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룡지회(金龍之會)편 제 9 장 물은 마루 밑을... 물은 마루 밑을 굽이쳐 흐르나니 사천성 과 섬서성 은 대파산 (大巴山) 줄기를 따라 성자산(星子山), 반 가산(盤家山) 등 새들도 날아 넘기 힘들 정도로 험준한 산들이 잇달아 서서 경계를 이루고 있어, 기후와 풍토가 마치 다른 나라에라도 온 것 처럼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겨울 내내 습기차고 따뜻한 사천 지역과 달리, 섬서성 은 건조하면서 살을 엘 듯한 한파(寒波)가 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산 하나 사이로 보이는 변화치고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흑저 일행은 옛적 제갈량 (諸葛亮)이 위(魏)나라로 출정(出征)한 길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나왔다. 그리고 얼어붙은 들판을 가로질러 중원제 일가가 있는 예양부를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올해도 결국 농사를 짓기에 충분한 비는 내리지 않았다. 초봄 파종할 시기를 놓치고, 담가(擔架)로 져서 나른 물로 겨우 파종을 한 밀과 보리는 여름의 열기에 모두 타 죽어 버렸다. 가을에만은……. 농부들은 애타는 심정으로 가을보리의 파종을 가능케 할 비를 기다렸 지만, 하늘은 저주스러울 정도로 푸르게만 흘러갔다. 강북 (江北)의 천수백만에 달하는 백성들이 다음해 봄까지 먹을 것이 라고는 아무것도 마련해 두지 못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한다는 절망적 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의 유민(流民)이 살아 남기 위해 고향의 땅을 떠 나, 남으로 남으로 행렬을 이루었다. 무능한 황제를 탓하는 원성은 하 늘을 찌르고, 곳곳의 농민들이 쇠스랑과 낫을 들고 나와 초적(草賊)의 무리를 이루어 떠돌았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아무런 구휼책(救恤策)도 없이 방관하고, 황제는 환관에 둘러싸여 도사들의 방술(方術)만 탐닉하고 있어 바야흐로 굶주 림에 분노한 농민들이 폭도로 돌변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한중 지역은 전통적으로 곡창지대(穀倉地帶)로 유명했다. 이곳의 소출(所出)에 강북 의 목숨이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흑저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황량한 벌판만이 펼쳐져 있고, 어쩌다 보이 는 인가는 주인이 떠나버린 빈집이었다. 황거지가 투덜거렸다.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 이러다간 굶어 죽겠다! 가도 가도 사람 사는 곳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사람이 보여야 동냥을 하든 말 든 할 것 아냐!” 엽검영이 말 위에 높이 올라 탄 채 따라오다가 곱지 않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영감은 그렇게 돈을 많이 가졌는데 사 먹을 생각은 않고 아직도 동 냥할 생각만 하는 거요?” 황거지가 입술을 일그러뜨려 묘한 인상을 지었다. 엽검영을 불쌍히 여 기는 듯한 인상. “부자가 동냥을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거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얻 어먹어야지 사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본령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지! 그래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 할 수 있는 것 이니 말이다. 그래서 공자(孔子)님도 임금은 임금답게(君君), 신하는 신 하답게(臣臣), 아버지는 아버지답게(父父), 아들은 아들답게(子子) 행동 하는 것이 정치(政治)의 이상(理想)이라 하셨으니……, 거지는 거지답 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 개개라고나 할까?” 엽검영이 기가 막힌 듯 입을 다물 줄을 모르다가 한참 후에야 할 말이 생각났는지 황거지를 비꼬았다. “그렇게 문장에 밝으신 분이 왜 거지짓이래?” “거지가 어때서?” “인간세상의 기생충 아니겠어?” “기생충? 기생충은 너처럼 능력도 없으면서 낯짝 하나 믿고 여자나 등쳐먹는 그런 놈들, 관작(官爵)이나 달고서 불쌍한 백성들 굶어 죽고, 목말라 죽는 줄도 모르고 주색(酒色)에 뒹구는 탐관오리들이 기생충이 지, 나처럼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하루 한 끼로 만족하는 그런 선 량한 거지에게 적당한 이름이 아냐!” 엽검영의 얼굴이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붉어졌다. “내가 무슨 여잘 등쳐먹었다고…….” “그럼 아닌가?” 황거지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엽검영은 그 게슴츠레한 눈이 마치 자 신의 가슴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흠칫했다. 황거지는 더 말할 생각이 없는지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가만히 그 눈 치를 보다가 그냥 지기는 싫었던 엽검영이 통비원을 불렀다. “이 영감이 계속 헛소리하는데 자넨 그냥 보고만 있나?” 통비원이 눈을 뒤룩거리며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두 분 다 힘도 좋으시오. 난 배가 고파 말할 힘도 없구먼…….” 그 말을 듣자 엽검영은 갑자기 배가 더욱 고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영감이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배만 더 고프잖소!” 황거지도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배가 고픈 것 은 그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벌판이었다. 비가 제대로 왔었다면 이 벌판에 가득 낟가리가 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칼날 같은 바람만이 간혹 보이는 빈 집과 앙상한 버드 나무들을 할퀴고 지나갈 뿐,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 다. 황거지가 다시 투덜거렸다. “굶어 죽기 전에 갈증으로 먼저 죽겠다. 수로(水路)는 말라 먼지만 날 리고, 그 흔한 우물 하나 보이지 않으니……. 젠장, 물주 하나 잘못 선 택한 죄로 늘그막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엽검영이 멀리 산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산에 샘이 있지 않을까?” 황거지의 눈이 빛났다. 산이 있으면 샘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지독한 가뭄이라도 샘은 마르 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물이니 말이다. “가 보자!” 일행은 방향을 바꿔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엽검영이 다시 앞을 가리켰다. “멀리 갈 필요 없겠군! 저기 오는 사람들에게 물을 좀 얻으면 될 것 같아!” 과연, 산쪽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랴--!” 엽검영이 말을 달려 그들을 향해 갔다. 황거지가 눈을 가늘게 떠 멀리 다가오는 사람들을 살피더니 피식 웃었 다. “저놈, 저렇게 사람을 볼 줄 모르고도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신기 하군! 재주도 없고 성질도 개판인데, 운이 좋은 건가……?” 그러더니 통비원을 향해 말했다. “손 좀 풀어 둬! 아무래도 한 판 해야 될 것 같다” 통비원이 고개를 들어 황거지를 보았다. 그 눈에 떠오른 의문에 답하 기라도 하듯 황거지가 중얼거렸다. “이 흉년에 건장한 사내 십여 명이 왜 돌아다니겠어? 아녀자를 동행 하지 않은 걸 보면 유민도 아니고 산에 가서 나무껍질 벗기는 건 여자 들을 보내도 충분하니……. 저건 도적이야!” 과연, 저만치 달려가던 엽검영이 갑자기 말을 돌려 미친 듯이 되돌아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날아오는 화살들! 엽검영이 용케도 화살에 맞지 않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도, 도, 도, 도적들이야--!” 이때 화살 하나가 말에 맞았던 모양인지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비명을 지르고 엽검영이 굴러 떨어졌다. 엽검영은 칼을 빼 들고 도적들과 엉켜 토닥거렸다. 도적들도 아주 맹 탕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칼을 제법 쓰는 자가 패거리 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엽검영 의 어설픈 검술을 간단하게 흩트려 버리고는 허벅지에 일 검을 가해 꼬꾸라뜨렸다. 서너 명이 와하고 달려들더니 금세 결박을 지었다. 통비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황거지를 돌아보았다. “어쩌죠?” 황거지는 어느새 저만치 뒤에서 말없이 땅만 보고 오던 흑저의 등뒤에 숨어 고개만 내밀고 말했다. “자네들이 알아서 해야지 내가 뭘 어쩌나?” 통비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을 돌려 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쇠스랑 들고 나선 초적들이라 해도 서너 명은 몰라도 그 이 상은 혼자 상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도적들 중에는 칼을 쓰는 놈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통비원이 도망가지 않는 것은 흑저가 뒤에 있기 때문이었다. 막강한 무림고수들을 개 패듯 패 죽인 무지막지하게 강한 고수가 뒤에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엽검영을 나포한 도적들이 의기양양하게 다가오더니 그 중 우두머리쯤 으로 보이는 중년의 도적이 나서서 말했다. “네 상전이 이미 꿇었으니 반항하지 않고 짐을 내놓으면 목숨은 부지 시켜 주겠다.” 엽검영 혼자 말에 올라타고 나머지는 터덜터덜 걷고 있었으니, 흑저들 이 마치 엽검영을 수행하는 하인들같이 보였던 모양이었다. 통비원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엽검영에게 말했다. “혹시 가진 것이 있으면 줘!” 땅바닥에 넙죽하니 뻗어 있던 엽검영이 고개를 들어 통비원을 보았다. 어이없다는 눈으로 한참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없어!” 통비원이 중년인을 보았다. “없다는데?” 살점 하나 없이 깡마른 데다 충혈된 눈자위만 댕그래서 얼핏 보기에도 굶주려 보이는 사내 하나가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것들이 장난치나? 돈도 없는 것들이 어떻게 말을 타고 하인을 데 리고 다녀?” 엽검영이 중얼거렸다. “옷 사고, 말 샀는데 남을 돈이 어디 있어……?” 엽검영을 누르고 있던 사내가 들고 있던 몽둥이로 등짝을 후려쳤다. “이놈이 나불거리긴……. 죽고 싶어? 정 안 내놓겠다면 하는 수 없다. 너희들이라도 삶아 먹어 버리는 수밖에!” 중년인이 명령했다. “껍데기를 벗겨 봐! 쇠부스러기 하나라도 나오면 몽땅 죽여 버린다!” 점점 흉흉해지는 분위기에 약간 겁을 먹은 통비원이 흑저를 슬쩍 돌아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여태 아무 말없이 서 있던 흑저가 손을 움직 이는가 했더니 스스로 옷을 벗고 있는 것이다. 이내 양손에 감은 흰 천만 빼고는 알몸이 된 흑저가 벗어 놓은 검은 가사를 들어 도적들에게 내밀었다. “살펴보고 돌려주시오. 돈이 되는 것도 아니니…….” 흑저의 무공을 아는 통비원과 황거지, 엽검영은 물론이고 설마 먼저 옷을 벗어 줄 줄은 몰랐던 도적들까지 아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황거지가 입을 벌리고 서 있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야 뭐, 거지니 뭐가 있겠어?” 금세 그도 알몸이 되었다. 옷을 들어 도적들 앞으로 던지려던 그가 흑 저를 보고 눈을 부라렸다. “뭘 봐? 너 이쪽에 취미 있냐?” 흑저는 황거지가 옷을 벗을 때부터 그 알몸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다. 흑저가 짧게 말했다. “꽤 단련된 몸이군!” 황거지가 흠칫했다. 흑저가 본 것은 그의 근육이었다. 얼굴로 보아서는 오십 줄의 노인인데 그의 골격과 근육은 삼십대의 그 것처럼 건장했던 것이다. 황거지가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가진 밑천이라곤 몸 하나뿐이니 이거라도 건사를 해야 하거든! 그보 다 네 몸이야말로 꽤 단련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그 말에 흑저의 알몸으로 시선을 모았다. 과연 황거지의 말처럼 흑저의 온몸은 꽉 짜여진 근육의 덩어리였다. 그 땅딸막한 몸이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는 우람한 근육으로 가득 차 있 는 것이다. 게다가 그 종(鐘)처럼 단단해 보이는 몸에 가로세로 그어지고 새겨진 상처들 원래의 살갗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헤집어 놓고 있었다. 그 중에도 가장 큰 상처가 아랫배의 기해혈 (氣海穴)에 있었다. 거대한 쇠못이라도 꽂힌 것처럼 벌겋게 부어오른 기해혈 . 그 주위에는 거무스름한 반점이 손바닥 하나 정도의 넓이로 퍼져 있었 다. 그 단단한 몸과 상처만 보아도 웬만한 사람은 기가 질려 버릴 정도였 다. 도적 중 중년인이 나서서 말했다. “보통 분들이 아닌 듯한데 이렇게 우리 동가채(銅架寨)의 체면을 살 려주시니 감사하오. 원래 이 정도로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녹림 (綠林) 의 도리가 아니오만, 흉년으로 식솔들은 늘었는데 사정은 점점 못해져 이렇게까지 되었소. 짐을 뒤지는 것을 용서하시길……!” 그러면서 수하들에게 손짓하고 한편 통비원을 보는 것이다. 그마저 옷을 벗으라는 눈치였다. 황거지가 다급해졌다. 그는 전날의 사천 표국 강탈 건으로 품속에 금원보가 남아 있었던 것 이다. 믿었던 흑저는 그냥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려는 눈치고, 설마 거지 옷까지 뒤지랴 해서 금원보를 넣은 채 자신 있게 벗어 보였던 옷가지 를 뒤지려 하니 큰 일이었다. ‘거지 누더기까지 뒤지려 하다니 치사한 것들……’ 그때 통비원이 뒤로 튀어 달아나려 했다. 사실은 그도 금원보를 쓰지 않고 품속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인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통비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럴 줄 알았지!” 쉿--! 하얀 선이 뻗었다. 저만치 달리던 통비원이 갑자기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윽--!” 중년인이 소리쳤다. “끌고 와!” 도적들이 통비원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왔다. 통비원의 장딴지에는 수리도 (袖裏刀) 하나가 꽂혀 있었다. 물론 중년 인이 던진 것이다. 중년인이 통비원을 향해 다가가며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쇠부스러기 하나만 있어도 죽인다고 했지!” 여러 말을 않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좌수(左手)에 든 칼이 번쩍 치켜졌 다가 내리쳐졌다. 통비원이 눈을 질끈 감았다. 깡--!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칼날 반토막이 허공에 떴다. 통비원이 간신히 한쪽 눈을 떠보니 근육으로 뭉쳐진 우람한 흑저의 뒷 등이 가득 들어왔다. 중년인은 어느새 통비원과 그 사이를 가로막은 흑저를 노한 눈으로 보 더니 천천히 몇 걸음 물러나서 거리를 유지했다. 그 소맷자락 사이로 이리의 이빨처럼 새하얀 수리도 의 끝이 보였다. 흑저는 알몸을 가리지도 않고 그를 향해 정면으로 섰다. “생명은 해치지 않는 것이 좋겠소만…….” 방금의 격돌로 왼손에 감은 흰 천이 끊어졌는지 가닥가닥 풀려서 흘러 내리고, 그 사이로 검은 광채를 은은히 뿌리는 박룡수가 드러났다. 중년인의 시선이 그 손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흑저의 전신을 훑었 다. “상처는 무사(武士)의 역사(歷史). 몸에 그만한 역사를 새긴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거야말로 사기지!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던 것 을…….” 그가 두 손을 가슴앞으로 반쯤 들어올렸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수리도 의 날이 번뜩였다. 양손에 하나씩 두 자루, 묘하게도 무명지와 약지 사이에도 하나씩을 끼워 들고 있어 한꺼번에 네 자루의 수리도 를 들고 있는 그였다. “우리 동가채가 지금은 퇴락했다 해도 전통 있는 녹림십팔채 (綠林十 八寨)의 일원으로 녹림 도의는 지킨다. 재주가 모자람이 증명되면 두말 않고 물러날 것이요, 그렇지 않을 때는 너희가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 다.” 황거지의 눈이 약간 달라졌다. 여태 굶주림에 못 이겨 쇠스랑 들고 나온 초적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법 뼈대있는 소리를 해대는 것을 보면 적어도 수리도 의 중년인은 녹림 도(綠林徒)가 분명했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중년인과 흑저의 거리는 점차 벌어져서 이제는 십 여 보 떨어져 있었다. 수리도 를 비롯한 암기 를 사용하기에 적당한 거리였다. 흑저는 어떻게 보면 일부러 그 정도의 거리를 만들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권법으로 싸우는 적정거리는 세 걸음 정도였다. 말하자면 발을 뻗어 가격을 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이상 벌어지면 아무래도 다가가는 시간이 걸리고, 적(敵)에게 밀착 하는 데에 신경을 분산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 동안에 적의 공격을 피 하거나 막아야 한다는 문제도 있는 것이고……. 게다가 흑저는 극도로 거리를 좁혀 세 치 이내의 거리에서 밀착해 싸 우는 것이 특기가 아닌가! 황거지가 이렇게 거지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이 중년인이 호선(弧 線)을 그리며 손을 뻗었다. 쉬익--! 바람을 끊는 휘파람 소리가 울리며 하얀빛이 흑저의 목덜미로 날아갔 다. 흑저가 손을 내밀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땅! 그의 목덜미로 날아들던 수리도 가 박룡수에 맞아 튕겨 올라갔다. 쉭! 그 뒤로 바짝 붙어 또 한 자루의 수리도 가 허공을 가르고, 연속적으 로 두 자루가 더 중년인의 손을 떠났다. 달인(達人)의 경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이십 년은 수리도 를 단련했 다는 흔적이 보이는 절묘한 공격이었다. 네 자루의 수리도 를 빠르게, 느리게, 직선과 곡선을 섞어 던짐으로써 흑저의 회피방향을 봉쇄한 것이다. 거기에 손에는 다시 네 자루의 수 리도 가 더 잡혀 있었으니……. 흑저는 두 걸음을 더 내디뎠다. 따당--! 비스듬히 목 아래쪽으로 날아들던 수리도 두 자루가 좌수에 튕겨지고, 곡선을 그리며 옆구리로 박혀 들던 수리도 한 자루는 오른쪽 팔목을 감싼 보호대에 맞아 떨어졌다. 목을 가리기 위해 들린 왼쪽 팔꿈치 아래로 수리도 가 파고들었다. 흑저의 손이 가슴앞으로 반원을 그리며 떨어졌지만 이미 늦었다. 칙! 흑저의 옆구리에 한 줄기 붉은 혈선이 그어졌다. 수리도 가 스치고 지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흑저는 한 걸음 더 내디뎌 두 사람의 거리는 여섯 걸음으로 좁혀졌다. 중년인이 수리도 를 든 손을 들었다. 흑저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중년인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졌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흑저는 그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사정거리를 없앤 것이다. 수리도 가 흑저에게 낸 상처는 피륙에 그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이제 흑저가 일격이라도 가한다면 그로서는 생명을 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중년인이 포권했다. “졸자(卒者)는 수리도 (袖裏刀) 곽상(郭尙)으로, 성자산 동가채의 부채 주(副寨主)요. 차후에 본 채를 찾으시면 오늘의 실례를 깊이 사죄드리 겠소!” 그리고는 돌아서서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가자!” 그때 황거지가 그를 불렀다. “잠깐!” 중년인이 돌아섰다. “무슨 하교할 일이라도?” 이런 식으로 실패하면 상대의 손에 목을 맡기거나 금품으로 보상하는 것이 또한 녹림 의 관행이었다. 그로서는 황거지의 요구가 뭐든 간에 들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거지가 하교는 무슨……. 물이나 있으면 좀 주게!” 황거지는 어느새 옷을 차려입고 실없는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중년인이 산을 가리켰다. “저기 샘이 있으니 안내해 드리지요.” “뭐라고?” 엽검영이 도끼눈을 뜨고 황거지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영감!” 황거지는 태연하게 말했다. “네 말을 잡아먹자고.” 동가채 패거리를 따라 야산에 들어와서 배가 부르도록 물을 마신 후에 황거지가 내뱉은 첫마디가 그것이었던 것이다. 엽검영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같이 어이없어 하길 기대한 것이지만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동가채 패거리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차마 부탁은 못하지만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녀석 의 눈에는 그의 말이 이미 요리된 고기로 보이기라도 하는지 벌써 입 가로 침까지 흘려대고 있었다. 그러나 엽검영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애마(愛馬)를 잡아먹자고?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요? 황금 이십 냥이나 주고 산 관외 (關外)의 명마를 삶아 먹는다는 게 말이 된 다고 생각하쇼?” 여태 뚱하니 있던 통비원이 한마디 했다. “자네 말은 잡마(雜馬)야!” “뭐?” 엽검영이 도끼눈을 떴다. 통비원이 표정도 바꾸지 않고 다시 말했다. “자네 말은 보기에만 그럴듯한 엉터리라구!” 엽검영이 이를 갈며 팔을 걷어붙였다. “어떤 근거에서 하는 말이야? 제대로 이유를 대지 않으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거야!” “예로부터 명마를 구분하는 기준에는 여덟 가지가 있지!” 통비원이 느릿느릿 시를 읊듯 말했다. “완족(腕足 : 말발굽 관절 사이가 높고), 제고부철(蹄高趺鐵 : 발굽은 두툼하게 높아 쇳덩이를 뉘어 놓은 것 같으며), 삭한옥(削寒玉 : 맑은 옥돌을 잘라 놓은 듯하고), 예이비추죽(銳耳批秋竹 : 머리위 날카로운 귀는 가을 대 깎아 놓은 듯하다). 봉억린기장풍생(鳳臆麟耆長風生 : 봉 황새 같은 가슴과 기린 같은 말갈기에는 긴 바람이 일고), 단배장복(短 背長腹 : 등이 짧고 배는 길며), 우목청형(隅目靑熒 : 모진 눈 푸르게 빛나고), 협경현(夾鏡縣 : 두 겹 거울 매달린 듯한 눈동자를 지녔다).” 생긴 것답지 않게 의외로 유식한 말을 지껄이는 그를 모두들 멍하니 바라보는데, 다시 그가 엽검영을 향해 물었다. “자네 말은 이 중 해당되는 것이 있나?” 엽검영이 아무 소리도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자 통비원은 엽 검영의 말에 다가가 발굽 관절을 가리켰다. “봐, 짧지? 그리고 발굽도 몸무게를 못 견뎌서 짜부라지잖아?” 엽검영이 다가가 말의 배를 가리키며 반박했다. “배는 길잖아!” 통비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긴 게 아니고 아래로 처진 거야! 겉만 그럴듯하게 가꾸고 훈련 을 안 시켜서 망친 것이지. 전형적인 비육마(肥肉馬)라고나 해야겠 군!” 엽검영이 마치 자신이 욕을 먹는 것처럼 씨근덕거리는데 갑자기 말이 고삐를 잡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산 아래로 뛰었다. 황거지가 감탄했다. “저놈, 저 잡아먹자는 얘기하는 줄 눈치챈 모양인데!” 모두들 갑작스러운 말의 행동에 미처 잡을 생각도 못하고 섰는데 희끗 한 그림자가 말 앞을 가로막았다. 퍽--! “이히히힝--!” 말의 머리가 부서져 나가고, 처절한 말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 시 달리는 자세 그대로 멈추었던 말이 천천히 땅 위로 뒹굴었다. 흑저가 발밑에 뒹구는 말의 시체를 보며 합장했다. “용서하라……!” 황거지가 곽상을 보며 말했다. “요리는 자네들이 하게!” 돌을 모아 임시로 화덕을 만들고 어디서 구했는지 귀퉁이가 깨어진 가 마솥이 그 위에 걸렸다. 샘가가 마치 잔치라도 하듯이 북적거리는데 엽검영은 분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거금 이십 냥을 들인 관외 의 명마(?)가 여러 토막으로 잘려지고, 가마 솥에 들어가 끓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자기 살이 삶기는 것 같았던 것이다. 도적 하나가 어디서 뜯어 왔는지 향신료(香辛料) 대신 풀을 한아름 뜯 어 와 가마솥에 넣었다. “이게 들어가면 더 맛있죠……!” 그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주절거리는 도적이 엽검영으로서는 더 미 웠다. ‘차라리 저놈을 삶아 버려……?’ 널찍한 돌판이 씻겨져 중간에 놓이고 그 위에 수북하게 고기가 쌓였 다. 도적들이 죽 둘러앉아 흑저의 눈치를 살폈다. 침을 꿀떡꿀떡 삼키면서 도 먼저 손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황거지가 서슴없이 다가가 고기가 많이 붙은 뼈다귀 하나를 잡아뜯었 다. 입 안 가득 고기를 물고 한참 우물거리고 씹어 삼키더니 그가 감탄했 다. “말고기치곤 아주 연한데! 먹을 만해!” 통비원이 역시 한입 가득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싼 값을 하는 거죠!” 엽검영이 욕을 했다. “넌 말을 다룰 줄 안다는 놈이 어떻게 말의 고기를 먹냐?” 통비원이 씹던 고기를 삼키고 대답했다. “일단 살아야 하니까!” 황거지가 곽상을 보며 말했다. “자네들도 드시게!” “저희들은 나중에…….” 곽상이 억지로 잠깐 사양을 해서 체면을 차렸다. 수하들이 그를 원망 스럽게 보았다. 황거지가 고기 하나를 들어 내밀었다. “이런 비상시국에 체면은……. 없어지기 전에 얼른 먹어!” 곽상이 마지못해 받는 척하며 수하들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먹으라는 소리를 마저 할 수가 없었다. 도적들이 개떼처럼 덤벼들어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그때, 엽검영이 달려들며 소리쳤다. “안돼, 내 말이야! 내가 제일 많이 먹어야 돼!” 말 한 마리가 없어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쉽게 뼈다귀를 핥는 수하들을 물리고 곽상이 말가죽에 싼 내장과 고 기 약간을 가리켰다. “저희들이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황거지가 나뭇가지를 분질러 이빨을 쑤시며 물었다. “가져가도 좋지만…… 왜?” 곽상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얼굴이 불붙듯 붉어졌다. “산에 식솔들이 있어서…….” 황거지는 그들이 불쌍해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말 들어보면 녹림십팔채 의 하나였다면서 어쩌다 이렇게 됐나?” 곽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대 채주였던 형님이 오 년 전 녹림 성회(綠林盛會)에서 입은 상처 로 돌아가신 이후 고수들이 하나, 둘 떠나고, 고수가 없으니 또 큰 건 (件)은 엄두를 못 내고, 표국 들도 무시하는지 통행세도 안 내고……. 한때는 그럴듯한 고수들이 즐비했는데 이제는 칼보다 호미가 어울리는 것들이 우글거리는 거지소굴이 됐으니…….” 녹림 성회는 오 년에 한번 있는 강북 녹림 맹(江北綠林盟)의 집회였다. 녹림 의 이름을 내걸고 있는 산채들은 모두 모여 열흘간의 집회를 갖 는데, 그 기간 동안 세 가지의 중요한 일을 처리한다. 첫째, 녹림 맹주의 재신임 여부. 둘째, 녹림 맹 전체에 관한 중요사안 결정. 셋째, 승급비무(昇級比武)였다. 이중 세번째 승급비무라는 것이 동가채의 전대채주인 독각동인 (獨脚 銅人) 곽철(郭哲)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이었다. 승급이라지만 일반 문파처럼 개인의 무공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각 산채의 등급을 대표의 비무로 결정해 십팔채(十八寨)와 삼십육향(三 十六香)을 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곽철이 십팔채의 일원이라는 자리를 방어하고 돌아오는 길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곽상이 이를 갈았다. “그…… 흑사타(黑沙舵)의 놈들이……!” 흑사타는 귀주성 (貴州省) 금사현(金沙縣) 오강 (烏江)가에 있는 수적 (水賊) 반, 산적(山賊) 반의 무리로 삼십육향 중 하나였다. 녹림 성회에서는 향의 지위를 가진 산채를 이기면 그 산채 대신 향이 되고, 다시 채의 지위를 가진 산채를 이기면 채가 된다. 그렇게 무한경쟁을 시켜 최강의 실력을 가진 산채들로 정예들을 구성 한다는 것이 녹림 맹의 전통이었던 것이다. 흑사타의 주인 흑사장(黑沙掌) 계석(季奭)은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보잘것없던 흑사채를 당당히 녹림 삼십육향의 하나로 올려놓고 나자, 이제는 십팔채의 반열에 올라선 뒤 최후에는 녹림 맹주의 위치까지 차 지하고자 하는 야욕을 품은 것이다. 그리고 십팔채 승격의 제물로 동가채를 찍었던 것이다. 엽검영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비웃었다. 향주(香主)면 많아야 일이백 명을 거느리는 자리, 채주(寨主)라 해도 강호 타문파의 당주(堂主)와 동격이니 많아야 사오백을 거느린 자리에 불과한 것이다. 표국 으로 치면 향주는 표두, 채주면 총표두 정도의 격이랄까? ‘겨우 고만한 자리 가지고 죽니사니…….’ 자신은 몰락한 산채의 채주도 아니고 부채주에게 당해 인질이 되었었 다는 부끄러운 기억 같은 것은 이미 어디에도 없는 그였다. 황거지가 제법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더니 물었다. “그럼 지금 채주는?” 곽상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형수님이 하고 있습니다.” 황거지가 감탄했다. “여장부인가 보군!”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곽상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럴 사정이 있어서…….” 강호에는 비밀스러운 일이 있고, 대개의 경우 그런 것은 물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황거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우린 그만 가지!” 흑저를 보고 하는 소리였다. 아까부터 한쪽에 물러나 앉아 있던 흑저가 일어났다. 통비원과 엽검영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자 황거지가 말했다. “너희들은 이 사람과 덜 해결된 일이 있잖아?” 곽상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무슨……?” 통비원과 엽검영은 물론이고 지목당한 곽상도 영문을 몰랐다. 황거지가 곽상에게 말했다. “배도 채웠으니 우린 가겠어. 자넨 이 두 사람과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하게나!” 곽상이 어리둥절해 있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물었다. “일행이 아닙니까?” “그냥 오다가다 만난 사이지, 일행은 무슨…….” “그래도 한솥의 음식을 나눠 먹은 사인데…….” “그렇게 치면 난 사천성 사람들과 무관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 자넨 그렇게 물러 터져서 도적질은 어떻게 해먹나?” 그 말에 깨달은 점이 있는지 곽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엽검영과 통비 원을 보았다. 엽검영과 통비원은 황거지의 행동에 망연해 하다가 흑저를 보았다. 흑 저는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엽검영이 이를 갈았다. “영감, 두고 봅시다!” 그러더니 품속을 뒤져 말을 사고 남은 돈을 내놓는 것이다. 통비원도 아무 말 없이 금원보 둘을 고스란히 내놓았다. 곽상이 그 중 반을 돌려주며 말했다. “도박판에서도 빈털터리는 안 만드는 것이오, 녹림 의 관례도 그러하 니 반만 받겠소!” * * * 예양에서 남으로 오십여 리 떨어진 나지막한 야산. 산 하나 가득 이름없는 무덤들이 들어차 있고, 그나마 격식을 갖춘 가 묘(家墓)들도 대개는 풍상에 시달려 대개는 무너져 버린 빈민들의 묘 지였다. 그 중 한 무덤에서 사람의 소리가 났다. 끝을 길게 끄는, 언뜻 들으면 야수의 신음소리 같은 목소리와 어쩐지 이런 음침한 곳에 어울리지 않는 밝고 절제된 음성이었다. “하백이 죽었다--! 모르진 않았을 텐데--?” “보고 있었죠.” “보고만--?” “참견할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큭큭큭--!” 목이 막힌 듯한 웃음소리였다. 분노가 배어 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그러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묘 안을 희미하게 비추던 등불이 꺼질 듯 팔랑거리고, 그 불빛에 비 추인 토용(土俑)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뿌렸다.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게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분노하여 외쳤다. “하백도 우리의 형제다--! 형제의 죽음을 보고서도 그냥 있었던 너도 형제라 말할 수 있느냐--?” 가묘 중앙에 태연히 서 있는 금의 공자, 정기룡은 여전히 태연자약했 다. “능력이 모자라면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제 책임범위를 먼저 침범한 것은 산귀어른이시고……, 이렇게 일이 꼬인 것도 산귀어른이 잘 처리할 줄로 믿고 그랬다가 초래한 결과이니, 저보다는 어르신께 더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요?” 가묘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대(前代)의 소사명도…….” 어둠 속에서 안개처럼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살기. “내게 그렇게 대하지는 않았다--!” 꺼져 가던 불빛이 파랗게 솟아오르는데 어둠은 오히려 더욱 짙어졌다. “네가 감히 내게 따지는 것인가--?” 정기룡이 피식 웃었다. “사소한 일을 크게 만드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죠! 대사명 앞에서 따 져 보실 건가요? 아니면 여기서 해결을 보실 생각……?”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살기가 치솟고, 무겁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부 르르 떨렸다. 극도의 분노가 대기를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정기룡은 태연한 신색으로 소맷자락 안으로 뭔가를 만지작거릴 뿐 경계하는 빛도, 두려워하는 빛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한결 진정된 어조로 산귀라 불린 인물이 말했 다. “큭큭큭! 대사명이야 소사명을 책할 리가 없겠지--! 그러나 보잘것없 는 귀신 나부랭이야 언제든 밟아 죽일 수도 있겠고, 안 그런가--?” 여운이 묘한 말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기분나쁠 수도 있는 말인데 정기룡은 웃었다. “그럴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겠지요? 난 이만 갑니다.” 가묘 안의 공기가 다시 부르르 떨렸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정기룡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폭음이 들리며 가묘가 무너져 내렸 다. 그 돌더미 위로 분노한 음성이 퍼졌다. “예양부 주위에 사람을 깔아--! 돼지새끼가 나오는 날이 제삿날이 되 도록 만들어라--!” 정기룡은 산을 내려오면서 중얼거렸다. “새로 생긴 장난감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는데……. 다음 기회를 기다려 볼까?” 그의 소맷자락 밑으로 은빛 원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사라졌다. 저만치 산 아래 어둠이 깔린 길가에 꼽추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기룡이 다가가 말했다. “네가 할 일이 생겼다.” * * * 동가채의 무리들과 헤어진 지 하루가 지나도록 엽검영은 계속 툴툴거 렸다. “영감, 도대체 정체가 뭐요?” 황거지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엽검영을 보았다.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있었나?” “누군데?” “거지!” 엽검영이 씨근덕거리다가 겨우 진정하고는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능청을 떨고 있지만 사실 숨겨진 정체가 있을걸? 우리 중 누군가에 게 흑심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고…….” 황거지는 코방귀를 뀌었다. “흑심? 누구에게? 설마 넌 네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야 영감 말대로 별볼일 없는 인물인지 모르지만…….” 황거지가 잘라 말했다. “너 별볼일 없는 인물인 거 맞아! 모를 것도 없지.” 엽검영의 얼굴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아 넘기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쳐도 다른 사람은 대단한 인물일 지도 모르지! 당신 은 그를 노리는 걸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래야 뻔했다. 일동의 시선이 흑저에게 모였다. 이들 일행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것도 밝히지 않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러운 인물이 흑저였던 것이다. 통비원이나 엽검영 같은 자들이야 강호의 어중이떠중이요, 무슨 신비 한 내력 같은 것이 있다면 오히려 우스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처음 그들의 앞에 나타날 때부터 흑도의 거물, 낭리도 혁천조를 죽였 고, 그 다음에는 정도의 명숙 금룡대선생, 중원사흉 중의 일 인(一人) 인 소리장도, 그 다음이 그 이름만으로도 장강 만리를 울리는 흑룡왕 하백이 줄줄이 그의 손에 쓰러졌던 것이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중원사흉 중의 청면수라와 대완구를 죽인 것도 그일 가능성이 많았다. 그런 인물이 평범한 인물일 수가 있을까? 아니었다. 엽검영이나 통비원 같은 강호의 무명소졸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 스울 정도의 거물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설마 보표 가 되려고 금룡장으로 가는 것일까? 말해 놓고 보니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무는 엽검영이었다. 그래서 흑저를 불렀다. “흑저…… 대협, 아니 흑저대사!” 저만치 앞서가던 흑저가 돌아보았다. “그냥 흑저라 불러!” “그래, 흑…… 저! 저 거지늙은이가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이 수상하 지 않소?” 흑저가 무언가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별로!”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엽검영이 말문이 막혀 그 뒷모습을 멍 하니 보았다. 누가 따라오든 신경쓰지 않는다는 느낌이 흑저에게서 강하게 풍겨왔던 것이다. “대범하달까, 바보스럽달까……?” 황거지가 그에게 쏘듯이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우릴 따라 오느냐?” 순간 당황해 하는 그를 황거지가 계속 다그쳤다. “흑저와 통비원은 보표 하러 간다고 치고, 난 물주를 쫓아간다만 넌 왜 가는 거야? 이제 보니 네가 제일 의심스럽잖아!” 엽검영이 더듬더듬 말했다. “이 영감이 궁색해지니까 남을 물고 늘어지긴……. 나도 나름대로 볼 일이 있어 가는 거야, 왜?” 황거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이 틈에 묻어서 어떻게 보표 한번 하려고 그러지?” 엽검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생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정곡을 찔렸다 고 해야 했다. “쓸데없는 소리! 이 엽검영이 설마 보표 도 못되어 남의 힘을 빌릴까 봐?” 황거지가 다시 뭐라 말하려 하자 엽검영이 딴전을 피웠다. “저기 뒤에 오는 사람이 누구지?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황거지가 뒤를 돌아보았다. 순전히 말꼬리를 돌리려는 잔머리인 줄 알았는데 과연 그들의 뒤, 관 도 저편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어제 헤어진 동가채의 곽상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다가와 의례적인 인사를 하는 곽상에게 황거지가 물었다. “우리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겠지?” 곽상이 얼굴을 슬쩍 붉히며 말했다. “금룡장에 가신다기에 같이 가려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산채의 사정이 좋아질 때까지 제가 보표 를 해서 돈을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일 년에 황금 오백 냥은 적은 돈이 아니다. 허리띠를 졸라맨다면 일이 백 명 규모의 작은 산채 하나가 먹고사는 데에는 별지장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황거지가 입을 벌렸다. 무슨 말인가를 할 듯하더니 결국 탄식하고 말았다. “세상이 뒤숭숭하니 누구도 자기 일에 전념할 수가 없군그래……. 좋 아, 같이 가세!” 이렇게 해서 흑저의 일행은 다섯이 되었다. * * * 나흘이 지나도록 중원제일가의 보표 를 뽑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예양부의 객점과 주점이 때아닌 호황을 맞고 골목골목에 각지의 사투 리로 욕을 해대며 싸우는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져 관(官)에서도 골머 리를 썩히고 있었다. 그러니 중원제일가 내부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운은 지치지도 않는지 하루 이백여 명의 지원자들을 일일이 만나며 내키는 대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소운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가 장안 의 화제로 떠오 를 때, 처음으로 합격자가 나왔다. 닷새째의 일이었다. “무의 극의가 뭐야?” “모르겠소!” 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 어깨까지밖에 안 내려오는 짧은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쳐 얼굴을 반이 나 가린 깡마른 사내가 눈을 번뜩여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름도 없이 그저 귀도(鬼刀)로 불러 달라던 사내, 시종 무표정으로 일 관하던 그가 이 정도로 감정의 표현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만큼 소운의 결정은 의외였다. 합격한 그가 오히려 얼떨떨해 하는 것이다. 좌우에 시립한 중원제일가의 식솔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소 운이 옆에 놓여 있던 상자를 앞으로 밀었다. “지금부터 일을 시작해!” 사내, 귀도가 앞으로 걸어와 상자를 열었다. 오백 냥 중의 금괴 하나. 그는 어깨에 멘 칼집도 없는 거무튀튀하게 녹슨 칼을 오른손에 잡아들 었다. “성의껏!” 더 이상의 말을 않고 소운의 뒤에 돌아가 버티고 서는 것이다. 정(丁)자도 아니요, 팔(八)자도 아닌 보법 을 취하고, 오른손의 칼을 무 릎아래로 늘어뜨려 칼끝이 바닥에 끌릴 듯 말 듯한 자세에서 더 이상 미동도 않는다. 소운이 눈살을 약간 찡그렸다. 귀도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방금 보표 에 합격했다지만, 정체도 의심스러운 자가 칼을 빼 들고 그 의 뒤에 가 버티고 서는 동안 제지할 생각도 않고 넋이 빠져 있는 중 원제일가의 식솔들이라는 것들이 한심했던 것이다. “다음!” 소운의 신경질 섞인 목소리에 놀란 수하들이 그제야 황급히 나가서 다 음 지원자를 불렀다. 귀도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합격했으며, 그 대답이 ‘모르겠다’였다는 소문은 금세 대기자들 사이에 퍼졌다. 그러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똑같이 대답하는 자도 나타나기 마련이었 다. “모르겠소!” “꺼져!” 철판이 툴툴거리며 나가자 뒤에서 구경하던 주고원이 못 참겠는지 물 었다. “같은 대답을 했는데 누구는 붙고, 누구는 떨어지니 그 중에 무슨 이 치가 있는 것입니까?” 소운이 짧게 대답했다. “저놈은 정말 모르고 있어!” 주고원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이건 아무리 좋게 봐줘도 변덕이었다. ‘그럼 네 뒤에 선 작자는 무의 극의가 뭔지 안단 말이냐? 너는 또 어 떻게 그걸 알아봐?’ 목구멍까지 기어올라오는 말을 다시 삼키고 주고원은 다음을 불렀다. “독안룡(獨眼龍) 한백(翰魄)!” 눈위로 칼날이 지나간 자국을 안대(眼帶)로 절반쯤 가린 삼십대의 사 내가 들어와 버티고 섰다. 소운이 보지도 않고 물었다. “무의 극의가 뭐라고 생각해?” 사내가 힐끗 소운을 보았다. 걸리는 것은 뭐든 받아 버린다고 말하는 것 같은 불량스러운 눈빛이었다. “니미,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소운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주고원이 탁자에서 벌떡 일어나고, 벽 아래로 도열한 중원제일가의 무 사들이 검에 손을 대었다. 일순 흉흉한 분위기가 면담장 안을 감도는데, 소운이 손가락을 까닥거 렸다. “재미있는 친구군, 합격!” 주고원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한백이라는 인물이 누군지는 그도 들은 바가 있었다. 예양부의 쓰레기, 뒷골목 창녀의 기둥서방,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 시간 보다는 뇌옥(牢獄)에 들어가 있는 날이 많다는 인간말종(人間末種)이 그였다. 무엇보다도 요근래 소운이 고굉지신(股肱之臣)처럼 부리며 데리고 있 는 자가 그였다. ‘역시 그런 것이었군! 한통속으로 놀 녀석들을 모으는 것이었어… …!’ 주고운은 그제서야 소운이 이런 요상한 방식으로 보표 를 모으는 이유 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불합격이었다. 어딘지 불량해 보이는 인물들만 골라서 뽑고 있다는 주고원의 짐작을 확신으로 만든 것은 오후에 뽑힌 인물들이었다. 뭔가 있어 보이는, 그리고 실제 각 지방에서 제법 무명(武名)을 날리는 인물들은 미리 귀뜸까지 해주는 데도 다 탈락이고 엉뚱한 자들을 뽑고 있는 것이다. 영락없이 거대한 원숭이를 연상시키는 통비원이 소운을 만난 것은 태 양이 남중(南中)할 때, 그러니까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뭘 잘하지?” 통비원이 눈을 뒤룩거리다가 대답했다. “말을 잘 탑니다.” “얼마나 잘 타나?” 통비원은 한참 망설이더니 두 무릎을 구부려 말을 타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과연, 말을 잘 탄다는 것은 보여주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 다. 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등이 편해 보이는군! 너도 해!” 그 다음은 검은 가사를 입은 뚱뚱한 중이었다. 두 손에는 흰 천을 감 아 병자 같기도 하고 다친 것 같기도 했는데, 이름도 우스꽝스럽게 흑 저, 검은 돼지라 했다. 소운은 그의 얼굴을 보더니 질문도 않고 툭 내뱉었다. “합격!” 조금 아래 탁자에 앉아 장부를 작성하던 주고원이 어이없어 입을 벌렸 다가 더듬더듬 물었다. “질문도…… 않으시고요?” “잘 싸우게 생겼잖아.” 소운이 짧게 대답하고는 하품을 했다. “몇 명이나 남았지?” 주고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문 앞에 기다리는 사람만 대충 오백 여 명……?” 소운이 일어나며 손을 저었다. “이젠 됐으니까 돌려보내!” 주고원이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그 사람들에겐 뭐라고 합니까? 멀리서 온 사람도 있을 텐 데…….” “그럼 나보고 오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다 만나란 말야? 개들을 풀어 흩어 버려!” “개……?” 주고원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개라고 부른 것이 가문의 무사들을 일컫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 나도 네 눈에는 개새끼로밖에 안 보이겠지!’ 주고원이 분기 어린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는데 소운은 통비원을 가까이 불러 그 등에 업혔다. 그리고 나머지 셋에게 손짓했다. “따라 와!” “한 사람 더 뽑아 줘야겠소!” “응?” 소운이 눈살을 찌푸리며 흑저를 보았다. 흑저가 천천히 말했다. “꼭 해야 할 사정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소운이 물었다. “누굴?” “수리도 곽상! 밖에서 기다리고 있소!” 소운이 주고원에게 말했다. “불러 와! 그 사람도 합격이야.” 소운이 통비원에게 업혀 문을 나서고 귀도, 한백, 그리고 흑저가 그 사 방으로 벌려 서서 뒤를 따랐다. 제 10 장 선한 사람들끼리... 선한 사람들끼리 진리를 말하므로 엽검영은 기가 막혔다.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면담도 안하고 퇴짜라니!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런 생각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금룡장 앞에 떼 거지로 몰려 있던 보표 지망자들이 악머구리 떼처럼 들끓었다. 터무니없는 시험방식에 질려 돌아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남아 있는 사 람도 많았다. 아니, 오히려 더 늘어나 대기자만 오백에 육박하고 있었 다. 금룡장에서 지원자들에게 노자(路資) 조로 은자 열 냥씩을 지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인근의 건달들이 그 돈을 노리고 몰려들 수밖에. 그런데 갑자기 사람이 나와 더 이상 뽑지 않는다는 말만 달랑 하고는 들어가 버린 것이다. 보표 를 뽑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떨어질 기회도 주지 않는다 는 것이 정말 문제였던 것이다. 금룡장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분노한 군중들이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 다. 물론 엽검영도 그 중에 있었다.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맨 앞에 나가 주 먹을 흔들었다. 면담만 보면 당연히 차지할 자리(?)를 기회가 없어 못 차지하게 생겼 는데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수리도 곽상이었다. “그만 돌아갑시다.” “아니 왜 돌아가? 자기들이 중원제일가면 제일가지 이렇게 사람을 우 롱할 수 있어? 왜 내 자리를 안 주는 거야? 단단히 맛을 보여줘야 한 다고!” 곽상이 쓴웃음을 지었다. “항의한다고 눈 하나 깜짝할 위인들이 아니오! 다치기 전에 그만 돌 아갑시다.” 엽검영은 곽상이 말리자 더욱 기승을 부렸다. “내 이익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오! 나야 어디 가서 뭐는 못하겠냐만 곽형은 막막한 입장 아니오? 산채에서 기다릴 식솔들을 생각해 보시 오!” 곽상의 얼굴이 붉어졌다. 엽검영의 생각해 주는 척하는 말이 그의 자 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이걸 받아 버려?’ 그러나 본의는 아니었지만 말까지 잡아먹게 내준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간신히 화를 눌러 참는데, 마침 금룡장의 측문(側門)이 열리고 문사차 림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주고원이었다. 소란을 피우던 사내들이 일시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무슨 말을 할 지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주고원이 입을 벌렸다. “수리도 곽상이라고 있나?” 곽상은 갑자기 자기 이름이 불리자 어리둥절해 하고, 엽검영이 그의 손을 치켜들어 주었다. “여기 있소, 여기!” 주고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한마디 내뱉고는 돌아섰다. “넌 합격이다, 들어와!” 엽검영이 곽상의 손을 끌고 사람들을 헤쳤다. “비켜, 비키라구!” 측문 앞에서 무사가 엽검영을 가로막았다. “넌 아냐! 돌아가!” 엽검영이 얼굴이 시뻘게져 날뛰었다. “왜 난 아냐? 같이 온 사람들이 다 보표 로 뽑혔는데 왜 나만 아 냐?” 무사가 곽상의 팔을 잡아 끌어들이고 엽검영은 밀어 버렸다. “내가 그 걸 어떻게 알아? 하여튼 넌 아냐!” 땅바닥에 주저앉아 망연히 바라보는 엽검영의 앞에서 조금 열렸던 측 문이 닫혔다. 사람들이 다시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엽검영이 어리둥절했던 정신을 추스르고 거기 합세하려 할 때, 황거지 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튀자!” “튀어? 왜?” 엽검영은 영문도 모른 채 황거지에게 끌려갔다. “머리통 깨지기 싫으면 튀어!” 황거지의 힘은 보기보다 셌다. 뭉그적거리던 그가 도리없이 끌려간 것 이다. 금룡장 앞에 모여 있던 군중들의 분노가 점점 높아졌다. 무성의한 보표 모집과 대책없는 중단에 항의하고, 이 사태의 주범(主 犯)인 금룡장 소장주 금조운과 몰지각한 서리들에 대한 성토가 이루어 졌다. 침이 튀고 주먹이 휘둘러지며 급기야 문을 뚫자는 겁없는 소리까지 들 리기 시작할 때, 금룡장의 높은 담장 위로 궁수들이 튀어 올라와 군중 들을 향해 활을 겨냥했다. 대문이 열렸다. 주고원이 다시 나와 군중들을 노려보았다. 그 뒤에 늘어 선 무사들의 손에는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곤봉(棍棒) 들이 들려 있었다. 주고원이 말했다. “중원제일가가 봉으로 보이나? 가라면 갈 것이지 이게 무슨 소란이 야! 셋 셀 동안 사라지지 않으면 치도곤을 안겨 주마, 하나!” 군중들이 슬금슬금 물러서기 시작했다. “둘! 셋!” 주고원이 숨쉴 틈도 없이 나머지 수를 세는 것과 동시에 무사들이 곤 봉을 휘두르며 뛰쳐나갔다. 군중들이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곳곳에서 격타음과 비명이 울리고, 순식간에 금룡장의 문 앞에는 터지 고 밟힌 부상자들이 즐비하게 나뒹굴었다. 금룡장 보표 모집 사건의 결말이었다. “비겁한 자식! 둘, 셋을 한꺼번에 세다니……!” 엽검영이 이를 갈았다. 금룡장의 정문에서 도망쳐 산 하나를 돌아선 다음의 일이었다. 황거지는 그를 끌고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힘이 들었던지 땅바닥에 주 저앉아 헐떡거리다가 엽검영의 그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퉁명스레 말 했다. “머리통 터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줄 알아!” 엽검영이 힐끔 바라보자 황거지가 다시 속 뒤집어지는 소리를 했다. “넌 안 돼도 상관없잖아! 앞일이 막막한 곽상이라도 됐으니 그 걸로 다행 아닌가?” 엽검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황거지는 아까 그가 곽상에게 한 말을 꼬투리 잡아 비꼬고 있는 것이 다.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자기만 당할 것이 뻔했다. 그저 부러져라 이를 갈고 돌아서는데 황거지가 따라왔다. 산길을 돌아 관도로 나오고, 쭉 뻗은 관도를 따라 예양부 성내에 들어 설 때까지, 그리고 딱히 갈 데도 없는 엽검영이 괜히 이리저리 떠돌다 가 어디인지도 모를 골목에 접어들 때까지도 황거지는 그의 뒤를 떠나 지 않았다. 이젠 참을 수 없었다. “왜 따라 오는 거야, 늙은이야!” 황거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꿈벅거렸다. “이 길 네가 닦았냐? 내가 다니려면 통행세라도 내야 하냐?” “하--!” 극히 초보적인, 그런 만큼 위력도 강한 억지. 엽검영은 분기를 한숨으로 달래고 안내하듯 손을 내밀었다. “먼저 가시죠, 황대야(黃大爺)!” 극존칭으로 불러가며 회유를 했는데도 황거지는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지금은 움직이고 싶지 않으니 네가 먼저 가라!” 엽검영이 폭발했다. “영감은 그럼 어쩌겠다는 거야? 이대로 내 뒤에 따라붙겠다는 심산이 야?” 황거지가 같잖다는 시선으로 엽검영을 보더니 갑자기 물었다. “너 어디 갈 곳이나 있냐?” 엽검영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무작정 흑저의 뒤를 따라온 것인데 갈 곳이 따로 있을 턱이 없었다.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 것인데……. 황거지가 연거푸 물었다. “뭐 할 일은 있고? 널 받아 주는 곳은 있겠냐? 당장 어디 가서 밥 사 먹을 돈이나 있냐?” 마지막 말에는 엽검영도 할 말이 있었다. “돈도 없을 줄 알아? 사람 무시해도…….” 품속에 손을 넣은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원래 씀씀이가 헤픈 데다가 멋을 부리느라 옷 사고, 패검 한 자루 사 고, 이제는 뱃속에 있지만 말도 한 마리 사고, 주점에 가서 펑펑 쓰고 했더니 남은 돈이 없었다. 그나마 몇 푼 남아 있던 돈은 곽상에게 탈취당하지 않았던가! 품속에서 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황 거지가 세차게 코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요즘엔 저런 애송이도 날 무시하니…… 더러워서!” 그의 손이 품속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반짝이는 물건이 잡혔다. 누렇게 빛나는 금원보였다. 엽검영은 옹중서에게서 그도 금원보를 가져갔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손바닥만한 배를 샀다고 해도 반은 남았을 것이다. 저만치 멀어져 가는 황거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엽검영은 갈등했다. ‘이렇게 험한 세상에 저 연약한 거지 늙은이가 저렇게 많은 돈을 가 지고 다녀도 괜찮은 것일까? 누군가가 지켜 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대로 따라간다면 돈 때문에 거지에게 굴복한, 거지보다 못한 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자신의 의협심(義俠心)을 따를 것인가, 자존심(自尊心)을 따를 것인가? 물론 엽검영은 의협심이 강한 협객이었지만, 자존심은 그 세 배쯤 강 했다. 그래서 차마 황거지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황거지가 골목을 돌아가며 손장난하듯 금덩이를 던졌다가 받는 것을 보는 순간 그에게는 새로운 하나의 감정이 끌어 올랐다. ‘저 돈은 같이 일해서 번 것 아닌가! 공평하게 나누어야 할 돈, 원숭 이와 돼지는 보표 라는 좋은 자리를 차지했으니 거지와 내가 반씩 나 누어야 옳지 않은가!’ 생각하면 할수록 옳았다. 그리고 마땅히 자신에게 돌아올 황금을 황거지가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함께 이 불공평한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의감 (正義感)이 불타 올랐다. 거기에 덧붙여 약간의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 말일 것이다. 그의 자존심이 아무리 강해도 의협심과 정의감의, 결정적으로 약간이 긴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강력한 욕심의 합공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엽검영은 정신없이 황거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 *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공통되는 것이겠지만, 그에게도 어린 시절 은 즐거운 것이었다. 얼음장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높아져 갈 때, 산비탈 양지쪽에 는 이른 산채(山菜)가 고개를 내밀고 그들 동자승들은 소년사미 들의 뒤를 따라 그것들을 캐러 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새순을 쥐면 그 부드러운 솜털 아래로 젖빛 같은 생명이 흐르는 듯 애처로워 차마 꺾지 못하고 돌아섰었기에, 그의 바 랑은 항상 비어 있곤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겨우내 눈보라에 시달린 낡은 법당(法堂)을 수리하노라면 구멍난 벽 틈으로 박쥐가 튀어나오고, 옆에서 구경하던 동자승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러다가 눈먼 박쥐가 그들에게 날아들면 또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갔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소피를 보다가 문득 바라본 석탑(石塔)의 그림자는 또 왜 그리 무서웠던지……. 멀리 산에서는 이리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퍼지고 대웅전(大雄殿) 처마 끝에 목어(木魚)가 달빛 속에서 헤엄치듯 움직여 가는 밤에…….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편린(片鱗)일 뿐이었다. 긴긴 겨울밤, 무릎에 앉혀 두고 옛 선지식(先知識)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던 노선사(老禪師)를 다시 볼 수는 없는 것이기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지?” 소운의 목소리가 귓가에 바짝 붙어서 들려 왔다. 흑저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양지쪽의 계단에 주저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던 참이었던 것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통비원의 등에 업힌 소운이 흐리게 보였다. 눈 을 깜박이자 뺨위로 뜨끈한 액체가 굴렀다. ‘눈물인가?’ 흑저는 당황스런 마음을 감추고 기지개를 폈다. “졸려서!” 소운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흐린 눈으로 그를 보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 했다. “졸든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내 목숨을 지키는 것이 그대들의 일이라 는 것은 명심해 뒀으면 좋겠어!” 가벼운 질책이 담긴 말이었는데 흑저는 기분나쁜 표정 하나 없이 고개 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보표 가 된 지 이미 사흘이 지났다. 소운은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었는지 흑저를 예사로 부렸고, 흑저 또한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흑룡이 보이면 금룡을 찾으라는 암호 같은 말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인데, 소운은 그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고 흑저 또한 묻지 않았다. 흑저는 그런 것은 궁금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무엇인가 복잡한 이유가 있을 듯하지만 그의 머리로 짐작해 알 수 있 는 일이 아니었다. 기다리면 밝혀질 일은 밝혀지고, 몰라도 될 일은 또 그것대로 넘어가는 법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단지, 당분간만이라도 살생을 않을 수 있다는 것, 조용히 그만의 수련 에 전념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도를 닦으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합니까? -배가 고프거든 밥을 먹고, 피곤하거든 자거라. -일반인들도 그렇게 하잖습니까? -아무나 그렇게 못한다. 그들은 먹을 때 천 가지 욕망을 떠올리고, 잘 때는 만 가지 매듭을 풀어헤친다. 어렸을 때 노선사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먹고, 자고 하는 일상 속에서 선(禪)을 수행한다는, 이른바 행중선(行中 禪)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처럼 수련도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가능했다. 오히려 그의 박투술 은 대상없이 홀로 하는 수련보다는 생사(生死)를 건 싸움 속에서야 진정 발전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흑저에게는 근래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고수들과의 싸움에 서 얻은 교훈들을 되새겨 볼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은 그것보다 거듭 된 살생이 가져다 준 심리적 상처로부터 치유될 시간이 더더욱 필요했 다. 금룡장은 그것을 가능케 해줄 것이다. 흑저가 그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 그들은 어느새 후원에서 나와 겹겹이 둘러쳐진 담장들을 돌아 중문을 통과하고 정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 다. 이 며칠 동안 그들의 역할은 묵시적으로 정해졌다. 통비원은 소운의 발을 대신하게 되었다. 요구에 따라 등에 업기도 하고 팔에 안기도 하며, 어느땐 어깨위에 얹 어서 다니기도 했다. 항상 원숭이처럼 구부정하게 다녀도 남보다 머리 하나는 큰 통비원이 었다. 그 건장한 어깨와 팔뚝, 범 같은 허리는 남보다 가는 편이 아닌 그의 하체를 오히려 부실하게 보이게 할 정도였다. 거기 얹혀 있는 소운이 마치 어미의 등에 붙어 가는 어린 원숭이 정도 로 보인다고 보는 사람마다 눈살을 찌푸렸지만, 소운은 신경쓰지 않았 다. 그는 남보다 위에서 내려보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귀도가 소운의 곁에서 한 걸음 밖으로 떠나는 일은 하루에 한번 용변 을 볼 때밖에 없었다. 소운이 금룡장의 무사들을 개라고 불렀지만 그는 정말 개처럼 행동했 다. 한시도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충실한 개처럼……! 누구를 만나도, 어디로 가도 그는 그 녹슨 듯 거무튀튀한 칼을 오른손 에 빼어 들고 소운의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는 것이다. 보표 가 되던 그날 뽑아 든 칼은 그 후 한번도 칼집에 다시 들어간 적이 없으니 ……. 수리도 곽상은 소운의 두 걸음 뒤, 귀도의 왼편으로 걸었다. 녹림 의 부채주답지 않게 깨끗한 청삼을 차려입고, 그리 길지 않은 소 맷자락에서 손을 꺼내지 않았다. 원래는 건실한 성격의 소유자인 듯, 무슨 일에든 성의를 보이고, 정도 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 뚜렷이 보였으니 다섯 명 중 제일 보표 에 어 울리는 사람이라는 평이 돌았다. 그에 비하면 한백은 가장 보표 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소운과 어울려 희희덕거리고, 같이 밥을 먹고, 잠을 같이 잤다. 한마디 로 모든 행동을 소운과 같이 했다. 그는 또 유일하게 소운의 앞에 서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치 고관의 행 차를 알리는 기수(旗手)처럼 일행의 맨 앞에 서서 불량한 눈초리를 희 번덕거리며 건들건들 걸어가는 것이다. 벼락출세를 한 불량배의 티가 넘쳐 흐르는 인물이 그였다. 무기도 무식한 것이어서 날이 시퍼렇게 갈려 푸르게 빛나는 부월(부 월), 작은 도끼와 큰 도끼 하나씩을 허리춤에 꽂고 다녔다. 문중(門中)에서 그를 보고 한마디씩 비난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태연자약하기만 해서 후안무치(厚顔無恥)라 는 욕을 먹곤 하는 것이다. 흑저는 항상 그들로부터 한걸음 뒤에 있었다. 그것은 실제(實際)의 거리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그러했다. 같이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처럼 그의 눈은 아무것도 보지 않거나, 어딘가 현실이 아닌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마치 실연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소운 일행과 몇 걸음 떨어져 따라가는 그의 걸음 은 허공을 밟듯이 허정허정 무의식적인 것이어서 정말 보표 를 할 마 음이 있는지 의심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완벽히 방심한 상태. 그런 그를 보표 로 뽑은, 그것도 얼굴만 보고 합격시킨 소운을 비웃게 하는 원인이 되고 만 흑저였다. 이런 식으로 지난 사흘 동안은 금룡장 안에서 그들에 대한 화제가 끊 이지 않았고 그 대부분은 비웃음과 험담이었다. 그러나 소운은 보라는 듯이 그들을 데리고 다녔다. 대문 앞에서 백염공 하구장이 길을 막고 섰다. “소장주! 어디 가십니까?” 소운은 손가락을 까닥거려 비키라는 시늉을 했다. 하구장은 비키지 않았다. “정 나가시려거든 호원무사들을 데리고 가십시오!” “데리고 가잖아!” “이 사람들만으로는 안 됩니다. 문중의 고수들을 대동하십시오!” 소운은 귀찮은지 더 다투지 않고 대문을 가리켰다. “열어!” 하구장은 양 팔을 벌렸다. “호위를 대동하지 않으시고는 한발도 나가지 못하십니다. 정 나가시 려거든 차라리 절 베고 가십시오!” 한백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어렵지 않지!” 도끼가 휘둘러지고 피가 튀었다. 금룡장의 총관 백염공 하구장은 자신의 가슴에 난 긴 상처를 믿지 못 하겠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누구도 말릴 사이가 없었다. 상처를 입은 본인도 피하고자 하면 피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설마 자신을 벨 용기가 한백에게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방어를 않은 것이었 다. 그러나 한백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쉽게 말해 생각난 대로 하는 자였다. 주저없이 허리에 찬 도끼를 뽑아 휘두른 것이다. 옆에서 구경하던 금룡장의 무사들이 분분히 달려와 하구장을 눕히고 지혈(止血)한다, 누구는 의원을 부른다 법석을 떨었다. 소운은 그 모습을 힐끗 보더니 짧게 말했다. “잘했어!” 더 이상 그들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 * * “나왔다!” 엽검영이 눈을 반짝거렸다. 그는 숨어 있던 나무에서 나와 길에 나서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른 생각을 하고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산길로 뛰기 시작했다. 산굽이를 돌아 관도를 가로지르고 이어진 다른 산 중턱으로 얼마나 올 라갔을까, 나지막한 양지쪽 언덕에 허물어져 가는 악가묘 (岳家廟)가 나타났다. 엽검영은 거기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나왔어, 나왔다구!” 낡은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질 정도로 크게 소리쳤는데 기대했 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엽검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묘 안을 둘러보았다. 묘라고 하지만 중국의 묘는 집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앙의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두 개에서 세 개, 많으면 대여섯 개의 작은 사당이 있는 것이다. 지금 그가 서 있는 악가묘 역시 그랬다. 정문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악가묘 의 주인인 악비 (岳飛)의 신주를 모 신 사당이 있고, 그 양 옆으로 진무전(眞武殿)과 여조전(呂祖殿)이 있 다. 진무전은 진무대제(眞武大帝), 즉 도가(道家)의 시조요, 나중에는 옥황 상제와 동격으로 모셔지는 노자(老子)를 모신 곳이다. 여조전은 도교팔선(道敎八仙) 중 가장 높이 받들어지는 여동빈 (呂洞 賓)을 모신 곳이다. 노자와 여동빈 이 악비 를 양 옆에서 호위한다는 것은 이상하지만 노 자나 여동빈 을 모신 묘가 아니면 대부분의 묘가 이런 형식들을 따르 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런저런 구분을 굳이 할 것도 없이 벽은 무너지고 제단 도 허물어져 한 걸음만 들어서면 묘 안이 전부 보였다. 그런데 엽검영이 찾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엽검영은 천천히 한 걸음 내디뎠다. 겨울의 창백한 양광이 무너져 내린 지붕 사이로 비추고, 벽 틈으로는 차가운 바람이 새어들어와 바싹 마른 낙엽들을 날려보냈다. 퇴락한 여조전 벽에는 회칠이 벗겨져 붉은 흙이 그냥 드러나 있는데 촛대도 없는 제단에 낡은 초상화 하나가 걸려 있었다. 자색(紫色) 법복(法服)을 걸친 흰 수염의 노도사, 아마도 그가 여동빈 이리라……! 엽검영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생사가 결정되는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을 내디뎠다. 순간,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짧게 들려 왔다. 엽검영은 먹이를 발견한 호랑이처럼 한달음에 뛰어올라 진무전과 악비 사당 사이의 벽이 무너져 쌓인 뒤편으로 달려갔다. 과연 거기 있었다. 무너진 흙벽돌 뒤, 바람이 닿지 않는 움푹한 곳에 황거지가 웅크리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 무언가 꺼리는 듯한 두 눈에 동자가 이리저리 구르고, 뒤 로 돌린 두 손에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터였다. 갑자기 엽검영이 그의 멱살을 잡고 고개를 바짝 들이대며 으르렁거렸 다. “뭐하고 있었어, 늙은이야! 나 몰래 혼자 뭘 먹고 있었지?” 황거지는 대답을 않고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거기 등뒤에 감춘 게 뭐야? 내놔 봐!” 엽검영이 달려들자 황거지는 등뒤에 돌리고 있던 두 손을 앞으로 내밀 었다. “봐,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엽검영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방금 황거지의 입에서 튀어나와 그의 옷자락에 묻은 것을 가리키 며 나직하게 말했다. “증거가 이렇게 있는데도 발뺌할 작정인가?” 황거지의 겁먹은 눈이 엽검영의 옷자락에 붙은 씹다만 닭뼈에 가 닿았 다. “아…… 그건, 그건…….” “말이 필요 없어, 이 치사한 늙은이야! 나중에 쓸데가 있다고 돈을 쓰 지 말자고 해서 이렇게 거지꼴을 하고 있는데 혼자만 고기를 사 먹 어?” 황거지의 멱살을 흔들던 엽검영이 그의 등뒤를 뒤졌다. 황거지가 물러나 앉으며 더듬더듬 변명했다. “산 게 아니라……, 다리 하나를 얻어서…….” “이게 다리 하나야? 뼈다귀만 세 마리는 되겠다!” 엽검영이 벽돌 틈에 수북이 쌓인 닭뼈를 들고 소리쳤다. “난 벌써 사흘이나 물만 마시고 나무뿌리 씹어 가며 오가는 행인만 감시하는데……. 어휴, 이걸……!” 엽검영이 닭뼈를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황거지를 노려보았다. 황거지 는 고개를 외로 꼬며 무색해 하다가 갑자기 다른 말을 했다. “뭘 봤는데 이렇게 달려왔어?” “말 돌리지 마, 이 거지야!” 황거지의 얼굴에 닭뼈를 던지고는 엽검영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 다. 문득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휴, 내가 왜 이렇게 치사해졌지?” 정말 한심했다. 거지보고 거지라고 해 봤자 욕도 아니다. 황거지는 이름조차 거지고, 근본부터 거지다. 그러나 그 거지가 뭘 혼 자 먹었다고 이렇게 흥분하는 그는 뭔가? 어쩌면 그는 거지보다 더 치사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엽검영은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나 악가묘 를 나왔다. 황거지가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엽검영이 홱 돌아서서 소리쳤다. “따라오지 마! 난 이제 사천 으로 돌아갈 거다!” 황거지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너 그럼 이제 보표 자리는 포기한 거냐?” 엽검영은 대답하지 않고 산 아래를 향해 걸었다. 그와 싸워 봤자 손해 만 본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황거지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이것 봐! 보표 가 아니라도 길은 많이 있어. 고용무사가 되면 무공도 배울 수 있고 잘하면 조장이 될 수도 있지. 능력이 있다면 말이지 만…….” 적어도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엽검영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자네 능력에 출세길이 그것뿐이겠어? 조장 위에 향주, 향주 위에 당 주, 다시 그 위에 호법 , 총호법 , 분가해서 기업을 세우면 맹주, 회주, 방주, 네가 이름 붙이는 대로 할 수도 있다고! 그게 다 무사로부터 시 작되는 거란 말야!” 엽검영은 약간 귀가 솔깃해졌다. 황거지는 그런 분위기를 금세 알아차리고는 목소리를 비장하게 해서 말했다. “지금 무림에서 일방(一幇)의 패주(覇主)로 군림하는 사람 중에 젊어 서 고생 않은 사람이 있나? 다 수많은 간난신고를 감내했기 때문에 지 금의 위치에 온 것일세! 그런데 자넨 이 정도 고통도 감수하지 못한단 말인가?” 나중엔 질책이요, 충고조로 말투가 변해 가는데 엽검영은 의식하지 못 하고 있었다. 황거지의 감언이설에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황거지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말을 맺었다. “그게 다 흑저를 다시 만나는 데에서 시작이 될 일일세. 후계자의 보 표 면 가장 입김이 통할 수 있는 자리야. 보지도 않은 곽상이 어떻게 보표 가 되었겠어? 다 그의 입김 탓이 아니겠냔 말야. 자네 하나 정도 무사로 만드는 건 손바닥 뒤집기지. 아니 어쩌면 조장부터 시작할 수 도 있고 말야!” 엽검영은 그 말에 완전히 넘어갔다. “사실은…… 그 소장주를 호위해서 성으로 향하는 걸 봤는데…….” 그 말을 듣자 황거지는 갑자기 치렁치렁한 누더기 자락을 걷어 허리에 묶더니 뛰기 시작했다. “다시 들어가기 전에 빨리 가자!” 엽검영이 어이가 없어 뭐라 말하려 입을 벌리는데 황거지는 이미 우당 탕퉁탕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저런 빌어먹을……!” 엽검영은 욕지거리를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황거지야 이미 빌어먹고 사는 늙은이 아닌가 말이다. 그도 이제는 뛰기 시작했다. 흑저가 다시 금룡장에 들어가기 전에 만나야 했다. * * * 벽옥루(璧玉樓). 예양부 제일의 기루(妓樓)였다. 부성 중앙의 요지에 삼십만 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아홉 개의 정원과 열여덟 개의 누각이 서 있고, 그 중앙에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구층의 누각이 있었다. 이 구층누각이 진정한 의미에서 벽옥루였는데, 수만 장에 달하는 기와 하나하나를 푸른빛 돌을 깎아 만들었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처마 마다에 영롱한 빛을 발하는 옥편(玉片)들을 매달아 바람이 일면 옥구 슬 부딪치는 소리가 예양부 전체에 퍼지고 달 밝은 밤에는 거기 반사 된 빛으로 인근이 휘황히 밝아질 정도였다. 가히 사치스러움의 극치라 해야 했다. 소운이 간 곳이 그곳이었다. 쾅--! 벽옥루 삼십만 평을 둘러싼 담장 남쪽에 난 거대한 대문이 큰 소리를 내며 울렸다. 한백이 걷어찬 것이다. “이 빌어먹을 집에서는 손님이 왔는데 주인은 코빼기도 안 비치나? 장사하기 싫은 거야?” 일반 대가(大家)에서도 그렇지만 대문은 아무에게나 열어주는 것이 아 니다. 벽옥루에서도 손님의 신분이 왕후장상이나 그 동급의 수준이라야, 그 것도 하루이틀 전에 예약을 해 놓아야 비로소 대문을 열고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부랑배 패거리가 감히 대문을 걷어차며 열어 달라고 하다 니……. 대문 양 옆에 나누어 서 있던 벽옥루의 호원무사들이 팔을 걷어붙이며 몰려들었다. “어디서 온 시러배 잡놈들이 감히 벽옥루에 와서 야료를 부리는 것이 야?” “모가지를 꺾어 버려!” 흉흉한 말들이 오가고 날카로운 창들이 그들을 겨누는 데도 한백은 태 연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기세를 부렸다. “중원제일가의 공자님이 납셨는데 대우가 이 모양이라……. 진정 장 사하기 싫은 것이냐? 내가 아예 오늘 닫아 주리?” 한백은 허리춤에서 큰 도끼를 빼 들더니 양 손으로 잡고 대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중국의 도끼는 한쪽으로만 날이 선 외날 도끼였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작은 것을 부(斧), 전쟁터에서 성문을 부수거나 사형장에서 사람의 목을 벨 때 사용하는 큰 것을 월(월)이라 부르는데 한백이 지금 뽑아 든 것은 도끼날의 길이만 한자가 넘는 대월(대월)이 었다. 펑--! 옆에 선 사람들이 말릴 사이도 없이 대월이 대문의 문짝에 박혀 들어 가고 나무조각이 튀었다. 한백은 한 발로 문을 걷어차며 다시 도끼를 뽑아 들었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벽옥루의 호위무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일부는 한 백에게, 일부는 소운을 호위하는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미친놈들--!” “죽여 버렷!” 수리도 곽상이 소맷자락에서 손을 빼 드는 것과 동시에 네 명의 무사 가 무릎을 잡고 고꾸라졌다. 귀도의 눈이 더욱 날카롭게 빛나고, 조금 뒤에 서 있던 흑저가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한백이 대월을 옆으로 휘둘러 무사들을 물리치고는 다시 대문을 향해 내리쳤다. 쾅--! 위로 삼 장, 옆으로 이 장에 달하는 거대한 대문이 무너질 듯 큰 소리 를 내었다. 벽옥루의 담 옆에 기대어 건들거리던 건달 십여 명이 무기를 뽑아 들 고 달려왔다. 건달의 일은 건달이 해결하는 것이 손쉽고 빠를 수가 있는 법이다. 그 래서 벽옥루 같은 기루에서는 인근의 건달집단에게 일정액을 주고 말 썽부리는 자들을 해결하는 일을 맡기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예양 인근에 세력을 편 장홍방(長紅幇)이라는 하오문 의 졸개들이 이 들인 것이다. 곽상의 손에서 다시 네 자루의 수리도 가 빛을 발하고, 어김없이 네 명이 꼬꾸라졌다. 그 뒤로 흥분한 몇 명의 사내가 몸을 날려 덮쳐 왔다. 귀도의 눈에서 폭발적으로 살기가 발산되며 칼이 슬쩍 움직였다. “으아악--!” 가장 가까이 다가온 건달 하나의 몸이 머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두 쪽으로 갈라졌다. 낭비없이 단순하면서도 쾌속한 동작. 귀도의 칼은 목표를 가로지르는 일직선으로만 움직였지만 그것으로 충 분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그의 칼을 피할 능력이 있는 자가 없었 으므로. 장홍방의 졸개들은 도망가고 싶었지만 몸이 그렇게 움직여 주지 않았 다. 죽을 힘을 다해 덮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뛰려 하는데 귀도의 칼이 이미 머리를 갈라 오고 있는 것이다. 그 칼과 머리 사이에 하얀 천을 감은 손이 끼여들었다. 깡--! 흰 천이 잘라져 날리고 파란 불똥이 튀었다. 귀도는 살기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을 들어 자기 칼을 막은 손의 주인, 흑저를 노려보았다. 흑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지나치다!” 귀도가 잠시 침묵하다가 칼을 뒤로 빼 가슴앞에 비스듬히 세웠다. 차가운 시선이 흑저의 눈을 찔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그 사이에서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흑 저가 손을 거두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우리가 싸울 이유는 없다.” “아니!” 귀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칼을 약간 움직여 흑저를 겨누었다. “내 칼을 막은 것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두 사람, 사실은 귀도가 뿜어내는 살기가 주위를 얼어붙게 했다. 벽옥 루의 무사들도, 장홍방의 건달들도 더 이상 덤벼들 수 없었다. “그만!” 재미있다는 듯이 이 모든 일들을 바라보던 소운이 귀도에게 말했다. “난 보표 들끼리 싸우라고 돈을 주진 않았어.” 귀도의 눈에 잠깐 갈등의 빛이 스쳤다. 열릴 것 같지 않던 그의 입이 처음으로 말을 토해 냈다. “이 일 도(一刀)는 나중에라도 받아야 할 것이다!” 흑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서 흘러내린 흰 천 을 다시 감기 시작했다. 그는 금룡장에 온 것을 처음으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했던, 그리고 기대했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방식으로 일이 흘러가고 있는 것 이다. 꽈앙--! 이때 벽옥루의 문이 굉음을 내며 쪼개져 열렸다. 한백의 대월이 겹겹이 가로지른 대문의 빗장을 동강내 버린 것이다. 쪼개진 대문 안으로부터 염소수염의 중년인이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며 굽신거렸다. “공자, 죽을 죄를 졌습니다요. 중원제일가의 공자께서 오실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십리 밖에서부터 마중을 했을 것을…….” 한백이 대월을 치켜들었다. “죽을 죄를 졌으면 죽어야지 무슨 말이 많아!” 소운이 말렸다. “그만 둬!” 그러나 멈추기에는 늦었다. 한백의 대월이 이미 염소수염, 벽옥루의 총 관 철산자(鐵算子) 요적(了積)의 머리에 닿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요적의 몸이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서며 소맷자락에서 산반(算盤) 을 꺼내 한백의 대월을 막았다. 촹--! 산반의 알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놀랍게도 한백이 대월을 손에서 놓치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요적의 산반은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가벼운 무기로 대월 같은 중병(重兵)을 막았으니 상당한 내공 을 닦은 고수라 해야 할 것 이다. 이 일 장의 격돌에서 명백히 모자람을 드러낸 한백이 얼굴을 붉히며 왼쪽 옆구리에 찬 작은 도끼를 잡았다. “그만 해!” 소운이 짜증스럽게 명령하고, 한백은 도끼에서 손을 뗐다. 요적이 다시 허리를 굽혔다. “소인이 진 죄로는 죽어 마땅하나 성심을 다해 모심으로써 면죄할까 하옵니다.” 말은 공손하지만 눈자위에 그늘이 깔린 것으로 보아 분한 마음을 억지 로 누르고 있는 티가 역력했다. 소운은 못 본 척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무나!” 요적이 다시 낯빛이 변했다가 급히 제모습으로 돌아왔다. 소운의 오만무례한 거동에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를 겨우 눌러 삼키는 모양이었다. 손을 뻗어 안내를 했다. “화청(花廳)으로 모시겠습니다.” * * * 쾅--! 두 치나 되게 두꺼운 탁자가 절반으로 쪼개져 뒹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목소리에서는 상처 입은 짐승의 신음처럼 분노가 묻어 나왔다. 탁자를 쪼개고도 가라앉지 않은 분노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고 있는 것이다. 삼양철검(三陽鐵劍) 하응(賀膺). 금룡장의 무사조직인 삼검대(三劍隊) 중 하나인 철검대(鐵劍隊)의 대주 (隊主)요, 총관 백염공 하구장의 늦게 본 아들인 하응은 끓어오르는 분 노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몸을 떨고 있었다. “이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삼대(三代)에 걸친 충성을 생각한다 면 금가(金家)가 어찌 우리 하가(賀家)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지금 금가, 금룡장을 위해 평생을 바친 부친이 일개 보표 의 도 끼에 찍혀 누워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온 것이다. ‘그 말종이 뭐라고 했다고?’ 그의 부친 하구장이 백발을 피로 더럽히며 쓰러진 모습을 보고 잘했다 고 보표 를 칭찬했다고 하지 않던가! 충혈된 눈이 벽에 걸린 그의 철검에 가 닿고, 다음 순간 그의 손이 그 것을 낚아채었다. “세가의 내일을 위해 오늘 그 말종을 베어 버리리라!”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는 몰랐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 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분노의 화염에 불타오르는 한 마리 호랑이며, 세가 의 앞날을 위해 화근을 제거하려는 충절(忠節)의 청년무사였을 뿐이었 다. 방문 앞을 드리운 휘장이 찢겨져 나가도록 거세게 문을 나가는 그의 앞을 삼십대 무사가 막아섰다. “참으셔야 합니다!” 하응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직속부하, 철검대의 부대주인 오초검(烏墅 劍) 마원(馬遠)을 노려보았다. “그대가 지금 내게 참으라는 것인가?” 물씬 위협의 뜻이 끼쳐지는데 마원은 비키려 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참으셔야 합니다!” 슈팍--! 장식없는 검은 가죽검집. 역시 그렇게 검은 철검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쾌속하게 뽑혀져 마원의 목젖에 대어졌다. 실낱 같은 틈. 반 치만 더 내밀어지면 마원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게 될 것이다. 하응이 무거운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그대의 공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검이 여기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러서라!” 그러나 마원도 완강했다. “그간의 은혜를 생각지 않았다면 저 역시 여기 서 있지 않았을 것입 니다. 그러나 지금은 참으셔야 할 때입니다.” “이…… 이…… 이……!” 하응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며 철검을 들어올렸다가 수직으로 내리쳤 다. 펑--! 철검은 돌로 만든 바닥에 깊이 박혀 부르르 떨렸다. 하응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가 뺨으로 굴렀다. 자신과의 힘겨운 싸 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원의 눈에도 이슬이 맺혀 있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 사내 중의 사내 삼양철검 하응에 게 가해진 이 모욕은 곧 그들 전체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응이 허리를 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싸움은 끝났다. 순간의 울분을 참지 못하면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일족(一族)의 멸 망뿐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돌바닥에 깊이 박힌 철검을 한 손으로 간단히 빼어 검집에 넣었 다. 그리고 마원의 곁을 스쳐 걸어갔다. 그는 걱정스럽게 따르는 마원을 돌아보지 않고 무겁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않을 수는 없다! 나도 세가의 일원이므로 …….” 제 11 장 네 상투 끝에 똥을... 네 상투 끝에 똥을 싸라 인적이 닿지 않은 깊은 산속.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소나무 선 봉우리에는 구름이 감돌았다. 잠시 흑저는 그런 깊은 산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림이 실제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사실적인 것이거나, 방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서 그런 착각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 그림 한 장에는 방 전체를 산속처럼 느끼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 다. 그들은 장식이라고는 그 그림 한 장밖에 없는, 그러나 그 하나로도 충 분히 고아(高雅)한 느낌을 주는 방 안, 벽옥루 칠층에 와 있었다. 난(亂)하지 않은 벽지를 바른 방에 얇은 창호지 너머로 비치는 양광이 은은한 색조를 드리우고, 그 중앙에 고풍스런 탁자가 있고 의자가 있 다. 그리고 노래. 昭君拂玉鞍 上馬啼紅頰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 왕소군 구슬안장 떨고 말에 오르는 붉은 볼엔 눈물이 흥건 오늘까지도 한나라 궁전 사람이더니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의 첩이 되다니 왕소군 은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후궁이었으나 나중에는 흉노 (兇 奴)와의 화친정책에 의하여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거기서 죽은 여자였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당시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 나 왕소군 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었다. 그녀가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후궁 중에서 으뜸가는 절 세의 미인이었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며 화공 모연수 (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고 한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문인들이 즐겨 읊는 시의 소재가 되었다. 지금 기녀가 부르는 노래 또한 그녀를 소재로 한 것이었는데……. 소운일행은 벽옥루 칠층에서 기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섬서 일대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가기(歌妓), 이화(梨花)가 비 파(琵琶)를 뜯으며 부르는 것이다. 갑자기 소운이 손을 들어 노래를 막았다. “쓸데없는 노래군! 다른 노래를 해!” 이름만큼이나 해맑은 인상이었던 이화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이다. 원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갈 일인데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않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좋아하는 노래인데, 공자께선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군 요?” “중국의 후궁이 선우의 왕비보다 나은 것일까?” “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궁궐 구석에서 홀로 늙어 꼬부라지거나, 운이 좋아 몇 백 후궁 중 하나로 사는 것이, 오랑캐라고는 하지만 자신만을 사랑해 주는 선우의 품에 안기는 것보다 나으냔 말이다.” “물론 일반적으로야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내에게 안기는 것보다 여 인에게 행복한 일이 없겠지요. 하나…….” 이화는 얘기의 방향이 이상하게 흘러가기는 하지만 말이 안 통하는 손 님은 아니라 생각하는지 미소를 되찾았다. “여인에게도 조국은 있는 것이니 어찌 조국의 강산을 떠나는 것이 기 꺼웠겠습니까?” “매년 가뭄 아니면 홍수, 다행히 풍년이 들어 살 만하면 호랑이보다, 독사보다도 무섭다는 학정(虐政)에 소출을 뺏기지. 굶주림에 지친 자식 이 부모를 잡아먹고 부모가 자식을 삶아 먹는 지옥도(地獄圖). 아들은 노예로, 딸은 창녀로 팔고 운이 좋으면 궁녀, 후궁으로 들어가 배나 불 리다가 그나마 황제가 죽어 자빠지면 구덩이에 산 채로 같이 묻혀야 되는 조국도 조국이라 할 수 있을까?” 간신히 떠올랐던 미소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이화는 소운의 유창한 말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아니, 그의 말이 대 역죄에 걸릴 수도 있는 위험한 말이었기 때문에 공포에 질렸는지도 몰 랐다. “그, 그런 참람(僭濫)한 말씀을…….” “네가 얘기 않으면 누가 고변(告辯)을 할까?” 고변. 관에 고해 바친다는 말인데, 고변으로 출세한 자도 적지 않은 시절이 었으니 전혀 경계하지 않아도 좋을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사실은…….” 소운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왕소군 은 선우에게 시집가서 왕비가 되고, 선우가 죽은 후에는 본 처의 아들인 복주 루선우(復株累單于)에게 다시 시집가서 두 딸을 낳 았어. 그리곤 늙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게 진 짜지. 어느 사서(史書)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다 죽었다는 말이 없어.” 사실이 그랬다. “그럼 그 많은 시가(詩歌)들은……?” “지금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다 오랑캐보다 강하지 못한 것을 비관한 문인(文人)들이 윤색한 이야기지. 힘으로 분풀이를 못하니까 그런 이야 기로나마 자존심을 살리려는 짓거리라는 거야. 사서 몇 장만 뒤져보면 다 나오는 얘기를 설마 모르진 않을 텐데 그런 시를 짓고, 좋아라고 노래까지 부르는 그런 맹목적인 애국심, 터무니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화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공자의 말씀을 듣고 보니 새롭게 눈이 뜨이는 군요. 그럼 무슨 노래 를……?” 말을 돌리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구가(九歌)!” 이화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눈을 들어 소운의 기색을 급히 살폈다. 그 러나 소운의 흐릿한 눈에 떠오른 빛을 그녀는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평민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라 잠시 실태(失態)를 보였습니다. 해량 (解諒)하시길……!” “아, 아--!” 소운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화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비파에 손을 대었다. 수초(水草)처럼 가냘픈 손가락에 끼워진 가조각(假爪角)이 비파의 무 (武), 대(大), 중(中), 자(子), 네 현(絃)을 눌렀다 늦추고 늦추었다 다시 누르고, 다른 손에 들려진 목발(木撥)이 그 현들을 날쌔게 튀겼다. 석명(釋名)에 ‘비파는 밖으로 타내면 비(琵)요, 안으로 디려타면 파 (琶)라고 한 까닭에 비파’라고 했듯이, 어떤 땐 소낙비 내리는 소리같 이 급하고 성기게, 어떤 땐 속삭이듯 다정하게 옥반에 궁글린 듯한 소 리가 방안에 가득 찼다. 그리고 이화의 노래. 좋은 날 좋은 때 님을 모셔다가 님께서 기뻐하시니 내 장검 옥고리 어루만지매 댕그랑 아름다운 패옥(佩玉) 소리 …… 소운이 물었다. “이런 노래 들어본 적 있어?” 흑저는 고개를 저었다. 소운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애들도 아는 건데……. 굴원 (屈原)의 구가(九歌)라는 것이지. 아홉 신을 찬미한다는 내용인데, 지금 대목은 천신(天神)인 동황태일(東皇太 一)을 노래하는 가락이야.” 님께서 환하게 내려오시와 어느덧 저 구름 속으로 회오리쳐 오르시나니 바라보니 먼 곳 기주 (冀州)땅 사해에 널리 퍼져 가이 없나니 …… 이화가 잠시 쉬었다가 다음 가락으로 넘어가자 소운이 다시 짧게 말했 다. “구름의 신 운중군(雲中君)!” 이런 식으로 소운은 기녀의 노랫가락에 맞추어 상강 (湘江)의 여신들 인 상군(湘君)과 상부인(湘夫人), 운명의 신인 대사명(大使命)과 소사명 (小使命), 해의 신인 동군(東君)을 노래하는 가락들을 설명했다. 흑저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묵 묵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가락에는 그도 무관심할 수만은 없었 다. 구가의 여덟번째 곡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님과 함께 구하(九河)에 노닐어라 거친 바람 일어 사나운 물결 물결 수레에 연잎 덮개라 세 마리 용이 앞에서 끌어라 …… 소운이 말했다. “뭔가 짚이는 것 없어?” 흑룡선의 뱃머리에 세 마리 용, 삼두용상이 있지 않았던가! “거기 탄 사람을 죽였지? 황하의 신 하백(河伯)을…….” 여덟번째 신은 하백이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곽상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지고, 이화의 노랫소리가 흔 들렸다. 하백이 흑저의 손에 죽었다고? 저 땅딸막한 파계승이……? 그들의 눈은 그런 불신과 회의를 표현하고 있었다. 흑저가 힐끗 이화를 보았다. 그녀는 찔끔 놀라더니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득한 물 끝을 생각하나니 거기에는 고기비늘의 지붕, 용비늘의 집 자개 문 진주의 궁전 어이하여 신령은 물 속에 계시느뇨 …… 흑저가 소운을 보았다. “흑룡왕 하백?” 소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이화의 노래는 아홉번째 가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딘지 서글프고 어두운 계면조(界面調)의 가락. 붉은 표범 타고 얼룩 이리를 데리고 향나무 수레에 계수가지 깃발 석란 옷에 두형 띠 향초 꺾어 사랑하는 이에게 주리 하늘도 가린 대숲에 사는 몸이라 길이 험해 늦게 왔어라 나 혼자 산 위에 서면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 어둠이 밀려와 낮도 그믐이나 같으니 동풍 밀려와 신령이 비를 내리어라 늙어진 나에게 누가 꽃을 피우랴 우렛소리 우르르 비는 캄캄하게 내리어라 잔나비들 밤에 슬피 울고 바람은 선들선들 나뭇잎 흔드나니 그대 생각하며 내가 시름에 젖나니 “거기까지!” 소운이 손을 들어 노래를 중지시켰다. “마지막 가락은 산에 사는 귀신, 산귀(山鬼)를 노래한 것이지! 이 귀 신도 당신과 무관하지는 않을걸?” 흑저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소운이 피식 웃었다. “그가 들으면 이를 갈겠군! 직속수하를 셋이나 죽이고 모른 척한다고 말이야!” 손가락을 꼽으며 하나씩 이름을 말하는 소운이었다. “청면수라, 대완구, 그리고 소리장도까지…… 중원사흉의 셋을 죽였잖 아?” 곽상과 이화의 눈이 다시 커졌다. 귀도의 눈에도 이채가 돌았다. 최근 강호를 뒤흔든 몇몇 혈사(血史)의 주인공이 바로 흑저였다는 것 을 그 말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흑저가 뭔가를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중원사흉 중 나머지 하나도 그의 수하인가?” “그 자신이지!” “……?” “중원사흉의 대형(大兄)이면서 상전(上典), 초혼귀(招魂鬼) 원체체(猿 涕涕)가 바로 산귀신이야!” “그들이 왜 날 노린 건가?” “그들의 일을 방해했지. 날 구해줬잖아!” “……!”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흑저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눈을 빛냈다. “그도 이리의 하나였나?” 처음 만났을 때 소운은 자신을 노리는 이리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 가! “용케 그 말을 기억하는군!” 소운은 웃었다. “당신 덕택에 밝혀 낸 두 명이지!” “그럼 더 있다는……?” “구신(九神)이니 당연히 아홉일 것 아닌가?” “아홉!” 법에 금지된 일들을 하고 있는 무림방파의 속성상 그 대부분은 비밀세 력일 수밖에 없지만 간혹 대부분의 무림인들도 그 정체를 모르는, 말 그대로 비밀 속에 감추어진 세력이 있다. 흑룡방(黑龍幇)이 그 중 하나였다. 그때그때의 사안에 맞추어 강호의 흉인들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실제 일을 처리하는 것은 검은 복면에 검은 옷을 차려입은 사내들이었다. 철저히 훈련되어 개개인이 웬만한 무림고수에 필적하는 자들인데 특징 으로는 일반의 병기보다 날이 좁은, 철저히 살상용의 병기를 사용한다 는 것. “당신이 죽인 흑도수(黑刀手)들이 협봉도 (狹鋒刀)를 쓰고, 흑창수(黑 槍手)들이 협인장창 (狹刃長槍)을 쓰는 것처럼 말이지……!” “흑도수, 흑창수?” 흑저의 눈빛이 묘해졌다. “날 찌른 마상의 장창 수(長槍手)들이 흑창수라고?” 소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배시시 웃었다. 흑저는 가늘게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뜻?” 소운은 다시 웃었다. “이해를 못하는군! 하긴 그게 당신 장점일지도……. 이용해 먹기 좋거 든.” 요컨대 흑저가 공격받는 것을 관찰해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었다는 것 이다. “그 외에도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현재 드러난 것만으로도 대단 한 세력이야. 특히 흑룡방과는 우연히 이름만 비슷할 뿐 직접적인 관 계는 없다고 생각했던 흑룡왕 하백마저 한 통속이었다는 것은 충격이 었지.” 흑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 자신이 미끼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 은 소운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말하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당연히 그가 받아야 할 업보라고 생각하는 탓일 것이다. 흑저에게 있어서 사태는 단순했다. 그들은 그를 죽이려 했고, 그는 그들을 죽였다. 그는 아직 죽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그를 죽이려 한다면 그때도 그는 죽지 않으려 노력할 수밖에 없 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마음에 걸렸다. “그들이 하는 일은?” “살인청부(殺人請負)! 최고의 이익을 남기는 장사지.” 흑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이면 죽어도 괜찮아……, 아니……!’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결국 죄악이었다. 선량한 양민을 죽이든, 백 명을 죽인 살인마를 죽이든 그가 살생을 했 다는 근본적인 사실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결국은 죄악이었던 것이다. ‘옴 살바 못자모치 사다야 사바하…….’ “그걸 토대로 조사를 하다가…….” 소운은 그의 심정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흑룡방과는 다른 한 단체가 묘하게 엮이는 것을 알게 되었지!” ‘또 다른 한 단체?’ 흑저는 복잡해져서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구신맹(九神盟)? 구신회(九神會)?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지. 중요한 것은 아홉 명이 모여서 만들어진 단체라는 것, 그리고 그 중 둘이 하 백과 산귀라는 것이야!” 구신이니 당연히 아홉 명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아홉 명은 백여 년 전 굴원 의 구가를 암호로 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구신(九神)이었다. 처음에 소운은 흑룡방이 구신 중 하나, 정확히는 산귀가 독자적으로 세운 세력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다면 흑룡방은 구신의 하부조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백이 바로 그 흑룡왕 하백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흑룡방이 단 순히 구신의 하부조직이라는 생각은 근거를 잃었다. 어쩌면 구신과 흑룡방은 하나일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아홉 개의 머 리를 지닌 흑룡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운은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또 한 단체가 거기 연결된다는 것이야.” 흑저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까지의 얘기로도 그는 충분히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그런데 또 한 단체라니……! 그러나 소운의 말은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금룡장! 중원제일가가 구신의 본거지라는 것!” * * * “향풍부동송화로(香風不動松花老)……. 향기는 바람없이 싱그러운데 소나무 꽃가루 진다…….” 정기룡은 족자에 쓰여진 글귀를 나직이 읊었다. 당대(唐代)의 명문장(名文章) 위야(魏野)의 ‘은자(隱者)를 찾았으나 만 나지 못하다(尋隱者不遇)’라는 시의 한 구절. 한가함이 묻어 나오는 게으른 풍류공자의 태도였다. 이때 문가에서 인기척이 났다. “바람 없이도 향기는 싱그럽고 소나무 꽃은 보이지 않으나 꽃가루는 하늘을 덮나니……. 은자(隱者)가 쉬이 찾아지면 은자가 아니겠지요?” 여인의 목소리였다. 문가에 드리워진 구슬 주렴을 희디흰 손으로 걷어내며 막 방에 들어서 는 이십대 후반의 여인, 벽옥루의 주인인 벽요낭랑(璧瑤娘娘) 도교교 (桃嬌嬌)였다.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유혹할 수 있는 여인이 있다더니 그녀가 바로 그랬다. 걸음걸이마다 향기가 풍겨 나올 듯한 자태, 보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치밀어 오르게 할 정도로 나긋나긋한 몸매와 유혹적인 몸짓이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 시대 고급 청루 가 대부분 그러하듯 손님과의 첫인사는 서로 시서 화(詩書畵)에 대한 담화를 통해 서로의 식견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그러한 상류사회의 취미에 정통한 기녀일수록 높은 값을 자 랑하게 되는 것인데, 도교교의 언동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 다. 정기룡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한가한 처지가 아닐 텐데 여유시군요!” 원래 아는 사이였던 모양, 도교교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투를 바 꾸었다. “뭐가 문제던가……?” 말은 목소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교교의 사소한 눈짓 하나, 몸짓 하나가 붉은 입술, 희디흰 치아에 어 울려 말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는데도 절로 유혹의 빛이 풍겨 나오는, 가히 유혹의 덩어 리였다. “모르십니까?” 그러나 정기룡은 그런 것에 익숙한지, 아니면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 인지 심상하게 넘겼다. “이 아래에 누가 와 있는지?” 도교교는 정기룡이 가리키는 손을 따라 바닥을 힐끗 보고 희미하게 미 소지었다. “그 어린 망나니가 온 것이야 알지만 그게 소사명을 놀래킬 정도였던 가?” “여기에 온 것이 우연이라 확신하고 계시나요?” 정기룡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벽요낭랑 도교교, 상부인(湘婦人)의 본거지가 여기라는 걸 전혀 모른 다고……. 그렇게 확신하고 계신 것입니까?” 도교교가 구신 중의 다섯째인 상부인이었던가?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 리가 없잖은가? 광인(狂人)이…….” 정기룡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는 위험한 광인도 있는 법이죠!” 그는 건들건들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계란같이 갸름한 얼굴을 슬쩍 건 드렸다. “광인이 하는 행동치고는 이상하게 계획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으십니 까? 주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적의 심장부로 온다…….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곧 전 중원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겠지요?” 도교교는 얼굴을 냉랭하게 굳히며 자신의 얼굴로 올라온 정기룡의 손 을 쳐내었다. “광인이 무슨 짓을 못할 것인가? 그보다 이 문제는 자네 소관이 아닐 텐데? 중원제일가 내부의 문제는 나와 상군(湘君)에게 맡겨졌을 텐 데?” 정기룡은 금방 그녀의 손에 맞은 손등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 다. 놀랍게도 가냘픈 섬섬옥수에 가볍게 맞은 것에 불과했는데 그의 손등 에는 선명한 네 줄기의 자국이 붉게 그어져 있었다. 손가락 자국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공을, 그것도 대단한 무공을 지녔 다는 증거였다. “손이 맵군요!” 정기룡은 웃음을 잃지 않고 방문을 향해 걸으며 말했다. “그 어린 망나니 곁에 하백을 죽인 자가 같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 러시는 것입니까?” 도교교는 말을 잊었다. 그러나 정기룡의 눈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저도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게 되었으니 유심히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방(幇) 내부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 지…….” “소문이라고?” 도교교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무슨 뜻인가?” “두 분에게 그 망나니를 처치할 의욕이 없다는……. 저는 사실이 아 니라 믿고 있습니다만, 다른 분들은 그렇게 생각을 않을 지도 모르지 요.” 도교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소릴?” “터무니없다면 다행이지만…….” 정기룡은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뒤로 도교교가 소리쳤다. “네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무고(誣告)라는 것이 드러날 때는 곱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 대답은 없었다. 도교교는 정기룡이 나간 후에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벽으로 다가 갔다. “뭔가 믿는 것이 생긴 모양인데……, 그렇지 않고는 저런 태도를 보 일 리가 없는데……,” 벽에는 아까 정기룡이 읊었던 시의 전문(全文)이 적힌 족자가 드리워 져 있었다. 그녀는 그 족자를 걷어내었다. 족자의 뒤에 드러난 쇠고리, 그녀는 그것을 잡아당겼다. 돌로 만들어진 벽이 상자모양으로 당겨져 나오고 거기에는 둥근 통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 그 중 한 뚜껑을 열자 놀랍게도 사람의 목소리가 그 안에서 흘러나왔 다. 전음 통(傳音筒)이었다. 벽옥루에는 특정한 방에 연결된 전음 통을 통해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원제일가가 구신의 본거지라고? -발생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나는 모르겠지만 다른 하나는 그녀가 아는 목소리, 소운의 것이었다. 도교교는 소리없이 의자에 앉아 그 대화를 듣기 시작했다. * * * “금룡장에는 삼당(三堂) 삼검대(三劍隊) 십이지가(十二支家)가 있지.” 소운은 금룡장의 내부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삼당은 관리차원의 분류였다. 금룡장 내부의 전반 잡무를 처리하는 총당(總堂), 금룡장 외부의 사업 을 맡은 외당(外堂), 그리고 내외를 통틀어 비리를 감시하고 법을 처리 하는 집법당(執法堂)으로 구성된다. 그 휘하의 무사가 오백여 명 정도. 삼검대는 호원무사들을 분류한 명칭이다. 무공의 수준에 따라 철검(鐵劍), 은검(銀劍), 금검(金劍)으로 나뉘는데 전체 숫자는 오백에 달한다. 가장 무공이 처지는 철검대에 삼백, 은검대에 백오십, 최고수준이라 할 수 있는 금검대는 오십여 명에 불과하지만 그 숫자로도 다른 무림방파 의 전력을 능가한다고 평가되었다. 십이지가는 금룡장에 속하지만 같이 있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분가의 형식으로 중원 전역에 나가 각자의 사업을 하고 이익 금을 본가(本家)인 금룡장에 정기적으로 상납하는 것이다. 그 일이라는 것이 다양해서 대규모의 농원(農園)에서부터 전장(錢場), 수운(水運), 광산(鑛山), 심지어는 법적으로 금지된 염상(鹽商)과 밀무 역(密貿易)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다. “이 기루도 그 중 하나지!” 한백이 끼여들었다. “그런데 대접이 이 모양이야?” 소운이 간단히 대답했다. “주인말고는 모르니까.” 중원제일가에서도 몇몇만 제외하고는 십이지가의 사업을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지방토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명왕조의 눈 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 가문에서 그토록 거대한 규모의 사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엄청 난 세금을 물리거나 최악의 경우 역모죄로 몰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우려도 있었던 것이다. 한백이 다시 물었다. “관(官)이 허수아비는 아닐 텐데?” 과연 그 정도로 거대한 사업을 벌여 놓았다면, 관에서 전혀 눈치를 못 채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엄청난 액수의 뇌물이 들어가지! 그리고…….” 소운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십이지가 중 하나는 관에 침투해 있다고 하면 어떨까? 그것도 대단 한 지위에……!” 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돈과 권력이었다. 둘 중 어느 하 나만으로도 안 되고 둘 다 있어야 한 가문의 영화(榮華)가 유지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중 반역자가 생겼다는 것이야.” “십이지가 중에?” “금룡장 전체에!” 언제부터인가 금가의 손에서 금룡장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 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반역의 모임은 처음 천패금룡이 금룡장을 창건한 그때부터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기가 앞에 있으면 군침을 흘리는 것은 개들의 당연한 생리이니 말이 다. 그러나 금룡장은 먹이치고는 너무 컸다. 아무리 탐욕스러운 개라도 한입에 삼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칫 잘못 하면 외려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모이기 시 작했다. 힘을 합쳐 안에서부터 금룡장을 삼키자는 것이었다. 누구는 삼당 중에, 누구는 무사들 중에서, 또 누구는 십이지가 중에서 나타났고, 그들 서로 외에는 아무도 구성원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들이 구신이었다. 얘기는 끝났다. 방안에는 무거운 기류가 깔려 있었다. 귀도도, 곽상도, 통비원도, 흑저도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단순히 보 표 만은 아니라는 것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적, 어쩌면 그들을 제외한 전원이 적이거나 적의 하수인 일 수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 다. 그들 자신의 목숨이나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상황인 것이다. “먼저 나가 계십시오!” 귀도가 소운의 등뒤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소운은 방 한구석에서 비파를 부둥켜안고 서 있는 이화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귀도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손에 들린 칼이 바닥에 스쳐 소리를 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귀도는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다 들은 이화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화는 별로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신경을 쓰 는 것은 오히려 방을 나가는 소운이었다. 대신 흑저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는가?” 소운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이없다는 듯, 한심하다는 듯 한참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음에 안 들어 죽이는 것이야. 왜, 불만 있나?” 이화는 그가 말을 하면서 우연인 듯 고개를 들어 천장을 가로지른 조 각(彫刻)들 중 입을 벌린 용을 슬쩍 보는 것을 보았다. 순간 그녀는 안색이 변해 비파의 현에 손을 가져갔다. 티잉--! 날카로운 비파의 울림. 이화의 손에 끼워졌던 세모꼴 손톱처럼 생긴 가조각이 귀도를 향해 격 사되었다. 귀도가 거무튀튀한 칼을 옆으로 뉘여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가조각을 막았다. 이화는 다시 비파를 들어 후려칠 동작을 하며 입을 벌려 소리쳤다. “그는 알고…….” 그러나 그녀의 입으로 나오던 말은 완전히 맺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목에는 어느새 한백의 작은 도끼가 파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귀도의 안색이 돌변해 한백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처치하겠다 는 뜻을 이미 보였던 것이다. 한백은 변명하듯 두 손을 들어올렸다. “여러 말 나오면 시끄럽잖아?” 그는 이화의 목에 꽂힌 도끼자루를 발로 가볍게 밟았다. 도끼가 공중 에 튀어 올라 몇 바퀴 돌며 피를 뿌리다가 그의 손으로 돌아갔다. 소운이 말했다. “그리 무고하지도 않다는 걸 알겠지?” 과연 일개 기녀였다면 그런 무공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은 그녀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니 죽어도 원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흑저는 귀도의 빠른 대응과 한백의 도끼 던지기에 감탄했다. 그들도 보통 실력은 넘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그들의 실력보다도, 더 그 잔인하고 악랄한 손 씀씀이 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가차없이, 그리고 아무런 주저도 없이 손 을 쓰는 그 냉정함이란……! 흑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도 마찬가지인가?’ 그들을 비난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비난받아 마땅할지도 몰랐다. 고민을 하고 죽이건, 혹은 고민 없이 죽이건 그 결과는 같았던 것이다. 흑저, 그 자신은 어쩌면 대단한 위선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더 본성에 충실해야 할지도……!’ 흑저는 고개를 들어, 죽어 넘어진 이화의 시체를 보았다. 이화의 목은 반이 넘게 잘려져 뒤로 넘어가 있었다. 그 열려진 동공과 목으로 넘어오는 붉은 피! 그는 고개를 돌리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 * * 엽검영은 벽옥루 정문을 바라보는 골목 모퉁이에 머리만 내놓고 바라 보고 있었다. 흑저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위풍도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 아리따운 기녀들을 옆에 끼고 금배옥잔(金盃玉盞)에 미주(美酒)를 가득 담아 마셔 가며 기다리 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돈이 없었다. 아까의 소동으로 벽옥루에는 들어가는 손님은 없고 몇몇 장정들이 넘 어진 대문을 고치느라 뚱땅거리고 있었다. 그때, 쪽문이 열렸다. 엽검영은 눈을 번쩍 뜨고 골목을 나와 달려갔다. 혹시라도 놓친다면 며칠을 또 굶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사람은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검붉은 비단옷에 주작의 깃털. 보기 드문 미남자가 막 벽옥루의 쪽문으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엽검영은 실망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가 돌아섰다. 괜히 달려온 덕분에 배만 더 고파지는 것 같았다. “형씨, 잠깐만!” 엽검영은 인상을 쓰며 천천히 돌아섰다. 오그라들은 뱃가죽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으니 표정이 좋을 리 가 없었다. “날 부른 거요?” 미남자, 정기룡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사람을 기다리고 있지 않소?” 엽검영은 더 인상을 썼다. 얼핏 보았을 때도 미남자였는데 자세히 보니 자기보다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아쇼?” 정기룡은 그가 인상을 쓰면 쓸수록 더 미소를 지었다. “그냥 그럴 것 같아서…….” 그리곤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소생 정기룡이라 하오!” 엽검영이 얼떨결에 마주 절했다. “엽검영이오!” “형씨가 기다리는 사람은…….” 정기룡이 말했다. “곧 나올 거요!” 그리곤 돌아섰다. “또 보게 될 거요!” “어…… 어……?” 엽검영이 입을 벌리고 뭔가 더 물어 보려 했지만 이미 그는 대로를 따 라 사람들 틈에 묻혀 버렸다. “싱거운 자식 같으니……!” 엽검영은 왠지 재수가 없어 침을 뱉었다. 그때 골목 뒤에서 황거지가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손짓했다. “왜 널 부른 거야?” “몰라!” 엽검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아마 내가 자기보다 잘생겼으니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지?” 황거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잠시 보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리 봐도 신비스러워!” “뭐가?” “너처럼 뭘 모르는 놈이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지금까지 부러진 곳 하나 없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가 하는 것이 말이야.” 엽검영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려 했다. 그러나 황거지가 빨랐다. “검붉은 비단옷, 같은 색의 가죽장화……, 그래도 모르겠어? 저놈은 동창 에서 온 거야!” “뭐?” “동창 의 고수라고! 그런 놈이 할 일 없이 널 붙들고 있겠어?” “동창 에서 왜 날……?”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생판 처음 보는 놈이 아는 척한 것인데 난들 어떻게 알겠어?” 황거지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다가 갑자기 벽옥루를 가리켰 다. “나온다!” 벽옥루 정문을 달고 있던 장한들이 갑자기 목재와 연장들을 치우고 반 쯤 달려 있던 문짝을 열어제쳤다. 그 사이로 한백이 거만하게 걸어 나왔다. 그 뒤에 통비원이 소운을 안 고, 곽상과 귀도가 그 주위를 에워싸면서 걸었다. 마지막이 흑저였다. “그런 얘기를…….” 귀도가 나직하게 말했다.해야겠소. “굳이 이런 곳에서 할 필요는 없지 않소?” 에워싸듯 같이 걷는 그들이 아니면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 였다. 아까 전부터 의문스럽게 생각하던 것을 문을 나와서야 비로소 물어 보 는 것이다. 소운이 나직하게 되물었다. “내가 어느 정도 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리라고 생각하나?” “그럼……?” “어차피 그들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우 리도 이만큼은 알고 있다고 미리 알려 주는 것이 나아!” “그게 무슨 이득이 있소?” 소운은 웃었다. “짐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적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 게다가 난 다 알려주지는 않았어!” 곽상이 감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소운은 아는 것을 다 알려 주지는 않은 것이다. 소운이 말을 이었다. “나는 적들이 모르게 행하고, 적은 내가 아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한 다. 병법의 요체(要諦)야!” 그때 한백이 소리치며 대월을 뽑아 들었다. “뭐하는 놈들이야!” 거지 하나와 청년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던 것이다. 엽검영과 황거지였다. 한백이 위협하듯 대월을 수평으로 휘둘러 바람소리를 내었다. “죽고 싶어?” 엽검영은 겁먹은 눈으로 대월의 시퍼런 날을 보았다. 힐끗 뒤를 보니 황거지는 어느새 세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비겁한 거지! 무식한 자식!’ 앞의 욕은 황거지에게, 뒤의 욕은 한백에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소리내어 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한백의 도끼날 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엽검영은 한백의 도끼날이 닿지 않을 곳까지 물러나 손을 흔들었다. “어이, 흑저! 나야, 나! 나 몰라?” 소운이 흐린 눈으로 그들을 보다가 흑저에게 물었다. “아는 자들인가?” 흑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엽검영에게 주었다. “그렇잖아도 만났으면 했는데……. 이거 가져 가.” 엽검영은 천에 싼 사각형의 그것을 확인도 않고 땅바닥에 팽개쳐 버렸 다. “이러지 마! 내가 동냥 온 거진 줄 알아?” 땡--! 돌로 깐 길바닥에 그 물건이 부딪쳐 내는 소리가 어쩐지 무거웠다. 그 충격에 풀려진 천 사이로 빛나는 황금빛. 흑저가 건넨 물건은 오백 냥짜리 금괴였다. 엽검영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황거지가 바닥으로 꼬꾸라질 듯 덮치며 금괴를 잡았다. “난 거지니까, 뭐……!” 혹시라도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 금괴를 품에 안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다. 엽검영은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굴러 들어온 보배를 걷어찬 셈인 것이다. 그렇다고 아깝다는 표정을 지을 수도, 황거지에게서 다시 빼앗는 것도 못할 일이었다. 창 피도 창피려니와 아귀 같은 황거지가 돌려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눈물이 날 정도로 억울한 마음을 억지로 눌러 참고 발길을 돌렸 다. ‘진작에 고향으로 돌아갔어야 하는 것을……!’ 그는 갑자기 고향의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하늘을 보았 다. 차라리 나가 죽으라고 식칼을 던지시던 어머니……, 이제 돌아간다고 반가워할 리가 전혀 없는 그 어머니가……. ‘하늘이 흐린 것은 정말 흐린 것이냐, 마음이 그런 것이냐!’ 엽검영이 온갖 맥락없는 감상을 잡으며 걷는데, 뒤에서 소운이 불렀다. “이봐, 자네!” 엽검영은 ‘예!’하고 돌아서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 참고 목소리 를 낮게 깔아 대답했다. “왜 부르시오?” “황금을 던진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지! 재물보다는 사내의 의기를 높이 생각한다는 뜻인가?” 엽검영은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뒤돌아 섰다. “이 엽모는 부족하나마 평생 그것 하나를 신조로 삼아 살아왔소이 다!” 소운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셔?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바라마지않던 일이었다. 그러나 듣자마자 넙죽 그러겠노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엽검영은 짐짓 고민스러운 태를 보였다. “글쎄…… 고향에 돌아갈까 하던 참이오만…….” “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 소운은 더 권할 생각도 않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가자!” “아니, 하겠습니다!” 엽검영은 한 번쯤은 더 권유할 것으로 기대하다가 예상을 깨고 그냥 갈 듯하자 여태까지의 잰 체하던 태도를 버리고 소운에게 매달렸다. 소운은 피식 웃었다. “나중에 장으로 날 찾아와!” 벽옥루 앞을 떠난지 한참 후에 한백이 물었다. “어디다 쓰려고?” 소운이 짧게 대답했다. “거가방(車駕房)!” 거가방은 금룡장 내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는 곳이었다. 통비원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저 친구, 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텐데……?” “남들이 모르게 네가 골라 줘!” 소운은 흐린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태양이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 다. “튼튼한 수레에 천리마들로……!” * * * “이럴 수가!” 당문 폭호 당가량의 눈이 흥미에 가득 차 번뜩였다. 그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한 가지만을 제외하면 손노인의 작업실은 변한 곳이 없었다. 모든 이에게 공평한 햇빛도 여기까지는 비출 틈이 없는지 방은 여전히 어두컴컴했고, 작업도구들 역시 가지런히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손노 인도 언제나 앉아 있는 그 자리에 그린 듯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 조용 히 썩어 가고 있었다. 당가량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방은 흑저가 나가고 정기룡 이 거기 들어올 때와 달라진 곳이 없었다. 한 가지만을 제외하면……. 그 한 가지 일이 당가량을 흥분시켰다. 그것은 시체들이었다. 자기자신의 머리를 두 손에 받쳐들고 그린 듯이 앉아 있는 손노인의 시체, 그리고 토옥의 뒤편 출입구에 켜켜이 쌓인 관원(官員)들의 시체 였다. 처음 당가량이 성도부 추관의 부탁으로 여기 올 때만 해도 이런 모습 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중독으로 여러 관원들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에도 그저 독기가 강한 곳에 모르고 들어가 죽은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독기는 없었다. 관원들의 시체들을 제외하면……! 놀랍게도 그들은 중독된 처음 한 명의 시체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중독 이 되어 연달아 두 명이 죽었던 것이다. 이런 독은 그들 당문 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 성도부 구석에서 나타나다니……! 당가량은 사슴가죽 장갑을 끼고 관원들의 시신을 만지려 했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났다. “만지지 마라!” 방에는 한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당가량은 그를 보고 해연히 놀랐다. 당문 삼형제 중 가장 냉정하고 지혜로운 자, 당가량의 둘째형 당문 한 응(唐門寒鷹) 당가소(唐可疎)가 나타난 것이다. 당가소의 날카로운 뱀눈이 흥미로 빛났다. 그는 당가량과 달리 관원들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독의 정체를 짐작했 다. 시신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중독이 될 정도로 강한 독이라면 천하 에 몇 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관원들보다 손노인의 시신에 먼저 다가가며 나직이 말했다. “불을 밝혀라!” 불이 밝혀지고 당가소는 손노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경악과 공포에 질린 그 얼굴은 살해된 시체에서는 흔히 보아 오던 것 이라 단서가 되기에는 너무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가소는 사자(死者)의 얼굴에서부터 실마리를 찾는 것을 즐겼 다. 그 얼굴에는 사자가 죽기 직전에 느꼈던 괴로움과 회한(悔恨), 이제 가 야 할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에 이르기까지 세밀한 감정의 찌꺼기들 이 구석구석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거기 공감하고 동조하여 자신을 사자의 그 감정 상태에 밀어 넣음으로 써 당가소는 범인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때가 많았다. 그것이 당가소의 방식이었다. 일 다경, 혹은 한 식경?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당가소는 천천히 손노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 리고 이번에는 가구와 도구들, 아무 표시 없는 벽에 이르기까지 방안 의 모든 것들을 세밀히 살펴보았다. 그 다음이 관원들의 시신이었다. 그들은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하나는 제일 앞에 넘어져 뒷사람에게 깔려 있었다. 두번째 사람은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죽어 있다. 마지막 한 명은 목을 움켜쥐고 뒤로 넘어져 있었다. 같이 있었던 또 다른 한 관원의 말에 의하면 앞사람의 가죽신만 만졌는데 죽었다는 것 이다. 그나마 신만 만졌으니 그런 행동을 할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 사람은 앞사람이 넘어지자 일으키려고 몸에 손을 댄 자세 그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은 것일 테니 말이다. 당가소는 품에서 약병을 꺼내 하얀 가루를 시체의 발목에 뿌렸다. 그 리고 사슴가죽 장갑으로도 모자라 그 위에 다시 가죽을 감고 시체를 뒤로 끌어내었다. 두번째, 세번째 시체도 그런 식으로 처리했다. 문가가 그렇게 치워졌다. 문 밖은 또 다른 방이었다. 당가량이 나서서 방에 들어가려 하자, 당가소가 손을 뻗어 막았다. 당가량이 눈을 뒤룩거렸다. “왜……?” 당가소는 대답하지 않고 신중하게 방안을 살폈다. 탁자 하나에 구석에는 침상이 있는 단조롭기 이를 데 없는 방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대부분의 방이 이런 식이었으니 의심스러운 것 역 시 찾을 수 없었다. 당가소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한 발을 옮겼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다시 한 걸음 옮겼다.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당가량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려 했다. 이때, 당가소가 미끄러지듯 뒤로 부딪쳐 왔다. 펑--! 당가량은 당가소에게 부딪쳐 뒤로 두 바퀴나 뒹굴었다. 순간적이나마 신형을 가볍게 하지 않았다면 그와 당가소, 둘 다 내상 을 입었을 것 이다. 그 정도로 당가소의 행동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당가량은 그만 화를 벌컥 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당가소는 아무 말 않고 방금 그들이 서 있던 장소를 가리켰다. 거기에 는 반짝이는 분말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는 없던 것! 당가량은 자세히 그 분말을 들여다보고 경악했다. 그 분말은 가루가 아니라 미세한 침들의 끝이 불빛에 반사된 것이었 다. 당가소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쉬문독심침(쉬蚊毒芯針)!” 당가량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모든 독에 해독약, 혹은 해독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혹시 있다 해 도 모두가 인간에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당문 에서 사용하는 것에도 해독약이 없는 독이 있었다. 그런 만큼 반드시 죽일 자가 아니면 절대로 쓰지 않는 그런 독이었고, 암기 , 이른바 칠대금기(七大禁忌)라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 중 하나가 쉬문독심침이었던 것이다. 당가소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첫번째 시체의 몸에도 이것이 박혀 있을 게다.” 쉬문독심침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한 명이 그 침을 맞고 쓰러지면 그 시체에 닿은 사람, 심지어는 그 의복이나 신에 닿은 사람도 중독되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당가소가 다시 나직이 말했다. “당가지소(唐家之所), 백사이후부일보(百思以後復一步) 불과야(不過 也)!” 당가의 손이 닿은 곳에는 백 번 생각하고 일보를 옮겨도 과하지 않다! 강호에 널리 퍼진 격언이었다. 과연 쉬문독심침이 나타난 곳이라면 당가의 손이 닿은 곳, 백 번 생각 해 한 걸음을 옮겨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당가 에서도 금기로 여기는 암기 를 설치해 놓았단 말인가? 당가량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는데, 당가소는 다시 문으로 다가가 이번에는 고개만 들이밀고 방안을 살폈다. 이 방에는 오른쪽 벽에 문 이 있었다. “첫번째 방은 정면, 다음은 오른쪽이라…….” 당가소는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방에 발을 들여놓으며 말했다. “너는 여기 있어라!” 당가소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디뎌 또 다른 문을 향해 다가 갔다. 이번에는 아무 일 없이 다음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다. 문 밖에는 또 다른 방이었다. 방금 통과한 방과 똑같은 모양의 방! 심 지어는 문까지 오른쪽에 붙어 있었다. 당가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십일면매복진(十一面埋伏陣)!” 삼국시대에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쌍벽을 이루었던 사마중달(司馬仲達) 이 펼쳤다는 진법 이었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방을 겹쳐 놓아 열한 개의 방으로 보이지만 실제 는 처음 들어온 방과 마지막 방, 그리고 착각을 일으키기 위한 한 개 의 방만이 진짜요, 나머지는 허상(虛像)이었다. 원리는 간단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 는 매복의 힘이었다. 사마중달은 군사를 숨겨 놓았지만 여기에는 독과 암기 가 숨어 있을 것, 어느 것이 더 무서운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초입에서부터 쉬문독심침의 세례를 받았으니 말이다. 당가소는 다행히 십일면매복진의 원리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원리대로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제대로 만들어 놓았 다면 모르지만 혹시 실수라도 해서 엉뚱하게 만들어 놓았다면 원리대 로 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죽음의 함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당가소는 다시 한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당가량은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가 버릴 수도 없었다. 이러다 가 당가소가 안에서 죽기라도 했다면 언제까지나 기다려야 한단 말인 가? 죽을 것처럼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문 밖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당가량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그러나 아무리 답답하다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 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 다시 앉으려 할 그때에 당가소가 나왔다. 물어 볼 것이 태산 같은데 당가소가 먼저 말했다. “너는 여기 남아서 살인범을 추적해라!” 형의 싸늘한 표정에 질렸는지 당가량이 멈칫멈칫 물었다. “형님은……?” 당가소는 먼저 방을 나가고 있었다. “가주를 급히 뵙고 다시 오겠다!” 제 12 장 돌로 치면 개는 울지만... 돌로 치면 개는 울지만 사자는 덤빈다 “돌아온다!” 망루(望褸)에 서 있던 누군가의 그 한마디에 중원제일가 외원(外園)의 넓은 뜰에 차가운 기류가 감돌았다. 사실, 그 전에 청석판 위에 나란히 부복(俯伏)한 삼백여 철검대원들의 모습이 충분히 찬 기운을 뿌리고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기다리는 ‘그’가 옴에 따라 그들 주변에 감도는 싸늘함은 더욱 예리해지고, 비장함은 그 기세를 더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누가 그러자고 선동한 것도 아니었다. 대주가 모욕 받음은 그들 스스로가 모욕 받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 보다 장내 모든 무사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총관 백염공 하구장이 받 은 모욕은 그들 무사 전원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이제 목숨을 건 충언을 하고자 하는 삼양철검 하응의 뒤를 따라 삼백여 대원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정문이 열리고 금룡장의 망나니 소운 패거리가 들어섰다. “이게 뭐야?” 소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둘러보 았다. 십이월 한파(寒波) 속에 웃통을 벗어제치고 무릎을 꿇은 것은 건강해 서 그렇다치고, 무릎앞에 놓은 장검 은 뭐란 말인가? 게다가 대주 이하 삼백이 넘는 떼거지들이 위협하듯 나란히 부복한 모 습이란……! 소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반항인가? 아니면 반역인가?” 제일 앞에 부복해 있던 하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소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불손한 눈초리하곤! 네놈이 분명 불측한 마음을 품은 것이구나! 감히 키워 준 주인을 물려 드는가?” 하응의 눈에 다시 불똥이 튀었다. 키워 준 주인을 문다……! 다시 한번 그와 무사들은 저 미치광이 아이에게 개 취급을 당한 것이 다.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저도 모르게 검에 손이 갔다. 그러나 그렇게 하 면 그는 정말 반역자가 된다.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천고에 남을 오명이 두렵다!’ 그는 이가 부러지도록 악물고 돌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부르짖었다. “속하의 한 조각 붉은 마음은 하늘이 아실 것입니다. 고언(苦言)을 용 납해 주시오!” 소운은 코방귀를 뀌었다. “내 귀에 들릴 정도로 이를 갈면서 혓바닥은 부드러운 모양이구나!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어째? 물러가라!” 전혀 씨가 안 먹혔다. 갑자기 하응의 입에서 으드득 소리가 났다. 그의 뒤에 부복했던 오초검 마원이 고개를 들어보고 깜짝 놀라 일어났 다. “대주!” 하응은 고개를 들고 입에서 붉은 것을 뱉어 내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속하의 충언을 들어주시오!” 소리가 제대로 말을 이루지 못하고, 입을 벌릴 때마다 선혈이 튀어 무 릎앞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놀랍게도 혀를 반이나 깨물어 뱉어 버린 것이다. 마원이 그 옆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속히 치료부터…….” 하응이 그를 밀어 버리고 다시 소리쳤다. “소주(少主), 정신을 차리시고 가신들을 수족(手足)과 같이 여기셔야 합니다!” 소운은 이 비장한 모습을 보고도 전혀 감동하는 빛이 없었다. 오히려 비웃는 티를 역력하게 보이며 말했다. “자기자신을 아끼지 않는 자가 누굴 아낄 수 있을까? 한비자(韓非子) 가 그런 말을 했지. ‘신하가 군주를 충심으로 섬긴다고 믿지 말라. 그 들이 섬기는 것은 군주에게서 받을 이익 때문이다’라고. 넌 뭘 원하 기에, 몸까지 상해 가며 충심으로 날 섬기는 척하는 것이냐? 가신들을 수족같이 여겨 달라고? 너희들이 수족처럼 움직이고서 하는 말이냐? 가증(可憎)스러운 것들!” 소운의 눈이 점점 충혈되었다. 하응은, 그리고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가슴 속에 찬바람이 지나 가는 것 같은 한기를 느꼈다. 소운의 말은 그토록 냉정하고 싸늘한 것이었다. 그것은 열다섯 살 소년의 말이 아니었다. 조숙해서라고 이해할 차원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차가움과 이중성에 철저히 절망해 버려 이제는 아무것 도 믿지 않게 된 노회(老獪)한 늙은이의 말이었다. 그것은 일체의 인간적인 것을 부정하는 얼음 덩어리 같은 심장을 지닌 사람, 주위의 모두가 적이라고 의심하는 편집광(偏執狂)의 말이었다. 하응은 입을 벌렸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운에게서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 높고 두 터운 벽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대신 소운이 물었다. “그래, 밥먹기 힘들 걸 감수하고 혀까지 잘라가며 하고 싶은 말이라 는 게 뭐냐?” 하응은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해봤자 소용없을 말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고개를 저으려다 한백과 눈이 마주쳤다. 주인의 총애를 믿고 날 뛰는 주제넘은 자의 그 밉살스러운 눈과……. 하응이 입을 벌렸다. 입 속에 흥건히 고인 피가 먼저 흘러내렸다. “그 보표 들을 다 쫓아내고 우리 가신 중에서 다시 뽑으시오!” “킥! 킥! 킥!” 소운이 발작적으로 웃었다. 그리고 비웃음을 가득 담아 하응을 보았다. “너희 손에 내 목숨을 맡기라고?” 하응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보다는 나을 것이오!” “그럼!” 소운이 빙긋빙긋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한번 시험해 보지! 누가 나은가 말이다.” 마원이 성난 눈으로 한백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시험해 보실 생각이십니까?” 이런 경우, 싸워 보는 것 외에 무슨 해결책이 있겠는가! 한번 솜씨를 겨뤄 보라고 하면 그는 한백을 때려죽이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운이 손을 저었다. “지금이 아니다. 보름 후!” “보름 후입니까?” 오늘이 십일월 말일(十一月 末日), 보름 후면 십이 월 십오 일(十二月 十五日)을 말하는 것인가? “보름 후, 태조모님의 기이지연 때 여흥(餘興)으로 보여 주는 것도 재 미있지 않나? 그리고…….” ‘기이(期이)’란 백세(百歲)를 말하는 것, 금태파야가 오는 십이월 십 오 일에 백세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때 해결하자는 소운의 말이었다. 소운은 하응을 가리키며 마원에게 말했다. “네가 대주가 되고 싶으냐? 저대로 죽을 때까지 시간을 끌어서 말이 다! 큭큭큭!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하다만……!” 마원은 소운의 말에 흥분하고 있다가 그제서야 하응을 보고 경악했다. 하응이 과다한 출혈로 혼절해 있는 것이다. 혓바닥이 잘리면 지혈도 곤란한 법, 분주히 하응을 들쳐업고 의원을 찾아 달려가려는 그를 보고 소운이 말했다. “너희 중 누구든 좋다! 내 보표 들을 모두 꺾으면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하지!” 소운을 처소로 호위해 가는 도중에 흑저가 입을 열었다. “심하지 않았나?” 소운은 마땅찮다는 눈으로 그를 한참 보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하는 일에 참견이나 하라고 오라 한 것이 아니야!” 흑저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참 후, 소운이 누그러진 어조로 다시 말했다. “돌로 치면 개는 울지만 사자는 덤빈다는 말 아나?”“……?” “저놈들은 결국엔 자존심도 없는 개새끼에 불과하단 말이다!” 소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대로 된 놈은 하나도 없어! 결국 개는 개답게 다뤄야 하는 것이 지!” 흑저는 말을 않고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과연 이 영악한 아이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아까의 행동이 마치 광기의 발동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극히 이성적으 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광인의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먹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잠시 고개를 내밀 듯 광기의 발동 후에 찾아 드는 휴식 같은 것일까? 어느쪽이든 소운이 지극히 냉정한 눈으로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것은 확 실했다. 모욕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아랫사람들을 한낱 개 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돌에 맞으면 울지 않고 덤비는 개도 있는 것이다. * * * “거가방으로 가!” “거가방?” 엽검영이 되물었지만 주고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물었다. “거가방이 뭐 하는 곳입니까?” “가보면 알 것 아냐!” 그는 더 물어 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주고원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입을 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머뭇머뭇 돌아서다가 이건 안 물을 수 없었는지 어렵게 물었다. “저, 엽검영인데요!” 주고원이 인상을 그으며 노려보았다. “그래서?” “혹시…… 사람을 착각하지나 않으셨는지……? 왜 소장주님께서 만나 보지도 않으시고 거가방이라는 곳으로 보내는 걸까요?” “내가 그 속을 어떻게 알아! 네가 오면 바로 거가방으로 보내라는 명 령이 있었고, 난 명령에 따랐을 뿐이야! 지금 내게 따지는 거냐?” 엽검영은 주고원이 왜 신경질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은 이대로 물러나야 했다. 인상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대신 그는 방을 나오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 속을 어떻게 아냐고? 일개 서기놈이 소장주를 놓고 그 따위 언사 를 하다니……, 내가 조장만 되면 넌 죽었다!’ 문득, 그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묻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 돌아섰다. 그리고 망설였다. 주고원의 찌푸린 얼굴을 다시 본다는 것은 괴로웠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엽검영은 방문을 다시 빠끔히 열고 말했다. “저……, 거가방은 어디 있죠?” 거가방은 금룡장 뒤편에 높은 성곽(城郭)을 따라 줄지어 선 목조건물 이었다. 금룡장에는 겹겹이 담장을 쳐서 구역을 나눠 놓았지만 크게는 세 구역 으로 구분되었다. 성곽이라 불러야 옳을 높고 두터운, 그리고 곳곳에 노전(弩箭)과 기관 (機關)을 장치해 놓은 담장으로 구분되는 외원(外園)과 중원(中園), 그 리고 내원(內園)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신분에 따라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것이다. 특히 내원은 금가의 직계자손과 극히 중요한 지위, 또는 필수적인 이 유에 따른 특수한 허락을 받은 자들이 아니면 발도 들여놓을 수가 없 었다. 반면, 외원은 이유만 인정되면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곳, 그래서 금룡 장과 외부의 교류는 이 외원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장에서 소용되는 물건들을 만드는 주, 부식과 일상용품들이 수레 로 실려 들어오고, 웬만한 물건들은 아예 장안 에서 만들었다. 그래서 금룡장의 외원은 웬만한 시가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번잡한 데……, 그 한구석 넓은 공간에 거가방이 있었다. 엽검영은 물어물어 겨우 찾은 거가방이 저만치 보이는데 인상부터 썼 다. 바람결에 풍겨 오는 악취, 그리고 시끄러운 말의 투레질 소리. 그는 불현듯 금룡장에서의 생활이 그가 기대했던 것처럼 쾌적한 것이 될 것 같지는 않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 아떨어졌다. 거가방이 사내들의 땀과 피냄새 물씬 풍기는 연무장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그 관리인이 마구간보다는 돼지우리 관리가 더 어울릴 것 같은 비대한 사내라는 것, 결정적으로 그의 첫 마디가 엽검영의 그런 예감 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다. “새로 온다는 멍청이가 너였나?” 비대한 사내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뜸 멍청이라 부르더니 비곗살이 몇 겹으로 쌓인 희끄무레한 팔뚝을 들어올려 누군가를 불렀다. “어이, 꼽추!” 길게 뻗은 통로 저편에서 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비대한 사내가 엽검영을 가리켰다. “신참이야. 데려가서 일 좀 가르쳐!” 꼽추가 천천히 다가왔다. 방금까지 똥이라도 치고 있었던 모양, 가까이 옴에 따라 말똥냄새가 코를 찔렀다. 꼽추는 엽검영을 보았다. 엽검영도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못생겨도 너 무 못생겼던 것이다. 고목의 껍질처럼 굳은 살갗이 얼굴 윤곽을 따라 이리저리 뱀처럼 꿈틀 거리는 모습을 만들었다. 그 굵은 이맛살 아래로 흔적만 찾을 수 있는 침침한 눈이 가늘게 박혀 있었다. 대문짝만한 누런 뻐드렁니 둘이 가볍게 움직이고 그 뒤에서 쉰 목소리 가 흘러나왔다. “따라와!” 말을 관리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열 명이 말 오백 필을 관리한다는 것은 더욱 그랬다. 새벽같이 일어나 먹이를 주고 똥이 얼어붙기 전에 치우고, 정오가 되 기 전에 다시 먹이를 주고 똥을 치우고, 저녁이 되면 또 먹이를 주고 똥을 치운다. 그리고 밤이 되면 자기나 할 것이지 이놈의 말들은 또 먹고 싼다. 그 중간중간 끌고 나가 운동도 시키고, 굵은 빗으로 털까지 빗어 줘야 한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을 웃으며 해야 했다. 싫은 기색을 보이거나 화를 내거나 하면 당장 표시가 났다. 말에 탈이 나는 것이다. 말은 겉보기와는 달리 섬세한 신경을 가진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나가기도 전에 엽검영은 달을 보며 고함을 질렀다. “흑저, 이 빌어먹을 돼지새끼야`! 이따위 일에 날 밀어 넣어--!” 그리고는 얼른 마구간 뒤로 숨었다. 야간 순찰을 도는 무사들이 달려오기 전에……. * * * 식사는 물론 젓가락으로 한다. 젓가락질을 아무리 못하는 아이라도 고깃점은 대충 집을 수 있고, 잘 하는 사람은 두 자나 되는 긴 젓가락으로 깨알을 집을 수도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지금 흑저는 어른의 주먹만한 포자(胞子`:`중국식 만두)를 젓가 락으로 집기 위해 무진 고생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손이었다. 그리고 손가락이었다. 하백을 죽일 때 처음 움직였던 박룡수의 손가락은 이제 조금씩 뜻대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극히 단순한 동작만 가능할 뿐, 젓가락을 쥔다거나 끈 을 묶는다거나 하는 복잡한 동작은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손을 오므리는 단순한 동작도 보기가 답답할 정도로 완만하게 이루어졌고, 주먹을 완전히 쥔다거나 할 때는 극심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는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흑저는 젓가락질로 손의 움직임을 단련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통스럽고, 무엇보다 끈질긴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흑저는 지겨 워하지도 않고 벌써 한 시진째 젓가락으로 포자를 집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젓가락을 쥐는 것도 어렵고, 그 젓가락으로 포자를 집는 것은 더욱 어 렵고, 어떻게 집는다 해도 떨어뜨리지 않고 입까지 올리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흑저는 일생의 대적(大敵)을 만난 듯이 이마에서 땀까지 흘리며 포자 를 노려보고 있었다. 포자가 천천히 탁자에서 떨어져 공중으로 들렸다. 그리고 입에 가까이 왔다. 지금까지의 시도 중 가장 높이 올라온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올라오 면 입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문이 열렸다. 포자가 젓가락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흑저는 아쉬운 눈으로 떨어진 포자를 보았다. 마치 다시는 맛보지 못 할 귀한 요리를 입에 대지도 못하고 빼앗긴 사람처럼. 들어온 사람은 곽상이었다. “시간이 됐습니다. 그만 가야…….” 그는 흑저의 실망스런 표정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제가 뭔가 실수했나요?” 흑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잘했소! 오히려 도움이 되었소.” 아무리 중요한 일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해도 곽상이 다가와 문을 열 도록 눈치를 못 챘다는 것, 그리고 문 하나 여는 정도에 집중력이 흐 트러졌다는 것은 실전에서는 죽음과 직결되는 실수일 수도 있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싸울 수는 있지만 그런 실수로 죽는다면 억울해 눈을 감지 못할 것이었다. ‘결점을 고치기 전에 장점을 보강하는 것이 더 급하군!’ 흑저는 조용히 일어나 곽상을 따라 나섰다. 다섯 명의 보표 가 한 사람을 지키는 것이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어마어마한 적이 그 한 사람을 노리고 있다면 더욱 그랬다. 적어도 세 사람 이상은 항상 그의 곁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 적의 강력함을 생각한다면 다섯 사람도 오히려 모자랐다. 할 수 있는 한 그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하는데 보표 도 인간인 이상 그 럴 수가 없었다. 최소한 먹고, 싸고, 잘 때는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대로 최소한의 시간을 내어 그런 것들을 해결하는데,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흑저로서는 소운을 지킨다는 일에 점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참 이었다. 사천 에서 섬서 로 넘어오면서 본 평민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참혹지경 이었다. 굶주린 아이들은 개구리 같은 배를 부여잡고 길바닥에 뒹굴고, 어른들 은 산으로, 들로 나가 얼어붙은 땅에서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 겼다. 그래도 안되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산설고 물설은 남쪽, 기다리는 사람 아무도 없는 먼 곳, 강남 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러다가 지쳐 죽고, 굶주려 죽는 사람들로 길 위에는 백골이 뒹굴고, 인육(人肉)을 맛본 들짐승들이 눈에서 붉은 빛을 뿌리며 길 위를 떠돌 았다. 전염병마저 창궐해 관원들이 마을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연기를 드물 지 않게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성 안에서는 부자들이 여전히 흥청거리며 기루를 찾고, 입맛을 따지며, 밤을 낮삼아 향락을 즐기고 있었다. 성곽 하나 사이로 극락과 지옥이 갈리고 있었던 것이다. 금룡장만 해도 마치 딴 세상에라도 온 것처럼 권력다툼에 혈안이 되어 금을 물처럼 뿌리고,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일에 개입해 그 또한 한 마리 개가 되어 같이 으르렁거려야 하는 것인지! 게다가 그에게는 육 개월의 시간밖에 없잖은가. 그 자신의 일을 처리 하기에도 많지 않은 시간인 것이다. 흑저는 문득 자신이 우습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얼토당토않은 세속의 일에 끼여들어 막상 할 일을 못하고 끌려 다니다 니! 업보(業報)에 코가 꿴 송아지 꼴이 아닌가 말이다. ‘떠나야 하는가……?’ 흑저는 어제부터 계속 입 속을 감도는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그와 곽상은 아무 말 없이 줄지어 늘어 선 전각들을 돌아 소운이 있는 처소를 향해 걸었다. 갑자기 흑저가 손을 들어 뒤통수로 올렸다. 팍--!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 주먹만한 돌멩이 하나가 그의 손에 부딪혀 튕 겨나갔다. “누구냐?” 곽상이 일갈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정원 저편에는 시녀 둘이 재잘거리며 걷고 있고, 전각 모퉁이마 다에는 통상적인 경계를 하고 있는 무사가 한 명씩 서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들이 지나온 전각 모퉁이에 용이 수놓인 무복(武服)을 입은 대여섯 명의 무사들이 둘러서서 담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곽상은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방향으로 보나, 눈치로 보나, 그들이 돌을 던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 었다. 흑저가 말렸다. “그만 둬!” 곽상은 성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장난이 아닙니다!” 흑저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던질 만했고, 우린 맞을 만했다. 돌 맞을 짓을 했으니!” “그런…….” 곽상은 말도 안 된다고 하려 했지만 흑저의 손이 가리키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철검(鐵劍)! 무사들의 허리에는 검은 가죽검집의 철검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철검대의 무사들이었다. 곽상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대주가 그런 꼴을 당했으니, 소운의 편으로 생각되는 보표 들에게도 적의(敵意)를 품을 만했다. 아니, 금룡장의 거의 모든 무사들이 그들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 을 것이다. 누구든 그들을 이길 수 있으면 덤벼 보라는 소운의 어제 발언은 금룡 장 무사 전원에게 도전장을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한 순간에 금룡장 무사들의 공적(公敵)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소한 시비가 아니었다. 주위 사람을 전부 적으로 돌려놓고 어떻게 장주가 되겠다는 것인지 곽 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보다도 문제는 그들이 금룡장의 고수들을 어떻게 이길 것이라고 확 신하느냐는 것이다. 곽상은 자신을 과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실력을 아는 사 람인 것이다. 아마도 철검대의 무사 한, 둘을 이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은검대라면 힘겹고, 금검대의 무사들과 싸우라면……. ‘목숨을 걸어도 이길까 말까?’ 고수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덤비라 했으니 만약 당주나 대주급의 인물이라도 나온다면 그 들 중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곽상은 문득 옆에서 걷고 있는 흑저를 보았다. ‘이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중원사흉 중의 셋과 흑룡왕 하백까지 죽인 혈사의 주인공이 진정 이 땅딸막한 파계승이 맞다면 대주급 인물들과 비등하게 싸울지도 몰랐 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수준일지는 알 수 없지만 패도적인 솜씨를 보여주 었던 귀도라면……! 그러나 그와 한백, 통비원은 나가자마자 목숨을 바쳐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곽상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황금 오백 냥에 포함된 대가라면 어쩔 수 없지!’ 황금 오백 냥이라면 목숨을 바쳐도 그리 억울한 일은 아니었다. 산채 에 남은 식솔들이 적어도 일 년은 먹고 살 수 있을 테니까……! 소운은 그들이 들어서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집법회의(執法會議)의 늙은이들이 날 부르는군!” 집법회의는 집법당이 주관하고 금룡장의 부당주급 이상 인물들이 모이 는 일종의 징계회의(懲戒會議). 소운은 후계자이지만 아직 어려서 참석을 않는 것이 상례였는데, 오늘 불렀다는 것은 그 자신이 징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에 대한 성토(聲討)의 장(場)을 준비해 놓았다는 것이겠지?” 소운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즐거운 소식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키득거리고 웃었다. 흑저가 물었다. “우리도 가는 것인가?” “당연한 얘기!” 소운이 잘라 말하더니 묘한 눈으로 흑저를 보았다. “만약 내가 자결하라는 명령이라도 받으면, 그냥 보고만 있을 텐 가?” 흑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흐릿한 눈빛이 되더니, 잠시 후에는 눈에 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강렬한 빛을 발하며 무겁게 말했다. “무슨 결정이든 네가 거부한다면 나도 같이 거부하겠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이마를 감은 천을 만지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동안은 나는 네 편이다. 누가 뭐래도!” 집법회의에 보표 가 따라 들어간다는 것이 소운에겐 당연한지 몰라도 집법당의 경비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특히 집법당 좌호법 염왕수(閻王手) 최극(崔克)에게는! 최극은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보표 와 함께 집법회의에 선다는 것은 불 가(不可)합니다.” “후욱--!” 소운이 입에 문 장죽을 떼더니 뿌연 연기를 최극의 얼굴에 뿜었다. “어떤 건방진 녀석이 내게 가신은 수족이라더군. 내 수족은 이 보표 들이야. 그런데 나보고 수족을 떼놓고 다니란 말인가?” 최극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고개만 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안됩니다. 금룡장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습니 다.” “하--!” 소운이 실소했다. “너는 역사 그 자체거나 적어도 그 수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구 나! 하지만 잘못 알고 있다. 이제 내가 제대로 가르쳐 주지. 금룡장의 역사는 나다. 내가 만드는 거야. 넌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란 말이다!” 최극은 완강했다. “안됩니다!” “그럼 하는 수 없군!” 소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게 막혀서 돌아갔다고 전하려무나!” 통비원이 소운을 안고 돌아섰다.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최극이 일순 당황한 빛을 보이더니, 번개처럼 움직여 그 앞을 막아섰 다. “돌아가시면!” 그는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땅딸막한 그림자가 나타나는가 했더니 검은 손그림자가 그의 목을 겨누고 쏘아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염왕수라는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도 권법에 조예가 있었다. 재 빨리 뒤로 물러나며 한 손으로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손 그림자를 쳐내고 다른 한 손으로 상대의 목을 찔러 갔다. 그의 성명절기인 염왕탈백(閻王奪魄)의 일 초였다. 으득--! 최극은 충격으로 동공이 커졌다. 적의 손을 막은 그의 손뼈가 으스러지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마치 맨손으로 강철을 두드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실제 강철을 쳤어도 그의 염왕수에는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졌 을 텐데 지금은 그의 손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땅딸막한 그림자, 흑저는 왼주먹으로 목을 향해 찔러 들어오던 최극의 다른 손을 옆으로 튕겨내고 벌어진 양 팔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 다음은 쉬웠다. 흑저의 검은 맨발이 번갈아 최극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정강이가 부러 지는 고통으로 최극의 허리가 숙여졌고, 흑저의 무릎이 그 턱에 꽂혔 다. “크윽--!” “그만!”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을 때, 최극은 이미 집법당 정문 앞에 길 게 누워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그 머리 위쪽에 나타났다. 백발을 정갈하게 빗어 상투를 틀고 나무비녀를 꽂은 노인, 바로 금룡 장 집법당의 당주, 활리삼흘(活鯉三吃) 염파령(廉波領)이었다. 활리삼흘은 원래 요리의 이름, 잉어가 살아 있는 동안 그것으로 세 가 지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는 뜻이니 그 손속의 빠름을 일컫는 별호였 다. 그 염파령이 흑저를 노려보았다. 소운이 말했다. “법을 집행한다는 주제에 감히 하극상을 하다니……! 내가 대신 교훈 을 내렸어!” 염파령은 매의 눈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흑저에게서 소운에게로 돌리고 짧게 말했다. “들어오시오!” * * * “상군(湘君)께 문안드립니다.” 어지간한 고수도 가까이에서 귀를 곤두세우지 않으면 도저히 들을 수 가 없을 만큼 낮은 목소리가 천장에서 새어나왔다. 그 천장 아래, 단아(端雅)한 색조의 방 안에 홀로 앉아 자수를 하고 있 는 여인이 보통사람이었다면, 무슨 소리가 났는지조차 몰랐을 그런 낮 은 목소리. 그러나 여인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구신 중의 하나, 상군이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세밀히 한땀 한땀 수(繡)놓고 있는 매화에서 눈을 떼지 않고 역시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유혼(幽魂)?” “대사명의 명을 전달합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천장 속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번천지계(飜天之計)의 발동을!” “드디어……!” 심중의 격동을 반영하듯 여인의 목소리가 약간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정상을 찾은 목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언제?” “열나흘 후!” 열나흘 후 십이 월 십오 일, 바로 소운의 태조모, 금태파야의 기이지연 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 모종의 계획이 발동된다고 하는 것이다. “번천제일계(飜天第一計)는 그럼 이미?” “산귀어른이 오늘이라고!” “오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인이 물었다. “그가 직접 나서는가?” “남들의 이목(耳目) 때문에 그렇게 못함을 아쉬워하고 계십니다.” 다시 침묵이었다. 그리고 나직한 중얼거림. “그가 직접 나서도 쉽지 않을 일을…….” “애초에 성패(成敗)는 문제가 아니라고, 그래서 제이계(第二計)가 있 었다고, 그렇게 대사명은 말씀하셨습니다.” “제이계라……!” 여인은 신음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가 해야 한단 말이지……! 차라리 산귀가 성공하기를 바래야 하 나?” 천장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여인은 수바늘을 든 채 망연히 앉아 매화꽃 한 잎을 마저 피우는 것도 잊고 있었다. * * * “소장주! 무릎을 꿇으시오!” “후계자라 다시 불러!” “후계자! 조사의 신위(神位) 앞이오, 무릎을 꿇어요!” “무릎이 굳어서 구부러지지 않는데?” 집법당 우호법 최명곤(催命棍) 하필방(何畢方)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 다. 소운의 태도는 집법회의의 진행을 삼십 년이나 맡아 온 그로서도 처음 보는 불손하고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집법회의에 세가의 후계자가 소환되었던 경우가 전례 없었던 것은 아 니지만, 이 정도로까지 행동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대우할 수는 없겠지만, 이건 좀 도가 지나 쳤다. 그야말로 집법의 권위를 철저히 깔아뭉개는 망동 아닌가! ‘아무리 어린애라도……!’ 그는 좌우를 돌아보며 호통쳤다. “후계자께서 다리가 불편하신 모양이니 구부려 드려라!” 검은 복장에 붉은 글자로 ‘법(法)’자를 새긴 무사들이 소운에게 다 가들었다. 한백과 흑저가 동시에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그들을 막아섰다. 귀도 가 늘어뜨리고 있던 칼을 비스듬히 올리고, 곽상의 손이 소맷자락 속 으로 들어갔다. 하필방이 입을 딱 벌렸다. “이, 이게, 이게 무슨 망동! 감히 집법의 권위에 칼을 겨누는 것인 가?” 한백이 징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올리며 대월과 부를 양 손에 나누어 들었다. “내겐 우리 공자의 말씀이 유일한 법으로 보이는군!” 흑저가 조용히 말했다.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지 마시오!” 나직한 어조였지만 그 속에는 조용한 분노 같은 것이 간직되어 있는, 그래서 대단한 위압감을 주는 말투였다. 흑저는 여기 집법당에 들어설 때부터 이상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해 한 점의 양광도 들어오지 않고 단지 몇 개의 횃불만이 타오르고 있는 넓은 대청. 전면 단상에 높이 모셔진 전대 금룡장주들의 신위. 아무 말없이 대청의 양 옆에 도열한 검은 옷의 장한들이 들고 있는 붉 은 곤봉들과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 나란히 앉은 금룡장의 수뇌인물들 에 이르기까지……. 그의 기억 깊은 곳에 새겨진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이곳의 모습과 겹 쳐져 그의 심령을 아프도록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극에게 그렇게 대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심하게 할 일은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흑저는 못 견딜 정도로 가려워지는 머리를 억지로 참고 있는 중인 것 이다. 하필방이 참다못해 소리쳤다. “건방진 것들!” “그만!” 갑자기 좌중이 조용해졌다. 염파령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닿는 곳 모두가 갑자기 얼음으로 덮인 것처럼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무릎을 꿇고, 안 꿇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하필방이 꾸중들은 아이처럼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염파령은 소운을 보았다. “후계자! 여기 불려온 이유를 아시겠소?” 소운이 태연히 대답했다. “하구장의 일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겠지?” “아시니 이야기가 빨라지겠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잘못을 인정 하시겠소?” “내가 뭘 잘못했던가?” 자리에 앉은 수뇌인물들이 술렁거리는데 염파령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 고 차분히 말했다. “후계자가 직접 뽑은 보표 가 위계상(位階上)으로 한참 위인 하당주 를 다치게 한 것은 하극상(下剋上)에 해당하며 그 벌은 참형(斬刑)이 오.” 한백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잘했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이는 하극상을 방조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니 조장 혐의도 있소. 그 벌 역시 참형이오!” 소운도 웃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초대가주이신 천패금룡께서 세운 전통과 가풍(家 風)이 후계자의 손에 현저히 훼손되고 있다는 것으로, 그 벌 역시 참형 이오!” ‘참형’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거듭되자 장내에 살벌한 기운이 감 돌았다. 염파령은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그러므로 한백이라는 자는 참형, 나머지 보표 들은 태형(笞刑) 백 대 에 팔 한쪽을 끊는 잔결형(殘缺刑)을 추가하여 집행한 후 추방, 후계자 금조운은 향후 삼 년간 근신(謹愼)할 것을 결정하는 바이오!” “웃기는군!” 소운이 그를 비웃었다. 염파령이 차갑게 물었다. “변명이라도?” “변명이 아니라 하교(下敎)다.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지.” 소운이 손가락을 꼽았다. “우선 하극상 문제! 내 보표 들은 나 외에는 상전이 없다. 그러므로 나를 제외한 누구를 죽여도 하극상이 아니다. 오히려 비키라는 내 명 령을 거부한 하구장이 하극상에 해당한다.” 장내가 들끓었다. 어둠 속의 금룡장 인물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다. 염파령이 손을 들어 진정시키고 물었다. “다음은?” 소운은 다시 한 손가락을 꼽았다. “하극상이 성립이 안되니 그 다음 것, 방조니 조장이니도 성립이 안 되지? 그리고 마지막인데……!” 소운은 다시 피식 웃었다. “전통? 가풍? 누가 그런 것을 만들었나? 염파령, 너냐? 아니면 멍청 이 하구장이냐?” 소운은 집법당 정면의 신위들을 가리켰다. “저분들이 만들었다. 바로 이 금조운의 선조들이 만들었단 말이다. 너 희 떨거지들이 아무렇게나 입에 올릴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기 코를 가리켰다. “이제 살아 있는 후계자, 나 금조운이 몸소 보여주는 것이 금룡장의 전통이요, 가풍이 될 것이다. 너희들은 구석에 찌그러져서 주는 먹이나 주워 먹고 있다가 늦지 않게 저승으로 가면 되는 거야!” 어둠 속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미쳤다! 저건 정상적인 사람이 할 언사가 아냐!” “누가 저런 망언을 하는 사람을 열다섯 살 어린애라고 하겠어?” “광인과는 더 할 말이 없소!” “후계자를 폐하고 새로 정해야 하오!” 소운은 주위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붉은 불빛에 비쳐 광인의 그것처럼 충혈되어 보였다. 어쩌 면 정말 충혈된 것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금룡장의 수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운이 차갑게 말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것인가? 이제 진정 반역의 칼을 뽑아 내게 겨누는 것이냐?” “입을 다물어라, 소운!” 불빛 속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분노와 흥분으로 들끓던 대청 안이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상좌에 앉아 여태까지의 경과를 지켜보고 있던 현 금룡장 호가봉공, 실질적인 장주인 이랑검 금야홍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흥분만 할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소운 역시 그러하다. 잘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가신들을 위무(慰撫)하고 덕으로 포 용해야 할 네가 이런 물의를 일으켰음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나직했지만 힘이 있었다. 성내지 않아도 감복하게 만드는 위엄이 그 말 속에는 있었다. 대청 안을 메웠던 살벌함이 일순간에 숙연함으로 바뀌고 광태를 보이 던 소운 역시 수그러드는 것 같았다. “다행히 하당주가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그와 하대주, 부자 이대가 우리 가문에 끼친 공적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벌로 소운, 너는 조모님의 기이지연 때까지 근신할 것을 명한다. 그 후의 일은 그때 모일 십이지가의 가주들까지 참석한 대금 룡회합(大金龍會合)에서 논의하기로 하겠다!” “흥--!” 소운은 차갑게 비웃고는 집법당을 나가 버렸다. 어둠 속에 있던 금룡장의 수뇌들이 금야홍의 옆으로 모였다. “이대로 후계자의 광기를 방치해 두어서는 안될 것으로 사료됩니 다.” “차도가 보이기는커녕 점점 심해지시니……!” “이러다가 대외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라도 하신다면 그때는 수습하 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분분히 나오는 걱정 섞인 성토의 말을 들으며 금야홍은 한숨을 내쉬었 다. “형님의 하나뿐인 후손이 저러니……!”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한탄했다. “내가 져야 할 짐인가 보오!” 불꽃이 흔들려 금야홍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 * * 하늘은 묘한 것이라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있어도 꽃은 피고, 그것도 계절에 맞추어 저마다 다른 풍경을 연출할 수도 있게끔 피어 준다. 집법당이 있는 중원(中園)에서 소운의 처소로 돌아가는 길가의 풍경이 그랬다. 바짝 마른 대기(大氣)의 탓이라 백설이 덮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난 한 살갗을 에는 차가운 바람이 높은 담장에 막혀 닿지 않은 탓인지 이 름없는 풀잎이 아직은 싱싱하고, 세한(世寒) 연후(然後)에야 그 지조를 드러낸다는 송백(松栢)도 푸릇하게 자랐다. 정원 한쪽에서는 구부러진 매화(梅花)나무가 하이얀 꽃을 피워 겨울 정경을 만들고 있는데……! 흑저는 이상하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집법당에서 아무 일 없이 나왔는데도 머리의 간지러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끈적거리는 뭔가가 머릿속을 기어다니는 듯한 느낌. 흑저에게 있어서 그것은 살인의 충동, 죄악을 저지를 것 같은 예감과 도 통하는 것이었다. 그 예감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빨리 해 소운을 안고 있는 통비원의 뒤, 귀도의 옆으로 다가섰다. 파파파악--! 그때, 땅이 들렸다. 그리고 튀어나온 여덟 개의 협봉도 ! 그 뒤로 여덟 개의 흑영(黑影)이 몸을 드러내었다. “흑도수--!” 흑저가 경호성을 발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좁은 길에 연해 있는 정원의 얼어붙은 땅거죽이 뒤 집어지며 흑도수들이 기습한 것이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피부를 찌르는 살기도 없이 아래에서 비스듬히 위로 찔러 오는 여덟 자루의 칼날. 매복은 완벽했고 공격은 신속했다. 게다가 사각(死角)으로 파고들어 피할 방법이 없었다. “야압--!” 한백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대월을 뽑을 틈도 없이 작은 도끼를 날렸 다. 순간적인 동작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다. 특히 허리춤에서 도끼를 뽑아 던지는 그 동작은 몇백, 몇천 번의 연습 으로도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원활하고 신속한 것이었다. 수년 동안 잠자리에까지 들고 다니며 연습을 거듭해 습관처럼 몸에 익 어야 그런 동작, 그런 공격이 나올 것이다. 팍` `! 절반쯤 솟구쳐 오르던 흑영 하나의 머리에 도끼가 박혀 들었다. 그러 나 그의 협봉도 도 그냥 허공을 가르지는 않았다. 칙--! 공중에 뜬 자세에서 멈칫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던 한백의 넓적다리 에 긴 핏자국이 그어졌다. 그 반대편에서 튀어 오른, 또 다른 흑영이 협봉도 를 휘둘렀다. 한백은 좌측 어깨에서 우측 허리까지 길게 베어져 뒹굴었다. 곽상은 수리도 를 던질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있었어도 거리가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흑영들의 협봉도 가 이미 그의 허리께를 파고들고 그들의 머리는 곽상 의 무릎 언저리에 붙어 있는 것이다. 곽상은 창자를 파고드는 쇠붙이의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그리고 항상 소맷속에서 들고 다니던 수리도 네 자루를 양 손에 나누어 든 그대로 그들의 머리에 박았다. 둔탁한 느낌, 그리고 전신을 파고드는 뜨거운 고통……! 통비원의 한 걸음 뒤에서 걷던 귀도가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안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바짝 붙어 칼을 휘두를 공간을 만들려는 행동이었 다. 다음 순간, 그의 칼이 원을 그렸다. 벽옥루에서 장홍방의 건달을 죽일 때와는 달리 공격처럼 보이긴 하지 만 사실은 철저히 소운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초식이었다. 과연, 방금 전처럼 통비원에게서 한 걸음 거리에 있었다면 귀도가 휘 두르는 칼의 범위 안에 통비원의 발목 또한 있었을 것이다. 챙-- 채챙--! 그들을 노린 협봉도 가 어지럽게 튕겨나갔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흑영들이 분분히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덮쳐 들었다. 귀도의 일 도(一刀)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공격을 하면 피할 수 없고, 방어를 하니 그것을 뚫고 들어올 수가 없 는 것이다. 그러나 적은 집요했다. 그리고 생명을 돌보지 않았다. 슈우--슈--슉! 한백과 곽상에게 당한 셋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이 귀도의 칼에 맞아 내장을 드러내는 것에 상관없이 날 좁은 협봉도 를 휘둘렀다. 생명을 돌보지 않는 공격. 귀도도 그 다섯 줄기 공격을 다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혼자였다 면 모르겠지만 통비원을 부둥켜안고는 더욱 그랬다. 그가 간이 잘 배게 칼집을 낸 오리고기처럼 네 줄기 홈을 몸에 새기고 비틀거릴 때 흑영들도 넷이 넘어졌다. 그들의 몸에는 한 줄기 칼집밖 에 없었지만……! 나머지 하나가 협봉도 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그 연장선상에 통비원의 허리가 들어갔다. 땅--! 칼이 반동강이가 나 허공으로 튀었다. 그 뒤를 흑영이 바스러진 턱을 위로 해서 따라 튕겨졌다. 시종일관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던 흑저가 소운의 몸에 직접적인 위협 이 가해지자 개입해 흑영의 칼을 날리고 다시 발을 올려 그의 턱을 부 숴 버린 것이었다. 흑저가 손을 뻗어 통비원의 어깨를 잡았다. “앞으로!” 소운을 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통비원이 무의식적으로 흑저의 명령 을 따라 너저분하게 널린 사람들을 밟고 앞으로 나섰다. 제 13 장 꽃 웃음 뜰 앞에... 꽃 웃음 뜰 앞에 비 뿌리고 팍--! 채 죽지 않고 꿈틀거리던 한 흑영의 머리가 터졌다. 통비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비스듬히 반 발자국 앞서가던 흑저의 맨 발이 거기 올려진 결과였다. 잠시 비틀거리다가 겨우 균형을 잡은 귀도의 칼이 비스듬히 땅을 훑었 다. 이미 시체로 화한 흑영들의 목이 채 죽지 않았던 자들의 목과 함께 흙 바닥 위로 뒹굴었다. 확인사살이었다. 곽상과 한백은 길 위에 길게 뻗어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흑저의 눈에도, 귀도의 그것에도 그런 모습은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소운의 목숨뿐이었다. 몇 발자국 옮기던 흑저가 갑자기 손을 뒤로 돌려 통비원의 가슴을 밀 었다. 통비원이 멈추어 섰다. 피투성이의 귀도가 바짝 다가와 그를 뒤에서 안고 칼은 그 어깨너머로 비스듬히 겨누었다. 흑저가 통비원의 팔에 안긴 소운의 멱살을 잡아 뒤로 밀었다. 소운이 뒤로 미끄러져 통비원의 등과 귀도의 가슴팍 사이에 끼었다. 누구든 소운을 죽이려면 통비원과 귀도를 먼저 베어야 할 것이었다. 소운이 피식 웃었다. “흉한 꼴이군!” 흑저가 그를 힐끔 보았다. 한백과 곽상이 쓰러지는 모습도, 귀도가 오리고기 몰골이 되는 것도 소운에겐 별 충격을 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운은 자객이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태연한 빛으로 재 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싸움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흑저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섰다. 그와 통비원의 사이가 한 발 반, 소운까지 두 발, 귀도와의 거리는 두 발 반이었다. 굵은 눈썹 아래 깊이 박힌 눈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살기였다. 아직도 적은 많았다. 흑저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적은 여덟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흑저는 그 보이지 않는 위협을 알기 이전에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머리로 생각해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 었다. “자객이다--!” “소장주님이 암습을 당했다--!” 정원 저 건너편에서 통상적인 경계를 서고 있던 금룡장의 경계무사들 이 소리지르며 모여들었다. 때마침, 전각을 돌아 연무장으로 향하던 십여 명의 무사들도 이 모습 을 보고 뛰어왔다. 검은 가죽검집, 철검대의 무사들이었다. 정원 외각에서 매화 구경을 하며 수다를 떨던 세 명의 시녀가 밝은 대 낮에 벌어진 이 혈사를 목도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태양이 서산 너머로 기울려면 아직 두 시진은 더 지나야 할 백주 대낮 의 한때였다. 의심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객의 징후도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흑저의 머릿속은 위험 경보를 발하고 있었다. 노골적인 살기보다 더 두려운 그 무엇이 그의 전신을 거미줄처럼 감싸 들고 있었다. 깨질 듯 아파 오는 뇌리(腦裡)의 고통이 척추를 타고 내려와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창을 든 경계무사 세 명이 정원을 가로질러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검이 아니라 창을 들고, 허리에는 새우등처럼 휘어진 유엽도 (柳葉刀) 를 차고 있으니 총당 소속의 무사들일 것이었다. 선두의 사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흑저의 눈이 사내를 꿰뚫어 버릴 것처럼 빛났다. 사내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움, 그리고 당혹감 외에는 없었다. “자객!” 흑저가 갑자기 소리치며 오른발을 들어 그의 손을 걷어찼다. 그 손에 들린 창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팡--! 흑저의 들어올린 오른발이 사내의 복부에 꽂혔다. 사내가 고통으로 눈 을 치켜 뜨며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파파팡--! 흑저의 발이 연속적으로 사내를 두들겼다. 하나같이 미간에서 단전 을 잇는 급소였다. 내공 을 모아 위력적인 일격을 가하기 어려운 흑저였다. 박룡수는 철퇴 에 가까운 흉기였으니 여러 번 칠 필요가 없었지만 맨 발을 쓸 때는 급소를 골라서, 그것도 여러 번 가격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슈악--! 두 자루 창이 엇갈리며 흑저를 향해 찔러 들었다. 나머지 두 사내의 그것이었다. 예리하게 뻗은 창날의 옆으로 가지처럼 작은 창날 하나가 더 붙어 있 는 단가창(單架槍)! 그 창 하나가 비스듬히 옆으로 쳐 나가 적의 문호(門戶), 즉 방어(防 禦)를 열고 다른 사내가 든 나머지 하나가 그 열려진 틈으로 독사의 머리처럼 파고드는 절묘한 쌍창합격술(雙槍合擊術)이었다. 총당의 무사라면 이런 신위를 보일 수가 없었다. 형태가 다른 창, 버들잎처럼 날카로운 협인장창 이 아니라 단가창을 들고 있었지만, 흑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은 금룡장의 무사로 변장한 흑창수들이었던 것이다. 총당의 무사들이라면 소운이 암습을 당했다 해서 그렇게 걱정스러운 빛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살기도 보이지 않았고, 이런 경우 당연히 보여야 할 반응들만이 있었지만 그 표정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오 히려 어색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 비명조차 없는 것도 증거의 하나였다. 소리없이 다가와 철저히 허식(虛式)을 배제한 실전수법으로 싸우고 죽 는 것, 그 침묵의 전투야말로 자객들의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흑저는 박룡수를 마주 내밀어 양 손에 하나씩 창날을 잡아 버렸다. 촤앙--! 불꽃이 튀었다. 흑창수들은 안색이 돌변해 창을 잡아 뽑으려 했지만 박룡수의 손가락 틈에 창날의 가지가 얽혀 뽑을 수가 없었다. 원래 그 가지로 상대의 무기를 얽어 빼앗는 것도 단가창의 묘용(妙用) 중 하나였지만, 이 경우에는 거꾸로 얽혀 들고 만 것이다. 원래의 주무 기인 협인장창 을 들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흑저는 아직도 손가락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으니……! 흑저의 몸이 뒤로 기울어지고 창날을 잡은 손에 의지해 양발이 땅에서 솟구쳐 올라갔다. 팍--! “끄윽--!” 아무리 단련이 잘된 자객이라도 이 경우에는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 었다. 흑저의 양 발이 그들의 사타구니를 걷어차 낭심(囊心)을 터뜨려 버렸던 것이다. 원래 여인의 가슴과 남녀 공히 사타구니를 공격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는 행위였다.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효과적인 공격이 라는 의미. 생사가 오가는데 그런 것을 지킬 여유는 없었다. 그것은 사치에 불과 할 뿐이었다. 땅바닥에 오그라들 듯 무너져 내리는 두 사내의 머리 위로 박룡수가 떨어졌다. 퍽--! 붉은 피와 잿빛 뇌수가 함께 튀었다. 흑저는 뒤로 물러나며 귀도에게 말했다. “뒤로 붙어!” 아직도 적은 많았다. 검을 쥔 열두 명의 적. 철검대의 무사들도 자객이었던 것이다. 흑저와 귀도, 소운을 보호하는 보표 들을 제외하면 이 정원에 모인 모 두가 적이었다. 흑저는 문득 생각했다. ‘금룡과 흑룡은 하나가 아닐까?’ 그것은 끔찍한 상상이었다. 황금의 비늘 아래 칙칙한 검은 비늘을 감춘 한 마리 악룡(惡龍)을 상 상하는 것만으로도 흑저는 전율을 느꼈다. 금룡장 전체가 소운과 그의 목숨을 노리고 발톱을 드러낼 가능성도 아 주 없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눈앞에 적이 있으니……!’ 날 좁은 협봉검 (狹鋒劍)을 쥔 열두 명이 반원형으로 벌려 서서 그들 에게 좁혀 들었다. 바람결에 풍기는 피비린내에 실려 스산한 살기가 정원에 무겁게 감돌 았다. 도(刀)는 날이 한 면에만 있지만 칼날의 중심 부위를 위주로 거의 전 면을 다 사용한다. 그래서 보다 실전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칼등은 두텁고, 내려치는 힘을 위해 대체로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검(劍)은 양쪽날을 가지지만 실제 사용하는 것은 검봉(劍鋒)이 라는, 일 촌도 안되는 끝 부분이다. 후려치고 베는 초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대체로 보조적인 것이고 찌르는 초식이 주가 되 기 때문이다. 지금 자객들이 사용하는 검은 마치 쇠꼬챙이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날이 좁은 협봉검 이었다. 그것은 검날보다는 검봉을 강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베고 후려치 는 것을 포기하고 찌르는 것을 최대한 강조한 모습이었다. 흑룡방의 흑검수(黑劍手)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귀도가 소운을 두고 흑저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여섯 명씩!” 흑검수들을 나누어 상대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흑저는 그 제의를 거부했다. “아니! 내가 여덟, 넌 일곱이다!” 귀도는 흑검수들의 뒤에 선 세 명의 시녀, 이제는 양 손에 녹피장갑을 끼고 노골적인 살기를 뿌리고 있는 그녀들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덟, 네가 일곱!” 정원에 감돌던 피비린내가 더욱 짙어졌다. 파--악--! 그 피비린내 속을 귀도의 칼이 가르고, 종처럼 단단한 몸뚱이의 흑저 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피이잉--! 열두 명의 흑검수들이 일제히 검을 떨쳤다. 풍명천침파(風鳴千針波)!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검기 들이 서리서리 뻗쳤다. 열두 자루 협봉검 이 바람에 우는 갈대처럼 서로 섞이고 부딪치며 귀 도와 흑저의 눈앞에 가득 찼다.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처럼 솟구치는 검세(劍勢) 속에 귀도의 칼과 흑저의 박룡수가 담구어졌다. * * * “인생칠십(人生七十)이 고래희(古來稀)라……, 인간이 칠십 년 사는 것도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 했는데 백 년이라……!” 당가의 가주 다비독종 당천호가 부러운 것인지 질렸다는 것인지 알기 힘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탁자에 올려진 붉은 청첩장(請牒狀), 금룡장 금태파야의 기이지연을 축 하하기 위해 왕림해 달라는 서한을 보고 나온 감탄이었다. 이 시대에 칠십을 산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어지간히 가난해 장가를 못 가는 빈민이 아니면 열다섯에 혼인해 열여 덟 이전에 자식을 보고, 마흔이면 이미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오십을 넘기면 죽어도 별로 억울하지 않으니 자식들이 관을 사 서 집 안에 미리 가져다 두는 것이 가장 큰 효도로 인정되고, 예순을 넘기면 장수했다는 소리를 듣는 시대였던 것이다. 무림고수들은 범인(凡人)에 비해 비교적 장수한다고는 하나, 그 자신이 일흔을 바라보는 고령의 몸이 돼 보니 감회가 남달랐던 것이다. 탁자에 마주앉은 차기가주, 당문 유룡 당가휘가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도 그렇게 장수하실 것입니다.” “늙은이더러 오래 살라는 것은 욕이니라!” 당천호의 어깨를 주무르던 당소홍이 끼여들었다. “왜 그런 말씀을……?” “이 할애비가 노망이 들어 벽에 똥칠이나 하고 있으면 좋겠느냐? 그 저 맑은 정신 유지할 때 죽어야 깨끗하고 주변사람들 고생을 덜 시키 는 것이려니……!” “아니에요!” 당소홍이 그의 목을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님은 그럴 리도 없을 것이고,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소 녀는 할아버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을 원해요!”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그렇게라도 오래 살아 계셔 주세요! 소녀가 평생 모시며 살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어린 것이 잔망(孱妄)스런 소릴 다 하는구나!” 당천호는 짐짓 꾸짖으면서도 과히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하긴 오 년 전 금태파야를 만났을 때도 정정해 보이긴 했으니… …!” 당가휘가 물었다. “이번엔 기이지연이고 하니 전처럼 아우들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제 가 갔으면 합니다만……!” 하객으로 참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천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엔 내가 갈 테니 네가 가주 대리로 남도록 해라!” “어떻게 직접 원로(遠路)를 행차하시려고……?” “‘환(幻)’에 관한 문제도 얽혀 있으니 이참에 직접 나가 보려 하는 것이다. 둘째를 데려갈 테니 걱정할 것 없으리라!” 둘째라면 당문 한응 당가소를 가리키는 것인데, ‘환’이라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그 말이 나오자 당가휘의 안색이 갑자기 침중해졌다. “거기 간다고 ‘환’에 대한 단서가 잡히겠습니까?” 문 앞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잡힐 것입니다! 아니, 유일한 단서가 거기 있습니다!” 방 안의 시선이 문에 모였다. 매부리코에 뱀눈, 당가소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되어 거기 들어서고 있 었다. 당가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가?” “흑저라는 파계승을 기억하십니까? 아마 금룡장에 갔다고 하죠?” 당천호의 눈이 흥미로 빛났다. “그와 ‘환’이 무슨 관계인가?” “손노인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날 그가 거기에서 나왔다는 목격자 가 있었습니다!” 당소홍이 경탄성을 발했다. “설마, 그가?” 당가소가 그녀를 날카로운 눈으로 보았다. “설마란 없다! 어떤 일이든 확정되기 전에는 있을 수 있는 전체의 가 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범인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어떤 단서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당소홍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들었 다. “소녀도 할아버님을 보필해 가도록 허락해 주세요!” 당가휘가 펄쩍 뛰었다. “무슨 망발을! 이제 겨우 병에 차도가 있는데 그 먼 곳에 어떻게 가 려느냐? 게다가 이런 일까지 걸려 있는 상황에!” “그래서 가려는 것이에요. ‘환’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 람이 소녀 아니던가요? 그리고 건강도 이젠 정상이고, 사실, 소녀가 그 런 연회를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잖아요. 소원이니 데려가 주세요!” 그녀도 결국은 어린애였던가? 처음에는 그럴싸한 이유를 대더니 나중은 아예 당천호의 목에 매달려 조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말이 당천호의 마음을 움직였다. 십육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내내 방에서, 조금 상태가 좋아야 겨우 정원에나 나가곤 했던 그녀가 갑자기 가여워졌던 것이다. “그래, 거기엔 중원 전역의 세가와 대문파의 수뇌급 인물들이 모이고, 헌걸찬 소년영웅들과 네 또래의 무림재원(武林才媛)들도 적잖이 올 것 이니 가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말을 하던 당천호가 슬며시 미소지었다. “거기서 준수한 녀석이라도 하나 만날지도 모르고……!” “어마, 그런……!” 당소홍은 짐짓 얼굴을 붉히며 외면했다. 당가소가 인상을 썼다. “큰일이군! 소취가 알면 생떼를 쓸 텐데……!” “아시는군요! 생떼를 쓰기 전에 그냥 허락해 주시는 것이 옳을까 아 뢰옵니다!” 당소취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짐짓 절까지 해 가며 애교를 부렸다. 당가휘가 잘라 말했다. “넌 안돼!” “왜 아니되나요? 소홍만 아버님의 귀여운 여식이고, 소취는 주워 오 기라도 한 건가요? 이 가련한 소녀는 그런 성회(盛會)에 참석해서 장 래의 낭군을 찾아볼 수도 없는 것인가요? 그만 두세요! 소홍은 마음에 드는 영웅호걸이나 재사공자를 만나 보석가마 타고 혼인하고, 소녀는 그저 가문에서 정하는 대로 백정이든 천민이든 시키는 대로 나무가마 를 타거나 그나마 아까우시면 걸어서라도 혼인하러 가지요!” 짐짓 울먹여 가며 능청을 떠는 그녀의 모습에 당천호는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설마 네게 백정이나 천민을 짝지워 주기야 하겠느냐? 하다못해 대장 장이라도 되어야 우리 당문 의 데릴사위로 맞을 수 있지!” 전통적으로 당문 의 여인은 혼인하더라도 남자의 집으로 가는 것이 아 니라 데릴사위를 맞아 당문 내에서 같이 살도록 되어 있었다. 당문 비전의 용독술 (用毒術), 암기 수법 등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편이었다. 당소취는 대장장이에게 보낸다는 말에 정말 울상을 지었다. “대장장이라도 나쁠 것은 없겠지만 전 차라리 목을 매달렵니다. 허구 한 날 지하공방(地下工房)에만 살 테니 그 꼴을 어찌 보나요?” 당문 의 장인들이 비밀스런 지하공방에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것 또한 당문 의 전통이었던 것이다. 암기 수법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암기 제조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하는 데서 생겨난 조치였다. 그나마 개개인에게는 부품의 제조만 맡기고 전체적인 과정을 알게 하 지 않는 이중, 삼중의 조치를 하고도 그렇게 주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암기 의 속성상 그 위력이 발출하는 수법의 교묘함보다는 암기 그 자체의 뛰어남에 의존하는 까닭이었다. 당문 의 어떤 암기 중에는 무공을 모르는 아이가 던져도 피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이다. 당천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귀여운 손녀가 목을 매다는 것을 보느니 데려가는 것이 낫겠지!” 당가소가 쓰게 웃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 * * 바람이 불었다.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퍼지고, 박룡수에 묻은 끈적한 핏방울이 그 바람에 날려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흑저는 피로 칠갑을 한, 두 손을 늘어뜨리고 귀도를 돌아보았다. “괜찮은가?” 칼을 땅에 거꾸로 꽂은 채 그 손잡이를 잡고 주저앉아 있던 귀도가 천 천히 고개를 들었다.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날카로운 눈이 빛났다. “넌 다시 날 모욕했다!” 흑저는 잠시 생각한 다음에야 그 말뜻을 짐작했다. 귀도는 자신이 여덟을 맡겠다고 한 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객들이 모두 죽어 넘어진 지금, 그 결과는 흑저가 시녀로 변 장한 자객들까지 합쳐 열 명, 귀도는 간신히 흑검수 다섯을 처치했을 뿐이었다. 흑저는 천천히,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는 일체(一切)가 물거품일 뿐이다!” 귀도는 뚫어질 듯 그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무공에서나 마음가짐에서나 흑저에게 패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좋은 말이지만 지금 그렇게 여유부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군!” 소운이었다. 그는 통비원의 품에 꽂혀 있던 장죽을 빼더니 입에 물었다. 그리고 아 직까지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떨고만 있던 통비원을 향해 짧게 명령 했다. “불!” 그는 통비원이 화석(火石)과 화도(火刀), 화섭자(火葉子)를 꺼내는 동안 손을 들어 나뒹굴고 있는 한백과 곽상을 가리켰다. “곽상은 몰라도 한백은 살아 있을 테니 빨리 의원에게 데려가야 할 걸?” 그 말을 기다렸는지 한백이 손을 들어 까닥거렸다. 흑저의 안색이 변했다. “설마?” 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설마가 사실이지! 필요에 따라 실력을 감추고 있어!” 흑저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통비원은 아직도 진정을 못했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어 제대로 불을 켜 지 못하고 있었다. 흑저가 붉게 물든 손을 통비원의 코끝에 내밀었다. 통비원이 그 손에 화석과 화도를 놓았다. 흑저의 다른 손이 화석과 화도 위에 겹쳐지더 니 지그시 비벼졌다. 이내 돌가루가 흘러내렸다. 강철로 만들어진 화도가 구부러진 고철이 되어 떨어졌다. “더 이상의 수수께끼 놀이는 사양하겠다. 이젠 말해 줘야겠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소운이 장난기 한 점 없는 흑저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며 빙글빙글 웃 었다. “말해 주지! 하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이 먼저 아닌가?” 흑저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을 벌리기만 하면 심중의 뜨거운 열기가 불길로 뿜어져 나올 것 같 은데, 그냥 눌러 삼키고 돌아서려 했다. “불을 못 붙이게 한 책임은 어떻게 질 텐가?” 흑저가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다가 두 손을 들어 통비원이 든 화섭자의 앞에서 부딪쳤다. 깡--! 불꽃이 튀고 화섭자에 이내 불꽃으로 번졌다. 소운이 웃었다. “여러 가지 쓸모가 있는 손이군!” 잠시 후 소운은 폐부 깊숙이 연기를 들이마실 수 있었다. 다행히 살아 있는 곽상과 연기(演技)라고는 하지만 상처를 입어 움직 이기 어려운 한백을 양 어깨에 들쳐업는 흑저를 보며……! “후--욱--!” 소운은 들어갈 때는 엷은 푸른색이다가 나올 때는 뿌연 회색뿐인 연기 를 입으로 뿜어내었다. 그리고 말했다. “부용헌(芙蓉軒)으로 가자!” 부용헌. 전대 금룡장주 금야국의 아홉번째 부인 매아상(梅雅霜)의 처소였다. 소운이 이미 죽은 친어머니 외에 유일하게 찾아가는 계모였다. 바로 흑저에게 비단주머니를 건네주었던 그 소부. 눈이 시릴 정도로 흰 목덜미에 살며시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 한 오 라기가 너무도 아름다워 흑저를 두렵게 했던 그 소부였다. * * * 십이 월 삼 일. 소운에 대한 암살 시도는 금룡장에 거대한 충격파를 몰고 왔다. 비록 소운이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하기는 했지만, 이번 암살 시도가 금룡장 내에서 행해졌다는 것은 출입통제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둘째로 자객들이 금룡장 무사의 복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는 것 은 내부에 내통자가 있을 가능성을 시준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는 그 일 각여의 시간 동안 담과 전각들로 가리워져 있기는 했지만 소위 금룡장의 요지라 볼 수 있는 중원의 정원 하나가 피로 강 물을 이룰 때까지 아무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비록 거의 모든 금룡장의 수뇌들이 집법당에 모여 있던 시점이었기는 했지만……! 소운에 대한 성토장이었던 집법회의는 즉각 대책회의로 돌변했고, 격 렬한 토론과 책임추궁 끝에 다음 세 가지 결정이 내려졌다. 첫째, 그 시간에 경비를 섰던 무사들은 외원에 있었든, 내원에 있었든 전원 징계, 각 경계 책임자 다섯은 자결(自決). 둘째, 암살 시도의 배후가 드러날 때까지 장원 전체에 대한 비상경계 령 선포로 당주 이하 전 무사들은 무장상태로 항시 대기. 마지막이 소운에 대한 경호강화로 은검대의 무사 오십 명이 소운의 의 사에 관계없이 보표 들이 경호하는 그 외각에서 경호한다는 것이었다. 소운은 전대 장주의 아홉째 부인, 매아상의 처소인 부용헌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보표 들 또한 거기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 이후 그들을 보는 시각이 약간 달라진 것은 현장을 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귀도 와 흑저의 활약상이 알려진 덕분이었다. 땅 속에 숨었던 여덟 명, 총당 무사로 변장했던 세 명, 철검대원으로 변장한 열두 명에 시녀 세 명까지 도합 스물여섯 명을 두 사람이 거의 처치했다는 것이 확연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암암리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현장을 검증했던 금룡장의 고수들이 거기 남은 두 사람의 무공 흔적에 감탄을 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건달 나부랭이로만 생각되었던 보표 들에 대한 생각이 변하는 것은 당 연한 일이었다. * * * 작은 연못이 보이는 창가에 흑저는 기대어 서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라 노랗게 시든 연꽃 이파리만 떠 있는 더러운 진흙탕. 이제 봄이 오면 죽은 것으로만 보이는 줄기와 잎에 초록색 생기가 스 며 오르고, 여름 한철에는 푸른빛을 머금은 붉은 연꽃 송이가 잔잔한 물 위에 송골송골 맺혀질 것이다. 옛 사람 중에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은 더러운 진흙 속에 서 나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을, 더러움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의 지를 굽히지 않는 것을 사랑함이라고 했다. 속은 비어서 사심(私心)이 없고, 가지를 뻗지 않아 흔들리지 않는다. 그 그윽한 향기 또한 멀리 퍼져 더욱 청정하고, 그 높은 자세를 누구 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절’에도 연꽃은 있었다. 관음상(觀音像)의 온화한 미소를 느끼게 했던 그 연꽃, 부용이……! 그가 ‘절’에서 자랐다는 것, 자신이 ‘중’이었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묘하게도 ‘절’에서 쫓겨나 길거리를 떠돌 때였다. 그 전에는 속인(俗人)과 중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니, 아예 그런 구 분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것과 다른 것을 보아야 비로소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은 묘 한 일이었지만 사실이었고, 무엇보다 흑저에게는 절실한 문제였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절’에서만 자랐고, 그렇게 죽을 것이 라 생각했던 흑저였다. 아는 것이라고는 불경(佛經) 몇 구절과 권법(拳法) 몇 가지……. 그나마 근맥(筋脈)이 잘려 제대로 일할 수도 없었던 흑저가 속세에서 산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가장 기본적인 일들, 말하 자면 돈을 내야 음식을 준다는 것조차 몰랐으니……! 그 후 십 년은 눈물겨운 고행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갈 곳도 쉴 곳도 없는 사람에게는 더운 여름 날씨도 춥기만 한 것이 다. 그에게 한 가지 생각이 없었다면 그는 ‘절’에서 쫓겨난 첫 일 년이 지나지 않아 길가에 뒹구는 백골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억울하다’였다. 그리고 ‘돌아가고 만다’였다.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만을 부여잡고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다. 어디에 있든 멀게만 느껴졌던, 그러나 단 한번도 잊지 않았던 곳, 소림 사 (少林寺)! 지난 십 년간 흑저가 어디를 걷고 있었든 그것은 소림사 를 향한 걸음 이었던 것이다. 생각에 잠겨 멍하니 서 있던 흑저는 자신의 눈이 습기로 흐려지는 것 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작은 연못가에 한 소부(少婦)가 아까부터 나와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흰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삼십대의 소부, 매아상이었다. 한 손에 대나무로 엮어 짠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을 거기 넣었다가 꺼낼 때마다 연못가 작은 풀밭에 곡식 낟알들이 뿌려졌다. 후두둑--!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작은 새들이 낙엽 떨어지듯 내려앉아 그 낟알들 을 쪼았다. 바구니는 이내 비었다. 흉년에 사람 먹을 곡식도 없는데 새들에게 돌아갈 것까지 있을 리가 없었다. 비쩍 말라 정원에 뒹구는 새들이 가여워 시작했던 먹이주기였던 것이 다. 날이 갈수록 많아지는 새들은 이제 그녀가 얼마를 들고 와도 다 만족시켜 주지 못할 정도였다. 매아상은 바구니를 뒤집어 보이며 미안한 듯 말했다. “내일은 더 많이 가져올 테니 용서해라!” 그래도 그녀에게 달라붙어 먹이를 조르는 듯 옷깃과 손, 머리에까지 앉는 새들을 보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몰래 흑저의 방을 힐 끗 보았는데 그 창가에 흑저는 이미 없었다. 무엇을 딱히 바란 것은 아니지만 매아상은 불현듯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어 어지러운 생각을 떨쳐 버리고 자리를 떠나려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나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그녀는 멈칫 뒤를 돌아보다가 급히 외면했다. 어느새 그녀의 뒤편에 흑저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사람들과의 만남이 드문 그녀로서는 그를, 그 특이한 용모와 행 색, 그리고 그녀와 소운을 구해 준 그 당당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평소에 부처를 신봉하던 그녀에게 흑저의 초라한 행색도 도 (道)를 쫓는 고승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외간 남자를 정면으로 보도록 배운 적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외로 꼬아 외면하고, 다소곳이 흑저의 다음 말을 기다렸 다. 흑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왜 자신이 그녀를 보는 순간 방에서 나왔는지, 왜 돌아서는 그녀를 불 러 세웠는지 이해가 안 갔고, 심지어 후회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문득 번개같이 머릿속을 스치는 섬광. 흑저는 더듬더듬 말했다. “다른 보표 들은 어디에……? 곽상과 귀도, 그러니까 다친 사람 들…….” 소부가 돌아보지도 않고 다소곳이 말했다. “저를……!” 따라오라는 뜻이었던가 보다. 그녀는 다시 잔걸음으로 연못가의 돌 깔린 길을 걸어갔다. 남자를 매혹시키는 것은 여인의 미모(美貌)가 아니라 기품(氣品)일 것 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이렇게 눈을 뗄 수 없을 리가 없었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게 풍성하게 휘감은 흰 옷, 흰 치마. 사람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요염함이 아니었다. 버들가지 휘청이 는 것 같은 가냘픔도 아니었다. 본다는 것 자체가 죄스러울 정도로 고귀한 기품. 이렇게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는 것 이다. 문득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연못을 도는 둥근 길을 반이나 돌아왔을까? 작은 연못을 중심으로 사방에 한 채씩 선 네 채의 작은 집이 흑저가 있는 곳이고, 치료받는 곽상과 한백, 귀도와 통비원이, 그리고 소운과 매아상이 있는 곳이었다. 흑저는 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있던 방 바로 옆으로 몇 걸음만 가면 나오는 작은 목옥(木屋)이 바로 곽상과 귀도가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물어 볼 이유가 없었던 것을……!’ 흑저는 안내해 주어 고맙다는 뜻을 보이기 위해, 사실은 달아오른 얼 굴을 감추기 위해서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만은 외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매아상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며 두 손 모아 합장했다. 그녀의 홍조 띤 얼굴에 반짝이는 맑은 눈이 흑저의 깊숙이 박힌 눈과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두 사람이 서로를 한참이 나 보고 있었던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태를 깨달은 흑저가 급히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매아상은 종종걸 음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흑저는 차마 그 뒷모습을 볼 용기가 없어 돌아서서 방문을 열었다. 곽상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옆구리를 꿰뚫고 들어간 두 자루의 칼이 내장(內臟)을 엉망으로 뚫어 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기였다. 한백처럼 일부러 맞아 주지 않았다면 더욱 그랬다. 흑저는 곽상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미안함을 느꼈다. 곽상은 그가 아니었으면 보표 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가난 한 도적으로 살았을 지는 몰라도 이렇게 사경(死境)을 헤매이지는 않 았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고 썩은 악취 풍기는 음모의 구렁텅 이로 고개를 들이민 셈인 것이다. 흑저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그것 또한 업보(業報)이니……!’ 방 반대편에 있는 또 하나의 침상에는 귀도가 앉아 흰 천으로 그의 칼 을 문지르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도신(刀身). 언뜻 보면 녹이 슨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재질(才質) 자체가 그러한 것인지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났다. 손잡이에는 흰 천을 친친 동여매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했다. 거듭된 싸움으로, 아니 살생으로 피에 절었을 텐데 지금은 깨끗한 것을 보면 새 천을 감은 모양이었다. 흑저는 보면 볼수록 그 도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무튀튀하다는 것을 빼고 나면 극히 평범한 유엽도 의 형태에, 둥근 호수구를 달았을 뿐, 별 장식도 없는 그 도가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말을 뱉었다. “좋은 칼이군!” 귀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저가 들어온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개 한 번 들어보지 않고, 아는 척도 않았던 그가 칼에 대해 말하자 바로 반 응이 돌아왔다. 그만큼 칼을 아낀다는 뜻이었다. 흑저가 물었다. “이름은?” “귀도(鬼刀)!” “아니, 칼 이름 말이야.” “귀도!” 흑저는 그제야 이해가 갔다. “좋은 이름이군!” 귀도의 칼 이름도 귀도였던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칼에 붙였다. 아니, 칼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삼았다. 어느쪽이든 칼에 대해 대단한 애착을 보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곤 더 할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는데 방문이 열리고 통비원이 고개를 들이밀었 다. 이번 사건으로 상처 하나 없는 것은 그와 소운뿐이었다. 흑저조차도 흑검수들의 공격에 칼자국 몇 개를 몸에 새겼어야 했으니 말이다. 바늘로 찔러 오는 것처럼 날카롭고, 채찍을 휘두르듯 유연했던 그 검 의 기세! 그들은 적어도 그 각각이 고수급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셋 이상 합 세해 공격한다면 중원사흉의 아래가 아니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런 인물 다섯을 죽인 귀도는 중원사흉보다 고수란 말인가? 흑저는 문득 귀도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를 의심하 게 되었다. 그 자신은 이상하게 일이 꼬여 그렇다고 쳐도 귀도 같은 인물이 왜 보 표 자리를 자처했을까? 어쩌면……. 어쩌면 그도 한백처럼 소운과 한패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결정적인 시기를 노리는 자객? 흑저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가 생각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통비원이 말했다. “모이랍니다!” 소운이 부른 것일 게다. 흑저는 그가 모든 것을 말해 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십이 일 후! 태조모의 기이지연이 있을 때에…….” 소운이 말했다. “우리는 금룡장을 빠져나간다!” 통비원이 놀라 입을 벌렸다. “도망가는 것입니까?”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진정한 금룡장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한백이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 있으면 죽을 뿐이니까!” “왜 하필 그때?” 대답한 것은 다시 한백이었다. “그때는 천하의 이목이 여기로 모인다. 소운의 탈출은 알리지 않으려 해도 알려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지.” “그때부터!” 소운이 말을 이었다. “사태변화의 주도권을 내가 잡는 것이다. 권력에 눈이 멀어 조카를 죽이려 하는 숙부와 거기 영합한 가신들에게 쫓기는 비운의 후계자! 가문을 되찾는다는 명분도, 그것을 도우면 공신이 된다는 실리도 내게 있다. 천하의 공분이 금룡장에 모이는 것이지. 그것이 가시(可視)적인 도움은 안된다 해도 그들이 드러내 놓고 날 추적하거나 죽이려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들도 세상의 이목이 두려울 것이니 말이다.” 흑저가 물었다. “숙부가 정말 너를 죽이려 하는 구신의 우두머리인가?” 소운이 또 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기색으로 쏘아보았다. “몰라!” “그런데 그런 식으로 숙부를 매도한다는 것은……?” “사실이 그렇고 안그렇고는 관계없는 일이야.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적어도 지금 당장은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 보다…….” 소운이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숙부를 음모의 주모자로 몰아 두는 것이 내게 유리해!” 흑저는 입을 벌렸다. 어이가 없어서 였다.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냥 다물고 말았다. 말한다고 들을 소운이 아님 을 느꼈던 것이다. 통비원이 대신 물었다. “금룡장 무사들과 싸운다는 것은 어떤 생각에서 꾸미신 것입니까?”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다.” “……?” “너희가 무사들의 도전을 다 격퇴한다. 그러면 난 기고만장할 것이고, 그들은 창피를 당하겠지. 그 순간에 우리가 도주하리라고는 누구도 생 각을 못할 것이다. 싸움에 이기고 후퇴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쉬운 일 이 아니니까.” “우리가 무사들을 이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당주급의 고수는 체면상 나올 수가 없다. 한낱 보표 와 싸워서 이겨도 별 명예가 아니고, 진다면 자결해야 할 정도로 수치스런 일이다. 그렇다면 나올 수 있는 인물들은 그 아래인 데……, 생각할 수 있는 최고수는 금검대의 몇몇뿐이야. 아니면 부당주 급의 인물인데 그들은 금검대원들보다 하수이니 생각할 필요도 없 다.” 통비원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금검대 아니라 철검대원도 못 당할 텐데요?” “너는 내 발이다. 누가 발더러 혼자 싸우게 하겠어? 싸우는 것은 귀 도와 흑저, 둘이다. 원래는 한백과 곽상도 나가 싸우다가 쓰러지는 것 으로 하려 했지만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어!” 흑저가 물었다. “왜 우리 둘이 그들을 이겨야 하는 것이지?” “이기기 싫은가?” 흑저는 잠시 침음하다가 입을 열었다. “싸우기 싫은 것이다. 내 손에 이유없이 피를 묻히기 싫은 것이다!” 소운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신랄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지 않았나? 이 모든 일이 애초에 당신이 청면수라를 죽이고, 날 구해 주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일이었어. 당신이 돌아다니며 흑룡방을 끌어내지 않았으 면 난 이런 계략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거야. 어떻게 그들을 끌어내었 지?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지 않았나? 무림에 이렇게 짧 은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다닌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 을 거야. 이미 희대의 살인마가 된 처지에 그 손이 피를 묻히기 아까 울 정도로 아직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흑저는 다시 입을 벌리려다 말았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죽여야 했다. 최초에 청면수라를 죽인 것은 물건에 욕심을 내어 살생을 한 것이라 마음에 걸리지만, 그 후의 살생은 죽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뿐, 살 생을 위한 살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무대회에서 살생을 한다는 것은 무가치한 일인 것이다. 체면을 위해, 알량한 자존심을 위해 사람을 죽여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누구도 대전(對戰)에 있어서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다. 생사의 간극(間隙)이란 종잇장보다 얇은 것이라 실오라기만한 실수만 있어도 승패와 생사가 역전되는 것이다. 힘과 기술, 정신력에 있어서까지 압도적인 우위에 있지 않다면 누구도, 항상 패배할 가능성은 열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패배의 대가는 죽 음일 것이다. 그 자신이 어느 한 순간 적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 었다. 오히려 결정적인 약점이 있는 그로서는 누구를 만나도 불리한 입장이 었다. 생사가 나뉘는 찰나의 순간에 미묘한 승기를 잡아 겨우겨우 이기고 나 면 운이 다시 한번 그의 편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곤 그 운을 계속 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저 필사의 노력으로 몸을 단련해 왔다. 단 한 순간도 박투술 을 보완하고 발전시키는 방법 을 생각하는 것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백과 귀도는 전부터 말해 오던 것을 준비하고 통비원 은 거가방에 가서 말을 골라 놔. 그 누구더라……, 멍청한 녀석 하나 보내 놓았지?” 엽검영을 말하는 것이다. “그 녀석에게 이렇게 말해! ‘금룡장의 운명이 걸린 극히 중요한 일 을 위해 특수한 임무를 맡긴다. 당일 아침부터 밤 삼경 까지 십리타(十 里陀) 숲속에서 마차를 가지고 대기하라’고.” 십리타라면 금룡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후미진 산기슭이다. 통비원이 입속으로 몇 번 되풀이하여 중얼거리더니 문득 물었다. “그 마차로 도주하는 것입니까?” 소운이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미끼일 뿐이야.” 통비원이 입을 딱 벌렸다. 미끼라면 엽검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딱히 이렇다 할 사이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기만해도 되는 것일 까……? 소운은 더 말할 것이 없다는 듯 누워 버렸다. 흑저가 그를 불렀다. “아직 말 안한 것이 있군!” “뭐 말인가?” 그는 손을 들어 한백과 귀도를 가리켰다. “저 두 사람에 대해!” “아주 바보는 아니군, 이제라도 알았으니!” 기분 나쁠 말투인데 흑저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바보라는 소리는 여태 수없이 들어오던 말이었다. 심지어 소림사 에서 도……. “금룡장쯤 되는 가문이면 비밀세력도 몇 개쯤 가지고 있게 마련이 지!” 소운의 짧은 대답이었다. 제 14 장 사랑이 얕으면... 사랑이 얕으면 끊어지기 쉽고 맺지 못한 정에 원한은 길어…… 때로는, 아니 대부분의 경우에 짐승은 인간보다 낫다. 꼽추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짐승은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먹고 싶으면 입을 들이밀지, 침 흘리며 눈치만 보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은 속이지 않는다. 이빨을 드러내며 동시에 꼬리를 치지는 않는 것이다. 그들은 찌들지 않은 순수한 본능의 추구(追求),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욕망의 화신(化身), 생존과 종족보존의 천명(天命)에 충실한 야성의 충동(衝動) 그 자체이다. 그들은 피를 흘릴 뿐, 이유를 대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런 가식은 애초에 필요없는 것이므로……! 아침부터 뭔가 좋은 일이 있는지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엽검 영을 보며 꼽추는 그런 자신의 생각들을 더욱 굳히고 있었다. 그가 어젯밤에 뭘 했는지, 누굴 만났는지 모른다면 꼽추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정기룡이 그를 여기 보낸 것은 바로 이런 낌새를 감시하라고 보낸 것 이었으니……! 소운 휘하의 보표 가, 그것도 그의 발 노릇을 하는 자가 야반 삼 경에 거가방에 갓 들어온 인물을 만났다. 그리고 둘이 마사(馬舍)에 들어가 한참이나 뭔가를 했다. 무엇을 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엽검영이 아침부터 하는 거동을 보면 그런 것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 는 것이다. 마지못해 겨우 하는 티를 보이던 그가 괜히 친한 척하며 환심을 사려 하는 몇 마리의 말. 아까부터 자꾸 시선을 주는 그 몇 마리의 말은 말 에 대해서 잘 모르는 꼽추가 보기에도 명마(名馬)들이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잡털이 없고 보기에만 좋은 그런 말들이 아니라, 다리가 길게 빠지고 군살이 없는 오로지 달리기 위한 말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사태는 명쾌해졌다. 소운은 도주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기가 머지 않았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도주 수단을 준비하는 것 은 대개 이런 일의 최종단계에 하는 일이니 말이다. 정확한 시기와 방법을 알고 싶다면 엽검영이라는 저 멍청이를 감시하 면 될 일이었다. ‘여기서 일한 보람이 있었던 셈인가?’ 십이 월 사 일이었다. 꼽추는 정기룡이 알아서 찾아오겠다고 말했지만, 따로 연락방법을 찾 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금태파야의 기이지연을 앞둔 금룡장은 갑자기 부산해졌다. 당세에 보기 드문 장수연(長壽宴)을 준비하느라 짐수레가 부성(府城)과 금룡장을 분주히 오가고, 예양, 장안 은 물론이고 멀리 강남 과 북평 부에서까지 초대한 일류 숙수(熟手:요리사)들이 바쁘게 손을 놀렸다. 건작어괴(乾炸魚塊), 건작리배(乾炸裡背), 남전환자(南煎丸子), 내유여황 (乃油蠣黃), 춘병채(春餠菜), 청증가어(靑蒸加魚),함화생두(鹹花生豆), 홍 소마안교(紅燒馬鞍橋), 타변로(打邊爐), 활리삼흘(活鯉三吃), 건조기문 (乾祚奇門), 연두대분(軟斗代粉), 계화어권(桂華魚卷) 등등……. 평민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부호도 구경하기 힘든 요리들이 당일 잔치 상에 올려지기 위해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금룡장에는 이미 반 년 전에 전달된 청첩장에 맞추어 중원 각지 에서 하객들이 모여들었다. 아무리 고수라 해도 워낙 멀리에 웅거하고 있어 반 년이나 전에 출발 한 곤륜파 (崑崙派)의 장로(長老) 곤륜 노선(崑崙老仙) 우진노사(于珍老 師)가 열두 명의 수행을 데리고 구대문파 중 최선두로 도착했다. 그를 필두로 중원의 명문 종남파 (終南派), 공동파 , 형산파(衡山派)가 일찌감치 도착해 영빈관에 여장을 풀었고,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무당 (武當), 소림 (少林), 화산 (華山), 아미 (峨嵋)에서도 장문인 혹은 장로급의 축하 사절이 출발했다는 연락이 있었다.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세가들 역시 적잖게 도착해 남궁세가 (南宮世家), 진주언가 (珍珠彦家), 하북팽가 (河北彭家), 사천 당문 (四川唐門) 등이 이미 도착했거나 섬서성 경내에 들어와 도착직전이라는 연락이 오곤 했다. 호가봉공 이랑검 금야홍이 하객의 신분에 맞추어 정문, 혹은 중문에서 쉴새없이 영접을 했고, 총관 하구장도 아픈 몸을 이끌고 제반 대소사 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각별히 더 부산스러워진 것은 기이지연과 때를 같이 하여 대금룡회합 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대금룡회합! 금룡장의 전 기업(企業)과 지가(支家)의 수뇌들이 모여 벌이는 회합이 었다. 모두가 중원에 있다고 해도 매년 모이면 멀리 산동 (山東)이나 복건 (福建)에 기업을 벌인 지가의 수뇌는 일 년 내내 길에서만 시간을 보 내야 할 것이다. 오는 데 반 년, 가는 데 다시 반 년이 걸릴 테니 말이 다. 그래서 대금룡회합은 십 년에 한번 정기적으로 모이고 금룡장 전체에 관련된 중요 사안, 예를 들어 전대 장주 금야국이 타계했을 때처럼 큰 일이 생길 경우 임시로 모이곤 했었다. 이번에는 그런 큰 일이 아니라 정기적인 것이고, 가문의 최고연장자가 백세를 맞는 경사스러운 자리였지만, 모여드는 가신들의 얼굴에 그늘 이 깔려 있는 것은 차기 장주가 될 소운의 광증(狂症)이 점점 심해진 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중도에 들은 암살 시도 사건은 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장원 곳곳에 깔려 있 는 경계무사들의 수는 평소의 세 배에 가까웠고, 그 행동에도 긴장감 이 감돌아 그런 인상을 더 짙게 했는데……. 그렇게 부산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금룡장의 중원의 정원 한 귀퉁이에 서 흑저는 뜻밖의 손님을 맞고 있었다. 바로 현 당문 가주인 당천호였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손노인은 나의 가형(家兄)이었소. 당문 역사상 유례없는 명장(明匠) 이었지. 신수(神手)라고도 불렀소. 그런 그가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되 고 결국 성도부 구석에서 그런 모습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 것은 한 장의 종이 때문이었지. 그리고 그 종이에 얽힌 전설 때문이었소.” 금룡장에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서야 간신히 연락이 닿아 비밀리에 흑 저를 불러낸 당천호의 입에서는 당문 의 비밀스런 은원이 하나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원래 그 종이조각은 당천호가 집안의 서가 구석에 있던 오래된 책을 펼치자 떨어진 것이었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만지면 부스러질 것처럼 바짝 말라 버린 그 양 피지 조각에는 그로서는 알아볼 수도 없는 복잡한 선과 기호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형인 당천군에게 들고 갔다. 그때 당천군은 삼십의 나이에 이미 당문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 히고 있었으며, 당문 깊숙한 곳에 있는 비밀공방에서 정교하기로 유명 한 당문 비전 암기 들의 제작을 책임지고 있었다. 처음 당천호가 들고 온 양피지를 보고 그는 곧 어떤 종류의 암기 도해 (暗器圖解)임을 알아보았다. 당문 특유의 흔적이 보이는 암기 도해……. 그는 천천히 검토해 보겠다고 하고는 도해를 받아 두었지만 곧 그 도 해에 빠져 침식을 잊게 되었다. 열흘을 꼬박 도해를 검토해 본 그의 결론은 ‘제작 불가능’이었다. 그는 당천호에게 말했었다. “이건 완전히 환상의 산물이야. 지금의 기술로는 도저히 만들 수가 없는 쓰레기라고!” 당천호는 그것으로 그 일은 끝난 줄 알았다. 그리고 잊고 있었는 데……. 사실은 그것이 당천군에게는 시작이었다. 그는 누군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왜 만들 수 없는가 라는 의문으로부 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일생을 걸고라도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는 아집 (我執)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그 도해에 그려진 물건은……. “당문 의 전설로 내려오는 환상의 암기 였네!” 당천호가 괴로운 빛으로 말했다. “이름도 모르는……, 단지 ‘환(幻)’으로만 불리우는 그것은 당문 의 명장이면 누구나 만들어 보고 싶어하던 것이었지만 아무도 만들지 못 한 것이었지!” 당천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것에는 무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명장들을 삼켜 버리는 유혹 의 힘이 있었어. 그것 때문에 모든 일을 버리고 폐인(廢人)이 된 사람 이 우리 당문 의 역사에는 적지 않다네. 그래서 옛 가주님들이 그 도 면을 치워 버리고 그것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금지시켰었는데…… 형 님도 그것에 빠졌지. 그 일이 당시의 가주이시던 내 조부님을 진노케 했네!” 그는 오랜 옛일임에도 그 아픔이 남았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난 괴로웠어! 내가 그 도해만 발견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서 형님은 손노인이라는 이름으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지. 당 문 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 것이야. 그리고 완성 시켰네!” 중간을 생략했지만 흑저는 그 부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 당천군이 손노인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자 골목에 있게 된 것인 지……. 그리고 왜 당천호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형님의 죽음도 슬프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이야. 특히 형님 의 기록에서 그 물건을 완성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전설의 암기 ‘환(幻)’이 완성된 것은 확실하네. 그 의미는 바로 무림에 재난이 닥 쳐왔다는 것일 수도 있네!” 당천호는 어마어마한 말을 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암기 가 무림에 일대 재난을 초래할 정도의 위력이란 말인 가! 그러나 당문 의 위명과 그 공포스런 잠재력을 생각할 때, 특히 무림에 이름 높은 당천호의 인품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 했다. 흑저는 고개를 저었다. “난 모르겠습니다.” 당천호는 그의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자넬 믿겠네! 그러나, 난 그 범인이 어떤 식으로든 자네와 연관이 있 다는 생각이 드는군. 앞으로 우리 당문 은 그 물건을 찾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지만 자네도 혹시 보거든…….” “찾아서 돌려 드리지요!” 당천호는 웃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서 우리에게 알려주기만 바랄 뿐이네!” “어떻게 보느냐?” 흑저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당천호는 그를 수행했던, 그리고 지금까 지 한마디도 않고 있던 당가소를 향해 물었다. 당가소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복잡한 계략을 꾸밀 인물 같지는 않군요.” “그 말은?” “그가 가지고 있고, 모종의 계략, 예를 들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을 은폐하거나 금룡장을 상대로 뭔가 꾸미고 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 습니다만,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머리가 단순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우둔해 보인다는 말이냐?” “둔하다는 표현이 어느 정도로 정확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복잡한 계략을 꾸밀 정도로 영민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둔하다는 말도 옳습니다.” “바보는 아니다. 그러나 교활하지는 않다 그 말인가?” “대지(大智)는 약우(若愚)라고도 하니까요.” 대지는 약우. 크게 지혜로운 자는 오히려 어리석어 보인다는 말인데……. 당천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손노인에게 갔는지, 또 짐작 가는 것이라도 있는지 왜 물어 보지 않았느냐?” “물어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서 물어 보지 않았습니다.” “너도 봤느냐?” 당가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당금 강호를 뒤흔든 혈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놀랍군요! 그 손은 분명 청마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당문 의 솜씨로 변형된 것이 더군요!” 그들은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흑저의 박룡수가 청마수의 변형된 모습 이라는 것, 그리고 손노인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 다. 당가소는 다시 입을 벌렸다. “그가 단서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아마 그 자신은 깨닫 고 있지도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옆에서 관찰하는 것이 더 쉬울 거라 는 생각에 묻지도 않은 것입니다. ” 당가소는 섣부른 추측을 극도로 혐오하는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물어 본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 정도까지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가 벌이고 다니는 혈사와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디 까지나 추측입니다만……!” 대화를 하며 걷고 있는 동안 그들은 영빈관 문을 통과했다. 웬만한 장원 하나만큼 큰 전각이 네 개나 늘어선 영빈관은 거기 묵어 가는 손님의 성향과 지위에 따라 등급이 나누어져 거하게 된다. 사천 당문 이면 정파(正派)에서도 최상급. 구대문파 와 중원 명문세가의 고위인물들만 들어가는 청룡관(靑龍館) 에 들어서자 돌과 나무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부자연스러운 티가 전혀 나지 않도록 세밀히 조성된 정원이 나오고 그 한 가운데에는 연못이 보였다. 연못을 가로질러 구름다리가 있고 그 중심에 만들어져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자(亭子). 정자 안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당가소가 손을 들어 그 정자를 가리켰다. “애들이 저기 있군요!” * * * “사천 당문 은 사천 에서도 패주로 군림하니 이번 사천 혈사(四川血 事)에 대해서 남들이 모르는 정보도 알고 계시겠지요?” 매화검(梅花劍) 이검악(李劍嶽). 화산파 장로 매화검선(梅花劒仙) 정일자(正一子)의 고제자로, 별호에서 도 알 수 있듯이 스승의 진전을 거의 익혀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後期 之秀)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용모 또한 영준하여 어디로 보아도 헌헌공자(軒軒公子)라는 소리를 들 을 만한데, 그가 지금 사천 당문 의 당소홍, 소취자매에게 사천 혈사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당소취가 눈을 깜박거리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천 혈사? 그게 뭐죠?” 이검악은 사천 에서 온 그녀가 그 일을 오히려 모른다는 것이 믿어지 지 않는지 눈을 크게 떴다. “기실 사천 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을 일일지도 모르죠. 원래는 섬서 성 , 그것도 여기 중원제일가에서 십 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시작 된 일이니 말입니다.” 그때 옆에 섰던 삼십 줄의 사내가 말을 가로채었다. “원래는 섬서성 , 중원 널리 흉명을 날리던 중원사흉의 일 인인 청면 수라가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된 것이죠. 그 일은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깨끗한 황색경장에 청강검(靑剛劍)을 메고 머리에는 보자기를 삼각으 로 접어 뒤로 넘긴 포건(包巾)을 해서 깔끔하게 멋을 낸 사내, 바로 종 남파 의 뇌전검객 유청이었다. 금룡장 보표 시험에 떨어지고 면목없이 돌아갔던 그가 스승의 수행원 (隨行員) 자격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당소취가 말을 잘랐다. “그 일이라면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왜 사천 혈사라는 것이죠?” 많아야 스물을 넘지 않는 젊은 남녀가 모인 자리에 서른 줄의 주책이 끼여들어 있으니 눈이 고울 리가 없다. 가만히 얘기나 들으면 조금 나으련만 꼬박꼬박 아는 척을 하는 것이 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이검악이 말을 받았다. “그 사건이 사천 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죠. 그리고 정말 혈사라 불릴 만한 일이 모두 사천성 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그 혈사라는 것은 흑저의 행적이었다. 섬서성 예양부 관도에서 청면수라를 쳐죽이고, 사천 으로 넘어가 성도 부 교외 호젓한 산길에서 오십여 명의 흑의인을 시체로 만들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강호의 비밀세력인 흑룡방의 자객들, 중원사흉 과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분분했는데, 과연, 그것 을 증명이라도 하듯 피로 이어진 산길의 끝에는 대완구가 뒹굴고 있었 다. 그 주인인 난쟁이의 시체 옆에서……. 그리고 사흘 후. 남충현(南充縣) 경내를 흐르는 가릉 강변에서 소리장도가 살해되었다. 이 사건이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膾炙)되었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속에서 벌어진 때문만이 아니라 사건 자체의 엽기적인 성격 탓이 컸다. 점잖은 중년문사가 소매 속에서 육도(肉刀)를 꺼내 휘두르고, 영락없이 목이 잘릴 것으로 보였던 사람이 머리위에 발이 붙은 것처럼 상대의 머리를 차더니, 마지막으로는 두 손으로 창자를 끄집어내 죽였다. 눈감을 사이도 없이 벌어진 일 장 살인극이었다. 그 뒤에 더욱 놀라웠던 것은 창을 든 세 기마인이 나타나더니 두 말 없이 그 사람을 찔러 꼬치로 만들 듯해서 끌고 가다가 놓치는, 그래서 결국 그 혈사의 주인공은 강물로 떨어지는 한 편의 활극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 사건을 목도한 사람들 중 마음 약한 사람은 넋이 나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말 잘하는 사람들은 그 목격담을 말해 주느라 목이 쉬어 버렸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끔찍한 일이어서인지 범인을 제대로 본 사람은 없 었지만, 그래도 목격자의 주장이 일치하는 단 한 가지는 범인이 맨발 의 파계승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끝이 났다면 그 파계승이 죽는 것으로 혈사는 원인도, 범 인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채 미궁 속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나흘 후, 가릉강 하류, 장강 의 본류와 만나는 물굽이에 좌초한 흑룡선 에 대담한 사람들이 올라가 보니 삼십여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흑룡왕 하백이 거기 섞여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혈사의 주인공, 파계승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검악은 단숨에 여기까지 말하고 목이 갈라지는지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 전중원 무림인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일을 막상 사천 당 문 에서는 모르고 있다니, 정말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일까요?” “모른다구요?” 당소취가 발끈했다. “사천 혈사라고 제멋대로 이름을 붙였으니 못 알아들었을 뿐, 그 일 을 왜 모르겠어요? 이공자가 아시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 지요.” 그녀는 천성적으로 호승심(好勝心)이 강하다. 게다가 이렇게 여러 문 파, 여러 가문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가지라도 못하다는 인상 을 줄 수야 있겠는가? “당장 그 파계승이 낭리도 혁천조까지 해치워 버린 것은 아무도 언급 하지 않으시는군요!”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놀라움으로 경탄성을 발했다. “낭리도 혁천조까지?” 당연한 것이 그 일에 대해서는 당문 이 직접 관여된 일이라 시체를 치 우고 함구하도록 명령한 일인 것이다. 사천 표국 의 표사 들 사이에서야 알게 모르게 떠돌고 있기는 했지만 중원에서는 아직 모르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유청이 놀라 물었다. “그게 언제 일입니까?” 당소취는 사람들이 놀라자 으쓱해 대답했다. “성도부 교외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죠. 뿐만 아니라 난 그를 직접 보기도…….” “언니!” 당소취는 소홍의 고함에 놀라 말을 멈추기는 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 다. 정자 저편에서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까지도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이니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정자 한 구석에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던 금의공자가 그들을 향해 걸어 왔다. 검붉은 비단옷에 주작의 깃털. 정기룡이었다. “소저께서 직접 보셨다면 그 정체도 짐작할 수 있겠군요?” 당소취가 당황해 말을 못하는데 당소홍이 그녀를 밀어내고 대신 대답 했다. “스쳐 본 것으로 어찌 그 정체까지 알겠습니까?” 정기룡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호오--, 그럼 소저께서도 보셨다는 말씀?” 당소홍은 얼굴이 굳었다. 짧은 말에서 숨어 있는 단서를 잡아내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은 아니 라 해도, 이렇게 순간적으로 거기까지 생각했다면 평소에 그런 대화가 습관이 된 사람일 것이다. 과연 그의 복장을 살펴본 당소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선문(六扇門)의 사람들이 무림에 일어난 일에 대해 웬 일로 그리 관심이 많으신가요?” “육선문?” 육선문이라면 관부에 종사하는 무림인들을 말하는 용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정기룡을 노려보았다. 과연, 검붉은 비단옷에 검붉은 가죽장화를 신지 않았는가? 육선문 중 에도 무림인들이 가장 경원하는 동창 의 위사 라는 의미였는데……! 정기룡은 웃었다. “소관(小官) 동창 의 교위, 정기룡이라 하오. 이왕 알아보셨으니 터놓 고 말씀드리려니와 무림인들이 밟고 있는 땅도 다 대명천자(大明天子) 의 땅인데 소저께서는 마치 다른 세계라도 되는 듯이 말씀하시는구려! 그런 대량학살은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니 황명을 받아 일하는 사 람으로 마땅히 참견할 일이 아니겠소?” “그보다는 굶주림에 죽어 가는 백성들을 어떻게 구휼(救恤)할까를 걱 정하시는 것이 더 급할 듯하군요!” “관이란 저마다 직분이 있는 것이니 소관이 어찌 타 영역에 월권하겠 소이까? 단지 그런 일들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관원이 있다면 상부에 보고하여 응당한 처벌을 하는 것으로 책무를 다할 뿐이지요!” 듣고 있던 이검악이 나섰다. “이번 혈사에 죽은 자들은 하나같이 흉명을 날리는 대마두 아니면 자 객들인데 그런 자들을 죽인 자라면 벌이 아니라 상을 내리는 것이 마 땅하지 않소?” 이검악이 이렇게 나서는 것은 화산파 의 제자로서 가지고 있는 동창 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 때문이었다. 명대의 종교 통제는 유명한 것이지만, 특히 영종(英宗) 정통제(正統帝) 때부터 백여 년간은 아예 환관(宦官)을 상주시켜 도관을 관리했다. 도교 북종(北宗) 무당 도(武當道)를 신봉하는 무당파 , 역시 도교 북종 정일교(正一敎)의 일파였던 화산파 , 도교 남종(南宗) 전진 교(全眞敎) 의 맥을 이은 모산파 (茅山派)가 대표적인 경우로, 이 시기에는 구대문 파 의 태두라 할 소림사 에도 환관이 상주했으니 구대문파 가 아예 그 들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났다고 볼 수 있었다. 그 백여 년간 각파의 절기가 유출되고, 정영(精英)들이 차출되어 관부 의 일을 했으며 장문인 의 위에 환관이 군림하고 있었으니 그 치욕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동창 에 고수가 많은 것도, 그것도 본산(本山)에서는 실전된 정 파무공에 정통한 고수들이 많은 것이 그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정기룡은 사방의 적의 어린 시선 속에서도 태연했다. “상을 주려 해도 사람을 모르고서야 줄 수 없는 것 아니겠소?” 당소홍이 더 이상 얘기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마도 그는 가만히 놔두어 주는 것이 상이라고 생각할 것이에요!” 정기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젠 늦었소! 이미 알아내었으니 말이오!” 모두가 경악으로 눈을 부릅뜨는데 그는 손을 들어 연못가를 가리켰다. “저 사람 아니오?” 거기 소운을 안은 통비원을 중심으로 귀도와 흑저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 반경 십 장 밖으로는 눈부신 은빛 손잡이와 검집의 무사들, 은검대 원들이 에워싸 누구도 다가설 수 없었다. 호위라기보다 마치 감시 같 은 분위기의 행렬이었다. 당소홍은 정기룡이 흑저를 정확히 집어내는 것에 넋을 잃고 있다가 그 를 다시 보았다. 그러나 정기룡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소운을 둘러싸고 있는 행렬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흑대협을 노리는 것일까?’ 그것도 아닌 듯했다. 정기룡의 시선은 마치 사모하긴 하지만 말을 못 꺼내는 사내의 눈길처 럼 소운을 뚫어지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운은 콧대높은 소녀처럼 그를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있는데……! 당소취는 그보다 소홍이 더 이상했다. 잠깐 금룡장의 미치광이 공자의 거창한 행렬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 돌 아보니 소홍은 마치 준수한 공자에게 넋이 나간 계집애처럼 정기룡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손을 내밀어 일깨워 주려다가 당소취는 멈칫했다. 소홍의 모습은 넋나간 듯 보였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익히 보아 오던 것이었다. 신기한 것을 보거나, 책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무엇보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보이는 그런 방심상태의 눈이었던 것이다. 대개 그런 일이 있고 나면 그녀는 뭔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곤 했 다. 당소취로서는 알 수도 없는 그런 일들을……! 흑저 역시 방심한 상태처럼 보였다. 아까 만난 당천호의 말이 그를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그 ‘환’이 무엇인지는 짐작이 갔다. 손노인이 항상 손에서 떼어놓지 않던 그 은빛 원반! 아마도 그것일 가 능성이 높았다. 흑저가 기관 이나 암기 에 대해 뭘 알아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 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흑저는 손노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었다. 무엇인가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비틀려 버린 삶! 그러면서도 그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인간만이 서로 느끼는 동질감이었다. 흑저가 박투술 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손노인은 ‘환’을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단 한 순간도 그것을 잊거나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저주의 대상일지도 모를 그 무엇을! 그래서 흑저는 알 수 있었다. 손노인이 그 원반을 어루만질 때의 그 애증(愛憎)이 엇갈린 미묘한 감 정의 변화를! 문제는 누가 그것을 알고 빼앗아 갔는가 하는 것이다. 무림을 진동시킬 가공할 위력의 암기 , 환상의 암기 이전에 손노인의 꿈이요, 희망인 그것, 그의 삶 그 자체일 수도 있었던 그것을 말이다. 이때 정자쪽에서 탄성이 울렸다. 흑저는 힐끗 정자를 보다가 눈에 익은 몇몇을 그 속에서 발견했다. 당소취와 소홍 자매, 그리고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검붉은 비단옷의 청년이었다. 그들은 막 영빈관을 들어서는 일행을 손짓하고 있었다. 흑저는 그 일행을 힐끗 보고 문득 검붉은 옷의 청년이 마음에 걸려 다 시 돌아보려다가 충격을 받고 멈춰서 버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멈추려 들지 않았다. 눈에 익은 장수편삼(長袖偏衫)에 자색(紫色) 가사(袈裟)의 노승과 단수 편삼(短袖偏衫)에 토황색(土黃色) 괘의, 그 위에 황색(黃色) 가사를 덧 걸친 여덟 명의 승려들. 머리 위에 박힌 아홉 개의 계인(契印)은 바로 소림사 의 승려들임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소림 장로 불류선사(不留禪師)와 ‘법(法)’자 배(輩)의 팔나한(八 羅漢)이 하객으로 도착한 것이다. 당금 소림사 의 승려들은 ‘심약불이(心若不異) 만법일체(萬法一切)’ 의 여덟 자로 항렬을 삼고 있었다. 이 여덟 자는 소림사 의 개산조사(開山祖師)인 달마 의 오도송(悟道頌) 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데, 달리 ‘파시(派詩)’라고도 했다. 즉, 하나의 파를 열 때 선포한 선언문이었다. 이 파시를 맨 처음 문자부터 하나씩 제자의 법호(法號) 속에 넣어 그 파의 정식 제자임을 나타내기 때문에 법호를 보면 그 파에서 몇 대째 의 제자가 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전통은 소림사 뿐 아니라 다른 문파, 예를 들면 무당 이나 화 산 같은 도교의 문파에서도 채택하고 있었다. 당금 소림사 의 장문인 불견(不見)과 대다수 장로가 ‘불(不)’자배요, 달마 원(達摩院), 반야당(般若堂), 장경각(藏經閣)과 나한당(羅漢堂) 등 중요직책을 맡은 승려들이 ‘이(異)’자배, 사오십 대의 비교적 덜 중 요한 직책을 맡은 승려들은 ‘만(萬)’자배였다. 흑저가 소림사 에서 쫓겨나기 전 법호가 법현(法玄)이었으니, 저기 들 어오는 불류선사는 태사숙조(太師叔祖), 팔나한들은 동기인 셈이었다. 그 중에는 눈에 익은 모습도 있었으니……! 흑저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같이 걷던 귀도만이 그를 힐끔 보았을 뿐, 누구도 흑저가 소림 사 의 일행을 보고 격동을 일으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흑저 역시 그 때문에 정기룡을 어디서 보았는지를 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 * * “뭘 한 거야?”찔러 들어오는 숙소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당소홍은 당소취의 갑작스러운 질 문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당소취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동창 의 위사 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당소홍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럼 빨리 말해! 그때 뭘 보고 있었던 것인지. 안 그러면 네가 그자 에게 홀렸다고 소문낼 거야!” 평소 같으면 펄쩍 뛸 이 위협에도 당소홍은 그녀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지 않았다. 단지 혼자말하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뭔가 음모가 있어!” “응?” “정기룡이라는 그 사람은 그냥 동창 의 위사 가 아닐 거야!” 당소홍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숙부가 들어오는 대로 자기가 본 것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기룡이 내공 이 최소 일 갑자(一甲子)는 있어야 가능하다는 전음입 밀 (傳音入密)의 수법으로 소운을 향해 무엇인가 전하고 있던 그 내용 을……! 짧은 순간 그녀는 독순술(讀脣術)로 일부의 내용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구두룡(九頭龍)을, 너는 금룡(金龍)을, 길은 달라도 바라고 있는 것은 같지 않은가……? 문제의 정기룡은 금룡장의 내밀한 후원담장을 소리 없이 넘어가고 있 었다. 천만 인이 지켜도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고 했던가?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금룡장, 그것도 가장 경계가 엄밀해 곳곳에 눈이 없는 곳이 없는 후원 담장을 넘고, 정원의 그늘을 스쳐지나 칸칸이 나 누어진 각각의 구역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하는 그를 알아채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무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고, 특히 경공 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지금 사용하는 신법 (身法)이 무당파 의 비전신법 인 승풍재운(乘風載雲), 이른바 바람을 타고 구름에 실려 간다는 초상 승경공 (超上乘輕功)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이윽고, 정기룡은 불꺼진 한 채의 작은 전각 창 아래에 붙었다. 그늘이라 해서 꼭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있 을 수 있는 모든 감시의 사각(死角)을 찾는다는 것인데, 정기룡은 지금 그 일을 완벽하게 해 내고 있는 것이다. 정기룡이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모기소리보다 가늘게 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안에서 들려 오는 소리도 그렇게 가는 것이었는데, 몇 마디를 주고받던 정기룡은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방 안에 나직한 탄식이 남았다. “꼭 내가 해야 하는가……?” 오늘밤 정기룡은 무척이나 바빴다. 후원의 담을 통과하자 그는 막바로 중원 뒤편에 있는 거가방을 향했 다. 비록 영빈관의 손님이라 하지만 밤에는 엄격히 출입이 통제되는지라 여기서도 그는 숨어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침입한다 해도, 거가방으로 오진 않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곳 주변은 경계가 덜 심했고,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거가방 뒤편 나지막한 관목과 바위 몇 개가 그늘을 만든 곳에 한 인영 (人影)이 엎드려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바닥이 조금 튀어나와 있 는 정도로 생각할 모습이었다. 정기룡은 그 옆 그늘로 스며들었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 “알아낸 것은 있나?” 인영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대낮에 보기에도 흉측한 인상, 꼽추였다. “조, 조금 있습죠!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기룡은 조용히 있었다. 꼽추 혼자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그, 그게……!” 순간 꼽추는 망설였다. 무엇인가가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 순간, 그의 뇌리 속에는 엽검영의 싱글벙글하던 얼굴이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계략이다!’ 꼽추는 깨달았다. 소운이 만약 도주하려고 했다면, 짐짓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오직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면, 굳이 장내의 거마(車馬)를 사용할 이유가 없 었다. 그것도 엽검영처럼 믿음직하지 않은 자를 골라서 그런 일을 맡 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다시 입을 벌렸다. 그러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이자에게 그토록 충성할 필요가 있는가?’ 문득 그때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시퍼런 육도가 그의 코를 스치던 그때의 기억이……. 그리고 돈주머니를 던져 주던 정기룡의 모습이……. 허리 숙여 그 돈을 주워 들긴 했지만, 그때 꼽추는 그를 마음으로부터 떠났었다. 꼽추는 천천히 입을 벌려 엽검영이 거가방에 들어온 것과 자신이 본 것을 말해 주었다. ‘돈 받은 만큼 하는 것이다!’ 이 밤, 자지 않는 사람은 영빈관에도 있었다. 소림사 십팔나한 중 금룡장에 온 팔나한, 그 중 하나인 법멸(法滅)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둔한 땅딸보. 방금 배운 불경도 외우지 못해 더듬거리고 글자도 제대로 깨치지 못해 놀림거리가 되었던 동료, 사미 . 그렇다고 좌선 (坐禪)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앉으면 졸기 바빴고 선사의 대나무 몽둥이가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 았었다. 무공이라도 열심히 하나 했더니 남들은 소림 장권(少林掌拳), 복호권 (伏虎拳), 나한권 (羅漢拳)은 일찌감치 수습하고 위타장 (韋陀掌)이나 대자대비천수식(大慈大悲千手式)을 익히고 있을 때, 그는 삼 년 걸려 소림 장권을 배우고 오 년 걸려 나한권 을 익히더니 다시 육 년 후, 복호권 을 간신히 수습하나 했을 때는 위타장 에서 막혀 허덕거리고 있었다. 재질이 뛰어난 누구는 산화장(散花掌)까지 배우고 상승무공(上乘武功) 으로 진입하고 있었는데……. 하긴 남보다 작은 키, 땅딸막한 체구에 짧은 손발로는 기초인 소림 장 권도 제대로 펼치기 어려웠으리라! 그러더니 엉뚱하게도 소림권 을 자신의 체형에 맞게 변형시키니 어쩌 니 하다가 교두승(敎頭僧)을 살해하고, 결국에는 파계 당하고 말았던 사미 , 법현! 어딘가에서 죽었으리라, 적어도 다시 보는 일은 없으리라고 까마득히 잊었던 그 법현을 여기서 다시 보다니……! ‘태사숙께 보고해야겠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던 그는 다시 주저앉았다. ‘한번 더 확인한 후에 보고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문득,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법현과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때는 무던히도 놀렸었는데…….’ 법현은 바보스럽게 웃기만 할 뿐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는……. 법멸은 돌아누워 버렸다. ‘다 지난 일이야!’ 붉은 환약(丸藥)! 환약에 색조(色調)를 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 붉은 색의 환약 또한 보기 드문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 흔한 환약 하나를 들고 있는 손은 한 식경 전부터 갈등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 손에서 한 자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용봉탕(龍鳳湯)이 식어 몇 번 을 다시 데울 동안……. 섬섬옥수(纖纖玉手)! 가녀린 손마디만큼 마음도 여린 탓인가? 환약을 쥔 손의 임자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흑저도 잠 못 이루고 있었다. 그랬다. 소림사 에 있을 때부터 자신이 뛰어나다거나 영민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똑똑한 학승(學僧)도, 깨달은 선승(禪僧)도 되기 힘들어 보여서 차라리 싸움 잘하는 무승(武僧)이라도 되려 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신체적 조건도, 보자마자 바로바로 익히는 오성(悟性)도 남보다 못했으 니……! 수련생활 십오 년 동안 동기들은 저만큼 가 있는데 그는 항상 제자리 였다. 그래서 박투술 을 만들었었다. 뭐라도 한 가지 잘하는 것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그것이 그를 주워 와 길러 준 노선사의 은혜에, 부처님 자비에 보답하 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발버둥을 치며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손이 짧으 니 남들이 주먹으로 칠 때 나는 발을 뻗고, 남들이 발을 뻗으면 나는 뛰어서 때려 보자고 해서 만들었는데……. 그것이 파계의 원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억울했다. 단 한번도 누굴 원망해 본 일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것만은 억울했다. 스님들의 이야기를 가슴깊이 받아들이지 않은 적도 없었지만 진정 그 것만은, 그것 하나만은 억울했다. 모든 악연(惡緣)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질기디질긴 악연, 살생의 업보가 다 거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무엇으로 그 업보를 해결할지는 몰랐다. 그것을 알 정도로 현명하지는 않았다. 해결책은 단 하나,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돌아가서 다시 물어 보는 것뿐이다. 진정 그가 잘못한 것인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인지 말 이다. 일천 가지 다른 생각들이 난마처럼 엉키는 인간세(人間世)를 내려다보 며 습기없이 바짝 마른 밤의 대기 속에 점차 원형으로 차 오르는 달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제 15 장 돌아갈 길을... 돌아갈 길을 아느냐, 모르느냐? “우우우--!” 야유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야유의 표적이 된 주고원은 두 손을 내저으며 땀을 뻘뻘 흘려야 했 다. “글쎄, 여긴 손님들이 들어가실 수가 없는 장소라서……!” 삼십 줄의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가 앞에 나서서 주고원의 어깨를 쳤 다. “아, 형씨 너무 그러지 맙시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는 우리도 다 알고 있어요. 자기들끼리만 좋은 구경거리를 독식하지 말란 거요!” 주고원은 사내의 힘에 밀려 뒤로 비틀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웃어 가며 툭 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힘껏 밀어 제친 것이다. 주고원은 노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선물을 접수하며 본 얼굴이었다. 아마 산서 (山西) 패도문(覇刀門)에서 온 떨거지일 것이다. ‘변두리에서 놀던 녀석이 감히 중원제일가 총당 제일서기를 밀어?’ 화를 내려 했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주위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산서 패도문의 사내를 밀며 우루루 몰려 들었던 것이다. “우리도 좋은 구경 같이 좀 합시다!” “안목 좀 넓혀 봅시다!” 연무장을 둘러싼 담장 정문에 일렬로 서 있던 이십여 명의 총당무사들 도 그 해일같이 밀려드는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성미 급한 사내들은 하객으로 온 체면도 잊고 담장을 뛰어넘어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는 형편이었다. 주고원은 그들에게 밀려 넘어진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는 금룡장에 하객으로 온 사람들이 금룡장의 치부(恥部)를 구경하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소운의 보표 들과 금룡장 무사들의 대결이 벌어지는 연무장 정문을 지 키는데 실패함으로써……! 바깥의 열기와 달리 연무장 안은 싸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오백은 아니라 해도 족히 사백은 될 것이다. 일천 명이 동시에 설 수 있는 넓은 연무장에는 금룡장 금, 은, 철, 삼검 대의 무사들은 물론, 총당, 외당 소속 무사들, 심지어는 평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집법당의 몇몇까지 빽빽히 둘러서서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선 두 사람. 한 명은 서 있고, 한 명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선 사람, 귀도가 천천히 칼을 들어 옷자락에 닦았다. 그의 검은 옷자락 이 유독 검게 번들거리는 것은 이렇게 채 마르지 않은 선혈들이 묻어 있기 때문이던가! 무릎을 꿇은 한 명, 은검대 수석조장(首席組長) 은검비환(銀劍飛環) 마 충(馬沖)은 깊이 갈라진 가슴에서 덩어리진 선혈을 쏟아 내며 그렇게 있더니 천천히 앞으로 넘어갔다. 오늘 이 자리에서 세번째로 죽은 사람이었다. 귀도가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음은?” “저 사람이 소문난 보표 중 한 사람인가?” 패도문의 사내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물었다. “귀도라더군!” 깔끔하게 차려입은 삼십대 사내, 뇌전검객 유청이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비슷한 연배면 대충 때려잡아 반말로 대화하기 마련 이다. 쾌도문의 사내는 나이가 조금 어려보이는 유청이 반말로 대답했는데도 별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않고 물었다. “나머지는?” 유청이 연무장 정면 높은 돌계단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거기 차일이 쳐진 자리에 소운과 그의 보표 들이 앉아 있었다. 통비원과 흑저는 물론이고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는 곽상과 한백까지 나와 있는 것이다. 금룡장 간부급의 인물로는 삼양철검 하응과 철검대 부대주 마원밖에 없었다. “그 옆에 면사를 가리고 앉아 있는 여인은 누구지?” 유청은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가늘게 떠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런다고 면사 속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고개 를 저었다. “몰라!” 소운이 옆에 앉은 하응을 보았다. “이젠 더 이상 인재가 없는 것인가? 이렇게 끝나면 너무 싱겁지 않 아?” 하응은 소운의 조롱기 섞인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혀를 씹어 뱉어 버린 후 극도로 말을 아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소운과는 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는 소운에 대한 한 점의 충성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장래에 대해서는 완전히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원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증오가 가득 담긴 눈으로 한백을 보았다. 사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한백을 죽여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자객에게 상처를 입어 싸우러 나올 수도 없게 되었으니! 그는 고개를 돌려 하응에게 말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하응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일어나 연무장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저 사람은 철검대주 아냐?” “삼양철검 하응, 오늘 일을 일으킨 두 주역 중 하나지! 그런데…….” 말을 흐리는 당소홍을 보며 당소취가 채근했다. “뭐가 그런데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철검대주가 벌써 나오면 안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왜?” “대주면 금룡장에서는 공식 서열 이십 위권에 들어가는 고수야. 만약 이겨도 그런 고수가 나와서야 이길 수 있었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만약 지기라도 한다면…….” 당소홍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나고, 사람들은 귀도라는 사람이 고수라고 하기 보다는 금룡장에 고수가 없다는 말을 먼저 할 거야!” 갑자기 그녀들의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감탄했소! 정말 예리한 판단이시오! 과연 그들도 그 생각을 했나 보 군요. 다른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면…….” 연무장 안으로는 하응이 아니라 황색경장을 입은 사내가 나오고 있었 다. 허리에 찬 검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으로 보아 금검대의 무사였다. 당소취는 잠깐 놀랐다가 이내 성난 표정이 되어 뒤돌아보았다. “동창 소속답군요. 이렇게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다가오시다니!” 정기룡은 자신을 고양이에 비교하는 것에도 별반 기분이 상하지 않았 는지 미소로 대답했다. “소관은 원래 사람 많은 것은 좋아하지 않으나 어차피 부대껴야 한다 면 아리따운 소저들 옆이 좋겠지요?” 사실 중심의 비무공간을 둘러싸고 금룡장의 무사들이 자리잡고 있는 이상, 구경꾼들이 아무리 염치가 없다한들 그 자리까지 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구름처럼 몰려든 구경꾼들이 연무장 외각에서 서로 부대끼면서 라도 서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정기룡의 그 말은 명문의 요조숙녀들에게 하기에는 지나친 넉살이었 다. 돌려서 생각하면 그녀들에게 부비적거리려고 일부러 왔다는 얘기로 생 각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으니 말이다. 당소취의 눈꼬리가 당장에 치켜 올라갔다. 그 입에서 의미심장하게 비비꼬인 말이 흘러나온 것도 정기룡의 자업 자득이라 해야 했다. “다가오시는 건 말리지 않지만 그 책임은 지지 않겠어요.” 말과 함께 그녀의 손이 백보낭(百步囊)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 손에는 검정색 오리알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당소홍이 아무렇지도 않게 백보낭 속에서 알약을 꺼내 삼키고 말했다. “설혹 그게 터져도 죽지는 않을테니 좋군요! 할아버님께 무고한 사람 들을 중독시켰다고 욕은 먹지 않겠지요?” 당소취가 그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당문 의 여인 옆에 가까이 올 수 있을 만큼 담대한 사람이라면 소골 산(笑骨酸)에 중독되는 것 정도는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겨우 며칠만 고생하면 되는 걸?” 말소리가 조금 컸던 모양이었다. 그녀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 말에 안색이 변해 허둥지둥 물러섰 다. “사천 당문 !”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안색이 돌변한 사람들이 허겁지겁 거리를 만들고, 순식간에 그녀들 주 변에는 방원 삼 장여의 공간이 생겼다. 정기룡이 두 손을 과장스럽게 휘저으며 물러서는 시늉을 했다. “소관은 유난히 간지럼을 타니 그 무시무시한 환약은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군요! 소골산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온몸이 간지러워지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두 분 소저의 곁으로는 초대해도 가지 않고 말고 요!” 그 엄살스런 행동에 당소취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함성이 터졌다. 당소취는 급히 고개를 돌려 연무장을 보았다. 장내에는 한 구의 시체가 더 늘어났다. 목줄기만 겨우 붙어 있는 금검대 무사의 시체 한 구. “어떻게 이겼는지 봤어?” 당소홍은 끔찍한지 연무장을 외면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번쩍하더니……!” 무공을 익히지 못한 그녀가 웬만한 고수들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순간적인 공방(攻防)을 파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금검이 세 번 공격했고, 귀도가 한 번 반격했소. 쌍방의 공격이 다 성공했죠.” 당소취는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한 정기룡을 보았다. “그런데 금검의 무사만 쓰러진 이유가 뭐죠?” “금검의 공격 중 둘은 허초고 하나만 실초였죠. 그나마 치명적인 것 은 아니었소. 귀도는 그 실초를 왼팔로 받아 흘리고 일 도만 휘둘렀는 데, 그 일 도는 철저히 목숨을 노리는 공격이었소!” “금검의 무사도 귀도를 죽이고 싶어했을 텐데요?”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머리로 했는가, 아니면 몸으로 했는가가 승부 의 관건이었소. 금검은 전자(前者), 귀도는 후자(後者)에 해당하오. 또 상대를 이기기 위한 무공이 있고, 상대를 죽이기 위한 무공이 있죠. 역 시 전자가 금검, 후자는 귀도요. 그게 승리의 원인이죠. 궁극적인 승리 는 상대의 죽음으로 완성되니까!” 당소취는 그를 다시 봤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눈을 빛냈다. “그렇게 뭐든지 아시는 분이니`, 저 차일 아래 있는 면사의 여인이 누 군지도 아시겠군요?” 정기룡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지는 알지만…… 글쎄, 그녀가 왜 여기 나왔을까?” 면사를 쓴 여인은 매아상이었다. 그녀는 연무장을 감도는 피비린내가 역겨운지 입을 꼭 다물고 꼿꼿이 앉아 있기만 했다. 흑저는 무릎 위에 모아 쥔 그녀의 두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다.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선 것이 불편했던 것일 게다. 아니면 백주 대낮에 벌어진 참혹한 광경과, 그 광경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 거기 모인 많은 사람들의 야수성에 질렸는지도 모른다. 하응이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왼손에 든 검집에서 철검을 빼들고 검집을 버렸다. 이제는 누구도 그를 되돌아 자리로 다시 들어가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흑저는 연무장 중앙에서 다섯번째 적을 기다리고 있는 귀도를 보았다. 그리고 그 팔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정기룡의 말대로 방금의 격돌에서 그도 일 검을 맞았던 것이다. 사실은 이 일 검만이 아니었다. 이미 네 명의 적을 맞아 싸우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피륙에 입은 상처보다 더 큰 문제는 그 동안에 소모된 예기(銳 氣)였다. 생사를 건 격전에서 일 도를 휘두르는 것은 도끼로 장작을 패는 것과 는 다르다. 투지와 살기를 끌어 모아 응축된 힘과 기를 한 순간에 상대의 틈으로 밀어 넣는 그 한 동작에는 하루종일 쉬지 않고 뛰는 것에 맞먹는 체력 이 소모되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되는 날카로운 기(氣)와 기의 대결 은 눈에 보이지 않게 기력을 좀먹어 들어가, 상대가 피를 뿌리며 누울 때는 그 옆에 같이 눕고 싶어질 정도로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대결을 네 번이나 한 사람이 이제 아마도 오늘의 가장 큰 적을 맞아 이길 수 있을까? 흑저가 소운의 옆으로 한 걸음 나섰다. “이제 내가 나가지!” 소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귀도가 더 싸울 수 있어. 당신은 나만 지키면 돼!” 소운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보표 는 몰라도 귀도와 흑저는 어차피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흑저가 그랬다. 여기 모인 사람들도 대부분 세칭 사천 혈사의 주인공 흑저를 보고 싶 어서 왔을 것이다. 만약 귀도가 진다면 어쩔 수 없이 나가야겠지만, 그 전에는 나서지 않 는 것이 좋았다. 운좋게도 귀도가 하응을 꺾어만 준다면 가장 큰 전력을 모호하게 흐려 놓은 채 이 일장의 격투를 끝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오늘의 계획은 나무랄 데 없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흑저가 나서게 되면 일은 꼬여 버린다. 구신, 아니 구두룡이라 했던 적들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흑저의 비중으로 보아 그들이 하응 이상의 고수를 내보내도 별 흉이 되지 않는다는 묘한 심리적 균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일개 보표 를 고수들이 차례로 나와 꺾으려 든다는 명분상의 문제는 무시한 채 말이다. 귀도는 흑저가 앞으로 나서다가 다시 물러서는 것을 보았다.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소운이 생각하는 정도는 그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물며 흑저라는 단 순한 인물의 생각은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흑저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했지만 그에게는 그 행동이 자신을 무 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분노가 그의 무디어졌던 예기를 가다듬는 활력소가 되었다. 하응이 철검을 중단으로 겨누고 다가오고 있었다. 귀도가 그를 향해 마주 다가갔다. 공기가 양쪽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팽팽해졌다. 유리알처럼 투명해졌다. 그 사이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서로의 눈에 아프게 박혀들 정도 로 그렇게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신경이 조여들고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승부는 한 순간에 결판난다!’ 두 사람은 공히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당소홍이 숨막힌 압력을 느끼고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누가 이길까?” 당소취 역시 속삭이듯 대답했다. “쉽게 결판나지는 않을 거야!” “아니, 세 초식 이내에 승패가 가려질 게다!” 두 소녀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녀들의 뒤에는 정기룡이 사라지고 당천호와 당가소, 그리고 한 노인 이 서 있었다. “고수들간의 싸움에는 여러 손놀림이 필요없는 것이다. 일격이 생사 를 가르기 때문이지!” 당천호가 연무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기세로 보아서는 하응이라는 아이가 위지만……!”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순간 귀도와 하응이 격돌했기 때문 이었다. 츄카악--! 아래로 내려져 있던 귀도의 칼이 하응의 왼쪽 무릎에서 오른쪽 어깻죽 지를 양단하는 궤도로 사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쐐액--! 허리께에서 수평으로 중단을 겨누고 있던 하응의 철검이 귀도의 가슴 팍을 노리고 일직선으로 내밀어졌다. 두 사람의 발은 서로를 향해 비스듬히 내밀어진 채 움직이지 않고 있 었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각자의 무기와 무기를 든 손, 그리고 어깨에 집중 시키고 있었다. 다른 부분에 신경을 분산할 필요도, 여력도 없었다. 귀도의 칼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선, 하응의 검은 자신의 허리 께에서 귀도의 목을 잇는 직선이었다. 둘 다 아무런 허초도, 변식(變式)도 없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베기 요, 찌르기였다. 그러나 둘러서 있던 중인들은 마치 자신이 그 궤도 속 에 있는 것처럼 살기를 느끼고 떨었다. 만약 자신이 그 공격을 당했다면? 막아 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 천에 가까 운 사람들 중에서도……! 먼저 칼을 휘두른 것은 귀도였다. 그러나 하응의 철검이 더 빨랐다. 그의 검은 절반쯤 그어 올라온 귀도의 칼을 만나서 튕겨내고 그대로 진행해 가서 귀도의 가슴을 찔렀다. 칵--! 귀도의 가슴팍을 꿰뚫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들을 수 없었다. 귀도의 칼을 튕겨낸 줄로만 보였던 철검이 중도에서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하응의 가슴팍이 갈라지는 소리가 더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 다. 연무장은 잠시 고요에 빠져들었다. 가슴팍이 갈라진 하응이 천천히, 한없이 느리게 뒤로 기울어지더니 돌 바닥에 넘어져 소리를 내었다.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가 주인의 몸에 다시 떨어졌다. 그것을 신호로 장내가 들끓었다. “혈음도(血飮刀)!” “피를 마시는 혈음도다--!” “십대흉기 중의 혈음도를 썼어!” 귀도가 든 칼, 하응의 철검을 무 자르듯 잘라 버린 그 칼은 십대흉기 중의 하나인 혈음도였던 것이다. 귀도는 허공을 향해 치켜진 칼을 내려 발 아래로 비스듬히 늘어뜨렸 다. 과연, 십대흉기 중 하나라는 이름에 걸맞게 칼에서는 한 방울의 피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칼 자체가 삼켜 버리는 것이다. 귀도가 창백한 얼굴, 핏기없는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다음은?” 그 입으로 핏방울이 튀었다. 하응의 부러진 반토막 철검이 그의 폐를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소운이 쓴미소를 지었다. “멋 부리는군!” 귀도는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가슴에 쇠꼬챙이를 꽂 고 어떻게 더 싸운단 말인가? “서 있는 걸 보면 심장을 꿰뚫리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소운이 마원을 보았다. “더 나올 사람 있나?” 창백하게 질려서 넋을 잃고 있던 마원이 번쩍 정신을 차리고 검을 움 켜쥐었다. 자신이 나가려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를 제지했다. “그만! 너희들이 졌다!” “이제야 나타나는군!” 당천호가 중얼거렸다. 차일 안에는 금룡장의 수뇌급 인물들, 이랑검 금야홍과 각당주, 대주, 호법 들이 줄지어 나타나 있었다.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어요!” 당소취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노인을 보았 다. “이 결과를 짐작하셨나요?”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랴?” 예측한 말을 하다 말았으니 결과가 난 후에야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이랑검 금야홍이 중인들의 앞에 섰다. “본 장의 후계자가 선발한 보표 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었으나, 사실은 이미 검증되었던 것. 더 시험해 볼 필요는 없을 것이오. 오늘의 자리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경사스러운 날 불길한 것을 보게 해 드려 여러 하객들께 죄송스러우니 대전에 마련된 주효(酒肴) 로 간단하나마 사죄를 드리겠소이다.” 앞의 말은 금룡장의 무사들에게, 뒷말은 하객들에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금야홍은 당천호가 있는 자리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왕림하신 것을 진작에 알지 못해 영접을 못하였으니 넓은 마음으로 해량(解諒)하시고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시는 것이 어떨지?” 중인들이 무슨 일인가 해서 그들이 선 곳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당천호가 손을 저었다. “노부는 아니야. 나야 얻어먹을 것 다 얻어먹었으니 저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 옆에 선 노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진노제(晋老弟)가 나쁜 사람일세. 중원제일가의 가주를 불편하게 하 다니 말일세!” 노인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저 같은 필부가 온 것이 무어 대단하다고……!” 당천호가 그의 등을 밀어 중앙으로 들여보냈다. “용수(龍樹) 진립동(晋立東)이 대단하지 않다면 세상에 대단한 사람이 없을 것일세!” 용수 진립동! 장내가 다시 술렁거렸다. 그는 그저 유복한 늙은이 정도로 보였다. 나이가 육십은 넘어 보이는데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세어 있었고, 한 눈에 보기에도 너그러운 얼굴이었다. 머리엔 난모(暖帽)를 쓰고, 몸엔 관삼(寬衫)을 입고, 발엔 숙피화(熟皮靴)를 신고 있었다. 그가 진립동이었다. 당금 소림 속가제일고수(少林俗家第一高手),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 용수 진립동이 나타난 것이다. 용수는 용의 나무, 풀이하면 ‘용오름 나무’라는 뜻이다. 용이 꿈틀거리며 승천하듯 하늘을 바라고 선 거목을 의미하던 것에서 나중에는 인간의 뜻을 하늘에 전해 주는 신목(神木)을 그렇게도 불렀 는데, 진립동은 그런 명호에 적합한 단 한 사람이라고 알려졌었다. 족히 무학(武學)의 거목(巨木)이요,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를 뛰 어넘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형님도 같이……!” 진립동은 당천호 일행과 함께 연무장을 가로질러 차일 앞으로 가더니 먼저 한쪽을 향해 포권을 했다. “사숙님의 존안을 뵈온 지도 오래입니다.” 차일 안에는 어느새 각 파에서 온 귀빈들이 서 있었다. 그 중앙의 노승, 불류선사를 향해 예를 표한 것이다. 불류선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예를 받았다는 표시만 했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용수 진립동의 사부인 현 소림 장문인 불견대사의 사형이 그였으니 말 이다. 세수(世壽), 이미 구십(九十)을 넘어 소림사 장로 중에서도 고령을 자 랑하는 그는 아마도 금룡장의 일이 아니면, 그나마 금태파야의 기이지 연이 아니었으면 속세에 다시 얼굴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진립동은 그러고 나서야 금야홍과 인사하고 다른 명사들과도 예를 교 환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 았다. 검은 가사를 입은 땅딸막한 사내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진립동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혹시 나를 아시는가?” 흑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진립동이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얼어붙은 듯 그만 쳐다보고 있었다. 호기심과 동경, 그보다 더한 강렬한 투지를 눈에 담고서……! 오래 전부터 진립동은 그에게 외경(畏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는 넘어야 할 벽이었다. 권(拳)을 추구하는 권법자(拳法者)로서, 같은 소림 의 무공을 배운, 그 러나 너무도 다른 길을 걸어온 낙오자의 입장에서……! 진립동이 빛이면 흑저는 어둠, 그가 탄탄대로를 걸었다면 흑저는 춥고 어두운 가시밭길로만 다녀야 했던 것이다. 불류의 뒤에 시립해 있던 팔나한 중 하나, 법멸이 진립동에게 다가서 더니 무어라 나직하게 말했다. 진립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흑저의 두 손을 보았다. 순간, 흑저는 그가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이 그를 격발시켰다. 흑저는 그를 향해 한 발 다가갔다. 소운이 인상을 쓰며 손을 들었지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 다. 흑저는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으로 쳐들었다. “한 수 가르쳐 주시오!” 진립동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처음에 그는 웃으려 했다. 그러나 이 땅딸막한 사내의 눈은 장난이나 젊은 무사의 치기(稚氣)로 흘리기에는 지나치게 진지했다. 흑저의 눈은 강렬한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흔히 보아 오던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단순히 그를 꺾고 이름을 날리려거나, 심지어는 한 수 겨루었다는 것 만으로도 자랑삼아 떠들고 다니려는 명예에 눈이 뒤집힌 무리들과는 다른 것이 그 속에 있었다. 그는 툭 던지듯 물었다. “복수인가?” 소림사 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으냐는 질문이었다. 흑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그는 소림사 에서 내쫓긴 복수를 하기 위해 여태껏 헤매었던가? 십 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피로 두 손을 물들여 가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흑저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제 박투술 을 인정받기 위해서 입니다.” “박투술 ?” “그리고 제 업(業)을 벗어 던지기 위해서 입니다.” 진립동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불류선사를 돌아보았다. 불류선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의 변화없이 흑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팔나한들은? 그들은 노선사의 앞이라 표현은 못하고 분노를 눌러 참는 표정들이었 다. 만인(萬人)의 앞에서 소림 의 무술이, 그것도 한낱 파계승에 의해 도전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분노였다. 진림동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흑저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 였다. “자네가 혁천조를 죽인 것이 사실이라면 내게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지. 이번엔 내가 도움이 된다면……!” 장내가 들끓었다. 있을 것 같지 않은 대결이 그들의 앞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근 삼십여 년간 권에 있어서는 무적으로 군림하던 용수 진립동과 최근 강호에 피의 회오리를 몰고 온 의문의 파계승이 일장 대결을 보여 준 다는 것이다.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다는 흥미와 두 사람의 무공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더 압도적인 비웃음이 흑저에게 가해졌 다. 관건은 그가 진립동의 손에서 얼마나 버티는가 하는 것이었으니……! 누구도 행여나 흑저가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않고 있는 것이 다. 흑저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오랫동안 염원해 오던 일이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질 수도 있게 된 것 이다. 저 사람! 진립동만 이기면 그의 박투술 을 엉터리라고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를 비웃는 사람도……! 진립동이 그의 오 장 앞에 우뚝섰다. 흑저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떨림이 멎었다. 진립동은 그가 여태 만났던 적들과 달랐다. 진립동은 완벽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가득 차 있어서 완벽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 없어서 완벽했다. 그의 자세 역시 아무 자세도 취하고 있지 않지만 완벽했던 것이다. 흑저의 검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일생 다시 볼 수 없을 만큼 높은 벽에 부딪쳤다. 그러나 이 벽을 못 넘으면 그는 영원히 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흑저는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박룡수의 손가락이 오므라들어 주먹 형태로 모였다. 주먹 끝으로부터 시작되어 골수까지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참기 힘든 고통이 흑저의 몸을 휘돌아 흘렀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정상을 되찾고 있었다. 주먹의 고통이 그의 투지에 불을 붙여 주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진립동의 표정이 묘해졌다. 법멸에게 들은 바와는 다른 인상이 흑저에게서 풍겼던 것이다. ‘사마외도에 빠져 추방되었다고 했는데?’ 그 자세가 소림권 을 변형시킨 것이긴 하지만 사악한 인상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가볍게 훈계를 해주마고 했던 마음을 다잡아먹고 비스듬히 한 발 내딛어 대적의 자세를 취했다. 만궁개흉(挽弓開胸)! 달마 십팔수(達摩十八手) 중의 한 자세였다. 쿵--! 흑저의 발이 무겁게 땅을 찼다. 순간, 그는 한줄기 검은 그림자로 화해 진립동에게 쏘아졌다. 달마 십팔수를 배우지는 못했어도 그런 자세가 일부러 적에게 가슴을 드러내어 공격을 유도하는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그로부터 한 자 이내의 거리에만 접근하면 박투술 을 사용할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진립동은 예상 밖으로 쾌속한 흑저의 공격에 잠깐 움찔하더니 급히 주 먹을 쥐어 달려오는 그림자를 향해 비스듬히 내질렀다. 펑--! 폭음이 터졌다. 중인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검은 그림자처럼 달려가던 흑저가 폭음이 울리자, 뒤로 튕겨나가 땅바 닥에서 몇 바퀴를 굴렀던 것이다. 분명 주먹이 닿은 것은 아니었다. 무엇에 걸려 넘어졌다면 앞으로 굴러야 하는데 뒤로? 눈이 휘둥그래진 것은 흑저가 더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립동을 쳐다보다가 더듬더듬 물었다. “백보신권 (百步神拳)?” 진립동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흑저의 접근이 순간적으로 그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 바람에 연성(鍊成) 이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백보신권 까지 사용 했던 것이 자신도 놀라웠던 것이다. 장내에 일대 회오리가 몰아쳤다. 전설 속에 전해 오던 무공, 백보신권 이 나타난 것이다. 당초(唐初) 정관(貞觀) 연간에 소림 고승 운암(雲巖)에 의해 처음으로 보였다는 그 신권. 백 보, 그러니까 이십 장 앞에 있는 바위를 박살낸다고 해서 백보신권 이었다. 바위를 부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 역시 아니다. 그러나 한 치라도 허공을 격(隔)하고 부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손이 안 닿았는데 어떻게 힘이 전달된단 말인가! 흑저가 벌떡 일어났다. “믿을 수 없다!” 고함과 함께 그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멧돼지가 달려가듯 저 돌적으로 덮쳐 갔다. 진립동은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바닥을 가슴 앞에 모았다가 정 면으로 밀었다. 콰--앙--! 흑저의 몸이 달려오는 마차에라도 부딪친 것처럼 공중에 뜨더니 입으 로 피를 뿜으며 이 장여나 뒤로 날려 갔다. “반야진기 (般若眞氣)!” 불류의 뒤에 서 있던 팔나한들이 합창하듯 소리쳤다. 백보신권 과 마찬가지로 소림 칠십이 절예의 하나, 연성 그 자체는 어 렵지 않지만 저렇게 허공을 격하고 무형의 진기 로 사람에게 충격을 줄 정도의 수준에 오른다는 것은 말로만 듣던 것이었다. 진립동은 천천히 두 손을 내리고 쓰러진 흑저를 향해 말했다. “무학의 길에는 끝이 없는 것, 제대로 된 체계를 밟지 않으면 처음에 는 쉬이 나갈 수 있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한 발도 더 나아갈 수 없게 될 것이네!” 조롱이 아니었다. 흑저의 박투술 이 잘못된 길로 나가고 있음을 깨우쳐 주려는 충고였 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면 흑저의 삼십 년 생애는 한낱 물거품이요, 그 간의 모든 고통이 헛수고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하 는 말이었다. 흑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욱--! 허리가 꺾이고, 검은 피가 입에서 쏟아졌다. 죽은피가 역류했던 것이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진립동이 손에 사정을 봐준 덕이라고 고 마워해야 했다. 흑저는 팔뚝을 들어 입가를 훔쳤다. “가르침은 고맙지만 난 아직 더 배워야 만족하겠군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이 탄환처럼 튀어 올랐다. “어리석은!” 진립동이 표정을 굳히며 두 주먹을 함께 내밀었다. 아까와는 달리 기가 밀려드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흑저는 박룡수를 가슴 앞에 들어올리며 팽이처럼 회전했다. 쾅--! 흑저는 다시 피를 토했다. 그 피는 가슴 앞을 가리듯 올려진 박룡수에 뿌려졌다. 이번에는 박룡수와 몸의 회전으로 기를 어느 정도 흘리는데 성공한 것 이다. 그는 뒤로 나뒹구는 듯하더니 박룡수로 바닥을 치고 거꾸로 진립동의 발 아래로 몸을 굴렸다. 진립동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나가며 둥글게 굴러 오는 흑저 의 몸뚱이를 걷어찼다. 담퇴(潭腿)! 그것 역시 기를 모아 찼다면 바윗덩어리도 박살나 흩어질 것이었다. 흑저의 몸이 곡예 하듯 거꾸로 서고, 두 발이 진립동의 턱 아래로 회 전하며 쳐들어왔다. 진립동은 주춤하더니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섰다. 팔괘 사형(八卦蛇形)의 보법 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흑저는 박투술 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공중으로 거꾸로 선 두 발이 벌려지며 두 팔을 축으로 크게 회전했다. 그 한끝에 진립동의 옷깃이 걸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부웅--! 흑저의 땅딸막한 몸이 들리며 옷깃에 걸린 발을 축으로 회전하고, 회 전방향으로 주먹이 쏘아졌다. 진립동의 한 손이 내려와 박룡수에 부딪쳤다. 쾅--! 온몸을 울리는 진동, 그리고 고통! 그러나 흑저의 두 발은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내려와 땅을 차고 어깨가 치켜져 진립동의 가슴팍으로 부딪쳐 갔다. 진립동의 안색이 급변했다. 한 순간 접근을 허용했던 것이 이 정도의 공격을 받게 하는 실수가 될 줄이야! 그의 두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흑저의 어깨와 팔, 다리, 무릎을 연속적 으로 쳤다. 소림 연환권(少林連環拳)! 한번 움직였다 하면 최소한 삼십 번은 적을 두들기고서야 그친다는 권 법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연속가격에 있어서는 흑저가 더 고수였다. 그의 팔, 다리, 무릎, 팔꿈치, 심지어는 어깻죽지와 머리까지 진립동의 온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닥--! 두 사람은 거의 밀착해 있어서 동작이 구분이 안 갈 정도인데 격타음 만 요란하게 울렸다. 팡--! 진립동의 손바닥과 박룡수가 부딪쳤다. 다닥--! 두 사람의 팔꿈치가 엉키고, 투다닥--! 흑저의 맨발과 진립동의 무릎이 연속으로 세 번 격돌했다. 진립동이 갑자기 두 손을 벌렸다. 흑저의 박룡수가 드러난 가슴팍을 두들겼다. 파파팡--! 놀랍게도 박룡수는 가죽북을 치는 것처럼 맥없이 튕겨져 나왔다. 소림 외가기공 (少林外家氣功)인 철포삼 (鐵袍衫)에 반야진기 를 운용 해 생긴 결과였다. 흑저는 그 반탄력으로 주춤주춤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진립동의 두 손이 둥글게 모이더니 허공을 격하고 흑저의 가슴으로 내 밀어졌다. 흑저는 박룡수를 들어올려 마주쳐 갔다. 보이지 않는 기라고 해도 허 공을 압축해 가며 밀고 들어온다면 박룡수에 먼저 부딪칠 것이다. 그러나 박룡수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초였던가?’ 다음 순간, 가슴팍이 터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쾅--! 우렛소리가 귓가에 퍼지고, 흑저의 검은 가사 뒷등 부분이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원형으로 터져 날아갔다. 흑저는 이번에는 뒤로 날려가지 않았다. 그저 눈이 하얗게 되어 그 자리에 고꾸라졌을 뿐이었다. 일장 대결은 그것으로 끝났다. “저게 뭐죠?” 당소취의 눈이 마술이라도 본 것처럼 커졌다. “격공장 (隔空掌)이다!” 당천호가 감탄했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대답했다. 당소취의 궁금증은 그것으로 풀리지 않았다. “격공장 ? 벽공장 (碧空掌)과 다른 것인가요?” 적에게 타격을 가할 때, 기를 모아 위력을 배가시키는 것을 발경 (發 勁)이라 했다. 일반적인 권(拳)이나 장(掌)은 이 정도 선에서 끝난다. 예를 들어, 벽을 쳤는데 벽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이 다친다거나 하는 것은 발경 의 위력에 속했다. 그러나 이런 것과 벽공장 , 격공장 은 차원이 달랐다. 발경 이 사람의 신체가 힘을 전달할 수 있는 어떤 물체에 닿아야 가능 한 것인 반면, 벽공장 은 허공 중에 기를 발산해 힘을 유지한 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른바 ‘장풍(掌風)’, 혹은 ‘권풍(拳風)’이라 불리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격공장 은 임의(任意)의 한 점에서 힘을 터뜨리는 것이다. 그 위치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위력도, 영향도 없지만 위치에 도달하면 방어할 방법도 없이 기가 폭발하는 것이었다. 소림 비전(少林秘傳)의 ‘일지선 (一指禪)’이 이런 것으로, 장애물에 는 아무 손상 없이 그 뒤에 선 사람의 혈을 짚는다거나 하는 위력이 있었다. 흑저 또한 처음의 벽공장 은 박룡수로 방어해 어느 정도 위력을 떨어 뜨릴 수 있었지만, 그 뒤의 격공장 은 방어할 도리도 없이 폐부에 직 접 충격을 받아 쓰러진 것이다. 당천호는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 “천하에 다시없는 무공의 천재라 해도 최소 사십 년은 수련을 쌓아야 한다던데……!” “그 정도는 수련하신 것 같은데요?” 당천호는 당소취의 철없는 말에 인상을 썼다. “천하에 다시없는 사람이니 그렇지, 어지간해서는 백 년을 해도 안되 는 것이 저것이다. 그리고 진노제의 화후를 보면 자유자재로 그런 신 기(神技)를 사용하고 있지 않으냐? 저건 그냥 체득한 정도의 것이 아 니란 말이다!” 진립동은 쓰러진 채 미동도 없는 흑저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저 거무튀튀한 강철 손에 맞은 곳을 제외하고는 위력이 강한 것은 없 었지만, 소림사 에서 수련할 때를 제외하고 이렇게 많이 얻어맞은 적 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강철 손에 맞은 곳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어를 위해서 가장 많이 부딪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까지고, 패어진 상처가 있고,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 만 손뼈도 한두 군데 부러진 것 같았다. ‘엉터리는 아니었군!’ 이른바 박투술 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에 가졌던 선입관을 씻어 버리고 마는 그였다. 그는 흑저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내밀어 옷이 찢겨져 나간 그 등을 짚 었다. 그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등을 통해 느껴지는 기혈의 흐름은 단순히 그의 반야장에 다친 것만으 로 이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잠시 기를 더 유통시켜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몸으로 그만큼 견뎠단 말이지?” 그 다음은 말이 없었다. 흑저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가 일어나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온몸이 바스러지는 것 같 은 고통이었다. 그나마 진립동이 어느 정도 기혈을 가라앉혀 준 덕택이었다. 그 다음 떠오른 것, 육신의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졌다는 자각 (自覺)이었다. 그리고…… 절망이었다. 삼십 년의 세월이 한낱 물거품으로 꺼져 버린 것이다. 진립동이 그의 마음을 짐작하는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다음에 나를 또다시 찾으면 그때도 도전을 받아 주겠네!” 꽝--! 갑자기 벽력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여태 무표정하게 보고만 있던 불류선사가 몸을 일으키고는 들고 있던 주장자로 바닥을 내려찍은 것이다. 그가 흑저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고?”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장자? 아니면 그 벽력 같은 소리? 흑저는 입을 벌리고 앉아 있다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불류선사는 한마디를 내뱉고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막야 (莫邪) 보배 검으로 수미산 (須彌山)을 자르고, 북두(北斗)를 잡 아서 낮종을 쳐라! 그때야 비로소 업을 벗어 던질 수 있으리라!”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저것이 이른바 선문답(禪問答)인 모양인데, 무슨 소린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은가? 진립동이 알 듯 모를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연무장을 나가는 불류선사 의 뒷모습을 보다가 뒤를 따랐다. 두 걸음 걷던 그가 갑자기 돌아서서 흑저의 박룡수를 가리켰다. “그걸 벗어버릴 때 자네는 진정 강해질 수 있을 걸세!” 이것 역시 맥락을 짐작할 수 없는 소리였다. 흑저는 한참이나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아마 통비원의 어깨에 올라탄 소운이 말을 걸지 않았으면, 그대로 언 제까지나 있었을 지도 몰랐다. “돌아갈 때다!” 소운과 통비원을 제외하면 다들 정상이 아니었다. 사흘 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곽상은 간신히 걸음을 옮길 정도였고, 칼날을 뽑고 상처를 감싸긴 했지만 귀도도 비슷한 상태였다. 한백은 일부러 입은 상처였지만 남 보기에는 환자처럼 행동해야 했으 니 그랬다.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자고? 흑저는 고개를 들어 소운을 바라보고 넋잃은 사람처럼 일어서서 뒤를 따랐다. 구경꾼들이 흩어지느라 연무장 밖은 소란스러웠다. 금룡장의 무사들도 자신들이 당한 패배와 하응의 죽음, 그리고 오늘 본 무학의 새 경지에 충격을 입어 어수선한 분위기 였다. 소운 일행은 그 사이에 섞였다. 그리고 그후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금룡장의 수뇌들이 소운의 실종, 보표 들과, 심지어 매아상까지 포함된 실종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날 밤 늦게 였다. 제 16 장 물은 마루 밑을... 물은 마루 밑을 굽이쳐 흐르나니 금룡장 중원. 지상에 높게 솟은 구층의 금룡대전(金龍大殿) 아래에 또 하나의 금룡 대전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않다. 대금룡회합은 바로 그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회의는 난국이었다. 이런 일이 대개 그렇지만 조직이 방대해지면 방대해질수록 거기 관여 하는 소집단간의 대립도 심해지게 마련이었다. 당금의 금룡장도 본가와 지가, 지가와 지가 사이의 이권다툼과 조직 내에서의 위상을 제고(提高)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갈등이, 첨예한 대 립으로 드러나는 것을 겨우 피해가며 어렵게 어렵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리에 소운의 실종이라는 긴급보고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지상 구층에서 다시 지하로 구층을 내려온 지하 금룡대전의 중심으로 벽력이 내려꽂혔다 해도 이렇게는 놀라지 않을 정도였다. 정면 상단의 비어 있는 태사의를 중심으로 좌우로 앉아 있는 두 사람 은 다른 사람들처럼 불안한 빛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들이 뒤엉켜 흘러가고 있었다. 현 금룡장 호가봉공, 실질적인 장주라 할 수 있는 이랑검 금야홍은 좌 측에 앉아 있었다. ‘애초에 형님만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어도……!’ 금룡장에 감도는 암중의 기류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전부터 있었던 흐름이었다. 단지 그의 가형(家 兄), 전대 장주 금야국이 죽으면서 그런 기류가 표면으로 드러났을 뿐 인 것이다. 어쩌면 금야국이 죽은 것 또한 그 영향일지도 몰랐다. 그들이 드러난 다는 신호였을 지도……! 또 어쩌면 이미 금룡장은 그들의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용(龍), 구두룡이 금룡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 을 지도 몰랐다. 호가봉공(護家奉公)이 된 지 십 년, 그는 그것을 밝혀 내기 위해 전심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 성과가 이제 겨우 보이려 하는데 소운이 없어지다니! ‘이들이 제거한 것인가?’ 끔찍한 상상이었다. 그의 오른편에 있는 태사의는 소운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는 눈에 띄지 않게 힐끔 태사의의 우측에 앉은 사내를 보았다. 거기에는 그가 알아낸 구신 중의 하나, 어제 당금 황제의 칙사로 내려 온 환관(宦官) 정소립(鄭召笠)이 앉아 있었다. 정소립. 종사품(宗四品) 국록대부태정태감(國祿大父太正太監), 겸 동창 대영반 (兼東廠大營班), 그리고 금룡장 호가삼위(護家三衛) 중 하나이기도 한 환관 정소립은 홍옥처럼 빛나는 긴 손톱으로 앞에 놓인 자단목 의 탁 자를 두드려 딱딱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그것은 그가 극도로 분노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 었다. 오늘의 일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아침에 틀림없이 죽었어야 옳았을 소운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에 이미 번천제이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소운이 살아 있는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상군의 배신, 구두룡 머리 아홉 개 중 하나가 다른 방향을 보기 시작 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한 제삼계가 준비되어 있는 이상, 대세는 그들의 것 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것마저 틀어지고 있었다. 금룡회의의 중단은 가신들의 신망을 잃은 소운을 공식적으로 후계자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차후의 실권을 공백상태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절 호의 기회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에……!’ 금룡장 밖에 대기시켜 놓은 산귀마저 실패한다면 극도로 귀찮은 일들 이 생길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모두 이 계획을 준비하고 밀어붙였던 그에게 모아질 것이다. 그래서 정소립, 운명의 신인 대사명은 분노하고 있었다. 대전의 문이 열렸다. 거기 나타난 사내를 향해 금야홍이 호통을 쳤다. “후계자를 호위한 은검대는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사내, 은검대주 곽자비검(藿字飛劍) 모용초(慕容肖)는 낯이 뜨거워 죽 을 것 같았다. 소위 정예 은검대의 오십 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하나같이 소운일행을 따라갈 생각을 못했다니……! 그가 들어도 못 믿을 얘기를 누구에게 한단 말인가? “속하(束下)!” 모용초는 결의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목숨을 걸고 찾아 모셔 오겠습니다!” * * * 어두웠다. 그리고 답답했다. 희미한 장명등(長明燈) 불빛에 비춰진 소운과 매아상, 그리고 보표 들 의 얼굴은 더욱 음침해 보였다. 코끝을 찌르는, 진한 흙냄새는 사방의 벽에서 풍겨 나오는 것일 것이 다. 그들은 벌써 네 시진째 이 어두컴컴한 토굴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문득, 통비원이 물었다. “저……, 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 거죠?” 소운이 대답했다. “열흘쯤?” 통비원이 입을 딱 벌렸다.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하다가 못 참겠는지 하고 만다. “먹을 건 어떻게 해결합니까?” “저기!” 소운이 가리킨 곳에 몇 개의 나무통이 있었다. “물과 건량(乾糧)! 열흘 아니라 한 달도 견딜 수 있으니 걱정 않아도 돼!” 통비원은 그래도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눈치였다. “저…… 그거……, 그건 어떻게 해결합니까?” “뭐 말이냐?” “저……, 그거……, 그게……!” 통비원은 말은 못하고 매아상의 눈치만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한백이 피식 웃었다. “배설 말이군! 이렇게 하면 되지 무슨 걱정을?” 그는 벌떡 일어나 토굴의 구석으로 가더니 바지춤을 내렸다. 쏴아--! 오줌줄기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진한 지린내가 풍겼다. 사방이 꽉 막혀 있고 숨구멍만 간신히 있으니 냄새가 쉬이 빠져나가지 않는 것이다. 소운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땅을 파고 눈 다음에 다시 흙으로 덮어! 지린 냄새에 코가 썩을 지 경이군!” 한백은 키득거리며 한참을 더 냄새를 피우고 있더니 바지를 추켜올리 고 허리띠를 묶었다. “네 시진이나 참았으니 어쩔 수 없지! 오줌 누지 않고 살 수 있는 사 람 있으면 나오라고 그래!” 통비원은 그래도 볼일을 못보고 한백이 소변볼 때부터 두 눈을 가리고 돌아앉아 있는 매아상을 힐끗거렸다. 한참이 지났다. “에이!” 통비원은 벌떡 일어나 구석으로 달려갔다. 쏴아--! 그는 해탈 한 노승도 짓기 어려울 정도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몸을 부르르 떨고는 바지를 추켜올렸다. 비로소 매아상 생각이 다시 난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막 돌아서려는데 오줌줄기가 파헤친 땅에 무엇인가 하얀 것이 보 였다. “으헉--!” 한백이 벌떡 일어나 통비원의 입을 막았다. 그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우리 여기 있다고 소문내고 싶어서 그래?” 통비원이 눈을 황소 눈알만큼이나 둥글게 뜨고 발 아래를 가리켰다. 한백이 인상을 썼다. “해골 가지고 그런 거야? 덩치가 아깝군!” 통비원의 오줌줄기에 파헤쳐진 것은 하얀 해골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도 별것 아닌 것에 소리지른 것이 창피한지 얼굴을 붉히더니 해골을 가리켰다. “이 백골은?” 한백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누가 이 땅굴을 팠다고 생각하나?” “그럼……?” 한백이 발로 백골을 건드리며 말했다. “이 여자!” “여자?” “시녀들!” 소운의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죽어 나오거나 행방불명으로 처리되는 일이 잦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만들 떠들어!” 소운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여기가 바깥과 완전히 단절된 줄 알아? 큰 소리라도 나면 누군가가 들을 수도 있어! 그리고 탈출 때를 대비해서 체력을 남겨 둬. 되도록 몸을 움직이지 마!” “똑똑하신 소주인 어른!” 한백이 빙글거리며 말했다. “우리야 괜찮지만 저 여자와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이 좁은 곳에 일 곱이나 처박혀 있어! 창피해서 오줌도 못 누는 건 둘째치고 이제 낮이 되면 더워질 거야. 아무리 겨울이라 해도 말이야! 아마…….” 그는 소운을 정면으로 보았다. “못 견디고 제일 먼저 발작하는 건 널 걸?” 소운이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한백, 간이 부었구나! 감히 내게 그런 말투로……!” 한백이 피식 웃었다. “내게 뭘 기대하는 거냐? 충성? 의리? 너도 그런 걸 믿었던가? 내가 알량한 금룡장 비밀 수호집단의 우두머리로 빛도 안 나는 어둠 속의 생활을 한 것이 평생 얼굴도 못 본 금가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었다고 생각해?” “그럼 왜 내 곁에 있는 것이냐?” “도박!” 한백은 명쾌하게 잘라 말했다. “질 것 같은 쪽에 걸면 배당이 크거든!” 순간, 한백의 목에 차가운 칼날이 닿았다. 차가운 목소리가 나직하게 퍼졌다. “더 이상 못 들어주겠군!” 한백은 자신의 목에 바짝 붙은 검은 칼날을 보며 피식 웃고는, 두 손 가락으로 칼날을 잡았다. “이게 뭐야? 장난치는 거야?” 귀도는 칼날을 앞으로 밀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협의(俠義)니, 충성(忠誠)은 모른다. 그러나 하나는 알지. 바로 신의(信義),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다!” 칙! 칼날이 매끄럽게 앞으로 나가 한백의 목을 스쳤다. 한 줄기 하얀 선이 그어지더니 이내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러나 피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한백은 자신의 목에 붙어 피를 마시는 귀도의 칼을 내려다보며 키득거 렸다. “내 피에는 술기운이 많아서 칼이 취할지도 몰라!” 주절거리던 그가 두 손가락으로 칼날을 힘주어 잡았다. 귀도가 눈치채 지 못하도록 은밀히 힘을 준 것이었다. 그리고 밀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의 몸이 칼날의 반대방향으로 미끄러졌다. 쿵--! “큭!” 귀도가 짧은 신음을 토했다. 한백의 팔꿈치가 그의 상처 입은 가슴팍을 때렸던 것이다. 한백은 귀도가 주춤하는 사이에 팔밑으로 돌아가 뒤에서부터 그의 팔 을 꺾어 눌렀다. 귀도는 신음을 토하며 땅바닥에 얼굴을 대고 납작 엎드려야 했다. “이 몸으로 뭘 하겠다고?” 한백은 귀도의 팔을 놓아주며 느물거렸다. “괜히 형입네해서 가르치려 들지 말란 말이다!” 통비원의 눈이 퉁방울만해졌다. ‘한백이 귀도의 동생이었던가?’ 잘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로는 분명 그렇다고 하 지 않는가! “도박을 걸어 이득을 노린 것이든, 선대에 맺은 약속 때문이든 상관 없다!” 소운이 나직하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살아 남는 것이다.” 토굴 안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소운의 말소리만이 조용조용 흘렀다. “열흘을 견디면 누구도 우리가 금룡장 안에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 다. 대금룡회합이 중단되고 장내의 무사들은 우리를 찾기 위해서 각지 로 흩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때 나간다. 그때까지는 체력을 회복해 두 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쓸데없는 객기 때문에 계산보다 많이 다쳤 어!” 그의 손가락이 흑저와 귀도를 가리켰다. ‘나는 아예 계산에 넣지도 않았군!’ 창백한 안색을 하고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않고 있던 곽상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 중 가장 필요없는 사람이 그였다. 통비원조차도 나중에 마차를 몰려면 필요하지만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다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이고 보면……! 애초에 뽑히지 않았을 몸이 뽑힌 것이니 누굴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 맥없이 죽는다는 것이 억울하군!’ 곽상은 눈을 감아 버렸다. 그 감긴 눈 너머로 동가채의 형제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백이 손을 내저었다. “그 계획에는 큰 결함이 있다!” “……?” “네 계획은 실제가 아니라 머리로만 짜내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몸이 들어갈 공간과 식량만 있다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서 열흘을 지내면 적어도 넷은 미쳐 버릴 것이다. 나, 귀 도, 저 파계승만 빼고 전원이 발광상태가 될 것이란 말이다!” 소운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실수를 정면으로 지적하는 말은 처음 들었다. 더 분한 것은 그 지적이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땅 속에 들어와서 그런지 겨울인데도 후끈하게 열기가 풍기고, 공기구 멍을 작게 뚫어놓는 바람에 환기가 안되어 악취가 코를 찔렀다. 여기에 배설을 해서 오물이라도 쌓인다면 그 다음은 정말 견디기 어려 워질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한백의 말에 긍정했다. 그가 잘못을 시인하는 것 또한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후로는 두번 다시 실수하는 일이 없을 것이므로……! “그러나 지금 당장 나갈 수는 없다. 지금 너희들 몸상태로는 나가 봤 자 죽을테니까!” “아--!” 통비원이 갑자기 탄성을 발했다. 그리고 자기 머리를 쿵쿵 두드리더니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었다. “이건 아까 누가 준 건데……!” 연무장에서 빠져 나올 때 당소홍이 다가오더니 건네준 것이라는 말이 었다. 소운이 손을 내밀어 약병을 받으면서 물었다. “왜 준거야?” 통비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흑저!'라고만 하던데요?” “그럼 흑저에게 주라는 뜻 아냐?” “그런가 보죠?” 약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던 소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미파 비전 벽령단(璧靈丹)!” “좋은 겁니까?” 소운은 흑저에게 약병을 던졌다. “기혈을 다친 사람에게만!” 상처를 회복시키는 약이 아니라 기혈을 빨리 안정시키는 약이라는 것 이다. 사실 당소홍이 혜진사태를 졸라 얻어 온 것이었는데……! “먹어 둬! 당신이 빨리 정상이 될 필요가 있어!” 흑저는 흐릿한 눈으로 발치에 떨어진 약병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렇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말을 않더니 지금 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백이 이죽거렸다. “진립동에게 까불다가 곤죽이 되도록 터지더니 숨만 쉬었지 시체가 다 되었군!” 흑저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백은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허리춤에서 작은 도끼를 꺼내 흑저 를 겨누었다. “알지 모르겠지만 난 앞뒤 안 가리고 막나가는 놈이야! 이 썩은 냄새 진동하는 곳에 시체 썩는 냄새 더 난다고 특별히 나빠질 건 없다는 생 각만 들면……!”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도끼가 팽그르르 돌면서 흑저를 향해 날아갔다. 탁--! 흙이 튀었다. 도끼는 아슬아슬하게 흑저의 뺨을 스치고 흙벽에 박혔다. 한백이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도끼가 어디로 날아갈지 나도 모른단 말이다!” 흑저는 그래도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한백의 얼굴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잡승 주제에 부처 흉내를 내려 들어? 처음부터 난 네놈이 마음에 들 지 않았어!” 파--앙! 바로 서면 머리가 닿을락말락하는 좁은 토굴에 갑자기 한백의 도끼그 림자가 꽉찼다. 한쪽 무릎을 세우며 일어서는가 싶더니 말릴 사이도 없이 대월을 들어 흑저의 머리를 찍어 간 것이다. 여태까지 그가 보였던 무공들은 진짜실력의 반도 되지 않았던 것임이 분명했다. 어떤 난폭한 행동들도 지금의 도끼질보다는 흉악하고 패도적이지 않았 으니 말이다. 초식도 변화도 없는, 오로지 무지막지한 힘으로만 장작 패듯 내려치는 일격이었다. 일동의, 심지어는 소운의 안색마저 변해 버렸다. 매아상의 면사 뒤에서 짧은 비명이 나왔다. 흑저가 비로소 눈을 가늘게 떴다. 윗몸을 틀어 도끼를 피하려는 것처 럼 보이더니 뒤로 돌아간 주먹이 도끼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었다. 땅--! 운남 특산의 철목(鐵木)으로 만들어진 대월의 자루가 부러질 듯 뒤로 휘어졌다. 한백은 뒤로 나뒹굴어 흙벽에 등을 대고 멍하니 흑저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의 두 손아귀가 찢겨 피가 흘렀다. 흑저의 움켜쥔 주먹, 박룡수가 부르르 떨렸다. 주먹 끝으로부터 어깨로, 다시 척추를 통해 발끝까지 전해지는 기분 좋은 짜릿함. 흑저는 한백의 코앞에 주먹을 내밀었다. 그의 형형한 눈빛이 한백의 눈을 찌르고 있었다. “난 강하다!” 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박투술 도 강하다!” 한백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흑저는 주먹을 거두고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나 진립동은 나보다 더 강하다……, 괴물처럼! 마치 권법(拳法) 의 신(神)처럼!” 소운이 중얼거렸다. “권법의 신? 신이 왜 인간세상에서 놀고 있겠어?” 흑저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서는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 었다. “그럼, 사람이란 말이군?” “그렇겠지?” “그럼 됐어!” “응?” “터무니없이 강해 보여도 사람이면 이길 수 있어! 난 그를 이길 수 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다짐하듯, 맹세하듯 주먹을 쥐고 말하는 그를 보며 소운이 중얼거렸다. “당신과 그는 차원이 다르지만, 그 차원이라는 것이 사실은 백지 한 장 차이지. 그러나 그 차이가 바다보다 넓은 차이가 될 수도 있어. 어 떤 사람에게는……!” 그러나 흑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언제 여기서 나가지?” 소운은 그를 보고 나뒹굴어 있는 한백, 그의 손에 들린 대월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안 나가면 그들이 끌어낼 거야!” 방금 들린 폭음이 아무에게도 안 들리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 한 것이다. “여덟 시진 정도가 지났으면 아침이겠군! 운이 좋으면……, 소란을 일 으키지 않을 수도 있겠군!” 통비원이 약병을 주워들었다. “이 약은……?” 흑저는 고개를 저었다. “약은 필요없어! 난 이미 정상이다!” 사실은 온몸이 비틀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으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고통은 그가 참아야 할 몫이었다. ‘약에 의지해서 어떻게 용수 진립동을 이기고 산으로 돌아갈 것인 가!’ * * * 엽검영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마차를 준비하고, 말을 묶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조심 장 밖으로 끌고 나가느라 얼마나 조바심을 내었던가! 정문에서 수문무사들에게 검문을 당했을 때는 대사가 무너질 것 같다 는 위기감으로 등허리를 적시기도 했다. 다행히 평소 익힌 허풍과 거짓말 솜씨로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다루지도 못하는 마차를 모느라 온갖 고생을 했고, 지리를 몰라 물어 물어 해가 동편 하늘 높이 치솟아 있을 때에야 겨우 찾아온 십리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시간 전에 도착했구나 라며 안심하던 것도 잠시, 혹시 늦게 와 서 그들이 먼저 가 버린 것은 아닐까 라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고, 다시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다. 그래도 아무 일 없었다. 겨울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정말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혹시 먼저 갔나? 혹시 무슨 일이 생겨 아무도 못 오는 것일까? 나 때문에, 내가 너무 늦게 나와서 대사가 실패한 것은 아니겠지? 상상은 상상으로 꼬리를 물어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 것은 기 억도 나지 않았다. 땅거미가 깔리고 난 뒤에야 그는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내었다. “이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가 장난친 것이 틀림없어!”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기를, 통비원이 장난친 것이기를 기원하며 금룡장으로 달렸 다. 아니, 달리고는 싶었는데 이놈의 말들은 도통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시 온갖 고생을 하며 돌아와 금룡장의 정문을 본 것이 야반 삼 경! 정문은 밤인데도 횃불을 밝혀 대낮처럼 밝았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번쩍, 그의 머릿속으로 아무것도 사오지 않았는데 그냥 나갔다 온 것 이 의심을 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쳐 갔다. 게다가 야반 삼 경에 돌아오는 사람이라면 평소라 해도 의심을 살 것 이다. 별 수 없이 그는 아침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거가방으로 돌아온 엽검영이 들은 이야기가 그것, 소장주가 실 종되었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엽검영은 옆에 굴러다니는 낡은 말구유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내뱉었 다. 그리고 발을 움켜쥐고 뛰었다. 낡은 말구유라고 썩어 부석거리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엽검영은 발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릴 뻔했다.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영웅이 되기 위한 최적의 기회를 놓친 것이 아 까워서였다. 걱정한 대로 자기가 너무 늦게 나간 때문에 그들이 먼저 떠나 버린 것 으로 착각한 것이다. 아까 전부터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던 꼽추가 말을 건네었다. “요, 용케 살아서 돌아왔군!” “엥?” 엽검영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눈을 크게 떴다. 꼽추는 눈살을 찡그렸다. 엽검영의 표정에서 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다. 그것은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가능한 것은 한 가지, 정기룡도 엽검영은 소운의 속임수, 미 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의미였다. ‘그도 보통은 아니군! 내 머리 위에서 놀고 있어!’ 꼽추는 문득 한기를 느꼈다. 정기룡을 모시려면 좀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하는 엽검영이 불쌍해 보였 다. 그는 어제 하룻동안 사신(死神)이 그의 머리 위에서 놀다 갔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 우리 같은 천민은 눈치가 빨라야 살아 남는다!” 엽검영이 발끈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 내가 천민이라고?” 꼽추는 한심하다는 듯, 불쌍하다는 듯 그를 보며 혀를 찼다. “어, 얼굴에 쓰여져 있는데 발뺌이냐?” 무의식중에 엽검영은 얼굴을 만졌다. 그리고 급히 손을 내리며 화를 냈다. “이 빌어먹을 꼽추가 날 놀려?” 꼽추는 그가 화를 내건 말건 계속 충고했다. “오, 오래 살고 싶으면 사람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라! 대부 분의 사람들은 널 어떻게 이용할까를 생각할 뿐이란 말이다! 조,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쉬운 방법을 가르쳐 줄까? 돈을 빌려주고 달 라는 소릴 않으면 된다. 가, 갚으라는 소릴 할 때까지는 넌 좋은 사람 이라는 소릴 들을 수 있지. 그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더 좋지. 그, 그 들은 말하겠지, 넌 좋은 사람이라고. 그리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염검영은 입을 다물었다. 꼽추의 충고가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한참의 침묵 후에 엽검영은 입을 열려 했다. 순간, 꼽추가 안색을 바꾸 며 입에 손을 대었다. 어디선가 쇳소리가 들려 왔다. “누, 누군가 밑에 있다!” 거가방 구석의 창고에는 겨울 내내 말에게 먹일 마른풀들이 산처럼 쌓 여 있었다. 급히 달려온 꼽추와 엽검영의 앞에서 그 풀들이 움찔거리다가 폭발하 듯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속에서 한백이 나타났다. 한백은 옷에 붙은 지푸라기들을 대충 털어 내며 말했다. “살아 있었냐? 잘됐군! 마차는 준비됐지? 엽검영이 창백한 얼굴로 섰다가 짐승 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그에게 덮 쳐 들었다. 그는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허수아비였다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달은 것 이다. 타닥-- 쿵--! 누군가가 그 앞을 막았다. 엽검영은 그 손에 뒤로 나뒹굴었다. “미안하다! 그러나 여기는 싸울 곳이 아니다!” 흑저였다. 엽검영이 욕설을 퍼부었다. “더러운 돼지새끼! 날 속여?” 흑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 말이 맞다. 난 돼지새끼다. 그러니 일단 나가자!” 엽검영은 그 손을 밀어 버리고 스스로 일어섰다. 마차에는 아직 말이 매여져 있었다. 통비원이 어자석(馭子席)에 올라탔다. 소운이 손짓했다. “장원을 나갈 때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보이면 안돼! 들어와!” 그리고 엽검영을 보았다. “나갈 수 있겠지?” 엽검영은 그에게도 욕설을 퍼부으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 먼저였다. “물론!” 꼽추는 멍하니 거가방을 나가는 마차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퍼뜩 돌아섰다. 그늘 속에서 비단옷을 입은 한 사내가 나타났다. “출발했나? 이제 조금 도와줘야겠군!” 꼽추는 더욱 멍해져서 정기룡을 보았다. “그, 그럼 한편?” 정기룡은 고개를 저었다. “한편은 없지! 내게 유리한 자와 불리한 자가 있을 뿐이야!” 그는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꼽추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도 적당히 빠져나가서 날 기다려!” 꼽추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금룡장의 문을 나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의 앞에는 중문과 정문, 통과해야 할 문이 두개나 있는 것 이다. 중문에서는 심지어 금룡장의 무사들까지도 하나하나 얼굴과 용무를 확 인하고, 영문을 모르는 하객들에게도 예리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금룡장 수뇌들이 아직은 소운의 실종을 소문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하객으로 온 사람들이 누군가? 하나같이 강호의 물을 마신 무 림인들, 이런 일에 유난히 발달된 감각으로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것 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공연히 금룡장 무사들이 있는 곳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있었 는데, 그 중에 당가의 두 소저가 있었다. 엽검영의 머리가 번개처럼 돌아갔다. 그는 마차를 멈추고 당소취를 불렀다. “당소저 아니신가요?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인생하처불상봉(人 生何處不相逢)이라는 고인(古人)들의 말씀이 틀림없군요!” 의외였던 것은 당소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엽검영의 복색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개과천선(改過遷善)한 것인가? 어제의 녹림 도가 오늘은 중원제일가 의 무사라니!” 엽검영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말을 돌렸다. “어디 가시는 것인가요? 제가 태워 드릴 수도 있는데……!” 당소취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분노해서 였다. ‘누구더러 같이 마차를 타자고? 지금 이 작자가 날 거리의 노류장화 (路柳墻花)로 알고 있는 거야?’ 막 분노를 터뜨리려 하는데 당소홍이 옆구리를 찔렀다. “그래요, 마침 부성에 놀러 가 보고 싶었는데 잘됐군요!” 당소취는 의외의 말에 놀라 뭐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엽검영과 소홍의 표정에서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 이었다. 그녀는 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소홍이 그 뒤를 따랐다. * * * “열하나, 열둘, 열셋! 다 거두었군!” 금룡장 동쪽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가면서 정기룡은 숫자를 세고 있었 다. 열세 개의 붉은 깃털, 그 뒤에 남은 열세 구의 시체. 그 이마에서 흐르는 피 또한 열세 방울이었다. 이로써 그는 금룡장에서 관도로 통하는 모든 요지를 감시하는 자들을 다 처치해 버린 것이다. 내일 아침이면 부지런한 누군가가 이 시체들을 발견할 것이고, 그때부 터 예양부성은 이 의문의 혈사에 몸서리를 칠 것이다. 그리고 몇몇 사람은 또 다른 의문으로 머리를 썩일 것이 틀림없었다. 야산에서 뒹구는 이 시체들의 신원에 대한 의문. 그들이 흑룡방의 방도들이라는 것, 소운의 탈출을 알리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이곳 관원들은 너무 멍청했으니 말이 다. 그는 문득 언덕에 서서 멀리 서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씨를 뿌렸으니 어떤 열매가 나올지 구경하는 것만 남았나?” * * * 중문은 당소취가 마차의 창 밖으로 얼굴을 한번 보여주는 것으로 무사 통과였다. 그러나 정문에서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총당의 부당주 과산룡(過山龍) 공야장(公冶章)까지 나선 수문무사들은 당문 의 소저들이 바깥구경을 간다는 데도 굳이 마차 속을 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엽검영이 있는 감언이설과 은근한 협박까지 동원해도 공야장은 요지부 동이었다.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고 당소취가 걸어나왔다. 그리곤 아무 말없이 그녀는 마차 밑과 그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공야장이 궁금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당소취는 계속 땅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방금 전까지 아홍(兒紅)이 마차 안에서 놀고 있었는데 보이지 않네……?” 그녀는 공야장을 향해 손을 벌려 보였다. “요만한 길이에 알록달록 예쁜 뱀인데 혹시 못 보셨나요?” “배, 뱀이요?” 공야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수문무사들이 분주히 뒤로 물러나 순식간에 마차의 반경 오장 이내는 텅 비어 버렸다. 주책없는 엽검영까지 어자석 위로 올라가 혹시라도 발 밑에 뱀이 없는 지 살피는 지경이었다. 당소취가 덧붙였다. “너무 여러 사람 죽이면 안될 텐데……!” 공야장의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여러 사람이 죽는다고요?” “칠채홍련사(七彩紅蓮蛇)라서 알아보긴 쉬울 거예요. 머리 위에 예쁜 벼슬이 하나 달렸거든요?” 무사들이 일 장 가량 더 물러섰다. 공야장도 발밑을 둘러보며 조심조심 물러설 지경이었으니 나무랄 처지 가 아니었다. 당소취가 눈을 빛내며 허리를 굽혔다. “여기 있네!” 그녀의 손에는 다섯 치 길이에 일곱 가지 빛깔 비늘, 머리에는 금빛 벼슬까지 달린 작은 뱀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뱀은 당소취의 말대로 생기기는 했지만 전혀 예뻐 보이지는 않았다. 공야장은 공복인데도 뱃속에서 무언가 올라올 것 같았다. 그 구토가 마차 안에 탄 사람이 당문 의 일족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 다. 더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말이다. 생명을 바쳐 충성하는 것도 좋지만 실수로 죽는 것까지는 원치 않았던 것이다. “어서…….” 그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고 말했다. “가시죠!” “고마워요!” 마차에서 내리는 두 소녀를 향해 소운이 말했다. 당소취가 미소를 지었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중원제일가의 공자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요!” 소운이 씨익 웃었다. “내가 가주가 되면 오늘의 일은 잊지 않고 보답하죠!” 당소홍은 슬쩍 마차 안의 흑저를 보았다. 흑저는 처음 그녀가 올라탔을 때 그런 것처럼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뿐 이었다. 약을 보내준 데에 대한 감사의 표시도 않은 것이다. 당소홍은 약간 섭섭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앞에서 문이 닫혔다. 그리고 다시 열렸다. 문이 채 닫히기 전에 길 옆에서 달려나온 오십 줄의 거지 하나가 밖에 서부터 잡아당겨 연 것이다. 거지는 문을 잡고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귀도의 칼을 보며 눈을 깜박 거렸다. “어이, 흑저, 나야 나! 황거지!” 소운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아는 사람인가?” 흑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곽상도 함께였다. “보기보다는 발이 넓군! 그런데, 지금 같이 가겠다는 건가?” 황거지가 손가락으로 흑저를 가리켰다. “저 녀석을 똑똑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요!” 그는 다시 자기 코를 가리켰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묘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이고요!” “흥--!” 소운은 콧소리를 내고는 다시 바로 앉았다. “가자!” 그것을 묵인으로 해석한 황거지가 곽상과 흑저 사이에 비집고 앉았다. “내가 달리 거머리겠어?” 곽상이 피식 웃었다. 어자석에 엽검영과 나란히 앉아 있던 통비원이 긴 채찍을 휘둘러 소리 를 냈다. “핫, 핫!” 네 마리 말이 일제히 앞발을 들더니 뛰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관도 위로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 제 2 권 金龍之會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