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룡지계(反龍之計)편 제 17 장 개는 부처가... 개는 부처가 될 수 없다 흑룡방, 정확하게는 산귀의 수하 살수 들이 마차를 습격한 것은 금룡 장을 빠져나온 지 반나절 후, 사천 과 섬서 를 잇는 관도상(官道上)에 서 였다. 슈칵--! “크아악--!” 피가 튀었다. 마차지붕 위로 기어 올라왔던 마지막 흑도수가 굴러 떨어졌다. 한백은 지붕 위에서 대월을 꼬나잡고 우뚝 선 채로 아래를 향해 소리 쳤다. “달려!” 통비원의 채찍이 꿈틀거리며 뻗어 가더니 허공을 쳐 소리를 냈다. 촤악--! 대완(大玩)특산의 준마 네 필이 달리던 발걸음에 속도를 가했다. 두두두두두--! 누런 먼지가 바퀴를 따라 일었다. 마차는 쏜살같이 질주했다. 바퀴에서 일어나는 황토먼지가 채 마차를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적들은 그보다 빨랐다. 자욱한 먼지구름을 뚫고 두 마리의 검은 말이 나타났다. 그들은 마차 를 추월하는가 싶더니 속도를 조절해 옆으로 나란히 달렸다. 그 뒤로 또 나타난 두 마리의 말, 그리고 두 명의 흑도수. 다시 두 마리의 말과 흑도수. 그들은 끝없이 나타나고, 죽고 또다시 나타났다. 이미 이십 명은 족히 죽었는데도 그만한 수가 또 나타난 것이다. 흑도수들은 마차쪽으로 몸을 기울여 협봉도 로 마차의 창과 문을 내리 치기 시작했다. 칵--! 칵--! 붉은빛 감도는 덧문이 달린, 마차의 창과 문은 작은 생채기만 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백은 아래에서 깔짝거리는 흑도수들을 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마차는 잘 골랐군!’ 금룡장에서도 중요한 인물들만 타도록 특별히 제조된 마차가 아니었다 면 마차는 벌써 종잇장처럼 찢겨져 안에 탄 사람들을 토해 냈을 것이 다.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도 없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른 방법 을 찾을 것이다. 한백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작은 도끼는 하나밖에 없다. 벌써 써 버리면 정작 위급한 순간에는 손 도 못 써 볼 것이다. 두두두두두--! 다시 네 마리의 말들이 더 나타나 흑도수들과 마차 사이에 끼여들었 다. 흑창수(黑槍手)들 이었다. 그들은 촛불의 끝처럼 예리하게 빠진 장창 (長槍)을 옆으로 들고 마차 를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캉--! 캉--! 나무조각이 튀었다. 흑도수들이 안장을 밟고 몸을 일으켰다. 마상재(馬上才)였다. 그들은 그대로 뛰어올라 흑창수들이 탄 말을 장검 다리처럼 밟는가 싶 더니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제기랄…….” 한백은 이를 갈았다. 이렇게 마차지붕 위에 서 있기만 해서는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 다고 내려갈 수도 없었다. 쉬릿--! 츠칵--! 마차의 오른쪽 허공에 둥근 칼날 같은 원이 그려지고, 그 원을 따라 핏물이 튀었다. 마차를 향해 뛰었던 여섯 흑도수 중 우측의 둘이 길바닥에 떨어져 뒹 굴었다. 어자석의 통비원을 보호하고 있던 귀도가 마차의 귀퉁이를 잡고 옆으 로 몸을 붙이며 칼을 휘두른 것이다. 그러나 살아 남은 우측의 하나는 마차의 귀퉁이를 잡고 매달려 있었 다. 츄욱--! 두 자루 장창 이 파공음을 일으키며 귀도를 향해 찔러 왔다. 귀도는 왼손으로 마차의 귀퉁이를 잡고 발끝을 마차 아랫부분의 모서 리에 겨우 걸친 채 오른손의 칼을 휘둘러야 했다. 그러나 그래가지고서야 제 위력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깡--! 장창 이 튕겨 나갔다. 동시에 귀도의 발도 마차 모서리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왼손만으로 마 차에 대롱대롱 메달린 꼴이 되었다. 부--웅--! 장창 두 자루가 이번에는 양쪽에서 그를 향해 휘둘러졌다. 창대로 후려갈기는 것이다. 귀도의 어두운 눈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왼손을 끌어당겨 몸을 띄우고 발로 마차의 벽을 찼다. 애초에 그의 머리를 노렸던 장창 들이 양 옆구리를 두들겼다. 동시에 귀도의 칼이 검은 사선을 그렸다. “크아악--!” 끼히히힝--! 사람과 말의 비명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과 두 마리의 말이 한꺼번에 토막 나며 시뻘건 피바람이 허공 을 자욱이 수놓았다. 귀도는 칼을 휘두른 기세 그대로 시체를 밟고 그대로 다시 뛰어올랐 다. 마차는 아직 그의 옆을 완전히 지나가지는 않았다. 귀도는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왼손을 뻗쳤다. 마차의 지붕모서리에 패어진 한 줄의 홈. 귀도의 왼손이 그것을 움켜잡았다. 지--끈! 그제서야 창대에 맞아 부러져 나간 늑골들이 강렬한 통증을 호소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통증이었다. 순간적으로 귀도의 반신(半身)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치익--! 왼쪽 손가락의 껍질이 벗겨져 피가 튀었다. 그 순간, 귀도는 잡은 모서리를 놓치고 마차 뒤로 떨어져 내렸다. 파--앙--! 귀도가 칼을 날리던 그 순간에 어자석에 앉아 있던 흑저는 마차의 지 붕모서리를 잡고 좌측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좌측 박룡수가 모서리를 뒤로 잡자 몸이 허공에 떴다. 우측 박룡수가 모서리를 앞으로 잡을 때 흑저의 땅딸막한 몸이 허공에 서 빠르게 회전했다. 짧지만 강한 다리, 검은 맨발이 팔랑개비처럼 돌 며 적을 찾았다. 휘리릭--! 그 순간에 그는 정말로 한 줄기 검은 회오리처럼 보였다. 좌측으로 뛰어 올라오던 세 흑도수들이 그 회오리에 휘말려 튕겨 올라 갔다. 콰쾅! 하나같이 턱뼈가 바스러지거나 관자놀이에 가해진 충격으로 의식을 잃 고 있는 상태였다. 츄악--! 장창 이 허공에 뜬 흑저를 십자(十字)로 꿰뚫으려는 듯 뻗어 왔다. 그러나 흑저의 회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흑저는 좌측 손으로 모서리를 잡고 우측 손은 놓은 상태로 몸을 돌렸 다. 마차의 측면에 발이 부딪치자 흑저는 발로 마차 벽을 걷어차며 뛰어올 라 오른쪽 주먹을 휘둘러 창날 하나를 정면으로 때렸다. 깡--! 강철로 만들어진 창대가 부르르 떨리며 옆으로 밀렸다. 그 창에 다른 흑창수의 창이 얽혔다. 창날을 때린 반동으로 흑저는 한바퀴 옆으로 회전하며 다시 마차 벽을 찼다. 두 흑창수가 자세를 바로잡고 창을 겨눌 때, 흑저는 이미 그들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직선으로 내리쳐지는 좌, 우 박룡수! 파--팍--! 흑저의 얼굴로 피와 뇌수가 섞여 튀었다. 까르르르릉--! 주인을 잃은 두 마리 흑마가 발을 치켜들고 울부짖었다. 흑저는 그 말들의 머리를 밟고 몸을 돌리며 뛰었다. 마차를 잡으려 하 는 것이었다. 흑저의 눈에 귀도가 마차에서 떨어지는 광경이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 였다. “잡아!” 흑저는 두 팔을 벌려 몸을 날리는 속도를 줄였다. 발밑으로 아슬아슬하게 마차지붕이 통과하자 흑저는 아래로 떨어져 내 렸다. 그는 우측 손을 뻗어 귀도의 옷깃을 움켜쥐고, 좌측 손으로 마차 뒷부분의 튀어나온 곳을 찍었다. 귀도는 흑저의 손에 목덜미를 잡힌 채로 땅바닥에 끌려왔다. 파파파앗--! 돌이 튀고 먼지가 일어났다. 옷자락이 찢겨져 나갔다. 땅에 닿은 흑저와 귀도의 살갗이 벗겨져 피투성이가 되는 것은 순식간 이었다. 귀도가 흙먼지 속에서 소리쳤다. “그냥 가!” 그는 말을 하면서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흑저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귀도가 다시 소리쳤다. “날 두고 그냥 가!” 그를 잡은 흑저의 손아귀가 더욱 완강해졌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조금 더 살아야 해!” “멍청한 새끼!” 귀도가 다시 몸을 뒤틀었다. 그 상황에서도 놓지 않던 칼이 목덜미 뒤 로 돌아가 흑저가 잡은 옷자락을 끊었다. 귀도는 그대로 길바닥에 뒹굴었다. “죽엇--!” 한백은 마차에 매달린 흑도수 하나를 향해 대월을 휘둘렀다. 쾅--! 여섯 중 유일하게 마차에 매달려 막 지붕으로 기어오르던 사내가 급히 몸을 옆으로 굴렸다. 목표를 맞추지 못한 대월은 마차지붕의 한 귀퉁이를 부숴서 날려 버렸 다. 한백은 눈이 뒤집힐 정도로 노했다. 귀도가 마차에 대롱대롱 매달려 길바닥에 끌려오는 것을 곁눈으로 봐 서 더한지도 몰랐다. 그의 대월이 다시 옆으로 마차지붕 위를 쓸었다. 사내가 몸을 일으켜 대월을 피하며 한백을 향해 협봉도 를 휘둘렀다. 깡--! 한백의 대월이 그 협봉도 를 쳐서 날렸다. 팍--! 푸른 하늘로 붉은 선혈이 튀어 올랐다. 사내는 연속적으로 휘둘러진 한백의 대월에 가슴팍부터 잘려져 튀어 올랐다. 쿵--! 바퀴가 돌이라도 밟았는지 마차가 흔들렸다. 지붕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서 있던 한백이 넘어져 굴렀다. “니미--!” 한백은 자칫 굴러 떨어질 뻔했다가 지붕의 패어진 부분을 잡고 겨우 멈추었다. 마차 옆에 붙어 있던 사내들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저 뒤편 에 일어나는 먼지는 아직도 적지 않은 수의 적이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흑룡방의 공격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멈춰! 멈춰어--!” 마차 뒤에 매달린 흑저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통비원이 급히 고삐를 당겼다. 그러나 전속력으로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지지는 않았다. “바보 같은 자식! 그냥 가!” 한백이 욕설을 퍼부으며 마차지붕으로 기어올라갔다. 통비원은 어쩔 줄 몰라 머뭇거렸다. “죽고 싶어? 그냥 달려!” 한백이 지붕 위에 올라서서 통비원을 향해 대월을 휘둘렀다. 빡--! 대월은 통비원의 옆 얼굴을 스치고 마차의 귀퉁이를 찍었다. 한백이 다시 소리쳤다. “저 새끼는 그냥 죽게 내버려두고 달리란 말이야--!” “핫! 핫!” 통비원의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마차는 더욱 속력을 내어 달렸다. 흑저는 마차 뒤에 매달려 끌려오면서 고개를 들었다. 지붕 위에 한백이 우뚝 선 모습이 보였다. 한백은 관도의 뒤편, 자욱한 먼지구름을 노려보고 있었다. “갈--!” 흑저는 오른손으로 마차의 뒷벽을 찍었다. 그 다음은 왼손, 다시 오른 손이었다. 파파파악--! 바지가 찢겨져 나가고 무릎이 화끈했다. 흑저는 그렇게 하반신이 땅에 끌리는 상태에서 한 손씩 번갈아 사용해 마차지붕으로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한백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이…….” 흑저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한 마리 들개 같던 사내, 한백의 눈가로 흐르는 물기를 보면서는 아무 말도, 욕설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흑저는 그대로 지붕 위에 주저앉아 그들의 뒤편, 관도를 바라보았다. 귀도는 그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칼을 발아래로 비스듬히 늘어뜨 린 자세로 관도 저편의 먼지구름을 향해 서 있었다. 중천을 지나는 햇살에 그의 거무튀튀한 칼이 빛나고 있었다.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피는 흐르는데……! 잠시 후, 자욱한 흙먼지가 귀도의 모습을 가려 버렸다. 흑저는 눈을 감아 버렸다. 한백의 눈가에 언뜻 비쳤던 물기를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였다. 눈물 이란 것은 한백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은…… 형제였었나?’ 귀도와 한백이 형제라는 말을 들은 것이 갑자기 기억에 스쳤다. ‘저마다의 삶에 새겨지는 저마다의 상처……!’ 그것을 마지막으로 오후는 조용해졌다. 그러나 소운은 편한 심정이 아니었다. 귀도가 죽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귀도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 휘했고, 소운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 정도의 인물을 다시 구한다는 것은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탈출이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심하군!” 소운은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열흘을 못 견디고 나오게 된 것에서부터 그의 모든 계획이 틀 어져 버렸다. 열흘 후, 그를 구하러 올 ‘그들’과 함께 지하로 잠적해서 강호의 여 론이 금룡장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단계, 모종의 공작 을 통해 내분을 유도하는 이단계, 마지막으로 당당히 금룡장에 진주(進 駐)해서 반대파와 불만세력을 모조리 숙청한 후 금룡장을 장악하는 최 종단계까지, 이 모든 것들이 단지 구 일(九日)의 시간 때문에 망쳐졌 다. 최악의 경우, 적들의 추격을 받게 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끈 질기고 노골적인 추격에 쫓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숙부는 현재 금룡장에 와 있는 각대문파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공식적 으로 그를 찾거나 쫓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흑룡방이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이렇게 백주대낮에 추격전을 벌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소운은 자신의 가치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론의 힘을 과대평가했다는 것도……. 나중에 무슨 욕을 먹든 일단 소운, 그 자신이 죽고 나면 일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던 가……! 여론은 정의(正義)5가 아니라 승자(勝者)의 편인 것이다. 계산이 정교했던 만큼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자 그 뒤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묶어 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은 추격을 피한다! 그 다음은……?’ 소운은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관도를 따라가면 어디가 나오지?” 내내 마차 안에서 떨고 있던 황거지가 얼른 대답했다. “곧 안강부(安康府)를 지나서 대파산 (大巴山) 줄기에 접어들게 되죠. 가장 평탄한 고개로 대파산 을 횡단하면 사천 땅입니다. 대파산 으로 접어들어서는 마차를 버리고 걸어야 할 테니…… 사천성 초입의 성구 부성(城口府城)에 도착하는 것은 오일 후 저녁쯤이나 될까요?” “대파산 ……!” 소운은 잠시 침음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대파산 경계에 도착하는 대로 마차를 버린다. 그리고 횡단이 아니라 산줄기를 따라 북상(北上)하는 거야! 적당한 곳에서 추격을 따돌리 고…… 그 뒤엔 다시 할 일이 있다!” “북상이라고요?” 곽상이 눈을 반짝였다. “아예 대파산 에 들어가기 전에 관도를 따라 북상하면 성자산(星子 山)이 나옵니다. 거기 저희 산채(山寨)가 있죠. 큰 곳은 아니지만 산이 높고 험해서 그곳 지리에 밝지 않으면 낮에도 길을 잃을 정도죠. 잠시 피신하기에는 적합한…….” 소운이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산채? 원래 녹림 도였나?” 그 표정을 경멸로 생각한 곽상이 얼굴을 붉혔다. “녹림십팔채 중 하나인 성자산의 동가채…….” “거기서 신분은?” 소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거푸 물었다. “부끄럽습니다, 부채주입니다.” 소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뇌리 속으로 번개처럼 스쳐 가는 생각들…… 그는 그 희미하게 점멸하는 불빛들을 잡았다. “동가채로 간다! 그러나 먼저 대파산 으로 들어간 뒤의 일이다. 어떻 게든 대파산 에서 추격을 따돌려야 쉴 시간을 벌 수 있어!” * * * “한심하군!” 정기룡은 발치에 굴러다니는 대감도 한 자루를 발끝으로 툭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오십 명이 넘는 살수 들이 보표 단 다섯 명을 막지 못한다는 것 은…….” 그는 관도 중앙에 칼을 짚고 선 사내, 이제는 시체가 된 귀도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언제 봐도 남에게 호감을 주기에 충분한 기분좋은 미소였다. “이 사내도 생각보단 대단한 고수였단 말이지!” “머, 머리는 여기 있군요!” 꼽추가 관도에 즐비하게 뒹구는 말과 흑도수들의 시체 틈에서 수급(首 級) 하나를 주워들었다. 귀도의 그것이었다. 예리한 칼날에 단숨에 끊어진 것이 아니라, 도끼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칼날에 짓이겨져 끊어졌는지 두 눈알이 튀어나오고 목줄기 가죽도 길 게 붙어 있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원래 그런 출신이라서 그런지 꼽추는 그런 흉한 것을 들고도 눈살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단지 그의 눈에 떠오른 것은 조소(嘲笑)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로서는 상전을 위해 이렇게 목숨까지 바쳐 가며 충성한다는 것은 이 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꼽추가 보기에는 귀도의 그 노예근성(奴隸根性)이야말로 비웃어 마땅 한 것이었다. 정기룡은 귀도의 수급을 힐끗 보고는 별 관심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 렸다. “그것보다는 저게 더 탐나지 않나?” 꼽추는 정기룡의 시선이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칼이었다. 거무튀튀한 칼, 목이 잘려 죽어 가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던 그 칼! “무림십대흉기 중 하나인 혈음도(血飮刀)다! 저것 봐, 그 많은 사람의 피를 마시고도 핏자국 하나 없잖아? 이름은 흉악하지만 보물이라 할 수 있지!” 꼽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 주인의 피를 마시고도 표시도 내지 않고 있으니 흉악한 놈이 긴 하군요! 내, 내다 팔면 돈이 되겠죠?” 말 속에 숨은 빈정거림을 깨달았는지, 정기룡은 잠깐 눈살을 찌푸리더 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무림인에 대한 조롱인가? 혈음도라는 이름만으로도 눈이 벌개 져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자들이 많은데 내다 팔겠다고?” 꼽추는 혈음도를 귀도의 손에서 빼내려 하고 있었다. “저, 저도 사람은 죄가 없어도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는 말은 알고 있습죠! 이, 이런 흉한 물건은…… 왜 이렇게 안 빠져……? 줘도 안 갖 습죠!” 꼽추는 귀도의 손에서 혈음도를 뺄 수가 없자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었 다. 그리고 손목에서부터 잘라 버렸다. 정기룡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누구는 쓰레기 보듯 하는데 누구는 그것 때문에 목숨을 버리고… …!” 무림십대흉기 중 이미 다섯 개가 주인이 바뀌었다. 청마수를 시작으로 대완구, 용설자, 낭리도가 그렇더니 이제 혈음도도 주인을 바꾼 것이다. 특히 사천 일대에서는, 대완구를 주운 초부(草夫) 일가족이 이유도 모 르고 참살되는 것을 시작으로 때아닌 보물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백이 쓰던 용설자도 흑룡선에서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누구의 손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주인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무림십대흉 기는 주인을 삼키는 흉기라고까지 불려지고 있었다. “그도 삼켜 버릴 것인가?” 정기룡은 소운일행이 도주한 관도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누가 당하든 내게는 손해보는 일이 아니지……!” 정기룡은 다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 그의 눈이 반짝였다. 정기룡은 관도의 동쪽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빨리도 오는군!” 꼽추가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시체의 옷을 벗겨 혈음도를 감아 등에 짊어진 상태였다. 그는 문득 땅바닥에 엎드리더니 귀를 대었다. “기, 기마대군요!” 정기룡은 내심 감탄한 모습이었다. “여러 가지 하는군! 숫자도 알아맞힐 수 있나?” 꼽추는 정신을 집중하는 듯하더니 자신없는 투로 말했다. “오, 오십에서 백 정도?” “아마 백 명에 근접할 걸?” 정기룡은 입 속으로 웅얼거리더니 꼽추를 향해 말했다. “일단 길 옆으로 피하지! 날 보면 귀찮아져!” 두두두두두--! 검은 말과 검은 옷의 사내들이었다. 백여 명이 하나같이 촛불의 끝처럼 날카로운 날이 달린 장창 을 꼬나 쥐고, 등에는 활과 화살, 허리에는 흑룡방에서 주로 쓰는 협봉도 가 아 니라 넓적한 파풍도(破風刀)를 차고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부터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나더니, 다시 그렇게 자욱한 먼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들의 눈에는 관도에 뒹구는 동료들의 시체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대로 말발굽으로 짓이기고는 가 버리는 것이다. 먼지구름이 가라앉고 난 뒤, 그 자리에 정기룡과 꼽추가 다시 나타났 다. 먼지에 덮여서 다행이었다. 칼에 베어지고 잘려 나간 시체들이 다시 말발굽에 짓이겨진 모습은 정 상적인 사람이라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평생을 시체와 더불어 살아온 꼽추조차도 눈살을 찌푸려 흉한 얼굴을 더 흉하게 일그러뜨릴 정도였다. 정기룡이 저만치 가다가 돌아보았다. “어물거릴 시간이 없다. 늦으면 좋은 구경거릴 놓쳐!” 그는 유람하듯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관도의 서쪽, 흑룡방도들이 사라 진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꼽추도 잰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핏구덩이를 굳이 피하지 않아 걸음마다 붉은 발자국이 찍혀 나왔다. 바람이 불었다. 메마른 땅 위에 흙먼지가 높이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붉은 발자국은 흙먼지에 묻혀 차츰 흐려지고,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 모습을 귀도의 부서진 머리, 튀어나와 대롱거리는 두 눈만이 지켜보고 있었다. * * * 흑룡방의 이차 공격이 시작된 것은 석양무렵, 소운일행의 마차가 안강 부(安康府)를 지나서 대파산 (大巴山) 줄기에 막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흑도수인지, 흑창수인지 구분이 가지도 않게 무장하고 있는 백 여 명에 달하는 흑의인들이었다. “핫! 핫!” 촤! 촤악--! 통비원은 정신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오전처럼 점잖게 허공을 때려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채찍 은 살아 있는 뱀처럼 영활하게 움직여 네 마리의 말 사이를 파고들었 다. 어르고, 달래고, 꾸짖으며, 지금 통비원은 말들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 내고 있었다. 이렇게 반 각만 더 달리면 말들 스스로가 탈진해 죽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자신들이 죽는 것이다. 마차 세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넓은 관도. 그 관도를 가득 메우고 그들 뒤로 질주해 오는 저 기마대들의 손에 죽 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마차지붕 위에 있던 두 사람, 흑저와 한백이 갑자기 어자석으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 타닥! 탁! 탁! 화살비가 마차에 쏟아져 내렸다. “더 빨리는 못 달려?” 한백이 대월을 허공으로 휘둘러 마차 앞으로 떨어지는 몇 개의 화살을 튕겨 내며 소리쳤다. 통비원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백의 말에 정신을 분산할 여유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 다가온 것 이다. 사람이야 피하든 막든 화살에 맞아 죽지는 않는다 해도 말들은 그럴 처지가 못된다. 한두 대에 죽지는 않겠지만, 이 상태로라면 백 장도 더 가기 전에 말 들은 다 죽어 넘어질 것이다. 그때는 누가 마차를 끌고 간단 말인가! 그 전에 무슨 수를 쓰든 화살을 피해야 했다. 어자석에 웅크려 있던 흑저가 갑자기 앞으로 뛰어나가 마차를 끄는 말 들을 밟더니 허공으로 뛰었다. 파아앙--! 흑저의 두 손 두 발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말들 위로 떨어져 내리던 화살들이 그 원에 걸려 허공에 튕겨졌다. 흑저의 발이 다시 말등을 밟고 솟구쳤다. 파아앙--! 화살들이 분분히 튕겨 올라갔다. 맨손에 맨발로 화살을 막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하나하 나를 눈으로 파악하고 화살의 대를 때려야 비로소 가능한 일인 것이 다. 흑저가 곡예에 가까운 동작으로 방어하고는 있지만 오래 유지될 일은 아니었다. 집중력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통비원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고삐를 왼쪽으로 홱 잡아당겼다. 까르르릉--! 말들이 소리 높여 울부짖더니 일제히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차가 쓰러질 듯 우측으로 기울어졌다가 간신히 바로 서서 달렸다. 마침, 말 위로 내려서던 흑저는 발 디딜 곳이 사라지는 바람에 길바닥 으로 구를 뻔했다. 그는 급히 길바닥을 차고 뛰어오르며 말의 목을 안고 매달렸다. “니미!” 자칫 마차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던 한백이 습관적으로 욕설을 퍼부었 다. 통비원은 굳은 얼굴로 채찍질을 늦추지 않았다. 관도의 옆은 물이 이미 말라 버린 작은 강줄기, 그 너머는 울퉁불퉁한 자갈밭이었다. 그리고 그 좁은 자갈밭을 지나면 바로 험준한 산, 대파 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연봉(連峰)이었다. 마차는 강언덕으로 떨어지듯 달려 내려가더니 다시 가파른 건너편 언 덕으로 기어올라갔다. “미쳤나! 뭐 하는 거야?” 한백은 통비원의 손에서 말고삐를 빼앗으려고 덤볐다. 이렇게 험한 길은 마차보다 말이 더 잘 달린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적의 활 앞에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지형으로 마차를 몰다 니…… 겁에 질려 미치지 않고는 이럴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놔, 이 새끼야! 기운 있으면 내려가서 밀어!” 통비원이 여태 않던 욕설을 내뱉으며 한백을 밀어내었다. 한백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이마에 핏대를 올렸 다. 그러나 이 위급한 순간에 마부와 싸울 수는 없었다. “니미!” 한백은 마차에서 뛰어내려 뒤로 달려갔다. 흑저는 이미 마차 뒤를 밀고 있었다. 가파른 강언덕을 올라가려니 말 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추격해 오던 기마대가 산개(散開)하며 일부는 화살을 날리고, 일부는 강언덕을 달려 내려왔다. 타닥! 탁! 한백은 왼쪽 어깨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눈을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눈먼 화살이 꽂힌 것일 터였다. “이익--!” 한백은 온 힘을 다리와 어깨로 모아 마차를 밀었다. 아니 지금 그와 흑저는 마차를 들어올리고 있다고 해야 옳았다. 강언덕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이 장 높이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핫--! 핫--!” 유달리 빨리 추격해 온 흑의인 두 명이 칼을 휘두르며 마차의 뒤로 바 짝 붙었다. 우두두둑--! 마차가 울컥 솟구쳐 한백과 흑저의 손을 벗어났다. 마침내 강언덕을 오른 것이다. “차앗--!” 흑의인들의 파풍도가 뒤에 남은 한백과 흑저의 등줄기를 노리고 휘둘 러 쳤다. 한백이 상체를 뒤틀며 대월을 휘둘러 쳤다. 흑저는 파풍도를 피해 언덕 중턱에 튀어나온 흙덩이를 밟고 뛰었다. 끼히히힝--! 말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퍼졌다. 한백의 도끼가 흑의인들이 타고 있던 두 마리 말의 앞다리를 잘라 버린 것이다. 파--아--앙--! 흑저의 신형이 허공에서 둥글게 원을 그렸다. 파--팍--! 그의 발에 걸린 흑의인들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흑저는 선혈을 뒤집어 쓴 채로 그들의 시체 위에 떨어져 내렸다. “뛰어!” 한백이 기다시피 하며 언덕을 올라갔다. 시체들을 짚고 일어난 흑저가 그 뒤를 따랐다. 강변으로 산개한 흑의인들이 칼을 휘두르며 일제히 강을 건너오고 있 었다. 마차는 이미 자갈밭을 지나 산과 산이 겹쳐져 좁은 협곡을 이룬 곳으 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백이 뛰어가며 이를 갈았다. “저 새끼가 정말 미쳤나?” 협곡이라지만 마차가 지나갈 정도로 넓은 것도 아니고 그저 산등성이 와 산등성이가 만나는 우묵한 지점, 잘해 봐야 산으로 올라가는 좁은 소로(小路)의 시작에 불과했다. 마차를 몰고 그런 곳을 어떻게 통과한단 말인가! 과연 마차가 산중턱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서 멈추었다. 양쪽으로 빽빽 히 늘어선 나무가 그들의 통행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 마차의 지붕 위로 올라온 통비원이 체격에 걸맞게도 뭉툭한 대감도 (大坎刀) 한 자루를 손에 들고 휘두르며 소리쳤다. “빨리 올라와!” 한백과 흑저가 한달음에 그 지붕 위로 뛰어 올라섰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 한백이 눈을 부릅뜨고 따져 묻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차 너머 길도 없는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몇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 기 때문이었다. 가장 앞에서 칼을 휘둘러 길을 뚫는 것은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는 못 하지만 동가채까지의 길을 안내해야 하는 곽상이 틀림없었다. 그 뒤를 따르는 두 개의 큰 그림자는 소운을 업은 엽검영과 매아상을 업은 황거지였다. 한백은 그제서야 통비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협곡 같지도 않은 곳이나마 마차로 막아 놓고 나니 아쉬운 대로 소수 로 다수를 막을 수 있는 요새(要塞) 비슷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동안, 소운은 추격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좋아, 이제 한번 제대로 싸워 볼까?” 한백은 두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대월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흑의인들은 분분히 언덕 위로 올라와 자갈밭을 횡단하고 있었다. 그들이 닿기 전에 화살이 먼저 쏟아졌다. 한백이 대월을 팔랑개비처럼 휘둘러 화살을 막았다. 흑저의 박룡수가 현란하게 움직였다. “우욱!” 통비원이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흑저와 한백은 몰라도 그가 날아오는 화살을 막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의 몸에는 두 사람의 방어를 뚫고 들어온 화살이 세 개나 꽂혀 있었 다. 화살 비가 그쳤다. 흑저는 힐끗 통비원을 돌아보았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흑의인들이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옆구리에 낀 장창 을 던져 버리고 파풍도를 꺼내 들고 있었다. 한백의 가슴에 찬바람이 일었다. 적들도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장창 같은 긴 무기는 산속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산으로 들어갔다가는 거치적거려 싸우지도 못할 것이다. 협봉도 도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고는, 그리고 어지간한 보검(寶劍), 보도(寶刀)가 아니고는 웬만한 나무도 자르기 힘들다. 게다가 협봉도 처럼 날이 좁 은 것은 한번 나무에 박히기라도 한다면 잡아 빼다가 부러뜨리기 십상 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흑의인들은 날이 넓은 파풍도를 들고 있었다. 수목이 우 거진 산에서 사용하기에는 최적의 무기였다. “젠장, 뻑뻑해졌군!” 한백은 다시 한번 손에 든 대월을 고쳐 잡았다. 그의 가슴을 더욱 서늘하게 만드는 일이 이때 일어났다. 흑의인들이 몇몇을 빼고는 일제히 말에서 내린 것이다. 이것을 보고는 흑저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은 나무가 빽빽한 산에 못 올라가도 사람은 갈 수 있는 것이다. 소 운이 업혀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흑의인들도 당연히 갈 수 있을 것이 었다. 흑저와 한백이 길목을 막아 선 보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과연, 흑의인들은 절반 가량만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나머지 절반은 산으로 바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흑저가 한백을 돌아보았다. 한백도 그를 마주보았다. 마주친 눈빛으로 그들은 서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통비원이었다. 화살에 관통되어 주저앉아 있던 통비원이 그들의 뜻을 짐작했는지 신 음하듯 말했다. “날 버리고 가시오!” 흑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렇게 생명을 바쳐 가며 소운을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일까? 통비원이나 귀도의 생명이 과연 소운보다 값이 싼 것이란 말인가? 통비원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난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한 달간이었습 니다. 대사를 만나면서……!” 흑저가 떨리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앗--!” 그때,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 세 명의 흑의인이 마차 위로 뛰어오르며 파풍도를 내리쳐 왔다. 한백이 대월을 휘둘렀다. 까까깡--! 파풍도들이 육중한 대월에 밀렸다. 그 기세에 마차에서 떨어지는 흑의인들을 발판삼아 밟고 다시 세 명의 흑의인이 뛰어 올라왔다. 미리 각본을 짜서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정교하게 맞아떨어지는 연속 공격이었다. 설사, 앞선 세 흑의인이 한백의 일격에 죽었어도 이차공격 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었다. 밟고 올라온다는 것 자체가 일차공격조가 시체로 변했을 경우까지 감 안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많았다. 그러나 한백이든 흑저든 힘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흑저가 살기로 눈을 빛내며 돌아보았다. “이야압--!” 그 순간,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양 팔을 벌리고 뛰어나갔다. 파풍도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통비원은 최후의 신력을 발휘한 것이 틀림없었다. 몸에 깊이 박힌 세 자루의 칼날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힘으로 흑의인 세 명을 안고 마차에서 밀어낸 것이다. 그 행동이 삼차공격조의 진로까지 방해했다. “튀어!” 한백이 뒤로 뛰었다. 흑저는 그 말에 본능적으로 반응해 산으로 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지붕으로 흑의인들이 뛰어오르고 있었다. ‘통비원은?’ 이제는 생각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흑저는 고개를 숙이고 소운이 사라졌던 그 수풀로 파고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들을 따라잡아야 또 다른 공격에 대비할 수 있 는 것이다. * * * 두두두두두--! “정지--!” 관도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속에서도 또렷한 명령 소리였다. 오십여 필의 말이 일제히 앞발을 들어올렸다가 내렸다. 기수들의 은빛 경장과 은빛 검이 말머리가 향한 방향에서 비스듬히 비 춰 오는 석양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선두의 백마에 올라탄 사내, 곽자비검 모용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관 도에 즐비한 시체들을 둘러보았다. 흑의인 일색의 시체들, 그 중 하나를 그의 손이 가리켰다. 뒤에 선 말에서 한 은검대원이 뛰어내리더니 모용초가 가리킨 물건을 주워들어 보였다. 부서져 있었지만 모용초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부서진 머리의 주인은 귀도였다. 돼지새끼처럼 생긴 파계승과 함께 그들 금룡장의 무사들이 고개를 들 수 없도록 만든 자! 무엇보다 그들 은검대의 부대주를 죽인 인물! 모용초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내 손에 죽었어야 했었던 것을……. 운이 좋군!” 그는 서산에 넘어가는 붉은 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방향이 확실하다, 가자!” 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도에 누운 시체들은 다시 한번 말발굽에 밟혀야 했다. 귀도의 머리를 들었던 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앞서가는 모용초를 보았다. 모용초는 앞서 간 소운을 쫓는 것에만 정신이 가 있는 듯했다. 소운만 다시 찾는다면 이런 머리통 하나야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는 더러운 물건을 버리듯 귀도의 머리를 던져 버리고 얼른 침을 뱉 었다. 귀도의 머리는 다시 한번 길바닥에 뒹굴며 관도 저편으로 멀어져 가는 먼지구름을 지켜보아야 했다. * * * 탁--! “초보적인……!” 흑의인은 소리가 난 반대쪽으로 돌면서 파풍도를 휘둘렀다. 그랬다. 돌을 던져 소리를 내고 반대편에서 암습을 가하는 것은 초보적인 속임 수였다. 그러나 그만큼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소리가 나면 일단은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흑의인의 동작도 예기(銳氣)에 있어서나, 반응의 속도도 자신의 힘을 완벽히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검은 그림자가 파풍도 밑으로 파고들어 왔다. 슈--팡--! 흑의인은 사타구니에 강한 충격을 받고 한 순간 정신을 놓았다. 그 다음은 끝이었다. 몇 대의 타격이 더 가해졌지만, 그는 더 이상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시체로 화해 숲속에 뒹굴었다. 살인자인 검은 그림자, 흑저는 이미 메마른 수풀 속으로 자취를 감추 었다. 풀잎 스치는 소리만이 거기 남았다. 숲속으로 들어간 적을 쫓지 말라는 것은 무림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지금 소운을 쫓는 흑룡방의 경우가 그랬다. 설사 암습을 받아 그들이 모두 죽는 한이 있어도 소운은 반드시 잡아 야 했다. 그것이 그들이 받은 명령이었다. 게다가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그들이 숲이라고 해서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저 토끼몰이 하듯 몰아서 잡아 죽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쫓는 목표는 토끼가 아니라 인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도 위기에 몰리면 토끼 정도의 사고(思考)밖에 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 소운 일행 중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도 냉정할 수 있는 인간이 하나 있었다. 소운이었다. 그는 엽검영의 등에 업혀 가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했 다. 지금 그들이 처한 입장에서는 사람의 힘만으로는 안전하게 도주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천시(天時), 그리고 지리(地利)다!’ 이 두 가지를 그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것에 탈출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소운은 인식하고 있었다. ‘천시는……?’ 연이은 가뭄으로 메마른 대기(大氣), 메마른 수풀, 그리고 바람이었다. ‘지리를 찾아야 한다!’ 소운의 뇌리 속에 그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들에게 유리 한 지형을 찾는 것으로 그림은 완성될 것이었다. 소운의 눈이 번쩍 빛났다. 지리를 찾는 것도 천시에 들어간다면 천시는 확실히 소운에게 있었다. “한백!” 뒤를 경계하면 따르고 있던 한백이 소운의 옆으로 왔다. 흑저가 숲속에서 흑의인들을 가로막는 동안 한백은 소운일행을 따라잡 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운은 그들이 가고 있는 작은 산길의 옆으로 뻗은 험준한 계곡과 그 계곡 옆에 선 장대한 고목을 가리켰다. “저걸 넘어뜨릴 수 있겠지?” 한백은 눈살을 찌푸렸다.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고목은 두세 사람이 팔을 돌려 안아야 간신히 닿을 정도로 굵고 컸다. 한백의 대월로도 삼, 사십 번은 찍어야 넘어갈 것이다. 소운이 그들이 서 있는 건너편 계곡을 가리켰다. “저기로 넘어뜨리는 거야!” 한백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소운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나무로 다리를 놓아 계곡을 건너자는 것인데, 약간 시간을 지연시킬 뿐 별다른 이득이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 사이에 적이 쫓아오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절벽을 등뒤에 두고 싸운다는 최악의 경우가 올지도 몰랐다. 어쨌든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이런 경우에 의견이 분산되면 그 자체 가 실패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한백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군소리없이 고목으로 다가가 밑둥을 찍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도끼날이 메마른 고목을 파고들어 가는 쩡쩡거리는 소리가 빽빽한 나무사이로 울려 퍼졌다. 대파산 줄기로 얼마나 들어온 것일까? 해는 이미 지고, 희미한 붉은빛만 남아 그들을 둘러싼 산의 윤곽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얼마 안 가서 그 빛마저 사라지고 나면 소운일행이 도망갈 수 있는 기 회는 그나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추격자들은 하나하나가 훈련된 자객들이지만 그들은 한백과, 저 뒤 수 풀 어딘가에 남아 적들을 방해하고 있을 흑저를 제외하면 야간에 자유 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내내 매아상을 업고 왔다가 근처 바위 위에 내려놓고 짧은 휴식을 취 하던 황거지가 투덜거렸다. “사람이 재수가 없으면 날씨까지도 이렇게 추운 것일까?” 소운을 업은 채 바위 위에 주저앉아 땀을 닦던 엽검영이 얄밉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영감이 왜 재수가 없어?” 황거지가 태연히 대답했다. “거지도 내 나이쯤 되면 양지바른 성황묘 담벼락 아래에서 졸개들의 공양을 받아 가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나 주력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야. 그런데 이 추운 날씨에 산정에서 떨고 있으니 운수 불길하다 아니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엽검영이 기가 막혀 웃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를 갈며 분노했다. “듣자듣자 하니 이 얼어죽을 영감이…… 오백 냥짜리 금괴는 어쩌고 여기까지 쫓아와서 헛소리야?” 그쯤 해서는 황거지도 염치가 없는지 우물거렸다. “돈이라는 게 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엽검영이 소리를 빽 질러 그 말을 끊었다. “돈에 환장한 늙은이야! 남들은 평생 만지기도 힘든 거금을 다 어쩌 고 여기까지 따라와서 사람 속을 뒤집어! 어디 첩이라도 몇 명 키우고 있냐? 안 그러고서야 그 돈을 다 어디다 썼어?” 황거지가 바지춤을 만지며 다시 우물거렸다. “그거야 여기 있지만…… 내일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일이니……. 또……!” 엽검영이 분노에 몸을 떨며 벌떡 일어났다. “요즘은 거지도 돈을 모아 두냐? 그러면서 이 시대의 마지막 거지가 뭐 어쩌고 어째?” 우지끈, 쾅--! 굉음이 일어났다. 깜짝 놀란 그들의 눈앞에 계곡을 가로질러 쓰러진 고목이 보였다. 여태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말다툼을 듣고 있던 소운이 건너편을 가리 켰다. “일단 저리 넘어가면 춥지는 않게 해 주지!” 소운은 다시 곽상을 보았다. “불 피울 수 있겠지?” 곽상은 파리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쉴 때가 아니잖은가?’ “어디에 말입니까?” 소운이 자기들이 막 나온 숲을 가리켰다. “아!” 곽상이 희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곧 안색이 변해 바로 고개 를 저었다. “흑저가 아직 숲속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몇 달째 비가 오지 않아 산은 메말라 있었다. 굳이 불을 붙이지 않아도 중원 곳곳에서 산불이 쉼없이 나고 있는 것 이 요즘의 실정, 이럴 때 소운의 말대로 숲에 불을 지르면 대단한 효 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계곡을 건너가 있으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흑저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상관없으니 붙여!” 곽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는 것이…….” 소운은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한백!” 제 18 장 그물 뚫고 나온 고기... 그물 뚫고 나온 고기 그물에 머문다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동녘에는 둥근 달이 떠올랐는데 하늘은 붉게 물 들어 있었다. 뱀의 혀처럼 일렁이는 불길이 허공으로 치솟아 붉은빛을 뿌려 대고 있 는 것이다. 계곡 건너편에 서 있는 곽상의 얼굴까지 열기가 끼쳐졌다. 가 보진 않았지만 지옥의 열기가 아마도 저럴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뜨거운 화염이었다. 그러나 더 뜨거운 것이 지금 곽상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분노였다. 소운에 대한 참기 힘든 적개심이 그의 가슴 속에서 푸른 불꽃으로 피 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엽검영이 소리쳤다. “저기, 저……!” 화염에 휩싸인 숲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붉은 화염을 뒤로 하고 나타난 땅딸막한 체구의 사내, 흑저였다. 그의 검은 가사 여기저기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곽상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구해야 돼!” 한백의 목소리는 대조적으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수로?” 곽상은 계곡으로 달려갈 듯하다가 우뚝 서 버렸다. 그렇다. 무슨 수로 그를 구하는가? 그들이 건너온 고목을 계곡 아래로 밀어 버린 것이 조금 전이었던 것 이다. 곽상은 그 일을 하는데 힘을 보탠 자신의 두 손목을 잘라 버리고 싶다 는 생각을 갑자기 했다. 계곡 건너편에서는 흑저 말고도 몇 개의 인영이 더 나타나 있었다. 하나같이 파풍도를 움켜쥔 흑의인들, 흑룡방의 살수 들이었다. 흑저는 계곡으로 다가와서야 사태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두운 눈빛으로 계곡 건너편에 선 그들을 바라보더니 다시 그의 뒤에 나타난 무리들을 보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놀려 불타오르는 검은 가사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뒤돌아 서서 흑의인들을 정면으로 대했다. 곽상이 소리쳤다. “살아 남거든……!”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백이 대월의 뒷등으로 뒤통수를 후려갈겼던 것이다. “더 말하게 놔두면 무슨 말까지 할는지……!” 그는 변명하듯 중얼거리며 곽상을 들쳐업었다. 곽상은 아직 필요가 있었다. 동가채까지 안내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계곡 건너편에서 흑저가 뒤돌아선 채 한 손을 들어 잠깐 흔들어 보였 다. 한백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저 손짓은 누구에게 한 것일까? 곽상? 아니면 우리 모두? 무슨 뜻인 가? 걱정 말라? 두고 보자? 이별을 고하는 것인가?’ 그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극히 단순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몸짓이 그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다. 한백은 그 모습을 마지막 남기는 흑저의 유언이라 생각하고 뒤돌아 섰 다. 황거지는 화광(火光) 속에 드러난 흑저의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보 고 있다가 탄식하며 돌아섰다. “멍청하면 이용만 당하다 저렇게 죽는 것이지! 그렇게 깨우쳐 줬건 만……!” “멍청한 것인가요?” “응?” 황거지는 귓가에 나직하게 들린 목소리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는 바로 그의 등에 업힌 소부, 매아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었다. “그가…… 멍청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냐구요…….” 황거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매아상의 별빛 같던 눈은 지금 안개 가 낀 것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황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저었다. “멍청한 놈이죠……. 하지만 이대로 죽을 놈은 아닙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걷기만 하던 그가 다시 말했다. “살다 보면 불에 잘 익지 않는 돼지도 보는 법이죠!” 웃기려고 한 소리였지만 매아상에게는 전혀 우습지 않았던 모양이었 다. 매아상에게서는 다시 반응이 없었고, 그 또한 아는 척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등으로 전해 오는 가는 떨림만으로도 그녀의 감정이 어떤지 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담담한 소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정도 너비의 계곡으로는 불길을 오래 막지 못할 거야! 지금 역풍 (逆風)이 불고 있지만 말이다. 불길이 우릴 쫓아오기 전에 이 산을 빠 져 나가야 한다!” “그러죠!” 한백의 짧은, 그러나 어쩐지 억눌린 듯한 대답이 뒤를 이었다. * * * “대주님, 저기!” 은검대원의 경호성이 없었어도 곽자비검 모용초가 그 모습을 못 볼 리 가 없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타오르는 저 산과 숲들을 눈 있는 사 람이면 못볼 수가 없는 것이다. 바람은 서에서 동으로 점점 거세게 불고 있었다. 불길은 그 바람을 타고 대파산 줄기를 따라 거침없이 달려가며 그 발 길에 걸리는 모든 것들을 삼켜 버리고 있었다. 이미 대여섯 개의 산봉우리는 화마(火魔)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린 것 처럼 보였다. 모용초는 관도의 옆으로 흙을 파헤치며 굽어진 마차자국과 멀리 강언 덕 너머 불길에 비쳐 보이는 몇 마리의 길 잃은 말들을 바라보았다. 소운과 그를 추격하는 흑룡방의 살수 들이 그 산으로, 이제는 불길에 휩싸여 화염지옥이 되어 버린 그 산으로 들어갔음이 분명했다. ‘죽었을까?’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되었든 상관없었다. 문제는 소운의 생사(生死)였 다. 불이 꺼진 산을 샅샅이 뒤져서 타 버린 뼛조각이라도 찾아내어 들고 가지 않는다면, 그것도 어떻게든 그것이 소운의 것이라는 증거를 들고 서 가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그가 태워지고 말 것이다. 모용초의 손이 관도 서쪽을 가리켰다. “불길이 닿지 않은 산부터 수색한다! 착안점은 산에서 나오는 자를 포착하는 것이다!” 은검대에 항명은 없다. 잠시 멈추어 있던 기마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용초는 불길에 휩싸인 산들을 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산귀(山鬼)가 불쌍하게 되었군!” * * * 흑저는 두 팔을 내린 자세로 고요히 서 있었다. 살이 익어 버릴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그가 서 있는 곳까지 밀려왔 다. 벌거벗은 웃통이 붉게 달아오르고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고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서는 십여 명의 흑의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불길이 달리는 속도는 인간의 그것보다 빠르다. 불을 보고 뒤로 도망친 자들은 거의가 불길에 휩싸여 숯덩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불길이 확산되기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든 자들은 안전할 수 있었다. 백여 명이 산 전체에 흩어져서 추격해 왔지만 살아난 것은 발화지(發 火地)에 가까이 왔던 그들 십여 명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흑저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이 선 곳은 오 장 너비의 공터, 흑저가 선 곳은 벼랑의 끝이었다. 도망갈 곳은 없었다. 무표정하게 다가오던 십여 명의 흑의인 중 앞의 셋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전질보(前跌步)! 단지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지만 사실은 양 발이 동시에 미끄러지며 일이 장의 거리를 좁혀 드는 보법 이었다. 슈파악--! 세 자루의 파풍도가 이름 그대로 바람을 가르며 흑저를 베어 왔다. 좌(左)와 우(右), 그리고 정면의 중단(中端). 벌거벗은 흑저의 맨몸에 세 줄기 칼자국이 생길 찰나에 아래로 늘어져 있던 박룡수가 좌우로 치켜 들렸다. 따당--! 양쪽으로 베어 오던 파풍도가 허공으로 튀었다. 나머지 한 자루가 흑저의 기문혈 (氣門穴)로 바짝 다가왔다. 흑저는 칼을 향해 한 걸음 나가며 우측으로 몸을 뒤틀었다. 두 손이 모이고 오른쪽 팔꿈치가 상대의 명치로 뻗었다. 슥--! 가슴이 서늘해지는 감촉. 팡--! 흑저의 오른쪽 팔꿈치가 중앙의 흑의인을 삼 장 밖으로 날려 버렸다. 슈악--! 튕겨졌던 두 자루의 칼이 흑저의 목을 노리고 되돌아왔다. 흑저는 정면을 향해 한 걸음 나갔다. 츄욱--! 칼날이 그의 뒷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흑저는 다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앞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두 걸음, 두 동작이 마치 한 걸음으로 보일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 간발의 순간에 칼날은 목표를 잃고 허공을 벤 것이다. 반원을 그리며 올라간 흑저의 두 손에 두 흑의인의 목이 잡혔다. 목밑에 틀어박힌 검은 박룡수! 흑의인들은 숨통이 막히기도 전에 먼저 공포로 전율했다. 흑저가 나직하게 말했다. “여전히 날 죽이고 싶은 것인가?” 그를 둘러싼 흑의인들이 그 고요함 속에서 풍겨 나오는 가공할 살기에 질려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섰다. 흑저는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치미는 살기로 전신이 터질 것처럼 팽창하고 있었다. 소운이 그를 버리고 가서 분노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을 향해 입을 벌린 저 가공할 탐욕의 덩어리, 산을 둘러싸고 타오 르는 불길 속에서 한 뼘 공간을 차지하고 간신히 선 이 지옥도. 그 속에서 서로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으르렁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아 귀 (餓鬼), 야차 (夜叉)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짐승들조차도 재난을 피할 때에는 서로를 해치지 않는 것인데도……, 어차피 죽을 목숨들끼리 서로를 꼭 자기 손으로 죽여야 만족할 수 있 는 것이 인간이란 것인지! 흑저는 이를 악물고 양 손에 힘을 주었다. 뼛속으로 스며드는 고통, 양 손아귀에 무겁게 느껴지는 뭉클한 질감이 무서울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우두둑--!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두 흑의인의 목뼈가 부러져 나갔다. 흑저는 축 늘어진 두 개의 시체를 앞으로 던지고 우뚝 서서 정면을 노 려보았다. 그를 죽여야 한다는 강박감에 지배당해 당연한 것처럼 다가서던 흑의 인들이 공포에 질려 주춤 뒤로 물러섰다. 우--우--우--! 그때,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포효가 불길 속에서 새어 나왔다. 동요하던 흑의인들의 얼굴이 그 소리에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조금씩 아래로 처지던 칼들이 다시 적의(敵意)를 띠고 흑저를 겨누었다. 파--앙--! 붉고 푸른 불똥들이 허공으로 터져 올랐다. 길을 막은 불붙은 나무 등걸들이 폭발하듯 솟구쳐 오르고 그 불길 속 에서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간의 형체를 띠었지만 인간이라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분명히 자연적으로 생긴 것은 아닌 검은 안개가 그를 둘러싸 모습 자 체가 모호하게 일렁거리는 형체였다. 간신히 식별이 되는 사람의 형체 오른쪽 윗부분에 일렁거리는 것은 연 기인가, 아니면…… 깃발? 초혼귀(招魂鬼) 원체체(猿涕涕)! 중원사흉 중 첫째인 그를 제대로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러나 그는 당당히 천하제일(天下第一)의 흉인(兇人)이었다. 그를 만난다는 것은 죽음과 대면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었 다. 그래서 그의 병기인 초혼번(招魂幡)은 본 사람도, 그 위력도 아는 이가 없었지만, 무림십대흉기의 하나였다. 세인들은 모르지만, 구두룡의 하나인 산귀가 바로 그였다. 구신(九神) 중 또 하나가 흑저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개가 일렁거리며 분노와 살기가 가득 찬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크으--흐-- 흑--저--?” 녹슨 쇠붙이들이 마찰하는 듯한 소음이 귀를 찔렀다. 흑저는 여태 이렇게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살기와 대면한 적이 없었다. 흑저는 이 순간 자신이 상처입은 야수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는 것을 알았다. 야수는 대답을 기다려 줄 줄을 몰랐다. “죽-- 어-- 라--!” 포효가 터져 나오고, 검은 안개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휘파람 같은, 이 리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대기를 찢어발겼다. 우--우--`우--! 흑저는 순간적이지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휘파람 같은 소리를 듣는 순간 심령이 흔들리는 듯한 묘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검은 안개가 그의 면전으로 닥쳐 들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양 팔을 올려 얼굴과 가슴을 가렸다. 촤--악--! 흑저는 한 순간,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의 전신에서 피가 뿜어지고 있었다. 마치 가시덤불 위로 구르는 느낌! 검은 안개 속에 숨겨진 예리한 가시들이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부--욱--! 흑저는 공중으로 떴다. 가시덤불이 그의 맨몸을 긁고 살을 헤집으며 삼 장이나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쿵--! 전신이 으스러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흑저는 뜨거운 대지 위로 공처럼 굴렀다. “크--아--아--!” 포효가 그를 따라왔다. 검은 안개, 그 속에 숨은 가시처럼 날카로운 예기까지! 흑저는 본능적으로 땅 위를 굴러 그 예기를 피했다. 촤아악--! 땅 위에 수십 줄기의 고랑이 팼다. 산귀의 초혼번은 단순히 정신을 흩트리는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일반적인 무기로는 도저히 만들기 불가능한 자국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치 그 기폭은 가시덤불 수십 줄기를 엮어 만든 것처럼 부드럽고도 날카로웠다. 그리고 자유자재로 움직여 흑저를 쫓아왔다. 우--우--웅--! 초혼번의 기세에 불길마저 소리치며 일렁거렸다. 흑저의 몸이 다시 거기에 감겨 피를 뿌리며 내동댕이쳐졌다. 상대를 공격하려 해도 보이지가 않았다. 공격을 피하려 해도 역시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상대의 사각(死角)으로 들어가 형체를 감추고 상대는 명확히 파악해 공격권 안에 두는 것! 이것이 박투술 의 제일원칙이었다. 그러나 지금 산귀는 그 원칙을 적용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 일렁거리는 윤곽만을 근거로 접근했다가는 맨몸으로 호랑이 아가리 에 뛰어드는 격이 되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흑저는 알고 있었다. 슈파악--! 공기를 찢으며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흑저는 맹렬하게 땅 위를 뒹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팍--! 옆구리에 와 닿은 뜨거운 통증이 흑저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 게 해 주었다. 그는 불붙은 나무등걸에 부딪친 것이다. 순간, 그의 뇌리에 스치는 한 줄기 빛이 있었다. 흑저는 두 손을 뻗어 불타오르는 나무등걸을 안고 그 너머로 굴러 들 어갔다. 온몸이 화끈했다. 찢겨진 몸에 화기(火氣)가 직접 파고들어 오는 것이다. 팡--! 흑저가 몸을 숨긴 나무등걸에 검은 안개가 부딪쳤다. 나무등걸은 화약 이라도 닿은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그러나 거기에 흑저는 이미 없었다. “우--후--우--!” 산귀는 분노에 가득 찬 신음을 흘리며, 달려가는 흑저의 뒷모습을 보 았다. 차라리 불에 타 죽겠다는 것처럼 흑저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산귀는 잠시 주춤했다. 어떻게 할 것인지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 순간, 산귀도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우웅--! 두 사람을 삼킨 불길은 신음하며 몸을 뒤틀고, 허공을 향해 긴 혓바닥 을 날름거렸다. 이제 하늘조차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 * 삼 경(三更)이 되어도 하늘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밤하늘에 금가루처럼 뿌려져 있을 별들도 오늘밤은 보 이지 않았다. 그저 동에서 서로 길게 뻗은 불길, 하늘을 찌르는 붉은 화광(火光) 위 로 붉은 달만 흐리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은검대원들은 아무도 말을 못하고 있었다. 다만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 장엄하면서도 공포스러운 장면 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메마른 대지와 산하(山河) 위로, 아귀 같은 인간의 터전 위로 떨어져 내린 하늘의 분노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좋지 않군!” 모용초가 중얼거렸다. 옆에 서 있던 은검대원 하나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모용초는 손을 들어 머리위로 곧추세웠다. “바람이 말이다!” 그 말에야 그들은 깨달았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있었다. 아까까지 서에서 동으로 불던 바람이 불길의 영향 때문인지 발길을 돌 리고 있었던 것이다. 은검대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 소운일행이 들어갔던 산을 향해 서에서 동으로, 즉 바람 의 방향과 같이 전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제 곧 그들을 향해 불 길이 다가온다는 의미였다. 누굴 찾기 전에 그들이 먼저 통구이가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저 지옥 같은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한단 말인가? 그러나 모용초는 그러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좌우를 가리켰다. “간격을 삼 장에서 오 장으로 넓히고 계속 전진한다!” 은검대에는 항명이란 없었다. * * * 곽상은 손을 들어 멀리 험준한 산봉우리 사이로 고개를 내민 봉우리 하나를 가리켰다. “아직 하루는 더 가야 도착하겠지만 저 봉우리가 성자산 와호봉(臥虎 峯), 저희 동가채가 있는 곳입니다.” 한백의 등으로 자리를 옮겨간 소운이 곽상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곽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소맷자락 속에서 수리도 한 자루를 꺼내 황 거지에게 내밀었다. “이걸 가지고 가시면 제 손님인 줄 알 것입니다.” 이번에는 한백이 물었다. “그래서?” 곽상이 뭘 하려는지 짐작한다는 어쩐지 곱지 않은 눈길이었다. 곽상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결국 말없이 뒤를 가 리켰다. 멀리 봉우리 사이로 붉게 물든 하늘, 그 아래 어딘가에 흑저가 있을 것이다. 황거지가 멍하니 그 하늘을 보더니 물었다. “그는 죽었을지도 몰라. 가면 너만 개죽음 당하는 것일 수도 있 고……, 그런데도 가겠다는 거냐?” 곽상은 고개를 숙였다. “저는 협(俠)도, 의(義)도 모르는 일개 도적 나부랭이에 불과합니다만, 마음이 편치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황거지는 그만 탄식했다. 오던 길로 되돌아 사라지는 곽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백 이 갑자기 툭 내뱉듯이 말했다. “죽여 버릴까?” 소운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돼 가는 대로 놔둬 보지!” “그러다가 그들에게 포착되기라도 하면 동가채까지 드러날텐데?” 소운은 다시 침음했다. 그리고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둬 보자!” 한백은 그런 그를 묘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평소와 다르네?” 소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불이 뜨거운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오래 있으면 타 죽는다는 것도 그렇다. 더욱이 그 속에서는 타 죽는 것보다 숨이 막혀 죽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었다. 불타오르는 숲, 연기 자욱한 그 아궁이 속에서는 말이다. 흑저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나갈 곳을 찾지 못해 허둥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검은 안개가 그를 쫓아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또한 나갈 길은 아까 그가 들어온 그곳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계곡이 있고, 그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산을 벗어날 가능성 이 있는 것이다. 막연한 기대요, 실낱 같은 가능성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거기로 돌아가려면 먼저 검은 안개, 그 속의 사내를 죽여야 했 다. 그러려면 지금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지금의 적은 용수 진립동과는 다른 의미에서 강적이었다. 그리고 그 강함의 비결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진립동은 전면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유명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의 무공은 정도(正道)의 것이었고, 원칙을 따르는 것이었기에 드러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수준이 상상도 못할 만큼 강하다 해도 결국은 흑저가 알고 있 는 무공원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검은 안개 속의 사내는 모든 것이 가려져 있다. 그가 쓰는 무기의 종류도, 그의 모습도, 심지어는 키가 큰지 작은지, 남 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은형술 (隱形術)과 기문병기(奇門兵器)에 상대할 방법을 찾지 못 하는 한 그는, 진립동만큼이나 강하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은 진립동이 우위였다. 그것이 당연했다. 진립동은 드러나 있는 상태에서도 강하지만, 그는 가려져 있는 상태에 서,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강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흑저는 그를 드러나게 하려 하는 것이다. 검게 탄 바닥은 뜨거웠다. 아니 타오르고 있다고 해야 더 정확했다. 최초에 타오르던 아름드리 고목들은 숯덩이가 된 상태에서도 아직 불 길을 내뿜고 있었고, 바위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흑저의 맨발이 딛는 모든 것이 입을 열어 열기를 토해 내고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연기가 다시 밀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의미였기에 중요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를 안고 같이 숯덩이가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흑저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아직은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드드득--! 쿵--! 검게 타오르는 고목이 중동에서부터 꺾여 쓰러졌다. 흑저는 그 고목을 건너뛰어 백열(白熱)하는 바위를 짚고 다시 뛰었다. 두꺼운 발가죽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지 닿는 대로 벗겨져 나갔다. 순간적으로 살이 익어 피도 흐르지 않았다. 휘유우우--! 순간, 불길을 동반한 한 줄기 기운이 공중에 뜬 흑저를 향해 뻗었다. ‘나타났다!’ 흑저는 오른쪽 박룡수로 그 기운에 정면으로 마주쳤다. 팡--! 불길이 흩어졌다. 그 속에서 가시돋친 은빛 사슬 같은 것이 줄줄이 뻗어나와 흑저의 팔 을 감았다. 초혼번의 정체가 드러났다. 흑저는 그 사슬에 끌려가면서 여태 그를 괴롭히던 무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깃발. 깃폭이 가시돋친 은빛 사슬로 그물처럼 엮인 깃발이었다. 파파파악--! 뜨거운 흙이 파헤쳐졌다. 흑저의 발은 살갗이 벗겨지면서도 완강히 땅을 파헤치며 버텼다. 그를 끌어당기는 힘의 방향이 변했다. 사슬들은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지고, 반대편의 깃봉이 원을 그리며 흑 저의 머리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흑저는 갑자기 여태 버티던 힘을 풀고 깃발이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뛰 었다. 그의 머리로 휘돌려쳐 오는 깃봉에 속도가 붙었다. 흑저의 박룡수가 그 깃봉을 막았다. 깡--! 흑저는 내장이 진동되어 피를 토하며 비스듬히 날려 갔다. 땅으로부터 솟구치는 뜨거운 열기에 피는 곧 역겨운 냄새와 함께 연기 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격돌의 충격 덕분에 그는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뜨거운 열기를 끊임없이 토해 내는 검은 땅 위로 뒹굴었다. 그리 고 다시 뛰었다. 아까보다 현저히 축소된 검은 안개가 그 뒤로 따라붙었다. 쾅--! 으드드득--! 불타오르는 나무 한 그루가 그 위로 무너져 내렸다. 검은 안개, 산귀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팡--! 붉게 달아오른 바위가 부서져 나가며 파편이 우박처럼 그에게 쏟아졌 다. “으--흐-- 아--악--!” 산귀는 극도의 분노로 포효하며 돌이 날아오는 쪽으로 오히려 달려들 었다. 그는 흑저의 박룡수가 그러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흑저는 뒤로 뒹굴었다. 콰앙--! 그의 등에 불타는 나무등걸이 부딪쳤다. 산귀가 주저앉은 흑저의 머리위로 깃발을 후려갈겨 왔다. 흑저는 주저앉은 채 몸을 비틀었다. 쾅--! 그의 오른쪽 팔꿈치가 뒤로 돌아가 기대어 앉은 나무의 밑둥을 후려쳤 다. 혼신의 힘으로 후려갈긴 일격이었다. 드드드드드--! 불타오르는 검은 나무, 이제는 내부에서부터 푸른 불꽃을 뿜어내는 숯 덩이라 불러야 좋을 그것이 밑둥에서부터 부러져 나갔다. 나무는 흑저의 등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그대로 앞으로 기울었다. 산귀의 머리위로 거대한 숯불덩어리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흑저는 두손 두발로 땅을 받치고 몸을 일으켰다. 등이 불타오르는 것같이 뜨거웠다. 그러나 뜨거움은 잠시지만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다. 흑저가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나무는 한층 빨리 쓰러졌다. 그 궤적에 산귀가 정면으로 들어갔다. 그는 급히 초혼번을 휘둘러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는 나무를 옆으로 쳐 내었다. 퍼엉--! 초혼번에 부딪친 나무가 두 동강이 나며 옆으로 밀렸다. 불똥이 폭죽처럼 튀었다. 흑저는 그 불똥을 헤치고 불꽃 속에 밝게 드러난 사람의 그림자, 산귀 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산귀의 눈앞에 붉은 몸뚱이 하나가 나타나더니 이내 그의 눈에 꽉차 버렸다. 초혼번이 쳐낸 나무 아래로 어느새 흑저가 돌진해 온 것이다. 초혼번이 나무를 후려쳐 생긴 불꽃으로 시야가 가리워져 흑저의 형체 를 놓친 그 순간, 그리고 그 자신은 불꽃 속에 모습을 드러낸 그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산귀는 눈을 부릅떴다. 뜨거운 인두로 배를 쑤시는 듯한 고통이 그의 모든 의식을 집중시켰 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배를 뚫고 들어간 박룡수는 틀림없이 그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검은 안개가 걷히고 드러난 두 눈, 강퍅한 얼굴에 피처럼 붉은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주루룩--! 말보다 피가 먼저 흘렀다. “크--으--으--, 흑--저--?” 처음의 그 질문이었다. 흑저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리고 그 사내의 배에 꽂은 박룡수를 잡아 뺐다. 붉은 창자들이 그 손에 걸려 같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산귀가 나무를 후려치는 그 순간에 적을 완전히 포착하고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자(一尺) 일곱 치(七寸)! 눈과 눈이 마주치고, 팔과 팔이 부딪치는……, 생사(生死)가 나뉘어지 는 그 간격으로……. * * * 날이 밝았다. 그리고 다시 황혼이 되었다. 그렇게 두 번을 더 거듭해 산불이 대파산 을 휘감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다. 불길은 지치지도 않고 연일 새로운 산과 들을 집어삼키며 번져 나가 이제는 동서로 오백 리가 완전히 연기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누구도, 그리고 어디에서도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엄청난 산불 이었다.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불길에 휩싸인 산과는 아직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숨막히는 열기가 은검대원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은근한 원망이 깃들인 눈으로 그들의 대주, 모용초를 바라보았다. 이 불길 속에서 누가 살아나온단 말인가? 혹시 살아나온다 해도 이렇게 오십 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이 광대한 지역을 어떻게 다 감시할 수 있을 것인가? 시간 낭비에 불과한 이런 일을 하다가 불길에 포위되기라도 하면 개죽 음밖에 안될 것이다. 그런데 모용초는 끝끝내 소운을 찾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불길이 심상치 않았다. 바람을 타고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 다. 이렇게 버티다간 그들도 불길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은검대원들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속이 답답하긴 모용초가 더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소운을 찾아가거나, 적어도 그가 죽었다는 흔적만이라도 가 져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신의 손으로 찢어 죽이기 전에는 죽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을 그렇게 하지 않고서 어떻게 납득시킨단 말인가! 모용초는 자신의 목에 대사명의 싸늘한 손길이 닿는 것을 원하지 않았 다. 금룡장 은검대주 이전에 구두룡의 지배를 받는 비밀요원 유혼(流魂)의 신분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해도 이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 살아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용초는 타오르는 산과 들을 바라보았다. 불길이 거세지고 있었다. 특별히 그럴 이유가 없는데 위력이 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그 들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직 불길이 닿기 전인데도 숨막히는 열기가 먼저 그들을 휘어 감고 있었다. 소운과 그 일행은 저 불길 속에서 잿더미가 되었거나 아니면 이미 그 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렸을 것이다. 산귀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은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 다. ‘어쩌면 산귀도 잿더미가 되어 버렸을지도……?’ 그렇다면 여기 이대로 기다리고 있어 봐야 얻을 것이라곤 뜨거운 공기 나 마시는 것뿐일 것이다. 그는 입을 벌려 돌아가자고 말하려 했다. 삐--익--! 그때,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무엇인가 발견했다는 신호였다. 모용초는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그는 경보가 울린 곳을 향해 화살이 쏘아지듯 나아가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있나!” 정기룡은 자못 감탄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무공은 둘째치고 저 생명력만은 인정해 줘야겠군!” 옆에 서 있던 꼽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불타오르는 숲과, 거기 모여드는 은 검대의 무사들을 보려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정기룡과 그는 산 중턱에 불거져 나온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은검대원들에게 발견되지 않기 위해 적잖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안 력이 모자란 꼽추로서는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은검대원들이 무엇을 목표로 모이는지는 알 수 있었다. 불타오르는 산 속에서 비척비척 걸어나오는 한 사람이었다. 옷은 거의 불에 그을리고 타 버려, 벌거벗은 것과 다름없었고, 온몸은 화상으로 붉게 부어오르고 군데군데 검게 탄 자국마저 있었지만 그것 은 분명 사람이었다. 꼽추는 그것이 누구라는 것까지 식별할 수 있었다. 저 특징 있는 체구만 보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탄식했다. “지, 지옥의 불길을 뚫고 나왔더니, 이번엔 호랑이 아가리라……, 저, 저 친구도 꽤나 재수가 없군요!” 정기룡이 묘한 빛을 눈에 담고 그를 보았다. 같이 다니는 동안 꼽추가 누군가를 친구로 지칭한 것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보다 그의 말 속에 담긴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동정인가? 아니면 공감?’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않고 아래에서 벌어지는 광경으 로 시선을 돌렸다. 산 속에서 나오는 사람도 이제 은검대원들을 발견했는지 제자리에 멈 춰 서고 있었다. 소용돌이처럼 꿈틀거리는 불길을 등뒤에 배경처럼 두고 우뚝 선 그에 게 모용초만이 다가서고 있었다. ‘곽(藿)’자는 빠르다는 뜻이다. 모용초의 별호 곽자비검은 그래서 그의 쾌검 술(快劍術)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금룡장 공식서열에서는 본가, 지가의 여러 노인들 때문에 한참 아래지 만 무공으로만 친다면 족히 십 위권에 들어가는 절정검수(絶頂劍手)가 그였다. 같은 대주라고 해서 숭양철검 하응과 동격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 이다. 그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산 속에서 나온 벌거숭이 사내, 흑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언제라도 검을 뽑아 찌를 수 있는 자세였다. 흑저의 몰골은 처참할 지경이었다. 곳곳에 화상으로 인한 물집이 잡혔고, 군데군데 살갗이 벗겨진 곳으로 는 하얀 힘줄이 드러날 정도였다. 온몸에 털이라는 털은 다 그슬려 버렸는지 머리카락도, 눈썹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깊숙이 박힌 눈만이 광채를 잃지 않아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모용초가 나직하게 물었다. “소장주는?” 흑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입술 달싹일 힘도 없어 그저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애초에 여기까지 온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그 자세한 경로는 기억도 할 수 없었다. 검은 안개에 휩싸인 자를 죽이고, 다시 숲을 나가서 계곡으로 내려왔 다. 다행히 소운 일행이 계곡을 건널 때 사용한 고목이 계곡 밑바닥까지 비스듬히 걸쳐져 있어서 내려오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 다음은 그저 화염을 피하는 것밖에 몰랐다. 불이 없는 곳, 연기가 밀려오지 않는 곳으로 걷고, 뛰고, 다시 걸었다. 자지도, 먹지도, 심지어는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서 나 온 곳이 여기인 것이다. 그렇게 빠져 나온 곳이 다시 적의 손아귀라니……. 운명이 그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용초는 흑저의 무응답을 적의(敵意)로 해석했다.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고 있다고 본 것이다. 설사 모르고 있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적어도 소운이 그와 같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이상, 그리고 소 운을 찾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 분명한 이상 그라도 잡아가야 대사명 의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모용초는 흑저의 상태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해서 방심하지는 않 았다. 방심하기에는 사천 혈사의 주인공이라는 이름이 너무 컸다. 모용초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양 손이 꼼지락거렸다. 그는 숨을 멈추었다. 쉬쉭--! 뱀의 혀 같은 은빛 선이 뻗었다. 흑저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우측어깨 견정혈 (肩井穴)이 은빛 선에 관통되었다. 쉬익--! 은빛선은 흑저의 우측어깨를 꿈틀거리며 빠져 나오더니 멈추지 않고 왼쪽 견정혈 로 다시 파고들었다. 흑저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모용초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슈왁--! 물오른 버드나무가지처럼 매초롬한 은빛 선이 수평으로 날며 흑저의 목을 쳐갔다. 흑저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몸을 움찔거리며 피하려는 빛을 보인 것이다. 컥--! 순간,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솟구쳤다. 흑저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마비되어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게 되 었다. 단순히 탈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혈의 역류가 그의 신경을 일시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지난 사흘 동안 그는 초인적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기해혈 의 파괴는 내공 의 운행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신경과 혈류의 흐름을 봉쇄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정기룡이 소매 속에서 손을 뺐다. “그대로 둬서야 재미가 없지?” 그의 손에는 은빛 원반이 들려 있었다. 칙--! 모용초의 은검이 흑저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튀었다. 최후의 순간에 그를 생포하겠다는 마음으로 모용초가 검을 거둬들이지 않았으면 이 순간이 끝이었을 것이다. 모용초는 흑저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의 은검이 다시 흑저에게로 뻗었다. 이번에는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요혈을 봉쇄하기 위해서 였다. 쐐액--! 그때, 모용초의 등을 노리고 날카로운 경기가 파고들었다. 모용초는 흑저를 찔러 가던 기세 그대로 상반신의 다섯 개 요혈을 일 시에 그어 놓고서야 검을 뒤로 돌렸다. 채채챙--! 그의 은검은 이름 그대로 빨랐다. 그리고 정확했다. 그의 등을 노리고 날아온 네 자루의 수리도 가 은검에 맞아 그대로 튕 겨 나갔다. 츄왁--! 모용초의 손에서 검이 떠났다. 은빛 선은 오 장여나 길게 연장되어 그를 노린 사내, 네 자루 수리도 의 주인 곽상의 가슴을 관통했다. 팍! 곽상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 들린 그 작은 소리가 자신의 가슴에서 나온 소리라는 것이 실감이 가지 않았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핏줄기가 거기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까지는 더욱 시간이 걸렸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핏기가 솟구쳐 붉게 흐려지는 두 눈에 저만치 서 있는 흑저가 보였다. 곽상은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자신의 행동이 결국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무위로 끝났지만 후 회스럽지는 않았다. ‘구할 수 없다면 같이 죽는 것이다!’ 협기(俠氣)에서 나온 행동이라 해도 좋았고, 의를 위한 것이라 해도 좋 았다.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행(愚行)이래도 괜찮았다. 그는 그저, 이러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떠올린 마지막 상념이었다. 컥--! 흑저의 입에서 다시 한 모금의 흑혈이 토해졌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분노했다. 한 순간, 그의 머릿속은 백지처럼 하얗게 공백으로 변해 버렸다.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이대로 그냥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소림 도, 박투술 도 잊어버리고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비원(悲願)도 잊 을 수 있다고, 한 순간 그렇게 믿었었다. 이대로 고해(苦海)를 떠나면 운명처럼 그를 얽매고 있는 살업의 사슬 에서도, 끝끝내 벗어 던질 수 없는 업의 중압도 훌훌 벗어버릴 수 있 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벗어버릴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은 고단한 삶을 회피하려는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곽상이 죽는 그 찰나의 순간에 흑저를 휘감은 격정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 운명의 또 다른 모습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다시 움직였는지, 어떻게 뼈와 힘줄이 드러날 정 도로 다친 두 발로 모용초를 때려죽였는지, 오십 명의 은검대원들이 어디선가 날아온 은빛 섬광에 휩싸여 죽어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단지 한 순간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굳건한 어깨에 곽상의 시체를 짊어지고 산 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다.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가 몇 개 나타났다. 흑저는 그들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더 희미해졌다. 흑저는 선 채로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 동가채는 그들의 부채주의 시체를 메고 온 흑저를 급히 산채 내로 들 고 들어갔다. 붉게 타오르던 하늘이 어두워졌다. 검은 먹구름이 섬서 와 사천 , 산서 와 호북 에 이르는 장강 이북지역 전체를 뒤덮었다. 처음에는 굵은 빗줄기, 다음에는 눈이었다. 반 년 넘게 모든 이들이 목타게 기다리던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비와 눈은 이번에는 보름이 넘게 그치지 않았다. 마치 지난 일 년 동안 내려 주지 못한 양만큼을 한번에 다 쏟아 부으 려는 것처럼 눈은 그치지 않고 내렸다. 들판에 널렸던 타 죽은 시체들이 그 눈에 덮여 가리워지더니 이번에는 얼어죽은 시체가 그 위로 뒹굴었다. 대파산 줄기를 휘감은 불길은 숨을 죽였지만 이제는 백성들의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 19 장 원앙새 수놓은... 원앙새 수놓은 것 보여주어도 수놓은 금침은 주지 못하네 보름 넘게 정신을 잃고 있던 흑저가 깨어나서 처음으로 본 것은 황거 지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 귓가로 들려 왔다. “축하하네, 새신랑!”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온몸으로 밀려드는 고통은 고통스러운 삶이 또 연장되었구나 라는 탄식 같은 감정으로 빠져들게 했다. 황거지가 주절거린 말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한참 후였다. “무…… 슨…… 소리지?” 흑저의 음성은 입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같이 미약했으나 황거지는 알 아들었다. “빨리도 묻는군!” 황거지는 놀리듯 웃었다. 소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설명해 주지!” 흑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려 했다. 그러나 목이 움직이질 않았다. 황거지가 말렸다. “무리해서 움직일 필요 없어! 지금 온몸에 화상에 좋다는 약초를 바 르고 천으로 친친 감아 놓았으니 말이야. 거울이 있으면 보여 주고 싶 을 정도로 재미있는 모습이야! 벌레의 고치같다고나 할까……?” 소운이 명령하듯 말했다. “보름 내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때는 복우산 (伏牛山)에 가 있 어야 해!” 흑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복…… 우…… 산? “그래, 복우산 ! 녹림 성회(綠林盛會)에 참석하는 것이다!” 지금 무림에는 금룡장의 차기장주 금조운이 보표 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로 떠들썩한 상태였다.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헛소 문을 퍼뜨림으로써 금룡장은 소운을 공식적으로 찾을 명분을 얻게 된 것이다. “게다가 보름 전에 대파산 아래에서 은검대원들이 몰살(沒殺)당한 사 건은…….” “몰…… 살?” 흑저가 일어날 것처럼 들썩거렸다. 소운이 그를 힐끔 보았다. “당신이 한 일이 아니었나?” 흑저는 멍하니 누웠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몰라……!” 듣고 있던 황거지가 키득거렸다. “속편한 대답이군!” 어쨌든 그 사건은 흑저가 일으킨 것이라는 소문이 돎으로써 소운이 납 치되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쪽으로 여론의 흐름을 바꿔 놓는 계기 가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별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 그들을 그렇게 죽일 수 있 느냐는 것이다. 모용초는 분명 흑저에게 죽은 여타의 시신들처럼 맞아 죽은 것이고, 다른 대원들은 보검이나 보도에 당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깨 끗하게 목이 베어져 나갔다고 했다. 추측컨대 아마도 귀도의 혈음도가 한 일일 것이라는 것이다. 황거지가 다시 거들었다. “귀도가 죽은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 그는 아닐 것이다. 그럼 누굴까?” 흑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의식 저편에 번뜩이는 은빛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 은빛 그림자와 이번 일은 무슨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 것은 상관없는 일이다!” 소운은 백 명이 타 죽고 오십 명이 몰살당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은 일 로 치부해 버리고 계속 말했다. “흑룡방의 살수 들은 실패했다고 하지만 금룡장은 절대 포기하지 않 을 것이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납치된 나를 보표 들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내적으로는 나를 잡아죽이기 위해 끈질긴 탐색과 추격을 해 올 것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금룡장을 다시 찾기 위해 녹림 성 회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기회다!” 소운은 녹림 성회에 참석하는 것에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 었다.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나중에 자세히 말해 주지!” 소운은 황거지의 질문을 간단히 일축하고 흑저를 보았다. “흑룡방의 살수 들은 어떻게 되었나?” 흑저는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난 뒤에야 천천히 말했다. “불 속에서 나온 자들이 십여 명 있었지……. 깃발을 사용하는 자를 죽이고 난 뒤에 보니까 아무도 없었어!” 대단히 간단한 말이었지만 소운과 황거지는 충분히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깃발!” “깃발을 사용하는 자라고?”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내뱉고는 서로를 보았다. 소운의 눈에 희미한 의혹이 스쳤다. 황거지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얼른 눈을 돌렸다. 소운은 이미 충분히 의심을 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흑저를 보며 물었 다. “어떻게 생겼지?” 흑저는 다시 간단하게 말했다. “몰라!” “고수던가?” “음……!” “틀림없군!” 소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손에 죽은 자 외에는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사람, 깃발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 초혼귀 원체 체가 틀림없어!” 황거지가 놀라 소리쳤다. “초혼귀 원체체? 중원사흉의 대형 말인가?” 소운이 싸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보다는 구두룡의 아홉째 머리, 산귀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 황거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구두룡? 그게 무슨 용인데? 산귀는 또 뭐야?” 소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는 일인가? 그러면 계속 모르는 대로 살게! 그게 여러모로 좋겠 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운이 그것을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명확해 보였다. 그러나 황거지는 그런 낌새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 을 뿐이었다. 소운이 다시 흑저를 보았다. “그를 어떻게 죽였나?” “손으로!” “좋아, 이렇게 해서 중원사흉이 모두 당신 손에 지옥으로 보내졌군! 장래 염라대왕을 만나게 되면 꼭 그 일을 말해! 벌이 일등급은 감해질 거야!” 흑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아까 말……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소운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대신 황거지가 말했다. “좋겠네, 너 장가가게 됐다!” “장가?” 흑저의 눈이 커졌다. 소운이 설명했다. “녹림 성회에 가려면 어쩔 수 없어!”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 “녹림 성회에는 녹림십팔채 와 삼십육향, 그리고 거기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녹림 맹에 속한 각 채의 채주와 그를 수행하는 이십 명만 참 석할 수 있어. 우리는 동가채의 이름을 걸고 참가하는 거야. 그러려면 당신이 지금의 채주, 그러니까 곽상의 형수와 결혼해서 채주가 되야 해!” 흑저의 얼굴색이 붉게 물들어 갔다. 수줍어해서가 아니라 그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결정하는 소운 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난……!” 황거지가 급히 말을 가로막았다. “말을 잘라서 미안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서 결정을 하는 게 좋을 거 야! 넌 한번 말하면 쓸데없이 거기 집착하는 경우가 있어서 말이다. 소 위 똥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지!” 그 자신, 이미 흑저의 고집에 두 손을 든 상태 아닌가! 소운이 차근차근 말했다. “곽상이 왜 부채주였는 줄 알아? 동가채의 전통은 부계(父系)가 아니 라 모계(母系)로 채주의 직위가 전승되기 때문이지! 그것도 여자가 직 접 채주를 맡는 게 아니라 그 여자의 남편이 맡는 거야.” 아마도 동가채의 최초 창설자는 운남 (雲南)이나 청해 (靑海) 출신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지방에서는 모계상속제를 여전히 신봉하는 부족이 여럿 있었으니 말이다. 형이 죽은 후 곽상은 고민거리에 부딪쳤다. 무공으로 보나, 순서로 보나 그 자신이 채주의 적격자인데 그러려면 형수와 결혼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의 형인 곽철만 해도 현 채주인 호낭랑(胡娘郞)의 첫번째 남편 이 아니라 두번째였던 것이다. 그러나 곽상은 형수와 결혼한다는 것은 결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 아내, 호이랑(胡二郞)의 언니와 결혼한다는 것도 되는 일 이었으니 말이다. 흑저는 그제서야 처음 만났을 때 곽상이 난처해 하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명목상이라도 당신은 반드시 그녀와 혼인해서 채주가 되어야 해! 그 래야 녹림 성회에 참석하는 의미가 있어!” 소운은 집요했다. 흑저는 반드시 동가채의 채주자격으로 녹림 성회에 참가해야 한다. 그 리고 비무에 참가해서 가능한 최고의 위치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황거지는 소운의 계획을 듣고 입을 딱 벌렸다. 기기묘묘하다거나 귀신도 놀랄 계책이라서가 아니었다. 그 발상의 기 발함이 놀라워서였다. 언뜻 생각하면 아이들 장난 같은……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계획이었 다. 몇 가지의 안배가 덧붙여진다면 말이다. ‘아마 이 영악한 아이는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을지도……?’ 황거지는 두렵기까지 한 기분으로 소운을 보아야 했다. 그 계획의 숨겨진 측면까지 생각해 보며……. 흑저는 소운의 계획을 다 듣고서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잠이 들 었나 할 정도로 긴 침묵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난 안돼!” 소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황거지가 눈알을 굴렸다. “너 고자냐? 안 그러고서야 왜 장가를 안가? 혹시 아직도 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아냐?” 쾅--! 흑저가 누워 있는 방의 문이 소리내어 열렸다. 거기 들어서는 그림자가 말했다. “함부로 말하지마! 이 거지야!” 평상어조로 말하는 것인데도 방이 울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황거지가 찔끔하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림자는 기골이 장대한 사십대의 여인이었다. 뚱뚱하다고 하기보다는 어쩐지 당당한 체구의 소유자. 그녀는 성큼성큼 침상으로 걸어오더니 흑저를 덮은 이불을 거칠게 걷 었다. 그리고 무겁지도 않은지 두 팔로 흑저를 들어올려 방 한 구석으로 가 더니 의자처럼 생긴 요강 위에 앉혔다. 흑저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다리를 감은 천만 빼고 하반신은 벌거벗은 상태라 는 것을 깨닫고는 정말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호낭랑이 두툼한 손을 내밀어 흑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사내대장부답지 않게 수줍어 하기는…… 하하하!” 남자 같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의 의자에 앉았다. “이제 당사자도 정신이 들고 했으니 본격적으로 혼인절차를 의논해 보자, 애야!” 소운이 씩 웃으며 말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호낭랑이 짐짓 생각하는 태(態)를 보였다.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이니 졸속으로 처리할 것은 아니지 만…… 뭐, 신랑 측에서 급하다면 서두르는 것도 좋겠지, 하하하! 내일 이라도 당장 하지 뭐!” 시원스럽게 결정을 내려 버리는 것이다. 황거지가 흑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 너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동안 뒷수발을 그 녀…… 호채주가 다 했어! 여자다운 맛은 없지만 사람은 좋더군! 게다 가 자세히 뜯어보면 귀여운 맛도 있잖아?” 은근히 호낭랑에게 들리도록 말을 하면서도, 얼굴 표정은 달랐다.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뒤돌아서서 온갖 인상을 지어 보이는 것이다. 호낭랑이 말했다. “칭찬해 줘서 고마운데, 나 못 보게 눈짓으로 딴 얘기하는 건 아니겠 지? 당장이라도 눈 내리는 벌판에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겉과 속을 일 치시키는 게 좋을 거야!” 황거지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 그는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며 돌아섰다. “저는 그렇게 표리(表裏)가 부동(不同)한 사람이 아니올시다. 그저 애 가 좀 멍청해서 혼인하는 게 두렵다고 해서 설득하고 있는 중이죠!” 호낭랑이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혼인이 두려워? 그럼 아직 숫…… 총각?” 황거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그럴 걸요?” 호낭랑이 일어나 다가왔다. 흑저는 공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요강에 걸터앉은 흑저의 엉덩이를 툭 치더니 다시 들어올려 침 상으로 데려갔다. “용변이 급하지 않은 모양이군! 혹시 급하면 소리쳐! 옆방에 있으니까 바로 달려오지! 그리고…….” 그녀는 힐끔 그의 아랫도리를 보더니 웃었다. “그게 그리 두려운 일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 이 호아줌마가 잘 가르쳐 주지, 하하하!” 그녀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황거지는 그 뒷모습을 두려운 표정으로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흑저에 게 속삭였다. “여자가 남자를 살해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뭔지 알아? 그와 혼인 하는 거야!” 그리곤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돼지와 여자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난 돼지를 고르겠어. 돼지는 화장 품도 필요없고 비단옷도 입지 않기 때문이지!” 흑저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소운이 일어나 방을 나갔다. “잘 생각해 봐! 하지만 내일은 결정을 해야 해! 금룡장에 쫓기기 시작 하면 평생 쫓기다가 끝난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거야!” “생각보다 심각하더군!” 엽검영과 한백이 들어와 동가채에 대해 이야기했다. 성자산 골짜기 사이에 깊숙이 숨은 동가채는 천험의 요새라고 할 만했 지만 무슨 교통의 요충지에 있는 것도 아니요, 인근에 약탈할 만한 대 도(大都)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녹림 채라기 보다는 세상을 피해 숨어 들어온 은거지라는 인상이 강한 곳이었다. 그러나 유례없는 가뭄이 섬서 사천 일대를 휩쓸기 전에는 여기도 그런 대로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사냥과 약초 채취, 그리고 산비탈에 경작한 밭에서 나는 몇 가지 작물 로도 그들 동가채의 백여 명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뭄으로 논밭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온 무리들이 동가채에 들 어오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달라졌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호낭랑은 유민들이 몰려오는 족족 받아들인 것이 다. 대신 산채의 원래 식솔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곽상의 표현대로 녹림 산채라기 보다는 거지소굴이라 부르는 것이 어 울릴 정도가 되어 버렸다. “다른 산채에 가면 난세를 틈타 예전에 못 가던 부현(府縣)같은 곳도 약탈해 오히려 전보다 호의호식하는데 누가 여기 남아 풀뿌리나 씹으 려 하겠어?” 인원은 늘었지만 무사 수는 오히려 줄어드는 그런 현상이 벌어질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 엽검영의 말을 들으며 흑저는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과거 그를 길러 준 노선사는 어떤 것에도 관대했지만 단 한 가지 증오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여인이였다. --여인이란 한결같이 경조부박하고 음란한 요물`에 지나지 않나니 ……! 노선사가 짐짓 두려운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어 이렇게 말하면 어린 흑저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던 것이다. ` `악귀보다, 야차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여인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혼인을 해야 한다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문득 한백에게 말했다.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자? 암컷을 말하는 것인가?” 한백도 흑저의 혼인건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징그러운 미소를 흘리며 말하는 것이다. “묘한 것이지! 모순덩어리라고나 할까? 말로는 그 오묘함을 다 말할 수 없고,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 그저 몸으로 느껴 볼밖에!” 한백은 그렇게 말하고는 키득거리며 나가 버렸다. “난 흑저가 이해가 가!” 엽검영이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거렸다. “혼인을 왜 해? 사랑해 줄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 나는 내가 항 상 재수없는 놈이라고 생각해 왔어! 공연히 내가 다른 사람보다 멋진 모습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엽검영은 하소연하듯 말했다. “여자들이 날 가만히 놔두지 않는 거야! 그런데 내가 결혼해서 한 여 자의 독차지가 되면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살겠어?” 황거지가 웃지도 않고 엽검영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너 지금 제정신이냐?” 엽검영도 웃지 않았다. “그래, 사실인걸!” 황거지는 뭐라고 욕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 가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난 그래도 네가 정신을 차리면 조금은 인간다워질 줄 믿고 있었다. 그래서 여태 데리고 다닌 것이고! 그게 잘못이었다는 것을 난 이제야 깨달았어. 넌…….” 황거지는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구제불가능한 놈이야!” 엽검영이 벌떡 일어나 팔을 걷어올렸다. “이 얼어죽을 거지영감이…… 데리고 다니긴 누가 누굴 데리고 다녀? 일생 도움이 안되는 것이 거머리하고 거지야! 영감은 둘 다 해당되니 지금이라도 나가서 얼어죽어 버리라고!” 침상에 누워 있던 흑저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밖으로 내저었다. “제발 둘 다 나가 줘!” * * * 예리했다.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뭔가에 눌리거나 집혀서 찢어지거나 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오십 명 전원이 다 그랬다. 대파산 에서 죽은 은검대원들의 목은 마치 예리한 칼로 나무인형의 목 을 베어 낸 것처럼 반듯하게 베어져 뒹굴고 있었다. 당가소는 떨고 있었다. 시체들의 모습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오십 개의 목과 오십 개의 몸뚱이를 모아 둔 금룡장의 지하빙동(地下 氷洞)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추워서도 아니었다. 드디어 전설의 암기 ‘환(幻)’이 그 가공할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것 을 알았던 것이다. ‘환’이 가진 일곱 가지 비밀 중의 하나, 은섬참(銀閃斬)이 아니고서 는 오십 명의 머리를 이렇게 한꺼번에 날려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했 다. 당가소는 지금 그 가공할 위력에 압도되어 버린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이야(唐二爺)께서는 무슨 흔적이라도 발견하셨소?” 당가소는 고개를 숙인 채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 를 들어 그의 곁에 다가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환(幻)’에 관한 일은 지금 알고 있는 몇몇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일이었고, 지금 말을 건 곤륜파 의 우진노사(于眞老師)에 게는 더욱 그러했다. 근래 곤륜파 의 속가출신인 금룡대선생의 죽음을 당문 이 떠맡은 바람 에 껄끄러운 사이가 돼 버린 처지였다. 원한이 생기는 것을 꺼려해 노골적으로 말은 않지만 곤륜파 가 당문 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혹시 눈치라도 채게 되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글쎄…… 저는 암기 와 독에 관한 일 외에는 문외한이라 이렇게 도 검(刀劍)에 생긴 상처는 전혀 모르겠군요!” “도검에 의한 것이라고요? 하!” 우진노사는 짐짓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하빙동에 모인 각파의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았다. 금룡장의 사건 이후 몇몇 문파의 사람들은 자파(自派)로 돌아가지 않 고 있었다. 온김에 좀더…… 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금룡장에서 일어나는 일 이 향후 십 년간의 무림정세를 바꿔 놓을 일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 이었다. 그 추이를 보고 자파에 유리하게 일을 만들어 놓는 것, 각파의 사람들 이 노리는 것은 사실, 그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사체(死體)의 사인(死因)을 밝히는 데에 입회해 달라는 요청이 온 것이 한 시진 전이었다. 물론 요청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참석했다.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흑저라는 파계승이 벌인 또 하나의 혈사인 대파산 혈사(大巴山血事)의 모습에 대한 호기심도 뿌리 칠 수 없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우진노사는 당가소를 비웃듯 큰 소리로 말했다. “당이야의 생각으로는 이런 예리한 상처를 남길 만한 검도(劍道)의 고수가 당금 중원에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것도 일검(一劍)에 오십 명 의 목을 날릴 만큼……?” 당가소는 기분나쁜 빛 없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일검에 오십 명이라고요?” 우진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하얀 턱수염이 고갯짓을 따라 휘날 렸다. “당연하지요! 만약 일 검이 아니라 오 검, 아니 삼 검만 되었어도 이 수급들의 표정에는 그런 흔적이 남았을 것이오! 경악이나, 공포, 분노 와 같은 감정들이 말이오!” “도검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까? 저희 당문 에서는 마음만 먹는다 면 가능한 일이라……, 도검에 관한 일은 노사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은!” 말 속에 숨은 비아냥을 깨달았는지 우진노사가 분노한 빛으로 그를 쏘 아보았다. 사천 당문 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오십 아니라 몇 백이라도 한꺼번에 죽이는 일이 독으로는 가능한 것이 다. 당가소의 말은 요컨대, 까불지 말라는 위협이었던 것이다. 우진노사가 항변했다. “독으로 죽이는 것이야 물론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거울처럼 매끄럽게 목을 베어 낸다는 것은 어떤 독으로도 불가능할 것 이외다!” ‘독으로 안되면 암기 로는 가능하지!’ 당가소는 속으로 그를 비웃으면서도 고개를 숙여 긍정했다. “물론 안되는 일이지요!” 우진노사와의 자존심 싸움 덕택에 혹시라도 이 일에 당문 이 관련되었 다는 의심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빈도(貧道)가 보기에는 전설 속의 검선(劍仙)이나 도귀(刀鬼)라도 이 런 상처를 내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구려!” 중인들의 시선이 말을 꺼낸 노도사, 화산파 의 장로 매화검선(梅花劍 仙) 정일자(正一子)에게 향했다. 그는 감탄했다는 듯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혹시 그 정도 경지에 이른 고수라면 한두 사람의 목을 이렇게 베어 내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오십 명이라는 것은……? 빈도가 보기에 도 이것은 도저히 도검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오!” 누군가 물었다. “어검술 (馭劍術)이라면?” 정일자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거야 전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어디……!” 누군가가 다시 말했다. “도장의 별호가 검선이시니 혹시 가능하지 않소이까?” 곳곳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정일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저었다. “강호동도분들께서 그리 부르시는 것에 빈도는 항상 과분함을 느껴 왔소이다. 이제라도 그 별호는 거두어 가셨으면 좋겠소만…….” 누군가가 말했다. “백여 년 전에 천외제일신마(天外第一神魔)가 사용했다는 은형마사(隱 形魔絲)라면?”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일자가 말했다. “실제 가는 철사(鐵絲)로 목을 휘감으면 도검으로 불가능한 예리한 단면이 나올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도 한번에 하나가 한계일 것이 오! 만약 그런 무기로 오십 명을 베었다면 두 명의 절정고수가 양 끝 을 팽팽하게 잡고 절정경공 으로 달려가면서 베어야 했을 것이외다. 그것도 오십 명의 키가 비슷하고 한 사람이라도 고개를 숙이거나 하지 않고 꼿꼿이 버티고 서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오!” 다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예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지극히 적절해 그런 무기를 사용한 것이 아 니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었다. 당가소도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 영도자급에서도 인격이나 재능, 언변까지 따져도 화산 정일자 를 따를 사람이 흔치 않다더니…….’ “륜 (輪)이나 동발 이라면 어떻소?” 누군가의 목소리에 지하빙동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 나른하면서도 가는 목소리를 여기 모인 각파의 영수급 인물들은 알 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동창 의 대영반 정소립이었다. 그는 걷기는커녕 일어서기도 힘들어 보이는 비대한 몸매를 뒤뚱거리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눈대중으로도 대충 오백 근(五百斤)은 넘어 보이는 비계덩어리였던 것 이다. “이기어검술 (以氣馭劍術)이 아니더라도 검기 (劍氣), 혹은 예리한 면 도 (面刀), 절정고수가 사용하는 연검 (軟劍) 등, 그런 상처를 낼 수 있 는 것은 다양하게 있지요. 나는 커다란 작두로도 저렇게 잘라 본 적이 있소이다.” 정일자가 고개를 저었다. “한두 사람의 목을 저렇게 벨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오! 오십 명을 동시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외다!” “독으로 마비시킨 다음이라면?” 정소립은 나른한 듯 눈을 반쯤 감고 중인들을 훑어보았다. 그 반쯤 감긴 눈 속에서 빛나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와 마주친 사람들 이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마치 뱀의 눈과 마주친 것 같은 싸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훑었던 것이 다. 그의 눈은 당가소에게서 멎었다. “어찌 생각하시오, 당이야(唐二爺)?” “불가능이오!” 당가소의 단호한 대답에 정소립의 눈이 더욱 가늘게 감겨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당가소는 턱으로 시체들을 가리켰다. “중독된 흔적이 없으니까!” “중독된 후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독기가 사라지는 독이라면?” “그런 독도 있긴 있지요! 그러나…….” 당가소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천천히 지하빙동 중앙으로 걸어 갔다. “독은 종류에 따라 온갖 효용이 있소! 대영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중독되고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흔적조차 없어지는 것도 있지요. 그러 나 효용이 뛰어나면 그만큼 제약도 많다는 사실을 대영반께서는 간과 하고 있소!”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효용이 뛰어나면 그만큼 제약도 많다는 것은 기울어짐을 싫어하는 하 늘의 섭리일 수도 있었다. 당가소는 시체들이 발견된 장소를 바닥에 그려 가며 설명하기 시작했 다. “그들이 발견된, 그리고 아마도 그들이 살해된 그 장소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불타오르는 산을 바라보는 위치였을 것이오. 이 경우, 바 람은 불이 있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불게 되고, 그렇다면 바람을 등진 다는 용독(用毒)의 원리상 독을 쓸 수 있는 곳은 한군데밖에 없소. 바 로 여기, 불 속이지요!” 당가소의 발이 타오르는 대파산 을 그린 지점을 찍었다. “누가 불 속에 들어가서 독을 쓰겠소? 나는 사양하겠소이다.” 화염 속에 들어가서 독을 쓰겠다고 덤빈다면 그가 먼저 타오르는 독덩 어리가 되고 말 것이었다. “또 하나의 방법으로는 독탄(毒彈)을 활로 불 속에 던져 넣어 그 연 기 중에 독이 섞이도록 하는 방법이 있지요. 그러나, 또 한 가지 장소 의 제약은 바람이 심한 곳, 특히 주위가 뜨거워 대기가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강한 경우, 독은 거의 쓸모가 없다는 것이오. 중독되기 전에 먼 저 대기 중에 흩어져 버릴 것이니까.” 당가소는 고개를 저었다. “방법은 아마 누군가 그들에게 미리 약을 먹여 그 시간에 발작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오만……, 나는 그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오. 그들 오십 명이 동시에 약을 탄 무엇인가를 먹는다는 것이 가능할 것 같소? 만약 그들이 다른 시간에 그 약을 먹었다면 동시에 발작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소?” 당가소의 유창한 해명에 중인들은 말을 잊었다. 그러나 정소립은 아직 할 말이 있었다. “나는 그런 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인들은 마치 자신이 그 독을 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섬뜩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들은 깨달았다. 정소립은 지금 당문 을 용의자로 놓고 취조하는 것이다. “고독(蠱毒)!” 정소립은 단호하게 말했다. “고독은 언제 먹었든 동시에 발작시킬 수가 있지! 나중에 빼내면 흔 적도 없고…….” 당가소가 그것까지 생각한 정소립을 가상하다는 듯이 보았다. “역시 동창 의 대영반께서는 견문이 넓으시군요! 감복했소이다. 그러 나 그것도 불가능하오!” 정소립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당가소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일반적인 고독은 일 대 일 대응을 하죠. 시전자가 모충(母蟲)을 갖 고, 대상은 자충(子蟲)을 몸 속에 넣고 있어야 위력을 발휘한단 말씀이 오. 그 원리대로라면 중독된 사람이 오십이니 시전자도 오십이 있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시전자의 뜻에 따라 발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죠!” “일반적인 경우라면 말이지?” 당가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경우요. 그럼, 특수한 경우라면…… 하고 생각하시겠죠? 본 인도 그 점을 생각해 봤소만 그것은 아니오, 왜? 지금까지 알려진 고 독 중 일인이 시전해서 다수를 중독시키는 고독은 하나밖에 없소! 바 로 표향섭정고(飄香攝精蠱)! 그러나 그것은 흔적이 남죠!” 당가소는 시체의 정수리 부분을 가리켰다. “저기로 자충이 다시 기어 나오니 구멍이 생긴단 말씀이오!” 시체에는 구멍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정소립은 집요했다. 어떻게 보면 당문 이 용의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독공(毒功)이라면? 독공을 사용한다면 그런 귀찮은 매개물을 빌릴 필요없이 바로 중독시키는 것도 가능할 텐데?” 당가소는 웃었다. 어이없다는 느낌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런 웃음이었다. “독을 기(氣)에 실어 보내는 그런 독중지성(毒中之聖), 독왕(毒王)의 경지를 말씀하시는 모양인데……, 대영반은 범인이 이야기 책 속에서 튀어 나왔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구려!” 그는 중인들을 돌아보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물론 독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독왕은 바라마지 않는 꿈의 경지요. 나도 그렇게 되고 싶소. 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제는 포기했소이다. 우리는 보름 전 무공을 익힌 사람이면 누구나 바라는 경지를 목격했 소. 용수 진립동 선배, 천하제일권의 손에서 말이오. 독왕은 그러한 경 지의 무공을 익힌 사람이 그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독에도 정 통한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가능한, 그런 꿈의 경지요! 나는 독에 대해 서는 앞으로 삼, 사십 년쯤 더 공부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고 기대하지만 무공에 있어서 용수선배를 따를 자신은 도저히 없소! 아쉽 게도 우리 당문 에도 그런 인재가 없고!” 듣고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용수선배도 독을 배울 맘은 없을 거요!” “와하하하--!” 장내에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졌다. 그것은 이 일장의 논쟁에서 정소립이 패했다는 것을 확신한 데서 나오 는 통쾌한 웃음이었다. 심지어 당가소와 감정의 매듭이 있는 우진노사까지도 그 웃음에 합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소립의 느긋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실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의미 모를 웃음을 보이고 있었 다. 그 웃음을 보자 당가소는 가슴 한 구석이 섬뜩해졌다. 그 웃음이 마치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이 순간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소립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정소립이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군!” 좌중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독도, 독공도 안된다고 밝혀진 지금 무엇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인가? 정소립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당가소는 얼어붙은 듯 말이 없고 누군가가 대신 물었다. “남은 것이 뭐란 말이오?” “암기 (暗器)!” 정소립의 실눈 사이로 예리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암기 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중인들의 시선이 당가소에게 모였다. 이번에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당가소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이제서야 그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애초부터 정소립이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그가 독이나 독공, 심지어 고독까지 들먹거렸던 것도 암기 외에는 다 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소립이 과연 ‘환’의 존재까지 알고 있을까? 당가소는 아무리 생각을 굴려 봐도 그 점에 대해서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당가소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못하고 있다가 애써 입을 벌렸다. “오십 명의 목을 한꺼번에, 그것도 저렇게 예리한 단면을 남기고 베 어 내는 암기 는 여태까지 없었소!” 정소립의 눈은 완전히 감겨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은 벌어지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없었겠지! 그러나 지금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나? 그 런 공포스런 암기 가 말이지……!” 당가소의 손끝이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이자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정소립은 두 눈을 실처럼 가늘게 접은 채 당가소를 보며 웃었다. 그 미소 속에 숨은 뜻을 당가소는 감히 추측할 수도 없었다. 정소립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 그 걸음을 따라 비대한 살집이 흔들리는 모습을 당가소는 식은땀을 흘 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정일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가 왜 당문 을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겠군요?” 당가소가 떨떠름하게 웃었다. “그가 혐의를 두고 있는 사람과 우리 당문 이 약간의 관계가 있기 때 문이지요!” “아!”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졌다. 우진노사가 놀랐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파나한(破羅漢)이 귀문과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시오?” 당가소가 어리둥절해 했다. “파나한? 아--! 흑저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사천 혈사의 주인공! 비록 용수 진립동과 겨뤄 패하기는 했지만, 이십 년 내에 무림에서는 처음으로 진립동과 비등하게 싸운 흑저는 그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파 나한이라는 별호로 무림에 확고한 명성을 구축했던 것이다. 당가소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애질녀(愛姪女)를 그가 구해 주었지요.” ‘당신네 곤륜파 의 빌어먹을 금룡을 죽여서 말이오!’ 뒷말은 속으로만 되뇌인 것이었다. * * * 평소 같았으면 시녀들의 조심스러운 걸음에서 나오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밖에 없었을 후원 정실(正室)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꼴도 보기 싫다! 운아를 찾기 전에는 여기 올 생각도 말아라, 이 놈!”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어두운 안색의 금야홍이 걸어 나왔다. 금태파야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가장 아끼고 귀여워하는 증손자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게 되었으니 그 분노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금야홍에게 분노가 폭발한다고 해서그녀를 나 무랄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금태파야의 처소에서 정원을 가로지르는 소로(小路)로 두 명의 시녀가 소반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금야홍이 다가가자 시녀들은 길옆으로 물러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 렸다. 금야홍은 걸음을 멈추고 소반을 보았다. 천에 덮인 것은 금태파야에게 올리는 음식이었다. 금야홍은 비교적 나이가 들어 보이는 시녀에게 말을 건네었다. “식사량은 어떠신가?” 시녀는 고개를 숙였다. “전보다 못하십니다!” “횟수는?” “그것도 하루 두 번으로 줄이셨습니다!” 금야홍은 탄식했다. “심려하시는 바가 있으신 까닭이니 정성을 더해야 할 것이다.” 시녀들이 고개를 숙여 긍정했다. 금야홍은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가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다. “백양회춘탕(白陽回春湯)은 올리느냐?” 나이든 시녀의 눈가에 두려운 빛이 언뜻 스쳤다. 그녀는 공손히 대답했다. “잊지 않고 꼬박꼬박……!” “연로하시니 빼먹지 말고 올려야 할 것……!” 금야홍은 정원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 * * “동군(東君)을 불러라!” 정소립의 명령은 한참 후에야 대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존명!” 목소리의 주인공, 이미 죽은 유혼 모용초와 더불어 정소립의 양 팔 중 하나인 망백(亡魄)은 평소와 달리 대답한 후에도 가지 않고 있었다. 정소립의 실처럼 가는 눈이 그를 향했다. “무슨 일이 있나?” “금의위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인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정소립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패였다. 전통적으로 금의위와 동창 은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러한 관계는 동창 , 정식명칭으로는 동집사창의 탄생에서부터 시작 된 것이었다. 동창 이 지금 하는 일은 애초에는 금의위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가장 세도를 부릴 수 있는 영역을 동창 의 탄생과 함께 빼앗기고, 그 나마 분가한 자식이랄 수도 있는 동창 에게 전통적으로 눌려지내고 있 으니 적대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대영반의 직위만 해도 정소립과 앙숙지간인 내각대학사(內 閣大學士) 왕석작(王錫爵)이 맡고 있었다. 만약 금의위가 정소립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눈치챈다면 그때는 파멸 적 결과가 도래할 것이다. 정소립은 한참 후에야 나직이 물었다. “그 움직임의 중심이 누구냐?” “금의위 부영반 복양운(僕陽雲)이라고……. 이미 강호로 나왔다는 첩 보가 있습니다.” “찾아서 제거해라.” 나직한 음성이었고 아주 간단한 명령이었으나 그 뜻은 분명했다. “존명!” * * * 조용한 오후였다. 침상에 누우면 정면으로 작은 창이 있었다. 흑저는 그 창을 열어 달라 고 부탁해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시끄럽게 다투던 황거지와 엽검영도 나가고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들 었다. 흑저는 자신이 모용초를 죽이고 여기 성자산까지 몇 백리 산길을 달려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시체 하나를 둘러메고서 말이다. 사흘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기력으로, 그리고 기혈이 역류해 한 순간 온몸이 마비된 상태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오라기 생기를 잡기 위해서 어떤 순간에도 정신 만은 투명하게 유지했던 그가 왜 그 순간은 전혀 기억하지를 못하는 것일까? ‘정신을 잃었다면 그냥 죽었어야 할 일 아닌가?’ 흑저는 희미하게나마 거기에 진립동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한 줄기 의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나오는 한 줄기 힘,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밝힐 수만 있다면 그는 그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죽음에 직면해서야 나온다는 최후의 진원 진기 (眞源眞氣), 본원진기 (本源眞氣)였을까? 아니면 발악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중에 누군가 방문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 다. 흑저는 지금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정신만은 수정처럼 투명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여태 이렇게 정신이 맑아진 적이 없을 정도였다. 방문이 열렸다. 흑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코끝에 풍기는 담담한 향기는 방에 들어온 사람이 여인이라는 것을 말 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호낭랑밖에는 들어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되 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흑저의 기억 속에 이와 같은 향기를 맡은 적이 있다 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호낭랑에게서는 흙냄새 외에는 나지 않았다 는 것도……. 방에 들어온 여인이 조심스럽게 흑저의 머리맡에 뭔가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앉더니 한참이나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흑저가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 었다. 흑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누군지를 알 것 같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예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눈을 떠 그녀를 보았다면 더 자연 스러웠을 것을……. 어쩌면 그랬다면 말 한두 마디쯤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아니, 아 예 안 들어왔을 수도 있었다. 코끝에 풍기는 향기는 그녀가 들고 온 것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게 했 다. 향기로운 냄새, 아마도 고기죽일 것이다. 약간 다른 냄새가 섞인 것은 약초겠고……. 흑저는 어쩐지 안정이 되지 않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생각을 음식으 로 돌리려 애썼지만 식욕은 없고 목만 타올 뿐이었다. 목으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그 소리가 천둥처럼 울리는 것 같아 뜨끔 했다. 여인도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봤 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갈증 때문으로 해석하고 차가운 물에 미리 준비해 둔 천을 담갔다가 흑저의 입으로 가져갔다. 마른 입술을 적셔 주려는 행동이었다. 그때, 흑저가 눈을 떴다. 여인, 매아상은 소스라치게 놀라 뛰어 일어났다. 그녀는 인기척에 놀란 작은 새처럼 방문으로 달려갔다. 흑저가 소리쳐 그녀를 불렀다. “잠깐! 잠깐만 기다리시오!” 매아상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나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뒤돌아 선 채로 아무 말 없이 흑저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를 불러 세워 놓긴 했지만 딱히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흑저는 순간, 괜히 그녀를 불렀다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눈이 내려 뜨락에 쌓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이 방 안에 감도는 유일한 소리였다. 매아상이 나직하게 말했다. “별일 없으시면 전…….” 그녀는 문을 약간 당겼다. 문이 조금 열리며 찬바람이 몰아쳐 들어왔다. 그 찬바람이 흑저를 일 깨웠다. “바, 바쁘시오?” 물어 놓고 흑저는 바로 후회했다. ‘바보 같은 질문을…….’ 그러나 그 바보 같은 질문에 매아상은 바로 대답했다. 그 대답이 애써 꾸민 흑저의 침착함을 깼다. “내일 있을 혼례식 준비 때문에…….” 어딘지 원망 같은 것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흑저는 아픈 줄도 모르고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도 못 일 어나고 그는 다시 누웠다. 다급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그건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오!” 매아상은 이미 문을 열고 반쯤 나가고 있었다. 그 뒤로 흑저가 언성을 높여 말했다. “믿어 주시오!” 매아상은 잠시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말했다. “저와는 관계없는 일이니…….” 그녀는 나가고 목소리만 남았다. “신경쓰지 마시길…….” 흑저는 멍하니 누워 그녀의 말을 생각했다. ‘관계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옳은 말이었다. 그와 매아상이 무슨 관계가 있으며, 신경을 써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애초에 그는 세상 누구와도 관계가 없는 사람 아니던가? 방문이 다시 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흑저가 바라보았지만 들어온 사람은 호낭랑이었 다. 흑저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아 보기도 싫었다. 호낭랑은 탁자 위에 놓인 음식과 물그릇을 잠시 보고는 침상에 누운 흑저를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흑저의 가슴을 찌르는 말을 했다. “그녀를 좋아하는군!” 흑저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급히 부인하려 했다. 그러나 호낭랑이 손을 저어 그의 입을 막았다. “애써 부인할 필요없어! 그녀도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 그녀는 흑저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내 나이 정도의 여자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도, 죄악도 아니 야! 그저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지.” “그러나 그녀와 나는 어울리지 않…….” 흑저는 불쑥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내심을 약간 내비치고는 스 스로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그런 흑저를 향해 호낭랑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당신 정도의 남자는 흔치 않은 사람이야. 그 매력을 알아 본 그녀도 내면보다는 화려한 겉을 좋아하는 다른 여자들에 비해 훨씬 좋은 눈을 가졌고……! 아마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정말 당신을 사랑했을지도 몰라.” 흑저는 그녀의 칭찬에 어색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말 속에 숨은 다른 의미에 충격을 받았다. “그럼 당신은……?” “난 애가 둘 있지! 둘 다 아버지가 달라. 첫번째 남편과 두번째 남 편…… 난 그들을 사랑했지. 하지만 둘 다 죽었어! 그들은 동가채와 식 솔들, 그리고 날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은 거야. 그런 남편들을 둔 내가 이제 사랑을 얘기한다면 몰염치한 계집이겠지!” 호낭랑의 얼굴에 쓸쓸한 웃음이 스쳤다. “내가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다거나 해서, 혹은 남자에 굶주려서 결혼 하겠다고 그런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야. 난 전남편을 묻으면서 그런 감 정도 같이 묻었어!” 흑저는 그녀가 낮에 보였던 인상과 너무도 다른 데에 놀랐다. 그녀는 이 순간 여자이기 이전에 오백 명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우 두머리였던 것이다. “소운…… 그 영악한 아이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우리 동가채를 이용 하려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당신도 그 아이에겐 한낱 이용물 에 불과하겠지. 버려졌는데도 화도 낼 줄 모르는……. 이용해 먹는 쪽 에서 보면 최고의 상대지!” 흑저는 그녀의 말에 깊이 충격을 받았다. “그걸 알면서도 이용당하려 하는 것이오?” “내게도 당신들, 정확하게 말해서 당신이 필요했으니까! 서로 이용하 는 것이지!” “내가?” 호낭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 온 것에 큰 잘못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대로 나 가면 동가채는 일 년이 못가서 무너지고 말 거야. 그렇게는 안된다 해 도 예전과 같은 명성을 되찾지는 못하겠지!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거 야.” 요컨대 흑저와 같은 고수가 채주를 맡아 녹림 성회에서 신위(神威)를 보인다면 동가채는 예전의 명성과 녹림 맹 내에서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흑저는 어이가 없었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나와 혼인하겠다는 것이오?” 호낭랑의 눈이 빛났다. “단지 그 이유? 내 두 남편은 그것 때문에 생명을 버렸어!” 흑저는 말문이 막혔다. 어떤 사람은 재물에 목숨을 건다. 다른 사람은 명예에 목숨을 건다. 이 두 가지에서 초연(超然)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세상 사람이 다 그런데 호낭랑만 욕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는 한참 후에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건이 있소!” 제 20 장 지극한 도는... 지극한 도는 걸림이 없다 흑저의 혼례식은 동가채의 식솔들과 소운일행만 지켜보는 가운데 조촐 하게 치러졌다. 신랑인 흑저가 들것에 누워 나왔으니 제대로 된 혼례식이 될 리가 없 었지만, 그런 대로 분위기는 흥겨웠다. 눈은 그칠 줄도 모르고 내려 쌓이고 있었다. 매 시간 치우지 않으면 그 눈에 깔려 통나무집이 무너질 지경이었지 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조차도 축복으로 여겨진다고 사람들은 말했 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일단은 배가 부르니 그런 이야기들이 나올 법도 했다. 겨울을 날 곡식들을 끌어내어 떡을 치고 밥을 했다. 애지중지 키워 오던 가금(家禽)과 돼지들을 잡아 동가채에는 오랜만에 기름진 고기냄새가 진동했다. 호낭랑이 대례복 옷자락을 치켜 들고 가축우리로 달려가 욕설을 퍼붓 지 않았으면, 동가채에서는 내일부터 닭울음소리도 들을 수 없었을 것 이다. 가축 중 반 이상이 이미 참변을 당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혼례를 치르고 임시회의실인 흑저의 병실로 들어가면서도 호낭 랑은 투덜거리고 있었다. “정신나간 것들! 몇 달간은 가축 구경도 못하게 된다는 걸 알고 하는 행동들이야?” 그런 호낭랑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흑저가 말했다. “잡아먹으라고 하시오!” “뭐요?” 호낭랑이 도끼눈을 뜨고 흑저를 노려보았다. 눈만 빼고 온몸을 천으로 친친 동인 그는 이불로 등을 괴고 침상에 기 대어 앉아 있었다. “며칠 후면 필요없게 되니 지금 맘껏 먹어 두라고 하는 거요!” 호낭랑은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흑저가 나직하게 목소리를 깔아서 말했다. “그것이 첫번째 조건이오, 동가채의 해산(解散)!” 방 안은 고요했다. 미리 들어와 있던 소운, 한백, 황거지와 엽검영, 그리고 동가채의 장로 몽필생화(夢筆生花) 하노삼(河老三)은 아무 말 없이 흑저와 호낭랑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낭랑은 흑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둥근 눈에 가득 담긴 의문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흑저는 자신이 채주가 되면서 내릴 첫번째 명령을 조용조용 얘기했다. -무공을 모르는 자는 전원 축출! -처자(妻子)가 있거나 노모(老母)를 모시는 자는 전원 축출! -상기 두 조건에 해당되지 않아도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전원 축출! -축출되는 자들에게는 가족의 수에 따라 차등을 두어 이주금(移住金) 을 지급하며, 그 이주금은 동가채의 전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한다. 황거지가 창 밖으로 눈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 폭설에 사람들을 내보낸다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마찬가지야!” 흑저는 그 말을 긍정하고 한마디를 추가했다. “원한다면 산채에 눌러 살아도 좋지만, 더 이상 동가채 소속이 아님 을 분명히 한다.” 호낭랑은 입을 벌리고 있다가, 한참 후에 다물며 조용히 물었다. “이유가 있겠지?” 흑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나갈 테니까!” 밤이 깊었다. 호낭랑은 흑저의 침상 곁에 또 다른 침상 하나를 가져다 놓고 코를 골 아가며 자고 있었다. 흑저는 잠을 못 이루고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내려서 그런지 불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방은 어둡지 않았다.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작은 그림자 둘이 방으로 들어왔다. 흑저는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림자는 여섯 살 정도 된 사내아이와 여덟 살 정도 된 여자아이였다. 사내아이가 작은 소리로 칭얼거렸다. “엄마--!” 여자아이가 그 입을 손으로 막았다. “쉿--! 아저씨가 깨면 안돼!” 흑저가 들을까 두려워하는 나직한 속삭임이었다. 호낭랑 고단한 가운데에도 아이의 목소리는 귀에 또렷이 들리는 모양 이었다. 코고는 소리가 딱 멈추었다. 그녀는 눈을 채 뜨지도 않고 이불 한쪽을 들어주었다. 두 아이가 그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평소에 그렇게 잤는지 아이 들은 호낭랑의 품속에 안기더니 곧 쌔근거리기 시작했다. 흑저는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웬만한 장정들은 목에나 겨우 닿을 정도로 장대한 호낭랑이었다. 그 품속에 작은 아이 둘이 안겨 자는 모습은 흑저로 하여금 절로 미소 를 머금게 할 정도로 넉넉한 모습이었다. 그는 여태 그런 따뜻한 품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문득, 이대로 한평생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 순간, 기해혈 (氣海穴)이 쑤셔 그는 작은 신음을 토했다. 마치 엉뚱 한 생각에 대한 경고이기라도 한 것처럼……. 기해혈 의 통증은 그를 잊을 수 없는 그때의 일, 그때의 고통을 깨우 쳐 주고 있었다. 소림사 에서 쫓겨나던 그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눈앞을 스쳤다. * * * 둥두두두둥--! 북소리가 울렸다. 그때 흑저는 법현도, 아무것도 아닌 단지 하나의 파계승이었다. 흑저는 계율승(戒律僧)들이 지워 준 작은 북을 등에 메고 산문 앞 긴 계단을 기어서 내려왔다. 검은 가사! 검은색은 죽음과 관련된 흉색(兇色), 이제 법현은 그들의 눈에는 죽은 자일 뿐이었다. 작은 북! 북은 세상에 널리 그의 죄를 알리는 것이다. 수도(修道)의 길을 가는 사문(沙門)들이여, 이자를 보고 경계하라는 것 이었다. 이마의 낙인! 두고두고 그 수치를 감추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였다. 걷지도 못하고 기는 것은 이제 짐승보다 못한 자라는 확인행위였다. 돌계단에 쓸린 무릎과 팔꿈치에서 피가 흘렀다. 이제 이 오백 계단보다 더 험하고 거친 세상에서 굴러 쉴 날이 없으리 라는 교훈이었다. 둥두두두둥--! 북이 울렸다. 계단 옆으로 길게 늘어선, 어제까지의 사형, 사제, 사숙들이 막대기로 그의 등에 매달린 북을 두들기며 깨우침의 노래를 불렀다. 百劫積集罪 一念頓蕩除 如火焚枯草 滅盡有無余 백겁으로 쌓인 죄 한 생각에 스러져 마른 풀이 불타듯 흔적조차 없으리라 * * * ‘연민인가, 조롱인가?’ 흑저의 귀에는 아직도 그때의 북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 염불소 리도……. ‘돌아가야 한다!’ 언제나 결론은 하나였다. 다른 모든 일은 자신이 돌아가 다시 설 그 계단 꼭대기에서 비로소 다 시 결정할 일인 것이다. “어디 아파?” 흑저는 번쩍 제정신이 들었다. 호낭랑이 그의 침상 곁에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의식중에 토한 억눌린 신음이 그녀를 깨웠던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난 괜찮소!” 호낭랑은 천 사이로 드러난 그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 았다. 그녀는 면건을 들어 흑저의 얼굴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한겨울에 이렇게 땀을 흘리면서 괜찮다니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 군!” 흑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눈은 뜨지 않았다. 그는 이 여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다. 문득 그가 말했다. “당신도 여기 남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소!” 호낭랑은 말이 없었다. 그는 다시 말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도…….” 호낭랑이 갑자기 그의 목덜미를 잡아 거칠게 끌어올렸다. “그건 날 생각해 주는 말이야, 아니면 우연히 떠맡은 짐이 귀찮다는 뜻이야?” 흑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녀의 분노에 불타는 눈을 정면으로 바라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마주 노려보다가 호낭랑은 흑저의 목덜미를 놓았다. “이번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건 알아! 아까 당신의 조건을 들었을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게 옳다고도 생각하고 있어! 그러나…….” 호낭랑은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흑저는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나도, 아이들도 녹림 에서 태어났고, 녹림 에서 자랐어! 그렇다면 녹 림 에서 죽는 것 외에는 달리 어울리는 죽음이 없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나직해져서 마지막 말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흑저에게는 그것이 그녀 스스로도 확신을 못하는 말인 것 같아 착잡해 졌다. 호낭랑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부모없는 아이가 되는 것보다는 부모와 함께 죽는 게 나을 거야! 얘들은 아버지만 두 번이나 잃었어. 어머니까지 잃는 슬픔을 주 고 싶지는 않아! 갈 때는 함께야!” 흑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찔렀다. ‘그게 나을지도……!’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열흘이 지났다. 흑저는 몸에 감은 천을 풀고 있었다. 내일은 녹림 맹이 있는 하북(河北)의 복우산 (伏牛山)으로 떠나야 하는 데 천을 감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팔뚝에 난 굵은 흉터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곽상이 예전에 ‘상처는 무사의 역사’라고는 했지만, 그렇게 말한다 면 그의 역사는 길고도 파란만장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보이지는 않아도 느낌으로 보아 등뒤에도 흉측한 상처가 났음에 틀림 없었다. 산귀를 죽일 때 불타오르는 나무를 등으로 이어야 했으니 말이다. ‘상관없지!’ 그는 손발을 움직여 보았다. 조금 결리는 곳은 있지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이제는 박룡수의 손가락이 그의 뜻대로 거의 움 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쥐고 펴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다. ‘이제는 젓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어쩐지 흥겨운 기분이 되어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며 공중에서 옆 으로 한바퀴 돌려찼다. 파--앙--! ‘좋군!’ 완전히 정상은 아니지만 발끝에 와 닿는 압축된 공기의 느낌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한번 더……!’ 뛰어오르려던 흑저는 갑자기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방 한 편에 걸린 동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그가 처음 보는 벌거벗은 사내가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 자신의 모습이 비친 것일 테지만, 거울 속에 나타난 얼굴은 그가 알고 있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화상(火傷)으로 눈썹과 짧은 머리가 그슬린 탓에 머리에는 털 한오라 기도 없었다. 게다가 뺨에서 이마까지 덮은 일그러진 흉터란……! 원래 보기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흉칙하게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흑저가 보는 것은 그 흉터가 아니었다. 이마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흉터가 ‘파계’라는 두 글자를 지워버린 것이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그는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호낭랑의 남자 같은 발짝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멍하니 선 벌거숭이의 모습 에 놀란 듯 잠시 멈추었다. 그녀는 바닥에 쌓인 피묻은 천들과 흑저의 등줄기로 기어간 굵은 화상 자국을 보았다. 화상이 완전히 아물려면 아직 멀었다. 화농(化膿) 투성이에다가 군데군데 붉은 새살이 올라오고 있는 흑저의 몸은 보기 끔찍할 정도였다. 그녀는 흑저의 옆으로 걸어갔다. 흑저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호낭랑이 잠깐 멈칫했다. 흑저가 물었다. “보기 흉하오?” 호낭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었다. “불에 그을리기 전에도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겠는데?” 흑저는 미소를 지었다. “맞소,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 그 미소가 어쩐지 기분좋아 보인다는 생각을 하고 호낭랑은 의아해 했 다. 흑저가 두 손을 벌렸다. “내 옷은 어디 있소?” 호낭랑이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저었다. “보기 흉하군! 기본적인 거라도 좀 가리지!” 흑저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속바지에 바지를 입고 돌아서자 호낭랑이 잘 개어진 흑색 가사를 내밀 었다. “이건 어디서 난 거요? 전에 입던 옷은……?” “그 걸레는 당연히 버렸지! 이건 당신을 사모하는 누군가가 준 거 야!” 흑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화상이 입는 가사는 큰 천 한 폭만으로 이리저리 꿰매어서 만드는 것 이다. 전문적으로 그런 것들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나 못 만드는 것이 가사인데…… 일부러 배워서 만들었다는 말인가? 그 가사를 몸에 걸치려던 흑저는 다시 한번 멈칫했다. “이건……?” 옷깃에 하얀 매화 하나가 수놓아져 있는 것이다. 호낭랑은 그것을 들여다보고 웃었다. “정표(情表)까지 남겼군!” “정표라…….” 흑저는 어쩐지 그 옷을 입기가 부담스러워졌다. 호낭랑이 그의 어깨를 쳤다. “성의는 성의로 받는 거야! 그보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졸개들이 다 굶어죽거나, 동가채가 침으로 홍수가 나거나 할거야! 화과(火鍋)가 아 까부터 끓고 있어!” 화과는 납월(臘月:12월) 말일(末日) 밤에 먹는 제석야(除夕夜) 음식이 다. 원탁 가운데 커다란 솥을 걸어 놓고 각종 산해진미를 끓여 먹는 것이 다. 오늘이 바로 말일(末日)이었던 것이다. 오백 명이 먹는 것이니 솥은 오십여 개가 넘게 산채 중앙의 마당에 놓 여 있었다. 거기에는 비록 산해진미는 아니더라도 각종 고기와 교자(交子), 말린 푸성귀지만 야채들이 들어가 끓고 있었다. 흑저와 호낭랑이 나타나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함성은 흑저가 불빛 아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자 잠시 끊겼다. 그 흉측한 모습에 질린 것이다. 짝짝짝…… 누군가가 다시 박수를 쳤다. 그러자 아까의 몇 배가 되는 우렁찬 함성들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그 중간중간에 감탄 섞인 말들이 들려왔다. “무림에 이름을 떨친 분이라더니 면모를 봐도 알겠어! 저런 용모라야 정말 채주답지 않아?” “보기만 해도 행인들이 질리겠는데, 안 그래?” 흑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합장해 답례했다. 그 다음은 먹느라 정신이 없는 시간이었다. 한백이 놀리듯 말했다. “대단한 인기군!” 흑저는 젓가락을 뻗어 교자 하나를 집으며 대꾸했다. “자네가 나 대신 채주 할 텐가?” 한백은 손을 저었다. “난 너무 선량하게 생겨서 안돼!” 흑저는 피식 웃으며 배처럼 생긴 커다란 교자를 씹었다. 딱--! 흑저는 인상을 썼다. 교자 속에 뭔가가 들어 있어서 이에 씹혔던 것이다. 노란 동전이었다. 옆에 앉아 먹고 있던 하노삼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그 동전을 손에 들고 높이 치켜올렸다. “채주님께 나왔다!” 다시 함성이 터졌다. 화과에 넣어 먹는 교자는 황금덩이처럼 만들어 원보(元寶)라고 부른다. 그 중 하나에 동전을 넣어 그 교자를 ‘원보교자(元寶交子)’라고 부 르는데, 이것을 씹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속설이 있는 것이다. “이번 채주님은 복자(福子)야!” “저런 분 밑에 있으면 일 년 내내 화살도 피해 간다구!” 동가채의 오백 식솔들은 흑저의 용모와 동전 하나에 경복(敬服)해 버 린 것이다. 사정을 들은 흑저는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한 사람들……! 저런 사람들이 동가채의 해산명령을 접하면 어 떻게 반응할까?’ 반응도 단순했다. 식사가 끝나고 앞으로 나선 흑저의 해산명령을 들은 그들은 처음에는 모두가 죽어도 떠날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개중 몇몇은 그들을 버리면 차라리 죽겠다고 울부짖기도 했다. 그러나 흑저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요컨대 금룡장이 그들을 쫓고 있다는 말이었다. “여기 오는 도중에 이미 추격자 백 명을 죽이고 왔소!” 그 말을 끝으로 흑저는 말을 맺었다. 장내에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눈은 아까 전에도 내리고 있었지만 갑자기 지금 더 차가워진 느낌이었 다. 한 사내가 비실비실 일어나 말했다. “저는 죽어도 채주님을 모시고 싶습니다만 고향에 계신 노모의 모습 이 눈에 아른거려 어쩔 수 없군요!” 흑저가 손을 들어 오른편을 가리켰다. “이해하오! 저편에 가 서시오!” 그를 보고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갑자기 벌떼처럼 일어나 그 사내의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자리에는 십여 명만이 남아 있었다. 흑저는 자리에 남은 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여자와 노인, 불구자도 그 속에는 있었다. 여자 둘은 그도 본 적이 있는 호낭랑의 두 동생, 그에게는 처제가 되 는 호이랑(胡二郞), 삼랑(三郞) 자매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들을 넘어가 한 사람을 가리켰다. “노인네는 왜 남아 있소?” 언뜻 보기에도 칠십은 넘어 보이는 쭈그렁 노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난 달리 갈 데가 없어!” 흑저는 한동안 침묵했다. 호낭랑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전전전대부터 산채에 있던 유노인(劉老人)이야!” 흑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 사람을 가리켰다. “당신, 일어나서 걸어보시오!” 파리한 안색의 중년인 하나가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잠시 후 일어나 걸었다. 그는 발목 하나가 없는 불구자였다. 지팡이처럼 사용하는 창을 짚고서 야 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호낭랑이 다시 속삭였다. “호랑이 사냥을 나갔다가……. 다치기 전에는 산채의 최고용사였던 철사장 (鐵沙掌) 가오(賈五)야! 뭐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줘!” 흑저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갈 곳이 없소?” 가오는 땀이 밴 얼굴로 흑저를 마주보며 말했다. “동가채의 일원(一員)으로 죽고 싶은 것뿐입니다!” 흑저는 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도록 해봅시다.” 하노삼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모자라!” “뭐가 말이오?” “녹림 성회에는 각 채주가 이십 명씩 수행원을 데리고 참석하도록 되 어 있습니다. 여기 남은 사람 열 명과 저, 호부인을 합쳐도 열둘밖에 안되니 여덟이나 부족하잖습니까?” 여태 말이 없던 소운이 나섰다. “셋이야!” 그는 자기 자신과 한백, 엽검영과 황거지, 그리고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는 매아상을 가리켰다. 호낭랑이 덧붙였다. “하나지!” 그녀는 자기 옆에 붙어 있는 두 아이를 안았다. “운수불길하니 말년에 도적이 다 돼 보는군!” 황거지가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더니 내뱉듯 물었다. “하나는 어떻게 채울 거야?” “저기 사람이 있다!” 하노삼이 반갑게 소리쳤다. 반가울 만도 했다. 이렇게 눈보라 휘날리는 한겨울, 게다가 정초(正初) 에 길에서 사람을 본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으니 말이다. 호낭랑이 백 근(百斤)은 돼 보이는 묵직한 독각동인 (獨脚銅人)을 집어 들며 물었다. “내가 가서 잡아올까?” 독각동인 은 동가채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무기였다. 통째로 동으로 주조된 그것은 어린아이만한 체구의 사람이 외다리로 서 있는 것처럼 된 기문병기(奇門兵器)로, 어지간한 힘으로는 휘두르기 는커녕 들기도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 호낭랑은 굳이 그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동가채(銅架寨)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바로 그 독각동인 때문이었던 것이다. 흑저가 그녀를 말렸다. “내가 가서 얘기 해보지!” 저만치 보이는 사내에게 다가가는 흑저를 보며 엽검영이 투덜거렸다. “정신 나간 놈이 아니고서야 누가 길에서 만난 사람이 갑자기 우리 산채에 들어오시오 한다고 들어오겠어?” 그들은 모자라는 하나를 복우산 에 가는 동안 충원하기로 했던 것이 다. 온몸을 가죽옷으로 싸매 눈만 내놓은 황거지가 중얼거렸다. “있을 수도 있지!” 엽검영이 말끝마다 끼여드는 그를 밉상스럽게 보며 물었다. “누구 말이오?” 황거지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정신 나간 놈!” 사내는 황거지의 말대로 정신 나간 놈이었던 모양이다. 흑저의 말을 듣자마자 그러자며 따라온 것이다. “달리 할 일이 없으니……!” 삼십대 후반쯤 돼 보이는 사내는 그렇게 짧고 간단한 이유로부터 말을 시작했다. 그는 원래 장안 북부에서 변경을 지키는 교위(校尉)였다. 섬서성 은 몽고 와의 접경지역이라 변진(邊鎭)이 네 군데나 있다. 그들 섬서 사진(陝西四鎭)의 병향(兵餉:군량미)은, 사할(四割)은 중앙에 서 보내는 경운(京運)으로, 나머지는 현지 백성들에게 거두는 민운(民 運)으로 충당했는데, 백성들이 다 굶어 죽는 형편에 변경 군사들에게 보낼 곡식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중앙에서 보내주는 군량도 중앙의 고관이 일부, 통과하는 각성 의 고관이 또 일부, 변진의 지휘관이 또 일부하는 식으로 가로채고 나 니 남는 것이 없었다. 그도 수하에 군졸을 둔 교위로서 수하들이 굶는 것은 둘째치고 그 자 신도 굶주리게 되자 울분을 못참고 지휘관인 참장(參將)을 베어버리고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다. “고향에는 이미 수배가 되어 있을 테니 못 가고, 그렇다고 달리 할 것은 없고 해서 길가에 서서 눈구경이나 하고 있던 참이었소!” 며칠을 굶었는지 초췌한 인상의 사내는 안광만은 닦아놓은 거울처럼 날카로웠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관(官)에 쫓기는 범죄자, 그것도 뜻하지 않은 범죄자라는 표시일 것이다. 듣고 있던 황거지가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하여튼 난세가 되고 보니 누구도 본업에 충실할 수가 없다니까……! 그래 자네 이름은 뭐고?” 사내는 흑저가 채주인 줄 아는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복운(僕雲)이라 불러주시오!” 동가채를 출발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정월 초사흘이었다. * * * 창(槍)은 백병지왕(百兵之王)이다. 무기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싸움에서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 다. 그런 창이 강호 무림에서는 그리 환영 받지 못하는 것은 무공을 배우 지 못한 군졸들이 주로 사용하는 초보적인 무기라는 인상의 영향이 컸 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실질적인 원인은 휴대의 불편함이 더 컸다. 명대(明代)에는 검(儉)은 장식품으로 서생들과 여인네들도 휴대할 수 있었고, 도(刀)는 무기라기보다는 일상의 도구처럼 쓰였기 때문에 휴대 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창은 명백히 병기인 것이다. 그래서 관, 혹은 군(軍)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창을 휴대하는 것은 불 법이었다. 창은 길어서 감추기도 어렵다. 무림에 단창(短槍)이 유행하는 것도 숨기기가 쉽다는 단 한가지 이유 에서 였는데……. 그는 지금 창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열두 자가 넘는 긴 창이었다. 그것이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창을 들 자격이 있는 사 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사람이 창을 들 수 없다면 천하에 창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섬서성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중랑장(中郞將) 양세기(梁世紀)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송대(宋代)부터 내려오는 양가창법 (梁家槍法)의 당대 전수자! 그 신묘한 창술은 무림에서도 당할 자가 없어 ‘신창(神槍)’이라는 명예스러운 칭호를 황제로부터 하사(下賜)받은 바 있었다. 그런 신창 양세기가 지금 들고 있는 열두 자 길이의 장창 은 그의 위 명에 어울리지 않게도 대나무로 만들어진 창, 죽장창 (竹長槍)이었다. 죽창(竹槍)! 대나무로 만들어진 창에도 여러 종류와 수준의 것이 있다. 가장 간단하기로야 대나무의 한쪽 끝을 비스듬히 잘라낸 것이지만 이 런 것은 토비(土匪)들이나 쓰는 것이다. 통대나무 끝에 창날을 끼운 것이 그보다는 윗길이지만 그것도 허리가 약해 꺾이기 쉽다. 그러나 죽장창 은 대나무를 쪼개서 속을 제거하고, 돼지뼈를 고아 만 든 아교에 대나무 가루를 섞어 빈 속을 채운다. 거기에 옻칠을 하면 창대가 완성되는데 이를 적죽(積竹)이라 한다. 거기 창날을 박으면 가볍고 부드러우면서도 굳세고 탄력이 뛰어난 이 상적(理想的)인 창, 죽장창 이 완성되는 것이다. 양세기의 창은 지금 눈 내리는 벌판에 수평으로 길게 겨누어져 있었 다. 피처럼 붉은 대나무 창대 끝에 매달린 버들잎 모양의 창날이 하얀 광 채를 뿌렸다. 붉은 칠을 한 것이 아니라 운남 지역의 특산, 혈죽(血竹)을 창대로 삼 아 강철 이상의 재질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무림십대흉기의 또 하나, 혈화창(血花槍)이 그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이 다. 창날이 가볍게 떨렸다. 슈슈슈--파앙--! 한 순간 혈화창은 수십, 수백 개의 붉은 그림자로 화해 사방으로 쏘아 졌다. 그 예리한 창날이 겨누는 것은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였다. 철번간(鐵飜竿)! 정면으로 창을 찔러 가는 단순한 초식이지만, 그 순간속도의 가공함과 연속으로 수백 번 같은 공격을 되풀이하는 신기(神技)는 족히 무림일 절(武林一絶)이었다. 창 하나로 천하를 주름잡아 온 신창 양세기의 성명절기인 것이다. 지금도 그의 몸 주변에는 단 하나의 눈송이도 침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휘두르거나 날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창끝으로 찔러 눈송이가 몸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는 신기를 한 식경이나 보이고서야 그는 창 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그때서야 긴 호흡을 내쉬었다. 힘을 쓸 때는 들이마시거나 내쉬거나 둘 중 하나, 움직일 때는 멈추는 것이 호흡의 기본이다. 그가 철번간을 시전하는 동안은 처음의 한 모금 호흡, 진기 (眞氣)로 한 식경이나 견뎌내는 것이다. 그렇게 긴 호흡을 거듭한 뒤에야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지막 썼던 것이 오 년 전이라…….” 솜씨가 줄었다고 변명처럼 말하고 있는 것인데, 약간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던 사내에게는 그것이 자랑처럼 들렸다. “장군께서는 오 년 전보다 오히려 배는 빨라지셨습니다. 그 창이 뻗 어오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드물 것입니다.” 양세기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불쑥 물었다. “녹림 성회로 갔다고?” 그의 옆에 선 사내, 망백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양세기는 혈화창의 중동에 묶은 끈을 어깨에 걸며 물었다. “소운…… 그 아이를 죽여 주면 되는 것인가?” 망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양세기가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망백은 한마디씩 또박또박 말했다. 절대 착오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대사명께서는 소운보다 파나한 흑저를 더 주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이번 목표입니다!” 양세기, 어둠 속의 청부살수 (請負殺手)이자 구신(九神) 중 동군(東君) 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섬서성 도지휘사사 중랑장 양세기가 원단(元旦) 휴가를 받아 평복을 하고 길을 나선 것은 그 다음 날인 정월 초나흘의 오후였다. * * * 정월 초닷새. 눈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흑저를 선두로 하는 동가채의 무리들은 가슴까지 파묻히는 눈길을 걸 어 복우산 천식봉(天息峰)에 위치한 녹림 맹의 정문에 들어서고 있었 다. 말(馬)도 없고 가마는 더욱 없었다. 소운은 한백의 어깨에, 호낭랑의 두 아이는 그녀와 그녀의 동생이자 곽상의 미망인인 호이랑의 어깨에 무동타듯 올라 타고 있었다. 유노인과 가오는 그냥 걷는 것도 힘든 처지에 눈길을 헤치고 오느라 거의 탈진해서 동료들의 등에 업혀오다시피 했다. 영락없이 큰 싸움을 겪은 패잔병의 몰골이었다. 그나마 누구 하나 죽지 않고, 여기 하늘도 걸터앉아 쉰다는 험준한 천 식봉의 산곡(山谷)에까지 온 것이 가상할 정도였다. 그러니 녹림 맹의 정문을 지키던 졸개들이 그들을 우습게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장한이 그들을 위아래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웬 거지떼야?” 중얼거렸다고는 하지만 주위에 다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태가 역력히 보이는 것이다. 아마도 녹림 성회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자랑거리를 삼으려는 어중이떠중이 정도로 생각한 것일 게다. 짝--! 호낭랑이 앞으로 나서며 사내의 뺨을 본때 있게 올려붙였다. “아니, 이년이……?” 사내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같이 수문을 서던 사내들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어이, 반형(潘兄)! 여자라고 봐주는 거요?” “평소 하던 말 하고는 다른데? 여자들이 반형 턱수염만 보면 비벼달 라고 난리라면서?” “비벼달라고 붙기는커녕 깔아 죽일 기센데?” 텁석부리는 동료들의 비웃음에 자극을 받았는지 큼지막한 철퇴 를 들 어 호낭랑에게 휘둘렀다. “냄새나는 계집이 감히 반어르신에게 덤벼……?”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호낭랑이 독각동인 을 들어 간단하게 그의 철퇴 를 쳐내고 한손으로는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던 것이다. “그 냄새나는 아가리 계속 놀려보시지?” 웬만한 사내의 넓적다리만큼이나 굵은 그녀의 팔뚝에 구렁이 같은 근 육이 꿈틀거렸다. 텁석부리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그는 숨이 막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발만 버둥거렸다. 그러나 호낭랑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어…… 어…… 억!” 텁석부리는 숨넘어가는 신음소리만 간신히 질러대었다. 그의 동료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어디서 온 종자들이 감히 녹림 맹의 정문에서 소란을 일으켜?” “죽고 싶어, 앙!” 하노삼이 그들의 코 앞에 붉은 배첩(拜帖)을 들이밀었다. “네놈들이야말로 죽고 싶지 않으면 조심해라! 십팔채의 일원인 동가 채주 흑저님과 그 일행이다!” 붉은 배첩과 그 위에 찍힌 맹주의 직인(職印)은 그들의 입을 막기에 충분했다. 녹림 맹의 정예, 십팔채와 삼십육향에 속한 산채에만 발송된 배첩이 그것이었던 것이다. 흑저일행은 그제서야 안내를 따라 객방으로 향했다. 정문을 통과하며 생긴 일장의 소란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동가채의 초 라한 등장은 이야깃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제법 나이가 있는 사내가 혀를 차며 말했다. “동가채가 저렇게 몰락했나?” “이번에는 십팔채에서 밀려나겠군! 오 년 전에는 그래도 전채주가 간 신히 방어했는데 말이야!” 옆에 있던 사내가 방명첩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듯한 이름인데……?” 방명첩의 이름을 기입하는 난에는 ‘흑저(黑猪)’라는 단 두자만이 적 혀있었다. 아마도 그가 채주일 텐데…….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물었다. “누구 흑저라는 이름 기억나는 사람 없어?” 안내된 객방에 들어서자 호낭랑은 아이들을 내려놓고 웃으며 말했다. “엄마 어디 잠깐 갔다올 테니까 이모랑 놀고 있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나 흑저는 그녀가 잡으려는 독각동인 을 먼저 잡고 놓아주지 않았 다. “놔!” 호낭랑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말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파란 불똥이 튀고 있었다. 흑저는 여전히 놓아 주지 않았다. “뭘 하려는지 아니, 놓아 줄 수 없소!” “내가 뭘 하려고 하는데?” 흑저가 간단하게 말했다. “좋지 않은 일!” 소운이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바보 같은 짓이지!” 호낭랑이 그를 노려보았다. “방 배정한 놈 머리통을 부숴 주고 오는 게 왜 좋지 않고 바보 같다 는 것이지?” 그들이 들어간 객방이라는 것이 커다란 방 한 칸에, 흙바닥에는 침상 도 없이 그저 짚이 깔려 있는…… 거의 마구간 수준이었던 것이다. 소운은 매아상이 깔아 놓은 비단 보료 위에 피곤한 듯 길게 누우며 말 했다. “좋은지 안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건 확실하지!” 소운은 방문쪽을 가리켰다. “그들이 먼저 잘못했다고 올 테니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며 음침한 인상의 중년문사가 들어섰다. “천기수재(天忌秀才) 진회(晋淮)라고 합니다.” 그는 방문에 서서 안을 둘러보더니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손을 모 아 인사했다. “금번 성회의 접객주(接客主)를 맡고 있습니다. 불편하신 것은 없으신 지……?” “아주 만족스럽소!” 황거지가 짚 위로 벌렁 누우며 탄성을 질렀다. “아--! 거지생활 사십 년 동안에 이렇게 마른 짚 위에서 잠을 청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거지소굴로는 최고야!” 진회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데, 황거지가 문득 그에게 물었다. “다른 채주님들도 이렇게 편한 잠자리를 제공해 드렸겠죠? 짚은 말랐 는지 모르겠군요. 여긴 조금밖에 안 축축한데……!” 진회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그는 입을 벌 려 뭐라고 변명을 하려 했다. 슉--! 그때, 그의 귓가로 섬뜩한 기운이 스쳤다. 팍--! 작은 도끼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뺨을 스쳐 나무 문에 꽂혀 있었 다. “이게 무슨……?” 진회는 벌컥 화를 냈다. 도끼를 던진 한백이 나른하다는 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여긴 그래도 따뜻하긴 한가보군! 한겨울에 남경충(南京蟲:바퀴벌레) 이 다 기어다니니 말이야!” 진회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백이 던진 도끼의 끝에 세 치 길이는 될 듯한 남경충 한 마리가 꽂 혀 버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미리 잡은 남경충을 도끼에 꽂아서 던진 것이었다. 진회의 가슴에 섬뜩한 바람이 불었다. 만약 자신을 겨누어 던져진 도끼였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 이 생긴 것이다. 그 정확성은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머리는 남경충보다 몇십 배는 크니 대충 던져도 맞을 것 아닌 가! 그 속도만으로도 그로서는 도저히 피할 엄두를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한 수는 그가 여기 올 때 가지고 있던 의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 었다. 그는 더 이상 동가채의 실력을 재어 볼 생각을 버리고 바로 본론에 들 어갔다. “사실 제가 온 것은 멍청한 수하들이 방 배정에 실수를 했다는 말을 듣고…….” 소운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쓸데없는 변명이나 듣고 싶어서 여기 온 것이 아냐!” 진회는 처음에는 놀란 눈으로, 다음에는 잔뜩 기분나쁜 표정이 되어 소운을 노려보았다. ‘새까만 아이녀석이 다짜고짜 반말이야?’ 그러나 그는 이내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소운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맹주에게 금룡장의 후계자가 보잔다고 전해!” “그럼 역시!” 진회는 탄성을 지르며 흑저를 보았다. “파나한 흑저대협이십니까?” 지금은 소운보다도 흑저가 더 유명하다는 것을 흑저일행은 이 순간 처 음 알았다. 으리으리한 자리였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탁자가 죽 늘어선 넓은 대청, 녹림 맹 중심부의 녹 림 대전(綠林大殿)에 흑저와 호낭랑이 들어가자 좌중에 이미 모여 있 던 사람들의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상석(上席)에 앉은 여유 있는 인상의 노인이 현 녹림 맹주(綠林盟主)인 천랑성(天狼星) 동방극(東方克), 그 좌우에는 호법 (護法)들이 줄줄이 앉아 있었다. 그 아래로 동가채를 제외한 십팔채주, 다시 삼십육향주들의 자리였다. 소운을 비롯한 동가채의 식솔들이 방을 옮기는 동안 그들은 녹림 대전 에서 저녁식사를 하도록 초대되었던 것이다. “동가채주께서 오셨군!” 동방극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자리를 가리켰다. 자리는 십팔채의 말석(末席)이었다. 호낭랑이 입술을 삐죽이며 뭐라고 불평을 털어놓으려 했지만 흑저는 이미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쑤군거렸다. 사천 , 대파산 두 혈사(血史)의 주인공에, 모시던 주인을 납치한 보표 로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그의 정체에 대한 논란일 것이다. 결국 향주 하나가 일어나 그런 의혹의 일단을 물었다. “동가채주께서는…… 최근 무림에 위명을 떨치시는 분이라고 들었는 데…… 혹시 파나한 흑저대협이 아니십니까?” 흑저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흑저가 나긴 하지만 파나한이라는 말은 모르겠소!” 여기저기에서 채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맞나본데……?” “별호야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붙여질 수도 있는 것이니 뭐……!” “그렇게 싸움을 잘한다는 거야?” “용수 진립동에게도 아깝게 졌다는대?” “진립동이 머리털 나고 여태 그렇게 많이 맞은 적은 없었다고 탄식하 더라던대?” “손가락이 몇 개 부러졌대!” “나는 진립동이 늑골도 몇 대 나갔다고 들었는걸?” “설마……!” 이야기가 흑저에 대해서만 오가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검은 얼굴에 강퍅한 인상의 향주 하나가 일어나 흑저에게 물었다. “듣자니 동가채는 산채도 잃고 떠돌아다닌다면서요?” 호낭랑이 그를 노려보다가 흑저의 귀에 속삭였다. “흑사타(黑沙舵)의 타주인 흑사장(黑沙掌) 계석(季奭)이에요!” 흑사장 계석! 그녀의 전남편 곽철을 죽게 한 자였다. 흑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오!” 계석이 비릿한 웃음을 띠었다. “산채도 없는 무리를 녹림십팔채 에 끼워 준다는 것은 좀 창피한 일 이군요! 나야 괜찮지만…….” 그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 중에는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말이오!” 호낭랑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동가채가 왜 산채가 없다는 거야? 냄새나는 움막 몇 개 따위만 산채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디에 가든 채주가 있고 내가 있는 곳이 바 로 동가채야!” 계석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호낭랑의 눈썹이 치켜 들렸다. 쾅--! 탁자가 반으로 쪼개지고 그릇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호낭랑이 독각동인 을 들어올려 탁자를 내리친 것이다. “동가채를 비웃는 거야? 흑사타가 이제 동가채 정도는 우스워 보일 정도로 그렇게 커졌나? 어디 한번 싸워볼까?” “그만 두시오!” 녹림 맹주 동방극이었다. 그는 자기 앞에서 다툼이 일어났는데도 별로 불쾌한 기색도 없이 손만 저었다. “내일 있을 승급비무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면 될 것 아닌가?” 계석은 분노를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서기에는 억울했던지 흑저를 다시 한번 비웃었다. “대명이 자자한 파나한이 얼굴은 왜 그렇게 되셨소? 하긴 이름하고 맞아떨어지긴 합니다만…… 하하하!” 호낭랑의 눈썹이 다시 치켜졌다. 그러나 흑저는 표정의 변화없이 담담 하게 말했다. “초혼귀 원체체와 싸우다가!” “초혼귀 원체체!” 좌중의 공기가 크게 흔들렸다. 그것은 초혼귀 원체체라는 이름이 가진 비중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중원사흉에 같이 올라 있기는 하지만 다른 셋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던 것이다. 소위 당금 강호의 정상을 달리는 초절정고수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여기 모여 있는 사람 중 원체체와 겨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맹주라 해도 그에 비하면 약간 밀린다는 인상인 것이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과는……?” 흑저는 그를 힐끗 보고 대답했다. “그는 대파산 에 묻혔소!” 좌중의 누구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흑저의 실력은 소문 이상이었던 것이다. 제 21 장 장궁들어 천랑성을... 장궁들어 천랑성을 쏘나니 북두병으로 계수 술을 마시네 동방극은 침중한 안색으로 말했다. “못 들은 걸로 하겠다!” 반 각(半刻)에 걸친 소운의 설명과 다시 그만큼의 침묵 뒤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소운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백을 불렀다. “가자!” 밖은 어두웠다. 녹림 대전에서의 연회가 끝난 것이 이 경에 가까워서 였다. 그후에 바 로 소운을 접견했지만 아마 지금은 삼 경이 다 되었을 것이다. 소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불쑥 말했다. “원래 저렇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도 늙었군!” 한백이 물었다. “겁쟁이가 되었다는 것인가?” “아니!” 소운은 고개를 저었다. “내 속셈을 알 정도로 교활해졌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끝에 한백이 다시 물었다. “포기할 건가?” “그럴 수는 없지. 누군가 욕심은 많고 머리는 멍청한…… 그런 자가 필요해!” 한백이 말했다. “그런 자가 하나 있긴 하지!” * * * 방은 어두웠다. 흑저는 그 어두운 방 한쪽에 놓인 침상에 누워 뒤척거리고 있었다. 동가채주의 직위는 십여 년을 고독과 싸우며 홀로 살아 온 그로서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오늘처럼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길가의 잡초처럼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 오히려 그가 바라는 삶이었 다. --인연을 따르지 않을 때에도 있다 없다 라고 말할 수 없고, 인연을 따를 때에도 그 자취가 없는 것이니, 이미 그런 것임을 알았다면 부처 가 있는 곳에서도 머물지 말고 부처가 없는 곳에서도 빨리 지나가거 라. 노선사는 그렇게 말했었다. --이것이 곧 모든 부처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집착 이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 而生其心)’고 한 것이 바로 그것 이다. 일체 중생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그 뜻이 내닫는 마음을 반영 하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쉬지 않고 육도(六途)를 돌아다니면서 갖가 지 고통을 받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생기면 모든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모든 법이 멸한다고 하신 것이다. 마음이 생기면 모든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모든 법이 멸한 다……! 마지막 말이 귓가에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이 인간 아닌가……! 그 마음이라는 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었다면 일체의 번뇌 또한 없었 을 것이다. --큰 스님, 제 번뇌를 어떻게 끊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육조(六祖) 혜능 선사(蕙能禪師)에게 그렇게 물었다고 했다. 노선사는 그런 이야기도 해주었었다. 혜능 선사는 질문한 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했다. --번뇌가 어디에 있는데 끊으려 하는가? 내게 보여주면 끊어주리라! 번뇌가 진정 없는가? 그렇다면 지금 그의 운명에 짙게 드리워진 이 그 림자는 무엇일까? 한낱 마음의 장난에 불과하단 말인가? 흑저는 요즘 들어 부쩍 예전 소림 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억지로 기억하려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불류선사를 본 이후 갑자기 까마득하게 잊었던, 그때에는 이해하지 못 했던 그런 이야기들이 갑자기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에게는 진립동을 이길 한 가지 방법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 작했다. 아직은 어렴풋한 생각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점점 뚜렷이 모습 을 보이고 있었다. 진립동의 무공에서 받은 충격이 진정되기 시작하면서 그는 그날의 싸 움을 조금씩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가 진 싸움이었다. 변명의 여지없이 진 싸움이었지만…… 이길 수도 있었다. 흑저는 지금 와서야 그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흥분하지만 않았으면, 그리고 처음 보는 무공의 새로운 경지에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지만 않았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랬다. 지금 상태로도 그는 진립동을 이길 수 있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밖에 없는 가능성이었지만,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불리함! 남보다 신체조건에서 불리하고, 배경에서 불리하고, 두뇌에서 불리하고, 내공 (內功)에서도 불리하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예전에는 천형(天刑)처럼 여겨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그저 사실일 뿐이었다. 그가 짊어져야 할 업보였을 뿐이었다. 그것들을 안은 채로 싸우는 것, 그리고 이기는 것. 어쩌면 터무니없는 오기일 수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그의 업보를 벗어 던질 길이라는 것을 그는 흐릿하게나마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막야 보배검으로 수미산 을 자르고 북두(北斗)를 잡아서 낮종을 치라 는 불류선사의 말은 아직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다른 길을 찾아볼 시간이 그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혜진사태를 만났을 때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육 개월을 더 살기 힘들 거라고 했지만……. 그 기간이 더 짧아졌으면 짧아졌지 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것을 느낀다고 했던가? 그는 어렴풋이 삼 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기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구신과의 싸움은 그런 면에서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일 수도 있다고 그 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얼마의 시간을 보냈던가.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흑저는 눈을 뜨지 않았다. ‘호낭랑인가 보군!’ 방 안에 들어온 사람, 호낭랑으로 여겨지는 이가 흑저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흑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호낭랑이 아니다!’ 소리를 내지 않는 조용한 발걸음! 방 안에 은근히 깔린 살기! 흑저가 지금 지극히 예민한 상태가 아니었으면 느끼지도 못했을 그런 것이었지만 분명히 그것은 살기였다. ‘자객인가?’ 흑저는 전신의 신경을 침입자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더욱 묘한 느낌이 되었다. 침입자로부터 스며 나오는 기운은…… 그것은 안개처럼 스며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 기운은 단순한 살기가 아니라 복잡한 색으로 채색된 어떤 것이었 다. 침입자는 뭔가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흑저는 조금씩 눈을 떴다. 그리고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 * * “좋군! 정말 뛰어난 발상이야!” 계석은 소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신 찬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진작 소운을 만나지 못했는지 아쉽다는 표정이 역력한 태도였다. 소운은 입에 머금었던 한 모금 연기를 내뿜었다. “적당한 얼굴이 필요한데……?” “물론 있지!” 계석이 실눈을 뜨고 웃음 지었다. “당금 맹주의 사제인 표두랑(豹頭狼) 서적(徐狄)은 전부터 자기 자리 가 좁다고 불평이었어!” “자리가 좁다……?” “현재 수석호법 (首席護法)이지!” 소운도 웃음 지었다. 어딘가 그늘이 깔린 웃음이었다. “야망이 큰 자에게는 어떤 자리도 좁지!” * * * 흑저는 당황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당하는 일이요,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그의 품에 여인, 그것도 매아상이 안겨 있는 것이다. 침입자는 매아상이었던 것이다. 흑저는 붉어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이게 무슨……?” 매아상의 물풀처럼 촉촉한 손끝이 그 입술을 눌렀다.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날 더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요……!” 그녀의 옷이 어둠 속에서 한꺼풀 벗겨져 나갔다. 흑저는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매끄러운 살결을 가슴으로 느 낄 수 있었다. 그 충격에 그는 매아상의 몸에서 스며 나왔던 살기를 잊어버렸다. * * * 과앙--! 거대한 징이 울렸다. 천식봉이 무너질 것 같은 우렁찬 환성이 울리는 속에 동방극이 일어났 다. “백만 녹림 도의 꿈! 녹림 성회의 시작을 고한다!” “우와--아--!” 다시 우레 같은 함성과 박수가 천식봉을 흔들었다. 구경하는 자리에 있던 황거지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백만 녹림 도? 꿈? 죽여주는군!” 가오가 불만스럽게 그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뭐가 그리 우습습니까? 녹림 맹에 속한 사람만 치면 이삼만여 명밖 에 안되겠지만, 실제 녹림 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족히 백만이 넘 지 않습니까! 그게 과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황거지가 녹림 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아 불쾌했던 것이리라. 채주와 같이 온 사람이라 심하게 말하진 않지만 성질 같았으면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눈을 뒤룩거리는 것이다. 황거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녹림 도가 백만이 넘는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다!” “예?” “도적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단 말이다! 녹림 맹의 세력이 지금처럼 강성한 적도 역사상 그리 많지 않은데 이게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느 냐?” 황거지는 결론을 내리듯 단호하게 말했다. “평범하게 살기 힘드니 이렇게 된단 말이다. 고향에서 부모 모시고 농사지어서 살 수 있으면 누가 산 속에 들어와 도적질을 하겠어? 유민 과 도적의 수는 난세일수록 느는 법이니……!” 엽검영이 하늘을 보고 웃었다. “거지는 도적보다 뭐가 잘난 게 있어서…… 어이가 없군, 정말!” 황거지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거지는 주는 걸 받을 뿐 빼앗지는 않아! 차원이 다른 것이지!” “그거나 이거나……! 게다가 누구는 칼만 안 들었지 거의 강도두 만……!” 황거지가 벌떡 일어나 이를 갈았다. “그 누구라는 게 누굴 말하는 거냐?” 엽검영은 태연했다. “누구라는 소릴 듣고 찔리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 바로 그 누군가 보 지 뭐!” 하노삼이 손을 들어 둘을 말렸다. “조용히들 좀 하시오! 남 보기 창피해서 원……! 어린애도 아닌 사람 들이 어째 그러오?” 가오가 손을 들어 중앙에 마련된 연무장을 가리켰다. “승급비무가 시작되는 모양입니다.” 규칙은 간단했다. 삼십육향에 속하는 산채에서 대표가 나와 십팔채의 아무 곳이나 골라 도전한다. 그러면 그 산채에서도 대표가 나와 싸운다. 이기는 쪽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삼십육향을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십팔채에 도전하는 것은 삼십육향에 속한 산채에만 가능하다. 어중이떠중이가 다 나와 도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의 관심은 단 하나였다. 전 대회에서 채주까지 잃게 만든 흑사타와 동가채의 격돌이 올해도 이 루어질 것인가? 만약 이루어진다면 누가 이길 것인가 였다. 더구나 이번 녹림 성회 최약의 세력이라 평가되었던 동가채가 그야말 로 초절정고수를 채주로 내세웠으니 그 결과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흑사타가 동가채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체면을 완전히 깎는 일인 것이다. 한백은 그런 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는 이미 그 싸움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소운과 흑사타는 이미 얘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석이 나와 다른 채주를 선택해서 간단히 이겼을 때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향에서 동가채에게 도전했을 때는 놀라고 말았다. 그것도 삼십육향 중 가장 약체로 평가되던 화산(華山)의 비호채(飛虎 寨)가 도전할 줄이야……! 화산에는 화산파 (華山派)가 있다. 천하를 울리는 구대문파 의 하나인 화산파 ! 그 영향력 아래에서 녹림 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에 가까운데 ……. 소운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도 구신(九神) 중 하나였나?” 연무장 중앙에는 핏빛 죽장창 을 든 한 사내가 나와 있었다. 처음에 그것은 소곤거림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경악의 함성으로 변했다. “양세기!” “신창 양세기다!” “신창 양세기가 나타났다!” 그것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동방극과 휘하 호법 들이 전원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잡을 정도의 충격파를 몰고 온 것이다. “비호채주! 이게 무슨 짓인가?” 말석에 앉아 있던 비호채주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 참석하러 오는 길에 한패가 되었습니다.” 동방극이 눈을 부릅떴다. “그런 말도 안되는……!” 현직 군부의 장군이 녹림 도(綠林徒)가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한패가 되었다지만 사실은 위협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들어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인지 비호채주는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만 긁고 있더니 눈짓으로 슬쩍 흑저를 가리켰다. “그는 동가채주만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동방극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지간하면 양세기와는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실력으로도 그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휘하의 채주를 제물로 내줄 수도 없었다. 그는 흑저를 바라보았다. “일단 자격을 갖추어 도전을 했으니 받아주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원 치 않는다면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소! 애초에 엉터리 같은 일이니 만 큼……!” 흑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방극의 성의는 고마웠지만 그는 양세기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날 죽이려는 구신(九神)의 하나겠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자세에서 풍기는 기운이 이미 그랬다. 예리한 한 자루 창 같은 느낌! 그 창끝이 겨누는 것은 그의 가슴이었던 것이다. 호낭랑이 옷깃을 잡아끌었다. “이길 수 있어?” 흑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소!” 호낭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면 안돼! 반드시 이겨야 해!” 흑저는 침묵하다가 나직이 대답했다. “노력해 보겠소!” “어제 힘썼다고 지는 건 아니겠지?” 흑저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호낭랑은 애써 웃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흑저는 알 수 있었다. 왜 그녀가 어젯밤에는 방에 들어와 자지 않고 새벽에 매아상이 나간 후에야 들어왔는지를……! 매아상을 그녀가 보냈거나, 적어도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흑저는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길 수 있을 거요!” 예리한 한 자루 창 같다고 했지만 그는 그런 표현을 넘어서 있는 존재 였다. 흑저가 앞에 버티고 서자 그는 창끝을 오른쪽 아래로 살짝 벌려 예 (禮)를 표했다. 그리고 바로 정안(征眼), 오른발을 일 보 물리며 창끝을 흑저의 눈을 향해 겨누는 것이다. 그 순간, 사람은 사라지고 창만 남았다. 수평으로 겨누어진 한 자루 창! 버들잎처럼 예리한 창끝 뒤로 양세기의 건장한 몸이 완전히 가려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흑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고수는 한 자루 검 뒤에도 몸을 숨길 수 있다더니 이제 그것을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양세기의 모습은, 일컬어 병기와 시전자가 합일(合一)되는 경지의 그것 이었다. 하얀 창끝에서 뿜어지는 예기는 거리에 상관없이 곧바로 흑저의 눈을 꿰뚫어 버리는 것 같았다. 슈왁--! 소리를 들었던가? 소리는 창끝이 흑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뒤에 났다. 혹은 그 소리는 흑저의 환청일 수도 있었다. 생각 이전에 왠지 차가운 느낌에 본능적으로 머리를 살짝 비키지 않았 으면 이 일격으로 모든 것은 끝났을 것이다. 양세기의 출수(出手)는 그렇게 빨랐다. 예비동작도 없었고, 창이 뻗어나오는 것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분명 오 장여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단 일격으로 그 거리는 없어진 것이다. 흑저는 가슴이 서늘해져서 한 걸음으로 일 장이나 뒤로 물러섰다. 겁먹은 노루처럼 달아났다 해도 하는 수 없었다. 그러나 창끝은 피할 수가 없었다. 슈왁--! 칙--! 가슴팍에 한 치 깊이의 상처가 났다. 그나마 뒤로 물러서는 중에 당한 일격이 아니었으면 가슴팍이 앞뒤로 관통당했을 것이다. 흑저는 좌우로 크게 몸을 흔들었다. 창끝에서 벗어나려는 회피동작이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칙--! 치익--!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창끝만이 흑저의 눈앞에 가득했다. 흑저는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상대에게 접근하지 않고는 박투술 은 소용이 없었다. 진립동처럼 백보신권 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백보신권 !’ 흑저는 문득 양세기의 창끝이 진립동의 백보신권 과 닮았다고 생각했 다. 거리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공격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 랬다. 흑저는 두 팔을 가슴앞에 모았다. 칙--! 왼쪽 어깨의 살점이 한 근은 족히 되게 떨어져 나갔다. 칙--! 오른쪽 옆구리에 긴 상처가 그어졌다. 흑저는 손을 풀지 않았다. 적어도 가슴과 머리의 요혈은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치익--! 잔뜩 웅크린 그의 넓적다리에 창이 와서 꽃혔다.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요혈을 방어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다간 결국엔 죽는 일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적의 공격을 막고 반격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려면 공격해 오는 창끝을 보아야 한다! 흑저는 박룡수를 비스듬히 휘둘러 넓적다리에 꽃힌 창대를 쳐갔다. 그러나 창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슈왁--! 드러난 팔 사이로 창이 쏘아져 왔다. 흑저는 상체를 비틀었다. 섬뜩한 느낌! 흑저의 가슴팍에 상처가 깊이 패었다. 흑저는 크게 원을 그리며 뛰었다. 제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방금 어떻게 가슴을 찌른다는 것을 알았지?’ 흑저의 머릿속에 번개 같은 생각이 함께 달렸다. 파--앙--! 파공음이 달라졌다. 열두 자의 죽장창 이 허공을 수평으로 갈랐다. 흑저는 정갱이가 부러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고꾸라질 듯하다가 겨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최--!” 창대가 흑저의 무릎을 때렸다. “액(扼)” 반대편으로 돌아간 창대가 종아리를 후려쳤다. “시(時)” 창끝의 돌(突)이 발등을 찍었다. 으드득--! 소름끼치는 소리, 그리고 발등의 뼈가 으스러지는 아픔이 밀려왔다. 흑저는 그 아픔에 본능적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유수(流水)” 양세기는 기합처럼 초식명을 외쳤다. 흑저의 발등을 찍은 창이 빠져나갔다. 창은 그의 손끝에서 한바퀴 회전하더니 둥근 공처럼 웅크린 흑저의 목 덜미를 찍었다. 흑저의 뒷골을 스치는 찬 기운! ‘보고 피하면 늦는다!’ 흑저는 화살처럼 앞으로 뛰어나갔다. 칙--! 창끝이 뒷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쾅--! 흑저의 박룡수가 돌바닥을 때렸다. 그 반동으로 흑저는 방향을 바꾸어 굴렀다. 챙! 챙! 창날이 돌바닥을 때렸다. ‘기세를 느껴야 한다!’ 흑저는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창끝이 쏘아져 오는 기세를 느끼고 미리 피해야 했다. 거기에 양세기 를 이기는 길이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했다간 창끝에 앞뒤로 꿰뚫릴 뿐이었다. 흑저는 바닥에서 몸을 튕겨 일어나며 눈을 감아 버렸다. 생사의 간극(間隙)! 그 좁은 틈 안에 활로가 있었다. 흑저는 박룡수를 들어 움켜쥐었다. 캉--! 창이 멈추었다. …… 정적이 흘렀다. 눈을 감고 서 있는 흑저. 왼발을 내밀고 창을 겨누고 선 양세기. 창은 그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었다. 흑저의 박룡수에 창끝이 잡힌 것이다. 양세기의 눈이 불신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흑저는 창을 놓아주었다. “다시 해보시오!” 방금의 결과가 우연의 일치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진립동을 이기기 위해서 였다. 양세기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 다. 주위는 극히 고요했다. 싸움이 시작되고 지금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정도로 급하고 살벌한 대결이었다. 영원보다 긴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멈추는 두 사람을 보자 아 직 차 한 모금 머금을 시간도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미쳤군!” 엽검영이 어처구니가 없는 듯 소리쳤다. “창을 잡았으면 빨리 때려죽이든가 해야지 저게 웬 여유래?” “다시 잡을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길에서 주운 사내, 복운이었다. 황거지가 그를 힐끔 보았다. “그래, 자네도 군문(軍門)에 있었으니 저 사람을 알겠군? 그의 창을 막은 사람이 있었나?” 복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전 채주님이 방금 그의 창을 잡은 것도 믿어지지 않습 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착실한 무인이었는데……!” 양세기는 세 걸음 물러섰다. 창을 들어 흑저를 겨누는 그의 신색에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창날을 잡히는 그 순간에 그는 이미 졌다. 비무(比武)였다면 그는 더 이상 창을 겨누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숨겨진 신분은 자객이었고, 자객의 싸움은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승부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생사를 가리려는 것이 자객의 무(武)인 것이다. 창날이 가볍게 떨렸다. 슈슈슈--파앙--! 한 순간, 그의 창은 허공을 직선으로 갈랐다. 불필요한 동작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저 흑저의 목덜미를 찔러 가는 동작이었다. 신창 양세기의 성명절기인 철번간(鐵飜竿)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한 군 간이었다. 흑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붉은 그림자가 번뜩하는 순간 흑저의 목이 꿰뚫렸다. 사람들은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창은 멈춰져 있었다. 흑저의 목줄기에 대어진 그대로, 한 줄기 피를 흘리게 하면서 창은 박 룡수에 잡혀 멈춰져 있었던 것이다. 양세기의 얼굴이 시커매졌다. 그는 양 손으로 잡은 창대를 힘껏 밀었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 내공 으로 밀어붙이면 틈이 보이고 말 것이다. 창끝을 잡은 흑저의 박룡수가 펴졌다. 그 순간 양세기는 전력을 다해 그대로 창을 밀고 나갔다. 쭈욱! 그의 몸이 그 창대 끝에 매달린 것처럼 앞으로 바짝 밀려들어왔다. 흑저의 두 박룡수가 하나는 창대를 비스듬히 밀어버려 창끝을 허공으 로 돌리고, 다른 하나는 창대를 따라 앞으로 펴진 채 뻗어갔다. 그 손끝에 양세기의 머리가 걸렸다. 퍽--! 붉은 피가 허공으로 분수처럼 튀었다. 흑저는 눈을 떠 천천히 뒤로 넘어가고 있는 양세기의 시체를 보았다. 나직한 염불이 그 입에서 새어나왔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 바를타 야 훔…….” 더 이상 흥분은 없었다. 이미 이겼지만 최후의 순간에는 이겨야 한다는 그런 마음조차 없어졌 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 평생 다시는 않으리라 생각했던 염불이 입 밖으로 자연스럽 게 나온 것이 신기했다. 흑저는 마치 방심한 것같이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의 귀에는 녹림 맹도들의 함성이 실제 산을 무너뜨린다 해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 * * “언제……?” “당장!” “그렇게나 빨리?” “오래 끌어서 좋을 일이 아니니까!” 표두랑 서적은 잠시 갈등했다. ‘그래도 오십 년이나 한솥밥을 먹은 사형을……!’ 그러나 갈등은 길지 않았다. 그의 야망에 비해 녹림 맹 수석호법 의 자리는 너무 좁았던 것이다. 서적은 벌떡 일어섰다. “한다!” 계석이 방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흰 옷을 입은 사내 이백여 명이 늘어서 있었다. 서적의 눈가에 놀라움이 스쳤다. “각 산채에서는 이십 명만 데려오도록 되어 있었을 텐데?” 계석은 희미하게 웃었다. “하려고만 한다면 방법은 많지요!” 문을 나서던 서적이 다시 멈추어 섰다. “동가채주는……?” 소운이 손을 저었다. “적당한 곳에서 이미 대기하고 있지!” ‘말 했다간 또 이러니저러니 할 텐데 흑저에게 말했을 리가 없잖 아?’ 소운은 서적을 비웃었다. 욕심은 많지만 용기가 없다.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이 다 그 증거였다. 기세좋게 일어났지만 사실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너보다는 동방극이 훨씬 낫다. 지금 그 자리도 네겐 과분해!’ 그러나 그 때문에 소운의 목적에는 딱 들어맞는 자이기도 했다. ‘배반은 이렇게 쉬우니…… 고래(古來)로부터 이 유혹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드물지!’ 소운은 한백의 어깨에 걸터앉아 흔들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 었다. 한백이 문득 말했다. “네 어머니가 어제 흑저의 방에서 나온 걸 아나?” 소운이 힐끗 그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잤을까?” “아마도……!” “잘됐군! 사랑에 빠진 남자는 이용하기 좋지!” “네 어머니인데도 괜찮은가?” 소운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부인일 뿐 내 어머니가 아냐! 그리고…….” 소운은 그들의 앞에 드러난 눈 덮인 하얀 지붕을 보며 중얼거렸다. “흑저를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친어머니라도 줬을 거 야!” 그들은 맹주부에 도착해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한백은 열려진 측문가에 기대어 자는 듯 쓰러진 경비무사의 시체를 툭 건드려 보았다. 시체는 그대로 무너지며 검게 물든 얼굴을 드러내었다. 한백이 중얼거렸다. “흑사타가 귀주성 에 있다고 했나? 묘강 (苗疆)과 가까우니 역시 독 을 쓰는군!” “흑사(黑沙)라는 것 자체가 독 모래를 의미하지! 계석의 별호도 흑사 장(黑沙掌) 아닌가? 독공을 연마했을 거야!” “곽철도 그래서 나중에야 죽었군!” “누구?” “전대 동가채주!” “……!” 그들은 맹주부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별 경계가 있지도 않았지만 어쩌다 보이는 경계병은 이미 다들 흑사타 의 수하들로 바뀌어져 있었다. 한백은 은근히 감탄했다. “계석은 생각보다 대단한 인물이군!” “원래 꽤하는 인물로 생각을 했었어!” 한백은 핀잔을 듣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멍청한 인물로 그를 추천한 것이 자신이었던 것이다. 소운이 말을 이었다. “다행히 욕심은 많았어! 안 그랬으면 우리는 녹림 맹으로부터도 쫓기 는 신세가 되었을 거야!” “네 속셈을 짐작할 정도로 그가 영리하단 말인가?” “물론!” “그런데도 협력하는 이유는?” 어떤 속셈인지는 몰라도 동방극은 그 속셈을 짐작했기 때문에 거절하 지 않았던가! 소운은 웃었다. “동방극은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었고, 계석은 달랐지! 그와 나의 이해 (利害)가 맞아떨어진 것뿐이야! 아마 내가 충동질을 않았어도 그가 무 슨 일이든 일으켰을 거야!” “이 정도로 준비를 해온 걸 보고 알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쉬 운데……?” “반란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성공가능성도 높고 대체로 쉽지! 배반자는 그들을 아는데 그들은 배반자를 모르거든!” “금룡장에서는 왜 그런 방법을 안 썼지?” “그때는 그들이 배반자고 내가 지키는 쪽이었으니까! 상황을 역전시 켜 놓을 필요가 있었지!” “지키는 것보다는 줬다가 다시 빼앗는 게 낫단 말인가?” “수세(守勢)보단 공세(攻勢)가 낫다는 뜻도 되지!” 한백은 묘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반란이 오히려 쉽다……, 묘한 논리군!” 그들의 앞에서 맹주실의 문이 열렸다. 동방극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누구라도 야반 삼 경에 침상에서 끌려나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그 런 기분이 될 것이다. 더구나 온몸에 시퍼런 칼날이 겨누어져 있다면 말이다. “서적! 네……, 네가……?” 서적은 다른 사람들의 뒤에 서서 외면하고 있다가 한 걸음 더 물러나 고개를 돌려 버렸다. 소운이 불쑥 말했다. “당신은 너무 늙었어! 이젠 은퇴해서 손자나 보는 게 어울릴 것이 오!” 계석이 검은 환약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드시면 안락한 노후가 보장될 수 있을 겁니다. 맹주님!” 동방극의 머리카락이 하나하나 곤두섰다. 그 눈에서 뇌전 같은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계석은 요혈에 칼날이 겨누어져 움직일 수도 없는 동방극의 상태를 알 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백이 물었다. “그게 무슨 약이지?” 계석이 낮게 말했다. “갈영칩독(蝎獰蟄毒)! 당장 죽지는 않지만 주기적으로 해약을 먹어야 하는 만성독약이지!” 한백이 대월을 꼬나잡고 나섰다. “그런 환약으로는 안락한 노후가 보장될 것같지 않군! 내가 도와주 지!” 대월이 치켜 들렸다가 떨어졌다. 팟! 동방극은 부릅뜬 눈으로 한광을 흘리고 있다가 천천히 한백의 앞으로 쓰러졌다. 한백은 대월을 내리쳐 나머지 한쪽 팔뚝도 끊어버렸다. 서적이 경악해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한백은 충혈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왜? 이제 와서 겁나시오?” 서적은 그 기세에 눌려 더듬거렸다. “그, 그게 아니라…… 내일의 성회도 주관해야 하는데 양 팔이 없어 서야……!” 소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긴 소매로 가리면 돼!” 그는 계석을 향해 말했다. “오늘밤 안으로 구워삶아서 내일은 우리 뜻대로 하게 만들어야 해!” 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되면 미혼약(迷魂藥)이라는 좋은 방법도 있으니까……!” 소운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서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맹주(徐盟主)님의 등극제일성(登極第一聲)은? 서적도 조금씩 안색이 풀려 미소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진격(進擊)!” 녹림 맹의 출동을 명령하는 것이었다. 십팔채와 삼십육향의 주인들은 물론 호법 들까지 일제히 자리에서 몸 을 일으켰다. 그만큼 서적의 등극제일성은 놀라운 것이었다. 한 호법 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어디라고 하셨습니까?” 서적은 태연했다. “금룡장!” 채주 하나가 안색이 파랗게 변해 더듬거렸다. “금룡장을 털자고? 이, 이건 미친 짓이야!” 동방극이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져서 맹주직을 서적에게 넘긴다고 했을 때에는 참았다.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대권이 넘어가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라도 보기 드문 일 또한 아니었다. 자고 나면 주인이 바뀐다는 것 정도야 그들 녹림 에는 신기한 일이 아 니었던 것이다. 동가채주 흑저를 수석채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어제 신창 양세기를 침몰시켜 녹림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신위를 떨쳤던 그였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을 텐데?’ 하룻밤 사이에 주인이 바뀌었으면 거기 힘을 쓴 자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설마 흑저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하고자 한다면 동방극은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도 지금 어리둥절해 있지 않은가? 중인들의 의혹을 풀어준 것은 흑사타주 계석이 총당당주(總堂堂主)의 직위를 겸한다는 결정이 났을 때였다. 그제서야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위인인 것이다. 평소에도 야심을 흘리며 다니는 자였으니까! ‘동방맹주에게 지혜가 있었으면 저자부터 견제했었어야 했어!’ 이미 다된 밥이니 못마땅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서적이 맹주의 증표(證表)를 거머 쥔 뒤 내뱉은 첫 명령은 좌 중을 발칵 뒤집어 놓고도 남음이 있었다. 호법 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했다. 금룡장이 어딘가? 당금 중원제일가! 정예무사만 일천이 넘는다는 와호장룡지지(臥虎藏龍之地)가 바로 그곳 이다. “게다가 만약 우리가 금룡장을 공격하면 관에서 구경만 할 것 같습니 까?” 서적이 대답했다. “관에서는 지금 유례없는 기민(飢民)의 구휼에도 손이 모자란 처지 요!” “섬서성 백성이 다 굶어죽어도 관에서는 먼저 금룡장부터 구하려 들 것입니다.” 금룡장이 중앙에 끈을 대고 있다는 정도는 그들도 알고 있었다. “중원의 각파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녹림 도가 산길에서 행인을 털고 통행세를 받는 것이야 무시하고 넘어 가지만 유수한 가문 하나가 통째로 약탈당하는 것은 좌시하지 않을 것 이 분명했다. 하물며 그것이 중원제일가인 다음에야……. 서적은 계속되는 반론에 짜증스러운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계석이 나섰다. “녹림 도의 본령(本領)이 뭡니까? 약탈 아닙니까? 이번은 목표의 덩 치가 조금 크다는 것뿐인데, 너무 겁들을 내고 계시는군요!” 호법 하나가 발끈해 일어났다. “금룡장이 덩치가 조금 크다는 정도로 표현되는 대상인가? 그 뒤에 버티고 선 관과 각 정파들은 어떻게 해결할 작정이야?” “그들은 참견할 수 없을 거요!” 회의실 한쪽에 나타난 소년을 모두는 어리둥절해서 바라보았다. 방금 말한 소년, 소운이었다. 계석이 그를 가리켰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최근 무림에 화제를 불러일으키신 분, 금룡장 의 원주인이십니다.” 소운은 거두절미하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난 당연한 권리로 적도들에게 빼앗긴 내 재산을 찾는 것이오. 녹림 맹은 협의지심(俠義之心)으로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고……! 누구도 이 일에 대해서는 참견할 수 없을 것이오!” 녹림 맹은 먼저 그들이 소운의 뜻을 대리한다는 포고를 천하에 알린 다음 금룡장으로 진군해 간다. 만약 금룡장에서 소운을 인정한다면 그대로 밀고 들어가면 된다. 그 경우 소운이 녹림 맹에 충분한 보상을 해줄 것이다. 반대의 경우, 즉 그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소운을 맞아들이기를 거절한다면 녹림 맹은 명분 있는 싸움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소운이 물었다. “녹림 맹도가 전부 동원되면 몇이나 되겠소?”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여기 맹에 있는 수만 해도 일천에 가까우니, 산채에 남은 식솔들까 지 동원하면 족히 이삼만 정도?” 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맹에 있는 일천도 고르고 고른 정예 아니오? 각 산채에서 다시 정예만 모아온다면 쉽게 삼사천을 넘지 않겠소?”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운은 결론짓듯 말했다. “금룡장에 무사가 일천이 있다지만 정예는 반도 안되지. 나머지는 칼 이나 겨우 쥐는 하인들에게 무사옷을 입혀놓은 것에 불과하니 무슨 힘 이 되겠소? 소수로 다수를 이기는 것은 병법의 궤계(詭計)라 했으니 당연히 다수로 소수를 이기는 것이 정상이라는 뜻이오! 그런데도 여러 분은 망설이겠소?” 공기가 변했다. 방금까지 안된다는 쪽의 이야기만 앞을 다투어 나오더니 이제는 조심 스럽게 가능성을 타진하는 목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소운의 영향이었다. 관과 무림정파에서 관여를 않는다면 불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인 것이 다. 만약 성공이라도 한다면……! 소운과의 의리를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천문학적인 재물을 챙겨서 각자 돌아가면……? 소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참고 삼아 말한다면 내 보표 였던 동가채주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금룡장에는 단 한 사람도 없소!” 그 말이 대세를 결정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그런 분위기에서 마지막 한마디를 기다렸 던 것처럼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금룡장을 털어 버리자!” “녹림 사상 전무후무한 위업을 세워 봅시다!” 녹림 맹이 금룡장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한 것은 사흘 후 정월 십 일 오전이었다. 제 22 장 바람은 선들선들... 바람은 선들선들 나뭇잎 흔드나니 그대 생각하며 내가 시름에 젖나니 “이번 일, 어떻게 생각해?” “녹림 맹의 패배!” 당소취는 당소홍의 간단한 대답에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단정을 지어? 녹림 맹도 출발할 때의 일천 명 이 이제는 삼천 가까이로 늘어나 거의 대규모 민란(民亂)으로 착각할 정도인데?” 당소홍은 손가락을 세웠다. “민란으로 착각되는 순간이 파멸의 순간이야! 섬서 사진(陝西四鎭)의 병력이 예양부 주변으로 모여든다는 정보가 있으니까!” 당소취는 눈이 동그래졌다. “군부가 녹림 맹을 치겠다는 거야?” “녹림 맹이 녹림 맹으로 남아 있을 경우에는 괜찮겠지만, 조금이라도 민란에 가까운 행동을 하면 그땐……!” 당소홍은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녹림 맹이라고 봐줄 리가 없으니까!” “만약 그런 간섭 없이 금룡장까지 진격한다면?” 당소홍은 두번째 손가락을 폈다. “그래도 녹림 맹의 괴멸이야!” “왜?” “녹림 맹의 일천이 어떻게 삼천이 되었을까? 그 대부분은 기아에 지 친 농민들이 따라 붙은 거야! 그런 오합지졸들이 금룡장 정예 무사 일 천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금룡장 내부도 분열되어 있잖아?” 소운의 탈출 이후 금룡장 내부에서는 오히려 소운의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은 이랑검 금야홍이었다. 그것은 소운을 추격했던 흑의인들이 강호의 비밀세력인 흑룡방의 무리 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소운의 행동을 이해 할 수도 있겠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암살의 위협은 소운의 말대로 그렇게 명백히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 일조(一助)를 한 것이 금야홍이었다. 그는 소운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바로 호가봉공의 자리를 내놓 고 소운을 정식 장주로 추대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좌우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흑룡방을 금룡장의 공적(公敵)으로 삼아 철저히 밝혀 내어 괴멸시킨다는 결의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 그의 주위에 금룡장 금가가문에 충성을 다짐하는 가신의 일단이 모여들었다. 놀랍게도 그 운동의 중심은 소운에게 가장 원한을 가지고 있을 법하던 백염공 하구장이었다. “자식은 작고 충성은 큰 일이다!” 그의 변(辯)이었다. 그들을 친소운파(親小雲派)라고 한다면, 반소운파(反小雲派)의 중심은 이 역시 의외의 인물로 금태파야였다. 그녀는 노탐(老貪)에 휩싸인 듯이 보였다. 소운도, 소운 때문에 호가봉공의 지위를 버린 금야홍도 금룡장의 책임 자로는 부족하니 자신이 다시 전면에 나서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가문을 위해 자손에 대한 애정을 버린다!” 그녀의 눈물 어린 호소였다. 소운이 납치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간 것임이 분명해진 이상 가문을 버린 패륜아(悖倫兒)라는 것이다. 소운이 광기에 휩싸인 상태라는 증언도 그들의 한 이유가 되었다. 평소, 소운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무리들이 그녀의 밑으로 모여들었 다. 그 세력이 엄청난 것이라 삼당의 대부분, 삼검대의 대부분이 그 아래 였고, 외부 십이지가에서도 은근히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분열되어 있다고 해도 금룡장의 전력에는 거의 손상이 없다 는 거야!” 당소홍은 결론짓듯 말했다.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그녀들의 뒤에 어느새 정기룡이 나타났다. “소저의 탁월한 분석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요!”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당소취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동창 사람들은 정말 기분나쁘게 행동하는군요!” “저런……!” 정기룡은 사람좋은 미소를 흘렸다. “동창 의 누가 당문 의 소저들께 실례를 범할 만큼 간이 부었습니 까?” 자신이 혼을 내주겠다는 태도였다. “하!” 당소취가 기가 막히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바로 당신, 당신이오!” 정기룡은 넙죽 허리를 구부렸다. “그런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말씀이……! 저로서는 온갖 성의와 예 의를 다해서 두 분 소저를 대하고 있습니다만……!” “거짓말쟁이 같은…… 풋!” 당소취는 그의 과장된 행동에 결국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이 기회였다. 정기룡은 재빨리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 예양부에는 별로 볼 것은 없지만 맛있는 음식은 몇 가지 있지 요! 벽옥루로 모셔서 간단하게 대접할까 합니다만……?” 당소홍이 말릴 사이도 없이 당소취가 물었다. “어떤 음식이 그렇게 자신 있어서 그러시는 거죠?” 애초에 거절했으면 모르되 이렇게 되면 반승낙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다. 정기룡은 느긋하게 말했다. “저포(猪暑)입니다!” “저포?” 당소취는 실망했다는 듯 말했다. “그건 어디에나 다 있는 것 아녜요?” 저포는 돼지를 진흙에 싸서 구워 먹는 것, 중원 어디에서나 볼 수 있 는 일반적인 요리인데……! 정기룡이 손을 저었다. “일반적인 것이지만 평범한 것은 아니오, 오래된 방법이지만 결코 낡 은 것은 아닙니다. 최고의 요리는 일반적인 재료를 일반적인 방법으로 요리해서 맛을 내는 것이니 결코 희귀한 것에 일미(一味)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정기룡이 설명한 방식은 이런 것이었다. 새끼 돼지의 내장을 꺼낸 후 대추를 가득 채우고, 풀로 묶은 후 진흙 을 발라 구워낸다. 다 익으면 진흙을 떼어내고 발효시킨 쌀을 풀처럼 끈적하게 물에 개어 바른 다음 끓는 기름에 담가 튀겨낸다. 이것을 조그만 솥에 넣은 후 솥째로 큰 솥에 담는다. 이 큰 솥에 물을 부어 사흘 밤낮으로 불을 때서 더 익힌다. 이 모든 것이 끝나면 식초와 소금만 넣어 간을 쳐 먹는다. 당소취가 흥미가 있는지 물었다. “시간만 많이 걸릴 뿐 모두 일반적인 방법에 아주 기본적인 양념만 들어가는 데도 맛이 있단 말인가요?” 정기룡은 다시 미소지었다. “사천 지방에서는 양념을 많이 넣지요? 물론 그 나름의 풍미(風味)가 있긴 합니다만, 요리의 도(道)에는 어긋나는 방법입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시 읊듯이 말했다. “요리의 도는 융합(融合)과 조화(調和)에 있나니, 조화는 반드시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짠 것으로 하는데, 선후(先後)와 다소(多少), 그 조절 의 심하고 미약함이 모두 스스로 일어나야 하나니……!” 음식 본연의 맛이 우러나도록 양념은 되도록 안 쓰는 것이 요리의 도 라는 것이다. 당소취는 감탄했다. “별 걸 다 아시는군요! 그것도 동창 에서 하는 일인가요?” 정기룡은 다시 웃었다. “오랫동안 조정의 일을 하느라 홀로 떠돌다보니 요리에 흥미를 갖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럼 한번 맛이나 보러 가실까요?” 당소홍이 안색이 변해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재미있는 모양이구나!” 나른한 목소리! 그 큰 몸이 바로 뒤에 붙어 있을 동안 어떻게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까? 동창 의 대영반 정소립이 정기룡의 등뒤에 유령처럼 나타난 것이다. 정기룡은 물론이고 그 방향을 보고 있던 당씨 자매까지도 언제 그가 거기 왔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정기룡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당소홍은 그 표정의 변화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정기룡이 미소를 띠고 돌아서서 포권했다. “대영반 합하(合下)를 뵙습니다!” 정소립도 미소지었다. “사석(私席)이니 그냥 아버지라 부르려무나!” 당씨 자매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정기룡이 동창 의 교위라고만 알고 있었지 설마 정소립의 아들이라고 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내시도 아들이?’ 생각하던 당소홍이 얼굴을 붉혔다. 우선은 처녀가 생각할 일이 아니었고, 둘째로 내시도 아들이 있을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양자(養子)는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정기룡이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다시 절했다. “예, 아버님!” 그러나 정소립의 가는 눈은 이미 그를 떠나 당씨 자매에게 향해 있었 다. “어디에선가 들었는데…… 금룡장 소장주 일행의 탈출이 있던 날, 바 로 그 마차를 타고 나가서 나중에 마차는 두고 몸만 돌아오셨다는 데…… 사실인가?” 나른한 목소리, 그러나 당씨 자매의 귀에는 염왕의 망치소리보다 더 두려운 목소리였다. 당씨 자매들은 일순간에 안색이 바래 버렸다. 하지만 대답을 않을 수가 없었다. 정소립의 나른한 눈 속에서 빛나는 섬뜩한 광채는 먹이를 노리는 뱀의 그것처럼 보였다. 당소홍이 간신히 입을 벌렸다. “그날…….” 누군가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날 거기 계신 동창 의 교위께서 대파산 인근에 계셨다는 얘기도 들으셨소?” 이번에는 정기룡의 안색이 바래 버렸다. 급히 고개를 돌려 말한 사람을 바라보는데, 누군지 궁금해서라기보다 정소립의 시선에서 표정을 숨기려는 행동이었다. 당가소와 당천호가 그들이 있는 금룡장 영빈관의 정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소립이 천천히 물었다. “사실인가?” 누구에게 묻는지를 알 수 없는 흐릿한 질문! 정기룡은 입을 다물고 당가소가 대답했다. “글쎄…… 사실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십 개의 목이 잘려진 그곳 에서 봤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그 역시 흐릿하게 진위를 가리고 운만 띄우는 대답이었다. 정소립에게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정소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남보다 두 배나 더 큰 손, 그러나 여인의 그것처럼 균형잡힌 아 름다운 손을 들어 정기룡의 어깨에 올려놓을 뿐이었다. “당문 의 분들이 사담(私談)을 나누시도록 우리는 그만 물러가자구 나!” 당가소가 한마디 더했다. “오십 개의 목에 관해서인데…….” 정소립은 또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조금 치켜 떴다. 당가소는 빙글빙글 웃어가며 말하고 있었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 있는 암기 가 원반처럼 생겼다는 얘기가 떠돌더군요! 아마 요만 할까……?” 당가소의 두 손이 원형을 만들었다. 정소립은 흥미롭게 그것을 보다가 돌아섰다. 그의 손을 어깨에 올려놓은 채인 정기룡이 같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당소홍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녀의 얼굴 에는 온통 땀이었다. “뱀 같은 느낌이야!” 당소취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뚱뚱한 뱀이 있다면……!” “아니 그자 말고 정기룡!” “응?” 당소취는 놀랐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던데?” “나쁜 사람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만……” 당천호가 중얼거렸다. “‘환(幻)’을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당씨 자매의 얼굴이 완전히 나무조각처럼 변해 버렸다. * * * 구슬을 드리운 가마에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정소립과 정기룡을 합쳐서 육백 근을 넘어서는 몸무게를 가마는 용케 도 지탱하고 있었다. 더 용한 것은 그 가마를 단 두 사람이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벌거벗은 웃통에 장대한 체구의 사내들! 먹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피부색이 검어 말로만 듣던 묵인(墨人: 흑인)들인 듯했다. 정소립이 나직하게 말했다. “상군이 배반한 것이 확실해졌다!” 정기룡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녀가 소운일행을 따라갈 때부터 그건 알려진 일 아니었습니까?” 정소립은 고개를 저었다. 다섯 겹이나 되는 목살을 움직이는 매우 힘든 동작이었다. “그녀는 내 지시대로 그를 따라간 것이다!” “그런……!” 정기룡은 짐짓 놀란 모습을 보였다. 정소립이 말을 이었다. “적절한 상황이 되었을 때 소운과 흑저를 암살하는 것이 임무였고!” 정기룡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실제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양아버지, 정소립이라는 인물의 이 비계로 둘러싸인 머릿 속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이중삼중으로 계략을 짜고, 그것을 필요한 만큼만 알려 준다. 정보의 적절한 배분과 통제는 그에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지 워 주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수하들의 통제를 그것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불충분한 정보로 일하는 수하들이 거기 근거해 무언가 다른 일을 꾸미 다가는 반드시 발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정기룡은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정소립은 주렴 사이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당가소의 말을 나는 절반만 믿는다!” 절반? 어떤 절반일까? 정기룡은 그의 양부(養父)가 어디까지 눈치채고 있는지가 두려울 정도 로 궁금했다.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소맷자락 속에 들어갔다. 정기룡의 어깨에 올려놓은 정소립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목으로 다가 갔다. 홍옥 같은 손톱이 목을 눌렀다. 아무런 이상한 낌새 없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었지 만, 순간적으로 정기룡의 온몸에서 기가 빠져나가 버렸다. “위험한 물건은 만지지 말아야지?” 정소립의 다른 손이 순간적으로 정기룡의 양 소매를 걷어올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신속한, 그러면서도 신체의 다른 부위에는 전혀 미동이 없는 환상적인 동작이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정소립의 대표적 무공인 무영수(無影手)였다. 그도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권법(拳法)의 고수였던 것이다. 정기룡의 소맷자락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소립의 실눈 사이로 희미한 실망의 빛이 스쳤다. 가마 안은 좁다. 정기룡의 다른 부분은 정소립에게 안기다시피 했기 때문에 무언가를 감춘다면 당장 알 수 있었다. 그 무엇인가가 지금 정기룡의 몸에 없는 것은 확실했다. 정소립은 아무렇지도 않게 정기룡의 소매를 내려주었다. “요즘 고생하는가 보구나, 살이 많이 줄어 보인다!” 정기룡은 침착을 되찾았다. “고생이랄 것은 없습니다만……, 형제들이 여럿 죽는 바람에……!” 정소립은 비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황태일(東皇太一)의 실종 이후 우리 형제들은 무척이나 고생 을 했지! 벌써 셋이나 죽었는데…… 서글프게도 한 사람이 더 우리 곁 을 떠나게 될 것 같구나!” 정기룡의 얼굴이 굳었다. 정소립의 그 한마디로 누군가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문제는 누가 죽 을 것인가 였다. 한참 후에야 그는 말했다. “소자(小子)가 처리할까요?” “아니……!” 정소립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나와도 특별한 관계가 있던 사람이니 내가 직접 보내주고 싶 구나!” 그의 홍옥 같은 손톱이 빛나는 것을 정기룡은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 었다. * * * 정월 보름, 원소절(元宵節)의 아침에 녹림 맹은 예양부에서 백리지점에 도착해 있었다. 금룡장의 일천 무사들과 마주친 것은 이때였다. 그리고 소운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이때였다. 서적은 안색이 돌변해 물었다. “동가채주는?” 그도 없었다. * * * 콰쾅--! 벽옥루의 두터운 나무문은 다시 한번 부서지고 있었다. 물론 한백의 도끼에 의해서였다. 오늘은 수문무사도, 장홍방의 건달들도 없이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사 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육중한 나무문짝이 넘어가자 한백은 대월을 어깨에 짊어진 채 벽옥루 에 들어섰다. 붉은 옷을 입은 이십여 명의 사내가 그 뒤를 따라 벽옥루의 문턱을 넘 었다. 소운은 네 명의 홍의(紅衣) 사내가 든 가마에 올라 그 뒤로 들어섰고, 흑저는 그 옆에 서서 걷고 있었다. 이들 이십사 명의 홍의 사내가 소운과 한백을 찾아온 것이 어젯밤이었 다. 그리고 소운은 더 이상 녹림 맹과 같이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결정 을 내렸다. ‘그들’이야말로 원래 금룡장에서 소운을 구해 주기로 했던 또 하나 의 비밀세력이었던 것이다. 반룡이십사위(返龍二十四衛)! 금룡장 최후의 호가세력(護家勢力)인 그들의 출현으로 반룡지계(返龍之 計)는 드디어 완전한 준비가 된 것이다. 개개인이 한백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닌 그들이 소운의 뜻을 이행함으 로써……, 그리고 이렇게 벽옥루에 난입하면서 드디어 반룡지계는 시 작되었다. 그들의 앞에 벽옥루의 구층누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푸른 기와와 영롱한 옥편들이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아 어쩐지 괴괴한 침묵만을 흘리고 있는 구층누각. 실질적인 벽옥루였다. 한백이 한 손을 들었다. 이십 명의 사내들이 부챗살처럼 흩어져 누각을 포위했다. 대월이 치켜 들리고 누각의 정문이 입을 벌렸다. 파파파악--! 순간, 강철화살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관 장치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백은 이미 옆으로 물러서 있었다. 와장창--! 누각의 창문들이 일제히 부서져 나갔다. 반룡위(返龍衛)들이 창문을 부수며 난입해 들어간 것이다. 누각은 이내 처절한 비명소리와 물건 부서지는 소리로 가득 차 버렸 다. 한걸음 물러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흑저가 물었다. “이곳 주인이 구신 중 하나라고?” “상부인(湘夫人)!” 소운이 짧게 대답했다. 흑저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왜 그때 처치하지 않았나?” 그들이 처음 이곳에 왔던 그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땐 의심만 했지, 확신은 않고 있었어.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 흑저는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소운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말을 않더니 툭 내뱉듯 말했다. “상군(湘君)이 가르쳐 주었지!” “상군?” “매아상!” 흑저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소운의 그 다음 말을 듣기 전에는 아직 다 놀란 것이 아니었 다. “당신과 자던 밤에 그녀는 구신(九神)을 배반한 거야!” 흑저의 검은 얼굴이 더욱 검어졌다. 한참 후에야 그는 더듬더듬 물었다. “알고 있었나?” 소운은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을 들어 앞으로 까닥거렸다. 그를 태운 가마가 움직였다. 벽옥루 안은 다시 고요를 찾고 있었다. 소운은 피가 강물을 이룬 벽옥루 복도를 지나며 나직하게 말했다. “구신(九神)은 금룡장의 창건 때부터 있었지. 처음엔, 그리고 초대가 주셨던 천패금룡, 동황태일이 실종된 사십 년 전까지는 그들은 충실한 금룡장의 수호자였어. 그러나 동황태일의 실종 이후 그들은 배신자로 변했어.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달아 암살되었지. 주모자는 두 사람, 운중군(雲中君)과 대사명(大使命)이었고…….” 그들은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지하 삼층의 복도 끝에 여섯 명의 반룡위가 쓰러져 있고, 그 앞에 벽 옥루의 주인인 벽요낭랑(璧瑤娘娘) 도교교(桃嬌嬌)가 서 있었다. 소운이 그녀를 힐끔 보았다. “저 여자가 오십이 넘은 할망구라면 믿겠어?” 흑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놀랄 것은 없었다. 매아상이 상군이고, 백 살이 넘었을 천패금룡이 아직도 살아 있을 것 이라는데 무엇이 그보다 더 놀랍단 말인가?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죽여 주면 되는 것인가?” 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금룡장으로 가는 통로가 열리겠지!” * * * “동황태일…… 할아버님이 왜 실종되었을까요? 거기에 모든 흑막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소손(小孫)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랑검 금야홍의 말을 금태파야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사십 년 전……, 할아버님이 실종되기 직전에 초대(初代)의 구신(九 神)들이 대거 죽거나 실종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에 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하나, 운중군(雲中 君)만은 죽지도, 실종되지도 않았다는 것은 아주 오랜 조사를 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신묘한 행적(行蹟)을 보였던 사람, 구신들을 빼 고는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르는 그 한 사람이죠!” 금태파야가 말했다. “재미있구나! 계속 얘기해 봐라!” “사실은 운중군이 그 모두를 살해한 것입니다. 처음엔 동황태일의 본 부인인 상부인만 독살했죠.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상군도 죽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구신 중 둘이나 죽게 되자 이젠 감출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되어 버렸죠. 그들은 운중군의 범죄에 대한 증거를 잡고 탄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중군은 그들을 모아 놓고 한꺼번에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심복들을 그 후계자들로 삼아 버렸 죠.” 금야홍은 목이 타는 듯 탁자에 놓인 차를 들어 한모금 마셨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동황태일이 그 일을 알았을 때는 부인도, 의형제들도, 총애하던 가신 (家臣)들도 모두 죽어버린 뒤였습니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질투심 많 은 첩(妾)밖에 없었죠. 바로 할머님, 운중군 말입니다!” 금태파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금야홍은 손을 들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방이 더워지고 있었다. “동황태일은 화낼 힘도 없었습니다. 그저 말없이 돌아서서 장원을 나 가버렸죠.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금태파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녀는 금야홍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잠시 보고 물었다. “그렇게 다 알아냈는데 뭘 더 물어보겠다는 거냐?” 금야홍은 다시 손을 들어 땀을 닦았다. 그는 오늘 유달리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조사해도 한 가지는 도저히 모르겠어서 이렇게 귀찮게 해드 리게 되었습니다.” 금야홍은 금태파야의 눈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아버님과 형님은 왜 죽이셨습니까?” 금태파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아련한 눈빛이 되어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아련한 눈빛이 점차 색을 띠었다. 붉은 광채! 원한과 살기의 빛이었다. “동황태일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였다!” 그녀는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그 빌어먹을 영감은 그때 나간 후로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내 가 사람을 풀어 아무리 찾아봤지만 흔적도 없었지. 여우 같은 계집과 버릇없는 가신들 몇몇을 죽였을 뿐인데……. 금룡장을 세운 것이 그 영감의 힘인 줄 아느냐? 내가 없었다면 그것이 가능하기나 했을 줄 알 아? 그런데 그 이리 같은 영감은 날 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쇳소리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여우가 낳은 아들놈을 죽였다. 소문이 나면 영감이 돌아 오리라고 생각했지! 그 짐승도 아들은 귀하게 여겼을 테니까! 그런데 안 돌아왔어! 그래서 네 형도 죽였다. 이제 네가 죽고 소운도 죽을 것 이다. 그때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금룡장을 태워버릴 거야! 그래도 돌아 오지 않는지 보자!” 금야홍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단지 그 이유였습니까?” “그렇다!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할까?” “우욱--컥--!” 심중의 격동을 못 참겠는지 금야홍은 피를 토해내었다. 검게 죽은피였다. 금야홍은 손에 묻은 그 선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소손도 이렇게 죽이시는군요! 아버지와 형님을 죽인 그 독으로… …!” 금태파야가 그를 묘하게 보았다. “생각보다 넌 침착하구나?” “아니요…….” 금야홍은 고개를 젓고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의 앞에 풀어놓았다. “생각처럼 침착한 것이지요! 이것을…….” 금야홍은 앞에 놓인 검은 물건, 짐승의 뼈 같은 것을 가리켰다. “십 년 전에 발견했을 때부터 저는 오늘을 예견했습니다. 밤중에 무 덤을 파서 넓적다리 뼈를 뽑아낸 그날 밤부터요!” 금태파야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 “넓적다리 뼈?” “형님의 것이죠!” 금태파야는 그 뼈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도저히 넓적다리 뼈라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그 검은 뼈 를……. “왜 이렇게 됐느냐?” 금야홍의 입가로 검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할머님께 대접하려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금태파야의 안색이 검게 변해 버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머리맡의 상자를 잡으며 되물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금야홍은 그녀의 행동을 보며 웃었다. 그는 거의 옆으로 쓰러지기 직 전이었다. “백양회춘탕(白陽回春湯)에 조금씩 섞었죠! 할머님이 독공(毒功)의 고 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매우 지루하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습니 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극히 미량만 넣어야 했던 데다가, 혹시 맛이 없 을까봐 매일 드시도록 앵속(罌粟:양귀비)도 조금씩 섞어야 했으니 말입 니다.” 금태파야는 상자 속에서 환약을 꺼내어 몇 알을 연속으로 먹었다. 금야홍은 거의 옆으로 누운 채 다시 웃었다. “소용없을 것입니다. 할머님! 십 년 이상 장복(長服)한 만성독약은 무 슨 수로도 해독할 수 없다고 당문 의 가주도 그러더군요! 다른 사람이 그런 상태인 것처럼 돌려 물었더니 왜 아직도 죽지 않았는지 신기해 하더군요! 그래서 효력을 빨리 내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금태파야의 손에서 상자가 날았다. 팍--! 금야홍의 머리가 부서져 흩어졌다.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말았지만, 금태파야는 알 수 있었다. 이 방 안의 뜨거운 온기가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발로 화로(火爐)를 걷어찼다. 팡--! 화로는 재와 불똥을 뿌리며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 뒹굴었다. 그제서야 금야홍이 처음 들어왔을 때 화로 주변에 앉았다는 것이 기억 났다. 무엇이든, 독을 빨리 돌게 만드는 약이 그 안에 들어갈 시간과 기회를 준 것이다. 또 그제서야 금야홍이 마신 차 속의 독이 생각보다 빨리 효력을 드러 냈던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문을 향해 걸었다. 이미 방 안에 가득한 그 냄새없는 향기(香氣)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그녀의 무릎이 꿇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문턱을 잡았다. 그 손을 누군가가 밟았다. 금태파야는 흐린 눈을 들어 발의 임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광채가 떠올랐다. “아, 당신……!” 한 사람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것이었다. 그 사람은 한동안 그녀를 내려보다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임자도 이젠 쉴 때가 되었네!” 금태파야는 돌아누웠다. 그녀의 눈에 가득한 사람의 모습! 그녀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올려보다가 물었다. “그…… 그 동안 어디서 뭘 했어요?” 입을 여는데 입속에서 시커멓게 죽은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그는 옷자락을 들어 보였다. “보는 대로!” 금태파야는 입과 코로 검은 피를 흘린 채로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 아…… 아내를 버린 남자가 잘될 리가 없으니… …!” 그는 말했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어!” 그리고 그는 말을 잃고 다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금태파야의 닭발처럼 야윈 손가락들이 그의 바지자락을 잡았던 것이 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했다. “나…… 나…….” 그 흐린 눈에 배어 나오는 습기는 설마…… 눈물일까?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벌린 입은 끝내 아무 말도 토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잠시 후, 그는 억눌린 한숨을 내쉬었다. “한 세상 살다가는 것이 뜬구름 같으니…….” 그는 화로를 집어 그 속에 남은 불똥을 금태파야의 시신과 방에 뿌렸 다. “이렇게 가는 것도 당신에겐 어울릴 거요……!” 금태파야의 방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 * 서적의 얼굴은 파리하게 바래 버렸다. 오합지졸이라 하지만 이렇게 형편없이 당할 줄은 몰랐다. 오는 동안 유민(流民)들이 합세해 이미 오천을 넘는 대병력이었었는 데……. 금룡장의 무사들이 일자로 대형을 짜서 돌격해오자 금세 이리에게 쫓 긴 양떼가 되어 버렸다. 압도적인 다수는 이럴 때 오히려 거치적거리기만 했다. 그런 대로 싸울 수 있었던 녹림 맹의 고수들도 아우성치며 도망다니는 유민들을 피해가며 싸우느라 맥없이 쓰러져 갔다. 엄밀한 포위망은 이내 낡은 그물처럼 뚫려 버렸고, 길게 반원을 그리 며 금룡장 무사들을 에워쌌던 학익진 (鶴翌陣)의 양 날개는 찢어져 녹 림 도들은 깃털처럼 눈밭에 뒹굴고 있었다. 금룡장 기마대가 밟고 간 자리에는, 피가 강물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만들었다. “으아아--!” 어제까지 농민이었음이 분명한 중년사내 하나가 공포에 질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등에서 가슴까지 관통한 창날이 그런 비명을 지르게 하는 것이 다. 그는 가슴팍으로 튀어나온 예리한 창끝을 손으로 움켜잡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사람이 이렇게 죽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중원의 한복판에서……. 단지 그들을 따라가면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다는 말에 아내와 아이들 의 손을 잡고 나선 결과가 이런 것이라니……! 사내는 허리까지 차 올라오는 눈 위로 코를 박았다. 유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창을 들었다. 한때는 그도 두 팔에 꿈틀거리는 근육을 자랑했던 적이 있었다.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는 내기도 했었고, 동가채의 식구들과 어울려 곰 사냥에 나서서 곰의 턱밑에 창을 쑤셔 박기도 했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유가(劉家)’라고 불리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늙어 창 한 자루 들기도 힘겨운 처지였다. 그러나 아직 녹림 도의 기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노인이었던 것 이다. 그는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말과 기수를 향해 힘껏 창을 찔렀다. 챙--! 창이 튕겨 나갔다. 쐐액--! 두려움을 모르는 유가, 유노인의 목이 허공에 높이 떴다가 눈 위로 굴 렀다. 가오는 유노인의 목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가 산에 들어갔던 십 년 전에도 유노인은 노인이었다. 그는 동가채의 산 역사(歷史)였던 것이다. 가오는 손에 든 창을 힘껏 던졌다. “컥--!” 유노인의 목을 자른 철검대원이 등짝에 창이 박혀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말을 달려 다가온 금룡장의 무사가 가오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호이랑은 눈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왼쪽 어깨로부터 잘려져 나간 팔에서 붉은 피가 흘러 그녀 주위의 눈 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모……!”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녀에게 업혀 있던 호낭랑의 아이가 그 손을 잡고 칭얼거리고 있었다. 주위의 상황을 잘 모르면서도 공포에 질려 울음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 하는 아이였다. 호이랑은 간신히 눈을 떠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손을 저었다. “도망가……! 어서……!” 말이 눈을 파헤치며 그들의 옆을 지나갔다. 말 위의 무사가 장난처럼 창을 휘둘렀다. 아이는 반으로 잘려져 눈 위에 뒹굴었다. “죽엇--!” 아이 하나를 업은 채로 호낭랑은 독각동인 을 휘둘러 정면으로 달려오 는 금룡장 철검대원의 허리를 후려갈겼다. 말에 타고 있는 철검대원이 검을 휘둘러 독각동인 을 마주 쳐갔다. 깡--! 독각동인 이 튕겨 나갔다. 그러나 그 반동으로 철검대원은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그 머리로 독각동인 이 다시 떨어져 내렸다. 팍--! 피가 튀었다. 순간적으로 호낭랑의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그 피가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가려 버렸다. 쐐--! 호낭랑은 가슴을 관통한 화살 끝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내려보았 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쏜 사람을 보았다. 또 다른 철검대원이 말 위에서 활을 겨누고 있었다. “우와악--!” 호낭랑은 독각동인 을 치켜들고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슈악--! 그녀의 가슴에 다시 한 대의 화살이 꽂혔다. 호낭랑은 그래도 상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슉--! 다시 한 대의 화살! 호낭랑은 거대한 배가 침몰하듯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독각동인 을 버리고 등에 업은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죽어 있었다. 그녀의 가슴을 꿰뚫은 화살이 아이까지 함께 뚫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갈 때는 함께야……!” 탁--! 그녀의 얼굴 정면으로 화살이 꽂혔다. * * * 매아상은 금룡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끝났다. 처음부터 이런 결과는 예견되었던 것이다. 녹림 맹이 금룡장 무사들을 잡고 시간을 끄는 동안, 소운은 그녀가 알 려준 비밀통로로 금룡장 내부에 쳐들어가서 점령해 버리는 것이다. 사건의 주모자인 운중군 금태파야와 대사명 정소립만 처단하고 나면 더 이상 그에게 반기를 들 사람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일순간에 머리를 잃고서 는 행동방침을 정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녹림 맹을 간단히 이기고 기세등등하게 돌아간 금룡장에서 그들은 한 나절 동안에 하늘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수뇌들은 포박되어 소운의 앞에 꿇려질 것이다. 그 뒤는 대규모 숙청밖에 없었다. 매아상은 달려가면서도 고개를 젓고 있었다. 더 이상 이런 생활은 신물이 나버렸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은자 다섯 냥에 기루에 팔려간 것이 여덟 살, 시중들 여인을 구하던 정소립의 눈에 들어 이번에는 황금 열 냥에 팔 려간 것이 열여섯이었다. 그때부터 지옥이었다.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대갓집의 습속(習俗)을 배우는 것은 그 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조금 힘이 들긴 했지만 무공을 배우는 것도 그런 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정소립의 밤시중은 고통의 극치였다. 남성을 거세한 그가 성욕을 채우는 방법은 유별났기 때문이었다. 죽도록 때리고, 혼절할 정도의 고통을 온갖 방법으로 주었다. 그러고 난 뒤에는 밤새도록 핥고 빨아야 했었다. 그 보기만 해도 구역질을 할 비계덩어리를……. 그래서 육 년이 지나 금야국의 아홉번째 첩으로 보내졌을 때는 지옥에 서 살아 나오는 기분이었다. 곧 그것도 지옥의 연장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지만……! 끝없이 고독을 씹어야 하는, 그러면서도 주위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언제라도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구신 중 하나라지만 그녀는 대사명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것이다. 애 완동물이요, 인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싫증이 나면 언제든지 버려지는…… 가지고 놀다가 망가지면 곧 버려 버리는……. 이제는 두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잘생긴 사람은 아니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 흑저의 시중을 들면서 말 이다. 그녀는 망가진 자신의 몸으로도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인지가 갑자기 궁금했다. 이제 금룡장에서 흑저가 나오면 두말 없이 그를 끌고 멀리 산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시골 아낙으로 평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녀의 앞에 그가 나타났다. 두 명의 묵인이 든 가마 위에 걸터앉은 거대한 비계덩어리! 정소립이었다. 그의 가냘픈 손가락 끝이 홍옥처럼 빛나고 있었다. * * * “이것 봐, 흑저!” 흑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옆에서 같이 움직이던 소운의 가마도 멈추었다. 흑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황거지를 보았다.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그들은 금룡장의 중원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무사들이 녹림 맹을 맞아 싸우고 있어서 경계가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들도 마주치는 금룡장의 무사들을 죽여가며 여기까지 오느라 벌써 반룡위가 절반으로 줄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거지가 여기 이렇게 태연히 앉아 그를 불러 세울 줄이야! 황거지는 정원 둘레의 바위에 걸터앉은 채 흑저를 보며 고개를 저었 다. “멍청한 녀석……! 밖의 네 가족들이 어떤 꼴이 될지도 모르고 여기 서 이러고 있어?” 흑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본격적인 싸움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 그 리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결판이 나지는 않 을……!” 황거지는 혀를 찼다. “그래서 멍청한 녀석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리도 실속없이 남에게 이용만 당하는지……! 금룡장 아이들이 속전속결로 결판을 보고 돌아 올 생각이 아니었으면 왜 이렇게 장원을 비워놓다시피 하고 나갔겠어? 네 옆에 있는 그 영악한 아이에게 한번 물어나 보란 말이다!” 흑저는 소운을 보았다. 소운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미 괴멸(壞滅)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걸……?” 흑저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소운을 후려치려다가 멈춰 버린다. 순간적으로 칼을 뽑아든 네 명의 가마꾼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굳이 소운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아니고 그 스스로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황거지가 고개를 저었다. “가봐야 소용없을 텐데……!” 흑저는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다. “세상사(世上事)라는 게 다……! 나도 그만 가볼까……?” 몸을 일으키던 황거지가 문득 소운을 보았다. 소운은 두 눈에 묘한 감정을 담고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황거지는 혀를 찼다. “일은 네 뜻대로 되려니와…… 그렇게 앞으로 나가기만 할뿐 뒤를 돌 아보지 않다가는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니……!” 소운이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황거지는 이미 뒤돌아 사라지고 있었다. 한백이 중얼거렸다. “처음 볼 때부터 수상한 영감이다 싶더니……! 쫓아가 없애 버릴 까?” 소운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바랠 일을 바래야지……! 그만 두고 하던 일이나 계속 해!” * * * 녹림 맹은 이제 멀찌감치 물러서서 지휘하고 있던 본진(本陣)까지 위 협 받고 있었다. 서적은 피묻은 얼굴의 계석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일어섰다. “어, 어떻게 돼 가는 거야? 처음 이야기하곤 다르잖아!” 계석이 숨찬 듯 소리쳤다. “그, 그래서 중요한 정보가……!” 서적은 계석에게 바짝 다가가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지금 와서 무슨 정보란 말야?” 칵--! 서적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계석의 멱살을 잡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 그의 입가로 한 줄기 피가 흘렀다. 계석은 서적의 가슴을 꿰뚫은 손을 천천히 잡아 뺐다. “당신이 책임을 지는 걸로 이번 일은 끝나는 것이오!” 그는 웃고 있었다. 서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익--!” 그의 손이 계석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전에 그의 심장이 먼저 터져 버렸다. 팍--! 그는 계석의 목을 조이던 손을 풀며 앞으로 무너졌다. 계석은 목을 만지며 천천히 돌아섰다. 북과 징을 들고 명령을 전달하던 녹림 맹의 전령들이 그 광경을 멍하 니 보고 있었다. 계석은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뒤로 움직였다. “퇴각!” 요란한 징소리가 눈 덮인 벌판 위로 울려 퍼졌다. 징……! 붉은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벌판 위로……. 제 23 장 반딧불로 수미산(須彌山)을... 반딧불로 수미산(須彌山)을 사르다 “젠장,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엽검영은 아까 전부터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녹림 맹과 금룡장 대전의 선두에 서서 빛나는 전공(戰功)을 세우고 있 어야 할 자신이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생각하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앞서가고 있던 꼽추가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 “나, 난 너처럼 한심한 놈은 머리털 나고 처음 본다!” “뭐야?” 엽검영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대들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야 하는지도 말 않고서 무작정 따라오라고만 하는 주제에 욕설까지 지껄여? 한때 같이 일한 인연이 없었으면 이렇 게 참지도 않았어!” 꼽추가 아니꼽다는 듯 그를 보았다. “나, 나도 부탁 받은 것이 아니었으면 널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 다! 그, 그냥 까불다가 영문도 모르고 죽도록 내버려뒀어야 되는 건 대……!” “부탁이라고? 누구의?” 엽검영은 의혹을 가득 담아서 꼽추를 보았다. 꼽추는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해선 안될 이야기를 무심결에 해버 린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벌써 엽검영은 의심스럽게 그를 보면서 걸음을 늦추고 있는 것이었다. 꼽추는 더듬더듬 얘기했다. “황거지님이……!” “황거지?” 엽검영은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뒤돌아 섰다. “나 안가!” 꼽추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엽검영의 옷자락을 잡았다. “왜, 왜 안 가겠다는 거냐?” “그 영감 말대로 해서 제대로 된 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 또 속으라 고? 내가 그렇게 바본 줄 알아?” 꼽추는 정말 다급한 모양이었다. “너, 너 이번에 안 가면 정말 바보다! 이, 인생이 순간에 바뀔 수 있 는 이런 기회를 놓치면 정말 저, 접시물에 코박고 죽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야!” 그 속에 숨은 사정을 다 말하지는 못하고 그저 꼭 가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꼽추였다. 그 열심인 태도가 마음을 움직였던지 엽검영은 주춤거리다가 다시 걸 음을 옮겨 꼽추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놈의 영감, 이번에도 날 속인 거면 때려 죽여버릴 거야!” 꼽추는 답답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저런 놈이 어디가 귀여워서…… 원!” * * * 흑저는 넋나간 듯한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코끼리로 착각할 정도로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가냘픈 여인의 목덜미를 잡고 서 있는 모습을……. 그 여인의 머리가 정상적으로는 불가능한 각도로 꺾여져 대롱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인은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었다. 흑저가 보고 있는 것은 매아상이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리며 보아도 그것은 분명히 매아상의 얼굴이었 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정소립의 손에 들린 매아상의 시체라는 것을 흑저가 알아차리기까지는 다시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얼마를 서 있었던가. 흑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소립의 비대한 얼굴을, 그리고 살갗 사 이에 깊이 박힌 실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했다. “내게 아직 잃을 것이 있었다니 나도 놀랐소! 그걸 알려 주고 이내 앗아가 버린 당신에게 어떤 보답을 해야 할까?” 그는 천천히 정소립에게 다가갔다. 정소립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위축되는 감을 느끼고 있었다. 극단으로 가면 오히려 돌아오는 것이 도의 움직임(道者反之動)이요, 지 극히 뜨거운 것은 오히려 차가워 보인다고 했던가? 흑저의 눈에서는 분노의 빛, 원한의 빛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정소립을 두렵게 만들었다. 정소립은 억지로 웃었다. “네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보는 것은 처음이군! 운명(運命)의 신(神) 이란 이름은 들어 봤나?” 흑저는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피에 물든 박룡수가 붉게 빛났다. “운명의 목줄기를 비틀어 주지!” 흑저의 몸뚱이가 탄환처럼 튀었다. 그는 한 줄기 검은 선이 되어 정소립을 향해 뻗었다. 그러나 정소립은 더욱 빨랐다. 그의 비대한 몸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흑저의 뒤 로 돌아가 있었다. 파악--! 흑저의 두 손은 그가 기대어 있던 나무의 껍질만 벗겨내었을 뿐이었 다. 파파팍--! 정소립은 흑저의 뒤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는데 갑자기 그의 손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흑저는 순식간에 연속으로 십여 대를 얻어맞고 삼 장이나 앞으로 굴러 서 나가떨어졌다. 그는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그대로 눈 위를 몇 바퀴 굴러 처음 나가떨 어진 곳에서 좌측으로 십여 보 떨어진 곳에서 뛰쳐 일어났다. 파앙--! 정소립의 거대한 몸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흑저는 본능적으로 박룡수를 올려 얼굴과 가슴을 방어했다. 쾅--! 팔이 으스러지고 가슴이 터져 나가는 듯한 충격이 흑저를 뒤흔들었다. 콰콰쾅--! 그 뒤로 이어지는 충격들! 사람이, 그것도 정소립같이 비대한 몸집의 사내가 어떻게 저런 움직임 을 보일 수가 있을까? 정소립은 그대로 허공에 떠서 연속으로 십여 번이나 발길질을 하고 있 었다. 그 하나하나가 흑저의 박룡수를 때려 주춤주춤 물러서게 하고 있는 것 이다. 부--웅--! 정소립의 몸이 공중에서 한바퀴 회전했다. 누가 손으로 들어 받치고 있는 것처럼, 혹은 무게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그는 움직이고 있었다. 파앙--! 흑저의 몸이 오른쪽으로 휘청 기울었다. 정소립의 돌려차기가 그대로 격중했던 것이다. 제아무리 강한 강철도, 두터운 벽도 그 일격의 위력을 감퇴시킬 수가 없었다. 흑저는 그 일격으로 왼쪽 팔이 으스러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쾌액--! 정소립의 오른쪽 발뒤꿈치가 흑저의 드러난 왼쪽 어깨를 찍었다. 흑저는 허리를 구부려 웅크렸다. 충격을 최대한 받아 흘려 보내려는 동작이었다. 빡--! 어깨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정소립의 발뒤꿈치는 마치 도끼로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그에게 주 고 있었다. “컥--!” 흑저는 한 모금 피를 토하고 주저앉았다. 직접적인 타격은 어깨에 맞은 한 방 외에는 없었지만 그 막대한 힘이 내부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천하장사도 공중에 떠서는 힘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정소립은 공중에 떠서 십여 번이나 정면으로 발을 내 뻗고, 돌 려차고, 내려찍기까지 한 다음에야 땅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다시 떠올랐다. 힘든 기색도 없이 무표정을 간직한 그대로였다. 흑저는 여태 만난, 그리고 그가 죽인 구신(九神)의 무리들은 대사명에 비하면 어린애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거듭된 싸움과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거쳐 그의 박투술 은 거의 완 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청면수라를 죽였던 두 달 전에 비하면 그는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이 다. 그런데도 지금 그는 반격할 생각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 었다. 정소립의 손발은 보이지도 않았고, 공격을 짐작할 아무런 예비동작도 없었다. 주먹을 뻗으려면 어깨가 움직여야 하고, 그 전에 등의 근육이 먼저 움 직여야 한다. 발을 뻗어 무엇인가를 차려면 허리가 받쳐줘야 하고, 그 전에 어깨가 기울어진다. 그러나 정소립에게서는 그런 것들을 볼 수가 없었다. 그의 손발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흑저는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공격을 어떻게 막는가?’ 그때 그는 얼마 전에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신창 양세기와 싸웠을 때, 그리고 용수 진립동과 싸웠을 때였다. 쐐액--! 날카로운 예기가 그의 머리를 향해 뻗어오고 있었다. 흑저는 우측 박룡수를 들어 그 예기의 머리부분을 쳤다. 칵--! 정소립은 공중에서 한바퀴 맴돌았다. 최후의 일격으로 내리찍은 발뒤꿈치를 흑저가 간단히 쳐낸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니고 기세의 최첨단(最尖端) 바로 옆, 가장 강한 부분 아 래에 숨어 있는 약점을 쳐낸 것이다. 직선으로 뻗는 힘의 바로 옆을 쳐냄으로써 방향을 바꿔 버린 것이다. 그 한 수로 전세(戰勢)는 역전되었다. 흑저는 웅크리고 있던 자세에서 뛰쳐 일어나며 아직까지 공중에 떠 있 던 정소립의 가슴팍을 박룡수로 찔렀다. 푹--! 반동이 전혀 없었다. 흑저는 안색이 변해 잘 움직이지도 않는 왼손을 움직여 정소립의 머리 를 쳤다. 턱--! 역시 주먹에 닿는 감촉은 마치 솜이불을 두드린 것 같은 허탈함뿐이었 다. 정소립은 흑저를 내려보며 히죽 미소지었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말고는 마음 내키는 대로 때려 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흑저는 이를 악물고 뛰어올랐다. 타타타탁--! 흑저의 손발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팔, 다리, 무릎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정소립의 전신을 두들겼다. 그러나 정소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특별한 호신공(護身功)을 익히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번으로 안되면 될 때까지!’ 흑저는 생각을 바꾸고 정소립의 한곳만 집중적으로 노렸다. 바로 머리였다. 다른 부분은 두터운 비계로 감싼다고 해도 머리의 살갗이 두터워지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도 바로 머리인 것이다. 단련하지 않아도 강한 곳이 그곳이지만, 역(逆)으로 생각한다면 가장 단련하기 어려운 곳도 그곳일 터였다. 팍--! 흑저의 우측 박룡수가 정소립의 머리를 내리쳤다. 정소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룡수로 감싼 오른손이 저릿저릿해질 지경이었다. 팍--! 다시 한번 박룡수가 내리쳐졌다. 정소립은 역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쪽이 먼저 부서지나 보자!’ 흑저는 연속으로 박룡수를 내리쳤다. 팔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이 어깨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흑저의 입에서부터 피가 흘러나왔다. 진동된 기혈이 역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목숨을 돌보지 않는 공격이 정소립에게도 약간은 충격을 준 모양이었 다. 정소립은 얼굴을 가린 손을 들어올려 흑저의 손을 옆으로 쳐내고 다른 손으로 가슴팍을 밀었다. 흑저는 그 손에 맞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유연한, 지금까지의 빠른 동작과는 달리 느리기 이를 데 없는 손짓이었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경기가 꿈틀거리고 있었 다. 흑저는 허공으로 치켜 들리는 손을 따라 무릎을 올렸다. 그 무릎에 정소립의 손이 와서 가볍게 때렸다. 파앙--! 흑저는 공중에서 세 바퀴나 곤두박질하며 뒤로 날려갔다. ‘무당파 (武當派)!’ 무릎을 바스러뜨리고도 모자라 온몸을 뒤흔드는 고통이 정소립의 무공 내력을 알려 주었다.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장력(掌力), 그러나 가장 파괴적인 장력인 십 단금 (十段錦)!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그 손길이 닿으면 강철을 녹여 만든 인간이라 해 도 내부가 갈가리 찢겨진다. 전통적으로 무당파 는 황궁과 관련이 있었으니 정소립이 그런 절기를 알고 있다 해도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까 사용했던 보이지 않는 손도 무당 의 것, 무영신나수(無 影神拿手)였을 가능성이 컸다. ‘경공 은 세류표(細柳飄)나 암향표(暗香飄)였겠지!’ 흑저는 온몸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한가하기까지 한 생각 을 하고 있었다. 여인의 그것처럼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정소립의 손이 다시 그를 향 해 다가오고 있었다. 흑저는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않고 박룡수로 그 손에 마주쳐갔다. 파팡--! 보검에도 끄떡하지 않던 박룡수가 갈가리 찢겨져 터져 나갔다. 흑저는 공중에서 다시 세 바퀴를 맴돌았다. 그 입에서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와 허공에 한 줄기 궤적을 만들었다. 흑저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좋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대로 끝나면 모든 것이 함께 끝나는 것!’ 원한도, 고통도, 피에 젖은 악몽들도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삼십여 년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는 자신이 핏물로 덮여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는 모습부터 탯줄이 끊겨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 다시 몇 년이 흘러 도적의 습격으로 폐허 가 된 마을의 핏구덩이 속에서 다시 태어나듯 노선사의 손에 들려나오 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소림사 의 나날들과 계단을 기어 내려오던 날의 모습, 십여 년의 절절 한 고생들과 수많은 살육들, 짧지만 달콤했던 매아상과의 밤들이 마치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허공에 튕겨 날려가는 그 짧은 순간에, 그는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인연을 따르지 않을 때에도 있다 없다 라고 말할 수 없고, 인연을 따를 때에도 그 자취가 없는 것이니, 이미 그런 것임을 알았다면 부처 가 있는 곳에서도 머물지 말고 부처가 없는 곳에서도 빨리 지나가거 라. 노선사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이것이 곧 모든 부처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집착 이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 而生其心)’고 한 것이 바로 그것 이다. 일체 중생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그 뜻이 내닫는 마음을 반영 하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쉬지 않고 육도(六途)를 돌아다니면서 갖가 지 고통을 받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생기면 모든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모든 법이 멸한다고 하신 것이다. 마음이 생기면 모든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모든 법이 멸한 다……! 흑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정소립의 거대한 체구, 홍옥같이 붉은 손톱을 보면서……. ‘피에 물든 살업(殺業)의 긴긴 업연(業緣)도 만들어 낸 것일 뿐!’ 흑저는 손을 내밀어 정소립의 머리를 쳤다. 가볍게 밀었다. 박룡수를 끼지 않은, 뼈다귀만 남아 있는 야윈 손이었다. 순간, 정소립의 얼굴이 검게 물들었다. 그는 허공에 일순 멈추는 것처럼 보이더니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파악--! 쌓였던 눈더미가 분분히 일어나 날렸다. 꽃같이 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흑저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스러진 무릎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통이 오히려 흔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 죽은 자들의 얼굴이 모두 미소를 짓고 있는 것 은 무엇 때문인가? 흑저는 눈 위에 그렇게 무릎 꿇은 채 정신을 잃고 있는 것처럼 보였 다. 정소립이 검게 물든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우…… 우…… 너……!”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일어서려 했지만 일어설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내려친 흑저의 일격이 머릿속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아무런 파괴력도, 예리함도 갖추지 않은 일격이었지만, 내부에서 오히 려 진동하는 그런 일격, 발경 (發徑)이었다. 아무런 힘을 주지 않던 일격이 닿는 순간에 힘을 뿜어내는 그것이었 다. 강하게 더 강하게로만 치달아 가던 흑저의 기세가 안으로 모아지기 시 작했던 것이다. 누워서 버둥거리던 정소립의 얼굴에 일순, 희색이 감돌았다. 가마를 들던 묵인(墨人) 둘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간신히 입을 벌려 말했다. “경보를…… 울려라! 동창 을…… 불러……!” “이미 늦었소, 대영반!” 누군가가 그들의 옆에 나타났다. 떠돌이 무사, 복운이었다. “예양부 일대에 대기하던 동창 의 위사 들은 모두 북경 으로 소환되 었고, 거부하던 몇몇은 이미 참수되었소!” 정소립의 눈이 커졌다. “너…… 넌…… 누구……?” 복운은 허리춤에서 사각형의 금패(金牌)를 꺼내어 흔들었다. “인사가 늦었군요! 금의위 부영반 복양운이라 하오!” 정소립은 뒤집힌 거북이처럼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묵인 둘은 복운의 뒤를 따라 나타난 몇 명의 금의 위 위사 들에 의해 포박되고 있었다. 정소립은 억눌린 고함을 질렀다. “나…… 난…… 종오품국록대부…… 태상태감…… 이고, 황상의 칙사 다. 나…… 날 일으키지 못할까……?” 복양운은 안됐다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그 모든 것에서 해임되었소! 이미 열흘 전에…….” 그는 뒤에 나타난 관복의 사내를 가리켰다. “여기 황상의 칙서를 봉행해 오신 진짜 칙사, 도찰원도어사(都察院都 御使)께서 계시니 직접 들어보구려!” 관복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환관 정소립, 황상의 총애를 빌어 사리사욕을 채우고, 붕당(朋黨)을 조직하여 동창 을 사리(私利)를 채우는 수단으로 썼으며, 외부의 적도 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키운 증거가 역력하니 그 죄는 기군망상(欺君罔 上)과 역모죄(逆謀罪)에 해당하니 어찌 살기를 바라느냐? 죄인에게 내 렸던 전 관작(官爵)과 칭호를 삭탈하고 주살(誅殺)을 명한다!” 복운은 흑저에게 물었다. “괜찮으시오, 채주?” 흑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치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복운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불편하지는 않소?” 흑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무릎뼈가 바스러진 것처럼 고통이 밀려왔지만 일어설 수는 있었다. 복운이 정소립을 가리켰다. “원하신다면 직접 목을 베셔도 좋겠습니다.” 흑저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내 일이 아니오!” 복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소립에게 다가서더니 단칼에 목을 잘라 버 렸다. 그리고 정소립의 머리카락을 묶어 허리에 찼다. 흑저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복운의 허리에는 다른 목 하나가 더 있었던 것이다. “그건……?” 복운은 그 목을 들어 보여 주었다. 혀를 빼어 문 계석의 목이었다. “이번 소동의 주범으로 주살했지요! 본인은 서적의 목을 들고 와 책 임을 벗으려 했지만, 제가 이미 보아서 알고 있는 일인데 그냥 살려 두겠습니까? 소운을 마저 손대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공신(功 臣)의 마지막 자손이기 때문에……!” ‘천패금룡이 공신이었던가?’ 흑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아상의 시신을 집어들더니 돌아서서 쩔뚝거리며 걸었다. 복운이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흑저는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녹림 맹과 금룡장의 싸움이 있었던 그곳을 가리키는 것이다. 복운이 그 뒤에 대고 소리쳤다. “지금 거기에는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흑저는 돌아보지 않았다. “죽은 자를 찾아가는 거요!” 복운은 땅딸막한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본 흑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뭐라고?” 엽검영의 걸음이 갑자기 배는 더 빨라졌다. 길목에 지키고 앉아 있던 황거지의 말을 들은 다음부터였다. 그보다 당소취의 위험한 상황에 대해 들은 다음부터라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황거지의 말은 단 한마디도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당소취에 관한 것 이라면 괜찮았다. 백 번 헛걸음을 하더라도 그 다음 한번을 더 갈 용의가 있는 것이다. 황거지가 종종걸음으로 옆에 따라붙었다. “야! 얘기는 제대로 듣고 가야지 무작정 가면 어쩌겠다는 거냐?” ‘지금 한가하게 얘기 듣고 있을 땐가?’ 엽검영은 황거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황거지는 노인네가 걸음도 빨라서 엽검영의 옆에 바짝 붙었다. “너 이대로 가서 어쩔 작정이야?” 엽검영은 숨이 턱에 차올랐지만 끈질기게 물어보는 황거지의 질문에 어쩔 수 없이 대꾸했다. “헥, 헥! 말이라고 물어? 헥! 그 벌레 같은 놈을 때려눕히고 당소저를 구해야지!” 황거지는 웃었다. “그가 벌레라고? 그렇게 잘생긴 벌레 봤냐? 너보다 열 배는 잘 생겼 더라!” 엽검영은 전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얘기라는 듯 코방귀를 뀌었다. “흥--! 늙은이가 눈이 삐었군!” “무공은?” 황거지는 집요했다. “동창 의 교위, 그것도 대영반의 양자 아니냐? 동창 에 중원 각대문 파의 비급 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말은 너도 들었겠지? 그런 그가 어 떤 수준일 거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 아니냐?” 엽검영도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벌레 같은 놈 정기룡, 거의 절반은 넘어간 당소취를 중간에 나타나 가 로채려는 치사하기 짝이 없는 놈이 적어도 무공에서는 자기보다 한참 위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것은 정기룡의 무공이 그다지 높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엽검영 그 자신의 무공이 형편없다는 것은 싫어도 인정해야할 일이었 으니 말이다. 황거지는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인은 가령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사랑을 바 치며 떠받들면 무관심할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정기룡 같은 사람이 라면……!” 엽검영은 점점 더 숨이 차왔다. 단지 오래 달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황거지의 말이 속을 긁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슴 속에 가득 찬 울분이 끓어올라 숨통을 막고 있는 것이다. 황거지는 그런 것도 모르는지 계속 주절거리고 있었다. “인물 좋지, 배경 좋지, 무공도 높고, 아마 학벌도 좋을 거다! 어느모 로 보나 너보다 한참 나은 신랑감 아니냔 말이다. 내가 당소저라도 그 냥 벗고 달려들겠다.” “으아아--! 더 이상 못 참아!” 엽검영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황거지에게 달려들었다. “지금 돕자는 거야, 약올려 죽이자는 거야? 너도 인간이야?” “켁! 켁! 켁!” 황거지는 엽검영에게 멱살을 잡혀 콜록거리더니 그 손을 잡아 뿌리쳤 다. “생각해서 말해주는 사람에게 이 따위 대우야? 네가 지금 이대로 달 려가서 덤볐다간 맞아 죽는 수밖에 더 있겠어?” “맞아 죽어도 좋으니까 상관 마, 이 거지야!” 엽검영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분노가 탱천하니 이젠 힘든 것도 몰랐다. 황거지가 다시 따라붙었다. 정말, 다리 힘 하나는 엄청나게 좋은 늙은이였다. 엽검영은 황거지가 저렇게 더러운 인간성으로도 여태까지 맞아 죽지 않고 살아온 비밀을 알 것 같았다. “맞으면 아프지! 두 대 맞으면 더 아프겠지? 석 대 맞아도 그렇 고…… 자꾸 맞으면 이제 아픈 건 모르겠지만 곧 죽어버릴 거다!” 엽검영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그때, 황거지가 그를 잡았다. “백 대를 맞더라도 한 대만 때리면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마!” 엽검영은 황거지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주먹을 쳐들다가 멈춰 섰다. 황거지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내 비장의 절초라 남이 몇 날 며칠을 빌어도 안 가르쳐 주던 것인 데…… 너와는 인연이 깊으니 특별히 가르쳐 주겠단 말이다.” “악연(惡緣)이겠지……!” 엽검영은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노골적으로 거절은 하지 않았다. 은근히 황거지의 비장의 절초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황거지가 바지춤에 손을 넣고 한참 꼼지락거리더니 더러운 손을 꺼내 엽검영의 양 손에 문대었다. 엽검영이 펄쩍 뛰었다. “이, 이…… 지저분한 늙은이……!” 황거지가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이건 그야말로 비장(秘藏)이라 남에게 보여주지도 못하는 것이요, 말 해 줘서도 안되는 것이다.” 엽검영이 소리쳤다. “그 지저분한 걸 누가 봐?” 황거지가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약 말이다!” “약?” “미약(迷藥)!” 미약이라면 사람의 정신을 잃게 하는 일종의 마취약이다. 엽검영이 얼굴을 구겼다. “이 늙은이가 갈수록 치사해지는군! 나보고 미약을 사용해서 이기란 말이야?” “달리 방법이 있으면 그렇게 해라!” 엽검영은 말문이 막혔다. 달리 정기룡을 이길 방법이 있는가? 없었다. 그는 자기 주먹을 들어 살펴보았다. 아무런 표시도, 냄새도 없었다. “코를 쳐야 되겠군?” 미약을 들이마시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더 있을 것인가? 황거지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누가 네게 코 들이밀고 때려주시오 하겠냐?” 엽검영의 엉터리 권법으로는 코는커녕 몸에 손대는 것도 힘들 것이다. 엽검영은 얼굴을 붉혔다. “그럼 어쩌란 말이야?” 황거지는 짐짓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 곳이나! 아무 곳이나 건드리기만 하면 된다! 몸에 바로 맞으면 효과가 좋겠지만 옷깃을 사이에 두고 맞아도 된다! 바로 쓰러지는 거 야!” “정말인가?” 엽검영은 설마 그렇게 효과가 좋은 약이 있을까 의아했다. “물론이다!” 황거지는 확신하는 듯 강조해서 말했다. “한참 개 맞듯이 두들겨 맞다가 슬쩍 내민 주먹에 옷깃이라도 걸리면 상대는 풀썩 주저앉는 거야! 당소저는 물론 감격하겠지? 그 다음은 만 사가 쉬워지는 것이다.” 엽검영은 희색을 띠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 비장한 낯빛을 해 보이고는 다시 뛰었다. 뒤에서 황거지가 소리쳤다. “십리파다!” 십리파! 엽검영은 예양부 인근에서 다른 곳은 몰라도 그곳만은 잘 알고 있다. 이가 갈리는 곳인데 모를 리가 없었다. 마차를 몰고 밤이슬을 맞으며 꼬박 덜덜 떨고 있었던 원한맺힌 장소가 아닌가? 그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기룡의 마수에서 당소취를 구하려고 달려갔다. 황거지는 멀어져 가는 엽검영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실소를 지었다. 그때, 그의 옆으로 두 개의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뜻밖에도 그들은 당가소와 당천호였다. 당가소는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저렇게 믿음이 안 가는 녀석에게 그런 일을 맡겨도 되는 겁니까?” 황거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못해도 그는 할 수 있지!” “무슨 말씀……?” 황거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어지간한 고수는 어차피 정기룡에게 다가갈 수도 없다. 그를 건드릴 수 있는 고수라도 만약 그에게 접근하면 그는 바로 ‘환’을 사용하려 할 것이다. 자네나 당노제가 접근하면 바로 ‘환’을 구경하게 된단 말이지! 그러나 저 녀석은 순수한 엉터리니 우스갯거리밖에 안될 것이 다. 귀찮아서 패다 보면 어쩌다 옷깃을 잡을 기회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이야!” 당가소는 그래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노선배님께서 수고해 주시면 간단히 끝날 일을…… 오히려 벌여 놓 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황거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참 동안 당가소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난 거지야, 일시킬 생각 마!” 당천호가 고소(苦笑)했다. “형님, 정말 감복했소이다그려!” 황거지가 그를 의아하게 보았다. “옛날 모습과 어쩌면 이렇게 달라지셨는지……!” 황거지는 맹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늙었단 말인가?” 당천호는 고개를 저었다. “천만의 말씀! 형님은 저보다 젊어지셨잖습니까? 저는 그런 몰골을 하고 계신 것을 말하는 거지요!” 황거지는 자기의 누더기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보기 흉한가?” 당천호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옛날의 형님은 화려했지만 어딘가 괴로운 빛이 떠나지 않았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겉은 초라해도 얼굴은 빛나고 계십니다.” 황거지도 그를 보며 미소지었다. “자유의 위력이라고나 할까?” * * * 금룡장에서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녹림 맹의 떼거지들을 간단히 물리치고 돌아온 무사들의 앞에서 금룡 장의 하늘은 변해 있었다. 아직도 자욱이 연기를 뿜어내는 후원 금태파야의 처소에서 꺼낸 두 구 의 시체는 비록 검게 그슬리긴 했지만 금야홍과 금태파야의 시신임은 알아볼 수 있었다. 친소운파와 반소운파의 영수(領首)로 다투던 조손(祖孫)이 동귀어진(同 歸於塵)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대안(代案)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대안은 지금 금룡대전의 태사의에 높이 올라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소운이었다. 좌우에 붉은 혈의(血衣)를 입은 사내들을 늘여 세우고, 태사의 뒤에는 거대한 대월을 꼬나 잡은 한백이 서 있었다. 그들이 사실은 금룡장의 호가세력인 반룡위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 위 세는 더해 보였다. 거기에 구신 전원의 죽음이 소운의 입으로 발표되었다. 내심 반항의 뜻을 품고 있던 무리들도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포기해 버렸다. 언제 다시 뜻을 모으고, 언제 다시 도당을 결성해 반기를 든단 말인 가? 깃발을 바꿔 달고 일단 목숨과 부귀영화를 보장받는 것이 중요했다. 소운의 첫 명령이 그것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오자 분위기는 완전히 소 운이 주도하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당주급 이상, 기존의 최고수뇌들이 경질되고, 부당주급의 인물들이 그 자리를 승계했다. 무사들은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가까운 신분의 사람을 선호한다. 순식간에 당주급 이상의 인물들은 세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다음은 차가운 숙청의 칼날이었다. 반룡위와 한백, 방금까지 자신의 심복이었던 자들에게 끌려 대전 바닥 에 팽개쳐진 수뇌들이 아우성치며 무죄를 호소했다. 그러나 소운은 가차없었다. 그 시퍼런 서슬 앞에 당주급 인물들의 목은 모조리 잘려서 뒹굴었다. 남들의 눈에도 가장 무고하게 보였던 인물이 친소운파의 중심인물이었 던 백염공 하구장이었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소신에게 반의(反意)가 없었음은 하늘이 아실 것입니다.” 소운이 그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네게 반의가 없었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넌 무능했어! 그건 반 란보다 무거운 죄다! 참수(斬首)!” 하얀 광채가 번뜩이고 하구장의 목은 차가운 대전 바닥에 굴렀다. 목은 장대에 걸어 반란을 꿈꾼 자들에게 주어지는 본보기로 내 걸렸 다. 목잃은 시체들을 치운 후에도 대전 바닥은 피로 물들어 붉게 윤기가 흘렀다. 죽음같이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대전에 소운의 목소리가 퍼졌다. “이제 금룡장은 제이(第二)의 도약기(跳躍期)를 맞이하게 될 것이 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백이 대월로 바닥을 찍어 소리를 내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소운과 한백은 말없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거대한 도끼를 비껴 든 한백의 흉폭한 모습과 태사의가 큰 만큼 더욱 작아 보이는 소운의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은 묘한 대조를 이루어 그 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후로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 다. 제 24 장 막야(莫邪) 보배 검으로... 막야(莫邪) 보배 검으로 수미산을 자르고 북두(北斗)를 잡아서 낮종을 쳐라 예상했던 일이지만 엽검영은 정기룡에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얼굴이 곤죽이 되어 사람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장난처럼 툭툭 내뻗는 정기룡의 주먹에 맞을 때마다 엽검영은 뼛속 깊 이 파고드는 고통에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퍽--! 정기룡의 발이 엽검영의 배를 걷어찼다. 엽검영은 새우처럼 등을 구부려 땅바닥을 기었다. 그 입으로 오물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정기룡은 미소를 지으며 발을 뻗었다. “왜 이런 일에 물정 모르고 끼여드냔 말이다!” 팍--! 엽검영의 얼굴이 옆으로 홱 돌아갔다. 그 입에서 이빨이 서너 대 튀어 나왔다. “그만 해요--!” 한쪽에 서 있던 당소취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사정이 있어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정이란 숙부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애초에 정기룡을 불러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하독(下毒)하고, 숙 부와 할아버지가 다시 다른 방법으로 이차(二次) 독을 시전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다. 그 두 가지 독이 합쳐져야만 비로소 정기룡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이 다. 그런데 난데없이 엽검영이 불쑥 나타나 다짜고짜 정기룡에게 덤벼들었 던 것이다. 덕분에 첫번째 목적은 훌륭히 달성했지만, 이제는 이차 목표가 성공할 때까지 섣부른 짓을 해서는 안되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정기룡이 마각 을 드러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무림에 공전의 혈풍(血風)이 불어닥치 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소리쳤다. “당신도 그만하고 도망가요! 왜 쓸데없이 싸워요?” 엽검영에게 하는 말이었다. 핀잔조였지만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걱정스런 어조가 아 닌가? 엽검영은 부쩍 힘이 솟아올랐다. 그는 바닥에서 간신히 일어나 당소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마치 강시 가 움직이듯 부자연스런 거동 이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기룡은 기가 막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왔을까?’ 엽검영이라는 놈도 우습지만 그보다 신경쓰이는 것은 꼽추의 행방이었 다. 당가소가 어떻게 그의 행적을 알았을까? 더구나 ‘환’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던 가? 대사명은 이미 죽었으니 겁날 것은 없지만, 그것은 그의 기반이 사라 졌다는 의미도 되었다. 동창 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반역죄로 죽은 정소립의 양자라는 것만 해도 족히 참수형 감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강호로 숨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지모와 무공, 능력으로 무엇은 못하겠는가? 그는 삼 년 내에 무림 최고의 방파(幇派)를 구성할 자신도 있었다. 환상의 암기 ‘환’도 그의 손 안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고 막후 준비에 들어갈 시간이 지금 절대절명으 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려면 그와 ‘환’, 그와 ‘대사명’과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을 제 거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환’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밀로 감춰둘 필요 가 있었다. 때문에 꼽추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유일 한 사람, 꼽추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그가 당소취를 만난 것도 사실은 그것 때문이었다. 꼽추 외에는 그의 행적을 당가에 알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당가의 보호를 받고 있을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정기룡은 자신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오는 엽검영을 보며 결심했다. ‘필요하다면 당가부터 모조리 없애 버린다!’ 엽검영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온몸의 신경이 가닥가닥 동강나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는 천천히 주먹을 뻗다가 정기룡의 옷자락을 잡고 앞으로 무너져 내 렸다. 정기룡은 그를 걷어차 뒤로 굴려 버렸다. “그만두라니까!” 당소취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어 엽검영을 안았다. 엽검영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안면이 뭉개져 흉측스런 미소였지만, 그는 정말 유쾌해 하고 있었다. ‘만졌어!’ 당소취가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바보, 멍텅구리!” 엽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느끼는 순간에 그는 진실을 마주대 할 마음이 되었다. 당소취는 쉬지 않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허우대만 멀쩡할 뿐, 허풍쟁이에 멍청하기까지 한 사람! 잘 하는 거 라고는 거짓말밖에 없는 사람!” 엽검영이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간신히 입을 벌렸다. “난 그런 놈 맞아요!” “그런 남자를 내가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당소취가 갑자기 그를 끌어안고 울먹거렸다. 엽검영은 처음에는 얼떨떨해 하다가 그들을 경멸하듯 바라보고 있는 정기룡을 향해 말했다. “적어도 이것만은 내가 이겼다!” 정기룡은 피식 웃었다. 이제 저런 얼간이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다. 목표를 정하고 나니 단 한 순간도 아까운 것이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이마를 동인 영웅건을 풀었다. 영웅건이 풀려진 그 자리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원환(圓環)이 남았다! ‘환’의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정소립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이 정소립의 유일한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정기룡 같은 인물은 ‘환’같이 귀중한 물건을 절대로 자신의 몸 밖에 두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했어야 했다. 정기룡은 그 원환의 한 부분을 만졌다. ‘환’이 이마에서 풀려 손으로 들어갔다. 원환은 다시 원반의 모습으 로 변해 있었다. 정기룡은 그 원반을 당소취의 눈앞에 들어올렸다. “혹시 아는 물건이오?” 당소취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숙부도 아직 오지 않았는데 ‘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그것이 한번 사용되어 만들어 낸 참극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 다. 오십 개의 잘려진 목이 그것이었다. 엽검영도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기룡의 손에 들린 원반이 무엇인지는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 황거지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 빌어먹을 거지새끼가 날 또 속여?’ 옷깃을 만졌을 뿐 아니라, 쓰러지면서 옷깃 전체에 도배하듯 문질렀으 니 효력이 발휘되어도 한참 전에 발휘되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저렇게 멀쩡하게 서 있다니……! “아!” 그때, 당소취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어?” 정기룡도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손에서 환이 굴러 떨어졌다. 갑자기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 버렸던 것이다. 그는 허리를 굽혀 ‘환’을 집으려 했지만, 허리도 구부러지지 않았다. “어?” 이번의 경악성은 엽검영이 토한 것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정기룡의 안색이 먹물처럼 검게 물들어 가더니 굳어버 리는 것이다. “이건 아닌데……?” 엽검영은 얼떨떨 해져서 중얼거렸다. 당소취가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었어요? 당신이 독을 썼어요?” 엽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들켰구나!’ “그건 그런데 사실은 독이 아니라…….” 당소취가 갑자기 그의 목을 부둥켜안았다. “정말 잘했어요!” 그녀는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정기룡은 이제 완전히 검게 물들어 땅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 입에서 마지막 말이 토막토막 끊어져 나왔다. “어, 언제……?” 숲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당가소가 피식 웃었다. “환상의 암기 라도 쓸 시간을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그의 시선 속으로 시커멓게 변한 채 녹아들어 가는 정기룡의 시신이 들어왔다. “네놈이 제아무리 영리하다 할지라도 설마 이런 식으로 하독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엽검영을 부둥켜안고 있는 당소취를 보며 그러는 것이다. “저놈, 어디다 쓰죠?” 옆에 서 있던 당천호는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소용이 있겠지!” 그리고는 당소취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훌륭한 여인은 남자를 훌륭하게 만들지!” * * * 눈이 그쳤다. 흑저는 눈 덮인 벌판을 이리저리 걷고 있었다. 매아상의 시신을 들쳐업은 채로 밤새도록 그렇게 걷고 있는 것이다. 눈은 살육이 끝난 뒤에도 내렸던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삐죽 솟아나온 창대만이 어제의 그 장소임을 가르쳐 줄 뿐 어디서 어디까지 시체가 덮여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발밑에 밟히는 감촉은 무수한 시체들이 그 아래 누워있음을 말해 주는 데……! 흑저는 땅에 그대로 누워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 다. 눈 속에서 시체들이 손을 뻗어 그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극심한 피로였다. 그는 드디어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흑저는 주저앉은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을 감쌌던 박룡수는 이미 부서져 떨어졌고, 왼손의 그것에도 무 수한 균열이 나 있었다. 그는 박룡수를 채우는 장치를 더듬거리며 눌러, 왼손에서도 마저 떼어 버렸다. 실제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가뿐함이 흑저를 안도하게 했다. 문득, 용수 진립동의 말이 기억났다. --박룡수를 풀어버릴 때 자네는 진정으로 강(强)해질 수 있을 것이네! ‘나는 강해진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제는 그런 모든 것들이 의미없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그는 눈 덮인 들판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어디에서도 동가채 식솔들의 시체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이 넓은 들판에서 시체 몇 구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눈을 돌려 매아상을 바라보았다. 확대된 동공과 빼어 문 혀, 뒤로 꺾인 목에 남아 있는 긴 손자국 을……! 그녀는 더 이상 아름답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한 구의 시체였을 뿐이었다. 애욕(愛慾)에 들떠 그의 어깨를 감아 오던 수초 같은 손도 이제는 차 갑게 식어 버렸다. 그녀가 살아 있었던 증거는 이제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돌아가리라!” 흑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스 스로 놀랐다.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한 지금도 할 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 손을 뒤로 짚으며 일어서려 했다. 그 손에 한 시체의 머리가 잡혔다. 흑저는 손을 들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잠시 이채가 스쳤다.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영감도 여기 있었소?” 시체는 사천 당문 의 표물 을 털 때 같이 있었던 옹중서였다. 문득, 흑저는 웃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눈밭 끝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매아상의 확대된 동공만이 바라 보고 있었다. “뭘 하시오?” 길 옆에 앉아 무엇인가를 태우고 있던 황거지가 흑저를 보았다. “지전(紙錢)일세!” 지전이면 저승가는 노잣돈이다. 흑저가 물었다. “누가 죽었길래?” 황거지는 쓸쓸한 모습으로 하늘 저편을 보았다. “마누라가 죽었어! 오랫동안 날 기다리다가 죽었다더군!” 흑저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황거지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더니 뒤를 따랐다. 흑저가 그에게 말했다. “이젠 날 따라와도 소용없소! 산(山)으로 갈 거니까!” 산으로 간다!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황거지가 웃었다. “나도 자넬 따라갈 필요가 없어! 새 물주(物主)를 물었거든!” 길 아래쪽에 꼽추가 서 있었다. 황거지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동냥하기에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잖아? 가만히 서 있어도 뭔가 주고 싶지 않아? 저놈을 만나면서 드디어 나도 노후(老後)가 편해지는 게지!” 흑저도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가다가 황거지가 불쑥 물었다. “구신 중에 여덟만 나온 거 알아?” 흑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거지가 다시 물었다. “동황태일은 끝까지 안 보였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 아냐구?” 흑저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오!” 길은 남쪽을 향해 나 있었다. 저 길 어딘가에 소림사 (少林寺)가 있을 것이다. 황거지는 그 길 끝으로 사라져 가는 흑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 * 숭산 소실봉, 소림사 달마 원(達摩院)의 넓은 연무장 정면의 단(檀)에 는 소림 방장(少林方丈) 불견(不見)이하 ‘불(不)’자배의 장로들이 나 란히 앉아 있었다. 그 한계단 아래에 앉은 승려들은 달마 원(達摩院), 반야당(般若堂), 장 경각(藏經閣)과 나한당(羅漢堂) 등 중요직책을 맡은 ‘이(異)’자배의 승려들이었다. 그들의 정면 연무장 중앙에는 과거의 법현(法玄), 흑저가 그들을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애초에 이런 자리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용 수사제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아예 상대할 일도 아니었다고 소승은 생 각합니다.” 달마 원 주지, 이각(異覺)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연무장에 퍼져 나갔다. 달마 원은 전적으로 소림사 의 무공만을 연마하는 곳이다. 무승(武僧) 중에도 가장 자질이 높은 무승들이 거기 속해 밤낮으로 소 림 의 무학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소림 무학의 보고(寶庫)인 것이다. 그 주지는 평생을 소림 무학만 연구한 사람이 되게 마련인데, 이각은 특히 그랬다. 소림 무학에 관한 한 그는 극도로 보수적인 원리주의자(原理主義者)인 것이다. 반야당 수좌인 이현(異峴)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만 볼 일이 아니라고 소승은 생각합니다. 시내〔川〕를 가리 면 강(江)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무학의 강은 넓고도 깊은 것이니 이류 (異流)의 흐름도 용납할 때 더욱 도도히 흐를 수 있는 것이지요!” 반야당은 천하 각문각파의 무공을 연마하는 곳이었다. 반야당 수십 승려들은 하나같이 한 파, 혹은 여러 파의 무공에 정통하 여 강호 무학의 흐름을 연구하고 한 오라기라도 소림 무학에 보탬이 되는 것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반야당의 수좌(首座)가 가장 무공에 정통하다고 알려졌는 데, 장로급의 고승들을 제외한 당금 소림사 내의 양대 고수가 바로 반 야당과 달마 원의 두 수좌였다. 지금도 두 사람의 논쟁 형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흑저의 문제였다. 이각이 벌떡 일어나 흑저를 노려보았다. “다른 흐름이라 해도 정도의 문제입니다. 차라리 타파의 것이라면 소 림 의 흐름과 아예 다르니 혼동의 우려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림 의 흐름을 제멋대로 변형시킨 것은 오히려 본류(本流)를 흐릴 우려가 농 후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입니다. 비슷하나 다른 것은 아주 다른 것보다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말은 이현에게 하는 것이지만, 흑저를 노려보는 것으로 보아서는 당장 이라도 내쫓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이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은 보고 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느 정도 다 르고, 또 어느 정도 비슷한 것인지……! 과연 그 다른 정도가 소림 무 학의 본류마저 흐릴 정도인지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현의 눈 속에 빛나는 광채는 호기심이 분명했다. 그는 흑저를 옹호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최근 강호에 위세를 떨친 흑 저의 박투술 을 구경하고 싶은 것이었다. 여태 말없이 듣기만 하던 불(不)자 배의 장로 중 하나, 불비(不沸)가 입을 열었다. “선연(善緣)이 있으면 선과(善果)가 있고, 악연(惡緣)이 있으면 악과 (惡果)가 있는 법. 오늘의 일은 십 년 전 그의 변명조차 듣지 않고 사 도(邪道)로 단정해 파문한 졸속(拙速)에 원인이 있는 만큼, 이제라도 들을 말은 듣는 것이 옳다!” 장문인 불견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흑저의 말을 듣는 것이 허락이 된 셈이라 이각은 불만스러웠 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답하라! 네가 만든 것의 이름은?” 흑저는 이각의 퉁명스런 질문에도 분노하지 않고 대답했다. “박투술 입니다!” “뜻은?” “제가 손발이 짧아 대적(對敵)에 불리하므로 가까이 붙어서 싸운다는 뜻입니다.” “요결은?” “적의 몸으로 제 방패를 삼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강한 일격을 가함입니다!” 이현의 눈이 참을 수 없는 흥미로 번뜩였다. 그러나 이각은 대조적으로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소림 무학 중에도 바짝 붙어 대적하는 무술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도 박투술 을 만든 이유는?” “제가 배운 소림 무예는 어느것도 방어를 앞에 놓고 공격은 기회를 보아 합니다. 그러나 저처럼 신체조건이 불리한 자는 일단 선기(先機) 를 빼앗기면 반격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릎쓰고 적의 사각(死角)으로 뛰어들어가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邪道)다!” 이각이 호통을 쳤다. “자신을 위험에 빠뜨려 상대의 목숨을 노린다! 이것은 어느 소림 무 학의 원칙에도 위배된다!” 이현이 중얼거렸다. “무(武)의 목적에 대해 여러 좋은 말이 많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 결 국은 적을 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소림 무학에도 한 수(一 手)에 적을 참살하는 것이 적지 않지요!” 이각이 쏘는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현도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다. 그는 이각이 유달리 흑저를 용납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흑저의 손에 죽은 교두승(校頭僧)이 바로 이각의 제자였던 것이다. 그것도 달마 원의 후기지수로 손꼽히는 무승이었다. 그런 교두승이 흑저에게 간단하게 죽은 것이다. 그가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소림 무학이 한낱 사미 승의 잡류무공 에 꺾였다는 굴욕감이 진정 문제였던 것이다. 이각은 벌떡 일어나 흑저를 향해 다가갔다.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법, 내가 네 솜씨를 보리라! 거꾸로 익힌 무공의 한계를 알게 해주지!” 이각이 시험하려 하는 것은 박투술 로 접근하기 어려운 장거리에서 내 력 이 담긴 공격을 피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집어든 것이 염주(念珠)였다. 소림 비기 보리 탄주(菩提彈 珠)를 시전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두 손가락 사이에 염주를 끼워 튕겨내듯 던지는 보리 탄주는 내공 을 실을 경우 오히려 강궁(强弓)보다 무섭다. 시전자가 고수면 고수일수록 더욱 위험하리라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었다. 흑저는 조용히 발을 옮겨 이각의 정면에 섰다. 이각이 말했다. “조심하라! 자칫하면 크게 다치리라!” 흑저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안심하고 던지라는 뜻인데, 이것이 이각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터무니없는 오만이라 느낀 것이다. 그는 애초 오성(五成)의 힘만으로 발출하려 했던 염주를 칠성공력을 끌어올려 던졌다. 쐐--! 염주는 오 장의 거리를 순식간에 압축해 들어갔다. 이각이 손을 튀기는 순간, 어느새 염주는 흑저의 어깨에 틀어박히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흑저는 어깨를 슬쩍 구부렸다. 칙--! 염주가 그의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스치고 방향을 바꾸어 천장에 꽂 혔다. 이각은 안색이 돌변해 흑저를 노려보았다. “왜 접근해 오지 않는가?” 흑저는 두 손을 모았다. “이번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맘대로 해보려무나!” 쒸왕--! 처음의 배나 빠른 속력으로 염주가 쏘아졌다. 흑저는 손을 비스듬히 뻗어 그 염주에 마주쳐 갔다. 좌우에서 보는 소림 승려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맨손으로 보리 탄주에 맞서려 하는가?’ 주먹에서 팔뚝까지 관통해 버릴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염주는 이번에도 방향을 바꾸어 천장에 박혔다. 흑저의 손이 쏘아져 오는 염주의 아래로 파고들어 튕겨내었던 것이다. 이현은 경탄에 가득 차 고개를 돌렸다. ‘흑저는?’ 흑저는 이각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염주를 튀겨내는 그 기세로 이각에게 돌진해 들어가 그 가슴팍 명문에 팔꿈치를 대고 있는 것이다. 이각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흑저가 방금의 일격에 조금의 힘이라도 밀어 넣었다면 그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흑저는 천천히 팔꿈치를 떼고 세 걸음 물러섰다. “결론은 난 것 같구나!” 창로한 음성이 연무장에 퍼졌다. 연무장에 막 들어서는 불류선사의 모습이 보였다. 당금 소림 장문인 의 사형! 무학(武學)에도, 자리에도 욕심이 없고 오직 선(禪), 한 길로만 정진한 선승(禪僧)이 그였다. 소림 장로 중 최고령에, 최고의 덕을 인정받는 그의 말에는 장문인 도 한걸음 양보하는 것이다. 그 뒤에 따르는 사람은 온화한 인상의 노인, 바로 용수 진립동이었다. 불류선사가 말했다. “무학과 같이 흉(凶)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내는 것이 어떨까 하오, 장문사제!” 불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형말씀대로……!” 불류가 흑저를 보며 물었다. “왜 왔는고?” 흑저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벗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불류가 다시 물었다. “벗어버릴 무엇이 있던고?” 흑저가 대답했다. “오면서 잊었습니다!” “잊어버릴 그 무엇은 있던고?” “그것조차 잊었습니다!” 불류가 주장자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꽈--앙--! 고요한 연무장이 흔들렸다. 불류는 불견에게 읍했다. “노승은 이것으로 쾌(快)하니……!” 불견이 마주 합장했다. “제자를 새로 얻으심을 축하드립니다!” 흑저를 불류의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의 대화였다. 불견은 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박투술 을 소림 외가(少林外家) 삼십육종(三十六種)의 하나로 인정하 고, 그 이름을 ‘생사박(生死搏)’이라 한다. 이름에 생사를 붙임은 생 명을 건드리는 위험을 알리는 것이니 함부로 익히지도, 함부로 쓰지도 말라는 뜻이다!” 장로들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무릎 꿇은 흑저는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기뻐서도, 서러워서도 아니었다. 가슴 속에 깊이 맺혀 있던 그 무엇인 가가 녹아 흐르는 것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움이 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더 이상 흑저 는 맺힌 것도 눌린 것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진립동이 나섰다. “우리끼리 해결할 일도 있지?” 흑저는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 “저는…… 저는…… 해결할 일이 없습니다!” 진립동은 웃었다. “사제는 득도(得道)했으니 그런 것에서 벗어났지만 우형은 속인(俗人) 이라 벗어나기 힘들다네! 우형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려나?” 불견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현이 흥미롭다는 듯 손을 비볐다. “재미있겠군!” 이각이 쓴 웃음을 지으며 그 옆에 앉았다. 흑저는 천천히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진립동이 그의 앞에 버티고 섰다. 흑저는 천천히 손을 모았다. 불견이 나직하게 말했다. “일이 끝나면 바로 동원선방(東院禪房)으로 옮겨 병을 치료하게!” 불류가 나직이 대답했다. “무공으로 생긴 일이니 무공을 버리면 끝날 일이네!” 이현이 말했다. “아깝지 않습니까?” 불류가 말했다. “좌선 에 무 따위는 필요없느니……!” * * * 몇 번의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늦게까지 소실봉을 장식하던 눈들이 녹아 내리고, 여기저기에 꽃이 피 었다. 농부들의 말로는 올해는 풍년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사미 승 몇몇이 바리를 들고 약초를 캐러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다가 한 사미 승이 수풀 사이에 반쯤 가려진 초옥을 가리켰다. “저기도 암자가 있네?” 다른 사미 가 손가락을 들어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 최고장로님의 거처야!” 처음의 사미 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올해 벌써 백 세가 넘으신다는 불류…… 선사?” 또 한 사미 가 중요한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분뿐만 아니라 파불(破佛)도 같이 있어!” 사미 승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용수 진립동 사조님을 이겼다는 그……?” “그래……!” 초옥의 문이 열렸다. 사미 들은 겁먹은 병아리처럼 우루루 달아났다. 땅딸막한 중년의 승려 하나가 나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화상으로 일 그러진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중년 승려는 잠시 온화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천천히 허공을 올려 다보았다. “꽃이 피는가……!” 結 꽃이 피어 비단을... 꽃이 피어 비단을 짠다. 남녘엔 대나무, 북녘엔 나무라! 그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나는 다시 소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바람이 전해 준 말로는 그는 금룡장의 주인으로 일 년을 넘기 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병에 걸려서 라고도, 암습을 당해서 라고도 하는데 나는 이미 그 일을 잊었다. 어떤 죽음이었더라도 그에게는 어울렸을 것이다. 뎅--!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 왔다. 종은 처음에 크게 울리더니 점점 잦아들며 산과 산,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를 메아리로 퍼져 나갔다. 그 소리 속에 소림사 의 아침을 알리는 염불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聞鍾聲煩惱斷 智慧藏菩提生 離地獄出三界 願成佛度衆生 종소리 들으며 번뇌를 끊어라 지혜 속에 보리 를 나게 하라 지옥에서 떠나 삼계를 벗어나라 원컨대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라 숭산 소실봉,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새벽하늘에는 외로운 별이 소리없 이 깜박거리는데 기러기만 홀로 날아가고 있었다. < 大 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