 었다. 하나 금방 그 눈빛은 가라앉고 소운비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가 조식 (調息)을 취하고 있는 동안 혼음사의의 눈길은 그의 손톱 끝에 머물렀다. '이익!' 혼음사의는 낭패한 자신의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소운비의 손톱은 자줏빛으로 물들었다가 서서히 본래의 색으로 돌아가고 있 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면자고가 소운비에게로 흡수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세상에...!' 인면자고는 천고의 영물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쉽게 구하기 힘든 귀한 생물이었다. 칠 년 전 간신히 묘족(苗族)의 여자에게서 한 쌍을 얻어 오늘날 까지 번식시켜 온 것인데, 그것을 몸 안에서 죽여 흡수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일이 없었다. 혼음사의의 눈에는 이제 소운비가 괴물처럼 보이 기 시작했다. 하나 혼음사의는 포기하지 않았다. 소운비는 진기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우 연히 그렇게 되었을 것이고, 한동안은 자신의 뱃속에 인면자고가 있는지 없 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결코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될 것 이다. 조식을 마친 소운비에게 혼음사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이야기했다. "흠! 좋다.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부터는 경신술을 제대로 익혀 보도록 하 자." 아직 중천에 머물러 있는 해를 보며 소운비가 물었다. "벌써 쉽니까?" "흥!" 혼음사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크게 콧바람을 내뿜으며 소운비를 비웃어 주었다. "쉬긴 뭘 쉬어? 무공을 익히게 되었으니 약속을 지켜야지! 기루에 가는 거 다. 오늘은 질탕하게 한번 놀아 보자!" * * *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출발한 두 사람은 별들이 천공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쯤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맹가촌이 아니라 신양현이었다. "큰 물에서 놀아나야지!" 혼음사의는 불빛이 휘황한 홍등가를 향해 어깨를 으쓱거리며 걸어갔다. 소 운비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숱한 사람의 무리들을 바 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아니 많은 사람들이 물결치는 거리를 보는 것도 너무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진회하에 살 때는 언제나 이렇게 사람이 많은 길을 지나 해당원에 노래를 팔러 가곤 했었지...' "자, 저기다!" 혼음사의는 적군을 발견한 장수처럼 용맹하게 외치며 불빛이 은근하게 깔린 기루로 쑥 들어갔다. '청화루(靑華樓)'라는 간판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 다. "아니! 이게 누구세요?" 소운비와 혼음사의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녀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나이 많은 여인이 펄쩍 뛰며 외쳤다. "흐흐! 오랜만에 몸 좀 풀러 왔지. 주인 계시는가?" 혼음사의가 기루 안에 가득한 지분(脂粉) 냄새를 통째로 삼킬 듯이 킁킁거 렸다. 나이 많은 여인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어쩌려고 이렇게 나다니세요, 의원님! 요새 분위기도 모르시나요? 다들 의 원님을 잡는다고 난리인데..." 격색마회의 손길은 여기에도 뻗쳐 있는 모양이었다. 하나 혼음사의는 아랑 곳하지 않았다. "괜찮아. 질탕하게 놀고 갈 거니까 방을 내주게!" 여인은 혼음사의와 그 뒤에 선 소운비를 번갈아 보다가 젊은 기녀들에게 손 짓했다. "어서 후원 별채로 안내해 드려라!" 기루. 그것은 소운비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추억의 장소였다. 어린 기녀에게 안 내되어 후원의 별채로 가는 동안, 그는 진회하의 해당원을 떠올렸다. 그로서는 기루의 심처에까지 가본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가 그때까지 만난 기녀들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길거리의 꽃이 아니라, 그의 노래를 돈을 주고 사는 친절한 누님들이었다. 오늘밤 그는 가난하고 순박했던 날의 추억을 깨고, 누이 같은 여인들을 사 야 하는 것이다. 이윽고, 그들은 후원 별채의 일층에 도착했다. 한데 그곳에는 기녀들이 보이 지 않았다. 몇 폭의 산수화가 벽에 걸려 있고 정갈한 탁자와 의자가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두 사람을 안내한 어린 기녀는 익숙한 솜씨로 두 잔의 차를 따라 놓더니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타고 사라졌다. 어리둥절한 소운비가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혼음사의가 킬킬거렸다. "급하긴! 너는 기루에 들어오면 그저 여자들이 홀랑 벗고 달려들 줄 알았 냐? 기루에서 기녀를 만나는 절차가 얼마나 복잡하고 돈이 드는 것인지 모 르는구나. 일단 이 차부터 마셔라. 이것은 소위 점화차(點花茶:꽃을 점검하 는 차)라고 하는 것이다." 소운비가 차를 들이키자, 혼음사의는 덧붙였다. "이 차 한잔 값이 얼마나 하는지 아느냐? 동전으로 세 관(貫:한 관은 동전 천 닢) 넘게 주어야 한다." "웬 차가 그렇게 비쌉니까?" "차 값만이 아니지. 이제 위에서 기녀들이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 면 입장료라고 할 수 있지. 이것뿐 아니다. 좀 있으면 우리를 이층으로 데려 갈 텐데, 거기에 가면 술 한잔을 준다. 지주(支酒)라고 하여 여기에도 또 값 을 지불해야지. 그렇게 하나하나 치르기 전에는 여자들 손목도 구경 못한 다." 혼음사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입(誤入)도 보통 돈 많은 집 자식이 아니면 못하는 거야." 과연 두 사람이 차를 다 마시고 나자 이층으로부터 사르륵거리며 옷자락 끄 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의원 나으리!" 화장을 짙게 한 성숙한 여인이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혼음사의에게 인사했 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신양일미(新陽一美) 요월(搖月) 아니신가?" 신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찬사를 받으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 히 웃을 수 있는 것은 그 여인이 그만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였 다. "동행이 있으시네요?" 요월이라는 기녀는 마치 왕녀처럼 우아하게 미소 지으면서 소운비 쪽을 향 해 눈길을 던졌다. "음! 내 제자야!" "준비가 다되었습니다. 어서 위로 오르시지요." 혼음사의는 품안에 손을 집어넣으며 짐짓 말했다. "점화차 값을 지불해야지!" "의원님도...!" 요월은 부드럽게 만류했다. "저희들이 은혜를 입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떻게 돈을 받겠어요? 그저 저희들 예법이니 번거로우시더라도 절차만 따라 주시면 고맙지요. 어서 오 르세요." 요월이 먼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혼음사의는 소운비의 귀에 속삭였다. "넌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이 사부가 기녀들 화류병 고쳐 주는 전문가거든!" 이층은 좀더 호화로웠다. 가구 때문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술 한잔을 혀로 굴리는 동안, 열댓 명의 기녀들이 나와 병풍처럼 섰다. 요월은 그들 중 세 사람을 고르라고 했다. 말하자면 시중들어 줄 여인을 선 택하라는 것이다. "한번 골라 볼 테냐?" 혼음사의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하나 소운비는 고를 수가 없었다. 모두 비슷한 화장을 하고, 모두 비슷한 옷을 입어 사실 고른다는 행위가 무의미 하게 느껴졌다. "내가 오늘은 너에게 여자를 고르는 법을 설명해 주마." 으스대며 나서는 혼음사의의 꼬락서니를 보건대, 그는 확실히 무공보다는 이런 방면에 대해 자신이 있는 듯했다. 혼음사의는 늘어선 기녀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여자가 정교(情交)를 맺기에 적당한가,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색마의 첫걸음이다. 명마(名馬)를 식별하는 기준이 있는 것처럼, 여자를 고 르는 데도 기준이 있다. <옥방비결(玉房秘訣)>에 의할 것 같으면 뜻밖에도 가슴이 발달하지 않은 여자가 좋다고 하지. 물론 절벽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젖소처럼 젖이 큰 여자는 좋지 않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느닷없이 한 여인의 젖가슴을 왈칵 움켜쥐었다. "자, 너는 너무 커! 불합격." 기녀는 재빨리 아래층으로 물러났다. "그 다음, 살집이 좋은 젊은 여자여야 한다. 몸에 살이 없고 뼈가 왈가닥왈 가닥거린다거나, 엊그제 손자를 본 할머니는 안 된다는 말이다." 혼음사의가 말하는 와중에 또 두 여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들도 아래층으 로 내려갔다. 혼음사의는 남아 있은 기녀들 사이로 파고 들어가, 그들의 손 이며 어깨를 주물러 보면서 말했다. "모든 관절이 살로 덮여 있어야 하고, 뼈는 크지 않아야 한다. 또 눈은 작으 면서 흰자위와 검은자위가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 다시 몇 명의 여인들이 아래층으로 물러났다. 남은 것은 다섯 명이었다. "흠...! 그리고 머리카락이 명주처럼 가늘고 부드러워야 하지." 혼음사의는 그 다섯 여인들의 머리카락까지도 일일이 만져 보았다. "하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말이야..." 갑자기 그의 두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하나는 기녀의 소매 속으로 들어가 겨드랑이로, 다른 하나는 치마를 들추고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이쯤 되자 아무리 간 큰 기녀라도 질겁을 했다. "어머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겨드랑이와 그곳에 털이 나지 않았거나 있더라도 가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점이지! 머리카락을 보는 것도 그 이유야. 머리칼이 가늘 고 부드러우면 다른 곳의 털도 그럴 테니까." 소운비는 실소했다. '그곳에 털이 나지 않은 여자가 좋다면, 대머리 여자도 좋다는 뜻인가?' 아무튼 그러는 와중에 세 명의 기녀가 남았고, 요월까지 포함한 네 여인이 본격적으로 두 사람을 시중들기 시작했다. 기루의 이층으로 큰 상이 들어오고 그 상 위에 차고 달콤하거나, 뜨겁고 기 름진 요리가 순서에 따라 올려졌다. 소운비의 좌우에는 요월과 다른 한 명의 기녀가 앉아 그가 손 쓸 틈도 없이 술과 요리를 입으로 날라 주었다. 그녀들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고, 부드러운 눈짓으로 사람을 유혹해 왔지만 소운비는 그녀들의 화장기 짙은 얼굴에서 다른 무엇을 발견하게 되 었다. 자신의 노래를 들으며 슬퍼하곤 했던 해당원의 기녀들. 그 쓸쓸한 길거리의 꽃들이 한숨짓는 모습을. 그는 돈에 팔리는 것이 이 기녀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인 것처럼 기분이 울 적해졌다. * * * '오늘도 아버지는 늦으시는군!' 남궁화련은 개방 안에 마련된 임시 거처 중에서도 가장 신경을 썼다는 자신 의 방안에 오도카니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흥...! 뭐가 그렇게 신이 나서 밤새는 줄 모르고 회의를 하는 건지... 그 텁 석부리 개방 장로하고 잘난 척하는 그 소방주... 게다가 가장 꼴불견인 그 출신도 모르는 계집!' 남궁화련의 가슴속에서 울컥 심술이 올라왔다. '다들 꼴도 보기 싫어! 내 앞에서야 소저, 소저하지만... 뒤에선 다들 수군거 리겠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겨워!' 그녀는 가냘픈 몸을 뒤로 젖혀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침상 머 리맡에 놓아 둔 자신의 장난감을 조그만 손으로 감싸쥐었다. 그것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한 쌍의 작은 종(鐘)이었다. 강호유람을 나왔던 철모르는 남궁화련을 꾀어 객점으로 데리고 들어간 탐서랑이 할 일을 마친 뒤 선물로 준 이 물건은 그 뒤 한 순간도 그녀의 곁을 떠난 일이 없었다. 물론 남궁세룡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이름이 면령(緬鈴)이라고 한댔지...?' 남궁화련은 그 종을 쥔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스 며들자 종은 흔들지도 않았는데 작은 소리를 냈다. -면(緬:지금의 미얀마)이라는 땅에 가면 커다란 새가 있는데 그 새의 이름 을 붕(鵬)이라고 하지. 그 붕의 정액을 모아 청동으로 만든 작은 종 안에 넣어 밀봉한 물건이 바로 이 면령이야. 밤이 적적한 귀부인들이 쓰는 물 건이지. 무슨 뜻이냐고? 그건 네가 알아 내 보도록 해. 탐서랑이 남긴 말이었다. 그와 헤어진 이후 지금까지 남궁화련은 의문의 답 을 찾기 위해 날마다 면령을 들여다보았다. 하나 그 두 개의 작은 종은 흔 들지 않고 사람의 체온만 느껴져도 종 소리가 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점 이 보이지 않았다. '탐서랑...!' 그녀는 붉은 입술 사이로 흰 이를 드러내며 그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잡고 말 거야. 꼭 잡아서...!' 아버지에게 말한 것처럼 죽이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녀에게 는 그녀 나름의 복수 방식이 있었다. 남궁세룡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테지 만... 침상 위에서 뒹굴뒹굴 몸을 굴리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던 남궁화련 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바깥으로부터 무슨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 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소란스러운 것은 북쪽이었다. 평소 개방 제자들이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다. "샅샅이 뒤져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해라!" 규염개를 비롯한 개방 장로들의 호령 소리가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리고 있 었다. 캄캄하던 총타 내 이곳저곳에 불이 켜지고 발소리가 요란해지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남궁화련은 쫓아가 볼 만큼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방문을 닫고 들어갈 만큼 관심이 없지도 않아서 그 자리에서 발돋움을 하며 멀리서 벌어지는 일의 추 이를 살폈다. 총타의 금지 쪽에서 일어난 동요의 물결은 삽시에 전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쪽으로도 오는군.' 위치상으로 보면 소동이 일어난 최초의 자리와는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 는 남궁화련의 처소에까지 그 물결이 번져 오는 데 일 각이 걸리지 않았다. 탁탁탁...! 단단한 나무몽둥이로 무장한 네 명의 개방 거지들이 발을 맞추어 그녀의 처 소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천지일월이었다. "남궁 소저! 혹시 수상한 자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문밖에 나와 있는 남궁화련을 보고 왠지 주춤하다가 그렇게 물어 왔 다. 남궁화련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잠옷 차림이었던 것이다. '흥...! 별수없는 것들.' 남궁화련은 자신을 흘깃거리는 네 거지들의 눈빛에서 거북함과 기묘한 자신 감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만 들어가 쉬십시오. 바람이 찹니다." 네 거지는 또 발을 맞춰서 왔던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남궁화련은 그들의 은근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곳에서 서성거렸다. 그녀의 처소는 개방 총타 내에서도 호젓하고 침투하기에 용이하지 않은 곳 이라 그런지 천지일월이 가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수색의 발길이 찾아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재미있는 일은 이쪽에선 일어나지 않겠는데?' 시간이 지나자 남궁화련은 금방 호기심이 시들해져서 하품을 하며 방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발을 들이밀었다. "들어가지 말아요!" 뾰족한 음성이 그녀의 방 앞 작은 수풀 속에서 들려 온 것은 바로 그때였 다. 남궁화련은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라 깜짝 놀라 며 뒤로 돌아섰다. 수풀 속에서 나온 것은 진설영이었다. "아니, 진 소저가 여긴 어인 일이세요?" "남궁 소저." 진설영은 목이 마른지 침을 삼키며 천천히 말했다. "그 방문으로부터 손을 떼고 이쪽으로 오세요. 어서!" 남궁화련은 진설영의 긴장한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기분도 좋지 않았다. '저 출신도 알 수 없는 것이 소방주의 눈에 좀 들어서 귀빈 대접을 받는다 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단 말이야?' 남궁화련은 샐쭉한 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피곤해서 자야겠어요." "남궁 소저!" 진설영이 안타깝게 외쳤지만 이미 남궁화련은 자신의 방안으로 성큼 들어서 고 말았다. '헉!' 들어서는 순간 남궁화련은 자신의 방이 아까 나가기 전의 방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는 낯선 사람의 모습도, 흐트러진 가구도 없었다. 눈 에 보이는 풍경은 모두 아까와 똑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아까와는 달랐다. 남궁화련은 자신이 그런 느낌을 받는 이유가 뭔지를 몰라 눈알을 굴리며 방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역시 눈에 보이는 이유는 없었다. 하나 그녀는 숨 이 막혀 왔다. '독인가...?' 독은 아니었다. 최소한 그녀는 웬만한 독에는 당하지 않는 체질로 키워진 세가의 여식이었다. 그녀로 하여금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다리를 후들 거리게 만든 것은 독이 아니라, 어떤 공포의 냄새였다. '누군가 있어!' 아무리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더라도 남궁화련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 었다. 방문 바로 앞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러나 방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렇듯 가공하게 밀려오는 살기! 남궁화련은 입술을 떨며 혼신의 힘을 다해 발을 옮겼다. 그리고 아직 닫지 않은 방문 쪽을 향해 돌아섰다. 얼굴을 돌리자, 진설영이 긴장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 거기까지가 고작이었다. 남궁화련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가서 구원병을 불러!' 남궁화련은 진설영에게 외치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막강 한 살기의 주인공이 바로 조금 전에 개방을 뒤집어 놓은 소동의 주인공일 것이며, 진설영은 그 흔적을 우연히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이 분명하다는 판 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야말로 '출신도 모르는 것'이 어떻게 이런 강자와 싸울 수 있겠는 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뿐이다. 한데 진설영은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고 망연히 남궁화련의 뒤쪽만 바라보 고 있었다. 남궁화련은 그녀의 그 둔한 반사신경을 속으로 탓하다가 '아차' 싶어졌다. '진 소저도 나처럼 가공할 살기 때문에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로구 나.' 자신을 포함한 두 사람의 목숨이 이제 정체 모를 괴인에게 달려 있다는 생 각으로 남궁화련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한 여자는 방안에서, 한 여자는 방 밖에서 그렇게 가만히 서 있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안타깝게도 총타 이곳저곳에서 들리던 수색자들의 외침과 발소리마저 차츰 잦아들기 시작할 무렵. "나와라." 느닷없이 진설영이 한소리 불쑥 뱉었다. 오랜 시간을 서 있어서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 되어 버린 남궁화련이 그 소 리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그녀의 등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바로 괴인의 음성이었다. 진설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화련은 그런 진설영에 비해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녀가 고개를 돌렸어도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린 계집이 당돌하군." 괴인이 비웃듯 읊조렸다. 진설영도 함께 웃었다. "검은 어리지 않다." "갸륵하군. 칭찬해 주고 싶다. 이름이 뭐지?" "냉면검화 진설영." 진설영은 자신이 있었다.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는 너무나 강했다. 장 시간에 걸친 기의 싸움에서 간신히 평수를 이루고서야 말을 꺼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 놀라운 진전을 보인 자신의 검법이 상대 못지않게 강하 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진설영은 자신의 이름을 댄 직후 남궁화련의 등뒤, 아무런 사람의 흔적도 없는 그곳에서 한 개의 섬광이 뻗어져 나올 때도 놀라지 않았다. '오라!'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벗인 관음보검을 바람처럼 휘둘렀다. 보검의 끝에서 일순 빛의 덩어리가 뻗어 나왔다. 빛의 덩어리는 그녀의 앞으로 쏘아져 오던 섬광을 튕겨 냈다. 섬광의 정체 인 작은 표창이 삼 장 밖으로 힘없이 날아갔다. 관음보검에서 뻗어 나온 빛의 덩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남궁화련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뒤편의 허공에 작렬 했다. "검환(劍丸)? 대단하구나!" 놀란 음성이 되돌아오자 진설영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사부에게 각 고의 훈련을 받은 끝에 완성한, 검기(劍氣), 검강(劍剛)의 단계를 넘어선 검 환은 그녀 자신으로서도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으으음...!" 그 순간, 남궁화련의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어지더니 그 자리에 지푸라기인 형처럼 쓰러졌다. 방안 가득한 살기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그녀의 몸이 견뎌 내지 못한 것이다. '됐어! 끌어 낸 거야.' 적이 방안에서 비로소 방 밖으로 나오는 것임을 확신한 진설영은 쾌재를 불 렀다. 하나, 그녀는 금세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전의 그 목소리!' 보통의 무인이라면 꿈에서나 꾸어 볼 검환의 공격을 받고도 적은 놀란 목소 리를 냈다. 단지 놀라기만 한 것이다. 적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설마!' 진설영은 이제 그녀에게조차 막강하게 엄습하는 보이지 않는 적의 기운에 대비해 재빨리 관음보검으로 가슴 앞쪽을 보호했다. 하나 적은 그녀의 예상을 초월했다. "솜씨가 가상하다만, 나는 네가 쫓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구경을 했을 뿐!" 언제 접근했는지 그녀의 발 밑에서부터 적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파아앗! 진설영은 한 모금 진기를 끌어올려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때, 그녀의 눈에 기절초풍할 광경이 쏘아져 왔다. 아까 삼 장 밖으로 날린 표창이 그녀가 허공으로 뜨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하아앗!" 그녀는 낭랑한 기합을 토해 내며 허공에서 그대로 검을 휘둘러 표창을 받아 쳤다. 퍼어어엉! 표창과 검이 부딪쳐서는 날 수 없는 폭발음이 거기서 터져 나왔다. "우우웁!" 매캐한 연기가 눈앞으로 가리자 그녀는 입을 틀어막으며 아래로 떨어져 내 렸다. 다행히 그 폭발은 사람을 살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진설영은 앞 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파묻혀 한동안 빠져 나오지를 못했다. 안개가 가셨을 때는 이미 그 가공할 살기의 주인공은 사라진 다음이었다. '굉장한 은신술의 고수다!' 그녀는 새삼 감탄했다. 안개는 한 올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남궁화련의 처 소 앞은 다시 괴괴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진설영은 방바닥에 쓰러진 남궁화련을 보살펴 주려다가 아까의 그 시건방진 태도를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몸을 꿈틀거리며 깨어나는 것으로 보아 서는 심하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대신 진설영은 방금 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남긴 말을 생각했다. '내가 쫓은 것이 자기가 아니라고? 이해할 수 없군. 그럼 오늘 밤 침입자가 둘이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개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괴사들에 대한 불 길한 의문이 가슴 밑바닥에서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하나, 모든 것을 단번 에 알아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팟! 진설영은 괴인이 남기고 간 표창을 발끝으로 차 올려 손에 쥐었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남궁화련이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좀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대체 무 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방에 침투한 괴인 이 무척이나 강했고, 또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진설영도 그만큼이나 강했다는 사실만이 기억날 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남궁세룡이 그녀의 방에 들른 것은 새벽이 다되어서였다. "아무 일도 없었느냐?" "말도 마세요... 한데 대체 무슨 소란이었어요?" 남궁세룡의 얼굴은 침중했다. '말도 마세요'라는 딸의 이야기를 듣고도 사정 을 캐묻지 않는 것으로 보면, 아까의 소란은 남궁화련이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큰 일임에 분명했다. "휴우..."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개방 방주 백미노개가 죽었다." 남궁화련은 움찔했다. 설마 그 정도의 일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아까 그... 그 괴인이 개방 방주를 살해한 흉수?' 남궁화련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궁세룡은 그런 딸의 태도는 눈치채지 못하고 더욱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신 같은 노릇이다... 아무튼, 이 일 때문에 영웅대회는 늦추어질 것 같구 나." * * * 방으로 돌아온 진설영은 손에 넣은 표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관찰해 보았 다. 손잡이 부분에 입을 벌린 괴수의 머리통이 새겨져 있다는 것 외에는 별 특 이한 점이 없는 표창이었다. 아마 폭발이 일어나고 안개가 새어나오는 것은 괴수의 입 부분인 모양이었다. 불빛 아래에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니 괴수의 이마 부분에 어떤 글씨가 새겨 져 있었다. 그것은 진설영이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중원의 문자가 아니다. 그럼 몽고인일까?' 보통 무림이라고 하면 중원인들만의 세계다. 하나 몽고의 황실에도 이름난 무인들은 존재하고 있다. 다만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몽고 황실의 무인들과 강호의 한족 무인들이 직접적으로 격돌한 일은 많지 않지만, 간간이 들리는 이야기로는 몽고 황실에서 이따금 고수를 풀어 중원인들의 기세를 꺾고자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것이 역대 몽고의 황실이 들불처럼 일어나려는 한족의 강호를 적절히 제 압하는 수단이었다. 강호인들이란 앞뒤 잴 줄 모르고 무식하게 싸움만 좋아 하는 것 같다가도, 힘에서 지면 깨끗이 승복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기 때문에 몽고 황실에서도 구태여 강호를 대군으로 진압하려 하기보다는 강호의 규칙대로 적절히 눌러 주기만 해온 것이다. '개방 방주의 살해에 몽고 황실의 입김이 작용한 걸까? 그렇다면...?' 진설영은 그 이상 어떤 추리도 진행할 수가 없어 이마를 찡그렸다. "설영아, 자느냐?" 바깥에서 조심스런 진파파의 음성이 들려 왔다. 진파파는 설영의 대답을 듣 기도 전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부님, 주무시지 않고...!" 진설영은 일어나 진파파를 맞이했다. "밖이 소란하던데,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진설영은 어찌 대답할까 하다가, 일단 사부에게는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해 주기로 결정했다. "일을 방해하려는 침입자가 들었던 모양이에요. 곧 쫓아 냈어요." 진파파는 별다른 의심없이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진파 파의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요즘 진파파는 영 몸이 좋지 않았다. 괴팍한 성격이 누그러진 것은 일전에 화금궁에서의 일전이 있고 난 다음부 터였지만, 건강까지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은 진설영이 격색마회의 일에 앞장 을 서면서부터였다. 딸이 아기를 낳으면 그 어머니는 갑자기 늙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저 명 목상의 할머니가 될 뿐 아니라 몸까지도 할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진파파의 경우가 그러했다. 진설영이 품안의 제자일 때 그녀는 천년만 년 살 것처럼 기고만장했었다. 하나 진설영이 이제 톡톡히 한 사람의 몫을 해내며 큰 배경도 없이 격색마회의 중요인물이 되고 나자, 진파파는 그 동 안 묵혀 두었던 나이를 한꺼번에 먹은 것처럼 시들시들해졌다. 본래 처음 두 사람이 개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다들 진파파의 무공을 두려 워했었는데, 이제는 모두들 단지 예의로만 대할 뿐이었다. 진파파에게 낙이 있다면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최근 무공의 성취가 하늘을 찌르는 진설영에게 자신의 절기를 빠짐없이 전수해 주는 일과, 이따금 과자 나 과일 같은 먹을 것을 싸가지고 자신의 처소를 방문하는 무옥과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다. 무옥의 심복들이야 무옥의 그런 친절은 다만 나이 많은 어른에 대한 예우라 고 이야기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옥과 진파파 가 이야기를 나누거나 산책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똑같이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사위와 장모.' 진파파도 그 눈치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쓰다 달다 말이 없었다. 진설영은 화금궁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사부가 예전처럼 '남자란 말이야...' 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가끔 이상하게 여기곤 했 다. 그것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번거롭지 않고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어쩐지 사부가 사부답지 않게 된 것 같아 불안한 일이기도 했다. "설영아,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걱정 마세요, 사부님." 진파파는 앉으라고 권하는 진설영의 말을 무시하고 방안을 불안하게 오락가 락했다. "사실은 너에게 할말이 있어서 왔다..." "네?" "이 사부는 요새 통 몸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얼마 못 갈 것 같구나." "사부님!" "내 말을 끝까지 들어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는 앞으로 네가 나를 사부 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불러 주었으면 한다." 진파파의 목소리는 처연하기까지 했다. 진설영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실 양딸로 삼은 것은 십 년 전의 일이고, 그 동안은 사부와 제자로서의 관계가 더 두드러졌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 않았던 것뿐이지, 특별히 그것을 거부 할 이유란 없었다. "그러겠어요, 어머니." 진설영이 다소곳이 대답하자 진파파의 눈에는 기쁨이 눈물이 고였다. "고맙다, 얘야!" "대신, 돌아가신다느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타이르는 듯한 진설영의 말에 진파파는 기분좋게 웃어 주었다. "알았다. 네가 나를 어머니처럼 생각해 주니, 이 어미는 정말 속 편하게 그 일을 털어놓을 수가 있겠구나. 나는 두고두고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 게 해서든지 너에게 진상을 들려 주고 싶다. 다만 판단은 너에게 맡길 뿐이 지만... 얘야!" 진설영은 대체 진파파가 자신에게 고백할 무슨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짐 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진파파가 진지하게 시작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언제나 별것이 아니었기에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 이야기에 궁금증을 갖기 전에 달래듯이 말했다. "어머니, 일단 이리로 와서 앉으세요. 말씀이 길어지실 것 같은데, 앉아서 하세요." 진설영의 권고에 진파파는 탁자 앞에 놓인 의자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막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입을 벌리다가, 자연스럽게 탁자 위로 시선이 갔 다. 아니, 탁자 위에 놓인 표창으로 시선이 갔다. 순간, 진파파는 표창의 자루에 새겨진 괴수를 흉내내듯 입을 크게 벌렸다. 그것은 경악의 표정이었다. 벌려진 입에서는 아무런 외침도, 비명도 튀어나 오지 않았다. 대신 목이 졸려지는 듯이 끄으윽, 하는 소리가 울렸다. "왜 그러세요?" 진설영은 화들짝 놀라 진파파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진파파 의 시선은 표창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진설영이 한참을 흔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진파파는 짜내는 것 같은 단어를 내뱉었다. 물론 그것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모... 모... 몽... 혼...!" 그리고 진파파의 목은 그대로 의자 등받이 쪽으로 넘어갔다.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허옇게 뒤집어져 가는 진파파의 눈자위를 보며 진설영은 절규했다. "사부님! 사, 사부님! 어머니!" 하룻밤 사이에 개방 총타 안에서는 두 명의 늙은이가 횡액을 당했다. 한 사 람은 죽고, 한 사람은 졸도한 것이다. 생과 사의 차이가 비록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것이라고 하지만, 졸도한 늙 은이의 처지도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쓰러진 이후로 도통 깨어나지를 못 하는 것이다. 제 15 장 인술(仁術) 목이 탔다. 삼 일째 이어진 술자리. 그리고 밤마다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낯선 여 인의 살결...! 어김없이 찾아오는 부담스러운 한낮의 햇살. 소운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을 부시게 하던 햇살이 한 순간 가려졌다. 한 여인의 나신이 그것을 막아 서고 있었다. "혜와...?" 허리까지 출렁이는 긴 머리칼이 소운비를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 이름을 입 술 바깥으로 꺼내 놓으면서 소운비는 벌써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또 그 이름을 부르시는군요." 그가 눈부시지 않도록 창문의 휘장을 내려 주고 돌아선 기녀, 요월이 부드 럽게 책망했다. "미안하오." 소운비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으로 한 그릇의 시원한 산매탕(散梅湯)이 내밀어졌다. "미안해 하시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래도 난 미안하오." 그는 산매탕은 거들떠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요월이 침상 위로 올라와 앉 으며 물었다. 밤을 보내고도 그녀의 얼굴을 덮은 짙은 화장은 지워지지 않 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미안하다고 하시지요? 제가 들으니 어제도, 그제도 공자를 모신 아이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군요." "했지." "어째서인가요?" 소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어쩐지 그대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오." "흠..." 요월은 시동생의 고민을 들어 주는 마음 좋은 형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번에는 소운비가 물었다. "왜 그런지 알겠소?" "맞춰 볼까요?" 자신이 있다는 듯한 요월의 대꾸였다. 침중한 소운비의 안색과는 달리 그녀 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맞추면 무엇을 상으로 내리시겠어요?" 소운비는 그저 그녀의 화사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요월은 그 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공자님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인이 있는데, 우리들 노류장화를 사서 데리고 노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 이런 것 아닌가요? 우리 노류장화들도 사람인 데 가지고 노는 것 같아서요." "비슷하오." 요월이 입술 양끝을 위로 치켜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두터운 화장 위로 살짝 주름살이 그려졌다. 그 광경은 소운비를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다. 신양일미에게도 세월은 어김없이 흐르는 것인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착각이라고?" "그래요. 흔히 기녀를 품는 남자들이 하는 착각이지요." 요월은 침상 아래 떨어진 속옷을 주워 입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 가면 서 계속 하나씩 옷을 도로 걸쳐 갔다. 소운비는 옷을 입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 기루의 기녀들은 본래 몸을 파는 것을 주업으로 하지 않아요. 사실 화대보다는 공자께서 이곳에 처음 오던 날 보았던 그 점화차 값이나 지주가 훨씬 이문이 많이 남고, 가장 좋은 장사는 향연에 불려 가 분위기를 맞추어 주고 받는 돈이지요. 그에 비하면 잠자리를 같이하고 받는 화대는 화류병에 걸리거나 임신할 위 험도 있는 데다가 기녀의 평판이 낮아지기 때문에, 기루를 관리하는 의모 (義母)들도 굳이 원하지 않아요. 기녀가 평판이 낮아지면 향연에 불려 가는 일도 적어지고 그러면 결국 손해니까요.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만으로 돈을 버는 것은 우리 같은 기루의 기녀들보다 하급 창기인 와사(瓦舍)의 여자들 이에요. 공자가 삼 일 간 이곳에서 여자를 품으신 것은 특별한 대접이에요." 요월은 옷을 다 입은 뒤 머리를 매만지기 위해 손을 올리다가 문득 자조적 인 웃음을 지었다. "물론 한번을 팔든 두 번을 팔든, 아니면 동전 몇 문에 팔리든 은자 천 냥 에 팔리든 몸을 판다는 것은 똑같지요. 저도 처음 손님을 받던 날에는 울었 었지요. 기녀도 여자니까 순결을 잃는 것은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아니, 그렇게 울기라도 해야 내가 정말 기녀가 아니라 그저 '어쩔 수 없이 지금 기녀로 있는 가련한 여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다 부질 없는 노릇..." 휘장 사이로 기를 쓰고 고개를 들이민 햇빛이 두터운 화장으로 가려진 요월 의 얼굴 위에 떨어졌다. "지금은 그저 내 직업이 기녀이고, 기녀가 장사를 하는 방식 중에 하나가 몸을 파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세상에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는 사람 이 있고, 사람을 죽여서 먹고 사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이건 그저 먹고 사 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요." 요월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한데 이따금 놀기 좋아하는 순진한 공자님들은... 기녀들의 몸뿐 아니라 마 음까지 사려고 해요. 길거리의 꽃인 우리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 그걸 바라는 거지요. 뭇 남자의 손에 시달리면서도 언제나 자기만을 생각하 는 기녀라...! 낭만적인 것이지요." "난 그런 것을 바라는 게 아니오." 소운비는 항변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결국 그 생각의 뿌리는 같다는 거죠. 그건 결국 허영 이에요. 그렇게 해서 공자님들이 얻는 것이 뭐죠? 단 하나죠. 자신은 하찮은 기녀의 몸이나 사는 색한이 아니라 기녀의 마음을 살 줄 아는 풍류공자다. 그런 자 기 위안이 아니겠어요? 남을 위해 주는 척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곳을 가 리려는 허영이에요." 요월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소운비는 그녀가 과연 어젯밤 자신과 한 이불 안에 누워 있었던 그 여자인 가 싶었다. 그만큼 그녀는 냉정했다. "몸을 사는 것은 몸을 사는 거예요. 그 이상 무슨 위장을 해서 가릴 필요도 없고, 또 특별히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깎아 내릴 필요도 없어요. 시장에서 과일을 사 먹는 것처럼, 그냥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고 팔 사람이 있는 것 뿐이에요. 우리를 마치 '어쩔 수 없이 몸을 파는 비련의 여인'로 보시는 것 은 황송하지만 별 도움이 안 돼요." 요월은 싸늘하게 잘라 말을 맺었다. "대가를 지불하고 몸을 사게 되시면, 몸만 사세요. 우리들이 팔지 않는 그 무엇까지 사려 하지 마시구요." 소운비는 호되게 꾸지람을 받은 소년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지난 삼일 동안 그는 요월이라는 기녀를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평판 좋고 경력도 오래된 기녀답게 유연한 솜씨로 매일 밤의 주연을 이끌었고, 자신의 생각을 술자리에서 털어놓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싸늘하고도 차분한 이야기는 분명 항변이었다. 그것도 소운비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힘있는 항변이 었다. '내가 기녀들을 동정하면서 나를 위안하고 있다고?' 소운비도 요월에게 항변하고 싶었다.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긴 하지만 모두 다 옳은 것은 아니라고. 최소한 자신은 남을 이용해 스스로를 치장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하지만 내가 내 입으로 아무리 용서를 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금 까지 삼 일 동안 다른 여자들을 품어 왔지 않은가! 아무리 혜와를 그리워하 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만지고 껴안은 것은 다른 여자의 몸이지 않은가. 여염집의 여자를 강탈하는 것은 못하겠다고 하면서 기녀를 사는 것은 그래 도 괜찮다고 혼음사의에게 허락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는 항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이 꺾어지도록 떨구었다. 막막한 침묵이 한참 흐른 뒤에 요월의 손이 그의 어깨에 와 닿았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금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부드러웠다. "제가 주제 넘게 공자를 훈계하려고 했군요. 기분이 상하셨나요?" 소운비는 세게 도리질을 했다. "아니오! 나는 절대로..." "기분이 상하셨다면 저를 매질하셔도 좋아요. 그렇게 해서라도 사과드려야 겠어요." "요월... 나를 더 이상 부끄럽게 만들지 마시오." 요월은 별안간 소운비의 머리를 끌어당기더니 자신의 젖가슴 위에 포근히 안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의원께서 당신을 색마로 만들 작정이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녀로부터 풍기는 짙은 화장 냄새는 어쩐지 소운비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 었다. "아마 공자께서는 이곳을 떠나시면 다시 오지 않겠지만, 이것도 인연이지요. 저는 그저 공자께서 모든 일에 거스름없이 받아들이시기를 바래요.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고, 공자 한 사람이 바꿀 수 없는 일...!" 요월은 소운비를 안았던 것처럼 갑자기 그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사뿐사뿐 탁자 곁으로 걸어가 거기 장식처럼 놓인 비파를 들어 보이며 신양일미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파를 잘 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 이야기가 공자의 가슴에 한 올 이라도 들어갔다면 저를 위해 한 곡조 타주실 수 있을지요?" 소운비는 햇빛을 등지고 화사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반쯤 자신을 내놓고 반쯤은 철저히 감춘 이 기녀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을 여인이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간신히 굳은 얼굴을 풀며 마주 웃어 주었다. "부끄러운 솜씨지만..." * * * 딱 하룻밤 질탕하게 놀 계획이었던 소운비와 혼음사의가 청화루 문턱을 넘 어 나온 것은 삼 일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늦은 오후였다. 신양현의 유흥가를 걸어나오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느긋했다. 청화루의 나 이 많은 기녀는 문간까지 따라나와 혼음사의에게 조심하라고 이야기했지만, 혼음사의는 자신을 쫓는 적들이 대부분 자신의 얼굴을 모르고 다만 혼자 다 니는 의원을 찾을 테니 소운비와 함께 있는 동안은 별 탈이 없을 것이라 확 신했다. 그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신양현을 다 빠져 나올 때까지 그들을 귀찮게 하 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 혼음사의는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고 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양현은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은 현이라 분명 사람 사는 곳이라면 있어 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는 거지도 포함되어 있다. 한데, 어찌 된 셈인지 삼 일 전과 다르게 신양현 일대에는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거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지가 없는 마을이란 야바위꾼 없는 도박장처럼 보기에는 좋아도 결정적으 로 중요한 것이 빠진 것처럼 맥이 없기 마련이었다. 혼음사의는 이 일을 매 우 괴이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삼 일 동안이나 기녀의 치마폭에서 놀아났기 때문에 기분이 나른하여 그 이상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수복산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른 현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다면, 하남행성의 모든 마을에서, 아니 그뿐 아니라 개방의 조직이 뻗어 있는 모 든 중원 땅에서 거지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 이다. 하나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사실은 볼 수가 없으니, 혼음사의는 크 게 관심 갖지 않고 신양현을 나와 맹가촌을 지나 풀벌레 소리가 요란한 밤 중, 수복산 자락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혼음사의는 무엇이 그리 기분이 좋은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뒤를 따라가던 소운비는 문득 실소했다. 생각해 보면, 그가 가장 먼저 만난 색마가 바로 이 혼음사의였고, 또 색마들 의 난전장에 자신을 끌어들인 것도 이 늙은이였다. 그때는 귀신처럼 날고, 사람을 움직이게도 못 움직이게도 만드는 혼음사의 가 그렇게 무섭게 보일 수가 없었다. 하나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 그의 얼굴은 딱 팔자 좋은 시골 촌로 그대로였다. 키며 체구도 소운비보다 작고 볼품이 없어 지금은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다. 다만 뭔가 흉계를 꾸미거나 음탕한 생각을 할 때 눈동자에 떠오르는 음흉한 기세만이 그가 강호칠대색마 중 하나인 혼음사의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 주었다. 하나 그 음흉한 기세 역시도 처음처럼 소운비를 두려움에 떨게 하 지는 못했다. '참, 지금 보니 그의 어디가 강호에 흉명을 날리게 만든 것인지 모르겠군.' 소운비가 이런 생각을 더듬고 있는데, 갑자기 앞서가던 혼음사의가 발걸음 을 우뚝 멈추었다. '응?' 소운비는 혼음사의의 어깨 너머로 그 앞쪽의 상황을 얼핏 살폈지만 그를 멈추게 만들 만한 것은 없었다. 쉬기에도 마땅치 않은 산길에서 갑자기 멈 춘 이유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는 소운비에게 혼음사의가 불쑥 입을 열 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에게 약속한, 무공 가르쳐 주는 일을 며칠 게을리 했 구나." 이게 웬 혼음사의답지 않은, 약속과 의무에 충실한 이야기인가...! "산길도 호젓하고, 집까지 가려면 시간이 족히 걸릴 테니 무료함도 달랠 겸 내가 너에게 경신술을 전수해 주겠다. 좋지?" 소운비는 혼음사의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자기야 좋지만, 혼음사의 입장 에서야 무엇이 급하다고 길 가는 와중에 무공을 전수해 준단 말인가. 하지 만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소운비는 공손히 대답했다. 색공을 배울 때는 어쩐지 가볍게, 무공을 배울 때는 정중하게 혼음사의를 대하곤 하는 소운비였다. "예." 혼음사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짐을 지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소운 비는 그 옆에 아까보다 바짝 붙어 걸었다. "네가 나에게 암중으로 배운 경신술의 이름은 망번신요보라 한다. 알겠느 냐?" "예." "도깨비처럼 뒤집어 몸을 꺾는다, 라는 뜻이다. 알겠느냐?" "예." "이 망번신요보는 세 가지 방면에서 효능이 있다. 첫째, 먼 길을 갈 때에 이 것을 시전하면 분명 걷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뛰는 사람보다 빨리, 그것도 지치지 않고 갈 수 있다. 이건 네가 알 것이다. 둘째, 빨리 가야 할 때 이것 을 시전하면 멀리서 보기엔 득달같이 달리는 도깨비처럼 그 흔적이 표홀하 며 빠르다. 이것도 너는 해보았다. 마지막으로, 적과 싸울 때 놀라운 보법(步 法)의 효능을 발휘한다. 이건 네가 모를 것이다." 혼음사의의 설명이 끝나는 순간, 소운비는 두 손으로 눈을 문질러야 했다. 분명 자신의 약간 앞에서 걷던 혼음사의의 몸이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자신 의 뒤쪽으로 긴 잔영(殘影)을 남기며 미끄러져 가는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혼음사의의 몸 그림자는 몇 걸음의 간격을 두고 나타났다 가 사라지며 마치 요술을 부리듯 소운비의 주변을 한바퀴 빙 도는 것이었 다. 사실은 요술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속도로 예측불허의 방위를 향해 이동 하는 방식을 써서 사람의 눈을 어지럽히는 것이지만, 소운비로서는 입을 다 물 수가 없었다. 별안간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혼음사의의 번뜩이는 그림자 쪽에서 들려 왔 다. "나를 잡아 봐라!" 이것이야말로 근엄을 떨 때보다 혼음사의다운 행동이라서, 감탄만 하고 있 던 소운비가 피식 웃고 말았다. '술래잡기라도 하자는 것인가?' 망번신요보의 기초는 익힌 몸이기 때문에 소운비는 한번 과감하게 혼음사의 를 쫓아 보았다.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 던 혼음사의의 몸은 소운비가 손을 내뻗자 금세 다섯 걸음 밖으로 멀어지는 가 싶더니 어느새 뒤편에 혀를 낼름거리며 나타났다. 몇 번이고 헛걸음과 헛손질을 거듭한 끝에 소운비는 작은 이치 하나를 깨달 았다.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해서든 내가 꼭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는구나.' 깨달은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깨달은 다음이 문제였다. '가장 상상하기 힘든 방향'을 소운비는 상상해 내야 하는 것이다. 자연 그의 발과 손은 아 까보다도 더욱 느려졌다. '음, 이 경우 절대 내 앞쪽으로는 오지 않을 것이니... 그럼 앞쪽, 아니...! 또 늦었다. 아는 게 병이구나!' 소운비는 한탄했다. 술래잡기를 시작한 지 일 각도 되지 않아 그는 숨이 차 오르기 시작했다. 한 시진 넘게 산길을 지나왔어도 지치지 않는 그였지만, 조급한 마음으로 움직이게 되면 피로는 금세 찾아오는 법이었다. 어느 사이 그의 뒤로 다가온 혼음사의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좋다. 몸은 못 따라오는 것 같지만 이치는 제법 깨우친 것 같으니 다음으 로 넘어가자." 도깨비가 춤을 추듯 날뛰던 혼음사의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점잖게 뒷짐을 지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땀으로 범벅이 된 소운비는 제자답게 그 뒤를 따라 걸어야 했다. "도깨비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지. 도깨비처럼 생각하고, 도깨비처럼 움직 여야 망번신요보를 실전에 응용할 수 있다." 소운비는 큰 가르침을 얻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피곤하기도 하고 방금 얻은 가르침을 마음에 새길 생각으로 되뇌느라 고 소운비가 못 본 것이 있었다. 점잖게 이야기하는 와중에서도, 혼음사의의 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비의 날개처럼 잘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동쪽이구나...! 놈!' 속으로는 그런 독백을 읊조리면서, 혼음사의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이야기 로 넘어가고 있었다. "에, 또... 이 망번신요보가 다른 공격법과 함께 펼쳐지면 당해 낼 자가 없게 되지. 나의 특기는 점혈과 암기이다. 먼저 암기와 함께 이 망번신요보를 펼 치면 적의 눈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쉽게 이(利)를 취할 수 있다. 자, 이것을 받아라." 느닷없이 소운비의 두 손 위로 던져진 것은 생사맥결통이었다. '어?' 이쯤 되면 소운비도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아무리 사부와 제자 사이라고 해도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다. 한데 본인이 가장 아끼는 무기를 넘겨 준다는 것은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한 일인 것이 다. "생사맥결통을 쓰는 기본자세는, 가볍게 손목을 흔들어 흩뿌리듯 하는 것이 다. 해봐라." "예?" 그러다가 눈먼 손에 암기가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나, 혼음사의 는 소운비가 당황하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침을 내가 다 빼놓았다. 걱정 말고 한번 흔들어 봐." 그제서야 소운비는 생사맥결통을 혼음사의가 하듯이 가볍게 쥐고 손목을 흔 들어 보았다. 침을 다 빼놓았다던 생사맥결통에서 묵침 하나가 쏘아져 나온 것과, 우뚝 서 있던 혼음사의가 별안간 몸을 움직인 것은 거의 동시였다. 혼음사의의 소매가 펄럭이고, 생사맥결귀영폭침이 방향을 바꿔 동쪽 수풀 속으로 날아간 것도 한 순간이었다. 퍼어어엉! 수풀 속에서 폭발음과 함께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분분히 날리고 난 뒤 혼 음사의가 일갈하며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잡았다, 쥐새끼!" 혼음사의의 회색 옷자락이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을 때에야 소운비는 어떤 사람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혼음사의가 능청을 떨며 행보를 느 리게 한 것이 다 그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한꺼번에 깨달았다. 퍼어어엉! 수풀 속에서는 또 한차례의 폭음이 일었다. 이어, 너구리 사냥이라도 하듯 뿌연 연기가 그 안에서 뭉게뭉게 일어났다. 그것은 삽시에 안개처럼 시야를 덮어 버렸다. 그것은 생사맥결귀영폭침의 폭연(暴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소운비가 눈을 못 뜨고 기침을 해대고 있을 때, 무엇인가 서늘한 기운이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인가?' 정말 바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제기랄!" 안개가 걷히고 수풀 속에서 혼음사의가 옷을 털며 나올 때, 소운비는 방금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 결코 바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우 같은 놈일세그려." 혼음사의의 손에는 작은 표창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소운비는 물었다. "언제 아셨습니까?" "뭘?" "따르는 사람이 있다는걸요." "넌 몰랐냐?" "예." 미행자를 놓쳤다는 사실 때문에 낭패한 얼굴을 하고 있던 혼음사의가 푸들 푸들 비웃음을 날렸다. "멍청하긴. 너는 그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감(五感)을 열지 못 했단 말이냐?" "오감을 열어요?" "눈을 감고 있어도 귀로 볼 수 있고, 귀가 막혀 있어도 피부로 사방을 감지 할수 있는 경지 말이다. 내공 수련이 어느 궤도에 이르면 당연히 그렇게 되 어야지." 자기의 힘으로 내공을 수련한다면 혼음사의의 말마따나 자연히 그렇게 될 수 있다. 하나 소운비의 경우는 좀 달랐다. 자신의 힘으로 수련한 바는 극히 적고 순 전히 남으로부터 받은 힘이기 때문에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 다. "다음부터 그것을 가르쳐 주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떤 놈일까?" 혼음사의는 미행자가 남기고 간 표창을 만지작거렸다. 괴수의 입처럼 생긴 표창 손잡이 부분으로부터 안개가 솟구쳐 나왔다는 사실 이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시자란 굉장한 불안감을 심어 주는 존재이다. 혼음사 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정파의 놈들은 아닐 것 같군. 혹시 이 운비 녀석을 노리는 다른 색마들 아 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혼음사의는 문득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이를 먹더니 둔해졌지. 코앞이 바로 만음요화의 화금궁인데, 여기서 얼쩡 거리고 있었다니. 화금궁 계집년들이 냄새를 못 맡았으면 이상한 거지.' 그는 단번에 방금 사라진 미행자를 화금궁 사람으로 단정 지었다. 하긴 그 미행자가 여자인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화금궁에 꼭 여자만 있는 것은 아니 니까... "어서 돌아가서 짐을 꾸려야겠다." 혼음사의는 침중하게 읊조렸다. "짐을 왜 꾸립니까?" 소운비가 물었을 때는 이미 혼음사의가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여기 더 있어서 유리할 것이 없을 것 같다. 설마 하니 화금궁으로 가고 싶 은 것은 아니겠지?" 혼음사의는 더욱 조급한 마음에 망번신요보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따라와!" 어둑한 산길에 두 개의 그림자가 희번덕거리며 쏘아져 갔다. 사실 두 사람이 꾸려야 할 짐이란 거의 없었다. 만일 혼음사의의 방 구석에 놓여진 작은 단지만 아니었다면, 그는 초옥에 들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수 복산을 벗어났을 것이다. "내 새끼들!" 혼음사의는 인면자고들이 꾸무럭거리는 작은 단지를 소중하게 품에 넣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라. 다 갈 곳이 있으니..." 두 사람이 막 초옥 문 앞까지 나왔을 때였다. 저 멀리서 허둥지둥 이쪽으로 달려오는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또 그놈인가?' 소운비와 혼음사의는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비틀거리며 달려오던 작 은 그림자는 중간에 몇 번이나 거꾸러질 뻔했다. "아니?" 마침내 그 사람을 알아본 소운비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혼음사의는 진작에 알아보았는지 난색을 띠고 있었다. "계셨군요...!" 소운비의 부축을 받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것은 다름아닌 낙매였다. 그 녀의 품에는 광아를 싼 것으로 보이는 작은 포대기가 안겨져 있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십니까?" "의원님...!" 낙매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자신을 부축하는 소운비의 손길을 성의없이 뿌리치고, 그녀는 혼음사의의 발치에 가 엎드렸다. "광아가 이상합니다! 제발 도와 주세요." "아이가?" 혼음사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일찍 집을 나섰어도 낙매를 마주 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그에게 급한 것은 얼른 이 산을 벗어나는 것이지, 낙매며 아이의 목숨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소운비는 눈물을 뚝뚝 떨구는 낙매의 얼굴과 혼음사의의 얼굴을 번갈아 보 았다. 의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그가 먼저 낙매에게 물었다. "아이가 어떻다는 겁니까?" "오늘 아침에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더니 이젠 울지도 않습니다. 몸에 부스 럼이 나더니, 열도 많이 나고 눈이 뒤집어졌어요. 제발...!" 질문은 소운비가 했지만, 낙매의 대답은 혼음사의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혼 음사의는 딱히 뭐라 대꾸해 주지도 않고 그저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의 발끝 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단을 내린 것은 소운비였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소운비는 낙매의 팔을 잡아 일으키더니 오던 길을 돌아 초옥 안으로 향했 다. 혼음사의가 그의 팔을 잡으면서 속삭였다. "이놈아!" 소운비는 낙매가 듣지 못하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 말했다기보다는 으 르렁거렸다는 편이 나으리라. "애가 죽는다지 않습니까? 뒤에서 바로 뭣이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진맥이 라도 해보십시오!" 혼음사의는 소운비의 팔을 잡은 그대로, 그를 따라 초옥으로 되돌아설 수밖 에 없었다. "으음...!" 진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밤에 산길을 달려와 겉모습으로 봐서는 아이보 다 더 아파 보이는 낙매가 초조하게 입술에 침을 발랐다. "무슨 병입니까?" 입 밖에 내어 물은 것은 소운비였다. 소운비는 사실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이가 걸릴 병이라 해보았자 홍역(紅疫) 정도가 아닐 것인가? 혼음사의 정 도의 의원이라면 크게 힘쓰지 않고도 고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으음...!" 혼음사의는 쉽사리 대꾸하지 않고 또 한번 깊은 신음만 내뱉었다. "의원님...!" 낙매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혼음사의는 고개를 휘휘 젓더니 방바 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긁적였다. <양매창(楊梅瘡)> "흐으...!" 낙매는 절망의 숨을 토해 내더니 그대로 방바닥에 엎드려 버렸다. 양매창. 광창(廣瘡)이라고도 하고, 화류병이라고도 하며 더 넓게는 매독(梅毒)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 병. 낙매 자신이 그 병을 앓아 보았기에, 아이의 몸에 난 부스럼을 보고 짐작은 하였지만, 난봉꾼이나 탕녀들만 걸린다는 그 병에 설마 하니 갓난아이가 걸 릴 리 없다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모양이었다. "다 내 죄예요. 내 죄 때문에 광아가...!" 낙매는 목놓아 절규했다. 매독에 걸린 임부(姙婦)의 아이는 태 내에서 죽거 나, 또는 태 내에서 매독에 걸린 채로 태어나게 되는데, 광아는 후자의 경우 인 모양이었다. 소운비가 조심스레 물었다. "고칠 수 있습니까?" 혼음사의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전에 낙매 부인의 병은 고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소운비의 반복되는 질문에 비로소 혼음사의는 입을 열었다. "병은 고칠 수 있지." "그런데요?" "아이의 목숨은 구할 수가 없어." 이건 웬 이상한 대답인가? 소운비가 재우쳐 묻기 전에 혼음사의가 먼저 대 답해왔다. "양매창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준진사(準辰砂)라는 돌에서 짜내는 수은(水銀)이라는 물을 쓰는 것이지. 그 물은 물이면서 또한 쇠이기도 한 거 야. 일전에 그 병을 고친 것도 다 수은요법(水銀療法)을 써서 된 거야. 하지 만 수은은 그 자체에 독성이 있어 극히 작은 양만 써야 하지. 그 작은 양이 라 해도 어른이나 견뎌 내지 아이라면 양매창이 낫기 전에 수은독(水銀毒) 으로 죽고 말아." 한마디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포대기에 싸인 아이는 넋을 잃어 눈자위가 허옇게 뒤집어져 있고, 그 어머니는 엎드려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데 두 남자는 망연자실하여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운비는 알 수 있었다. 낙매의 눈물은 다만 아이가 다 죽게 된 것을 슬퍼 해서 흘리는 눈물만이 아니라는 것을. 거기에는 지나온 그녀의 인생에 대한 회한까지 함께 섞여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의원님...!" 낙매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그러시오." "지금 광아는 어떤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혼음사의는 주춤했다. 그러나 눈물기가 가시고 이제 차분 히 가라앉아 가는 낙매의 눈동자를 마주하고서는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었 다. "후... 양매창의 초기 증세는 당신도 겪어 봐서 잘 알 것이오. 광아는 태내에 서부터 주욱 몸 속에서 앓아 왔기 때문에 바로 말기로 넘어간 것 같소. 말 기에 이르면..." "계속하세요." 그가 약간 망설이자, 낙매가 재촉했다. "사람의 머릿속에는 골이 들어 있지. 양매창은 극심해지면 바로 그 골에 기 운을 미치오. 말하자면... 누군가 삽으로 자기 골을 파내 가는 것처럼 아프다 고 하지." 그것은 소운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비단 소운비 뿐만이 아니라 직접 겪어 보지 못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낙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광아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더 니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혼음사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잠들게 해주세요." 흥분할 일도 없는데 혼음사의가 말을 더듬거렸다. "무, 무어라고 했소?" "그런 고통을 겪게 할 바에 차라리 영원히 잠들게 해주세요!" 처절하게 한마디 뱉고는 낙매는 다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목소 리는 독을 바른 화살처럼 다른 두 사람의 가슴에 꽂혀 왔다. 어머니가 제 아이를 죽여 달라고 하는 이 말은 하늘이 분노할 만한 것이었 다. 하나 어느 누구도 그런 그녀를 탓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죽는 것보다 못한 삶도 있는 법이다. 인간의 힘으로 버텨낼 수 없 는고통이 깃들인 삶이 바로 그러하다. 자기 속으로 낳은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말한 낙매의 서러운 눈물은 그래서 용서받을 권리가 있었다. 하나 소운비는 용서할 수 없었다. 낙매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다. 그의 몸은 바람에 휩쓸 리는 나뭇가지처럼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일어서기는 했지만 그의 입에서 는 금방 다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광아를 안아 올렸다. "방법이 있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포기한 듯한 낙매의 말을 소운비는 허리에서부터 잘랐다. "찾아봅시다. 혼음사의!" 혼음사의는 열기에 들떠 있는 소운비의 말투에 놀라 몸을 움찔했다. 하도 목소리가 커서 그는 소운비가 감히 자신을 '혼음사의'라고 부른 것도 모르 고 대꾸했다. "응, 으응?" "그래도 당신은 보통은 넘는 의원이 아니오? 한목숨 구할 방법이 없소?" "하지만..." 소운비의 기세에 짓눌려 말끝을 얼버무리는 혼음사의였다. 소운비는 그의 망설임에서 어떤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주 없지는..." 어찌 된 일인지 혼음사의는 틈을 보이고 있었다. 소운비는 그 틈을 집요하 게 파고들었다. "글쎄 그게..."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어서 말을 해요!" 쾅! 소운비는 저도 모르게 한쪽 주먹을 쥐고 방바닥을 내리쳤다. 내리쳐놓고도 아픔을 모를 뿐 아니라 방바닥이 움푹 파인 것도 알지 못했다. '히익!' 혼음사의는 앉은 자리에서 한 치 정도 뛰어오를 만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열망에 타오르는 소운비의 눈빛이 그에게는 살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태도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낙매 역시 혼음사의의 얼굴에 시선을 못박아 두고 있었다. "휴우우..." 한숨을 내쉰 혼음사의는 모기 소리만하게 종알거렸다. "내 새끼들이 먹는 흑독사는 수은의 원료가 되는 준진사와 성분이 유사하 지... 일단 내 새끼들의 뱃속에 들어가면 독기는 사라지고 약기운만 남게 되 니..." 결국 해답은 혼음사의가 소중하게 품고 있는 그 단지 안에 들어 있었던 것 이다. "하지만 장담은 못해!" 궁지에 몰려 속을 털어놓던 혼음사의가 마지막으로 심술궂게 덧붙인 말이었 다. * * * 스무 마리 남짓하던 인면자고는 탕기(湯器)에 두 마리씩 들어가 하루 세 차 례씩 기름진 국물이 되어 광아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인면자고의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혼음사의의 얼굴은 우거지상이 되어 갔 다. "아이고 아까워라!" 불 위에 올려진 탕기를 지키고 앉아서, 때가 되어 단지 안에서 두 마리의 인면자고를 꺼낼 때, 먼 산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나 밥을 먹을 때마다 그 말은 반복되었다. "아이고 아까워라!"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아이의 눈동자가 차츰 정상으로 돌아오 고, 온몸에 번져 있던 오얏나무 열매 모양의 상처도 사라져 가자 낙매와 소 운비는 희색이 만면했다. 짐짓 큰 소리로 불평을 토로하던 혼음사의도 마침내 광아의 병이 깨끗이 나 아 까르르 웃으면서 자신의 염소 수염을 잡아당기게 되자 싫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말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이고 아까워라!" 아마도 천진난만한 광아의 얼굴을 보면 애지중지하던 인면자고들의 추억이 떠오르게 되는 모양이었다. 삼 일이 흐르자 광아는 더 이상 인면자고탕을 먹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소운비는 마치 자기 자식이 되살아난 듯 기뻤다. 아침부터 낙매와 함께 광 아의 재롱을 보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한쪽 구석에선 겨우 서너 마리의 인면자고만이 남은 단지 안을 구슬픈 얼굴 로 들여다보던 혼음사의가 또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오후가 되자 낙매는 땅이 머리에 닿도록 혼음사의에게 거듭 절을 하고는 집 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내가 맹가촌까지 바래다 주지!" 혼음사의는 기운이 쪽 빠진 얼굴로 낙매를 따라 나섰다. 막 사립문을 나서 다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소운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청화루 앞에서 만나자. 다른 길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어. 아무도 못 쫓아오 게 망번신요보를 써라." 마치 지금도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 듯한 은밀한 태도였다. 산길에서 괴인을 발견하고 삼 일이 지나는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 는데 굳이 떠날 필요가 있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소운비는 잠자코 고 개를 끄덕였다. 사립문 밖에서 낙매는 소운비에게 눈으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소운비도 눈 인사를 했다. 거기에 서 있는 것은 왕년의 명기도, 초라한 퇴기도 아닌 한 사람의 어머니 일 뿐이었다. * * * 해가 어스름 질 무렵이 되어 초옥을 살그머니 빠져 나온 소운비는 전력으로 망번신요보를 전개해 수복산을 빠져 나갔다. 약속한 청화루 앞에서 혼음사의를 만난 것은 달이 중천에 떴을 때였다. "따라온 놈은 없어?" "없는 것 같습니다." "물을 걸 물어야지. 오감도 열지 못한 놈한테... 아무튼 따라올 놈이라면 계 속 따라오겠지. 가자!" 혼음사의는 소매를 펄럭이며 남쪽으로 난 대로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청화루에 코끝 한번 내밀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은 참새가 방앗간을 무시하는 것처럼 희한한 일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가던 소운비는 문득 그의 가슴팍 옷자락이 홀쭉한 것을 발견 하고 의아해졌다. 아까 초옥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분명 그 안에는 인면자 고 몇 마리가 남은 단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저..." 소운비가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키며 궁금한 빛을 던지자, 혼음사의는 문 득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더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툭 말했다. "남은 것 모두 낙매를 줘버렸네!" "예?" 엉겁결에 반문을 던졌지만 소운비는 곧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만일 의 경우에 대비해 혼음사의가 그토록 아까워하던 인면자고를 몽땅 낙매에게 줘버린 것이다. 소운비는 새삼 감탄한 빛으로 혼음사의를 응시했다. 그 눈에 담긴 빛이 혼음사의를 고무시켰는지 입에서 줄줄 이야기가 새어나 왔다. "에... 혹시 복통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먹이라고... 아마 아이가 크면 보통 사 람보다도 훨씬 건강한 체질이 될 거야. 그만큼 영물이니까... 어이구 아까워 라!" 마지막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덧붙인 말만 아니라면 아마 소운비의 감정은 감탄을 넘어 존경의 경지까지 다다랐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소운비로서는 혼음사의가 천하에 상대 못할 악당이 아니라는 사실 을 확인한 셈이었다. 입으로만 생명이 중요하다 말하면서 손으로는 누런 황금만 세고 있는 의원 이 얼마나 많은가! 또 협의와 인의를 이야기하면서 친구의 뒤통수를 치거나 숱한 생명을 앗아 가는 무림인은 또 얼마나 많은가! 혼음사의는 그들보다 낫지는 않을망정 못하지도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 소운 비의 결론이었다. '그럼 나는? 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결국 나도 혼음사의보다 낫지도 않고 못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혼음사의가 저만치 앞장서서 걸어가다가 뒤를 보고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뭐 해? 빨리 따라오지 않구?" 소운비는 상념에서 깨어나 자기도 모르게 웃음 지으며 공손한 목소리로 대 답했다. "예! 사부님!" 소운비의 생각을 알 길 없는 혼음사의는 그의 해맑은 웃음에 괜시리 뜨끔해 졌다. '왜 웃는 거야, 저놈? 설마 뱃속에 인면자고도 없고 내 수중에 남은 것도 없으니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제 16 장 조우(遭遇)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도 될 만큼 작고 투명한 향로. "시아자맹 청아자농 감유도모아자반수기앙..." 꿈속의 속삭임처럼 들려 오는 나지막한 진언 소리에 맞추어, 그 향로로부터 피어나는 네 가지 색의 연기. 네 줄기 연기는 앞쪽을 향해 일 장 가량 뻗어 나가다가 각각 용과 호랑이, 주작과 현무의 형상을 허공에 그려 갔다. 바로 만음요화의 마병 혼혼옥잡이 빚어 내는 기경(奇景)이었다. 네 가지 영물의 형상은 그대로 앞으로 뻗어 흐릿해지다가 한 사람의 콧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벌거벗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탐서랑이었다. 그의 나신은 기름을 바르고 햇빛에 그슬린 것처럼 구릿빛으로 윤이 나고 있 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몸뚱어리에 손톱 끝이라도 대본다면 한겨울의 화로 처럼 한창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탐서랑의 맞은편에서 혼혼옥잡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진언을 외우고 있는 것 은 만음요화였다. 시간이 흘러 만음요화의 눈에 지루한 기색이 감돌기 시작할 때쯤, 탐서랑이 가느스름하게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입을 둥글게 모으며 한 소리 뱉었다. "흡(吸)... 토(吐)!" 순간 영물들의 꼬리인 양 흐릿한 연기의 뒷부분이 남김없이 탐서랑의 입 속 으로 빨려 들어감과 동시에 코에서 하얗고 맑은 기운이 뭉클 토해졌다. 만음요화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혼혼옥잡에서 빠져 나갔던 연기들을 회 수해 들였다. 이윽고 탐서랑은 뜻을 이룬 자다운 큰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하하! 드디어 이루었다. 대락불사신공(大樂不死神功)!"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가가대소(呵呵大笑)를 발하고 있는 탐서랑을 보며 만 음요화는 속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신공은 무슨 얼어죽을 신공...! 천하의 신공이 다 목을 매 자살하면 그게 신 공이겠다. 고작 장생비법 하나 연성해 놓고 저렇게 난리를 치다니.' 하지만 겉으로야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축하드려요! 인세에 얻기 힘든 기연을 얻으셨군요." 탐서랑은 남의 속도 못 읽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참으로 온몸이 날아갈 것 같군. 화금궁의 모든 여자들이라도 한번에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야." 마치 자신이 화금궁의 주인인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러나 만음요화는 기분 나쁜 내색은 하지 않고 요염하게 웃으며 그에게 옷을 걸쳐 주었다. "그럼 오늘은 녹의 항렬 제자 셋을 들여보내 드리겠어요. 푹 쉬시고 내일은 제가 말한 곳으로 함께 가도록 해요." "싫소!" 난데없는 거절의 말에 만음요화는 흠칫했다. "녹의 항렬 제자는 싫단 말이오. 난 당신을 바라오." 탐서랑은 몸을 틀어 만음요화의 허리를 껴안으며 속삭여 왔다. 그 바람에 걸쳐 주려던 옷은 땅에 떨어지고 탐서랑의 나신이 만음요화에게 바짝 밀착 되었다. 기왕 내친 김에라고, 탐서랑은 만음요화의 목덜미에 입을 대더니 슬금슬금 아래쪽으로 미끌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만음요화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뿐 아니라 두 눈에는 살기까지 끓어올랐다. '이놈을 그냥 콱...!' 하나 만음요화는 절세의 인내력으로 그 살심을 억눌렀다. 그리고 정신없이 가슴팍에서 허우적거리는 탐서랑을 내려다보며 제법 흥건한 신음을 흘려 주 었다. "아... 아...! 이러시면... 안 돼요!" 소리만 들어서는 탐서랑의 애무에 함빡 빠져 버린 열여섯 처녀의 미태처럼 느껴질 것이다. 만음요화는 교태있게 몸을 비틀어 탐서랑의 품에서 빠져 나 오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는 요새 몸이 별로 좋지 않아 남자를 멀리 하고 있어요. 녹의 항렬 제자 가 싫으시다면 싱싱한 백의 항렬 애들로 준비하겠어요." 탐서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의 속마음도 썩 싫 지는 않았다. 백의 항렬이라고 하면 화금궁 안에서도 가장 어리고, 또 단 한 번도 꿰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숫처녀들의 집단이 아닌가! 게다가 보통 숫 처녀라고 하면 앙탈만 심하고 비명만 질러대기 일쑤지만, 화금궁이라는 최 고의 교육집단에서 자라난 여자들이기에 처녀라고 해도 기본적인 기교는 익 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탐서랑은 만음요화를 품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은커녕 목이 간질간질하니 구미가 부쩍 당기는 것이었다. "아쉽지만 뭐 궁주가 정 그렇다면...!" 능청을 떠는 탐서랑을 남겨 두고 만음요화는 그의 방을 빠져 나왔다. 그녀 의 얼굴에 감도는 것은 싸늘한 냉소뿐이었다. 그날 밤, 무산각은 달콤한 신음 소리와 진한 육향(肉香)으로 가득 찼다. "아! 오랑! 나의 오랑!" 만음요화는 근 몇 년 동안 낸 적이 없는 절정의 신음을 토하며 정인의 이름 을 부르고 또 부르고 또 불렀다. 그녀의 정인은 낮고 높은 구릉(丘陵) 같은 여체 위에서 구슬 같은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몸의 흔들림에 따라 흔들리는 촉촉한 까만 머리. 단 김을 내뿜는 소녀처럼 붉은 입술... 만음요화의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놀리는 그 미청년은 다름아닌 용양도인의 아들 오랑이었다. 땀에 젖은 두 개의 육체는 떡 치는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부딪쳐 갔다. 그 흔들림의 박자가 점점 격렬해지고 마침내 사람의 몸으로는 더 이상 빠를 수 없을 때까지 치달아 간 뒤... "으으으응..." 누구의 것인지 모를 깊은 한숨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은 축 늘어졌다. 오랑은 만음요화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만음요화 역시 호흡을 정리하며 자신 위에 누운 오랑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 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미청년의 방중술은 술(術)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다. 한데 천하에 겪어 보지 못한 자세가 없고 써보지 않은 기 술이 없다는 만음요화가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 닌가! 나이로 따지자면 오랑의 어머니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만음 요화다. 한데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남자에게보다도 만음요화는 훨씬 빠져 들고 있 었다. 그녀는 어머니 같기도 하고 사랑에 푹 빠진 처녀 같기도 한 표정을 지으며 오랑을 처음 만났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젊은 처녀로 소운비를 꼬이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그 젊은 처녀가 소운비와 함께 달아나 버린 뒤, 열이 뻗칠 대로 뻗쳐서 단신으로라도 추적하기 위해 화금궁을 막 벗어났을 때였다. 비에 촉촉히 젖은 수림 속에 한 미청년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의 머리카락 은 여인보다도 검었으며 살결은 달보다도 희게 빛났다. -오랑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묻는 만음요화에게 그렇게 대답하며 그가 박속 같은 이를 드러내 웃 음을 보였을 때, 만음요화는 이미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것을 깨닫고 있었다. 천하의 탕녀가 무슨 사랑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새 남자를 만나게 되면 언제나 사랑에 빠지곤 했었다. 다만 그 사랑이 유지되는 기간이 짧다 는 것이 문제지만. 사랑의 힘이란 과연 묘해서, 자신이 고아이며 양부모가 돌아가신 뒤 친부모 를 찾아 세상 유람을 떠났다는 오랑의 말에 만음요화는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좋은 말로 설득해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올 때, 그녀는 소운비 를 쫓는 따위의 일은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은 끝을 모르는 달콤한 사랑의 향연이었다. 만음요화가 사흘이 멀다 하고 상대를 바꾸며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이번 경우는 각별히 심했다. 그녀는 아예 거기서 빠져 나올 생각이 없는 것처럼 완전히 오랑에게 빠져 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해요?" 오랑이 속삭여 오는 소리에 만음요화는 번뜩 회상에서 깨어났다. "응, 좋은 생각." 만음요화는 달콤하게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눈과 눈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밀어들이 오가고, 오랑도 미소 지었다. 정겨운 풍경이었다. "내일 어디 간다면서요?" 오랑은 누나에게 그러듯이 만음요화의 품에 기대며 물었다. 만음요화는 얼 버무렸다. "응, 어딜 좀... 금방 올 거야." "어딜 가는데요?" "알 것 없어요." "혼자 가나요?" "아니..." 오랑은 어린아이처럼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고, 만음요화는 계속 말끝을 얼 버무리고 있었다. 그 문답의 행렬은 만음요화가 오랑의 품속으로 파고들면 서야 끝이 났다. "오랑과 함께 있을 때는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 달콤한 이야기만 하고 싶다구." 그녀의 손이 끈쩍끈쩍하게 오랑의 몸을 더듬어 가자, 그도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고 만음요화의 긴 머리칼 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그 향긋한 머리 내음을 맡으면서도, 그의 눈은 만음요화가 알지 못 할 어떤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날 밤. 무산각에서 날아올라 옥문을 빠져 나간 뒤 동백산의 어느 자락으로 날아가 는 까마귀가 있었다. 울음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날아간 그놈이 내려앉은 것은 벼락에 맞아 썩어 가는 고목의 가지 위였다. 까아아악! 까마귀가 달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울음을 토해 냈다. 순간, 그 까마귀가 앉아 있던 나뭇가지가 꿈틀거리더니 까마귀의 다리를 잡아챘다. "전갈이 왔어." 나뭇가지에서 연결된 나무 둥치까지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막 구름을 벗 어난 달빛에 드러난 것은, 나무의 모습으로 은신하고 있었던 사람의 형상이 었다. 놀랍게도 도깨비처럼 등장한 그 사람은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그 얼굴에 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귀기가 감돌고 있었는데, 그것만 아니라면 매우 귀엽게 여겨질 용모였다. 까마귀는 훈련된 놈인지 놀라거나 발광하지 않고 얌전히 그 소년의 손바닥 에 한개의 둘둘 말린 종이를 토해 냈다. <내일 일이 있을지 모르니 항상 신호를 기다려라.> 소년은 그 속에 적힌 전갈을 읽고는 자신의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까마귀는 왔던 방향으로 날아갔고, 소년은 근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의 근처에서, 사람의 말을 할 수 없는 사물들로부터 몇 마디의 말이 튀어 나왔다. 나무라든가, 바위, 혹은 땅바닥 등이 그것이었다. "찾고 있는 그 소운비라는 놈을 발견한 걸까?" "소문주님은 여자들만 있는 곳에서 잘 버티시는군." "푹 자두자. 내일은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니까. 기회는 한번뿐이야." "혈루(血淚)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해야겠지." 전갈을 전했던 소년이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이면서 다시 나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소리도 사라지고 흔적도 가셨지만, 그 일대를 감도는 으스스한 귀기만큼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 * * 만음요화는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향수(香水)로 목욕을 하고 몸에서 미끌 어져 내려 버릴 듯한 비단옷을 꺼내 입었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갈 정도로 머리를 빈틈없이 틀어 올리고 청동거울 앞에 서서 자태를 비춰 보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고작 출발점이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미소를 지웠다. 이럴 때일수록 긴장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어렵게 온 길이었던가. 아니,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으 리라 생각했었던 길이다. '한치의 실수도 저질러서는 안 돼, 옥녀(玉女)!' 옥녀. 얼마 만에 불러 보는 이름인가. 그 촌스러운 이름이야말로 만음요화의 본명 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녀 혼자뿐이었다. 알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나이가 들어 죽었고, 좀처럼 하늘에서 데려가 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는 만음요화가 사람을 보내 도와 주기도 했다. 과거 를 묻어 버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옥녀는 화금궁의 궁주이자 무림제일탕녀가 아닌, 어느 시골 부호집의 하녀 이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목구비가 도드라졌던 옥녀는 열 살이 되던 해에 주인 마님 의 부름을 받았다. 주인 나리께서 연로하시어 입이 돌아가는 병에 걸리셨는 데 동첩(童妾)을 품어야 회생한다는 것이다. 열 살 위인 막내 도련님을 연모하던 옥녀는 그런 변태적인 처방을 내린 의 원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우연인지 정말 효 험이 있어선지 두 달 만에 주인 나리가 병석에서 일어나는 데야. 하지만 그 후에도 그녀의 처지는 별반 바뀌지 않았다. 손녀라고 해도 이상 하지 않을 그녀를 주인 영감은 변함없이 이부자리 속으로 끌어들였다. 대신 주인집 외동딸같이 좋은 방과 좋은 옷과 기름진 밥상이 그녀에게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수동적인 옥녀의 태도를 고치기위해서라 며 온갖 약과 교육이 동원되었다. 그 수고의 결과는 옥녀가 나이보다 조숙 하게 그 세계에 빠져 들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옥녀는 점점 파리하고 말없는 아이로 자라났다. 옥녀가 집을 뛰쳐 나온 것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져 내리던 어느 새벽이었다. 그날, 옥녀의 침실로 사모하던 막내 도련님이 들어온 것이 다. 막내 도련님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척이는 그녀를 때리고, 입을 틀어막은 뒤 자신의 욕망을 쏟아 붓고는 올 때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참 뒤에 정 신을 차린 옥녀는 옷을 수습하고 그 길로 그 집을 뛰쳐 나왔다. 마음속에는 세상 남자들에 대한 이글거리는 증오심을 품고서. 그때가 열두 살. 열세 살의 생일을 맞이하기 직전에 그녀는 전대 화금궁주를 만났다. 그리고 무림인으로서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화금궁주의 직위를 계승하고 나서 그녀가 제일 처음 한 일은 그 부호의 집 을 도륙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결혼하여 두 딸의 아버지가 된 막내 도련님의 가족만을 화금궁으로 끌고 왔다. 그녀는 아이들과 부인이 보는 앞에서 그와 관계를 가졌다. 물론 가족의 목 숨을 담보로 한 억지 정사였다. 애초에는 두고두고 괴롭힐 생각이었다. 한데 중간에 기분이 잡쳐지고 말았다. 막내 도련님은 얼굴은 울상일지언정 아내 와 아이들이 보는 앞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사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 역시 즐기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해서는 진짜 괴롭히 는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녀는 막내 도련님을 죽여 버리고, 가족은 풀어 주 었다. 복수를 하고 싶으면 나중에 복수를 하러 오라는 말과 함께. 십여 년 함께 잠자리를 해온 남편의 심리를 옥녀보다 더 미묘하게 알아챘던 것인지, 막내 도련님의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복수할 가치가 없는 일이지요. 아내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갔다. 신강(新疆) 쪽으로 떠났던 그 가족이 돌림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 은 그로부터 삼 년 후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 세상에서 옥녀라는 존재는 없 어졌다. 화금궁 궁주요, 천하의 탕녀 만음요화라는 새로운 강호인의 탄생과 교차하 면서...! 만음요화는 손바닥 위에 혼혼옥잡을 올려놓고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이 혼 혼옥잡이야말로 전대 궁주 시절만 해도 그저 특이한 집단일 뿐이었던 화금 궁의 이름을 날리게 만든 힘의 근원이었다. '기연이란 바로 그런 것이야!' 궁주의 위에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백산 일대에서 괴사가 벌어졌 었다. 산중의 짐승 수컷들이 떼죽음을 당해 있었던 것이다. 그 괴사의 중심은 거대한 고목이었는데, 수하들을 이끌고 정탐을 나간 그녀 는 고목의 뿌리 밑에서 혼혼옥잡과 사용법을 적은 낡은 책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 무기로 강호의 숱한 호걸들을 무릎 꿇렸으며, 자존심을 건드린 무산음호를 사로잡았고, 이제 또 하나의 대계를 이루려 하고 있었다. '계집의 속이 얕다고들 비웃지...' 만음요화는 또 한번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디 그 얕은 속에 당하는 꼬락서니들을 좀 봐야겠어!' 탐서랑을 이용해 색존의 자리에 오르려는 것이 그녀의 계산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탐서랑은 완벽하게 소운비로 가장해야 하며, 또 누가 보아도 가공스 런 색마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내기에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순탄 하지 않을 것은 뻔하기 때문에, 탐서랑은 최대한 강자가 되어야 했다. 대락 불사신공으로는 침대에서나 강자이지, 무림의 강자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탐서랑은 아무리 강해져도 결국은 그녀의 허수아비여야 했다. 오늘, 그녀는 탐서랑을 바로 강한 허수아비로 만들 것이다. "이런 지하동굴이 화금궁 안에 있는지는 몰랐는데!" 끝없이 아래로 이어진 계단의 음침한 분위기가 어쩐지 불안해진 탓일까. 탐 서랑은 왕모선을 꺼내 부치며 중얼거렸다. 만음요화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머쓱해진 탐서랑은 더욱 요 란하게 부채질을 했다. 지하동부로 들어오기 직전에서야 무산음호가 화금궁 안에 머물고 있으며 그 의 내공 진전을 이어받게 해주겠다는 만음요화의 설명을 들은 탐서랑은 갑 자기 굴러 들어오는 떡에 좋다 싫다 말할 여유도 없는 형편이었다. '물론 내가 강해지는 것이 이 여우의 입장에서도 좋긴 하겠지만... 단지 그 이유뿐일까?' 그가 그렇게 찜찜한 심정을 곱씹고 있는 동안, 어느새 계단은 거의 끝나 있 었다. 예전에 소운비가 서 있었던 그 공터에 다다른 만음요화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안쪽 동굴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무산음호!" 대답이 없었다. 만음요화는 망설이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탐서랑도 그 뒤를 따랐다. 그 안에 무산음호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왕년에 강호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무산음호가 아니었다. 거무죽죽한 코피를 흘리며 옆으로 누워 있는 모양이, 이미 죽었거나 혹은 죽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무산음호의 동체를 먼발치에서 확인한 만음요화는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무산음호의 몰골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그녀의 예민한 귀 에 포착된 것이다. 그것은 침입자의 숨소리였다. "누구냐!" 만음요화는 몸을 왼쪽으로 틈과 동시에 동굴 석벽을 향해 일장을 쏘았다. 침입자는 그 안에 은신해 있었던 것이다. 대담하게도 침입자는 은신처에서 튀어나오며 장력을 마주쳐 왔다. 하나 그 기세는 대단치 않았다. 몸을 틀어 장력을 옆으로 흘리면서 만음요화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침투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저놈이 무산음호를 저 지경으로 만든 모양인데, 이 정도 실력에 당할 그가 아니잖은가?' 아무튼 의아한 것은 침입자를 잡아 놓고 문초해 볼 일이었다. 그녀가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침입자에게 한소리 날카롭게 호통을 치며 달려드는 순간, 장법보다는 훨씬 세련된 수법으로 표창 하나가 날아왔다. 만음요화는 몸을 뒤집어 표창을 피하고 계속 전진했다. 한데, 뒤쪽의 석벽에 부딪친 표창이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폭발하듯 흰 연 기를 뿜어 냈다. 아차 하는 동안 흰 연기는 자욱하게 깔려 짙은 안개처럼 동굴 안에 꽉 찼다. "서라!" 안개가 약간 가신 뒤 만음요화는 이를 갈며 침입자가 갔을 동부의 입구 쪽 으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어안이 벙벙해진 탐서랑뿐이었다. 그는 먼저 무산음호 를 살펴보았다. 죽은 것은 아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칠공으로 이미 내보낼 것을 다 내보낸 듯, 눈은 멍하니 천장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고 사지도 뻣뻣 했다. 소위 살아 있으되 살아 있은 것이 아닌 상태가 된 것이다. 만음요화가 가졌던 의문을 탐서랑도 똑같이 품었다. '아까 그 복면인 정도에 당할 실력은 아닐 텐데?' 그도 만음요화도 모르고 있었다. 무산음호가 이미 소운비를 위해 본원진기 를 다 내놓았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싸움하는 법만 알 뿐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거기에 가해지는 어떤 일격이라도 충분히 지금과 같은 처지에 빠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천 개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 지하동부의 입구까지 쫓아간 만음요화는 입구 를 지키던 두 제자가 혼절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침입자는 도망치는 기술에는 일가견이 있는지 이미 흔적도 찾아볼 길이 없 었다. 만음요화는 소리를 질러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제자들을 불러모은 다음 그 녀들에게 전궁에 수색령을 내리고 옥문을 철저히 폐쇄하라고 일렀지만, 이 미 그자를 잡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다. 다시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만음요화의 표정은 복잡했다. 일이 처음부터 어 그러진것이다. 포기와 실망으로 감각이 흐트러져서인지, 만음요화는 그 순간 동부의 문밖 바로 뒤에 숨은 오랑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아까 자리로 돌아와 볼품없이 쓰러져 있는 무산음호를 내려다 보게 될 때까지 쓴 입맛을 다시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은 쓸모가 있었는데...' 태원옥호공을 통해 탐서랑을 강한 허수아비로 만들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말 았다. 만음요화는 잠시 무산음호를 이 자리에서 죽게 만들까 어쩔까 하다가, 그래 도 조금은 더 써먹을 수 있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탐서랑에게 그를 업 으라고 말했다. 돌아서던 그녀의 눈이 우연히 아까 침입자가 던진 표창에 머물렀다. '아차... 설마 하니!' 눈빛을 빛내던 그녀는 성큼성큼 그 앞으로 다가가 표창을 집어 들었다. 그 리고, 계획이 어그러진 실망보다 몇 배 큰 놀라움이 그녀의 얼굴에 가득 차 올랐다. "몽혼표!" * * * <예상 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화금궁 안에 소운비의 흔적은 없고 만음 요화가 무산음호를 감금해 놓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아 냈습니다. 만음요 화는 최근 탐서랑과 한패가 되었는데, 이자들이 분명 한 수 흉계를 꾸미 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 예의 주시할 가치가 있으니 용양혈루단은 한동 안 아버님께 돌려보내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까아아아악! 용양도인이 오랑으로부터 온 전갈을 다 읽었을 때, 오랑의 까마귀인 오아 (嗚兒)가 흉측한 울음 소리를 토해 냈다. 용양도인은 살찐 턱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산음호가 거기 있었다니... 만음요화 그 계집이 보통내기가 아니로구나.' 그가 색마들 중에, 아니 무림인들 중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오직 무산음호뿐이었다. 자신의 특기가 주로 내공 방면인데, 무산음호의 내공은 그를 훨씬 앞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무산음호를 만음요화가 붙잡 고 있다면, 이제는 두려운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다. '색존이고 뭐고 그냥 여기 잠자코 처박혀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문득 그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한초가 그의 목을 끌어안은 것이다. "걱정이 많아 보이세요, 어르신." "하아..." 용양도인은 짐짓 신중한 기색을 보이며 얼굴 근육을 실룩였다. "걱정하는 마음이 너한테까지 미치다니, 내 수양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하지 만 천하의 형세를 걱정하려니 어쩔 수가 없어...! 나에게도 천하는 버거운 짐 임에 틀림없다." "강호에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래도 천하를 걸머지기에 족한 사람이 있다면 오직 어르신 한 분뿐일 거예요." 한초의 말이 입에 발린 아부임을 알지 못하는 용양도인은 입을 귀 밑까지 찢었다. "그래? 네 생각에도 그러냐? 하긴 욕심없이 초야에 묻혀 지내려고 몇 번이 나 마음을 다잡았지만 워낙 세상이 혼탁하니..." 속이 얕은 자는 두려움도 얕은 것인지, 편리하게도 그 두려움은 금방 잊혀 져 버렸다. 어린 소년의 말 한마디에 고무된 용양도인은 어느새 오랑이 물어다 줄 색존 의 자리를 꿈꾸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래도 그 녀석이 무공은 열심히 익혔으니... 한데 좀 어른스러워진 것 같 군.'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로 그런 짐작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용양도인이었 다. * * * 개봉부 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던 혼음사의는 중간에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 다. 개방 장로의 죽음으로 격색마회의 영웅대회가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주워 들 은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소운비의 물음에 대한 혼음사의의 대답은 여전히 불친절했다.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하긴, 묻지 않아도 알 수는 있었다. 그들이 걷고 있는 것이 사천행성 쪽으로 뻗은 관도였기 때문이다. "저기서 밥을 먹자!" 혼음사의가 길가의 한 주루를 가리켰다. 밥도 팔고 술도 파는지 저녁 어스 름에 손님이 꽤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구석의 한 자리를 잡고 끼니를 때울 만한 음식을 주문했다. 혼음사의는 불안한 듯 시선을 사방으로 굴렸다. 객점이니 주루니 하는 곳은 말썽이 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사실 요즘 같은 시절에 이렇게 관도 변에 있는 주루나 객점을 이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상인이나 무림인들이고, 그 사 람들이라는 것이 말썽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게 다가 자신들의 처지가 각별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은 들어맞아 주문한 음식이 채 나오기도 전에 소란이 벌어졌다. 콰앙! 한 떼의 사람들이 주루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손님들이 모두 그 자리에 서 움찔하며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들어온 사람들은 일곱 명의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로, 뭐 특별한 이유가 있 어서라기보다는 문이란 원래 손이 아니라 발로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 문에 그렇게 요란하게 등장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중앙의 가장 큰 자리로 떠들썩하게 몰려가 탁자 위에 냄새나는 발을 올려놓고는 요리와 술을 시켰다. 그저 '가장 비싼 걸로'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돈이 많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지불할 자신이 있는 듯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서로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주루의 모든 손 님들이 들으라는 듯 그들의 목소리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이번에 잡은 하남삼흉(河南三兇)은 생각보다 값이 덜 매겨졌는걸?" "돈을 벌려고 한 것인가, 어디. 거래를 트기 위해 시작한 것이니 앞으로 돌 아올 이익을 생각해야지." "하지만 그걸로야 어디 변변한 벌이가 되는가! 지난번에 귀나찰(鬼羅刹) 야 월화(夜月花)를 잡았을 때는 좋았는데 말이야." "귀나찰이야 돈을 많이 받아서 좋았나? 형산세가(衡山世家)에 넘기기 전에 고 탱탱한 것을 이리저리 주물러 보아서 좋았지. 안 그래?" "머리수로 나누면 하남삼흉이 귀나찰 하나보다도 덜 받은 셈이지. 게다가 하남삼흉은 이리저리 주물러 볼 수도 없었잖아." "하긴 자네는 귀나찰을 세 번이나 끼고 놀았지. 넘길 때도 아쉬워하지 않았 나?" "하! 그러는 자네는 하룻밤 내내 끼고 있지 않았나? 그년, 자기를 능지처참 해 죽이겠다는 형산세가에 넘겨질 때 오히려 더 좋아하더군." "그게 다 나 때문에 녹초가 되어서 그런 게 아닌가. 아마 죽을 때까지도 몸 서리를 쳤을 걸세. 계집이란 말이야..." 잡담은 지저분한 육담(肉談)으로 슬슬 변질되어 갔다. 주점 사람들 중에 좀 식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직한 속삭임들이 번져 갔다. "저 사람들이 바로 그 현상금 사냥꾼 흑포칠랑(黑捕七狼)인가 보군." "주로 세가나 부잣집의 청부를 받아 흉악범이나 원수들을 잡아다 준다지?" "하지만 워낙 손속이 잔인해서 그 흉악범들보다 더 흉악하다더군." "쉿!" 자기들에 대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흑포칠랑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흘렀다. 그들은 오만하게 주루 안을 휘휘 둘러보았는데, 그 눈빛을 마주보는 사람도,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사람도 없었다. 문득 흑포칠랑 중 한 사내가 나머지 일행에게 말했다. "주문한 것들이 좀 늦게 나오는군. 시간도 남는데 우리 여기서도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다른 사내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여긴 사람들도 많으니 분명 한두 명쯤은 현상금 걸린 자들이 숨어 있을 만도 하군." 심심한 판에 야료를 부려 보자는 의도였다. 일이 귀찮게 돌아가자 문 가까 이 있던 몇 사람이 식사도 채 마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 흑포칠랑 중 두 사람이 벌써 입구를 막고 있었다. "흐흐... 본인들이 여기서 잠시 탐문을 하려 하니 가더라도 협조를 좀 해주 시고 가셔야겠소." 포교도 아닌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탐문을 하냐고 따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자리에서 일어났던 서너 명의 사람들은 다리를 후들거리다가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흑포칠랑 중 텁석부리 한 놈이 짐꾸러미에서 두루마리 뭉치 를 꺼냈다. 아마도 현상범들의 용모파기(容貌把記)를 해둔 것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문을 지키는 두 명을 빼고 다섯 명이 한꺼번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몰려가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디, 얼굴들 좀 들어 보시오."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든 다섯 명의 상인들의 얼굴들을 힐끔거리던 텁석 부리가 두루마리를 뒤적거려 보더니 그 중 하나를 뽑아 들고 고개를 갸웃거 렸다. 그리고는 상인들 중에 오른쪽 뺨에 사마귀가 난 사람을 가리키며 말 했다. "거,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지적된 상인이 놀라 펄쩍 뛰었다. "제가 누구랑 비슷하단 말씀입니까?" "금룡장(金龍莊)에서 야광주(夜光珠)를 훔쳐 가지고 달아난 하인 놈 말이 야!" 텁석부리는 숫제 반말로 지껄이며 두루마리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사마귀 난 상인은 더욱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도대체 닮지가 않은 얼굴을 가지고 닮았다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하나도 안 닮지 않았습니까?" "사마귀가 났잖아!" "그건 눈 옆에 난 사마귀잖아요." "이게 어디 눈 옆이야! 뺨에 붙은 것을 화공이 약간 위에 그려 넣은 것이 지." 우겨도 보통 우기는 것이 아니었다. 사마귀 난 상인이 울상이 되어 어쩔 줄 을 몰라 하는데, 그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덩치 큰 장한이 재빨리 나섰 다. "제가 자세히 좀 봐도 되겠습니까?" 텁석부리는 장한에게 뭐라고 해대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가 별안간 마음 이 변했는지 아무 말 없이 두루마리를 넘겼다. 장한은 별반 자세히 살펴보 는 것 같지도 않더니 두루마리를 말아 텁석부리에게건네 주었다. "비슷하긴 합니다만, 이 사람은 아닌 것 같군요. 안 그렇습니까?" 건네 받은 두루마리를 조금 풀어 본 텁석부리가 싱긋이 웃더니 자기 이마를 탁 쳤다. "이런! 배가 고파서 제대로 못 보았나? 내 눈이 어떻게 되었는가 보이. 정말 전혀 닮지 않았군. 이거 미안하게 됐소."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은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었다. 실은 혼음사의와 소운비를 비롯해 눈치 빠른 사람들은 다들 그 이유를 알아 채고 있었다. 우두머리 상인이 두루마리를 받았다가 다시 돌려줄 때, 그 안 에 가볍지 않은 돈주머니를 끼워 넣은 것이다. 흑포칠랑은 어느새 옆 자리로 옮겨가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이자들은 그저 야료를 부리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짓 자체가 현상금 외에 부수입(副收入)의 일종인 모양이었다. '저런 쓰레기 같은 자들이...!' 소운비가 분개하여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흑포칠랑의 한 사내가 구석 자리를 가리키며 빈정거렸다. "저건 뭐야! 재수없게!" 그가 가리킨 자리에는 여승 한 사람과 여도사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사내는 침을 카악, 뱉으며 모두에게 들리도록 외쳤다. "삼고육파(三姑六婆) 중 하나라도 만나면 하루가 재수없다고 하는데, 그 중 둘이나 만났으니 내일까지 재수가 없을 것 아닌가?" 삼고육파. 세 명의 아주머니와 여섯 명의 노파라는 뜻이다. 세 명의 아주머니란 비구 니와 여도사, 그리고 여자 점쟁이를 말하고, 여섯 명의 노파는 여자 뚜쟁이, 여자 중매인, 여자 마술사, 여자 도둑, 여자 돌팔이 의사, 여자 산파를 말한다. 어 리석은 풍습의 하나에 바로 이 삼고육파를 꺼리는 것이 있는데, 이들이 집 안에 들어오면 간음과 도둑질로 엉망이 되며, 뱀이나 전갈처럼 해로운 것이 니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남자야말로 정말 남자 다운 남자라고 하였다. 나이 지긋한 두 여인은 사내의 면박에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제기랄! 너희들은 양심도 없냐? 혼자서 나다니는 것도 조심해야 할 마당에 어째서 같이 몰려다니는 거냐?" 그 사내는 아마도 전에 여도사나 비구니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지 어떤 지 돈 뜯어 내는 일에는 관심을 잃고 발까지 굴러 가며 두 여인을 향해 으 르렁댔다. 사람들의 시선도 그쪽을 향해 집중되었다. 여도사는 완전히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는데, 다행히 비구니 쪽이 침착하 게 대답했다. "우리는 원래 자매인데, 각기 다른 곳으로 출가하여 나이를 먹다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 함께 식사라도 하려고 들어온 것입니다." 사내는 두 여인의 사이에 놓인 탁자 위에 발을 척 올려놓았다. 두 여인이 시킨 채소 요리 위로 고약한 발냄새가 풍겼다. "흥! 내가 너희들의 신세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 줄 알아? 나는 다 알고 있 단 말이야. 너희들에겐 아마 한 자매가 더 있는데 그년은 점쟁이일 것이다. 그리고 네 년들의 어미는 뚜쟁이일 것이고...!" 자기보다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욕지거리가 퍼부어졌다. "네년들에게는 다섯 명의 이모가 있는데 아마도 매파, 산파, 도둑, 마술사, 사람 잡는 의사겠지. 틀렸냐?" 아예 집안을 삼고육파로 몰아 버리는 말이었다. 이제는 비구니도 안색이 변 해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여도사는 고개도 감히 들지 못했다. 패악(悖惡)을 부리는 사내 옆으로 다른 네 명도 버티고 섰다. 비구니는 누군가 도와 줄 사람이 없을까 하는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는 데,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쳇! 비구니나 여도사는 그렇게 놀리는 것보다는 다르게 놀리는 것이 더욱 재미있는데...' 혼음사의는 자기만의 '놀리는 법'을 상상하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었 다. 문득, 앞에 앉은 소운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그의 몸이 움찔했 다. 순간 혼음사의는 짜증이 났다. '아니 이놈이 아무데나 나서려고...!' 혼음사의는 지그시 그의 팔을 잡아 도로 앉혔다. 아니, 그럴 생각이었다. 한데 결과는 엉뚱하게도 소운비의 힘에 이끌려 혼음사의까지 자리에서 일어 나는 쪽으로 벌어지고 말았다. '어이쿠!'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귀찮은 일이 아닌가. 벌써 일곱 명의 흉흉한 눈빛이 두 사람을 향해 집중되고 있었다. "뭐야, 너희들은?" "힘없는 분들을 괴롭히지 마시오." 소운비는 그렇게 대답했다. 두 여인에게 시비 걸던 사내가 다시 한번 침을 칵, 뱉었다. 그는 씩 웃더니 패거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래야 재미가 있지." 보아하니 이 사내는 돈을 갈취하는 것보다는 뭔가 행패를 부려 한 판 드잡 이질이라도 하는 쪽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네놈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인데..." 사내가 소운비 쪽을 손가락질하며 막 선전포고를 할 참인데, 갑자기 텁석부 리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자, 잠깐!" "뭐야?" 텁석부리는 잠자코 자기 패거리들이 볼 수 있도록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 들 었다. 순간, 여태까지 심심풀이로 노닥거리는 듯하던 흑포칠랑의 안색이 확 변해 버렸다. "무산음호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순간, 소운비는 주루 어디에 무산음호 가 와 있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파바바밧! 어떤 신호를 주고받은 것인지 흑포칠랑은 갑자기 사방으로 몸을 날리더니 혼음사의와 소운비를 포위해 갔다. 소운비는 분명 싸움이 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이렇게 갑 자기 전면적인 공세로 나오리라고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 다. 한데 그 순간 혼음사의는 허공으로 몸을 띄우며 생사맥결통을 꺼내 흔 들고 있었다. 은빛 광채가 눈앞을 스치는가 싶더니 짧은 비명 소리가 울렸 다. "으악!" "크윽!" "헉!" 약속이나 한 듯 흑포칠랑 중에 세 명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얼굴을 감싸 쥔 손가락 틈새로 피가 줄줄 나는 것으로 보아, 눈 어디쯤에 침을 맞은 모 양이었다. 비구니와 여도사에게 시비를 걸었던 사내도 그 세 사람 중 하나 였는데, 혼음사의가 그를 향해 말했다. "저 비구니 때문이 아니라 네놈 때문에 너희 패거리들 모두 오늘 재수 옴 붙은 줄 알거라." 그리고 혼음사의는 '무산음호다'라고 소리친 사내에게 이죽거렸다. "너 이 머리 나쁜 놈아! 나는 무산음호가 아니다. 이름을 헷갈린 죄로 오늘 너희들은 그 무겁기만 한 머리를 모두 여기 내려놓고 가도록 한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기선을 제압당해 버린 흑포칠랑의 안색은 핼쑥했 다. 하나 험한 강호에서 현상금 사냥꾼 노릇을 한다는 것이 과연 보통 수단 을 가져서는 안 될 일인지라, 그들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헷갈리기는 누가 헷갈렸단 말이냐! 그리고 누가 당신 늙은이를 보고 무산 음호랬나? 저 젊은 놈을 말한 것이다." 텁석부리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아까의 두루마리를 아래로 쭈욱 펼쳤 다. "아니?" 소운비와 혼음사의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과연 거기 그려진 얼굴은 소운 비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림 아래에는 뚜렷한 글씨로 '무산음호'라고 써 있는 것이었다. "무산음호다!" "무산음호가 나타났다!" 그것을 보고 정작 놀란 것은 쥐죽은듯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었 다. 그들은 더 이상 흑포칠랑 따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리에서 벌떼처럼 뛰어나왔다. 심지어 점소이며 주루 주인까지도 함께였다. 흑포칠랑도 무섭지만, 무산음호만 하랴. 삽시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 루에서 도망치고 남은 것은 아까의 상인 패거리와 비구니 일행뿐이었다. 두루마리 아래쪽에 쓰인 글을 읽고 자신에게 현상금을 건 것이 다름 아닌 격색마회라는 사실을 알게 된 소운비는 속이 쓰렸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 이 지난번에 개방 제자들과 싸울 때의 일이 여기까지 번진 것이다. 하나 혼음사의는 도통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없었다. 소운비의 내공이 무산음호로부터 온 것임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음사의는 무조건 흑포칠랑이라는 작자들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단정했 으며,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 번개 같은 솜씨로 세 명이나 적을 해치웠는데도 불구하고, 적은 경 계하기보다는 소운비를 더 경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 이놈들!" 혼음사의는 주루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질렀다. "허튼 수작으로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구나. 똑똑히 들어라! 여긴 무산음호는 없다. 저 아이는 내 제자고, 나는 혼음사의란 말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흑포칠랑들은 멍한 눈으로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 눈이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 내가 들은 것이 무슨 소리냐'는 뜻이었다. 악 에 받친 혼음사의는 다시 한번 말했다. "혼- 음- 사- 의! 그래도 모르겠어?" 그렇게 말해도 흑포칠랑들은 일언반구 대답이 없었다. 반응을 보인 것은 비 구니와 여도사였다. "꺄아아아악!" 여자의 비명이란 나이가 들었거나 안 들었거나 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여인은 펄쩍 뛰더니 앞서거니뒤서거니 주루의 문밖으로 달려나가 버렸다. 그들을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구니의 천적이라는 혼음사의가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소운비는 긴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흑포칠랑의 무반응은 혼음사의로 하여금 비구니의 존재에는 관심도 안 가지 게 할 만큼 화가 나게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아까는 사람도 많고 공간도 좁 아 쓰지 않았던 생사맥결귀영폭침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이 녀석들이 이래도!" 위협용으로 흑포칠랑의 앞쪽 바닥에 큰 구멍을 낸 혼음사의가 씩씩거렸다. 그때야 비로소 흑포칠랑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얼떨떨한 눈들이 서로 를 향하더니 입술이 비실비실 열렸다. "무... 산... 음호... 랑...!" "혼음... 사... 의?" 흑포칠랑은 확실히 현상금 사냥꾼답게 계산이 빠른 사람들이었다. 무산음호 라고 해도 사실 그들 일곱이 당해 낼 상대는 아닌데, 외양이 워낙 젊고 앳 되 보여 혹시나 싶은 마음에 도전을 해본 것이었다. 한데 혼음사의와 함께 라니! 무산음호야 전대의 고수라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하더라도, 혼음사의는 바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도망가자!" 누가 외쳤는지 모를 그 소리와 함께 눈을 다친 세 놈까지를 포함한 흑포칠 랑 모두가 문이며 창문으로 허둥지둥 달아났다. 소운비가 갑자기 그들 중 한 사람을 번개같이 따라잡았다. 아까의 텁석부리 였다. 텁석부리는 소운비와 어깨를 심하게 부딪치고는 두루마리 뭉치를 모두 바닥 에 떨군 채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소운비는 더 쫓지 않았다. 대신 그들을 쫓으려는 혼음사의를 잡아 말렸다. "놔! 놔! 저런 놈들은 모두 물고를 내버려야 해...!" "참으시죠. 여기서 말썽을 일으키면 길만 지체됩니다." 소운비가 간신히 좋은 말로 그를 설득했다. 씩씩대던 혼음사의는 아까의 상 인 일행과 자신들밖에 남지 않은 텅 빈 주루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제기랄! 밥도 못 먹었잖아." 그리고는 누군가 앉아 있다가 달아난 식탁으로 다가가 젓가락 한번 대지 않 은 요리를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소란스럽던 상황이 정리되는 기미가 보이자, 소운비는 문득 호기심어린 눈 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누구인지 애써 찾을 필요도 없었다. 아까 수단을 부려 흑포칠랑의 행패로부 터 벗어났던 그 상인의 우두머리 장한이었다. 장한은 소운비가 자신의 시선 을 눈치채고 마주보는데도 불구하고 눈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 서 배어나오는 것은 호감 반, 호기심 반이었다. 소운비는 그들 일행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포권한 뒤 말했다. "소란이 일어나 피해를 보시지는 않았는지요." 장한은 마주 포권하며 대답했다. "소란을 피운 자들이야 이미 달아났는데 사과를 하시면 몸둘 바를 모르겠습 니다." 예의바른 말투가 닳을 대로 닳은 상인이라기보다는 대가댁 자제처럼 여겨졌 다. 소운비는 품안으로 손을 넣었다가 정중히 앞으로 내밀었다. "아까 그 무리들이 흘리고 간 겁니다. 거두십시오." 소운비의 손 위에 얹혀진 것은 아까 장한이 텁석부리에게 넘긴 돈주머니였 다. 그것을 보는 순간 상인들의 표정은 얼떨떨해졌다. 텁석부리가 그것을 흘렸을 리는 없었다. 방금 전 소운비가 수단을 부려 빼 돌린 것임에 틀림없었다. 장한은 의미있는 웃음을 지으며 소운비에게서 그 주머니를 건네 받고는 답 례했다. "강호가 비록 더럽고 어지럽다고 하나 소협 같은 분이 있어 그래도 살아 갈 만합니다그려. 감사의 표시로 술 한잔을 드리고자 하니 받아 주십시오." 소운비는 옆에서 사마귀 난 상인이 건네 준 술잔에 장한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술을 마시면서, 그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술을 따라 준 장한의 웃옷이 이상했던 것이다. 무엇이라고 딱 집어서 이야 기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확실히 정상적이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 이유를 확실히 깨달은 것은 소운비가 그에게 술 한잔을 되돌려주면서부 터였다. '옷깃이!' 그렇다. 옷깃이었다. 그의 웃옷은 왼쪽 깃이 위에, 오른쪽 깃이 아래에 있었 다. 그뿐 아니라 일행인 상인들 모두의 복장이 그러했다. 정상적인 경우 오른쪽 깃이 위로 가고 왼쪽 깃이 아래로 가서 허리둘레를 긴 허리띠로 묶어 여미는 것이 중원의 복색 풍습이다. 이 습관은 아주 오랜 옛날로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말하자면 중원인들이 이민족(異民族)과 자신 들을 구별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소운비는 들키지 않게 술을 마시는 장한의 얼굴을 관찰했다. 확실히 어딘가 중원인과는 다른 느낌이 풍겼다. 머리통의 길이가 중원인보다 짧았으며, 눈 두덩이 부푼 듯한 느낌이었다. '몽고인!' 단두(短頭)에 부푼 눈두덩. 그것은 몽고인을 뜻하는 신체적 특징 중의 하나 였다. 마치 태초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느낄 만큼 몽고인들의 중원 통치가 오래 이 어져 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몽고와 중원인들은 좀처럼 어울리지가 않아서, 사람이 많은 큰 성에는 몽고인이 많고 이런 한적한 곳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 현실이었다. 특히 강호인들의 활동이 잦은 곳에서는 몽고인들의 목이 쥐도 새도 모르게 떼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일부러라도 찾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만큼 소운비로서는 앞의 일행이 몽고인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내 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표정이 새어나간 것인지, 몽고 장한이 그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때였다. "음적 혼음사의! 목을 내놓아라!"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를 뒤따르듯 일단의 사람들이 주 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푸우웃!" 혼음사의는 먹던 음식을 입 밖으로 내놓고 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의 눈에 떠오른 것은 놀람이 아니라 기쁨의 빛이었다. '이게 웬 떡이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비구니였고, 더구나 선두에 선 세 사람은 젊은 비구 니였던 것이다. 하나 혼음사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 비구니의 눈은 살기로 형형했 다. 그 중 가운데에 선 입술이 도톰한 비구니가 날카롭게 외쳤다. "혼음사의! 아미삼봉(峨嵋三鳳)이 너를 징계하러 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혼음사의는 느낄 때만큼이나 빠르게 기쁨을 지워야 했 다. 아미삼봉. 그들은 아미파가 당대에 배출한 최고의 기재 삼 인을 묶어 칭하는 말이었 다. 삼봉 중 가장 무공이 뛰어나다는 사람이 현재 정파에서는 여중제일검 (女中第一劍)이라고 공인되어진 정혜신니(正惠神尼)였는데, 혼음사의를 죽일 듯 노려보는 입술 도톰한 비구니가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쳇! 아미삼봉이 산에서 도는 안 닦고 어째 여기까지 내려왔는가! 아마도 강 호행을 핑계로 놀아나려고 하는 게지?" 입으로는 핀잔을 던지면서도 혼음사의는 형세가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편에는 아미삼봉 외에도 몇 명인가의 아미파 제자가 더 있었고, 이편에는 고작해야 두 사람이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도 혼음사의는 소운비 가 과연 자신의 편을 들어 줄까 하는 의문까지 생겼다. 소운비의 눈은 혼음사의와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미파 여승들의 뒤 쪽에는 아까의 나이든 비구니와 여도사가 얼굴을 붉히고 서 있었다. 소운비 는 탄식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구나. 그래도 우리는 저 사람들이 곤란할 때 도움 을 주려했는데...' 생각해 보니 꼭 그 사람들만을 탓할 것도 아니었다. 그 두 사람에게 소운비 나 혼음사의가 준 도움이 한 바가지의 물이라면, 혼음사의가 저지른 죄는 큰 바다와 같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소운비는 혼음사의를 혼자 내버려둘 수만은 없었다. 어 쨌거나 지금 그는 자신의 사부였기 때문이다. 소운비가 망설임없이 혼음사의의 옆으로 와서 서자, 혼음사의의 표정이 묘 하게 변했다. 주루 안에 들어온 이래로 혼음사의만을 노려보던 정혜신니의 시선도 그를 향해 움직였다. "앗... 저자는...!" 정혜신니는 이미 강호 문파에 널리 알려진 새로이 나타난 무산음호의 얼굴 을 거기에서 발견하고 경악했다. 그녀의 경악은 흑포칠랑과는 좀 다른 성질 의 것이었는데, 무산음호와 혼음사의 둘을 대적하는 것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천하의 음적 혼음사의와 잊혀진 색마 무산음호가 한패거리라는 사실이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운비는 일단 싸우기 전에 양측을 화해시켜 보려는 생각에서 정중하게 입 을 열었다. "잠시 진정하고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신다면..." 하나 정혜신니는 불문곡직하고 소운비를 가리키며 외쳤다. "내 직접 겪은 일은 아니나, 과거 무산에서부터 시작된 겁란(劫亂)에서 아미 파의 피해 또한 없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제 두 마리 음적을 한자리에서 처 치하게 되니, 하늘이 우리 아미삼봉을 긴히 쓰시려는구나." 소운비는 입맛이 썼다. 이 비구니조차도 자신을 무산음호라고 생각하고 있 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무산음호가 아닙니다. 그분과 전혀 관계가 없다 할수는 없지만, 그 이름으로 오해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고 정하시고..." "문답무용(問答無用)! 두 놈 다 상대해 주마. 덤벼라!" 참으로 불 같은 성격의 비구니였다. 함께 나서려는 두 명의 사제를 제지하 고 혼자 앞으로 나서며 등에 멘 장검을 뽑아 드는데, 검 자루의 호랑이 조 각이 휘황했다. 아마도 호안석(虎眼石)을 눈 부분에 박은 모양이었다. 혼음사의가 소운비를 옆으로 밀어 내며 앞으로 나섰다. 혼자서 상대하겠다 는 뜻이었다. 소운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어려우실 것 같으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방해나 하지 마라." 빈정거리는 말투였지만, 소운비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경험으로는 정혜신 니를 상대하기 힘들 것 같아 말린다는 것을. 혼음사의는 특유의 육담을 던지는 것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우리 둘을 다 상대하겠다고? 비구니가 정력도 좋구나. 특별히 방중술이라 도 익힌 모양인데, 웬만하면 이슥한 밤에 자리 깔고 모시는 게 어떻겠느 냐?" "닥쳐라!" 심사를 어지럽히려는 혼음사의의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정혜신니가 검끝을 돌려 원을 그렸다. 고요한 가운데서도 경기(勁氣)가 강력하게 밀려오는 한 수였다. 혼음사의가 망번신요보로 그 기세를 피하자, 정혜신니의 몸은 그를 따라 빙 그르르 돌더니, 한 무릎을 거의 땅에 댈 듯 구부리고 검을 위로 찔러 갔다. 거듭 혼음사의가 피해 가자 정혜신니의 몸도 그렇게 낮은 자세에서 민활하 게 움직여 따라갔다. 낮은 자세, 날카로운 검세. 바로 아미파 비전의 복호검법(伏虎劍法)의 기본이다. 자세가 낮을수록 그 위 력이 강하며, 자세가 낮음에도 그 움직임이 민활한 것이 복호검법이었다. 혼음사의는 호랑이의 발톱처럼 매서운 검광(劍光)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몸 을 피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위태위태해 보였지만, 본인은 농을 걸 만큼 여 유로운 모양이었다. "내 평소에 꿈이 무엇인지 아느냐?" 정혜신니는 대답할 이유가 없으므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혼음사의는 일 변 피하고 일변 입을 놀렸다. "양쪽 겨드랑이와 가랑이 사이에 아미삼봉을 끼고 아미파 장문인에게 뒷구 멍을 핥게 하는 것이지!" 그의 말에 분개한 것은 싸움을 하는 정혜신니가 아니라 싸움을 지켜보던 아 미파 사람들이었다. 정혜신니 한 사람에게 싸움을 양보한 아미삼봉의 나머 지 두 명은 특히나 노여움이 더했다. "닥쳐라!" "저놈을 당장...!" 정혜신니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접전 중에 적의 심계에 말려들 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토록 더러운 욕설 은 그녀로서도 처음 들어 보는 것이기에 눈빛이 파래지며 공격이 더욱 매서 워졌다. 두 사람의 싸움 자리 반경 이 장(二丈)이 새파란 검광으로 가득 찼 다. 그래도 혼음사의는 여유 작작이었다. "내가 특별히 너를 가랑이 사이에 끼워 주마." 득달같이 달려들던 정혜신니의 검이 혼음사의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 나갔다. "어디 위명이 자자한 아미삼봉이 얼마나 야들야들한지 보자!" 혼음사의는 히죽거리며 허리를 굽히더니 왼손을 뻗어 정혜신니의 팔을 쥐려 고 한다. "더러운 음적!" 정혜신니가 날카롭게 꾸짖더니 검을 머리 위로 휘둘렀다가 앞으로 쭈욱 뻗 어 냈다. 잘못하면 그 검에 꿰여 처량한 꼬치 신세가 될 것이 뻔한데도 혼 음사의는 몸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는 따로이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앗!' 한쪽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소운비는 경악했다. 혼음사의가 암암리에 생사 맥결통을 쥐고 앞으로 내미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귀영폭침을 쓰면 저 비구니는 죽고 말 텐데!' 소운비가 순간 정혜신니를 보니, 정혜신니의 몸은 거의 바닥에 닿을 듯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나 그것은 혼음사의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거 센 반격을 준비하는 순간의 움츠림이었다. 자세를 낮추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복호검법은 결정적인 순간 반탄력을 이 용한 공격을 펼쳐 적을 꿰뚫어 버리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혜신니는 그 동안 검광 속에 적을 가두어 멀리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접근전으로 싸 움을 이끌어 이 한 수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바야흐로 일촉즉발, 생사맥결통은 정혜신니의 배 앞에서 묵침을 토해 내려 하고 정혜신니의 검은 혼음사의의 목을 꿰뚫으려고 하는 순간! 소운비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멈추시오!" 그 말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소운비가 그 말을 뱉기도 전에 혼음사의 와 정혜신니 모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공격을 멈추고 있었던 것이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도 할 듯 달려들던 두 사람이 멈춘 사연은 간단했다. 검을 든 정혜신니의 팔목과 생사맥결통을 든 혼음사의의 팔목이 소운비의 양손에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놀란 것은 소운비가 뛰어든 속도와 자신들을 제지한 힘 때문이었다. "왜 서로 죽이지 못해서 이렇게 애를 씁니까? 제발 그만두십시오!" 당황한 정혜신니의 귀에 소운비의 말이 들어갈 리가 없었다. 아미삼봉의 첫 째인 정혜신니가 다른 때도 아니고 한참 격전 중에 엉뚱한 사람에게 무기를 제압당하다니... 그녀로서는 이런 치욕은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혼음사의의 걸쭉한 육담보다 더욱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고, 싸움에서 잃어 서는 안 될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이놈!" 잡히지 않은 한쪽 손이 날카로운 수도(手刀)가 되어 소운비의 목을 향해 날 아갔다. "어딜!" 맞은편에서 혼음사의 역시 자유로운 한 손을 이용해 소운비 대신 그 수도를 막았다. 정혜신니는 나무를 타고 오르는 뱀처럼 손을 틀어 혼음사의의 손을 피하더니 이번에는 이룡쟁주(二龍爭珠)의 수법으로 소운비의 눈을 찔러 갔 다. "죽엇!" 혼음사의도 지지 않았다. "너부터!" 툭, 탁! 툭, 탁! 소운비의 코 바로 앞에서 두 고수의 손이 온갖 지법과 금나수와 장법을 써 가며 오락가락하는 이 진경(珍景). 십여 수를 교환한 정혜신니와 혼음사의는 아예 소운비를 잊고 자기들끼리 찌르고 막고 야단이었다. 소운비는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 가지 계책을 생 각해 내고 한 모금 진기를 들이켰다가 두 사람의 팔을 잡았던 양손을 놓고 그대로 두 사람의 겨드랑이를 때렸다. 파악! 싸우던 두 사람이 적지 않은 힘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소운비도 즉시 그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그의 손에는 어느새 정혜신니의 보검과 혼음사의의 생사맥결통이 쥐어져 있었다. 소매치기 시절의 잽싼 손놀림과 겨드랑이를 때린 적절한 힘의 조화가 낳은 결과였다. "그만 싸우라니까요!" 하나 싸움이란 붙이기는 쉬워도 말리기는 어려운 법이다. 더구나 정혜신니 가 보기에 소운비는 싸움을 말릴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싸워야 할 상 대이니...! "사매! 검을!" 정혜신니가 싸늘하게 외치자, 쌍검을 매고 있던 비구니가 그 중 하나를 풀 어 그녀에게 던졌다. 정혜신니는 검을 받는 즉시 뽑아 들며 외쳤다. "많은 수로 압박하려 한다고 서러워하지 마라! 너희들은, 놓치기에는 너무나 흉악한 자들이다." 정혜신니의 그 말은 곧 아미파 사람들 모두에게 하는 공격 명령과 같았다. 챙! 챙! 챙! 검이 제 집에서 빠져 나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한군데 뭉쳐있던 아 미파 사람들이 원형을 그리며 쫘악 퍼져 갔다. 물샐틈없는 포위망이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두 사람을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년들을 싸그리...! 어서 그거 내놔!" 눈에 살기를 담은 혼음사의가 소운비에게 생사맥결통을 내놓으라고 닥달했 다. 하나 소운비는 선뜻 내줄 수가 없었다. 생사맥결귀영폭침이 발출되면 적 지 않은 사상자가 날 것이 뻔한데 어떻게 내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대로는 둘 다 잡힐 텐데...!' 소운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파아앗! 그의 뒤쪽에서 무엇인가 강하게 바닥을 차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이었다. 소운비의 머리 위를 넘어 싸움판의 가운데에 놓인 탁자 위로 떨어져 내린 사람. 아직도 주루에서 나가지 않고 있던 그 상인의 우두머리 장한이었다. 하나, 지금 그를 상인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눈부신 몸놀림, 무엇보다도 눈과 입가에서 물씬물씬 풍겨나는 보기 드문 투지. 그런 것은 상인의 표정 이 아니었다. 정혜신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웬 놈이냐?" "불제자가 입이 험하군!" 장한이 대뜸 그렇게 말하자 정혜신니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 한 마디로 적아(敵我)를 구별해 버린 것이다. "쳐...!" 하나 공격을 명하려던 그녀의 말은 채 맺어지지 못했다. 장한이 버티고 선 탁자 주변으로 네 사람이 더 뛰어든 것이다. 바로 그의 일행인 다른 상인들 이었다. 물론 그들 역시 장한과 마찬가지로 상인의 것이 아닌 몸놀림을 보 여 주었다. 갑자기 늘어난 적의 숫자에 정혜신니가 다시 흠칫하고 있을 때, 장한이 가 슴팍의 옷자락을 풀어헤쳐 보였다. 그 속에서 드러난 것은 놀랍게도 진녹색 의 관복(官服)이었다. "나는 어사대(御史臺)의 타라하이[塔刺海]다! 한인들은 잠시 싸움을 멈추고 내말을 들어라!" * * * 정혜신니와 아미파 사람들은 떠났다. 힘에 밀려서가 아니라, 권력에 밀려서 였다. 타라하이라고 자신을 밝힌 몽고인의 일행이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엄연 히 관리이고, 그 관리와 싸울 경우에는 아미파에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 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대신 혼음사의와 소운비에 대한 적개심에 한 가지 이유가 덧붙여졌다. '몽고족의 끄나풀!' 떠나기 전 두 사람을 노려보는 정혜신니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또 한 그들이 멀리 떠나지 않고 주변을 맴돌다가 두 사람이 타라하이 일행과 헤어진 뒤에 재차 덮칠 의도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타라하이 일행이 싸움을 말려 준 덕분에 귀찮은 일을 모면하게 된 두 사람은, 그들이 청하는 대로 근처 객점으로 가 정식으로 인사를 하게 되 었다. 타라하이는 그 생김새만큼이나 털털한 사나이였다.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는 소운비에게 그는 당치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도움이란 받았으면 당연히 돌려주는 법! 내가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 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핍박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오." 흑포칠랑에게 빼앗긴 돈을 돌려준 일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으나, 소운비는 더욱 부끄러워졌다. 알고 보면 타라하이 일행이 힘이 없어서 그 돈을 빼앗 긴 것이 아니라 귀찮은 일을 겪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해 간 것이 아닌가. 사실 소운비의 도움이라고 하는 것이 그다지 절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운비는 자신이 애국지사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한족들이 본 능처럼 가지고 있는 몽고인에 대한 적개심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관리이 면서도 조금도 권위적이지 않고, 사나이답고 소탈한 태도로 자신들과 이야 기하는 타라하이 일행을 보고 있노라니, 그런 생각이 무너져 갔다. '몽고인 중에도 좋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원래의 생각을 정당화해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몽고인을 싫어하는 것은 지금의 황실이 실정(失政)을 해서 백성을 핍박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나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생각은 걷잡을 수 없었다. '아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족의 황제 중에도 실정을 한 사람은 많았다. 결국 몽고인이냐 한족이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부여잡고 고민하는 소운비에게, 타라하이가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쫓기고 있는지 물어 봐도 좋겠소?" 소운비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대신 대답한 것은 혼음 사의였다.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미워하고 죽이려 들지!"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몽고인이자 관리인 타라하이에게 한인인 혼음사의가 대뜸 반말을 쓰자, 옆에 앉아 있던 타라하이의 일행들이 언짢은 표정을 보 였다. 그들이 그러는 것도 당연한 것이, 몽고의 왕실이 정하여 세상에 펼친 제도에 따르면 사람은 네 계급으로 나누어지는데 몽고인이 첫째이고 색목인 (色目人), 즉 파랗거나 갈색눈을 가진 서역인이 둘째, 셋째가 한인이며, 마지 막이 옛날 남송(南宋) 지역에 살던 남인(南人)이니 혼음사의가 비록 타라하 이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신분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것 이다. 하나 정작 타라하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수하로 짐작되는 일행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한동안 강호인들과 어울려야 할 것이니, 강호인들의 질서에 따르는편이 옳을 터." 소운비는 그의 너그러운 마음 씀씀이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동안 강호인들과 어울려야 할 것'이라는 구절이 신경 쓰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째서 관직에 계신 분들이 강호행을 나오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어조가 아까 타라하이가 소운비에게 물 을 때와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타라하이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렇게 물어 오시니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옹졸한 사람이 되고 말겠 구려." 소운비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면..." "아니, 아니오." 타라하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여러 사람이 알아서 좋을 것은 없지만, 또 굳이 비밀을 지켜야 할 이유도 없소. 더구나, 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소 공자와 같은 강호인들의 도움이 필요 하오." 타라하이는 먼저 만류할 기색을 보이는 수하들을 눈빛으로 제지했다. 수하 들이 금세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아 타라하이의 지위는 남달리 높은 모양이 었다. 타라하이의 매 같은 눈빛이 소운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그가 이야기를 해도 좋을 만한 사람인지를 마지막으로 판가름해 보려는 듯이. 이윽고... "나는 특별히 한 사람을 찾아 달라는 대원국사(大元國師)님의 명을 받고 강 호로 나왔소." 대원국사란 황제가 총애해 마지않는 티벳 승려 가린진(伽璘眞)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황실의 음행과 가렴주구의 원흉이라는 대원국사가 거론되자, 소운 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상한 것은 그 말을 거론하면서 타라하이의 안색 역시 미미하게나마 찌푸 려졌다는사실이었다. 그가 자신의 윗사람인 국사를 탐탁치 않게 여겨서 그 런 것인지, 아니면 임무의 부담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속을 들여다보지 않 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오래 전에 실종되었는데, 아마도 강호인들 속에 있지 않겠느냐 고 대원국사께서는 생각하고 계시오. 나는 그 일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 하고 있소. 어쩌면 강호인들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오." 타라하이는 거기서 말을 끊고 혼음사의와 소운비를 돌아보았다. "미안하지만, 그 이상의 일은 말씀드릴 수가 없구려. 하나 만일 내 일이 여 의치 않고 또 그쪽에서 꺼리지 않으신다면, 훗날 인연이 있어 다시 만날 때 도움을 청하고 싶소만." "도와 드릴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공짜로 바라지는 않소.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타라하이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까의 그 여승들은 아마도 두 분을 끝까지 쫓으려고 들 것이오. 내가 두 명의 수하를 두 분과 비슷하게 변장시켜 그들을 딴 길로 보내겠소. 그리고 두 분이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패자(牌子) 하나를 내드리 겠소." 패자는 황제가 발행하는 특허장과 같은 것으로, 그것 하나면 어디를 가든지 국가에서 경영하는 역마와 숙소를 이용할 수가 있었다. 몽고인들은 과연 기 마민족답게 전국을 망라하는 역전제도(驛傳制度)를 실시하였는데, 대도(大 都) 연경(燕京)을 중심으로 하여 이십오 리마다 말과 숙소를 갖춘 역을 두 었다. 전국을 통틀어 그 역의 숫자가 약 일만, 마필의 숫자가 약 이십만에 이르니, 패자 하나만 있으면 중원 땅 어디에서라도 불편함없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도움에 대한 선불로 패자를 준다는 타 라하이의 말은 소운비에 대한 깊은 호의를 표현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사나이는 한번 마음에 든 사람에게는 비록 초면일지라도 간, 쓸개를 다 빼 준다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타라하이야말로 사나이다운 사나이였다. 소운비는 이 지나친 친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혼음사의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 해...? 얼른 받아!" 다음날, 혼음사의와 소운비는 타라하이의 수하 둘이 아미파 여승들의 눈을 홀려 북쪽으로 이동한 후에 타라하이와 이별하고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헤어지기 전에 타라하이는 소운비의 손을 굳게 잡고 말했다. "소 공자는 근자에 보기 드문 진실한 사람인 것 같소. 나는 소 공자가 한인 이라고 해서 나쁘게 보지 않소. 소 공자도 나를 몽고인이라고 경계하지 않 기만을 바라오." 그가 크게 손을 한번 흔들고 제 갈길을 가던 뒷모습을 생각하며 소운비는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어, 다만 그가 색마라고 욕할 수도 없고, 또 몽고인이라고 미워할 수만도 없구나!' 제 17 장 성물(聖物) 사천(四川)에는 인물도 많고 문파도 많다. 오직 하나의 가문이면서도 오랜 세월 어떤 거대 방파에서도 업신여기지 못할 지위를 구축하고 있는 당문(唐 門)도 그 중 하나이다. 사천 당문의 세력권이라고 할 수 있는 중경(重慶). 그곳에 명성이 자자하여 당문의 가주조차 공손히 진맥을 청한다는 명의(名 醫)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제 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서늘해진 가을. 하얀 옷을 정갈하니 차려입고 자그마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소담한 정원에 청수한 늙은이가 서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명의 한종린(韓宗藺)이었다. 사람들이 불수화타(佛手華陀)니, 성수화타(聖手華陀)니 부르는 것을 두고 손 사래를 치며, 감당할 수 없는 이름이니 그저 '한 노백(韓老伯)'이라 불러 달 라 청하는 그의 겸손함은 신묘한 의술과 함께 그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하나 사람의 마음이란 깊고깊은 물속보다도 더욱 짐작하기 힘든 것이라 한 종린이 알려진 것처럼 성인 같은 인물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그에게도 보통 사람의 으쓱거림 같은 심리는 남아 있어, 지금처럼 혼자가 된 시간에는 자신이 이룩한 남다른 지위에 대해 즐겁게 곱씹곤 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조금 있으면 당문에서 그를 청하는 마차를 보내 온다고 했다. 일개 의원으로서 당문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일생이 걸려도 얻기 힘든 성취였다. 한종린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사천제일의(四川第一醫)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고... 다른 성의 세가나 문파에 초청이라도 되면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도 꿈만은 아니 지...!'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문득 공상에서 깨어난 한종린은 당문의 사람이 왔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휘둥그래졌다. 입도 마 찬가지였다. 콧구멍까지도 눈과 입을 따라서 있는 대로 벌어졌다. 그 얼굴이 말하는 것 은 다름아닌 경악 그 자체였다. "오랜만이다!" 한종린을 그렇게 만든 것은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 그가 생각하기에 는 인간 말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한종린의 표정이 조금씩조금씩 변해 갔다. 이번엔 경악이 아니라 분노였다. 인자한 신의 한 노백이 아니라 인간 한종린의 일그러진 얼굴이 울분에 찬 함성을 토해 냈다. "이... 이...! 정명도(丁明道), 이놈!" 얼마나 울분에 가득 찼는지 그 한마디를 뱉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부 르르 떨기만 하는 한종린이었다. 그에 반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 자네 왜 그러나? 급체라도 했어?" 사뭇 걱정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한종린을 살펴보는 사람, 바로 소운비 와 동행한 혼음사의였다. "이거 갖고 가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진정한 한종린이 방까지 따라 들어와 능청스럽 게 차를 마시는 혼음사의 앞에 꺼내 놓은 것은 은전이 가득 든 돈궤였다. "지금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야. 곧 손님들도 올 테니 제발 곤란하게 만 들지 말고." 혼음사의는 대체 왜 이걸 자신에게 주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한종린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제발...!" 한종린은 숫제 애원조였다. 혼음사의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자네, 그래 하는 일은 잘되고?" 혼음사의의 능청을 나름대로 해석한 한종린은 머리를 싸매고 끙끙 고민을 하더니 최후의 한 수를 보인다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이걸로 부족하다면 내 전표(錢票)라도 줌세! 전재산이나 다름없는거니 여기 서 끝내 주게. 이 이상 떼를 쓴다면 나도 가만있지는 않겠네." 혼음사의는 갈수록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내가 왜 친구의 돈을 이유없이 받아야 하나? 그저 제자 녀석과 함께 며칠 머물러 보겠다는 것뿐이야. 폐 안 끼칠 테니 걱정 말게. 자네 아직도 독신이 지? 불편해 할 가족도 없잖아." 한종린의 눈에 화등잔이 켜졌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네놈이 저지른 짓 아니냐!" 그때, 바깥에서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한 노백 계십니까? 당가에서 왔습니다요." 당가에서 보낸 어자(馭子)인 모양이었다. 한종린은 자신의 목소리가 바깥에 까지 들릴 만큼 컸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입을 가렸다. 싱글벙글하는 혼음사의의 얼굴과 그 옆에 앉아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운비를 돌아본 그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세상에 이런 진드기도 다시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일이 있나 본데, 걱정 말고 나가 일보게. 내가 집을 지켜 주지!" 혼음사의는 아까보다 살이 두 근은 빠진 것 같이 초췌한 한종린의 등을 밀 어 내보냈다 한종린은 무엇이 아쉬운지 계속 원망스런 얼굴로 혼음사의를 돌아보다가, 당문에서보낸 마차에 올랐다. 한종린을 내보낸 혼음사의는 비로소 특유의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헹! 내가 왜 네놈이 던져 주는 돈을 받고 나가겠냐? 여기 있으면 그 돈이 다 내 것인데!" 혼음사의의 사문인 고의문에는 대대로 두 계통의 제자가 있었다. 의술의 진 전을 많이 받는 제자와, 무공의 진전을 많이 받는 제자이다. 한종린은 바로 그 전자였다. 하지만 혼음사의가 고의문 출신이라는 것이 전 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처럼 한종린의 사문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사문은 커녕 한종린이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한종린이 자신의 출신에 대해 입을 꽉 다문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동문 인 혼음사의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 * * 어느 집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당문의 규방은 외인이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다. 갈 수 있다면 바로 진맥하러 온 의원이라든가 하는 특수한 신분이 필요했다. 너무 향그러워서 독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짙은 향내가 물씬 풍기는 규방 안, 어른 다섯이 뒹굴어도 될 듯한 큰 침상 위에 오도카니 누 워 진맥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당문의 금지옥엽이라는 당미령(唐美鈴)이 었다. "딸아이가 삼 일 전에 잠들었다가 여태 깨어나지를 못하고 저러고 있소..." 침중하게 말하는 사람은 당미령의 부친이자 당문 가주 당철(唐哲)이었다. 전 대 가주 당욱(唐煜)이 천수를 마치고 세상을 뜬 뒤 가주 자리를 이어받은 지 일 년이 조금 넘는 중년의 당철은, 강호에 소문난 당가의 호랑이가 아니 라 걱정 많은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철의 눈은 의원의 표정을 집요하게 따라갔다. 진맥을 하는 동안에도, 진맥 을 마친 뒤에도, 의원의 안색은 당철 본인보다도 훨씬 어두웠다. '가망없는 것인가?' 당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딸의 병세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가 미처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있었으니, 지금 진맥을 한 의원 한종린은 당미 령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마음이 온통 먹장구름이었던 것이다. '그 거머리를 어떻게 내쫓아 버리지...?' 주인이 없는 집을 발칵 뒤집어, 먹을 것을 내어 먹고 좋은 옷을 꺼내 입는 행패를 저지르면서도 혼음사의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한 종린과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소운비가 좌불안석이었다.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쓸데없는 소리! 이래도 되는 사이니까 이러는 거지." 혼음사의는 한종린의 비단옷을 걸치더니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고 히죽 히죽 웃었다. 그리고 한종린의 자리에 턱 앉아서 이야기했다. "여기서는 얼마든지 머물러 있어도 상관없을 거다. 이곳에서 무공 수련도 하고 색공 수련도 한 뒤에 격색마회의 영웅대회 날짜가 다시 발표되면 개봉 부로 움직이도록 하자." 격색마회의 영웅대회. 혼음사의와는 다른 이유에서 소운비는 그것을 기다려 마지않았다. 바로 그 곳에서 재회하기로 약속한 혜와 때문이었다. '무사할까...? 무슨 일이야 없겠지... 그때 떠나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소운비는 새삼 후회했지만, 그때야 혼음사의 곁에 하루라도 더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아 그렇게 결정했던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곳에 가면 사매를 만나게 되겠지...?' 그 생각을 하니 소운비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진설영이라는 존재는 그의 명 치께에 걸린 음식처럼 묵직하고 답답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 부담은 한 순간에 너무나 멀리 떨어져 버린 그녀와의 사이, 어린 시절, 그토록 친했던 시절에 대한 정, 동심이 자라나 연정으로 변하기 전에 절단당하고 만 애틋 함 같은 것이 한데 뭉친 결과였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만남이라면 뒤로 미루지도 말아야지.' 진설영과 헤어진 뒤에 많은 여인들을 만나고, 사람에 대한 생각도 사뭇 변 화된 소운비는 모질게 자신을 닦아세웠다. 한종린이 돌아온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전율스러울 정도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소운비는 말할 것도 없고 후안무치의 극을 달리는 혼음사의조차도 그의 침 묵에 아연해져 버렸다. 때로 격렬한 항의보다 무서운 것이 싸늘한 침묵일 수 있다는 진리를 확인케 하는 현장이었다. 한종린은 천천히 탁자 앞으로 다가가더니 가지고 온 꾸러미를 풀어 놓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술과 오리고기 안주였다. 한종린은 별안간 사막을 가로질러 온 목마른 대상(隊商)처럼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녹림의 우두머리가 그러듯이 우악스럽게 오리의 다리를 찢어 입에 넣었다. 고기를 우물우물 씹는 동안 한종린의 눈은 혼음사의와 소운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도저히 사람들이 익히 아는 한 노백의 형상이 아니었다. "퉤!" 고기를 다 발라 먹고 입 속에서 뼈만 뱉어 낸 한종린은 소운비를 노려보았 다. 그 얼굴에 벌써 불쾌한 취기가 올라오는 것이, 과히 술이 세지 않은 모양이 었다. 술기운을 빌려 한종린은 소운비를 가리키며 혼음사의에게 불쑥 말했 다. "네놈 제자라면서, 제대로 소개도 안 해줄 테냐?" 그 말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혼음사의가 대뜸 소운비에게 명했다. "인사해라. 내 사제이자, 네게는 사숙이 되는 한종린이라고 한다." 소운비는 얼른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소운비라고 합니..." 하나 그의 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종린이 호통쳤다. "내가 왜 네놈의 사제냐? 입문은 내가 먼저 했는데!" 혼음사의도 지지 않았다. "약재 써는 작두질이나 한 것이 무슨 입문이야! 정식으로 제자가 된 것은 내가 먼저다." "이놈이!" "이놈이!" 두 초로의 사내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방안의 공기가 험악해졌 다. 소운비가 말려 보겠다고 나섰다. "두 분 다 진정하십시오. 일단 제 인사부터 받으시고..." 한종린이 짐짓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소운비에게 말했다. "그렇지. 이 사백(師伯)에게 큰절을 올려라." "사백은 무슨 사백! 사숙이라니까!" 난리법석도 이런 난리법석이 없었다. 소운비가 어찌어찌 상견례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두 사람은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네가 사제니, 내가 사형이니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에게 번갈아 술을 따라 올리는 동안 밤은 이슥해지고 별도 빛을 더해 갔다. 두 사람이 술기운에 흘리는 이야기를 통해 소운비는 젊은 시절 한종린에게 도 아내가 있었는데 '사제' 혼음사의가 와서 주제를 모르고 '형수'에게 지분 거리는 바람에 짐을 싸가지고 달아났다는 사연을 알게 되었다. 물론 혼음사 의는 '제수'씨는 본래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고, '사제' 한종린은 분수에 안 맞게 너무 예쁜 마누라를 데리고 있었다고 반론을 폈지만, 소운비가 진실의 윤곽을 잡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오랜만에 상면한 첫날 밤은 흐드러진 술판으로 날아갔지만, 소운비는 한종 린이 겉보기만큼 혼음사의를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과연 다음날 숙취에서 깨어난 두 의원은 제자이자, 사질인 소운비가 끓여 준 해장국을 먹더니, 앞으로 어떤 방을 누가 쓰며 어떤 물건은 절대로 건드 리지 말라는 둥 이야기를 해댔다. 그리하여 사천 당문의 그늘 아래에 있는 의원 한종린의 집에서 소운비의 생 활이 시작되었다. * * * 아무리 평화로운 시절이라고 하더라도 여자 혼자 어두운 밤에 길을 걷는다 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여자들이 겪어야 하는 산고(産苦)처 럼 숙명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요즘이 어떤 때인가! 사방이 색마로 들끓고, 개봉부 일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간살이 보름이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는 때가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길을 가야 하는 사연을 가진 여자들은 늘 있었 다. 여기, 두려움에 질린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며 허겁지겁 발걸음을 놀리 는 삼십대 초반의 여인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너무 늦어 버렸네...! 아이들이 기다릴 텐데...' 여인은 흡사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뒤쪽을 흘끔거리며 점점 속도를 빨리 했다. 하나 검은 손은 그녀의 뒤가 아니라 앞쪽에서 다가왔다. '허...!' 여인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 다. 여인은 쓰러져서도 처음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깨닫지 못했 다. 어둠 속에서 솟아난 것 같은 검은 복면의 사람이 다가와 땅바닥에 드러 누운 자신의 치마를 부욱 찢어 내는 것을 꼼짝도 못하고 지켜보면서, 비로 소 소문에만 듣던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 비명을 지르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그녀는 할 수 없었다. 이마에 은빛 꽃 모양의 무늬가 있는 복면을 쓴 그 사람은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 더니,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복면인의 뒤쪽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여인은 그 와중에 서도 지금 다가오는 저 사람이 요즘 일어나는 괴사의 주범이며, 복면인은 그의 종범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사람이!' 개봉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얼굴 한번쯤은 보았을 그 인물이 나타난 것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 사람이 자신이 두 다리 사이로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집에 기다리는 아이를 둘이나 둔 여인은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취화비도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옆에 무릎을 꿇고 묵묵히 앉아 있었 다. 하도 반복되는 일이었기에, 그는 이제 아예 주인이 일을 처리하는 순서 와 호흡을 욀 수 있을 지경이었다. 오늘도 예전처럼 시작된 지 일 각(一刻) 만에 희생물이 된 여자의 눈동자가 허옇게뒤집어졌다. '일 각 후면 숨은 끊어지고, 골수가 하나하나 빨려 가겠지. 동공이 점점 줄 어들어 작은 알갱이만해져서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때야 비로소 일이 끝날 것이다...' 주인이 일을 처리하는 동안 사방에서 접근하는 자가 없는지 오감을 열고 감 시를 하는 한편으로, 그는 일의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린 과정대로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마침내 여인이 내뱉는 단말마의 짧은 호흡이 예민한 귀에 파고들 때...! 언제나처럼 복면 밖으로 빠끔히 드러난 두 개의 길쭉한 눈매에 처음으로 어 떤 감정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수고했다." 의관을 정제한 주인이 그에게 말했다. 짧은 말이지만 취화비도는 그 말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물었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만..." 취화비도가 낸다고 여기기에는 좀 가는 목소리였다. "일이 썩 매끄럽지 않아서야...!" "겉으로 보기에는 탈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우환거리이던 그 늙은 거지도 없앴고..." "우환거리? 그 늙은 거지는 우환거리 축에도 끼지 못하지. 진짜 우환은..." 주인은 말끝을 끌며 엄지손가락을 떨구어 땅 밑을 가리켰다. "저 아래에 있지!" "소교주님!" 취화비도가 반사적으로 주인을 불렀다. 주인은 그 목소리에 담긴 책망의 뜻 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이 웃었다. "왜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교주님은 소교주님의 친부(親父)이십니다." "흐음..." 주인은 천천히 손을 들어 복면에 감싸인 취화비도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비화, 너는 이따금 보기보다 순진할 때가 있군." 취화비도가 당혹해 하는데, 주인은 어느새 등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 었다. "너한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나를 따를 생각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 비전(秘傳)을 훔쳐 내도록 해라. 그 길이 아니라면..." '교주를 택해 당신을 배신하라는 말이겠지...!' 하나 멀어져 가는 주인으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좀 다른 것이었다. "죽는 길이 있겠지!" 주인의 목소리는 주인의 몸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한 불행한 여인의 시체와 취화비도뿐이었다. 취화비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먹에서부터 그의 어깨 어림까지 물결치 는 듯한 진동이 일어났다. '이이...!' 누르고 눌렀던 분노가 폭발하듯, 그는 비도를 빼 들었다. 슈아아아앗! 비도는 반라의 시신 위로 작렬하듯 그어졌다. "이잇! 이잇! 이이...!" 짐승처럼 억눌린 신음을 지르며 취화비도는 시신 위에 분노의 흔적을 새겼 다. 그의 눈가에 눈물 비슷한 것이 고이기 시작한 것은 검은 옷이 희생자의 피로 붉게 물들어 갈 때쯤이었다. 달빛. 한 여인의 이유없는 죽음을 지켜보다 못해 구름 뒤로 숨어 버렸던 달이 간 신히 얼굴을 내밀고 그 빛을 내리붓고 있었다. 거기 비친 풍경은, 발을 담그기조차 무서운 시커먼 강물 가운데에 허리까지 잠기도록 들어간 취화비도의 모습이었다. "흐으... 흐..." 자신에 대한 비웃음인지, 아니면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를 강물 위에 떨구며, 취화비도는 옷을 벗어 던졌다. 한데...! 놀랍게도 그 속에서 드러난 것은 여자의 몸이었다. 비록 근육으로 단단히 뭉친 각진 육체일망정, 가슴의 곡선은 틀림없는 여자의 그것이었다. 비록 복 면만은 끝내 벗지 않아 얼굴은 알 수 없지만, 어슴푸레 물속에 비치는 둔부 의 곡선도 결코 남자의 몸으로서는 보여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신은 너무 잔인하군요. 잔인해요. 너무 잔인해요...!" 떠나간 주인에 대한 원망처럼 들리는 그 목소리도, 완연한 여자의 음성이었 다. 강호에 간살자(姦殺者)로 알려진 흉악한 자객 취화비도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던 것이다. * * * "너는 환정(還精)을 아느냐?" 또다시 시작되는 '공부'였다. 소운비야 알든지 모르든지, 혼음사의의 설명은 이어졌다. "방사의 기쁨을 알게 되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는 좀 더 건 강한 몸으로 오래도록 즐길 수 있도록 자신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 보다도 중요한점은 자기의 정신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신의 정액을 아끼는 것이다. 어리석은 이는 정력이 다할 때까지 방탕한 생활에 빠져 허우적거리 다가 사십도 되기 전에 정액이 메마르고 점차 시들시들해지다가는 급기야 말라 빠진 해골같이 되어 죽고 만다. 현명한 자들은 환정의 기법을 익혀,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도 오히려 점점 정정해지며 어떤 경우에는 여 동빈(呂洞賓)처럼 신선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잘 들어라, 환정이라 함은..." 시대를 막론하고 중원에서 방사술을 연구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것이야 말로 왕도라 일컬었던 환정. 그것은 쉽게 말해 '정액을 되돌린다'는 뜻이었 다. 남자가 매번 정사를 할 때마다 여인의 몸 속에 자신의 정액을 발출해 버린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퍼다 쓰고 결국 생명의 샘을 말 라 버리게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이론에서 출발하였다. 정액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몸 속으로 되돌린다는 '환정'. 그 이론이 황당 한 것만큼이나, 실제의 방법도 황당한 것이었다. "일단 남자는 사정을 참는 방법부터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 를 지나치게 사랑해서도 안 되고 조금은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정사에 임해 야 한다. 마치 전쟁터에 나간 장수가 상대편 병사의 생명을 안중에 두어서 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알겠지?" "예."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입을 다물고 눈을 크게 뜨고 숨 을 죽이고서 확고하게 자신을 억제해야 한다. 척추를 곧게 펴고서, 왼손의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으로 병예혈(屛峠穴)을 재빨리 누르고서, 그 다음 에 숨을 내쉬고 그와 동시에 이를 악물면 사정을 막을 수 있다." "..." "사람의 정액에는 근본적인 정액과 욕정으로 인해 만들어진 정액이 있다고 하는데,욕정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정액은 사타구니 속에서 오지만, 근본적인 정액인 원정(元精)은 원기(元氣)와 결합하여 머리에서 오는 것이다. 그 장소 는 바로 이환점( 丸點)이다. 너는 이환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머리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멍청하긴! 머리가 다 이환점이겠느냐? 먼저 너의 배꼽 세 치 위 단전(丹田) 안에 안은 노란색이고 바깥은 붉으면서도 하얗고, 빛이 나는 붉은 정기가 있다고 상상해보아라. 그 다음에 그 정기가 해와 달로 나뉘어져 너의 아랫 배에서 움직이다가 이윽고 너의 머릿속으로 올라가 자리잡는 곳이 바로 이 환점인 것이다. 이제 알겠지?" 욕은 먹었지만 설명을 듣고서 오히려 헷갈리는 소운비였다. "네가 만일 원정을 낭비하지 않고 매번 이환점으로 돌려보낸다면, 그때마다 네 머릿속에서는 해와 달이 만나 결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무시 할 수 없는 생명의 힘이 될 것이니, 잘 새겨듣고 실천하도록 해라. 특히..." 근엄한 선생 같았던 표정을 일시에 일그러뜨리며 혼음사의가 덧붙였다. "영웅대회에 갔다가 네 아낙을 만나 좋아라고 너무 힘을 쓰지 말라는 것이 다!" 하도 들어서인지 이제 혼음사의의 육담은 별로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소운 비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 참 이해가 안 가는군요." "뭐가?" "우선,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 안에 자신의 씨를 뿌리는 것은 농부 가 봄에 밭에다 그러는 것처럼 생명을 가꾸는 소중한 일인데, 환정이란 그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머리가 깨져서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머릿속에 정액을 만들어 내는 기관 같은 것은 보이지 않더군요. 또 사정을 참는 것이 방사를 오래 하는 데는 효과가 있는 지 몰라도 정말 건강에 좋을지는... 글쎄요." 계속 따지려던 소운비는 혼음사의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져 가는 것을 보고 대충 이야기 끝을 얼버무렸다. "이 둔재야! 너는 사부의 말을 믿지 않는 거냐? 그리고 이것은 천하에 나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도가 경전이나 당나라 때의 의사 손사막(孫 思邈)이 쓴 책에도 나오는 것인데, 어찌 네가 감히 선현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느냐? 그리고 또, 대대로 황제는 아랫서열의 후궁들과 동침할 때는 자주 많이, 그리고 결코 사정하지 않는 채 정사를 치르고, 그 방식으로 이환점에 힘을 축적한 뒤에야 비로소 황후와 동침하여 튼튼한 후계자를 얻는다는 이 야기도 듣지 못했느냐? 고얄 뿐 아니라 무식한 놈이로고..." 소운비는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혼음사의가 신념처럼 믿 고 있는 모든 방사의 이론들을 일일이 부정하다가는 이대로 늙어 노인이 되 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저 이야기라 생각하고 들어 두면 되는 게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서 이 지루한 수업을 끝내고 무공 수련으로 넘어 가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야!" 오늘도 당문에 갔다가 오는 길에 한종린은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첫날에 야 혼음사의의 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지 만, 벌써 열흘이 다되어 가는데 당미령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다. "무슨 귀신이라도 씐 걸까?" 당미령의 증세는 소문난 명의인 한종린으로서도 그런 소리나 뱉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기묘했다. 이따금 잠꼬대 같은 헛소리를 내뱉는 것으로 보아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헛소리라는 것도 묘했다. -으응... 조금... -안 돼요... 그러시면... 이건 원인 불명의 병으로 혼수 상태에 빠진 처녀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좀 수상쩍은말들이 아닐 수 없다. 당철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지만, 한종린은 얼핏 당미령이 귀교를 겪 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난색을 띠고 있던 한종린은 문득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정명도 그 녀석이 이런 일에는 전문이 아닌가!" 정명도. 한종린만이 알고 있는 혼음사의의 본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금세 풀 이 죽어 버렸다. '만약에 그놈을 당문 안에 끌고 들어갔다가 혹시 또 무슨 난동이라도 부리 면...' 한종린은 아무래도 좀더 자신의 힘으로 고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결론을 내 렸다. 불청객들에게 점령당하다시피 한, 집 안으로 한종린이 들어가자 팔짱을 끼 고 선 혼음사의와 저 앞에서 망번신요보를 시전하고 있는 소운비가 보였다. '무공 수련 중인 모양이군!' 한종린은 방해되지 않도록 혼음사의의 뒤쪽에 서서 구경했다. 그는 본래 무 공에는 관심이 없고 의술 쪽만 연구했기 때문에 일신의 무공은 혼음사의에 비해 턱없이 뒤떨어졌다. 하나 보고 들은 것이 있어 내공의 기원이며 무공 의 깊이, 심지어 어느문파와 연관이 있다는 따위는 강호에 그 누구와 내기 를 해도 지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었다. 한마디로 알기는 한종린이 많이 알고, 싸움은 혼음사의가 더 잘하는 것이다. "호흡이 극에 달할 때까지 한번 망번신요보로 움직여 봐. 내 눈에 네 모습 이 제대로 안 보일 때, 그때 귀영폭침을 쏴야 해." 혼음사의의 호령을 듣고, 소운비는 오 장 넓이의 원을 그리며 망번신요보로 눈부시게 움직여 갔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소운비의 뒤쪽으로 여러 명의 소운비가 따르는 듯이 보였다. "허! 음음음음공이 아니로군?" 달리면서 소운비가 숨을 내쉬고 뱉는 것을 본 한종린이 혼음사의에게 참견 했다. 혼음사의는 심각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진지한 태도에 감 복한 한종린은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이놈이 가끔 진지해질 때도 있군.' 소운비의 신영이 걷잡을 수 없이 번뜩여 갔다. 이제 한종린의 눈에도 소운 비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하나 혼음사의는 냉정하게 외쳤다. "아직 멀었다! 네놈의 눈썹까지 하나하나 다 보인단 말이다. 더 빨리!" 한종린은 의아했다.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빠른데... 이 녀석 무공이 그렇게 굉장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종린도, 숨막히게 달리는 소운비도 모르고 있었다. 진 지한 얼굴 뒤에 가려진 혼음사의의 진짜 속셈을. '이놈! 아까 내 말에 콩이야 팥이야 토를 달았었지? 한번 목에서 피가 터지 도록 고생 좀 해봐라!' 파바바밧! 소운비는 달렸다. 비단 달릴 뿐 아니라, 가상의 적을 상상하여 적의 사각으 로만 몸을 옮겼다. 사람의 몸이 어느 정도의 속도 이상으로 움직이려면 상 당한 근력과 더불어 막강한 내력을 필요로 했다. 달리면서도 태원옥호공에 근거한 호흡법을 시행하고 있으니 한동안은 숨이 막히는 줄도 몰랐다. 소운비는 자신이 달리면 달릴수록 몸 속의 힘들이 용천혈과 천주혈로 치솟 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한번씩 움직이고 나면, 그의 내공은 태원옥호공의 자체 법칙에 따라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다. 달리는 와중에 소운비는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내공은 어떤 수준일까?' 지난번에 혜와에게 채양보음술로 내공의 상당 부분을 덜어 주었다고 하지 만, 그 뒤로 수련을 꾸준히 했으니 본래의 상태로 회복은 되었을 것이다. 말 하자면, 십 성의 수준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태원옥호공 이라고 해도 분명 늘어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만일 십이 성의 수 준에까지 이르렀다면... '물이 가득 담긴 그릇 안에 더 이상 물이 차지 못하는 것처럼, 내공의 증진 도 멈추겠지?' 소운비는 나름대로 그렇게 상상을 해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물이 차지 않 을 만큼 증진된 내공의 위력은 어떨지 그는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아직도 보인다!" 어렴풋이 혼음사의의 호통이 다시 한번 들려 왔다. 더 이상 빠를 수 없게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소운비는 말에 채찍질을 가하듯 조금 더 진기를 끌 어 모았다. 끌어올려진 진기는 천주혈과 용천혈을 향해 꿈틀꿈틀 움직여 갔다. 그 힘을 바탕으로 소운비의 다리 근육도 꿈틀거렸다. 파바바바바바밧! 몸이 바람이 되고, 공기가 몸이 되는 것처럼 아득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 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슬아슬하게 손에 닿을 것 같은 '조금만 더' 빠른 경지를 쫓아 그는 온몸 의 힘을 쥐어짰다.순간, 그는 천주혈로 치솟았던 진기가, 늘 종착점으로 삼 았던 그곳을 벗어나 더 위로 치솟기 위해 움찔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용천혈로 갔던 진기는 더 아래로, 아니, 발바닥의 밑이니 말하자면 소운비의 몸 밖으로 나가려는 듯했다.땅바닥을 치던 발소리가 순간 사라졌 다. 구경하던 한종린도, 심술을 부리던 혼음사의도 순간 말을 잊었다. 더없이 빠르면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경지. 소운비가 보여 주는 망번신요보는 말 그대로 도깨비의 움직임이었다. 소운비의 입이 벌어지며, 소리나지 않는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오른 손에 쥐고 있던 생사맥결통이 전방을 향해 흔들어졌다. 묵침이 발출되는 소리조차 없었다. 아마도 소운비의 가공할 속도 속에 모든 소리들이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묵침은 전방의 바위 속으로 푹 파묻혀 들어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 바 위가 두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리고 생사맥결귀영폭침 특유의 떨림. 부르르...! 그 다음에 폭발이 있었다. 콰아아아앙! 숨막힐 것 같은 소리의 실종 뒤에 처음으로 들려 오는 소리였다. 바위 조각 이 사방으로 튀었다. "세상에...!" 혼음사의는 자신조차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그 장본인인 소운비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 런 그에게서 혼음사의가 발견한 것은 예전에 인면자고를 흡수할 때와 같은 이글대는 호랑이의 눈빛이었다. 혼음사의가 반사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물러날 때, 한종린은 거꾸로 앞으로 나섰다. 소운비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정원을 망쳐 놓은 자에 대한 분노 대신에 믿을 수 없다는 심정이 담겨 있었다. "설마...? 자네는... 그... 태원옥호공을 익힌 것인가?" 호랑이의 눈빛이 가라앉을 때까지, 소운비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 었다. "그렇게 된 것이로군." 소운비의 긴 설명을 듣고 난 다음에야 한종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 가에는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부심 비슷한 것이 감돌고 있었다. 분하게 된 것은 혼음사의였다. 제자의 내공 근원도 알지 못한 못난 스승이 되고 만 것이니까. "왜 나한테는 숨긴 거냐?" "언젠가는 말씀드리려고 했지요." 소운비는 웃음 지으며 말했다. 사실 그가 혼음사의를 약간이나마 신뢰하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아 함부로 그 사연을 밝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뭐라고 또 투덜거리려고 입을 실룩이는 혼음사의를 한종린이 제지했다. 그 리고 소운비를 향해 호감이 어린 미소를 던졌다.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 사실이네만, 아무튼 자네는 참으로 인세에 보기 드문 기연을 만난 것이지. 그 태원옥호공은 근 이십 년 전에 사라진 사대성물(四大聖物) 중 하나라네." "사대성물이라니요?" 한종린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자네 같은 일세기재가 어째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는고... 다 무식한 스승 을 둔 탓이리라." 두 사람에게 다 놀림을 당한 격이 되어 발끈한 혼음사의가 냅다 소리를 질 렀다. "그래! 종린이 자네는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니 잘해 보게! 원 태어나서 무식하다는 이야기는 듣다듣다 처음 듣는구만...!" 홱 토라져 돌아앉는 혼음사의를 무시하고 한종린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도 들은 이야기네만, 이십 년 전에 강호무림에 서장의 고승이 출현한 적 이 있었지. 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단기간 동 안 활동하면서 네 개의 보물을 모았네. 그것들은 사실 어찌 보면 보물이라 고도 할 수 없는 것들이네만, 특정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렇게 말하며 한종린은 혼음사의 쪽을 흘끔 보았다. 그가 말하는 특정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란 아마도 혼음사의와 같은 색마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보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지. 그 고승은 천하 를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는 보물들을 모두 모아 없애겠다고 했다더군. 그렇 게 모은 것이 사대성물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자네가 익힌 태원옥호공의 비급일세." "그러면 그 비급이 어째서 무산음호의 손에 들어간 것일까요?" "그게 말이야, 사대성물을 모두 모은 그 고승이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다 더군. 사람들은 아마도 그 성물을 탐낸 자들에게 그가 살해당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네. 도는 높지만, 무공은 그리 높지 않은 사람이었거든." 소운비는 얼핏 무산음호가 그 고승을 살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하나 그는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 버렸다. 부탁을 들어달라 며 가르쳐 준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에게 막강한 힘을 건네 준 장본인 인 무산음호를 그렇게까지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소운비는 얼른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하면 나머지 세 개의 성물은 무엇입니까?" "하나는 양의 힘을 제압하는 향로지. 만음요화가 가진 혼혼옥잡이 아마 그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 또 하나는 비파인데... 음의 힘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하더군. 아마 이름이 음곡비파던가..." "예?" 별안간 소운비의 목소리가 두 배로 커지자 한종린은 깜짝 놀랐다. "음곡비파라고. 왜 그렇게 놀라나?" "그... 비파가?" 소운비는 자신이 십 년 간이나 매만져 왔고 혜와에게 정표로 준 그 비파가 사대성물 중 하나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음곡비파란 결코 흔 한 이름이 아니지 않은가! "마지막 하나는 사대성물 중 가장 신비한 것인데, 한 권의 책자라고 들었네. 나는 거기까지밖에 모른다네." 흘끔흘끔 눈치를 보며 건네는 한종린의 말도 그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 다. 돌아앉아 있으면서도 귀가 솔깃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혼음사의가 냉큼 돌아앉으며 물었다. 의도를 알 수 없으리만치 살살거리는 웃음을 지으 면서. "난 정말 똑똑한 친구를 두었어! 자넨 세상에서 모르는 것이 없군 그래." 그럴 법하지 않은 사람이 지나친 친절을 베풀면 일단 의심부터 드는 법이 라, 한종린은 경계의 빛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지. 방금도 말했지만 사대성물의 마지막이 무엇인지는 모 르고 있거든." "하지만 그것이 책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도 어디인가? 나는 상상도 못할 지식일세. 그래서 말인데, 하나 물어 봐도 되겠는가?" 한종린은 비로소 '네놈의 의도가 그것이로구나'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혼 음사의를 노려보았다. 하나 무엇을 생각했는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자네도 내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네." 혼음사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품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탁, 소리가 나 도록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 표창이 어느 문파에서 쓰는 것인가 하는 점이야!" 한종린은 괴수의 아가리가 새겨진 표창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어디서 난 건가?" 한종린이 던지는 자신없는 투의 질문에 혼음사의는 점점 기쁜 표정이 되어 갔다. 하지만 최후의 일 각까지 마각을 드러내지 않으려는지 담담하게 그 표창을 손에 넣던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으음...!" 한종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혼음사의는 한종린이 항복하려는 것이라고 생 각했지 만, 그것은 아니었다. 한종린은 혼음사의의 설명을 듣고서 그 표창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몽혼표로군!" "잉?" "몽혼표! 내가 아까 설명한 그 고승이 사라진 북망산(北邙山)에 그 당시 많 은 무림인 들이 몰려가 그 사건을 조사했었지. 표면적으로야 실종된 고승을 찾는다는 것이었지만, 그 속내를 누가 알겠나?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대성물에 눈독을 들이고 간 것이겠지. 하지만 그 무림인들은 갑자기 나타 난 괴인들의 기습을 받았네. 그들은 나타날 때처럼 신비하게 사라졌는데, 안 개를 뿜어 내는 표창을 던지고 갔다더군. 그 자리에 남았던 것이 바로 이 몽혼표일세!"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소운비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몽혼표를 던진 사람들이 그 고승을 납치해 간 주범일 가능성이 있군요." "그렇지." 한종린은 혼음사의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침중한 안색으로 말했다. "오늘은 사대성물 중에 태원옥호공을 눈으로 보고, 게다가 몽혼표까지 여기 있으니... 어째 좀 기분이 이상하군그래." 불길함. 그것이 바로 이 순간 한종린과 소운비가 동시에 느끼는 심정이었다. 태원옥호공, 혼혼옥잡, 음곡비파. 세 개의 성물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어 있었던 소운비로서는 몽혼표의 등장이 결코 우연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혜와가 음곡비파를 가지고 있는데... 혹시나 무슨 위험을 당하지는 않을는 지!' 늦가을을 향해 치닫는 하늘은 맑고 푸르기만 한데, 소운비를 둘러싼 운명의 그림자는 점점 낮고 무겁게 깔리고 있었다. < 제2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