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장 대결(對決) 마차는 이제 당가타(唐家 )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천 당문의 장원으로 들어갈 때가 가까워지자, 출발 전부터 피어오르던 근심이 한종린의 이마에 주름살 모양으로 접혀 갔다. '내가 너무 생각이 없었던 게야...' 당가의 장원이 폐쇄적인 것은 유명했다. 무림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자기 가문의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지 않는 한, 무림에 어떤 혈겁이 일어나도 상관하지 않으며, 대신 당가의 영역 안에서 일이 벌어지면 땅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해결하고 만다. 이것이 당가의 방식이었다. 당가의 사람들은 마치 넓은 밀림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지만 좁은 자기 구역만큼은 어떤 침입자의 발길도 용서하지 않는 늙은 호랑이 같았다. 그만큼 자신들의 터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그것이 희롱당했을 때는, 보통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보복을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유로 무림에서는 당문을 매우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 또 종이호랑이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다 일리가 있는 것이었으니, 당문과 관련된 일을 눈꼽만치도 하지 않는다면 당문만큼 별것 아닌 곳이 없고, 당문과 사소한 원한이라도 맺는다면 또 그 당문만큼 무서운 악귀가 천하에 다시없는 것이다. 지금 한종린이 탄 마차가 향한 곳이 바로 그런 당문이요, 당문의 영역이었다. 한종린의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새겨 넣은 걱정거리는 바로 같은 마차 안에 타고 있는 말썽 많은 사람이었다. 며칠을 함께 지내 본 결과, 지닌 바 무공과는 달리 순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을 가진 소운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 창 밖을 천연덕스럽게 내다보고 있는 혼음사의였다. 혼음사의는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불행이라고 말해도 될 만큼 분란(紛亂)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던가? '음... 아무래도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어! 저놈이 그런 병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하지만... 일가견이야 딴 방면에 더 있지 않은가!' 한종린의 얼굴은 닥쳐 올지도 모를 불행한 사태 때문에 잔뜩 일그러져 있는데,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혼음사의와 소운비의 얼굴은 무심하기만 했다. 아무리 인피면구가 섬세한 표정은 내 보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혼음사의의 진짜 얼굴 역시 태연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종린이었다. 마차는 어느새 장원 안으로 들어섰으며, 이제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가고 있었다. "이쪽은 정명도라고... 저와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사람입니다. 영애(令愛)의 병과 같은 증상에는 저보다 정통해 있기 때문에 실례를 무릅쓰고 데려왔습니다만..." 가주(家主) 당철에게 혼음사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종린은 지레 진땀을 흘렸다. 혹시나 당철이 혼음사의와 소운비의 인피면구를 꿰뚫어 보면 어쩌나, 혹시나 혼음사의나 소운비가 말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사실 보통 때라면 한종린은 보다 다른 문제를 걱정했어야 했다. 미리 통보하여 허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당가의 장원 안에 외인을 둘이나 끌어들인 문제 말이다. 여느 때의 당문 가주라면 그것이 아무리 한 노백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문제였다. 하나 한종린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지금의 당철은 결코 그런 '여느 때'의 기분이 아니었다. 청하지도 않은 외인 두 명과 동행한 것을 따지는 것은 물론이요, 지금 앞에 서 있는 낯선 의원과 그 의원의 젊은 제자가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지 어떤지 눈을 부릅뜨고 검사해 볼 심정도 못 되었던 것이다. "이젠 여식(女息)뿐만이 아닙니다..." 당철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당문의 가주 답지 않게, 불쌍하다고 여겨도 좋을 만큼 힘없는 음성이었다. 혼음사의가 냉큼 물었다. "무슨 일이 또 있었습니까?" 대답하는 당철의 얼굴이 무척이나 침울했다. "장원 안에 같은 증세를 보이는 환자가 더 생겼지요." "누가...?" 당철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직접 그곳으로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과연, 당문 가주 당철의 심기를 어지럽힐 만한 상황이었다. 당미령의 규방 옆에 있는 작고 아담한 방에 두 명의 여인이 누워 있었는데, 한 사람은 중년부인이고 한 사람은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초로의 부인이었다. 중년부인은 바로 당미령의 어머니, 즉 당철의 아내였고, 노부인은 당철의 어머니였다. "안사람과 어머님께서는 딸아이의 병이 깊어지자 아예 침실을 이리로 옮기고 불철주야 간호를 했었습니다. 한데 며칠 전부터... 갑자기 두 사람도 똑같은 증세로 잠에서 깨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한종린이 살펴보니 과연 두 여인은 당미령과 똑같이 죽은 듯이 잠에 취해 있었고, 이따금 헛소리를 뱉어 냈다. 순간이었지만 한종린의 머릿속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전염병인가?' 혼음사의는 제법 신중한 안색을 하고 턱을 두어 번 긁더니 당철에게 대뜸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두 부인을 진맥해 봐도 되겠습니까?" 진맥해 보라고 부른 의원을 못하게 할 리 없었다. 한데 혼음사의가 말한 '진맥'은 여태껏 한종린이 하던 진맥과는 다른 것이었다. 의원들이 귀한 집 여인네들을 진맥할 때는 아주 가는 실을 쓴다. 그 실을 여인의 손목에 감고 실 끄트머리를 의원이 쥐고 맥박 소리를 듣는 것이다. 물론 아주 어렵고 섬세한 기술이 요구되는 방법이었다. 그 이상 환자의 살갗에 직접 접촉하는 일은 병세가 아주 위태로운 지경이 아니면 피하는 것이 의원들의 상식이었다. 하나 혼음사의는 당철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얼른 안주인의 손목부터 덥석 잡았다. 한종린은 기겁을 했고 당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 손목을 쥐고 지그시 눈을 감은 혼음사의의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 누구도 무어라고 할 수가 없었다. '흠...! 아마도 직접 진맥을 해야 할 만한 상황이라고 판단을 하신 게지!' 그렇게 생각하며 안색을 펴는 당철이었다. 혼음사의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거나 말거나 그저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당 부인의 손목을 쥐고만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그러고 앉은 것이 일 각을 넘겼다. 한종린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속으로 간절하게 울부짖었다. '제발..., 이 친구야! 여자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말아라. 당가의 안채에서 당가의 여자를 희롱하면 대대손손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 각이 다되어 갈 때쯤에야 혼음사의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당 부인의 손목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보십니까?" 당철이 조급하게 물었으나 일언반구 대꾸도 하지 않고 이번엔 또 하나의 당 부인, 당철의 어머니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저놈이 이젠 늙은 여자까지?' 혼음사의가 하는 일이라면 지나가는 개를 쓰다듬는 것도 심상치 않게 보는 한종린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노부인의 진맥은 잡자마자 금세도 끝났다. 당철은 그저 자신의 아내와 같은 종류의 병인가만 확인하느라고 금세 끝났다고 생각했고, 한종린은 그래도 나이는 가리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혼음사의는 진맥의 결과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언급하지 않고 점잖게 한마디 뽑았다. "영애를 진찰하고 싶소만." 당철은 당연한 순서라고 생각했지만, 한종린은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혼음사의의 눈에서 순간 득의의 빛을 발견한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당가장에 들어온 이래로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있던 소운비는 이 거대한 장원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무척이나 음울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 * * "어떻게, 방법은 있어 보입니까?" 당미령의 진맥은 한종린의 생각대로 시간이 두 배는 족히 더 걸렸다. 하나 다행히 혼음사의는 별 추태를 보이지 않았는데, 한종린은 그 이유가 당미령이 오랜 병으로 해골에 옷을 걸쳐 놓은 것처럼 볼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당철의 방으로 돌아왔는데, 혼음사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고, 당철은 답답한 마음에 재우쳐 물었다. "그것이...!" 혼음사의가 목소리를 질질 끌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에 오기 전에, 저 친구로부터 증상에 대해 설명을 듣고 한 가지 짐작하는 바가 있었습니다만..." "예." "역시 그 짐작이 맞는 것 같습니다." 혼음사의의 말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기에, 당철은 반색을 보였다. 아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여태껏 병명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시간을 끌어 오지 않았는가. 병명을 알 수 있다면 치료 방법도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면?" 그 답을 해주는 대신, 혼음사의는 한종린에게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자네도 짐작을 못했을 리가 없었을 텐데?" 그것은 언뜻 약을 올리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었지만, 실은 지금까지 당문과 거래를 해온 한종린의 체면을 살려 주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한종린도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아 그 속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짐작한 것은... 가주께는 외람되나 따님이 귀교(鬼交)의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다만 귀교치고는 너무 괴이해서 저로서는 손도 댈 수 없고, 또 그 병의 성질상 함부로 진단을 내리기가 껄끄러운지라..." "예?" 귀교. 그 말이 한종린의 입에서 주저주저하며 흘러나오고, 혼음사의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당철은 대경실색했다. '귀교라니, 귀...!' 당문의 금지옥엽이 귀교에 걸렸다니. 그것은 정말 당치않은 말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나이가 꽉 찼는데도 욕구를 풀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하게 되면, 그 불만이 마음 구석에 가득 쌓여 마침내 사람의 골수에까지 사무치게 되는데, 사악한 귀신이 이 기회를 틈타 사람의 모습을 하고 그의 꿈에 들어가 교접하면서 정기를 앗아 가는 것을 귀교라 한다. 귀신은 보통 사람보다 교접하는 기교가 훨씬 능란해서 사람이 한 번 그 맛을 보게 되면 헤어 나오지를 못하게 되는데,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그것을 몰래 즐기다가 결국 생기를 잃고 죽은 다음에야 그 사실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다행히 귀교에 완전히 빠지기 전에 적당한 배우자를 찾아 살가운 잠자리를 하게 된다면 모를까, 한번 걸리면 영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고 요행히 살아나도 언제나 반쯤은 얼이 빠진 채로 보잘것없는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남자가 이 병에 걸리는 것도 흔하지 않지만 여자의 경우는 거의 찾아 볼 길이 없었다. 여자가 만일 귀교에 걸렸다고 하면 동정심을 사기 전에 먼저 '얼마나 음탕한 생각에 빠져 있었으면 귀신에게 다 틈을 주는가' 하는 욕을 먹어야 했다. 아연해진 당철은 그제야 왜 그 동안 한종린이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입 속의 말을 시원히 뱉지 못하고 그토록 주저주저해 왔는가를 알 수 있었다. 딸이 귀교라고 한번 진단을 내린 이후에는 그 말을 주워 담기 힘들고, 만일 아니라고 판명이 되거나 당철이 이 수치스런 사실이 퍼지지 않도록 함구(緘口)시키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당미령이 죽기 전에 의원인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판단을 한 것이리라. 혼음사의가 쯧쯧 혀를 찼다. "대체 체면이 무엇인데 그걸 그렇게 감추고 있었단 말인가...! 사람의 생명이 위험한데 말이야!" "뭐라고?" "이건 귀교와 비슷하기는 하나 결코 귀교 수준에서 끝나는 일이 아닐세!" 혼음사의는 한종린에게 설명하는 듯하면서 은연중에 당철에게까지 반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당철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번갯불이 번쩍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짐작할 수는 없지만 귀교를 가장한 어떤 존재가 당 소저를 욕보이고, 계속 잠을 자도록 어떤 술법을 쓴 거야. 두 부인이 당한 것은 당 소저를 욕보이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귀교를 가장해?" "그렇지. 귀교보다도 훨씬 무서운 것이지! 잘 생각해 보게. 당문의 심처까지 거침없이 들어올 수 있으니 무공의 고수요, 처녀를 욕보이면서 그 꿈을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으니 사술에 능한 당대의 색마라..., 가주께서는 뭐 떠오르는 바가 없소?" 질문은 당철에게 했지만, 대답은 그 자리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나왔다. "몽중마령?" 그 대답은 반쯤은 회의에 차서 되묻는 것이었다. 하나 끄덕이는 혼음사의의 얼굴은 확신에 넘치고 있었다. '그럴 수가...! 다름아닌 몽중마령이었단 말인가? 믿을 수가...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토록 기척없이 숨어들 수 있으며, 이토록 귀신같이 일을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혼음사의를 똑바로 노려보는 당철의 얼굴에도 점차 그 확신의 표정이 전염되어 갔다. 당철은 고집이 세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뭔가를 믿게 만드는 것은 힘들지만 일단 믿게 하고 나면 일사천리로 밀어붙이게 된다. 방안에 얼음 같은 침묵이 쌓이고 당철의 눈이 완전히 그 사실을 확신하는 빛으로 덮였을 때. "총관! 총관은 어디 있는가?" 당철의 그림자처럼 흑의를 입은 중년인이 방문을 열고 고개를 숙인 채 하교(下敎)를 기다렸다. 당철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즉시 장원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경계를 명하게. 중심은 령아의 방, 오늘부터 매일 밤일세. 들어올 놈은 자객이네." 흑의중년인은 말없이 고개를 한번 조아리고는 다시 물러났다. 당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일을 궁리하는 모양이었다. 한종린과 소운비, 혼음사의 세 사람도 주인의 영향을 받아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종린의 경우에는 내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 저 가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몽중마령이라는 심증을 잡았으니 앞으로 그가 올 때를 기다려 잡으려고 할 테고...! 우리를 어찌할까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 딸이 몽중마령의 제물이 되었다는 이 수치스러운 사실이 바깥에 퍼지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고, 하지만 사람을 죽이거나 가둬서 멸구(滅口)하자니 도의가 아니고... 과연 이 신임 가주는 실리를 따지는 쪽인가, 아니면 도의를 따지는 쪽인가?'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듯 혼음사의가 문득 헛기침을 했다. "어흠, 어흠!"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당철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혼음사의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엉뚱한 질문이었다. "총관께서 나가셨는데 밖이 아주 조용합니다그려?" 과연 그랬다. 가주가 특별 경계령을 내렸으니 안팎으로 그에 대한 대비를 하자면 떠들썩한 것이 정상일 텐데, 바깥에서는 꽃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것이었다. 당철이 천천히 입을 뗐다. "이것이 당문이오." "오오!" 혼음사의는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하나 한종린은 당철의 말속에 담긴 의미 때문에 표정이 더욱 굳어 갔다. '이렇듯 매사를 소리없이 치를 수 있는 것이 당문이니, 우리 역시 소리없이 해치울 수 있다는 뜻일까...?' "외람됩니다만..." 혼음사의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 갔다. "외적을 퇴치하는 것도 퇴치하는 것이고, 영애의 병을 고치는 것도 고치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 이상 몽중마령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영애의 병이 이미 골수에 사무쳐 있는지라 반드시 치료가 필요합니다. 해서, 저희 세 사람이 당분간 장원 안에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만, 허락해 주시겠는지요?" 순간, 당철이 약간 머뭇거렸다. 그는 아직 실리를 택할지 도의를 택할지 결정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나 만일 몽중마령이 온다면 이곳은 안전치가 못할 것입니다만." 당철이 묻자, 혼음사의가 느닷없이 소운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들도 한 몸쯤은 지킬 수 있습니다. 이 친구가 제 제자 겸 호위의 역할도 하고 있으니 외적을 지키는 데 한몫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제서야 당철은 거의 한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던 소운비를 새삼스럽게 살펴보았다. 곱상하게 생긴 데다가 표정이 유순한 것이 무공을 익힌 사람으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소운비의 깊은 눈매를 들여다본 당철은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눈빛에 맑은 정기가 엿보였던 것이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수련이 없지는 않은 사람이군.' 당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일이 끝날 때까지는 장원 밖으로 나가지 않을 사람들이니, 어떻게 처리할지는 나중에 결정해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세 분의 처소를 마련하겠습니다." 당철이 마침내 결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종린도 예를 갖추며 따라 일어났다. '실리도 도의도 아직은 선택하지 않았군그래!' 막 방을 나서려는 당철에게 혼음사의가 예의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영애의 처소 가까운 방으로 했으면 합니다." 멈칫하는 당철의 눈을 마주보면서 혼음사의는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당장 오늘부터 원기를 회복시키는 치료를 해야 하니까요." * * * "정말 그인가?" "그렇다니까! 언제 내 말이 틀린 적이 있었나?" 거듭해서 몽중마령이 틀림없느냐고 묻는 한종린에게 혼음사의가 짜증 섞인 투로 대꾸했다. 한번만 더 물으면 싸움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자네 언제 몽중마령을 만난 적이 있었나?" 한종린은 이제 내용을 바꾸어서 질문을 던졌다. 혼음사의는 고개를 저었다. "몽중마령은 당대의 사람이면서도 무산음호만큼이나 신비에 가려져 있지. 아마 다른 오대색마들 중에서도 몽중마령을 만나 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그의 무공이 어떤 수준인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한종린은 안타까운 얼굴이 되어 고개를 흔들었다. "그를 모른다면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군. 그럼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어떻게 하나?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아. 당문의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할 만큼 해주었으니 여기서 어서 나가는 게 좋지 않겠어?" "안 돼." 혼음사의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아까 말한 대로 이 당씨집 딸년의 병도 고쳐 줘야 하고, 또 무엇보다도 그 몽중마령을 만나 보고 싶다구. 게다가..." 혼음사의는 푹신한 침상 위로 벌렁 드러누우며 이죽거렸다. "네 집 침상은 돌처럼 딱딱한데, 여기는 정말 궁궐처럼 편안하지 않아? 며칠 쉬어 가는 셈 치면 되지!" 몽중마령의 진면목은 짐작이 가지 않고, 당철의 마음은 언제 바뀔지 모르는 데다가, 혼음사의의 정체가 또 어느 때 들통날지 몰라 전전 긍긍하던 한종린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소운비는 두 사람의 입씨름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는 혼음사의가 애써 몽중마령을 만나려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색존이 되는 것이 소망이니, 몽중마령을 만나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를 타진해 보려는 것이겠지. 만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다른 색마들을 제압하는 것은 크게 어려움이 없을 테니까...!' 소운비 역시 몽중마령을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정말 이곳에 몽중마령이 나타나고, 그를 만나게 된다면 소운비는 그야말로 강호칠대색마 전원을 상면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매일 밤 오는 것은 아닐 거야.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니, 낮엔 자고 밤엔 지켜야 한다구." 혼음사의는 애써 장원을 나가려는 한종린의 말을 그렇게 묵살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는 못박듯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금이라면 저 당씨 아가씨를 내가 고쳐 볼 수도 있겠지만, 한번 더 몽중마령의 손길이 닿으면 정기를 모두 빨리니 방법이 없어. 그땐 그저 죽는 걸 기다릴 수밖에!" 혼자서라도 나가겠다고 떼를 쓰던 한종린이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친구를 아껴서가 아니라, 자신마저 없다면 혼음사의가 정녕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것이고, 그 욕은 보나마나 틀림없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일 당미령이 죽기라도 한다면 당철이 과연 가만히 있을 사람인가! 한종린은 포기의 한숨을 내쉬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소운비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당가의 장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했지만,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언제 닥쳐 올지 모를 신비인을 막기 위한 보이지 않는 그물이 소리없이 사방에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 * * 매복이란 효과적인 전술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만일 적이 매복에 쉽게 걸려 주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기만 한다면, 그것처럼 지독한 고행은 또 따로 없을 것이다. 소운비 일행이 당문에 들어온 지 칠 일이 지났다. 하나 몽중마령의 그림자는 비치지도 않았다. 당철은 한때 혼음사의가 허언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 따지려고 했으나, 자신의 노모와 부인의 병에 차도가 생기기 시작한 것을 보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마 놈은 경계가 강화된 것을 보고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치료를 하면 병이 나아지지요." 혼음사의의 설명이었다. 나이든 두 여인은 혈색이 제대로 돌아오고 이제 눈을 떠서 이따금 당미령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왜 병에 걸렸느냐는 질문에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미령이의 간호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아주 지독한 악몽이었다는 것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아요. 대체 며칠이나 잔 거죠?" 당 부인의 그러한 말은 당철로 하여금 더 더욱 이 일이 몽중마령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믿게 만들었다. 당철은 내심 이를 갈았다. '놈...! 감히 당문의 안채를 건드리다니...! 아무리 강호칠대색마라고는 하지만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어디 두고 보자.' 일전에 격색마회에서 사람이 와서 당문의 사람을 초빙해 갈 때, 당철은 처음엔 거절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격색마회가 아무리 큰 뜻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 일은 당문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음적이란 언제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고, 또 선대 가주와 친분이 있었던 개방의 백미노개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차원에서 중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몇 명 딸려 보내기만 했을 뿐이었다. 하나 이제는 달랐다. 만일 원흉이 몽중마령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면, 강호칠대색마는 사천 당문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꺼림칙하고 깊은 관련을. 당철은 이를 지그시 물었다. '음적들...! 왜 강호에 염라대왕과 원수를 맺을지언정 당문과는 맺지 말라는 속담이 있는지 알게 해주마!' "오늘밤에도 올 것 같지가 않군!" 벌써 며칠째 밤을 지새운 혼음사의가 길게 하품을 하고 말했다. 슬슬 지겨워하는 표정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소운비가 물었다. 혼음사의는 그를 힐끗 보다가 문득 무릎을 쳤다. "흥, 그렇지! 네놈은 내공만 고강하다 뿐이지 오감의 개발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어. 그러니 그렇게 둔한 거지...!" 오감이라는 이야기는 일전에도 혼음사의가 한 적이 있었다. 소운비는 오늘이야말로 그 내용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감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지요?" 혼음사의는 약올리듯이 고개를 저었다. "오감이라는 것은 말이야. 배울 수도 없고 익힐 수도 없는 거야. 그저 타고나는 것이지. 너는 포기하는 게 좋을걸?" 그때 자고 있는 줄 알았던 한종린이 벌떡 일어났다. "그걸 왜 못 배워?" 순간 혼음사의의 얼굴은 벌레를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고, 한종린은 더할 나위 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소운비를 향해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오감이라는 것은 타고나는 측면이 분명히 있지. 하지만 또한 후천적으로 습득될 수도 있는 거야. 내가 비록 의술을 주로 익히느라고 무공의 공부는 깊지 못하나 자네에게 가르칠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 나에게 몇 수 배워 볼 텐가?" 혼음사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 그놈은 내 제자야!" 한종린도 지지 않았다. "자네 제자면 내 사질이 되는 셈인데, 사백이 사질에게 몇 수 가르쳐 주기로서니 그게 뭐 나쁜 일인가?" 은근히 '사백'의 '백' 자에 힘을 주는 한종린의 말에, 혼음사의도 맞섰다. "아무리 사숙이라도 이류 무공을 가르치게 할 수는 없어!" '숙' 자에 드러나게 힘을 주긴 했지만, 정작 한종린을 발끈하게 만든 것은 '이류'라는 말이었다. "뭐, 이류? 그래 좋다, 이류...! 어차피 무공은 네놈이 나았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말야!" 한종린은 이빨 가루가 떨어지도록 이를 갈았다. "그래도 그런 중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아서 제자를 욕보이게 만드는 사부보다는, 비록 이류일지라도 가르쳐 주려는 사백이 훨씬 나은 게 아니냔 말이다!" "누가 가르치지 않는데?" "네가 그랬잖아!" "제자의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것인데, 자네가 쓸데없이 끼여든 거라구!" "웃기지 말라고...!" 초로의 나이로 접어들어 외관도 의젓해 보이는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풍경은 과히 보기에 아름답지 못했다. 양쪽을 번갈아 보던 소운비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두 사람 사이로 선뜻 들어갔다. "저..." 소운비가 양쪽을 만류하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말을 뚝 그쳤다. 소운비는 미소를 잃지 않고 물었다. "어느 분이 가르쳐 주시겠어요?" 혼음사의와 한종린은 동시에 소운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경쟁하듯이 입을 벌렸는데, 혼음사의가 조금 빨랐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느끼고, 촉감을 느끼는 다섯 가지를 오감이라고 한다. 하지만 무인에게 이 오감이란 살아 가는 데 필요한 다섯 가지 기능, 각각을 말한다기보다는 그 기능의 총체를 말하는 것이다." 혼음사의가 잠깐 숨을 쉬는 틈에 한종린이 냉큼 그 말을 잡아챘다. "여기 한 사람의 무인이 걸어가고 있다고 치자. 그가 걷다가 갑자기 인적이 없는 길을 돌아보았다.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지. 살기란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고, 냄새도 아니며 맛도 아니고 살에 와 닿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다섯 가지 감각이 없고서는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칼날 위를 걷는 거나 다름없는 강호의 생활을 하려면 그런 감각은 반드시 필요하다. 눈으로 보는 것만 믿을 것이 아니라 오감이 가리키는 바를 믿어야 하는 거야...!" 두 사람이 경쟁적으로 쏟아 내는 말을 소운비는 정신없는 가운데도 하나 흘리지 않고 받아 들었다. "오감은 물론 타고나는 측면이 강하지만 수련을 계속하면 결코 불가능한 것이..." "그 수련이란 일단 귀와, 눈과, 입과, 코와, 몸을 하나씩 열고...!" 두 사람은 허공에 뜬 공을 번갈아 잡아채듯이 빠르게 수련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혼음사의는 방금 전까지 소운비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겠다고 했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들어야 할 것을 다 들은 다음 소운비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방안에는 여전히 말다툼을 하는 혼음사의와 한종린만이 남았다. "자네! 내 제자한테 눈독들이지 마!" "무슨 소리야, 자네 제자면 내 사질도 된다니까...!" "눈 가리고 아웅하지 말게. 그 속셈을 모를 줄 알고? 그 나이 되도록 제자 하나 못 거둔 주제에...!" "뭣이 어째? 그래, 내가 저 젊은이를 좀 탐낸다고 치자. 그래서 내가 네 제자를 빼앗더라도 그것이 뭐 그리 큰 흉이냐? 남의 가족도 뺏은 놈이...!" "네 가족을 왜 내가 뺏어? 저 혼자 도망간 걸 가지고..." 방문을 등뒤로 닫으며 소운비는 다시 한번 웃음 지었다. 이젠 익숙해져서인지, 두 사람이 개와 원숭이처럼 싸워도 결국은 한 동문사형제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그였다. 이제는 쌀쌀하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가을이 깊어 가는 날씨였다. 소운비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한 점도 없는 고즈넉한 정원을 휘둘러보다가, 구석에 있는 으슥한 수풀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널찍한 바위가 있었다. 바위는 울창한 수풀을 마치 휘장처럼 앞에 드리우고 있어 바깥쪽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았다. '좋군...!' 소운비는 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방금 한종린과 혼음사의에게서 들은 방법대로 오감의 터득을 위한 수련을 하려는 것이다. 그는 일단 눈을 감고 운기를 시작했다. 이윽고 몸과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자 그는 먼저 천지사방에 무엇이 들리는가 귀를 기울여 보았다. 밤은 고요한 듯하면서도 특별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을 위해 많은 소리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낮게 깔리는 바람 소리, 가느다란 풀벌레 소리, 풀잎들이 서로 몸을 비벼대는 소리, 나뭇가지 위의 부엉이가 목을 울리는 소리, 그리고 소운비 자신의 고른 숨소리...! '세상은 한없이 조용한 것 같지만 귀를 기울이면 이렇게 많은 소리들이 웅성거리는구나!' 소리만으로도 소운비는 그 숱한 생명들이 움직이는 풍경 속에 홀로앉은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소리는 그저 귀로 들리기만 할 뿐 아니라 살갗에 느낌을 전해 왔다. 바람이 깔리는 소리는 그의 피부에 가벼운 소름을 돋게 했으며, 풀벌레의 울음 소리는 그의 귀 밑을 찌르며 들어왔고, 몸을 비벼대는 풀잎들의 노래는 겨드랑이로 파고 들어왔다. 관자놀이께를 쿵쿵 치는 자신의 숨소리까지 합하여 그는 마치 그를 둘러싼 밤의 풍경이 한 곡의 장대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운비는 그 음악이 너무나 편안하고, 그 안에 안주하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져 가는 순간이었다. 한데, 그 평온은 허무하게도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바스락! 불청객의 발이 몸을 비벼대던 풀잎을 짓밟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 온 것이다. 소운비는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그 불청객은 오히려 소운비를 불청객 취급하듯 따져 묻고 있었다. 소운비는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흑의중년인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당문의 총관이었던 것이다. "수련 중입니다만." 총관은 소운비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팎이 어지러운데 수련이란 말이오?" "예." 소운비는 대답하며 그의 피곤에 절은 안색을 슬쩍 살폈다. 벌써 며칠째 철야로 경계를 하니 아무리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도 신경이 날카롭고 몸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난 이곳에서 아가씨의 처소를 지켜봐야 하오. 앞으로 매일 나올 거요?" 소운비는 이어지는 총관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앉은 자리가 당미령의 거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요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운비는 가부좌를 풀고 서둘러 일어났다. "불편하시다면 제가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아니, 됐소." 총관은 고개를 젓고 바위 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바위는 넓고, 두 사람이 앉기에 부족함이 없소. 당신은 수련을 하오. 나는 내 일을 하겠소. 다만 큰 소리를 내거나 서로 일을 방해하지 말도록 합시다." 그리고 총관은 어색한 투로 덧붙였다. "혹시 내가 잠든 것처럼 보이거든 어깨를 흔들어 주시오." 불청객일 수도 있는 소운비를 쫓아 내지 않고 동석을 허락한 것은 바로 그 이유였다. 하긴, 당문의 사람들은 소운비의 일행과는 달리 낮에도 잠 한숨 못 자고 벌써 칠 일을 흘려 보낸 다음이었던 것이다. * * * -먼저 너의 오관(五官)을 열고 그 하나하나를 다듬는 기분으로 천지간의 소리와, 냄새와, 맛과, 빛과, 촉감을 느껴 보도록 해라. 그 다음에는 그 모 든 것을 따로따로 구분하지 말고 하나로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중에 는 그것들을 합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잊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천지를 향해 몸과 마음을 열어 두는 것이 특별히 수련 중에만 가능한 것 이 아니라 길을 걷는 동안이나 잠을 잘 때조차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때가 되면 너를 암습할 사람은 세상에 없게 된다. 물론 그 경지 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수련을 해야겠지만, 우선 이와 같은 심정으로 운기를 해보면, 기초적인 오감은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한종린과 혼음사의가 뒤죽박죽으로 일러준 말에 따라 소운비는 틈나는 대로 그 자리에서 수련을 거듭했다. 의술을 모르는 그로서는 당미령의 치료에 아무런 보탬이 될 수가 없었고,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에 오히려 수련을 위한 시간으로는 적당하다 할 만했다. 처음 수련을 시작했던 날로부터 칠주야(七晝夜)가 더 흐르자, 이제 지치는 것은 당문의 하급 무사들뿐이 아니었다. 잔뜩 기대와 긴장을 하고 있던 혼음사의와 한종린조차도 얼굴색이 누렇게 되면서 시도 때도 없이 졸기 시작했다. 당문 안에서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지 않는 사람은 오직 세 사람뿐이었는데, 그 하나가 가주 당철이었다. 당철은 날이 갈수록 두 눈을 또록또록 뜨고 딸의 방에 침입하는 수상한 그림자가 없는지 감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졸지 않는 두 번째 사람은 당미령이었는데, 그녀는 아예 푹 자고 있었기 때문에 졸 일이 없었다. 한종린이 여러 가지 약을 쓰고 혼음사의가 침을 놓아 얼굴색은 차츰 발그스레하게 돌아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좀체로 깨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색이 회복되어, 이제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해골에 옷을 입혀 놓은 것 같은 몰골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명문의 규수에 미인 아닌 사람이 없다고, 당미령도 약간은 거만해 보이도록 오똑하게 선 콧날이 시원스러운 것이 미인이라 할 만했다. 당미령의 미색이 회복되어 갈수록 혼음사의의 표정은 밝아졌고, 한종린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당문 안에서 졸지 않는 세 번째 사람은 바로 소운비였다. 이상하게도 실제로 눈을 붙인 시간은 혼음사의나 한종린과 별다를 바가 없는데도 그는 잠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낮에는 건실하게 두 의원의 일을 돕고, 밤에는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련에 열중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때로 사람이 너무 잡념이 많다 보면 실제보다 두 배는 피로해지기 마련인데, 소운비는 바로 그 잡념이 없었기 때문에 피로를 덜 느낀 것이다. 그날 밤도 소운비는 여느 때와 같이 수풀 속의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고, 당문의 총관 역시 그 옆에 와서 앉았다. 별은 밤하늘의 한쪽 끝을 잡고 기울이면 쏟아질 것처럼 많았다. 바람도 딱 기분좋을 만큼 시원했다. 당문의 총관은 이 며칠 대해 본 바로는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말이 드문 사내였다. 원래 성격이 그래서인지 아니면 일이 피곤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소운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는 일절 소운비의 수련에 방해를 주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 말했던 대로, 자신도 그의 일을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방해받지도 않겠다는 식이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았던 만큼, 두 사람은 서로의 목소리에 낯설었다. 총관이 느닷없이 불쑥 말을 꺼냈을 때, 소운비는 며칠 동안이나 함께 같은 자리에서 밤을 샌 사이인데도 꼭 처음 대하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곤하지 않은가?" 소운비는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풀의 그늘진 곳에 얼굴과 몸을 반쯤 가린 총관은 노고에 지친 한숨을 무겁게 내뱉었다. "정말 놈이 오기는 오는 건지 모르겠군. 이젠 피곤해..." 총관의 그 말은 당문 사람들 전체의 심정이리라고 소운비는 생각했다. 만일 정말 몽중마령이 이 일에 개입되어 있다면, 그는 무척이나 인내심이 많은 맹수 같은 존재일 것이다. "이런, 수련을 방해했군.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게." 총관은 넋두리를 거두고 소운비를 격려했다. 소운비는 그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눈을 감자 천지사방이 그에게로 조용히 다가들기 시작했다. 그의 오감은 전과 다르게 무척 예민해져서, 사방 십 장 이내의 인기척은 쉽게 감지할 수 있는 정도였다. 게다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숨소리를 한껏 낮추고 여기저기 그림자처럼 매복해 있는 당문 사람들의 기척도 그는 느낄 수가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당문 사람들의 숨소리는 고르고도 침착했다. 하나 이삼 일 전부터는 소운비가 걱정스러워할 정도로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역시 피로하기 때문이었다. 피로라는 것은 단지 잠을 못 자서 오는 육체적 피로뿐만이 아니었다. 비파의 줄도 너무 바짝 죄어 놓으면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지기 마련이다. 사람의 신경도 그러한 것이다. 총관을 비롯하여 당문의 사람들은 모두 너무 바짝 죄어진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내서 늘어진 줄과도 같았다. 한데, 오늘은 무엇인가 달랐다. 소운비는 수련에 임하자마자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원 이곳저곳에 매복해 있는 당문 사람들의 숨소리는 매복이 시작된 첫날과 다름없이 고르고도 침착했다. 호흡이 흔들리는 것은 소운비의 등뒤에 있는 총관뿐이었다. 소운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일 당문 사람들이 오늘 총관이나 가주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받아서 다시 긴장을 했다면 어째서 총관은 여전히 피로한 기색일까...?' 그것이 그의 의문이었다. 한데 그 의문보다 더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소운비 자신의 불안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운비의 불안감은 가중되기만 했다. 그가 불안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엉뚱한 일에서 불안감을 느낀다는 사실이었다.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엉뚱한 것일수록 그 불안감은 크기 마련이다. 소운비는 어째서 불규칙하고 흐트러진 총관의 기척보다도 고르고 규칙적이며 은밀한 당문 사람들의 기척에서 자신이 더 불안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느낌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자신의 느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불안할 뿐이다! 소운비의 오관은 바로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소운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야 속에서, 며칠째 그려 놓은 것처럼 변화가 없던 풍경에 한 점의 변화가 일고 있었다. 당미령의 옆 방, 예전에는 당미령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앓아 누워 있던 그 작은 방의 문이 소리없이 열린 것이다. 문이 열리는 데는 소리가 없었지만, 그 문에서 나온 사람은 정원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당철이었다. 당철은 딸의 방 가장 가까운 곳에 스스로 매복하고 있었던 것인데, 왜 갑자기 매복을 깨고 몸을 드러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뚜렷하게 불안한 기색으로 당철은 정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 사람도 나처럼 불안을 느낀 것일까?' 소운비가 당철을 살피다가 문득 뒤쪽에 앉아 있던 총관을 돌아보았다. 총관은 막 몸을 일으키는 참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가주께서 어찌...?" 당철에게로 가려던 총관은 소운비의 옆에서 갑자기 휘청거렸다. "엇!" 오랜 시간 한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어지러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무공을 익힌 사람이 어지럼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총관은 소운비의 어깨를 짚으며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았다. 어둠 속이지만 총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소운비는 볼 수 있었다. 하나 그는 총관의 체면을 생각해서 못 본 체 고개를 돌렸다. "미끄럽군!" 총관은 쑥스러운 듯 발뒤축으로 방금 디딘 바위의 표면을 때리더니 정원을 가로질러 당철이 서성거리는 주랑(柱廊) 쪽으로 걸어갔다. 이상하게도 총관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낯설게 보였다. 물론 며칠 동안 언제나 총관은 그의 뒤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뒷모습이 낯익을 이유는 없었지만, 그 낯선 느낌조차 소운비에게는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당철과 총관이 마주서서 은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있던 소운비의 몸에 갑자기 변화가 왔다. '으으윽!' 마치 억눌려져 있던 불안감이 폭발이라도 하듯, 그는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입으로는 비명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소운비는 자신의 손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마비가 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수풀 사이로 총관이 당철의 귀를 빌려 무어라 속삭이고 있는 모습이 뚜렷이 보였지만, 도와 달라는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몸이 마비가 되었는데 정신은 맑아지는 듯, 소운비는 그 순간 왜 자신이 당문 사람들의 고르고 침착한 기척에 불안을 느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숨소리가 마치 잠든 사람들의 그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잠들었어!' 소운비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당문의 장원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이 잠든 것이다! 당미령의 방과 마주보는 방안에 있는 혼음사의와 한종린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그 많은 고수들이 일시에 깊은 잠에 떨어진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잠이 단지 피곤해서 저절로 찾아온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다. '몽중마령!' 소운비는 그가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총관의 귓속말을 듣고 있던 당철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돌부처처럼 굳어지더니, 몸이 그대로 기울어져 소리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가?' 소운비는 이제 자신을 제외하고는 집 안에서 유일하게 잠들지 않은 사람인 당문의 총관을 뚫어져라 보았다. 당미령의 방문을 응시하고 있는 총관의 모습은 정말 낯설게 여겨졌다. 한 순간, 마치 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허물처럼 총관이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뱀의 몸통 대신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는 것은 총관의 그림자였다. '허억...!' 소운비는 이미 감각이 마비되었는데도 뒤통수를 바늘로 찔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키가 비정상적으로 크고, 깡마른 손발이 유난히 긴 사람이었다. 전신을 검은 옷으로 감싼 그 사람은 오늘 당문 총관의 그림자가 되어 그를 제압하고 조종해서 모든 사람들을 잠들게 하고, 소운비에게도 술수를 쓴 뒤 마지막으로 당문 가주마저 쓰러뜨린 것이다. 그 그림자 같은 사내는 자신이 모든 방해꾼들을 제거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 듯 주변을 특별히 경계하지도 않고 당미령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소운비는 어떻게 해서든지 손발을 움직여 보려고 용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서 몽중마령을 막을 만큼 의식이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고, 혼음사의의 말대로라면 지금 몽중마령을 막지 않을 경우 당 소저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내가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을 깨워야...!' 마음이 급해서인지 손가락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조차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구슬 같은 땀방울이 바위를 적시고 흘렀을 때에야 소운비는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그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당철에게로 달려갔다. "으응...! 으으으음...!" 당미령의 방안에서는 악몽에 시달리는 듯한 그녀의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소운비는 방안의 괴인이 들을까 봐 감히 말로는 깨우지를 못하고 당철의 몸을 마구 흔들고 뺨을 꼬집어 보았다. 하나 그는 바위처럼 잠들어 깨어날 줄을 몰랐다. '낭패다...!' 소운비는 혼음사의라도 깨우기 위해 다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그의 귓가에 나지막하고도 음산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 와 발목을 붙잡았다. "아이야,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 그 목소리는 소운비의 발목뿐 아니라 온몸을 보이지 않는 줄로 꽁꽁 묶었다. 소운비는 감히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을 깨우려는 거냐?" 두 번째로 그 소리가 들렸을 때, 소운비는 있는 힘을 다해 목을 뒤로 틀었다. 목은 몸의 일부인데도 마치 천 근의 바위를 드는 것처럼 움직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소운비는 마침내 그 일을 해냈다. 그가 본 것은 당미령의 방에서 막 나온 검은 옷의 괴인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얼굴은 몸처럼 길쭉하고 비쩍 말랐으며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왔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이 귀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운비는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당신이 몽중마령이오?" 괴인, 몽중마령은 소운비의 질문이 뜻밖이라는 듯 그를 새삼스럽게 관찰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이야,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놀라게 하는구나." 그는 말하고 있었는데,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달싹거리지도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말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으로 착각할 만했다. 하나 소운비는 바로 눈앞의 사람이 말을 하고 있으며, 그가 입을 움직이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으므로 조금도 놀라지 않고 그를 노려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첫 번째는 오직 너만이 이 장원 안에서 나의 천년수혼(千年睡昏)에 제압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네가 감히 나의 점혈 수법을 깨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며, 세 번째는 지금 네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말에서 소운비는 비로소 그가 장원 안의 모든 사람을 잠들게 한 수법이 천년수혼이라는 사술이며, 아까 총관의 몸을 빌어 자신의 어깨를 짚는 척하고 점혈을 했던 일과 방금 자신을 불러 세울 때도 일종의 사술을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몽중마령이오?" 소운비는 거듭해서 물었다. 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꾸로 소운비에게 물어 왔다. "너는 당문의 제자냐?" 소운비가 고개를 젓자 괴인, 몽중마령은 탄식하듯 깊게 숨을 내뱉었다. "어쨌거나 너는 놀라운 아이다. 나는 오늘 너 때문에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구나." 몽중마령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을 후회하는 듯 갑자기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소운비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눈...! 몽중마령의 눈에는 색깔이 있었다. 그것을 딱히 무슨 색이라고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보통 중원인들의 눈과는 확실히 빛깔이 달랐다. 소운비는 그 눈을 계속 마주보고 있다가는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고개를 떨구며 시선을 피해 버리고 말았다. 하나 시선을 피한다고 모든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적과 마주선 상태에서 눈을 돌려 버리는 따위의 일은 오직 소운비처럼 싸움의 경험이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바보 짓이었다. 스으윽...! 소운비는 비록 몽중마령의 눈길은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그가 자신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 발걸음은 느리게 흘러가는 밤하늘의 먹구름 같은 것이어서, 감히 피하거나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한걸음과 함께 말할 수 없이 괴이한 기운이 소운비 쪽을 향해 한걸음 밀려왔다. 그 한걸음만으로 소운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제 몽중마령은 막 두 번째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소운비는 몽중마령을 만남으로써 강호에 이름을 날린 칠대색마를 모두 견식하게 되었다. 그 중에는 물론 강호 전체를 통틀어도 능히 일류 고수에 끼일 만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하나 단언컨대 이 몽중마령만큼 무서운 고수는 없었다. 소운비가 처음 색마들의 집회에 끌려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한다면 무공의 진전이 실로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때 혼음사의나 만음요화, 심지어 무산음호를 만났을 때에도 이와 같이 저항하기 힘든 기도를 낀 적은 없었던 것이다. '몽중마령은 강호에서 드러나게 활동을 하지 않고, 사람인지 귀신인지조차 불분명했는데, 이제 보니 일곱 색마들 중에 가장 무서운 자가 바로 그였구나!' 소운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몽중마령은 막 세 걸음째를 딛고 있었고, 한걸음만 더 다가온다면 그의 무형의 기도 때문에 소운비의 심장이 터질지도 몰랐다. 그때, 몽중마령의 등뒤에서 갸날픈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으응...! 어... 머니...!" 방문은 열려 있었고, 그 소리는 당미령의 것이었다. 그리고 누가 들어도 뻔한 단말마의 신음이었다. 순간, 소운비는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코앞까지 다가온 몽중마령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 순간 그가 본 것은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고수 몽중마령이 아니라 연약한 소녀의 생명을 앗아 가려는 한낱 색귀(色鬼)였다. 몽중마령은 최후의 일격을 얌전히 기다리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운비가 갑자기 자신을 마주 쏘아보자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바로 야릇한 미소로 이어졌다. "저 계집이 불쌍하냐?" 소운비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계속 쏘아보았다. 사람 같지 않은 비릿한 냄새가 몽중마령으로부터 풍겨 왔다. "세상의 계집이란 그저 한 사람의 고수를 만들기 위한 양분에 불과하다. 저 계집은 세상에 태어나 충분한 역할을 하고 가는 것이다." 말을 이어 가면서, 몽중마령의 오른손이 천천히 위로 들어올려졌다. 소운비의 시선은 몽중마령의 눈으로부터 그 손으로 옮겨졌다. "너는 태어난 만큼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가니 불쌍하구나!" 들어올려질 때는 분명 느리던 그 손이 내리쳐지는 순간에는 전광석화와 같았다. 끼아아아악! 사람의 혼백을 찢어 놓을 것 같은 귀곡성이 손끝에서 터져 나왔다. 몽중마령의 손은 분명 빨랐다. 하지만 소운비의 몸이 그보다 약간 빨랐다. 망번신요보로 그 일격을 피한 소운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생사맥결통을 꺼내 쥐었다. 소운비의 수련을 위해 혼음사의가 맡겨 둔 그 생사맥결통이었다. 그 안에서 다섯 개의 은침이 벌처럼 쏘아져 나와 몽중마령을 향해 날아갔다. 파파파팟! 소운비는 자신의 암기 수법이 혼음사의만큼도 못하기 때문에 결코 몽중마령을 맞힐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 하니 몽중마령이 다섯 개의 은침을 모두 위아래 입술 사이에 끼워 받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사람의 목숨을 앗을 수도 있는 은침 다섯 개를 입술 사이에 물고, 몽중마령은 여전히 입술을 달싹이지도 않으면서 말했다. "혼음사의의 제자냐?" 소운비에게는 그가 단번에 자신의 내력을 알아 냈다는 것에 감탄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전신에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 내며 몽중마령을 향해 달려들 뿐이었다. "차아아앗!" 순간, 소운비의 몸은 마치 도깨비처럼 사라졌다가 몽중마령의 앞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몽중마령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다만 그 음산한 두 개의 눈동자에 놀라움과 감탄의 빛을 띠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소운비가 알고 있는 무공은 오직 하나의 내공심법과 하나의 경신술, 그리고 하나의 암기 수법뿐이었다. 손발이나 무기를 써서 몽중마령과 싸우기에는 그가 아는 초식이 너무나 없었다. 초식을 모르는 사람들의 싸움이란 시장 거리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단순하기 이를 데가 없다. 소운비는 오직 그 수법 이외에는 몽중마령에게 대항할 길을 몰랐다. 바로 상대의 멱살을 쥐고 땅바닥으로 구르는 수법이었다. 하나 그것은 소운비의 마음일 뿐, 몽중마령은 그렇게 싸울 이유가 없었다. 멱살을 쥐겠다고 다가오는 소운비의 순진한 두 손은 몽중마령에게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한편으로는 비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맞상대해 줄 마음이 생긴 것인지, 몽중마령도 소운비와 같이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터억! 소운비는 애초의 의도대로 멱살을 쥐고 구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몽중마령의 몸과 접촉하게 되었다. 네 개의 손이 서로 깍지를 끼고 허공에서 얽혀 서로의 몸을 향해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추아아앗...! 손이 서로 얽히자마자 소운비는 저편으로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기운이 자신을 짓누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온몸으로 그 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으으으으...!" 소운비의 앳된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가는데, 몽중마령의 얼굴은 반대로 침착하고 태연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와 놀이를 하듯 편안해 보였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싸움은 차츰 승패가 완연하게 가름되어, 소운비의 몸 안으로 몽중마령의 힘이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은, 비록 소운비가 힘은 딸릴망정 남의 힘이 몸 안으로 치고 들어오는데도 그렇게 큰 고통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소운비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오직 좀더 많은 힘을 내기 위한 것이지,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먼저 깨달은 것은 소운비가 아니라 몽중마령이었다. 그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번뜩였다. "우와앗!" 동시에 소운비의 눈동자가 호안(虎眼)으로 변해 갔다. 퍼어엉! 힘의 폭발! 몽중마령은 어느새 손을 풀고 뒤로 다섯 걸음이나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소운비 사이의 빈 공간에는 방금 터뜨려진 엄청난 힘의 막이 보이지 않게 들어찼다. 소운비는 자신의 힘을 감당 못한 나머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몸은 주저앉았을망정 소운비의 눈은 한치의 소홀함도 없이 계속 몽중마령을 향하고 있었다. 몽중마령의 기도는 변함이 없었다. 방금 그가 물러난 것도 스스로 물러난 것이지, 소운비의 힘에 밀려 물러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너는...?" 몽중마령의 입술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사람처럼 입을 써서 말을 한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만큼이나 그가 놀란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소운비가 놀란 것도 그 못지않았다. "네 이름이 소운비냐?" 몽중마령이 그렇게 물어 온 것이다. 온몸을 긴장시키고 두 번째의 격돌에 대비하던 소운비는 그만 숨이 멎을 뻔했다. "당신이 어떻게 나를...?" 몽중마령의 얼굴이 묘하게 실룩이더니, 곧 의미 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그가 아까처럼 천천히 소운비를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태산을 누르는 듯한 살기는 없었다. "저 계집을 살리고 싶으냐?" 몽중마령은 느닷없이 그렇게 물었다. "만일 저 계집을 네 것으로 취한다면 나는 양보하겠다." 그가 소운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바닥에는 작은 단약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그의 말투로 미루어 그 약이 당미령을 살릴 수 있는 것임에 분명한데도, 소운비는 선뜻 그것을 집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에겐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몽중마령이 기묘한 웃음을 짓자, 단약은 바람을 탄 새처럼 둥실 떠오르더니 얌전히 소운비의 발치에 내려앉았다. 몽중마령은 마치 귀여운 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소운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순간, 소운비의 얼굴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싹 들이대더니 나지막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다시 만나자." 그때, 소운비는 보았다. 몽중마령의 두 눈이 별안간 흐릿해지더니 호랑이의 눈동자처럼 변하는 것을.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소운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몽중마령의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둔탁한 나무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소운비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동안 해는 뜨고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악몽이 찾아들었던 밤은 올 때처럼 그렇게 급작스럽게 가버린 것이다. * * * 오랜만에 푹 잠을 자고 깨어난 당가의 아침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철은 간밤에 몽중마령이 왔다 갔다는 사실에 놀랐고, 당문의 사람들 중 그를 깨어나서 맞이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 분노는 몽중마령이 당문을 놀리듯 그 중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치솟았지만, 단 한 가지 사실이 그의 모든 열화를 가라앉혔다.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의원의 제자 한 사람이 몽중마령을 맞이해 싸웠으며 당미령의 생명을 건질 약을 빼앗았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혹시 의원 일당이 짜고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당미령의 증언이 그것을 흩어 버렸다. 그녀는 몽중마령의 마지막 방문 후 생명이 경각에 달한 상태에서 비로소 제정신을 차렸는데, 방문 밖으로 흑의의 괴인과 소운비가 격돌하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당미령이 나설 때까지 특별히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던 소운비는 그저 담담하게 한마디 뱉을 뿐이었다. "그는 이제 다시 안 올 것입니다. 가주께서는 안심하고 따님의 건강이나 돌보십시오." 소운비와 두 명의 의원이 당당하게 당문의 장원을 나가고 난 뒤까지 당철은 자신을 비롯한 당가의 식구들이 모두 악몽이라도 꾼 것이 아닌가 얼떨떨했다. 결국 남은 것은 몇 개의 명확한 사실뿐이었다. 당문의 금지옥엽 당미령은 알 수 없는 괴인에게 능욕을 당해서 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고, 그 목숨을 살려 준 것은 한 청년이라는 사실이었다. 당철은 그때부터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는데, 전에 한종린이 짐작했던 것처럼 실리냐, 도의냐 하는 문제였다. 이번의 고민은 저번보다 훨씬 신중하고 무거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딸의 일생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흠! 네놈이 제법이구나. 확실히 그가 몽중마령이었다면...!" 적이 왔을 때 기껏 잠이나 자고 있었으면서도 혼음사의는 민망해 하는 기색도 없었다. 하긴 천년 동안 잠을 자게 할 수도 있다는 몽중마령의 사술에 누가 당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이상한 것은 잠들지 않은 소운비인 것이다. 그것뿐 아니라 소운비의 가슴에는 많은 의혹이 물결치고 있었다. '대체 그가 나를 어떻게 아는 걸까? 색마들의 내기를 그도 들은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왜 다른 색마들처럼 나를 납치하려 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도...!' 무엇보다도 소운비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마지막 순간 몽중마령이 보여 준 그 호안이었다. 몽중마령과 대결했던 모든 상황에 대해 두 의원에게 다 털어놓으면서도, 소운비는 그 점만은 차마 이야기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거기에는 너무나 많은 비밀들이 응축되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가 호안을 보일 수 있는 것은 그의 내공도 태원옥호공이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소운비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만일 그렇다면 미약하게나마 소운비가 몽중마령의 수법들에 대항할 수 있었던 이유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같은 종류의 기운이기 때문에 오히려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한 종류의 독약에 익숙해진 사람이 그 독약에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이치와 같이. "한데 이상한 일이야!" 묵묵히 고민하고 있는 소운비의 속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혼음사의가 문득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이상하다고 한 내용은 소운비와는 판이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정말 몽중마령이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네놈에게 그 당가의 계집을 양보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 계집애는 보기 드문 영약이나 마찬가지인데!" 사람을 영약이라고 비유하는 의원은 천하에 혼음사의밖에 없을 것이다. "영약이라니?" 한종린이 묻자 혼음사의가 전문가답게 설명했다. "내 당문 안에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네만, 그 당미령이라는 계집아이는 몸 그 자체가 보약이나 마찬가지야. 계집들 중에도 특이한 체질은 많지. 특이한 체질에도 몇 가지 등급이 있는데 그 아이는 말하자면 그 중 세 번째로 좋은 체질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체질도 인세에 보기 드문 것이지. 귀한 집 여식들 가운데서만 그런 체질이 나오지. 모태 안에서부터 영약을 받아 먹고, 태어나서도 내내 좋은 음식과 좋은 차만을 먹고 마시는 데다가, 엄한 교육으로 사내와의 접촉은 극히 제한된 상태에서 자라나 몸 안에 순수한 음기가 가득한 것이지. 그런 순음의 기운은 계집아이가 대략 열여덟을 넘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잡스러운 기운이 섞여 보통 여자처럼 수그러드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 그 순음의 기운을 취할 수 있다면 만년금구(萬年金龜)니 태양화리(太陽火鯉)가 부럽지 않지!" 혼음사의는 자신도 무척 구미가 동한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이상한 것은 왜 그가 다 삼킨 것이나 마찬가지인 영약을 도로 뱉어 냈느냐 하는 거야...!" 한종린은 비록 그런 방면에 대해서는 혼음사의보다 아는 것이 없었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법에 있어서는 훨씬 지혜로웠다. 혼음사의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그는 의미있는 눈으로 소운비를 돌아보았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 순음의 기운은 아마 자네의 것이 될 걸세!" 소운비는 바늘에라도 찔린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자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 한종린은 기분좋은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내 말은, 당철이라는 위인이 그렇게 배은망덕하지도 않고, 또 딸의 장래를 내팽개칠 만큼 신경이 굵지도 않은 위인이라는 얘기지!" 한종린의 말은 수수께끼 같았지만, 그 답은 그날 오후에 알 수 있게 되었다. 한종린의 집에 당문에서 정식으로 보낸 매파가 찾아든 것이다. 물론 상대는 소운비였다. "절대로 할 수 없어요!" 소운비가 펄쩍 뛰며 거절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한종린과 혼음사의가 그런 그를 뜯어말린 것도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바보 같으니라구! 왜 싫다는 거야?" "나는 이미 혼인을 한 몸입니다!" 매파를 밖에서 기다리게 한 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저런, 쯧쯧... 넌 영웅에게 삼처사첩(三妻四妾)이 흠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느냐? 하물며 본처 하나에 첩 하나면 소박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야." "하지만 전 싫습니다, 영웅이 아니라도 좋아요!" "소심한 놈...! 내가 말했잖아. 그 당가의 여식은 영약이나 마찬가지라고. 눈 딱 감으면 네 무공이 강해진단 말이다." "그래도 싫습니다." 소운비가 고집을 피우자 이번엔 한종린이 나섰다. "이 사람아, 하지만 당가의 체면도 생각해 줘야지. 이미 딸의 몸은 망쳤겠다, 이런 처지에 어디 시집을 보낼 수도 없지 않느냐? 당미령이 시집갈 수 있는 곳은 오직 그 몸을 건드린 원흉과 은인, 둘 중 한 사람뿐인데 원흉에게 보낼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그 애비되는 사람 입장도 그렇지. 딸이 당한 일을 아무리 쉬쉬하려고 해도 이런 소문이라는 것이 원래 한번에 삼천 리씩은 퍼진다네. 그로서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딸의 일이 소문날 만큼 났다고 하더라도 우리 세 사람만 없어지면 증거가 없으니 한결 상황은 나아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지 않으려면 그저 눈 딱 감고 어디서 굴러 온 말뼈다귀인지 몰라도 은인에게 딸을 주는 것이지. 당문 가주가 생각하고 생각해서 모두에게 좋자고 내린 결정인데, 그렇게 박정하게 거절해서야 쓰나?" 무턱대고 으르렁거리는 혼음사의보다는 그의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지만 소운비는 도대체 흔들릴 줄을 몰랐다. "그래도 싫습니다. 당 소저도 원하지 않는 결혼일 테고, 저는 이미 처가 있습니다. 그 처의 허락도 없이 다른 부인을 맞을 수 없습니다." "누가 당장 혼인을 하라나? 일단 약혼만 해두게. 그러면 당가의 체면도 살고, 모든 게 원만하지. 만일 나중에 자네의 처가 이 일에 반대한다면 그때 다시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도 늦지 않아." 한종린은 마치 자기 아들의 혼사라도 되는 것처럼 간곡히 이야기했다. 소운비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혼음사의가 문득 끼여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주 타당한 이유가 있지!" "뭡니까?" "사천 당문도 이번 몽중마령의 일로 격색마회에 참여할 마음이 굳어졌을 테니, 분명 가주가 그곳에 갈 것이란 말이야! 당문의 사윗감으로서 거기에 간다면 그보다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지!" 혼음사의의 말은 확실히 그럴듯했지만, 그 이유로서는 혼음사의 자신을 설득할 수 있을 뿐, 소운비를 설득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득의한 표정으로 덧붙이는 말은 소운비로 하여금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너, 네 마누라를 만나고 싶으면 말 들어. 그리고 나랑 한 약속 잊지 말라구. 넌 색마가 되어야 하는 거야!" 소운비는 한숨을 쉬었다. 색마. 소운비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을 것 같던 그 말이 왜 그리 그의 운명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 19 장 비무(比武) 전임 방주의 거상(居喪) 기간이 끝나자, 개방에서는 장로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결정되어야 할 일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결정하기 쉽고 빠른 문제가 앞서 이야기되었다. 그것은 전임 방주가 비록 병중이었다고는 하나 분명 흉수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기 때문에 그 원한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하는 일이었다. 장로들은 한 사람도 어긋남없이 그 일을 색마들의 소행으로 간주했다. "방주님을 해한 원한은 결코 사사로이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천하의 색마들을 모두 소탕한 뒤라야 원한도 청산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방의 힘을 모두 쏟아 격색마회를 반석에 올려놓고 그 힘으로 색마들을 무찌른 뒤 그들 중 진짜 흉수가 누구인가를 족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장로들이 입을 모아 한 가지 의견을 말했기에, 전임 방주의 대행으로서 거상 기간 동안 방을 운영해 온 삼목신룡 무옥은 간단하게 그 일을 결정할 수 있었다. "하면, 흉수는 강호칠대색마 중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따로이 이 일에 대해 조사하지는 않고, 격색마회에 힘을 모으도록 하겠소이다." 이제 두 번째 일을 처리할 순서였다. 그 이야기를 할 때가 되자 열두 명의 장로들이 순간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누추한 방안에 찾아온 것은 침묵의 무게만큼이나 신중하고도 준엄한 시간이었다. 바로 신임 개방 방주를 선출할 때가 된 것이다. 거상 기간 동안의 임시 체제는 끝났고, 새로운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야 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사실 전임 방주의 생존 시에 후개가 결정되어 장로들에 의해 후계자로 키워졌으니 어쩌면 이러한 절차는 그 후개가 장로들의 인준을 받기 위한 형식적인 자리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번 경우에는 백미노개가 병석에 누운 뒤부터 탈상 때까지 무옥이 빈틈없이 방 내의 일을 처리해 왔으며 흠잡힐 것이 없었으니 더욱 이 자리는 형식적인 것이어야 했다. 하나 묘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규염개를 비롯한 열두 명의 장로들은 침중하게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옥 역시 그런 그들의 태도에 놀란 빛이 없었다. 방안에 있는 사람은 열두 명의 장로와 무옥뿐으로, 개방 방도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격색마회의 수뇌부인 남궁세룡이나 진설영 같은 경우 거의 개방의 사람처럼 대접을 받아 왔으나 이번의 회의는 전적으로 방 내의 일인 만큼 그들조차도 출입이 차단된 것이다. 하나 순수한 방도들만으로 이루어진 그 회의에 감도는 침묵...! 그 침묵 사이로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것은 다름아닌 분열의 조짐이었다. 무옥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눈길을 열두 명의 장로들 중 그 생김새가 각별한 두 사람을 향해 던졌다. 사실 그 두 사람은 따로 떼어 놓고 본다면 별로 특이하지 않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붙어 있게 되면 누구나 그들의 얼굴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돌아보게 만들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찍어 놓은 듯한 쌍둥이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함께 움직이고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싸움하는 것도, 함께 하는 이 쌍둥이를 가리켜 사람들은 일월쌍개(日月雙 )라고 한데 묶어 불렀다. 하지만 무옥이 그들을 주시하는 이유는 그들의 꼭 닮은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오늘 이 자리, 분열의 중심이 그들 일월쌍개였기 때문이었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후개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떨어지자 일월쌍개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쌍둥이답게, 그들은 연습이라도 한 듯 입을 맞추어 말을 했다. "오늘 이 자리는 앞으로 개방을 이끄실 방주를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누군가와 입을 맞추어 이야기하는 것은 연습을 해도 힘이 드는 법인데, 그들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일월쌍개는 평소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뱉는 말일지라도 언제나 이와 같이 서로 호흡이 맞았다. 말까지 똑같이 할 수 있는 두 사람이라면, 그들의 합공 경지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그 일은 전임 방주님의 원한을 갚는 일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욱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방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였다. 어제 개방에 들어온 백의개(白衣 )라고 할지라도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이야기를 한 것이 전임 방주의 총애를 각별히 받았으며 방 내에서 세력이 막강한 일월쌍개였기 때문에, 그 말 뒤에 숨은 뜻이 각별히 느껴질 뿐이었다. 일월쌍개가 말하는 동안에도, 그들을 향한 무옥의 시선은 바뀌지 않았다. 일월쌍개의 말투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은 발걸음이 무거운 사나이가 큰 문으로 들어설 때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무게를 실어 말을 이었다. "비록 소방주께서 여태껏 후개의 책무를 탈없이 이행하셨다고는 하나, 그것이 곧 방주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뱉은 일월쌍개 역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무옥은 마치 일월쌍개가 하는 말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라도 되는 듯 무표정하고 담담하게 물었다. "어째서?" 그의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일월쌍개는 입을 맞춰 대답했다. "개방은 한 사람의 방파가 아니오, 한족(漢族)의 방파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진설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오늘 방주를 결정하는 회합이 있다는 사실은 미리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하니 무옥을 반대하는 의견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설영의 앞에 앉은 규염개 역시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 결정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도 오늘 회의에서 내려진 전체 장로들이 결정에 한 표를 던지고 온 것이다. "어느 방파나 마찬가지겠지만, 폐방에도 소수파가 있고, 반대 의견이 있다오." 규염개는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던졌지만, 그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소방주의 무공이나 인품, 어느것도 차기 방주로서 문제가 없지 않나요?" 진설영은 그 말을 뱉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자신의 말에는 잘못된 점이 없었지만, 어쩐지 자신이 무옥의 무공이며 인품을 칭찬한다는 것이 쑥스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다행히 규염개는 그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일월쌍개의 의견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오...! 개방은 한족의 방파이며, 소방주의 출신은 불분명하다는 것이지." "개방은 한족의 방파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소방주의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 두 가지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진설영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내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그들의 말은 소방주가 한족 출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규염개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설영은 순간 울컥 하는 분노를 느꼈다. 무옥은 분명 버려진 아이였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몽고인이라든가 다른 민족으로 오해받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설영 자신도 고아가 아니었던가! "말도 안 되는 어거지로군요. 그렇다고 그가 이민족이라는 증거도 없잖아요!" 보기 드물게 흥분하는 진설영에게 규염개는 씁쓸한 웃음을 보여 주었다. "진 소저께서도 이제는 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소방주께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진설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삼목, 세 개의 눈. 그것이 무옥에게는 약점이 되는 것이다. "그럼 그들은 그가 기형이라고...!"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서장(西藏) 밀교에서는 세 개의 눈을 가진 자를 득도한 고승으로 취급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무래도 이민족의 징표가 아닌가 하는..." "기가 막히군요! 그 밀교에서 이야기하는 세 개의 눈은 다만 깨달음을 통해 시야가 넓어지고 높아졌다는 비유일 뿐이지 진짜 눈이 세 개라는 뜻은 아니잖아요!" "진정하십시오...!" 진설영은 그런 주장을 펼친 것이 눈앞의 규염개라도 되는 듯이 분노했다. 하나 그 분노는 과녁이 틀린 것이기에 그녀 스스로 가라앉힐 수 밖에 없었다. "하...! 개방 장로분들이 나 같은 어린 여자도 믿지 않는 잘못된 미신을 믿으실 줄은 몰랐군요." 신랄한 독설을 내뱉으며 진설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규염개를 외면한 것은 그에게 화가 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두 눈에 담긴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무옥과 자신 사이에 흐르고 있는 묘한 감정의 기류를 모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한번도 그것을 폭발시키지 않기 위해 애를 써왔다. 한데 갑자기 그를 위해 분노를 터뜨리면서 그 감정도 같이 터져 나온 것이다. 진설영은 그것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설영은 그대로 규염개를 외면한 채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럼, 방주의 자리는 어떻게 되었나요?" "내일 결정될 것입니다." "어떻게...?" "분명 소방주의 출신을 알아 낼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이 관문은 소방주께서 어차피 한번은 치르셔야 했던 것으로, 전체 방도들의 신뢰를 모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해서..." "해서?" "일월쌍개와 내일 비무를 하시게 됩니다." "...!" 진설영은 지난 몇 달 동안 개방 내부의 사정에 대해서 개방 사람보다도 소상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일월쌍개의 무공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더구나 두 사람과 한꺼번에 싸우는 것이라면 녹록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어렵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대 일이라면 불공평한 싸움이 아닌가요?" "하나 그런 싸움이라야 전체 방도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비무의 조건은 결코 상대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설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력이 엇비슷한 사람과 싸워서 그를 죽이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무공이 월등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진설영은 무옥이 지금 무척이나 어려운 싸움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설영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자, 규염개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비로소 그가 찾아온 참된 용건을 꺼냈다. "소방주께서는 지금 홀로 계십니다..." 그는 어려운 부탁을 꺼내는 사람답게 말을 천천히 했지만, 할말은 끝까지 하고 마는 성미였다. 특히 자신의 소방주를 위해서라면. "진 소저께서 가주신다면, 힘이 되실 것입니다." 무옥은 과연 홀로 있었다. 백미노개가 남긴 녹죽장(綠竹杖)을 두 손으로 쥐고 거기에 이마를 댄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녹죽장은 방주의 신물로, 오늘은 방주의 대행자인 그의 손안에 있지만 내일은 또 누구의 것이 될지 모르는 물건이었다. 진설영이 그의 바로 등뒤까지 접근했을 때에야, 무옥은 비로소 뒤돌아보았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은 한없이 쓸쓸해 보였다. 심지어 그의 이마에 동여매진 영웅건조차 한없이 쓸쓸해 보였다. 진설영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자신 있으신가요?" 무옥은 힘 들이지 않고 웃어 보였다. 하나 그 웃음은 평소에 그가 보여 주던 자신있는 웃음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어떤 싸움이라도 이기고 지는 것은 미리 알 수 없는 법이 아니겠소?" 진설영은 알 수 있었다. 무옥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단지 내일의 비무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동안 개방을 위해 바쳐 온 자신의 세월에 대한 회한 때문이리라는 것을. 한 사람이 그 무엇인가를 위해 평생을 바치다시피 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의심을 받는다면, 그 의심은 차라리 배신보다도 더 뼈아픈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녀는 무옥의 쓸쓸한 어깨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의 옆에는 의부인 백미노개가 있었지만, 이제는 혼자인 것이다. 그리고 혼자인 사람의 옆에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진설영은 그의 옆에 앉았다. 앉는다는 행위는 사람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는 것이고 아주 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무옥의 옆에 앉는 그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무옥은 그녀를 새삼스럽게 돌아보았고, 진설영도 어쩐지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다니! 그것은 냉면검화라는 별호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귀회루의 철모르는 시절, 그때의 진설영에게나 합당한 행동인 것이다. 무옥은 진설영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옷자락을 여미게 할 만큼 스산한 바람이 그들의 둘레를 맴돌았다. 문득, 무옥이 지나가는 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당신도... 당신 사부님의 일 때문에 고심이 많을 텐데..." 진설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이라는 말이 그녀의 귀에 왕왕 울려 와, 그 뒤의 말은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었다. 쏴아아아...! 바람은 파도처럼 밀려와 그들의 발치에 쌓인 낙엽들을 쓸어 갔다. 낙엽들은 허공을 향해 짧은 비행을 하다가 속절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녹죽장을 짚고 있던 무옥의 한 손이 내려왔다. 그 손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지나 진설영의 어깨로 다가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처음 손이 닿을 때 잠깐 몸을 떨었을 뿐, 진설영 역시 자연스럽게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쏴아아...! 쏴아아아아...! 바람 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두 사람은 석상처럼 그 속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바람이 한 순간 가라앉았을 때, 무옥이 진설영의 얼굴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진설영은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란 듯 짧게 숨을 들이켰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낙엽 더미 위로 녹죽장이 떨어졌다. 녹옥처럼 빛나는 죽장 위에서 두 개의 젊은 입술이 포개졌다. 두 개의 눈을 가진 처녀는 눈을 감았고, 세 개의 눈을 가진 청년은 눈을 감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바람이 다시 불어대기 시작했고, 분분히 흩날리는 노란 낙엽들의 무리가 두 사람의 모습을 감추어 주었다. 밤은 금세 찾아왔다. 진설영은 진파파의 침실에 있었다. 진파파는 그날 이후로 여전히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었다. 비록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정정했던 진파파였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이런 꼴의 진파파를 대할 때마다 진설영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한데 오늘은 달랐다. 그녀의 가슴은 찢어지기는커녕 쉴새없이 방망이질치고 있었다. 진설영은 자신의 입술을 만지고, 만지고 또 만졌다. 오늘은 자신의 손이나 찻잔이 아닌 다른 무엇이, 그것도 살아 있는 무엇이 그 입술에 닿은 첫 번째 날이었다. 비록 한번뿐이었지만 그 입맞춤은 무척이나 길었고, 마치 꿈을 꾸고 난 것처럼 아련했다. 진설영은 입술을 만지고, 만지고 또 만졌다. 쓰라린 느낌이 올 때까지 만졌다. 그리고 문득 진파파를 향해 말했다. "사부님, 아니 어머니... 나는 오늘 입맞춤을 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진파파가 병석에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진파파가 멀쩡하다면, 진설영은 오늘의 이야기를 마음속에 담아둘 뿐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지 아시겠죠? 그 사람이에요...! 어머니가 건강하시다면 노발대발하시겠지만...!" 진설영은 눈에 눈물을 담고 생긋이 웃었다. "그래도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는 하지 않는데..." 그녀가 문득 말끝을 흐렸다. 찰랑찰랑 눈시울에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진설영의 손등에 톡 떨어졌다. "이상하게 그 사람이 생각나요... 그렇게 미워하고 원망했는데도... 이상하죠? 사형이... 아니 이젠 사형도 아니지만... 너무 생각나요... 이상해요..." 두 방울, 세 방울. 눈물 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져 감에 따라, 진설영은 차츰 깨달아 갔다. 오늘,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원망의 자물쇠로 잠가 둔 소운비가 거듭 떠오르는 것은 이제 그녀가 소녀 시절의 애틋한 마음과 이별하고 한 여자가 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비록 원망하고 미워했을망정 가슴속에 꼭꼭 담아 두고 있던 소운비와 이별하고, 새로운 사람을 맞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냉면검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어도 마음속의 사람과 이별하는 것조차 가슴 태울 만큼, 아직 그녀가 어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무옥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그는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와는 달리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의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채였다. 문득, 그 사람이 물었다. "왜 그 여자를 취하지 않으셨습니까?" 남자인 듯 여자인 듯, 애매모호한 음성이었다. 무옥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다르다." 어둠 속의 사람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비로소 반항기 섞인 질문이 다시 나왔다. "그 여자는 왜 다릅니까?" 짧은 말속에 섞인 항의를 못 알아들을 만큼 둔한 무옥이 아니었다. 하나 그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완성을 위해 언젠가 크게 쓰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껴 두어야 한다. 소중한 보석처럼 아껴 줄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뒤를 쫓아가듯 다급한 목소리로 어둠 속의 사람이 물었다. "내일 어떻게 하실 건가요?" "모두가 아는 만큼만 내 힘을 보이겠다. 그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한 순간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멀어져 가면서, 무옥은 냉혹하게 덧붙였다. "넌 돌아가라! 가서 교단에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 오도록 해라." 무옥이 완전히 자리를 뜬 뒤에도 어둠 속의 사람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쏘아져 나오는 화살처럼 어둠 속에서 뛰쳐 나왔다. 그리고 아까 무옥의 대답을 전혀 듣지 않은 것처럼 원망스럽게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 여자는 왜 다릅니까? 왜? 왜? 왜!" 검은 복면. 이마 부위에 새겨진 은빛 꽃 무늬... 귀기 어린 목소리에 진하게 묻어나는 정한(情恨). 자객 취화비도였다. 방주 결정의 비무를 앞둔 개방 총타. 밤은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격정과 회한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 * * 귀한 집의 아가씨들이란 오만한 법이다. 미인도 오만한 법이다. 만일 한 여자가 있는데 그녀가 미인이고 또 귀한 집의 아가씨라면, 그 오만함이란 실로 상상하기 힘들 정도일 것이다. 오만한 여자의 자존심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상처받는다. 자존심이 세다는 것은 그만큼 상처를 잘 받는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고금의 진리였고, 그 진리에서 어긋나는 경우는 찾아보기가 드물었다. 당미령 역시 그런 진리의 틀 바깥으로 벗어나는 여인이 아니었다. 혼음사의와 한종린의 의술로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뒤,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약혼자가 된 청년, 소운비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는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 것이다. 물론 당미령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몽중마령이라는 희대의 색마에게 걸려 몸을 더럽혔으니, 애당초 귀공자의 배필이 되기는 글렀다는 사실을. 하기사 당문에서는 전통적으로 사윗감의 가문 배경은 크게 따지지 않아 왔기도 했다. 가문의 비전이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데릴사위가 아니면 맞아들이지 않고, 한번 당문 사람이 되면 죽을 때까지 당문의 귀신이 되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미령으로서는 비록 일개 의원의 제자가 자신의 남편이 된다고 하더라도 크게 상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소한의 것은 기대하고 있었다. 비록 몽중마령에게 몸을 더럽혔다고 하지만 그래도 당문의 금지옥엽인 자신과 약혼하게 된 것에 대해 그 일개 의원의 제자가 눈물을 흘리며 감지덕지하기를. 평생 자신의 발을 씻겨 주며 살아도 고맙게 여기겠다는 갸륵한 태도를 아낌없이 보여 주기를. 당미령의 약혼자가 된다는 것은 충분히 그래도 될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직계의 아들이 없는 당문의 현실에서는 그녀의 남편이 된다는 것은 곧 다음 대의 당문에서 작지 않은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들여도 될 만큼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다. 한데...! 이 무표정한 사내는 말 그대로 자신의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를 않는 것이다. 자신의 약혼자가 된다는 일이 별것 아닌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은 당미령의 자존심을 철퇴로 후려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그녀가 스스로 생각할 때 아무런 약점도 없다면 그 상처는 별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아직 낯설고 잘 몰라서 그러려니 하면서 관대하게 보아 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미친개에게 물렸었거니 생각하며 애써 잊어버리려고 하는 그 몽중마령의 흔적이, 소운비를 만날 때마다 이상하게도 자꾸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내가... 내가 그런 일이 있었다고 나를 멸시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만일 그렇다면?' 당미령의 눈은 파랗게 떨려 갔다.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소운비는 모든 것이 답답했다. 일단 당문에 올 때마다 뒤집어써야 하는 이놈의 인피면구가 답답했고, 한 쌍의 선남선녀처럼 당미령과 당문의 장원 안을 거닐며 한담을 나눠야 하는 이 시간이 답답했다. 그나마 가을이라 날씨가 선선했기에 인피면구 속에서도 참을 수 있었고, 그래도 당문을 방문할 때마다 혼음사의와 한종린이 협박 반, 애원 반으로 당미령에게 친절히 대하라고 이야기해 왔기 때문에 이 시간도 견뎌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미령과 정말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보통 남녀가 만나면 서로 좋아하는 일이나, 어린 시절의 추억, 아니면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 같은 것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지금 그와 당미령 사이에는 그 어떤 화제도 적당하지가 않았다. 그만큼 그와 당미령은 살아 온 환경이 달랐을 뿐 아니라, 처음 만난 것도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달콤하지 않은 것이다. 소운비는 비록 당미령이 자신의 옆에서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자신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도 한 순간의 눈빛이나 말투가 많은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한 시진 남짓이나 후원을 거닐면서도 서로 심술난 아이들처럼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마침내 먼저 입을 연 것은 당미령 쪽이었다. 세가의 규수답게 고운 음성이었다. "소 공자께서는 특별히 어떤 취미가 있으세요?" 배 씹는 소리처럼 사근사근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목소리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소운비는 그 소리가 과히 듣기에 좋지가 않았다. '혜와는 시끄러운 새처럼 재잘거렸지만 듣고 있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어...!' 소운비가 묵묵부답하자 당미령의 얼굴에 분한 표정이 솟아올랐다. "소 공자님...!" 부드럽게 부르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채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소운비는 세상에서 제일 먹기 싫은 음식을 먹는 사람처럼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글쎄요. 하릴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신세에 무슨 특별한 취미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그저라니요?" 별것 아닌 질문이지만 확실한 대답을 꼭 들어 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그녀는 집요했다. 소운비는 갑작스레 심술궂은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저 기방에 다니며 이 꽃 저 꽃 향기를 맡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라고나 할까요." 이 말을 혼음사의가 들었다면 제자가 제법 능숙한 난봉꾼이 되었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하나 당미령은 얼굴색이 확 변하고 말았다. 만일 당미령이 그 자리에서 화를 내고 돌아서 갔다면 소운비는 미안해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명문 규수답게 화를 억누르고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말았다. "이제 보니 풍류공자시군요. 뜻밖입니다." 그리고 한껏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덧붙이는 것이었다. "소녀는 지아비되실 분의 풍류는 마땅히 받아들이라고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당미령의 그 말은 한없이 순종적이고 아름다운 것일 테지만, 소운비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것은 당미령이 스스로 자신의 관대함을 뻐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아가씨는 솔직하지도 않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구나!' 소운비는 입맛이 써서 발걸음을 빨리 했다. 당미령이 분한 듯 그 뒷모습을 쏘아보다가 총총걸음으로 뒤쫓아갔다. 당미령은 분명히 미인이었다. 이목구비의 생김새로만 보더라도 진설영보다 화려했고 혜와보다 우아했다. 하지만 소운비는 그녀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은 여자였던 것이다. "어째 정인을 만나고 온 사람답지 않게 표정이 우울하구먼?" 집으로 들어가자 한종린이 마중하며 인사치레로 말을 건넸다. 소운비는 불퉁하게 대꾸했다. "정인을 만나고 온 적이 없으니 그렇지요." "허, 이 사람...?" 한종린은 한마디 불쑥 내뱉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소운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뒤따라 들어갔다. "사부님은...?" 혼음사의가 보이지 않는 것에 소운비가 의아해 하자, 한종린이 간단히 대답했다. "기분이 울적하다고 기루에 갔다네." 그리고는 바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그놈, 이상해졌어." "누구 말입니까?" "누구긴 누구... 자네 사부 말이지." 한종린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낮게 속삭였다. "내 그놈이 기분이 울적하다고 길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아녀자를 낚아채는 것은 봤어도, 기루에 가는 것은 본 적이 없거든." 그 말을 하고 한종린이 씩 웃었고, 소운비도 따라 웃었다. 확실히 혼음사의는 변했다. 물론 지금도 군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걸찍한 입담과 해박한 지식만 아니라면 예전의 그 악명 자자한 색마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생활이 건실해진 것이다. 혼음사의의 생활이 건실해졌다는 것은 전에는 상처 입은 여자를 강제로 취하고 희롱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는데 이제는 돈을 주고 사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다분히 소운비의 영향이 컸다. 애초에 소운비가 기녀들만을 상대하겠다고 조건을 내걸었을 때, 혼음사의는 기녀라도 자주 접하다보면 반드시 여자 맛을 알게 되어 색마가 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과가 뒤바뀌어 변한 것은 소운비가 아니라 혼음사의가 된 것이다. "그놈이... 살가운 정이 그리웠던 게지, 아마." 불쑥 한종린은 그렇게 말했다. 소운비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그의 말이 이어져 나왔다. "생각해 보게. 강제로 취하는 여인에게서 정욕은 풀 수 있지만 정은 못 느끼지 않나? 하지만 비록 기녀라도 돈을 주고 사면 가식일망정 그 시간 동안은 정을 주지. 많이 주면 많이 줄수록 그 정은 살갑고 말이야."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한종린의 말은 옳았다. 힘으로 취하는 여자보다는 돈으로 취하는 여자가 그래도 좀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도 소운비는 알고 있었다. 돈으로 취한 여자는 그 돈만큼밖에는 정을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양의 기루에서 기녀들과 어울려 며칠 밤을 놀아나면서도 소운비는 마음이 흡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돈으로 취한 여자보다 더 좋은 것은 정으로 취한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정으로 묶인 두 사람이 살내를 맡으며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었던 꿈 같은 시간이 비록 단 하룻밤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보다 더 달콤한 꿀은 없고 그보다 더 부드러운 비단도 없었다. 소운비가 신양에서 기루에 갈 때는 비록 혼음사의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이 컸지만, 마음 한구석에 한번 동정을 잃고 난 뒤 더욱 거세어지는 욕망을 잠재우려는 생각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리운 여인은 손 닿지 않는 곳에 있고, 행여 비슷한 여인이라도 안고 있으면 그날의 그 편안함과 행복을 다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저 옷을 벗고 알몸으로 한 이불 속에 눕는다고 누구한테서나 얻을 수 있는 행복이 분명 아니었다. 한번 바다를 본 사람이 아무리 큰 강을 보아도 그 마음에 차지 않는 것처럼, 소운비는 기녀들의 온갖 미태에도 큰 감흥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기녀들은 돈을 주고 사는 정이고, 혜와는 정으로 묶은 정이기 때문이었다. '혜와...!' 틈만 나면 갈비뼈를 들추고 파고드는 듯한 찌릿한 그리움의 탄식이 소운비의 입 속에서 절로 되뇌어졌다. "자네, 무슨 생각 하나?" 소운비가 이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홀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한종린이 물었다. 소운비는 얼른 표정을 지우고 말을 돌렸다. 전부터 한종린에게 물어 보고 싶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참, 사백님. 여쭤 볼 것이 있는데..." "무엇을?" "전에 말씀하신 사대성물 중에 말입니다. 음곡비파라는 것이 있었지요?" "있었지." "그 비파에 대해서 좀 자세히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뭘 자세히?" "그러니까 그 비파의 효능이라든가... 어떤 특성이 있는지..." 한종린이 갑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자네..." 그럴 때의 한종린은 중경에 이름난 인의(仁醫), 한 노백이 아니라 영락없는 혼음사의의 동문 한종린이었다. "왜 묻는지 이야기해 주면 자세히 알려 줌세!" 소운비는 잠시 생각해 보고 구태여 감출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간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비파가 소운비의 손에 들어온 경로며, 그것의 이름이 음곡인지를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또 그것이 어떻게 혜와의 손에 넘어갔는지를 듣는 동안, 한종린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허, 자네 신세 한번 기구하네그려." 소운비의 이야기가 끝난 뒤 한종린은 혀를 휘휘 내둘렀다. "이제 알고 보니 자네가 처음에 그토록 양기가 쇠하고 사내로서 마땅히 느껴야 할 것도 못 느끼고, 게다가 나이가 차서도 몽정(夢精)이 없었던 것은 모두 그 음곡비파를 가까이 한 때문이로군." "그건 어째서 그렇습니까?" "내 알기로는 음곡비파는 오직 소리로서 그 효능을 발휘하는데, 음곡비파에서 나는 비파음은 소위 말하는 극음지성(極陰之聲)이라네." "극음지성이라니오?" "너는 전설에 나오는 소녀(素女)에 대해 알고 있겠지?"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화금궁의 삼녀대전에서 보았던 그 관음보살처럼 아름다운 여인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소녀는 본래 음악에도 아주 정통했다고 하지. 그 소녀가 하루는 황제를 위해 거문고를 연주했는데, 그 거문고의 줄이 모두 오십 현이었다고 한다. 황제는 그 음악에 심히 감탄하였지만, 그 소리가 사람의 심정을 너무나 흔들어대어 성인이 아니고서는 능히 들을 수가 없으니 위험하다고 그 거문고를 둘로 나누어 각각 이십오 현의 거문고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뒤로는 거문고는 결코 오십 현으로 만들 수 없게 했다는데, 아무튼 그 전설 속에 나오는 소녀의 오십 현 거문고에서 나는 소리가 극음지성이라고 하지." "그럼...?" "음곡비파의 현은 바로 그 오십 현 거문고의 줄로 만들었다고 한다." "예? 하지만... 그건 그저 전설 아닙니까?" "전설 속의 물건들이 나타나니 성물이라고 불리는 것이지. 한데 문제는 음양의 기운을 제대로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 그 비파를 타면 그저 극음의 소리만 계속 흘러나와 사람의 양기를 누르고 음기만 고이게 만드는 것이지. 여자가 그 소리를 들으면 당장은 큰 문제가 없지만, 남자의 경우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네 경우가 바로 그랬지." 소운비는 그제야 한종린이 내린 진단의 전모를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조급하게 물었다. "하면, 만일 여자가 그 비파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습니까?" "문제야 없지. 비파를 가지고만 다닌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나? 비파를 타야 극음지성이 나는 것인데...!" "극음지성이 여자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습니까?" 혜와가 음곡비파를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소운비가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한종린은 피식 웃었다. "물론 여자라고 해도 음의 기운이 너무 강하면 좋지는 않지... 특히 그 신랑에게는 말이야." "예?" 한종린은 장난꾸러기처럼 소운비에게 얼굴을 바싹 갖다 대고 말했다. "원하는 것이 많을 테니 자네가 몸이 축날 거라는 말일세!" 소운비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예전 같으면 그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혜와에게 특별히 좋지 않을 일이 없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하긴 혜와는 비파를 탈 줄도 모르니까... 가지고 다니기만 할 뿐 그 소리를 듣는 일도 없겠지.' 한종린이 소운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중에 자네 처를 만나 비파를 다시 찾게 되거든 잘 한번 연구해 보게. 그 비파는 그저 아무 곡이나 타도 극음지성을 흘려 보내지만, 태원옥호공을 그 정도로 수련한 지금 자네가 타면 효능이 만만치 않을 걸세. 그리고 만일 대음지곡(大陰之曲)의 악보를 찾아 낼 수만 있다면...!" "대음지곡?" "그것은 오직 음곡비파로만 탈 수 있다는 곡이지. 음공(音功)일 뿐만 아니라 음공(陰功)으로서도 최상이라고 하네. 음곡비파로 대음지곡을 탈 수 있다면 그것으로 혼혼옥잡을 제압할 수 있어." 소운비는 귀가 번뜩 트였다. 자신이 익힌 태원옥호공은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혼혼옥잡을 만나면 맥을 못 쓰고 제압당한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기에 지금 그에게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만음요화였던 것이다. 하나 만일 혼혼옥잡을 제압할 무기가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만음요화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정말입니까? 그 비파로 혼혼옥잡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 "물론이지. 사대성물은 서로 돋우어 주고 제압하는 관계가 매우 복잡하고 기기묘묘하다네. 오직 태원옥호공을 익혀 양을 위주로 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음곡비파를 연주해 제대로 된 극음지성을 낼 수가 있고, 또 음을 위주로 양을 다스릴 수 있는 음곡비파만이 혼혼옥잡의 사신무(四神舞)를 제압할 수 있으며, 그 혼혼옥잡만이 또 태원옥호공의 양기만을 폭발시켜 제압할 수 있는 것이지." 들으면 들을수록 신묘하고 신묘한 이야기였다. "사대성물 중에 세 개가 그러한데, 나머지 하나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 하나면 능히 나머지 세 개를 다스릴 수 있고, 하늘과 땅이 열린 이래로 사람으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준다고 하더군...!" 한종린의 이야기는 갈수록 흥이 더해 가는데, 갑자기 방문이 왈칵 열리며 한 사람이 쓰러질 듯 안으로 들어왔다. 혼음사의였다. 그를 따라 들어온 것은 고약한 술 냄새였다. 사람이 마시는 술 냄새가 고약할 리는 없지만, 사람이 일단 마시고 나면 고약해지는 법이다. "아니? 저놈이 웬일로 술이야?" 한종린은 생전 처음 술 마신 사람을 보는 것처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술을 마시지 않는 혼음사의가 술을 마신 것도 이상한 일일 뿐더러, 무공을 익힌 사람이 그렇게 형편없이 취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고수는 오직 자신이 취하고 싶을 때만 취할 뿐이다. 혼음사의는 술에 잔뜩 절은 소리로 대답했다. "흐응...! 원래 여자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좋아하는 법이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지." 대답하는 와중에도 그의 몸은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중이었다. 그는 느닷없이 소운비를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 "야, 이놈아! 너는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여자를 좋아하지도 않으니 색마가 되기는 다 틀렸다! 애당초 글러먹은 거야!" 소운비는 웃으며 그를 부축했다. "전 원래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흥...! 너는 똑똑한 척하지만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어..." 혼음사의는 소운비의 손길을 뿌리쳤다. "색마가 될 수 없는 놈은 영웅호걸도 될 수 없는 거야. 주색은 무공 다음으로 영웅의 조건이란 말이다." 소운비는 오늘따라 혼음사의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일 그렇다면 영웅도 별로 되고 싶지 않군요." "흥... 네놈이...! 야 이놈아, 내가 한 가지 묻겠다." "물으십시오." "너, 당가의 그 계집애하고 아직 아무 일도 없지?" 소운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혼음사의가 입 주변을 실룩이며 비웃었다. "계집이란 그저 만나면 삼 일 안에 자빠뜨려야 하는 법이야. 넌 사내도 아니다." 갈수록 가관이었다. "내가 만일 네놈이 혜와랑 자던 날 옆 방에서 듣지 않았다면 네놈이 필시 고자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날 네놈의 정력은 정말 절륜했는데, 어째서 내가 시키지 않으면 계집을 찾지 않는 거냐? 더구나 옆에 따라붙는 계집도 왜 덮치지 않는 거야?" 혼음사의의 추궁은 마치 어린애가 어른을 닥달하는 것처럼 막무가내였다. 소운비는 기가 막혀서 그저 웃을 도리밖에 없었다. 혼음사의는 큰 비밀이라도 캐내는 사람처럼 소운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은... 네놈은 어떻게 그 욕망을 푸는 거지? 솔직히 말해. 난 다 알고 있다." "알고 계신다면 왜 물으시는데요?" "흥... 네가 네 입으로 불 수 없다면 내가 말해 주마. 너, 수음(手淫)을 하고 있는 게지?" 한종린과 소운비는 똑같이 입을 딱 벌렸다. 혼음사의는 범인을 잡은 포교(捕校)처럼 득의 양양했다. "밤마다 몰래 수음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렇게 잘 참을 수 있느냐? 흥...! 네놈은 색마들이 모두 더럽다고 하겠지만, 혼자 골방에 숨어서 그러는 네놈하고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수음은 너 혼자만 좋자고 하는 거지만, 나는 다 계집도 좋고 나도 좋자고 하는 것이니 오히려 내가 더 인(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거야, 푸하하하...!" 신나게 웃어젖히던 혼음사의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꼿꼿해졌다. 그리고는 큰 도끼에 연거푸 맞은 나무처럼 뒤로 기울어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쿵! 그 소리가 하도 커서 한종린과 소운비는 기겁을 했지만, 곧 요란하게 코고는 소리가 울려 나와 혼음사의가 다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놈이 웬일이지? 이렇게 인사불성이 되어서..." 발로 혼음사의를 툭툭 건드려 보며 투덜거리는 한종린이었지만, 눈가에 걱정이 지나가는 것을 소운비는 볼 수 있었다. 한종린은 갑자기 탄식했다. "아..., 그렇군! 오늘이 지월(至月:동짓달, 11월) 보름이 아닌가?" "그렇습니다만...?" 인사불성이 되어 자고 있는 혼음사의를 내려다보는 한종린이 문득 서글픈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랬군...!" 소운비는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캐묻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고, 한종린처럼 아는 것이 많은 만큼 말도 많은 사람이라면 굳이 캐묻지 않아도 이야기해 줄 것이라고 여겼기에 묻지 않았다. 한종린은 웬일인지 더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생각을 지워 버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휘휘 젓더니 소운비에게 방을 나가라는 듯 손짓했다. "그만 가서 자게. 그는 여기서 자도 될 거야. 내일 아침에는 우리보다 일찍 일어날 거니까 말이야."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운비는 그 말대로 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나가기 전에 인사하는 소운비에게 한종린이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덧붙였다. "아, 참. 자네 말이야, 내가 저 친구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웬만하면 수음은 하지 말게." "예?" 소운비는 너무 기가 막혀 반박도 못하고 웃지도 못했다. 한종린의 표정은 진지했다. "수음이란 남자의 양기를 헛되이 허공으로 날리는 거니까... 백정(白精:힘을 잃은 정액)이 양기의 배출구를 막고 있을 때만 제외하고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네. 모든 고금의 의학서가 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 소운비는 그저 머리를 조아리는 인사를 하고 급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색마의 친구들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 * * 날이 완전히 밝기도 전부터 사람들의 그림자가 연무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개방의 제자들뿐 아니라 격색마회의 결성을 위해 개방에 머물고 있던 각 문파와 세가의 고수들도 있었다. 연무장의 서편으로는 개방의 제자들이, 동편으로는 타 문파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으며, 남쪽에는 개방의 장로들이 앉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서도 속삭이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시끄러운 거지들의 연무장이 오늘은 심산의 암자처럼 숙연했다. 둥! 둥! 둥! 돌연 세 번의 북 소리가 울리더니, 연무장의 북쪽으로부터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아니, 한 사람처럼 걸어 들어온 두 사람이었다. 일월쌍개가 먼저 도착한 것이다. 일월쌍개는 먼저 남쪽을 향해서 한번, 서쪽을 향해서 한번, 마지막으로 동쪽을 향해서 한번 절을 했다. 동쪽 자리에 앉아 있던 남궁화련이 옆 자리의 제 아버지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저 사람들은 타문파의 사람을 경시하는군요. 어째서 자신의 아랫사람들이 앉아 있는 쪽을 향해 먼저 절을 하고, 손님이라 할 수 있는 이쪽에는 맨 마지막에 하는 것일까요?" 남궁세룡이 대답했다. "지금 개방은 알게 모르게 두 개의 파로 나뉘어져 있다. 한쪽은 삼목신룡 무옥과 규염개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그들은 격색마회를 통해서 개방의 세력을 바깥으로 팽창시키려고 하는 쪽이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지금이 팽창할 때가 아니고 안을 정돈하고 힘을 모을 때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세력의 중심이 바로 저 일월쌍개지." 남궁화련은 입을 삐쭉거렸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이 타문파에서 온 우리를 좋아할 리가 없겠군요. 이 승부에서 만일 저들이 이기면 저 두 사람이 방주가 되나요?" "아니다. 저들은 방주 자리를 노리고 비무를 청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구나. 그저 자신들이 이길 경우 무옥이 방주의 위에 오르지만 않는다면, 나머지는 장로 회의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더라." "아버지는 무옥이 이기기를 바라시죠?" 남궁세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동쪽에 앉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것을 바라고는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일월쌍개의 주장대로 만일 이민족의 핏줄을 타고났을 수도 있는 무옥이 방주가 될 경우의 문제도 생각하고 있었다. 무옥이 방주가 될 경우, 그것은 곧 격색마회의 회주가 된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였고 격색마회 역시 개방과 마찬가지로 핏줄이 불분명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모시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모두들 생각하고 있겠지. 비록 한족의 품에서 자랐을망정 불분명한 핏줄은 위험하다... 는 쪽일지, 아니면 그 피와 상관없이 자란 것이 한족의 품이니 그도 역시 한족이다... 일지.' 진설영은 동쪽의 자리에서도 가장 높은 쪽에 혼자 떨어져 앉아 있었다. 어젯밤의 그 타는 듯한 흥분과는 판이하게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힘이 있는 쪽이 진리가 되겠지.' 그때, 연무장의 북쪽으로부터 한 사람이 또 나타났다. 이번에는 무옥이었다. 이마에는 검은색의 영웅건을 두르고, 양손에 죽장을 하나씩 든 모습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연무장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조용했으면서도 더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모든 시선이 그를 향해 쏠렸다. 그 중 네 개의 눈이 가장 강렬하게 그를 쏘아보았다. 일월쌍개의 눈이었다. 하나 무옥은 그 눈을 무시하고 남쪽에 앉은 장로들을 향해 목례했다. 이어 동쪽의 타문파 사람들에게 목례했다. 마지막으로 서쪽을 향해 목례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일월쌍개와 마주 섰다. 남쪽에 앉아 있던 규염개가 벌떡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높은 석단 위로 올라간 것도 그때였다. "오늘의 이 비무는 결코 서로를 상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한 것이오!" 그는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외친 다음 무옥과 일월쌍개를 돌아보았다. "만일 오늘 소방주께서 승리하신다면 그것은 소방주의 혈관에 흐르는 피가 우리와 다름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니, 앞으로 어떠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우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이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개방 방도들과 무림의 어른들께서 증명하실 것입니다." 규염개는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일신의 힘을 모두 모아 장엄하게 외쳤다. "세 분 다 개방의 식구이니 결코 목숨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 시작하오!" 규염개가 자리로 돌아가 앉은 뒤 무옥이 두 손에 잡은 죽장 중 하나를 땅에 꽂았다. 땅에 꽂힌 것은 개방 방주의 신물인 녹죽장이었다. 그리고 무옥의 손에 남은 것은 보통 대나무로 만든 평범한 죽장이었다. 무옥은 일월쌍개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그대들이 나를 이긴다면 이것은 그대들의 것이 될 거요." 일월쌍개는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방주의 위를 탐내서 이러는 것이 아님을 모르시오?" 그리고 일월쌍개도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극(戟)이었다. 하나는 그 날이 초승달처럼 생기고, 다른 하나는 마치 하늘의 해처럼 둥근 두 개의 극이었다. 사람들은 그 극을 일컬어 일월쌍극(日月雙戟)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일월쌍개의 무기였다. 일월쌍극이 무옥을 향해 겨냥되었다. 그러자 무옥도 자신의 죽장을 일월쌍개 쪽으로 뻗었다. 서로가 서로를 겨냥하기만 할 뿐, 열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거리를 좁히려고는 하지 않은 채 싸움은 시작되었다. 바위도 쪼갤 수 있을 것 같은 극과 보통 사람이라도 능히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죽장. 선공을 취한 것은 일월쌍개 쪽이었다. 촤아아앙! 무옥을 시험이라도 하듯, 무게는 실려 있으되 살기는 없는 허초였다. 하나 허초라고 해도 이렇게 두 개의 극이 서로 엇갈려 교묘히 양쪽 방향을 위협하는 공격이라면 받아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삼목신룡의 이름이 거저 얻어진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무옥의 신형은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두 개의 극이 만들어 내는 위협적인 그늘을 빠져 나왔다. 한데, 일월쌍개 중 한 사람이 어느새 그가 빠져 나가는 방향을 점하고는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죽장의 푸른빛과 일월쌍극의 은빛이 허공에서 번쩍거리는가 싶더니, 무옥은 간신히 두 쌍둥이의 사이를 가르고 나와 재빨리 수비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아앗!" 기합 소리마저 똑같은 일월쌍개가 일심동체가 되어 무옥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무는 이제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것이다. 장로들과 개방 사람들은 모두 무거운 낯빛으로 이 싸움을 지켜보았지만, 동쪽에 앉은 타 문파의 사람들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크게 실례가 안 될 정도로 옆 자리의 사람들과 이 비무에 대한 관전평을 나누었다. "허! 일월쌍개는 석년에 백미노개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합공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했는데, 삼목신룡이 그에 못지않으니 과연 후기지수의 으뜸이로군요." "하지만 일월쌍개의 합공은 과연 거의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할 만하지 않습니까? 두 개의 극이 마치 한 사람의 양손에 잡혀 있는 것처럼 호흡이 딱딱 맞는군요!" "한 사람이 양손에 극을 잡고 있다면 결코 저렇게 하지 못하지요! 일월쌍개의 한 사람은 오른손잡이이고, 다른 한 사람은 왼손잡이라 저런 합공이 가능한 것입니다." "삼목신룡의 내공이 결코 전임 방주에 뒤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어째 듣던 것보다는 못한 것 같군요." 과연 수십여 합을 나누면서 형세는 차츰 일월쌍개 쪽으로 유리하게 변해 갔다. 격전장에는 죽장의 푸른빛은 드물고 화려한 은광만이 난무하는 것이었다. 무옥이 차츰 뒤로 밀리는 기색이 역력해지자, 진설영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파아아! 왼손에 잡혀 있던 극이 별안간 무옥의 후방을 막으며 살기를 뿜었다. 무옥은 뒤로 더 이상 물러날 수도 없게 되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른손을 쓰는 일월쌍개 중의 한 명이 둥근 극의 날을 이용해 무옥의 전면을 후려쳤다. 따아앙!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죽장과 극이 마주쳤다. "오오오!" 동쪽에 앉은 사람들로부터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무옥이 앞쪽으로 쳐오던 극을 죽장으로 막은 것이다. 그들의 탄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었는데, 하나는 감탄이고, 다른 하나는 탄식이었다. 무거운 극을 가벼운 죽장으로 막아 버티는 무옥의 공력에 대해서는 감탄을 했지만, 그 바람에 뒤에서 다가오는 또 하나의 극에 대해서는 방비할 수단이 없어져 버린 것에 대한 탄식이었다. 쒸이잉! 보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틈을 싸움하는 당사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일월쌍개 중에 왼손을 쓰는 사람이 번개처럼 허공에 선을 그렸다. 파바밧! 이때,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옥이 죽장으로는 앞쪽의 극을 막은 채로, 번개 같은 원앙각(鴛鴦脚)을 뒤쪽을 향해 날린 것이다. 사람들이 눈을 어지럽게 하는 화려한 발 그림자가 허공에 수놓여지더니, 다음 순간 세 사람은 그 자리에 그린 듯이 멈추어 섰다. 오른손을 쓰는 사람의 극은 무옥의 죽장과 팽팽하게 맞대어져 있었고, 무옥은 오른발로만 땅을 디딘 채 왼발을 뒤쪽을 향해 뻗고 있었다. 왼손을 쓰는 사람의 극은 그 날이 초승달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거의 무옥의 얼굴 앞까지 날이 접근해 있었다. 하지만 접근만 했을 뿐 더 이상은 다가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무옥의 왼쪽 다리가 그 극의 자루를 감고 있었던 것이다. 장내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만일 세 사람을 가까이서 본다면, 극을 쥔 두 사람의 손도, 또 두 개의 극도, 그리고 죽장과 무옥의 왼쪽 다리도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무옥이 죽장과 다리로 양쪽의 공세에 대응하는 임기응변의 능력과, 두 사람의 힘을 버텨 내는 탁월한 공력에 찬사를 보냈다. 하나 그렇다고 무옥이 승세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의 자세는 어디까지나 방어일 뿐, 버틸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일월쌍개는 무옥의 호흡이 흔들릴 때 둘 중 한 사람이라도 공격에 성공만 한다면 바로 승기를 잡을 수 있게 된다. 지금의 상태에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무옥에게는 불리하고, 일월쌍개에게는 유리하게 되는 것이다. 세 사람은 그림 속에 그려진 두 마리의 뱀과 한 마리의 학처럼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렀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바람과 구름조차도 숨을 죽였다. 그 순간, 동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진설영이었다. 그녀는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로 무옥을 직시했다. 자신의 행동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것이라는 점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무옥도 그녀를 본 것 같았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무옥의 몸이 한 순간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정지되어 있던 형세에 변화가 닥쳤다. "차아아앗!" 낭랑한 기합 소리와 함께 죽장이 극을 밀어 내고, 무옥의 몸이 뒤쪽으로 기울어졌다. 극을 감고 있던 다리가 어느새 풀려 있었고, 그 극을 쥐고 있던 사람과 무옥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퍽! 무옥의 일퇴가 그의 가슴에 작렬했다. 일격을 맞은 그는 입에서 가는 선혈을 뿜으면서 뒤로 날아갔다. 일월쌍개 중 또 한 사람이 노한 기합을 토하며 무옥에게로 극을 찔렀다. 무옥의 죽장이 그의 손을 후려쳤다. "와아아!" 관전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주먹을 불끈 쥐며 함성을 질렀다. 무옥은 한 순간에 전세를 역전시키고 승기를 거머쥔 것이다. 일월쌍개의 한 명이 매운 죽장 맛에 손을 움츠리며 물러서는 듯 보였다. 한데 그 순간, 멀리 떨어져 있던 다른 한 명과 그의 시선이 마주치더니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야앗!" 기세가 움츠러들던 극이 갑자기 무옥의 목을 향해 뻗어 갔다. 그것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삼엄한 살초였다. 무옥이 급히 몸을 뒤로 젖혀 그것을 피하려는 순간, 아까 일퇴를 맞고 떨어져 있던 자가 극을 힘껏 던지는 것이었다. 그대로 둔다면 무옥은 목을 꿰뚫리거나, 아니면 날아온 극에 몸뚱이가 꼬치가 될 판이었다. "우왓!" 이번에는 동쪽에 앉은 타문파의 사람들뿐 아니라 장로들을 비롯한 개방 사람들도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일월쌍개의 행동은 서로를 상하지 않기로 한 비무의 약속에는 어긋나는, 명백히 무옥의 목숨을 노린 것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는 이제 거의 성공할 것으로 보였다. 그 순간 무옥의 두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하나 싸움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거리가 멀어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 살기를 본 것은 오직 한 사람, 무옥의 앞쪽에서 극을 찔러 가던 일월쌍개 중 한 명뿐이었다. 거의 목을 찌를 듯하던 그의 극 끝에서, 갑자기 무옥의 키가 줄어드는 것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머리카락도 벨 수 있는 날카로운 극의 날은 무옥의 이마를 스치면서 상징 같은 영웅건을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허공을 날아온 또 하나의 극이 있었다. 하나 무옥은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도 볼 수 있었다. 무옥이 간신히 몸을 비틀어 그 극이 등이 아니라 어깨를 꿰뚫는 것을. 그리고 무옥의 손에서 일순 푸른 광채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죽장이 대나무 화살처럼 쏘아져 극을 던진 사람에게로 날아가는 것을. 극은 무옥을 죽이지 못했지만, 죽장은 실수가 없었다. "커어어어억!" 처절한 비명이 울리고, 극을 던졌던 사람이 뒤로 쓰러졌다. 쌍둥이 형제의 혼이 땅을 떠나는 그 순간에 다른 형제도 무사하지는 않았다. 무옥의 일권이 어느새 그의 목울대를 향해 꽂혀 가고 있었던 것이다. "멈추십시오!" 전광석화와 같은 일전에 넋이 나가 있던 모든 사람들을 깨우고, 무옥의 공격을 멈춰 세운 것은 규염개의 한소리 외침이었다. 그렇게 외친 규염개 역시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옥은 멈췄다. 살아남은 일월쌍개의 한 사람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스르르...! 그때에서야, 무옥의 이마에서 잘려 나간 영웅건이 두 조각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모두가 알면서도 모두가 모르는 척했던 무옥의 세 번째 눈이 햇빛 아래 드러났다. 하나 무옥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적을 등지고 돌아서 연무장 안의 모든 사람들을 오시했다. 극에 꿰뚫린 어깨에서 검붉은 피가 솟아나고 있는데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무시무시하면서도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세 개의 눈을 가진 젊은이가 어깨를 꿰뚫린 채 선혈을 뚝뚝 흘리며 한낮의 태양 아래 만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규염개는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약속을 먼저 어긴 것은 일월쌍개지만, 승자의 아량으로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이제 십만 개방 방도의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그의 말이 신호가 되어, 장로들을 비롯한 개방 총타의 전인원이 일제히 무옥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방주님을 뵈옵니다!" 그 소리는 가을 하늘을 뒤흔들듯이 우렁찼다. 무릎을 꿇은 뒤 한 점 몸을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무옥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동쪽에 앉은 타문파의 사람들도 일어났다. 그들은 무릎을 꿇는 대신 무옥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의 무공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승리에 대한 찬사였다. "과연 삼목신룡이오!" "개방은 젊은 영웅을 방주로 모시게 되었소!" 이상한 것은 그들 중에도 삼목신룡 무옥의 세 번째 눈을 감히 마주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찬사의 소리가 가라앉은 뒤 무옥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일월쌍개는 장로의 위를 박탈하고, 이곳에서 즉시 추방한다. 차후로 그들의 죄를 묻지도 않을 것이며, 개방의 제자들은 그들에게 해를 입히지도 말라!" 그것은 단호하고도 자비로운 결정이었다. 방금의 비무에서 분명 그 쌍둥이 형제가 무옥을 시해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는데도 무옥은 그들을 추방할 뿐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 이런 경우 언제나 보는 사람들만이 그 자비를 실감하듯이, 일월쌍개의 살아남은 한 사람은 조금도 감동하는 빛이 없었다. 그는 넋을 잃고 무옥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팔이나 다름없었던 일월쌍극을 떨구었다. 그리고 죽장에 가슴이 뚫린 형제의 시체를 안고 쓸쓸하게 북쪽으로 걸어갔다. 왔던 길로 사라지는 그 뒷모습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것이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무옥은 자신의 어깨에서 극을 빼냈다. 장로들이 분분히 그의 앞으로 뛰어가더니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 하나 그는 거절하고 규염개에게 끈 하나를 청해 다시 이마를 묶었다. 신비한 그의 세 번째 눈은 다시 가려진 것이다. 그가 선혈로 길을 그리며 방주의 처소가 있는 남쪽으로 장로들과 함께 걸어가고 난 뒤, 연무장 안에는 흥분과 감탄으로 소란한 목소리들이 남았다. "정말 대단하군! 그것은 의지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야. 그 위험한 상황에서 간발의 차이로 피하고, 또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일월쌍개의 한 명을 죽이다니!" "의지도 의지겠지만, 무공이 없이 어떻게 가능했겠나?" "이제 삼목신룡은 더 이상 강호 후기지수가 아닐세!" 소란스러운 와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조용했다. 삼목신룡의 세 번째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던 그 한 사람, 진설영이었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온몸이 싸늘해져 있었다. 아까 무옥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녀는 비록 얼굴은 창백했을망정 몸이 차갑지는 않았다. 그녀의 몸이 싸늘해진 것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그것은 그녀가 무옥의 세 번째 눈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전에 한 번 보고 이번에 두 번째 보기 때문이었다. 무옥의 세 번째 눈은 전과 달랐던 것이다. 안구(眼球)가 거의 핏빛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못 보던 새에 피를 흠뻑 들이마시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그대로 서서 그 붉은 눈을 떠올리고 있었다. * * * 화금궁. "삼목신룡이 개방 방주의 자리에 올랐다고 합니다." 만음요화는 오랑의 침실에서 보고를 들었다. "그리고 격색마회의 영웅대회 날짜가 다시 선포되었습니다. 섣달 보름이라고 합니다!" 만음요화는 미소 지었다. "이제 저 할 일 없이 무위도식하는 탐서랑이라는 작자를 써먹을 때가 왔군요!" 오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문. "우리 가문도 영웅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네!" 당철은 당미령의 옆에 앉은 장래의 사윗감에게 말했다. "자네도 가겠지?" "예, 제 사부님과 사백님께서도...!" 당철은 두 의원 나부랭이가 동행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을 뿐이었다. "우리 령아도 함께 가네! 자네가 보살펴 주게." 소운비는 깜짝 놀라며 옆에 앉은 당미령을 돌아보았고, 당미령은 얄팍한 미소를 지으며 조신하게 고개를 숙였다. * * * 풍월도문. "개방 신임 방주가 비무에서 입은 상처가 의외로 크다고 하더군요! 아직 못 깨어나고 있대요." 한초의 속삭임은 한없이 다정했다. 용양도인은 무엇이 좋은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한초가 더욱 귀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인께서는 분명히 세상에서 제일 강하신 분이시죠?" 용양도인은 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귀엽고 소중한 미동들을 위해서라면, 그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남자가 자신의 여자를 위하는 마음보다도 더 크고 굳센 것이었다. 제 20 장 소문(所聞) 미소년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뽀얗다 못해 창백한 빛깔이었다. 오랫동안 햇빛을 못 본 것처럼 그렇게 파리한 얼굴의 소년들이 일렬로 행진하고 있었다. 선두의 미소년들은 날라리를 불어댔다. 그 소리는 일정한 음조도 없이 제멋대로였으며, 귓구멍을 찢을 듯이 요란했다. 그 뒤의 미소년들은 높이가 오 장이나 되는 거대한 깃발 하나를 간신히 들고 전진하고 있었다. 바람결에 꿈틀거리는 그 깃발에는 크고 화려하게 '풍월도문'이라는 네 글자가 수놓여져 있었다. 깃발의 뒤에는 길바닥 가득히 종이꽃을 뿌리는 미소년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쪽 소매가 잘려진 옷을 입고 있었다. 행렬의 가운데에는 커다란 사인교가 있었고, 그 사인교 위에 비대한 도사(道士)가 앉아 있었다. 그들의 행렬은 개봉부를 향해 북상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소문이 바람을 타고 그들보다 먼저 북상했다. -용양도인이 개방을 치러 간다! * * * 그 주인이 없을 때조차 사람을 눌러 죽일 만큼 귀기에 휩싸여 있던 대전에, 마침내 주인이 돌아왔다. 그는 여러 가지 이름과 신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현재 무림에 알려져 있는 '몽중마령'이라는 이름만 해도 두렵고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하나 지금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또 하나의 이름에 비한다면, 그것은 두렵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적무공!" 그가 부르자, 붉은 안개의 화신인 양 서 있던 벌거벗은 사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 깊이 조아렸다. "교주의 부르심을 받듭니다!" "듣자하니 내가 없는 사이에 몽혼표를 사방에 뿌려댔다고?" 교주 몽중마령의 음성에는 한 점의 감정도 깃들여 있지 않았다. 적무공의 나신을 둘러싼 붉은 안개가 약간 떨리는 듯했지만, 그 움직임은 굉장히 미미하여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적무공이 태연히 대답했다.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어떤 머리가 그런 판단을 내렸지?" "속하의 머리입니다." 몽중마령이 태사의의 손잡이를 길고 창백한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손가락이 멈췄을 때, 여전히 감정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쓸모없는 머리인가 보군!" 살짝 들린 그의 손가락 끝이 적무공의 머리 부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자신이 공포의 화신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적무공의 붉은 눈에 공포가 떠오르는 것은 보기 쉬운 광경이 아니었다. 하나 적무공은 쉽게 흔들리려 하지 않았다. "속하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손가락으로 여전히 적무공의 머리통을 가리키면서, 몽중마령이 말했다. "해봐." "먼저, 교주님의 출도가 머지않았기 때문입니다. 십 년 전, 몽혼표는 강호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지만, 이제 잊혀질 만합니다. 몽혼표가 다시 등장하여 그 일을 상기시키고 교주님의 출도 전에 미리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몽중마령이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좋은 생각을 했군." 적무공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가 비록 괴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심계에 있어서는 제갈량(諸葛亮)이 울고 갈 정도로 놀라운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 몽중마령은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부족하다는 표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소교주님을 위해서 그리하였습니다." 그 말에 몽중마령의 눈이 약간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음...?" 적무공은 의도를 알 길 없는 비릿한 흉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소교주님께서 교리에 열중하신 모양인지, 비화공을 시켜 경전을 가지러 보내셨더군요. 소교주께서 교리에 열중하시는 것은 아주 고무적이고 기쁜 일이지요. 한데 중요한 시기에 소교주님 주위에 너무나 시끄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 주위를 다른 곳으로 돌려 볼 의도로 몽혼표를 날렸던 것입니다. 속하의 생각이 부족했다면 벌해 주십시오." 몽중마령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뒤 적무공을 가리켰던 손가락은 그의 긴 옷자락 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벌은 없다." 그의 말에 적무공이 감사의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벌리자 몽중마령이 그것을 막았다. "네 이유가 그럴듯해서는 아니다. 나는 오늘 기분이 좋다.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적무공이 붉은 눈동자를 빛냈다. "이번에 나가신 길에 성취를 이루셨습니까?" "아니다." 몽중마령이 사람 같지도 않은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오히려 나는 거의 내 것으로 만든 계집의 혼을 도로 내주었다. 그 때문에 나는 오늘부터 폐관 수련에 들어가야 한다. 하나 기분이 좋다. 왜 그런지 알겠느냐?" "속하의 머리로는..." "나의 라사나가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적무공이 숙인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 떠오르는 것은 경악과 기쁨이었다. "사람을 풀어 제가 그놈을 뒤쫓았습니다만, 혼음사의라는 놈이 간교하여 놓치고 말았었습니다. 한데 놈이 교주님의 품으로 기어 들어갔었군요." "그는 건드리지 마라. 그대로 좀더 크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의 완성이 곧 나의 완성이다." 몽중마령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태사의에 몸을 묻었다. "그만 물러가라. 폐관 기간 동안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안개는 대전의 거대한 문틈으로 빠져 나가고, 적무공도 그를 따라 사라져 갔다. 혼자 남은 몽중마령은 잠시 눈을 감고 앞으로의 대계를 설계하는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해골처럼 말라 있었고, 소매 끝으로 비어져 나온 손가락은 악마의 갈퀴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몽혼일도!" 눈을 감은 채로 그가 갑자기 한 사람을 불렀다. "예!" 대답이 허공 중에서 돌아왔다. 몽중마령에게는 세 명의 신임하는 부하가 있었다. 그들은 삼령주라고 불렸으며, 그의 사람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삼령주에 비하면 대전의 수문장인 몽혼일도는 일개 호위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진실을 말하자면, 몽중마령은 몽혼일도를 가장 신임했다. "개방의 일은 어찌 된 거였나?" 몽혼일도의 대답은 몽중마령 자신보다도 더 감정없는 목소리로 돌아왔다. 이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사내의 무뚝뚝함에는 이따금 몽중마령조차도 감탄할 때가 있었다. "백미노개가 소교주님의 신분을 눈치챈 모양입니다. 해서 비화공이 손을 썼지요. 저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흠...! 그 녀석이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백미노개 따위가 눈치를 챘으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말해라." "교주님이 안 계실 때 비화공이 이 방에 왔었습니다." 몽혼일도가 무덤덤하게 그때의 상황을 보고했다. 몽중마령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의 상황이 오가고 있었다. '비화공이 딴 마음을 먹고 있다...? 아니지..., 비화공이 혼자 그럴 리는 없어. 그럼 그 녀석이 설마...?' 몽혼일도의 설명은 이어졌다. "그래서 적무공께서 개방으로 저를 보내셨지요. 굳이 몽혼표를 날리라면서." 몽중마령은 열 개의 손가락을 서로 맞대고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적무공도 딴마음을 먹고 있군. 개방의 몽혼표는 그 녀석에게 경고하는 뜻이 담겨져 있었겠지. 경쟁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후계자 자리를 놓고...?' "개방에서 한 여자를 보았습니다." "음?" 몽혼일도의 입에서 여자 이야기가 나오자 몽중마령은 혼자만의 생각에서 번뜩 깨어났다. "어떤 여자였기에 네가 특별히 이야기하는 거지?" 몽중마령은 모처럼 흥미를 느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몽혼일도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진설영을 만나던 순간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설명은 그의 성격처럼 무덤덤하면서도 정확하여, 몽중마령에게 진설영이라는 사람의 상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몽중마령의 얼굴 위에 점점 야릇한 웃음이 번져 갔다. "젊은 계집이 그 정도의 무공이라...? 혹시..." '혹시'라고는 말하지만 그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라라나...!" * * * 용양도인의 행렬이 개봉부 경 내로 접어들어 개방 총타의 문전까지 도착하는 동안, 방해하는 무리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용양도인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미소년들의 애원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들이 조금만 찬사를 보내 주면 몸이 허공으로 붕붕 뜨는 것 같아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고서는 못 배길 지경이었다. 해서 한초의 꼬드김을 이겨 내지 못하고 이번의 원정을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용양도인도 강호의 밥을 헛되이 먹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름의 계산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 개봉부에 격색마회의 인물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다고는 하지만, 강호의 싸움이란 군대와는 달라서 반드시 숫자가 많다고 승기를 잡는 것이 아니었다. 요는 질이었다. 어느쪽의 최고수가 가장 센가, 용양도인의 자신감은 바로 그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재 개방에 머물고 있는 고수급의 인사는 신임 개방 방주 무옥, 규염개를 비롯한 장로들, 사천 당문에서 파견된 사람들,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세룡 정도인데, 그 중 그가 가장 꺼리는 사람은 무옥이었다. 한데 그 무옥이 바로 얼마 전 일월쌍개와의 격돌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는 것이다. 남은 장로들 중에 규염개가 최고라고는 하지만 용양도인에게는 맞수가 되지 않으며, 사천 당문의 독공이 일류라 하지만 지금 개방에 와 있는 자들은 사천 당문에서도 중간급 정도이고, 또 풍월도문의 미동들도 독공에 관해서는 만만치 않았다. 남궁세룡 역시 용양도인의 상대로는 부족했다. 결국, 개방에서 나오는 그 어떤 고수라고 하더라도 일 대 일로는 용양도인이 우세한 것이다. 남은 문제는 개방의 거지 떼들이 인원을 믿고 밀어붙이는 것인데, 그에 대해서도 대책은 있었다. 행렬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개방에 일 대 일의 비무첩을 보낸 것이다. <그대들이 색의 소탕을 말하는데, 그대들 중 한 사람이 나와 겨루어 그것 이 온당한지를 증명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정파 어쩌구 하는 자들일수록 체면에 얽매이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런 자들에게는 정면 공격이 더욱 효과가 있다. 영웅대회를 얼마 남기지 않은 격색마회는 최대한 체면을 잃지 않으면서 정당하게 승리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용양도인의 계산이었다. 그가 흐뭇한 표정으로 흔들리는 사인교 위에 비스듬히 눕는데, 저 멀리 개방 총타의 깃발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총타를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거지들! 겁을 먹고 미리 도망이라도 친 것인가?' 우쭐한 생각에 젖어 있던 용양도인이 문득 몸을 굳혔다. 커다란 나무 대문 앞에 한 사람이 오도카니 서 있었던 것이다. 문은 크고 사람은 작아 잘 보이지 않았는데, 거리가 가까워지자 비로소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아니?" 그 사람의 면모를 살펴본 용양도인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그것은 용양도인이 너무나 싫어하는 여자였다. 그것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행렬은 그 여자의 앞에서 멈추었다. 발걸음이 멎자 날라리 소리도 그쳤고, '용양도인 친림'을 외치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용양도인의 무리를 홀로 맞이한 여자의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두 팔 안에 한 자루 검을 안고 있었다. "너는...?" 용양도인은 비대한 몸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진회하에서 보고 몇 달 만인가요?" 그제야 용양도인은 자신을 막아 선 그 여인이 지난 여름 진회하의 귀회루에서 보았던 그 소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용양도인은 어안이 벙벙하여 물었다. 진설영이 입가의 웃음을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이 격색마회에 비무를 청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내가 그 상대예요." 용양도인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항복을 하면 했지 그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잠시 멍해 있던 용양도인은 한 순간에 적들의 의도를 꿰뚫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름대로의 추측일 뿐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놈들이 내가 여자라면 질겁한다는 것을 알고 궁여지책으로 계집애를 내보낸 모양인데...! 어림없다!' 발끈한 용양도인이 한 모금 진기로 그 비대한 몸을 허공에 띄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몸은 진설영의 앞으로 떨어졌다. "나는 영웅입네, 하는 놈들처럼 계집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네가 피떡이 될 때까지 두들겨 팰 것이다! 계집, 그래도 하겠느냐?" 용양도인은 일부러 내공을 실은 음성으로 진설영에게 호통을 쳤다. 그 정도면 웬만한 무인이라도 귀를 감싸며 땅바닥에 뒹굴 정도였다. 하나, 이상하게도 진설영은 여전히 웃고 있을 뿐, 귀를 감싸기는커녕 긁지도 않았다. "뜻대로 하세요. 만일 내가 이긴다면 나는 당신을 뇌옥에 가두겠어요. 그래도 될까요?" 진설영의 태연한 태도에 용양도인은 그녀가 녹록하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 계집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더구나 뒤에서는 귀여운 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그는 배를 내밀며 외쳤다. "만일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면 내 골통을 가지고 네년의 요강을 삼아도 괜찮다. 자, 삼 초를 양보해 주마. 덤벼라!" 용양도인이 선언하자, 뒤에 서 있던 미동들로부터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도인 어른, 너무나 멋있으세요!" "세상에 영웅호걸이 있다면 오직 어르신뿐입니다!" "힘내세요, 도인 어른!" 먹이를 보고 모여드는 참새 떼처럼 미동들은 재재거렸다. 흐뭇한 표정을 짓던 용양도인이 한 순간 소매를 휘두르자, 그 시끄러운 지저귐은 뚝 그쳤다. 진설영은 가볍게 실소하며 용양도인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 "삼 초를 양보하신다니 그 아량은 참으로 넓으십니다만, 저는 양보받을 수가 없는 처지이니 바로 시작하시지요." "양보받을 수가 없다니?" 진설영의 대답은 차분하면서도 싸늘한 것이었다. "삼 초까지 가지도 않을 테니까요." 용양도인은 어리둥절하여 다시 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지?" "내 검은 빨라요." 안 그래도 퉁퉁한 볼따구니 살에 밀려 작아 보이는 용양도인의 두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것은 분노의 표현이었다. 용양도인의 옷소매가 소리없이 부풀었다. 용양도인은 일격을 퍼붓기 전에, 진설영을 샅샅이 관찰했다. 보통의 계집이라면 감히 저렇게 자신만만할 수는 없다. 분명히 숨겨 둔 한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 아무리 보아도 몸에 붙는 경장 차림의 그 몸에 숨겨 둔 암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손에 장갑도 끼지 않았으니 독을 쓸 리도 만무했다. 오직 가슴에 안고 있는 검 하나가 무기인 모양인데 그것이 용양도인을 압도할 만한 쾌검으로 변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쾌검의 기초는 전광석화와 같은 발검에 있다. 검은 보통 옆에 차거나, 아니면 등에 지거나, 혹은 손에 쥐여져 있는 것이 상식이다. 지니고 있는 자세에 따라 검을 빨리 뽑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가슴에 안고 있는 검이 빨리 뽑히는 경우는 없다. 최소한, 용양도인과 같은 고수를 압도할 만큼 빨리 뽑히기는 어려운 자세인 것이다. 용양도인은 일초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그의 사람 됨됨이가 좀 허랑하다고는 해도, 싸움에 있어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험한 강호에서 그 욕을 먹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계산까지 마친 순간, 용양도인은 웅맹(雄猛)한 내력을 실은 거대한 장력을 손바닥에 담아 앞으로 밀었다. 그것은 강할 뿐 아니라 빠르기까지 하여, 도저히 실패할 리가 없는 한 수였다. 한데, 그런 그의 일장보다도 더 빠른 것이 분명히 세상에는 존재했다. 코앞으로 밀려오는 장력을 뻔히 보면서도 진설영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꼼짝 않고 있는 동안, 그녀가 안고 있는 검이 먼저 움직였다. 스르릉...! 검은 뼈를 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저 혼자 검집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검신에 부딪친 햇살이 용양도인의 눈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이기발검(以氣拔劍)!' 용양도인은 기절할 듯 놀랐다. 자신의 장력보다 진설영의 발검이 느릴 것이라는 계산이 틀린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 * * -내공으로 치면 당금의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라는 용양도인 을 한 사람의 앳된 소녀가 격퇴했다! 그 놀라운 소문은 용양도인이 북상할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개방의 영웅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개봉부로 몰려가는 영웅호걸들이 곳곳의 주루와 객점에서 그 소식을 듣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안객잔(平安客棧)은 연경 한가운데 갖다 놓아도 꿀리지 않을 만큼 컸다. 하지만 아무리 큰 객잔도 손님을 받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이즈음 평안객잔은 방이 없어 주인이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손님이 미어 터졌다. 개봉부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그곳이 이렇게 손님으로 북적대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영웅대회! 격색마회의 이름으로 소집된 영웅대회가 뭇 강호인들의 발길을 개봉부로 이끌었고, 자연히 평안객잔에 머물게 만든 것이었다. 아무리 손님이 많아도 유독 눈에 띄는 패거리가 있기 마련인데, 오늘은 두 패거리가 특히 그랬다. 한 패는 오전에 평안객잔에 도착했다. 한 마을이 몽땅 타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큰 마차를 타고 천지를 울릴 것 같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객잔 앞에 도착한 것이다. "방을 준비해라!" 발 빠른 점소이가 마중 나가기도 전에 문을 열어제치며 들어온 손님들은 놀랍게도 꽃처럼 어여쁜 젊은 아가씨 두 사람이었다. 점소이는 물론이고 밥을 먹고 있던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그녀들의 몸에 쏠렸는데, 허리에 찬 장검이 서늘한 한기를 내뿜는 것이 꽃은 꽃일망정 가시가 있는 꽃이었다. "아, 예. 몇 개나 준비할깝쇼?" 점소이가 사근사근하게 말을 붙이는데, 두 아가씨가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 양쪽으로 비켜 섰다. 그러자 그 커다란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그 안으로 당당히 들어서는 것이었다. 먼저 들어온 것은 앞선 두 아가씨가 무색할 정도로 예쁘장한 미청년이었다. 까마귀 깃털처럼 까만 머리칼과 눈처럼 흰 피부가 남색 취미하고는 관계가 없는 사내라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의 뒤에는 몸매가 풍만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들 일행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녀의 몸매만큼 얼굴도 농염한지 알고 싶어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챙이 넓은 모자 앞에 면사를 드리우고 있어 이목구비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 여인의 뒤에 들어온 것은 몸매가 날렵한 사내였는데, 이 사람의 모양이 가장 우스꽝스러운 시선을 끌었다. 마치 강호 나들이를 나선 여인네처럼 그 사내 역시 모자 앞에 천을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을 감춰야 하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꼴에 손에는 접선을 쥐고 점잖게 부쳐대는 모습이 쌀쌀한 날씨와 맞지 않아 우습게 여겨졌다. 하나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화려한 마차며, 시녀로 여겨지는 두 아가씨들의 냉엄한 기도, 그리고 얼굴을 가린 여인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살기가 그들이 웃어도 좋을 만큼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었다. "방은 두 개. 대신 가장 화려하고 넓은 것으로." 점소이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얼굴을 가린 여인이었다. "예! 따라오십쇼." 점소이는 그 손님들을 안채로 안내하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이 다섯이나 되는데 방을 두 개만...? 돈이 모자란 것 같지는 않은데 여자 손님들 한 방, 남자 손님들 한 방 이렇게 묵으시려나?' 점소이의 머릿속에서는 그 이상의 구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두 개의 방에 도착한 손님들은 '수고했다'고 짤막하게 말한 뒤 한 방에는 얼굴을 가린 남자와 두 아가씨가, 그리고 다른 한 방에는 꽃 같은 미청년과 얼굴을 가린 여자가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온종일 그 두 개의 방안에서 오묘하고도 기묘한 소리들만 연달아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두 번째 패거리는 첫 번째 패거리가 한나절 내내 농탕을 치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나왔을 때 평안객잔에 도착했다. 그들도 큰 마차를 타고 왔지만, 첫 번째 마차보다 크지는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것은 맵시있게 옷을 입고 얼굴을 면사로 가린 젊은 아가씨와 그녀의 아버지인 듯한 중년대한 두 사람이었고, 마차를 따라온 인마가 스물이 넘었다. 평안객잔에 그 인원이 다 묵을 만한 방이 모자라다는 것을 안 그들은 아랫사람들로 짐작되는 이십 명 정도를 가장 가까운 다른 객잔으로 보내고, 예의 부녀와 두 명의 늙은이, 그리고 한 명의 청년만 남아 방을 요청했다. 방이 모자라 죽을 지경이었던 객잔 주인이 그들 다섯 명에게 각방을 쓰게 해준 것은 순전히 '사천 당문'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두 번째 손님들은 첫 번째 손님들과는 딴판으로 아주 점잖았다. 바야흐로 객잔 안의 모든 손님들이 식당에 모여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는 시간이 되자, 객잔 주인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시비거리를 찾아다니는 강호인들이 이 객점 안에 꽉 차 있는 데다가, 그 중 두 패거리는 유달리 눈에 뜨이는데 과연 시비없이 평안하게 이 평안객잔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달그락, 달그락. 쩝쩝... 긴장한 것은 객잔 주인만이 아니었다. 동행들끼리 모여 식사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두 패거리에게 분명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팽팽한 가운데 식당 안에는 젓가락이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와 조심스럽게 음식을 씹어 삼키는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한데 주목받고 있는 두 패거리는 의외로 조용했고, 음식과 물을 먹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사람들의 긴장은 차츰 풀려 가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자 굳었던 혀도 풀리고, 나지막하게나마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었다. "자네, 그 이야기 들었나?" "무슨?" "용양도인이 격색마회에 사로잡힌 바 되었다더군." "뭐야?" 한구석에서 평범하게 생긴 두 무사가 주고받기 시작한 이야기에, 갑자기 식당 안의 젓가락 소리들이 딱 멈추었다. 두 무사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너무 컸나 싶어 말을 멈추었으나, 첫 번째 패거리의, 얼굴을 가린 여인이 자신들을 똑바로 노려보며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고 있어 계속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말이야... 개방 신임 방주가 일월쌍개와 비무 도중에 심한 부상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이야기야 다들 알고 있지." "그러니 격색마회가 눈엣가시 같은 용양도인이 그 틈을 노려 달려든 걸세. 격색마회에 사람이 많다고는 하지만 삼목신룡 무옥 같은 고수가 더는 없거든." "하긴 그렇지. 한데 어째서 용양도인이 사로잡혔다는 말인가?" "그게 말일세, 격색마회에 삼목신룡 무옥만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 모르는 소녀고수가 나타났다네." "뭐야? 그게 누군가, 아미파인가? 아니면 어디 세가의 여협인가?" "허, 어떤 명문명가의 제자도 아니니 더욱더 놀랍네. 사실 그 동안 격색마회를 꾸리는 데도 삼목신룡만큼 그 소녀고수의 힘이 컸다더군." "그래, 이름이 뭔가? 별호는?" "냉면검화 진설영 소저라고 하더군." "호오...!" "용양도인이 그 냉면검화의 삼 초를 채 받아 내지 못했다더군. 그래서 개방의 뇌옥에 갇혀 버렸다네." "아니, 근데 용양도인이 바보였나? 어째 범아가리로 혼자 들어갔다던가?" "혼자 간 것은 아니었지. 몇 백이나 되는 미동들을 데리고 갔다네. 그 미동들이 생긴 것은 곱고 용양도인에게는 곰살궂게 굴어도 손 씀씀이가 보통 악독하지 않네." "그런데 어째서...?" "격색마회에서 작전을 미리 세워 두었던 모양이야. 냉면검화가 용양도인을 격퇴하자마자 사방에 매복하고 있던 개방 제자들이 몰려 나와 미동들을 공격하니 그것들이 울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버렸다더군." "그 미동들이 독공의 수준이 보통이 아닐 텐데?" "때마침 당문의 고수들이 있어서 개방 제자들에게 해독약을 미리 주었다더군. 그러니...!" 이야기하던 사람은 '당문의 고수'라는 부분에 특히 힘을 주어 칭송했다. 아마도 한쪽에 자리잡은 당문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으라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요는, 그러한 작전마저도 모두 냉면검화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용양도인의 몰락을 비웃고 냉면검화라는 소녀 영웅의 등장에 흥미를 가졌다. 그 중 한 사람의 가슴속에 '냉면검화 진설영'이라는 이름은 무척이나 가슴 아프게 꽂혔다. 중인들이 보기에는 당문의 일행인 평범한 용모의 청년, 인피면구로 본모습을 가린 소운비가 바로 그였다. '설영이가... 설영이가 강호에 이름을 날리고 있구나. 그래, 너는 언제나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했지.' 소운비는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릿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그에게 진설영이라는 이름은 아내인 혜와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달콤하기보다는 씁쓸한 것이고 짜릿하기보다는 아프게 가슴을 쳐오는, 멀고 먼 옛날의 갚을 수 없는 빚 같은 느낌이었다. 비록 인피면구라고는 하지만 그 위로 행여 표정이 들킬세라 소운비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것이었다. 점잖은 체하며 식후의 차 한잔을 마시고 있는 혼음사의였다. 소운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혼음사의가 그의 허벅지 위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 <만음요화> 그 네 글자는 소운비를 제자리에서 펄쩍 뛰게 만들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혼음사의는 그가 행여 동요하지 않도록 글씨를 쓴 직후 그의 허벅지를 지그시 눌러 주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손가락 끝으로 한쪽을 몰래 가리켰다. 소운비 역시 들키지 않게 그쪽을 훔쳐보았다. 혼음사의가 가리킨 것은 바로 첫 번째 패거리의 그 얼굴을 가린 여인이었다. '그녀가?' 과연 소운비가 찬찬히 살펴보니 얼굴은 몰라도 그 몸매며,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만음요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식사를 하는 동안 뒤에 시립해 있는 두 명의 아가씨는 분명 낯이 익은 화금궁 황의 항렬 제자 중 두 사람이었다. 결정적으로, 여인이 얼굴을 덮은 면사를 살짝 들면서 차 한 모금을 마시는데 하관(下觀)의 생김새가 영락없는 만음요화였다. 소운비는 그것을 보는 순간, 그만 나지막하게 탄성을 뱉고 말았다. "헉!" 그 소리는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만음요화의 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만음요화의 눈이 날카롭게 소운비를 쏘아보았다. 소운비는 다급한 마음에 얼른 눈길을 피하려 하였으나 다음 순간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자신의 얼굴은 인피면구로 가려져 있고, 만일 당황한 눈치를 보인다면 자칫 정체가 발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소운비는 대담하게도 만음요화를 향해 타락한 귀공자처럼 은근한 미소를 던졌다. 그러자 만음요화의 태도가 대번에 바뀌었다. 면사를 살짝 들추고 반쯤은 비웃는 듯, 반쯤은 유혹하는 듯 미소를 짓더니 옆자리에 앉은 미청년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것이었다. '휴우...!' 간신히 만음요화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잡은 소운비가 다시 식탁으로 몸을 돌렸을 때, 불길 같은 또 다른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당미령이었다. 말로는 낭군될 사람의 풍류쯤은 다 받아넘길 수 있다고 했지만 오만한 귀공녀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그렇게 헐렁하지는 않았다. 당미령은 아무 말 없이 소운비를 노려보고 있다가 소운비가 무시하듯 국그릇으로 눈길을 돌려 버리자 고개를 떨구었다. '저럴 수가...! 저럴 수가...!' 당문의 딸이라고는 하지만 무공을 익히는 것보다는 예쁜 옷을 입고 치장하기를 좋아했던 당미령이 강호행을 나선 것은 보통 행사가 아니었다. 그 목적은 오로지 소운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미령은 나름대로 꿈을 꾼 것이다. 험난한 강호행, 낯선 사람들이 득실대는 객점, 우연한 싸움, 거기서 자신을 굳건하게 지켜 주는 믿음직한 정혼자, 그리고 그날 밤, 혼례를 치르기 전에 맞이해 보는 뜨거운 밤...! 물론, 당미령은 거듭 다짐하고 있었다. 그것이 결코 소운비를 진심으로 사랑해서는 아니라고. 오히려 그것은 소운비를 덫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라고. 목적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여지없이 그를 걷어찰 것이라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약혼을 했으니 혼인 그 자체야 깨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은 귀공녀이고 소운비는 시혜를 받은 부랑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줄 것이라고. 한데, 이게 뭔가...! 지금까지 오는 며칠의 여정 동안에도 소운비는 그녀를 거의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말을 안 거는 것은 물론이요, 눈도 잘 안 마주치려 하는 것이다. 당미령은 속이 상했다. 속이 상해도 이만저만 속이 상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아버지와 사촌 오라버니들이 다루는 독을 한 사발쯤 생으로 삼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속이 상하니 입으로 들어가는 산해진미가 다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당미령이 음식 투정이라도 하는 어린아이처럼 젓가락으로 요리들을 쿡쿡 쑤시기만 하는 것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당철이었다. '흠... 거, 사윗감이 너무 무뚝뚝하구만. 아무래도 령아에게 문제가 있다 보니...!' 강호의 도리로 은인에게 딸을 주기로 결정한 것까지는 좋다고 치더라도, 그 결과까지 좋을 리는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당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눈으로 확인하는 그 결과란 과히 기분좋은 것은 아니었다. 혼음사의는 동업자이자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만음요화를 발견한 것 때문에 긴장하고, 소운비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말이 없고, 당미령은 소운비 때문에, 당철은 당미령 때문에 우울해 하니 이래저래 당문의 자리는 썰렁했다. 오직 한종린 혼자만이 어색한 자리를 메워 보겠다고 이 얘기 저 얘기 끄적거려 보았지만, 그도 역시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 한 자리 두 자리 잠을 자기 위해 올라가고, 마침내 객잔 주인이 유심히 관찰했던 두 패거리도 아무 말썽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자고로 말썽이란 잠자리에서 벌어지는 예가 훨씬 많은 법이었다. 객방이 있는 뒤편으로는 밀회하기에 알맞은 후원이 있었다. 석공이 공을 들인 가산(假山)도 그럴듯하게 놓여 있고, 자그마한 연못 위로 향나무가 운치있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밀회를 하는 연인 따위는 없었다. 강호의 흉흉한 사람들이 번다한 객잔에 밀회를 원하는 연인이 머물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이 객잔에 머문 사람들 중 연인이라 할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방 구석에서 밀담을 나누기에 바쁘지 후원을 거닐 여유 따위는 갖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밤이 이슥해지자, 한 사람이 후원으로 어두운 그림자처럼 스며 들어왔다. 하지만 밀회하러 온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그 태도가 지나치게 은밀했고 일신의 경공술도 만만치 않았다. 달빛에 얼핏 드러난 그의 얼굴은 달보다도 창백했다. 만음요화의 베갯머리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오랑이었다. 그의 얼굴은 다른 때보다 유달리 창백했는데, 바로 아까 저녁을 먹던 자리에서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랑이 가산 옆에서 입술을 오무려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을 내자, 작은 연못 속에서 유령처럼 한 소년이 솟아 나왔다. 물을 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신비한 거동이었다. 뒤따라 향나무 그늘에서도, 가산의 어두운 틈바구니에서도 속속 소년들이 솟아 나왔다. 그 수는 모두 다섯이었다. "문주께서 개방의 손에 떨어지셨다!" 오랑이 침통하게 말했다. 소년들은 일순 말을 잇지 못했다. "문도들 역시 뿔뿔이 흩어진 모양이다..." 이어지는 오랑의 말투에는 헤아릴 수 없는 비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오랑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하셨군요!" 한참 만에 연못 속에서 나온 소년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거기에는 분명 오랑을 책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문주께서 고집을 피워 우리를 끌어 내고, 하릴없이 화금궁 주변을 맴돌게 하시더니 정작 중요한 때에 문주님을 지키지 못하고...!" 오랑이 발끈하여 되쏘았다. "혈루수(血淚水)! 너 지금 그것이 내 탓이라는 거냐?" 혈루수도 지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저희들만 문주님 곁에 있었어도 한낱 개방의 무리 따위가 어찌 문주님을 욕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오랑은 부정하지 못했다. 혈루수뿐 아니라 다른 혈루화, 혈루목, 혈루금, 혈루토 등 다섯 명의 용양혈루단 전원이 그를 말없이 비난하고 있었다. 오랑은 고개를 떨구었다. 혈루수의 말이 발칙하기는 해도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전의 그였다면 과연 아랫사람이 지적하는 잘못 따위에 고개를 숙이는 일 따위가 가능하기나 했을까? 더구나 그 '아랫사람'은 그냥 부리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랫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노리갯감이며, 자신은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 미동들이 아닌가. '많이 약해졌어, 오랑!' 오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목적을 가지고 화금궁에 잠입해 만음요화의 정인이 된 다음부터, 그의 심성은 이따금 그 자신이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여리게 변해 버린 것이다. 하긴 그것을 변했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자신이 가슴속에 묻어 두고 있던 어떤 심성이, 무엇인가를 계기로 드러난 것이리라. 요는 무엇이 그 계기가 되었는가 하는 문제였다. 죽어도 그것을 만음요화와의 만남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오랑이었다. '어쨌든...!' 오랑은 울분을 다스리고 혈루수를 비롯한 다섯 명을 일일이 돌아보았다. "어쨌든 지금 풍월도문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일 것이다. 나는 당분간 화금궁과 함께 움직이겠다. 그대들은 먼저 개방으로 가서, 문주님의 안위를 살피도록 해라." "우리들만?" 혈루화가 불만이 담긴 소리로 반문했다. 오랑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화금궁의 인원은 여기말고도 수십 조로 나뉘어 가고 있다. 그들은 도착하는 대로 개방에서 큰 소란을 일으킬 계획인 것 같다. 문주님을 탈출시키는 것은 그때다. 나는 그 계획을 좀더 자세히 알아 내기 위해 남는 것이다." 오랑의 대답에 용양혈루단은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연락은 저기 오아로 하겠다." 오랑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크게 원을 그리며 도는 오랑의 애조 오아가 보였다. "먼저 가겠소!" 용양혈루단의 다섯 소년이 쌀쌀맞게 인사를 던지고 순간 사라져 버렸다. 오랑은 쓸쓸하게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의 오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은 아버지의 사람이지 내 사람은 아니야...!' 그때, 객방 쪽에서 바스락거리며 옷자락 끄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몰래 수혈을 짚어 놓은 만음요화가 깨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랑은 황급히 복도의 창을 타고 자신의 객방으로 돌아갔다. "소랑(蘇郞), 당신이에요?"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당미령이었다. 당미령은 잠자리 옷차림에,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머리까지 늘어뜨리고 어딘가 흩뜨러진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잠 못 들고 창 밖을 내다보던 그녀는, 어둠 속에 후원을 맴도는 그림자를 보고 혹 소운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렇게 나온 것이다. 당미령이 제법 고혹적인 차림을 하고 감히 밤나들이를 한 것은 다 모진 결심을 한 덕분이었다. '어쩌면 그는 내가 너무 얌전한 척, 도도한 척하기 때문에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몰라. 어차피 나와 그는 혼인을 할 사이니 이 정도쯤이야...!' 당미령은 오늘밤에는 기필코 그와 정혼한 사람다운 관계를 만들어 보리라 결심하고 호칭마저 '소랑'이라는 친근한 말로 대신하고 있었다. 하나 막상 차디찬 초겨울바람에 살갗을 드러내고 후원을 거닐다 보니 추위와 함께 야릇한 공포가 밀려왔다. 아무리 보아도 소랑은커녕 사람 같은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헛것을 보았나...?' 그녀가 찾고 있는 소랑은 후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 창문에서 후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그는 오랑이 용양혈루단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보았을 뿐 아니라, 당미령이 자신을 찾아 헤매는 것도 다 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후원을 거니는 당미령의 모습은 다분히 매혹적일 만했다. 하나 소운비의 눈에는 그녀가 예쁘게 보이기는커녕 어떤 때는 고고한 척하는 지체 높은 아가씨였다가, 어떤 때는 옷까지 풀어헤치고 밤에 나돌아다니는 철저한 이중성격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 광경이 보기 싫어진 소운비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창문을 닫고 침상에 벌렁 누워 버렸다. 오지 않는 잠일망정 억지로라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아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혼음사의가 슬쩍 건넨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만음요화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이 틀림없다. 한데 따라다니는 두 사내 놈은 누구지? 오늘밤에 나는 만음요화의 방을 엿볼 생각이다. 대체 어떤 속셈인지... 소운비는 아까 혼음사의가 오랑의 뒤를 밟다가 오랑이 방으로 돌아가자 따라서 후원을 빠져 나가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그로서는 오랑의 신분을 추측할 길이 없기에 그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만음요화의 치마폭에 휩싸인 미청년인가 보다 하고 생각을 했는데 심야에 이상한 괴소년들과 회합을 가진 것을 보니 그것만도 아닌 것 같아 아리송할 뿐이었다. 처음에 색마들이 귀회루에 모여 색마영웅회니 뭐니 하며 떠들 때는 분명 그것이 괴이한 짓이기는 해도 그 속에 담긴 뜻은 단순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거기에 격색마회라는 반대의 세력이 생겨난 뒤부터는 더욱 돌아가는 상황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누가 적(敵)이고, 누가 아(我)인지를 알 수 없는 난전장. 소운비는 문득 그 속에 홀로 떨어져 있는 혜와가 걱정되었다. 그리고 진설영도 걱정되었다. 한데 소운비가 눈을 감고서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못 이루고 있는 동안, 후원에서는 소름 끼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당미령은 어둠 속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을 보고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분명 소운비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소운비보다 키는 조금 더 큰 듯했으나, 살은 약간 찐 편이 몸매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놀라지 마시오, 소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어둠 속의 그 사람이 천천히 달빛 아래로 나왔다. 당미령은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을 내질렀다. 멋들어지게 접선을 꼬나 들고 선 그 사람은 분명 아까 식당에서 본 여자들의 일행 중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 사내였다. 아까와 다른 점은 이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한데 그 얼굴이 당미령의 경계심을 스르르 풀어 버릴 만큼 잘생기지 않았는가! "밤이 고적하여 잠을 못 이루고 잠시 거닐었소이다. 소저께 방해가 되었다면 용서하시오. 본인은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게다가 발바닥부터 삭삭 긁어 주는 듯이 낮고도 매력적인 음성! 무뚝뚝하고 생긴 것도 그저 그러한 정혼자와는 너무나 딴판인 미공자가 아닌가! 그 미공자가 사과를 하며 객방 쪽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당미령은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제가 너무 놀랐을 뿐이에요. 후원이 제 것도 아닌데 공자의 흥을 어찌 망치겠어요?" 미공자가 얼굴을 돌리고 있는 터라 당미령은 그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읽었다면 기절초풍을 했으리라. 잘생긴 얼굴에 그렇게 음험한 표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당미령은 상상도 못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얼굴이 사실은 인피면구이며, 그 원판이 실은 자신의 정혼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보고 있는 인피면구 속에 숨은 것은 천하의 색마 탐서랑이라는 것을. 탐서랑으로서는 한밤에 봉을 잡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 여행 중에 이만한 미색을 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에게는 만음요화가 객고를 달래라고 붙여 준 화금궁의 두 제자가 있었다. 오늘도 저녁을 먹기 전에,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서 그 두 여자를 끼고 일전을 치르고 난 다음인데, 대락불사신공을 연마한 이후 다른 것은 몰라도 정력만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만큼 절륜해진 터라 두 여자는 그만 녹초가 되어 잠들고 말았다. 심심파적으로 막 후원 쪽 창문에 눈길을 돌렸다가 우연찮게도 당미령의 산책을 발견하고 나온 것이다. 그나마 탐서랑이 두 여자와 일전을 치르고 난 다음이라는 것이 당미령에게는 행운이었다. 배가 부른 맹수가 조급해 하지 않고 슬슬 사냥감을 놀리듯 탐서랑은 이 우연찮은 '야식'을 갖고 놀아 볼 생각이었다. 잡을 수 있는 흥, 풍류, 멋을 다 동원하여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줄줄 녹여 버린 뒤에 한입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탐서랑은 감추려고 해도 자꾸 음험한 미소가 떠올라 애써 왕모선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데 엉뚱하게도 당미령에게는 이런 광경조차 너무나 멋있게 보였다. 그것은 소운비 따위는 감히 흉내도 못 낼 고아한 품이요, 귀공자의 흥취였다. "하면, 소저... 방해가 안 된다면 벗삼아 잠시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겠소?" 당미령은 바라던 바였으나 넙죽 그러겠다고 나설 뻔뻔함은 없어 고개를 외로 꼬며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네에..." 애초에 밀회 장소로 만들어진 것인지, 가산 옆에는 두 사람이 앉기에 적당한 넓적한 바위가 있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 반쯤 서로 외면한 자세로 앉았다. "내 눈과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소저께서는 당문의 금지옥엽으로 알고 있소만..." "미천한 이름, 미령이라고 부릅니다." 당미령은 짐짓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미태를 자랑했다. 탐서랑은 안 보는 척하면서 왕모선 너머로 그녀를 슬쩍슬쩍 넘겨다보고 있었다. 비록 탐서랑이 지난 시절에 남궁세가의 여식을 건드렸다가 혼줄이 난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탐서랑은 '당문'이라는 이름에도 크게 두려움이 없었다. 화금궁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데다가, 그 자신 대락불사신공이라는 희대의 신공을 익히고 있지 않은가. 그가 그 신공에 기대하는 바는 결코 그것으로 당문의 독공을 어찌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대락불사신공의 맛을 본 여자라면 감히 자신을 가문에 고발하고 어쩌고 할 수 없으리라는 자신감이었다. "결례가 안 된다면, 공자의 영명은 어찌 되시는지요?" "아...!" 신분을 묻는 당미령의 말에 탐서랑은 짐짓 탄식을 뱉었다. "가문의 원수를 찾아 헤매인지 십여 년... 그 한을 해결하기 전에는 선부의 이름을 함부로 댈 수 없는 이 사람의 사정을 낭자께서 헤아려 주시기 바라오." "아...!" 이번에는 당미령이 탄식했다. 그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영화로운 가문, 사파의 무리들에게 한 순간에 도륙난 혈겁의 순간, 홀홀단신으로 살아남은 마지막 후계자...! 그리고 숨은 기인을 사부로 맞이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 마침내 강호 출도. 이것이 아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미공자의 전력이리라. 그 다음의 이야기도 너무나 뻔했다. 원수의 종적을 찾아가는 지난한 여정, 그 여정 중에 만나는 아리따운 여인, 마지막에 여인의 도움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고 마침내 가문의 영화를 회복하여 백년해로...! 당미령은 어느새 그 정해진 영웅담 속의 여인에 자신의 이름을 대입해 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실제 인생, 버릇없는 금지옥엽으로 자라다가 아닌 밤중의 횡액으로 색마에게 처녀성을 빼앗기고 어디서 온지 모를 무뚝뚝하고 그저 그러하게 생긴 사내와 결혼하여, 파과(破瓜:처녀성을 잃음)한 게 죄라고 고개 숙인 채로 한평생 살아 가야 하는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며, 너무나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탐서랑은 밤의 기운을 빌어 멋들어지게 들릴 뿐, 사실 낮에 들으면 정말 시시할 만한 이야기들, 예를 들어 달이 밝다는 둥 날씨가 쌀쌀하여 옆 자리가 쓸쓸하다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었는데, 당미령은 그 이야기에 이미 흠뻑 빠져 들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공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지식에서는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더욱 수줍게, 더욱 얌전하게, 그러면서도 어딘가 빈 틈을 보이는, 한마디로 내숭을 떠는 것이었다. 갈수록 당미령의 고개는 외로 꼬아졌고, 머리카락 끝도 배배 꼬아졌다. 그리고 갈수록 탐서랑의 고개도 기린 목처럼 쭉 빼내밀어져서 당미령의 목덜미 아래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탐서랑은 당미령보다 키가 크고, 또 그가 앉은 쪽의 바위가 좀더 높았기에 당미령의 목덜미 아래 움푹 패인 젖가슴의 계곡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소운비를 꼬셔 보겠다고 얌전치 못한 옷차림을 하고 나온 터라 당미령은 얄팍한 잠옷 위에 걸치나마나 한 피풍(被風) 하나만 덧입은 채였다. 달빛 아래 보이는 그녀의 계곡은 더욱 도발적이었으며, 탐서랑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어디 슬슬 시작해 볼까?' 탐서랑은 한겨울에 접선을 부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싶어 조심하면서, 당미령이 눈치채지 못할 적절한 순간에 살짝 왕모선을 흔들었다. 물론 손잡이 부분의 작은 장치를 누르면서였다. 싸늘한 밤바람을 타고 왕모선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향기가 당미령의 콧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어떤 냄새를 맡았는지 본인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희미한 향기였다. 하나 그 효과는 실로 대단하여, 조금 시간이 지나자 당미령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야기 도중에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뛰어도 너무 뛰는 것이다. '혹시 이 공자님 때문에 심장이 너무 뛰어 병이 되는 것은 아닐까?' 당미령이 걱정을 하려니까 탐서랑이 은근한 소리로 물었다. "소저,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심장이... 좀...!" 탐서랑은 걱정하는 빛으로 충고했다. "저런! 그럼 가슴을 누르면서 몸을 좀 숙여 보시지요." 당미령이 시키는 대로 했다. 가슴께가 드러난 옷을 입고 몸을 숙이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탐서랑의 탐색은 더 한층 신이 나게 되는 것이다. '아, 아니?' 옷자락 사이의 아주 얇은 틈을 비집고 이제 거의 굴곡을 드러낸 젖가슴을 눈도둑질하던 탐서랑은 좋아서 죽을 뻔했다. 얄팍한 옷 위로 드러난 것으로 보아도 그렇고, 아주 약간, 정말 눈꼽만큼 보이는 희미한 돌기의 모양새도 그렇고, 분명 당미령의 유실(乳實)이 짙은 애무에 녹아난 기녀처럼 바싹 곤두서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 계집! 경험이 있는 게로구나.' 그의 왕모선이 처녀도 흥분시키는 효능이 있다고는 하나, 저 정도의 적극적인 반응이라면 경험있는 여자가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탐서랑은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이미 그는 대락불사신공이 아랫도리로부터 슬슬 힘을 불어넣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 참이었다. "소저, 추워서 그러신가 본데...!" 탐서랑은 일단 손을 뻗어 당미령을 부드럽게 안았다. 당미령은 갑작스런 그의 접근에 일단 한번 몸을 부르르 떨며 벗어나려는 듯 굴었으나, 어느 정도는 기대하고 있던 바라 그렇게 심한 앙탈은 부리지 않았다. 그녀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달밤, 꿈 같은 사랑과 황홀한 포옹,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꿀 같은 입맞춤 정도였다. 그녀는 그 이상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공자, 이러시면...!" "소저, 아무 말도 마시오." 탐서랑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기에 당미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따뜻한 화로 같은 탐서랑의 품안에 얼굴을 묻자 그녀는 그만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렇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운명의 장난으로 그녀가 얻기도 전에 날아가 버린 것, 애틋하고도 청초한 사랑과 따스한 포옹,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을 소운비가 주었다 해도 그녀는 어쩌면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출발부터 잘못 얽혀 버린 인연이라 그는 그것을 그녀에게 주지 않았고, 그녀는 엉뚱한 곳에서 그것을 꿈꾸게 된 것이다. "소저...!" 아직 포옹의 감격에서 채 깨어나지도 못한 당미령의 턱을 탐서랑이 조급히 들었다. 그는 이미 후끈 달아오른 대로 달아올라 있었기에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후원 바닥에 눕히고 그녀의 몸 중에서도 특별히 따스하고 촉촉한 곳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탐서랑에게도 나름의 원칙은 있었다. 지체 높은 아가씨들을 꼬실 때, 그는 언제나 열과 성을 다하고, 그녀들이 꿈꾸는 모든 절차들을 나름대로는 지켜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그는 그저 '색마'라기보다는 '풍류남아'로 불리기를 원했고, 그러기 위해 조금의 인내쯤은 감수할 줄 아는 덕이 있었다. 해서 탐서랑은 당미령의 입술을 향하여 조금씩 조금씩 다가갔다. 그가 늘 애호하는 순서에 따라 먼저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약간 가슴 쪽으로 미끌어져 내려가는 듯하다가, 다시 위로 올라와, 턱을 타고, 뺨을 훑어 귀를 스치다가 반쯤 감은 눈꺼풀 위에 타액을 남기고 시원스레 뻗은 콧날을 타고... 마침내 입술 위에 입술을 쉬게 하는 것이다. 물론 기대감에 몸을 떨던 처녀들도 처음 입술을 뺏길 때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게 되는데, 지금 처녀도 아닌 당미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막 입술 위에 입술을 겹치려는 판에 당미령이 갑자기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 내는 것이다. '이 계집이...! 썩어도 준치라더니 꼴에 세가의 여식이랍시고 앙탈은...' 당미령이 비록 몸은 처녀가 아닐지언정 모든 불행이 꿈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마음은 처녀나 진배없다는 속사정을 탐서랑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숭에 대한 방비책도 그는 다 가지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탐서랑이다. 이러저러한 경우의 수에 대응하는 방비책도 다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탐서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탐서랑은 당미령의 소극적인 앙탈을 잠재우기 위한 비장의 한 수로,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던 오른손을 내려 갑자기 그녀의 젖가슴을 쥐려했다. 물론, 그것이 탐욕스런 색마의 손짓으로 여겨지지 않게끔 최대한 부드럽게, 그리고 갈망하는 듯한 탄식까지 섞어서였다. "소저, 소저, 제발...!" 그의 몸짓과 안타까운 음성은 당미령에게 '나는 그대 없이는 못 산다. 제발 한번만 입맞추게 해다오. 나는 그대를 만지고 싶다, 입맞추고 싶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또 원한다'는 간곡한 절규로 들렸다. 남자의 애원은 때로 아무리 굳건한 처녀의 마음까지도 허무는 경우가 많다. 어릴 적부터 아이들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마음이 여자의 덕성, 어머니의 덕성이라 교육받아 온 여인들은 반은 본능적으로 모성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남자가 애원하거나, 조르거나, 절규할 때 여자의 마음은 무관심에서 동정으로, 연민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변하여 한 순간에 허물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상하게도 경험이 없는 여자일수록 그런 속임수에 잘 넘어갔다. 모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처녀일수록 '자애로운 여인'의 틀에 매여 쉽게 자신의 성을 열어 버리는 것이다. 당미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입술이 다가오지 못하게 방어하던 당미령의 두 손은 탐서랑이 젖가슴을 더듬자 그쪽을 막으려다가 불타는 애원에 그만 마음이 흔들리며 중간에 붕 뜨고 말았다. 그리고 탐서랑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으음...!" 사람의 입은 혼자 있을 때는 침만 고이지만, 남녀의 것이 한데 붙으면 아교나 꿀 같은 것이 나오는지 한번 붙으면 떨어지기란 쉽지 않았다. 당미령은 자신의 혼이 천당에 있는지 지옥에 있는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넋이 홈빡 빠지고 말았다. 일단 입술의 겉을 공략한 탐서랑은 여세를 몰아 혀끝으로 당미령의 입술을 열었다. 옥 같은 이가 벌어지며 그 안에서 귀하게 자란 아가씨다운 은은한 방향(芳香)과 이미 육체의 경험이 있는 것을 드러내는 짙은 육향이 동시에 밀려 나왔다. 뱀 같은 혀가 목젖께까지 파고들자, 혼백이 반쯤 나간 당미령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혀로 탐서랑의 혀를 감았다. 이쯤 되자 탐서랑도 그저 기술적으로만 그녀를 대하는 선을 넘어 버렸다. '이거, 이거 죽이는구나...!' 그의 아랫도리는 이미 낙낙한 화복(華服) 바지가 찢어질 만큼 불룩해져 있었다. 그는 당미령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당기며, 동시에 아랫도리를 그녀 쪽으로 힘껏 밀어붙였다. 한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탐서랑, 그가 풍류공자가 아니라 색마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비극이 여기 있었다. 그는 한번 시작하면 여자가 어디까지 원하든 그저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자제심이 약했다. 무공을 익히거나 다른 일을 하는 데는 특별히 근성이 있지도 않으면서 이상하게도 이 일에서만은 '한번 시작하면 뿌리를 뽑는다'는 근성이 뼛속까지 박혀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많은 여인들은 일사천리로 진도가 나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저 남녀간의 일이란 오늘 손을 잡았으면 내일은 팔짱을 끼고, 그 다음날에 부드럽게 포옹하고, 그날 저녁에 입맞추고, 삼 일쯤 뒤에 짙은 애무를 동반한 포옹을 하고, 그것이 반복되다가 여자 쪽에서 몸을 배배 꼬기 시작하며 허락할 뜻을 보일 때야 합궁하는 것이 마찰도 없고 부작용도 없는 법인데, 탐서랑은 그러지를 못했다. 한참 넋이 나가 있던 당미령은 불룩한 아랫도리가 밀착되어 오자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별안간 입술을 반쯤 떼며 놀란 음성을 터뜨렸다. "공자, 공자, 왜 이러시와... 어맛!" 언제나 그랬듯이 탐서랑은 당미령의 반발을 무시하고 그녀의 입술을 거의 깨물면서 그대로 바위 위로 쓰러뜨렸다. 혼음사의가 소운비에게 '여자란 만난 지 사흘 안에 자빠뜨려야 한다'고 했는데 탐서랑은 만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자빠뜨렸으니, 만일 혼음사의의 제자가 소운비가 아니라 그였다면 칭찬을 받아도 보통 받을 일이 아니다. 어쨌든, 이 시점에서 탐서랑은 '멋진 공자'가 아니라 '색마'로 돌변하고 말았다. 짜악!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탐서랑은 일단 당미령의 뺨을 호되게 갈긴 뒤, 한 손으로 그녀의 상체를 억누르고 급한 대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위로 걷어올렸다. 걷어올린 치맛자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입까지 틀어막은 뒤 순서에 입각하여 자신의 아랫도리를 까 내렸다. 애꿎은 당미령의 아랫도리는 물론이요, 언제나 탐서랑이 자랑해 마지않는 무기가 싸늘한 겨울바람의 이빨 앞에 아낌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 순간, 당미령의 머리를 치는 것은 후회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녀는 멍했고, 그 다음에는 팔자가 박복하여 전에는 꿈결에 당한 일을 이젠 생시에 당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전에 당한 일 때문에 자신이 입은 마음의 상처가 새삼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가 생각보다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이미 사람의 손이 닿은 옹달샘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녀는 그 순간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먼저 탐서랑이 안심할 수 있도록 모든 반항의 동작을 중지했다. "옳지, 그래야지. 그래야 예쁜 아기지...!" 탐서랑은 고소하며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차가운 바람 탓인지 아니면 돌변한 분위기 탓인지 그녀의 몸은 메말라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여자를 공격하는 것은 또 색마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 탐서랑의 지론이었다. 물론 그의 사정도 급하기는 했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로도 사막 같은 여자를 장강 같은 여자로 바꾸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여자의 몸이란 참으로 신비한 것이어서 만져 줘야 할 데를 알고 제대로 만져 주면 원수지간이라 할지라도 노골노골해진다는 것이 또 탐서랑의 지론이었다. 그가 누르고 있는 팔의 힘을 약간 빼면서, 당미령을 흥분시켜 보겠다고 손가락 움직이기에 신경을 쓰는 찰나, 당미령은 바로 그때를 노리고 있었다. 퍼어어억! "으흐윽!" 당미령의 매서운 무릎이 탐서랑의 낭심(囊心)을 향해 날아갔다. 탐서랑은 기겁을 하며 간신히 몸을 뒤틀었는데, 중요한 부위는 피했지만 그래도 반쯤은 얻어맞고 말았다. 당미령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있는 대로 소리를 내뱉었다. "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뱉으려고 노력은 했다. 하나 탐서랑이 고통을 무릅쓰고 재빨리 그녀의 가슴팍에 일장을 먹인 뒤 아혈을 짚어 버려, 그녀의 노력은 헛되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이구... 이렇게 독한 계집을 보았나...!" 아픈 곳을 어루만지며 탐서랑은 벌떡 일어났다. 비명도 못 지르고 고통을 삼키고 있는 당미령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살심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의 살심, 특히 여자에 대한 살심은 종종 엉뚱한 결과를 빚곤 했다. "좋다, 이 계집. 그렇게 싫다 하니 죽을 때까지 해버리겠다." 사내라면 주먹으로 죽이겠지만, 여자를 죽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탐서랑만의 원칙이 또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상당한 당미령을 그 자리에서 범하려다가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야심한 시각이라고는 하지만 주변에 사람도 많은 이곳은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게다가 그 지독하다는 당문 놈들도 있지 않은가! '흠...! 원래는 살살 녹여서 셋째 첩쯤 삼아 주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좋게 마무리하기는 글렀으니 어디 으슥한 곳에 끌고 가 죽도록 데리고 놀다가 나중에 목을 베어 버리면...! 아마도 취화비도의 짓인 줄 알 것이다.' 나름대로 계산을 끝낸 탐서랑은 재빨리 당미령을 들쳐 업었다. 오던 길에 인적이 드문 사당이 있었던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신형이 후원에서 사라진 직후, 그를 따라 객잔을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소운비였다. 당미령에게는 천만다행으로, 그녀가 외치다 만 비명을 그는 들은 것이다. 처음엔 일행을 깨울 생각을 했으나, 그는 문득 당미령의 처지를 떠올렸다. 안 그래도 몽중마령의 일로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만일 오늘 또 이런 일을 겪고 변을 당하기 전에 설령 구조가 된다고 해도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비록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더럽힌 다음에야 구출되었을 것이다'라며 입방아를 찧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최대한 조용히, 당미령과 자신과 범인만이 아는 상황에서 그녀를 구출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으로서 그만한 인정은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새벽으로 넘어가는 으슥한 한밤중, 평안객잔에서는 그렇게 해서 세 개의 그림자가 빠져 나왔다. 제 21 장 재회(再會) 사당은 으슥했다. 한쪽에 다 썩어서 자빠져 있는 목조상(木彫像)을 보아 고매(高媒)를 모시는 사당인 것 같은데, 이런 몰골로는 제 구실을 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하나 탐서랑은 개의치 않았다. 사당이란 꼭 신을 모시기 위해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의 눈을 피해 치러져야 할 일을 치르는 장소로도 종종 사용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탐서랑에게는 이 사당이 꼭 마음에 들었다. 그는 들쳐 업고 온 당미령을 아주 거칠게 흙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혈을 짚인 당미령은 비명도 못 지르고 사색이 되어 버렸다. 그것을 보자 탐서랑은 약간 가슴이 아팠다. 가인(佳人)을 거칠게 다루는 것은 그로서도 마음에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종류의 행사를 할 때는 반드시 약간의 폭력을 동반해야만 일이 순조로이 진행되는 것을. 그의 경험상, 앙탈을 부리기로 마음먹은 계집은 적당히 두들겨 주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곱게 말을 들으면 다치게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만일 말을 듣지 않으면..." 속으로는 이미 당미령의 최후를 결정해 놓았으면서도 그는 일단 말끝을 흐리는 탁월한 기술로 말을 듣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는 언질을 던졌다. 그리고 먼저 자신의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아까와는 달리 그는 침착했다. 겉옷과 관(冠), 요대(腰帶)와 속옷 일습(一襲), 나중에는 신발까지 모두 벗어 차곡차곡 한쪽 옆에 개어 두는 것이다. 일이 끝나고 난 뒤 흔적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객잔에 돌아갈 요량인 것이다. 겁간을 행하려는 악한이 제 집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듯이 침착하게 벗고, 게다가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개는 모습은 당미령에게 오히려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휘이잉...! 가늘게 스며드는 달빛 외에는 빛이라고는 없는 어두컴컴한 사당 안에 한 줄기 겨울바람이 몰아쳐 왔다. 옷을 입은 당미령은 칼날 같은 추위를 느끼고 몸서리를 쳤다. 하나 발가벗은 탐서랑은 대락불사신공을 연마한 뒤로 추위를 몰랐다. "흠... 시작하기 전에...!" 옷과 신발을 모두 벗었지만 아직 탐서랑에게는 벗을 것이 또 남아 있었다. 바로 인피면구였다. 아까는 비록 불같이 서둘렀던 그지만, 이제는 성찬을 앞에 둔 대부호처럼 갖출 환경은 제대로 다 갖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땀이 배어나가지 않는 답답한 면구는 이런 일을 치르는 데 기분을 영 깎아 버리기 마련이다. 마치 음갑(陰甲:중국식 콘돔)과 같은 것이다. 쭈아악...! 당미령은 자신이 그토록 감탄했던 잘생긴 미공자의 안면이 찰떡처럼 늘어나다가 훌렁 벗겨지는 것을 보며 소리없이 경악했다.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탐서랑의 진면모, 분명 잘생긴 중년인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느끼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속았어...! 내가 완전히 속았어...!' 이미 후회해 보아도 늦은 일이었다. 당미령은 두 눈을 꼭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뺨 위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탐서랑이 두 다리를 쩍 벌리고 그녀의 바로 앞에 섰다. 객잔에서 꽤 오래 달려왔는데도 그의 몸은 흥분이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하늘을 찌를 듯 일어서 있었다. 탐서랑은 두 손을 갈고리처럼 치켜 들더니 청성파(靑城派)에서 배운 취응조(鷲鷹爪)의 한 수를 이용해 번개처럼 당미령의 옷 위로 호선을 그어 내렸다. 쫘-악! 자기 옷을 정성스럽게 벗어 갤 때는 언제고 이번엔 아주 한번에 옷을 걸레로 만들어 양손에 쥐고는 껄껄껄 웃어대는 것이었다. 당미령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지 않고도 살갗에 와 닿는 느낌만으로, 자신이 성장한 뒤로는 어머니에게조차 보이지 않았던 나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볼 테야...! 지난번처럼 꿈이려니 생각하고 그냥 이대로 있을 테야...' 하나 갑자기 두 개의 손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두 다리를 집게처럼 쫙 벌리는데, 당미령은 눈을 안 뜨고는 배겨 낼 재간이 없었다. 놀라 화들짝 눈을 떠보니 거의 일 자가 되도록 벌려 놓은 다리 사이에 탐서랑이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와 서서는 신중한 눈으로 당미령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처음엔 백옥 같은 나신을 훑어보며 입맛을 다시는 줄 알았으나, 마치 해독하기 어려운 고서(古書)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유학자의 태도 같은 것이 속마음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탐서랑 그로서는 정말 신중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숭이가 나무에 매달려 울부짖는 듯한 자세가 좋을까? 아니면 비단을 칭칭 감는 듯한 자세가 좋을까? 아니지... 뭐니뭐니 해도 한 구멍 안의 고양이와 쥐 같은 자세가 시작하기에 낫지 않을까? 흠... 요사이 가을철 개의 자세를 시전해 본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것으로 해볼까...?' 한참을 고민하던 탐서랑이 일순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렇지! 그게 좋겠군!" 손가락을 튕기는 '딱' 소리가 당미령에게는 저승사자의 호령 소리보다 더 무서웠다. 탐서랑의 몸이 그녀에게로 숙여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양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닌가? 경험이 없는 그녀로서는 혹시나 보내 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순 머리를 스쳤다. 하나 그것은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탐서랑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자마자 포교가 죄인을 체포할 때와 비슷하게 사당의 흙벽에 밀어 세우는 것이었다. 차가운 흙벽에 당미령의 뺨과 젖가슴, 그리고 허벅지가 단단히 밀착되는 순간, 그녀의 피부는 추위와 공포로 일제히 곤두섰다. 탐서랑의 거친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뒤로 당겼고, 그녀는 엉겁결에 벽에 두 손을 짚고 허리를 구부리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삼춘려(三春驢:춘삼월의 노새)!" 비무를 할 때 초식 이름을 외치는 것과 비슷하게 탐서랑은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자세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번개 같은 솜씨로 당미령의 아혈을 풀어 주었다. 당미령은 말문이 트이는 순간 자신의 허리를 안고 뒤쪽에 들러붙는 탐서랑의 육체를 느끼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입궁하기 직전, 탐서랑은 그녀의 뒤편에서 느물거리는 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소리없이는 흥이 나지 않는다. 아프면 아픈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소리를 내라, 응?" 그것이 탐서랑이 아혈을 풀어 준 이유였다. 당미령은 엉덩이에 닿아 있던 탐서랑의 육체가 잠깐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곧 그녀는 멀쩡한 정신에 치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찬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쳐 그녀의 다리 사이로, 그리고 숙인 얼굴과 젖무덤 사이로 들이닥쳤다. 잠깐의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졌다. 막 열락의 세계로 돌입하려던 탐서랑은 문틈으로 스며드는 것치고는 바람이 매서워졌다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사당의 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고, 한 사람이 거기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하지만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제기랄! 당문의 졸자 아닌가?' 탐서랑은 낭패하여 인상을 구겼다. 꽃은 꽃대로 따고, 죄는 취화비도에게 넘기려던 계획이 이렇게 되면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라는 것도 있지!' 그는 재빨리 당미령의 마혈(麻穴)을 짚고 뒤돌아 섰다. 당미령은 지푸라기로 만든 인형처럼 엎어졌다. "볼일이 있어 온 것 같은데... 젊은이, 말씀을 하시게나." 그는 벌거벗은 처지도 아랑곳 않고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유유히 입을 열었다. 소운비는 차가운 표정으로 묵묵히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사당 안에 들어서는 순간, 그가 탐서랑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어떻게 살아났단 말인가! 또 개어 놓은 옷 위에 떨어져 있는 자신을 닮은 저 인피면구는 뭐란 말인가!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는 지금 그것을 풀 수는 없었다. 당미령에게 특별히 정을 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약한 여인을 강제로 취하려는 이와 같은 범죄는 순하기 이를 데 없는 소운비의 심장에도 분노를 지피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할말이 없다면, 거기서 순서를 기다리겠나? 보시다시피 나는 급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소운비를 격동시키기 위한 것인지, 탐서랑은 슬쩍 당미령 쪽으로 손을 뻗는 시늉을 했다. "멈춰랏!" 소운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일갈하며 품속에서 생사맥결통을 꺼내 들었다. 혼음사의의 생사맥결통에는 세 개의 침이 각기 다른 기관을 이용해 발사되게끔 되어 있었다. 금침은 혼음사의가 멋을 부릴 때나 사람을 치료할 때 쓰는 것이고, 은침은 가까운 거리의 적과 싸울 때, 묵침은 폭발성이 있는 암기로서 거리를 둔 싸움에서 쓰는 비장의 절학 생사맥결귀영폭침에 쓰는 것이다. 혼음사의의 생사맥결통을 본떠 만든 소운비의 생사맥결통에는 오직 은침만이 들어 있었다. 의술을 배우지 않았으니 금침은 쓸모가 없고, 묵침은 패도적인 살상용이라 소운비가 꺼려 했던 것이다. 생사맥결통을 꺼내 쥠과 동시에 소운비는 망번신요보를 밟으며 탐서랑을 향해 쇄도해 갔다. 소운비가 당문의 사람이라고 짐작하고 있던 탐서랑은 그가 암기통 같은 것을 꺼내 들자 내심 긴장했다. 한데 접근해 오는 보법이 기이하고 표홀한 것이 당문의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소운비의 손이 한번 번뜩이자 사당의 어둠을 날카롭게 꿰뚫는 은광이 그를 향해 폭사되어 오는 것이다. 탐서랑은 최대한 신경을 집중하여 그 암기들의 방향을 예측하고 마지막 순간에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다섯 개의 은침이 소리없이 흙벽 속에 파묻혔다. 적이 비록 제일초를 간단히 피해 버렸지만 소운비는 실망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로서는 대적조차 할 수 없었던 탐서랑이 아닌가! 하지만 이제는 맞상대를 할 수 있으니 엄청난 진보였다. 소운비는 재빨리 방향을 틀어 술 취한 도깨비와 같이 비틀거리는 보법으로 탐서랑의 뒤를 쫓아갔다. 탐서랑은 어느새 자신의 옷더미 쪽으로 다가가 왕모선을 집어 들고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타아앗! 그는 접선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소운비를 향해 마주쳐 갔다. 미처 은침을 발사하지 못한 소운비는 팔꿈치로 그 접선을 막았다. 찌르르...! 멋이나 부리고 여자나 꼬시는 데 쓰는 줄 알았던 왕모선은 뜻밖에 단단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탐서랑의 내력이 실려 소운비의 팔꿈치 뼈를 시큰하게 만들었다. 병기와 몸을 마주한 상태에서 탐서랑이 중얼거렸다. "네놈의 그 침통은 낯이 익구나. 설마 혼음사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소운비는 대꾸하지 않고 낭랑한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날렸다. 어떤 권법도 익히지 않은 그저 맨주먹질이었지만, 거기에는 웅후한 태원옥호공의 내력이 담겨 있었다. 탐서랑은 그 초식이 비록 엉성하나 주먹 끝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재빨리 접선을 떼며 뒤로 물러났다. 소운비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다섯 개의 은침을 쏘았는데, 마음이 조급해서 겨냥이 제대로 되지 않은 터라 탐서랑은 몸을 좌우로 흔들어 모두 피해 냈다. "네놈이 무공은 별볼일없으면서 그 암기만 믿는 모양인데, 어디 몇 개나 쏘아 내는지 보자!" 탐서랑이 이죽거리는 소리를 들은 소운비는 아차 싶었다. 그의 생사맥결통은 혼음사의의 것보다 크기도 작고 정교하지 못해서 은침을 모두 스무 개밖에 넣지 못했다. 물론 품속에는 따로 은침을 넣어 둔 주머니가 있지만, 통 안의 것을 다 쓰고 난 뒤라면 탐서랑이 채워 넣을 시간을 줄 리 만무했다. '침착하자! 그저 많이 쏜다고 맞는 것이 아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소운비는 내심 다짐했다. 순간 약한 틈을 본 탐서랑이 다시 접선을 휘두르며 달려드는데, 소운비는 망번신요보를 밟아 그의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헛?" 분명 사정권 안에 있었던 소운비의 신형이 돌연 꺼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비스듬히 뒤편에 나타나는 것을 본 탐서랑은, 이 젊은이의 암기술뿐 아니라 경신술도 제법 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하면 내 공격의 빈틈을 노리고 파고들어 암기를 날리겠군. 그래선 안 되지!' 탐서랑은 생각을 바꾸어 소운비로부터 최대한 멀리 피해 버렸다. 그리고는 달아날 듯이 문 쪽으로 쭈욱 빠졌다가 불현듯 멈춰 서서 소운비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소운비는 다시 한번 은침을 날렸다. 하나 탐서랑이 보여 준 방금의 행동은 그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탐서랑은 허리를 제쳐 소운비가 아껴서 날린 한 개의 은침을 손쉽게 피하고 비웃음을 던졌다. "아까는 물 쓰듯 날리더니 왜 이렇게 짜졌나? 아하, 생각대로 침이 별로 없나 보군그래? 이제 몇 개나 남았나?" 소운비가 대답을 하지 않자 탐서랑은 더욱 약을 올렸다. "내가 맞춰 볼까? 처음에 다섯 개, 그 다음에 다섯 개, 이번에 한 개, 지금까지 도합 열한 개를 썼군. 침통이 작으니 얼마나 들어갈까? 서른 개? 아니야. 스무 개 정도가 적당하겠군. 하면 이제 아홉 개가 남았어!" 탐서랑은 얄밉게도 정확히 남은 은침의 숫자를 짚어 내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제 자네에게는 아홉 번밖에 기회가 없는 거야. 아홉 번! 모두 구 초식!" "닥쳐라, 색마!" 소운비는 큰 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막아 버렸다. 그리고 분노의 일침을 날렸다. 피유웃! "색마라니? 보아하니 고명하신 당문에서도 혼음사의와 무슨 관련을 맺으신 모양인데, 동업자끼리 그렇게 욕을 해서야 쓰나?" 피유웃! "쯧쯧! 또 빗나갔군.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맞히기가 어려운 법이지. 젊은이, 자넨 더 살아야 해. 그렇게 겨냥을 못해서야 어디 제대로 혼례라도 치를 수 있겠나?" 피윳! 피윳! "허허, 아끼라니까. 남은 침이 자네 남은 목숨이야. 부디 자중하시게." 피윳! 피윳! 피윳...! 속을 뒤집을 듯한 탐서랑의 이죽거림 속에서 소운비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듯 정신없이 아홉 개의 은침을 모두 쏘아 냈고, 탐서랑은 모두 피해 냈다. 마지막 시도마저 실패한 이후, 소운비는 자기 무릎에 두 손을 대고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낭패한 모습이었다. 탐서랑은 손가락을 꼽아 가며 얄밉게도 셈을 헤아렸다. "자, 스무 개의 은침에서 남은 것이 아홉 개였는데...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모두 다 썼군!" 소운비를 노려보는 그의 눈에 살기가 이글거렸다. "이젠 없는 거야. 침도, 자네 목숨도!" 탐서랑은 접선을 쫙 펼쳐 들고는 벌거벗은 몸으로 허공을 날아 소운비를 향해 덮쳐 갔다. 일장에 때려 죽일 듯한 기세였다. 그때, 몸을 수그리고 있던 소운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이 움찔거렸다. "미안하지만 하나가 더 남았다!" 외침과 함께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그의 손을 떠나 날아갔다. "우아앗!" 쿠당탕! 소운비의 손을 떠난 비장의 무기는 덮쳐 들던 탐서랑의 아랫배를 강타하여 사당의 흙벽에 꽂아 버렸다. 우수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흙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탐서랑을 격중시킨 것은 은침이 아니었다. 바로 소운비가 내력을 실어 날린 생사맥결통이었다. '저, 젊은 놈의 내력이 이렇게 강할 수가!' 탐서랑은 치명적인 내상을 입어 운신도 못하고 사당 구석에 구겨져 박혔다. 소운비는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탐서랑의 몸이 날렵한 데다가 혼음사의의 무공을 알고 있어 은침으로는 그를 격중시키가 어렵다는 판단을 했기에 그는 위험한 도박을 한 것이었다. 설마 하니 암기통을 날리는 일격을 당할 줄이야 탐서랑이라도 어떻게 생각을 했겠는가! 소운비는 그를 노려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이 파렴치한 자를 어떻게 벌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릴 시간을 벌기라도 하듯이. 탐서랑의 얼굴에는 비로소 공포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그는 상대가 분명 일격에 자신을 때려 죽이려고 할 것이라 생각하고는 몸을 떨었다. '안 돼! 안 돼! 지금 이대로는 죽을 수가 없어.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대락불사록>을 얻었고, 또 그걸 익혔는데...! 안 돼, 죽을 수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탐서랑의 생명줄은 다행히 바로 손 닿는 곳에 놓여져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소운비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탐서랑이 필사적으로 몸을 던져 바로 옆에 있던 당미령의 목 줄을 움켜쥔 것이다. "물러나지 않으면 이 계집은 죽는다!" 탐서랑은 악을 썼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당미령의 마혈을 풀었다. 막 깨어나는 당미령을 탐서랑은 자신의 몸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뒤에서 두 팔로 목을 조이는 것이었다. 소운비가 혹시 무엇인가 다른 무기를 던지지 않을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차라리 계속 기절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당미령은 애처롭게도 입술을 바르르 떨며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소운비는 당황했다. 하지만 최대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며 말했다. "그런 말에는 속지 않는다." "뭐라고? 이 계집이 죽어도 상관없단 말이냐?" 당미령에게는 미안한 짓이지만, 소운비는 탐서랑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 그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될 테고, 그렇다면 소운비도 당미령도 결국은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그 여자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오로지 네놈을 벌하고 싶을 뿐이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소운비는 냉랭하게 말하며 한 발 앞으로 더 다가갔다. 그 경황 중에도 소운비의 말은 당미령의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죽여도 좋다고? 하...! 하...!' 당미령은 기가 막혔다. 부러울 것 없는 귀공녀였던 자신의 신세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당황한 것은 탐서랑이었다. 소운비의 말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던 그는 어떻게 해서든 소운비의 발걸음을 제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거기 서라! 너는 사내도 아니냐? 이렇게 예쁘고 깜찍한 계집이 네 눈앞에서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냐?" 탐서랑은 호통을 치며 당미령의 목에서 한 손을 풀어 느닷없이 당미령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봐라, 이 몸매를! 이것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몸뚱어리가 죽어서 고깃덩어리가 되어도 좋단 말이냐?" "아아악!" 그가 절규하며 손아귀에 힘을 주자 당미령은 도살당하는 암송아지처럼 애처롭게 비명을 짜 올렸다. 소운비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남에게도 그러하리라는 착각을 하고 산다. 탐서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운비가 발걸음을 멈춘 것은 당미령을 염려하는 마음에서였건만, 그는 자신의 설득이 먹혀 들어간다는 가당찮은 착각에 매달렸다. 그의 설득은 한층 뜨거워졌고, 젖가슴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도 더 들어갔다. "그래, 봐라. 아깝지 않으냐? 이 뽀얀 살결을 봐라. 여기에 얼굴을 묻고 싶지 않으냐? 이 살 내음을 맡고 싶지 않으냔 말이다...!" 당미령은 호리호리한 몸매의 여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원래 젖가슴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하나 몽중마령과의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조금씩 더 부풀어올라 이제는 탐서랑의 손아귀 안에 꽉 차고도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비져 나올 정도가 되었다. 소운비는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탐서랑의 추태를 지켜보았다. 그로서도 아까의 일격으로 많은 힘을 내쏟은 뒤라 한 순간에 탐서랑을 제압하기는 힘들었다. 당미령을 무사히 구출해 내려면, 틈을 보아야 했다. 소운비의 침묵과 굳은 얼굴을 흥분 때문이라고 성급히 판단해 버린 탐서랑은 더욱 노골적인 유혹을 하기 시작했다. 꽉 움켜쥐었던 손을 풀어 두 손가락 사이에 유실을 끼우고는 마치 자신이 애무당하는 여인인 양 황홀한 표정까지 지으며 느릿느릿 말했다. "봐라...! 이 얼마나 생생한 모습이냐? 나는 세상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해도 이렇게 귀한 보석은 본 일이 없다. 그리고...!" 그는 손으로 당미령의 나신을 슬슬 쓸어 내리며 아랫배를 지나 허리와 둔부의 곡선을 매만졌다. "세상에 명승절경이 많다고 하지만, 여자의 몸보다 더 좋은 절경은 본 적이 없다. 봐라...! 여자의 몸에는 모든 것이 있다. 능선도 있고, 비탈도 있으며..." 탐서랑은 눈으로는 소운비를 노려보면서, 손으로는 당미령의 허벅지 안쪽을 더듬어 갔다. "계곡도 있고, 숲도 있다. 그리고... 너 같은 젊은이는 제대로 본 적도 없겠지만 호수도 있다. 흐흐...!" 귀를 씻고 싶을 만큼 음탕한 비유를 서슴지 않으며 탐서랑은 소운비의 눈을 잡아 삼킬 듯 마주보았다. "어떠냐? 내가 이 계집의 호수를 구경시켜 주랴?" 은근한 목소리로 권하면서, 그의 두 손은 벌써 당미령의 다리 안쪽으로 파고들어, 소운비가 고개만 끄덕이면 당장 두 다리를 벌려 보여 주겠다는 기세였다. 순간, 당미령은 정말 죽고 싶었다. 차라리 탐서랑의 배 밑에서 능욕을 당할지언정, 소운비에게 그런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의 수치만으로도 그녀는 능히 자결을 해야 마땅할 정도였다. 한데, 한데 만일 탐서랑이 지금 입에 담고 있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면...! '죽자...!' 당미령은 그 순간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 고개를 떨구는 그녀의 모습을 소운비는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어떠냐? 보여 주랴? 보고 싶겠지?" 악마의 속삭임처럼 끈끈하게 탐서랑은 유혹했다. 소운비는 당미령의 자존심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상처가 얼마나 클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불현듯 그는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 주고 싶어졌다. 그녀의 생명을 지켜 주는 것 이상으로 그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싫소!" 탐서랑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것은 소운비의 대답이 그의 상식에 너무나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바로 직후, 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지게 되었다. 이번엔 고통 때문이었다. 소리도 없이 날아온 비수 하나가 당미령의 다리 사이를 파고 들어간 그의 오른쪽 손등에 찍힌 것이다. 눈이 먼저 그것을 확인하고, 비명은 때늦게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악!" 그가 두 손을 빼내며 고통스러워하는 찰나에 소운비는 그 비수가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계산할 틈도 없이 당미령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파아앗! 소운비가 당미령을 자신의 등뒤로 빼돌리는 순간, 탐서랑은 다급한 대로 그를 향해 일장을 날렸고, 소운비도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퍼어엉! 한바탕 흙먼지가 일어난 뒤에 두 사람은 각각 뒤로 나가떨어졌다. 황망중에 일장을 교환한 소운비와 탐서랑은 서로 상처를 입었다. 소운비는 당미령을 구할 마음에 호흡의 조절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달려들었다가 필사적으로 휘두른 탐서랑의 장력을 정통으로 맞아 기혈이 뒤틀렸고, 탐서랑은 설맞기는 했지만 아까의 부상이 더 깊어지고 만 것이다. 하나 아까와는 달리 당미령은 이제 소운비의 손에 있었다. 게다가 사태를 역전시킨 비수의 임자가 있지 않은가! 땅바닥에 떨어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비수가 날아온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휑하니 열려진 사당의 문턱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달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구가 무척 당당했다. "웬 놈이냐?" 이빨 사이에 한 모금 선혈을 머금고 탐서랑이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나가라!" "...?" 탐서랑은 잠깐 그 말속에 담긴 뜻을 해석하지 못해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 같은 놈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 어서 꺼지란 말이다!" 이번엔 좀더 긴 대답과 함께 비수가 하나 더 날아왔다. 파악! 비수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탐서랑의 발치께에 꽂혔다. 비수가 꽂히는 깊이로 보아서는 내력도 상당한 사람인 것 같았다. 탐서랑은 정황을 살폈다. '이미 패색이 짙은데 다른 놈까지 나타났으니...! 한데 죽이지는 않고 그저 나가라니 그나마 다행이군.' 그는 비틀비틀 일어나 옷가지를 쌓아 둔 곳으로 걸어갔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슴을 움켜쥔 채 반쯤 누워 있던 소운비가 재빨리 당미령을 막았다. 하나 탐서랑은 이미 그쪽에는 관심도 없었다. 사람이 살아야 여색이고 방사고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는 옷가지와 제 왕모선을 집어 들어 사타구니께를 가리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머뭇거렸다. "어서 꺼지지 않고 뭘 해?" 문턱의 사람이 다시 한번 호통했다. 탐서랑은 엉덩이를 호되게 맞은 개처럼 깜짝 놀랐다. "가, 가려 하오. 다만 당신이 문을 막고 있어서...!" "다른 문으로 나갓!" 그 사람의 손이 위협하듯 비수 하나를 꺼내 드는 것을 보고 탐서랑은 내상이고 뭐고 까맣게 잊고 안쪽의 자그마한 창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그대로 그 길로 객잔을 향해 줄달음쳤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발가벗은 몸뚱어리도 상관하지 않고 그저 두 다리 사이만 꼭 움켜쥔 채로. 탐서랑이 멀어지는 소리를 귀로 확인한 뒤에, 소운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장포를 벗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던져 주었다. 처음엔 당미령이 그 옷을 집어 드는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충격이 컸겠지...!' 소운비는 새삼 그녀가 불쌍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입으시오. 외인도 있으니...!" 그가 여전히 당미령을 외면한 채 한마디 내뱉자, 당미령은 비로소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마치 자신을 강간하려 했던 것이 소운비인 양, 그 눈에는 증오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주섬주섬 그 장포를 몸에 걸쳤다. 소운비는 힘들게 몸을 일으키고는 아직도 조용히 문턱에 앉아 있는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앗?" 포권하며 예를 취하던 그는 사내의 얼굴을 비로소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반갑게 외쳤다. "타라하이!" 어쩐지 안색이 창백한 타라하이는 소운비의 태도에 오히려 경계심을 품으며 손 안의 비수를 날릴 자세를 취했다. "당신은 누구요? 어떻게 나를 알지?" 타라하이의 적의에 어리둥절해 하던 소운비는 문득 자신이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소했다. "이런 내 정신을 보게나...!" 소운비는 재빨리 답답한 인피면구를 벗었다. 타라하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기억나십니까? 그때 그..." 타라하이의 표정은 금세 바뀌어, 소운비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손을 마주 잡아 왔다. "기억하다마다! 내 강호인 친구 소 공자가 아니오!" 굳세게 손을 잡는 것이며 소운비를 칭하는 말에서 타라하이의 깊은 호의가 느껴졌다. 소운비 역시 다시 만나는 마당에 그가 몽고인이고 어쩌고 하는 담은 이미 허물어진 뒤였다. "지난번에도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그렇군요. 참, 이런 것도 큰 인연입니다...!" 소운비는 문득 엉거주춤 일어난 타라하이의 하체로 시선을 던졌다. 타라하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 이번엔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차례가 된 것 같은데..." 소운비는 일순 말을 잊었다. 그리고 왜 타라하이가 비수만으로 탐서랑을 위협해 내쫓았는지를 깨달았다. 타라하이는 왼쪽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어 출혈이 심한 상태였던 것이다. 옷자락을 찢어 대충 동여맨 상처 부위가 무섭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흠, 강호의 맛을 보았다고 해야겠지. 뭐 그리 심한 건 아니오. 혼자 치료라도 할까 해서 왔다가 아까 그 광경을 본 거지...!" "어서 치료를 해야..." "나는 그렇게 급하지 않소. 내상을 입은 것 같은데 먼저 운기조식하시오. 그러고 난 뒤 나를 데리고 가까운 인가로 좀 가주겠소?"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이 심할 텐데도 불구하고 싱글벙글하는 그의 얼굴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소운비가 운기조식하기 위해 벽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 순간, 그의 뒷모습만을 줄곧 노려보고 있던 당미령이 갑자기 찢어지게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소운비도, 타라하이도 기겁을 했다. "왜 그러는 거요?" 당미령은 소운비의 얼굴을 가리키며 바르르 떨었다. "새... 새, 색마! 아까 그놈!" 그녀는 소운비의 얼굴이 아까 탐서랑이 변장했을 때와 똑같은 것을 보고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소운비가 사정을 짐작하고 혀를 차는데, 당미령은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앉은 채로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거품까지 토했다. 소운비는 도저히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어 그녀를 향해 달려가 힘껏 뺨을 후려쳤다. 짜악! 얼얼한 뺨의 통증이 그녀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소운비는 당미령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 "정신을 차려요! 나는 그놈이 아니오! 그놈이 무슨 이유에선지 나로 변장을 한 거요. 알아듣겠소?" 당미령이 연방 고개를 끄덕이기는 하는데, 과연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난 사정이 있어 이렇게 변장했소. 앞으로도 변장을 하고 있어야 하오. 비밀을 지켜 주겠소?" 당미령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소운비는 그녀를 놔주고 옷깃을 여며 주며 말했다. "놀랐을 텐데, 좀 쉬어요. 운기가 끝나는 대로 객잔에 데려다 주겠소." 당미령이 쓰러지듯 흙벽에 기대어 눈을 감는 것을 보고서야 소운비는 혼음사의가 전에 줬던 내상약을 먹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타라하이가 어이가 없는 듯 뱉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한족 여자들은 시끄럽기도 하군!" 탐서랑이 자신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못내 그의 마음에 걸렸다. '만음요화와 탐서랑이 연합을 한 모양인데...! 흉계를 꾸미고 있군.' 한 시진쯤 지나고 난 뒤 소운비는 타라하이를 부축해 사당을 떠났다. 당미령은 그 뒤를 말없이 따랐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휘청거렸다. 그리고 눈도 어디 먼 곳을 보고 있는 듯 초점이 흐렸다. 평소 도도하고 우아했던 그녀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걷다가 이따금 푸들푸들 웃기도 했다. 누가 보아도 약간 실성한 여자 같았다. 소운비는 그녀의 웃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안됐군...! 어린 나이에 거듭... 천벌을 받을 놈들 같으니라고.' 만일 둘만 있었다면 소운비는 좀더 당미령을 위로해 주려고 했을 테지만, 부상이 심한 타라하이를 부축하고 있는 터라 그러지를 못했다. 멀리 인가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할 때, 갑자기 타라하이가 쿡 고꾸라졌다. "괜찮으십니까?" 소운비가 놀라서 묻자 타라하이는 투덜거렸다. "이런... 사나이 체면이 말이 아니군...! 잠깐 쉬었다 갑시다." 부축을 받았으면서도 걷기가 힘들었던지 타라하이는 소운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물을 좀 떠다 주지 않겠소? 목이 타서 도저히..." 타라하이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호로병을 내주는 것을 받아 들면서, 소운비는 그가 이상하게도 약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인가까지 갔다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소운비가 멀리 보이는 불빛을 가리키며 말했다. 타라하이가 고개를 저었다.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강이 있소.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거외다." 소운비는 타라하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뒤편에 멍하니 서 있는 당미령에게 한마디 덧붙이고 곧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당 소저도 여기서 좀 쉬어요." 소운비가 없어지고 난 뒤 그 자리에는 타라하이와 당미령만이 남았다. 타라하이는 팔베개를 하고는 거친 땅바닥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몽고말로 무엇인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당미령은 무표정한 시선을 소운비가 간 쪽으로 고정시킨 채 계속 서 있었다. 침묵의 시간은 실제보다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한참 후에 당미령이 문득 자신이 보고 있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타라하이가 불쑥 말했다. "죽고 싶소?" 당미령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엉뚱한 말을 꺼냈다. "강물은 깊은가요?" 타라하이가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하긴, 죽고 싶겠지. 으음..." 그는 가벼운 신음을 흘리고 다리를 동여맨 상처를 다시 살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했다.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아직 우리 테무친의 아들들이 저 먼 변방의 땅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이야기요. 내 오래 전 할아버지 한 분은 몽고의 용사였소. 그리고 오래 전 할머니는 용사의 아내였지. 부족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나면, 반드시 한쪽은 지고 한쪽은 이기기 마련이오. 이기는 편의 용사와 그 아내에게는 한없는 영광이 뒤따르지만, 지는 편의 용사에게는 죽음만 남았었소. 그리고 그 아내에게는 오직 이긴 쪽의 용사들에게 강간당할 자유만 남았던 것이오." 옛날 이야기처럼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뜻밖에도 스산한 것이었다. 당미령은 꼼짝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서 있었다. "내 오래 전 할아버지에게도 단 한번 패배가 찾아왔소. 그리고 그 할머니는 다른 여인들과 똑같은 운명을 겪었지만, 모질게 이를 악물고 살아서 부족의 땅으로 돌아왔지. 하나 할아버지는 용서하지 않았소. 한칼에 자신의 아내를 땅으로 돌려보냈소. 그리고 말했지." 타라하이는 마치 자신이 자신의 오래 전 할아버지인 것처럼 잠깐의 사이를 두고 단호하게 말했다. "용사의 아내는 죽을지언정 더럽혀진 채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의 말이 자신에 대한 선고라도 되는 것처럼, 당미령은 문득 몸을 떨었다. "당신 역시 죽어야겠지. 억울한 생각 따위는 할 필요도 없소. 남은 인생을 아까워할 필요도 없소. 당신을 욕보인 놈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왜 죄없는 내가 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은 할 필요도 없소. 그런 생각은 다 부질없는 거요. 더럽혀진 여자는 죽는 거요. 나는 말리지 않겠소." 당미령의 얼굴에 비로소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수치와 분노였다. "강은 똑바로 걸어가면 나오지. 물이 좀 차갑긴 해도 괜찮을 거요. 금방 끝날 테니까." 타라하이는 냉정하게 말하고는 돌아앉았다. 당미령은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강 쪽이 아니라, 타라하이 쪽이었다. 이글대는 눈으로 타라하이를 내려다보던 당미령이 옥수를 치켜 들었다. 짝! 매서운 일격이 타라하이의 뺨에 작렬했다. 타라하이는 그녀를 올려다볼 뿐, 아무 말도, 어떤 방어도 하지 않았다. 당미령은 계속해서 그의 뺨을 때렸다. 타라하이의 뺨보다 그녀의 손바닥이 더 빨개졌다. "너 따위가...!" 그녀는 타라하이를 때리면서 외쳤다. "너 따위 오랑캐가 감히 나에게...! 감히 나더러 죽으라고? 그렇게는 못해! 나한테 나쁜 짓을 한 놈들을 다 죽이기 전에는 난 못 죽어!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지금 그녀가 때리는 것은 타라하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몽중마령이었고, 탐서랑이었으며, 자존심을 뭉갠 소운비였고, 또 자신을 측은한 눈으로 훔쳐보던 모든 사람들이었다. 타라하이의 뺨을 수십 번이나 갈긴 뒤에야 당미령은 숨을 거칠게 쉬며 손을 멈췄다. 타라하이는 한 대도 맞지 않은 것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으... 으... 으흐...!" 당미령은 타라하이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보가 터짐과 동시에 그녀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던 절망과 암울함이 함께 쓸려 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나자 그녀는 시원해졌다. 타라하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젠 좀 시원하오?" 당미령이 눈가를 주먹으로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죽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소?" 당미령은 입술을 악물며 타라하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죽지 않겠어요!" 타라하이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야지. 한족 여자들도 알고 보면 굳세군." 타라하이는 얼얼한 뺨을 어루만졌다. "손도 매섭고 말이야." 당미령은 그런 타라하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거칠게 돋아난 턱수염과 바위처럼 굵은 얼굴 선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타라하이도 당미령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하얀 얼굴과 고집이 셀 것 같은 도톰한 입술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고맙군요!" 갑자기 당미령이 고개를 돌리며 들릴 듯 말 듯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는 일어나 장포 자락을 단단히 여미고 좀 떨어진 곳에 가서 앉는 것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제의 그 당당하던 당문 규수와는 판이하게 달랐지만, 아까처럼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한번의 겨울을 나고 난 뒤 나무가 자라나듯이 그녀의 마음 안쪽에서도 한 겹의 나이테가 더 둘러진 것 같았다. 타라하이는 잠시 더 그녀를 지켜보다가, 아까처럼 땅바닥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몽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두 사람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소운비는 몸을 숨기고 있었다. 호로병에 물을 가득 담아 오기는 했지만, 그는 두 사람에게 좀더 시간을 준 것이다. 소운비의 입가에는 훈훈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저 사람은 거칠어 보여도 나보다 훨씬 섬세하구나. 안 그러고서야 당 소저를 저렇게 절망에서 꺼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세 사람은 평안객잔 앞에 도착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시간이라 아무도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짐작했던 바대로, 화금궁 일당의 마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탐서랑이 일으킨 소동 때문에 밤을 도와 달아난 것이 틀림없었다. 소운비가 당미령에게 말했다. "들어가서 좀 쉬도록 해요. 저... 그리고 나는 이분의 상처를 치료한 다음에 돌아가도록 하겠소." 당미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 타라하이를 부축해서 떠나려는 소운비를 그녀는 갑자기 불러 세웠다. "소 공자!" 소운비가 고개를 돌렸다. 당미령의 눈은 어느새 전처럼 약간 오만한 빛을 회복하고 있었다. 하나 그 오만함이 이상하게도 반가운 소운비였다. "당신은 분명히 쫓기는 사람이죠?" "그렇소." "계약을 해요." "계약?" 당미령이 또박또박 말했다. "난 당신의 비밀을 지켜 주겠어요. 당신도 나의 비밀을 지켜 주세요." 당미령의 말한 그녀 자신의 비밀이란 오늘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미령의 말투는 싸늘했지만, 소운비는 그녀가 자신의 무엇을 지키려고 생각한다는 것도 다행으로 여겨졌다. 남과 계약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자살 따위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좋소!" 당미령은 객잔 안으로 들어가고, 소운비와 타라하이는 근처 다른 객잔을 찾아갔다. 객잔의 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당미령의 옷자락을 타라하이는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제 22 장 배신(背信) 새벽부터 문을 열어 놓은 주점이 하나 있었다. 들어가니 키 작은 점소이 하나가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 사람은 없었다. 하긴, 사람이 있으면 신기할 시간이었다. "의원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운비가 걱정이 되어 말을 던졌지만, 타라하이는 가슴을 탕 치며 호기롭게 대답했다. "무슨 말을. 대수롭지도 않은 상처로 의원을 찾으면 비웃음을 당하오." 사실 대수롭지 않은 상처는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타라하이는 일단 독한 화주(火酒) 한 병을 시켜 상처 부위에 반 병쯤 들이붓더니 손으로 쓱쓱 닦아 냈다. 그리고 점소이에게 깨끗한 천을 부탁해 상처를 싸매는 것으로 치료는 끝났다. 남은 화주 반 명이 두 개의 잔에 골고루 부어졌다. "소 형과의 재회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잔합시다." 소운비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이따금 해당원의 기녀들이 반 강제로 권하는 술을 두어 잔 먹어 본 일은 있었지만, 이렇게 독한 술은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마셔 보니 그 역시 술을 잘 마실 가능성이 있었다. 한 잔을 마시고 다시 두 잔, 석 잔, 넉 잔이 되어도 몸이 좀 훈훈해질 뿐 취기가 올라오지 않는 것이다. 술을 기분좋게 마실 수 있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술이 좋거나 풍경이 좋을 때, 그리고 가인이 옆에 있을 때이다. 타라하이와는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지만, 그 됨됨이에 감탄하고 있던 소운비인지라 그와 마주한 술자리가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었다. 가뜩이나 어딘가 권위와 예법에 치우친 듯한 당문 사람들과 어울린 여행길에 답답함을 느끼던 터라, 이 자리의 상쾌함이 두 배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술이 어느 정도 돌면서 두 사람의 입도 부드럽게 풀려 갔다. "한데 전의 일행은 어디에 있습니까? 왜 혼자가 되셨습니까?" 소운비가 묻자, 타라하이의 안색이 문득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라도...?" "내가 왜 강호에 나왔는지는 소 형도 알고 있지 않소." "예, 한데...?" "흠... 한데 실마리조차 잡을 수가 없었소." 타라하이는 속이 타는 듯 술병째로 목구멍에 털어 넣더니 점소이를 닥달하여 두 병이나 더 주문을 했다. "해서 모두가 흩어져서 실마리를 찾아 보기로 하고 헤어졌던 거요. 그런데 어제 객점에 들어갔다가 내가 몽고인이라는 것을 안 개방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지. 나는 충돌을 하고 싶지 않아 끝까지 독수를 쓰지 않았는데, 그 중 무공이 제법 매서운 사람이 있어 한칼을 얻어맞고 말았소." 이야기를 듣고 나자, 소운비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인데, 다만 모... 몽고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강호 호걸들의 핍박을 받으셨군요." "흠, 할 수 없지 않겠소? 만일 몽고인이 많은 곳에 당신들 한족이 한 사람 있다면 그 역시 봉변을 면하기는 어려울 거요." 타라하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답답한 것은 그저, 임무 수행은 한걸음도 진척이 되지 않았는데 하릴없이 강호인들과 시비나 하고 있는 내 처지일 뿐이오." 소운비는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타라하이에게 칼을 휘두른 것이 자기가 아닌데도 소운비가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오직 자신도 타라하이를 처음 만났을 때 '몽고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일 때문이었다. 소운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타라하이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한족 모두가 그렇게 속이 좁지 않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술잔을 막 들어올리던 타라하이가 눈을 빛냈다. "소 형이?" "예, 그래도 제가 요새 강호 사정에 대해 들은 바가 그리 적지는 않으니, 어쩌면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지난 번에 주셨던 패자에 대한 보답도 해드려야 하구요. 덕분에 여행이 아주 편했습니다." 소운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만일 당신이 좀더 그 임무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실 수만 있다면요." 타라하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소운비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마치 이 사람을 믿어도 좋을지 어떨지 관찰이라도 하듯이. 소운비도 그에게 자신의 두 눈을 숨기지 않고 보여 주었다. 그는 타라하이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하고 싶었다. 한족을 믿게 하고 싶었다. 타라하이가 문득 이마에 손을 대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그 패자를 준 것은 결코 소 형에게 무엇을 받아 내겠다는 생각은 없었소. 세상에는 그냥 무엇을 주고 싶은 사람이 간혹 있기 마련이오. 내게 있는 어떤 것이든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 말이오." "..."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술만 들이켰다. 그리고 세상에는 술보다도 몸과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사람이 간혹 있다는 생각을 했다. 타라하이가 전에 소운비를 만났을 때는 막 강호에 나온 처지라 자신의 일에 대한 자신감도 대단했다. 그러니 사실 말로는 소운비에게 강호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는 했어도 그것이 그렇게 절실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수하들과도 헤어져 홀홀 단신으로 한족들의 강호를 떠도는 그에게 소운비의 도와 주겠다는 한마디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감로수와 같았다. "만일 소 형께서 정말 나를 도와 주겠다면..." 타라하이가 술잔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이 더 있는데 들어주겠소?" 소운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어서 나오는 타라하이의 말은 소운비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나를 소 형의 친구로 받아 주시오!" 타라하이는 적어도 소운비보다 칠팔 년 연상이었다. 그리고 신분도 높은 관리가 아닌가. 친구라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차이가 많이 나는 두 사람이었다. 그 점이 소운비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 소운비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타라하이의 입장이 워낙 강경했던 것이다. "나는 친구의 도움이라면 받겠지만, 친구가 아닌 사람의 도움은 절대로 받을 수 없소. 이 타라하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마치 친구가 아니면 원수라는 식으로 노려보는 타라하이의 시선을 받아 내던 소운비가 이윽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타라하이도 얼굴을 풀고 입꼬리를 올렸다. 술병 위로 두 손이 굳게 맞잡혔다. "타라하이!" "운비!" 그리고 나서는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술병이 비기 시작했다. 기름진 안주도 두어 접시 시켰다. 친구라는 끈으로 서로를 묶은 뒤에 두 사람은 자신들이 살아 온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타라하이는 어사대 내에서도 일찍 출세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기하는 자들도 많았고, 억울한 일도 적지 않았다. 이번에 위험 천만한 임무를 맡게 된 것도 그런 입김의 작용이었고,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는 사정도 거기에 있었다. 소운비의 이야기를 들은 타라하이는 기가 막혀 했고, 어느 부분에서는 무척 부러워하기도 했다. 남자로서 화금궁 같은 곳에는 한번 가보고 싶다는 농을 던지며 껄껄 웃기도 했다. "그만 놀리고, 아까 그 이야기나 해봐요." 소운비가 짐짓 정색을 하고 말하자, 타라하이가 되물었다. "무슨 이야기?" "그... 당신의 임무에 대한 것." 타라하이의 얼굴이 다시 신중해졌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고, 아까부터 졸아대던 점소이가 주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자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대원국사는 서장에서 오셨네." "그거야 모든 중원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흠, 하지만 국사께서 무공의 고수인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런가요?" "그렇지. 본래 서장 밀교 내에서 무공을 전수받았다고 하더군." 타라하이는 말을 잠시 끊고 목을 축였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욱 낮은 소리로 말했다. "황제께서는 대원국사의 연설아(演渫兒:교합 훈련)에 빠져 정신이 없으시네. 양가의 규수들을 공양(供養)하여 그런 의식들에 쓸 뿐 아니라, 첩들을 뽑아 황제의 형제들과 벗들에게 주어 황제 앞에서 성교를 하게 하고..." 타라하이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더 이상 자기 민족의 황제를 비난할 수 없었던지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재빨리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런 판에, 대원국사는 더욱이 자신의 사문으로부터 또 다른 사람을 불러들여 세력을 늘리려고 했었다네. 그것이 이십 년 전의 이야기지." "가린진이 불러들이려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의 사형뻘 되는 서장 밀교의 고승인데, 내가 찾아야 할 사람이 바로 그야." 타라하이는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밀교의 속사정에 대해서 자네가 들은 바 있는지는 모르겠네만, 아무튼 그 교리는 매우 복잡하여 수많은 교리 중에 어느것을 최상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파가 되기도 한다네. 국사의 사문은 그 중 인도로부터 온 탄트라 신앙과 결합한 좌도밀교(左道密敎)에 속하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사람 역시 대원국사에 못지않게 고수이고, 또 좌도밀교의 사람일 테지." 타라하이가 흐린 그 말속에는 자신이 찾아야 할 사람이 가린진 못지않게 나라를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 스며 있었다. "다만 이상한 것은, 나에게 그 명령을 내릴 때 국사는 그 사람을 찾는 즉시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하라고 한 점이야. 아무래도, 국사와 그의 사형 사이에도 어떤 알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군." "알력이 있는 사람을 왜 불러들입니까?" "상상해 보게. 서장에 있을 때 은근히 경쟁하는 관계에 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중원에 들어와 대원국사의 지위에까지 올랐을 때는,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을 불러 와 자신의 세력을 강하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발 밑에 두고 힘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겠나?" 그것은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추측을 덧붙였다. "하면, 그 국사의 사형되는 고승 역시도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중원에 오지는 않았겠군요." "그렇다네. 국사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다른 세력에서 그 사람을 없앴을 가능성도 있지만, 오히려 그 사람 스스로 잠적해 중원 내에 세력을 만들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국사는 오히려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네." "둘 중 어느쪽일지는 짐작하기가 어렵군요. 아, 그러고 보니...!" 소운비는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무릎을 쳤다. "왜 그러나?" "당신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운비가 꺼낸 것은 한종린에게서 들은 사대성물과 관련된 고승의 이야기였다. "그도 서장의 고승이고, 또 때가 맞습니다. 둘 다 이십 년 전의 일이니까요!" 타라하이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강호행을 나선 지 몇 달 만에 비로소 실마리 다운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몽혼표... 몽혼표라! 그래, 이제 좀 일이 풀려 갈 기미가 보이는군. 성물... 서장의 고승... 실종...!" 타라하이는 흥분하여 손바닥을 비비며 단서들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느닷없이 소운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군! 역시 자네가 도움이 되었어!" "뭘요...!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내 수하들과 보름 뒤에 만나기로 했네." "내일 당장 출발해야겠지. 그리고 일단 그 고승이 사라졌다는 북망산으로 가서 조사를 시작해 봐야지.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자네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야겠어!" 술로 사람의 코가 삐뚤어질 수 있다면 두 사람의 코는 이미 가로로 누웠을 것이다. 한참을 마셔대다 보니 어느새 동이 텄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주점 안과 밖에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술을 마셔댔다. "참, 아까 그 여자는 자네 여잔가?" 지나가는 말처럼 타라하이가 묻자,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사정이 어찌 되어 약혼을 하기는 했지만, 서로가 서로의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내자가 있으니까요." 타라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다행이군." 소운비는 의아했다. "무엇이 다행이라는 말이죠?" "만일 자네 여자라면, 내가 쓸데없는 간섭을 한 것 같아서 말이야." "간섭이라니요?" "어쩌면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군." 소운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타라하이의 생각에 그대로 동의할 수는 없었다. 설령 당미령이 그의 정인이라 하더라도, 더럽혀진 몸으로 정인의 앞에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과연 더 나을까? 생명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그는 쉽게 해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침묵 속에 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주점 안으로 한 더벅머리 꼬마애가 들어왔다. 꼬마애는 더러운 손에 제 키만한 비파를 들고 있었는데, 그 비파도 무척이나 낡은 것이었다. 꼬마는 주점 안을 휘휘 둘러보며 구걸할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문득 꼬마를 돌아본 소운비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꼬마의 손에 들린 비파는 그에겐 너무나 낯익은 것이었다. "너, 그 비파 어디서 났지?" 소운비가 후들거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물었다. 꼬마는 소운비가 비파에 관심을 가지는 줄 알고 기뻐했다. "왜 묻죠? 이거 사고 싶어요? 은자 한 냥 주시면 팔게요." 소운비는 벌떡 일어나 꼬마 앞으로 가서 그 손을 잡고 말했다. "어디서 났는지 이야기해 주면 은자 열 냥을 주마!" "정말요?" 꼬마는 소운비가 너무 적극적으로 나오자 혹시 비파를 뺏으려는 것이 아닌가 조금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 "정말 은자 열 냥을 줄 건가요?" "더 이상 묻지 말고 얼른 이야기해 주면 스무 냥을 주마!" 꼬마는 셈이 빨랐다. "조금 전에요, 저기 앞길에서 어떤 사람이 내게 줬어요." "어떤 사람이? 그리고 왜 너에게 주었니?" "죽립(竹笠)을 쓴 사람이었어요. 내가 착하게 생겼다면서 주고는, 이 주점에 들어가 팔라고 했어요. 누구든지 사주면 돈이 될 거라면서요." "그 사람은 어디에 있니?" 소운비는 다급하게 물었지만, 꼬마는 별로 급할 것이 없었다. "은자 스무 냥으로는 그 대답까지 사실 수는 없는데요." "오십 냥이다! 얼른 말해 다오." "일단 주세요." 탁!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타라하이가 답답했던지 은자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반 협박조로 말했다. "아저씨들은 시간이 없다. 어서 말해라!" 꼬마는 비로소 타라하이를 보고는 입을 삐쭉거렸다. "엄마가 몽고 사람하고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대뜸 타라하이가 몽고인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으로 보아 꼬마의 눈썰미가 보통은 아니었다. 하지만 타라하이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내놓았던 은자를 향해 도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도로 넣는다?" 꼬마는 냉큼 은자를 집더니 빠르게 말했다. "그 사람은 이 앞의 주점에 들어갔어요. 내가 봤어요." 소운비는 꼬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점을 나갔다. 그 뒤를 쫓아가려던 타라하이가 잠시 주춤거리더니 꼬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파를 이리 다오." "안 되겠는데요?" "왜?" 꼬마는 히죽 웃었다. "비파 값 한 냥은 안 내셨잖아요." 타라하이는 이 악랄한 꼬마에게 한 냥을 더 내줄 수밖에 없었다. * * * 소운비와 타라하이가 술을 먹던 주점 바로 앞에는 그보다 더 작은 주점이 있었다. 시간이 이르지만 아침을 사 먹는 사람들이 서넛 정도 되었다. 꼬마가 말한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코까지 가리는 죽립을 눌러쓴 채로 밥을 먹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소운비는 부리나케 그를 찾아왔건만, 정작 주점 안에 들어서서는 주춤거렸다. 내심 그는 죽립을 썼다는 사람이 혜와일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뜻밖에도 그 사람은 키가 자그마하고 몸이 좀 여윈 남자임이 분명했다. 소운비는 천천히 그 사람의 앞쪽으로 돌아갔다. 죽립을 눌러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집은 손등에는 거무스름한 털이 나 있고 가느다란 입술 주변에도 솜털이 나 있었다. 혜와가 남장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깨지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는 혼란이 찾아왔다. '어째서...? 그 비파는 내가 그녀에게 정표로 준 것인데, 어째서 다른 남자가 그것을 가지고 있을까?' 소운비가 선 채로 죽립인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혼란스러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죽립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남의 식탁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거요?" 그 목소리를 듣자, 한 가닥 희망도 사라져 버렸다. 그 목소리는 보통 사내보다는 가늘긴 해도 분명 칼칼한 남자의 음성이었다. "나, 나는...!" 소운비는 바보처럼 말을 못 잇고 더듬거렸다. "할말이 있으면 앉으시오." 차갑긴 해도 죽립인의 한마디는 소운비를 곤란에서 구해 주었다. 소운비는 주저앉듯 그의 앞 자리에 앉았다. 하나 앉고 나서도 소운비는 입이 금방 떨어지지 않았다. 한데, 죽립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비파 때문에 오셨소?" 소운비는 더욱 놀라 눈을 부릅떴다. '이 사람은 어쩌면 내가 그 주점에 있는 것을 보고 일부러 꼬마를 들여보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를 알고 있는 것이고, 그럼 혜와가...' 이어지는 죽립인의 말이 소운비의 추측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한 사람의 부탁을 받고, 당신에게 비파를 전해 준 것이오." 비로소 소운비의 말문도 터졌다. "누구의 부탁이오?" "당신이 비파를 주었던 사람의 부탁이오." 소운비는 혀가 바작바작 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먼 곳에 있소. 그리고 당신과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전해 달랬소." "어째서?" 죽립인은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세상은 드넓고 남자도 많으며, 마음이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소." 변심(變心)! 소운비의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 두 글자가 머릿속에 크게 확대되어 다가왔다. 변심, 변심이라니! 최초의 충격이 가신 뒤에 소운비는 저 혼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다! 세상이 모두 변해도 혜와는 변할 리가 없다. 혜와가 그럴 리 없다! 이 사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소운비는 애써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또 그것을 매우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죽립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최대한 표정을 풀며 웃었다. 하지만 그 노력은 어쩐지 애처롭게 보였다. "그럴, 그럴 리가 없소.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거짓말?" 죽립인의 반문에는 씁쓸한 맛이 배어 있었다. "그렇소, 거짓말. 혜와는 그럴 리가 없소. 당신은... 아마도 당신은 그 비파를 훔치거나 아니면 강제로 빼앗았을 거요. 그리고 나의 혜와에게 못된 짓을 했을 거요. 그렇지 않소?" "하하하하하...!" 죽립인이 갑자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 소리는 통렬하게 소운비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한 순간, 죽립인은 웃음을 딱 멈추고는 냉정하게 말을 뱉었다. "그녀는 당신의 여자가 아니오!" "뭐?" 소운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언제라도 내지를 기세로 주먹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하나 죽립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그래도 귀하를 생각해서 끝까지 말을 하지 않으려 했소만, 이렇게 되니 알려 줄 수밖에 없구려! 혜와는 나하고도 잤소." -나하고도 잤소! 그 말은 어떻게 생각하면 단순한 말이었지만,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다. 소운비는 입술을 떨었다. "그건 당신이 강제로...!" 한사코 부정하려는 소운비의 말을 죽립인은 다시 한번 매정하게 끊었다. "강제는 아니었소! 그녀가 먼저 유혹했고, 나는 그 유혹에 넘어가 주었소. 나와 그녀는 무려 한 달이나 같이 지냈고,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있소. 한 달이 지나자 그녀는 딴 남자를 만나 그 사람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소! 헤어지기 전에 그 비파를 나에게 준 것이오. 혹시 개봉부 쪽으로 가다가 당신을 만나거든 돌려주라고!" 소운비를 지탱하고 있던 벽은 차츰 무너져 갔다. "하지만... 하지만 그녀는 나를 사랑했소. 한데 왜 그녀가 당신과...?" 죽립인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렸다. "당신은 무척 순진하군! 세상에서 가장 변하기 쉬운 것이 그 정이라는 놈인데, 그걸 믿고 있단 말이오? 그녀는 창녀나 다름이 없었소." "닥쳐!" 콰앙! 소운비는 마침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울분에 찬 주먹이 나무탁자를 허망하게 쪼개 버렸다. 서너 명의 손님들이 깜짝 놀라 그들의 자리로 시선을 모았다. 하나 죽립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당신은 정에 눈이 멀어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셈이오? 혜와는 화금궁 제자였소. 그곳의 여자들이 어릴 때부터 어떤 것을 보고 들으며 자라는지 알지 않소? 제아무리 성인군자의 딸이라 해도 그런 곳에서 자란다면 음탕한 성정을 지니기 마련이지. 설마 하니 당신의 여자만이 특별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겠지!" "닥치시오...! 한마디만 더 하면 나는 당신을 칠지도 모르오!" "나는 당신을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가르쳐 주려는 거요. 그녀가 무어라 했는지 아시오? 남자가 귀한 화금궁 안에서만 살다 보니 당신이 신기했고, 그래서 따라다녔지만, 부모를 찾으라고 떠나 보낼 때부터 당신한테 조금씩 실망했다고 합디다. 그리고 세상에 나와 보니 너무 많은 유혹이 있었고, 당신보다 훨씬 친절하고 그녀의 가치를 알아주는 남자들이 많았다는 것이오. 이제 그녀도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녀가 그럴 수 있도록 도와 주었소. 그녀는 당신의 옹색한 인생에 끼고 싶지 않다고 했단 말이오!" "그만, 그만 하시오!" 소운비는 절규했다.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죽립인의 말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혜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가 그저 도둑이거나 혹은 간적이었다면 결코 혜와가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가 일부러 소운비에게 거짓말을 할 리도 없는 것이다. 소운비는 식탁의 잔해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주먹은 너무나 힘을 주어 불끈 쥐고 있어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날 지경이었다. 악 다문 입술에서도 피가 흘렀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도 피눈물이 흘렀다. 죽립인은 더 이상 그를 격동시키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주점의 입구에는 비파를 든 타라하이가 서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 두 사람의 입씨름을 지켜보았지만 끼여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소운비 개인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숨을 죽인 채로 흘러갔다. 점소이도, 다른 자리의 손님들도 입을 다문 채로 눈치를 보았다. 소운비가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도, 비통한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인피면구를 다시 뒤집어쓴 것처럼, 무표정했다. 원래의 소운비를 이루던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특성이 사라져 버린 그런 얼굴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침착하게 몸에 묻은 먼지와 나무쪼가리를 털었다. 그리고 높낮이 없는 담담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알려 주어서 고맙소." 그는 죽립인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입구를 향해 걸어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죽립인의 죽립 끝이 웬일인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타라하이 앞까지 간 소운비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죽립인을 차갑게 쏘아보며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형씨의 이름을 알고 싶구려." "어째서 그러오?" "내가 형씨에게 빚을 진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운이 닿으면 갚아야 하지 않겠소?" 그 말은 묘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죽립인은 피식 웃더니 죽립을 눌러쓰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얼굴에 흉칙한 상처가 있어 추면인(醜面人)이라고 불린다오. 이름 석 자는 나도 잊어버린 지 오래이니, 혹시 나를 찾고 싶거든 추면인을 찾으시오." 소운비는 추면인의 등뒤에 대고 다시 한번 정중히 포권했다. "잊지 않도록 하겠소. 가르침을 주어서 고맙소이다." 그리고 그는 찬바람이 일도록 휭 하니 주점을 나가 버렸다. 타라하이가 쓰게 웃으며 그를 따라갔다. 바닥에 떨어진 술잔을 집는 추면인의 손이 다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상심이 크겠군." 소운비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저 앞을 향해 걸어갔다. 부상을 입은 다리로 간신히 그를 쫓아가던 타라하이가 말을 붙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도 없었다. 그는 목적지도 없이 걷기만 했다. 길가로 휙휙 스쳐 지나가는 주루들도, 여행객들이 몰려 나오는 객잔도 그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타라하이 역시 더 이상은 묻지 않고 그저 그의 옆에서 함께 걸어 주기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걷기만 하다가, 갑자기 소운비가 멈추어 섰다.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타라하이에게 물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당신은 가야 하지 않습니까?" "...!" 타라하이는 그가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이 젊은 한족 친구에게 지금 당장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 그는 까칠까칠한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곧 소운비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는 괜찮은 친구야!" 소운비의 굳은 얼굴이 약간 펴졌다. 타라하이는 비파를 소운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중원이 넓다고는 하지만, 다시 만날 날이 분명히 있을 걸세!"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타라하이가 먼저 등을 돌렸다. 소운비는 그 자리에 선 채로 타라하이가 작은 점으로 변할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뒤, 소운비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처음엔 조급하고 불안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겨울바람은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매섭게 몰아쳤지만, 그의 마음속보다 추운 곳은 세상에 없었다. 소운비가 객잔으로 돌아오지 않자, 당철은 출발을 미루고 수하들을 시켜 주변을 샅샅이 뒤지도록 했다. 당문의 무사들이 소운비를 발견한 것은 거리였는데, 소운비는 다시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평안객잔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의 한쪽 손에는 비파가 쥐여져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술병이 들려져 있었다. 그의 옷 앞섶은 목을 타고 흘러내린 술로 푹 젖어 있었고, 그가 걸어온 길에도 흔적처럼 술이 흘려져 있었다. 소운비는 그들에게 끌려 평안객잔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당철은 아직 해가 남았지만 만취한 소운비 때문에 하루 더 머무르기로 했다. 이제 개봉부까지 하룻길이 남았는데, 저런 몰골로 입성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 * 당미령은 어제 고매 사당에서 돌아온 이후로 무려 열다섯 번이나 목욕을 했다. 씻고 또 씻는다고 그 기억이 지워질 리는 없지만, 그래도 목욕을 한번 하고 나면 그만큼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다. 그 악몽을 완전히 잊을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목욕 한번에 한걸음씩 깊숙한 곳으로 놈을 쫓아 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지막 목욕을 마친 뒤 그녀는 정갈한 잠옷을 꺼내 입고 침상에 들었는데, 막 잠이 들 무렵에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그녀는 지레 겁에 질려 머리맡에 놓아 둔 비수부터 들었다. 하나 바깥에서 들려 온 소리는 그녀를 적이 안심시켰다. "나요." 그것은 소운비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비수를 내려놓고 두툼한 겉옷을 꺼내어 입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무슨 이야기할 것이라도 있나요?" 소운비는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묵묵히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기묘하게 불안한 느낌을 풍겼다. 당미령은 코끝에 확 끼쳐 오는 술 냄새에 눈살을 찡그렸다. "당신, 아직도 술이 안 깼군요. 할 이야기가 있다면 내일...!" 당미령의 말은 중간에서 뚝 끊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소운비의 두 눈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소운비가 다시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두 눈만은 진짜 그의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두 눈, 평소에는 당미령을 향해 무관심밖에 보여 주지 않던 그 두 눈에 기묘한 욕망이 번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나가요!" 하나 소운비는 나가기는커녕 그녀를 향해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취했군요!" "취하지는 않았소." 소운비는 차갑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정혼한 사이 아니오? 좀더 일찍 이랬어야 하는 거라고 오히려 반성하고 있소!" 소운비는 당미령을 침상 쪽으로 밀어붙이고는 간단히 쓰러뜨렸다. 당미령은 당황했다. 소운비는 비록 거칠게 굴지는 않았지만, 그의 힘은 그녀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잠깐 망설였다. 소운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놀랍기는 하지만, 그 말은 분명 맞는 것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당미령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그녀가 망설이고 있는 동안, 소운비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그것은 한없이 촉촉한 느낌이었다. '안 돼!' 불현듯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는 절실한 느낌이 그녀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그녀는 목을 비틀어 소운비의 입술로부터 빠져 나오고, 있는 힘을 다해 두 손으로 그의 몸을 밀어 내려 했다. 하나, 소운비의 무정한 팔이 그녀를 꼼짝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당미령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애원했다. "이러지 말아요! 이러지 말아!" 소운비가 중얼거렸다. "몽중마령에게도, 탐서랑에게도 보여 준 몸 아닌가? 이제 내가 좀 본다고 무슨 흠이 되겠소?" "당신 미쳤군요!" 당미령은 이를 갈았다. 그녀는 똑바로 소운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두 팔을 누른 채로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의 눈은 깊은 슬픔의 빛을 띠고 있었다. 당미령은 잠깐 동안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잊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소운비가 혹시 울음을 터뜨리며 품에 안겨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소운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짤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녀에게 자유를 주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싫다면 할 수 없지!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자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는 큭큭 소리를 내어 웃으며 방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 당미령은 묘한 안도감과 함께 참을 수 없는 궁금증 속으로 빠져 들었다. "큭... 크크...!" 소운비가 계속 웃음을 흘리며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데,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혼음사의였다. 그는 당미령의 방안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들은 모양이었다. "너, 웬일이냐?" 혼음사의는 놀라움 반, 기쁨 반이 된 얼굴로 대뜸 그렇게 물었다. 소운비는 대답하는 대신 불쑥 물었다. "근처에 혹시 와사가 있소?" 와사는 기루의 기녀들보다도 하급인 창녀들의 집으로, 술과 가무가 아니라 전문적으로 매춘만을 다루는 곳이었다. 어디에 가든지 와사와 기루가 있는 곳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아는 혼음사의인지라,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있긴 있다만, 왜 그러는데?" "갑시다!" "가자고? 야, 너 정말 웬일이냐?" 소운비는 아까처럼 허망한 웃음을 흘렸다. "한 여자가 나를 버렸으니, 나는 세상 모든 여자를 갖겠소!" '청향옥(淸香屋)'이라는 이름의 와사는 아주 작았다. 통틀어 봐야 손님을 받을 수 있는 방이 고작 네 개였고, 영업을 할 수 있는 여자도 열 명을 넘지 않았다. 청향옥의 의모인 왕대고(王大姑)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열 명의 의붓딸들이 모두 건강하며 쓸데없는 화류병이나 안 걸리면 그녀는 그것으로 족했다. 여자들이 건강한 이상 굶어 죽을 일이 없는 것이 바로 이 바닥의 장사이기 때문이다. 한데 오늘, 오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젊은 남자 한 명이 그 열 명의 장사 밑천을 모두 거덜내는 것이 아닌가! "지금 몇 명째니?" 막 그 손님의 방에서 어기적거리며 기어나온 오향(五香)을 붙잡고 왕대고는 물었다. 오향은 대답도 하기 힘들다는 듯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일곱 번째예요...! 양엄마, 그 손님이 다시 한 명 들여보내래요." "뭐? 아직 삼향(三香)하고 육향(六香)은 방안에 있잖아?" "아유, 걔들은 녹초가 돼서 나오지도 못해요! 그래도 나니까 내 발로 걸어나온 거지." 왕대고는 입을 딱 벌리고 오향이가 나온 방문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 방 옆에는 젊은 손님을 따라온 초로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방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지 눈을 지그시 감은 채였다. 젊은 손님이 들어간 이래 방음을 위해 벽을 두껍게 바르고 솜까지 넣은 그 방에서는 계속 소리가 새어나왔다. 왕대고가 특별히 훈련시킨, 만들어 낸 감창(甘唱)과는 거리가 먼 소리였다. 아니, 그것은 감창이 아니라 숫제 비명이고, 절규였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저렇게 지독한 거야?' 왕대고의 양딸들은 내일도 모레도 장사를 해야 할 장사 밑천이었다. 그 장사 밑천들이 몽땅 다 드러눕는다면 왕대고에게 누가 돈을 벌어다 줄 것인가. 그렇다고 방안에 뛰어들어가 이 불한당을 끌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까 젊은 불한당놈이 처음 청향옥에 들어올 때 한 주먹에 부순 문짝이 눈에 선연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행색이 볼품없기는 하지만, 방문 앞에 버티고 앉은 초로의 사내도 만만한 사람은 아닌 것임에 분명했다. 왕대고는 끙, 하고 깊은 신음을 내뱉었다. 재수가 옴붙어도 이렇게 옴붙을 수가 있는가! "아유, 끔찍해! 아유... 아유...! 눈이라도 좀 붙여야지!" 오향이가 연방 신음을 흘리며 자기 방으로 기어 들어갔다. 만일 몇 시진이 지나기 전에 자신이 다시 그 방으로 불려 들어갈 처지가 된다는 것을 오향이 짐작이라도 했다면, 아마도 그녀는 그 길로 보따리를 싸 들고 내빼거나 혀라도 깨물었을 것이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청향옥의 여자 열 명 모두가 똑같은 처지에 빠진 것이다. 혼음사의는 타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곰방대에 연초를 꾹꾹 눌러담고 불을 붙인 뒤 한 모금 길게 빨았다. 그가 청향옥에 들어와 여자를 찾지 않고 방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은, 참새가 방앗간에 들어와 그저 짹짹거리기만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삼녀금침회정대법과 태원옥호공의 효능으로 소운비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정욕이 강하며 힘도 대단하다는 것은 그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소운비는 스스로를 강하게 억제하고 있었던 것인데, 혼음사의가 궁금한 것은 대체 무엇이 소운비의 벽을 이토록 한 순간에 허물어 버린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변해도 너무 변했군!' 마땅히 좋아해야 할 일인데도, 혼음사의는 왠지 입맛이 썼다. 벌써 몇 명째의 여자인지 몰랐다. 그는 여자를 얼굴로 구별하는 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가 먼저 폭발해서 정사가 끝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여자 쪽에서 먼저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지는 것이었다. 그의 몸에서는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숨도 몰아쉬지도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허리를 움직여 감에 따라 두 눈이 차츰 호안으로 물들어 갈 뿐이었다. 그에게 여자는 이제 소중히 대해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정사 역시 달콤한 꿈이 아니었다. 그는 침을 뱉듯이 정사를 했다. 물을 마시듯이 정사를 했다. 몸이 지치는 것보다 먼저 그의 마음이 지쳤고, 그의 심장은 사막처럼 메말라 갔다. 그렇게 그 밤은 갔다. * * * 다음날, 사천 당문의 마차는 평안객잔을 떠나 개봉부를 향했다. 선두의 무사는 '당(唐)'이라는 한 글자가 새겨진 녹색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개봉부 전체는 야릇한 흥분과 열기로 들떠 있었다. 바야흐로 영웅대회가 삼 일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제 23 장 전야(前夜) 군웅들이 개방으로 몰려든 것은 섣달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처음엔 작은 숫자였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닷새, 열흘이 지나면서 그 숫자는 차츰 불어났고, 급기야 영웅대회 전날인 섣달 열나흘에는 개방을 둘러싼 군웅들이 마치 구름 떼와 같았다. 개방 총타가 작지는 않지만 그 많은 인원을 모두 들일 수는 없었다. 격색마회에서는 미리부터 준비한 대로 총타 주변 사오 리에 걸쳐 임시로 초옥을 짓고 군웅들이 오는 대로 거기에 기거하게 하였다. 물론 귀한 신분의 사람일 경우에는 총타 안에 숙소를 마련했는데, 총타 안에 들어온 손님을 내객(內客)이라 하고, 임시 초옥에 머무르는 손님을 외객(外客)이라 불렀다. 이번 영웅대회는 비록 그 내용이 '격색마'라 하여 강호 색마들 몇 명을 겨냥하고 열리는 것이기는 하나, 몽고의 통치 기간 동안 강호인들이 이렇게 크게 모인 예가 없었기에, 큰 관심을 끌었고 성황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런 영웅대회에 내객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굉장한 영광으로 알았다. 물론 내객의 숫자는 외객의 숫자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외객들은 개방에 와서 일단 자신의 신분을 밝혀 참가인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뒤, 초옥을 배정받아 머무르게 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왜 내객이 안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투덜거리는 항산파(恒山派)의 숭양검객(嵩陽劍客)같이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있었지만, 정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문파의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한마디로 말해 설령 강호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당히 무슨 무슨 파에서 왔다고 하면 외객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 신분을 일일이 조사하고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영웅대회에 모여든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토록 엄청난 성황을 이루며, 마침내 격색마회의 영웅대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개방을 둘러싼 공기는 물론이고 머리 위의 하늘까지도 묘한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온갖 재료들을 사서 모으고, 진귀한 짐승을 잡아 목을 따고, 기름에 튀기고, 지지고, 볶고, 무치고, 절이고, 구워, 엄청난 잔치상을 준비해 놓은 뒤, 이제 뒷짐을 지고 서서 사람들이 그것을 먹기만을 기다리는 요리사. 격색마회의 수뇌부들과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영웅대회의 전야에 최종 점검을 위한 회의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이제 부상에서 거의 회복된 삼목신룡 무옥. 최근 전중원에 명성을 날린 냉면검화 진설영. 삼목신룡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개방 장로 규염개.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세룡. 그들의 얼굴은 자신들만의 성취감으로 묘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나 누구도 여기에 만족하여 자세를 흩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점검해야 할 것은, 격색마회의 영웅대회를 차질없이 시작하고 마치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림 속의 용에 눈을 그려 넣는 일과 같았다. "지난번 용양도인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진설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용양도인을 제압한 일로 격색마회에서 그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호칠대색마, 그들이 자신들의 목을 노리는 우리들의 영웅대회를 그저 두고 보지는 않을 거라 추측됩니다. 적어도 한두 놈은 더 들어오지 않을까 싶군요." 그녀는 가벼운 손짓으로 군웅들의 소리로 시끄러운 바깥을 가리켰다. "저렇게 사람이 많으니, 그것이 분명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테구요." 규염개가 가볍게 헛기침을 해서 시선을 자기 쪽으로 모았다. "저의 생각도 진 소저와 같습니다. 방비가 있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무옥이 그에게 물었다. "장로에게 무슨 생각이 있소?" "저와 진 소저가 그 동안 기록된 참가인들의 명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입구에서 내외객들을 접대하던 백 장로를 통해 수상한 인물이 없었는지도 알아 보았습니다. 과연 그 중에는 요주의할 몇 사람이 있더군요." 남궁세룡이 물었다. "물론 다 외객들이겠지요? " 진설영이 고개를 저었다. "다 그렇지는 않았어요." 남궁세룡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아니, 그럼 내객들 중에도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오? 그럴 리가...! 모두 명문대파와 세가들의 사람들인데 어찌 그들 중에..." "내객들 중에 저희들이 주목해야 할 사람은 뜻밖에도 사천 당문에 있습니다." 내객 중에 누가 수상하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지만, 그 중에서도 사천 당문이라는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사실 이번에 당문의 가주가 나선 것은 이 자리의 사람들로서도 의외의 사건이었다. 그만큼 당문은 폐쇄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당문에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었다. "당문의 누가?" 남궁세룡의 거듭되는 질문에 규염개는 두께가 무려 두 뺨이나 되는 두꺼운 방문첩을 펼쳐 한 이름을 가리켰다. "성명은 소운. 당가 영애의 정혼자라고 합니다." "한데 그가 어째서 수상하다는 거요?" 규염개는 대답하는 대신 먼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당문의 마차가 안으로 들어올 때, 사소한 충돌이 있었다는군요. 그 소운이라는 사람이 기녀 두 명을 대동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동은 모두 입을 열지 못했다. 음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소탕하자는 자리에 기녀를 끼고 오다니, 생각이 모자라도 보통 모자라는 소행이 아니었다. 남궁세룡의 분노는 특히 거셌다. 아마 남궁세가와 당문 간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경쟁 심리가 작용한 때문이리라. "정혼자까지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장인될 사람과 동행길에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당 가주는 그것을 그저 묵인하고 있었다는 거요?" "마차 안은 두 개의 칸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내릴 때까지 당 가주께서도 그 상황을 모르고 계셨다는군요. 입구를 지키던 백 장로는 당연히 두 기녀는 들어올 수 없다고 막았는데 소 공자가 막무가내였다고 하더군요. 간신히 당 가주의 중재로 기녀들을 돌려보냈답니다." "허허..." 일동들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규염개가 어째서 당가의 사람을 수상한 자로 지목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만일 그 소 모(蘇某)라는 사람이 얼간이라 사리를 짐작하지 못하고 저지른 짓이라면 별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일부러 한 짓이라면 격색마회를 모욕할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무옥이 입을 열었다. "내객 중에 더 의심 가는 사람은 없소?" "내객 중에는 없습니다. 이제 외객으로 넘어가서..." 규염개는 빠르게 보고를 했다. "먼저, 추면인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그렇지요. 게다가 얼굴을 통 드러내지 않습니다.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다른 사람은?" "그 다음에는 세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로 이루어진 일행입니다. 자신들은 부귀산장(富貴山莊)의 사람이라고 합니다만, 역시 들어 본 바가 없는 데다가 그 중 한 사람의 여자와 한 사람의 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추면인과 마찬가지로 수상한 점입니다." "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문파를 밝히지 않는 네 명의 비구니가 있습니다." "문파를 밝히지 않는 사람을 들여보냈단 말이오? 백 장로가 일을 그렇게 처리하다니..." "그것이...!" 규염개는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하긴, 그에게 백 장로가 이야기를 해줄 때도, 백 장로 역시 곤란해 하지 않았던가? "어찌 된 일인지 백 장로는 그 비구니들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는군요." "흠..." 무옥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진설영이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혹시 심령을 제압하는 사술 같은 것이 아닐까요?" "저도 그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백 장로의 의견으로는 네 비구니 중 중년으로 보이는 한 사람을 빼고 나머지 셋은 모두 나이가 지극히 고령인 데다가,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람 같더라는 겁니다." 남궁세룡의 얼굴이 문득 어두워졌다. "허...!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라면 상대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규염개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을까요? 현 소림사 방장조차도 그만한 경지에 있지는 못하고... 또 그와 같은 고인들이 있다는 것도 들은 바가 없는데요." 일동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지목된 네 무리는 하나같이 신비에 싸여 있다. 이들 모두가 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영웅대회를 치르기 전에 그들 모두를 내쫓는 방법도 있을 수는 있지만, 그래서는 격색마회의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합시다." 무옥이 결정했다. "만일 그들이 혹 모습을 감춘 색마들이라면, 노리는 것은 뻔하오. 본 회의 수뇌부를 암살하려 하거나, 혹은 기밀을 탐지하려고 할 것이오. 우리는 적들의 태도를 예의 주시하고,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이오." "감시의 임무는 누구에게 맡깁니까?" "무공이 낮은 사람으로는 안 될 것 같소. 이 자리의 우리들이 직접 맡아야 하지 않을까 싶소. 일단, 그 정체를 짐작하기 힘든 네 명의 비구니는 본인이 맡겠소." 이리하여 남궁세룡이 당문의 사윗감을, 규염개가 추면인을, 진설영이 부귀산장의 일행을 맡기로 하고 회의는 끝났다. 그들의 의심은 놀랄 만큼 정확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웅대회 당일이 아닌 바로 전야에 나타났다. * * * 밤이 이슥해지자, 떠들썩했던 개방 총타의 안팎도 조용해졌다. 비록 똑같이 영웅대회의 손님으로 온 것이기는 해도, 외객들은 내객들이 머무는 총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밤에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들이 총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날이 밝아 영웅대회가 시작된 다음부터이고, 그 전에는 내객 중의 누구나, 아니면 격색마회 사람과 동행을 했을 때만 가능했다. 수많은 개방 제자들이 총타를 물샐틈없이 둘러싸고 경비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 사람이 지켜도 한 사람의 도둑을 지킬 수는 없는 법. 달이 중천에 떴을 때, 총타 안으로 숨어드는 귀신 같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러 무리였고, 각각 숫자도 달랐으며, 무엇보다도 그 목적이 달랐다. 남궁화련은 여전히 할 일이 없었다. 그저 누워서 두 개의 면령을 조물락거리는 것밖에는. 딸랑, 딸랑, 딸랑...! 면령이 내는 작은 울음 소리만이 그녀가 듣는 유일한 소리였다. 아버지 남궁세룡은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 지 벌써 며칠째 그녀의 방에는 코빼기도 들이밀지 않았다. 남궁화련은 너무나 심심하고 적적한 나머지, 한 밤중에 느닷없는 목소리가 들려 왔을 때도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다. "혼자 있군." 그 목소리는 음침했고, 개방이나 격색마회 사람들 중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분명 침입자의 목소리였는데, 이상하게도 남궁화련은 그 소리가 귀에 익었다. "누구세요?"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나 문 쪽을 응시하며 물었다. 묘한 예감이 그녀로 하여금 사람들을 불러야 한다는 경계심마저 무너뜨렸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두 개의 면령을 침상 위에 떨구자, 방울 소리도 멈췄다. 문밖의 사람이 탄식했다. "그 소리는 매우 듣기 좋은데 왜 멈추지? 계속 만져 봐." 남궁화련의 손은 마치 문밖의 사람과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것처럼 저절로 움직여 면령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따뜻한 손 안에 쥐어지자 면령은 금세 작은 종 소리를 뱉어 냈다. "흠...! 아직 그 용도를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군." 그 말에, 남궁화련은 갑자기 불에 데인 듯 펄쩍 뛰었다. "당신은...! 당신은...! 당신이로군요!" 그녀의 말에는 분노와 정열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문은 양 옆에서 누가 여는 것처럼 스르르 밀렸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모습이 마침내 드러났다. 남궁화련의 두 눈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왔군요!" 그것은 히죽이 웃고 있는 탐서랑이었다. 남궁화련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왕모선을 들고 흰 옷을 입은 멋드러진 모습이었다. "얏!" 남궁화련이 갑자기 미친 듯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동안의 원한을 풀려는 듯 기세 등등한 모습이었다. 남궁화련의 날카로운 일장이 탐서랑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갔지만, 탐서랑은 방어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녀를 품에 안을 듯 두 손을 벌렸다. 퍽! 일장은 고스란히 탐서랑의 가슴에 격중되었다. 탐서랑은 뒤로 두어 걸음 비틀거렸다. "연매(蓮妹), 못 보는 사이에 손이 많이 매서워졌군." "닥쳐요!" "아직 나를 원망하는 거야? 내가 자주 만나러 오지 않았다구?" 남궁화련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당신이 나한테 감히 그따위 말을 할 수 있나요? 색마 같으니라구!" "연매, 내가 자주 오지 못한 것은 오직 그대의 아버님 때문이야. 내가 그대 곁에 가기만 하면 나를 죽이려고 하실 텐데 어찌 올 수 있었겠어?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연매를 만나고 싶어했는지 알아?" "닥쳐, 이 색마야!" 남궁화련은 다시 한번 탐서랑의 가슴에 일장을 던졌다. 탐서랑은 비틀거리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입술에 붉은 선혈이 가늘게 흘렀다. 탐서랑은 씁쓸하게 웃었다. "연매...! 그래, 연매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지. 나는 색마야. 하지만 연매한테만은 진심이었어. 연매만큼 나를 사로잡은 여자는 없었어.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연매를 만나러 온 거고, 이제 연매의 손에 죽는다 해도 한이 없어. 자, 이제 마지막 한 수로 나를 죽여 줘...!" 그는 슬픈 눈으로 남궁화련을 올려다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 가슴을 내밀었다. "자! 어서!" "이잇!" 남궁화련은 손을 치켜 들었다. 하나 그녀의 손은 차마 내리쳐지지 못하고 허공에서 바르르 떨기만 했다. 그녀의 뺨 위로 굵은 눈물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힘없이 떨구어지는가 싶더니, 탐서랑의 어깨를 잡는 것이었다. "왜 이제 왔어요! 왜!" 그녀는 방금 탐서랑을 죽일 뻔했던 손으로 그를 안았다. 탐서랑도 감격에 겨운 얼굴이 되었다. 그의 두 팔이 굳세게 그녀를 안았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당신을 죽이고 싶었어요... 한 번만 더 만나면 죽여 버리려고 했었어요... 흑... 흑... 하지만 난 당신을 죽일 수가 없어요...!" 모순된 여심은 눈물과 함께 설움을 토로했다. 탐서랑은 그녀를 안은 채, 그녀가 볼 수 없게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헐떡이는 소리로 말했다. "연매! 나도 그대가 보고 싶었어. 얼마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난 연매의 얼굴도, 몸도 너무 보고 싶고, 안고 싶었어...!" 탐서랑은 배고픈 야수가 토끼를 덮치듯 남궁화련의 입술을 덮쳤다. 남궁화련은 목마른 사람이 물을 들이키듯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누가 질세라, 헤어져 있던 세월의 회포를 깡그리 먹어치우듯 서로의 입술을 빨았다. "음...! 음! 음!" "아, 음...! 음!" 코와 입으로 짤막한 비명까지 내지르며 이어진 짧고도 강렬한 입맞춤이었다. 입술을 뗄 때는 쩍, 소리까지 날 정도로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연매, 안으로 들어가지!" 탐서랑은 남궁화련이 허락도 하기 전에 그녀를 덥석 안아 들더니 두 발로 방문을 닫아 버렸다. 남궁화련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침상에 눕혀졌다. 탐서랑의 손이 서둘러 그녀의 옷을 벗겨 내렸다. 백옥 같은 나신이 등불 아래 드러나자, 탐서랑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일 년 전 그토록 사랑해 주었던 육체를 그는 다시 대면하게 된 것이다. 남궁화련은 전에 보았던 당가의 여식만큼이나 좋은 체질에다가, 유난히 예민한 성감(性感)을 갖고 있어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자지러지곤 했었다. 일 년 동안 그의 손길이 닿기를 기다리며 무르익어 온 그녀의 육신은 그의 숨을 턱 막히게 할 정도였다. 탐서랑의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를 들은 남궁화련은 눈을 뜨더니 살짝 눈을 흘겼다. "색마...!" "연매한테는 언제나 색마이고 싶어!" 탐서랑은 그녀의 젖가슴에 깊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는 고수다운 솜씨로 재빨리 옷을 벗어부쳤다. 한데... 남궁화련은 웃옷을 벗은 그의 가슴에 검은 호신갑(護身甲)이 입혀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머!" 탐서랑은 바지를 벗으며 씩 웃는 것이었다. "연매의 무공이 혹시 많이 진전되지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 말이야!" 이미 마음이 풀어진 남궁화련은 짐짓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만일 내가 장력이 아니라 검으로 당신을 찔렀다면 어쩔 뻔했어요?" "그럼 난 벌써 십 리 밖으로 도망가 있을 거야." 말을 마쳤을 때, 탐서랑은 이미 벌거벗은 상태였다. 남궁화련은 그의 나신을 꿈꾸듯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난 이제 이 사람을 따라 도망갈 거야. 아버지는 죽어도 색마에게 나를 시집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이 사람은 타고난 색마이니, 내게서 흥미를 잃으면 떠나 버릴지도 몰라. 난 이 사람을 좀더 사로잡아야 해!' 남궁화련은 좀더 뜨겁게 그를 달구어 주리라고 결심했다. 그리고 탕녀(蕩女)나 할 것 같은 기묘한 자세를 잡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자, 낭군! 어서 이리 오세요..." 탐서랑은 그녀의 의중을 읽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그는 금방 달려들지는 않았다. 오늘은 좀더 특이한 일을 꾸며 볼 생각이었다. 그는 남궁화련을 자신의 여자로 삼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좀 더 농염해지고 많은 기술을 익히기를 바랬다. 남궁화련은 남궁세가의 유일한 후계자이니, 설령 남궁세룡이 자신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의 사후에는 그 많은 남궁세가의 재산이 모두 자신에게 넘어오게 될 것이 아닌가! 탐서랑은 남궁화련이 떨구었던 두 개의 면령을 집어 들었다. "연매! 우리 오늘은 좀더 재미있게 놀아 보도록 하지. 이 두 개의 종은 특별한 쓰임새가 있는 거야. 내가 말했지? 적적한 귀부인들의 밤을 달래 주는 것이라고." 남궁화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난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었어요..." "내가 가르쳐 주지. 자, 연매. 다리를 벌려 봐...!" 남궁화련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두 개의 면령을 든 탐서랑의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아아!" 남궁화련은 별안간 자지러질 듯 비명을 질렀다. 하나 그것은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자, 됐어. 이제 무릎을 꿇고 앉아 봐!" 남궁화련은 두 개의 면령이 모두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간 것을 알았다. 그녀의 아래쪽에서 체온을 느낀 면령이 달콤한 방울 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침상 위에 무릎을 꿇었다. 탐서랑은 그녀의 뒤에 앉더니, 팔을 뻗어 그녀의 젖가슴을 쥐었다. "자, 이제 몸을 흔들어 봐. 위아래로...!" 푹신한 침상은 남궁화련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몸을 흔들자 면령의 울음 소리가 더욱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기묘한 느낌이 몸 아래쪽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 갔다. 그녀는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아...! 이건, 이건 대체...!" 탐서랑은 그녀의 어깨에 턱을 대고, 그녀와 함께 몸을 흔들었다. "여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물건이지, 연매! 마치 내가 연매를 즐겁게 해주는 것처럼 말이야." 남궁화련은 더 이상 질문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단 김을 내뿜으며 면령이 주는 열락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탐서랑은 그녀가 흥분하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쾌감을 느꼈다. 언제나 경험하는 것이긴 하지만, 달아오른 여자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반개한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신비, 복숭아 빛으로 달아오른 얼굴, 단 김을 내뿜는 벌려진 입, 절정에 치달을 때마다 붉은 반점이 감도는 흰 피부. 꼿꼿이 고개를 든 젖꼭지와 젖가슴, 그리고 물이 넘치는 계곡...! 탐서랑은 천상의 아름다운 경치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이토록 흥분시키고, 즐겁게 만드는 것은 세상에 또 존재하지 않았다. "연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나직이 속삭이며 그녀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면령을 빼내고는 곧바로 그 면령보다 더 신묘한 것을 집어넣었다. 이미 흥분할 만큼 흥분한 남궁화련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날 데려가 줘요! 데려가 줘요!" "그래, 연매! 이제 나랑 함께 사는 거야." 누가 들을까 하는 걱정은 이미 접어 둔 채,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환락 속으로 빠져 들었다. 방안은 온통 열기로 가득 찼고, 세상이 모두 분홍빛으로 변해 갔으며, 오직 침상만이 힘에 겨워 삐걱삐걱 비명을 질러댔다. 취화비도.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복면을 쓰고 있었다. 갓난아기였던 그녀에게 교주 몽중마령이 그런 운명을 부여한 것이었다. -자객은 언제나 자취가 없어야 하며 사람이 갖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너는 여자아이니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얼굴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교주의 뜻이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은 오직 그녀 자신과 교주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복면을 벗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하나 그 사람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한 권의 책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하도 오래 읽어서 귀퉁이가 닳고닳은 책이었다. 취화비도의 얼굴은 흘러내린 머리칼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입술이 바르르 떨리다가 문득 목소리를 뱉어 냈다. "결국 결행을 하시려는 겁니까?" 그녀는 여자로서의 얼굴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목소리마저 버린지 오래였다. 그녀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완벽한 남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나 방금 뱉은 목소리는 그녀가 낼 수 있는 가장 여성스러운 소리였다. 물론 그것조차도 귀가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듣기에는 남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겠으나, 분명히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녀가 이와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한 것은, 오직 그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아 주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 사람은 너무도 무정했다. "왜 명령을 어기고 돌아온 거냐?" "교주께서 복귀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폐관 수련에 들어가신다 하셨습니다. 이번 수련이 끝나면 교주께서는 신공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등을 돌리고 있던 그의 어깨가 문득 흠칫했다. 하나, 그는 곧 이어 비릿한 웃음을 터뜨렸다. "흥...! 그래? 과연 그답군. 그래야 중원밀교의 교주라 할 수 있지." 취화비도는 웃음 때문에 흔들리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소교주님! 적무공과 몽혼일도의 말 때문에 교주께서는 소교주님을 의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흥! 고작 그것을 알리려고 돌아온 거냐? 그런 말을 하면 내가 혹시라도 포기할까 봐?" "소교주님..." "닥쳐라! 나는 반드시 해내고 말겠다. 나는 그보다 강해져서 그를 죽이고야 말겠다. 말린다면 너도 죽이겠다, 비화공!" 취화비도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소교주님, 소교주님께서 그토록 증오하는 사람이 대체 누군지 아십니까?" 파악! 마침내 그가 취화비도를 돌아보았다. 등잔불 아래 빛나는 세 개의 눈이 섬뜩한 광채를 띠고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가 비록 돌아보았지만, 취화비도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복면을 벗고 있는 것을 보고도 눈꼽만큼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마치 그녀가 언제나 그런 모습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분노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알지. 그는 내 아버지다! 너는 내가 그걸 모를까 봐 확인시켜 주는 거냐?" 취화비도는 고개를 떨구었다. 머리칼이 흘러내려 얼굴을 가리는 것을 그녀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아주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신다면,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어찌 당신의 부친이자 교단의 어르신을 해하겠다는 생각만 하시는 겁니까?" "흥...!" 그는 가볍게 비웃으며 자신이 지금까지 읽고 있었던 책을 들어 보였다. "너는 이 책이 어떤 것인지 아느냐?" 취화비도는 대답하지 못했다. 책을 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게도 어머니가 계셨다. 그분은 중원인이었다. 내 아버지가 왜 그녀와 결혼했는지 아느냐? 아니... 결혼도 아니었다. 그저 데리고 산 것일 뿐이다. 그는 평생에 오직 한번 내 어머니에게만 씨를 뿌렸다. 아들을 보기 위해서였지. 중원인 아들을 낳아 중원 무림에 침투시키기 위해서...! 그 목적을 이루고 난 뒤, 그는 내 어머니를 죽였다. 어머니를 안던 바로 그 손으로 말이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취화비도는 숨조차 죽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운명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낳기 전에 그의 비전을 훔쳐보고는 그것을 필사(筆寫)했다. 하나 다 베끼지 못하고 반 권쯤을 베껴 냈을 때 내가 태어나고 말았다...! 그녀는 죽기 전에 백혈공에게 이 책을 맡겼다. 나는 백혈공에게 삼 년 전 이 책을 받으면서 비로소 그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취화비도는 백혈공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몽중마령에게는 세 명의 영주가 있는데, 그 중 백혈공의 무공이 가장 뛰어났다. 얼마 전 적무공과 백혈공이 교주의 명을 받고 서장으로 떠났었는데 그 중 적무공만이 돌아왔고 백혈공은 교주의 밀명을 받아 어딘가 모르는 장소에서 활동 중이라고 했다. 그만큼 교주는 그를 신임했는데, 그런 그가 교주 몰래 소교주를 도왔다는 사실은 그녀로서도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 더욱 놀라운 것은, 대체 소교주가 어디서 얻었는가 궁금하게 여겼던 교주의 '비전' 절반 가량이 바로 그의 어머니로부터 왔다는 사실이었다. 취화비도는 알고 있었다. 교주에게는 한 권의 진경이 있고, 그 진경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는 비법이 적혀 있다는 사실을. 그 책에는 두 가지의 길이 적혀 있는데, 하나는 연성이 빠른 대신 불완전하고, 또한 패도적이라 수련자가 위험할 수도 있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막대한 시일이 걸리지만 완벽하고, 수련자가 위험에 빠질 일이 거의 없는 방법이었다. 소교주가 가지고 있는 반 권 분량의 필사본에는 그 중 첫 번째 방법이 실려 있었고, 소교주는 삼 년 전부터 그것을 익히기 위해 절치부심했으며, 숱한 생명들을 말려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십여 년 전부터 신공을 연성하고 있었던 아버지를 쫓아가려 한 소교주지만, 그만큼 그 방법은 위험한 것이었다. 만일 소교주의 어머니가 살아 있어 자신이 아들에게 준 것이 극약처방임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통탄할 것인가...! 소교주를 둘러싼 비극의 확실한 윤곽을 잡게 된 취화비도는 자신의 힘으로는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소교주. 당금 무림에서는 삼목신룡 무옥이자 개방의 신임 방주이며 격색마회의 회주라는 놀라운 신분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강호 최대 방파에 침투시켜 중원 무림을 제압해 나갈 틀을 마련하게 한 다음, 자신이 신공을 완성하게 되면 나를 이용하여 천하제일인으로 서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 꾀에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먼저 신공을 연성하여 그를 앞지르고 말겠다. 중원 밀교를 내 손안에 넣고 무림도 내 손안에 넣을 것이다...!" "소교주님!" 취화비도는 이번의 애원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며 결연하게 말했다. "소교주님이 가시는 그 길은 자칫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시지 않...!" 소교주의 눈이 번뜩임과 동시에 소매가 펄럭였다. 그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다시 돌아앉은 것이었다. "사내가 한번 결심하면, 설사 죽음이 눈에 보이더라도 가는 법이다." 취화비도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긴 속눈썹 끝에 이슬 같은 것이 맺혔다. 지난 몇 년 간 그녀는 교주와 소교주 두 부자의 신공 연성을 위해 숱한 여인들을 끌어오고, 또 두 사람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스스로 간살자(姦殺者)의 역할을 맡아 왔었다. 사람을 하나씩 죽일 때마다 그녀에게서는 조금씩 '인간'이라는 것이 사라져, 이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나, 그녀에게도 눈물은 남아 있었다. 비록 맺히자마자 말라 버리는 아주 작은 양이었지만. 소교주가 책을 덮고 일어섰다. "그의 성취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면 나도 서둘러야겠다. 지금 마침 적당한 계집이 있다. 그 동안은 내 굳이 안에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참아 왔지만...!" 취화비도는 고개를 반짝 들었다. 그녀는 그 순간 진설영을 생각했다. 하나, 소교주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녀의 어렴풋한 기대를 뭉그러뜨렸다. "남궁세룡은 아마 당문의 가주와 환담을 나누느라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흐흐흐...!" 그는 괴소를 날리며 소리없이 문을 나서고 있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 싸늘한 말 한마디가 마지막으로 들려 왔다. "그건 그렇고, 비화공. 너는 복면이 더 잘 어울린다. 자객에게 얼굴이란 필요없는 거야!" 소교주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진 뒤, 취화비도는 창백한 얼굴 가득히 쓴웃음을 베어물었다. '당신들 부자는... 어쩌면 그렇게 똑같습니까...!' 탐서랑은 정말 오랜만에,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남궁화련의 방을 나섰다. 대락불사신공을 연마한 뒤로 그에게는 마땅한 잠자리 상대가 될 만한 여자가 없었다. 혹시 만음요화라면 어떨까 늘 군침을 흘리긴 했지만, 만음요화는 어찌 된 일인지 그 허여멀건한 애송이에게 푹 빠져서는 마치 정숙한 여자로 둔갑이라도 한 양 그에게 조금의 틈도 주지 않은 것이다. 여행길 내내 그를 모신 화금궁의 두 제자는 어림도 없었다. 그야말로 목마른 사람에게 간신히 주어지는 한 방울의 물일 뿐이었다. 한데 오늘 남궁화련은...! 그에게 엄청난 기쁨과 가벼운 어지럼증까지 심어 준 것이다. 그녀는 체질이 좋을 뿐 아니라 그를 기쁘게 할 요량으로 열과 성을 다했기에 그만큼 만족을 선사할 수 있었다. 아예 그 길로 짐을 싸서 따라 나오려는 남궁화련을 탐서랑은 간신히 설득하고 두 가지 약속까지 한 뒤에야 방을 나설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앞으로 영웅대회가 끝나는 날까지 매일 밤 그녀를 찾아올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영웅대회가 끝나는 대로 그녀를 데리고 멀리 달아날 것. 탐서랑은 어두운 숲을 지나 담벼락으로 몸을 붙인 뒤 마지막으로 남궁화련의 방을 돌아보고 씩 웃었다. '하하...! 고것, 참. 좋다, 이 탐서랑이 지금까지 없던 파격을 보여 주마. 너는 내가 앞으로 계속 데리고 다니며 예뻐해 주겠다.' 그는 막 담벼락 위로 몸을 날리려다가 주춤했다. 저쪽 멀리에서 누군가 오는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크...! 잘못하면 들키겠군.' 그는 수풀 속에 몸을 감추고 잠시 기다렸다. '응?' 그는 한 사람이 은밀하게 남궁화련의 방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저놈은...? 아니, 왜 저놈이 저 방으로 들어가지?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그는 눈에 불을 켜고, 귀를 바짝 곤두세웠다. 남궁화련의 방 앞에 선 '그놈'은 방문 앞에서 점잖게 말했다. "남궁 소저, 부친의 전갈이 있어서 왔소. 실례가 안 된다면 좀 뵈어도 될까요?" 탐서랑은 '그놈'의 말을 듣고서야 슬며시 올라오려던 질투를 억누를 수 있었다. '하긴,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는 자신이 질투를 하려 했다는 사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어쭙잖아 피식 웃으며 담벼락 위로 몸을 날렸다. 남궁화련은 기분좋은 나른함을 즐기며 벌거벗은 몸을 침상 깊이 파묻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 몇 달 간의 이유없는 우울함과 짜증이 어디로 갔는지 일시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정말 행복했다. 한데, 그 행복을 깨는 방문자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처음에 들려 왔을 때 그녀는 일단 화가 났고, 그 다음엔 당황했다.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가 직접 온 것을 보니 아버지가 무슨 중요한 말을 전할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옷을 주워 입으며, 입으로는 잠시 기다리라고 바깥에 알렸다. 하나 서두를수록 옷은 몸에 꿰어지지가 않았다. 한데... "너무 서두르지는 마시오. 보기가 좋구려." 어느새 문은 열려 있었고, '그'가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평소에 그녀가 보던 사람이 아닌 듯했다. 이상한 귀기와 음침한 살기, 그리고 그녀의 반라(半裸)를 쏘아보는 눈에는 야릇한 욕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순 정신이 아뜩했다. 멍한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들어왔다. 피를 잔뜩 마신 것처럼 붉디붉은 눈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공포였다. "아...!"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나 어느새 그녀의 아혈은 제압되어 있었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로 쓰러졌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는 말 한마디, 동작 하나 낭비하지 않고 바로 그녀를 덮쳐 왔다. '그'가 들어왔을 때 그녀는 무지막지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찢어진 걸레쪽처럼 다뤘지만, 그녀는 그것이 무섭다기보다는 '그'가 일을 끝내고 자신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더 두려웠다. '날 죽일까? 아냐, 그냥 내 몸이 탐이 나서 그러는 건지도 몰라. 죽이진 않을 거야, 죽이진 않을 거야...!' 하나 그것이 부질없는 소망이라는 것을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의 신분과 명예는 지금 '그'가 저지르는 짓과는 너무나 판이하다. 과연 그런 것들이 일순간에 파괴될지도 모르는데 '그'가 그녀를 살려주겠는가!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막 행복을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이런 일이 닥쳤다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그'는 확실히 그녀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하나 구태여 일을 끝낸 뒤에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 일 자체가 가장 효과적인 살인 행위였다. 시간이 차츰 흐르자, 그녀는 문득 자신의 몸 전체에 기이한 열기와 고통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저 그 일만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몸에 퍼지는 열은 점점 달아올라 그녀는 마치 용암 속에 몸을 담근 것 같았다. 머릿속의 뇌수마저도 익어 버릴 것 같은 고통이었다. '아... 아... 제발...! 제발...!' 그녀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두 손을 불끈 쥐었다. 혈도가 눌려진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동작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그녀의 손바닥 안에는 두 개의 면령이 쥐어져 있었다. 면령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탐서랑이 아까 이야기 해주기를, 이 면령은 한 번 여자의 몸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두어 시진 정도는 기능을 못한다고 했다. 남궁화련은 안타까웠다. 지금 그녀의 몸은 타오르다 못해 빨갛게 변했고, 좀 있으면 햇빛에 오래 내놓은 생선처럼 말라붙을 것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탐서랑의 정표나 마찬가지인 면령의 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하나 면령은 울지 않았다. "크흐흐...!" 갑자기 그녀의 몸 위에서 '그'가 웃었다. '그'의 눈이 완전히 붉게 물들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남궁화련의 몸은 화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열기는 고스란히 '그'에게 빨려 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는 앞이 캄캄해지며 눈의 기능이 마비되더니 눈두덩에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만일 그녀에게 또 다른 눈이 있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자신의 안구가 쪼글쪼글 쪼그라들며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으리라. '난... 난... 죽는...' 그녀의 의식이 흐릿해져 갈 때, 그리고 그녀의 체온이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기적적으로 면령이 울렸다. 그 소리는 지금까지 면령이 냈던 소리들 중에 가장 컸다. '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파아악! '그'는 무지막지하게도 면령을 쥔 그녀의 손 위로 일장을 날렸고, 그녀의 손과 면령이 함께 으스러져 버렸다. '그'는 그리고 나서도 불안한 듯 일어나 문밖을 살폈다. 그리고 혀를 찼다. "이런...! 하필 그녀가..." '그'는 이미 꼬치꼬치 말라붙은 남궁화련의 몸과 문밖을 번갈아 보며 잠시 갈등했다. "흠... 이만하면 성취라 할 만하니... 오늘은 참지!" '그'는 마지막으로 남궁화련의 명치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일 각을 못 넘기고 죽을 목숨이었지만, 마무리를 확실히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남궁화련의 몸뚱어리가 그 일장을 맞고 벌레처럼 꿈틀거릴 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지막 숨. 남궁화련을 놀랍게도 그것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다. 비록 눈은 없었지만, 그녀는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누군가 오고 있고, 그 사람 때문에 '그'가 갔다는 것을. 그녀는 죽기 전에 알려야 했다. '그'가 누구인지를. 요 근래 개방 인근에서 일어났던 괴사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진설영이 남궁화련의 방 근처에 오게 된 것은, 어떻게 말하면 순전히 우연이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까의 회의가 끝난 뒤 그녀는 이상한 흥분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서성이다가, 자신이 감시하기로 한 부귀산장 일행의 동태나 살필까 하고 총타를 나갔다. 그녀가 부귀산장 일행의 숙소에 도착하여 발견한 것은 그들 일행 중 한 명인 얼굴을 가린 사내가 밤나들이에서 돌아오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그가 개방 총타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수상한 자들은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잡아 족치려다가 생각을 바꾸어 그가 왔던 길을 거꾸로 밟아 보았다. 혹시 총타 안에 그와 호응하는 첩자가 있는 것은 아닌지 알아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도착한 것은 남궁화련의 처소 근처였고, 마침 그때 기적적으로 면령의 울음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 왔다. 그리고,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곳에서 빠져 나와 달아나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쫓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그림자는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리하여... 그녀가 남궁화련의 방으로 황급히 뛰어들어갔을 때 발견하게 된 것은 너무나 끔찍한 광경이었다. "남궁 소저! 남궁 소저!" 진설영은 사실 남궁화련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인 섬뜩한 시신을 붙잡고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이건, 그 동안 이 근처에서 발견된 그 시체들과 똑같아!' 진설영은 치를 떨었다. 그때, 시체인 줄 알았던 남궁화련의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그녀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이미 목구멍과 혀도 말라서 쪼그라들어 버린 것이다. 대신 남궁화련은 있는 힘을 다해 손가락으로 '삼(三)'을 가리켜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진설영의 얼굴이 있음직한 방향을 가리켰다. 남궁화련에게 좀더 힘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녀가 앞을 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정확히 진설영의 눈을 가리켰을 것이다. 하나 안타깝게도 거기까지가 그녀의 최선이었다. 남궁화련은 그때까지 잡고 있는 마지막 숨을 내뿜으면서 부디 진설영이 자신이 말한 의미를 눈치채주기를 바랬다. 그녀는 웃고 싶었다. '그를 잡아... 안 그러면 너도 죽을 거야... 나처럼...!' 마지막 숨을 놓치고 나니 무척이나 편안한 암흑이 찾아들었다. 죽은 남궁화련은 평온을 찾았지만, 살아남은 진설영에게 남은 것은 공포와 의혹과 혼란뿐이었다. 그녀는 남궁화련이 말하고자 한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지만, 그것을 정확히 판단할 만큼 냉정하지는 못했다. '이, 이런 일이...! 어떻게 영웅대회 하루 전날에...!'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일단은, 사람들을 불러모아야 해!' * * * 그 밤의 분위기란 실로 묘해서, 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운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개방에 도착하던 순간부터 목에 무엇이라도 걸린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는데, 그 이유는 오직 먼 발치에서 본 추면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저자가 왜 영웅대회에 참가한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정작 중요한 이유는 추면인을 다시 보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추면인을 마땅히 증오하고 경멸해야 했다. 한데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그의 마음속에 그런 미움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좀더 색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밤이 깊어 갈 때쯤에야 소운비는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추면인과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혜와의 배신에 대해 듣고 난 뒤 그는 분노하고 절망한 나머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결심을 했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는 그 배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혜와에 대한 신뢰의 앙금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배신당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사람의 심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추면인에게 무언가 좀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결국 처소를 나와 외객들이 머무는 곳을 향했다. 나오긴 나왔지만 그는 막막했다. 외객들이 숙소로 쓰는 임시 초옥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그 중 어디에 추면인이 머물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미 밤이 늦어 집 밖으로 나와 있는 사람도 없어 물을 수도 없었다. 소운비는 마음만 급했던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가 씁쓸한 기분으로 몸을 막 돌려 처소로 가려고 하는데, 한 초옥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보이는 그 얼굴은, 지난번에 만음요화와 일행이었던 미청년이었다. 소운비는 반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초옥 옆으로 몸을 숨겼는데, 애초에 그가 서 있던 곳이 워낙 어두웠기 때문에 미청년 오랑은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오랑은 사방을 조심스레 둘러보더니 개방 총타를 둘러싼 담벼락 쪽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여 갔다. 소운비는 그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흠... 용양도인을 구출하려고 하는 모양이군.' 그는 일전에 평안객잔에서 오랑과 용양혈루단의 밀담을 엿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연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때, 오랑이 방금 나왔던 초옥의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조용히 걸어나왔다. 만음요화였다. "오랑!" 그녀가 나직이 불렀다. 쥐새끼처럼 초옥의 그림자 사이로 스며들려던 오랑의 몸이 멈칫했다. 만음요화의 음성은 소운비로서는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가시려는 거예요? 아버지를 구하러?" 오랑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만음요화를 향해 돌아섰다. "알고 있었군요...!" 만음요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랑이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죠?" 만음요화가 어쩐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오랑이 나에게 왔을 때부터..." "어떻게?" "내가 비록 여자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지는 않았어요. 알아 볼 만큼은 알아 보았죠. 그래서 알게 되었어요. 당신이 용양도인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것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음요화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애증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냥 내버려뒀죠? 당신을 속이려는 것을 알았으면서?" 만음요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에게 속아 주는 것이, 당신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오랑은 우는지 웃는지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목소리 역시 우는지 웃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럼 왜 끝까지 참아 주지 않고 지금 따라 나온 겁니까?" 만음요화는 만음요화답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용양도인을 구하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해요. 오늘밤은 경계가 보통 삼엄하지 않을 거예요. 내일 우리 화금궁의 제자들이 내 신호에 따라 한꺼번에 습격을 할 것이고, 그 뒤로는 혼란스러울 테니 그때 구출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오랑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하지만 오늘 개방 사람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는데, 내일 영웅대회를 시작할 때 우리 아버지를 처형한다더군요. 그러니 기다릴 수가 없어요." 만음요화의 눈빛은 갈수록 안타까워졌다. "내일 제가 돕도록 하겠어요." 오랑의 입가에는 쓰디쓴 웃음이 떠올랐다. "당신이? 당신의 경쟁자인 우리 아버지를 구출하는 일을 돕는다고? 글쎄..."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나는 당신을 속이러 온 사람이고, 그래도 그는 나의 부친입니다. 난 가겠어요!" 오랑은 별안간 홱 몸을 돌렸다. 만음요화가 그를 잡을 듯이 발걸음을 옮기다가 입술을 깨물더니 그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한마디를 던졌다. "만일 실패하면 돌아와도 좋아요! 나는 기다릴 수 있으니까." 오랑은 다시 한번 멈칫거렸다. 말을 뱉고 난 뒤 만음요화는 사랑에 실패한 처녀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한참 만에 만음요화는 고개를 들고 오랑에게 말했다. "나는 많은 남자들을 알고, 또 함께 잤어요. 그리고 그 모두를 내버렸어요. 모든 사람이 내 몸을 가질 수는 있지만, 아무도 내 마음을 가진 적은 없어요. 오랑, 그대는... 부끄러울 정도로 나보다 어리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대에게 꼼짝할 수가 없어요." 만음요화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그대가 나에게 그냥 잘 보이려는 사람들과는 다른 데다가... 너무도 젊어서... 내 잃어버린 옛날을 생각나게 해서..." 만음요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망설이던 오랑이 돌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나도... 그냥 당신을 속이려고만 했지만... 어쩐지... 당신이 어머니 같고... 포근하고..." 오랑의 말은 만음요화보다 훨씬 동이 닿지 않았지만, 그 말뜻은 충분히 그녀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만음요화는 비로소 긴장을 풀며 두 눈에 눈물을 담았다. "그래요. 우린 서로를 좋아하니, 서로를 속일 이유가 없어요, 오랑! 내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아버지를 구출하겠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참으세요." 오랑이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궁주...!" "이젠 옥녀라고 불러요!" 두 사람은 속삭이며 서둘러 처소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소운비는 비로소 숨을 크게 쉴 수 있었다. 의외의 광경을 목격한 소운비의 가슴은 묘한 회한으로 들끓고 있었다. '만음요화의 저 태도는 뭐란 말인가...? 그녀가 저 오랑이라는 사내를 진심으로 생각하다니...!' 그의 가슴은 비수에 찔린 듯 아파 왔다. '희대의 탕녀인 그녀조차도 저럴진대, 혜와는 어째서 나를 배반했단 말이냐...? 어째서!' 그는 가슴이 미어질 듯하여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발걸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저 앞에 희끄무레한 인영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인영은 죽립을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추면인이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소운비의 마음은 반갑기도 하고 쓰라리기도 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품었다. 추면인은 이미 그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좀 망설이는 듯하더니,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지 주춤주춤 소운비를 향해 다가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추면인이었다. "형장께서는 어째서 이 밤에 잠을 못 이루고 계시오?" 소운비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신을 만나고 싶었소." 추면인은 다시 한번 머뭇거렸다. 소운비의 말이 과연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듯했다. "형장은 나에게 원한이라도 갚고 싶소?" 추면인의 입에서 나온 반문은 그것이었다.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아니오. 나도 무엇이라 뚜렷하게 이유를 밝힐 수는 없지만, 당신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오." "그렇다면?" "그저... 나는 당신에게 몇 가지를 묻고 싶을 뿐이오." "무엇을?" 소운비는 생각했다. 그가 추면인에게 묻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은 당신이 왜 이 영웅대회에 왔는지가 궁금하구려." 죽립 밑으로 드러난 추면인의 얄팍한 입술이 일그러졌다. "어리석은 질문이군. 비록 명문의 사람은 아니지만 나도 엄연히 무림인의 한 사람인데, 전무림인을 상대로 한 영웅대회에 오지 못할 까닭이 또 무엇이오?" 소운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면인의 말은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하나 의심하는 마음까지 깡그리 지울 만큼 강한 설득력은 없었다.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소?" "한 가지 있소." "뭐요?" 추면인은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소운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혜와가... 어디로 갔는지, 대강이라도 가르쳐 줄 수 있겠소?" 추면인은 순간 말을 잊었다. 소운비의 그 질문은 뜨거운 목젖을 간신히 누르고,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뱉어 내는 기운이 역력하여, 그가 이 질문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사나이의 자존심을 스스로 죽이고 뱉는 말이었으며, 그만큼이나 절박한 질문이었다. "흥...!" 한참 만에 추면인은 갑자기 비웃음을 던졌다. "이제 보니 당신은 그녀를 찾아가서 복수하고 싶은 모양이구려. 그런 탕녀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지만, 내가 그녀와 헤어진 지도 꽤 시일이 지났는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안다 해도 거기에 계속 머무르고 있다는 보장이 없지 않소?" 추면인의 입에서 '탕녀'라는 말이 뱉어져 나올 때 소운비의 두 주먹은 순간적으로 불끈 쥐어졌다. 하나 그 힘은 금세 스르르 풀렸다. 그리고 소운비의 입이 열렸다. "당신은... 비록 그녀와 함께 있었다고 하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게 분명하오." 소운비의 입에서 나온 엉뚱한 소리에 추면인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당신 말은 맞소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오?" 소운비는 추면인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서고 있었다. 그의 대답은 희미했다. "만약 사랑했다면, 아마도 그녀가 없는 지금 삶의 의미 또한 잃었을거요. 마치... 나처럼 말이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마치 지금 곧 자진이라도 할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추면인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여전히 비웃는 어조로 말을 했지만, 그 목소리 역시 어딘가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사내 대장부가 아니오. 기껏 그런 여자 때문에 삶의 의미가 어쩌구저쩌구 한단 말이오?" "당신은 모를 거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배신당하는 고통을 모르오. 이 넓은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건..." 소운비는 목이 메이는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왔던 길로 돌아가고 말았다.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추면인과의 재회는 씁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그의 뒤에서 추면인이 외치고 있었다. "당신, 너무 고지식하오! 여자에게 배신당했다고 그렇게 사람이 쭈그러들 수 있소? 한심하군...! 정말 한심해!" 소운비는 귀를 틀어막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총타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한 소운비는 의외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너댓 명의 개방 사람들이 입구를 지키는 정도였는데, 갑자기 인원도 수십 명으로 불어났고, 대낮처럼 횃불이 밝혀져 있는 것이었다. 그는 간신히 당문의 일행이라는 것을 밝히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긴장과 살기로 번들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그에게 오직 한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다. '흠... 분명 안에서 사건이 일어난 것이로군!' 하나 일이 어떻게 돌아가던, 그로서는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오직 번뇌를 잊을 만한 그 무엇뿐이었다.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죽엽청주(竹葉淸酒)를 찾았고, 그 차디찬 술만이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함께 밤을 새주었다. * * * 규염개. 진설영. 무옥. 남궁세룡. 저녁 나절에 회의를 했던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모였다. 바뀐 것은 오직 시간이 새벽이라는 것과, 그들의 얼굴 표정이 전과는 달리 침통하면서도 분노로 물들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다른 세 사람의 눈은 한 사람에게로 쏠려 있었다. 남궁세룡의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침통함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짙었고, 분노 역시 다른 사람들보다 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오늘로 유일한 일점 혈육을 잃은 것이다. 한참 만에 무옥이 입을 열었다. "남궁 가주의 결정을 기다리겠소.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그가 말한 '결정'이란 진상 규명을 대대적으로 할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처리할지 하는 것이다. 상황이 그만큼 난처했기 때문이다. 일이 일어난 즉시 흉수의 흔적을 쫓는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고, 진설영은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 어떤 인영이 그 직전에 남궁화련의 방을 나간 것만 이야기하고, 부귀산장의 일행 중 하나에 관한 이야기나 남궁화련의 마지막 몸짓에 대해서는 함구해 버린 것이다. 물론 강경하게 나가기로 한다면야 당장 모든 사람들을 탐문하여 범인을 색출하는 작업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그들이 당면한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그런 행위가 영웅대회를 파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 자신이 주인이 되어 마련한 잔치상을 엎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둘째는 사실 남궁화련과 비슷한 죽음이 이전부터 개방 근처에서 계속 일어났던 것이라, 반드시 이번에 개방 주변에 모인 사람들 중에 범인이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 잘못하면 이 일은 엉뚱하게도 군웅들에게 무고죄를 지은 셈이 되어 개방과 격색마회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나 어쨌든 이것은 격색마회 중 한 사람의 혈육이 살해당한 일이며, 영웅대회를 코앞에 두고 벌어진 일대 사건이었다. 무옥의 그 말은 지금 격색마회가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남궁세룡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남궁세룡은 무옥의 질문을 받자마자 일순 고개를 떨구었다. 부르르 떨리는 주먹이 그의 갈등을 말해 주고 있었다. 주먹의 떨림이 멈추는 순간, 그의 고개도 번쩍 치켜 들어졌다. 그의 눈에는 한 세가의 가주다운 의지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딸의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 아비된 사람의 마음이지만, 본인도 이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소이다. 하니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는 편이 옳을 것 같소. 아마 죽은 화련이도 그것을 바랄 것이오." 규염개가 물었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신다 함은...?" "내 딸이 흉수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탐서랑에게 몸을 더렵혔던 일을 비관하다가 이 아비와 무림의 영웅들에게 복수를 부탁하며 자결한 것으로 하자는 말이오. 내일 그렇게 발표한다면 이는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낼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힘으로 색마들을 소탕한다면 어쨌든지 간에 화련이를 죽인 범인도 함께 처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 한 개로 두 마리 새를 잡으려는 남궁세룡의 계산을 이해한 것이었다. 남궁세룡의 이 판단은 현재 그들이 처한 난처한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궁화련이 세가의 여식으로서 두 번이나 음적의 손에 몸을 더럽힌 치욕스러운 사실도 감춰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남궁세가도 좋고, 격색마회도 좋자는 의견이다. 무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 가주의 말씀은 참으로 옳습니다." 규염개 역시 찬탄했다. "그런 참변을 겪으셨으면서도 가주의 혜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시는군요. 저는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진설영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옥은 곧바로 규염개에게 안팎의 입을 단속해 이번 일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시켰고, 그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남궁세룡과 규염개가 먼저 자리를 비웠고, 진설영은 어찌 된 일인지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피곤한 듯 두 손으로 양 관자놀이를 만지고 있던 무옥이 문득 그녀를 보았다. "왜 가서 자지 않소? 피곤할 텐데...!" 그녀를 보는 그의 눈은 회의를 할 때와는 달리 다정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의 일이 있은 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에 그녀와 단 둘이 이야기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진설영은 그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무옥이 앉은 의자 뒤에 가서 섰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에 올리는 것이었다. '응...?' 무옥은 그녀의 의외의 행동에 다소 놀랐다. 진설영이 여느 여자들보다 대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무림의 일에 대해서나 그렇지 남녀 사이의 일에서는 오히려 보통의 여자들보다도 더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옥..." 더구나 진설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의 이름이었다. 평소처럼 '방주'나 '회주'가 아닌 '무옥'이라는 이름인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두 손이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것이 아닌가...? "난... 무서워요. 지쳤어요...!" 무옥은 그녀의 말을 듣고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그 손을 잡아 주었다. "무섭다니...! 설영도 역시 여자였군." 그는 어느 정도 진설영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냉면검화라고 불릴 정도로 냉정한 그녀라지만 그래도 역시 여자인 것은 별수가 없을 터. 최근 연달아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고스란히 감당하기에는 힘이 부칠 것이다. 더구나, 그 끔찍한 남궁화련의 시신을 직접 목격한 당사자가 아닌가! 진설영은 허리를 굽혀 무옥의 어깨에 뺨을 댔다. "내가 너무 약해 보이죠?" "그러니까 훨씬 여자답군." 무옥은 몸을 돌려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자연스럽게 진설영은 그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고, 두 사람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무옥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머리를 자신 쪽으로 당겼다. 진설영은 어느새 두 눈을 사르르 감고 있었다. 두 번째의 입맞춤은 처음보다 훨씬 부드럽고 여유가 있었다. 하나 그 달콤하고 짜릿한 촉감은 결코 처음보다 못하지 않았다. "으음...!" 웬일인지 진설영은 가벼운 신음까지 흘리며 그의 품속에서 몸을 꼬았다. 그리고 두 팔로 무옥의 목덜미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입맞춤이 길어지자 무옥은 문득 치밀어 오르는 정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원래 때가 되기 전까지는 진설영을 아껴 두려 했었다. 그런데 지금 느끼는 정욕은 그가 대법을 연성하기 위해 여자들을 간살할 때 느끼는 것과는 조금 색이 다른 것이었다. 그는 진설영을 한 여자로서 품고 싶었다. 여전히 입술을 맞댄 채 무옥의 손길이 진설영의 허리에서 조금씩 위로 전진했다. 그녀의 몸은 무공으로 단련되어 있어 단단했지만, 역시 여느 여자들과 다를 바 없이 젖가슴은 부드러웠다. 젖가슴 위에 무옥의 손길이 닿자 진설영은 조금 멈칫거렸지만, 뜻밖에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 자신이 무옥의 얼굴과 가슴을 번갈아 어루만지며 정욕을 돋우는 것이었다. "음...!" 무옥도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손은 더욱 거칠어졌다. 그는 오늘 아예 그녀를 벗겨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 고민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이 아마도 지금 이대로 상황이 진전되어 간다면 조만간 두 사람은 회의실의 바닥에 벌거벗은 채 몸을 맞대게 될 것이 뻔했다. 진설영의 손길도 격렬해졌다. 그녀는 무옥의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마치 젖가슴을 애무당하는 쾌감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그때 바로 일이 벌어졌다. 진설영의 손이 우연처럼 무옥의 이마를 묶은 영웅건의 매듭을 당겼고, 그것이 스르륵 풀려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아!" 진설영의 눈이 무옥의 세 번째 눈에 머무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는 나직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의 몸은 무옥의 무릎을 떠나 있었다. 무옥의 얼굴색은 급변했다. 비록 진설영이 자신의 사정을 다 알고 있다고는 해도, 한참 달콤한 행위에 열중하다가 그것을 보면 기분이 깨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무옥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 미안해요." 진설영은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듯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정말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무옥은 입맛이 씁쓸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뜨거운 육체가 떨어지고 나면,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불도 꺼지기 마련이다. 그는 담담하게 바닥에 떨어진 영웅건을 집어 들었다. "미안하긴... 괜찮소. 내가 좀 서둘렀지..." "난... 저... 당신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래요." 무옥은 영웅건을 묶으며 미소를 보여 주었다. "물론이오. 그런 일로 상처받는다면 무옥이 아니지. 그만 가서 쉬어요." 진설영은 무옥의 넓은 마음에 고마움을 느낀 듯 그녀로서는 보여 준 적이 없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방을 나가기 직전에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무옥." 그 말은 의미가 깊어, 약간이나마 상한 무옥의 기분을 바꾸어 줄 수 있었다. 무옥은 나름대로 만족하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탁...! 진설영의 등뒤로 회의실의 문이 닫혔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진설영의 표정도 일변했다. '역시 그랬군...!' 그녀의 얼굴은 아픔과 경악, 그리고 분노가 뒤범벅되어 싸늘해져 있었다. 그녀는 확인하고 싶었던 것을 본 것이다. 세 번째 눈. 지난번 일월쌍개와의 비무 때보다 더욱 붉어진 눈. 그 눈은 아마도 피를 들이마셨기 때문에 붉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피는 아마도 남궁화련의 것이리라. 증거는 없었지만, 그리고 칼에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이 뒤따랐지만, 진설영은 이미 그 생각을 바꿀 수가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어째서 그가 그랬느냐는 것뿐이었다.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진설영은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한 것이다. '영웅대회가...!' 그토록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일이었지만, 그 일이 성사되는 날, 진설영의 마음은 결코 밝지가 못했다. 제 24 장 대회(大會) 동녘이 밝아 올 때부터 희끄무레한 사람들의 형체가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한 시진이 지나지 않아 개방 총타 앞의 야산을 깎아 만든 영웅대회장이 본격적으로 떠들썩해졌다. 손짓발짓만 크게 해도 옆 사람과 시비가 붙을 정도로 사람이 들어서는 것도 금방이었다. 태양은 점점 하늘 꼭대기를 향해 치달렸고, 모두들 기대와 흥분으로 일렁이는 눈빛이었다. 몽고의 통치가 시작된 이래 이와 같이 큰 무림계의 행사는 드문 일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군웅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수천에 이르는데, 흥분한 격색마회 측의 입장에서는 만 명이라고 주장해도 괜찮을 만한 인파였던 것이다. 물론 그 수많은 인물들이 모두 격색마회의 주장에 동의해서 모인 것만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칠대색마, 또는 강호에 별 이름도 없는 색마 나부랭이들에게 가족이나 연인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고, 그저 많은 무림인들이 모인다기에 덩달아 개봉부로 들어선 사람들도 있었다. 하나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자리에 모인 군웅들의 숫자는 분명 격색마회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힘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군웅들은 새벽녘부터 흥분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는 사람을 흥분시키기 마련인데, 오늘은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군웅들을 흥분시킨 두 가지 소식이 암중으로 퍼졌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오늘 영웅대회의 선포식에서 용양도인의 공개처형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군웅들의 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개방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은근히 퍼뜨린 소식이었는데, 며칠 전부터 내외객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두 번째는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개방 총타 안에서 일어난 모종의 사건에 대한 소식이었다. 이 경우에는 개방과 남궁세가에서 일부러 그 진상을 최대한 숨기려고 했지만, 함구령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퍼져 나간 이야기도 있었고, 함구령이 떨어진 이후에도 입이 간지러운 몇몇 제자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궁세가의 여식 남궁화련이 비참한 몰골로 간살당했다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자극적인 내용이라 군웅들을 쉽게 흥분시켰다. 군웅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퍼졌다는 것을 안 격색마회에서는 황급히 맞불 작전을 펼쳐 남궁화련이 자결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리게끔 했다. 그 결과 지금 군웅들의 반은 남궁화련이 간살당했다고 알고 있고, 다른 반은 남궁화련이 자결했다고 알고 있는 상태였다. "자네 알고 있나? 그... 두 번이나 당하고 죽었다더구만!" "무슨 소리야? 떳떳하게 자결했다는데. 거참, 죽은 사람 또 죽일 헛소리하지 말라고." "뭐? 내가 헛소리를 했다고?" 간혹 이런 식의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소문을 듣고 모여든 음식을 파는 장사치들의 악다구니와 군웅들의 아우성으로 대회장은 점점 끓어올라 한겨울의 날씨를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된 진시(辰時). 한 사람이 군웅들 모두가 잘 보이도록 흙을 쌓아 올려 만든 단 위에 올라섰다. 개방의 장로 규염개였다. 그가 나타나는 것을 본 군웅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미처 보지 못한 사람들도 내공이 실린 외침이 이어지자 숙연해졌다. "여러 영웅들께 고하오!" 규염개는 걸쩍한 외모에 걸맞는 걸쭉한 목소리로 군웅들을 사로잡았다. "본 회의 영웅대회를 위하여 불원천리 먼 길을 오신 여러분들께 격색마회를 대신하여 우선 불초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 그는 절도있게 사방을 향하여 포권했다. 그가 포권하는 대로 동서남북의 사람들이 환호로 답했다. "우와아아아아아!" 규염개는 함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약간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영웅대회를 시작함에 있어 먼저 본 회의 회주이자 신임 개방 방주님의 인사 말씀이 있어야겠으나, 오늘 특별한 이유가 있어 먼저 남궁세가의 가주이신 남궁세룡 대협께서 여러분들께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하오." 군웅들의 시선은 규염개의 소개에 따라 단 위로 오르는 체격이 당당한 중년인에게로 쏠렸다. 대부분이 남궁화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라 남궁세룡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다. 군웅들을 둘러보는 남궁세룡의 얼굴은 자못 침통해 보였다. 그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만큼 조용해진, 그 사람의 바다 위를 한번 훑어보더니 느닷없이 품속에서 한 장의 붉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이것은!" 거두절미하고 그는 말했다. "내 못난 여식이 이 아비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오!" 그의 목소리에는 피가 끓고 있었다. "진작에 죽었어야 했으나 오직 복수할 수 있는 날만을 기다리며 모진 목숨을 이어 왔노라고. 이제 격색마회가 창설되고, 중원의 뭇 영웅들이 구름같이 모였으니, 못난 계집의 복수 하나쯤은 여반장(如反掌)인 것 같아 비로소 편안히 눈을 감는다고... 내 딸은 그렇게 쓰고 목을 맸소이다!" 붉은 종이를 든 남궁세룡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군웅들은 침을 삼켰다. "여러분! 제 딸은 비록 자결했으나 그 목을 조른 것은 비단끈이 아니라 더러운 색마들의 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이제 늙었고 후손조차 없습니다. 하나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색마들을 토벌할 수만 있다면 무덤을 보살필 자손 하나 없이 남궁세가가 멸손(滅孫)된다고 하더라도 한 점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었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하나 믿건 안 믿건 간에 남궁세룡의 일장 연설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도 있었고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도 있었다. 스스로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남궁세룡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고, 자신은 아버지가 아니지만 아버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튼, 대회장은 숙연하면서도 경건하고, 또 경건하면서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데...! 갑자기 이 열기 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벌어졌다. "남궁 대협께 질문이 있소!" 연단에 가까운 자리에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외친 것이었다. 그 사람은 우습게도 여자처럼 천이 드리워져 얼굴을 가리게 되어 있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연단 위에 있던 규염개와 남궁세룡은 그 사람이 주목해야 할 대상 중의 하나인 부귀산장의 일행임을 즉각 알아보았다. 규염개가 나섰다. "여러 영웅들이 계신 자리이니 만큼, 귀하께서는 소속과 성명을 밝히고 질문을 해주셔야 할 것이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가능하다면 얼굴도 밝히시고 말이오." 부귀산장의 일행, 다름아닌 탐서랑은 비웃음으로 맞섰다. "때가 되면 천은 치울 수 있고 얼굴도 밝혀질 것이오. 하나 위선의 천은 치워지지 않고, 그 얼굴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오." 탐서랑은 스스로 너무나 날카로운 대답을 했다고 감탄했다. 남궁세룡이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귀하는 질문할 것이 있다면 어서 질문하시오." 휘익-! 몸을 번뜩 날려 연단 위로 올라선 탐서랑은 남궁세룡의 손에 쥐어져 있는 붉은 종이를 가리켰다. "남궁 대협의 영애께서는 확실히 자결한 거요?" 남궁세룡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럼 귀하는 내가 죽지도 않은 딸을 죽었다고 한단 말이오?" "내 질문은 그런 뜻이 아니오. 죽는 것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소. 자결도 있지만 타살도 있다는 말이오이다." 탐서랑의 말은 크고 우렁우렁해서 모든 군웅들이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남궁세룡의 뛰어난 연기로 잠시 잊게 만들었던 남궁화련의 죽음을 둘러싼 두 가지 상반된 소문을 떠오르게 했다. 군웅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것은 남궁세룡이었다. 규염개가 재빨리 나섰다. "귀하는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그러는 거요? 여식을 잃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한 분에게 어찌 그런 망발을...!" 탐서랑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헛소문만으로 이러는 것이 결코 아니오. 나는 우연히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오." 이번엔 규염개도 남궁세룡도 화들짝 놀랐다. "뭣이라고?" 수천 쌍의 눈동자가 오직 탐서랑 하나에게로 쏠렸다. 탐서랑은 은근히 연단 아래쪽에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는 삼목신룡 무옥을 쏘아보았지만,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탐서랑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 "어젯밤에 본인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배회하다가, 남궁 소저의 처소로 가는 한 사람을 보았었소. 그 사람이 어째서 그곳으로 가는가 의심을 했소만,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쳤소. 하나 그 직후에 남궁 소저가 피살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나는 내가 본 광경에 생각이 미쳤소. 그 뒤로 남궁 소저가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그것은 모두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자는 수작일 뿐이오." 남궁세룡은 당황한 나머지 탐서랑의 말에서 드러나는 다른 사실들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그저 말을 막기에 급급했다. "하! 지나가는 사람들이야 있을 수도 있는 것이지, 누가 지나갔다고 해서 화련이가 꼭 그 사람에게 살해되었다는 법이 있소? 귀하는 너무 쓸데없는 억지 주장을 하는구려." "내 말은 모두 근거가 있는...!" 탐서랑이 막 대거리를 하려는 판에, 갑자기 연단 아래쪽에서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삼목신룡 무옥이었다. 그가 가볍게 몸을 날려 연단 위로 뛰어오르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최근 들어 무림에서 삼목신룡 무옥 만큼이나 화제가 되는 사람이 또 있었던가? 후기지수의 첫 손가락에 꼽히던 그가 이제 당당히 중원 최대 방파의 방주 자리에 올랐으며, 그 상승의 과정 또한 족히 이야기거리가 될 만한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는 중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옥이 연단 위에 올라오자 두 사람의 말다툼이 일시 중지되었다. 무옥이 내뿜는 압도적인 기운은 누구라도 말을 멈추게 만들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무옥은 탐서랑의 얼굴을 가린 천을 꿰뚫듯 한번 노려보더니 그대로 군웅들을 향해 절도있게 포권했다. 그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모든 사람들의 귀에 깨끗한 소리를 꽂을 수 있었다. "삼목신룡 무옥이라 합니다. 대회에는 마땅히 절차와 법도가 있어야겠으나, 오늘 이분이 던지신 질문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많은 분들의 의혹이 씻겨지지 않을 것 같아 나선 것이니 여러 영웅들께서는 양해해 주십시오." 그는 곧바로 탐서랑을 향해 돌아섰다. "귀하께서는..." 탐서랑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무옥의 형형한 안광을 마주하자 왠지 가슴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무옥의 말은 이어졌다. "어제 잠이 오지 않아 배회하다가... 라고 했는데, 본인이 알기로 귀하는 부귀산장의 일행으로 분명 외객에 속하실 텐데 어떻게 본 방의 내부에 있는 남궁 소저의 처소 근처를 지날 수 있었단 말이오?" 규염개와 남궁세룡은 동시에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들은 당황한 나머지 집어 내지 못했던 것이다. 탐서랑이 대답을 못하자 무옥은 씩 웃으며 말했다. "만일 남궁 소저가 흉수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이라면, 혹시 그대가 바로 그 흉수가 아니오?" 탐서랑이 무어라고 그 말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리는 순간, 무옥의 손이 갑자기 그의 얼굴을 향해 뻗어 갔다. 파아앗! 날카로운 파공음이 일어나며 탐서랑은 미처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쫘아악! 탐서랑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은 너무나 간단하게 무옥의 손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앗!" "이자는!" 규염개와 남궁세룡이 동시에 외쳤다. 무옥은 탐서랑의 얼굴이 드러난 즉시 뒤로 물러나며 냉정하게 외쳤다. "개방 육결제자(六結弟子)들은 즉시 이 음적을 잡아라!" "존명!" 연단을 둘러싸고 있던 수백 명의 개방 제자들 중에 여섯 개의 매듭을 묶은 자루를 메고 있는 수십 명의 인영이 연단 위로 일제히 뛰어 올라왔다. 규염개와 남궁세룡도 동시에 뒤로 몸을 날렸고, 연단 위에는 육결제자들에게 빈틈없이 포위된 탐서랑만이 남았다. 규염개가 냉랭하게 외쳤다. "무산음호! 네놈이 감히 간이 부어 이곳에 제 발로 찾아들었구나!" 천이 찢어지자 드러난 탐서랑의 얼굴은 그의 진면목이 아니라 바로 소운비로 위장한 얼굴이었다. 규염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무산음호'라고 착각한 것이다. 하나 탐서랑은 그것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적들에게 달아날 구멍조차 없이 포위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흥! 내가 비록 격색마 운운하는 위선의 무리가 아닌 것은 확실하나 남궁화련을 죽인 흉수는 분명 아니다. 너희 정파 무리들의 위선에는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구나." "두말할 것 없다. 쳐라!" 규염개의 호령에 육결제자들이 일제히 탐서랑을 향해 개 잡는 몽둥이들을 뻗어 갔다. 한데...? 탐서랑은 웬일인지 싱글싱글 웃을 뿐 몽둥이를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몽둥이들 중의 반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탐서랑을 공격해 가는 몽둥이들을 때리는 것이었다. 팍! 팍! 팍! 요란한 격타음과 함께 육결제자들의 반이 몽둥이를 놓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나머지 반이 탐서랑을 둘러싸고 그를 보호하듯 모여드는 것이었다. 이 상황은 참으로 순식간의 일이라 지켜보던 개방 사람들도 손쓸 틈이 없었다. 탐서랑을 둘러싼 육결제자들은 바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더니 느닷없이 낭랑한 여인의 음성으로 외치는 것이었다. "천비들이 궁주님을 뵈옵니다!" 사천 당문에 대한 배려로 특별히 연단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혼음사의는 혀를 쯧, 차며 옆에 앉은 소운비를 돌아보았다. "만음요화로군!" 그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소운비 역시 보고 있었다. 별안간 여자로 둔갑해 버린 육결제자들의 신호에 따라 한 마리 봉황처럼 몸을 날려 연단 위로 올라선 중년미부. 이미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 따위는 집어던지고 그 요염하고 묘하게 퇴폐적인 이목구비를 드러낸 만음요화의 모습은 여러모로 중인들의 얼을 빠지게 했다. 소운비의 앞줄에는 한종린과 당철이 앉아 있었다. 한종린이 당철의 귀에 속삭였다. "당 대협께서는 계속 지켜보시겠습니까?" 당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런 소란이 일어날 줄은 몰랐소만, 격색마회가 어찌 대응하는지를 좀 지켜보아야겠소. 아직은 이편이 더 사람이 많고 또 유리한 형세이니...!" 소운비는 흘낏 옆에 앉은 당미령을 돌아보았다. 처음에 탐서랑이 나타났을 때부터 당미령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하나 소운비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더니, '약속을 잊지 말아요'라는 듯이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탐서랑과의 일은 그녀에게는 영원히 묻어 두고 싶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운비가 '알았다'는 눈빛을 보내고 다시 고개를 돌리자, 혼음사의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흥...! 이제 보니 만음요화가 가짜를 내세워서 색존이 될 생각이었던 모양이군. 어림도 없지, 진짜가 버젓이 있는데 말이야. 한데... 저 가짜 놈, 몸집이며 하는 짓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이미 사실을 알고 있던 소운비는 툭 뱉었다. "탐서랑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더군요." 혼음사의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 정말이냐? 아니...!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지?" 소운비는 설명하기가 곤란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말씀드리죠. 일단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나 보도록 합시다." 하지만 소운비의 눈은 연단 위의 만음요화를 향하지 않았다. 연단 아래에서 꼼짝을 하지 않고 있는 진설영,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과연 자신으로 변장한 탐서랑의 등장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진설영은 소운비와 이런 식으로 재회할 날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기절할 만큼 놀라지도 않았다. 요즘 들어 그녀를 놀라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지금 연단 위에 서 있는 '소운비'가 아까 한 말에 따를 것 같으면 한 사람이 남궁화련의 방으로 갔다고 했다. 그 사람이 과연 그녀가 생각하는 '그'일 것인가! 만일 아니라면 그녀로서는 그 이상의 다행이 없을 것이지만, 만일 그라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마음이 무뎌진 만큼 검도 무뎌졌는지, 연단 위의 상황이 급박하게 변해 가는데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는 진설영이었다. 만음요화는 연단 위에 올라서자마자 미리 개방 육결제자들로 변장해 침투시켰던 화금궁 제자들에게 치하의 한마디를 던졌다. "수고했다." 그리고 탐서랑에게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예정보다 빨리 움직이게 만든 거예요?" 탐서랑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다 당신을 믿었으니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았겠소?" 만음요화는 혀를 한번 차고는 비로소 남궁세룡과 규염개, 그리고 무옥이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녀는 양쪽 입꼬리를 올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일전에 화금궁을 방문하셨던 일에 이것으로 비로소 화답을 할 수 있게 되었군요." 규염개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제 그가 만음요화를 상대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짐짓 애석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됐구려, 안됐어." "무슨 말이지요?" "우리야 수고스럽게 다시 동백산을 방문하는 일이 없게 되어 좋지만, 만음요화 그대는 무모한 행동 때문에 객사(客死)하게 되니 어찌 안됐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소?" 만음요화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오." 만음요화는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고개를 쳐들고 웃더니 그것으로도 참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리고 허리까지 숙이고 웃었다. 그것은 단지 허세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지나친 웃음이었다. 웃음 소리가 이어질수록 규염개는 왠지 자신이 뱉은 말이 불안해졌다. 뚝! 갑자기 웃음이 멈추고 만음요화가 허리를 펴더니 고개도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이 그녀의 손바닥 위로 쏠렸다. 거기에는 어느새 작고 투명한 향로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만음요화는 자신이 들고 있는 향로를 홀린 듯한 눈으로 보더니 군웅들을 한번 돌아보고는 씨익 웃었다. 누구의 입에선지 모르게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호... 혼혼옥잡이다! 혼혼옥잡!" "마병 혼혼옥잡이다! 저기에 중독되면 살아남을 길이 없다!" 군웅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혼혼옥잡의 악명은 너무나 자자해서 그 이름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만들 수 있었다. 당황한 것은 남궁세룡과 규염개였다. 만음요화가 나타났으니 혼혼옥잡도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을 정작 당혹하게 만든 것은 군웅들의 동요였던 것이다. 물경 수천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이곳에서 만일 작은 공포라도 번지게 된다면 밟고밟히는 혼란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 중 다수는 부상을 입을 것이 분명할 뿐더러,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영웅대회는 시작하자마자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남궁세룡과 규염개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은 막아야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바로 만음요화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를 제압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혼혼옥잡만이라도 빼앗아야겠다는 판단이었다. 한데... 뒤에서 누가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달려들던 기세보다 더 빨리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규염개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무옥이 거기 서 있었다. "참으십시오, 두 분." 무옥의 말에 규염개와 남궁세룡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만음요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그래도 개방에 사람이 있었군. 삼목신룡 무옥은 눈이 빨라!" 혼혼옥잡을 잡지 않은 그녀의 나머지 한 손은 어느새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규염개가 탄식했다. "혼혼색수!" 못 보던 사이에 만음요화의 무공은 일취월장하여 기척도 없이 혼혼색수를 운용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다. "으... 으아...!" 규염개의 앞에서 남아 있던 육결제자들이 갑자기 신음을 내지르며 연단 위에 나동그라졌다. 그들은 강력한 춘약이라도 먹은 듯이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규염개가 놀랄 틈도 없이 이번에는 연단 아래에 도열해 있던 오결 이하 제자들이 나동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증상은 똑같았다. 규염개는 만음요화를 노려보며 말했다. "요녀! 무공이 제법 늘었구나. 이제 적색무를 내쏘지 않고도 혼혼색수를 쓸 수 있단 말이냐?" 만음요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규염개의 말이 거칠어졌기에 그녀의 말도 고울 리가 없었다. "나는 너희 거지들처럼 앉아서 놀기만 하지 않았으니 무공의 진보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 규염개는 난감했다. 격색마회에서 비록 여러 사람들을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주시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인 기습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들이 예상한 것은 무옥이나 남궁세룡에 대한 암습, 혹은 기밀 탐지 정도였다. 설마 하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버젓이 나타날 줄 어떻게 짐작이나 했겠는가! 한데 정작 맞닥뜨리고 보니, 이런 상황에서 숫자의 많고 적음은 무의미했다. 만일 이편의 수천 명이 조직된 군대이고, 적이 소수로 침투한 것이라면 숫자의 많고 적음은 분명 승패로 직결될 것이다. 하나 이편의 수천 명은 제가끔 뜻이 다른 군웅들이니, 입씨름이라면 모르되 이런 장소에서 실제로 전면적인 싸움을 벌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격색마회의 입장에서 취할 방도는 오직 하나였다. 숫자의 우세가 아닌 힘의 우세로써 적들을 제압하여 격색마회의 기상을 자랑하고 영웅대회의 분위기를 다시 잡아 가는 것이다. 만음요화의 무공이 저토록 진보했다면, 상대할 만한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규염개와 남궁세룡의 눈이 무옥을 향했다. 동시에, 무옥도 앞으로 나섰다. 무옥은 담담하게 말했다. "만음요화, 그만 본 방의 사람들에게 해약을 주시오." 만음요화는 빈정거렸다. "내가 병 주고 약 주는 수고를 하려고 이곳에 온 줄 아오?" "그럼 무엇 때문에 온 거요?" "나는 그대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받아 내려고 왔어요." "그게 뭐요?" "그것을 말하기 전에 나는 분명히 해둘 것이 있어요." 만음요화는 문득 웃음기를 지우고 연단 아래의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본 화금궁 궁주는 강호인들에게 고하오! 내년 유월, 본 궁주를 회주로 하는 색마영웅회가 결성될 것이오." 색마들이 자신들을 위한 모임을 결성한다는 이야기는 강호인들 사이에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하나 그 회주가 만음요화라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사람들이 술렁거렸으나 만음요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색마영웅회의 회주는 색존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나 색존 만음요화는 그 이름으로 격색마회에 제안하고 싶소. 첫째, 공공연히 격색마 운운하여 불씨를 만들지 말고 자숙하라는 것이오." 만음요화의 말이 그쯤 이르자 군웅들 사이에서 분노의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닥쳐라!"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만음요화를 찢어 죽이는 것으로 격색마회의 영웅대회를 시작합시다!" 하나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만음요화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입말고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만음요화는 소리가 난 쪽을 한번 무섭게 노려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둘째, 그대들의 포로가 된 용양도인을 나에게 넘기시오. 이 두 가지 조건을 들어준다면 본 궁주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물러가겠소." 어쩐 일인지 그녀의 말을 방해하지 않고 경청하던 무옥이 빙그레 웃었다. "만음요화, 지금 당신은 당신네들이 조용히 물러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오?" 만음요화도 지지는 않았다. "그대들은 수를 믿는 모양인데, 너무 많은 숫자는 어떤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이라오. 그리고 그대들에게 숫자가 있다면 나에게는 혼혼옥잡이 있소." "흠...!" 무옥은 만음요화가 쥐고 있는 혼혼옥잡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내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만..." 만음요화는 웃었다. "말로 시간을 끌어서 개방 방도들이 중독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려는 모양인데, 어림없어요. 내일 아침까지는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아무튼,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어서 물어 보아요."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대들은 내년 유월이 되어야 회주도 뽑고 회도 결성한다고 알고 있소. 한데 어떻게 벌써 그대가 회주로 결정되었단 말이오?" 만음요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호호... 거기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어요. 우리 오대색마들이 모여서 결정하기를, 색존을 선발하는 것에 내기를 걸었지요. 한 고지식한 사람이 있는데, 그를 우리와 같은 색마로 만드는 사람을 색존으로 뽑기로 했었어요. 그가 바로 저 사람입니다." 만음요화는 말끝에 당당히 탐서랑을 가리켰다. "저자는 무산음호가 아니오?" "미안하지만 무산음호가 아니에요. 당신들은 잘못 알고 있었죠. 무산음호는...!" 만음요화가 손으로 신호를 하자, 연단 아래쪽에서 두 명의 화금궁 제자가 뛰어올랐다. 두 여인은 양쪽에서 한 개의 큰 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그 자루는 묵직해 보이는 데다가 그 형태로 미루어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로 여기 있어요!" 만음요화의 말에 따라 두 제자가 양쪽에서 자루를 잡고 휙 벗겨 냈다. "아니!" "저놈은!" 나이 지긋한 강호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루 속에서 나온 것은 마치 시체처럼 굳은 사람이었는데, 그 얼굴은 십여 년 전 악명이 높던 무산음호의 그것이었다. 십여 년 전에 강호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얼굴이 바로 공포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간 소운비가 무산음호로 몰렸던 것은 그가 무산음호의 무공을 썼기 때문이었다. 무산음호는 성격이 괴이하여 제자를 키울 수 없으리라는 것이 중론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이 나타난 그 인물이 무산음호의 제자라기보다는 무산음호 그 자신이 새로운 무공을 연성하여 젊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십여 년 전 그대로의 얼굴을 가진 무산음호가 나타난 이상 그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시체와 같이 변해 버린 무산음호의 등장은 지금껏 무산음호에게 느껴 왔던 공포심을 만음요화에게로 옮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만음요화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이곳에 사람이 많지만, 무산음호를 맞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차지도 못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는 '그런 무산음호가 내 손에 떨어졌는데, 너희들이 감히 나를 상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협박은 굉장히 효과적인 것이었다. 수천 군웅들이 일제히 조용해졌고, 누가 과연 영웅이 되어 이 상황을 수습할지에 귀추가 모아졌다. 남궁세룡과 규염개의 얼굴 표정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무옥이었다. "내가 제안을 하나 하겠소." "무엇이죠?" "그대의 말마따나 우리에게는 많은 인원이 있고, 그대에게는 혼혼옥잡이 있으니 서로 마찬가지요. 그대의 제안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단지 그대의 협박만으로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오? 하나 만일 그대가 혼혼옥잡으로 사람들을 해친다면, 죽음을 각오한 이상 수천 명이 그대들을 가로막고 나설 테니 피차가 좋을 일이 없을 것이오. 나는 이 일을 정당한 비무로써 가리고자 하오." 만음요화의 눈이 반짝였다. "비무라?" "화금궁의 대표와 격색마회의 대표가 겨루어 만일 우리가 이긴다면 당신은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말고 물러날 것이며, 우리가 진다면 당신의 말마따나 자숙하기로 하겠소." "용양도인을 풀어 주는 것도?" "물론이오." 만음요화는 생각했다. 그녀가 화금궁의 다수를 이끌고 적의 심장부에 뛰어들어 이런 소란을 피운 것은 순전히 색존의 자리를 굳히기 위함이었다. 중요한 것은 기세를 점하고 피해 없이 뒤로 빠지는 것인데, 원래의 생각대로 혈로를 뚫고 빠진다면 제자들의 피해가 적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무옥의 말대로 비무를 통해 가린다면 여러 군웅들 앞에서 체면도 설 뿐만 아니라 피해도 없게 된다. 찾아온 목적을 이루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만음요화는 슬쩍 연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사람들 틈에 숨어 있도록 한 오랑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무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마음에 드는 제안이로군요. 하나 조건이 있어요." "무슨 조건이오?" "본 궁의 대표라면 당연히 내가 나서야 하겠죠. 하나 나는 연약한 여인이라 남자와는 손발을 겨룰 수가 없어요. 그러니 날 상대할 사람은 반드시 여자여야 합니다." 규염개가 참지 못하고 끼여들었다. "하! 그대가 나약한 여인이라고?" 규염개가 느끼는 바대로 만음요화는 비록 여인일망정 나약한 여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인이라는 점을 유리하게 이용해 먹으려고 들 정도로 지독한 여인일 뿐이었다. 만음요화는 화도 내지 않고 규염개를 향해 빈정거렸다. "나는 여인이고, 원래 여인은 나약한 존재가 아닌가요? 나는 규염개 그대와 침상 위에서는 겨룰 수 있어도 손발은 못 겨루겠어요." 규염개는 마치 불한당에게 희롱당한 여인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닥쳐라, 이 탕녀...!" "그만 하시오!" 무옥이 그를 엄하게 꾸짖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했다. 무옥은 만음요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좋소, 여인으로 합시다. 본래 격색마회의 대표로는 내가 나가야 마땅하나 궁주의 요구가 그러하니 따르겠소. 하나 나를 대신해서 싸워 줄 사람이니 내가 고르도록 하겠소. 그리고 나 역시 조건이 있소." "뭐죠?" "그대는 비무가 진행되는 동안 결코 혼혼옥잡으로 사람들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 만음요화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서 나의 상대나 골라 보세요." 보통 사람들도 싸움 구경이라면 밥 먹는 것도 팽개치기 일쑤인데, 무림인들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더구나 평생에 한번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 힘든 고수들의 싸움이라면 더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광적인 수집가가 인세에 보기 드문 골동품을 만났을 때 밤낮을 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군웅들의 관심은 무옥이 과연 누구를 만음요화의 상대로 내세울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만음요화는 사파여중제일인(邪派女中第一人)으로 꼽히고 있으니, 그 상대는 당연히 정파여중제일인(正派女中第一人)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연단 오른쪽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아미파 쪽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아미삼봉이 앉아 있었는데, 그 중 주목받는 사람은 바로 아미삼봉 중의 일인자인 정혜신니였다. 정혜신니는 최근 몇 년 동안 여중제일검의 지위를 놓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그녀가 지목될 것이 뻔하다는 것이 중인들의 생각이었다. 정혜신니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벌써 등에 멘 검집을 풀러 다잡고 있었다. 한데... "나는 나를 대신하여 싸울 사람으로 냉면검화 진설영 소저를 지목하오!" 무옥의 입에서 나온 말은 중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한데 연단 왼쪽 아래에 앉아 있던 진설영은 마치 예상이나 한 듯이 담담하게 일어나 연단 위로 올라왔다. 무안을 당한 정혜신니는 안색이 창백해지며 도톰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옥이 말했다. "물론 이 자리에는 본인의 추천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여협들이 많으시지만, 본인은 격색마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한 진 소저에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소. 군웅들께서는 본인의 선택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오." 그 말은 정혜신니의 굳은 마음을 조금 풀어 주는 것이었다. 진설영이 무공이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격색마회의 일을 맡아 왔기 때문이라는 완곡한 해명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음요화의 상대로 진설영이 지목된 것은 군웅들의 호기심을 더욱 돋우었다. 안 그래도 규염개, 용양도인을 격퇴한 것으로 강호의 신성(新星)으로 떠오른 냉면검화 진설영의 진정한 무위에 대한 궁금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음요화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미삼봉의 정혜신니가 자신의 상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가 뜻밖에 어린 계집이 지목되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계집은 이미 전에도 겨루어 본 바가 있는, 소운비의 사매인 촌계집이 아닌가! "흥, 너랑 나는 인연이 아주 없지는 않구나. 벌써 세 번째지, 아마?" 만음요화가 인사 겸해서 시비를 걸었다. 진설영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관음보검을 품에 안고 서 있었다. 그녀는 만음요화보다는 먼저 탐서랑을 보았다. 어쩐지 체격이 변한 것 같지만, 얼굴은 그녀가 알고 있는 소운비와 다를 바 없는 바로 그 사람을. 그녀는 그에게 짧게 말했다. "사부께서 깊은 병에 걸리셨어요. 당신은 크게 상관하지 않겠지만...!" 탐서랑은 그녀가 왜 자신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진설영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지금 눈앞에 있는 적에 대해 더 고민을 해야 했다. 만음요화는 이런 어린 계집과 싸워 이겨 보았댔자 크게 자신이 명성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기는 내기인 만큼, 이긴다면 그녀는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 아닌가! "어린 것아, 나는 너를 생각해서 특별히 점잖은 비무 방식을 택하겠다. 너와 내가 각각 일초씩을 교환하여 세 번 겨룬 뒤에 네가 나를 상처 입히거나 혹은 내가 너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내가 지는 것으로 하마!" 진설영은 만음요화의 이러저러한 수작이 모두 귀찮았다. 그녀는 사실 자신이 정말 무옥을 대신해서 이 싸움을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하나 그녀로서는 무옥이 흉수라는 것을 밝힐 증거도 뚜렷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갈등이 심했기 때문에 때가 오기 전까지는 결코 본심을 들키지 않아야 했다. 진설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만음요화의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만음요화는 혼혼옥잡을 쥔 한 손을 옆으로 돌리고 다른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네가 먼저 일초를 써라. 이 언니가 맞아 주마." 만음요화의 태도는 혼혼옥잡을 한 손에 쥔 채 다른 한 손만으로 진설영을 제압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본 무옥과 남궁세룡, 그리고 규염개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진설영의 무위를 알고 있었기에, 만음요화가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면에 군웅들의 긴장은 극도에 달했다. 특히, 소운비는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럼...!" 진설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보검이 스르릉 소리와 함께 저절로 뽑혀지는 것이었다. 손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기(氣)로써 발검하는 것이었다. 마치 춤을 추듯 천천히 팔짱을 푼 진설영은 검집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허공에 뜬 검을 잡았다. 잡는 순간까지는 아주 느린 것 같았지만, 검이 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몸은 전광석화처럼 쏘아져 갔다. "헛!" 만음요화는 쇄도해 오는 진설영의 공격이 결코 한 손으로 막아 낼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것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 저런 성취를 할 수가?' 그녀는 당황했다. 진설영의 검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그녀의 복부를 노리고 있었다. 극쾌의 검법이었다. 쉬이이이잉!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뒤로 젖혔다. 탄력있는 허리 덕분으로 그녀의 등은 땅에 닿을 정도로 휘어졌고, 그 위로 무시무시한 칼바람이 지나갔다. 만음요화가 아찔해 하며 몸을 일으키자, 진설영은 어느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몸이 빠르시군요." 진설영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와아아아아!" 군웅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다. 만음요화는 발끈했다. 이따위 어린 계집에게 기세를 빼앗겨서야 되겠는가? 그녀는 함성 소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앞으로 다섯 걸음을 전진하며 한쪽 손으로 혼혼색수를 운용했다. 가볍게 손바닥을 뒤집자 불그스름한 손바닥에서 무형의 기운이 발출되어 진설영을 향해 날아갔다. 하나 진설영의 첫 공격이 만음요화로 하여금 전력을 다해서 피하게 만들었던 것에 반해, 진설영은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만음요화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잘난 체하는 계집이 곧 콧소리를 내지르며 땅바닥에 뒹굴 것이 예상되었던 것이다. 하나 진설영은 말똥말똥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만음요화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진설영이 말했다. "만음요화, 당신은 내가 한번 당한 수법에 또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만음요화는 문득 보이지 않는 기운이 자신을 향해 덮쳐 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옆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입맛이 너무나 썼다. 방금 그녀를 덮친 기운은 바로 만음요화 자신이 방금 쏘아 보냈던 혼혼색수의 기운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설영은 호신강기로서 그것을 되튕겨 낸 것이다. 그것도 약올리듯이 아주 느리게. 만음요화가 악에 받쳐 입술을 깨무는 동안 진설영은 검을 들어 천천히 중단을 겨누었다. "이제 내 차례지요?" 만음요화는 이제 그녀가 더 이상 만만히 볼 어린 계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긴장하며 방어자세를 잡았다. 하나 웬일인지 진설영은 몸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검이 잔잔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파동은 순식간에 검극에서부터 진설영의 손까지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주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검극에서 발출되기 시작했다. '검기!' 만음요화는 경악했다. 그 나이에 검기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정녕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검기는 점점 강해지더니 일정한 형체를 이루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로 검강(劍 )이었다. 만음요화의 눈이 있는 대로 부릅떠지는 순간, 검강은 한 순간에 공 모양으로 둥글게 뭉쳐지더니 소리도 없이 만음요화를 향해 폭사되었다. "검환(劍丸)!" 만음요화는 비명처럼 외치며 몸을 날렸다. 지금 그녀에게는 검환의 공격을 피해 낼 어떤 수비초식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초식이랄 수도 없는 나려타곤(懶驪打滾)의 수법으로 바닥에 몸을 굴리는 것 이외에는. 검환을 발출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작 나려타곤으로 피하는 적을 격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나 웬일인지 진설영은 거기서 공격을 멈추었다. "마지막 한 번이 남았으니, 이쯤에서 손을 거두겠어요."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이번엔 군웅들 쪽에서도 탄성조차 지르지 못했다. 내심 진설영이 만음요화의 상대로 지목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아미파의 정혜신니조차 이 어린 여고수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 자신도 아직까지 검에서 저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승 문턱에까지 다녀온 것이나 다름없는 만음요화는 진설영의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은 독살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건방진 것!" 그녀는 폭발하듯 외치며 혼혼옥잡을 내밀었다. 그리고 뒤에 시립해 있던 화금궁 제자들을 향해 외쳤다. "진언을 외워라!" 제자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시아자맹, 청아자농, 감유도모아자반수기앙...!" 만음요화는 즉시 혼혼옥잡을 쥔 손에 진기를 운용했다. 규염개가 외쳤다. "만음요화! 약속이 틀리지 않소!" 만음요화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나는 사람들을 상하지 않겠다고 했지, 저 계집을 내버려두겠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혼혼옥잡은 나의 최대 절기인데, 비무에서 그것을 빼놓는다니 말이 됩니까?" 이미 혼혼옥잡은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음요화의 진기 조절에 따라 검은색의 현무 형상 하나가 허공에 맺혀졌다. 이어 청룡과 백호, 그리고 주작이 떠올랐다. 그것은 분명 연기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뜨거운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었다. 사방신의 형상들은 꿈틀거리며 진설영을 향해 움직여 갔다. 진설영은 멈칫하다가 곧바로 검을 뻗어 괴물을 향해 검환을 쏘아 냈다. 파아앗! 하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그 검환은 연기로 된 괴물들의 몸을 통과해 버릴 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진설영은 가장 먼저 다가오는 현무를 피해 몸을 뒤로 날리며 이번에는 괴물들의 뒤쪽, 혼혼옥잡을 조종하는 만음요화를 공격하려 했다. 현무는 피할 수 있어도, 만음요화는 피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에서였다. 하나 현무는 그녀에게 그런 여유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방신의 형상이 그녀를 사방에서 감싸 버렸고, 그녀는 검은 안개에 둘러싸인 사람처럼 전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검고 붉고 푸르고 흰 연기가 마구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진설영은 즉시 호흡을 멈추었다. 퍼어엉! 무옥은 진설영의 위기를 보자마자 만음요화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하나 그가 만음요화를 향해 날린 일장은 화금궁의 제자 하나가 대신 맞았다. 그리고 다른 여인들이 일제히 만음요화와 그 사이를 막아 섰다. 만음요화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녀들을 모두 죽여야만 했다. 무옥은 이를 갈았다. "만음요화! 비겁하군." 만음요화는 기세 등등하여 외쳤다. "패배를 인정하면 모르되, 안 그러면 저 계집은 죽는다!" 무옥은 안타까운 눈으로 사방신의 형상을 돌아보았다. 진설영은 그 가운데에 갇혀 있어 바깥에서는 볼 수조차 없었다. 그때였다. 따아아앙! 비파 현을 퉁기는 맑은 소리가 어디선가 우렁차게 들렸다. 내공을 실어서 퉁기는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따앙! 따앙! 따땅!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청명하면서도 어딘가 음유한 기운이 실린 그런 소리였다. 중인들의 시선은 그 비파를 타는 사람에게로 몰렸다. 소운비였다. 그는 일정한 곡조 없이 비파현을 퉁기며 사람들을 헤치고 연단 위로 올라섰는데, 이상하게도 비파 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사방신의 형상들이 주춤하기 시작했다. 연단 위에 올라선 소운비는 만음요화를 노려보며 한마디했다. "좀 변했는가 했더니 변한 게 없군요. 당신은 역시 혼이 좀 나야 해요." 그리고 소운비는 숨을 고르고 난 뒤 본격적으로 곡을 타기 시작했다. 해당원에 드나들던 시절 즐겨 탔던 비파행의 곡조가 음곡비파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솜씨는 녹슬지 않았지만 곡조는 옛날 같지 않았다. 손가락에 내공을 실어 연주하는 그 소리는 한없이 차갑고 음유하여 그 곡조를 듣는 그 자리의 모든 남자들이 별안간 온몸에 기운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기운이 빠지는 것은 남자들뿐이 아니었다. 사방신의 형상들은 마치 고통을 느끼는 듯이 몸을 마구 뒤틀더니 조금씩 그 크기가 줄어들면서 혼혼옥잡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사방신의 형상들이 물러나자 그들에게 포위된 채로 지금까지 호흡을 멈춘 채로 버티고 있었던 진설영의 신영이 드러났다. 그녀는 의외의 도움에 놀라며 소운비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낯선데도 이상하게 낯익은 느낌이었다. 그 목소리, 그 비파. '서, 설마?' 진설영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얼굴은 소운비이지만 느낌이 다른 사내가 있고, 또 얼굴은 다른 사람이지만 다른 것들이 분명 소운비와 같은 사내가 있으니, 그녀는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만음요화는 소운비의 말을 듣고 금세 그가 소운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비파 또한 알아보았다. '아니, 세상에 저것이 내 혼혼옥잡을 막는 무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구나...! 그때 대전에서 청룡이 어째 주춤거린다 했더니, 그저 그 비파가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그런 효과가 있었던 거로구나!' 만음요화는 오늘 뜻밖의 일들이 계속 일어나 자신의 형세가 결코 좋지 않음을 판단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 사방신의 형상들은 거의 혼혼옥잡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만음요화가 그것들을 회수한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음곡비파의 탄주에 밀린 것이었다. 비파 소리가 들리고 나서부터 잠시 주춤하던 무옥이 만음요화의 난감한 기색을 눈치채더니 재빨리 남궁세룡과 규염개에게 외쳤다. "요녀를 잡으시오!" 그리고 그 자신부터 먼저 만음요화를 둘러싼 화금궁 제자들을 쳐 나갔다. 남궁세룡과 규염개는 힘을 써보려고 했지만, 음곡비파의 소리를 들은 직후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두 사람뿐 아니라 연단 아래의 웬만한 남자들이 다 그런 상황이었다. 규염개는 기지를 발휘해 외쳤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분들, 여협들은 저 요녀를 잡는 데 힘을 모아주시오!" 그의 외침에 호응하여 아미삼봉을 비롯한 아미파 여인들이 연단 위로 뛰어 올라왔다. 삽시에 연단 위에서는 피보라 자욱한 난전이 벌어졌다. "악!" "쳐라!" "으아악!" 죽기를 각오하고 궁주를 보호하는 화금궁 제자들과 아미파를 비롯한 무옥의 충돌은 처절했다. 하나 아무래도 기세는 격색마회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한데,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음곡비파의 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소운비가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으며 비파를 떨군 것이었다. 소리로써 남을 공격하는 음공은 여러 가지 무공 중에서도 가장 내공의 소진이 심한 무공이었다. 만일 소운비가 태원옥호공을 십 성 이상 연성하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피를 토했을 것이다. 소운비는 제대로 음곡비파를 쓰는 방법도 모른 채 진설영의 위기를 보고 다짜고짜 뛰어든 것이라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인데, 이것은 만음요화에게 구원의 신호였다. "제자들은 결사적으로 막아라!" 만음요화는 그렇게 외치고는 다시 한번 혼혼옥잡을 쳐들고 진언을 외웠다. "시아자맹 청아자농 감유도모아자반수기앙, 시아자맹 청아자농 감유도모아자반수기앙...!" 무옥은 다급해지고 말았다. 혼혼옥잡은 어느새 다시 달아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면 사방신의 형상이 다시 나오게 되리라. 그 전에 반드시 혼혼옥잡을 빼앗든가 만음요화를 없애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화금궁 여제자들의 저항이 너무 거셌다. 만일 그가 숨겨 둔 무공을 사용한다면 이 발악하는 계집들을 한번에 쓸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중인들의 시선이 너무 많았다. 하나 그는 이대로 격색마회가 시작부터 무너지게끔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격색마회는 그의 목표를 이루는 데 분명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다급해진 무옥의 손속이 한층 악랄해지고 있는 것을, 멀리서 운기조식하고 있던 진설영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모든 남자들이 힘이 없는데, 당신만은 멀쩡하군요...!' 우우우우웅...! 혼혼옥잡은 이제 서서히 그 가공할 괴물들을 내놓고 있었다. 한번의 패배가 사방신들을 더욱 노하게 한 듯 이번의 기세는 아까보다 훨씬 거셌다. 이제 사방신들의 머리 부분이 막 옥잡의 네 귀퉁이에서 나오고 있는데, 온몸이 다 나오게 된 뒤에는 너무 늦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만음요화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고, 무옥을 비롯한 격색마회 쪽의 사람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멈추어라!" 창노한 음성 하나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네 개의 인영이 연단 위로 뛰어올랐다. 둘은 화금궁 제자들의 머리 위를 새처럼 날아 만음요화를 덮쳐 갔고, 하나는 한쪽 옆에 쓰러져 숨을 몰아쉬고 있는 소운비를 덮쳤으며, 다른 하나는 비파 소리가 난 뒤부터 맥을 못 쓰고 자빠져 있던 탐서랑을 잡아챘다. "악!" 만음요화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을 습격한 사람의 손으로 떨어졌다. 다른 사람이 혼혼옥잡을 잡았으며, 그 순간, 막 빠져 나오다만 사방신의 형상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만음요화를 간단히 제압한 사람이 아직도 발악하고 있는 화금궁 제자들에게 외쳤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거라! 우두머리가 떨어졌으니 너희들도 따라야 한다." 그 목소리는 늙은 비구니의 음성이었다. 화금궁 제자들은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어지럽던 연단 위의 상황은 네 비구니의 등장으로 한꺼번에 정리가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중인들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눈으로 확인조차 할 틈이 없었다. 세 명의 늙은 비구니와 한 명의 중년비구니. 그들이 연단 위에 나타난 사람들이었다. 또한 규염개가 어젯밤의 회의에서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했던 그들이기도 했다. 그들 중 두 명의 노비구니가 각각 만음요화를 제압하고 혼혼옥잡을 빼앗았으며, 다른 한 명의 노비구니가 탐서랑을 잡았고, 마지막으로 중년의 비구니가 소운비를 잡은 것이었다. 소운비는 자신을 잡고 혈도를 빈틈없이 누른 중년의 비구니와 이미 구면이었다. 중년의 비구니, 석명은 소운비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간악한 놈!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구나!" 짜아악! 그녀는 무지막지하게 소운비의 가짜 얼굴을 잡아뜯었다. 동시에, 탐서랑을 잡고 있던 늙은 비구니도 그의 얼굴을 잡아뜯었다. "아니, 저런?" "저...!" 중인들은 입이 딱 벌어졌다. 한 사람의 진짜 얼굴은 다른 사람의 가짜 얼굴이었던 것이다. 특히 남궁세룡의 놀라움은 더했다. "아니! 네놈은 탐서랑이 아니냐!" 그는 지금 자신이 발걸음도 떼기 어려운 지경만 아니라면 당장 달려가 탐서랑의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 석명이 일어나 늙은 비구니들을 향해 합장하며 말했다. "제자가 아룁니다. 이놈이 전에 제가 찾았던 그놈임에 분명합니다. 숨겨진 얼굴이 그렇고, 지닌 비파가 그렇습니다." 탐서랑을 제압한 늙은 비구니가 말했다. "쯧쯧...! 이렇게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을 뒤집어쓰고 대체 무슨 흉계들을 꾸몄단 말인고...!" 비구니들이 등장한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 무옥이 앞으로 나섰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네 분은 어디에서 오신 분들인지요?" 네 비구니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아 걸어다니는 고목처럼 보이는 늙은 비구니가 자신이 짚고 있는 불장(佛杖)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리는 남해(南海)에서 왔소이다!" 불장. 마치 그 주인인 비구니처럼 꾸불거리는 고목을 깎아 만든 듯한 그 불장에는 관음보살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 형상을 보고, '남해'라는 말을 들어 가장 먼저 상황을 깨달은 것은 아미파의 정혜신니였다. 그녀는 깨달았으면서도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서, 설마! 남해 보타문(普陀門)에서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보타문! 그 말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남해 보타산(普陀山)에 뿌리를 두고 중원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높은 무공을 자랑하는 남해 보타문. 그 뛰어난 무공보다는, 일체 바깥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살다가 오직 백 년에 한 번 정도 무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세상 밖으로 한두 명의 제자를 내보낸다는 그 신비한 행적 때문에 중원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 보타문의 비구니들이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보타문의 네 비구니는 아미파 비구니들을 향해 불호를 외우며 합장하는 것으로 그 질문에 대해 긍정했다. "관세음보살...!" 탐서랑을 잡고 있던 비구니가 그를 끌고 무옥에게로 갔다. "우리 늙은이들은 모종의 일을 조사하기 위해 체면도 잊고 이렇게 강호행에 나섰소. 좀더 일찍 나서서 도왔어야 하나 몸이 느려 그런 것이니 회주는 이해하시고 이자들을 받으시지요." 무옥은 다급히 포권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렇게 귀빈들이 오신 줄은 몰랐습니다. 네 분의 방문으로 격색마회는 금칠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노비구니는 담담히 웃으며 그의 말에 화답하더니, 천천히 진설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아가, 너의 무공은 매우 낯익구나. 네 사부는 어디 있느냐?" 진설영은 뜻밖에 친근하게 나오는 노비구니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하나 방금 말을 꺼낸 노비구니 외에 다른 세 비구니들도 그녀를 향해 감격에 겨운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 사부는 분명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너의 무공과 그 보검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진설영은 노비구니가 가리키는 자신의 보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생사의 지경을 넘나들고 있는 자신의 사부이자 의모인 진파파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십여 년 간 신비에 싸여 있던 진파파의 신분이 한 겹 껍데기를 벗고 밝혀지려는 순간이었다. "어딘가 적당한 곳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주마. 네 사부는 어디 있지? 보고 싶구나!" 노비구니의 이야기는 뜻밖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격색마회의 인물들에게 어서 이 자리를 수습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했다. 무옥은 군웅들에게 외쳤다. "뜻밖의 사건으로 영웅대회는 잠시 휴회하겠습니다! 내일 다시 대회를 시작하겠으니 본 회가 마련한 임시 숙소에서 몸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개방 제자들과 남궁세가의 사람들, 그리고 아미파의 사람들이 함께 포로들을 잡아 묶고 시체들을 치웠다. 비록 영웅대회는 엉망이 되었지만 그들의 수확은 정말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음요화, 탐서랑, 무산음호. 게다가 무산음호의 제자라고 추정되는 젊은이까지. 이미 잡아 놓은 용양도인까지 친다면, 격색마회는 출범하자마자 칠대 색마 중 넷을 제압한 것이다. 물론 당철은 자신의 사위가 색마들의 일당이라는 사실에 펄쩍펄쩍 뛰었지만, 증거가 확실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놈이 일부러 내 딸을 노리고 접근한 거야'라며 소운비를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펄쩍펄쩍 뛰기까지 했다. 뒤늦게 당철이 혼음사의와 한종린에게 생각이 미쳤을 때, 두 사람은 이미 흔적조차 없이 달아난 후였다. 하늘의 운세는 격색마회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하나 마지막 순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 제3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