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장 뇌옥(牢獄) 땅을 깊이 파서 만든 뇌옥(牢獄)은 어둡고 습했다. 아무리 음침 하다는 색마들이라고 해도, 그런 곳이 마음에 들 리는 없었다. 뇌옥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마다 팔목과 발목, 그리고 허 리를 동여맨 쇠사슬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쇠사슬의 끝은 흙벽 깊숙이 박혀 있었는데, 얼마나 깊이 박혔는지 암만 용을 쓰 고 당겨 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긴, 깊이 박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쇠사슬에서 벗어난 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전신 대혈을 제압당한 데다가 산공독(散功毒)을 강제로 들이마셨기 때문에 그냥 뇌옥 바닥에 뉘어 놓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나란히 파놓은 세 개의 뇌옥에 그들은 모두 따로따로 갇혀 있 었다. 맨 왼쪽에는 만음요화와 용양도인이, 가운데에는 탐서랑과 무산음호가,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소운비가 갇혀 있었다. 간신히 살아남아 같이 잡힌 화금궁의 제자들 너댓 명은 밧줄로 묶어 방 하나에 가두어 놓았다는데, 이들은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무공을 못 쓰게 해놓은 것뿐 아니라 혹시 셋 이상 을 함께 두면 음모라도 꾸밀까 봐 두 명, 혹은 한 명씩 나누어 가둔 것이었다. 뇌옥의 유일한 입구인 천장은 그물처럼 촘촘한 철창이 덮여져 있었다. 그 좁은 틈으로 막 저물어 가는 불그스름한 하늘의 빛깔 이 새어 들어왔다. 쇠사슬을 몸에 칭칭 감고 흙벽에 등을 기대인 소운비는 문득 저녁놀을 마음놓고 바라보는 것이 오랜만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일 년도 채 안 지났지. 처음 귀회루를 떠났던 때가……!’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귀회루를 떠난 이후로 별의별 일을 다 겪었던 소운비였다. 자 신이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남을 죽일 뻔한 적도 있었다.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소중한 사람들과 이별을 했으며, 가장 짧은 시 간 동안 가장 많은 정을 주었던 사람에게는 배신을 당하기도 했 다. 한데 이제 그의 모든 여정은 이 좁은 뇌옥 안에서 종말을 고하 게 되는 것이다. 이따금 이 주변을 경비하며 오락가락하는 개방 제자들이 자기 들끼리 하는 말로, 포로가 된 색마들을 내일 다시 개최하는 영웅 대회에서 공개 처형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는 들었던 것이다. 하나 소운비는 그 말에 아무런 자극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에 대해 하는 이야기인데도 자극은커녕 한 점의 두려움도 일 지 않았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가능한 한 그 죽음의 시간이 빨리, 그리고 고통없이 오는 것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상처가 깊은 삶을 버티 기가 힘들었다. 심성이 굳건하거나 고약한 사람이라면 한 여자에게 배신당한 고통 때문에 죽기를 바라는 나약한 짓은 하지 않는다. 오직 어린 양의 속살처럼 심성이 부드러운 사람만이 한번의 상처에도 쉽게 굴복하곤 하는 것이다. 소운비는 지난날 진설영과 오해가 생겨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 을 때에도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하다가, 간신히 혜와를 만나 그 고통을 잊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 혜와에게 배신을 당하자 그 는 해묵은 상처까지 되살아나는 듯했다. 걱정해 줄 사람이 없는 삶. 좀 귀찮더라도 자신을 얽매어 줄 존재가 없는 그런 공허한 삶. 소운비가 맞닥뜨리고 있는 것은 바 로 그런 삶이었다. “어이구……!” 옆 뇌옥으로부터 마치 소운비 대신 터뜨려 주기라도 하듯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비록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소운비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무산음호는 인사불성이 된 몸이니 분명 탐서랑일 것이었 다. “이런 젠장할……! 내가 어쩌다가 별 실력도 없는 패거리들의 꼬임에 넘어가 이 용담호혈(龍潭虎穴)로 기어 들어왔을꼬……! 천 하의 대락불사신공까지 연마한 내가 이런 신세가 되다니……!” 한 칸 건너 만음요화의 뇌옥에서 뾰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탐서랑, 당신은 지금 나와 우리 화금궁을 모욕하는 건가요? 정확히 해두고 넘어갑시다. 누가 누구를 꼬였단 말이에요?” 탐서랑도 지지 않았다. “흥, 내가 모욕했다고? 이것 봐, 모욕이란 근거가 없는 말로 상대방을 욕보이는 것을 뜻하는 거야. 내 말이 어디 근거가 없는 가? 화금궁과 당신이 별 실력도 없이 설쳤기 때문에 요 모양 요 꼴이 된 게 아닌가 말이야!” “뭐가 어째요? 누가 난데없이 보타문 사람들이 나타날 줄 알 았겠어요?” “솜털도 채 안 가신 계집애한테도 진 주제에……!” 듣고 있던 소운비는 그만 픽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보지 않아 도 환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잘난 체하는 탐서랑과 눈을 새파랗게 부릅뜬 만음요화의 그 얼굴 하나하나를. 또 다른 힘없는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이봐, 이봐. 당신네들은 아직 밥을 굶은 지 며칠 되지 않아서 힘이 남아도는가 본데…… 여기 며칠만 더 갇혀 있다 보면 그렇 게 싸움할 기력도 없을 거야. 아직 뱃속에 든 게 있는 동안 힘을 좀 아껴 두라고.” 입술을 달싹이는 것도 귀찮은지 웅얼웅얼하는 그 음성은 귀에 낯설었다. 아마 한번밖에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용양도인일 것임 에 틀림없었다. 그의 말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는지 막 입씨름을 하려던 탐 서랑과 만음요화의 기세가 확 누그러졌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탐서랑이 맥빠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린 며칠 굶지도 못할걸……? 내일 처형한다고 하지 않 아?”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뇌옥 주변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확실히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완전히 해가 넘어가 사방이 캄캄해진 뒤에 만음요화가 다시 입 을 열었다. “이봐요, 소 공자!” 뜻밖에도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운비를 부르는 것이었 다. 소운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왜 그러시오?” 만음요화는 그의 목소리가 썩 달갑지 않은 것을 느끼고 더욱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내가 일전에 당신에게 좀 심하게 굴었었다고 화가 났나요? 그건 미안해요. 아……, 그리고 이번에 저 쓸모없는 사람을 당신 으로 꾸며서 색존이 되려고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저 쓸모없는 사람의 제안이었으니 너무 화내지 말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탐서랑이 툭 끼여들었다. “흥!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이 어찌 그런 놀라운 제안을 했을 까? 소 공자! 이 쓸모없는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었으니 오해 말 기 바라네. 자네도 생각이 있다면 저 요녀가 정말 조심해야 할 여자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만음요화는 탐서랑의 말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 었죠? 설마 혼자는 아니겠죠?” 만음요화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까지 배어 있었다. 소운비가 아 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만음요화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는 것이었다. “난 알고 있어요. 그때는 주의해서 보지 않았지만, 당신과 함 께 다니던 사람이 바로 ‘그’이지요? 그렇지요?” 만음요화는 특별히 ‘그’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가 누구 인지는 소운비도 알고 만음요화도 알고 있었다. 만음요화는 은근한 목소리로 정작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 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는 분명히 당신을 구하러 올 거예 요. 그때 나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세요.” 탐서랑이 또 빈정거렸다. “흥!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주변에 누가 듣고 있을지 도 모르는데, 잘도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군. 아주 신중한 여자 야! 아주 신중해!” “당신 정말 신경을 긁는군요. 당신은 귀가 먹통이에요? 주변 을 경계하던 사람들은 아까 교대를 하려고 자리를 비웠단 말이에 요. 눈치가 그 모양이니 아마 모두 다 도망가도 당신 하나는 남 겠군요. 당신하고 그…… 나무토막하고 말이에요!” 만음요화가 말한 나무토막이란 바로 탐서랑과 한 뇌옥에 갇힌 무산음호를 말하는 것이었다. 소운비는 새삼 무산음호와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에게 무공을 배웠던 일, 딸을 찾아 주마고 했던 약속,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무산음호를 비난했던 순간들. ‘이제 나는 그를 욕할 수 없어. 나도 결국 비슷한 인간이 되 고 말았으니까.’ 소운비는 쓴웃음을 짓고 입을 열었다. “만음요화! 무산음호는 왜 저렇게 되었소? 당신이 그를 해한 거요?” “천만의 말씀!” 만음요화는 단호히 부정했다. 소운비는 웃었다. “하지만 천하에 만음요화의 혼혼옥잡이 아니고서는 무산음호 를 저렇게 만들 것이 없지 않소?” “잘도 아는군요. 하지만 분명 무산음호는 화금궁에 침입한 괴 인에게 당한 거예요. 하긴……!” 그 대목에서 만음요화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했는지 머뭇 거렸다. “평소 무산음호의 무공을 생각한다면, 웬만한 고수라도 저렇 게 그를 상하게 만들 수는 없었을 텐데……! 그의 몸에는 태원옥 호공의 진기가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만음요화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그저 무산음호의 진기를 고 갈시킬 정도의 고수가 과연 있을까 하는 점이었지만, 그 이야기 를 듣는 순간 소운비는 가슴 한가운데가 뜨끔해졌다. ‘그때, 그가 나에게 주었던 그 단약……! 혹시 그것이?’ 소운비는 생각할수록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헤어질 당시 돌아서는 무산음호의 발걸음은 도무지 무공 이 고강한 사람답지 않았으며, 그런 상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그를 인사불성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소운비는 한탄했다. ‘나는 그저 내 일에만 정신이 팔려 그렇게 분명한 것을 당시 에는 눈치채지 못했구나……! 무산음호, 무산음호! 나는 강호에 나와 당신의 딸을 찾으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었단 말이오……!’ 소운비의 가슴은 뜨거워졌고, 목에서는 무엇인가 치밀어 오르 려고 했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탐서랑에게 물었다. “그는 지금 어떻소?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소?” “멀쩡한 나도 말 한마디 하기가 힘든데 나무토막이나 다름없 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나? 신음 소리라도 한번 들어 봤으면 좋겠군!” 소운비는 낙담하여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씩 주변을 도는 개방 제자들의 발걸음 소리만 들릴 뿐, 뇌옥 주변은 완전한 적막 속으로 빠져 들었다. * * * 격색마회의 수뇌들이 회의실로 썼던 그 방에 보타문의 늙은 비 구니 세 명과 무옥, 규염개, 남궁세룡 등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각각 뜨거운 차 한잔씩이 놓여 있었는데, 아무도 그 차를 입에 대지 않았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한참이 지나자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방에 들어왔다. 바로 중년의 비구니 석명과 진설영이었다. 석명은 노비구니들 앞에 합장하고 말했다. “제자가 사숙님을 뵙고 왔습니다.” 노비구니는 진설영을 가리키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오! 그래 저 아이의 사부가 과연 네 사숙 공혜가 맞더 냐?” “예, 다만 병이 너무 깊어 제가 몇 가지 손을 써두었습니다. 내일 저녁 때쯤에 깨어날 것이니 그때 부르십시오.” 보타문의 비구니들은 무엇이 그리 기쁜지 연신 불호를 외워댔 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도무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조 차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진설영은 예외였는데, 진파파를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석 명에게서 진파파가 본래 비구니이며, 석명의 사숙뻘로서 법명이 공혜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설영아! 이 세 분은 바로 너의 사조(師祖)가 되신다. 어서 인 사드려라.” 흥분이 가라앉은 뒤에 석명이 말했다. 진설영은 세 노비구니에 게 절을 했다. “진설영이 세 분 사조님들을 뵙습니다.” 세 노비구니는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 는 노비구니부터 자신의 법명을 밝혔다. “얘야, 나는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나는 무각(無覺)이라고 한다.” “나는 무수(無愁)라고 한다.” 세 노비구니의 소개가 끝나자 석명이 궁금해 하는 다른 사람들 을 위해 덧붙였다. “이 세 분은 본 문에서 가장 배분이 높으신 분들로서, 삼대성 니(三大聖尼)라고 불리십니다. 빈니(貧尼)는 석명이라고 하며, 현 재 보타문의 장문인 대행을 맡고 있습니다.” 석명은 진설영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의 사부는 내게는 사숙이 되시니, 너는 나와 배분상으로 같은 항렬이 되는 셈이다.” 진설영은 문득 눈물이 왈칵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귀회루에서 나온 이래 이름없는 문파의 사람이라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해 얼 마나 야무지고 당차게 살아 왔었던가! 하지만 이제 그녀는 엄청 난 배경과 든든한 사문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만일 사부 진파파, 아니, 공혜신니가 건강을 회복한다면, 그것 이상으로 기쁜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남궁세룡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진 소저는 과연 명문의 제자였구려. 이 사람들의 눈이 틀리 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져 기쁘기 그지없소이다.” 떠들썩한 축하의 말이 오고간 뒤에 비로소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규염개, 남궁세룡, 무옥의 눈은 궁금증을 가득 담고서 보타문의 삼대성니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이십 년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소.” 입을 연 것은 삼대성니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무명성 니(無明聖尼)였다. 그녀는 벼락을 맞은 썩은 고목처럼 늙었으면서 도 말 소리는 매우 정정했다. “비록 우리 보타문이 궁벽진 남해에 있기는 하지만, 어떤 일 은 여기 중원보다 훨씬 잘 알게 되기도 한다오.” 무명성니는 긴장된 표정으로 듣고 있는 규염개와 남궁세룡, 무 옥, 진설영 등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 어떤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좌도밀교의 일이라오.” 뜻밖에 ‘밀교’라는 말이 무명성니의 입에서 나오자 모두는 경악한 표정이었다. 하나 곧 그들은 그럴 법도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는데, 좌도 밀교와 같이 사이한 종교라면 보타문과는 상극일 터이니 가장 경 계하는 대상에 대해 가장 잘 안다는 것은 타당성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들이 납득하는 얼굴을 하자 무명성니는 이십 년 전 좌도밀교 의 승려 하나가 중원으로 들어와 사대성물을 모았다가 실종되었 던 일에 대해 언급했다. 몽혼표에 얽힌 그 이야기는 남궁세룡과 규염개처럼 나이가 좀 지긋한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허허……! 그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좌도밀교 측의 사람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당시 서장에서 온 법력(法力) 높은 고승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남궁세룡은 과거를 회상하다가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하면, 그의 실종 역시 그 스스로가 꾸민 것일까요?” 무명성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좌도밀교에서 가무진(伽戊眞)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 소.” 무명성니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남궁세룡에게 물었다. “이 이름에서 무엇인가 연상되는 바가 없으시오?” “가무진…… 가무진……! 현재 황실의 대원국사가 가린진인 데…… 설마?” 남궁세룡을 비롯한 격색마회의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 다. 무명성니가 그 말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소. 가무진은 바로 가린진의 사형되는 사람이오.” 무명성니가 들려 주는 이야기는 갈수록 놀라운 것이었다. 보타 문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가무진은 가린진의 초청을 받고 중원 으로 왔으나, 가린진에게 가지 않고 혼자 중원을 돌아다니며 사 대성물을 모았고, 암중으로는 자신의 비밀세력을 심어 나갔다. 그 리고 사대성물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실종 사건을 조작하여 잠 적해 버린 것이었다. “우리가 짐작하기에, 그는 아마 그 사대성물을 이용하여 최고 의 신공을 연마하려고 한 것 같소. 그가 서장의 고승인 체한 것 은 사대성물을 모아 들이는 과정에 중원 무림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함이었고, 사라진 것은 신공을 연마할 시간을 획득하기 위함일 것이오.” 무옥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사대성물이라 함은?” “바로 요녀가 가지고 있던 혼혼옥잡, 젊은 사내가 가지고 있 던 음곡비파, 무산음호가 익혔던 태원옥호공의 비급이 그 중 세 개이며……” 무명성니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마지막 하나는 인세에 다시 나올 수 없는 비급이라는 <기제 진경(旣濟眞經)>이오!” 규염개가 탄식하듯 뱉었다. “아하! 그렇다면 그 가무진이 익히려고 한 것은 바로 <기제진 경>에 적힌 무공이겠군요.” “그렇소. <기제진경>에는 어떤 초식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이 써 있다고 하오. 그가 원하는 것 은 바로 그런 힘일 것이오.” 문득 남궁세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나머지 세 개의 성물은 어째서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 어가 있을까요?” 무명성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우리들도 정확히 진상을 알 수가 없소. 다만 추측컨 대 그 삼대성물을 가지고 있는 색마들이 다름아닌 가무진의 수하 가 아닐까 하는 것인데……”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설영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비파는…… 제 사부님께서 사형에게 준 것인데 요!” 석명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누가 네 사형이란 말이냐?” 진설영은 아차 싶었지만 굳이 숨길 일도 아니라 그간의 사정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십 년 전 다 죽어 가는 사부를 자신과 소운 비가 발견했던 일, 사부가 자신에게는 관음보검을, 소운비에게는 비파를 하사했던 일, 소운비가 색마들에게 납치된 일, 그리고 다 시 만났을 때 소운비가 변모되어 버린 일……! 진설영의 이야기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두 가지 의문이었는데, 하나는 어째서 소 운비가 불과 반 년 만에 극악한 색마들과 한 무리가 되었을까 하 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어째서 공혜신니가 진설영과 소운비에게 발견될 당시 음곡비파를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남궁세룡이 말했다. “사람이 선해지기는 어려워도 악에 물드는 것은 눈 깜짝할 사 이니……! 그 사람도 아마 짧은 시간 동안 색마들과 어울리다가 심성이 더럽혀진 것일 게요.” 모든 사람들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오직 삼대성니밖에 풀어 줄 수가 없었다. 무명성니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관세음보살……! 공혜는 우리 세 사람의 제자로서, 보타문의 장문인이었소. 장문인의 위에 오르자마자 가무진의 일을 해결하 기 위해 중원으로 나갔소. 한데 그 뒤로 소식이 끊겼던 것이오. 지금 생각건대 아마도 가무진을 만나 음곡비파를 빼낸 뒤에 놈에 게 부상을 당하고 기억을 잃은 것 같소이다마는……” 무명성니는 말끝을 흐렸는데, 그것은 공혜가 실종되고 나서 다 시 발견되기까지 무려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그 세월은 아무리 공혜가 가무진의 일을 조사하기 위해 고군 분 투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긴 것이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어찌하여 단 한번도 사문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모든 사람들은 의문과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무명성니가 나 직이 불호를 외웠다. “관세음보살…… 어쨌든 내일 저녁쯤에는 공혜가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니…… 그때가 되면 모든 의문이 풀릴 것이오.” 무옥이 물었다. “하지만 진파파…… 아니 공혜성니께서는 기억을 잃으셨는데 어떻게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실 수 있을까요?” 석명이 대답했다. “본 문의 비전 의술로 제가 보살펴 두었으니, 기억은 회복하 실 것입니다.” 진설영을 비롯한 사람들의 얼굴이 비로소 밝아졌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다섯 명의 색마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 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밤이 깊을수록 이야기도 무르익어 가는데, 삼목신룡 무옥의 눈 이 야릇하게 빛나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얼핏 잠들었던 소운비는 시끄러운 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어났 다. 떠들썩한 고함 소리, 요란한 발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들이 난 데없이 들려 온 것이었다. 만음요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우리를 구하려고 소란을 피우고 있는가 봐요!” 탐서랑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깨어난 모양이 었다. “저렇게 소란을 피워서야 우리를 구해 내기는커녕 자기가 잡 히겠군! 어떤 얼간이가 저런 짓을 하고 있지?” 말은 빈정대는 것이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기대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시체나 다름없는 무산음호를 제외하고 네 사람은 귀를 쫑긋 세 우고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주의를 기울였다. 밤하늘을 깨부술 듯 치솟던 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지자, 그들 은 모두 긴장했다. 침묵은 잠깐이었고, 다시 떠들썩한 소리가 뇌옥 쪽을 향해 다 가오기 시작했다. “이놈! 꿈쩍도 하지 말아라!” “아주 잘 걸렸다!” 들려 오는 소리들은 모두 개방 제자들의 목소리였다. 색마들은 모두 실망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뇌옥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덜컹`─`! 갑자기 소운비가 갇혀 있는 뇌옥의 뚜껑이 열리면서 두 개의 시커먼 그림자가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소운비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두 개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야, 이 버릇없는 놈아! 어르신을 좀 살살 던지지 못하겠느 냐?” “어이구……! 어이구……!” 욕설을 퍼붓는 것은 혼음사의였고, 신음을 내지르는 것은 한종 린이었다.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부축해 줄 수 없었던 소 운비는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뒤따라 내려온 개방 제자 두 명이 혼음사의와 한종린마저도 소 운비처럼 쇠사슬에 매달아 버린 뒤 다시 올라가 버렸다. 그런 꼴 을 당하면서도 저항을 못하는 것이 그들 역시 다른 색마들처럼 혈도를 제압당하고 산공독을 먹은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혼음사의가 계속 투덜거리자, 만음요화가 큰 소리로 물었다. “거기 새로 오신 분은 의원 나으리가 아니신가요? 어쩌다가 잡혀오셨습니까?” 혼음사의가 귀를 기울여 듣더니 제법 호기를 부려 대답했다. “누군가 했더니 화금궁주시구만! 내 사제와 함께 사랑스러운 제자를 구출하려고 하다가 놈들의 독수에 당하고 말았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한종린이 발딱 고개를 들었다. “사제라니! 사형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그리고 네놈이 무슨 구출을 하려고 했어? 내 모든 사실을 밝히고야 말겠다!” 어쩐 일인지 혼음사의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다급히 한종린에게 말했다. “그, 그래. 자네가 사형이 맞네. 그러니 제발 그 이야기는 하 지 말게.” 한종린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뭐, 사형에게 자네라고? 난 이야기하고 말 테다! 이야기하고 말 거야!” 소운비는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자 자신의 처지도 잊 고 웃음이 나왔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밝히시겠다는 겁니까?” 한종린은 주저하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내 못난 사제는 자네가 영웅대회장에서 잡히자마자 당장 나 를 끌고 달아나 몸을 숨겼지. 원래는 어둠을 틈타 멀리 달아날 계획이었는데, 저 주책없는 놈이 느닷없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여 승 냄새가 난다는 게야. 아, 그러더니 아미파 여승들 숙소로 음충 맞게 기어 들어가지 않았겠나? 나는 죽어라고 말렸지만 말을 듣 지 않더군. 결국 아미삼봉한테 들켜서 호되게 혼이 나고 결국 여 기까지 잡혀오고 말았지! 어이구, 어이구…… 군자는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법인데……!” 소운비는 비로소 혼음사의와 한종린이 잡힌 내막을 알게 되었 다. 이상하게도 실망스럽다기보다는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상황 이 어떻게 변하고 세월이 얼마나 흐르는가에 상관없이 여전히 혼 음사의는 혼음사의이고 한종린은 한종린이었던 것이다. 탐서랑이 비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흥! 나이도 많으신 의원 나으리께서 주책스럽게 또 비구니를 탐하다가 저승길로 접어들었구려. 축하하오! 축하해!” 혼음사의는 끝까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나는 어디까지나 비구니들을 인질삼아 자네들 을 빼내려고 했던 것이야. 같은 색마끼리 내 말을 안 믿으면 어 떻게 하겠다는 건가?” “같은 색마니까 당신 속을 빤히 들여다볼 수 있지 않겠소?” 혼음사의는 더 이상 탐서랑과 대거리하지 않고 이번엔 한종린 에게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이 비겁한 놈아! 너 역시 내가 비구니 속살 맛을 보자는 말 에 은근히 회가 동해서 따라와 놓고 무슨 헛소리냐? 정말 신의가 없는 놈하고는 사귀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뭐가 어째? 이놈이!” 둘의 막 언성이 높아지는 판에 천장의 철창을 요란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닥치지 못할까?” 혼음사의와 한종린이 찔끔해서 위를 올려다보자, 철창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남궁세룡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소운비를 포함하여 세 사람을 노려보더니 발걸음을 돌려 가운데 뇌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탐서랑이 있었다. 탐서랑에 대한 남궁세룡의 감정은 각별했다. 그것은 증오와 원한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네놈과 이런 식으로 만날 날이 있기를 늘 바래 왔었다.” 탐서랑은 주눅이 든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궁세룡에 대 한 탐서랑의 감정도 각별한 것이었다. 그 감정의 이름은 두려움 이었다. “내 딸은 네놈 때문에 죽었다. 그것도 처참하게!” “나는 연매를 죽이지 않았소.” “닥쳐라! 연매라니……! 네놈이 내 딸의 신세를 망쳤으니 그 애가 그렇게 자결한 것이 아니냐?” 남궁세룡은 이를 갈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네놈을 내 딸처럼 처참하게 죽여 버리고 싶다. 그것도 지금 당장!” 탐서랑은 가슴이 벌렁거려서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이, 이것 보시오. 연매…… 아니 남궁 소저는 자결한 것이 아 니오. 그녀는 원래 나와 달아나려고 했는데, 어찌 자결 따위를 하 겠소? 당신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지금 나를 몰아붙이는 것이 아 니오?” “입을 찢어 놓기 전에 닥쳐라!” 콰앙! 남궁세룡은 거칠게 발을 굴러 철창을 후려쳤다. 탐서랑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이제 알겠다……!” 남궁세룡이 중얼거렸다. “네놈은 내 딸을 강제로 범하고 데려가려다가 말을 듣지 않자 사이한 무공으로 내 딸을 죽인 것이지? 네놈이 바로 내 딸을 죽 인 것이지!” “나, 남궁 대협, 왜 그러시오? 내가 아니오! 나는 남궁 소저를 죽이지 않았소.” “네놈이 아니라며 누구겠느냐? 네놈이 어찌 우리 화련이가 자 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겠느냐? 바로 네놈이 화련이를 죽 인 범인이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이것 보시오. 내가 방을 나갈 때만 해도 남궁 소저는 멀쩡했 소. 내, 내…… 짐작 가는 놈이 하나 있긴 하오만……!” “뭐라고?” “내, 내가 그 방을 나올 때 한 사람이 그 방으로 들어가는 것 을 보았소. 그는 당신이 시켰다며 남궁 소저의 허락을 받아 방으 로 들어갑디다. 그놈을 족쳐 보시오. 반드시 아는 것이 있을 것이 오.” “그가 누구냐?” “바, 바로 삼목신룡 무옥이오.” 남궁세룡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탐서랑은 기대감을 가지고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네놈이 지금 나를 희롱하려고 하는 것이냐?” “저, 전혀 아니오. 내가 왜 당신을 희롱하려고 하겠소? 당신은 내 장인이나 마찬가지인……!” “이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남궁세룡은 불같이 노하며 대뜸 철창을 열어제쳤다. 그는 옆에 서 있던 남궁세가 사람의 창을 빼앗더니 그것으로 탐서랑의 목을 꿰뚫으려고 했다. 탐서랑은 쇠사슬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피해 보려고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는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남궁세룡이 내지른 창끝은 탐서랑의 목젖을 건드리고 상처까지 입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너…… 이놈! 내 지금 당장이라도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 고 싶으나 격색마회는 네놈들과 달리 공명정대하다는 것을 보이 기 위해 내일까지 참도록 하겠다. 한번만 더 나와 우리 회주를 모욕하는 말을 한다면 이 창끝에 네놈의 창자를 걸어 말리리 라!” 탐서랑은 침을 꼴깍 삼키며 눈을 끔뻑거렸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서 비 오듯 땀이 떨어졌다. 한참 만에야 남궁세룡은 창을 치우고 다시 철창을 닫고는 물러 났다. 남궁세룡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탐서랑은 비로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도 내일 죽는 것과 오늘 죽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가시고 나자 탐서랑은 갑작스레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누구든 좋은 술과 미인에 취해서 살 다가 갑자기 몰락하여 추운 겨울날 축축한 뇌옥에 갇혀서 목숨을 위협받았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탐서랑은 특히나 원래 성격이 유약하여 청성파에서 오래 수련 을 하지도 못하고 여체의 유혹에 빠져 타락의 길로 떨어졌었던 사람이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지자 그는 금방 마음이 여려지고 심지어 눈물까지 솟았다. “연매…… 연매! 당신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이런 수모를 당 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을……” 그가 서럽게 외치자 만음요화가 비웃었다. “흥! 당신이 그녀를 죽여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예요?”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어! 데리고 살 생각이었는데 내가 왜 죽이겠어!” “당신은 어젯밤에 그녀를 찾아갔었잖아요. 그리고 어젯밤에 그녀는 간살당했고.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해요?” 탐서랑은 너무나 울화가 치밀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답은 엉뚱한 데서 나왔다. “그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소!” 말을 한 것은 한종린이었다. 만음요화가 짜증 섞인 소리로 물 었다. “아까 이야기를 듣자 하니 의원 나으리의 동문 사형제이신 모 양인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죠?” “여자를 겁간하고 죽이는 것은 취화비도나 하는 짓이지. 탐서 랑은 그렇지 않소이다.” 비록 강호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에 박식한 그 인지라 간단한 말이라도 일리가 있었다. “그럼 누가 죽였을까?” 만음요화가 물었다. 한종린은 소운비와 혼음사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그가 보았다는 사람이 무슨 열쇠를 쥐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남궁세룡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가라앉자, 의문이 고개를 들고 치솟아올랐다. 그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한 사람의 방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그는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회주, 내 물어 볼 말이 있어서 왔소.” “무슨 일이십니까?” 삼목신룡 무옥은 남궁세룡이 그를 처음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당당하고 호탕한 태도로 그를 맞아들였다. “음…… 이건 어디까지나 궁금해서 물어 보는 것인데 말이오, 혹시 어젯밤에 내 딸애를 방문하지 않았었소?” 무옥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회의를 마치고는 바로 잠이 들었습니다만. 제가 야심한 밤에 영애를 찾아갈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긴, 만일 그렇게라도 했었더라면 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을 테니 안타깝군요……” 남궁세룡은 무옥의 자연스러운 대답에 적이 안심하는 태도였 다. 그는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휘적휘적 가버렸다. 그를 배웅하며 뒷모습을 지켜보는 무옥의 눈에는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 ‘저 늙은이도 약간이나마 의심을 품은 모양이니 곧 처리를 해 야겠군. 하지만 일단 그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사람이 있어… …!’ 그는 만일 내일 저녁에 한 사람이 깨어나 기억을 회복해서 많 은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신의 아버지는 물론 자신의 정체마저 도 밝혀지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진설영은 자신의 사조가 되는 삼대성니와 석명 앞에 앉아 있었 다. 외인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석명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 다. “내 아까는 바깥 사람들이 있어 차마 입을 열지 못했지만…… 공혜 사숙님의 용태는 좀 괴이하더구나.” “예?” “물론 사숙께서 저렇게 인사불성이 된 것은 강한 충격을 받았 기 때문이지만…… 그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몸이 허약해져 있 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몸에 축적되다가 급기야는 생명이 끊기는 독을 계속 복용했기 때문이란다!” 진설영은 너무나 놀라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부의 건강이 이 상할 정도로 급작스럽게 안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 이 독에 의한 것일 줄이야……! 무수성니가 말했다. “그것은 정말 괴이하구나. 만일 한번 복용하여 목숨이 끊어지 는 독이라면 모를까, 장기간 복용하는 독약이라면 누군가 공혜의 가까운 사람이 저지른 짓일 것이며, 그것도 독살된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죽일 심산이었던 게야. 이것은 색마들의 소행이라기 보다는 분명 가까운 사람 중의 하나가……!” 진설영은 이 늙은 비구니들이 비록 고루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아주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명성니가 부드럽게 물었다. “설영아, 너는 그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겠지?” 진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은 함부로 입 밖에 낼 수가 없겠지?” 진설영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는 공혜의 제자이자 우리 보타문의 차기 장문인감이 니 네가 확신을 갖게 되면 그때 우리에게 이야기해도 괜찮다!” 진설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문인이라니요? 석명 사조께서 계시는데 제가 어찌……!” 석명이 부드럽게 웃었다. “설영 사매, 우리 보타문에는 검의 달인만이 문주가 될 수 있 다는 전통이 있지. 세 분 사숙조께서는 바로 검의 달인이시고, 공 혜 사숙은 그 전통을 이었으며, 사매가 또한 그 전통을 이었으니 장래의 장문인은 바로 그대야. 나는 보타문의 문인이기는 하나 검이 아닌 다른 무공을 익혔지. 오직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검법 을 지닌 검후(劍后)만이 보타문의 문주가 될 수 있어.” 검후! 그것은 검에 있어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보타문의 여인을 지칭 하는 전설적인 말이었다. 역대 보타문의 문주들은 하나같이 검술 이 고강했고, 그들의 검법을 당할 자는 천하에 없었기 때문에 중 원인들도 보타문에서 온 고수를 검후라고 불렀다. 진설영은 검을 쓰는 여인으로서 자신이 바로 그 검후가 될 수 있다는 소리에 가 슴이 두근거렸다. 석명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혜 사숙은 비록 나와 나이가 같지만 나의 사숙이시며, 보타문의 문주이신 거지.” 진설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명은 아무리 많이 보아도 나 이가 사십오 세를 넘지 않아 보였고, 진파파 공혜는 칠십은 훨씬 넘어 보이는 파파 늙은이인데 같은 나이라니? 진설영의 의문을 금세 눈치챈 무수가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로구나……! 공혜는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 에 십 년 동안이나 연락이 없었고, 또 저렇게 늙은 모습으로 다 시 나타난 것일까……?” 그 의문은 누구도 풀 길이 없었다. 진설영은 까닭 모를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어딜 가려느냐?”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그녀는 인사를 하고 재빨리 방을 나왔다. 찬바람이 그녀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 * * “흥…… 차라리 빨리 죽여 줬으면 좋겠군. 무섭게 춥구나!” 혼음사의가 중얼거렸다. 내공을 운용하지 못하니 얇은 옷 속으 로 추위가 무섭게 파고드는 모양이었다. 그는 문득 소운비를 쳐다보더니 대뜸 물었다. “너는 죽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은 표정이로구나.” 소운비는 쓸쓸하게 대답했다. “살아도 별 즐거움이 없는 세상이니 죽는다고 뭐가 두렵겠습 니까?” “내 안 그래도 네놈이 얼마 전부터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은 했다만 시간이 없어서 묻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꼭 물어야 겠구나. 대체 뭣 때문에 네놈이 그렇게 맥이 빠진 거지?” “묻지 마십시오.” 혼음사의는 갑자기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얘기해 주지 않아도 내 십분 짐작할 수 있다. 너 같은 놈이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것은 백이면 백 다 계집 때문이지. 그렇지 않느냐?” 소운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혼음사의로 하여금 자신 의 추측이 맞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혜와 때문이냐? 그녀가 너를 배신했다는 소식이라도 들었느 냐?” 소운비는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해 가며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혼음사의는 계속해서 귀찮을 정도로 집요하게 질문했다.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보거라.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응? ” “……” “너, 대답하지 않으면…… 계속 물어 볼 테다!” “……” “대답 안 할래?” “휴우……!” 소운비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고 떠듬떠듬 추면인을 처음 만났 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종린이 끼여들었다. “음…… 그래서 그 비파가 네 손에 있었던 것이로구나. 음……!” 혼음사의는 이야기를 다 듣고는 제법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 렸다. 그로서는 보기 드물게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울리지 않 을 정도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고작 그것 때문에 그렇게 난리를 쳤던 것이냐?” 소운비는 혼음사의가 자신의 고민을 일거에 무시해 버리는 듯 한 말투에 반발을 느꼈다. “사부께서는 여자의 정 따위에 상처를 받지 않으시는지 몰라 도 저는 다릅니다.” “뭐야? 이놈이!” 혼음사의는 화가 나서 그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하지만 쇠사 슬 때문에 그 발길질은 소운비의 몸에 닿지도 못했다. “이놈아! 어른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듣지 못하고……! 네놈 처럼 순진한 척하는 놈들이 사소한 일로 여자를 의심하고 펄펄 날뛰는 꼴은 정말 구역질이 난다!” “그녀는 나를 배신했고, 다른 남자를 시켜 내게 그것을 알리 기까지 했는데 어째서 그것이 사소한 일입니까?” “바보 같은 놈, 혜와는 너와 헤어진 뒤 무수한 일을 많이 겪 었을 것이다. 어떤 곡절이 있어서 너를 위해 그렇게 했을지도 모 르는데, 최소한 그녀를 만나 직접 그 입으로 이야기를 들어 보아 야 하지 않겠느냐?” “이미 추면인이 내게 모든 이야기를……!” “이놈 정말 철이 없구나. 좋다, 이 경험 많은 어르신네께서 조 목조목 따져 주마. 일단 그 추면인이라는 놈부터가 아주 수상쩍 다. 그놈은 제 입으로 혜와랑 잤다고 했다지? 어떤 말썽이 일어 날지 모르는데 제가 데리고 잔 여자의 본남편에게 찾아와 그런 소리를 늘어놓다니, 정말 이상하지 않느냐? 그놈이 말썽 일으키 는 것을 너무나 좋아해서 돈을 주고 살 정도가 아니라면 그럴 리 가 없다.” “……” “그리고, 정말 그놈이 혜와랑 잤을까? 그건 한쪽의 말만 듣고 그렇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먼발치에서 그놈을 보았을 때는 비록 목소리가 굵고 몸이 각지기는 했지만 어쩐지 음양인처 럼 이상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세상에는 고자이면서도 그것을 감추기 위해 여자랑 잤다고 떠들고 다니는 놈들도 있단 말이다. 최소한의 증거라도 알아 내야지. 정말 그놈이 혜와랑 잤다면 뭔 가 혜와에 대해서 너만이 알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잠자리에서 어떤 버릇이 있다든가, 아니면 그 발바닥 에 있는 붉은 점이라든가……!” “……!” “아무튼 그런 것을 알고 있어야만 그나마 조금 믿을 만한 것 이다.” “잠깐!” “응?” 소운비는 긴장된 목소리로 혼음사의의 말문을 막았다. 그리고 간신히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지금 발바닥의 붉은 점이라고 하셨습니까?” “응……? 응! 아…… 저, 그건 말이야!” 혼음사의는 자신이 흥분한 나머지 말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 고 얼버무리려 했다. 하지만 소운비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혜와한테 그런 점이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언제 그걸 보셨습 니까?” “어……! 그건 저…… 사실은 혜와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았 는데 말이지. 하지만 절대로 그 이상은 하지 않았네. 자네 부인이 된 다음에는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 소운비는 짜증이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부님이 혜와를 훔쳐본 것이야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제 가 지금 그것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정말 혜와에게 그런 점이 있었단 말입니까?” 혼음사의는 되려 화를 냈다. “아, 그렇다니까! 내가 분명히 보았어. 한데 자네가 더 이상하 군. 이미 동침까지 해놓고 어째서 그것을 못 보았단 말인가?” 한종린이 대신 대답했다. “그거야 소 사질은 자네처럼 음흉하지 않으니 분명 불을 끄고 운우의 정을 나누었겠지. 불을 껐는데 어찌 점 같은 것을 볼 수 있었겠나?” 혼음사의는 코웃음을 쳤다. “흥, 그랬겠군. 그러니 무릇 제 아내와 동침할 때는 불을 환하 게 밝혀 두고 구석구석 다 보아 두어야 하는 법이야. 그래야 아 내의 몸에 대해서 세상에서 제일 잘 알게 되는 거지.” 소운비는 지금 새로운 발견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려 혜와의 배 신이 진짜인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혜와가 바로 무산음호의 딸이라는 말인가? 아니다…… 세상은 넓고, 발바닥에 붉은 점이 있는 여자 는 비록 흔하지는 않지만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혜와 가 그럴 리는…… 하지만…… 혜와는 화금궁에서 자랐고, 고아라 고 했으며 모든 것이 무산음호가 말한 것과 일치한다……!’ 소운비는 혼자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문득 이 문제에 대해 가 장 정확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에 생각 이 머물렀다. “만음요화!” 그가 다급히 부르자 만음요화가 귀찮다는 듯이 느릿하게 대답 했다. “왜 부르는 거지, 소 공자?” 어느새 말투도 바뀌어져 있었다. “물어 볼 것이 있소. 무산음호의 딸이 누구요?” “흥, 내가 왜 거기에 대답을 해야 하지? 아까야 혹시 혼음사 의가 너를 구하러 오지 않을까 싶어서 친절하게 대해 준 것이었 지만……!” “어차피 내일이면 같이 죽을 목숨인데, 대답해 준다고 무슨 손해가 나는 것은 아니지 않소!”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그런지 대답해 주고 싶지가 않군! 귀 찮게 굴지 마!” 소운비는 애가 타서 다시 만음요화를 부르려고 하는데, 문득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색마들은 얼른 입을 다물고 다시 철창만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발소리는 절도가 없으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의 것이었고, 가볍고 사뿐사뿐한 것이 틀림없는 여자의 것이었다. “여긴가……?” 발소리의 주인공은 만음요화와 용양도인이 있는 뇌옥을 들여다 보더니 금세 바로 옆의 뇌옥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머나!” 번들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탐서랑을 발견하고 그 발소리의 주인은 나지막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탐서랑이 희롱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정말 오래간만이군그래.” 소운비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황급히 탐서랑의 뇌옥 앞을 떠나 소운비가 있는 곳 으로 왔다. 내려다보는 그 얼굴은 당미령의 것이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어쩐지 미안한 느낌이 들어 소운비는 고개를 숙였다. “왜 왔소?” 당미령은 소운비를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그 아래는 견딜 만한가요?” “뭐 아주 좋은 것은 아니지만 견딜 만하오.” 소운비는 비로소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면 별로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거요. 내가 권하는 데 어서 이 자리를 뜨시오.” “이미 밤이 깊어 개방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여기저기에 기 대어 졸고 있어요. 이 사람들은 벌써 며칠째 밤을 새면서 일을 했기 때문에 당신들이 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도 오는 잠을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에요.” 혼음사의가 냉큼 말했다. “당 소저! 그렇다면 우리를 풀어 줄 수 있겠소?” 당미령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당신들 모두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니까 요. 하지만……!” 당미령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소 공자, 당신은 그리 나쁜 사람 같지도 않고, 또 한때나마 나의 정혼자였으니 작은 선물을 하나 주고 가겠어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품안에서 작은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 은 어둠 속에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날이 시퍼렇게 선 비수였 다. 한종린이 감탄하며 말했다. “저건 교룡(蛟龍)의 힘줄도 끊어 놓는다는 당문의 보물 한혈 비(寒血匕)로군!” 당미령은 한혈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 한혈비라면 비록 한번에 당신의 쇠사슬을 끊지는 못해도 일 각만 노력하면 끊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이것을 당신에게 주겠어요. 대신 당신 혼자서만 탈출하세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어도 싸니까요. 그리고……” 당미령은 말끝을 늘였다. “그리고 뭐요?” 소운비가 묻자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게 한 사람의 행방을 가르쳐 주어야 해요. 그것이 조건이 에요.” “어떤 사람 말이오?” 당미령은 주변에 듣는 사람들이 있어 꺼려지는 듯 주저하고 있 었다.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만음요화가 말했다. “이봐요, 당 소저. 우리야 어차피 내일이면 모두 죽을 사람들 인데 뭘 부끄러워하지요? 어서 대놓고 그에게 물어 보세요.” “나는 당신 같은 탕녀와 달라 아무리 죽을 사람 앞이라도 부 끄러움은 느낄 수 있어요!” 당미령은 샐쭉해져서 만음요화에게 핀잔을 던졌지만,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용기를 얻었는지 소운비에게 말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때 나와 당신을 구해 주었던 몽고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거예요.” 소운비는 당미령이 왜 느닷없이 타라하이에 대해서 묻는가 의 아했지만, 전혀 짐작이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미령이 무 안해 하지 않도록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그는 몽고인으로서 어사대의 관리이고, 이름은 타라하이라고 하오. 나와 헤어질 때 그는 북망산으로 간다고 했소.” 당미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손이 번뜩하더니, 한혈비가 철창 사이로 던져졌다. 소운 비는 팔을 벌려 그것을 받았다. “고맙소!” 소운비는 손 안에 들어온 한혈비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생명 의 도구였다. 시간은 걸리지만 그는 여기서 탈출할 수가 있는 것 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되든지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었다. 하나 잠깐 사이에 그는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품게 되었다. 그것은 혜와가 무산음호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 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무산음호의 은혜를 입었으니 그의 딸에게 이 사 실을 알려 주고 부녀를 상봉하게 해줄 의무가 있어.’ 그는 자신을 그렇게 닦아세웠다. 사실 그는 애써 부정하려고 했지만, 혜와가 너무나 보고 싶었 다. 다만 혜와가 이미 자신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굳이 찾아갈 명분이 없어 그저 절망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갑자기 희망 을 갖게 된 것은 무산음호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비록 자신을 배반한 여자이지만 다시 만나야 할 명분을 갖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이제 이곳을 빠져 나가 추면인을 찾아서 혜와의 행방을 알아 보리라 결심하며 한혈비를 굳게 쥐었다. 당미령은 그가 한혈비를 받아 든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럼 일이 잘되길 바래요.” 당미령의 자그마한 발소리가 사라지자마자 혼음사의가 말했다. “어서, 어서 서두르게. 일단 자네 것을 자르고 그 다음엔 내 쇠사슬을 잘라.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어서!” 소운비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쇠사슬을 한혈비로 자르기 시작 했다. 한혈비는 과연 날카로운 비수였지만 금세 쇠사슬을 잘라 낼 수는 없었다. 옆 뇌옥에서 탐서랑이 말했다. “이봐, 이봐, 소 공자! 설마 나를 버리고 가지는 않겠지? 응?” 만음요화도 갑자기 안면을 바꾸었다. “소 공자! 알고 싶은 게 뭐예요? 내 당장 가르쳐 주겠어요. 혜 와의 신분? 원한다면 가르쳐 주겠어요.” 소운비는 귀가 솔깃해져서 만음요화에게 물었다. 어쨌든 그는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다. “그럼 묻겠소. 혜와가 정말 무산음호의 딸이오?” “호, 호호……!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 냈는지 정말 신기하군 요. 사실 나는 그 아이를 옆에 두었다가 언젠가 무산음호를 크게 약올리려고 했던 것인데…… 뜻밖에 당신이 그 아이를 마음에 들 어하기에 당신에게 딸려서 내보냈던 거예요.” 소운비는 ‘역시’ 하면서 나직하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가 직접 찾지는 못하고 마음속으로 걱정만 하고 있었던 무산음호의 딸은 바로 그의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혜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있는 힘을 다해 쇠 사슬을 썰기 시작했다. 내공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속도는 매우 더뎠다. 소운비가 쇠사슬을 끊기를 기다리는 동안, 혼음사의는 초조하 게 입술을 빨다가 문득 만음요화에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요녀로군. 어째서 그 딸을 괴롭힌 것으로도 모 자라 무산음호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소?” 그는 소운비의 분노를 자극해 만음요화를 돕지 못하도록 만들 려는 것이었다. 동행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탈출 시간은 길어지고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음요화가 발끈하여 대답했다. “아까도 설명했지만 무산음호는 내가 저렇게 만든 것이 아니 에요. 몽혼표를 가진 사람이 저지른 짓이지!” “뭐? 몽혼표?”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종린과 혼음사의, 그리고 소운비가 일제 히 놀라 물었다. “그래요.” 만음요화는 재빨리 무산음호가 당하던 순간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혼음사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이상하군. 내게도 몽혼표를 가진 자가 찾아왔었는데… …!” 한종린이 덧붙였다. “필시 깊은 곡절이 있을 것이 틀림없어. 왕년의 그 괴인들이 다시 준동하는 것은……!” 소운비 역시 어떤 음모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은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 해 쇠사슬을 자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쇠사슬을 완전히 잘라 내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유난히 길고 지루했다. “이상한데?” 갑자기 탐서랑이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힘을 아낀답시고 입을 꽉 다물고 있던 용양도인이 마침내 짜증이 났는 지 투덜거렸다. “정말 말이 많군. 여자야 입이 두 개니 말이 많은 것이 당연 하지만 저건 사내놈이 분명한데 어쩌면 저렇게 말이 많을까?” 탐서랑은 즉각 받아 쳤다. “닥쳐! 온전한 사람도 아닌 주제에……! 지금 여기 사람이 죽 을 것 같단 말이야.” 소운비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쇠사슬을 자르던 손을 멈 추고 탐서랑에게 물었다. “무산음호에게 이상이 있소?” “얼굴이 시커메지고 손발이 꼬이는군.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 애.” 무산음호는 진기가 사라지고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여서 본래 편안한 곳에서 쉬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춥고 더러운 뇌옥에 장 시간 있게 되자 목숨이 경각에 달하게 된 것이었다. 소운비는 자신이 쇠사슬을 완전히 자르게 될 때까지 그가 기다 릴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 들어 혼음사의에게 말했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혼음사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지금 침도 없고 약재도 없을 뿐 아니라 환자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데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한종린이 나섰다. “탐서랑! 당신은 지금 무산음호를 만질 수 있소?” “손은 도저히 닿지 않고 발을 힘껏 뻗으면 고작 그의 몸에 닿 을까 말까 하오.” “그럼 됐소. 만일 당신에게 한 올의 힘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힘을 발가락 끝에 모으시오. 그리고 내가 말하는 순서대로 혈도 를 치시오.” “알겠소!” “자, 먼저 유궐(幽闕), 밀호(密戶), 병예, 장강, 용천, 명문… …!” 한종린은 사천의 명의답게 유창한 소리로 거침없이 혈도의 이 름을 나열했다. 팍, 팍! 탐서랑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야지만 소운비의 눈에 들어 함께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있는 힘을 다했다. 발가락에 경 련이 일 정도로 힘을 주어 무산음호의 혈도를 쳤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시커멓게 변해 가던 무산음호의 안색이 차 츰 평온해졌다. “이제 숨도 고르고 얼굴도 원래대로 돌아왔소.” 탐서랑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한종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아마 하루는 더 버틸 수 있을 거요. 최대한 빨리 이 곳을 나가 내가 직접 보고 치료할 수 있다면 아마 정신도 되찾고 목숨도 건질 수 있을 거요.” 한종린은 그렇게 말하며 소운비를 향해 씩 웃었다. 자신을 데 리고 나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소운비는 구슬땀을 흘리며 쇠사슬을 썰었다. 이제 그의 오른팔 목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거의 끊어져 나가고 있었다. 좀더 쓰기 편한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으로 오른팔목의 쇠사슬을 끊으려 한 것은, 일단 오른손이 풀리기만 하면 그 뒤의 시간이 훨씬 단축되 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 거의 되었다……!’ 소운비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가 거의 끊어져 가는 쇠사슬 에 마지막으로 한혈비를 갖다 대는 순간.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 왔다. “애를 쓰시는군요.” 소운비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철창 위에서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는 사람. 그녀는 바로 진설영이었다. * * * 진파파, 아니 보타문의 공혜는 석명의 예상보다 빨리 눈을 떴 다. 다만 몸은 여전히 부자유스러워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지난 세월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 머리 가 혼란스러웠다. 너무나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녀의 기억들은 정리되지 않았고, 오히려 두통이 밀려왔다. 지독한 두통과 함께 그녀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그녀는 간신히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여진 물그릇을 잡았다. 탁. 그러나 물그릇은 그녀의 손에 딸려 오지 않았다. 보다 힘이 센 다른 손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 공혜는 그 손을 따라 올라가 그 사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괴로워 보이시는구려.” 공혜는 그의 얼굴을 대하자 너무나 반가웠다. 그 반가움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입을 벌릴 수가 없어서 그녀는 다만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두 눈에 눈물을 그렁 그렁 담을 뿐이었다. “소리지르고 싶소? 미안하지만 내가 아혈을 점했소.”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공혜는 자신이 전혀 소리를 지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당신은 의외로 유명한 사람이더군. 만일 기억을 회복했다면 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겠지?” 공혜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가 누구인지 자신은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과연 그렇군. 미안하지만 그 사실은 당신 혼자만 알고 가야 겠소.” 그는 품안에서 작은 약봉지를 꺼내 그녀가 잡으려던 물그릇에 약을 풀었다. 말갛던 물의 색깔이 삽시에 검게 변했다. 공혜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내가 당신에게 그 동안 조금씩 복용시켜 왔던 독이오. 사실 진 소저를 내 것으로 만드는 데 당신이 적잖이 방해가 될 것 같아 남들에게 눈치채이지 않고 없애려고 했던 것인데……! 평소 먹던 것의 열 배는 넘게 탔으니, 이것이면 편안해질 수 있 을 거요!” 그는 거동할 수 없는 공혜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물그릇을 입술에 갖다 댔다. 공혜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설마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 다. 하나 메마른 입술에 쓰디쓴 약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다급해졌다. 안타까운 눈길로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래선 안 돼……! 안 돼……!’ 하지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약을 그녀의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들이부으면서, 그는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이 약은 아주 천천히 당신을 죽일 것이오. 원래 지독산(遲毒 酸)은 강하기는 하지만 그 속도가 느린 독이라오. 좀 고통스럽기 는 하겠지만 한 시진 후에는 조용히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거예 요. 당신은 원래 수도하는 비구니였으니 번잡한 삶에 미련은 없 겠지?” 마지막 한 모금이 공혜의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뜨거운 눈물 이 그녀의 메마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가 천천히 방 을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설영……!” 소운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혼음사의가 황급히 말했다. “허, 허허……! 설마 너는 네 사형을 이대로 죽게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도 옛날에는 제법 정이 깊지 않았었냐?” 소운비는 진설영의 싸늘한 눈빛에서 그녀가 아직도 자신에 대 해 오해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냉정함은 그로 하여금 어떤 변명도 할 의욕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끼여든 것은 만음요화였다. 그녀는 진설영과 소운비 사이에 빚 어진 모든 오해가 자신으로 인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지금 진설영이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탈출의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 역 시 알고 있었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봐요, 진 소저! 당신은 아직도 그때의 일로 소 공자를 오해 하는 모양인데, 그때는 어디까지나 내가 소 공자를 강제로 희롱 했던 것이에요. 소 공자는 조금도 저항할 수가 없는 상태였고, 결 코 그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무엇보다도 그는 나 하고 단 한번도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구요.” 진설영은 차갑게 만음요화의 뇌옥 쪽을 돌아보더니 한마디 뱉 었다. “입 다물어요!” 그 말이 너무나 싸늘해서 만음요화는 입을 꽉 다물 수밖에 없 었다. 츄아앗! 냉랭한 얼굴로 뇌옥 속을 돌아본 진설영이 손을 내뻗자 소운비 의 손에 들려 있던 한혈비가 낚싯줄에 걸린 고기처럼 빨려 올라 갔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이었다. 낙담한 것은 소운비보다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런 젠장할! 조그만 계집이 정말 심성이 악독하구나!” “빌어먹을……!” 혼음사의는 울화가 치민 김에 진설영을 탓했고, 점잖던 한종린 마저 저도 모르게 상소리를 뱉었다. 소운비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차갑게 내 려다보던 그녀의 뒤쪽으로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규염개였다. “이자들이 어디서 이런 비수를 구했을까요?” 진설영은 규염개에게 한혈비를 건네 주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진 소저의 말대로 한번 와보기를 잘했군요. 졸고 있는 제자 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진설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규염개에게 말했다. “실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만……!” “예?” 규염개는 진설영이 비록 어리지만 야무지고 냉랭하기 그지없는 성격이라 자신은 물론이고 누구에게 부탁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그녀의 부탁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진설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한때나마 제 사형이었던 사람이니, 마지막으로 잠시 이야기 를 나누고 싶어요.” 소운비는 잠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나 쇠사슬과 뇌옥에서 풀려났다 뿐이지, 그는 여전히 힘을 쓸 수가 없었고 두 손은 뒤 로 묶여 있었다. 진설영을 그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눈짓하고 말없이 앞서 나 가기 시작했다. 달빛이 그늘진 수풀의 한 귀퉁이에 이르자, 진설영은 문득 걸 음을 멈추었다. 주변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진설영은 소운비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소운비는 애써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오래간만이구나.” “아까 그 탕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라버니…… 와 나 사이 에는 분명 오해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겠죠. 하지만…… 어쨌든 오라버니와 나는 길이 엇갈렸고, 이제 결코 예전처럼 될 수가 없 을 거예요.”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역시 진설영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그래도 한 사문의 사람이 될 뻔했으 니…… 이 이야기를 아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설영은 숨을 몰아쉬더니 차분히 아까 보타문 삼대성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소운비의 표 정은 변해 갔다. 그는 일단 무엇보다도 기뻤다.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을 줄 알 았던 진설영과 진파파가 막강한 사문의 품으로 돌아갔으니 이제 걱정이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좌도밀교의 기승 가무진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타라하이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한종린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그 속에서 하나로 융합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의아했던 것은 왜 진설영이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 주는가 하는 점이었다. 만일 자신의 사문이 밝혀 졌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면 그것만 이야기하면 되는 것을 어째서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는 것인지 그는 그 속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진설영은 소운비가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 가를 살핀 뒤에 물었다. “오라버니, 만일 알고 있다면 얘기해 주시겠어요? 만음요화나 무산음호는 그 가무진이라는 자의 수하인가요? 만일 솔직히 이야 기해 준다면……” 진설영은 품안에서 한 알의 노란 단약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산공독의 해약을 드리겠어요. 이건 진심이에요.” 소운비는 놀랍고도 씁쓸했다. 그는 진설영의 속셈을 조금 알 것 같았는데, 그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과 거래를 하려 한다 는 사실을 깨닫자 무척이나 가슴이 아렸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비록 행동이 괴이하기는 하지만 아주 근본부터 나쁜 사람들은 아니야. 최소한 그들은 위선적이지는 않으니까. 그 리고 그들 역시 몽혼표의 기습을 받은 일이 있었어. 가무진에 대 해 궁금해 하는 것은 저들 역시 마찬가지야.” 진설영은 소운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운비가 색마들과 한 무리로 어울리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심성이 더럽혀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만 큼 색마들에 대해서는 잘 알 것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자신을 도와 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은근히 상황 을 알리고 색마들의 정체를 탐지해 그것이 무옥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 내려고 한 것이었는데, 소운비가 색마들을 옹호하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 오라버니는 그들에게 홀린 거야……!’ 진설영은 소운비를 설득하려던 생각을 바꾸고 단약을 품속에 갈무리하더니 몸을 돌렸다. “이제 그만 뇌옥으로 돌아가요. 도와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설영.” 소운비가 그녀를 간곡히 불렀다. “왜요?” “미안…… 하지만 마지막으로 사부님을 뵙게 해줄 수 없을까?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 그것은 소운비의 진심이었다. 진설영은 그의 눈빛을 읽더니 고 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따라오세요.” 그들이 발견한 것은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공혜였다. 진설영은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 어머니!” 그녀는 정신없이 공혜를 품에 안고 절규했다. 공혜는 힘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진설영은 그녀의 입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로 그녀가 독살되 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안 돼요! 안 돼요!” 진설영은 흐느끼며 공혜의 몸을 흔들었다. 공혜는 진설영의 어 깨 너머로 소운비를 보았다.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괴롭혔던 소운비를…… 따지고 보면 그녀가 소운비를 미워할 까닭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그녀가 행동했던 것은 어째서일까?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쓰라린 경험과 틀어진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혜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소운비에게 미소를 보냈다. 소운 비는 그녀의 미소가 어쩐지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 졌다. 진설영은 공혜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녀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머니!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요? 그 사람이지요? 무옥이지 요?” 공혜는 말없이 진설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 다. ‘아니다……! 아니다……! 나를 죽인 것은 결국 나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녀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 게 뜬 진설영의 얼굴이었다. 모든 풍경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마지막에는 캄캄해졌다. 보타문의 장문인이었다가 보잘것없는 노파로 살아 간 공혜는 죽음이란 그저 한없는 적요(寂寥)와 암흑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으 며 그렇게 갔다. 제 26 장 탈출(脫出) 소운비는 뇌옥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팔목과 다리에는 다시 차 가운 쇠사슬이 채워졌다. 한혈비로 거의 끊어 놓았던 쇠사슬은 물론 새로 교체된 상태였다. 혹시나 진설영이 그를 도망시켜 주지 않았을까 기대했던 색마 들은 모두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에 게서는 희망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소운비는 눈을 감았다. 방금 전에 보았던 믿을 수 없는 장면들 이 그의 감은 눈앞에 다시 떠올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는 진파파의 죽음이 슬 프다기보다는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세상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 같은 사람 들이 있는 법이다. 동네에서 감초 역할을 하는 노인네들이 그렇 고, 사람을 들들볶는 나이 든 숙모나 고모들이 그렇다. 말하자면 진파파는 소운비에게 있어 그런 존재였다. 그는 무슨 수를 써도 결코 진파파를 신비스러운 보타문의 문주 로 기억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진파파는 언제까지나 그에게 혹독하고 이유없이 심술을 부리던 귀회문의 늙은 스승일 뿐이었 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도 그는 좋았다. 진파파의 죽음은 너무나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소 운비는 한동안 그것을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무리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고, 죽음도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 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소운비는 눈을 뜨고 품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노란 단약 하나 가 딸려 나왔다. 아까 진설영이 그에게 색마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면 주겠다고 보여 주었던 바로 그 산공독의 해약이었다. ‘미안하다…… 설영!’ 진파파가 숨을 거둔 뒤 울며 몸부림칠 때, 소운비는 그녀를 부 축해 주었었다. 그리고 그때, 무척이나 가슴 아파하면서도 특유의 솜씨를 발휘해 그녀의 품에서 단약을 빼낸 것이었다. 두 손가락으로 단약을 집어 들고 들여다보면서, 그는 잠시 생 각에 잠겼다. ‘설영이는 내 손이 빠르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이상하게도 이 약을 허술하게 보관했을 뿐 아니라 아까도 유난히 내 품에서 오래 울었지……! 어쩌면 설영이가……!’ 그 생각은 물론 아주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운비 스스로 자신의 도둑질을 정당화시키려는 심정도 다분히 섞여 있 었다. 그는 단약을 혀끝에 올려놓고 꿀꺽 삼켰다. 혀끝에서는 쌉쌀한 맛이 감돌더니 목구멍을 넘자마자 화끈한 느낌이 쫘악 퍼져 갔 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천천히 운공에 들어갔다. 그가 약을 먹고 운공을 하는 광경을 혼음사의와 한종린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의 몸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에 따라 혼음사의와 한종린의 얼굴은 희색이 만면해졌는데, 소운 비가 곧 공력을 회복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이 각 정도가 지나자 소운비의 머리 위에는 희미한 고리 모양 으로 김이 서렸다. ‘이제 조금만 더……!’ 소운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나 적의 소굴에서 탈출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 다. 그의 운공이 막 막바지로 치달아 가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 다. 그 소리는 마치 혼음사의와 한종린이 잡혀갈 때와 비슷했는 데 그보다 서너 배는 치열한 것이었다. ‘또 누군가가……?’ 소운비는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을 느끼고 아쉽지만 서둘 러 운공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칠팔 할은 회복이 되었지만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오늘밤은 도대체 얌전히 넘어갈 수가 없군!” “정말 온갖 놈들이 다 저 색마 연놈들을 구하겠다고 덤비니, 원!” “새벽에 회주께서 문초하신다니 적당한 곳에 처넣자구!” 철컹! 떠들썩하게 몰려온 개방 제자들은 맨 처음에 소운비의 뇌옥을 들여다보았다. “여긴 세 놈이나 있는걸!” “옆으로 가자!” 개방 제자들은 올 때처럼 번개같이 옆으로 움직여 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소운비는 그들이 끌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비록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반쯤 부서진 그 죽립은 분명 추면인의 것이었다. ‘어째서 그가 우리를 구하려고?’ 개방 제자들은 탐서랑이 있는 곳에 추면인을 던져 넣으려고 했 다. 한데 악에 받친 탐서랑이 으르렁거리는 것이었다. “여긴 환자도 있고 너무 좁아! 만일 그놈을 여기 던지면 내가 뼈다귀째 아작아작 씹어 먹어 버릴 테다!” 개방 제자들은 무시무시한 그의 협박에 찔끔했지만, 설마 쇠사 슬에 포박된 탐서랑이 무슨 짓을 할까 싶어 얼른 대꾸했다. “야, 이 색마 놈아! 내일이면 죽을 놈이 무슨 큰소리냐?” “그래! 내일이면 죽을 거라 나는 거리낄 것이 없다. 네놈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귀신이 돼서 네 마누라, 네 누이동생, 네 늙 은 어머니, 네 할망구까지 몽땅 다 홀랑 벗겨 놓고 진을 빼먹겠 다!” 개방 제자들은 색마들에 대해 과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으므 로 탐서랑의 그 협박에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굳이 탐서랑과 부딪치고 싶지 않아 다시 옆의 뇌옥으로 옮겨 갔다. 쿠웅! 추면인은 만음요화의 뇌옥에 던져졌다. “이놈은 쇠사슬로 채우지 않아도 될까?” “무공도 약하고, 부상이 심해 그냥 던져 놓아도 될 거야.” 개방 제자들은 대충 일을 처리하고 서둘러 뇌옥을 떠났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만음요화의 뇌옥 쪽 에서 들려 왔다. “으…… 으음……!” 만음요화가 의아한 듯 그를 살펴보았다. “이봐요, 젊은이. 상처가 무척 심한 모양이군요? 대체 누구를 구하려고 여기 온 것이지요?” 간신히 정신을 차린 추면인은 대뜸 소운비를 찾았다. “소…… 소 공자는 어디 있죠? 그는 무사한가요?” 대답한 것은 소운비였다. “나는 여기 있소.” 추면인은 한 칸 건너 뇌옥에서 들려 온 소운비의 목소리를 듣 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했군요……! 다행입니다……! 다행……! 앗!” 비로소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던 추면인은 뾰족한 비명을 질렀 다. 더욱 놀란 것은 만음요화였다. “어머나! 이 사람이 왜 나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지? 어 디, 얼굴 좀 봅시다. 혹시 나에게 무슨 죄라도 저지르고 도망갔던 사람이 아닌가……?” “이러지 마시오!” 만음요화와 추면인 사이에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운비 는 귀를 기울였지만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잘 알 수가 없 었다. 한참 만에 느닷없이 만음요화의 짤막한 비명이 울렸다. “어맛!” 아주 어이없는 것을 본 사람처럼 만음요화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침묵을 사이에 두고 만 음요화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호호호……! 호호호호!” 만음요화는 기막혀 하다가 또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말이 없던 용양도인조차 이런 만음요화의 태도에 궁금증을 느꼈 던 모양이었다. “대체 뭐야?” “저리 비켜요!” 만음요화가 용양도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용양도인은 찔끔하 며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옆 뇌옥의 탐서랑이 빈정거렸다. “흥! 또 어떤 미공자가 재수없게 만음요화에게 떨어진 모양이 군. 만음요화, 마지막 밤인데 아주 질탕하게 보낼 모양이구려?” 만음요화는 무엇이 그렇게 기분좋은지 깔깔거렸다. “호호……! 이 사람을 데리고 잘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나로 서도 정말 기분이 좋겠지. 아주 색다른 경험이 될 거야. 호호호 호……!” “만음요화, 제발……!” 애원하는 듯한 그 목소리는 추면인의 것이었다. 소운비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크게 물었다. “추면인! 당신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어째서 여 길 온 거요? 이유가 뭐요?” 추면인은 일시 대답하지 못했다. 만음요화가 그 대신 나섰다. “이 사람은 소 공자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구하러 온 거예요. 이 사람과 나의 인연은 얕지 않으니 소 공자는 관심을 끊으세요.” 그리고 만음요화는 키득키득 웃었다. 소운비는 추면인이 품행이 방정한 군자가 아니니 만음요화와 관계가 있을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데 만음요화는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소 공자! 만일 도망칠 기회가 생긴다면 꼭 이 뇌옥에도 들러 서 나와 이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건 왜 그렇소?” “당신은 이 사람에게 물어 볼 것이 있지 않나요?” 소운비는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추면인만이 혜와의 행방 을 제대로 알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운비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다시 운기에 들어갔다. 뇌옥 은 다시 침묵에 싸이고, 오직 개미만큼 작은 소리로 만음요화와 추면인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만이 바람 속에 섞여들었다. * * * 무옥은 병자처럼 떨리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 다. 이상한 일이었다. 떨리는 것은 그의 손뿐만이 아니었다. 마음도 떨리고 있었다. 진파파, 공혜에게 독을 먹이고 나온 직후부터 그는 손도 마음도 떨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도 손이 떨리지 않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 었다. 그저 자신이 버려진 기형아인 줄로만 알았던 어린 시절, 개방 의 제자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그는 느닷없이 나타난 친아버 지를 상봉했고, 그가 대업을 위해 자신을 개방 조직 속에 넣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친아버지는 밤마다 찾아와 자신에 게 놀라운 무공을 전수해 주었고, 그는 삼목인(三目人)이라고 괴 물 취급을 받아 온 수모를 갚을 길이 생긴다고 그저 좋아하기만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부의 수하인 백혈공에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고, 반 권짜 리 비급을 전달받았다. 고아로 살아 온 그에게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어머니였 다. 그 어머니를 자신으로부터 앗아 간 것이 다름아닌 친아버지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그의 가슴속에서는 억누를 길 없는 분노와 살기가 괴 수처럼 용틀임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그는 사람을 죽이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이 십 년 간 자신을 키워 준 의부 백미노개가 자신의 비밀을 눈치채 기 시작했을 때, 만음요화를 일부러 끌어들여 의부와 동침케 하 고 곧바로 지독산을 써서 의부를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방 내에서는 아무도 백 미노개의 병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으니, 그저 만음요화의 채양보 음술에 당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나무토막이나 다름없는 의부의 존재마저도 부담스러워 외부의 암살자를 가장하여 그를 죽일 때에도 그는 한 점 망설임도 없었 다. 친아버지인 몽중마령, 보다 더 오래된 이름으로는 가무진이라 고 불린 그 사내를 앞지르기 위해 극악한 신공을 연성하며 숱한 여인들을 죽일 때에도 그저 그는 풀포기를 뽑는 것보다도 대수롭 지 않게 생각했다. 한데……! 지금 한 노파를 죽이고 나오면서 그의 손과 마음은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할 방도도 없었다. 그는 거의 입에 대지 않았던 술을 찾았고 병이 빌 때까 지 술병을 기울였다. ‘설영 때문일까? 내가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녀 를 생각해서 그 노파를 죽인 것이 걸리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되자 무옥은 자신에 대해 웃음이 나왔다. ‘여자라니…… 무슨 사치냐. 내게 여자는 그저 대업으로 가는 길에 깔리는 돌다리일 뿐이다.’ 그는 술방울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진설영을 죽일 때는 가능한 한 처참하게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교주,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웬 풍류시오?” 음산한 목소리가 뒷전에서 들려 왔다. 무옥은 멈칫했다. 그 소리는 귀에 익은 사람의 것이었지만, 그 가 어째서 이곳까지 나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콧등을 찡그리게 만들 정도로 비릿한 붉 은 안개가 그의 몸을 감쌌다. “적무공……! 교단을 지키셔야 할 몸이 어째서 이곳까지 나온 거요?” 무옥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유들유들 하게 웃고 있는 적무공과 복면을 쓴 취화비도가 서 있었다. “교주님의 특별한 명을 받고 왔소. 이곳에서 몇 사람을 데려 오라는 명이셨소.” 무옥은 소교주에 대한 예라고는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는 적무 공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뿐, 그는 더 이상 따지지 않 았다. 어차피 교주 몽중마령은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접을 하지 않았다. 쓸모가 있으면 곁에 두고, 없으면 폐기 처분해 버리는 것. 그것이 몽중마령이 사람을 쓰는 방식이었다. 결국 소교주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고, 혈육이 아니라고 해서 못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무옥을 마주보는 적무공의 붉은 눈은 자신 역시 그것을 잘 알 고 있다는 자신감 비슷한 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옥은 취화비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전에 그 앞에서 드 러냈던 얼굴은 다시 복면 속으로 감춰진 다음이었지만, 드러난 두 개의 눈동자는 안타까운 빛을 역력히 보이고 있었다. “교주님의 명? 그것도 특별한?” 무옥이 묻자, 적무공은 느릿하게 대답했다. “지금 이곳에는 교주께서 라사나감으로 지목한 젊은이가 있 소. 그는 죽어서는 안 되오.” “소운비라는 자 말이군. 흠……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역시 라라나가 될 가능성이 있는 계집도 데려오라고 하셨소.” 무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누구요?” 적무공은 일부러 천천히 그 이름자를 내뱉었다. “냉면검화 진설영!” 퍽! 무옥의 손에서 술병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치더니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적무공의 입가에는 노골적인 웃음이 맺혔다. 무옥은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내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가더니, 이제 그녀마저 빼앗아 가려는군……! 하지만 그녀는 내 마지막 희망이다…… 그럴 수는 없어!’ 사람의 정기를 빨아 신공을 연성하는 방법은 점점 단계가 올라 갈 수록 젊고 강한 힘을 필요로 한다. 무옥이 익히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설영을 마지막 단계의 제물로 점찍어 두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좀 이르긴 하지만…… 지금부터 싸워 볼까……?’ 무옥은 두 주먹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물었 다.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적무공은 그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허공에서 들 려 왔다. “교주님의 명령이니 이행할 뿐입니다!” 너무나 무덤덤하기 때문에 빈틈을 찾을 수 없는 목소리. 그 소 리를 듣는 순간, 무옥은 주먹에 주었던 힘을 뺐다. ‘이런…… 몽혼일도까지 보냈군!’ 그는 낙담했다. 몽혼일도는 비록 대전의 수문장으로서 서열은 삼영주보다 아래지만, 실력에서는 결코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그 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아들인 그 자신보다도 아버지가 더 신뢰하는 인물인 것이다. 만일 몽중마령이 적무공만을 보냈다면 무옥은 아버지가 자신을 떠보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단호하게 응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몽혼일도까지 보냈다면 그것은 명확한 실력행사인 것이다. 준비 없이 거역했을 경우 돌아올 결과는 너무나 뻔했다. 무옥은, 치욕적이지만 참기로 했다. 어차피 마지막 순간까지는 그에게도 기회가 있는 것이니까…… “그럼……!” 무옥은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자신있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엇부터 시작할 건가?” * * * “커억!” 입에서 새어나오던 비명은 목이 끊어지면서 그대로 멈추고 말 았다. 목이 끊어진 시체는 맥없이 넘어가고, 그 시체를 뛰어넘어 유령 같은 그림자들이 움직여 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여섯. 모두 여섯 개의 인영이 뇌옥 주변을 지키던 개방과 남궁세가 사람들을 소리없이 처치하고 어둠을 방패삼아 뇌옥을 향해 접근 해 갔다. 그들은 오늘밤 뇌옥을 습격했던 사람들 중에 가장 신중했으며, 또 그만큼 실력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었다. 다섯 명의 용양혈루단과 오랑. 그들은 한 점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밀물이 갯가로 스며 들듯이 그렇게 뇌옥을 향해 접근해 갔다. 하나 그들의 소리없는 전진도 뇌옥으로부터 오 장의 거리를 두 고 삼 보 간격으로 빙 둘러선 마지막 경비선에서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인원은 총 삼십여 명 가량. 두 눈에 졸음을 가득 담고 있기는 해도 개중에는 무공이 제법 뛰어난 육결제자급들도 있었고, 무엇 보다도 인원이 많아 아무리 빠른 시간 안에 공격을 하더라도 미 처 다 해치우기도 전에 경계령이 사방에 내려질 불상사를 막기는 힘들 것 같아서였다. 어둠 속에서 용양혈루단은 오랑을 향해 일제히 시선을 모았다. 이제 어찌해야겠느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오랑은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그는 손에 잡힐 듯이 저 앞에 보이는 뇌옥을 향해 안타까운 눈빛을 던졌다. 그 안에는 그에게 있어 존경스럽지는 못해도 피를 이어 준 아 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 을 맛보게 해 준, 어머니처럼 따스한 여자 만음요화가 있었다. 그는 그 두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고, 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일은, 이 세상에서 그가 마지막으 로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하나 그래도 그는 상관없었다. ‘이대로 끝나게 되더라도…… 그렇더라도……!’ 오랑의 입술이 달싹였다. 막 돌격 명령을 내리려는 참이었다. 그의 입술은 다 벌어지지 못했다. 그의 눈이 놀라운 광경을 발 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일행이 있는 반대쪽, 멍한 눈으로 서 있던 십여 명의 개 방 제자들 주변으로 마치 유령 같은 붉은 안개가 퍼지기 시작했 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개방 제자들이 눈을 까뒤집더니 뒤 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커흑!” 쓰러진 자들의 바로 옆에 있던 자들 역시 입을 벌리려는 순간 무엇에 당했는지 고꾸라졌다. 오랑은 암습자가 한 명인지, 아니면 여러 명인지, 혹은 남자인 지 여자인지, 무슨 수법을 썼는지, 심지어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만음요화와 용양도 인을 구출해 내기에 아주 적절한 기회라는 사실이었다. “지금이다!” 오랑의 신호와 동시에 다섯 명의 용양혈루단이 막 입을 열어 침입자의 출현을 외치려는 개방 제자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팟! 팟! 파파파! 순식간에 십여 명의 개방 제자들이 입도 못 벌려 보고 이승을 하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뇌옥 주변을 경비하던 개방 제자들 은 벙어리처럼 말 한마디 못해 보고 시체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카강! 오랑은 있는 힘을 다해 만음요화의 뇌옥 입구를 막고 있는 철 창을 부쉈다. 어둡고 습한 뇌옥에서 만음요화가 고개를 쳐들고 마침내 그를 발견했다. “오랑!” 그 말에 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용양도인도 고개를 들었다. “오랑!” 오랑은 환한 미소를 지어 거기에 대답했다. 그리고 쇠도 자르 는 보도(寶刀)를 빼 들고 뇌옥 안으로 뛰어들었다. ‘다른 놈들이 또 있었군!’ 소운비를 빼내기 위해 뇌옥에 왔던 적무공은 어쩌면 자신이 굳 이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소 운비 외의 다른 놈들이야 도망을 치든 말든 상관이 없었지만, 큰 소동이 일어나면 어쨌든 소운비는 쉽게 몸을 빼낼 수 있을 터였 다. 적무공은 일단 관망하기로 하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오랑 과 그 일행이 만음요화와 용양도인, 그리고 추면인을 꺼내는 것 을 지켜보았다. 만음요화의 뇌옥에서 사람들이 빼내진 것은 소운비가 완전히 공력을 회복한 순간과 일치했다. ‘됐다!’ 소운비는 먼저 두 팔목에 힘을 모았다. 지이이잉! 굵은 쇠사슬에서 쇠의 울음 소리 같은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핫!” 소운비의 입에서 짧은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두 개 의 쇠사슬은 썩은 나뭇가지처럼 부서져 나갔다. 팍! 팍! “잘했다!” 혼음사의와 한종린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탄성을 내질렀다. 소운비는 서둘러 두 발을 묶은 쇠사슬도 잡았다. 그때, 위쪽에서 추면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다른 사람들도 구해 줘야지요! 그냥 가다니요!” 용양도인이 호통을 쳤다. “지금 우리도 이 용담호혈을 빠져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야! 어서 가야 한다구.” “그럴 수는 없어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는 순간 소운비는 마음이 묘하게 흔들렸다. ‘용양도인과 만음요화가 우리를 버려 두고 자기들만 몸을 피 하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저 추면인은 정말 이상 한 일이다.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구하려 했고, 또 지금도 저렇게 애를 쓰는 것일까?’ 그때 만음요화가 말했다. “시간을 끌지 말고, 일단 쇠사슬을 자를 수 있는 보도를 소 공자에게 주고 갑시다. 도망을 치든 말든 그건 그들의 복이니까 요.” “이리 줘요! 내가 남겠습니다.” 추면인은 오랑의 손에서 보도를 빼앗듯이 낚아채고는 바로 소 운비의 뇌옥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철창의 한 부분을 힘껏 내 리쳤다. 카강! 불꽃이 튕겨지더니, 두어 번 더 내리친 뒤에 철창의 고리들이 끊어져 나갔다. “이걸 받아요.” 추면인은 보도를 소운비에게 던져 주었다. 소운비는 반쯤 쪼개 진 죽립 아래에 감춰진 그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말없이 보도를 내리쳐 자신의 발목을 묶고 있던 쇠사슬들을 끊어 냈다. 소운비 는 이미 공력이 회복된 상태라 금세 그것들을 절단낼 수 있었다. “자, 빨리빨리!” 혼음사의의 재촉을 받으며 그는 이번에는 혼음사의와 한종린의 쇠사슬들을 끊어 냈다. “자, 꽉 잡으십시오.” 마침내 세 사람 모두가 쇠사슬에서 풀려났을 때, 소운비는 보 도를 입에 물고 두 사람을 각각 양손에 잡은 채 몸을 솟구쳤다. “색마들이 탈출한다!” “침입자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그들이 본 광경은, 저만치서 달려오고 있 는 열 명 가량의 개방 사람들과, 먼저 달아나려다가 일순 주춤하 고 있는 용양도인 일행이었다. 분명 소리 하나 내지 않았건만 그들이 어떻게 눈치를 채고 몰 려온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 경 위가 아니었다. ‘일전을 피할 수가 없겠군!’ 절그렁, 절그렁! 소운비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을 때, 발 아래쪽에서 쇠사 슬을 요란하게 흔들어대는 소리가 났다. 탐서랑이었다. “이봐, 이봐! 나도 꺼내 줘! 나도 구해 달라구! 나만 빼놓고 갈 셈이야?” 소운비는 그의 처량한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물론 가운데 뇌 옥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탐서랑 때문이 아니라, 무산음호 때문 이었다. “어서 도망치지 않을 건가요?” 추면인이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차피 싸움을 하지 않고는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소. 한 명 이라도 우리 편을 만드는 것이 낫지 않겠소?” 아직 추면인의 진심을 파악할 수가 없었던 소운비는 차갑게 응 수하고 탐서랑의 뇌옥 철창부터 부쉈다. ‘저럴 수가!’ 개방 제자들을 데리고 뇌옥을 둘러보려고 나왔던 규염개는 가 슴을 쓸어 내렸다. ‘만일 방주께서 예감이 좋지 않으니 뇌옥을 한번 둘러보라고 명하지 않으셨다면 저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여기를 탈출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규염개는 일단 사방에 경계령을 내리고, 사람들이 몰려올 때까 지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켜 내야 했다. 다행히 서 있는 꼴들을 보아하니 외부에서 온 조력자 여섯 명과 소운비를 제외하 고는 모두 무공이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 그것이 아주 불가능하 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먼저 자신의 죽장을 불끈 다잡아 선두에 섬으로써 제자들 의 용기를 북돋웠다. “이 천인공노할 색마들아! 모두 무릎을 꿇어라!” 적무공은 붉고 두툼한 입술을 열어 푸들푸들 웃었다. 난데없이 규염개가 제자들을 끌고 뇌옥을 순찰하러 온 이 우연 같은 일에 대해서, 그는 오직 한 가지 추리만을 끄집어 낼 수 있 었다. ‘소교주가 훼방을 놓는군그래!’ 물론 증거야 없지만, 간단한 언질만으로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것쯤은 무옥이 손 안에 든 떡을 먹는 것만큼이나 쉽게 할 수 있 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기 구역이라고 텃세를 부린 것인가……? 아니면 정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가? 전자라면 별 문제 없지만 후자라면……! 아무튼 일단 교주님의 명대로 저자를 빼내 놓고 볼 일이 아닌 가?’ 적무공은 붉은 숨결을 토해 내며 천천히 어둠 속에서 몸을 빼 냈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무산음호를 업은 소운비, 혼음사의, 한종린, 추면인, 탐서랑, 만 음요화, 용양도인, 오랑, 다섯 명의 용양혈루단. 때로는 같은 색마이기 때문에 어울려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피우기도 했던 열네 명의 사람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죽장이며 몽둥이를 꼬나 들고 달려오는 개방 사람들을 보며 일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공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일곱 명. 하지만 그들 중 용양혈루단 같은 경우는 암습에 능한 자객 전 문의 무공이라 과연 이와 같은 백병전에서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 지도 알 수 없을 뿐더러, 지금 눈앞의 적보다는 시간을 끌 경우 몰려올 더 많은 적들이 큰 문제였다. 오랑이 모진 결심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와 용양혈루단이 죽기를 각오하고 저들을 막을 테니 그 동 안 모두 몸을 피하십시……!” 만음요화가 외쳤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나도 함께 남겠어요, 오랑!” “궁주……!” 애틋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는 두 사람을 용양도인이 희번덕 거리는 눈으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혈루수가 말했다. “방법이 없으니 우리가 막겠습니다. 소문주는 도인 어른을 모 시고 훗날을 기약하십시오.” 오랑은 만음요화 쪽을 한번 더 돌아보더니 혈루수에게 당당히 말했다. “훗날의 기약은 문주 한 분이면 족하다! 내가 어떻게 그대들 을 버리고 혼자 간단 말인가?” 소운비가 그들의 실랑이를 툭 끊었다. “지금 누가 남고 안 남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무공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은 달아나더라도 얼마 못 갈 겁니다. 죽어도 이 자리에서 같이 죽고, 살아도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소운비의 말에 분명 일리가 있었기 때 문이었다. 하나 이미 코앞까지 육박한 적에 대해서는 어떤 뚜렷한 대책도 있을 수가 없었다. “무공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앞에,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뒤로!” 소운비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색마들은 훈련된 병사들처럼 그의 말에 따라 진영을 바꾸었다. 코앞에 다가온 위기가 그들을 한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만들어 주었다. 팍! 규염개가 죽장으로 땅바닥을 찍으며 위협했다. “스스로 기어 뇌옥으로 되돌아가겠느냐? 아니면 내가 다리몽 둥이를 분질러 직접 던져 주랴?” 오랑이 대답했다. “할 수 있다면 한번 해보시오!” 규염개는 선두에 선 일곱 명의 눈빛이 형형한 것을 보고 이미 문답은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차앗!” 그는 우렁찬 기합과 함께 죽장을 앞으로 뻗어 냈다. 오랑을 노 리는 듯하면서도 교묘하게 소운비의 목도 함께 노리는 빠른 출수 였다. 하나, 그의 죽장이 채 그들의 몸에 닿기도 전에, 왼쪽으로부터 비릿한 냄새와 함께 붉은 기운이 그를 향해 쇄도해 왔다. ‘헉!’ 규염개는 급히 죽장을 회수하며 뒤로 몸을 굴렸다. “크흐흐흐흐……!” 음침한 괴소가 두 패거리의 가운데를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처절한 비명이 개방 제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으악!” “아악!” 규염개는 비록 땅바닥에 뒹구는 낭패를 당하기는 했지만, 강호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자연히 터득한 노련함으로 부상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너 명의 개방 제자들이 괴인의 첫 공격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규염개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운비의 옆에 멈춰 선 붉은 안개에 휩싸인 괴인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저건 또 어디에서 나타난 괴물이지?’ 규염개는 그를 발견한 순간 속이 느물거리면서 무척이나 역겨 움을 느꼈는데, 그것을 느낀 것은 비단 개방 사람들뿐 아니라 색 마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운비는 느닷없이 나타나 개방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 기 옆에 와서 선 괴인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상한 인간들이 자꾸 나를 도와 주려 하는군!’ 괴인, 적무공은 소운비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리 고 물었다. “네가 라사나로군!” 소운비는 눈살을 찡그렸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였다. 라사나라 니……? 하나 그가 되물을 틈도 주지 않고 적무공은 그를 밀쳐 냈다. “너희들 모두, 여기서 꺼져라! 이 거지 새끼들은 내가 막아 줄 테니까……!” 색마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벅이며 적무공을 바라보았 다. “어서!” 적무공이 야수처럼 으르렁대며 한번 더 위협하자, 그들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소운비는 다른 사람들이 물러나기를 기다려 마지막에 몸을 돌 렸다. 한데, 그 자리를 벗어나기 직전 적무공이 그의 귓가에만 들 리도록 말하는 것이었다. “일이 끝난 뒤에 북망산으로 와라! 너를 기다리는 분이 계시 다!” 북망산. 그 말이 소운비의 발목을 붙잡았다. ‘서역에서 온 괴승 가무진은 북망산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타 라하이도 북망산으로 갔다. 그렇다면 저자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거기서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몸이 안전해진 다음에 생각하고 볼 일이었다. 적무공은, 규염개를 비롯한 개방 제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경 악한 눈빛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사람을 죽이는 즐거움을 맛보도록 할까!’ 그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의 나신을 감싼 붉은 안개가 점점 짙 어지기 시작했다. “헉……! 헉……!” “하악……! 하악……!” 산불에 쫓기는 짐승들이 떼를 지어 달리듯이 색마 일행들은 한 무리로 똘똘 뭉쳐 숨이 턱에 닿도록 죽자꾸나 하고 달렸다. “자, 잠깐 멈춥시다!” 수풀 우거진 곳에 이르러 소운비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더 이 상 달릴 힘이 없기도 하고, 그저 뛰는 게 아니라 다른 대책을 세 워야 할 필요도 있었기에 그들은 모두 멈추었다. “일단 뇌옥은 빠져 나왔지만, 아직은 개방 총타 안입니다. 개 봉부를 벗어날 때까지는 안전하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소운비가 묻자, 혼음사의가 말했다. “갈라져서 가는 게 좋겠지!” “그럼 무공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섞어 몇 개의 조를 짜도록 합시다.” 탐서랑이 얼른 찬성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만일 자기편끼리 몰려 떠난다면 용양도인에게는 용양혈루단이 있고, 만음요화는 오랑이 있으며, 혼음사의 쪽에는 소운비가 있지 만 탐서랑은 달랑 혼자였다. 그로서는 인원을 섞어 조를 짜자는 소운비의 의견에 얼씨구나 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용양도인은 눈살을 찡그렸다. “뭘 굳이 조를 짜나? 풍월도문 사람은 풍월도문 사람들끼리 가겠네. 화금궁은 화금궁대로 가고, 각자 알아서 가자구.” 그 말에 만음요화와 탐서랑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혼음사의 쪽 은 그래도 소운비가 무공을 회복했으므로 좀 다행이지만, 그들은 만일 용양도인의 말대로 할 경우 정말 대책이 없었다. 추면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얼굴을 감추고 싶은 모양이었다. 소운비가 용양도인에게 말했다. “용양도인, 방금 전 뇌옥에 있을 때를 생각해 보시오. 우리는 모두 같은 처지였는데, 뇌옥에서 한 발 나왔다고 지금 안면을 바 꾼단 말입니까? 아직 우린 완전히 탈출한 것이 아닙니다!” 용양도인은 강경한 그의 태도에 찔끔했다. ‘저놈이? 전에 귀회루에서 봤을 때만 해도 힘 하나 못 쓰는 어린애에 불과했었는데……!’ 그때, 오랑이 앞으로 나섰다. “용양혈루단은 문주님을 모시고 가게. 나는 화금궁주와 함께 가겠어.” 놀란 것은 용양도인이었다. “오랑! 너 왜 그러느냐?” 오랑은 갑자기 용양도인 앞에 넙죽 절을 했다. “아버지! 그 동안 어리광을 많이 피워서 죄송합니다만, 저도 이제 지켜 주고 싶은 여자가 생겼습니다. 그러니 말리지 마십시 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설마 했던 용양도인은 입을 딱 벌 리고 만음요화와 오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물론 자신의 아들 오랑이 자기처럼 후원의 꽃을 탐하는 남색가가 될 것이라고 기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고 많은 여자들 중에 하필 만음요화라 니! 만일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면 용양도인은 거품을 물며 기절이 라도 했을 것이다. 하나 적들의 기세가 삼엄한 곳이라 차마 그렇 게는 못하고, 용양도인은 그저 두 사람을 노려보기만 했다. 만음요화가 고개를 발딱 들었다. “지금 이런 문제로 여기서 머뭇거릴 때가 아니에요. 소 공자 의 말대로 일단 적당히 사람들을 나누어 각개 격파를 하고, 적당 한 곳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합시다. 추격전이 계속될 수도 있으 니,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곳까지는 함께 행동해야 해요.” 외란(外亂)이 내분(內紛)을 진정시킨다고, 모두는 그 말에 따르 기로 했다. 만음요화와 오랑, 혈루목과 혈루금이 한 조가 되고, 용양도인과 탐서랑, 혈루화와 혈루수, 혈루토가 한 조가 되고, 소운비와 혼음 사의, 추면인과 한종린, 그리고 무산음호가 한 조가 되었다. 재회 의 장소는 평안객잔으로 정해졌다. “살아 나가는 것은 각자의 몫이고, 다시 만난다면 운이 좋은 거요!” 그들은 짧은 인사를 하고 각각 방향을 나누어 흩어졌다. 용양도인의 조는 바깥을 향해 방향을 잡은 반면, 만음요화의 일행은 거꾸로 개방 총타의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소운비 일행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어쩔 건가?” 혼음사의의 질문에 소운비는 일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른 조에 비해 그들은 가장 불리했다. 무공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오 직 그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한종린이 넌지시 말했다. “만음요화는 아마 혼혼옥잡을 되찾으러 안으로 들어간 것일 거야! 그것이 없어서는 차후에도 계속 불리할 테니까 말이야!” 그의 어조에는 소운비 역시 음곡비파를 되찾아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소운비도 음곡비파를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아무래도 무공을 쓸 수 없는 네 명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 나간다는 것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영에게 해약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소운비는 그 해약을 얻어 한 사람이라도 더 무공을 쓸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 “일단, 나 혼자 안에 들어갔다 나오겠습니다. 적들은 움직이는 사람들을 쫓을 것이니, 여기에 땅을 파고 숨어 계십시오. 죽은 듯 누워 있으면 아마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먼저 땅을 파기 시작했다. 혼음사의와 한종 린, 그리고 추면인까지 달려들어 땅을 팠다. 네 사람이 간신히 몸을 눕힐 정도의 깊이가 되자 우선 무산음 호부터 안에 눕히고, 혼음사의와 한종린도 얼른 누웠다. 소운비는 머뭇거리는 추면인에게도 말했다. “당신도 얼른 들어가시오.” “난…… 당신과 같이 가겠어요.” 소운비는 가만히 그를 쏘아보았다. 얼굴을 비스듬히 가린 반 쪽난 죽립을 벗겨 버리고 싶은 충동이 순간 일었다. 그때 혼음사의가 끼여들었다. “무공을 못하는 사람이 따라가 보았자 도움이 안 돼! 어서 와 서 누워. 시간이 없어!” 추면인은 할 수 없이 한종린의 옆에 누웠다. 소운비는 그들 위 에 가볍게 흙을 덮고 나뭇가지와 가랑잎들을 흩뿌렸다. 어설픈 위장이기는 하지만, 후미진 수풀 속이고 어두운 밤인지 라 쉽게 발각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소운비는 숨을 들이키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사방에서는 요란한 호각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탈출 소식이 알려지며 모두가 눈을 뜨고 달려나오는 모양이었다. “공혜가 먼저 가다니……!” 무명성니는 너무나 무미건조해서 오히려 더 서글프게 들리는 목소리로 몇 번이고 공혜의 죽음을 애달파했다.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던 진설영이 다시 큭, 하고 눈물을 터뜨 렸다. 석명이 그녀를 토닥였다. “울지 말거라. 사람이란 어차피 언젠가는 한번 죽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냐? 다만 안타까운 것은 사숙께서 편안하게 열반에 들지 못하시고 흉수의 손에 돌아가셨다는 점이로구나……!” 무수성니가 말했다. “공혜의 실종과 죽음에는 분명 많은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중원에 나온 이상 반드시 그 속에 숨겨진 것들을 해명하 고 공혜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는 공 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경을 읊어야겠구나……!” 무수성니의 눈은 말을 하면서 방 가운데에 깨끗이 모셔진 공혜 의 시신으로 향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진설영 소저께 아룁니다. 뇌옥에 갇혀 있던 색마들이 달아났 다고 합니다.” 석명이 벌떡 일어났다. “이런 발칙한 것들……! 설영 사매는 쉬고 있게. 나 혼자 나가 보겠어.” 진설영도 따라 일어났다. “아닙니다. 저도 가보아야……!” 무수성니가 말했다. “아니다, 설영아. 너는 오랫동안 너무나 무리를 한 데다가 사 부의 죽음을 목격해서 심신이 엉망일 것이다. 일단 네 방으로 가 서 쉬거라. 석명은 나가 보아라. 색마들을 잡은 것은 격색마회의 몫이니 만큼, 우리 보타문이 너무 많이 개입하는 것도 보기 좋지 는 않을 것이야. 우리 늙은이들은 공혜를 위해서 경을 읽어야겠 다.” 진설영은 다소곳이 말했다. “그럼 저도 사조님들 곁에 있겠습니다.” 사조들이 사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경을 읽겠다는데 방에 가서 쉬는 것은 예가 아닐 것이다. 한데 석명이 다정하게 어깨를 두드 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사매, 걱정하지 말고 방에 가서 쉬어. 바깥은 내가 나가 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진설영은 석명의 말투에서 세 분 사조들이 무언가 그들만의 이 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석명과 진설영이 방을 나가고 난 뒤, 경을 읽는다던 무수성니 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 공혜가 죽었으니 보타문 검후의 대가 끊기게 되었소. 이 일은 어떤 일보다 더 큰 문제인 만큼 신속히 결정을 해야 할 것이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머지 두 비구니가 무겁게 불호를 외고, 방안은 침묵에 휩싸 여 갔다. * * * 진설영의 방을 찾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까 와보았던 진파파의 방 바로 옆이기 때문이었다. 불은 꺼져 있었고, 주변을 지키던 사람들도 다 뇌옥 쪽으로 몰 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잘되었군……!’ 소운비는 조심조심 방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방안은 비어 있었 다. 그는 어둠 속을 더듬어 해약이 있을 만한 곳을 뒤져 보았다. 한참 만에 그는 두 개의 노란 단약을 찾아 냈다. 손톱으로 살짝 깬 뒤에 혀를 대보니 아까의 그 단약과 맛이 똑같았다. ‘해약이로군……! 이 두 개밖에 없을까……?’ 소운비가 아쉬워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방안이 확 밝아졌다. 그 가 황급히 뒤돌아보자, 등잔에 불을 붙이고 있는 진설영이 보였 다.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오라버니, 다시는 내 눈에 뜨이지 않기를 바랬는데, 어째서 다시 돌아온 거죠?” 소운비는 입 안이 바작바작 타는 것을 느꼈다. “이 약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오라버니는 그 더러운 색마들과 한패가 된 건가요?” 소운비는 한숨을 쉬었다. “너는 그 사람들이 더럽다고 하는구나. 너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나는 비록 그 사람들 때문에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지만, 그들이 근본부터 나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파의 인물들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숨은 위 선의 무리들이 더 나쁜 것이 아니냐?” 진설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등잔 위에 고여 있던 기름을 손가락으로 튕겨 보냈다. 파앗!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그 기름방울은 소운비를 향해 쇄도해 갔다. 소운비는 망번신요보로 그 공격을 비스듬히 피했다. 하나 피했 다고 생각한 순간, 진설영은 바로 그가 피한 방향으로 몸을 날려 왔다. 팍! 팍! 순식간에 소운비는 진설영에게 마혈(麻穴)을 짚이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오라버니와 나는 정말 길이 다르군요. 이젠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소운비의 팔을 틀어쥐고 나직하게 속삭이던 진설영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그녀는 문 쪽을 돌아보더니 재 빨리 소운비의 아혈을 점했다. ‘설영……!’ 소운비는 낙담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한데 진설영은 갑자기 서둘러 그를 벽장 안에 던져 넣고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진설영은 방문을 열고 뜰을 향해 외쳤다.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뜰의 풍경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다른 곳보다 훨씬 더 겨울이 깊은 것처럼 유난히 을씨년스럽고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을 타고 한 줄기 무뚝뚝한 음성이 실려 왔다. “우리는 구면인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진설영은 그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세상에는 아무리 여러 번 보고 들어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과 목소리가 있 는 반면에, 단 한번 보거나, 단 한번 들어도 기억할 수 있는 사람 과 목소리도 있는 법이다. 진설영에게는 지금 들리는 그 목소리가 바로 그랬다. 단 한번 마주친 상대였지만 이 사람은 그녀가 무공에서 한 단계 높은 경 지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어떤 존재처럼 각인된 사람 이었다. 진설영은 관음보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너무나 날카로워서 시디신 물이 떨어질 것 같은 검날이 달빛 아래 나신을 드러냈다. 진설영은 천천히 뜰 아래로 내려갔다.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떠나지 않고 기다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진설영은 허공을 향해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허공이 대답했다. “뭐지?” “당신이 누구인지 물어 봐도 될까요?” 허공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덤덤하고 차분한 대답이 돌아왔다. “몽혼일도.” 진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실력자에게 맞는 이름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의 칼이라면……!’ 그녀는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많은 일이 일어 났던 하루였고, 그녀는 수십 년을 산 노파처럼 마음이 지쳐 있었 다. 기대하지 않았던 사문이 나타났으며, 사부가 죽었고, 한때 사형 이었던 사람은 이미 큰 강 건너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 날. 그녀는 이상하게도 허탈한 마음에 이대로 하늘이 놀랄 싸움 끝 에 깨끗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몽혼일도라면, 그녀에게 능히 그런 죽음을 선사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몽혼표를 던지고 사라지셨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겠죠?” 진설영이 물었다. 그러자 그 대답 대신 한 줄기 광풍이 불더니 그 바람을 타고 온 듯이 한 사람의 신형이 나타났다. 검은 무복에 긴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사나이였다. 이마 왼쪽 에서부터 턱 오른쪽까지 길고도 깊은 검흔이 새겨진 것만 뺀다면 그 목소리처럼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의 손에는 폭이 넓고 두툼한 도가 하나 들려져 있었다. 진설 영의 신경은 온통 그 도에 집중되었다. 그녀는 관음보검으로 그를 겨냥했다. 이 승부가 그다지 길게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일초에 모든 힘을 쏟기로 했다. 서서히 도를 들어올리는 몽혼일도 역시 마찬가지로 보였다. 생사의 대결을 앞에 둔 두 사람은 상대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도, 느낄 수도 없었다. 오감은 모두 적을 향해서만 열려 있었고, 바늘 끝처럼 날카롭게 서 있었다. 한데……! ‘흡!’ 진설영은 갑자기 화끈한 고통을 전신에 느꼈다. 몽혼일도의 모습이 옆으로 기울더니, 갑자기 땅이 올라왔다. 눈 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녀는 몽혼일도가 혼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늦은 판단이었다. 모든 신경을 몽혼일도에게 쏟아 부었기 때문에 등뒤로 다른 적 이 접근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진설영이 쓰러진 자리에, 취 화비도가 서있었다. 그녀는 생기없는 눈으로 몽혼일도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미 그 자리에는 몽혼일도가 없었으니 몽혼일도가 서 있었던 자리를 바 라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몽혼일도가 모습을 드러내다니……! 정말 이 계집과 대결을 해볼 셈이었을까?’ 취화비도는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몽혼일도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 일을 도우신 것을 알면, 소교주께서 화내지 않으시겠습니 까?” 취화비도는 냉랭하게 그 말을 받아 쳤다. “어쨌든 나는 교주를 모시는 몸!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쓸 것 없다.” “그거 아주 듣기 좋은 소리로군그래!” 나타난 것은 적무공이었다. 취화비도의 눈이 꿈틀거렸다. “뇌옥 쪽의 일은 벌써 다 끝난 겁니까?” “그들도 일행이 있어 어찌어찌 다 달아났지. 소란을 좀 피워 주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웬 비구니가 하나 나타나더군. 좀 귀찮 아질 것 같아서 몸을 빼냈어.” “소운비라는 자는 취하셨습니까?” “그는 어차피 북망산으로 오게 되어 있어! 세상이 온통 자기 를 쫓는 데 피신할 곳을 찾지 않고 어쩌겠나? 일단 그 계집만 데 리고 가지. 그 계집이 과연 라라나로서 적당한지 알아보아야 하 지 않겠는가?” 취화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얼버무렸지만 나타난 비구 니에게 적무공이 낭패를 보았다는 생각이 들어 내심 통쾌했다. “계집은 나에게 넘기고, 두 사람은 소운비가 도망을 칠 수 있 도록 계속 안팎에서 소란을 피우도록.” 적무공이 비릿하게 웃으면서 취화비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은 욕심을 담고 늘어진 진설영의 몸을 훑고 있었다. 취화비도는 진설영과 적무공을 번갈아 보다가, 그녀를 막 들어 올리려고 손을 뻗었다. 한데, 몽혼일도가 있던 쪽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 오는가 싶더니, 진설영의 몸을 낚아채 갔다. 노한 적무공이 외쳤다. “뭐 하는 짓이냐?” 몽혼일도의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남는 것보다는 이미 모습을 세인들에게 보이신 적무공 께서 남으시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제가 비록 재주가 없지만 몸을 숨기는 것은 익숙한 편이니 염려 마십시오!” “이놈!” 적무공은 펄펄 뛰었지만, 몽혼일도는 이미 할말을 마치고 가버 린 듯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진설영을 적무공에게 넘겼을 때 그녀가 당할 처참한 몰골을 은 근히 기대하고 있던 취화비도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몽혼일도의 말이 옳군요. 날이 밝기 전에 어서 일을 마쳐야 지요.” 적무공은 몽혼일도로 인해 불붙은 노여움을 엉뚱한 곳으로 폭 발시켰다. “내 이 개방 거지 놈들을 깡그리 죽여 그 피를 마시고야 말겠 다!” 싸늘한 중얼거림과 함께 두 사람도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진설영의 방 주변에는 다시 괴괴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쿵……! 한참 만에 벽장 문이 열리며 소운비가 쓰러졌다. 진설영의 점혈에는 뜻밖에도 큰 힘이 실려 있지 않아 시간이 지나자 혈도가 서서히 풀렸던 것이다. 간신히 몸을 추스린 소운비는 진설영이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 보며 중얼거렸다. 벽장의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고 열려 있었기 에 그는 모든 광경을 하나 빠짐없이 지켜볼 수가 있었다. ‘나에게 북망산으로 오라 한 사람과 한패가 설영이를 납치해 갔구나. 게다가 교주니, 라라나니 하는 말들은……!’ 소운비는 수십 년에 걸친 음모들이 하나하나 옷을 벗는 것 같 은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그들이 우리의 탈출을 도와 주기 위해 소란을 피운다 니, 일은 좀더 쉬워질 것이다. 어서……!’ 그는 두 알의 해약을 손에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어둠 속을 내 달렸다. 유난히 길고 일 많은 밤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제 27 장 해후(邂逅) 평안객잔은 그들이 개봉부를 향해 갈 때와는 달리 파리를 날리 고 있었다. 소운비 일행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객잔 주인과 점소이 는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대뜸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손님을 받을 수 없으 니 다른 곳을 찾아 주시지요.” 혼음사의가 뭐라고 대거리를 하려고 하는데, 안쪽의 주렴을 헤 치고 한 소년이 나타났다. 혈루수였다. “그는 우리 일행이니까 괜찮아!” 객잔 주인의 얼굴은 더욱 핼쑥해졌다. 아마도 용양도인 일행이 먼저 도착해서 다른 사람들이 들지 못하도록 객잔 사람들을 단도 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혈루수는 소운비를 쓱 훑어보고는 붉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제일 늦으셨군요. 안에서 다들 기다리십니다.” 소운비 일행은 그의 안내에 따라 평안객잔의 내실로 들어갔다. 바로 개방 분타를 빠져 나온 용양도인 일행은 가장 탈출이 쉬 웠다고 할 수 있었다. 무공이 온전한 사람도 많았고, 무엇보다 방 해가 가장 적을 때 적의 소굴을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 일행 중에서 꼴이 처참한 것은 탐서랑 하나였다. 용양혈 루단의 소년들은 목숨을 걸고 용양도인을 지키기는 했지만, 탐서 랑은 어떻게 되든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무공조차 쓸 수 없었던 탐서랑은 그야말로 일행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죽 을 힘을 다해야 했다. 몸에 입은 상처도 상처지만, 심리적 타격이 워낙 커서 평안객잔에 도착한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그의 얼굴색 은 시퍼랬다. 그 다음은 만음요화 일행이었는데, 혼음사의의 추측대로 그들 은 혼혼옥잡을 찾으러 적의 심장부로 뛰어들었다. 하나 원하는 것은 찾지 못하고 악전고투를 치르며 빠져 나와야 했다. 그나마 우연히도 개방 이곳저곳에서 침입자들이 일으킨 소란 때문에 인 원이 분산되어 그들은 간신히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소운비 일행은 마지막으로 탈출했는데, 만음요화 일행에 비해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소운비는 일단 두 개의 해약을 혼음사의 와 한종린에게 복용시키고 운공할 시간까지 주었다. 그래서 동이 훤하게 터올 무렵에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지만 부담이 훨씬 줄었고, 오히려 날이 밝을 때라 사람들의 경계심이 허물어져 총 타를 빠져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군데군데 가볍게 입은 상 처를 뺀다면 그저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들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열네 명의 뇌옥 동지들이 모두 모이게 되 었는데, 그들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 었다. 안에서 탈출한 것이야 여기저기 조력자들이 많고 적의 의표를 찔렀기에 가능했다고 치고, 어째서 추격대가 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궁금한 점이었기 때문에 전원이 모이게 되자 일 단 그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분명히 그들 내부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겁을 집어먹은 게 아닐까요?” “아무러면 어때! 우리가 무사히 나왔으면 그만이지.” 색마들은 시장판의 장사치들처럼 일제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내부의 문제라……!’ 소운비는 언뜻 진설영이 납치되었던 일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 무리 진설영의 격색마회 내부에서 지금껏 맡아 왔던 일이 크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부 사람들의 문제일 뿐, 격색마회의 활동을 중지시킬 정도로 큰 문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 각이었다. ‘설영이가 없어진 것보다는 더 큰일이 생긴 거야!’ “그만들 떠들자구!” 용양도인이 한마디 뱉어 모두를 조용히시켰다. 지금 모인 사람 들 중에 용양도인의 힘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에게 충 성을 다하는 용양혈루단이 버티고 있는 데다가, 만음요화도 오랑 과의 관계 때문에 예전처럼 그에게 함부로 덤빌 수가 없었기 때 문이었다. “일단 말이야, 약들 먹고 운공들 해서 몸을 회복한 뒤에 어떻 게 할 것인지 정식으로 모여서 이야기들 좀 해보자구. 이대로 추 격전이 멈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야. 분명히 무슨 흉계가 있을 거야.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수천 명이 모인 지금 기회를 그냥 흘려 버리겠어?” 그의 말은 평소와는 달리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일단 일행 별로 방을 나누어 들어가 용양혈루 단이 나누어 준 해약을 먹고 운공에 들어가거나 상처를 치료했 다. 용양도인은 오랑이 만음요화에게 해약을 줄 때는 눈살을 찡그 렸다. 그리고 탐서랑이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혈루수에게 해약을 받아 갈 때는 눈알을 마구 부라렸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 하지 않은 것은, 적이 언제 쫓아올지 모 르는 상황에서 힘이 될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는 쪽이 낫다 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종린은 일행들 전체의 크고 작은 상처들을 보아 주고 적절한 치료를 맡았다. 소운비는 특별히 무산음호를 혼음사의에게 부탁 했는데, 혼음사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글쎄, 자신이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군. 어떻게 될지 모르겠 어.” “사부님만 믿습니다. 난 이 사람을 살려서 반드시 그 딸을 만 나게 해야 합니다.” 혼음사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추면인이 보이지 않는군. 이 사람은 내게 맡기 고 자넨 얼른 나가 봐.” 그의 말을 듣자마자, 소운비는 무산음호와 혼음사의를 남겨 두 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가슴은 이상하게 쿵덕거리고 있었다. 추면인은 막 평안객잔을 나서고 있는 참이었다. “잠깐!” 부르는 목소리는 소운비의 것이었다. 마치 밤도둑처럼 조용히 객잔을 나가려던 추면인은 그 목소리에 흠칫하며 발걸음을 멈추 었다. “왜 그러시오?” “형장께서는 어째서 몰래 떠나시려고 하는 거요?” “나는 어차피 당신들 색마들과는 일 점 관계도 없는 사람이 고, 일신도 안정되었으니 그만 떠나도 되지 않겠소?” “그건 아니오.” 소운비는 잘라 말하고 천천히 추면인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옷 도 엉망이 되었고, 죽립은 거의 쪼개져, 가는 바람결에도 흔들리 고 있었다. 소운비는 분명히 솜털 같은 턱수염이 돋아 있지만 남자치고는 가는 편인 턱 선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도망치는 와중 에서도 몸의 안전보다는 죽립을 잃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하던 추면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난 당신과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소.” “무슨 말을……” 되묻는 추면인의 목소리는 어딘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드는구려.” 소운비는 말을 돌렸다. 그의 말투는 따스했고, 어딘지 아이를 놀리는 것 같은 투가 깃들여 있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오?” “뇌옥에서 들었던 당신의 말투와 지금의 말투는 어딘지 변한 것 같소. 그때는…… 말하자면……!” 추면인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소운비는 추면인 옆에 바싹 붙어서서 말했다. “말하자면 그때는 당신의 말투가 마치 여자 같았다는 거요.” 추면인은 일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침묵은 잠시였다. 그는 곧 너무나 기가 막히다는 듯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소 형은 나에게 여자가 아니냐고 묻는 것이오? 하 하……! 내가 소 형을 구하러 간 줄 알고 있구려? 내가 소 형을 남몰래 짝사랑하기라도 해서 그렇게 몸을 던진 줄 알고? 하 하…… 하하! 이거 정말 기가 막히는구려!” 처절하게 웃던 추면인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자기 가슴팍 의 옷자락을 잡았다. “내 사정이 있어서 얼굴을 밝히기를 꺼리나, 그토록 소 형이 얼토당토않은 의심을 한다면 내 깨끗이 그 의혹을 벗겨 드리겠 소! 바로 이렇게 말이오!” 쫘아악! 추면인의 단호한 손길에 의해 그의 가슴팍 옷자락이 찢겨져 나 갔다. 순간 소운비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가슴은 작은 체구만큼이나 넓지 못했지만, 분명 밋밋한 것이 여자의 그것은 아니었다. 약간 동그스름하게 솟은 흔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젖가슴이라기보다는 가슴의 근육에 가까운 정도 였다. “이제 됐소?” 냉랭한 추면인의 질문에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럼 내가 떠나더라도 상관이 없겠소?” “그건……!”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곤란하오. 어쨌든 나는 당신에게 물어 볼 것이 있소. 그러니……!” 추면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물어 볼 것이 있다면 빨리빨리 물어 보시오! 나는 갈 길이 급한 사람이오!” 그때, 바람결에 실려 말 방울 소리가 들려 왔다. 두 사람은 동 시에 평안객잔 앞에 뻗은 길 저쪽을 바라보았다. 한 마리의 백마(白馬)에 올라탄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소운비는 긴장하여 그녀를 응시하다가, 곧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 긴장했던 것은 말 위의 여인이 당미령이었기 때문이었 고, 안심한 것은 그녀가 당문 일행과 함께가 아니라 혼자였기 때 문이었다. 그녀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려왔는지 옷도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 었고 안색도 피로해 보였다. 하지만 소운비를 발견하자 눈을 반 짝반짝 빛냈다. “소 공자로군요!” 그녀는 말에서 내려 반갑게 인사했다. “안 그래도 당신을 만나게 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랬어요!” “그건 어째서요?” 당미령은 약간 망설이다가 말했다. “당신이 나를 북망산으로 데려다 주었으면 하구요.” 소운비는 웃음이 나왔다. 그토록 오만하던 당미령이 이렇게 지 체도 자존심도 잊고 뛰쳐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 였다. ‘북망산……! 어차피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꼭 가보아야 하 니 상관이 없겠지……’ 소운비는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일행이 있어서 지금 당장은 힘들겠소. 하지 만 같이 들어가서 일행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결정나기 를 기다린다면 동행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소.” 당미령이 그의 말에 따라 객잔 안으로 발길을 돌리다가 문득 이맛살을 찡그리며 물었다. “혹시 그 일행 중에 지난번의 그 색마도 있나요?” 탐서랑을 말하는 것이었다.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소. 하지만 그도 지금은 당 소저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거 요. 너무 걱정 마시오.” “흠……!” 당미령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다가 마침내 말했다. “소 공자만 믿겠어요.”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객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은 옛날의 두 사람 사이가 냉랭했던 것에 비하면 사뭇 다 정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막 문안으로 들어서던 소운비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는 아직도 추면인이 얼음 조각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소운비가 물었다. “당신은 결국 떠날 거요?” 추면인이 그 말에 갑자기 몸서리를 쳤다. 누가 깜짝 놀라게 만 들어 화가 난 것처럼 그는 버럭 소리쳤다. “생각이 바뀌었소! 나도 당신들과 좀더 오래 행동을 같이해야 겠소. 혼자 있다가 추격을 받으면 대책이 없으니 말이오!” 소운비는 갑자기 그의 마음이 바뀐 이유는 알 수가 없었지만, 다행이라고 여겨져 미소를 지었다. * * * 저녁 무렵이 되어 일행은 가장 큰 방에 다 같이 모였다. 용양 혈루단이 객잔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나가고 새로 합류한 당미령 까지 합쳐 모두 열 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었다. 그 중 환자인 무산음호만이 방에 누워 있고 도합 아홉 명이 회의에 참가했다. “일단!” 용양도인이 으름장을 놓듯이 말했다. “헤어지기 전까지는 임시로 내가 우두머리 역할을 하겠어. 우 두머리가 없으면 모두 오합지졸이라 회의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까 말이야!” 하나 사람들이 무공을 쓰지 못하던 아까와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혼음사의로부터 대뜸 반박이 돌아왔다.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회합이나 주재하시오. 괜히 어른 노릇 하려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으니 말이오.” 용양도인이 혼음사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데, 탐서랑이 얼른 말했다. “의원 나으리의 말씀이 옳소. 이야기할 때 주재하는 것은 상 관없지만, 대장 노릇까지 하려는 것은 좀 심하오!” 탐서랑은 만음요화와 티격태격했던 문제 때문에 은근히 혼음사 의 쪽으로 붙은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보는 눈이 곱지 못한 소운비와 당미령 때문에 그는 여전히 처지가 불안했다. ‘여차하면 혼자 튀는 거지. 이 탐서랑이 언제는 누구 밑에 붙 어서 목숨을 부지한 적이 있었더냐. 어차피 강호는 혼자 헤쳐 나 가는 거야……!’ 그는 모질게 결심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이……!” 용양도인은 당장 얼굴이 시뻘게져서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 를 말린 것은 오랑과 만음요화였다. “아버지,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고 어서 이야기를 시작하시지 요.” “도인께서는 잡다한 의견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마세요.” 두 사람의 말이 그나마 체면을 세워 주자 용양도인은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리고 말을 시작했다. “흠……! 오늘날 우리 색마들은 실로 사상 최대의 위기에 처 했다고 말할 수 있소. 화금궁과 풍월도문의 사람들은 영수(領首) 가 없어진 사이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뒤에는 언제 닥칠지 모 르는 극악한 추격자의 무리들이 있으니……” 용양도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십 년 간의 강호생활 끝에 힘들게 만든 풍월도문이 하루아침에 주저앉은 것이 그로서는 정 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것은 만음요화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화금궁과 풍월도문 같은 단체는 어차피 이렇게 사라질 수 밖에 없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 방문좌도의 문파는 오랜 전 통과 교의를 가진 소위 명문정파들과는 달리 한 사람의 기인(奇 人)으로 인해 그 힘을 유지하는 곳이라 그 사람이 없어지고 나면 살랑살랑 불어 오는 봄바람에도 흩어질 만큼 나약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만음요화나 용양도인 둘 다 아랫사람을 잘 다스리는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니, 자신들이 없을 경우 문파를 지킬 이인자(二人者)를 키우는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혼음사의나 탐서랑처럼 혼자 행동하는 사람들과 는 체질이 달라 아랫사람을 거느리지 않고서는 큰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시급한 것은 어떻게든 적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장기간 은신하며 무너진 조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지금 함께 행동하고 있 는 무리들의 힘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용양도인은 그 절실함을 머리로는 알지 못해도 본능으로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본능이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해서, 나는 감히 제안하는데…… 우리 색마들이 그 동안 서 로 경쟁 관계에 있었던 것은 잠시 묻어 두고, 이 위기에서 벗어 날 때까지 상호협조하자는 것이오.” 그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내 의견을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오랑은 바라던 바라 얼른 말했다. “아버지의 의견은 참으로 현명하십니다.” 만음요화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오랑의 체면도 있고, 또 나도 혼혼옥잡을 되찾을 때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힘이 필요하니까……’ 그녀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 했다. “저도 도인 어르신의 말씀에 찬성합니다. 적극적으로 돕겠어 요.” 혼음사의는 팔짱을 낀 채로 소운비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로서 는 뚜렷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 소운비에게 일임한 것이었다. 소운비는 비록 이 사람들이 성격이 간사하기도 하고 자기 이익 만 챙기는 면이 있어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속을 위험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역시, 지금은 색마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찬성하자, 한종린과 혼음사의, 탐서랑, 그리고 추면인과 당미령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양도인은 일순 흠칫하였는데, 지금 소운비의 말에 함께 동의 한 사람들의 숫자를 보니, 자신의 패거리에 비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허? 색마로 만들려던 놈이 되려 색마들을 끌고 다녀?’ 하나 용양도인은 내색하지 않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좋소. 모두들 찬성하셨으니 그럼 우선 언제 올지 모르는 추 격대를 어떻게 따돌릴 것인가 하는 점부터 이야기해 보도록 하……” “추격대는 오지 않아요.” 용양도인의 말을 자른 것은 다름아닌 당미령이었다. 당가의 여 식이 일행에 합류한다는 것 자체를 미심쩍게 생각하던 색마들은 그녀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색마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소운비를 향해서 말했다. “내가 아마 마지막으로 격색마회를 떠나왔으니 가장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개방에 큰 문제가 생겨서 지금 그곳은 온통 난리법 석이에요. 추격대가 오더라도 하루이틀 안에는 힘들 거예요.” “그 난리라는 것이 뭐요?” “당신들이 탈출하느라고 법석을 떨 때, 냉면검화 진설영 소저 가 납치되었어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거예요. 그리고 동일한 무 리의 소행으로 여겨지는데, 당신들에게서 빼앗았던 혼혼옥잡과 음곡비파 역시 도난을 당했어요.” “뭐?” “뭐라고?” 혼음사의와 만음요화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그들에게는 진 설영이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미령은 그들을 흘깃 보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거기다가 삼목신룡 무옥, 격색마회의 회주가 진 소저를 구하 러 간다는 편지 하나를 남기고 사라졌어요. 우두머리가 없어지자 그들은 일시 질서를 잡지 못하고 수천 군웅들도 어찌할 바를 모 르고 있어요.” 당미령은 숨을 몰아쉬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각파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연합해 추격대를 구성하는 데는 못 걸려도 이틀은 걸릴 것 같아요.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우리 아버님의 말씀이었으니 아마 정확할 겁니다.” 용양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그럴듯하긴 하지만, 냉면검화와 삼목신룡이 없다고 하더 라도 격색마회에는 남궁세룡과 규염개가 있는데 어찌 그리 오합 지졸이 되었을라구?” 당미령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규염개는 지난밤 총타를 습격한 괴인과의 격전에서 큰 부상 을 입어 생사지경을 넘나들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남궁 대 협은……!” 당미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남궁세가의 노인네들이 몰려들었대요. 남궁화련이 죽어 그나 마 데릴사위로라도 대를 이을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졌으니, 남 궁세룡이 몸을 보중하여 대를 이을 자식을 하나 더 낳아야 한다 고, 세가의 원로들이 난리를 쳤답니다. 하니 남궁 가주는 위험한 일에 나서지도 못하고 전전 긍긍하고 있지요.” 소운비가 물었다. “상황이 정 그렇다면, 보타문에서 온 비구니들이나 개방의 장 로급 인물들이 나설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오?” “그것도 묘하게 되었지요. 보타문 네 비구니들은 진 소저가 납치된 직후부터 이상하게 꼼짝도 안 한답니다. 워낙에 단신으로 신비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니 무리를 이끄는 행동은 입맛에 맞 지 않겠지요. 게다가 지난밤의 격전 중에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 을 빼고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개방 장로 네 명이 모두 삼목신 룡보다는 일월쌍개를 지지했던 사람들이라는군요. 다시 말해 개 방이 격색마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 던 사람들이지요. 그러니……” 당미령의 의견은 당미령 스스로의 생각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아버지인 당철이 말하던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그렇 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었다. 당미령의 설명이 끝나자 색마들은 제가끔 생각했다. ‘어쨌거나 우리로서는 운이 좋군!’ ‘그럼 하루이틀 안에 이 근방을 벗어나 잠적해 버리면 일단 안전해진다는 뜻이렷다……?’ 용양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흠, 흠! 만일 당 소저의 말이 맞다면 이야기는 간단하군. 우 리는 각자 흩어져서 적들이 찾지 못하게 은거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오. 출발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소. 본인이 먼저……!” 용양도인은 그야말로 걸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추격대의 위 협만 없다면 가장 먼저 이 일시적인 연합을 깨고 떠나고 싶어하 는 사람이었다. 그가 막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 때, 소운비가 그를 제지했다. “그건 안 됩니다!” “뭐? 왜 막는 거지?” 용양도인은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고, 말투도 험악하게 바뀌어 져 있었다. 소운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는 모든 색마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동안 당신들과 돌아다니면서, 당신들을 둘러싸고 어 떤 음모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당신들 각자의 힘으로는 깨기가 어렵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용양도인이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음모라니?” 소운비는 논리 정연하게 그 동안 자신이 알게 된 몽혼표에 얽 힌 이야기, 사대성물과 사라진 서장 승려 가무진에 대한 이야기, 어제 자신들을 도왔던 괴인이 마지막에 해준 귀띔과 진설영의 납 치 경위 등을 들려 주었다. 그 이야기들 중 어떤 부분은 색마들 도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었고, 어떤 부분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취화 비도가 진설영을 납치하는 일을 거들었으며, 짐작컨대 가무진의 수하일 것 같다는 이야기에서는 모두들 깜짝 놀랐다. 반쯤 몸을 일으켰던 용양도인도 도로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 다. “그놈이 전에 나를 찾아와 감언이설을 늘어놓았었는데, 서장 요승의 부하란 말인가?” 하지만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들은 쉽게 그 말을 믿으려는 눈치가 아니었다. 만음요화가 먼저 반론을 제기했다. “소 공자의 말은, 서장에서 온 가무진이 음모를 꾸며 사대성 물을 취해 사라져서 대단한 신공을 익히려고 한다는 것인데, 그 렇다면 어째서 그 사대성물 중 세 개가 강호에 나와 있겠어요? 혼혼옥잡은 내가 가지고 있었고, 태원옥호공은 무산음호가, 음곡 비파는 소 공자가 갖고 있지 않았어요?” 소운비는 만음요화에게 되물었다. “화금궁주께서는 어떻게 혼혼옥잡을 발견하게 되었습니까?” 만음요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처음 혼혼옥잡을 발견하게 된 경위를 털어놓았다.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대충 추측해 보건대 무산음호가 태원옥호공을 발견한 시 기와 일치하는군요. 제 생각에는 가무진이 의도적으로 두 분에게 그 물건을 보낸 것이 아닌가 싶군요. 음곡비파의 경우에는 제 사 부…… 였던 분께서 아마 가무진으로부터 빼내신 것 같고……!” 그래도 만음요화는 쉽게 소운비의 견해에 찬성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가 일부러 그 물건을 보냈다는 거죠?”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자 에게 어떤 음모가 있다면, 그자가 드리운 그물 안에는 두 분도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음요화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만일 소운비의 말이 맞다고 하 면, 그녀로서는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화금궁주의 자리에 오른 이래로 세상에 거리낄 것 없이 살아 왔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무림의 측천무후(側天武后)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만일 그것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제천대성(齊天 大聖) 꼬락서니였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노릇인가! 우스 울 뿐 아니라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음요화는 기분이 나빠져서 입을 다물었고, 대신 혼음사의가 물었다. “그렇다면 좋다. 네 의견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 겠다는 거냐?” 소운비는 대답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두 가지 적이 있습 니다. 격색마회는 언제든지 전력을 재정비해 우리를 쫓을 수도 있으니 무시할 수 없는 적이고, 가무진은 암중에서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 모르니 역시 적입니다. 제 추측이 맞다면 그 동안 격색마회가 비난해 온 색마들의 행동들 중 상당 부분은 가무진에 게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가무진의 꼬리를 잡아 그 증거 를 정파 인물들에게 들이댄다면, 그들도 함부로 우리를 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힘을 합해 그들을 치는 것이 우리의 안전을 도모하는 지름길이 아니겠습니까?” 용양도인이 투덜거렸다. “흥……! 너는 아마 우리들의 힘을 빌려서 납치된 냉면검화를 구할 생각인가 본데……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 네놈의 수족처 럼 움직여 줄 줄 아느냐?” 소운비는 모두를 향해 공손히 포권하며 말했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자 할 따름입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혼음사의였다. “나야 네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 너는 내가 온 힘을 기울여 색마로 만들어 낸 내 제자니까 말이야!” 그는 은근히 자신이 소운비를 색마로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하 기를 잊지 않았다.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만음요화였다. “나도 가겠어요. 소 공자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그자 들이 나의 혼혼옥잡을 가져 갔다는데,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지 요!” 바늘이 가면 실이 가듯이, 만음요화가 찬성하니 오랑도 그 뒤 를 따랐다. “나도 가겠소!” 용양도인이 불에 덴 송아지처럼 펄쩍 뛰었다. “이 녀석아, 너 그게 무슨 소리냐? 이 일은 우리와는 하등 무 관하다. 그런데도 가겠다고?” 오랑은 어른스럽게 용양도인을 설득했다. “아버지, 소 공자의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이 기회에 문제 들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격색마회에 쫓기게 될 것이 고, 그사이에 그 가무진이라는 자가 어부지리를 취하게 될 것입 니다. 아버지가 정말 영웅이 되고 싶으시다면 마땅히 함께 행동 하셔야 합니다.” 용양도인은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콧구멍에서 김이 나올 지경 이었다. “너…… 너……! 말은 번드르하게 하지만 사실은 저 여자한테 반해서 그런 거지? 저 여자는 네 어머니뻘이 될 정도로 나이가 지독하게 많은 여자다. 그 동안 너처럼 어린 사내들을 무수히 끼 고 자서 저렇게 살이 팽팽한 거야. 그런데도 그녀를 따라가겠다 는 거냐? 이 바보 놈아!” 만음요화가 벌떡 일어났다. 그 동안 마음에 들지 않았던 용양 도인이지만 오랑의 체면을 보아서 예의를 지켜 주고 있었는데, 이제 기분도 좋지 않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뭐가 어째요? 내가 어린 사내들을 끼고 자서 이렇게 팽팽하 다면, 어째서 나보다 어린 사내들을 끼고 잔 당신은 그렇게 쭈글 쭈글한 거죠?” “옥녀!” 오랑이 대뜸 소리쳤다. 하나 만음요화는 지지 않았다. “오랑, 당신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당신 아버지는 이상한 사람이니, 더 이상 그 아래 있을 필요가 없어요.” 쾅! “뭐가 어쩌고 저째?” 용양도인이 탁자를 거세게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음대로 해라! 난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용양혈루단과 함께 떠날 테다. 만일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넌 내 아들도 아니 야!” 용양도인은 바람 소리가 나도록 휑하니 방을 나가 버렸다. 만음요화가 그 뒤에서 종알거렸다. “흥! 언제는 아들이 있다는 사실도 부끄러워 쉬쉬하더니… …!” 오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용양도인과 만음요화가 사이 좋게 지낸다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벌써부터 이렇게 부딪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시아 버지와 며느리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용양도인과 만음요화 일 터였다. 오랑은 소운비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소 형, 내일 아침까지 내가 부친을 설득해 보도록 하겠소. 하 지만 부친께서 뜻을 굽히지 않으신다고 해도 나는 아까 한 말을 지킬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소운비도 마주 손을 잡아 보였다. “믿겠습니다.” 만음요화와 오랑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종린이 남은 사 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같은 의견일 거고…… 아, 탐서랑께선 어 쩌실 거요?” 탐서랑은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소운비가 말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머릿속에서 종합해 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 특별한 생각들이 모여졌다. 뒤를 쫓는 격색마회, 언제나 쫓겨 다니기만 해야 하는 신세, 혼혼옥잡 과 음곡비파, 그것을 가로챌 수 있는 기회, 소운비를 꼬여 색존이 될 수 있는 기회 등등……! ‘흠, 어차피 손해볼 것은 없으니 함께 가기로 할까? 만일 일 이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도망치면 될 것이 아닌가?’ 탐서랑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짐짓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 했다. “나도 중원 사람인데 중원 무림이 서장 요승(妖僧)의 손에 놀 아나는 것을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소? 당연히 함께 가는 거지!” 그의 말은 진지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 람은 없었다. 소운비는 웃음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하도록 합시다.” 혼음사의가 물었다. “어디로 가자는 거지?” “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가무진의 흔적은 북망산에서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무진이 이십 년 전 사라졌던 곳이 북망산이었고, 또 어제 그 괴인이 제게 말한 곳도 북망산이었으 니까요.” “네 생각은 어제의 괴인이 그 가무진의 수하일 것 같다는 소 리인데, 북망산에서 사라진 사람이 북망산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 아니냐?” “저도 그가 북망산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오히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북망산에서 사라진 사람이니 북망산에 그대 로 숨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십 년이나 지났으니까요. 그리고 그곳이 근거지가 아닐지라도 내게 오라고 한 것을 보면 분명 무슨 단서가 있을 것입니다.” 혼음사의는 더 이의를 달지 않았다. 소운비가 북망산으로 간다는 말에 가장 좋아한 것은 당미령이 었다. 추면인은 화가 난 사람처럼 시종일관 말이 없었다. 자리를 파하기 직전, 탐서랑이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객잔 지붕 아래 칠대색마 중에 다섯이 모였구려! 몽중마령과 취화비도만 있으면 모두 모이는 것이 될 텐데 말이오!”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취화비도는 확실히 서장 요승 가무진의 수하일 것이다. 그럼 몽중마령은……? 강호칠대색마 중 가장 신비에 싸여 있으며, 그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무공도 가장 강했던 몽중마령……! 비록 사람 같지 않은 그 용모 때문에 정확한 판단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어쩐지 중원 인 같지 않았던 그 용모…… 소운비는 가슴 깊은 곳에서 까닭 모를 흥분을 느꼈다. 그 흥분 은 예전처럼 그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묘 한 투지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 * *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소운비는 한종린을 은밀히 불러 물어 보았다. “뭐 말인가?” “사백님은 워낙 박식하신 분이라…… 혹시 아실지도 몰라 여 쭙는 것입니다. 혹시 라라나, 라사나라는 말을 아십니까?” 한종린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글쎄……?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는군. 아마 밀교 쪽에서 쓰 는 말인 것 같은데…… 그……!”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있던 한종린은 마침내 머릿속에 쌓여 있던 온갖 잡다한 지식들 중에서 그 내용을 골라 낼 수 있었다. “자네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밀교의 교리는 본래 아주 나 쁘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여러 가지 유파가 생기면서 그 중 에 사이한 것도 있고 음란한 것도 만들어졌지. 밀교에서는 특히 인간의 육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들은 인간의 몸이야말로 진리가 마땅이 실현되는 최상의 도구라고 생각한다네. 좌도밀교 의 한 파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사람의 몸 속에 우 주의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하지. 특히나 남녀가 성교하는 것이야말로 음양이 부딪혀 천하만물을 만드는 창조의 순간을 재 현하는 것이라 여긴다네. 그들은 우주를 만든 힘 중에 여자의 힘 을 ‘라라나’라고 하고, 남자의 힘을 ‘라사나’라고 하는데, 지 고의 라라나와 지고의 라사나가 결합하여 성교를 하다가 절정에 이르러 더 이상 둘이 아니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이 천 지만물을 만들고 소멸시킬 수 있는 조물주의 힘, 궁극의 힘이라 고 보고 있다네.” “그것이라면 그리 나쁜 이야기 같지는 않은데요?” “뭐, 그냥 이론이라면 당연히 나쁘지 않지. 하지만 이것을 신 봉한 나머지 밀교도들 중의 일부에서는 실제로 남녀교도로 하여 금 교합을 하게 만든 뒤에 두 사람이 절정에 달했을 때 살해하여 궁극의 힘을 제물로 삼는 관행마저 있다고 하더군. 이것은 사이 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지!”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왜 묻나?” 한종린이 궁금한 듯 캐물었지만 소운비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 라고 얼버무리며 돌아섰다. 몇 달 만에 무산음호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 다. 물론 전에도 그의 용모는 과히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귀신처럼 바싹 마르고 쪼그라들은 얼굴에 힘줄 하나하나를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을 정도로 야윈 몸통이 방 금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도망쳐 나온 영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나마 개방에서와는 달리 간간이 숨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소운비를 조금은 안심하게 만들었다. 소운비는 무산음호의 몸에 신중하게 금침을 꽂고 있는 혼음사 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살아날 수 있을까요?” “알게 뭐야.” 혼음사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원래 사람의 목숨이란 하늘에 달린 것이고, 의원은 그저 좀 손을 빌려 도와주는 것뿐이야. 하늘이 굳이 데려가겠다고 생각했 다면 난들 별 수 있나?” 이어지는 혼음사의의 말은 어두웠다. “웬만하면 혜와를 빨리 찾는 것이 좋겠군!” 소운비 역시 우울해졌다. 혼음사의의 그 말은 곧 무산음호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 세상 어디에 가서 그녀를 찾는단 말인가?’ 그때, 방문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누구요?” 소운비가 문을 여니 새초롬한 얼굴의 만음요화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오?” “흠…… 아까는 내가 경황이 없어서 말을 못했어요. 그래, 부 녀상봉(父女相逢)은 끝났나요?” 소운비는 그녀가 말하는 부녀가 무산음호와 혜와임을 알고 고 개를 저었다. “무산음호는 여기에 있고 혜와는 너무 먼 곳에 있으니 상봉이 이루어질 리가 있겠소?” “뭐라구요?” 만음요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운비를 바라보았다. “소 공자는 바보로군!” 느닷없는 그녀의 핀잔에 소운비는 어리둥절해졌다. “어째서 가까이에 있는 보물상자를 열어 보지 않는 거지?” “그건 무슨 소리요?” 만음요화는 키득키득 웃었다. “정말 바보로군. 알겠어요. 난 구경이나 해야지.” 그녀는 계속 웃으면서 몸을 돌려 떠나 버리는 것이었다. 소운 비는 황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 어! 잠깐만요. 내게 얘기를 해줘요. 뭘 어쩌라는 거요?” “난 더 얘기해 줄 게 없어요.” 만음요화는 총총히 가버리고 말았다. 혼음사의가 소운비를 힐끔 보았다. “만음요화도 똑똑한 구석이 있군. 넌 바보다.” 소운비는 이마를 찡그렸다. “흠……! 모두들 나를 놀리는군요. 물론 나도 당신들 같은 생 각을 했었어요. 그가 혹시 혜와가 아닐까 하고. 하지만 너무나 확 실한 반증이 있었어요.” 소운비는 아까 추면인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혼음사의는 턱을 벅벅 긁었다. “흠, 얼굴에 털도 나는 데다가 몸의 선은 둥글지 않고 모났으 며, 가슴이 밋밋하다면 남자겠지. 남자라면 혜와가 아닐 테고 ……!” 혼음사의는 소운비로부터 등을 돌리더니, 아까처럼 무산음호의 몸에 침을 꽂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다, 세상에는 눈으로 본 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야.” 그의 말소리는 아주 작아서 거의 들릴 듯 말 듯했지만 소운비 는 최대한 귀를 기울였다. “옛날에 어떤 바보가 있었지. 그 바보가 어렸을 때는 그래도 굉장히 순진했었다. 한 계집아이를 좋아했는데, 그 계집아이도 그 바보를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어느 보름날…… 바보 가 산길을 가다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말았지. 계집아이가 다른 사내놈에게 겁간을 당하고 있었어. 죽자꾸나 하고 싸워서 놈을 내쫓긴 했지만 이미 당한 거야 어쩌겠느냐? 한데 이상하기 도 하지. 계집아이가 그날부터 이상하게 자기를 겁간한 사내놈한 테로 기울기 시작한 거야……!” 이야기를 하는 혼음사의의 등은 유난히 굽어 보였다. “목숨을 걸고 그놈과 싸워 주었던 바보는 정말 바보가 되고 말았지. 계집아이는 곧 대놓고 그놈과 좋아라고 어울려 다니더니, 그예 시집을 가버리고 말았어. 바보는 그때 생각했다. 계집이란 아끼고 위해 줄 필요가 하나도 없구나. 그저 먼저 옷을 벗기는 자가 임자로구나. 그때부터 그 바보는 강제가 아니면 여자를 취 하지도 않았어……” 혼음사의는 아주 우스운 이야기를 한 사람처럼 큭큭 웃음을 터 뜨렸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바보가 나이를 먹으면서 말이다. 하나씩, 하나씩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야. 계집아이네 집이 유난히 가난했던 것도 생각나고, 시집가자마자 유난히 빨리 아이를 낳았 던 것도 생각나고, 시집가기 전에 바보를 찾아와서 울먹거리다가 한마디도 못하고 돌아갔던 일도 생각나고……” 침을 꽂던 혼음사의의 손길은 어느새 멈추어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다. 왜 그때 좀더 터놓고 이야기를 해 보지 못했을까 하고 가끔 후회가 돼. 만일 그랬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뭐, 지금 와서야 어쩔 수가 없지만 말이 야!” 혼음사의의 이야기는 느닷없이 끝이 났고, 그는 다시 무산음호 의 몸에 침을 꽂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한종린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한종린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거, 사대성물은 말이다. 그 특성에 따라 효능이 다양한 것은 물론이고 익히는 자가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서도 아주 달라질 수 가 있다고 하지. 음곡비파를 보통 남자가 가지고 있으면 양기가 쇠해지고, 여자가 가지고 다니면 음기를 보충해 주는 것처럼 말 이야. 만일 혼혼옥잡을 남자가 가지고 있다면 양기가 채워지고, 여자가 가지고 있다면 남자를 끌어들이는 강한 마력을 지니게 되 지.” 한종린은 소운비의 눈치를 살피듯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소운 비는 그를 뚫어져라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태원옥호공을 남자가 익히게 되면…… 그거야 자네가 잘 알고 있겠지만, 만일 여자가 익히게 되면 어찌 될까?” 소운비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별안간 미친 사 람처럼 방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의 얼굴은 목이 막혀 곧 죽어 넘어갈 사람처럼 시뻘게졌다. 그는 숨조차 거칠게 몰아쉬며 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방 은 추면인이 혼자 쓰고 있는 방이었다. 막 죽립을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던 추면인은 소운비가 방안으로 뛰어들자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어 그는 탁자 위 로 손을 뻗어 죽립을 다시 잡으려고 하였다. 하나 날렵하게 움직인 소운비의 손이 그보다 먼저 죽립을 잡아 눌렀다. “왜, 왜 이러는 거요?” 추면인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 손으로는 죽립을 빼내 려고 애쓰며 소운비에게 항의했다. 소운비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를 지그시 노려보기만 했다. 손으로 가린 얼굴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소운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허억!” 그는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죽립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아랫 배를 움켜쥐며 고꾸라졌다. 창백한 얼굴에 구슬땀을 흘리는 그 모습은 금방이라도 죽을 사 람처럼 보였다. 추면인은 얼른 죽립을 뒤집어쓰고 안심하다가, 소운비의 기색 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놀랐다. “소, 소 형. 왜 그러시오? 어디가 아픈 거요?” 소운비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주, 죽을 것 같…… 이, 인면…… 자고……!” 추면인은 소운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불에 덴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추면인은 소운비를 방에 뉘어 놓고 부리나케 뛰쳐 나갔다. 그 는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혼음사의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열자마자 추면인은 숨막히게 외쳤다. “흑독사! 흑독사를 어서 줘요!” 추면인이 숨막히게 외친 것에 비해, 혼음사의는 심드렁하게 뒤 돌아볼 뿐이었다. 한쪽 옆에 앉아 있던 한종린 역시 무슨 소리인 가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추면인은 더욱 다급하게 외쳤다. “사람이 죽어요! 어서 흑독사를 달라구요!” 그러나 여전히 혼음사의와 한종린은 조금도 놀라거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변화가 있다면, 그들의 시선이 똑같 이 추면인의 등뒤를 향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추면인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전 죽을 듯이 쓰러져 있었던 소운비가 서 있었 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아파서 그런 것으로는 보이 지 않았다. 추면인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다, 당신……?” 소운비는 그를 따라 한걸음 내디뎠다. “난 인면자고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 지 이미 오래요.” 그의 손이 호선을 그리며 추면인의 죽립을 향해 뻗어 갔다. 추 면인은 당황하며 두 손으로 죽립을 꽉 잡아 눌렀다. “혜와가 인면자고 이야기까지 해주었소?” 소운비가 죽립을 벗겨 내기 위해 힘을 주는 순간 추면인이 찢 어지게 비명을 짜 올렸다. “아아악! 제발 그만!” 추면인은 소운비가 주춤하는 사이에 죽립을 붙잡은 채로 그 자 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외쳤다. “혜와는 없어요! 혜와는 죽었어요! 제발 더 이상 혜와를 찾지 말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처절했고, 방문은 열려 있었기 때문에 탐서랑 과 당미령이 무슨 소동인가 싶어 각각 자기 방문을 열고 나와 내 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요?” 바깥의 소란에 궁금해진 오랑이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만음요 화가 저지했다. “나가지 말아요. 뻔한 일이니까.” “뻔하다니?” 만음요화는 배시시 웃었다. “세상의 어떤 무공은 여자가 결코 익혀서는 안 되는 것이 있 지요. 여자가 익히면 수염이 자라고 목소리도 남자처럼 변하며 가슴도 줄어들다가 급기야 음문이 막히는 그런 무공 말이에요. 태원옥호공도 그런 무공이에요.” 추면인은 울고 있었다. 죽립과 옷자락으로 한껏 얼굴을 가리려 고 노력하며 그는, 아니 그녀는 울고 있었다. “혜와, 혜와가 맞지?” 소운비가 그 앞에 앉으며 물었다. 추면인은 여전히 흐느끼는 소리로 대답했다. “혜와는 죽었어요. 이제 여긴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물만 남 았어요.”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상관없어. 난 혜와가 어떤 모습이라도 상관없어. 얼굴 을 보여 줘!” 소운비가 손을 뻗자 추면인은 더욱 죽립을 누르며 소리쳤다. “싫어요! 이 얼굴을 당신이 보면 난 바로 죽어 버리고 말겠어 요! 저리 가요!”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 완강했기 때문에 소운비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추면인에게 다가가는 대신 두 주먹을 아프게 꽉 움켜쥐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얘기해 봐……! 정말 태원옥호공 때문이었어?” 추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울기만 했다. 한종린이 혀를 찼다. “아무리 좋은 신공이라고 하더라도 익힐 것이 있고 익혀서는 안 될 것이 있는 법이야. 그런 것을 제대로 몰랐으니 이런 일이 생길 수밖에……!” 소운비가 안타까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되돌릴 방법은 없을까요? 이대로는 살아 갈 수가 없을 텐 데……!” 한종린이 고개를 저었다.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없지는 않다구요? 그게 뭔데요?” “이치를 따져 보게. 성물 중에 하나로 일어난 일이니 성물만 이 그 해답이겠지. 음곡비파가 그 답이야.” 음곡비파는 지금 소운비의 손에 없었다. 막연히 북망산으로 간 괴인들이 훔쳐 갔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소운비는 추면인의 손을 잡고 부르짖었다. “들었지? 내가 꼭 음곡비파를 되찾아서 너를 되돌려 놓겠어. 그러니까 울지도 말고, 도망치지도 마.” 맞잡은 손 위로 추면인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진작 얘기하지 않고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어? 난 차라 리 혜와가 날 떠난 것보다는 지금이 더 나아. 다시는 그런 바보 짓 하지 마. 알았지? 알았다고 말해.” 추면인의 입술 사이에서 마침내 흐느끼는 듯한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라…… 버니……! 오라…… 버니……! 으흐흐……!” 추면인, 아니 혜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소운비의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소운비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한종린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쯧……! 음양인(陰陽人)이나 남녀추니가 되면 빠른 시간 안에 고치지 않을 경우 방법이 있어도 영 못 돌아오는 수가 있는 데…… 너무 늦지는 않았을는지……!’ 한종린은 걱정스러웠지만 차마 그 말을 뱉지는 못했다. 눈시울 이 붉어진 혼음사의가 두 젊은이로부터 눈길을 돌리며 한마디 던 졌다. “자! 눈물치레들은 그만 하고 어서 부친을 만나 뵈야 할 것 아닌가!” 혜와가 고개를 들었다. “부친이라고요?” 소운비가 말했다. “그래, 혜와. 저기 누워 계신 분이 바로 혜와의 부친이야.” 손발을 가늘게 떨며 이제 깨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 무산음 호. 그 한 사람에게로 방안의 시선은 모두 모여졌다. * * * 무산음호가 깨어난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사시나무 떨듯이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던 그는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환하 게 불타 오르듯이 그렇게 잠시 눈을 떴다. 소운비는 무산음호에게 그다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 다. 그는 서둘러 말했다. “절 알아보시겠어요? 저 소운비입니다!” 무산음호가 이를 드러내며 웃으려고 애썼다. “운…… 비……!” “예, 운비입니다. 알아보시는군요!” “내…… 딸…… 찾았…… 어?” “여기, 옆에 있습니다!” 소운비는 혜와를 가리켰다. 무산음호는 고개를 들지는 못하고 간신히 눈동자만 움직여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무산음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아들…… 없어…… 내가 찾아 달…… 라고 한…… 것은…… 딸…… 이…… 야……!” 소운비는 안타까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닙니다. 여기 이 사람이…… 거기엔 사정이 있어서……!” 어떻게든 무산음호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소운비의 손목을 혜와 가 잡았다. 소운비가 돌아보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소운비 대신 혜와가 무산음호에게 말했다. “어르신, 저는 따님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님은 여기서 좀 먼 곳에 있습니다.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걸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따님도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구 요. 조금만 더 건강하시면, 따님을 뵐 수 있으실 겁니다.” 무산음호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다시 떠올랐다. “그, 그래. 고…… 맙군!” 하지만 그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벌써 숨이 가슴까지 차올라 부풀어올랐다 가라앉았다 하고 있었다. “그애…… 이름……?” 혜와가 대답했다. “혜와라고 합니다.” “혜와……! 결혼…… 했던…… 가?”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무산음호는 사람 좋은 촌로(村老)처럼 웃었다. 그리고 소운비를 향해 힘겹게, 아주 힘겹게 이야기했다. “자넨…… 보기보다…… 굳세……! 난 의지가 약해서…… 본 성……을 잃고…… 하지만…… 자넨……, 딸애를…… 부탁…… 하네……” “어르신!” 소운비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무산음호는 그에게 가장 많은 것을 준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으 로 제대로 된 무공을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그가 가장 사랑 하는 사람을 낳아 준 사람이기도 했다. 한번도 그렇게 불러 보았 던 적은 없었지만, 소운비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어르신’이 라는 말이 나왔다. “다르게…… 살았으면…… 그랬으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질긴 실처럼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것 같았던 무산음호의 말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뚝 끊어졌 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식어 가는 무산음호의 몸을 내려다보는 소 운비와 혜와의 뒤쪽에는 혼음사의와 한종린, 탐서랑과 만음요화, 오랑 등이 서 있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주검 앞에서는 쉽게 통곡도 나오지 못 했다. 누군가 이따금 잔기침을 뱉는 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아버지……!” 한참 만에 혜와가 목 쉰 소리로 말하며 무산음호의 손을 쥐었 다. 어쩌면 무산음호의 죽음과 그 불행한 삶에 대해 가장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는 만음요화가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 “나도, 달리 살 수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야!” 만음요화가 떠나고, 오랑이 떠나고, 탐서랑이 떠났다. 칠대색마 중에 가장 공포스러웠던 이름, 무산음호가 사라지는 광경은 참으로 보잘것없고 초라한 것이었다. 이것을 지켜본 다른 색마들의 느낌은 여느 사람보다도 각별하다 할 수 있었다. 소운비 역시 그러했다. 한때 무산음호를 색마이기 때문에 증오하기도 했었던 그였다. 무산음호는 자신이 의지가 박약하여 참지 못하고 숱한 죄를 저질 렀다고 말하고 갔지만, 과연 그런 기묘한 운명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도 무산음호처럼 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은 소운비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함부로 대답할 수가 없 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흩어지고,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방안에는 슬픈 흐느 낌만이 남아 희미하게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새로운 태양이 동녘 하늘 위로 고개를 내 밀기 시작했다. * * * 길에서 죽은 강호인에게는 화려한 묘지가 필요 없었다. 그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만한 무덤 한 자리면 족했다. 동이 트고, 매장이 끝난 뒤 일행은 마침내 북망산을 향해 출발 했다. 무산음호가 간 것은 상상 속의 북망산이지만, 그들이 가는 것 은 실제로 존재하는 북망산이었다. “용양도인도 가는군그래!” “아무래도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아들놈이 그냥 만음요화의 치마폭에 싸일 것 같아 걱정인가 봐.” “혹시 저놈, 만음요화에게 질투하는 것은 아닐까?” “예끼! 아무리 용양이라도 그렇지, 설마 아들한테 그럴라구?” “어떻게 아들을 낳았는지 참 신기해!” “소 공자! 혜와는 내가 데려가겠어요.” “어째서요?” “바보 같으니라구, 아무리 당신이 괜찮다고 해도 여자로서 저 런 모습을 낭군에게 보이고 싶겠어요? 그애가 자청한 일이니까 잔소리하지 말고, 여행길에서도 절대 그애에게 말을 걸지도 말고 가까이 오지도 말아요. 우린 행렬 맨 끝에 따라갈 거니까.” “……!” “알겠죠?” “잘 부탁하오, 궁주!” “오랑아! 저 죽립 쓴 놈을 보는 소운비라는 놈의 눈빛이 어째 심상치가 않다?” “아버지, 제가 알기로는 특별한 사이라고 하더군요.” “그으래?”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그렇게 웃으세요?” “흠! 비록 내가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혹시 내가 색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다. 아무튼 여자는 나빠. 너도 잘 알 아 둬야 해!” 용양도인과 용양혈루단 다섯 명, 오랑과 탐서랑, 혜와와 만음요 화, 혼음사의와 한종린, 소운비, 그리고 당미령……! 목적도 다르고 근본도 다른 열다섯 명이 북망산을 향해 발걸음 을 재촉하기 시작할 때, 세상은 때늦은 첫눈으로 뒤덮이고 있었 다. 제 28 장 북망(北邙) 북망산. 문밖을 나서면 바로 북망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작 북망산은 낙양(洛陽)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산이 아니라 산만큼이나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비록 험한 산처럼 가까이 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었지만, 묘지에 서 풍기는 짙은 죽음의 냄새는 어떤 험한 산세보다도 더 사람들 의 출입을 꺼리게 만들어, 시신을 묻으러 오는 경우가 아니고서 는 누구도 그곳에 오려 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왕후장상(王候將相)의 썩은 해골도, 장삼이사(張三李 四)의 문드러진 시신도 공평하게 묻혀 있었다. 이따금 부는 구슬픈 바람 소리만이 그 모든 주검들을 위한 조 곡(弔哭)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을씨년스러운 풍경 속으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 다. 굳게 다문 입술에 이마에 두른 영웅건. 삼목신룡 무옥이었다. 삶의 냄새라고는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적막한 무덤 사이를 망설임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던 무옥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거기 있으면 얼굴을 보일 일이지, 왜 숨어 있는 거지?” 그가 싸늘하게 읊조리자, 무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유령처럼 나타나 그의 앞에 섰다. 나타난 사람은 백지장처럼 흰 얼굴에 물 에 적셔 빗은 듯이 단정히 넘긴 긴 백발, 그리고 티 한 점 묻지 않은 백의를 입은 모습이었다. 무옥은 나타난 사람이 의외였는지 일순 흠칫했다. “백혈공!” “오랜만입니다, 소교주.” “특별히 임무를 받아 멀리 떠났다고 들었는데……?” “그 일이 거의 끝나 돌아오게 되었지요.” 백혈공은 무옥의 신색을 살피며 빙그레 웃었다. “한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개방을 지키고 계셔야 하지 않 습니까?” 무옥은 불쾌한 듯 대답했다. “나도 일이 있어서 돌아온 거야!” “기분이 상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막을 생각이 아니라면 비켜 주게!” 백혈공은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켜 주었다. 무옥이 냉랭하게 그를 지나쳐 갔다. 꼿꼿한 무옥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혈공의 눈에서는 언뜻 근 심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못 보던 사이에 소교주와 교주님 간에 골이 많이 깊어진 모 양이로군. 좋지 않다……!’ 무옥은 백혈공의 시선을 뒤로하고 거침없이 무덤들 사이를 지 나갔다. 백혈공은 삼영주 중에 가장 성격이 온후한 편이었고, 누 구보다도 무옥을 위해 준 사람이었다. 그런 백혈공을 오랜만에 만났으면서도 따뜻한 소리 하나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무옥 이 초조하다는 반증이었다. 무옥은 숱한 무덤들 중에서도 가장 외진 자리, 그 중에서도 가 장 초라한 무덤 앞에 섰다. 비석조차도 반쯤 부서져 비스듬히 땅 에 박혀 있는 그런 임자없는 무덤이었다. 그는 비석 머리에 손을 얹고 가무진이 밀교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수해 준 비전의 내공을 운용했다. 그으응……! 비석이 살아 있는 짐승처럼 몸을 떠는가 싶더니, 무덤 아래쪽 의 흙이 떠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귀신의 조화처럼 한 사람이 간신히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흙계단이 그 안쪽에 나타났다. 무옥은 서슴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통로는 무옥을 삼킨 뒤에 곧 조용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멀찌감치서 무옥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백혈공은 이윽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무덤 주위에 울창한 사철나무 숲을 향 해 뇌까렸다. “이제 나도 어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겠네. 그만들 숨어 있 고 나오지 않겠나?” 숲은 조용했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내가 직접 끌어 내야겠나?” 백혈공이 한마디 더 재촉하자, 눈 속에 숨어 있던 토끼처럼 몇 몇 사람이 숲으로부터 몸을 드러냈다. 경악한 눈으로 백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들은 바로 타라하이 와 그의 수하들이었다. 타라하이는 백혈공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우리가 은신하고 있는 것을 알았소?” 백혈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내가 그 동안 자네를 계속 뒤쫓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모르겠나?” “당신이 나를 뒤쫓아왔다고? 어찌 그런……?” “어사대에서 사람이 나와 우리의 흔적을 쫓는데, 우리라고 가 만히 앉아 있을 수 있었겠나? 난 그 동안 자네가 우리에 대해 아 무 단서도 잡지 못하기만을 바래 왔지만, 운명이 이리 되었으니 할 수 없지.” 타라하이는 눈을 번뜩였다. “우리라……! 그럼 당신도 가무진의 수하요?” 백혈공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타라하이는 그 침묵이 긍정의 대답임을 알 수 있었다. 타라하이는 미소 지었다. “흠, 소 형의 말을 듣고 그저 북망산에서 단서를 잡기 위해 은신해 있었던 것인데……! 뜻밖의 수확을 거두는군!” 백혈공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자네들 운명도 여기까지일세. 사람이 북망산을 보게 되면 거기가 끝이지.” 타라하이가 눈살을 찡그렸다. “우리를 막을 셈이오?” 백혈공은 천천히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뇌까렸다. “북망산은 사람이 쉬기에 적당한 곳이지…… 영원히 말이 야!” * * * 또옥……! 또옥……! 차가운 물방울 같은 것이 미간에 떨어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 으면서,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설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특별히 몸에 고통이 느껴지지 않 는 것으로 보아 절박한 위기에 처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기 위해,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하나, 완전히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웬만한 사람이라도 결코 침 착할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이 처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붉은 야광주가 희미한 빛을 던지고 있는 석실 안에 그녀는 누 워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어른거리는 석실 벽의 그림 들……! 그 그림들은 처음에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생생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백 가지의 자세로 성희를 즐기고 있는 부처들의 나신. 그것은 거대한 환희불의 벽화였다. 석실의 차가운 공기와 그녀의 몸 사이에는 오직 한 장의 얇고 흰 비단밖에 존재하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발가벗겨진 채 흰 비 단 한 장을 덮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한 괴인이 어둠 속에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 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몸에서 떨어뜨려 본 적이 없는 관음보검 이 그 괴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붉은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괴인의 윤곽은 마치 유령 같았 다. 비쩍 마른 얼굴에 붙어 있어서 유난히 커 보이는 두 개의 눈 동자가 진설영을 핥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진설영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니,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전신대혈은 추측할 길이 없는 막강한 힘에 의해 제압되어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다행이었다. 만일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면 오히려 두려움이 더 커졌을 것이다. 비명을 지 를 수 없었기에 진설영은 차츰 침착해져 갔다. “네 사부가 누구냐?” 별안간 그런 소리가 들려 왔다. 괴인은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분명 말소리가 들린 것이다. 진설영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그 까닭을 알 수 있었 다. ‘이상한 전음술을 익힌 사람이로구나!’ 진설영은 괴인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방금의 질문에 대답할 필 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질문을 던졌다는 자체가 굳이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괴인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그녀겠지……! 분명히 그녀일 것이다……! 이 보검과 네 무 공이 그 증거다. 흐…… 그녀는 결국 그 녀석 손에 죽은 것이로 구나. 한데 어째서 그녀는 그때 죽지 않았을까? 백혈공이 나를 배신했었다는 말인가?” 괴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나…… 어쨌든 상관없다. 나는 네가 아주 무공이 뛰어나고 체질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나를 위한 라라나가 될 수 있 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쉽구나……! 아쉬워……!” 괴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진설영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해 골 같은 손가락이 진설영의 몸을 덮은 흰 비단의 끄트머리를 쥐 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움직일 수만 있었다 면, 그녀는 더 움직였을 것이다. 괴인의 손가락은 천을 잡고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도 이어졌다. “너의 체질이 좋은 것은 확실하지만, 너는 너무나 자신을 억 제하고 살아 왔구나…… 내 공력을 늘려 줄 수는 있지만 라라나 로서는 부족하다. 하지만 괜찮다. 라라나를 맞이하기 전까지 더 많은 공력을 비축해 둘수록 나의 성취는 보다 더 완전해질 테니 까 말이다……!” 펄럭……! 비단은 가볍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세상과 그녀 사이에 놓여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진설영의 몸은 굳은 가운데 파르르 떨렸다. 괴인은 측은한 듯이 그녀를 훑어보았다. “무서운가 보구나? 하긴 무섭겠지. 아무리 당찬 계집아이라고 해도 두려움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라. 너는 모든 끔찍한 일들을 몸소 겪지 않아도 된다. 그저 꿈을 꿀 뿐이다. 너는 꿈속에 쾌락을 맛볼 것이고, 쾌락이 절정에 이르 면 그때부터 천천히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그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꿈에서 금방 깨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라. 나는 꿈 을 다스리는 사람이니, 그럴 염려는 없다. 자, 이제 잠들어라……! 나 몽중마령이 너를 꿈속의 환락경으로 인도하겠다……!” 몽중마령! 진설영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의 실체를 깨닫고 경악했다. 하 지만 경악은 짧았다. 그녀의 정신은 곧 아득하게 흔들리며 어지 럽고 막막한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모든 것이 어지럽고, 세상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몽중마령과 자 신, 그리고 이 거대한 석실이 하나처럼 녹아 들어갔다. 벽화 속의 환희불들이 걸어나와 그녀를 둘러쌌다. 환희불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그녀의 나신에 매달리더니, 입술을 핥고, 젖가슴 을 쥐고 아랫배와 허벅지를 빨기 시작했다. “으응……!”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성의 한 조각이 남아 이래서는 안 된다고 절규했지만, 그것도 차츰 소멸 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건 꿈이야……! 꿈에서는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어……!’ 그녀 자신의 목소리인 것 같은 음성 하나가 멀리에서 들려 와 그렇게 속살거렸다. 그녀는 점점 몸의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붉은 숨을 내뿜던 가장 큰 환희불 하나가 그녀의 다리를 벌렸 다. 그동안에도 전신을 애무하는 다른 환희불들의 치태는 멈추지 않았다. 환희불들의 뒤쪽에서는 몽중마령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 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혈도가 풀려 가는지 그녀는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저 도 모르게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들어 환희불이 자신의 몸 속 에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진설영은 마치 진설영이 아닌 것처럼, 빨리 뜨거운 환락 속으 로 들어가고 싶다고 스스로에게 보채고 있었다. “소교주께서 오셨습니다!” 멀리서 그런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그녀는 누가 왔는지 관 심도 없었다. 그저 어서 이 수많은 환희불들과 몸을 섞고 싶을 따름이었다. 한데……! 일순, 눈앞에서 환희불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온몸을 감쌌 던 쾌락도 함께 가셨다.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그녀가 알아보기 도 전에, 의식의 불도 꺼져 버렸다. 그녀는 갓난아기처럼 벌거벗은 채로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었 다. 꿈이 없는 편안한 잠이었다. 삼목신룡 무옥은 자신이 늦기 전에 도착한 것을 알고 몰래 안 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의 아버지이자, 그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인 몽중마 령 가무진이 막 진설영의 몸 위로 누우려다가 술법을 거두고 일 어서고 있었다. “왜 온 거냐?” 돌아보는 몽중마령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 았다. 그저 좀 귀찮은 빛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당신께 따질 것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음?” 몽중마령의 얼굴에 미미한 변화가 일어났다. 감히 아들이 아버지를 ‘당신’이라 칭하고 있었다. 하나 몽중 마령은 그 호칭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들이 아버지 를 그 정도로 여기는 것만큼이나, 아버지도 아들을 그렇게, 아니 어쩌면 그 이하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중마령의 심기를 미미하게나마 건드린 것은 ‘당신’이라는 호칭이 아니라 따질 것이 있다는 바로 그 말이었다. 몽중마령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차마 그에게 무엇을 따지기는커녕 묻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아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몽중마령은 무옥을 스윽 훑어보다가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이야기할 것이 있다면 따라오너라. 옆 방으로 가자!” 무옥은 코웃음을 가볍게 치고, 성큼성큼 몽중마령의 뒤를 따라 갔다. 석실 안에는 진설영의 나신을 훔쳐보는 벽화 속의 환희불들이 남아 귀기를 흘리고 있었다. “할말이란 뭐냐?” 몽중마령이 태사의에 앉자마자 물었다. 그의 손은 자신의 앞에 놓인 또 하나의 태사의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옥에게 앉으라는 뜻이었다. “호오?” 무옥은 의자에 앉기 전에 일단 놀란 표정부터 지어 보였다. 누 구에게도 함께 앉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였다. 한데 지금 그것을 허락한 것이다. 무옥은 의자에 앉으며 새삼스럽게 작은 방안을 훑어보았다. 이 작은 석실은 다른 곳처럼 괴상한 벽화도 없었고, 그저 두 개의 태사의와 작은 다탁(茶卓)이 하나 놓인 평범한 방이었다. 하나 그 방은 무옥에게 실로 이상하게 여겨졌다. 밀교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몽중마령에게 무릎을 꿇을 뿐이지 결코 동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방에 두 개의 태사의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 다. ‘이 방은 오래도록 쓰지도 않은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사 연이 있는 것일까?’ 몽중마령이 말했다. “언제까지 방만 구경할 테냐? 어서 할말이 있으면 하거라.” 그 재촉에 비로소 무옥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천천히 이마로 손을 가져 가더니, 영웅건을 풀어헤쳤다. 그는 자신의 세 번째 눈이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 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필요할 때 쓴다면 아주 적절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은 바로 그런 위압적인 무기가 필요할 때였다. 무옥은 세 개의 눈으로 몽중마령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너무 많은 걸 가지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몽중마령은 물끄러미 아들의 세 번째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놈이……! 결국 그걸 익혔단 말인가? 어떻게 알고? 설마 백혈공이 그것마저 빼돌렸나? 하지만 백혈공은 그걸 볼 기회조차 없었는데 어떻게……?’ 무옥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신공도 좋지만, 저 여자는 내가 마음에 둔 여자요. 세 상엔 다른 여자도 많은데, 굳이 저 여자를 라라나로 써야 하나 요?” 몽중마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흠……! 너를 중원무림으로 통하는 다리로 만들 계획이었다 만…… 이처럼 나에 대해 역심(逆心)을 품는다면 그냥 놔둘 수는 없구나. 네가 없더라도 삼목신룡 무옥의 자리를 이용할 방법은 많으니……!’ 무옥은 몽중마령이 대답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자 좀 불 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몽중마령에게 어느 정도는 가치 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강경하게 나간다면 진설영을 양보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데, 만일 진설영이 자신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면……? 그 생각은 무옥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나 다행히 몽중마령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내가 살펴보니 라라나감이 아니더구나. 그러니 네 가 도로 데려간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무옥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지금 당장 데려가겠어요. 개방에서는 내가 저 여자를 구출하러 간 줄 알고 있으니, 함께 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 을 겁니다.” “얘야, 잠깐……!” 몽중마령이 그를 제지했다. “오랜만에 왔는데 뭘 그리 서두르느냐? 나는 너에게 몇 가지 물어 볼 것이 있다.” 무옥은 막 태사의에서 떼던 엉덩이를 도로 붙이며 불안하게 세 개의 눈동자를 번들거렸다. “뭐죠?” “저 계집아이에게 혹 사부가 없더냐?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만……!” 무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것을 묻는지 알 수가 없 었다. “있었습니다. 공혜라고…… 보타문의 장문인이었다고 하더군 요.” 몽중마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 다. 뿐만 아니라 취화비도에게 보고를 들어 공혜를 무옥이 제거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보타문 비구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더 냐?” 무옥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그 비구니들을 상대하기가 껄끄러우십니까?” 몽중마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신공을 연성한 다음이라면, 그녀들은 감히 내 발치에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무옥은 몽중마령과 마주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묘하게 불편했 다. 게다가 그의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무옥은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더 물으실 것이 없다면 그만 가겠어요.” 한데, 몽중마령이 다시 그를 잡았다. “굉장히 서두르는구나. 너는 궁금하지 않느냐?” 무옥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뭐가 궁금하지 않느냐는 말입니까?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 지요?” 몽중마령은 손을 들어 방금 무옥이 앉아 있던 태사의를 가리켰 다. “저 태사의에 앉을 수 있었던 사람 말이다. 이 세상에서 저 태사의에 앉았던 사람은 너와 또 한 명뿐이다.” 몽중마령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바로 네 어머니지.” 무옥의 몸은 돌처럼 굳었다. 세 개의 눈빛이 방금 자신이 앉아 있었던 태사의에 못박혔다. “어머니……?” “그래, 나는 오늘 그녀의 소식을 오랜만에 들었기 때문에, 너 에게 이 방을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단다.” ‘나는 오늘 그녀의 소식을 오랜만에 들었기 때문에……’ 그 말이 무옥의 심장을 두드려댔다. ‘소식을 들었다고?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말인가?’ 몽중마령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원래 그녀는 나를 적으로 생각했었지만, 내 아내가 되고 말 았다. 너를 낳기 전까지는 사이가 좋았지. 그래서 이 방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하지만 네가 태어나고 나니 생 각이 바뀌더구나. 애초에는 낳자마자 죽이려고 했지만, 그래도 정 이 있어서 죽이지는 않고 토굴에 가두어 두었었지. 고생을 너무 해서인지 나이보다 빨리 늙더구나. 그러다가 한 십 년 만인 가…… 그녀가 탈출을 시도했지. 음곡비파까지 훔쳐서 말이다. 백 혈공이 뒤를 쫓았지. 그녀는 절벽에 떨어져 죽었다고 들었다. 한 데…… 그녀의 명이 질겼는지, 아니면 백혈공이 내게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살아 있었다는구나. 얼마 전까지 말이다.” 쿠궁! 쿠궁!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왔다. 마치 누군가가 무옥의 심장을 꺼내 들고 그의 귓가에 들이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몽중마령의 목소리는 아주 느리고 작았다. 그런데도 그 큰 심 장 소리보다 더 크게 무옥의 귀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원래 보타문 사람이었지! 한데 저 밖의 아이가 바로 그녀의 제자인 것 같더구나. 죽은 줄 알았더니 그 동안 제자까지 키웠던 모양이다.” 부르르……! 무옥의 몸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발끝부터 머리 끝 까지 미친 듯이 떨기 시작했다. 몽중마령은 아들의 그런 신체 변 화를 모르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자못 궁금하구나!” “으……!” 무옥의 입에서 짐승 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괴성 이라도 질러서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모두 흩어 버리고 싶 어했다. “끄아아……!” 무옥이 자신의 머리를 쥐고 마구 흔들어대며 비명을 토해 내려 는 찰나였다. 몽중마령은 태연한 얼굴로 두 손가락을 뻗어 무옥 의 이마를 향해 찔러 갔다. 푸아악!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무옥의 세 번째 눈이 그 손끝에 뽑혀 나 갔다. 피와 끈끈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고통에 찬 비명은 그 다음이었다. “크아아아아악!” 무옥은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며 뒹굴었다. 몽중마령이 무 심하게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쯧쯧, 너는 이제 쓸모가 없구나. 어쩌자고 사내 녀석이 그렇 게 모질지가 못하단 말이냐!” 몽중마령은 신음하는 무옥을 내버려두고 작은 석실을 빠져 나 왔다. 취화비도가 대기하고 있었다. “토굴에 가둬라. 그리고 저 녀석과 체격이 비슷한 교도 하나 를 뽑아 이마에 이것을 박아 넣어라.” 몽중마령은 취화비도에게 방금 뽑아 낸 무옥의 세 번째 눈을 던져 주었다. 거기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 었다. “존명!” 취화비도는 고개를 조아렸다. 몽중마령은 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럼, 아까 하던 일을 마저 해볼까……!” 그때, 그의 앞에 번개처럼 다가와 부복하는 사람이 있었다. 적 무공이었다. “교주께 아룁니다.” “뭐지?” “근방에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교도들의 보고입니다.” 몽중마령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그저 내버려두고, 귀찮아질 자들이라면 없애면 되지 뭣 하러 보고를 하는가?” 적무공은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말했다. “그 사람들 속에 소운비라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 * * “앗?” “저 사람은?” 황량한 북망산에 도착해 막막하게 사방을 휘둘러보던 소운비 일행 앞에 난데없이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몇몇 사람이 그를 알아보았다. 소운비가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타라하이!” 무엇에 쫓기고 있었던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허둥지둥하던 타라하이는 소운비의 목소리를 듣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어서 피하게!” 그는 소운비를 알아보자마자 대뜸 그렇게 외쳤다. 소운비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은 금세 그가 적에게 쫓기고 있 다는 사실을 알고 분분히 방비할 준비를 했지만, 당미령은 그렇 지 않았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타라하이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다친 거죠?” 타라하이는 달려오는 당미령을 보고 의아해 하다가, 얼굴을 찡 그리며 외쳤다. “당장 물러나요! 어서!”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의 뒤에 흰 물체가 번뜩 나 타났다. 백혈공이었다. 백혈공은 늘어선 십여 명의 사람들을 보고 흠칫했다. “적인가? 아니면 지나가던 사람인가?” 하나 백혈공은 곧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피식 웃었다. 그는 타 라하이를 향해 말했다. “어느쪽이든, 자넨 운이 좋군. 아니, 아니지……!” 그의 눈이 소운비 일행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당신들이 운이 나쁘다고 해야겠군!” 실력이야 어찌 되었든 기고만장하기로는 천하에 둘째 가라면 서러운 색마들이었다. 타라하이를 처음 보는 사람이든,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든 간에 백혈공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일제히 울컥 울화가 치미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 허연 놈이 안하무인이로구나. 얘들아!” 용양도인이 호령하자 용양혈루단이 힘차게 던져진 차돌멩이들 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것들 봐라?” 백혈공은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어린 미소년들이 일류 자객들처럼 빈틈없는 솜씨로 자신을 빙 둘러싸자 가볍게 탄성을 내질렀다. “타앗!” 싸늘한 표정의 혈루수가 망설임없이 손을 썼다. 이어 다른 네 소년들도 출수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섯 개의 사람 그림자가 백혈공 하나를 둘러싸고 눈 발을 흩뿌리며 휘돌기 시작했다. 그사이, 당미령은 타라하이를 얼른 부축했다. 소운비가 그 옆에 달려왔다. “괜찮습니까?” 소운비가 묻자, 타라하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버틸 만하네. 못난 꼴을 보여서 부끄럽군. 내 수하들은 모두 당했어. 저자는 내가 찾던 인물과 한패인 것 같아. 이 북망산이 그들의 근거지이고 말이야.” 타라하이의 몇 마디 말에서 소운비와 그 일행들은 자신들이 알 고 싶었던 것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소운비는 다급히 용양도인에게 말했다. “용양혈루단에게 저 사람을 사로잡으라고 하세요. 그래야 소 굴을 알아 낼 수 있을 테니까……!” 용양도인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글쎄, 우리 애들은 워낙에 손이 매워서 한번 시작하면 바로 끝을 보기 때문에……! 그건 그렇고 왜 네가 나한테 이래라저래 라 하는 거야?” 아주 크게 모욕을 당했다는 듯이 용양도인이 화를 벌컥 내려는 순간, 백혈공과 용양혈루단의 싸움이 순식간에 막을 내리고 있었 다. 하지만 끝을 보는 쪽은 용양혈루단이 아니었다. 몸을 허공으로 띄워 다섯 소년의 공격을 한번에 피해 낸 백혈 공은 공중에서 몸을 꿈틀하더니 갑자기 거센 장력에 격중된 사람 처럼 피를 왈칵 토해 냈다. “우워억!” 그 피는 놀랍게도 붉지 않고 젖처럼 흰 빛깔이었다. 그가 피를 토하며 고개를 흔들었기에 그 흰 피는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용양혈루단은 피에서 풍기는 냄새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재빨리 몸을 피하려 했으나, 혈루수와 혈루토가 미처 피하지 못 하고 두세 방울을 몸에 맞고 말았다. “으앗!” “아악!” 피가 몸에 닿자마자 혈루수와 혈루토는 땅바닥에 떨어지며 비 명을 내질렀다. 이어, 나머지 세 소넌과 백혈공이 땅에 내려섰다. 백혈공은 한 사발이나 피를 토해 낸 사람답지 않게 태연한 신색이었다. 혈루수와 혈루토는 땅에 끌어올려진 물고기처럼 마구 몸을 퍼 덕이더니, 금세 잠잠해지고 말았다. 백혈공이 입가에 묻은 흰 피를 소매로 스윽 닦아 내고는 중얼 거렸다. “어린애들이 손이 매우니 더 살아 봐야 사람만 많이 죽이겠 지!” “저, 저……!” 용양도인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백혈 공을 향해 손가락질만 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기가 막혀 백혈 공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종린이 문득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피가 모두 독으로 되어 있는 거야. 정말 저런 사 람이 있기는 있었군……!” 백혈공은 나머지 세 소년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제 너희들도 친구들을 따라가야지?” 그때, 오랑의 머리 위를 돌고 있던 까마귀 오아가 갑자기 날카 로운 울음을 토해 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백혈공의 뒤쪽, 끝없이 이어진 무덤들 사이로 집중되었다. 그곳에서는 한 사람이 걸어나오고 있 었다. 아니, 사람이 걸어나오고 있다기보다는 한 무리의 붉은 안 개 덩어리가 걸어나오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대낮의 흰 눈 위에서 보아도 괴기스럽기는 마찬가지인 적무공 은 순식간에 백혈공 옆에 와 서더니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교주께서는 백혈공께서 손님들과 다투기를 원하지 않습니 다.” 백혈공은 가만히 적무공의 두 눈동자를 쏘아보더니 조용히 물 었다. “정말인가?” “물론이지요.” 백혈공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홱 돌아서더니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서라!” “목숨 값을 갚고 가거라!” 혈루화와 혈루목, 혈루금이 비장하게 외치며 그를 가로막았으 나, 백혈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세 소년이 그를 향해 막 출수하려 할 때, 용양도인이 급히 외쳤다. “그만, 그만 해라, 얘들아! 다칠라!” 용양혈루단이 그 소리에 주춤하는 사이에 백혈공은 거침없이 사라져 버렸다. 세 소년은 용양도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도인 어르신!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들만 살아남고 싶지는 않습니다.” 용양도인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말했다. “그만, 그만 하거라. 너희들 마음은 내가 다 안다. 어쨌든 좀 참거라.” 그는 내심 지금 상황이 아주 묘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까 그 하얀 귀신 같은 놈은 상상 외의 고수다. 게다가 지 금 나타난 이 괴인도 전에 보니 무공이 만만치 않았다. 아마 이 두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군자의 복수야 시간이 얼마 나 걸리든지 상관이 없는 것 아닌가!’ 그는 이를 바드득 갈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다만 몹시 두려운 체하기만 했다. 소운비가 적무공에게 말했다. “당신은 전에 나더러 이곳으로 오라고 하지 않았었소? 한데 어째 환영인사가 너무 맵구려.” 적무공은 속을 알 수 없도록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난 자네만 오라고 했지, 다른 사람들은 초대한 적이 없네. 너 무 동행을 많이 끌고 오는 것도 실례가 아닌가?” 그 말에 여타 색마들의 안색이 확 변했다. 소운비는 얼굴을 굳 히며 돌아섰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소!” “성질도 급하군!” 적무공이 킥킥 웃었다. “교주께서는 특별히 모든 사람들을 안으로 초청한다고 하셨 네. 오늘 아주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야. 저 몽고 황실의 끄나풀까 지도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으니 말이야!” 소운비는 반색하며 돌아섰다. “그거 반가운 소리군. 그럼 쓸데없이 말만 주고받을 것이 아 니라 어서 안내를 해주시오.” 소운비가 계속 딱딱거리며 나오자 적무공은 내심 비위가 거슬 렸다. 하나 그는 표정을 감추고 빙긋이 웃었다. ‘두고 봐라, 이놈……! 얼마 살지도 못할 것이……!’ 적무공은 먼저 돌아서며 말했다. “좋아! 모두들 따라오게. 자네들에게 수십 년 동안 가꾸어 온 중원 밀교의 교단을 보여 줌세!” 그리하여, 소운비 일행은 적무공의 뒤를 따라, 초라한 무덤 아 래 열린 비밀통로를 통해 밀교 교단의 내부로 들어서기 시작했 다. 혈루수와 혈루토의 시신을 눈 옆에 가지런히 놓아 두고 눈물을 뿌리며 돌아선 용양혈루단도, 당미령의 만류를 듣지 않고 따라 나선 타라하이도 함께였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통로 안으로 사라지자 통로는 다시 닫혀 버렸고, 눈발이 날리는 북망산은 다시 괴괴한 정적 속으로 묻혀 갔다. 오랑을 따라가지 못한 까마귀 오아만이 묘지에 어울리는 풍경 으로 빙글빙글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 * * 백혈공은 몽중마령 앞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그는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자신의 행적에 대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간 교주님의 명을 받들어 국사 가린진의 동태를 감시, 그 가 어사대의 타라하이를 내보내 교주님의 행적을 쫓는 것을 보고 은밀히 뒤따르던 중, 마침내 이 북망산까지 오기에 방금 손을 써 타라하이의 수하들을 죽이고 타라하이까지 죽여 입을 봉하려다 가……!” “그만, 되었네!” 몽중마령은 그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기 에 적절할 만큼의 틈을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난 그보다 자네에게 궁금한 것이 있네. 그 동안 몇 가지 새 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는데, 자네 나를 속인 것이 있더구먼.” 백혈공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평생 몽중마령을 속여 본 일이 없었다. 오직 한번 있었는 데, 만일 몽중마령이 알게 된 것이 그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궁금한 것은 말이야, 어째서 자네가 날 속였을까 하는 점이야. 자넨 날 속일 사람이 아니잖은가?” 몽중마령은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소리로 묻고 있었 다. 백혈공은 그가 부드럽게 나오면 나올수록 더 깊은 절망을 느 꼈다. “요, 요……!” “응? 뭐라고? 좀 크게 말해 보게!” “용서하십시오! 달게 죽음을 받겠습니다!” 백혈공은 결연히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들어 자신의 천령개를 내리치려 했다. “그만!” 몽중마령이 일갈했다. 백혈공의 손은 천령개 바로 위에서 멈추 었다. 몽중마령이 혀를 찼다. “자네도 성격이 어찌 그리 모질지 못한가? 배신을 했다면 끝 까지 배신을 했어야지. 어리석긴……! 나는 오늘 아들 하나를 잃 은 것으로도 족하네. 자네의 처벌은 나중에 생각해 보겠어.” ‘소교주가……!’ 백혈공은 정신이 아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옥! 지금 교주는 바로 그 무옥을 잃었다고 이야기했다. 무옥 은 백혈공에게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뜨겁고 붉 은 피가 흐르지 않는 그의 가슴에 유일하게 자리잡은 한 여자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 무옥을 잃었다니…… 그 말을 그 아비되는 사람이 저 토록 담담하게 내뱉다니. 백혈공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몽중마령이 그로부터 차츰 멀 어져가는데도, 그는 조금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격동하는 백혈공을 내버려둔 채, 몽중마령은 냉정히 등을 돌리 고 다른 석실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환희불들이 가득 그려진 붉은 석실. 바로 진설영이 누워 있는, 아니 누워 있어야 하는 그 석실이었다. 하지만 없었다. 그녀의 몸을 덮었던 흰 비단천만이 펄럭이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몽중마령은 큰 소리로 수하들 을 불렀다. “비화공! 누가 가서 비화공을 데려오너라. 무옥을 끌고 오라고 해!” 하나 잠시 뒤, 그는 뜻밖의 대답만 듣게 되었다. “비화공과 소교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순간, 몽중마령은 헛웃음을 흘렸다. ‘허! 대체 뭐가 이렇게 쉽게 배신을 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는 좀 허탈해지기는 했지만, 그저 모기에 물린 정도일 따름 이었다. 그는 원래 사람이란 늘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아무리 충성스러운 수하라고 해도 자기 자신만은 못하다 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거듭되는 수하들의 배신은 그런 그의 신조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강해져야 한다! 그 누구도 배신할 수 없도록 강해져야 한 다!’ 그는 깡마른 주먹을 굳게 쥐었다. 무옥의 뒤를 추격할까 하는 생각이 잠시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 다가 사라져 갔다. 지금 그에게는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일단 그 일만 완수된다면 무옥이 제아무리 멀리 도망간다고 하 더라도 걱정될 것은 없었다. 아쉬운 것은 단 하나, 라라나를 아직 구하지 못했다는 점이었 다. 하지만 그것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훌륭한 라사나가 있 는 이상, 라라나라면 지금 함께 온 일행 중에서도 대용품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제 호랑이굴로 들어온 저 사냥 감들을 어떤 방법으로 즐겁게 요리할까 하는 생각이 그를 유쾌하 게 만들었다. 바야흐로 사냥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 29 장 함정(陷穽) 두 사람이 줄고, 한 사람이 더해졌다. 그래도 일행은 많았다. 어두운 계단은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폭으로 참으로 오래 계속되었다. 용양도인은 통로가 비좁다고 계속 투덜 거리면서 행렬의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따라 들어간 지 한 반 시진쯤 되었을까……? 갑자기 선두에서 안내하던 적무공이 우뚝 멈추어 섰다. 그는 일행을 멈추게 하고는 혼자 두어 걸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천천히 말했다. “자, 여러분! 중원 밀교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화르르르르……!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뒤쪽 어둠 속에서 중원 밀교라 는 네 글자 모양의 불글씨가 점화되었다. 그것은 귀화(鬼火)처럼 새파란 빛을 띠고 있었다. 불글씨는 기 척도 없이 나타나 신비롭게 타올랐으므로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았다. 한데, 언제까지라도 꺼지지 않을 것처럼 타오르던 그 불글씨는 느닷없이 팍 꺼지고 말았다. 그와 함께 몇몇 사람이 들고 있던 화섭자의 불도 꺼졌다. 온통 암흑, 그리고 요란한 경계의 외침이 이어졌다. “조심해!” “흉계다!” “모두 모여!” 일행은 당황한 와중에서도 기민하게 방금 적무공이 서 있었던 방향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은 계단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곳 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서로가 등을 맞댈 수 있게 되자, 그들은 소란을 멈추고 침묵을 유지했다. 혹시라도 적의 암습이 있을 경우 좀더 그 소리 를 잘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숨막히는 적막.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각자의 이마와 등줄기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애초에 중원 밀교 안으로 들어설 때, 그들이 이런 상황을 예상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일전 악투를 치르게 되리라 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움없이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창칼이 난무하는 한판 싸움을 치르는 편이 나았 다. 지금과 같은 숨막히는 고요는 혈관을 폭발시킬 것같이 괴롭 기만 했다. 소운비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숨소리가 무척이나 거칠다는 생 각을 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한 사람이 그의 손을 잡아 왔다. 그는 처음엔 흠칫 놀랐으나, 이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손은 거칠어도, 이렇게 따스하고 다정한 느낌을 줄 수 있 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혜와……!’ 자신의 변한 모습 때문에 결코 소운비와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던 그녀가 어둠에 힘입어 그의 손을 잡아 온 것이었다. 소운비 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순간……! 덜커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저편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비명성이 울렸 다. “으허억!” 그것이 누구인지 분간해 볼 틈도 없었다. 덜커덩! 덜커덩! “우앗!” “바닥을 조심해!” 연속해서 바닥의 함정이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사람 들은 미처 경신술을 쓰기도 전에 아래로 떨어져 갔다. 그것도 각 각 다른 함정으로……! 소운비는 다급히 혜와의 손을 잡은 채로 위로 몸을 솟구쳐 갔 다. 하나 위쪽이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치이이이익! 천장에서 무엇인가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수천 송이의 꽃들이 떨어지는 듯 향긋한 냄새가 밀려왔다. 그는 숨을 쉬지 않으려고 했지만, 몸을 허공에 띄운 상태에서는 불가 능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기 시작했지만,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혜와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사람의 힘에는 한 계가 있었다. 그의 힘보다 더 큰 힘이 그와 혜와 사이를 갈라 놓았고, 그의 의식은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 * * 한 사람이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다른 한 사람은 암흑 으로부터 빠져 나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진설영은 자신의 몸이 여전히 벌거벗겨진 상태이며, 누군가의 널찍한 등에 업혀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분명 아까 몽중마령이 있었던 그 어두운 방은 아니었다. 어둡 기는커녕 눈부실 정도로 흰 눈이 쌓여진 산중이었다. 그녀는 불현듯 추위를 느꼈다. 그러나 몸을 떨거나 하지 않고 그녀는 입술을 가만히 깨물었다. 그때, 뒤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 왔다. “소교주님, 쫓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제발 그만 멈추십시오!” 그러자 진설영을 업고 뛰던 사람은 고삐가 당겨진 말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거칠게 진설영을 땅바닥에 내동 댕이쳤다. 이마에서 쉴새없이 피를 뚝뚝 흘리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 사내. 진설영을 업고 있었던 것은 무옥이었다. 진설영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일단 정신을 되찾은 것 을 들키지 않도록 한치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허억……! 허억……! 정말…… 정말 아무도 뒤쫓아오지 않 나?” 무옥은 무공을 익힌 사람답지 않게 숨이 거칠었다. 그는 지금 거의 광인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엉망으로 뒤섞여 버린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저주스러운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도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세상과 그 자신이 서로 부딪 쳐 동귀어진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대로 끝날 수는 없었다. ‘내게도 마지막 한 수가 있어!’ 무옥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가슴팍의 옷자락을 헤치고 너덜너 덜한 책을 꺼내 들었다. ‘으으…… 어머……!’ 그것은 그의 어머니, 자신이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생 각했던, 하지만 요 몇 달 간 바로 코앞에 두고 있었던, 그리고 자 기 손으로 독을 먹이고 자기 손으로 마지막 숨을 끊어 버린 그 어머니가 오직 아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베껴 낸 사대성물의 마 지막 <기제진경>의 반 권 분량이었다. <기제진경>은 본래 한족이 쓴 책이었는데, 수백 년 전 밀교의 고승이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이었다. <기제진경>은 말 그대로 사람으로서 가장 완전해지는 길을 밝 혀 둔 책이었다. 그것은 태원옥호공과 분명 궤를 같이하나 훨씬 극악하고도 막강한 방법을 싣고 있었다. <기제진경>에는 완전한 인간, 천지간의 음양의 힘을 하나로 합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신과 같은 인간이 되는 두 가지 길이 쓰여져 있었다. 전반부에 적힌 것은 밀교의 용어로 만트라`─`아바드후티카였 고, 후반부에 적힌 것은 빈두`─`아바드후티카라 했다. 두 가지의 공통점은 죽은 자의 정기, 그리고 남녀의 정기를 필 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지금 무옥이 들고 있는 <기제진경>의 전반부에 적혀 있는 만 트라`─`아바드후티카는 만트라를 통해 아바드후티카를 연다는 뜻으로 여인을 바로 죽이면서 음의 힘을 흡수해 양의 힘을 북돋 우고, 최후에는 무공이 강한 여인을 취하면서 밀교의 진언 만트 라를 외우면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천하에 당할 자가 없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기제진경>에 쓰인 바대로라면, 적어도 한 달 간은 도검으로 도 뚫을 수 없고, 산을 쪼개는 장력으로도 상처 입힐 수 없으며, 한번 손을 휘두르면 수십 명을 피떡으로 만들 수 있고, 옮기는 걸음마다 시산혈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위험한 것은 자신보다 무공이 더 뛰어난 상대의 진기를 흡수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이 있고, 언제든지 실혼(失魂)하 게 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몽중마령이 택한 빈두`─`아바드후티카는 빈두, 곧 하나의 점으로 바뀐 정액의 힘을 통해 아바드후티카를 연다는 뜻 으로, 오랜 세월 동안 죽은 자의 시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마지 막 진기들을 얻고, 환희불을 이용한 술법으로 여자들의 정기를 모아 그 힘이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면 라라나와 라사나라는 두 개의 희생물을 취한 뒤 그것을 통해 가장 완전한 초절정의 힘, 영원한 지복(至福)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몽 중마령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북망산에서 은거하며 때를 기다렸 던 것이었다. 물론 무옥은 <기제진경>의 나머지 부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책 앞에 나온 대략의 설명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적어도 몽중마령이 완전한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무옥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점이었다. 무옥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그는 진설영을 그 뛰어 난 무공과 정순한 내공 때문에 최후의 제물로 점찍어 두고 있었 다. 하지만 현재 그의 상태는 진설영을 취하기에는 약간 모자란 상태였다. “소교주, 괜찮으십니까?” 무옥은 자신을 상념에서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숱한 갈등 끝에 마침내 마음을 자신한테로 모으고 탈출을 도운 취화비도, 평생을 복면 속에 살아 온 그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 었다. 무옥의 눈이 빛났다. ‘그래…… 너도 여자였지.’ 무옥은 힘겨운 듯 신음을 토해 냈다. “나를…… 좀 부축해 다오!” 취화비도는 바로 그의 겨드랑이를 잡고 일으키려 했다. 하나 무옥은 고개를 저었다. “좀 누워서 쉬고 싶다. 눕게 해다오.” 하나 사방은 눈밭이었다. 취화비도는 자신의 피풍을 벗어 땅바 닥에 깔고 그 위에 무옥을 눕게 했다. “지혈을 좀 해주겠느냐?” 취화비도는 이번에도 묵묵히, 무옥의 요구대로 그의 이마 위, 눈이 뽑힌 자리에 약을 뿌리고 깨끗한 천 조각으로 주변을 눌러 주었다. 응급처치가 끝나자 무옥이 문득 취화비도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남자에게 손을 잡혀 본 일이 없는 취화비도였다. 하나 무옥의 손은 너무나 따스해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손을 빼내려고 했다. “넌 그 동안 나에게 너무나 잘해 주었지……!” 말은 부드러웠지만, 무옥은 그녀가 손을 빼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허락하기는커녕, 오히려 천천히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너에게 차갑게 대했던 것은…… 우리가 주종 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이제 나는 소교주도 무엇도 아니다. 그저 한 남자일 뿐이다.” 무옥은 뜨거운 숨이 취화비도의 복면 위에 닿도록 끌어당긴 다 음 나직하게 속삭였다. “언젠가 내 앞에서 복면을 벗은 적이 있었지. 다시 한번 보여 줄 수 있겠느냐……?” “소교주님……!” “무옥이라고 불러라.” 취화비도의 두 눈은 회의를 가득 담고 무옥을 응시했다. 일생 동안 사람을 죽이기만 했고, 또 죽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던 그 런 눈이었다. 그런 눈은 결코 쉽게 남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는 법 이었다. ‘결국……?’ 일순, 취화비도의 눈에 원망의 빛이 떠올랐다. 무옥은 언뜻 불안해져서 그녀의 손목을 더욱 굳세게 쥐었다. 순간, 취화비도의 눈빛이 원망에서 체념으로 바뀌어 갔다. 무옥 에게 잡히지 않은 한 손이 자신의 복면 위로 서서히 올라갔다. 일생을 덮고 있던 복면이 벗겨지는 것은 찰나였다. 검은 복면이 흰 눈 위에 떨어지고, 검은 머리가 출렁이며 휘날 렸다. 취화비도의 얼굴은 결코 예쁘지 않았다. 여자의 아름다움이란 거울을 보는 횟수에 비례하는 법인데, 거울을 볼 틈도 없이 살아 온 그녀가 예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녀는 돌이나 나무처럼 무미 건조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묘하게도 비극적인 냄새를 풍겼다. 무옥은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리고 몸을 틀어 그녀 의 딱딱하게 굳은 몸을 아래쪽으로 돌리며 피풍 위에 몸을 눕혔 다. “좀 춥구나……!” 무옥은 중얼거리며, 취화비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취화비도의 두 눈꼬리에, 고목이 수액 을 토해 내듯이 물방울이 서글프게 맺혔다. 몸은 비록 추위로 얼음덩어리가 되어 갔지만, 진설영은 이 모 든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이게 웬 쓸데없는 짓이냐, 응?” 용양도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캄캄한 미로 안에 우렁우렁 울 려 퍼졌다. 오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의 황망중에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각각 다른 함정에 빠진 모양인데, 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미로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 께 빠지게 된 것이었다. “네가 천하에 쓸모없는 계집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냐! 원 정말……!” “제발 그만해 두세요. 정신이 산만해서 출구를 찾을 수가 없 잖습니까?” “사방이 적막 강산인데 뭐 네가 빠져 나갈 뾰족한 수라도 만 들어 낼 수 있다더냐? 그저 계집에게서 얻은 아들이란 하나 쓸모 가 없다. 너 때문에 내 귀여운 아이들을 둘이나 잃고……!” 캄캄한 가운데 희미하게 불빛이 스며 들어오는 미로의 출구를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던 오랑은 계속되는 용양도인의 욕설에 마 침내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그만 하지 못하겠어요? 그놈의 계집! 계집! 아버지한테 는 계집이었는지 몰라도 내게는 어머니예요!” 용양도인의 눈이 그의 몸처럼 둥그래졌다. “뭐야? 네놈이 지금 애비한테 덤비는 거냐?” “그래요. 덤비는 겁니다. 아버지는 뭐 여자한테서 나지 않으셨 습니까? 그렇게 예뻐하는 미동들은 돌이라도 쪼개고 꺼내셨어 요?” 두 사람은 멀리 불빛이 깜빡거리는 미로의 출구로 나갈 생각은 않고 그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눈에 번뜩이는 노여움으로 보아서는 웬만하면 말다툼에서 끝날 성질의 싸움이 아니었다. 용양도인으로서는 일생의 오점이 라 여겨지는 오랑에 대해 그 동안 내내 억누르고 있던 불만의 폭 발이었고, 오랑의 입장에서도 아버지 같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 품고 있던 한을 바야흐로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너, 너, 원래 강호에 나갈 때 뭐라고 하고 나갔었느냐? 뭐, 나를 대신해서 일을 벌려 이 애비를 색존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큰소리 땅땅 치고 가지 않았었어? 그런데 고작 계집한테 푹 빠져 서 뼈가 노골노골 해져 가지고 돌아와? 그것도 이놈 저놈 세상 온갖 놈들이 다 한번씩 헤집어 본 걸레 비슷한 계집을?” “욕하지 말아요! 그녀가 아무리 색녀라고 소문이 났어도, 나를 만난 이후에는 얼마나 조신해졌는지 아세요? 그리고 색녀면 또 어떻습니까? 난 그저 능숙한 사람이 오히려 편안해서 좋기만 하 던데! 그리고 세상 사람 백 명을 붙잡아 놓고 한번 물어 보십시 오! 똑같은 색마라도 여자가 남자 좋아하는 것하고,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것하고 어느것이 더 망측하고 꼴불견인지요!” “너, 너 지금 이 애비 보고 꼴불견이라고 하는 거냐?” “뭐 그걸 꼭 내 입으로 확인시켜 드려야 합니까? 여자의 몸은 따뜻하고 온유하고 부드럽지만, 아버지가 탐하는 미동들의 후원 이야 아무리 향수로 닦고 문질러도 냄새밖에 더 납니까?” “이놈이!” “치실 겁니까? 치려면 치세요! 나도 지긋지긋합니다! 이상한 아버지 때문에 나까지 이상한 취급 받는 거, 정말 지긋지긋해 요!” 언성은 높아져 갔고, 두 사람 사이에 붙은 불도 점점 타올랐다. 이상한 것은, 싸움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가슴 깊이 묵혀 두었던 어떤 짐 같은 것이 점점 가벼워져 간다는 사실이었다. “너, 너, 이 애비한테 덤볐지? 너, 이 애비가 왜 여자를 싫어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면서 덤볐지? 후회할 거다……! 후회할 거 야……!” 용양도인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우스꽝스럽게도 그의 두 눈에 는 눈물 비슷한 것이 그렁거리고 있었다. “후회해요? 뭘 후회합니까?” “너…… 정말 지독한 놈이로구나! 니 에미가 어떤 여자였는 줄 알아? 넌 정말 니 에미를 똑 닮았어. 아주 그대로야……! 아주 지독한 여자였어. 정말 지독했다고……!” 오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용양도인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이번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칠 기세였다. “그 입으로 제발 어머니 욕 좀 하지 마세요! 불쌍하게 병으로 돌아가신 분을!” 두 사람 주변의 공기는 정말 살기 등등해졌다. 그들은 서로에 게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 미로의 다른 쪽, 빛이 비쳐 오는 곳에서 스멀스멀 그림자들이 기어오고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병? 흥……! 병 좋아하네. 그래, 병은 병이다. 홧병이지! 네 에미는 의부증(疑夫症)이었어. 자나깨나 그저 내가 다른 여자와 눈이라도 맞을까 봐 안달복달하다가 홧병으로 죽은 거야!” “뭐가 어째요?” “칠 거냐? 좋다, 쳐봐라! 하지만 난 할말은 끝까지 하고 말 테 다. 이놈아, 네 에미가 죽기 전에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이걸 씌웠다구!” 느닷없이 용양도인이 품안에서 동그랗게 생긴 물건 하나를 꺼 내 들었다. 그것은 옥으로 만든 것인데, 반지라기에는 좀 크고 팔 찌라기에는 작아 보였다. 오랑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기에 일순 주춤했다. “내 너무나 한이 맺혀 두고두고 이 물건을 품에 지니고 다녔 다……! 네 에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여보, 이건 현옥환(懸 玉環)이라고 하며, 남성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도구예요. 나는 앞 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으니, 이것으로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 서 나를 마지막으로 즐겁게 해주세요……’ 하! 나는 깜빡 속아 넘어가고 말았지 뭐냐. 뭣도 모르고 그저 죽어 가는 여편네 소원 을 들어준답시고 그걸 칠주야(七晝夜) 동안 아랫도리에 끼고 있 었다. 한데…… 한데 말이다……” 죽은 마누라의 음성까지 흉내내 가며 열변을 토하던 용양도인 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느라고 목젖까지 부르르 떨었다. “네 에미는 거기에 독을 발라 두었던 거야! 내가 남자 구실을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처음엔 그저 거기가 조여서 그러는가 보 다 했는데, 칠주야가 지나자 본격적으로 썩기 시작하더니, 나무 열매가 익다 못해 시들어 쪼그라들었다가 떨어지듯이…… 그렇 게, 그렇게……!” 용양도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랑은 이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졌다. 그랬단 말 인가,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 꼴이 되고 나서 네 어미는 마음을 푹 놓겠다면서 좋은 얼 굴로 저승으로 갔다. 그러니 내가 계집이라면 치를 떨 만하지 않 냐? 네 에미가 구태여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도, 그 계획만 털어 놨었더라도 나는 두번 다시 계집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 다! 눈앞에서야 꽃처럼 예쁘고 선녀처럼 착한 척해도, 계집의 속 이란 악독하기 그지없는 거야! 그에 비하면 남자들은 서로 지나 치게 투기하지도 않고, 어린 미소년들의 아름다움은 여자에 못지 않으니, 누가 나를 감히 욕할 수 있겠느냐!” 오랑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물었다. “정말, 정말 어머니가 그런 짓을 하셨단 말입니까?” “물론이다. 그 여자가 그 짓만 했는 줄 아느냐? 끔찍하게 사 랑했던 네가 만일 장성해서 며느리감이라도 데려오면 그 꼴을 볼 수 없다고 갓난아이인 너한테마저 그러려는 것을 내가 간신히 너 를 빼돌려……!” 용양도인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적이다!” 그는 번개처럼 손을 휘두르며 오랑을 잡아 한쪽 옆으로 몸을 날렸다. 슈슈슉! 두 사람의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독화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퍼어억! 용양도인이 몸을 피하며 던진 현옥환은 독화살을 쏜 흑의인의 미간에 정확히 격중되었다. “커어억!” 현옥환에 맞은 자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지만, 적은 그 하나가 아니었다. 어느새 통로를 꽉 메운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들개처 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들 중 선두에 선 자가 용양도인의 정 확한 응수에 주춤거리더니, 갑자기 품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땅 에 꽂았다. 퍼어어엉!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번져 가는 뿌연 안개……! “몽혼표입니다, 아버지! 벽 쪽으로 붙으세요!” 오랑은 소리쳤다. 하나 소리침과 동시에 오랑의 몸은 벽 쪽이 아닌 통로 가운데를 향해 굴러 갔다. 용양도인도 마찬가지였다. 파바바바박! 수십 대의 독화살이 벽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몽혼표가 흩뿌린 안개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손을 맞잡았다. 이제는 두 사람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 저 수많은 적과 싸워야 할 때인 것이다. 용양혈루단의 살아남은 세 소년은 한 몸처럼 어둠 속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들은 어리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경계 한다든가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법도 없이 그들은 쾌속 전진했다. “수와 토를 죽인 놈을 찾아!” “그래, 그 흰 옷을 입은 놈! 그놈을 찾아!” “찾아서 죽여 버리자!” 소년들은 피의 맹세라도 하듯이 외쳐대며 막힘없이 달려갔다. 일 각 동안 그들을 막는 것은 없었다. 일 각이 지난 후, 처음으 로 한 사람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그들이 찾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한번 본 적이 있는 사람 이었다. 붉은 안개의 화신, 바로 적무공이었다. “당신, 우리를 속였지?” 혈루화가 싸늘하게 외쳤다. 적무공은 한쪽 입술을 치켜 올리며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소년들은 망설임없이 적무공을 둘러싸며 빈틈없이 포위했다. “당신 친구, 그 흰 옷 입은 사람을 데려오면, 당신은 살려 주 겠어.” “우린 밀교에는 관심없어. 원수를 갚고 싶을 뿐이야.” 적무공은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듯 소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 다섯 명이 백혈공을 당해 내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세 명이 나를 살려 준다 만다 하는 거지?” “그땐 방심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적무공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가슴의 울분을 억누르고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할 능력이 그들에 게는 없었다. 승리는 그의 손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흠……! 용양도인이 아끼는 미동들이라 그런가……? 예쁘장 하기는 정말 계집에 못지않군. 한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이 녀석 들 살을 맛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적무공이 입을 다물자, 세 소년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짤 막한 소도(小刀)를 꺼내 들며 낭랑한 기합과 함께 그를 향해 세 개의 화살처럼 쏘아져 왔다. “차아앗!” “죽어!” 적무공은 눈을 벌겋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일단, 속살 맛을 보기 전에 피맛부터 보아야겠군!” “조심해요!” 당미령은 쓰러지려는 타라하이를 안간힘을 써서 부축했다. 육 중한 사나이의 몸은 그녀 혼자 부축하기에는 확실히 벅찼다. 하 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 와 단 둘이 함정에 빠진 것조차 기뻐하고 있었다. 타라하이도 그런 심정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쩐 일인 지 캄캄한 통로를 지나오는 동안 계속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려고 만 하고 있었다. “통로가 끝나는가 봐요. 저 앞은 환하군요!” 당미령은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녀는 그저 본능적으로 밝은 곳으로만 가면 살 수 있다는 생각 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라하이는 달랐다. ‘저곳에는 또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이건……?” 통로가 끝난 곳. 그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방이 있었다. 아니, 그것 은 방이라고 하기보다는 넓디넓은 정원이라고 해야 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이토록 많은 풀과 꽃들을 기를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벽과 천장을 따라 수십 개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어 앞을 분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이 후원은 발디딜 틈 없이 꽃 과 풀로 가득 차 있어 그것들을 밟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가 없었 다. 하지만 그것뿐, 매복도 없어 보였고 위험한 기색이라고는 보이 지 않았다. 하나 풀과 꽃들을 눈여겨보던 당미령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이 풀들은?” “왜 그러오?” “여기 빽빽하게 나 있는 풀들은 모두 시독(屍毒)을 먹고 자란 다는 시독초(屍毒草)들이에요. 몸에 닿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아오?” 당미령은 샐쭉해져서 말했다. “이래봬도 난 당문의 딸이에요. 성격이 맞지 않아 한사코 무 공은 배우지 않았지만, 아버지나 사촌 오빠들이 만독초화원(萬毒 草花園)에다가 갖은 독초와 해독초들을 기르는 것은 어깨 너머로 실컷 보았다구요.” 타라하이는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당문의 고명한 소저였군. 몰라봐서 미안하오!” 그녀는 살짝 눈을 흘겨 주고는 다시 풀과 꽃들을 관찰했다. “하지만 시독초는 오랜 시간 공들여 키워야만 하는 것이라 이 렇게 많이 피어 있는 것은 본 적이 없어요. 흥……! 이제 보니 이 곳이 거대한 묘지의 지하라 가능했던 것이로군요. 흠…… 게다가 시독초뿐만이 아니군요. 사이사이에 피어 있는 저 얼룩무늬 화초 는 세 걸음을 걷기 전에 사람을 중독시킨다는 삼보단장화(三步斷 腸花), 저건 절명초(絶命草), 저건 단혼지(斷魂芝)……! 세상에 여 긴 독초로 가득한 화원이로군요.” “그럼 지나갈 수 없겠군.” 당미령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독초 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해독초가 같이 자란다고 하셨어요. 이 렇게 독초가 많으니 분명 해독초들도 있을 거예요. 지금 내 눈에 뜨이는 것만 해도…… 저기 삼보화 옆에 핀 것이 절명초를 해독 하는 연명구은초(延命救恩草), 저건 삼보화의 극성인 칠엽연지화 (七葉娟脂花)……!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분명 있긴 있어요. 물론 저 해독초들만 밟으면서 간다면 통과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겠지 만…… 아주 위험해요.” 당미령은 근심이 가득한 안색으로 타라하이에게 물었다. “지나갈까요?” 타라하이는 생각했다. 여기서 발길을 돌려 통로의 반대편으로 간다해도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이 독초화원보다 덜 위험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자신은 심하게 부상을 입은 몸이고, 당미령은 무공을 모르니, 차라리 적과 격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이쪽이 그나마 나을지도 몰랐다. 타라하이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나이는 결코 뒤돌아가지 않는 법이라고 하셨소!” 당미령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소리로군요! 이제 어떤 방법으로 갈 것인지나 생각해 봐요.” 타라하이가 말했다. “독초는 많고 해독초는 적으니 발디딜 틈도 아주 적소. 두 사 람이 걷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업고 가는 편이 나을 것이오.” 당미령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붉게 물들어 갔다. “음……!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업고 가겠어요. 당신은 부상까 지 당했으니 말이에요.” 타라하이가 웃었다. “이것 봐요, 당가의 아가씨……! 내 몸은 보기보다 무거우니 당신이 업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부상은 당했지만 아가씨처럼 솜털 같은 사람은 능히 업을 수가 있소.” 당미령은 타라하이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끝까지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독초는 많고 해독초는 적은데, 당신처럼 도둑놈같이 큰 발로 어떻게 해독초만 밟을 수가 있겠어요? 내 발이 작으니 내가 업겠어요.” “허, 참. 나는 무공이 있으니 발끝으로도 능히 걸을 수 있소. 아가씨 발이 아무리 작아도 내 발끝만 하겠소? 잔소리 말고 업혀 요. 아가씨는 내 등 위에서 차분하게 어느것이 해독초인지만 가 르쳐 주면 되는 거요.” 당미령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넓게 열려진 타라하이의 등 에 업혔다. 그 등은 근육으로 탄탄했고, 땀에 절어 고약한 냄새가 났다. 하 지만 당미령은 그녀가 일생 누워 본 어떤 침상보다도 훨씬 그 등 이 아늑하고 따뜻하게 여겨졌다. 당미령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누르며 침착하게 말했다. “자, 우선 왼쪽에 보이는 그 잎이 일곱 개 난 연지화를 밟으 세요. 그것이 칠엽연지화예요.” “이것 말이오?” 타라하이는 독초밭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라 나들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거침없이 성큼 발을 내디뎠다. “조심해요!” 당미령은 놀라 소리를 쳤지만, 타라하이는 정확하게 발끝으로 칠엽연지화를 딛고 서 있었다. “토끼처럼 놀라지 말고 다음 갈 길이나 알려 줘요.” “그, 그래요. 그럼 저기 보이는 저 연잎처럼 넓적한 것……! 연명구은초예요.” 그런 식으로 당미령이 알려 주면 타라하이가 그것을 디디며 두 사람은 끝이 보이지 않는 독초 화원을 가로질러 갔다. 반 시진을 그런 식으로 가게 되자, 타라하이는 이제 당미령이 알려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해독초를 골라 밟을 수 있는 경 지에 이르렀다. 당미령이 해독초를 알려 줄 필요가 없게 되자,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그리고 말없이 몸으로 주고받는 대화가 이어졌다. 타라하이의 등은 넓었고, 당미령의 심장은 쿵쿵거렸다. 당미령 은 혹시 자신의 이 커다란 심장 소리가 타라하이의 등을 타고 그 의 귀에까지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무료한 침묵을 달래듯, 타라하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한 말이 또 있는데, 심심하면 듣겠소?” 당미령은 타라하이가 입을 열자 사뭇 다행으로 여겨 얼른 대답 했다. “해봐요.”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나이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처가에 얹혀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소. 하물며 데릴사위는 꿈 도 못 꾸지!” 당미령은 갑자기 이 웬 황당한 이야기인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타라하이는 지금 사위를 맞아도 꼭 데릴사위로 맞아들이는 당문의 전통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타라하이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 다. 지금 두 사람의 살이 맞닿아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그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타라하이는 몽고족이고, 그녀는 중원무림에서도 유서 깊은 당 문의 딸이었다. 두 사람 사이가 가까울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또 있는데……” 타라하이가 다시 말했다. 당미령은 울컥 화가 치밀어 외쳤다. “당신 할아버지가 하는 말은 하나도 쓸모가 없어요. 나는 듣 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꼭 얘기해야겠소.” “그럼 맘대로 해요!” 타라하이는 자못 심각하게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발이 작은 여자는 일도 못하고 말도 못 타니 뭐 하나 쓸모가 없다고 하셨소. 그래서 중원 여자 들은 보기만 좋지 쓸 데가 없다고 말이오.” 별안간, 당미령의 몸을 받치고 있던 타라하이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치마 밑으로 살짝 나온 당미령의 조그마한 발을 덥석 잡았다. 여자의 발은 그 어떤 곳보다도 은밀하고 부끄러운 곳이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엉덩이나 가슴에 닿는 것은 실수나 우연으로 둘러댈 수 있어도, 발을 잡는 것은 어떠한 변명도 할 수가 없었 다. 당미령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무슨 짓이에요……!” “움직이면 우린 둘 다 죽소!” 타라하이가 나지막하게 위협했다. 당미령은 비명도 지르지 못 하고 타라하이의 등에서 전전 긍긍했다. 하지만 타라하이는 그저 그녀의 자그마한 발을 따스하게 감싸 쥘 뿐이었다. “정말 작구려……! 어쩌면 내 발끝보다도 더 작을지 모르겠군. ” 그는 조용히 읊조렸다. 그의 속삭임을 듣는 순간, 당미령은 가 슴속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뜨끔함은 무엇을 들킨 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작은 불씨 가 온 산하에 퍼져 산불이 되듯이, 그 작은 뜨끔함은 그녀의 온 몸으로 번져 갔다. 타라하이는 조용히 그녀의 발을 만지다가 이내 놓아 주고는 두 사람의 앞쪽에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화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 다. “이 독초밭은 정말 끝이 없구려……!” 정말 끝이 없었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무려 한 시진을 더 그 렇게 걸어야 했다. 그나마 해독초가 드물기는 해도 꼭 필요한 곳에 나타나 주어 다행이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문제는 이제 그것이 아니었다. 독초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들이 슬슬 두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 한 것이다. 처음엔 머리가 어지러운 정도였지만 차츰 구역질이 나고 갈수 록 정신조차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타라하이의 발걸음도 휘청였다. 간신히 균형을 잡은 타라하이가 농담처럼 물었다. “흠……! 저 시독초밭은 보기엔 아주 푹신할 것 같은데…… 만일 내가 저기 눕는다면 어찌 되겠소?” “시독초는 아주 독하니, 일 각이 지나기 전에 당신의 시신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문드러질 거예요.” “흠…… 나야, 괜찮지만 아름다운 아가씨한테는 못할 짓이로 군. 만일 내가 쓰러지게 된다면 무슨 수가 있어도 앞으로 넘어질 테니, 아가씨는 내 위에 엎드려 몸을 보전하시오.” 당미령은 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 그녀도 웃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만일 당신이 쓰러지면 나도 더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을 테 고, 그럼 어차피 죽게 될 텐데, 뭘 그런 걱정을 하세요?” 타라하이는 힘을 모아 다음 해독초로 건너 뛰며 말했다. “엇차……! 그럼 우리는 어차피 둘 다 죽겠구려. 죽기 전에 뭐 하고 싶은 말은 없소?” 당미령은 서글픈 눈으로 타라하이의 귓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난 하고 싶은 말보다…… 궁금한 것이 있어요.” “뭐가 말이오?” “당신과 나는…… 당신과 나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고…… 또 딱 한번 만났을 뿐인데…… 어째서…… 어째서……!”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타라하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하고 짭조름한 눈물 한 방울이 타라하이의 굵은 목 으로 떨어져 내렸다. 타라하이도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뱃심 좋은 사내인지라 얼른 한걸음을 더 내뛰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중에는 간혹 쓸 만한 것도 있다오.” 당미령이 울음 섞인 소리로 물었다. “그게 뭔데요?”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말이오. 사랑이란…… 대지의 봄처럼 천천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기도 하고, 초원의 지평선을 가로 지르는 뇌성벽력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올 때도 있다고 하셨소. 다만 떠날 때는 예외없이 봄이 가듯이…… 천천히, 알지 못하 고……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간다고…… 하셨 지.” 타라하이의 마지막 말에는 힘이 없었다. 마음이 떨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독초의 향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 다. 당미령은 두 팔로 그의 목덜미를 살포시 안으며 말했다. “나는…… 나는 봄처럼 그렇게 가지는 않을 거예요. 가지 않 을 거예요.” 타라하이의 손이 다시 한번 그녀의 발을 쥐었다. “나 역시 당신을 보내지는 않겠소.”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등뒤에 있는 그녀와 마주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더할 수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이 빌어먹을 화원이 우리 둘을 보내 주질 않는구려.” 타라하이는 다시 한번 당미령을 추슬러 업고, 좀더 속력을 내 어 해독초 사이를 건너뛰었다. 서두를수록 그의 몸에서는 땀이 났고, 땀이 날수록 독향의 흡 입은 빨라졌다. 그는 자신이 일 각 이상은 버틸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욱 숨막히게 달렸다. 자신의 몸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 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이 화원의 끝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당미령의 목숨을 건질 수만 있다면……! 그는 그의 조상들이 초원을 달리듯이 그렇게 달렸다. 황제를 위해 달릴 때에도, 대원국사를 위해 달릴 때에도 느낀 적이 없었 던 무한한 기쁨과 자유를, 그는 죽음 직전에 맛보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거기에도 끝은 있었다. 이제 타라하이는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해독초를 골라 밟을 수조차 없었다. “미안하군. 더 이상은…… 갈 수가 없겠소……” 타라하이의 등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당미령은 비로소 고개 를 들었다. 그때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기쁨 의 환성이 터진 것은……! “끝이 보여요! 저기 끝이 있어요!” “정말? 정말이오?” 타라하이는 무리를 해서 달리느라고 너무 많은 독향을 흡입해 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끝이 보인다는 그녀의 말은 그에 게 희망만이 줄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래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우린 다 빠져 나왔어요.” “난 앞이 보이지 않소. 어디로 발을 뻗어야 할지를 가르쳐 줘 요.” 당미령은 순간 가슴이 답답했지만, 슬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 다. “자, 일단 우측으로 비스듬히 발을 뻗으세요. 예, 거기예요. 밟 아요.” “……!” “자, 이번에는 세 걸음 정도 똑바로 앞으로 뛴다고 생각하세 요. 하나, 둘, 셋!” “……!” “자, 이번에는……!” 그리하여, 한 사람은 눈이 되고 한 사람은 다리가 되어 길고도 긴 독초의 화원을 마침내 건너고 말았다. “끝났어요!” “끝났어!” 더 이상 독초가 없는 돌로 된 바닥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서로를 부둥켜안는 것이었다. 제 30 장 검후(劍后)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두 사람의 격렬한 몸짓에 눈발이 흩날 렸다. 희디흰 눈 위로 취화비도의 몸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붉은 뱀처 럼 기어갔다. 상대가 무옥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그녀가 치르 는 마지막 정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카아악! 카아아! 으아아아……!” 그녀의 입에서는 짐승 같은 괴성마저 터져 나왔다. 그것은 공 허한 산중으로 넓게 울려 퍼져 갔다. 철썩! 철썩! 무옥이 문득 그녀의 뺨을 연달아 갈겼다. “소리지르지 마! 누가 들으면 안 돼……!” 무옥은 취화비도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 않고 잔인하게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이제 취화비도의 입은 그저 크게 벌어져 있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수십 번도 더 절정이 찾아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절정의 순간이 거듭될수록,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말라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교주와 소교주의 명 을 받아 생명을 빼앗았던 숱한 여자들처럼 그렇게 희생양이 되어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기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죽 기 위해 정사에 몰두하는 사람 같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눈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고, 축축하던 몸 한구석마저 가뭄 끝 의 논바닥처럼 메말랐을 때……! 그녀는 서서히 죽어 가기 시작했다. 오래된 시체처럼 그녀의 몸도 꼬치꼬치 말라 갔다. 대신, 무옥의 이마 위, 예전에 세 번째 눈이 있었던 그 자리에 는 새생명을 빨아들인 흔적처럼 붉은 피가 맺혀지기 시작했다. 뚜욱……! 뚜욱……! 핏방울이 그녀의 땀에 젖은 나신 위로 떨어졌다. “크아아아앗!” 무옥은 한 순간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취화비도의 몸 위에서 조각처럼 굳었다. 치이이이이……! 그의 몸에서 나는 열기 때문인지, 주변의 눈이 김을 내며 녹기 시작했다. 취화비도는 죽었다. 그녀가 무옥의 손길 아래 달아오르는 것도 금방이었지만, 이제 식어 꼿꼿하게 얼어붙는 것은 허망할 정도로 눈 깜짝 할 사이였다. 무옥은 취화비도의 몸 위에 앉은 채, 그대로 운기행공에 들어 갔다. 이제 그의 나신은 자신이 도달했던 어떤 경지보다 높은 곳에 도달한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눈보다 더욱 희게 빛나고 있었 다. 진설영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짐작하고 있던 범죄의 현 장을 눈으로 목격한 지금 그녀의 마음은 쌓인 눈보다 더 싸늘했 다. 그녀는 아까부터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애썼지만, 꼼짝도 할 수 가 없었다. 혈도는 풀렸건만, 문제는 점혈보다 더욱 지독한 동상 이라는 적 때문이었다. ‘팔 하나만…… 팔 하나만 움직일 수 있어도……!’ 그녀는 안간힘을 썼지만, 무엇 하나 그녀의 편이 되어 주는 것 은 없었다. 어느덧 무옥이 운기를 끝내고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후후후……!”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살고, 죽 음마저도 그렇게 맞이한 취화비도의 쪼그라들은 시체를 돌아보지 도 않고 천천히 진설영을 향해 다가갔다. 진설영은 숨을 죽이며 가만히 잠든 듯 누워 있었다. 무옥은 이마에서 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그녀 위에 섰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그녀 위에 몸을 숙였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그의 피가 진설영의 싸늘한 젖가슴과 복부에 뚝뚝 떨어졌다. “난 당신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소름 끼치는 손길이 그녀의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몸이 차군. 미안하오. 하지만 내가 곧 덥게 해주겠소……!” 무옥은 별안간 두 손으로 그녀의 젖꼭지를 틀어쥐더니 살짝 비 틀었다. 그것은 진설영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하고 말았다.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떨고 말았다. 무옥이 웃었다. “역시 깨어 있었군. 그렇지?” 진설영은 하는 수 없이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큰 노여움을 담아 무옥을 쏘아보았다. “당신이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군요.” 무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의외의 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남녀 사이의 재미가 아니겠 소? 또 나야 어차피 중원 밀교의 후계자이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는 여자를 취할 수가 없고……!” 그는 느닷없이 그녀의 젖가슴을 들이마실 듯이 빨아댔다. 진설영은 몸을 뒤틀 수도 없어 목만 뻣뻣해지도록 힘을 주며 절규했다. “이러지 말아요!” 무옥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굶주린 아이처럼 그녀의 젖가슴을 탐했다. 그것은 애무라기보다는 탐식에 가까웠다. “헙……! 헙……! 어머니……! 어머니……!” 그의 신음 속에는 뜻밖의 말들이 섞여 나왔다. 그는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느닷없이 젖가슴에서 입을 떼고 진설영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의 눈은 정상인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슬퍼 보이기도 하 고, 또 섬뜩해 보이기도 했다. “저승에 가거든 어머니에게 이야기해 주겠소?” 진설영은 턱을 파르르 떨면서 물었다. “어머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무옥에게 이야기를 시켜서 손을 움직 여 볼 기회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내 어머니, 당신 사부, 보타문의 장문인 말이오! 내 손에 죽 은 불쌍한 어머니 말이오……!” 무옥은 발작하듯이 외쳤다. “어머니를 만나거든 말해 줘요. 난 정말 몰랐다고. 몰라서 그 런 거라고. 나중에 저승에서 만나게 되더라도 절대로 날 야단치 지 말라고 말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날카로운 창으로 정수리를 꿰뚫리는 듯한 충격이 진설영의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눈 위에 꼼짝 없이 못박혀 있던 그녀의 오른손이 꿈틀거렸다. “난 절대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말이……!” 무옥이 절규하는 순간, 진설영의 오른손이 그대로 한 자루의 날카로운 수도(手刀)가 되어 그의 목덜미로 날아갔다. 파아악! 하나 무옥의 반사신경은 짐승과도 같았고, 막 동상에서 풀린 그녀의 손은 생각보다 훨씬 느렸다. 무옥은 펄쩍 뛰어 그 수도를 단번에 피해 버렸다. “흐흐……! 흐흐……! 날 데려가려고?” 무옥은 이제 어머니에게 칭얼대는 아이가 아니라 탐욕과 광기 에 절은 야수였다. 퍼억! 인정 사정 보지 않은 그의 발길질이 진설영의 복부에 가해졌 다. “하악!” 진설영은 새우처럼 허리를 구부렸다. 치밀어 오르는 고통 속에 서도 그녀는 내심 외치고 있었다. ‘그래, 때려! 때려라! 그래야 내 몸이 한시라도 더 빨리 풀린 다……!’ 퍼억! 퍼억! 무옥은 그녀를 아예 곤죽으로 만들 생각을 하기라도 한 듯이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몇 군데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고, 그녀는 비명조차 밖으로 토해 내지 못했다. 그녀의 몸 외부는 삽시에 셀 수 없는 상처로 물들어 갔다. 하 나 반대로 그녀의 몸 내부는 외부의 충격에 의해 하나하나 신경 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흐흐흐!” 무옥은 한 순간 발길질을 멈추고 그녀의 두 손을 꼼짝 못하게 누르며 다시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날 어머니한테로 데려가려고? 그렇게는 못해. 어차피 가긴 가야겠지만 난 아버지를 먼저 보낼 거야. 그리고 나서 갈 거야. 내 발로 갈 거야……!” 무옥은 피실피실 웃었다. 진설영은 그가 누르는 힘을 이겨 낼 수 없음을 깨닫고 두 눈을 감았다.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정말 이대로……?’ 그때, 숲 어디에선가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 “무옥아!” 무옥은 소스라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나 아무도 없었다. 그저 공허한 소리만이 맴돌 뿐이었다. “무옥아! 왜 설영이를 죽이려 하느냐?” “누구요?” “난 네 어미다! 왜 설영이를 죽이려 하느냐? 그앤 네 의동생 이야. 죽여서도 안 되고 범해서도 안 돼!” 무옥은 킥킥 웃었다. “누가 날 놀리는 거야? 어머니는 죽었어. 내 손에 죽었어.” “자식 손에 죽은 혼은 이승을 떠나지 못해. 무옥아, 설영이를 놔 줘!” 무옥은 진설영을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진설영 스스로가 무옥 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그녀는 난데없이 들려 온 소리 때문에 무 옥의 주의가 흩어진 틈을 이용해 잽싸게 발로 그를 걷어차고 공 처럼 굴러 그를 피해 달아났다. “가지 마!” 무옥이 복부를 움켜쥐고 그녀를 잡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때,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기다란 물체 하나가 진설영을 향해 날아왔다. 진설영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내면서야 그것 이 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집에 들어 있지 않은 검. 눈보다 싸늘한 검. 눈보다 날카로운 검. 촤아아악! “응……?” 무옥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자신의 복부를 가른 커다란 상처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곳마다 눈이 녹았다. 무옥이 서 있는 곳은 금세 피바다가 되었다. “흐으……!” 무옥은 피식 웃더니, 진설영을 향해 뭐라고 입을 달싹이려다가 그예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철벅……! 자신의 몸에서 나온 피바다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소리는 질척 하고 듣기에 좋지가 않았다. “하아……! 하아……!” 진설영은 가쁘게 숨을 쉬었다. 자신이 어떻게 무옥을 죽였는지, 또 무옥이 완전히 숨을 거두기나 한 건지, 그녀는 확인해 볼 여 유도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검을 떨어뜨리고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사 방을 돌아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그 목소리는 정말 공혜의 목소리이며, 이 검도 공혜의 유령이 던져 준 것이란 말인 가! 진설영은 아무 생각도 없이 휘청휘청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그녀 앞으로 또 무엇인가가 날아와 떨어졌다. 그것은 옷 보따리였다. “옷을 입어라.” 아까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진설영은 허겁지겁 보따 리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옷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그 두께가 얼마가 되든 상관 없이, 그것은 사람을 짐승이 아닌 정말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옷을 걸치자 몸 전체로 훈기가 맴돌았고, 그녀의 머릿속에서도 차츰 이성이 자리를 잡아 갔다. “다 입었거든 이쪽으로 오너라.” 정신을 차리고 들어 보니 그 소리는 한쪽 옆의 숲속에서 들리 고 있었다. 방금 격전이 일어났던 곳은 숲 가운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 터라 숲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면 이쪽에는 모습을 들키지 않은 채 공터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진설영이 숲으로 들어갔을 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보타문의 석명과 삼대성니였다. “사조님!” 진설영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냐……! 기특한 것, 잘 해냈다.” 무명성니가 감격에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두 노비구니도 연신 불호를 외워댔다. 석명이 말했다. “우린 무옥의 뒤를 밟아 여기까지 왔다. 이 근방에서 그의 종 적을 잃었다가 하늘의 도우심으로 너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 다. 일찍 나서서 너를 도울 수도 있었으나, 사숙조님들께서는 너 를 시험하셨다.” “시험이라니요?” 진설영이 묻자, 무수성니가 말했다. “설영아, 우리 보타문은 여인들만의 힘으로 누백 년 가장 뛰 어난 검법을 지켜 왔다. 그러다 보면 모진 일들도 많고, 숱한 유 혹들은 셀 수조차 없다……!” 무수성니의 노안(老眼)은 안개처럼 뿌연 수막으로 덮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보타문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음이 굳 세고 모진 후계자였다. 검후란 그저 검을 잘 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 자체가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이어야 검후 가 될 수 있는 법이다.” 무각성니가 말을 받았다. “네 사부인 공혜는 비록 검은 잘 썼지만 마음은 여렸다. 그렇 기 때문에 적의 사람이 되지 않았겠느냐……! 우리가 전에 이야 기할 때는 그 부분을 짐작하지 못한 것처럼 말했었지만, 나이를 먹다 보니 느는 것은 짐작뿐이라 우리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까 저 무옥이 죽기 전에 한 말로 그것 이 증명이 되었으니, 어쨌든 이리 되면 검후의 대는 공혜에서 끊 기고 마는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 세 늙은이가 이번에 강호 에 나온 것은 공혜의 실종과 가무진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검후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서 였다. 다행히 공혜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너를 제자로 거두어 길렀으며, 또 네 재질이 매 우 뛰어나 보여 우리는 적이 안심하고 있었다.” 무명이 말했다. “하나, 너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무옥 을 심상치 않게 보아 왔다. 그의 세 번째 눈에서 풍기는 막강한 사기는 결코 범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무옥과 너 사이에 어떤 감정의 교류가 있는 것 같기에 우리는 공혜와 같은 경우가 되지 않을까 싶어 걱정을 했던 것이다. 한데 너는 기특하 게도 방금 무옥을 가차없이 베어 우리의 근심을 끊어 주었으니 이것은 보타문의 홍복이로다……! 홍복이야!” 진설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앉은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숲의 나무들과 다를 바 없는, 훨씬 오래되고 말라붙은 세 그루의 고목을 그녀는 보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그 세 비구니들처럼 자신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있다는 것을. 껍질을 두텁게 하여 다른 사람 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고, 안으로 안으로 자신을 감추는 한 그 루의 나무. 씁쓸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편이 훨씬 편했다. “저는……, 저는……!” 입을 여는 진설영을 석명이 막았다. “그만! 괜찮다. 너는 지금 몹시 피곤할 것이다. 우리가 떠나오 기 전에 개방의 규염개를 치료해 주고, 몸이 낫는 대로 우리가 남긴 표식을 따라오라고 일러 두었다. 아마 그가 이끄는 군웅들 이 하루이틀 후에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너는 그때까지 몸을 추 스르도록 해라.” 진설영을 토닥인 석명은 문득 아까의 격전장으로 눈을 돌렸다. “아니?” 그녀는 문득 깜짝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그곳에는 두 구의 시 체가 남아 있어야 했다. 하나 남은 것은 취화비도의 시체뿐이었 고, 피바다 속에 잠겨 있던 무옥은 보이지 않았다. “관세음보살……! 그 녀석의 목숨이 질기기도 하구나. 하나 머 지않았다. 하늘의 벌이 내리는 것은……!”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던 무옥은 백혈공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의 숨은 거의 끊어져 있었지만, 백혈공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무옥이 취화비도와 함께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뒤를 밟아 왔던 것이었다. 그의 전신이 눈과 같은 흰색이라 그는 교묘한 은신술로 무옥을 빼낼 수가 있었다. 백혈공이 무옥을 안고 향한 곳은 무옥이 도망쳐 나온 그 중원 밀교였다. ‘그래도…… 그래도 아버지인데, 무슨 방법을 내주지 않을 까?’ 그는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십수 년을 섬겨 왔으면서 도 아직 몽중마령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 * * “꼬마 녀석 셋은 적무공께서 제거하셨습니다. 나머지는 관문 을 뚫고 대전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몽중마령은 무덤덤한 몽혼일도의 보고를 들었다. “호오? 셋만 빼고 나머지 모두? 제법인데!” 몽중마령은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법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법일 뿐이지. 어쨌든 앞으로 는 사람이 많이 필요할 테니 살아남아서 오는 자들은 한번 생각 해 봐야겠어.” 몽혼일도가 물었다. “직접 나가시려 하십니까?” “내가 직접 데려와야 할 사람이 있지.” “소운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쉬운 대로 라라나로 써야 할 여자 가 있지 않은가! 자넨 따라올 것 없어. 각지의 상황을 돌아보고 내가 돌아오면 다시 보고해 주게.” 몽혼일도를 떨구어 내고, 몽중마령은 홀로 어둠침침한 복도를 걸었다. 중원 밀교의 교단. 비록 이름은 거창하지만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몽중마령은 애초에 중원에 뜻을 품을 때부터, 자신이 신공을 연성하기 전까 지는 세력을 크게 벌일 생각이 없었다. 호수가 넓으면 잡고기도 많은 법이었다. 그는 암암리에 모은 가장 충실한 교도 삼백 정도만으로 교단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 중 이백은 지금 외부에서 북망산 일대를 은 연중에 지키고 있었고, 백 명은 교단 안에 있었다. 오늘과 같이 잡인들이 교단 안에 들어올 경우를 대비해, 그는 쓸데없이 많은 수하들을 두기보다는 배신도 하지 않고 만용도 부 리지 않는 많은 기관들을 교단 안에 설치했다. 그 기관들은 지금 적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각기 다 른 곳에서 다른 종류의 위험들을 맞닥뜨리게 하고 있었다. ‘세력이야 힘있는 자에게 자연히 모이게 마련이다……! 하지 만 내가 힘이 없고서는 아무리 세력을 크게 벌여 놓아도 결국 나 타나는 적수에게 한번에 무너지게 되지. 그게 무림이야……!’ 강호가 황실의 정쟁(政爭)이나 보통 사람들의 세상살이와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강호에서는 오직 가장 강한 자만이 마지 막에 웃을 수 있었다. 명예나 세력은 그 뒤를 따르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최소한 몽중마령이 이해하고 있는 중원무 림이었다. 아무튼, 그는 바로 자신이 그토록 간절하게 소망하는 힘, 완전 한 인간이 되는 길인 아바드후티카를 열어 줄 반쪽, 라라나를 대 신할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네 개의 성물을 살펴본 뒤 <기제진경>에 비하면 나머지는 그저 장난감이나 마찬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 하여 그는 그것들 중 두 개를 유감없이 자신을 위한 도구를 단련 시키기 위해 세상으로 흘려 보냈다. 그가 처음 라사나로 점찍었던 것은 무산음호였고, 라라나로 점 찍었던 것은 만음요화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어딘 가 부족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들의 불완전한 성격, 편협한 생활은 분명 그를 위한 고귀한 제물이 되기에는 부족했다. 그리고 그가 수련을 하는 사이에 그 들은 너무 나이가 들어 버렸다. 하나 운명이 그를 도와 지금 완전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라 사나가 나타났다. 비록 여자인 라라나는 흡족하지는 않지만, 그래 도 그의 성취를 돕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었다. 몽중마령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를 자기 자신을 위해 지어 보였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웃는 사람이었다. 그 시각. 소운비는 홀로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캄캄한 통로는 오직 한쪽 방향으로만 뻗어 있어서 그로 하여금 어디로 갈 것인가 망설이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은 유독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하나 시간이 갈수록 그는 미칠 것 같은 고독에 사로잡혔다. 외 로움이라는 악마가 심장을 파먹는 것은 은밀하면서도 참을 수 없 는 고통을 그에게 선사했다. 고독이 그를 갉아 먹으면 갉아 먹을수록, 그는 한 사람을 더욱 처절하게 그리워했다. ‘혜와……! 혜와……!’ 생각해 보면, 태어나 부모를 잃은 뒤부터, 그에게 외롭지 않았 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진설영이 있었고 진파파가 있었지만, 그 정이란 불완전한 것이 었다. 때로는 그 사람들의 존재가 그를 더 외롭게 만들기도 했었 다. 하지만 혜와는 달랐다. 모든 짐승들, 그리고 사람들이 짝을 이루고 사는 이유를 그는 조금씩 알 것 같았다. 피가 통하지 않는 남남끼리 한배에서 태어 난 형제보다도 더욱 끈끈하게 맺어질 수 있는 비밀이 거기에 있 었다. 철이 들고 나면 부모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는 보여 줄 수도 있었고, 그들끼리는 아무리 신랄한 비판을 해도 결코 마음에 상처로 남지 않았다. 하나 어떤 경우에는 사소한 언행이 그런 깊은 정을 단숨에 박 살내고 서로를 차가운 남남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것은 정이 깊 을수록 더욱 그랬다. ‘혜와……!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난 당신과 바꾸 지 않을거야. 이제 이 캄캄한 곳에서 벗어나 당신이 원래대로 돌 아오게 되면 번잡한 세상을 벗어나 단 둘이서만 사는 거야. 죽는 것도 같은 날 죽고, 오직 서로를 위해서만 사는 거야.’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소운비는 온몸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분주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음속에 못 내 틀어박혀 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인 진설영의 안위는 차츰 그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 * * 만음요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니……! 오랑은 무사할까? 어서 혼혼옥잡을 되찾고 오랑과 함께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할 텐데 ……’ 그녀는 자신이 성급했다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뭣 하러 소운비 따위와 함께 우우 몰려왔었더란 말인가! 만일 소운비가 일차 침 입하여 교단을 들쑤셔 놓은 뒤에 은밀히 잠입했다면 이렇게 적이 마련해 놓은 덫 안으로 뛰어드는 수고는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나이가 들면 머리만 둔해진다더니……! 옥녀, 너도 많이 늙었 구나.’ 그녀는 조심조심 뒤를 따라오는 혜와를 얼핏 뒤돌아보았다. 그 녀의 젊음이 문득 무척이나 부러워졌다. ‘내가 만일 저 아이의 나이라면, 오랑과 결합하는 것에 지금 처럼 한 점 거리낌이 있지는 않았을 텐데……!’ 하나 그녀는 곧 자신의 부러움에 코웃음을 쳤다. ‘아서라, 아서! 늙었어도 여자의 몸인 게 낫지. 만일 저 아이 처럼 남자가 되었어 봐라! 오랑이 나를 거들떠나 보겠느냐?’ 그녀는 우쭐한 마음에 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급격하게 틀어진 길에 막 접어들었을 때, 그녀는 길 끝에 누군 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등만 바라보고 따라오던 혜와는 만음요화를 따라 멈춰 서며 고개를 들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 외쳤다. “사람이 있어요!” “나도 알아, 이 멍청한……!” 만음요화는 ‘계집애야!’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놈아!’라 고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뒷말을 삼켜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혜와가 태원옥호공을 익혀 내공은 제법 높지만 변변한 초식을 익힌 것이 없으니 싸움은 자신이 도맡아 해야 할 판이라 고 혀를 찼다. ‘자, 그럼 어떻게 저놈을 요리한다?’ 상대는 분명히 남자였다. 그녀는 남자와의 싸움이라면 항상 자 신이 있었다. 무림의 남자들이란 쓸데없이 호기 부리기를 좋아하 는 법이라 그 틈만 비집고 들어가면 심리전에서 일단 우위를 점 하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윤곽만 보이는 그 사내의 빈틈을 잡기 위 해 유심히 관찰을 해보았다. 하나 그는 마치 석상처럼 한 점 움 직임이 없었다. 게다가 더욱 곤란한 것은 말도 없었다. ‘말이 없는 남자들은 곤란하지. 잘 속지를 않거든……!’ 그녀는 조금 초조해져서 입술을 적셨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 기를 기다렸지만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아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단한 수작으로 일단 싸움의 물꼬를 틀 심산이었다. 바로 그때, 그 남자가 움직였다. 천천히 한 손을 들어 그녀가 볼 수 있도록 앞으로 내민 것이었다. 그 동작이 놀라워서가 아니라, 그의 손에 올려진 물건에 놀라 서 그녀는 헉,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그녀가 이 바보 같은 행동 에 동참하게 만든 물건, 그녀를 강자로 만들어 준 마병 혼혼옥잡 이었다. ‘잘됐다!’ 그녀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나 마음이 그리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혼혼옥잡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것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상대가 이곳 밀교 내에 서도 인정받는 실력자라는 반증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궁금한 것을 그대로 묻고 말았다. “당신은 누구죠?” 의외로 상대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그대에게 이 혼혼옥잡을 보냈던 사람이지.” 이건 또 웬 소리인가! 그녀는 머리 뒤쪽을 둔탁한 망치로 얻어 맞은 것처럼 멍하게 서 있다가 비로소 사태가 어떻게 되어 가는 지를 깨달았다. “당신이 그럼 중원 밀교의 교주인 가무진인가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그대들과 같은 강호칠대색마 중 한 사람인 몽중마령이 기도 하지!”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전신을 그녀가 볼 수 있는 곳에 드러냈다. 바싹 마른 얼굴, 나무를 깎아 만든 것 같은 광대뼈. 바로 몽중마령이었다. 밀교 교주 가무진이 몽중마령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만음요화에 게는 꽤나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왜 적의 수뇌가 하필 자신에게로 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소운비도 있고, 혼음사의도 있고, 용양도인도 있잖아! 그런데 왜 하필 나지? 왜 나야?’ 그녀는 문득 자신이 오늘 굉장히 재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혼혼옥잡을 되찾겠다던 생각이 그녀 인생에서 가장 어리석은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 비슷한 감정도 치밀어 올랐다. 하나, 어쨌든 마지막까지는 싸워 볼 문제였다. 그녀는 은밀히 두 손에 혼혼색수를 운용하면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호오, 한데 교주께서는 무슨 일로 나를 이런 곳에 가두어 놓 고 찾으셨나요? 설마 비천한 이 계집을 첩실로 받아들이시려는 것도 아닐 테고. 만일 그렇다면 저야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지만 말이에요.” “그 비슷하지.” 몽중마령은 천천히 만음요화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만음요화의 뒤에 서 있던 혜와가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로 물었 다. “어, 어쩌실 거예요? 가까이 오잖아요?” 만음요화는 낮은 소리로 쏘아붙였다. “잠자코 있어, 이 계집애야!”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출수 전까지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서 웃어 보려고 했다. 하나 보통 때와는 달리 입가에는 경련 만 심하게 일어났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웃음은 몽중마령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만음요화에게 말했다. “얼굴은 웃으려고 하지만 손은 다른 말을 하는군. 공격하려면 지금 하는 것이 어때? 좀더 늦으면 기회가 없을 테니까 말이 야.” “흥!” 만음요화는 지금껏 취하던 전술을 한 순간에 내던져 버리고 별 안간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자줏빛 영롱한 혼혼색수로 몽중마령 의 가슴을 공격했다. 퍼어엉! 소리는 듣기 좋았는데 어찌 된 셈인지 몽중마령은 조금도 타격 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놀라 주춤거렸지만, 이내 제이장을 펼쳤다. 퍼어엉! 하나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새로 발견한 것이 있다면 장력은 몽중마령의 몸에 격중된 것이 아니라 그녀와 몽중 마령 사이에 있는 허공에서 폭발하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정말 놀라운 호신강기(護身 氣)로구나!’ 그녀는 생전 그런 정도의 무위를 지닌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녀가 너무나 놀라 혼비백산이 되어 있 을 때, 몽중마령이 천천히 그녀의 애병이었던 혼혼옥잡을 들어올 렸다. ‘저것만 내 손에 있었어도 걱정이 없을 텐데……!’ 만음요화는 한탄했다. 몽중마령은 그녀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너는 지금 이것만 있어도 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리석다. 나는 너에게 이 성물을 십수 년 동안이나 맡겼었는데, 너는 고작 초보적인 쓰임새밖에 깨닫지 못했더구나. 그것은 네가 음과 양의 힘을 조화롭게 쓸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음의 힘만으로 영물들을 부리는 데 그쳐 그 힘을 반밖에 쓰지 못 했기 때문이다. 내 진정한 혼혼옥잡의 위력을 너에게 몸소 보여 주겠다.” 그는 혼혼옥잡을 쥔 손에 운기를 시작했다. 혼혼옥잡은 만음요 화가 부릴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그리고 강렬하게 달아올랐 다. 그의 입에서 진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만음요화 가 외우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청룡은 양이오, 백호는 음이다. 현무는 달이오, 주작은 해다. 사방에 사방신의 신력이 있으니 구름은 무릎을 꿇고 비는 절을 하리라……!” 진언이 채 한번 반복되기도 전에, 네 개의 영물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뻗어 나왔다. “아니, 저, 저……!” 만음요화는 너무나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릴 뿐이었다. 그 동안 그녀가 부려 왔던 영물들은 지금 등장한 네 개의 영물에 비한다 면 그야말로 장난감에 불과했다. “크와아아아아!” “크르르르르……!” “캬르르르르릉……!” 게다가 이 영물들은 마치 실재처럼 괴성까지 내질렀다. 그리고 코끝에까지 훅훅 끼치는 더운 숨을 내뿜고 있었다. 만음요화와 혜와가 넋을 잃고 그 네 개의 성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몽중마령이 문득 한 손을 앞으로 내저으며 나직하게 외쳤다. “천년수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사람은 짚단인형처럼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흐흐……!” 천년수혼은 몽중마령이 서장 밀교에서 전수받은 특유의 최면술 이었다. 최면술이란 상대에 따라 정신을 홀리게 만들 어떤 대상 이 있어야 하는데, 혼혼옥잡의 영물들은 아주 좋은 대상이 되어 주었다. 만음요화를 살갗 하나 다치지 않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 었던 몽중마령은 재빨리 네 개의 영물을 안으로 회수하고 성큼성 큼 앞으로 나아갔다. ‘응……?’ 막 만음요화의 몸을 집어 들려던 몽중마령의 손은 문득 멈추어 졌다. 그의 눈길이 머문 곳은 죽립이 벗겨진 혜와의 얼굴이었다. “사내인가……? 계집 같기도 하고……!” 부우욱! 그는 서슴없이 그녀의 웃옷을 찢어 냈다. 하나 가슴을 보고도 그의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흐음? 설마 하니 음양인이라는 말인가?” 그는 손을 휘둘러 혜와의 아랫도리마저 한번에 찢어발겼다. 그 리고……! “이럴 수가!” 그는 탄성을 터뜨렸다. 혜와의 몸은 틀림없는 여자였다. 세상에는 음핵이 마치 남성의 음경처럼 유달리 커서 때에 따라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는 그런 인간들이 분명히 있다고 하지만, 혜와는 그렇지도 않았다. 최소한 그녀는 아랫도리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여자였던 것이다. 하나 보통 여자는 분명히 아니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남성으로의 변이(變移)를 겪고 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이건……, 이건……!” 그는 <기제진경>에 적혀 있던 한 구절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음과 양은 그저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 속에는 양이 있고, 양 속에는 음이 있어야 그것이 비로소 음이 음다워지 고 양이 양다워지는 길이니, 여인 중에 가장 완전한 여인은 그 안에 남자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며, 남자 중에 가장 완전한 남자 는 그 안에 여자를 가지고 있는 남자이다. 그리하여 가장 완전한 인간은 남자이면서도 여자이고, 여자이면서도 남자인 인간이니, 이를 일컬어 남녀추니라고 하며 가장 신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는 처음 읽을 때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던 그 알쏭달 쏭한 구절이 사실이었음을 소운비의 경우에 비로소 알 수 있었 다. 처음 소운비를 라사나로 지목했을 때는 그저 무산음호의 진전 을 이었다는 이유 하나뿐이었지만, 사천 당문에서 직접 대면하고 나서 그의 생각은 바뀌었던 것이다. 소운비의 몸 속에는 마치 여자와 같은 음의 힘이 강하게 흐르 고 있었다. 태원옥호공을 익혀 저절로 생성된 것과는 유가 다른 것이었다. 소운비가 양기가 쇠하고 음기가 강한 사람으로 자라난 이유가 어린 시절부터 음곡비파를 만져 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 지 못했지만, 그때부터 <기제진경>의 그 구절이 결코 허언이 아 님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 소운비와 같은 체질이 나타난 것은 거의 우연이고, 행운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였다. 한데, 아쉬운 대로 만음요화를 쓰려고 하는 순간에 바로 그와 같은 행운이 두 번 일어난 것이 다! “흐, 흐흐…… 흐흐흐흐흐……!” 몽중마령은 웃었다. 웃고 또 웃었다. 찬바람이 이는 통로 가득히 그의 웃음이 메아리쳤다. 제 31 장 승복(承服) 퍼버버벙! 생사맥결귀영폭침이 어두운 통로 안에 작렬했다. 가로막고 있 던 밀교도 중 마지막 두 놈의 비명 소리가 터지고 난 후, 눈앞을 가리던 몽혼표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정말 끝도 없군!” 혼음사의는 눈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탐서랑과 한종린도 비슷한 심정인지 혀를 휘휘 내둘렀다. 그들이 함정에 빠진 이후 맞닥뜨린 적은 방금의 밀교도들뿐만 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벽에서 튀어나오는 수십 개의 창, 앞뒤로 떨어져 내리는 천장들, 땅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뱀 떼, 독무 (毒霧)로 가득 찬 통로……! 혼음사의와 탐서랑이 그 악명 때문에 강호에서 온갖 일을 겪어 임기응변에 능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이 기나긴 미로의 고혼(孤魂)이 되었을 것이다. 제일 꼴이 엉망인 것은 한종린이었다. 그도 무공을 모르는 것 은 아니었지만 그저 연무장에서 손발을 휘두르는 것이나 할 줄 알지, 이렇게 생사를 가르는 칼날 같은 강호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대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그 때 혼음사의가 그를 도와 주지 않았다면 한종린은 여기까지 따라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얄미운 것은 탐서랑이었다. 그는 동행이면서도 자기 몸 하나만 건사할 뿐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들지도 않았다. 혼음사의는 이따금, 몰려오는 적이 아니라 탐서랑을 때려 죽이 고 싶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저놈이 힘을 아껴 두었다가 나중에 쓸 꿍꿍이인 거야. 저런 음흉하고 사악한 색마 놈 같으니라구……!’ 그는 자신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색마라는 사실도 잊고 무진장 탐서랑에게 욕을 해댔다. 이십 년 동안 만들어진 밀교의 지하통로는 어찌나 복잡하고 길 었던지 그들에게 거의 한나절을 소비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지칠 만큼 지쳤고, 화가 날 만큼 화가 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그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이었 다. 텅 빈 대전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오는 동안 한번도 제지를 받지 않은 소운비였다. 그는 누군가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대전을 둘러보았는 데, 벽에 가득한 환희불의 그림을 제외하고는 사람 비슷한 것도 없었다. 대전 안은 텅 빈 대신 음산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적들로 꽉 차 있는 것보다 오히려 이런 공허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 그는 이곳이 규모로 보아 이곳에서 가장 중심에 해당될 것이라 짐작하고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먼저 도착할 사람이 적일지, 동료일지 그는 궁금해졌다. “젠장! 너는 싸움도 별로 하지 않은 것 같구나.” 투덜대며 나타난 것은 혼음사의였다. 그 뒤에는 탐서랑과 한종 린이 뒤따르고 있었다. “무사했군요!” 소운비가 반가워하며 맞이하자 탐서랑이 으쓱거렸다. “흠! 그럼 우리가 죽기라도 했을 줄 알았냐? 강호 밥을 십 년 얻어먹으면 무공이 진보되진 않아도 쉽게 죽지는 않아.” 한종린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복마전(伏魔殿)으로 기어들었지? 사천에서 약이나 달이고 있어야 하는데. 흐유……!” 그때, 한종린보다 더 크고, 더 울분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억울하기는 내가 더 억울해! 자네들은 그 정도면 꽃밭에서 놀다 온 것이나 다름없어.” 용양도인 부자는 정말 억울하다고 할 만큼 엉망이 되어 있었 다. 옷은 성한 곳이 거의 없었고, 오랑 같은 경우에는 출혈도 심 해 보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이 다행입니다.” 소운비가 애써 위로하려고 하자 용양도인은 눈을 마구 부라렸 다. “그럼 저 하잘것없는 놈들도 여기까지 왔는데, 천하의 용양도 인이 못 올 줄 알았느냐?” 사람들이 모이자 대전 안을 꽉 채우고 있던 무겁고 음산한 공 기가 점점 엷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장터에 온 장사치들처럼 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이곳까지 오는 동안 겪었던 일들을 마구 떠들어댔다. 당미령과 타라하이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두 사람의 형편없는 몰골을 본 일동은 더 이상 자신들이 고생을 했 다고 투덜거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몰골을 하고서도 타라하이와 당미령의 표정은 밝 았다. “결국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당미령은 소풍이라도 나온 아이처럼 즐겁게 말했다. 소운비의 시선은 타라하이의 두 눈에 못박혀 있었다. “타라하이, 당신 그 눈은……!” 타라하이는 손을 저었다. “걱정할 것 없소. 독향을 많이 쐬서 이렇게 된 거니까.” 당미령이 말했다. “바깥에 나가게 되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쳐 줄 거예 요.” 다른 여자가 그렇게 말한다며 그저 그러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 이겠지만, 당문의 여식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게부터가 달랐다. 그것은 곧 타라하이의 눈이 고쳐진다는 말이나 진배가 없었다. 타라하이가 보이지 않는 눈을 당미령 쪽으로 고정시키며 말했 다. “뭐, 고치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눈이 되어 줄 테니 나는 괜찮 소.” 소운비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렸다. 사람은 눈을 잃더라도 다른 어떤 것을 얻으면 더 행복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두 사람이 삽시에 가까워진 것을 보고 색마들은 눈을 부라렸 다. 그중 가장 속 쓰려 한 것은 탐서랑이었다. “쳇! 뭐 하느라고 늦게 온 거야? 보아하니 우리만큼 싸움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설마 딴짓을 하느라고……?” 그는 괜스레 당미령의 얼굴이 붉어지도록 투덜거렸다. 당미령과 타라하이의 문제에 가장 관심이 없었던 것은 용양도 인이었다. 그는 그보다 다른 문제에 더 마음이 쏠려 있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은 도대체 왜 안 오는 것이지?” 오랑과 소운비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만음요화와 혜와 때문이 었다. 그때로부터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다섯 명은 나 타나지 않았다. 걱정도 점점 깊어졌다. 하나, 정작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나타 나지 않는 다섯 명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이었다. 처음엔, 그저 동료들이 하나둘씩 모여드는 것이 기뻤고 서로 그간의 안부를 묻느라고 바빴다. 다들 모이고 나자 어쩐지 마음 이 든든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좀더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적의 소굴 한가운데서 느 껴서는 안 되는, 그리고 느낄 수도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심심함이었다. 그들이 그 대전에 모이고 나서 몇 시진이 흐르도록, 어떤 적도 오지 않았고,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거기서 일어나 온 길을 되짚어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 에는 왔던 길이 너무 험난했고 또 너무 지쳐 있었다. 그들은 그 저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싸우는 것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힘들다는 생각만 갖게 될 뿐이었다. 너무나 지루하고 너무나 심심해진 그들은 하나둘씩 저도 모르 게 대전 안의 풍경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비로 소 ‘그것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그림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흥미를 무척 끄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남녀가 서로 포옹하고 있는 쌍신(雙神)들로, 그렇 게 절묘한 체위를 자랑하는 쌍들이 대전의 벽과 천장을 둘러 수 백, 수천은 될 것 같았다. 언제나 아는 척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는 한종린이 ‘그것들’ 의 이름을 ‘환희불’, 또는 ‘환희천’이라 한다고 가르쳐 주었 다. 먼 나라에서는 환희불을 상두인신(象頭人身), 즉 코끼리 머리 에 사람의 몸뚱이를 한 신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밀교에서는 이 그림에서와 같이 난음하는 남녀신으로 묘사한다는 것과, 그 의미인즉 성천(聖天)의 이름 아래 부부의 화합과 자식복을 누리 게 해주는 것이라는, 쓸데없는 설명까지도 덧붙여서였다. 색마들은 모두 코웃음을 치면서 한종린의 설명을 들었는데, 여 기에 있는 바와 같이 기기묘묘한 자세를 보이는 음란한 신들이 어찌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신이 될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였 다. 아무튼 그들로서는 붉은 야광주의 불빛 아래 어슴푸레 보이는 이 그림들이 무척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는데, 탐서랑 같은 자는 나름대로 거기에 표현된 자세들을 열심히 외워서 훗날 써먹을 생 각까지 하고 있었다. 한참 그림에 열중하던 혼음사의는 문득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느꼈다. ‘공기가 탁해서 그런가?’ 그는 얼핏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 역시 안색이 좋지 않았다. 특히 한종린과 탐서랑은 더했다. 소운 비, 오랑, 용양도인, 당미령 등은 덜했고, 타라하이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하긴 이미 상태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 사람이 뭐 더 나빠질 것이 있겠어. 눈까지 멀었는……!’ 혼음사의는 문득 뒷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다급히 외쳤다. “모두들 눈을 감아! 벽화를 봐서는 안 돼!” 하나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은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듣고 혹 자는 무슨 소리인가 눈을 껌벅이기도 하고, 혹자는 낌새를 눈치 채고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으려고 했지만 아무도 벽화에서 시 선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혼음사의 자신마저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의식은 눈을 감으려고 몇 번이나 노력을 했지만 육체의 눈은 집요하게도 혀를 상대의 다리 사이에 박고 거꾸로 얽혀 있는 한 환희불의 그림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건 환술이다! 이대로 있으면 심령이 제압되는데……!’ 그는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루한 가운데 소리없이 다가온 적, 환희불들은 이미 세상에서 온갖 달콤함과 환락을 경 험한 자들의 심령 속으로 밀물처럼 침입하고 있었다. 이제 눈만이 아니라 입과 귀와 몸 전체마저도 점령되어, 그들 은 주변을 잊고 환각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했다. 오직 눈이 먼 타라하이만이 그 재앙에서 제외될 수 있었지만, 그 역시 부상과 중독 증세로 인한 고열에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지는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타라하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환상을 붙잡고 허 우적대기 시작했다. ‘정, 명, 도!’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혼음사의는 당연히 한종린일 것이 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정명도라는 그의 본명을 알고, 또 서슴없 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종린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혼음사의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최소한 그 자신의 이름을 알 뿐 아니라 서슴없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은 더 있었던 것이다. 다만 부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평소에는 전혀 부 르지 않을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혼음사의 자신이었다. 가늘게 눈을 뜨고 이쪽을 돌아보던 환희불 중의 한 쌍이 서서 히 그 자신을 닮은 얼굴로 변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물론 한 쌍 이 몸이 붙은 채였다. 혼음사의는 눈살을 찡그렸다. 남자 쪽이 자신을 닮는 것은 그 런 대로 봐줄 수 있지만, 여자 쪽은 차마 못 봐줄 지경이었다. ‘정, 명, 도!’ 환희불들은 입을 열어 말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말을 던져 보냈 다. ‘이쪽으로 와! 넌 아직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어!’ 여자 환희불이 흉칙스러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제딴 에는 미소를 짓는다고 짓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아주 많은 환락을 맛보게 해주지! 이리로 와!’ 남자 환희불이 여자 쪽의 다리를 들어 벌려 보이면서 혼음사의 자신처럼 음흉하게 웃었다. ‘거절할 까닭이 없지!’ 혼음사의는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아니, 저, 저놈이!’ 한종린은 코에서 김을 뿜어 냈다. 그가 보고 있던 환희불 한 쌍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아래쪽에서 벌겋게 신음을 토하고 있 는 것은 분명 오래 전에 집을 나간 자신의 아내였다. 하지만 그를 화나게 한 것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고 있 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다른 남자가 바로 자신의 사제요, 언제 나 미워해 마지않았던,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떨쳐 버릴 수 없었 던 혼음사의였기 때문이었다. ‘내, 내 오늘에서야 현장을 잡았구나!’ 한종린은 그 동안 늘 아내가 집을 나간 것은 혼음사의와 관계 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고왔던 아내에게 그가 지분거리는 것을 한두 번 목격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 다. 다만 뚜렷한 증거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마음속 에 얹어 두고 있을 뿐이었다. 천인공노할 남녀는 한참을 헐떡거리다가 문득 한종린을 돌아보 더니 배실배실 웃기 시작했다. 그것은 설명이 필요없는 비웃음이 었다. 한종린은 머리 꼭대기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 이 자리가 결코 자신의 옛 아내가 나타날 자리가 아 니라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지금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 이 젊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한달음에 두 남녀를 쳐죽이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 갈 뿐이었다. 한데 이상한 것은 그의 발뿐 아니라 온몸이 마치 진흙 속에 빠 져 있는 것처럼, 한 발을 내딛는 데 엄청난 힘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바닷속을 유영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두 주먹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내와 혼음사의가 측은하다는 듯이 그를 돌아 보았다. 아내인지, 혼음사의인지 모를 애매한 목소리가 그들로부 터 들려 왔다. ‘이 바보야! 화를 낼 일도 아닌데 뭘 그리 화를 내는 거지?’ 그 말은 한종린의 부아를 부지깽이로 쑤시는 것과 같았다. ‘화를 낼 일이 아니라고?’ ‘그래! 너는 지금 너의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다른 사람 탓 만 하고 있는 거야!’ ‘내 잘못이라니?’ ‘네 마누라가 왜 너를 버렸지? 왜 널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 하기까지 했겠어?’ ‘그건 네년이 천성적으로 음란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저놈이 색마의 피를 타고났기 때문이고!’ ‘우습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종린은 어쩐지 자신이 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설왕설래(說往說來)할 것이 아니라 일격에 이 탕남탕녀 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온 힘을 들여 두 주먹을 각각 아내와 혼음사의의 얼굴을 향해 뻗어 갔다. 뻗으면서 울분을 담아 외쳤다. ‘내가 뭘 가리려고 한다는 말이야?’ 주먹이 그들의 얼굴에 도달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들의 대답을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네 마누라가 널 버린 것은 네놈이 불구이기 때문이 아니었 어?’ 주먹은 헛되이 허공을 쳤다. 겨냥을 잘못한 것은 분명히 아니 었는데, 그들의 얼굴에 주먹이 닿자마자 그 얼굴이 허공으로 변 한 것 같았다. 한종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헛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불구라고? 아니야! 난 불구가 아니라 그저 좀…… 좀 빠를 뿐이었어.’ ‘아니라면 증명해 봐!’ 눈을 빛내며 아내가 말했다. 혼음사의가 웃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한종린은 이를 악 다물었다. ‘좋아!’ 그는 옷 끈을 채 풀어헤치기도 전에 아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용양도인은 자신의 옷 앞섶이 축축이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턱을 타고 흘러내린 침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앞에는 수십 개의 달이 떠 있었다. 그것은 둥글고, 하얗 고, 매끄러운 달이었다. 옥토끼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달이 아니었다. 달이라면 용양도인이 그렇게 침을 흘릴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홀랑 벗은 채 그에게 뒤를 보이고 있는 수십 명의 미소 년들이었다. 미소년들은 노래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도인 어르신, 어서 이리 오세요! 어서 오세요!’ ‘자, 잠깐만……!’ 다른 때 같으면 미소년들이 말하기 전에 덥석 덤벼들었을 그였 다. 하지만 그는 온갖 인내심을 발휘하여 자제하고 있었다. ‘아, 아들놈이 보고 있어. 지금은 안 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요. 여긴 우리들밖에 없어요!’ 용양도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그랬다. 오랑의 모습은 어 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헤벌쭉 웃었다. 오래 전에 죽어 버린 그의 아랫도리가 어쩐지 뻐근해져 왔다. 그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외쳤다. ‘자, 잠깐만 기다리라구!’ 오랑은 아버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환희불들 속에서 걸어나온 만음요화가 자신의 품속에 파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만음요화는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미끈 거리는 뱀처럼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를 발가벗기고는 집요하게 만지고 핥을 뿐이었다. 그도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몸으로 말을 걸어 오는 사 람에게는 몸으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옥녀! 옥녀!’ 그가 그녀 속으로 빠져 들면서 헐떡일 때, 그녀가 격렬하게 고 개를 젖혔다. 그녀의 얼굴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이름은 어느새 변 하고 있었다. ‘옥녀, 옥…… 어머니! 어머니!’ 맹세코 탐서랑의 인생에 지금처럼 행복한 때는 없었다. 단 한 가지만 뺀다면 말이다. 그의 앞에는 지금까지 그가 범했던 여인, 한번 더 만났으면 하 고 내심 바랬던 여인, 감히 그를 거부했던 여인, 그가 꿈속에라도 옷을 벗겨 보기를 바랬던 여인들이 모두 늘어서 있었다. 그것도 전라의 몸으로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여인들을 즐겁게 해줄 대락불사신공의 힘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갑옷도 창 도 없이 맨몸으로 전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하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락불사신공을 쓰지 않고 그저 힘으로만 이 여자들을 상대하다가는 반도 못 가 죽어 엎어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꽃밭에서 죽으면 사람들은 두고두고 이 탐서랑을 정말 색마 다운 색마였다고 칭송할 것이야!’ 그는 거의 결전에 임하는 용사의 심정이 되어 가장 가까운 곳 에 있는 여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돌아보며 처연하게 웃는 그녀 는 남궁화련이었다. ‘연매! 내가 왔어!’ ‘오셨군요! 날 데리러 오셨어요, 낭군!’ 탐서랑은 정말 맹세코 이 순간처럼 행복했던 때가 없었다. 모두들 행복한 환상에 취해 있었지만 당미령만은 그렇지 못했 다. 그녀는 온몸이 결박된 채로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앞에 서 있 는 것은 화등잔처럼 두 눈을 밝히고 있는 아버지 당철이었고, 주 변에 늘어선 것은 싸늘한 얼굴의 당가 식구들이었다. ‘당문의 피를 더럽힌 년!’ ‘오랑캐와 붙어먹은 년!’ ‘귀신과 놀아날 때부터 알아 보았지!’ ‘가문의 수치다’ 그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미령에게는 변명의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라하이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던 죄책감이 지금 그녀를 꽁꽁 묶고 있었다. ‘죽음을!’ ‘죽음을!’ ‘더러운 계집에게는 죽음뿐이야!’ ‘더러운 계집에게는 그에 맞는 죽음을!’ 분노한 그들의 손길이 그녀의 옷을 갈가리 찢었다. 그녀는 알 몸이 되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죽음을!’ ‘죽음을!’ 그녀를 그토록 아끼고, 떠받들고, 귀여워해 주던 당문의 식구 들. 그들이 아랫도리를 까내리고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의 눈에 떠오른 것은 어떤 음탕한 생각이 아니라 오직 이러한 벌 로 그녀를 죽이겠다는 의지뿐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은 이렇게 죽어도 싸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이렇게 죽기라도 해야 그나마 당문의 이름에 해를 덜 입 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저항을 포기했다. 죄인이 사약을 달갑게 받는 심정으로 그녀는 몸을 늘어뜨렸다. 소운비의 환상 속에는 오직 한 여자만 있었다. 그것은 혜와였 다. 그녀는 잠든 듯이 누워 있었고, 얼굴도 몸도 여자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에겐 그녀가 소중하냐?’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려 하지 않고 그저 대답했다. ‘그렇소!’ ‘살아 있는 그녀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 네가 안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살아 있는 여자만이? 꼭 그녀가 아니라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냐? 네가 정을 줄 수 있는 어떤 여자라 하더라도 괜찮 은 것이 아니냐?’ ‘아니오!’ 목소리는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네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죽일 것이다. 너는 감히 나에 게 반항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녀가 죽은 뒤에도 잠시 슬퍼할 뿐 또 여느 때처럼 살아 갈 수 있겠지. 사람은 아무리 정 이니, 사랑이니 떠들어대도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 갈 뿐이다.’ ‘아니오! 나는 혜와가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도 없소. 나는 그 녀가 죽는다면 따라서 죽겠소. 아니, 당신이 그녀를 죽이지 못하 게 하겠소!’ 소운비는 미친 듯이 외치며 혜와를 향해 달려갔다. 하나 그는 빨리 갈 수가 없었다. 그가 허공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동안, 혜와 의 흰 목덜미에서 서서히 한 줄기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핏줄기는 그녀의 목을 따라 둥글게 원을 그렸고, 마침내 그녀의 입술에서도 한 모금의 피가 솟았다. 그가 간신히 그녀의 몸에 손을 댔을 때, 그녀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목소리가 말한 대로 소운비는 혜와의 죽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소운비는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느껴졌다. 이렇게 무서운 느낌 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마치 어렸을 적에 어머니, 아버지가 없어 지는 꿈을 꾸고 새벽에 깨어난 것처럼 그는 추위를 느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상실감은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혜와……! 혜와……!’ 오열하는 그의 앞에 살인자의 미소처럼 싸늘한 단검 하나가 나 타났다. ‘너는 죽겠다고 했지? 그녀를 따라 죽는다고 했지? 이제 그때 가 왔다. 죽어라!’ 소운비는 서슴없이 단검을 집어 들었다.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 지만, 그것은 이 단검이 과연 한번에 숨통을 끊어 줄 수 있을까, 하는 회의 때문이었다.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단검을 들어 스스로의 목을 찔러 갔 다. 목기에 뜨끔한 느낌이 파고들었다. “쿨룩!” 갑자기 모든 공기가 싸늘해지고 그를 향해 바싹 다가들었다. 느닷없이 돌아온 실재의 느낌은 환상보다 오히려 더 환상 같았 다. 소운비는 자신이 빈 손으로 자기 목을 친 것을 깨달았다. 그 것은 무척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결코 스스로를 죽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가 기침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니 색마들과 오랑, 당미령 등 은 제각기 그 자리에 누워서, 또는 허공을 잡을 듯이 뛰어다니면 서 뜻 모를 소리들을 중얼거리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정신이 멀쩡한 것은 오직 그 자신과 한옆에 쓰러져 있는 타라 하이 뿐이었다. 타라하이는 파리한 안색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 는데,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입술은 불에 그슬린 듯이 바짝 말라 있었다. 아마 반은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리고, 대전 안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붉은 안개의 사나이 적무공, 무표정한 만음요화, 두 사람이 태 사의 양 옆에 시립해 있었고, 태사의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몽중마령! 역시 당신이었군요.” 소운비는 자신의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힘이 없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은 몽중마령의 무릎을 향했다. 두터 운 천에 싸여져 잠든 듯이 그 위에 늘어져 있는 것은 다름아닌 혜와였다. 그의 환상 중에 어떤 부분은 실재와 비슷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죽었소?” 몽중마령은 씨익 웃었다. “아니, 죽지 않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어쩌면 곧 죽게 될지도 모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얼음장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야 소 운비는 입을 뗄 수가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요?” 몽중마령의 대답은 엉뚱했다. “이 대전의 환희불 벽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네 동료들 은 아마 하루낮 하룻밤을 시달리게 될 것이다.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을지는 모르지. 하지만 너는 환각에서 금방 빠져 나왔다. 그 이유를 아느냐?” 소운비가 대답했다. “당신이 특별히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오?” “물론 그렇기도 하지. 하나 좀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나는 사대성물을 연구한 끝에 하나의 내공심법을 만들어 밀교의 제자 들에게 익히게 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이 대전을 드나들어도 환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내가 특별히 손을 쓰지 않을 때뿐이지만……! 네가 익힌 태원옥호공이 밀교의 내공심법과 유 사하기 때문에 너는 이득을 본 것이다.” 소운비는 그제야 지난번 몽중마령과의 대결에서 자신과 몽중마 령의 내공 성격이 비슷하다고 느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몽중 마령은 사대성물을 모두 극한까지 익힌 사람이었고, 그 중 자신 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물건들만을 세상으로 내보낸 것이었 다. 몽중마령은 마치 탐나는 여인을 훑어보는 사내의 그것 같은 눈 빛을 띠고 소운비를 훑어보았다. “너는 정말 나에게 있어서 하늘이 준 선물이다. 내가 무산음 호처럼 특별히 배려해 준 적도 없었는데 태원옥호공을 익혔고, 더구나 그 전에 양기를 잃고 음기로 가득한 시절까지 보냈기 때 문에 정말 완전한……!” 그는 너무나 흡족한 나머지 말을 채 맺지도 못했다. 그의 눈길 은 스르르 무릎 위에 있는 혜와에게로 움직여 갔다. “그것은 이 계집아이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은 둘 다 천고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소운비는 몽중마령이 혜와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까 싶어 속이 탔다. “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뭐요? 어서 말해 보시오!” “내가 너에게 뭘 원하느냐고?” 몽중마령은 엄한 아버지가 그러는 것처럼 소운비를 향해 지그 시 힘을 넣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너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너에 게 최고의 선물을 주려는 거야! 아이야, 생각해 보아라. 세상은 더럽다. 온통 쓰레기판이야. 사람들은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사랑이 있고 인정이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 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랑은 그 생김새가 좋고 향기로 워 보이지만, 그 밑에 얼마나 많은 질투와 의심이 숨어 있느냐? 그 질투, 그 의심이라는 괴물들이 한번 날뛰기 시작하면 아무리 정으로 뭉친 사람들이라고 해도 서로를 미워하고, 슬퍼하며, 가슴 에 칼을 하나씩 꽂은 채로 피를 줄줄 흘리면서 살아 가게 되지! 너는 그런 인생이 과연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 소운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몽중마령의 말을 다 믿을 수 는 없었지만, 그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로 지금 대전 안에서 환상에 허덕이고 있는 저 색마들 역시 그런 세상의 풍파에 휩쓸리면서 왜곡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으며, 자기 자 신 또한 혜와를 의심하고, 다른 곳에서 그 울분을 풀려 하지 않 았었던가! 평생 그녀를 사랑하고 아낄 것처럼 들떠 있었던 바로 자신이 말이다. 몽중마령의 말은 이어졌다. “인생이란 그렇게 진실을 알 수 없는 어지러운 환락경이다. 진실이란 오직 네 마음속에만 있다. 두 사람이 정말 진실로 사랑 하고 싶다면 세상 모든 것과 인연을 끊고 서로만 바라보며 살아 야 한다. 아니,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산다고 하더라도 세월 그 자체가 언젠가는 너희들을 유혹할 것이다. 그 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오직 하나, 두 사람이 한날 한시 에 가장 행복한 순간에 죽는 방법밖에 없다. 나는 너희 둘에게 그것을 주려는 것이다!” 몽중마령의 눈은 파랗게 빛났다. 그 자신이 자신의 말에 도취 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남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자신 의 말에 취해 있었다. “나는 이 여자아이를 온전한 몸으로 되돌려 놓겠다. 그리고 너희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너는 라사나가 되고 이 아이는 라라나가 되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너희는 죽는 것이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하늘 위에도 하늘 아래에도 없는 힘의 실체로 내 몸 안에서 둘 다 영 원히 사는 것이다! 어떠냐?” 소운비는 그의 달콤한 유혹이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을 간신히 밀어 내며 물었다. “만일 내가 싫다고 한다면?” 소운비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던 몽중마령은 별안간 태사의 속으로 몸을 묻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네가 싫다고 한다면, 이 여자아이는 죽을 것이고, 너는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하며 끈질긴 목숨을 이어나가게 될 것이다. 평 생!” 몽중마령은 좀 흥분했는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네가 병에 걸리지 않도록 돌봐 줄 것이며, 달아나지 못 하도록 감시도 할 것이다. 너는 어떤 사람도 다시는 만나지 못하 고, 다만 평생 동안 네 앞에서 죽은 이 여자아이만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바로 네 앞에서 피를 흘리고 간과 심장을 쏟으며 죽 은 이 아이를!” 그것은 아주 원초적이고도 효과적인 협박이었다. 가장 사랑하 는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적이 협박할 때, 그것에 저항할 수 있 는 사람은 영웅이었다. 하나 소운비는 그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몽중마령의 노골적 인 협박을 듣는 순간, 그의 주먹은 관절이 하얗게 되도록 굳세게 쥐어졌다. 하나 몽중마령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만일 네가 반항할 생각을 한다면, 그 생각을 바깥에 내놓는 순간이 바로 이 여자아이가 죽는 순간이 될 것이다!” 소운비는 주먹의 힘을 풀지 않고 말했다. “하나 나와 혜와는 당신에게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오? 나야 당신에게 덤비다가 힘이 부족해 죽는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천고 에 다시없는 보물로 여기는 혜와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을 까?” 몽중마령이 허허 웃었다. “얘야,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나는 너희 둘을 통 해 어떻게 하면 최고의 라라나와 라사나를 만들 수 있는지 그 길 을 알았다. 내 손에는 사대성물이 있고, 시간과 힘 또한 있다. 너 희 둘을 죽이고 내가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사서 너희들처 럼 만들어 본다면,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 효과는 너희들 못 지않을 것이며, 그 아이들은 내게 어릴 때부터 제압당해 감히 벗 어날 생각도 못할 것이다. 다른 길이 분명히 있는데 내가 망설일 것 같으냐? 나는 사람을 죽여 본 일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그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덧붙였다. “나는 다만 하루라도 빨리 성취를 이루고 싶어서 너를 설득하 는 것이다!” 소운비의 주먹에서는 서서히 힘이 빠져 나갔다. 그의 눈은 혜 와에게로 향했다. ‘혜와……!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힘을 길러 왔던 나인데, 아 직도 길은 너무 멀구려. 만일 당신을 지킬 수 없다면…… 그렇다 면 나는……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소운비는 깊게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의 말을 따르겠소!” 그가 말하는 순간, 반쯤 혼절해 있던 타라하이가 안타깝게 말 했다. “안 돼! 소 형, 그러면 안 되오……!” 하나 그의 속삭임은 대전을 울릴 듯한 웃음 소리에 묻혀 버렸 다. “으하하하하하……!” 그것은 몽중마령이 터뜨린 웃음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그가 내 보이는 아주 기분좋은 웃음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웃음을 뚝 그치 고 낮게 중얼거렸다. “천년수혼!” 쿵……! 소운비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의 얼굴은 잠든 혜 와처럼 아주 편안해 보였다. 몽중마령은 이미 소운비의 체질을 알고 있었고, 또 환희불들의 환각과 심계로써 소운비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였기 때문에, 지난 번 당문에서와는 달리 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중마령은 한 팔에 혜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운비에게 로 갔다. 그리고 가벼운 짐을 들듯이 그도 들어올렸다. 몽중마령 은 이 소중한 남녀를 결코 남에게 들게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남은 것은 대법뿐이다!” 그가 환희에 차서 중얼거릴 때, 적무공이 그의 앞에 부복했다. “감축드리옵니다! 하나 교주님, 한 가지 문제가……!” “무엇이냐?” “전열을 수습한 격색마회의 무리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 다. 선두에는 보타문의 비구니들이 서 있습니다. 이 어지러운 무 리들을 물리치고서야 방해없이 대법을 시작하실 수 있지 않겠습 니까?” 몽중마령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하잘것없는 벌레 따위들이……!” “모기가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도 괴롭힐 수는 있는 법입니 다.” 몽중마령은 적무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음을 가라 앉히기 위해 애를 썼다. 승리를 눈앞에 둔 지금, 바로 지금이 그 가 가장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힘써야 할 때인 것이다. 만일 지 금 아차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몽중마령은 말했다. “교단을 버린다!” 적무공이 물었다. “하면……?” “이런 때를 대비해 마련해 둔 제이의 장소로 나는 옮기겠다. 최소의 인원만을 데리고……! 교도들은 이곳에서 적들을 맞아 싸 우다가 전원 장렬하게 순교하라. 그러면 그들은 밀교를 궤멸했다 고 희희낙락하여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지……! 복수는 대법 을 이룬 뒤에 내 손으로 직접 하겠다.” 적무공은 순간 불안해졌다. 교주의 말대로라면 누군가는 남아 서 그를 대신해 교도들을 지휘하며 순교해야 했다. 교주는 몽혼 일도는 몸에서 조금도 떼어 놓지 않으려 하고, 만음요화라는 계 집은 어느새 교주에게 붙어 시중을 든다고 하니, 남을 사람으로 는 그가 가장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그의 붉은 눈동자가 불안스럽게 떨리고 있는데, 몽중마령 또한 그런 생각을 했던지 적무공을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데 그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 그 순간 벌어졌다. 반 주검이 된 무옥을 안은 백혈공이 뛰어 들어온 것이다. “교주님, 소교주께서……!” 백혈공은 그의 신분과 무공에 걸맞지 않게 허둥대고 있었다. 몽중마령은 무옥의 꼴을 보고서도 누가 그렇게 했는지 묻지도 않 았다. 그는 전혀 아들을 보고 있는 아버지답지 않게 냉정한 태도 였다. “그놈은 어차피 내 손에 벌을 받았어야 했다. 뭐가 그리 큰일 이라고 난리지?” “하나 어쨌든 아드님이십니다! 부디 용서를……!” 몽중마령은 자신으로 하여금 두 번 같은 말을 하게 하는 수하 를 둔 적도, 용서한 적도 없었다. 그는 눈에 불을 담고 막 백혈공 에게 일갈을 내쏘려다가 문득 멈추었다. 몽중마령은 적무공을 힐끔 보았다. 적무공은 백혈공을 힐끔 보 다가 몽중마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은 같 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몽중마령이 백혈공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 지 않았다. “나는 무옥을 용서하겠다! 대신 너는 나를 위해 죽을 수 있겠 는가?” 백혈공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백지장 같은 얼굴에는 묘한 홍 조가 떠올랐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 이 순간부터 중원 밀교의 교주가 된다. 나 대신 이곳에서 적들을 맞아 순교하라. 무옥은 내가 데리고 가 겠다.” 죽으라는 명령을 이토록 달갑게 받는 사람이 있을까? 백혈공은 혼신의 힘을 다해 기쁘게 대답했다. “존명!” 몽중마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적무공과 만음요화를 돌아보 며 말했다. “가자!” 그는 앞서 몇 발자국 걷다가 문득 만음요화에게 말했다. “너는 설마 여기 이자들에게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만음요화는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을! 이자들은 내 친구가 아닙니다. 서로 잡아 먹지 못해 안달하던 사이였어요. 저는 저 혼자만 살아남게 되어 너무 나 통쾌하게 생각합니다.” 몽중마령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중원의 색마들이란 다 그렇지. 그저 계집의 치마폭만 파고들 면 그게 곧 색마인 줄 알지만, 색이란 그렇게 즐기고 탐닉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색이란 곧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너도 나를 따르면 그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턱 끝으로 아직도 환각 속에 허덕이고 있는 색마들을 가 리켰다. “저들은 저대로 두어도 얼마 후면 기진해서 자멸할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나를 따르겠다고 하니 앞날에 힘과 영광이 있을 게 야.” 그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앞장서서 대전을 나섰다. 백혈공과 색 마들이 남겨진 대전 안은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적무공은 무 옥을 업고 따랐다. “몽혼일도! 앞길을 잘 살펴라!” 몽중마령은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한번도 자신을 떠난 적 이 없는 믿음직한 수하를 향해 명령했다. “존명!” 몽혼일도의 대답이 다른 때보다 아주 약간, 정말 아주 약간 늦 었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쓰기에는 그는 지금 너무나 흥분해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아귀 바로 앞에 있었던 것이다. 제 32 장 본명(本名) 북망산에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다. 묘지로 쓰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한데 오늘은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더 많았다. 격색마회의 깃발 아래 오백 명의 무림인들이 중원 밀교를 정벌하기 위해 모 여들었기 때문이었다. 냉면검화 진설영과 삼목신룡 무옥의 잇단 실종으로 난관에 빠 져 들었던 격색마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규염개였다. 군웅들은 몽고 관헌의 눈을 피해 소규모로 분산하여 비로소 북 망산에서 집결했다. 사기는 드높았고, 움직임은 기민한 데다가 적 의 인원은 보잘것없어, 승리가 눈앞에 보였다. 하나 규염개의 심기는 영 편하지가 않았다. 여러 가지 문제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최대한 속전속결로 이번 싸움을 끝내야 했다. 시간 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북망산은 몽고 관헌들의 주목을 받게 된 다.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백밖에 데 려오지 않은 이유도 그런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상황에서, 비록 인원은 적지만 약에라도 취한 듯 결사적 으로 저항하는 밀교도들은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어 주고 있 었다. 게다가 또 저들은 왜 이렇게 죽기를 원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튀어나온다는 말인가? 선두를 짓밟으면서 지하로 밀고 들어가 본 결과 그 아래에는 천병(天兵)이 와도 끄덕없을 정도의 훌륭한 기 관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만일 밀교의 교주라면 이렇게 교도들을 내모는 것이 아 니라 기관과 미로를 이용하여 끈질기게 저항을 할 텐데……!’ 그는 밀교도들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내릴 수 있는 대답은 그저 광신도들의 발악이라는 것뿐이었다. “크아아아악……!” 비명이 울리고, 좁은 통로 안에 피가 튀었다. “장로님! 통로가 뚫렸습니다.” 천지일월의 보고에 규염개는 무표정하게 명령했다. “전진!” 격색마회의 사람들은 밀교도들의 시신을 밟고 거침없이 앞으로 전진해 갔다. 한 발 한 발 밀교의 중심부를 향해 전진해 갈수록 규염개의 혼 란도 깊어만 갔다. 다른 모든 것은 큰 싸움을 하다 보면 자연히 느끼게 되는 불안 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하나 한 가지만은……! 바로 삼대성니와 진설영으로부터 전해 들은 무옥의 정체에 대 한 이야기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너무나 놀라울 뿐만 아니라 도무지 믿을 수가 없 었다. 그 이야기가 퍼질 경우 일어날 동요와 파장을 생각해서 일 단 이번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규염개와 보타문 측만 알기로 하 고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그 진위를 밝혀야 할 문제였 다. 규염개는 개방 제자들이 밀교도들의 피로 만들어 내는 통로를 따라 한 발 한 발 묵묵히 걸어가면서, 자신의 가슴속에서 번져 가는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을 발견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불안해 하는 것은 무엇 보다도 어느 순간 그토록 믿어 왔던 무옥이 광란하는 밀교도들을 이끌고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문득 방에서 몰아 낸 일월쌍개가 그리워졌다. 타라하이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칼을 짚고 일어났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색마들과 당미령의 헛소리가 차츰 가늘어지 다가 마침내 신음처럼 변해 가는 것을 들으며 그는 그들의 생명 이 경각에 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 이 상황을 깨어 버릴 수 있는 행동을 할 만큼 이성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가 비몽사몽 간에 들은 바에 의하면, 격색마회가 이 미 이곳에 도착해 시시각각으로 짓쳐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여 기 있는 사람들이 격색마회의 수중에 떨어져서는 결코 무사할 리 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였다. 아니, 이대로 놔둔다면 격색마 회가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으리라. 그들이 환각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다가 탈진하여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타라하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선 다음, 일단 당미령의 소 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는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진 그 녀의 몸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대며 외쳤다. “정신을 차려요! 이것 봐!” 그는 그녀를 흔들고, 외쳐 부르고, 뺨도 때렸다. 하나 그녀는 인형처럼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좋을까…… 어쩌면……’ 안절부절하던 그는 문득 당미령을 놓고 앞을 더듬어 벽 쪽으로 향했다. ‘환각은 모두 눈으로부터 오는 것! 이 벽에 그려진 그림들이 그 원인이다!’ 타라하이는 칼을 머리 위로 힘껏 쳐든 다음, 벽을 향해 내리그 었다. 찌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환희불의 얼굴에 금이 갔다. 타라하 이는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벽을 향해 난도질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누구요?” “밀교 교주 가무진!” 마침내 격색마회의 앞을 가로막고 나타난 백발백의(白髮白衣) 의 사내, 백혈공은 그렇게 대답했다. 진설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은 밀교 교주가 아니오.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있 소.” 백혈공은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이것이 나의 본모습. 너는 그때 환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내 진면목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진설영은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하나 마음속의 의혹은 사 라지지 않았다. 백혈공이 자신을 둘러싼 수십 명의 군웅들을 오시(傲視)하며 말했다. “교주의 징표는 오직 실력뿐이다. 너희들 중 누구라도 본 교 주의 손을 빌어 저승 구경을 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어서 나서 라!” 군웅들의 눈은 적의로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지는 않았다. 적의 수뇌를 상대할 사람은 그에 걸맞는 사람이어야 하 기 때문이었다. 규염개가 심호흡을 하고 나서려는 순간, 진설영이 가로막았다. “장로께서는 부상이 완치되지 않으셨습니다. 소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규염개는 고마움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 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는 진설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 다. 그녀가 단지 진회하에서 올라온 무명의 소녀일 때도 그러했 지만 지금은 더 그랬다. 진설영은 바로 보타문 검후의 후계자가 아닌가! 촤아아앙……!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싸늘하고도 번뜩이는 검, 관음보검이 검집에서 나왔다. 그것을 본 백혈공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겁에 질려서가 아니었 다. 그가 극도로 공력을 끌어올릴 때, 그는 마치 설인처럼 하얗게 변하곤 했다. 우우우웅……! 백혈공의 몸에서 백광이 일렁이고, 진설영의 검이 서늘한 울음 을 토해 내기 시작하자 군웅들은 말없이 뒤로 물러서 싸움의 자 리를 만들어 주었다. 보타문의 삼대성니와 석명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진설영을 보 고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한 명의 어린 소녀가 아니라 어떤 검보다 날카롭고 어떤 검보다 단호한, 그 자신이 바로 검 자체인 그런 사람이었다. 환희불의 벽화를 엉망으로 만들려는 타라하이의 노력은 온몸이 땀에 젖고 마침내 피까지 토하고서야 성과를 볼 수 있었다. 제일 먼저 환각에서 깨어난 것은 오랑이었다. 타라하이가 토한 피가 오랑을 사로잡고 있던 환희불을 더럽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깨어나고 나서도 한동안 움직이지를 못했다. 현실과 환각 을 분간하지 못하며 눈을 껌뻑이던 그는 타라하이의 호통을 듣고 서야 정신을 차렸다. “다른 사람들은 밀교 교주에게 다 납치되었소! 화금궁주도 마 찬가지요. 지금 격색마회가 이곳으로 오고 있소. 어서 사람들을 정신차리게 만들어야 하오!” 오랑은 서둘러 일어나 후들거리는 몸을 이끌고 타라하이를 도 와 벽화를 못 쓰게 망쳐 놓는 데 동참했다. 그 다음은 혼음사의, 용양도인, 탐서랑 순으로 깨어났다. 그들 은 모두 사흘간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기녀원에서 놀다 나온 늙은이처럼 얼굴이 홀쭉하고 눈이 퀭해져 있었다. 황망한 가운데에서도 격색마회가 짓쳐 오고 있다는 소리에 그 들은 불에 덴 듯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빨리……! 빨리……!” “어서들 정신차리자구!” “아이구…… 왜 이렇게 다리가 후들거리냐……” 무공이 약하고 색공을 익힌 바가 없는 한종린과 당미령은 가장 늦게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환각에서 깨어났을 뿐 그들은 기절 한 것이나 거진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 격색마회 놈들을 만나면……, 우리도 밀교를 치러 온 것이라고 아무리 말해 보았자 씨도 안 먹힐 거야. 우린 다 죽는 다구!” 탐서랑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에 귀를 대고 상황을 탐지하던 오랑도 얼굴 이 파랗게 되어 말했다. “지금 바로 이 문앞에서 밀교도들하고 격색마회가 싸우고 있 어요! 좀 있으면 격색마회가 밀고 들어올 겁니다.” “어쩌지? 어쩌지?” 전전 긍긍하는 색마들에게 타라하이가 말했다. “이곳은 밀교의 대전이니 분명 어딘가에 비밀통로가 있을 거 요. 다들 찾아봐요!” 그들은 꽁무니에 불침을 꽂은 사람들처럼 허둥거리며 대전 안 의 모든 물건들을 들쑤셔 보았다. 용양도인이 태사의를 뒤집어 놓다가 그 밑에 숨겨진 장치를 건드리 게 된 것은 실로 행운이었 다. 통로라고 보기도 힘든 자그마한 개구멍 하나가 뱀머리의 여신 상 뒤에서 입을 벌렸다. “자, 어서, 어서!” 그들은 손발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 개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갔 다. 마치 반란이 일어난 궁중을 탈출하는 늙은 환관들처럼 그들 의 꼬락서니는 형편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오랑이 개구멍 속으로 들어가면서 여신상을 끌어다 가 구멍 앞을 단단히 막았다. 출구가 들통나서 추격이라도 받게 되면 정말 대책이 없기 때문이었다. 뚜욱……! 뚜욱……! 백혈공의 입에서 흰 피가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청석(靑石)으 로 된 바닥이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녹아들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는 그 스스로가 뿜어 낸 것이 아니었 다. 그 피는 하염없이 흘러 그의 발등에마저 떨어졌다. ‘소교주……!’ 그는 덧없이 웃었다. ‘부디 무사하기를…… 나는 먼저 가오……!’ 죽음이라는 것은 과히 기분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저 승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여인을, 주군의 아내였기 때문에 감히 넘보지 못했던 여인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기대가 그를 기쁘게 했다. ‘저승에서라면…… 그곳에서라면……!’ 그는 모든 것을 주군에게 양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백혈공 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크게 웃었다. 하나 웃으려고 한 것은 그 의 생각일 뿐이었고,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마지막 숨 한 올이었다. “커…… 윽……!” 쿠웅……! 챙! 백혈공이 쓰러진 것과 진설영이 검을 검집에 꽂은 것은 동시였 다. 손톱만큼의 침묵이 있은 뒤에 군웅들의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 “과연 냉면검화다!” “냉면검화야말로 여중제일검이다!” “아니다! 그녀는 여인들 중에서뿐만이 아니라 능히 천하제일 검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군웅들이 흥분하여 외칠 때, 보타문의 석명이 나섰다. “여러분! 본 문의 진설영은 이제 더 이상 냉면검화가 아닙니 다!” 군웅들이 궁금증으로 눈을 빛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석명은 입술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이제 이 아이는 검후입니다. 보타문의 검후 진설영이 될 것 입니다!” 군웅들은 그 말을 받아 일제히 외쳤다. “검후 만세!” 사방의 통로를 통해 동시에 공격해 들어가던 격색마회의 인원 들이 마침내 대전으로 모여들었다. “밀교도들은 마침내 괴멸된 것 같군.” 규염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승리의 주역인 진설영은 이상하게도 엉망이 되어 있는 대전의 벽화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희미하게, 자신이 이 벽화 속의 환 희불들에게 농락당하는 환각에 빠졌던 일이 생각났다. ‘어째서 이곳이 이렇게 엉망이 되었을까?’ 그녀는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문제들에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방금의 승리가 가져다 준 갑작스 런 허탈감이 너무 짙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더 큰 궁금증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진설영은 검집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어째서 그 사람은 없는 거지?’ 당연히 이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 단 한번 모습을 드러냈던 몽혼일도를 그녀는 싸움하는 동안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무공은 분명히 교주라 자칭한 그 사람보다 훨씬 강했 다. 그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싸우다가 죽었을 리는 없다. 그런 데 왜 그가 없을까?’ 그녀는 어쩐지 이 싸움은 미완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그녀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규염개는 벌써부터 퇴각을 명하고 있 었다. “이곳은 낙양과 멀지 않소! 그곳의 관병들이 출동이라도 한다 면 일이 매우 귀찮게 될 것이니 최대한 흩어져서 개봉부로 재집 결합시다!” 그의 말에는 일리가 없지 않았으나, 너무 손쉽게 뒤로 빠지는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던지는 군웅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규염개가 이 싸움을 계속 진행하다가 무옥의 정체가 탄로나고, 그렇게 됨으로써 개방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 했다. 밀물처럼 밀려왔던 격색마회의 군웅들은 썰물처럼 도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쩐지 미련이 남는 대전 안에 끝까지 남아 있던 진설영은 막 문을 나서려다가 한쪽 옆에 놓여진 작은 탁자 위에 시선이 머물 렀다. 거기 놓인 물건은 별로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으스스한 방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가 않아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곳에는 한 장의 얇은 종이가 놓여져 있었고, 그 위에는 거친 솜씨로 풍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밀교의 중심부에 놓여진 그리다만 풍경화라는 것은 정말 어울 리지 않는 소품이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린 솜씨가 매우 거칠 뿐더러 그림에 조금도 흥취라고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선은 어찌 보면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대충 찍어서 그린 것처럼 투박했 다. ‘흠……! 손가락으로 그렸다기에는 좀 선이 가늘기도 하 고……! 이것은 어쩌면……?’ 진설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어쩌면 검끝에 먹을 찍어 그 린 것인지도 몰랐다. 붓으로 그렸다면 형편없는 그림일지 몰라도 만일 검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면 보통 솜씨가 아닐 것이다. 이런 실력을 가진 사람이 검으로 그림을 그린 뜻은 무엇일까? 진설영은 비로소 그 그림 자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한 채의 집이었다. 기둥이 허물어져 있는 것이 오래되 고 낡은 폐가 같았다. 집 옆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강에 는 배가 서너 척 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도 배에는 꽃이 그려 져 있었다. ‘낡은 집. 강……, 꽃이 실려 있는 배……!’ 진설영은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진회하!’ * * * 진회하. 한겨울의 그곳은 여름만은 못해도 여전히 환락경을 이루고 있 었다. 그곳에서 살고, 그곳에서 웃고, 그곳에서 울었던 많은 사람 들의 인생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데도 진회하는 조금도 바뀌 지 않았다. 여전히 노래와 술이 있었고, 토악질을 해대는 취객이 있었으며 짙은 화장 밑에 주름을 숨긴 기녀들의 공허한 웃음이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귀회루는 전보다 좀더 황량 해진 것을 빼면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석 달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귀회루를 슬며시 드 나들고, 밤이면 이따금 조심스러운 망치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 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형편없이 취한 한량들이 근처 를 지나다가 그 소리를 들어도 그저 귀신들의 놀음이거니 생각하 고는 취기를 씻어 내며 황급히 달아날 뿐이었다. 며칠 전의 깊은 밤, 귀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은밀한 그림 자 몇이 귀회루의 담을 넘어 들어간 일도 물론 알려지지 않았다. 반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귀회루는 귀회루, 진회하는 진회하였던 것이다. “저녁 준비는 아직 안 된 건가?” 한참 불을 때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만음요화의 뒤쪽에 어느새 나타난 적무공이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로만 물어도 되는 것을 그는 괜시리 짐승의 앞발 같은 두툼 한 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얹고 지그시 누르며 묻고 있었다. 만음요화는 살짝 몸을 떨었으나, 곧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대 답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되어 뭘 하려면 한참 손을 봐야 하 는걸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참! 땔감이 떨어졌는데 사러 나가 도 될까요?” 적무공은 눈을 부라렸다. “널린 게 땔감인데 왜 사러 간다는 거지? 쓰지 않는 집들은 놔둬서 뭐 해? 뜯어서 쓰면 되는 거 아냐?” 만음요화는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아무 나무나 뜯어서 쓰면 연기가 많이 나지요. 귀신들이 사 는 집에 연기가 나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겠어요? 허락하신 다면 제가 가서 사 오겠습니다만……!” 적무공은 만음요화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눈을 굴렸다. 그는 아 직 만음요화를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라도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그녀를 귀회루 바깥으로 내보낼 수는 없 었다. “기다려! 내가 다녀오지.” 돌아서기 전에 그는 만음요화의 앞가슴을 툭 쳤다. “일만 잘 풀리면 내가 한번 흠씬 주물러 줄 테니, 기대하고 있으라구!” “아이……!” 만음요화는 요녀답게 야릇한 신음을 흘려 보였다. 땔감을 가지러 은밀히 귀회루를 빠져 나가는 적무공의 심정은 착잡했다.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 참, 잠깐이라고 생각하니 참는 거지, 못해 먹을 노릇이군!’ 한 달의 시간이 걸린다는 교주의 대법이 완성될 때까지는 눈앞 에서 먹음직스럽게 왔다갔다하는 만음요화를 건드려 볼 수도, 술 을 마실 수도 없는 지루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행여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운 교주의 신경을 건드렸다가는 언제 백혈공처럼 저 승으로 가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이야……!’ 적무공은 다짐을 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회루로 오는 길에 교주가 넌지시 던진 말이 그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몽혼일도는 믿음직스럽기는 하지만 일인자의 재목은 아니 지. 내가 대법을 완성한 뒤에는 혈통에 상관없이 가장 충성한 자 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물려 줄까 한다. 그것은 누구인가? 다름아닌 적무공 자기 자신이 아닌가! ‘교주의 대법이 완성되고…… 밀교가 중원을 거머쥐고…… 내 가 그 후계자가 되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고생이 야!’ 적무공은 기분좋게 웃고는 몸을 흔들어 신형을 뿌옇게 만들었 다. 그는 땔감을 사는 것이 아니라 훔칠 생각이었다. 그와 같은 사 람에게 물건을 산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밤도 이슥하니 야행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땔감을 구하는 김에 진회하의 계집도 같이 한번 훔쳐 볼 까……?’ 붉은 안개의 인간 적무공은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적무공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순간, 만음요화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소름 끼치는 놈! 간신히 혼자가 되었구나!’ 만음요화는 서둘러 옷자락을 찢고는 그곳에 먹으로 몇 글자를 써넣었다. 그리고 조심조심 뜰로 나가니 나무 위에 한 마리 까마귀가 앉 아서 졸고 있었다. 만음요화가 다가가도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는 그 까마귀는 다 름아닌 오아였다. 만음요화는 옷자락을 오아의 다리에 묶고 속삭였다. “어서 가거라! 얼른 오랑에게로 가!” 까마귀 오아는 울음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날개를 펼쳐 밤하늘 로 날아올랐다. 전신이 까만 까마귀는 날아오르자마자 어둠 속으 로 숨어 버렸다. 만음요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오랑은 살아 있을 것인가? 만일 몽중마령의 말대로 그곳 에서 다들 탈진하여 죽었다면 지금의 이 연락도 모두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 하나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만의 하나라도 그들이 살아났 을 경우, 자신들을 찾을 수 있는 일말의 단서는 남겨야 했다. 몽중마령이 마련해 둔 제이의 장소가 다름아닌 귀회루라는 것 을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몽중마령은 색마들의 회합에 참가했던 취화비도에게서 귀회루 에 대해 듣고, 이목이 번잡한 가운데 유독 떨어져 있는 곳이라 오히려 세인들의 눈을 속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곳을 택했다고 하였다. ‘그때 취화비도가 색마들의 모임을 종용한 것도 다 우리들을 한군데 모아 놓고 강호의 일들을 조종하기 위해서라고 했지!’ 만음요화는 이를 갈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득의 만면한 몽 중마령이 그 이야기를 들려 주지 않았다면, 그녀가 어찌 그것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만음요화는 오아가 사라진 밤하늘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희망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살아난 일행이 오아를 발견하여 다름아닌 바로 이 귀회루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 주는 것. 그리고 때늦지 않게 이곳에 와주는 것. ‘하지만 만일 그들이 살아나지도, 오아를 발견하지도, 때맞추 어 와주지도 못한다면……?’ 만음요화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는 그녀로서도 최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거짓웃음을 지어 가며 여기까지 몽중마령을 따라온 목적을 실행하는 것이다. 오랑을 죽인 자를 죽이고, 자기 도 죽는 길뿐이었다. 만음요화의 눈은 문득 귀회루의 본각을 향했다. 그곳에는 몇 달 전부터 몽중마령이 사람들을 보내 특별히 만들어 놓은 방이 있었다. 그 방은 사방 벽이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되어 있어 부수 고 들어갈 수도 없고, 오직 안에서 열지 않으면 출입할 수 없는 그런 방이었다. 그 방안에는 몽중마령과 혜와, 소운비, 그리고 무옥이 있었다. 이따금 식사를 나르러 갈 때마다 보았던 혜와와 소운비의 밀납인 형 같은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불쌍하기도 하지……!’ 그녀는 이전의 자신이라면 결코 품지 않았을 측은지심을 마음 속에 떠올렸다. 혜와를 죽이고 살아남느니 함께 죽는 길을 선택 한 소운비의 행동이 그녀의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함께 죽고 싶은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이 런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단지 그녀는 소운비보다 좀 더 나이가 들었기에 당장 오랑과 함께 죽지 못하고 원수를 갚을 기회를 노린다며 살아남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때 죽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원수를 갚겠다고 그러지만, 어쩌면 죽음이 두려워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아가 지금 어디쯤 날아갔을 까를 생각해 보았다. 캄캄한 밤하늘 어디에도 외로운 까마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 았다. * * * 위기 일발의 순간에 북망산을 탈출한 색마 일행은 병에 걸린 데다가 개한테마저 쫓긴 거지꼴이 되어 개구멍을 간신히 빠져 나 왔다. 그리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 부근에서 격색마회 사람들의 눈에 걸리지 않도록 정말 거지로 변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들이 따뜻한 객점 방에서 비로소 몸을 눕힐 수 있게 된 것은 격색마회가 북망산에서 완전히 물러난 다음이었다. “이젠 어떻게 하지?” 혼음사의가 모두에게 묻자 용양도인이 화를 버럭 냈다.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몸이 회복되는 대로 뿔뿔이 흩어지 는 거지! 네놈들하고 같이 다니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 금쪽 같은 내 아이들을 모두 잃었다구……!” 탐서랑이 콧방귀를 날리며 쏘아붙였다. “참내……! 제일 먼저 설치다가 뇌옥에 갇혔던 사람이 누군데 저런 소리를 하지?” “뭐야?” 용양도인은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이 눈을 부라렸지만 말 뿐이었다. 힘이 없어서 당장은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끼여든 것은 당미령의 부축을 받고 있던 타라하이였다. “이대로 헤어진다니? 당신들은 소 형을 구하지 않을 거요? 우 리는 일행이 아니었소?” 용양도인이 신경질을 부렸다. “일행이라구? 우린 어쩌다 그저 같은 길을 걸은 것뿐이야. 내 가 너 같은 몽고 놈과 어떻게 일행일 수 있어?” 당미령은 그가 타라하이를 타박하자 발끈하여 덤벼들었다. “당신네들은 그러고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고, 위험할 때 소 공자나 이분이 당신들을 도와 준 적도 있지 않았나요? 그런데도 이젠 각자라구요?” 용양도인은 노한 범처럼 으르렁거렸다. “어린 것이 뭘 안다고 큰 소리야? 강호란 말이다, 원래가 혼 자 살아가는 곳이야. 정파랍시고 고고한 척하는 무리들도 이익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고 하는데, 우리는 그야말로 색마들이니 더 볼 것이 있나? 이득이 있으면 모이고, 없으면 헤어지는 것이야, 그것뿐이야! 그게 강호를 살아 가는 방법이라구!” 타라하이가 탄식했다. “당신들은 고작 그런 생각으로 일생을 강호에서 살아 왔단 말 이오? 밀교 교주조차도 엄청난 포부와 야망을 가지고 있었소. 그 가 당신들을 일컬어 무어라고 했는 줄 아시오?” 혼음사의가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타라하이는 대답했다. “중원의 색마들은 색을 그저 즐거움 정도로만 알고 있으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합디다! 자신에게는 색이란 곧 힘이라고 말이오!” 색마들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을 굴렸다. 혹자는 그 의미를 곰곰 이 생각하는 듯했고, 혹자는 이게 웬 흰소리인가 비웃는 것 같기 도 했다. 혼음사의가 중얼거렸다. “궤변이야. 사람에게 색이란 그저 자손을 퍼뜨리고 좀더 즐겁 게 살아 가는 것뿐이지, 그게 무슨 힘이고 무슨 큰 도리가 된단 말이야?” 용양도인이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놈은 그렇게 생각하라고 해. 우린 그저 자기 생각대로 살면 그뿐 아닌가? 난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겠 어!” 그는 정말 모든 것이 귀찮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는 것도, 혹시나 지금까지 잘못 살아 온 것이 아닌가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져 오는 느낌도 모두가 귀찮았 다. 그저 그가 바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예전처러 강호인들이 뭐라고 욕하든 말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 가는 그런 인생이었다. 그때, 오랑이 결연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갈 사람은 가도 좋아요! 하지만 난 옥녀를 구하러 갈 겁니 다!” 모두들 생경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용양도인이 불쑥 물었다. “옥녀가 누군데?” 오랑은 이게 웬 뜬금없는 질문인가 하는 눈빛으로 제 아버지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머리를 쳤다. “만음요화 말입니다. 본명이 옥녀예요.” 용양도인은 비로소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었다. “난 또…… 무슨 이름이 그렇게 촌스럽지? 왜 본명은 세상에 안 알려져 있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어흠……!” 한종린이 도통한 도인처럼 헛기침을 하더니 중얼거렸다. “본명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어디 만음요화뿐인가……? 이 름이 촌스러워서가 아니라 부끄럽기 때문에 알리지 않은 것이겠 지.” 탐서랑이 발끈했다. “왜 부끄러워?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한종린이 되물었다. “색마이기 때문에 부끄럽겠지. 아무리 안 그런 척해도 색마니 음적이니 불리는 것이 자랑스럽지는 않은 것 아닌가?” 탐서랑은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난 부끄럽지 않아! 나를 색마니 음적이니 하는 정파 놈들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죄가 없는 놈들은 아니야! 나는 위선을 저 지르지 않았으니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 한종린이 얼른 물었다. “그럼 당신 이름이 뭐지? 부모님이 준 본명 말이야!” 탐서랑은 주춤했다. 한종린은 틈을 주지 않고 재촉했다. “정말 부끄럽지 않다면 말할 수 있겠지. 이름이 뭐야?” “내, 냉허심(冷虛心).” 스스로를 변호할 때와는 달리 탐서랑의 목소리는 작았다. 말을 해놓고 나서도 오랜만에 입 밖에 내어 놓는 자신의 이름이 쑥스 러웠던지 헛기침을 해댔다. 게다가 그는 전혀 허심(虛心)하지 않 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에 잠겨 있던 혼음사의가 불쑥 말했다. “난 정명도라고 하지. 원래 이 친구와 함께 고의문에서 수련 을 했었어.” 용양도인이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그는 언제나 잘난 척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흥! 다들 이름이 좀스럽군. 나야말로 사나이다운 이름이지. 곽대호(郭大虎)! 내 아들은 곽오랑(郭烏郞)이 되는 거지.” 탐서랑이 빈정거렸다. “흥! 이름은 사나이답지만 사람은 전혀 그렇지 못하군! 만음 요화 옥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아!” “뭐가 어쩌고 어째?” 용양도인은 벌떡 일어나 탐서랑을 노려보았는데, 이번에는 아 무리 힘이 없을지언정 시정잡배들의 싸움처럼 뒹굴면서도 한판 해볼 기세였다. 한데 탐서랑 냉허심도 조금도 지지 않을 기세였다. “내 말이 틀렸나, 곽대호?” 두 사람은 여의주 하나를 사이에 둔 두 마리 이무기처럼 서로 를 노려보았다.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얼굴은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더 두려움을 줄 수 있을까 연구라도 하듯이 온갖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참 분위기를 잡고 있을 때, 갑자기 ‘쿡’ 하는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혼음사의였다. 그의 웃음은 점차로 커지더니 마침내 박장대소가 되어 모두들 싸우려는 두 사람보다 그를 더 이상한 눈으로 보게 되었다. 심지어 탐서랑과 용양도인 마저도 그랬다. “으하하하하! 으하하하하! 우린 모두 이름을 감추고 살았군! 정말 별호에 안 맞는 이름들이었어! 으하하하하하……!” 한종린이 따라 웃기 시작했다. 당미령도 웃었다. 타라하이도 웃었다. 마침내 탐서랑도 웃어댔다. 용양도인도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명치 한가운데를 짓누르던 그 무엇을 녹여 버리는 듯한 통쾌한 웃음은 그로부터도 한참이나 이어져 방안의 공기를 따뜻하게 덥 혀 주었다. 그들은 너무 웃었기 때문에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만음 요화에 대한 걱정 때문에 계속 웃지 않고 버티던 오랑마저도 마 지막에는 할 수 없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오랑은 곧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쨌든, 저는 가겠습니다. 옥녀를 구해야지요. 그녀는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봐, 이봐.” 혼음사의가 간신히 웃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좀 참게. 누가 젊은 사람 아니랄까 봐 그러나?” “하지만 이대로 기다리고 있으면……” “그래, 어디로 가려고? 가야 할 곳을 알기라도 하는가?” 오랑은 입을 다물었다. “이 넓은 천지에 그자가 어디로 몸을 숨겼는지 누가 알겠나? 나도 자네처럼 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 누군 급하지 않은 줄 아 는가?” 탐서랑이 물었다. “당신이 구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누구?” “누구긴 누구야! 내 제자!” 혼음사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기묘한 눈빛으로 색마들 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나를 색존으로 만들어 줄 보물덩어리지! 반드시 구해 내야 해.” 순간, 용양도인과 탐서랑의 눈에도 번갯불이 번쩍 빛났다. 혼음 사의는 그것을 못 본 척,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대책이 생길 때까지는 몸부터 추슬러야지.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싸우는 방법 중에 배워야 할 덕목이야.” 색마들은 모두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들은 비록 몸은 지쳤으 나, 마음만은 방금 닦아 낸 은그릇들처럼 번쩍번쩍 빛났다. ‘막연하기는 하지만, 일단 기다려 보는 거야!’ 막연한 기다림. 하나 그것은 그리 길지도, 그리고 생각한 것만 큼 막연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북망산 근처의 객잔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앞으로의 일 을 걱정하기 시작한 지 보름 만에, 동료도 없이 혼자 비행하는 까마귀 한 마리가 그들을 발견하고 까악까악 울어대며 객잔 지붕 위를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랑의 까마귀 오아였다. * * * 소운비는 자신이 거의 조각처럼 변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고, 오랜 시간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는 상태 그대로 그는 정좌한 채로 방안의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창문 하나 없이 철벽으로 둘러싸인 방안에는 몇 개의 촛불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방 구석에는 상처는 치료되었으나 넋은 반쯤 나간 채 그대로인 무옥이 헝겊인형처럼 구겨져 있었다. 한옆에는 은은한 향기를 흩뿌리고 있는 혼혼옥잡. 그리고 방 중앙에는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는 몽중마령……! 몽중마령의 무릎 앞에는 음곡비파가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음 곡비파에서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비파의 현이 절로 뜯겨지는 것은 실로 놀라운 내공의 발휘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소운비는 놀라지도 않을 뿐더러 그쪽으로는 시선조차 던지지 않고 있었다. 벌써 한 달 가까이 그는 똑같은 풍경을 보 아 온 것이다. 소운비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오직 한곳, 몽중마령의 머리 위 였다. 거기, 허공에 한 마리의 불사조처럼 빛나는 나신이 둥둥 떠 있 었다.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물속을 부유하듯 천천히 빙글빙글 도는 그것은 다름아닌 혜와였다. 혜와의 나신을 감고 도는 음곡비파의 음률은 소운비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묘한 곡이었다. 그것이 바로 음곡비파의 효능을 극대로 표현하는, 천하에서 가장 음유한 음악인 대음지곡(大陰之 曲)이라는 것을 소운비는 몽중마령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대음지곡이 끊임없이 연주되면서, 혜와의 몸은 조금씩 조금씩,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돌아오는 지경을 넘어 그녀의 몸이 신령스럽게 빛나기까 지 했다. 그것은 한없이 성결하면서도 한없이 유혹하는 듯한 나신이었 다. 누구라도 그녀 앞에서는 정욕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으면서 도, 또 누구라도 감히 그녀를 넘보며 손을 뻗을 수 없는 그런 몸……! 소운비는 화금궁의 삼녀대전에서 보았던 소녀의 상을 떠올렸 다. 혜와는 지금 전설 속의 소녀처럼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것은 또한 자애로운 관음보살을 닮은 모습이기도 했다. 몽중마령이 대음지곡을 탄주하는 동안 소운비는 그 앞에 정좌 하고 앉아 태원옥호공을 끝없이 연성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소운비마저도 대음지곡의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두 가지 기운을 중간에서 조절해 주는 역할로 혼혼옥잡은 은은 하게 향을 태우고 있었다. 그러한 시간이 벌써 한 달 가까이 흘렀으나 소운비에게는 시간 의 흐름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한없이 높아지고, 혜와는 한없이 넓어지는 듯한, 그리하여 자신은 하늘이 되고 혜와는 땅이 되는 듯한 편안한 느 낌만이 그를 감싸고 돌았다. ‘땅이 이어져 바다가 되고, 하늘이 그 바다에 제 얼굴을 비출 때……! 혜와와 내가 바다에서 하나로 만날 때……!’ 소운비는 그때가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앙……!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대음지곡이 갑자기 멈추었다. 소운비는 몽중마령을 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한 웃음이 맴돌고 있었다. “이제 다 이루었다……!” 몽중마령이 손을 들어 혜와를 가리켰다. 그녀의 나신은 허공에서 멈추었다가 바람을 타고 팔랑팔랑 떨 어지는 가랑잎처럼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받아라!” 몽중마령의 말이 떨어지자 소운비는 앞으로 나아가 혜와의 나 신을 받아 안았다. “혜와……!” 그것은 실로 오랜만의 느낌이었다. 그 매끄럽고 따스하고 온유 한 나신의 촉감이 그의 팔 가득히 차 올라왔다. 몽중마령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내일 밤……! 이제 내일 밤이다. 하늘과 땅이 바다에서 만나 고, 그 바다의 모든 물들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리라……!” 제 33 장 공무(空無) 격색마회를 책임진 규염개가 북망산의 일전으로 밀교와 색마들 을 소탕했다고 선언하며, 이제 뜻을 이루었으니 깃발을 접노라고 격색마회를 해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한번의 싸움으로 너무 쉽게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없지 않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규염개는 더 이상 싸움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삼목신룡 무옥은 밀교와의 대전 중에 암수에 걸려 전사했다고 규염개는 만인에게 알렸으며, 무림인들은 젊은 영웅의 죽음을 애 달파했다. 신임 개방 방주로는 규염개가 추대되었으며, 소문에 의하면 일 월쌍개 중 살아남은 사람을 수소문해서 방 내로 다시 끌어들이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소문들은 금릉까지도 은은히 퍼졌지만, 진회하의 거리에 서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날 아침, 만음요화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부들부들 떨리 기 시작했다. 몽중마령이 문을 열고 나와 무옥을 짐꾸러미처럼 던져 주면서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을 깨끗이 목욕시키고, 너도 목욕한 다음 방으로 들 어와라.” 그녀는 무옥을 씻기고 자신도 씻으면서 몇 번이나 도망칠까 생 각해 보았다. 칼날 같은 강호를 살아 오면서 단련된 그녀의 예감 은 지금 이순간, 저 방안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무리 오랑의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어도 살고 싶은 욕망은 가시지를 않았다. 만일 달아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몇 번이고 달 아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욕하는 그녀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 고 있는 적무공의 시선이 시퍼렇게, 아니 시뻘겋게 빛나고 있는 데야……! 그녀는 모질게 마음을 다잡고, 옷을 걸친 뒤 조용히 몽중마령 의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기제진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모든 양은 그 속에 음을 포함하고 있고, 모든 음 또한 그 속 에 양을 머금고 있다. 완전한 여자는 그 안에 남자를 가지고 있 으며 완전한 남자 또한 그 안에 여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수련자는 마땅히 지고의 여인과 지고의 남자를 택해 교합하게 하고, 그들이 절정에 달할 때에 진언을 외우라. 진언은 이와 같다. ─`백원금정(白元金精)이여, 나의 오화(五華)에 생명을 가져다 주십시오. 중앙황로군(中央黃老君)이여, 나의 혼에 조화를 주고 나의 정을 단정하게 해주십시오. 황상태정(皇上太精)이여, 나의 체액을 단단하게 해주고 나의 정신을 강하게 해주십시오. 무상태 진(無上太眞)이여, 나의 여섯 기를 묶어 주십시오. 상정현로(上精 玄老)여, 나의 신기가 되돌아와 나의 뇌를 강하게 만들도록 해주 십시오. 이 두 사람을 하나로 합쳐 혼합하여, 태가 순화되고 보가 보존하게 해주십시오.`─ 이와 같이 진언을 외우는 동안 교합하는 남자는 자신의 신장 (腎臟)을 잡고 정액이 나오지 않도록 잠그며, 형태가 바뀐 그 기 가 척추를 따라 올라가 마침내 뇌 속의 이환혈에 다다르도록 해 야 한다. 여자는 연화부동(煉火不動), 순화된 물이 움직이지 않듯이 감정 을 억제하고 정신을 키워 절정에 쉬 다다르지 않도록 만든다. 두 남녀가 결코 혼자 절정에 다다르지 않도록 이리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여인의 두 젖가슴의 기가 신장으로 내려갔다가 그 다 음에 다시 거기로부터 올라가 마침내 뇌 속의 이환혈에 다다르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화진(化眞)이다. 남자의 환정이 더 이상 쌓일 곳이 없을 정도로 쌓이고, 여자가 마침내 화진에 이르게 되었을 때, 수련자는 두 사람의 천령개 위 한 치 되는 곳에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두 손을 대라. 그리하면 그곳으로부터 기운이 솟구쳐 올라 장심(掌心)을 타고 안으로 들 어올 것이다. 이때, 단전 언저리에 배아(胚芽)의 모습을 하고 있는 보리심(菩 提心)에 상념을 집중시키라. 그리하면 마음속에 하나의 점(點)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마치 환정(換精)과 같은 것이다. 환정은 수 련자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음과 양의 분리를 깨뜨려 신성(神性) 을 획득하고 공무(空無)와 하나가 되며, 열반(涅槃)과 대락(大樂) 이라는 영원한 지복(至福)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때 교합하는 남녀의 힘이 부족하여 중간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 이를 대비하여 이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줄 또 하나의 남 녀를 준비해 둠이 좋으리라……!> 이것이 <기제진경>의 원저자인 중원인이 쓴 기록이었다. 이름 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도교와 불교를 섭렵한 자임에 틀림없었다. 하나 몽중마령에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원래의 내용보다는 후대에 와서 밀교의 고승이 첨가한 내용이었다. 그 자신이 이십 년 동안 준비해 온 빈두`─`아바드후티카도 밀 교 고승이 써둔 바대로였다. 그는 말하기를, 여기서 지적한 여자와 남자가 곧 밀교 교리에 나오는 라라나와 라사나이며, ‘점’이라 일컬은 것이 곧 밀교의 빈두라는 것이고 이 빈두가 한 사람의 몸 속에 깃들인 라라나와 라사나의 분리를 깨고 정화된 길, 아바드후티카를 열어 주며, 이 길을 따라 심장에 있는 다르마`─`차크라를 연 뒤에 목의 중심부 에 도달하여 마침내 ‘정수리의 연꽃’이라 칭하는 우스니사``─ ``카말라에 이른다. 정수리의 연꽃에 이르는 동안 빈두는 우주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인 흙, 물, 불, 바람, 공기와 결합하여 균질화 된 빛으로 바뀌고, 이 빛이 곧 수니야타, 즉 공(空)과 카루나, 즉 자비`─`반야와 방편과 완전한 결합을 이르면 비로소 최고의 경 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애매한 비유와 이해하기 힘든 구절로 가득 찬 해석이었지만 몽 중마령은 이것을 믿고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 일 <기제진경>이 그저 중원인 혼자 쓴 것이라면 그는 믿지 않았 을 테지만, 본래의 분량보다 열 배는 넘는 밀교 고승의 주석이 그를 지금까지 사로잡았던 것이다. 몽중마령은 흡족한 마음으로 방안을 돌아보았다. 방안에는 그 자신을 포함하여 벌거벗은 남녀가 모두 다섯 명이 었다. 의식을 잃었기에 두려운 빛이라고는 없는 무옥과 혜와. 의식이 있기에 온몸을 가볍게 떨고 있는 만음요화. 의식이 있으면서도 담담하게 혜와만을 바라보고 있는 소운비. 몽중마령은 방문을 닫기 전에 문 앞에 부복한 적무공과, 보이 지는 않지만 그 어딘가에 지키고 있을 몽혼일도에게 말했다. “이제 본 교주는 지고지상의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 힘을 얻고 나면 천하에서 나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리 라. 행여라도 잡인이 나타나 이 성스러운 의식을 방해하지 않도 록 너희들은 최선을 다해 지켜라!”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철문을 닫았다. 타아아앙`─`! “존명!” 문이 닫히고, 우렁찬 복종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먼저, 넋은 살아 있으되 몸은 움직일 수 없도록 남녀의 몸 을 제압한다. 타아앗! 들릴 듯 말 듯한 파공성이 울리며 만음요화와 소운비의 몸이 비칠거리더니, 못에 걸린 옷처럼 늘어졌다. ─`그 다음, 의식이 시작될 수 있는 위치에 모든 사람은 자리 를 잡는다. 몽중마령이 두 손을 천천히 들어올리자, 신기하게도 혜와와 소 운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허공을 밟고 선 것처 럼 그렇게 마주보고 둥둥 떠 있게 되었다. “차앗!” 몽중마령이 팔을 휘두르자, 무옥과 만음요화가 각각 소운비와 혜와의 발 밑으로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 어 무옥은 소운비의 발바닥에, 만음요화는 혜와의 발바닥에 손바 닥을 대고 마치 받들어 주는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몽중마령 자신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는 가부좌를 튼 상태로 소운비와 혜와보다 약간 높은 곳에 떠서 바 야흐로 의식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 * * 그때, 귀회루의 허물어져 가는 담장을 타넘는 일곱 개의 그림 자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건강과 무공을 회복하면서, 한편으로는 때늦기 전 에 도착하기 위해 서두르면서 먼 길을 달려온 색마들과 그들의 동료들. 바로 혼음사의, 탐서랑, 용양도인, 오랑, 한종린, 당미령, 타라하이였다. 한데, 그런 그들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는 청의여인이 있었다. ‘저들이 어째서 이곳에 왔을까?’ 의아해 하는 그녀는 바로 진설영이었다. 격색마회가 떠들썩하 게 전과를 자랑하고 있는 동안, 보타문의 네 비구니에게 남해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살던 곳을 돌아보겠노라고 말미를 얻어 떠나온 것이었다. 그토록 색마들을 증오하고 그들과 싸워 왔던 진설영이었지만, 지금 그들을 보는 그녀의 눈에는 증오의 빛도 찾아볼 수가 없었 다. ‘어쨌든 그들에게는 그들의 싸움이 있겠지……!’ 그녀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고 천천히 검을 다잡으며 걸음 을 내디뎠다. ‘나에게는 나의 싸움이 있는 것처럼……!’ 적무공은 적을 두려워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 지금 은 그렇지 않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두려워하기보다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은 싸움을 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보다도 좋지 않은 감정이 었다. 두려움은 그래도 사람을 긴장시키는 역할이라도 하지만, 당 혹감은 싸움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내 제자를 내놔라!” “옥녀는 어디에 있느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던 이 하잘것없는 중원의 색마 나부랭이들이 살기 등등하게 그를 둘러싸고 으르렁 대고 있는 광경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일곱 명 모두를 단매에 쳐죽이고 싶었다. 그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들 모두를 향해 말했다. “하루살이 같은 것들! 그 자리에서 죽었으면 편하게 눈이나 감았을 것이 아니냐? 그리고 살아남았으면 그저 잠자코 산야에 처박히기나 할 것이지, 죽을 방법을 몰라 이곳까지 기어들었단 말이냐?” 혼음사의가 침을 탁 뱉었다. “네놈이야말로 하루살이 같구나.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르고 네가 감히 우리를 협박하느냐?” 숫자로 볼 때 확실히 적무공은 불리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 름의 계산이 있었다. 자신조차도 그 실력의 끝을 알 수 없는 몽 혼일도와 함께라면 그는 한 시진 정도는 평수를 이루며 이들과 싸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면……! 교주가 저 문을 열고 나오리라. 지고지상의 힘을 소유한 채. 그 는 그때까지만 버텨 주면 되는 것이다. 적무공은 눈을 부라리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몽혼일도! 이자들에게 밀교의 칼맛을 보여 주어라!” 색마들의 눈도 허공을 따라갔다. 하나 허공에서는 대답이 없었 다. 적무공의 눈은 순간 불안해지며 흔들렸다. “몽혼일도!” 역시 대답이 없었다. ‘이런 젠장할! 이 중요한 때에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가 당황해 하고 있을 때, 용양도인이 외쳤다. “저 녀석, 괜히 뻘겋게 치장하고 다니면서 알고 보니 허풍만 심하구나! 내 너에게 중원의 손맛을 보여 주마!” 용양도인은 말 끝에 앞으로 나서며 일장을 휘둘렀다. “단수장(斷袖掌)!” 퍼엉! 그것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때, 몽혼일도는 본각의 후원에 있었다. 오랜만에 그 무덤덤한 본모습을 드러낸 채였다. 여전히 그의 손에는 한 자루 투박한 칼 이 들려져 있었고, 그의 앞쪽에는 진설영이 서 있었다. 진설영이 물었다. “그림을 남긴 것은 당신이었나요?” 몽혼일도의 얼굴 근육이 살짝 비틀렸다. 그것은 웃음이라고 부 를 수 있을 만한 어떤 것이었다. “망설였지. 그건 도박이었소.” 그의 말은 그 사람 자신처럼 짧고 덤덤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었다. 교주의 명을 어기고 다시 진설영을 만나도 될지 그가 무척이나 망설였으며,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그 그림을 남겼다는 그런 이 야기……! 진설영은 눈을 감았다. “당신이 나를 부른 이유는, 내가 당신을 다시 보고 싶어한 그 이유와 같겠지요?” 몽혼일도가 대답했다. “물론!” 말이 끝나는 순간, 두 개의 달빛이 후원에 번뜩였다. 그것은 하 나의 칼이 칼집에서 빼내지는 빛이었고, 하나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 나오는 빛이었다. 이 순간 한 여자는 그대로 검이 되었고, 한 남자는 그대로 칼 이 되었다. 진설영은 다시 눈을 뜨고 몽혼일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그 인생에 드리운 무게로 인해 웃음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하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소리는 없지만 참으로 통렬하고 시원한 웃음이었다. 만일 한 자루의 칼 이나 검이 웃을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웃음일 것이다. * * * 허공에서,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 혜와의 두 다리는 소 운비의 등을 단단히 감고 있었고, 소운비의 두 손은 혜와의 엉덩 이를 꽉 잡고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 다. 그들의 움직임은 조용하면서도 격렬했다. 마치 물속의 수초들 이 흔들리듯이 그들은 흔들렸다. 그들의 입에서는 한 점의 신음 도 새어나오지 않았으며, 정사를 하는 사람들답지 않게 그들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것은 이 정사가 그들 스스로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 문이었다. 그들 몸의 움직임도, 그들 몸 속 정기의 흐름도 그들의 뜻과 무관했다. “으으음……!” 오히려 달뜬 신음을 흘리고 있는 쪽은 허공에 뜬 몽중마령이었 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과 정사를 벌이는 사람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혜와와 소운비의 몸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평온한 얼굴과는 판이하게, 그들의 몸은 절정을 향해 치 달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몽중마령의 입에서 단 김과 함께 진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백원금정이여……, 중앙황로군이여……, 황상태정이여……, 무상태진이여, 상정현로여……, 이 두 사람을 하나로 합쳐 혼합하 여, 태가 순화되고 보가 보존하도록……!” “생사맥결귀영폭침!” 퍼버벙! “대라산수(大羅散手)!” 콰과강! 싸움은 요란했다. 여러 마리의 고양이가 한 마리의 쥐를 가지 고 먼저 잡겠다고 아우성치듯이, 색마들은 적무공을 미친 듯이 몰아치고 있었다. 당미령과 타라하이는 물론이고, 한종린마저도 나설 틈이 없을 정도로 혼음사의와 탐서랑, 용양도인과 오랑 등은 신이 나서 적 무공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적무공은 몰리고 몰린 나머지 언제나 몸을 감싸고 있던 붉은 안개가 거의 흩어지고, 벌거숭이 알몸을 드러낸 채였다. “흥! 그놈 자세히 보니 정말 볼 것 없군그래!” “물건이 그 모양이니 색마라고 나서지도 못하고 무덤 속에서 이십 년을 썩지 않았겠어?” 색마들은 손을 쓰는 한편으로 끝없이 입을 놀려 적무공을 자극 했다. 패색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적무공은 더욱 화가 났다. 자기 자신의 꼴이 한 마리 쥐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 화는 더욱 솟구 쳤다. 평생 고양이가 되었으면 되었지 쥐가 되어 본 적은 없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분노는 사람에게서 인내를 빼앗아 가기 마련이었다. 적무공은 어떻게 하든 시간을 끌며 몽중마령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느닷없이 공세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내가 고작 네놈들의 놀림감이 되려는 줄 아느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적무공을 보면서 색마들은 빙긋이 웃었 다. 그의 분노는 그들이 바라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색마들의 떠들썩한 싸움과는 판 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싸움에는 한마디 말도 없었고, 소리 또한 들릴 듯 말 듯 희 미한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에 이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검후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도제(刀帝)의 싸움이었다. 검후 진설영은 세상에 나와 싸움을 거듭할수록 자신이 점점 냉 정해지고 차분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을 처음 연마하기 시 작한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바란다. 좀더 냉철해지기를, 좀더 싸 늘해지기를, 좀더 한 자루의 검에 가까워지기를. 하지만 정작 그것을 이루는 사람은 점차 그것을 두려워하게 된 다. 이것이 과연 인간의 길인가? 좀더 냉철해지는 것이 과연 인 간이 걸어가야 할 정당한 길인가? 나는 어쩌면 보다 중요한 것들 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타앗! 검과 칼이 얼그러졌다가 떨어졌다. 몽혼일도와 잠깐 얼굴을 마 주했던 진설영은 문득 이 사람 역시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가서는 안 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되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좀더 앞을 향해 치달리는 것으로 자기 가슴속의 의문을 해결하고자 한다. 진설영도, 몽혼일도도 그 런 사람들이었다. 가서 부딪치자! 좀더 강한 것에 부딪쳐 보자! 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모든 질문은 해결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와 같이 순수한 싸움만이 인생의 목적이었고, 그 외의 즐거움이란 모두 바스라지는 마른 꽃잎과 같은 것들이었다. 카아앙! 두 사람은 부딪쳤다. 서로를 향해 거세게 부딪쳤다. 이번에는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스치며 지나갔다. 검과 칼도 서로를 핥았다. 그 순간, 진설영은 자신을 스치고 갔던 세 남자를 생각했다. 소운비. 그는 그녀의 어린 시절을 채워 준 사람이었다. 하나 어 른이 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부정하며 커 나가듯 이 그녀는 소운비를 부정했다. 사소한 불신 때문에 그녀는 그를 마음속으로부터 베어 낸 것이다. 무옥. 그는 여자가 되려 했던 시절의 사람이었다. 하나 한 남자 의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보지 않아야 했고, 많은 것들을 몰라야 했다. 어떤 사람은 그 길을 서슴없이 가기도 했지 만, 진설영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육신을 벰으로 써 그를 마음으로부터 떠나 보냈다. 그리고 이 사람, 몽혼일도. 그와 만나는 것은 이번으로서 세 번 째. 그리고 마지막이었다. 하나 만남의 횟수와는 무관하게, 그 만 남의 무게는 무거웠다. 그는 그녀가 진정한 검후가 되기 위해 마 지막으로 베고 넘어가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베었다. 베는 순간은 짧았고, 검신을 통해 전해져 오는 느낌은 이를 시 리게 했다. 마치 한 장의 얇은 종이를 벤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검은 허공에서 멈추었고, 진설영도 멈추었다. 그녀는 가만히 눈 을 감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벤 것이다! 이겨야 할 상대를 이겨 낸 것이다! “후우……!” 웃음 같은, 혹은 탄식 같은 숨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그뿐이 었다. 쿵……! 그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그가 유언 따위를 남기지 않고 쓰러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유언 따위를 남 길 시간을 주었다면, 그것은 그녀의 검이 날카롭지 못했다는 뜻 이었고, 그렇다면 몽혼일도에게 그만한 치욕과 고통은 없었으리 라. 뚜욱……! 뚜욱……! 그녀의 어깨를 타고 피가 흘렀다. 그녀 자신도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그녀는 자 신이 있었다. 이런 기분이라면, 결코 후회하지 않고 섬으로 갈 자 신이 있었다. 점차로 격렬하게 움직여 가던 소운비와 혜와의 몸이 문득 멈추 었다. 그 정지는 찰나였지만 아주 강렬했다. 그들이 멈출 때, 그 들 밑에 앉아 있던 무옥과 만음요화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들 의 몸으로부터 진기가 빨려 올라간 것이다. 다시 소운비와 혜와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몽중마령은 이를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이제 또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절정을 맞이하며 정지하리라. 그리고 다시 폭풍……! 정지……! 그 반복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될 것이고, 정지의 순간은 점 점 자주 오다가, 마침내 두 사람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기 시작 하며 귀로부터 한 치 위, 이환점이 있다고 이야기되는 그곳이 하 얗게 빛나게 되면, 그때가 바로 그가 기다리던 그때가 되리 라……! 몽중마령은 쉬지 않고 진언을 외웠고, 두 사람의 움직임은 격 렬하기만 했다. “크윽!” 마침내 용양도인의 단수장이 적무공의 복부에 정통으로 맞았 다. 쓰러지는 적무공의 등 위로 탐서랑이 아끼고 아껴 두었던 청 성파의 절기 대라산수가 격중했다. 적무공은 엎드린 채로 꿈틀거리더니, 마침내 패대기쳐진 개구 리처럼 사지를 쭈욱 뻗고 말았다. “끝났다!” 용양도인이 흡족해 하며 외쳤다. 하나 혼음사의가 냉정하게 말 했다. “확인을 해야지!” 그는 다섯 개의 묵침을 적무공의 시신 위로 내쏘았다. 어디까 지나 확인이라는 의미였으므로 그 기세는 그리 세지 않았다. 하 지만 시체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부상을 입은 사람이라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그런 기세였다. 한데……! “차아앗!” 죽은 듯 엎드려 있던 적무공이 느닷없이 튕겨지듯 일어나며 두 손을 번개처럼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허엇! 피해라!” 되돌아오는 묵침들을 보며 혼음사의가 기겁을 하고 몸을 뒤집 었다. 다른 색마들도 마찬가지였다. 적무공의 역습은 실로 놀랍고도 효과적이어서, 색마들이 간신 히 묵침들을 피해 내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십 장 밖으 로 몸을 빼고 있었다. “두고 보자!” 적무공은 울분에 찬 소리를 남기며 막 귀회루의 담장을 넘고 있었다. “저, 저놈을!” 색마들은 이미 그를 쫓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알며서도, 안타까 워 발을 굴렀다. 혼음사의와 용양도인은 그 와중에서도 몸을 날 려 그를 따라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않은 검광이 번뜩였다. “크아아악`─`!” 담장을 넘던 적무공은 그대로 담장에 짙은 핏자국을 남기며 밀 려 내려왔다. 그의 몸에서 나온 피도 그의 모든 것처럼 붉었다. 하지만 피가 붉은 것은 너무나 평범해 보였고, 그의 죽음도 평범해 보였다. 적 무공은 몇 번 몸을 뒤척이다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이번에는 확인해 볼 필요도 없는 죽음이었다. 색마들을 놀라게 한 것은 적무공의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을 가져다 준 사람이었다. “냉면검화!” 그들은 두려움과 분노가 담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 고 그녀의 뒤쪽을 넘겨다보았다. 격색마회의 사람들이 같이 오지 않았는가 해서였다. “걱정할 것 없어요.” 진설영은 적무공의 피가 묻은 검을 눈 위에 닦은 뒤 검집에 꽂 으며 말했다. “나는 내 개인적인 일로 이곳에 온 것일 뿐. 당신들과 싸울 마음은 없으니까.” “그럼 혼자 왔단 말인가?” 혼음사의가 물었다. 진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음사의는 다 시 한 번 물었다. “그럼, 네 사형이 저 안에 있는데 도와 줄 마음이 있나?” 혼음사의가 굳게 닫힌 철문을 가리켰다. 진설영은 천천히 고개 를 돌려 그 철문을 바라보았다. ‘왔다……!’ 마침내 소운비와 혜와의 이환점에서 광채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몽중마령은 두 손을 펼쳐 그들의 머리 위 한 치 높이에 갖다 댔 다. 후끈한 열기가 장심을 타고 밀려오기 시작했다. “오랑……! 오랑……!” 불과 한 시진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된 만음요화가 시름시름 헛 소리를 뱉고 있었다. 아마도 생사지경에 처하게 되자 비로소 정 신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소리도 멈 추게 될 것이었다. 대법이 끝나면, 이 방에 있는 사람들 중 몽중 마령을 뺀 나머지는 껍데기만 남은 시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 다. ─`이제 신성을 획득하고 공무와 하나가 되며, 열반과 대락이 라는 영원한 지복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몽중마령은 점차 자신의 몸 안에 충만해지는 기운을 느끼며, < 기제진경>의 그 구절을 떠올렸다. ‘신성을 획득하고…… 공무와 하나가 되리라…… 공무와 하나 가……!’ 콰아아아앙! 그때, 별안간 시끄러운 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잡인이 왔군!’ 몽중마령은 하마터면 자세를 흐트러뜨릴 뻔했으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문을 부수려고? 암만 애를 써보아라. 그 문은 내가 열고 나 가기 전에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 문을 열고 나갈 때, 너 희들은 바로 죽음을 만나게 되리라……!’ 몽중마령은 최대한 보리심에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장심을 통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의 몸 속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척추를 중심으로 왼쪽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오른쪽은 차갑게 얼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번지더니, 마침내 그 구별이 차츰 사라져 가며 척추 자체 가 경계를 허물고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내 몸 안의 라라나와 라사나가 경계를 허물기 시작하 는구나……!’ 몽중마령은 너무나 기뻐 입을 벌렸다. 그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환희의 함성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혜와……!’ 그때, 소운비는 혜와를 만나고 있었다. 혜와도 소운비를 만나고 있었다. 그곳은 어디인지 몰랐다. 온통 백광이 흐르는, 마치 꿈속 같은 곳이었다. ‘오라버니……!’ 혜와는 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나와 함께 죽겠다니…… 어리석었어요.’ 혜와가 말했다. 소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는걸. 난 혜와가 죽는 걸 보는 것은 죽기 보다 싫었단 말이야.’ 혜와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같이 살아 봐요. 죽지 말고……!’ 소운비도 손을 내밀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두 사람의 손이 따뜻하고 다정하게 서로를 감싸 쥐었다. 몽중마령이 척추에 뜨끔한 고통을 느끼며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헉……! 너! 너……!” 몽중마령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환희 에 빠져 있는 동안, 무옥이 그의 등뒤에 와서 서 있었다. 그의 손 에는 혼혼옥잡에 꽂아 두었던 타다 만 향이 쥐어져 있었다. 무옥 은 그 향의 타고 있는 부분으로 몽중마령의 척추를 찌른 것이었 다. 그것은 결코 큰 타격을 줄 수 없는 아이의 투정 같은 짓거리 였으나,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몽중마령을 무척 놀라게 했고, 그의 연공을 방해한 것이었다. 무옥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어머니한테로 가요……!” 몽중마령은 분노가 치밀었다. 이 넋 빠진 놈이 왜 중요한 순간 에 정신이 깨어 방해를 한단 말인가? 무옥은 손에 쥐고 있던 향을 내던지고 펄쩍 뛰어 몽중마령의 아랫도리에 매달렸다. 그리고 철없는 아이처럼 칭얼대기 시작했 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머니한테로 가요! 가요!” 콰과과광! 잡인들이 바깥에서 철문을 두드려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 다. 이래저래 조급해진 몽중마령은 혜와의 머리 위에 얹었던 손을 들어 무옥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쳤다. “못난 것! 가라!” 퍼억! 수박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옥의 얼굴 위로 묽은 핏 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몽중마령의 아랫도리를 감싸 쥐고 있 던 무옥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무옥은 백치 같은 얼굴로 몽중마 령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쿵! 그는 바닥에 떨어졌다. 여전히 그 백치 같은 얼굴로 몽중마령 을 올려다보는 모습 그대로였다. 몽중마령은 빼앗긴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아들의 죽음에 대해 되짚어 보지도 않고 서둘러 혜와의 머리 위에 다시 손을 얹고 보 리심에 마음을 집중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보리심은 없었고, 그저 수련을 위한 상상 속의 보리심뿐이었다. 그에게는 보리심이란 그저 혈도와 비 슷한 그 무엇일 뿐이었다. 방금 전의 일격에서 받은 고통은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빈두 는 정수리의 연꽃을 향해 차츰 상승해 가기 시작했다. 요란하게 울려대는 바깥의 소리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일순, 그는 자신의 정수리 꼭대기에서 빈두가 폭발하여 찬란한 다섯 줄기의 빛으로 화하는 것을 느꼈다. ‘성취!’ 그는 환호했다. 머리털 하나하나에서부터 발톱에 이르기까지 그 순간 그에게 속하는 모든 것에 궁극의 힘이 흘러넘쳤다. “우아아아아아아아!” 그는 장소성을 터뜨리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혜와아 소운비, 만음요화가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는 충만한 힘을 자랑하기라도 하듯이 힘껏 목청을 뽑아 냈 다. 보라!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방이 그의 장소성에 따라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궁극의 힘이 보여 주는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는 미칠 듯이 기뻤다. 마침내 이룬 것이다. 오랜 기다림을 딛 고 마침내 이루어 낸 것이다. “이`─ 겼`─ 다`─`! 우아아아……!” 환호를 터뜨리던 그는 문득 몸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 다. ‘응?’ 궁극의 힘을 이룬 몸에 허전함이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한 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점차 온몸으로 번져 가기 시작했다. “어, 어?” 이십 년의 세월을 기다려 획득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은 삽시 의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공중에 떠 있을 힘조차 없어서 바닥 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왜 이러지? 어째서 이러지?” 그는 마구 자신의 몸을 두들겨댔다. 사라져 가는 힘을 어떻게 해서라도 잡아 보겠다는 듯이……! 하지만 모든 노력이 쓸모가 없었다.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유가 뭐야? 왜 이러는 거야?” 그는 분노에 빠져 외쳐댔다.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 간 것은 마지막 순간에 무옥이 방해했던 일이었다. 그는 힘이 남 아 있는 동안 무옥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미 죽은 아들의 몸 을 힘껏 발길질 해댔다. “몹쓸놈! 어째서 모든 걸 망쳐 놓은 거야! 내가 얼마나 바랬 던 일인데 네가 무(無)로 돌려 놓은 거야?” 그때였다. 마구 발길질을 하던 몽중마령의 뇌리에 <기제진경> 의 가장 중요했던 구절이 떠오른 것은……! ─`신성을 획득하고 공무와 하나가 되며, 열반과 대락이라는 영원한 지복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공무……! 열반……! 중원인이 말한 공무란 바로 이런 것이 었나? 밀교에서 이야기하는 궁극의 힘은 진짜 힘이 아니고 무로 돌아가는 이런 것이었나? 이 녀석이 방해를 해서가 아니라 혹시 원래 그런 뜻이었는데 잘못 해석한 것이었나?’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끝내 그 해답은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 다. 숱한 종교적 글귀들의 진위를 어찌 세상 사람들이 다 알 수 있 겠는가? 더구나 그와 같이 한 가지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살아 온 사람이 어찌 그 깊고 오묘한 상징과 비유의 숲을 헤치고 진실의 샘을 맛볼 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분노할 뿐이었다. 알 수 없는 글귀로 자신을 현혹한 <기제진경>의 원저자에게. 밀교적 해석으로 진실을 더욱 흐려 놓은 밀교의 고승에게. 마지막 순간 연성을 방해한 죽은 아들에 게. 그리고 세상 모든 것들에게……! 그가 눈을 돌려 방안을 돌아보자, 소운비가 깨어나 자신을 바 라보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신공이 완성되었다면 저들은 모두 죽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저렇게 살아 있다니……! 역시 잘못되었던 거야!’ 몽중마령은 불같이 노했다. 그의 몸에서는 시시각각 힘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종내에는 본래의 무공조차 사라지고, 말 그대로 공무가 될 것이 뻔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을 때, 가증스러 운 세상의 무리들을 쓸어 버리고 싶었다. 소운비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실패했소.” 몽중마령은 크게 고함쳤다. “아직 너는 죽일 수 있어!” 그는 온 힘을 다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뻗어 나오는 그의 주먹에 실린 힘은 방안의 미약한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충분히 소운비를 죽일 수 있는 그런 힘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허둥지둥 그것을 피했으리라. 하지만 이미 죽 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돌아온 소운비는 차분하게 그의 주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주먹에 실린 죽음의 힘을 담담히 응시하고 있었다. 소운비는 손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반이 부러진 향이 하나 얹혀 있었다. 그가 익힌 무공은 별로 없지만, 혼음사의에게서 전수받은 암기 술만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적절한 힘을 실어 적절한 순 간에 적절한 부위를 가격하면, 그것이 비록 연약한 풀잎이라고 하더라도 적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는 그 암기술을. 피유웃! 주먹 끝에서 바람이 일 때, 반 토막의 향은 은은한 향기를 남 기며 그 바람을 가르고 날아갔다. “……!” “……!” 털썩……! 긴 침묵 뒤에 몽중마령은 이제 그만 쉬어야겠다는 듯이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그의 미간에는 마치 점처럼 보이는 작은 향 토막이 꽂혀 있었 다. 그것은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그 치명상이 아니더라도 그는 끝까지 공격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의 몸에는 한 올의 힘도 남 아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발을 내려다보았다. 시력조차 약 해져서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손 도 발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궁금하군.” 몽중마령이 문득 중얼거렸다. 소운비가 물었다. “무엇이?” “어떤 것이 진짜 공이고 무인지 말이야……” 몽중마령은 보이지 않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 그는 정말 궁금해졌다. 만일 무옥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래도 지금처럼 한낱 먼지로 화해 가는 자신을 보게 되었을까? 아 니면 정말 무소불위의 힘을 얻은 지상 최강의 강자가 된 자신을 보게 되었을까?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젠 틀렸어……!” 손이 부러져라고 철문을 두들겨대다가 몸까지 던져 보았던 혼 음사의는 낙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 어떻게 든 몽중마령의 신공 연성을 방해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하나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은 끝내 열 수가 없었고, 방금 전에 문 틈으로 새어나온 몽중마령의 웃음 소리는 모든 것 이 끝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탐서랑이 겁에 질려서 말했다. “어,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지 않나?” 혼음사의는 그를 힐끔 돌아보더니 고집쟁이 영감처럼 그 자리 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못 가! 갈 사람은 어서 가!” 용양도인이 어서 물었다. “여기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는 어마어마한 강자가 되어서 나올 텐데?” “죽더라도 내 제자의 시체는 수습해 주고 가야겠어!” 입을 한 일 자로 굳게 다물고 앉은 혼음사의 옆에 또 한 사람 이 털썩 주저앉았다. 타라하이였다. 그 옆에 당미령도 앉았다. 그 리고 오랑도 앉았다. “고의문의 대가 끊기게 생겼군!” 한종린이 중얼거리며 혼음사의 뒤에 앉았다. 화가 난 듯이 입 을 꽉 다물고 있던 용양도인이 불쑥 말했다. “나도 좀 늙어서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며느리의 시체는 수습해 줘야지!” 말이 끝났을 때는 용양도인도 오랑의 뒤에 앉아 있었다. 진설 영은 색마들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돌아보다가 한옆에 정좌하고 무릎 위에 검을 올려놓았다. 오직 탐서랑만이 어정쩡하게 서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혼음 사의가 꽥 소리를 질렀다. “아, 뭘 해! 가려면 어서 가고, 앉으려면 어서 앉을 것이지.” 탐서랑이 주춤주춤 말했다. “그, 그게 아니라……!” “뭐가 어쨌단 말이야? 갈 테면 가게. 아무도 자넬 욕하지 않 아. 우린 어차피 내키는 대로 살아 온 사람들이 아닌가?” 탐서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아니라, 이 사람들아! 나도 뭔가 말을 한마디하고 앉아 야 하잖아. 한데 적당한 이유가 생각나질 않아!” 색마들이 그를 멀거니 올려다보다가 일제히 소리쳤다. “그냥 앉아!” 탐서랑은 제깍 그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모두 굳게 닫힌 철문을 바라보았다. 한 방울, 한 방울 흘러가는 시간이 천금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끼이이이잉……! 마침내 그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 그 문을 통해 그가 나타나기를 모두가 바라기는 했으나, 모두 가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 사람이었다. “소운비!” 제 발로 앉았던 모든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문을 열 고 나오는 순간 그들을 발견한 소운비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색마들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그에게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나 소운비가 그들 을 막았다. “오지 말아요!” 그들은 한 가닥 불안감이 남아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혼음사의가 물었다. “왜 그러나?” 잠깐의 사이를 두고, 소운비가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혜와랑, 만음요화랑……! 우린 모두 옷이 없어요. 아무거나 걸칠 것들을 이쪽으로 먼저 던져 주십시오.”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귀회루. 하늘마저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의 새벽에 느닷없이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메아리쳤다. 후기(後記) “타라하이, 이제 어쩔 겁니까?” “미령과 함께 떠나네. 당문에서는 아무래도 우리의 혼인을 허 락하지 않을 테니……! 나 역시 황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고 말 이야.” “하지만 당신의 눈은 당문이 아니고서는……!” “난 눈이 없어도 좋다니까! 그건 소 형도 마찬가지가 아닌 가?” 소운비는 웃었다. 타라하이도 웃었다. 그리고 당미령과 그, 두 사람은 보기 좋은 모습으로 부축하고 부축 받으며 귀회루를 떠나갔다. 진설영은 소운비 한 사람만의 배웅을 받았다. 나루터까지의 멀 지 않은 길을 두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는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쪽배가 기다 리는 나루터에 도착했을 때, 진설영이 한 발을 배 위에 올려놓다 말고 갑자기 그를 불렀다. “사형!” 그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응?” 사형. 오랜만에 들어 보는 호칭이었다. 진설영의 얼굴에는 그 옛날을 돌아보게 하는 따뜻한 미소가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그 녀는 별안간 검을 뽑아 자신의 머리채에 갖다 댔다. 사락! 그녀는 한 움큼의 머리칼을 소운비의 손에 건네 주고 말했다. “이제 머리를 기른 내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 거예요. 기념 으로 간직해 주세요. 사형을 위한 기념이 아니라 나를 위한 기념 으로.” 진설영은 쓸쓸하게 웃으며 배에 올랐다. 쪽배가 기슭에서 멀어져 갈 때, 소운비는 외쳤다.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이라도 좋으니, 나중에 다시 만나자!” 진설영이 대답했다. “강호의 무명소졸은 만나기 힘들 거예요. 나는 일문의 장문인 이니까!” 배는 기슭에서 멀어져 갔고, 두 사람의 마음은 오랜 시간을 건 너 비로소 가깝게 마주섰다. 그것은 정녕 따스한 이별이었다. 가지 않아도 좋을 사람들은 먼저 떠났는데, 정작 가야 할 사람 들만 뭉그적거리며 남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소운비와 혜와는 짐짓 짜증을 내며 말했다. “왜들 안 떠나시고 그러십니까?” 색마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허! 누가 안 떠난다더냐? 간다, 곧 간다고.” 혼음사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한데 너희들은 어쩔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소운비와 혜와는 서로를 마주보며 대답했다. “우린 여기서 살 거예요. 폐가이긴 하지만 가꾸고 고치면 두 사람이 살기에는 족할 거예요.” 소운비는 싱글싱글 웃으며 혼음사의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쩌실 거죠? 계속 색마 노릇을 하실 겁니까?” 혼음사의는 그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흥! 사람이 아무리 개심하려고 해도 본성이야 어쩔 수 있겠 느냐? 흠……! 하지만 이 친구가 늘그막에 외롭다고 하니 둘이서 함께 쓰러진 고의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 볼까 한다만……!” 한종린이 헛기침을 했다. “내가 이 친구 사람 만들기로 작심했지!” 용양도인이 참견을 했다. “사람을 만들지, 같이 색마가 될지는 두고 봐야 아는 게지!” 혼음사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쌍음사의(雙淫邪醫)라……! 그거 괜찮겠는데? 그럼 그쪽 풍 월도문 패거리들은 어쩔 건가?” 용양도인이 어깨를 우쭐거렸다. “나도 한가족을 이루었으니 어디 조용한 데 파묻혀서 여생을 즐겨 봐야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다정하게 어깨를 마주대고 있는 만음 요화와 오랑이 있었다. 용양도인은 아직도 만음요화라는 며느리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지 잠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문득 말했다. “어디 시골에 가서 말이야! 보송보송한 애들을 모아 놓고 서 당이나 차렸으면 좋겠어!” 만음요화가 얼른 말했다. “큰 총각들도 받으면 어떨까요?” 순간 용양도인 일가족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들은 아 무래도 쉽게 평화로운 가족을 이루기는 힘들어 보였다. 만음요화가 오랑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며 탐서랑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쩔 거죠?” 탐서랑은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난 전부터 생각해 둔 사업이 있소.” “뭔데요?” “기루를 경영해 볼 생각이야! 중원의 모든 풍류객들이 낙원이 라고 생각할 만큼 편안하고 즐거운 그런 기루를……!” 그는 자신이 펼칠 사업에 스스로 감동한 듯이 눈을 감고 말했 다. “기루의 이름은 화련원(嬅蓮院)이라고 지을 거요. 중원 어디에 세우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기루를 발견하거든 놀러들 오시오. 싸게는 못해 줘도 바가지는 씌우지 않으리다.” “자, 자!” 소운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모두들 앞으로 하실 일들이 있으시니, 뭘 망설이십니까? 날 이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들 길을 떠나셔야지요.” 에누리없는 축객령에 투덜거리며 색마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음사의가 쏘아붙였다. “넌 도대체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그렇게 우리를 못 쫓아 내 서 안달이냐?” 소운비가 혼음사의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그의 눈 은 혜와를 힐끔 보고 있었다. “아시잖아요. 정말 오랜만인데……! 방해하지 마시고 어서 가 세요.” 혼음사의는 기가 막혀 이별의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놈이 진짜 색마야!” 운하를 건너는 쪽배 위에서 문득 혼음사의가 중얼거렸다. 사람 들이 물었다. “누가?” “소운비, 그놈 말이야! 글쎄 날더러 혜와랑 둘이 있고 싶으니 어서 나가라잖아? 그게 그 뜻이 아니고 뭐야? 그 험한 싸움을 하 고서도 그 생각뿐이라니……! 그게 색마가 아니면 누가 색마겠 어?” 투덜투덜대던 혼음사의가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그놈이 오늘날의 색마가 된 것은 다 내 탓이렷다! 그럼 색존은 내가 되는 게 확실하지?” 오래된 내기를 다시 끄집어 낸 그의 느닷없는 말에 색마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만음요화가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그가 그렇게 된 데는 내 영향도 적지 않아요. 어떻게 마지막 에 데리고 있었던 게 당신이라고 꼭 당신이 색존이 될 수 있어 요?” 탐서랑도 덤볐다. “아직 약속한 유월은 멀었잖소? 그때까지는 더 기다려 봐야 지. 아직은 완전한 색마라고 말할 수 없어!” 용양도인도 헤벌쭉 웃었다. “그렇지. 이번에야말로 내게도 기회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 어?” 혼음사의는 인상을 찡그리다 크게 인심을 쓰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았어! 유월까지 기다려 보지.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을걸……?” 한종린과 오랑은 색마들의 수작에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한겨울이지만 진회하는 여전히 흥청거렸다. 아직 해가 서쪽 하 늘에 머무르고 있는 중인데도, 강 위에는 벌써 오색 영롱한 불빛 이 아롱거리고 있었다. 쪽배는 운하 건너편에 도착하기까지 숱한 홍등선의 사이를 헤치고 나가야 했다. 강 건너에 도착하자 유곽에서 새어나오는 웃음 소리와 노랫소 리 또한 요란했다. 뱃삯을 지불하고 돌아서던 혼음사의가 문득 저 너머 귀회루가 있음직한 곳에 시선을 던졌다. 한종린이 그에게 물었다. “뭘 생각하나?” “그 두 사람 말이야……!” 혼음사의가 중얼거렸다. “궁금해지는군그래. 이렇게 요란한 환락경 한가운데서, 서로 의좋게 끝까지 살아 갈 수 있을까?” 한종린이 말했다. “뭐, 꼭 진회하만 그런가? 세상 어디나 다 유혹의 늪인걸… …!” “내 말이 그 말이야.” 두 사람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앞서가는 일행의 뒤를 따라 발 걸음을 재촉했다. * * * 소운비와 혜와. 두 사람은 진회하가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은 담벼락에 올라앉 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마주댄 어깨로 전해져 오는 온기는 이것 이 꿈이 아닌 실제임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혜와……!” 소운비는 오래오래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어렵사리 끄집어 내었다. “사실은 혜와를 다시 만나고 나서부터…… 이 이야기를 꼭 해 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 털어놓지 않고서는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얘긴데요?” “실은……!” 소운비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심정으로 부끄러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혜와가 배신한 줄 알았을 때 색마라도 되어 버리겠다는 심정으로 방탕하게 살았던 것을. “그래서…… 난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그만 근처의 와사 로 가서……!” 그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혜와의 눈치를 계속 보았고, 그녀가 혹시 화를 내거나 울어 버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혜와의 얼굴은 점차 변해 갔다. 처음 엔 표정이 굳더니, 그 다음엔 붉어졌고, 마지막엔 창백해졌다. 그것을 본 소운비의 마음은 점차 불안해졌다. ‘혹시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순간 이야기를 털어놓는 자신의 입이 너무 부끄럽다는 생 각이 들었다. 혜와가 음양인이나 다름없이 변했을 때, 그녀는 자기 탓이 아 니었던, 아니, 죄라고도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얼마나 괴로워하며 맴돌기만 했었던가!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의 사이라는 것은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어렵고 조심스럽기도 한 것 이다. 한데 소운비 자신은 그저 어린아이가 비싼 그릇을 깬 사실을 털어놓는 정도로 너무 쉽게 그 이야기를 뱉고 만 것이다. ‘난 너무 뻔뻔하구나! 어떤 여자들은 정조를 더럽힌 사실 때 문에 목을 매달기도 하는데, 나는……!’ 그는 더 이상 이야기를 끌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혜와의 대 답을 기다렸다. 하나 혜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화를 내 며 떠나 버리는 것보다도, 그녀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이 깊은 상처를 준 것이 아닌가 싶어 그는 더욱 두려웠다. 혜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입을 열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녀는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과는 달리 두세 명의 아내를 거느 린다거나 외도(外道)를 하더라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지금 세상의 법도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숙한 아내란 그런 것들을 잘 참고 인내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녀는 자기 자신만은 특별하 기를 바랬다. 그래도 소운비는 그녀와 생사를 넘나들며 한 몸이 된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떻게 한 순간의 일로 다른 여자 를 서슴없이 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쉽게 용서한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런 용서는 그녀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짓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 이었다. 울컥 솟아오르는 서러움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 없어지라고 할까?’ 모진 생각을 하며 그녀가 힐끔 옆을 돌아보았을 때, 소운비는 곧 죽을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두려움, 불안, 안타까움, 그리고 축 처진 어깨……!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추면인의 신분으로 그의 주변을 맴돌 때, 몇 번이고 정체를 밝히고 싶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이렇게 외로워하는 그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잔뜩 움츠려 있던 혜와의 어깨가 스르르 풀렸다. 그녀는 자신이 이 사람을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그것이 여자의 도리이기 때문도 아니고, 어차피 세상일이 그 렇기 때문도 아니고, 오직 그녀 자신이 당장은 이 사람을 떠나서 는 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좋아! 용서해 주겠어.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러면……!’ 그녀는 당장 소운비의 품으로 뛰어들고 싶은 것을 눌러 참으며 천천히 손을 들어 저물어 가는 해를 가리켰다. 그리고 소운비 쪽 은 보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궁 예( )의 이야기를 알아요?” 소운비는 고개를 들고 그녀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혜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아주 옛날에는 하늘에 해가 열 개나 있었대요. 하늘에 해가 여러 개면 좋을 것 같지만, 사람들은 너무 뜨거워서 결국 천제님 께 그것들을 없애 달라고 부탁했다지요? 신궁 예가 내려와 그 해 들을 모두 쏘아뜨리고 요임금님의 지혜로 오직 하나만이 남았다 더군요.” 혜와는 손을 내리고 고개를 떨구더니 작은 소리로 조단조단 이 야기했다. “해는 하나뿐이기 때문에 소중하고, 숭배받고, 사랑받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해처 럼 되자고 하는 것이 뭐가 나쁠까요? 해가 둘인 것은 싫다는데 그것이 정말 나쁜가요? 만약 내가 당신말고 다른 해를 가지고 있 다면, 당신은 좋겠어요? 하늘의 해도 자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오 직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렇게 아낌없이 햇빛을 나눠 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소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소망은 결코 과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을 들어주지 못하고서야 어찌 감히 그녀를 책임 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그런 식으 로 속인다면 그것은 백 명의 여자를 속인 색마보다 나을 것이 없 을 것이다. 혜와는 천천히 소운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저녁 햇살 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꺼질 것 같 은 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이 소망을 깨지 마세요.” 그것은 간절한 용서의 한마디였다. 소운비는 크게 고개를 끄덕 였다. 앞으로 어떤 회의와 불신이 찾아오더라도, 해가 하나인 것이 변함없듯이 두 사람도 변함없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려운 일 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배겨 낼 수가 없다는 것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소운비는 말없이 그녀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 을 굳게 쥐었다. 그의 손에서 그녀의 손으로 후끈한 열기가 번져 갔다. 백 마디의 맹세보다도 훨씬 단단하게 두 사람을 이어 줄 그런 열기였다. 혜와의 얼굴에 비로소 잔잔한 웃음이 번지더니, 그녀의 손에도 힘이 가해졌다. 담벼락 위에서 두 사람은 굳게 손을 맞잡았고, 같은 곳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오직 하나뿐인 해가 온통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장관이었다. 그리고 웃음을 파고 정을 사는 진회하의 변함없는 풍경이 그 하늘 아래 펼쳐져 있었다. 물에는 빛깔이 없다. 붉은 등(燈)을 들고 들여다보면 붉은빛이요, 푸른 등을 들고 들 여다보면 푸른빛일 뿐이다. 달이 휘영청 뜬 밤은 온통 달빛이며, 매화락(梅花落) 만발한 날은 매화 빛인 것이다. 진회하(秦淮河)의 물빛은 그래서 찬연한 오색이라 말할 수 있 었다. 사람들의 삶도 그와 같아 본래는 아무런 색깔도 없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색깔들을 머금게 되는 것이다. 도인은 도인의 색을. 범부는 범부의 색을. 색마는 색마의 색을. < 大 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