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章(一) 石大原 자궁내 양수와도 같이 포근한, 숙면(熟眠)이라는 무의식을 부영하다가, 사내가 최초로 느낄 수 있었던 감촉은 간지러움이었다. 그가 느낀 간지러움은, 방금까지 그를 포옹하고 있던 몽계(夢界)의 율법과는 대단히 이질적인 것이다. 몽계는 비명처럼 경계선을 허물어뜨리며, 사내에게 형벌을 내린다. 의식의 복원. 어느 한 순간 사내는 거칠고 딱딱한 현계(現界)로 추방당한다. 속눈썹의 미세한 경련. 그리고 천천히, 하지만 순간적으로 눈꺼풀이 열린다. 세계의 경계를 넘는 것을 저어하는 동공의 자지러짐. 멍함. 그리고 습관적인 적응. 석대원(石大原)은 초옥(草屋)의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아침햇살 속에서 깨어났다. 얼굴을 간지럽히던 녀석은 다름 아닌 빛의 물결이다. 놈은 연인의 손길과 같이 따뜻하고, 또 감미로왔다.빛이 만들어낸 투명선(透明線)을 쫒던 그의 시선은 문득, 어느 한 곳에서 멈춘다. 수면의 나른함이 채 가시지 않은 망막 속으로 한 여인의 얼굴이 투영된다. 여인의 얼굴은, 시장 화구점(畵具店)이면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싸구려 족자 속에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내가 누워있는 침상의 머리맡에 걸려있다. 여인은 갸름한 얼굴에 고운 눈매를 지닌 미인이었다. 약간은 우울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담고있는 여인화. 매우 정성들인 흔적이 엿보이는 그림이지만, 거친 필선과 어색한 구도에서 솜씨있는 화공(畵工)의 작품이 아님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모친 석부인 연씨를 그리워하며(望 先母 石婦人 燕氏), 불초자 석대원이 그림(不肖 子 石大原 畵)> 그림 옆에 쓰여진 두 줄의 글귀에서 그림을 그린 사람이 다름 아닌 석 대원, 지금 침상에 누워 그림을 바라보는 사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 입꼬리가 미묘하게 풀어진다. 새벽안개를 바라보는 듯한 몽롱한 눈빛. 마치 그림 속의 어머니로부터 정겨운 화답이라도 듣는 것 처럼. 하지만 먹과 조잡한 물감으로 이루어진 그림 속의 여인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흣. 나직한 냉소와 함께 장대한 신형이 훌쩍 침상을 벗어난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쾌활한 움직임. 방안의 공기가 일순 출렁거린다. 일순,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는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하지만 유령처럼 문득문득 되살아나 그의 영혼을 괴롭히던 어느 아침의 광경. 딱딱한 돌바닥이 배겨 잠에서 깨었을 때, 천정에서 대롱거리던 주검. 그 얼굴, 얼굴....... 그는 사납게 고개를 내젖는다. 마치 눈 앞에 떠오른 생생한 영상의 유리막을 깨뜨려버릴 듯이. 석대원은 초옥의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문득 무엇인가 생각난 듯 다시 족자를 돌아본 다. 좋은 아침입니다. 목이 잠겼는가. 그의 목소리는 입 안에서 헛되이 웅웅거릴 뿐이다. 여인은 우울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녀의 미소 에서 힘을 얻는다. 묵묵히 족자를 응시하던 석대원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진다. 그래. 지금은 아침이다. 이 세계가 시작하는 아침이다. 그의 입이 얄팍하게 벌어진다. 어머니, 좋은 아침입니다. 序章(二) 十一年 석대원은 초옥을 나섰다. 그는 두 팔을 들어올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늑골이 요란하게 들려지며 한껏 넓어지는 가슴. 마음 속의 상념을 떨쳐버리듯 크게 기지개를 켜던 그는 가벼운 탄성을 터뜨린다.초여 름의 맑은 아침이 청류산(淸柳山)의 수려한 산세 위에 펼쳐있다. 산줄기는 물이 한껏 오른 나무들이 토해낸 신선한 공기로 하얀 안개가 꿈틀거리고 있 었고, 투명한 햇살은 어느 한 곳 저버림이 없이 만상(萬象)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다. 수풀 속에서 숨어있던 자그마한 들짐승, 온갖 종류의 산새들, 청류산에 온통 짙푸른 물을 들인 나무들, 기암괴석(奇岩怪石), 만장폭포(萬丈瀑布), 신발의 바닥을 적시는 함초롱한 이슬까지도, 빛이라는 탯줄을 통해 공급되는 거침없는 힘을 받아들이고 있다. 빛, 그것도 여름 아침의 신선한 빛은,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새파란 색깔의 성장을 느 끼게 한다. 모든 것은 그 속에서 크고 살지는 것이다. 초옥으로부터 두어 마장 쯤 떨어진 작은 움막에서 밥짓는 파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 었다. 석대원이 나온 초옥은 그리 훌륭하다곤 할 수 없다. 아니, 훌륭하기는 커녕 매우 작고 초라하다고 해야 더 적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초옥도 지금 연기가 피어오르는 움막에 비하면 대궐이라고 해도 무방하 다. 움막의 벽은 여기저기 틈새가 벌어져 거렁뱅이의 해진 옷을 보는 것 같았고, 지붕을 얹은 싸릿대도 햇빛에 말라 누렇게 비틀어져 있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나즈막한, 진흙으로 만든 굴뚝만이 사람이 살고 있음을 짐작케 해 주는 유일한 흔적이다. 끼이이. 움막의 문이 생김새와 어울리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고 노인이 걸어나왔다. 오른 손을 등 뒤로 돌려 허리를 두드리는 노인. 부시시한 백발과 낡은 회색 단삼(短衫), 구부정한 허리 때문에 매우 초라해 보인다. 한 폭의 풍경. 노인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움막과 잘 어울린다. 일어나셨군요, 소주(少主). 느릿한 동작으로 걸어온 노인이 몸을 숙인다. 가뜩이나 왜소한 노인이 더욱 작아진 것 같았다. 한(韓)노인은 여전히 일찍 깨시는군요. 늙으면 잠이 없어지는 법이지요. 석대원은 한로(韓老)의 굽은 등을 바라보았다. 정물(靜物)이 되어 버린 노인의 초라함이 그의 눈에 엷은 설움으로 새겨졌다. 오늘인가요? 석대원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라도 하듯 시선을 돌리며 담담하게 묻는다. 파란 하늘이 그의 망막을 아리도록 찔러온다. 예, 바로 오늘이지요. 한로는 허리를 천천히 펴며 감회어린 탄식을 뱉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매섭게 뻗은 노인의 눈꼬리가 풀어지며, 거미줄같은 잔주름이 한차례 물결친다. 소주(少主), 11년입니다. 一章 江東第一家 (1) 강동구주(江東九州). 초인(楚人) 오자서(伍子胥)의 복수와 비분.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적(項籍 : 項羽)의 패도와 절망이 수려한 산세와 온 화한 기후 아래 담겨있는 영웅들의 고향. 전설처럼 선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서시(西施)의 고운 찡그림, 유비(劉備)는 백제성 (白帝城)에 웅크리고 있건만 절벽에 몸을 던진 손씨부인의 아픈 사랑이 어울어진, 가 인들의 이야기가 생생한 아름다운 땅이다. 초여름의 아침 햇살은 사천(四川)의 청류산으로부터 수만 리 떨어진 이곳 강동의 푸른 대지 위로도 아름답게 비치고 있었다. 석가장(石家莊). 거대한 장원(莊園)이다. 세 치 두께, 은은한 금장(金裝)이 고아해 보이는 단풍나무 송판 위에, 힘찬 필치로 쓰 인 <석대세가(石大世家)>라는 편액이 정문 위에 걸려있다. 송대(宋大)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의 하루 일과는, 해뜨는 것과 동시에 세가의 앞길을 청소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르는 적이 없었다. 삼십 대 초반의 건강함이 그의 부지런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른 시각부터... 손님인가? 그는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세가의 정문 앞을 비로 쓸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말굽소 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늘게 뜬 그의 눈에는 아침햇살을 등 뒤로 받으며, 정문 앞으로 곧게 난 관도 위로 다가오는 한 필의 말이 보인다. 삼 공자(三公子)께서 오시는군. 어느 결에 다가왔는지 송대의 곁에 선 문지기 화(華) 노인이 쉰 목소리로 말한다. 송대는 눈살을 지푸렸다. 말라붙은 토사 찌꺼기에서 풍겨오는 듯한 퀘퀘한 냄새. 술독에 빠져사는 화 노인은 언제나 그런 역겨운 냄새를 대동하고 다닌다. 힐끗 바라본 화 노인의 입술은 꺼멓게 죽어 있다. 아마도 주독(酒毒) 때문이리라. 송대와 화 노인 앞으로 천천히 다가온 칠흑같이 검은 말 위에는 한 사내가 앉아 있었 다. 자신이 탄 말과 같이 검은색 무복에 머리에는 금색 띠를 두른 청년이었다. 이십 대 초반쯤일까. 앳띤 구석이 아직 남아있는 얼굴이지만, 관자놀이로 힘차게 뻗은 눈썹과 날카로운 정 광을 발하는 눈매에선 범접치 못할 위엄과 예기를 찾을 수 있었다. 오랫만입니다, 삼 공자. 화 노인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흑의 청년은 송대와 화 노인의 구부린 허리를 흘끗 바라보고, 습관같이 허리에 찬 검 자루를 가볍게 친다. 그는 자세를 오연히 가다듬고 세가로 말을 부려 들어갔다. 허리를 굽힌 송대의 눈에는, 청년의 허리춤에서 흔들리고 있는, 금장이 멋들어진 검집 이 보인다. 청년이 세가의 문턱을 넘어 사라지자 송대는 허리를 폈다. 화 영감님, 이 가주(二家主)님은 종복들의 인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신가봐 요. 화 노인은 흑의청년이 사라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삼 공자는 따뜻한 아이였지. 잠시 눈빛이 흔들린다. 허! 그때 그 일만 아니였다면... 그의 쉰 목소리는 아주 공허하게 들린다. 이 가주. 삼 공자. 송대의 이마에 가는 주름이 생긴다. 영감님은 자꾸 삼 공자라고 하는군요. 단봉각(丹鳳閣) 지란(芝蘭)아가씨께서 하신 말씀도 못 들으셨어요? 이 가주께선 노복들이 삼 공자라고 부르는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고요. 화 노인은 송대의 말을 못들은 듯, 머리 위에 걸린 편액으로 눈길을 돌렸다. 노인은 그대로 화석이 된 듯 움직임이 없다. 무언가 노인의 대꾸를 기다리던 송대는, 노인이 한동안 말이 없자 혀를 차곤 다시 비 질을 시작했다. 기계적으로 비질을 하는 송대의 귀에 노인의 나지막한 탄식이 들렸다. 이 공자(二公子)께서는 어디서 뭘 하시는지... (2) 만심각(滿心閣). 강동제일가(江東弟一家)로 이름난 석가장 가주의 집무실이다. 만심각은 백여 년 전, 이 장원의 주인이 명초의 거유(巨儒)이자 권신(權臣)인 담종(潭 棕)이었을 때부터 이 이름으로 불려왔다. 아마도 담종의 호가 만심거사(萬心居士)인 것에 기인한 것이리라.십일 년 전의 화재로 새 들보를 올리기 전까지는 강동에서는 여간해서 찾기 힘든 강북풍(江北風) 화려한 건 물이던 만심각. 하지만 지금은 현 가주의 성품을 대변해주듯 검박하고 실용적인 남부양식으로 지어져 있다.화려한 것이 있다면 만심각 앞뜰 정원에 화려하게 피어있는 남장미(南薔薇). 그리고 그 덩굴가지 아래에서 윤기나는 흑색으로 자리잡은 자오란(子午蘭)뿐. 넓은 방 안에는 한쪽 벽면을 메우고 있는 커다란 서각 때문인지 맵싸한 책냄새가 은 은히 감돌고 있었다. 창가에는 붉은 색의 서탁이 놓여있고, 방 중앙에는 한 개의 큰 원형탁자와 여러 개의 나무의자가 마련되어, 회의장과 같은 검박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석가장의 현(現) 주인이며, 담백한 성품과 공정한 일처리로 강동의 뭇 군웅들로부터 판검대인(判劍大人)이라는 칭송을 받는 석대문(石大文)은, 만심각 창가에 서서 밖으로 보이는 세가의 아침을 바라보고 있다. 삼층 건물인 만심각의 일층은 천정이 높은 대전(大殿)이었다. 만심각 삼층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세가를 한 번에 담기에 충분했다. 그의 고요한 시선은 전각의 지붕을 반짝이게 하는 햇살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청아한 하늘색 속으로 소미산(逍彌山)의 능선이 분명해 보인다. 맑은 날이다. 똑똑. 나직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며 백색 장삼을 입은 중년인이 들어왔 다. 가주, 이 가주께서 오셨습니다. 석대문은 창가로부터 서서히 몸을 돌린다. 언제나 흰 옷만을 고집해 백도군(白刀君)이라는 별호가 붙어있는 정효(鄭曉)에게는, 아침햇살을 역광으로 받고 있는 석대문의 그늘진 체구가 여느 때보다 더 거대하게 보 였다. 육 척이 넘는 체구와 짙은 눈썹 아래 차분히 가라앉은 석대문의 눈빛은 십여 년 전까 지 강동삼수(江東三秀)의 한 명으로 무명을 떨치던 전대(前代) 가주의 모습을 떠올리 게 했다. 정효가 홍안의 나이로 석가문중에 투신한 것도 벌써 이십 년이 넘는다. 그 당시 열살박이던 소년이 이제는 저리도 거대한 주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왔느냐? 상념같은 감회에 젖은 정효의 눈빛과 순간적으로 얽히던 석대문의 눈길이 천천히 움직 인다. 정효의 등 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방 안을 바라보는 금색 두건을 머리에 두른 흑의청 년. 바로 자신의 동생이다. 보름만에 만난 동생이지만 별로 놀라지 않은 것은, 동생이 만심각으로 들어오는 것을 창 밖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들어오거라. 석대전(石大全)은 방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좋아 보이시는구려, 형님. 석대전은 쇳소리처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인사 비슷한 말을 던지고, 가까운 의자로 몸을 던진다. 건방져 보이는 행동이지만 동생의 성격을 잘 아는 석대문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맞 은 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동생 석대전과의 나이차는 열 살. 연년배 형제들이 느끼는 정 - 서로 좋아하기 보다는 지긋지긋하게 싸우며 자라다가 들 어버린 정 - 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동생을 사랑한다. 조금은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조반은 들었느냐? 어제 저녁부터 굶어서, 아귀(餓鬼)가 될 지경이오. 석대문은 동생의 모습이 보름 전보다 훨씬 초췌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동생이 보름간 세가를 떠났던 바로 그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는 것과도 상통한다. 일은 어찌 되었느냐? 석대전은 잠시 형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양숙부(楊叔父)께서 실종된 것은 사실인 것 같소. 으음... 그리고 실종 직전, 양숙부께선 근래 강남(江南)에서 출몰한다는 혈랑곡도(血狼谷徒) 들을 잡으러 다녔다고 합디다. 혈랑곡! 석대문의 이마에는 한 줄기 깊은 고랑이 생겼다. 양숙부, 양무청이면 그의 부친인 석안(石鞍)이 강호에서 활약하던 시절, 혈육같이 지 내던 의제(義弟)였다. 당시 강동삼수는 고강한 무공과 혁혁한 협행으로, 그 명성이 대강남북(大江南北)을 진동시켰다. 사자신검(獅子神劍) 방령(方嶺)이 삼수 중 첫째였으며, 석가장의 주인이었던 검군자 (劍君子) 석안이 둘째, 그리고 실종된 을미수(乙彌手) 양무청(楊戊靑)이 막내였다. 양삼숙은 남에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다. 석대문은 당금 강호에서 양무청을 쉽게 다룰 수 있는 위인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쌍의 육장(肉掌)으로 전개하는 삼십육로을미수(三十六路乙彌手)는 석대문이 코흘리 개 개구장이일 때부터 강호일절(江湖一絶)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호방한 성품의 양무청에게는 무림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그가 돌연히 사라지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양삼숙의 자취가 마지막으로 끊긴 곳은? 그것이 약간 문제가 있어요. 석대전의 눈썹이 조금 모아진다. 숙모께서 하신 말씀에 의하면, 삼숙께선 개방의 소주분타(蘇州分舵) 삼각풍(三脚風) 으로부터 전갈을 받고 혈랑에 관한 정보를 듣기 위하여 소주로 간다고 하셨답니다. 개방의 삼각풍... 위백(魏栢) 말이냐? 바로 그 삼각풍이요. 하지만 소제가 소주로 가서 위백을 만나보니, 그는 혈랑에 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삼숙께 그런 편지를 보낸 적도 없다고 하더군요. 형님도 아시다시피 위백은 개방 내에서도 정인군자로 이름난 위인아니오? 사부께서도 위백의 위인됨이 지극히 바르고 성실해서 간계(奸計)로 사람을 속일 사람 이 아니라고 하시니,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오. 석대전의 사부는 삼수의 대형(大兄)인 사자신검 방령이였다. 방령은 사자검문(獅子劍門)의 문주이며, 이미 오래전에 강호활동을 그치고 무학수련에 만 전념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석대전은, 십일 년 전 석안이 사망한 직후 가주직을 이어받은 석대문의 청에 의해, 방령의 문하로 들어간 것이다. 십일 년 전의 사건에 생각이 머물자 석대문은 새삼스러운 생각에 아우를 물끄러미 바 라본다. 어린 시절 석대전은 결코 무인의 재목이 되지 못했다. 목검만 들어도 벌벌 떨던 그를, 석안은 심지가 약하다고 호되게 꾸짖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석가의 대대로 내려오는 천부적인 무골(武骨)은 석대전 에게도 어김없이 이어져, 그는 이미 방령의 독문무공인 금사검법(金獅劍法)과 사왕팔 장(獅王八掌)을 모두 터득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를 변신시킨 것은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석대전의 마음을, 꽃을 사랑했던 유약한 아이로부터 얼음심장을 지닌 무사로 변화시킨 또다른 이유. 아전(兒全)과 소란(小蘭)을 잘 돌봐줘, 형! 석대문은 한숨을 쉰다. 잊고 지내던 과거의 한 조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몽롱해졌던 시선의 끝을 다잡는다. 눈앞에는 석대전의, 깎아놓은 얼음과 같은 차가운 얼굴이 있다. 혈랑지화(血狼之禍)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사흘 전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황산(荒山) 원왕장(猿王莊)의 사십여 식솔들이 혈랑기 (血狼旗)와 함께 몰살당했다고 하더구나. 저도 무강(戊江)에서 그 소식을 들었소. 장비원왕(長匕猿王) 정욱사(呈旭思)는 시신을 보전하지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형님, 아무래도 양숙부께 무슨 변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염려되는군요. 석대문은 침음했다. 반 년 전부터 혈랑의 이름 아래 계속되는 피의 행진은 이제 친인(親人)의 실종으로까 지 이어진 것이다. 그는 강남무림으로부터 닥쳐오는 불길한 피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침 햇살은 아직도 방안을 화려하게 채색하는데, 마주앉은 두 형제는 마음을 무겁게 짖누르는 어두운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3) 운리사부(芸理師父)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세가의 북쪽에 위치한 가산(家山), 자그마한 석옥(石屋)에서 석대문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한 명의 대머리 노인과 마주앉아 있었다. 혈랑이라... 석대문의 물음을 가볍게 되뇌여보는 노인의 이름은 운리학(芸理鶴), 석대문 형제의 어린 시절 글선생이기도 했다. 이제는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이곳에서 다초(茶草)를 가꾸는 것으로 소일하는 노인에 불과했지만, 석대문은 소년시절부터 운리학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친인 석안도 그에게는 언제나 공경했으며, 노인의 학문과 지혜는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고 항상 말하곤 했다. 석대문은, 그가 가주가 된 후 세가의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항상 운리학에게 자 문을 구했다. 가주께선 혈랑에 얽힌 이야기를 아시는지? 세월이 가르쳐주는 지혜인 차분하고 조용한 움직임으로 다구(茶具)를 다루며, 운리학 은 말을 꺼낸다. 신비...혈랑(神秘血狼)의 혈랑 말씀입니까? 운리학은 석대문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운리학의 다예(茶藝)는 그 경지가 높았다. 남송(南宋)의 도읍인 항주(杭州)가 함락되고 몽고의 기마민족이 중원십팔만리를 완전 히 점령한 뒤, 항간에는 지극히 간소화된 전차(煎茶 : 明代 이후 민간에서 시행된 茶 道, 현대에 전해지는 中國茶道를 칭한다)만이 유행할 뿐, 이미 모차법(芼茶法 : 唐代 에서 南宋까지 유행하던 茶道, 절차가 복잡하고 많은 茶具가 사용된다)이나 고서로부 터 전해지는 다례(茶禮)가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운리학은 이러한 풍토를 안타깝게 여기며, 가산의 후미진 곳에 차밭(茶田)을 가꾸고 손수 차를 말려, 남송 풍의 다례를 즐기곤 했다. 화암(花岩)은 기교없는 향이 은은해서 좋지. 드시게. 화암은 운리학이 가장 즐기는 차였다. 화암은 본디 복건(福建)의 무이산(武夷山)에서만 생산된다는 암차(岩茶) 중 한 종류 였다. 용정(龍井 : 江南에서 유행하는 차. 특히 杭州에서 생산된 것이 유명하다)이나 향편(香片 : 北京에서 널리 애용되는 차), 또는 사문홍(邪門紅 : 紅茶의 일종으로 安徽省에서 생산된다)처럼 널리 알려진 차는 아니었지만, 정미(精微)한 코와 입을 지닌 다도가에게는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는 것 이 바로 이 화암인 것이다. 석대문은 공손히 찻잔을 받으며 생각에 잠겼다. 투박하면서도 그 실체를 감지하기 어려운 담담한 차향이 찻잔을 받친 그의 좌수로부터 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석대문은 차향을 음미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신비혈랑! 그 말이 주는 무게가 그의 오감을 일순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설마 그 혈랑이란 말인가. 운리학은 차를 한 모금 입에 품은 뒤 눈을 감고 음미한다. 잠시 향을 즐기던 노인은 말을 잇기 시작했다. 노부가 아는 바, 혈랑은 하나 밖에 없다네. 바로 혈랑곡(血狼谷)이지. 하지만 혈랑곡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 아닙니까? 운리학은 대답없이 다시 눈을 감는다. 십수 년 전 석대문이 수학(受學)하던 시절만해도 탐스러운 하얀 수염을 쓸어보이며 위엄을 세우던 운리학이건만, 이제는 수염도 많이 빠져 꽉 다물어진 그의 입가의 주름 이 훤히 보인다. 석대문은 터무니없이 늙어버린 이 고고한 선비를 바라보며 한줄기 서글픈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혈랑곡이 있는 한 다른 누구도 함부로 혈랑을 표기로 삼지 못할걸세. 혈랑이 현세에 출현했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군. 어찌 그런 일이... 운리학은 혈랑곡의 출현이라고 단정하면서도 그 사실을 불신하고 있었다. 석대문은 이러한 운리학의 태도에서 괴이함을 느꼈다. 혈랑곡에 관한 이야기는 얼핏 선친께 들었을 뿐, 정확한 내막은 모릅니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운리학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인다. 가주께서 모르시는 것도 당연하지. 가주의 연세도 이제 갓 삼십이 아닌가. 운리학의 흐린 노안(老眼)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련히 피어올랐다. 과거의 기억은 지나간 세대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보잘 것 없어진 사람들이 움켜쥐고 있는 인생의 편린이기도 하다. 그는 기억을 더듬는 듯 좀처럼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석대문은 마른 침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을 느낀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결코 크지 않을진대, 석대문의 귀에는 마치 천둥과 같이 들린다. 긴장. 석대문은 자신의 신경이 운리학의 입으로 쏠려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랜 침묵이 지난 뒤 운리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혈랑곡은 사십여 년 전 <곤륜지회(昆崙之會)> 때 처음 강호에 이름을 드러냈다네. 하지만 곤륜지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보다도 훨씬 더 전인 명초(明初)로 거슬러 올 라가야 하지. 二章(一) 廬山白蓮敎 (1) 원말(元末), 지배종족과 황조가 동시에 흔들리던 대격동기였던 1364년 - 以下 年度 는 西紀를 기준함. 1세기 가량 계속되었던 유목민족에 의한 대륙지배는, 중국사회를 정치 경제적으로 극 심하게 피폐시켰다. 몽고지상주의(蒙古至上主義)라는 민족차별정책에 의해 전통적 대륙문화는 철저하게 멸시되었다. 유목민족인 몽고족은 대륙의 뿌리와도 같은 농경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했다. 상업에 보다 역점을 둔 몽고의 경제정책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비해 농민들에 게 상대적으로 막중한 세금을 물리게 되었고,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유랑민으로 대륙을 횡행하게 되었다. 농토는 황폐해지기 시작했고 굶주린 사람들이 인육을 먹는 아비규환의 참상이 곳곳에 서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몽고인의 학정은 조금도 그치지 않았다. 원 제국 최후의 황제인 순제(順帝 : 1333 ~ 1368 제위) 때의 권신 메르키드 바얀은 어 느 때인가, 장(張), 왕(王), 유(劉), 이(李), 조(趙) 5개 성을 지닌 중국인들을 모두 죽이게 해주십시오. 라고 청원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만일 실행되었다면 얼마나 많은 중원인들이 죽 었을까. 이런 터무니없는 제안이 권신에 의해 태연히 청원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시대의 정치 적 퇴락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암흑기는 한민족의 자발적인 봉 기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한다. 농민반란의 성격을 띠던 초기의 궐기는 차차 군사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며, 어느 순간 엔가 인간의 힘으로 제압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된 것이다. (2) 당시 원 황실에 저항하던 한족(漢族) 최대세력은 홍건군(紅巾軍)이라는 이름으로 불 려졌다. 이 홍건군의 계보를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하나의 비밀결사 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바로 백련교(白蓮敎)라는 종교결사이다. 백련교는 남송 고종(高宗) 때 오군(吳郡 : 현재의 蘇州) 연상사(延祥寺)의 승려 자조 자원(慈照子元 : ? ~ 1116년)이 창시한 종파이다. 이들은 아미타정토(阿彌陀靜土) 신앙을 중심으로 살생과 주육을 금하고 평소 신앙적인 수련을 통해 부처를 이룬다는 것을 주된 교리로 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백련교는, 초기에는 민간신앙적인 면이 다소 강하다는 것 외에는 여타 의 불교 종파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런 백련교가 독특한 교리와 교세를 갖추게 된 것은, 13세기에 접어들며 페르시아 마니교[明敎]의 배화(拜火)적인 요소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미륵하생(彌勒下生) 명왕출세(明王出世)> 백련교의 신앙을 대변하는 교리(敎理)이자 그 교도들이 주문처럼 외우던 문구이다. 미래의 어느 시기엔가 미륵불(彌勒佛)이 세상에 내려오면 명왕(明王 : 明尊)이 출현해 모든 악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이 문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백련교들에게는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집권층은 밝고 정의로운 다음 세상을 위해 깨뜨려져야만 할 대상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부정적인 교리는 백련교가 송(宋), 원(元) 양대의 이족(異族) 지배세력들 의 공적(共敵)으로 간주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관부 차원에서의 백련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질수록 백련교의 교세는 더 욱 확장하게 된다. 오랜 기근과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는 미륵과 명왕의 출현을 기원하는 백련교의 교리는 크나큰 위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 산불처럼 번져가는 백련교의 교세는, 원말 하나의 국가와 버금갈 지경까지 이르 게 되었다. (註 : 백련(白蓮)이라는 이름은 진대(晉代)의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의 호 계동림사(虎溪東林寺)에서 123명의 명승(名僧), 명유(名儒)들과 함께 세운 백련사(白 蓮社)에서 유래된 것이다. 백련교를 여산백련교(廬山白蓮敎)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거기에 기인한다.) 백련교가 원 황실에 대해 본격적인 무력 저항을 시작한 것은, 1351년 원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가 황하(黃河)의 제방공사를 위해 이십만 명이 넘는 인부를 고용한 사건에 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국가가 인부들을 고용했을 때에는, 비록 적은 액수이지만, 법이 정하는 일정한 녹봉을 반드시 지급해야 했다. 하지만 조정은 이들에게 아무런 보수도 지급하지 않고 어느 한 순간 한꺼번에 해고해 버렸다. 당시 국고는 순제가 곳곳에 벌여놓은 엄청난 토목공사와 화려하기 이를데없는 궁중생 활의 경비를 조달하는 것만으로도 바닥 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인해 이십만이라는 엄청난 수의 인부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되 었다. 각처에서 착출되었던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마저 없게 된 것이다. 이들은 결국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는 도적이 되고, 일부는 염효(鹽梟)라고 알려 진 소금밀매업자 - 당시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으로서 개인이 임의로 취급할 수 없었다 - 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들의 일부는 원에 저항하는 군사조직으로 개편하게 되니, 그 시작은 하북(河 北)사람 한산동(韓山童)에서 비롯된다. 한산동(韓山童)은 당시 하북 백련교의 수령이었다. 한산동은 황하 제방공사가 진행되던 초기부터 인부들을 거병에 끌어들일 치밀한 계획 을 세웠다. 그는 아이들을 이용해 동시(童詩) 한 구절을 민간에 유포시켰다. <독목석신(獨目石身)이 나타나면 황하가 요동하고, 한조(漢祖)가 들어서니 우리 땅을 찾는다네.> 아니나 다를까, 제방공사를 위해 황하 연변을 굴착하던 인부들은 옛 하도(河道)에서 눈이 하나 달린 석상을 발굴하게 되었다. 물론 한산동이 연출한 조작극이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 한산동은 휘하 문사(文士)인 유복통(劉福通)·두준도(杜遵道)를 이용해, 자신이 북송 휘종의 직계 팔대손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러한 연극은, 그 조잡한 극본에도 불구하고,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의 백성들에겐, 한조라고 하면 100년 전 지배왕조인 조(趙)씨의 송조(宋祖)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씨의 직계 팔대손이 한씨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내심 끓어오르는 불만의 구심점을 찾던 백성들에게는 솔깃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한산동은 인부들을 규합하여 대규모 군사조직을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한산동은 곧 관군에 의해 처형당한다. 하지만 그가 계획하던 일은 멈추지 않으니, 모사 유복통은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韓 林兒)를 왕으로 옹위하고 하남성(河南省)의 남부 호주(毫州)에서 송(宋)을 세우게 되 었다. 이때 한림아가 사용한 제호가 소명왕(小明王)이니, 이는 곧 <미륵하생 명왕출세>라는 백련교의 주문과 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들의 군사는 붉은 헝겁을 이마에 두르는 것으로 표기를 삼았으니, 이가 바로 홍건군 이다. 홍건군의 봉기를 시초로 곳곳에서 한족의 궐기가 이어지게 된다. 양자강 중류의 장사치 서수휘(徐壽輝)이 홍건군의 이름으로 천완국(天完國 : 유복통의 홍건군을 동계홍건(東系紅巾)으로 분류하는데 반해 서수휘의 홍건군은 서계홍건(西系 紅巾)으로 구분한다. 이는 이들의 계통이 일치하지 않음을 시사한다)을 세운데 이어, 무장 곽자흥(郭子興), 염효 장사성(張士誠), 절강(浙江)의 방국진(方國珍) 등이 속속 거병하기 시작한다. (3) 결과적으로 이러한 반란은 몽고족을 중원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한 인간의 잔학성과 교활함을 볼 수 있으니, 명의 초대 황 제이자 중국 역사상 가장 잔혹한 군주 중 하나로 알려진 주원장(朱元璋)이 바로 그였 다. 주원장의 모습에 대해서는 후세에 남겨진 두 가지 초상화가 서로 다른 증언을 남기고 있다. <역대제후도(歷代諸后圖)>에 그려진 초상은 둥근 얼굴에 큰 귀, 온화한 눈과 입의 주 원장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세간에서 전해지는 또다른 초상은 하늘로 치솟은 눈꼬리에 툭 튀어나온 이마와 턱, 얼굴에 가득 찍힌 곰보자국의 추악한 주원장을 그리고 있다. 어느 것이 진짜 주원장의 얼굴인지는 확인할 바가 없지만, 그가 미남은 아니었음은 쉽 게 짐작할 수 있다. 주원장은 1328년 회하(淮河) 부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기근과 전염병으로 혈혈고아가 된 주원장은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서 탁발 승 노릇을 하며 3년 간 천하를 주유하게 된다. 탁발승의 몸이란 태평성세에도 그리 편할 수 없는 처지. 하물며 온 세상이 전란에 빠진 수라도(修羅圖)에서의 유랑이란 그 고초를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기 동안 청년 주원장은 천하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법칙인 강자존(强者 存)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유랑세월을 마친 주원장은 1352년 곽자흥의 휘하로 들어가 홍건군에 가담하게 된다. 곽자흥은 기골이 장대하고 우락부락한 용모의 주원장이 마음에 들었다. 주원장은 곧 십부장(十夫將)에 발탁되었으며 곽자흥의 딸(후일 마태후(馬太后))과 혼 인을 하여 군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간다. 그가 훗날 명의 건국공신이 되는 서달(徐達), 탕화(湯和) 등 24명의 청년들을 만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곽자흥이 병사하자 주원장은 곧바로 곽군(郭軍)을 장악할 수 있었다. 군의 수뇌가 된 그는 자신의 새로운 거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1356년, 주원장은 양자강을 도하, 남경(南京)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남경이 함락되자, 주원장의 입지는 안팎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 게 된다. 안으로는 백련교의 간부 및 홍건군의 지도자라는 직위에서 대륙을 경영할 군주로서의 변신을 시도하게 되었으며, 밖으로는 패권을 위한 세력확장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패권 다툼의 대상은 북쪽 대도(大都)에 웅크린 원 황실이 아닌, 같은 처지의 반란군들, 즉 한족이었다. 같은 목표를 지니고 있지만 동족을 해치우지 않으면 군주가 될 수 없는 상황. 이러한 미묘한 상황하에서 주원장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간웅(奸雄)으로서의 잔인함이 서서히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당시 천완국의 서수휘는 그의 휘하 무장인 진우량(陳友諒)에게 암살당한 후였다. 진우량은 국호를 대한국(大漢國)으로 고치고 그 세력을 강서와 양자강 유역을 완전 장 악, 반군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한 소주(蘇州)를 근거지로 한 장사성 역시 오국(吳國 : 張吳國)을 세우고 풍부한 곡 물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바, 주원장에게 있어서 이들은, 몽고족을 몰아내기 위한 동지가 아닌, 대륙 패권의 대적(大敵)인 것이다. 1363년 주원장과 진우량의 양대세력은 파양호에서 천하를 건 접전을 벌이게 된다. 이 수상전에서 약세로 평가되었던 주원장은 절묘한 유인계와 화공책을 사용하여 진우 량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진우량은 난군(亂軍) 틈에서 죽고 만다. 이 전투를 통해 양자강을 장악한 주원장은 그 이듬해 오국(吳國)을 세우게 되었으니, 사가(史家)들은 이를 장사성의 오국과 구분해 주오국(朱吳國)이라고 명명한다. 진우량을 무찌른 주원장은 총력을 기울여 장사성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장사성의 세력은 여타의 반군과는 달리 백련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장사성은 백련교를 <요언(妖言)으로 양민을 현혹시키는 마귀의 무리>라고 비난 하며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주원장 휘하의 백련교도들은 이러한 장사성을 토벌하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1367년, 소주는 주원장의 집요한 공세에 수 개월을 저항하다가 함락당하고, 장 사성은 자살한다. 이제 주원장은 중원 남부를 지배하는, 명실상부한 유일한 지배자가 된 것이다. 그러한 주원장에게 남아있는 두 가지 과제는 몽고족을 장성 밖으로 몰아내 중토수복의 숙원을 이루는 것과 자신에게 붙어있는 백련교의 망령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소주가 함락되기 직전인 1366년 말엽, 주원장은 휘하 요영충(寥永忠)에게 은밀히 지 시, 자신의 보호 하에 있던 소명왕 한림아를 양자강에 수장하였다. 이후 요영충 마저 제거한 주원장은 이 일이 비밀에 붙여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한림아와 같이 죽었다고 알려진 위사(衛士) 종무용(鍾無庸)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은 어찌보면 하늘이 주원장에게 내린 마지막 시험이었는지도 모른다. 종무용은 이 사실을 곧바로 여산에 있는 백련교 총단에 보고했다. 이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백련교도들은 사리사욕을 위해서라면 주군이자 교주인 한림아마저 가차없이 살해하는 주원장의 진면목을 안 것이다. (4) 백련교의 총단, 여산백련교가 백련교도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결코 소명(小明王) 한림 아(韓林兒)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비록 정세에 직접적인 간섭은 금하고 있던 여산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백련교 신 앙의 정통이자 본산인 것이다. 더욱이 여산백련교는 남송 말엽부터 강호에 이름이 높은 무예명문이었다. 무림제일문(武林第一門). 비록 중원과 이질적인 교리로 인해 사교(邪敎)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있었지만, 강호의 무가 중 단독으로 여산백련교를 상대할 수 있는 문파는 존재하지 않을 정도였다. 여산백련교의 십육대 교수(敎首) 서문호충(西門昊忠)은 주원장의 배신을 전해듣고 불 같이 진노했다. 그는 천하 백련교도들에게 격문(檄文)을 돌리고 주원장의 처단을 호소하기에 이르른다. <광명동도(光明同徒) 전(前). 교조(敎祖) 자원상인(子元上人)께서 오군(吳郡)에 초석(礎石)을 심으시고 역대 광명 선열들께서 피와 땀으로 이룩하신 우리 정토백련교(淨土白蓮敎)가, 모든 백성의 숙원 인 중토수복의 기치를 내어걸고 명왕(明王 : 韓山東)의 지휘 아래 호적(胡賊)과 성전 (聖戰)을 시작한지 어언 열다섯 성상(星霜)이 지났도다. 우리에게는 천하를 굽어보시는 명존(明尊)의 사랑이 있으니, 이제 그 대업을 소명왕 께서 이어 몽고의 도적떼들을 장성(長城) 밖으로 몰아낼 호기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아아, 쥐도적같은 간흉(奸凶)이 있어 천리를 거역하고 명존을 기만하니, 천하가 그의 간악함에 치를 떨도다. 위사(衛士) 종모(鐘某)가 전한 말에 의하면 우리의 소명왕께서는 이미 간흉의 해를 입어 세상을 떠나셨다 하니, 그 간흉은 다름아닌, 남경(南京)에서 취업(臭業)을 쌓고 있는 주원장(朱元璋)이라. 오호라, 하늘이 노하고 땅이 울부짖도다. 본교가 이땅에 뿌리를 밖은 이래 이런 참사는 없었으니, 하늘은 어찌하여 그런 간흉에 게 무리를 주어 중토수복의 대업과 본교의 백년지계를 흔드는가. 이제 나 서문호충은 감히 명존의 이름을 빌어 중토 각지에서 성전을 수행하는 광명동 도 제위께 선포하노니, 주적(朱賊)의 목을 베어 비명에 가신 소명왕의 원혼을 달래고, 흐트러진 교단(敎壇)을 바르게 하라. 정토백련 십육대 교수 서문호충.> 주적의 목을 베어 교단을 바로 하라(以梟朱賊 定立敎壇). 그 효과는 곧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원장 휘하의 장수 중 여섯 명의 무장이 삼만 명의 백련교 군졸을 이끌고 반란을 일 으킨 것이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백련교 하급간부인 천호장(千虎長)이었다. 이들은 주원장이 계획하던 필생 숙원인 대도(大都)로의 북정을 석 달 간 묶어놓게 만 들었다. 하지만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고, 거사에 참여한 일만 명에 달하는 백련교도들이 처형 되었다. 백련교수 서문호충의 손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군세로써 주원장과 겨루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유능한 자객을 보내어 주 원장을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백련교의 최고 고수인 호교십군(護敎十軍)이 서문호충의 밀명을 받고 남경으로 파견되었다. 호교십군은 대대로 전수되어오는 백련교의 비전무학을 익힌 열 명의 고수들이었다. 일당백의 무학명인(武學名人)들인 이들이 파견된 이상 주원장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 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주원장을 보살피심인가. 당시 여산 총단에는 이미 주원장의 간세(奸世 : 첩자)가 있었다. 호교십군의 노정은 곧장 주원장에게로 보고되었다. 결국 하늘 아래 두려운 것이 없다던 호교십군은 명장(名將) 서달과 이선장(李善長)의 매복(埋伏)에 걸려 하북(河北) 황음곡(黃陰谷)에서 뼈를 묻고 말았다. (註 : 徐達과 李善長 역시 후일 주원장의 가혹한 공포정치속에서 숙청된다. 이 외에도 建國大臣인 胡惟庸과 名將 藍玉도 주원장에게 제거된다 / 1393년 胡藍의 獄) 1368년 주원장은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명을 건국한다. 그리고 연이어 원의 수도인 대도가 함락된다. 1세기 동안 게속된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황제 주원장. 하지만 그에게는 서문호충의 제거가 여전히 중대한 사안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산에는 호교십군 외에도 난다긴다하는 고수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들이 자객으로 계속 보내진다면, 수십만으로 둘러싸인 군막(軍幕)안에서도 생명을 보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교수 서문호충은 당시 무림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는 무학종사로 알려져 있었 다. 주원장은 그가 살아있는한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정황은 여산으로 거병(擧兵)할 만치 한가로운 것이 아니었다. 외몽고(外蒙古)로 쫒겨간 원의 잔당은 다시 북원(北元)을 세우고 호시탐탐 중토를 노 려보며 재기를 꾀하고 있었으며, 운남(雲南)의 티벳족(土番族), 요동(遼東) 너머의 고 려국(高麗國)과의 외교문제 등이 건국초기의 중대사로 남아있었다. 더구나 겨우 안정되기 시작한 민심을 아랑곳하지 않고 동족의 토벌하는 것은 정당한 명분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에 빠진 주원장에게 호기가 찾아왔다. 비영사(秘影社)가 귀순해온 것이다. (5) 비영사는 원 황실의 비밀감찰기관으로, 무림에서는 악명이 높은 기관이었다. 이들은 대도 함락 당시 수많은 몽고병들과 함께 화마(火魔)속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 져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이미 불리한 형세를 파악하고 성 밖으로 몸을 피하 여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비영사는 사십구 명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의 임무는 원 황실에 불순한 마음을 품은 강호의 고수들을 감시, 척살하는 것이었다. 사(社)의 구성은 대부분 새외(塞外)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한족(漢族)의 무 사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비영사의 수뇌는 서장 밀교(密敎)출신인 야율사(耶律泗)로 징기스칸과 동정(東征)을 함께했던 몽고의 명재상 야율초재(耶律草宰)의 적손이었다. 기원전 500년경 석가(釋迦)가 깨달음을 세우고 수많은 천축고승들이 그 내용을 더한 불교는 서장으로 전파되며 토속적인 제례의식(祭禮儀式)과 혼합되어 지극히 사이한 형 태의 종교를 만들었다. 밀종(密宗)-밀교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불경이 전하는 불도(佛道)보다도 활불(活佛)이라 불리워지는 제사장의 가르침 에 더 가치를 두었다. 중원인의 눈에는 그들의 행위가 도리에 어긋나고 상식에 위배되는 사악함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밀교는 천 년의 역사를 이어왔고, 야율사는 장구한 밀교의 역사 속에서도 능히 수위를 다툴 수 있는 위인이었다. 당시 밀교의 수장(首長)은 서장에서 밀종을 수행하는 팔십칠 개 사찰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아두랍찰(阿斗拉刹)의 주지인 홀파(笏巴) 활불이었다. 야율사는 그의 수제자로 사십 세 이전까지는 아두랍찰에서 수련하다가 차기 활불의 지 위도 마다하고 중원으로 진출한 야심가였다. 그의 밀종무학(密宗武學)은 사부인 홀파도 경탄할 경지였다. 야율사는 고강한 무공과 치밀한 심계를 이용해, 중원의 명사들을 탄압해온 것이다. 주원장은 자신의 앞에 항서(降書)를 들고 나타난 야율사에게 사면(赦免)의 조건을 제 시했다. 바로 서문호충의 목이었다. 야율사는 충성을 다짐했다. 하기야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지만... 하지만 49인의 비영사의 고수들로 백련교와 전면전을 수행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야율사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중원의 뭇 무인들은 비영사를 원수같이 여기고 있어서,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도 없는 지경이었다. 여기서 그는 묘책을 떠올렸다. 백련교를 이단(異端)시 해오던 정통불교를 이용한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략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중원의 불교는 혼탁한 세태속에서 새로운 중흥을 시도하고 있었다. 원대 황실의 비호를 받으며 성행한 라마교(羅摩敎)에 의해 쇠퇴한 불교는, 각 종파의 통합과 선종도교(禪宗道敎)와의 융합을 모색하며 그 교세를 확장시켜 갔다. 이러한 시기에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황산(荒山) 청진암(淸進庵)의 백여 명의 비구승들이 일단의 괴인들에게 참혹하게 몰살 당한 것이었다. 이것이 사서(史書)가 전하는 홍무불화(洪武佛禍)의 시작이었다. 개봉(開封)의 천불사(千佛寺), 등주(登州) 신안사(身安寺)의 장엄한 불전이 잿더미로 변했고, 남소림(南少林) 주지인 백견(白見)대사가 피살되었다. 강호는 들끓었다. 뜻있는 강호인들의 조사에 의해 이러한 살상이 백련교 성련도복(聖蓮道服) 차림의 괴 한들에 저질러졌다는 것이 밝혀지자 무림은 일촉즉발의 살기와 긴장이 감돌았다. 피에는 피로. 무림인들은 공공연하게 백련교도들을 살해하기 시작했고, 백련교 역시 무력을 사용한 보복을 시작했다. 무림은 백련교와 비(非)백련교로 양분되어 날로 험악해져 갔다. 드디어 무림의 주춧돌인 오대문파가 나서서, 당시 무림맹주(武林盟主)로 추앙받던 신 주소가(神州蘇家)의 가주 소대진(蘇大眞)에게 백련교 토벌을 강력히 주장하기에 이르 렀다. 소대진은, 서문호충이 비록 정파의 인물은 아니지만 인물이 정대(正大)하고 비겁한 짓을 하는 소인배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오대문파의 빗발치는 요구를 무마시키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해산일을 얼마 앞두고 친정으로 가던 소대진의 아내마저 성련도복을 입은 괴한 들에게 무참히 살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화해를 위한 어떠한 길도 없어졌다. 무림연합세력의 백련교 토벌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6) 당시의 여산백련교는 거병하여 원에 대항하던 때와 같은 군세(軍勢)를 잃은 지 오래였 다. 하지만 수만을 헤아리는 충성스러운 교도들과 오랜 역사속에서 꾸준히 정진해온 수련 때문에 능히 강호제일대방(江湖第一大幇)으로 그 위세를 간직할 수 있었다. 전면전. 토벌군과 백련교 사이엔 수없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 피비린내나는 싸움은 두 해를 넘게 끌었다. 비록 백련교가 제 아무리 강대하다고는 하나, 신주소가를 주축으로하여 오대문파와 육문구가(六門九家)가 힘을 합한 무림연합군에겐 당할 수가 없었다. 백련교도들은 중토 각지에서 하나 둘씩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전선(戰線)은 여산으로 계속 밀려왔다. 토벌군들이 여산을 오르던 날, 여산백련교의 총단인 백련정(白蓮井)의 연못은 피로 가득차게 되었고, 철마다 기품있는 운치를 자랑하던 연꽃들도 호교를 부르짖으며 죽어 간 백련교도들의 피로 물들었다. 최정예를 선발하여 여산을 오른 무림연합군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여산의 익숙한 지세에 매복한 백련교도들과 백련정에 설치된 수많은 기괄(機括), 함정 에 의해 수많은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대의 최고수로 알려진 백련교수 서문호충의 무공은 명불허전이었다. 오대문파의 하나인 무당파(武當派)의 장문인인 파사진인(破邪眞人), 개방의 용호풍운 (龍虎風雲)장로 중 세 명, 그리고 소철의 동생인 철권대협(鐵拳大俠) 소경(蘇景)이 서 문호충의 손 아래 목숨을 잃었다. 이렇듯 피를 뒤집어쓴 채 혈로를 뚫던 서문호충의 앞을 소철이 막아섰다. 소철과 서문호충의 싸움은 후세 무림의 사가들이 수없이 묘사한 바, 두 마리의 용이 비와 바람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싸우는 듯한 처절함과 장엄함, 그 자체였다. 서문호충은 24세의 젊은 나이로 교수위(敎首位)에 오른 후 30여 년을 무학 수련에 바 친 무학대종사였으며, 소대진은 일개 강호세가에 불과하던 소씨세가를 강호제일대가 (江湖第一大家)로 다진 무림의 큰 기둥이었다. 곳곳에서 난투를 벌이던 뭇 군웅들도 숨을 죽이고 이 희대의 대결을 관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황제의 칙서를 앞세운 비영사의 고수들이 등장하였다. 일단의 금군(禁軍)과 함께 들이닥친 비영사 사십구인의 고수는 개개인이 능히 일문의 문주에 버금가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가뜩이나 열세에 놓였던 백련교도들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하나 둘 씩 쓰러 져 갔다. 갑자기 나타난 강적들 때문에 크게 당황해있던 서문호충을 비영사주(秘影社主) 야율 사가 공격했다. 이 싸움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본디 서문호충과 야율사 모두 능히 일세를 풍미할 기인이었다. 짧은 시간에 무공의 우열을 가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문호충은 소대진과의 싸움에서 진원(眞原)을 크게 소모한 뒤였다. 서문호충은 야율사의 밀종무공 아래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서문호충의 죽음과 백련정의 파괴, 뒹구는 수천 백련교도들의 시체. 남송(南宋)과 원(元), 양대 황조에 걸쳐 융성한 여산백련교는 이렇게 멸망한 것이다. 신주소가에 관한 이야기는 제자도 옛날에 들은 기억이 있군요. 하지만 비영사란 단체는 처음 듣습니다. 석대문은 과거의 무담(武談)으로부터 깨어나며 말했다. 운리학은 이가 빠져 보기 흉해진 입가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가주께선 신무대종(神武大宗) 소철(蘇喆)을 아시겠지? 물론입니다. 강북무림의 제일대파인 신무전(神武殿)의 주인이며 천하의 오대고수의 일인... 하오시면...? 말을 잇던 석대문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소철이 바로 소대진의 아들이라네. 백련교도로 위장한 비영사의 고수에 의해 소대진의 부인이 살해된 후, 소대진은 전처 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탓인지 재가(在家)하지 않았지. 하지만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서문호충에게 죽임을 당한 동생 소경이 남긴 돌박이를 자신에게 입적(入籍)시켰다네. 그가 바로 소철이지. 조각조각난 과거와 현재의 토막들이 이렇게 연결되는가. 석대문은 잠시 말을 잊고 멍해진다. 운리학은 석대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말을 멈추고 식어버린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석옥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담(高談)을 계속 들려주시지요. 석대문은 고개를 쳐들며 침묵을 깼다. 노인은 빙긋이 웃는다. 음. 그때의 은원(恩怨)이 그로부터 삼십여 년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전으로 이어진다네. 바로 성조(成祖, 永樂帝 : 1402 ~ 24 제위)께서 즉위한 해이지. 二章 (二) 兩雄 (1) 연왕(燕王)이 조카인 건문제를 폐하고 영락제로 즉위한 1402년. 절강(浙江) 무림에 한 명의 청년이 등장했다. 청년의 이름은 서문숭(西門崇). 약관 20세였다. 각진 얼굴과 부리부리한 고리눈, 삼척장도를 허리에 질끈 맨 강호초출(江湖初出)의 청년. 당시 그의 이름 석 자에 신경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은 밥과 흙탕물 먹기를 각오하며 보금자리를 떠나는, 수많은 청년무사 중 하나에 불 과했기 때문이다. 청년의 행적 또한 그다지 눈에 띠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호를 갓 출도한 모든 젊은이들이 그러하듯, 중원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여러 사 람들과 사귀고, 또 싸우기도 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다. 강호행(江湖行) 3년. 몇 번의 협행과 그 정도 수에 해당하는 살인. 이것이 서문숭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그의 이름 석 자에 신경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서문숭이라는 이 름이, 꽤나 기개가 있는 청년무사로 강호에 알려질 즈음하여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바로 영락 3년의 끄트머리를 장식한, 북경성(北京城) 팔달대로(八達大路)에 나붙은 공개 도전장 사건이다. <소림 방장(方丈) 광문(曠聞) 전(前). 일찍부터 천축(天竺) 승려 달마(達磨)가 무학의 초석(礎石)을 올린 소실산(少室山) 소림사의 드높은 위명(威名)을 앙모해 왔습니다. 중토무학의 태두라고도 일컬어지는 소림의 고학(高學)을 보잘것없는 소생에게 한 수 지도해주는 은혜를 베푸신다면 천생(天生)의 광영(曠榮)으로 여기겠습니다. 시일과 장소는 신승(神僧)께서 결정하십시오. 높은 가르침을 가슴 졸이며 기대하겠습니다. 악연자(惡緣者) 서문숭 배상(拜上).> 서문숭의 글처럼 소림은 당대(唐代) 이후부터 무림의 태두였다. 달마가 전한 삼덕(三德)과 역근(易筋)의 진경은 중원의 고승들에 의해 거듭 발전하였 다. 명실공히 내외공 모두, 소림의 지고한 경지는 타 문파의 추종을 불허했다. 광문은 소림의 이십 대 주지승으로 사십여 년이 넘게 장령(長令)을 수행한 고승이었 다. 삼십여 년 전, 여산(廬山)에 웅크리고 있던 백련교(白蓮敎) 마귀들을 무찌를 때 보여 준 그의 무공은 군웅들을 감복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한 광문에게 햇병아리인 서문숭이 악연자 운운하며 도전장을 띄웠으니, 사람들이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정난의 변(靖難의 變 : 주원장의 四子인 燕王이 1399년 일으킨 변란. 당시 황제인 建文帝는 조부인 주원장이 이루려 했던 병권의 중앙집중을 위해 북경에 위치한 숙부 燕王의 병권을 자신에게 복속시키려 하다가, 1402년 오히려 燕王에게 의 해 황제직을 뺐기게 된다. 燕王은 즉시 황위에 오르니, 곧 明의 3대 황제인 成祖)으로 조정은 숙청의 피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강호의 정세는 평화로웠다. 여산혈겁 이후 북변 일각에서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밀교(密敎)와의 분쟁이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아련한 기억 속에 잊혀지는 과거지사일 뿐. 평화가 너무 길었음인지, 서문숭이 붙인 한 장의 벽보는 예상보다 큰 화제거리가 되 었다. 호사가(好事家)들은 이 철모르는 청년의 광오함을 떠들어 댔으니, 영락 3년에서 4년 으로 넘어가던 겨울, 중원의 이름없는 객점 주막에서도 웃기는 청년 서문숭에 관한 이 야기가 꽃을 피웠다. 하지만 무례하기 이를데없는 도전장을 받은 소림사의 심기는 그리 편한 것이 아니었 다.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중원무학의 태두로 버텨온 소림은 세인들의 객담을 대수롭지않 게 넘기기엔 너무도 고고했다. 게다가 유행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이 시기에도 있었으니, 서문숭이 벽보를 붙인 이후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무명배(無名輩)들은 너도나도 명문대파에 도전장을 내기 시작하였다. 소림의 경우만 해도 도전장을 가지고 온 이름없는 낭인무사들의 발길 아래 문턱이 닳 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광문이, 대 소림사의 주지승이 서문숭의 도전에 응해 일전을 벌인다 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림은 골치가 아팠다. 속가제자를 통해 뜨거운 맛을 보여주자는 사내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광문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일신의 무공만큼이나 수양이 깊은 고승이었다. 광문은 소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흔한 속사(俗事)로 치부하고, 젊은 청년의 호기를 높이 평가하며 그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제재도 거부했다. 아마도 이것은 미담으로 알려져도 마땅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결코 미담과 같이 훈훈하지 않았다. 도전을 회피한 것에 대한 서문숭의 보복이 무자비했기 때문이다. 광문대사의 속가제자(俗家弟子)로 절강에서 일문(一門)을 이루던 다비수(多臂手) 모 운(毛雲)과, 역시 소림의 속가인 시은협(市隱俠) 포대진(包大珍)이 서문숭과의 비무에 패하고 죽음을 당했다. 서문숭이 비록 청년검수로 약간의 명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모운과 포대진에 비하면 명월과 반딧불이라고 할까. 하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두 사람 모두 변변하게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서문숭의 칼 날 아래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서문숭이라는 청년에 대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광문대사와 같은 항렬이며 보은사(報恩寺) 주지로서 무림에 명성이 높은 광여법사(曠 旅法師), 속가에서 불법을 전하던 소림사 장로 광업대사(曠業大師)가 서문숭에게 잇달 아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강호인들은 광문과 대결하겠다는 그의 광오함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림사는 서문숭을 문적(門賊)으로 규정, 십팔나한(十八羅漢)을 하산시켜 그를 사로 잡으려 하였다. 십팔나한이라면... 하지만 이것은 소림의 실착이었다. 서문숭에게는 그를 주인으로 추종하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세력은 어둠과 같이 조용하게 움직이고, 또 어둠과 같이 모든 것을 덮어버 리는 힘이 있었다. 십팔나한은 서문숭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그 어둠에 소리없이 묻혀버렸다. 강물에 던져진 돌처럼. 결국 광문대사는 서문숭과의 공개비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은 빠른 속도로 무림을 뒤흔들었다. 영락 4년 중양절(重陽節). 숭산(崇山) 아래의 청운평(靑雲坪)에는 각 문파의 영수급 인물들은 물론, 소란을 즐 기는 강호의 떠돌이 낭인들까지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날은 바로 서문숭과 광문의 비무일이다. <젊은 시주가 왜 그리도 소림사에 원한이 많은지, 노납이 알 수 있겠소?> <나와 싸워보면 그 해답을 자연히 아실 것이외다.> <내 이렇게 늙었지만, 평생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터. 비록 시주가 아무리 범같은 혈기를 자랑한다 한들 노납을 이기긴 쉽지 않을 것이오.> <하하! 과연 그럴까요?>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이들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서, 이십여 세의 젊은이가 광문을 꺾 는다는 것을 상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서문숭의 정체를 알고있던 일단의 무리들을 제외한다면. 싸움은 시작되었다. 정통 중의 정통이라고 할 수 있는 소림의 정심한 내공이 광문의 늙은 육신을 빌어 재 현되었다. 군더더기없는 깔끔한 움직임과 일수 일식의 심오한 진퇴. 노승은 사람들의 탄성을 받으며 소림무학의 정수를 선보였던 것이다. <과연!> 비웃음인지 칭찬인지 모를 탄성을 뱉으며 서문숭은 도를 움직였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하늘이 바뀐다. 땅이 바뀐다. 범상치 않은 예기를 붐어내는 장도(長刀)가 휘둘러지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리고 새파란 애송이는 삼십여 수만에 광문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광문의 갈라진 가슴 사이로 뿜어지는 검붉은 피에 군웅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그가 광문을 꺾은 사실보다 더 군웅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선혈을 토하며 죽어 가던 광문대사가 최후로 남긴 말이었다. <이 수법은..., 시주는 여산의 전인(傳人)이구료...> 이 한마디는 청운평의 군웅들의 귀에 천둥처럼 울렸다. 여산백련교. 과거, 무림인들이 연합하여 제거한 강호제일문파의 후예가 엄청난 무공과 함께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산혈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노웅(老雄)들은 그 자리에서 서문숭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비무는 공평하게 진행된 것이어서, 서문숭을 공격할 수 있는 아무런 명분도 없었다. 그리고 정당한 명분이 있었다고 한들,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청운평은 이미 서문숭의 수하들에게 포위당해 있었기 때문이다. 서문숭은 군웅들을 향해 외쳤다. <이 자리를 빌어 나, 서문숭은 백련교의 십칠대 교수이자 대무양문(大武陽門)의 문주 임을 선포한다!> 서문숭은 바로 서문호충의 손자였다. 청운평을 포위하고 군웅들을 위협하는 무리들은 과거 여산 백련정 대전(大戰) 당시 총 단에 없었거나, 아니면 몸을 피할 수 있었던 백련교도들의 후예였다. 서문숭은 그 자리에서 백련정 토벌에 참여하였던 오대문파와 육문구가의 십년의 금제 (禁制)를 강요하였다. 봉문(封門). 한 문파가 외력에 의해 문호를 폐하는 것은, 무림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다. 기개있는 자들은 억압을 거부했다. 하지만 비무를 관전하는 제파(諸派)의 수뇌들은 소수였고, 그들은 상대는 어둠이었다. 끝까지 저항하던 형산검문(衡山劍門)과 화씨세가(華氏世家)는 그 자리에서 멸문지화 (滅門之禍)를 면치 못했다. 쌓여가는 시체들을 보며 다른 문파들은 피눈물을 삼키고 십년봉문에 혈약(血約)을 맹 서(盟誓)했다. (2) 놀랍군요! 무양문이 백련신앙을 지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당시 백련교의 정통 후예들이라 니. 석대문은 나직히 탄성을 터뜨렸다. 과거란 현재를 보는 거울이라는 성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은원의 연(緣)은 참으로 질기기가 그지없군요. 운리학은 빙그레 웃는다. 그의 맑은 눈은 석대문을 정시(正視)하고 있다. 사바(娑婆)에서의 은원(恩怨)이란 끝이 없는 법. 가주께서는 매사에 사려깊고 바른 판단을 하는 분이시니 별다른 걱정은 없지만, 원한 을 맺을 때는 항상 응보(應報)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할 것이네. 운리사부의 금언(金言), 명심하겠습니다. 석대문은 가볍게 머리를 숙인다. 운리학은 고개를 끄떡이고는 말을 이어 나간다. 서문숭은 청운평에서 대무양문의 개파(開派)를 공고한 뒤, 당시 무림의 패주라고 할 수 있는 신무전(神武殿)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다. 신무전은 신무소가(神武蘇家) 소대진의 의자(義子)인 소철(蘇喆)이 가주직을 맡은 뒤 새로이 일으킨 문파였다. 소대진은 백련정(白蓮井)의 대전 이후, 서문호충에게 입은 내상으로 십여 년을 병상에 누워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소씨세가의 가주직에 오른 소철은 천품무골(天品武骨)이었다. 게다가 소철은 순후했던 소대진과는 달리, 차고 독한 심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전임가주의 사망 후 어지러워진 세가를 재빨리 정비하였고, 새로운 문도들을 받 아들여 신무전이라는 문파로 재창업한 것이다. 소철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 서장밀교(西藏密敎)가 중원 진출을 시도한 일이 있었 다. 이때 소철은 중토무림수호라는 기치를 내걸고 옥문관(玉門關)의 남쪽 시운령(視雲嶺) 에서 밀교도 칠백을 물리쳤다. 이 일로 소철은 군웅들로부터 신무대종(神武大宗)이라는 칭호와 함께 무림맹주직을 수 여받았다. 서문숭은 소철에게 선전포고와 함께 도전장을 한 장 보냈다. 과거 서문호충과 소대진이 자웅을 결했던 여산 백련정에서 그 후예인 서문숭과 소철이 원한을 매듭짓자는 내용이었다. 이 당시 신무전은 무림맹주의 문파라는 위명과는 달리, 밀교와의 대전으로 크게 원기 를 손상한 시기였다. 소철에게는 일대일로 승부를 결정하자는 서문숭의 제안이 오히려 반가울 수밖에 없었 다. 더구나 상대는 약관의 젊은이가 아닌가. 당시 소철은 일대일의 비무에서 자신이 누구에게 진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을 정 도로 무예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시기였다. 서문숭과 소철 모두, 천하오대고수의 일인이 아닙니까. 그 비무의 결과가 어찌 되었나요? 가주께선 누가 이긴 것 같은가? 운리학은 석대문에게 반문했다. 석대문은 오대고수가 곤륜산(昆崙山 : 히말라야 산맥 중 중국과 연한 동쪽 일대를 가 리킴) 무망애(霧望厓)에서 회합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 서문숭과 소철이 개인적인 싸움을 벌였다는 것은 들은 적이 없었다. 지금의 양대고수라면, 이미 반인반선(半人半仙)의 경지에 올라있다는 강호의 이야기처 럼, 누가 이기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 하지만 그 당시라면...? 아무래도 그 당시에는 수련의 햇수가 길었던 소철이 우세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군요. 운리학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노부의 생각도 그랬지. 그렇다면 서문숭이 이겼단 말인가? 석대문은 호기심을 느꼈다. 운리학은 느릿하게 말을 계속했다. 여산에서의 싸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네. ...! 나머지 삼대고수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지. 二章 (三) 昆崙之會 (1) 여산 비무를 한 달 남짓 앞두고 금릉성(金陵城) 외곽에 위치한 무양문을 찾은 손님이 있었 다. 초라한 도관(道冠)에 남루한 청색 도복을 걸친 늘그수레한 도사(道士)였다. <청류산(淸柳山) 적심관(積心館) 관주(館主) 천선(天旋).> 배첩에 쓰인 이름이었다. 당시 이 배첩을 받아든 무양문의 접객당(接客堂) 당주는 적심관이라는 도관(道館)의 이름은 커녕, 청류산이 사천(四川) 오지(奧地)에 틀어박힌 궁벽한 산 이름이라는 것 조차 알지 못했다. 당연한 것이 당시 강호에는 적심관이란 이름을 지닌 문파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법 정중한 척 하지만, 완강한 축객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늙은 도사는 떠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담담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것 이 아닌가. 이렇게 무례한 도사를 존장으로 대접할 정도로 예의바른 무인은 드물 것이다. 수문무사들은 크게 고함을 지르며 도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왜 날아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보기 사납게 허공을 가르고는 땅으로 나뒹굴었다. 도사는 도포자락을 휘젖는 너무도 간단한 동작 만으로 무양문의 정문을 통과한 것이다. 무양문. 그리고 무양문을 구성하는 백련교에는 고수가 많았다. 하지만 넓이가 이십만 평이 넘는 거대한 무양문에서 중늙은이 도사 한 명의 걸음을 막 을 사람은 없었다. 도사는 마치 바람이라도 쐬러 나온 서생처럼 유유자적하게 걸음을 옮겼다. 도사의 걸음은 무양문의 최고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 호교십군 중 세 명이 앞을 가로 막았을 때야 비로소 멈췄다. <빈도는 말썽을 일으키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오. 서문문주를 잠깐 뵙게만 해 주시오.> 도사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던 삼인의 고수들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무인이라면 아주 생소할 수밖에 없는 느낌. 마치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상대하고 있는 것처럼, 싸우고자 해도 싸울 마음이 전혀 일지 않았다.이때 서문숭의 전언(傳言)을 지닌 사령(使令)이 달려왔다. 광명전. 백련교수이자 무양문의 젊은 주인인 서문숭의 처소이다. 또한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희한한 만남이 벌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천선이라는 도명(道名)을 지닌 도사와 서문숭은 아주 오래된 친구의 만남과도 같은 온화로운 분위기 안에서, 향기로운 차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장께서 이 서문숭을 만나고자 한 이유가 무엇이오?> <허허... 빈도(貧道)는 짝을 찾을 수 없다는 청년영웅이 강호에 출현했다기에, 못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산을 내려왔소이다.> <청년영웅? 하하, 재밌는 말씀이군요. 그래 청년영웅을 만난 소감은 어떠신지?> 천선자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물론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 다. <사실 이 늙은이가 하산한 진정한 이유는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라오.> <부탁이라...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얼마 후 신무전의 소전주와 여산에서 비무를 하신다고 들었소.> <그렇소이다.> <그것에 관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어처구니없게도 천선자(天旋子)는 서문숭에게 여산 비무를 연기할 것을 청하였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느냐를 떠나서 그 비무 자체가 간인(奸人)의 계략에 휘말릴 수 있 을 것이라는 것이 도사가 제시한 이유였다. <도장께서는 서문숭을 너무 가벼이 보시는구려. 나, 서문숭이 소철의 계략에 휘말릴 것 같소?> 서문숭은 실소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소철과 신무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던 그였다. 새삼스럽게 소철이 계략을 쓴다고 해도 거기에 대한 비책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문주께서는 제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길... 문주께서는 아직 모르시지만 중원무림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간계는 수십 년 전부터 이어오고 있소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하는 자들은 신무전과 같이 표면에 드러난 자들이 아니오.> 제삼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천선자의 이야기에 서문숭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천선자의 이야기는 점입가경으로 이어졌다. 천선자는 어떤 경로인지는 몰라도, 삼십여 년 전 백련교가 당한 액화(厄禍)에 대해 그 내막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비사(秘史). 명 태조인 주원장과 서문호충의 반목에서부터 야기되었던 숨겨진 이야기가 천선자의 입을 빌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음모의 주체인 비영사와 야율사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 서문숭은 단호하게 천선자의 말을 끊었다. <도장의 말씀은 도저히 믿을 수 없소.> 그도 그럴 것이 야율사가 구상한 일련의 차도살인지계는 여산백련교의 멸망 이후, 과 거 속으로 묻혀버린 비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거의 완벽하게. 그리고 서문숭의 마음 속에는 젊음만이 줄 수 있는 호승심이 있었다. 당대에서 자신과 소철을 옭아매는 계략을 쓸 정도의 대단한 위인이 존재한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문숭의 불신스러운 표정을 보고 천선자가 말했다. <서문문주께선 스스로 능히 천하제일이라고 자신하시는 모양이구려. 하지만 무학만을 놓고 본다면, 빈도가 아는 사람만 해도 문주와 비견될 수 있는 영웅 이 세 명이나 더 있소이다.> 서문숭은 피식 웃었다. 이 도사는은 스스로를 과신하고 있군. <셋이라... 소철과 도장, 그리고 누가 또 있소이까?> 서문숭의 물음에 천선자는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 <빗물이 새는 도관에서 도덕경이나 읽고 사는 졸도(拙道)를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구 려. 빈도가 어찌 감히 서문문주와 나란히 설 수 있으리까.> <하면...?> <빈도가 알고 있는 세 영웅이란 신무전주 소철, 황궁의 비밀감찰기관 비각(秘閣)의 주 인인 잠룡야(潛龍爺) 이악(李嶽), 그리고 신비 속에 감춰져 있다는 혈랑곡주(血狼谷 主). 바로 이들을 말함이지요.> 서문숭은 천선자가 허황된 이야기를 꾸며댄다고 생각했다. 비각이란 이름은 그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있는 비각이란, 태조 말년에 세워진 장서각(藏書閣)에 불과했다. 역대 왕조를 통해 물려 내려오던 희귀한 문서와 서책, 왕이 내린 조서(詔書) 칙서(勅 書), 그리고 사관(史官)들이 편찬한 실록(實錄)을 보관하는 서관(書館). 그런 곳의 우두머리라면 육경구류(六經九流)에 달통한 문사라면 모를까, 무예의 고수 라니? 그리고 당시 감찰업무는 중앙은 도찰원(都察院), 지방은 안찰사사(按察使司)라는 기관 에서 관장하였다. 비각이 비밀감찰기관이라는 것은 강호인들 뿐만 아니라, 유수한 정객(政客)들 조차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혈랑곡이라니... <도사께선 없는 이야기를 꾸며 말씀하시는군요.> 서문숭이 비웃었다. 천선자는 예상이라도 했다는듯이 크게 웃고는, 호기롭게 말했다. <빈도는 그들 중 혈랑곡주와 한 번 겨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문주의 무공이 대단함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결코 혈랑곡주의 위에 있다고는 보 이지 않소이다.> 이것은 분명한 도전장이었다. 서문숭은 호승심과 함께 투지가 치밀었다. 비록 약관의 청년이지만 소림사 방장인 광문대사를 삼십여 수만에 쓰러뜨릴 만한 무 공의 소유자인 서문숭. 그의 경지는 이미 무림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수준이었다. 서문숭은 천선자에게 비무를 제안했고 천선자는 두말없이 응했다. 이로써 대무양전의 연무장에서 후세에 전혀 알려지지않은, 하지만 결과적으로 강호사 의 물줄기를 틀어놓은 비무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그 비무는 무승부로 끝났다. 서문숭의 무학은 백련교의 비전내공에 연원을 둔 것으로서 강맹 일변도의 양강공력(陽 剛功力)은 능히 암석을 부수고 강철을 녹여낼 정도였다. 하지만 천선자의 움직임은 그와는 대조적인 온유(溫柔)의 극치를 이루고 잇었다. 마치 진공막(眞空幕)을 한 겹 두른 듯한 진퇴 속에서, 서문숭은 자신의 어떠한 공격도 천선자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이길 수 없었고, 누구도 질 수 없었다. 서문숭은 그제서야 천하가 넓고 기인이 많음에 경탄할 수 밖에 없었다. <문주께선 이제야 빈도의 말을 믿으실 수 있겠소이까?> <놀랍소. 도장께선 진정 대단한 사람이구려.> 서문숭은 방금 전까지 쏟아냈던 막강한 공력의 여파로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천선자의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담담한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을 뿐. <과거의 사건에 관해서는 내가 직접 조사해 보겠소이다. 진위가 밝혀지기 전 까지는 소철의 목숨을 연장시켜 주지요.> <그러시겠다면 이 늙은이는 더 바랄 것이 없지요.> 사실 서문숭은 아직도 천선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음모자가 있다면, 소철과의 소모전으로 어부지리를 안겨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천선자는 무양문을 떠나며 말했다. <신무전주 또한 빈도가 설득시켜, 비무를 연기한 것에 대해 문주의 체면이 절대 깎이 게 하지 않겠소이다. 대신 두 분께서 조용히 과거의 진상을 밝히고 은원을 풀 수 있는 자리를 한 번 마련해 보지요.> 서문숭은 천선자가 사라진 후에도 오랬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2) 천선자의 약속대로 신무전에서도 비슷한 일이 진행되었다.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않은 초라한 도사 한 명이 당대 제일로 알려진 양대 무학종사와 겨뤄 불승불패(不勝不敗)의 결과를 얻은 것이다. 반 년이 지난 뒤, 천선자는 양대 고수를 방문하여 곤륜산 무망애에서 천하의 고수들 이 모여 무학을 토의할 것을 제안했다. 서문숭은 이때 이미 삼십여 년 전 여산의 혈사(血事)에 대해 면밀한 조사를 마친 후였 다. 그는, 서문호충은 물론 소대진과 중원의 많은 무인들 역시 주원장과 야율사의 차도살 인의 계략에 걸려든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서문숭은 전대(前代)의 원한으로 대사를 그르칠 정도의 옹졸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는 소철에게 따로 서한을 보내 순수한 비무만을 위해 천선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 을 종용하였다. 소철 역시 서문숭의 호방함에 감탄했고, 이렇게 해서 신무전과 무양문 사이에 벌어질 지도 몰랐던 거대한 피의 씨앗은 사그러졌다. 소철과 서문숭은 천선자도 함께 천산지회에 참석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천선자는 스 스로의 졸렬함을 핑계로, 그들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드디어 곤륜산 무망애에서 사대고수의 비무가 열렸다. 두 명은 너무도 유명했고, 다른 두 명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위인들. 그들은 사전에 약속한대로 한 명 씩의 입회인만을 데리고 참석했다. 곤륜산 무망애의 비무는 삼 일 밤낮을 계속되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일들이 벌어졌겠지만 그 자세한 경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아무도 서로의 위에 설 수 없었다는 것밖에는. 그들은 비무가 끝난 뒤 서로를 같은 위치에 놓을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서문숭의 제안으로 곤륜지회의 주선자인 천선자 역시 같은 반열에 올라서게 되 었다. 이날 무망애의 우뚝 솟은 거석에는 다섯 명의 명호가 담긴 스무 자의 문구(文句)가 적 혔다. 천하오대고수라는 명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가주께선 노부가 왜 이런 구사(舊史)를 장황히 이야기하며, 혈랑곡주를 설명하려 하 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걸세. 석대문은 운리학의 뒷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당시 입회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혈랑곡주는 혈랑검동(血狼劍童)이라는 청년과 함 께 무망애를 올랐다고 하더군. 그는 남송말(南宋末) 천하제일검으로 전해지는 좌천량(佐川亮)의 혈랑검법(血狼劍法) 을 극성(極成)으로 수련하였다고 전해진다네. 혈랑이란 명칭은 원 태조(太祖) 철목진(鐵木眞 : 징기스칸)이 청랑(靑狼 : 당시 몽고 에서는 푸른 늑대와 하얀 사슴의 전설이 있었다. 징기스 칸은 초원의 용사들에게 푸른 늑대로 불려졌다)으로 칭해진 것에 대한 반발에 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지. 혈랑살청랑(血狼殺靑狼)이란 문구가 그 당시 유행했던 것을 봐도, 오랑캐에게 국토를 빼앗긴 지사의 한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걸세. 좌천량의 혈랑검법...? 들어본 적이 없으신 모양이군. 하기야 이미 오래전에 잊혀진 인물이니 그럴 수도 있지. 어쨌거나 붉은 색 장포에 붉은 늑대 가면을 뒤집어 썼다던 혈랑곡주는 검법 외에도 혈 옥수(血玉手)라는 무서운 수법을 익혔다고 하더군. 하지만 누구도 그의 진실한 용모를 본 적이 없다고 하네. 오대고수를 가리키는 이십자구(二十字句) 중 신비혈랑(神秘血狼)이란 말이 무리도 아 니군요. 석대문의 말에 운리학은 고개를 끄떡였다. 곤륜지회 이후 혈랑곡주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지. 그도 그럴 것이, 강호인들은 어딘지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을 좋아한단 말씀이야. 하지만 그 누구도 혈랑곡이 어디 있는 지 몰랐다네. 그러던 어느날 청해(靑海) 일대에서 혈랑곡도(血狼谷徒)임을 자처한 자들이 나타났다 네. 그들의 무공이나 손속은 매우 잔혹해서, 부근의 양민들은 크게 시달림을 당했다지. 이때 혈랑곡주가 예의 그 검동(劍童)과 함께 청해에 나타났다네. 석대문은 점점 운리학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혈랑곡도를 자처하던 무리들은 혈랑곡주의 손속 아래 모두 목숨을 잃었다네. 족히 수백은 죽었을 게야. 그리고 그들의 시신위엔 하나의 깃발이 꽂혀 있었는데, 백색 천에 붉은 늑대가 새겨진 기였다네. 바로 혈랑기(血狼旗)였지. 깃발에는 한 줄의 글귀가 써 있었는데, <망령되이 혈랑곡을 일컫는 자는 누구도 용서 치 않는다>라는 경고의 내용이 적혀 있었네. 그 이후로는 혈랑곡도를 사칭하는 무리들이 나타나지 않았을 게야. 으음.... 혈랑기. 석대문은 자신이 여기에 왜 앉아 있는지를 깨달았다. 숙부인 양무청의 실종. 그리고 혈랑기... 석대문의 입에선 무거운 신음이 새어나온다. 운리사부. 하면 지금 다시 나타난 혈랑곡도들 또한 그를 사칭하는 무리일까요? 운리학은 대답없이 눈을 감는다. 대답을 않겠다는 뜻이다. 하기야 사부께서도 그것을 알 턱이 없지. 석대문은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고 생각되었다. 바로 그 순간, 운리학의 눈이 번쩍 떠졌다. 노인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눈빛. 가주. 아무도 모르는 신비단체인 혈랑곡, 이 혈랑곡이 사십여 년 전은 물론 지금까지도 무림 의 평화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했는지 생각해보게. ...? 평화? 석대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혈랑곡이라는 수수께끼 투성이 단체가 평화에 공헌을 했다고? 그 말뜻을 물어보려고 하던 석대문은 문득 한숨을 쉬었다. 화두(話頭)를 던진 선승(禪僧)처럼 몸을 돌리는 운리학의 갸냘픈 체구가 눙에 들어왔 기 때문이다. 늙은 글선생의 구부정한 등을 바라보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던 석대문은 문득 시장기 를 느꼈다. 석옥 밖을 보니 초여름의 태양은 어느덧 중천을 지나고 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운리학에게 절을 한다. 노인은 이미 할 말을 다 했다. 남은 부분은 젊은 그의 몫인 것이다. 만심각으로 걸음을 옮기던 석대문은 양무청의 실종에 대해 자신이 직접 움직일 것을 결심했다. 문득,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혈랑곡주의 으시시한 늑대탈이 눈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석대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三章 積心館 (1) 청류산은, 산세가 웅장하기로 유명한 사천(四川)에서도, 그 험준함으로 이름이 높다. 청류산은 고원과 구릉으로 이루어진 사천의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곤륜산맥(昆崙山脈)의 구부러진 줄기에서 시작하는 외산(外山)은, 석회질이 많아 은은 한 회백색을 머금은 토양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기(雨期), 연교차(年較差)가 심한 기온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석림지대(石林地帶)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외산의 줄기가 굽이쳐 낙일령(落日嶺)을 지나게 되면, 화산활동이 남아있는 조 산(造山) 지역이 펼쳐져 있어, 하늘을 보기 힘들 정도로 울창한 아열대림(亞熱帶林)을 만날 수 있다. 이 수림지역을 지나야만 청류산의 진정한 웅장함이 담긴 내산(內山)으로 들어갈 수 있 는 것이다. 이 지방의 사람들은 반경 십 리가 넘는 이 수림을 만수림(萬獸林)이라고 부른다. 사납고 날랜 짐승들이 많아 그런 이름이 붙은 이 숲은, 지세가 이를데없이 험해 사람 들의 발길을 찾기 힘들다. 또한 군데군데 위치한 늪지대는 장독이 가득차 있어서, 독사나 독충류 같은 독물(毒 物)들 외에는 다른 생물들의 서식이 불가능했다. 산에 익숙한 사냥꾼이나 약초꾼들도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만수림. 초여름의 강렬한 태양빛도 울창한 가지들을 뚫을 수 없어서, 숲속은 황혼과 같은 어스 름한 그늘로 내리덮여 있다. 삼사형(三師兄), 아직도 멀었나요? 교성(嬌聲). 물방울이 계곡으로 떨어져 동글동글 부숴지는 듯한 아름다운 음성의 주인은, 물론 그 음성만큼이나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은 지금 처량하리만큼 일그러져 있다. 작은 방갓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가련한 표정의 미소녀는 옆에 서 있는 청년을 바라본 다. 방갓 아래로 발그레한 볼이 예쁘게 실룩거린다. 배도 고프고 힘들어 죽겠어요. 적심관(積心館)이라는 곳이 아직도 더 가야해요? 청년. 단정한 외모, 옆으로 길게 뻗은 눈가에 은은한 귀품이 서려있는 사내는 칭얼거리는 소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약간은 짜증이 섞인 시선. 아무런 말없이 소녀를 응시하던 그의 눈빛이 어느 순간 풀어지는가 싶더니, 꽉 다문 입술이 벌어지며 한숨이 나온다. 빌어먹을! 같이 오자고 조를 때 내가 왜 거절 못했을까? 그는 소사매(少師妹)의 꼬임에 넘어간 자신의 모질지 못함을 원망하고 있었다. 청년은 수 년 전 이곳에 와 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뭉클한 감동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늘같이 존경하는 사부로부터 여러 차례 들어온 <성지>. 천하를 구한 기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풍광. 그러나 황폐한 기둥, 부서진 기왓장이 담고 있는 무상(無常). 인간사의 비장함은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의 호연한 마음을 여지없이 뒤흔들었다. 당시 청년은 단신이었다. 밤하늘을 천정삼고 차가운 땅에서 몸을 떨던 고달프고 쓸쓸한 수행(修行). 하지만 아무런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만 리 가까운 긴 노정을 한 달 남짓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늘로 벌써 사문을 떠난 지 두 달 째로군. 청년은 답답했다. 눈 앞에서 칭얼거리는 이 철부지 사매는 마치 처음 집 떠난 어린아이처럼 눈에 보이 는 모든 것을 알고싶어 했고, 모든 사건을 제 일인 양 관여하려 했다. 덕분에 청년은 지난 두 달을 돌이키고 싶지않은 고생 속에서 살 수 있었다. 화산(華山)을 구경하고 오겠다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낙양(洛陽) 객점에서 사라졌을 때 그녀의 흔적을 쫒아 사흘 밤낮을 사냥개처럼 헤매고 다녔고, 금문(金門)에서는 십 자검파(十字劍派)와 시비를 하여 칼부림을 할 뻔 하기도 했었다. 애당초 따라오는 것이 아니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생각해보니 이 후회를 반복하는 것도 벌써 두 달 째다. 이 숲만 지나면 적심관이지. 하지만 이곳은 위험한 곳이야. 쉬어갈 여유가 없다고. 청년 구양현(歐陽賢)은 활화산처럼 부글거리는 짜증을 지긋이 억누르며 애써 부드러 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부터 인내심의 잔여분도 얼마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하지만 이 숲은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여기서 요기라도 하고 가요. 소녀는 구양현의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나무 아래 주저앉는다. 땀에 젖은 그녀의 얇은 여름옷이 살갖에 휘감겨서, 약간은 덜 발달한 듯한 여체(女體) 의 굴곡이 언뜻 드러나 보인다. 그것은 비록 육감적인 광경이겠지만, 청년 구양현은 은밀한 감상에 빠질 정도로 마음 의 여유가 없었다. 인내심이 바닥이 난 것이다. 내 아버지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데 내가 또 한번 너와 여행을 하면 구양씨가 아니다, 이 망할 기집애야! 구양현은 욕설을 퍼부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흠칫 걸음을 멈춘다. 소녀가 기대앉은 나무를 타고 내려오는 파란 줄을 발견한 것이다. 영청사(映靑蛇)? 구양현은 강호 뿐만아니라 민간에서도 널리 알려진 의가(醫家) 출신이었고, 그의 부친 은 당대 제일의 명의로 불려지는 사람이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독충이나 독사의 종류에 대해 수없이 공부했고, 또 직접 다뤄보 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종류의 뱀은 크고 흉직하기만 할 뿐, 독이 없어 위험하지는 않았 다. 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소녀 소소(蘇素)는 사형이 뭐라고 잔소리를 하건 간에, 여기서 푹 쉬지 않고는 한 발 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사형의 얼굴에 떠오른 기이한 미소를 보았지만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구양현을 포함한 그녀의 사형들은 언제나 그녀에게 양보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자신이 마음먹은대로 이곳에서 쉴 수 있을 것이다. 소소는 싱긋 웃으며, 허리에 찬 가죽 주머니에서 말린 고기를 꺼낸다. ...? 막 한 조각의 육포를 뜯어 입에 넣으려고 할 때였다. 그녀는 무언가 차갑고 축축한 것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악! 여자라면 대부분 이럴 것이다. 소소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푸른 색의 젖은 밧줄과도 같은 무엇이 얼굴을 스치며 그녀의 발 앞에 떨어졌다. 소소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검을 뽑아 휘둘렀다. 오 년이라는 연공기간은 그녀의 반사신경을 비교적 훌륭히 단련시켰고, 덕분에 검 끝 에서는 범인의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화려한 검화가 피어올랐다. 제법인데? 구양현은 사매의 검술이 꽤 경지에 들어섰다는 것을 발견하곤 가볍게 감탄했다. 그 순간 그의 장난스럽던 눈빛이 가볍게 굳어졌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2) 소소가 정신을 차리니, 토막난 채 아직도 꿈틀거리는 푸른 뱀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이 더러운 물건을 본 것 처럼 찡그려졌다. 화공이 정성들여 그린 듯한 아미(蛾眉)가 하늘로 상큼 치켜 올라간다. 그녀는 그제서야 사형이 이상한 웃음을 지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청사. 토막난 채 점액이 흐르는 비늘이 흙투성이가 되며 서서히 멈추어가는 뱀의 간헐적인 꿈틀거림을 바라보다가 소소는 검을 갈무리했다. 그녀의 검은 유리같이 투명한 신기(神氣)가 일렁이고 있어 범상해 보이지 않았다. 사형! 이럴 수 있어요? 구양현을 돌아보며 한바탕 쏘아붙이려던 소소의 입이 다물어졌다. 딱딱하게 굳어진 구양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형, 왜 그런...? 쉿! 구양현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소소의 말을 잘랐다. 조금 전까지 그를 둘러쌓고 있던 장난스러운 신색은 씻은 듯 찾아볼 수 없었다. 오른 무릎을 약간 구부린 채 오른 손을 단전(丹田) 어름치에 가볍게 댄 자세. 그것은 오랜 수련으로 얻어진 자연스러운 발검(拔劍)의 준비였다. 소소는 의아했다. 삼사형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긴다는 징조였다. 앙숙인 이사형(二師兄)과 다툴 때의 표정이 바로 이런 것이다. 다투고 나면 둘 다 대사형(大師兄)으로부터 엄한 꾸중을 받았다. 설마 이곳에 이사형이 왔을 리는 없을텐데... 그녀의 이러한 엉터리같은 추리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숨어있는 친구! 이제 그만 나오시지. 구양현의, 딴딴한 적의를 품고있는 일갈이 만수림의 우거진 덩굴을 타고 울려퍼졌다. 충일한 내공이 담긴 그의 음성에 놀란 날짐승들이 푸득거리며 날아오른다. 흐흐, 구양공자께선 벌써 우리를 발견하신 모양이로군. 울창한 수림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울려나왔다. 웃음소리는 매우 낮았다. 하지만 소소는 등뒤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웃음소리에는 작은 들짐승을 노려보는 승냥이의 눈초리와 같은 흉폭함과 잔인함이 진 득하게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구양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는 검을 뽑는다. 맑은 검명(劍鳴). 어떤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무면귀(無面鬼)는 아닐테지. 순간, 길게 이어지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대기를 뒤흔들었다. 수십 수백 마리의 늑대들이 일제히 울부짖는가. 만수림의 수풀이 거센 바람을 맞은듯이 요란하게 진동한다. 소소는 깜짝 놀라며 사형의 단단한 등 뒤로 몸을 움츠렸다. 쐐애액. 전면의 우거진 덩굴로부터 하나의 깃발이 살같이 쏘아져 두 사람의 앞에 내리꽂혔다. 깃발을 흘끗 쳐다본 구양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백색 천에 붉은 늑대가 피로 그린 듯 선명하게 새겨진 깃발. 요사이 강남 일대가 이 늑대가 그려진 깃발로 인해 얼마나 몸살을 앓고있는지, 그도 익히 들어 알고있었다. 구양현의 입에선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혈랑기(血狼旗)... 깃발을 사이에 두고 구양현과 소소 앞으로 십여 개의 인영들이 떨어져 내린다. 붉은 복면, 붉은 장포, 심지어 신발까지 붉은 단화를 갖춘 괴한들. 구양현은 자신과 사매가 대단한 위험에 직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착지할 때의 안정된 신법(身法)으로 미루어, 괴한들의 무공이 녹녹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구양현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구양현은 후기지수(後期之秀)로 이름이 높았다. 무리(武理)에 대한 높은 이해력, 수련에 대한 강한 집착력으로 사부의 지고한 가르침 을 잘 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장점은 침착함이었다. 의가 대대로 이어오는 정(靜)적인 신중함은 배움 이전의 천품(天品)이었다. 무공이야 수련을 거듭하여 강해질 수 있는 것이지만 타고난 성격은 그럴 수 없을 것이 다. 이자들을 상대해 내 한 몸을 지키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매를 보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군. 구양현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괴한들 중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선다. 그는 다른 자들과는 달리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늑대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가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야참구룡(一夜斬九龍)의 명성은 일찍부터 들어 왔지. 하지만 이곳을 벗어날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아. 구양현은 일찌기 장강에서 악행을 일삼던 장강구룡방(長江九龍幇)을 휘하 무사들과 함께 괴멸시킨 일이 있었다. 당시 구룡(九龍)이라 자칭하던 장강구룡방의 아홉 방주들은 모두 그의 검 아래 고혼 (孤魂)이 되었다. 일야참구룡은 그때 얻은 별호였다. 나를 아는 것을 보니, 감히 신무전(神武殿)을 상대로 시비를 걸 생각인가 보군. 구양현은 냉랭하게 말했다. 홍포괴한은 혈랑탈속에서 음산한 웃음을 터뜨린다. 남들은 신무대종(神武大宗) 소철(蘇喆)을 두려워할 지는 모르지만, 우리 혈랑곡은 그 런 허명(虛名)에 눈도 깜짝하지 않지. 순순히 우리를 따라온다면 아무 해가 없을 것이다. 구양현의 눈빛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어림없는 수작! 뭐하는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신무전의 제자가 그리 호락호락한 줄 알았다면 큰 오산 이지. 구양현은 호기롭게 큰소리 치면서 등뒤의 소소에게 급히 전음(傳音)을 보냈다. (내가 우측을 뚫을테니, 그리로 곧장 달아나라. 우리가 가던 방향으로 이삼 리만 더 가면 적심관이 나온다. 적들을 따돌린 뒤 그곳에서 만나자.)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하는 도중에 전음을 보내는 것은 본디 좌도(佐道)의 수법으로서, 내공이 심후한 자가 복화술(腹話術)을 익힌 후 사용할 수 있었다. 소소는 아직도 눈앞에 벌어진 사태에 대하여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할아버지 소철은 강호의 그 누구라도 윗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금문에서 십자검파와 시비가 붙었을 때에도 신무전의 제자라는 것만으로 그들을 물리 치지 않았던가. 그녀는 <신무대종 소철>이라는 이름을 동네 개 이름 부르듯 불러젖히는 괴인들의 존재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필부(匹夫)의 만용으로 목숨을 잃겠다는 건가, 하긴 우리야 상관없지. 흐흐! 혈랑탈의 괴인은 쇠붙이를 긁는 듯한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왼 손을 붉은 장포의 긴 소매에서 서서히 빼냈다. 뼈다귀에 살거죽만 씌운 듯한 앙상한 손이 드러났다. 그 손에는 거무틱틱한 가죽으로 만든 도집이 들려있었다. 문양... 도집에 새겨진 문양을 발견한 구양현의 눈이 빛난다. 유부(幽府)에서 울부짖는 듯한 생생한 귀신 문양. 그리고 한 사람의 이름이 더올랐다. 진남(晉南)에서 십수 년 간 이름을 떨쳤던 도의 달인... 둘째 사형의 말에 의하면 그는 귀신 문양의 도를 바람처럼 빠르게 사용한다고 했다. 하지만 구양현은 그의 정체에 대해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생사를 다투는 상황. 간다! 결심한 순간, 그의 몸은 더 이상 당겨질 수 없는 팽팽한 시위처럼 긴장되었다. 얘들아! 사내 놈은 죽이고 계집애는 생포... 엇! 득의에 찬 말을 이어나가던 혈랑탈의 괴인은 깜짝 놀랐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양현의 신형이 우측을 향해 쏘아져 나간 것이다. 그것은 장내에 있던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돌발적인 사태였다. 우측에 서 있던 복면인은 자신을 향해 매섭게 날아오는 철검을 당황한 시선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사매, 어서! 구양현의 짧막한 외침과 함께 우측에 서 있던 복면인은 집단처럼 쓰러졌다. 구양현의 철검이 여지없이 이마를 가른 것이다. 공터의 한 가운데 멍하고 서 있던 소소는 사형의 다급한 외침이 들리자 정신이 퍼뜩 난 듯, 쓰러진 복면인을 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발칙한... 쳐라! 혈랑탈을 쓴 사내의 외침과 함께 십여 개의 붉은 그림자가 구양현을 향해 짓쳐갔다. 달려가는 사매의 뒷모습을 힐끗 바라본 구양현은 난투의 현장에 사매가 없는 것만으로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전면을 가득 메워오는 붉은 그림자들을 노려보았다. (3) 이게 무슨 일이람! 미소녀 소소는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권각지예(券脚之藝)나 검법이 범상한 것은 아니지만 생사지투(生死之 鬪)에 처하면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짐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형이 걱정되지 않는 바가 아니지만, 멀리 달아나는 것만이 사형을 도울 수 있는 유 일한 방법인 것이다. 만수림은 수풀이 비할 데 없이 울창하고 길다운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사형의 말대로 숲은 곧 끝났다. 그녀는 거짓말처럼 탁 트인 넓은 공지(空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달렸기 때문인지 그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방갓은 이미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고, 소매나 바지의 무르팍은 나뭇가지에 긁혀 찢겨져 있었다. 공터에 힘겹게 선 채 바툰 숨을 토해내던 소소의 눈이 반짝 빛난다. 한쪽 구석에 뎅그마니 서 있는 낡은 석비(石碑)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적공수심(積功修心)> 석비는 연록색 돌이끼로 뒤덮여 있었고 비문의 자획의 여기저기가 깨어져 있어, 한눈 에도 풍상(風霜)에 시달린 흔적이 역연하다. 하지만 소소는 그 초라해 보이는 비석이 너무도 반가웠다. 드디어 긴 여정의 종착역인 적심관에 도착한 것이다. 소소는 자신이 빠져나온 만수림을 돌아보았다. 어둡고 괴괴하다. 숲은 마치 흑녹색의 거대한 괴물처럼 사형과 괴한들 모두를 삼킨 채 시치미를 떼는 것 처럼 느껴졌다. 문득 불길함이 솟아오른다. 사형은 어찌 되었을까. 온갖 핏빛 상상이 그녀를 괴롭혔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무력함이 담긴 한숨을 토한다. 소소는 석비 뒷켠으로 놓여있는 소롯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래지않아 낡은 도관이 한 채 나타났다. 밝은 여름햇살 속에서도, 폐허가 된 지 오래인 듯한 도관은 을씬년스러워 보였다. 추녀는 이끼마저 말라버린 듯 검붉은 기와의 갈라진 흉터들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고, 기둥과 처마에 칠해진 단청은 군데군데 벗겨지고 색 바래 있다. 사람의 손길이 오랫동안 미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퐁퐁. 소소는 어디선가 물소리를 들었다. 샘물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것에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갈증이 밀려온다.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을 옮기니, 도관의 뒷편에 청류산 윗 계곡으로부터 떨어지는 맑은 물이 작은 샘을 이루고 있었다. 소소는 반가운 마음으로 물을 마시려 샘으로 몸을 숙였다.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울같이 맑은 물을 통해 일렁이고 있는 붉은 그림자를 본 것이다. 우(禹) 형님의 예상이 맞았군. 이곳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길 잘했지. 목소리는 매우 깨끗했다. 다른 곳, 예를 들어 경론장(競論場)이나 연석(宴席)과 같은 장소에서라면 여인들의 시 선을 끌기에 충분한 매끄러운 음색이다. 하지만 소소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혼절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았다. 그녀와 샘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 명의 건장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한 명은 예의 지긋지긋한 혈랑탈을 쓰고 있었고 나머지 두 명은 그의 수하인 듯, 공손 하게 뒷전에 시립해 있었다. 소저께서 소철, 소전주의 손녀가 분명하시지? 혈랑탈을 쓴 단단한 체격의 괴인이 예의 듣기 좋은 목소리로 묻는다. 도대체... 도대체 당신들은 왜 사람을 핍박하는 거죠? 앙칼지게 외치는 그녀의 말에 괴한들은 약속한 것 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소소는 얼굴을 가린 괴인들의 눈구멍으로 떠오르는 탐욕스러운 시선을 전신으로 느꼈 다. 그것은 남자의 눈, 암컷을 바라보는 숫컷의 시선이었다. 그녀는 부르르 진저리치며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선다. 상부의 명령만 아니었으면, 그대로 데려가기 아까운 계집이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얘들아, 털끝 하나 다치게하지 말고 살살 모셔라. 혈랑탈의 장한은 맛있는 음식을 바라보는 미식가처럼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예, 분부대로 합죠! 헤헤! 두 명의 복면인이 흉소를 흘리며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한 명은 키가 작달막하고 뚱뚱했는데 오른 손에 검은 빛이 번들거리는 채찍을 들고 있 었다. 다른 한 명은 마르고 왜소한 체격이었는데 쌍수가 먹물에라도 담근 것 처럼 검었다. 아마도 사이한 방법으로 음독한 장법을 수련한 것 같았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소소야! 소소는 신무전의 장중보옥(掌中寶玉)으로 태어나서 이러한 경우는 처음 겪는다. 그녀는 공포로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것을 모질게 다잡았다. 사형들에게 배운 수많은 검초가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어차피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반항하면 고운 몸만 다치지. 비웃음과 함께 왜소한 체격의 복면인이 그녀의 좌측 상체를 공격하였다. 맵싸한 냄새를 풍기는 괴한의 손가락이 갈고리같이 구부러지며 그녀의 어깨 위 견정혈 (肩貞穴)을 찍어왔다. 악! 비록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지만 비명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황급히 허리를 뒤틀며 괴한의 공세로부터 몸을 빼냈다. 휘청이는 신형을 바로잡기 위하여 오른발을 축으로 금계독립(金鷄獨立)의 수법으로 회 전한 그녀는 그 여력을 빌어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차가운 검기가 그녀의 어깨 어름에서부터 발출된다. 엇! 괴한은 그녀의 검초가 의외로 날카로운 것을 보곤 공격하던 손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 났다. 한 호흡 정도의 차이를 두고 목표물을 노친 소소의 검은 발렵한 반원을 그리며 회수되 어 우측 전면을 향해 비스듬히 뉘어진다. 스스로 가장 쓸만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난조검법(鸞鳥劍法)의 기수식이다. 제법 앙칼진 년이군! 그녀의 우측에서 다가오던 땅딸막한 괴한은 가소롭다는 듯이 손을 휘둘렀다. 손목의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진동은 채찍의 전장(全長)을 타고 크게 증폭되어 온다. 한 자루 검은 채찍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그녀의 검을 휘말아왔다. 흥! 괴한의 채찍이 검에 휘감기자 소소는 냉소를 지었다. 저놈은 내 검을 우습게 보는군. 그녀는 손목을 흔들어 가볍게 검을 떨쳤다. 팍. 짧막한 소리와 함께 채찍은 여러 토막으로 끊어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땅딸보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질기기로 유명한 천축물소 가죽을 꼬아서 만든 채찍치고는 너무도 허망하게 끊어져 버 렸기 때문이다. 조심해라, 보통 검이 아니다! 곁에서 바라보고 있던 혈랑탈의 거한이 나직히 소리쳤다. 그녀의 검은 재작년 그녀의 열다섯 살 생일에 대사형의 친구인 신기보주(神機堡主) 왕제민(王齊旻)이 선물한 것으로, 강호에서는 유리검(琉璃劍)이라고 알려진 명검이었 다. 길이에 비해 매우 가벼워서 여인이 쓰기에 적합했고, 날카롭기 또한 보통 병기에 비할 수 없는 명품인 것이다. 그녀의 병기가 보검이라는 말을 들은 두 복면인은 한편으론 경계하며, 또 한편으로는 신병에 대한 욕심을 감출 수 없었다. 땅딸막한 복면인은 품속에서 또 하나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 역시 채찍이었는데 아까 토막난 것과는 달리 붉은 색인데다가 길이가 매우 짧았 다. 채찍으로 여기기 어려울 정도로 짧막해서 앞뒤로 유연하게 구부러지는 점을 제외하면 단봉(短棒)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들의 무공은 결코 나보다 높지 않다. 소소는 그녀의 수법이 제법 효과를 거두자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물러가요! 나는 사람을 다치게 하고싶지 않아요.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껏 위엄을 부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러한 위협은 괴인들의 비웃음만 살 뿐이다. 분수를 모르는 계집 같으니라고! 그녀의 뒷편으로 다가섰던 왜소한 복면인이 버럭 호통을 치며 일장(一掌)을 쳐냈다. 장세는 평범한 것이었지만 담겨있는 내력은 사이한 것이어서, 소소는 장력이 도달하기 도 전에 맵싸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구부려 장력을 피했다. 이때 땅딸보의 채찍과도 같은 괴상한 병기가 그녀의 다리를 노려왔다. 그녀는 곧장 검을 아래로 휘둘러,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재주를 부리며 하체를 보호했 다. 펑. 어이없게도 채찍과 검이 부딪히자 폭음과 함께 녹색 연기가 자욱히 피어올랐다. 흐흐! 녹연이 퍼짐과 동시에 두 괴한은 소매로 코와 입을 막으며 재빨리 몇 걸음 물러선다. 순간 소소는 하늘과 땅이 울창한 숲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런... 비겁한...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녀는 황급히 숨을 멈추고 녹색 연기로부터 몸을 빼내었지만, 이미 손발의 맥은 잠으 로 막 빠져들 때와 같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헤헤. 암쾡이를 상처없이 잡는 방법으론 이게 최고지. 무릎에 힘이 빠져 허물어지듯 땅으로 주저앉는 소소의 귓전에 땅딸보의 음흉맞은 웃 음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들이마신 녹색 연기에는 몽혼(夢魂)성분의 약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연기가 가라앉자 땅딸보는 느긋하게 소소에게 다가갔다. 소소는 자꾸 멀어지는 의식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녀의 망막에는 만면에 웃음을 딘 땅딸보가 다가오는 것이 흐릿하게 비쳤지만, 그녀 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땅딸보가 손이 느릿하게 그녀에게 뻗쳐진다. 이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으악! 땅딸보의 동그란 체구가 처절한 비명과 함께 소소의 몸을 타고넘어 전방의 샘으로 날 아가 쳐박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샘에 꺼꾸러진 땅딸보에게 향했다. 으음. 지휘하던 혈랑탈을 쓴 장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 자루 장검이 땅딸보의 등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의 등에서 배어나온 핏물은 샘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비검술(飛劍術)...! 붉은 늑대가면 사이로 나직한 탄성이 새어 나온다. 수치도 모르는 놈들! 장정 여럿이 어린 여자 하나를 괴롭히다니! 노기가 가득 담긴 고함과 함께 한 청년이 소소의 앞을 막아섰다. 다름아닌 구양현이었다. (4) 구양현은 소소를 달아나게 한 뒤 십여 명의 괴한들과 악전고투를 벌였다. 구양현의 성명절기(聲名絶技)인 생사구검(生死九劍)은 가히 강호일절(江湖一絶)이어 서, 그가 무림후수(武林後秀)의 한 명으로 이름을 떨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 이었다. 하지만 혈포괴한들의 무공은 녹녹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초식은 하나같이 괴공이초 (怪功異招)였다. 특히 우두머리인 늑대가면의 도법은 지극히 빠르고 날카로와, 구양현과 일대일로 겨룬 다고 해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구양현은 싸움이 길어지게 되자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생각이 달아난 사매에게 미치자 마음이 흐트러져 적들의 맹공을 막아내기 어렵게 되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무슨 수단을 사용해야겠군. 구양현은 호신용(護身用)으로 가져온 비장의 암기(暗機), 폭우뢰(爆雨雷)에 생각이 미쳤다. 폭우뢰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철구(鐵球) 안에 미세한 납침들을 넣은 것이다. 뇌관 부분은 초석(硝石 : 초산칼륨)과 비상석(砒霜石)을 역청(瀝靑)으로 혼합해서 만 든 것으로, 폭발시 사방 십여 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불꽃과 비침을 피할 수 없는 무 서운 화기였다. 이 암기는 신무전의 군사(軍師)인 삼절수사(三絶需士) 운리소유(芸理燒儒)가 설계한 것이다. 구양현이 이 암기를 선뜻 사용하지 못한 것은, 암기를 사용하기엔 적들과의 거리가 너 무 가까왔기 때문이다. 폭우뢰의 강맹한 살상력은 시전자라고해서 결코 피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칫하 면 자신도 큰 부상을 면치 못하기 십상이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던 죄과는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구양현이 머뭇거리는 사이, 적의 우두머리가 휘두른 도는 여지없이 그의 허벅다리의 살을 헤집고 지나간 것이다. 동맥을 갈랐는지 한 줄기 피화살이 그들 사이를 솟구치며 가로막는다. 단념하시지. 애송이! 공격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자 늑대가면은 득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쏟아진 핏물로 바지가 뜨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던 구양현은 후방에서 연이 어 쏟아지는 적들의 병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겹게도 많군. 구양현은 몸을 회전하며 생사구검의 구명절초인 조암이생(照暗而生)을 펼쳤다. 철검이 아래로부터 솟아 오르며 짧막하고 깨끗한 반호를 그린다. 으악! 철검 끝으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 살과 뼈를 갈랐을 때에 느끼는 야수적인 쾌감. 구양현은 두 명의 혈포인이 선연한 핏물을 흘리며 넘어가는 장면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의 것으로 보이는 단창(短槍)은 그의 왼쪽 어깨에 꽃혀 건들거리 고 있었다. 빌어먹을! 구양현은 단창을 힘주어 뽑는다. 다행히도 박힌 깊이는 그리 깊은 것이 아니어서 뼈는 상하지 않은 듯 싶다. 하지만 조금 전 우두머리에게 당한 다리의 자상(刺傷)은 예사롭지 않아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상처로부터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지혈시킬 경황은 없다. 괴한들은 그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는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들기 시작한다. 구양현은 순간 결심했다. 혈랑탈을 쓴 우두머리는 갑자기 구양현의 검초가 변한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날카롭고 빠르게 상대의 빈틈을 찔러가던 그의 검법이, 돌연 도끼질을 하는 듯 거칠고 사납게 변한 것이다. 부벽검법(釜壁劍法)은 구양현의 대사형 도정(陶正)이 만든 검법이었다. 이 검법은 위력은 강하지만 내력의 소모가 매우 크다. 그가 <곰같은 사형에게 잘 어울린다>고 빈정거린 적이 있을 정도로 과도한 힘이 요구 되는 수법인데, 바로 그 검법을 지금 그가 시전하는 것이다. 검이 휘둘러지자,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검과 석 자 이상 떨어진 곳에 있던 괴한 한 명이 장포가 갈라지고 살갖이 터지며 쓰러졌다. 검기(劍氣)! 역시 소철의 제자답다. 우두머리가 낮게 부르짖었다. 그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비록 구양현의 내력이 심후하다곤 하지만, 저렇게 내력을 실어 검을 휘두르면, 진기가 곧 고갈되어버릴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구양현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난 사이, 돌연 구양현의 신형이 줄에 끌리기라도 하는 듯 뒤 로 곧바로 날아갔다. 이 경공은 신무전의 비전 신법인 무쌍팔로(無雙八路)중 사로부영(射路浮影)이었다. 괴한들은 그가 싸움 도중 갑자기 달아나리라는 것을 예상치 못한 듯, 멍청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구양현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울려왔다. 조금은 이르지만 칠석(七夕) 선물이다! 순간 괴한들을 향해 어린아이의 주먹만한 검은 구슬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혈랑탈 속의 우두머리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피해라! 화탄(火彈)이다! 우두머리의 대갈과 함께 요란한 폭음이 만수림을 뒤흔들었다. 그들이 조금 전까지 드잡이질을 벌이던 일대는 휘몰아치는 화염과 우박같은 비침들로 뒤덮였다. 구양현은 휘몰아치는 화염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한 고비 넘겼다는 생각 이 들었다. 하지만 다리에 입은 상처는 위중했고 방금 전의 폭발의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피한 것 이 아니어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하지만 구양현은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에 앞서 사매의 안전이 걱정되어 견딜 수 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황급히 다리의 피를 지혈시킨 후 적심관을 향해 달려간 것이다. 그가 막 적심관의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땅딸보 괴한이 쓰러진 소사매에게 손을 뻗치는 것이 보였다. 구양현은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없이 검을 날렸다. 구양현이 검을 던진 거리는 십여 장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 일검에는 필사적으로 끌어올린 그의 전신내력이 담겨있었고, 검을 던진 수 법은 신무전이 자랑하는 비류비검술(飛流飛劍術)이었다. 땅딸보는 검에 등을 관통당하고도 그 여력을 견디지 못하고 몇 장 더 떨어진 샘물 속 으로 처박힌 것이다. (5) 반쯤 풀어진 소소의 풀어진 눈에 구양현의 그을린 의복과 상처가 들어왔다. 사형! 부상을 입었군요. 구양현은 소소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비록 땅에 쓰러져 있었지만, 그녀의 몸에는 이렇다할 상처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혈색이 불그레한 것으로 보아 중독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구양현은 약간 마음이 놓였다. 그는 품속에서 정신을 맑게 해주는 단약을 꺼내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사매! 다친 데는 없어? 구양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소의 인중(人中)을 쓸어주었다. 소소는 입안으로 단약의 청량한 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이 약은 소소의 부친이자 신무전의 약사(藥師)인 구양자(九陽子) 소흥(蘇興)이 직접 조제한 청신환(淸神丸)이었다. 약효는 탁월한 것이어서, 소소는 몽혼연으로 가물거리던 의식의 가닥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사형, 다리에서 피가... 구양현은 그제서야 지혈시켰던 상처가 터진 것을 알았다. 검을 던질 때 내력을 집중한 것이 상처 부위를 자극한 것이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는다. 이... 이... 쥐새끼 같은 놈! 노갈과 함께 숲속으로부터 한 사람이 뛰어나왔다. 바로 귀신 문양의 도를 휘두르던 우두머리였다. 혈랑탈은 이미 불에 타버린 듯 얼굴이 드러나 있었고, 장포도 군데군데 구멍이 뚫어져 아까의 폭발로 크게 낭패를 당했다는 것을 한 눈에 발견할 수 있었다. 햇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화기에 검게 그을려 있었고, 턱밑의 수염도 타붙어서 몇 가 닥 남아있지 않았다. 구양현은 눈매가 날카롭고 왼쪽 뺨에 동전만한 상처가 있는 오십 세 가량의 초로인의 얼굴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도법을 보고 짐작했었지. 당신은 귀문도(鬼文刀) 우낙(禹駱)이로군. 귀문도 우낙은 입술을 실룩거린다. 우낙은 수 년 전까지 진남(晉南) 일대를 횡행하며 무명을 떨치던 고수였다. 귀신 문양이 새겨진 도가 울부짖을 때마다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 을까. 구양현이 아는 바로는 우낙은 특정한 문파에 소속되지 않은 낭인이었다. 그런 우낙이 혈랑곡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구양현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구양현의 등장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던 혈랑탈의 장한은 우낙이 낭패한 몰골로 등장 하자 비웃음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형님, 풍채가 보기 좋소이다. 그리 당하신 것을 보니, 소철의 제자라는 것이 허명은 아니었나 보군요. 우낙은 폭발로 인해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는 구양현을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다가, 혈랑탈을 쓴 장한이 조롱하자 분기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네는 아직 저 젓비린내 나는 계집애 하나 잡지 못하고 뭐했나! 질책을 당한 장한은 가볍게 웃으면서 품 속에서 바퀴 끝에 날이 달린 자그마한 철륜 (鐵輪) 두 개를 꺼냈다. 그의 손 위에서 검붉은 빛을 번들거리는 철륜은 종잇장처럼 얇고 예리해 보였다. 느릿하지만 헛점을 발견할 수 없는 움직임 하나하나로부터 고도의 수련을 거친 고수의 자신감이 진득하게 배어 나온다. 하면, 소제가 저 애송이를 처리하는 솜씨를 보시겠소? 그는 구양현에게 다가서며 느물거렸다. 낭패다. 진기가 모아지지 않는다. 구양현은 내심 당황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과다한 출혈은 눈앞이 가물거리게 만들고,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전력을 쏟은 비류비 검술 때문에 내식(內息)이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또 한바탕의 싸움을 피할 수는 없다. 그는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며 땅에 떨어진 사매의 검을 주워들었다. 유리검의 보광이 그의 전면에서 한 차례 일렁인다. 와라! 구양현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내뱉는다. 내 면도철륜(面刀鐵輪)에는 눈이 달렸으니, 조심해라. 자심감이 담긴 경고와 함께 두 개의 륜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들었다. 철륜의 회전이 일으키는 경기는 두 사람 사이의 대기를 요란하게 진저리치도록 만들었 다. 차앗! 구양현은 유리검을 십자로 맹렬히 휘둘러 철륜을 막아냈다. 십생우활(十生憂活). 생사구검 중에서 구명절초였다. 검으로 폭이 큰 십자를 그림으로써 상하와 사방의 방위를 방어하여 육합(六合)의 공세 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수비식이다. 하지만 구양현이 이를 악물고 끌어올린 내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빠박. 검신은 새파란 불똥을 튀기며 두 장의 면륜을 막아냈지만, 종이장처럼 얇은 면륜에는 예기치 못한 막강한 내력이 담겨 있었다. 구양현은 내장이 진탕되고 기혈이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우욱! 구양현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왈칵 피를 토했다. 그가 발을 딛은 자리는 선명한 족인(足印)이 찍혀져 있어서 괴한의 철륜에 실린 내력 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형! 소소는 구양현이 검붉은 피를 토해내자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혈랑탈의 장한은 철륜을 가볍게 회수했다. 그는 비틀거리는 구양현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천하의 일야참구룡, 구양공자께서 몰골이 영 말씀이 아니군. 이제는 염불이나 외는 것이 좋을 거야. 구양현은 장한이 품속에서 다시 두 개의 철륜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양손에 각각 두 개 씩의 철륜. 구양현의 뇌리엔 퍼뜩 스쳐가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눈 달린 네 개의 철륜! 당신은 안령사륜(眼靈四輪) 부대연(夫大延)! 부대연이라고 불린 혈랑탈의 장한은 의외롭다는 듯이 말했다. 오호! 신무전 세째 공자님의 견식은 놀랍군. 강호활동을 거의 하지않은 내 정체마저 파악하다니. 아까운 일이야. 재주가 많은 청년영웅을 죽여야 하다니. 부대연의 손이 부드러운 궤도를 만들자 네 개의 철륜이 환상처럼 날아올랐다. 철륜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어떤 것은 느리게 또 어떤 것은 빠르게 회전하며 구양 현의 요혈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철륜들이 그려내는 끊임없는 궤적 가운데에는 무서운 살기가 숨겨져 있었다. 아아! 구양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四章 救援者 (1) 절체절명의 순간, 가증스러운 도배(徒輩)들이 선주(先主)의 처소를 어지럽히다니! 벼락같은 일갈과 함께, 샘물 뒷편의 수풀이 흔들리며 회색 그림자 하나가 장내로 뛰어 들었다. 돌연한 출현에 가장 기겁을 한 사람은 수풀 바로 앞에 서 있던 깡마른 복면인. 복면 속에서 무어라 놀라움의 외침을 발하려고 열렸던 입술은 다급한 헛바람과 함께 다물어졌다. 말라붙은 나뭇가지와도 같이 앙상한 손 하나가 눈앞으로 크게 확대되어 왔기 때문이다. 헛! 회색 그림자가 뻗어오는 수법은 실로 불가사의하게 빠르다. 복면인은 앙상한 손을 뿌리치며 자신의 장기인 흑사장(黑沙掌)으로 반격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헛된 바램일 뿐이었다. 으드득. 복면인의 목뼈는 섬뜩한 음향과 함께 부러져 나갔다. 쾡하니 뚫어놓은 복면의 눈구멍 속으로 하얗게 뒤집어지는 흰자위가 번들거린다. 허약한 놈! 회색 그림자의 잔인한 손속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비릿한 냉소를 흘리며 왼발을 휘둘러 이미 절명한 복면인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복면인의 시신은 투석기를 떠난 돌맹이처럼 날아갔다. 우연이었을까. 마침 복면인의 시신이 날아간 방향은 방어할 기력을 잃고 탁한 호흡을 뱉어내던 구양 현의 전방이었다. 빠져나갈 곳 없이 절묘한 배합을 이루며 구양현의 목숨을 노렸던 네 개의 철륜은 살과 뼈를 가르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복면인의 시신을 가르고 지나갔다. 복면인의 시신은 검붉은 핏덩어리를 우박같이 뿌리며 걸레와 같이 찢겨져 나갔다. 아악! 눈앞에서 난비하는 혈육들에 소소는 눈을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부대연이 철륜을 던지고, 회색 그림자가 대갈(大喝)과 함께 장내에 뛰어들어와 복면 인을 죽인 뒤, 철륜이 그 시체를 난자한 것은, 숨 한 번 들이내쉴 정도의 짧은 시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이 돌발적인 사태에 잠시 말을 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중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허름한 회색 단삼을 입은 노인이 공터 한 가운데 우뚝 서서 노기어린 눈으로 우낙과 부대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에 신산(申酸)에 찌들은 초췌하고 야윈 얼굴이지만, 날카롭게 찢어진 두 눈에서는 불꽃이 피어나는 듯한 강렬한 안광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사악한 무리들이 감히 피냄새를 풍기느냐. 죽고싶어 환장한 놈들! 회색 단삼을 입은 노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쥐꼬리같이 보잘것 없는 수염 올올마저 진하게 배어나오는 살기를 못이겨 파르르 떨리 고 있었다. 우낙과 부대연은 노인의 목소리에 담긴 충만한 내공을 읽을 수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들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원, 노인네 하고는... 매일 죽네사네 쩔쩔매더니, 뛰는 품을 보니 아직 한창이시오. 앞으로 삼십 년은 내가 보장하리다! 노인이 튀어나온 수풀이 흔들리며 걸직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린다. 아니, 아마 그를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가 그랬을 것이다. 그의 체구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칠 척(註 : 이후 단위는 현재 사용하는 단위를 사용했음)이 넘는 키에 장정의 아름으 로도 안지 못할 우람한 가슴을 지닌 사내. 바위처럼 탄탄해 보이는 목을 돌려 장내를 쓰윽 흟어본다. 이십 대 중반 정도? 군데군데가 허옇게 빛바랜 황색 무복(武服)의 소매는 팔꿈치 위까지 둘둘 말려 솔잎같 은 털이 무성한 팔뚝을 드러내고 있고,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회색 각반은 수백 년 묵 은 소나무 뿌리같이 단단해 보이는 발목에 꽉 감겨 있다. 검을 메었는가. 일견 범상치않은 듯한 고풍(古風)의 검자루가 선이 굵은 목덜미 옆으로 삐죽 솟아나와 있다. 빙긋이 웃고있는 입가에 돋힌 짧은 수염은 볼따구니까지 간헐적으로 매달려 있어, 거 대한 체격과 어울려 거칠고 강인한 분위기를 풍겨낸다. 저런! 저 물건이 한 노인 작품이오? 청년은 눈살을 찌푸리며 복면인의 시체를 가리켰다. 아닌게 아니라 그 물건(?)은 조금전까지 사람이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 게 널부러져 있다. 요즘 아이들은 뼈다귀가 시원칠 않소이다. 조금만 힘주어 쓰다듬으면 저런 꼴이 된다니까. 회색 단삼의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혈랑곡(血狼谷)의 사람을 해치다니! 감히 우리 일에 끼어들 생각인가? 우낙은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다는듯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두 노소가 괘씸했다. 그는 애병(愛兵)인 귀문도(鬼文刀)를 움켜쥐고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위협이 담긴 음성 으로 외쳤다. 혈랑곡! 청년과 노인의 눈에는 한 줄기 기광(奇光)이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청년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북악신무 남패무양 구중비각 신비혈랑 만용천선(北嶽神武 南覇武陽 九重秘閣 神秘血 狼 萬容天旋)의 신비혈랑곡 말이오? 천하에 혈랑곡이 또 있는가? 청년이 노래하듯이 천하오대고수의 이십자구(二十子句)를 읊자, 우낙은 의기양양하여 말했다. 혈랑곡이라... 청년의 입가에 미소가 한층 짙어진다. 이 분이 바로 혈랑곡 사람이라고 하는군요. 무섭지 않소, 한노인? 조롱기가 섞인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은 하늘을 바라보며 큰 웃음을 터뜨린다. 장내에 있던 인물들은 노인이 터뜨린 의외의 웃음에 깜짝 놀랐다. 한참을 이어지던 노인의 웃음은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네놈은 그 한 마디로 살 길을 저버렸다. ...? 우낙은 물론 멍청히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던 구양현과 소소도, 노인의 매서운 말에 잠시 얼이 빠졌다. 노인의 어조엔 심상치않은 노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우낙을 바라보는 노인은, 마치 혈랑곡과 철천지한(徹天之恨) 이라도 맺힌 사람과 같았다. 젊은이, 검 좀 빌리세. 노인은 구양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손에 힘겹게 들려있 던 유리검을 빼았듯이 나꿔챘다. 병기를 쥔 노인은 유리검의 가벼운 무게에 잠깐 놀라며 손가락으로 검신을 가볍게 튕 겨본다. 스르릉. 살아있는 생명음(生命音)과 같은 영롱한 검명이 부드럽게 울려나오며 검신(劍身)은 은은한 신광(神光)을 내뿜었다. 좋은 검이야... 명품(名品)이로군! 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 노인은 연방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게를 가늠하듯 검을 두어 번 휘둘러 본 노인은, 검극(劍極)을 똑바로 치켜들어 우낙 의 미간을 겨누었다. 순간 상황이 가볍게 바뀐다. 검봉으로부터 번지는 으슬으슬한 기운. 우낙은 동지삭풍을 정면으로 받고있는 듯한 한기를 느끼며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노인의 얄팍한 입술꼬리가 살짝 비틀어진다. 십 초! ...? 십 초를 버티면 살려주마. 십 초. 열 개의 초식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열 번의 칼질이라는 뜻이다. 우낙은 기가 막혔다. 귀문도 우낙이 누구인가. 그의 귀문도법은 진남을 십여 년 간 종횡하며 수많은 인마를 도륙하면서도 적수를 찾 을 수 없었다. 그의 칼 아래 변변히 저항조차 못해보고 피를 뿌린 무사의 수가 얼마이던가. 지금 우낙이 속한 조직도 그러한 그의 무공을 높이 평가해서, 입각(入閣)과 동시에 단 번에 두령급의 직책을 하사하지 않았던가. 허리 굽은 초라한 노인이 십초지적(十招之敵) 운운하자 우낙은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의 늙은이가 죽고싶어 환장했구나! 우낙은 대갈일성과 함께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도집을 빠져나온 귀문도가 한 차례 부르르 떨리자 수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했던 귀문삼십육도(鬼文三十六刀)의 절초가 전개되었다. 두 자 남짓한 짧막한 귀문도는 협곡에서 요동치는 격류처럼 좌우 양쪽을 베며 빽빽한 도의 그물을 만들어 노인의 왜소한 체구를 덮쳐간다. 하지만... 일 초! 쇳소리가 섞인 노인의 목소리가 울리자 주위의 대기는 일순 얼어붙었다. 우우우...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휘몰아치며 늑대의 울음소리와 같은 음산한 파공성이 유리검 의 투명한 검신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 이런...? 순간 우낙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노인이 치켜든 검끝으로부터 뿌연 안개가 피어나는 듯 하더니, 그 안개는 피에 굶주린 늑대의 무리처럼 자신이 전개한 도세(刀勢)를 휘감으며 밀려오는 것이 아닌가. 분명 노인의 검은 움직였건만 검로(劍路)를 예측하기는 커녕 검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다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목덜미로 얼음조각이 들어갔을 때와 같은 섬뜩한 느낌. 그리고 본능이 감지하는 죽음의 음습한 냄새 뿐. 윽! 우낙은 노인의 기이한 검초를 피하기 위해 한껏 몸을 뒤틀었지만 목 옆의 살점이 한 뭉텅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불로 지지는 듯한 화끈한 통증이 그의 척추를 달려 내려갔다. 그러나 우낙 역시 당대의 고수 중 하나라고 자처하는 인물. 흩뿌려지는 자신의 핏속에서 언듯 모습을 드러낸 노인의 우수(右手) 어림을 향해 도를 내리꽂았다. 제법! 이 초! 뜻하지 않은 반격이 의외로운지, 노인은 칭찬인지 조롱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묘한 탄성 을 흘리며 검을 머리 위로 크게 돌리며 우낙의 귀문도를 맞받았다. 쩡. 쇠와 쇠가 부닥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중인의 귓청을 자극했다. 순간 우낙의 몸이 휘청거렸다. 유리검에 실린 노인의 내공은 괴이한 것이어서, 뚫린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처 럼 우낙의 내장을 진탕시켰다. 우낙은 기관지에 탁한 기운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귀문도를 회수하여 황급히 뒤로 밀려났다. 빌어먹을! 우낙의 입에선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도를 쥔 팔이 어깨어름까지 진동되었고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하지만 아픔에 앞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강호물로 때우면서도 아직까지 이러한 괴이한 내공을 지닌 검 수와는 겨룬 적은 없었던 것이다. 삼 초! 웃는가. 노인의 쭈글쭈글한 입가에 잔인한 금이 하얗게 그어졌다. 순간 노인은 땅을 박차며 전상방(前上方)으로 솟구쳤다. ...! 공격의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우낙의 눈이 노인을 쫒아 하늘로 향했을 때, 하늘의 일 부가 폭발했다. 검화. 어느새 하방으로 향한 노인의 손끝에서 화려한 검화가 피어오른 것이다. 대단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관전자의 입장이 되어버린 구양현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모른다. 그 역시 검을 수련한 지 십여 년. 강호에서 당당한 검수의 반열에 이름이 오른지 오래였다. 하지만 노인의 검초가 자신에게 향해졌을 경우를 상상해보면, 그간의 수련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저절로 얼굴이 붉어질 따름이다. 그만큼 노인의 몸놀림은 빠르고, 깨끗하고, 잔인했다. 구양현은 멋진 예술품을 본 사람처럼 박수라도 치고싶은 심정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소나기처럼 내리꽂히는 검영에 갇힌 우낙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허상과 실체를 분간할 수 없는 검의 폭풍은 우낙의 머리를 노리고 매섭게 쏟아진다. 피할 길은 없다. 이런 경우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이익!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머리 위를 향해 도막(刀幕)을 펼쳤다. 검이 걸리면 피할 수 있다. 우연일까. 귀문도의 일각에 유리검이 걸렸다. 하지만 황급히 분산시켜 전개한 도끝에 내력을 주입시키는 것은 우낙으로서는 역불급 이었다. 귀문도는 노인이 떨친 검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튕겨져 땅으로 떨어졌다. 우낙의 오른손은 아귀가 터지며 흘러나온 선혈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노인은 소리없이 우낙의 전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 초! 마지막이다! 유리검이 방어력을 상실한 우낙의 미간을 향해 사신(死神)과 같이 찔러간다. 아무런 사전동작없이 이루어진 찌름이지만 그 기세는 한껏 응축시킨 억센 용수철이 튕 겨지는 것과 같이 사납다. 우낙은 정면으로 크게 확산되어오는 검극(劍極)을 바라보며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흥! 네놈이 대신 죽겠다는 거냐? 우낙은 노인의 노갈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장 먼저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퍼뜩 미간을 더듬어간 그의 손가락 끝에는 검기에 의해 상한 듯, 살갖이 찢어지며 흐 른 피가 끈적하게 엉겨붙어 왔다. 황급히 장내를 바라보는 우낙의 눈에는 노인이 몸을 뒤로 물리며 부대연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시금 검끝에서 피어오르는 진저리치는 살기. 검을 상대에게 똑바로 겨누는 것은 이 무시무시한 검법의 기수식인 것 같았다. 부대연은 두 개의 철륜을 회수하며 혈랑탈 속에 감추어진 눈빛을 빛낸다. 우낙이 위기에 처하자 부대연이 급히 철륜을 던져 노인의 후방을 공격한 것이다. 노인은, 맹렬히 찔러가던 일 검으로 우낙을 죽이는 일은 간단한 일이지만, 부대연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쩔 수 없이 검을 멈추고 급히 몸을 돌려 철륜을 튕겨냈고, 우낙은 모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형님은 부상을 입으셨소. 대신 이 몸이 상대해 드리지요. 노선배께선 손속에 정을 두시길... 부대연은 네 개의 철륜 모아 앞으로 세우며 말했다. 정중한 예법. 하지만 노인은 코웃음을 친다. 의리있는 척해봐야 소용없지. 어차피 네놈도 살려둘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노인이 부대연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딛을 때, 곁에서 지켜보던 거대한 체구의 황삼청 년이 불쑥 입을 열었다. 한 노인, 그만 검을 거두세요. 이곳은 성인의 유훈(遺訓)이 깃든 곳, 더 이상의 소란은 선훈(先訓)을 거스르는 일입 니다. 생사지투를 멈추기에는 너무도 점잖은 말이다. 하지만 청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노인은 검을 거두고 청년의 뒤에 공손히 시립 한다. 공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회의노인과 같은 검수(劍手)를 태연히 부리는 청년의 신분 에 크게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들은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성지를 어지럽힌 죄는 더 이상 묻지 않으리다. 청년은 담담한 어조로 우낙과 부대연을 향해 말했다. 자존심이 상한 탓인지 무언가 발작하려고 하는 우낙을 눈짓으로 말린 부대연은 철륜을 거두며 말했다. 좋소. 오늘은 우리가 물러나겠소이다. 하지만 가르침을 주신 분의 고명(高名)이라도 알아야 헛되이 돌아가는 자들의 체면이 서지 않겠소? 청년은 싱긋 웃는다. 큰 붓으로 그린 듯한 선이 굵은 웃음. 그것을 바라보는 소소의 눈길이 몽롱해진다. 그녀의 사형인 구양현만해도 무림에서 기남(奇男)으로 이름이 높았고, 둘째 사형 백리 평은 금도옥인(金刀玉人)이라는 별호가 말해주듯 수려한 미목(美目)으로 강호가인(江 湖佳人)들의 선망의 한 몸에 받는 실정이었다. 지금 그녀의 눈 앞에서 웃음을 짓고 있는 이 황삼청년은 결코 그들보다 잘 생겼다고는 할 수 없었다. 청년의 얼굴은 미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선이 분명했다. 질끈 묶어 등뒤로 늘어뜨린 머리는 억센 철사와도 같이 뻗뻗해 보였고, 눈썹은 두 마 리 검은 벌레를 달아놓은 것 처럼 난잡하게 뻗쳐있었다. 게다가 시커멓게 자란 수염과 그 안으로 보이는 두툼한 입술은 그의 곰같은 체격과 더 불어 산도적이나 하면 딱 어울릴 사나움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저 웃음... 맑은 눈 속 깊은 곳에서부터 떠오르는 은은함은 아무 얽매임없이 흘러가는 구름처럼 막힘없는 자유로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소소의 뺨에는 홍조(紅潮)가 어리기 시작한다. 이름 따위가 무어 그리 중요하다고 감추겠소이까. 소생의 성은 석(石)가이고 이름은 대원(大原)이라 하오. 그리고 여기있는 나이답지않게 정정하신 노인은 성은 한(韓)이며, 이름은 내게도 알려 주지 않았으니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시든지 하시구료. 부대연은 청년이 순순히 이름을 말하자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석대원. 석대원... 곱씹듯이 몇 번을 되뇌여 보고는 그는 청년에게 가볍게 포권(抱拳)하였다. 그럼 이만... 부대연은 우낙을 향해 눈짓을 하고 신형을 날렸다. 오늘 일은 언젠가 반드시 갚아주마. 우낙은 짓씹듯이 한 마디 내뱉고는 부대연을 따라 사라져갔다. 석대원은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신비혈랑(神秘血狼)이라... 음모가 무르익은 것인가. (2) 소소의 시선은 예리하게 날이 선 한 자루의 소도(小刀)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사각. 소도는 그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나무를 깎고 있다. 소도가 나무 위를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일정한 크기의 나뭇밥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시간이 갈수록 나무는 길죽한 지팡이 모양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소소의 똘망똘망한 눈초리는 소도를 쥔 손으로 옮겨진다. 노인의 주름진 앙상한 손. 닭 한 마리조차 잡을 힘 없어 보이는 저 말라 비틀어진 손이 자신과 사형의 목숨을 구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두 분 덕택에 저와 소사매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할는지 모르겠군요. 구양현은 석대원과 한로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그들은 적심관 내의 넓은 방에 앉아 있었다. 적심관의 외견은 여기저기가 허물어지고 낡은 반면, 그 내부는 비교적 깨끗히 정돈되 어 있었다. 오십 평 남짓한 방은 과거 제당(祭堂)으로 사용되었던 듯, 검게 칠한 목판이 촘촘히 깔려 있었다. 방 북벽에 마련된 제단에는 가장자리가 우그러진 고물 향로 하나가 뎅그마니 올려져 있을 뿐, 그 흔한 목상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엷게 배어있는 먼지 냄새가 사람들의 눈살을 지푸리게 만들지만, 주기적으로 청소를 한 듯, 거미줄이나 곰팡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원 별 말씀을... 천한 산사람들이 쓸데없는 참견을 했을 뿐입니다. 설령 저희들이 아니었어도 천하에 이름높은 신무전의 제자를 누가 감히 어쩌겠습니까. 석대원은 구양현의 정중한 사례에 황급히 답례하며 말했다. 하지만 노인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나무를 깎아가는 소도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 고 있다. 한로, 지팡이는 뭐 하러 깎으시오? 석대원이 웅크린 채 조물락거리고 있는 노인에게 넌즈시 말을 건넨다. 문득 노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늙은이가 너무 설쳤더니 허리가 아파서 그렇소. 이제는 노복도 지팡이가 필요한 나이라오. 원, 환갑도 안 지난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세상 천지의 노인들이 웃겠소이다. 웃으라면 웃으라지요, 허허. 한로는 고개를 들고 석대원을 바라보며 웃었다. 석대원도 그를 마주하며 빙그레 웃는다. 주종 간의 관계라지만 마치 할아버지와 손자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훈훈함이 풍기 는 웃음들이다. 석대원은 고개를 돌려 구양현을 바라본다. 헌데, 두 분께선 이 외진 곳까지 어인 일로 오셨소이까? 석대원이 묻자 소소가 짤랑거리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저희는 이곳 적심관을 보려고 왔어요. ...? 석대원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예쁜 얼굴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설명이 이어지지 않자 다시 구양현을 바라본다. 구양현은 소사매가 몽혼연(夢魂煙)에서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입가에는 안도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석대원에게 이번 여행의 경위를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소생의 사부이신 신무대종께서는 천하의 고인(高人)중 진정으로 탄복한 사람은 오직 만용천선(萬容天旋)의 천선자(天旋子), 단 한 분 뿐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부께선 오래 전부터 천선자께서 은거해 계신다는 이 청류산으로 사람을 보내 선장 (仙長)을 청하려 하셨지만, 이미 도관은 황폐하고 선장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었지요. 사부께선 단념하지 않으시고 이곳을 순례지로 정하시여, 제자가 출도할 때마다 이곳을 순례하여 선장의 자취를 탐문케 하셨습니다. 이번에 마침 이 개구장이 사매의 순서가 되어, 소생이 수행하여 온 것입니다. 신무전을 노리는 흉악한 무리가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못한 터라... 그만 꼴 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석대원은 구양현의 말을 듣고 나직히 한숨을 쉰다. 몇 년 전부터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간혹 보이더니... 이들이었던가. 그의 입가엔 쓸쓸한 미소가 잠시 머문다. 만선만악(萬善萬惡)을 포용하신다는 천선자께서는 이미 우화등선(羽化登仙)하신지 오 래십니다. 소 대전주(蘇大殿主)께서 이제 이곳에 신경을 쓰실 필요는 없겠지요. 구양현과 소소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것이 사실입니까? 천선자께서 타계(他界)하시다니...! 구양현과 소소는 그들의 사부인 소철이 천선자를 흠모하여 <천하에 둘도 없는 기인이 며 당금의 평화를 있게한 무림의 대은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을 떠올리고는, 서 글픈 감회에 젖었다. 그러한 기인도 생로병사(生老病死) 질곡(桎梏)의 수레바퀴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니, 이 황적(荒寂)한 곳에서 드높은 이름을 홀로 묻은 것이다. 세상의 분진속사(粉塵俗事)들이 어찌 허무하지 않겠는가. 구양현은 우울한 마음을 떨쳐버리듯 화제를 돌렸다. 헌데, 석형의 고명(高名)과 풍모에서 소제는 무림에서 이름 높은 한 분의 대협이 연 상되는군요. 혹시... 강동제일가(江東弟一家)의 석대문, 석가주와 인척이라도 되시는지요. 구양현은 삼 년 전, 석대문의 결혼식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석대문의 당당한 풍모를 보고 감탄하였는데, 눈앞의 석대원이라는 청년을 처음 본 순간 그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연상했던 것이다. 사실 석대원과 석대문이라는 이름자는 차치하고서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어딘지 닮은 구석이 많았다. 강동제일가의 석대문... 구양현의 질문 속에 등장한 이름에 한로는 나무를 깎던 손길을 우뚝 멈추었다. 하하, 미천한 소생이 그런 명문과 인연을 둘 복이 있겠습니까? 석대원은 담담한 어조로 부인한다. 소주...! 한로는 그런 석대원을 바라보며, 한줄기 가슴저린 비애가 북받쳐 오르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 이리도 아플진대 당사자인 석대원은 오죽하겠는가. 그러한 와중에서도 일말의 동요없이 늠연하게 참고있는 석대원의 모습은 당당함에 앞 서 비장함을 풍겨내고 있었다. 젊은 주인은 원래 천품이 담백하였고, 죽음을 넘나드는 혹독한 수련으로 이미 마음을 다스리는 경지에 올라있는 것이다. 한로는 십일 년 전 자신의 손을 잡고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겨울산을 오른 석대원의 애처롭던 모습이 떠올라 눈가가 붉어졌다. 그리고 채찍... 암벽을 마주한 채, 자신이 휘두르던 채찍 아래서 울부짖던 소년... 그는 상념을 떨쳐버리듯 고개를 한 차례 저은 후, 입을 열었다. 소주, 드디어 혈랑곡이 강호에 나타났군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군요. 한바탕 큰 풍파를 면할 수 없게 되었지요. 놀라운 일입니다. 실로 운리(芸里) 선생의 혜안(慧眼)은 시공을 초월하고 있어서 십여 년 후의 일을 내 다보시는군요. 설마했건만... 혈랑곡이라니, 가증스러운 무리들 같으니라고! 두 노소의 선문답(禪問答)같은 얘기를 듣던 소소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혈랑이란 어떤 무리들이죠? 혈랑곡은 무슨 지명같은데 어디 있나요? 사매, 사부께서 <곤륜지회>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셨잖아. 오대고수 중 혈랑곡주가 바로 혈랑곡의 주인이지. 구양현이 소소에게 일러주었다. 석대원이 구양현의 설명에 덧붙였다. 혈랑곡은 신비혈랑이라는 말이 대변하는 것처럼 어디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석대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소소 뿐 아니라 구양현 또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혈랑곡도들이 출몰하는 것은, 북악남패로 양분되어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작금의 강호에 강력한 교란세력이 출현한 것을 의미합니다. 소소는 석대원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혈랑곡주가 <곤륜지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무시무시한 대마인이라는 것은 일찍이 조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힘의 균형은 무엇이고, 또 교란세력이라니... 사실 그녀는 그리 똑똑한 편이 아니었다. 석대원을 바라보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지만, 별다른 대답이 떠오를 리 없다. 옆에 앉은 구양현이 석대원에게 말했다. 헌데 오늘 겪은 일로 미루어, 소제는 혈랑곡이라는 단체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 군요. ... 저희를 습격했던 우낙이나 부대연은 대단한 위인들입니다. 우낙은 진남에서, 부대연은 장성(長城)밖의 요동(遼東)에서, 특정한 문파에 적을 두지 않고 낭인처럼 돌아다니던 자들인데, 그들이 혈랑곡에 소속되어 있다니... 흥! 그까짓 것들이 무슨 대단한 위인이라고! 다 깎은 지팡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한로가 코웃음을 쳤다. 구양현은 한로가 보여주었던 놀라운 검법을 떠올리곤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이때 석대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소가 불쑥 입을 열었다. 석오라버니, 오라버니의 무공이 그들 우모, 부모라는 자들보다 훨씬 더 강할 것 같아 요. 오라버니의 수하인 한노인만해도 몇 번 칼을 찔러서 우모라는 자를 간단히 물리쳤잖아 요. 오라버니의 사문(師門)은 어디죠? 오라버니? 석대원은 예쁘게 생긴 소녀가 난데없이 오라버니라고 녹아내릴 것 같이 부르자 당황했 다. 부리부리한 눈은 갑자기 둘 곳을 잃어 이리저리 돌아갔고, 햇빛에 그을려 가뜩이나 거 무스름한 얼굴은 더욱 까매졌다. 허허, 저런... 한로는 석대원의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늘그수레한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한창 나이를 이 두메산골에서 수련으로만 지새운 석대원이었으니, 귀엽게 생긴 여자아 이와의 수작을 어색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흠, 흠! 에... 소저께선 석모를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군요. 제 일신무공이라 함은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것, 그리고 기를 움직여 몸과 마음을 건 강하게 하는 몇 가지 방법에 불과할 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소저의 사문처럼 그 위명이 천하를 뒤덮는 그런 대단한 명문일 까닭이 없지요. 구양현은 석대원의 말을 듣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석형께선 겸양이 지나치시군요. 이 소사매는 사형들의 보살핌 속에서 너무 버릇없이 커서 예절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말괄량이이지요. 석형께선 예쁘게 봐 주시고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소소의 고운 눈꼬리가 샐쭉해진다. 그녀는 구양현의 다리를 매섭게 때리며 말했다. 흥! 삼 사형은 제가 있건없건 어디서나 제 흉만 보는군요. 또 한 번 그러면 대사형에게 일러서 삼사형을 혼내주도록 만들겠어요. 소소의 일장은, 물론 전혀 내력을 싣지않아서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얻어맞은 구양현의 얼굴은 형편없이 구겨진다. 그녀가 때린 부위가 공교롭게도 우낙의 칼에 의해 상처를 입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는 구양현의 얼굴을 보고 소소는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득의양양한 소소의 표정에서 구양현은 그녀가 고의로 그런 것을 알아차렸다. 망할 기집애! 구양현은 속으로 부득부득 이를 갈며 잡아먹을 듯이 소소를 노려보았다. 석대원과 한로는 이들 사형제의 사이가 매우 격이 없고 친근한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 다. 구양형, 호흡이 순조롭지 못 하신 것을 보니 내상이 가볍지 않은 듯 하오이다. 헌데 이곳은 워낙 벽지(僻地)라 변변한 약재가 없어서 걱정이군요. 석대원의 근심어린 말에 구양현은 싱긋 웃어보였다. 석형께서 염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소제의 상세는 그리 심각한 정도는 아니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헤헤, 사형은 이래뵈도 이름난 의가 출신이라고요. 아마 금방 나을거예요. 그렇지요, 사형? 하지만 구양현의 상세는 말과는 달리 꽤나 위중한 편이었다. 다리에 입은 외상이야 지혈산(止血散)을 뿌리고 효능이 좋은 금창약(金創藥)을 발랐으 니 사오 일 후면 움직이는데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대연의 철륜을 받을 때 역류한 기혈은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출발할 때 삼황보전환(三黃補傳丸)을 가져왔던 것이 천만 다행이군. 구양현은 내상에 좋은 요상약을 지니고 온 자신의 준비성에 감사했다. 세가지 황(黃)을 처방한 보전환은, 가벼운 내상이라면 보름안에 능히 치료해 줄 수 있 었다. 더구나 그는 소소의 말대로 의원의 수업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침을 이용한 치료도 어렵지 않게 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석형께선 이곳 적심관과 인연이 있는 것 같아 보이는군요. 석형의 사문이 혹시 천선자 어른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구양현의 묻자 석대원은 그런 물음이 나오리라 짐작했던 듯, 대수롭지않게 대답했다.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이전 선장의 보살핌을 받은 인연으로, 가끔 성지를 비질이나 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곳에 찾아오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석대문의 대답에 소소가 황급히 물었다. 역시 오라버니는 천선자어른의 전인(傳人)이었군요! 강호제일기인의 전인과 알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예요. 하지만 앞으로 이곳에 왜 못 오죠? 혹시 저희가 성지를 어지럽혀서인가요? 석대문은 소소를 바라보고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소저의 말씀은 틀렸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 어른의 의발(衣鉢)을 이어받을 복이 있겠습니까? 단지 크나큰 은혜를 소중히 간직하고,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후학(後學)에 불 과하지요. 하지만 구양현은 석대원이 계속 겸손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선자의 후예...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석대원의 담담한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앞으로 이곳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저희들이 이 청류산을 떠날 결심을 하였 기 때문입니다. 결코 두 분으로 인한 일이 아니니 괘념치 마십시오. 출도. 석대원은 이제 산인으로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풍진강호(風塵江湖)에 발을 딛을 생각인 것이다. 구양현은 가볍게 주먹을 모으며 하례(賀禮)한다. 소제가 석형의 출도를 경하드립니다. 앞으론 강호에서 자주 뵐 것을 생각하니 기쁘기 한량없군요. 하하. 강호에 나가게 되면 아마도 두 분께 많은 도움을 구해야 될 겁니다. 소생은 강호초출에다가, 산에서만 생활한 턱에 요사이 문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 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만두 하나, 국수 한 그릇을 먹어도 그 값이 얼마인지 모르니... 부디 귀찮게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소소가 방울이 구르는 듯한 교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러면 제가 까마득한 인생선배네요? 에헴! 염려하지 마세요. 이 누나가 예쁘게 돌봐 드릴 테니까... 소소의 장난기 어린 말에 석대원은 물론, 시종 근엄한 표정을 하고있던 한로마저 늙 은 볼을 무너뜨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웃음소리는 유리거울에 떨어진 옥구슬처럼, 수십 년 간 적심관을 무겁게 짓눌렀던 정 적과 고요를 맑게 깨뜨렸다. 五章 蘇州夜 (1) 삼주기(三州祈)라는 말이 있다. 모름지기 장부라면, 소주(蘇州) 계산승치(溪山勝致)에서 태어나 항주(杭州) 가염옥지 (佳艶玉池)에서 노닐다가 유주(幽州) 창량수해(蒼養樹海)에 기대어 죽고 싶다는 말이 다. 이유인 즉슨, 소주는 산세가 장엄하고 경관이 빼어나 풍수학상 재사(才士)가 많이 나 며, 항주는 경제가 번화하고 미인이 많아 청춘의 가연(佳緣)을 만들기 좋으며, 유주는 울창한 숲속에서 무한정으로 자라는 양재(良材)가 많아 좋은 관을 구할 수 있기 때문 이다. 드넓은 중원 십팔만리 속에서도 짝을 찾기 어려운 수려한 경치로 많은 문장가의 시구 (詩句)에 회자(膾炙)되어 왔던 소주. 밤의 어둠은 그 소주의 하늘 아래에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소주성 북문을 나서서 서북쪽으로 삼십여 리 걷다보면 무석(無錫)에 조금 못 미쳐, 천하절경으로 이름 높은 태호(太湖)의 풍광을 만나볼 수 있다. 낙조의 절경, 아가미 넷 달린 잉어요리와 더불어 태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주는 용 산(龍山)은, 그 이름에 걸맞게 용꼬리와 같은 긴 줄기를 드리워 무석과 소주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이 산줄기엔 강소성(江蘇省)에서는 보기 드물게 그 모양이 험벽한 세 봉우리가 있으니, 사람들은 이를 뭉뚱그려서 재의산(再疑山)이라고 부른다. 재의산... 산을 두 번이나 의심한다는 뜻이다. 이런 괴이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세 봉우리가 그 모양이 엇비슷하여, 산자락을 낀 관 도를 따라 걷다보면 혹시 앞서 지나온 길을 다시 걷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두 번 이나 거듭하게 되는 까닭이다. 재의산 세 봉우리 중 가장 북쪽 봉우리인 녹양봉(綠楊峰) 기슭에는 너무 낡아서 폐가 로 보이기 십상인 장원이 한 채 있다. 장원 뒷편엔 산을 타고 내려온 잡목림이 우거져 있다. 숲은 오랜 시간 사람에게 버려진 듯한 폐장원의 돌담을 타고 넘어와, 장원의 절반 가 량을 먹성 좋게 삼키고 있다. 낡고 버려진 장원.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들은 장원의 무너진 담, 허물어진 전각 사이사이로 오고가는 거 지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거지는 불쌍하다. 거지는 한덩이의 식은 밥을 얻기 위해서 아무에게나 굽신거려야 한다. 식당의 가마솥에서 무럭무럭 김을 내며 익어가는 만두를 보면 걸음을 멈추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주린 창자를 달래야 한다. 더러운 벌레를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아야 한다 - 자 존심이란 비럭질의 가장 큰 적이다. 가뭄이나 홍수로 흉년이 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시체는 굶어죽은 거지일 것이다. 언제나 얼굴은 누렇게 뜨고 눈빛은 풀어져 있는 것이 바로 거지이다. 거지란 이렇듯 불쌍하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 오랜 시간 이 장원을 관찰한 사람이 있다면, 장원을 돌아다니 는 거지들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남루한 의복과 초라한 몰골이지만 눈빛이 날카롭고 행동이 재빠르다. 그것은 분명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안다면 모두 고개를 끄떡일 것이다. 그들은 다름아닌 개방의 거지들이기 때문이다. 이 낡은 장원이 바로 무림 오대문파 중에서 가장 방대한 조직을 자랑하는 개방의 소 주분타(蘇州分駝)이다. 소주분타는 말이 분타이지 개봉(開封)의 본원(本院)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강남의 모든 분타를 관장하는 남개방의 총본산이다. 개방은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빈민부락이던 궁가촌(窮家村)에 연원을 두고있다. 여러 이민족들의 지배를 받던 암울한 시기, 끊이지않는 전쟁의 수라도(修羅圖)는 헤아 릴 수 없는 많은 난민들을 만들어냈다. 궁가촌은 이러한 수많은 난민들의 집합소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다른 난민촌과 달리 궁가촌이 자치능력을 지닌 하나의 조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한 명의 무인이 들어온 후부터였다. 그의 이름은 사마진우(司馬進盂), 훗날 개방을 창시한 이운(李雲)의 사부이다. 무반으로서 무척이나 불우했던 관로(官路)를 거쳤던 사마진우가 궁가촌에 들어간 특 별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수많은 유랑민들처럼 중토 각지를 이리저리 전전하다가 우연히 머문 곳이 궁가촌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후, 관할 관청과 정식으로 허가되지 않은 부락 사이의 조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락민들의 힘을 모았던 것도, 어찌 보면 우연일지도 모르 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 사사한 이운은 그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이운은 부락의 보다 효율적인 생존을 위해 구체적인 사업을 시행하였다. 우선 능력은 있으나 시대를 만나지 못한 불우한 인재들을 부락으로 흡수하였다. 그가 천하의 요회(要會) 라고 불리는 대도시 변량(지금의 開封)에 개방이라는 방회를 설립하자, 그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언제나 지저분한 옷을 입고 다녀 폐포신통(廢布神通)이라고 불렸던 이운. 백성들의 고통은 나몰라라 하던 당시의 가진자들을 극도로 혐오했던 이운. 문파의 이름을 굳이 <거지들의 방회>로 지은 것도 그러한 그의 성격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후 개방은 오호십육국과 송대를 거치며 성쇠의 역사를 반복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다른 방파와는 달리 그 방세(幇勢)가 평세(平世)면 쇠해지고, 난세(亂 世)면 성해진다는 점이다. 하기야 모든 백성이 배불리 먹고 사는 태평성대에, 누가 더러운 옷을 입고 구걸다니는 거지가 되려 할까. 하지만 남송 말엽 여진과 몽고의 말발굽이 중토를 유린하던 시기, 고수로 민간에서는 신앙처럼 알려진 전설적인 구지신개 홍공(洪公 : 홍콩의 작가 김용의 연작소설에 등장 하는 洪七公은 야사에 실존하는 기인이다. 하지만 그가 과연 강호의 방회를 이끌었는가는 알 수 없는 일이다)이 방주로 취임하자 일취월장으로 발전하여 천하제일대방이라는 칭송을 받기에 이르렀다. 무릇 천하의 모든 것에는 전기(轉機)가 있기 마련이다. 개방의 융성도 강호의 모든 방회가 쇠락하던 원대에 들어서자, 그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명초의 강호사를 핏빛으로 물들였던 여산백련교와의 싸움에서 수뇌부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린 개방은 재기하기 어려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불행은 언제나 겹치는 법.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개방을 더욱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것이 바로 방내 북오의 파(北汚衣派)와 남정의파(南淨衣派)의 분쟁이다. 본디 궁가촌에서 이어져 개방을 지배하던 세력은 북오의파였다. 남정의파는 구지신개 홍공이 문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받아들인 강남 거지들의 모임 이었다. 원류인 북오의파에 비하여 방내 입지가 미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구지신개 이후 열 한 명의 방주 중 남정의파 출신은 한 명도 없다는 점은 그러한 사실 을 확인시켜주는 단적인 예이다. 남정의파는 방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자신들의 위치를 새롭게 확립하기 위해 타 문 파의 힘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의 분쟁이, 비록 <조직의 효율적인 운영에 대한 논쟁>이라는 생산적인 이름을 빌 리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쌓이고 쌓였던 지역간의 해묵은 감정이 담겨져 있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유혈사태까지 벌어지며 개방은 두 개의 방파로 갈라서기 직전까지 치달았다. 개방이 분파의 위기를 극복하게 된 것은 불가항력의 힘을 지니고 있는 절대적인 외적 이 등장했기 떄문이다. 그 외적이란 다름아닌 백련교수 서문숭이 이끄는 무양문. 개방이 쇠락의 길을 걷게 만든 원흉 서문호충의 후예가 개방을 결속시키는 은인(?)이 된 것은 공교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서문숭에 의해 봉문당한 십 년 간, 개방도들은 오(汚) 정(淨)의 구분없이 한마음으로 힘을 단련했다. 그리고 십여 년 전, 그 능력이 능히 구지신개에 비견된다는 철포결(鐵布結) 우근(于 勤)이 취임하자, 개방은 제2의 중흥기를 맞이하여 활짝 개화(開花)할 수 있었다. 개방의 현임 소주분타주는 용호풍운(龍虎風雲) 사(四)장로 중 풍장로(風長老) 직위를 맡고 있는 삼각풍(三脚風) 위백(爲栢). <다리 셋 달린 바람>이라는 별호처럼, 몸이 빠르기로 강호에서 따를 자가 없다는 경공 대가(輕功大家)이기도 하다. 현재 정의파의 영수격이기도한 위백은 방주인 우근을 보필하여 개방의 힘이 하나로 뭉 치는데 크게 공을 세운 위인이다. 강호명숙으로 이름을 날릴 정도의 고강한 무공과 고지식하리만큼 공정한 성격을 지녀, 방내는 물론 방외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신망이 두텁다. (2) 삼경(三經). 열나흘의 밝은 달빛이 교교하게 흩뿌려지는 폐장원의 동편 담장 아래에는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엉성한 초소가 보인다. 초소 옆으로는 탁탁 잔솔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화톳불... 일렁이는 불꽃 사이로 음산한 그림자를 땅바닥에 길게 드리운, 남루한 의복을 걸친 사 내 두 명이 불침번을 서고 있다. 스슬거리는 풀벌레 소리... 한 사내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듯, 초소의 기둥에 기대앉아 무겁게 떨어지는 고개를 연발 치켜세우곤 한다. 도(逃) 사형, 잠시 후면 교대조가 올거요. 제발 그때까지만 참으시구려. 꾸벅거리는 사내를 안스럽게 바라보던 마른 얼굴의 사내가 혀를 차며 말한다. 하지만 도사형이라고 불린, 거지 답지않게 기름이 흐르는 살집좋은 사내의 얼굴에서는 좀처럼 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두른다. 으음... 누가 오면 깨워. 난... 난 지금 눈 좀 붙여야 살겠어. 사형도 참, 지난 달에도 약(藥) 사형이 졸다가 장(張) 사백에게 걸려 호되게 경을 치 지 않았소. 아직도 절둑거리는 약 사형 생각을 해봐요. 사형도 오행봉으로 늘씬하게 맞고 싶소? 삐쩍마른 사내는 졸던 사내의 어깨를 흔들었다. 도 사형이라고 불린 사내는 한두 번 어깨를 뿌리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 킨다. 그는 졸음으로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크게 기지개를 킨다. 그의 육신을 반쯤 지배하던 졸음은 문득 짜증으로 바뀐다. 우라질... 정말 죽겠네! 나는 이놈의 짓이 제일 싫어. 거지들 소굴에 뭐 훔쳐갈 것이 있다고 보초를 곳곳에 세운담. 이(李)아우, 자네 생각에도 타주(駝主)가 좀 신경과민인 것 같지 않나? 그의 말대로 장원 여기저기에서 초소에서 피우는 듯한 화톳불의 광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李)라고 불린 삐쩍마른 거지가 낄낄거린다. 도사형, 요즘 서창(西娼)의 애월이에게 홀딱 빠지더니, 부쩍 몸이 허해지신 것 같소. 쉿! 윤(尹) 사숙이 듣는 날엔 난 박살나네. 안 그래도 윤 사숙은 애월이가 다른 기둥서방이 생긴 것 같다며 단단히 벼르던 눈치던 데... 그 얘기 어디가서 함부로 하지 말게나.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도가가 애원조로 말한다. 마른 거지는 방정맞아 보이는 입 주위로 연방 음흉스런 웃음을 흘린다. 내 참, 사내가 이리 담이 작아서야. 창기(娼妓)야 화대내는 놈이 임자지, 따로 임자가 있겠소? 그리고 윤 사숙도 그렇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스물도 안 되는 창기 사타구니에서 허부적거릴 꼴이란. 생각만해도 우스운 일 아니오? 누가 아니래. 체통없는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애월이 말을 들으면 맨날 와서는 문전만 더럽히고 간다나? 하긴, 다 늙은 나이에 방사(房事)가 제대로 될 리 없지. 도가는 자신의 젊음이 자랑스러운듯 묵직한 가운데 물건을 툭툭 쳐 보았다. 사형, 그나저나 삐쩍마른 애월이가 뭐 그리 좋다고 숙질간에 동서가 된단 말이오? 계집이란 자고로 가슴이 흐벅지게 발달하고 엉덩이가 펑퍼짐해야 제 맛이지. 그건 자네가 몰라서 그래. 애월이 고년이 감창을 부리며 앙탈할 때면... 으흐흐... 도가는 애월이의 하늘거리는 자태가 떠오르는 듯 입가에 게슴츠레한 미소를 띠우며 부르르 진저리쳤다. 그러면... 어디 소제도 한 번... 옛끼! 내 아무리 거지라지만 자네하고까지 구멍동서가 되라는 말인가? 낄낄대는 웃음 속에서 사내들의 음담패설은 멈출 줄 모른다. 그들은 고래(古來)로 불침번을 서며 시간을 때우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을 터득한 모양 이다. 그들은 밤하늘에 흘러가던 구름이 달을 가린 것도 깨닫지 못하고 시시덕거린다. 하지만 설령 두 사내가 정신을 똑바로 가다듬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고 한들, 귀신 과 같은 검은 그림자 하나가 초소 담장을 넘어 내원(內園)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열 자가 넘는 담장을 가볍게 날아넘은 흑영(黑影)은 장내를 달려 정원에 구석에 있는 석등 뒤로 몸을 숨겼다. 단단해 보이는 몸뚱아리는 착 달라붙는 칠흙같은 야행복(夜行服)으로 감춰져 있었고, 얼굴 역시 검은 복면 안에 감춰져 있다. 그의 몸에서 드러난 것이라고는 마디가 투박해보이는 억센 손, 그리고 눈구멍을 통해 파랗게 피어오르는 한 쌍의 한성(寒星) 같은 눈동자... 우선 건물들의 배치를 살펴야 겠군. 흑영은 석등 뒤에서 몸을 날려 십여 장 앞에 떨어진 전각을 향해 달려갔다. 석등을 비껴가며 순간적으로 달빛 아래 노출된 그의 체구는 대단히 장대한 것이다. 하지만 표홀한 움직임은 도둑고양이의 그것과 같아서, 풀잎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 는다. 그는 전각 아래에 다다르자 신형을 위로 뽑아 처마 밑에 달라붙었다. 구름이 지나가며 어슴푸레한 달빛이 장원을 비춘다. 흑영은 처마를 통해 전각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는 오래 몸을 감출 수 없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하늘과 경계하는 곳에서는 움직임이 드러나기 쉽다. 이러한 잠행수칙에 대해 잘 알고있는 그는 빠른 시선으로 장원의 모양과 보초들의 위 치를 확인한다. 동편에 둘, 그리고 북편에 둘인가... 초소의 배치와 그 시야의 사각(死角)을 가늠하던 그는 이윽고 움직일 방향을 결정했는 지, 전각의 지붕으로부터 장원의 중앙으로 몸을 날렸다. 엇? ...? 방금 무언가 지나가지 않았나? 글쎄, 난 못 봤는데. 뭐가 지나갔나? 음... 그래? 하긴... 나도 보지는 못했어. 눈이 침침해서 그런가? 잠깐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이 순간 복면의 침입자는 수풀 속에 납작 엎드린 채 내원의 북쪽 담장을 지키던 보초 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었다. 거지 주제에... 제법 귀가 밝은 놈이군. 오래살고 싶으면 못본 척 해라... 그가 오늘 이 폐장원에 침입한 이유는 누구를 해치거나 소란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적을 발각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차하면 어쩔 수 없이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기분 탓이겠지 뭐... 그나저나 내가 아까 어디까지 말했지? 음... 닭 두 마리를 가지고 나온 데까지 애기했어. 그래, 내가 고놈의 모가지를 요렇게 꽉 비틀어 쥐고 있었지. 근데, 막 문밖을 나오려는데 말이야... 그들은 오늘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잠시 곁길로 샜던 화제는 다시 이어진다. 살금살금 그 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복면인은 내심 고소를 짓고 있다. 그놈 장수하겠군. 내원의 담장은 사람 키의 두 배나 된다. 담장 한 구석에 다다른 그는 구렁이처럼 벽에 붙어 담장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고도의 벽호공(壁虎功)이다. 담장 너머로 내원을 잠시 살피던 그는 은신할 만한 곳을 찾았는지 주저없이 담을 타 고 넘었다. 그는 또 한 번 널직한 정원을 가로지른 후에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여긴가... 흑영은 눈앞에 있는 삼층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낡아빠진 장원 내에서 유일하게 잘 단장된 건물이기도 하다. 건물 남쪽의 입구에는 두 명의 보초가 서 있다. 밤손님 체면에 대문으로 갈 수야 없지... 소리없이 건물 뒤로 돌아간 흑영의 눈이 빛난다. 그곳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다. 장정 셋이 손을 잡아야 간신히 둘레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우람한 것이, 아마도 수령 이 수백 년은 됨 직하다. 이 정도라면 사다리로 적격일 것이다. 그는 그중 한 그루를 선택하여 가지 위로 사뿐히 날아오른다. 그의 경공은 대단히 교묘한 것이어서 땅을 박찰 때나 가지 위에 내려앉을 때에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그는 손을 내밀어서 근처의 은행잎을 만져보았다. 한여름의 소주의 대기는 대단히 불안한 것이어서 어떤 날은 하루에도 두어 번 씩 소나 기가 내리곤 했다. 잎은 오늘 낮에 내린 소나기로 촉촉히 젖어 있다. 그것은 기척을 숨기는데 크게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그는 높은쪽 가지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지상으로부터 오륙 장은 떨어졌을까. 흑영은 나뭇잎 사이로 전방을 바라본다. 건물의 삼 층. 남부의 무더운 날씨 탓인지 창문들은 하나같이 활짝 열려있다. 삼 장 정도일까? 흑영은 건물과의 거리를 가늠한다. 이 정도면... 그는 가지 끝을 차며 가볍게 몸을 띄운다. 삼 장이면 결코 가깝다고 할 수 없는 거리. 하지만 거대한 새와 같은 그림자는 그 거리를 한 순간에 줄여버렸다. 잠시 창턱에서 어른거리던 그림자는 곧바로 창문 안으로 사라졌다. 처음 월담한 후 건물의 창문을 넘어들어간 순간까지의 시간은 일 각 여... 장원 안에는 많은 감시자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3) 흑영이 넘어들어온 창은 건물 삼층을 횡으로 길게 가로지르고 있는 복도의 중앙에 달 려있었다. 횡으로 난 복도의 중앙은 종으로 난 또다른 복도와 정(丁)자 모양으로 만나고 있다. 열나흘 밝은 달빛을 등뒤로 받고 있는 그의 전면에는, 유령같은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 리는 사각의 백색 창영(窓影)과 박쥐같은 어두움이 잠복해있는 복도가 긴 동굴처럼 펼 쳐져 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몸을 숙인 채 복도 위를 소리없이 미끌어지기 시작한다. ...? 일순 멈칫하는 흑영.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이다. 소리는 앞쪽의 방문으로부터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다가간다. 으음... 헉, 헉. 아... 여보! 아... 방문 앞에 다다른 흑영의 눈빛이 야릇해진다. 방은 아마도 침실인 듯하다. 그리고 그 안에선 오늘 같은 달 좋은 밤에 가장 어울릴 법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누군지 아침에 코피깨나 쏟겠군. 군자라면 이런 대목에서 귀를 씻고 자리를 피해주는 법이다. 그는 내심 실소를 흘린다. 하기야 양상군자(梁上君子)도 군자가 아니던가. 조심스럽게 방문 앞을 지나치던 그의 귀에 여인의 짜증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여보? 벌써...? 호기심이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었다. 사내가 실정(失精)을 한 모양이다. 잠시 어색한 숨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사내의 민망한 목소리가 들린다. 휴... 이젠 나도 늙었나 보구료. 젊디 젊은 당신에겐 미안하군. 허! 천하의 위백이 이 무슨...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여인의 다소곳한 음성이 들려온다. 아니에요. 당신이... 아마 여름을 타시나봐요. 전 괜찮으니, 신경쓰지 마시고 그만 주무세요. 위백? 흑영은 방안에서 들려오는 짧막한 대화로부터, 방사를 벌이던 사내가 이곳의 주인인 삼각풍 위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백이라... 하지만 그의 조사에 의하면 위백은 오래 전 상처(喪妻)했다. 위백이 재혼했던가? 찰나적인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런 것은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방안의 인물이 위백이라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위백은 자타가 공인하는 고수. 그는 운신에 더 한층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위백이 소리소문없이 재혼했다는 사실이 이번 행보와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사 실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는 복도 끝에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다른 것들보다 갑절이나 커 보이는 양개문(兩開門). 문은 다행히 잠겨있지 않았다. 소리없이 문을 밀고 들어간 그는 방안의 짙은 어둠에도 전혀 장애를 받지 않는 듯, 익 숙하게 사방을 살핀다. 제대로 찾았군... 그는 고개를 끄떡인다. 서안(書案) 위에 쌓여있는 문서들과 벽에 붙은 빽빽한 문갑에서 이 방이 집무실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흑영은 문갑으로 다가갔다. 문갑 하나하나에 붙어있는 목록표는 방주인의 꼼꼼한 성격을 대변해준다. 그는 문갑 하나를 열고 잘 정리된 문서더미를 뒤적인다. 인사기록서...? 한 장의 문서를 들고 바라보던 그의 눈이 회심의 미소를 띤다. 낡고 변색된 종이 위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들과 그 신상이 차분한 필체로 적혀있었다. 서류 하단에는 작성일과 작성인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종이를 두 번 곱게 접어 품속에 갈무리한다. 인사기록서이든, 신변잡기이든, 서류의 내용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작성자의 이름 뿐... 그는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미끌어져가는 그의 등 뒤로 아직 잠을 못 이룬 남녀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간 간히 들린다. 이윽고 그는 자신이 들어왔던 창 앞에 이르렀다. 잠시 아래를 살피던 그는 훌쩍 장대한 몸을 날렸다. 남들보다 새벽잠이 많은 황칠(黃七)은 교대지로 걸어가면서 연방 투덜거리고 있었다. 순번이 잘못되었다느니, 뭔가 농간이 있을 것이라느니... 망할! 또 시작이군. 재수없이 황칠과 동번(同番)을 서는 탓에 매일같이 온갖 불평을 들어줘야만 했던 불 쌍한 거지 양고(楊庫). 잠시 황칠을 노려보다가 짜증스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던 그는 어느 한 순간 깜짝 놀랐다. 그들로부터 서너 장 쯤 떨어진 풀숲에서 움직이는 시커먼 그림자를 본 것이다. 그림자의 윗부분이 그들을 향해 돌려지는 순간, 양고는 얼어붙었다. 양고의 신지를 새하얗게 덮씌워오는 섬광. 그것은 사람의 눈빛이다. 이... 이봐...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뱀 앞에 웅크린 개구리처럼 사고가 이어지지 않는다. 이상한 기색을 느낀 황칠이 몸을 돌렸다. 이때 황칠은 거대한 검은 구름이 덮쳐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침...입자...? 황칠의 외침이 목구멍으로부터 채 빠져나오기 전에 검은 구름은 두 거지의 얼굴 앞까 지 몰아닥친다. 억센 손아귀가 검은 구름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와 황칠과 양고의 아혈을 찍고, 숨쉴 새 없이 가슴 아래의 현기혈(玄機穴)과 배의 제문혈(臍門穴)을 눌러간다. 불쌍한 두 거지는 반항 한 번 못해보고 꼼짝없이 제압당한 채, 새벽 이슬이 내리기 시 작한 풀잎 위로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이. 검은 구름으로부터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는 사지가 굳어버린 두 거지를 근처의 수풀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의 수법은 무림에서 금룡박쇄(禁龍縛鎖)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능히 사람의 근육 을 끊고 뼈를 으스러뜨릴 수 있는 잔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사람을 상하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력을 조절하여 적당히 손을 썼으니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은 잠시 후면 깨어날 수 있 을 테고, 막힌 혈도 역시 해뜰 무렵이면 저절로 풀릴 것이다. 잠시 후, 들어왔을 때와 같은 담장을 넘어가는 흑영의 귀엔 도·이 두 거지의 투덜거 림이 들렸다. 망할 놈의 교대조 놈들은 왜 이리 안 와? 이렇다 날 새겠네. 하지만 그들이 기다리는 교대조는 이슬을 맞으며 풀숲 안에서 푹 쉬고 있었고, 그들 은 아마도 그 곳에서 날 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개방의 소주분타에서는 가벼운 소란이 일어났다. 삼각풍 위백은 양고와 황칠의 장황한 설명에서, 지난밤에 대단한 침입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상한 사람이나 없어진 귀중품이 전혀 없으니, 매우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위백은, 그가 팔 년 전 이곳 분타주로 부임할 무렵 작성했던 방도들의 신상서 류 중 한 장이 사라졌다는 것을,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할 것이다. (4) 대운하(大運河)는 만리장성과 함께 화족(華族)의 수준높은 토목기술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수나라 때 건설된 길이 칠천여 리의 이 엄청난 인공수로는 소주라는 도시에게는 성장 의 젖줄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고마운 존재이다. 성 서북쪽으로 지나가는 운하 덕택에 소주는 서북쪽을 중심으로한 상업지역과 동남쪽 을 중심으로한 주거지역으로 자연스럽게 나뉘어졌다. 이렇게 번화한 서북쪽에는 춘추시대 이후 전해져오는 유서깊은 사적(史蹟)들이 많아, 오고가는 유람객들로 언제나 불야성을 이룬다. 호구릉(虎丘陵)도 그러한 사적들 중 하나이다. 호구릉은 춘추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부친 합려(闔閭)의 시신을 이장(移葬)한 릉이다. 이장한 후 사흘 후부터 하얀 호랑이가 나타나 묘를 지켰다고 하여 호구릉이라 불리는 이곳은, 부차가 아비의 시신과 함께 삼천 자루의 검을 묻어 월왕(越王) 구천(句踐)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하여 갱검지(坑劍池)라는 별칭이 있기도 하다. 강동제일가주 석대문은 호구릉 주변 객점의 이층 숙소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창밖으로 보이는 호구탑(虎丘塔)의 비스듬한 모양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오대(五代) 말기에 호구릉 남쪽에 세워진 탑... 물론 처음에는 곧게 세워졌겠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쪽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여, 언뜻 보기에도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위태함이 묻어나온다. 하지만 그런 기경(奇慶)조차 사내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머리속을 꽉 채우고 있는 한 가지 의문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탁자 위로 돌아온다. 탁자 위에는 두 장의 종이가 놓여 있다. 한 장은 빳빳한 고급 당지(唐紙), 다른 한 장은 누렇게 변색된 질 나쁜 한지... 부리부리한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다. 아무리 보아도 같군... 물론 지질을 말함이 아니다. 그의 혼잣말처럼 두 종이 위에 쓰인 필체는 어김없이 일치했다. 비록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보아도 동일인이 쓴 글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다면 흉수는 위백인가? 석대문은 몸을 의자 깊이 파묻는다. 무언가가 있다... 을미수 양무청의 실종에 관해 직접 조사를 결심한 그는, 우선 양숙부의 처소인 소흥 (紹興)의 양가장(楊家莊)으로 찾아갔다. 양가장에서의 조사는 작은 수확이 있었다. 양무청의 침실을 조사하던 중 침상 밑에 감춰진 문갑을 발견한 것이다. 문갑 안에는 삼각풍 위백이 양숙부에게 보낸 짧막한 편지가 들어있었다. <양무청형 친전(親前). 별래무양(別來無養)하신지요. 이렇게 황망히 전갈을 보내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오라, 수삼 일 전 방도들의 보고를 받던 중 혈랑도(血狼徒)들이 소주성내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렇게 급히 소식을 전하니, 근일내 이곳으로 왕림하시면 자세한 내막을 알려드 리겠습니다. 위백 배상(拜上).> 편지의 날짜는 한 달 전으로 되어있었다. 양무청은 이 서신을 받고 즉시 소주로 달려가던 중 실종되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우 석대전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위백은 혈랑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을 뿐 아니라 양무청에게 편지를 보낸 일도 없다고 하지 않는가. 만약 이 편지가 위백의 친필이 분명하다면 양무청의 실종에 그가 암중으로 관여된 것 이 분명하다. 하지만... 상대는 개방... 섣부른 소란은 곤란하지. 위백은 무림에서 협객으로 이름이 높았고, 더욱이 천하제일대방인 개방의 거물이다. 일파만파(一波萬波)라고 하지 않던가. 이 일을 섣불리 공개하여 위백을 직접 추궁하는 것은 하중하책(下中下策)일 것이다. 무언가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에는... 이일엔 전문가가 필요하군. 전문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석대문은 푹신한 의자 속에 파묻힌 채 가만히 눈을 감는다. 알고있는 수많은 강호의 인물들이 하나하나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다가 한 사람의 이름에 생각이 미쳤다. 선이 굵은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래. 이 일에 아마 그보다 적임자는 없을 것이다. 석대문은 의자에서 일어서 침상으로 갔다. 어젯밤 어울리지 않게 도둑고양이 흉내를 낸 탓에 한잠도 자지 못한 것이다. 부족한 수면이 나른한 피곤과 함께 밀려온다. 침상 위로 털썩 몸을 던진 그는 눈을 감았다. (5) 소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구(康丘)의 북쪽 북산촌(北汕村) 주민들에겐 황제보 다 더 두려운 존재가 있었다. 관(官)은 멀지만 그는 항상 곁에 있었다. 칼과 주먹으로 북산촌의 빈민들을 지배하며 온갖 포악한 짓을 일삼는 존재... 그곳 주민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야황(夜皇)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실 야황이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는 무공을 모르는 힘없는 백성들에게나 통용 되는 것이다. 공야진(孔冶進). 그의 무공은 꽤 쓸만한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창 시절의 얘기. 이미 환갑이 지난 노인에 불과한 공야진에게선 예전과 같은 무용(武勇)을 찾아보기 힘 들다. 근력이 떨어진 팔다리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궂은 날이면 저려온다. 팔다리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용기도 사그러드는 법. 공야진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곤란한 적과의 시비를 스스로 회피하기 시작했다. 무인으로서의 공야진은 이제 쉴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강호활동을 정리하고 북산촌의 으리으리한 장원에 틀어박혀 좀처럼 이 바 닥을 벗어나질 않았다. 비록 초라하게 늙어버린 공야진이지만, 북산촌에서는 누가 뭐래도 최고수였다. 주민들이 밤의 황제 라고 부르며 그를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공야진의 인생 역정은 매우 기구한 편이다. 본디 그는 유림(儒林) 명문인 왕가(王家) 출신이었다. 명문 출신답게 어려서부터 문장에 탁월함이 있어 일찍이 대과에 탐화(探花 : 3등)로 급제, 제법 높은 관직을 지낸 전력도 있었다. 연왕(燕王)의 황위찬탈이 있던 해. 대내에 몰아친 숙청의 칼날은 열렬한 보수파인 그에게도 여지없이 떨어졌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금군(禁軍)의 눈을 속이고 깊은 산중으로 달아났다. 산중에서 우연히 이인(異人)을 만난 것은 그의 인생에 몇 안 되는 행운 중 하나... 그는 팔 년 간 그곳에서 상승내공과 고명한 검장지술(劍掌之術)을 배울 수 있었다. 그후 이름을 공야진이라고 고친 후 강호를 떠돌다가, 늙고 힘이 떨어지자 이곳 북산촌 으로 들어와 밤거리를 지배해온 것이다. 공야진을 아는 무림인들은 그의 무공보다는 다른 재주를 높이 평가했으니, 바로 위조 술(僞造術)이다. 각종 서체에 달인인 그는 눈썰미가 빠르고 손재주가 좋았다. 그의 손을 거치면 흉내내지 못하는 필체가 없었고, 새기지 못하는 도장이 없었던 것이 다. 그래서 무림에선 공야진을 귀조수(鬼造手)라 불렀고, 기(棋)·화(火)·취(醉)·통(通)· 조(造) 의 강호오괴(江湖五怪)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런 기구한 내력의 공야진은 지금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그는 아니꼬운 눈초리로 눈앞을 꽉 채울 정도로 체격이 큰 검은 옷의 사내를 노려본다. 이 자는 건방지게도 북산촌의 제황에게 조금의 존경심도 지니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노부가 귀가 어두워서 그러니, 다시 한 번 말해주지 않겠나? 공야진은 노기를 꾹꾹 참으며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검은 옷의 사내는 여전히 무표정하다. 공야 노인께서 할 일이 있으니 어디 좀 가주셔야겠소. 음절 하나하나가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 이건 숫제 명령조이다. 공야진은 특별히 호화롭게 만들어진 의자의 등받이에서 상체를 세운다. 눈가에 무수히 많은 잔주름이 생긴다. 그는 건방진 불청객을 찬찬히 살펴본다. 삼십 세 전후의 나이... 외가공부를 익혔나? 탄탄한 체격이군. 사내를 바라보던 공야진의 잿빛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린다. 태양혈(太陽穴)이 밋밋한 것을 보면 사내의 내공은 별 볼일 없으리라. 건방진 자식! 얘들아, 이 곰 같은 놈에게 예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렴. 예! 공야진은 등받이로 몸을 실으며 귀찮은 어조를 내뱉는다. 그의 뒷전에 천장(天將)같이 늠름하게 서있던 세 명의 장한은 큰소리로 대답하며 검은 옷의 사내에게로 다가선다. 목덜미가 윗가슴에 달라붙은 떡벌어진 체격. 흉터투성이의 험상궂은 얼굴에는 웬만한 사람이면 보기만 해도 오줌을 지릴 정도로 위 압적인 표정이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눈가로는 옅은 지루함이 새겨진다. 이봐 곰퉁이! 어른에게 뭘 배울 때에는 무릎을 꿇고 공손히 굴어야 한다는 걸 네 애비가 안 알려주 대? 세 장한 중 한쪽 눈에 검은색 안대를 한 애꾸가 느물거린다. 말 잘했다. 차가운 음성과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몸이 잠시 흔들거린다. 바람처럼 표흘한 발길질. 빠각.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애꾸는 무릎을 감싸며 마루 위를 뒹굴었다. 죽는 시늉을 하며 이리저리 구르는 품이, 아마도 무릎뼈가 부러지기라도 한 것 같다. 이 새끼!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돌발적인 사태에 놀라며 남아있던 두 명의 장한이 병기를 꺼내들고 검은 옷의 사내에 게 달려들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삼십 근 유성추(流星鎚)와 날이 시퍼런 장도가 사내의 거 대한 몸 위로 쏟아진다. 귀찮군. 검은 옷의 사내는 자신의 몸 위로 쏟아져오는 병기들을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바라본 후, 대뜸 공세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조금 먼저 날아든 유성추가 사내의 얼굴 옆으로 가볍게 스쳐지난다. 순간 왼손이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러지며 유성추의 사슬을 낚아챈다. 사내가 사슬을 쥔 왼손을 떨치자, 시차를 두고 사내를 쪼갤 듯이 휘둘러지던 장도는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사슬이 크게 출렁이며 마치 눈달린 뱀처럼 장도의 중앙을 여지없이 묶어버렸기 때문이 다. 단 한 수에 병기를 제압당한 흉한들의 눈이 커진다. 신발바닥... 족히 십육 문은 될 듯한 거대한 신발의 바닥이 눈 앞을 꽉 채워왔기 때문이다. 원앙퇴(鴛鴦腿). 강호에서 널리 알려진 각법(脚法)이다. 여느 각법과는 달리 두 발을 동시에 당에서 띄워, 두 발이 마치 원앙처럼 사이좋게 상 대를 공격할 수 있다. 지극히 일반적인 무공... 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몸을 빌어 전개된 원앙퇴는 여느 원앙퇴와는 차원이 달 랐다. 교차되는 두 발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게 빨랐고, 무엇보다도 묵직한 힘이 담겨 있었다. 두 명의 흉한은 엄청난 둔기(?)에 얼굴과 가슴을 채이고 숨이 컥 막히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나가 떨어졌다. 너무도 간단히 상황을 마무리한 사내는 왼손에 쥐고 있는 유성추의 사슬을 던지며 옷 매무새를 두어 번 손질한다. 사내의 표정은 처음 장원을 들어왔을 때와 조금의 변함도 없다.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구료. 나는 예의를 배우러 온 것이 아니오, 공야 노인. 공야진의 단추구멍만한 눈이 한껏 커졌다. 사내의 손속은 절도가 있고 깨끗하다. 팔다리를 뻗고 휘두르는 동작은 단정하기 이를데 없으며, 절제된 호흡은 동작의 흐름 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 불필요한 동작은 철저히 배재된 운신... 이것은 사내의 수련과 실전경험이 예사롭지 않다는 증거이다. 공야진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아니, 어리석기 보다는 교활하다는 쪽에 훨씬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헤... 이제보니 고수셨군. 어쩔 수 없이 이 늙은 몸이 따라갈 수밖에. 공야진은 헤실거리며 호화로운 의자로부터 몸을 일으킨다. 노인네 답지않게 훤칠한 키가 이채롭다. 검은 옷의 사내는 공야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는 것을 보고 내심 코웃음을 친다. 아무래도 이 늙은이는 뜨거운 맛을 보여주기 전엔 순순히 따라올 것 같지 않군. 아니나 다를까, 등을 보인 채 문가로 걸어가던 공야진이 어느 한 순간 재빨리 몸을 돌리며 사내를 향해 득의에 찬 고함을 외쳤다. 이놈아! 네가 속았다! 공야진은 무엇인가를 사내에게 겨누고 있었다. 사내는 담담한 눈길로 노인의 손에 쥐어진 물건을 바라본다. 길이 한 자, 직경 다섯 치 정도의 검은 통... 강호에서는 제법 이름이 난 화기(火器)이다. 사내의 눈살이 보일 듯 말 듯 찌푸려진다. 공야진은 왼손으로 통을 받쳐든 채, 오른손으로 통 뒤에 달린 검은 줄을 단단히 감아 쥐고 있었다. 마루를 뒹굴던 공야진의 수하들은 화기의 사정거리에 자신들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곤,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절룩거리며 몸을 피한다. 검은 옷의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곤, 한숨을 쉰다.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 노인이군. 나는 드잡이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니오. 단지 당신이 나를 위해 조그만 일을 해주길 바랄 뿐이오. 네 용무가 무엇이던지 내 알 바가 아니지. 단지 이곳에는 이곳의 법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탈혼통(奪魂筒)이 네게 그 법을 가르텨 줄 것이고... 공야진은 교활한 웃음을 만면에 띄운 채 차갑게 대꾸한다. 하지만 사내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그 통을 믿고 큰소리치신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셨소. 내가 보기엔 별 쓸모없는 빈 통 같은데... 하긴 반으로 잘라서 붓이나 넣고 다니면 딱 어울리겠소이다. 공야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이 곰같은 놈은 탈혼통의 이름 석 자도 못 들어봤단 말인가. 탈혼통은 천하에서 못 만드는 물건이 없다고 알려진 귀조수 공야진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암기이다. 공야진은 십여 년 전,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비산탄(秘酸炭)의 제작술을 입수할 수 있었다. 비산탄은 동영(東瀛)의 인자가(忍者家)인 고가(高家)의 비전화물(秘傳火物)이다. 다른 화물과는 달리 순간폭발력이 일품이어서 일찍부터 비산탄의 비방을 탐냈던 공야 진은, 우연히 남해에서 노략질을 하던 왜구들 중 고가출신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남 해를 이 잡듯이 뒤져 천신만고 끝에 그들 중 하나를 생포하고 그 제작법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강호오괴의 일인으로 그와 절친한 만화부(萬火父) 이개(李介)가 손이 닳도록 애걸하며 그 비방을 얻으려 했지만 공야진은 한 마디로 딱부러지게 거절했다. 그만큼 공야진은 비산탄의 위력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탈혼통은 바로 이 비산탄의 순간폭발력을 이용해 제작된 암기이다. 발사되는 순간 전방 사오 장은 쇳덩이도 녹여버릴 엄청난 불꽃으로 뒤덮이게 된다. 잘라서 붓통으로나 쓰라는 사내의 말에 공야진의 자존심이 구겨졌음은 물론이다. 그래... 빈 통인지 아닌지는 네놈이 직접 확인해 보거라! 저 잘난 척하는 놈과의 거리는 일 장. 이 정도 거리라면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확인하는 데에는 시간이 별로 필요하지 않 았다. 공야진이 발사줄을 잡아 당기려는 순간,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 던 사내의 허리 어름에서 한 줄기 빛이 폭출되었다. 빛은 사내의 허리를 떠나는 순간 일 장이라는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공야진의 전면을 휘감아갔다. 공야진은 무엇인가 차가운 기운이 전신을 흟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 손이 허전하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공야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자랑하는 탈혼통은 그 길이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다. 나머지 절반은 사내의 말처럼 붓통으로나 쓰면 어울릴 모양이 되어서 마루 위를 데구 르 구르고 있다. 뭐...지? 놈의 손을 보지도 못했다. 만약 놈이 살심을 품었다면 구르고 있는 것은 아마도...? 어두운 밤, 고양이의 새파란 눈알과 마주쳤을 때의 기분이 그러할까. 한 차례 진저리치는 전율이 공야진의 늙은 몸을 꿰뚫고, 관념의 한 구석으로 사라진다. 서서히 고개를 드는 노인의 시선에는 검은 윤기가 흐르는 연검(軟劍)을 허리에 두르 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휴우! 공야진은 한숨을 쉬며 손에 쥔 탈혼통의 반토막을 떨구었다. 뉘신가 했소이다. 노부가 이렇게 어이없이 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깨끗히 승복하겠소. 그의 수하들은 갑작스럽게 순한 양이 되어버린 야황의 변화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공야진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검은 옷을 입은, 지독히도 건방진 사내의 정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귀조수라는 별호답게 공야진의 눈썰미는 대단히 날카롭다. 검은 빛이 감도는 연검은 금석을 두부 자르듯 벨 수 있다는 흑정(黑晶)이라는 검이 분 명했다. 흑정의 주인은 천하에 오직 한 명. 이제는, 손 안에 있는 줄을 당기기도 전에 탈혼통을 두 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엄청난 쾌검초(快劍招)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 검초는, 강호에서 이름 높은 석가비전(石家秘傳)의 의형검뢰(意形劍雷)일 것이다. 제 정체를 아셨군요. 처음부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점을 용서해 주시길! 은밀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신분을 드러낼 수가 없었소이다. 공야진이 의외로 담백하게 나오자,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석대문은 오히려 미안함을 느낀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볍게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아니, 아니오! 공정무사하다는 가주의 일이라면 분명 강호중대사일 터... 늙은 수고라도 원하신다면 의당 도와드려야 마땅하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생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이번 행차는 절대 공야 노인께 해가 되는 일이 아님을 약속 드리겠소이다. 부디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공야진은 거듭 미안해하며 머리를 숙이는 석대문을 바라보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천하의 판검대인(判劍大人)을 몰라보다니... 공야진아, 공야진아! 너도 관 속으로 들어갈 날이 멀지 않았구나! 六章 燕蘗濟 (1) 연벽제(燕蘗濟)는 오후 수련을 마치고 연무장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격렬한 수련 때문인지 연록색 무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마흔 셋 중년의 군살없는 탄 탄한 육체에 휘감겨져 있었다. 연벽제는 열세 살에 검을 처음 손에 쥔 후, 삼십 년이란 긴 세월을 강호라는 피비린내 나는 뻘 속에서 뒹굴어 왔다. 상대와 검을 맞대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상대에게 죽기 전에 상대를 죽여야 한다. 상대에게 죽기 전에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 그는 강해지기 위한 수련을 계속해왔다. 그 결과 그는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수련을 거리지 않는 까닭은, 수련은 그에게 있어서 이제는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 만큼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린 탓이다. 정말 더운 날이군. 열기로 일렁거리는 태원(太原)의 하늘을 보며, 연벽제는 불쑥 혼잣말을 내뱉는다. 중천 비스듬히 걸려있는 백양(白陽)은 도도한 전제군주처럼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 을 지배하고 있었다. 한낮이 훨씬 지났을 시간인데도 쏟아지는 불볕은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 창공이 눈에 시리다. 연벽제는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눈을 감는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일찍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조심스럽게 열리는 그의 눈 속으로는 폭양 속에서 휘청거리는 오태산(五台山) 줄 기가 들어온다. 목이 마르군... 수련을 마치셨습니까? 그의 앞에 수건과 물병을 양손에 든 청의 중년인이 공손히 서 있다. 연벽제는 고개를 끄떡거린 후 물병을 건네받아 단숨에 들이킨다. 황소의 그것처럼 목젖이 껄떡거리며, 얼음장 같은 차가운 물이 갈증을 덮어씌우는 것 이 느껴진다. 두전은 언제나처럼 이 물 한 병을 준비하기 위하여 빙고(氷庫)에까지 다녀왔을 것이다. 그는 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말했다. 고맙네, 두전(杜田). 응조귀(鷹爪鬼) 두전. 이제는 연벽제의 수족과 다름없이 되어버린 사람이다. 연벽제가 강호에 이름을 떨치기 이전부터, 그를 그림자같이 수행했던 충직한 수하이자 추종자이기도 하다. 물병과 수건이 올려져 있던 쟁반은 길죽하고 푸른빛이 감도는 손가락이 받치고 있다. 푸른 손가락... 이미 십일 년 전에도 저 손가락으로 펼쳐지는 응조공(鷹爪功)은 능히 일문을 이룰 수 있는 경지이지만, 신앙과도 같던 연벽제가 입각할 때, 두전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뒤를 따랐다. 사십삼비영(四十三秘影)이 아까부터 처소에서 기다리십니다. 연벽제의 눈에 잠시 서늘한 빛이 머문다. 사십삼비영...? 마흔아홉 개의 숫자로 불려지는, 그것도 수시로 변화하는 비영들의 이름을 모두 외기 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연벽제가 사십삼이라는 번호와 진남의 도객인 귀문도 우낙이라는 이름을 연결 시킨 것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며칠 전 그 이름을 들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낙이라...? 연벽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입각한 지 몇 년 안되는 우낙은 자신과의 교통(交通)이 거의 없던 위인이었다. 용건은? 자세한 용건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최근에 사십삼비영과 사십팔비영이 거사에 실패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벽제는 사십삼비영과 사십팔비영, 우낙과 부대연이 실패한 건(件)에 관해서는, 수 일 전 십영회의(十影會議)에서 천안(天眼) 문강(文康)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 일로 엄중한 문책을 받았을 것이다. 아직 징계기간일 텐데 자신을 찾아오다니, 무슨 일일까. 연벽제는 의아한 기분을 간직한 채, 그의 처소인 인검원(忍劍院)으로 발길을 옯겼다. 그의 뒤로 두전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2) 우낙이 삼(三)비영께 인사 드립니다. 연벽제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일어서서 허리를 숙인다. 엷은 자주색 화복(華服)을 입은 오십 대의 초로인. 쥐꼬리같은 수염과 뺨에 달려있는 동전만한 점. 바로 사천 청류산에서 구양현과 소소를 핍박하던 우낙이다. 같은 동료이면서도 이렇게 둘이 만나긴 처음인 것 같구료. 잘 오셨소이다, 우(禹) 비영. 연벽제는 가볍게 답례하며 자리를 권한다. 각(閣)내에서 연벽제와 우낙은, 사십구비영(四十九秘影)의 일원으로 같은 항렬(行列) 이라 할 수 있었다. 이들 비영의 서열은 대체로 수평적인 것이다. 하지만 예외인 부류가 있었으니, 바로 일(一)비영에서 십(十)비영까지 상위 열 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조직의 대사를 결정하는 십영회의의 주관자이다. 삼비영인 연벽제와 사십삼비영인 우낙은 같은 비영이라 할 지라도 그 신분은 천양지차 (天壤之差)인 것이다. 연벽제는 두전에게 주안상을 마련케 했다. 잠시 후 시녀가 자그마한 팔각상을 들고 들어왔다. 자, 한 잔 듭시다. 헌데 나는 독한 술은 꺼려하는 터여서... 술이 입에 맞으실런지 모르겠소이다. 옥호로를 기울여 두 개의 잔에 술을 채운 후, 연벽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연벽제는 본디 아랫사람을 대하는 데에는 부드럽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자신에겐 엄하게, 남에게는 부드럽게>. 연벽제의 신조이자 생활수칙이다. 예나 지금이나 거만할만한 지위을 가진 자가 거만하지 않는 것은 대단한 미덕이다. 연벽제에 대한 각원들의 신망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허어! 술이 아주 맛있군요. 우낙은 잔을 비운 후 입맛을 다셨다. 술은 입안에서는 향기롭고 목구멍을 넘어갈 때에는 부드러웠다. 잔을 내려놓은 후에도 담담한 향내가 입안을 감돌고 있어, 실로 맛보기 힘든 명주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술은 연벽제의 입맛을 잘 아는 두전이 강남에서 이름난 주도가에게 특별히 주문해 만든 것으로서, 본디 그 이름이 없어 연벽제 스스로 회향주(廻香酒)라고 부르고 있었 다. 이름 그대로, 술이 목구멍을 넘어갈 즈음하여 다시금 향기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맛있으시다니 다행이외다. 헌데 서장이나 천축의 발바닥 같은 위인들은 독하지 않으면 술이 아닌 줄 안다오. 하하! 오랑캐들이 중화(中華)의 품(品)과 격(格)을 알 리 없지요. 연벽제와 우낙은 마주보며 웃는다. 각 내에는 외지인들이 많았다. 한족은 이방인들의 미개함을 얕잡아보고, 이방인들은 그러한 한족들을 아니꼽게 여긴 다. 비록 한 가지 목적으로 힘을 합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은연중에 경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벽제는 한족의 무인들에게 있어서 영웅과 다름없는 존재... 연벽제를 경외하는 우낙으로서는 모처럼 마음을 열고 즐거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실은 삼비영께 가르침을 청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불쑥 찾아뵌 것입니다. 어디 말씀해 보시지요. 우낙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한다. 삼비영께서는 중원 천하에서 검왕(劍王)으로 위명을 떨치시는 분, 강호의 제반 검학 (劍學)에 대한 견식도 지극히 높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벽제는 잠자코 우낙의 보비위를 듣고 있었다. 우낙이 연벽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간다. 아시다시피 얼마 전 저와 사십팔비영 부대연이 이번에 각주의 명을 받들고, 소철의 손녀를 납치하기 위해 행보(行步)를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두전의 말대로 그 일이군... 연벽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우낙을 바라보았다. 거사가 거의 성사되려던 참에 두 명의 노소(老少)가 나타났지요. 헌데 그 중 노인의 검법이 실로 기괴했습니다. 불초가 몇 수 버티지 못하고 패퇴하는 바람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죠. 잠깐! 연벽제는 손을 내밀어 우낙의 말허리를 잘랐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부드럽다. 그 얘기는 지난 십영회의에서 거론되어서 이미 알고 있소이다. 헌데 또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이까? 그 일로 저와 부대연은 백일근신을 계(戒) 받았습니다. 헌데 오늘 아침 이비영께서 부르시어 찾아뵈니, 노인이 사용했던 검법을 파악하여 보 고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노인의 검법은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지만, 소생의 견문이 워낙 천한 것이라... 해서, 이렇게 삼비영 나으리를 찾아뵌 것입니다. 우낙은 꽤나 급했던지 나으리라는 호칭까지 쓰고 있었다. 문강이...? 연벽제의 눈꼬리가 잠시 가늘어진다. 우낙이 말한 이비영이란 천안 문강을 가리킨다. 그는 순간적으로 문강의 얼굴을 더올린다. 중년답지 않은 새하얀 피부와 깊고 맑은 눈. 부드럽지만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신비한 미소. 십영회의의 총 주관자이며, 강호의 정보 수집이나 조직의 대외활동에 관한 전략을 세 우는 군사(軍師)인 문강. 그리고 연벽제로서는 조금 더 특별하게 껄끄러운 존재... 연벽제는 우낙의 말을 들으며 호기심을 느꼈다. 천하는 넓고 기인의 수는 헤아릴 수 없지요. 제가 아는 검법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혹시 우 비영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어디 한 번 설명해 보시지요. 감사합니다. 제가 대충 흉내를 내 보겠습니다. 우낙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오른쪽 벽을 향해 자세를 잡고, 허리에 꽃힌 도를 도집 채로 뽑아들었다. 도합 네 초식입니다. 연벽제의 눈에 흥미의 기미가 스친다. 도합 네 초식... 그렇다면 네 초식으로 우낙을 패배시켰다는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검왕>이라고 불리는 연벽제로서도 노인의 검술의 고명함을 인정하 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낙은 도를 벽면을 향해 똑바로 겨눈다. 우선 검을 쓰기 전 중단(中段)자세로 목표를 향하는 것이 기수식인 것 같았습니다. 중단직지세(中段直指勢)... 연벽제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중단직지세를 기수식으로 하는 검법 중 우비영을 곤란하게 할 수 있는 검법은 곤륜파 (崑崙派)의 곤륜겁법(崑崙劍法). 광동(廣東) 제민장(濟民莊)의 사일팔검(射日八劍), 동해 금부도(錦浮島) 뇌문사(雷門 社)의 연파검법(鉛波劍法) 정도입니다. 그들 중 절정고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뇌문사의 아(阿)씨 형제 정도일 터... 하지만 설령 그들이라도 우비영을 그렇게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기수식에 대한 연벽제의 검론은 유유롭기 그지없다. 우낙은 연벽제가 자신을 치켜세워 주자 황감해하며 설명을 게속한다. 첫번째 초식은 찌르는 수법입니다. 하지만 찌르기 전 미세한 변식이 앞서더군요. 검이 제가 펼친 도망(刀網)을 비집고 들어올 때엔 마치 안개를 보는 것 처럼 떨렸습니 다. 그 다음에는 쾌속하게 찔러왔는데, 변식이 하도 괴이하여 검로를 예측할 수 없더군요. 이 상처는 그때 입은 것입니다. 우낙은 붕대가 감겨있는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설마... 개...운직지(開雲直指)? 찌르는 초식은 어느 검법에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싸움이 전개된 다음에 상대의 헛점을 노려 찌르는 것이 일반적인 검법의 상도(常道)일 것이다. 찌르는 초식은 검로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에 처음부터 시전하다가는 자칫 반격을 받 아 선기를 제압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 특별하게 훌륭한 초식, 예를 들자면 연벽제가 방금 머리에 떠올린 개 운직지와 같은 초식은 예외였다. 그것은 심한 변환술(變幻術)을 전초(前抄)로 하고 있어, 상대의 시야를 혼란시킨 후 찌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개운직지를 제외하고라도 천하의 유수한 검법들 중에서 범상치않은 찌르는 초식 들도 적은 수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유독 개운직지라는 이름이 떠오른 것에는,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연벽제의 눈에선 자신도 모르게 신광이 번뜩인다. 두번째 초식은 방어식이었고, 세번째는 공중에서 하방을 공격하는 초식이었습니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각도로 허리를 꺾으며 검화(劍花)를 그리는데, 소생은 머리 위를 가득 덮은 검영(劍影)으로 상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네번째 초식은 어떤 것이었소? 연벽제는 자신의 음성이 약간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흔들리는 심기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네번째 역시 찌르는 초식인데... 그것은 앞서 설명드린 초식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어깨나 팔굽, 허리를 웅크렸다가 펴는 동작에서 힘을 얻는 것이 일반적인 찌르는 동작 이라면, 그 노인은 전혀 아무런 준비동작없이 검을 찌르더군요. 하지만 그 기세가 놀랄만치 빨라서 부대연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 미간(眉間)은 꼼짝없 이 바람구멍이 났을 것입니다. 낭수탐미(狼首探眉)! 역시... 연벽제는 앞에 놓인 잔을 천천히 비운다. 그의 마음은 어느새 가벼운 흥분에서 벗어나 본연의 평정심을 되찾고 있는 중이다. 그는 고개를 들고, 초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우낙의 시선을 찾는다. 이 자는 결코 혼자 판단해서 내게 온 것이 아니다. 이 순간 연벽제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우낙을 내게 보낸 인물은... 아마도 문강일 테지. 놈이 장난을 치고 있군. 문강과 우낙의 대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문강은 스쳐가는 식으로 우낙에게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뭐라고 했을까? <검법에 관한 것이라면 삼비영에게 찾아가 자문을 구하면 알 수 있을 거외다.> 대충 그런 식이리라. 문강은 이 검법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짐작을 한 것이 분명하다. 십일 년 전 자신이 투명장(投命狀 : 어던 조직에 입당할 때 자신을 믿고 거두어달라는 뜻으로 바치는 서약서로서, 녹림이나 강호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투명장으로 받는 경우 가 많다)을 들고 입각한 순간부터 아직까지 그는 자신을 완전히 신임하고 있지 않았다. 투명장이 그토록 완벽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연벽제는 우낙이 말한 검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검법이 출현한 후라면 굳이 감추어 문강의 장난에 덩달아 놀아줄 필요는 없겠지... 연벽제의 입이 무겁게 열린다. 그런 검법은, 내가 알기론 천하에 단 하나밖에 없소이다. 혹시 그 노소의 특징 같은 것은 없소이까? 우낙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노인은 한(韓)이라는 성을 지닌 육십 세 가량의 작은 체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체격이 아주 장대했습니다. 거의 칠 척에 가깝더군요. 그는 자신의 이름이 석대원(石大原)이라고 거침없이 밝히던데... 한로와 아원(兒原)...! 전광같이 스쳐 지나가는 소년의 얼굴... 그 목소리... <와! 검왕이요? 그럼 검 쓰는 사람들의 임금인가요?> 녀석. 유난히도 몸집이 컸었지... <삼촌이 검왕이라면서요? 와아!> 아이 치고는 조금 굵은, 하지만 배어나오는 맑은 울림은 감출 수 없는 목소리가 십일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머리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연벽제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우낙의 입을 빌어 나온 두 이름은 그를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도대체... 그 검법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조심스러운 우낙의 목소리가 연벽제를 과거의 늪으로부터 끌어올렸다. 연벽제는 눈을 뜬다. 이제부터 싸움은 시작이군. 우비영이 설명한 네번째 검초는... 아마도 낭수탐미라는 초식일 겁니다. 낭수탐미...? 연벽제의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고금제일의 마검(魔劍), 혈랑검법(血狼劍法) 중의 절초이지요. (3) 태행산(太行山) 서쪽에 있는 땅이라 하여 산서성(山西省)이라 불리는 중원 중북부 지 방에선, 세계를 이끌어 온 두 형태의 문명이 공존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농경문명과 유목문명이다. 흔히들 중화문명(中華文明)이라면 농경문명만을 연상하기가 쉬운데, 그것이 결코 그 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문자인 한자를 찬찬히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례로 상서롭다는 뜻의 상(祥) 자는 양(羊)을 보는 것[示] 에서 유래된 말이며, 의롭 다는 뜻 의(義) 는 내[我]가 양(羊)을 존중하는 것 에서 유래된 말임을 유추할 때, 양 을 키우는 유목문명이 중국 문화의 저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산서성에서 공존하는 두 문명은 유목민족의 대명사와도 같은 몽고족이 주씨 황조에 의해 장성 밖으로 쫒겨난 15세기 무렵에는, 공존 이라기 보다는 충돌 의 성격으로 표 출되었다. 성(省) 북부는 에센이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중심으로 재기의 칼을 갈고 있는 몽고족이 있었으며, 성 남부는 진대(秦代) 이전부터 중토의 노른자 로 알려진 산동(山東) 하남 (河南) 지역과 연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역학상의 알력은 해발 1,000m 전후의 황토고원이 대부분인 산서성 전 지역을 군사적 요충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산서성이 중원의 군사적 요충지라면, 성도(省都) 태원(太原)은 산서성의 군사적 요충 지라 할 수 있다. 15세기 초 영락제의 친정(親征 : 군주가 직접 참여하는 정벌) 이후 끊이지 않았던 크 고 작은 싸움 탓에, 태원에서는 변변한 사적이나 건축물을 찾기 힘들다. 반면 그 지역 백성이라 해도 연원을 짐작치 못할 신비스러운 곳은 많다. 그리고 그 지역 백성이라면 그 연원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뭐 하는 곳인지 기웃거려 보고 싶은 곳도 있겠지만, 자칫 군사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기관이라면 첩자로 몰려 죽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북쪽 교외에 있는 건물군(建物群)처럼, 아무런 편액없이 오직 <禁>이라는 금색 인(印)이 대문 한가운데 찍혀있는 곳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 표식은 특수한 직무를 수행하는 황궁 관할의 기관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오늘 바로 그곳에서, <십영회의>를 진행하기 위하여 일곱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다. (4) 십영회의가 열리는 비천대전(秘天大殿) 외곽은 삼엄한 경비로 둘러쌓여 있다. 하늘에선 밧줄같이 굵은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전각 주위의 장한들은 숨소리 하나 없이 안광을 빛내며 사방을 경계하고 있다. 대전 내의 회의청는 한 개의 거대한 청향목(靑香木) 탁자를 가운데 두고 각양각색의 일곱 사람이 앉아 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공간을 시원하게 가르는 빗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안색은 조금은 경직되어 보인다. 딱 따닥 딱... 자그마한, 하지만 빠르고 정교한 박자를 담고 있는 타성(打聲)이 무덥고 습기찬 공기 속으로 유영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박자가 끊어진다. 웃기는 일이군! 무겁게 짖누르던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즐거움을 만들어내던 손가락은 청향목 탁자 위 에 여전히 놓여있다. 하지만 손가락은 이미 움직임을 멈췄고, 손가락의 주인은 무엇이 재미있는지 고개를 흔들어가며 헛웃음을 흘리고 있다. 다른 여섯 명의 시선은 일제히 그쪽으로 꽂힌다. 그곳에는 작은 산이 있었다. 혈랑검법이 드디어 나왔다? 그것도 자그마치 사십 년이라는 세월을 넘어서? 허허! 조금 전까지 손가락으로 연출했던 경쾌한 박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그릇 깨지 는 듯한 걸직한 목소리. 하기야 어울리지 않는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악기로 사용되었던 손가락 두 개를 합치면 웬만한 팔뚝 굵기는 될 것이다. 의자에 앉은 키가 보통 사람의 선 키와 맘먹을 거한. 그런 거한이 그토록 절묘한 손가락 연주를 했다는 것은, 강호에 몸 담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단순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거한의 독백과도 비슷한 말에 아무런 대구를 하지 않는다. 내 비록 미련하지만, 혈랑곡이 이미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소! 동의를 구하기 위함인지 거한의 목소리가 조금 커진다. 육(六)비영의 말씀이 맞소이다. 혈랑곡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본각(閣)은 사십 년이 넘는 시간을 소비했소. 대강남북은 물론 관외(關外) 본교(本敎)의 지원까지 받아 서장과 고비사막, 청해의 오 지까지 혈랑을 표기로 하는 세력을 찾아보았지만, 결과는 혈랑곡은 현세(現世)에 없는 것으로 판명되지 않았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거한의 뒤를 따랐다. 유창하지만, 어딘지 어색한 구석이 있는 어투... 잠시 사이를 두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말을 이어나간다. 이제와서 정확한 증거도 없이 우낙의 말만 믿고 혈랑곡이 출현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거외다. 더구나 계획 자체를 수정한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해골에 살거죽을 입힌 듯한 깡마른 몸에 쌀자루같이 헐렁한 황색 가사를 걸친 노승. 그는 중원인이 아니다. 피를 바른 듯 붉은 북식북실한 구레나룻과 눈가에 감도는 은은한 벽광(碧光)에서 그것 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말을 마친 노승은 어디 해명이라도 해보라는 듯이 오만한 눈빛으로 연벽제를 바라본다. 순간, 그의 눈썹이 곧추선다. 연벽제는 노승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길은 창밖으로 힘차게 내리꽂히는 장대비에 머물러 있다. 금방 그칠 소나기인 줄 알았더니 아니로군... 덥지 않아 한결 좋아. 그의 사고는 눈길에 실려 빗물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연벽제의 이런 태도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벽안(碧眼)의 노승이 참지 못하고 벌컥 화 를 냈다. 연 비영! 그대는 이 십영회의가 장난으로 여겨지오? 그대가 혈랑검법이 출현했다고 말했다면서! 대장부라면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할 것 아니오! 꽤나 준엄한 호통. 문득 창밖을 바라보던 연벽제의 몸이 작은 흔들림을 보인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노승에게로 옮겨진다. 어느 한 순간, 그의 시선이 노승의 두 눈에 고정되었을 때, 노승은 자신도 모르게 가 쁜 숨을 들이켰다. 얼굴이 바늘에 찔린 듯한 싸늘한 예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노승은 시선을 황망히 돌려버렸다. 하지만 아교풀처럼 달라붙는 칼날같은 기운이란... 노승은 마음 한 구석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자의 기도가... 이리도 대단하던가. 노승은 자신이 느낀 예기로부터 강호에서 뭍 검수들이 숭앙하는 <검왕 연벽제>의 이 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숨쉴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게 몰아쳐오던 예기는 시작되었던 때와 같이 어느 한 순 간 사라졌다. 패륵노사(貝勒老師)께서는 우낙 뿐 아니라, 이 연모(燕某) 또한 못 믿으시는구려. 연벽제는 느릿하게 웃고 있다. 칠(七)비영 패륵은, 서장(西藏) 일대에서 반백 년을 진동했던 자신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더듬거리며 대답한다. 아니, 그... 연 비영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안(事案)이 사안이다 보니... 연벽제는 미소를 거둔다. 나는 수 년 전 노각주(老閣主)와 검에 관한 토론을 벌이던 중, 혈랑검법에 관해 자세 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소이다. 우낙은 분명 혈랑검법만이 독창적으로 지니는 몇 가지 초식을 내게 설명했소이다. 한 순간에 선기를 잃어버린 패륵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대꾸도 하지 못한다. 픽. 조롱과 같은 웃음이 연벽제의 입술 새를 비집는다. 이런 이야기를 패륵 따위와 할 필요는 없지. 연벽제는 고개를 돌려 상석(上席)에 앉은 유생 차림의 중년인을 바라본다. 문형(文兄)! 문형도 설마 우낙과 부대연이 자신의 실수를 무마시키기 위해 꾸며댄 것이, 우연히 혈 랑검법과 일치한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겠지오? 상석에 앉은 중년인, 이 회의의 주도자이자 명실공히 조직 내 이인자(二人者)인 천안 (天眼) 문강(文康)은 지금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머리 위에 얹혀있는 백황색 절각건(折角巾 : 巾의 角을 접어 맵시를 낸 儒生의 모자) 이나 소매가 넓은 유의(儒衣) 등의 차림새는, 잘 손질된 수염과 길죽한 눈매에 어려있 는 혜광(慧光)과 잘 어우러져 있다. 잠시 연벽제를 바라본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말문을 열었다. 음, 여러분! 본인 역시 연형(燕兄)께서 하신 말씀에 동의하는 바이오. 우낙과 부대연이 비록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일을 무마시 키기 위해 혈랑검법을 동원할 정도로 교활한 위인들은 아니라고 사료되오. 연벽제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백의청년이 고개를 끄떡인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본 각의 대계를 수정한다는 것은 빈대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아흔 아홉 간 대궐을 태우는 격! 우선은 그것이 과연 혈랑검법인가에 대한 분명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오. 문강의 음성은 맑고 깨끗했다. 마치 학식 높은 노선비가 경전을 읽어나가듯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높낮이... 그것은 비단 듣기 좋을 뿐 아니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한 믿음을 갖게 해준다. 문강은 좌중의 인물들을 천천히 쓸어본 후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일비영께선 이 일을 노각주(老閣主)께 보고드리기 위해 북경(北京)으로 들어가셨소. 해서 본인이 향후 일을 지시할까 하오. 문강은 소매 속에서 작달막한 금색 홀(笏)을 꺼내어 앞으로 내민다.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홀을 향해 반례(半禮)를 올린다. 작달막한 홀이 바로 이 조직의 군령(軍令)을 상징하는 영부이기 때문이다. 팔(八)비영께서 혈랑겁법에 관해 조사하여 주시오. 문강의 음성은 지금까지와 달리 무상의 위엄을 담고 있다. 탁자의 끝쪽을 차지하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깊이 숙인다. 초혼매(招魂妹) 진금영(陳錦英)... 연벽제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마에서 콧날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의 굴곡에서 그녀의 미모를 짐작할 수 있다. 강호에는 그 정체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녀였지만, 초혼독편(招魂毒鞭)이라는 한 자 루의 채칙으로 펼치는 수법의 잔혹함은 각 내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강호육사(江湖六社)의 사주(社主)들에게 연락을 띄울 터이니 그들과 합류해서 석대원 이라는 청년과 한씨 성을 가진 노인의 행방을 탐문하시오. 그들이 청류산에 출현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그들의 행적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이오. 주의할 것은, 정황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들을 살해해서는 안된다 는 점이오. 이점 특별이 유의하길 바라오. 명심하겠습니다. 진금영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문강은 고개를 끄떡거리곤, 다시 홀을 치켜든다. 십(十)비영은 강동에서의 사업에 관해 보고해 주시오! 예! 음침한 음성이 대전에 낮게 깔린다. 연벽제는 소리난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백랍같이 창백한 안색에 붉은 도관(道冠)을 쓴 십비영 사생(史生)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붉은 색 도복을 휘감고 있는 깡마른 몸매와 검은 살기가 죽죽 감도는 눈두덩이, 피를 칠한 듯한 붉은 입술은, 매령귀사(賣靈鬼使)라는 별호와 어울리는, 유부(幽府)에서 막 올라온 저승사자의 으시시한 몰골과 다름없었다. 올해 초부터 해온 공작은 이제 그 결실을 수확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개방의 위백을 중심으로 한 이번 사업은, 이미 강동삼수의 한 명인 양무청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현재 양무청은 철군사(鐵群社)에 있는데 조만간 이곳으로 호송할 계획입니다. 훌륭하오! 양무청은 강동의 사자검문(獅子劍門)과 석가장(石家莊)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좋은 인질, 그 대접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철군사의 곽 사주(郭社主)에게 서신을 띄워 감시에 각별히 유의하라고 주의를 주시오! 그리고 삼각풍 위백 역시 개방을 공략할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터이니 항상 신경을 써 감시하길 바라오. 소주와 이곳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향후 십비영께서는 강동에 머물면서 비합전 서(秘盒傳書)를 통해 지시를 받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문강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바로 앞자리에 서 있는 백삼청년에게 로 향한다. 이(李) 공자, 모용풍(募容楓)에 관한 건을 보고해 주길 바라오. 백의청년.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광장에서라도 번쩍, 한 눈에 띌 만큼 잘생긴 사내 이군영 (李君永)은 천천히 사람들을 돌아본 후 입을 열었다. 삼십이(三十二)비영으로부터 섬서(陝西) 화소(花昭)에서 모용풍의 행적을 발견했다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아마 빠른 시일 안에 그를 제거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생김새 만큼이나 깨끗한 음성이다. 눈처럼 새하얀 비단옷과 은은한 옥빛이 감도는 한 자루 부채가 그의 고고한 풍치를 더 해주고 있다. 사(四)비영 이군영... 연벽제의 눈빛이 잠시 날카로와 진다. 이십 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영 서열 네 번 째라는 높은 직위에 오른 것 은, 결코 그가 노각주와 일비영의 혈육이라는 이유 만은 아닐 것이다. 연벽제는 이군영의 정확한 능력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묻어나오는 정제된 균형감각은, 그가 혹독한 수련을 쌓은 무 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모용풍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어찌한다... 이러한 연벽제의 갈등과는 전혀 무관하게, 문강의 낭랑한 음성이 이어진다. 모용풍의 신변은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오. 그가 우리 조직에 관해 오래 전부터 조사하였다는 사실은, 어쩌면 오(五)비영이나 구 (九)비영의 행적에 관한 단서를 찾았을 수고 있는 일! 오비영과 구비영의 정체가 알려지면 강호에 대한 본각(本閣)의 적공 중 절반이 사라지 는 것과 다름이 없소. 만에 하나 삼십이비영 혼자만으로는 벅찰 수도 있으니, 각 내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인 원을 추가로 파견하여 일의 결말을 분명히 하도록 하시오. 알았습니다. 이군영은 가볍게 머리를 숙인다. 연벽제는 후덥지근한 더위 속에서도 등줄기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연벽제는 이곳에 가입하기 전부터 검왕이라는 이름으로 강호를 진동시켰던 대검수(大 劍手)이다. 하지만 그의 풍부한 견식으로도 천안 문강이라는 이름은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삼비영이라는 높은 직책으로 입각한 후, 문강의 청수한 얼굴을 마주 대할 때마다... 그리고 범인이 상상할 수 없는 날카로운 혜지(慧智)와 깔끔한 일처리를 발견할 때마다 거듭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같은 동료이면서도 그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는 오비영과 구비영... 연벽제는 그들과 만나보기는 커녕 이름조차 알 수 없었다. 각내에서도 그들의 신원을 아는 사람은 노각주와 일비영, 그리고 문강 정도... 짐작컨대 그들 두 명은 강호의 어떤 문파에 시한폭탄과도 같이 침투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각주... 아아! 사고가 노각주에게 이어지자, 아득한 절망처럼 현기증처럼 엄습한다. 연벽제는 그 순간 노각주와의 첫 대면을 떠올렸다. <자네가 연벽제로군. 검왕이라는 칭호는 아무에게나 내려지는 것이 아니지. 과연 명불허전!> 노란 색 장포를 입은 비대한 노인.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두 눈. 보름달 같은 환한 빛이 감도는 얼굴. 온몸에 넘쳐흘러, 상대의 긴장이 저절로 풀어지게 하는 원인모를 즐거움. 노각주는 연벽제가 장담하건데 천하에 짝을 찾을 수 없는 강자(强者)이다. 무학이 강하고, 의지가 강하고, 인내심이 강하다. 그리고 모든 수하들이 마음속 깊이 복종할 만큼 너그럽다. 연벽제는 바로 그런 강자와 상대하려고 하는 것이다. 십영회의는 문강의 주도 아래 계속 진행되고 있고, 창밖으로 꽂히는 빗줄기는 쉽사리 그칠 줄 모른다. 연벽제는 십일 년 전 매제(妹弟)가 한 말이 불쑥 생각났다. <그들은 너무도 강하고...은밀하외다.> 七章 客店風雲 (1) 일찍이 황석공(黃石公)의 묘(妙)를 이은 장량(張良)이 초왕 항우의 패도(覇道)로부터 유방을 피신시킨 곳도, 와룡선생(臥龍先生) 제갈량이 일개 유랑인에 불과한 유비를 위 해 삼각정(三脚鼎) - 삼국정립의 계책으로 선택한 곳도, 모두 촉(蜀), 즉 사천 땅이었 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천재가 사천이라는 지역을 선택한 공통적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사천분지(四川盆地)에서 생산되는 양을 짐작할 수 없을 곡식 때문이요, 둘째는 이백이 노래한 촉도난(蜀道難) 의 시구처럼 성(省) 자체가 절험하기 이를 데 없는 천 혜의 요새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세에는 짝을 찾을 수 없었던 이 희대의 두 천재는 사천을 택함으로써, 경제와 군사 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여 위태롭던 건국 초의 국가 경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천 중부에 솟아있는 아미산(峨眉山)은 <아미천하수(峨眉天下秀)>라는 명성에 걸맞 는 곳곳에 절경을 지니고 있다. 화창한 날 금정봉(金頂峰)에 정상에 어리는 불광(佛光) - 사실 불광이라 불리는 빛의 동그라미는, 봉 정상의 차가운 기온으로 얼어붙은 수증기에 반사된 햇빛에 불과하지만 - 때문에, 예부터 사대불교명산 중 하나로 불린 아미산... 이 아미산의 기슭으로부터 동쪽으로 백여 리 떨어진 곳에는, 산해주(山海州)라고 불 리는 유명한 염소(鹽所 : 소금을 생산, 취급하는 지역)가 있다. 바다로부터 수만 리 덜어진 내륙에서 무슨 소금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산해주라는 이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산해주에서 나는 소금은 다름 아닌 암염(岩鹽)인 것이다. 곤륜산맥의 동쪽 끝이라 할 수 있는 산해막고원(山海膜高原) 일대에서는 예부터 암염 이 많이 생산되었다. 이 암염은 음식물을 절이고 간을 맞추는 향신료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약재로써도 그 쓰임새가 많은 물건이다. 이곳을 상도(商都)로서 번창하게 만든 이들은, 암염 생산을 위한 관속(官屬) 소금업자 들이나 약재상들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산해주에 오늘은 궂은 비가 내리고 있다. 지겹게도 퍼붓는군. 굵은 목소리... 하지만 산해주 대로를 후벼파듯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가 목소리를 금새 삼켜버린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우기(雨期)... 안 그래도 축축하기로 유명한 사천이다. 사흘 전부터 내리는 비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를 수막(水幕)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사천 사람들은 우기 때엔 밖에서 활동하지 않소이다. 워낙 고지대가 많아서, 갑자기 불어난 물이 언제 어디서 덮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 이지요. 석대원.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큰 체구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네 배는 더 젖어버린 사내 의 설명이다. 그의 손에 들린, 끝에 대나무살이 몇 개 덜렁거리는 괴상한 막대는, 아마도 사흘 전에 는 우산이라고 불렸던 물건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우산이라 불리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이리도 비참하게 만든 장본인은, 석대원의 말대로 지겹게도 퍼붓는 빗줄기였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은... 지겹군요. 구양현은 챙이 넓은 죽립을 조금 치켜 하늘을 올려다 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얼굴을 때려오는 빗줄기... 시각은 초저녁이건만 두꺼운 비구름에 가린 하늘은 어둑어둑하다. 삼사형! 아직 몸 상태가 안 좋은데 이런 비 속으로 계속 행보하는 것은 회복에 나쁠 거예요. 석오라버니, 약간 이른 시간이지만 어디 객점에라도 들어가 비를 피하도록 하죠? 뒷전에서 걸어오던 소소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손차양을 만들어 빗물을 막고 있던 석대원은 그녀를 돌아다 본다. 젖은 옷을 오래 입었던 탓인지, 그녀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다. 구양형, 시간도 늦었고 하니 소(蘇) 소저의 말씀대로 아무 곳에서라도 비를 긋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한로, 앞쪽의 여관에 빈 방이 있나 알아봐 주세요. 구부정한 허리를 도롱이로 감싸고 있던 한로는 고개를 끄떡이곤 잰 걸음으로 앞질러 간다. 석대원은 한로의 왜소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한껏 좁아진 시야 속으로 제법 화려해 보이는 객점이 들어온 다. 청류산을 떠난 석대원과 한로는 구양현의 몸이 정상이 아님을 알고, 안전한 곳까지의 동행을 자청하였다. 만일 우낙이나 부대연과 같은 위인들이 재차 습격할 경우, 구양현과 소소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행 중 부상자가 있다는 것은 여정을 엄청나게 늦어지게 만든다. 청류산에서 산해막고원까지는 천이백 리 남짓. 석대원의 평상시 행보라면야 칠팔 일이면 당도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하산한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리고 비... 우기를 맞아 시시때때로 쏟아지는 비는 이들의 걸음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다. 끼이익. 객점의 문이 열리며 한로의 힘없는 모습이 나타난다. 석대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젖는 표정으로 보아, 객방을 구하지 못한 것 같다. 방이 없소? 한로는 심드렁한 말투로 대꾸한다. 객방은 없고, 별채만 빈 것 같소이다. 헌데 돼지 같은 주인놈이 부르는 값이 워낙 비싸 놔서... 허! 석대원은 난처한 표정이 된다. 원래가 산인(山人)이던 그와 한로에게 몸에 지닌 금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는 구양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구양현 역시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뜻하지 않게 길어진 여정이 그의 전낭(錢囊)을 간당간당하게 만든 것이다. 사매, 미안하지만... 소소를 바라보는 구양현의 눈이 처연해진다. 그녀의 머리에 꽃힌 장식을 발견한 것이다. 비녀... 아무리 눈치없는 그녀라지만 사형의 눈에 쓰여진 안타까운 표정을 읽지 못할까.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장식을 뽑는다. (2) 별채의 방은 제법 훌륭한 편이었고, 또 훌륭한 만큼이나 비쌌다. 소소의 머리장식이 좋은 옥으로 세공한 귀물임에도 불구하고, 방을 몇 개 얻고 보니 은자 십여 냥 정도밖에는 남지 않는다. 은자 십여 냥... 소소는 손 안의 돈을 꼬옥 쥔다. 그런대로 값싼 의복이나마 젖은 옷과 갈아입을 수 있게 해줄 소중한 돈이다. 이러다간 염소나 토끼가 되겠군요. 푸른 색이 무성한 식탁을 바라보며 소소가 투덜거린다. 옷가지를 사고 남은 돈으로 어렵게 주문한 식탁은 소면(素麵)과 채소 몇 가지로도 벅 찰 지경이었다. 구양현은 사문에서는 보물같이 대접받던 소사매가, 거친 여행에서 좋은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곤 빙그레 웃는다. 사실 그녀의 일생에선 이런 기회도 흔치 않으리라. 음식을 뒤척이며 께죽거리는 소소와는 달리, 석대원은 반찬이 좋건 나쁘건 개의치 않 는다는 듯 젓가락을 바삐 놀려 텅빈 위장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는 빛바랜 황색 무복을 갈아입지 않고 있다. 순양진기를 일으켜 옷을 말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흠! 면이 조금 불었군. 투덜거림과는 달리 한 번 젓가락질을 할 때마다 동굴같은 입 속으로 한 그릇 분량의 국수가 들어간다. 소소는 그런 석대원을 멍청하게 바라본다. 네 개째의 빈 그릇이 탁자 위에 놓였다. 가장 많이 먹은 석대원이 가장 빨리 식사를 끝낸 것은 신기한 일이다. 구양형의 내상도 거의 치유되신 듯하니, 내일은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자신의 앞에 쌓여진 빈 그릇들을 만족스러운 듯이 바라보던 석대원이 불쑥 말했다. 난데없는 이별 선언에 구양현과 소소는 깜짝 놀란다. 이왕이면 저희와 함께 신무전으로 가시죠. 이대로 헤어지면 저희가 입은 은혜를 갚을 길이 없잖습니까? 소생의 사부께서도 청년 영웅과 사귀기를 즐기십니다. 구양현이 황급히 만류했다. 소소도 울상이 된다. 석 오라버니, 할아버지께선 분명히 큰 상을 주실거에요. 그리고 제가 부탁드려서 전(殿) 내에서 높은 직위를 받도록 해드릴께요. 석대원은 담담히 웃는다. 저 역시 북악(北嶽) 신무전의 위명을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습니다만, 급하게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귀전의 방문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군요. 원래 말이 없는 한로는 탁자로 오고가는 대화에는 신경쓰지 않고 느릿하게 젓가락을 놀리고 있다. 구양현의 만류와 소소의 징징거림이 몇 차례 더 반복되었지만 석대원은 계속 정중하게 거절한다. 구양현은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석형께서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저희들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성도(成都)에만 도착하면 신무전의 지단(支團)이 있습니다. 소소는 믿었던 사형마저 이렇게 말하자 속이 탔다. 그녀의 무구한 방심(芳心)엔 이미 석대원의 큰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져, 함께 지냈던 하루하루가 잊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은 남녀간의 애정이라고는 할 수 없는 천진한 그리움에 불과하지만, 어쨌거 나 그녀에게는 이성으로 인해 처음으로 흔들렸던 감정이 아닌가. 그런데 이 무뚝뚝한 사내는 자신의 마음 따위는 조금도 안중에 없는 듯 저리도 담담하 게 이별을 얘기하고 있다. 말로는 후일을 기약한다고 하지만, 이 넓은 대륙에서 한 번 헤어짐이 영원한 헤어짐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그는 일정한 거처조차도 없는 뜨내기가 아닌가.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문다. 구양현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소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눈이 안타까움으로 흔 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석형은 대단히 정중하고 예의바른 사람이다. 하지만 따스한 가운데 좀처럼 마음을 주지 않는 냉정함이 있는 것 같다. 사매가 그에게 정을 두었다면, 가슴 아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 구양현은 품 속에서 작은 영패를 꺼낸다. 석형을 만난 것이 소제에게는 다시없는 인연으로 여겨집니다. 인연의 정표(情表)로써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팔각형의 영패는 주조한 순강(純鋼)에 금을 입혀 만든 것이었는데, 앞면에는 한 마리 매가 살아 움직이듯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비응(飛鷹)이라는 글자가 새 겨져 있었다. 구양현은 신무전의 내삼당(內三堂) 중 비응당의 당주(堂主)였고, 이 영패는 그를 상징 하는 신표와 다름없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쓸만한 물건이 없어서 구양형의 선물에 답례할 수가 없군요. 만일 하찮은 것이라도 간직해 주신다면,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석대원은 영패를 갈무리하며 허리춤에서 검은 빛의 죽도(竹刀)를 꺼낸다. 한 뼘 남짓한 소도(小刀)였는데 손잡이에는 아원(兒原)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석대원의 아명(兒名)인 듯 싶었다. 감사합니다. 이 소도를 석형의 위체로 생각하고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구양현은 소도를 요대에 꽂으며 말한다. 제게도 뭔가 주세요, 석 오라버니! 소소의 대담한 말에 석대원과 구양현은 깜짝 놀란다. 예조(禮調)가 엄격하던 당시에는 남녀간에 정표를 교환하는 것은 큰 의미를 담고 있었 으며, 그것은 강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석대원은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소저, 이 석모는 거칠게 자란 산인인지라 소저께 선물할 만한 물건이 없소이다. 자칫 고귀하게 자라신 소저의 손을 더럽힐까 염려되는군요. 소소는 사형과 석대원이 신물(信物)을 교환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무엇인가를 갖고 싶은 마음에서 대수롭지 않게 꺼낸 말이다. 그렇다가 문득 자신이 한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홍당무같이 되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뜻이 아니고요... 소소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뭐가 아니란 말인가. 석대원은 소소를 바라보고 빙긋이 웃더니, 좌수 중지에 끼고 있던 철로 만든 반지를 빼내었다. 저나 소저 모두 이제는 강호에 몸 담고 있는 터, 남녀 사이의 예법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리라 믿소이다. 이 반지는 어머님께서 남기신 물건인데, 값싼 규중지물(閨中之物)에 불과하지만, 석모 에게는 소중한 물건이라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인연의 증거로 드리겠소이다. 어머님께서 끼던 반지?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소소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오른다. 그녀는 반지를 받으며 생긋 웃는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소매도 이 반지를 항상 손에서 빼지 않고 간직하겠어요. 원래 미모가 빼어난 그녀가 볼을 붉히며 살포시 웃자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구양현도 귀여운 사매가 즐거워하자 마음이 기꺼워졌다. 근데 어머님께서도 석오라버니처럼 손이 크셨나 보군요. 이 반지는 제겐 팔찌로나 써야겠네요. 소소의 짤랑거리는 말처럼 철반지는 보통 반지의 두 배 크기는 되어 보인다. 반지는 그녀의 물고기같이 늘씬한 손가락 위에서 이리저리 건들거리고 있었다. 뱅뱅 돌아가는 거무틱틱한 반지 표변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제비 문양이 생 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석대원은 그녀의 말을 듣고 피식 웃는다. 하하. 선당(先堂)께선 손가락이 그렇게 굵으시지 않소이다. 소생은 반지를 이렇게 늘이고, 또 줄이기도 하죠. 소소로부터 반지를 다시 받아든 석대원은 잠시 반지의 가장자리를 어루만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구양현의 눈이 커졌다. 석대원의 손가락에는 아무런 힘이 들어있는 것 같지 않은데, 쇠로 만든 반지는 조금씩 그 크기가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물론 구양현도 내력을 돋우어서 쇠반지를 우그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석대원의 손가락 안에서 줄어드는 반지는 마치 새롭게 세공(細工)을 한 듯, 표 면은 여전히 매끄러웠고 새겨진 문양 또한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석대원의 내공이 깊음은 물론, 그 수발(受發)이 미세한 부분까지 자유롭게 다 스릴 수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머, 오라버니는 요술도 할 줄 아시는군요. 소소는 자신의 손가락에 맞게 줄어든 반지를 받고 신기한 듯 말한다. 사실 어리고 견문이 짧은 그녀의 눈에는 석대원의 재주란 저잣거리의 눈속임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반지 표면엔 그의 내력이 아직 남아있어 은은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소주, 문앞의 탁자에 앉은 무리들이 낮설지 않군요.) 석대원의 귓전에 나직한 한로 의 전음이 들렸다. 석대원은 내심으로는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자, 내일이면 이별인데, 술이라도 한 잔 있어야 이 서운함을 달랠 수 있겠지오? 석대원은 과장된 몸짓으로 너스레를 떨며, 문가에 앉은 한 무리의 사내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운다. 아닌게 아니라 석대원은 그들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들은 산해주의 번화가로 들어오는 다리를 건널 때부터, 포장을 두른 마차를 몰며 석 대원의 일행을 따라오던 상인 차림의 사내들이었다. 석대원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 탁자의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는, 오른쪽 눈알 흰자위에 작은 점이 박혀있는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틀 전 나룻터에서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당시 사내는 결코 상인 차림이 아니었다. 무리는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저마다 한 두름씩의 짐을 옆에 놓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잡담을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간간히 이쪽을 살피는 시선에서 번 뜩이는 예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미행자치고는 어리숙한 편이군. 석대원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말려 올라간다. 그도 그렇군요. 하지만 여비가 넉넉하지않아 박주(薄酒)도 대접하기 어려우니 안타깝습니다. 구양현이 처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 염려하지 마십시오. 마침 술값을 보태주실 너그러운 친구들이 계십니다. 석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가에 앉은 다섯 명의 사내들에게 다가간다. 구양현과 소소는 돌연한 석대원의 행동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초리로 그의 뒷모습 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시오! 석대원은 호탕한 목소리로 인사한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과 같은 환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담겨져 있다. 상인 차림 사내들의 얼굴에 잠시 당혹의 물결이 번져 나갔다. 눈 속에 점이 있는 사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형장과는 초면인 것 같소만... 저희 같은 장사치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으신지...? 사내의 키는 보통 사람들보다 반 뼘 정도 작았다. 그가 석대원과 마주서자 마치 어른과 아이가 마주한 형국이다. 사내는 여름철임에도 불구하고 얇팍한 누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사슴가죽 장갑이라... 석대원의 눈 속 깊은 곳에서는 한줄기 흥미로운 빛이 일렁인다. 하하, 초면이라니... 이거 섭섭하군요. 지난 번 풍산(豊汕) 나룻터에서 뵈었지 않소이까? 오! 그러고 보니 저 사람도 그때 뵌 분이군요. 헌데 그때는 무인이셨던 것 같은데... 전업(專業)이라도 하신 모양이군요. 하긴 요즘같이 좋은 세상에선 칼로 밥 벌어 먹기가 쉽지 않죠. 새로 시작하신 장사는 잘 되십니까? 석대원의 말에 사내의 눈초리가 일순 날카로와졌다. 눈썰미가 대단하군. 사내가 턱짓을 하자, 나머지 네 명도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다. 그들이 신형을 세우자 조금전까지만 해도 내비치던 장사꾼같이 바지런거리는 기색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턱을 치며들고 아래로 내리깐 시선에서 묵직한 살기가 풍겨나오기 시작한다. 아이고, 손님들 왜 이러십니까? 엽차를 나르던 점원이 심상치않은 분위기를 짐작하고 달려왔다. 하지만 그는 어젯밤 꿈자리가 사나왔을 것이다. 상인 차림의 한 사내가 귀찮다는 듯 걷어차자, 그는 정강이를 움켜쥐고 바닥으로 나뒹 굴었다.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는 모양이 뼈가 상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식사를 하던 손님들은 슬금슬금 게걸음질을 치며 밖으로 달아난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귀하가 청류산에서 하산한 석대원, 맞소이까? 사내의 물음에 석대원은 내가 아니면 누구겠는가라고 말하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 떡인다. 멍청하게 앉아있던 구양현도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듯 몸을 일으켰다. 걱정했던 대로 적당들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문 밖에 몰려든 강아지들도 네가 키우는 것이겠지? 한로의 입에서 카랑카랑한 호통이 나왔다. 아닌게 아니라 문과 창문 사이로는 매서운 빗발에도 불구하고 언뜻거리는 그림자들이 보인다. 그런가 보구료. 구양형께선 사매분을 지켜주시고, 한로는 바깥에 어슬렁대는 강아지들을 좀 쫓아 주시 겠소? 매사가 이런 식이라니까. 늙은이를 저 비 속으로 내몰다니... 매정한 주인이지. 한로는 투덜거리며 일어난다. 그의 손에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 투박한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3) 눈 속에 점이 있는 사내, 곡요(曲耀)는 각(閣)의 책임자가 도착하기 전까지 석대원을 쉽게 상대하지 말라던 사주(社主) 여문통(余雯通)의 지시를 떠올렸다. 하지만... 상대는 겨우 네 명... 그것도 계집아이와 늙은이, 병자를 제외하고는 힘 깨나 쓸 위인이라고는 눈 앞의 덩 치 외에는 없지않는가. 자신이 데려온 삼십여 명의 정예무사라면 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식은죽먹기일 것이다. 놈이 미행을 눈치채고 안 채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조각 자신에 찬 웃음이 곡요의 얄팍한 입술 위에 자리잡는다. 네 분께서는 우리를 얌전히 따라가 주셔야겠소이다. 우리 애들은 워낙 거칠어서... 자칫 귀하신 몸들이 상하실까봐 걱정이외다. 석대원은 가당치 않다는 듯,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 귀하들로는 조금 어려울 거라 생각되는데... 소생의 생각으로는 돌아가서 쓸만한 위인들을 몇 명 더 데리고 오는 것이 좋을 듯 싶 소이다. 건방진 놈! 순간, 외마디 호통소리와 함께 곡요의 뒷전에 서 있던 네 명 중 하나가 벼락같이 몸을 날려 석대원을 덮쳐왔다. 어느새 뽑았을까. 그의 손에는 시퍼런 송곳이 숭숭 박혀있는 낭아곤(狼牙棍)이 들려있다. 석대원은 사내의 손에 들린 흉기를 바라보며 혀를 찬다. 성미가 급한 친구로군. 석대원은 몸을 뒤로 젖히며 한 걸음 물러섰다. 사실, 甲 이 乙 에게 丙 이라는 물건을 휘두른다면, 乙 은 丙 을 피하기 위해서든 아 니든 반사적으로 석대원과 같은 행동을 취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사적인 몸짓은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장사치 차림의 장한이 어금니까지 악물어가며 휘둘렀던 낭아곤은 석대원의 가슴과 한 뼘 정도의 공간을 남기며 지나간다. 한 차레의 공격이 무위로 끝난 촌각의 순간, 석대원의 오른손이 회수되는 낭아곤의 궤 도에 달라붙었다. 헉! 낭아곤을 휘둘렀던 장한의 눈이 부릅떠진다. 석대원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가볍게 미는 순간, 오른손이 부 르르 진동하며 낭아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기 때문이다. 그가 낭아곤을 휘두른 수법은 발(發)에서 수(收)까지 반원을 그리는 초식... 하지만 석대원으로부터 전달된 여력(餘力)은 궤도를 반원보다 조금 더 길게 만들었고, 연장된 궤적(軌跡) 위에는 자신의 왼쪽 어깨가 있었다. 사내는 왼쪽 어깨를 자신의 병기에 질린 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사천 일대에선 공문사살(空門四煞)이라는 이름으로 흉명을 떨치던 사내들은, 동료가 자신의 병기에 상하여 쓰러지자 잠시 어이가 없었다. 꽤나 용감한 친구지만... 좀 급했군. 그래, 당신들은 거기에 계속 서 있을 텐가? 조롱이 섞인 석대원의 목소리가 그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정신을 차린 세 명은 탁자 옆에 놓인 짐 속에서 병기를 꺼내든다. 석대원은 흥미있는 눈초리로 그들의 병기를 훑어보았다. 기형환도(奇形環刀). 삼지검(三枝劍). 용조수갑(龍爪手匣). 석대원은 피식 웃는다. 꽤나 별난 것들을 좋아하는 작자들이군... 한 명의 부하가 쓰러졌지만, 곡요는 아직도 여유있는 모습을 잃지 않고 장내의 상황 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부천왕(冥府天王)과 같은 기세로 서 있는 늠름한 부하들... 그는 나직하게 명령을 내린다. 놈을 쳐라! 단, 죽이지는 말고. 옛! 삼구일성(三口一聲). 이제는 공문삼살이 되어버린 공문사살. 주인이 지목한 토끼를 향해 달려드는 사냥개처럼 석대원에게로 쏘아져 나간다. 석형을 도와야 한다... 아직도 운행이 부드럽지 않은 진기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구양현은 싸움에 끼어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석대원의 왼손 - 허리 뒤로 가볍게 돌려져 구양현의 위치가 아 니면 볼 수 없는 - 을 발견한 순간 멈춰진다. 변해간다. 석대원의 왼손은 마치 붉은 등롱을 피부 속에 감춘 듯 점점 붉은 광채를 띠어가고 있 었다. 휘이익. 끝이 갈라진 기형환도가 석대원의 얼굴을 향해 찔러왔다. 그 기이한 모양 덕분에, 어디라도 한 군데 찔리면 뭉텅살이 떨어지는 것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석대원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왼손을 쭉 내밀어 환도를 잡아채 간다. 미친 놈! 환도를 휘두르던 장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살과 뼈를 찢었던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맨 손으로 이 칼을 잡으려 한 자는 없었다. 그런데 이 미친 자식은... 이 칼이 종이로 만든 줄 아는 모양이지? 놈의 손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주리라. 장한은 칼자루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하지만... 우두둑. 그의 생각대로 환도는 종이로 만들지는 않은 것 같다. 대신 밀가루나 두부로 반죽한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손아귀 속에서 어찌 그렇게 맥없이 부숴져 나갈 수 있겠는가. 장애물을 너무도 간단하게 부수고 장한의 눈앞으로 밀려오는 손. 붉은 손. 붉다. 그 생각을 끝으로 뒤로 날아가는 장한의 의식은 끊어졌다. 탁자와 의자 몇 개를 쓰러뜨리며 요란스럽게 쳐박힌 그의 안면은, 잘 반죽한 밀가루처 럼 우스꽝스럽게 우그러져 있다. 네가 감히! 죽엇! 동료의 패퇴에 더욱 분노한 듯, 석대원의 좌우를 노려오는 삼지검과 용조수갑은 날카 롭기만 하다. 제법 기개가 있는 놈들이군. 석대원은 오른손바닥을 뒤집어 삼지검의 날없는 면을 누른 후, 빠르게 오른손을 튕겨 검 주인의 목을 때린다. 이 순간 석대원의 왼쪽 옆구리를 할퀴었던 용조수갑의 날카로운 발톱들은, 예의 붉은 손에 걸려 휴지처럼 찢어지고 있었다. 이어 허리 뒤로 끌어당긴 오른주먹으로 복부 강타. 석대원이 보여준 몇 가지 동작들은 비단 빠를 뿐만 아니라 완숙한 무용수가 펼치는 춤과도 같이 매끄러웠다. 개개의 동작이 맞물려 하나의 형(形)을 만들고, 그 형의 절정에는 가격할 목표물이 있 었다. 장한들은 숨쉴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놀랍군! 맨 손으로 병기를 부러뜨리다니, 사술(邪術)인가? 탄성과 함께 곡요의 손에서 한 자루 기형추(奇形錐)가 석대원에게 쏘아진다. 호! 드디어 대장님께서 등장하셨나? 이죽거리는 말투와는 달리 석대원의 거구는 기쾌하게 움직인다. 좌로 이 보. 옆으로 움직이는 그의 보법은 매우 특이했다. 두 다리가 교차되고 다시 벌어지며 이루어지는 이동은, 네발 짐승의 움직임과도 같은 기묘한 완급(緩急)이 조화되어 있다. 목표물을 잃어버린 추는, 조금 전까지 석대원이 서 있던 공간에서 작은 원을 그리곤, 다시 회수되어 간다. 추의 끝에 매달린 가는 사슬이 그러한 수발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이미 관전자가 되어버린 구양현은 방금 드러난 한 자루 겸자추(鎌子錐 : 끝부분이 낫 같이 갈라진 추)로부터 작달막한 사내의 내력을 알아낼 수 있었다. 석형, 그 자는 혈추독정(血錐毒釘) 곡요라는 자요. 독암기를 조심하시오! 혈추독정이라... 석대원은 곡요를 바라보며 그 별호를 되새겨 본다. 이 순간, 곡요는 품 속에서 꺼낸 여러자루의 추를 움켜쥐고 있다. 양인추(兩刃錐), 구조추(九釣錐), 분동추(分銅錐)... 7저 자는 꼭 만물상 같군. 저 조그만 품 속에 얼마나 많은 추들을 숨기고 있을까. 석대원의 눈초리엔 흥미있는 동물을 바라보는 듯한 호기심이 어려 있다. 줄넘기라도 하자는 것인가? 어디 한바탕 놀아보시오. 그러면 내가 노래라도 불러드리지. 석대원의 조소에 자극받은 듯, 곡요의 얼굴에 노기가 서린다. 애송이! 이번에는 피하지 못할 것이다! 외마디 기합과 함께 곡요의 손에 들려 있던 여러 자루의 추가 일제히 쏘아졌다. 일순, 객점 안은 각양각색의 추들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빛줄기로 가득 찬다. 보기 좋군! 가벼운 탄성과 함께 석대원의 장대한 신형이 꺼지듯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추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석대원은 구르듯이 곡요를 향해 미끄 러졌다. 지추란활(池鰍亂滑)... 그러다가 불쑥 곡요의 앞으로 치솟는 것은 어변성룡(魚變成龍)의 신법. 곡요는 눈앞에서 난데없이 석대원의 거대한 얼굴이 솟아오르자,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황급히 뒤로 물러서는 곡요. 하지만 석대원은 그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추의 사슬들을 나꿔챈다. 석대원이 은빛으로 빛나는 사슬들을 감아 쥐자, 곡요는 손아귀는 물론 팔꿈치까지 저 려오는 것을 느낀다. 사슬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석대원의 내력은 강맹하기 이를 데 없다. 곡요는 꼼짝없이 무기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총사(總司)님! 객점 바닥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의 수하들이 상전의 위험을 보고 석대원의 등을 향해 달려든다. 너희들은 더 쉬어라! 석대원의 한 소리 외침이 객점의 벽과 천정을 진동시킨다. 그의 오른손이 한 차례 흔들리자, 길이 삼 장이 넘는 사슬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맹목 적으로 돌진하던 자들을 단번에 휘감아 버린다. 사슬에 감긴 자들은 저항할 수 없는 한 줄기 힘에 의해 번쩍 들려졌고, 이어 석대원의 손짓에 따라 객점의 문 밖으로 사납게 팽개쳐졌다. 이때다! 석대원의 주의가 잠시 다른 곳으로 쏠린 순간, 곡요의 눈이 교활하게 빛난다. 피핑. 곡요의 오른손이 뒤집어지자 세 개의 작은 물체가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석대원 에게로 쏘아진다. 곡요가 자랑하는 삼재독정(三才毒釘)이다. 새끼손가락 길이에 원추형(圓錐形)으로 생긴 이 독정의 끝에는 남만(南灣)에서 서식 하는 백분당랑(白粉螳螂)의 독액이 발라져 있었다. 백분당랑의 독은 피하지방이나, 신경에 침투하는 여타의 독과는, 달리 혈액에 직접 작 용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혈관을 통해 심장에 이르는 침투력은 다른 약물과 비교할 바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곡요는 빠르고 정확하게 독정을 던지기로 정평이 나 있는 위인이다. 손목과 손가락의 탄력만으로 발사되는 그의 독정은 더할 나위 없이 은밀했고, 또 치밀 했다. 강한 독성과 정교한 시전. 그래서 이제까지 곡요의 독정에 당하고 생명을 부지한 사람은 거의 없다. 악! 소소는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는다. 그녀의 뇌리에는 암기에 꽂힌 채 고통스럽게 쓰러지는 석대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으윽! 짧막한 비명이 울렸다. 비명이 석대원의 것이 아님을 알아챈 소소는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그녀의 눈에는 비장군(飛將軍)처럼 당당하게 서있는 석대원과 바닥에 쓰러진 곡요의 모습이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선지, 소소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는다. 내 가죽장갑을 보고 짐작했었지. 7석대원이 웃으면서 말한다. 그는 곡요의 손에 낀 장갑을 보고 상대가 독암기를 사용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사슴가죽으로 만든 장갑은 강호에서 암기를 사용하는 무리들이 자신의 중독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보호용구였기 때문이다. 곡요의 독암기는 비록 그 속도와 방위가 절묘했지만, 미리 짐작하고 있던 석대원에게 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붉은 빛이 감도는 그의 왼손은 이때에도 큰 힘을 발휘했다. 삼재 방위를 이루고 날아온 세 개의 독정은 모두 그의 왼손에 맞아 부숴졌다. 놀라운 점은 그의 왼손은 공문사살의 병기를 부술 때와 마찬가지로 손톱만큼의 상처도 없이, 독정들만 산산조각 내었다는 것이다. 곡요는 이 의외의 광경 앞에서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고, 벌린 입이 채 다물어지기 도 전에 석대원의 주먹에 격중된 선기혈(腺氣穴)을 감싸쥐며 쓰러졌다. 끼이익. 객점의 문이 열리며 한로가 들어선다. 손에는 여전히 지팡이가 쥐어져 있고, 의복은 빗물에 흠뻑 젖어 있다. 소주, 이 늙은이를 어지간히 좀 부려 먹으시오. 이 비 속에서 생쥐들과 노닥거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라고... 다시 말하지만, 노복은 소주처럼 왕성한 젊은이가 아니라오. 한로는 비에 젖은 의복을 털어내며 투덜거린다. 구양현은 몸을 내밀고 객점 문 밖을 바라보았다. 꽤나 많은 숫자의 사내들이 저마다 죽는 시늉을 하며 진흙탕 속을 뒹굴고 있었다. 대부분 제대로 운신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어디 한 군데씩은 크게 부러지거나 상한 것 같다. 허! 구양현은 두 노소가 다수의 적을 맞아 그들을 처리하는데 한 식경이 채 안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대단하오! 소제는 정명 눈을 믿을 수 없군요. 곡요라면 사천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인물인데, 저항 한 번 변변히 못하고 이 꼴이 되 다니... 석대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겸연쩍게 웃으며, 곡요를 일으켜 세운다. 석대원의 팔 안에서 축 늘어진 곡요는 명치를 얻어맞은 충격에서인지 입가에 게거품을 머금고 있었다. 본디 자신의 본신무공이 아닌 괴병암기(怪兵暗器)에 너무 의지하면, 낭패하는 날이 오는 법. 이 자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석대원은 곡요를 의자에 앉힌다. 대혈을 제압당한 곡요는 마치 나무인형과 같이 석대원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석대원은 왼손을 뻗어 곡요의 어깨를 지긋이 누른다. 그것 보시오, 곡 선생! 내가 당신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지않았소? 석대원에게 눌리는 어깨는 불 속에 들어간 듯 화끈거린다. 곡요의 얄팍한 입술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반면 내공을 끌어올려 곡요를 핍박하고 있는 석대원은 빙글빙글 웃고 있다. 곡요는 눈앞에 서 있는 석대원이란 위인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고수 임을 깨달았다. 귀찮게 군 것을 생각하면 어디 한 군데를 분질러 버리고 싶지만... 점잖은 체면에 그럴 수도 없고 해서, 곡 선생이 내 요구 두 가지만 들어주면 탈 없이 그대로 돌려 보내드리리다. 곡요의 눈동자가 교활하게 구른다. 석 공자의 요구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이 몸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들 어 드리리다! 피식... 석대원은 곡요의 순순한 반응에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우선 귀하가 소속한 문파가 어딘 지 말씀해 주실 수 있소이까? 이 몸은 공문(空門)의 녹(祿)을 먹고 있소이다. 석대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하는 곡요... 그도 그럴 것이, 이 정도의 질문이라면 거리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공문? 석대원은 강호의 문파에 대하여 아는 바가 매우 적다. 그는 자문을 구하듯 구양현을 바라본다. 구양현은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는 공문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공문은 사천 일대에서 활동하는 방회로, 철탑마왕(鐵塔魔王) 여문통(余雯通)이라는 자가 문주로 있습니다. 아마 서부무림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겁니다. 이 자는 공문의 총사 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석대원은 고개를 끄떡인다. 구양현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상하군요. 여문통 정도의 위인이... 감히 신무전을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인다는 것은... 구양현의 의문은 당연했다. 공문이 어느 정도의 문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무전을 상대로 수작을 벌일 수 있는 문파는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러다면...? 석대원은 문득 사부로부터 전해 들은 어떤 단체가 생각났다. 여섯이 모여서 하나를 이룬 단체... 곡 선생께서는 한 글자를 빠트리셨소이다. 혹시 공문이 아니고 공문사(空門社)가 아니오? 석대원의 말에 곡요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니, 어떻게...? 순간, 곡요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社)의 비밀을 누설한 자에게 내리는 무서운 형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흐흠! 아마도 말씀하시기 곤란하신가 보구려. 좋소, 한 가지 요구는 이제 되었소이다. 그러면 두번째 요구인데... 석대원은 첫번째 요구를 순순히 질문을 거둔다. 곡요의 놀라운 얼굴에서 이미 원하는 해답을 얻었기 때문이다. 곡요로서는 석대원이 사(社)에 대하여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순순히 넘어가주는 것 이 너무도 반가웠다. 하지만 이 자의 두번째 요구가 얼마나 곤란한 것일까를 생각하자 겁이 덜컥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꿀꺽. 마른 침이 넘어가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나온다. 다름 아니라, 보시(布施)를 좀 베풀어 주셔야 하겠소이다. 소생들이 노자가 간당간당해서요. 잔뜩 뜸을 들인 끝에 나온, 너무도 의외로운 석대원의 요구에 곡요는 물론 구양현과 소소도 얼이 빠진다. 오직 한 사람, 한로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슬쩍 추켜올린다. (4) 석형! 공문이 아니고 공문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죠? 일행의 앞에는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성찬이 준비되어 있다. 석대원은 사천의 대표적인 요리라 할 수 있는 마파두부(麻婆豆腐)를 뒤적이던 젓가락 을 멈추고, 구양현을 바라본다. 으음... 구양형께선 강호육사(江湖六社)라는 이름을 들어본 일이 있소이까? 강호육사...? 구양현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는 머리를 내젖는다. 소제는 초문(初聞)이오만... 구양현의 대답에 석대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인다. 저도 이 단체에 대해 자세한 것은 모르고 있소이다. 단지 아까 아는 체 했던 것은, 곡요라는 자의 입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입 니다. 석대원은 구양현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른다. 이들 일행은 곡요로부터 적선(?)받은 금화은(金花銀 : 당시 사사로운 은의 유통을 금 지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대명통행보초라는 화폐를 사용했지만, 민간에서의 은 의 유통을 근절시킬 수는 없었다)은 삼백 냥은 족히 되었다. 덕분에 이들은 오랫만에 호식(好食)하고 있는 중이다. 사기로 만든 호로가 기울어지며 구양현의 잔에는 좋은 주향(酒香)이 감도는 유백색 액체가 서서히 차오른다. 석대원은 술호로를 거두며 입을 연다. 강호육사는 어떤 조직의 전위(前衛)입니다.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만... 그 조직은 행적이 워낙 은밀하여 강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옆에서 불그레하게 양념이 된 쇠고기 조각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담싹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소소. 문득 무엇인가가 떠오른 듯 참견한다. 맞아, 혈랑곡! 그 단체가 바로 혈랑곡이 틀림없... 후아! 소소는 말을 하다말고 화들짝 놀라서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들이킨다. 입 안에서 불이 났다. 본래 사천음식은 맵기로 유명했다. 사천은 기후가 습하고 한난(寒暖)의 교차가 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악천후를 이겨내 기 위하여 많은 향신료가 음식에 사용되었다. 암염을 이용한 소금절이와 고추, 후추를 이용한 매운 음식은 사천지방을 대표하는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입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 후추는 사천요리가 왜 사천요리인지를 알게 해 준다. 소소가 무심코 입에 넣은 가랄유편우육(加辣油片牛肉 : 고추기름(辣油)으로 간을 한 얇게 저민 쇠고기)도 그 중 하나였다. 맵기로라면 천하제일을 다투는 사천 고추가 아닌가. 이 순간, 소소는 혼이 반쯤 달아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왑! 소소는 휴지처럼 얼굴을 구기며 양손으로 목을 움켜쥔다. 얼떨결에 들이마신 술은 독하기로 유명한 호골주(虎骨酒)였기 때문이다. 입 안에선 불이 났고, 목구멍에선 화산이 터졌다. 소소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복합적인 고통으로 혼절할 지경이다. 하하! 아마 그럴 거야, 사매. 구양현은 사매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웃고는, 그녀의 말에 동조한다. 혈랑곡! 그들을 제외하면, 신무전 소속의 자신들을 핍박할 존재는 없을 것이다. 석대원은 그들 남녀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비운다. 구양현은 그다지 술을 즐기지 않는다. 세 호로나 시킨 술은 석대원 혼자서 거의 다 비운 상태... 그의 사고는 술잔 속에서 투명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는 다시 잔을 채운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웃으며 술을 마셔본 것이... 머리를 아찔하게 만드는 강한 주향과 함께 독한 맛의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 어간다. 오랫 동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술기운과 함께 밀려온다. 문지기 화(華) 노인은 그와 그의 동생 소전(小全)을 유난히 귀여워했다. 하지만 그들은 술냄새를 풍기는 화노인이 다가오면 얼굴을 찡그리며 요리조리 달아나 곤 했다. 화노인은 화초를 가꾸는데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 정원에 희귀한 자오란(子午蘭)을 심어주었다. 다른 난과는 달리 유실초(有實草)인 자오란에 까맣고 탐스러운 열매가 열리면, 화노인 은 그것을 보물 다루듯 조심스럽게 따서 술을 담궜다. 석대원은 술이라면 질겁을 하던 동생과는 달리, 화노인을 졸라 자오란주(子午蘭酒)를 얻어마시곤 했다. 한 모금 들이킨 자오란주는 열살바기 아이에게는 너무 썼다. 하지만 알딸딸한 기분이 즐거워 홀짝홀짝 마셔버린 독주... 취해 혀 꼬부라진 소리로 글을 흥얼거린 후에는, 언제나 대머리 사부의 매서운 회초리 가 기다리고 있었다. <허허, 운리사부. 그놈이 벌써 술 먹고 객기 부리는 걸 보면, 무인으로 대성할 놈입니다. 그만 용서해 주시지요.> 아버지...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하시던 아버지께서는, 훌쩍거리는 석대원을 감싸주었다. <석씨는 사대(四代)가 언제나 이 모양이란 말씀이야. 그 놈, 꼭지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술이라면 환장하는 건 꼭 제 증조부 닮았군.> 대머리 사부는 이렇게 빈정거리고는, 석대원을 때리던 회초리를 거두었다. 어린 시절 주마등(走馬燈) 같은 기억들이 술잔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스러진다. 하지만 이제는... 석대원은 잔을 단숨에 비운다. 태산같이 자신을 내려다 보던 아버지는 멀리 떠났다. 영원히 볼 수 없다. 화 노인은, 대머리 사부는 아직 살아 있을까? 석대원은 툴툴 웃는다. 나의 유년은 사라졌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유년의 추억만이 가시관처럼 머리를 죄인다. 누구 때문인가. 누가 내 인생을 이런 미로 속으로 밀어넣었는가. 연 외백(燕外伯)? 순간 석대원의 눈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파아란 섬광이 폭발한다. 복수, 복수다... 천진하던 꼬마 주정뱅이는 복수를 짓씹는 원귀(怨鬼)가 되어버린 것이다. 석 오라버니, 술을 잘하시네요? 소소가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철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그녀의 예쁜 얼굴도 한 잔 들어간 술 때문에 불그레한 취기가 감돌고 있다. 술을 마셔본 지도 십 년이 넘는군요. 그때는 맛을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아주 맛있군요. 자, 소저께서도 한 잔 더 하시죠? 석대원은 약간 흐트러진 어조로 말하며 호로를 쳐든다. 석대원이 주는 것이라면 뭐든지 받겠다는 듯, 빨개진 얼굴로 헤헤거리며 술을 받는 소 소... 구양현은 언제나 절도있는 몸가짐을 보여주던 석대원의 흐트러진 모습에서 작은 흥미 를 느낀다. 한로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방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오라버니는 혈랑곡에 대해 뭔가 중요한 비밀을 알고 계시죠? 잔을 받은 소소가 석대원에게 묻는다. 신비혈랑(神秘血狼)이라, 혈랑검은 베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혈옥수(血玉手)는 부수 지 못하는 것이 없도다. 석대원은 시를 읽듯이 운율을 넣으며 흥얼거린다. 많이 풀어진 목소리... 석형, 오늘은 많이 피곤하실 겁니다. 약주도 그만하면 과한 편이니 이제 자리에 듭시다. 석대원이 과하게 마셨다는 것을 알아차린 구양현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 이 정도로 파할 자리였으면 애당초 시작하지도 않았소이다. 이봐요! 여기 술 좀 더 가져와요! 석대원은 주방을 향해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잠시 팔을 헛짚고는 비틀거린다. 탁자가 흔들리며 앞에 놓여있던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쨍. 요란한 소리는 아니지만, 석대원은 퍼뜩 정신이 든다. 흐트러진 탁자 위로 잠시의 정적이 감돈다. 미안하외다. 소생, 하도 오랫만에 술을 마셔서인지 다리가 풀려버렸군요. 석대원은 미안한 듯 씨익 웃어보이고는, 탁자를 짚고 다시 일어선다. 점차로 취기가 사라진다. 그렇다. 술에 취하고 추억에 취할 때가 아니다. 그런 여유는... 십일 년 전 이미 사라진 것이다.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석대원을 바라보고 있는 소소의 시선에, 일순 허공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이 들어온다. 이윽고 석대원은 구양현과 소소를 천천히 바라본다. 아마도 이들은 나를 도와줄 것이다... 어느 순간, 그의 입이 무겁게 열린다. 구양형! 신무전으로 돌아가시면 소전주께, 혈랑곡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마시도록 말씀 드려 주십시오. ...? 잠시 멍청해진 구양현... 석대원의 가라앉은 음성은 계속 이어진다. 거기에는 무언가 드러나지 않은 큰 비밀이 감춰져 있습니다. 八章 順風耳千照眼 (1) 강호에서 가장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이 물음이 어떤 방파일까 라면, 대답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거지들의 집합소인 개방이 지닌 정보수집 능력은 타 방파의 추종 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는 거지들 중 절반 이상이 음으로든 양으로든 개방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니, 충분히 신빙성있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방은 개방 나름대로, 수집된 정보의 처리에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거지들의 귀동냥과 같은 식으로 난잡하게 수집되는 정보들... 당연히 한낱 첩보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며, 설령 제법 괜찮은 정보가 들 어온다고 해도 조직의 산만함 때문에 그 처리가 효과적이지 못한 실정인 것이다. 그래서 개방이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정보력은 소문만큼 굉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일(一) 개인으로써 개방에 버금가는 정보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 말 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그 인물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인물>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묻는다면, 견식이 풍부한 노강호(老江湖)라면 아마 그라면... 하며 고개를 끄떡거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인물>의 가계(家系)가 원래 그 모양이기 때문이다. (2) 천부고유(天賦高儒) 모용가(募容家)는 산동(山東)에서 제일가는 유림 명문이었다. <이었다>라는 과거형에서 알 수 있듯, 물론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조군(趙君)이 통치하던 송조 초기에는 그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 다. 모용가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모용개(募容盖)는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 : 927 ~ 976)이 후주(後周 : 951 ~ 960까지 성립한 오호십육국 말기의 왕조)의 전전도점검(殿 前都點檢 : 각 지역 병마절도사의 총수령) 직에 있을 당시, 조광윤의 집에서 기거하던 열아홉 명의 식객(食客)들 중 하나였다가, 후일 송나라의 건국공신이 된 위인이다. 950년 정월 초하루. 북변에서 요(遼)와 북한(北漢)의 연합군이 침략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후주의 조정은 군부의 실력자인 조광윤에게 10만 정병을 주어 국경을 방어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정월 초나흘 새벽, 개봉(開封)에서 북쪽으로 40여 리 떨어진 진교역(陳橋驛) 에서, 이 10만 명의 정병이 조광윤을 천자로 모시자고 돌변, 조광윤에게 강제로 황포 (黃布)를 입히곤 후주의 도성인 개봉으로 회군, 당시 8살이 된 후주의 황제 공제(恭 帝)에게 황위를 넘겨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송사(宋史)가 기록한 <진교의 변>이다. 하지만 후세의 사가(史家)들 중 이 기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 다. <진교의 변>에 관한 가장 유력하고도 신빙성있는 해석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반 란이었다는 설이다. 즉 중국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무혈정변은, 조광윤이 주연을 맡고, 그의 부장(副將)이자 당대 제일의 맹장인 온조(溫組)가 조연을 맡아, 지모가 장량에 버금간 다는 재사(才士) 모용개가 연출대로 움직인, 삼인 합작의 교묘한 정치적 연극이라는 것이다. 전전도점검이라는 군부의 핵을 움켜쥐고 있던 조광윤에게는 언제라도 어린 공제를 몰 아내고 황위를 찬탈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차분히 때를 기다린 이유는, <말 위에서 얻은 천하 는 말 위에서 빼앗기며, 칼로써 세운 국가는 칼로써 무너진다>는 모용개의 간언(諫言)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조광윤의 인내는, 뭇 왕조가 난립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칭 송받아 마땅할 것이다. 조광윤은 모용개의 말을 좇아, 차분히 시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 모용개는 돈과 봉록을 미끼로 후주 조정의 문신들을 매수했고, 마상귀(馬上 鬼)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처럼 그 무용이 당대 제일이라는 온조는 여러 지방의 절도사 들을 설득하여 조광윤의 추종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심증 외에도, <진교의 변>이 잘 꾸며진 하나의 연극이라는 주장에는 두 가지 근 거가 있다. 우선 첫번째는, 당시 조광윤이 군사를 일으킬 구실이었던 요와 북한 연합군의 침공은 어던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요사(遼史)>에 의하면 958년 북한과의 연합이 깨어진 후 다시 연계된 것은 979년 - 조광윤의 동생 태종(太宗 : 976 ~ 997 즉위)이 즉위한 후이다 - 이며, <진교의 변>을 전후한 시기 거병한 기록은 나와있지 않다. 이것은 연합군의 침입 따위는 금군을 내기 위한 속입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한다. 이는 또한 후주 북쪽 변방의 군영의 정보진까지 조광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또 다른 이유는 앞서도 말한 바, 정변이 지나치게 조용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후주의 중신들은 송의 건국과 함께 거의 대부분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정치 적인 숙청이나 보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새 왕조의 창조는 곧 피의 수라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격렬한 중국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이것은 후주의 문신들과 조광윤 사이에 암묵적인 약속이 존재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진교의 변>이라는 희대의 연극이 가져온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조광윤은 황제에 즉위한 후 얼마 후 무장들을 위한 주연을 베풀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꺼냈다고 한다. <삶이란 허무하기 그지없다네. 칼날이 언제 목숨을 위협할지 모르는 군인이란 그래서 더욱 슬픈 일이지. 자네들도 골치 아픈 군무(軍務)를 그만두고 자식들과 함께 인생을 즐기면서 천수(天 壽)를 누리는 것이 어떻겠나?> 이에 무장들은 흔쾌히 웃으면서 병부의 인감(印鑑)을 풀었다고 한다. 이 <술잔을 나누며 병권을 풀다(酒杯釋兵權)>이라는 고사는, <진교의 변>이 피로써 피 를 부르는 유혈정변의 악순환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각설하고, 모용개는 실로 그 내심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송조의 성립 이후 능히 공신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그는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조광윤 에게 두 가지만을 요구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이 내린 학자(天賦高儒)>라는 황제 친필의 현판이며, 다른 하나는 대대로 반역의 대죄가 아니면 지은 죄를 면해준다는 증명서인 단서철권(丹書鐵卷)이었다. 모용개의 이러한 은퇴는 - 실제로는 아니었겠지만 - 공명에 초탈한 것을 지고한 가치 로 삼는 유림의 선비들에게는 대단한 미담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 일로 모용개는 일시에 유림에서 제일가는 명사로 지위를 굳힐 수 있었으며, 그의 후예들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뛰어난 자질을 갈고 닦아 그 지위를 더욱 굳건히 지켜 나갔다. 이상이 천부유림(天賦儒林)으로 이름 높던 모용가의 화려했던 과거이다. 하지만 세월은 공평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흐른다. 금박을 입힌 황제의 친필 현판은 오랜 풍상 속에서 획 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고, 조군(趙君)의 사면권을 의미하는 단서철권 따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 여 효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유림의 명문으로 이름이 높던 모용가도 수많은 가문들처럼 몽고족이 지배한 백년 암흑 기 속에서 쇄잔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자 맹자의 도리가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뜻있는 한족 선비들의 등용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원대에는 글을 읽어 출세할 수 있 는 길들은 모두 막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비들은 굶주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천부고유의 모용가라고 해도 예외가 될 수 없었 다. 유림 제일가는 명문임을 자처하던 모용가의 문인들도, 이름 석 자 쓸 줄 모르는 무지 렁이들처럼 배를 채우기 위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가문의 율법은 형편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노객(路客)들의 물건을 강탈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 화적이 된 선비도 있었고, 아이 에게 먹일 젖을 만들기 위해 몸을 팔아야만 했던 아낙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활은 조금도 향상되지 못했다. 모용개의 칠대손이자 모용풍(募容楓)의 증조부인 모용자령(募容滋嶺)은 가문의 생존 을 위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가 택한 최상의 길은, 바로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장사, 그것도 문인이던 그들 가문도 훌륭하게 할 수 있는 장사. 바로 정보 장사이다. 정보 장사 중 가장 이문이 큰 것은 비밀, 그것도 아주 중요한 비밀을 거래하는 것이 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닭 모가지도 비틀지 못하는 유생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기름을 끼얹고 풀무 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용자령은 영리한 사람이어서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굶어죽지 않으려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름 모를 낭인 무사의 검에 의해 개처럼 비참하게 죽었다. 하지만 그의 후예들은 달랐다. 그들은 선대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위하여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명석한 두뇌는 제자백가를 논하고 시부(詩賦)를 지어내는 것 이외에도 쓸모있는 데가 많았다. 그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오성을 이용해서, 독창적인 무예의 형(形)과 세(勢)를 만들었 다. 검(劍) 권(拳) 장(掌) 지(指)... 강호를 굴러다니는 흔해 빠진 무공들이 그들의 두뇌를 거쳐 새롭게 해석되었고, 한층 발전되었다. 결국 그들은 남들보다 짧은 시일 사이에 어엿한 무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이 천부유림으로 이름 높던 모용가의 그다지 화려하지 못한 현실이다. (3) 하지만 고강해진 무공에도 불구하고 비밀장사는 위험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사실은, 때로는 살아가는데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할 수 있 다. 그래서 모용풍은 모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칠흑같은 밤에도 열심히 달려야 했다. 헉, 헉! 모용풍의 경공은 대단히 훌륭한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경공을 지니고 있어도 닷새를 주야(晝夜)로 달린다면 지치지 않 을 장사가 없을 것이다. 이제는 모용세가 만들어낸 경공신법의 요체인 상실하허(上實下虛)의 운기 따위는, 머 리 속에 떠올릴 기력 조차 없다. 아교칠을 했는지 발바닥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고 있다. 빌어먹을... 때려 죽인다고 해도, 더 이상은 못 뛰겠다! 지친 숨을 내뱉으며 모용풍은 쓰러지듯 땅에 주저앉는다. 나도 모르겠다... 그는 그 자리에 벌렁 누워버린다. 땅에 고여있는 빗물이 등덜미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진다. 차라리 한결 시원하군... 기진맥진한 그의 눈에는 서쪽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둥근 달이 가득 들어왔다. 생애 마지막으로 보는 달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밝고 고울 수가 없었다. 달빛에 겹쳐 한 폭의 묵화처럼 보이는 한 줄기 나무가지... 원, 이 나이에 감상적이 되다니. 친구들이 알면 놀림감이 되기 십상이지. 흐흐... 하지만 이미 감상적으로 되어 버린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싯귀를 흥얼거리고 있다. 혼자서 술을 마시니, 달과... 또... 또 뭐가 내려와 셋이 되었던가? 이백(李白)의 독작(獨酌) . 하지만 그 귀절도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기진맥진한 몸이 그의 기억력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당연히 짜증이 났다. 밤새 한숨도 못돌리고 꼬박 뛰었군. 머리에 털나고 이렇게 뛰어 보기도 처음이네... 그때 멀리서 늑대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닷새 동안 자신의 주위를 맴돌던 소리... 모용풍은 어이없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허헛, 망할 놈들! 저것들은 잠도 안 자나. (3) 유구한 중국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영웅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이 다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영력(靈力)을 인정받으며, 민간으로부 터 신과도 같은 추앙을 받는 영웅은 흔치 않다. 그렇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살아 생전의 놀라운 업적이다. 신명을 바쳐 나라를 보필한 충성심, 금석지약(金石之約)과도 같은 의리, 후세 만담가 (漫談家)들에게 떨어지지 않는 소재를 제공해 줄 정도로 놀라운 무위, 등등... 이런 것들은 영웅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둘째는 죽음, 혹은 죽음에 이르는 구도의 특이성이다. 만고의 영웅이 되려면, 푹신한 이불에 등을 댄 채 아들 손자의 손을 잡고 편안히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적어도 눈알을 뽑아 망루 위에 걸어야 하며, 잘려진 목이 상자에 담긴 채 이곳 저곳을 전전해야 하며, 음습한 옥중에서 간신의 독을 마셔야 하는 것이다. 세째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원통스러운 역사가 시작되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일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그의 죽음이 더욱 큰 값어치를 지니게 되며, 그의 한이 곧 모든 민초(民草) 들의 한과 동화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차(夫差)가 구천(句踐)에게 멸망당해 오나라의 영화로 상징되는 고소대 (姑蘇臺)가 불길에 휩싸여야 하고, 한나라의 중흥을 외치던 유비(劉備)가 오군(吳軍) 의 화공에 패하여 큰 뜻을 가슴에 묻은 채 쓰러져야 하며, 송나라의 조씨 황제가 알토 란 같은 강북 땅을 여진족에게 내준 채 강남으로 달아나야 하는 것이다. 영웅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많지만, 위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사람들 은 얼마 되지 않는다. 꼽아 본다면, 운몽택(雲夢澤)에서 초왕의 시체에 일천 편(鞭)을 휘둘러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았다는 오자서(伍子胥), 다섯 관문을 지나며 여섯 장수의 목을 베었다는 관 우(關羽), 산은 흔들어도 악군(岳軍)을 흔들 수는 없다고 했던 악비(岳飛) 정도가 아 닐까. (우리나라의 경우엔 巫俗에서 將軍神으로 추존되는 崔瑩, 南怡, 林慶業 장군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각기 다른 시대를 살며, 무위나 업적에 있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영웅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일반에게 가장 널리 알려지고, 또 추앙받는 인물은 관우일 것이 다. 이것은 오자서나 악비와 같은 인물들이 역사라는 관념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데 반해 관우는 적토마(赤兎馬)와 청룡도(靑龍刀), 배꼽까지 내려온 수염 등으로 구체적 형상 화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중국 어디를 가도 관우의 신상과 위패를 모셔놓은 관제묘(關帝 廟)를 찾아볼 수 있다. 사천과 섬서(陝西)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화소산(花昭山) 추오령(秋烏嶺)... 관도로부터 두어 마장 떨어진 죽림 사이에도 이러한 관제묘가 한 채 있다. 휘익. 산들바람에 여린 대나무 잎이 흔들린다. 열엿새 달빛도 흔들린다. 그림자... 한 줄기 바람으로 잠시 흔들리는 경물 사이,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바람이 사라지자 모든 것은 다시 제 자리를 찾는다. 그림자는 여전히 그곳에 서 있다.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듯 그림자의 출현은 바람과 어우러져 있었다. 그는 관제묘를 바라본다. 대개 이런 사당은 백일창천(白日蒼天)의 대낮이라도 괴기스러운 구석이 있는 법이다. 하물며 이런 밤중이라면... 휘이이... 제법 세찬 바람이 불며 죽림이 요란스럽게 버석거린다. 대나무들이 흔들리며 그를 둘러쌓고 있던 그늘이 걷힌다. 그 사이로 비추는 환한 달빛... 녹의(綠衣)...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언뜻 비친다. 무엇인가를 망설이던 그는, 결심한 듯 관제묘 안으로 들어간다. 일 각의 절반쯤 지난 후. 그는 다시 사당 밖으로 나온다. 이미 늦었단 말인가... 잠시 낭패의 기색을 보이던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뀐다. 멸 걸음 앞쪽 땅바닥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건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물건을 짚는다. 흙탕물 속에 묻혀 있던 물건... 절반 가량이 잘려 나간 붓이다. 그것도 무쇠로 만들어진... 불길함이 엄습한다. 그는 이 물건의 임자를 알고 있다. 주인을 보호하던 물건이 이 꼴이 되었다면, 주인이 무사할 리 없는 것이다. 잠시 잘려진 붓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입술을 깨문다. 그는 바닥을 살핀다. 빗물 때문에 많이 지워졌지만, 예리한 눈매는 전투의 흔적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빗물에도 씻기지 않을 정도로 깊이 패인 족인(足印). 잘게 부서진 검편(劍片)... 그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핀다. 꺾여 건들거리는 대나무, 땅거죽과 함께 뒤집어진 바위 등이 모두 이 부근에서 있었던 싸움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하나하나의 흔적들이 모여 어떤 방향을 만들고 있음을 발견한 것은 오래지 않아 서였다. 그는 그 방향을 바라본다. 포기할 수 없다! (4) 모용풍은 한 달 전부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노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하지만 그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정보를 지니고 있는 자들 주위엔 항시 파리들이 꼬이는 법이고, 그는 무림의 다섯 괴 짜인 강호오괴(江湖五怪) 중 한 명으로서, 자신의 무공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아도 모용풍의 무공은 일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 자루의 판관필(判官筆)을 이용한 양의행운필법(兩意行雲筆法)은 그 민첩함과 조화로움으로, 그의 이름을 강호 명숙의 반열에 올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란 반드시 입맛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무서운 것 없던 그가 드디어 임자를 만난 것이다. 그는 수 년 전부터 한 가지 일을 조사하기 위해 섬서(陝西) 땅 촌구석에 틀어박혀 있 었다. 하지만 그리도 은밀했던 그의 행적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한 달 전부터 붉은 색 장 포를 입고 늑대 탈바가지를 뒤집어 쓴 괴인들이 집요한 노림을 받은 것이다. 모용풍은 그들과 이미 여러 차례의 접전을 벌였지만, 그 대단한 필법으로도 조무라기 몇 놈을 죽였을 뿐, 끝내는 자랑하던 철필도 잃어버린 채, 벌써 닷새 째 쫒기고 있는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모용풍의 전면에는 세 개의 붉은 인영이 당도하였다. 붉은 색 장포에 피를 칠한 듯한 늑대가면이 어둠 속에서 으스스하게 번뜩인다. 뒤이어 수하로 보이는 복면인 칠팔 명이 그들의 뒤에 둥글게 선다. 요란스러운 복색치고는 너무도 조용한 움직임이다. 모용 노인, 기껏 달아난 곳이 겨우 이곳이오? 어찌 된 일인지 여기, 화소산 주위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는구려. 선두에 선 구부정한 허리의 늑대탈이 조롱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모용풍은 흙탕물 속에 몸을 던진 채 꼼짝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의 가느다란 눈꼬리는 늑대가면들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탈바가지를 쓸려거든 허리나 펴고 쓸 것이지... 그런 괴상한 물건을 쓰고 있어도, 내 눈을 속이진 못하지... 오뉴월 복중(伏中)에 감기라도 걸렸나, 잔왜수(殘倭手) 동파로(東芭魯)? 선두에 선 사내는 흠칫 놀라더니,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으하하! 과연! 눈알 천 개인 귀 밝은 원숭이, 순풍이천조안(順風耳千照眼 : 西遊記에 나오는 신비한 원숭이. 順風耳는 귀 밝은 원숭이이며 千照眼은 눈 밝은 원숭이)이란 말이 허명이 아니었군. 그러면 어디 여기 서 계신 분들도 맞춰 보시오. 동파로는 옆에 서 있는 두 명의 늑대가면을 쓴 괴인들을 가리켰다. 오른쪽 허리에 길고 왼쪽 허리에는 짧은 왜도(倭刀)를 덜렁거리고 있는 사람... 마르고 훌쩍하게 큰 키가 이채롭다. 또 한 사람은 장포 속에 양 손을 감추고 있다. 중키에 탄탄한 체구, 유난히 가늘고 긴 목이다. 가늘고 긴 목... 빌어먹을! 이 순간 모용풍은 아주 더러운 인간의 이름을 떠올리고 말았다. 좋지! 내 하라면 못 할 줄 알고! 모용풍은 부시시 몸을 일으킨다. 헝클어진 머리채와 의복에서 흙탕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휘청거리는 다리로 몸을 지탱하는 데에는 의외로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다. 모용풍을 둘러싼 사내들은, 저항력을 잃은 먹이를 바라보는 맹수의 그것처럼, 득의에 찬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본다. 죽을 때 죽더라도 쥐새끼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수는 없지... 모용풍은 허리를 쭉 편다. 일순 매서운 안광이 번쩍이며, 사그러지지 않은 노강호(老强豪)의 풍도가 살아난다. 저 삐쩍마른 녀석은 좌수도(左手刀)를 쓰는 품으로 봐서 몇 년 전 동영(東瀛)에서 건 너왔다던 몽도류(夢刀流) 이시이 타로오(石井太郞)고, 그 옆의 놈은... 흠흠, 이름을 입에 담기도 더러운 음마(淫魔) 유붕(兪朋)인가? 아직도 살아있는 걸 보면, 역시 욕을 많이 처먹을수록 명줄이 길어지는 게로군. 모용풍은 배우가 주어진 대사라도 외듯이 듯이 술술 이름을 불러 제낀다. 가벼운 놀라움이 세 괴한들 사이에서 일렁인다. 잔왜수 동파로나 음마 유붕이야 워낙 유명한 위인들이지만, 이시이 타로오는 왜국(倭 國)에서 추방된 도객으로써 중토를 밟은지 삼 년도 채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강호에서 나도는, <순풍이천조안이 모르는 일은 귀신도 모른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천하의 모용풍! 동모(東某)는 진정으로 탄복했소이다. 오 척도 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등이 약간 굽어 난장이[倭] 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동파로는 짐짓 포권하며 과장된 목소리로 말한다. 가뜩이나 작은 키가 더욱 작아진다. 하지만 그 난장이 가 두 육장으로 펼치는 잔백수(殘魄手)는 십 장 떨어진 바위 위에도 선명한 장흔(掌痕)을 남길 수 있는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모용노인의 늙은 목숨에는 전혀 관심이 없소이다. 단지 노인장이 지니고 계시는 비세록(秘世綠)만 넘겨 주시면, 순순히 돌려보내 드리겠 소. 동파로의 말에 모용풍은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녀석! 내가 왜 이 궁벽한 곳에서 몇 해를 썩었는데, 늙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내 놓으 라고? 큭큭... 자네는 비세록이 몇 권 짜린지 알기나 하는가? 이 모용풍이 비록 늙은이 치고는 정정하다고 하지만 그 무거운 걸 들고 닷새를 뛰어다 닐 만큼 힘이 넘치지는 못하지. 비세록은 벌써 다른 이의 손으로 넘어간 지 오래야. 단념하고 늙은 목숨이나 가져 가게! 모용풍은 암중으로 진기를 끌어올려 보았다. 앉아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노인의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손톱 만큼의 진기도 모아지지 않는다. 닷새 간의 뜀박질은 노인의 진원(眞元)을 크게 상하게 만든 것이다. 음마 유붕이라고 불린 사내가 한 걸음 나선다. 냄새 나는 늙은이가 주둥아리만 살아있구나! 시체라도 온전히 남기고 싶거든 그 책의 행방을 빨리 실토해라. 모용풍은 불쾌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불쾌했다. 이 개 같은 자식에게 욕을 듣다니! 그 역시 강호의 모든 사람들처럼 유붕이라는 인간을 사갈(蛇蝎)처럼 혐오하고 있었다. 유붕은 강호에서 그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흉명이 대단했다. 이 악한의 손에 걸려 죽임을 당한 무공도 모르는 약자와, 신세를 망친 여인의 수는 헤 아릴 수도 없었다. 유붕은 사오 년 전 사소한 시비 끝에 백련교도들을 여럿 살해했다가, 남패(南覇) 무양 문(武陽門)의 추격을 받게되자 멀리 새외(塞外)로 달아났다고 알려진 인물인데, 이렇 게 버젓이 돌아다니는 내막이 궁금했다. 아깝다. 이것도 좋은 건(件)일 텐데... 제 버릇 개 주지 못한다고, 모용풍은 이런 절박한 와중에서도 비세록에 올릴 정보를 하나 더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진기가 멀쩡할 때 같으면 결코 유붕과 같은 버러지에게 욕을 듣고 넘길 모용풍이 아니 다. 이기든 지든, 한바탕 드잡이질로 분을 푸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은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진기가 고갈되어 있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버러지에게 특유의 독설을 퍼부을 뿐... 흐흐흐! 유붕, 이 개 같은 자식아! 몸 팔아 빌어 먹는 네 에미년한테나 가서 물어보아라. 아마 자식놈에게도 가랑이를 벌리며 해롱거리겠지? 순간 나무로 만들어진 늑대가면의 눈구멍 속으로부터 독살스러운 안광이 번뜩인다. 씹어 죽일 늙은이! 붉은 장포가 펄럭이며 유붕의 두 손이 소매 사이로 드러난다. 갈고리같이 구부러진 손이 휘둘러지며 일어나는 매서운 경풍. 음공(陰功)인가...? 모용풍은 피하려고 했지만, 두 다리는 물 먹은 솜과 같다. 퍽. 모용풍의 노구(老軀)가 실 끊어진 연처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형편없이 구겨진 채 땅 위로 처박힌다. 유붕의 독문장력인 유명음독수(幽冥陰毒手)에 정통으로 격중된 것이다. 유명음독수는 외부는 상하지 않은 채 내부를 파괴하는 여타의 음공과는 달리, 강맹한 타력(打力)을 띠고 있다. 그런 장력에 정통으로 얻어맞았으니 내상은 물론이고, 갈비뼈도 서너 대는 어긋났을 것이다. 모용풍은 들끓는 내식(內息)을 이기지 못하고 심하게 기침한다. 하지만 얼굴이 흙탕물 속에 처박힌 탓에, 기침 소리는 들리지 않고 물거품만 간헐적으 로 피어오른다. 손속을 삼가시오, 유형! 저 자가 그냥 죽으면 곤란하오. 더러운 소갈머리 하고는... 저 자식은 언제나 저 모양이라니까. 잔왜수 동파로는 내심 유붕의 고약한 성질을 욕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붕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성큼성큼 엎어져 있는 모용풍에게로 다가 간다. 감히 내게 냄새나는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다니... 동형, 내 저 늙은이의 사지 중 한 군데는 잘라내야만 분이 풀리겠소. 죽이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뼈를 갈아마시는 듯한 음침한 음성을 내며, 유붕은 품속에서 예리한 한광을 빛내는 단도를 한 자루 꺼내든다. 열엿새 밝은 달빛이 단도의 날 위에서 한 차례 진저리친다. 흐흐... 주둥아리를 놀린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유붕은 잔인한 웃음을 흘리며 모용풍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드러나는 얼굴... 흙탕물로 범벅이 된 노인의 입가에는 가는 핏줄기가 언뜻 보인다. 유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도를 쥔 오른손을 움직인다. 으윽! 모용풍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뒤틀었다. 왼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느낌. 유붕의 단도가 아주 천천히 그의 어깨에 박혀들었던 것이다. 지루할 정도로 아주 천천히... 으아악! 끝내는 참을 수 없었던지 모용풍은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사시나무 떨듯 흔 들어댄다. 하지만 유붕의 손에 단단히 잡힌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깨에서 솟구치는 피분수만 더욱 거세어졌을 뿐. 선혈은 모용풍의 의복을 붉게 물들이고, 뼈를 톱질하는 듯한 소름끼치는 음향이 고요 한 밤공기를 진저리치게 만든다. 유붕의 잔인함은 그의 더러운 음행(淫行)만큼이나 유명했다. 산 사람의 사지를 잘라내는 것은, 그의 화려한 명성에 비하면 그다지 심한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잔인함으로 인하여, 무림인들 누구나가 대면하기를 두려워하는 강호오마 (江湖五魔) 중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동파로와 이시이 타로오는 유붕의 잔인한 짓꺼리를 더 이상 봐줄 수 없었던지, 고개를 돌려 피를 외면한다. 九章 對面 (1) 문득, 시선을 돌린 이시이 타로오의 매와 같은 시선에 이채가 번뜩였다. 보름달이 환하게 비치고 있는 서쪽 관도로부터 화살처럼 쏘아져 오는 물체를 본 것이 었다. 이시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저게...? 혈랑탈 속의 얄팍한 입술을 비집고 서투른 중원 말이 튀어나왔다. ...? 동파로는 이시이 타로오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동파로가 처음 물체를 발견했을 때, 그 물체는 백수십 장 밖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저게... 뭐지? 이러한 동파로의 의문은 너무도 빨리 해소되었다. 달려오는 물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두어 번 숨을 들이내쉴 정도의 시간 이 지난 후였다. 왜냐하면 그 물체는 벌써 그들의 면전까지 달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달려온 괴인은 놀랍게도 한 번 땅을 박찰 때 마다 칠팔 장을 훨훨 날아온 것이다. 아뿔사! 한 발 늦었구나.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경공 앞에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동파로 일행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괴인은 장탄식을 토해낸다. 괴인의 무거운 시선은 혈랑탈을 쓴 누군가에게 잡힌 채 어깨가 반쯤 잘려진 채 혈인 (血人)이 되어버린 한 노인의 참혹한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놈들이 감히... 끓어오르는 마음이 매섭게 곤두서기 시작한다. 얼이 빠져있는 이시이 타로오의 시선이 사내의 모습을 아래서부터 흟어 올라간다. 검은 가죽 신발... 아래 위 녹색 무복... 등에 맨 검... 그리고 검은 두건... 순간 그는 검은 두건으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괴인의 두 눈에서 소름끼치는 한광(寒 光)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등줄기를 따라 치닫는 한 줄기 전율. 언제였던가... 그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다다미에 앉아 도를 손질하던 아버지. 그 손 끝에서 점점이 묻어나오던 왜도의 빛... 그것은 지극히 갈무리된 살기(殺氣)였다. 위험...! 뭐라고 경고성을 내며 물러나려는 그의 전면으로 검은 두건이 크게 확대되어 왔다. 이시이 타로오는 좌수발도술(左手拔刀術)의 달인이었다. 동영 규슈(九州)지방에서 이름이 높은 무사 가문인 이시이가(石井家)의 비전 몽도류는, 장도를 뽑은 후 한 호흡 안에 승부를 결정해 버리는 쾌속함을 장기로 삼고 있었다. 우수로 전개하는 단도는 그 호흡이 지난 후 상대의 숨통을 완전히 끊을 때 사용된다. 하지만... 한 자루 검... 어느새 뽑혔을까. 이시이의 좌수가 도의 손잡이에 이르기도 전에 갑자기 솟아난 듯한 괴인의 검이 그의 미간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끄으... 한숨 같은 단말마(斷末魔)와 함께 그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어졌다. 빠르다. 어찌 이렇게 빠를 수가... 감탄성을 토해내는 그의 영혼은 이미 갈라진 미간 사이로 새어 나간 후였지만, 도를 휘두르려는 의지는 아직 육신을 떠나지 않았나 보다. 몽도류의 매서운 일식(一式)이 화려하게, 하지만 헛되이 허공을 가른다. 적이다! 조심해라! 이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은 허둥거리며 병기를 뽑는다. 하지만 괴인의 검은 단 한 순간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까깍. 괴인과 가까운 곳에 있던 한 복면인이 자신의 병기와 함께 두 조각이 되어 쓰러진다. 이것을 시작으로 일대는 괴인의 검이 그려내는 환상적인 환영에 갇힌다. 정해진 초식도, 형도 없다.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듯한 철검... 하지만 피하기에는 너무 빠르고 막기에는 너무 강하다. 동파로가 이끌고 온 여덞 명의 복면인들은 단 한 초식도 변변히 저항하지 못한 채 괴 인의 검 아래 쓰러져 갔다. 뭔가... 이상하다? 부하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가만히 있는다면 우두머리가 될 자격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파로는 우두머리의 자격이 충분했다. 그는 적어도 부하의 죽음을 보고 등을 돌리는 비겁한 위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명절기인 잔백장을 발출하여 괴인의 측면을 노리던 동파로는, 무엇인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나 공포와는 약간 성질이 달랐다. 물론 괴인의 검은 무섭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한 가지 의문이 동파로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다. 아니, 이제는 의문이 아니다. 이미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문과 해답 사이에는 논리성이 없는 것이다. 잔백장인가...? 두건을 쓴 괴인은 자신을 노리는 장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채고는 검을 비스듬히 당 겨 옆구리를 봉쇄한다. 검극을 살짝 돌려 좌하방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내지르는 동작에는 상대의 진기를 풀어 분산시키는 묘용이 들어 있었다. 강한 물줄기가 안개가 되어 흩어지듯, 동파로의 장력은 지니고 있던 중심을 잃고 괴인 의 몸 주위에서 사그라진다. 이때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동파로는 분노나 허탈감을 느끼지 못한다. 아까부터 느끼던 괴이함이 그의 사고를 반쯤 마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기합을 외치며 괴인을 향해 달려들 때에도 그의 사고는 엉뚱한 곳에 가 있었 다. 그래, 바로 소리였어! 부하들을 공격할 때 괴인의 검으로부터 은은하게 울리던 소리... 폭풍과 함께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도 같고, 아득히 멀리서 울리는 우뢰 소리와도 같은, 바로 그 소리가 동파로를 혼란에 빠드린 것이다. 설마 그란 말인가? 차앗! 잔왜수 동파로는 그 명성 만큼이나 훌륭한 무인이다. 비록 사고와는 유리되어 있어도 반사적으로 전개하는 그의 장력은 괴인의 주변을 둥글 게 말아 감으며 휘몰아쳤다. 하지만 상대가 만약 그라면 부질없는 짓이리라. 괴인의 가슴에 잔백장이 막 적중되려는 순간, 괴인의 신형이 뿌옇게 흐려진다. 연기가 흩어지는 듯한 교묘한 움직임. 순간 동파로는 오른팔이 팔뚝 어림에서부터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뒤이어 밀려오는, 얼음물 속으로 팔을 담근 것 같은 섬뜩한 느낌. 잘려진 오른팔이 야공(夜空)으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동파로는 그 은은한 뇌성(雷聲)을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었다. 깨달음은 촌각 사이에 있었다. 어느 한 순간 거짓말같이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이다. 바로 그였다! 검뢰대구식(劍雷大九式)! 당신이 왜...? 동파로의 목은 그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려주질 않고 땅으로 떨어졌다. 동파로의 눈은 의문으로 한껏 부릅떠져 있다. 뇌성을 동반한 검법... 천하에 이런 검법을 쓰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이다. 이미 나와 있던 해답. 하지만 여전히 논리성이 없다. 그가 왜 자신을 벤다는 말인가? 검뢰...대구식? 홀로 살아 남은 유붕은 아직까지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파로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윙윙거리며 맴돌고 있다. 유붕은 자신의 손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건 악몽이다. 검뢰대구식이라는 동파로의 부르짖음은 섬광과도 같이 한 사람의 이름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가 왜? 유붕의 머릿 속은 하얗게 비어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설마... 삼비영(三秘影) 연...벽제? 당신이 왜 우리를? 두건을 쓴 괴인은 유붕의 앞에 우뚝 몸을 세운다. 이윽고 왼손을 들어 두건의 한쪽 끝을 서서히 잡아 당긴다. 두건이 벗겨지며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을 담은 얼굴이 드러난다. 구렛나루가 위맹하게 뻗쳐 있는 호목(虎目)의 중년인. 바로 검왕 연벽제이다. 유붕! 그 노인을 내려놓아라.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연벽제가 말했다. 유붕은 연벽제의 차가운 눈빛을 대하자 얼굴 전체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낀다. 살기로 응축된 기세... 호흡이 가빠온다. 삼비영, 동료들에게 살수를 펼치다니... 각(閣)의 징계가 두렵지 않소이까? 동료라고? 연벽제는 차갑게 웃는다. 말인 즉슨 옳은 말이다. 이들은 같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고, 모두 비영이라는 공통된 직위를 지니고 있었다. 연벽제가 삼비영이듯, 유붕은 삼십오(三十五)비영, 동파로는 삼십이(三十二)비영, 이 시이 타로오는 사십칠(四十七)비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연벽제는 아무런 말없이 모용풍을 바라본다. 어깨는 이미 뼈까지 잘려져 나간 듯, 살과 가죽에 매달린 왼팔이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건들거리고 있었다. 노인은 이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한 상태... 유붕은 모용풍을 바라보는 연벽제의 눈빛이 큰 아픔을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붕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한다. 연벽제! 이 노인을 살리고 싶으면 허튼 수작은 않는 게 좋아! 꼼짝말고 그대로 있어라. 연벽제의 검에 맞선다는 것은 천하에 있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그러하듯 유붕에게도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유붕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인 모용풍을 몸 앞으로 돌려세웠 다. 연벽제의 칼날을 품은 듯한 시선이 유붕에게로 옯겨졌다. 유붕은 가슴 한 구석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황급히 단도를 들어 모용풍의 심장을 겨누었다. 더러운 놈! 나지막한 호통과 함께 연벽제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출수... 본디 유붕과 연벽제는 이 장 정도의 거리가 있었는데, 연벽제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번뜩이는 검광이 그들 사이의 공간을 휘감는다. 으웃! 기겁을 한 유붕은, 이를 악 물고 단도를 세워 모용풍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을 뿐, 단도를 쥔 유붕의 손목은 그의 팔로부터 싹뚝 잘려져 날아간다. 어, 어? 팔목이 없어졌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의 귓전으로 아무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연벽제의 음성이 들려온다. 가라! 뇌성과 함께 유붕의 목은 연벽제의 검기에 휘말려 수 장 상공으로 말려 올라갔다가 땅 으로 처박힌다. 목을 잃은 유붕의 몸뚱아리는 허수아비처럼 풀썩 땅으로 무너졌고, 기댈 곳을 잃고 쓰 러지는 모용풍의 몸뚱아리는 연벽제의 강인한 팔에 안긴다. 모용풍은 가슴이 부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힘겹게 떠진 그의 눈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년인의 얼굴이 흐릿 하게 들어왔다. 그 얼굴은 자신이 오래 전부터 기다리던 얼굴이었다. 은공(恩公)! 모용풍의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십수 년 전, 동정호(洞庭湖)를 지나던 연벽제는 위기를 맞은 모용풍을 구해준 일이 있었다. 당시 모용풍은 남만(南灣)에서 중원으로 진출하여 활동하던 타랍문(打拉門)에 관한 정 보를 수집하다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죽었다고 알려진 노독물(老毒物)이 버젓이 살아서 타랍문의 문주로 활약한다는 것이 바로 그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노독물은, 잔인한 독술(毒術) 독공(毒功)으로 강호를 떨게했던 무서운 인물 이었다. 그리고 모용풍은 알지 않아야 할 것을 안 죄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 연벽제는 타랍문도들을 물리치고 모용풍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은 모용풍은 연벽제에게 무엇으로라도 보답하기를 원했다. 연벽제는 그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으며, 그 부탁은 그를 지난 수 년 간 이 화소를 떠 나지 못하게 했다. 미안하외다. 그들이 모용 노인을 노린다는 것을 진작 알았지만, 몸을 빼내기가 쉽지 않았소이다. 조금만 일찍 왔으면 모용 노인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셨을텐데. 연벽제는 모용풍의 상세(傷勢)를 찬찬히 살폈다. 잘려진 왼팔은, 급히 지혈해 놓았지만 신경은 이미 죽어버린 것 같아 회복이 불가능해 보인다. 호흡이 힘든 것으로 보아 부러진 늑골이 허파를 상하게 한 것 같다. 입 가장자리로 붉은 피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내상도 가볍지 않을 것이다. 상세가 심합니다. 빨리 치료를 해야겠소이다. 근심이 담긴 연벽제의 말에 모용풍은 왼팔로 시선을 옮겼다. 반 이상이 잘려져 힘없이 늘어진 자신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은공, 이놈의 고깃덩어리가 덜렁거려 귀찮군요. 좀 잘라내 주시겠소? 연벽제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이 노인은 굳이 이 화소를 벗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 이 지경이 된 노기인(老奇人)의 허세에 가슴 한 구석이 저려왔 다. 그는 이를 악 물고 검을 휘둘렀다. 팍 소리와 함께 모용풍의 왼팔이 땅으로 굴렀고, 상처에선 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한결 낫군...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모용풍은 다시 혼절했다. 당신의 한 팔에 대한 보답은 내가 반드시 갚아주리다. 연벽제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늘은, 오랫동안 지푸렸던 날이 개려는지, 동편 하늘이 맑은 제 빛을 서서히 찾아가 고 있었다. (2) 관우는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존재라기 보다는 종교적 존재에 더욱 가깝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매년 6월 24일 지내는 무제(武祭)를 통해서, 신장군(神將軍) 관우 에게 건강과 부귀, 그리고 자손의 번창을 기원한다. 이것은 관우가 중국의 여러 신들 중에서 무(武)와 재(財)를 주관하고 있다고 믿기 때 문이다. 6월 23일 전야제로부터 시작되는 무제를 이야기하려면, 뭐니뭐니해도 제사의 가장 마지막에 치러지는 헌화식(獻花式)을 빼놓을 수 없다. 화의(花衣)로 곱게 차려 입고 머리에 화관(花冠)을 쓴 처녀들이 다섯 가지 색갈의 꽃 들로 가득 찬 바구니를 들고 입장하여 위엄있는 신상(神像) 앞에 꽃을 뿌리는 모습은 성하지절(盛夏之節)에 지내는 무제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일 것이다. 그래서 무제가 끝난 후의 관제묘는 싱그러운 꽃향기로 가득 찬다. 꽃은 시들기 마련이다. 자양분을 빨아들이던 뿌리로부터 잘려진 꽃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석대원은 지금 눈살을 찡그리고 있다. 석대원은 고개를 돌려 한로를 바라본다. 이곳이 맞소이까? 한로는 석대원의 물음에 고개를 끄떡인다. 분명하오, 소주. 석대원은 다시 앞을 바라본다. 눈썹 사이가 더욱 좁아진다. 석대원과 한로가 서 있는 곳은 섬서성 화소산 추오령 관도변에 있는 낡은 관제묘이다. 닷새 전에 구양현 일행과 헤어진 석대원은 행보를 재촉하여 이곳으로 달려왔다. 이 관제묘에서 만나야할 중요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석대원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한 달 전 무제 때에 바쳐진 것으로 보 이는 시든 꽃더미와 뎅그랗게 서 있는 관제상(關帝像)뿐이다. 형편없군! 석대원의 투덜거림처럼 관제상은 형편없었다. 어떤 화공이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굴곡이 많은 목상 위에 덕지덕지 울긋불긋한 원색 을 뒤발라 놓았으니, 누가 이 물건으로부터 살아 생전 관우의 위엄을 읽을 수 있겠는 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무재신(武財神) 관우의 신상을 훼손시킨 녀석은, 지극히 무험하고 불경스러운 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석대원은 관제상의 가슴 부근에 박혀 있는 짧은 막대를 바라본다. 사실 그것은 그리 짧은 물건이 아니다. 일곱 자가 넘는 창이 목상을 관통하여, 끝부분 한 자 정도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낸 창의 임자는 제법 행세깨나 하고 다니는 무인일 것이다. 하지만 관우에 대한 존경심이 눈꼽만큼도 없는 녀석임에는 분명하다. 고개를 돌려 사당을 훑어보는 석대원의 눈살은 점점 더 찡그려진다. 대들보에 박쥐처럼 대롱대롱 박혀 있는 비표, 걸개로부터 보기 흉하게 뜯겨져 있는 휘 장, 단풍나무로 만든 제단 아래에 찍혀있는 선명한 장인(掌印)... 사당 내부는 여기저기가 훼손되어 있었다. 자연적인 손상이 아닌 인위적인 파괴에 의하여... 소주! 관제묘의 한 구석에서 한로의 나직한 외침이 울렸다. 석대원은 그곳으로 다가간다. 한로의 목소리는 나지막한 제단 뒷편에서 들리고 있다. 관제묘 옆면에 설치된, 신마(神馬 : 赤兎馬. 주인인 關羽가 죽은 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울다가 죽었다고 한다)의 충성심을 기리 는 제단이다. 무슨 일입니까? 이것 좀 보십시오. 한로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앞에는 자그마한 자루가 하나 놓여 있었다. 쌀입니다. 한로는 자루 속에 넣은 손을 끄집어 내며 말한다. 사르르 소리와 함께 앙상한 손가락 사이로 하얀 낱알들이 흘러내린다. 누군가 여기에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한로는 다시 벽쪽을 가리킨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시커먼 것이 놓여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조잡하게 만든 아궁이였다. 큼직한 흙벽돌 두 개로 양쪽 괴어 그 위에 냄비를 올려놓는... 아궁이 뒷쪽의 벽면은 알맞게 구멍이 뚫려 있어, 불을 때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 다. 석대원은 손을 내밀어 아궁이 속에 고여있는 재를 만져본다. 온기라고는 쥐새끼 체온만큼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하다. 이것으로 미루어 불이 꺼진 것은 최소한 사나흘은 되었을 것이다. ...! 잿더미를 뒤적이던 석대원의 눈이 빛난다. 아궁이를 이루고 있는 흙벽돌 한 짝의 표면에서 기이한 요철(凹凸)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벽돌에 묻어있는 재를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요철의 완전한 모양을 파악할 수 있었을 때, 석대원은 머리가 멍해진다. 비록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작았지만, 그것은 날렵하게 날아가고 있는 제비 그림이 다. 어머님의 반지에 새겨져 있던 그림과 같다. 이 문양은 석대원의 외가(外家)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이미 가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해 버린... 이제는 천하에서 이 문양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뿐이다.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벽돌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린다. 벽돌과 바닥이 닿는 부분. 벽돌을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그곳에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주재신상하(珠在神像下)> 무언가 날카로운 물체로 새긴 듯 그 필획은 엉망이었지만, 글자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구슬은 신상 아래에 있다... 신상이라면... 이곳에 신상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석대원은 관제상으로 다가간다. 용서를!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도관(道館)에서 보낸 석대원은, 비록 관우가 자신이 섬기는 도 교신(道敎神)은 아니지만 그 신상에 함부로 손을 대기가 미안했을 것이다. 그는 공손히 머리를 숙인 후 신상에 손을 댄다. 신상이 놓인 바닥은 오래되어 이리저리 뒤틀린 낡은 판자로 짜여져 있다. 그가 힘을 주자, 관제상은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밀려난다. 영락없는 도굴범 같군요. 석대원은 곁에 서 있는 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관제상이 밀려난 곳에는 누가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새 나무판이 깔려 있었다. 석대원은 그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넣어 들어올렸다. 한 줄기 기이한 향기와 함게 네모난 구멍이 쩍 아가리를 벌린다. 향단(香緞) 냄새군요. 구멍을 기웃거리던 한로가 말한다. 향단은 촉 땅에서 생산되는 희귀한 비단으로서, 떫은 듯한 독특한 냄새는 방충(防蟲) 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로의 말대로 구멍 안에는 향단으로 잘 포장한 네모난 물체가 있었다. 구슬치고는 너무 부피가 크다. 이것이 구슬이라면 우린 오늘부터 갑부가 되겠소이다. 석대원은 향단을 펼친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구슬이 아닌, 다섯 권의 책뭉치였다. 그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어 있었다. <비세록(秘世錄)> 아마도 이것을 감춘 사람은 대단히 오만한 성격일 것 같소이다. 책을 구슬이라고 표현할 정도니... 석대원은 맨 위에 놓인 책의 겉장을 넘긴다. 물에 젖어도 훼손되지 않는다는 회유지(回油紙)의 빠닥거리는 감촉이 손가락 끝을 즐 겁게 해준다. <영락 17년 여름 천부고유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풍이 찬하다(永樂十七年 夏 天賦高 儒募容家主 募容楓 纂).> 영락 17년이면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다. 모용풍이라는 사람은 25년 동안 꾸준히 이 책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구슬이라고 할만도 하군... 25년 전 여름이면 석대원이 태어날 무렵인 것이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책장을 덮는다. 이곳에 모용풍이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군요. 그렇군요. 한로는 책들을 훑어본다. 이 책들은 모용풍에게는 목숨과도 같이 중요한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소이다. 강호의 견식이 그리 풍부하지 못한 한로였지만, <비세록>이 어떤 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모용풍이라...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이곳에 있었다면 어떤 곤경이 닥친 것이 분명하다. 파손된 사당이나 신상에 박힌 창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석대원은 왼주먹으로 자신의 볼을 툭툭 친다.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하는 버릇이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는데... 석대원은 입을 연다. 그가 어떻게 제 외가의 비연문양(飛燕文樣)을 알고 있을까요? ... 한로는 대답이 없다. 석대원은 다시 묻는다. 그가 우리의 조력자임은 분명합니까? 글쎄요... 사실은 노복도 모용풍이라는 늙은이를 만난 적이 없소이다. 하면, 이곳에서 그와 만나기로 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오? 석대원은 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로는 자신과 십일 년간 함께 지냈다. 그것도 사천의 오지인 청류산 깊은 숲속에서... 그런 한로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모용풍이 이 곳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으 며, 또 그가 자신을 기다린다고 확신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로? 노복은 분명히 이곳에서 그와 만나기로 했소이다. 한로는 단호하게 말한다. 목숨보다 아끼는 어린 주인이기에 말해줄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한로는 불현듯 오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3) 오 년 전. 청류산에서 석대원을 보살피던 한로는 식량을 사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마을 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들의 거처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고 해도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닌 터라, 한로는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하루를 마을에서 보낸 후 다음날 아침에 산을 오 르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 한로는 거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을 배회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수상하게 느낀 것은 당연했다. 그곳은 사람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외진 곳이기 대문이다. <노인장, 말 좀 물읍시다.> 불쑥 말을 걸어오는 삼십 대 초반의 사내는, 한 눈에 보아도 예기를 느낄 수 있는 무 림인이었다. <이 근처에 적심관이라는 도관이 있다는데, 혹시 아시오?> 한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주인(老主人)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고, 어린 주인은 아직 수련 중이었다. 적당들이 습격한다면 어린 주인을 지킬 사람은 자신뿐인 것이었다. <너는 누구냐?> 한로는 마음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여유있는 성미가 아니다. 말이 마치기도 전에 한로의 갈고리같은 손이 사내의 맥문을 움켜쥐어 갔다. 하지만 사내는 그리 어렵지 않은 몸놀림으로 한로의 공격권으로부터 벗어났다. <노인장은 뉘신대 함부로 내게 손을 쓴단 말이오?> <시끄럽다! 적심관을 찾는 이유나 대라!> 한로의 공격은 집요했다. 장기인 검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한로의 금나수는 매섭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한로는 사내를 제압할 수 없었다. 아니 제압하기는 커녕, 사내가 손가락 세 개를 기이하게 구부리며 할퀴어 오자, 한 수 에 사방을 전방을 봉쇄당하곤 허둥거리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금나수나 조공(爪功)으로는 나를 당할 수 없을 것이오. 나는 싸우러 온 사람이 아니오. 노인장은 뉘시오?> 사내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추급하지 않았다. 한로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사내가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내는 자신에게 적 의가 없다는 것이다. 한로는 사내와 싸울 생각이 없어졌다. <나는 적심관과 인연이 있는 한가 성을 지닌 사람이다. 너는 누군데 이곳에 왔느냐?> 한로의 말을 들은 사내는 즉시 공손히 포권을 하며 실례를 사과했다. 그는 품 속에서 한 개의 반지를 꺼내어 한로에게 보여주었다. 반지에는 날아갈 듯한 제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반지는 사내를 이곳으로 보낸 사람의 소유였을 것이다. 한로는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두전(杜田)이라고 밝힌 사내는 한로에게 한 가지 말을 전하고 떠났다. <석 공자께서 수련을 마치시면, 섬서성 화소산 추오령의 관제묘로 가 보십시오. 그곳에서는 모용풍이라는 사람이 석 공자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한로, 무언가 내게 숨기는 것이 있구려. 석대원은 노인으로부터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하자 조금 화가 났다. 하지만 한로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비세록>을 다시 싸기 시작한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석대원은 한숨을 쉰다. 일단 입을 다문 한로는 벙어리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는 이미 십일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 쓴 입맛을 다시던 석대원은 문득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고도로 단련된 예리한 청각은 사당 밖으로부터 들리는 어떤 소리를 잡아낸 것이다.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였지만, 분명히 사람의 말소리이다. 소주, 누가 오고 있군요. 한로가 표정을 고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석대원은 문쪽으로 다가간다. 끼이익. 낡은 사당답게 문짝이 지르는 비명은 요란하다. 사당을 나서는 석대원과 한로 앞에는 산안개가 비단 휘장처럼 살짝 드리운 부드러운 아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개는 아침햇살 속에서 서서히 그 화려한 외출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석대원은 눈을 가늘게 뜬다. 안개 사이로 이십여 장 밖에 하나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조금 커 보이는 그림자는 사당의 문짝이 토해낸 비명에 놀란 듯 우뚝 서 있다. 석대원과 그림자... 조금씩 걷혀가는 안개는 이들 사이의 대기를 점차로 선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석대원의 거대한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린다. (3) 아침 안개는 태양 아래 몸을 감추는 세상의 모든 어둠처럼 서서히, 하지만 어느 한 순 간에 존재를 시간 속으로 던져버린다. 그간의 궂은 날씨를 아쉬워하듯 청명한 아침햇살이 천지간 구석구석을 생기롭게 깨워 나간다. 연벽제는 그 속에서 멍청히 서 있다. 은공, 혹시 저들이...? 그의 등에 엎힌 모용풍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자신이 오랫동안 기거하던 관제묘 속에서 나온 두 사람. 허리가 굽고 눈매가 날카로운 노인과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큰 덩치를 지닌 황삼청 년... 연벽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다. 만일 시선이 담고 있는 파장을 공기 중에 그려낼 수만 있다면, 그의 전면 풍경은 그의 시선이 만들어낸 파장의 혼돈으로 요란하게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바로 그 아이다... 비록 자신의 가슴 어림에도 못 미치던 키가 산문(山門)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처럼 부풀어 버리고, 계류(溪流)에 씻은 옥구슬 같던 동안(童顔)이 세월의 의미를 알아버린 지쳐버린 얼굴이 되었어다 해도... 바로 그 아이다! 이 순간, 석대원의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 있다. 언제나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는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있다. 십일 년 수련을 하며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사람.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사람.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영원히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해온 사람. 잘못 봤을까? 아니, 절대로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지옥의 한 귀퉁이에서 스치듯 만난다고 한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두 개의 눈, 두 개의 영혼이 소리없는 불꽃을 튀기며 얽혔다. 한, 분노, 애정이 용광로 속에 끓어오르는 쇳물처럼 뒤엉킨다. 너무 많은 감정은 오히려 무풍지대(無風地帶)와 같은 공백을 낳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느끼는 감정에 대해 아무런 표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그들은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날 내려주시오, 은공. 심상치않은 분위기를 짐작했음인가. 모용풍이 연벽제의 옷자락을 가볍게 흔든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연벽제는 조심스럽게 노인을 내려, 풀밭에 앉혔다. 그는 석대원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오랬만이구나, 아원(兒原)아! 치밀어 오르는 격동으로 가늘게 떨리는 음성이다. 쾅. 석대원의 머릿속에서 작은 폭발이 있었다. 목소리. 이 목소리... <네가 이랑(伊娘)의 아들이구나. 대원이라고? 하하, 사내다운 이름이다.> 석대원의 귓전으로 연벽제의 굵은 음성이 맴돈다. 네가... 어린 네가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허, 이놈 뼈대 좀 보게? 열살박이가 이렇게 뼈가 굵어?> 아원...! 말을 하던 연벽제는 석대원의 눈을 바라보고 흠칫 놀란다. 석대원은 지금 연벽제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연벽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석대원의 시선은 두 사람 사이의 어느 한 공간에 망연히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과거를 보고, 듣고 있다. 연벽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석대원의 촛점없는 시선으로부터 달아난다. 자신의 유일한 혈육을 만났다. 그러나 슬픈 운명은 그들을 마주 설 수 없는 원수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흐흐...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일지연(一枝煙) 같은 나직한 웃음소리가 석대원의 입술을 비 집는다. 연벽제는 다시 석대원을 바라본다. 석대원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조금씩 흔들고 있다. 어느 순간, 석대원의 얼굴이 번쩍 치켜 들린다. 연벽제는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그곳에는 아침햇살 속에서도 차갑게 빛나고 있는 두 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그맣게 응축되어 있다. 하얀 눈밭 위에 박혀있는 한 조각 흑진주처럼... 단. 하루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소이다. 말의 마디마디가 부러진다. 그리고 한 마디가 부러져 나갈 때 마다 눈동자가 변해간다. 인광(燐光)과 같은 새파란 눈빛은, 그 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분노와 함께 적개심으로 타올랐고, 곧바로 살기가 되어 폭발한다. 폭발의 순간, 연벽제는 당황한다. 석대원의 거대한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져 왔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의 공기를 삽시간에 찢어발기는 차가운 기세. 그리고 기세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핏덩어리 같은 붉은 빛이었다. 빠르다! 연벽제는 황급히 붉은 빛으로부터 몸을 피한다. 꽝. 방금까지 서 있던 지면이 폭음과 함께 뒤집어진다. 부서진 돌가루, 자욱한 흙먼지가 눈 앞을 가리고 있다. 연벽제는 간발의 차이로 붉은 빛무리를 피한 것이다. 하지만 안심하고 있을 겨를은 전혀 없었다. 검은 구름이 갈라지며 떨어지는 뇌전처럼, 흙먼지 속으로부터 쏘아져 나온 것은 칼날 같은 장력이다. 차앗! 석대원은 그림자같이 연벽제를 따라붙으며 장력을 발출한다. 왼손 주위를 일렁이던 붉은 기운이 작은 공처럼 둥글게 뭉쳐지더니 연벽제를 향해 쏘 아져 나간다. 유형화(有形化)된 강기... 주위 공기가 진동하며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린다. 혈옥수(血玉手)? 붉은 덩어리로부터 가까스로 몸을 빼낸 연벽제의 입에선 놀라움에 가득찬 음성이 터져 나온다. 연벽제의 가슴 옷자락은 강기권에서 완전히 피해내지 못한 죄과로 보기 흉하게 찢겨져 나풀거리고 있다. 지금 석대원의 왼손은 금방 피를 쏟아낼듯 붉은 색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왼손을 힐끔 바라본다. 그렇다. 혈옥수! 홍안의 나이, 한로로부터 마귀 같은 채찍 세례를 당하며 연성한 귀신의 손! 그렇소. 살가죽을 벗기고 뼈를 부숴뜨리는 고통이 있어야만 연성할 수 있다는 혈옥수요. 나는 까무러칠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 았소. 석대원의 음성은 너무도 가라앉아 아무런 감정의 기복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연벽제는 그 속에 도사린 검붉은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불쌍한 놈, 저 어린 것이... 강호에서 검왕이라고 불렸던 철인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온다. 하지만 이런 감상에 빠질 여유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소! 아침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연벽제를 향해 돌진하는 석대원. 다시 혈옥수가 전개되었는가. 예의 붉은 덩어리가 연벽제의 눈앞으로 확대되어 온다. 연벽제는 두 발을 모듬 모아 비룡번신(飛龍飜身)의 신법으로 뒤로 몸을 물린다. 흐흐, 어디까지 도망치나 보겠소! 차가운 비웃음과 함께 날카로운 경기가 허공을 가르며 따라붙는다. 앞으로 치달리며 장력을 쳐내는 자와 이리저리 피하며 뒤로 몸을 뒤집어 후퇴하는 자... 일순, 연벽제의 몸이 딱 멈춘다. 그의 등뒤를 거대한 바위가 가로막은 것이다. 친다! 물실호기! 전신공력을 끌어올린 석대원의 왼손이 연벽제의 정지된 신형을 향해 휘둘러졌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위에 막혀 퇴로를 차단당한 연벽제의 신형이 잠깐 뿌옇게 흐려지는 듯하더니, 석대 원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형환위(移形換位)...? 시간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촌각의 순간, 석대원의 눈빛이 짧은 진동을 보인다. 혈옥수가 조금 전까지 연벽제의 등 뒤에 서 있던 바위를 강타한 것은 거의 동시의 일 이다. 꽈꽝. 땅까지 흔들리는 듯한 엄청난 폭발음... 말도 안 돼... 지금까지의 광경을 지켜보던 모용풍의 입이 딱 벌어진다. 석대원의 일 장에 맞은 바위는 우박 쏟아지는 듯한 파편의 비산(飛散)과 함께 산산히 부숴져 흩어진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사람의 육신으로써 어찌 저런 파괴력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모용풍의 놀라움에는 아랑곳없이 석대원은 연벽제를 바라본다. 연벽제는 어느새 석대원으로부터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침중한 표정으로 서 있다. 과연... 석대원은 조금 전 연벽제가 보여준 놀라운 신법을 떠올리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을 옮겨 위치를 바꾼다는 이형환위의 신법. 내공을 익히고 신법에 익숙한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제 나름대로는 구사할 수 있는 신법이다. 하지만 자신이 전개한 폭풍같은 공세 속에서, 그것도 돌연한 장애물로 운신이 봉쇄된 짧은 순간에 그런 임기응변을 보인다는 것은, 절대로 <머리로 생각해서 이루는> 경지는 아닐 것이다. 머리가 움직이기 전에 마음이 먼저 움직이며, 마음이 움직이면 몸은 저절로 따른다. 고도로 발달된 반사신경... 그런 한 동작은 연벽제의 무도가 얼마나 지고한 위치에 올라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편린이 될 수 있다. 아원아! 네 마음은 안다. 하지만 이 백부는 아직 죽을 수 없단다. 연벽제의 말에 석대원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웃음... 소소가 반하고 구양현이 친근감을 느꼈던 그런 맑은 웃음이 아니다. 색깔로 말하자면, 말라붙어 조각조각 부숴지는 흙덩이 같은 무미건조한 웃음. 충혈된 눈가로 죽음을 뿌리는 냉기가 번져간다. 물론 죽고 싶지 않으시겠지. 석대원은 등에서 장검을 뽑는다. 강호출도 이후 단 한 번도 뽑은 일이 없던 검. 차앙... 차가운 검명과 함께 청량한 아침 대기 속으로 눈부신 붉은 광채가 서리서리 뻗쳐오른 다. 하면, 이 조카를 죽이시면 되오! 석대원은 붉은 빛을 토해내는 삼척 장검을 곧추 세워 서서히 연벽제에게로 내뻗는다. 순간 진저리치는 살기가 연벽제에게로 몰아쳐 온다. 직지세(直指勢). 혈랑검법의 기수식이다. 혈랑검법인가... 연벽제는 투덜대듯 말한다. 그의 마음은 실로 복잡했다. 피를 나눈 조카, 그것도 단 하나 뿐인 혈육이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조카는 백부를 죽이려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흡족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몰아쳐 오는 이 무형검기를 보라! 그는 강해졌다. 자신의 무릎 위에서 뛰놀던 철 모르는 개구장이가, 이제는 검왕이라는 자신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강한 무인이 된 것이다. 천하오대고수와 비견된다는 검왕(劍王)의 높으신 검학, 말학후진(末學後進)에게 가르 쳐 주시겠소? 석대원은 연벽제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간다. 연벽제는 삼 장의 거리를 격하고 전달되는 예리한 검기에 살갖이 쓰라린 것을 느킨다. 하지만 그의 두 팔은 여전히 축 늘어진 채 검자루를 쥐려 하지 않는다. 흐흐... 죄의식을 느낀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벨 것이다. 그가 검을 뽑든, 아니 뽑든... 석대원은 차갑게 웃는다. 일촉즉발의 순간... 안 되오, 소주! 두 사람 사이에 회색 인영이 뛰어들었다. 한로였다. 무슨 짓이오! 석대원은 내뻗은 검을 황급히 회수하며 소리친다. 검봉(劍峯)과 한로의 거리는 석 자 남짓. 그 정도의 거리라면 능히 검기로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한로는 이마의 살갖이 터졌다. 내비치기 시작한 혈흔... 아니 되오! 연 대인을 치시려거든, 이 노복부터 베고 치시오. 주르르... 한 줄기 피가 밭고랑 같은 노인의 주름살을 타고 흐른다. 하지만 한로는 완강하게 석대원을 가로막고 있다. 풀밭에 앉아있던 모용풍도 힘겹게 일어서 다가온다. 공자! 연 대협은 제 목숨과도 같은 분! 먼저 이 몸을 베고, 은공을 치시오. 살기로 차갑게 얼어붙었던 석대원의 눈동자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마치 눈에서 불똥이 떨어질 정도로 강렬한 안광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한 가지 생각 외에는 없었다. 그를 벤다... 일 각 여. 한로와 모용뭉에게는 일 겁과 같이 길게 느껴진 시간이다. 으음... 석대원의 입에서 무거운 탄식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눈빛이 차츰 평정을 되찾아간다.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되었던 온 몸의 근육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풀어진다. 그는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아원아... 연벽제는 시시각각 변하는 조카의 눈 속에서 그의 아픔을 읽을 수 있었다. 불쌍한 놈... 언젠가는 그에게 검 아래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후후... 어쩔 수 없지. 나는 그에게서 부모를 빼앗고, 유년(幼年)을 빼앗았지 않았던가. 연벽제는 씁쓸한 표정으로 품 속에서 한 권의 얇은 책자를 꺼내어 모용풍에게 건네주 었다. 내 나름대로 조사한 것이오. 워낙 비밀스러운 조직이라 밝히지 못한 것이 많소만, 추후 다시 조사해 보리다. 연벽제는 아직도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조카를 바라보았다. 네 검은 언젠가 내 반드시 받아주마. 흣! 석대원은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신형을 돌린다. 연벽제는 바위처럼 완강해 보이는 조카의 등을 바라본다. 매제(妹弟) 석안(石鞍)의 모습이 석대원의 등 위에 겹쳐진다. 연 대인, 오랫만이외다. 한로가 다가와 연벽제에게 포권했다. 연벽제는 한로의 쭈글쭈글한 손을 잡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 선배! 아원(兒原)이를 저리도 훌륭하게 키워 주시다니. 연벽제의 목소리는 어느 결엔가 떨리고 있었다. 연 대인... 한로는 그의 눈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져 온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원수가 되어버린 연벽제의 마음 고통이 얼마나 클 것 인가. 비록 차가운 성격의 한로였지만, 그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모용 노인의 치료를 부탁드리겠소. 이목이 항상 따라다니고 있는 이 몸... 이만 떠나겠소이다. 조카를 부탁하외다. 연벽제는 신형을 돌린다. 석대원은 여전히 돌아선 채 미동도 않고 있다. 그들은 이미 너를 주목하고 있다. 초혼매라는 여인이 육사(六社)를 지휘하며 네 주위를 노리고 있으니, 부디 몸조심해라. 연벽제의 마지막 말은 어느새 멀리서 들리고 있었다. 등을 돌린 석대원은 그대로 석상이 되어버렸는지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휘이이... 한 줄기 바람소리가 중인들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十章 老雄 (1) 흰 머리 무성하니 근심 또한 무성하리. 거울에 비친 이, 어디서 서리 만났을까. 白髮三千丈 緣愁似個長 不知明鏡裏 何處得秋霜 - 李白의 秋浦歌 中) 동경(銅鏡) 속의 인물, 청색 장삼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노인은 나직히 한숨을 쉰다. 무슨 심려라도 있으신지요. 노인의 머리를 손질하던 여인이 손길을 멈추고 묻는다. 이제 막 스물을 넘긴 듯한 나이. 자그마한 이마와 서글서글한 눈빛은 고운 유의(裕衣)와 잘 어울린다. 아니다. 그만하면 됐으니 이제 나가봐라. 여인은 빗과 동곳을 작은 상자에 담고는 공손한 뒷걸음으로 방을 나간다. 노인은 여전히 동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다. 형편없이 늙어버린 동경 속의 노인은 방 안의 노인을 마주보고 있다. 물고기같이 생명없는 시선... 이제는 정말 늙은이가 됐구나, 소철(蘇喆). 나지막한 독백이 노인의 메마른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소철... 이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 신무대종(神武大宗) 소철인 것이다. <강북에 산악이 있으니 이가 곧 신무요, 강남에 패왕이 있으니 이가 곧 무양이라(北 嶽神武 南覇武陽)> 천하오대고수를 읊은 이십자구 중 앞 두 구절이 말해주듯, 신무전은 반백 년 간이나 강북 무림을 영도해왔다. 지금 동경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칠순 노인, 소철이 바로 신무전의 주인 이자 강북 무림의 주인인 것이다. 허!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나. 서리서리 뻗쳐 위엄을 품고있는 눈썹과 힘찬 산맥과 같이 우뚝한 콧날은 그 모양새가 예전과 다름이 없지만, 이미 눈썹은 희게 변했고 거미줄 같은 잔주름이 콧잔등을 덮고 있다. 살갖이 팽팽했던 젊은 시절보다 풍성해진 것이라고는 춘삼월 버들가지처럼 탐스럽게 드리운 수염뿐... 그리고 그것마저도 함박눈을 맞은 듯 새하얗다. 거울 속 노인은 잿빛 미소를 짓는다. 미소는 너무나 낮게 가라앉아 서글퍼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세월을 광음(光陰)이라 했던가. 삶이란 여러 겹으로 꼬인 새끼줄을 붙잡고 벼랑에 매달린 형상과 같다. 어느날부터인가 새끼줄은 한 가닥 두 가닥 씩 끊어지기 시작한다. 이제 노인의 주름진 손에 남겨진 것은 몇 가닥일까. 젊음이 몸과 정신을 지배하던 시절, 바위를 부수고 군웅을 호령하던 힘과 위엄은 이미 사라졌단 말인가. 노인의 두 눈에 옅은 그늘이 잠긴다. 주공! 현현단주(玄玄團主)께서 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나직한, 하지만 더할 나위없이 공손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현현단은 전내 삼단 중 하나로서 노인의 첫째 제자가 이끌고 있다. 들어오라. 동경으로부터 서서히 돌아서는 눈빛은 인생의 폐막을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노인의 어 두운 공허감으로부터, 제자를 기다리는 사부의 따듯한 자애로움으로 변해간다. 늠름하게 성장한 제자를 만나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백색 비단 휘장 너머로 도정(陶正)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정(正)이 문안 드리옵니다. 도정은 공손히 허리를 굽힌다. 오냐, 그래. 소철은 만면에 미소를 떠올린 채, 고개를 끄떡여 제자의 인사를 받는다. 양사(兩師)와 사방대협(四方大俠)이 청심각(淸心閣)에 모두 모였습니다. 도정의 당당한 체구는 살색과 잘 어울리는 흑회색 무복 덕분인지, 비바람에도 흔들리 지 않는 강철 기둥처럼 보인다. 당년 삼십삼 세. 강호에서는 철인협(鐵人俠)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로 불리는 도정. 소철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제자를 바라본다.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올 굵은 고수머리... 제딴에는 머리 위로 잡아맸다고는 했겠지만, 새하얀 머리끈에서부터 삐져 나온 절반 가량은 이마 앞에서 사납게 물결치고 있다. 혹 다른 사람이 그런 머리 모양을 한다면 멋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정에게 있어서는 절대 아니다. 다만 어수선하고 지저분해 보일 분이다. 그리고 굵고 투박한 선으로 이루어진 턱선, 배부른 암소 같은 유순한 눈매... 도정의 외모는 무인이라기 보다는 화전(火田)하는 농꾼에 더 어울린다. 단단하되 날카롭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소철은 그가 거두어들인 세 명의 기명제자(記名弟子) 가운데 도정을 가장 높 이 평가한다. 다른 두 명이 잘 빚은 고급 자기라면, 도정은 아무런 무늬도 없지만 그 용량을 짐작할 수 없는 커다란 질그릇과 같았다. 투박하지만 어떤 물건이든 담아낼 수 있는 포용력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도정은 사람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만, 단점에 앞서 장점에 관심을 기 울인다. 남을 칭찬함에 인색하지 않되, 스스로는 언제나 순박과 소탈함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 지 않았다. 어쩌면 도정과 같은 성격은 목숨을 칼날에 걸고 살아가야 하는 무인으로서는 걸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결점이라면 결점... 하지만 소철은 내심 고개를 젖는다. 하긴 평(平)이나 현(賢)이에 비하면 조금 어리숙한 점이 있지. 하지만 적당히 단순할 수 있다는 것은, 무인에게 있어서 단점이 될 수 없는 법! 소철은 도정의 어수선한 머리카락을 보며 절로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사부를 배알하기 위해 어지간히 공들여 몸치장을 했을 것이다. 철사 같은 머리를 잡아매느라 고생하는 도정과 그의 부인 당가영(唐佳瑛)의 모습을 상 상하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저 답답해하는 꼴이라니! 그래, 나가자꾸나. 소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선다. 도정은 붙들어 맨 머리카락이 불편한 듯이 한두 번 긁적이고는, 사부의 뒤를 따른다. (2) 청심각(淸深閣)은 조경(造景)이 잘 된 신무전 내에서도 운치있기로 손꼽히는 장소이 다. 청심각은 전 중앙에 위치한 금랑호(錦浪湖)라는 이름의 반경 삼 리 정도 원형 호수 가 운데 위치한 팔각정이다. 정자는 운남(雲南)의 특산품인 우유빛 대리석으로 주추를 세웠고, 햇빛이 비추는 각 도에 따라 그 색을 조금씩 바꾼다는 흑단풍나무로 여덞 개의 기둥을 올렸다. 흑단풍 기둥이 만들어낸 여덞 개의 면(面)은, 원월창(圓月窓)이 멋드러진 북방 두 벽 을 제외하곤, 구슬 주렴이 드리웠을 뿐 시원하게 뚫려있다. 천정 중앙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여덞 개의 대들보에는 붉은 비단이 늘어져 있고, 은물을 입힌 정자의 기와는 중천에 솟은 태양 아래 화려하게 반짝거린다. 정자 둘레의 호수 위엔 태을선인(太乙仙人)이 타고 놀았다는 수련(水蓮)이 만발하고, 금빛 비늘을 퍼득거리며 뛰노는 잉어의 모습이 풍치를 더해주고 있다. 소철은 전내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회의를 언제나 이 청심각에서 가졌다. 회의가 있는 날이면 승치(勝致) 속에 고요하게 잠긴 숲과 호수는 소철의 직속경호대인 무영군(無影軍)에 의해 철통같이 경비된다. 호반과 정자를 이어주는 반원형 목교(木橋) 위에 도정을 대동한 소철의 모습이 나타 난다. 정자 안의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선다. 느릿하게 반월형 목교를 건너 정자에 도착한 소철이 좌정하고, 곧바로 회의가 시작되 었다. 칠월 열이레의 회의에는 양사(兩師)와 사방대주(四方臺主), 삼단 중 현현단과 자운단 (紫雲團), 두 단주가 모였습니다. 소철의 옆자리에 앉은 도사 차림의 장년인이 낭랑한 소리로 소철에게 보고한다. 흑청색 도관(道冠)에 같은 색깔의 도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도사... 소철의 외아들인 구양자(九陽子) 소흥(蘇興)이다. 그는 나이 삼십에 아내를 잃고 시름에 빠져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황산(荒山)의 태 백관(太白館)이라는 도관(道館)으로 출가해버린 위인이다. 천생무골(天生武骨)인 아버지와는 달리, 무공은 일찌감치 접어둔 채 하(夏) 상(商 : 殷) 양대의 희귀한 문자를 해독하며 연단술(煉丹術)과 장생술(長生術)로 청춘을 바친 괴짜이기도 하다. 물론 소철은 아들을 달래보기도 했고, 엄하게 꾸중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흥은 신무전의 차기 전주로 내정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장(老莊)의 무위무욕(無爲無慾) 평정심을 배워버린 소흥은 요지부동이었다. 자식을 이길 수 있는 부모는 없는지, 하나뿐인 아들과 삼 년 씩이나 대치했던 소철은 어쩔 수 없이 도정을 후계자로 지목할 수밖에 없었고, 소흥은 그 뒤로도 몇 년을 태백 관에서 더 보낸 뒤, 어느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난데없이 돌아온 것이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소철은 그러한 그에게 하나의 직책을 주었다. 약사(藥師). 이름부터가 약간 이상한 이 직책은 실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를테면 별정직(別 定職)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결국 소흥은 그의 바람대로 신무전 한 귀퉁이 한수거(閑修居)라는 약실(藥室)에 틀어 박혀 연단으로 세월을 보내는, 팔자 늘어진 도사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그는 대단히 만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 오늘과 같은 회의가 아니면 아버지인 소철 조차도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든 것이다. 현(賢)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정자 안의 인물들을 천천히 흟어 본 후, 소철이 말했다. 비응단주(飛鷹團主)는 지금 돌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사천지부(四川支部)에 도착했다는 전서가 있었습니다. 마른 체구를 붉은 장포로 휘감고 있는 주작대협(朱雀大俠) 염가위(廉街偉)가 말한다. 그가 관장하는 주작대(朱雀臺)는 정보 수집, 전내 규찰, 형벌 집행을 수행하고 있었 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깡마른 뺨에 송곳같이 튀어나온 턱, 날카로운 매부리코가 그의 강퍅함을 더욱 강조해준다. 생긴 것 만큼이나 칼날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염가위. 율법을 집행하는데 있어서는 추호의 사정이 없어, 전내의 인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기 도 하다. 음양인(陰陽刃)이라는 두 자루의 길고 짧은 쌍도를 쓴다고는 하지만 좀처럼 무공을 사 용하는 일이 드물다. 허, 전을 출발한 것이 언제 일인데... 일정이 왜 그리 지체되었다던가? 소철의 물음에 염가위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머뭇거리다가 대답한다. 비응단주 구양공자와 소소 아가씨께서는 사천에서 괴한들의 습격을 받으셨다고 합니 다. 무사하다는 전갈이 있어 다행입니다. 소철의 흰 눈썹이 꿈틀거린다. 습격이라고! 누가 감히? 나직한 일갈이지만 회의장을 얼어 붙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좌중의 사람들은 문득 노인의 어깨 위로 검은 먹구름이 출렁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제는 늙어 많이 온유로와졌지만, 한때는 그 비정함으로 냉혈왕(冷血王)이라는 별명 을 지녔던 소철이다. 염가위는 소흥의 옆에 앉아있던 문사 차림의 오십 대 초로인에게 도움의 눈짓을 보낸 다. 초로인은 고개를 끄떡인다. 제가 회의 소집을 청한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제가 설명드리지요. 새하얀 비단에 검은 깃을 품넓게 누빈 학창의, 유생건(儒生巾)이 잘 어울리는 수려한 용모의 초로인이 담담한 어조로 말문을 연다. 신무전의 군사(軍師)인 운리소유(芸里燒儒)이다. 운리소유는 오십 안팎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신무전 내에서 유일하게 소철로부터 경어를 듣는 인물이다. 출신 가문이나 사문 내력 등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십여 년 전 홍안의 청년으 로 소철에게 발탁되어 신무전의 군사직을 맡은 뒤, 신출귀몰한 용병술과 명쾌한 전략 으로 신무전을 강북제일의 대방으로 우뚝 서게한 일등공신이다. 육도삼략(六韜三略)은 물론 손오(孫吳 : 孫子와 吳子)의 병법에 통달했고, 현(絃) 관 (管)의 악기에 대한 조예가 깊으며, 기국(棋局 : 바둑)에 대한 재주가 남다르다 하여 삼절수사(三絶秀士)라는 별호로 불려진다. 좋소. 운리 선생께서 설명해 주시지요. 소철의 허락이 떨어지자, 운리소유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본 후,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금 강호에는 두 가지 기이한 세력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첫째는 운남(雲南)에서 귀주(貴州), 광동(廣東)에 이르는 대륙 남서부 일대에서 무양 문(武陽門)을 계속 자극하는 강이환(姜易環)의 용봉단(龍鳳團)이며, 둘째는 절강(浙 江)과 강서(江西) 동남부에 걸쳐 이유없는 살겁을 자행하는 혈랑곡을 지칭하는 무리들 입니다. 구양공자와 아가씨는 바로 이 혈랑곡도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소철의 눈에 가벼운 이채가 떠올랐다. 근자 혈랑곡도들이 소란을 부린다는 얘기는 나도 들었소. 하지만 신비한 척하기 좋아하는 무뢰배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지. 그들에게 액화를 입은 방파 수가 벌써 열 둘, 살해된 사람은 부지기수입니다. 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움직임이 행적이 매우 은밀하고 날래서, 범상한 무리라고는 여 겨지지 않는군요. 저도 운리 선생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유난히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청의노인이 말을 거든다. 사방대협의 대형(大兄) 격이며 청룡대(靑龍臺)를 이끌고 있는 청룡대협(靑龍大俠) 진 우(陳宇)이다. 혈랑곡이라면 강남에서는 이미 그 악명이 자자합니다. 어쩌면 신비혈랑의 혈랑곡주가 강호 활동을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소이다. 그의 가문은 소철의 의부(義父) 소대진 대(代) 이전부터 소씨세가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청룡대는 소씨세가 때의 봉공가문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신무전의 내사를 담당하고 있 다. 신무전과 같이 거대한 집단이 움직이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대소사들... 관할 토지의 경작을 포함한 열한 곳의 표국과 전장(錢莊)의 운영, 신무전과 교류하는 타 문파와의 우호 유지, 일흔 여섯 개 전각의 경비 등이 그의 손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구절각(九節角)이라는 기병(奇兵)을 사용하는 그의 무공은 삼십여 년 전부터 신기(神 技)라고 알려져 있으며, 매와 같이 날카롭게 찢어진 눈에서는 마주보기 어려운 안광이 번쩍이고 있어 사람들은 그를 천응공(天鷹公)이라 부른다. 혈랑곡주... 소철의 뇌리엔 사십 년 전 곤륜산 무망애의 회합이 조각조각, 하지만 생생하게 떠오른 다. 붉은 늑대탈. 붉은 장포. 붉은 기운이 서리서리 하늘을 찌르던 보검. 칠십 평생에 단 한 번 느꼈던 두려움의 정체... 그가 바로 혈랑곡주인 것이다. 사십여 년 간 아무 소식이 없던 그가 드디어 강호에 나오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서문숭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렇다면 길고 지루했던 평화는 끝이다. 소철은 나직히 침음성을 뱉는다. 운리 선생, 선생께서도 혈랑곡주가 다시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시오? 소철의 물음에 운리소유는 웃음을 띠우며 고개를 젖는다. 아직까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구양공자의 전서에 의하면 사천공문(四川空門)이 혈랑곡도들과 함께 습격했다 고 합니다. 그쪽을 통해 조사해 보는 것이 빠를 것 같군요. 순간,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정자를 뒤흔든다. 공문이라고요? 여... 여문통(余雯通), 이 잡...종이 죽고 싶어 환... 환장했나! 목소리의 주인은 제 분에 못 이겨서인지 심하게 더듬고 있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옮겨진다. 거기엔 우람한 체구의 백호대협(白虎大俠) 이창(李昌)의 부리부리한 외눈이 있었다. 백호대협 이창은 백호대(白虎臺)를 이끌고, 전외(殿外)에서 발생하는 각종 분쟁에 참 여하고 있다. 다른 사방대와는 달리 정예 전투부대로만 이루어진 백호대는 신무전의 얼굴이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호에서 그 명성을 드날린다. 패배를 모르는 백호대. 두려움을 모르는 백호대. 그리고 그 백호대에서도 이창은 언제나 선두에 선다. 그의 그러한 용맹을 알려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육 년 전 장성 북동부에서 흑사방(黑蛇幇)이라는 집단이 신무전의 지부를 괴멸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검은 뱀을 신으로 숭배하는 사이한 종교 집단이었는데, 주술과 속임수로 선량 한 백성들까지 현혹시켜 그 규모가 명문대파에 못지 않았다. 특히 그들의 교주였던 현인사(玄人蛇) 채곤(蔡坤)과 그 휘하 칠사(七蛇)라는 자들은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서, 관으로서도 그들을 제어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신무전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인 운리소유와 백호대를 현지로 파견했다. 운리소유는 한 가지 유인계를 사용했고, 이 계책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아 흑사교의 수 뇌들을 어떤 계곡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백호대는 여지없이 그들을 섬멸했다. 재미있는 것은 공격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아닌 이창이었는데, 그가 적들을 향해 얼마나 빨리 달려갔으며 또한 얼마나 빨리 그들을 해치웠는지, 휘하의 백호대원들이 계곡 아래에 도달했을 때엔 채곤과 칠사를 비롯한 흑사교도들의 널부러진 시신만이 기 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이때 얘기를 전해 들은 소철은 <급과만초(急瓜蔓抄)>라며 웃었다고 한다. 과만초(瓜蔓抄)는 오이 넝쿨을 당긴다는 뜻으로, 사람의 목을 무더기로 자르는 것에 비유되는 말인데, 거기에 급(急) 자가 붙었으니 오죽할까. 어쨌거나 새하얀 전포(戰布?)에 오십 근이 넘는 거검(巨劍)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는 이창의 위용은, 그야말로 전신(戰神)의 그것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실명한 한쪽 눈을 백금(白金) 안대로 가리고 다녀 삼국시대 위나라의 맹장 하후돈(夏 侯惇)에 비견되는 그에게는, 독안백마(獨眼白魔)라는 별호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뭔가 이상하군요. 여문통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지만, 그 정도의 위인이 신무전에 도전하다니... 도정이 느릿한 어조로 말한다. 소철은 천천히 눈을 감는다. 도정의 말이 맞다. 여문통이라면 소철도 들어본 일이 있는 터, 사천에서야 제법 행새깨나 할지도 모르지 만 신무전에 비하면 하루살이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는 감았던 눈을 뜬다. 그의 눈은 이미 아무런 감정이 담겨져 있지않은 무심, 그 자체로 돌아간 후였다. 모든 것은 현이가 돌아오면 알 수 있겠지. 염 대주는 여문통과 공문에 관한 자료를 뽑아보도록. 알겠습니다. 염가위는 공손히 복명한다. 신무전은 중원제일의 문파였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구의 도전도 용납할 수 없다. 설령 그 상대가 신비혈랑이라 할지라도... 별다른 감정없이 차분하게 말하는 소철이지만, 중인들은 싸늘한 한기를 느낀다. 그들의 시선 속에 물처럼 앉아있는 소철은 더 이상 죽을 날을 기다리는 평범한 칠순 노인이 아닌 것이다. (3) 백리평(百里平)은 청심각에서의 회의가 끝난 후, 습관처럼 연무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는 미남이다. 관자놀이를 향해 단정히 자리잡은 눈썹,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와 부드러운 선을 그리 며 솟아 뻗은 콧날은, 약간은 여성적인 분위기가 풍기기는 하지만 누가 보아도 찬사를 아끼지 않을 잘생긴 얼굴이다. 지금 그런 준미한 얼굴은 묘한 기대감에 달떠 있다. 역시 공중에서의 운기에 문제가 있었어... 백리평은 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도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요 며칠을 두고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던 것은, 그의 독문무공인 홍운도법(紅雲刀法)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이었다. 그의 무공은 이미 <익혀야 하는 경지>를 넘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깨달음이란 익힘과는 달라서 마치 알 속에 잇는 거북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난치(卵齒)만으로 껍질을 깨듯, 스스로가 꺼풀을 벗고 오의(奧義)를 터득해야 하는 것 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무수한 각고와 시행 착오가 필요하다. 스스로 무척이나 똑똑한 편이라고 자부하는 백리평도 그러한 변태(變態)의 고통을 피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동안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어서, 오늘 아침에야 깨달음의 단서를 어렴풋 이 발견한 것이다. 어이, 사제! 백리평의 바쁜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걸직한 목소리였다. 백리평은 천천히 몸을 돌린다. 몇 장 뒷쪽에는 부시시한 몰골의 사형, 도정이 서 있었다. 끙! 나 좀 도와주게나. 도정은 뒷머리에 양손을 올린 채 끙끙거리고 있다. 백리평은 피식 웃는다. 곰 나리께서 또 갑갑증이 도진 모양이군... 무슨 일입니까, 사형? 한 여름 두꺼운 솜이불 속에서 수백 마리의 이와 싸우는 사람의 표정이 그럴까. 가뜩이나 투박한 도정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부풀어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 고무 풍선을 보는 것 같았다. 망할 놈의 계집애! 매듭을 이따위로 묶을 게 뭐람. 게다가 머리끈은 왜 이렇게 비싼 것으로 골랐는지, 뭐 백방수주(白紡水紬)로 만들었대 나? 성질 같아선 확 끊어버리고 싶지만, 그럼 또 잔소리를 바가지로 해대며 징징거리겠지. 하여간 여자란 피곤한 존재야. 언제는 요조숙녀(窈窕淑女)는 군자호구(君子好逑)라, 남자란 장가를 가야 사는 맛을 안다고 소제를 놀리시더니... 그 새 마음이 변하기라도 하셨소? 자네, 날 놀리는 건가? 백리평이 <시경(詩經)>까지 인용하며 빈정거리자 도정은 도끼눈이 된다. 하지만 백리평의 말대로 그 구절은 분명 자신이 지껄인 말이다. 그것도 불과 몇 달 전에... 도정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쉰다. 휴! 내가 미쳤지, 혼자 멀쩡히 잘 살다가 장가는 왜 갔을까. 자고로 독신만큼 맘 편한 것이 없다네. 생각 같아선 오늘이라도 이혼하고 싶은 심정이야. 도정아! 네 앞날이 걱정된다. 하하! 백리평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문득, 사형을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제 똑똑히 들었습니다. 이혼이라... 형수님께 그대로 전해 드리면 아주 좋아하시겠는데요? 순간, 도정의 얼굴이 믿을 수 없을만큼 검게 변한다. 설마... 자네 진짜로 그 얘길 하려는 건 아니겠지? 왜요? 안 그래도 형수님의 암기술이 천하일절이라는데, 사형의 무쌍팔로(無雙八路) 경신술이 얼마나 훌륭한 지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군요. 도정은 머리 속이 하얗게 된다. 눈은 백리평을 바라보고 있지만, 시신경(視神經)을 통해 뇌로 전달되는 것은 눈썹을 하늘로 치켜올린 당가영의 모습이다. 백리평의 말대로 그의 부인인 당가영은 암기술로 유명한 사천당문(四川唐門) 출신이다. 무림에서 천수선자(千手仙子)라는 별호로 명성을 날리던 그녀의 암기술... 그 현란한 광경이 도정의 시야를 꽉 채운다. 방금까지 그를 그리도 괴롭히던 머리카락의 답답함은 이 순간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제의 입을 막아야 산다! 백리평은 쩔쩔매는 사형을 우습기도 했고, 재밌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한가지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도정은 평상시 대단히 사려깊은 사람이다. 하지만 여자, 특히 부인인 당가영과 관련된 일이 터지면 머리속이 백지와 같이 텅 비 어, 일자무식의 천치와 전혀 다를 바 없이 되는 위인인 것이다. 누구보다도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백리평이, 그런 중대한 사실을 깜빡 했다는 것은, 글 쎄... 그의 불운이랄 수밖에. 사제! 묵직한 음성과 함께 백리평의 멱살이 도정의 쇠스랑 같은 손아귀에 덥석 잡혔다. 헉! 백리평은 숨통이 턱 막힌다. 목덜미를 죄어오는 무시무시한 악력. 내공을 일으키지 않아도 무쇠 향로의 가장자리를 두부 조각 떼내듯 부숴뜨린다는, 도 정이 자랑하는 악력이다. 딱딱하게 굳어진 사형의 안색을 보며 백리평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 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도정은 어린 아이에게 글을 가르키는 것 처럼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다. 난 말이야, 경신술 보다는 주먹 쓰는 게 조금 더 훌륭하다네. 자네에게 이래선 안 되겠지만, 지금은 살인멸구(殺人滅口) 외에는 딴 방법이 없군. 미안하네, 사제! 내 덕 높은 고승에게 청해 극락왕생을 빌어주겠네. 이번엔 강호에서 금도옥인(金刀玉人)이라고 칭송받는 백리평의 잘생긴 얼굴이 믿을 수 없으리만치 검게 변한다. 마누라가 그렇게 무섭냐? 나도 네 앞날이 걱정된다! 연무장 바닥에 엎드린 채, 절대로 형수에게 쓸데없는 입을 놀리지 않겠다는 맹서(盟 書)를 쓰는 백리평이 백 번도 더 되씹은 생각이다. 그의 왼손 약지 끝은 붉게 물들어 있다. 불쌍하게도 혈서인가 보다. 밑에 수결(手決)을 하게! 아니, 아니지... 그 손가락으로 지장(指章)을 찍는 것이 더 좋겠군! 유혈낭자한 자신의 손가락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호령하는 도정을 바라보며, 백리 평은 또 한 번 예의 욕을 되씹는다. (4)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물러간 청심각... 서쪽으로 기운 해가 호반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산들바람이 불어 잔잔한 파랑이 정자의 기둥에 찰싹거리며 부딪친다. 정자 안에는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청포를 단정하게 입은 백염의 노인은 신무전의 주인인 소철이고, 가끔 쥘부채를 따딱 거리며 반상(盤上)을 응시하는 초로인은 군사 운리소유이다. 소철의 입가에 떠오른 만족의 미소와 팔자로 늘어진 운리소유의 눈썹에서 바둑의 형세 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호오! 이제는 석 점으로 제가 밀리는군요. 보통은 나이가 들 수록 기력(棋力)이 줄어드는 법인데, 전주께서는 오히려 더 강해지 시는가 봅니다. 집백(執白 : 바둑에서 백돌을 쥠. 본디 고대 중국의 기보에 의하면 上手가 흑을 쥐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현재에 맞추었 다)인 운리소유가 말한다. 그의 눈은 반상에 고정되어 있다. 그의 말대로, 백여 수 남짓 진행된 바둑은, 흑의 기세가 두드러져 보인다. 확정된 집으로만 따진다면 백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쪽 변의 접전에서 실리를 백에게 허용한 흑은, 그 대가로 중앙을 향한 막강 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모든 접바둑이 그렇듯이 중앙의 흑 세력은 기착점들과 어울어져 큰 위력을 발휘한다. 허허, 또 엄살이시군! 운리 선생, 그래서 언제 노부가 이겨본 적이 있던가요? 소철 역시 반상을 응시한 채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웃음소리가 즐겁게 들리는 것은, 아마도 이 판에 대한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운리소유는 그런 소철을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바둑판 위로 얼굴을 묻는다. 노란 유의를 입은 소철의 시비, 작아(雀娥)가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차를 날라온다. 운리소유는 반상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다. 담담한 향기가 입 안으로 번져간다. 순간, 그는 잠시 멍해진다. 이 맛은... 유년의 기억이란 놀랄만큼 질긴 것이다. 늙어 백발이 되어도 어린 시절 즐겁게 빨았던 사탕수수의 감미로운 맛을 잊을 수 없는 법이다. 운리소유는 어린 시절 이 차를 자주 마신 적이 있었다. 그는 찻물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한 모금 마신다. 소철은 그러한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왜 그러시오? 차 맛이 이상하오? 소철은 시선을 작아에게로 돌린다. 작아는 노주인의 시선을 받자 몸둘 바를 모르고 당황한다. 아닙니다. 하도 오랫만에 마셔 보는 차여서... 작아, 이것은 화암차(花岩茶)... 맞느냐? 예? 예... 그렇습니다. 작아는 당혹스러움에서 헤어나지 못한 듯 얼굴을 붉게 상기한 채 황급히 대답한다. 화암? 허허, 노부는 천지(天池)를 즐긴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 죄... 죄송합니다. 소녀의 죄입니다. 소철의 부드러운 질책에 작아는 황급히 바닥에 엎드린다. 어찌나 깊이 엎드렸는지, 그녀의 예쁜 이마는 정자 바닥과 하나가 되어버린 듯하다. 허허, 녀석 같으니라고! 누가 너보고 죄 졌다고 하더냐? 괜찮으니 일어나거라. 한 번 쯤 다른 차를 마신다고 입술이 부르트는 것도 아니니까. 작아에게 미안하군요. 제가 괜히 유난을 떨어서... 그나저나 작아, 네 고향이 무이(武夷)인가 보구나. 운리소유가 묻자 작아가 공손히 대답한다. 예, 이 화암은 마침 소녀의 애비가 며칠 전 이 부근을 지날 때 선물한 것이기에, 소 녀가 주제 모르고... 화암이라면 무이산의 특산품이다. 소철은 작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법이다. 고향의 특산물을 대접하고 싶어한 그녀의 마음은 지극히 당연하고, 또 고운 것이다. 그래, 됐다. 그만 물러가거라. 그리고 화암은 내 종종 즐기고 싶으니, 앞으로도 가끔 내오도록 해라. 예? 예, 알겠습니다. 소철의 말에 작아는 뺨에 기쁨의 홍조를 띄우며 물러간다. 착한 아입니다. 그렇소, 허허! 다소곳한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그녀를 보며 소철과 운리소유는 동시에 미소를 짓는다. 헌데 화암에 그리 놀라시는 것을 보니, 뭔가 얽힌 추억이라도 있으신 게요? 운리소유는 소철의 물음에 담담히 웃으며 찻잔을 바라본다. 찻잔 위로는 어떤 얼굴, 매우 근엄하고 또 고지식한 얼굴이 아른거린다. 소생의 부친께서 이 차를 무척이나 즐기십니다. 소철의 눈에 잠시 놀라움의 빛이 머문다. 운리소유가 자신의 입으로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운리소유는 다시 반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소철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딱. 돌과 바둑판이 부딪히는 경쾌한 음향이 호수 위에 맴돌던 정적에 작은 파문을 만든다. 음? 운리소유의 착점을 바라본 소철은 신음과 함께 눈썹을 모은다. 백은 서쪽 변의 영토를 완전히 결정짓지 않은 채, 남동쪽의 귀 옆에 묘하게 붙여온 것이다. 흑의 울타리가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안에서 수를 낼 수 있는 수단을 미리 심어 놓겠 다는 의도... 교묘하군... 어찌 받나 보시겠다는 타진수(打診手)인가요? 이번에는 소철이 장고(長考)에 들어간다. 운리소유는 시선을 반상에서 돌려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가는 호수를 바라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운리 선생! 나직한 소철의 부름에 운리소유는 시선을 돌린다. 앞으로 한동안은 시끄러울 것 같소. 소철은 밑도 끝도 없이 한 마디를 던지고 흑돌을 집어 반상을 힘차게 두드린다. 백이 남동쪽 귀에 붙여간 수에 대해, 흑은 외각을 열어둔 채 귀를 단단히 지킨 것이다. 이 부근에서 대세를 휘어잡겠다는 강수(强手)이자 매서운 기합이 담긴 수이다. 이제 백은 흑의 세력 쪽으로 달아나며 삶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백의 대마가 잡히면 바둑은 흑의 승리로 간단히 끝나겠지만, 만약 살 수 있다면 흑이 공들여 투자한 세력은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는군요. 운리소유는 중앙을 향해 가볍게 뛰어나간다. 이미 두어 놓은 백 한 점에 염두가 있는지 없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미묘한 수... 하지만 소철은 기다렸다는 듯이 백을 공격해 간다. 두 사람 모두 군세(軍勢)를 움직일 전략을 세우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소비했지만, 막 상 작전이 수립된 뒤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자신이 읽었던 수순을 밟아간다. 참으로 긴 평화였소. 하지만 이제는 다시 피바람이 불겠지. 백 대마의 안형(眼形)을 위협하던 소철의 입에서 엉뚱한 탄식이 흘러나온다. 흑진 속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교묘히 집 모양을 만들고 있던 운리소유는 문득 고개를 들고 소철을 응시한다. 전주께선 혈랑곡주와 인연이 있으시지요. 신비혈랑이란 말처럼 그가 그렇게 강합니까? 소철은 운리소유가 방금 놓은 수를 예상하지 못했던지, 난처한 기색으로 반상을 응시 하고 있다. 한참을 석상처럼 있던 소철의 입이 열린다. 네 사람의 무공은 백중지세(伯仲之勢)였소.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혈랑곡주가 조금 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고, 잠룡야(潛龍 爺) 이악(李嶽)은 약간 뒤진다고 할 수 있을 거요. 혈랑곡주는 정말 강했지... 나나 서문숭, 이악은 상대를 꺾기위해 수많은 무학 초식들을 내놓았지만, 그는 오직 검법 한 가지와 수법 한 가지만으로 평수(平手)를 이루었으니. 반상은 어느덧 정리되어가고 있다. 백 대마는 흑진 안에서 절묘하게 두 집을 내고 살았으며, 형세는 누가 우세하다고 말 하기 어려운 미세한 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소철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잡은 백돌 한 개를 반상 위에 올려놓는다. 투료(投了 : 바둑에서 패배를 선언하는 행동)... 역시 노부가 욕심이 과했나 보구려. 이번에도 졌소이다. 운리소유는 빙그레 웃는다. 제가 보기에는 이제부터라고 여겨지는데요? 소철은 손을 젖는다. 석 점 바둑의 이득을 벌써 다 잃었거늘, 선생의 신묘한 마무리를 어찌 당하겠소. 과연 삼절(三絶)중 기절(棋絶)이요. 운리소유는 조용한 동작으로 돌을 통으로 쓸어담는다. 소철도 흑돌을 챙기다가 막 생각난 듯, 운리소유에게 묻는다. 선생과 기광(棋狂) 과추운(過秋雲)의 수를 비교하면 어떻소이까? 글쎄요. 그는 국수(國手)인 고운선생(孤雲先生)에게도 이겼다고 하니, 소생이 아무래도 한 점 정도는 딸리겠지요. 소철은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듯 의미있는 웃음을 짓는다. 그는 정자 기둥에 매달린 붉은 등에 불을 당긴다. 잠시 후 작아가 총총이 목교를 건너온다. 여기서 운리 선생과 술을 한 잔 하고 싶구나. 간단하게 상을 보아오너라. 잠시 후, 바둑판이 치워지고 단촐한 주석이 벌어졌다. 산동(山東)의 특산품으로 유명한 오로주(烏鷺酒)가 쇄금(鎖金) 주전자에 담겨 나오고, 다섯 가지 향료로 맛을 낸 소고기와 야채 몇 가지가 마련되었다. 한 순배(巡杯) 후 운리소유가 입을 열었다. 전주께서는 오랬동안 유지되어온 평화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여기시는지. 음, 선생께서는 무어라 생각하시오? 운리소유는 주전자를 기울여 소철의 잔을 채운다. 소생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없는 북악남패의 힘의 균형입니다. 소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인다. 둘째는, 그러한 균형 위에 얹혀진 혈랑곡이라는 추(錘)이지요. 이 추가 오랜 기간 무게중심의 역할을 해온 것입니다. 소철은 무릎을 탁, 친다. 선생의 의견은 노부의 생각과도 같소이다. 바로 혈랑곡이 있기 때문에 노부와 서문숭이 쉽게 움직이지 않은 것이었소. 천선자(天旋子)가 사십여 년 전 이야기한 제삼의 세력, 혈랑곡의 존재가 노부와 서문 숭이 자웅을 결하지 못하게한 가장 큰 이유요. 사실, 산불용양호재(山不用兩虎在)라고,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있을 수 없는 법 아니오? 서문숭과는 전대의 은원 이전에 한 번쯤은 겨뤄보고 싶었소. 하지만 곤륜산에서 본 그런 대단한 위인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가 북악남패의 양패 구상을 노리고 있는 것을 아는 한, 경거망동으로 대세를 그르칠 수가 없었던 것이오. 운리소유는 소리없이 잔을 비운다. 젓가락으로 장육을 뒤적이던 그가 불쑥 물음을 던진다. 잠룡야 이악은 어떤 사람입니까? 소철은 옛 기억을 더듬는 듯 어둑해진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그의 입이 나직한 탄식과 함께 열렸다. 이악은 노부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소. 아니, 조금 더 늙었던가? 그는 영락제께서 즉위하신 뒤 새롭게 개편된 감찰기관, 비각의 수반이지요. 무학을 말하자면 나머지 세 명과 비교하여 반 수 정도 뒤진다고 할까? 하지만 관(官)에 대한 예우였는지는 몰라도 모두들 그에게는 조금씩 양보했었소. 소철은 잠시 당시를 생각하듯 잠시 말을 멈춘다. 하긴, 그의 무학은 매우 박대(博大)했었소. 넓기로 따지면 능히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을 거요. 운리소유는 잠시 생각에 빠져든다. 소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혈랑곡이 등장한 이상 서문숭도 더 이상 뒷짐지지는 않겠지. 노부 역시 마찬가지! 이 기회에 남아있는 과거를 마무리 지을 생각이오. 소철은 호기있게 잔을 비우며 말한다. 운리소유는 이십대 청년과 같은 투지를 되찾은 늙은 주인을 바라보며 씁쓸히 웃는다. 강호는 시끄러워질 것이다. 전주! 운리소유의 다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한다. 혈랑곡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전주께선 믿으시겠습니까? 소철의 깊은 눈빛이 흔들린다. 어떤 신비라 해도 그 근원은 반드시 있는 법. 소생은 소년 시절, 혈랑곡주에 대해 잘 아는 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선생의 사부? 그 분이 누구요? 운리소유는 소철의 다급한 질문에서 노인의 가슴에 담긴 흥분과 기대감을 읽을 수 있 었다. 그는 한숨을 쉰다. 강호는 정말로 시끄러워질 것이다. 소생의 부친입니다. 十一章 幻術 (1) 제기랄! 위백(魏栢)은 측간에서 나오며 혀를 찬다. 요즘 언제나 이꼴이라니깐... 그는 바지춤에 묻은 오줌 방울을 툭툭 털어내고 있다. 요사이 요의(尿意)를 느끼고 측간으로 달려가면, 근력이 달리는지 영 오줌 줄기가 신 통치 않은 것이다. 처음에 제법 후둑거리며 이어지던 오줌발은 곧 찔끔거리는 방울로 변해, 급기야는 신 발을 적실 지경으로 맥을 못추는 것이다. 이것은 사내 - 특히 위백과 같이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 있는 사내 - 에게는 사형 선고 와도 같다. 양기(陽氣)가 갈 데까지 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위백은 부르르 몸을 떤다. 원인이 너무도 분명한, 하지만 그 책임은 세월만이 질 수 있는 절망감이 밀려온다. 삼각풍(三脚風) 위백. 금년 나이 오십칠 세. 개방 소주분타주. 물론, 환갑을 바라보는 중늙은이에게서 이십대 청년과 같은 체력을 기대하는 것은 욕 심일 것이다. 하지만 위백은 매우 꾸준한 수련가이다. 홍안의 소년 시절부터 정진한 개방의 외가공부(外家功夫)는 오십칠 년이란 긴 세월을 굴려온 낡은 몸뚱아리를 어느 젊은이 못지 않게 건장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왜 이럴까? 위백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요사이 거울 보는 회수가 부쩍 줄었다. 하기야 거지 주제에 무슨 단장할 일이 있어서 거울을 보랴마는, 그래도 위백은 항상 지저분한 행색으로 다니는 오의파(汚衣派) 거지들보다는 깨끗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 위백이 거울을 두려워 하게된 까닭은 뽑아도 뽑아도 자꾸 생기는 흰머리 때문이 다. 조여청사모성설(朝如靑絲募成雪)이라, 아침에 감태(甘苔) 같던 머리가 저녁이면 눈처 럼 센다고 하지 않았던가. 위백의 경우 그 진행이 급격한 감이 있지만, 이런 일련의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그 원 인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는 노인이 된 것이다. 형님! 측간 앞에서 뭐 하시오? 위백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본다. 그곳엔 얼굴 절반을 붕어같이 툭 튀어나온 눈알에게 점령당한 듯한 장산홍(張山弘)의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닐세.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람이 설사난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섰소? 왜 측간에 두고 온 게 아까와지기라도 하셨소? 장산홍은 빙글거리며 농지거리를 걸어온다. 하지만 위백은 그와 농담할 기분이 아니다. 장(張) 아우, 나도 이제는 은퇴할 때가 왔나봐.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허허! 위백의 의제(義弟)이자 개방 소주분타의 집법당주(執法堂主)를 맡고 있는 오행봉(五行 棒) 장산홍(張山弘)은 걸직한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위백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원, 형님도! 지나가는 개, 밭 가는 소가 웃겠소. 팔 다리에 알통이나 없어지거든 엄살부리시오. 위백은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자네가 몰라서 하는 얘기야. 정말로 요 몇 달 사이 몸이 이상해. 어, 정말로 하시는 말씀이오? 내가 자네에게 실없는 소릴 왜 하겠나? 증상이 좀 이상해. 아침에 깨면 뒷골에 물이라도 고인 것처럼 묵직하고, 몸도 사방 천지가 결린 것이 몸 살 앓는 사람처럼 찌뿌드드 하다네. 뿐인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조금 전의 일도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어. 휴... 왕년에 잘 나가던 위백도 이제는 한물 갔나보이. 이제 이 자리도 오래 못 앉아 있겠어. 장산홍은 위백이 엄살을 부리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는 아이가 놀라서 울음을 멈출 정도로 험상궂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지만, 마음은 비 단결같이 곱고 여린 장산홍이다. 그는 문득 의형의 건강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음... 아마도 여름을 타시는가 보오. 성 남쪽거리에 가면 용한 의원이 있다는데 한번 진맥이라도 받아보지 않으시겠수? 아니면 소제가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이라도 한 재 지어 올릴까요? 위백은 손을 내 젖는다. 아닐쎄, 아니야. 실은 두어 달 전에도 내자(內子)가 지어온 약을 먹어봤어. 양기를 보해주는 약이라는데 먹어도 별 효험이 없는 것을 보면, 내가 약발이 서는 체 질이 아닌가봐. 아하! 장산홍의 입가엔 능글맞은 미소가 어린다. 드디어 위백이 떠는 너스레의 근원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형수께서 너무 젊고 미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오? 올초에 늦장가를 간 위백의 부인 죽(竹)씨는 위백의 절반 나이도 안 된다. 위백이 아무리 단단하고 옹골찬 사람이라고 해도 나이는 속이지 못할 것이다. 이십대 초반의 피어나는 여인과 환갑 가까운 사내와의 부부생활은 아귀가 어긋나는 것 이 당연한 일이다. 촌철살인(寸鐵殺人)... 장산홍의 말에 위백의 얼굴이 붉어진다. 예끼 이사람! 자네도 내가 늙었다고 놀리는 건가? 놀리기는요... 이치를 따져 보면 그렇다는 말씀이죠. 으음... 위백은 한숨을 쉰다. 장산홍의 말이 옳다. 하지만 그 옳은 말이 젊은 아내를 둔 노인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빈 것이다. 장산홍은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마시고 오늘 소제와 개나 한 마리 먹으러 갑시다. 북촌(北村)에 가면 제발 날 좀 잡아잡숴주 하고 돌아다니는 멍멍이 천지라오. 위백은 요즘 부인인 죽삼랑(竹三郞) 얼굴이 그다지 밝지 않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마도 밤일이 신통치 않아서일 것이리라. 사실 위백은 거지답지 않게 개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건만 제대로 움직여 준다면, 개 아니라 개 할아버지라도 잡아먹을 수 있다. 좋아! 황구를 큼직한 놈으로 한 마리 푹 고아먹으면, 몸이 좀 좋아지겠지... 가세!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이 동하면 몸도 반응하는 법이어서, 결심을 하고 나니 갑자기 개 가 먹고싶어 진다. 쩝! 위백은 자신의 눈 앞에 큼직한 개다리가 김을 모락거리며 놓여 있기라도 한 것같이 입 맛을 다신다. (2) 개방 소주분타. 금세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낡은 장원이지만, 비교적 번듯하게 서 있는 전각도 한 채 보인다. <기풍전(起風殿)> 깔끔하게 다듬은 단풍나무 위에 음각으로 석 자를 새기고, 옻에 먹을 갠 칠묵(漆墨)을 패인 곳에 칠한 편액이 조촐해 보인다. 거지들 소굴 치고는 꽤나 모양을 낸 삼층 건물... 건물 뒤로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어, 편액의 문구처럼 장 한 바람이라도 일어날 듯한 위엄을 보여준다. 바로 분타주 위백의 처소이다. 양광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는 여름날의 나른한 오후. 전각의 삼층, 내실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다. 여인은 어떤 책을 보고 있다. 착착거리며 사납게 넘겨지는 책장 소리. 소리의 간격이 매우 짧은 것으로 보아 여인은 책을 읽되, 제대로 읽는 것 같지는 않다. 흥! 그녀는 갑자기 읽던 책을 바닥에 팽개친다. 삼실을 조잡하게 꼬아 만든 철끈이 끊어지며 낱장들이 후두둑 방안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화가 풀리지 않는 듯, 그녀의 작은 주먹은 꼬옥 말린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하체 힘이나 좋으면 어디가 덧나? 다리를 후들거리며 빌빌거리는 꼴이라니! 그런 주제에 도리어 짜증을 내? 쉬흔일곱 살 늙은 위백의 스물세 살 젊은 부인 죽삼랑은 어젯밤 일을 떠올리고는 뽀드 득 소리나게 이를 간다. 그녀는 치미는 노기를 이기지 못하고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인다. 후후후! 여전하군 죽삼랑! 순간, 창가에서 한 줄기 음산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깜짝 놀라며 돌아서는 죽삼랑의 앞에는, 언제 방안으로 들어왔는지 한 사내가 유령같 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천비, 십(十)비영님의 존안(尊顔)을 뵙습니다. 죽삼랑은 즉시 바닥에 엎드린다. 남의 침실에서 저리도 당당하게 서 있는 사내... 핏기를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안색과 대비되는 붉은 입술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시체를 염습(殮襲)할 때 두르는 염포(殮布)처럼 전신을 감싸고 있는 붉은 도관 과 도복... 매령귀사(賣靈鬼使) 사생(史生)이다. 두 달 만이군. 각(閣)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있다. 복명! 죽삼랑은 바닥에 이마를 찧는다. 철포결 우낙을 이리로 유인하라. 양무청을 생포한 그 장소에서 우낙을 처리할 계획이다. 거사일은 팔월 초닷새! 감정의 색깔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말이다. 죽삼랑은 조심스럽게 상체를 치켜 든다. 앞섭이 살짝 벌어지며 뽀오얀 젖무덤이 언뜻 드러난다. 하오시면, 매혼대법(賣魂大法)을 다시...? 물론! 위백은 아직 아무 것도 눈치채지 않았겠지? 사생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다. 하지만 죽삼랑의 앞섬 어림을 훑고 지나가는 시선은 점액이라도 묻어나올 듯이 끈적끈 적하다. 사내의 시선에 담긴 밀도(密度)를 읽은 죽삼랑은, 허벅지살까지 꿈틀거릴 정도로 짜릿 한 전율이 스치는 것을 느낀다. 붉으스레한 두 뺨에는 교태 어린 홍조가 떠오르고, 젖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간드러 진 음성이 굴러나온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단지 늙은이의 몸으로 대법을 견디기가 어려웠든지, 요사이 부쩍 몸이 약해졌다는 것 외엔... 사생의 그녀의 눈빛이 야릇한 기대감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계집, 밝히기는... 백랍(白蠟) 같은 얼굴 위로 붉은 기운이 서서히 번져간다. 호오! 그렇다면 네 더운 가슴이 무던히도 달아올라 있겠구나. 시선에서 묻어나오던 끈적거림은 이미 목소리에까지 전이(轉移)되었다. 일이 이쯤 되었으면 아궁이에 올려놓은 밥의 뜸은 거의 든 셈이다. 남은 것은 수저를 대는 작업뿐... 죽삼랑은 바닥에 엎드렸던 몸을 살며시 일으킨다. 교구를 세운 그녀에게선 발정기의 암컷이 풍기는 달착지근한 살냄새가 풍겨온다. 호호! 모두 십비영님 탓이옵니다. 설마 소첩에게 베푸시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잊으신 것은 아니시겠죠? 끈적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죽삼랑의 나긋나긋한 육신이 사생에게로 기대온다. 너무나도 익숙한 동작. 팔 다리는 촉수같이 흐느적거리고, 뱉아내는 숨결에는 은은한 단내가 어려 있다. 좋은 냄새군... 사생은 진한 사향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죽삼랑이 가장 애용하는 향료이다. 사향이 지닌 최음 성분 탓인지, 사생은 머릿속이 끓어오르는 듯한 흥분감과 함께 고환 (睾丸) 아랫쪽이 팽팽해지고 남성(男性)으로 피가 고이는 것을 느낀다. 위백은 소주로 나갔고, 이 시간에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죽삼랑은 사내의 귓바퀴를 옥치(玉齒)로 잘근거리며 속삭인다. 음험하게 잠긴 목소리가 더운 입김과 함께 귓속을 간지럽힌다. 오냐! 나도 네년의 몸이 그리웠다! 사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친 호흡을 뱉으며 죽삼랑을 끌어안는다. 아이, 하는 가벼운 거부의 몸짓도 잠시, 죽삼랑의 교수가 능동적으로 사생의 목을 휘 감아간다. 오장육부를 으스러뜨리는 듯한 사내의 힘... 그녀는 사생의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혼백이 천공으로 달아나는 희열에 빠져든다. 여인의 겨드랑이에 찬 향낭(香囊)이 거친 포옹으로 터진 듯, 아찔한 향기가 방안을 진 동한다. 하지만 두 남녀의 몸뚱아리는 그러한 향기조차 끼어들 틈없이 얽혀있다. 十章 幻術 (3) 나지막한 언덕. 관솔가지들이 이리저리 얽혀있는 잡목림 위로 몇 그루 오동나무가 간헐적으로 보인다. 일 장도 안 되는 작달막한 놈에서 부터 사오 장도 넘을 듯한 우람한 놈까지... 오동락금정(梧桐落金井)이라는 시구처럼 오동의 멋이 한창이려면 계절이 지나가야 하 건만, 여름햇살 속에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내는 오동잎은 그런대로 운치가 있을 것 이다. 석대문은 그 오동나무들 중 가장 우뚝한 놈의 가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가늘게 뜬 눈은 언덕 아래로 펼쳐진 풍경에 고정되어 있다. 여기저기가 허물어진 장원 한 채가 꽁지 부분을 숲에 잠식당한 채 황량하게 누워있는 풍경... 이글거리는 여름햇살 속에 출렁거리는 대기 때문인지 조금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겨 내고 있지만, 그리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는 이 풍경을 꼬박 열흘 동안 감상했다. 하긴 감시라고 하는 표현이 더 올바르겠지만... 붕붕... 쉬파리 한 마리가 그의 얼굴 앞을 어지럽힌다. 아마도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육질 냄새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는 느릿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우물거리고 있다. 일 각 쯤 전에는 육포(肉脯?)라고 불리던 음식이다. 그는 손을 휘저어 파리를 쫒는다. 파리는 그의 손짓을 요리조리 피하며 좀처럼 냄새의 근원으로부터 떠나려하지 않는다. 문득,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입 안에서 맴돌던, 이제는 육즙(肉汁)이라고 불러야 할 액체를 꿀꺽 삼켜버린다. 아쉬움 때문에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를 뒤적거려 보지만, 그것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 을 잘 알고 있다. 이젠 마른 식량도 떨어진 건가... 그는 심한 시장기를 느낀다. 정오도 훨씬 지난 시간, 오늘 하루 동안 그의 위장으로 들어간 것이라고는 손바닥만한 육포 두 장과 몇 모금의 물뿐이다. 육 척이 넘는 그의 체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따위로는 어림없다. 하지만 준비한 식량이 떨어졌는데야 천하의 강동제일가 가주의 신세도 처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긴 허기뿐만은 아니군... 석대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지금 이 순간 그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오랫동안 손보지 않은 양 까치둥지가 되어있었고, 단정하던 검은 무복은 형편없이 반들반들한 나무때가 타 있었다. 아마 누구라도 그런 그를, 강동제일인 석대원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열 번의 낮과 밤이 변화시키지 못한 것이 있다면 조용히 가라앉은 눈빛... 낡은 장원의 입구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잠시 스친다. 개방과 위백... 문득 귀조수(鬼造手) 공야진(公冶眞)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석 가주, 이 편지와 문서는 분명 동일인이 쓴 것이오.> <그렇소이까?> <그런데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소이다.> <말씀해 주시지요.> <노부가 동일인이라고 판단을 하는 이유는 필법에 있어서의 사소한 습관들이 일치하기 때문이외다. 가령 나무 목 변이나 물 수 변, 갓머리 등과 같은 흔한 부수를 쓸 때엔, 누구든지 자 신의 습관이 나오는 법이오. 하기야 어쩌면 그런 것들은 모사(模寫)해낼 수 있는 문제이지. 하지만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들, 예를 들면 어떤 특정한 글자를 쓸 경우 주위 의 자간(字間)을 약간 좁히거나 넓히는 것은 전문가, 그것도 고도의 모사 전문가가 아 니라면 흉내내지 못할 부분이라오. 천하에 그런 전문가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강호에서라면 정말 드물지요. 노부가 단정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이오. 그런데...> <그런데...?> <한 가지 석연치않은 점이 있소. 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감정의 문제라고나 할까.> <감정...?> <문서에는 필자의 감정이 담겨 있소이다. 그것이 이 편지와 약간 다른 점이지요. 이 문서는 인사기록인 것 같은데, 여기 쓰인 황삼(黃三五)이라는 이름과 황소삼(黃小 三)이라는 이름에서 공통으로 들어 있는 황(黃) 자와 삼(三) 자를 보시오. 뭐 느끼시는 것이 없소이까?> <음... 황삼 쪽보다 황소삼 쪽이 글자가 똑바르군요.> <그렇소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름 아래에 기록된 사항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거외다.> <...!> <황삼라는 사람을 기록할 때엔 뭔가 못마땅한 것이 있다는 것이 담겨 있소이다. 보시다시피 획의 줄기는 날카로운데 끝부분은 유난히 굵게 맺혀 있소. 격앙된 상태에서 획을 그었고, 그 끝에서 붓을 멈추고 무엇인가를 떠올렸다는 증거이 지요.> <으음...> <하지만 황소삼을 보시오. 줄기가 부드럽고 끝이 산뜻하지요? 그리고 내용도 구구절절 칭찬하는 말뿐이니... 이제 글자에 감정이 실렸다는 노부의 말을 이해하시겠소이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요. 그러면 이 편지는 그런 감정이 없다는 말슴입니까?> <바로 그렇소이다. 내용은 혈랑곡도니 뭐니 하면서 무척이나 화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고 했지만, 필획 은 지극히 안정되어 있군요. 아니, 이것은 안정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밋밋한 필운(筆運)입니다. 서예의 대가들도 이런 평정심으로 글을 쓰지는 못하지요. 마치 혼이라도 빠진 사람이 쓴 글이랄까...> <과연!> <노부가 더 도와드릴 일은 없소이까?> <아닙니다. 소생은 오늘에야 세인들이 선생을 가리켜 귀조수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 는 것을 알았소이다. 감사하오, 공야 노인!> 석대문은 물 주머니를 꺼내어 그 주둥이를 입술에 댄다. 미지근한 물 몇 방울이 목젖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석대문은 가죽주머니를 몇 번 흔들어 텅 빈 것을 확인했다. 물도 떨어졌군. 석대문은 무릎을 펴고 나뭇가지에서 몸을 일으킨다. 근처의 마을로 내려가 음식을 좀더 준비해 오려는 것이다. ...! 순간, 석대문의 고개가 독 오른 방울뱀과 같이 곧추 선다. 폐장원의 한 귀퉁이 담장을 넘어 나오는 붉은 그림자를 본 것이다. 석대문의 눈이 가늘어진다. 가볍게 담장을 넘어 소롯길을 달려가는 경공은 매끄럽기 그지없다. 삼각풍이라는 별호처럼 경공의 일가를 이룬 위백을 제외하고는, 개방의 소주분타에 저 런 고명한 몸놀림을 보여줄 수 있는 위인은 없다. 하지만 위백은 오전 중에, 그의 의제인 장산홍과 함께 소주 성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던 가. 후후... 성과가 있었나? 석대문의 입가에 의미있는 미소가 어린다. 지겨웠던 열흘 동안의 잠복이 무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신형은 나뭇가지로부터 훌쩍 떨어져 내린다. 매령귀사 사생은 장원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관도에 이르자 발걸음을 늦춘다. 으흐흐. 칼날처럼 얄팍한 입술 위로 웃음이 떠오른다. 만족스러운, 하지만 약간의 나른함이 배어 있는 미소... 조금 전 죽삼랑과의 격렬했던 정사의 여운인지, 그의 눈가는 엷은 홍조가 어려 있다. 죽삼랑의 보챔도 대단했었고 사생의 정력 또한 절륜한 것이어서, 정사는 놀랍게도 한 시진이나 이어졌던 것이다. 하기야 위백이 품기엔 아까운 계집이지. 아쉬움을 여운으로 남긴 혼잣말을 지껄이던 사생... 어느 순간에 흠칫, 놀라고 만다. 십여 장쯤 떨어진 전면 관도변, 길죽한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유유하게 서 있는 한 사 내를 발견한 것이다. 가늘게 늘어진 눈꼬리가 살짝 떨린다. 소매를 둘둘 말아올린 검은 색 무복... 이마를 덮고 있는 봉두난발은 지저분해 보이지만 강인해 보이는 사내. 사생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마음 한 구석이 싸늘해진다. 하긴, 괜한 걱정이군... 픽, 사생은 자신의 소심함에 웃음이 나온다. 사실 그가 겁먹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서장(西藏) 제일의 교파인 밀교 중에서도 그 태두라고 할 수 있는 아두랍찰(阿 斗拉刹) 출신이다. 비록 귀기(鬼氣)가 지나치게 강한 탓에 정통밀종(正統密宗)은 수련하지 못했지만, 각 종 주술을 집대성한 환불습(幻佛拾)의 경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사생을 안심시킨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수련을 마치고 중원 땅을 밟은 지 일년이 채 안 되는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전 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안색을 엄숙하게 가다듬으며 거한의 곁을 천천히 지나친다. 도사 양반! 말 좀 물읍시다. 굵은 목소리... 사생의 발길이 땅에 붙은 듯 멈춰진다. 빈도 말씀이시오? 사생은 최대한 태연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천천히 신형을 돌린다. 이 자리에 이 몸과 도사 외에 또 누가 있소이까. 이 순간 석대문의 입가엔 매우 사교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다. 하지만 그 사교적인 미소 속에 담겨 있는 엷은 비웃음을 읽은 사생은 더 이상 태연함 을 유지할 수 없었다. 무엇을 물으려 하시는지...? 석대문은 사생의 눈에 떠오른 경계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역시 켕(?)기는 구석이 있는 친구로군... 거지들 소굴에 몰래 들락거리는 도사에 관해, 혹시 들어본 적 있소? 사생은 움찔한다. 무사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이 순간 사생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상대는 강동제일인 석대문... 그 검법은 빠르고 정학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비록 스스로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은 사방이 탁 트인 대로변. 더구나 아직은 양광이 대지 구석구석을 비추는 하오였다. 자신의 장기를 사용하지 않고 석대문을 이긴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도사께선 고명(高名)이 어찌 되시는지...? 석대문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빈도의 이름이라, 허허, 그 쓸데없는 것을 무사께서 알아서 무엇에 쓰시려고... 찻! 말 끝을 우물거리던 사생은 돌연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소매를 뿌린다. 팔목에 전대(箭帶)라도 차고 있었던 듯, 한 자루의 수전(手箭)이 석대문을 향하여 쏘 아진다. 이 장 남짓한 거리... 수전을 발출한 사생의 재주가 예사롭지 않아서, 온전히 피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 이다. 하지만 석대문은 차갑게 웃는다. 그럴 줄 알았지! 석대문의 육 척 거구가 땅으로 꺼진다. 꼿꼿히 선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진 것이다. 철판교(鐵板橋)... 무릎을 전혀 구부리지 않은 채 뒤로 몸을 피하고, 또 그대로 일으킬 수 있는 신법이다. 수전은 간발의 차이로 석대문의 얼굴 위로 지나쳤다. 네 정체를 알아야겠다! 석대문은 등판이 땅을 치는 여력을 이용하여 몸을 솟구침과 동시에 사생에게로 튕겨져 간다. 그의 재빠른 몸놀림은 이 장이라는 거리를 한 걸음으로 단축해 버린다. 사생을 향해 쭉 뻗은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구부러진다. 석가비전 금나수인 금룡박쇄수(禁龍縛鎖手)... 과연! 갈퀴 같은 손가락이 자신의 요혈을 노려오는 것을 바라보며 사생은 두 손바닥을 합장 하듯 모은다. 물론 한 번의 암습으로 강동제일인을 꺾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아무 리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나 신속한 반격이 아닌가! 그는 석대문이 내뻗은 힘이 몸에 닿는 순간, 양손에 끌어올린 유가공(柔加功)을 발출 한다. 엇! 석대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앙상하게 말라바진 도사의 손바닥이 뒤집어지는 순간, 상대의 선기혈(선기혈)(?)을 노 리던 자신의 금나수가 봉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치 솜으로 뭉쳐진 벽을 친 듯... 석대문은 괴이함을 느낀다. 귀기... 도사로부터 발출된 진기는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사이함이 담겨 있었다. 실낱 같은 공백. 사생은 몇 걸음 재빨리 물러난다. 품 속으로 들어간 그의 손은 한 장의 붉은 종이를 끄집어 낸다. 부적이었다. 사생은 석대문을 바라본다. 하얀 얼굴에 붉은 금이 그어진다. 선지를 베어문 듯한 비릿한 웃음... 너는 나를 잡을 수 없다. 파악...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부적으로부터 새파란 불꽃이 피어 오른다. 사생은 불붙은(?) 부적을 땅바닥에 집어던진다. 암(唵) 급급(急急) 여율령(如聿令)... 혼귀(混鬼)! 요사스러운 진언(眞言)... 순간 석대문의 눈썹이 좁아진다. 그와 사생과의 사이, 삼사 장 남짓한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까닭이다. 거대한 솥에 담긴 죽을 휘젓(?)듯, 크고 작은 흔들림이 안정된 공간을 혼란 속으로 휘 말아 들어간다. 나를 잡으려면 어디 따라와 보아라! 으하하! 비록 혼귀를 불러내어 상대의 눈을 속일 수는 있지만, 이렇게 탁 트인 밝은 곳에서는 술법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생이다. 그는 멀리 보이는 숲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저곳에서라면 제 아무리 석대문이라 한들 나를 당할 수 없을 것이다! (4) 울창한 숲. 큰 교목(喬木)들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남부 특유의 활엽림이 낮게 깔려 있다. 석대문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 앞에 벌리고 있는 거대한 녹색의 아가리를 바라본다. 발작하는 간질병자의 수족과 같이 이리저리 꼬인 덩굴들, 보라색 그늘로부터 풍겨 나 오는 썩은 해초향(海草香) 같은 냄새... 그는 잠시 뒤를 돌아본다. 후덥지근할 정도로 밝게 느껴지는 오후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숲속은 저주받은 어둠의 세계... 마치 자신이 서 있는 곳을 경계로 명부(明府)와 유부(幽府)가 갈려지는 것 같았다. 이 기분 나쁜 숲이, 요상한 술수를 부리고 토끼같이 달아나버린 도사 녀석이 뛰어든 곳이다. 토끼? 하필이면 왜 토끼 같다는 생각을 했을까? 석대문은 피식 웃는다. 조금은 마음이 유쾌해진 것 같다. 그는 모든 불쾌함을 등뒤로 남긴 채 숲 안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는다. 이 근처에 있다... 향 한 자루 탈 시간 정도를 들어 왔을까? 석대문은 걸음을 멈춘다. 인기척은 감지되지 않는다.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아까보다 한층 더 짙어진 읍습한 냄새 - 어쩌면 냄새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기운을 오감으로 식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구분한다면 냄새에 가 장 가까울 것이다 - 와 헐떡거리는 맹수의 숨소리 같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숲의 정적 은, 하나의 심상(心象)을 이루어 석대문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 인간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심상... 그것은 요기(妖氣)였다. 스으으... 주위의 수풀들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수풀이 움직일 리 없다. 구부러진 가지와 넓적한 잎새 사이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숲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착 각을 부른 것이다. 안개는 무한한 용량의 위장을 지닌 식귀(食鬼)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삼켜간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서서히... 흐흐흐... 강동제일가주, 석대문! 방향을 짐작할 수 없는 목소리. 육합전성(六合傳聲)이라고 하기에는 그 여운이 너무도 길게, 그리고 으시시하게 이어 진다. 차라리 느낌 그대로 유부를 떠도는 원혼들의 귀곡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할지도 모를 정도로. 날 알고 있군. 그래, 또 한번 귀신놀음을 하자는 건가? 석대문은 냉랭한 음성으로 말한다. 귀신놀음이라... 하긴, 뭐라고 부르던 네 맘이겠지. 어쨌건 이곳에서 나, 매령귀사 사생이 네 목숨을 거두어주마. 휘이이... 돌연 한 줄기 음풍(陰風)이 석대문의 몸을 감싸고 지나간다. 석대문은 눈을 가늘게 뜬다. 전방에 일렁이던 안개가 서서히 변해간다. 여름 하늘의 먹구름이 만들어내는 이합집산(離合集散)처럼, 서로 얽히고 풀어지며 만 들어지는 형태... 바로 붉은 도포를 입은 사생이다.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다... 석대문은 곤혹을 느낀다. 적과의 거리를 가늠하는 것은 무인으로서 중요한 습관.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의 예리한 눈썰미로도 사생과의 거리를 측량할 수가 없다. 그는 곧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리 측정의 기준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목표물의 크기로 감지하는 원근감이며 다른 하나는 목표물과 사이에 있는 주위 경물의 변화이다. 안개로 인해 주위 경물을 살필 수 없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 사생이란 도사는 도 대체 무슨 술수를 부렸길래 자신의 형체를 아지랑이처럼 모호하게 만들었을까... 사술이로군... 결론은 하나, 숲속을 짓누르던 모든 요기의 근원이 바로 사생이었던 것이다. 석대문은 지리가 불리함을 새삼 깨닫는다. 아열대림의 괴괴한 어둠과 눅진눅진한 습기는 사술을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 품인 것이다. 우선, 수의(壽衣)를 한 벌 선물해 주지. 딸랑딸랑... 유령처럼 허공에서 흐느적거리는 사생은 어느새 꺼냈는지 붉고 검은 수실이 달린 요 령(搖鈴 : 佛家에서 法要를 행할 때 흔드는 방울이 달린 기구)을 꺼내 흔든다. 요령 소리가 울릴 때마다 사생의 입으로부터 붉은 연기가 뭉클뭉클 뿜어져 나오기 시 작한다. 붉은 연기는 석대문의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다. 마치 수의처럼... 석대문은 두 걸음 물러서 보았지만, 연기는 생명을 가진 동물처럼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시야는 점점 좁아진다. 석대문은 자욱히 덮어오는 안개 속에서 한 줄기의 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무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냄새... 바로 피냄새였다. 파설법술(破舌法術)! 석대문은 무겁게 중얼거린다. 파설법술이란 영매(靈魅)나 술사(術士)들이 귀신을 부를 때 사용하는 수단 중 하나이 다. 혀나 입술을 깨물어 얻은 피를 허공에 뿜어 요귀를 모으는 방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고도의 수련으로 단련된 그의 시야를 차단한다는 것은 예 사 재주가 아니다. 평범한 마도사(魔道士)가 아니군. 시야는 이미 완전히 차단되었다. 눈을 어지럽히던 사생의 모습도, 조금 전까지 그렇게 우거졌던 수풀조차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단지 역겨운 비린내를 풍기는 피연기뿐... 이쯤이면 분위기는 괜찮은 편이지? 아차, 이런! 음악이 없군. 내 깜빡했네. 이렇게 좋은 분위기에 음악이 없어서야 쓰나. 어디선가 사생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비웃음과 호기, 그리고 확신. 섣불리 움직이면 당한다! 석대문은 정신을 가다듬고 전신을 긴장시킨다. 한 줄기 가벼운 전율이 척추를 타고 미골(尾骨)로 달려간다. 일종의 쾌감. 상대할 만한 적수를 만난 무인의 피가 부르는 열기이기도 하다. 근육의 생생한 탄력, 신경 조직의 팽팽한 긴장, 건강하게 박동하는 심장, 그곳에서 용 솟음쳐 혈관으로 내닫는 신선한 피... 그 모든 것이 눈에 보이 듯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의 우수는 요대로 사용하고 있던 연검, 흑정(黑晶)의 손잡이를 잡아간다. 오너라, 사생! 유부를 떠도는 원혼들이여... 유시령(酉時靈) 금관계왕(金冠鷄王)의 음기(陰氣)가 만천하(滿天下) 하였도다... 염왕의 사자가 그대들을 부르나니, 이제 현신하라! 요령 소리와 함께 연기 속으로 녹아드는 주문. 흐으으... 우우... 무간지옥(無間地獄)의 뚜껑이 열렸는가. 땅속 깊은 곳으로부터 귀기 어린 외침들이 울려나온다. 수천 수만의 영혼들이 일제히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듯... 처음엔 진동만 느껴질 정도의 낮은 음역(音域)을 맴돌던 소리들은 점차 비단폭을 찢는 듯한 귀곡(鬼哭)으로 솟구친다. 어느 순간 석대원 주위를 맴돌던 붉은 연기가 심하게 요동치며 망자(亡者)들의 시간이 열리기 시작한다. 서서히 만들어지는 지옥도(地獄圖)... 석대문의 눈꼬리가 일그러진다. 그가 서 있던 곳은 잠깐 사이에 지옥의 한 구역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붉은 연기 속에서 나타난 귀신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신화 속의 우두마면귀(牛頭馬面鬼)는 물론이고, 머리가 잘린 놈, 팔다리가 끊어진 놈, 몸뚱아리가 후벼파져 창자가 흘러나오는 놈, 눈알이 대롱대롱 매달린 채 썩기 시작한 살점 사이로 구더기가 꿈틀거리는 놈... 간담이 약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거품을 물고 쓰러져 그 끔찍한 대열에 합류할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다. 히이이... 머리를 산발한 여귀(女鬼) 한 구가 흐느적대며 석대문의 곁으로 다가온다. 목을 매달아 죽었는지 반쯤 부패한 채 늘어진 혓바닥이 가슴께에서 덜렁거린다. 요망한! 대갈일성(大喝一聲). 그는 메슥한 욕지기를 삼키며 우수를 휘두른다. 흑정검이 그리는 짧고 빠른 반원(半圓)... 팍. 검의 궤적(軌跡) 안에서 여귀는 두 조각으로 베어져 나풀거린다. 지귀(紙鬼)? 잘려진 여귀의 실체는 어처구니 없게도 종이 조각이다. 두 쪽으로 베어진 종이 조각 위엔 범어(梵語)와 상형자(象形字)가 붉은 주사(朱砂)로 써져 있다. 강혼주문(絳魂呪文)이다. 석대문은 부적을 던져 공간을 혼란시켰던 사생의 재주를 떠올린다. 영매나 술사들이 부적이나 지전(紙錢)을 사용하여 귀신과 교통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것을 영력이 없는 사람 앞에 현신시킨다는 것은 대단한 재주이다. 석대문이 감탄하고 있는 사이에도 붉은 연기로 이루어진 귀신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 다. 석대문은 눈을 감는다. 모두 심마(心魔)에 불과하다... 물론 그의 마음에서부터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공포나 두려움이 허와 실을 혼동하게 하는 것이다. 귀신들이 실체가 있을 리가 없다. 있다면 어지러워진 마음, 그리고 요사한 주문이 담긴 종이 조각뿐이다. 환상은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 석대문은 차츰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낀다. ...! 석대문은 번쩍 눈을 뜬다. 주위를 가득 메운 요기와는 전혀 다른 살기를 감지한 것이다. 우측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실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빨랐다. 그의 신형이 한쪽으로 쏠리며 회전하며 흑정이 매섭게 휘둘러진다. 오무라드는 국화처럼 안으로 감겨오는 검초는 편신옹국(偏身擁菊)의 방어식... 하지만 조금 늦은 출수였다. 끼긱... 흑정이 부러질 듯이 휘어지며 오른쪽 옆구리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진다. 빌어먹을! 눈살이 찌푸러진다. 반사적으로 왼쪽으로 세 걸음 피하며 옆구리를 더듬는다. 쇄도해오는 살기를 느낀 후 막아내는 일은, 그와 같이 고도로 단련된 신경의 소유자에 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시청각이 차단된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이 연결되어지는 극미한 호흡차. 사생의 공격은 그 사이를 헤집은 것이다. 세 치는 긁힌 것 같군... 미끈거리는 핏물 사이로 두 고랑의 길게 패인 상처가 만져진다. 석대문은 상처를 어루만지던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간다. 입 안으로 신선한 피맛이 물씬 감돈다. 다행스럽게 독은 없는 것 같다. 대단하군! 그 와중에서 내 사인혈구(死刃血鉤)를 막아내다니. 석대문의 주위를 맴도는 귀신들은, 이제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 한 무더기의 붉은 소 용돌이가 그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 같다. 그 위로 사생의 비웃음과도 같은 감탄이 실린다. 놈은 자리를 옮겨 다음 공격을 노릴 것이다.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 그렇다면... 속전속결! 결심과 동시에 석대문의 장대한 신형이 붉은 소용돌이를 가르고 나간다. 우수에 쥔 흑정에선 검은 벼락이 휘몰아친다. 가전검학인 의형검뢰(意形劍雷) 중 천작난비(千鵲亂飛)가 전개된 것이다. 끼이악... 까아... 소름기치는 비명. 가을 들녘에 앉아 있던 까치떼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듯, 화려하게 폭발하는 흑정의 검 기 앞에서 귀신들의 환상은 수많은 종이 조각으로 갈라져 분분히 날린다. 석대문은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들 속에서 한 줄기 매서운 파공성이 울리는 것을 들었 다. 예상했던 공격... 그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전방으로 신형을 날렸다. 파팍. 땅거죽이 뒤집어지며 갈갈이 찢긴 수림들이 비산한다. 한 개의 시뻘건 갈고리가 방금 전까지 석대문이 서 있던 자리를 후비고 지나간 것이다. 땅 위를 한 바퀴 구르며 자세를 바로잡는 석대문... 하지만 사생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다. 우욱! 석대문은 등줄기를 후려치는 음유로운 장력으로 외마디 신음을 토한다. 기혈이 막히고 척추가 울릴 정도로 음독한 장력이다. 앞으로 고구라지듯 휘청거리는 석대문을 향해 예의 갈고리가 다시 날아든다. 석대문은 상세를 살필 틈도 없이 황급히 몸을 굴려 피한다. 덕분에 한 그루 비파나무가 살인적인 갈고리의 공격에 제물이 되었다. 거대한 맹수의 발톱에 얻어맞은 초식동물처럼, 비파나무는 한 뭉텅이의 살점을 뜯기며 굉음과 함께 쓰러진다. 놈은 사술에만 능한 것이 아니다... 방금 한 식으로 이어진 세 차례의 공격은 그 사이사이가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있 다. 사생의 본신 무공 또한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증거이다. 석대문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다음 공격에 대비한다. 그의 시야로 붉은 연기 속으로 회수되는 갈고리가 들어온다. 갈고리 끝부분에서 반짝이는 은빛... 아마도 갈고리에 달린 가느다란 사슬이 자유로운 수발을 가능케 해주는 것 같다. 흐흐, 강동제일인께서 왜 이리 맥을 못쓰시나? 첫번째 놀이에서 벌써 지치면 어쩌실려고. 놈은 나를 비웃고 있다... 석대문의 어금니가 거칠게 맞물려진다. 자! 그러면 다음 놀이로 가 볼까, 가주 나으리? 주위의 연기가 다시 짙어진다. 석대문은 가만히 진기를 움직여 본다. 등에 일장을 맞는 순간, 무의식중에 발동한 선천공(先天功) 때문에 내상은 입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몸을 일으킨다. 옅은 웃음이 배어나오는 것은 고래 힘줄처럼 질긴 전투의지 때문일 것이다. 흑정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유시령 금관계왕의 권세를 빌어 지령박과 토지신에게 명하노니, 땅은 스스로의 결계 (結界)를 풀고 어두운 영혼의 기를 토하라... 땅의 저주받은 영혼들은 내 명을 받으라... 암(唵) 급급(急急) 여율령(如聿令)! 메아리치는 진언(眞言)과 함께 축축한 요기가 구름처럼 일어난다. 엇? 어느 순간, 천하의 석대문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딛고 있던 땅이 늪으로 변한 듯, 오른쪽 다리가 쑤욱 빠져드는 것이다. 왼다리에 힘을 주어 오른다리를 빼려 했지만, 그 다리마저 맥없이 가라앉고 만다. 무릎까지 빠져버린 다리는 차꼬라도 채운 것처럼 요지부동이다. 스멀거리며 감겨오는 요기... 땅은 개미지옥처럼 그를 빨아들이고 있다. 흐흐! 검은 당나귀가 이번엔 어떻게 구르는지 감상해볼까. 석대문의 왼편 연기가 갈라지며 하나의 붉은 그림자가 엄습한다. 바로 사생이다. 붉은 입술에 맺힌 비릿한 웃음이 언뜻 보인 것 같더니, 뒤따라 밀려오는 무음장력(無 音掌力)... 석대문은 급히 허리를 꺾으며 일 장을 마주 때린다. 펑. 석대문의 허리가 휘청거린다. 내공으로 말하자면 사생보다 뒤질 리 없지만, 힘을 쓰기 위해서는 단단한 지지대가 있 어야 한다. 흙 속으로 빠져드는 몸으로는 안정된 장력을 발출할 수 없다. 탁한 기운이 목구멍으로 차오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석대문은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너를 묻는 수고를 덜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하하! 어느새 연기 속으로 숨어버린 사생의 비웃음... 하지만 석대문은 모멸감을 느낄 여유가 없다. 이 순간 그의 뇌리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접장(接掌)과 함께 풍겨온 냄새... 그것은 비록 아주 미약했지만 향기였다. 꿈틀거리는 대지는 석대문을 반 가까이 삼키고 있다. 이제는 허리를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 끝내자, 석대문! 쐐애액. 붉은 갈고리가 석대문의 정수리를 노린다. 이번에는 정면이다. 정말로 끝을 볼 결심을 한 듯, 이제까지 종적을 숨기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르다. 주변의 붉은 연기들은 갈고리가 만들어내는 와류(渦流)에 휘말려 산산히 흩어진다. 석대문은 갈고리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깨문다. 푸욱. 탱탱한 육질에 칼을 박아넣을 때 들을 수 있는 파육음... 석대문은 눈앞이 아득해진다. 상체를 뒤틈으로써 갈고리의 맹공을 오른쪽 어깨로 받아낸 것이다. 비록 극성의 선천공으로 보호한 어깨였지만,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긁히는 고통을 이 기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은 그의 의지... 하늘을 향해 높이 들려진 좌수가 꿈틀대는 땅을 향해 힘차게 내질러진다. 필생공력이 실린 가전의 태을장(太乙掌)이다. 꽈앙... 폭음과 함께 석대문을 삼키던 흙들이 산산히 부숴지며 주변을 자욱히 메운다. 장력의 반동은 석대문의 몸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정면을 향해 돌진한다. 환술의 근본은 요기와 법술로 상대의 눈을 속이는 것에 있다. 사생은 난데없는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자 크게 당황한다. 지금까지 그가 전개한 파설법술과 초혼술(招魂術)은 석대문의 시야로부터 그를 감춰 주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생 역시 석대문의 종적을 노친 것이다. 위기를 직감한 사생은 황급히 옆에 서 있는 나무 뒤로 몸을 숨긴다. 석대문은 눈을 감는다. 후각에 실린 본능이 흑정을 움직인다. 슈욱. 들릴 듯 말 듯한 소리가 환청과도 같이 시공을 스친다. 잘 익은 수박에 날카로운 송곳을 찔러 넣을 때 들리는 소리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생의 뇌리에는 천둥처럼 새겨진 소리였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상황이 드러난다. 숲속을 가득 메우던 붉은 연기는 어디론가 사라진 후이다. 조금 전까지 석대문이 파묻혀 있던 장소는 반경이 일 장에 가까운 큰 구덩이가 파여 있다. 석대문은 한 그루의 나무 앞에 우뚝 서 있다. 오른쪽 어깨에 박힌 채 건들거리고 있는 붉은 갈고리... 하지만 오른팔은 정면으로 힘차게 뻗어 있다. 어떻게... 어떻게 내 위치를...? 나무 뒤에서 가래끓는 소리와 함께, 힘없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석대문의 오른팔과 하나가 되어 뻗어나간 흑정은 한 아름이 넘는 나무를 관통하고, 그 뒤에 숨은 사생의 목젖까지 뚫어버린 것이다. 사생이라고 했나? 그대의 사술은 내가 처음 겪는 대단한 것임을 인정하네. 하지만 남자가, 그것도 도사가 향 주머니 같은 것을 차고 다닌 게 잘못일세. 나무 뒤의 사생의 눈이 부릅떠진다. 향 주머니? 향 주머니라니? 석대문의 말대로 남자가, 그것도 도사가 누구에게 잘 보일 일이 있다고 그런 것을 차 고 다닌단 말인가. 맹세컨대 평생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지녀본 일이 없었다. 잘가라, 사생! 석대문은 흑정을 뽑는다. 사생의 목에서 한 줄기 피화살이 뿜어져 나온다.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사생의 눈은 하얗게 뒤집어진다. 나무에 등을 댄 채 서서히 주저앉는 몸뚱아리... 맞아! 그... 그 년... 때문이군. 사생의 혼은 육신을 떠나며, 죽삼랑과 가졌던 격렬한 정사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들의 얽힌 육체 위를 맴돌던 진한 사향 냄새가 떠오른 것이다. (註 : 사향은 한대 이전부터 중국 여인들에게 애용되어온 화장품이다. 사향사슴이나 사향고양이의 향낭을 말려 가루로 만든 향료로서, 한의학에서는 강심제 나 각성제의 원료로 사용된다. 또한 사향에는 최음 성분이 있어서, 중국의 여인들은 가슴이나 겨드랑이에 주머니를 만들어 그 가루를 담고 다녔다고 한다.) 석대문은 사생의 시신을 바라본다. 억울함 때문인지 하얗게 부릅떠진 생명없는 눈동자가 그를 마주 본다. 그는 흑정을 다시 허리에 감는다. 악전고투... 지리가 불리한 싸움을 자청했던 자신의 만용이 부끄러워진다. 경적(輕敵)이면 필패(必敗)라. 무척이나 흔한 경구이다. 하지만 지금 석대문은 그 평범한 말에 담긴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문득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그 경구에 담긴 진의를 배우기 위해 목숨이라는 큰 대가를 치뤄야 하기 때문이다. 석대문은 사생의 시신을 뒤지던 중, 기이한 영패를 발견했다. 사각형 모양의 흑옥(黑玉)으로 만들어진 영패에는 <십비(十秘)>라는 글이 양각되어 있 다. 혈랑곡에서의 직위인가? 그는 영패와 함께 유지(油紙)로 단단히 포장한 한 장의 서찰을 발견했다. <사(史)비영 전(前). 철포결 우근을 제거하시오. 방법은 양무청 건(件)과 동일하게 매혼대법을 사용하도록. 일이 끝나면 위백을 제압하여 철군사(鐵群社)로 이송하시오. 팔월 초하루에 일조령(日照嶺)으로 지원을 보내겠소. 이(二) 문강.> 편지를 읽어가는 석대문의 눈빛이 빛난다. 드디어 양무청의 실종에 관한 직접적인 단서를 잡은 것이다. 위백이 이 일에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군... 석대문은 편지와 영패를 갈무리한다. 불현듯 어깨로부터 통증이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갈고리는 아직도 그의 어깨에 박혀 있는 것이다. 며칠은 고생하겠군. 석대문은 갈고리를 잡아 뽑는다. 튀어오른 선혈이 그의 옷을 더욱 검게 만든다. 얼마 후 숲속 후미진 곳에는 사생의 무덤으로 보이는 작은 흙더미가 생겼다. 十二章 水上戰 (1) 옥계(玉溪)는 중원 중서부에 세로 방향으로 길죽하게 자리잡은 섬서성(陝西省) 중에 서도 서쪽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옥계는 당나라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비단길이 만들어낸 수많은 상업도시 중 하나이 다. 기록에 의하면 한 해 오만 마리의 말이나 낙타가 비단을 싣고 옥계를 거쳐 서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비단길이란 단순히 비단을 수송하던 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타(馬駝)에 실린 비단을 연결하면 그만한 길이의 길을 놓을 수 있기 때문에 비단길 인 것이다. 옥계로부터 동북쪽으로 삼백여 리 떨어진 곳에는 도요산(陶窯山)이라고 불리는 작은 산이 있다. 적백관(積白關)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도요산에서는 도자기를 굽기에 적합한 양질의 흙 이 많이 생산된다. 물과 반죽하여 은은한 백색을 띠는 고령토(高嶺土)는 도요산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토종(土種)이다. 요업(窯業)의 연원은 춘추전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민간에 도기(陶器) 및 자기(磁器)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후당에서 송대까지. 그 이전의 요업은 전문지식의 부재와 대량생산시설의 미비로 생산비용이 매우 높아서, 생활용구라기 보다는 감상과 소장을 목적으로한 귀족문화의 일부로 해석하는 것이 옳 을 것이다. 이러한 생활자기는 명대에 들어서서 더욱 활발히 보급되게 된다. 도요산 아래 형성된 도요촌(陶窯村)은 영청(影靑 : 靑白瓷)을 생산하는 경덕진요(景 德鎭窯)나 천목(天目 : 술잔, 또는 찻잔)을 생산하는 길주요(吉州窯), 용천요(龍泉窯) 등과 같은 관요(官窯 :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도자기 공장)는 아니었지만 수요가 많 은 질그릇이나 항아리들을 생산해서 짭짤한 재미를 보는 그런 마을이다. 생산된 물품들은 가까운 탕구진(糖丘津)으로 운반되어, 수로를 통해 황하 연안의 군소 도시들로 공급되는 것이다. 짐이 시장하구나. 대장군, 빨리 먹을 것을 대령해라! 의젓함을 가장하려 애쓰지만 치기를 감출 수 없는 음성이다. 열두어 살쯤 됐을까? 나이에 비하면 제법 큰 몸집을 지닌 소년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말한다. 이것 봐라? 빨리 빨리 못할까! 소년은 재촉하듯 탕탕 두드린다. 소년의 손바닥 아래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것은 은행나무의 심재(心材)로 짠 결 좋은 목 판... 지금 그 목판은 한 채의 낡은 가마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다. 가마는 진흙으로 만든 한쪽 벽면이 허물어진 채 은행나무 목판의 지붕만이 번듯해 보 인다. 오래 되어서 더 이상 도자기를 굽지 못하게 된 가마의 지붕을 뜯어내고 비바람을 막을 수 있게 지붕을 새로 짠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허물어진 한쪽 벽면을 통해 짚단이나 석탄, 장작들이 빼꼼이 보인다. 아마도 마을의 도공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탄재고(炭材庫)인 것 같다. 여기 대령했사옵니다. 한 사내애가 조그만 나무판자를 높이 들어올린다. 얼굴에 묻은 검댕이나 덕지덕지 기운 자국이 있는 의복이 소년의 행색을 초라하게 만 들어 준다. 아이가 받쳐든 판자 위에는 꼭지가 노랗게 익은 참외가 몇 알 올려져 있다. 히히! 맛있겠다. 황비도 먹으시오. 가마 위의 소년은 옆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에게 참외를 한 알 내민다. 비록 촌가의 아이답게 검게 그을리고 값싼 베로 만든 옷을 입고 있지만, 큰 눈과 오똑 한 콧날이 꽤나 귀여워 보인다. 여자아이는 참외를 받아 입으로 가져가다가 문득 손길을 멈춘다. 남루한 차림의 조그만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부러움의 기색을 읽은 것이다. 대장군도 좀 먹어요. 여자애가 입으로 가져가려던 참외를 판자를 들고 있는 소년에게 쥐어준다. 소년은 헤헤 웃으며 참외를 받아 껍질째 덮썩 깨문다. 무험한 자식, 황제보다 먼저 먹다니! 가마 위에 앉아 있던 소년은 마치 역적이라도 바라보는 듯한 눈길로 초라한 차림의 소 년을 째려보고는, 뒤질새라 성급히 참외를 입으로 가져간다. 여자아이는 그제서야 참외를 한 알 집어 옷에 문지르고는, 한 입 베어문다. 먹을 것이 생긴 아이들은 하던 놀이도 잊은 채 참외 먹기에 열중하고 있다. 참외가 참 달다. 그지? 대장군은 무험하게도 황비에게 반말을 지껄였고, 황비는 참외를 오물거리다가, 체통없 이 배실거리며 고개를 끄떡인다. 아이들이 놀고있는 가마로부터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는 수령이 몇백 년은 되어 보이 는 정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우산처럼 드리워진 나무그늘 아래엔 두 명의 사내가 앉아서 한낮의 더위를 피하고 있 다. 파랗게 깎은 머리와 목에 감은 칠염주(漆念珠)는 그들이 승려임을 말해준다. 망아(妄我)! 무엇을 생각하느냐. 두 명의 화상 중 붉은 가사를 걸친 노승이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한다. 나무껍질 같은 주름으로 덮인 얼굴... 등섬등성하게 빠진 눈썹과 검버섯이 피어난 피부는 그가 살아온 날들의 수가 범상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늘어진 눈꺼풀을 어렵사리 들어올리고 있는 듯한 눈동자는 옆에 앉아 있는 승려를 향 하고 있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망아라고 불린 중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나이는 환갑 정도 되었을까, 그 중은 가사도 없이 상하 회색승복만 입고 있다. 그의 얼굴은 대단히 추하다. 툭 튀어나온 뒤통수와 초생달처럼 휘어진 턱은 희극적인 느낌까지 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그 얼굴을 비웃을 수 없다. 오른 빰에서 목덜미까지 이어진 불에 일그러진 흉터가 주는 험악함 때문이다. 근육과 신경이 모두 죽어버린 듯, 입을 벌려 말을 할 때마다 온전한 왼쪽 얼굴이 요란 스럽게 실룩거린다. 마침 왼쪽 뺨에는 세 개의 붉은 점이 나란히 찍혀 있어서, 그 근육의 율동을 더욱 부 각시켜 준다. 그래, 아이들의 놀이가 재밌어 보이는가? 제자가 잠시 망념에 빠졌군요. 죄송합니다, 사부님. 망아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린다. 그는 기이하게도 신발을 신지않고 있다. 만일 누군가 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면 이들이 평범한 탁발승이 아님을 쉽게 알아차렸 을 것이다. 먼 거리에 있는 아이들의 노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력은 범상한 것이 아니다. 사바에서의 부귀, 권세란 모두 저 아이들의 놀이와 같은 걸세. 사람이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앉은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권력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지기 마련이지. 망아, 내 자네에게 한 가지 얘기를 해줌세. 하교해 주십시오. 어느날, 아리수(阿利修)라는 청년이 석가께 질문했지. <제게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석가께선 <어디 말해보게>라고 하셨지. 청년은 <밤에 잠을 편히 잘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석가께서 물으시길 <몸에 병이 있는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럼 사는게 어려운가 보군>, 청년은 고개를 흔들 며 대답했지. <소생은 이 지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입니다. 소생이 지닌 땅은 한 사람이 열흘을 걸어도 돌아보지 못할 만큭 넓고, 거느린 하인들 도 삼백이나 됩니다>, 석가께선 빙긋이 웃으시며, <그래 그런데 잠을 못자는 이유는 뭔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잠만 들면 여섯 명의 사내들이 저를 채칙질을 하며 일을 시킵니다. 저는 밤새 힘든 노동을 하다가 지쳐서 깨곤 합니다> 청년은 울먹이며 말했다네. 자, 망아! 자네는 청년이 그런 꿈을 꾸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망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젓는다. 제자는 어리석어서 알 수 없군요. 노승은 망아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석가께선 아리수에게 말씀하셨지. <자네는 병이 있으며,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고, 또 사는게 어렵다네>, 청년은 어리둥 절했지. <자네가 가진 부귀와 권세는 한 사람이 가지기에 너무나 벅찬 것이야. 그런데도 자네는 만족하지 않고 더 큰 부귀, 더 큰 권세를 바라고 있다네. 자네가 그런 생각을 더할 때마다 꿈 속에서 자네를 매질하는 사내들의 수는 점점 늘어 날 것일세. 마음에 맺힌 것이 있으니 병이 있는 것이고, 더 큰 부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으며, 그러니 자연 사는게 힘들어지는 것이야> 석가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재산을 둘로 나눠서 절반은 하인들에게 주게나. 그리고 그들을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게, 그리고 마음을 정하게 하며 명상을 계속한다 면 자네는 편한 잠을 잘 수 있을 것일세>, 청년은 펄쩍 뛰었지. <제 재산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제가 사업을 더욱 번창하게 만들어서 아들들에게 물려줘도 모자른 판에 재산을 나누고 하인들을 내보내라니요? 정말 어이없는 말씀이군요. 그것만은 절대로 못합니다>, 청년은 화를 내며 가버렸지. 노승은 잠시 말을 끊고 눈을 감는다. 쭈글쭈글한 두 뺨 위에 붉그레한 화색이 잠시 머문다. 무릇 사바에서의 그릇된 부귀영화는 내세의 매운 채칙과 다름없는 법... 청년이 떠난 후 석가께서는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네. <그는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록 그의 밤은 더욱 빈곤해질 것이다>라고. 이 우언(禹言)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알겠나? 제자는 헛된 권세를 잃고 사부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행복하게 생각합 니다. 사부님의 가르침,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망아는 다시 머리를 조아린다. 선재(善材)로다, 아미타불... 망아의 뒤통수 위로 노승의 나직한 독경소리가 얹혀진다. 슬슬슬... 정자나무 위에선 참매미들이 제철에 신명이라도 난 듯이 요란을 부리고 있다. (2) 대지를 달구었던 태양이 서산 한 모퉁이에 걸린다. 숨가쁜 여름날과는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담담한 노을이 무대의 휘장처럼 하루의 막을 내리고 있다. 지금 도요산 아래 위치한 탕구진은 마지막 나룻배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그들 대부분은 도요촌에 사는 양민이거나, 도자기를 취급하는 인근의 상인들이다. 예정보다 늦어진 나룻배 때문인지 여느 때보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룻터... 하지만 그 한켠은 이상하리만치 한산해 보인다. 그곳에는 황의를 입은 거구의 무사와 두 명의 노인이 나룻터 바닥에 앉은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바로 석대원과 한로, 그리고 외팔이가 된 모용풍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석대원의 어마어마한 체구와 등에 맨 장검을 꺼려해서인지, 이들 주 위로는 다가오지 않고 있다. 오늘이 칠월 스무이틀이니, 중추절(仲秋節) 이전까지는 화산(華山)에 무난히 도착할 수 있겠소이다. 챙이 넓은 죽립을 쓰고 있는 모용풍이 말한다. 파리한 안색은 그가 아직 부상으로부터 회복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모용형, 고검(孤劍)이라는 인물이 그리도 중요하오? 허리를 두드리던 한로가 입을 연다. 모용풍은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가 어디있냐는 얼굴로 한로를 바라본다. 물론이오. 고검 제갈휘(諸葛輝)가 당금의 강호 정세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다대(多大)하다고 할 수 있소. 고검 제갈휘. 지금은 비록 쇠락했지만 한때 오대문파에 당당히 이름을 내걸었던 화산파(華山派) 출 신. 검왕 연벽제와 비교해도 그 우열을 논하기 힘들 정도의 검호(劍豪). 현재 무양문(武陽門) 호교십군(護敎十軍)의 우두머리인 일군장(一軍將). 석대원은 <비세록(秘世綠)>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모용풍의 설명은 계속된다. 그는 남패(南覇) 무양문의 호교십군 중 우두머리라는 신분 외에도, 곤륜지회 이후 새 롭게 매겨진 오대고수(五大高手) 안에서도 당당하게 상위로 꼽히는 위인이라오. 음... 아마도 두 분께서는 모르시는 얘기일 겁니다. 새로운 오대고수? 그들이 누굽니까? 석대원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끼어든다. 모용풍은 이제야 말할 맛이 생긴다는 듯, 크게 헛기침을 한 후 이야기를 계속한다. 흠흠, 석공자께선 산중에서 오래 계셨으니, 그런 소식엔 어두울 수밖에. 새로운 오대고수의 서열은... 헤헤, 자랑같지만 삼 년 전에 노부가 직접 만들어 보았다오. 한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는다. 허허, 모용형이 직접 만들고 당신들은 모르지? 라고 묻는다면 세상에 알 사람이 누가 있겠소? 하지만, 그 얘기는 제법 유명하단 말씀이야! 사실 노부는 강호에서 정보에 관한 한은 누구에게도 뒤질 생각이 없는 사람이거든? 그러니 노부가 정한 서열이 제법 공신력을 지닐 수 밖에. 안 그렇소, 한형? 모용풍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뻐기는 투로 말했다. 한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음 이야기를 손짓으로 재촉한다. 첫째는 검왕 연벽제, 바로 연은공(燕恩公)이지! 아마 이것엔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거외다. 은공의 무학이 전대 곤륜지회의 다섯 고수들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사 람들도 많은 정도니까... 아마 검에 관한 한은 무림사를 통털어도 그같은 경지에 이른 이가 드물거요. 아마 남송(南宋) 말엽의 대검객인 좌천량(佐川亮)이나 무당파(武當派)의 시조인 삼봉 진인(三峯眞人), 그리고 혈랑곡주와 비교해도 절대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암, 그렇고 말고! 석대원은 고개를 끄떡인다. 강호의 숱한 검객으로부터 검왕이라는 칭호를 듣던 연벽제. 십수 년 전, 열살박이 꼬마였던 그에게 그토록 당당한 모습으로 다가온 외삼촌... 석대원의 눈동자가 기이한 열정으로 일렁이기 시작한다. 부친의 호탕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얘야! 이분이 너의 외백부이시니라. 그러니까 네 엄마의 오라버니시지. 네 외삼촌은 전 중원인이 검왕이라고 부르는 훌륭한 어른이시란다.> <와! 검왕이요? 아버지, 그럼 외삼촌이 검 쓰는 사람들의 임금인가요?> <임금? 허헛, 그래 네 외삼촌이 바로 검의 임금이니라. 허허허!> <네가 이랑(伊娘)의 아들이구나. 대원? 하하, 사내다운 이름이다.> <삼촌이 검왕이라면서요?> <응? 그래, 내가 검왕이다. 어디, 이리 가까히 와 봐라... 허, 이놈 뼈대 좀 보게? 열살박이가 이렇게 뼈가 굵어?> 둘째가 바로 고검 제갈휘지요. 모용풍의 목소리가 석대원의 귓전을 때린다. 촌각 동안 상념의 늪에 가라앉았던 석대원의 자아가 다시 현실의 끈을 움켜쥔다. 제갈휘는 오대문파의 하나인 화산파 출신이면서도, 오대문파의 대적(大敵)이나 다름 없는 무양문에 투신,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인 십군장의 지위에 오른 위 인이라오. 전대로부터 그렇게 혈채(血債)가 많이 쌓였던 오대문파와 무양문 사이가 오랜 세월 동 안 평화로웠던 것은 고검 제갈휘의 완충역(緩衝役)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요. 그렇니 그의 존재가 자연 중요할 수밖에... 그리고 무공 또한 대단하다고 알려져 있소. 화산검법의 정화인 양의검법(兩意劍法)을 약관(弱冠) 이전에 완성했다고 하니, 무학에 대한 그의 천재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요. 셋째는 신무전의 사방대협 중 백호대협인 독안백마(獨眼白魔) 이창(李昌)인데... 성질이 더럽게 급한 위인이지오. 말을 심하게 더듬는 것도 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라오. 그것만 아니면 괜찮은 친군데... 쩝! 넷째는 철포결 우근, 개방의 현임 방주이지요. 오대문파 중 침체된 개방을 천하제일방으로 만든 수완가이기도 하지. <역경(易經)>의 팔팔(八八) 육십사효(六十四爻)에 기초를 두고 거기에 천궁(天宮)의 방위를 가미한 구궁장법(九宮掌法)은 진짜 무섭다오. 외가공부(外家功夫)로는 아마 천하제일로 꼽아도 될 것이오. 다섯째는 석공자의 형님이신 강동제일가의 석대문, 석가주라오. 뭐, 이 사람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군. 하지만 한 가지! 그 당시엔 석가주를 오대고수로 꼽은 것에 이러쿵 저러쿵하며 딴 소리를 지껄이던 사 람들도 많았지만, 지금은 노부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 노부의 선견지명이 어떻소, 한형? 한로는 자화자찬하는 모용풍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석대원은 석대문의 이름을 듣자, 불현듯 형제들이 그리워진다. 특히 아우 대전(大全)과 여동생 지란(芝蘭)은 유난히 그를 잘 따르지 않았던가.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십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떨어져 지냈던 형제들. 비록 어머니가 다른 형제지만, 어린 시절 한 몸으로 뛰어놀던 피붙이들... 혹시 그들 간에 진검 승부는 없었소? 한로의 질문에 모용풍이 피식, 웃는다. 큰일날 소리! 지금 논한 사람들은 일신에 지닌 무공 못지않게 강호에 대한 영향력이 큰 세도가들이 오. 이들은 뜨내기 낭인무사들 처럼 드잡이질을 할 수 있겠소? 진검 승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얘기지! 한로는 고개를 끄떡거린다. 무인으로서 무공의 고저를 비교하는 비무는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소철과 서문숭이 진검 승부를 벌인다면 어찌 되겠는가. 비록 아무리 순수한 비무 차원이라고 한들 그 이후엔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북악 남패 간의 전쟁일지도 모르는... 헤헤, 하긴 내가 이들을 꼽은 것은 재미에 불과하다오. 이들 외에도 제법 대단한 고수들이 많소이다. 모용풍은 좀처럼 변설을 그치려하지 않는다. 어디 들어나 봅시다, 모용노인! 석대원이 맞장구치자 모용풍은 의기양양하게 뻐기며 설명을 시작한다. 우선 십여 년 전부터 강호를 떨게 만든 오마(五魔) 중에서 거경(巨鯨)이나 흑수마객 (黑手魔客), 독중선(毒中仙) 등을 고수라고 꼽을 수 있지요. 비록 유붕(兪鵬) 같은 더러운 놈도 오마 중 한 명이지만, 무공면에서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오. 특히 그들 중에서도 거경이 가장 무섭다고 알려지고 있소. 또, 신무전의 후계자인 도정(陶正)과 사방대협들, 무양문의 호교십군 중에서 쾌찬(快 燦) 양진삼(楊眞三)이나 분광검(分光劍) 좌응(佐鷹)같은 위인들도 제각기 독보적인 장 점이 있고, 소림(少林)이나 무당(武當)같은 명문엔 좀처럼 강호 행보를 안 하는 기인 들이 우글거린다오. 아까 애기한 다섯 고수들과의 우열을 비교한다면... 글쎄요, 뭐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일이오. 굳이 있다면 백지 한 장 정도 차이랄까? 고수의 승부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지요. 그날 그날의 상태라던지, 운세같은 것 말입니다. 사실 고수의 서열을 정한다는 것은 허망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하! 석 공자께서는 노부를 비꼬시는군. 하긴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감이외다. 서로 겨뤄본 적도 없는 모래알 같은 고수들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소. 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새외의 고수들도 한 번 꼽아 볼까요? 청해(靑海)의 삼불귀(三不鬼), 금부도(錦浮島)의 동해뢰왕(東海雷王)은 오래 전부터 지역의 패주로 군림해왔소이다. 또 장성 너머의 서역(西域)과 몽고에서 다시 일어서는 밀종(密宗), 밀교(密敎)에도 대 단한 위인들이 많소이다. 으음... 그리고 바다 건너 동영에는 오랜 전란을 통해 누적된 기이한 수련법으로, 장도(長刀) 를 수련하는 무리들이 있다고 하지요. 묵묵히 모용풍의 설명을 경청하던 석대원은 한숨을 쉰다. 난세는 난세로군요. 그들 모두 난세에 한 몫을 하는 위인들, 군웅이 할거하니 평화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 한 일입니다. 모용풍은 그런 석대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인다. 난세라! 제갈휘가 중요하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오. 그의 출신은, 지금은 비록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지만, 한때는 매화검문(梅花劍 門)이라는 이름으로 천하를 진동시키던 화산파! 그런 그가 무양문에 투신하여 명문대파들과 서문숭 사이의 묵은 감정을 풀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가 지닌 중요성은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소이다. 한 마디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뇌관이라고 할까. 그가 무너지면 무림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고루하게 명분을 들먹이는 자들이 그를 배신자로 매도한다는 것이지. 그의 별호가 외로울 고(孤), 고검인 것도 그 때문이라오. 외로운 검호(劍豪). 석대원은 제갈휘의 별호를 되새겨 본다. 묘하게 끌리는 점이 있다. 어린 나이에 산인이 되어 처절한 고독과 싸움을 했던 자신이 아니던가. 일면식도 없는 제갈휘에 대해 느끼는 아련한 감정은, 외로움이라는 같은 병을 앓고 있 는 상련(相憐)의 슬픔일지도 모른다. (3) 말을 멈춘 모용풍은 멋적은 듯이 선착장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란다. 아니! 저들이 여기 웬 일이지? 석대원과 한로는 모용풍의 시선으로 눈길을 맞춘다. 그곳에는 황색 가사를 입은 중 두 명이 서 있었다. 석대원의 눈꼬리가 가늘어진다. 예사 중들이 지니지 못하는 비범한 신태를 발견한 것이다. 귀 밑으로 북실북실한 구레나룻이 보기 좋은 한 화상이 모용풍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는 반색을 하며 석대원들에게로 다가온다. 아미타불! 모용시주, 오랬만입니다. 그는 정중하게 합장하며 인사한다. 적오(跡悟)대사 아니십니까? 허! 적송(跡悚)대사께서도 계셨군요. 모용풍은 남은 한 팔을 들어 답례한다. 적오라고 불린 중은 모용풍의 잘려나간 팔을 보고는 안색을 굳힌다. 아니, 이런 변고가! 그 팔은 어찌되신거요? 아하, 이 팔 말씀이오? 몸이 늙어 무덤에 들어갈 때가 되니, 팔이란 놈부터 관이 그리웠나 보오. 하하하! 모용풍은 껄껄거리며 말을 얼버무린다. 모용풍은 맹숭맹숭하게 서 있던 석대원과 한로를 중들과 소개시킨다. 소승은 소림의 적오라 하오. 소승은 적송이라 합니다. 석대원은 답례하며 모용풍으로부터 받은 <비세록>을 떠올렸다. 적오와 적송이라 하면 불학(佛學)보다는 무학면에서 훨신 더 큰 명성을 떨치고 있는 소림사 내에서도 방장승(方丈僧)과 같은 항렬의 고승들이다. 적오는 장문방장인 적공(跡空)대사의 바로 손아래 사제였으며, 적송은 적(跡)자 항렬 의 가장 막내이다. 소림은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다더니, 과연 허명이 아니군. 석대원은 엄전함 가운데 고아한 아치가 서려있는 그들의 기품에 감탄했다. 모용풍과 인사를 나눈 적오는 당당한 체격에 희끗희끗한 구렛나루가 위맹해 보이는 오 십 대의 중년승이고, 적송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얼굴도 해사하여 승려보다는 풍류객 (風流客)이 더 어울릴 것 같아 보이는 청년 미승(美僧)이었다. 심신의 수련으로 스스로의 경지를 닦아나가는 강호라는 사회가 생긴 것은 사서에도 기록되지 않는 까마득한 상고시대. 그 유규한 세월을 통해 얼마나 많은 방회들이 성가를 높이고, 또 스러졌던가. 소림이나 무당과 같은 방회들이 명문대파라고 칭해지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전통 때문일 것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데, 한 세대를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거대문파들이 얼마 나 많았던가. 물론 역사가 오래된 만큼, 소림이나 무당 역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때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무궁한 잠재력은 쉽게 바닥을 드러내지 않아, 어떤 위기에도 불사조같 이 살아나 오늘의 칭송을 받고있는 것이다. 적송... 석대원의 신경은 적송에게 맞춰졌다. 적송은 전대 불문제일인으로 알려진 범광(凡光)대사의 의발(衣鉢)을 이은 제자로써 그 수행의 깊음은 무학의 태두로 이름난 소림사 안에서도 손곱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수련에 난관이 많다는 소림구양공(少林九陽功)의 경지가 지순하다고 한다. 때마침 사공의 우렁찬 회선호(廻船號)와 함께 나룻배가 선착장으로 들어왔다.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배에 오른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작은 나룻배는 금새 만원이 되었고, 사공은 숨돌릴 틈 도 없이 닻줄을 되감는다. 때마침 불어오는 순풍을 받고 나룻배는 붉은 석양 아래에서 반짝거리는 황하의 지류 초이강(焦耳江)의 수면 위를 미끄러져 간다. 대사께서는 육 년만에 뵙는데도 여전히 정정하시오. 오히려 더 젊어지신 것 같구료. 설마 수양 깊으신 대사께서 소녀경(少女經)과 같은 회춘비전(回春秘傳)을 읽지는 않으 셨겠고, 어디서 동자삼(童子蔘)밭이라도 발견하셨소? 어디 이 늙은이도 한 번 맛 좀 봅시다. 모용풍이 익살스럽게 말한다. 적오는 허허, 웃으며 대꾸한다. 원, 모용시주께서도 말씀하시는 품은 여전하십니다. 소승도 겉 모양만 그럴 듯할 뿐, 많이 쇠약해졌습니다. 세월의 덫을 누가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모용풍은 문득, 생각난 듯, 적송에게 묻는다. 적송대사께선 여간해선 산문 출입을 안 하신다고 들었는데, 이 외진 곳엔 무슨 바람 이 불어서 찾아오셨소이까? 적송은 합장을 하며 답한다. 이 근처에 사문의 존장께서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사내(寺內)에 중대사가 생겨서 그 분의 가르침이 절실한 터라, 이렇게 행보를 재촉했 지요. 존장이시라면...? 노부가 알기엔 범(凡)자 항렬의 신승(神僧)께서는 장로원(長老院)의 범결(凡結)대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타계하신 걸로... 모용풍의 말에 적오가 빙그레 웃는다. 비록 모용풍이 강호의 정보통으로 이름이 높지만, 그가 알고 있는 소림승들은 모두 강 호에 이름을 떨친 무승(武僧)들뿐. 소림은 진정 그 깊이가 바다와 같아, 학승(學僧)은 물론 산문을 떠나지 않았던 수행승 들에 대해서는 그 정확한 수가 얼마인지 자신도 모르는 터였다. 범자 항렬도 마찬가지... 하지만 저 말 많고 자존심 강한 노인에게 그런 것들을 시시콜콜히 설명할 생각은 조금 도 없다. 모용시주답군요. 궁금한 것은 기여코 아셔야 직성이 풀리시니. 소승의 사백, 사숙분들은 범결 사숙을 제외하시곤 대부분 열반에 드셨지만, 사숙조(師 叔祖)께서는 아직 한 분 남으셔서 사바(娑婆)에서 정법(正法)을 전하고 계십니다. 모용풍은 적오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적오의 사숙조라면 광(曠)자 항렬이 아닌가. 사십여 년 전 서문숭에게 죽임을 당한 광문(曠聞)대사와 같은 항렬의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웠다. 당시 광문의 나이는 칠십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분께선 연세가 지극하시겠군요. 모용풍의 말에 적오가 대답했다. 금년 세수가 아흔 셋이실 겁니다. 하지만 아직도 불법을 전하는 유랑승을 자처하시니, 진정 대단하신 어른이지요. 소승은 십여 년 전에 한 번 뵈었지만, 제 사제는 아직 그분을 뵐 기회가 없었답니다. 다행히 뵐 수 있으면 좋으련만... 허어! 모용풍은 탄식인지 경탄인지 모를 한숨을 쉰다. (4) 나룻배 치고는 꽤 큰 편이군. 석대원은 고물 부근에 느긋하게 자리를 잡으며 생각한다. 그의 생각처럼 초이강의 강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배는 나룻배라기 보다는 작은 범 선(帆船)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는지 모른다. 나룻터에서 기다리던 승객들의 수효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 람도 남김없이 승선시키고도 그 큰 엉덩이를 붙일 만한 공간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무더웠던 한여름이 서서히 그 고비를 넘어가고 있다. 이제는 해질 무렵이 되면 제법 상쾌함을 느낄 수 잇는 바람이 분다. 석대원은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한가로운 경치로 눈길을 준다. 붉은 노을과 누런 갈대밭... 여러 해 동안 산속의 답답한 경물에만 익숙해진 그로서는 색다른 운치를 느낄 법한 풍 경이다. 시선에 담겨지는 모든 정경은 잔잔한 강물과 어울어져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뒷쪽 강물 위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두 척의 배를 제외하면... 석대원은 왼손으로 자신의 볼을 툭툭 치면서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불쑥, 모용 선생, 혹시 이 부근에 이름난 수적(水賊)들이 있습니까? 일행은 일제히 뒷쪽을 바라본다. 그들의 안력도 범상한 것이 아니어서, 석대원이 발견했던 두 척의 배를 어렵잖게 발견 할 수 있다. 모용풍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젓는다. 아니, 보잘 것 없는 도적들이라면 모를까, 유명한 방회가 이렇게 외진 곳에서 항아리 나 싣고 다니는 나룻배를 털 리가 없지요. 그도 그렇군요. 사십 장, 삼십 장... 두 척의 배는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석대원의 눈이 가늘어진다. 두 척의 배는 보통 배가 아니다. 주가(走[舟+可])... 난간 부근에 쇠못이 박힌 강철대(鋼鐵臺)를 두른, 수전(水戰)에 사용하는 쾌속정이다. 하지만 물살을 헤치며 맹렬하게 미끄러져 오는 저 배들은 보통의 주가보다 세 배는 커 보인다. (辯 : 주가 의 가([舟+可]) 와 같은 해괴한 경우가 앞으로 종종 나올 것입니다. 한자가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라서 어쩔 수 없이 짜집기를 했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주가를 소형으로 조선(造船)하는 이유는 수전 (水戰)에서 진세(陣勢)가 무너지고 난투가 벌어졌을 때 그 기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함 이다. 헌데 보통 주가보다 세 배는 큰 놈이 보통 주가와 다름없이 신속하게 움직인다면, 노 를 젓는 노군들의 능력이 보통 사람의 세 배 이상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림인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겠지... 좀 더 거리가 좁혀져 갑판 위에 서 있는 자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가 되었 을 때, 석대원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낮익은 얼굴... 바로 산해주(山海州)의 객점에서 자신과 한 차례 부딪힌 적이 있는 공문(空門)의 총사 곡요이다. 그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여기는 장소가 너무 안 좋구나. 그가 탄 배는 이미 강심 한 가운데로 들어선 후이다. 강둑과의 거리는 아무리 가까이 잡아도 삼십여 장, 비록 황하의 일개 지류에 불과하다 지만, 사람이 빠져 죽을 깊이는 충분히 될 것이다. 이 많은 승객들은 어찌한다... 어느덧 십여 장의 거리로 다가온 두 척의 주선... 각각의 배 위에는 십여 명의 범강장달(范疆張達)들이 안색을 흉흉하게 굳힌 채 서 있 다. 갑판 밑에서 노를 젓고 있는 노군들까지 포함한다면 한 배에 삼십 명 가량이 타고 있 을 것이다. 두 척 모두 뱃머리에 요란스러운 깃발을 꽃고 있다. 주장기(主將旗)에 쓰인 여덟 글자가 아는 게 많은 모용풍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활여장공(闊如長空) 준여천탑(峻如天塔)> 장공(長空)과 같이 넓고, 천탑(天塔)과 같이 우뚝하다... 기문(旗文) 치고는 조금은 유치한 구절이지만, 모용풍은 그런 것엔 신경쓰지 않는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유치한 구절을 매우 좋아하는 맹수 같은 사내가 있다는 것이고, 그 사내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이천 리는 가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깨닫는다. 자신이 연벽제의 부탁을 받고 조사하던 신비한 조직. 그리고 강호육사(江湖六社)라는 이름을 지닌 그 조직의 전위단체 중 하나가 이곳에 왔 다는 것을... 주장기 아래로 이남일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위아래 몸에 착 달라붙는 남색경장을 입은 여인과 오종종한 얼굴의 곡요, 그리고... 철탑마왕(鐵塔魔王) 여문통(余文通)... 모용풍의 입가가 실룩거린다. 사공은 돛을 내려라! 두꺼비 같은 입이 벌어지며 터져나온 고함은 내공이고 뭐고를 따질 필요도 없다. 그 자체만으로도 뇌공(雷公) 풍백(風伯)이 일제히 재주를 뽐내듯 굉굉(轟轟)하기 때문 이다. 장판교에서 한 소리 기합만으로 조조의 대군을 쫒아 버렸다는 장익덕(張益德)의 고함 이 그러할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육 척이 넘는 우람한 체격에,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강귀신처럼 치 렁치렁한 사십대 호한이다. 달랑 걸친 팔이 없는 호피(虎皮) 조끼는 구릿빛 번들거리는 근육에 의해 터질 듯이 팽 만해 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외모의 소유자... 바로 공문의 문주인 여문통이다. 불쌍한 것은 나룻배의 사공이다. 난데없이 뒤쫓아온 도깨비 같은 무리들을 발견한 순간부터 어찌할 바를 모르고 키를 움켜쥔 채 벌벌 떨고만 있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석대원이란 놈은 썩 나오거라! 여전히 당당한 호령. 석대원은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없이 고물에 선 채 여문통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문득 그 옆에 서 있는 남색 옷을 입은 여인과 눈길이 마주친다. 이목구비가 선연한 아름다운 여인... 그녀의 눈 속으로 이채가 스친다. 잠깐! 여인의 새하얀 손이 여문통의 앞을 가로막는다. 순간 나룻배를 향하여 퍼부어지던 여문통의 대단한 위세가 거짓말같이 멎는다. 그대가 석대원인가? 단순호치(丹脣皓齒).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옥 같은 치아가 살짝 드러난다. 재미있군... 석대원은 흥미있는 눈으로 여인을 바라본다. 그의 흥미를 유발한 것은 두 가지. 하나는 공문의 문주인 여문통을 가볍게 저지할 수 있는 그녀의 신분이며, 또 하나는 십여장의 거리를 격하고 나직한 음성을 또렷이 전달하는 그녀의 내력이다. 석 시주! 아시는 여인이오? 시종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적오가 나직하게 묻는다. 석대원은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도 같다. 내가 석대원이오. 아가씨는 뉘신지 모르겠소만, 그 옆에 계신 분은 돈 많고 마음씨 고운 곡 선생이 아니 오? 석대원의 조롱이 담긴 인사에 곡요의 안색이 붉어진다. 지난 번 객점에서 당한 일이 다시 생각났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석대원이라는 자 하나뿐! 나머지 눈과 입들은 귀찮은 존재들이다. 속히 처리하도록! 여인의 아름다운 입술이 다시 벌어지며 섬뜩한 명령이 떨어진다. 뱉어진다. 주가의 갑판에 서 있던 장한들이 일제히 활을 치켜든다. 보통 강궁(强弓)의 절반 크기밖에 되지 않는 검은 활... 거기에 앙증맞게 장전되어 있는 짧은 화살. 정씨궁(定氏弓)! 화살의 끝에 살촉 대신 매달린 길이 한 뼘 가량의 흑갈색 원통을 본 모용풍은 깜짝 놀 란다. 1211년. 초원의 패자(覇者) 칭기스칸이 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당시 중토의 지배자인 금나라를 치기 위해 남하(南下)할 때의 일이다. 당시 몽고군이라면 명실 공히 세계 최강의 정예군. 징기스칸은 유목민족의 한이 어린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단숨에 돌파하고 금나라의 수 도 변경(지금의 開封)을 휘감아 버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 이다. 하지만 이 희대의 정복자는 장성 밖 대수락이라는 작은 요새를 지키던 만오천 명에 불 과한 금나라 수비군에게 패하는 수모를 겪고 말았다. 그때 몽고 최고의 용사라는 귀신 늑대 제베가 이끄는 선봉군을 무참히 패퇴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무기가 바로 태화소궁(太火小弓). 화기에 관해서라면 어떤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는 여진족이 자랑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이 태화소궁이 정씨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당시 대수락의 수장(守將)인 정설(定薛)의 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활에 장전되는 화살은 특별히 제작된 것이다. 살 끝에 부착된 흑갈색 원통은 태화통(太火筒)이라 불리며, 심지에 불을 붙여 폭발시 키는 여타의 화기와는 달리 통 후면에 달려 있는 줄에 의해 격발된다. 이 격발사(擊發絲)에는 작고 동그란 고리가 있어, 궁수는 활을 잡은 왼손 약지에 고리 를 걸고 시위를 놓기만 하면 된다. 화살이 발사되는 힘에 의해 줄이 뽑히면, 원통 내에 장치된 심지에 불꽃이 당겨지고, 두 세 호흡이 지난 후 맹렬한 힘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저것은 아주 고약한 화기요! 모용풍이 다급한 음성에 석대원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공을 지닌 자신들이야 몸을 날려 피하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수영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신공(神功)을 지니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하지만 나룻배에는 그들 외에도 많은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그 승객들은 화기에 속수무책일 것이다. 배에서 뛰어내리시오! 승객들의 귓전에 우뢰와 같은 음성이 쩌렁 울린다. 적오가 불문의 사자후(獅子喉)의 수법으로 외친 것이다. 불타(佛陀)께서는 한 번의 사자후로 수많은 귀신들을 불문에 귀의시켰다고 한다. 물론 피와 살을 지닌 적오가 토해낸 사자후에서 그런 법력(法力)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의 외침 안에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게 만드는 온화로운 힘 이 담겨 있다. 갑판에서 벌벌 떨던 승객들 중 자맥질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에 이끌 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속으로 뛰어든다. 아미타불! 용서하십시오. 낭랑한 불호와 함께 적송의 호리호리한 신형이 흙탕물을 비집는 미꾸라지처럼 배 안 을 누비기 시작한다. 그의 양손을 통해 발출되는 진기는 부드러운 가운데 물체를 끌어당기는 만(挽) 의 묘 용이 담겨 있다. 이것은 그의 세심한 배려... 당겨 던지는 것이 밀어 때리는 것보다 작은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미처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승객들은 한 줄기 부드러운 힘에 당겨져 배 밖으로 던져 진다. 대단하오! 석대원은 그들의 자비심과 민첩한 대응에 감탄한다. 쏘아라! 여문통의 호령과 동시에 매서운 파공성이 합주하듯 울려 퍼진다. 순식간에 허공을 자욱하게 메워버리는 화살들... 석대원은 어금니를 깨문다. 한로! 모용 선생을 부탁하오. 그의 거대한 신형이 고물을 박차며 날아오른다. (5) 태화통(太火筒)을 매단 한 대의 수전(手箭)이 석대원의 어깨 옆을 스치고 아래로 떨어 진다. 힐끗 내려다보는 시선에 나룻배로부터 뛰어내리는 한로 등의 모습이 잡힌다. 그리고 한 줄기 섬광... 꽈꽝. 섬광과 폭음은 거의 동시였다. 뇌공(雷公)의 벽력부(霹靂斧)가 강물 위로 떨어진 듯, 허공을 향해 솟구치는 굵은 물 기둥. 조금 전까지 나룻배의 일부였을 나뭇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한 대의 화력만으로도 능히 반경 이삼 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정씨궁. 그러한 마물(魔物) 수십 대가 일제히 퍼부어졌으니, 철갑으로 만든 배라고 한들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흔하디 흔한 소나무로 만든 목선(木船)이야 오죽할까. 으윽! 뜨거움이 먼저였는지 물벼락이 먼저였는지 구분할 수 없다.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의 충격파가 공중에 뜬 석대원의 몸을 후려친다. 신형이 흐트러지고 몸이 맴돌기 시작하자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분간할 수 없 다. 문득, 몸 가까이 날아온 어떤 물체를 발견한다. 석대원은 왼쪽 발꿈치로 물체를 찍으며 그 반동을 이용해 자세를 바로잡는다. 동자종약(童子踵躍)의 가벼운 신법. 하지만... 퍽. 발꿈치 아래에서 기분 나쁜 음향과 함께 깨어지는 물체를 바라본 석대원의 얼굴이 일 그러진다. 달걀 흰자와도 같은 신경줄을 매달며 튀어나온 눈알, 무참하게 함몰된 콧마루... 그것은 잘려진 사람의 수급이다. 그는 주위를 돌아본다. 나룻배의 잔해와 뒤엉켜 크고 작은 동심원들을 만들며 물속으로 떨어지는 육괴(肉 壞)... 정씨궁의 독아(毒牙)에서부터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승객들의 것이다. 으드득. 석대원은 자신도 모르게 턱근육이 한껏 당겨지는 것을 느낀다. 구겸조(鉤鎌組)! 우렁찬 여문통의 구령과 함께 두 척의 주가로부터 수십 개의 갈고리가 석대원에게로 쏘아져온다. 갈고리는 끝에 달린 가느다란 은삭(銀索)에 의해 살아있는 뱀처럼 영활하게 그의 사지 를 걸어당기려 한다. 비록 여러 사람이 행하는 동작이지만, 한 사람이 할 때와 마찬가지로 질서정연하다. 치밀하다! 주가에 탄 공문도(空門徒)들은 분명 여러 차례 훈련을 거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제3, 제4의 대비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머뭇거림으로써 그들이 준비한 대비책을 감상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차앗! 두 다리가 교차되며 한 줄기 회전력을 만들어낸다. 회전력은 척추를 타고 하단전(下丹田)으로 전달되고, 석대원은 그 힘을 운용해 허리를 튕겨 올린다. 이른바 수면 위로 솟구친 은어(銀魚)가 몸을 퍼덕여 더 솟구친다는 어번약신(魚飜躍 身)의 신법이다. 이러한 공중에서의 도약은 그의 몸을 석 자 가량 위로 떠오르게 해주었다. 몸 아래의 공기를 매섭게 할퀴고 지나가는 갈고리들... 석대원의 우수가 등 뒤 혈랑검의 손잡이를 향해 돌려진다. 발검(拔劍)... 까가각. 한 번 휘둘러지면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혈랑검이다. 그의 우수가 하방을 향한 큰 원을 그리자 십여 개의 갈고리들이 잘려진다. 마치 고시(古詩)에서 말한 것처럼 수수밭에서 청룡도를 휘두르는(如振偃刀於高粱) 형 국이다. 석대원은 더이상 진기가 순탄하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날개가 없는 이상, 바닥을 딛지 않은 채 몸을 운신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는 것이다. 그는 왼손을 휘감아 갈고리가 잘려진 사슬 하나를 나꿔챈다. 사슬의 임자는 한 가닥 억센 힘이 자신의 병기를 당겨오자 깜짝 놀라며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잡아당긴다. 이것은 석대원이 바라던 바. 그는 사슬을 통해 전해진 상대의 힘을 버팀 삼아 한 척의 주가로 몸을 날린다. 악인들! 무고한 양민들까지 살해하다니! 저녁 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 지금 이 순간 석대원은 불같이 분노하고 있다. 나룻배 위에서 떨고만 있다가 팔다리가 무참히 잘려져 목숨을 잃은 사람들. 그들에게도 공양해야할 부모가 있고 먹여야 할 자식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단지 자신과 같은 배에 탔다는 것을 제외하면... 검자루를 움켜쥔 손아귀에 한층 힘이 더해진다. 파아... 보검의 영성(靈性)은 주인과 교감한다. 혈랑검의 검신(劍身)을 타고 붉은 광채가 흐르는가 싶더니, 붉은 광채는 작은 결정(結 晶)으로 응축되며 검봉(劍峯) 앞으로 쭈욱 솟아나온다. 검기(劍氣)? 다른 주가 위에서 석대원을 주시하던 남색 경장의 여인이 나직히 감탄한다. 석대원이 쥐고 있는 검은 처음보다 두 배는 길어 보인다. 그것은 검봉에서 솟아나온 시뻘건 혈광, 검기 때문이다. 석 자가 넘는 검기라니! 하지만 여인의 놀라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퍽. 가죽북을 치는 듯한 소리... 여인이 탄 주가의 철갑 부근에 서 있던 공문도 하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스르르 주저앉는다. 하얗게 뒤집힌 눈동자와 입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거품으로 미루어 내가중수법(內家 重手法)에 당한 듯하다. 여인은 고개를 돌려 난간 쪽을 바라본다. 한 사람이 철갑에 꽂힌 쇠못을 잡고 갑판 위로 뛰어오른다. 아미타불, 외모는 아름다운 여시주이건만 마음 씀씀이는 더할 나위 없이 잔인하시오. 무거운 목소리로 불호를 외우는 미목이 수려한 승려... 젖은 승복과 파랗게 깎은 머리가 어딘지 애처로워 보인다. 적송이다. 어디서 새파란 땡중 녀석이! 여인의 곁에 서 있던 곡요가 그의 독문암기인 삼재독정(三才毒釘)을 날리며 외친다. 피잉...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세 대의 못이 적송의 면문을 급습한다. 피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이다. 독랄한 무기로다! 적송은 나직히 중얼거리며 곡요를 향해 오른손을 크게 내젓는다. 쩡. 철판에 돌멩이를 던졌을 때와 비슷한 소리. 순간, 곡요는 화들짝 놀란다. 난데없이 차가운 물방울들이 얼굴을 때렸기 때문이다. 철포수(鐵布袖)... 그대는 소림 출신인가? 여인의 입에서 또 한 번의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온다. 곡요가 독정을 던지고 청년승이 소매를 휘두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때 여인은 청년승의 소맷자락이 칼날같이 빳빳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손길을 따라 흩뿌려지는 물방울들... 아마도 흠뻑 젖은 천이 펼쳐지며 발생한 탄력이 만든 작품이리라. 소승은 소림의 삼십칠대 제자인 적송이라 하오. 여시주께서는 무슨 이유로 이런 살생을 저질렀는지 말씀해주시오. 이때 그의 오른쪽 소매 위로는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다. 명문대파의 양대 거두로 알려진 소림과 무당의 무학은 한 가지 공통점과 한 가지 차 이점이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은 일체의 사기(邪氣)를 배제한 정종(正宗) 순양내공(純剛內功)을 바탕 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차이점은 소림은 순양진기를 바탕으로 한 강맹함을 내력의 축으로 사 용하는 반면, 무당은 순양진기를 바탕으로 한 유순함을 내력의 축으로 사용한다는 것 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포수는 대단히 상징적인 무학이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수백 년 전부터 강호 활동을 행해 왔다. 승려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활법(活法)으로써의 수행으로 중생계도 를 추구하는 소림은 선장(禪杖)이나 일산(日傘), 철염주(鐵念珠) 같은 불가지물(佛家 之物) 외에는 병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봉이나 계도(戒刀) 같은 병기를 사용할 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을 도와 수나라 병사들을 물리쳤던 십삼나한(十三羅漢) 과 같이, 특수한 임무를 수행할 경우였다. 자연히 소림사에서는 신체나 의복의 일부를 단련하는 수법이 계발되었고, 승포에 진기 를 주입하여 방패와 같이 사용하는 철포수도 그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소림이라고 아무데서나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여문통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그가 손짓하자 이십여 명의 공문도들이 적송의 주위를 둘러싼다. 흐흐, 진(陳) 비영께서는 석대원이라는 애송이를 상대하시오. 놈이 달아나면 곤란하니까. 이 땡초는 우리가 처리하겠소이다. 여인은 잠시 적송을 바라본다. 아무리 소림사가 고명하다고 해도 기껏해야 약관을 갓 넘긴 청년에 불과하다.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그녀는 석대원이 날아든 주가를 바라본다. 고운 아미가 살짝 찡그려진다. 배 위에 남아 있는 공문도들은 세 명... 지휘자인 목예(穆譽)가 환도를 뽑아 석대원에게 달려드는 것이 얼핏 눈에 띤다. 나머지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나마 목예를 비롯한 세 명도 전의를 상실한 채 형편없이 밀리고 있다는 것은, 십여 장 떨어진 이곳에서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럼 저자의 처리는 여 문주께 부탁드리겠어요. 그녀는 여문통에게 말한 뒤 난간을 찍으며 강물을 향해 몸을 날린다. 지금 한로와 모용풍, 그리고 적송은 나룻배의 잔해 위를 이리저리 오가며 물에 빠진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들 또한 물 위에서 그다지 자유롭게 운신할 수 없는 터라, 구조 작업은 별 신통한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제 막 한 명의 중늙은이에게 나뭇조각을 밀어보내던 한로는 누군가 수면을 찍으며 자신 쪽으로 날아오자 판자 위에서 몸을 바로 세운다.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바로 적선을 지휘하던 여인임을 안 한로는 갑자기 분노 가 치솟았다. 이 못된 년! 한로는 버럭 소리치며 일 장을 때린다. 하지만 여인은 코웃음을 치며 허공에서 몸을 뒤집는다. 늘씬한 두 다리가 가볍게 교차되며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듯이 몸을 상승시키는 매끄 러운 신법... 순간 한로는 머리 위를 가득 덮어오는 매서운 파공성에 헛바람을 삼킨다. 어느 틈에 풀렀는지, 그녀의 오른손에는 한 자루의 푸른 색이 감도는 채찍이 쥐어져 있다. 한로의 머리를 노리며 쏟아지는 매서운 편영(鞭影)... 손바닥만한 판자 위에서 소나기 같은 채찍 세례를 피할 공간이 있을 리 없다. 단 한 군데를 제외하면... 이런 제기랄! 한로는 욕설을 투덜거리며 왼발로 판자를 세차게 밟는다. 천근추(千斤墜)... 안 그래도 허약해 보이던 판자는 산산조각이 났고, 한로는 물속을 허우적거리는 승객 들과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린다. 사람은 새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없다. 물론 상승 경공을 사용한다면 제법 오랜 시간 동안 허공에 몸을 둘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석대원의 장력에 얻어맞은 사내와 같이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허공을 날아간다면, 필경은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풍덩.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강물로 떨어진 사내는 조금 전 얻어맞은 장력으로 갈비뼈가 부 러졌다는 것도 잊은 채 팔다리를 휘저으며 물귀신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목예는 사력을 다하여 환도(丸刀)를 휘두른다. 명색이 이 주가를 탔던 스물여덞 명의 지휘자이자 공문에서 부문주(副門主)의 직위를 지닌 그는, 비록 강호를 떵떵거리는 고수는 아니지만 사천에서는 알아주는 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설혹 직위와 실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당당하고 호기 넘치는 사내 이다. 한달 전 각(閣)의 간부라는 여인이 와서 사냥감이 있다고 했을 때에도, 적어도 그의 생각으로는 아무런 문젯거리가 없었다. 사냥감이 제법 힘깨나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공문의 노른자라고 할 수 있는 최 정예 50여 명이 동원된 이상 성공 여부에 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는 얼마나 깔끔하게 사냥감을 포획하느냐일 뿐... 하지만 저 황의 거한이 그의 주가에 뛰어든 순간, 모든 것은 허물어졌다. 자신을 제외한 스물일곱 중 팔다리가 잘려져 갑판에 널부러진 것이 다섯, 나머지는 하 나도 남김없이 물속으로 던져진 것이다. 악마 같은 놈! 공포란 놈은 때로는 신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힘까지도 끌어올리게 만들어 준다. 환도가 그려내는 연속적인 호(弧)는 석대원 주위의 공간을 흉흉한 살기 속으로 몰아간 다. 제법이군... 석대원은 몸을 젖히며 오른발을 한 걸음 뒤로 물려 환도의 공세로부터 벗어난다. 몸의 중심이 미세하게 옮겨진다. 목예 역시 단련된 무인이다. 상대의 중심이동에 따라 공수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익숙함이란 간혹 방심을 불러 일으킨다. 상대가 한 걸음 물러선 것이 후퇴가 아닌, 단지 탄력을 만들기 위한 동작일 뿐이었음 을 깨달을 여유는 없었다. 석대원의 순간적인 돌진과 핏물 속에 담궜다가 꺼낸 듯한 거대한 손바닥...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 으악! 목예는 코와 입으로 핏물을 토하며 난간에 세차게 부딪힌다. 석대원의 수법은 암석을 두부같이 부술 수 있는 혈옥수의 절기... 하지만 살생을 피할 생각으로 내력을 조절했으니 생명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듣던대로군. 차가운 목소리가 석대원의 뒷전에서 울린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어둑해진 하늘을 등지고 고물의 난간 위에 우뚝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 시선 안으로 들어온다. 목(穆) 부문주라면 사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인! 그런 그를 가볍게 물리치다니, 과연 우낙(禹駱)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군. 우낙이라면 석대원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청류산(淸柳山)에서 신무전의 제자인 구양현과 소소를 습격했다가 한로에게 패하여 달 아난, 혈랑곡도임을 자처하던 자. 그녀와 우낙이 한 패라면... 짐작한대로군. 석대원은 그녀를 찬찬히 바라본다. 석대원보다 한두 살 어리거나 동배 정도로 보인다. 지금 그녀는 얼음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그녀의 미모는 더욱 수려하다. 강바람에 팔랑거리며 몸에 휘감기는 남의는 그녀의 요염한 몸매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 시켜주고 있다. 독버섯일수록 아름답다는 말은 사실이군... 석대원은 내심 쓴웃음을 짓다가 불쑥 입을 연다. 진금영(陳錦英). 나이 스물 다섯, 비각의 팔(八)비영, 별호는 초혼매(招魂妹), 한 자루 채칙을 능하게 사용함... 맞는가? 여인의 차가운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진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지. 중요한 것은 당신은 앞으로 더 살기에는 너무 많은 생명을 해쳤다는 사실이야. 별다른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정면으로 선다. 그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 자신감이 충일해있다. 낮고 굵은 목소리, 느릿한 동작, 그리고 깊게 가라앉은 눈빛까지도... 이자는 내 예상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른다... 진금영의 마음 한 구석에서 작은 불안이 생겨난다. 그 위에서 그렇게 몸매 자랑만 할 생각인가? 석대원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기 시작한다. 결코! 진금영은 갑판 위로 가볍게 뛰어내린다. 왼쪽 소매를 천천히 걷어올리자 살짝 드러나는 뽀오얀 팔뚝과 거기에 감긴 비취빛 채 찍... 그녀의 애병인 초혼독편(招魂毒鞭)이다. 오른손으로 채찍의 한 부분을 잡고 한 차례 흔들자, 채찍은 영사(靈蛇)처럼 부드러운 파동을 그리며 일곱 자 다섯 치 길이의 본 모습을 드러낸다. 석대원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선 채 그녀가 병기를 마련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그녀가 싸울 준비가 끝났을 때, 그는 우수에 쥐고 있던 검을 들어 천천히 그녀 를 가리킨다. 끓어오르는 살기가 붉은 검신을 타고 검봉으로 집중된다. 뭐야... 이것은? 진금영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붉은 검이 그녀를 겨눈 순간, 그녀는 눈이 아려 석대원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전방의 공기가 알알이 부숴지며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그녀의 전신으로 휘몰아쳐 온다. 형체가 없는 괴물에게 떠밀린 듯, 그녀의 교구가 부르르 떨리며 한 걸음 물러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살기의 그물은 그녀의 몸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아직도 덤빌 생각이 들지 않았나? 석대원의 미소가 짙어진다. 그와 함께 살기의 그물이 그 예기를 더해진다. 진금영은 입안의 침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무예를 익힌 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런 식으로 선기(先氣)를 제압당한 적이 없었다. 검봉과의 거리는 일 장 반 정도... 상대는 단순히 검을 겨누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 자신은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것 도 어려울 지경인 것이다. 말도 안 돼... 무형검기(無形劍氣)가 이 정도라니! 이건 검왕(劍王)에 비해 결코 아래가 아니다. 진금영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문득, 다른 사(社)의 지원없이 공문사(空門社)만으로 석대원을 생포하려고 했던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친다. 十三章 曠非大師 (1) 흔히들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고 한다. 한 주먹이 두 주먹을 당하지 못한다는 이치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문통은 그 말의 진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놈의 호리호리한 빡빡머리는 십여 자루의 병기에 포위되고 도 어떻게 저리도 유유하게 돌아다닌단 말인가! 그가 보기에 중이 사용하는 수법은 너무나 단순했다. 상대가 찔러오면 물러서고, 막히면 돌아가며, 물러서면 내딛는다. 십여 자루의 병기와 중은 서로가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멋들어진 진퇴(進退)를 반복하고 있다. 마치 정해진 각본에 따라 군무(群舞)를 추는 배우들 처럼... 그리고 간혹 그 현란한 무대 위에서 퇴장하는 배우들도 있다. 바로 지금처럼! 아미타불! 선인지로(仙人之路)의 매끄러운 한 수가 비스듬히 떨어지자 첨두양인검(尖頭兩刃劍)을 쓰던 사내는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진다. 오성(五成)의 소림구양공(少林九陽功)이 담긴 지순한 경력(勁力)에 적중되었으니, 심 하지는 않겠지만 내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얗게 질린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적송은 자신도 모르게 염불을 왼다. 악인을 처벌하되 살계(殺戒)를 범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그이다. 자연 손속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요놈의 낙타 대가리가 감히! 죽엇! 맥없이 허물어지는 동료의 모습에 분노한 듯, 거친 기합과 함께 두 자루 장창이 적송 의 좌우 옆구리를 찔러온다. 우연히도 똑같은 지남침(指南針)의 일 초. 짧은 순간에 왼쪽 손목을 비틀어 창끝을 돌리는 재주에서, 사내들의 창술이 기초가 잘 잡혀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수법! 적송은 구부렸던 양팔을 피며 소매를 휘두른다. 삼베로 만든 승포의 소맷자락이 허리 어림을 덮으며 두 자루의 창을 넓게 휘말아 버린 다. 천이 만들어 내는 곡선의 율동 속으로 두 자루의 창날을 가둬버리는 수법은, 푸른 바 닷물이 넓고 넓은 수미산(須彌山) 염부주(閻浮洲)를 단숨에 가둔다는 단단벽해(團團碧 海)이다. 손을 놓으시오! 벼락 같은 일갈(一喝). 순간 창자루를 쥐고 있던 두 사내는 손아귀로부터 느껴지는 통증에 입을 딱 벌린다. 적송의 소매를 통해 전달된 힘은 <역근경(易筋經)>의 진(振)자결. 외력(外力)을 만들어 내는 특별한 초식이 아닌, 진기를 운용을 위한 열두 가지 심결 중 하나이다. 하지만 구양공의 정순한 내공을 바탕으로 시전된 심결은 체내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모든 물체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위력이 있었다. 손아귀가 터지지 않으려면 창자루를 놓을 수밖에 없는 일. 어, 하며 창자루를 놓친 순간, 창자루는 끝이 가볍게 회전하며 그들의 선기혈(腺氣穴) 을 찔러온다. 자루 끝이 매섭게 비틀어지는 일초는, 어처구니없게도 방금 그들이 시전했던 지남침의 초식이다. 그들은, 그들의 창자루에, 그들이 시전했던 초식으로 명치를 얻어맞고 혼절하고 만다. 땅. 창자루가 힘차게 갑판을 두드린다. 습관적인 시봉지례(始棒之禮). 중생계도(衆生啓導)를 목적으로 하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소림무학이 봉술의 시전에 앞서 이제부터 봉을 사용하겠소 라고 알리는 통고의 예(禮)이다. 순간, 적송을 중심으로 반경 일 장은 창자루가 그리는 환상적인 그림자로 뒤덮인다. 창자루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마치 무수히 많은 창자루가 하나하나의 부챗살이 되어 한 개의 거대한 부채를 만들어낸 것 같다. 양주수양(楊州垂楊)으로부터 선학독립(仙鶴獨立)까지 펼쳐지는, 격류가 탕탕히 흐르는 듯한 일련의 봉술은 항마봉법(降魔棒法). 비록 소맷자락으로 감싼 창자루로 시전하는 장법이지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빠각. 삽시간에 대여섯 자루의 병기가 부러져 나간다. 나무로 만든 창자루이지만 그 안에 담긴 적송의 웅혼한 내력이 금속 병기들을 산산이 부숴버린 것이다. 뽀족한 비명과 함께 병기 파편에 몸을 상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적송의 얼굴이 조금 굳어진다. 봉을 사용한 것이 효과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생명을 상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초식을 바꾸어 엉덩이가 왼쪽 발꿈치에 닿을 정도로 주저앉는다. 바닥과 수평이 되도록 뻗은 오른쪽 다리가 힘차게 돌아가자 쪼그린 그의 몸이 팽이처 럼 회전한다. 하늘이 무너질까봐 항상 허리를 못 펴고 살았다는 기(杞)나라 사람의 엉거주춤한 걸음 같은 기인선알(杞人旋斡)의 초식. 갑판에서 한 자 높이로 회전하는 창자루는 주위를 둘러싼 공문도들의 하체 요혈을 매 섭게 후려쳐 간다. 몇몇 민첩한 자들은 휘둘러지는 창자루를 피하려고 황급히 물러섰지만, 그리 넓지 않 은 갑판 위에서 그들이 물러설 공간은 별로 없다. 봉에 다리를 얻어맞고 뒹구는 자, 병기를 버리고 강물로 뛰어드는 자... 에잇, 허약한 놈들! 창자루가 그리는 궤적 안으로 거대한 사내가 뛰어든다. 부하들의 패퇴를 더 이상 참지 못한 여문통이다. 그는 교묘한 방위를 밟으며 무릎을 때려오는 창자루를 피한 후, 적송의 뇌문(腦門)을 향해 맹렬히 우장을 내뻗는다. 그의 독문절기인 철마장(鐵磨掌)이다. 과연 일문(一門)의 문주! 적송은 머리 위를 덮어오는 장력의 범위가 넓고도 두터움에 감탄한다. 그는 구부렸던 왼쪽 다리를 쭉 펴며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왼손바닥을 뒤집어 둥글게 머리 위를 방어하는 초식은 단봉조양(丹鳳朝陽). 장안성(長安城 : 지금의 西安) 백성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는 조양봉(朝陽峰) 단봉(丹 鳳)의 울음소리처럼 그 힘이 구석구석까지 이르는 소림권의 절초이다. 펑. 두 줄기 서로 다른 힘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히며, 공기주머니가 터져나가는 소리 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휘청거린다. 불안정한 자세 때문인지 반 걸음 뒤로 물러서는 적송. 하지만 그는 재차 갑판을 찍고 솟구치며 오른 소매로 말아쥔 창자루를 크게 휘두른다. 흥! 어찌된 일인지 여문통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떨어지는 창자루를 피하려 하지 않는 다. 다만 오른팔을 들어 머리 위로 막아갈 뿐. 투웅... 창자루는 여문통의 팔뚝 위에서 기묘한 메아리를 남기며 튕겨진다. 호오! 적송은 가볍게 놀란다. 비록 인명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내력을 조절하여 출수했다고는 하지만, 저 사내는 등사입초(騰蛇入草)의 초식선상 중 가장 정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초식이 그렇듯이 등사입초 역시 발(發)-정(頂)-수(收)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속도 면에서건 파괴력 면에서건 정점에서 가장 극치를 이루는 것은 자명한 이치. 그것을 정면에서 튕겨낸다는 것은 사내가 수련한 공부(功夫)가 범상치 않음을 시사한 다. 흐흐... 애송이 녀석! 이 어르신의 재주가 어떤지 알겠느냐! 극성으로 수련한 구구대모갑(九九玳瑁甲)이 효과가 있자 의기양양해진 여문통이 위엄 있게 호통을 친다. 단련을 거듭하면 전신이 대모(玳瑁 : 거북과(科)에 속하는 열대 지방의 바다거북)의 껍질처럼 단단해 진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외가공부이다. 그럼 시주의 높은 재주를 한 수 배우겠소이다. 적송은 소매를 풀어 창을 강물 속으로 던져버리고 단정하게 합장을 한다. 어느덧 짙게 깔려버린 어둠... 그의 눈빛이 서서히 타오른다. 구도자로서의 초탈함에 앞서 젊은이로서의 호승심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2) 끈적거리는 살기를 토해내는 검은 여전히 그녀의 미간을 겨누고 있다. 붉은 검광은 원소절(元宵節) 거리에 걸어놓은 홍등(紅燈)과 같이 요요(耀耀)한 빛을 뿌리고 있다. 검 뒤로 차갑게 얼어붙은 사내의 얼굴... 그 투박한 굴곡은 붉은 조명 탓인지 묘한 음영이 새겨진다. 어느 순간, 붉게 물든 굵은 입술이 벌어지며 다시 한 번 만들어지는 악마 같은 웃음. 벌써 지친 건가? 석대원은 검을 겨눈 자세 그대로 오연하게 서 있다. 어둠 속에서 펄럭이는 황색 무복을 입고 태산같이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신(魔神)과 도 같다. 으으... 진금영은 진저리를 친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눈앞을 가려온다. 본디 곤륜옥(崑崙玉)으로 만든 호접(蝴蝶) 장식으로 곱게 틀어올렸던 머리카락이다. 하지만 격렬한 움직임 탓인지 장식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후였다. 그녀는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뒤로 넘긴다. 허파가 찢어질 것 같다. 이미 석대원과 십여 합을 겨룬 후... 그리고 침 삼키기도 거북할 정도의 탈진 상태가 되었다. 그의 검법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검이 처음 찔러들어올 때 그녀는 검로(劍路)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도망가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검이 휘둘러지며 발생하는 소름끼치는 음향이라니! 초반 그렇게 기선을 제압당하자 그녀는 변변한 공격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랑하는 초혼독편은 석대원으로부터 한 자 떨어진 곳조차도 접근해보지 못했 던 것이다. 이 정도로 지치면 곤란하지. 맑은 기합과 함께 석대원의 거대한 신형이 갑판 위를 미끌어지며 진금영에게로 쇄도 한다. 진금영은 채찍을 당겨 끌며 전방을 수비한다. 채찍의 끝에 달린 타원형의 강철추가 빠른 회전을 그리며 석대원을 마중해간다. 하지만... 스으으. 빠른 속도로 미끌지던 석대원의 몸이 흐릿해진다. 앗! 진금영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가뜩이나 거구인 석대원이 두 배는 뚱뚱해진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사람이 갑자기 둘로 나뉜 것이다. 그녀의 채찍은 순간적으로 목표물을 잃고 허공에서 머뭇거린다. 돌연 전방 좌측이 싸늘해진다. 온몸이 찌릿해질 정도의 차가운 기운에 그녀는 황급히 채찍을 회수하며 좌측을 방어한 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 실제로 혈광이 밀려닥친 것은 우측이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튼다. 싸악. 무엇인가가 예기(銳器)에 베어지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어깨 어림으로 얼음조각이 박 혀드는 듯한 통증... 그녀는 공중제비를 넘으며 몸을 뒤로 피한다.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머리 뒷꼭지를 스치고 지나간다. 한 웅큼의 머리카락이 베어져 날린다. 그녀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자신이 내려설 곳 바로 뒷전에 쇠난간이 막아서 있음 을 발견했다. 이미 그녀의 시야는 적의 공세를 놓친 상태. 단 한 순간이라도 몸을 멈춘다면, 곧바로 저 붉은 검 아래 연목(鍊木 : 검법을 수련할 때 상대역으로 쓰이는 나무 말뚝) 신세가 될 것이다. 바닥에 발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지체없이 좌측으로 몸을 던진다. 이미 호흡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경신술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단지 다리힘을 이용한 본능적인 도약이다. 휘익. 매화가 수 놓인 남색 당혜(唐鞋)로부터 한 뼘 정도의 공간을 두고 혈랑검이 떨어져 내 린다. 석대원은 쇠난간을 무우베듯 갈라버리고 갑판에까지 깊히 박혀든 혈랑검을 천천히 뽑 는다. 다급한 나머지 착지할 곳도 살피지 않고 필사적으로 몸을 던진 터라, 진금영은 그로부 터 대여섯 걸음 떨어진 갑판 위에 모양 사납게 넘어져 있다. 반사신경이 대단하군. 석대원의 말투에는 감탄이 담겨져 있다. 그가 전개한 초식은 혈랑검법의 환식(幻式) 중에서도 절초라고 할 수 있는 이로일살 (二路一殺)이었다. 출검과 동시에 전개되는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상승 신법은 진금영의 시야를 혼란시키 는 데에 성공했다. 이로일살의 무서운 점은 실초와 허초 두 방향에 모두 검기를 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검기가 실린 허초는 실초가 도달하기 전까지 상대의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다. 그는 이 한 수로 진금영의 오른팔을 벨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줄기 검상을 어깨 위에 새기기는 했지만,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어 이로일살의 실초로 부터 벗어난 것이다. 뒤이어 그녀의 목을 노리고 전개된 횡소천군(橫掃千軍)은 비룡번신(飛龍飜身)의 신법 으로 피해냈고, 세번째 공격인 조천세(朝天勢)는 신법의 상리를 무시한 채 몸을 내던 지는 임기응변으로써 피해낸 것이다. 실로 대단한 반사신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약 그녀가 어느 순간에서건 촌각의 지체라도 보였던들, 톱니바퀴같이 맞물린 세 번 의 공격 아래서 목숨을 잃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진금영은 몸을 일으킨다. 얼굴 반쪽이 피로 물들어 있다. 몸을 내던져 검을 피할 때, 이마를 갑판 모서리에 부딪힌 것이다. 툭. 발 아래 무엇인가가 와서 떨어진다. 오른 어깨에 칼을 맞을 때 놓친 그녀의 채찍... 석대원이 주워 던진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본다. 진금영! 이대로 죽는다면 억울하지 않겠나? 석대원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다. 칠 척 거대한 몸뚱아리 전체가 살기로 뭉쳐진 것 같다. 정말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진금영은 공포를 느낀다. 기억 깊숙히 묻혀 있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흐흐... 이년아! 나는 벌써 돈을 치렀단 말이다. 자, 착하지! 이리 오렴... 자꾸 귀찮게 굴면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꺼야!> 안 돼, 그것을 떠올려서는 안 돼!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그것이... 혈랑검법인가? 혈랑을 사칭하는 무리들이니 혈랑계(血狼戒)를 알고 있겠지? 망령되이 혈랑곡을 일컫는 자는 누구도 용서치 않는다! 망령되이 혈랑곡을 일컫는 자는 누구도 용서치 않는다! 삼십여 년 전 청해(靑海) 일대에서 살행을 일삼던 자칭 혈랑곡도들이 하루 아침에 차 가운 시체들로 변했을 때, 그 시체 더미 위에 꽂혀 있던 혈랑기(血狼旗)에 새겨진 피 의 율법! 이 순간 진금영은 그가 혈랑곡주의 전인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연(燕) 비영의 말이 사실이었어... 각(閣)에 알려야만 한다. 삶에 대한 애착은 단지 그 이유뿐만 아니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나 단조로운 인생이었다. 불행을 전전하던 절반과 처절한 수련으로 보낸 나머지 절반...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두려움이라는 흙더미 속에 매몰되었던 전의가 되살아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석대원! 그녀는 채찍을 움켜쥔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자 검상이 벌어지며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반드시 살아야 한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비웃음 같은 한 마디와 함께 혈랑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3) 쉬쉭. 바람소리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미세한 파공성. 소림이 자랑하는 점혈공부(占穴功夫)인 탄지공(彈指功)이 전개된 것이다. 여문통은 전방의 문호(門戶)가 활짝 개방되는 것을 느끼고 뒤로 물러선다. 그 정도 몸놀림으로는 소승의 수법을 피하기 어려우실 것이외다. 적송은 뒤로 물러서는 여문통에게 그림자처럼 달라붙으며 삼지(三指)를 연속해서 튕 긴다. 어엇! 신속하고 은밀한 전개와 강한 파괴력으로 신통(神通) 이라는 말이 따라다니는 탄지공 이다. 여문통은 난간을 끼고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적송의 공세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유부혈(乳府穴)에 뜨끔한 통증이 느껴진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통증은 곧 사그러든다. 여문통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천근추(千斤墜)의 신법으로 밀려나는 몸을 안정시 킨다. 그따위 수수깡 같은 손가락으로 뭘 어쩔 수 있다는 말이냐! 여문통은 크게 고함을 치며 쌍장을 쭉 뻗는다. 적송은 선 자세 그대로 두 걸음 옆으로 미끌어지며 장력을 피한다. 고도의 활면(滑面)의 요체가 담겨있는 움직임이다. 쥐새끼 같은 땡초 녀석! 욕설을 퍼부으며 앞으로 내달아 소나기 같은 장력을 퍼부어대는 여문통. 당황하지 않고 이리저리 피하는 적송의 신법은 경묘하기 이를데 없다. 하지만 지금 적송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중혈(重穴)을 아홉 개나 격중시켰는데도 조문을 찾을 수 없다니...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겠군. 조문은 외문기공을 익힌 사람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급소이다. 본디 사람의 신체에는 혈(穴)이라는 급소가 있다. 혈이란 경(經)과 락(絡)을 통하여 체내를 순환하는 기(氣)의 정류장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피부에 드러난 혈을 공격하면 운기(運氣)에 충격을 주어 신체 내외의 활동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한 호흡법이나 비방(秘方)에 따라 만들어진 약물을 통해 수련하는 외공(外 功)은, 인간의 신체에 있는 혈을 갑옷과도 같아진 피부로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외공을 익힌 사람 중 고수가 드문 까닭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고도의 내가수법 앞에서 버틸 정도로 훌륭한 외공을 찾기란 드물다는 점이다. 내가수법이 인체를 파괴할 때 타격에 의한 외부적인 경로보다는 발경(發勁)에 의한 내 부적인 경로가 더욱 치명적이다. 달걀을 손에 쥐었을 때 껍질에는 아무런 손상을 가하지 않은 채 흰자위로 보호되고 있 는 노른자를 파괴하는 무형추(無形錐), 가죽북의 앞면을 침으로써 뒷면의 가죽을 터뜨 리는 격복통배(擊腹通背), 그리고 산을 격하여 소를 치는, 공간을 뛰어넘어 진기를 자 유자재로 수발(收發)하는 격산타우(隔山打牛) 등이 상승의 발경법들로 꼽힌다. 이런 신공(神功) 앞에서는 단단한 갑옷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둘째, 외문을 수련하면 조문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생긴다는 점이다. 조문은 일종의 통기점(通氣點)이다. 혈은 경락(經絡)의 정류장이라는 역할 외에도, 혈맥을 순환하는 도중 쌓이는 탁한 내 기(內氣)를 외부로 방출하는데 역할을 한다. 이것이 순조롭지 못할 경우엔 독(毒)이 발생하게 되니, 침술이나 뜸과 같은 치료요법 으로 혈을 타동(打動)시켜주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외공으로 수련한 살가죽은 이러한 탁기(濁氣)의 방출에 큰 지장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외공을 수련하는 사람은 몇 군데 혈도를 개방하여 신체 외부와의 교통로를 확보해줘야만 한다. 이 개방된 혈도를 조문이라고 하는데, 수련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조문의 수는 줄어든 다고 한다. 외공을 익힌 사람에게 있어서 조문의 위치란, 설령 부모자식 관계라 해도 알려줄 수 없는 비밀임은 자명한 일이다. 여문통은 적송의 탄지공에 의해, 한두 군데도 아닌 자그마치 아홉 군데의 대혈을 적 중당했다. 소림구양공의 순양진기가 실려 있는 탄지공... 적중되면 혈도를 제압당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근육이나 뼈도 으스러뜨릴 정도의 파 괴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문통이 전개하는 철마장은 여전히 위력적이다. 이것은 그가 수련한 구구대모갑의 조문이 은밀할 뿐만 아니라, 그의 외문기공 자체가 얼마나 충후한 것인지를 잘 알려준다. 점잖게 해결하기는 틀린 것 같군... 적송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내력을 끌어올린다. 살수(殺手)는 불가피해진 것이다. 펑. 청룡출해(靑龍出海)의 수법으로 적송의 가슴을 때려가던 여문통은 갑자기 밀려온 반 탄력에 허리를 휘청인다. 이제까지 적송이 전개하던 민활한 수법과는 전혀 다른 강맹한 힘이다. 이 어린 놈의 내공이 이렇게 강했나? 여문통은 호흡이 순조롭지 못한 것을 느끼고 한 걸음 물러선다. 아미타불! 시주의 신공이 뛰어나신 탓에, 소승은 이제부터 폐사(弊寺)의 수미장법(須彌掌法)을 사용할까 합니다. 거친 수법이니 용서하시길... 적송은 가슴 앞으로 두 손을 합장한 후 기마세(騎馬勢)로 다리를 벌리고 손바닥을 뒤 집는다. 손바닥의 움직임에 따라 완만하게 일어나는 장력은 허허로운 가운데 매우 무거운 힘이 담겨 있다. 강호에서는 소림신장(少林神掌)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수미장법 중 나한배불 (羅漢拜佛)이다. 잠시 전 반탄력의 충격을 가까스로 가라앉힌 여문통은 이미 사방이 적송의 장세에 둘 러싸여 있음을 깨닫는다. 창망한 중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바로 세우고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적송의 장세에 대 항하는 동작은 일문의 문주다운 신속한 대응이다. 하지만 그의 내공으로써 적송의 지순한 구양공을 당해내란 어려운 일이다. 우욱! 여문통은 가슴으로 밀려오는 뜨거운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하며 뒷걸음질을 친다. 이십을 갓 넘긴 것으로 보이는 젊은 중의 내력이 이토록 심후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 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승기를 잡은 적송은 두 걸음을 내딛으며 머리 위로 치켜든 우수를 크게 내리친다. 이 불광조현(佛光照顯)의 일초는 상대의 상체를 공격함에 있어서 그 힘을 아래로 눌러 척추를 상하게 만드는, 불문의 무학치고는 패도(覇道)가 담겨 있는 수법이다. 여문통은 엉겁결에 철마장을 휘둘러 반격했지만, 어느 순간 수천 근 바윗덩이가 머리 위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을 받는다. 그의 발 아래서 은행나무로 만든 갑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러진다. 이대로 일 장을 더 가하면 여문통이 중한 내상을 입는 것은 불문가지... 강한 방패가 더 강한 창에 궤뚫리듯, 단단하기만 하던 여문통의 구구대모갑은 더욱 큰 힘에 눌려 으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이 적송의 출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순간 등뒤에서 전해지는 거센 충격... 이놈아! 맛이 어떻냐? 적송은 옆으로 몇 발자국 물러서서 뒤를 바라본다. 그곳에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띠우고 있는 곡요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손에는 날 부분을 비단 헝겁으로 감싼 길죽한 물건이 들려 있다. 쯧, 시주는 정대하지 못하시군요. 마치 산들바람을 한 번 만난 듯한 가벼운 말투이다. 하지만 적송은 내심 자신의 성취에 실망하고 있었다. 구양공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이 없이 외부의 충격에 대해 자연 스러운 반력(反力)이 발생하게 된다. 이 반력이란 외가기공이나 호신공(護身功)에 의한 반탄력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불괴(不壞)의 묘용을 담고 있어서, 그 수련이 극성에 이르면 전설상의 법체 (法體)라고 할 수 있는 금강불괴(金剛不壞)까지도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조금 전 곡요가 암습했을 때 그의 반력이 완성되었던들, 곡요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공격한 것과 같은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이놈의 뼈는 무쇠로라도 만들어졌단 말인가? 십성의 공력을 끌어올려 격중시킨 일 장이 적에게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한 것을 알 고는, 곡요는 문득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문주! 패왕도(覇王刀)를 사용하십시오! 그는 들고 있던 물건의 비단을 벗겨낸 후 여문통에게 던져준다. 여문통이 주가의 기둥에 걸어둔 마흔두 근 짜리 언월도(偃月刀)였다. 이깟 빈 손의 애송이에게 패왕도를 쓸 수는 없는 일! 여문통은 병기를 갑판에 세차게 꽂으며 외친다. 부르르... 날이 한 자가 넘게 박히며 강철로 만든 자루가 몸부림을 친다. 비록 정대한 인물은 아니지만, 일문을 이끄는 문주의 신분으로 자신보다 어린 적수공 권(赤手空拳)의 후진(後進)에게 병기를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적송은 여문통의 호기에 감탄한다. 그러면 저도 돕겠습니다! 무인답게 승부를 겨루고자 하는 문주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상대의 손속이 문 주의 재주를 훨씬 뛰어넘음을 파악한 곡요이다. 그는 품 속에서 여러 개의 추를 꺼내어 움켜쥔다. 현란한 혈추공(血錐功)으로 저놈의 시야를 어지럽힐 때 문주가 철마장으로 공격한다면 승산이 있다! 곡요 나름대로의 달콤한 복안이다. 하지만 현란한 혈추공을 상대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곡 선생의 추를 던지는 솜씨는 빈승이 대신 견식하면 어떻겠소? 돌연 난간을 찍으며 멋들어진 신법으로 배 위에 오른 사람은 적송과 마찬가지로 승복 에 가사를 걸친 승려이다. 각진 얼굴 귓부리에 돋아있는 무성한 구레나룻은 불가에 의탁한 사람답지 않은 억센 인상을 준다. 승려를 바라보던 곡요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어둠 속에서도 젖은 승복 위로 피어오르는 허연 김을 본 것이다. 승려는 순양진기를 끌어올려 의복을 말리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말을 하는 도중에... 빈승은 저 친구의 사형되는 사람으로 적오라고 하외다. 자고로 싸움이란 공평해야 되는 법이지요. 소림사의 방장사제(方丈師弟)이자 나한당(羅漢堂)의 당주(堂主)인 적오의 이름은 강 호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터이다. 그 조그만 나룻배에 어찌 이다지도 많은 강적들이 있었단 말인가! 곡요는 꿀꺽, 마른침을 삼킨다. 여(呂) 시주의 호탕함은 잘 알았습니다만, 병기를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소승은 승포나 가사를 병기로 사용하는 공부를 익혔습니다. 결코 시주께서 득을 보고 시작하는 것이 아닐 것이니, 시주의 용명(勇名)에 조금도 누 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적송은 사형이 곡요를 맡아주자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그는 여문통에게 병기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승부를 어서 마무리하자는 완곡한 표현이다. 지금 강물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은, 나룻배의 승객들에 공문의 무사들까지 합쳐, 사오 십 명은 족히 될 것이다. 더 시간이 지체하기 이전에 인명을 구출하려면, 한시라도 빨리 여문통을 제압해야 하 는 것이다. 여문통의 얼굴 근육이 몇 차례 꿈틀거린다. 이윽고 결심한 듯 갑판에 꽂힌 언월도의 자루를 거칠게 움켜쥔다. 으음... 좋다! 그러면 내 패왕도가 무정하다고 원망하지는 말거라! 아미타불! 적송은 불호를 나직이 외며 양손을 비스듬하게 내려뻗는다. 팔을 뻗는 가벼운 동작에서 소매가 팽팽하게 세워지기 시작한다. 그 위로 은은하게 감도는 푸른빛은 바로 철포수이다. 여문통은 언월도를 뽑아드는 것과 동시에 적송을 향해 휘둘러간다. 곡요는 적오의 적수가 아니다. 그는 지니고 있던 추를 몇 개 던져보지도 못한 채 손발이 어지러워짐을 느낀다. 일이 왜 자꾸 꼬일까? 자신들은 석대원을 제압하기 위해서 사천으로부터 이천 리가 넘는 길을 달려왔다. 그런데 이 귀신 형님 같은 소림승들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산해주(山海州)의 객점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일은, 급기야 그를 이런 궁지에 몰아넣 기에 이른 것이다. 곡 선생의 재주는 이제 대충 감상했으니, 이제 소승의 재주를 보여드리겠소이다. 갑자기 적오의 몸놀림이 묵직해진다. 두 발을 정(丁)자로 벌려 한껏 숙인 상체를 단단히 고정하는가 싶더니 팔을 어깨와 수 평이 되게 하고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후려쳐 온다. 지극히 완만하지만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숨겨져 있다. 이러한 둔(鈍) 속에 감추어진 변(變)의 묘용은, 진흙을 주먹 안에 쥐고 움켜쥘 때 어 느 손가락 사이로 진흙이 꿰어져 나올지 알 수 없는 이치를 담고 있다. 헉! 곡요는 몸을 급히 젖혀 둔중한 손가락의 공세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앞가슴이 길게 할 퀴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살갖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적오의 손가락이 부딪칠 때 느낀 거대한 충격은 그의 내기 (內氣)를 격탕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때 적오의 손가락은 곡요의 가슴 세 군데 혈도를 노리며 크고 작은 원을 그리고 있 다. 소림권에 오금수(五禽手)라는 것이 있다던데 혹시 저것이...? 곡요의 안목은 정확했다. 오금수는 후한(後漢) 말엽의 명의(名醫) 화타(華陀)가 도인체조(導引體操)로 고안한 오금희(五禽戱)에, 달마(達磨)의 수제자이자 중국 선종(禪宗)의 이대조종(二代祖宗)인 혜가(慧可)가 묘를 더한 것이다. 호(虎), 웅(熊), 학(鶴), 원(猿), 녹(鹿)의 다섯 짐승의 동작을 본따서 만들어진 이 오금수는, 강호에 유전(流轉)되는 싸구려 금수공(禽獸功)과는 차원이 다른 상승의 절 학이다. 적오가 전개하고 있는 것은 둔한 가운데 엄청난 힘을 담고 있는 곰의 움직임에서 비롯 한 거웅절목수(巨熊折木手). 곡요는 끊임없이 자신의 가슴을 억누르는 적오의 웅혼한 내력에 호흡조차도 거북할 지 경이다. 하지만 이대로 허망하게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곡요는 이를 악물고 적오의 손바닥을 향해 좌장을 뻗는다. 원정(元精)을 손상할 정도로 극한까지 끌어올린 내력 때문에 그의 얼굴은 잘 익은 홍 시같이 검붉게 변해 있다. 허! 함께 죽자는 거요? 적오는 안위를 도외시한 곡요의 맹렬한 공격에 찔끔한 기색이다. 하지만 그도 수련으로 청춘을 바친 무승(武僧). 전방을 향해 구부렸던 양손이 활짝 열리며 밀려오는 장력을 분산시킨다. 동귀어진을 각오한 곡요의 공격은 적오의 좌우로 헛되이 갈라지고, 그 틈새를 비집고 곧바로 찔러가는 적오의 수법은, 스치는 곳곳마다 연꽃이라도 피어날 듯이 유연한 쌍 관수(雙貫手)... 장심에서 일어난 미약한 기운은 삽시간에 둥글게 응축되며 곡요의 심장을 엄습한다. 곡요는 진기를 끌어올려 가슴을 압박하는 힘에 저항하려 했지만 이는 창호지로 송곳을 막는 격이다. 뚝. 늑골 한 대가 불쾌한 소리를 내며 어긋나고, 두 무릎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꺾 여진다. 으웩!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비명을 지르자, 가슴을 보호하던 진기가 흩어지며 목구 멍으로 선혈이 왈칵 솟구친다. 적오의 두터운 내력이 내장을 상하게 만든 것이다. 곡요는 엄중한 내상을 입은 채 갑판 위로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좀 심했군... 혈도만 제압하려고 했던 것인데, 상대의 격렬한 반격에 당황한 나머지 내상까지 입히 게 된 것이다. 적오는 언짢은 마음이 생겨 눈살을 찌푸린다. 그는 아직도 선수(船首)에서 격전을 벌이는 적송과 여문통을 바라본다. 사제의 경지가 자신을 능가함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특별히 걱정되는 바는 없다. (4) 패왕도라는 이름이 붙은, 마흔두 근 언월도를 장작개비 휘두르듯 내돌리는 여문통의 신력(神力)은 천부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둥글게 휘어진 칼날이 공간를 가를 때마다 호각소리 같은 파공성이 강바람을 뚫고 솟 아오르고, 귀화(鬼火) 같은 새파란 섬광이 밤하늘을 수 놓는다. 하지만 적송의 호리호리한 신형을 빌어 전개되는 철포수는 고명하기만 하다. 부드러운 소매는 때로는 철벽이 되고, 때로는 솜뭉치가 되어, 맹수처럼 달려드는 여문 통의 공세를 유유히 막아낸다. <내딛는 걸음마다 구름이 일고, 떨치는 옷자락 악한 기운 물리치니, 마치 나한이 사 바에 하강한 것 같다.(步步起雲烟 袖袖防惡氣 眞如羅漢臨下土)>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십삼나한(十三羅漢)의 구원을 받은 후 소림사에 하 사한 200자 어필(御筆) 찬무비문(讚武碑文)의 한 구절이 실감나는 장면이다. 십 초가 지나고, 이십 초가 지났다. 뼈와 근육이 만들어내는 힘은 시간이 갈수록 쇠하기 마련이지만, 순후한 내공에 바탕 을 둔 진기는 쇠하기커녕 더욱 왕성해진다. 여문통의 이마에 돋는 땀방울과 비례하여 적송의 소매 위를 감도는 푸른빛은 점점 위 세를 더해간다. 하핫! 어느 순간, 적송의 양 소매가 활짝 펼쳐진 채 여문통을 덮쳐간다. 야경에 취한 선학(仙鶴)이 날개를 활짝 펴고 그 도도한 흥취를 춤사위로 풀 듯, 화려 하지만 지극히 정제된 가락을 담고 있는 소매의 물결. 주먹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팔방풍우(八方風雨)와 흡사하다. 이런...! 전면을 덮어오는 소맷자락을 바라보며 여문통은 하늘의 일각이 무너져 덮쳐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는 안색을 굳힌 채 언월도를 돌리기 시작한다. 익산피양(翼傘避陽). 언월도의 회전이 만들어낸 일산(日傘)은 전면을 가득 채운 소매의 환영(幻影)들과 맹 렬히 충돌한다. 끼이이... 쇠붙이를 갈아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파란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정물처럼 한자리에 우뚝 선 두 사람. 바야흐로 병기를 통한 본격적인 내력 대결의 양상이다. 어린 놈의 내공이 어찌 이리 강하단 말인가? 여문통은 오래지 않아 팔꿈치가 시큰해옴을 느낀다. 하체에 힘을 준 채 필사적으로 애쓰지만, 곧추선 자세 그대로 밀려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뒤로 미끄러지는 그의 발밑으로 검고 굵은 직선이 만들어진다. 가죽신 밑바닥이 녹아 붙은 자국이다. 이익... 여문통은 붉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문다. 그의 얼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 있다. 사나워 보이는 갈기 수염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 구구대모갑을 연성하여 한서(寒暑)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체였지만, 내공의 열세로 인 해 침범하는 열독(熱毒)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후... 허헉! 그는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몇 걸음 물러서며 오장(五臟)에 가득 찬 탁한 기운을 가라앉힌다. 이제 순순히 단념하시는 것이 어떠시오? 적송은 어디까지나 자비롭다. 상대가 손해를 보자 기세를 틈타 나아가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서서 투항을 종용하고 있다. 여문통의 이마 위로 지렁이 같은 힘줄이 꿈틀거린다. 개수작하지 마라! 대개 여문통과 같은 성격의 소유자는 남에게 동정받는 것을 참지 못한다. 상대가 아무리 자비로운 마음에서 양보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비웃음보 다 더한 모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지금, 눈앞의 새파란 땡초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있다. 이 사실이 여문통의 오기를 폭발시켰다. 우와와! 파파팍... 핏발선 눈, 짐승 같은 괴성과 함께 도끼질처럼 휘둘러지는 패왕도. 여문통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최후의 힘을 짜낸 것이다. 마흔두 근 중병에 적중당한 갑판목이 조각나고, 조각난 갑판목은 공간을 휘몰아치는 도기(刀氣)에 휘말리며 가루가 되어 비산한다. 패왕도법의 절초 중에서도 절초라고 할 수 있는 춘뢰주야(春雷走野)였다. 이 사나운 기세 앞에는 적송도 다리를 움추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양 소매로 도로(刀路)의 요처를 선점하며 물러서는 일련의 후퇴는 매끄럽기 짝 이 없다. 살아 생전 뒷걸음질만 연습한 사람이라도 이보다 더 맵시있게 물러서지는 못할 것이다. ...! 그러던 그의 맵시가 어느 한 순간에 구겨져 버렸다. 한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버린 그의 신형은 평소보다 한 자는 줄어든 것 같다. 왼쪽 다리가 갑판의 구멍으로 빠진 것이다. 본디 그 구멍은 잠시 전 여문통이 적송의 장력을 받아낼 때, 그 힘을 견디지 못하여 갑판목을 부러뜨림으로써 생긴 것이다. 무릇 단련된 무인이라면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 후방 공격에도 자유자재로 대처할 수 있는 법이다. 이는 동적(動的)인 움직임이 수반하는 음향이나 공기의 흐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판에 난 구멍과 같이 움직임이 없는 함정은 제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대처 하기 어려운 것이다. 업친 데 덮치는 격으로 시고(視高)의 급락으로 인한 순각적인 당혹감은, 적송의 시야 로부터 패왕도의 동선(動線) 앗아가 버렸다. 사제! 이쪽 싸움을 바라보던 적오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나온다. 하지만 그가 손을 쓰기에는 너무 멀다. 꼴 좋구나! 회심의 기색이 가득 담긴 쩌렁쩌렁한 여문통의 대갈일성... 적송은 황급히 머리를 들어 적의 움직임을 찾는다. 그의 시야에 언뜻 잡힌 것은 십여 개의 환영을 만들며 확대되어 오는 패왕도의 거대한 날. 그것은 하늘을 맴돌던 매가 들짐승을 향해 내리꽂히듯, 적송의 뇌문을 노리고 매섭게 떨어지고 있다. 위기의 순간, 적송의 양 손이 기쾌하게 교차된다. 아미타불! 주루룩. 돌연 적송의 머리 위로 장막이 펼쳐진다. 소맷자락을 휘두른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장막이다. 캉. 날카로운 금속성... 동시에 여문통의 팔이 부르르 떨린다. 패왕도를 타고 전해진 진동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도 자루를 내리 누르는 그의 왼손 팔꿈치가 탈골되어 버린다. 온몸의 뼈가 시큰거리는 듯한 통증이 덮쳐왔지만, 여문통은 개의치 않고 패왕도에 담 긴 내력을 배가시킨다. 입가에 맺혀 있는 득의의 미소는, 장막 아래로 무언가를 찍은 듯한 느낌 때문이다. 순간, 장막의 가운데가 뻥 뚫리며 하얀 손바닥이 튀어나온다. 이 손바닥의 움직임은 기이하게 빠르다. 장막이 뚫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패왕도의 도 자루가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 다. 그리고 가슴을 때려오는 묵직한 충격... 으으... 일시에 호흡이 콱 막힌다. 여문통은 목구멍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세 발자국 물러선다. 그의 가슴을 때린 힘은 외문기공으로는 감내할 수 없는 무거운 힘이 실려 있었다. 물러서는 걸음마다 갑판이 우직거리며 부러져 나간다. 대, 대...단하구나! 세 걸음을 물러서고도 여력을 떨쳐버리지 못해 부들거리며 떨던 여문통은 더 이상 견 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만다. 구구대모갑으로 보호되어 있던 진기가 정경(正經)을 벗어나 기경(奇經)으로 흩어지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지만, 이러한 내상은 거죽이 상하는 외상과는 차원이 다르 다. 수많은 바늘이 혈관 속으로 치달리는 듯한 고통! 으득... 악문 어금니만 헛되이 부러지며 급기야는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온다. 우왁! 비명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선홍색 핏덩이들. 드디어 기가 역류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그가 이십 년 간 수련한 내외공이 한순간에 산산히 무너져 버렸다. 아미타불, 미안하외다. 적송은 구멍으로 빠진 다리를 빼내며 황급히 여문통에게로 다가간다. 여문통은 이미 눈을 까뒤집은 채 인사불성이 되어 있다. 검게 물들어가는 안색. 적송은 품속에서 목갑을 꺼낸다. 그 안에서 굴러 나온 것은 소림사 약왕당(藥王堂)에서 제조한 호심단(護心丹). 강호에 잘 알려진 대환단(大丸丹)이나 소환단(小丸丹)처럼 기사회생의 신효(神效)는 없지만, 기를 평평하게 하는 황정(黃精)과 기를 자극하는 반묘(斑猫)를 비방에 따라 배합한 요상약이다. 일곱 번 보호한 후 세 번 침범하는 칠보삼침(七保三侵)의 약효는 내상을 치유하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왼손으로 여문통의 고개를 젖혀 받치고 두 알의 호심단을 먹인다. 이때 그의 왼손 소매는 마름질한 부위가 어깨까지 뜯어진 채 하얀 팔뚝을 드러내고 있 다. 뜯어진 소매 사이로 길게 그어진 혈선. 뽀얀 피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선혈... 적송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졌던 창응박토(蒼鷹搏兎)의 초식은, 본디 절기라고는 할 수 없는 평범한 수법이다. 하지만 백 합이 넘는 전투 끝에 처음으로 맞이한 승리의 고비에서 전개된 창응박토는 여문통의 이십 년 수련의 진수가 담겨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디 언월도, 혹은 월도는 무겁기로 말하자면 병기십팔반(兵器十八般) 중에서도 손꼽 힌다. 더욱이 패왕도는 일반 언월도보다 두 배나 무거운 마흔두 근짜리 중병(重兵). 이런 중병으로 전개한 창응박토에 십여 개의 도영(刀影)을 만들어 낸 변(變)의 묘용은 적송을 궁지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적송이 그것을 막아내고 여문통을 패퇴시킨 것은, 어쩌면 절반쯤은 운이라고 할 수 있 다. 위기의 순간, 적송은 오른손 약지와 중지를 갈고리처럼 구부려 승포의 소매 끝에 걸 었다. 그 상태에서 왼팔을 휘두르자 소매의 재단한 부위가 튿어지며 제법 넓적한 장막을 만 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소매를 넓게 튿어 상대를 휘말아가는 수법은 철수공 중 구명절초라고 할 수 있 는 진인포원(眞人抱猿)의 수법이다. 이는 선도(仙桃)를 망쳐놓고 달아나는 손오공과 삼장법사 일행을 진인(眞人)이 소매를 한 번 펼쳐서 가둬버린 묘용이 담겨있는 것이다. 도의 방향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개된 진인포원은 적송의 뇌문을 엄밀히 방어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문통의 회심의 일격을 완전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재빠른 임기응변이기는 하지만, 튿어진 소매에 순간적으로 진기를 주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패왕도에 담긴 괴력은 승포를 뚫고 적송의 왼팔에 깊은 도상을 새겼고,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안 적송은 수미장법 중 사자귀림(獅子歸林)의 수법으로 여문통을 친 것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출수한 적송의 장력은 평소 그 답지않은 패도가 담겨 있었다. 활짝 펼쳐진 승포가 여문통의 시야를 차단한 것 또한 공교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제! 괜찮은가? 적오가 굳은 안색으로 달려온다. 아들을 바라보듯 지켜보던 막내 사제에게 탈이 있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생명은 지장이 없습니다만, 자칫하면 폐인이 될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제가 조심성이 없는 탓입니다. 이 희대의 활불(活佛)은 여문통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것조차 잊고 있다. 적오는 한숨을 쉬며 적송의 어깨 부근의 혈도를 두 군데 봉쇄하여 지혈시킨다. 적송의 외상은 제법 중하다. 자네는 일벌백계(一罰百戒)라는 말도 모르는가? 이 자는 사람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악인이야. 자네라면 백 수도 필요치 않았을 것을, 사정을 봐 주다가 위험에 처하다니... 자네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일세! 적오는 조금 화가 나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적송은 송구한 마음에 고개를 숙인다. 그 역시 사형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다. 어느 틈에 배에 올랐는지 한로와 모용풍도 그들 곁으로 다가온다. 적송 대사는 참으로 자비로우시오. 하지만 이 늙은이 생각으로도 독수를 써서라도 여문통을 빨리 제압하고, 물에 빠진 사 람들을 구하는 것이 불자(佛者)된 도리인 듯 하구려.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한 모용풍의 말이다. 적송은 얼굴이 붉어진다. 그라고 그러한 이치를 왜 모를까. 하지만 사람에게는 천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치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천성이 있고, 이치를 알아도 그것을 실행 할 수 없는 천성이 있는 것이다. 제 수양이 부족해서입니다. 적송은 서글픈 마음이 되어 합장한다. 됐소이다, 구할 사람들은 거의 구했소. 모용풍과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한로가 투덜거리듯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배 위에는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기진한 채 끌러올려져 있다. 적송과 적오가 공문의 무리들을 처리할 때, 모용풍과 한로가 물 속에서 바삐 움직이며 건져낸 사람들이다. 개중에는 공문의 무사들도 간간이 섞여 있다. 남은 것은 저 배뿐인가? 모용풍의 말에 사람들은 잊고 있던 것이라도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석대원과 진금영 이 대치해 있는 주가를 바라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석대원의 외침이 밤하늘을 울린 것은. 한로, 조심하시오! (5) 한 조각 남은 마지막 힘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눈빛을 표독스럽게 빛내고, 목구멍 너머로 올라오는 단내를 되삼킨다 한들, 그 녀는 이것이 마지막 힘이라고 생각했다. 하앗! 채찍의 끝에 달린 추가 여덞 개의 소원(小圓)을 그리며 목표물을 향해 날아간다. 하지만 목표물, 너무나 거대한 목표물은 추호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빠른 속도로 달 려든다. 구부러진 팔꿈치가 퉁겨지는 순간, 정면을 향해 쭉 뻗어가는 혈랑검. 검로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검끝에서 피어나는 안개 같은 떨림은 채찍이 만들어 낸 작은 동그라미들을 하 나씩 하나씩 파괴한다. 이른봄 광풍(狂風)에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처럼 아름다운 잔해를 남기며 사라지는 동 그라미들. 그리고 불쑥 눈 앞으로 튀어나온 검봉(劍峰)... 이젠 끝이야... 진금영은 쾌감과도 같은 아찔함을 느낀다. 하긴, 이제 저 악마 같은 검을 피하기도 지쳤어. 쉬고 싶어... <자, 착하지! 이리 오렴... 자꾸 귀찮게 굴면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 꺼야!> 망할! 이 순간에서까지 그 지긋지긋한 주정뱅이의 목소리를 떠올려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무의식은 쇠진(衰盡)한 몸 어느 구석에서인가 악몽처럼 도사리고 있던 독기를 끌어올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지나치는 혈광을 느낀 순간, 그녀는 자신이 붉은 검의 공격을 또 한 번 피해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석대원은 이제 일말의 의아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무공은 자신의 십초지적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그녀는 오십 초가 넘게 버티고 있다. 물론 그녀의 신법과 반사신경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좁은 주가 위에서, 그것도 저렇게 거칠어진 호흡으로 천하 검법 중에서 가 장 잔인하다는 혈랑검법을 피해내기란... 아마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했다. 방금 전 전개한 개운직지(開雲直指)의 신속함은 비록 그녀가 정상적인 상태라도 장담 하기 어려운 살초이다. 검봉이 그녀의 하얀 목을 꿰뚫는 순간, 허깨비같이 몸을 옮긴 그 움직임은, 분명 무공 과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질 것이 없다! 석대원은 차갑게 되뇌며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러 간다. 북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은 백로횡강(白鷺橫江)에서 북망남고(北望南顧), 그리고 낭수 탐미(狼首貪眉)... 검기만으로도 근육과 뼈를 토막낼 삼초 오검이 진금영의 휘청거리는 존재를 세계로부 터 말살시키려는 듯 사납게 덮친다. 그가 말했던 바, 그는 그녀를 살려둘 생각이 없는 것이다. 지옥 같군... 그녀는 아까보다 오히려 느긋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다시 불붙은 삶에 대한 집착은 말라붙은 신체에 한 줌 단비를 뿌린다. 그녀는 사방으로 서리서리 닥쳐오는 혈광을 향해 수중의 초혼독편을 휘젓는다. 둥글게 응축되는 편영(鞭影)은 그녀의 신형을 엄밀히 방어한다. 이렇게 죽을 수 없다! 파팍... 석대원의 검은 무섭다. 그녀의 병기는 그 무서움을 직접 겪게 되었다. 혈랑검은 무쇠도 벨 수 있는 보검. 거기에 실려진 석대원의 예기(銳氣) 앞에는 더없이 질기다는 교룡피(蛟龍皮) 역시 썩 은 새끼줄과 다름이 없었다. 단말마(斷末魔)와 같은 절삭음과 함께, 그녀를 초혼귀매라는 으시시한 이름으로 불리 게 했던 초혼독편은 네 조각이 되어 갑판으로 떨어진다. 접인(接引)의 검결이 담긴 북망남고의 삼 검이 채찍을 당겨 한 호흡에 끊어버린 것이 다. 하지만 북망남고에 이어진 낭수탐미의 절초는 허공을 헛되이 찌를 수밖에 없었다. 진금영은 채찍이 끊어지는 순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표홀한 신법을 발휘하여 쇠난 간 위로 달아난 것이다. 다람쥐 같은 계집! 혈랑검을 다시 직지세로 겨누는 석대원의 눈가로 이채가 스친다. 그녀가 허리 뒤로 손을 돌려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피묻은 그녀의 입가가 조금 움직인다. 석대원! 화성(花星)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화성? 꽃별... 이 앙증맞은 이름이 지닌 의미를 떠올린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어른 주먹만한 두 개의 쇠구슬이 들려 있었다. 오늘은 내가 졌다. 다음에 보자, 석대원! 선약(仙藥)을 훔쳐 월궁(月宮)으로 날아오르는 항아(姮娥?)처럼 진금영의 가냘픈 신형 이 난간을 찍고 야공으로 솟아오른다. 그와 동시에 석대원을 향해 쏘아져 오는 한 개의 쇠구슬... <동해에는 금부도(錦浮島)라는 섬이 있다. 그곳에는 화기를 능하게 다루는 무리들이 있으니, 금(金)의 멸망 이후 유랑하던 여진 왕족(女眞王族)의 후예라고는 하나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무공보다도 더욱 무서운 두 가지 비기(秘器)가 있는데, 그 하나는 팔열호 (八熱號)라 하고 그 둘은 화성(花星)이라 한다. 이들 금부도 무리의 행적은 지극히 은밀하여 중토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 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뇌문(雷門)이라고 칭한다.> 모용풍의 <비세록(秘世錄)>에 적혀 있던 구절이다. 더불어 모용풍은 뇌문을 강호에 신비스러운 여섯 세력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 로 지목하기도 했다. 위험하다... 생각은 한순간이었다. 석대원의 거대한 신형이 훌쩍 뒤로 날아오른다. 그의 얼굴에 은은한 유백색 광채가 일렁인다. 그가 수련한 상승심공인 천선진기(天旋眞氣)가 극성으로 끌어올려진 것이다. 뿌직. 쇠구슬... 초현(初現)한 천선진기의 상대는 쇠구슬이었다. 지금 그 쇠구슬은 갑판목에 박혀 있다. 그리고 얼굴에 감도는 온화로운 유백색 광채와는 전혀 무관하게 석대원의 얼굴은 사납 게 구겨지기 시작한다. 진금영이 던진 쇠구슬은 정말로 쇠구슬이었던 것이다. <비세록>에는 화성의 외형(外形)에 관한 기록도 기재되어 있었지만, 순간적인 위기감 이 그의 관찰력을 잠시 마비시켰나 보다. 교활한 계집! 분노 때문에 더욱 그러할까... 허공을 한 바퀴 맴돌아 갑판에 내려선 석대원은 실로 놀라운 속도로 진금영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몸을 날린다. 노갈(怒喝)의 여운이 아직도 갑판 위에 맴돌고 있는데 그의 신형은 벌써 수 장 떨어진 강물 위를 날아가고 있다.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재간으로 한 번 강물을 찍을 때마다 사오 장씩 솟구치는 진금 영의 신법은 실로 고명하기 그지없다. 신법만으로는 결코 석대원의 아래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 거대한 붕새처럼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는 석대원은 곧 그녀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십여 장 앞을 날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지 불안정해 보인다. 그것은 그녀가 극도로 지쳐있기 때문임을 석대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자신을 돌아보는 그녀의 입가에 어린 옅은 미소를 보았을 때, 석대원은 마음 한 구석에 무엇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연인과 수작이라도 하듯 그녀의 늘씬한 손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그녀가 들고 있던 또 하나의 쇠구슬! 이미 뇌관의 봉인이 풀렸는지 파란 불꽃을 퉁겨내며 날아가는 구슬의 목표는 한로 등 이 타고 있는 주가였다. 독수리 같은 석대원의 눈썰미는 불꽃의 조악한 잔광 속에서 구슬 표면에 선명하게 새 겨진 백화문양(白花文樣)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비세록>의 한 구절... <뇌문의 문주 동해뢰왕(東海雷王)은 팔열호에는 여진족의 영조(靈鳥)인 해동청(海東 靑)을, 화성에는 여진족의 영초(靈草)인 백요화(白遼花)를 새겼다.> 한로, 조심하시오! 내공이 실린 우레 같은 외침이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남들보다 많이 안다는 것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지금 모용풍이 바로 그 격이었다. 석대원의 대갈(大喝)은 배 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그 중에서 저 검 은 철구(鐵球), 그 위에 새겨진 백화문양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고 있는 사람은 모용풍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빠, 빨리 저, 저 쇠구슬을... 화성에 대해 강의할 시간이 없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머리 꼬리 다 빠진 그의 외침은 사태의 심각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에 충분했다. 평소 입술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한 달변가가 저 정도로 더듬는 것은, 지금 그의 마음 이 얼마나 다급한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사제! 적오는 적송에게 눈짓하며 걸치고 있던 황색 가사를 벗는다. 적송 역시 사형의 마음을 알아채곤 황급히 가사를 벗는다. 패앵... 젖은 빨래를 힘차게 털 때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들의 가사가 철판과 같이 팽팽 히 곤두선다. 철수공을 가사에 응용한 것이다. 자네는 왼쪽을 맡게! 순간, 두 장의 누런 포막(布幕)이 좌우 양 방향을 엄밀히 봉쇄하며, 한 쌍의 거대한 박쥐처럼 날아오른다. 그들은 천망회회(天網恢恢)의 수법으로 저 위험한 물건을 가두려고 하는 것이다. 한 개의 화성 안에는 손톱만한 크기의 납성자(星子)가 삼백여 개 들어 있다. 연납으로 만들어진 이 납성자는 특별히 독을 바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자체 독성 이 강하다. 더구나 불의 왕국이라고 알려진 금부도의 화기이다. 그 폭발력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지금 석대원은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곧바로 진금영을 추격할 것인가, 아니면 한로 등을 구원할 것인가. 만일 그녀가 뭍으로 올라선다면 그녀를 놓칠 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녀를 살려두지 않겠다던 그의 살심은 허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바로 다음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생명을 없애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을 놓고 어떻게 망설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가! 석대원은 신형을 공중에 띄운 채 허리를 꺾으며, 내력을 극성으로 끌어 올린다. 왼손바닥 위로 흔들리는 미약한 공기의 파동에는, 패도지학(覇道之學) 혈옥수의 살기 가 아닌, 온화로운 척공(斥空)의 조화가 피어오르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그리고 형에게 배웠던 가전장법, 태을장(太乙掌)이다. 차앗! 용의 울음소리 같은 기합과 함께 그의 왼손이 쭉 앞으로 내밀어진다. 거센 반동이 그의 신형을 흐트러뜨린다. 촤아아... 성난 고래가 수면 위를 가르듯, 장력이 지나는 뒤로 한 길이 넘는 물살이 하얀 포말 을 뿜으며 뒤집어진다. 꽈릉! 겨우 주먹만한 철구가 그렇게 굉량한 폭음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폭음과 동시에 톱니처럼 좌우로 맞물려 철구를 휘감아 간 두 장의 가사가 가죽공같이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가사가 봉쇄한 방위의 절묘함은 실로 감탄할 만한 것이다. 배 위에 탔던 사람들은 일순 안도의 표정이 된다. 하지만 그 얼굴들은 금방 굳어져 버린다. 두 장의 가사... 사천왕상(四天王像)같이 든든하게 여겨졌던 가사가 유리처럼 산산이 부숴졌던 것이다. 밤하늘 가득 메운 납자성... 본디 적송을 비롯한 네 명은 처음 철구가 날아왔을 때 얼마든지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렇지 못한 까닭은, 배 위에 건져 올려진 승객들 때문이다. 마병(魔兵) 정씨궁(鄭氏宮)의 악독한 화공 앞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십여 명의 승 객들... 비단 불문 제자인 소림승들뿐만 아니라 한로와 모용풍 도한, 그들을 나 몰라라 내버리 고 몸을 피할 비정은 없었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적오가 생각한 것이 가사를 사용한 천망회회의 수법. 하지만 소림의 내공이 제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한들, 몸으로부터 이미 떨어진 천에 오랫동안 진기를 담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순간, 적송은 얼굴을 때려 오는 웅혼한 기세에 헛바람을 들이킨다.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배를 후려친 것이다. 떨어지는 납자성을 살필 겨를도 없이, 몰아치는 힘에 대해 수미장(須彌掌)을 때려간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다. 퍽. 두 덩어리의 진흙이 부딪힐 때 울릴 법한 둔탁한 소리... 적송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난다. 적송의 뒤에 서 있던 적오가 그의 등이 떠받쳤지만, 적오 역시 두 팔이 크게 진동되며 적송과 함께 두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적송과 적오의 반사적인 대응, 정확히 말하면 대응으로 발생한 반작용은 그들과 승객 모두를 살리는 요인이 되었다. 아이쿠! 어억! 승객들 사이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납자성에 당한 고통의 비명이 아니다. 그들이 탄 배가 고물을 하늘로 치켜들며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이 빠른 속도로 밀려났 기 때문이다. 갑판이 기울어지며 사람들은 난간에 매달려 강물에 떨어지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이 상황은 그들을 구원해 주었다. 후두둑... 조금 전까지 배가 떠 있던 수면 위로 납성자의 우박이 퍼부어진다. 원인 모를 기세로부터 자유로워진 적송의 얼굴에는 안도와 의혹의 빛이 동시에 떠올 랐다. 설마 그가...? 힘이 밀려온 방향으로 십수 장 떨어진 곳에는, 물에 빠진 채 고개만 내밀고 있는 석대 원이 있다. 적송은 방금 전 그들을 구해준 힘이 석대원의 장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십 장의 거리를 격하여 장력만으로 큰 배를 밀어내는 내공이라니... 적송은 불과 자신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석대원이라는 청년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석대원을 향해 공손히 합장한다. 고맙소이다, 석 시주! 석대원이 물에 빠진 것은, 태을장을 발출한 순간의 반동 때문만은 아니다. 적송의 수미장 또한 범상한 것이 아니어서, 두 힘이 부딪히는 순간, 그 또한 허수아비 처럼 허공을 밀려가 이렇게 사나운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천만다행이군! 석대원은 한로 등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 지체없이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른다. 팽이처럼 몸을 돌려 그 회전력을 빌려 출수(出水)하는 교번작와(蛟飜作渦)의 신법은 화려하기 그지 없다. 허공에서 한 차례 몸을 튼 그는 어느 한 방향을 향해 몸을 날린다. 바로 진금영이 사라진 방향이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잠시 억제한 살기가 다시금 그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살기. 지금 그의 심신을 지배하고 있고, 또 조금 전 그를 살생과 구생(救生)의 기로에서 망 설이게 만들었던 바로 그 살기가 향후 그의 강호행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인 지에 관해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6) 괴괴한 어둠에 잠겨 있는 관도(官道). 한낮의 열기가 채 식지않은 늦여름밤, 부엉이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감돌고 있다. 도요촌(陶窯村)과 탕구진(糖丘津)을 연결해 주는 관도 위로 두 명의 늙은 중이 걷고 있다. 도요촌에서 아이들의 임금 놀이를 바라보며 불담(佛談)을 나누던 망아(妄我)와 그의 사부이다. 탕구 나루까지는 아직도 많이 남았는가? 늙수그레한 목소리... 나이 탓인지 지팡이에 의지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 노승이 말했다. 그가 쥐고 있는 지팡이는 흔히 볼 수 있는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거의 왔을 겁니다. 회색 승복, 적족(赤足)이 이채로운 망아의 대답이다. 망아는 잠시 생각한 후 덧붙인다. 배는 이미 끊겼을 텐데... 나루터 부근에 쉴 만한 객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군요. 객점이 없다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천지간에 태어나 천지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육신인데, 하늘과 땅이 있고 마음에 거리 낌이 없다면 어디에서라도 못 쉴까? 붉은 가사를 입은 노승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사부님께선 항상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단 말이야... 망아승은 고개를 끄떡이며 걸음을 재촉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누가 오는군요. 문득 걸음을 멈춘 망아는 손차양을 만들며 말한다. 노승은 주름으로 뒤덮인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본다. 망아의 말대로 곧게 뻗은 길 위로 빠르게 달려오는 하나의 그림자가 보인다. 범상치 않은 속도로 미루어 무림인임이 분명하다. 허허, 여인이 아닌가? 이 밤길을... 무슨 일일까? 한 갑자가 훨씬 넘는 세월을 선법(禪法)으로 매진한 노승의 경지는 이미 천하에서 짝 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순(靜純)한 것이다. 비록 법심(法心)으로써 천지만물과 교감한다는 육통(六通)의 지경에는 이르지 못했지 만, 사물을 바라보는 안력은 주야원근(晝夜遠近)의 제약을 벗어난지 오래였다. 가히 천안통(天眼通)이라고 불릴 만한 법력... 노승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걸레같이 너덜너덜해진 남의(藍衣) 곳곳에 혈흔을 새긴 채 정신없이 달려오는 사람은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미모의 여인이다. 노승의 축 처진 눈썹이 잠시 꿈틀거린다. 여인의 뒷켠 까마득한 곳에 그믐달처럼 음산하게 떠오르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기 때 문이다. 으음... 노승은 나직하게 신음한다. 비록 오십 장이 넘게 떨어진 거리였지만, 노승의 높은 법력은 검은 그림자가 뿜어내는 지독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살기였다. 중? 걸음을 멈춘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중을 발견한 진금영은 눈빛을 빛낸다. 저들을 이용해 시간을 벌자. 진금영은 손가락을 구부려 용조(龍爪)를 만들어 대뜸 앞켠에 서 있는 망아를 할퀴어 간다. 어억! 의외의 기습을 받은 망아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를 나꿔채는 여인의 손속은 빠르고 잔혹하다. 싸악... 매서운 파공음이 그녀의 손가락에 실린 경력을 대변해 준다. 망아는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한다. 됐다! 진금영은 이 흑묘박서(黑猫撲鼠)의 한 수로 목표한 중을 능히 제압하리라는 것을 의심 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중의 어깨를 움켜쥔 순간, 그녀는 자신의 확신이 빗나갔음을 깨닫는다. 조심하시오! 망아는 여인의 손가락이 견정혈을 찍는 순간 가볍게 어깨를 흔든다. 그와 동시에 일어나는 미세한 흐름... 어깨 근육이 강철같이 뭉쳐지며 그녀의 손가락을 퉁긴다. 엇? 음! 망아와 진금영은 한 발자국씩 물러선다. 진금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록 진기가 고갈된 상태라 하지만, 그녀가 손가락에 실어보낸 힘은 혈육지신(血肉之 身)으로는 방비하기 힘든 독랄한 것이었다. 그것을 선 자리에서 근육을 움직임으로써 봉쇄하는 기공(奇功)이 있다니... 하지만 놀라기는 망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의 손가락을 받아낸 오른쪽 어깨는 아직까지도 저릿저릿 하다. 연약한 여인이 전개한 금나수(擒拿手)가 어찌 저리도 흉맹하단 말인가! 여시주! 우리는 흉인이 아니니 안심하시오. 두 사람의 충돌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던 노승이 말한다. 신형을 바로 세운 진금영은 새삼스럽게 두 중을 살펴본다.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화상은 가사도 걸치지 않은 맨 승복 차림에 불에 일그러진 흉칙 한 얼굴을 하고 있고, 그 옆에서 온화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는 노승은 나이가 얼마인지 짐작할 수도 없다. 이 두 명의 승려는 갑작스럽게 닥친 변고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는 듯 유유롭기 그지없 다. 얼핏 보기에도 범상한 인물들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오늘은 만나는 중들마다 대단하구나. 난처함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진금영 뒤로 웅혼한 내력이 담긴 장소성(長嘯聲)이 울려 퍼진다. 그자가 온다! 바로 그 순간, 진금영은 이 궁지를 벗어날 한 가지 계책이 떠올랐다. 그녀는 허물어지듯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도와주세요, 스님! 악인이 저를 해치려 합니다. 그녀의 피묻은 얼굴에 떠오른 처연한 기색... 이것은 꼭 가장한 것만은 아니다. 지금 그녀는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탈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망아는 서둘러 그녀를 부축한다. 염려마시오! 소승이 악인을 물리치겠소이다. 망아는 그녀를 길가의 나무에 기대 앉히고 전면을 향해 우뚝 선다. 당당하게 길을 막아선 그의 모습에는 승려답지않은 호기와 기상이 어려있다. 노승은 그런 제자의 모습을 뒷전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휘이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한 명의 거대한 인영이 망아 앞에 떨어져 내린다. 석대원이다. ...? 석대원은 자신을 막아선 두 명의 노승을 보고 잠시 말문을 잊는다. 진금영과 한패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검을 거두고 정중히 포권한다. 소생은 석대원이라 하오. 실례지만 스님들께서는 어떤 연유로 소생의 앞길을 막으시는지? 흥! 노승은 망아라고 한다. 너는 어찌하여 연약한 아녀자를 괴롭히는가? 망아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한다. 연약한 아녀자...? 석대원은 고개를 돌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운기를 조식하고 있는 진금영을 바 라본다. 저 요녀가 또 계교를 썼군. 하지만 도망치는 여자는 피투성이에 아리따운 용모이고, 쫒아온 남자는 칠 척 거구에 산도적 같은 상판이다. 누가 보아도 자신의 모습은 죄없는 여인을 뒤쫒는 무뢰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그는 문득 귀찮아졌다. 설명은 차후에 드리리다. 스윽... 석대원의 거대한 몸이 허깨비처럼 망아의 옆을 지나쳐 진금영에게로 다가간다. 소리없이 땅 위를 미끄러지는 제종술(提縱術)은 가히 일품. 하지만 눈 앞의 중 또한 허수아비가 아니다. 어딜! 망아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석대원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오른손 주먹을 반쯤 말아쥔 채 완만하게 뻗는다. 석대원은 한 줄기 은근한 기운이 자신에게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춘삼월 훈풍(薰風)과도 같은 부드러운 기운... 대수롭지 않게 왼손을 내밀어 그 기운을 물리치려 했던 석대원은, 어느 한 순간 깜짝 놀라며 신형을 뒤로 물린다. 음? 쿵. 그의 왼발 아래로 두 치가 넘는 족인이 새겨진다. 하지만 그의 좌반신을 압박하는 기운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급히 내력을 끌어 올려 그를 옭아매는 기운을 떨쳐낸다. 현묘한 수법이다! 망아가 발출한 허허롭던 첫 기운은 석대원의 저항과 만나는 순간 몇 배로 증가되며, 바위 덩어리 같은 묵직한 내력으로 짓눌러 온 것이다. 이 변화는 석대원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기에, 꼼짝없이 손해를 보며 물러설 수밖 에 없었다. 사람을 다짜고짜 해치려 하다니, 필경 선하지 못한 무리로다! 내 오늘 불법이 자비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마! 망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양손을 앞으로 내민다. 석대원은 미약한 기운이 주위를 둥글게 감싸는 것을 느낀다. 역시 지극히 허허롭다. 조금 전과 똑같은 상황... 방심할 수 없다. 내막을 모르는 외인이 방해하는구나! 석대원은 큰소리로 꾸짖으며 망아승을 향해 왼손을 휘두른다. 손바닥에 어리는 은은한 붉은 빛. 천하에 부수지 못할 것이 없다는 혈옥수가 전개된 것이다. 하지만 석대원은 누군지도 모르는 승려를 다치게 하고싶지 않은 생각에 절반의 힘은 뒤로 감추었다. 저 수법은 혹시? 하얀 눈썹 아래로 감춰진 노승의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석대원의 좌수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이 노승의 뇌리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 던 어떤 무공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펑... 큰 폭음과 함께 둘 사이의 공기가 크게 진동한다. 어억! 망아승의 흉칙한 눈이 놀라움으로 부릅떠진다. 그의 손바닥을 통하여 침투한 기운은 흉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차가운 한기에 진저리를 치며 물러선 그의 앞에는 두 개의 선명한 족인이 찍혀 있다. 이번에는 그가 손해를 본 것이다. 예사 도적놈이 아니군. 망아승은 체내의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린다. 회색 승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펄럭인다. 어디 이번엔! 망아승은 오른 주먹을 석대원을 향해 뻗는다. 화살같이 찔러오는 강렬한 권력은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강렬한 기운을 품고 있다. 석대원은 한 발자국 옆으로 피하며 혈랑검을 비스듬히 내민다. 검신을 통해 발생되는 접인력(接引力)이 사납게 부딛쳐오는 권풍을 끌어당긴다. 바로 진기 도인의 이화접목(以化接木)... 치이익... 경력이 뒤틀리는 파공음과 함께 그의 왼쪽에 있던 소나무가 밑둥째 부러져 나간다. 고명한 수법이로다! 옆에 선 고승이 나직히 감탄한다. 대단한 재주다! 하지만 금강나한권(金剛羅漢拳)은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금강나한권! 석대원은 망아의 외침에 찔끔한다. 소림승이시오? 왜? 소림이라면 마음이 켕긴다는 말이냐? 망아는 양 주먹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든다. 주먹의 진퇴에 따라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금빛은, 소림의 칠십이종절기 중 백보권(百 步拳)과 더불어 양대 권법으로 불리는 금강나한권이 극성으로 전개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퍼퍽. 석대원은 가슴에 둔중한 충격을 느끼고 두 발자국 물러선다. 상대가 소림승이라는 생각에 주저하다가 이 권을 얻어맞은 것이다. 충격으로 인해 내기가 진탕되자 억눌렀던 살심이 되살아난다. 혈안(血眼)... 지금 그의 눈빛은 곤두선 핏발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다. 이제 그만 쓰러지거라! 허공에 떠오른 망아의 몸이 가볍게 뒤집어지며 그의 주먹이 현란한 춤사위를 만든다. 금강나한권의 후삼식(後三式) 중 나한동귀(羅漢同歸)의 초식... 순간 망아는 자신이 핏물 속에 빠진 듯한 착각에 빠진다. 죽인다! 가슴 앞으로 끌어올린 석대원의 좌수가 내질러지자 밤하늘로 붉은 빛이 폭발한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혈옥수가 전개된 것이다. 그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는 망아의 웅장한 권력을 한순간에 뭉 개버린다. 망아! 노승이 대경하며 제자를 구원하여 했지만 이미 혈옥수는 망아의 가슴 앞까지 이르러 있다. 흑! 입으로 피화살을 토하며 뒤로 날아가는 망아... 일견하기에도 엄중한 내상을 입은 것 같다. 이 순간 석대원의 마음은 검붉은 살기가 지배하고 있다. 그의 살기는 사람이 어느 상황을 만나 생겨나는 살기와는 그 유(類)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저주받은 음지의 존재가 지니는 본연 그대로의 사이로운 기운이다. 흐흐흐. 석대원은 망아가 토해낸 피를 보며 악마처럼 웃는다. 감히 내 일을 방해하다니... 그러던 그의 웃음은 어느 순간, 단단하게 응고된다. 훌훌 날아가던 망아의 몸뚱아리가 한 지점에 이르자 자석에라도 끌린 듯 아래로 뚝 떨 어진 것이다. 그 자리에는 바람만 불면 날아갈 것같이 왜소해 보이는 노승이 서 있었다. 혈옥수... 주름살로 뒤덮인 노승의 입이 실룩거리며 신음 같은 한 마디가 새어 나온다. 노승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의 거한을 자세히 살펴본다. 스무이틀날의 반달은 두꺼운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데, 붉은 손에 붉은 검, 그리 고 금방이라도 활활 타오를 것 같은 두 개의 붉은 눈동자를 지닌 거인의 모습...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흉신악살(凶臣惡煞)의 모습이다. 한편 석대원 역시 노승의 신비스러운 수법에 감탄하고 있었다. 사나운 기세로 날아가던 망아를 가볍게 끌어당긴 것은 노승이 쥐고 있던 평범한 지팡 이였다. 이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수법은 비록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석대원은 노승의 한 수가 망아의 몸에 침투한 혈옥수의 힘을 당겨 풀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이 그의 살기를 더욱 증폭시킨다. 나무아미타불... 실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마기로다. 사악한 무공이 골수를 침범한 것인가. 노승은 내공을 돋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한다. 순간 석대원은 귀가 먹먹할 정도의 충격을 느낀다. 마치 쇠젓가락으로 유리를 긁어대듯, 노승의 목소리에 담긴 불문 사자후의 척사(斥邪) 의 능력이 그의 심혼을 여지없이 후벼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서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폭발 직전까지 갔던 살기가 서서히 의식의 휘장으로 덮여진다. 석대원은 그제서야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붉은 빛이 가신 그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나무에 기댄 채 무아지경에 들어있는 진금영의 모습. 운기조식이 막바지에 이른 듯, 그녀의 호흡은 점점 길어지고 또 고르게 깔리고 있다. 세상 없어도 저 계집은 살려둘 수 없다! 그 결심은 마성에 물든 살기가 진정된 후에도 변함없이 확고하다. 그는 지체없이 진금영을 향해 몸을 날린다. 시주는 잠시 멈추시오. 갑자기 깃털 같은 부드러운 기운이 석대원의 하체를 휘감아 온다. 또 방해하는 것인가... 석대원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혈랑검을 아래로 휘두른다. 폭죽처럼 하방을 향해 폭발하는 검화(劍花)는 사천 청류산에서 우낙을 격퇴할 때 한로 의 손을 빌어 시전되었던 청풍우화(淸風雨花)의 초식. 하지만 부드러운 기운은 혈랑검의 격렬한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밀려온 다. 바닥 없는 우물처럼 깊고도 깊은 힘은 도도(濤濤) 그 자체... 석대원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끔틀거린다. 하앗! 우렁찬 기합과 함께 좌보와선기(左步渦旋起)의 절정 신법이 석대원을 허공 위의 거대 한 팽이로 만든다. 맹렬한 회전력을 이용해 밀려오는 유력(柔力)을 뒤흔든 석대원은 수유지간(須臾之間) 에 드러난 실낱 같은 기운의 틈새를 비집고 혈랑검을 내리꽂는다. 허! 싸악. 노승의 경호성과 무엇인가가 잘려지는 듯한 소리는 동시에 울렸다. 땅 위를 구르는 것은 한 치 가량의 나무 토막. 노승이 쥐고 있던 지팡이의 끝부분이다. 회전을 멈춘 석대원의 신형이 나무 토막 앞에 내려선다. 놀라운 검법이오. 아까의 수법이 혈옥수라면... 이것은 분명 혈랑검법이겠구료. 노승은 석대원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방금 전 자신의 반야력(般若力)를 뚫고 들어온 검은 가히 쾌(快)의 심득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빨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수법은 혈랑검법 삼십육초 중 후육초의 하나인 투월궤장(透月軌藏) 이었기 때문이다. 이 투월궤장은 검을 크게 휘둘러 검봉에 가해지는 물리적인 힘을 극대화시키는 반면, 순간적으로 손목을 이용해 끌어내리는 검결이 교묘해, 그 속도가 비할 수 없이 빠른 수법이다. 범인이 시전한다면 과도한 검력을 견디지 못하고 손목이 탈골되기 십상인 난학(難學) 이 석대원의 손에 의해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절학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찌 협의도를 외면하고 살겁에 눈이 멀었는가! 노승은 지팡이를 천천히 치켜올린다. 지팡이의 끝부분이 지면으로부터 두 자쯤 떨어진 후, 노승과 지팡이는 밤풍경의 일부 가 된 듯 멈춘다. ...? 석대원은 기이함을 느낀다. 지금 노승에게선 아무런 기운도 풍겨나지 않는다. 한없이 깊게만 느껴졋던 부드러움도, 처음부터 노승의 주위를 감싸던 현유(玄幽)로움 도 없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석대원이 과거 어떤 사람으로부터 느꼈던 무엇인가가 노승에게 있 었다. <대원아, 너는 반드시 이것을 깨우쳐야 한단다. 하지만 네가 이 도리를 깨닫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 할런지...> 그것이 그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그는 노승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스님, 저 여인은 인명을 가볍게 여기는 마두(魔頭)입니다. 그녀를 살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시주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소이다. 하지만 사냥꾼도 품 안에 날아든 새는 쏘지 않는 법! 소승에게 도움을 청한 사람을 해치게 놔둘 수 없소이다. 석대원은 진금영이 있던 곳을 바라본다. 어느새 그녀는 사라지고 없다. 말짱 헛수고가 되었군... 다 잡은 목표물을 노친 분노 때문일까. 그의 눈빛이 조금씩 차가워진다.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던 살기가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왼손을 가슴 앞으로 끌어올린다. 좋소! 소생도 더 이상 손에 정을 두지 않겠소. 땅 위에 누워 있던 망아는 진기를 일주천한 후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을 깨달았다. 그의 내식을 공격한 혈옥수는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지만, 진원을 크게 상하기 전 그의 사부가 혈옥수의 기운을 해소시킨 까닭에 생각처럼 위중한 내상은 입지 않은 것이다. 사부님께선 지극히 연로하시다. 혹시라도 위험을 당하게 되면, 몸을 던져서라도 사부님을 지켜드려야지. 망아는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노승의 뒷전에 자리잡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석대원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진다. 그와 비례하여 그의 왼손은 불똥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시뻘겋게 변하고 있다. 어느 순간, 그는 가슴 앞으로 당겼던 왼손을 서서히 앞으로 내민다. 붉은 빛이 달무리처럼 그의 주위를 감싼다. 아미타불... 붉은 빛으로 뒤덮인 거한의 몸은 더욱 커 보인다. 노승은 주위를 휘몰아치는 진저리치는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늙은 몸으로 저 악마의 무공을 당해낼 수 있을까? 노승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그들 사이의 공기는 유형과 무형의 소리없는 전쟁 속에서 한 마디 신음도 뱉지 못한 채 산산히 부숴지고 있다. 비록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지만, 천하의 어떤 격렬한 사움보다도 흉험한 국면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후우! 앞으로 내밀었던 석대원의 왼손이 커다란 한숨과 함께 내려온다. 동시에 그의 주위를 감싸던 붉은 광채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 소생이 한순간의 혈기를 참지 못하고, 어른께 큰 죄를 지으려 했군요.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 석대원이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이 순간, 석대원은 살기를 이기지 못한 자괴감에 젖어 있었다. 혈랑검법과 혈옥수는 무서운 위력만큼 살기가 강하다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강호 출도 이전엔 단 한 번도 이 절학들을 극성(極成)으 로 시전한 적이 없었다. 출도 후에도 오직 단 한 번, 바로 화소에서 연벽제를 만났을 때뿐... 아마 한로가 그를 막지 않았던들 연벽제와 그, 둘 중에 한 명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 다. 그리고 조금 전도 그때의 상황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스스로 살기를 억제했다는 것. 그 까닭은 노승으로부터 읽어낸 허허로움이 과거 자신의 친인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노승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지팡이를 거둔다. 시주께선...? 무어라 말을 하려던 노승의 말이 도중에서 뚝 끊긴다. 전면의 관도위를 달려오는 몇 명의 사람들을 발견한 것이다. 갑자기 그들 중 한 명이 달려오는 속도를 더한다. 순식간에 장내에 도달한 사람은 바로 적오였다. 뒤이어 적송과 한로, 모용풍이 도착한다. 적오는 노승 앞에 대듬 엎드려 절한다.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다. 사숙조, 소손 적오가 문안 드리옵니다. 적오가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순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적오의 행동을 바라보던 노승이 놀라며 말한다. 적오? 범도(凡途)의 제자냐? 예, 그러하옵니다. 7 송도 또한 노승의 신분을 짐작한 듯 황급히 배례를 올린다. 소손, 적송이 사속조를 뵈옵니다. 이 사람은 범광 사백이 말년에 거둔 적송이라고 합니다. 적오의 소개에 노승은 자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허허, 범광이 제자 따윈 거두지 않겠다고 뻗대더니, 죽기 전엔 그래도 하나 두었구나. 석대원은 이제야 망아가 시전했던 금강나한권이 노승으로부터 연유되었음을 알아차렸 다. 그런 그를 향하여 만면에 기쁨의 미소를 가득 띠운 적오가 말한다. 석 시주, 이분이 바로 저희들이 뵈려 했던 본사의 대어른이시오. 광(曠)자, 비(非)자, 광비 사조이십니다. 十四章 龍鳳團 (1) 한 마리 푸른 새가 노을이 시작되는 서산을 향해 날아오른다. 단주(團主)께 전해다오. 이 조무삼(曹戊三)이 얼마나 남아답게 죽어갔는지를... 새의 힘찬 비상을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은 형용키 어려운 수많은 감정을 담고 있다. 불가항력에 대한 절망과 뜻을 이루지 못한 비분,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 청(靑)이처럼 날개라도 있다면... 조무삼은 죽음 때문에 뜻을 꺾을 정도로 나약한 사내는 아니다. 하지만 어떠한 굴강한 의지도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초월시키지는 못한다. 이 점은 조무삼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는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이러한 그의 마지막 달콤한 상념마저도 앗아간다. 씻... 청각이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파공음과 함께 조무삼의 머리 위로 무엇인가가 지나간다. 조무삼에게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끼이이... 창공 속의 한 점으로 변해가던 푸른 새가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요동친다. 조무삼의 머리 위를 스쳐 쏘아져간 물체가 새의 날개를 관통한 것이다. 청아! 새의 날개를 관통한 물체는 한 대의 화살이다. 조무삼의 마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는다. 백 장도 넘게 떨어진 창공 위의 날짐승을 명중시킨 궁술은 신기(神技)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살에 맞은 새 또한 예사 날짐승이 아니다. 곤두박질하며 떨어지던 몸을 바로잡으며 성한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 다. 날개에 화살을 꽂은 채로... 영물(靈物)이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굵은 목소리에 조무삼은 정신을 차린다. 그는 서서히 몸을 돌린다. 그곳에는 바위 같은 체격을 지닌 백의 호한이 서 있다. 백의 가슴 부위 새겨진 붉은 문양이 조무삼의 눈에 확 들어온다. 둥근 테두리 안에 가운데가 구부러진 천(川)자 모양의 화염문양(火焰文樣)... 백련교(白蓮敎)를 전신(前身)으로 한 남패(南覇) 무양문(武陽門)의 독문 표기이다. 네가 쏘았느냐? 조무삼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다. 백의 호한은 대답 대신에 손에 쥐고 있는 활을 툭 친다. 긍정의 몸짓이다. 조무삼은 사내가 쥐고 있는 활을 바라본다. 양쪽 끝 활줄고리에 금빛 까치가 조각된 강궁(强弓)... 그것은 궁술의 명인으로 알려진 어떤 사람의 상징과도 같은 병기이다. 범인(凡人)은 활줄을 걸 수도 없을 정도로 억세 보이는 저 금작궁(金鵲弓)의 주인은, 한 자루 활로써 궁술은 물론 창술과 편술까지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는 호걸이다. 관산귀전(貫山鬼箭) 대적용(大迪容)... 조무삼은 그 이름을 씹듯이 내뱉는다. (2) 새가 하늘을 날고 있다. 새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푸른 깃털로 뒤덮여 있다. 눈썰미가 좋은 사냥꾼이면 한 눈에 그 새가 매, 그것도 요동(遼東)의 영물인 해동청 (海東靑)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구우... 매는 고통스러운 울음을 길게 뱉는다. 매의 왼쪽 날개엔 한 자루 화살이 관통해 있다. 한 번 날개짓을 할 때마다 깃털과 함께 선연한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는 비상을 멈추려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수단이기라도 하듯. * * * 성(城). 한 아름이 넘는 바위를 기초로 하고 흙과 자갈을 쌓아 성곽을 두른 후 그 바깥쪽에 굵은 통나무를 층층이 쌓아 올린, 암(岩)-목(木)-토(土)의 조립성(組立城)이다. 높이 이 장, 둘레 이백 장의 크지 않은 규모. 성이라기 보다는 작은 요새(要塞)에 가까울 것이다. 요새의 북문(北門). 대나무로 만들어진 망루에는 두 명의 사내가 서 있다. 단주(團主)님! 혹시 무양문 놈들이 십리곡(十里谷)에 당도한 것은 아닐까요? 술시(戌時 : 오후 5시 ~ 7시)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는 것은 뭔가 이상합니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른 호리호리한 몸집의 사내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내가 두른 두건에는 봉황새 한 마리가 금실로 생생하게 수놓아져 있다. 글쎄... 하지만 예상보다 이틀이나 빠르지 않나? 듣기 좋은 중저음의 음색으로 대답하는 사내는 아래 위로 짙은 청색 무복을 입고 있다. 청색 무복 가슴 부근에는 용 한 마리가 금실로 수놓아져 있다. 계산한 것보다 하루나 이틀 먼저 도착할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고수인 것을 감안하고, 또 도보가 아닌 마필을 사용한다면 말입니다. 호리호리한 사내, 화국진(華國珍)은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 기색이다. 청색 무복을 입은 사내는 한동안 말없이 북쪽 하늘을 바라본다. 문득, 그가 입을 연다. 전서구(傳書鳩)를 준비하게. 십리곡에 있는 조(曹) 형님을 어서 철수시켜야겠어. 예! 화국진은 망루 아래로 달려간다. 어쩌면 천추의 한을 남길 수도 있구나! 청색 무복을 입은 사내는 나직히 혀를 찬다. 왜 적들이 일찍 도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던가... 십리곡은 이곳에서 이백 리 가량 떨어진 골짜기이다. 이를테면 이곳으로 오기 위한 관문인 셈인데, 산세가 험준하고 길목이 좁아서 적은 인 원으로 많은 수의 적을 방비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요충지이다. 평소 그곳에는 사내의 의형(義兄) 조무삼이 백여 명의 단원을 이끌고 상주하고 있다. 무양문도들이 이곳을 공격하기 위해 온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 사내는 조무삼에게 철수 하여 합류하자는 연락을 보냈다. 하지만 조무삼은 십리곡의 지형에 의지하여 적을 막겠노라며 그곳을 떠나지 않았던 것 이다. 하기야 지리의 유리함과 조무삼의 무공을 감안하면 천군(千軍)이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무양문이다. 무양문이 수천 리 떨어진 이곳으로 거병(擧兵)했다면, 시시한 놈들을 보냈을 리가 없 다. 사내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는다. 무양문은 신무전과 더불어 강호 제일을 다투는 문파이다. 타 문파와의 연대없이 단독으로만 비교한다면 신무전 또한 무양문의 적수가 될 수 없 을지도 모른다. 무양문주 서문숭(西門崇)은 어쩌면 이번 출정에 그가 자랑하는 호교십군(護敎十軍) 중 하나를 파견했을 수도 있다. 한 명 한 명이 이미 신화가 되어버린 호교십군을... 단주님! 망루 아래에서의 외침이 사내의 깊은 상념을 깨뜨린다. 청색 무복을 입은 사내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곳에는 화국진이 손에 전서구를 든 채 서 있다. 그는 북녘 하늘을 가리키며 외친다. 청이가 옵니다! 사내는 반사적으로 화국진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저물어가는 노을 속으로 푸른 점이 되어 날아오는 한 개의 물체가 있다. 바로 조무삼이 키우는 새매이다. 일순 사내의 눈이 커진다. 그의 예리한 안력은 새매의 한쪽 날개를 관통한 한 대의 화살까지 발견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리곡의 상황을 대변해준다. 아뿔사!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큰 탄식을 내뱉는다. (3) 급조한 것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건물은 푸른빛이 감도는 대나무로 벽과 지붕을 올린 것이다. 지금 삼십 평 남짓한 건물 내부는 많은 수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차림을 한 사람들은 한 개의 큰 탁자를 둘러앉아 있다. 탁자의 주인석에는 조금 전 망루 위에 서 있던 청의를 입은 사내와 유백색 경장이 잘 어울리는 삼십대 여인이 앉아 있다. 여러분, 잠시 주목해 주십시오! 청의 사내는 손을 들어 중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사내의 이름은 강이환(姜易煥). 삼십육 세. 사내는 어디에서라도 눈에 번쩍 뜨일 만큼 잘생긴 용모의 소유자이다. 눈썹은 짙고 가지런하며, 콧날는 길고 곧다. 약간 각진 강인해 보이는 턱선은 남성의 매력을 물씬 풍겨내고 있다. 그는 장내가 정돈되기를 기다린 후 다시 입을 연다. 청이가 가져온 소식은 불행히도 안 좋은 것입니다. 십리곡의 형제들은... 불행히도 무양문도들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중인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조무삼, 조 형님의 생사는 현재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형님의 성품으로 보아... 강이환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사람들은 길게 한숨을 쉰다. 그들 모두 조무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입호(立虎) 조무삼. 당년 사십칠 세. 그는 오 년 전만해도 어느 문파에도 적(籍)을 두지 않고 천지간을 홀로 유랑하던 낭 인이었다. 오 년 전 어느날, 운남(雲南)의 오지를 유랑하던 그는 인생에 큰 전환을 맞게 되었으 니 바로 강이환과의 만남이다. 그들은 금방 의기투합하여 백년지기처럼 친해졌고, 제단에 백마의 피를 뿌리며 결의형 제를 맺은 것이다. 조무삼은 무공도 고강하거니와 강직함에서는 무림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위인이 다. 호랑이 같은 기상 조차 그에겐 걸맞지 않는다고 하여, 네 발로 기는 호랑이가 아닌 서 있는 호랑이[入虎] 라는 별호가 붙은 것만 보아도 그의 기개가 얼마나 굳고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조무삼이 지키던 십리곡이 무양문에 의해 함락된 것이다. 조무삼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강이환은 그가 살아있을 확률이 거의 없음 을 안다. 수족이 떨어지는 아픔이 가슴을 짓누르지만, 마냥 슬퍼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강이환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생사를 책임져야 할 우두머리이기 때문이다. 십리곡은 이곳에서 이백리 길입니다. 지세가 험하여 마필이 쉽게 행군하지 못할 테니, 그들이 감히 야습을 감행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모든 것을 미루어 무양문의 공격은 아마도 내일, 아니면 모레쯤으로 예상되는군요. 단주님!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 중 한 청년이 일어선다. 이마에 봉황이 수놓인 붉은 두건을 쓴 청년... 망루 위에서 강이환과 대화를 나누던 화국진이다. 서문숭의 졸개들은 수가 얼마나 됩니까? 청이가 가져온 서신에는 오백 명이 넘는다고 한다. 화국진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강이환의 옆자리에 앉은 여인이다. 그녀의 이름은 화반경(華盤瓊), 강이환의 아내이자 화국진의 누이이기도 하다. 유백색 경장의 가슴 부위에는 봉황 한마리가 붉은 실로 수 놓아져 있다. 그것은 강이환이 입은 청의에 수 놓인 용 문양과 잘 어울린다. 적도의 수가 오백이 넘는다는 그녀의 말은 장내를 소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돌연 상석에 앉아 있던 노인 하나가 껄껄거리며 웃는다. 오백이 넘는다고? 으하하! 이 오지에 그렇게 많은 수를 보내다니 과연 서문숭다운 대단한 위세로군! 그래, 우두머리는 누구라던가, 강 단주? 사람들은 그 노인을 바라본다. 당당한 체격과 곧은 자세,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은 노인을 오십대 정도로 보여지게 만 든다. 하지만 그의 실제 나이는 일흔이 넘는다.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것이다. 노인의 차림새는 실로 괴이했다. 연한 자주빛 도포 한복판에는 커다란 태극도형(太極圖形)이 수 놓아져 있다. 이 태극도형을 중심으로 한 여덟 방위에는 팔괘(八卦)를 상징하는 소성괘(小成卦)가 새겨져 있어, 커다란 태극기(太極旗)를 뒤집어쓴 형국이다. 노인의 몸에 달린 태극문양(太極文樣)은 거기서 그치지 않아, 높이가 한 자가 넘는 운 함관(雲函冠)에도 작지만 선명한 태극도형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음양팔괘(陰陽八卦)에 환장한 복자(卜者) 같은 차림의 노인.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괴이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앉은 의자 옆에 놓인 한 개의 물 건일 것이다. 네모 반듯한 형상에 네 개의 다리가 달린, 그래서 만약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하반 (下盤)이 쓸데 없이 두꺼운 밥상처럼 보이는 물건... 하지만 한 번이라도 바둑을 두어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그 물건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둑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둑판은 노인에게 있어 친자식만큼이나 소중한 물건이다. 태극과 팔괘가 요란스럽게 새겨진 도포, 그리고 바둑판... 강호인 중에서 이렇게 괴상한 행장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밥보다도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역(易)의 원리를 이용한 독특한 기술(棋術)로 당대의 국수(國手)인 고운선생 (孤雲先生)을 꺾은 적도 있는 사람.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바둑에 미친 자, 기광(棋狂) 과추운(過秋雲)이라 부른다. 그리고 또한 기(棋) 화(火) 취(醉) 통(通) 조(造), 강호오괴(江湖五怪)의 첫째로 꼽기 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약간 문제입니다. 서문숭의 둘째 제자인 왕삼보(王三寶)와 호교십군 중에서 삼군(三軍)과 오군(五軍)이 오고있다는군요. 순간, 과추운의 안광이 강렬해진다. 노인의 눈빛을 마주 대한 강이환은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강렬한 태양을 바라본 것과 같은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그것은 오십여 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피와 죽음을 술과 안주로 삼아 살아온 강호의 명숙(名宿)이 보여주는 이력(履歷)의 편린일 것이다. 내가 매의 날개에 꽃힌 화살을 보고 오군장(五軍將) 대적용(大迪容)이란 놈이 온 줄 알았지. 끝이 갈라진 금작시(金鵲矢)를 쓰는 놈은 중원 천지에 그놈뿐이거든. 하지만 왕삼보와 초당(楚堂)까지 오다니... 서문숭이 이번엔 단단히 결심했나보군. 과추운의 말에 화반경의 우측에 앉은 오종종하게 생긴 도사가 무거운 안색으로 말을 꺼낸다. 왕삼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초당이라면 상대하기 쉽지 않겠군요. 헌데 조금 이상합니다. 그 노마두(老魔頭)는 여간해선 외부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볼품없는 외모와는 달리 그의 내력은 대단한 것이다. 소림과 함께 무림을 영도해온 무당파(武當派)의 장문사제이기 때문이다. 현 무당파의 장문인이자 태극검법(太極劍法)의 달인으로 삼십여 년 전부터 명성을 드 날린 현유자(玄柔子)에게는 세 명의 사제가 있었다. 강호인들에게 무당삼숙(武當三叔)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하나같이 수행이 깊고 검술이 고명해, 그 명성이 사형인 현유자에 비해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 우거지상을 하고 말하는 도사는 무당삼숙 중 둘째인 현송(玄松)이다. 그와 그의 사제인 현수(玄修)는 오래 전부터 강이환과 화반경을 도와주고 있었다. 이곳은 토벽이 연약하고 장소가 협소하여 많은 적을 맞아 싸우기에 적합하지 않습니 다. 제겐 두 가지 생각이 있는데... 강이환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린다. 과추운은 씨익 웃으며 내심 생각한다. 필경 함께 싸우자는 얘기일 텐데 저리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것을 보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싸움에 임했다는 다짐이라도 받고 싶은 게로군. 소심한 친구 같으니라고... 강이환은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하나는 일단 그들을 피하여 형산(衡山)의 험한 산세 속으로 숨는 것입니다. 다행히 과거 소생의 사문이 만들어 놓은 산채(山砦)들이 여러 채 남아 있으니, 일신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상책(上策)이겠지요. 강이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좌중에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우뢰와 같은 목 소리로 외친다. 만부당한 말씀이요, 단주! 조(趙) 형님의 생사도 분명치 않은 마당에 그들에게 꼬리를 보일 수는 없소이다. 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그 더러운 마귀들을 피해야 합니까? 맞서서 싸우다 물리치면 그만이요, 그렇지 못하면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생명을 버리 면 그만 아니겠소? 분노를 참지 못하고 씨근덕거리는 사람은 강이환의 부하이자 사제인 여범(呂範)이다. 여범에게는 호랑이처럼 사납게 생긴 얼굴과 천근정(千斤鼎)을 들어올리는 천력 때문에 호면대력신(虎面大力神)이라는 별호가 붙어다닌다. 그의 목소리는 그의 생김새와 잘 어울린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판가름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한가지 분명히 불행한 점 은 그의 두뇌 또한 생김새와 무척이나 어울린다는 것이다. 여(呂) 사제의 뜻이 곧 제 뜻이오만,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드리는 말씀이오.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모이신 많은 영웅들의 생명은 결코 헛되이 상하게 해서는 안 될... 강이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탕, 소리와 함께 현송 옆에 앉은 도사가 벌떡 일어 선다. 그가 앉았던 의자의 팔걸이는, 그의 장력에 의해서 가루가 되어 있었다. 강 단주께서는 우리들을 외인 취급하지 마시오! 그리고 우리는 무양문의 폭거에 투쟁하기 위해 모인 것이지, 강 단주 한 몸을 돕고자 조력자로 모인 것이 아니외다! 우리의 안전을 걱정해서 적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 얼음가루가 풀풀 날릴 것 같은 냉랭한 일갈을 터뜨린 도사, 무당삼숙 중 막내인 현수 이다. 주먹을 쥔 채 노기를 감추지 않는 그는 사형 현송과는 달리 이목구비가 시원스럽게 생 긴 호걸이다. 단지 흠이 있다면 앞으로 내밀어 흔들고 있는 기이한 형태의 주먹. 그의 왼손 주먹에는 엄지와 인지 두 개의 손가락만이 온전하게 달려 있고, 나머지 세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는 흉측한 살덩어리로 뭉개져 있다. 예리한 병기에 잘린 것이 아닌, 어떤 강한 힘에 의해 으스러진 듯한 몰골이다. 그리고 이 상처는 그로 하여금 무양문에 대해 자다가도 이를 갈게 만든 원한의 뿌리가 되었다. 현수의 노갈에 장내는 잠시 조용해졌다. 상석에 앉아있던 과추운이 천천히 일어선다. 그의 눈은 강이환에 고정되어 있다. 우리는 이미 생사를 용봉단(龍鳳團)과 함께 하려 결심했소. 강 단주께서는 더 이상 괜한 말씀으로 우리를 섭섭하게 만들지 마시오. 용봉단. 바로 강이환과 화반경이 이끌고 있는 무리의 명칭이다. 과추운의 딱부러진 말에 용봉단의 인물들은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이곳에 모인 조력자들, 과추운과 무당이숙, 그리고 강호의 여러 군협(群俠)들은 용봉단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主)와 객(客)의 교감. 이것이 바로 강이환이 짧막한 말 몇 마디로 얻으려 한 효과인 것이다. 강이환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포권하며 하례한다. 여러분들의 협의도(俠義道)에 여기 앉은 강모(姜某)는 진심으로 탄복했습니다. 그러면 소생이 생각한 두번째 방책을 말씀드리지요. 이 성채의 서남쪽으로 십여 리 가면 낭리곡(囊裏谷)이라는 협곡이 있습니다. 그곳의 지형은 지극히 험준하여, 암목(岩木)을 굴리고 화기를 매설하여 적을 방어하기 에 매우 적당합니다. 여러분들의 의향은 어떠신지? 하하, 그 의견이 매우 좋군! 화기라면 노부의 특기이니 맡겨만 주게. 근자에 개발한 지충화폭(地沖火爆)의 위력을 시험할 장소가 없어 걱정이었는데 잘 됐 군. 과추운의 옆자리에 앉은 또 하나의 노인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소매가 없는 단삼을 입어 앙상한 팔뚝을 휑하니 드러낸 노인이다. 오 척 단구의 작은 체격에 맨질맨질한 대머리, 툭 튀어나온 뻐드렁니를 보고 있자면, 아마 누구라도 저절로 웃음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노인이 화기 제작에 있어서 강호 제일이라는 만화부(萬火父) 이개(李介)임 을 아는 사람은, 그 초라한 외모를 비웃지 못할 것이다. 이개는 초석과 유황의 독창적으로 배합하여 폭발력이 강한 화석(火石)을 만드는데 달 인이다. 또한 그는 무엇 하나 즐기는 것 없이 오직 폭약만을 가까이한다 하여, 세인들은 그를 강호오괴 중 화(火)의 일인으로 꼽고 있다. 킬킬, 이가가 또 발작이 도졌구만! 하지만 이번엔 꽤 재미있을 것 같군. 어디 무양문 아이들을 데리고 불장난이나 해볼까? 과추운은 손뼉을 치며 웃는다. 예끼! 노부의 고매한 작품을 불장난이라니! 네놈은 어디 정자나무 그늘이나 찾아가 그 잘난 바둑이나 두고 있거라. 무양문 녀석들은 여기 계신 형님께서 적당히 구워줄 테니. 이개는 과추운을 향해 주먹을 흔든다. 장내의 사람들은 두 노인의 농지꺼리를 들으며 마음이 든든해 지는 것을 느낀다. 강이환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큰 소리로 말한다. 자, 여러분! 그러면 서둘러 저녁을 지어 먹고 움직입시다. 이곳을 정리하고 낭리곡에 매복을 설치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 * * 늦은 밤, 토성의 남문이 활짝 열리고 여러 마리의 마소가 끄는 수레가 남쪽으로 굴러 갔다. (3) 삼사 년 전부터 중원 남부 무림은 오랜 기간 유지해 온 평화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남의 패자(覇者)인 무양문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온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숨은 용과 같이 은밀했고, 발톱을 세운 표범처럼 사나웠다. 그들의 기세는 놀라워 남패 무양문의 막강한 힘으로도 쉽게 진압하지 못했다. 그 단체의 지도자가 세간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지도자는 한 쌍의 부부였는데, 이들은 놀랍게도 사십 년 전 서문숭에 의해 멸문당한 문파들의 후예였던 것이다. 추뢰검룡(追雷劍龍) 강이환이 이끄는 형산검문(衡山劍門)과 봉소천녀(鳳簫天女) 화반 경이 이끄는 화가(華家)... (註 : 중국에서는 결혼한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관습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문파간 계보의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혼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 기로 한다.) 사람들을 긴장시킨 것은 그 두 문파의 세력이 대단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명문이라고 불리는 제파(諸派)들과 백련교를 전신으로 하는 무양문 사이의 해 묵은 원한이 이 일을 계기로 폭발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의 염려는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대문파 중 형편없이 쇠잔한 화산파를 제외한 소림, 무당, 개방의 인물들이 공공연하 게 강이환 부부에게 협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부부가 마치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준다고나 할까. 더구나 무엇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명문대파의 무림인들에게는 서문숭에게 당한 십년봉문(十年封門)의 치욕이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굵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명문대파들의 암중 지원에 힘입어 강이환과 화반경이 이끄는 세력은 자연스럽게 그 위 세를 더해갔다. 사람들은 한 쌍의 용과 봉이 이끄는 이들을 가리켜, 용봉단(龍鳳團)이라고 불렀다. * * * 형산(衡山)은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으로 불린다. 하지만 장사(長沙)의 악록산(岳麓山)에서 형양(衡陽)의 회안봉(回雁峯)까지의 소위 형 산칠십이봉(衡山七十二峯)은, 나머지 사악(四嶽)을 두루 유람한 사람에게는 실망만을 안겨줄 것이 분명하다. 산세가 특별히 웅장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준미수려한 경처(景處)가 많은 것도 아니 기 때문이다. 형산이 오악 중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마도 형산이 위치한 호남성(湖南省) 사람 들의 자존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지역 대부분이 평야로 이루어져 예부터 곡창(穀倉)으로 이름높은 호남성에서 북 쪽 산간지역과 같은 험준한 산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제법 쓸만한 것이 있다면 형양 북쪽 축융봉(祝融峰)을 위시한 몇몇 봉우리 군(群)... 문제는 호남성 사람들의 부(富)에 있었다. 호남성 사람들이 쌀과 비단으로 대변되는 중국 상로(商路)에 영향력을 행세하기 시작 한 것은 8세기 이전부터였다.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 것이어서 이들의 입김은 재계(財界)뿐아니라 정치 문화 구석구석에 미쳤고, 자연히 내노라하는 관인이나 시인묵객들은 호남이라는 지역 자체 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녀의 피부에 대한 비유로 수많은 시구에 등장한 형산백옥(衡山白玉 : 실제로 백옥은 커녕 변변한 옥이 산출되었다는 자료도 찾기 어렵다)이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추측은 어디까지나 호사가들의 것. 천룡, 백호, 주작, 현무, 등사가 상징하는 오방론(五方論)에 입각해 중토의 산세를 구분한다면, 남방의 주작 위(位)에 있을만한 산은... 사실 형산뿐이다. 칠월 그믐이면 여름이라고 보기 힘든 계절이다. 더욱이 검흔(劍痕)같이 가늘어진 그믐달이 뜬 밤이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지막한 야산에 서 있는 사내는 콱콱 조여오는 후덥지근한 열기에 옅은 짜증을 느낀다. 하기야 강남의 오뉴월 햇빛은 오리알도 익힌다고 했다. 그러한 강남 중에서도 남쪽이라고 할 수 있는 형산 중턱 고원지대니, 칠월 그믐이라도 서늘한 초가을 청풍(淸風)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손부채를 만들어 앞가슴께에 활랑거리던 사내는 스멀거리는 더위를 더 이상 참기 어 려웠던지 입고 있던 흑의 단삼을 벗어버린다. 얇은 천으로 만든 속옷 차림이 되어버린 사내는 한결 시원하다는 듯이 크게 심호흡을 한다. 야산 아래로 보이는 숙영장(宿營場)이 사내의 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천막들이 펼쳐진 가운데 곳곳에 휘황한 화톳불과 독충을 쫓기 위해 태우는 약연(藥煙)이 매우 번잡하게 보인다. 사내는 하늘을 바라본다. 과연 온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군. 나직한 혼잣말. 문득 오늘 낮에 벌어졌던 싸움이 떠오른다. 우두머리의 이름이... 조무삼이라고 했던가. 쓰디쓴 웃음이 입술을 비집는다. 대단한 사내였어. 대(大) 군장의 금작시에 한쪽 눈이 꿰이고 난전 중에 두 팔 모두 잘려나간 와중에서도 그는 자는 자신의 시신을 밟지 않고는 고지를 내줄 수 없다는 듯이 굳세게 버티고 서 있었지. 수없이 많은 화살이 그를 고슴도치와 같이 만들었을 때에도 그의 무릎은 꺾이지 않았 다. 무엇인가! 그를 그렇게 세울 수 있는 힘은... 어디선가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사내를 잠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다. 하지만 사내는 곧 상념의 세계에 남겨둔 끈을 찾아 쥔다. 과연 우리 무양문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선연한 적대감을 유발시킬 정도의 악당(惡 黨)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사내는 고개를 가볍게 흔든다. 무양문은 악의 무리가 아니다. 사부님께선 얼마나 강호세사에 대해 공평하신가. 무양문은 세상을 뒤집어 엎을 힘이 있음에도 군소 방회와의 교류에서 결코 무리한 억 지를 부리지 않는다. 무양문은 모든 일에 있어서 공평하게 중재, 해결한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 게다가 제갈 숙부를 생각하면... 제갈 숙부! 사내는 마음 한 구석이 훈훈해짐을 느낄 수 있다. 출정 전에 형산검문(衡山劍門)의 역검(逆劍)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던 제갈 숙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내의 우상이었다. 진정한 대장부였다. 하지만, 하지만 오늘 그 조무삼이란 자의 행동은... 사내의 생각이 단절된다. 뒷켠에서 풀잎 밟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신형을 돌린다. 여기 계셨구료, 왕(王) 공자! 다가온 사내는 눈처럼 흰 무복을 입은 가슴이 떡 벌어진 장한이다. 어깨엔 화려한 금작화세궁(金鵲畵細弓)... 조무삼의 면전에서 신기에 가까운 궁술을 보여준 바 있는 바로 그 사내였다. 무양문 호교십군 중 서열 오위 대적용. 호교십군이라는 이름은 송나라 휘종 때 당시 백련교(白蓮敎 : 明敎) 교주인 방납(方 臘)이 거병(擧兵)했을 때 처음 사용한 강남십이신(江南十二神)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랬던 것이 사(四)를 상수(祥數)로 여기던 몽고인들의 세상이 오자 열둘은 사의 배수 라 하여 그 중 둘을 버린 열로 고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문파 내에서 고유한 호칭을 이어가는 예는 많았다. 소림의 십팔나한(十八羅漢)이나 무당의 진무칠검(眞武七劍), 개방의 용호풍운(龍虎風 雲)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호교십군이라는 명칭이 주는 느낌은 이들과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하나하나가 이미 강호에서 신화처럼 되어버린 가공할 무위와 서문숭에 대한 종교적인 맹신, 그리고 그들은 바로 남패 무양문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호교십군, 그 중 다섯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대적용이다. 한 자루 화살을 쏘아 능히 암석을 꿰뚫는다 하여 관산귀전(貫山鬼箭)이라는 별호가 붙 어 다닌다. 대 군장이셨군요.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밤바람을 쐬던 중입니다. 웃으며 대답하는 청년. 지금까지 상념의 늪을 허우적거리던 사내는 서문숭의 둘째 제자인 왕삼보였다. 금년 나이 스물여덞. 중원 육로 무역의 이 할을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경(北京)의 거상(巨商) 왕 고(王庫)의 둘째 아들이다. 열두 살에 서문숭의 제자로 입문한 후, 어떤 수련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십 세를 전후하여 강호로 나왔을 때에도 무양문의 둘째 제자라기 보다는 거상 왕고 의 아들로서 더 유명해진 팔자 좋은 도련님이었다. 이름붙이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병기가 한 자루 묵오철필(墨午鐵筆)임에 비추어 묵 오군자(墨午君子)라고 부르지만, 무인으로서 왕삼보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아마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몇몇 지음(知音)들을 제외한다면. 산세가 넓지는 않지만 몇몇 봉우리는 제법 험준하군. 강가(姜哥) 놈이 산 속으로 숨는다면, 찾아내기가 쉬울 것 같지 않소이다. 대적용은 근처의 돌 위에 주저앉으며 말한다. 그렇겠지요. 그가 숨을 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오늘 낮의 전투에서 보인 기세로 미루어 숨을 것 같지는 않군요. 숨지 않고 덤벼만 준다면 단숨에 깔아뭉개 버리지. 하하! 대적용은 호탕하게 웃는다. 왕삼보는 씁쓸하게 웃는다. 헌데, 대 군장께서는 이번 출정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대적용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한다. 왕삼보가 용봉단의 토벌에 대해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적용이 대답이 없자 왕삼보는 말을 이어나간다. 저는 아무래도 마음내키지 않습니다. 이번 출정은 오랜 시간을 묻어둔 구원(舊怨)이 개입된 것 같아 모양새가 썩 좋지 않습 니다. 차라리 이유없이 살생을 저지르는 혈랑곡도들을 토벌하는 출정이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음, 왕 공자도 문주께서 용봉단에 대해 그간 얼마나 양보를 하셨는지 아시지 않소? 그들이 비록 협행을 표방하여 강호인들에게 인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장(張) 공자가 강이환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문주께서 노하신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대적용은 조용한 음성으로 왕삼보의 말에 반박한다. 왕삼보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제 장민(張旻)의 시신이 떠오른 것이다. 올해 초 외유를 나갔던 장민은 두 달 전에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를 호위했던 삼지쾌도(三指快刀) 초가뢰(楚街賴)의 증언에 의하면, 장민은 운남을 지나던 중 용봉단의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왕삼보는 수족이 떨어져 나간 듯한 슬픔을 느꼈다. 장민은 그 폭급한 성미와 잔인한 손속으로 인혈사(人血蛇)라는 흉명이 붙어 있었지만, 그래도 왕삼보에게는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동고동락한 사제인 것이다. 서문숭의 대제자이자 의자(義子)이기도 한 서문복양(西門福陽)과 왕삼보는 장민의 시 신을 세밀히 검사하였다. 시신은 사나운 짐승에게 할큄을 당한 듯, 양쪽 어깨의 결분혈(缺盆穴)이 뜯겨져 있었 다. 또한 왼쪽 가슴에는 관통당한 검상이 있었는데 상처 주위의 옷과 살갗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검상에 화기가 서려있는 것은 형산파의 독문절기인 추뢰검법(追雷劍法)의 특징임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왕삼보는 오랜 시간을 침묵하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기이한 생각이 듭니다. ...? 우선 발해(渤海)로 간다던 장 사제가 남쪽 끝인 운남에서 변을 당했다는 것이 이상합 니다. 또, 장 사제는 평소 조심성이 많아서 항상 요대 속단에 열두 개의 금마문독침(禁魔蚊 毒針)을 감추고 다녔는데, 시신을 살펴볼 때에는 그것이 그대로 들어있더군요. 아무리 기습이라고 해도 구명비기(救命秘器)인 그것을 써보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당 했다? 장사제의 무공은 그 정도로 녹녹하지 않습니다. 대적용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골치 아픈 추리를 좋아하지 않는 그로서는 그런 시시콜콜한 것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듣고 보니 조금 이상하군. 대적용의 말에 왕삼보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그 일에 대한 정밀한 조사를 제갈 숙부께 부탁드렸습니다. 제갈 형님? 음, 형님께서 조사하신다면 분명 모든 의혹이 풀리겠지. 워낙에 사려 깊고 조심스러운 분이시니까. 왕삼보가 말한 제갈 숙부라는 사람은 바로 호교십군의 수장인 제갈휘를 가르킨다. 제갈휘는 무양문 내에서 십군지수(十軍之首)라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 之上)의 직위를 지니고 있다. 비록 백련교도가 아닌 탓에 많은 무양문도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기도 하지만, 제갈휘의 일신능력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헌데, 그렇다면 왕 공자께선 이번 출정에 왜 자원하셨소? 대적용이 심드렁한 어조로 물음을 던진다. 별로 마음에도 없는 싸움인데 자원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투이다. 글쎄요... 왕삼보의 이마가 살짝 지푸려진다. 저는 강이환이란 사람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허! 대적용은 가볍게 코웃음을 친다. 사람 사귀기를 아무리 즐긴다고 한들, 강이환은 자네의 적이야, 이 사람아! 피와 비명으로 뒤범벅된 아수라장 속에서 술잔을 나누며 군자의 낭만이라도 찾아보겠 다는 얘긴가? 왕삼보는 대적용의 마음을 짐작하는 듯이 어색하게 웃는다. 대 군장께선 소생의 어리석음을 비웃으시겠지만, 강이환도 인물이라면 인물! 그런 자와 겨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 자의 추뢰검법은 무섭습니다. 왕삼보는 묵묵히 고개를 끄떡인다. 추뢰검법. 형산검문의 삼백 년 적공(積功)이 응집된 무서운 수법이다. 강호의 제(諸) 검법과는 다르게 역검(逆劍)을 가미한 수법이 독랄하며, 극성에 이르면 검왕 연벽제의 검뢰대구식(劍雷大九式)과도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양강검법(陽剛劍法) 의 정화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를 만나보면 소생의 궁금증이 많이 풀릴 것 같습니다. 왕삼보는 다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간다. 어쩌면 장 사제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풀 수도 있겠지요. (4) 장 공자가 강이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노부가 보증하오. 왕삼보와 대적용의 등 뒤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지척에서 들린 음성인데도 그들은 누군가가 접근한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다. 대적용의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 예의도 모르는 영감탱이!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린다. 오시면 오셨다고 기척이라도 하실 것이지, 초 노사(楚老師)!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자그마한 노인이 공방대를 뻑뻑거리며 서 있다. 헤헤, 이 늙은이야 원래 몸이 가벼워서 발소리가 안 나지. 어린아이와 같이 깔깔거리는 노인, 그 행색이 실로 괴이하다. 상투를 틀어 조그만 동자관(童子冠)으로 묶어 놓은 머리모양새 하며, 명절에 아이들 이 입으면 딱 어울릴 법한 울긋불긋한 색동옷, 붉은 수실이 달린 당혜(唐鞋). 피부는 아이의 그것과도 같이 팽팽하지만, 눈주위로 감도는 검붉은 살기는 잔인한 심 성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렇듯 괴기로운 분위기의 노인, 그가 바로 호교십군 중 세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 는 불로동자(不老童子) 초당이다. 그는 동자공(童子功) 중에서도 사이하기로 이름난 마단동자공(魔丹童子功)을 수련해 일흔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외모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뒤에서 가만히 듣자하니, 왕 공자께서는 조카놈의 말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오. 초당의 말투엔 못마땅한 기색이 담겨 있다. 장민의 죽음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인 초가뢰는 바로 초당의 생질이다. 왕삼보는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 사제의 죽음으로 마음이 아파서 하는 말이니 초군장께서는 크게 괘념치 마십시오. 번쩍. 초당의 시선이 왕삼보의 얼굴에 꽂힌다. 송곳처럼 예리한 시선이다. 대장부 답지않게 말을 돌리지 마시오! 가뢰 녀석이 못마땅하기로서니 그런 식으로 매도하니, 에잉! 초당은 아니꼽다는 듯이 혀를 찬다. 평소 초당을 탐탁찮게 여기던 대적용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일어섰다. 초 노사! 남의 얘기를 엿듣고서 이러쿵저러쿵 빈정거리다니! 기분이 과히 유쾌하지 않소이다. 대적용이 바위에서 일어서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이 사람들을 비방할 궁리나 하다가, 남에게 들키니 뒤끝이 캥기시나? 초당이 빙글빙글 웃으며 빈정거린다. 섬뜩한 일은 그의 눈은 조금도 웃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쌍의 뱀눈은 예리한 기운을 내뿜으며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말씀이 지나치시군! 사람들은 초당 당신을 두려워 한다지만, 나 대적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이오! 대적용이 노기를 띠며 말했다. 초당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공방대를 천천히 허리춤에 꽂는다. 둘 사이에는 금방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다. 두 분, 왜들 이러십니까! 대적(大敵)을 눈 앞에 두고 집안싸움이라니, 서로 조금씩 양보하시죠. 왕삼보가 둘 사이로 끼어들며 말한다. 대적용은 한 동안 초당을 노려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초당은 왕삼보를 힐끗 보더니 말한다. 왕 공자께서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니, 잠이나 자 두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내일은 험악한 싸움이 있을 것 같으니. 왕삼보는 초당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하하, 그러지오. 소생과 대 군장은 초 군장의 생질되는 분을 비방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부디 오해를 푸시길 바랍니다. 왕삼보는 대적용의 팔을 잡아끌며 언덕을 내려간다. 초당의 시선이 그들의 그림자 뒤에 머문다. 제갈휘라... 그가 개입했단 말이지? 나직히 새어나오는 초당의 독백. 그는 고개를 들어 음울하게 빛나는 달을 바라본다. 내일은 꽤나 바쁘겠군... 어디선가 들짐승의 처연한 울음소리가 습기찬 밤공기 속으로 녹아든다. 十五章 囊裏谷 (1) 시간을 함수로 서서히 진행되는 자연의 장엄한 조화는 하루살이 같은 인간으로선 상 상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작품을 만들어내곤 한다. 태초부터 진행되어온 지맥(地脈)과 지혈(地穴)의 요동은 대지의 무수한 파괴와 창조를 반복하다가, 보는 이로 하여금 무궁한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기험한 지형을 만들어내 는 것이다. 낭리곡도 바로 그런 곳 중 하나이다. 낭리(囊裏 : 주머니 속)라는 이름은 골짜기의 형상을 훌륭하게 설명해 준다. 일반적으로 협곡(峽谷)이라 하면 가파른 두 개의 절벽이 약간의 사이를 두고 서로 마 주보는 형국인데 반하여, 이 낭리곡은 그 생김새가 자못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여타의 협곡처럼 두 개의 절벽이 마주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 절벽이 란 것이 서 있는 각도가 수직이 훨씩 넘을 정도의 반경사(反傾斜)를 지니고 있는 탓에 낭리곡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말 그대로 주머니 같은 모양... 그 기괴한 모양 덕분에 절벽 위에서 다른 절벽의 꼭대기 까지는 사오 장도 채 안 되 는 좁은 거리이지만, 협곡 아래에는 폭이 이십 장에 가까운 대로(大路)가 뚫려 있는 것이다. * * * 협곡 입구에 우거진 숲 전면에는 백여 기(騎) 마군(馬軍)을 포함한 오백여 명의 인원 들이 질서정연하게 방진(方陣)을 이루고 있다. 용봉단을 토벌하기 위해 수천 리 길을 달려온 무양문의 정예무사들이다. 그들은 낭리곡의 절험한 지세에 압도되어서인지 섣불리 곡내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천험이로군. 왕삼보는 기괴하게 생긴 계곡을 바라보며 감탄한다. 그는 몸 전체에 밤색 윤기가 탐스럽게 흐르는 말등에 앉아 있다. 그가 탄 말은 깔개나 발걸이는 고사하고 안장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단지 가죽끈을 꼬아 만든 재갈과 고삐만 달렸을 뿐이다. 밥지어 먹은 흔적을 보면 이 계곡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한데... 계곡 입구까지 다가갔던 대적용이 투덜거리며 돌아온다. 그는 눈같이 하얀 설총마(雪總馬)의 안장에 발을 걸고는 가벼운 동작으로 올라탄다. 말의 안장 옆에는 보통 활보다 두 뼘은 길어 보이는 강궁(强弓)이 걸려 있다. 활줄고리 부위에 조각된 금빛 까치 머리... 바로 대적용을 관산귀전이란 별호로 불리게 만든 금작세화궁이다. 강가 놈이 바보나 멍청이가 아니면, 매복을 심어 놓을 만한 지형이오. 불행히도 그는 바보나 멍청이가 아닐 겁니다. 왕삼보는 웃으며 뒷쪽을 바라본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고개 너머로 한 줄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손빈의 감정지계(減鼎之計)까지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감... 무슨 계라 했소? 대적용은 무인, 그것도 오로지 무인이다. 킬킬, 왕 공자! 차라리 돌이나 나무한테 얘기하는 것이 빠를 거요. 뒷전에서 들려온 키득거리는 조소에 대적용의 쌍심지가 곤두선다. 빌어먹을 늙은이! 대적용의 머리가 바람소리나게 웃음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돌아간다. 그곳에는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초당의 단구(短軀)가 있다. 방연을 잡으려면 솥을 줄이고 등롱을 켤어 나무에 걸어둘 지어다... 대 군장 같은 머리가 그런 얘기를 알아들을 리 없지. 초당은 제 키의 두배는 되어 보이는 말등에 등나무로 짠 의자를 얹어 두고, 그 위에 반쯤 누워 있다. 왕삼보는 피식 웃는다. 손빈이나 방연은 모두 춘추전국시대의 병법가들입니다. 손빈이 방연을 칠 때 거짓으로 쫓기면서 병사들이 취식한 흔적을 줄임으로써 방연이 교만에 빠지도록 만든 적이 있었죠. 흠, 그런 일이 있었군. 대적용은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떡인다. 왕삼보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골짜기 너머를 다시 바라본다. 그 연기는 하나의 산채가 재로 변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오늘 중화 무렵 용봉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산채를 급습했을 때 그들을 반기는 것 이라고는 불붙은 오두막들, 그리고... 산채에 남아있던 가마의 수는 스물 네 개. 한 가마가 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면 이백사십 명이 밥을 지어 먹었다는 얘기죠. 헌데 우리가 조금 전 발견한 가마의 수는 열다섯 개뿐... 강이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들의 수가 줄고 있다고 믿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음, 왕 공자는 부뚜막 수까지 세고 있었군. 이곳은 적지입니다. 약간 책망의 기운이 담긴 왕삼보의 말에 대적용은 머리를 긁적인다. 왕삼보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가만히 웃는다. 하기야 대적용 같은 호랑이에겐 부뚜막 숫자를 세며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퉁기는 일은 어울리지 않는다. 초 노사. 노사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왕삼보는 초당을 바라본다. 초당은 연기도 안나는 곰방대를 뻑뻑대고 있다가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본다. 왕 공자의 세심함에 노부 또한 놀랐소이다. 그 불더미 속에서 가마의 수까지 하나하나 세고 있었다니. 문주께서 공자를 아끼시는 까닭을 이해할 것 같군.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 왕삼보는 묵오군자라는 별호처럼 예의바른 군자. 존장에게 칭찬을 들었으면 답례하는 것이 도리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가볍게 머리를 숙여 답례했을 때에 한 쌍의 싸늘한 눈초리가 그의 뒷통수 위에 실린 것을 느끼지는 못했다. 왕삼보가 고개를 들었을 때엔 초당은 이미 말등에서 내려온 후이다. 초당은 느릿하게 곡구(谷口)까지 다가가서 절벽의 이곳 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젠장, 굼뜬 동작 하고는! 대적용은 초당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이윽고 초당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돌아온다. 여기는 지형이 매우 괴이하군. 적이 계곡 위에서 암습하면 막아내기가 싑지 않겠는데... 누가 그걸 모르나! 대적용이 투덜댄다. 초당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왕삼보를 바라본다. 어쨌거나 이번 토벌의 총수령은 왕삼보인 것이다. 가급적 이런 곳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오. 다른 길은 없소? 다른 길이라는 게... 왕삼보는 난처한 표정이 된다. 형산의 지리에 어둡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아무 길이나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유람이 아닌 토벌을 온 것이다. 적의 흔적이 눈앞에 있는데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까짓 쥐새끼들이 매복을 하면 얼마나 한다고! 장애물은 부순다, 이것이 문주의 신조이자 나 대적용의 신조요! 대적용은 호기롭게 가슴을 친다. 초당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올라간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웃음... 그는 명령을 기다리며 방진을 이루고 대기하던 무리들을 바라본다. 삼사(三蛇)! 앞으로! 초당의 나직한 호령이 떨어지자 세 명의 사내가 말등에서 몸을 날려 그의 앞에 내려선 다. 세 개의 붉은 방갓, 세 개의 붉은 소검(小劍). 무더운 날씨에 적합한 소매 없는 단삼마저도 똑같은 세 사나이. 초당이 지휘하는 삼로군(三路軍) 휘하에서도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 수 있는 위인들이 다. 개개인의 이름도 없이, 단지 초당으로부터 불리는 천사(天蛇) 지사(地蛇) 인사(人蛇) 라는 별호만이 이름 대신 쓰이는 사내들. 초당과는 동향(同鄕)이라고 하나, 강호에서는 물론 무양문 내에서도 이들의 출신을 아 는 사람은 없다. 가끔 사용하는 말투로부터 이들의 고향이 중원의 북동쪽이라고 추측하는 정도 외에 는... 노부가 이들과 함께 협곡 위쪽을 살피지. 만일 계곡 위에 매복이 있다면 우리가 그들을 막아 보리다. 초당은 앞에 시립한 삼사를 만족스럽게 흝어본 후 말한다. 왕삼보는 고개를 끄떡인다. 불로동자 초당. 좀처럼 손을 쓰는 일이 없지만, 그 무공은 고수들이 구름 같다는 무양문 내에서도 감 히 상위를 점할 사람을 찾기 어려운 고강한 것이다. 삼사 또한 삼재독사진(三才毒蛇陣)이라는 연수합격술(聯手合擊術)로 성가가 높은 자들. 초당과 삼사가 매복을 상대한다면 이 험곡을 무사히 통과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알겠습니다. 초 노사께서 그렇게 수고해 주신다면, 소생과 대 군장은 안심하고 계곡으로 진입하지 요. 초당은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삼사를 이끌고 골짜기의 한 곳을 향해 걸 어간다. 소풍이라도 나가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이다. 초당이 절벽을 올라간 후 진입합시다. 대적용이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왕삼보는 <그렇지요>라고 대답하면서도 초당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절벽 아래에 도착한 초당은 고개를 들어 높이를 가늠해 본다. 수직 높이가 사십 장이 넘을 정도로 까마득한 절벽.... 하지만 초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등 뒤를 향해 손을 내민다. 이 정도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겠군. 밧줄! 지사가 준비한 밧줄더미를 초당에게 건내준다. 어디... 시작해 볼까? 초당은 밧줄을 어깨에 걸고는 발끝으로 땅을 찍으며 신형을 솟구친다. 날개라도 달린 것일까. 자신의 키보다 몇 배는 더 될 높이를 단숨에 뛰어오른 초당은 오른손으로 절벽에 튀어 나온 바위를 한 번 치며 그 반력을 이용하여 몸을 뒤집는다. 허! 초당을 못마땅히 생각하는 대적용이지만 그런 신묘한 경공 앞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 다. 튀어나온 곳이 있으면 손으로 잡고, 튀어나온 곳이 없으면 곰방대로 찍는다. 초당의 조그만 신형은 그런 식으로 몇 번 공중에서 재주를 부리더니, 까마득해 보이는 절벽을 금새 올라갔다. 강호에서 찾아보기 힘든 금안월령(金雁越嶺)의 신법. 초당이 절벽 위의 바위에 밧줄을 잡아매자, 아래에 있던 삼사들은 밧줄을 쥐고 저마다 재주를 발휘하며 절벽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자연의 위용을 한껏 뽐내던 절벽이 이들 네 사람에게 간단히 머리 위를 내 준 시간은 일다경(一茶頃)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초 노사의 신법은 일품이군요. 저렇게 가파른 곳을 평지 걷듯 가볍게 올라가다니... 왕삼보의 탄성에 대적용이 혀를 찬다. 무공으로 말하자면 호교십군 중에서도 제갈 형님과 좌 형님, 그리고 여덟째 양(楊) 아우를 제외하면, 감히 그의 위를 장담할 사람은 없을 게요. 그 놈의 지랄 같은 성질만 아니면... 에잉! 하하! 소생이 보기엔 두 분의 불화는 대 군장님의 성격이 너무 강하신 탓도 있습니다. 자, 우리도 서둘러야죠. 초 노사에게 뒤질 수야 없는 일 아닙니까? 왕삼보는 말고삐를 돌려 계곡으로 향한다. 어쩌면 골짜기 안에는 강이환과의 본격적인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적(大敵) 강이환! 왕삼보는 온몸이 가볍게 흥분되는 것을 느낀다. 자, 전진! 대적용은 손을 들어 명령을 내린다. 우두두. 백여 필의 말발굽이 지축을 흔든다. 싸움을 앞둔 무사들이 발하는 붉은색 선연한 투지가 먼지 속으로 뒤섞이며 피의 내음 을 기대하게 만든다. (2) 놈들이 곡구로 진입하는 것 같습니다! 계곡 위 험준한 바위덩어리 사이로 붉은 두건을 이마에 감은 청년의 얼굴이 빼꼼 드러 난다. 용봉단 중 봉단(鳳團)의 소두령이자 강이환의 처남이기도 한 화국진이다. 이제 시작인가. 강이환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다. 솟구치는 투지가 그의 호흡을 거칠게 만든다. 그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무양문과는 삼 년 전부터 싸워왔지만, 이번과 같은 큰 규모의, 그리고 전면적인 전투 는 처음이다. 이 매복전(埋伏戰)... 자신은 물론 용봉단의 생사가 걸린 싸움인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강이환. 하지만 그라고 해서 생명이 아깝지 않을 리 없고 두려움이 없을 리 없다. 더욱이 상대는 무양문, 자신의 사문과 아내의 가문을 반 세기 동안 절망의 나락으로 내동댕이 쳤던 바로 그 무양문이다. 괴멸당한 문파의 후예들이 모여 복수의 길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을 때, 어떤 사람은 그들을 무모하다고 비웃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수는 허무한 것이라 타일렀다. 복수... 강이환은 천천히 눈을 뜬다. 눈꺼풀의 열림과 함께 서서히 만들어지는 세상... 초가을 하늘이 그가 만들어 낸 세상을 짙은 물빛으로 축복하고 있다. 그렇다! 세상에는 도(道)가 있듯 강호에도 도가 있다. 단순히 힘만이 그러한 도의 요체가 된다면 의(義)와 협(俠), 그리고 모든 미덕(美德) 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무양문... 물론 상상조차도 하기 어려운 힘을 보유한 집단이다. 무양문에는 오백 년을 이어온 백련교의 누적된 전통이 있다. 오십만 명이 넘는 교도들의 지원이 있다. 일부당천(一夫當千)의 고수라는 호교십군이 있다. 그리고 서문숭이 있다. 하지만... 저들은 배도(背道)이고 우리는 정도(正道). 이것은 단순한 복수의 싸움이 아니다. 밝음과 어둠의 싸움이며, 선과 악의 싸움이며, 바름과 그름의 싸움인 것이다.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명분은 우리에게 있다! 단주님! 화국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새로운 의지로 충전된 강이환의 귓전을 울린다. 강이환은 상체를 내밀어 계곡 아래를 바라본다. 멀리 계곡의 입구에서부터 요란한 말발굽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다. 강이환은 청각과 시각을 통해 동시에 전달되어오는 어떤 묵직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어둠과 같이 모든 것을 소리없이 덮어버리는 힘... 그들이 온 것이다! 암목조(岩木組), 일선으로! 궁수들은 장전한 채 이선에 대기하라! 강이환의 입에서 나직한 명령이 떨어진다. 화국진은 녹색 기를 들어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세운 뒤, 청색 기를 왼족으로 흔든다. 수기(手旗) 신호가 떨어지자 머리통만한 돌덩어리와 통나무를 멜대에 진 삼십 명의 장 정들이 절벽 끝으로 다가선다. 그들 앞에는 버팀목으로 괴어놓은 사람 몸통만한 바위들이 일렬로 놓여 있다. 궁수 앞으로! 삼십 명의 궁수들이 암목조 뒷쪽으로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정돈해 앉는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절벽 위에도 돌과 나무를 설치하는 장정들의 모습이 보인다. 서두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삼보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는 대적용에게 말한 후, 발꿈치로 말의 배를 찔러 달리는 속도를 더해간다. 있을지도 모르는 매복에 대비하여 초당과 삼사로 하여금 측면 지원을 맡도록 하였지만, 불리한 지형은 가급적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다. 더구나 골짜기의 모양은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만일 골짜기 위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면, 영락없이 독 안에 든 쥐. 서둘러라! 대적용 역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는 뒤를 바라보고 크게 외친 후 박차를 가한다. 뒤따르던 마상의 무사들은 채찍질에 힘을 더하고, 경공을 이용하던 보군들 역시 진기 를 한층 더 끌어올린다. 우두두... 오백여 무양문도들은 살을 떠난 화살과 같은 속도로 계곡을 관통해간다. 이제는 선두에 서서 달려오는 사람의 얼굴이 확연히 보일 정도이다. 강이환은 한 자루의 활을 꺼내든다. 그의 눈은 쏜살같이 달려오는 한 마리 말에 맞춰져 있다. 마상의 흑의 장한... 저 자가 수령인가? 젊은 것을 보니 왕삼보겠지. 강이환은 한 대의 낭아전(狼牙箭)을 꺼내어 시위에 건다. 선전포고를 이것으로 대신하는군. 시위가 한껏 당겨진다. 이처럼 정신없는 전진 속에서 화살이 쏘아져오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왕삼보는 공기를 찢으며 자신의 목젖을 노리는 살기를 느꼈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삐를 놓으며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말 위에서 벌렁 눕는다. 안장도 없는 말 위에서 다리의 힘만으로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무공의 고 하를 떠나 그의 마술(馬術)이 비범하다는 증거. 씨이잇. 화살은 그의 가슴 위 반 자 남짓 떨어진 허공을 관통한 후 맹렬한 기세로 땅에 꽂힌 다. 깃털만 남긴 채 박혀버린 화살은 그 주인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식은땀에 섞여 목덜미를 달려 내려가는 것은 한 줄기 전율... 적이다! 왕삼보의 외침은 계곡을 가로지르던 무리들에게 작은 소요를 안겨 준다. 호포! 강이환의 명령이 떨어지자 화국진은 손에 들고있던 황자호포(黃字呼砲)에 화승을 당긴 다. 탕. 포성이 협곡 아래로 울려퍼진다. 와아! 죽여라! 우레소리 같은 고함과 함께, 계곡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몸을 드러내며 통나무와 바 위들을 굴리기 시작한다. 계곡 아래에 있던 무양문도들은 난데없이 쏟아지는 돌의 우박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예상했던 매복이다. 하지만 왕삼보는 화가 치민다. 그는 무인이지 군인이 아니다. 이런 식의 난전보다는 좀더 고상하고 격식이 있는 대결을 원했던 것이다. 진을 풀고 후퇴하라! 왕삼보는 큰 소리로 외치며 말머리를 세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용봉단이 계산하고 있던 정확한 타격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하늘을 가릴 흙먼지를 동반하며 쏟아지는 돌과 바위는 엄청난 위력으로 무양문도들을 때린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깨진 사람들의 비명이 울리고, 공포에 질린 말들은 이리 저리 날뛰며 미친듯이 울부짖는다. 침착해라! 말을 버리고 절벽 아래로 몸을 숨겨라! 대적용은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바위 하나를 장력으로 밀쳐내며 외친다. 수직이 넘는 각도로 서 있는 낭리곡의 형상 때문에 계곡의 중앙에만 암목이 떨어진다 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대적용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무양문도들은 화급히 절벽 아래로 몸을 피한다. 흐흐, 과녁들이 슬슬 세워지는군. 과추운은 꿀과자에 달라붙는 개미떼같이 절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무양문도들을 보 며 득의의 미소를 짓는다. 그는 건너 절벽 위로 보이는 강이환을 향해 손을 흔든다. 사격 개시! 이번 명령은 따로 기신호(旗信號)가 필요없었다. 강이환의 내공이 담긴 음성이 계곡을 쩌렁쩌렁 울린 것이다. 빗발이 쏟아지는가. 무양문도들은 하늘을 새까맣게 메우며 날아드는 화살을 보며 막막한 절망감에 사로잡 힌다. 돌과 나무는 수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절벽에 붙음으로써 피할 수 있었지만, 맞은편 절벽을 겨냥하고 대각선으로 쏘아지는 화살은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삽시간에 십여 명의 무사들이 고슴도치가 된 채 목숨을 잃는다. 방패로 몸을 막고, 반격하라! 왕삼보가 외치자 무양문도들은 절벽에 등을 댄 채 일부는 방패로 화살을 막고, 일부는 절벽 위를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지리(地利)를 잃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쏘는 것과 아래서 위로 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어서, 시간이 갈수록 피 를 뿌리며 쓰러지는 이들은 무양문도들 뿐이다. 감히 내 앞에서 화살 장난을! 대적용이 노갈을 터뜨리며 어깨에 맨 강궁을 움켜 쥔다. 어느새 전통(箭筒)으로부터 뽑힌 금작시가 시위에 걸린다. 그의 궁술(弓術)은 관산귀전이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신기(神技). 한 대의 금작시는 시위를 떠나는 순간 수십 장의 거리를 단숨에 없애버리고 한 명의 용봉단원의 가슴에 바람구멍을 내 버린다. 금작세화궁에는 어느 틈엔가 다른 화살이 장전되어 있다. 다시 절벽 위를 향한 그의 바늘끝 같은 시선은 깃발을 쥔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사내 를 발견한다. 깃발쟁이! 너도 한 대 먹어라! 핑. 경쾌한 시위 소리와 함께 한줄기 금선(金線)이 맞은편 절벽 위를 향한 빛살 같은 질 주를 시작한다. 위험해! 강이환은 외마디 경호성과 함께 화국진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젖힌다. 화살과 자신의 사이를 비스듬히 가로막고 있던 바위만을 믿고 있던 화국진이다. 그는 생각치 못한 강이환의 일 장에 떠밀려 쥐고 있던 깃발이며 수포(手砲)를 떨어뜨 린 채 모양 사납게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퍽. 화살은 화국진이 믿어 마지않던 바위를 너무나 우습게 관통해 버리고 하늘을 향해 쏘 아져 올라간다. 한 대의 화살이 지닌 이 엄청난 위력에 화국진은 토끼눈이 된 채 할 말을 잊는다. 과연 관산귀전! 강이환은 화국진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화 아우, 다음 단계로 갈 때가 되었군. 강이환이 나직히 속삭이자 화국진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땅에 덜어진 깃발 중 하나 를 주어 흔둔다. 그의 손에는 타는 듯한 붉은 깃발이 들려 있다. 이가 놈의 불장난을 감상해 볼까나? 맞은편 절벽 위에 있던 과추운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옆에 서 있던 화반경은 요대에서 한 자루 퉁소를 뽑아 입에 댄다. 삐이익. 한 가닥 소성(簫聲)이 난마같이 어지러운 전장으로 울려퍼진다. 계곡의 아래, 정확한 위치를 말하면 무양문의 인마들이 조금 전 지나쳤던 대로 옆에 는 수풀로 잘 위장된 작은 참호가 있다. 참호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초조한 안색으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문득, 삐이익... 날카로운 소성. 그들이 기다리던 신호이다. 이 선배, 신호요! 오종종한 얼굴이 얼마까지 찌푸러질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듯한 표정의 현송 도장이 재촉한다. 헤헤, 어디 작품을 만들어 볼까? 딸꾹질을 하는 듯히 키득거리는 노인. 오척단구 소매 없는 단삼이 초라해 보이는 이개이다. 이개는 참호 바닥에 널린 다섯 개의 자그마한 손바닥으로 감싸 쥔다. 순간 현송의 단추구멍만한 눈이에 커진다. 노인의 드러난 어깨 부위, 금방이라도 퉁겨져 나올 듯한 혈선(血線)이 서서히 만들어 지며 팔뚝을 향해 내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붉은 뱀과도 같은 혈선의 움직임이 손바닥에 이르렀을 때 손바닥에 쥔 다섯 개의 줄은 치익, 소리를 내며 일제히 점화되기 시작한다. 다섯 개의 줄은 단단하게 꼰 잠사(蠶絲)에 화약분(火藥粉)을 개어 입힌 도화선이다. 맨손으로 불꽃을 일으킨다... 대단한 용화술(用火術)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융신공(祝融神功)입니까? 신공은 무슨 신공, 늙어 죽지도 못한 늙은이의 하찮은 재주지... 이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보인다. 한 대의 화살이 왕삼보의 면문을 향해 날아온다. 왕삼보는 가볍게 손을 놀려 살 대를 나꿔챔과 동시에 손가락에 힘을 주어 화살을 부러 뜨린다. 강이환이라는 자, 무인이면서 이토록 능란한 용병술을 구사하다니! 왕삼보는 지금 암습당한 분노와는 이율배반적인 감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에 대해 감탄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오백팔십 명의 문도 중에서 계곡 중앙에 작은 언덕을 이룬 난석더미에 깔려 죽은 수가 얼마나 될까. 오십? 백?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저 빗발치는 화살엔... ...! 낭패한 안색을 짓고 있던 왕삼보는 뭔가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낀다. 설마...?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던 왕삼보는 삼 장 쯤 떨어진 곳의 땅거죽이 조금 들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몸을 숙인 채 황급히 다가가 그 끝을 나꿔채니, 까끌한 감촉의 흙거죽이 간단하게 벗 겨진다. 토형목피(土形木皮)! 그것은 땅으로 위장한 나무껍질이다. 경악한 그의 눈에는 토피 아래로 무수한 도화선들이 파란 불꽃을 퉁기며 어지럽게 달 려가는 것이 들어온다. 번개처럼 달린다는 저 화사(火蛇)와도 같이... 왕삼보는 피를 토하듯이 외친다. 대 군장! 폭약이 매설되어 있습니다! 정신없이 화살을 날리던 대적용이 그 말뜻을 알아들은 시각은 촌각. 그는 펄쩍 놀라며 몸을 날린다. 폭약이다! 모두 피해라! 꽝! 꽈꽝! 연쇄폭발. 만화부 이개가 자랑하는 지충화폭은 수십 개의 폭탄군(群)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충화폭은 얇은 금속으로 만든 사각의 상자에 폭발력이 강한 화약을 채우고 도화선으 로만 폭발되게끔 특수 제작된 뇌관을 장치한 것이다. 늑대를 피하려다 호굴에 들어간다고, 이러한 화기가 골짜기 양 옆으로 감쪽같이 매설 되어 있었으니, 무양문도들은 떨어지는 암석을 피하려다 폭탄 위로 올라선 것이다. 꽈꽝! 꽝!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지충화폭은 골짜기를 따라 십여 장에 달하는 흙기둥의 행진을 만 든다. 땅거죽이 뒤집혀지며, 시커먼 흙먼지는 계곡 위의 사람들에게까지 튀어오른다. 투석전의 돌맹이들처럼, 끊어진 팔다리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비등하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화마(火魔). 잠깐 사이에 골짜기 아래는 아비규환이 되어버렸다. 우와! 이가 놈이 뻐길 만하구나! 과추운은 입을 딱 벌리고 감탄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력적인 폭발이기 때문이다. 그가 딛고 있는 절벽은 지진이라도 만난 듯, 사납게 흔들리고 있다. 적도들을 섬멸하자! 이제는 백병전을 벌여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듯, 강이환의 외침은 충만한 자신감을 느끼게 해 준다. 가자! 서문숭의 졸개들에게 정도의 의기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자! 수십 가닥의 동앗줄이 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힘찬 함성을 지르며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용봉단의 무사들. 그들은 지금 적들의 피에 굶주려 있다. * * * 내 이럴 줄 알았지. 계곡 위의 어느 으슥한 곳에는 초당과 삼사가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래에서 벌어지는 지옥도가 한가로운 풍경이라도 되는 양, 초당은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에서 예의 곰방대를 뻑뻑대고 있다. 지극히 느긋한 신색이다. 벌레를 노리던 개구리는 등 뒤로 다가온 뱀을 모른다..., 개구리만 잡을 수 있다면 뱀과 벌레가 공생하는 것도 괜찮지! 어떻냐,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 아니냐? 초당은 귀뚜라미의 싸움을 바라보는 어린아이 처럼 무릎을 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삼사는 나무로 만든 인형들처럼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이런 싱거운 녀석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무슨 대꾸가 있어야 할 맛이 나지! 초당은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차더니 팔을 치켜들어 길게 기지개를 켠다. 조그만 몸뚱아리의 뼈마디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풀어진다. 자, 우리도 슬슬 움직여 볼까? 그는 곰방대를 뒤집어 재를 턴 후 허리춤에 꽂고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다. 어느새 그의 눈동자는 개구리를 노리는 뱀처럼 파란 살기가 타오르고 있다. 문득 생각난 듯, 그는 삼사를 돌아보며 말한다. 일러둔 것 잊지 마라. 싸움에 섣불리 끼어들지 말고. (3) 이것은 비무가 아니다. 살기 위해 죽여야만 하는 전투이다. 왕삼보는 이 순간 자신이 난생 처음 겪는 처절한 혈투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협곡 안에서 난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사백 명이 훨씬 넘는다. 이 상황에서 현란한 경신술이나 화려한 초식을 펼치는 것은 화를 자초할 뿐이다. 난투 중인 사람들은 오직 복장과 면식(面識)만으로 적아(敵我)를 구분하고 있다. 우연히 등을 마주하더라도 적의 의복을 입었거나 안면이 없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베야 만 한다. 한순간이라도 머뭇거리는 날에는 자신의 목을 상대에게 내어 주기 때문이다. 왕삼보는 본능적으로 등을 벼랑을 향한 채 몇 걸음 물러선다. 적어도 등 뒤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죽어라! 부우웅. 좌측 공간을 헤집으며 머리를 향해 사납게 떨어지는 둔중한 기세는 평범한 것이 아니 다. 왕삼보는 나직히 헛바람을 삼키며 궁형호보(弓形虎步)의 유연한 발놀림으로 기세의 예 봉을 코 앞으로 흘려보낸다. 펑. 방금 전가지 그가 서 있던 지면을 뚫고 박힌 물체는 자루의 길이가 넉 자가 넘는 팔 방추(八方錘)이다. 궁형의 보법을 유지한 채 세 걸음을 연거푸 물러선 왕삼보는 전면을 바라본다. 원소절(元宵節?) 때 거리에 매다는 등롱만큼 큼직한 추환(錘丸)을 뽑아내고 있는 자는 험상궂기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거한이다. 그는 고리눈을 부릅뜬(?) 채 왕삼보를 노려보고 있다. 화살과 폭약, 그 다음엔 곰이라? 왕삼보는 쓰게 웃는다. 쥐새끼 같은 놈! 호면대력신 여범은 팔방추를 움켜쥔 오른손에 힘을 준다. 일반적으로 둥근 추환에 자루가 달린 팔방추는 변(變)의 묘용이 뛰어난 십팔반(十八 般)의 일종이다. 그런 탓에 추환 위에 십자로 감은 띠와 그 위에 박힌 못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가볍고 단단한 목재를 사용한다. 지금 여범이 사용하는 팔방추는 자루 끝에서 철환 꼭지에 달린 창날까지 무겁기 그지 없는 오금(烏金)으로 만들어져 있다. 덕분에 그 무게는 백사십 근. 평범한 사람은 감히 들어볼 수도 없는 물건이 되었다. 하지만 여범은 그것을 들어올릴 뿐 아니라 여타 팔방추와 같은 변의 묘용을 십분 활용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천력(天力)은 그로 하여금 용단(龍團) 서열 삼위라는 직위에 올려 준 것이다. 여범은 자신의 일격이 목표물을 노치고 땅 위에 추환과 같은 모양의 도장만 헛되이 찍은 사실에 대해 무척 분노하고 있다. 더구나 그 검은 옷을 입은 녀석은 뭐가 좋은지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개새끼! 죽을 놈이 웃기는! 서문숭의 개! 내가 조무삼 형님의 원수를 갚아주마! 여범은 이를 갈며 팔방추를 머리 위로 세운다. 단숨에 상대의 머리를 부수겠다는 표두(豹頭)의 자세... 조무삼...? 왕삼보는 이 곰 같은 녀석이 용봉단 내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다시 두 걸음 물러선다. 뒷통수(?)에 눈이 달렸을 리는 없지만, 자신의 짐작이 분명하다면 이제 절벽과는 반 장 정도의 거리만이 남았을 것이다. 이 정도 거리라면 등 뒤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는 씨근덕거리며 조금씩 다가오는 흉악한 얼굴의 거한 뒤로, 정신없이 휘돌아가는 장내의 상황을 살펴본다. 대 군장! 맞은편 벼랑 부근에서 대적용의 모습을 발견한 왕삼보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대적용이 그 지옥 같은 폭발을 이기고 살아남았다면, 최소한 일 할의 승산은 보태졌다 고 할 수 있다. 대적용 또한 그 등을 벼랑 쪽을 향하고 있다. 왕삼보와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지금 대적용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학우관(鶴羽冠)을 쓴 두 명의 도사들이다. 그들은 한 자루의 장검을 휘두르며 대적용의 좌우를 노리고 있다. 멀리 떨어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시퍼런 검기가 번뜩이는 것으로 미루어 범상한 내 력을 지닌 자들은 아님이 분명하다. 하지만 왕삼보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상대는 다름아닌 대적용이기 대문이다. 그곳에서 오장 쯤 우측으로 떨어진 곳에는 삼로군의 부군장(副軍將)인 학곤(壑坤)이 늘씬한 키의 궁장여인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대치는 주변에서 끼어드는 자들이 많아 매우 어지러워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학곤의 성명절기인 오행장(五行掌)은 여인에게 그다지 큰 위협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한 자루 옥피리를 사용하는 여인의 수법은 경쾌하고도 날카롭다. 더욱이 학곤은 하체가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검게 그을린 흔적으로 미루어 폭발로 인한 화상을 입은 듯하다. 다행한 것은 무양문의 몇몇 고수들이 학곤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궁장여인의 매서운 소법(簫法)을 가로막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촌각의 시간, 장내를 살핀 왕삼보는 전장이 길게 확대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양쪽이 터진 협곡이다. 난투를 벌이던 무사들이 등 뒤의 칼날을 피해 조금씩 공간을 확보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러한 현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적아를 구분하기 힘든 난전에서 점차 상대가 정해지는 대결구도로 정리되고 있 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왕삼보는 생각보다 승산이 조금 더 높아졌음을 깨닫는다. 객관적인 무공수위라면 무양문이 용봉단에게 떨어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약간의 여유를 찾는다. 도끼질하듯 팔방추를 치켜든 거한은 어느새 눈 앞까지 다가와 있다. 나는 북경의 왕삼보라고 한다. 그대는 누구인가? 나직한 한마디였지만 여범을 찔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왕삼보? 이 새까만 놈이 서문 마귀의 제자인 묵오군자란 말인가! 나는 용봉단의 호당주(虎堂主?) 호면대력신 여범이다! 비록 상대가 이번에 쳐들어온 무양문의 총수령임은 알고 있지만, 그 명성에 위축당한 다면 사나이 여범이 아니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당당하게 외친다. 여범? 처음 듣는 이름이군. 어서 강이환이나 불러와라! 난 무명필부(無名匹夫)를 죽였다는 말은 듣고싶지 않다. 여범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는다. 이 새까만 새끼가! 여범의 무릎이 구부러졌다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도약하더니 어느새 박도의 날이 왕삼 보의 면문으로 내리꽃힌다.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수법이다. 하지만 그의 상대는 다름아닌 왕삼보였다. 미련한 놈. 왕삼보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그와 동시에 왼팔이 짧은 곡선을 그리며 박도의 면(面)을 밀고, 오른손바닥은 여범의 오른팔꿈치를 강타한다. 여범의 오른팔에는 왕삼보의 오른손을 중심으로 서로 반대의 힘이 지렛대처럼 가해진 것이다. 빠각. 너무나 단순한 음향과 함께 여범의 팔꿈치 관절이 부러졌다. 여범은, 팔이 부러진 고통을 채 느끼기 전에 왕삼보의 몸이 경쾌하게 회전하는 것을 발견했다. 왕삼보의 등이 보이는가 싶더니 턱에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 으악! 여범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진다. 왕삼보의 선풍각(旋風脚)에 적중된 그의 턱은 잘 다진 산적처럼 뭉개진 상태였다. ......! 쓰러진 여범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다가가던 왕삼보는 여범의 늘어진 육신 위로 길게 늘 어진 한 개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다. 무엇인가 영감이라도 받은 듯, 그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간다. 검은색 당전화(唐戰靴). 청색 각반. 청색 무복. 왕삼보의 눈길이 상대의 시선과 얽힌다. 사십대 초반 정도? 재자가인이 많다는 삼주(三州)에서도 눈에 번쩍 뜨일만한 미남이다. 청색 무복 가슴에 금실로 새겨진 선명한 용문(龍文). 왕삼보는 마른 침을 삼킨다. 강이환! 강이환은 쓰러진 여범을 힐끗 바라본다. 그는 왕삼보와 여범의 대결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단 내에서도 제법 손꼽히는 여범을 단 두 수만에 저 꼴을 만들다니....... 그는 고개를 돌려 장내를 바라본다. 치밀한 계획으로 기선을 제압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제는 백중지세로 어울려 있다. 이것이 무양문이며, 서문숭인가! 우리는 진정 바위를 향해 날아드는 달걀과 같은 존재인가! 신색을 보아하니 귀하가 강남에 이름 높은 왕삼보, 왕공자 같구료. 걸직한 목소리. 왕삼보는 목소리의 임자인, 강이환의 뒤에 서 있는 키 큰 노인을 바라본다. 태극도복 차림에 등에는 엄청난 물건을 짊어지고 있는 노인. 노인의 이름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과 노인께서도 오셨군요. 후배가 인사드리지 못하는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왕삼보는 허리를 숙여 반배함으로 강호의 노숙에 대한 예의를 갖춘다. 과추운은 손을 내저으며 껄껄 웃는다. 원, 당치도 않소이다. 생사지투(生死之鬪)의 와중에 팔법구례(八法九禮)가 무슨 소용이오. 자, 이 몸은 다른 상대를 찾아 가보겠소이다. 두 분께선 좋은 승부를 가리시길. 과추운은 넓은 도복소매를 휘적거리며 멀어져 간다. 여유로운 품이, 아마도 강이환이 이길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당신이 추뢰검룡 강이환이오? 대적을 만났음에도 마음은 이상하게 진정이 된다. 왕삼보는 마치 다정한 선배의 이름을 부르듯 묻는다. 물론! 전혀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는 하대. 강이환은 짧게 대답한다. 여기는 소란해서 좋지 않군. 장소를 옮길까? 주위를 둘러보던 강이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그것은 왕삼보가 바라던 바이기도 하다. 좋소! 강이환과 왕삼보는 어깨를 나란히하고 계곡의 출구를 향해 신형을 날린다. * * * 얼마 정도 달려가니 넓직한 공터가 나온다. 그곳은 사람들이 싸우는 곳과 꽤 떨어져 있어 그런대로 조용하다. 여기가 어떤가? 형산파의 추뢰검법을 한 수 배우기엔 더없이 적당하군요. 왕삼보는 허리춤에서 철필을 꺼내든다. 수족과도 같은 묵오철필의 묵직한 감촉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그는 철필을 하늘로 세워 지천공배(指天恭拜)의 자세를 취한다. 싸움을 앞둔 무인의 예법이다. 좋아! 강이환은 왕삼보의 풍도에 감탄하며 등 뒤의 검을 뽑는다.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왼손바닥을 당겨 검자루를 움켜쥔 오른손 위에 올려놓는다. 마치 비무하기 전의 인사와도 같은 예도. 하지만 이제 얼마 후 그들 중 한 명은 죽어야 한다. 한 팔 정도 중간 길이의 형산파 장문영부와 같은 명검, 소뢰(素雷)가 싸늘한 한광을 발한다. 十六章 九飛影 (1) 현송과 현수 두 도장은 대적용의 현란한 활놀림을 보며, 원대(元代)부터 무명(武名) 이 쟁쟁했던 백련교 호교십군에 대해 다시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적용은 검도본산(劍道本山)이라고 할 수 있는 무당파 출신 검도고수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는데 있어서 일말의 밀림도 없었다. 활줄이 걸리지 않아 기형곤(奇形棍)처럼 보이는 금작화세궁은 그의 손 안에서 때로는 날카로운 창이 되고, 때로는 부드러운 채찍이 되어 도사들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기세는 바람같이 표홀하고 진퇴는 신룡(神龍)같이 예측할 수 없다. 바로 대적용이 자랑하는 척천탄로(刺穿彈路)의 수법. 금빛 강궁이 휘둘러지는 곳에는 소름끼치는 파공성과 함께 벛꽃처럼 현란하게 피어오 르는 살기가 있다. 하지만 현송과 현수 또한 무당삼숙이라는 전당에 명패를 걸어놓은 위인들. 엄밀한 검막을 만들며 대적용의 좌우를 노리는 그들의 자세에는 빈틈이 없다. 하하! 말코들치고는 제법이구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와 함께 금작화세궁이 반월도(半月刀)와 같이 둥글게 휘어진다. 순간, 현수는 한 줄기 날카로운 기운이 구렁이처럼 허리께를 감아오는 것을 느낀다. 현수의 입술이 오무라든다. 어림없다! 채챙. 대적용의 눈가에 이채가 흐른다. 상단을 향하고 있던 현수의 검이 연체동물처럼 휘어지며 활의 진로를 막아낸 것이다. 순강으로 정련된 검이 어찌 뱀처럼 흐느적거리랴. 손목을 이용한 현수의 방어수법이 너무나 유연했기 때문에 나타난 순간적인 착시일 뿐 이다. 팔? ? ? ? 꿈치와 손목의 회전을 극대로 이용한 무당의 절 기.바로 무당의 개파조사(開派祖師) 삼봉진인(三峯眞人)이 창안했다는 요지검다. 상대의 재주에 놀란 대적용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기회를 엿보던 현송의 검이 세 차게 찔러온다. 난훼취화(鸞喙取花). 일체의 변식(變式)을 배제한 쾌속한 수법이다. 찌이익. 다급하게 피하는 대적용의 왼팔에 긴 검상이 새겨진다. 상처의 깊이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대적용의 불 같은 성질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일 격이다. 이 지렁이 같은 놈들! 한 길이 넘는 활이 꼿꼿하게 일어서는가 하더니 펼쳤던 요지검을 회수하려는 현수를 향해 벼락같이 찔러나간다. 활 끝에 어린 기세는 창술의 비사형(飛蛇形)과 비슷하다. 엇! 현수도장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린다. 순간 오른쪽 어깨로부터 느껴지는 섬뜩한 기분... 바늘에 찔릴 때 고통에 앞서 스치는, 예감과도 같은 기분이랄까. 분명히 피했는데...! 현수는 자신의 어깨를 바라본다. 붉은 피가 점점이 방울 맺혀 떨어지고 있다. 핏방울이 아니었다면 어느 곳을 당했는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극미한 상흔. 활줄? 현수는 상대의 병기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다. 그 죄과는 대단히 무거운 것이어서 활과 함께 쏘아진 시윗줄은 여지없이 그의 어깨를 관통해 버린 것이다. 피부의 상처는 눈으로 찾아 보기 힘들만치 작은 것이지만 오른팔 전체가 저려오기 시 작한다. 검수로써 힘의 원천인 어깨를 상한 것은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놈! 넌 죽었다! 대적용의 활이 우아한 호를 그리며 현수의 이마를 향해 내리꽂힌다. 이대로라면 현수의 머리가 두부처럼 박살날 것은 자명하다. 사제의 머리가 그렇게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현송이 아니다. 사제! 사제의 위기를 막기 위해 현송은 독룡출해(毒龍出海)의 수법을 펼친다. 비검(非劍)의 자세로 늘어뜨렸던 검이 힘차게 솟구치며 활이 그리는 포물선 안으로 들 어간다. 빠각. 검과 활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 현송은 손아귀가 터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현송은 황급히 검을 왼손으로 옮겨쥔다. 힐끗 바라보는 그의 손바닥엔 선혈이 흥건하다. 내력으로 말하자면 대적용을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흐흥! 대적용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는 빠른 속도로 두 걸음 물러서며 현송의 검에 막혀 돌아온 활 끝을 쓸어잡는다. 시위가 손가락에 잡히는가 하더니, 가볍게 아래로 당겨지며 활고리에 걸린다. 펼쳐진 활을 당겨진 궁(弓)의 형태로 만드는데 소비된 동작은 단 한 동작, 사용된 손 도 단 한 손뿐이다. 사격거리다! 대적용의 손놀림에 감탄하고 있던 무당이숙은, 순간적으로 그들과 대적용의 거리가 제 법 떨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도 막아 봐라! 찌잉하는 시위소리와 함께 한 대의 화살이 현송을 이마를 향해 날아든다. 삼사 장이라는 거리는 시위가 퉁겨진 순간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하얀 번개... 현송은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퍽. 진흙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현송의 머리 위에 얹혀있던 멋들어진 학우도관(鶴羽道 冠)이 박살난다. 한 줌의 머리털이 화살에 뒤따른 경기에 휘말려 부숴진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현송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쥐새끼 같은 놈들! 대적용은 코웃음을 치며 시위에 또다른 화살을 걸어올린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연결되지 못하게 된다. 우연이었을까. 부러진 철검 한 자루가 빙글거리며 그의 시야를 가로지르며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땅에 떨어진 철검의 손잡이가 눈에 익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돌아간다. 제기랄! 대적용 휘하 오로군(五路軍)에서 그 무공이 가장 쓸만하다는 비천오웅(飛天五雄), 그 중 둘째인 송대금(宋大錦)은 오른 팔목을 움켜쥐며 욕설을 내뱉는다. 그의 팔목을 감고 있는 곰가죽으로 만든 투수(套袖 : 팔뚝에 끼어 추위를 막는 방한구 의 일종)는 누렇게 그을린 채 매캐한 누린내를 풍기고 있다. 그에게 대량제일검(大凉第一劍)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던 철검은 안타까운 회전을 그 리며 멀리 날아간 후이다. 킬킬, 이젠 무얼 휘두를 테냐? 쌍장을 장난스럽게 뒤집어 보이며 웃고 있는 대머리 노인. 어린아이처럼 발그레한 볼을 가진 만화부 이개이다. 으... 늙은이! 네 이름이 뭐냐? 송대금은 두어 발자국 물러서며, 고통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로 묻는다. 허! 이런 후레자식, 어른한테 말하는 꼴 좀 보게? 이개는 같잖다는 듯이 혀를 차며 왼손을 쭉 내민다. 보통 사람의 절반밖에 안 되는 손바닥. 하지만 그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열양진기는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다. 퍽. 마음껏 비명이라도 토하면 속이 편하겠건만, 가슴에 뜨겁고 둔중한 충격을 받은 송대 금은 목구멍에 불덩어리라도 막힌 듯이 끽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그는 뒤로 주르륵 밀려나더니 맥없이 땅바닥으로 쓰러진다. 감당키 어려운 화기에 내장을 다친 모양이다. 이놈아, 방금 네 놈이 맛본 것이 축융장(祝融掌)이면, 이 어르신네께서 누군지 알겠 느냐? 이개는 의기양양해하며 쓰러진 송대금에게로 다가간다. 그가 자랑하는 열양장력으로 버릇없는 놈의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이다. ...? 어? 이게 뭐야? 뭔가가 이상하다. 이개의 주름진 눈가엔 가벼운 경련이 일어난다. 그는 회의가 가득 찬 눈으로 옆구리를 내려다본다. 옆구리는 줄을 꿰기 위한 구슬처럼 왼쪽과 오른쪽이 맞창나 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어... 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인가. 이개는 눈 앞에 보이는 자신의 옆구리가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간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큰 활을 천천히 내리고 있는 백색 무복의 호한이 서 있다. 너, 대... 적... 끄으...! 이름을 부르려는 것일까. 이개의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일그러진다. 풀썩. 무릎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꺾인다. 말...도 안...된다... 온 천지가 눈이라도 내린 듯 하얗기만 하다. 이개의 목덜미가 푸르르 떨리고 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나무토막같이 땅으로 처박힌다. 화신(火神). 불의 아버지라는 멋진 이름으로 강호천지를 수십 년 간 주유했던 호걸 이개의 허망한 최후이다. 비겁한 놈! 네가 감히! 대적용의 곁에 있던 현송과 현수는 검을 휘두르며 달려나간다. 그들 모두 대적용과 함께 자폭이라도 하려는 심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과 상대하던 대적용이 다른 사람에게 살수를 쓰도록 방치한 셈이 니, 이개의 죽음은 그들의 책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책과 분노는 대적용에 이르기 전에 차단되고 만다. 군장님! 이 말코놈들은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두 명이 대적용의 앞을 막아선다. 비천오웅 중 첫째인 독심수사(毒心需士) 낙독흠(落讀欽)과 다섯째인 살지관(殺地觀) 오경주(吳京柱)이다. 비켜라, 이놈들! 무당이숙의 노기가 서린 두 자루 송문고검이 힘차게 휘둘러진다. 하지만 낙독흠과 오경주도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다. 그들은 각기 비발(飛鉢)과 철척(鐵尺)을 매섭게 부리며 검을 마중해 나간다. 좋아! 조심해라. 대적용은 현송, 현수 두 도사들로부터 시선을 돌린다. 그들 중 한 명은 이미 오른팔을 쓸 수 없는 부상을 안고 있다. 낙독흠과 오경주라면 능히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비천오웅 중 셋째인 호리살도(狐狸殺刀) 번속(煩涑)은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이 개에게로 다가간다. 강호오괴 중 하나의 목을 내가 벤다? 흐흐흐! 비록 시신에 불과하지만, 이개의 목을 벤다면 대단한 공을 세웠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번속의 손 위에선 한 자 남짓한 왜도(倭刀)가 파랗게 빛난다. 하늘로 치켜든 왜도가 힘차게 내리꽂히려는 순간, 번속은 무엇인가 커다란 물체가 자 신에게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엇? 그는 화급히 도를 휘둘러 날아오는 물체를 막아내려고 했다. 아니, 분명히 그는 물체를 막았다. 하지만 물체는 너무 무거웠다. 뚝. 왜도의 중간이 힘없이 부러져 나가며 물체는 어김없이 번속의 머리를 때린다. 피가 튀며 뇌수가 비산한다. 번속의 머리를 때린 물체는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왔던지 번속의 뇌문(腦門)을 절반 이상이나 뭉개놓고도 오 장이나 더 날아가 박힌다. 왼쪽 얼굴이 알아볼 수 없는 형상이 되어버린 번속은 하나 남은 온전한 눈으로 자신을 이렇게 만든 물건이 무엇인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허헛... 번속은 혼백이 부서진 뇌문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허탈한 웃음을 감출 수 없다. 그는 풀썩 뒤로 넘어간다. 웃기는 일이야. 내가, 천하의 호리살도 번속이 바둑판에 맞아죽다니, 허헛! 과추운의 눈은 이 순간, 격랑 속의 조각배처럼 출렁거리고 있다. 이가야! 그는 땅에 엎어진 이개의 왜소한 몸을 향해 달려간다. 엎어진 이개의 몸을 뒤집으려고, 배 밑으로 손을 집어넣던 과추운은 손바닥에 잡히는 뜨끈뜨끈한 느낌에 움찔한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시뻘건 덩어리들. 구멍난 옆구리를 통해 흘러나온 창자를 움켜쥔 것이다. 이런 지경이 되고 살아있다면, 신선이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이가 이놈아... 과추운의 쉰 목소리가 나직해진다. 잠시 동안 백치라도 되어버린 듯 아무런 생각을 할 수조차 없다. 텅 빈 육신을 슬픔보다도 먼저 점령한 것은 분노. 눈 속 깊은 곳에서 새파란 불꿏이 피어오른다. 대.적.용! 한 자 씩 질겅거리며 씹는가. 과추운은 이것이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몸을 일으킨다. 전면 칠팔 장 쯤 떨어진 곳... 금작화세궁을 든 대적용이 오연하게 서 있다. (2) 끼기긱. 쇠붙이로 유리를 굵는 듯한 껄끄러운 마찰음과 함께 두 명의 사내는 매서운 기세로 교차되어 서 있던 위치를 바꾼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이 장... 결코 멀다고 할 수 없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화산의 투지와 빙굴의 살기를 동시에 담 은 두 쌍의 눈동자가 소리없이 얽히고 있다. 이것으로 도합 열여섯 합... 하지만 처음과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강이환은 이마 앞으로 흘러내린 한 가닥 머리카락을 젖히기 위해 고개를 살짝 흔든다. 수려한 용모의 그가 가볍게 머리를 젖히는 동작은, 취한 채 수레 위에서 여인들이 던 진 꽃송이에 파묻힌 두목지(杜牧之)의 그것처럼 매우 멋들어져 보인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풀칠이라도 한 듯 이마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마에 배어나온 엷은 땀방울 때문이다. 긴장감은 성적인 쾌감처럼 흐느적거리며 신경 조직 하나하나를 간지럽히고 있다. 의외로 강한 상대... 강이환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간다. 과연 명사(名師)에 졸도(猝徒)는 없는 법! 묵오군자란 이름이 사부의 그늘 아래서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는, 갑부집 둘째아들의 허명으로 여겼던 점 사과해야겠군. 강이환은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가볍게 펼치며 배우와 같은 우아한 동작으로 허리를 굽힌다. 어찌 생각하면 조롱하는 듯한 행동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지한 성품의 왕삼보에게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과찬의 말씀! 스승님의 그늘은 아직도 불초를 덮고도 끝없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소이다. 왕삼보는 철필을 세워 천중(天中)을 가리키는 자세로 답례를 대신한다. 좋았어! 그럼, 다시 시작한다! 강이환은 한 걸음 몸을 앞으로 내닫으며 아래로 늘어뜨렸던 검을 뒤집어 친다. 독룡출해(毒龍出海)와 비슷해 보이는 초식이지만 검이 솟구쳐 오르는 기세는 그보다 더욱 은밀하다. 번개에 놀란 뱀이 뛰어오르는 모양을 본땄다고 해서 영사경뢰(靈蛇驚雷)라는 이름이 붙은, 추뢰검법 중의 일식... 좋은 수법! 왕삼보는 감탄하며 솟구치는 검을 향해 철필을 내지른다. 부드러운 붓털 몇 가닥이 검날과 비끼며 나풀거린다. 하지만 필봉(筆峯)에 담긴 인(引)의 요결은 검날의 궤도를 처음 계산보다 좌측으로 쏠 리게 만들 수 있었다. 검극에 가해진 순간적인 외력 탓인지 강이환의 자세가 잠시 흐트러진다. 빈틈! 왕삼보의 왼손 중지가 빳빳히 곤두서며 상대의 빈틈을 찔러간다. 일지로 바위에 글씨를 새길 수 있다는 백련교의 무극선(無極線). 하지만 수유지간을 비집고 지나가는 어떤 목소리는 왕삼보의 손가락을 멈추게 한다. <무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능이지. 본능이 시키는대로 움직이게.> 그리고 한쪽 발을 허방에 놓은 듯한 기분 나쁜 예감... 그는 본능이 시키는대로, 뻗었던 손을 뒤로 당기며 두 걸음 물러선다. 휘익. 간발의 차이를 두고 강이환의 검이 왕삼보의 왼팔을 스치고 떨어졌다. 팔뚝에서 손목까지 길게 베어진 흑의를 바라보며 왕삼보는 신음을 삼킨다. 그는 한 호흡을 수십 차례 쪼갠, 짧은 순간을 차이로 두고 왼팔뚝이 잘리는 위기를 모 면한 것이다. 강이환의 눈썹이 약간 일그러진다. 자신의 감춰진 공격이 실패한 것이 대단히 의외롭다는 표정이다. 그가 처음 전개한 영사경뢰의 초식은 기실 허초와 다름이 없었다. 상대가 그 공격을 무산시킬 때 얼핏 드러냈던 빈틈의 연기 역시 완벽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왕삼보는 자신의 급소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이때 허공을 베며 위로 솟구쳤던 강이환의 검은 왕삼보의 계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뒤집어져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강이환은 검이 치켜올려진 순간, 매우 빠른 동작으로 역검(逆劍 : 검자루를 꺼꾸로 움 켜쥐는 수법, 짧은 칼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곤 여간해선 사용하지 않는다)으로 바꿨던 것이다. 그런데 왕삼보는 어떤 일인지 그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강이환은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방금 그가 시전했던 일련의 수법은, 어떤 의미로 보면 암수와 다름없는 속임수였기 때 문이다. 강이환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들은 처음과 마찬가지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비록 어린애같은 속임수였지만, 실전에서 피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텐데... 강이환은 정말로 싸울 만한 상대와 싸운다는 느낌을 받는다. 왕삼보의 콧등엔 진땀이 송글거리며 맺혀 있었다. 방금 본능적인 후퇴가 아니었다면, 왼손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거칠어진 호흡을 조절한다. 강이환은 분명 나보다 상수(上手)다. 비록 그 차이는 극미할지라도... 과연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왕삼보는 강이환의 검을 바라본다. 그는 아직도 역검을 풀지않고 있다. 역검이라... 문득 어떤 사람과의 대화 한 토막이 떠오른다. 조금 전 왼손이 잘리는 위기를 모면하게 해 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이번에 제가 강이환을 치러가게 되었습니다. 제갈 숙부께서 형산검법에 대해서 하교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형산검법이라면 추뢰검 말인가? 대단히 훌륭한 검법이지. 추뢰검은 한 가지 큰 특징이 있네. 검법의 모든 정화가 바로 역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지.> 섬광같이 지나가는 생각. 바로 역검! 왕삼보는 허리를 쭉 핀다. 탁한 호흡이 어느 정도 풀어진 것이다. 그는 철필을 들어 강이환을 가르킨다. 과연 검룡(劍龍)이란 칭호가 조금도 아깝지 않소!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왜 내 사제를 암습으로 죽였소? 강이환의 콧등에 잔주름이 생긴다. 인혈사(人血蛇) 장민(張旻)말인가? 몰라서 묻는거요? 왕삼보는 손목을 뒤집어 필봉을 하늘로 세우고 천부첩(千斧帖)의 기수식을 만든다. 강이환은 픽 웃는다. 강호엔 어떻게 알려졌는지 관여할 바가 아니지만,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네. 이번엔 왕삼보의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장 사제를 죽이지 않았다고? 강이환이라는 이름 석자가 강호에는 호걸로 알려졌건만, 이제 보니 자신의 행동을 감 추는 소인배였구나! 왕삼보는 노기 섞인 외침과 함께 철필을 휘두른다. 철필의 끝을 쥐고 있는 오른손 엄지와 약지가 기묘하게 회전한다. 파팍. 천부첩의 명구들이 뒤집어진 은하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붓털은 팽팽한 진기에 힘입어 철사와 같이 빳빳하게 곤두서 있다. 강이환은 거푸 물러서며 필봉의 예기를 피한다. 어딜! 한 소리의 외침과 함께 왕삼보의 왼손이 뒤집어지자 매서운 바람소리와 함께 전개된 것은 무극선의 지력. 슈슉... 요혈을 노려오는 지력을 피하려 몸을 좌측으로 옮기는 순간, 돌연 사나워진 왕삼보의 필법이 강이환을 향해 몰아쳐 온다. 예(乂) 자는 좌우로 요동치며 강이환의 뇌문을 개방하고, 구슬처럼 꿰어져 내리꽂히 는 관(串) 자의 힘친 일식이 개방된 강이환의 정수리를 노린다. 강이환은 재차 손목을 돌려 상대의 진기로 밀린 검을 회수한 후, 검을 머리 위에서 왼쪽으로 쓸어 철필로부터 뇌문을 보호한다. 팍. 횡소천군(橫掃千軍)의 평범한 응용이지만 그 시기가 적절해서, 왕삼보의 사나운 공세 를 막아낼 수 있다. 강이환은 소뢰검에 걸려 있는 철필을 세차게 밀어낸다. 내가 장민을 죽였다면, 왜 안 죽였다고 할까! 내가 지금 자네를 겁내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가? 더구나 인혈사란 자는 그 포악함으로 흉명이 자자한 터,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 지경인데! 왕삼보는 병기를 물리며 강이환을 똑바로 바라본다. 강이환의 약간 푸른 빛이 감도는 눈동자는 고요하기 이를데 없다. ...! 어느 순간, 왕삼보는 강이환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왕삼보는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면 장 사제를 죽인 자가 누구란 말인가? 초가뢰가 거짓말을? 그가 왜? 자네가 이곳까지 온 것이 겨우 그 질문을 하기 위함인가? 왕삼보는 퍼뜩 정신이 든다. 강이환의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헝클어진 머리 속을 단번에 가라앉힌 것이다. 호기심 때문에 참가한 전투였지만 이제는 이 전투를 멈출 수 없다. 쌍방이 수많은 사상자를 낸 이 아비규환을, 자신의 호기심이 충족되었다는 이유로 그 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생 마주치기 어려운 대적과 겨루고 있다는 사실이 청년 왕삼보의 피를 요동치게 만들고 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왕삼보는 차갑게 웃으며 새로운 투지를 당긴다. * * * 강이환과 왕삼보의 싸움은 구경꾼들로 하여금 갈채를 아끼지 않으리만치 수준 높은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몇 명의 구경꾼들은 주인공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서 이 멋진 대 결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다. 흐흠! 강이환이란 놈도 저만하면 쓸만하군! 공터에서 십여 장 떨어진 수풀 속, 고개를 끄떡거리는 노인. 그는 뒷켠에 서 있는 세 명의 나무토막 같은 수하들을 쓸어본 뒤, 허리춤에서 곰방대 를 꺼내 맛좋게 빨아 본다. (3) 네 짓이냐? 억누를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과추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려 나온다. 그의 팔에 머리를 얹고 있는 이개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다. 물론! 대적용은 짧막하게 대답한다. 그는 눈 앞에서 이를 갈고 있는 괴상한 태극도복의 노인이 누구인지 잘 안다. 그의 왼손 인지와 중지 사이엔 어느새 전통에서 뽑았는지 한 대의 금작시가 끼워져 있 다. 강호의 다섯 괴인, 강호오괴 중 가장 강하다는 기광(棋狂) 과추운. 근접전에서 발휘되는 과추운의 힘은 무당파 도사들 이상임이 분명할 것이다. 강호의 뭇 연환장법 중 능히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는 붕천십삼장(崩天十三掌)도 그렇 거니와, 백수십 근 무쇠바둑판으로 전개하는 기반술(棋盤術)은 그 개세적인 위력과 변 화무상함으로 수십 년 전부터 강호일절의 명성을 얻어왔다. 대적용은 금작시를 들어 신중하게 시위에 건다. 거리는 스무 걸음 정도. 궁술에 있어서 천하제일의 경지에 도달한 그로서는, 화살을 사용하기에 거북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궁술을 시전함에 있어서 그보다 빠르고 정확한 자는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화살에 담 긴 내력은 바위도 꿰뚫을 정도로 강맹한 것이기 때문에, 한 번 숨을 내쉴 정도의 시간 이면 대부분의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대적용은 거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화살 한 대로는 제압하기 어려운 상대. 운신의 호흡을 끊어가며 화살을 날릴 수 있는 회수는 세 번? 아니면 네 번? 상처를 보니, 그가 모르는 사이에 손을 썼군. 과추운은 이개를 바라보고 있다. 대적용이 제 아무리 하늘 아래 두려울 것이 없다는 호교십군의 일인이지만, 이개 역시 한 쌍의 수장으로 강호천지를 오시한 걸물이었다. 정면승부라면 이렇듯 허무하게 급소를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바둑판이 번속을 친 것도, 그리고 내 화살이 이 노인의 옆구리를 뚫은 것도 모두 마찬가지겠지. 우리는 지금 검극(劍劇)을 벌이는 것이 아니오! 대적용의 싸늘한 대꾸에 과추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떡인다. 똑똑한 체하기를 좋아하는 놈이군... 하지만 맞는 말이다. 좋아! 과추운은 이개를 땅에 누인 후, 땅에 꽂힌 바둑판을 향해 성큼 걸어간다. 활짝 개방된 등을 대적용의 활 앞에 내어주고 있지만 조금의 망설임이나 위축됨이 없 다. 대적용 역시 자세를 허물지 않은 채 과추운의 등을 응시하고 있다. 비록 껄끄러운 대적(大敵)이지만, 관산귀전이 승부를 선언한 상대의 등을 향해 시위를 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추운은 땅에 절반 쯤 꽂힌 바둑판의 한쪽 다리를 잡더니 간단하게 뽑아낸다. 그 무게를 감안한다면 환갑이 지난 노인의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완력이다. 잘난 활솜씨, 어디 구경 좀 하자! 과추운은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내밀며 까딱거린다. 흣! 잘난 활솜씨, 보여드리지! 차가운 웃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대의 화살이 시위를 떠난다. 관산귀전의 금작시 앞에는 스무 걸음이라는 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순식간에 공간을 줄이고 쏘아져온 화살. 과추운의 시선으로 금작시의 갈라진 끝이 크게 확대되어 온다. 피잉. 소리보다 빨랐음인지, 시위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다음이다. 음! 과추운의 왼발이 좌전방의 방위를 밟으며 허리가 묘하게 흔들린다. 동시에 연결된, 왼쪽 다리를 축으로 하는 한 바퀴의 회전. 과추운의 훤칠한 몸은 비단같이 유연하게 휘어지며 직선으로 날아든 금작시를 둥글게 감아 만다. 바람에 휘장이 펄럭이는 듯한 흔들림만 없었다면, 마치 노인의 몸이 금작시에 관통당 했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기묘한 신법이다. 이른바 취한 이백이 달빛을 밟으며 거닌다는 적선답월취유보(謫仙踏月醉遊步)... 여파가 이 정도라니... 화살이 귓전을 스쳐 지나갈 때 과추운은 귀 밑이 뜨끔한 것을 느낀다. 화살 주위에 형성된 충격파가 살갗을 찢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절묘한 회전은 대적용과의 거리를 일 장 정도 단축시켜 주었을 뿐만아 니라, 상대를 향해 퉁겨 달릴 수 있는 충분한 추진력을 안겨 주었다. 어디, 내 장력을 받아 보아라! 두 다리를 기쾌하게 교차되는가 싶더니, 과추운의 신형은 어느새 대적용의 일 장 앞까 지 쇄도해 있다. 과추운은 큰 고함과 함께 오른손바닥을 전면을 향해 뒤집는다. 다섯손가락이 부채살처럼 펼쳐지며 대적용을 향해 밀려가는 거센 장력. 헛! 대적용은 형용하기 어려운 강맹한 기운이 가슴을 짓눌러 오는 것을 느끼고, 급히 내공 을 일으키며 빈 시위를 퉁긴다. 투웅, 소리와 함께 송곳 같은 예리한 기세가 과추운의 장력 속으로 뚫고 들어간다. 대적용이 쏘아보낸 기세는, 끓는 물 속으로 던져진 한 조각 얼음처럼 비등하는 장세를 누그러뜨린다. 무형전(無形箭)? 제법이군. 하지만 잠시 주춤거리던 과추운의 장력은 곧바로 그 힘을 더하며 대적용을 향해 진격 해간다. 대적용은 섣불리 대하지 못하고 오른손을 휘둘러 벽공장(劈空掌)의 수법으로 과추운의 장력에 맞서간다. 펑. 한 차례의 접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하나의 장력이 대적용을 후려쳐온다. 한 번 회수될 때마다 한 푼의 힘이 증가되어 도합 열세 차례의 장력을 줄줄이 뿜어낸 다는 붕천십삼장이 전개된 것이다. 대적용은 헛바람을 삼키며 과추운의 장력을 해소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장법으로 말하자면 과추운이 한 수 위였다. 퍼퍽. 결국 그 힘을 완전히 해소시키지 못한 두 대의 매서운 장력이 대적용의 어깨를 때린 다. 음! 대적용은 쇄골이 부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거푸 세 걸음을 물러선다. 아직 멀었다! 선기를 잡은 듯 과추운의 외침에는 자신감이 충만해 있다. 파파... 태극도포가 찢어질 듯 펄럭거리며 과추운의 오른손은 계속 휘둘러진다. 그는 붕천십삼장의 정화인 열세번째 장력으로 단숨에 승부를 결정지을 생각이다. 위세가 대단하시군. 돌연 대적용의 왼손이 후방을 향해 돌아간다. 엇? 과추운은 자신의 장력이 헛되이 허공을 때리는 것을 느끼고 잠시 어리둥절한다. 대적용은 어느 틈엔가 삼 장 밖으로 몸을 피한 것이다. 자신의 장세가 적을 궁지에 몰았다고 생각한 순간, 적은 손에 쥐고 있던 강궁을 지팡 이 삼아 힘차게 땅을 찍으며 뒤로 달아난 것이다. 상황에 대한 파악이 끝나기가 무섭게 과추운은 목덜미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대적용의 금작화세궁은 이미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 시위 위에 걸려있는 것은 세 대의 금작시! 산합전(散合箭)이외다! 한 소리의 외침과 함께 세 대의 금작시는 과추운을 향해 어김없이 쏘아진다. 세 대의 화살이 만드는 방위는 정확한 삼각. 삼각의 정점을 이룬 화살은 과추운의 미간을 노리고, 나머지 두 대는 좌우의 운신을 제압하고 있다. 이미 피할 시기는 노쳤다. 쩡. 한 대의 화살이 무쇠바둑판에 꽂힘과 동시에 두 대의 화살이 과추운의 도복 겨드랑이 께를 찢으며 지나간다. 바둑판 뒤의 과추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대적용의 화살에는 손목을 시큰하게 만들 정도의 강한 힘이 실려있었던 것이다. 그 기세에 밀려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선 과추운은, 이를 악물고 몸을 앞으로 날린다. 거리를 둔 채 끌려다니면 꼼짝없는 과녁 신세가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떨어져야만 하고 한 사람은 달라붙어야만 한다. 이 싸움의 관건은 바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에 있는 것이다. * * * 두 자 남짓한 기형철척(奇形鐵尺)을 종횡으로 휘두르며 현수를 몰아붙이고 있는 살지 관(殺地官) 오경주(吳京柱)는 자신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치 않고 있었다. 현수의 검은 무당검법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도도한 예기를 잃은 지 오래. 대적용의 활줄에 오른어깨의 근육을 관통당한 탓에 검끝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때때로 왼손으로 전개하는 면장(綿掌)의 교묘함이 없었던들, 현수의 머리는 오래 전 오경주의 철적 아래 수박처럼 부숴졌을 것이다. 현송은 부상당한 사제와 합류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지만, 그를 막아선 비천오웅 의 대형 독심수사(毒心需士) 낙독흠(落讀欽)의 무공은 결코 녹녹한 것이 아니다. 낙독흠이 사용하는 동비발(銅飛鉢)은 현송으로서는 생전 처음 상대하는 괴병(怪兵). 흉흉한 살기를 뿌리는 날카로운 톱니를 제외한다면 영락없는 동냥승의 밥그릇처럼 보 이는 한 쌍의 비발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인 양 허공을 헤집으며 현송을 괴롭히고 있다. 망할 밥주발 같으니라고! 가뜩이나 주름이 많은 현송의 이마에 굵은 밭고랑이 새겨진다. 누구도 승기를 잡지 못하는 팽팽한 대치. 사제의 안위를 걱정하는 현송은 속이 새까맣게 탈 지경이다. 깡. 천중(天中)을 향해 조천세(朝天勢)로 올라간 철척이 땅을 향해 뒤집어지며 수직으로 내리꽂힌다. 으... 무릎을 엉거주춤 구부리며 백로횡강(白鷺橫江)의 초식으로 철척을 막던 현수는 어깨 를 통해 전달되는 고통에 신음한다. 평소의 그였다면 이런 유형의 단순한 공격은 막아낼 수 있었음을 물론이거니와, 백로 횡강의 후반식을 살려 상대의 하체를 향해 매서운 일검을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근육과 신경의 일부가 마비된 오른팔로는 그러한 힘을 얻을 수 없다. 대적용으로부터 입은 상세는 그렇듯 심각했다. 오경주는 현수에게 달라붙으며 철척을 쭉 뻗는다. 적당히 버티고 누워랏! 현수는 왼손을 둥글게 휘어감아 소매를 이용해 철척의 면을 밀어버린다. 매우 고명한 탄현비파(彈絃琵琶)의 한 수였지만 진기가 뜻대로 이어지지 않아, 그 위 력이 십분 발휘되지 못한다. 찌익. 도복이 찢어지며 왼쪽 팔뚝에 긴 상흔이 새겨진다. 손가락 두 개로 내 철척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오경주는 호기롭게 외치며 현수의 좌반신을 공격한다. 아닌게아니라 현수의 왼손에는 엄지와 인지 두 개의 손가락만이 달려 있었다. 오경주로서는 불구인 왼손을 들어 장법을 사용하려 애씨는 현수가 가소로울 법도 하다. 하지만 오경주는 그가 손가락 셋을 누구에게 잃었는지, 그리고 그 원한을 갚기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 순간, 현수는 그에게 손가락 세 개의 빚을 안겨 준 사내가 아니면 절대로 사용하 지 않으려 했던 비장의 절초를 떠올리고 있었다. 차앗! 지금까지와는 다른 웅혼한 장소성은 현수가 극한으로 내력을 끌어올렸음을 시사한다. 갑작스럽게 경맥을 치달린 진기는 근육과 혈관을 자극하고, 바늘끝만한 어깨의 상처로 부터 한 줄기 피화살을 뿜어나오게 한다. 그와 동시에 소용돌이치는 검기를 동반한 송문고검이 오경주를 일직선으로 찔러간다. 좌반신을 노리는 철척은 완전 도외시한 동사(同死)의 독수(毒手)... 엇! 상대의 기세에 눌렸음인지, 오경주는 화들짝 놀라며 철척을 비스듬히 회수해 검봉을 막는다. 그런데 철척과 검봉이 부딪치는 순간, 오경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 다. 현수의 오른팔꿈치와 손목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른 속도로 회전한 것이다. 상처 부위에 가해진 갑작스러운 부하(負荷)는 현수로 하여금 고통의 신음을 삼키게 만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수련했던 공부는 훌륭하게 전개 되고 있다. 팍. 밖을 향해 밀어내는 철척에 담긴 오경주의 내력과 검신을 타고 전달된 갑작스런 회전 력은 송문고검이 산산히 부숴뜨리고 만다. 수십 조각의 검편(劍片)들은 찰나의 순간에 현수가 전개한 척력(擲力)에 실려 일제히 오경주에게 쏘아져 간다. 그리고 은밀하기로 말하자면 천하의 어떤 신법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무당파의 제운종 (提雲縱)이 시전되었다. 이런! 눈 앞으로 가득 확대되어오는 검편의 폭풍은, 난반사되는 빛무리와 함께 대단히 위협 적인 공격이 분명했다. 오경주는 돌연한 사태에 안색을 굳히며 경설난비(輕雪亂飛)의 수법으로 철척을 휘둘러 이 위협적인 검편의 폭풍을 막으려 했다. 그가 이 검편의 폭풍이 시선을 빼앗는 허초였음을 깨닫는 데에는 너무도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흐흐, 어떠냐... 오경주의 눈 앞에서 현수가 차갑게 웃는다. 철척을 휘두르던 오경주의 입은 무엇이 그리 놀라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크게 벌려 져 있다. 너 따위 놈에겐 손가락 두 개도 필요없지? 일지관수(一指貫水). 현수의 왼손에 남아있는 두 개의 손가락 중 인지가 꼿꼿이 곤두선 채 오경주의 미간에 박혀 있다. 천지동장(天地同葬), 파검술(破劍術), 제운종, 그리고 일지관수. 현수를 통해 보여진 이 네 초식의 연계는, 그 정확함이나 조화로움을 논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무섭게 빨랐다. 하늘과 땅을 함께 장사지낸다는 비장한 이름이 붙은 천지동장. 무당파의 검법이기는 하지만 지닌 바 독랄함이 너무도 심해 일반 제자들에게 전수를 꺼리는 초식이다. 파검술 역시 그런 맥락에서 검수에게는 금기시되는 수법. 만일 공격이 실패한다면, 검을 버린 검수의 말로는 너무도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운종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지관수는 무당파의 무공이 아닌 소림금강지 (少林金剛指)의 변형이다. 현수는 과거 두 개의 손가락만 남은 왼손으로는 위력적인 장법을 연성할 수 없음을 알고는, 속가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소림장문인으로부터 내력을 손가락에 최대한 응집 시킬 수 있는 금강지의 요결을 배운 것이다. 현수가 이 연환사식으로 상대하고자 했던 인물은 검신(劍神)의 칭호도 아깝지 않을 대검객. 바로 현수의 손가락 셋을 자른 자이다. 하많은 세월 동안 이 연환사식을 수천 번 반복하면서, 현수가 절치부심 가슴 속에 새 긴 것은 오직 설욕에의 일념뿐이었다. 그리고 그 를 다시 만나기 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닥치니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만 것이다. 비천오웅의 다섯째인 살지관 오경주... 그가 비록 일신상의 무예로 현수에게 뒤지지 않는 고수였지만, 검신의 반열에 오른 그 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경주가 이렇듯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춘삼월 제비의 비천(飛天)처럼 깔끔하기 짝이 없는 연환사식으로 오경주를 쓰러뜨린 현수는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본다. 물빛 절각건(折角巾)을 쓴 문사 차림의 매부리코를 상대하고 있는 사형 현송은, 비록 적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지만 무당검법의 매서움을 잘 살리어 십중육칠(十中 六七)은 공세를 취하고 있다. 패색이 짙었던 자신이 감춰둔 절초을 사용하여 오경주를 쓰러뜨린 사실이 현송의 검 끝에 준엄함을 더해주었음은 알지 못하는 그였지만, 어쨌거나 사형의 분전을 바라보며 마음이 놓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현수의 우전방, 그리 넓지 않은 공간 속에서 흡사 경주라도 벌이듯 다가서고 물러서는 두 사람... 그 중 백의장한의 넓직한 등판을 발견한 현수는, 두 개 남은 손가락마저 뭉개버릴 듯 거칠게 주먹을 움켜쥔다. 장한의 손에 들린 한 길이 넘는 금빛 강궁! 순간적으로 현수는 소매없는 단삼을 입고 낄낄거리던 대머리 노인 이개의 허망한 최후 를 떠올린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적용, 네놈만은 살려둘 수 없지. 현수는 땅바닥에 꽂혀 있는 철척을 집어든다. * * *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뒤로 달아나던 대적용의 몸이 좌우로 기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을 때, 상대의 움 직임을 섣불리 예측하지 말라는 무예계명을 간과한 것은 욕심 때문일 것이다. 일다경(一茶頃)이 넘도록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헛손질을 하고 있다는 초조감은, 과추 운으로 하여금 단숨에 단병육박(短兵肉薄)의 거리를 취해야겠다는 욕심이 들도록 한 것이다. 신법, 그것도 좁은 공간을 능란하게 활보하는 보법의 행로를 예측하는 데에는 몇 가 지 방법이 있다. 우선 가장 기초적인 것은 이동의 주체가 되는 상대의 하체 움직임을 살피는 것이다. 하이상수(下移上隨), 하체의 이동에 상체는 따라가기 마련이다. 발목이나 무릎, 가랑이 같이 하체를 움직이는 관절을 살핌으로써 하체의 동선(動線)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전신의 움직임을 유추해내는 것이 바로 이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상실하허(上實下虛)의 요결을 얻은 단련된 무인이라면 하체의 움직임과는 별 도로 중단전(中丹田)의 진기를 운용함으로써 신체를 이동할 수 있다. 이런 경우 하체를 관찰함에 집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오히려 중단전에 가까운 부위, 어깨나 가슴의 회전하는 방향을 살피는 것이 상대의 움 직임을 봉쇄하는 데에 더 효과적인 것이다. 그러면 하이상수와 상실하허에 능한 - 아마도 대적용 정도의 무인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 상대와 대적할 경우엔 어찌해야 하나.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다. 오히려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지 않는 것이다. 먼저 움직이면 제압당하고 나중에 움직이면 제압한다 라는 요결처럼, 상대로 하여금 먼저 움직이게 하고 그 뒤를 장악함으로써 결국 상대를 제압한다. 이것은 고양이같이 팽팽한 반사신경이 없이는 시도할 수조차 없는 수준 높은 경지임은 말할 나위 없다. 대적용의 쌍환보(雙幻步)가 과추운의 시야를 혼동했을 때, 과추운은 상대가 우측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속단했다. 그리고 두 번의 속보(速步)로 예상지점을 점령한 과추운은, 그의 좌후방 사 장이 넘는 곳까지 물러선 대적용이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끝이외다! 대적용은 살기 배인 외침과 함께 시위를 놓는다. 맙소사! 과추운의 눈이 크게 떠진다. 채 자세를 갖추지 못한 그에게 쏘아지고 있는 화살은 자그마치 여덟 대. 대적용의 궁술 중 가장 무서운 수단이라고 불리는 팔문련시(八門聯矢)가 전개된 것이 다. 금빛의 해일. 여덞 대의 금작시는 허공의 한 축을 중심으로 휴(休), 생(生), 상(傷), 두(杜), 사 (死), 경(京), 경(驚), 개(開)의 여덞 방위를 취하며 날아온다. 어떤 것은 빠르고 어떤 것은 느리며, 어떤 것은 직선이고 어떤 것은 곡선이다. 번쩍이는 금광(金光)을 본 순간, 과추운은 자신이 이미 모든 방위로부터 차단당해 있 음을 깨닫는다. 여덟 대의 화살이 이루는 축이 좌후방이라는 것과, 좌후방을 기축(基軸)으로 하는 팔 문의 중심이 상문(傷門)임을 떠올릴 수 있었음은, 과추운에게 있어서 크나큰 행운일 것이다. 차앗! 과추운의 손에서 바둑판이 빠르게 회전한다. 백수십 근이 넘는 무거운 물체가 그렇게 경쾌하게 율동할 수 있다는 자체가 신기한 일 이다. 그는 회전하는 바둑판으로 요혈을 보호하며 상문(傷門)을 이룬 화살을 향해 몸을 날린 다. 쩡. 무쇠를 쪼개는 소름기치는 소리와 함께 상시(傷矢)가 바둑판에 박힌다. 순간 과추운의 누에고치 같은 흰 눈썹이 꿈틀거린다. 생시의 좌하방에서 날아온 경시(驚矢)가 왼쪽 넓적다리에 적중했기 때문이다. 우욱! 비명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무쇠바둑판을 뚫고 꽂히는 금작시였다. 금강동인(金剛銅人)이 아닌 다음에야 그 힘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금작시는 넙적다리의 근육과 뼈를 너무도 간단히 부숴버린다. 화살의 힘에 실려 일순간 쭉 뒤로 밀리는 하체. 사지 중 하나가 갈갈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과추운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이대로 밀려나 놈이 다시 발사할 기회를 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이다. 승부다! 과추운의 왼손이 칼날같이 곤두선 채 자신의 왼다리를 향해 내리꽂힌다. 기광을 잡았다! 강적에게 일격을 가했을 때의 쾌감. 이제는 단 한 번의 공격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 물결친다. 하지만 상황은 그에게 더이상의 단 한 번 을 허용하지 않았다. 쐐액!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등뒤로부터의 공격. 그 표독스러운 살기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피할 수 있는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엇...? 대적용은 황급히 몸을 돌리며 오른손을 뻗어 장력을 쳐낸다. 하지만 그런 갑작스런 순간에 진기를 끌어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날아온 살기는 대적용의 미약한 장세를 뚫고 들어와 그의 어깨를 사납게 때린다. 이것은... 오경주의...? 고통에 앞서 의아함이 대적용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왼쪽 어깨에 두 치 정도의 자상을 남기고 박혀있는 것은 쇠로 만든 자였다. 날보다 두꺼운 뒷부분과 손잡이에 감긴 붉은 소가죽이 낮익다. 자신의 수하인 비천오웅 중 다섯째 살지관 오경주가 사용하던 기형철척이다. 무양문의 개! 죽엇!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만면에 흉흉한 살기를 띤 도사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어 온다. 바로 오경주를 죽인 무당의 현수이다. 헉! 이건 숫제 무예고 뭐고가 아니다. 머리와 어깨, 그리고 몸통을 내던진 너죽고 나죽자는 발악이다. 이런 광적인 기세가 대적용을 질리게 만든다. 윽! 우욱! 두 마디의 각기 다른 신음. 현수의 투신 공격이 대적용의 가슴을 후려친 것과 대적용의 발길이 소엽(掃葉)의 퇴 법(腿法)으로 현수의 허리를 후려찬 것은 거의 동시이다. 두 사람 모두 뼈가 부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퉁겨져 나간다. 이 한 수로만 말하자면 누가 득이고 누가 실인지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수가 퉁겨진 곳에는 아무도 없고, 대적용이 퉁겨진 곳에는 대적이 있다. 퍽. 백수십 근의 중병이 척추의 가운데를 후벼팠다면 비명조차 지르기 힘들 것이다. 대적용... 네놈...이 졌다... 목소리가 땀을 흘린다고 한다면 이상한 표현이겠지만, 대적용은 지옥의 귀퉁이로 들 어간 듯한 고통 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현수의 필사적인 공세로 인해 잠시 그의 사고 영역에서 떠나있었던 존재가 떠오른 것 도 그때이다. 기...광인가...? 대적용의 몸이 조금씩 돌아선다. 그의 뒤에는 오른쪽 다리로 위태롭게 서 있는 과추운의 얼굴이 있다. 대적용의 금작시가 과추운의 다리를 관통했을 때, 과추운은 뒤로 물러서면 안됨을 느 꼈다. 그래서 그는 다리에 박힌 화살이 하체를 뒤로 끌고갈 때, 가차없이 자신의 다리를 수 도(手刀)로 잘라내 버린 것이다. 그는 이어 한손으로 땅을 찍으며 대적용을 향해 날아들었고, 어찌된 일인지 등을 개방 한 채, 자신에게 뒷걸음질치던 대적용을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린 것이다. 대적용의 입꼬리가 조금 비틀어진다. 이미 그의 척추 가운데 부위는 넝마처럼 너덜해져 있다. 보통사람이라면 즉사했을 정도의 치명상이지만, 그는 여전히 허리를 편 채 서 있다. 그는 고개를 돌린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허리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키는 현수가 있다. 흐흐... 역시 이런 식의 난전(亂戰)은 취미에 안 맞아... 불꺼진 숯더미 같은 힘없는 웃음이 그의 입술을 비집는다. 통증 때문인지 크게 한 번 휘청거리는 허리... 하지만 대적용은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 잡는다. 입가의 잿빛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거기 말코놈, 이름이나 알자. 현수는 아무런 말없이 왼손을 내보인다. 현수의 왼손에 애처롭게 달려있는 두 개의 손가락을 바라본 대적용은 피식 웃는다. 제갈 형님에게 까불다가 손가락이 셋 잘린 도사가 무당파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군. 이름 따위는 기억나지 않지만... 멸시의 기색이 가득한 말투였지만,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상태에 빠져버린 현수 는 아무 대꾸가 없다. 너를 비겁하다고 하진 않겠다. 그러면 나도 덩달아서 비겁해질 테니까... 이개를 암사(暗射)한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잠시 대적용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과추운도 아무런 말없이 대적용을 바라보고 있다. 고통을 참느라고 흘린 식은땀은 노인의 주름진 콧잔등에 송글송글 맺혀 있다. 과 노인, 당신도 대단하군. 그 와중에도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니. 오히려 자네가 더 대단했네. 주르륵. 대적용의 입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 나온다. 과추운의 바둑판에 실린 힘이 그의 내장마저 으스러뜨린 것이다. 삶과 죽음이야 명존(明尊)의 뜻! 하지만, 하지만 나 대적용이 이런 꼴이 되다니, 으하하! 대적용은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부러진 그의 허리가 조금씩 꺾이기 시작한다. 그는 두 팔을 가슴 높이로 끌어올려 백련교의 수결(手結)을 만들려 하지만 육체는 이 미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당당한 체구가 서서히 뒤로 넘어간다. 명존이시여! 이제 미륵(彌勒)의 세상으로 가는 당신의 제자를 받아주소서! 쿵. 닭의 볏처럼, 무적이라는 호칭을 그 이름자 앞에 항상 달고 다니던 백련교 호교십군 의 기둥 하나가 땅으로 무너진다. * * * 과추운은 현수의 부축을 받으며 위태로운 신형을 바로 잡는다. 그의 눈빛이 어두운 것은 고통 때문만은 아니다. 현수의 암습이 아니었다면 쓰러진 것은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 것이다. 호교십군의 열 명 중 하나를 해치우는 데에도 이토록 어렵거늘, 나머지 아홉은..., 그 리고 서문숭은... 당랑거철(螳螂拒轍). 문득 자신이 정 하나를 들고 천장절벽을 없애버리겠노라고 마주 한 석수(石手)와 같 다는 생각이 든다. 무양문... 어찌 이토록 거대하단 말인가! 괜찮으십니까? 현수의 물음에 과추운은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지, 괜찮아. 과추운은 하늘을 바라본다. 노인을 부축한 채 걸음을 옮기는 현수의 귀로 푸념 같은 중얼거림이 들린다. 다리 하나에 관산귀전이라... 사석(捨石 : 바둑에서 어떠한 목적을 위해 일부러 버린 돌)치고는 덩어리가 크긴 하지 만, 괜찮은 바꿔치기라고 할 수 있겠지. (4) 거대한 괴수의 발톱에 할퀴어진 듯 동서로 긴 상흔(傷痕)을 간직한 낭리곡. 대지로부터 솟구치는 피내음에 환멸을 느낀 듯, 태양은 어느덧 서쪽으로 고개를 떨구 고 있다. 낭리곡에서의 낙일(落日)은 볼 만하다. 신부의 얼굴에 드리운 홍포면사(紅布綿絲)처럼, 짙어진 태양을 반쯤 가리고 있는 붉은 구름... 기형적인 절벽 사이로 연출되는 아찔한 장관은,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시흥이 움틀 그 런 절경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란 하나같이 않은 법이어서, 지금 어떤 두 사람은 그런 절경 아래서도 조금의 운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태양이 마치 가슴앓이가 있는 서시(西施)를 흉내내기 위해 얼굴을 찡그린 동 시(東施)의 추괴한 얼굴이라도 되는 양, 조금이라도 등 너머로 지기 위해 고양이처럼 표독스럽게 몸을 움직이고 있다. 생명을 병기 끝에 걸고 있는 두 사람... 바로 왕삼보와 강이환이다. 채앵--- 날카로운 여운을 노을 속으로 던져 올리며 두 자루의 병기가 얽히고 풀어진 다. 오리알도 익는다는 남부의 태양 아래서 두 시진째 생사의 외줄타기를 벌인 탓인지, 병 기를 통해 전달되는 상대의 내력에 찬사를 보낼 여유가 남은 사람은 없는 듯하다. 점점 더 흐물흐물해지는 몸뚱이와 점점 더 딱딱해지는 안색은 그들의 숨가쁜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다. 병기가 풀리는 순간, 펄럭이는 푸른 옷자락과 함께, 강이환의 왼손이 왕삼보의 어깨 를 찍어간다. 구부러진 엄지와 둥글게 모여 송곳같이 뻗은 네 손가락은 사두(蛇頭)의 형상인데, 위 를 취하며 아래를 때리는 기세는 매섭기 그지 없다. 하지만 접근전에서의 육박이라면 점혈공부에 능한 왕삼보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왕삼보는 어깨를 한 자 정도 낮춤으로써 사두의 예봉을 무마시키며, 숨쉴 틈없이 이어 지는 원앙퇴(鴛鴦腿)로 반격한다. 두 다리가 허공에서 화려한 퇴영을 그린다. 퍼퍽. 왕삼보의 발길질이 교묘할 정도로 시간을 잘 맞춘 탓에, 강이환은 속절없이 허리에 이 퇴(二腿)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 강이환은 낮은 신음과 함께 물러선다. 한쪽 다리를 땅에 딛는 동시에, 재차 장기로 하는 연환퇴법(連環腿法)으로 강이환을 몰아세우려던 왕삼보는, 어느 순간 강이환의 팔꿈치 뒤에서 폭사된 차가운 살기에 헛 바람을 삼킨다. 흣! 왕삼보는 퉁기듯 뒤로 물러선다. 그의 흑의 앞자락이 베어져 나풀거리고 있다. 왼쪽 가슴... 조금만 더 깊게 베였으면 모든 상황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 퇴를 허용한 강이환의 육박 속에는 이처럼 음험한 덫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달아나는가? 차가운 빈정거림과 함께 강이환의 푸른 신형이 왕삼보에게 그림자처럼 달라붙는다. 역파(逆把)된 소뢰검이 그의 팔꿈치 어림에서 현란하게 변화한다. 이익! 왕삼보는 뒤로 뺀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며 아래로부터 솟구쳐 오는 차가운 검광을 맞 받는다. 그런데 바로 이때, 왕삼보로서는 매우 재미없는 일이 벌어졌다. 힘주어 버틴 오른발이 갑자기 세 치쯤 짧아져버린 것이다. 싯. 안개가 바람에 흔들린 듯한 안타까운 파공성과 함께 왕삼보의 옆구리에 한 줄기 검상 이 종으로 길게 새겨진다. 이런...! 비록 상처는 치명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상황은 치명적이다. 땅 속으로 세 치나 박혀 들어간 오른발은 강이환의 두번째, 세번째 공격을 피하는데 크나큰 장해요소가 될 것이 뻔하며, 그리고 그 공격들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이환은 그의 예상을 깨고 훌쩍 몸을 날려 서너 장 뒤로 물러선다. 형산은 보기보다 메마른 땅이지. 딛을 곳을 제대로 찾지 못하면 왕왕 그런 일이 벌어진다네. 왕삼보는 지표면을 뚫고 들어간 오른발을 바라본다. 푸석한 다공질(多空質) 현무암이 그의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것이다. 형산 곳곳에 화산암 지역이 있음을 알 턱이 없는 그였기에, 이런 종류의 재해 에는 속 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강이환을 바라본다. 강이환의 눈 속에는 묘한 웃음이 감돌고 있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다가 넘어진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강이환은 어느덧 결투가 시작되기 전의 여유를 되찾은 것처럼 보여진다. 픽. 원인모를 실소가 왕삼보의 말라붙은 입술 사이를 비집는다. 멋지군... 묻혀 있는 발을 빼내며 왕삼보는 나직히 중얼거린다. 강이환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중얼거림이다. 그는 신발에 묻은 흑을 철필로 툭툭 털어낸다. 나 정도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문득 왕삼보는 강이환의 번들거리는 오만에 흙덩이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이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잘 봐두게, 이제부터가 형산검법의 진짜일 테니까. 말이 끝나는 순간, 강이환의 몸이 살짝 웅크러든다. 정인(情人) 앞에서 교태를 부리는 여인네처럼 부드럽기 그지없는 변화. 하지만 무릎과 허리가 보일 듯 말 듯 구부러진 그의 자세로부터 발산되는 예기는, 사 방을 향해 가시를 곤두세운 고슴도치와 같은 느낌을 준다. 왕삼보의 눈이 가늘어진다. 오른팔 뒤로 돌아간 강이환의 검은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오른다리를 한 자쯤 후방으로 뺀 상태, 두 무릎과 허리가 굽혀졌...다...? 그런 자세는 대개 한 가지 동작의 준비 단계일 것이다. 바로 달리기 이다. 핫!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강이환의 몸이 화살 같은 질주를 시작한 것은, 왕삼보가 그 자 세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과 동시였다. 위험하다! 생각과 몸이 동시에 반응하는지, 왕삼보의 몸은 황급히 왼쪽으로 미끌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지금껏 저런 유형의 기이한 공격을 경험한 적이 없다. 두 팔이 뒤로 돌아간 상태에서 머리와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달 려드는 강이환. 갈기분천(渴驥奔泉)이라고, 샘을 향해 달려가는 목마른 말의 속도가 이럴까.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살기는 그 질주보다도 빠르게 왕삼보의 전신을 휘감아가고 있 다. 파악. 왕삼보의 오른쪽 가슴에서 피가 솟구친다. 어느 결인가, 두 자 길이의 독아(毒牙)는 한 치에 가까운 깊은 상처를 만들고 지나친 것이다. 차가운 한기가 엄습한 순간, 재빠르게 몸을 뒤틀지 않았다면 절명을 면치 못했을 것이 다. 살이 갈라지는 섬뜩한 느낌과 추뢰검법이 자랑하는 열양강기로 인한 화끈한 통증이 밀 려온다. 그리고 상처를 돌볼 여유도 없이 소나기같이 퍼부어지는 검풍. 차앗! 왕삼보는 묵오철필을 사납게 휘두르며 강이환의 검을 막아낸다. 그 거친 초식에 질린 듯 강이환은 몇 걸음 물러선다. 입가를 스치는 미소는 공격의 성과에 대한 만족감일 것이다. 왕삼보는 빠른 뒷걸음으로 강이환과의 거리를 두는 한편, 가슴의 혈도 두 군데를 봉 쇄하여 솟구치는 피를 막는다. 이런 식의 지혈은 시간이 흐르면 대맥에 치명적인 영향이 미칠 만큼 위험한 것이었지 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강이환!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분명히 공세로부터 벗어났다고 여겼건만, 도대체 어디에서 검이 튀어나왔단 말인가. 저것이 역검인가! 비록 실전경험이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는 왕삼보였지만, 검수를 상대한 경험은 결코 얕은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호교십군의 1, 2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절정검호(絶頂劍豪)들이 그가 홍안의 시절일 때부터 검에 관한 가르침을 준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때로는 검론(劍論)에 대한 강의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수련이라는 이 름 하에 실전을 방불케하는 매서운 목검 타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들 대검수들과 강이환을 비교한다면... 승부의 의외성을 감안한다고 한들, 그들이 뒤질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 좋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삼보는 지금 어이없을 정도로 몰린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하나뿐. 바로 역검 이다. * * * <형산검법이라면 추뢰검 말인가? 대단히 훌륭한 검법이지. 음... 추뢰검은 한 가지 큰 특징이 있네. 검법의 정화가 바로 역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지.> <역검...?> <역검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야. 투로(套路)가 짧게 끊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더 큰 이유는 날이 팔 뒤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 짧은 투로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까 닭이지.> <역검의 위력이 그토록 무섭다면, 강호 제(諸)검법 중 역검을 찾기 어려운 까닭은 무 엇입니까?> <글쎄, 아마 수련하기 어려워서일 게야. 그리고 역검은 암중으로 베는 기능이 강화된 대신 찌르는 기능이 약한 까닭도 있겠지. 하지만 추뢰검처럼 탄탄한 정검을 바탕으로 한 역검이라면, 이미 그런 약점은 스스로 보완했을 걸세.> <그러면 추뢰검법의 역검은 단점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왕삼보는 이번 남정(南征)에 나서기 전, 자신이 숙부라고 부 르는 제갈휘(諸葛輝)와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자네는 역시 내 적수는 못되는 것 같군. 강이환은 오른팔을 늘어뜨리고 역검을 유지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공격을 위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상처 입은 가슴을 왼손으로 누르며 왕삼보 역시 걸음을 옮긴다. 적에게 유리한 위치를 쉽게 내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무엇에라도 놀란 듯, 왕삼보의 걸음이 우뚝 멈춘다. 살짝 내리깔고 있는 왕삼보의 눈가가 가볍게 떨린다. 푸석푸석한 땅... 아까 자신의 발이 빠졌던 바로 그런 땅이 다시금 그의 발 아래 있었다. 왕삼보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태양을 등진 유리한 위치를 확보한 강이환은 다시금 몸을 웅크린다. 왕삼보와의 거리는 오 장 정도... 그에게는 매우 익숙한 거리. 달리며 감춰 베는 추뢰검법이 가장 확실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의 왼쪽 무릎이 서서히 구부러진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몸 뒤로 돌아가는 오른 팔... 그리고 어느 순간, 차앗! 힘찬 기합과 함께 강이환의 질주가 재현된다. * * * <허허, 단점이라... 상대해 보지도 않은 검법의 장단점에 대해 내가 어찌 왈가왈부할까? 더구나 추뢰검 같은 기특(奇特)한 겁법을.> * * * 사(四) 장. 왕삼보는 무릎을 반쯤 구부린다. 탈진한 육체가 무형추(無形錐)를 시전할 수 있고, 없고는 하늘의 몫이다. 발바닥 아래에서 작은 흙덩이가 부서진다. 질주 중인 강이환의 눈빛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이를 두고 미세한 파랑을 일 으킨다. 허리와 팔목의 회전을 극대화할 수 있는 그의 역검은 상대가 좌우로 피한들 능히 따라 붙어 벨 수 있다. 그렇다고 후방으로 피하는 것은 자살행위. 자신이 질주 속도는 뒷걸음질로 달아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멍청히 서 있는 저 자는 무엇을 할 생각인가? 삼(三) 장. 기회는 단 한 번! 왕삼보는 필생의 내공을 폭발시키듯 끌어올린다. 지혈시킨 상처가 터지며 핏물이 솟구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二) 장. 피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정면대결? 지척에 이르기까지 왕삼보가 엉거주춤 서 있자 강이환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상처입은 몸으로 자신의 검과 정면으로 맞서다니, 어리석기 작이 없는 놈 아닌 가! 독오른 고양이가 발톱을 휘두르듯, 오른어깨 반 자쯤 아래 부위에서 소뢰검이 튀어나 온다. 일(一) 장. 지금이다! * * * <참! 혹시 이것이 역검의 단점일지도 모르지...> * * *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목표물을 향해 검을 휘감아가던 강이환의 얼굴이 일 순 딱딱하게 경직된다. 거짓말처럼 목표물이 사라진 것이다. 어디...? 일대일의 대치상태에서 적의 기척을 노쳤다는 것은, 벌써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의미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다. 그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전, 좌, 우 삼방(三方). 왕삼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면! 강이환의 몸이 오른발을 축으로 빠르게 회전한다. 순간, 그의 신형은 균형을 잃은 조각배처럼 크게 휘청거린다. 조금 전 왕삼보가 그랬듯, 그의 오른발 또한 발목까지 지면 속으로 꺼져들어간 것이다. 이런! 허둥지둥 흐트러진 신형을 추스리던 강이환은 뒤꼭지가 서늘해짐을 느낀다. 단련된 무인의 직감은 강이환으로 하여금 머리 뒤쪽의 하늘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 곳에는 붉은 하늘과 너무나 붉어서 오히려 하얗게 보이는 저녁 태양이 있다. 그리고 독수리같이 그를 덮치는 검은 그림자...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검은 그의 뜻대로 휘둘러지지 않는다. 흐트러진 자세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바로 주먹 쥔 새끼손가락 부분부터 검날이 시작되는 역검 때문이다. 빡. 그림자의 오른손이 휘둘러지는 순간, 강이환의 완골(脘骨)과 그 아래 삼각근(三角筋) 이 한뼘 반 길이의 묵오강(墨烏鋼)에 격중되어 움푹 함몰되고 만다. 순간적으로 뼈가 부숴지고 근육이 찢기는 고통 속에 던져졌을 때라면, 아무리 철장석 담(鐵腸石膽)의 대장부라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가슴을 때려온 충격은 강이환에게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여유마 저 앗아간다. 퍽.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강이환의 몸이 주르르 밀려간다. 왕삼보의 필생공력이 실린 장력이 가슴을 때린 것이다. 그 일 장에 담긴 힘은 강이환의 굳센 내력으로서도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다. 눈 앞으로 하얀 선들이 축제를 벌이듯 난무하더니 급기야는 풀썩, 무릎이 꺾인다. 털썩. 약간의 시차를 두고 왕삼보의 살집 좋은 몸뚱아리도 허물어지듯 지면 위로 떨어진다. (5) 무형추(無形錐). 진기를 수발이 수의(隋意)의 경지에 오른 내가고수가 아니면 구사하기 힘든 상승수법 이다. 가늘게 통하여 내부를 진탕시키는 발경의 묘(妙)가 요체인 무형추는, 달걀을 움켜쥐되 껍질이나 흰자위는 상하지 않고 노른자위만을 터뜨릴 수 있는 고도의 내력 운용이 필 요하다. 운기가 원활하지 않은 데다가 가볍지 않은 검상까지 입은 왕삼보가 그러한 무형추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천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으음... 땅에 엎어져 있던 왕삼보는 철필에 의지하여 몸을 일으킨다. 하늘이 보살폈든지 아니든지 간에, 억지로 지혈시킨 상태에서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 린 죄과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혈시킨 상처는 그가 하늘로 솟구치기 전에 벌써 터져버렸다. 상처에서 흘린 피를 모두 받았으면 족히 한 말은 되었을 것이다. 고통 이전의 과도한 출혈이 그의 신지를 어지럽게 만든다. 뇌수가 흘러내려 땅에 늘어붙은 듯한 몽롱한 기분이다. 하지만 강이환을 이겼다는 단 한 가지의 사실이, 그로 하여금 두 다리로 대지를 딛을 수 있도록 해 준다. 나는 말이오... 왕삼보는 땅에 눕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고 말을 이어 간다. 치사한 놈이라서 당신처럼 멋을 부리지 못하오. 특히 싸울 때는... 비릿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맺힌다. 그는 소원대로 강이환의 번들거리는 오만에 흙덩이를 끼얹은 것이다. 그것도 매우 극적인 방법으로! 이기기 위해선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것이 내 신조요. 물론 잘 부숴지는 땅거죽도 포함해서... 길게 쓰러진 강이환의 고개가 힘겹게 들려진다. 죽을 때 죽더라도 개처럼 엎드린 채로 적의 살수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벌레처럼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몸뚱아리는 바위에 짓눌린 손오공처럼 꼼 짝도 하지 않는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엎드린 몸을 뒤집어 눕는 간단한 동작에 그치게 되 었다. 쿨럭---. 기다렸다는 듯이 목구멍을 타고 솟구치는 뜨거운 선혈은 그의 두 뺨을 붉게 물들이고, 메마른 땅으로 스며들어 간다. 땅이... 그렇게 된 것도 자네 작품인가? 토혈이 진정된 강이환의 힘겨운 물음이다. 회전의 축이던 오른발이 땅 속으로 빠진 일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렇소. 무형추였나...? 그 짓을 하느라고 꼼짝않고 있었군.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이 피를 토하더니, 토혈이 멎자 정신이 조금 돌아온 듯하다. 강이환은 멀쩡한 왼팔로 버티어 상체를 간신히 일으킨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삼보의 입이 불쑥 열린다. 제갈 숙부를 아시겠지? ...! 제갈 숙부께서 말씀하셨소. 역검은 검자루를 쥔 모양상 상하의 전환이 늦을지도 모른다고. 달려오던 당신을 한순간만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래서 위에서 아래로 공격할 수만 있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소. 우웩! 강이환은 또다시 선혈을 토해낸다. 화산파...의 반도... 제갈휘가 그런... 말을 했...던가? 말을 하는 도중에도, 입가에 피는 쉴 새 없이 흐르고 있다. 자신의 검법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간신히 진정시켜 놓았던 내식을 다시 진탕시킨 것 이다. 정검에서 역검으로 바꾸는 것은 검자루를 가볍게 던져 놓은 상태에서 손목만 뒤집어 잡으면 된다. 하지만 역검에서 정검으로 전환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역검에서의 공세가 강호일절인 추뢰검법에는 역검을 정검으로 바꾸어쥐는 초식 따위는 필요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는 필요없다고 생각해 온 것이다! 강이환은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손바닥으로 닦아낸다. 그렇다고 해도... 그 몸으로 내 시야를 벗어나는 신법을 쓸 수 있다니... 놀랍다. 왕삼보는 씨익 웃는다. 별다른 용한 신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오. 나는 다만 가장 높이 뛰어오르려 했을 뿐. 당신이 너무 빠르게 달려왔기 때문에 당신의 시야가 좁아진 탓이겠지. 그랬던가... 강이환은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체념의 기운이 짙게 배어 나오는 웃음이다. 모든 것이 끝났소, 강이환! 왕삼보는 강이환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런 악전고투는 경험한 적이 없다. 그의 말대로 저 자를 처치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사제의 죽음에 대한 의문도, 어쩌면 아직도 곡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규환지투(叫喚之 鬪)도, 모든 것이 다 귀찮다. 단지 편안한 침상에 누워 쉬고 싶을 따름이다. 하지만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휘잇--- 강이환을 향해 치켜든 철필을 내리치려는 순간, 호각소리 같은 파공성과 함 께 세 줄기의 백선(白線)이 왕삼보의 좌측 후방으로부터 쏘아져 왔다. 엇? 세 줄기 백선은 빠르고 정확하다. 왕삼보가 몸을 돌려 백선을 마주대했을 때에는 이미 피할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 을 정도로. 왕삼보는 철필을 쭉 내밀어 삼점두(三點頭)의 초식으로 허공을 세 곳을 찍어 간다. 이 방어는 매우 시의적절한 것이어서, 백선들은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그의 앞으로 떨어지고 만다.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유엽도(柳葉刀)... 왕삼보의 시선은 백선이 날아든 방향을 더듬는다. ...? 뒷편의 수풀 속에서 걸어나오는 세 사람을 발견한 왕삼보의 눈빛이 크게 흔들린다. 붉은 죽립에 소매 없는 단삼, 그리고 그 단삼 왼쪽 가슴 부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불꽃 문양이 한결 같은 세 남자. 삼...사(三蛇)? 저들이 유엽도를 던졌단 말인가? 현실이란 언제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엉뚱할 수도 있 는 것일까. 왕삼보는 이 순간 바보가 된 것처럼 아무런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삼사가 몇 시진 전 낭리곡 입구에서 초당과 함께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는 사실을 떠올 린 것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온 그들이 삼재(三才)의 방위로 왕삼보를 둘 러싼 후이다. 약속한 것처럼 손에 쥐고 있는 세 자루 붉은 소검이 주위를 으시시한 살기 속으로 던 져 넣는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오? 채챙... 대답은 세 자루 소검이 대신한다. 세 방향을 동시에 찌르고 들어오는 험악한 공세에 왕삼보는 철필을 급히 휘둘러 요혈 을 방어한다. 하지만 그들의 돌연한 행동에 잠시 넋이 빠진 사이, 허리와 허벅지에 검붉은 상흔이 새겨진다. 이, 이놈들! 배신했구나! 고통이란 묘한 것이다. 두 개의 상처는 도가니 속에서 뒤엉켜 끓던 어지러운 감정들을 거짓말처럼 하나로 통 일시켜 주었다. 바로 사자와 같은 분노로. 퍼펑. 상처입은 몸의 어느 구석에 이런 힘이 남아 있었을까. 강이환과 싸울 때에도 이런 용맹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철필을 휘둘러 전방의 천사(天蛇)를 물리침과 동시에, 허리를 틀어 좌우 후방으로 쳐 낸 장력의 수는 자그마치 여덟 번. 지사(地蛇)와 인사(人蛇)는 눈도 못 뜰 정도로 몰아쳐 오는 거센 장력에 방위를 흐트 러뜨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다. 네놈들부터 죽여 주마! 등 뒤의 두 명을 멀찍이 물러서게 만든 왕삼보는 재차 허리를 틀며 천사에게로 쇄도해 들어간다. 빳빳하게 곤두선 왼손 인지는 숨돌릴 틈없이 백련교의 호교절학(護敎絶學)인 무극선 (無極線)을 토해낸다. 이러한 흉맹한 기세는 평소 온유로운 묵오군자 왕삼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면 강이환과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든 악전고투가, 그의 본능 깊이 잠들어 있던 살 기를 눈뜨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삼로군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인 천사조차도 그러한 기세에 눌린 채 속수무책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윽! 송곳 같은 삼 지(三指)가 평생 열릴 것 같지 않던 천사의 입으로부터 비명을 짜낸다. 더러운 놈들, 대가리를 부숴주마. 타오르는 눈은 금방이라도 피를 뿜어낼 듯 충혈되어 있다. 왕삼보는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누르지 못하고, 철필을 단봉처럼 치켜든 채 단숨에 천 사의 머리를 부숴버리려 한다. 하지만... 그의 뒷편에서 날아든 살기는 너무도 은밀하고 부드러웠다. ...? 왕삼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배를 바라본다. 길죽한 대꼬챙이 같은 것이 배 앞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다. 꼬챙이의 앞부분에는 상아로 만든 듯한 무엇인가가 달려 있다. 피리의 입부리 부분처럼 사람이 입을 대기에 적합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상아 조각... 그것은 곰방대였다. 이것은 초당의...? 배 앞으로 삐죽 튀어나왔던 곰방대는, 자신이 만들어 낸 구멍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듯 부드럽게 뽑혀져 나간다. 일련의 수법이 얼마나 매끄럽게 절제되어 있던지, 왕삼보의 아랫배에서 피분수가 솟구 치기 시작한 것은 곰방대가 뽑혀진 한참 후였다. 왕삼보는 몸은 철필을 치켜든 자세 그대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에잉! 이제 이놈은 더 못 쓰겠군. 신경을 거슬리는 쇳소리... 왕삼보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간다. 그 곳에는 작달막한 키에 우수꽝스러운 색동옷을 입은 늙은이가 얼굴을 찌푸리고 곰방 대를 바라보는 희극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다. 노인은 아끼던 곰방대가 피에 젖은 것이 매우 못마땅한 기색이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망령난 늙은이 같은 복장의 조그만 노인, 무양문 호교십군 중 세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불노동자 초당은 문득 생각이라도 난 듯이 왕삼보를 바라본다. 왕 공자, 어쩌다 이렇게 되셨소? 왕삼보는 피가 머리끝으로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초당마저...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사고가 이어지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만 은 아니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더 밝은 법이니까. 하기야 삼사 따위가 자의로 배신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들이 배신했다면 아마도 그 배후에는 초당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왜...? 왕삼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땅으로 쓰러진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얼마나, 얼마나 어렵게 역검을 잡았는데, 이제와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현실이란 언제나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현실이란, 이를테면 그가 지금 죽어간다는 식의 결과만이 남을 뿐이다. 고통스럽소? 노부가 도와 드리리다. 초당은 장심을 왕삼보의 등에 대고 가볍게 누른다. 왕삼보의 몸이 한 차례 꿈틀거리곤 잠잠해진다. 심맥과 함께 한 조각 남아 있던 생명마저도 끊어진 것이다. * * * 원극(元劇)에서 그날의 대사를 모두 마친 보조배우처럼, 한쪽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 던 강이환은 눈 앞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을 믿을 수 없다. 쯧쯧, 서문 교주(西門敎主)의 제자를 가볍게 대하니 이런 일을 당하지. 괜찮은가? 멍청히 앉아 있는 강이환에게로 초당이 다가온다. 고개를 들어 바라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조그만 늙은이였다. 당신이 불로동자 초당이오? 내가 초당일세. 단 한 토막의 대화였지만, 초당이 자신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아차리는 데엔 충분하다. 하지만 구름처럼 일어나는 의혹은 감출 수가 없다. 당신은 왜 왕삼보를 죽였소. 초당은 빙긋 웃는다. 강 단주, 자네가 죽으면 곤란하기 때문이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겹치는 의혹이 서서히 짜증으로 바뀐다. 나 때문이라고? 당신은 무양문의 호교십군 중 한 명이 아니오? 문파를 거역하면서 나를 살리려는 이유나 들어봅시다. 강이환의 말과 표정에선 방금 생명을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공손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초당의 눈이 장난스럽게 동그래진다. 잠시 후 초당의 얄팍한 입술이 벌어진다. 내게는 또 하나의 신분이 있기 때문이지. 또 하나의 신분...? 나는 황상의 명을 받들어 감찰의 업무를 수행하는 비각(秘閣) 사람이라네. 사십구비영(四十九秘影) 중 구비영, 그것이 또 하나의 신분이지. 초당의 어조는 한가롭기만 하다. 十七章 日照嶺 (1) 그가 허리에 감고 있는 철포(鐵布)는 대단히 진귀한 물건이다.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만드는 공정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우선 명검의 산지로 유명한 곤오(昆吾)에서 생산되는 현철(鉉鐵)을 남만(南灣)의 연 순강(軟純鋼)과 알맞은 배합으로 섞어 가는 철사(鐵絲)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철사는 현철의 강인함과 연순강의 질김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이 철사를 세 가닥으로 꼬아 젓가락 굵기로 만든 후, 종으로 한 푼, 횡으로 두 푼 간 격으로 촘촘히 늘어놓아, 폭 두 자 길이 일곱 자의 철망(鐵網)을 만든다. 이것을 철포의 틀로 삼는다. 틀이 만들어지면 금사(金絲)와 잠사(蠶絲)를 아홉 가닥씩 꼬아 종횡으로 두 겹의 천 을 짠다. 그 위에 교금(膠金)을 부어 그늘에서 석 달 동안 건조시키면 표면에 질긴 피막이 형성 된다. 그가 감은 철포는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든 것이다. 이 철포를 힘을 주어 구부릴 수 있다면, 그는 대단한 힘을 지닌 장사일 것이다. 이 철포를 허리에 겹겹으로 둘러 감을 수 있다면, 그는 대단한 내공을 지닌 내가고수 일 것이다. 헌데 그는 철포를 허리에 둘러 감은 정도가 아니었다. 철포의 양 끝을 잡아 왼쪽 옆구리에 멋들어진 아홉 개의 매듭을 만들어 늘어뜨린 것이 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철포의 매듭, 철포결(鐵布結)이라고 부른다. * * * 철포결 우근(于勤), 그는 지금 태호(太湖)가 바라보이는 언덕 위의 관도를 걷고 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경호(鏡湖) 위로 자리잡은 계절을 바라본다. 어느덧 팔월 초...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은 자연에게 힘을 준다. 갓 태어난 계절은 높은 하늘에 푸르게 맺히고, 호수 건너편 산봉우리에 창연히 물들고, 일렁이는 금빛 물결 위에 부드럽게 부숴지고, 그물을 드리운 고깃배의 어부가(漁夫歌) 속으로 유유히 녹아든다. 여름이 제 몸을 살라가며 축적시켜 놓은 생명력을 동생 가을이 물려받아, 이토록 화려 하고도 숙연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저, 방주(幇主)님. ... 방주님! 응...응? 뒷전에서 빽, 하고 울리는 질그릇 깨지는 소리가 우근의 풍류를 여지없이 구겨버린다. 돌아본 우근의 눈 앞에는 싱싱한 계절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 확대되어져 있다. 우근의 풍류를 구겨버린 사내의 차림은 대단히 누추하다. 차림이 누추하다고 해서 모두 거지는 아니겠지만 기운 옷에 떨어진 짚신, 허리춤에 매 단 표주박은 그가 거지임을 유추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비록 머리에 삐딱하게 얹혀 있는 것은 문사나 서생들이 쓰는 홍화소요건(紅華逍遙巾) 이지만, 이것 때문에 그를 문사나 서생으로 봐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이 너무도 분명히 그를 거지라고 말해 주기 때문이다. 우근의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는 것은 수양이 깊은 탓이라기 보다는, 그가 거지들의 우두머리인 탓에 이런 얼굴들에 워낙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리라. 이 좋은 경치에, 헤헤... 술 한 잔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박박 얽은 얼굴이 추레해 보이는 사내 호유광(胡裕珖)은 손때가 반들거리는 죽봉(竹 棒)을 겨드랑이에 낀 채,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우근을 바라보고 있다. 눈가에 잔뜩 잡힌 반달 주름에는 알랑거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어험! 우근은 근엄한 헛기침 한 번으로 그의 알랑거림을 묵살해 버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태호의 절경을 바라본다. 방...방주님! 곰보 사내는 잰걸음으로 우근의 시선을 따라붙는다. 사내의 얼굴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안타까움이 물들어 있다. 우근의 미간이 좁아진다. 호(胡) 아우! 자네 개봉(開封)을 떠날 때 뭐라고 약속했었나? 호유광은 우근의 한 마디에 찔끔한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절실한 이유가 그의 반항심을 자극한다. 바로 그 개봉을 떠난 것도 벌써 엿새입니다, 엿새! 술을 자제 하겠다는 약조도 엿새 동안이나 지켰으면, 이제는 방주님께서도 소인의 갸 륵한 인내심을 좀 살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만이 가득한 투덜거림이다. 우근의 눈빛이 묘하게 꼬인다. 자제? 방금 자제라고 했나? 절대로 안 마시겠다고 하지는 않았고? 그게... 그거죠. 어떻게 그게 그건가? 그래도... 호유광은 말문이 막힌 듯 머리를 긁적인다. 원 사람, 술이랑 원수라도 맺었나. 쯧쯧... 우근은 혀를 찬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호유광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천하의 항거주지(恒居酒池)가 술을 엿새를 참았다는 것은 사건 중에서도 사건이기 때 문이다. 또한 호유광도 다른 제자들에게 존경받는 칠결제자(七結弟子)인데, 술 한 잔 때문에 이렇게 몰아세우는 것도, 방주의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하긴 나도 목이 컬컬하군. 태호에는 잉어 요리가 일품이라는데, 그걸 안주 삼아서 딱 한 잔만 하기로 하지. 우근의 이 한 마디가 호유광의 눈빛에 생기를 준다. 역시, 방주님이셔! 영웅호주(英雄好酒)란 말이 딱 맞단 말씀이야! 제가 전망 좋은 자리를 잡아 놓을 테니 방주님께서는 이 좋은 경치를 감상하시면서 천 천히 오십시오. 호유광은 죽장을 뒷춤에 꽂더니 멀리 보이는 객점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 간다. 그 굉장한 신법에 우근은 실소를 터뜨린다. 영웅...호주...? 원 사람도. 하기야 저 술귀신이 그 동안 참은 것이 신통한 일이지. 사실 그 역시 술을 좋아하며, 더구나 생선 요리라면 사죽을 못 쓴다. 태호의 잉어 매운탕이야, 장한(張翰)이 대사마(大司馬) 벼슬도 마다하게 만든 진하(晉 河)의 농어회와 함께 천하절미로 손꼽히는 음식이 아닌가. 우근의 부리부리한 고리눈은 펄펄 뛰는 잉어가 눈 앞에 놓여있기라도 한 것 처럼 번들 거린다. * * * 여기가 어디라고, 거지 새끼가 함부로 들어오려고 그래? 제법 번듯한 이층 객점 앞에 도착한 우근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전망 좋은 자리를 맡겠노라고 큰소리치며 앞서 달려갔던 호유광은, 자리는 커녕 문턱 도 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호유광의 앞에는 육 척이 넘는 거한이 금강나한(金剛羅漢)처럼 버티고 서 있다. 벗어부친 상체에 꿈틀거리는 근육은 제법 위협적으로 보인다. 아니, 거지는 술도 못 먹는단 말이야? 호유광은 침을 튀기며 거한에게 대든다. 호유광은 객점의 주렴 사이로 솔솔 풍겨나오는 술냄새에 반쯤 환장한 상태이다. 오죽 술을 좋아했으면 그의 별호가 항거주지(恒居酒池 : 항상 술 못 위에서 삶)일까. 방주를 단독으로 호위한다는 막중한 임무가 아니었으면, 애당초 술을 안 마시겠다는 망발을 입에 담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 이거 웃기는 자식이네. 이놈아! 비럭질로 돈푼이나 생겼으면 집에가 니 마누라 속곳이나 새것으로 사 주렴. 네깐 놈의 거지가 이 유명한 태호반점(太湖飯店)에서 술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니? 호유광의 앞을 태산같이 막아선 채 눈을 부라리는 덩치 큰 위인은, 태호 부근에서는 장사로 이름난 왕풍(王豊)이란 위인이다. 원래는 어부였는데, 풍채가 당당하고 힘이 워낙 좋은 탓에, 행패를 부리는 취객들의 치닥거리를 맡는 주부(酒夫)로 전격 채용된 것이다. 이 자식이 내 마누라 속옷이 더러운 걸 어떻게 알았을까? 호유광은 내심 움찔했지만, 눈 앞에는 술독이 있다. 하여튼 비켜! 난 때려 죽여도 여기서 술 마실래. 호유광은 왕풍을 밀치며 객점으로 들어가려 한다. 요놈의 쥐새끼 같은 녀석이! 어른이 점잖게 말씀하시면 냉큼 알아 듣고 곱게 물러갈 것이지! 왕풍은 팔을 뻗어 흑호투심(黑虎透心)의 수법으로 호유광의 가슴을 때린다. 다리를 구부리며 주먹을 뻗는 모양새가 제법인 것이, 뒷골목에서 사람깨나 패 본 솜씨 이다. 호유광은 한 걸음 물러서서 그의 주먹을 피한다. 이걸 패고 개값을 물어? 호유광은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개방의 칠결제자이자 호법(護法)인 그가 손 한 번 휘둘러 거한을 때려눕히는 것은 손 바닥 뒤집는 것 보다 쉬운 일. 하지만 개방에는 사소한 시비로 사람을 상하게 하면 무거운 벌을 받는다는 엄한 방규 (幇規)가 있다. 그리고 등 뒤에선 방주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고... 그는 난처한 얼굴로 우근을 바라본다. 여보오, 장사(壯士). 우리가 공짜로 먹겠다는 것이 아닌데 너무 박하게 굴지 맙시다. 우근이 호유광 앞으로 나서며 거든다. 이건 또 뭐라는 개고기야? 왕풍은 거칠게 내뱉으며 우근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그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우근의 허리에 감긴 금빛 찬란한 비단을 본 것이다. 우근이 두른 철포는 교금으로 덧입혔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값비싼 비단으로 여기기 십상인 것이다. 흥! 거지 주제에, 무슨 비단을 둘렀니? 왕풍은 비단에 대한 탐심(貪心)이 생겨,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리며 철포를 잡아챈 다. 우근은 허허, 웃으며 가만히 서 있다. 엇? 왕풍은 깜짝 놀란다. 손으로 잡아챈 천의 매듭이 강철과 같이 단단하다. 아무리 구부리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움켜쥔 천이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매듭은 보기보다 단단하외다. 손가락에 힘을 좀 주지 않고는 풀기 어렵지. 우근이 젊잖게 말하며 손가락을 써서 철포의 늘어진 끝을 쥐고 이리저리 휘둘러 보인 다. 왕풍의 눈이 왕방울같이 커진다. 왕풍은 주먹깨나 쓴다는 파락호들과 어울린 적이 있는 탓에 강호의 일에 대해 들은 풍 월이 많았다. 거지 중에서 쇠로 만든 천으로 매듭을 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그의 머리에 떠오르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혹시... 개, 개방의 방주? 왕풍은 말을 더듬으며 두어 발자국 물러선다. 개방의 방주도 때로는 배고픈 거지에 불과하오. 자, 이젠 들어가도 되겠소? 왕풍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린다. 아이고, 소인이 눈은 달렸어도 영웅을 알아 뵐 줄 몰라서 이런 실수를 범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왕풍은, 무슨 충신 열사들이 드러했듯, 쾅쾅 소리나게 이마를 땅바닥에 찧는다. 그도 그럴 것이 개방은 명실공히 천하제일대방이다. 그 방주라 하면 수만 거지들의 생사여탈을 한 손에 쥔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게다가 무공은 또 어떻고... 그런 사람에게 쌍소리를 하며 까불었으니, 자신의 인생이 여기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도 무리는 아니다. 허허, 재미있는 친구군. 누가 당신을 죽인다고 했소? 여러 소리 말고 빨리 자리나 안내하시오. 우근은 바닥에 머리를 연신 부딪히고 있는 왕풍의 곁을 지나치며 말한다. 그 뒤를 따라가는 호유광은 고소한 듯 히죽거리고 있다. * * * 뭘로 드릴깝쇼. 주문을 받는 일이 자신의 소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풍은 우근이 앉은 탁자 앞에 와서 굽신거린다. 험상궂은 얼굴에 떠오른 간지러운 미소는, 오히려 없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근은 전낭(錢囊)을 꺼내어 흘깃 들여다 본다. 달랑거리는 은정(銀丁) 하나... 한 냥이다. 개방은 본시 거지의 무리이기 때문에 방주라 할지라도 많은 돈을 지니고 다닐 형편이 못 된다. 개봉에서 노자로 가져온 것은 은 다섯 냥. 노자라는 것이 과연 노자라서 오는 길에 거의 다 써버린 것이다. 우근은 난처한 표정으로 은정을 꺼내 탁자 위에 놓는다. 가진 게 이것밖에는 없구려. 이걸로 술과 간단한 잉어 요리를 먹을 수 있겠소? 왕풍은 탁자에 놓인 은정을 쳐다본다. 은정 한 냥이면 평범한 식사는 되겠지만, 고급 요리를 차리기에는 힘든 금액이다. 하지만 상대는 무림의 영웅이다. 잘 대접하면 혹시 좋은 일이 생길 지도 모르지. 왕풍은 눈 딱 감고 말한다. 소인이 한 상 알아서 차려옵죠. 이 액수면 충분합니다. 주방으로 달려간 왕풍은 주방장에게 묻는다. 모(毛) 아저씨, 잉어 싱싱한 거 있어요? 아침에 산 잉어는 다 팔렸지. 어제 들어온 놈 중에서 남은 게 있는데, 싱싱하진 않을 거야. 주방장 모춘일(毛春一)은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왕풍은 서둘러 주방을 나와 객점 뒤편, 호수로 향한 창문으로 달려간다. 마침 그 근처를 지나가는 배 한 척이 있다. 어이! 장(張) 형님, 여기 좀 보세요! 워낙 우렁찬 목청이기에 두 번 소리칠 필요도 없다. 고깃배는 삐꺽거리며 노를 저어 온다. 대풍(大豊)이 아닌가? 무슨 일이야? 잉어 싱싱한 놈 있어요? 어부는 흰 이빨을 보이며 고개를 끄떡인다. 자네 오늘 운이 좋군. 내 오늘 큰 놈으로 몇 마리를 잡았거든. 왕풍은 급히 객점 밖으로 뛰어나간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버들가지에 아가미가 꿰인 잉어 네 마리가 퍼덕거리고 있 다. 두 자 가까이 되는 몸뚱아리 가득 은은한 금빛이 감도는 것이 매우 싱싱해 보인다. 저사람 너무 수고하는군. 이 돈으론 상 차리기가 마땅치 않을 텐데, 저 친구한테 미안한데요? 우근과 호유광은 마주보며 웃는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음식을 기다리는데, 촤르륵 소리와 함께 객점의 주 렴을 들려지며 세 사람이 들어온다. 그들을 바라본 우근은 깜짝 놀란다. 방(方) 노영웅 아니십니까? 허! 유(劉) 대협까지... 이거 묘한 곳에서 뵙게 되는군요. 우근은 탁자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한다. 객점 안으로 들어온 세 사람 역시 우근을 보고 반색을 하며 다가온다. 우(于) 방주, 반갑소이다. 안 그래도 태호 부근을 지나실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제자들을 시켜 노상과 객 점을 샅샅히 뒤지게 하던 참이었소. 두 손을 활짝 벌리고 우근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수염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꼿꼿한 노인이다. 등에 멘 금검(金劍)은 검집의 끝이 허벅지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것이다. 노인이 이런 장검을 지니고 다닌다면 버거워 보일 법도 하건마는, 옅은 물빛 장삼에 금실로 수 놓은 깁이 멋들어진 이 노인에게는 조금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노인이 은연 중에 풍기는 엄정한 위의(威儀) 때문이다. 허허, 거지의 행보에 그리 신경써 주시다니요... 어서 이리로 앉으시지요. 우근은 껄껄 웃으며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자신보다 반 배분 정도 높은 선배에 대한 예의이다. 한두 번 사양하다가 못 이기는 체하며 자리에 앉는 노인의 이름은 방령(方嶺). 수십 년 전부터 사자신검(獅子神劍)이라는 명성을 강동에 떨쳐 온 검객이다. 과거 강동삼수(江東三秀)의 대형으로서 그가 행한 협행은 강호에 몸 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다. 우 방주께서는 몇 년 사이 신수가 더욱 좋아지신 듯합니다. 호(胡) 형께서도 그렇시고요. 정중히 인사를 한 후, 방령의 옆자리에 호위하듯 앉는 황포 장한. 방령이 일으킨 명문검파인 사자검문(獅子劍門)의 총사이자 방령의 외조카이기도 한 황 포객(黃布客) 유태성(劉太成)이다.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유순한 눈매는, 왼쪽 눈 위에 새겨진 깊은 검상에도 불 구하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 있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유태성의 친근한 인사에 우근과 호유광은 엉덩이를 자리에서 뗀 채 황급히 답례한다. 그건 그렇고... 우근은 약간 의외로운 눈으로 방령의 뒷켠에 서 있는 거한을 바라본다.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인물은 오히려 방령보다도 거물일 것이다. 대명(大名)을 앙모한 지는 오래이나, 소생이 불민한 탓에 여태껏 인사드릴 기회가 없 었습니다. 석가(石家)의 첫째인 대문이라고 합니다. 약간 어색한 얼굴로 우근을 향해 주먹을 모으는 흑의 거한. 바로 강동제일가로 알려진 석가(石家)의 가주 석대문이다. 이거, 강동제일인을 몰라뵈었군요. 허허, 송구스럽소이다. 거지들 왕초 노릇을 하고 있는 우근이외다. 우근은 마주 포권하며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한다. 전대가주 석안(石安)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딛고 석가를 명문대가로 우뚝 세운, 실로 입지전적인 청년영웅이 바로 그인 것이다. 그때 왕풍이 큰 쟁반 두 개를 들고 주방에서 나온다. 한 쟁반 위에는 싱싱한 잉어회와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어랄탕(漁辣湯)이 올려져 있 었고, 다른 쟁반 위에는 한 접시의 소채와 사기로 만든 술병이 올려져 있다. 그는 일행이 늘어난 것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해 한다. 잉어를 싱싱한 놈으로 한 마리 더 회로 잡아 주고, 술은 강주(康州) 옥호춘(玉壺春) 을 작은 독으로 하나 가져다 주게. 방령은 전낭에서 작은 금원보를 꺼내 왕풍에게 던져준다. 물론 왕풍은 노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개방 방주와 마주한 사람이니 대단한 호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영웅호걸은 마음씨가 호탕하구나. 이 금원보는 은 열 냥은 족히 나가겠는걸? 헤헤, 영웅을 극진히 대접하니 재신(財神)이 곧바로 복을 주는구나. 왕풍은 뜻밖의 횡재에 기뻐하며 주방으로 달려간다. * * * 헌데 제가 태호를 지난다는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자리의 주인격인 우근이 세 사람의 잔에 술을 채우며 묻는다. 이번 행차는 소주분타의 삼각풍(三脚風) 위(魏) 대협께서 청하신 것이 맞습니까? 공손한 자세로 잔을 받은 석대문이 우근에게 반문한다. 우근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음, 석 가주께선 그 사실을 어찌 아셨소? 방 내에서도 은밀히 움직인 일인데... 말씀드리자면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석대문은 자신이 두 달 전부터 이곳 소주에서 조사한 것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위백의 편지를 받고 양무청(楊戊靑)이 실종된 것부터 사생(史生)이라는 도사를 죽인 일까지, 세세한 설명을 다 하는데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경과했다. 우근은 잉어 요리의 진미라고 할 수 있는 삼푼가랄점홍백어탕(三分加辣點紅白漁湯)이 싸늘히 식는 것도 잊은 채 이야기를 듣고 있다. 놀라운 이야기군요. 석대문의 이야기가 끝나자, 우근은 무거운 침음성을 내뱉는다. 호유광 역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다. 석 가주! 가주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믿기 어려운 얘기외다. 저는 위백, 위 형님과 삼십여 년을 함께 생활해 왔소. 그는 괴퍅할지언정 사악이 없고, 거칠지언정 신의를 배신하지 않는 충후한 사람이오. 우근은 약간 경직된 얼굴로 말한다. 석대문은 빙긋이 웃는다. 소생 역시 위 대협의 인품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있습니다. 사실 소생이 조사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도 그 어른의 성품이 공 명정대하며 강직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유형의 화술은 매우 교묘한 것이다. 이 한 마디로 우근과 호유광의 얼굴이 조금 풀어진다. 석대문의 설명은 계속된다. 하지만 강호에는 사람의 혼을 부리는 기이한 술법이 있습니다. 방주께서는 매혼대법(賣魂大法)이란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매혼대법? 글쎄요... 그런 것이 있소이까? 우근이 반문하자 잠자코 대화를 듣던 방령이 끼어든다. 더러운 사술이지! 못된 약물과 주술을 이용하여 사람의 신지를 마비시키는 방법이라오. 흐흠... 우근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방령의 말에 석대문이 부연한다. 소생이 그것에 대해 따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천축(天竺)에서 생산되는 살비파(薩肥芭)라는 식물과 남만의 양귀비를 비방에 따라 배 합하면 섞으면, 인간의 신지를 마비시켜 시술자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마약이 된다고 합니다. 거기에 사악한 주문까지 곁들이면, 제 아무리 마음이 굳건한 사람이라 해도 꼼짝없이 꼭두각시가 되어버릴 수밖에요. 이 요법(妖法)은 서장의 밀교 중에서도 지극히 사이한 교파에서 행하는 비밀 제사에 사용되는데, 주로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칠 때라고 하더군요. (註 : 고대 인도의 경전 중 고대 주문에 관한 지식의 서(書) 인 <아타르바베다 (Atharvaveda)>에 의하면, 남편이 죽은 후 그 부인을 함께 순장(殉葬)할 때 부인이 의 식을 거부할 경우, 사티바(Sativa, Sutteeva)라는 약초를 이용해 의식을 치르게 했다 고 한다. 薩肥芭는 사티바의 음성 표기이다.) 우근은 아무런 말없이 묵묵히 앉아 있다. 그의 이마에는 깊은 고랑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읽어 보시오. 석대문은 종이 한 장을 우근에게 건네 준다. 사생의 품 속에서 찾아낸 편지이다. <사(史) 비영 전(前). 철포결 우근을 제거하시오. 방법은 양무청 건과 동일하게 매혼대법을 사용하도록. 일이 끝나면 위백을 제압하여 철군사(鐵群社)로 이송하시오. 팔월 초하루에 일조령(日照嶺)으로 지원을 보내겠소. 이(二) 문강(文康).> 글을 다 읽은 우근의 눈이 횃불처럼 활활 타오른다. 위 형님을 요법으로 이용하다니... 죽일 놈들! 석 가주, 이 놈들이 대체 누구요? 분노를 지긋이 억누른 묵직한 음성이다. 소생도 그들의 정체는 모릅니다. 단지, 근래 들어서 혈랑곡이라는 이름으로 출몰하는 무리라는 것 외에는. 석대문은 고개를 젓는다. 우근은 방령을 바라본다. 그러면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바로 그 일 때문에 우리가 우 방주를 찾은 것이오. 방령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다. 그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굴로 들어가야지. (2) 비둘기는 쇠붙이 위에 여간해선 앉지 않는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이미 그런 감촉에 익숙해졌다면, 쇠붙이라고 해서 앉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 다. 강구(康丘)에서의 연락인가... 시커먼 윤기가 번들거리는 손가락이 비둘기 다리에 매달린 전통(傳筒)을 연다. 손가락이 검게 번들거리는 까닭은 그가 팔뚝까지 오는 강철 장갑을 끼고 있기 때문이 다. 관절 부위가 투박해 보이는 장갑이지만, 전통을 열고 손가락 크기로 말린 종이를 펴는 섬세한 동작을 펼치는데 조금의 어색함도 없다. 이것은 그가 이 장갑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새들이 출발함. 어미새 하나, 일곱 깃털 둘, 여섯 깃털 셋. 사십(四十)> 숫자 투성이의 전서였지만, 그 내용은 단순한 것이다. 어미새는 새들 둥에서 우두머리를 뜻하며, 일곱 깃털은 칠결(七結), 여섯 깃털은 육결 (六結)을 뜻한다. 마지막의 사십은 전서를 작성한 사람을 가리킬 것이다. 팍. 강철 장갑에 부착된 두 치 길이의 예리한 손톱이 전서 위에 꽂힌다. 그 서슬에 놀란 비둘기가 발작적인 날개짓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우연일까. 손톱은 어미새 이라는 글자를 관통하고 있다. 강구와 일조령은 사십 리 길... 슬슬 준비해야겠군. 강철 장갑을 낀 사내는 손톱에 뚫린 전서를 털어내며, 굵직한 음성으로 말한다. 그는 지금 소주성 북서쪽 백여 리 떨어진 일조령(日照嶺) 위에 서 있다. 그의 주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편한 자세로 둘러앉아 있다. 우라질! 사(史) 비영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군. 나무 그늘에 앉은 적발괴인이 말한다. 그의 얼굴은 조금 검은 편인데, 콧잔등을 관통하여 양쪽 뺨을 가로지른 흉터가 새하얗 게 두드러져 보인다. 말을 하며 뺨을 실룩거리자, 사람들은 마치 그의 얼굴 위로 한 마리 백사(白蛇)가 기 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남궁(南宮) 형님, 젊은 친구가 서열만을 믿고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까? 적발괴인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강철 장갑을 낀 사내를 바라본다. 글쎄... 각(閣)의 연락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 강철 장갑의 사내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품 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낸다. 금새라도 살아 울부짖을 듯한 늑대탈이다. 그는 그 생생함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 잠시 바라보더니, 이윽고 머리에 뒤집어 쓴다. 얼음장 같은 딱딱한 얼굴이 늑대탈의 그늘 속으로 사라진다. 쨍. 적발괴인의 옆에 앉아 있던 땅딸보 노인이 양손에 들고 있던 단도를 소리나게 마주친 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나이 설흔도 안 된 애송이가 셋씩이나 십영회의(十影會議)에 참가하다니! 다 늙은 이몸이야 그렇다 쳐도, 남궁 현제(賢弟) 같은 사람이 그런 애송이들 밑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가? 불안증에라도 걸린 병자처럼 단도 두 개를 쉴 새 없이 놀리는 노인의 이름은 음자송 (陰字松), 각 내에서 열일곱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위인이다. 그의 손 안에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단도들은 그의 불만스러운 심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음자송은 다시 한 번 단도를 부딪치고, 말을 계속한다. 사생만 해도 그렇지! 귀신 상판을 한 새파란 녀석이 단지 아두랍찰(阿斗拉刹) 데바의 추천이 있다고 해서 십 비영 자리를 덜컥 내준다는 것은, 십여 년을 그늘 속에서 굴러온 우리들을 너무 무 시하는... 그만하시오, 음 노인! 강철 장갑의 사내는 음자송의 말을 자른 뒤, 음자송의 뒷편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승려 들을 흘깃 바라본다. 조직 내에서 중원 출신과 서역 출신과의 대립은 해묵은 문젯거리였다. 서역 출신을 우대하는 수뇌부의 인사 정책에 대한 불만이야, 그가 음자송보다 못할 리 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불만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지금은 그 거지 녀석을 처치하는 일이 급선무일 것이오.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매듭짓는 사내. 그는 비록 각 내에서 열한번째 서열을 차지하고 있지만, 무공으로만 따진다면 분명히 훨씬 상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십일(十一) 비영님, 헌데 거지 놈의 일행이 예상보다 많군요. 재미있는 일이다. 강철 장갑의 사내에게 질문한 남자는 언뜻 보면 말과 친척으로 여길 정도로 길죽하고 튀어나온 하관을 지니고 있다. 말을 할 때마다 콧구멍이 벌름거리는 것까지도 영락없는 마족(馬族)의 상판이다. 하지만 정말로 재미있는 일은 그 얼굴이 아니다. 그 얼굴과 찍어낸 듯 똑같이 생긴 얼굴 두 개가 그 양편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 재미있는 일인 것이다. 으하하, 까짓 거지 놈들이야, 우근만 뺀다면 벌써 시체나 다름없지. 적발괴인이 크게 웃으며 말한다. 놈은 누구도 건드리지 말게! 놈의 심장은 내 것이야! 강철 장갑을 낀 사내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적발괴인은 웃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본다. 적발괴인은 그를 이해할 수 있다. 반 갑자 동안 강호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강철 장갑의 마디마디에는, 과거의 어느날 우근의 구궁장법(九宮掌法)에 굴복했던 쓰라린 패배의 기억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근은 형님의 몫이오. 지난번 회하(淮河)의 일을 이자째 갚아 주시구려. 암 그렇고 말고... 잘난 척하는 거지 놈, 오늘이 바로 제삿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으헤헤. 음자송이 적발괴인을 거들며 웃는다. 자지러지게 웃던 음자송은 생각난 듯, 등 뒤에 앉은 세 명의 승려에게 말한다. 세 분 신승(神僧)께서는 나서실 일이 없으실 것이오. 놈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아만 주시구려. 바위 그늘에 앉아 있던 세 명의 승려는 하나같이 라마승 복장을 하고 있다. 그들 중 금빛 찬란한 가사를 입고 있는 두 명은, 눈이 움푹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것 이 서역인으로 여겨진다. 큰 체격에 회색 승복을 입은 다른 한 명은, 얼굴이 온통 썩은 것 같이 울퉁불퉁해서 중원인인지 서역인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그런 용모를 지닐 수는 없을 터이니, 그에게는 아마도 남보다 불행한 과거가 있었을 것이다. 소승들은 음 비영의 말씀을 따르겠소이다. 조각조각 갈라진 입술이 벌어지며 나온 목소리는 그의 얼굴에 잘 어울리는 탁음(濁 音)이다. 그는 두 명의 라마승에게 빠른 서역말로 무어라고 지껄인다. 아마도 음자송의 말을 번역하여 전해주는 것이리라. 끼이익--- 갑자기 강철 장갑이 오무라들며 소름끼치는 음향이 중인들의 고막을 긁어 댄다. 저들인가... 강철 장갑의 주인, 이제는 붉은 늑대탈 속에 감추어진 사내의 두 눈은 고개 아래로 나타난 몇 개의 그림자에 고정되어져 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장갑이 내는 기음(奇音)만큼이나 으시시한 살기가 담겨져 있다. * * * 이 고개는 지금 매우 위험합니다. 제발 소인들의 말을 믿으시고 그늘에서 푹 쉬시다가, 한 시진쯤 뒤에나 올라오십시오. 방령의 큰아들이자 방령이 은퇴한 뒤 사자검문의 제반사를 도맡아 처리해 온 방기옥 (方麒玉)은, 목덜미에 애써 칠한 검댕이 지워질 정도로 진땀을 흘리면서 설명하고 있 다. 준수한 외모와 굳센 기상으로 옥금강(玉金剛)이라는 별호가 붙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 토록 애원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있을 법도 한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방기옥 은, 평소 옥금강으로서 찬사를 받던 그런 방기옥 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허! 썩 비켜라! 어디에서 미천한 거지 놈이 감히 관인(官人)의 행차를 막으려 하느냐! 방기옥의 면전에 침을 튀기며 호령하는 사람은, 그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찢어진 쥐눈 과 개기름에 절어 축 늘어진 볼따구니 그리고 화려한 비단옷 아래로 불룩 튀어나온 아 랫배가 영락없는 관원의 행색이다. 이 길을 너희들이 전세라도 냈느냐? 암, 그렇고말고! 서두르지 않으면 성문이 닫힌단 말이야! 뚱보 관원의 호령에 힘을 얻은 듯, 뒷전의 장사치 한 패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지껄인 다. 난처한 표정으로 쩔쩔매는 가짜 거지 방기옥을 돕기 위해 진짜 거지 호유광이 나선다. 나리, 그렇게 화만 내지 마시고 소인들 말을 좀 들어보십시오. 이 고개 위에는 지금 살인 강도가 있어서... 이 고오연 놈! 제딴에는 친근함을 준답시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살살거리던 호유광은, 매섭게 후려치 는 뚱보의 부채에 얻어맞을 뻔하였다. 빌어먹을! 정말 못 해먹겠군. 그 광경을 바라보던 우근의 이마에 일(一)자 큰 주름이 잡힌다. 강구 나루에서 배로 출발하여 일조령 입구의 선착장에 내린 우근의 일행은 모두 여섯. 원래 소주분타로 가던 우근과 호유광에다, 새롭게 합류한 방령, 유태성, 방기옥 등 사 자검문의 정예, 그리고 강동제일가주 석대문이다. 나룻배에서 내릴 때 일조령을 넘으려던 다른 승객들에게, 지금은 위험하니 기다렸다 가 저녁 나절에 고개를 넘으라는 말을 꺼낸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친절한 협객 유태성 이었다. 간곡하고도 부드러운 그의 말이 막 씨가 먹혀 들어가려던 순간, 바로 저 빌어먹을 놈 의 뚱보 - 소주성 도찰원(蘇州省都察院) 소속 상방수역(上房首驛)의 관인(官印)을 지 닌 - 가 등장하였고, 그의 등장은 장사치들 중 꺽진 친구들의 어깨를 부추켜서 상황을 이 꼴로 만든 것이다. 나리께서 정 그러시다면 소인들이 앞장서서 가다가 도적이 나오면 물리칠 테니, 멀찍 이라도 떨어져서 오십시오. 이 순간,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고개를 조아리는 우근은, 정말 거지 노릇은 할 짓이 못된다는 생각을 되씹고 있다. 허허!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내 앞길을 가겠다는 것이냐? 이 발칙한 놈들! 이대로 놔두면 뚱보의 분노는 해질녘까지 계속될지도 모른다. 석대문은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더구나 이제는 장사치들까지도 설쳐대지 않는가. 수역 나으리, 소인이 이 거지놈들을 혼내 주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흰 두건을 이마에 질끈 동여맨 건장한 사내 하나가 장사치 무리 중에서 걸어나온다. 눈두덩이로 불구죽죽한 살기가 맴도는 것이, 어디서 살인 강도짓이라도 저지르고 장사 치 무리 속으로 숨어다니는 자일지도 모른다. 석대문은 방기옥을 밀치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다. 항아리나 요강에도 귀가 달렸는데, 그만큼 말을 했으면 좀 알아들어야 할 것 아니오? 이...이! 개방의 오결제자로 위장한 탓에 어쩔 수 없이 거지가 된 석대문의 삐딱한 말에 뚱보는 게거품을 물고 만다. 흰 두건을 두른 사내는 내심 옳다구나 기회가 왔구나 라는 듯이 두 주먹을 움켜쥐고 석대문에게로 달려들려 한다. 하지만... 빠각. 석대문이 지긋이 밟고 있던 어린아이만한 바위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박살이 나자, 장내는 놀랄만치 조용해진다. 관원은 찢어진 쥐눈이 토끼처럼 변해 입을 다물었고, 흰 두건을 두른 사내는 입을 딱 벌린 채 신속한 뒷걸음질로 일행 속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네, 네가 감히 국록(國祿)을 먹는 관인에게 행패를 부릴 작정이냐? 누가 행패 부린다고 합디까? 멀정히 고개를 넘고 싶으면, 우리 뒤나 잘 따라오라는 말이외다. 빠각. 이번에는 석대문 옆에 서 있던 작달막한 팥배나무가 요란한 비명과 함께 부러져 나간 다. 석대문은 이어 부러진 팥배나무 옆에 있는 구부정한 가래나무를 바라본다. 아마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전에는, 부근의 초목암석(草木岩石)을 남김없이 박 살낼 모양이다. 끄응... 위엄도 이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상대는 비록 천한 거지들이지만, 바위를 밟아 깨뜨리고 나무를 한 주먹에 꺾는 놀라운 재주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것은 고금의 진리일 것이다. 좋다, 이놈들... 어디 성 안에 들어가서 두고 보자! 뭐가 그리 분한지 통통한 주먹을 하늘로 휘두르는 뚱보를 바라보며 석대문은 피식 웃 는다. 물론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이처럼 젊잖게(?) 일을 해결한 까닭은, 어쩌면 나라의 보살 핌을 받는 한 포기 민초(民草)로서 관(官)에 대한 약간의 거리낌이 남아 있었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산은 높을 수록 유명하고 고개는 낮을 수록 유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높고도 험준한 일조령은 고개로서 그리 유명하지 못하다. 무더운 날씨에 거친 길, 그리고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적의 공세에 대한 긴장은 우 근 일행의 행보를 자연 더디게 만들고 있다. 저 돼지놈, 그래도 따라오네요. 뒤를 힐끗거리던 호유광의 나직한 말이다. 우근은 뒤를 돌아본다. 칠팔 장 뒤로, 붉은 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방 훔치면서 그들 일행을 따 라오는 뚱보 관원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우근 등의 이동은 일반인에 비해 훨씬 빠른 것이다. 우근은 관원의 걸음이 체구에 비해 꽤나 빠르다고 생각하였다. 망할 놈, 부채는 멋으로 가지고 다니나? 저러다 제 명에 못 죽지. 호유광은 아까 부채로 얻어맞을 뻔하였던 일이 분하였던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 린다. 아닌게 아니라 옥으로 살을 만든 듯한 하얀 부채는 관원의 허리춤에 꽂힌 채 하오의 햇살 아래 반짝거리고 있다. 제가 가서 다시 한 번 말해 보지요. 다시금 일어난 자비심에 돌아서려는 유태성의 어깨는, 칠결제자로 위장한 방령의 주 름진 손에 잡힌다. 놔 두게. 그래도 위험할 텐데... 다 제 팔자요, 복이지. 그리고 다른 데 신경쓸 겨를이 없어. 이제 슬슬 놈들이 나타날 걸세. 방령은 유태성의 등을 한 차례 툭 치고는 걸음을 재촉한다. 유태성은 다시 한 번 뚱보 관원을 돌아본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걸음을 옮긴다. 하기야 목표가 단지 개방의 우근이라면 관원은 건드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문득, 앞장서 걷던 석대문이 걸음을 멈춘다. 놈들이 나타난 것 같군요. 우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 위를 바라본다. 사오십 장 전면 우거진 숲 속에서 서서히 걸어나오는 인형들... 따사로운 햇살과 검푸른 초목, 그 속에 등장한 붉은 장포들은, 색체의 균형이 어그러 진 가운데 묘한 대비감을 주고 있다. 저들인가... 뚜둑. 우근의 손가락 마디가 가볍게 부딪히며 둔탁한 뼈소리를 토해낸다. (3) 기다리고 있었다, 우근! 우근의 눈꼬리가 살짝 흔들린다. 굵직하되 저음부에서 약간 텁텁하게 갈라지는 탁한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나를 아는가? 물론! 붉은 늑대탈을 쓰고 있는 홍포 장한은 뒷짐지었던 손을 풀어 앞으로 살짝 내민다. 한 쌍의 강철 장갑이 온화로운 햇볕 아래로 묵묵한 살기를 뿌린다. 우근의 고개가 무겁게 끄떡여진다. 늑대탈의 괴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했더니, 자네는 남궁월(南宮越)이로군. 다 아는 처지에 그런 흉한 바가지는 왜 쓰고 있나? 우근의 이 한 마디는 나머지 다섯 명의 얼굴을 굳게 하기에 충분하다. 흑수마객(黑手魔客) 남궁월. 농서 출신으로 이십여 년 전에 강호에 출도하여 흑수마갑(黑手魔匣)이라는 한 쌍의 괴병(怪兵)으로 흉명을 떨친 마인이다. 구 년 전 농서에서 구원(舊怨)이 있던 배씨도장(裵氏道場)을 단신으로 박살내고, 쌍장 진구주(雙掌震九州)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따라다니던 농서제일인 배호(裵浩)의 심장 에 다섯 개의 바람구멍을 낸 일로 강호오마(江湖五魔)의 일인에 올랐다. 비록 음마(淫魔) 유붕(兪朋) 같은 위인도 강호오마의 일인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 람으로서는 범할 수 없을 비열한 악행 때문이다. 유붕의 무공 따위는 남궁월에게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천박한 것이었다. 나도 이런 우스운 물건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네. 하지만 높은 분들이 시키시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자네 같은 사람이 윗자리에 누굴 둔다고...? 누구인지 소개라도 받고 싶어지는군. 그와 우근과의 대화는 오래된 지기들이 나누는 그것처럼 매우 친근하게 들린다. 내 특별히 우근, 자네에게는 선택권을 주지. 아까 살펴보니 이 위에는 쓸만한 땅이 많던데... 어디에 묻히고 싶은지 말해 보게. 끼이이...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흑수마갑의 손가락들이 곤두서기 시작한다. 으헉! 돌연, 소스라치는 비명소리에 우근의 일행은 일제히 뒷쪽을 바라본다. 비명은 다름아닌 뚱보 관원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그의 뒷쪽에는 언제부터인지 세 개의 그림자가 서 있다. 금빛 가사의 라마승 둘과 구토를 유발하게끔 만드는 추악한 얼굴의 파면승... 그들은 우근 등이 올라온 길을 막아서고 있다. 뚱보를 포함한 일곱 명은 앞뒤로 포위된 것이다. 이 태평성대에 강도질을 하려고 하다니... 네, 네놈들은 국법이 무섭지도 않으냐? 뚱보는 관원치고 제법 뼈대 있는 위인일지도 모른다. 공간을 터뜨려 버릴 듯한 살기 속에서도 남궁월을 향해 호통을 치고 있으니 말이다. 혈랑탈 속에 감춰진 남궁월의 눈빛이 묘하게 변한다. 뭐라고... 했느냐? 나는 소주성 도찰원 소속 상방수역 모득(冒得)이다!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내 성주께 고하여 토포군(討捕軍)을 내어 모조리 주멸(誅滅)해 버릴 것이다! 재미있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궁월의 눈은 웃고 있다. 남궁월! 그는 우리와는 상관 없으니 보내 주거라! 목소리를 가다듬고 남궁월에게 호통친 사람은 허리에 여섯 개의 매듭을 두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개방의 육결제자일 것이다. 어떤 이름이라고 네놈이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 남궁월의 옆에 서 있던 땅딸보가 노갈을 터뜨린다. 역시 혈랑탈을 쓰고 있던 음자송이다. 오래 전부터 아우이자 상전인 남궁월의 이름이 조무라기 거지의 입에서 꿰어져 나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쏘아져 나가는 한 줄기 백광(白光). 흥! 앞쪽에 서 있던 석대문은, 육결제자로 위장한 유태성에게 쏘아지던 비수를 향해 일 장 을 발출한다. 다섯손가락이 딱 달라붙은 가운데 엄지만이 조금 구부러진 장결(掌結)은, 둥글게 묶고 감추어 막는[團繫藏禦] 석가(石家)의 태을장(太乙掌)이다. 이 장력은 은은한 가운데 엄밀한 기운을 품고 있어서 비수의 예기를 퉁겨내는 데 부족 함이 없다. 땅... 추진력을 상실한 비수는 곧 땅으로 떨어질 것처럼 보였지만, 무슨 조화인지 두어 바 퀴 허공을 맴돈 후 혈랑탈을 쓴 땅딸보의 수중으로 회수된다. 엇! 엇! 두 마디의 탄성. 하나는 비수를 갈무리한 땅딸보로부터, 다른 하나는 우근 일행의 퇴로를 차단하고 서 있던 파면승으로부터 나온다. 인자(因子)가 석대문의 장력임에는 둘 다 다름이 없지만, 그 각각에 담긴 감정은 매우 판이한 것이다. 개방의 무공 중에 저런 유연한 장력이 있었나? 남궁월의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남궁월! 너 정도의 위인이 일개 주구에 불과하다니, 노부는 오마라는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 다! 허리에 일곱 개의 매듭을 두른 백발노인 방령의 질타에 남궁월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 해진다. 귓전에 쟁쟁거리는 노인의 음성은 지닌 바 내공의 비범함을 말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 남궁월보다도 더 큰 곤혹과 격동에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조금 전 석대문의 태을장에 놀란 파면승이다. 남루한 의복과 더러운 얼굴에 가려졌던 방령을,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남부 억양이 강 한 말투 속에서 본 것이다. 늙은이! 그대는 누구인가? 남궁월은 흑수마갑의 손가락을 펴 방령을 가리킨다. 흥! 누구긴 누구냐? 보시다시피 늙은 거지지. 코웃음과 함께 돌아온 방령의 대꾸에 남궁월은 이를 간다. 찢어 죽일 영감태기... 남궁월은 혈랑탈을 벗는다. 가면이야 그의 말대로 어차피 상징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잠깐 사이에 눈썹이 짙은 사십 대 호한의 얼굴이 드러난다. 푸스스... 나무로 만들어진 붉은 가면은 흑수마갑 사이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누구든 간에 별 상관은 없겠지. 어차피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니까! 남궁월이 차가운 말에 뒷전에 서 있던 다섯 명이 천천히 우근 등을 향해 나아간다. 그들은 하나같이 으시시한 붉은빛 늑대가면을 쓰고 있다. 우근은 소리없는 미소를 지으며 두어 걸음 남궁월에게 다가선다. 남궁월! 사람의 일이란 원래 뜻대로 되기 어렵다는 것을, 너는 곧 깨닫게 될 것이다! 퍽! 우근의 쌍장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주쳐진다. 비등하는 투지로 활활 타오르는 고리눈은 남궁월의 얼굴을 똑바로 향한 채, 무릎이 구 부러지며 약간 비틀어진 기마세(騎馬勢)가 만들어진다. 이어 기를 모으는 듯 팔꿈치가 느릿느릿하게 펴지더니, 어느 한 순간 쭉 뻗어진다. 두 팔 모두 전방을 향한 채, 왼손은 하늘을, 그리고 오른손은 땅을 가리킨다. 일순 그의 다부진 몸에서는 이제까지의 평범을 찾아볼 수 없는, 강호제일대방의 영도 자로서의 엄숙함이 피어오른다. 좌천우지세(左天右地勢)...! 남궁월은 방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올린다. 한순간에 위아래를 봉쇄해 버리는 우근의 자세는, 과거 자신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 준 바 있었던 우근의 독문수법, 구궁장법(九宮掌法)의 기수식이었기 때문이다. * * * 비각(秘閣)의 사십구비영. 그 중에서 스물일곱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쌍계자(雙鷄子) 동소이(東小二). 이 순간 그는 잔혹한 강호풍진(江湖風塵) 속에서 자신을 존재하게끔 해 준 애병을 매 섭게 휘두르고 있다. 허공으로 하여금 찢어지는 비명을 토하게 만들며, 황포객 유태성을 몰아 붙이고 있는 두 개의 계조구(鷄爪鉤). 각각 다른 각도로 갈라진 여덟 개의 갈고리 끝에서는 피를 부르는 살기가 점점 묻어나 온다. 흐흐... 이 어르신의 계왕조(鷄王爪) 맛이 어떻냐? 득의어린 웃음과 함께 두 개의 계조구가 가위처첨 교차되며 유태성의 전신을 훑어댄다. 가을날 갈고리로 낙엽을 긁어모으는 듯한 추일소엽(秋日掃葉)의 재주는 유태성의 옷자 락 여기저기를 뜯어내고 있다. 비록 개방의 제자로 변장한 까닭에 허름하기 그지 없지만, 그래도 걸치고 있는 의복이 타의에 의해 넝마로 변해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태성의 표정은 밝지 않다. 워낙 단병(短兵)인데다가 초식마저도 저렇게 괴상하니, 상대하기 쉽지 않겠군. 공격다운 공격 한 번 못해보는 유태성을 보노라면, 괴병(怪兵)의 이(利)가 두드러진 형국인 듯하다. 하지만 그들의 조금만 더 찬찬히 지켜보면 승부에 대한 예측이 간단하지 않음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호를 유전하며 어느덧 불혹(不惑)의 나이를 바라보는 유태성이다. 그의 검법은 보기와는 달리 계조구의 괴이한 공세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다. 거지 주제에 질기기도 질기구나! 하지만... 연신 물러서면서도 좀처럼 실기(失機)를 범하지 않는 유태성의 노련함에 감탄하면서, 동소이는 병기에 진기를 배가한다. 어느 순간, 동소이는 매서운 기합을 내지르며 왼손에 쥔 계조구를 미친 듯이 휘두른다. 위를 긁는가 하면 어느새 아래쪽을 걸어당기고, 왼쪽을 할퀴는가 하면 어느새 오른쪽 을 찍어간다. 이른바 광풍절지(狂風折枝)의 숨가쁜 수법이다. 사납지만... 너무 번잡하다. 그렇다면...? 공간을 난자하는 갈고리의 공격은 사납기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일관성이 없어 보 인다. 유태성은 두 다리를 굳게 버티며 검을 종횡으로 휘둘러 갈고리에 대항하는 한편, 옆구 리 어림에 붙인 채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 적의 오른손을 주시한다. 계조구의 조두(爪頭)가 미세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미루어, 현란한 초식으로 유태성의 신경을 분산시킨 후, 오른손으로 치명적인 살수를 전개하려는 것이리라. 찻! 드디어 동소이의 오른손이 빠르게 내밀어진다. 계조구를 단봉같이 사용하여 찔러온 것이다. 계조구는 애당초 생긴 것부터가 찌르는 것에 알맞지 않은 무기이다. 그래서 계조구를 상대하다 보면, 할퀴거나 당기는 수법에만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형(物形)에 대한 상식을 초월한 이런 류의 공격은, 동소이에게 뜻하 지 않은 승리를 안겨준 경험이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이미 동소이의 오른손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유태성은 크게 당황하지 않고 왼손을 내밀어 계조구의 봉 부분을 때려간다. 가볍게 편 그의 좌장이 갈고리의 뿌리 부분을 치는 순간, 어지럽던 동소이의 왼손 공 격에 작은 헛점이 생긴다. 그것은 유태성이 노려 온 것이다. 이얍! 폭이 넓은 청강검이 허공의 한 점을 매섭게 짚는다. 차갑게 뻗어나가는 백구분극(白駒奔隙)의 일 초는 사자검문의 금사검법(金獅劍法) 중 나아가 차지하는[進占] 묘용을 극대화한 초식이다. 헉! 계조구의 환영 사이를 헤집고 불쑥 튀어나온 검봉은 동소이를 기겁하게 만들기에 충분 했다. 황급히 몸을 비틀어 면문을 노리는 검봉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돌연 셋으로 갈라 진 검봉이 그의 운신을 제한한다. 유태성의 검식은 어느새 허중유실(虛中有實) 실중유허(實中有虛)의 봉황삼점두(鳳凰三 點頭)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기쾌한 변화는 동소이의 의중을 여지없이 꿰뚫은 것이었다. 그는 땅을 두어 바퀴 구르는 꼴사나운 모습을 연출한 후에야 검봉의 공세로부터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닭 발가락 구경 좀 더 해보자. 이초 일식의 공격으로 그 동안 잃었던 기선을 만회한 유태성은, 상당한 여유가 생겼 나 보다. 동소이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병기를 추스린다. 거지들 중에서 검을 저리도 잘 쓰는 자가 있었던가? 분노보다도 앞서 떠오른 동소이의 의문이다. * * * 금검의 휘황한 광채와 삼재검(三才劍)의 짜릿한 살기가 서로를 짓누르듯 얽히는 틈바 구니에서, 적발신마 오독추(吳獨秋)의 왼쪽 소매가 가볍게 펄럭거린다. 소매 속에서 유령처럼 튀어나와 금검의 면을 가볍게 퉁기고 지나가는 것은, 삼재검을 꼬나쥔 오른손과는 판이한, 나무껍질처럼 말라 비틀어진 앙상한 손가락이다. 순간, 방령은 형용하기 어려운 음침한 기운이 검신을 타고 전달되어 오는 것을 느낀다. ...! 방령은 허리를 크게 틀며 금검을 크게 한 번 휘두르고 황급히 뒤로 물러선다. 뒤따라 달려드는 오독추에게 봉황전시(鳳凰展翅)의 매서운 일 식을 날린 것은, 강호 밥 수십 년이 안겨준 노련미의 결과일 것이다. 잰 걸음으로 삼사 장을 물러선 방령은 검을 가슴 앞으로 모아 요혈을 보호하며 진기 를 운행한다. 검신을 통해 몸으로 전달된 한기(寒氣)는 독랄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방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이 수법은 태행산(太行山) 칠성채(七星砦)의 현옥지(玄玉指)! 너는 칠성노마(七星老魔)와 무슨 관계냐? 강동삼수의 막내이자, 은퇴한 방령으로 하여금 다시 검을 쥐게 한 직접적인 원인을 제 공한 을미수 양무청은, 칠팔 년 전 거의 사경에 이르는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동정호(洞庭湖)의 수적들이 항주 서호(西湖)로 그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을 때, 항주 부근의 협사들을 규합해 이를 막으려 했던 양무청이, 보잘 것 없으리라 예상한 수적들 로부터 맹렬한 반격을 당했던 것이다. 그들의 배후에 있던 위인은 이미 당시에도 육십을 훨씬 넘긴 칠성노조(七星老祖) 곽조 (郭操), 세상 무서운 것이 없던 양무청에게 이검 삼지(二劍三指)의 살수를 적중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멀리 장성 부근의 태행산에서 칠성채라는 녹림당을 이끌고 있던 노마두가 무슨 까닭 으로 수적의 우두머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 기척없이 발출한다는 쌍응절 (雙鷹絶)의 비검술과 독특한 약물로 수련하는 현옥지는, 당대의 고수인 양무청을 염라 전 문턱까지 다녀오게 만들었다. 당시 양무청의 머리맡에서 한 달이 넘도록 간병한 방령이, 여러 해가 지난 오늘, 같은 수법을 쓰는 자를 만났으니, 그때의 분노가 새삼 되살아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죽을 놈이 그런 것은 알아서 뭐하냐? 방령의 안목은 정확했다. 지금, 적발을 휘날리며 방령에게 달려드는 오독추는 사부인 곽조가 전수해 준 수법에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가 방금 시전한 현옥지는 연성 방법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열피탈조(裂皮脫爪)의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오독추가 그것을 무릅쓰고 현옥지를 연성한 까닭은 흔적없이 상대의 심맥을 공격하는 무서운 위력 때문이다. 비록 신체에 직접 격중시키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저 늙은 거지는 서 있는 것조차 어 려울 것이다. 이러한 오독추의 생각은 상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 현옥지의 한기를 본신 내공으로 해소할 수 있으려면 한 갑자의 정순한 내공이 필요한 데, 적어도 개방 내에서는 방주인 우근을 제외하고는 그런 심후한 내공의 소유자가 없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관찰력이 방령의 얼굴에 묻은 검댕을 꿰뚫을 정도로 날카로웠다면, 현옥 지가 가져오는 한독(寒毒)의 증상인 청선(靑線)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냐! 안 그래도 현옥지라면 이가 갈린다! 멍청히 서 있던 방령은 갑자기 버럭 고함을 지르며 오독추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금검의 끝에서 푸른빛이 번뜩거리는 순간 종이를 찢는 듯한 소리가 매섭게 울린다. 바로 검기진공(劍氣振空)의 절정 경지이다. 엇! 오독추는 방령의 돌연한 기세에 신형을 급히 정지하며, 쏘아 보낸 삼재검을 회수하려 한다. 삼재검은 세 자루의 비검을 가는 은삭을 이용하여 시전자의 뜻대로 조종하는 암병(暗 兵)이다. 접근전이나 기습에는 그 묘용이 십분 발휘되지만, 이처럼 정면으로 승부할 때에는 정 종검법을 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씨잇... 묘한 파공성과 함께 삼재검은 허공을 선회하며 오독추에게로 돌아가려 하지만, 방령 의 금검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깡. 웅혼한 내력이 실린 운애막막(雲靄漠漠)의 수법이 삼재검 중 한 자루를 산산히 부숴 버린다. 손가락 마디 하나의 크기로 조각난 삼재검은 방령이 전개한 검풍에 실려 오독추에게로 퍼부어진다. 이, 이런! 몇 조각의 검편(劍片)에 살갖이 찢기며, 이제는 이재(二才)가 되어버린 삼재검을 회수 한 오독추는, 두 눈을 부릅뜨고 방령의 검로를 쫓는다. 쐐애액--- 어느새 코 앞까지 쇄도한 누르고 푸른 빛이 혈랑탈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 진다. 까깍. 오독추는 두 자루의 삼재검을 종횡으로 휘둘러 가까스로 금검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검에 실린 패도(覇道)는 그의 내력으로써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독추는 무릎을 휘청거리며 고꾸라질 듯 물러서지만, 매섭게 호통치며 재차 검을 휘 두르는 방령의 기세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다. 마치 단숨에 오독추의 숨통을 끊어, 지난날 의제가 당했던 고통을 보상이라도 받으려 는 기색이다. 무슨 놈의 늙은이가 이리도 기운이 좋지? 오독추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마른침을 삼킨다. * * * 대저, 쌍동이는 심령이 통한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이체일심(二體一心)의 교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만,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협공을 시전할 때에는 쌍동이로서의 이득이 작용하는 것이 다. 그런 의미에서 동소일(東小一)과 동소삼(東小三),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동이들이 이 토록 형편없이 몰리는 까닭은 단 하나 뿐이다.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폐포장한, 석대문의 놀라운 무위 때문이다. 네놈들도 사람깨나 죽여 본 모양이지만, 그 정도로는 나를 상대할 수 없다! 종잇장처럼 얄팍한 연검, 흑정(黑晶)의 끝이 지면을 잠시 긁는가 하더니 하방(下方)에 서부터 천작란비(千鵲亂飛)의 검영이 폭죽같이 솟구쳐 오른다. 하체를 휩쓸어 오는 검의 물결에 동소일은 화들짝 놀라며 두 걸음 물러선다. 달아날 수 있을성 싶은가? 지면에서부터 석 자 위 공간까지를 가득 메우며 밀려오던 묵광이 돌연 씻은 듯이 사라 졌다. 그 대신 어느 틈엔가 중단으로 치켜진 흑정은 제혈출수(堤穴噴水)의 수법으로 직격해 들어간다. 목표는 신형이 흐트러진 동소일의 심장. 네 놈이 감히!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동소삼은 단부(短斧)를 휘둘러 검로를 차단해 간다. 찔러가는 검의 속도는 매우 빨랐지만, 동소삼의 출수 또한 그 시기가 적절했다. 석대문의 연검이 아무리 날카롭다고 한들, 도끼의 공세를 측면에서 받는다면 그 전단 력(剪斷力)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수조권(須鳥倦)이면 당지환시(當知還時)라... 하늘을 나는 새도 모름지기 피로를 느끼면 마땅히 돌아올 때임을 알아야 한다... 경서(經書)의 한 구절 같은 중얼거림과 동시에 흑정의 끝이 기묘한 각도로 선회한다. 금강석이라도 두쪽 낼 듯한 기세로 휘둘러진 동소삼의 단부는 흑정과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간격을 두고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동소삼은 헛손질에 따른 허탈감을 느낄 수 없었다. 잠시 비틀었던 검로를 촌각의 순간에 회복한 흑정은, 똑같은 제혈분수의 초식으로 그 의 심장을 찔러왔기 때문이다. 셋째! 동소일의 간장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지만, 이미 심장이 관통당한 동소삼은 대답할 수 없다. 형제였나? 안 됐군! 늑대탈을 쓰고 있었던 탓에, 자신을 합공하던 두 사람이 쌍동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밖 에 없는 석대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들이 비록 형제지간이든 아니든 간에 자신의 적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개 강자는 억센 투지와 비정한 살기가 만들어 낸다. 이 순간, 안 됐다는 말과는 별도로 하늘로 치켜 올려진 석재문의 좌수가 그것을 입증 해 준다. 퍽. 허공을 격하고 날아든 태을장의 음유로운 일격이 아우의 죽음 앞에 넋이 빠져 있던 동소일을 일 장 밖으로 날려보낸다. 연이어, 숨쉴 사이 없이 발출된 두 대의 장력이 동소일을 향해 밀려간다. 이러한 연환장법(連環掌法)은, 만약 방해자만 없었다면, 동소일의 이름을 명부에 올 리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휴웅... 석대문은 갑자기 자신이 쳐낸 장세(掌勢)가 오간 데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안색 을 굳힌다. 그의 전면 사 장 앞에는 금빛 가사를 걸친 서장승(西藏僧) 하나가 유령처럼 서 있다. 일행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세 명의 승려 중 하나이다. 서장승은 검은 빛이 감도는 얼굴을 차갑게 굳힌 채 석대원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친다. 서장말을 모르는 석대문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지만, 말투로 보아 그의 독한 손속을 질타하는 듯하다. 애당초 너희들이 자초한 피이다. 석대문은 차갑게 내뱉는다. 사람의 표정이라는 게 오묘한 것이어서, 이 순간 두 사람은 비록 말이 통하지 않지만 상대의 의사를 알아차리는 데에 별다른 장애가 없는 듯하다. 서장승은 석대문을 향해 눈을 부라리더니 들고 있던 금빛 찬란한 삼고저(三[金+古]杵) 로 땅바닥을 내리찍는다. 쿵, 소리와 함께 은은한 진동이 석대문의 발 밑까지 전달되어 온다. 놀랍게도 삼고저가 찍힌 바닥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흣, 내력을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석대문은 흑정을 움켜쥐고 새롭게 등장한 적에게로 천천히 다가선다. * * * 으헉! 나를, 나를 보호해라! 어서! 미리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뚱보 관인은 끝까지 말썽이다. 이것은 소리장도(笑裏藏刀) 음자송 - 물론 예의 늑대탈 덕분에 누구인지 알 수 없겠지 만 - 정도의 강적을 상대하는 방기옥과 호유광에게는 매우 고약한 일이다. 내가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황상께 진주(進奏)하여 중원에 있는 거지놈들을 모두 없애버리겠다! 이 말을 들은 호유광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두 자루 단도를 귀신같이 휘두르며 굴러다니는 저 땅딸보로부터 그 잘난 비계덩 어리를 지켜 주는 게 누군데, 누가 누구를 없앤다는 얘기인가! 생각 같아서는 돌아서서 따귀라도 올려붙이고 싶지만, 정말로 귀신 같은 당딸보의 단 검은 그에게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저 죽봉으로 엄밀히 요혈을 보호하며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방기옥의 검공(劍攻)에 보조나 맞출 분이다. 으헤헤, 아이들아! 아직도 힘이 남았느냐? 음자송은 본디 회회족(回回族)이다. 비록 십여 년 전부터 중원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의 본명인 음타라승(音陀羅升) 이라는 넉 자는 아직도 옥문관(玉門關) 밖 오사(烏斯) 일대에서 우는 아이도 울음을 멈추게 할 정도로 흉흉한 것이다. 흥! 흉적(兇賊)치고는 대단하지만, 사불승정(邪不勝正)은 고금의 진리이다! 방기옥은 군자라서 군자다운 말밖에 할 줄 모른다. 그리고 음자송은 군자가 아니라서 방기옥의 군자다운 말에 코웃음을 친다. 사불승정? 흐흐... 좋은 말이지, 좋은 말이야... 음자송은 갑자기 단도를 소매 속으로 감추더니, 두 손바닥을 앞으로 뒤집어 방기옥을 향하게 한다. 노부의 비기인 무음무형장(無音無形掌)을 맛봐야 그 따위 쉰내 나는 소리를 안 하겠 군. 방기옥은 바짝 긴장하여 검을 곧추세운 채 상대를 노려본다. 문득, 방기옥은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삼 장. 물론 고수들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는 거리겠지만, 방기옥의 무학은 장력에 얻어맞은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로 천박하지는 않다. 적어도 지금 음자송의 자세에서는 아무런 기운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방기옥의 준수한 얼굴에 노기가 감돈다. 나를 놀리자는 것인...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방기옥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짧막한 비명과 함께 땅으로 엎어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놀란 사람은 그 옆에 서 있던 호유광이다. 엇! 무음무형이라고 하더니, 정말인가? 이 땅딸보의 재주가 이 경지에 이르다니! 하지만 그가 조금만 더 생각이 깊었다면, 이 정도 경지의 무음무형장이라면 자신은 물 론이거니와 당대의 무학달인이라 할 수 있는 우근이라도 대적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 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방기옥의 등판 위로 선연하게 피어오르는 혈흔은, 결코 전면으로부터의 장력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는 사실도...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헉! 호유광 역시 방기옥과 똑같은 자세로 길게 엎어진다. 하하! 음 비영님의 무음무형장은 과연 일품이군요. 쓰러진 호유광의 뒷켠에는 이제까지의 호들갑스럽던 기색이 씻은 듯이 사라진 뚱보 관인이 옥선(玉扇)을 까딱거리며 서 있다. 그의 오동통한 입가에는 부채의 재질과 잘 어울리는 차가운 질감의 미소가 머물러 있 다. (5) 방기옥과 호유광이 뚱보 관인의 암습으로 쓰러지자, 장내에 있던 우근의 일행들은 하 나같이 마음이 급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방령임이 분명할 것이다. 호유광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방기옥은 그에게 있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 들이 아닌가. 그는 삼귀추혼(三歸追魂)의 수법으로 검을 크게 세 번 휘둘러, 이미 몇 개의 검상을 입은 오독추를 멀찌감치 떨궈버린 뒤, 방기옥을 향해 달려간다. 에헤헤, 어딜 가시려고. 늙은이는 늙은이끼리 놀아야지... 슈욱- 새파란 빛이 짧게 번득이며, 두 자루의 단도가 가뜩이나 조급한 방령의 움직임 을 가로막는다. 음자송이다. 이런 개 같은 난장이 자식! 평소의 방령이라면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대결을 회피할 리 없겠지만, 지금은 음자송 을 상대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그는 달려오는 기세를 멈추지 않고 능공허도(凌空虛渡)의 절정신법을 전개하여 음자송 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하방 좌측에서 밀려드는 한 줄기 음유로한 기운이 방령의 신법을 흐트러뜨린다. 그래도 그는 신형을 멈추려 하지 않고 손을 뒤집어 하방을 향해 장력을 발출한다. 펑. 두 개의 기운이 부딪히는 순간, 방령은 가슴에 둔탁한 충격을 느끼며 허공을 주욱 밀 려나간다. 물론 아무런 대비없이 발출한 장력이다. 그러한 장력으로 상대를 격퇴시키겠는 기대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 신을 이처럼 밀어붙이는 내공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허공에 머물게 해 준 진기는 이미 흩어진 뒤. 한 바퀴 몸을 뒤집어 착지함으로써, 가슴을 때린 충격을 완화시키는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일 것이다. 그의 앞에는 금빛 가사를 걸친 서역승이 무표정한 얼굴로 버티고 있다. 고갯길의 퇴로를 막고 있던 세 승려 중 한 명이다. 비켜라! 말보다 행동이 빠른 것도, 다급함 때문일 것이다. 방령은 운애막막(雲靄漠漠)의 검식으로 서역승의 뇌문(腦門)을 공격한다. 서역승은 머리가 허옇게 센 거지의 검법이 상상외로 위력적임을 알아차리곤, 솥뚜껑 같은 두 손을 엄밀히 휘두르며 금검에 대항한다. 손바닥으로부터 발출되는 기운은 음유롭기 그지없지만, 일단 어떤 기운에 부딪히면 강 맹한 타력(打力)으로 바뀌며 심맥을 공격해 온다. 서장의 밀종 무학 중에서 대수인(大手印)이라는 유가공(柔伽功)이 있다던데, 바로 이 것인가 보구나! 금검이 부르르 떨리며 검로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음을 느낀 방령은 빠른 걸음으로 좌 측으로 이동해 장세로부터 검을 빼낸다. 차근차근 상대한다면 설마 호승(胡僧) 하나 무찌르지 못할까만은, 지금 상황은 촌각도 아쉬운 판국이다. 비키라고 했다! 그는 금검에 한껏 진기를 실어 상대의 손바닥을 찔러간다. 아무런 변식없는 평범한 수법이지만, 검봉에서 번뜩이는 푸른빛은 금검에 실린 경력을 말해 준다. 싸아악... 매서운 검기가 대수인의 음유로운 기운을 가른다. 중원의 거지들은 하나같이 굉장하구나! 서역승은 검이 다가오기도 전에 장심(掌心)에 은은한 통증이 전달되어 오는 것을 느끼 고 황급히 장력을 거둔다. 저러한 내력이 담긴 검에 장심을 찔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십여 년을 수련한 대수인 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신승께선 조심하시오! 그 늙은이의 검법이 예사롭지 않소이다. 음자송은 왼손의 단도는 꺼꾸로 쥐고, 오른손의 단도는 바로 쥔 채 방령을 향해 달려 든다. 두 자루 단도는 상리(常理)에 어긋나는 궤도를 그리며 방령의 등쪽 요혈을 노린다. 그가 자랑하는 서천음양도법(西天陰陽刀法)이다. 에잇! 두 명의 강적으로부터 동시에 협공을 받게 되니, 천하의 사자신검 방령도 신경을 집중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왼손을 겨드랑이 아래까지 끌어당겼다가 부드럽게 뽑아내며 서역승에게 일 장을 때리는 한편, 오른손으로는 금검을 종횡으로 휘둘러 음자송의 공격을 봉쇄하려 한다. 방금 전 금검으로부터 장심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움츠린 탓에 상대의 장력에 방비할 겨를이 없기도 했지만, 서역승의 가슴을 때려오는 방령의 장력은 교묘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팔꿈치 관절이 안쪽을 향해 살짝 말려 들어가다가 어느 한 순간 끊어지듯 탁 퉁겨지는 변화는, 사자검문의 이대절기 중 하나인 사왕팔장(獅王八掌) 중 사출동혈(獅出洞穴)이 다. 퍽. 서역승은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주르륵 밀려난다. 방령이 공력을 전후로 분산한 탓에 큰 내상은 입지 않았지만, 뼈 속까지 스며드는 고 통은 참기 어려운 것이다. 몇 번 호흡을 하여 탁기(濁氣)와 통증을 몰아낸 서역승은, 이윽고 무척이나 화가 난 듯 빠른 서장말로 뭐라고 소리치더니, 쌍장을 세우고 재차 방령에게 달려든다. 이 늙은이는 정말 지독하군! 보아하니 개방의 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이런 물건이 튀어나왔을까? 음자송은 자신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서역승에게 교묘한 일 장을 격 중시키는 방령의 무공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도 연신 어딘가를 힐끗거리는 방령의 표정에서, 그가 매 우 불안한 심기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곳을 바라본 음자송은, 노인의 신경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모(冒) 비영! 아까 그 두 놈을 처치해 버리게! 어서! 음자송의 이 한 마디 외침은 당장 효과가 있었다. 이제 막 유태성과 동소이의 싸움에 끼어들려 하던 뚱보 관인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는 아까의 장소로 되돌아간다. 그 곳에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방기옥과 호유광 두 사람이 있음을 아는 방령은 당장에 마음이 흐트러져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한다. * * * 한편, 마음이 다급하기로는 석대문도 마찬가지이다. 멈춰라, 이 비겁한 놈! 서역승과 두세 합을 나누던 석대문은,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뚱보 관인을 향해 버럭 고함을 친다. 하지만 그가 상대하는 서역승은 한눈을 팔면서 대적해도 될 정도로 녹녹한 실력이 아 니다. 석대문은 큰 호를 그리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쇠몽둥이를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는다. 빌어먹을! 괴이한 내공이나 삼고저를 다루는 장법(杖法)으로 미루어 서역승은, 적어도 조금 전 상대했던 동소일, 동소삼보다는 뛰어난 것이다. 서역승의 삼고저에 정통으로 얻어맞을 뻔한 석대문은 가까스로 몸을 피한 뒤 자세를 가다듬는다. 시간이 없다... 석대문의 눈빛이 매서워진다. 지이잉. 흑정이 가볍게 진동하며 묵광이 짙어진다.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방기옥은 그에게 있어서 골육과도 같은 친구이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큰 한을 남기게 될 것이다. 파아- 돌연 그의 검세가 독기를 품는다. 흑정의 끝이 부르르 떨리더니 한 개의 고리가 피어오른다. 고리는 환상처럼 그 수를 늘리며 흑정의 하늘하늘한 검신을 타고 서장승에게로 쏘아져 간다. 검이 서장승의 몸 앞에 이르렀을 때, 고리의 수는 자그마치 일곱. 억! 이러한 기경(奇景)에 서역승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선다. 까깡! 깡! 금빛 찬란한 삼고저 표면에서 네 번의 불꽃이 튀긴다. 그와 동시에 서역승의 두 팔에는 세 개의 검흔이 새겨진다. 일곱 개의 고리 중 세 개에 격중된 것이다. 서역승은 겁이 덜컥 난다. 그의 삼고저를 놀리는 수법이 조금만 더 민첩하지 못했던들, 그는 나머지 네 개의 검 환(劍環)에 전신을 난자당했을 것이다. 물러가라! 석대문은 큰 고함과 함께 손바닥을 뒤집어 석 대의 태을장을 때린다. 급한 마음 때문인지, 유유함을 장점으로 하는 태을장의 묘용은 십분 발휘되지 않았지 만, 이미 구세칠환(救世七環)의 기절(奇絶)한 수법에 얼어붙은 서역승은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여러 걸음 뒤로 달아난다. 석대문은 그를 따라붙으려 하지 않고 몸을 돌린다. 곡유(穀有)! 그는 방기옥의 자(字)를 부르며 쏜살같이 몸을 날린다. 이러한 갑작스런 행동에 서역승은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버려두고 동료를 구하러 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크게 고함을 지르며 석대문을 쫓아간다. 뚱보 관인, 비각의 사십구비영 중 마흔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옥선비랑(玉扇肥 郞) 모득(冒得)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달려오는 석대문을 바라본다. 거리는 이십여 장. 그 정도면 벌레처럼 자빠져 있는 거지 두 명을 충분히 죽이고도, 적을 상대할 여유가 있을 것이다. 후후, 이 나으리께서는 강구(康邱)에서부터 네놈들을 죽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지. 방기옥의 앞에 선 그는 애병인 환희옥선(歡喜玉扇)을 치켜든다. 이대로 내려찍기만 한다면 방기옥의 생명은 끝나고 마는 것이리라. ...? 순간, 모득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갑자기 기혈이 콱 막히며 오른팔이 마비된 것이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살펴 본다. 오른팔 아래 경문혈(京門穴)과 소해혈(小海穴)에 박혀있는 작은 돌조각 두 개... 그는 고개를 돌려 돌조각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훤칠한 파면승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물고기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왜...? 시간이 있었다면 이러한 의문을 찬찬히 해결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목전에 쇄도한 흑정의 살기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더러운 놈! 노갈과 함께 흑정이 허공을 가른다. 공간을 찢는 검은 번개. 헉! 모득은 다급성을 내지르며 마비되지 않은 왼손을 휘둘러 검을 막아간다. 검게 물든 손바닥에서 전개된 것은, 옥선십이식(玉扇十二式)과 더불어 그가 자랑하는 철사독장(鐵沙毒掌)이다. 하지만 독이 오를대로 올라 있던 흑정의 기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씨잇. 소리라고 여겨지지도 않을 미약한 소리와 함께 철사장의 장세는 허무하게 갈라지고, 잘려진 손가락들이 하늘로 후두둑 뿌려진다. 으악! 얼음물에 손가락을 담근 듯한 느낌. 뒤이어 화끈한 통증. 모득은 손가락이 잘린 왼손을 마구 흔들며 비명을 지른다. 선혈이 뿌려지며 허공에 기이한 붉은 그림을 만들어 낸다. 이 자가 왜 멈칫거렸을까? 석대문은 검을 휘둘러 모득은 손가락을 베면서도, 한편으로는 옥선을 치켜들고 우두커 니 서 있던 그의 이상한 행동에 의문을 품는다. 으아악! 손, 내 손! 피가 뿜어져 나오는 왼손을 흔들면서도 마비된 오른팔을 치켜든 채 비명을 지르고 있 는 모득의 몰골은 희극적이면서도 기괴한 느낌을 준다. 다시금 검을 날려 모득의 숨통을 끊어버리려 하던, 석대문은 등 뒤로부터 울리는 매서 운 바람소리에 멈칫거린다. 애써 돌아보지 않고도, 뒤따라 달려온 서역승이 삼고저를 휘두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 다. 하지만 잠시 멈추었던 흑정은 앞서 본 피맛에 이미 중독되었음인지, 예정된 궤도를 그 리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돼지 같은 네 놈 상판이 보기 싫었지! 흑정으로 직강표두(直降豹頭)의 일검을 쳐내는 동시에, 허리를 틀며 좌수로 삼고저의 갈라진 머리부분을 움켜쥐는 것은 금룡박쇄(禁龍縛鎖)의 가전(家傳) 금나수(擒拿手). 퍽. 흑정의 궤도 안에 들어간 모득의 머리는 여지없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머리가 갈라 진 모득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즉사하고 만다. 한편 삼고저의 위맹한 힘을 손가락으로 받아낸 석대문의 상황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 다. 금룡박쇄의 절묘한 접기무화(接氣無化)의 수법은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삼고저를 한 자 정도 옆으로 기울어지게 만들 수 있었지만, 거기에 실린 바위를 쪼갤 듯한 힘은 그 의 손가락 두 개를 탈골시키고 만 것이다. 으와압! 서장승은 자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석대문이 모득을 죽이자 눈이 뒤집혀질 정도로 화 가 났다. 그는 삼고저를 거칠게 땅에 꽂더니, 두 손을 홱 뒤집으며 석대문을 향해 일 장을 때린 다. 석대문은 한 가닥 음유로운 기운이 온 몸을 얽어오는 것을 느끼고, 안색을 굳히며 태 을장으로 맞선다. 펑. 두 사람의 손목이 꺽일 듯 휘청거리며 서로 두 발자국씩 물러난다. 누구도 이득을 얻지 못한 형국. 하지만 석대문은 팔꿈치까지 솟구치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린다. 탈골된 손가락 두 개는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다. 이런 손으로 장력을 전개하는 것은 깨진 두레박으로 물을 퍼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미안하지만, 손바닥은 이제 사절이다! 석대문은 왼손을 검자루 아래로 끌어당겨 검결을 만들면서 흑정을 코 앞으로 세운다.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의형검뢰(意形劍雷)의 살검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서역승도 심상치 않은 살기를 느꼈음인지, 황급히 삼고저를 뽑아든다. 그는 고개를 돌려, 가까운 곳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파면승에게 빠른 서장말로 몇 마디를 외친다. 아마도 도움을 요청하려는 듯. 하지만 파면승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다. 그것은 서역승은 물론이거니와 석대문으로서도 매우 이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네 친구는 너를 도와주지 않을 모양이군. 덕불고(德不孤)라, 평소에 덕을 좀 쌓아 두지 그랬나? 석대문은 차갑게 비웃으며 검을 출수한다. 검을 쥔 손목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세 갈래의 매서운 검기가 서역승의 세 군데 요혈을 비스듬히 찔러간다. 서역승은 파면승에게 다시 무어라고 소리치려다가 그만 검에 찔릴 뻔하였다. 그는 별 수 없다는 듯 삼고저를 휘둘러 요혈을 방어한 뒤, 독특한 장법(杖法)으로 석 대문의 하체를 쓸어간다. 부웅- 보리심(菩提心)을 상징하는 밀종의 법기(法器), 삼고저가 이렇게 흉흉한 병기 가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사람의 혼백을 앗아갈 듯하고, 땅 위로 피어오르는 흙먼지는 사 방을 자욱하게 뒤덮는다. 하지만 이러한 무지막지한 공격도 석대문의 날렵한 움직임 앞에는 별 소용이 없다. 멋들어진 비룡번신(飛龍飜身)의 재주로 허공을 맴돌아 삼고저를 피한 석대문은, 허리 를 가볍게 틀며 두 번의 발길질을 서장승의 어깨에 적중시킨다. 실로 경묘한 신법이며 우아한 발놀림이다. 으... 두 뼘 두께의 바위를 밟아 부숴뜨렸던 각력(脚力)이다. 그러한 발길에 어깨를 채였으니 그 고통이 오죽할까. 서장승은 어깨를 감싸쥐며 물러선다. 차앗!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는 듯, 석대문은 바닥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앞으로 돌진한다. 차가운 눈동자와 검푸른 흑정, 그리고 그보다 앞서 쏘아져 오는 살기. 이익! 서장승은 확대 되어오는 검봉을 향해 삼고저를 내지른다. 삼고저의 갈라진 머리 부분은 작은 사발보다도 크다. 이 수법은 삼고저의 머리를 검집 삼아 검을 봉쇄하려는, 일종의 탈검술(奪劍術)이다. 그러나 석대문의 검은 어찌된 영문인지 부드럽게 꿈틀거리며 너무도 간단하게 삼고저 의 머리를 피해 버린다. 삼고저의 면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려오는 검봉. 서역승의 눈이 왕방울처럼 부릅떠진다. 회격조점(廻擊彫點)? 멋지군! 흑정이 서역승의 가슴을 관통하는 순간, 뒷전에 우두커니 서 있던 파면승이 뱉은 탄성 이다. 이 말은 석대문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회격조점은 강동 석가(石家)의 가전검법인 의형검뢰 중 가장 무서운 세 가지 초식 중 하나이다. 연검인 흑정의 이로움을 십분 발휘해 검을 자유자재로 구부러지게 만드는 이 수법은 삼봉진인(三峰眞人)이 창안했다는 요지검(搖枝劍)조차 아래로 굽어본다는 절초 중의 절초였다. 천하에서 이 수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는 석대문 하나뿐. 그 조차도 강호를 행유(行遊)하며 몇 번 사용한 적이 없는 초식을 저 파면승이 어찌 알아본다는 말인가! 감탄만 하지 말고 직접 경험해 보시지. 파면승이 돌조각을 날려 방기옥과 호유광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석대 문이다. 그는 가뜩이나 껄끄럽게 생각하던 파면승을 향해 매서운 일 검을 날린다. 까깍... 파면승은 별로 의외롭지도 않다는 듯 수중에 들고 있는 두 자 길이의 강철척(鋼鐵尺) 을 휘둘러 석대문의 검공을 해소시킨다. 쯧쯧, 아직은 헛점이 많군. 파면승이 왼손을 불쑥 내밀어 때린 일 장이 잠시 흥분 상태에 빠져 있던 석대문의 가 슴에 적중된다. 석대문은 한 줄기 부드러운 힘에 밀려 세 걸음이나 물러선다. 내식을 조절해 보니, 운기에는 큰 지장이 없다. 선천공(先天功) 덕분인지 별 다른 내상은 입은 것 같지 않다. 이상하다, 이 자의 장법은 태을장과 흡사하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파면승에게는 이상한 구석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그는 곧 모든 생각을 떨쳐 버리고 다시금 살기를 돋운다. 의혹 따위에 마음이 흐트러지고서도, 이 험악한 싸움에서 살아남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핫! 석대문은 빠르게 달려들며 흑정을 쳐낸다. 천작란비(千鵲亂飛), 구세칠환(求世七環), 일도삼경(一到三傾)의 삼 식이 다시 한 번 파면승의 후리후리한 몸에 퍼부어진다. 이런 사나운 공세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파면승은 강철척을 끌어당기며 뒤로 물러선 다. 이때다! 석대문은 다리를 기쾌하게 교차하며 서역승의 목전으로 쇄도하며 흑정을 찔러간다. 동소삼의 목숨을 앗아간 방혈분수(坊穴噴水)의 초식인 듯하지만, 검로 중간에 크게 휘 청이며 구부러지는 묘용은 바로 회격조점이다. 흥! 파면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강철척을 마주 찌른다. 치이익- 회격조점이 지닌 묘용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휘되어서, 흑정은 살아있는 뱀 처럼 강철저의 면을 타고 미끌어진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파면승의 강철저가 부르르 떨리며, 타앙 소리와 함께 흑정을 퉁겨내 버리는 것이 아닌 가! 그 수법이 자신의 회격조점과 다름이 없음을 발견한 석대문은 눈을 크게 뜨며 두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다. 이 수법은 회... 석대문! 놀라움에 찬 석대문의 말을 파면승의 메마른 일갈이 매섭게 자른다. 같은 수법을 두번씩이나 연달아 펼치다니, 강동에서 고명하다 알려진 검판대인(劍判 大人)의 재주가 겨우 이 정도였나? 당신은...? 파면승은 강철저를 폭 넓은 승복 소매 속으로 갈무리한다. 마치 석대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이다. 그리고 석대문의 귀로 전해지는 모기소리 같은 전음... <나는 자네와 싸울 이유가 없네. 가서 방..., 방 대협이나 도와 드리게.> 석대문은 머리가 먹먹할 정도의 의혹에 빠졌다. 초면인 파면승이 거지로 위장한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부친에게 전수받은 의형검뢰는, 그의 아우인 석대전(石大 全)조차도 연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보 같은! 머뭇거리다가 천추(千秋)의 한을 남길 셈인가!> 이번 파면승의 전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매우 다급하게 들린다. 석대문은 고개를 들어 파면승의 얼굴을 바라본다. 원형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파괴된 얼굴. 그 가운데 자리잡은 한 쌍의 눈은 깊기만 하다. 석대문은 그 눈으로부터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다. 단 한 가지, 파면승이 그에게 적의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파면승이 바라보는 곳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 곳에는 방령이 백발을 휘날리며 땅딸보와 서장승을 맞이하여 싸우고 있다. 방령의 금사검법이 비록 강호일절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는 검을 손에서 놓은지 이미 오래였다. 은퇴한 검수의 해이함이야 시간이 갈수록 확연해지리라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이치일 것이다. 석대문은 한숨을 쉬고는 파면승을 향해 고개를 끄떡여 보인다. 파면승과의 싸움을 포기한 것이다. 다음에 만날 때에는 이렇게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 곳에는 곤경에 빠진 백부가 있었다. (6) 구궁장법(九宮掌法)의 무서운 점은 단순해 보이는 하나의 장력마다 팔괘(八卦)의 오묘 한 조화가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남송 시대 전설적인 협객인 구지신개(九指神개)가 창안했다고 전해지는 이 장법은, 본디 강맹한 외문장력(外門掌力)에 역경(易經)의 변화를 응용한 열여덟 개의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18초 장법은 원나라가 들어선 뒤 후인(後人)을 만나지 못해 거의 단절되고 말았으니, 이는 손양(孫陽)과 같은 백락(伯樂 : 天馬를 관리하는 별 이름. 일반적으로 말을 잘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면 천리마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개방 장로들에게 구전되어 오던 장법의 요결을 우근이 얻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 백 락에 의해 천리마의 준기(駿氣)가 발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근은 많은 부분이 소실된 이 장법을 새롭게 보완한 뒤, 스스로 팔괘의 묘용 외에 구 궁(九宮)의 기상(奇想)을 가미하여 구궁장법이라 이름하였다. 우근의 차돌 같은 몸을 빌어 전개되는 구궁장법은 가히 무적의 무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범해 보이는 한 쌍의 육장(肉掌) 아래에서 죽어간 도적, 악당들의 수는 셀 수도 없 었고, 상산삼귀(商山三鬼)나 우면독도(牛面毒刀) 등의 마두는 물론, 남궁월 같은 절정 고수 역시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그러니 세인들이, 당금 강호에서 개방이 떨치는 성세는 방주 우근의 무용(武勇) 탓이 다 라고 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 * 남루한 의복 소매는 두팔 모두 팔뚝까지 둘둘 말려져 올라가 있다. 그러한 두팔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남궁월에게로 휘둘러진다. 우수는 뇌문(腦門)을, 좌수는 하단전(下丹田)을 각각 노리고 있다. 우르르... 무슨 조화인지 쌍장이 앞으로 나아가며 은은한 뇌성이 울린다. 제기랄! 뇌경백리(雷驚百里)로구나! 수 년 전 회수(淮水)의 모래톱 위에서 우근의 구궁장법의 무서움을 톡톡히 경험한 남 궁월이다. 지금 우근이 전개하고 있는 초식이 산을 진동하여 울리게 하는[震爲雷] , 구궁장법 중 네번째 초식인 뇌경백리임을 알아차린 남궁월은, 그 극강한 힘에 감히 저항하지 못하 고 뒤로 물러선다. 우근은 뻗는 손을 멈추지 않고 남궁월을 추격한다. 도망갈 수는 없지, 남궁월! 팔괘 중 진(震)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뇌경백리의 장력이 뇌천대장(雷天大壯)의 허장성세로 변해 전면을 가득 채운 것도 한 순간이었고, 다시 움츠렸다 펴지며 뇌산소과(雷山小過)의 날카로운 살초로 남궁월의 가슴을 찔러 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놈은 장력을 때리기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우근은 언제나 남궁월과의 거리를 일 장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 마치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막대가 가로 놓인듯, 남궁월이 육박하면 우근이 물러서 고, 남궁월이 달아나면 우근은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에게 거리를 빼앗기다가는 전일 패배의 재판이 될 것임을 깨달은 남궁월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내닫는다. 파팍--- 다섯 개의 강철 손가락이 뇌산소과의 뾰족한 장세와 엇갈리며 우근에게로 쏘 아진다. 달라붙겠다는 건가? 이대로 장력을 전개하다가는 흑수마갑에 의해 몸 어딘가에 구멍이 뚫리기 십상이다. 우근은 장력을 회수하며 좌장을 둥글게 휘말아 흑수마갑의 예기를 감싸안는다. 장중부동(莊重不動)을 상징하는, 구궁장법 중 일곱번째 초식인 겸산간(兼山艮)의 수법 이다. 남궁월의 오른손이 겸산간의 무거운 위력에 휘청거릴 때, 어느새 그의 오른쪽으로 미 끌어져 들어간 우근은 회심의 일 권을 발출한다. 하앗! 외마디 기합과 함께 우근의 왼주먹을 통해 전개되는 절기는 돌비석도 깨부순다는 개방 의 절기, 쇄비권(碎碑拳)이다. 퍽. 우근의 쇠망치 같은 주먹은 빠르고도 매끄럽다. 남궁월은 속절없이 옆구리에 일 권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그러나! 항문까지 울리는 듯한 통증이 내장을 뒤흔들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우근을 향해 와 락 달려든다. 비록 일 권을 얻어맞았지만, 우근을 옆구리 아래에까지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거리를 둔 채 장력으로 겨룬다면, 자신은 물론 천하에서 우근을 당할 자가 거의 없다. 반면 거리없이 육박전을 벌인다면, 우근을 포함한 천하의 누구와도 자신이 있다. 엇! 남궁월의 돌연한 반격에 허를 찔린 듯, 우근이 허둥지둥 전개한 육합망(六合網)의 방 어식은 그 시기를 놓쳐 버렸다. 갈! 남궁월은 우근의 코 앞까지 바싹 육박하여 그가 자랑하는 흑응조공(黑鷹爪功)을 소나 기처럼 퍼부어댄다. 흑수마갑에 부착된 두 치 길이의 강조(鋼爪)가 먹이를 노리는 매의 그것처럼 매섭게 요동하며, 우근의 전신을 회오리바람 같은 조영(爪影) 속으로 가둔다. 찌이--- 찍! 맹수의 발톱에 뜯긴 듯 우근의 상의 가슴팍이 너덜해진다. 그와 함께 강조에 묻어나오는 살점... 하지만 재빨리 정신을 차린 우근이 빠르게 몸을 물려서인지, 상처는 치명적이지 않았 다. 안 본 사이에 손가락이 제법 날카로워졌구나! 우근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교차시켰다가 쌍장을 뒤집으며 비스듬히 뿌려낸다. 다시 한 번 전개되는 육합망이다. 남궁월은 자신의 연속적인 공격이 우근의 쌍장에 의해 엄밀히 봉쇄되는 것을 느끼고, 잠시 발놀림을 멈춘다. 잠깐 사이의 공백... 그리고 이때부터 우근의 신기(神技)가 펼쳐진다. 하지만 아직 내 적수가 되기에는 멀었다! 우근의 오른발 발등이 남궁월의 각진 턱을 노리고 빠르게 날아든다. 좌전방 아래쪽에서부터 날아든 이 발길질은, 남궁월이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자 별 효 력을 거두지 못하고 허공으로 흘러가고 만다. 그런데 남궁월이 몸을 다시 폈을 때, 남궁월은 깜짝 놀란다. 또 하나의 발이 같은 방향에서 날아든 것이다. 남궁월과 같은 무에의 달인이 무릎을 굽혔다 피는 시간은, 그야말로 시간이라고도 말 하기도 어려운 촌각이리라. 그 사이에 오른발을 회수하고 다시 내지르는 퇴법(腿法)은, 실로 고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남궁월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우근의 발을 피한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으스스한 바람소리는 발길질에 담겨 있을 경력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엇? 남궁월은 자신도 모르게 경호성을 토하고 만다. 우근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오른발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어처구니 없게도 같은 방향에서 날라든 또 하나의 오른발이 있었다. 으음... 엉겁결에 왼팔을 들어 우근의 발차기를 막았지만, 팔뚝이 부숴지는 듯한 고통에 신음 이 절로 흘러 나온다. 순간, 우근의 몸이 뒤로 벌렁 넘어진다. 그리고 발, 발... 퇴영(腿影)의 홍수... 파파파... 두 팔을 이용해 몸을 지탱하며 두 발을 교차하여 상대를 공격하는 수법은, 무영각(無 影脚)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호흡이 길게 이어지고, 원앙퇴(鴛鴦腿)라고 하기에는 너무 빠르다. 땅을 짚은 채 전개한 것이 사이에 여덟 번, 그리고 두 팔로 땅을 찍으며 공중에 몸을 띄워 전개한 것이 여섯 번... 그 중 네 대의 발길질이 남궁월의 몸뚱아리에 격중된다. 허공에서 여섯 번의 발길질을 마친 우근은 승기를 인식한듯, 발 끝으로 지표를 찍으 며 새처럼 훌쩍 날아오른다. 받아라! 일조령을 쩡, 울리는 우렁찬 기합 소리... 우근은 왼손으로 오른팔꿈치를 지지하며 천중(天中)으로 치켜든 오른손을 힘차게 내리 찍는다. 구궁장법 중 첫번째 수법이자, 둥글고[圓] 굳센[健] 기운이 일품인 원형리정(圓亨利 貞)의 초식이다. 에익! 천 근 암석이 온몸을 찍어누르는 듯한 압력 속에서, 남궁월은 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 린 채 오른손을 힘차게 뻗는다. 시커먼 살기로 번들거리는 다섯 개의 강조가 장세 속으로 파고 든다. 그러나 하늘에서부터 무너지듯 쏟아지는 압력은 너무도 거센 것이다. 빡! 둔탁한 파열음... 으윽! 남궁월은 가슴과 오른손이 무엇인가에 깔린 듯한 느낌을 받으며 서너 걸음 물러선다. 쿵, 쿵, 쿵! 그가 끌어올린 내공과 우근의 장력에 담긴 힘은 물러서는 그의 발 아래로 두 치가 넘 는 자국을 남긴다. 목구멍으로 느껴지는 비릿한 기운... 다급히 운기하여 흔들리는 내식을 조절하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입으로부터 왈칵 솟구쳐 나오는 검은 핏줄기... 휘익--- 우근은 허공에서 한 바퀴 재주를 넘은 뒤 일 장 정도 물러선 곳에 내려선다. 왼손바닥을 펴 가슴 앞으로 끌어당기고 오른주먹을 말아 옆구리 어림에 붙인 자세는 내상을 입은 남궁월에 비하여 당당하기 이를 데 없다. 우근은 토혈하는 남궁월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가 불쑥 내뱉은 말이 강호오마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궁월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난자해 버린다. 남궁월! 자네는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는군. 나는 이번에는 구궁시방계(九宮十方界)를 사용해야 될 줄 알았지. 이 말은 회하에서 우근에게 패할 때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구궁시방계... 우근이 가장 자랑으로 여기는, 구궁장법 중의 마지막 수법이다. 그러한 수법을 남궁월에게는 쓸 필요도 없으니, 다시 말하면 남궁월 따위는 전력을 다 하지 않고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명인 것이다. 이... 놈! 우근! 남궁월의 눈에 핏발이 선다. 지난 날의 패배 이후, 우근을 꺾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고련(苦鍊)한 날들이 얼마였던 가. 그런데 그렇게도 벼르고 벼르던 순간을 맞아, 채 백 수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패한 것 이다. 분노 때문일까, 자괴감 때문일까. 우욱! 또 한 번 진기가 뒤엉키며 한 모금의 검은 피가 남궁월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 순순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남궁월! 승리감에 가득 찬 우근의 말이다. 투항...? 남궁월은 소맷자락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우근을 노려본다. 으하하! 네놈은 장법은 쓸만하지만 사람 보는 눈은 여전히 개눈깔이군!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궁월은 흐트러진 진기를 억지로 끌어올린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이마 위로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힘줄은, 그의 내상이 얼마나 심각 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우근에게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백 배 낫다고 생각하는 남궁월이었다. 네 놈의 사지 중 하나는 지옥으로 데리고 가 주마! 그는 흑수마갑을 가슴 앞으로 끌어올린다. 내상을 입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형형한 안광이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다. 과연 오마 중 하나... 남궁월의 전신에서는 휘어지지 않는 무사의 기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비록 적의 입장이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우근은 좌장을 완만하게 뻗는다. 삼 장 정도의 거리를 격하고 남궁월의 가슴을 향해 밀려가는 장력은 뇌성을 동반한 뇌 경백리... 하지만 남궁월은 피하려 하지 않고 쌍수를 세운 채 앞으로 내닫는다. 옥쇄(玉碎)를 각오한 육탄 공격이다. 남궁 비영께서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길! 이때 어디선가 밀려든 한 줄기 온화로운 기운이 우근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들던 남 궁월에 측신(側身)을 때린다. 몸을 상하게 하는 묵직한 힘은 담겨있지 않지만 그 시기와 방위가 매우 교묘한 까닭에, 남궁월은 자세가 무너지며 세 걸음 게걸음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상처입은 자를 공격하는 것은 대방(大幇)의 방주된 도리가 아니지... 귓청을 자극하는 쇳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기운이 우근에게 밀려든다. 펑! 엇! 엉겁결에 왼손을 휘둘러 접장(接掌)한 우근은 둥글게 몸을 감싸는 기이한 힘에 밀려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만다. 우근의 얼굴이 묘해진다. 비록 미리 대비하지 못한 접장이지만, 장력을 겨뤄 자신을 밀어냈다면 예사 재주가 아 닌 것이다. 어느새인가, 그와 남궁월 사이에는 회색 승포를 걸친 파면승이 버티고 서 있다. 신승께서는 비켜나시오! 이 남궁월, 저 거지놈에게 아직 지지 않았소이다! 남궁월은 파면승에게 도움을 받자 모멸감을 느낀 듯 고함을 지른다. 파면승은 아무런 대답없이 남궁월을 바라보다가 불쑥 그의 오른손을 가리킨다. ...?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 본 남궁월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우수에 끼어진 흑수마갑은 형편없이 으스러져 있고, 갈라진 균열 사이로는 다진 고기 와 같이 뭉개진 살점이 비친다. 이것이 바로 우근의 원형리정에 정면으로 대항한 대가이다. 손이 이 지경이 되었건만, 패배에 대한 분노는 고통마저 마비시켰던 것이다. 나는 거지라서 도리 같은 것은 잘 모르지... 그렇게 도리를 따지는 네가 대신 덤벼봐라! 우근의 음성에는 은근한 노기가 담겨 있다. 장력 대결로 한 걸음 물러선 것에 자존심이 상한 탓이리라. 파면승은 우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못할 것도 없겠지... 파면승의 예의 탁성(濁聲)은 건조하게 말라붙어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 무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소매 속에서 금척(金尺)을 꺼내어 천천히 치켜든다. 우근은 감히 태만히 못하고 안색을 굳힌 채, 왼손으로는 하늘을, 그리고 오른손으로 는 땅을 가리킨다. 구궁장법의 기수식인 좌천우지세(左天右地勢)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 으아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팽팽하게 당겨진 두 사람 사이의 공간으로 뛰어든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비명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본다. 끄으윽... 그곳에는 유태성의 청강검에 의해 어깨에서부터 젓가슴까지 비스듬히 베어진 혈랑탈 인의 끔찍한 몸뚱아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검을 움켜 쥐기라도 할 듯 두어 번 닭발 같은 병기를 허우적거리다가, 풀썩 땅으로 무너진다. 동 비영... 남궁월의 피 묻은 입가가 실룩거린다. 유태성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자, 바로 계조구의 달인인 동소이였던 것이다. 다른 동료들은...? 남궁월은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격전을 벌리고 있는 음자송과 서역승을 바라본다. 순간, 그의 눈에 절망의 빛이 스친다. 음자송과 서역승이 상대하고 있는 자들은 금검을 쓰는 노인과 흑검을 쓰는 장한... 멀리서 보아도 그들의 검법은 이미 어떤 경지를 넘어선 달인의 그것이었다. 음자송과 서역승은 서로 등을 댄 채 앞 뒤에서 공격하는 두 자루 누르고 검은 검에 대 항하고 있지만, 여기저기에 검상을 입은 모습은 누가 보아도 패색이 역력하다. 남궁 비영, 그만 각으로 돌아갑시다. 오늘 이들을 더 상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길보다 흉이 많을 것 같소이다. 파면승이 남궁월을 돌아보며 말한다. 우근은 잠시 어이가 없어진다. 미친 놈! 마음대로 왔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을 줄 아느냐? 우근은 크게 꾸짖으며 장력을 전개하려고 한다. 이때 파면승은 툭 던진 말이 그의 행동을 멈추게 만든다. 우근, 나는 매혼대법(賣魂大法)에 사용된 미약(迷藥)의 해독법을 알고 있소. ...! 양귀비야 별 게 아니지만 살비파(薩肥芭)는 해독하기 어렵지. 해약이 없으면 중독된 사람은 반 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인이 되고 말 것이오. 어떻소? 신승!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남궁월은 파면승이 우근에게 이러한 조건을 제시하자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남궁 비영, 저들 중 우근을 제외한 나머지는 개방 문도들이 아닌 것 같소. 이들이 이처럼 준비하고 왔다는 것은, 이미 사(史) 비영의 계략이 탄로났다는 증거! 위백(魏栢)이나 매혼대법은 이미 그 효력을 잃었소이다.> 파면승의 전음에 남궁월의 얼굴이 굳어진다. 파면승은 다시 우근에게 말한다. 우근, 당신이 저들의 지휘자일 터! 결정하도록 하시오! 우근은 생각에 잠긴다. 사실 승세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그로서도 꺼리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들이 전력을 다해 저항한다면, 지리한 싸움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 모르는 일이 다. 위백의 중독도 중독이거니와, 부상을 입은 방기옥과 호유광의 상세도 염두에 두지 않 을 수 없는 것이다. 으음... 좋다! 우근은 무겁게 고개를 끄떡인다. 이것으로 계약은 성립된 것이다. 이어서 우근은 석대문에게 크게 소리쳐 싸움을 멈추게 한다. 파면승 역시 서장말로 뭐라고 소리쳐 서역승과 음자송을 멈추게 한다. 우근은 방령과 석대원을 가까이 부른다. 우 방주! 이제 거의 끝난 마당인데, 어찌하여 싸움을 멈추라는 것이오? 영문을 모르는 방령과 석대문이 얼굴을 붉히고 다가오자, 우근은 파면승과의 거래를 설명한다. 이야기를 듣던 방령과 석대문은 멍한 얼굴로 파면승을 바라본다. 하지만 파면승은 이미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 약속대로 살비파의 해독약을 알려 주겠소. 파면승은 근처에 서 있는 큰 소나무로 성큼성큼 걸어가, 나무의 밑둥 부분에 손가락 으로 무엇인가를 쓴다. 그리고는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오독추와 동소일에게로 다가가 부축해 세운다. 그러는 동안 남궁월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우근을 노려보고 있다. 우근! 오늘도 내가... 졌다.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때에는 반드시 네 놈을 죽이고 말겠다! 남궁월의 씹어뱉는 듯한 말에 우근은 담담히 웃는다. 기다려 주마. 그리고 그들은 떠나갔다. 남궁월은 심한 내상으로 걸음을 옮기기도 어려울 텐데도, 부축하려는 음자송의 손길을 뿌리치고 걸어간다. * *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으음. 남궁월 등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우근은, 아까부터 옆구리 뒤로 감춘 채 말아쥐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편다. 그의 손바닥은 손금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찢겨져 있다. 주먹 가득 고여 있던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진다. 남궁월의 흑수마갑이 우근의 장력에 대항한 대가로 부숴진 것이라면, 우근의 손바닥 은 남궁월의 흑수마갑을 부순 대가로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나와 호 아우, 둘만 왔다면 어찌 되었을까... 든든한 원병(援兵)으로 기선을 제압하지 않았던들, 정말로 이 일조령에 묻혔을지도 모 르지. 우근은 쓴웃음을 지으며 옷자락을 찢어 손을 감싼다. 방령과 유태성은 아직도 땅에 널부러져 있는 방기옥과 호유광의 상세를 돌보고 있다. 그들의 안색이 어둡지 않은 것을 보면, 부상의 정도가 생각했던 것처럼 심각하지는 않 은가 보다. 우근은 그들에게로 다가간다. 자, 소주로 갑시다. 아드님의 상처도 치료하고, 또 위 형님에게 몹쓸 짓을 한 요인(妖人)을 잡아 내야죠. 어느새 우근의 얼굴은 밝아져 있다. 十八章 山中閑談 (1) 한풀 꺾인 더위는 계절이 이미 옷을 갈아입었음을 말해 준다. 뷔로롱--- 옥현(玉絃)과도 같은 영롱한 울음소리와 함께 산새 한 마리가 계곡 아래 수풀로 날아 내려간다. 날개짓마다 묻어 나오는 활기찬 생명... 이마에 엷게 배인 땀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바람이 이미 어제와 다름을 깨달은 석대 원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 본다. 창천(蒼天). 까마득하다... 선약(仙藥)을 훔쳐 월궁(月宮)으로 날아간 항아(姮娥)와도 같이, 하늘은 스스로의 창 창함을 부여 안고 아득한 저 위쪽으로 올라가 있다. 그 까마득한 푸르름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 석대원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지금은 까마득한 푸르름으로 모든 것을 완성시켜 주는 가을이다. 시주께 한 마디 여쭐 것이 있소만... 석대원은 가만히 눈을 뜬다. 그의 눈 앞에는 심연(深淵)처럼 깊게 가라앉은 광비대사(曠非大師)의 두 눈이 머물러 있다. * * * 초이강(焦耳江) 노을 위에서 비각(秘閣)의 팔비영 진금영(陳錦英)이 이끄는 공문도 (空門徒)들과 한바탕 악전고투를 벌린 석대원 일행은, 동지로서 함께 싸운 적오(跡悟) 와 적송(跡悚), 그리고 그들의 사문 존장(尊長)인 두 명의 노승과 동행하게 되었다. 이들이 동행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석대원 일행의 목적지인 화산은 소림사가 위치한 숭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팔월 초사흘. 중추절까지 화산에 도착해야 하는 석대원은, 처음에는 일행이 늘어나는 것이 그리 달 갑지 않았다. 광비대사(曠非大師) 같은 경우는 세수가 아흔셋인 노인이다. 그와 동행하여 먼 길을 간다는 것은, 자칫 기일(期日)을 어그러뜨리는 일이 벌어질 수 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염려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석대원이 알아차린 것은, 함 께 길을 떠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설흔한 살에 산문(山門)을 떠나 한 갑자 가까이 천지를 떠돌았던 광비대사이다. 그 엄청난 유랑 경력은 나이를 초월하고도 남았으니, 일행에게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 고 예정된 행보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말씀하시지요. 석대원은 살짝 고개를 숙인다. 지난 열흘 간 노납이 계속 고민했던 점인데... 묻지 않으려 했지만 늙은이의 호기심이란 어쩔 수 없군요. 석대원은 노승이 무엇을 물으려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괘념치 마시고, 하문(下問)하시지요. 음... 고맙소이다. 시주께서 일전에 시전하신 수법은 바로 혈옥수(血玉手)... 맞소이까? 대사님의 높으신 식견, 여부가 있겠습니까. 석대원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대답한다. 역시 그랬구려. 광비대사의 고요한 눈빛이 잠깐 어둡게 가라앉는다. 하면, 시주께서는 혈랑곡주(血狼谷主)의 전인이시오? 그렇습니다. 석대원은 순순히 시인한다. 광비대사는 고개를 무겁게 끄떡이고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늘어진 눈꺼풀이 깊게 깔린 것이 어쩐치 조는 듯한 모습이다. 석대원은 고고한 노승의 희극적인 명상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 그러다가 그의 눈빛이 잠시 서늘해진다. 혈랑곡주라는 이름 넉 자가 지닌 무게가, 그가 산 속에서 십일 년 간 생각해왔던 것보 다 훨씬 더 무겁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소주! 밥이 다 됐소이다! 내려와서 드시지요! 십일 년 간 석대원을 봉양하는 것에 이력이 난 한로의 목소리가 계곡 아래쪽에서 들려 온다. 대사님, 내려가시지요. 석대원은 걸터앉은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엉덩이를 툭툭 턴다. 광비대사는 천천히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킨다. 여기는 푸른 하늘과 계곡, 그리고 칠 척이 넘는 바위 같은 거한과 오 척이 간신히 넘 는 구부정한 노승이 어울어진 가을의 한 모퉁이다. (2) 꽈르릉... 꽈릉... 미친 듯한 물살이 흐르는 계곡. 바위에 부딪혀 솟구치는 포말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해 준다. 물소리가 어찌나 세찬지, 계곡 가에 둘러 앉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지 경이다. 마치 세상의 시시비비(是是非非)에 환멸을 느낀 계류(溪流)가 천지 사방을 자신의 위 세 속으로 단숨에 가두려 마음먹은 듯하다. 물살이 대단하군요! 모용풍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의 목소리는 물살에 휩쓸려 저만치 계곡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 것 이다. 모용 선생, 저 위를 보시지요. 광비대사가 앙상한 손을 들어 멀리 계곡 위쪽을 가리킨다. 노승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오랜 세월 수련한 선법(禪法) 때문인지, 물소리를 은근 히 이기며 사람들의 귓전에 울린다. 계곡의 모양이 마치 꿈틀거리는 용과도 같지 않습니까? 모용풍은 눈을 크게 뜨고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노승의 말처럼, 바위와 물살이 어울어진 계곡의 상류 형상은, 물살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치는 창룡(蒼龍)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용등협(龍登峽)이라고 하지요. 노승의 부연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떡거린다. 여기서 화산까지는 얼마나 됩니까? 석대원은 구운 토끼의 엉덩이살을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우적거리다가, 누구에게랄까 불쑥 묻는다. 토끼는 한로가 비지땀을 흘리며 그를 위해 잡아온 두 마리 중의 하나였지만, 십일 년 간 봉양받는데 이력이 난 그는 별로 고마워하는 기색도 없는 듯하다. 이 계곡물은 동쪽으로 백여 리를 흘러 위수(渭水)와 합쳐진다오. 계곡만 나서면 화산은 천리길이지요. 주유천하(周遊天下) 한 갑자인 광비대사의 설명이다. 그렇군요. 밥 한 솥과 토끼 한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운 석대원은, 손가락에 뭍은 검댕을 옷자락 에 슥슥 닦는다. 그의 눈 앞에는 또 한 마리의 토끼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놓여 있다. 그는 문득 생각난 듯, 대사님들께서도 조금 드시겠습니까? 라며, 적오와 적송에게 권한다. 두 승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젓는다. 아미타불, 부처를 섬기는 자가 어찌 육식을 하겠소이까? 아... 그렇습니까? 석대원은 유감이라는 듯 이마를 찌푸리더니, 이제는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듯 토끼 한 마리를 위장으로 집어넣기 시작한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토끼는 뼈다귀라고 부를 수 있는 몇 개의 석회질 토 막으로 변해 버렸고, 사람들은 눈을 껌뻑거리며 석대원의 늠름한 식욕을 감상할 수 있 었다. 열흘 남짓 동행하며 여러 차례 느껴온 일이지만, 석대원은 거대한 체구는 이유없이 만 들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소림승들에게는 육식이 허용된 것으로... 식성도 전염되는지, 석대원의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시던 모용풍의 말이다. 광비대사의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허용이라니오? 공을 세운 소림승에게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특별히 그러한 은전(恩典)을 내렸다고... 아! 그 일 말씀이로군. 허허, 허헛! 광비대사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나무껍질 같은 주름살을 흔들며 웃고 있다. 모용풍은 머쓱해져서 안색을 붉힌다. 그러한 기색을 눈치챈 적오가 모용풍에게 말한다. 부도(浮屠)들이 육식을 꺼리는 것이, 먹고 싶은 것을 누가 금하여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닐진대, 어찌 황제가 이러쿵저러쿵 하겠습니까? 모두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이지요. 아닐세, 그게 아니야! 갑자기 광비대사가 손을 저으며 적오의 이야기를 부정한다. 모용 선생께서는 노납이 갑자기 웃어서 기분이 상하신 것 같은데, 죽을 때를 넘긴 늙 은이가 그만 주착없이 망령을 부렸구려. 용서하시길... 원, 대사께서는 별 말씀을! 배분을 따지기도 어려운 까마득한 선배의 감당하기 어려운 사과에, 모용풍은 황급히 읍(揖)으로써 답례한다. 노납이 웃은 것은 모용 선생의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옛일이 생각나서입니다. 한 번 들어보시겠소? 불감청(不敢請)일지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남들이 모르는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귀가 번쩍 뜨이는 모용풍이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떡이며 광비대사의 입을 바라본다. 문득 광비대사는 적송에게 말한다. 네 스승도 등장하는 이야기이니 너도 잘 들어라. 예? 적송은 잠시 어리중절해진다. 자신의 스승이라면 광비의 사질이 되는 전대의 불문기인(佛門奇人) 범도(凡途)를 가리 킨다. 이세민이 소림에 허주허육(許酒許肉) 의 은전을 내린 것은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만은 아니지요. 모두 아시다시피 열세 명의 나한이 적당(賊黨)의 창검 아래에서 이세민의 생명을 구해 주었을 때, 이세민은 그들의 무위에 감탄한 나머지 휘하의 무장(武將)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수좌 나한(首座羅漢)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한들은 출가한 몸으로서 세사(世事)에 지나 치게 깊게 관여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고 하며 청을 거절했지만, 세 명의 젊은 나한 들은 혈기와 호승심을 이기지 못하고 청을 수락하기에 이르렀지요. 탁발승으로 굶주리지 않기 위해서는 만담가(漫談家) 못지 않은 입담이 있어야 한다. 광비대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화롯가 옛이야기처럼 정겹기 그지 없다. 사람들은 노곤한 식곤증도 잊은 채 노승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도탄에 빠진 중생들을 구원하는 것이야 부처를 본받으려는 불자(佛者)된 도리이겠지 만, 그 뒤 공명을 얻어 영달한 그들 세 나한은 다시는 불당(佛堂)으로 돌아오지 않았 으니... 아미타불! 결국 소림에서 가르친 부처의 도리 따위는 말짱 헛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잠시 우울한 심정이 된 듯 광비대사는 칠염주를 두어 번 굴리더니 공손히 경청하고 있던 적오를 바라본다. 자네가 지금 나한당(羅漢堂)의 주인이라지? 예. 그렇습니다. 소림삼십육방(少林三十六房)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나한당... 무승(武僧)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며 십팔나한을 배출하는 수련장이기도 하다. 적오는 당금 방장의 사제로서 나한당 당주직을 맡고 있는 것이다. 나한들의 무공이야 지금도 제법이지만, 당나라 때에도 꽤 쓸만했을 걸세. 안 그런가?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긴, 이 사람아. 광비대사는 항렬로 손주뻘 되는 적오를 한 차례 격려한 뒤 다시 이야기를 잇는다. 이세민 휘하에서 세 나한들이 세운 공적은, 정사(正史)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대단 했던 것으로 전해지지요. 그런데 어느날 장수들을 격려하는 잔치가 열렸는데, 세 나한 중 한 명이 불쑥 말했다 고 합니다. 승려 신분이라 저희들만 주육(酒肉)을 즐기지 못하니 잔치라고 해봤자 아무런 재미도 없다고... 아마 이때까지만해도 그들은 승려의 신분을 잊지 않고 그 계율을 스스로 지키고 있었 나 봅니다. 하지만... 허허! 아까 적오가 한 말처럼 웃기는 일이지요. 누가 주육을 먹으라고 해서 먹고, 먹지 말라고 해서 먹지 않는다면, 그게 어찌 불자라 하겠소? 그리고 임금이 불도(佛道)를 간섭할 수 있다면, 석가께서도, 그리고 선조(禪祖 : 달 마)께서도 무슨 까닭으로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출가하셨겠소? 광비대사는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에게 먹혀들 여유라도 주려는 듯, 잠시 여운을 둔 뒤 에 이야기를 계속 잇는다. 어쨌거나 이세민이라면 당대의 호걸로 유명한 사람! 과연 그답게 즉석에서, 오늘부터는 소림승들은 술과 고기를 먹어도 된다 라고 선포하 고, 그것을 비문에 새겨 소실봉(少室峰) 어귀에 세우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태종 황제가 세운 찬무비(讚武碑)에도 그 구절이 새겨져 있었습니까? 적오의 물음에 광비대사는 고개를 끄떡거린다. 암! 찬무비야 수백 년 풍상으로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그 탁본(拓本)은 지금도 장경각(藏 經閣) 한 구석에 보전되어 있지. 단지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줄 때에는 주육에 관한 구절은 쏙 빼놓고, 무예가 어떻니 나 한이 어떻니 하는 헛소리만 보여 준단 말이야. 원, 고리타분하기는...! 그래서 사람들이 중이란 족속들을 재미없게 여기는 것이지. 백 년 가까이 산 노승의 구수하고도 소탈함이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는다. 사숙조님, 그런데 소손(小孫)의 스승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은...? 적송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광비대사는 잊고 있었다는 듯 무릎을 가볍게 친 뒤 대답한 다. 아이야! 그 때 이세민에게 술과 고기를 먹게 해 달라고 요구한 나한의 법명이 바로 범도(凡 道 : 道는 途와 발음이 비슷하다)란다. ...! 네 스승은 광문(曠聞) 사형의 제자였지. 나중에야 조금 명성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스승이 젊은 시절에는 얼마나 말썽 꾸러기였는지 모를 것이다. 예? 술도 좋아하고, 고기도 좋아하고... 오죽했으면 광문 사형께서 숭산 아래의 객점마다 통문(通文)을 돌려, 절대로 범도에게 만은 술을 팔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기까지 했을까. 허허, 범도 녀석! 그래도 중이랍시고 여색만은 밝히지 않았으니, 그거 하나는 신통한 일이었지. 적송의 해사한 얼굴이 노랗게 변한다. 부처 중의 부처라고 여겼던 스승의 우상(偶像)이 깨지는 순간이다. 광비대사는 그러한 적송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고는, 사부에 대한 그의 공경심에 최후 의 비수를 꽂는다. 어느 날인가 경내에서 몰래 술을 먹다가 나한테 들킨 일이 있었다네. 이 놈은 간도 크게 장경각(藏經閣) 서가 뒤에 작은 술독을 감춰두고 제가 번을 서는 날이 올 때마다 그 뒤에서 조금씩 홀짝거렸던 것이었어. 나는 그때 그 사실을 사형에게 고하고 놈을 파문시킬까도 생각했었지. 그런데 이 놈이 별로 잘못했다는 기색도 없이, 사숙, 당대(唐代)에 대범도(大凡道) 나 한께서 대호주대호육(大好酒大好肉)으로서 소림의 이름을 떨쳤는데, 금대(今代) 소범 도(小凡途)가 소호주소호육(小好酒小好肉)한들 무엇이 큰 문제이겠습니까 라고 하지 않는가! 이야기가 이 대목에 이르자, 적오는 평소의 근엄함도 잊은 채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키득거리고 만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던 범도 사백에게도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광비는 그러한 적오를 바라보고 픽 웃는다. 과거 범도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그만 웃고 말았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놈이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더란 말이야. 하늘 같은 사숙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호기(豪氣)는 둘째로 치더라도, 먼지투 성이 서가에서 뭍혀 있던 하찮은 탁본마저도 꼼꼼히, 그리고 제대로 읽고 있었던 것이 야. 당시 경 읽기 싫어하던 범(凡) 자 아이들을 생각하면, 놈은 비록 불자로서 금하는 술, 고기를 즐겼지만, 행자(行者)로서의 본분은 잊지 않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 문이지. 허허, 그래서 내가 그냥 눈 감아 줬어! 이야기를 마친 광비대사는 다시금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인지 한 차례 크게 웃는다. 그러기를 얼마나였을까. 좌중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을 느낀 광비대사는, 문득 석대원을 바라본다. (3) 내 실례인 줄은 알지만, 석 시주께 어려운 청을 하나 드리리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매우 조심스러운 말투이다. 석대원은 조용히 광비대사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노납이 잠시 시주의 맥을 살펴보아도 되겠소? 바위 그늘에서 모처럼의 한가로움을 즐기던 한로의 얼굴이 가볍게 굳는다. 석대원은 광비대사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깊고도 깊은 눈이다. 그렇시지요. 석대원은 선선히 좌측 팔을 내민다. 고맙소이다. 광비대사는 앙상한 두 손을 내밀어 나무 밑둥같이 굵직한 석대원의 팔목의 혈도를 더 듬는다. 노승의 눈이 지긋이 감겨진다. 기(氣)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부정형(不定形)의 생명의 근원은, 경락(經絡) 중 십이 정맥(十二正脈 : 十二經)을 순환하며 인체의 구석구석까지 그 무한한 조화력(造化力) 을 공급해 준다. 이러한 기는, 내가(內家)를 수련하지 않은 범인(凡人)의 경우, 일주야에 50회 정도 작은 우주라는 인체를 순환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석대원과 같은 내가고수의 경우에는 기의 순환 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길고도 부드러운 기로다... 석대원의 진기를 조용히 음미하던 광비대사의 얼굴이 평온하게 가라앉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지하 동굴에 들어온 듯한 기분... 하지만 그 막막한 동굴은 탐험자에게 어떠한 불안감이나 공포도 주지 않는다. 봄날의 훈풍과도 같은 따사로움이 석대원의 맥문을 통해 전달되어져 온다. 노승의 늙으수레한 입가에 붓다의 그것과 같은 미소가 맺힌다. 그리고, 허어, 천하에 이러한 내공이...! 광비대사의 입에서 절로 나오는 탄성... 매끄러운 옥탁(玉卓) 위에 떨어진 두 개의 물방울이 있다고 하자. 물방울끼리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부착력이 있어 이러한 부착력이 탁자와의 접착력을 이길 때, 작은 물방울이 탁자의 표면을 미끌어져 큰 물방울에 합쳐지게 된다. 두 개의 서로 다른, 하지만 적대하지 않는 내공이 어울어질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 이 발생한다. 광비대사는 애당초 석대원의 진기를 자신의 진기로써 인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석대원의 몸 속을 흐르는 진기는 칠십여 년을 수련한 자신의 역근공부(易筋功 夫)로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량(無量)한 것이다. 개천이 강을 만난 듯, 강이 바다를 만난 듯, 광비대사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석대원 의 길고도 깊은 진기에 실린 채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기가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에서 수소양삼초경(手小陽三焦經)으로 넘 어갈 때, 광비대사는 드디어 그것 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노승의 듬성한 흰 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두텁고도 부드러운 내공의 동굴 속에서 동면(冬眠)의 또아리를 튼 독사와도 같은 한 줄기 사이로운 기운... 광비대사는 시험 삼아 약간 내력을 돋워 그 기운을 자극해 본다. 석대원은 순간적으로 체내의 진기가 급박하게 요동하는 것을 느낀다. 찰나를 두고 그의 전신을 관통하는 차가운 기운은, 색깔로 말하자면 핏물과도 같은 붉 은색... 이것은 노승이 보낸 진기가 아니다. 노승의 진기에 반발하여 튀어나온 본신마기(本身魔氣)인 것이다. 아미타불... 한편 광비대사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불호가 흘러 나온다. 손가락을 통해 되돌아오는 석대원의 반탄력은 지금까지 자신의 진기와 조화롭게 어울 어지던 그런 온후(溫厚)한 기운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더 이상 탐험을 이어가지 못하 고 자신의 진기를 서서히 회수한다. 불씨로다... 재앙의 불씨로다. 아미타불! 석대원의 몸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사기는 단단한 통나무집 안에 떨어진 한 점 불씨와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제풀에 스러져 꺼져 버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나무벽에 옮겨 붙어 집을 태우 고, 숲을 태우고, 세상을 태워버릴지도 모른다. 광비대사는 천천히 손을 거둔다.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온다. 대단한 일이구려... 시주 같은 나이에 이같이 지고한 수련이라니, 노납은 직접 확인하고도 믿어지지 않소 이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석대원은 겉어부친 소매를 내리며 답례한다. 이 순간 놀라움을 느끼기는 석대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광비대사의 뼈만 남은 손가락을 통해 스며들었던 진기는, 세상 어느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간난아이의 기운처럼 부드럽고 깨끗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높은 산 새벽 이슬을 받아마신 듯, 온유로운 느낌이 온 몸을 적셨던 것을 새삼 느끼니, 석대원은 노승의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일평생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납에게 한 가지 걱정이 있군요. 늙은이의 기우였으면 좋으련만... 신승께서 가르침을 내리신다면 소생에게는 더없는 광연(廣緣)이지요. 세이경청(洗耳敬聽) 하겠습니다. 석대원은 읍하며 가르침을 바란다. 강호의 배분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그였지만, 노승의 티없이 깨끗한 내력에 감복했기 때문인지, 그의 자세는 정중하기 짝이 없다. 광비대사는 가벼운 손짓으로 석대원의 예의를 만류한 후, 천천히 말문을 연다. 시주께서는 혈랑곡주의 성명절학인 혈랑검법과 혈옥수의 내력을 아시오? 석대원은 잠시 침묵한다. 내력...? 소생, 비록 팔다리를 놀려 초식은 비루하게 전개할 수는 있지만, 어리석게도 그 내력 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신승께서는 소생의 이러한 우매함을 깨우쳐 주시길 바랍니다. 광비대사는 고개를 끄떡인 뒤 석대원에게 묻는다. 시주께서는 좌천량이라는 이름을 아시는지? 좌...천량? 그렇소이다. 두 가지 무학 중 혈랑검법은 남송의 대검객(大劍客)인 망국치사(亡國恥士) 좌천량(佐 川亮)이 만들어낸 무학이라오. ...? 지낭(智囊)으로 유명하신 모용 선생께서는 그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모용풍은 고개를 끄쩍인다. <혈랑살청랑(血狼殺靑狼)>이라는 노래의 주인공, 천하제일검 좌천량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바로 그 좌천량, 좌공(佐公)이지요. 광비대사는 빙그레 웃는다. 그는 배반과 비겁이 난무했던 당시, 보기 드문 진정한 우국지사(憂國志士)였지요. 본디 강호의 이름난 검객이었으나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천군(天軍) 휘하의 무장으로 투신했던 그는, 쿠빌라이(註 : 원 세조)에게 송이 멸망당하자 망국의 혈루(血淚)를 뿌 리며 횡산(橫山)으로 은거했다고 전해집니다. 좌천량의 자는 인지(仁之), 호는 충산인(忠山人) 또는 망국치사이다. 좌씨활검(佐氏活劍)의 달인으로 강호에 무명을 떨치던 그는, 몽케 사망 이후 어지럽 던 부족을 정비하고 새롭게 대한(大汗)에 오른 쿠빌라이가 남침하자 당대 제일의 무관 인 장세걸(張世傑)의 막장(幕將)으로 투신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설흔여섯... 양양과 양자강 부근의 전투에서 그가 보여준 무위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으니, 그의 검 아래 죽은 천부장의 수만 해도 셋, 백부장과 십부장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놀라운 무위로도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의 부대가 광동(廣東) 부근에서 몽고병 이만 대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그는 임안 부(臨安府)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도가 떨어지고 황제를 적의 손에 빼앗긴 후에도 그들은 단념하지 않았다. 장세걸은 문신 육수부(陸秀夫)와 함께 단종(端宗)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여 남송의 명맥을 유지하려 노력하였고, 단종이 죽은 뒤에는 위왕(衛王)을 다시 옹립, 광동의 끝 인 애산도(崖山島)에서 필사적인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은 끝내 조씨(趙氏)의 송나라를 외면했다. 애산도 역시 회회포(回回砲)라는 대포로 무장한 몽고군에 의해 함락된 것이다. 회회포의 엄청난 파괴력과 노도와 같은 삼만 대군의 습격에는 한 사나이의 손에 쥐어 진 검이란, 수레를 향해 들려진 버마재비의 앞발과 다름이 없었다. 아아! 결국 애산도의 초라한 석성(石城)은 화마 속에서 허물어지고, 만고충신 육수부는 위왕 을 등에 엎은 채 바다로 뛰어들어 스스로 생명을 끊었으며, 부하들의 손에 의해 강제 로 배에 실린 채 인도로 달아나던 장세걸은 풍랑 속에서 한 많은 일평생을 마감하였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석대원은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충신과 열사의 가없는 열혈지심(熱血之心)이 백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스물다섯 살 젊은 가슴을 여지없이 뒤흔들고 만 것이다. 좌공이 장세걸 장군의 휘하였다는 얘기는 알고 있습니다. 모용풍은 순풍이천조안(順風耳千照眼)이라는 별호답게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다. 더욱이 비록 지금은 쇠락했지만, 대대로 머리 좋기로 소문난 천부모용가(天賦慕容家) 의 가주 아닌가. 광비대사는 모용풍을 바라보며 아는 얘기를 늘어 놓아 미안하다는 듯 빙긋 웃고는, 이 야기를 이어간다. 좌공은 애산도의 전투에서 목숨을 건진 몇 안 되는 송군 중 하나였지요. 하기야 그 정도의 무인이라면 제 한 목숨은 어느 상황에서라도 건질 수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그 뒤 나라와 함께 생명을 버릴 기회를 놓쳤음을 슬퍼하며 산중으로 은 거했소이다. 호를 망국치사로 바꾼 것도 아마 이 때의 일이겠지요. 하지만 좌천량은 자호(自號)한 망국치사처럼 그 치욕스러운 생명을 덧없이 이어간 것 은 아니었다. 십 년 동안 횡산의 절곡에 틀어박혀 망국의 한을 씹던 그는, 어느날 홀연히 대도(大 都)의 저잣거리에 몸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날 밤 황궁에는 한 명의 자객이 침입하였다. 자객? 좌공이 말입니까? 석대원의 물음이다. 그렇지요. 이 일은 <원사(元史)>에도 기록되어 있소이다. 하지만 <원사>에는 백여 명의 녹림도(綠林道)들이 야음을 틈타 황궁을 기습했다고 말 하고 있지요. 그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눈에 그날 벌어진 일이 한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 로 여겨졌기 때문이지요. 그 밤에 살해된 사람의 수는 무려 이백여 명... 황궁을 수비하던 무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중에는 쿠빌라이가 아끼던 셋째 황자(皇 子)와 일곱째 황자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누가 감히 한 사람이 한 일이라고 짐작이나 하겠소? 그도 그렇겠지... 석대원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 일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좌공 혼자서 한 일이었소이다. 그때 좌공의 손에 들린 검이 바로... 광비대사는 말을 맺지 않고 석대원의 등에 걸린 보검을 바라본다. 희대의 이기(異器)인 혈랑검이다. 아마도 좌공이 십 년 간 횡산에서 수련한 것이 자로 혈랑검법이었을 것이오. 광명정대한 활검(活劍)으로 이름 높던 좌씨검법이 어떤 경로로 잔혹무비한... 아... 석 시주, 미안하외다. 괘념치 마십시오. 혈랑검법이 살기가 짙다는 사실은 소생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늙은이가 한결 마음이 편해 지는군요. 음... 노납이 생각하는 바로는 좌공이 횡산에 은거한 뒤 우연한 기회에 살기가 짙은 마공(魔 功) 수법을 얻어, 그것들을 자신의 높은 검리(劍理)와 종합한 것이 바로 혈랑겁법인 듯하외다. 석대원은 잠시 생각한 뒤, 광비대사에게 묻는다. 어쨌거나 혈랑검법이라는 이름이 강호에도 알려진 것을 보니, 그 후 좌공이 다시 강 호 활동을 했나 보군요. 광비대사는 나직히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다. 만일 그가 강호 활동을 했다면, 어찌 그의 이름이 혈랑검법에 앞서 전해져 내려오지 않겠소이까? 맞는 말이다. 광비대사의 말처럼 좌천량이 강호 활동을 했다면, 혈랑곡주의 혈랑검법 이전에 좌천량 의 혈랑검법 이라고 전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좌공의 지음(知音) 한 분이 있어, 거사(擧事)에 관한 결심을 좌공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출가인으로서 페사와 약간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노납이 이렇게 석 시주께 아는 체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렴! 천하제일검 좌천량이 다시 강호 활동을 했다면, 그의 이름이 중양진인(重陽眞人) 왕철 (王喆)이나 구지신개 홍공(洪公)에 미치지 못할 이유가 없지! 모용풍이 광비대사의 말에 맞장구친다. 광비대사는 고개를 끄떡인 뒤 다시 이야기를 잇는다. 이렇게 좌공의 쿠빌라이 암살은 실패로 끝났으니, 많은 이들이 그 일을 안타까워 했 지요. 이 일이 성공했으면 아마 중원의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역사라는 마차는 한 사람의 힘으로 방향을 돌리기에는 그 바퀴가 너무도 무겁겠지요. 광비대사는 석대원의 비유를 잠시 음미해본 뒤 다시 입을 연다. 이때 성공 직전까지 이른 좌공의 대사를 방해한 사람은 나이가 삼십도 채 되지 않은 서장승이었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놈의 팔사파(八思巴 : 巴思八이라고도 함)... 신음 같은 모용풍의 말에, 광비대사는 의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본다. 과연 모용 선생답구려. 그 서장승은 바로 대보법왕(大寶法王) 팔사파이지요. 그와 그를 추종하는 밀종(密宗)의 팔부중(八部衆)이 때마침 황궁에 머물고 있었음은, 아마도 하늘이 쿠빌라이의 생명을 거두려 하지 않았던 탓일 게요. 팔사파라면 석대원도 물론 알고 있는 유명인이다. 토파(土波)의 어떤 여인이 우물 위에 떠 있는 흰 헝겁을 배에 두른 뒤 태어났다는 팔 사파는, 어린 시절부터 신통력이 범상치 않아 쿠빌라이로부터 스승의 대접을 받은 서 장의 기승(奇僧)이다. 그리고 팔부중은, 모용풍이 저술한 <비세록>에 의하면, 서장 밀종을 대표하는 여덟 개 의 큰 기둥으로서 아직까지도 그 자리가 계승되는 고승들이다. 광비대사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결국 좌공은 큰 상처를 입고 몸을 피하였지요. 좌공의 지음이라 했던 그 분께서도 그 뒤로는 좌공을 뵙지 못했다고 하니, 아마도 어 느 심산(深山)에서인가 덧없는 부토(腐土)로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잠시 말을 멈춘 광비대사는 한동안 묵묵히 석대원을 바라본다. 좌공의 혈랑검법은 살기가 너무 강하여 상대는 물론 시전자까지 상하게 한다는 말이 있소이다. 그 검법을 사십여 년 전의 기인(奇人)인 혈랑곡주가 어떻게 수련했는지 궁금한 일이외 다.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이는 광비대사의 말 속에는 석대원이 혈랑검법을 수련하게 된 내력에 대한 호기심이 담겨 있다. 하지만 석대원은 담담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 * * 콰릉... 용등협의 장한 물줄기는 계곡 전체를 부술 듯 으르렁거리며 하오(下午)의 따듯한 양 광(陽光)을 난자하고 있다. 메아리조차 잡아먹는 사나운 공간의 한켠에서, 광비대사는 석대원을 한참 동안 바라보 다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젓는다. 화강암같이 단단한 자세로 앉아 있는 칠 척 거구의 청년 석대원... 그가 굳이 말하지 않겠다면, 천하의 누구도 그의 입에서 사문(師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광비대사는 천천히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흉측하게 그을린 망아(妄我)의 못생긴 얼굴이 있다. 망아, 목이 마르군. 물을 한 잔 가져다 주겠나? 광비대사는 옆에 끌러놓은 걸망(註 : 망태기 모양의 걸머지고 다니는 바랑)에서 바리 때 하나를 꺼낸다. 한 되 남짓한 나무로 만든 그릇... 망아는 무릎을 꿇고 바리때를 공손히 받은 뒤, 계류(溪流) 중 잔잔한 곳으로 가서 조 심스러운 동작으로 웃물을 떠가지고 온다. 여기 있습니다, 사부님. 망아는 무릎을 다시 꿇고 머리를 어깨 아래로 숙인 채 바리때를 받들어 올린다. 광비대사는 그릇을 받아 물을 절반쯤 마신 뒤 망아에게 물린다. 자네도 목이 마르겠지? 이걸 마시게. 감사합니다. 망아는 무릎을 꿇은 채로 그릇을 받아 남아 있는 물을 마신다. 한 쌍의 사제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은, 단순한 음수(飮水)의 차원을 넘어 종교적인 의 식과 같은 경건함을 보여준다. 이윽고 광비대사는 석대원을 다시 바라본다. 혈랑검법은 비록 살기가 강하지만 우국지사의 의기(義氣)가 담겨 있으니, 후인(後人) 들이 함부로 평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혈옥수는 그렇지 않소이다. 유유한 노승의 목소리 중에서 유독 혈옥수 라는 세 자만이 딱딱 끊어져 토막난 채로 튀어 나온다. 석대원은 자세를 허물지 않고 노승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혈옥수는 현존하는 무학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 중 하나일 게요. 육합권(六合拳)이나 양창술(楊槍術), 연청권(燕靑拳) 같은 것이 제법 오래된 축에 속 하지만, 혈옥수와는 여러 갑자(甲子)의 차이가 있겠지요. 육합권은 후당(後唐), 그리고 양창술과 연청권은 북송(北宋) 시대의 무학이다. 듣고 있던 모용풍이 끼어든다. 정말로 그렇게 오래되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혈옥수는 혈랑곡주가 창안한 것으로... 광비대사는 고개를 끄떡인다. 혈랑곡주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겠지요. 석 시주, 한 가지만 여쭈어 봅시다. 그러시지요. 시주께서는 혹시 붉게 칠한 열 장의 잎사귀에 새겨진 요결을 보고 혈옥수를 연성하시 지 않으셨소? 석대원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그는 잠시 한로를 바라본 뒤 고개를 끄떡인다. 그렇습니다. 종려나무의 잎사귀 같더군요. 종려가 아니고 패다라(貝多羅 : pattra)였을 게요. 딱딱하기가 종려 잎사귀와 다름이 없지요. 고대 천축에서 불경을 새길 때 목재 대신에 사용했던 잎사귀라오. 천축? 그러면 혈옥수가 그 곳에서 유래되었단 말씀입니까? 그것은 노납도 알 수 없지요. 하지만 그 위에 새겨진 요결이 범어(梵語)가 아닌 것을 보면, 비록 아득한 옛날에 쓰 여진 것은 분명하지만 천축에서 유래된 것은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소이다. 석대원은 왼 주먹으로 자신의 볼을 툭툭 친다. 혈랑검법에 관한 내력이야, 나이가 벼슬이라고 남들보다 오래 산 덕분에 알 수 있다 고 치자. 하지만 혈옥수를 직접 연성하지 않았다면, 저 노승은 도대체 어떻게 그 비급에 관해 저리도 소상히 알고 있단 말인가! 광비대사는 이러한 석대원의 곤혹을 눈치챈 듯 빙그레 웃는다. 시주께서는 노납이 어찌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까 이상하게 여기시겠지.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오. 하나 혈옥수가 폐사와 무관하지 않다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오. 시주께선 혹시 발타(跋陀)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발...타? 석대원은 나직히 뇌까려 본다. 이름으로 미루어 중원인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광비대사는 혼자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민망한지, 묻는 듯한 얼굴로 모용풍을 바라본 다. 석 공자, 발타 선승(禪僧)은 소림사라는 편액을 처음으로 내건 분이라오. 아마도...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의 스승이었지요? 모용풍의 설명에 광비대사를 포함한 모든 소림승들이 고개를 끄떡인다. 역시 아시고 계시는구려. 많은 사람들은 소림사의 시조를 1대 선조(禪祖)이신 달마대사로 알고 있지요. 아마 석 시주께서도 그러실 것으로 아오만... 예. 소생도 그리 알고 있습니다. 석대원의 대답에 광비대사는 다시 모용풍을 바라본다. 모용풍은 하나뿐인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흠, 하는 잔기침을 내뱉은 뒤 이야기를 늘 어놓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달마대사는 소림사의 손님과도 마찬가지! 강호의 사람들이 너나 없이 소림사와 달마대사를 연관시키려는 까닭은, 아마도 역근경 (易筋經)의 진기도인(眞氣導引)의 공부가 달마대사로부터 연유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어디 보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팔구백 년 전인가? 남천축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불법을 배웠다 는 달마는, 양(梁) 무제(武帝) 때 중원으로 들어와 하남(河南)의 소림사에서 구년면벽 (九年面壁)의 수도로 선(禪)을 깨달았고, 그 깨우침을 혜가(慧可)에게 물려, 중국 선 종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 이후 그가 남긴 역근경은 소림 무학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으니, 세인들이 달마를 소림사 개파조사(開派祖師)로 알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달마가 소림에 몸을 의탁한 시기는 서기 520년 경이니, 발타가 처음으로 소 림사라는 사찰을 창건한 것과는 20~30년 정도의 시차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달마는 소림사의 승적(僧籍)에 기록되지 오르지 않은 식객에 불과 했으니, 그를 개파조사로 여기는 세인들의 인식은 사실과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모용풍의 설명은 정확하고도 논리적이다. 원, 모용 선생께서는 소림의 내력에 대해 소림사 중들보다도 더 많이 알고 계시는구 려. 과찬의 말씀... 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희대의 식자(識者) 모용풍은 광비대사의 칭찬을 듣고 으쓱거 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석대원은 노인들의 수작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광비대사에게 묻는다. 헌데 혈옥수가 소림과 연관이 있다는 말씀은... 이것은 모용풍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광비대사는 예의 느릿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한다. 혈옥수는 발타 사조와 인연... 으음, 그리 좋은 인연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인연이 있는 무공이라오. 폐사에는 역대 방장(方丈)들이 기록한 일지들이 전해져 오는데, 노납의 전전배(前前 輩) 한 분께서 그 중 우화(寓話)로 쓰일 만한 이야기를 간추려 모으셨지요. 책 이름은 <훈도제선(訓徒弟選)>이라고 합니다. 적오와 적송도 소시 적엔 이 책을 읽었겠지? 그렇습니다, 사숙조. 적오, 적송은 약간 어리둥절해 하며 대답한다. <훈도제선>은 그들이 소사미 시절, 꽤나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었다. 하지만 내용의 대부분이 옛 고승(高僧)들이 귀신을 어떻게 쫓고, 마귀를 어떻게 물리 쳤다 는 식이어서, 아이들이 읽기에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이미 깨달음이라는 무한한 목표를 향한 수행의 길에 나선 선자(禪者)들에게는 잡서(雜書)와 다름 없는 책인 것이 다. 거기에 적힌 발타 사조와 혈귀(血鬼)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느냐? 적오와 적송은 이마에 내 천(川)자를 그리며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보다 젊은 적송이 먼저 기억해 낸다. 예, 기억나는군요, 사숙조. 무슨 봉우리에서인가 사조께서 핏빛 마귀를 제압하여 무간나락(無間奈落)으로 떨어뜨 리셨다는... 그래, 그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피빛 마귀의 이야기는 그 후에 다시 나오지. 음... 아마 발타 사조 이후 서너 갑자 뒤의 일일 것이다. 10대 방장이신 공여대사(空余大師)께서도 그 핏빛 마귀를 나락으로 쫓아내셨다는 이 야기 말이다. 예... 그 이야기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석대원은 소림사 조손(祖孫)들이 난데없이 불경 - 그가 <훈도제선>을 불경으로 착각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 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의혹 어린 눈으로 광비대사를 바라 본다. 광비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고요한 시선을 석대원에게 준다. 어느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오른 석대원은 깜짝 놀란다. 그렇다면 그 핏빛 마귀가...? 아미타불...! 광비대사는 조금은 무거운 목소리로 불호를 왼다. 발타 사조께서 개운봉(開雲峰)에서 제압하셨다는 혈귀에 관한 것은 정확한 기록이 없 소이다. 하지만 공여 방장께서 가까스로 제압하신 혈귀는 우화에서나 나오는 귀신 마귀가 아닌, 장동복(張東福)이라는 이름의 실존했던 사람이지요. 석 시주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 장동복이 익힌 무공, 이십여 명이 넘는 소림의 무승 (武僧)들의 희생을 부른 무공이 바로 혈옥수입니다. 장동복... 장동복이라... 모용풍은 장동복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은지, 혼잣말로 그 이름을 여러 번 뇌까린다. 광비대사는 그러한 모용풍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간다. 장동복은 당시 유명한 협객이었지요. 무공도 강하고 성품도 올곧은 탓에 강호에서 큰 명망이 있었고, 폐사의 공여 방장과도 막역한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소이다. 모용풍은 고개를 끄떡인다. 그가 알고 있는 것도 대충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림승들을 향해 미친 듯이 살수를 휘두르던 장동복은, 이미 공여 방장께서 알고 지내던 장동복이 아니었지요. 시뻘건 눈과 시뻘건 손, 그리고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그런 그를 혈귀라고 기록한 것도, 크게 과장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으음... 석대원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는다. 시뻘건 눈, 시뻘건 손, 그리고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솔직히 말씀드리면, 장동복은 소림에 의해 제압당한 것이 아니지요. 실로 악마의 힘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무공으로 포위했던 승려들을 격살하던 그는, 무 슨 까닭인지 전신을 비틀며 발작을 일으킨 뒤, 칠공(七孔)에서 피를 쏟으며 죽었다고 합니다. 그의 품 속에서 나온 것이 혈옥수의 연성 비결이 적힌 패다라... 노납이 생각하기로는 아마도 감당할 수 없는 마기 탓에 주화입마(走火入魔)를 일으켜 자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말을 마친 광비대사는 석대원을 넌지시 바라본다. 석대원은 시선을 내리깥 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아까 석 시주의 내기(內氣)를 살펴보다가 한 줄기 기이한 사기(邪氣)를 느낄 수 있었 지요.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운은 구십이 넘게 살아온 노납도 처음 대하는 섬찟한 것이었소. 노납이 생각하기에는 바로 혈옥수에서 비롯된 마기로 여겨지는데... 늙은이의 생각이 맞소이까? 석대원은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심안(心眼)은 그의 과거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십일 년 전 혈옥수의 구결이 적힌 패다라를 보았다. 그리고 익히기 시작했다. 혈옥수의 연성은 정상적인 신체를 지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매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더해지는 마기, 그리고 그로 인한 주화입마의 위험... 그것은 석대원에게도 여지없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온화로운 힘으로 주화입마의 문턱에서 헤매는 그를 구 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사부였다. 혈옥수의 연성은 정상적인 의지를 지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혈옥수를 완성할 때까지 석대원의 왼손은 온전한 적이 없었다. 상처 위에 다시 상처가 생기고, 갈라진 살거죽이 다시 갈라졌다. 혈옥수를 연성할 바에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맹수의 발톱 같은 채찍을 석대원의 약해진 의지 위에 퍼부은 사람이 있었 다. 한로였다. 육 년 뒤, 석대원은 마학(魔學) 혈옥수를 완성하였다. 그와 동시에 몸서리칠 정도로 거대해진 살기를 몸 안에 품게 된 것이다. 석대원은 눈을 들어 광비대사를 바라본다. 세월의 고랑이 깊게 드리운 노승의 자애로운 눈매... 그는 노승의 눈 속에 자리한 깊은 호수를 오래 마주하지 못한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혈옥수의 살기가 지나치다는 것은 소생도 알고 있습니다. 혈옥수를 극성으로 전개하면 소생도 모르는 괴이한 살심이 솟구치는 것을 간혹 느낍니 다. 아미타불... 석대원의 대답에 소림승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끌어올리며 불호를 왼다. 잠시 동안이지만 누구도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다. 꽈르릉... 답답한 정적이 거친 계류 소리에 휩쓸려 지나간다. 그러다가 문득, 모용 선생, 실례되는 부탁인 줄은 알지만 노납이 석 시주에게만 들려 줄 이야기가 있구려.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시겠소? 난데없는 광비대사의 청에 모용풍은 어리둥절해진다. 분명 실례가 되는 부탁이다. 하지만 저 소탈한 노승이 그런 부탁을 하는 것에는 틀림없이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러지요. 마침 다리가 저리던 참이었습니다. 모용풍은 약간 과장된 몸짓으로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적오와 적송 또한 하늘 같은 사숙조의 명령에 거역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한로와 망아는 각각 석대원과 광비대사의 뒷전에 앉은 채 자리를 뜨려 하지 않 는다. 광비대사는 조금 책망하는 눈길로 망아를 바라본다. 망아, 자네도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오게. 망아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시선으로 광비대사와 석대원을 바라본 뒤 천천 히 일어선다. 딱딱한 얼굴로 앉아 있던 한로도 그제서야 일어서서 모용풍을 따라 간다. 이윽고 넓적한 바위 위에는 석대원과 광비대사 둘만 남게 되었다. 지금부터 노납이 하려는 이야기는 폐사의 부끄러운 과거라, 외인이나 적(炙)자 아이 들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구려. 사람들을 물린 것을 석 시주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광비대사의 음성이 조금 은근해진다. 대사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석대원의 말에 광비대사는 미소를 지은 뒤,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석 시주께서는 혹시 범업(凡業)이란 이름을 아시오? 석대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소생은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광비대사는 마치 그 대답의 진위를 가려내기라도 할 듯이 석대원을 바라본다. 하지만 석대원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음... 그렇군요. 그는 노납의 사질뻘 되는 사람입니다. 비록 나이는 노납과 비슷했지만. ... 노납은 그를 직접 본 적은 없지요. 노납이 산문을 떠난 뒤, 마흔이 넘은 나이로 소림에 들어온 사람이었으니. 광비대사는 고개를 돌려 계류를 바라본다. 마치 생각이라도 정리하는 것처럼... 그리고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뗀다. 장동복의 시신에서 나온 혈옥수의 연성 비결이 적힌 패다라는 폐사에 보관되었지요. 그로부터 누백 년 후 장경각이 건축되자, 그것은 여러 악경(惡經), 이술서(異術書)들 과 함께 장경각 내의 비고(秘庫)에 봉인되었다오. 석대원은 묵묵히 경청하고 있다. 50여 년 전의 어느 밤이지요. 송초(宋初)에 건축된 이후 단 한 번도 유실이 없었던 장경각, 그것도 열쇠를 방장이 직접 관리하는 비고가 활짝 열린 것을, 번을 서던 나한이 발견하였습니다. 발칵 뒤집혀졌겠군... 석대원은 조금 놀란다. 강호에 관한 견문이 짧은 그였지만, 소림사의 장경각의 경비가 얼마나 엄중한지는 익 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고에서 사라진 것은 혈옥수의 연성 비결이 적힌 패다라... 그리고 다음날 아침 승려들은 밤새 범업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소이다. 입산한 뒤 단 하루도 하산한 적이 없었던 그가 말이오. 하면 그가 패다라를 가져간 것입니까? 그렇소이다. 그의 방에서 나온 것은 사부인 광지(曠知) - 당시의 방장이었지요 - 사형 앞으로 봉해 진 한 장의 서찰이었지요. 서찰에 무슨 내용이 적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광지 사형께서는 무슨 까닭인지 범업과 혈옥수에 관한 모든 것을 비밀에 부쳤다오. 그리고 스스로 방장직을 손 아래 광문(曠聞) 사형에게 전하셨고,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열반에 드셨지요. 광비대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돌려 석대원을 바라본다. 그 뒤 광문 사형도 열반하시고, 범(凡)자 사질들도 거의 다 서토(西土)로 떠났으니, 범업이라는 두 자는 이제 소림에서 잊혀진 이름이 되었을 게요. 노납 같은 퇴물의 노망난 기억력 구석 자리를 제외한다면... 그런데 오늘날 범업이 가져간 혈옥수를 석 시주께서 익혔으니, 노납이 이리 장황한 유 난을 떤 것이라오. 석대원은 까닭 모를 송구함에 고개를 떨군다. 광비대사의 앙상한 손이 눈에 들어온다. 문득, 자신에게 혈옥수의 구결이 적힌 패다라를 넘겨주던 손이 떠오른다. 노승의 그것처럼 볼품없는 손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준 손이기도 했다. 그 손의 주인은 석대원의 전신(前身)이며, 석대원은 그의 분신인 것이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군요. 죄송합니다. 석대원은 광비대사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광비대사는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노납은 추호도 석 시주를 탓하는 것이 아니오. 일전의 초이강에서도 악인들을 상대하여 여러 인명을 구하는데 힘썼으니, 시주의 마음 속에는 대협지심(大俠之心)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요. 대사님의 말씀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주의 좌수(左手)를 생각하면 노납의 마음이 무거워지니, 아미타불... 좌수... 석대원은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 본다. 강한 손, 한없이 강한 손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十九章 訪問 (1) 천 대장(千隊長)... 활짝 열려진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화암의 투박한 다향(茶香)과 상쾌하게 어울어지 는 나른한 오후. 노인은 탁자 끝자리에 앉은 중년인을 바라본다. 석상처럼 앉아있던 무영비수(無影飛手) 천궁(千穹)은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본다. 강남을 다녀올까 하는데... 천궁의 눈빛이 보일 듯 말 듯 흔들린다. 노인은 지난 몇 년 간 신무전(神武殿)이 있는 산동(山東)을 떠난 적이 없었다. 정(正)이와 현(賢)이가 동행할 걸세. 천궁의 눈빛이 이번에는 조금 크게 흔들린다. 대공자와 삼공자가 동행한다면 무엇인가 중요한 사안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다시 가라앉는다. 사안이야 무엇이든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항주(杭州) 부근일세.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결례가 될지도 모르니 직접 가서 통보하기로 하지. ...! 오래 전부터 노인의 호위를 담당한 천궁은 다시 한 번 놀란다. 노인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거물이다. 노인의 호위를 임무로 하는 무사의 수만 해도 백이십 명. 천궁은 그들의 우두머리이다. 만약 노인이 어디를 방문한다는 일정이 잡히면, 방문에 앞서 무영대(無影隊)가 통보 라는 이름 아래 그 곳을 살피는 것은 오랜 관례였다. 그런데 노인은 지금 그 관례를 깨고자 하는 것이다. 출발은 내일 아침으로 하세. 예. 천궁의 놀라움은 노인에게는 물론 그 자신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록 그림자가 없다[無影] 는 별호를 지니고 있지만, 그는 그림자이다. 그림자에게 있어서 놀라움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이 결정한다면, 그림자는 따를 뿐이다. 그리고 먼 길을 번잡하게 가고 싶지는 않아. 호위는 될 수 있는대로 적은 수로 준비하게나.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노인은 탁자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천궁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지시가 끝난 것이다. (2) 석가장(石家莊)의 문지기 화 노인(華老人)의 손은 이 순간 가볍게 떨리고 있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배첩이 쥐어져 있다. 배첩은 테두리에 금실을 누빈 비단에 검은 실로 이름을 수놓은 고급품이다. 하지만 화 노인이 손이 떨리는 이유는 그 고급스러움 때문만은 아니다. <신무전주(神武殿主) 소철(蘇喆)> 배첩에 수놓인 여섯 자가 화 노인의 눈빛을 흔들리게 한 것이다. 묘하군... 도정(陶正)은 기이함을 느낀다. 퀘퀘한 술냄새를 푹푹 풍기던 딸기코 문지기 노인은 분명 배첩에 쓰인 사부의 성명을 알고 있다. 그것은 가늘게 떨렸던 손끝과 잠시 흔들리던 눈빛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배첩을 전한 자신 외에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순간적이었다. 귀인께서 왕림하셨군요. 소인이 안으로 기별을 올리겠습니다. 화 노인은 주먹을 한 데 모아 미간 어림으로 끌어올리며 천천히 허리를 구부린다.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는 읍례(揖禮)이다. 화 노인의 읍이 얼마나 멋들어졌는지, 도정은 자신도 모르게 황망히 두 손을 모아 답 례하고 만다. 송대(宋大), 자네는 손님들을 영빈관(迎賓館)으로 안내해 드리게. 화 노인은 옆에서 눈만 꿈뻑거리며 서 있던 송대에게 말한 뒤, 몸을 돌려 문 안으로 사라진다. 언제나 구부정하던 노인의 등은 이 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펴 져 있다. 그것 참! 부시시한 머리를 긁적이던 도정 앞에, 빗자루를 든 송대의 순하디 순한 얼굴이 불쑥 들이밀어진다. 헤헤, 귀빈들께서는 소인을 따라 오십시오. 아, 알겠소! 도정은 몸을 돌려 칠팔 장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마차로 돌아온다. 바퀴 부분에 댄 강철 장식이 튼튼해 보이는, 하지만 그 외에는 특별한 점이 없어 보이 는 사두마차이다. 마차 옆에는 백의를 입은 청년 하나가 말고삐를 쥔 채로 서 있고, 그 뒤로는 10여 명 의 무사들이 말에서 내린 채 공손히 시립해 있다. 사부님, 안으로 드시지요. 도정은 마차 안을 향해 나직히 말한다. 마차의 옆면에 드리운 주렴(珠簾)이 차르륵, 소리와 함께 걷혀지며 칠순 노인의 움푹 꺼진 볼이 드러난다. 두 단 짜리 간이 계단이 고삐를 쥐고 있던 청년 구양현(歐陽賢)의 손에 의해 마차와 땅 사이에 설치된다. 노인은 계단을 딛고 천천히 땅으로 내려선다. 노인의 시선은 대문이 활짝 열린 석가장을 향하고 있다. 문지기의 기품이 저러하니, 가주 석대문의 명성이 무림을 진동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화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노인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탄성이 흘러 나온다. 도정은 뒷전에서 고개를 끄떡인다. 자신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부님은 눈도 좋으시지. 이 먼 곳에서 그걸 다 보시다니! 도정은 부시시한 머리를 긁적인다. * * * 귀인께서 방문해 주시니 폐가의 광영(廣榮)입니다. 소생은 석가의 둘째인 대전(大全)이라 하옵니다. 화 노인으로부터 배첩을 전해 받은 석대전은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철이 누구인가. 반백 년간 무림을 양분해 온 큰 기둥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러한 이름을 한 장의 첩지로 전해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 는 그였지에, 의관(衣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허둥지둥 영빈관으로 뛰어나온 것 이다. 지금 이 순간 그의 허리는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다. 이거 불청객을 너무 환대해 주시는구려. 노부, 소철이외다. 석대전은 조심스럽게 허리를 펴며, 노부, 소철이외다 라고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는 노인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곤혹에 빠지고 만다. 눈처럼 센 머리와 수염, 매부리코와 조금은 강퍅해 보이는 뺨, 그 외에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보통의 노인이다. 입고 있는 옷도 비록 정갈하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물빛 장포에 불과하다. 이런 노인이 북악(北嶽) 신무전의 주인인 신무대종(神武大宗) 소철이란 말인가! 석대전은 자신이 실례를 범하고 있음도 잊은 채, 소철의 신색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있 다. 하지만 소철에게서 소철다운 점은 단 한가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냥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 허험! 이 늙은이도 금사검(金獅劍) 석 이가주(石二家主)의 용명(勇名)은 들은 지 오래였소. 장차 강호를 이끌고 갈 청년 영웅을 이렇게 만나니 마음이 기쁘구려. 소철의 나직한 헛기침에 석대전은 자신의 실례를 깨달은 듯, 얼굴을 붉히며 다시 허 리를 굽힌다. 이들은 이 늙은이의 제자라오. 소철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도정과 구양현을 소개한다. 도정이외다. 도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먹을 모은다. 사부 소철의 말투를 흉내낸 것이지만 그리 매끄럽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것을 느낄 겨를이 없는 석대전이다. 황급히 허리를 굽혀 답례할 따름이다. 청년 무사들의 우상인 철인협(鐵人俠) 도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석대전의 장황한 인사는 입에 발린 소리만은 아니다. 사실 철인협이란 이름은, 석대전의 형인 검판대인(劍判大人) 석대문과 함께 청년 무사 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지명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석대전은 천천히 허리를 펴며 도정의 얼굴을 살펴본다. 하지만 도정의 외모는 그 사부의 그것과도 같이 평범하다. 아니, 저렇게 머리를 긁적일 때에는 오히려 덜 떨어져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이 석대전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구양현이라고 합니다. 뵙고 싶은 지는 오래였지만, 사는 곳이 멀어 왕래가 없었군요. 비범과 평범의 혼돈 속에 빠져 있던 석대전은, 구양현의 인사에 제대로 답하지도 못 한 채 고개만 꾸뻑 숙인다. 그러다가 문득, 구양현의 준수한 외모를 발견하고는 마음이 약간 안정되는 것을 느낀 다. 이제서야 명(名)과 물(物)이 어울리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 * * 만심전(滿心殿) 일층의 대전. 길게 이어진 탁자에는 소철의 일행과 석가장 사람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백도군(白刀君) 정효(鄭曉)를 포함한 석가의 명숙(名宿)들은 소철이라는 당대의 거인 과 한 탁자에 앉은 것이 한편으로는 영광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한 탓 에, 얼굴을 나무토막같이 굳히고 눈길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있다. 주인석에 자리 잡은 석대전은 시녀가 날아온 차를 권하며 상석(上席)에 앉은 소철에 게 묻는다. 가주께서 출타중이셔서 소생이 대신 영접하는 결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헌데 소(蘇) 대전주께서 이 외진 곳까지 어인 일로 친히 왕림하셨습니까? 노부가 직접 뵙고 싶은 분이 계신데, 초청을 하면 결례가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늙은 몸을 움직인 것이외다. 소철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미리 전갈을 주셨으면 가주께 연락할 수 있었을 텐데... 공연히 헛걸음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석대전은 소철이 가주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생각으로는 형 석대문을 제외하면 소철이라는 거물이 직접 만날 사람은 이 집 안에 없기 때문이다. 허허, 석 가주 역시 노부가 꼭 뵙고 싶은 분이지요. 하지만 오늘 찾아온 분은 가주가 아니라오. 그러면 누구를...? 소철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연다. 운(芸)자 리(理)자 학(鶴)자, 운리 선생을 뵙고 싶소이다. 예? 석대전은 잠시 멍해진다. 소철이 말한 운리학이 자신의 어린 시절 글선생이며 가산의 후미진 곳에서 차밭을 가 꾸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이라는 것을 떠올리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운리 사부라면 가산의 석옥에 계십니다. 사람을 시켜서 이리로 모셔오겠습니다. 아니, 그 곳으로 안내해 주시오. 노부가 직접 찾아뵙겠소이다. 이 가주께선 그사이 제 제자들과 얘기를 나누시지요. 아마 젊은이들끼리니 통하는 것이 있을 거외다. 늙은이 수발하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나도 잘 알고 있소이다. 소철은 사람 좋은 늙은이처럼 너털웃음을 흘린다. 소철이 자리를 뜨자 만심전 안에는 침묵이 감돈다. 주인인 석가장 사람들은 소철을 만난 최초의 당황함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손님인 신무전 사람들은 그러한 주인의 태도에 어색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가끔 들리는 것이라고는 달그락거리는 찻잔 소리뿐, 초상집같이 낮게 깔린 분위기이다. 도정의 입에서 튀어나온 나직한 투덜거림이 천둥처럼 울릴 정도로... 제길, 이게 무슨 맛이야? 20여 쌍의 시선이 일제히 도정의 얼굴에 꽂힌다. 그것을 느끼고는 있는 것일까? 도정은 신기한 곤충이라도 관찰하는 양 고개를 기울여 손에 쥔 찻잔을 한 번 살펴본 뒤, 다시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는, 빌어먹을! 비상이라도 먹은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린다. 석가장 사람들의 안색이 가볍게 굳어진다. 하지만 도정은 부르르 진저리까지 치더니, 고개를 돌려 석대전을 바라본다. 어이, 석 아우! 나는 촌놈이 돼놔서 그런지 시금텁털한 차 따위는 질색이야. 주촌(酒村)인 소흥(紹興)이 코 앞인데, 이 따위 풀 끓인 물만 줄건가? 언제 봤다고 대뜸 반말이며, 누구 맘대로 제 아우일까? 도정의 무례한 말투에 얼굴이 흑빛으로 변한 것은, 석대전도, 석가장의 가신(家臣)들 도 아닌, 도정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구양현이다. 형님도 참! 저... 우리 형님이 원래 이런 분이니 석 형께서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구양현은 어색한 웃음으로 경직된 분위기를 얼버무리려 한다. 석대전 역시 구양현 못지 않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한다. 도 대협의 성품이야 소제도 잘... 내가 원래 이렇다고? 셋째! 내가 원래 어떻다는 말이야? 석대전의 입발린 말은 도정의 우렁우렁한 목소리 속으로 묻혀 버린다. 구양현의 얼굴이 조금 더 검게 변한다. 형님... 아니, 이 자식이 남의 옆구리는 왜 찔러? 도정의 옆구리를 찌르던 구양현의 손가락은, 예절을 지켜보려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 고 장철집게 같은 도정의 손아귀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보다 어린 사람을 아우라고 부르는게 뭐가 어때서, 그리고 젊은 놈이 술먹자는 게 또 뭐가 어때서? 안 그런가, 석 아우? 마지막 말은 석대전을 향해서이다. 그, 그게... 석대전은 뭐라고 대답하려고 하였지만, 이럴 때에는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 차갑고 조금은 오만한 그의 성격대로라면 의당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야 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철인협이라는 이름 석 자는 너무 부담되는 상대이다. 그렇다고 지당하신 말씀 이라고 웃어 넘기기에는 칼날 같은 그의 신경이 너무나 예민 하다. 으... 이 손 좀 놓으시구려, 형님! 그러길래 남의 살은 왜 쑤셔? 내공을 일으키지 않고도 무쇠향로의 테두리를 두부 부수듯 뜯어낸다는 도정의 악력(握 力)이다. 그 범 아가리에 손가락 두 개를 넣고 있는 구양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석대전을 비롯한 석가장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 상한 표정이 되어 버린다. 이런 괴상한 분위기를 일신시킨 것은 약간 저음이 섞인 여인의 목소리였다. 도련님, 술상은 제가 마련하지요. 사람들은 일제히 시선을 돌린다. 만심전 일 층과 이 층을 잇는 나무 계단 위, 두 명의 여인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살았다! 구양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까닭은, 손가락을 부러뜨릴 듯이 죄어오던 압력이 순식 간에 사라진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도정이라는 위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도정은 인간적으로도 괜찮은 데가 많은 순박한 사람이지만, 예의에 관해서라면 논할 가치조차 없는 무뢰한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튀어나오는 도정의 푼수짓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남자들 중에서는 도정이 하늘같이 떠받드는 소철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여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험! 험! 막 발작할 것 같던 도정의 얼굴은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두 여인에게 시선을 향하지도 못하고 바위같이 앉아 있다. 여자에게 꼼짝 못하는 도정의 약점. 그것은 그가 결혼한 뒤, 고쳐지기는 커녕 더욱 심해진 것 같다. 구양현은 저절로 실소가 나온다. 석대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두 명의 여인을 손님들에게 소개한다. 이 분은 소생의 형수이신 석 부인이십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소생의 손아래 누이이지요. 석대문의 부인이라고 소개된 여인의 나이는 이십대 후반 쯤... 키가 매우 큰 여인이었다. 하늘색 상의에 엷은 자주색 치마를 입었는데, 눈이 커서 전체적으로 시원스러운 분위 기를 준다. 그리고... ...! 석대전의 누이를 바라본 구양현의 눈이 커진다. 분홍색 치마를 입은, 이미 소녀라고 부를 나이가 지난 듯한 여자는 아름다웠다. 특별히 꼬집어서 어디가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목구비가 모두 알맞은 자리 에 알맞은 크기로 위치하고 있어서 잘 그려진 미인도(美人圖)를 보는 느낌이다. 더구나 그녀에게선 그림에서 느낄 수 없는 생기가 감돈다. 도 대협은 옛 친구를 본 척도 안 하는군요. 게다가 그 놈의 술타령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시고... 석 부인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도정을 바라본다. 도정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여인들을 바라본다. 시선이 석 부인의 얼굴에 머문 순간, 그의 부리부리한 눈이 휘둥그래진다. 당신은... 신기보(神機堡)의 왕(王)... 소저? 호호, 이제야 기억나세요? 도정은 귀신이라도 본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신기보주 왕제민(王齊旻)은 자신과 둘도 없는 친구이다. 눈 앞에 서 있는 여인은 바로 왕제민의 누이동생인 왕홍(王紅)이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소식이 끊긴 지 오 년이 넘었는데, 어디서 뭘하고 사나 했더니 석씨 집안 의 안방마님이 되었군. 왕가 그 자식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더니만... 혼인식이 워낙 조촐해서, 초청하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도 대협. 미안이고 자시고, 아니 왕가 녀석과 내가 어떤 친구인지는 왕 소저도 잘 알면서, 도 둑 시집을 갔단 말이오? 석씨집 대문은 당신의 주먹을 견딜만큼 튼튼하지 않거든요. 얼마 전 가정을 이루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석대전은 형수의 말에서 이들이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형님 내외의 이야기 중에 한두 번 등장했던 낮도깨비 같은 위인 이 바로 도정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하기야 낮도깨비 같은 위인임에는 분명하다. 두 분께선 이미 안면이 있으시군요. 형수께서 술자리를 봐 주시겠습니까? 영웅들을 만났으니 소제도 한 잔 생각이 나는군요. 피! 오라버니는 술이라고는 입에도 못 대면서... 석대전의 누이 석지란(石芝蘭)이 삐죽거린다. 석대전은 누이의 핀잔을 들으며 구양현을 슬쩍 바라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이 가던 구양현이다. 그런 구양현이 곁눈질로 석지란을 힐끔거리는 것을 보니, 이유없이 마음이 즐거워진다. 소란(小蘭)아! 내가 비록 술을 즐기지는 않다만, 오늘 같은 날 술이 빠지면 되겠니? 너도 형수를 도와드려라. 하하! 아무렴요. 내 화 노인한테 자오란주(子午蘭酒)를 달랠께요. 손님들께선 아마 한 번도 못드셔 봤을걸요? 석지란은 짤랑대듯 웃으며 대전을 나간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뒷모습이 구양현의 눈길까지 데리고 나갔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3) 운리학은 반쯤 감긴 눈으로 꿴 구슬[連珠] 같은 거품이 탕관(湯罐 : 茶具의 一種. 물을 끓이는 데 사용된다)의 바닥으로부터 솟구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말을 몰아 달리는 듯한 소리[驟聲]가 낮은 천정의 석옥 안에 듣기 좋은 소리의 물결을 만들고 있다. 탕관 안의 물은 잠시 후면 차를 우려내기 가장 좋은 순숙(純熟)의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육우(陸羽)의 진품이라는 말씀이오? 운리학은 느릿한 손길로 비단으로 거죽을 장식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양 손바닥을 펴서 둥글게 감싼 크기인 하얀 차관(茶罐 : 茶具 의 一種. 찻잎을 우려내는 데 사용된다), 그리고 조그만 찻잔 네 개이다. 그렇습니다. 모두 안진경(顔眞卿)이 육우에게 선물한 것이지요. 우연한 기회에 얻어 지니고 있던 것인데, 이 기회에 선생 같으신 다인(茶人)에게 드릴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이 정중한 말투의 임자가 신무전주 소철라고 한다면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음... 과연 진품이구려! 육우와 안진경 모두 600여 년 전인 당나라 때 사람이다. <다경(茶經)>의 저자로서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육우는 다도(茶道)라는 개념을 최초 로 설립한 사람이며, 그 당시 호주자사(湖州刺史) 자리에 있던 안진경은 육우와는 둘 도 없는 친구였다. 차관 옆에 새겨진 안진경의 관지(款識)를 살피던 운리학이 고개를 꺼떡인다.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운리학의 눈가에 머문 것은 놀랍게도 기쁨 의 기색이다. 어디, 그러면 다성의 운치를 감상해 볼까요? 탕관의 물은 이미 순숙의 경지에 이르렀다. 운리학은 화덕으로부터 탕관을 내린 뒤, 표주박으로 끓는 물을 조금 떠서 차관과 찻잔 에 조심스럽게 붓는다. 차를 우려내기 전에 차관과 찻잔을 데우는 까닭은 잠시 후 이루어질 차와 물의 조화를 보다 윤택하게 하기 위함이다. 호! 전대 다성의 다구(茶具)로 현세 다성의 운치를 감상할 수 있는 저야말로 진정 행운아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허허, 소 전주께선 보잘 것 없는 늙은이를 너무 높이 띄우시는구려. 운리학은 탕관의 물을 식힘 그릇에 따르고는 차관과 찻잔에 담겨 있던 뎁힘물을 옆에 놓인 큰 통에 쏟아 버린다. 노인의 손길은 물처럼 고요하고 아이처럼 민첩하다. 소철은 차에 대하여 그리 많은 지식은 없다. 하지만 노인의 동작 하나하나에 배어있는 달인의 경지를 발견하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적당한가? 운리학은 식힘 그릇을 손으로 만져보더니 중얼거린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머무는 것이 아마도 그릇 안의 물이 적당히 식은 듯하다. 어찌 드시겠소? 노부는 중투(中投)를 즐기오마는...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중투란 차관에 물을 반쯤 부은 뒤 찻잎을 넣고 물을 마저 채우는 방식이다. 이외에도 상투(上投)와 하투(下投)의 방식이 있는데, 이들은 소철이 평소에 즐기던 간 략한 전다(煎茶)에는 없는 용어이다. 하지만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한 탓에 소철의 대답은 유유하기 그지 없다. 잠시 후 석옥 안에는 그윽한 향기가 감돌고, 소철의 앞에는 찻잔이 하나 놓여졌다. 드셔 보시오. 올해는 햇빛이 장해서인지 신맛을 없앨 수가 없구료. 소철은 고개를 끄떡인다. 예. 양지에서 자라는 향편(香片)이나 용정(龍精)은 더욱 그렇지요. 운리학은 차잔을 가슴 어림으로 치켜든 후, 눈을 감고 숨을 얕게 들이마신다. 향기가 못마땅하기라도 한 것일까. 거의 빠져버려 몇 올 남지 않은 흰눈썹이 살짝 이지러진다. 이놈은 그늘에서 노부가 직접 가꾼 것이라오. 장백산(長白山)에서 자라는 적삼(赤蔘)을 이리로 옮겼더니, 기후가 달라서인지 향이 변하더군요.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그 뒷맛이 특이하지요. 고맙습니다, 운리 선생. 소철은 가볍게 목례한 후 찻잔을 들어올린다. 쌉쌀한 가운데 약간 새콤한 향기가 소철의 코끝을 간지럽힌다. 향이 마음에 드는군요. 이것은 늙은이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다. 다향의 기품을 이루는 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천시(天時)에 맞춰 차를 만들어야 하고, 수덕(水德)과 인덕(人德)으로 맞춰 차를 끓여 야 하며, 법도에 맞춰 차를 마셔야 한다. 지금 소철이 들고 있는 적삼차는 앞서 두 가지 기품은 나무랄 데 없이 맞춰진 것 같다. 세번째 조건은 소철의 몫이다. 소철은 찻잔을 잔받침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후 오른손 소매를 두 번 걷는다. 그리고 왼손으로 잔받침을 가슴 높이에 받치고 오른손으로 조심스레 잔을 들어 한 모 금 머금는다. 잔받침을 든 왼손은 태산(泰山)같이 장중한데, 찻잔을 든 오른손은 평수(平水)같이 고 요히 움직인다. 그러한 소철을 바라보던 운리학은 나직히 한숨을 쉰다. 소유(燒儒), 그놈이 이 늙은이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많이 말한 모양이구려. 소철은 내심 뜨끔한다. 노인의 말처럼 운리소유, 신무전의 군사(軍師)이자 운리학의 아들인 그가 오늘의 자리 에 대해 많은 사전 정보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육우의 다기(茶器) 역시 운리소유가 구한 물건이었다. 자제분께서는 여러 방면으로 저를 도와 주고 계시지요. 신무전이 이만큼 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자제분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철은 고개를 숙여 사의(謝意)를 표한다. 하지만 운리학은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운리소유는 쉬흔이 넘은 나이에 얻은 독자(獨子)였다. 한때는 목숨보다 소중했던 자식이지만, 자신의 뜻을 거역하고 슬하를 떠난 지 20년이 지나 버린 지금은 남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철은 그러한 운리학의 반응을 짐작했다는 듯 담담한 신색으로 차를 마신다. 어두침침한 석옥 안은 긴 침묵이 흐르기 시작한다. * * * 만심전의 대전은 이미 연회장이 되어버렸다. 소생은 이 집의 총관을 맡은 정효라고 합니다. 강호에 이름 높으신 무영비수(無影飛手) 천 대장께 한 잔 올리겠소이다. 백색 무복을 멋드러지게 입은 정효가 잔을 들어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중년인에게 권 한다.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어울린 가운데, 유독 천궁만이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미안하오만 주인의 호위를 맡고 있는 터라 잔을 받을 수가 없소이다. 용서하시길! 천궁은 정중한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말투로 거절했다. 사실 과묵하기로 소문난 천궁이 이 정도로 긴 말은 한 것 자체가, 대단한 예의를 차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천궁은 은 무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원, 별 말씀을. 직무가 막중하신 분께 제가 오히려 결례를 범했군요. 정효는 잔 내민 팔의 머쓱함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팔을 내리려 한다. 그 팔의 머쓱함을 구해준 사람은 무뢰한 이었다. 천 대장! 정 대협의 잔을 거절하면 그 다음엔 이 몸이 권하리다. 굵직한 목소리. 천궁과 정효는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이제 막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도정의 칙칙한 얼굴 이 있었다. 천궁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는 듯하였다. 대공자, 나는... 내가 권해야겠군. 도정은 사발 같은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한다. 천궁의 눈빛은 더 이상 가라앉을 수 없는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내 정형의 잔을 받고 말지. 천궁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팔짱을 풀고 정효의 잔을 받는다. 정효는 천궁에게 술을 따르며 도정을 힐끗 바라본다. 도정은 묘한 구석이 있는 사내였다. 무례하지만 나름대로의 예의를 갖추고 있고, 무뚝뚝하지만 나름대로의 배려를 갖추고 있다. 이 순간 정효는 도정이라는 위인이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매력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한 정효의 심정은 석대전과 다름이 없었다. 석대전은 이미 큰 그릇으로 두 잔을 마신 뒤였다. 술과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여간해서는 입에 대려고 하지 않던 그가 사발술을 비우 게 된 것도 모두 도정의 강권 때문이었다. 억지반 농담반으로 술을 권하는 그에게서는 거역하기 힘든 묘한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귀에 거슬리던 도정의 반말도 어느덧 오래 전부터 들어온 것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석 아우 술을 아주 잘하는군. 자, 한 잔 더! 도 대협, 소제는 이미 취해서 정신이 없습니다. 이제 좀... 어허! 성현들 말씀에도 술을 마시려면 삼배(三杯)는 피하지 말라고 했네. 자네는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라는 말도 못 들어 봤나? 석대전은 울상이 된 채로 잔을 받는다. 성현이니 부일배니 하며 달려드는 도정에게는 당할 재주가 없는 것이다. 석형! 삼배 타령에 넘어가지 마세요. 그 다음에는 삼천배(三千杯)가 기다리고 있을... 사제! 구양현은 옆에서 참견하다가 도정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고 찔끔한다. 구양현과 애기를 나누던 석지란은 그 모습을 보고 깔깔대며 웃는다. 구양 공자께서는 사형을 꽤나 무서워 하시는군요. 석지란의 말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석 부인이 웃으며 대꾸한다. 세상에서 도 대협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아가씨. 어머, 그렇게 무서운 분이가요? 도정은 칭찬을 들은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며, 사실, 이 몸이 무섭기는 무서운 사람이지요. 라고 하더니, 제 말에 신이 난 듯 거푸 술잔을 비우기 시작한다. 독하기 이를 데 없다는 자오란주가 마치 물넘어가듯 그의 목젖을 타고 흘러 들어간다. 석 부인은 도정의 쾌음(快飮)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혀를 찬다. 호탕한 술버릇은 여전하시군요. 밥도 호탕하게 먹지요. 남이 뭐라고 비꼬아도 대충 칭찬으로 해석하는 도정이다. 멍청하다면 대단히 멍청한 사람이고, 영리하다면 대단히 영리한 사람이다. 제가 가군(家君)과 혼인할 때 소리소문없이 대사를 치른 것도 모두 도 대협 때문이었 죠. 엉?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도 대협이 아셨으면 필시 달려와 훼방을 놓을 것이 분명하잖아요. 아니, 내가 당신들 결혼을 왜 방해하겠소? 제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한 주먹에 그 놈을 박살내 버리겠다 고 얼러댄 사람이 누 군데요? 가군께서도 그 얘기를 들으시고는 힘들게 태어난 세상 낮도깨비 같은 도정에게 맞아죽 을 순 없지 하시며 쉬쉬 하시던데요? 그, 그것이... 끄응! 도정은 석 부인이 옛일을 들춰내자 꼬리를 말고 만다. 으흠! 사형, 새로운 정보로군요? 형수님이 아시면 아주 좋아하시겠군요. 구양현은 술기운으로 벌개진 얼굴로 도정에게 이죽거린다. 석지란은 뭐가 좋은지 박수를 치며 깔깔거리고, 도정의 얼굴은 점점 더 검어진다. 가영(佳瑛)에게 알린다고? 도정은 한 손을 품 속에 집어넣고 한 장의 종이를 만지작거린다. 한달 쯤 전 둘째 사제인 백리평(百里平)이 쓸데없는 고자질을 형수에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혈서였다. 셋째도 너무 위험해! 도정, 자신의 마누라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사나이는, 지금 이 순간 혈서가 한 장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혀 버렸다. (4) 마포(麻布)는 물기를 닦기에 더없이 좋은 헝겁이 될 수 있다. 특히 깨긋한 물로 행궈낸 찻잔의 물기를 닦는 데에는 마포 만큼 좋은 물건이 없다. 그래서 천하에서 이름 높은 신무전주 소철은 지금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올린 채, 마포 로 만든 행주를 들고 찻잔을 닦고 있다. 운리학은 그런 소철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호랑이에게 집을 지키라고 시킨 사육사처럼, 꽤나 의기양양한 눈길이다. 소철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이 사라질 즈음, 설겆이가 드디어 끝났다. 어떻소? 직접 찻잔을 행궈 보니, 차를 대하는 마음이 조금 더 새로워지지 않소이까? 한 번 설겆이로 그런 오묘한 마음이 생길 까닭이 없다. 소철은 내심 툴툴거렸다. 제가 이곳에 온 까닭은 선생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 입니다. 흐흠... 운리학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소철이 닦아 놓은 다구를 챙기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한쪽 구석에 있던 바둑판을 꺼내 온다. 소철의 얼굴이 조금 구겨진다. 소유, 그 놈하고 오랫동안 지내셨으니, 바둑 한 수쯤은 두실 수 있겠지. 예? 아, 예... 어디 이 늙은이와 한 수 해 볼까요? 운리학은 돌통 중 하나를 소철의 앞으로 옮겨 놓는다.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소철은 드디어 오랫동안 참아 왔던 것을 묻고 말았다. 혹시 석대원이란 청년을 아십니까? * * * 혹시 석대원이란 청년을 아십니까? 소철의 그것과 똑같은 질문이 만심전의 연회장에 앉아 있던 소철의 셋째제자 구양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직무 운운하며 술을 거절하던 천궁이 오히려 정효의 입에 잔을 들 어 부으며 해실거리고, 도정이 석 부인을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옛이야기를 나누고 있 는, 술자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무르익고 또 무르익었을 때였다. 꽈직. 아마도 흥겨운 분위기가 일순 경직되었다가 조각조각 부숴지는 소리가 있다면, 이런 소리가 날 것이다. 석가장의 식솔들은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신무전 손님들도 잔을 비우던 손길을 멈출 수밖에 없다. 그 이름을 어찌 아시는지...? 대전 안을 짓누르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석대전이 되묻는다. 소생이 얼마전 사천(四川)을 지나다가 혈랑곡도들에 의해 위기를 맞은 적이 있소이다. 그때 석대원이란 사람에게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었지요. 구양현은 자신의 얼굴에 좌중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목소 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느낀다. 자신이 던진 파문에 스스로 매우 놀라고 있는 것이다. 그 석대원이란 사람은 어찌 생겼던가요? 석지란이 다급히 구양현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쾌활하던 그녀는 무슨 까닭인지 매우 절실한 눈초리로 구양현을 바라보고 있 다. 소생이 그의 얘기를 꺼낸 이유를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가 석대문, 석가주와 아주 닮 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가주를 만나고 보니 그런 생각을 더욱 감출 수... 그만! 석대전은 구양현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 버린다. 그는 의자를 차며 벌떡 일어선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나뒹군다. 그의 얘기는 꺼내지 마시오! 그는 우리 집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오! 오라버니! 뾰족한 노갈이 석대전에게 향해진다. 석지란이었다. 그녀는 눈썹을 하늘로 치켜올린 채 석대전을 쏘아보고 있었다. 둘째 오라버니가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죠? 그는 그때 철 모르는 소년이었어요. 왜 아직까지도 둘째 오라버니를 미워하죠? 이제는 모두 잊을 때가 되지 않았나요? 소란, 너...! 석대전은 탁자 모서리를 움켜쥔 채 부들부들 몸을 떤다. 우두둑--- 단단한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탁자 모서리가 종이쪽 찢어지듯 뜯겨 나간다. 하지만 석지란은 조금도 굴하지 않은 채 고개를 똑바로 치켜 세우고 석대전을 노려보 고 있다. 으음...! 한참을 씨근덕거리던 석대전의 안색이 조금 풀어지는 듯한다. 귀한 손님들께 추태를 보였군요. 소생은 취기를 견딜 수 없어 잠시 들어가서 쉴까 하오니,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석대전은 누구에게랄 것 없이 툭 한 마디를 던지고, 신형을 돌려 만심전을 나가 버린 다. 옛 상처는 절대로 아물지 않는다. 망각이란 처방전은 결코 만병통치가 될 수 없다. 석대전, 십일 년 전 석대원과 맨발로 뛰놀던 소년이었던 그의 눈꼬리가 세차게 떨린다. 형이 살아 있다! 딱딱한 증오의 껍질 속에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기쁨이었다. 하지만 옛 상처는 절대로 아물지 않는다. 석대전이 떠나 버리자 좌중엔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그 침묵을 깬 것은 착 가라앉은 석지란의 목소리였다.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구양 공자님의 질문엔 소녀가 답해 드리죠. 괜한 얘기를 꺼낸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구양현은 자신의 한마디로 박살난 분위기가 견디기 어려웠다. 좌불안석(坐不安席)이라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하지만 석지란은 고개를 젓는다. 구양 공자께서는 아무 잘못이 없으세요. 또한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요. 음... 얘기를 꺼내려고 하니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 가문을 괴롭혀온 일인데... 그러니까... 십일 년 전 일이지요. * * * 흐흠, 소 전주의 제자가 우리 아원(兒原)이를 만났다고? 그것 참 묘한 인연이구료. 운리학은 몸을 조금씩 앞뒤로 흔들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한다. 그의 앞에 앉은 소철은 턱을 괸 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다. 소철이 집백(執白)인 것을 보면, 운리학은 바둑을 그의 아들 만큼 잘 두지는 못하는 듯하다. 석대원이란 청년이 그럼 석가장의 인물이란 말씀이십니까? 여부가 있겠소! 대원이는 가주 대문이의 아우이지요. 음, 물론 대전이의 형이기도 하고... 딱. 반상에 백돌 하나가 경쾌하게 놓인다. 운리학은 고개를 끄떡이더니 흑돌을 집어 응수한다. 세 아이 중에서 대원이만 둘째 부인의 자식이긴 했소이다. 하지만 전대가주였던 석안(石鞍)이 가내를 공평하게 다스린데다가, 아이들이 모두 착 해서인지 적서(適庶)의 구분없이 아주 친하게 지냈지요. 특히 대원이와 대전이는 한배 형제 이상으로 친했을 거외다. 음... 그랬군요. 소철은 노인의 수가 예상밖으로 날카로웠던지 장고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얼마 후, 제가 졌습니다. 하며 돌을 거둔다. 형세는 백이 그리 불리한 것이 아닌데 돌을 거두는 것을 보면 이야기에만 집중하겠다 는 뜻이다. 운리학도 아무런 말없이 돌을 거둔다. 헌데, 석대원이란 청년이 석가장을 떠난 이유는 무었입니까? 소 전주께선 혹시 석안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아시오? 검군자 석안은 자객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운리학은 눈을 지긋이 감는다. 바로 그렇소이다. 그러니까... 십일 년 전의 일이지요. * * * 연벽제? 검왕 연벽제 말입니까? 구양현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커진다. 그래요. 아버님을 살해한 원수가 바로 연벽제이지요. 모든 일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석지란의 차가운 말에 구양현은 물론 신무전의 모든 인물들이 말을 잊었다. 연벽제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곤륜지회에서 천하오대고수라는 명칭이 등장한 뒤, 다음 세대로서 유일하게 그들을 능 가할 수 있는 고수로 알려진 사람이 바로 연벽제인 것이다. 그런 그가 석가장의 전대가주를 암살했다니...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런 이야기가 왜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공교롭게도 연벽제는 둘째 오라버니의 외삼촌이었어요. 그러니까... 둘째 어머님의 친정 오라비였죠. 으음. 구양현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온다. 이제야 석대원이 스스로 석가장과 무관하다고 말한 것, 석대전이 석대원의 이름을 듣 고 화를 낸 것 등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연벽제가 왜 자신의 매제를 해쳤단 말이오? 도정이 불쑥 끼어든다. 말술을 들이킨 그였건만 어느새 취기를 몰아낸 듯, 바위 같은 자세를 회복하고 있다. 그건 소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마 누구의 사주를 받았겠지요. 석지란은 마치 인형처럼 아무런 감정없이 말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구양현이 묻는다. 화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버님은 시신을 보존하지도 못하셨죠. 부숴진 전각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형체를 알 수 없는 혈육들과 아버님이 아끼시던 보검 외에는... 연벽제는 도주하였고, 둘째 어머님과 오라버니는 가신들에 의해서 뇌옥에 갇히게 되었 습니다. 부친의 최후를 묘사하는 석지란의 표정은 이제까지의 침착함을 조금 허물어뜨리는 듯 하였다. 다음날 아침 뇌옥에서 눈을 뜬 둘째 오라버님은 참혹한 광경을 보셨죠. 바로 옆에서 주무시던 그의 어머님께서 뇌옥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진하신 겁니다. 구양현은 눈을 감는다. 선이 굵고도 온화로운 석대문의 얼굴이 떠올랐다. 둘째 어머님께선 유서를 남기셨습니다. 오라버니만은 온전히 집을 나가게 해달라는 것이었죠. 물론 가신들은 후환을 남겨서는 안 된다고 펄펄 뛰었죠. 결국 석대원이 무사히 석가장을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곧바로 가주직을 계승한 석대 문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리고 석대문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석안의 죽음에 대해서도 일체의 함구령을 내렸다. 그때는, 그리고 지금 역시 누구도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둘째 오라버니가 떠나시던 날, 큰 오라버니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지요. 철부지였던 셋째 오라버니와 소녀는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요. 대문 앞에는 어떤 사람이 둘째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둘째 오라버니는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대문을 나가다가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죠. 아전(兒全)과 소란(小蘭)을 잘 돌봐줘, 형 ... 그때 둘째 오라버니는 웃고 계셨죠. 더는 울 수 없어서 웃는 그런 웃음... 겨우 열서너 살짜리 아이가 말이죠. 흐흑. 석지란은 드디어 오열을 참지 못하고 만다. 이미 술자리는 깨진 지 오래... 사람들은 묵묵히 그녀의 울음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소란(小蘭)아, 이거 너 가져.> 오라비는 꼬마 계집애에게 무언가를 불쑥 내민다. <이게 뭔데?> <이건 우담화라는 꽃이야.> <우담화?> <응, 오늘 대머리 사부님한테 들었는데, 우담화는 극락에 핀다는 꽃이래. 아마 세상 꽃 중에서 제일 예쁠거야.> <와, 그런 꽃이 다 있어? 어? 근데 왜 이렇게 못 생겼어?> 계집애는 얼굴을 찡그린다. 나무를 깎아서 만든 꽃은 이름이 담고 있는 기품과는 달리, 여섯 살 여자아이 눈에도 조잡하게 느껴질 정도로 엉성해 보였기 때문이다. <내 솜씨가 형편없어서 그렇지 뭐. 하지만 다음엔 분명히 소란이 너처럼 예쁜 우담화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소년은 머리를 긁적인다. 머리를 긁는 손가락에 하얀 붕대가 감긴 것을 발견하곤 소녀는 코끝이 찡해온다. 서툰 손으로 나무를 깎다가 베인 것이리라. <고마워. 역시 대원이 오빠가 제일이야.> <헤헤, 하지만 아전(兒全) 한테는 비밀이다. 걔가 알면 자기도 만들어 달라고 조를 테니까.> 오빠는 어른스럽게 웃는다. 여자아이도 따라서 웃는다. 그 밝은 웃음들은 십수 년이 지난 오늘, 이제는 더 이상 조그만 여자아이가 아닌 그 녀의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얼굴을 탁자에 묻고 흐느끼던 석지란은 따뜻한 손길이 어깨 위에 얹히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든다. 그 곳에는 구양현의 슬픈 눈이 있었다. 석 소저,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석지란은 소매로 눈가를 찍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제가 귀빈들 앞에서 추한 꼴을 보였군요. 죄송합니다! 구양현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소저의 오라버니, 석형은 장부 중의 장부였습니다. 곧 소저 앞에 당당히 웃으며 나타날 것입니다. * * * 대원이가 추방당하던 날, 정문 밖에는 노부가 부른 한 사람이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 었소. 한자고(韓子庫)라는 사람인데, 노부와는 막역한 사람이지요. 예... 제자놈으로부터 들었습니다. 한씨 성을 지닌 노인이 석대원이란 청년과 함께 다닌다고요. 그렇소이다. 그리고 아마... 소 전주께서 과거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일 거요. ...? 소철은 한자고라는 이름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운리학은 다른 설명없이 말을 계속한다. 내 소전주께 뭐 좀 물을 것이 있소이다. 그러시지오. 운리학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신무전과 무양문의 균형이 깨진다면 어쩌시겠소. 소철은 생각에 잠긴다. 양대 세력은 균형을 유지하여 무림을 양분한 채 사십 년을 지냈다. 혹시 다른 세력의 등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이다. 균형이 잡힌 저울을 흔들려면 또다른 추 가 필요하지요. 운리소유와 이야기를 나눈 바로 그 대목이다. 소철은 낮은 신음을 토한다. 으음... 하면 혈랑곡의 창궐? 운리학의 미간이 좁아진다. 전주께서는 사십 년 전의 어떤 속임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시는구료. 왜 하필 혈랑곡이오? 이번엔 소철의 미간이 좁아진다. 천선자께서 말씀하신 제삼의 세력이 왜 혈랑곡이라고만 생각하시오? 비각은 염두에 두지 않으시오? 운리학의 말에 소철은 움찔한다. 곤륜지회에서 만난 비각의 이악, 소철은 이악이 지체 높은 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언 제나 강호와는 별개의 인물로 생각해 온 것이다. 선생의 말씀은...? 소유, 그놈의 말대로 노부는 혈랑곡주의 정체를 알고 있소이다. ...! 소철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그것이 신무전주 소철이라는 거물을 강동의 한 구석까지 움직이게 한 참 이유였다. 하지만 운리학의 다음 말은 그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노부는 그것을 밝힐 수가 없구려. 노부는 사십여 년 전 한 사람에게 약속을 했지요. 혈랑곡주의 정체에 관한 비밀을 관 속까지 가지고 들어가기로... 소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한 사람을 아는 데에는 때로는 평생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한 시진도 필요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소철이 짧은 시간 동안 느낀 운리학은, 한 번 말하지 않겠다면 절대로 말하지 않는, 고집으로 먹고 사는 늙은이였다. 하지만 소 전주께서는 곧 그것에 관해 아실 수 있게 될 것이오. 대원이가 드디어 강호에 나왔으니까. 그러면, 그가 진정 혈랑곡주의 전인입니까? 운리학은 한동안 대답없이 몸을 흔들거리다가, 불쑥 입을 연다. 사십삼 년 전 곤륜지회를 기억하시오? 소철은 고개를 끄떡인다. 그가 그것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리고 운리학은 말했다. 아까 이야기했던 한자고라는 친구... 그는 그날 혈랑곡주와 함께 곤륜산에 올랐던 검동(劍童)이였소. 二十章 華山 (1)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과거 강호에서 명망 높았던 문파의 장문인이었다. 그에게는 협객이 될 수 있는 뜨거운 협의심이 있었고, 고수로 불릴 수 있는 절정의 무 공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때 대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어느날 사악한 무리들이 다시 창궐하였다. 이미 칠십여 년 전 붕괴된 것으로 알려졌던 그들은, 서문숭(西門崇)이라는 희대의 패 웅을 앞세우고 천하 위에 우뚝 섰다. 그리고 무수한 문파들과 함께 그의 문파 역시 치욕적인 봉문(封門)을 당할 수밖에 없 었다. 거기에는 그의 협의심도, 그의 무공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문파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제자였다. 그의 제자는 그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제자는 이십 이전에 서악은일(西嶽隱逸)의 구초 장법과 매화양의(梅花兩意)의 칠 십이초 검법을 완성시킨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사부인 그조차 사십이 넘어서야 연성할 수 있었던 희대의 난공(難功)을... 그의 제자는 정의로웠고, 사려깊었으며, 강했다. 그는 그의 제자가 자신을 능가하는 대협이 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봉문의 시한인 십 년이 이미 흘러갔다. 그의 제자는 피끓는 무사혼(武士魂)과 함께 산문을 나섰다. 사악한 무리들의 수괴를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산문 아래 수십 리를 더 내려가 제자를 전송하였다. 하늘은 맑디맑은 가을이었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햇살이 제자의 넓은 등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의 제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절망하였다. 그를 절망시킨 것은 제자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제자는 어처구니없게도 사악한 세력과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절망과 함께, 한때 오대문파의 하나로 절정기를 구가하던 화산파(華山派)는 몰 락하였다. (2) 갈! 나가라! 터질 듯한 분노가 담긴 외침과 함께 네모난 나무토막이 허공을 가른다. 허공을 가른 나무토막, 목침(木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머리 아래서 애용되던 물 건은, 목표인 제자의 이마에 여지없이 명중된다. 빡. 제자의 이마에서 선혈이 튄다. 피는 제자의 흉터 - 머리털이 시작되는 이마 위부터 미간을 지나 콧잔등에까지 이어져 있는 - 를 타고 인중과 턱을 보기좋게 가리고 있는 북실북실한 수염에 고인다. 지렁이 같은 흉터가 실룩거린다. 굵은 눈썹이 부르르 떨리며 일그러진다. 눈썹 아래로 움푹 들어간 눈에 고통의 빛이 차오른다. 단단한 목침에 이마가 깨어졌으니 고통스럽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제자의 고통은 깨어진 육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십여 년을 괴롭혀 온 영혼의 상처가 그를 고통 속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썩 나가라는데, 이... 이... 고연 노움! 이제는 내 말이 말같이 안 들리느냐? 목침을 던져 사람을 다치게 할 기운이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늙고 여윈 노인. 한때는 무림오대문파의 하나인 화산파 장문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복마대협(伏魔大俠) 주동민(朱東民)은, 자신의 노기를 이기지 못하고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다. 주동민의 제자이자 한때 주동민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제갈휘(諸葛輝)는 대청에도 오 르지 못한 채 땅바닥에 천천히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절을 한다. 휘(輝)가 사부님의 수일(壽日)을 경하드립니다. 이마로부터 흐르는 붉은 피가 머리카락을 지나 땅바닥으로 고인다. 흙과 엉겨붙는 핏물 위로 한 가닥 차가운 조소가 실린다. 사부? 이 자리에 네 사부가 있다는 말이냐? 제갈휘는 천천히 고개를 든다.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부디 강녕(康寧)하소서. 순간, 주동민은 낄낄대며 웃는다. 흐흐... 네가 나의 이런 꼴을 조롱하고 싶은 생각이로구나. 그래, 마음껏 조롱해 보시지, 제갈 나으리! 제갈휘의 고개가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아랫입술로 파고든 앞니 탓인지, 비릿한 피내음이 입 속으로 번져온다. 매해 반복되는 고문, 하지만 그가 느끼는 것은 모멸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책감이었다. 사부님, 이것은 해동(海東)의 산삼입니다. 제자가 미우시더라도 이것만은 꼭 드시고 기운을 되찾으십시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제갈휘는 품 속에서 흰 베로 꼭꼭 포장한 꾸러미를 꺼내어 대청 앞에 서 있던 청년에게 건네 준다. 산삼을 건네 받은 청년, 주백상(朱白祥)은 난처한 눈길로 아버지, 주동민을 바라본다. 주동민의 눈가에 한 줄기 기광이 스쳐간다. 그것을 발견한 제갈휘의 눈빛이 어두워진다. 오호, 산삼이라고? 그래 어디 이리로 가져와 보거라. 주백상은 반색을 하며 꾸러미를 가지고 대청으로 올라간다. 대청 아래에 묵묵히 서 있는 제갈휘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진다. 이리 다오! 대청을 향해 열린 문으로 방 안에 들어선 주백상은 부친의 차가운 음성에 흠칫 놀란다. 침상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주동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문지방 너머로 보이는 제갈휘 를 노려본다. 네놈이 산삼이 아니라 천하에 둘도 없는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해온들, 내가 고맙다고 굽신거리며 받을 줄 알았더냐? 주백상의 손에서 꾸러미를 나꿔챈 주동민은, 그것을 풀러보지도 않고 곁에 놓인 타구 (唾具) 안으로 던져넣는다. 그리고는 머리맡의 등잔을 기울여 기름을 붓는다. 칫. 부싯돌이 부딪히며 자그마한 불똥이 튀기더니, 이내 타구는 불꽃에 휩싸인다. 삽시간에 풀뿌리가 타는 매캐한 연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연기가 방 안을 채우자 병약한 부친을 염려한 주백상은 타구를 황급히 방 밖으로 들고 나온다. 어서 꺼지거라! 쾅! 주동민은 줄을 잡아다녀 방문을 소리나게 닫는다. 제갈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았다. 주백상은 조심스럽게 제갈휘의 얼굴을 살피지만, 무표정한 그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다. 사형, 죄송합니다. 아버님께서 좀처럼 용서하려 하시지 않으시니... 소제도 어쩔 수 없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주백상은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옥령산(玉靈散)과 붕대를 가져왔다. 제갈휘는 아무 말없이 주백상의 치료에 머리를 맡긴다. 그의 이마엔 하얀 붕대가 두어 겹 감긴다. 제갈휘는 닫혀 있는 방문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절을 한다. 내년 수일에 다시 오겠습니다. 옥체 보중하소서. 엎드린 제갈휘의 어깨가 약간 흔들렸다면, 주백상이 잘못 본 것일까... 방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제갈휘의 눈가는 약간 붉어져 있다. 제갈휘는 몸을 돌려 산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 * * 서악(西岳) 화산(華山). 섬서성 동부, 민산산맥의 동단에 우뚝 솟은 영산... 조양(朝陽), 낙안(落雁), 연화(連花), 운대(雲臺), 옥녀(玉女) 등 다섯 봉오리가 손가 락 처럼 솟아있어 오지산(五指山)이라고도 불린다. 위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경관은 예로부터 시인묵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절경 으로 이름이 높다. 화산 연화봉 중턱에 위치한 산문, 오동나무로 만든 고색찬연한 현판은 과거 매화무적 (梅花無敵)의 명성을 드날리던 화산파의 위용을 말해준다. 하지만 문주 주동민이 주화입마(走火入魔)로 쓰러진 뒤, 화산파는 쇠락하였다. 성황을 이루던 문도들도 모두 산문을 떠나고, 이제는 주씨 식솔들과 몇몇의 노복들만 이 문파의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오대문파의 당당한 일원으로 강호를 위진하던 영광은 지나간 꿈이던가. 당금 무림의 그 누구도 화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산파라는 이름이 세인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까닭은 단 한가지, 화산파가 탄생시킨 한 사람의 천재 검객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화산파가 아닌 다른 문파에 적(籍)을 두고 있다. 주동민이 주화입마를 일으킨 것도 다른 문파, 그것도 적당(適當)에 투항한 애제자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게나. 사부에게 목침으로 얻어맞은 불쌍한 사내 제갈휘는, 산문까지 배웅 나온 착하기만한 사부의 아들 주백상에게 말한다. 사형, 죄송합니다. 아버님께서도 언젠가는 사형의 정성을 이해하실 날이 있으실 겁니다. 주백상의 목소리는 그 끝이 점점 기어들어가고 있다. 그는 제갈휘가 당한 수모가 자신 때문이라도 되는 듯 송구스러워 하고 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제갈휘는 피식 웃고 만다. 아닐세. 모든 것이 내 탓이지. 그리고... 이것을 받게. 제갈휘는 품 속에서 또 하나의 꾸러미를 꺼내어 주백상에게 내민다. 꾸러미는 아까의 것과는 달리 유지(油紙)로 포장되어져 있다. 이게... 뭡니까? 아까 말한 해동삼(海東蔘)일세. 여섯 뿌리이니까, 한 뿌리씩 달여서 삼 일 간격으로 아침 공복(空腹)에 올리게. 그리고 장백산(長白山)에 사람을 보내 사부님의 음독(陰毒)을 치료할 약재를 구하고 있으니, 구해지는대로 사람 편에 보내지. 그럼 아까 그것은...? 제갈휘는 웃었다. 그의 입가가 허물어지자 보기 좋은 수염이 가볍게 출렁인다. 사부께서 내게 교활한 놈이라고 늘상 욕하셨지. 하하! 사부께서 잘보신 게야. 사실 난 교활하다네. 그건 해동 장사치들이 곧잘 산삼이라고 속이는 도라지라는 풀뿌리였어. 사형! 주백상의 눈가가 젖어왔다. 이십여 년을 하루같이 부친의 생일인 팔월 보름이면 찾아와서 문안을 드리는 사형. 그런 그에게 부친은 온갖 모욕을 주며 냉랭하게 대해왔다. 제갈휘의 준수한 얼굴을 종(縱)으로 길게 가르고 있는 상처도 십여 년 전 주동민의 검 이 만든 작품이었다. 그런 수모라면 그 누구라도 참기 어려운 일이건만, 제갈휘는 언제나 지성으로 사부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럼 다음에 보세. 제갈휘는 몸을 돌려 산 아래로 내려간다. 하늘은 맑디맑은 가을이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햇살이 제갈휘의 넓은 등 위에 쏟아지고 있다. (3) 사기로 만들어진 작은 잔 하나가 평범해 보이는 길죽한 손가락 위에서 뱅글뱅글 맴돈 다. 잔 속에는 적갈색의 액체가 담겨져 있다. 하지만 손가락의 임자는 이 방면에 있어서 꽤나 재주가 좋은 사람인지, 잔 속의 액체 는 한 방울도 넘치지 않는다. 그리고 손가락의 주인 양진삼(楊眞三)은 실제로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지도 않고 있다. 그의 눈은 탁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턱수염의 사나이 제갈휘, 그 중에서도 머리에 칭 칭 감긴 붕대 위에 고정되어져 있다. 형님의 참을성도 대단하시오. 이십 년이 넘도록 그 꼴을 당한다면 부처님이라도 눈살을 찌푸리고 돌아앉으시겠소. 양진삼의 목소리는 매우 듣기 좋았다. 좋은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눈매가 단정하고 콧날이 우뚝한 그는, 삼십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십대 청 년과 같이 쾌활하고 건강한 용모를 지니고 있다. 제갈휘는 양진삼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눈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들이킨다. 잔 속에 담겨진 회한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간다. 한 점의 편육이 그의 어금니 사이에서 으스러진다. 우적거리며 안주를 씹는 품이 그리 좋지 못한 그의 심사를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양진삼의 이죽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화산의 노사부는 언제쯤이나 형님 정성을 알아 주신다고 합디까? 문자 그대로 간장과 뇌를 땅바닥에 쳐발라야 알아 주신답니까? 제갈휘는 양진삼의 얼굴을 노려본다. 찔끔한 양진삼은 자칫 손가락 위에서 돌고 있는 술잔을 떨어뜨릴 뻔한다. 제갈휘가 비록 순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이쯤에서 놀리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한다. 이 정도는 제갈휘의 단짝인 양진삼에게 있어서 상식이다. 하긴...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음... 다른 얘기나 합시다. 제갈휘의 눈길이 양진삼의 얼굴로부터 서서히 떨어진다. 양진삼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러다 언젠가 한 대 맞고 말지... 하지만 한 방 맞는 것이 무서워서 제갈휘를 놀리는 재미있는 일을 그만둘 그가 아니 다.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 바로 그의 행동 철학이다. 탁! 가벼운 소리와 함께 양진삼의 손가락 위에서 돌던 잔이 탁자 위에 놓여졌다. 그렇지! 소제가 이번에 벼슬한 얘기나 해야겠군요. 양진삼은 미소띤 얼굴로 제갈휘를 바라본다. 좁은 이마와 반짝거리는 눈동자, 그리고 천연덕스러운 웃음은 그의 인상을 매우 유쾌 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들이다. 벼슬? 하하! 그것도 꽤 높은 벼슬이지요. ...? 소제가 이번에 동창(東廠)의 부영반(副令班)이 되었습니다. 형님께서도 이 기회에 저한데 잘 보이셔야 할 걸요? 부영반! 제갈휘는 깜짝 놀란다. 동창은 전대 황제인 선덕제(宣德帝)가 만든 정보감찰기관이다. 건국 이후, 대내감찰을 도맡아오던 도찰원(都察院)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직된 동 창은, 한 명의 영반과 두 명의 부영반, 그리고 백 명 내외의 사령(使令)들로 구성되어 있다. 백 명이라면 결코 많은 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백 명의 능력은 숫자 상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 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창의 무서운 점은, 사령들 하나하나가 강호의 방회나 지방 호족 들과 연줄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관계에서 든든한 후원자처럼 좋은 힘이 없다는 사실은 고금의 진리. 덕분에 동창은 일천한 역사와 적은 수의 인원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총아(寵兒)로서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임 동창 영반은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감찰사(監察司)를 지낸 바 있던 무관, 하 도지(河道之)였다. 아버지 잘 둔 사람은 좋겠군. 빈정거리는 말투와는 달리 제갈휘의 눈은 따듯하게 웃고 있다. 그의 말처럼 양진삼은 명문대가의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선덕제의 장인이자 정덕대부(正德大夫)에 봉해진 바 있는 지체 높은 귀 족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출신은 양진삼이 무양문에 투신하기 이전부터 동창의 수석사령으로 활 약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요인 중 첫번째 요인이 된다. 원, 형님도! 모두다 소제가 잘난 탓이죠. 하하! 양진삼은 크게 웃는다. 몸을 흔들며 가가대소하는 그의 손가락 위에는 어느새 술잔이 다시 돌고 있다. 술이라고는 입에도 못 대는 녀석이 저 재주는 어디서 배웠을까... 제갈휘도 그런 그를 바라보며 웃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더욱 얼굴 보기가 힘들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는 팔로군장(八路軍將)의 직책도 반납할 수 밖에 없게 되었어요. 형님이 문주님께 잘 좀 말씀드려 주세요. 양진삼은 무양문 호교십군 가운데, 자신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백련교도가 아닌 사람 이었다. 제갈휘는 문득, 앞으로 외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십여 년 전 서문숭에게로 투신하여 호교십군의 우두머리인 십군지장(十軍之長)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제갈휘의 인생행로는 가시밭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를 밖힌 돌을 빼는 굴러온 돌 로 바라보던 백련교도들의 시선이야 참을 수 있는 것 이었지만, 자신을 배반자로 매도하는 강호인들의 경멸 어린 시선은 견디기 어려운 것 이었다. 그런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세 개의 버팀목이었다. 첫째는 누구보다 그를 신뢰하는 서문숭이라는 거인이었고, 둘째는 자신을 숙부라고 부 르며 잘 따라준 서문숭의 제자들과 의제 양진삼과의 인간적인 관계, 그리고 마지막이 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존재함으로해서 무양문과 정파무림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책임감이었다. 헌데 얼마 전 서문숭의 셋째 제자인 장민이 용봉단의 강이환에게 죽임을 당했고, 이 제는 양진삼도 문파를 떠나려 한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쓸쓸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형님!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군요. 뭔가? 양진삼은 손가락 위에서 돌리던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약간 치켜올라갔던 눈매가 수평으로 되돌아오는 순간, 그의 전신을 감돌던 장난기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번에 서장(西藏)에서 온 봉공단(奉貢團)에게서 수상한 점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봉공단? 요즘은 사신이 올 때가 아니지 않는가? 그거야 그렇지요. 하지만 황상께서 탄귀비(呑貴妃)의 회임(會姙)을 기원하기 위해 특별히 청하셨습니다. 탄귀비는 당금 대명제국의 황제인 정통제(正統帝)가 가장 총애하는 애첩이었다. 묘족(苗族) 출신인 그녀는 오 년 전 토번국의 진상품(進上品)으로 보내져, 빼어난 미 모와 간드러진 애교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경국(傾國)의 미녀라고 전해진다. 그 미모가 얼마나 빼어난지, 황제는 다른 사람이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을 질투하여 손수 비단 면사를 하사해 얼굴을 가리고 다니도록 하였다고 한다. 탄씨의 회임을 위해 청한다? 웃기는군! 제갈휘는 황제의 무도(無道)함을 비웃고 있다. 당금 황제에게는 어엿한 황후가 있었고, 왕자를 바란다면 그것은 의당 황후의 몸을 통해서라야 한다. 자고로 황권의 계승에서 생긴 잡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왕조가 무너졌던가! 하지만 황제는 무엇을 배웠기에 일개 호녀(胡女)의 임신을 위해 저리도 설치며, 그 아 래의 중신(重臣)들은 뭘 하는 작자들이기에 그것을 그대로 방관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무슨 불사(佛事)라도 벌이겠자는 겐가? 예! 해서 봉공단에는 라마승들이 많이 끼어 있었지요. 탄씨라면 본디 묘족이니 라마교를 믿을 수도 있겠지? 그래, 그게 자네가 얘기한 수상한 점인가? 그런데 들어온 라마승의 수가 너무 많아요. 아마 이백 명은 훨씬 넘을 겁니다. 이백...? 좀 많군. 그 정도 숫자의 라마승을 모으려면 오이랏의 에센 이 관여하지 않고는 어림없는 일이 지요. 게다가 무공을 익힌 자가 많은 것 같았어요. 특히 우두머리인 듯한 몇 명은 소제도 쉽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수인 듯했습니다. 제갈휘의 길죽한 흉터가 꿈틀거린다. 양진삼의 무공은 일류, 그것도 초일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무과를 장원한 사람답게 십팔반 정통무예에 달통해 있었으며, 전대의 이인 무산 삼은(巫山三隱)의 공동전인이기도 했다. 개개인이 능히 일문(一門)을 이룰 수 있다는 호교십군 가운데에서도 일군장 제갈휘와 이군장 좌응(佐鷹)을 제외하면 양진삼을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양진삼이 동창의 수석사령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요인 중 두번째 요인 이다. 쾌찬(快燦)이라는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니군. 안 그래도 날로 강성해지는 오이랏인데... 자네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쾌찬은 일종의 감탄사이다. 무양문주 서문숭이 양진삼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깨끗하고도 빠른 손속에 쾌찬이로다 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후 양진삼의 별호는 그대로 쾌찬이 되어 버렸다. 에센이 개입했다면, 필시 심상치 않은 암수(暗手)가 감춰져 있을 겁니다. 과연 그 중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서장 밀교의 총본산 아두랍찰의 팔부신중(八部神衆)이오! 난데없이 끼어든 우렁찬 목소리에 제갈휘와 양진삼은 깜짝 놀란다. 재빨리 주위를 살피는 그들의 눈에, 두어 자리 건너편 탁자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황의 거한 하나가 들어왔다. 그의 앞에는 회색 단삼을 입은 작달막한 노인과 팔 하나가 없는 노인이 게걸스럽게 젓 가락을 놀리고 있다. 제갈휘의 눈이 가늘어진다. 주루에 들어올 때부터 신경쓰이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다가, ...! 외팔이 노인의 얼굴을 살피던 그는 깜짝 놀라고 만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모용 노인이 아니시오? 하도 오랫만이라서 몰라뵈었군요. 제갈휘의 말에 외팔이 노인, 모용풍은 고개를 들고 손을 흔든다. 아니오. 이 늙은이가 당연히 아는 체 했어야 하는데... 실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제갈 대인이 주루에 들어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소이다. 석대원 일행이 소림승들과 헤어져 화산에 도착한 것은 바로 어제, 팔월 십사일이었다. 그들은 화산파가 있는 연화봉 아래의 주막에서 묵으며 제갈휘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담(高談)에 불쑥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석대원은 몸을 일으켜 제갈휘의 탁자 쪽으로 다가온다. 제갈휘의 표정이 야릇해진다. 앉아있을 때에는 그냥 큰 체격인 줄로만 생각했을 뿐인데, 일어서서 가까이 다가오니 이건 그냥 큰 정도가 아니다. 천하에서 이런 덩치를 지닌 인간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저희들은 제갈 대협을 뵙기 위해서 수천 리 길을 왔지요. 합석해도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석대원은 손을 모은 채 허리를 절반쯤 구부린다. 흥! 제갈휘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양진삼이 벌떡 일어선다. 여기 앉으신 형님은 워낙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위인이라 대충 넘어가겠지만, 나 는 남의 말을 엿듣는 도둑고양이 같은 놈과는 합석할 생각이 없다!. 양진삼의 눈초리는 매우 매서웠다. 하지만 석대원은 재미있는 물건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남의 말을 엿듣는 못된 버릇을 고쳐주마! 허어, 자네... 형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소제에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제갈휘는 양진삼의 의중을 알고 더 이상 그를 만류할 수 없었다. 그와 나눈 얘기들 중에서 그가 동창 소속이라는 것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꽤나 큰 소란 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소, 동창의 부영반 나으리. 석대원의 입가가 묘하게 뒤틀린다. 다짜고짜 큰소리를 치는 양진삼이 아니꼬왔던 것이다. 흣! 덩치 만큼이나 꺽달진 놈이군. 따라 나와라! 양진삼은 성큼성큼 객잔의 문을 향하여 걸어간다. 석대원은 두말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이거야 원... 제갈휘는 모용풍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몸짓을 지었고, 모용풍도 일이 꼬인다고 생각하며 쓰게 웃는다. (4) 너는 오늘 큰일났다. 제법 널찍한 공터, 그 한 가운데에서 양진삼은 자신보다 목 두 개는 큰 석대원에게 주먹을 내휘두르고 있다. 자주색 비단옷을 입은 풍류공자가 빛바랜 황삼을 아무렇게나 걸친 산도적을 윽박지르 는 광경은 매우 희극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양진삼은 남들 눈에는 어떻게 비치던 알 바 아니라는 듯, 턱을 치켜들고 어깨 를 건들거리며 으름짱을 놓는다. 마치 어줍잖은 시정잡배나 된 것처럼... 쾌찬이 마작해서 따낸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마. 뚜둑, 뚜드득... 양진삼의 손가락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저 친구, 정말 싸울 생각은 없는 게로군. 공터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제갈휘는 피식 웃고 만다. 자, 눈이 있으면 잘 봐라! 양진삼은 근처에 있던 주먹만한 돌덩이를 주워 들더니 오른주먹으로 힘차게 내리친다. 돌덩이는 빡 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 아래에서 산산히 으스러지고 만다. 이 대목에서 석대원과 두 늙은이마저 웃고 만다. 저 인간은 약이라도 팔려는 것인가. 이 바위처럼 되고 싶으냐? 양진삼은 손을 툭툭 털며 으쓱거린다. 바위? 동창 바위는 모두 고만한가? 석대원은 몇 걸음 떨어져 있는 어른 몸통만한 바위 옆으로 다가간다. 왼손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듯하더니, 돌덩이는 쩡 소리와 함께 두 조각으로 갈라져 버린다. 혈옥수가 전개된 것이다. 양진삼의 안색이 가볍게 변한다. 으음... 한 가닥 재주는 있는 놈이군. 좋다! 동창의 바위가 얼마나 큰지 보여 주마! 양진삼은 등 뒤에 있는 거대한 바위를 향해 걸어간다. 석대원의 몸통보다고 배는 커보이는 바위였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눈빛에 호기심이 감돈다. 저만한 놈을 부수려면 보통 공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막상 바위 앞에 선 양진삼은 조금 켕기는 기분이 든다. 기를 콱 꺾어버릴 생각으로 눈에 띄는 것 중 제일 큰 놈을 고르기는 했지만, 이건 너 무 크다. 양진삼은 처음 만난 사람과 싸울 정도로 난폭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한두 번 시범을 보여 겁먹게 한 뒤, 오늘 들은 내용을 함부로 발설하지 말도록 엄포를 놓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걸 깨부수다가 실수라도 한다면, 엄포를 위해 지금껏 잡아 놓은 위신은 순식간에 날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미 호랑이 등에 탔고, 호랑이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 그래. 이 정도면 되, 되겠군. 잘봐라! 자신도 모르게 약간 더듬는 양진삼. 과연 부술 수 있을까라는 의혹을 뒤로 한 채 오른손이 하늘 위로 치켜 세워진다. 바로 그때, 잠깐! 양진삼을 위기에서 구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석대원이다. 양진삼은 반가운 마음이 솟구쳤지만, 여전히 위엄있는 표정을 유지한 채 천천히 고개 를 돌린다. 뭐냐? 왜 방해하냐는 식의 짜증이 배인 말투다. 그 바위가 무슨 죄가 있겠소? 그리고 또 우리가 어디서 원수진 사이도 아닌데 죽네 사네 싸울 필요가 있겠소?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석대원으로부터는 어떠한 종류의 적의나 투지도 발견 할 수 없다. 그래? 하긴 그것도 그렇군... 양진삼은 오른손이 스르르 내려온다. 이 순간 그의 표정은 자신의 장기를 보여 줄 기회를 놓친 사람의 아쉬움, 바로 그 자 체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석대원은 잠시 생각한 후 말한다. 내기를 합시다. 내기? 그렇소. 만일 내가 진다면 당신이 시키는대로 하겠소. 재미있군. 그래, 무슨 내기냐? 석대원은 아까 주루에서 말했듯이 양진삼과 싸워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술내기요. 적당히 그만 두고 술이나 먹자는 얘기다. 하지만 양진삼의 이마에는 내천(川)자 주름이 잡힌다. 그는 한참 동안을 그런 표정으로 서 있다가 불쑥 고개를 든다. 그의 얼굴은 약간의 곤혹스러움과 약간의 분노, 그리고 대부분의 자괴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좋다! 하지만 내가 정한 내기에서 네가 이길 경우, 나와 술내기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주겠다. 석대원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꽤나 복잡한 제안이다. 당신은 상당히 깐깐한 사람인 것 같소. 좋소! 그 내기라는 게 뭐요? 양진삼은 품속에서 작은 비단주머니를 하나 꺼낸다. 금실로 아름다운 수를 놓은 고급품이다. 이 안에는 구슬이 하나 들어있다. 허공으로 이것을 던진 뒤, 땅에 떨어지기 전에 구슬을 취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음... 조건이 하나 있소. 뭐냐?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 말기로 합시다. 소생의 뼈다귀는 무양문 호교십군의 발길질과 동창 부영반의 주먹을 견뎌낼 자신이 없 소이다. 하하! 좋다. 양진삼은 석대원의 너스레에 웃고 만다. 소주! 내기에서 이기면 그 구슬도 달라고 하시오. 우리는 지금 빈털털이라오. 모용풍 옆에서 나무지팡이를 짚고 선 허리 굽은 노인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양진삼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 웃지도 못한다. * * * 석대원은 한쪽 무릎을 절반쯤 구부린 채 몸을 숙이고 있고, 양진삼은 두 손을 가볍게 늘어뜨린 채 그냥 평범하게 서 있다. 가운데 서 있던 제갈휘는 두 사람의 자세를 살핀 뒤,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진 끝없는 창천을 바라본다. 그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맺힌다. 자, 올라가네! 휘익--- 제갈휘가 힘차게 던진 주머니는 까만 점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친다. 차앗! 두 명의 유쾌한 사내들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몸을 날린다. 두 마리의 크고 작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웅장하고 경쾌한 움직임이었다. 멋지군. 제갈휘는 나직히 중얼거린다. 그의 시선은 석대원을 쫓고 있다. 쾌찬의 민첩함이야 세상 천지가 다 알고 있는 것이니 그렇다고 칠 수 있지만, 저 젊은 이는 무슨 수련을 했길래 보통 사람의 두 배 가까운 거구를 저리도 가볍게 움직이는 것일까? 과연! 지상에서 제갈휘가 석대원의 몸놀림에 감탄하는 바로 그 시각, 상천제(上天梯)의 절정 신법으로 하늘로 솟구쳐 오르던 석대원 역시 터져 나오는 탄성을 참지 못한다. 자신과 동시에 땅을 박찬 양진삼이다. 하지만 그는 겨드랑이 밑에 보이지 않는 날개라도 달린 듯, 허공을 가르며 자신을 간 단히 앞지르고 있다. 저러한 신법이 바로 양진삼에게 쾌찬이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내기에서 질 수는 없는 일이다. 석대원의 오른손이 머리 위로 쭉 뻗어진다. 건방진 자식... 양진삼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코 앞까지 다가온 주머니를 향해 오른손을 뻗는다. 천하에서 신법으로 자신과 겨룰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서로 상처를 입히지 말자라는 둥, 구슬을 달라는 둥, 쾌찬이라는 명호를 아주 장남감으로 알고 있는 저 덩치만 큰 곰과 늙은이! 양진삼은 그 뺀질뺀질한 오만을 여지없이 짓뭉개고 싶은 심정이다. 휴웅... 그런데 주머니는 그의 손에 잡혀지지 않는다. 아래 방향에서 밀려온 한 가닥 부드러운 힘이 떨어져 내리는 주머니를 퉁 밀어올린 것 이다. 어? 이 자식이...? 굳이 아래를 보지 않아도 누가 한 짓인지 알 것 같다. 양진삼은 내심 욕설을 퍼부으며 왼발로 오른발등을 가볍게 찍는다. 거기에서 생긴 탄력을 바탕으로 허공을 재차 솟구치는 그의 몸놀림은 문자 그대로 신 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각이 행동으로 옮아가는 찰나의 시간, 석대원은 어느새 그의 발 아래까지 바 짝 다가와 있다. * * * 모용형, 누가 이길까 내기할까요? 좋지요. 허공에서 날램을 겨루기라면, 제 아무리 석 공자라도 쾌찬에겐 한 수 아래지. 난 쾌찬에 걸겠소. 걸 돈 있소? ...아니, 없소. * * * 허공의 주머니를 매섭게 바라보던 석대원의 눈빛이 야릇해진다.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양진삼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춰진 듯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어깨 위에 양진삼의 발이 얹혀진다. 엇? 비록 가벼운 발딛음이있지만, 석대원의 중심을 흐트러뜨리기에는 충분했다. 석대원은 몸을 한 바퀴 뒤집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중심을 끌어올린다. 그의 눈에 자신을 내려다보는 양진삼의 얼굴이 들어온다. 그 입가에 맺혀있는 득의의 미소. 석대원의 굵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린다. 하아압! 갑자기 석대원의 풍차처럼 회전하기 시작한다. 몸을 뒤집어 생기는 탄력으로 양진삼에게로 접근하려는 것이다. 휘유! 올려다보던 제갈휘가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을 분다. 저런 임기응변의 동작을 자유자재로 펼친다는 것은 석대원의 신법의 경지가 이미 자신 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거나 주머니를 먼저 잡은 사람은 양진삼이다. 이때 그의 몸은 지상으로부터 오 장이나 떨어진 위치였다. 그는 회전력을 이용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석대원을 피해 가볍게 허리를 비튼다. 순간 석대원의 몸이 회전을 멈추고 활짝 펴진다. 온 몸을 퉁기듯 펼침으로써 양진삼의 진로를 봉쇄하겠다는 뜻이다. 제법인데? 양진삼은 앞을 막아서는 석대원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품 안으로 담싹 안겨 들어간다. 그는 앞서처럼 석대원의 몸을 이용하여 허공을 움직일 수 있는 추진력을 얻으려는 것 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석대원의 몸이 그를 감싸며 옆으로 돌아간 것이다. 주머니를 주시오! 귓가를 스치는 요란한 바람소리에 실려 굵은 음성이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쇠스랑 같은 손바닥 하나가 양진삼의 오른손을 향해 밀려간다. 양진삼은 석대원의 손이 도달하기도 전에 오른팔 경문혈(京門穴)이 저려옴을 느낀다. 석대원 같은 미련한 위인과 좁은 공간에서 몸을 부대끼며 싸울 생각이 없는 양진삼이 다. 그는 미꾸라지처럼 상체를 뒤틀며 석대원의 겨드랑이 아래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슬쩍 보이는 석대원의 등짝에 발길질 한 번을 베푸는 것을 잊지 않는다. 명백한 약속 위반이긴 했지만, 석대원의 등짝은 걷어차고 싶은 유혹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넓었던 것이다. 퍽. 가죽북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석대원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뼈속까지 찌르르 울려오는 통증... 하지만 남에게 공짜로 얻어맞을 그는 아니다. 등 뒤를 향해 쭉 내밀어진 그의 왼손은 어느새 양진삼의 어깨부분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다. * * * 모용 노인! 저 청년, 대단한데요? 누구죠? 석대원이란 친구지요. 바로 그 유명한 혈... 윽! ...? 아니 이 늙은이가 남의 옆구리는 왜 꼬집고 난리야? 그가 혈랑곡주라는 것이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 * * 양진삼은 팔을 쭉 펼치며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킨다. 찌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양진삼의 자주색 무복의 어깨죽지가 길게 찢어진다. 석대원의 억센 아귀힘과 양진삼의 멋들어진 신법의 합작품이다. 이, 이런...! 양진삼이 꼬리를 떼어준 도마뱀처럼 옷자락 한 조각만 남긴 채 빠져나가자 석대원은 당황하고 만다. 허공에서 진기를 이용해 몸을 놀리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는 두어 차례 몸을 뒤집으며 아래로 내려가는 양진삼을 허탈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양진삼의 오른손에는 비단주머니가 굳게 쥐어져 있다. 이쯤이면 승부는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다. 빌어먹을, 꽤나 뻐기겠군... 순간 석대원의 눈이 빛난다. 내기에 이겼으니 의당 의기양양해 하고 있을 양진삼, 하지만 이 순간 그의 얼굴은 잔 뜩 우그러져 있다. 모용풍의 비세록(秘世綠) 중에서 양진삼에 대한 기록 중 한 구절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양진삼은 거의 지상에 내려온 상태였다. 자신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이지만 그의 마음은 그리 즐겁지 못하다. 찢어진 옷! 저 불곰 같은 놈이 찢은 것은 그의 옷뿐만이 아니다. 머리 속과 심장, 그리고 영혼까지도 갈갈이 찢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양진삼의 이러한 생각은 그가 지니고 있는 한 가지 기벽(奇癖)에서 연유된다. 바로 결벽증(潔癖症)이다. 석대원은 씨익 웃는다. 그의 왼손이 아래를 향해 쭉 뻗어간다. 퍼엉! 양진삼이 막 땅을 밟으려는 순간, 그의 길죽한 눈은 믿을 수 없으리만치 휘둥그래진다. 행여나 바람결에 흩날리는 먼지 하나라도 옷자락에 묻을까 살피고 다니는 양진삼이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흙덩어리가, 그것도 발 아래로부터 힘차게 솟구쳐 오른 것이다. 으악! 무사 양진삼은 예리한 검에 전신이 난자당한다고 해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철담장부 (鐵膽丈夫)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한 가지 뿐이다. 그는 발 아래로 느껴지는 작은 힘을 빌어 전력을 다해 하늘로 몸을 띄운다. 떨어져 내리는 사람과 다시 올라가는 사람. 두 가지 다른 얼굴이 스쳐가는 순간... ......? 양진삼의 확대된 동공으로 언듯 붉은 섬광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아스라한 사이로 하나의 웃음. * * * 내가 이겼소이다. 석대원은 왼손에 쥔 구슬을 들어보인다. 그의 두 발은 이미 대지를 딛고 있다. 석대원으로부터 일 장쯤 떨어진 곳에 내려서는 양진삼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본다. 꽉 움켜쥐고 있던 비단주머니는 수실이 달린 주둥이 부분만이 남아 있다. 밑부분은 가위로 자른 것처럼 예리하게 잘려진 채로... 허허, 대단한 공부군. 제갈휘가 웃으며 다가온다. 그는 석대원의 장력에 놀라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상으로부터 까마득히 떨어진 허공에서 요란한 박투를 전개한 석 대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대원은 착지하려는 양진삼의 발 아래로 위력적이고도 정확한 장 력을 때렸던 것이니, 내공과 장법에 대한 조예 역시 나이를 초월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좋은 검법이야! 제갈휘는 석대원의 오른손을 바라본다. 석대원은 어느새 검을 꺼내들고 있었다. 그가 검을 뺀 것은 양진삼과 허공에서 교차되는 순간. 그때 그는 정교한 검술을 발휘하여 비단주머니의 밑부분을 베어낸 것이다. 감사합니다. 석대원은 제갈휘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제갈휘는 가볍게 답례한 뒤 양진삼쪽을 바라본다. 양진삼은 무엇이 그리 분한지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리고 있다. 이번에는 자네가 꼼짝없이 당했구만. 젠장! 양진삼은 아직까지 쥐고 있던, 주둥아리만 남은 주머니를 땅바닥에 팽개친다. 그래 네놈이 이겼다! 하지만 아직 술내기가 남았으니 너무 좋아하지는 마라! 죽을 맛을 보여 주마, 애송이! 양진삼은 석대원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 제갈휘는 그런 양진삼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양진삼과 술내기. 제갈휘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뻔히 알고 있다. (5) 주루의 입구에 매달린 옥토(玉兎 : 달에 산다는 토끼, 중국에서는 중추절에 月神像과 玉兎像을 내거는 풍습이 있다)가 소슬한 저녁바람에 대롱거린다. 제갈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석대원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독한 백건아(白乾 兒)를 한 모금 마신다. 진정 자네가 오대고수 중 혈랑곡주의 전인이란 말인가? 제갈휘는 이 질문을 벌써 세번째 반복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석대원의 대답은 여전히 짧막하다. 놀랍군, 놀라운 일이야. 제갈휘야 원래 애주가였고, 석대원은 강호출도 이후 빠른 속도로 주량을 늘려가고 있 는 중이다. 독주를 여러 병 비우고 있는 그들이건만 취기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석대원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한로는 물귀신 같은 모용풍에 의해 주루 지하 에 마련된 투전판으로 끌려간지 오래였다. 천하에서 제일 무섭다는 혈랑검법에 관한 이야기는 검을 쥔 이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 음, 석대원이라고 했나? 예. 제갈휘는 문득 젓가락을 만지작거린다. 미안하네. 예? 의아해하며 제갈휘를 바라보던 석대원의 눈이 순간적으로 얼어붙는다. 소리도 들을 수 없다. 형체도 볼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석대원의 목줄기를 향해 찔러온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여유는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웃! 석대원의 큰 체구가 빠른 속도로 왼쪽으로 미끌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찔러오는 무엇인가의 측면을 베어간다. 육체를 움직인 것은 사고 이전의 반사신경이다. 우당탕. 석대원이 앉았던 나무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잠시의 정적... 과연, 대단하군. 칠 척 거구가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눈으로 보지 않고서야 믿을 수 없겠 지. 미안하네!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제갈휘는 내밀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거둔다. 그의 손에는 가운데가 부러진 젓가락이 쥐어져 있다. 젓가락의 부러진 토막은 탁자 위에 깊히 박혀 있다. 석대원의 수도(手刀)에 의해 잘려 퉁겨진 것이다. 으음... 석대원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 만다. 한낱 나무젓가락을 통해 전개된 한 수는 제갈휘가 검왕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고수 임을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살기를 동반하지 않고도 저럴진대, 진검을 맞댄다면... 석대원의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은 것은 후덥지근한 화산의 밤공기 때문만은 아닐 것 이다. 그건 그렇고, 아까 자네가 아두... 뭐라는 곳의 천룡팔부를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게 뭔가? 나직한 제갈휘의 물음이 석대원을 상념으로부터 끌어냈다. 석대원은 잠시 흥분되었던 마음을 가라앉힌다. 아두랍찰은 서장 밀종의 총본산이지요. 천룡팔부중은 그들 중 가장 수행이 높은 여덞 명의 고승을 뜻합니다. 밀종? 그럼 역시 밀교가 다시 중원진출을 노리는 것인가? 아까 양 대협의 말로 미루어 그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음, 간단한 문제가 아니군. 제갈휘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대답해줘야 할 일이 있네. 석대원은 제갈휘가 무엇을 물으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말씀하시지요. 근자에 혈랑곡도들이 일으키는 만행... 자네와는 무관한 일인가? 물론입니다. 제갈휘는 석대원의 눈을 응시한다. 석대원의 눈빛은 고요하다. 제갈휘는 빙긋 웃는다. 그래. 석대원은 조금 의아한 눈으로 제갈휘를 바라본다. 믿으십니까? 물론! 제 말 한 마디로요? 뭐가 더 필요할까? 그래도... 제갈휘는 석대원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준다. 나는 어지간히 안목이 없는 우부(愚夫)이지만, 세상에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바로 거짓말을 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과,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지. 자네는 죽었다 깨어나도 전자는 될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야. 하하! 제가 어리석다고 은근 슬쩍 욕하시는군요. 그런 셈인가? 하하! 제갈휘와 석대원은 크게 웃는다. 오늘 처음 만난 그들이지만, 그들에게는 닮은 점들이 많았다. 출신으로부터 오랫동안 배척받은 상처, 그래서 깊어진 뼈저린 외로움...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지닌 어둠 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을 극복하고 탁 트인 밝은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신념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 건배! 소리나게 잔을 부딪히는 그들의 마음은 지음(知音)을 만난 유쾌함으로 가득했다. 그들의 즐거움을 깨뜨린 것은 주루에서 일하는 점원이었다. 저, 이것은 중추절을 맞이해서 저희 주루에서 특별히 드리는 것입니다. 그가 가져온 접시 위에는 둥그런 모양의 월병(月餠 : 중추절에 먹는 보름달 모양의 떡)이 여남은 개 올려져 있다. 고맙네. 제갈휘는 품속에서 운자 몇 푼을 점원에게 쥐어 준다. 점원은 뜻하지 않은 횡재에 직각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점원은 조심스럽게 제갈휘의 옆자리를 바라본다. 여기 주무시는 손님은 소인이 방으로 뫼실까요? 제갈휘와 석대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아진다. 그 곳에는 탁자에 머리를 처박고 자고 있는 양진삼의 처량한 모습이 있다. 죽을 맛을 보여 주겠노라고 거품을 물던 동창의 부영반은, 독하디 독한 백건아 석 잔 이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二十一章 潛龍爺 (1) 꽃가지... 망울이 열리지 않은 연녹색 봉오리를 머금은 꽃가지 사이로 좁다란 소롯길이 하나 보 인다. 습기를 머금은 땅 위로 조그만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아이는 앙증맞은 노란 화복 을 입은 열두어 살 가량의 동자였다. 귀여운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채로 걸음을 바삐 재촉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나 보다. 좁다란 소롯길을 따라가던 동자의 눈은 좌우로 만발한 국화 화원을 살피다가, 어느 한 곳에 머물어 반짝 빛을 낸다. 아이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국화와 같은 노란 덩어리가 웅크리고 있다. 노야(老爺)! 빨간 입술이 벌어지며 병아리가 삐약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반쯤 핀 꽃잎들을 흔든다. 웅크리고 있던 노란 덩어리가 움찔하더니 천천히 일어선다. 노란 장포를 입은 백발 노인이다. 오! 해아(海兒)로구나. 그래, 무슨 일이냐? 허리를 핀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불그레한 안색과 둥글둥글한 얼굴이 좋아 보인다. 태원부(太原府)에서 손님들이 오셨어요. 그래? 몇 분이나 오셨느냐? 작은 어르신과 문 선생님, 두 분입니다. 노인은 화단으로부터 천천히 걸어나온다. 본디 노란색은 밝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그런 까닭에 노란 옷과 어울리는 머리가 허연 노인은 보기 드물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국화 화원에서 걸어나오는 이 뚱뚱한 노인에겐 놀랍게도 노란색 장포가 아주 잘 어울린다. 그 이유는 노인으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묘한 분위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의 정체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밝음 이나 즐거움 과 같은 종류일 것이다. 군영(君永)이는 왜 안 왔지? 노인은 손에 든 전지(剪枝) 가위를 동자에게 건네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2) 1421년. 성조 영락제의 황명(皇命) 하에 금릉으로부터 북경으로 천도(遷都)가 이루어졌다. 그때부터 새롭게 제국의 도읍이 된 북경에는 고관대작(高官大爵)들과 만금거상(萬金巨 商)들의 고래등 같은 저택들이 구름처럼 모이게 되었다. 저택의 규모나 크기로 본다면 남팔대로(南八大路)의 끝에 자리한 강북 제일의 거부인 금적산(金積山) 왕고(王庫)의 보운장(寶運莊)을 따라갈 건물이 없을 것이다. 강북의 돈줄기 중 이 할 이상을 움켜쥐고 있다는 거상 왕고의 저택을 능가하는 건물은 오직 한 곳, 황궁인 자금성(紫禁城) 뿐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신비스러운 저택을 찾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북경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야(李老爺)라고 불리는 노인이 살고 있는 국림장(菊林莊) 을 꼽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림장은 희귀한 흑단목(黑檀木)으로 만든 정문과 담장 위를 빙 두른 구리 기와, 페 르시아산 보라색 담장이 덩쿨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같 은 우아한 풍치를 안겨 준다. 국림장의 주인인 이노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노란 장포에 사인교자를 타고 행차하는 이노야를 보고, 혹자는 은퇴한 거물급 관리라 고 했고, 혹자는 유림(儒林)을 이끄는 대학자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모든 얘기들은 오직 추측일 뿐... 가을이 되면 담장 밖으로 진한 국화향을 피워내는 국림장의 육중한 대문은 오늘도 단 단히 닫혀 있다. * * * 국림장 중앙에 있는 가산(家山). 나무들이 심어진 모양이나 암석들의 배치가 정연하다. 아마도 많은 인부들의 손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인공산인 듯하다. 가산의 정상에는 반경 삼사 장 정도의 평평한 공지가 있고, 공지 한 가운데에는 네모 반듯한 돌탁자가 놓여져 있다. 팔월 열이레의 밤은 아직 채 이지러지지 않은 환한 달빛 때문인지, 조금도 어둡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얀 달빛 아래 한 줄기 향 연기가 환상처럼 피어 오른다. 해와 달과 모랫바람, 물로부터 받은 생명, 다시 처음의 세계로 돌아가셨으니, 용자 (勇者)여! 현자(賢者)여! 후손들을 살피소서! 술사들의 주문과 같은 제문(祭文)이 깨끗한 밤공기 속으로 울려퍼진다. 제문을 읽은 사람은 검은색 제의(祭衣)를 입은 노인, 국림장의 주인인 이악(李嶽)이다. 용자여! 현자여! 후손들을 살피소서! 이악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흑의인이 한 목소리로 제문을 따라 외고는 허리를 숙인 다. 마유주(馬乳酒)를! 이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곁에 서 있던 조그만 소동이 검게 칠한 나무잔을 그 에게 내민다. 노인은 돌탁자 위에 잔을 기울인다. 걸죽한 유백색의 액체가 탁자의 울퉁불퉁한 표면에 잠시 고이고, 다시 땅으로 스며들 어간다. 영리목극(瓔利穆克) 차아호열(且兒互悅) 야율세세항(耶律歲歲行)... 구리 향로 앞에 서 있던 노승 하나가 독경(讀經)을 시작한다. 그가 읊는 경전은 중국의 불경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라마식의 복장을 한 승려임을 안다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독경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악과 두 명의 흑의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의 독경을 듣고 있다. 세항(歲行) 궁열불호(宮悅佛護). 라마승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하고는 허리를 굽힌다. 독경이 끝난 것이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돌아서며 이악을 향해 합장을 해 보였다. 빈승의 미천한 공덕으로 대영웅의 명복을 빌게 해 주시니, 정말 고맙소이다. 라마승의 한어(漢語)는 말끝이 약간 딱딱하게 끊어지는 것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가 없다. 허허! 감사는 오히려 제가 드려야겠소. 천하의 데바님께서 가제례(家祭禮)를 주관해 주시다니, 가없는 영광이오. 이악은 라마승, 데바의 합장한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숙인다. 명(明)아! 강(康)아! 예. 이악의 부름에 뒷전에 서 있던 두 명의 흑의인이 공손히 대답한다. 이악은 그들에게로 몸을 돌린다. 둥근 얼굴. 둥근 코. 둥근 체구. 이악에게선 마치 원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풍겨져 나온다.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꽉 찬 보름달. 그런 끊이지 않는 부드러움이 그의 전신에 어려 있는 것이다. 그래... 오늘은 갑자기 이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해(海)아! 차를 이곳으로 날아다 주렴. 예, 노야! 해아라고 불린 소동은 총총히 산을 내려간다. 네 사람은 주위에 마련된 나무 의자에 몸을 앉힌다. 이악은 라마승을 다시 바라본다. 아두랍찰(阿斗拉刹)에서 북경까지는 만 리가 넘는 길,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각주의 도움이 없이 소승들이 어찌 중원을 밟을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애쓰셨소이다. 라마승, 데바는 물빛이 감도는 그윽한 눈으로 이악을 마주본다. 눈가와 입꼬리에 가늘게 잡혀있는 무수한 잔주름을 제외한다면, 중년 정도로 여겨질 정정한 모습이다. 일흔이 넘는 나이였지만, 언제나 평명(平明)을 잃지 않는 정신 수양이 그를 그렇게 보 이게 만드는 것이다. 너희들은 어서 인사를 올려라. 아두랍찰의 최고 원로인 팔부중(八部衆), 그 중에서도 천(天)의 자리에 계신 활불 데 바님이시다. 이악의 소개에 두 명의 흑의인은 앉았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진작에 나눴어야 하는 인사였지만, 초저녁 무렵부터 시작된 제례가 너무 엄숙한 탓에 이제서야 소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중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비각의 이명(李明)이라 합니다. 검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호한의 초로인의 인사에 이어, 고아한 풍모의 중년 문 사가 허리를 숙인다. 문강(文康)이라 합니다. 이명과 문강. 태조 때부터 이어진 황제 직속 감찰기관인 비각의 일(一)비영과 이(二)비영이다. 데바 역시 몸을 일으켜 답례한다. 두 분의 이름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니 빈승, 평생에 광영이 아닐 수 없군요. 이때 소동이 다과상을 날라왔다. 따듯한 차는 귀뚜라미가 쓰슬거리는 가을 밤과 잘 어울렸다. 이악과 데바 등은 자리에 앉아 담소를 시작하였다. (註 : 팔부중(八部衆), 혹은 천룡팔부중(天龍八部衆)은 <법화경(法華經)> 등의 대승불교 경전에 나오는 불법을 수호하는 여덞 신을 가리킨다. 데바(Deva)는 그중 첫번째 신으로서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천계에 거주하는 33천 중 제석천(帝釋天, Indra)을 가리킨다.) 오이랏의 대공께선 안녕하신지요? 대공 건강이야 원래 유명한 것 아닙니까. 데바는 웃으며 대답한다. 귀비마마와 왕 태감께 드릴 선물은 준비하셨소이까? 마치 음모를 얘기하듯 이악의 목소리가 나직해진다. 물론입니다. 왕 태감께는 따로 태서(泰西 : 西洋)에서 구입한 진귀한 향수를 준비했지요. 이악은 실소를 금치 못한다. 당금 황제인 영종(英宗)의 총애를 받는 이유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 는 태감(太監) 왕진(王振)에겐, 성기가 거세된 중성(中性)답게 괴상한 취미가 있었다. 바로 향수를 수집하는 것이다. 그 집착력은 이미 취미의 도를 지나쳐, 편집광(偏執狂)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이다. 모든 것은 대공의 깊은 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공께선 이번 일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계시죠. 허허, 세월은 참으로 빠르군요. 그 어리던 공께서 이제는 천하를 향해 전략을 세울 대장부로 자랐으니... 이악의 눈 앞에 지독히도 못생긴, 하지만 별빛같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소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십여 년 전, 몽고의 성지(聖地)인 부르칸 산(山)에서 만난 에센의 얼굴이었다. * * * 서달(徐達)의 북정(北征)으로 장성 밖 고비 사막 너머로 쫒겨간 몽고족은 타탈 부 (部) 카라코름에 북원(北元)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말이 좋아서 국가이지, 그들은 징기스칸 이전의 유목생활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태양과 초원의 아들임을 자처하던 용맹스러운 몽고족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위해 처 절한 재기의 몸부림을 쳤다.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의 아들 소종(昭宗)과 그의 아우 톡스티무르는 주원장 의 지속적인 토벌에도 굴하지 않고 타탈을 지켜 나갔다. 몽고의 힘은 점차 강해졌다. 그들의 뒤를 이은 본야시리 대에 와서는 그 힘이 명의 국경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기 도 한 것이다. 하지만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몽고에게 결정적인 악운(惡運)이 발생하게 되었다. 후세 사가들에 의해서 전황(戰皇)이라 일컬어진 성조 영락제의 즉위가 바로 그것이었 다. 연왕(燕王) 시절 타고난 무장으로 이름을 드날리던 영락제는 몽고의 재기를 결코 용 납하지 않았다. 1410년에서 1423년 사이 이어진 다섯 차례의 친정(親征 :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원 정)은 타탈 부를 회복 불능의 상태로 유린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막을 천 년 간이나 떠돌며 유목 생활을 해 온 몽고족은 쇠가죽처럼 끈질겼 다. 영락제의 매서운 채찍 아래 타탈부가 쇠퇴하자, 이번에는 서북쪽의 오이랏 부(部)가 서서히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오이랏의 융성에는 타탈과는 다른 많은 행운이 따르기도 했다. 뭐니뭐니해도 몽고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영락제가 1423년 타탈의 마지막 원정 도중 유목천(楡木川)에서 병사한 사실이 오이랏의 발흥에 가장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 다. 영락제에 이어 명 제국의 4대 황제로 즉위한 인종(仁宗)은 제위 2년을 넘기지 못했고, 이어서 즉위한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는 화려한 외국 원정 보다는 내실을 위주로 한 내치(內治)로 눈을 돌렸다. 이런 일련의 정세 변화는 오이랏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이랏의 융성에는 영락제의 사망에 못지 않는 다른 원인이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한 한 명의 걸출한 지도자, 쿠빌라이칸 이후 최고의 영웅으로 불 리는 에센의 등장이다. 열 아홉에 오이랏부의 수령이 된 에센은 가장 먼저 몽고의 민족 종교와 다름없는 라 마교를 융성시켰다. 14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밀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사원의 건립은 흐트러진 부족들을 단결시키는데 큰 효과가 있었다. 존폐의 위기에 처했던 아두랍찰을 위시한 팔십일 종의 밀종이 되살아난 것도 그 시기 인 것이다. 또한 동터키스탄을 점령, 천산북로(天山北路)라고 알려진 비단길을 확보한 것은 그의 손꼽히는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비단길을 통해 동서양의 교역을 전담해 오던 회회족(回回族 : 위그르 족)들은 에센에 게 막대한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수입은 오이랏을 대륙의 어떤 나 라보다도 부유한 나라로 만들었다. 급기야 1440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대륙의 주인인 명나라 역시 에센의 눈치를 보지 않 고서는 서방 무역을 할 수 없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악은 십여 년 전인 선종 8년(1432년), 사신의 일원으로 오이랏을 방문한 적이 있 었다. 일행에서 떨어져 징기스칸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부르칸 산에 참배하러 갔던 그는 그곳에서 사슴 사냥을 하던 소년 에센을 만났던 것이다. 오늘은 제 부친의 기일(忌日)이고 하니, 아이들에게 몇 마디 해 줄까 합니다. 혹 데바님께서 지루하실까봐 걱정이군요. 원, 별 말씀을... 이 각주의 가르침이라면 빈승도 배우는 것이 많을 겁니다. 저도 경청하지요. 이악은 데바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인다. 그리고 검은 수염이 턱밑으로 길게 내려온 초로인의 부리부리한 눈동자 위에 자신의 부드러운 눈길을 올려 놓는다. 명아! 너의 성(姓)이 무엇이냐? 제 성은 이(李) 입니다. 그래, 너의 성은 이 이다. 이악은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묻는다. 하지만 네 조상들의 성은 무엇이냐? 선조들께서는 야율(耶律) 을 성으로 쓰셨습니다. 그러면 너는 앞으로 어떤 성으로 살아갈 것이냐? 태조(太祖)께서 가문에 하사하신 자랑스러운 이 씨로 살아갈 것입니다. 검은 수염의 사내, 이명의 눈빛은 자신감에 가득차 있고, 그의 대답은 조금의 망설임 이 없이 당당하다. 이악의 둥글둥글한 얼굴로부터 미소가 사라진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석탁(石卓)을 바라본다. 석탁의 우묵한 곳에는 아직도 마유주가 고여져 있다. 흐음. 잠시 후 그의 입에선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아마도 내 아버지, 야율공께서는 그러한 너의 대답을 탐탁치 않게 여기실 것이다. 이명은 아무 말이 없다. 이악은 말을 계속 이어나간다. 네 아비인 나 역시, 네가 선조들의 혈통을 외면하고 한족(漢族)으로 살아가는 것이 달가운 것은 아니란다. 본디 식물이든 인간이든 그 타고난 뿌리가 소중한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노인의 통통한 볼에 다시 자그마한 우물이 만들어진다. 네게 야율이라 성을 강요할 생각은 없단다. 이명은 시선을 떨군 채 묵묵히 이악의 말을 기다린다. 하기야 내가 이악이라는 한족의 이름으로 살아온 것이 벌써 팔십 년이 넘는데... 중원에서 태어나 중원의 학문과 풍물이 몸에 밴 너에게 새삼스럽게 몽고의 혼을 얘기 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따지고 보면 네 육대조이신 야율초재(耶律草宰)공께서도 거란인이셨으니, 아마도 혈통 의 순수성이란 우리 가문과 거리가 먼 가치가 아닌가 싶구나. 송구스럽습니다, 아버님. 이명은 아버지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짙은 회한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초재공이 거란인과 몽고인의 과도기를 살았다면, 그의 아버지 이악은 몽고인과 한인의 과도기를 살아온 것이다. 네 할아버지, 야율사(耶律泗)공에 대하여 얘기를 해 주마. 그분에 대한 얘기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누누히 하려했지만, 아직도 못다한 얘기들이 많단다. 이 자리에 군영이가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이 얘기들은 너희들이 잘 기억했다가 훗날 후손들에게 꼭 전해 주기를 바란다. 예. 이악은 차를 한 잔 머금는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마치 앞으로 이어질 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정리하기라도 하듯. 공께서 타계하신 지도 벌써 사십칠 년이 되는군. 그분을 이곳에 장사지낼 때 명이 너는 열 살도 채 안 되었고, 강이는 아마 첫돌을 막 지낼 무렵이었을 거야. 그때 명이 네 눈에는 고인의 시신을 산 위의 돌탁자 위에 버리는 아비가 이상하게 보 였겠지. 아닙니다. 소자는 그 당시에도 풍장(風葬)이 몽고의 오랜 관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우리 몽고인들은 시신을 땅에 묻지 않는단다. 특히 용사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하지. 용사의 시신이 태양 아래서 흙으로 되돌아가고, 새들과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어쨌거나 그 분께서는 공교롭게도 태조께서 붕어(崩御)하시고 사흘 만에 타계하셨지. 우리 가문과 주씨와의 인연이 이리도 질기니... 전생에 무슨 업이라도 쌓인 탓일까? 후후... 밤벌레 소리가 더욱 높아진다. 노인은 말을 계속한다. 오늘은 공이 가장 아끼셨던 두 사람의 천재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다. 아마 너희들도 처음 듣는 얘기일 것이다. 그 두 사람은 중원인이었으며, 모두 비각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는 비영사(秘影 社)의 일원이었단다. * * * 여산백련교를 괴멸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비영사. 비영사는 사주(社主)인 야율사를 포함하여 사십구 인의 절정고수들로 이루어져 있었 다. 그러한 사십구 인의 고수들 중에는 다수의 한인들도 포함되 있었지만, 조직 자체가 워낙 신비한지라 그 구성원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원황실에 반기를 들던 무림방파를 감시, 교란시키고 요인을 암살하는 것이 주 임무였 던 비영사... 하지만 그 사십구 인의 요원 중 어리디 어린 한인 소년 두 명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을 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한 명은 천민의 아들로 태어나 강호를 유랑하다가 야율사의 눈에 뜨여 거두어진 석무 경(石武慶), 또 다른 한 명은 모사들의 집단인 귀문(鬼門)의 후예인 운리학(芸理鶴)이 라 하였다. 석무경, 석 형님은 나보다 십 년 연상이었지. 홍안의 소년 시절, 그는 나에게 있어서 세상의 누구보다도 위대했던 우상이었지. 아마 나는 아버지보다도 그를 더 따랐을 거야. 아버지께서도 입버릇 처럼 말씀하셨지. 내게 무경과 같은 자질이 있다면, 백련교수 서문호충과 신주소가주 소대진이 한꺼번 에 달려들어도 조금도 무섭지 않을 천하제일인이 되어 있을 거다 라고... 하하! 젊은 시절, 몽고 제일의 기재라고 칭송받던 아버지이셨단다. 헌데 그런 아버지께서 하신 석무경에 대한 평가는, 이미 평자(評者)와 피평자(被評者) 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지. 그만큼 무학의 대한 석무경의 자질은 대단한 것이었단다. 이상하군요. 석무경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봅니다. 말없이 앉아있던 사내, 청수한 문사풍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바로 비각의 군사인 이비영 문강이다. 아마, 그랬을 거야.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천하에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나도 그 이름을 입 밖으 로 꺼낸 것이 몇십 년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이니... 하지만 이제는 말을 해야할 때가 온 것 같구나. 때라 하오시면...? 그의 후예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지. 언제나 고요함을 유지하던 문강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렇다면 조직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부상된 그 가 석무경의 후예란 말인가? 여산백련교가 무너지고 서문호충이 사망한 후, 비영사는 자연스럽게 주원장이 세운 명 황실과 유착하게 되었다. 주원장은 내심 비영사와 같은 비밀조직을 간절히 원해 왔었다. 무릇 모든 제국의 시작이 그러하듯, 건국 초에는 피비린내나는 숙청과 공포정치가 필 요했기 때문이다. 비영사는 그런 주원장에게 있어서 입속의 혀와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비각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개편되어, 수십 년 간 익혀 왔던 능력을 십분 발 휘하였다. 대내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호시탐탐 준동하려는 지방 호족들을 억눌렀으며, 개국공 신들을 숙청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드러난 석무경과 운리학의 능력은, 감춰진 옥이 빛을 발하듯 가히 발군이라 할 수 있었다. 헌데, 각내의 기록에는 왜 그들의 이름이 없습니까? 그것은 아버지께서 모두 삭제하셨기 때문이지. 거기에는 모종의 사건이 있었어. 비각으로는 실로 크나큰 손실일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이지. 1393년, 개국공신인 남옥(藍玉)과 호유용(胡惟庸)을 제거하는데 큰 공을 세운 야율 사는 주원장으로부터 이(李) 라는 중화성(中華姓)을 하사받았다. 이른 바 <호남(胡藍)의 옥(獄)>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대장군으로써 강호의 무인들과도 친분이 돈독하던 남옥의 처형은 무림에 큰 반 향을 불러일으켰다. 무림의 뭇 방회들이 노골적으로 관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련교와의 전례로 미루어볼 때 이것은 주원장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그는 궁리 끝에 엄청난 계획을 세우게 되었으니, 골치 아픈 도적들이 조직적으로 운집 한 강호, 그 자체를 말살해 버린다는 계획이었다. 주원장의 지시를 받은 야율사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밀종 출신인 그에겐, 서장밀교의 중원 진출이라는 크나큰 염원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다가온 것이었다. 중원의 모든 방파가 문을 닫는다면, 임자가 없어진 그곳에 밀종이 들어서는 것은 손 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었다. 이러한 주원장과 야율사의 화려한 꿈을 깨뜨린 자는 바로 석무경과 운리학이었다. 석무경과 운리학은 비영사에 가입할 당시 모두 어리디 어린 소년들이었다. 명이 건국된 1368년, 석무경의 나이는 17세, 그리고 운리학은 그보다 두 살 어린 15 세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야율사는 아버지와 마찬가지의 은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민족을 따지기에 앞서 야율사의 명령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충 실히 수행해 왔다. 하지만 그들은 성인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능히 돌아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자신의 수족같던 신하를 무참히 숙청하는 주원장의 잔인함, 밀종의 중원 진출을 위해 중원무 림을 말살하려는 야율사의 야심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백방으로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구르기 시작한 거대한 음모의 마차를 정공법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주원장의 암살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이야기로군요. 이명이 말했다. 이악은 고개를 끄떡인 뒤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물론 그 일은 사전에 발각되었지. 두 사람의 힘만으로 황제를 암살한다는 것은, 비록 그들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 도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야. 석무경과 운리학의 계획은 시도하지도 못한 채 허물어졌다. 그들의 움직임이 공교롭게도 그들이 속한 비각의 정보망에 걸린 것이다. 야율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시국은 하루하루가 칼날 위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그런 시국에 황제 암살이라니! 물론 야율사는 석무경과 운리학의 죄목을 밝히고 그들을 치죄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황제 암살 기도라는 죄는 그들 둘의 목숨과 바꾸는 것만으로 끝날 성질의, 그 런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굶주린 늑대 같이 상대방의 헛점만을 노리던 수많은 정객들은 야율사와 비각마저도 그 죄의 희생양으로 만들려 할 것은 겪지 않고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 결국 석무경과 운리학에게는 관작을 이용한 수뢰의 죄목이 씌워졌고, 그들이 태형 삼 십 장에 유배형을 당하는 것으로 모든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들이 귀양길에 오르는 날, 비각의 몇몇 수뇌들은 자객을 보내 그들을 척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유배지에서 곱게 여생을 마치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 기 때문이었다. 그때 야율사는 쓰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무경과 학이 함께 있다면, 내가 직접 간들 그들을 죽일 수 없을 것이오.> 이 사건은 야율사의 지시에 의해 곧장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었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지금, 미수로 끝난 황제 암살사건의 전모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내가 모든 대업을 이어받게 되었지. 이악은 그때 일을 회상하듯 고개를 잠시 떨군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시선이 아들인 이명에게 옮겨진다. 명아, 너는 나의 가장 큰 강점이 무엇인 줄 아느냐? 난데없는 질문에 이명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단호한 어조로 대답한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방면에 있어서 누구보다 강하신 십전(十全)이십니다. 소자는 하늘 아래 아버님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확고한 믿음이 담겨져 있었다. 하하, 이 아비를 그렇게까지 칭찬해 주니 기분은 나쁘지 않구나.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야. 네가 석무경과 운리학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속단을 내리는 것이지. 무학에 대한 나의 재질은 석무경의 절반도 미치지 못할 것이고, 지모 역시 운리학에 비하면 어림없다고 할 수 있지. 나는 자신있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단다. 왜냐하면 이 아비는 범인(凡人)에 불과하고, 그들은 하늘이 내린 천재니까. 하지만 하늘이 범인인 내게 주신 단 한 가지의 비범함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살 수 있었지. 이악은 잠시 말을 멈춘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이악의 입으로 모아진다. 이윽고 이악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그것은 인내심이야. 인내심. 이악은 자신있게 자신의 인내심이 천하제일임을 이야기한다. 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인다.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회를 노렸지. 영락제께서 즉위하신 해, 대를 이어 내려온 주씨와 야율씨의 소원인 무림 평정은 이루 어질 뻔했다. 서문숭의 등장은 다시없는 기회였으니까. 사실 나 역시 여산백련교수 서문호충의 손자인 그가 등장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지. 맞습니다. 천선자라는 신비인이 등장하지 않았던들, 무림은 수라장으로 변했을 것이고 소철과 서 문숭은 양패구상했을 겁니다. 문강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보다 조금 전인 태조 말년, 밀종이 중원 진출을 시도한 바 있었지만, 선발대가 소 철의 신무전에 의해 저지당하는 바람에 무산된 일이 있었지. 그리고 사실 그것은 무모한 시도였어. 그렇지 않소이까, 데바님?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데바는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각주의 말씀이 맞소이다. 아마 소철의 장벽을 넘어섰다고 한들, 제2, 제3의 벽이 끊임없이 등장했을 겁니다. 중원 무림의 잠재력은 그만큼 무섭지요. 저도 당시 희생된 교도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경거방동하면 안 된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으니, 교의 대계를 위한 어 쩔 수 없는 밑거름이라고 생각해야죠. 이악은 다시 이명과 문강을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서문숭의 등장은 본각으로선 더할 나위없이 좋은 기회였던 것이야. 하지만 그것이 곤륜지회와 함께 그리도 간단히 무산되다니, 세상 일이란 역시 어려운 법이야. 아버님, 그후 석무경과 운리학의 소식은 없었습니까? 이명의 물음에 이악의 얼굴이 굳어진다. 돌연 과거의 어느 장면이 생각난 것이다. 이 아비는 대담한 사람이란다. 좀처럼 무엇에 놀라거나 겁먹는 일이 없지. 그런 내가 무엇 때문에 사십여 년이란 긴 세월을 허비하며 혈랑곡을 찾는데 시간을 소 비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 말해 주마. 이악의 말에 이명과 문강은 가볍게 긴장되는 것을 느낀다. 그들이 여러 차례 품었던 의문이 이제 밝혀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곤륜산에서 나와 소철, 서문숭, 그리고 혈랑곡주 이 네 명이 만났지. 그때 나는 심장이 멎을 뻔했단다. ...? 혈랑곡주, 비록 늑대탈과 혈포로 정체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과 목소리는 눈에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지. 그는 다름 아닌 석무경이었다. ...! 이야기를 듣던 세 사람은 이악의 말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토록 신비에 가려져 있던 혈랑곡주. 그는 비영사의 사십구 비영 중 하나인 석무경이었던 것이다! 석무경! 내 젊은 시절의 우상! 그는,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인이었다. 곤륜산에서 그를 만난 나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너희들은 내가 혈랑곡의 존재 여부에 왜 그리 신경을 쓰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느 냐? 노인의 얼굴은 격동으로 붉게 상기되었다. 일렁이는 눈으로 이명과 문강, 두 사람을 쓸어보던 노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내가 혈랑곡을 그토록 찾아 헤맨 이유, 그것은 바로 혈랑곡이 비각을 상대하기 위해 석무경과 운리학이 만든 조직이기 때문이야. 싸늘한 바람이 밤공기를 타고 스친다. 이명과 문강은 원인모를 위압감 속에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답답한 침묵이 가산 위로 무겁게 내리깔린다. * * * 자, 이제 강이의 이야기를 듣자꾸나. 오랫만에 네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겠지? 이악의 말에 정신을 차린 문강은 황급히 입을 연다. 예! 요사이 각의 사업에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악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한다. 석대원이란 아이가 혈랑검법을 사용한다는 얘기는 얼마 전에 들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석무경의 후예이겠지. 역시... 문강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일 외에도... 강호에서 활동하던 형제들이 많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래? 예... 살해된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문강의 말이 의외였던 듯 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다. 그리고 경친왕(景親王 : 영종의 동생, 훗날 代宗)과 동창 영반인 하도지(河道之)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오군도독부 사인사마(四人司馬)의 수령인 우겸(于謙) 역시 그들과 활발히 접촉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미 짐작했던 일이야. 하지만 아직 동창에게는 대세를 좌지우지할 힘이 없어. 우리에겐 귀비마마와 왕태감이라는 강력한 바람막이가 있으니까... 대내로부터의 정치적인 지원은, 강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문강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데바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말하였다. 분명한 것은, 강호에서 활동할 인원이 절대 부족합니다. 지금 본각은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문강의 어조는 단호하였다. 문강의 예리한 시선을 받은 데바는 고개를 끄떡인다. 이번에 팔부중을 포함한 밀교의 이백여 정예가 모두 중원에 도착했소이다. 중원에서의 제반 전략 전술이야 문 선생께서 훨씬 더 뛰어나실 터이니, 그들의 지휘권 을 비각으로 이양하지요. 문강은 빙긋 웃는다. 외람되지만, 소생은 그 말씀을 기대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활약하던, 패륵노사를 비롯한 신승들은 본각의 크나큰 힘이 되어왔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입경한 분들과 힘을 합친다면 반드시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데바의 물빛 맑은 눈이 일순 어두워진다. 몽고의 쇠락과 함께 밀종이 서장으로 쫒겨간 것도 벌써 한 세기가 가까와 지는군요. 빈승은 원나라 때와 같은 중토 정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전쟁은 너무나도 많은 피를 원하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오이랏 부에는 그 정도로 강한 힘이 없고요. 빈승은 단지 팔사파(八思巴 : 원 세조 때 국사로 봉해진 라마교 고승) 법왕을 비롯한 전대 달라이라마(註 : 티벳어로 달라이는 바다, 라마는 높은 사람(上人)을 가리킨다. 달라이라마는 덕높은 고승이란 뜻)들의 가르침을 중토 구석구석 전파할 그날만을 기다 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날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악의 음성이 데바의 뒤를 잇는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팔십사 년을 끈질기게 기다려 온 강인한 남자의 세월이 담 겨져 있다. 二十二章 侵入 (1) 천녀(天女)의 거울이었다고 전해지는 동정호(洞庭湖). 호수 둘레의 길이만 해도 수천 리에 달해, 호수라기 보다는 육지 안의 작은 바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동정호의 북쪽, 군산(郡汕)의 호반에도 밤이 내렸다. 사위는 고요한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저편에는 스물엿새 그믐달이 걸려 있다. 파리한 달빛이 일렁거리는 호반 위로 한 척의 배가 물결을 가르며 지나간다. 갑판 위에 우뚝 서서 아련한 수평선을 바라보는 사내... 밤하늘과 같은 칠흙 같은 옷을 입고 있다. 밤바람이 차게 느껴지기라도 한 것일까. 바위같이 단단해 보이는 어깨 위에는 검은색 피풍의(避風衣)가 둘러져 있다. 석 현질(石賢姪)! 선실의 휘장이 열리며 한 명의 노인이 갑판으로 걸어나온다. 가슴에 금실로 울부짖는 사자를 수놓은 자주색 장포를 입은 노인... 석년 강동삼수(江東三秀)의 대형으로 강호에 혁혁한 협명(俠名)을 떨치던 사자검문주 방령이다. 노인의 허리에 걸린 금빛 장검은 그의 상징과도 같은 옥명사자검(玉冥獅子劍)... 휘이잉-- 한 가닥 싸늘한 바람이 노인의 하얀 머리카락과 수염을 쓸고 지나간다. 바람이 찬데, 안에 있지 않고? 괜찮습니다. 오랜 더위 끝의 바람이라 그런지 꽤나 상쾌하게 느껴지는군요. 그래? 역시 젊음이란 좋은거야. 무더운 여름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바람이 차가워지면 팔다리부터 쑤셔오니... 이젠 나도 송장이 다 됐어. 원, 백부님께선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흑의무복을 입은 사내, 석대문은 웃음으로써 얼버무린다. 하지만 불행히도 방령의 말은 사실이었다. 옛날 석대문에게는 방령만큼 무서운 사람도 없었다. 당시의 방령은 한 번 노하면 흑염과 흑발이 모두 하늘을 향해 곤두선 채 맹수의 포효 (咆哮) 같은 소리로 고함을 치곤 했었다. 그럴 때면 그의 아버지인 석안과 숙부인 양무청조차도 방령의 독선적인 위엄에 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코흘리개였던 석대문이 이 사자 같은 백부를 어찌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세월의 그의 팔다리에서 힘을 빼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독선과 위엄마저도 뒤흔들어 놓았다. 이제 방령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이 성장해버린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며, 삭 신의 버거움을 푸념하는 그런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나저나 자네 몰골도 가관이야. 아무리 집 떠난 지 오래라고는 하지만 얼굴이 그게 뭔가? 석대문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본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수염은 이젠 북실북실하게 잡힐 정도로 자라 있다. 입가에 쓴웃음이 감돈다. 여름 내내 바깥에서 뛰어다녔으니 그의 얼굴도 많이 탔을 것이다. 거울을 본 지도 제법 오래되었지만, 보나마나 산도적 상판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입꼬리를 비튼다. 방령은 그런 석대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일렁이는 호수 위로 시선을 돌린다. 혼잣말과도 같은 나직한 음성이 노인의 입술 사이에서 불쑥 나온다. 긴장되나 보군. 자네답지 않게 눈빛이 흔들리고 있어. 하하! 그렇습니까?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사실 석대문은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린 시절, 지표 밖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칡줄기를 당겨 뜻밖에도 팔뚝만큼 큼직한 뿌리가 따라나왔을 때 느낄 수 있는 흥분... 절반의 기대와 절반의 두려움. 지금 석대문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적의 정체를 알게된 후 첫 출전이니, 아무리 자네라고해서 긴장되지 않을 수 없겠지. 검을 놓은지 오래인 이 늙은이도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마당인데... 방령은 검집을 두드리며 말한다. 백부께선 아직 정정하십니다. 아마 검이 뽑히는 날에는 예전처럼 뇌성벽력이 울리겠죠. 옛끼, 이 사람! 어디서 늙은이 보비위하는 법은 배워가지고! 하하! 마치 웃음으로서 긴장을 풀려는 듯, 그들은 크게 얼굴을 풀어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얼굴이 차가와진다. 방령이 말한 적 . 그것은 개방의 장로 위백에게 요법(妖法)을 걸어 양무청을 납치한 적 이며, 그리고 흑수마객 남궁월을 보내어 우근을 죽이려 했던 적 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적 의 정체는 너무도 의외로운 것이다. 저는 솔직히 죽삼랑(竹三郞)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군요. 하긴 워낙 간교한 계집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구만. 그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석대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문득 혈랑곡도들이 등장한다면 진정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노사부 운리학의 말이 떠올랐다. * * * 팔월 초에 벌어졌던 일조령(日照嶺)에서의 싸움은, 개방의 방주 우근과 사자검문주 방령, 강동제일가주 석대문 등 세 사람의 고수가 힘을 하나로 모음으로써 큰 어려움없 이 이길 수 있었다. 물론 이 편도 손해가 없지는 않았다. 관인으로 변장한 옥선비랑(玉扇肥郞) 모득(冒得)의 암습으로 방령의 아들 방기옥이 허 리를 다친 것이다. 그의 부상은 가벼운 것이 아니어서, 이번 출정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싸움이 끝난 뒤 개방의 소주분타에서 조사한 결과, 삼각풍 위백에게 약을 투여한 사 람이 그의 부인인 죽삼랑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 사실을 안 위백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절망에 빠졌다. 그는 늘그막에 새로 얻은 매력적인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우근의 일처리는 서릿발 같았다. 그는 죽삼랑이 의형인 위백의 처라는 사실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개방의 방주 자리에 앉아 있던 그는, 방도에 의해 타인인 양무청이 실종되었다는 사실 에 참기 어려운 수치를 느꼈던 것이다. 죽삼랑의 가녀린 몸 위로 모진 고문이 퍼부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근은 강호에서 묵시적으로 금기시하는 오독최혼(五毒催魂)이나 절백침 (絶魄針) 같은 고문을 시전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죽삼랑의 요염한 교구(嬌軀)는 곧 넝마처럼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그것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오죽했으면 방령과 같은 노강호마저도 눈살을 찌푸리고 자리를 피했을까. 그 자리에 위백이 없었던 것은 그를 위해서 매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방(大幇)을 이끄는 방주가 필요악(必要惡)으로 갖추어야만 하는 비정함. 그는 그러한 비정함의 전형(典刑)을 보여 주고 있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은 죽삼랑을 체념하게 만들었고, 체념은 굳게 닫혔던 그녀의 입 을 열게 만들었다. 그때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말들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의 진술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一. 혈랑곡이란 세력은 실존하지 않는다. 혈랑곡이라고 자칭하며 강남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일단의 무리들은 대내의 감찰기구 인 비각에서 모종의 전략을 위해 안배한 세력이다. 二. 강호에 대한 비각의 공작은 수십 년 동안이나 이어져 왔다. 비각의 수뇌부 중 하나였던 매령귀사(賣靈鬼使) 사생(史生)이 밀교 출신인 것으로 미 루어, 비각은 서장 쪽과 모종의 선이 닿아있는 것 같다. 三. 비각의 수뇌 중에는 강호오마(江湖五魔) 중 거경(巨鯨) 제초온(諸草溫)과 흑수마객(黑 手魔客) 남궁월(南宮越)과 같은 대마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검왕 연벽제가 서열 삼위를 차지하고 있다. 四. 비각은 강호에 여섯 개의 전위세력을 두고 있으며, 양무청이 잡혀 있는 곳은 그중 한 곳인 철군방(鐵群幇)이다. * * *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요. 관부의 기관이 강호 무림에 대해 공작하려는 바가 무엇일까요? 석대문이 불쑥 묻는다. 그것은 소주를 떠난 이후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은 연벽제가 그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부친인 검군자 석안의 죽음도 비각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낸들 알 수 있겠나.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관과 무림이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은 오랜 관례였네. 서로 묵시적인 평행을 유지하는 것이 쌍방의 보존과 평화에 지름길이라는 생각 때문이 었지. 대명 초기에 일어난 여산백련교 사건이 그러한 불문율이 깨어질 때 어떤 참변이 발생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좋은 예가 될걸세. 비각의 이번 음모를 강호에서 알게 된다면 어떤 소란이 일어날지... 방령은 혀를 찬다. 으음... 세상은 점점 시끄러워진다. 북악남패(北嶽南覇)의 오랜 균형이 무너지고, 지리하리만치 길게 끌었던 평화가 깨어 지고 있는 것이다. 석대문은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름다운 밤, 바람은 상쾌하기만 하다. (2) 여기요, 석 가주! 숲 속에서 나직한 부름이 들린다. 석대문과 일행은 소리가 난 곳으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나즈막한 잡목림 아래에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여기저기를 기운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바로 개방의 고수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 늦었군요. 석대문은 그들 중 선두에 선 사내에게 다가갔다. 초라한 의복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금빛 천으로 허리를 묶은 사내, 철포결 우근은 반갑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잡는다. 아니, 우리도 방금 도착했소이다. 철군방에 대한 조사는 끝났소이까? 석대문의 뒤에 선 방령이 물었다. 예! 상(尙) 아우, 조사한 것을 이분들에게 알려드리게. 우근이 말하자 머리에 새끼줄을 감은 중년인이 앞으로 나온다. 개방의 용호풍운(龍虎風雲) 네 장로 중에서 호(虎)장로 상위지(尙偉知)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약간 쉰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한다. 우선 철군방에 대한 자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정호 일대에서 무림에 이름이 높은 문파로는 악양(岳陽)의 동방무장(東方武莊)과 군산의 철군방이 있었다. 그 중 철군방은 동정호 북부 일대를 이십여 년 간 장악하고 있는 방회였다. 요사이 특히 철군방의 이름이 유명하게 된 것은, 올초 오랜 숙적이던 동방무장을 격 파하고 남북동정(南北洞庭)을 평정한 일 때문이었다. 방파의 본거지는 동정호 가운데에 위치한 철군도(鐵群島)에 두고 있으며 현임 방주는 칠보살도(七步殺刀) 곽인(郭仁)이었다. 곽인이라는 위인에 대해서는 얘기들은 바 있소이다. 그는 열자루의 비도(飛刀)를 잘 쓴다고 하더군요. 석대문이 말하자 상위지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잘 쓰는 정도라면 별로 걱정할 문제가 아니지요. 그 인간이 칼을 던지는 솜씨는 아마 중원에서 손꼽힐 정도입니다. 동방무장의 장주, 육합신창(六合神槍) 동방곤(東方坤)이 그의 비도 아래 변변히 저항 도 못해보고 고혼이 되었다고 하지요. 칠보살도란 별호대로 동방장주도 일곱 발자국도 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곽인 외에도 철기(鐵騎), 집법(執法), 군마(軍魔) 등 삼당(三堂)의 당주가 제 법 한다는 축에 끼는... 곽인 정도의 위인뿐이라면 일은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어! 우근이 단호한 목소리로 상위지의 말허리를 잘랐다. 우근은 그다지 겸손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필부지용(匹夫之勇)에 사로잡힌 몽상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곽인의 무공은 우근이나 석대문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석 가주! 곽인이 이곳의 제일고수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요.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비각의 정예가 이곳에 지원되었을 경우라오. 일조령에서 달아난 자들이 머리가 있다면, 오독추가 모두 불 것이라고 예상치 못할 이 유가 없지. 그러면 우리가 이곳을 습격하리라는 것도 당연히 예측하고 있지 않겠소? 석대문의 미간이 좁아졌다. 우근의 말이 지당했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소, 우 방주! 그들의 본거지는 북경이요. 소주에서 북경, 그리고 다시 북경에서 동정호로 오는 데에는 적어도 한 달 이상이 걸 리기 마련이요. 노부의 생각으론 지금이 더없이 좋은 기회요. 방령이 반박했다. 방령의 말을 들으며 석대문의 마음 한 구석엔 불안이 엄습했다. 백부의 나이는 이미 육십을 넘어섰다. 그는 이미 지나간 세대인 것이다. 환갑이 넘어 은퇴한지 오래인 노무인에게 정보전에 대한 얘기를 새삼 설명한들 통할 리가 없는 것이다. 또한 방령은 그의 의제인 양무청의 안위에 지나치게 조급해하고 있다. 소생 생각도 우리에게 약간의 선수(先手)가 돌아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아무리 심해도 손해가 없는 법이니, 신중을 다하기로 하죠. 석대문의 말에 우근은 고개를 끄떡였다. 이러한 형국을 기호지세(騎虎之勢)라고 한다. 위험을 알지만 딴 방도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근은 상위지에게 다시 눈짓했다. 눈짓을 받은 상위지가 애헴, 하고 기침을 한 후 말을 이어나간다. 철군방은 하나의 거대한 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곽의 담장의 높이가 자그마치 이장이 넘지요. 양대협이 갇힌 곳으로 추정되는 뇌옥은, 철군방의 중앙에 위치한 삼층탑 지하에 있습 니다.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정문과 내원문, 그리고 탑의 입구 등 세 곳의 관문을 돌파 해야 합니다. 정면 돌파는 이 인원으로는 무리지. 우근이 말한다. 그의 말에는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떡이며 동조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내노라하는 고수들이지만 삼십 명 정도의 숫자로 정면 승 부를 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래서 세운 계획이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수법입니다. 호오, 다른 곳을 친다? 그거 그럴 듯 하군. 방령이 맞장구를 쳤다. 상위지는 기운이 난 듯 신나게 설명을 게속해간다.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철군사 곽인은 오래 전부터 페르시아 상인들로부터 화약과 대포를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쪽 야산에 동굴을 파고 그것들을 보관하고 있지요. 몇 분이서 그곳에 불을 지른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그리로 집중시킬 수 있을겁니다. 그사이 양대협을 구출하면....... 그것 참 묘책입니다. 석대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대포의 화약이 폭발한다면 엄청난 소란이 일 것이다. 그 사이를 틈탄다면 무사히 작전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느 분께서 화약고를 폭발시키시겠습니까? 상위지가 물었다. 무기고나 화약고라면 경비가 삼엄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제가 그 일을 맡겠습니다. 석대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일행 중에서 무공의 고강함으로 말한다면 우근과 석대문이 선두를 다툴 수 있을 것이 다. 그가 소란을 일으키고 우근이 구출작전을 진두지휘 한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구상일 것 이다. 내가 석 가주를 돕겠소이다. 개방의 일행 중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성큼 나온다. 세 가닥으로 꼬은 수염에 초췌한 얼굴, 다리에는 삼베 각반을 질끈 동여맨 사내... 바로 개방의 소주분타주인 삼각풍 위백이다. 양형이 그 지경이 된 것은 모두 이 위모의 탓이오. 이 한몸이 부숴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양형을 구출하리다. 위백은 자신이 사술에 중독되어 양무청과 우근에게 유인편지를 보낸 일을 끝없이 자 책하고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이번 행보에 자진해서 참가하면서, 위험한 일이 생기면 목숨을 던져서라도 거사 를 성사시키겠노라고 굳게 다짐한 터이다. 경공의 대가이신 위 대협께서 함께 가주신다면, 일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지요. 석대문은 환하게 웃으며 위백의 손을 맞잡는다. 그 광경을 보면서 우근의 고개가 끄떡여진다. 그도 의형인 위백이 의기소침해 있는 것이 못내 가슴아팠던 것이다. 그럼 시간을 맞춥시다. 우근은 품 속에서 두 개의 모래시계를 꺼낸다. * * * <경비가 대단하군요.> 석대문의 귓전으로 모기소리만한 위백의 전음이 들려왔다. 석대문은 모래시계를 꺼낸다. 솔솔거리며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모래의 남은 분량은 사분의 일 정도. 약속된 시간까지는 불과 반 시각 남은 것이다. 석대문과 위백은 발각되지 않고 이곳까지 도달하는데 주어진 시간 중에서 대부분을 허비했다.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경공의 대가라 할 수 있는 그들이라도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석대문의 전음에 위백의 눈이 빛난다. 그들이 숨어있는 곳은 야산으로부터 한 마장 쯤 떨어진 수풀 속, 우거진 나뭇가지 사 이로 보이는 야산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이고 관찰한다면 곳곳에 흉흉한 매복이 감춰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네 명인가요? 동쪽 바위 뒤에 두 명, 동굴의 입구를 지키는 자가 두 명이군요.> <입구 바로 뒷켠의 나무 위를 보십시오.> 위백은 가볍게 놀란다. 석대문의 전음대로 입구 뒷켠의 나무 위에도 두 명의 사내가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할까요?> 석대문의 물음에 위백은 생각에 잠긴다. 무공으로 따진다면 강동제일인, 석대문을 능가할 수 없겠지만, 위백은 수없이 많은 전투를 거친 백전노장이다. 특히 개방은 강호에서 정보통으로 이름이 높다. 이런 장소의 침투에 대해서도 경험이 풍부한 것이다. <우선 동쪽의 보초들을 처치합시다. 다른 두 곳의 위치를 가늠해 볼 때 그곳이 사각(死角)인 것 같소이다.> 석대문은 다시 전방을 살폈다. 과연 위백의 말대로, 동쪽의 바위 뒤는 동굴 입구쪽에선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저는 후방으로 돌아갈테니 위 대협께서 그들을 처리해 주십시오.> <알았소이다.> 위백은 몸을 낮추고 기쾌하게 수풀을 빠져나갔다. 석대문은 위백의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 위백을 조사하기 위해서 개방 소주분타에 잠입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니, 저 친구가 왜 저래? 동굴 입구에서 근무중이던 고수용(高洙容)은 졸음을 쫒기위해 기지개를 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거... 장과우(莊誇祐)가 아니오? 고수용의 말에 놀란 듯 목을 길게 빼고 앞을 살피던 동료 김풍(金諷)이 의아한 말투로 말을 받는다. 그들의 눈 앞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위 뒤에 매복해서 조는지 깨있는지 뵈지도 않는 사내 중 한 명이 비틀거리며 자신들 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갈지자 걸음으로 다가오던 사내는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땅바닥으로 엎어진다. 아이구! 요란한 신음소리가 나는 것으로 봐서 몹시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저녁을 잘못 먹었나? 저녀석 토사(吐瀉)라도 난 모양이군. 고수용과 김풍은 혀를 차며 엎어진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봐, 장(莊) 아우! 자네 괜찮아? 김풍은 손을 뻗어 엎어진 사내의 몸을 부축하려고 하였다. 바로 그때 그는 흠칫 놀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선 사내의 얼굴이 자신의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 다. 엇? 너는...? 화들짝 놀라는 김풍의 말을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장과우로 위장하고 있던 사내의 오른 손이 용수철처럼 퉁기면서 그의 명치를 가격했기 때문이다. 으악! 김풍은 그리 작은 체구가 아니었지만, 사내의 주먹에 실린 경력은 예삿 것이 아니어서 인지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동료가 맥없이 격퇴당하는 것을 바라보며 <어어>, 뒷걸음질치던 고수용의 숨통이 컥 막혔다. 고수용은 자신의 목에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이 박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어서 느껴지는 뜨끈한 피의 느낌.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간단하군. 위백은 만족한 듯이 웃는다. 보초의 옷으로 위장한 위백이 파옥권(破玉拳)으로 김풍의 가슴을 치고 고수용의 목에 비수를 날려 박은 것은 한 호흡이었다. 침입자다! 동굴 뒷켠의 나무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던 두 명의 사내는 일련의 돌발적인 사태에 소 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군호용 피리를 입에 물었다. 하지만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눈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가득 차올라온 것이다. 동시에 엄습하는 북풍과 같은 매서운 한기... 미안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자신들의 목을 향하여 날아드는 날카로운 검광 속에서 그들은 상대의 말투가 꽤나 정 중하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 너무도 빨랐고, 그들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비명도 없이 모든 것이 끝났다. 그들의 손에 쥐어졌던 피리는 힘없이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시간은? 위백의 다급한 물음에 석대문은 예의 모래시계를 살폈다. 다행히도 아직 약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어서 서두릅시다! 위백은 보초의 품을 뒤져서 한 개의 열쇠를 찾아냈다. 끼이익. 육중한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음산한 그믐달빛이 문틈으로 빼곡 안을 살폈다. 이런...! 동굴 안으로 들어선 위백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설마... 이게 다...? 위백을 따라 들어선 석대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코 끝에 매캐하게 차오르는 화약 냄새. 그리고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동굴 내부는 층층히 쌓아올린 갈색 포대로 가득차 있었다. 동굴 중앙에는 네 귀퉁이에 완충쇠를 댄 큰 궤짝이 있었다. 위백은 성큼 다가가서 궤짝을 열었다. 휘이유! 그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석 가주, 이게 뭔지 아시오? 석대문은 위백이 들고있는 물체를 살폈다. 네모 반듯한 나무토막 같은 흑갈색 물체에는 짧막한 도화선이 달려있었다. 그게 뭡니까? 동해(東海) 뇌문(雷門)의 팔열호(八熱護)라면 아시겠소? 석대문의 눈이 커졌다. 팔열호라면 그 역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놀라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석대원의 귓전에 나직한 위백의 탄식이 들린다.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가, 그들은...? (3) 천붕(天崩)이라 함은 세상에서 더없는 슬픔, 즉 부모가 죽었을 때 자식이 느끼는 슬픔 을 가리키는 말이다. 천붕지성(天崩之聲)이라 함은 그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의미를 지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엄청난 소리를 뜻할 것이다. 아마도 기(杞)나라 사람이 걱정한 것처럼 하늘이 무너지기 전에는 들을 수 없는 소리. 그것이 바로 천붕지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팔월이 지나가는 어느날, 동정호 북쪽 철군도에서 드디어 하늘이 무너지고 말 았다. 극한의 소음은 극한의 정적과도 같다. 너무도 엄청난 소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단지 무언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생각 외에는... 수천 근 화약의 폭발압을 견디지 못한 자그마한 야산(野山)은, 창자를 훑어낸 낙지처 럼 속살을 드러내며 뒤집어진다. 그믐의 고요한 밤하늘은 십여 장이나 솟구친 화염과 휘몰아치는 압력풍으로 갈갈히 찢 겨나간다. 폭발의 중심으로부터 반경 삼십여 장 안은 초열지옥(超熱地獄)과 같은 불꽃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그 엄청난 힘은 영향권 내의 수목(樹木)이나 전각(殿閣)들을 낙엽처럼 휘감아 흩날려 버린다. * * * 화약고가 폭발하기만을 기다리던 우근과 방령 등은 얼빠진 얼굴로 발밑까지 흔들리는 어마어마한 진동을 감상하고 있다. 비록 그들 중 누구라도 태산이 무너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는 철담(鐵膽)임을 자부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얘기이지, 실제로 눈 앞에서 태산이 무너지는데 놀라지 않을 사 람이 누가 있으랴! 특히 잘난 듯이 성동격서(聲東擊西) 운운한 상위지의 넋빠진 얼굴은 실로 볼만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자, 어서 갑시다! 한동안 넋이 나가 있던 우근이 정신을 추스린다. 석대문이 성공했다면 이제는 그의 차례인 것이다. 우근의 말에 천붕지성의 미망(迷妄)으로부터 가까스로 깨어난 일행은, 보초들이 허둥 거리며 사라진 내전(內殿)의 입구를 향해 달려간다. 휘이익---! 자루에 울부짖는 금빛 사자가 조각된 검이 허공을 크게 가른다. 곧추세운 검봉(劍峰)이 천중(天中)으로부터 수직으로 떨어지는 역벽화산(力劈華山)의 단순한 일초. 하지만 그 무게와 빠르기는 하급 무사의 박도(朴刀)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빡!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한 사내가 천령개(天靈蓋)부터 미간까지 갈라진 채 쓰러진다. 그의 손에 들려졌던 박도는 가운데 부분이 잘려진 채 안타깝게 흙바닥 위를 뒹굴고만 다. 하하! 우 방주, 이래도 내가 늙었소이까? 호탕한 외침과 동시에 방령은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일식으로 검을 쓸어 장창수(長槍 手) 한 명의 목을 날려버린다. 허리를 힘차게 비트는 동시에 손목을 돌려 검의 투로(套路)를 바꾸는 방령의 자세는, 검도고수인 그조차도 평범한 초식 하나하나를 펼치는 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가를 보여주는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대단하십니다, 방 문주! 우근은 정면을 베어오는 철군도 무사의 공격을 피하면서 방령에게 갈채를 보낸다. 하지만 그의 예리한 시선은, 가슴 앞 공간을 헛되이 가른 뒤 회수되어지는 귀두도(鬼 頭刀)의 허술함을 그냥 지나쳐 보내지 않는다. 왼손을 밀어 도의 등부분을 미는 동시에 오른손을 부드럽게 뻗으며 적의 가슴을 때리 는 수법은 개방의 절기 쇄비권(碎碑拳)이다. 우근의 쇄비권은 위백의 그것과는 달리 뻗고 당기는 형태가 매우 유연하지만, 그 권 세(權勢)는 매우 넓고도 지속적인 것이었다. 귀두도를 든 무사의 무공 또한 그리 얕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주먹이 몸뚱어리에 닿 기도 전에 늑골이 부러져 나가는 고약한 경우마저 극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끄윽! 늑골 넉 대가 부러져 나감과 동시에 한줄기 강맹한 후력(後力)이 무사를 삼 장 밖으로 내동댕이쳐버린다. 그는 탑을 지키던 여섯 명의 보초들 중 마지막으로 널브러진 사람이 되었다. 이곳 같군요! 뒷전에서 상위지의 짤막한 외침이 들린다. 우근과 방령 등이 여섯 명의 보초들을 처치하는 사이, 그는 탑의 지하로 내려가는 입 구를 발견한 것이다. 빌어먹을! 쇄구(鎖具)가 예사 것이 아니군! 입구로 다가간 우근은 철문의 빗장에 견고하게 채워져 있는 쇄구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그의 말처럼, 순강(純鋼)을 수십 번 정련(精鍊)한 듯 푸른 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쇄 구 고리의 굵기는 어린아이의 팔뚝만큼이나 된다. 막야(莫邪)나 어장(漁腸)과 같은 신병이기(神兵異器)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훌륭하게 만들어진 강철을 끊기 어려울 것이다. 이 자들에게선 열쇠가 없습니다. 쓰러진 보초들의 품속을 뒤지던 사자검문의 총사 황포객(黃布客) 유태성(劉太誠)이 혀를 찬다. 우근의 미간에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더욱 깊이 새겨진다. 어디, 노부가 한번 끊어보리다! 휘황한 금빛 장검을 움켜쥔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사자검문주 방령이다. 그래 주시겠소이까? 사람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몇 걸음 물러선다. 방령은 양손으로 검을 단단히 쥔 채 쇄구를 노려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적과 대치하기라도 하는 양, 그의 노안(老眼)으로부터 등골을 으스 스하게 만드는 예리한 정광(精光)이 뿜어져 나온다. 그의 분신과도 같은 사자검(獅子劍)이 서서히 머리 위로 올라간다. 한껏 압축시킨 용수철과 같은 기세... 그것은 사냥감을 향해 뛰어내리기 직전의 표범과도 같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검신 위로 출렁이는 검기가 보기(寶氣)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검기가 검봉을 타고 주욱 늘어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것이야말로 검기성형(劍氣成形)의 지고한 경지... 타아앗! 사자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웅장한 기합과 함께 머리 위로 들려진 방령의 사자검이 사 라져 버린다. 쉬잇---! 그와 동시에 쇄구가 걸려진 철문 표면에 가는 모래를 비비는 듯한 기이한 음향이 울린 다. 순간적으로 흘러버린 음향이었지만, 그 여운은 사람들의 귓속으로 이상하게도 길게 이 어진다. 그리고, 쩔컹! 둔중한 비명과 함께 쇄구의 고리 한가운데가 툭 잘라져 나간다. 마치 처음부터 두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방령은 만족한 듯 미소지으며 이제는 하단(下段)으로 드리워진 검을 천천히 거둔다. 오오! 우근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내고 만다. 검이 움직이기 시작한 시간과 정지한 시간, 상단으로 겨눈 자세와 하단에서 거둔 자 세 사이에는 어떠한 틈조차 찾을 수 없었다. 꽉 짜여진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검은 자유로운 차원을 부영하듯 목표물을 통과한 것 이다. 검의 궤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 쇄구와 같이 잘라질 수밖에 없다. 비록 그것이 부단(不斷)을 덕목으로 여기는 강물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검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경지를 <단천(斷川)>이라 부른다. 과연 사자신검(獅子神劍)! 물베기에 관해 들은 풍월은 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니... 오늘 이 거지가 참으로 개안(開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근은 손뼉을 치며 방령의 경지를 칭송했다. 이미 일선에서 은퇴한 지 오래인 노강호의 검법이 이토록 절도 있고 웅장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그였다. 하하! 낯뜨거운 칭찬은 차후에 받기로 하고, 어서 갑시다. 방령은 두어 차례 손을 내 저은 뒤 철문을 힘차게 밀어 젖힌다. 끼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어스름한 달빛 아래로 지하로 통한 돌계단이 드러 난다. * * * 유태성은 나직한,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움직이지 마라! 암도(暗道)의 모퉁이, 의자에 앉아 있던 보초는 대단히 억센 신경조직을 지니고 있음 이 분명하다.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동에도 불구하고 한가로이 잠을 잘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순간에도 그는 목젖에 바짝 들이밀어진 검끝의 존재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입을 벌려 무어라 소리치려는 순간, 유태성의 왼손 수도가 목덜미 뒤 천주(天 柱)로 떨어진다. 끄윽! 그나마 그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피를 싫어하는 유태성의 천성 탓이다. 모퉁이 너머를 찬찬히 살피던 유태성은 삼 장쯤 떨어져 있던 사람들을 향해 손짓한다. 그의 손짓을 본 사람들은 자세를 낮춘 채 빠른 걸음으로 유태성에게 다가온다. 이상하군요. 보통 이런 뇌옥은 감시가 엄중하기 마련인데, 지키는 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으니... 유태성의 말은 사리에 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태성이 선두에 서게된 이유이기도 했다. 감시가 허술한 암도라면 의당 무인기관(無人機關)이 감추어져 있을 터. 일행 중에서 유태성만큼 기관에 밝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조심하게! 방령은 벽에 걸려 있던 횃불을 하나 꺼내어 유태성에게 건넨다. 유태성은 아무 염려 말라는 듯 씨익 웃는다. 후욱---! 어디선가 음산한 바람과 함께 동물의 시체가 썪는 듯한 악취가 끈적하게 풍겨온다. 유태성은 긴장한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어딘가에 감추어진 다른 공간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유태성은 잘 알고 있다. 곁길이 없는 암도에서 이런 경우를 만나면 곧 튀어나올 암격(暗擊)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바닥을 조심하십시오! 유태성의 경고성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바닥으로 향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발견되지 않을 미세한 금이 돌길 한복판에 길게 그어져 있다. 길이는 이 장 반 정도... 제가 시험해 보지요. 개방 오결제자 중 경신술에 정평이 있다는 개오추(介五秋)가 앞으로 나선다.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함정치고는 너무 단순하니까요. 개오추는 고개를 끄떡인 뒤 통로를 향해 신중히 걸음을 옮긴다. 그가 세 걸음이나 갔을까. 통로를 찬찬히 살피던 유태성의 눈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화등잔만큼 커진다. 우 방주! 저, 저기를! 유태성의 손길을 따라가던 우근 역시 유태성이 발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오추! 위험해! 덜컹! 우근의 외침과 동시에 둔중한 소리와 함께 통로 가운데 금이 갈라지며 시커먼 아가리 를 드러낸다. 이미 예견했던 함정. 개오추는 발밑이 허전해지는 순간, 진기를 끌어올리며 몸을 허공에 띄운다. 하지만 왼쪽 벽면으로부터 쏘아진 십여 자루의 강전(鋼箭)은 그의 예상에 없는 일이다. 휴웅---! 꼼짝없이 고슴도치가 되어야만 할 찰나, 세찬 바람소리와 함께 개오추의 몸은 일 장 가까이 허공을 밀려간다. 파팍! 강전들에 오른쪽 석벽에 박혀 들어간 것과 바람에 밀린 개오추가 맞은편 바닥에 내려 선 것은 거의 동시의 일. 생명을 건진 개오추는 크게 한숨을 내쉰다. 기관은 교묘한 것이어서 바닥이 꺼짐과 동시에 벽에 일곱 자 높이로 설치된 강전이 발 출되었던 것이다.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공을 전개한 사람을 노린 이중암격... 방주님! 감사합니다! 개오추는 큰 소리로 외친다. 누가 발출한 장력인지는 보지 않았어도 알 수 있다. 허공을 격하여 이렇게 부드러운 척력(拓力)을 발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 대협이 강전 자국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림없는 일이야. 감사는 유 대협께 하게. 우근의 말처럼 유태성이 발견한 것은 이전에 발출되어 지금처럼 석벽에 꽃혀졌을 강 전의 흔적이었다. 빛이라고는 흐릿한 횃불이 전부인 어두컴컴한 통로, 그것도 모든 신경이 바닥에만 집 중되었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그의 관찰력은 실로 세심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드디어 통로가 끝났다. 통로의 길이는 이백 장 정도에 불과했지만, 일행의 전진 속도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것이어서 이 각이 넘는 시간이 소비되었다. 다행히도 처음의 암격 외에 별다른 기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통로의 끝에는 벽을 따라 여러 개의 방이 죽 늘어서 있다. 그것들을 살피던 유태성의 눈이 빛난다. 여러 개의 석문 중에서 유독 하나만이 작은 쇄구가 채워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곳 같습니다! 유태성의 외침을 듣고 달려온 우근은 쇄구를 양손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힘껏 비튼다. 이 정도 크기의 쇄구라면 그의 외가무공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부술 수 있었던 것이다. 쩡---! 쇄구가 우근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쪼개지자, 옆에서 초조하게 바라보던 방령이 급히 석문을 연다. 뇌옥의 바닥에 놓인 밥그릇 위에서 놀던 쥐들이 뜻밖의 불청객들을 맞아 찍찍거리며 놀라 날뛴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 비록 초췌한 몰골이지만 그 얼굴선이 의제 양무청의 그것과 일치함을 발견한 방령의 눈이 커진다. 아우! 방령은 한 걸음에 달려가 쓰러져 있던 사내를 안아 일으킨다. 二十三章 陷穽 (1) 불꽃들은 승천하는 용처럼 기승을 부리며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 그믐밤은 비상하는 불꽃들에 의해 그 적요(寂寥)함을 빼앗긴 지 오래이다. 수차(水車)를 가져와라! 나무를 베어라! 불길이 전각에 옮겨붙지 않도록 해라! 불길을 잡아보려고 허둥거리는 철군방도들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삼십여 명... 땅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들의 그림자는 번제(燔祭 : 짐승을 불에 구워 제물로 하는 제 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춤사위처럼 보인다. 일렁이는 화마(火魔)는 그들의 안타까움마저 희극적인 제무(祭舞)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꽝! 꽈릉! 감춰둔 화약이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처음 폭발이 있은 뒤 반 각이 지났지만,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폭음 소리는 불길을 잡으려 애쓰는 철군방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으... 위대협! 괜찮으십니까? 야산에서 제법 떨어진 수풀 속에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수풀을 뚫고 얼굴 하나가 솟아오른다. 영웅건(英雄巾)이 풀려 산발한 귀신 몰골이 되어버린 석대문이다. 젠장! 괜찮은 게 다 뭐요. 불고기가 될 뻔했소이다. 원, 그렇게 대단할 줄 누가 알았나? 목소리와 함께 이 장쯤 떨어진 숲속에서 위백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는 바지자락을 타고 올라가는 불똥을 손으로 비벼 끄고 있다. 위백의 말은 어김없는 사실이어서, 화약고의 폭발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엄청 난 것이었다. 팔열호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후, 서둘러 이십 여장 떨어진 곳까지 피신한 그들이었만, 폭발의 여파는 그들의 등짝을 후려쳐 사오 장 더 날아가도록 만든 것이다. 우방주께서 양숙부를 무사히 구출했는지 모르겠군요.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어서 뇌옥으로 갑시다. 의당 그래야겠지요. 옷자락에 묻은 검뎅을 대충 털어내고 몸을 돌리던 석대문과 위백은 어느 한 순간 딱 딱하게 굳어지고 만다. 우왕좌왕 뛰어다니는 철군방도들 사이를 뚫고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 견한 것이다. 하늘을 사르듯 솟구처 오르는 불길을 뒤로 받으며 천천히 수풀을 둘러싸는 사람들... 묵직한 걸음걸이에 배어 나오는 투지는 그들의 내력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수풀은 천천히 에워싸기 시작한다. 철군도에 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요란스러운 불꽃 놀이를 좋아할 줄은 몰랐네. 자네가 강동제일인(江東第一人) 석대문인가? 학익진(鶴翼陣)으로 활짝 펼쳐진 사람들의 정중앙... 느긋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던 사내가 입술을 달싹인다. 이게... 사람인가? 사내를 본 석대문의 눈이 커진다. 석씨가문의 뼈대도 보통내기는 아니어서 석대문 역시 육 척이 넘는 거구의 소유자였 다. 하지만 눈 앞의 사내는 석대문보다도 머리통 두 개는 더 커 보이니, 석대문이 사람인 지 곰인지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사내의 머리통 뒤로 삐죽 솟은 병기... 비록 화광을 역으로 받아 윤곽 외에는 알아볼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날의 길이만 해도 다섯 자가 넘는다는 참마도(斬馬刀)임이 분명하다. 칠 척이 넘는 체구. 육십사 근 청강참마도(靑鋼斬馬刀). 대강남북을 통털어 이토록 분명한 특징의 소유자는 단 한 사람 외에는 없었다. 일권으로 태산을 진동하고 일도로 대해를 가른다는 희대의 마왕(魔王)...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강호오마(江湖五魔)의 최강자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거경(巨鯨) 제초온(諸草溫)! 석대문은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내뱉는다. 제초온이라 불린 사내는 소리없이 웃으며 팔짱을 푼다. 몇 년 전 모용풍(慕容風)이 새롭게 꼽은 천하오대고수 중 자네 이름이 끼어 있더군. 쩝! 그래도 내 스스로 한가닥 한다고 자부했는데, 내 이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말 이야. 아는 것 많기로 유명한 노인이 한 말이니, 어련히 어김없으랴마는... 자네가 오늘 모용풍을 대신하여 그것을 증명해 보여줘야겠네. 우람한 팔뚝이 등 뒤로 돌아간다. 일렁이는 화광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참마도... 제초온의 신력(神力)에 의해 저것이 휘둘러진다면, 말[馬]뿐만이 아니라 말의 할아비 라고 해도 베어지지 않고는 못배기리라.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순간 석대문의 뇌세포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돌연 입 안이 바싹 말라붙는다. 그들이 이 지경에 든 이상, 탑으로 간 우근과 방령 또한 그들 못지 않은 함정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 위대협! 이곳은 소생이 맡겠습니다! 어서 탑으로 가세요! 석대문은 위백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제초온을 향해 몸을 날린다. 어느 결에 뽑았을까. 그의 오른손에는 칙칙한 살기를 토해내는 명검(名劍) 흑정(黑晶)이 들려져 있다. 좋았어! 제초온은 감탄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참마도를 움켜쥔 손에 힘을 배가 한다. * * * 엎힌 사람이 엎은 사람을 찌르기란 손바닥 뒤집는 일처럼 간단할 것이다. 그래서 연남색 장포를 입은 양무청은 그를 업고 있던 의형 방령의 왼쪽 옆구리에 큼직 한 바람구멍을 낼 수 있었다. 흐윽! 방령의 두 눈이 한껏 부릅떠진다. 무릎이 풀썩 꺽이며 쓰러지는 순간에도 오른팔꿈치로 양무청의 옆구리를 후려친 것은, 노강호의 몸에 밴 반사적인 반격일 것이다. 양무청은 방령의 등판으로부터 훌쩍 몸을 날리며, 간단하게 팔꿈치 공격을 피해낸다. 허공에 떠 있던 그의 몸이 한 바퀴 맴도는 순간, 개방도 하나가 목덜미에 비검(飛劍) 을 꽂은 채 뒤로 넘어간다. 실로 출수조차 파악하기 힘든 절묘한 비검술이라 할 수 있다. 네놈은 양무청이 아니구나! 당황한 외침과 함께 우근의 좌수가 쭉 내밀어진다. 급하게 처낸 일장이었지만, 장법의 달인답게 그 위력은 경시(輕視)할 수 없는 것이다. 헛! 장력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내는 잠시 휘청거린다. 하지만 제자리에서 한 바퀴 맴돌며 어렵잖게 중심을 되찾는 사내를 보며, 우근은 그가 예상밖의 고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내의 양손이 부드러운 호선(弧線)을 그린다. 쉭! 쉭! 독사의 숨소리 같은 살기 넘치는 비명과 함께 우근을 향해 쏘아져가는 두 자루의 비 검... 그와 동시에 사내의 몸이 열려진 석문을 향해 튕겨진다. 그 또한 두 자루 비도로써 천하의 우근을 어찌해보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가 필요로 한 것은 잠시의 여유... 적의 수뇌 중 하나를 암격(暗擊)한 뒤, 모두 경악해하고 있는 틈을 타서 비좁은 감방 을 빠져나가는 것이 그 나름대로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그와 석문 사이의 직선 경로를 베어버린 한 자루 철검에 의해 무 산되고 만다. 이놈! 분노가 가득 담긴 쩌렁쩌렁한 고함과 함께 사내의 뇌문(腦門)을 향해 떨어지는 철검... 사내는 헛바람을 토해내며 달리던 속도를 늦추고 몸을 피할 수밖에 없다. 철검은 사내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돌바닥에 절반 가까이 박힌다. 이런 위력의 검에 맞는다면 천하의 어떤 호신공(護身功)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방령 아닌 어떤 놈이 이런 대단한 검을 쓴다는 말인가! 사내는 경악스러운 눈초리로 검을 휘두른 자를 바라본다. 더러운 자식! 황색 장포를 입은 장한이 시뻘개진 얼굴로 사내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있다. 방령의 조카이자 사자검문의 총사인 유태성이다. 그는 지금 평소의 유순함을 잃고 있었다. 자비심 많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따르던 방령에게 살수를 쓴 놈 에게까지 자비를 베풀 수는 없는 것이다. 네가 곽인(郭仁)이냐? 사내는 소리나는 곳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곳에는 양 손에 한 자루씩의 비검을 쥐고 있는 우근의 얼굴이 있다.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성공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기습적으로 쏘아보낸 자신의 비검을 맨손으로 받아내 다니... 하지만 사내의 얼굴은 곧 본래의 표정을 되찾는다. 네가 우근이겠군. 사내는 왼손을 들어 얼굴을 슬쩍 문지른다. 잠자리 날개 같은 살가죽이 벗겨지며 세모꼴 하관이 강퍅해보이는 사십대 중년인의 얼 굴이 나타난다. 동정호의 지배자로 알려져 있는 칠보초혼비검 곽인이다. 보기 좋게 걸려드셨나? 더러운 거지놈들! 곽인은 궁지에 몰린 신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죽거리고 있다. 우근은 곽인의 손에 들려진 얄팍한 인피면구(人皮面具)를 바라본다. 저것이 살아 있는 사람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의 본래 주인이었던 을미 수 양무청은 대단히 불행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늑골 사이에 비검을 박은 채 기식이 엄엄한 그의 의형 방령처럼... 우드득! 그의 양 손에 손에 쥐어져 있던 비검의 상아 손잡이가 산산히 으스러져 나간다. 스스로 사지로 뛰어든 주제에 뭘 잘했다고 큰소리냐? 우근은 쌍장을 힘차게 마주친다. 어처구니 없게도 뻥, 하는 폭음소리가 중인의 고막을 먹먹하게 만든다. 동료의 부상을 바라보며 한 가닥 살심(殺心)이 솟구친 것이다. 석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곽 사주께서는 어찌 그리 성급하게 손을 쓰셨소? 시냇물 소리처럼 부드럽기 그지없는 음색이지만, 어딘지 질책하는 듯한 기운이 담겨 있다. 우근의 시선이 석문 쪽으로 향한다. 호시탐탐 빈틈만을 노리던 곽인이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죽엇! 곽인은 한 자루 비검을 종횡으로 휘두르며 우근을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시선이 분산되었다고 해서 주의력마저 분산된 우근이 아니다. 좌장이 천장을 향해 쭉 펴지고 우장이 바닥을 가리키는 순간, 그 사이의 한 점에서 만들어진 강맹무비(强猛無比)의 압력... 우르릉! 감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돌연 천정과 석벽이 무너질 듯 진동하는 것을 느낀다. 우근의 구궁장법(九宮掌法) 중 산을 진동하여 울리는[震爲雷] 뇌경백리(雷驚百里)가 전개된 것이다. 우욱!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내공 앞에서는 곽인의 독랄한 공격도 별 소용이 없다. 더러운 놈! 장세에 휘말려 뒤로 물러서는 곽인을 그대로 놔둘 우근이 아니다. 한 달음에 거리를 좁히며 연속하여 내지르는 주먹은 비석도 때려부순다는 쇄비권... 이익! 힘없이 물러서던 곽인은 이를 악물며 우근의 권력을 향해 오른손 중지를 쭉 뻗는다. 펑! 권력과 지력이 부딪히며 작은 폭음이 생긴다. 이것은 현옥지(玄玉指)로구나! 칠성노조(七星老祖)의 수양아들이라고 하더니, 노마두의 진전을 모두 이은 모양이군! 손가락과 부딪힌 주먹을 통해 한 가닥 음독한 한기가 스며들자, 우근은 권력을 거두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그제서야 간신히 몸을 추스린 곽조는 목구멍까지 치오른 울혈(鬱血)을 되삼킨다. 정면대결로 우근을 이기기란 바라기 힘든 일이다. 밖에서 말학후진(末學後進)이 인사드리고자 하니, 우방주께서는 그쯤에서 싸움을 멈 추시고 이리로 나오심이 어떠하신지? 반쯤 열려진 석문을 통해 예의 그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물론 나가서 인사를 받아주지! 하지만 그전에 해야할 일이 있다! 상아우 석문을 닫게! 우근은 차가운 목소리로 외친다. 우근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위지는 석문을 닫는다. 네 애비가 자랑하는 쌍응절(雙鷹絶)인가 뭔가를 써 봐라! 지금 쓰지 않으면 영원히 쓸 기회가 없을 테니까! 우근은 곽인을 노려보며 한자 한자 힘주어 말한다. 형세의 위급함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 우선은 이 밥맛없는 녀석을 죽여버릴 생각인 것이다. 곽인의 얼굴에 비로소 공포의 빛이 떠오른다. * * * 감방 밖의 통로에 서 있던 백의청년은 나직하게 한숨을 쉰다. 뒤에 시립해 있던 누군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사비영(四秘影)님. 곽사주(郭社主)를 구해야하지 않을까요? 사비영 이군영(李君永)은 생각에 잠긴다. 무엇인가 망설이는 것일까? 관옥(冠玉) 같은 이마에 옅은 주름이 맺힌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든다. 본디 그는 우리가 등장한 뒤 정체를 밝히기로 약속했었지. 공을 탐내어 미리 손을 썼으니, 그 다음은 그가 알아서 할 일! 우리는 예정대로 이곳을 지키면 된다. 음습한 지하 통로의 공기가 후덥지근하게라도 느껴지는지, 이군영은 하얀 부채를 꺼 내어 천천히 부치기 시작한다. (2) 좋았어! 시원시원한 것이 마음에 드는군! 이것은 제초온이 자신을 향해 기습적으로 달려든 석대문을 향해 한 말이다. 말과 동시에 거대한 청강참마도(靑鋼斬馬刀)가 허공을 가른다. 부우웅---! 회전반경만 해도 일 장에 가까운 엄청난 신위(神威)... 그 궤도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그것이 설사 바위나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이라 할지라 도 무사할 리 없을 것이다. 하물며 피와 살로 만들어진 사람일진대, 바보가 아닌 이상 그 힘과 정면으로 대결할 까닭이 없다. 석대문은 물론 바보가 아니다. 나동와상(懶童臥床). 게으른 동자놈이 하라는 일은 안하고 자꾸 드러누우려고만 한다는 이름이 붙은 괴이 한 신법이다. 하지만 허공에서 몸을 퉁기며 석대문이 전개한 이 동작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눕혀진 그의 허리로부터 한 뼘 정도 사이를 두고 참마도의 살벌한 도풍(刀風)이 스쳐 지나간다. 하앗! 재차 몸을 퉁겨 신형을 바로 잡은 석대문은 힘찬 기합과 함께 흑정을 내리찍는다. 목표는 제초온의 뇌문(腦門). 흑정은 비록 낭창낭창한 여섯 근짜리 연검(軟劍)에 불과했지만,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 는 직강표두(直降豹頭)의 기세는 육십사 근 참마도와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까깍! 어느새 회수한 것일까? 흑정의 섬전 같은 낙하를 막아낸 것은 청강참마도의 두꺼운 날이다. 흑정이 크게 휘어지고 참마도가 부르르 떨린다. 한 사람은 허공에 몸을 띠운 채, 그리고 다른 사람은 땅을 딛은 채 서로의 힘과 내력 을 병기를 통하여 겨루는 양상... 하지만 그런 대치는 한 순간에 불과했다. 에잇! 제초온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불끈 일어선다. 헉! 석대문은 돌연 증가된 반력에 떠밀려 허공으로 튕겨져 나간다. 몸을 뒤집어 바닥에 내려앉은 석대문의 얼굴에는 기묘한 표정이 어린다. 마치 백사장에서 조개껍질을 줍다가 갑자기 들어온 밀물에 휩쓸린 어린아이의 그것과 도 같은... 제초온의 힘과 내력은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석대문은 분명 내력을 끌어올려 버티려 했건만, 제초온이 한 번 인상을 쓰기가 무섭 게, 투석기를 떠난 돌맹이처럼 어처구니없이 튕겨나간 것이다. 석대문은 사람들이 제초온을 거대한 고래[巨鯨] 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 다. 제 선배의 내외공(內外功)은 이미 입신의 경지에 오르셨구려! 석대문은 하시라도 칭찬할 사람을 보면 칭찬을 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비록 그가 그가 친구든 적이든 간에... 하하! 자네의 힘도 보통은 아니군! 이번에는 어디 한 번 내 주먹을 받아보겠나? 제초온은 들고 있던 참마도를 땅 속에 깊이 찔러넣더니, 오른주먹을 앞으로 내민다. 석대문은 침중한 안색으로 그 주먹을 바라본다. 묘당(廟堂)의 청동향로만큼이나 거대한 주먹이다. 사람들의 손들이 모두 저만하다면 장갑 가죽을 얻기 위해 온 세상 동물들의 절반쯤을 멸종시켜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따라 일어나는 기이한 음향... 후우웅---! 주먹의 움직임은 완만하지만 권풍(拳風)은 전혀 완만하지 않다. 발출된 순간 이미 석대문의 전방은 바늘끝 하나 들어갈 수 없도록 빽빽하게 봉쇄돼버 린 것이다. 석대문은 권풍을 향해 좌장을 뻗는다. 담담한 기운이 그의 좌반신으로부터 피어난다. 가전(家傳) 태을장(太乙掌)의 부드러움으로 강맹일변도의 권력을 슬쩍 비틀어보려는 심사이다. 하지만 두 줄기의 힘이 서로 얽히는 순간, 그는 태을장의 부드러움으로도 감당치 못 할 강맹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비를 막기 위한 우산이 거센 폭우를 만나 폭삭 주저앉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퍽! 거대한 쇠망치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석대문의 전신을 강타한다. 비록 처음보다는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사람의 오장육부를 진동시키기에는 충분한 힘 이다. 하지만 석대문은 이런 충격을 받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권력이 후려치는 순간 석대문은 그 힘에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진기를 부드럽게 돌려 힘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몸을 맡긴 것이다. 그 덕분에 그는 삼 장 가까이 뒤로 밀려나서야 신형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그런 석대문의 행동을 바라보던 제초온은 나직히 감탄한다. 허허! 거인권(巨人拳)을 그렇게 해소하는 방법이 있었나? 자네는 무공 못지않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군! 제초온의 장기는 한 가지 도법과 한 가지 권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방금 전개한 일 권이 바로 그의 두 가지 장기 중 하나인 거인권이었다. 권력에 담긴 힘은 능히 천 근 암석을 가루로 만들 정도... 하지만 석대문은 그 힘의 대부분을 태을장의 부드러움으로써 완화시킨 뒤, 남은 후력 (後力)마저도 애써 버티지 않음 으로써 풀어버린 것이다. 석대문은 몸이라도 풀듯이 어깨를 한두 번 흔들어본다. 가슴과 왼손의 뻐근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그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도대체 선배는 어릴 때 뭘 드시고 자랐소? 제초온의 눈썹이 묘하게 쫑긋거린다. 무슨 소린가? 뭘 드셨기에 그리 힘이 좋소?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그것 좀 먹여 키우려고 해서 드리는 말이오. 하하! 제초온은 크게 웃는다. 지금 그와 석대문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철군도의 내로라하는 방도(幇徒) 십여 명과 자신이 직접 키운 이십여 명의 무사들이다. 그들의 능력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제초온 자신만 하더라도 석대문에게 조금도 윗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은 고수 라고 자부하고 있다. 석대문의 이름이 비록 모용풍이 꼽은 새로운 오대고수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는 하나, 이 위기를 무사히 벗어나기란 기대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석대문을 보라! 조금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지 않는가! 그래서 제초온은 크게 웃었다. 제초온은 호탕한 사람을 만나면 항상 크게 웃었다. 비록 그가 친구든, 적이든 간에... 우리가 왜 이제야 만났을까? 제초온은 땅에 꽂아두었던 참마도를 뽑는다. 그는 진정으로 석대문을 만난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참마도를 높이 들어 석대문에게로 겨눈다. 큼직한 입가로 길죽한 웃음이 머금어진다. 자네의 검을 더 구경하고 싶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칠 척이 넘는 거구가 석대문에게로 날아든다. 석대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는다. * * * 화약고의 불길은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었다.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비등하는 화염은 석대문과 제초온의 싸움을 더욱 화려하게 채색해주고 있었다. 참마도법은 무겁고 의형검뢰(意形劍雷)는 빨랐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병기...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사람... 싸움은 어느새 백 초를 지나고 있었다. 깡---! 두 병기는, 이제는 흡사 익숙한 정인(情人) 사이라도 된 것처럼, 격렬하게 만나고 우 아하게 헤어진다. 즐겁군! 너무 즐거워! 제초온의 부리부리한 두 눈에 번들거리는 광기가 맺힌다. 그는 아무런 취미도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술이나 도박은 물론 여색(女色)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강적과의 싸움뿐이다. 거경이라는 별호를 얻은 뒤, 속이 후련할 정도로 치열한 싸움을 벌여본 것은 다섯손 가락으로 꼽을 정도... 그런데 오늘 드디어 또 한 명의 강적을 만난 것이다. 그가 어찌 즐거워하지 않을까? 선배 같은 사람이 어찌 비각에 있는지 모르겠구려! 석대문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가라앉히며 냉랭한 목소리로 묻는다. 비각이 어디가 어때서? 비각이 무림을 무너뜨려, 제 마음대로 관장하려 한다는 사실을 선배는 모르시오? 제초온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피식, 웃는다. 모르는 소리! 참마도가 한 차례 뒤집어지며 허공에는 다섯 가닥 매서운 도기가 만들어진다. 육십사 근 중병(重兵)으로 이처럼 영활한 변식(變式)을 만들어낸다는 자체가 신기(神 技)이다. 석대문은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흑정을 돌려 편신옹국(偏身擁菊)의 방어식으로 참마 도를 받아낸다. 참마도가 적중되는 순간, 약간 기울어지는 검신에는 외부로부터 유입된 힘을 교묘히 흘려버리는 접목(接木)의 묘가 담겨 있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석대문의 좌측에 몇 자 깊이의 구덩이가 패인다. 자네는 무림이 뭐라고 생각하나! 말은 차분하기 이를데 없지만, 쉴 새 없이 퍼붓는 참마도의 맹공은 석대문의 손길을 바쁘게 만든다. 무림 자체는 누구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해! 무공을 익힌 자가 존재하는 이상 무림은 언제나 존재하니까! 깡! 까강---! 자네가 정말로 염려하는 일은 이미 현무림에서 권력을 지니고 있는 자네들의 영역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비각이 그것을 위협하기 때문에 자네들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닌가? 제초온의 질타(叱咤)가 끝난 것은 이미 삼십여 번의 칼춤이 지나간 뒤였다. 석대문은 여섯 걸음이나 물러선 채 흑정을 중단(中段)으로 겨누고 있다. 여전히 빈틈없는 자세... 하지만 그는 제초온의 질타에 대해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제초온의 말처럼, 그가 진정으로 염려하는 것은 그와 그의 친인이 구축한 영역이 무너 지는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엉뚱한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왜 이제는 혈랑(血狼)을 가장하지 않소? 남궁월(南宮越)처럼 혈랑탈을 쓰고 나오셨으면 더 재밌지 않았겠소? 혈랑? 제초온은 돌연 참마도를 내리고 껄껄 웃는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진짜가 등장했으니 가역(假役)들은 사라져야 되지 않겠나? ...? 석대문은 제초온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비각 아닌 혈랑곡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제초온은 자신의 말에 대해 더 이상 부연(敷衍)하지 않는다. 우습군! 자네 같은 사람과 어울려서까지 이 따위 골치 아픈 이야기를 나눠야 한단 말인가? 자! 이것을 한 번 받아보게나! 그리고 전개된 것이 제초온이 자랑하는 풍백도법(風伯刀法)임을 알아차렸을 때, 석대 문은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춘풍벽류(春風擘柳)에서 풍백치지(風伯馳地)까지 이어지는 세 차례의 연환도초는 흑 정의 검은 검신 위로 새파란 불똥을 튕기겨 만든다. 석대문으로 하여금 헛바람을 들이키며 물러서게 만드는 것은, 초식의 오묘함 이전의 천생신력(天生神力)이다. 그런데 이 순간, 석대문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몸을 가볍게 하여 힘을 해소시키는 데에만 열중한 나머지, 그를 둘러싼 무리들이 만든 벽에 너무 접근해버린 것이다. 기회다! 석대문의 등 뒤에 서 있던 사내의 눈이 탐욕으로 반짝인다. 말 그대로 손만 뻗으면 세울 수 있는 전공(戰功)이 눈 앞에 온 것이다. 으윽! 석대문은 이를 악물며 번개같이 몸을 돌린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에 세 가닥으로 턱수염을 꼬은 사내의 득의어린 미소가 들어온 다. 그리고 사내의 손에 쥐어진 채 싸늘한 한기를 뿌리는 두 자루 은창(銀槍)... 석대문은 그제서야 자신의 등줄기를 파고든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낭패감과 분노가 동시에 솟구쳐 올랐지만, 그의 무릎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풀썩 꺽이 고 만다. 죽어랏! 사내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두 자루 장창이 서로 교차되며 석대문의 요혈을 향해 쏘아진 것이다. 사내가 창을 찌른 수법은 무림에서도 이름 높은 양가창법(楊家槍法) 중 쌍룡출운(雙 龍出雲)의 절초이고, 이미 심한 창상을 입은 석대문은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뒤이다. 이대로라면 일대호걸의 목숨이 등 뒤의 암습으로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콰직! 석대문을 구해준 사람은 놀랍게도 대적(大敵)이었다. 두 자루 은창은 참마도에 의해 토막났고, 은창의 임자와 쓰러진 석대문 사이에는 칠 척 거구의 제초온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제... 선배? 석대문은 의아한 음성으로 제초온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제초온은 석대문을 등진 채 시선도 돌리지 않는다. 불을 뿜을 듯한 그의 두 눈은 파랗게 질려버린 은창의 임자에게 고정되어져 있다. 쥐새끼 같은 놈! 제초온의 굵은 입술이 벌어지며 이를 가는 듯한 욕설이 튀어나온다. 육... 비영(六秘影)님? 은창의 임자인 사내, 철군도의 간부 중 하나인 쌍각귀(雙角鬼) 조후(曹厚)는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사색이 된다. 그러고도 네가 사내냐? 남부지방의 벌레처럼 굵은 눈썹이 역팔자로 치솟으며 밤하늘을 쩌릉 울리는 고함이 터 져 나온다. 그와 동시에 천중(天中)을 향해 올라가는 참마도... 조후는 제초온과 한편이다. 한편이 한편을 죽여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무어라 말하려 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구구한 변명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좌악---! 사람의 몸뚱어리가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양단될 때 울려난 소리는 물 한동이를 쏟 아붓는 소리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제초온은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인가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다. 석대문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걱정스러운 빛이 담겨져 있다. 좀 어떤가? 그런 제초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석대문은 흑정을 땅에 꽂으며 몸을 일으킨다. 견딜 만하오... 계속합시다, 선배! 등줄기를 파고든 상처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지만, 적에게 동정받을 수는 없는 노 릇이다. 석대문은 흑정을 뽑아 비스듬히 치켜든다. 그의 아버지 석안의 숨결이 남아 있는 흑정은 언제나 그에게 용기를 준다. 그의 손에 흑정이 있는 한, 그는 명예를 생명보다 중히 여기는 무사인 것이다. 하지만 제초온은 고개를 젓는다. 나는 이제 싸울 마음이 없어졌네. 석대문을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제초온은 이미 참마도를 거두고 몸을 돌리고 있다. 제 선배! 석모가 비록 필부(匹夫)에 불과하지만, 값싼 동정을 입어 목숨을 건지는 비겁자는 아 니오! 석대문은 몸을 떨며 소리친다. 걸어가던 제초온의 몸이 우뚝 멈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다시 걸음을 옮긴다. 더 이상 말하지 말게. 자네 같은 사람과 겨룰 수 있다는 것은 무인으로 큰 행운이지. 그런 좋은 기회를 추잡하게 마무리지을 수는 없는 일!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겨룰 수 있기릴 바라네. 나는 이만 각(閣)으로 돌아가겠네. 얘들아! 가자! 제초온의 말이 끝나자, 석대문을 포위하고 있던 무리 중 절반이 넘는 장한들이 병기를 거두고 제초온을 따른다. 육비영! 대공자의 명령을 거역하는 거요? 남아 있던 무리 중에서 한 사내가 급히 제초온의 등을 향해 소리친다. 하지만 그의 외침도 제초온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지는 못한다. 아니, 천하의 어떤 외침이라도 제초온과 같은 부류의 남자를 멈추게 만들지는 못할 것 이다. 허허! 이(李)공자의 서열이 비록 내 위이긴 하지... 하지만 그가 감히 내게 명령을 내리지는 못하지. 아직도 거세게 타오르는 화염을 뚫고 제초온의 음성이 나직하게 들려온다. 저 남자... 몸뚱이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고래와 같군. 석대문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잔인한 마인(魔人)으로만 알려진 제초온에게 이렇게 당당한 면모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들만으로라도 네놈을 없애야겠다! 제초온에게 소리쳤던 사내, 철군도의 이인자인 쾌자산수(快刺散手) 손만리(孫萬里)가 쌍장을 세운 채 석대문의 앞을 막아선다. 십여 명의 사내가 저마다 흉흉한 병기를 꼰아잡은 채 석대문을 둘러싼다. 그래? 차가운 미소가 석대문의 입가를 가로지른다. 내기(內氣)는 흐트러지고 외상(外傷)은 가볍지 않다. 하지만 제초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이자들의 손에 죽어서는 안 된다. (3) 그르릉---! 감방의 돌문이 둔중한 마찰음과 함께 열리고 십여 명의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선두에 선 작달막한 호한은, 남루한 옷차림에 금빛 허리띠가 이채로운 개방의 방주 우 근이다. 이 순간, 그의 왼쪽 어깨에는 비검 한 자루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있는 듯하였다. 우근은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돌려 통로를 바라보았다. 그가 들어온 통로는 일단의 무리들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눈처럼 새하얀 백의를 입은 청년이 그림처럼 서 있었다. 톡, 톡... 청년은 쥐고 있던 백옥선(白玉扇)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말은 이 청년을 가리켜 하는 말임에 분명할 것이다. 옥으로 다듬은 듯한 단정한 이마와 알맞게 진한 눈썹. 별처럼 빛나는 눈과 주사(朱砂)를 머금은 듯한 입술. 길죽한 목과 단단해 보이는 어깨, 균형잡힌 상체와 늘씬한 하체... 아마도 저 유명한 두목지(杜牧之)가 환생한다 한들, 이 청년의 풍모에는 견줄 수 없 을지도 모른다. 우근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가 내게 인사하겠다던 말학후진인가? 우근의 목소리가 통로 안을 쩌릉, 울렸다. 청년은 우근을 향해 천천히 포권했다. 그렇소이다. 소생은 태원(太原)의 이군영이라 하외다. 금종(金鐘)의 울림처럼 맑은 목소리였다. 청년 이군영의 기파(氣波)는 사람들의 마음을 저절로 안정시키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동료는 물론이거니와 적의 마음까지도 안정시켜주는 차분함... 이러한 힘은 결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근은 그러한 이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자네도... 비각의 주구(走狗)인가? 우근의 물음에 이군영은 담담히 웃었다. 주구라는 말씀은 조금 듣기 거북하구려... 소생은 어엿히 만세야(萬歲爺)의 녹(祿)을 받는 관리외다. 만세야? 흥! 웃기고 있군! 우근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상 아우! 그 개 같은 놈을 이리로 끌고 오게! 상위지에 의해 개처럼 끌려온 것은 다름 아닌 철군도의 주인인 곽인이었다. 지금 곽인은 눈알이 툭 튀어나오고 혀를 길게 빼어문 보기 흉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우근의 어깨에 비검을 박은 대가는 큰 것이어서, 목뼈가 으스러지고 척추가 부러지는 큰 값을 치뤄야만 했던 것이다. 우근은 곽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놈도 만세야의 녹을 먹는 관리인가? 이군영은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칠성노조(七星老祖)가 슬퍼하겠군. 친자식처럼 아끼던 사람이었는데... 공(功)을 지나치게 탐하면 안 좋은 결과가 오기 마련이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 한 사람의 차분함은 때로는 다른 사람이 흥분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우근은 곽인의 시신을 이군영에게 집어던지며 물어뜯듯이 외쳤다. 시끄럽다! 국록을 먹는 관리라는 놈들이 왜 나의 형님을 요법(妖法)에 걸리게 만들고, 왜 무고한 사람을 납치하여 감금한다는 말이냐! 이군영은 쏜살같이 날아드는 곽인의 시신을 향해 부채를 가볍게 휘둘렀다. 세워진 부채가 수평으로 눕혀지는 순간, 솜처럼 부드러운 진기가 일어나 시신에 담겨 있던 힘을 가볍게 해소시켜 버렸다. 추진력을 잃은 곽인의 몸뚱이는 이군영의 발치에 힘없이 떨어졌다. 쯧쯧... 이군영은 곽인의 시신을 안타까운 듯 내려다 보다가, 뒷전을 향해 소리쳤다. 곽 사주께선 만세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이시다! 비록 시신이지만 정중히 모시고 나가도록!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사람이 달려나와 곽인의 시신을 수습했다. 우근은 이군영이 보여준 한 수에 감탄하는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던져진 곽인의 시신에는 그가 자랑하는 막강한 외공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가벼운 부채놀림으로 해소시켜버린 이군영의 내력은 비범하다 하지 않을 수 없 는 것이다. 우 방주께서는 본각의 방침에 대해 불만이 많으신 모양이시구려. 이군영은 차분한 눈빛으로 우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우물처럼 깊고도 고요했다. 하지만 우근은 그 안에 담겨진 한 가닥 예기를 읽을 수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뿜어나오는 보검과도 같은 신기(神氣)... 그것은 스스로의 수련에 대한 자신감 탓일 수도 있었고, 타고난 외유내강의 기질 탓 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 일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싶다면, 소생과 함께 본각(本閣)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소이까? 여기 이 후배가 섭섭치 않게 대접해드릴 것을 약속하지요. 부드러운 말투이지만 그 뜻은 명백한 투항의 종용이었다. 저 새끼가! 그 말을 들은 개방도 중 성질이 급한 몇몇은 대뜸 앞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잠깐! 하지만 우근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이군영이 저리도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이면에는, 필시 시작과 끝에 대한 모든 준비가 서 있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자네는 우리 개방의 거지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군. 우근은 말을 함과 동시에 어깨에 박힌 비검을 천천히 뽑았다. 추욱--- 비검이 뽑히는 순간, 한 줄기 피분수가 힘차게 뻗어나갔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우근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다만 어깨 안쪽의 혈도를 봉해 뿜어지는 피를 지혈시킬 뿐... 자네는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근은 비검의 날을 움켜쥐며 속삭이듯 말했다. 으드득... 수십 번 정련(精鍊)한 검날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과자처럼 으스러졌다. 강호를 진동시키는 외공의 달인, 철포결 우근의 신위였다. 하지만 이군영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우 방주께서 미천한 후배에게 한 수 지도해 주신다면, 소생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무공의 고하(高下)를 논할 시기가 아닌 듯하여 무척 안타깝소이다. 이군영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청의노인 하나가 통로의 벽쪽으로 다가갔다. 청의노인이 벽의 어느 한 부분을 건드리자 벽돌 중 일부가 갈라지며 쇠사슬 몇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군영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그는 그 쇠사슬에 대해 무척이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이곳에 몇 가지 준비를 해 놓았지요. 비록 천하제일대방인 개방과 천하제일장(天下第一掌)인 우 방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 지만, 이미 잃어버린 지리(地利)를 되찾기란 어려우실 것 같소이다. 어디... 하나쯤 보여드릴까요? 이군영의 말이 끝나자 청의노인이 쇠사슬 하나를 잡아당겼다. 덜컹! 순간, 우근의 일행이 서 있던 통로의 천정으로부터 묵직한 굉음이 울렸다. 우근은 반사적으로 천정을 바라보았다. 벽돌로 만들어진 천정의 일부가 쩍 갈라지며 희끗한 무엇인가가 우근의 일행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내음... 독사(毒砂)? 우근은 깜짝 놀랐다. 독사는 강호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암기였다. 크기가 작은 만큼 많은 양의 독을 담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크기가 작은 만큼 일 단 피부 속에 침투하면 피해가 치명적이라는 장점이 있는 것이 바로 독모래, 독사였다. 치사한 놈들... 우근은 본래 서 있던 위치로부터 다섯 걸음 정도 물러선 곳에서 이를 갈고 있었다. 그의 일행이 모두 내노라하는 무인인 이상, 경고한 뒤 충분한 시간차를 두고 천정으로 부터 쏟아진 독모래에 허무하게 당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군영 또한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물론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외다. 이것 외에도 서너 가지 더 준비한 것이 있는데, 그것들은 아마 이처럼 간단하게 피하 실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원하신다면 차례차례 보여드릴 수도 있지요. 이군영은 부채를 가볍게 부쳐 자신에게 다가오는 독사의 매운 내음을 물리치고 있었 다. 개 같은 자식! 우근은 귀가 새빨개질 정도로 화가 났다. 하지만 이곳을 빠져나갈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때 문득, 그의 귓전으로 들려오는 모기소리 같은 전음 하나가 있었다. <우 방주! 어떻게든 놈들의 주목을 끌어주시면, 제가 기관을 움직이는 자를 해치우고 기관을 파 괴해 보리다.> 전음의 주인은 사자검문의 총사 유태성이었다. 우근의 안색이 굳어졌다. 유태성이 비록 기관에 정통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 엄폐물이 없는 이런 좁은 통로에 서, 어떻게 저들 한 가운데 있는 쇠사슬에 접근한다는 말인가? 이때 갑자기 우근의 뒤에 서 있던 개방의 칠결호법 호유광(胡裕珖)이 갑자기 바닥에 드러누우며 숨 넘어갈 듯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이고...나 죽네! 호유광은 목덜미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다가, 급기야는 눈알을 까뒤집은 채 입에 거품을 물었다. 자네... 왜 그러나? 우근은 몸을 돌려 호유광을 바라보고, 뒷전에 있던 유태성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 와 그를 부축했다. 그으으... 그르... 호유광은 손톱으로 자신의 얼굴을 마구 쥐어뜯으며 벌레처럼 버둥거렸다. 그의 발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군영과 그의 수하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우근이 갑자기 몸을 돌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사에 맞은 듯한데, 이거 정말... 하지만 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동료의 고통에 어쩔 줄 몰라하는 처연한 얼굴로 입을 벌림과 동시에, 우수를 번개같이 뻗어 바닥을 후려치는 것은 구궁장법 중 후려쳐 흩뿌리는 힘이 강미(强味)인 뇌천대장 (雷天大壯)이었다. 쿠웅! 돌로 만들어진 바닥이 움푹 패이며 쌓여 있던 독사들이 이군영을 향해 확 밀려갔다. 우웃! 코끝으로 확 밀려오는 매캐한 독향(毒香)에 이군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잘 훈련된 육체의 반응은 신속했다. 활짝 펼쳐진 백옥선이 수직으로 떨어지며, 팔선개동(八扇開洞)의 교묘한 경기(勁氣)가 비침(飛針)처럼 날아드는 독사의 한가운데를 매섭게 갈랐다. 촤악--- 하지만 공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희뿌연 독사가 좌우로 갈라지며 잠시 잃어버렸던 시야가 회복된 순간, 이군영의 눈빛 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큼직한 마대 하나가 독사의 뒤를 이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온 것이다. 뭐냐! 이군영은 얼떨결에 왼손을 내밀어 마대를 나꿔챘다. 찌익--- 구부러진 손가락이 마대를 찢는 순간, 그 안을 채우고 있던 내용물들이 이군 영을 향해 쏟아졌다. 밥그릇, 깨어진 솥, 술호로... 마대 속에서 튀어나온 것들은 쓸 만한 것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잡동사니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군영은 누군가가 자신의 옆을 스치고 지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크윽! 등 뒤에서 들리는 답답한 비명소리... 이군영은 황급히 뒤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기관을 움직이던 철군도의 당주(堂主) 귀면제갈(鬼面諸葛)의 심장으로부터 검을 뽑고 있는 황포장한의 늠름한 모습이었다. 우근의 기습적인 장력은 이군영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군영의 대비는 생각보다 신속한 것이어서, 그는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쏟아지는 독사를 물리쳤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날아든 마대는 이군영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공격이었다. 게다가 마대 속으로부터 튀어나온 구질구질한 그릇 나부랭이들이라니! 그것도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라 할 수 있는 호유광의 손때가 반질반질 묻어 있는... 난생 처음 당하는 더러운 공격에 이군영이 잠시 평정을 잃었을 때, 마대와 동시에 몸 을 날린 유태성은 도마뱀처럼 통로 우측의 벽을 타고 달려 이군영을 지나쳤다. 기관 앞에 서 있던 귀면제갈의 시야에 유태성이 잡혔을 때, 번쩍거리는 철검은 이미 그의 심장 속으로 쑤셔들어오고 있었다. 우근의 출수부터 유태성의 마무리까지 소요된 시간은 두세 호흡 정도, 실로 쾌속한 협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허허! 이런 경우를 당하고서는 아마 누구라도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태성이 기관을 파괴하는 것까지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을 이군영은 아니었다. 기어이 손을 쓰게 만드는가! 이군영의 몸이 훌쩍 움직이는 순간, 백옥선은 허공에 수십 개의 편영(扁影)을 토해내 며 유태성의 전신을 난자해갔다. 헛! 유태성은 갑자기 머리 위로 퍼부어진 부채의 소나기에 기절할 듯이 놀랐다. 물론 처음 마음먹은 대로 쇠사슬을 자를 수야 있겠지만, 그러면 그는 부채에 맞아 죽 는 불쌍한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는 철검을 돌려 부채의 공격에 맞서갔다. 깡, 까강---! 철검과 부채는 허공에서 순식간에 여덟 차례나 교차되었다. 삼십 근이 넘는 장검과 두 근도 안 나가는 부채. 하지만 마지막 여덟번째의 충돌이 끝난 순간, 유태성의 철검은 뚝, 소리와 함께 중간 이 부러져버렸다. 낭창낭창한 부채에 담긴 경력이 유태성이 수련한 삼십 년 검공(劍功)을 여지없이 무너 뜨린 것이다. 아홉번째 휘둘러진 부채가 완골(腕骨)을 부러뜨리고 뒤이은 장력이 아랫배를 강타하 자, 유태성의 두 무릎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풀썩 꺾이고 말았다. 반항은 이 정도로 그치시는 것이 어떻겠소? 이군영은 쓰러진 유태성의 멱살을 잡아 든 뒤, 우근을 향해 말했다. 으음... 우근은 무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유태성과 이군영이 충돌하는 순간, 우근은 앞으로 달려가 유태성을 도우려 했지만, 그의 걸음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상황은 끝나버렸다. 유태성의 검법의 경지를 몇 차례 지켜본 바 있는 우근으로서는, 그를 단숨에 제압해버 린 이군영의 무예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들을 본각으로 모셔가기로 한 결심에는 변함이 없지만, 반드시 살아 있는 당신들 을 데려갈 필요성은 느끼지 않소. 여러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우 방주께서는 심사숙고해 주시길 바라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담고 있는 뜻은 그의 참을성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우근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물론 투항이란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유태성의 목숨이 그의 손에 있는 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우근을 바라보던 이군영의 준미한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기관을! 이군영이 짧게 지시하자 쇠사슬 앞에 또 다른 사람이 다가섰다.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기관을 작동시킬 태세였다. 빌어먹을...! 철담(鐵膽)을 자부하는 우근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무력 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개수작 마라! 통로를 쩌렁쩌렁 흔드는 외침... 그것은 이군영의 뒷쪽에서 들려온 것이다. 이군영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횃불을 들고 있는 한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형님! 우근은 깜짝 놀랐다. 통로를 막고 있는 사람들 너머로 나타난 사내는 그의 의형이자 개방의 소주분타주인 삼각풍 위백이었던 것이다. 흐흐... 아우님, 애송이 하나 때문에 고생깨나 하시는구려! 위백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웃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만 했다. 칼집을 낸 잉어처럼 온 몸에 자상들이 가득 차 있고, 어깨와 등덜미에 각각 한 대씩의 화살을 꽂고 있는 사람은 쉽게 웃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 애송이를 우형(愚兄)이 어찌 처리하는지 구경해 보시겠소? 위백은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무엇을 믿는지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어 그는 우근에게 주었던 시선을 이군영에게로 끌어당겼다. 자, 자! 얘야! 저 벽 앞에 서 있는 놈을 좀 부르지 않으련? 이군영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는 농담이나 허세를 좋아하지 않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누구도 그 앞에서 저런 식의 말을 쓰지는 못했다. 그가 안색을 굳히자 전신에서 자욱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어쭈, 노려봐? 흐흐, 어디 이걸 보고도 노려볼 수 있나 보자! 위백은 낄낄거리며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들고 있던 횃불에 가져다 댔다. 치이익! 위백이 꺼낸 물건의 꽁지 부분에서 새파란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군영의 안색이 확 변했다. 팔열호?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위백이 꺼내든 물건은 그들이 철군사에 보관하고 있던 폭탄, 팔열호였던 것이다. 아까 화약고에서 나오다가 하나 슬쩍 했지... 자! 이제는 저놈을 불러들이실까? 보시다시피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어. 으드득... 이군영은 이를 갈았다. 네모 반듯한 장작과도 같이 생긴 흑갈색의 폭약 팔열호... 그 막강한 위력은 그 또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동해의 끝, 해동 조선국(朝鮮國)과 요동반도 사이에는 해도(海圖)에도 나와 있지 않 은 신비한 섬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 섬을 금부도(錦浮島)라 부른다.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아 수많은 물새들의 서식지였던 금부도에는, 언제부터인가 몽고족에 의해 중원에서 쫒겨난 여진(女眞)의 일족인 카므르족(甲門族)이 거주하게 되 었다. 카므르족은 여진의 금국(金國)이 융성하던 시절, 타고난 신력과 용맹으로 무예에 대 한 일파를 이루던 부족이었다. 또한 이들은 여진 특유의 화기제작에 능하여, 화력이 강한 폭탄을 만드는 비전(秘傳) 알고 있었다. 금부도에 정착한 이들은 하나의 문파를 이루고 황하나 양자강 하구, 조선의 평안 황 해 연안, 그리고 멀리 동영(東瀛)까지 진출해 해적질을 일삼았다. 사람들은 이들을 두려워하며 뇌적(雷賊)이라 불렀으니, 이들이 바로 동해뇌문(東海雷 門)인 것이다. 비각의 각주인 이악은 강호 활동을 위해 강호육사(江湖六社)를 포섭함에 있어서, 의 도적으로 중토를 에워싸는 포진(布陣)을 취하였다. 뇌문의 포섭 역시 그런 의도로 성사된 것이지만, 뇌문은 다른 곳들과는 달리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비각의 인물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단지 그들이 정기적으로 상납하는 팔열호와 화성(花星), 두 가지 유명한 화기만이 뇌 문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었다. 이렇게 좁은 통로에서 그것을 사용한다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이군영의 말은 물론 사실이었다. 하지만 위백은 코웃음을 칠 뿐이고 심지는 계속 타들어갈 뿐이다. 좋아, 좋아! 말대로 하지! 이군영의 손짓에 기관 앞에 서 있던 장한이 몇 걸은 뒤로 물러섰다. 흐흐! 좋았... 으...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던 위백은, 온 몸을 관통하는 듯한 통증에 비틀거리면서 통 로의 벽에 기대 섰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말을 잘 듣는 아이로군! 애비가 누군지는 몰라도 가정교육이 제대로 됐어! 심지가 반 뼘 정도 남았을 때, 위백은 이빨로 불이 붙은 부분을 물어뜯었다. 사람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 가지 더! 잠시 유예를 둔 위백은 다시 심지쪽으로 횃불을 가져다 댔다. 흘러내린 피가 얼마나 많은지 발 밑에 찰랑거리며 고일 정도였지만, 눈빛만은 광인처 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네가 모시고 있는 분을 방주님께 보내드려라! 이군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서! 날뛰는 듯한 광기가 위백의 두 눈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이군영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자는 이미 살기를 포기한 사람 같았고, 팔열호에 남겨진 심지는 너무나도 짧았다. 만약 팔열호가 또다시 점화된다면 이제는 그 누구도 폭발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군영은 축 늘어진 유태성을 우근에게로 던졌다. 이제 됐나? 이군영의 물음에 위백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나는 말이야... 위백은 벽에서 기댔던 몸을 다시 세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록 비럭질로 천하를 주유한 몸이지만, 살아 생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던 적 은 한 번도 없었어. 알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위백이 말이 장황해지자, 우근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고요한 통로 안으로 위백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너희들이 내 마누라를 부려 내 몸에 무슨 수작을 하고, 그것 때문에 내 친구가 몹쓸 일을 당한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정말 그 자리에서 죽고 싶었어! 죽고 싶었다고! 형님! 안 돼요! 우근이 소리치며 앞으로 내달으려 했다. 이제는 위백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주! 뒤에 서 있던 상위지가 우근의 몸을 부등켜 안았다. 잘된 일 아닌가? 이렇게 훌륭하게 죽을 자리가 있다니... 앞이 가물거려 이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위백은 툴툴거리며 웃었다. 아마도 동지들은 무사할 것이다. 그들의 뒷쪽에는 어떤 불길도 막아줄 든든한 돌문이 달린 석실이 있으니... 위백은 횃불을 든 손을 서서히 치켜들었다.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상 아우! 방주를 모시고 석실로 들어가게! 횃불이 심지에 바싹 접근했다. 안 돼! 순간, 이군영의 손으로부터 새하얀 섬광이 폭출했다. 파앗--- 섬광은 출발과 동시에 위백을 지나가고 위백의 가슴에서는 선명한 피분수가 솟구쳤다. 형님---! 우근은 울부짖듯 소리치며 앞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그를 잡고 있는 상위지는 요지부 동이었다. 흐흐...제기랄! 위백은 나직히 중얼거리며 벽에 기댄 채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의 가슴에는 사발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통증은 없었지만 한 올의 힘도 끌어올릴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며 팔열호가 힘없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치이익--- 모든 사람들을 눈을 찔러오는 새파란 불꽃... 심지는 점화된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던 위백의 얼굴에 노을 같은 미소가 맺혔다. 으아아아! 방주님! 상위지는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외치며 몸부림치고 있는 우근을 석실로 잡아 끌었고, 이군영은 몸을 날려 기관 중심부에 달린 쇠사슬 하나를 잡아챘다. * * * 쾌자산수(快刺散手) 손만리(孫萬里)의 반월도(半月刀)는 그 별호만큼이나 빠르고 요 란스러운 것이었다. 뚝...뚝... 손만리의 목에서 뿜어져나온 핏물이 흑정의 좁은 검신을 타고 흘러내릴 때, 석대문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십여 개의 상처들이 일제히 저마다의 존재를 호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석대문은 촌각도 머뭇거리지 않고 탑을 향해 달려갔다. 석대문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탑 입구에 즐비하게 널려 있는 시신들, 그 대부분은 가슴이나 얼굴이 으스러져 있었 다. 석대문은 그것이 위맹한 외가공력에 의해 당한 상처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 다. 먼저 들어간 우근 일행의 솜씨이든 나중에 뒤따라 들어간 위백의 솜씨이든, 개방이 자 랑하는 권장지력(拳掌之力) 때문이리라. 대단하군. 석대문은 탑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진쯤 전에 우근이 발견했던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는, 그 역시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석대문은 벽에 걸린 화섭자 하나를 들었다. 왼손을 치켜올리자 뜨끔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치솟아 올라왔다. 등에 박힌 단창이 척추 주위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석대문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계단을 딛고 걸음을 옮겼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고요했다.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무슨 광경이 지치고 상처입은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우웅--- 이때 갑자기 계단 전체가 진동했다. 천정이 흔들리며 돌가루가 떨어지고, 바닥이 지진이라도 만난 듯 요란스럽게 진동했다. 뒤이어 들리는 엄청난 폭음... 콰앙---! ...? 무슨 소릴까? 석대문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화섭자의 불꽃이 후방을 향해 활딱 드러누우며, 누가 양쪽에서 잡아다니기라도 한 듯 귀 밑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압력이 밀려온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계단 앞쪽을 가득 메우고 몰려드는 것은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시뻘건 불길의 노도(怒濤)... 으웃! 신체의 모든 기관이 일시에 마비된 듯, 석대문은 아무 생각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 었다. 단지 환한 빛 속으로 갑자기 들어간 듯한 기분만이 그의 뇌리를 지배했다. 빛, 그리고 뜨거움... 몸이 붕 띄워져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빛의 물결은 그의 의식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갔다. * * * 양무청으로 가장한 곽인이 쓰러져 있던 감방 안... 상위지는 석문을 밀어닫은 채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팔열호의 폭발압은 그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어서, 석문은 통째로 떨어져 나갈 듯 심하 게 요동치고 있었다. 만약 석문이 없었다면, 석실 안으로 피한 사자검문과 개방의 방도들은 그 자리에서 잿 더미가 되버렸을 것이다. 문 밖에 있는 사람들처럼... 방주! 문의 돌쩌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자 상위지는 우근을 향해 고함쳤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우근은 그가 알던 우근이 아니었다. 형...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감방 벽에 기대 있는 우근의 입에서 울음 섞인 신음 소리가 흘 러나왔다. 상위지에 의해서 석실로 끌려들어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그의 눈에 담긴 광경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이군영이 던진 백옥선에 가슴이 관통되고도 석문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이 그를 향해 손짓하던 위백의 미소띤 얼굴... 흐흑---! 우근은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쏟고 만다. 방주! 상위지는 피를 토하듯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위 형님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 생각이오? 문도들을 생각하시오! 그 말에 꽉 감겼던 우근의 두 눈이 번쩍 뜨여진다. 금방이라도 주르르 피를 흘릴 듯이 붉게 충혈된 눈동자... 하지만 상위지의 말은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는 여전히 개방의 방주였고, 방령이 쓰러진 이상 이 일행의 책임자였다. 그르릉--- 돌쩌귀가 떨어진 석문은 지탱력을 잃고 석실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 틈새로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화마... 이익! 개방 문도 두 명이 다시 석문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문을 밀어오는 압력은 너무도 거센 것이었다. 그들은 피가 배어나올 때까지 입술을 깨물며 석문을 밀어붙이지만, 점차 뒤로 밀려나 는 두 다리는 그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다. 이때 솥뚜껑 같은 두 손바닥이 석문 위에 대어졌다. 일그러졌던 상위지의 얼굴이 확 펴졌다. 손톱 부근까지 시커먼 털이 숭숭 나 있는 두툼한 손바닥.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익숙한 사람의 손바닥이었던 것이다. 내가 잠시 본분을 잊었네! 자, 힘을 주게! 우근이 공력을 끌어올리자, 덕지덕지 기운 옷자락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끼이이--- 석문은 날름대는 화마를 밀어붙이며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석문이 달구어졌을 무렵, 그토록이나 거세게 석문을 밀어오던 압력이 서서히 사그러들었다. 끝났군요... 상위지는 한숨을 쉬며 석문을 밀던 두 손을 떼었다. 그의 두 손바닥은 누렇게 익어 있었다. 그는 손바닥을 휘휘 내두르며 우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근은 아직도 석문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치이이--- 우근의 손바닥으로부터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석문으로부터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방주... 말리려 하던 상위지의 말이 쑥 들어간 것은, 가늘게 떨리는 우근의 어깨를 보았기 때 문이다. 잠시 후 우근은 석문으로부터 손바닥을 떼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어느덧 방주로서의 근엄함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상위지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두 뺨을 가로지른 선명한 눈물자국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근은 얼굴을 쓰윽 문지르며 말했다. 나가세! 지탱력을 잃은 석문이 바깥 쪽으로 힘없이 넘어졌다. 쿵! 후끈한 열기가 밀어닥쳤다. 사람들은 통로를 꽉 메운 화약냄새와 고기 타는 냄새,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 로 자욱한 연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우근은 두 손을 쭉 내밀었다. 휴릉--- 가벼운 바람이 일어나며 통로를 메우던 연기가 바깥쪽으로 밀려갔다. 통로의 벽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으며 군데군데 사람의 형상을 한 희끄므레한 그 림자가 새겨져 있었다. 악마와도 같은 화염의 폭풍은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태운 것도 모자라, 그 재마 저 벽 위로 밀어붙여 저렇듯 도배를 해버린 것이다. 형님...! 우근의 눈시울이 다시금 뜨거워졌다. 아마 위백도 저 하얀 그림자들 중 하나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는 차마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가자! 우근은 사람들을 이끌고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끼이익--- 우근의 일행이 사라진 뒤 오래지 않아, 통로의 바닥 한 곳이 갈라졌다. 콜록, 콜록! 심하게 기침을 하며 구멍 밖으로 나온 사람은 본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커 먼 검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쿡, 쿨룩! 카악! 입 속에도 검뎅이 들어갔는지, 내뱉는 가래조차 시커멓게 엉겨 있었다. 의복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눈썹과 머리카락은 절반 이상이 그을려 가루 가 된 사내... 기침이 끝나자 사내는 허리를 펴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검게 타붙은 옷자락을 탁탁 털기 시작했다. 문득 문득 검은 얼굴 가운데 한 줄기 하얀 선이 그어졌다. 과연 뼈대가 강한 거지들이야. 조금만 늦었다면... 사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통로를 따라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몇 발짝이나 갔을까... 사내의 눈이 반짝 빛난다. 바닥 한켠에 떨어져 있는 검은 덩어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느릿하게 그것을 집어들었다. 손바닥으로 몇 번 털어내자 하얀 본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물체, 그것은 부채였다. 천잠사(天蠶絲)로 짠 천은 보푸라기 하나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순옥(純玉)으로 만든 살만은 그토록 무서운 화마 속에서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오늘은 내가 진 셈인가? 하하! 촥---! 살만 남은 부채를 경쾌하게 펼쳐보는 사내, 이군영은 맑게 웃으며 우근의 일행이 사라 진 통로 저편을 바라보았다. 二十四章 秘密 (1) 농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를 만들어주던 황금빛 계절도 무심히 지나가고 있었다. 풀잎 위에 매미날개처럼 얇은 서리가 살짝 내린 새벽길... 북경 북쪽, 팔달령(八達嶺)을 넘어가는 네 명의 사내가 있었다. 두 명의 장한과 두 명의 노인. 화산에서 만난 제갈휘까지 합류한 석대원의 일행이었다. 제갈휘가 합류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석대원 일행이 제갈휘에 합류했다고 해야 옳 을지도 몰랐다. 일행을 인도하는 사람이 바로 제갈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자가 바닥난 석대원들에게 있어서 제갈휘는 세상에 다시 없을 훌륭한 물주나 마찬가지였다. 형님! 곡리(穀里)에서 무슨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요? 석대원은 앞서 걷고 있던 제갈휘에게 물었다. 그들은 이미 호형호제(呼兄呼弟)의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한 번 마음이 맞은 사내들이란, 한눈에 반한 처녀 총각들보다도 빨리 친해지기 마련 이다. 더구나 화산에서부터 팔달령까지는 사천 리가 넘는 길이었다. 한 계절을 노상(路上)에서 공유한 길고 긴 동행이 그들의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 준 것이다. 글쎄... 사실 나도 자신은 없다네. 하지만 초당(楚堂)에 대해 한 올의 정보라도 찾을 수 있는 데라고는 그곳뿐이니, 무작 정 가볼 수밖에... 제갈휘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번 행보에 대해 그 역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당이라... 모용풍의 <비세록(秘世錄)>에 적혀있던 초당에 관한 기록들이 석대원의 뇌리를 스쳐 갔다. 석대원은 마음 속으로 그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성명 : 초당. 외호 : 불로동자(不老童子). 출생 : 하북성 북동부 곡리. 무공 : 마단동자공(魔丹童子功). 특징 : 상기 무공을 수련한 탓에 체구가 왜소. 행적 : 34세 무림 출도 후 하북과 산동을 중심으로 명성을 떨침. 37세에 백련교에 입교. 38세에 무양문에 입문. 49세에 호교십군 중 서열 팔위인 팔로군장에 오름. 55세에 호교십군 중 서열 삼위인 삼로군장에 오름. 성격 : 치밀하고 잔인하며 사교성이 없음. 초당의 나이는 일흔이 훨씬 넘지 않습니까? 그가 곡리를 떠난 것도 삼십 년도 훨씬 더 되었을 텐데... 무슨 흔적이 남아있을까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제갈휘는 그 이상의 것을 대답할 수 없었다. 제갈휘가 초당에 대해 조사해보겠다는 의문을 품은 것은, 화산에서 석대원을 만난 뒤 함께 무양문으로 향하던 중에 날아든 한 통의 전서(傳書) 때문이었다. <제갈 숙부 전(前). 비보(悲報)를 전하는 소질(小姪)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형산(衡山)으로 용봉단(龍鳳團)을 토멸하기 위해 출정한 토벌대가 괴멸당했습니다. 토벌을 지휘했던 왕(王) 아우와 오군장(五軍將)의 시신이 어제 본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망자는 이백스물여덟 명, 부상자는 여든한 명으로 피해 상황은 무척 심각합니다. 아버님께서도 이번 일로 매우 노하셨고, 용봉단과 그 방조자들에 대해 긴급척살령을 발동하셨습니다. 한 가지 의심스러운 일은 초(楚) 노사가 이끄는 삼로군의 피해가 비교적 경미하다는 것입니다. 일전 장(張) 아우의 건(件)도 있고 해서, 약간 미심쩍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군요. 숙부께서 기왕에 북행(北行)하신 김에, 초 노사의 과거 행적에 관해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소질이 나름대로 조사했던 몇 가지 사항을 별첨합니다. 북경 왕(王) 대인에게 지원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그럼 위체를 보중하십시오. 조카 복양(福陽) 배(拜)> 전서에 동봉한 것은 초당의 강호 행적에 관한 몇 가지 자료들... 전서를 다 읽은 제갈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형산으로 떠난 서문숭의 둘째 제자 왕삼보(王三寶)와 오군장 대적용(大迪容)이 차가 운 시신이 되어 무양문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었던 것이다. 왕삼보는 서문숭의 제자라기 보다는 제갈휘의 제자라고 하는 편이 맞을 정도로 그를 따르던 사람이었다. 토벌을 떠나기 전, 형산검문의 역검(逆劍)에 대해 걱정스럽게 묻던 왕삼보의 충후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는 영원히 대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비탄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서문숭의 양자이자 대제자인 서문복양(西門福陽)이었다. 그는 초당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은 제갈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섯 달 전 서문숭의 셋째제자인 인혈사(人血蛇) 장민(張旻)이 용봉단주 강이환(姜易 環)에게 죽음을 당한 이후, 두번째로 벌어진 흉사(凶事)... 두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장민의 시신을 수습해 온 것은 초당의 조카인 초가뢰였고, 왕삼보와 대적용의 시신을 수습해 온 것은 초당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만약 왕삼보의 죽음에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 감춰져 있다면, 제갈휘는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파헤치고 싶었다. 그래서 제갈휘는 초당의 고향인 곡리까지 찾아온 것이다. 여기까지 따라와 주다니, 자네에게 미안하군. 게다가 한 노인과 모용 선생은 이번 행보를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 것 같던데... 제갈휘는 뒷전에 따라오는 두 명의 노인들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원 형님도... 행여 그런 말씀 마시구려. 어차피 무양문에 들릴 몸, 기왕이면 든든한 형님과 동행하여 귀빈 대접이나 받아볼까 하고 함께 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잔소리가 심한 노인네들은 신경쓰지 마세요. 원래가 그런 영감들이니까. 말씀 다 하셨소, 소주? 한참 뒤에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던 한로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석대원을 나무랐다. 팔달령 숲 속에서 곤한 새벽잠에 빠져 있던 참새들이 그 서슬에 놀라 후드득 날아올랐 다. 노인네, 귀도 밝지! 석대원은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2) 중국과 해동과의 무역은 신라와 교류하던 당나라 이후부터 주로 해로(海路)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 산동반도 아래쪽으로 해안을 따라 발달한 여러 무역항들의 역사는 대개 그 당시부터라 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 초기 주원장에 의해 반포된 해로봉쇄령(海路封鎖令)은 이러한 국가 단 위로 진행되던 해상 무역에 큰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무역의 형태 또한 크게 달라지게 되었으니, 관이 주가 되던 국가간 교역보다 상인이 주가 되는 육상 민간 교역이 크게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상인들로서 무역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선구자적인 시각을 갖춘 사람으로 칭송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왕삼보의 아버지이자 북경에서 손곱히는 거상인 왕고(王庫)는 가장 선구자적인 시각을 갖춘 상인이었을 것이다. 왕고의 주판 위에서 움직이는 육상 무역은 다른 상인들의 그것과는 규모부터 달랐다. 육상 무역을 위해서는 말과 마차가 쉬어가고 각지의 소매상인들과 접촉할 수 있는 중 간 거점이 필요했다. 왕고는 그런 거점을 확보하는 데 남다른 투자를 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지는 거점은 물론이거니와, 장소의 확보가 어려운 곳에는 직접 자 본을 들여 새로운 상업도시를 만들기도 했다. 장성(長城) 아래 영세한 농촌인 곡리가 북동면에서 세손가락 안에 드는 상업도시로 성장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 * * 북경대포점(北京大布店)은 곡리 안에서도 굴지의 규모를 자랑하는 상점이었다. 왕고가 중원에 가지고 있는 마흔세 곳의 포목점 중 하나였으며, 해동과의 무역에서 가 장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비단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북경대포점에 이른 아침부터 손님이 찾아왔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하신 제갈 대협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배첩을 받고 허둥지둥 달려나온 혈색 좋은 중년인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조상님이라도 만난 것처럼 활짝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가식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제갈휘는 예상치 않았던 환대에 멋적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명뿐인 일개 무부(武夫)를 너무 반겨주시는군요. 제가 제갈휘라는 사람입니다. 아이고!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소생은 이 포점(布店)을 관리하고 있는 박선동(朴宣東)이라고 합니다. 중년인은 너스레처럼 겸손을 보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박...선동? 그 이름이 이상하게 들렸던지 제갈휘의 뒷전에 서 있던 모용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박선동이라 소개한 중년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 키며 말했다. 이름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하하! 그렇시겠죠. 박씨야 중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성씨이니까요. 소생은 해동 출신입니다. 산 속에서 자란 석대원은 장사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해동인이라 밝히는 박선동을 보며, 왕고의 수준 높은 상술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역이란 종합적인 경제 행위이다. 무역을 이윤 획득만을 위한 단순한 장사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류 잡상인의 얕은 상술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무역을 위해서는 상대 국가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상세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정보를 밑바탕으로 한 경제적 동화(同化)는 교역을 지속적이고,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다. 왕고는 그것을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을 사용했으니, 바로 교역 당사국 출신의 상인 을 관리자로 고용하여 그에게 거래에 관한 전권(全權)을 위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탁월했다. 예부터 해동의 상인들은 중국인들에 대한 불신감이 컸다. 왕고는 이러한 불신의 골을 같은 해동인인 박선동을 내세움으로써 좁히려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직은 소매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해동 상인으로 하여금 중국인과 거래 한다는 불안감 대신, 믿을 만한 동족과 거래한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다. 또한 박선동은 어떤 중국인보다도 해동의 정세에 밝을 것이다. 해동은 나라가 작은 만큼, 돌출된 변수에 따라 경제가 흔들리는 정도가 심했다. 한 가지 원칙만을 가지고 해동과 같은 소국(小國)과 교역을 한다는 것은 답답하고도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소국에는 소국의 정세에 맞는 유기적인 임기응변이 필요했다. 그 점에 있어서 박선동은 그야말로 적임이었던 것이다. 자, 들어가시지요! 아직 식전이시죠? 아랫것들에게 아침을 준비해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석대원의 감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선동은 밝게 웃으며 일행을 대문 안으로 안내했 다. * * * 얍! 하압---! 박선동의 안내를 받아 내원으로 향하던 석대원 일행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울리 는 맑은 기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의아한 기색을 보이자 박선동이 멋적은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 아들놈입니다. 제 아비처럼 상인이 되는 게 싫다고, 날마다 저렇게 검을 들고 설치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지요. 허허! 그렇습니까? 제갈휘는 석대원을 힐끗 보더니, 박선동을 향해 말했다. 검이라면 다행히 저나 여기 있는 석 아우가 조금 휘두를 줄 아는 형편이니, 혹시 도 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마음씨 좋은 제갈휘는 박선동의 과분한 환대에 무엇인가 답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중원에서 태양 같은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검호의 이런 제의는 박선동에게 있 어서는 뜻밖의 영광이었다. 박선동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렸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희에게는 다시 없는 광영이지요! 일행은 박선동의 뒤를 따라 작은 문으로 들어섰다. 한쪽 면의 길이가 이 장이 채 안 되는 정방형의 좁은 연무장이 마련된 정원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연무장 한가운데에는 열두셋 정도 된 소년이 두 자 길이의 검을 휘두르며 겅중겅중 뛰어다니고 있었다. 용(容)아! 이리 오거라! 박선동이 큰 소리로 부르자, 소년은 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코가 오똑한 귀여운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인사드려라! 이분께서는 중원에서 제일가는 검객이신 제갈휘, 제갈 대협이시다! 아이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냉큼 달려와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인용(仁容)이가 제갈 대협을 뵈어요! 허, 이런... 난데 없이 대례(大禮)를 받은 제갈휘는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이는 몸을 발딱 일으킨 뒤 제갈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두 눈에는 기이한 열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제갈 대협의 협담(俠談)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지요. 촉잔(蜀棧)에서 열두 명의 도적을 단숨에 물리치셨을 때에는 관운장(關雲章)처럼 따라 놓은 술이 채 식지도 않았다면서요? 저는 이 담에 꼭 제갈 대협 같은 검객이 될 거예요.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것은 비단 아침 수련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는 마음 속에 가득 담아놓은 제갈휘에 대한 찬사를 한꺼번에 풀어놓지 못하는 것 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제갈휘는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한두 차례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래... 아주 똘똘하게 생겼구나. 제갈휘는 아이의 모습을 죽 흝어보았다. 나이답지 않게 어깨가 두툼했고, 팔과 다리 또한 길죽한 편이었다. 이런 체형의 소유자가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수련한다면 능히 상승검도를 익힐 수 있 을 것이다. 해동의 검법을 익히는 모양이지? 아이가 쥐고 있던 검은, 폭이 좁은 것만을 제외하면 마치 도(刀)처럼 보였다. 제갈휘는 해동의 검사들이 이런 검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예! 아이는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어디, 네가 수련한 것을 펼쳐보거라. 제갈휘의 말에 아이는 아버지 박선동을 바라보았다. 박선동은 눈짓으로 아이를 재촉했다. 알겠습니다! 아이는 연무장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찻---! 검을 중단세로 치켜들고 검극을 한참 동안 노려보던 아이는 맑은 기합과 함께 검을 휘 두르기 시작했다. 쐑! 휘익---! 두자 길이의 해동검이 허공을 휘감으며 제법 매서운 파공성이 울렸다. 열여덟 초식의 연환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투로(套路)는 아이가 얼마 전 수련한 연화정 심(蓮花正心)의 검법 중 일부였다. 해동 북부에서 은밀히 이어지고 있다는 이 검법의 정화는 은일자중(隱逸自重)으로 이 루어지는 견고한 방어였다. 후우---! 초식이 다 끝나자 아이는 검을 허리춤에 댄 채 호흡을 조절하는 것으로 시전을 마무리 하였다. 제갈휘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손짓으로 불렀다. 훌륭한 기파(氣波)와 좋은 힘이다. 네 나이에 진검으로 수련하는 것만 보아도, 네 기량이 충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구나. 정말이요? 아이는 평소 앙모해오던 대검객에게 칭찬받은 것이 기쁜지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한 가지를 알려주마. 내가 일러주고 싶은 것은 초식이나 검로가 아니라 검인(劍人)으로서의 마음가짐이란다. 자! 내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말거라! 제갈휘는 오른손 인지(人指)를 세웠다. 아이는 눈을 부릅뜨고 제갈휘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길고 부드러워 보이는 멋진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손가락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아이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날카로운 기운이 자신의 눈 앞으로 쏘아져 오는 것을 느꼈다. 얼음물 속에 얼굴을 담근 듯한 소름기치는 한기가 아이의 가녀린 영혼을 꽝꽝 얼어붙 게 만들었다. 악! 아이는 엉겁결에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꽉 감아버렸다. 잠시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손가락 하나가 아이의 코 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제갈휘의 손가락이었다. 아이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이를 찔러온 것은 다름 아닌 제갈휘의 손가락이었던 것이다. 제갈휘는 손가락을 거두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너만한 나이였을 때 이런 수련을 했단다. 검수는 손가락이 아니라 송곳이 찔러오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아차,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이 바로 검수이지. 검을 쥐고 상대와 맞섬에 있어서 단 한 순간이라도 상대의 눈과 발과 검끝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아이는 멍청하게 서 있다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이때 곁에 서 있던 석대원이 불쑥 끼어들었다. 재미없기는 여전하시구려! 이렇게 귀여운 아이에게 눈 깜빡이는 거나 가르치고 있다니, 원... 제갈휘는 껄껄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하하! 그렇게 말하는 자네가 좋은 가르침을 주면 되지 않겠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오. 석대원은 싱긋 웃으며 아이 앞에 나섰다. 석대원이 아이 앞에 서자 아이는 입을 딱 벌렸다. 원래 체구가 큰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대하니 이건 완전히 괴물이었다. 바위 같은 근육이 불거져나온 가슴팍과 소나무 뿌리같이 튼튼해보이는 다리... 아이의 키는 그의 허벅지 어림밖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이리 줘 보렴. 석대원은 아이의 손에서 해동검을 받아들었다. 아이에게는 그리도 크게 느껴지던 검이, 그의 손 안에 들어가니 마치 젓가락처럼 보였 다. 모두 세 가지 수법을 가르쳐주마! 눈을 크게 뜨고 잘 보아라! 석대원은 연무장으로 걸어나갔다. 첫번째는 정면에서 우측! 석대원은 정면을 향해 한 차례 검을 내리침과 동시에 기묘하게 두 다리를 놀리며 우측 을 베었다. 회전하는 순간의 그의 몸은 너무나 빨리 움직였다. 그토록 거대한 덩치였음에도 불구하고 희뿌연 잔상만 일렁일 뿐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 던 것이다. 두번째는 정면에서 좌측! 그는 같은 방법으로 정면과 좌측을 동시에 공격했다. 마지막으로 정면에서 후방! 정면을 벤 석대원은 뒤로 돌아 후방을 향해 일검을 날렸다. 처음서부터 후방을 노리고 벤 것처럼 한 치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는 균형잡힌 일검 이었다. 석대원은 검을 거둔 뒤 손짓으로 아이를 불렀다. 자,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보거라! 아이의 눈이 커졌다. 연무장 바닥은 비록 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황토를 여러 번 다져 만든 탓에 돌에 못지 않게 단단했다. 그런데 어느새인가 그 위에는 발자국이 십여 개 찍혀 있었다. 어른 손바닥 두 개는 들어갈 정도의 무지막지한 크기로 미루어 누구 발자국인지 생각 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 이것, 이것이 첫번째 동작의 걸음이지. 그리고 이것, 이것, 이것은... 석대원은 발자국을 세 종류로 분류해서 각각의 순서를 일러주었다. 자상한 훈장이 아이에게 천자문을 처음 가르칠 때처럼 부드럽고도 상세한 설명이었다. 발자국의 진행을 잘 살펴보면 하체와 허리의 움직임을 알 수 있을 거야. 간단한 동작이지만 숙달되면 실전에서 유용하게 쓰일 테니, 하루에 백번씩 이 발자국 을 따라 움직이도록 해라. 아이는 한참 동안 발자국을 들여다 보았다. 설명을 곰곰히 되새겨보노라니, 회전하는 순간의 석대원의 거대한 몸이 왜 분명히 보 이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감사는! 밥 한 끼 떳떳이 얻어먹으려고 하는 짓이지! 석대원은 배를 어루만지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석대원이 제갈휘의 곁으로 돌아오자, 제갈휘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자네 답군! 딱 필요한 만큼의 실용 검법을 가르쳐주니 말이야! 석대원 또한 제갈휘의 어깨를 치며 대꾸했다. 형님 답소! 딱 필요한 만큼의 검리(劍理)를 가르쳐주니 말이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 (3)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풍성한 아침상은 먼 길을 온 나그네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을 안 겨주었다. 동북쪽 해산물이 주가 된 식탁을 바라보노라니 근엄한 제갈휘까지도 군침이 넘어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위장이 큰 만큼 허기 또한 컸던 석대원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음식을 해치워나가고 있었다. 궁벽한 곳이라 귀한 분들께 너무 거친 음식을 대접하는 것 같아서 송구스럽습니다. 물론 빈말이다. 빈말을 빈말이 아닌 것처럼 하는 것은 고도의 화술이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박선동은 타고난 장사치였다. 아주 맛있습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제갈휘는 젓가락으로 생선의 가시를 발리며 대꾸했다. 왕 대인께서는 무양문에서 오시는 손님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고 지시하셨지요.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제갈휘는 문득 왕고의 살집 좋은 얼굴이 떠올랐다. 문득, 가슴 한 구석이 아파왔다. 왕고는 본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인 대부(大富)는 왕고의 가업을 잇기 위해 일찌감치부터 상인 수업을 받았으며, 둘째인 이귀(二貴)는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셋째인 삼보(三寶)는 서문숭의 둘째 제자로 무양문에 입문시켰다. 왕고의 마음 한구석에는 어린 시절부터 슬하를 떠나보냈던 막내에 대해 애뜻한 마음 이 항상 존재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당당한 무인으로 자란 왕삼보는 얼마나 큰 자랑거리였을까. 왕 대인을 생각하면 면목이 없습니다. 그토록 아끼시던 자제분이 그리도 허망하게 죽었으니... 제갈휘는 우울한 기분이 되어, 생선을 발리던 젓가락을 떨구었다. 박선동의 부드럽던 눈꼬리가 날카로워졌다. 왕 대인께선 왕 공자를 살해한 용봉단과 오대문파에 대해 모든 수단을 다해서라도 보 복조치를 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령 파산하는 한이 있더라도, 영웅연(英雄然)하는 가증스러운 정파의 위선자들에게 돈의 무서움을 보여주겠다고 하셨죠. 제갈휘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걱정하던 일이었다. 그가 사부와 사문의 몰락도 외면한 채 무양문에 투신한 이유는 단 한가지, 무양문과 정파무림 사이의 오랜 불화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십여 년 간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해 왔다. 하지만 근래들어 오랜 균형이 깨어질 기미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용봉단이나 비각과 같은 난제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제갈휘는 당금 무림의 판도에 대해 가장 객관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또한 오대문파와 무양문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제갈휘의 눈에 비친 용봉단과 오대문파를 위시한 정파인들은, 백련교를 모태로 삼고 있는 무양문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천하에서 무양문의 힘을 당해낼 문파는 없었다. 이것은 제갈휘가 이십 년 간 몸으로 직접 체험한 사실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무양문을 견제해 왔던 신무전 역시 정파무림의 유형, 무형적인 도움없 이는 무양문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파무림의 끈질긴 힘 또한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갈휘는 잘 알 고 있었다. 그들은 천하 각지에 산개해 있으며,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지자를 확보 하고 있었다. 전통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이 시점에서 등장한 용봉단은 제갈휘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오대문파를 등에 업은 용뵹단이 계속 무양문에 도전한다면, 서로에게 아무 소득없는 소모전은 끝없이 지속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이전투구(泥田鬪狗)... 결국 아무도 승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제갈휘의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강이환이란 놈은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함께 죽자는 얘긴가? 제갈휘는 석대원을 바라보며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에 대한 왕 대인의 보복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박선동의 말에 사람들은 손길을 멈추고 그의 둥글둥글한 얼굴을 주목했다. 왕 대인의 금력은 여러분들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입니다. 중원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지요. 오대문파 중에서 규모가 큰 소림사 같은 경우는 왕 대인의 조치가 취해진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지금, 식량이 떨어져 학승(學僧)들까지 시주를 받으러 다닌다고 하더군요. 아마 얼마 후면 장경각의 불경들까지 서방(書房)에 내다 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하하! 박선동은 자신이 속한 계급인 상인의 힘을 과시라도 하듯이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있었 다. 하지만 이 순간, 사람들은 등덜미를 타고 내려가는 섬뜩한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금적산(金積山). 황금으로 산을 쌓아올렸다는 말이다. 왕고의 불가산(不可算)적인 재산은 그의 별명인, 금적산이라는 석 자로 대변된다.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즐비한 북경에서도 황궁을 제외하곤 가장 큰 집인 보운장(寶運 莊)의 주인인 왕고. 북경을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그의 땅을 밟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강북 상권의 이 할 이상을 움켜쥔 경제계의 제왕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말이 강북의 이 할이지, 그 액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천문학적인 수치일 것이다. 또한 조상 대대로 갑부였던 왕씨가문의 힘은 관부에도 깊숙히 미치고 있었다. 경제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부각되고 있는 이 시기, 어쩌면 중원의 진정한 제황은 황 궁 안에 있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옛말 그대로군. 석대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오대문파를 위시한 정파인들은 앉은 채 굶어죽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곡리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제갈휘가 화제를 슬쩍 돌렸다. 이곳의 역사요? 역사랄 것 까지 있나요, 생겨난 지 백 년도 안 되는데... 부탁하시니,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박선동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3) 기린(麒麟)은 영물이다.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올 때 하늘은 기린을 먼제 세상에 등장시켜 그 전조(前兆)로 삼는다고 한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밟지도, 먹지도 않는다는 기린... 그래서 기린은 영물이다. 하지만 기린원(麒麟院)이라는 간판을 내걸은, 곡리의 동쪽 구석에 위치한 자그마한 학당(學堂)은 이름만큼 영묘(靈妙)스럽지 못했다. 세 간 짜리 초라한 건물에 이제는 학동들의 발길마저 끊긴 그곳은, 죽지 못해 살아가 는 곡리의 노인들이 한 푼 짜리 내기바둑이나 장기판을 벌이며 하루를 때우는 장소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초당이라... 아, 초당! 초당이라면 여기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지. 여봐, 황(黃) 영감! 이리 좀 와 보게나. 지금은 노인들과 어울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였지만, 한때 기린원에서 훈장질 을 해먹던 공(孔) 노인이 한쪽 구석에서 바둑을 구경하는 노인을 불렀다. 한참 훈수에 열중하고 있던 황 영감이 휘적휘적 다가왔다. 시커멓게 변색한 이빨과 얼굴에 핀 검버섯... 비릿한 노인네 냄새가 황 영감으로부터 풍겨나왔다. 이분들이 초당에 관해 알고 싶어 하는군. 자네는 그에 관해 조금 알지? 초당이라... 한참을 되뇌여 보던 황 영감은 갑자기 무릎을 치며 소리쳤다. 초당이라면 육선문(六扇門)에서 잘 나가고 있을 그 친구? 헐헐, 그에 관해서라면 아마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을걸? 육선문? 육선문이라면 관부를 뜻한다. 제갈휘의 눈빛이 번뜩였다. 박선동의 소개로 오게 된 이곳에서 노인네 냄새를 맡아가며 고개를 조아린 대가는 전 혀 예상치 못했던 육선문 이라는 세 글자였다. 약소하지만... 어르신들 약주값이라도 하시지요. 제갈휘는 품 속에서 한 개의 주머니를 꺼내어 황 영감에게 내밀었다. 뭘 이런 것을 다... 익? 엉겁결에 주머니를 받아들던 황 영감은 그 무게의 묵직함에 깜짝 놀랐다. 슬쩍 주머니를 열어본 황 영감의 입이 귀 밑까지 찢어졌다. 하얗게 번들거리는 은원보가 세 덩이나 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험! 젊은이가 아주 됐구만, 사람이 됐어! 그래 초당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뭔가? 누가 뺏을까 얼른 주머니를 소매 속에 집어넣는 황 영감의 목소리는 어느덧 청루(靑 樓)의 점원처럼 나긋나긋해져 있었다. 모든 것! 노인장께서 알고 계시는 초당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만족한 만큼 이야기해 주신다면 따로 사례를 드리겠습니다. 제갈휘는 품 속에서 또 하나의 주머니를 꺼냈다. 그것을 바라보는 황 영감의 눈빛이 게슴치레해졌다. 초당에 관한 옛일을 되새기는 황 영감의 머리는, 아마도 십년 내로 가장 활발하게 돌 아가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에... 그러니까 그의 가문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아마도... 황 영감은 제갈휘가 원하지도 않은 초당의 삼대조 때부터 주워섬기고 있었다. * * * 제갈휘는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며 기린원의 낡은 문을 나섰다. 뭔가 수확이 있습니까? 대문 밖 담장에 기대어 앉아 있던 석대원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다네. 가면서 애기해주지. 어느덧 북방의 저녁해가 그들의 그림자를 길죽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벌써 하루가 지나간 것이다. 우선 초당이 감추고 있던 경력을 한 가지 밝혀냈네. 숲 사이로 난 소로를 걷던 제갈휘가 입을 열었다. 경력? 그래! 바로 그가 무과에 급제한 적이 있다는 거지. 석대원은 잠시 멍해졌다. 무과라면 무관이 되기 위한 시험을 가리킨다. 무과에 급제했다면, 초당이 무관이었다는 말인가? 대시(大試) 말씀이요, 소시(小試) 말씀이오? 소시라네. 석대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무슨 단서가 잡힐 듯도 했다. 무과의 소시라면, 변방이나 지방 진영(陣營)에 근무하는 무관을 뽑는 대시와는 달리, 소규모의 정예만을 뽑아 황실 경비원이나 도찰원과 같은 감찰기관요원을 뽑는 시험을 말한다. 그가 얼마 전 화산에서 무예를 겨룬 바 있던 동창의 영반, 양진삼도 소시에서 급제한 경력이 있었다. 즉, 소시는 대시에 비해 어딘지 은밀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초당은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소시에 장원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지. 휘이유! 대단하군요. 신동(神童)소리깨나 들었겠는데요? 그런데 그가 열일곱 살 때라면 벌써 오십 년도 전의 일 아닙니까? 그렇지! 제갈휘는 미소짓고 있었다. 재미있지 않나? 그가 무림에 발을 딛은 것은 삼십여 년 전이고, 곡성을 떠난 것은 오십여 년 전이야! 결코 짧지 않은, 이십 년이라는 공백 기간...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물론 관(官)에 있었겠지요. 석대원의 얼굴에도 제갈휘의 그것과 동질의 미소가 떠올랐다. 머릿속을 스쳤던 한 가지 단서, 그것이 윤곽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제갈휘는 설명을 계속했다. 물론 관이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볼까? 소시에 장원급제할 정도의 무반의 기재를, 그것도 이십 년씩이나 대외에 알려지지 않 게 은밀히 부릴 수 있는 기관은 세 곳뿐이지. 첫째는 오군도독부 산하 홍포시위대(紅布侍衛隊), 둘째는 비각, 그리고 셋째는 동창일 것이야. 만일 초당이 황제의 신변을 경호하는 홍포시위대 출신이라면 그 전력(前歷)을 숨길 하 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고, 동창은 그 시절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지. 그렇다면 남은 곳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비각뿐이지. 비각뿐이군요.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그리고 이 숲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놈들도 아마... 석대원의 말에 제갈휘는 의미있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비각 놈들이지. 비각이겠죠.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돌아섰다. 두 사람이 지나쳤던 숲 속으로부터 이십여 명의 장한들이 흉흉한 살기를 번뜩이며 몸 을 드러내고 있었다. (5) 소매를 걷어붙인 손목이 무수히 많은 작은 원을 그리며 허공에서 맴돌았다. 손에 쥐고 있던 주발 하나가 손목의 운동에 따라 맴돌았다. 수십 쌍의 시선이 주발의 운동을 따라 맴돌았다. 따드드---. 한 개의 주발 안에서 울려나오는 요란한 소리. 꿀꺽! 수십 개의 목구멍에서 울려나오는 침 넘어가는 소리. 탁! 어느 순간, 주발은 붉은 천으로 덮인 탁자 위에 내리꽂혔다. 사람의 숨을 꽉 막히게 만들 정도의 무거운 정적이 주발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듯 무서 운 속도로 번져나갔다. 거십시오! 주발을 놀리던 사내가 활짝 편 손바닥을 우아하게 내두르며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 갈래로 잘 다듬은 수염이, 태학(太學)에서 보았다면 학식있는 유생(儒生)으로 여길 법한 사십대 중년인이었다. 대분(大分)! 에잇! 이번에도 소분(小分)이다! 세 번이나 틀렸는데, 이번에는 설마 맞겠지! 맞아! 이번에는 소분이야! 사람들은 저마다 쥐고 있던 동전 꾸러미를 좌판 위에 올려놓으며 소리쳤다. 세 구역으로 나눠진 좌판 위에 수북한 동전 무덤이 쌓여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만!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리자 사람들은 하나 둘씩 좌판으로부터 손을 떼었다. 사람들의 손이 다 떨어지자, 사람들과 좌판 사이에 붉은 줄이 길게 걸렸다. 줄의 양편을 잡은 사람은 날카로운 눈매의 청년 둘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얼마씩을 걸었는지 하나하나 기억해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돈을 걸지 않거나 틀린 곳에 걸어놓고도 시침을 떼며 배당금을 요구하는 얌체들에게 배당금 대신 주먹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세 가닥 수염의 중년인은 청년들을 바라보았다. 청년들의 고개가 보일 듯 말 듯 끄떡여졌다. 이는 돈의 확인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이 신호가 나오기 전에 주발을 개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개봉합니다! 중년인은 조심스럽게 주발을 치켜들었다. 주발 안에서 나온 것은 상아로 세공한 두 개의 주사위였다. 오(五)와 사(四)! 합계 구 점, 이번에는 중분(中分)에 떨어졌습니다! 주사위의 눈금을 확인한 중년인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와---! 히힛! 내가 뭐랬어? 어젯밤 꿈이 괜찮다고 했잖아? 좌판 중 가운데에 돈을 걸었던 몇 사람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하지만 중분에 돈을 걸지 않은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강호에서 마당발로 소문난 모용풍의 기분 역시 과히 즐거울 수 없었다. 소분(小分)에 걸었던 두 냥짜리 은정(銀釘) 하나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렸기 때문이 다. 그는 대낮부터 주사위 두 개를 사용한 가장 간단한 노름 중 하나인, 삼분락(三分樂) 을 하고 있었다. 삼분락은 두 개의 주사위로 나올 수 있는 열두 개의 숫자를 대-중-소로 삼분하여, 그 중 한 곳에 돈을 거는 도박이었다. 삼분락. 이름 그대로 삼분에 나누어 걸며 즐기는 도박이다. 하지만 노름이란 본디 돈을 딸 때가 아니면 즐긴다 는 표현을 쓸 수 없는 것이고, 또 한 전문적인 도박꾼이 아닌 이상 노름으로 돈을 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돈 버려 가며 기분 나빠지는 것이 도박인데, 오늘 모용풍이 겪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제기랄! 이거 오늘 재수는 왜 이 모양이지? 카악... 퉤! 모용풍은 걸쭉한 가래침을 뱉으며 전낭을 풀어헤쳤다. 하지만 박선동이 곡리 구경이나 하라고 안겨주었던 비단 주머니는 어느새 그 내용물을 모두 비운 채 단순한 비단 주머니 가 되어 있었다. 주머니를 마련한 박선동의 씀씀이는 결코 박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무엇을 해도 단 한 판을 못 따는 재수로도 질펀히 놀 수 있을 정도로 후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흠, 흠! 모용풍은 슬그머니 옆쪽의 눈치를 살폈다. 그곳에는 우두커니 선 채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한로의 강퍅한 얼굴이 있었다. 한형! 나 돈 좀 꿔 주오. 내 이자는 톡톡히 쳐서 갚아드리지. 한로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진다. 나잇값이나 하시구려! 해도 저물었는데 그만 갑시다! 아니, 이번엔 꼭 맞출 수 있어. 그러지 말고... 어, 어? 한로의 갈고리 같은 손이 모용풍의 겨드랑이를 완강하게 죄어왔다. 모용풍은 한로가 잡아끄는 대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 * * 망할 놈의 새끼! 아까 그 얌체 수염 자식이 분명히 속임수를 썼을 거야. 어쩐지 주사위를 던질 때 자세가 이상하더라니깐... 북경대포점으로 돌아가는 모용풍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 다. 한로는 웬만하면 참고 견디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도박장에서 포목점까지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모용풍의 욕설이 몇번째인지 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한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 마디 쏘아부치고 말았다. 이보슈, 모용형! 이미 주사위를 던진 다음에 당신이 돈을 걸었는데, 그가 무슨 속임수를 썼다는 거요? 주발 안의 주사위가 당신이 돈을 거는 순간에 재주라도 넘었다는 거요? 욕을 하려면 당신의 더러운 재수에나 대고 욕하시오. 열 번 찍어 단 한 번을 못 맞추는 주제에 무슨 도박을 하겠다고... 어? 한형까지 그러기요? 한형 당신도 그러는 게 아니오! 이제 슬슬 재수가 돌아오려는데, 돈 좀 빌려달래도 박정하게 뿌리치기나 하고... 우리 사이가 그래도 되는 사이요? 모용풍은 너 잘 걸렸다. 는 듯이 박박 대들기 시작했다. 한로를 상대로 돈 잃은 분풀이라도 해보려는 생각에서였다. 바로 그때였다. ...? ...?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의 입이 다물어졌다. 먼 곳으로부터 울려오는 날카로운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쇠붙이가 부딪힐 때 울리는 소리, 즉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잠시 시선을 교환하던 그들은 소리가 난 곳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 * * 제갈휘의 앞에는 벌써 두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누구인지를 묻던 제갈휘의 물음에 대꾸도 없이 다짜고짜 달려든 놈들이었다. 검과 곤(棍)을 휘두르던 솜씨야 녹록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절정(絶頂)의 경지에 올 라 있는 제갈휘에게 있어서는 어린애 장난과 다름없었다. 제갈휘는 그들의 공격을 겨드랑이 아래로 흘려보내며 검자루로 그들의 목덜미를 찍어 혼절시켜버린 것이다. 너무도 간단히 두 명이 나자빠지자 제갈휘와 석대원을 둘러싼 무리의 움직임이 돌연 신중해졌다. 너희들은 누구냐? 제갈휘는 검을 한 번 흔들어 허공에 매서운 파공성을 만든 뒤, 다시 한 번 물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두 자루의 병기가 아까보다는 훨씬 고명한 수법으로 짓쳐들어왔다. 파풍도(破風刀)와 연자창(練子槍)이었다. 제갈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검의 이름은 주인의 충후한 성정을 본딴 탓인지 정념(精念)이었다. 정념검이 가볍게 뻗어나가자, 검신(劍身)을 타고 일어난 경력(勁力)의 파동이 파풍도 와 연자창을 부드럽게 휘감아갔다. 그리고 그 경력은, 두 자루의 병기가 경력의 권내(圈內)로 들어가자, 갑자기 금방이라 도 부러져버릴 듯이 빳빳하게 경직되어버렸다. 패애앵---! 삭풍에 문풍지가 떨리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헉! 이, 이런! 파풍도와 연자창의 주인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유력(柔力)이 강력(剛力)으로 바뀌는 순간, 거센 충격이 밀려와 그들의 공격 호흡을 여지없이 뒤흔들어버린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충격은 거푸 이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은 병기를 놓치는 수모를 가까스로 면하면서, 두어 걸음씩 물러서서 호흡 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하늘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자들인가? 얼굴들이 왜 그 모양이지? 병기 한 번 마주치지 않고 두 사람을 격퇴시켜버린 제갈휘는 빙긋 웃으며 빈정거렸다. 그의 말처럼 숲속에서 나타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 수는 스물하고도 한둘 정도... 하지만 그들 외에도 모습을 감춘 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제갈휘는 알고 있었다. 간적(奸賊)! 시끄럽다! 무리 중 한 사람이 크게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왔다. 하아압! 큼직한 쌍장이 뒤집어지는 순간, 한 줄기 억센 힘이 제갈휘를 향해 밀려왔다. 무모할 정도의 정면 공격이었다. 제갈휘는 검으로 반격하려던 생각을 바꿔,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장력을 피하려고 했다. 그의 반격이 계속 모호한 까닭은, 정체를 모르는 자들에게 독수(毒手)를 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밀려온 장력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점하고 있었다. 한 수의 장력으로 이렇게 넓은 범위를 취할 수 있는 것은, 평범한 내력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제법이다! 제갈휘는 감탄하며, 검봉을 미간까지 끌어당겼다가 수직으로 짧게 휘둘렀다. 싸악---! 구부렸던 오른 팔꿈치가 곧게 펴지는 순간, 섬뜩한 파공성을 동반한 예기가 장력의 한 복판을 가르고 들어갔다. 엇? 제갈휘를 향해 장력을 격출한 복면인은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훑고 지 나가는 차가운 느낌에 깜짝 놀랐다. 제갈휘의 검과 그 사이에는 본디 일 장이 넘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제갈휘는 깃털처럼 가벼운 검기로써 그 거리를 가볍게 뛰어넘어버린 것이다. 복면인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예기가 미치는 범위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이런 생각을 하니 복면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 장력의 밀도가 가장 높은 지점을 저토록 간단히 갈라버린 제갈휘의 검기는 이미 그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갈휘는 뒤로 달아나는 복면인을 따라붙지 않았다. 그는 검을 떨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장법은 복호장(伏虎掌) 같은데... 이상하군, 사천 아미파(峨嵋派) 출신인가? 장력을 격출했던 사내는 움직임을 우뚝 멈췄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면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 전체의 기세가 꺾여버릴지도 몰랐다. 그는 꺼림칙한 마음을 몰아내듯 크게 웃으며 쌍수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으하하! 곧 죽을 놈이 그것은 알아 무엇 하려고? 손놀림에 따라 강성(剛性) 일변도의 패도적인 장력이 다시 한 번 제갈휘의 전방을 봉 쇄해갔다. 죽어랏! 죽엇! 그와 동시에, 조금 전 파풍도와 연자창으로 공격했던 두 복면인 또한 제각기 병기를 휘두르며 제갈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말 경우없는 놈들이구나! 제갈휘는 조금 화가 난 듯 그들의 공세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좌하방으로 늘어뜨렸던 정념검이 빙글 돌아가는 순간, 검푸른 검기가 검봉 위로 쭈욱 솟구쳤다. 핍박하는 것이야... 정념검이 비스듬히 휘둘러졌다. 그에 따라서 가장 먼저 제갈휘를 공격하던 장력이 허망하게 갈라져버렸다. 너희들의 마음대로겠지만... 정념검의 검봉이 제갈휘의 우하방에서 짧게 회전하며 전방을 향해 주욱 내밀어졌다. 장력을 뒤따라오던 파풍도와 연자창, 두 자루의 병기는 제갈휘를 만나기에 앞서 얼음 장 같은 검기부터 만나야만 했다. 카앙! 연자창 끝에 달려 있는 철당익(鐵당[金+堂]翼)이 검기에 휩쓸리며 산산조각나 흩뿌려 졌다. 연자창을 쥐고 있던 복면인은 어지럽게 날리는 파편을 피하기 위해 허겁지겁 뒤로 달 아날 수밖에 없었다. 치이이---! 허공을 맴도는 거센 파도와 같은 검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파풍도마저 휘감아버렸 다. 쩡, 소리와 함께 파풍도가 쪼개졌다. 그리고 제갈휘의 검은 잘려진 파풍도를 쥔 채 멍청히 서 있던 복면인의 어깨 위에 얹 혀졌다. 적어도 명호(名號) 정도는 밝히는 것이 무사된 도리가 아닌가? 제갈휘는 담담한 목소리로 하던 말을 마무리지었다. 어... 어... 파풍도를 쥐고 있던 사내는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던 것은 단순한 쇠붙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독사처럼 생명체의 심혼(心魂)을 싸늘히 얼어붙게 만드는 마물(魔物)이었 다. 이름이 뭐냐? 제갈휘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졌다. 허억! 그와 동시에 어깨 위로 얼음이 박혀든 것과 같은 섬뜩한 통증이 가해졌다. 제갈휘의 검은 맨 처음 얹혀졌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는데 말이다. 이것이 무, 무형검기? 말로만 듣던 무형검기(無形劍氣)를 몸으로 경험한 복면인은 경이로움과 공포로 머릿속 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이름이 뭐냐니까? 어깨를 짓눌러오는 한기가 더욱 거세어졌다. 비... 비가달(丕可達)... 파풍도의 복면인은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비가달? 복우삼걸(伏牛三傑) 중 막내인 남양호(南陽豪) 비가달? 복면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런데 왜 내게 덤비느냐? 복우삼걸은 복우산(伏牛山) 일대에서 활약하는 호걸들이었다. 이름난 협사(俠士)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복면을 쓰고 사람을 습격할 정도로 후 안무치(厚顔無恥)한 위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과 동행인 석대원을 노린다는 말인 가? 하지만 이들은 등장하는 순간부터 석대원은 본체 만체하고 자신에게만 달려들고 있지 않는가! 제갈휘는 이 일의 내막에 대해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갈휘는 비가달로부터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를 놔 주어라! 쩌렁쩌렁한 호통과 함께 두 자루의 검이 제갈휘를 향해 찔러들어왔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복면인들 중 두 명이 비가달의 위기를 보고 동시에 출수 (出手)한 것이었다. 쐐액! 두 자루의 검은 모두 제갈휘의 허리를 노리고 있었다. 적어도 제갈휘로부터 다섯 자 떨어진 곳에서 상하로 나뉘며, 하나는 목덜미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허벅지로 검로(劍路)를 바꾸기 전까지는 그렇게 보였다. 꽉 짜여진 배합도 배합이거니와, 바람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그 쾌속함은 제갈휘로서 도 감탄할만한 놀라운 것이었다. 허어! 비가달로 인해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제갈휘는 두 자루의 검을 피하기 위해 별 수 없이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물론 물러서기에 앞서 비가달의 목숨을 취하기란, 제갈휘에게 있어서 주머니 속의 물 건을 꺼내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제갈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복면인들이 비각의 소속이라 생각한 짐작이 틀릴지도 모른다면, 살수를 쓰기에 앞서 자세한 내막부터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제갈휘는 비가달의 어깨에 얹힌 검을 애써 들어올리며 뒤로 물러섰던 것이다. 그런데 비가달은 남양(南陽)의 호걸(豪傑) 이라는 별호에 어울리지 않게 독한 성품을 지닌 위인이었다. 그는 제갈휘가 검을 들어올릴 때 생긴 작은 헛점을 그대로 지나치려 하지 않았다. 죽엇! 비가달은 손에 쥐고 있던 부러진 파풍도를 제갈휘를 향해 집어던졌다. 제갈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특별히 고명한 비도술(飛刀術)은 아니었지만, 대처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피잉---! 반도(半刀)는 비가달의 손을 떠난 순간, 이미 제갈휘의 가슴 옷자락을 파고들고 있었 다. 형님! 곁에서 지켜보던 석대원의 입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가 보기에도 제갈휘가 그 반도의 공격을 피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제갈휘의 움직임은 석대원의 걱정을 한순간에 불식했다. 더러운 녀석! 나직한 일갈과 함께 제갈휘의 몸이 뿌옇게 흐려졌다. 반도가 제갈휘의 가슴에 꽂힌 것과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하지만... 스으---!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제갈휘의 몸뚱이는 마치 허깨비라도 되어버린 양, 비가달이 던진 반도를 등뒤로 통과 시켜버린 것이다. 저것은? 석대원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바로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신법이었다. 형을 옮겨 위치를 바꾼다는 이형환위는, 무림인이면 그 요결(要訣)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신법이었다. 하지만 찰나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을 비집으며 저토록 능란한 몸놀림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석대원은 몇 개월 전에도 지금과 같은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섬서(陝西) 화소산(花昭山)에서 모용풍을 처음 만났을 때, 외백부인 연벽제(燕蘗濟)가 석대원의 혈옥수를 피하며 시전한 경신술 또한 이형환위였다. 문득, 석대원은 그때 연벽제가 보여준 이형환위와 지금 제갈휘의 그것을 비교해 보았 다. 둘 다 이미 심(心) 과 형(形) 의 굴레를 초탈(超脫)한 상승(上乘)에 이른 것이었다. 누가 위인지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다. 제갈휘의 초절한 신법에 가장 놀란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반도를 던졌던 비가달일 것 이다. 제갈휘와 그와는 일 장도 떨어지지 않은, 어찌 말하면 눈앞 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거리 였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눈앞 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황은 그의 이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싯-! 날카로운 쇠붙이가 얼음 위를 스치는 것 같은 음향이 비가달의 우측으로부터 터져나왔 다. 얼마나 미세했던지, 비가달은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하지만 음향에 실려 허공으로 날아오른 물체는 절대로 착각할 수 없는 엄연한 실체(實 體)였다. 그것은 잘려진 팔이었다. 불행히도 비가달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멍청한 눈길로 노을 속에 뿌려지는 붉은 핏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어? 비가달은 오른팔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팔꿈치 아랫부분이 잘려져나간 것을 발견한 사람 치고는 매우 특이한 반응이었 다. 상황을 이해시키는 데에는 결과의 확인만큼 좋은 스승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알아차린 비가달의 행동은 처음과는 달리 매우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었다. 으아아---! 내 팔! 비가달은 오른팔을 감싸안으며 찢어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이, 이런! 비 형제! 조금 전 검을 휘둘러 제갈휘를 물러서게 만들었던 두 복면인의 입으로부터 다급한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제갈휘의 후속 공격을 염려해서인지 재빨리 비가달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비가달의 팔을 잘라버린 제갈휘는 더 이상 공격할 생각이 없어진 것처럼 보였 다. 그는 검을 떨군 채 처음 위치로부터 삼 장 정도 떨어진 곳까지 물러나 있었다. 팔 하나는 암습에 대한 대가로 하지. 제갈휘는 그의 전면에 초승달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복면인들을 죽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여유있는 목소리와는 달리 그는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복면인들은 절대로 방문좌도(傍門左道)의 마두(魔頭)들이 아니었다. 아니, 그들 중 대부분은 명문임이 분명했다. 수법의 정민(精敏)함과 동료를 배려하는 마음도 그렇거니와, 합공을 할 때에도 그 수 가 결코 셋을 넘지 않는 것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왜 자신을 공격하는 것일까? 다행히도 그의 궁금증은 곧 풀렸다. 그것은 제갈휘의 뒷편에서 나타난 두 사람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로와 모용풍이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모용풍은 장내에 등장하기가 무섭게 복면인들을 가리키며 호통을 질렀다. 복면인들 사이에서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천하에서 가장 오지랖이 넓다는 모용풍이었다. 내로라하는 강호인들 치고 모용풍이 모르는 얼굴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내로라하는 강호인들 치고 모용풍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 또한 거의 없었다. 원숭이떼처럼 무리지어 소수를 핍박하는 것을 보면, 필시 원숭이보다 나을 것이 없는 놈들이 분명하구나! 석대원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모용풍의 말이 어색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의 외호가 바로 눈알 천 개 달린 귀 밝은 원숭이 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용풍의 독설은 계속 이어졌다. 그 따위 천쪼가리로 쥐새끼 같은 얼굴을 가렸다 한들 이 모용 나리의 눈을 벗어날 수 는 없지. 어디 뭐하는 놈들인가 보자! 으흠... 저쪽에 제 키만한 칼을 쥔 땅딸보는 개봉(開封)의 왜각오(倭脚鼇) 같고, 그 옆에 손톱 이 시커먼 놈은 태백산(太白山)의 묵조추작(墨爪墜雀)이 분명한데... 식구들 굶는 것을 보다 못해 강도질이라도 나온 것인가? 그리고... 다리 짧은 용 이 졸지에 다리 짧은 자라 새끼 로 둔갑한 개봉의 도객(刀客) 왜각룡 (倭脚龍) 군무외(君無畏)와 검은 발톱의 날아가는 매 가 졸지에 검은 발톱의 떨어지는 참새 로 뒤바뀐 태백파(太白派) 응조공(鷹爪功)의 대가인 묵조비응(墨爪飛鷹) 등우(鄧 羽)는 복면 속의 얼굴을 와락 구길 수밖에 없었다. 모용풍은 계속 사람들을 둘러보며 하나씩 명호를 읊어나갔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의 이름을 찝어내는 모용풍의 견식 은, 실로 별호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탁월한 것이었다. 그런데 복면인들을 확인해 나가던 모용풍은 조금씩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의 입에서 구슬처럼 줄줄이 꿰어져 나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강호에서 위명을 떨치는 협사들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선이 복면인들 한복판에 서 있던 두 사람에 이르렀을 때, 모용풍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설마... 무, 무당(武當)? 두 사람은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우측의 키 작은 사내는 오종종하게 생긴 초로인이었고, 좌측의 늠름한 체구의 사내는 위엄있게 생긴 장년인이었다. 귀신의 눈은 벗어나도 모용 선생의 눈은 벗어날 수 없다더니... 과연 놀랐소이다. 무당의 현송(玄松)이 인사를 올리오. 오종종한 초로인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현(現) 무당파 장문인의 사제인 무당삼숙(武當三叔) 중 둘째, 현송도장이었다. 무당의 현수(玄修)요! 모용 선생께서는 무슨 연유로 저 간적을 비호하는 것이오? 여기 계신 여러 군웅(群雄)들 앞에서 해명해주길 바라오. 현송의 옆에 서 있던 무당삼숙의 막내 현수가 왼손으로 모용풍을 가리키며 쏘아부쳤 다. 그의 왼손은 엄지와 인지 두 개만이 달려 있는 기형적인 것이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십여 년 전 어느날인가 제갈휘의 검 아래 세 개의 손가락을 잃었고, 그 뼈아픈 과거는 제갈휘에 대한 그의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켜 주었다. 아니, 그, 그게... 모용풍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당파라면 비록 신무전과 무양문이라는 양대 산맥에 가려 예전의 성세(盛勢)를 찾아 보기 힘들다고는 하나, 소림과 함께 오대문파의 수위를 다투는 명문 중 명문이었다. 왜각룡이나 묵조비응 따위와는 격이 달랐던 것이다. 제 아무리 기행(奇行)으로 이름난 모용풍이라 한들 그들마저 우습게 여길 수는 없었 다. 그리고... 복면인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서는 한 사람을 본 순간, 모용풍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 다. 모용 아우, 오랜만이군! 팔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복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의복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입고 있던 짙은 회색의 평범한 무복(武服)과 매우 달 랐다. 연한 자줏빛 도포 위에 수놓아진 커다란 태극도형, 그것을 중심으로 여덟 방향에 자리 잡은 여덟 개의 소성괘(小成卦). 그리고 오른손에 쥔 무쇠로 만든 바둑판... 과(過) 형님... 모용풍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신음에 가까웠다. 사람들 사이로 등장한 사람은, 모용풍을 포함한 기(棋) 화(火) 취(醉) 통(通) 조(造), 강호오괴(江湖五怪)의 대형이라 할 수 있는 기광(棋狂) 과추운(過秋雲)이었기 때문이 다. 놀란 사람은 모용풍뿐만이 아니었다. 과 선배셨구려. 모용풍의 뒷전에서 흘러나온 제갈휘의 목소리 또한 놀라움 때문에 굳어져 있었다. 그 또한 과추운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아니, 천하의 그 누구도 과추운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과추운의 눈빛이 섬전처럼 변하여 제갈휘의 얼굴에 꽂혔다. 제갈휘! 귀에 못박히도록 들은 이름이지... 이렇게 직접 만나니 영광이군. 얼음 가루가 풀풀 떨어질 것만 같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제갈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이제야 짐작할 수 있었다. 비각이라고 생각했던 그와 석대원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을 습격한 사람들은 정도무림 을 이끌어 나가는 협객 이요, 명숙 들이었다. 아울러 제갈휘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소위 협객 이나 명숙 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자들이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추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서문숭의 개! 너의 간사함을 보다 못한 군웅들이 드디어 너를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오늘 이 자리를 살아서 벗어날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갈휘는 묵묵히 과추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때 제갈휘와 과추운의 사이에 있던 모용풍이 끼어들었다. 형님! 그것은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정도무림과 무양문이 오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공은 모두... 자네는 조용히 하게! 과추운은 차가운 목소리로 모용풍의 말허리를 잘랐다. 무양문이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백련교의 후신이라는 것은 자네도 잘 아는 사실! 강호의 형제들은 서문숭에 의해 자행된 치욕스러운 혈사(血史)를 잊지 않고 있다네. 이제는 우리가 그 빚을 값을 때! 정도의 배신자인 제갈휘의 목은, 무양문을 토멸(討滅)해 정의가 살아있음 보여주는 첫 번째 북소리가 될 걸세. 준열하기 이를 데 없는 과추운의 질타에는 일체의 가식이나 과장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제갈휘란 반드시 주살(誅殺)해야만 하는 간인(奸人)요, 악적이었던 것 이다. 모용풍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제갈휘가 무양문에 투신해 활약한 모든 행동에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명분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제갈휘를 치고자 하는 정도 명숙들의 행동에도 굴욕 청산과 척마멸사(斥 魔滅邪)의 명분이 담겨 있는 것이다. 명분과 명분의 대치... 그것은 천하의 그 누구라 해도 말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십여 년 동안 온갖 모욕을 삭혀온 제갈휘의 인내심은 모든 이들의 예상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나는 당신들과 싸우지 않겠소. 제갈휘는 정념검을 등에 멘 검집에 꽂으며 말했다. 그 말이 의외였던 것일까? 소요(騷擾)보다도 더 어수선한 기괴한 정적이 장내를 감돌았다. 그렇다고 당신들 손에 죽지도 않겠소. 나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 사람이니까. 제갈휘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뜻이냐? 과추운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당신들과 싸우고 싶지도 않고, 또 죽기도 싫으니 내가 할 일이라고는 한 가지밖에 없 구려. 나는 이만 갈까 하오. 제갈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식으로 이 자리를 유야무야(有耶無耶) 피할 수 있다면, 애당초 우리가 여기에 오지도 않았다! 무당의 현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제갈휘는 씁쓸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그리고 두 개의 손가락만 남아 있는 그의 손 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갈휘의 눈빛은 이내 평상처럼 돌아왔다. 당신의 손가락을 자른 일은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오. 만약 당신이 그때 무양문도를 죽이려 하지 않았던들, 나도 진검(眞劍)을 사용하지 않 았을 것이오. 현수의 얼굴에 푸르스름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 뒷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수치심이었다. 강호인은 오직 검으로 말하는 법! 내 검이 네 검에 이르지 못했으니, 내가 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구차한 옛이야기는 집어치우자! 검을 뽑아라, 제갈휘! 하지만 제갈휘는 검을 뽑지 않았다. 당신들이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소. 나는 달음박질에는 제법 소질이 있는 편이니, 이만 가겠소. 제갈휘는 석대원에게 눈짓을 보낸 뒤 몸을 돌렸다. 제갈휘가 개처럼 꼬리를 말고 등을 보이는 것이다! 무양문의 살아 있는 전설, 호교십군 중에서도 우두머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검 (孤劍) 제갈휘가 달아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제갈휘에게 있어서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이십여 년 간 제갈휘를 죽이겠다고 달려든 협사 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물론 그들 중 제갈휘의 적수가 되는 사람은 없었다. 제갈휘는 이미 약관의 나이에 화산파(華山派)의 진학(眞學)을 모두 이어받은 희대의 천재였다. 그의 검학은 무양문에 투신한 뒤 더욱 원숙해졌으니, 검으로써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검왕(劍王)이라 불리는 연벽제 정도뿐인 것이다. 만약 제갈휘가 자신을 죽이려했던 모든 자들을 향해 검을 뽑았다면, 어쩌면 지금쯤 강호 제일의 살인자 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갈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피를 본다면 화산파를 저버리고 무양문에 투신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거의 모든 대결을 피했다. 심지어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강호초출 애송이를 피해 달아난 적도 있었다. 그로서는 오늘 하루, 굴욕을 한 번쯤 더 참는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 간다고? 그런데 현수를 비롯한 정파 명숙들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했다. 제갈휘의 말처럼 제갈휘의 신법은 군웅들보다 한 수 위에 있었다. 제갈휘가 달아나겠다고 한 이상 그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진대, 그들은 아 무런 행동도 취하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울려온 과추운의 목소리는 제갈휘를 그 자리에서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주동민(朱東民)이 죽었어도 그냥 가겠나? 꽝! 제갈휘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주동민... 한때는 일검복마진인(一劍伏魔眞人)이라는 이름으로 뭇 마두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일대(一代) 호걸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형편없이 몰락해버린 화산파에서 아들의 병 수발을 받으며 목숨을 연명 해가는 늙고 가련한 사부의 이름이기도 했다. 뭐라고 했소? 제갈휘의 몸이 서서히 돌려졌다. 깨진 유리처럼 처절하게 조각나버린 시선이 과추운의 얼굴 위에 꽂혔다. 과추운은 엷은 웃음을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화산으로 친구들이 갔지. 천하의 배덕자(背德者)를 제자로 두고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주동민에게 명예로운 기회를 주려고 말이야. 지금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나는 그래도 주동민이 삶과 죽음을 선택할 줄 아는 대 협이라고 믿지. 그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게야. 제갈휘의 훤칠한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갖가지 조소가 그의 몸뚱이 위에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제갈휘! 네놈은 사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사부를 죽인 셈이 되었구나! 주동민이 잘난 고검 나으리 때문에 자결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서문숭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 하하! 하지만 제갈휘의 목덜미 살이 푸르르 떨린 것은, 그런 조소 때문이 아니었다. 물그릇에 물을 담을 수 있는 용량이 존재하듯, 인간의 영혼에도 감정을 담을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한계를 초과한 감정이 영혼 위에 쏟아질 때, 인간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물이 그릇 밖으로 흘러넘치듯... 형님!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읽은 석대원이 재빨리 제갈휘 곁으로 달려갔다. 제갈휘는 못박힌 듯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전면을 향해 똑바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런 감정의 빛이 담겨 있지 않은, 죽은 물고기 같은 눈동자였다. 형님! 정신차리세요! 석대원은 왕급히 오른손에 진기를 끌어올려 제갈휘의 등 부분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목덜미에서 미골(尾骨)로 이어지는 천주(天柱), 심유(心兪), 대장유(大腸兪)의 혈도 를 쳐가는 그의 손길은, 뇌에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은 사람을 치료하는 도가(道家)의 요상수법이었다. 그 순간, 제갈휘의 몸뚱이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그리고 부릅떠져 있던 두 눈이 꽉 감기며 입으로부터 검붉은 피화살이 뿜어져 나왔다. 우웩! 피화살은 제갈휘의 전면 석 자 앞까지 뿌려졌다. 대맥(大脈)에 응어리져 있던 악혈(惡血)이 석대원의 손에 의해 풀리며 몸 밖으로 세차 게 배출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경직되었던 근맥이 일제히 풀리면서 제갈휘는 허수아비처럼 풀썩 허물어 졌다. 곁에 있던 석대원이 급히 부축하지 않았던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는 꼴사나운 모습 을 보이고 말았을 것이다. 제갈휘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활짝 열려졌던 동공이 서서히 오므라들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석대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제갈휘의 귓전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 았다. 사고가 다시 이어지며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사부 주동민의 모습이었다. 세 가닥 수염에 칠흑같이 검은 머리털, 수실을 나부끼며 등에 매달려 있던 고색창연 한 삼 척 장검... 홍안(紅顔)이었던 그가 사문에 처음 들어가던 날, 진정한 영웅이란 바로 저런 모습이 다. 라고 감탄했던 당당한 모습이었다. 사문을 떠나겠다고 말하던 날,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분노에 찬 주동민. 하지만 사랑하는 제자를 차마 베지 못하고 몸을 돌리고말았던 그였다. 비통을 이기지 못하고 빠져든 주화입마, 이십여 년 간 보내온 신산(辛酸)의 병석, 그 리고... 아아! 제갈휘는 다시 한 번 눈을 꽉 감아버렸다. 눈을 감았어도 확 달아오르는 눈시울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주동민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주동민은 저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지금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시겠지. 허허! 끝내 사부님께 용서받지 못하는군! 슬픔에 앞서, 천지간 혈혈단신이라는 외로움이 북받쳐 올랐다. 피같이 처절한 눈물이 제갈휘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과추운이 주동민에 관한 말을 꺼내고, 제갈휘가 눈물을 흘리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살심을 품고 공격을 하려면 열 번도 더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군웅들은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이한 적막 속에서 이루어지는 살얼음판과도 같은 균형... 이러한 균형을 깬 사람은 과추운이었다. 제갈휘! 아직도 도망칠 생각인가? 제갈휘의 미간을 종으로 길게 가르고 있던 흉터가 꿈틀거렸다. 주동민의 일검이 남긴 작품이기도 한, 그래서 이제는 제갈휘가 지닌 유일한 사부의 유 물이 되어버린 바로 그 흉터였다. 좋아! 제갈휘는 석대원은 부축을 뿌리치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의 눈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 꺼풀 얼음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전면에 버티고 서 있는 사람들을 죽 훑어보았다. 모두 스물 아홉인가? 착 가라앉은 제갈휘의 목소리로부터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목소리보다도 으스스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유를 알 수 없는 한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움찔거렸다. 이십 년을... 제갈휘는 천천히 정념검을 뽑았다. 뽑은 정념검을 치켜들어 사람들을 곧장 겨냥한 제갈휘는 예의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하 기 시작했다. 온갖 굴욕을 참으며 지냈다. 사문이 깨어지고 쇠망(衰亡)하는 것을 보면서도, 오직 나만이 중간자(中間者)가 노릇 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모든 것을 견뎌냈다. 하지만 너희들이 원한다면 더 이상 그런 바보 짓을 그만두마. 정파명숙? 협사? 내가 보기에는 피에 환장한 혈귀(血鬼)요, 무엇이든 악착같이 물어뜯으려는 들개떼에 불과하다. 좋다. 그렇게 내 피를 원한다면 어디 덤벼 봐라. 이야기가 길어짐에 따라 목소리는 더욱 더 담담해지고 낮아졌다. 그와 함께 제갈휘는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마치 뱀이 껍질을 벗듯, 그를 둘러싼 온화하고 여유로운 기운이 점차로 차갑고 급박한 기운으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제갈휘와 군웅들 사이에 있던 모용풍이었다. 제갈 대협, 아니되오! 이제까지의 적공(積功)을 생각하셔서라도 순간의 울화를 참으셔야 하오! 모용풍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활짝 벌리며 제갈휘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제갈휘의 검이 가볍게 움직이는 순간, 모용풍은 마치 만취(滿醉)된 사람처럼 온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깃털처럼 가벼운 격공점혈(隔空占穴)의 수법이었다. 모용 선생, 이제 됐소. 제갈휘는 비틀거리는 모용풍의 몸을 곁에 서 있던 한로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는 이어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있던 석대원을 바라보았다. 석 아우, 자네는 이 일에 끼어들지 말게나. 자네까지 이런 개 같은 업보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아. 운명이란 놈이 이토록 끈질기게 나를 피의 길로 내모는군. 뿌리치려 애썼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군. 형님! 무슨 말인가가 입 안에서 맴돌았다. 석대원은 자신이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6) 이십구(二十九)와 일(一). 스물 아홉 명과 한 명. 이미 숫자에서부터 상대가 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끄으으! 생에 대한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있는 신음이었다. 무정하게 뒤로 뽑혀지는 정념검, 그 검신에 맺혀진 핏방울과 잘 어울리는 신음이었다. 신음과 핏방울... 그 조화 속에서 정념검은 또 하나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털썩! 지금 이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신이 흘린 핏물 위에 몸을 눕히는 사람은 이일광 (李一廣)이라는 이름의 권법가(拳法家)였다. 허공을 안타깝게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은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큼직했다. 지금까지 그 손이 말려져 주먹이 쥐어지면 아무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주먹은 빠르기로 말하자면 광동(廣東)에서 손꼽힐 수 있었고, 그 파괴력으로 말하 자면 중원 전체에서도 능히 십위 안에 들 수 있었다. 뇌주반도(雷州半島)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해경방(海鯨幇)을 초토화시킨 것도 그 주먹 이었고, 그 마음 씀씀이가 승냥이도 잡아먹을 지경이라 하여 식시귀(食豺鬼)라는 이름 으로 불리던 광주아문(廣州衙門)의 탐관오리 전모량(田慕良)을 핏떡으로 만든 것도 그 주먹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주먹도 독수리처럼 날아와 심장을 관통해버린 정념검 앞에서는 솜뭉치 와 다를 바가 없었다. 넷[四]. 제갈휘가 이일광을 저승으로 보내는데 소비한 초식의 수(數)였다. 이제부터는 누구도 이일광의 주먹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땅 위에는 이미 일곱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제갈휘는 그 앞에 정념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의 호흡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는 이제 막 발검(拔劍)한 것처럼 정제된 기파(氣波)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곱 개의 생명을 무한(無限)의 세계로 보내버린 그였지만, 날 선 보검 같은 그의 살 기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다음은 누구냐. 착 가라앉은 목소리... 중인들은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들 중 제갈휘의 검법이 고절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 곤륜지회(崑崙之會) 이후 새로운 천하오대고수를 꼽는다면 연벽제와 제갈휘가 선두 를 다툴 것이다. 모용풍이 평(評)한 이 말을 애써 떠올리지 않더라도, 무양문 호교십군 중 수좌(首座) 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갈휘가 이룬 경지가 얼마나 지고한 것인지 짐 작할 수 있었다. 제갈휘는 강자 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상한 제갈휘는 상식의 선상에 있는 강자 였다. 상식을 초월하는 강자 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결과는 뭐란 말인가! 땅 위에 널브러진 일곱 명 중 한 지방을 오시(傲視)하는 패주(覇主) 아닌 자가 없었고, 그 이름이 당금 강호를 위진(威震)하는 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오 초. 제갈휘의 검 아래에서 단 오 초를 버틴 사람도 없었다. 제갈휘는 마치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곱 명의 고수들을 베어버 린 것이다. 자신들이 상대하는 자가 상식을 초월하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강자 임을 깨달은 중인들은 얼음을 삼켰을 때처럼 섬뜩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과 선배, 협공하는 수밖에 없겠소.> 과추운의 귓속으로 나직한 전음이 흘러들어왔다. 방향으로 미루어 우측 후방에 서 있던 개방의 칠결제자 견위(堅威)인 것 같았다. 과추운의 허연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협공이라니! 그들이 누구인가! 정도 무림을 떨치는 영웅호걸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이 한 사람을 상대로 협공을 하다니! 지금처럼 차륜전(車輪戰)을 벌이는 것만 해도 부끄러운 일인데 협공을 하다니! 하지만 견위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 못지 않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누구 못 지않게 협의도(俠義道)가 뭔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협공을 제안했다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과 상통했다. 어쩌면 제갈휘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협공 외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멍청이가 아니라면, 방금의 무위(武威)를 목격하고서도 누가 감히 제갈휘의 검을 일대 일로 상대하려 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멍청이가 있었다. 제갈휘! 내가 상대해주마! 송문고검을 꼬나 쥐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선 사람은 무당삼숙의 막내인 현수였다. 현수도장! 자중하시오! 사제! 과추운과 현송이 황급히 현수를 제지했다. 현수의 무당검법이 비록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고는 하지만, 제갈휘의 적수가 되기에 는 부족함이 많았던 것이다. 차라리 협공을 합시다! 맞소! 저런 놈에게는 대의나 예법을 따질 필요가 없소! 제갈휘에 대한 공포심을 그런 식으로나마 떨쳐버리려 했던 것일까? 기다렸다는 듯이 중인들은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수가 중인들을 향해 외쳤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상관치 마시오!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웠던지, 중인들의 웅성거림은 단번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허! 이 일을 어쩐다... 은연중에 중인들을 영도하고 있던 과추운은 내심 당황했다. 현수가 취한 행동은 정도를 걷는 무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선(死線)으로 나가려는 동도(同徒)를 그대로 방관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같은 심정에서였을까? 과추운과 현송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들은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추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현송이 앞으로 나섰다. 현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사형... 하지만 현수가 하려는 말은 현송의 우렁찬 외침 뒤에 묻혀 버렸다. 제갈휘! 우리 개개인이 네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나와 사제가 함께 펼치는 무당검법이라면 네 목을 베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 다! 놀고 있군! 제갈휘는 차갑게 웃었다. 한 녀석은 혼자 덤비겠다고 날뛰는데, 다른 녀석은 나와서 합공을 하겠다고 을근대고 있었다. 그것도 치졸한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써가며... 마음대로 하려무나! 제갈휘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사형! 소제는 저 자에게... 이 사람! 자네 마음은 아네만, 지금은 사사로운 원한보다도 대의가 더 중요해!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러는가! 현송은 현수의 항변을 일축하며 제갈휘의 전방에 자리를 잡고 섰다. 현수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현송의 좌측에 자리를 잡았다. 두 자루의 송문고검이 제갈휘를 겨누었다. 우우웅---! 바람 한 점 없건만, 전방의 공기가 퉁겨진 거문고 현(絃)처럼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과연! 그것은 마치 한여름 쏟아지는 햇빛의 작살 같았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바늘 끝처럼 찔러오는 압력에 제갈휘 는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송과 현수, 두 사람의 검기가 만들어낸 무형경(無形勁)은 그렇듯 대단했다. 제갈휘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무당삼숙 중 두 명을 한꺼번에 상대한다는 것은 천하의 누구라 할지라도 감히 태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들이 신묘한 검진(劍陣)이라도 사용한다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제갈휘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발진(發陣)! 현송의 우렁찬 기합과 더불어, 현수의 몸이 제갈휘를 향해 쏘아져왔다. 무서운 기세로 확대되어오는 검봉(劍峰). 교묘함이나 화려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이, 오직 효과의 극대화만을 추구한 살인적인 초식이었다. 제갈휘는 허리를 꺾어 몸을 두 자쯤 좌측으로 이동시켜 검봉으로부터 몸을 빼냈다. 상대의 기세가 왕성할 때에는 굳이 정면으로 승부하지 않는 것이 그의 겁법의 요체 중 하나였다. 하지만 현현검진(玄玄劍陣)이라는 이름의, 무당 내에서도 원로급이 아니면 익힐 수 없다는 희대의 검진은 결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참주(斬州)! 짤막한 기합성과 함께 현수의 검이 부챗살처럼 촤르륵 펼쳐지며 제갈휘에게 달라붙었 다. 직자(直刺 : 곧게 찌름)의 수법이 돌연 횡격(橫擊 : 옆으로 침)의 수법으로 바뀐 것이 다. 반 호흡 정도의 차이를 두고, 현수의 우측에서 중단(中段)을 취하고 있던 현송이 움 직이기 시작했다. 봉축(封畜)! 취리릭---! 제갈휘의 측방을 봉쇄해가는 현송의 검은 한 마리 뱀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검로(劍路)의 변화무쌍함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같다는 무당절학 요지유검(搖 枝柔劍)이었다. 한 사람은 공격을 하고, 다른 사람은 퇴로를 봉쇄한다... 두 사람이 합공을 할 때 등장하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두 무당파 도인들은 가장 보편적인 공격이 가장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훌 륭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제갈휘가 먼저 대응한 것은 봉쇄 보다 공격 이었다. 찌이이! 생가죽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정념검이 몸 안쪽 방향으로 꺾어지며 십여 개의 잔상 (殘像)을 만들었다. 두 다리를 교차해 허리를 우측으로 조금 더 빼는 몸놀림은 원숭이의 유연함을 본떴다 는 영원보(靈猿步)인데, 상체의 빈 공간을 화려한 검영(劍影)이 꽉 채워가는 것은 교 태를 부리는 미녀의 손짓과도 같은 가인추파(佳人秋波)였다. 빠깡! 검과 검이 부딪치며 현수는 손아귀가 전체가 시큰하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내력이나 검기로 말하자면 제갈휘는 그보다 상수(上手)였다. 하지만 현수는 검을 물리지 않았다. 뒤따르는 현송의 두번째 공격이 있는 이상, 제갈휘는 그에게 더 이상 신경 쓸 수 없음 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빙글! 제갈휘는 어느새 정념검을 돌려 현송의 요지유검을 막아갔다. 요지유검의 경인(驚人)할 유연성은 상대하는 사람의 기를 질리게 만들 법도 한데, 정 념검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화려한 검세를 뚫고 들어가 현송의 손목을 베어가고 있 었다. 이제 현수가 사형을 도와줄 차례였다. 현전(眩轉)! 현수는 검을 어깨에 둘러메며 몸을 돌렸다. 검은 그의 몸을 휘감듯 회전하며 제갈휘의 목덜미를 후려쳐갔다. 금계독립(金鷄獨立) 같기도 하지만, 허리와 어깨를 동시에 퉁기며 검에 빠른 회전력을 가하는 동작에는 틀을 벗어난 임기응변이 담겨 있었다. 제갈휘는 눈살을 찌푸리며 현송의 손목을 노리는 것을 포기했다. 만약 공격을 고집한다면 현수의 검을 피할 기회를 잃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현송에게 여유가 생겼다. 만화(滿花)! 현송의 검끝이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심하게 요동을 쳤다. 무당 태청검법(太淸劍法)의 절초인 양구만화(良丘滿花)의 검화(劍花)가, 현수의 공격 에 대응해가는 제갈휘의 오른쪽 가슴을 취해갔다. 치차(齒車)처럼 꽉 짜여져 번갈아 독수를 가하는 현송과 현수. 그 폭풍 같은 공세 속에서 유연히 진퇴하며 대처해가는 제갈휘. 그들이 만들어내는 격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할 정도로 예술적이 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석대원은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제갈휘는 정상적인 몸이 아니었다. 아까 주동민의 죽음을 전해들었을 때 받은 충격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물론 석대원은 두 도사의 검진이 제갈휘를 이기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상생상보(相生相補)하는 검진의 묘용이 제갈휘를 잠시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그 의 검학(劍學)은 그 정도에 밀릴 정도로 천박하지 않았다. 문제는 싸움이 점점 길어지는 것에 있었다. 제갈휘가 입은 내상은 철사 위에 난 작은 흠집과 같았다. 흠집만으로는 절대로 철사를 끊을 수 없지만, 흠집을 중심으로 반복적인 자극을 주면 아무리 질긴 철사라도 결국에 가서는 끊어지고 마는 것이다. * * * 삼십여 초가 넘게 이어지던 이대 일의 박투. 그 결말은 한 사람의 실수로 판가름나고 말았다. 그것은 부지불각(不知不覺)의 실수였다. 엇? 현송과 검을 마주한 한 제갈휘는 자신의 몸이 병기와 함께 앞으로 딸려가는 것을 느꼈 다. 그것은 지금껏 거칠게 밀어붙이기만 하던 현현검진에 변화가 생겼음을 말해주고 있었 다. 개병(開屛)! 현송이 고명한 접인지기(接引之氣)로 제갈휘의 중심을 흔든 것과 현수가 앞으로 달려 들며 구주개병(九州開屛)의 절초를 펼친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화라락---! 수십 첩 병풍이 단숨에 펼쳐지듯, 현수의 검은 으스스한 검기를 뿌리며 제갈휘의 허리 를 베어갔다. 그것은 신형이 흐트러진 제갈휘가 채 몸을 바로잡기도 전의 일이었다. 제갈휘의 허리가 기묘한 각도를 그리며 회전했다. 두 발을 고정시킨 상태에서 허리를 크게 돌리는 전불추(轉拂鎚)의 수법이었다. 하지만 몸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빠른 중심 이동을 실행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파악! 제갈휘의 옆구리가 쩍 벌어지며 선연한 핏물이 튀어올랐다. 섬뜩한 통증이 그의 미간을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삼점(三點)! 기회를 잡은 현송이 앞으로 내달았다. 송문고검이 뿌옇게 흐려지는가 싶더니 허공의 세 점에서 세 개의 검봉이 불쑥 튀어나 왔다. 봉황삼점두(鳳凰三點頭)의 자법(刺法)이었다. 바로 이때, 현수의 눈빛이 번쩍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을 하는 것은 현현검진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현현검진의 가장 큰 무서움은 미묘한 시차를 두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과 방어에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가 방금 전 제갈휘의 옆구리에 새겨놓은 일 검은 검진의 금기마저도 잊게 만들 정도 로 짜릿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놈을 벨 수 있다면! 현수는 끝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하앗! 현수의 검이 무서운 기세로 회전하며 제갈휘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정면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 곡선과 직선, 상단과 중단. 하지만 검진의 묘용인 상생상보의 배합은 없었다. 제갈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불안한 내식 때문에 이제껏 한 호흡에 전력을 쏟아내지 못하던 그였다. 저들에게는 언제나 두번째 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차앗! 창룡의 울음이 이럴까! 땅거미가 내린 곡리(穀里) 한 구석의 하늘과 땅이 제갈휘의 웅혼한 장소성에 진저리를 쳤다. 꽝!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세 자루의 검이 허공의 한 점에서 동시에 부딪쳤을 때의 일이었다. 윽! 우욱! 현송과 현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무슨 엄청난 내공이란 말인가! 후읍! 눈앞이 캄캄해진 것은 제갈휘도 마찬가지였다. 내상을 입은 몸으로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린 결과였다. 하지만 제갈휘는 물러서지 않고 검을 힘껏 밀어붙였다. 까가가---! 이빨을 시큰거리게 만드는 금속성과 함께 새파란 불똥이 어둠 속으로 비산했다. 두 자루 송문고검이 부러질 듯 낭창거렸다. 허억! 현송에 비해 내공이 약한 현수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탁한 기운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서버렸다. 그것은 부지불각의, 하지만 엄청난 실수였다. 비록 제갈휘가 승기를 잡고 있다고는 하나, 세 자루의 검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현수가 뒤로 물러서기 전까지는... 현수가 물러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정념검을 쥔 제갈휘의 오른 손목이 몸 안쪽으로 살짝 돌아갔다. 그 순간 검신을 통해 흘러나오던 검기가 돌변했다. 어엇! 제갈휘의 검을 혼자 감당하게 된 현송은 누군가에게 떠밀기라도 한 듯 앞으로 주르륵 딸려갔다. 이것은 조금 전 그가 제갈휘에게 시전했던 접인지기에 의한 중심 흔들기 였다. 이번에는 정반대로 그가 제갈휘에 의해 겪게 된 것이다. 제갈휘의 수법은 그보다 훨씬 더 고명했다. 현송의 상체는 읍례(揖禮)를 할 때처럼 앞으로 숙여졌다. 그리고... 정념검의 요기 서린 일섬광채(一閃光彩)가 유성처럼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슉---! 한 인간의 두개골이 두 쪽으로 잘려진 소리치고는 너무나 작은 소리였다. 현송은 입을 딱 벌린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무의식중에 뇌문(腦門)을 보호하려 했음인가. 송문고검은 그의 콧날 부근에서 어정쩡하게 멈춰져 있었다. 사형! 뒤로 물러서기에 급급했던 현수는 사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석상처럼 굳어져 있는 사형의 뒷모습에서 상상하기조차 싫은 불길한 일이 벌어 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느낌은 적중했다. 제갈...휘... 너... 현송은 벌어진 입을 놀려 제갈휘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간과 콧날, 인중, 그리고 입술 한가운데를 가르며 만들어지는 희미한 혈선은 그로부터 의지로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박탈해버렸다. 그는 밑동이 베어진 고목처럼 천천히 엎어지기 시작했다. 쿵! 왜소한 몸이 쓰러지는 소리가 그리 클 까닭이 없었지만, 현수를 비롯한 정파명숙들의 귓속에서는 천둥처럼 커다랗게 울렸다. 사---형---! 현수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았다. 검진을 풀지만 않았던들, 그리고 뒤로 물러서지만 않았던들, 사형이 이처럼 허망하게 죽을 리가 없었다. 슬픔과 자책감, 그리고 분노가 현수의 영혼을 무자비하게 난자했다. 차라리!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서 상대했다면! 그토록 혹독히 수련했던 수법으로 처음부터 나 혼자서 상대했다면! 제---갈---휘---! 현수의 검이 벼락같이 제갈휘의 가슴을 찔러갔다. 상처 입은 야수와도 같은 악이 받친 기세였다. 제갈휘는 조금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깡! 검과 검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정면에서 부딪쳤다. 바로 그때, 제갈휘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파악! 단단한 돌바닥 위에 떨어진 유리잔이 부서지듯, 현수의 검이 제갈휘의 눈앞에서 산산 조각나버린 것이다. 어엇! 제갈휘는 깜짝 놀랐다. 정념검에 담긴 검기가 아무리 위맹한 것이라 한들, 현수와 같은 고수의 검을 그토록 무참히 부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하나뿐! 현수는 스스로 내력을 끌어올려 자신의 검을 부순 것이다. 왜? 라는 의문을 떠올리기에는, 우박처럼 퍼부어오는 검편(劍片)들은 너무도 살인적인 것 이었다. 제갈휘는 정념검을 끌어당겨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시퍼런 검기가 둥글게 휘말리며 무수한 파편들을 단 한순간에 휩쓸어버렸다. 하지만 상황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시야가 정돈되었을 때, 제갈휘는 무언가 섬뜩한 예기를 품은 물체가 미간을 향해 빠 르게 찔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위험! 제갈휘의 몸이 뿌옇게 흐려졌다. 다시금 재현되는 기경(奇驚)할 이형환위의 재주였다. 하지만 그 놀라운 몸놀림에도 불구하고 제갈휘는 미간을 노리던 예기로부터 완전히 몸 을 빼내지 못했다. 찌익! 왼쪽 눈썹 부위의 살이 움푹 파이며 도끼로 맞은 듯한 통증이 제갈휘의 얼굴 위에 엄 습했다. 잠시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할 정도의 극렬한 통증이었다. 살덩이는 물론이거니와 뼈까지 파여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제갈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바로 눈 위에 그런 일격이 가해졌는데도 말이다. 그것이 고검 제갈휘가 여타의 검객들과 다른 점이었다. 죽엇! 활짝 펼쳐진 두 개의 손바닥이 제갈휘의 가슴을 때렸다. 재차 달려든 현수가 그 유명한 무당의 면장(綿掌)을 시전한 것이다. 퍼엉!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제갈휘는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입에서부터 붉은 피화살이 쭉 솟구쳤다. 하지만 제갈휘의 두 눈은 여전히 떠져 있었다. 그리고 떠진 그의 눈은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몸뚱이가 뒤로 밀려남에 따라 멀어져가는 현수, 면장을 격출하기 위해 쭉 내밀어진 그의 두 손, 그리고 그 사이로 활짝 열린 가슴... 정념검이 짧은 사선을 그리며 솟구쳐 올랐다. 안 돼---! 제갈휘와 현수의 접전을 바라보고 있던 과추운이 지른 외침이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늦가을의 땅바닥은 분명 차가울 것이다. 하지만 땅바닥 위에 길게 엎어져 있는 현수는 땅바닥의 차가움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 다. 갈라진 가슴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핏물의 뜨거움도 역시 느낄 수 없었다. 이... 정도였던가! 그토록 준비해 왔건만 결국 이렇게 끝나는가...! 생명은 뭉클거리는 선혈에 실려 서서히 그의 육신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이상 하게도 의식은 또렷했다. 천지동장(天地同葬)의 검초와 파검술(破劍術), 그리고 제운종의 은밀함 위에 실린 일 지관수(一指貫首)의 패도적인 지법(指法)... 지난 여름 형산을 피로 물들게 한 용봉단(龍鳳團)과 무양문의 전투에서, 무양문의 고 수인 살지관(殺地官) 오경주(吳京柱)를 간단히 죽여버린 비장의 연환사식(連環四式)이 었다. 그는 제갈휘를 죽이기 위해 이 네 가지 수법을 얼마나 열심히 수련해 왔던가! 하지만 제갈휘의 무공은 오경주와 차원이 틀렸다. 제갈휘는 시야가 차단된 속에서도 연환사식의 최후 수법인 일지관수를 피했다. 모든 것은 그 순간 이미 끝났다. 검객이 스스로 검을 부쉈을 때엔 반드시 그 수로 상대를 죽여야 했다. 다음 수란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과연 면장에 적중된 와중에서도 제갈휘는 검을 날렸고, 그 검은 그의 가슴을 여지없 이 갈라버렸다. 현수는 두 팔을 버텨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행동은 심장으로부터 빠져나가는 피의 양을 증가시킨 것에 불과했 다. 제갈...휘... 최후의 힘을 다해 짜낸 목소리였으리라. 제갈휘는 현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제갈휘의 얼굴은 핏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눈썹까지 뭉텅 날아가버린 왼쪽 이마의 상처는 허연 뼈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지독한 것이었고, 가슴 앞섬을 적시고 있는 토혈 또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흘러내리는 핏물로 이미 왼쪽 눈은 뜰 수도 없는 상태... 하지만 하나뿐인 그의 눈초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과연... 과연... 과연 뭐가 어떻다는 말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그 뒷말은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현송과 현수. 한 시대를 풍미한 무당파의 두 검객은 이렇게 궁벽한 새하(塞下)의 산중에서 그 일생 을 마감했다. 제갈휘는 현수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살심에 지배당한 그였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아직 자비심이 남았기 때문 이었을까?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쿨룩! 제갈휘는 갑자기 허리를 굽히며 심하게 기침을 했다. 가래와 함께 아이 주먹만한 핏덩이가 그의 입으로부터 토해져 나왔다. 형님! 석대원은 제갈휘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아직 살기 등등한 많은 고수들이 남아 있는데, 제갈휘는 운신에 장애가 되는 중한 상 처를 입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멈추게 만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제갈휘였다. 다가오지 말게! 석대원의 몸이 우뚝 멈춰졌다. 너무도 단호한 말투였다. 석대원은 이제껏 제갈휘로부터 이토록 단호한 말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것은 내 운명이요, 내 문제라네. 자네는 이 일에 개입해서는 안되네! 역시 칼로 자른 듯한 말투였다. 석대원은 별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제갈휘는 고개를 돌려 과추운을 바라보았다. 계속합시다... 낮은 목소리였다. 으음... 무거운 안색으로 현송과 현수의 시신을 보고 있던 과추운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제갈 휘의 얼굴을 정시했다. 비록 상처를 입었지만, 제갈휘는 여전히 강하고 위험했다. 이제 더 이상 군웅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협공. 문득, 과추운의 머릿속에는 한 단어가 떠올랐다. 이전과는 달리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 * * 저들은 도대체 왜 싸우고 있는 것일까? 밤이었다. 어둠은 이미 사위를 복속시켜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려 놓았다.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둑한 산 길, 어슴푸레한 달빛만이 악귀(惡鬼)처럼 살기 등 등한 사내들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었다. 달빛은 무심한데, 밤의 한구석에 우뚝 선 채 혈전(血戰)을 바라보고 있는 석대원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석대원의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었다. 강호에 발을 딛은 지 어느덧 반 년이 가까워 오건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싸웠던가! 강호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마음이 통했던 의형 제갈휘는 지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는 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십여 년 전부터 피를 피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써온 제갈휘였다. 하지만 제갈휘로 인해 평화를 얻었던 자들이 이제는 그를 배덕자(背德者)로 몰아 죽이 려 하고 있었다. 대의? 명분? 좋은 이야기들이었다. 석대원에게도 대의가 있었고 명분이 있었다. 사천 청류산을 떠나며, 한 갑자를 이어진 비각의 음모를 파헤치고 강호의 안녕을 얻 는 것이 석대원의 대의요 명분이었다. 그것은 선(善)이었다. 석대원에게 있어서 지고한 가치를 지닌 절대선(絶對善)이었다. 하지만 지금 제갈휘를 죽이려는 저들의 대의와 명분을 바라보며, 석대원은 머릿속이 터질 듯한 혼란과 함께 입안에 오물이 찬 듯한 욕지기를 느끼고 있었다. 위선이었다! 그것은 위선이었다! 아니, 어쩌면 무엇을 목표로 산다는 것 자체가 위선일지도 몰랐다! 세상의 모든 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어서, 한 사람이 느끼는 어떤 선(善) 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어떤 악(惡) 일 수 있었다. 한 사람이 확신하는 절대선 조차 다른 사람이 확신하는 절대악 일 수 있었다. 무엇이 대의요, 무엇이 명분인가! 천하의 무슨 근거가 반드시 자신은 옳은 일을 한다 는 신념을 줄 수 있는가! 석대원은 또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단지 오랫동안 머릿속에 곱씹어 왔던 일을 나의 의지와 나의 욕망으로 행하는, 철저하 게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나는 저들에게 질문한다. 과연 무양문이 악인가? 그런데 누군가가 내게 질문한다. 과연 비각이 악인가? 사고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비탈을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불확실한 모든 가치가 석대원의 영혼을 꽝꽝 때렸다. 거대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주 거대한 쇠망치가 되어... 참을 수 없었다. 장대한 체구와는 달리 아주 순박하고 가녀린 석대원의 영혼은 크게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아아---! 쩡! 무쇠 바둑판을 쥔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꺾어지며, 과추운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는 면문(面門)을 보호하고 있던 바둑판을 빙글 돌리며, 왼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파파파---! 다섯손가락은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져 있는데, 장심(掌心)으로부터 뿜어져나오는 강맹 무비한 경기는 그가 자랑하는 붕천십삼장(崩天十三掌)이었다. 열세 번의 장력을 숨 한 번 내쉴 정도의 짧은 시간에 때려낸다는 붕천십삼장은, 이미 절반의 내력도 사용하지 못하는 제갈휘에게 있어서 충분히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제갈휘는 감히 정면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왼발로 땅을 찍으며 허공으로 몸을 피했다. 날렵한 금리약연(金鯉躍淵)의 신법이었다. 그러자 과추운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나왔다. 갈 수 없다! 부웅! 백오십 근이 넘는 중병(重兵) 중에서도 중병인 무쇠 바둑판이 허공에 떠 있는 제갈휘 를 향해 날아갔다. 제대로 맞으면 아무리 고강한 외문기공을 익혔다 한들 살아남을 수 없는 무지막지한 일격이었다. 이미 피할 여유는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제갈휘의 검이 밤하늘에 두 줄기 섬광을 그렸다. 종횡이 교차돼 십(十) 자의 형상을 이루는 섬광이었다. 쩡! 묵직한 격타음과 함께 무쇠 바둑판이 튕겨졌다. 그 광경을 과추운의 안색이 변했다. 화산파 양의검법이 경지에 이르면 한 수에 두 개의 실검(實劍)을 만들 수도 있다고 했 다. 제갈휘가 보여준 검법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과추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 것은 제갈휘가 이룩한 놀라운 경지가 아니었다. 핏물이 덕지덕지 말라붙은 한쪽 눈은 실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끊임없이 토해내 는 핏물은 그 내상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제갈휘의 상태가 그러했다. 그런데도 저런 위력적인 검법을 전개할 수 있다니, 도대체 그 실력의 끝은 어디란 말 인가! 이미 제갈휘의 손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는 열여섯에 이르러 있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열셋... 어쩌면 그들로도 제갈휘를 못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과추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 었다. 하지만 한 주먹이 여러 주먹을 견디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몸을 날렸던 제갈휘가 내릴 곳을 찾지 못하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 었다. 그가 착지할 만한 지점은 살기어린 눈초리들에 의해 선점(先占)당해 있었다. 하지만 새가 아닌 이상 언제까지나 허공에 떠 있을 수는 없었다. 차앗! 이얍! 제갈휘가 지상을 향해 내려오자 예상했던 대로 몇 개의 병기가 그를 향해 솟구쳐 올라 왔다. 제갈휘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한 번 내력을 끌어올렸다. 빠박! 정념검이 하방을 향해 큰 호를 그리자 병기들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격퇴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윽! 아래로 떨어지던 제갈휘의 몸이 허공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격퇴되는 병기들 사이로 솟아오른 유성추(流星鎚) 하나가 그의 왼쪽 어깨를 때린 것이 다. 중심을 잃은 제갈휘의 몸은 의지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회! 때마침 그곳에 서 있던 개방의 칠결제자 견위가 오른 주먹을 쭉 내질렀다. 개방의 절기 파옥권(破玉拳)의 묵직한 권력이 제갈휘의 머리를 향해 밀려올라갔다. 쳇! 비록 중심을 잃은 상황이었지만, 파옥권에 쉽게 머리를 내줄 제갈휘는 아니었다. 그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 위에 감았다가 힘차게 펼쳤다. 휘리릭! 제갈휘의 몸은 옆으로 눕혀진 채 팽이처럼 맴돌았다. 물론 급작스러운 행동인 탓에 그 회전은 그리 위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직선으로 솟구쳐오던 파옥권의 진로를 미세하게나마 비틀 수는 있었다. 휘융! 권력은 제갈휘의 얼굴로부터 반 자도 떨어지지 않은 허공을 쓸고 지나갔다. 얼굴 옆면을 갈고리로 훑는 듯한 기분나쁜 느낌이 제갈휘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권력의 여파는 귀 아랫부분을 쩍 갈라지게 만들었고, 흘러나온 핏물은 무성한 구레나 룻을 삽시간에 붉게 물들였다. 지겨운 놈들! 제갈휘는 양팔을 쫙 펼쳤다. 옷자락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조금 전의 회전을 감안한다면 믿기 어려운 균형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의 발 아래에는 견위가 있었다. 흐억! 견위의 안색이 대변했다. 파옥권의 투로(套路)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상반신이 제갈휘에게 활짝 노출된 것이다. 그는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무작정 몸을 날렸다. 쐐액! 정념검이 허공을 갈랐다. 견위의 왼쪽 허벅지에서 시뻘건 핏물이 솟구쳐 올라왔다. 빌어먹을... 제갈휘는 몸을 뒤집어 땅에 내려서며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방금 쓴 것은 살초(殺抄)였다. 견위의 대응이 아무리 신속했다고 한들, 그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허벅지 정도로 끝났 을 리가 없었다. 검수가 검이 느려졌다. 이것은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갈! 고막을 먹먹하게 만드는 기합소리... 어느새인가 과추운의 몸이 코앞까지 육박해 있었다. 술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보법은 개울에 뜬 달을 밟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적선 답월취유보(謫仙踏月醉遊步)인데, 시야를 꽉 메우며 쏟아지는 폭풍 같은 장력은 붕천 십삼장의 최후수법인 십삼첩(十三疊)이었다. 이번에는 피할 곳이 없었다. 하앗! 정념검이 종횡으로 휘둘러지며 장영(掌影) 전체와 부딪쳐갔다. 실과 허를 구분할 수 없는 공격에 대해 실과 허를 구분할 수 없는 공격으로 맞대응한 것이다. 퍼퍼퍽! 씨씻! 삼 장(三掌)과 이 검(二劍). 앞에 것은 제갈휘가 얻어맞은 장력의 수였고, 뒤에 것은 과추운 몸에 새겨진 검상의 수였다. 두 사람 모두 피를 흘리며 몇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외견상으로는 누가 이득을 보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과추운과는 달리 제갈휘에게는 아직 상대해야할 많은 적들이 있었다. 씽! 유성추였다. 아까 제갈휘의 왼쪽 어깨뼈를 으스러뜨린 바로 그 유성추였다. 던진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후를 노리고 쏘아져오는 그 쏜살같은 속도로 미루어 일가(一家)를 이룬 자의 솜씨임이 분명했다. 제갈휘는 상체를 비틀었다. 유성추는 간발의 차를 두고 제갈휘의 목 앞으로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던들 목에 큼직한 바람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빙글! 스쳐지나간 유성추가 허공의 한 점에서 맴돌았다. 그러자 유성추에 달린 사슬은 살아있는 뱀처럼 제갈휘의 목을 휘감아갔다. ...! 너무나 급작스러운 변화였기 때문에 제갈휘는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완전히 감기기 전에, 왼손을 들어 목과 사슬 사이에 끼운 것은 제갈휘로서는 천만다행 한 일이었다. 전재겸(田材兼)이 스물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추왕(鎚王)이라는 영예로운 별호를 얻 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성명절기인 환성구구변(幻星九九變)은 추법(鎚法) 중에서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고, 전재겸의 자질은 환성구구변의 변화무쌍함을 십분 발휘할 정도로 것 이었다. 전재겸은 이 순간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유성추를 허공에서 휘감아 상대의 목을 졸라버리는 수법은 결귀나(結鬼拿)라는 이름의, 환성구구변 중 가장 괴이한 초식이었다. 그의 이 수법에 걸려 속절없이 쓰러져간 마두, 도적의 수만 해도 얼마였던가! 하지만 그들의 이름과 무게를 다 합쳐도 제갈휘이라는 이름의 거물과는 비교할 수 없 었다. 그는 유성추를 던져 생애 최대의 대어를 낚은 것이다! 제갈휘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달아올랐다. 이마와 귀밑에서 흐르는 핏물이 뚝 멈춘 것만 보아도 사슬이 조여드는 힘이 얼마나 무 시무시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왼손 주먹이 목과 사슬 사이에 끼워진 탓에 실낱 같은 호흡만은 유지할 수 있 었다. 그리고 호흡이 유지되는 한, 그는 단전으로부터 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패앵! 전재겸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사슬에서 발생한 힘이 그의 몸뚱이를 엄청난 힘으로 잡아당긴 것이다. 어억! 전재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당기던 힘 따위는 바다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제갈휘의 오른손이 허공에 떠 끌려가는 그를 향해 불쑥 내밀어졌을 때, 그는 눈을 꽉 감고 말았다. 치켜들려진 오른손, 그 끝에서 요사스럽게 빛나는 검봉. 만약 때마침 달려온 과추운이 아니었다면 그의 이마는 정념검에 의해 여지없이 관통 당했을 것이다. 전 소협! 사슬을 놓으시오! 과추운이 전재겸의 몸을 거칠게 밀어붙인 것과 정념검이 전재겸의 얼굴 옆을 스쳐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순간, 제갈휘의 목을 죄던 사슬의 압력이 사라졌다. 과추운에게 떠밀린 전재겸이 사슬을 놓아버린 것이다. 갑자기 호흡이 자유로워지자 기침부터 나왔다. 하지만 눈앞으로 날아들어온 하나의 신발은 기침을 할 여유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전재겸을 밀친 과추운이 허공에서 몸을 눕히며 왼 다리로 제갈휘의 얼굴을 걷어찬 것 이다. 제갈휘의 눈빛이 번뜩였다. 물론 위력적인 발차기였다. 하지만 검이 아직 그의 손에 있는데 다리를 그 앞으로 내미는 것은 큰 실수였기 때문 이다. 그는 지체없이 검을 휘둘러 다리를 베어갔다. 씻! 정념검의 예기는 과추운의 왼 다리 종아리 부분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런데... ...! 뭔가가 이상했다. 제갈휘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잘려져나간 과추운의 다리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의족? 과추운의 다리... 과추운은 지난 여름 형산의 전투에서 무양문의 오군장(五軍將) 관산귀전(貫山鬼箭) 대 적용(大迪容)의 목숨과 다리를 맞바꿨던 것이다. 철로 만들어진 의족을 벤 것으로는 과추운에게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과추운의 쌍수가 제갈휘의 가슴 위에 도달한 뒤였다. 뻑! 갈비뼈를 으스러뜨릴 정도의 강력한 장력이 제갈휘의 가슴 위에서 폭발했다. 입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제갈휘의 몸은 허공을 이 장이나 날아가 뒷전에 서 있던 소나무에 부딪쳤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소나무가 절반쯤 꺾어질 정도로 거센 충돌이었다. 으으... 제갈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일으킬 수가 없었다. 과추운의 이번 일 장은 그 정도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제갈휘를 포위하고 있던 자들의 눈가에 검붉은 빛이 감돌았다. 그들로서는 천하에 다시없는 기회가 온 것이다. 죽어라! 간적! 죽엇! 예닐곱 자루의 병기들이 제갈휘를 향해 쏘아져갔다. 목숨을 앗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어육을 만들어버릴 정도로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 * * 후두둑. 부러진 병기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제갈휘를 비롯해서 그를 공격하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 순간, 제갈휘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석대원의 눈꼬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 부러진 단창 하나. 길게 찢어진 황색 무복 가슴팍에 서서히 배어나오는 핏물. 하지만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그의 거대한 몸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짧은 수염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에는 갈등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을까? 자네...! 뒷통수 위로 제갈휘의 목소리가 얹혀졌다. 황소의 그것 같은 굵은 목이 천천히 돌아갔다. ...! 석대원과 눈이 마주친 제갈휘는 움찔 놀랐다. 석대원은 울고 있었다. 눈물도 없고 소리도 없었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형님... 석대원의 굵은 입술이 벌어졌다. 잔뜩 쉬어버린 갈라진 목소리가 그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겠군요.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세상의 무서움을 알아버린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처럼 절망적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어요. 형님을 이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때 석대원의 앞에 서 있던 견위가 움켜쥔 주먹을 쭉 내밀며 호통을 질렀다. 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슈유유! 파옥권의 권력이 바위처럼 우람한 석대원의 가슴을 향해 밀려왔다. 쿵! 석대원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어떠한 충격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견위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방금의 일 권에 실린 힘을 저처럼 덤덤하게 받아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 지 못한 일이었다. 제갈휘를 향했던 석대원의 고개가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의 눈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당신들은 어찌 이리도 어... 어리석소? 북받친 슬픔 때문인지 쉽게 뒷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석대원은 말을 잇기 위해 크게 한 번 숨을 쉬어야만 했다. 형님이 지난 세월 동안 당신들 정파의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소? 영웅이라고 자처하는 당신들은 그를 비겁자라고 경멸했지만, 그가 진정 비겁자였다면 천하는 오래 전에 무양문에 의해 뒤집어졌을 거요. 당신들의 힘만으로 무양문의 만 오천 무사들을 당해낼 수 있소? 당신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은 거요? 과추운이 앞으로 나섰다. 의족이 잘려져 한쪽 다리밖에 버텨주지 못하는 몸뚱이였지만, 기이할 정도로 안정되어 보였다. 누군지 모르지만, 자넨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천하의 정도(正道)란 동정심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네. 몸이 천 개로 갈라져 죽을 지라도 악인에게 굴복하지 않는 것이 정도를 걷는 장부의 의기요 도리이지. 과추운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석대원을 꾸짖었다. 이때 석대원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들은 우리가 곡리를 지난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을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런데 알 수 있는 자들이 있었다. 비각의 사주를 받았소? 석대원의 말에 과추운의 몸이 움찔거렸다. 제갈휘가 이곳을 향한다는 사실은 무양문의 삼군장(三軍將) 불로동자(不老童子) 초당 (楚堂)이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초당은 비각의 사십구비영 중 아홉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일은 비각과는 상관없는 일일세. 그리고 황실의 일은 자네 같은 천민이 논할 바가 아니야! 하지만 과추운의 말은 어딘가 궁색하게 들렸다. 역시 당신들은 비각의 간인(奸人)에게 무슨 말을 들은 모양이구려. 닥치게! 감히 황상께 불충하는 건가? 석대원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황상? 흥! 주원장의 간교함이 아니었던들, 이런 피의 역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외다. 주씨의 후예는 그것도 모자라 이제 강호를 아예 없애려고 하는데, 그 놀음에 꼭두각시 처럼 놀아나면서 무엇이 황상이고 무엇이 불충이란 말이요? 이놈, 기군망상(欺君妄上)의 죄를 범하다니... 네놈이 바로 역적이나 다름없구나. 내 모용 아우의 얼굴을 봐서라도 네놈의 목숨은 살려둘 생각이었지만, 이제 도저히 안 되겠다! 과추운의 얼굴이 벌개졌다. 그의 보수적인 사고 속에서, 눈앞의 젊은이는 존재해서 안 될 역도인 것이다. 그 분노에 기가 질린 것일까? 석대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석상처럼 서 있었을까? 석대원의 어깨가 조금씩 흔들렸다. 개울물이 흘러가는 소리 같은 키득거림이 어깨의 흔들림에 따라 밤하늘 속으로 피어올 랐다. 그러다가 그의 고개가 번쩍 들려졌다. 입가에 맺힌 웃음... 핏물로 그린 그림같이 섬뜩한 느낌을 주는 웃음이었다. 흐흐... 그래,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군. 석대원은 어깨에 꽂힌 단창을 뽑으며 말했다. 거대한 몸뚱이 전체에서 서서히 피어나는 살기... 제갈휘가 석대원의 뒷전에서 소리쳤다. 자네는 끼어들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형님! 낮지만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뭉친 듯한 단단한 목소리였다. 석대원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천천히 말했다. 형님을 혈로(血路)로 던져넣은 운명이 있듯이, 제게도 마찬가지의 운명이 있군요. 그래요! 형님을 처음 뵈었을 때 왜 그리 마음이 끌렸는지지, 이제야 알겠군요. 석대원의 왼손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마공 혈옥수를 운용한 것이다. 제가 형님 일에 끼어든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었던 겁니다. 단지 형님께서 조금 더 일찍 시작하신 것 뿐이죠. 말을 마침과 함께 석대원은 사람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거대한 체구 때문일까? 사람들은 마치 산이 자신들을 향해 밀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二十五章 活人莊 (1) 손. 거무튀튀한 손이었다. 피부가 온통 일그러져 원형을 짐작하기 힘든 추한 손이었다. 무엇이라도 움켜쥐려는 듯 다섯 손가락이 장심(掌心)을 향해 기괴하게 구부러진 손이 었다. 하지만 두달 반 동안 손가락의 마디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기에, 미추(美醜)를 따지 기에 앞서 슬픈 손이었다. 그 손을 감정 없는 시선으로 응시하는 하나의 눈이 있었다. 애꾸가 아니니 마땅히 두 눈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얼굴 반쪽이 붕대에 감겨 있는 이 상 어쩔 수 없었다. 석대문은 뜨고 있던 한쪽 눈을 감았다. 눈가가 실룩거렸다. 두달 반 전 겪었던 화염의 폭풍이 폐안(閉眼)의 암흑 위에 또다시 겹쳐진 것이다. 그날 밤, 동정호의 철군도(鐵群島)... 그는 뇌옥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우웅--- 계단 전체가 진동했다. 천장이 흔들리며 돌가루가 떨어지고, 바닥이 지진이라도 만난 듯 요란스럽게 진동했다. 뒤이어 들리는 엄청난 폭음... 콰앙---! 귀밑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엄청난 압력. 그리고 계단 앞쪽을 가득 메우고 몰려드는 것은 불길의 노도(怒濤). 빛, 그리고 뜨거움... 석대문은 눈을 떴다. 천장이 보이고, 손이 보였다. 천장은 멀고 손은 가까우니, 마땅히 손부터 보였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두 눈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는 쳐들었던 오른손을 천천히 내렸다. 왼손은 아직 붕대에 감겨 있는데 오른손은 붕대를 풀었으니, 외상으로 말하자면 오른 손이 가볍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감각에 있었다. 왼손은 아프고 쓰라린 와중에서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지만, 오른손은 움직이기는커 녕 어떠한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검수(劍手)! 그는 물론 훌륭한 검수였다. 두달 반 전 화염에 휩쓸려 계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때, 그는 정신을 잃은 상태에 서도 애검 흑정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훌륭한 검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른손 손가락이 검을 움켜쥔 모양 그대로 굳어버린 그가 지금도 검수라고 할 수 있을 까? 석대문은 쓰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침대 탁자를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는 왼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석 가주 친전(親前). 아직 환우(患憂) 불편하신 줄 알면서 비보(悲報)를 전하는 소생의 마음도 아픕니다. 방(方) 노영웅께서 시월 초여드레에 별세하셨습니다. 우근(于勤) 배상(拜上).> 아버지와도 같던 의백부(義伯父) 방령(方嶺)의 부음(訃音)은 개방의 방주 우근의 서신 에 실려 시월 말에야 그의 손에 전해졌다. 그리고 오늘은 십일월 초엿새. 백부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 예끼, 이 사람! 어디서 늙은이 보비위 하는 법은 배워가지고! 지난여름 철군도(鐵群島)로 잠입해 들어가던 배 위에서 석대문을 향해 파안대소(破顔 大笑)하던 백부였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백부에게 회복 불능의 치명타를 안긴 자는 철군도의 주인인 칠보초혼비검(七步招魂飛 劒) 곽인(郭仁)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자는 우근의 구궁장법 아래 목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무사 된 몸으로 복수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석대문은 억울하지 않았다. 곽인의 배후에는 비각이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에게 배후가 있다는 말은, 아직 복수해야할 대상이 남았다는 말과 상통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석대문은 다시 오른손을 눈앞으로 쳐들었다. 어떻게 복수한다는 말인가? 이 꼼짝하지 않는 손을 가지고 어떻게 복수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절망하기에는 때가 일렀다. 그가 누워 있는 이 방, 방이 포함된 장원의 주인은 천하제일의 명의(名醫)였기 때문 이다. 현재로서 믿을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후후..." 석대문은 맑게 웃었다. 맑게 웃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는 맑게 웃었다. - 몸이 건강해지려면 영혼부터 건강해져야 한다오. 천하제일의 명의가 혼절에서 깨어난 그에게 건넨 첫말이었다. 그래서 석대문은 맑은 웃음으로써 음지로 흘러가려는 영혼을 다독거렸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한 사람을 믿으려면 그 사람의 말부터 믿어야 한다. * * * 손. 하얀 손이었다.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백옥 같은 손이었다. 그 손은 정맥이 비치도록 투명하고 매끄러운 다섯 개의 손가락을 지니고 있었다. 이토록 고운 손의 주인이 육십 줄에 접어든 노인이라는 사실은 의외의 일이었다.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인지와 엄지 사이에는 손가락 하나 정도 길이의 쇠털처럼 가느다란 금침(金鍼)이 끼워져 있었다. "사람이나 미물이나 생명을 이루는 근간은 다름이 없는 법..." 부드럽고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노인에게는 구양정인(歐陽定仁)이라는 이름 이 있었다.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구양정인은 여간해서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구양정인이 대문을 나선다면 그것은 대부분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병세가 중한 환자가 있어 노인의 집인 활인장(活人莊)으로 찾아오지 못할 때, 그 환자 를 구하기 위해 왕진하는 경우였다. 이웃들이 구양정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길에서 구양정인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 안녕하십니까, 신의 어르신! 오늘도 어디 환자가 있나 보죠? 구양정인은 그럴 때마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꾸했다. 신의(神醫). 이렇듯 구양정인은 신의, 또는 구양신의(歐陽神醫)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고 이 이름은 이웃뿐만 아니라 널리 강호인들에게까지 알려져 있었다. "모든 생명은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활동할 수 있는 힘을 얻지." 구양정인의 앞에는 털이 북슬북슬한 강아지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눈알에 총기가 없고 코끝이 말라붙은 것으로 미루어 몸 어딘가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았 다. 구양정인은 왼손을 내밀어 강아지의 머리 위를 천천히 더듬었다. 그의 손가락이 스치는 곳마다 누런 털들이 이리 저리 밀리며, 거죽이 얇아 다른 부위 보다 딱딱한 두피(頭皮)가 드러났다. "음식물을 섭취할 때에는 주의할 점이 많다고 할애비가 늘 말했지? 어디 경아(敬兒)가 말해보아라." 강아지의 머리 위를 바라보던 구양정인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칠팔 세 가량의 앙증스러운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다. 구양정인의 손자인 구양도경(歐陽道敬)이었다. 구양도경은 명문장(名文章)을 읊는 문사라도 된 것처럼 눈을 꼭 감고 붉은 입술을 나 풀거리기 시작했다. "첫째는 조금씩, 둘째는 천천히, 셋째는 잘 씹어서... 할아버지, 맞지?" 구양정인은 껄껄 웃었다. 구양도경의 어린 눈에는 할아버지가 웃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새하얀 수염이 보기 좋 았다. "녀석, 그래 맞았다. 그런데 네 강아지는 그 중 뭔가를 지키지 않아서 이렇게 병이 걸린 거란다. 경아는 똑똑하니까 강아지처럼 미련스러운 짓을 하지 않겠지?" "그럼요!" 구양도경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구양정인은 빙그레 웃더니 금침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그러면 이제 시작해볼까?" 금침이 강아지의 정수리를 파고 들어갔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백회(百會), 두개골의 틈새에 있는 급소로서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되는 요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요처에 금침을 박아 넣는 구양정인의 손길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백회는 대장(大腸) 신경을 진정시키는 데 효험이 있는 혈(穴)이지. 주의해야 할 것은, 진정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침을 퉁기거나 움직여서는 안된다 는 점이다." 구양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지금 강아지를 치료하는 동시에 침술의 기초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백회에 박혀 들어간 금침은 향 한 자루 탈 시간이 지나자 뽑혔다. 날카로운 금침이 한 치나 박혀 있었지만 강아지는 그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이 정도 설사에는 침을 쓸 필요도 없단다. 이놈이 꾀가 많아 약을 먹지 않으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침을 쓴 것이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의술 또한 반드시 써야할 곳에만 써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 도록 해라." "응! 할아버지!" 이어 구양정인은 손을 내밀어 강아지의 등골 중 몇 군데를 누르기 시작했다. 방광경(膀胱經)에 해당하는 요혈들을 가벼운 지압술로 자극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뒷다리 슬골(膝骨) 바깥쪽의 양구(梁丘)와 발가락 사이 태충(太衝), 행간(行 間)을 강하게 네댓 번 누르는 것으로 모든 치료가 끝났다. 강아지는 고개를 들어 웅얼거리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총기가 없었고, 코는 여전히 말라붙어 있었다. 아무리 가벼운 설사증이라 한들 엄연히 병(病)이었고, 병을 단숨에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의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구양정인의 경백(驚魄)할 의술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의술이란 환자 스스로 병균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근본적으로 병균을 이겨내는 것은 환자의 몫이었다. "다 끝났구나. 강아지는 이제 좀 쉬어야 한단다. 오늘 하루는 심심하더라도 강아지를 귀찮게 굴지 말거라." 구양도경은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또래 하나 없는 재미없는 활인장 안에서, 소황(小黃)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는 구양도경 의 유일한 놀이 상대였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경아야, 할애비가 준 책은 다 읽었느냐?" 구양도경의 귀여운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본초론(本草論)>은 다 읽었는데, <구침경(九鍼經)>은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요. 에잉!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모르겠어." 사과 같은 볼을 실룩거리던 구양도경이니 투정처럼 내뱉은 대답이었다. 구양정인의 얼굴에 잠시 놀란 빛이 어렸다. <본초론>만 해도 어린아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그런데 손자의 말을 듣자하니 <본초론>은 거의 이해한 것 같지 않은가! 구양정인은 문득 손자의 지식을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골피(地骨皮)가 뭔지 아니?" "지골피? 두충(杜沖) 껍질을 말린 거지." 대답은 즉석에서 돌아왔다. "호오! 약효는?" "뼈가 아플 때 좋아. 두충이랑 비슷해. 음... 하수오(何首烏)도 비슷할걸?" "그래..." 지골피와 두충, 하수오는 모두 근골(筋骨)에 쓰는 약재이지만, 그 쓰임새나 효능은 모 두 달랐다. 하지만 저 정도를 아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구양정인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침경을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침을 쥔 지 오십 년이 넘은 이 할애비도 침에 대해서라면 아직도 자신이 없단다. 침술의 오묘함이란 그렇게 끝이 없는 게야. 본초를 읽을 수 있다면 경아는 바보가 아니지, 아니, 오히려 아주 똑똑한 편이라고 할 수 있어. 경아야, 이리 오너라! 할애비가 안아 주마." "응!" 구양도경은 쪼르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서 할아버지의 품에 담싹 안겼다. 부모가 없는 이 아이에게 있어서, 할아버지의 품속은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안식처였 다. 아이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할아버지 몸에서는 항상 향긋한 약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 근데 환신당(還神堂)의 덩치 큰 아저씨는 많이 아파?" 구양정인의 새하얀 눈썹이 미간 쪽으로 모아졌다. "석 아저씨?" "그래, 석 아저씨!" 구양정인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많이 아프니까 환신당에 누워 있겠지. 하지만 할애비가 다시 건강하게 고쳐줄 거란다. 그런데 왜? 경아는 석 아저씨가 좋으냐? 보기가 흉한데... 무섭지 않니?" 아이는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경아한테 참 잘해 줘. 어제는 이것을 줬어." 그리고 품속에서 꺼내드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나무 토막... "호오!" 구양정인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의 손에 들린 나무 토막을 바 라보았다. 그것은 소나무의 연한 심재(心材)로 조각한 어떤 '짐승'이었다. 조각한 솜씨가 얼마나 엉성했던지, 그것이 '짐승'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쉬운 일 이 아니었다. 단지 귀 비슷한 것이 붙어 있고 입 비슷한 구멍이 뚫린 머리가 튀어나와 있었고, 두 루뭉실한 몸통 아래쪽으로 네 다리 - 길이가 제각기 달랐다.- 가 달려 있었기에, 그렇 게 추정할 뿐이었다. '하기야 왼손 하나로 이만큼 하기도 쉽지 않은 일...' 구양정인은 곁눈질로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아이의 별빛 같은 두 눈은 할아버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받은 선물에 대해 뭐라고 품평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험, 험! 석 아저씨는 재주도 많구나! 소황을 이렇게 멋있게 만들어주다니, 허허허!" 소황일 것이다! 이것은 구양정인의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자, 구양정인은 자신이 잘못 짚었음을 깨달았다. "소황이 아냐! 아저씨는 용(龍)이랬어!" 용? 하늘에 올라 풍운(風雲)을 부르고 뇌우(雷雨)를 관장한다는 바로 그 용? 그 황당함이 구양정인의 얼굴에 그대로 담겨버렸다. 아이의 무구(無垢)한 직관력은 할아버지의 황당함을 즉시 읽을 수 있었다. "봐! 여기 뿔이 있잖아! 그리고 발을 봐! 이게 용 발이야!" 귀라고 짐작한 돌기를 뿔이라고 주장하는 것까지는 묵인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네 개의 발을 용 발이라고 우기는 데에는 어쩔 수 없었다. 구양정인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건 석 아저씨가 잘못 알고 있구나. 용은 발이 두 개야. 뒷발은 없고 앞발만 있지." 아이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할아버지는 자꾸만 용을 용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봤어?" 아이의 뾰족한 항변에 구양정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번도 용을 보지 못했던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랄 수밖에... 자신의 항변이 효과가 있었음을 눈치챈 아이는 당장 후속 공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그러는데, 이 용은 이름이 '청(靑)'이래. 그래서 사람들은 청룡이라고 부른대. 세상에는 용이 스물세 마리가 있는데 청룡이 그 중에서 임금님이래." 끄응... 드디어 구양정인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청룡? 스물세 마리? 도대체 석 가주(石家主)는 언제 이 아이를 이렇게 구워삶은 것일까? 묘한 질투심이 이 신선 같은 의원의 머릿속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참! 그리고 다음 번에는 '백(白)'이라는 호랑이도 만들어 준댔어. 세상에 호랑이가 칠천예순두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아이는 청룡과 백호를 동시에 거느리게 된 것이 신났는지, 정신없이 조잘대고 있었다. 졸지에 '영물학(靈物學)'의 문외한이 되어버린 구양정인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2) 활인장 남쪽 양지바른 곳에는 아담하게 지어진 두 채의 건물이 있었다. 얇은 청석(靑石)이 깔린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자리잡은 두 채의 건물은, 돌계단의 난간에서부터 지붕의 이음새까지 똑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본 사람은, 외양뿐만이 아니라 내부 구조까지도 똑같이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서로 길게 난 복도, 열 개의 문, 열 개의 방... 이 두 채의 건물은 활인장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여기서 손님이란 보통 손님이 아니다. 거동이 불편해 입실(入室) 치료가 불가피한 손님, 즉 중환자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이 두 채의 건물은 '병동(病棟)'인 것이다. 이 두 채의 건물을 지은 사람은 활인장의 당금 장주인 구양정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오 년 전, 그는 둘째아들의 탄생을 기념하며 건물의 초석(礎石)을 심었다. 상량식(上樑式) 때, 구양정인은 제문(祭文)을 쓰고 향을 사르며 두 채의 건물에 각각 의 이름을 붙였다. 남쪽 정원에서 바라볼 때 왼쪽에 자리잡은 건물의 이름은 과운당(過雲堂), 우측에 자 리잡은 건물의 이름은 용련당(勇鍊堂)... 첫째아들의 자(字)가 과운, 둘째아들의 자가 용련임에 기인한 것이다. 그 후 이십오 년 간 과운당과 용련당에서 새 삶을 얻은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일생을 검끝에 걸고 살아가는 강호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강호인들은 구양정인의 놀라운 의술과 두터운 덕망에 감탄하며 과운당과 용련당 두 건물을 그들 특유의 방식으로 명명했으니, 이름하여 혼백이 돌아오는 집, '환신당(還 神堂)'이라 했다. * * * 구양정인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이전에는 과운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건물의 복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작명자(作名者)인 구양정인조차도 과운당이라는 입에 담지 않았다. 과운을 자로 삼은 그의 장자(長子)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또한 그냥 환신당이라고 불렀다. 이 건물도, 그리고 맞은편에 보이는 또 하나의 건물도... "어험!" 구양정인은 나직이 헛기침을 했다. '팔(八)'이라는 숫자가 쓰여져 있는 방문 앞에서였다. "들어오십시오." 굵은 목소리가 문 안쪽으로부터 울려나왔다. 구양정인은 문을 밀었다. 문 틈새를 비집고 나오며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것은 퀴퀴한 냄새였다. 하지만 구양정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익숙했던 냄새였기 때문이다. 말라붙은 피고름에서 풍기는 냄새... 그것은 '병(病)'의 냄새였다. "안녕하시오?" 구양정인은 창가에 놓여 있는 침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침대 위에는 한 사내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신의 어르신!" 쾌활하게 답례하는 사내... 강동제일가주 석대문이었다. "오늘은 어떠시오?" "좋습니다. 조금 답답한 것만 제외한다면..." 석대문이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흘러내리며 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그의 상체는 붕대로 친친 감겨져 있었다. 붕대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불그죽죽한 고름... 방안을 지배하는 악취의 근원이었다. "답답하시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산책까지 하셨소?" 구양정인의 말투는 온화했다. 하지만 석대문은 그 안에 담긴 책망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석대문은 나직이 혀를 찼다. 필요없는 것을 들켜버린 것이다. "으흠! 유 당사(劉堂師)가 본 모양이군요. 이거... 몰래 공기 좀 쐬어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건만, 쯧쯧!" 유 당사라면 병동 전체를 관장하는 유홍(劉弘)을 가리켰다. 구양정인 밑에서 의술을 배우다가 중도에서 포기하고 당사 일을 맡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유홍 본인이 그것을 완강히 부인하니 확인할 도리는 없었다. 구양정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뒤, 조금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찬 공기는 회복에 좋지 않으니, 다음부터는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하하! 유당사는 언제나 고자질만 하고, 신의께서는 언제나 잔소리만 하시는군요." 침상 위의 사내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범종(梵鍾)의 울림과도 같이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얼굴 왼쪽이 온통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허! 잔소리로 들으시면 곤란하외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라 한들, 환자가 된 이상 의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오." 석대문은 왼손을 들어 얼굴 앞에 세우며 정중히 말했다. "아무렴요! 하늘 같으신 신의 어르신의 말씀인데... 소생이 어찌 감히 그 분부를 거역하오리까?" 한 손으로만 하는 불례(佛禮)는 있어도 한 손으로만 하는 포권은 없다. 하지만 석대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른팔 근육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니 한 손으로 포권을 할 수도 있는 일이 었다. 어찌 생각하면 민망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지경인데도 석대문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사라 지지 않고 있었다. 반병신인 그가 이렇게 짓궂게 나오는데야, 구양정인으로서도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 었다. "석 가주도 가만히 보면 참 재미있는 분이시오. 강호 사람들도 검판대인(劍判大人)이 이렇게 실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이제는 소생더러 경박하다 탓하시는군요. 이렇다가는 무슨 질책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석대문은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쯧쯧!" 구양정인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석대문이라는 사내에 대해 깊이 감탄하고 있었다. 구양정인은 강호인이 아닌 의원이었다. 하지만 그의 둘째아들이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후기지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강호 견식은 결코 천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검판대인 석대문이 얼마나 위엄있고 중후한 위인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양정인은 석대문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활인장에서의 석대문은 그런 엄정한 석대문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일곱 살 개구쟁이처럼 짓궂고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양정인은 석대문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얼굴 반쪽을 비롯해 전신을 일그러지게 만든 흉측한 화상! 검객에게 있어서 사형 선고와 마찬가지인 오른팔 근육의 마비! 석대문은 그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그 동안 친숙하지 않던 '웃음'을 선 택한 것이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성정(性情)까지 배우는 사내... 그런 사내를 환자로 삼은 의원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환자가 일(一)의 의술로써 일의 효과를 얻는다면, 그런 사내는 일의 의술로 써 십(十)의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진맥(診脈)을 해볼까요?" 구양정인의 말에 석대문은 지체없이 왼손을 내밀었다. "어디..." 구양정인은 석대문의 두툼한 팔목을 짚고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개미의 더듬이처럼 예민한 그의 손가락은 팔목을 통해 전달되는 맥박을 읽기 시작했다. 맥박의 세기, 맥박의 주기, 그리고 물리적 세계에서 설명할 수 없는 그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느낌... 구양정인은 무엇보다도 이 느낌을 믿었다. 같은 세기, 같은 주기의 맥박이라 해도 어떤 것은 죽어가는 자의 것이며, 어떤 것은 회복되어가는 자의 것이다. 그 느낌을 읽어내는 탁월한 감각이 있는 이상, 그는 발군의 의원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진맥을 하던 구양정인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손을 거두었다. 그의 안색을 살피던 석대문이 히죽거렸다. "관이라도 하나 주문하실 표정이군요." "원, 사람도!" 구양정인은 가볍게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껏 셀 수도 없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보았소." 석대문은 잠자코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석 가주처럼 회복이 빠른 환자는 이제껏 단 하나뿐이었소." "그게 누구죠?" 구양정인은 천장을 바라보며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를 치료한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군. 참으로 놀라운 체력이었지..." "누구냐니까요?" 구양정인이 딴청을 부리자 석대문은 더욱 궁금한 모양이었다. 석대문이 재차 묻자, 구양정인은 그를 힐끔 바라보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이산(武夷山) 흑계령(黑鷄嶺)을 넘어갈 때 화살 여섯 대를 맞고 자빠져 있는 곰을 한 마리 만났지요. 그래서 화살 여섯 대를 뽑아주고 금창약(金瘡藥)을 발라주었는데, 그놈이 그 자리에서 즉시 일어나서 수풀 속으로 달려들어가 버리지 않겠소? 한두 대도 아니고 자그마치 여섯 대요, 여섯 대! 그것도 엄지손가락 정도로 굵은 강전(鋼箭)으로! 어떻소? 놀라운 회복력 아니요?" 석대문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곰이라고요? 으하하!" 쉰내 나는 늙은이한테 멋지게 한 방 먹은 것이다. 석대문의 웃음은 기침이 나올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멎었다. 그 동안 묵묵히 석대문을 바라보고 있던 구양정인은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 다. "내일부터 오른팔 근육을 치료할까 하오." 농담은 이제 끝났다. 석대문의 눈빛이 번뜩였다. 방금 구양정인은 그가 두달 반 동안 애타게 기다렸던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가주께 허락받을 일이 하나 있소." "말씀하십시오." 구양정인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작은 자기병 하나와 침과도 비슷한 길쭉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가주의 오른팔은 팔꿈치와 손목, 그리고 손가락 부분의 힘줄이 뒤틀려 있소. 이럴 때는 대개 침을 써서 힘줄을 바로잡는 법인데... 가주의 경우는 그것이 어려운 실정이오. 뒤틀린 정도가 너무 심하고, 또 그간 내외상이 심해 침술을 미뤘기 때문이지요. 치료의 적시(適時)를 놓쳐버렸다고나 할까..." 석대문은 아무 말없이 구양정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상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직 미래의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내일부터 치료한다는 구양정인의 한 마디로 인해 구체화된 것이다. 구양정인은 상자 안에 있던 자기병을 꺼내들었다. "이 안에는 봉독(蜂毒)이 들어 있소." 봉독? 벌의 독? 석대문의 눈빛에 의문이 담겼다. 그것이 뭐 어쨌다는 말인가? "십여 년 전, 왼팔이 나무에 깔린 초부(樵夫)가 이 장원에 온 적이 있었지요. 그때 그의 왼팔은 이미 되살리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소이다. 찢어진 살갗과 부러진 뼈야 한두 달 안에 치료되었지만 뒤틀린 힘줄은 노부가 알고 있 는 어떤 시술로도 고칠 수 없더이다. 마치..." 가주의 오른팔처럼... 구양정인은 석대문의 오른팔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반년쯤 지난 뒤에 그 사람이 다시 실려왔지요. 왜 실려왔냐 하면... 바로 이것 때문이었소. 벌집을 건드렸다가 말도 못하게 쏘여버린 게지. 참, 재수도 없는 사람이지요?" 구양정인은 자기병을 흔들며 말했다. 석대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정인의 말대로라면 그 초부는 재수없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전생에 초목과 곤충에게 무슨 악연이라도 있었거나... 그건 그렇다 치고, 구양정인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달 동안 고생하다가 결국 죽었소."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단 말인가! 석대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구양정인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노부는 그를 치료하던 두 달 동안 이상한 점을 발견했소! 그의 왼손이 움직였던 것이오.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던 바로 그 손이!" 석대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마치 자신의 손이 움직인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흥미있는 일 아니오? 그래서 노부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연구했다오." 구양정인은 이번에는 상자 안에서 길쭉한 물건을 꺼냈다. 한쪽 끝은 침같이 뾰쪽하고 다른 끝은 액체를 주입할 수 있게 고안된 물건이었다. "그를 공격한 것은 꿀벌이었소. 그런데 다른 꿀벌과는 달리 몸통 색깔이 검고 꼬리 부분이 길쭉한 놈이었지요. 그래서 벌을 부리는 사람을 구해 그놈들을 사육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근맥이 허술한 동물들을 대상으로 계속 실험해 보았고... 그 결과, 근육에 봉독을 주입해 죽은 부분을 살리는 침술을 고안하게 되었다오. 바로 이 침으로..." "그것울 제게 시술해 주십시오!" 석대문은 주저없이 말했다. 그러자 구양정인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런데 문제가 있소." "...?" "우선 사람에게 이것을 써본 적이 없소이다. 만약 지금 사용한다면 가주가 처음이 될 것이오." "상관없습니다!" 석대문은 구양정인을 믿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검을 쥐지 못할 오른손이었다. 검을 쥐지 못한다면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것은 다른 치료와 병행할 수 없소이다. 부작용에 관해서는 아직 미심쩍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지요." "다른 치료라 하시면...?" "지금까지 계속해온 화상 치료 말이오. 화상 역시 적시를 놓치면 치유하기 어렵지요. 만약 지금 봉독침을 사용한다면, 가주는 영원히 본 모습을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르오. 그래도 상관없겠소?" 누구라도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지닌 채 일생을 보내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석대문은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상관없습니다. 본래 잘생긴 얼굴도 아니었지요." 구양정인은 싱긋 웃는 석대문의 얼굴을 보며, 이 사내에게 있어서 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좋소이다! 그러면 내일부터 시작합시다!" 구양정인은 한결 흔쾌해진 기분으로 말했다. 얼굴이 중요한 사람도 있고, 검이 중요한 사람도 있다. 그 선호도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문제였다. "장주님!" 병실 밖에서 유홍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슨 일인가?" "내실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신무전(神武殿)에서 둘째 도련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알았네. 곧 가겠네." 구양정인은 천천히 석대문을 돌아보았다. "둘째아들이 온 모양이오. 노부는 이만 가봐야겠소." "그렇게 하시죠." 석대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 회진은 이렇게 끝난 것이다. 구양정인이 나간 뒤에도 석대문은 한동안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을 다시 쥐고 싶다는 소망이 이제 검을 다시 쥘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바뀐 것이다. 환자에게 있어서 희망처럼 좋은 약이 또 있을까? 석대문은 벌써 '강동제일인'으로서의 심신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석대문은 베개 밑을 더듬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어린아이 주먹만한 가죽공이었다. 석대문은 그것을 엉성하게 구부러진 오른손 안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왼손바닥으로 오른손을 덮었다. 처음 왼손에 힘을 가해 가죽공을 움켜쥐었을 때, 석대문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찡 그렸다. 하지만 눈썹을 찡그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註 : 봉독침의 효능에 대해서는 현대 의학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일벌들의 독침은 보통 때는 복부 말단 내부에 들어 있다가 쏠 때에는 바늘이 튀어나와, 가는 관으로 연결된 독낭(毒囊)에서 봉독액이 국부에 주사된다. 봉독은 비중 1.3, pH 5.2, 쓴맛이 있고, 약한 방향성(芳香性)이 있다. 그 성분은 대부분의 단백질과 소량의 칼륨, 나트륨, 마그네슘, 인, 알라닌, 발린, 아 르기닌, 트립토판, 히스티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약의 일종으로 분류되는 봉독은, 살아 있는 벌에 미세한 전기 쇼크 - 9~12 Volt - 를 주어 채집할 수 있다. 봉독은 미국 의약품 협의회[FDA]에서 '에피톡신(apitoxin)'이란 약품명으로 분류되며, 신경통이나 관절염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봉독에 관한 연구는, 유전공학에 의한 새로운 독성을 지닌 봉종(蜂種)의 개발로 더욱 발전할 것이 예상된다. (3) 부우웅--- 매서운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골난 아이처럼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하늘은 금새 눈이라도 펑펑 쏟아 부을 것만 같 았다. 바람과 하늘 아래, 알록달록한 꾸러미를 받아든 고사리손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 그 속에 짙게 밴 호기심... "삼촌, 이게 뭐야?" 구양도경은 솟구치는 호기심을 끝내 억누르지 못하고 꾸러미를 건넨 구양현(歐陽賢)에 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구양현은 삼촌답게 능청스러운 표정이었다. "글쎄...? 궁금하면 경아가 직접 풀어보렴." 구양도경은 꾸러미를 급히 풀었다. 추위에 곱은 손가락으로 꾸러미의 매듭을 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이의 호기심은 그런 과정을 수고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큼직했다. 꾸러미가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물건은 참나무를 둥글게 깎아 만든 팽이였다. 구양도경은 물론 팽이를 본 적이 있었고, 돌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긴 팽이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함께 딸려 나온 이상한 도구들이라니! "팽이잖아? 근데 딴 것들은 뭐야?" 여기서부터가 본론이었다. 구양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분위기를 잡아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팽이는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지. 수만 리 떨어진 나라에서 만든 거란다. 그곳 아이들은 이렇게 생긴 팽이를 가지고 놀지." 물건의 효용이란 굳기 전의 고무와 같아서, 처음에 얼마나 잡아 늘리느냐에 따라서 그 크기가 좌우된다. 특히 그 크기를 판단할 사람이 구양도경과 같은 아이일 때에는 더욱 그랬다. "어때? 위에 칠해진 색깔이 예쁘지?" "응!" "팽이가 돌아가면 훨씬 더 예쁘단다." 얼마 전 석대문이 강아지 닮은 '청룡'으로 밟았던 성공의 길을, 지금 구양현은 어김없 이 따라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석대문보다 유리했다. 그에게는 석대문이 보여주지 못한 확실한 시범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삼촌이 돌려볼 테니 잘 봐라." 구양현은 팽이를 들어 길쭉한 나무 막대의 끝에 끼웠다. 그리고 둥글게 꼰 가죽끈을 막대 끝에 튀어나온 팽이 윗부분에 감은 뒤, 으랏차, 기합 과 함께 힘차게 잡아당겼다. 핑---! 팽이는 기묘한 음향과 함께 나무막대로부터 튀어나왔다. 그리고 정원의 단단한 땅바닥 위에서 힘차게 돌기 시작했다. "와아!" 감탄을 참기에는 끈을 잡아채는 구양현의 동작이 너무도 멋졌던 것일까? 아이는 손뼉을 치며 눈을 빛냈다. "자,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채찍질을 하면 계속 돌지!" ?! ?! 경쾌한 음향과 함께 조그만 가죽 채찍이 팽이를 후려쳤다. 팽이는 사람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고통스러우면 비명을 질렀다. 더욱 맹렬히 회전하면서... "이리 줘! 나도 해 볼래!" 아이는 구양현으로부터 빼앗다시피 채찍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 구양현을 흉내내어 팽이를 후려쳤다. 하지만 숙달되지 않은 채찍질은 팽이의 회전을 오히려 방해할 뿐이었다. 조금 전의 장쾌한 회전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인 양, 팽이는 발악 같은 몸짓과 함께 옆 으로 쓰러졌다. "아이 참! 나는 왜 안되지?" 아이는 얼굴이 빨개진 채 팽이를 집어들었다. 물론 다시 돌리기 위해서였다. 팽이를 다시 장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이는 놀라운 눈썰미와 끈기로 그것 에 성공했다. "으랏차!" 삼촌과 똑같은 기합! 그리고 팽이는 다시금 회전을 시작했다. 구양정인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신선 같은 모습을 나타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호! 삼촌이 좋은 선물을 가져왔구나." 구양현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 그간 강녕(康寧)하셨는지요." 신무전과 본가와의 거리는 제법 먼 편이었다. 자연 왕래도 뜸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는 지금 넉 달 만의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오냐, 오냐!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했다. 생각보다 일찍 당도했구나." 구양정인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 소 전주(蘇殿主)는 안녕하시고?" "예, 사부님께서도 아버님께 안부를 여쭈셨습니다." "안부? 그 꼬장꼬장한 양반이 안부라... 그래 뭐라고 하더냐?" "저... 그것이..." "말해봐라. 뭐라 하더냐?" 구양현이 머뭇거리자 구양정인은 그의 어깨를 탁 치며 말을 재촉했다. "십 년쯤 후에 은퇴할 생각이니, 함께 유람 다닐 절경(絶景)이나 부지런히 답사해 두 시라고..." "유람? 하하하!" 구양정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딱딱하기가 대나무 같던 소 전주도 늙기는 늙은 모양이지? 실없는 농지거리를 하는 걸 보면..." 소 전주라면 물론 신무전의 주인인 소철을 가리켰다. 소철과 구양가(歐陽家)의 인연은 소철의 양부인 소대진과 구양정인의 아버지인 구양 숙철(歐陽叔哲) 대에서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과거 백련교와의 대전(大戰)에서 큰 부상을 입은 소대진의 병세를 돌본 것이 당시의 활인장주 구양숙철이었고, 그 가연(佳緣)은 현세에까지 이어져 구양숙철의 손자 구양 현이 소대진의 양자 소철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자, 날씨가 차다!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구양정인은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그러면서 힐끔 바라본 손자 구양도경은 정신없이 빙글거리는 팽이만을 바라보고 있었 다. 아이의 어린 영혼은 이미 돌아가는 팽이 위에 얹혀진 모양이었다. * * * "안 본 사이 경아가 부쩍 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부쩍 늙어버렸다. 방안에 들어와 겉옷을 벗은 구양정인의 모습이 넉 달 전보다 훨씬 왜소하게 보이는 것이, 구양현에게 엷은 슬픔으로 다가왔다. "애들 때는 그런 법이지." 구양정인은 사기 주전자에서 차를 따르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지만, 손자에게 걸고 있는 그의 기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 만치 지대한 것이었다. 구양현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형님과 형수님께서 보셨다면 얼마나..." 아차! 구양현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꺼내지 않았어야 할 이야기를 무심결에 꺼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구양정인은 의외로 담담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과연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실까? 구양현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구양정인의 큰아들인 구양덕(歐陽德)은 천하제일의 신의를 부친과 스승으로 삼고, 온 화하고 정숙한 여인을 부인으로 삼고, 귀엽고 영리한 아이를 자식으로 삼은 행운아였 다. 의원으로서 그의 자질 또한 훌륭한 것이어서, 누구도 그가 활인장의 가업을 이으리라 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죽었다.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감모(感冒 : 감기)였다. 당대의 천하제일 신의를 시아버지로 두고, 다음 대의 천하제일 신의를 남편으로 둔 여인이 시시한 감모로 죽은 것이다. 구양덕은 절망했다. 의술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대한 믿음이 컸던 그였기에, 그리고 아내를 누구보다도 사 랑했던 그였기에 절망은 극단으로 치달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절망처럼 지독한 병은 없었다. 아내가 죽고 한 달 뒤, 구양덕도 죽었다. 아내의 곁으로 찾아간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하지만 남은 자들은 행복할 수 없었다. 갓 걸음마를 시작한 손자를 품에 안은 채, 구양정인은 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키실 일이 있다고요?" 분위기를 바꾸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구양현은 조금 큰 목소리로 신무전까지 서신을 보내 자신을 청한 까닭을 물었다. "그래,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형이 죽었으니 의당 사자(嗣子)가 되어 가업을 이어야 할 구양현이었지만, 자의반 타 의반으로 강호에서 몸을 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버지에 대해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열흘쯤 뒤에 한 사람의 보표가 되어주어야겠다." 구양현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보았다. 보표라면 호위(護衛)를 말한다. 구양현은 보표 노릇을 해본 경험이 있었다. 올해 초 소철의 손녀인 소소(蘇素)가 사천 청류산(淸柳山)을 방문할 때 보호자가 되었 던 일... 그때의 고생을 떠올리면 지금도 골치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입니까?" "석대문이라고... 아마 너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일 게다. 지금 이곳에서 치료받고 있지." "석대문? 강동 석가(石家)의 가주 석대문 말입니까?" "그래." 구양현은 기묘한 얼굴이 되었다.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왜 그러느냐?" "그, 그것이..." 구양정인의 물음에 구양현은 머리를 긁었다. 구양현은 어릴 적부터 하기 힘든 말이 있을 때마다 머리를 긁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구양정인은 문득, 호기심을 느꼈다. 구양현이 말문을 연 것은 뒤통수가 벗겨질 정도로 머리를 긁은 뒤였다. "사실 저도 오늘 아버님께 허락 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게 뭐냐" "마음에 드는 처자가 한 명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빙인(氷人)을 놓아주셨으면 합니다." 구양정인의 늙수그레한 입가가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구양현의 나이도 벌써 이십대 중반을 넘기고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에 비춰본다면 꽉 찬 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성 문제에 관해서는 그의 성격이 지나치게 숫된 것이 아닌가 걱정하던 구양정인으로 서는 반가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혼인은 대사(大事)였다. 대사는 감정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 이럴 때일수록 어른의 위엄이 필요한 것이다. "어느 댁의 규수냐?" "그, 그것이..." 구양현은 또 한 번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내버려 두면 아마 반나절은 긁어댈 것이다. 구양정인은 은근한 목소리로 아들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괜찮으니 말해 보아라. 아무려면 내가 너를 총각귀신으로 만들까?" 구양현은 그제야 머리를 긁던 손을 멈추고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로 석 가주의 누이동생입니다." "하하! 소란(小蘭), 그 말괄량이가 그런 재주가 또 있었나? 자네같이 멋진 청년을 후리다니...? 하하!" 석대문은 잔 속의 찻물이 넘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흔들며 요란하게 웃었다. 화상 때문에 붕대 외에는 속옷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그였다. 그런 괴상한 차림으로 웃어대는 그를 탁자 맞은편에 앉혀둔 구양현은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만 놀리십시오. 소제, 무안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내가 자넬 왜 놀리겠나? 내 매제(妹弟)가 되어 암호랑이 같은 아이에게 잡혀 살 불쌍한 인간을 놀리는 거지! 하하... 으윽!" 석대문은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요란을 떠는 바람에 막 아물려하던 왼쪽 어깨의 상처가 터져버린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아, 아... 괜찮아, 괜찮아!" 어느새 호형호제(呼兄呼弟)의 사이가 되어버린 그들이었다. 석대문은 왼쪽 어깨를 오른 손등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터진 상처가 아프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이런 날, 술이라도 마셔야 하는데, 자네 부친께서 질겁을 하실 테니... 자! 이거라도 건배하세! 자네의 용기있는 결단에 조의(弔意)를 표하네!" 어깨의 통증 때문일까? 석대문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익살은 여전했으니, 구양현으로서는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 다. 그들은 술 마시듯 차를 들이켰다. 그러다가 문득, 구양현의 시선이 석대문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조금 전 석대문이 어깨를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문지른 이유가 있었다. 그의 오른손 안에는 공이 하나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뭡니까?" 구양현의 시선을 쫓던 석대문은, 이내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공 말인가?" 오른손을 탁자 위에 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쥔 뒤 물건을 들 듯 들어올려야만 했다. 그리고 구부러진 오른손 손가락 틈으로 공을 끄집어내는 일이라니! 구양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보다시피 공이지. 경아에게 부탁해서 하나 얻었다네. 왜 이상한가?" "아, 아닙니다." 구양현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방금 전 석대문이 보인 간단한 동작만으로 그는 석대문이 처해 있는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구양현의 안색을 살피던 석대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덜거렸다. "한심한 일 아닌가? 검수의 손이 이 꼴이니..." 하지만 석대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머물고 있었다. 구양현은 그 점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대개, 자조(自嘲)는 봐줄 수 있지만 자학(自虐)은 봐주기 어려운 법이다. "상태가... 안 좋으신가요?" "가친께 얘기를 듣지 못한 모양이지?" "예... 단지 열흘쯤 후에 이곳을 나가신다는 것 외에는..." 석대문의 눈이 번뜩였다. "열흘이라 하셨다고?" "예." "다행이군!" 석대문은 씨익 웃으며 다시 공을 오른손에 끼워넣었다. 구양현의 말로 미루어 신의는 열흘 안에 자신을 치료할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싼 뒤, 예의 움켜쥐는 동작을 시작하였다. 흰 붕대 위에 배어나오는 불그죽죽한 진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돌리게끔 만들었다. "신경쓰지 말게. 뭐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홧병이 날 것 같아서 이러는 거니까..." 석대문은 구양현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온전한 한 눈을 감으니 결국 두 눈을 감은 셈이었지만, 쾌활한 표정이 그 어색함을 덜 어주었다. 구양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말로만 듣던 석대문... 과연 물건은 물건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요즘 뭐 재미있는 일 없나?" "예?" "강호 말일세. 뭐 쓸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느냐고. 두달 반을 침대 위에서 뒹굴다보니 뭐 아는 게 있어야지..." 구양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즘 강호를 시끄럽게 만든 한 가지 소식, 그 서두를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까를 고민 하는 것이다. 그는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석대원...이라는 사람을 아시죠?" 순간, 화상기가 남아 있는 석대문의 뺨이 실룩거렸다. "자네가 그를 어찌 아는가?" "그는 형님의 동생인가요?" 석대문은 눈살을 찌푸렸다. "소란이나 대전(大全)이가 자네에게 쓸데없는 얘기를 했나보군." 구양현은 정색을 하고 다시 한 번 물었다. "형님의 동생, 맞습니까?" 구양현의 목소리는 어느 결인가 추궁하는 투로 변해 있었다. 석대문은 구양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짧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단호한 그 대답에 구양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석대문은 차분한 목소리로 부연했다. "그는 누가 뭐래도 내 아우야.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지." "하지만, 이(二)가주는...?" 이가주라면 석대전을 가리켰다. 구양현은 석가장의 술자리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석대원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석대전이 보였던 예민한 반응... 그것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구양현의 가슴을 눌러오던 존재였다. "대전이 앞에서 그 이름을 꺼낸 게로군." 구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석대문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대전이가 그를 꺼려하는 것 같던가?" 꺼려한다... 듣기 좋은 표현이었다. 구양현이 그날 느낀 것은 꺼려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석대전은 석대원을 증오하고 있었다. 적어도 구양현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후우! 그럴 리가 없지. 아무렴, 그럴 리가 없어..." 석대문은 혼잣말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아득히 잊고 있던 영상이 꼬리를 물고 아련히 떠올랐다. 꽃이 만발한 정원, 그곳에서 뛰어놀던 네 명의 아이들... - 아전(兒全)과 소란(小蘭)을 잘 돌봐줘, 형! 감긴 눈까풀이 가늘게 떨렸다. 아이답지 않게 굵은 이 목소리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짙은 비애와 그보다 더 짙은 그 리움에 사로잡혔다. 봄이 오면 그 정원에는 다시 꽃이 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도 다시 그곳에서 뛰어놀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유전(流轉)하는데, 왜 사람들은 그럴 수 없는 것일까? 석대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물론 대원이의 외삼촌, 연벽제로 인해 선친께서 돌아가신 것은 불행한 일이지. 하지만 그것은 대원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 구양현은 고개를 끄떡인다. 그가 마음을 준 여인, 석지란(石芝蘭)도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대전이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어린 시절 대원이와 가장 가깝게 지낸 놈이 바로 대전이야. 후후..." 석대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몽롱하게 들렸다. 아름다운 과거는 그것을 떠올리는 모든 사람을 신비 속으로 끌어들일지도 모른다. "대전이는 그다지 사내답지 못한 애였지. 글을 읽거나 꽃을 가꾸는 일은 좋아했지만, 나나 대원이처럼 씩씩하진 못했어. 해서 아버지께선 그를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셨네. 그런 대전이에게 용기를 주고 항상 보호해 준 것이 바로 대원이야. 대전이가 실수를 하면, 그것을 가로맡아 꾸중을 듣는 아이는 언제나 대원이였어. 그 우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원이는 대전이를 진짜로 좋아했지. 아마 한배에서 난 나보다도 훨씬 더 좋아했을 거야." "그랬군요..." 설명 한두 마디로 이해하기에는 십일 년이란 세월이 너무도 길 것이다. 하지만 구양현은 막연하게나마 그들 형제들의 오랜 애증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원이의 추방이 결정되었을 때, 대전이는 형을 보내지 말라고 울고불고 난리였어. 그가 어찌나 슬퍼하던지,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 안타까워 고개를 돌릴 정도였네. 결국 대원이는 열네 살의 어린 몸으로 가문을 떠났지. 그리고 대전이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던 거야. 자신을 보호해줄 대원이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지. 몹시도 두려워했지만 피해갈 길은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일 게야." 사랑과 증오의 차이는 무엇일까? 석대전은 사랑을 잊기 위해 증오를 선택했다. 그의 증오는 사랑 속에서 피어난, 사랑의 왜곡된 형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증오는 단순히 증오에 불과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수액(樹液)이 굳어 만들어진 옹이는 여타의 생명없는 옹이들과는 구분되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나긴 세월 속에서 굳어진 감정의 껍질은 단단하다. 그 안에 갇혀벼린 옛 감정은 이제 아무런 향기도 풍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석대전은, 그리고 석대원은 이 비틀어진 세월을 과연 다시 잡을 수 있을까? 구양현의 입에서는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대원이가 뭐 어쨌다는 겐가?" 석대문은 구양현이 난데없이 석대원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궁금했다. 구양현은 아까보다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우선 제갈휘가 죽었다는 이야기부터 해야겠군요." "뭐?" 석대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제갈휘? 고검(孤劍) 말인가?" "예... 스무 날쯤 전인가 오대문파를 위시한 용봉단의 인물들이 장성(長城) 부근에서 그를 살 해했다고 합니다." 쾅---! 탁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찻잔과 찻주전자가 쓰러지며 연록색 찻물이 탁자 위에 깔린 하얀 보를 적셨다. 그 장본인은 붕대가 감긴 큼직한 주먹,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분노를 떨치지 못하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명분만 찾는 바보 같은 늙은이들! 지난 이십 년을 제갈휘 덕분에 목숨을 연명해놓 고... 이제 살 만해진 모양인가? 제갈휘를 죽여?" 쾅---! 탁자가 다시 한 번 진저리를 쳤다. "강이환(姜易環), 이 천치 같은 녀석이 기어이 일을 저질렀군! 모두 함께 죽자는 얘 긴가? 제갈휘가 죽으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이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구양현으로서는 석대문의 반응이 의외였다. 하지만 그는 못들은 척, 이야기를 계속했다. "한데, 바로 그 자리에 석대원이란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순간, 석대문으로부터 뿜어나오던 분노의 기세가 주춤거렸다. "그는 제갈휘와 친교(親交)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갈휘가 살해당하자 그가 즉시 나섰다고 하더군요." 석대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갈휘도 당해내지 못한 자들에게 아우가 덤벼들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혹...? 하지만 이어지는 구양현의 말에 그의 굳은 안색은 눈 녹듯 풀어졌다. "그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제갈휘를 습격했던 자들은 단 한 사람도 살 아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 석대문은 기뻤다. 소식이 끊어졌던 아우가 절세의 고수가 되어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런데 문 득,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그 아이는 지난 십일 년 간 어디에서 무엇을 배웠기에 그런 고수가 되었단 말인가? "덕분에 그는 오대문파를 위시한 정도 무림의 공적(公敵)이 되었습니다. 척살통문(刺殺通文)을 돌리자는 의견도 분분해, 본전(本殿) 청룡대(靑龍臺)에 접수되 는 것만해도 하루에도 수십 통에 이른다고 하더군요." "정도 무림의 공적이라..." 어느새 석대문은 느긋한 신색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는 정사(正邪)의 구분에 대해 강호인들이 흔히 보이는 선입관에 대해 냉소적인 견해 를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는 다원적(多元的)인 시각으로 세세히 조명하면서 타인은 이분적(二分的)인 시 각으로 속단해버리는 것이 인간 심리의 맹점이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누구는 마두니, 누구는 대협이니 하는 것이다. 참으로 쉽고도 단순한 논리이다. 하지만 거대한 창고 가득 자료를 쌓아둔다고 해서 한 인간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을 까? 모태(母胎)로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크고 작은 수많은 은원(恩怨)과 업(業)으로 얽혀진 삶을, 그 누가 감히 칼로 자르듯 명쾌하게 결론지을 수 있을까? 가치의 본질. 이것에 대해 결론짓는 행위는 어쩌면 처음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가 아닐지도 모른 다. "형님께서는 별로 걱정하는 것 같지 않으시군요?" 구양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우가 공적으로 낙인 찍혀 척살통문이 발송될 지경인데도 느긋해하는 석대문의 신색 이 의외로운 모양이었다. "난 그를 잘 알지. 충분히 강한 아이니까 별일 없을 걸세." "출신이 밝혀지면 형님 가문에 악영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도요?" "악영향? 하하! 이제 보니 자네, 재미있는 말도 할 줄 아는군!" 석대문은 몸을 흔들며 크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색을 하고 구양현을 바라보았다. "나는 강호에서 친하고 싶은 사람이 셋, 싸워보고 싶은 사람이 둘, 그리고 두려워하 는 사람이 하나 있지." "...?" "친하고 싶은 사람은 개방의 우 방주와 자네 사형인 철인협(鐵人俠), 그리고 제갈휘라 네. 한 사람은 이미 교분을 맺었고, 한 사람은 아직 기회가 없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애 당초 인연이 없었나보이..." 구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공감은 할 수 있었다. "싸워보고 싶은 사람은 신무전의 백호대협(白虎大俠)과 강호오마 중 거경(巨鯨)... 한 사람과는 싸워보았지만, 결판을 내지는 못했지." 백호대협 이창(李昌)과 거경 제초온(諸草溫). 이 둘은 아마 강호에서 가장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검왕(劍王) 연벽제이지." "...!" 구양현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원수라는 단어의 뒷면에는 아지랭이같은 두려움이 깔려 있다.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두렵고, 만나서 복수에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 르는 일이어서 두렵고, 복수에 성공한다 한들 생의 큰 목표가 사라진 뒤 찾아올 허탈 감 때문에 두렵다. 그리고 모든 것을 차치(且置)하고라도 그 원수가 연벽제라면... 누구라도 그냥 두려울 것이다. "악영향이라고 했나? 만약 그들에 의한 악영향이라면 조금 심각하게 생각해보겠네. 하지만..." 석대문은 미소로 말을 맺었다. 여타의 사람들은 안중에 없다는 뜻이었다. 광오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석대문만이 지닌 호탕 함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장차 신무전 둘째 도련님의 처가(妻家)가 될 가문을 감히 누가 건드리겠나?"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인 석대문의 말에 구양현은 얼굴을 붉혔다. 석지란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 그리고, 사실 소제는 석대원, 석형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 "반 년쯤 전에 사천에서 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죠." 석대문은 신기한 눈초리로 구양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석씨와 인연이 많은 친구가 아닌가! 그 눈초리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구양현은 조금 굳은 안색으로 석대문을 바라보았다. "한데, 형님!" "응?" "한 가지 미심쩍은 게 있습니다." 구양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석형의 사문(師門)에 관한 얘기인데... 혹시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석대문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과거 석대원이 가문에서 추방되던 날, 문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중늙은이의 모습 을 석대문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중늙은이는 세가의 큰 어른인 운리학이 부른 사람이라고 했다. 운리학이라면 의당 그 중늙은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석대원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 을 것이다. 하지만 운리학의 늙은 입은 그 일에 관해 두번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입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면 절대로 열리지 않는 고집의 결정체였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는 바가 없군. 자네는 뭣 좀 아는가?" 구양현은 조금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소제는 그가 곤륜지회(崑崙之會)의 오대고수 중 천선자(天旋子)의 문하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한데..." 석대문의 눈빛이 기묘해졌다. 만약 구양현의 표정이 어둡지 않았다면, 그는 기쁨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천선자라면 전대 천하제일의 기인으로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강호에는 이상한 소문이 있더군요. 그가 혈랑검법을 사용했다고..." 석대문의 얼굴이 얼어붙은 듯 딱딱해졌다. 혈랑! 지난 반 년 동안 그 이름 때문에 겪은 수많은 일들이 섬광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모든 것이 비각의 계략임을 알았을 때, 곤혹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혈랑곡이 실재(實在)하지 않음을 얼마나 안심했던가! 그런데 그의 아우가 혈랑검법을 사용했다 니! "설마...?" "소제도 그 말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그의 등장과 함께 혈랑을 자칭하며 혈겁을 일으키던 무리들이 자 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 * * - 그런데 왜 이제는 혈랑을 가장하지 않소? 남궁월처럼 혈랑탈을 쓰고 나오셨으면 더 재밌지 않았겠소?" - 혈랑? 참마도를 내리며 껄껄 웃던 제초온. 그리고... -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진짜가 등장했으니 가역(假役)들은 사라져야 되지 않겠나? * * * 석대문은 불현듯, 철군도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제초온이 말한 '진짜'란, 바로 석대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二十六章 至尊 (1) 여명(黎明) 직전의 어둠은 밤의 절정보다도 짙었다. 연문건(連文建)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광활한 검은 장막 위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니, 오늘 하루도 쾌청(快晴)할 것 같았다. 연문건은 광명전(光明殿)에서 동쪽으로 반 마장쯤 떨어진 귀천각(歸天閣)을 향해 걸 음을 옮겼다. 그의 하루 일과는 귀천각을 점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얇은 가죽신 아래에서 사각사각 부서지는 서리는 얼어붙어버린 계절을 느끼게 해주었 다. "삼호법(三護法)님을 뵈옵니다!" 귀천각의 입구를 지키던 두 명의 문도(門徒)가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며 외쳤다. 손바닥은 하늘을 향하고 손가락을 기묘하게 구부린 불꽃 문양... 그들 문파, 종교에서는 극존(極尊)의 의미가 담긴 예법이었다. 연문건은 그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낸 뒤 귀천각 안으로 들어갔다. 귀천각의 용도는 본디 피서장(避署莊)이었다. 이곳의 여름 날씨는 오리알도 익힐 정도로 징그러운 것이어서, 문주는 여름이 되면 답답한 광명전을 나와 탁 트인 이곳 귀천각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름이 아니고 문주가 이곳에 있을 리도 만무하니, 귀천각은 내년을 기약하며 외로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 * * 귀천각의 지상 부분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삼층의 점검까지 다 마친 연무건은 천천히 일층으로 내려왔다. 그에게는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지하의 밀실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여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공에 능한 문도가 하루 열두 시진 끊임없이 번(番)을 서 야 하는 진정한 이유, 그리고 연문건이 매일 아침 점검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그 지하 밀실에 있었다. 연문건은 동쪽 벽면으로 다가갔다. 벽의 한복판에는 문이 있고, 그 옆으로 북두칠성의 형상으로 일곱 개의 구슬이 박혀 있었다. 연문건은 일곱 개의 구슬을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열네 차례... 일곱 개의 구슬을 특정한 순서에 의해 열네 차례 누르는 것은 조금 번거로운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일을 수천 번 반복해온 연문건은 눈을 감고서도 그 순서를 짚어낼 수 있었 다. 열네번째 구슬이 눌려졌을 때... 철컹! 둔중한 소리가 문에서 울렸다. 문과 벽을 가로지르고 있던 반 자 굵기의 강철봉 세 개가 뽑혀지는 소리였다. 근 십여 년 동안 단 한 번의 고장도 없이 정교하게 움직이는 이 잠금 장치를 설계한 사람은 두뇌가 희한하게 발달한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이 정도는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연문건은 문을 밀었다. 그긍---! 팔백 근에 가까운 강철문을 여는 것은 대단한 공력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일 텐데, 연 문건은 여염집 방문을 밀 듯 가볍게 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연문건의 발 아래로 긴 모습을 드러냈다. 연문건은 문 안쪽에 놓인 유등(油燈)을 들었다. 심지에 불을 붙이고 계단을 비추는 그의 동작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물론 이백여 개의 계단을 딛고 밀실로 내려가는 동작 또한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열 평 남짓한 공간이 있었다. 연문건은 정면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유등의 불빛을 받아 각각 다른 색깔을 뿜어내는 다섯 개의 구슬이 박혀 있 었다. 이것 역시 밀실의 입구를 설계한 그 머리 좋은 노인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밀실의 입구와는 달리 무척이나 위험한 기관이었다. 다섯 개의 구슬은 각각 치명적인 함정을 준비해 놓고 있었으니, 기관을 모르는 사람이 건드린다면 누구라 한들 무사하기 힘들었다. 한동안 벽을 바라보던 연문건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구슬들을 조작하여 기관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은 천하에서 오직 네 명 뿐이었고, 연 문건은 그 중에 포함되지 않았다. 즉, 연문건의 일과적인 점검은 여기까지였다. 오늘도 수많은 날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한 가지 일이 끝나자 한 가지 근심이 떠올랐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느끼는 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한 달 전부터 한껏 당겨진 활처럼 팽팽히 긴장해 있는 그들... 문주가 시위를 놓는 순간, 그들은 쏜살같이 날아가 피를 빨고, 뿌려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오늘일지도 모른다. 환갑에 가까워지고서도 안온(安穩)한 생활을 바라지 않는다면, 광인(狂人)이 아니면 시간의 가르침에 귀기울일 줄 모르는 고집쟁이일 것이다. 연문건은 광인도, 고집쟁이도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 우울해졌다. 그런데... "...!" 계단을 오르던 연문건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밀실의 문. 그 안쪽에 붙어 있는 새하얀 물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런 곳에 붙어 있었으니, 들어올 때 발견하지 못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슈욱---! 유등의 불빛이 길쭉하게 늘어나는가 싶더니, 연문건의 신형은 어느새 문 앞에 이르러 있었다. 새하얀 물건은 한 통의 봉서(封書)였다. 연무건은 봉서를 문에서 떼어냈다. 무엇으로 붙여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간단하게 떨어졌다. 봉서의 겉봉에는 다섯 자가 쓰여 있었다. - 필(必) 육건(陸健) 친개(親開). 반드시 육건이 개봉하라! 연무건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래로 이어지는 어두컴컴한 계단... 어제 이곳에 왔을 때에는 분명히 봉서가 없었으니, 열두 시진 사이에 누군가가 이 봉 서를 붙이고 간 것이다. 어디로 들어와서 어디로 간 것일까? 불침번의 눈이야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입구의 기관이 내는 소리, 일곱 개의 구슬을 제대로 눌렀을 때 울리는 요란한 금속성만은 감출 수 없었다. 즉, 아무도 귀천각을 통해 이곳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본디 계단 아래의 밀실은 문파 외부로 통하는 암도(暗道)였다. 누군가가 오행신주(五行神珠)의 기관을 통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기관을 작동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사람... 문주, 군사(軍師), 대호법(大護法)과 죽었다고 알려진 '그'였다. 그들 중 '그'를 제외한 세 사람은 어제 하루 문파 안에 계속 있었다. 그렇다면...? 연무건의 눈빛이 바람을 만난 촛불처럼 크게 흔들렸다. 혹시 '그'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 * * 육건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디? 어디서 발견했다고?" "귀천각 지하 밀실 안입니다." 육건의 얼굴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던 주름살들이 부르르 떨렸다. 이 머리 좋은 노인은 연무건의 대답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즉시 파악할 수 있었던 것 이다. "그가 살아 있었군!" 탄식 같은 혼잣말... 하지만 그 안에는 기쁨과 안도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육건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문주가 아닌 자신이 개봉하라고 했을까? 육건의 눈이 심유롭게 빛났다. "연 호법! 혹시 다른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아는가?" "아닙니다. 겉봉을 보고 바로 이곳으로 왔습니다." 연무건은 원리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반드시 육건이 개봉하라고 했으니, 그대로 한 것이다. 육건은 빙긋 웃었다. "잘했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게." 연무건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문주께도요?" "문주께는 내가 고하지. 잊지 말게. 중요한 일이니..." 연무건은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육건은 그를 포함한 칠천 문도들의 두뇌였다. 손발은 두뇌가 결정한 일을 따를 뿐이다. (2) 문(門). 그 위의 현액(懸額) 하나... 마석산(馬石山)의 눈이 게슴치레하게 변했다. 현액이 문 위에 걸린 것은 두 달 전 어느날의 일이었다. 그날은 무양문(武陽門)에서 쌓은 그의 이십 년 공(功)이 이루어진 날이기도 했다. 바로 그날... 마석산은 호교십군(護敎十軍)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그것은 저 문 안쪽의 모든 것 - 한 채의 큰 집, 여덟 채의 작은 집, 정원과 연못, 수 많은 초목, 그리고 오백 명의 무사 - 이 그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뜻했다. 한 구역의 새로운 주인이 된 마석산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그 구역의 이름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는 사흘 동안 고민한 끝에 새로운 당호(堂號)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문파 내의 물품 보급을 담당하는 풍고(豊庫)의 책임자를 윽박질러 현액으로 쓸 목재 또한 최고급품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현액을 새기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불행히도 그의 지식은 그의 작명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당호 석 자 중에서 두 자를 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날... 오른손에는 끌을 들고 왼손에는 망치를 든 채 멍청히 서 있던 마석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하들의 수근거림. 달아오르는 얼굴 - 사실 그의 얼굴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붉어지지 않았다. 본 바탕이 어떠한 붉은색도 파묻힐 정도로 거무틱틱했기 때문이다. 얼굴이 달아올랐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도 그만의 느낌이었을 것이다. '흐흐... 그래도 잘 넘어갔지.' 그날의 일을 떠올리자 마석산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진급함으로써 이제는 같은 반열이 된 아홉 명의 군장(軍將), 그 중 이군장(二軍 將) 좌응(佐鷹)이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은 하늘의 보살핌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좌응과 그는 이전부터 각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마석산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좌응에게 달려갔다. - 오! 형님이 이 아우를 축하하러 오셨구려! - 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미루어 좌응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마석산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 아우가 이 자리에 오른 데에는 형님의 은공을 빼놓을 수 없지요! 마침 잘 오셨소! 지금 현액을 새기려 하는데... 형님과 아우가 함께 한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엉겁결에 끌과 망치를 받아든 좌응은 마석산이 부르는 대로 글자를 새길 수밖에... 그때 마석산이 부른 것은 '철(鐵)'자와 '당(堂)'자였다. - 그런데 글자 사이가 왜 이리 휑한가? 마석산의 원하는 장소에 글자를 새긴 좌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마석산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 허허! 그 사이에는 아우가 한 글자를 더 넣을 거라오! 이는 형님의 보살핌을 잊지 않기 위함이지요. 형님은 밖에서, 그리고 나는 안에서... 어떻수? 마석산으로서는 평생 한두 번 잊을까말까 한 임기응변이었지만, 좌응은 별로 감탄하지 않았다. - 그래? 좋군! 그럼 난 가네. 좌응은 총총히 떠나갔다. 과연 다른 볼일 때문에 이곳을 지나가던 모양이었다. 마석산은 그를 잡지 않았다. 이미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마석산은 늠름한 모습으로 나머지 한 자를 현액 위에 새겨 넣었다. 그것은 좌응이 새겼던 두 자에 비해 무척이나 간단한 것이었다. - 철오당(鐵午堂)! 내 별호가 철오(鐵午)이니 이곳의 이름은 이제 철오당이다! 마석산은 유별난 점이 많은 만큼 여러 개의 별호를 달고 있었다. 독두마권(禿頭魔拳), 흑면야차(黑面夜叉), 풍질(風蛭 : 미친 거머리), 등등... 하지만 그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별호는 납자철오(蠟子鐵午), 그 중에서도 '철오'였 다. 그는 별호대로 밤에는 밀납처럼 흐물거리고 낮에는 무쇠처럼 단단했다. 물론 생활이 규칙적이라는 점은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규칙적인 생활의 근원이 여섯 살 때 아버지로부터 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 어나라'는 가르침임을 감안한다면,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마석산은 수하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외쳤다. - 철오당! 알겠느냐! 부릅떠진 수많은 눈들. 벌어지는 수많은 입들... 이러한 수하들의 반응을 감동과 경복(敬服)의 의미로 해석한 마석산은, 상천제(上天 梯)의 신법으로 몸을 솟구쳐 현액을 걸었다. 모든 것을 마무리하듯, 깔끔하고도 인상적인 몸놀림이었다. "군장님!" 현실 세계에서 들려온 걸걸한 목소리가 마석산의 즐거운 회상을 깨뜨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가 이끄는 십군(十軍)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 강평(姜平)이었다. 두 눈이 토끼처럼 빨갛다하여 묘안자(卯眼子)라는 별명이 붙은 그였지만, 충혈된 눈 이 뒤집혀 발광할 때면 마석산조차도 찔끔 겁이 날 정도로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도 했다. "거기서 뭐 하십니까? 조천숙례(朝天肅禮)가 시작될 시간입니다." 매일 사시(巳時)에 미륵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무양문의 전신(前身)인 백련교의 전통이었다. "이봐, 강평!" 마석산은 강평을 손짓해서 불렀다. "저 현액 어때? 작품이지?" 강평은 현액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마석산 앞에서 현액에 대해 감히 뭐라고 할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 그...렇군요." 강평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석산은 활짝 웃었다. 그의 검은 얼굴이 두 배는 커진 것 같았다. "으허허! 철오당! 아무리 봐도 걸작이란 말씀이야! 자, 들어가세! 숙례가 끝나고 의논할 일이 있어!" 마석산은 강평의 등을 탁 후려친 뒤, 휘적거리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밖에 남겨진 강평은 다시 한 번 현액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철우당(鐵牛堂)> 무쇠 소[鐵牛]가 사는 집! 십군 휘하 오백 문도들이 두 달 동안 놀림당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산산히 쪼개 불쏘시개로 쓰고 싶은 현액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오(午)'자와 '우(牛)'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식한 놈을 주군으로 삼은 것도 팔자라 면 팔자일 텐데... 그리고 어찌 생각하면 제대로 된 현액일지도 몰랐다. 아직까지 마석산을 그토록 잘 묘사한 단어는 없었으니까. * * * "무위관(無位關)이 부활되었다고요?" 홍살장(紅殺掌) 호연육(胡連六)의 물음에 마석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게다가 우리 십군(十軍)이 첫 순번이지." "첫 순번? 설, 설마 오늘?" "물론 오늘이지! 어때? 신나지 않아?" "예? 예... 신, 신나네요." 호연육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눈과 입은 웃고 있는데, 전체적인 인상은 울고 있었다. "어서, 준비하라고! 기회란 흔한 게 아니야." 호연육은 화들짝 놀랐다. "저요?" "그래! 무위관이 부활되고 처음하는 거니까 맵고 짜게 해주자고! 자네하고 강평, 당 선생(唐先生), 그리고 부군장(副軍將)하고 나도 간다! 다른 놈들 입이 딱 벌어지게 끝내줘 버리자고!" 마석산은 뭐가 좋은지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지명된 사람들, 호연육, 강평, 철지선생(鐵指先生) 당권(唐眷), 그리고 십군의 부군장 만화객(萬花客) 추임(秋壬)의 안색은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출정 대기 한 달째... 그런데 난데 없이 무위관이라니! 사람들의 가슴 위에는 암적색 불길한 느낌이 끈적하게 내리깔렸다. * * * "갑니다!" 제일 먼저 달려든 것은 마석산이었다. 큼지막한 두 주먹이 번갈아 내질러지자, 주위의 공기가 요동을 치며 권로(拳路)를 따 라 휘말려들어갔다. 속도와 변화보다는 파괴력을 주로 한 패도적인 권법이었다. 제일 먼저 튕겨나간 것도 마석산이었다. "자네의 진천권(震天拳)은 이전보다 물러진 것 같으이!"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함께 뻗어낸 좌장(左掌)을 회수하는 사람은, 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 장포를 입은 위맹하게 생긴 노인이었다. 손부채질이라도 하듯 가볍게 움직인 노인의 좌장에서는 마석산의 두 줄기 권력을 합친 것보다 오히려 강한 힘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젠장!" 마석산은 바닥에 호되게 부딪친 머리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다른 사람 같으면 머리가 깨졌을 법도 한데, 그의 둥그스름한 대머리 위에는 아무런 상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석산이 자랑하는 절세의 강피공(鋼皮功)이다. "뭐해? 놀러 왔어?" 마석산이 소리치자 주변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호연육 등도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쏟아지는 장(掌), 권(拳), 지(指)의 폭풍... 하지만 마지 못한 기색이 완연한 공격들이었다. "다들 뭐야? 아침도 안 먹었나!" 노인은 쩌렁, 소리를 지르며 쌍장을 후려쳤다. 붉은 장포가 독오른 복어처럼 팽팽히 부풀어 오르며, 사방을 향해 뻗어나가는 노도와 같은 거력(巨力)... 사람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퍽! 퍼퍽! 물론 손속에 사정을 두었으니 큰 부상의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고수가 되어가지고 이처럼 꼴 사납게 나뒹굴고 싶은 자는 없을 것 이다. 처참하게 뭉개지는 위엄. 더 처참하게 뭉개지는 자존심... 애당초 그랬지만, 더 이상 전의(戰意)를 끌어올리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여전히 전의가 넘치는 사람이 있었다. "이얍!"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마석산은 염소처럼 머리를 앞세우고 노인에게 날아들었다. 이 장의 거리를 훌쩍 뛰어넘으며 화살처럼 쏘아지는 그의 기세는 실전을 방불케했다. 우직! 한 수에 넷을 물리친 만족감에 잠시 마음을 풀고 있던 노인은 마석산의 머리통에 어깨 를 받히고 말았다. 쇠보다 더 단단하다는 머리통이었으니 아픔이 오죽했을까? 노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팔꿈치를 휘둘러 마석산의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일차공격에 성공한 마석산의 후속 동작은 신속했다. 그는 천근추(千斤墜)의 공력을 사용해 몸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쉬익! 머리 위로 노인의 팔꿈치가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마석산의 고리눈이 번뜩였다. 자색 가죽신으로 감싼 노인의 발등이 시야에 확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목표가 정해진 이상 추호도 망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억!" 노인은 오른쪽 발등에서 솟구친 통증 때문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마석산의 이마가 발가락 부분을 힘차게 내리찧은 것이다. 척추까지 저린 것으로 보아 발톱 한두 개는 으스러진 것 같았다. 그래! 바로 이 재미에 산다니까! 이차공격까지 성공한 마석산은 신이 났다. 그는 왼손으로 바닥을 찍으며 뒤로 몸을 물린 뒤, 머리를 들이민 채 재차 앞으로 달려 들었다. 이번 목표는 노인의 사타구니였다. 그러면서 그는 소리쳤다. "봤지? 봤지? 모두 달려들어!" 호연육 등 네 명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론 마위산의 말에 고무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마위산의 주먹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팔다리를 휘두르며 일제히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에라! 이...!" 사타구니로 들이밀어지는 머리통을 보며 노인은 목구멍까지 솟구친 욕설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무리 자신의 부하라지만 정말 구질구질한 놈이 아닌가! 노인은 왼손바닥을 활짝 펼쳐 사타구니를 향해 날아드는 마석산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후려치는 수법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좌박우격(左縛右擊)이라고나 할까? 이어 왼쪽 발을 쭉 내밀어 마석산의 아랫배를 차올리고,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잡 아 바닥으로 내리꽂는 일련의 동작! 빡! 젓가락으로 두부를 찌르듯, 마위산의 머리는 단단한 돌바닥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노인의 동작은 참으로 빨랐다. 그의 동작이 얼마나 빨랐는가 하면, 마위산의 고함을 듣고 몸을 날린 네 명의 공격이 아직도 노인에게 당도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쉽게 알 수 있었다. 허리를 펴 네 명을 바라보는 노인의 입가에는 하얀 즐거움이 맺혔다. 그것을 바라보는 네 명의 입가에는 칙칙한 절망이 맺혔다. * * * 교주의 무공은 언제 보아도 예술이었다. 아픈 몸통을 부등켜안고 끙끙거리던 호연육 등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거꾸로 꽂혀 있는 마석산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무위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방 십 장의 정사각형 석실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 사람은 붉은 장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험, 험! 오랜만이라 그런지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군. 오늘은 이만 할까?" 고소원(固所員)이라! 호연육 등은 바삐 신색을 가다듬고 허리를 숙였다. 지긋지긋한 멍투성이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나는 가보겠네." 노인은 몸을 돌렸다. 호연육 등은 일제히 바닥에 엎드리며 두 손을 모아 불꽃 모양의 수결(手結)을 만들었 다. "미륵하생(彌勒下生) 명왕출세(明王出世)!" 이제는 일개 무림 문파의 구호처럼 전락해버린 백련교의 진언(眞言)이었다. 노인이 나가고난 뒤, 거꾸로 꽂혀 있던 마석산의 몸이 움찔거렸다. 호연육과 강평이 그 다리를 붙잡고 힘을 쓰자, 둥그스름한 머리가 무우 뽑히듯 뽑혀나 왔다. 그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노인의 괴력 앞에서는 철두공(鐵頭功)으로 단련된 머리 껍질도 별무신통한 모양이었다. "어? 갔어?" 마석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의아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추임이 멍든 눈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가셨습니다." "갔다고? 이제 겨우 시작인데?" 마석산은 벌떡 일어섰다. 그는 무위관에서 벌어지는 교주와의 드잡이질을 정말로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뭐야, 이게? 몸이 슬슬 풀리려는 참인데 끝나다니! 맹숭맹숭하잖아!" 마석산이 못내 아쉬워하자, 이곳에 반강제로 끌려온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당권이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안타까우면 다시 하자고 사정이나 해보시구려." 당권은 고희(古稀)를 넘긴 노인이었다. 나이가 벼슬이라고, 그는 상관인 마석산에게 반공대(半恭待)를 써도 되는 몇 안되는 수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공대 하대를 떠나, 그 말은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다. 세상에는 핀잔과 의견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게 좋겠군!" 마석산은 깨진 머리를 슥슥 문지르더니 문을 향해 달려갔다. 당권의 의견대로 교주를 쫓아가 한 판 다시 붙자고 조를 생각에서였다. "군장님! 제발 좀!" 불쌍한 것은 다른 세 사람, 호연육과 강평 그리고 추임이었다. 그들은 사색이 된 채 마석산의 우람한 다리통을 붙잡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3) 겨울로 접어들던 어느 날... 한 사람의 부음(訃音)이 무양문으로 날아왔다. 그날은 강남 제일의 문파, 남패(南覇) 무양문이 비탄에 빠진 날이기도 다. - 제갈휘가 살해되었다! 호교십군의 일군장(一軍將)이자 무양문의 2인자로 공인받던 제갈휘가 해당한 것이다. 가장 큰 슬픔을 느낀 사람은 문주 서문숭(西門崇)이었다. 그 소식이 도착한 뒤 사흘 동안, 무양문 안에서 서문숭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그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한 채, 한 발짝도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 이다. 사흘째 되는 날 밤... 보다 못한 서문숭의 의자(義子) 서문복양(西門福陽)이 방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그는 방 한복판에 '대(大) 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눈가는 붉게 짓물러 있었고, 얼마나 깨물었는지 입술은 넝마 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때 서문숭은 잔뜩 쉬어 가닥가닥 갈라진 목소리로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 시신을 수습하라. 그리고 그를 습격한 놈들의 명단을 작성하라. 명령을 받은 서문복양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전언(傳言)에 의하면 제갈휘를 습격한 자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 다. 이른 바 양패구상(兩敗俱傷)... 그런데도 명단을 작성하라는 것은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했다. 서문숭은 그들의 가문과 문파를 겨냥한 피의 보복을 계획한 것이다. 조기(弔旗)도 올리지 않았다. 만장(輓章)도 걸리지 않았다. 그 흔한 향 한 자루 피우지 않았다. 망자(亡者)를 추도하는 모든 움직임은 복수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무양문의 칠천 문도는 그날부터 출정(出征) 대기의 상황에 돌입한 것이다. 열흘에 한 번씩 꼬박꼬박 열리던 무위관이 폐쇄된 것도 그날부터였다. 그로부터 한 달 후가 지난 지금... 서문숭의 명령은 절반만 완수되었다. 제갈휘를 습격한 자들의 명단은 오래 전 완성되었지만, 그의 시신은 찾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문숭이 더 이상 기다릴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은 것은 강호를 피로 씻기 위한 출정뿐이었다. 오늘? 아니면 내일? 칠천 문도는 긴장과 흥분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꼽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무위관이 다시 열렸다. * * * 끼이익--- 쿵! 서문숭(西門崇)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며 붉은 장포를 툭툭 털었다. 어깨와 발가락은 여전히 욱신거렸다. 하지만 한 달 만에 맛보는 상쾌한 기분이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만들어 주었다. "흘흘... 문주께서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무위관 밖에는 한 사람이 서문숭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하얀 학창의 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노인이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서문숭은 머리를 가볍게 숙여 노인에게 인사했다. 무양문 안에서 서문숭에게 이러한 인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세 명의 장로뿐이 었다. "하도 늙다보니 이제 몸이 어떤지도 잘 모르겠구려." 이가 빠져 볼품없이 오므라든 입가를 실룩거리는 노인은 무양문의 세 장로 중 한 명인 하만(河晩)이었다. 나이가 얼마인지 본인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그는 서문숭이 코흘리개일 때부터 업어 키 워 온 유모(乳母)이자, 서문숭에게 처음으로 무공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관주(關主)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무위관에 드신 것이 꼭 한 달 만이라고 하더군요. 그 소식을 듣고 이 늙은이, 아주 기뻤습니다." 서문숭의 손을 잡고 쉰 목소리를 토해내는 하만의 얼굴은 눈물이라도 주르르 쏟을 것 처럼 떨리고 있었다. 서문숭은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괜한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하만은 별소리를 다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출정은 언제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서문숭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전혀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만 둘 생각입니다." "예?" 서문숭은 메기처럼 히죽 웃으며 대답했고, 하만은 개구리처럼 눈을 부릅떴다. 서문숭은 실로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만은 가끔 이런 생각도 해보곤 했다. 만약 서문숭에게 백련교주 겸 무양문주라는 직책만 없었던들, 그는 능히 강호 제일의 호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서문숭은 웃음을 알고 있었다. 실없는 헛웃음을 알고 있었고, 잔잔한 미소를 알고 있었고, 봇물 같은 폭소를 알고 있 었다. 서문숭은 술을 알고 있었다. 밥을 맛있게 해주는 술을 알고 있었고, 잠을 잘 오게 해주는 술을 알고 있었고, 사람 을 정답게 만들어주는 술을 알고 있었다. 서문숭은 여자를 알고 있었다. 옷을 입은 여자를 알고 있었고, 옷을 벗은 여자를 알고 있었고, 그녀들이 먹고사는 사 랑을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서문숭은 세상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모든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문숭이 지존으로서의 위엄과 기상을 갖추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십여 년 전 오대문파를 십 년 간 봉문시키던 그의 서릿발같은 기세는, 검은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아진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의 말은 실행되었고, 그의 분노는 피를 불렀다. 그는 쓸데없이 칠천 수하들을 출정 대기시키는 무책임한 지존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만 둘 생각이라니... 도대체 무엇이 그의 무거운 말을 되돌린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그의 용암 같은 분노를 누그러뜨린 것일까? 서문숭은 창문 너머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어느덧 천중(天中)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진 것이다. "이만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뵙겠습니다." 서문숭은 처음처럼 가벼운 목례로써, 아직 혼돈 속에 머물고 있는 노장로와 헤어졌다. 그의 걸음걸이는 어딘지 불안해 보였다. 깨진 발톱 때문일까? * * * 무양문에는 설흔아홉 개의 연무장(練武場)이 있었다. 문파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십군(十軍)에 각각 세 개씩의 연무장이 할당되어 있었고, 양원(兩院)을 포함한 기타 조직에 여덟 개가 할당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 미륵봉(彌勒峯) 중턱의 죽림(竹林) 한복판에 위치한 연무장은 서문 숭과 그의 제자들이 무공을 단련하는 곳이었다. 이름하여 광명연무장(光明練武場)... 서문복양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한 자루 도가 들려 있었다. 길이는 두 자 남짓하고 폭은 한 뼘에 가까운, 도배(刀背)가 유달리 뭉툭해 어딘지 둔 해 보이는 도였다. 지금 그 도는 연무장 바닥 쪽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호흡도 불규칙했다. 두 시진 동안의 격렬한 수련 때문이었다. 그는 호흡을 조절했다. 복부로 깊이 들이마셔 오래 간직한 뒤 코로 소리 없이 내뱉는, 소위 광명비전(光明秘 傳)의 호흡법은 그가 일곱 살 때부터 해오던 것이었다. 호흡을 조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전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진기의 움직임이 부드러워지고, 높은 곳에 떠 있는 듯한 메스꺼운 느낌도 사라졌다. 더 할까? 서문복양은 수련을 계속할 것인지 여부에 대해 생각했다. 역대 백련교주들의 손을 거치며 기틀이 잡혀 서문숭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천중(天重) 의 도법(刀法). 수련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극강(極强)의 파괴력을 발휘하며, 그 경지를 넘어서 면 어떤 장애물도 초월하는 무애(無碍)의 신령스러움을 얻을 수 있다는 천하 제(諸) 도법의 최고봉, 천중의 도법. 서문복양이 이 도법의 수련을 시작한 지도 벌써 십삼 년이 지났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파괴의 경지, 하지만 그 입구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깨달 음의 난관들이 그의 발목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몇 개월 전에도, 어제도, 그리고 방금 전에도... "후우!" 오늘은 그만 하자... 서문복양은 뱃속에 품고 있던 숨을 길게 내뿜었다. 그가 나아가려는 길은 심득(心得)이 없이는 완성할 수 없는 지고(至高)의 경지였다. 심득이란 육체적 단련과는 달라서, 투자한 시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심득의 벽을 억지로 통과할 수 없었다. 서문복양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연무장 밖에 서 있던 그의 심복 관씨형제(關氏兄弟)가 하얀 수건과 도집을 들고 다가 왔다. 이십여 년 동안 서문복양을 받들어 온 그들이었다. 서문복양이 그들 형제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주종지간(主從之間)을 뛰어넘어선, 우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연무를 마치셨습니까?" 관씨형제 중 형인 관대랑(關大郞)이 물었다. "그래..." 서문복양은 그의 손에서 수건을 받아 얼굴의 땀을 닦았다. 아우 관이랑(關二郞)은 서문복양의 도를 받아 도집에 넣었다. "기분이... 언짢으신 것 같습니다." 관이랑의 물음에 서문복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울적한 마음을 굳이 감추고 싶지 않았다. "주군께서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관이랑의 말에 서문복양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조급하다... 글쎄, 아버님께선 삼십 이전에 오르신 경지를 나이 서른 다섯이 되고도 오르지 못했는 데,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자 관대랑이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문주님께서는 하늘이 내린 무골(武骨)이시죠. 세상 누구도 문주님과 비교할 수 없을 겁니다." 날카로운 인상의 아우와는 달리 본 바탕이 온화한 그가 이렇게 미소짓고, 마치 태학 (太學)의 거유(巨儒)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실제로도 그는 문무를 겸전(兼全)하고 있었으니, 일찍이 무양문의 총사(總師) 육건이 그를 칭하여 '여포(呂布)의 용맹에 퇴지(退之)의 문장'이라 한 것도 그에 기인한 것이 다. "하긴..." 서문복양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천천히 상의를 벗었다. 땀으로 젖은 몸을 닦기 위해서였다. 삼십대 중반 장년의 잘 발달된 몸뚱이가 한낮의 햇살 아래 드러났다. 이미 한서(寒暑)를 꺼리지 않아도 될 경지에 오른 서문복양이었지만, 긴장되었던 근육 이 이완되고 흐르던 땀이 증발하자 약간의 한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한기를 쫓기 위해 양팔을 앞뒤로 몇 차례 흔들었다. 그리고 수건으로 천천히 몸을 닦아가기 시작했다. 굵직한, 하지만 어딘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가 울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호오! 지금 뭐 하는 거냐?" 서문복양과 관씨형제는 연무장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무양문 내에서 서문복양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존체(尊體)를 뵙습니다!" 관씨형제는 연무장 바닥에 엎드리며 백련교의 수결을 만들었다. "오셨습니까?" 서문복양은 그들과는 달리 허리만 구부려 반배(半拜)했다. 후계자는 예도(禮度) 면에서도 일반 문도와 구분되는 것이다. 그들이 배례를 마쳤을 때에는, 서문숭은 이미 그들 앞에 다가와 있었다. 서문숭은 관씨형제를 바라보았다. "자네들은 갈수록 젊어지는 것 같아... 눈빛을 보아하니 남명공(南冥功)이 더 상승된 모양인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천박한 재주라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관대랑은 머리를 숙이며 황급히 대답했다. 그들 형제가 수련하는 남명공은 해남관가(海南關家)가 자랑하는 기공(奇功)이었다. 제심수신(齊心修身)의 묘용이 탁월해 경지에 오를수록 안광이 깊이 가라앉는 특징이 있었다. 서문숭은 예전보다 한층 더 고요해진 관대랑의 눈빛에서 그의 경지를 읽어낸 것이다. "겸손 떨기는..." 서문숭은 관대랑의 귓전에 얼굴을 바싹댔다. 그리고 역적 모의라도 하는 것처럼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낮게 속삭였다. "다음 번 무위관이 열렸을 때에는 자네들을 꼭 부를 테니, 몸이나 풀고 있으라고... 흐흐..." 관대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얼굴도 바라보기 힘든 까마득한 상관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나가 난처 함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지난 한 달 동안 제갈휘의 죽음으로 인해 분노할 대로 분노해 있다는 서문숭 이 아닌가? 오늘 오전에는 무위관도 열렸다는데...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있다는 말인가? 관대랑의 이런 의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문숭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복양이와 단 둘이 있고 싶은데... 잠시 자리를 피해주겠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관씨형제는 다시 한 번 엎드려 절한 뒤 연무장 밖으로 물러갔다. 그들이 떠나는 광경을 지켜보던 서문숭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자네들도 미륵봉 아래에서 기다려 주겠나?" 누구에게 말한 것일까? 이때 어디선가 가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목소리의 여운이 사라진 뒤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서문복양은 서문숭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네 명의 형체 없는 호위, 사망량 (四망[鬼+岡]량[鬼+兩])이 떠났음을 알 수 있었다. 서문복양은 문득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기에 호위마저 물리는 것일까? 서문숭은 느릿하게 몸을 돌려 서문복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본 서문복양은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서문숭은 웃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웃음은 여러 가지 의미를 품을 수 있다. 어떨 때는 극도로 허탈하거나 극도로 분노해도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서문복양은 서문숭의 웃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저 웃음은 분명히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었다. 서문복양은 하만이 느끼고, 관대랑이 느꼈던 동질의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때 서문숭이 말했다. "늙은 아비 앞에서 몸 자랑을 계속하기냐?" "예?" 서문복양은 화들짝 놀라며 손에 쥐고 있던 옷을 입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손목을 움켜잡는 억센 손이 있었다. 어느새 그에게 바싹 다가온 서문숭의 손이었다. "으흠... 별것 아닌 녀석이..." 서문숭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서문복양의 몸을 살펴보았다. 서문복양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서문숭의 말과는 달리 충분히 봐줄 만한 몸이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예끼!" 서문복양은 서문숭의 호된 일갈(一喝)에 찔끔했다. "봐라! 진짜 남자의 몸이란 이런 거다!" 본때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서문숭은 호쾌하게 외치며 붉은 장포를 훌떡 벗었다. 그 안에 나타난 것은 불꽃 문양이 새겨진 백견(白絹) 상의... 또 엷은 색깔이 들어간 두꺼운 속옷... "험, 험! 날이 춥다고 시비(侍婢)들이 하도 보채서 말이지..." 껴입은 옷들이 무안했는지, 서문숭은 어색하게 변명을 했다. 세 겹의 옷을 벗은 뒤에야 그의 몸뚱이는 햇살 아래 몸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것은 환갑을 넘긴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 만치 훌륭한 몸이었다. 뭉쳐진 근육들이 험준고령(險峻高嶺)처럼 뒤엉켜 있었고, 불거진 힘줄들이 신령스러운 지맥(地脈)처럼 그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어떻냐, 이 아비의 몸이?" 자랑스러움이 곁눈질처럼 서문복양에게 던져졌다. "아주 좋습니다!" 우람한 근육은 서문숭이 손꼽는 자랑거리였으니, 그의 친인(親人)인 서문복양이 새삼 스럽게 감탄할 까닭은 없었다. 하지만 서문복양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감탄으로써 부자유친(父子有親)의 도리를 지 켰다. "자! 이 상처!" 서문숭은 왼쪽 어깨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굵직한 상처 하나가 구렁이처럼 어깻죽지를 휘감고 있었다. "한 자루 붉은 장검으로 천하 뭇 검객 위에 우뚝 선 혈랑곡주... 그가 남긴 정표(情表)이지. 물론 나도 그의 종아리에 일 도를 새겨주었지. 흐흐... 그 친구 절름발이가 되지 않았나 몰라?" "예..." "그리고, 이 상처!" 서문숭은 배꼽 위를 가리켰다. 그곳의 피부는 거무스름하게 죽어 있었다. "소철! 그 여우같은 위인이 자랑하는 팔진수(八振手)였지! 하늘이 노래지더군. 그 기분, 맞아본 사람이 아니면 몰라. 하지만 그의 손목도 이 꼴이 되었으니..." 서문숭은 두 손으로 무엇인가를 똑 부러뜨리는 시늉을 하며 서문복양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리 손해본 것은 아니지?" "예..." 서문복양은 공손히 대답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상처!" 서문숭은 등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두 개의 흰 금이 '예(乂) 자' 모양으로 교차되어 있었다. "이 상처... 이 상처는..." 서문숭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선뜻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님... 서문복양은 가슴이 찡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상처를 새긴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갈휘... 그 멋있고 중후한 검객의 양의검법(兩義劍法)이 남긴 작품이었다. 물론 그때 제갈휘도 무사하지 못했다. 서문숭의 도에서 뿜어 나온 천중(天重)의 힘 때문에 저승 문턱을 넘어갈 뻔했으니까. 그리고 그때, 그들은 형제의 애정으로써 망년(忘年)의 친교를 맺었다. 서로의 무공에, 그리고 서로의 기질에 반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제갈휘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서문복양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서문숭의 안색을 살폈다. 서문숭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제갈휘에 대한 그리움이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서문숭이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못된 놈이 새긴 것이지! 으하하! 천하에 둘도 없이 못된 놈이!" "예...?" 서문복양은 어리둥절한 눈초리로 서문숭을 바라보았다. 서문숭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연무장 북쪽 울창한 대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대뜸 소리쳤다. "왔으면 썩 나오지 않고 뭐 하나!" 서문복양은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딱 벌렸다. 너무 놀라면 머릿속이 이상하게 뒤엉키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서문복양은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하하하! 귀는 여전히 밝으시군요, 형님!" 맑게 웃으며 대나무 숲 사이로 걸어나오는 회색 무복을 입은 사내... 파리한 안색에 홀쭉한 뺨, 왼쪽 눈썹 부근엔 처음 보는 상처까지 매달고 있었지만 너 무나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이... 이..." 서문숭의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 그의 부리부리한 고리눈에는 뿌연 물안개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놈!" 쑤아앙---! 서문숭의 벗은 몸통이 쏜살처럼 대나무 숲을 향해 날아갔다. 십여 장의 거리란 이 순간, 아무 의미가 없었다. "허...허허..." 나타난 사람 앞에 우뚝 선 서문숭의 입에서는 웃음도 아니고 울음도 아니 기괴한 소리 가 흘러나왔다. 오늘 아침 육건이 가져온 봉서. 출정 대신 무위관을 다시 열게 만든 바로 그 봉서... <오시(午時) 정각에 광명연무장으로 가겠습니다. 휘(輝).> "이놈... 이 못된 놈 같으니라고!" 서문숭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二十七章 生還 (1) 염사위(閻思偉)는 무양문 내에서도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다른 문도와는 달리 고급 관리 출신이었다. 선황(先皇) 선종(宣宗) 때에 추밀원(椎密院) 도사(都使)직을 지낸 그는, 선종이 죽고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野人)으로 돌아왔다. 주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사실을 안타까워 했다. '추밀원의 소염왕(少閻王)'이라는 그의 별명은 비단 그가 염씨(閻氏)이기 때문만은 아 니었으니, 그의 행정 능력은 염라대왕처럼 추상같고 엄정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던 것 이다. 하지만 마흔셋, 한창의 나이로 관로(官路)에서 은퇴한 염사위에게는 다른 뜻이 있었 다. 그는 남은 여생을 자신이 믿어온 종교를 위해 헌신할 생각이었다. 그 종교가 무엇인지는 그의 처자식도 알지 못했다. 드디어 어느날, 염사위는 집을 떠났다. '길을 찾아 산으로 간다'는 간단한 편지 한 장만을 남긴 채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염사위는 무양문에 입문했다. 그의 입문 절차는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되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독실한 백련교도였기 때문이다. * * * "광명령(光明令)이 내려왔네!" 육건은 순찰당주(巡察堂主) 염사위에게 금봉(金棒)으로 축(軸)을 만든 두루마리 하나 를 내밀었다. 염사위의 표정이 굳어졌다. 광명령은 무양문에서 가장 강력한 명령이었다. 광명령의 내용은 경우에 따라서는 무양문뿐만 아니라 전 중원에 흩어져 사는 모든 백 련교도들에게 전달되었다. 무양문주로서, 그리고 백련교 교주로서 서문숭이 내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교서(敎 書)를 받아든 염사위의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무공은 간단한 권각술과 운기토납(運氣吐納)을 할 수 있는 기초 단계에 불과했다. 마흔이 넘어 처음으로 무공에 입문한 그였으니, 그 정도면 상당한 경지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강호문파인 무양문이었으니, 상하의 직위는 무공을 잣대로 결정되는 것이 상례(常例) 였다. 실전에서 하급무사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염사위가 호교십군(護敎十軍)과 동등 한 직위인 순찰당주에 오른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염사위는 그 일을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집단이 진정한 집단으로서 힘을 발휘하려면 모든 조직들이 살아 있는 생물체의 그 것처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그것은 조직들이 강하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지나친 강성(剛性)은 오히려 집단 전체를 해치는 독소(毒素)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무양문의 정화는 오천 명에 이르는 전투부대, '십군'이었다. 하지만 힘은 그들만으로 충분했다. 즉 그 외의 조직들, 가령 염사위가 이끄는 순찰당을 비롯한 삼당(三堂)과 교단의 어른 으로 구성된 양원(兩院)까지 힘을 갖출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갖춰야할 덕목은 집단 전체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세부적인 행정 업무를 조정하는 관리자로서의 능력이었다. 염사위는 그 일에 관해 자신만큼 뛰어난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 다. 그가 자신에게 부여된 순찰당주라는 직위를 당연히 여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염사위는 받아든 두루마리를 붉은 탁자 위에 놓고 거기에 세 번 절을 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다. - 12월 14일 유시(酉時) 정각, 광명전 광장에 전 문도 집결. 염사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드디어 출정입니까?" 육건은 그 질문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심유한 눈으로 염사위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염사위는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그의 임무는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 명령에 담긴 속뜻을 분석하는 일은 이미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염사위는 공손한 동작으로 광명령을 갈무리했다. * * * 광명령은 연락 계통을 통해 각 조직으로 전달되었으며, 곳곳에 마련된 전방(傳榜)에 나붙었다. 올해 들어 세번째 발동되는 광명령이었다. - 令 - 十二月 十四日 酉時 正刻 光明殿大廣場 全門徒集結 (2) 중화(中火)할 무렵을 지나며 쾌청하던 날씨가 어둑어둑해지더니, 저녁이 되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때는 십이월 중순... 구주(九州) 대부분은 이미 동장군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였다. 하지만 무양문이 위치한 곳은 겨울에도 얼음 구경하기 힘들다는 복건(福建), 그 중에 서도 남쪽이었다. 십이월 중순에 흩날리는 눈발이 초설(初雪)인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눈은 하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송이송이 떨어지는 순백의 정령(精靈)들은 천하만물(天下萬物)을 막고야산(막姑射山) 신인(神人)의 피부처럼 새하얗게 단장시켜준다. 그러면 우주 안의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으로 탈바꿈하게되는 것이다. 또한 첫눈은 서설(瑞雪)이다. 어린아이들은 백설 위를 뒹굴며 탐스런 눈뭉치를 맛볼 테고, 어른들은 겨울나기에 분 주한 일손을 멈추고 벙긋 웃음지을 것이다. 하지만 광명전 대광장에 운집한 무양문의 칠천 문도 중에서 첫눈이 안겨주는 잔잔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리는 눈발을 고스란히 맞으며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칠천 문도들은 흡사 토용(土俑: 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으로라도 화(化)해버린 것 같았다. 오전에 게시된 광명령, 그 무상(無上)의 권위는 그토록이나 지엄한 것이었다. 광장에 정렬한 문도는 크게 두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광장 동편을 차지한 이천 명은 순찰(巡察), 교무(敎務), 호공(戶工)의 삼당(三堂)과 집법(執法), 원훈(元勳)의 양원(兩院)에 적(籍)을 둔 문도들이었다. 실제 삼당, 양원에 소속된 인원수는 일만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정식 문도가 아닌 입문 절차를 밟는 평교도(平敎徒)였다. 광명령이 '문도'라 제한한 이상, 평교도들은 차가운 눈발 아래 꽁꽁 얼어붙을 영광스 러운 권리마저 부여받지 못한 것이다. 광장 중앙을 차지한 오천 명은 무양문의 주력인 십군(十軍)이었다. 열 개 군단(軍團) 앞에는 각각을 상징하는 군기(軍旗)가 꽃혀 있고, 그 옆에는 군장 (軍將)들이 서 있었다. 그들이 바로 무양문이 자랑하는 열 명의 절세고수, 호교십군이었다. 그들 중 가장 좌측에 있는 일군기(一軍旗)는 다른 아홉 기들과 달리 깃폭 아래 세 뼘 쯤 떨어진 부분에 검은 헝겁이 달려 있었다. 세 치 정도 폭에 길이는 한 자 정도의 자그마한 헝겁... 그것은 어떤 죽음을 애도하는 조포(弔布)였다. 그리고 일군기 아래에는 사 척이 넘는 거도(巨刀)를 등에 멘 호목(虎目) 중년인이 서 있었다. 금새라도 불똥을 쏟아낼 듯한 강렬한 눈빛과 칼자루에 용머리가 새겨진 웅장한 용형도 (龍形刀)의 중년인... 그 사람은 눈빛만큼이나 뜨거운 피와 병기만큼이나 불굴의 용기를 지녔다는 일군의 부군장(副軍長) 종리관음(鍾里觀音)이었다. 지금 이 순간, 종리관음은 흑건(黑巾)을 이마에 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뒷전에 도열한 일군 소속 오백여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헝겁. 군장이 아닌 부군장. 오백 개의 검은 머리띠... 이 일련의 상황은 모두 한 가지 일에서 연유(緣由)했다. 바로 일군장 제갈휘의 부음(訃音)이었다. * * * "그것 참! 유시(酉時)가 훨씬 넘었는데... 밤 샐 작정인가?" 십군장 마석산, 이 신경 굵은 위인에게는 광장 전체를 짓누르는 숨막히는 긴장도 소용 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추운 날 집을 나선 건달처럼 팔짱 낀 양손을 겨드랑이 아래로 바짝 파묻은 채, 이군(二軍)이 도열한 곳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흰 바탕에 검은 독수리가 수놓인 이군기(二軍旗) 아래에는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온 흑의(黑衣) 초로인(初老人)이 지긋이 눈을 감은 채 석상처럼 서 있었다. 호교십군 중 서열 이위인 좌응(佐鷹)이었다. 한 자루 철검을 휘두르면 빛살조차 벨 수 있다하여, 그의 별호는 분광검(分光劍)... 어떤 이들은 그의 검이 제갈휘의 그것보다 무섭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묵묵히 웃었다. 시인하는 것일까, 아니면 부인하는 것일까? 하지만 불행히도 그 웃음의 참 의미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석산은 좌응을 향해 능청스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주무시우?" 그럴 리가 있을까? 굳게 감겼던 좌응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너무도 희어 오싹한 느낌을 주는 흰자위와 검은 보석처럼 투명한 광채를 발하는 눈동 자가 마석산의 얼굴을 향했다. "형님, 뭔일로 모이라 한 건지 혹시 아시우?" "곧 알게 되겠지." 마석산은 힝, 코웃음을 쳤다. "그걸 누구는 몰라서 묻겠수? 지금 당장 궁금하니까 이러지." 좌응은 연민과 짜증이 반반씩 섞인 표정으로 마석산을 바라보았다. 미련하고 고집이 센 주제에 어찌 방정맞기까지 하단 말인가! 그렇다고 속속들이 알고 있는 처지에 새삼스럽게 면박을 주기도 뭣한 노릇이었다. "난 출정 명령이 떨어졌음 좋겠수!" 마석산은 생각만해도 짜릿한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좌응의 얼굴에는 한 자락 그늘이 드리웠다. "출정이라..." "예, 출정! 그래서 일군장을 죽인 놈들을 죄다 요절을 내버린다면, 정말 세상에 두 번 없을 후련 한 일 아니겠수?" "하지만 일군장을 죽인 자들 또한 모두 죽었다고 하지 않는가?" "형님도 참! 놈들의 씨앗까지 남김없이 쓸어버려야 복수했다고 할 수 있지요!" 검은 얼굴로 씩씩거리는 마석산을 바라보며 좌응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마석산의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도 지당했기 때문이다. '복수'라는 피비린내 나는 단어의 속성은 본디 그런 것이다. 무양문은 당금 강호에서 단일 방파로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강북의 신무전(神武殿)이 '북악신무(北嶽神武) 남패무양(南覇南覇)'이라는 대구 (對句)와 함께 무양문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깊은 이치를 살피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형세만을 논하는 단견(短見)이었다. 무양문은 강호인들에게 마귀굴(魔鬼窟)로 배척당하는 고립된 문파였다. 오대문파를 비롯한 명문대파들은 그런 무양문을 견제하기 위해 암중으로 신무전을 응 원했고, 그런 보이지않는 지원이 오늘의 신무전을 만드는 초석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양문의 위세는 신무전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만약 모든 외부 요인을 배제한 채 일 대 일로 비교한다면 신무전은 무양문의 맞수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 무양문이 다른 문파, 그것도 다수의 문파를 겨냥한 복수전을 결행한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오대문파가 그대로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고, 오대문파가 끼어든다면 신무전 또한 모른 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으음..." 좌응은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눈을 감았다. 목전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대한 피의 올가미가 그의 영혼을 아프게 죄어왔다. 마석산은 그저 신이 나는지 내리는 눈송이를 주먹으로 후려치며 호기롭게 말을 이어 갔다. "선봉은 누가 뭐래도 이 납자철오(蠟子鐵午) 나으리께서..." "자리로 돌아가게. 문주께서 나오실 시간이 되었어." 좌응은 차가운 목소리로 마석산의 말허리를 잘랐다. 덜 떨어진 아우의 되지도 않는 농짓거리를 더 이상 들어줄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볼이 잔뜩 부은 마석산은 좌응을 향해 뭐라고 쏘아붙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좌응의 눈 감은 얼굴에 떠오른 푸르스름한 냉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비록 둔하디 둔한 그였지만, 저런 기운이 감돌 때의 좌응에게는 거역하지 않는 편이 보신에 좋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제길..." 마석산은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러던 그의 눈에 좌응의 옆쪽 삼군기(三軍旗) 아래 서 있는 왜소한 인영이 들어왔다. 마석산은 마침 잘됐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어, 초 노사(楚老師)! 오랜만이외다! 이런 일이 아니면 얼굴 볼 일이 없구려!" 세 개의 금빛 고리를 수놓은 흑자색(黑紫色) 삼군기 아래 서 있는 사람은 오척 단구의 노인 초당(楚堂)이었다. 초당은 마석산을 힐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초리는 마석산을 향해질 때보다 두 배는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갔다. "히야! 눈이 펑펑 내리는데? 이러다가 우리 초 노사께서 완전히 파묻히지나 않으실지 걱정인데? 으헤헤!" 마석산은 하늘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멋진 농담을 한 것이다. 하지만 초당은 들은 척도 않고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우라질!' 마석산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아는 척이라도 하면 어디가 덧나나? 독사 같은 난장이 자식! 마석산은 내심 욕설을 퍼부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 줄기 웅장한 징소리가 광장에 울려퍼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지---잉---! 지잉---! 창룡(蒼龍)의 꼬리처럼 긴 여운을 담은 징 소리가 광장 안의 침묵을 휩쓸고 지나갔다. 곧바로 우렁찬 고함 소리가 뒤따랐다. "조-온(尊)---, 추-울(出)---!" 칠천 문도들은 상의의 앞자락을 와락 소리나게 걷어올리며, 눈 덮인 광장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긍---! 둔중한 소리와 함께 남만(南蠻)의 묵오강철(墨烏鋼鐵)로 만든 광명전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몇 사람이 광명전으로부터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사람은 무양문의 대호법(大護法)이자 백련교의 수좌제관(首座祭官)인 목군 평(木君平)이었다. 목군평은 수좌제관답게 금장(金裝) 화려한 제의(祭衣)에 높이가 한 자나 되는 검은 제관(祭冠)을 쓰고 있었다. 나이 칠십을 바라보는 그였지만 가슴까지 드리운 턱수염은 칠흑처럼 새카만 윤기가 흘 렀다. 반백 년을 수련해 온 박대정심(博大精深)한 광명비전(光明秘傳)의 내공심법이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점이 있었다. 목군평은 여느 때와는 달리 위패(位牌)를 담는 검은 궤짝을 들고 있었다. 문도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일군장 제갈휘의 위령제(慰靈祭)를 지내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에 대한 모든 추모 의식은 복수 이후로 미뤄졌는데...? 목군평에 이어 걸어나온 사람은 이(二)호법 곽굉(郭轟)과 삼(三)호법 연문건이었다. 곽굉은 백 근이 넘어 보이는 거대한 부(斧)와 그 절반 정도 나갈 듯한 월(鉞)을 두 손에 들고 있었다. 금은주옥(金銀珠玉)으로 요란스럽게 치장된 이 두 개의 도끼는 장군부월(將軍斧鉞)이 었다. 연문건은 커다란 은반(銀盤) 하나를 제미(齊眉)하여 받쳐들고 있었다. 은반 위에는 신기(神氣)를 뿜어내는 두 자루의 병기가 놓였는데, 그것들은 이척 오촌 길이의 신도(神刀) 방원(方圓)과 삼척 이촌 길이의 보검(寶劍) 용신(龍神)이었다. 두 개의 병기 모두 문파의 수장인 서문숭을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두 사람의 뒤를 이어 하만과 손삼기(孫三起), 두 장로가 노구(老軀)를 드러냈다. 너무나도 늙어버려 이제는 걷는 것마저 힘에 부친 듯, 두 장로는 시종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문주 서문숭이 나타났다. 네모꼴 각진 얼굴 위엔 구름 같은 통천관(通天冠)이 올려 있고, 육척 당당한 근육질 의 몸뚱이는 붉은 곤룡포(袞龍袍)에 감추어져 있다. 벌레처럼 숭숭한 눈썹과 부리부리한 호목은 맹엄(猛嚴)한 위세를 품었는데, 불그스레 한 혈색과 푸른빛이 감도는 수염은 신비스런 기파(氣波)를 더해준다. 실로 제왕 같은 풍도라 아니할 수 없었으니, 흩날리는 눈발도 그 주위를 범하지 못하 고 힘없이 밀려나버리는 것 같았다. 서문숭의 뒤에는 삼대장로(三大長老) 중 하나이자 총사이기도 한 무양문의 두뇌, 육 건과 이미 다음 대의 후계자로 내정된 부문주 서문복양이 따랐다. 지잉---! 또 한 번의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옹(恭)---, 처-언(天)---!" 순간... "미륵하생! 명왕출세!" 칠천 문도들은 두 손으로 불꽃 수결을 지으며 한 목소리로 진언을 외쳤다. 그 우렁찬 기세는 거센 회오리바람이 되어 광장에 쌓인 눈들을 허공으로 휘말아 올렸 다. 안개처럼 광장을 자욱히 덮어버린 눈가루, 그 분분한 신비 속에 석상처럼 무릎꿇고 있는 칠천 명의 문도들... 지잉---! 그리고 세 번째 징소리... "수-욱(肅)---, 배-애(拜)---!" 구령이 울리자 칠천 문도들은 머리를 바닥에 대었다.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 허리만을 숙여 머리를 조아리는 고두배(叩頭拜)였다. "존체(尊體)를 알현합니다!" 이러한 고두(叩頭)는 아홉 회나 반복되었다. 그 장한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던 서문숭이 입을 열었다. "예를 거두어라!" 나직했지만 범인(凡人)이 거역할 수 없는 무거운 위엄이 담긴 목소리였다. 문도들이 몸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칠천 명의 움직임이 마치 한 사람의 그것처럼 일치했다. 평소 문파의 기강이 얼마나 칼날 같은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였다. 서문숭은 칠천 문도들을 쓰윽 둘러보았다. 그의 뇌전 같은 안광 앞에는 자욱한 눈발도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을 접한 문도들은 감히 눈길을 들지 못했다. "본좌가 광명령을 발동한 것은 한 가지 좋은 일과 한 가지 나쁜 일 때문이다." 좋은 일 한 가지와 나쁜 일 한 가지... 서문숭의 말에 심기가 깊은 몇몇 문도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출정을 위한 소집은 아닌 모양이었다. "본좌는 그 중 나쁜 일부터 해결하고자 한다." 서문숭은 뒷전을 바라보았다. "부문주는 명을 받들라!" 서문숭의 호명에 아들 서문복양의 허리가 깊숙이 구부러졌다. "복명(服命)!" 지금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적인 관계가 아닌, 문주와 부문주의 공적인 관계인 것이다. 서문숭은 삼호법 연문건이 받쳐든 은반 위의 보검을 집어들었다. "용신검은 본교(本敎)의 지고무상한 신물! 그 법통(法統)은 초대 교주이신 광명대법신(光明大法神)으로부터 본좌까지, 십칠 대 삼백 년 동안 불변의 진리였다!" 서문숭은 용신검을 서문복양에게 내밀었다. "일군의 오백 문도를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부문주에게 준다! 부문주는 광명전 광장을 포위하여, 허락 없이 광장을 빠져나가는 자, 직위의 고하(高 下)를 불문하고 참(斬)하라!" 이 한 마디는 거대한 공포가 되어 문도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문도들은 고개를 제대로 돌리지도 못한 채 숨을 죽였다. 분노. 희대의 패도지존(覇道至尊) 서문숭이 무엇인가에 분노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서문복양은 두 손으로 용신검을 받았다. 서문복양의 지휘 아래 명령은 어김없이 실행되었다. 오백 명의 일군 무사들은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든 채 광명전 광장의 포위를 마쳤다. 그 과정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던 서문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수좌제관은 명을 받들라!" "복명!" 이번에는 목군평의 허리가 구부러졌다. "제단(祭壇)을 마련하라!" "알겠습니다!" 목군평이 광장 한쪽을 향해 손을 들자, 검은 옷을 입은 십여 명의 사내가 문도들의 정 면에 앞에 제단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목재를 짜 맞춰 다섯 자 높이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다시 넓은 차일(遮日)을 쳐 눈을 막고... 미리 준비한 탓인지, 제단을 설치하는 데에는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제단이 완성되자 목군평은 들고 있던 검은 궤짝을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네 개의 위패였다. 목군평은 위패들을 제단 위에 놓고 옥호로(玉虎爐)를 마련한 뒤 향불을 살랐다. "...?" 문도들 사이에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위패 위에 쓰인 글들이 그들의 예상과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순교성체(殉敎聖體) 대적용(大迪容) 신위(神位)> <순교성체 왕삼보(王三寶) 신위> <순교성체 장민(張旻) 신위> <순교도(殉敎徒) 이백 이십 팔 영령(二百二十八英靈) 신위> 호교십군 중 다섯 번째 자리를 차지했던 활의 명수 대적용, 서문숭의 둘째 제자 왕삼 보, 그리고 이백 이십 팔 명의 무사... 그들은 지난 여름 용봉단(龍鳳團)을 토벌하기 위해 형산(衡山)으로 출정(出征)했다가 죽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장민은 그 토벌의 원인이 된, 용봉단주 강이환에게 살해당했다는 서문숭의 셋 째 제자였다. 그런데 왜 그들의 위패를 설치하는 것일까? 그들의 위령제(慰靈祭)는 이미 오래 전에 거행했다. 지금 또 다시 제단을 마련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문도들 사이에 일어나는 동요는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그런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문숭은 제단 앞으로 내려와 제문을 읽기 시작했다. 백련교의 제도(祭度)에 따라 제문을 읽어 내려가는 그의 목소리는 강개(慷慨)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도들은 숨 한 번 크게 내쉬지 못한 채, 제문 낭송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 다. 이윽고 제문 낭송이 끝났다. 서문숭은 제단을 향해 두 번 절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서문숭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삼군장 초당의 왜소한 신형이 있었다. "초당!" 이제껏 무심(無心)을 유지하던 초당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복명!" 초당은 허리를 숙였다. 서문숭은 초당의 굽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과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초당은 등덜미에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서문숭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왜 그랬나?" 초당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뱀의 그것과도 닮은 눈동자에 새파란 섬광이 번뜩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서문숭은 초당의 대꾸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탄식했다. "답지 않아... 천하의 초당답지 않아!" 서문숭은 다시 초당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랬나?" 초당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굳어진 듯 꼼짝하지 않았다. 만물이 정지한 것 같았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던 눈의 장막도 이 순간에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 것 같 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초당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위패가 설치되는 순간부터... 아니, 오늘 아침 무위관이 다시 열렸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순간부터 그의 작은 몸뚱 이를 엄습하던 자욱한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초당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어떻게 아셨소?" 초당의 말투는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모든 문도들의 얼굴에 해연(駭然)함이 물결쳤다. "그래! 그래야 초당답지!" 하지만 서문숭은 짐작했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광명전 쪽을 향해 외쳤다. "아우! 나오게나!" 그러자 열려진 광명전의 입구, 그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잿빛 무복을 입은 중년인과 허리가 굽은 마의 노인,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 대한 체구를 지닌 황삼 청년... 순간, 경악의 해일(海溢)이 광명전 광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세 명의 선두에서 선 중년인... 그는 죽었다고 알려진 호교십군의 서열 일위, 제갈휘였다. (3) 제갈휘의 신색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치고는 괜찮아 보였다. 비록 볼따구니가 눈에 띄게 홀쭉해지고 왼쪽 눈가에는 처음 보는 상처딱지가 어 있었 지만, 깊디깊은 눈빛과 평화로운 입매에서 느껴지는 중후한 귀품(貴品)은 과거와 여일 (如一)했다. "군, 군장님!" 부군장 종리관음을 위시한 일군 소속 무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 은 물이 눈앞을 가린 것일까? 멀쩡하던 시야가 갑자기 뿌옇게 흐려지니 말이다. 그들은 광장을 포위하라는 서문숭의 명령마저 까맣게 잊은 채 격동에 찬 표정으로 제 갈휘를 바라볼 뿐이었다. "...!" 놀라기로 말한다면 초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초당의 심장은 얼음물에 빠진 새끼 노루만큼이나 팔딱거리고 있었다. 설마 제갈휘가 살아 나타날 줄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제갈휘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초당과 제갈휘의 시선이 허공의 한 점에서 얽혔다. 경악으로 부릅떠진 눈과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깊은 눈... 초당의 눈빛이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뭐라 말하려 입술을 벌렸지만, 침이 말라붙은 입술 사이에선 새된 기음(奇音)만 이 흘러나왔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제갈휘였다. "살아 돌아와서 미안하오, 초 노사..." 어의(語義)는 조롱이 분명할진대, 어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에 모멸감을 느낀 것일까?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초당의 작은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요동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때? 이 정도면 설명이 되겠나?" 서문숭은 다시 초당을 바라보며 웃었다. 득의(得意)가 담긴 웃음, 하지만 사람의 혼백을 얼어붙게 만드는 싸늘한 웃음이었다. 초당은 잔뜩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후우! 그랬나...? 제갈휘 그대가 살아 있었나...?" 창자까지 묻어 나올 것 같은 절절한 장탄식이었다. 떨어지는 눈발은 멍청히 응시하는 초당의 눈빛이 마른 흙처럼 푸석하게 퇴색해갔다. 소위 명문 대파라는 아이들이 대사(大事)를 그르친 게야. 하지만... 하지만 누굴 탓할까? 그런 황구지자(黃口之子)들을 믿고 마음놓았던 내 잘못이지... 초당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서문숭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뱀처럼 차갑게 변해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신색. 이제는 감정의 혼돈에서 벗어나 평상심(平常心)을 회복한 것이다. 서문숭은 초당을 향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소리쳤다. "집법원주(執法院主)는 명을 받들라!" 서문숭의 추상같은 호명이 있자, 도열해 있던 문도들로부터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복명!" 그는 무양문의 양원 중 법령의 입안(立案), 해석(解析), 집행(執行)을 담당하는 집법 원의 총책임자, 진궁(陳宮)이었다. 전문 관료나 공장(工匠) 위주로 구성된 양원(兩院)에서는 드물게 수련이 절정에 이른 무학 고수이며, 휘하에 부리는 백여 명의 집법사(執法士)들도 일당백의 무인이라 했다. 서문숭이 물었다. "본좌를 기만하고, 문파를 배신한 죄! 해당하는 형벌을 고하라!" 누구의 질문인데 감히 망설일까? 진궁은 즉시 대답했다. "오체분시(五體分屍)입니다!" 진궁의 입에서는 머리와 사지를 몸통에서 떼어내는 끔찍한 형벌이 흘러나왔다. 칠천 문도들은 마치 자신들이 받기라도 할 것처럼 목을 움츠렸다. 서문숭은 다시 진궁을 향해 물었다. "동도불살(同徒不殺)의 교칙(敎則)을 어긴 죄! 해당하는 형벌을 고하라!" "두 손을 자른 뒤 참수형(斬首刑)에 처하는 것입니다." 동도의 피를 묻힌 손을 자르고 다시 목을 치는 형벌. 오체분시와 마찬가지로 극형(極刑)에 해당하는 중벌이었다. 서문숭은 초당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슨 까닭일까? 초당의 입가에는 기이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극형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든 여유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문숭은 초당을 향해 냉엄(冷嚴)히 외쳤다. "초당, 죄를 인정하는가?" 초당은 고개를 저었다. "못하오." 그 대답이 의외인 듯, 서문숭은 고개를 한두 차례 갸웃거렸다. "못한다고?" "그렇소! 나는 본디 황상(皇上)의 명에 따라 백련교도를 가장해 무양문에 들어온 사람. 진정한 교도가 아니니 교칙이 적용되지 않으며, 진정한 문도가 아니니 문령(門令) 또 한 적용될 수 없소." 초당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그래?" 감탄일까, 비웃음일까? 서문숭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관원에 걸맞은 예우를 해달라는 건가?" 그러자 초당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소? 내가 관원이라고 주장한다면... 문주께서는 나를 살려주시겠소?" "그럴 수야 없지." "나는 애당초 당신의 적이었소. 결코 당신과 무양문, 그리고 백련교를 배신한 것이 아니지. 처음부터 우리는 단 한 번도 한편이 된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그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오!" "적이라... 그래서 본교의 법대로 처벌받지 않겠다 이건가?" "그렇소!" 초당은 잠시 말을 끊고 서문숭의 얼굴을 직시하였다. 그의 찢어진 눈이 새파란 광망으로 뒤덮였다. "서문(西門) 문주! 나를 적(敵)으로 대우해 주시오!" 서문숭은 잠시 말을 잊었다. 서문숭은 지닌 바 수련이 신화경(神化境)에 이른, 고금을 통틀어 손꼽힐 수 있는 대 종사(大宗師)였다. 하물며 그의 뒤에는 단일 문파로 강호 제일이라는 무양문의 칠천 고수들이 운집해 있 었다. 감히 누가 서문숭의 앞에서 이리도 당당히 적이 되겠노라 말할 수 있을까? 비록 초당을 증오하는 마음이 골수에 사무친 서문숭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꿋꿋한 기상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적으로 대우해주지! 하지만..." "하지만?" "조건이 있다!" "말씀하시오." 서문숭은 초당의 뒤에 도열해 있는 삼군(三軍)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초당으로부터 비롯된 이 돌연한 사태에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긴장해 있었 다. "네 동료들을 모두 불러내라! 나는 이유 없는 피를 보고 싶지는 않다!" 서문숭이 초당을 적으로 인정한 이상, 초당의 동료라면 서문숭의 적이요, 무양문의 적 이요, 백련교의 적이었다. "으음..." 초당은 한동안 말을 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죽었다는 제갈휘가 나타났다. 그것도 한 달 간 잠적한 뒤에야... 제갈휘는 왜 자신의 생존을 숨겼을까? 그것은 초당 자신에 대해 은밀히 조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즉, 그간 초당의 행동은 이미 대부분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나 버린 것이다. 초당은 고개를 들었다. 구레나룻이 위맹한 서문숭의 각진 얼굴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많은 광경과 많은 이야기가 주마등(走馬燈)처럼 초당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 다. 나이 열 일곱에 무과(武科) 소시(小試)에 장원으로 급제해 청운의 꿈을 품고 관로에 들어선 뒤 어언 오십 성상(星霜)... 황상에게, 그리고 소속된 조직, 비각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결심은 홍안의 시절부터 지 금까지 단 한순간도 변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 끝났다. 이제 죽으면, 과연 옛사람들의 말처럼 충성심은 영원히 남겨질까? 초당은 픽 웃었다. 이 마당에 그런 생각 따위는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일은 있었다. 명예로운 죽음은 살아온 인생까지도 명예롭게 단장해준다. 적의 우두머리가 명예롭게 죽을 자리를 마련해 주는데, 초당은 그것까지도 저버릴 용 기가 없었다. 사람은 개처럼 죽어서는 안된다! "알겠소이다." 초당은 크게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앞에는 조금 전까지 그를 주군으로 모시던 삼군 소속 오백 무사들이 늘어서 있 었다. 그는 생각했다. 저승길 동무란 많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리라. 강퍅해 보이는 초당의 얇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부군장..." 순간, 삼군의 부군장인 오행장(五行掌) 학곤(壑坤)의 준수한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가뢰(街賴)야..." 삼지도(三枝刀)의 달인이자 초당의 조카이기도 한 초가뢰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삼사(三蛇)..." 천지인(天地人) 삼사는 연수합격(聯手合擊)에 능한, 삼군에서 손꼽히는 절정고수였다. 그들은 이 순간에도 붉은 방갓을 눌러쓰고 있어, 그 표정의 변화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다 끝났다. 이리 나오거라." 학곤과 초가뢰는 구원을 청하기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쏟아지는 것은 차가운 눈초리들뿐... 두 사람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앞으로 걸어나왔다. 하지만 삼사는 달랐다. 그들은 마치 산보라도 나선 듯한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초당은 우선 삼사를 바라보았다. "주인을 잘못 만나 이런 꼴을 당하는구나. 너희들을 볼 면목이 없다." 가장 좌측에 서 있던 천사(天蛇)가 담담한 목소리로 초당의 말을 받았다. "어차피 이십 년 전에 죽었어야 할 목숨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주인님을 보필할 수 있으니 여한이 없지요." 이십 년 전, 그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들 외에는 없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그 일을 알지 못할 것이다. "고맙다..." 초당은 세 사람의 손을 차례대로 한 번씩 움켜쥐었다. 그는 이어 시선을 초가뢰에게 돌렸다. "전아(展兒)가 몇 살이지?" "내달이면 열한 살입니다." 전아는 초가뢰의 아들이자 초씨 문중의 유일한 후손이었다. 초가뢰는 잔병이 많다는 이유로 아들을 아내의 친정이 가까운 하북(河北)에서 키우고 있었다. "열 하나라... 몸이 약한 게 걱정이지만 어미가 있으니 잘 돌봐주겠지." 유유한 초당의 말에 초가뢰의 세모꼴 눈이 몇 차례 흔들렸다. 하지만 체념에 필요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둥지가 깨지는데 알들이 무사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초당은 이번에는 학곤을 바라보았다. "자네에겐 미안할 뿐이군." 학곤의 표정은 기이했다.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혼돈이 그의 얼굴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군, 군장님! 제, 제가 왜...?" '왜 죽어야 하느냐?'는 말일 것이다. 초당의 입가에 쓰디쓴 웃음이 스쳤다. 학곤의 경우는 초가뢰나 삼사의 경우와 달랐다. 입문할 때부터 심복이 아닌, 초당이 삼군장에 오른 후 포섭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본디 학곤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얼굴값을 하기 때문인지 여색을 무척이나 밝힌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 양문의 다른 간부들과는 달리 명존(明尊)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 년 전 어느 날, 학곤은 이 두 가지 약점으로 인해 큰 난관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학곤은 네 명의 마누라와 열 명의 자녀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그의 마누라라는 여인들이 하나같이 한때 잘 나가던 기녀였음을 감안한다면, 그 씀씀 이가 얼마나 헤픈가는 불문가지... 학곤은 무양문에서 받는 녹봉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경제적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학곤은 그해 겨울에 있을 부군장 진급에 대한 심사 에서 자신의 이름이 누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유는 '신심(信心)의 부족'이었다. 그런 학곤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초당이었다. 초당은 우선 학곤에게 황금 백 냥을 조건 없이 빌려준 뒤, 그를 부군장으로 강력히 추천해줄 것을 약속했다. 학곤은 난데없이 나타난 이 행운의 손길을 믿을 수 없었다. 백 냥의 황금과 부군장이라는 직책! 그것이면 제비 새끼들처럼 자신을 향해 벌어진 네 마누라의 입을 꽉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학곤은 바보가 아니었다. 초당은 왜 그에게 이런 은전(恩典)을 베푸는 것일까? 이 엄청난 행운의 뒤편에는 무슨 불순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을까? 그때 초당이 학곤에게 말했다. - 자네 벼슬 한자리하고 싶지 않나? 문파의 간부 따위가 아닌 어인(御印)을 받은 진정한 관직 말일세! 학곤은 귀가 솔깃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초당의 제안은 생각보다 불순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관의 밀정 노릇을 해주고 칠품(七品) 관직을 받는 것은 문파나 교단에 대한 큰 배반이 아닐 지도 몰랐다. 듣자하니 대내(大內)에서는 백련교가 역심(逆心)을 품지 않을지 항상 불안히 여긴다고 했다. 그렇다면 역모가 있을 때에만 밀정 노릇을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하기야 무양문이 강하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호지사(江湖之事)였다. 만약 역모가 일어나 관이 개입한다면, 일개 문파가 어찌 나라를 감당할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학곤은 누가 부추기지 않아도 제 스스로 밀고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즉, 학곤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유혹의 손을 뿌리칠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 * * 초당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는 진정한 내 사람이라고 볼 수 없지. 하지만... 여기에서 내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는 것 같군." "당, 당신...!" 학곤의 얼굴 근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비로소 코앞까지 밀려온 퀴퀴한 죽음의 냄새를 맡은 것일까... 그는 몸둘 바를 모르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니까 자네도 이제 그만 단념..." "안 돼!" 학곤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초당을 노려보며 발악했다. "단념하라고? 이, 이 가증스러운 놈아! 네가 그때 뭐랬어? 뭐? 관직을 얻으면 문파에서도 어쩔 수 없을 거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함께 죽자니, 내가 왜 너 같은 난쟁이와 함께 죽는단 말이냐! 네 일을 해준 것도 별로 없는 내가 왜!" 학곤은 사방을 둘러보며 외쳤다. "난 아냐! 난 문파를 배반하지 않았어! 저 난쟁이에게 물어봐!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피를 토할 듯한 그의 항변은 누구 한 사람의 동정도 사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싸늘한 시선들로부터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학곤은 시뻘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다가, 갑자기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가 향한 곳에는 그의 생사여탈(生死與奪)을 쥔 서문숭이 있었다. 그는 돌 바닥에 이마를 꽝꽝 찧으며 구슬픈 목소리로 애걸하기 시작했다. "문주님! 속하, 초가(楚哥)의 꾀임으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맹세코! 맹세코 저는 문파와 교단에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간뇌도지(肝腦塗地)해서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이마가 깨져 눈 위에 붉은 피가 점점이 뿌려지는 광경은, 말 그대로 '간과 뇌를 땅에 처바름[肝腦塗地]'이었다. 이때, 서문숭의 목소리가 학곤의 귓전을 울렸다. "네가 정녕 나를 문주로 인정하느냐?" 학곤은 절망의 나락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반색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피범벅이 된 얼굴이 들어 서문숭을 응시했을 때, 그는 온몸의 힘이 쭉 빠져버 렸다. 서문숭은 여전히 얼음 덩어리였다. 그의 얼굴에서는 한 올의 자비심도, 한 올의 관용도 발견할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자결해라." 서문숭은 짧게 말한 뒤 학곤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서문숭을 문주로 여기는 무양문도 학곤'의 운명은 이미 결정 되었다. 하지만 학곤은 도저히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살아온 인생인데! 장부의 오기? 무사의 기개? 그런 거창한 것들을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맥없이 앉아서 운명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학곤은 몸을 일으켰다. 납득하지 않는 운명에는 순응할 수 없다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최후의 부탁입니다! 문주님의 손으로 속하를 직접 죽여주십시오!" 학곤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하지만 서문숭은 그의 이러한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참히 짓밟았다. "너는 본좌가 손을 쓰게 할 자격이 없다." 학곤은 잠시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내 하늘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으하하---! 내가, 이 학곤이 그 정도의 가치도 없단 말인가! 으하하!" 학곤의 웃음소리가 칼로 자른 듯이 뚝 끊어졌다. 순간, 학곤의 신형이 서문숭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쑤아앙--- 본디 학곤과 서문숭 사이의 거리는 사 장 정도...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벼락같은 기세는 사 장의 거리를 삽시에 없 애버릴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서문숭! 당신의 손이 얼마나 비싼지 확인해 보겠다!" 시뻘건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외침과 함께 학곤의 쌍장이 금빛 찬란한 장영(掌影) 을 토해냈다. 그가 수련한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오행장법(五行掌法) 중 가장 강맹하다는 경금압 귀장(庚金壓鬼掌)이 시전된 것이다. 그의 화후(化侯)라면 맨손으로도 능히 수백 근 암석을 부술 수 있었으니, 천하의 서문 숭이라 할지라도 태연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학곤은 끝내 서문숭의 손이 지닌 값어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펑---! 퍼펑---! "허억!" 학곤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채 우뚝 멈췄다. 그곳은 서문숭과의 거리를 일 장여 남겨둔 허공의 어느 한 점이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네 개의 희끄무레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시체처럼 푸르뎅뎅한 낯빛에 수의(壽衣) 같은 헐렁한 회색 장포를 걸친 네 명의 괴 인... '사, 사망량(四망[鬼+罔]량[鬼+兩])!' 학곤의 눈이 부릅떠졌다. 서문숭을 그림자처럼 호위하는 네 명의 허깨비의 이름을 떠올렸던 것이다. 서문숭을 공격하는 자가 아니면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한이 있다한들 결코 손을 쓰지 않지만, 일단 손을 쓰면 상대를 어육(魚肉)으로 만들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는 철벽의 호위 사망량. 학곤의 두 눈에 공포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학곤은 사그라지는 투지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어차피 살 생각은 버리지 않았던가! "이얍!" 학곤은 두 손바닥을 합쳤다가 힘차게 뒤집었다. 화르르--- 장심(掌心)을 통해 뿜어 나온 병화분귀장(丙火焚鬼掌)의 열기가 사망량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들은 허깨비였다. 이름만 허깨비가 아니라 정말로 허깨비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옥 같은 병화분귀장의 열기 속에서 어떻게 저리도 유유히 부영 (浮泳)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학곤은 사망량이 무엇인가를 꺼내드는 것을 보았다. 바퀴 같기도 하고 목걸이 같기도 한 기이한 둥근 병기였다. 파앗! 학곤의 두 어깨에 길쭉한 혈선이 새겨졌다. 얼마나 갑작스러웠던지, 붉은 비사(飛蛇)가 허공을 가로질러 그의 어깨에 달라붙은 것 처럼 보였다. 학곤은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혈선이 점차 벌어져 급기야 두 팔이 잘라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악---!" 고통 없이 두 팔이 잘렸다는 사실이 학곤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이것이 사망량의 독문병기 현빙권(玄氷圈)의 무서움이었다. 현빙권에는 그들이 평생 수련한 지음(至陰)의 현빙공(玄氷功)이 담겨 있었으니, 당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팟! 팟!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 학곤의 두 다리가 몸통으로부터 떨어졌다. 그리고 목덜미에 올가미 자국 같은 혈선이 휘감긴 순간... 학곤의 머리통은 한 줄기 선풍에 휘말려 허공 높이 솟구쳐 올랐다. 한 방울의 피도 없었다. 붉은 얼음 조각들만이 존재하던 한 생명이 사라진 것을 증명해주듯 눈발에 섞여 분분 히 날릴 뿐이다. "쯧쯧! 흉한 꼴이야, 흉한 꼴..." 초당은 나직이 혀를 찼다. 서문숭은 학곤이 여섯 토막으로 참혹하게 죽는 광경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 았다. 그는 초당을 향해 물었다. "이들이 전부인가, 초당?" 약간의 권태기가 섞인 음성이었다. "물론 이들 외에도 노부를 위해 일해준 아이들은 많소.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를 터! 무고한 피로 문주의 영명(英名)을 더럽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서문숭은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마." "고맙소." 초당은 서문숭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 속에 가늘게 떨고 있는 초가뢰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동정을 유지해야 하는 동자공을 수련한 덕분에 후손을 볼 수 없는 초당으로서는 자식 처럼 아끼던 혈육이기도 했다. 초당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잘 가라, 얘야..." 알록달록한 천으로 만든 초당의 소매가 흔들렸다. 허공 중에 한 줄기 강맹한 기운이 둥글게 뭉쳐졌다. 퍽! 초가뢰의 천령개(天靈蓋) 부근에서 검붉은 핏물이 솟구쳤다. 초가뢰는 멍청한 눈으로 초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망한 죽음에 대한 원망일까? 아니면, 생각했던 것보다 고통스럽지 않은 것에 대한 경이로움일까? 그의 눈은 실로 묘한 빛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은 안타까우리 만치 급속도로 사라졌다. 풀썩! 초가뢰는 허물어지듯 옆으로 쓰러졌다. 초당은 다시 삼사를 바라보았다. 삼사는 천천히 붉은 방갓을 벗었다. 그들의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이십 년을 함께 한 수하들이었다. 생명조차 아끼지 않고 자신만을 따르던 수하들이기도 했다. 초당의 얼굴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곧 가마. 먼저 가 있거라." 초당은 쌍수를 흔들었다. 마단동자공(魔丹童子功)의 막강한 양강공력(陽剛功力)이 그의 손짓에 따라 흘러나왔다. 퍼퍼퍽---! 가벼운 파육음과 함께 삼사의 머리가 수박처럼 부서졌다. 삼사의 입가에 매달린 웃음들이 박제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새하얀 눈밭에 후드득 뿌려지는 선혈... 초당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네 구의 시신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윽고 초당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매서운 눈매 끝에는 한 방울 눈물이 달려 있는데, 입가에는 환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초당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정중히 포권했다. "대내(大內) 비각 소속, 종오품(從五品) 무반(武班) 초당! 무양문의 서문 문주께 도전하오!" "허락한다!" 서문숭은 엄숙한 목소리로 초당의 명예로운 죽음을 윤허했다. 二十八章 兩宗後裔 (1) 물, 그것도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뜨거운 물 속에 고개를 처박고 있기란 쉬 운 일이 아니었다. 그 점은 아무리 뛰어난 호흡법(呼吸法)을 지닌 무인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푸아--- 석대원은 고개를 힘차게 치켜들었다. 뜻밖의 자유를 얻은 물방울들이 맑게 부서지며 허공으로 날아올라, 욕실에 가득 찬 뿌 연 수증기 속으로 사라졌다. 석대원은 욕조 가장자리에 뒤통수를 기댔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촉수처럼 얼굴에 휘감겼지만, 가녀린 물의 무게가 싫지는 않았다. 지난 수십여 일... 돌이켜 보면 몸 씻을 기회조차 변변히 가질 수 없었던, 너무나도 바쁘게 흘러간 나날 들이었다. "후우---" 석대원은 천장을 향해 큰 숨을 토해냈다. * * * 가을이 끝나가던 어느 날, 장성(長城) 인근 곡리(穀里)의 싸움. 내로라 하는 군웅(群雄)들에게 둘러싸인 제갈휘는 기진한 채 쓰러졌고, 석대원은 알 수 없는 분노와 혐오감에 휩싸인 채 검을 뽑았다. 순간, 석대원은 변했다. 자유로운 빛이 가득하던 두 눈동자는 무저갱에서 기어 나온 마귀 같이 시뻘개졌고, 부드러운 여유가 유쾌하게 몰려다니던 얼굴은 철갑을 씌운 듯 빙결(氷結)되었다. 소림의 광비노선사(曠非老禪師)가 염려한 바 있던 살기의 불꽃이 점화된 것이다. 기광(棋狂) 과추운(過秋雲)을 위시한 열세 명의 무인들... 무학의 고수 아닌 자 없었고, 일방(一方)의 패주 아닌 자 없었다. 하지만 석대원은 그들의 화려한 이력(履歷)을 공염불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그렇게 강하고 잔인했다. 개방의 칠결제자(七結弟子)이자 두 주먹이 질풍처럼 빠르다 하여 쌍풍개(雙風개)라는 별호가 붙은 견위(堅威). 그는 필생의 절기로 생각하던 개방의 파옥권(破玉拳)을 전개해 석대원의 머리를 단숨 에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석대원의 거대한 신형이 흐릿해진 순간, 그의 두 주먹은 몸통으로부터 잘려 나 갔다. 혈랑검법 중 이로일살(二路一殺)이었다. 스물 여덟이란 젊은 나이로 추왕(鎚王)이란 칭호를 얻은 유성추(流星鎚)의 달인 전재 겸(田材兼). 제갈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결귀나(結鬼拿)의 수법으로 석대원의 검을 봉쇄하려고 했다. 하지만 단금절옥(斷金切玉)의 보검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보검이 석대원과 같은 검 수의 손에 쥐어지면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전재겸은 손에 쥔 유성추처럼 토막난 뒤 에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뿐일까? 용봉단(龍鳳團)에서도 용사 중의 용사로 꼽히는 백리공(百里共)과 장독비(莊獨臂), 소 주제일퇴(蘇州第一腿) 윤여관(尹與款), 다섯 자루 비도(飛刀)를 귀신처럼 잘 쓴다는 오 사소야(吳四少爺)...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군웅들의 영수(領首)이자 강호오괴(江湖五怪)의 대형이라는 기광 과추운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 * * 머리 위에 가득한 수증기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석대원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 다. 모용풍의 절규가 그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 석 공자! 이럴 수 있소이까? * * * 그날, 석대원이 열두 개째의 목숨을 황천길로 보내고 돌아섰을 때... 과추운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노호성(怒號聲)을 터뜨리며 석대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제갈휘와 격전을 치르는 동안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였다. 바닥난 진력으로 전개한 붕천십삼장(崩天十三掌)은 수수깡 하나 부러뜨리지 못할 정 도로 미약했고, 한쪽 다리로 전개한 취선답월보(醉仙踏月步)는 굼벵이의 조롱을 살 정 도로 느렸다. 석대원은 왼손을 쭉 뻗었다. 혈옥수의 무자비한 공력이 과추운의 갈비뼈를 산산이 으스러뜨릴 때, 석대원의 입가 에는 악귀(惡鬼)의 그것과도 같은 잔소(殘笑)가 맺혀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모용풍이 절규하며 석대원에게 달려든 것은... - 석 공자! 이럴 수 있소이까? 형님만은, 과(過) 형님에게만은 독수(毒手)를 삼가해 달라고, 내가... 이 모용풍이 그렇게 부탁했건만... 모용풍은 석대원의 멱살을 움켜쥐고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하지만 이때의 석대원은 이미 스스로 일으킨 살기에 영혼을 지배당한 일개 마인(魔 人)에 불과했다. 살기의 목표는 모용풍이라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석대원의 왼손이 또 한 번 혈광을 토해냈다. 만약 그 기색을 눈치 챈 한로가 모용풍을 보호하지 않았던들, 모용풍 또한 혈옥수 아 래 무사할 수 없었으리라. 몸을 날려 모용풍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낸 한로는 내공을 한껏 끌어올려 외쳤다. - 소주! 정신차리시오! 견심공부(堅心功夫)를 익힌 한로의 일갈에는, 불가(佛家)의 사자후(獅子吼)처럼 사기 (邪氣)를 물리치는 항마지력(降魔之力)이 실려 있었다. 그 덕분에 석대원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극단까지 치달려간 후였다. 한로와 제갈휘의 당황한 눈빛, 모용풍의 경악에 찬 표정... 기식이 엄엄한 과추운, 그리고 사지가 잘려 널브러진 열두 구의 시신... 모두가 한 순간의 살기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석대원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 * * 석대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 허공을 부영(浮泳)하는 수증기는 여전히 탐욕스러운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제갈 형님을 죽였을 것이다! 석대원은 그날의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이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긋지긋한 자기 혐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이었다. 단지 결,과,론,이었다. 당시의 석대원이 어떤 존재였던지에 대해서는, 세상 누구보다도 석대원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피에 굶주린 혈귀(血鬼)에 불과했다. 누구를 구하겠다, 아니면 누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식의 명분은 결과 이후에 급조된 -그것도 석대원 자신에 의해 급조된- 허울 좋은 자위(自慰)에 불과했다. 아무리 부정하려 애를 써도, 당시의 그는 몸 속 어느 구석에서 움튼 살기에 휘둘린 그런 저급한 살귀(殺鬼)에 불과했던 것이다. 망할! 석대원은 물 속 깊이 머리를 파묻었다. 언제부터인가 살기는 석대원에게 있어서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업(業)이었고, 스물 여섯 살 그의 영혼은 이러한 업까지 직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지는 못했다. (2) 퉁퉁. 방문이 재미있는 소리를 냈다. '퉁퉁'이든 '똑똑'이든, 방문이 저 혼자 소리를 낼 리는 만무했으니, 누군가가 방안으 로 들어오고 싶다는 신호였다. 석대원은 방문 쪽을 바라보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 잠깐만..." 이미 목욕을 끝내고 욕실을 나선 그였지만, 벗어둔 황의가 너무 낡고 더러워서 입기를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상체는 벗은 데다가 하체 또한 욕건(浴巾)으로 대충 가리고 있었으니, 사람을 맞이할 수 없는 처지임에는 분명했다. 그런데 문을 두드린 사람은 석대원의 처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끼익--- 문이 살짝 열리고 얼굴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석대원?" 난데없이 이름을 불린 석대원은 흠칫 놀랐다. "맞구나! 와! 제갈 할아버지 말처럼 진짜로 크다!" 얼굴은 손뼉이라도 칠 듯이 좋아했다. 하지만 석대원은 별로 좋아할 수 없었다. 나무는 나이테요, 사람은 얼굴이라고 했다. 비록 방안으로 들어온 것은 얼굴뿐이었지만, 나이를 판단하는데 얼굴보다 더 좋은 자 료가 있을까?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석대원의 이름을 불러 젖힌 얼굴은 기껏해야 예닐곱 살, 그것도 계집애의 것이었다. 예닐곱 살 계집애에게 함부로 이름을 불리고도 좋아할 어른은 드물 것이다. 그런 석대원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는지, 새하얀 손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와 계집애의 머리통에 꽁, 소리나게 알밤을 먹였다. "관아(瓘娥)야! 무례하게 굴면 혼난댔지?" "아얏!" 알밤을 먹은 계집애는 한 손으로 머리통을 감싸안았다. 그러자 툭, 소리와 함께 한 개의 지팡이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지팡이를 바라본 석대원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길이가 두 자쯤 되는 지팡이는 한쪽 끝에 헝겊으로 친친 감은 삼각형 모양의 손잡이 가 달린 것이었다. 석대원은 이런 지팡이가 어디에 쓰이는지 알고 있었다. "내 지팡이!" 관아라 불린 계집애는 손을 내밀어 떨어진 지팡이를 집으려 했다. 하지만 지팡이 없이 움직이는 것은 익숙하지 못한 탓인지, 그만 중심을 잃고 앞으로 엎어졌다. "위험해!" 깜짝 놀란 석대원은 아이를 부축하려 했다. 이때 돌연 아이의 몸이 번쩍 들려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방금 전 알밤을 먹였던 새하얀 팔이 아이의 허리를 능숙하게 감아 올린 것이다. 이 일련의 상황은 반쯤 열린 방문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석대원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공자께서는 이 옷으로 갈아입으시지요." 방문 너머로부터 곱게 개어진 백의 한 벌이 들이밀어졌다. '이런!' 순간, 석대원은 자신이 아직 벌거벗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백의를 받아 입었다. 끼는 느낌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치수는 얼추 비슷해, 행동에 큰 제약은 받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그는 옷에 대해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맞는 옷 구하기가 하늘에서 별따기인 덩치를 지닌 죄였다. 석대원은 소매를 접어 팔꿈치까지 걷어붙이는 것으로 새단장을 끝냈다. "어험! 들어오시지요." 방문이 완전히 열렸다. 방문밖에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관아라 불린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 새하얀 이마와 깨끗하게 빠진 콧날이 차분한 성정(性情)임을 말해주는 여인이었다. "석대원이라 하오. 새 옷을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석대원은 수박처럼 큼직한 주먹을 모아 여인을 향해 들어 보였다. 여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그의 포권지례(抱拳之禮)에 답했다. "목연(木娟)이에요. 이곳 무양문에서 호공당(戶工堂) 부당주(副堂主) 직을 맡고 있지요." 호공당의 부당주라면 비록 요직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고급 간부임에는 분명했다. 두어 살은 어려 보이는 목연이 그렇게 높은 직책을 맡고 있다는 사실은, 석대원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의외로운 일이었다. 이때, 목연에게 안겼던 관아가 칭얼거렸다. "목(木) 이모! 나 내릴래! 빨리 내려줘!" 목연은 관아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에 무례하게 굴면 또 혼내줄 거야." "알았어! 빨리 지팡이나 집어 줘!" 관아의 손에는 아까 바닥에 떨어뜨린 것과 같은 모양의 지팡이가 하나 들려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내리기 위해서는 두 개 모두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러한 짐작이 석대원의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만들었다. 목연이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집어주자 관아는 익숙한 손길로 두 개의 지팡이를 겨 드랑이에 끼운 뒤, 그것으로써 바닥을 짚고 섰다. 앙증맞은 치마 아래로 언뜻 비치는 관아의 두 다리는 두 개의 지팡이 사이에서 힘없이 건들거리고 있었다. 또각. 또각. 비록 경쾌했지만 누구도 경쾌하다 여길 수 없는 처량한 지팡이 소리와 함께, 관아는 석대원에게로 다가왔다. "안녕!" 관아는 고개를 들었다. 사 척도 안되는 관아가 칠 척이 넘는 석대원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있는 대 로 뒤로 젖혀야만 했다. "아저씨가 제갈 할아버지가 데려온 석대원이지? 난 서문관아(西門瓘娥)야! 다들 관아라고 부르니까 아저씨도 관아라고 부르면 돼." 서문(西門)...? 대부분의 복성(復姓)이 그렇듯, '서문' 또한 매우 드문 성이었다. 이곳이 무양문임을 감안한다면 의미심장한 성이기도 했다. 석대원은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목연을 바라보았다. - 관아는 문주님의 하나뿐인 손녀죠. 서문숭의 손녀... 목연의 전음(傳音)은 석대원을 기이한 감정 속으로 밀어 넣었다. 혈통으로 논하자면 능히 강호 제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서문씨(西門氏)였다. 강남 제일의 문파 무양문. 추정 불능의 교세(敎勢)를 자랑하는 백련교. 그리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서문숭... 서문관아라는 아이의 배경은 이렇듯 막강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저 아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팡이 한 쌍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아이에게... 아이를 바라보는 석대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 애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하면 안 돼요! 갑자기 목연의 날카로운 전음이 석대원의 귀청을 두드렸다. 석대원은 아차, 싶어서 관아의 눈치를 살폈다. 관아의 동그랗고 조그만 얼굴에는 기이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의심과 실망이 반반씩 뒤섞인 듯한... "아저씨?" 얼굴에 나타난 기색과 동일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아저씨도... 관아가 이래서 싫지?" 관아는 겨드랑이에 끼운 지팡이들을 바라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대원은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아니! 아니다, 관아!" "모두들 똑같아... 관아는 다 알아." 아이는 쓸쓸하게 말했다. 석대원은 심장이 멎을 정도로 당황하고 말았다. "아저씨는 관아가 싫지 않아!" 절절함이 녹아 든 목소리였다. 하지만 한 번 떠난 아이의 마음을 다시 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 같았다. "거짓말 마." 목발을 놀려 천천히 돌아서는 관아의 작은 어깨에는 세상의 모든 슬픔이 모두 얹혀 있 는 것 같았다. '크, 큰일이다!' 관아가 누구의 손녀라는 것은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석대원에게 있어서 예닐곱 살 짜리 목발을 짚는 계집애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는 사실은, 십팔층 지옥에 떨어져도 한마디 항변 못할 대죄와 다름이 없었다. 다시 말해 체면이고 뭐고 따질 상황이 아닌 것이다. "관아야---! 아저씨 좀 보렴---!" 석대원의 목소리가 확 틀려졌다. 과장된 높낮이에 길게 끌어주는 말꼬리. 영락없는 시장 바닥 약장수의 목소리였다. "...?" 아무리 상심했다 한들 나이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어린애는 어린애여서, 관아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관아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도 우스꽝스럽지만, 하고 있는 짓은 훨씬 더 우스꽝스럽다. 가랑이 사이로 집어넣은 오른팔은 다리 대신에 바닥을 짚었는데, 두 다리는 기묘하게 옆으로 들어올려 목덜미를 감았다. 그 커다란 몸집으로 이런 자세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그게... 뭐야...?" 관아는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이상한 몰골로 변해버린 석대원에게 물었다. 뭐냐고? 석대원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 나왔다.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닌, 어떻게 해서든 아이의 관심을 끌어볼 요량으로 취해본 자세 에 불과했다. 뭔지 알 턱이 없었다. "이, 이게 뭐냐 하면 말이지..." "코끼리란다." 목연이 가련한 청년 하나를 구했다. 관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했고, 석대원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코끼리?" "그래, 코끼리. 관아도 그림으로 봤지? 코가 길쭉하고 귀가 이렇게 넓적한..." 목연은 손바닥을 귀에 대고 팔랑거렸다. "정말...?" 관아는 석대원을 보았다. "그, 그럼!" 석대원은 목연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목에 두른 두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야 만 했다. 인간으로서는 차마 하기 힘든 고난도의 동작이었지만, 아이에게 웃음을 되찾아주기 위 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정말이구나!" 드디어 관아가 활짝 웃었다. 관아는 다리를 못쓰는 것 외에는 특별한 구석이 없는 아이였다.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두 다리 때문에 남들이 자기를 귀찮게 여긴다고 우울해하 지만, 조금이라도 색다른 일이 생기면 금방 우울함을 떨쳐버리고 본연의 천진한 모습 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아이인 것이다. 성공이다! 석대원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뻤다. "잠시 후 환영연회(歡迎宴會)가 시작합니다. 석 공자께서도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길 바랍니다." 목연은 그제야 이곳을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2) 납덩이처럼 묵직한 앙금이 머릿속 저 밑바닥에 늘어붙은 것 같은 불쾌한 속에서 석대 원은 눈을 떴다. "으으..." 어금니를 깨물 새도 없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지독한 기침(起寢)은 난생 처음이었다. 숙취는 굶주린 들개처럼 그의 몸뚱이 곳곳을 물어뜯고 있었다. "소주! 깨셨소이까?" 늙수그레한 목소리... 그것의 임자가 한로임을 떠올리는 데에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정도로 석대원의 상태 는 정상이 아니었다. "쯧쯧! 이거나 드시오." 나직한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하얀 물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석대원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큼직한 사발... 하얀 사기로 만들어진 사발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뭔가 시원한 것이 담겨 있을 것 같았다. 석대원은 창기(娼妓)처럼 달라붙는 현기증을 애써 떨치며 침상에 파묻힌 상체를 일으 켰다. 사발에는 석대원의 예상대로 시원한 것이 담겨 있었다. 타는 듯한 목구멍을 적셔준 액체는 숙취에 좋다는 한밀수(寒蜜水)였다. 숨도 쉬지 않고 한 사발을 들이키고나니 제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침상 옆에 구부정한 모습으로 서 있는 한로도 그제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는 아주 소처럼 마시더구려. 무슨 짓을 했는지는 기억나시우?" 어젯밤...? 석대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이 분명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마신 것도 난생 처음이었다. 처음에 제갈휘와 점잖게 마신 것까지는 좋았다. 석대원의 주량도 적은 편이 아니어서 두주불사(斗酒不辭), 말술 정도는 쉽게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호교십군 중 몇 사람이 끼여든 순간부터 석대원의 자신감에 보이지 않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소문처럼 일당백의 무인인지는 겪어보지 못했으니 알 도리가 없지만, 일당백의 주당(酒黨)인 것만은 분명했다. 서문숭이 껄껄거리며 다가와 잔을 내민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탁발승이 가지고 다니는 바리때처럼 큼직한 금잔(金盞)이었던 것 같았다. 석대원이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 후는 그믐밤처럼 깜깜했다. 뭘 했더라...? 애써 기억하려고 하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뱃속이 메슥거렸다. 석대원은 더 이상 가련한 몸뚱이를 혹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르겠군요. 이거나 한 그릇 더 줘요." "쯧쯧!" 한로는 석대원이 내민 사발을 받아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을 나서기 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주, 이제 큰일났소." 한로의 말은 걱정인지 비아냥거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무슨 뜻일까? 하지만 석대원의 사고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쇠뭉치로 세게 얻어맞았을 때처럼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석대원은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감싼 뒤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그리고 양 팔뚝에 힘을 주어 머리통을 세게 조였다. 그러고 있으니 조금 나았다. 물론 윙윙거리는 느낌이야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지만... 삐이이---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로가 돌아온 것이려니 생각한 석대원은 고개를 쳐들지 않았다. 들어온 사람은 한로가 아니었다. 또각. 또각. 귀에 익은 소리였다. 석대원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내 사슴처럼 여리고 샛별처럼 반짝이는 한 쌍의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깼어? 괜찮아?" 서문관아였다. "괜찮아." 석대원은 건성으로 대꾸하며 머리를 다시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평소의 그는 지장보살(地藏菩薩)처럼 자애로운 사람이지만, 이 순간의 그는 숙취에 신 음하는 별볼일없는 주정뱅이에 불과했다. 서문관아는 아이답지 않게 남의 눈치를 잘 살피는 아이였다. 말라비틀어진 두 다리가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아이는 석대원의 상태가 대단한 것처럼 괜찮지 않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많이 아파?" 간만에 생긴 재미있는 친구였으니, 서문관아는 어떻게든 석대원을 위로해주고 싶었으 리라. "이거 먹어봐." 힘들게 침상으로 다가온 관아는 지팡이가 빠지지 않도록 겨드랑이를 꼭 붙이며 손을 내밀었다. 석대원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나뭇잎처럼 조그만 아이의 손바닥 위에는 손톱 만한 크기의 금빛 환약(丸藥) 한 알이 놓여 있었다. "이게..." "쉿!" 서문관아는 급히 석대원의 말을 막고서는 그의 귓가에 입을 바싹 갖다댔다. "아침마다 내가 먹는 약인데... 음... 몸에 좋은 거래. 근데 오늘은 아저씨 줄려고 몰래 감춰놨어."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이었다. 석대원은 아이가 왜 이렇게 작게 얘기하는지 궁금했다. 그의 궁금증은 곧 풀어졌다. "관아! 오늘도 약을 안 먹었구나!" 문밖에서 여인의 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서문관아의 보모인 목연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자 서문관아는 깜짝 놀라며 내밀었던 손바닥을 오므렸다. "약을 거르면 할아버지한테 이른다고 했지?" "이, 이모!" 서문숭이 무섭기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서문관아는 울상이 되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오셨으면 들어오시구려, 목 소저." 석대원이 말이 끝나자, 목연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방안에 감도는 퀴퀴한 술냄새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서문관아에게 다가와 환약을 빼앗았다. "벌써 몇 번째니? 약이 조금 써도, '몸에 좋다'라고 생각하면서 꾹 참으라고 했잖아!" "오늘은 써서 안 먹은 거 아냐!" "요것이!" 목연은 주먹을 쥐고 알밤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평소의 서문관아라면 이 대목에서 두 눈을 꼭 감고 새끼 자라처럼 목을 움츠려야 정 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정말이야! 아저씨 줄려고 안 먹은 거야!" 서문관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때릴 테면 때리라는 식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목연은 서글서글한 눈으로 서문관아의 당돌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서문관아는, 거짓말을 하고도 이렇게 우길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결국 목연은 주먹 쥔 손을 스르르 풀고 말았다. "이모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야단이야! 아저씨는 빨리 나아서 나랑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서문관아의 득의양양한 얼굴은 석대원의 한 마디에 휴지처럼 구겨질 수밖에 없 었다. "약속? 무슨 약속인데?" "나랑... 약속한 거... 기억 안 나?" 아이의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기억이 날 리는 만무했다. 석대원은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목연을 바라보았다. "공자께서는 어제 일을 기억 못하시는군요." 목연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인 즉, 어제 연회장에서 떡이 될 정도로 술에 취한 석대원은 서문관아를 어 깨에 태우고 '구름 타기' 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제가 '구름 타기'를 했다고요?" 석대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구름 타기'란 그가 잘 아는 놀이였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 석안(石安)은 아이들 -그와 석대전, 그리고 막내 석지란을 가리킨다. 형 석대문도 그런 혜택을 누렸는지는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당시 석대문은 이미 의젓한 소년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이 칭얼거릴 때마다, 아이들을 어깨에 올려놓고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는 재주를 부리곤 했다. 반응은 세 아이가 전부 틀렸다. 소전(少全)은 백짓장처럼 핼쑥해진 얼굴로 한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소란(少蘭) 은 무섭다고 악을 빽빽 쓰며 석안의 구레나룻을 쥐어뜯었다. 오직 즐거운 아이는 석대원뿐이었다. 그는 정말 구름을 타는 것처럼 짜릿함을 느꼈으니, '구름 타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 도 바로 그였던 것이다. 물론 가장 많이 구름을 탄 아이가 그였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어제 술자리에서 그가 서문관아를 목말 태우고 그 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서 말이다. 게다가 날이 밝으면 또 해준다는 약속까지 했다고 한다. 하나뿐인 손녀를 벽(璧) 구슬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서문숭의 기분이 어땠을까? 차마 말리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얼마나 애태웠는지, 안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어제는 너무 취해 추태를 부린 것 같군요." 민망해진 석대원은 뒤통수를 긁었다. "별말씀을... 여독(旅毒)이 채 풀리지 않으신..." 무슨 까닭일까? 목연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석대원의 얼굴을 멍청히 응시했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비록 얼굴을 익힌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목연의 성정이 얼마나 차분한지 잘 아 는 석대원으로서는 무척이나 의외로운 일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공자님께서는 그, 그 약속도 기억 못하시는 게 아닌가요?" 약속? 또 무슨 약속? 석대원은 거듭되는 '약속'에 슬그머니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짜증이었다. 술에 취해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많은 약속을 남발하고 다닌 것일까? "소저와도 무슨 약속을 했나요?" 짜증 때문인지 석대원의 목소리는 어딘지 퉁명스럽게 들렸다. "아, 아니! 저하고 약속하신 게 아니에요." 목연은 붉어진 얼굴을 황급히 옆으로 흔들었다. 사실 그녀는 석대원에게 약간의 호감 -물론 그녀는 강력하게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이 있었을 것이다. 무양문이라는 경직된 닫힌 공간 안으로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석대원은 신비로운 존재였다. 더구나 내심 서문관아를 무척 애처롭게 여기는 목연이었다. 석대원이 서문관아에게 베푼 자비심은, 호감을 넘어 감사마저도 느끼게 할 정도로 따 스하고 훈훈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석대원과 어떤 약속을 했다면, 장담할 수는 없지는 아마도 목연이 싫어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가 언급한 '그 약속'은 그런 감미로운 일이 아니었다. 감미롭기는커녕, 삭막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무서운 일이었다. "다행이군요." 석대원은 여인의 섬세한 심리를 살필 수 있을 만치 경험이 풍부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목연의 혼란스러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너무도 간단히 '다행이군요'라고 말 해버렸다. 무안을 느꼈는지 목연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이상하다...?' 서문관아는 그러한 목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백설처럼 뽀얗던 목 이모의 얼굴이 왜 빨개진 것일까? 아무리 눈치가 빠르다 하더라도 일곱 살 짜리 아이의 조그만 머리로 과년(過年)한 남 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을 이해하기란 무리였다. "그러면 소생이 대체 무슨 약속을 한 거죠?" 석대원이 물었다. 대답은 방문 쪽에서 날아왔다. "쯧쯧! 한심하시오, 소주!" 방문 앞에는 하얀 사발을 든 한로가 서 있었다. "아무리 취중(醉中)이기로서니, 서문 문주 같은 사람과 비무를 약속하고 새까맣게 잊 어버리는 사람은 천하에 소주밖에는 없을 거외다." 석대원의 입이 딱 벌어졌다. 말 그대로 청천벽력(靑天霹靂)... 그는 큰일을 낸 것이다. * * * 오장(五臟)과 뇌문(腦門)에 엉긴 혼탁한 주기(酒氣)는 운공(運功)에 있어서 결코 작 은 장애가 아니었다. 석대원은 운공을 통한 몰아(沒我)의 삼매경(三昧境)에 들기 위해 다른 날보다 갑절이 넘는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후우---" 석대원의 호흡이 조금씩 조금씩 길어졌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호흡은 더욱 더 고요해졌고, 육체를 억압 하던 장애들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석대원은 드디어 자아(自我)가 사라지는 경지에 들었다. 스으으--- 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속인들이 알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환희라도 발견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의 얼굴에는 가을날 구름 같은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을 움직이는 속된 힘과 인간을 유지하는 속된 균형은, 이 순간 그에게 있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의 영육(靈肉)은 전혀 다른 우주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우주를 움직이고 또 유지하는 법칙은 지상의 어떤 법칙보다도 올바르고 깨끗했다. "흐으읍---" 석대원은 아랫배 깊숙이 밀어 넣었던 한 모금의 숨을 흉강(胸腔) 쪽으로 천천히 끌어 올렸다. 뿌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대맥(大脈)을 꽉 채우며 돌아다니던 진기가 점점 그 속도를 빨리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오래 전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타통(打通)된 상태, 운공이 일단 제 궤도에 오르자 진기는 거대한 강물처럼 도도히 사지백해(四肢百骸)로 뻗어나갔다. 잠시 후, 석대원의 머리 위로 증기와도 같은 허연 김이 어렸다. 허연 김은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단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만 아니라, 한껏 물 오른 생명체처럼 역동적(力動 的)으로 보였다. 그것은 때로는 신령스러운 뱀처럼 똬리를 틀고 꿈틀거렸으며, 때로는 비온 다음날의 꽃봉오리처럼 충일(充溢)하게 피어났다. 일 각쯤 지난 뒤, 허연 김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신비하게 사라졌다. 하나의 탄생과 하나의 종말... 그것은 비록 사각의 작은 방에서 이루어진 역사(歷史)였지만, 더러운 먼지로 가득 찬 인간의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잠시 머물렀던 작은 우주, 그 청정(淸淨)의 흔적이었다. 이제 우주는 닫혔다. 세계의 통로 또한 사라졌다. 그리고 석대원은 눈을 떴다. "끝났나?" 굵은 목소리가 인세(人世)로 되돌아온 석대원을 반겼다. "언제 오셨습니까?" 석대원은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풀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조금 되었네. 한 노인이 특별히 들여보내 주더군." 침상 앞에서 석대원을 향해 싱긋 웃어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갈휘였다. 그는 의자 하나를 돌려놓고 등받이에 턱을 괸 채 석대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떤가? 숙취는 좀 가셨는가?" 운공하는 광경을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그것을 본 다음에야 이런 물음은 필요가 없었다. 이미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고 소유할 수 있는 석대원이었다. 주독(酒毒)이 아니라 그보다 십배 더한 독이라 할지라도, 그 조화지력(造化之力) 앞 에서는 창해(滄海)에 던진 한 톨 좁쌀처럼 오그라들고 마는 것이다. "대충 사람 꼴은 된 것 같군요." 석대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때? 자신은 있는가?" "자신이 있을 턱이 없지요. 서문 문주께서 어여삐 봐주시기만을 바랄 수밖에요." "그렇게 맥없는 소리는 곤란해. 칼을 잡았을 때 문주를 술잔을 잡았을 때의 문주로 생각하면 큰코다칠 걸세." "그렇게 겁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 그래도 소제는 지금 충분히 질린 상태니까요." 하지만 석대원의 얼굴은 겁에 질린 사람의 그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제갈휘의 입가에 미소 한 조각을 만들어 주었다. "내가 좋은 거 하나 일러주지." "좋은 거요?" "그래 좋은 거!" 제갈휘는 얼굴을 석대원에게로 바싹 갖다대었다. "과거 나는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문주의 칼을 상대하다가 하마터면 황천길에 오를 뻔했네." 석대원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제갈휘라면 당금 강호에서 '초일류'라는 칭호를 들어 마땅한 무인... 그런 제갈휘를 황천길 문턱까지 몰아넣었다는 서문숭의 칼이란 과연 얼마나 거대하고 얼마나 강한 것일까? 제갈휘의 속삭임은 계속되었다. "문주와 겨루다보면, 어느 때고 그의 칼이 가볍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걸세." 가볍게 느껴지는 순간...? 석대원은 잠시 그 말을 되새겨 보았다. "조심하게. 바로 그때를..." 제갈휘는 한 자씩 힘주어 말했다. (3) 서문숭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첫눈이 내렸던 어제와는 달리 쾌청한 날이었다. 겨우 유시(酉時) 무렵인데 서녘 하늘에는 은근한 홍기(紅氣)가 감돌았다. 겨울날 낮이라는 게 원래 이랬다. 노루 꼬리처럼 터무니없이 짧은 것이다. 서문숭은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붉은 노을과 대조를 이루는 청죽림(靑竹林), 그 짙푸름을 배경 삼아 유유하게 서 있 는 거구의 청년 석대원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석대원은 눈처럼 깨끗한 백의를 입고 있었다. 백의는 뒷전의 청죽림과 무척 잘 어울려, 그의 주위는 온통 푸르른 기운[靑氣]이 넘실 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방금 전 노을을 보았기 때문일까? 서문숭은 그러한 청기(靑氣) 속에서 한 줄기 선명한 붉은 빛깔을 볼 수 있었다. 청(靑), 그리고 적(赤). 그 두 색깔이 주는 이질적인 심상(心象)은 서문숭으로 하여금 청춘을 치달렸던 길고 긴 시간을 한순간에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었다. 사십여 년 전 어느 날. 곤륜산 무망애(霧望崖)에서 열린 곤륜지회(崑崙之會). 삼 일 밤낮을 겨루어 승부를 가릴 수 없었던 네 명의 절세고수들. 하지만 서문숭은 네 명 중 오직 한 사람만이 모두의 위에 우뚝 설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백련무학(白蓮武學)에 대한 자부심으로도, 그리고 대 악(大嶽)보다 높은 그의 자존심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혈랑곡주(血狼谷主)! 오직 한 가지 검법(劍法)과 오직 한 가지 수법(手法) 만으로 무양문주 서문숭과 신무 전주(神武殿主) 소철(蘇喆), 그리고 잠룡야(潛龍爺) 이악(李嶽)의 천종만기(千種萬技) 를 상대한 괴인! 붉은 늑대탈. 붉은 장포. 붉은 검. 붉은 손... 그날 이후 서문숭은 혈랑곡주라는 존재를 되새길 때마다 붉음[赤]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니, 솔직히 말한다면 그것은 그의 의지와 무관했다. 악몽... 정체 모를 거대한 힘에 짓눌린 채 괴로워하다가 식은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깨어날 때, 그의 머릿속 한 귀퉁이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는 악몽의 잔재 역시 붉음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색깔의 차원이 아니었다. 하늘 끝에 있다는 거대한 벽이었다. 바다 끝에 있다는 끝없는 낭떠러지였다. 서문숭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초월의 마력(魔力)이었다. 청년 서문숭은 절치부심(切齒腐心)했다. 어떤 존재에 위압당한 채 평생을 보내기에는 그의 영혼은 너무나도 굴강했다. 단련, 또 단련... 수많은 해가 내딛는 발 아래에서 저물었고, 수많은 달이 휘두르는 칼끝에서 퇴색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서문숭을 일러 '무학에 미친 사내'라고 불렀다. 하지만 '무학에 미친 사내'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붉음 -한 남자의 청춘을 옭아매 그의 인생까지도 뒤바꿔버린 그 귀신 들린 붉음- 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사십여 년이 지난 오늘. 서문숭은 드디어 그 귀신 들린 붉음을 이어받은 청년과 마주서게 된 것이다. 저리도 푸르른 기운에 휩싸여 서 있는... "허헛..." 웃음이 나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 * 석대원은 온몸의 관절을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 두 시진에 걸친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운공 덕분에 몸의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문득, 지난 반년간의 강호행(江湖行)이 떠올랐다.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범인(凡人)이라면 평생을 가도 만날까 말까 한 무인들이 석대원의 곁을 스쳐갔다. 그 중에는 구양현(歐陽賢), 적송(跡悚) 같은 동배의 청년 영웅들도 있었고, 광비대사 (廣非大師), 모용풍(慕容風), 과추운(過秋雲) 같은 전설적인 노기인들도 있었으며, 진 금영(陳錦英)이나 여문통(余文通) 같은 비각의 적도(敵徒)들도 있었다. 모두가 한 시대와 한 지역을 풍미했고, 또 풍미할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무공의 강약만을 놓고 논한다면 어떨까? 그들 중 검왕(劍王) 연벽제와 고검(孤劍) 제갈휘를 능가하는 사람이 있을까? 석대원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들 두 사람은 모용풍이 평한 새로운 천하오대고수 중에서도 수좌를 다툴 만치 절세 의 검호(劍豪)요, 위대한 무인이었다. 석대원은 또 생각했다. 만약 그들 두 사람과 자신이 진검(眞劍)을 겨뤘다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물론 승부란 바람난 과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제 아무리 강한 고수라 할지라도 일순간의 방심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고, 그 틈을 비집을 수만 있다면 한낱 촌부(村夫)의 손에 들린 녹슨 낫이라 할지라도 그 고수의 명 줄을 끊을 수 있는 것이다. 승부의 의외성이란 바로 그것에 기인한다. 하지만 객관적인 전력을 놓고 볼 때, 석대원은 자신이 그들 두 사람의 상대로 부족함 이 없을 것이라 자부했다. 내공에 있어서도, 정력(定力)에 있어서도, 그리고 검학에 있어서도 석대원의 수련은 결코 그들에게 뒤질 이유가 없었다. 단지 뒤지는 것이 있다면 실전에 대한 경험뿐... 그리고 경험의 격차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라면...? 석대원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연벽제와 제갈휘를 폄(貶)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그들을 맞아 정말 보기 드문 승부, 명승부를 연출할 자신이 있었다. 이제 석대원은 새로운 상대를 맞이할 때가 왔다. 석대원은 고개를 들어 연무장 맞은편에 산악처럼 꿋꿋한 자세로 서 있는 감청색 무복 차림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무양문주 서문숭. 백련교가 배출한 사상 최강의 무인이라 알려진 대종사이자, 곤륜산 무망애에서 열린 곤륜지회가 천하무림을 향해 공포한 오대고수 중 일인... 그것이 벌써 사십여 년 전의 일이니, 지금의 경지란 불문가지(不問可知)... 어쩌면 이미 무신(武神)의 반열에 올랐을지도 몰랐다. 만약 연벽제와 비교하면 어떨까? 또 제갈휘와 비교하면 어떨까? 모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들이니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서문숭이 두 사람의 아래는 아니리라. 강호 출도 이후 최고의 상대...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더 끓어오르는 피! 전신 모공을 통해 확확 뿜어 나오는 투지! 그것이 무인(武人)이었다. 무인의 피요, 무인의 투지였다. 득- 으득- 석대원은 근육과 뼈마디가 퉁기는 기분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자신의 몸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소나무 등걸 같은 목덜미에서 시작되어 가죽 부대처럼 부풀어오른 어깻죽지, 구렁이 같은 근육이 꿈틀거리는 팔뚝, 그리고 웬만한 사람의 머리통만큼이나 큼직한 주먹에 이르는 활력의 선(線)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적당한 긴장감 속에서 최적의 상태에 도달한 육체. 너무도 맑고 투명해 존재감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정신. 이 정도면 상대가 서문숭이라 할지라도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후훗..." 웃음이 나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 * "그가 과연 문주님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제갈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곧 한 쌍의 고운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눈동자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의 주인이 나이답지 않게 정적(靜的)인 심성의 소유자임을 아는 제갈휘로서는 의외의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석(石) 아우를 걱정하는 건가? 얼굴을 익힌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제갈휘는 내심 고소(苦笑)를 지었다. 요번에 새로 얻은 의동생은 미욱해 보이는 덩치와는 딴판으로 여자 후리는 데에 남다 른 소질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눈동자의 주인, 목연에게 그가 아는 대로 말해 주기로 작정했다. "석 아우의 깨달음은 이미 내가 평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지. 지금 이 무양문 내에서 문주와 일 대 일로 비무할 수 있는 사람은 세 명 정도인데, 석 아우가 그 중 한 사람이네." 목연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어렸다. 호교십군에서 세 번째 서열을 차지하던 초당, 그 기경(奇驚)할 마공(魔功)으로도 십 초를 버틸 수 없었던 것이 서문숭의 가공할 무위였다. 석대이 서문숭을 상대가 될 수 있다는 제갈휘의 말은 그녀가 아닌 누구라도 믿기 어려 웠으리라. 하지만 제갈휘는 자신의 눈을 믿었다. 석대원은 이미 절정에 올라 있었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는 제갈휘가 알 도리가 없지만, 이십대의 나이에 저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고금을 통틀어도 몇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때 석대원이 검을 뽑았다. 요사스러운 홍광이 일렁이는 혈랑검(血狼劍)이었다. 그러자 서문숭도 칼을 뽑았다.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방원도(方圓刀)였다. 광명연무장(光明練武場)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아찔한 정적 속에서 두 자루의 병기가 발하는 광채가 더욱 짙어졌다. 비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선공(先攻)은 석대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아---앗!" 중간 마디가 길게 이어지는 창룡음(蒼龍吟). 두 다리가 구름을 딛듯 표홀(飄忽)히 교차되고, 검병(劍柄:손잡이)에 댄 검결(劍訣: 검을 쥐지 않은 쪽의 손의 인지와 중지를 곧게 펴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구부리는 것) 이 후하방을 향한 반호를 그렸다. 스으으--- 손가락 사이로 고운 모래 가루가 빠져나가는 듯한 미세한 음향과 함께 혈 랑검이 가늘게 떨렸다. 개운직지(開雲直指). 손목의 회전으로 전사(纏絲)의 효과를 극대화한 이 수법은 검끝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로 검로(劍路) 자체를 감추어 버리는 묘용이 뛰어났다. 안개 같은 환상이 석대원의 상반신에서 피어오르는가 싶었는데, 혈랑검의 검봉(劒鋒) 은 어느새 서문숭의 목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서문숭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훌륭한 수법!" 서문숭의 감탄은 석대원의 우측에서 들려왔다. 혈랑검법의 살기를 느끼는 순간, 바닥을 미끄러지며 몸을 피한 것이다. 최소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 무학의 이치...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날짐승처럼 신속한 보법(步法)이었다. '과연!' 석대원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변(變)과 쾌(快)가 조화된 개운직지의 예기(銳氣)가 너무도 간단히 무위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세가 꺾이거나 할 석대원이 아니었다. 상대는 대종사 중 대종사라 할 수 있는 서문숭이 아닌가! 한두 걸음으로 넘기에는 너무나 높은 거봉(巨峰)이었다. "차아압!" 호쾌한 기합 소리와 더불어 석대원의 몸이 벼락처럼 돌았다. 두 다리가 회전하고, 허리가 회전하고, 어깨가 회전했다. 신체 부위에 따라 발생한 회전의 미세한 시차(時差)는 원심력의 급작스러운 증가를 가져왔다. 그 결과, 반경 여덟 자에 달하는 거대한 원을 수평으로 그려낸 혈랑검의 속도는 가히 질풍 같았다. 쐐애액---! 검이 가르고 지나간 공간은 금방 부스러질 것처럼 얼어붙었다. 검신을 통해 뿜어지는 냉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서문숭의 방원도는 여전히 하단을 향한 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서문숭은 여전히 두 다리와 허리만을 움직여 석대원의 사나운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훗! 봐주는 건가?' 송충이처럼 시커먼 석대원의 두 눈썹이 꿈틀거렸다. 순간, 한 차례의 회전으로 그칠 것 같던 그의 거구가 팽이처럼 맴돌기 시작했다. 콰콰콰--- 미친 바람이 여린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狂風折枝], 우렛소리가 거친 벌 판을 질주하듯[雷聲馳野]... 석대원은 시뻘건 검광에 휩싸인 한 개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되어 서문숭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엇?" 서문숭은 움찔 놀랐다. 다시 한 번 몸을 움직여 피하기에는 검세(劍勢)의 권역(圈域)이 너무나 넓었다. 석대원의 이 연환회전(連環回轉)의 수법은 일견 단순히 후려쳐 베는 초식 같았지만, 상상을 초월한 몸통의 회전력과 범인보다 두 자는 길쭉한 팔 길이와 맞물려, 서문숭이 쉽게 몸을 빼낼 수 없을 정도의 위력적인 공격이 된 것이다. 혈랑검법의 절초인 무상륜(無上輪)이 바로 이것이다. '어쩔 수 없지!' 본디 서문숭은 석대원에게 몇 수(手)를 양보해줄 작정이었다. 그것도 병기로써 방어하지 않고 순전히 몸만을 움직여 피하는 완전한 양보를... 혈랑곡주의 유진(遺眞)을 이었다한들 스물 대여섯에 불과한 석대원이었다. 수련 햇수를 놓고 본다면 자신과는 비교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서문숭은 당초의 결심을 바꾸었다. 어떤 기연(奇緣)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석대원의 수련은 그의 양보를 필요로 하 지 않는 경지였다. 당위성이 없는 예의는 예의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모욕인 것이다. "하오[好]!" 서문숭은 탄성 같은 기합과 함께 방원도를 비스듬히 휘둘러 측신(側身)을 베어오는 혈 랑검을 막았다. 일단 마음이 일어난 이상 힘과 기세는 부수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빠앙! 거센 폭음이 터져 나오며 그토록 맹렬하던 혈랑검의 회전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후웁!' 그 순간, 석대원은 몸뚱이 전체가 허공으로 퉁겨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맹렬히 회전하던 바퀴가 외력에 의해 갑자기 정지하면, 스스로의 회전력을 이기 지 못하고 살대나 축이 부러져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석대원은 황급히 천근추(千斤墜)의 공력을 끌어올려 불안한 신형을 안정시켰다. * * * "허!" 제갈휘가 탄성을 발했다. "문주의 경지는 가위(可謂) 심즉생(心卽生)이요, 심즉멸(心卽滅)이라 할 수 있군." "그렇습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서문복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복양은 방금 전 서문숭에 의해 시전된 한 번의 칼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백련교가 낳은 개세(蓋世)의 무공인 천중도법(天重刀法), 그 칠부 능선쯤에 자 리잡고 있는 '파괴의 경지'이었다. 그리고 그 또한 그러한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서문복양은 자문(自問)했다. '과연 나라면 아버지처럼 능숙하게 공력을 수발(收發)할 수 있을까?' 서문복양은 내심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겉멋에 사로잡힌 젊은 화공이 객기 어린 붓장난질을 치는 것과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른 달인이 순간 순간의 마음에 따라 필봉(筆鋒)을 놀리는 것은 같은 차원에서 논할 수 없었다. 서문복양이 전자(前者)라면 그의 부친 서문숭은 후자(後者)였다. 외경(畏敬)과 자조(自嘲)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서문복양의 품에 안겨 있던 서문관아가 손나팔을 만들고 뾰족한 목소리로 외쳤 다. "코끼리 아저씨[象叔]! 힘내!" (4) 검주청(劍走靑)이요, 도주흑(刀走黑)이다. 검은 양인(兩刃)이요, 도는 단인(單刃)이다. 검은 경령(輕靈)함을 묘용으로 삼고, 도는 중건(重建)함을 묘용으로 삼는다. 이처럼 두 가지 병기는 각각 장점과 단점이 있다. 만약 어떤 이가 검이나 도 중에서 하나를 취해 사용한다면, 장점을 최대로 살리고 단 점을 최소로 만들어야 이른바 그 병기를 '능당(能當)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이다. 하지만 석대원의 혈랑검과 서문숭의 방원도에는 장단(長短)의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 지 않았다. 혈랑검이 천근거암(千斤巨巖)처럼 묵직하게 떨어지면, 방원도는 하주위초(河洲葦草) 처럼 낭창하게 휘어진다. 방원도가 영물(靈物)처럼 재빠르게 공간을 헤집으면, 혈랑검은 철벽(鐵壁)처럼 굳건하 게 요처를 수비한다. 이미 두 사람의 수중에 들린 것은 검인 동시에 검이 아니며, 도인 동시에 도가 아니 었다. 스스로 지닌 한계를 뛰어넘은 검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또 도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너른 광명연무장은 차갑고 웅혼한 기운으로 가득한데, 두 마리 용이 구름 속에서 구슬 을 다투듯, 두 마리 호랑이가 수림 속에서 먹이를 다투듯... 마검(魔劍)과 신도(神刀)의 겨룸은 어느새 이십 합을 넘어가고 있었다. * * * "대단하군! 대단해!" 좌응(左鷹)은 비무가 시작된 이래 계속 '대단하다'는 말을 되풀이 해 중얼거리고 있었 다. "뭐가 그리 대단하단 말이우?" 퉁명스런 목소리로 묻는 대머리 장한은 천하의 어떤 소보다도 훨씬 더 소에 가깝다는 무쇠소[鐵牛] 마석산(馬石山)이었다. "석대원이란 청년 말일세. 나는 저 나이에 문주와 맞겨룰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네." "그렇수?" 마석산은 눈을 게슴츠레 내리깔고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물론 말인 즉 옳았다. 하지만 그는 선뜻 좌응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투기(妬忌)가 일었기 때문이다. "뭐가 대단하다고? 문주가 봐주니까 그런 거지요!" 마석산은 힝, 소리나게 코방귀를 뀌었다. "그런가...?" 비록 유치한 투기에서 비롯된 말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좌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석산의 말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문숭이 수련한 천중도법의 진정한 위력은 '파괴의 경지'가 아니었다. 무애(無碍)의 경지.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역도(力道)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힘을 사용하는 무공이었 다. 좌응은 이태 전 그 무공을 겪어본 일이 있었다.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땀을 흘리며 비무하던 무위관(無位關)에서의 수련 때였다. 그리고 그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좌응은 소태처럼 쓰디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호교십군의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였다. 검의 빠르기로 말한다면 천하 누구의 뒤에도 설 생각이 생각이 없는 그였다. 그런 그를 열 합만에 바닥에 메다 ?아버린 무시무시한 무공이라니! 그것은 이미 세간에서 말하는 무공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석대원과 대치한 서문숭은 아직까지는 그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야 알 수 없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마석산의 말처럼 봐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만약 어느 순간인가 서문숭이 그 힘을 사용한다면, 석대원은 그래도 당당히 버틸까? 바랄 수 없는 일이겠지... 좌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응은 어느 새인가 석대원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 었다. 묘한 일이었다. 기껏해야 하룻밤 주연(酒宴)에서 통성명한 것이 두 사람 사이 연(緣)의 전부에 불과한 데. 어쩌면 그러한 좌응의 마음은 서문숭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좌응에게 있어서 서문숭은 인간이 아니었다. 무학이라는 길고 험한 세계 속에서 서문숭은 다른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엄청난 길이를 지닌 잣대였다. 자신이 그 잣대의 길이에 맞추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반드시 누군가는 그 잣대 앞에 당당히 마주서야만 했다. 혹시 석대원이 바로 그 누군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좌응의 마음이었으리라. 물론 왜 하필 석대원이었는지는 좌응 자신도 알 수 없겠지만... 어쩌면 철탑을 연상케하는 육신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항상 주위를 감도는 기 이한 여유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산을 물들이던 노을은 이제 피처럼 검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사위에 감도는 어둑한 야색(夜色)... "불을!" 누군가가 짧게 명하자, 연무장 주위에 서 있던 수십 명의 백포 장한들이 일제히 화섭 자를 밝혀 들었다. 휘황한 빛을 받은 청죽림은 신비스러운 광채를 머금어 가는데, 연무장 중앙에서 대치 하고 있는 두 자루의 병기가 품은 냉엄한 기운은 여전히 선명하기만 하다. ?- 츄육--- 허공의 어느 한 점... 혈랑검과 방원도는 질풍처럼 다섯 차례나 교차되다. 병기끼리 부딪지는 않아서인지 귀를 찢는 듯한 파공성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 았다. 하지만 서로 엇갈리며 뿜어낸 기세는 여지없이 상대편 병기를 휩쓸었으, 그 흉험함과 급박함은 쇠를 맞대고 부딪칠 때와 비교해 추호도 떨어지 않았다. 다섯 번째 검을 내질러 도기를 풀어버린 석대원은 더 이상 허공에 머물 못하고 땅으로 내려섰다. "...!" 땅으로 내려서면서도 맹금(猛禽) 같은 시선을 서문숭에게 고정시켰던 대원은 어느 순 간, 헛바람을 들이키며 재차 후방으로 몸을 날렸다. 역시 다섯 번째 칼질을 마친 서문숭이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그를 향 내리꽂혔기 때 문이다. 까앙! 석대원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연무장 바닥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도흔(刀痕)이 깊게 새겨졌다. "좋은 신법!" 하지만 서문숭의 공격은 칭찬과 무관하게 이어졌다. 파바바--- 방원도가 아래에서 위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질 때마다 시퍼런 불똥 과 함께 푸른 번갯불 같은 도기가 석대원을 향해 달려나갔다. "우와!" "허어!" 푸른 번갯불들이 연무장 바닥 위를 치달리는 광경은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관전하던 사람들은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당사자인 석대원은 탄성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여유가 없었다. 까딱하면 그 보기 드문 장관 속에서 엉망진창이 될 판국이었으니 말이다. 비룡번신(飛龍飜身)에 동자종약(童子踵躍), 그리고 천마행공(天馬行空)까지... 석대원은 세 가지의 절정 신법을 연거푸 구사하고서야 간신히 푸른 번갯불들의 범위 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손속이 매서우십니다, 문주!" 석대원은 서문숭으로부터 오 장쯤 떨어진 곳에서 몸을 세우며 말했다. 비록 입 모양은 웃는 듯하였지만, 중단으로 힘차게 뻗은 혈랑검은 그가 얼마나 긴장하 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하! 이 정도를 가지고 엄살을 부리면 되겠는가?" 서문숭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닥을 힘차게 찍었다. 금리도천파(金鯉渡穿波)... 파도를 뚫고 솟구치는 잉어를 연상케하는 장쾌한 몸놀림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번엔 청면수(靑面獸)의 여덟 초라네! 받아 보시게나!" 호기가 실린 외침이 서문숭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쭉 내민 방원도 끝에서 물결처럼 일어나는 도기(刀氣)는 저 양산박(梁山泊)의 영웅, 청면수 양지(楊志)가 잘 썼다는 양가비전(楊家秘傳)의 연환도법! 양가비전의 여덟 초 도법이야 송대(宋代) 이후 강호에 널리 알려진 수법이었다. 검으로 말하면 육합검법(六合劍法)과 비슷한 수준이랄까? 투로(套路)에서의 변화도 그리 복잡하지 않았으니, 비록 도를 무기로 삼지 않는 석대 원이라 해도 귀동냥으로 대충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원도를 통해 쏟아지는 도기는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같은 양가도법이라 할지라도 시전자에 능력에 따라 시정잡배(市井雜輩)의 과시용 칼춤 이 될 수도 있고, 절정고수의 배산도해지초(排山倒海之招)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후자의 경우, 하지만 석대원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까딱하다가는 기세를 잃는다!' 두 번 연속으로 후퇴한다면, 그 저상(沮喪)된 기세를 좀처럼 회복하기 힘들 것이다. 더구나 상대가 서문숭이라면. 석대원은 안색을 굳힌 채, 펼쳐진 도세(刀勢)를 향해 오히려 반걸음 다가섰다. 취리릿!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방원도의 끝이 좌우로 요동했다. 씨잇--- 도에 실린 세찬 경기(勁氣)가 확 밀려오며 석대원의 의복 어깨 부분을 예리 하게 잘라냈다. 하지만 도초가 임중교표(林中交豹)에서 교상참호(橋上斬虎)로 변하는 순간, 석대원은 초식과 초식이 변하는 과정에서 실낱같은 틈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석대원은 그 틈새를 비집으며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기껏해야 두 자쯤 될까? 하지만 석대원은 그 짧은 전진을 반격의 계기로 삼았다. 스으으--- 석대원의 거대한 체구가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옆으로 길쭉이 늘어나며 두 개로 나눠졌다. 순간, 두 명의 석대원으로부터 두 줄기의 시뻘건 검광이 뿜어 나왔다. "이로일살(二路一殺)이구나!" 살을 저미는 듯한 예리한 검기가 자신이 전개한 연환도초를 뚫고 들어오자 서문숭은 경호성(驚呼聲)을 토하며 황급히 좌측으로 피했다. 석대원은 집요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놓칠까? 화라락! 서문숭의 머리 위로부터 수십 송이의 검화(劍花)가 쏟아 내렸다. 어느새 허공으로 몸을 띄운 석대원이 발출한 청풍화우(淸風花雨)의 공세였다. 그 공세는 신속하고도 넓었으니, 서문숭은 순식간에 하늘을 보기 힘들 정도로 빽빽한 검화의 그물 속에 갇히고 말았다. "허어!" 서문숭은 이번에는 호락호락 피해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쉬잇---! 방원도가 지상에서부터 수직으로 솟구쳤다. 그러다가 어느 곳,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문숭의 머리 위로 두 자쯤 떨어진 곳에서 보일 듯 말 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끼이익! 소름끼치는 마찰음이 터져나오며 석대원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방원도에 실린 막강한 힘이 청풍화우의 검초를 봉쇄함과 동시에 이백 근에 가까운 석 대원을 퉁겨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극성에 이른 파괴의 경지였다. 하지만 석대원은 이미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아압!" 퉁겨 오른 오른손을 힘차게 젖히며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한 석대원은 가슴 앞으로 당 겼던 왼손을 들어 아래를 향해 힘차게 후려쳤다. 목표는 방원도를 회수하는 서문숭의 면문이었다. 서문숭의 얼굴 위로 은은한 홍광(紅光)이 드리웠다. 혈랑곡주의 검(劍)장(掌) 쌍절(雙絶) 중 장절(掌絶), 귀신의 손 혈옥수가 모습을 드러 낸 것이다. 서문숭은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왼손을 들어 석대원의 붉은 손과 마주쳤다. 퍼억! 물이 가득 담긴 가죽 주머니끼리 부딪치면 이런 소리가 날까? 귓구멍을 답답하게 만드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으음!" "헛!" 서로 다른, 하지만 비슷한 의미를 담은 두 줄기 신음... 석대원은 허공에서 여섯 번이나 재주를 넘은 후에야 연무장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고, 서문숭은 세 걸음이나 물러선 후에야 뒤로 밀려나는 몸을 멈출 수 있었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두 사람... 두 사람 모두에게는 공통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의복의 왼팔 꿈치 부분이 터져 나간 점이고, 다른 하나는 가슴에 쇠뭉치로 얻 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막상막하의 접장(接掌)... * * * "혈옥수가 소철의 팔진수(八振手), 개방의 구궁장법(九宮掌法)과 더불어 천하에서 가 장 강한 세 가지 장공(掌功) 중 하나라 더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요." 서문숭이 틈날 때마다 그 무서움을 강조했던 것이 바로 혈옥수였다. 서문복양은 지금에야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문주께서 쓴 장력은 뭔가? 처음 보는 공력인데?" 제갈휘가 신기한 듯 묻자, 서문복양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식의 표 정으로 대답했다. "광명심법(光明心法) 중의 벽자결(劈字訣)입니다. 십이자(十二字) 비결(秘訣) 중에서도 맹렬함을 묘용으로 삼는 수법이지요." "십이자결...? 얘기는 들었네만, 저런 위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자네도 익혔나?" "부끄럽습니다만, 소질(小姪)은 간신히 흉내나 내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서문복양은 잠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내공으로 말하자면 저 석씨 청년은 아버님과 비교하기 힘든 듯합니다. 벽자결이 비록 현묘한 수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혈옥수에는 비할 수 없겠지요. 그런 벽자결로써 신공으로 이름난 혈옥수와 평수(平手)를 이루었으니, 이는 내공의 우 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갈휘는 달리 대꾸하지 않았다. 곡리에서 석대원에 의해 벌어진 혈사(血事)를 직접 목격한 그였기에, 그리고 석대원 의 진정한 무서움은 피를 토할 듯한 분노와 요사스러움마저 느끼게 만드는 살기를 동 반해야만 발휘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그였기에, 서문복양의 말에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만약 석대원이 분노와 살기에 휩싸여 있었다면, 천하의 서문숭이라 할지라도 저처럼 여유 있게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때 서문숭의 자세가 바뀌었다. 서문숭은 방원도를 상단(上段)으로 겨누며 왼손바닥을 활짝 펴서 도파(刀把:손잡이) 끝에 갖다댔다. 실처럼 가늘어진 그의 눈은 감은 듯 뜬 듯 구분이 가지 않는데, 곧게 편 허리와 어깨 넓이로 벌린 다리는 천년거목(千年巨木)처럼 늠연(凜然)해 보였다. "드디어 제대로 할 마음이 생기셨는가...?" 제갈휘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쓰다듬었다. 국면(局面)은 바야흐로 흥미로운 대목에 접어든 것이다. 제갈휘의 눈 또한 서문숭의 그것처럼 가늘어졌다. 자, 석 아우! 이제 어떻게 할건가? * * * 서문숭의 변화를 가장 확연히 느낀 사람은 마주선 석대원일 것이다. 뭐라고 딱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삼십여 합 겨루는 동안에도 서문숭의 기파(氣波)는 장중하고도 위력적이었다. 도로써 상단을 취하며 몸을 꼿꼿이 세운 지금도 그 기파는 여전했다. 그런데 달랐다. 서문숭을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미묘하게 변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석대원을 짓누르던 기운도 미묘하게 변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이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석대원의 콧등에 작은 땀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서문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수법은 내 평생의 심득(心得)이 담긴 거라 할 수 있지. 자네의 사부도 겪어보지는 못한 것이야. 나는 이것을 무애경(無碍境)이라 이름했다네." 무애경...? 막힘이 없는 경지란 뜻일까? 어깨 위의 거인은 점점 더 그 무게를 더해갔다. 혈랑검을 쥔 석대원의 손에 지렁이 같은 힘줄이 불끈 돋아났다. 이때 서문숭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를 놀려 걷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에 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냥 스르르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무너지듯 방원도가 떨어졌다. 꽝! 단순히 칼이 공기를 가른 것뿐인데 고막을 먹먹하게 만드는 이 엄청난 폭음은 뭐란 말 인가? 석대원은 섣불리 병기를 부딪칠 수 없었다. 무애경이 어떤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기쾌(奇快)한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신법이 발휘되고, 석대원은 방원도가 그려낸 궤 적으로부터 석자 정도 우측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우욱!" 석대원은 오른쪽 가슴에서 전해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도끼로 얻어맞은 듯한 엄청난 고통이었다. 석대원은 하마터면 혈랑검을 놓칠 뻔했다. 뭐지? 이 충격은...? 고통과 경악에 범벅이 된 채, 석대원은 두 걸음 물러섰다. 파앙! 방원도가 다시금 날아들었다. 먹이를 덮치는 독사의 대가리처럼 빠른 일격이었다. 석대원은 혈랑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어깨 위의 망할 놈의 거인 녀석은 너무나도 무거웠고, 오른쪽 가슴의 빌어먹을 통증 은 숨 쉬기도 거북할 정도였다. "치잇!" 석대원은 이를 악물고 성한 왼손을 들어 방원도의 측면을 쓸어갔다. 꽝! 혈옥수의 사나운 공력에 도신(刀身)이 부르르 떨리며 퉁겨 나갔다. 하지만 석대원은 왼쪽 가슴이 갈라지는 듯한 극렬한 통증을 안은 채 재차 다섯 걸음 이나 물러났다. "우욱!"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세운 석대원은 가슴에서 솟구치는 탁기(濁 氣)를 조절하기 위해 새우처럼 몸을 구부릴 수밖에 없었다. 꽝! 또 한 번 석대원의 머리 위를 눌러오는 폭음...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애써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석대원은 죽을힘을 다해 혈랑검을 들었다. 의지가 거인의 무게를 이긴 것인지, 혈랑검은 다행히도 시기를 놓치지 않고 그의 면문 을 방호(防護)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과연 방호했다고 할 수 있을까? 쿵! 도와 검이 충돌한 순간, 석대원의 한쪽 무릎이 단단한 청석(靑石)을 깨고 연무장 바닥 에 틀어박혔다. 서문숭의 도에는 실로 상상하기조차 힘든 엄청난 역도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여타의 힘과는 달리 힘으로써 막을 수가 없었다. 검으로 막으면 검을 통해 힘이 전달되며, 장으로 막으면 장을 통해 힘이 전달되는 것 이다. "대단하군! 견딜 수 없을 거라 생각했거늘!" 꽝! 말과 동시에 방원도가 다시 날아들었다. 석대원은 바닥에 박힌 무릎을 빼내며 몸을 뒹굴었다. 폭음이 터지고 돌가루가 비산(飛散)했다. 그가 조금 전까지 쭈그리고 있던 있던 연무장 바닥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는 보지 않아 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다섯 차례나 바닥에 몸을 굴린 후에야 석대원은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목구멍에서 한 줄기 비릿한 기운을 느끼며, 석대원은 무애경이 왜 무애(無碍:막힘이 없음)인지 알 수 있었다. 막을 수 없으니 막힘이 없는 것이다! "괜찮나, 자네?" 서문숭은 도를 멈추고 석대원을 향해 물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혈랑검으로 바닥을 짚은 채 위태롭게 서 있는 석대원의 모습은 전혀 괜찮아 보 이지 않았다.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것이 어떤가?" 이것은 생사를 겨루는 결투가 아닌 비무였다. 서로 간 무공의 고하를 가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무애경을 사용해 석대원을 다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서문숭이었 다. 하지만 석대원은 쉽게 승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혈랑검을 힘겹게 들어올리며 말했다. "무애경이 어떤 것인지는 소생이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소생에게도 아직 한 수가 남아 있습니다." 서문숭은 눈살을 찌푸렸다. 젊음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이미 내공 면에서 격차가 있는 두 사람이었다. 비록 그리 크지 않은 차이였지만 승부를 가르는 데에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밖 에 없었다. 그것은 혈랑곡주의 공력과 서문숭의 공력이 모두 패도(覇道)를 지향하기 때문이었다. 힘과 힘의 충돌이라면 보다 강하고 보다 현묘한 힘이 이기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좋아! 그러면 다시 한 번 가네!" 서문숭은 석대원의 호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발을 굴러 석대원을 향해 육박해 들어갔다. 아직 휘두르지도 않았건만 방원도에 담긴 기세는 벌써 은은한 뇌성(雷聲)을 울리고 있었다. 무애경이 절정에 오른 것이다. 이때 석대원의 검이 움직였다. 그 속도는 너무도 느려 날벌레가 날아와 앉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기 기세는 너무 미약해 검을 휘두르는 것인지 장작개비를 휘두르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얼마나 처연한 일 검이었든지, 서문숭이 스스로 끌어올린 패도를 삼 할 가량 늦출 정 도였다. 하지만 결과는 모든 사람의 예상을 빗나갔다. 후릉! 무애경의 막강한 위세는 혈랑검의 검신(劍身)을 타고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치 미친 듯한 바람이 부드러운 갈대 줄기를 타고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엇?" 그러한 와중에서 한 줄기 반력(返力)을 느끼며, 서문숭은 깜짝 놀랐다. 무애경이 이렇게 힘없이 스러진 경우는 처음이었다. '처음...?' 순간, 섬광 같은 무엇인가가 서문숭의 뇌리를 스쳤다. 아니었다. 처음이 아니었다. 얼음을 지치듯 미지의 공간으로 흘러가 버린 자신의 힘. 도의 손잡이를 타고 돌아오는 기괴한 와선형(渦旋形) 반력... 익숙했다. 서문숭은 언젠가 이런 기분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사고는 섬광 같은 기억의 편린(片鱗)을 추적하고 있는데, 육신은 반력을 해소하는 한 편 재차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싸움에 임한 무인의 본능 때문이리라. 꽈릉! 요란한 벽력성이 울렸다. 아까와는 달리 전력을 다한 일격... 석대원의 몸이 주저앉을 듯 흐느적거리는 것과 동시에, 혈랑검으로써 의 굼뜬 검초를 전개했다. 왼쪽 무릎 어림에서 비스듬히 올려치는 단조로운 일 검이었다. 스릉! 두 자루의 병기가 엇갈리며 아까보다는 조금 큰 소리가 울렸다. 순간, 석대원은 상체를 휘청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우웩!" 석대원은 자신의 앞섬에 검붉은 피를 한 모금 토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입은 충격으로 말미암은 토혈(吐血)에 불과했다. 이번에 밀려온 무애경의 역도 역시 혈랑검을 타고 미끄러지며 구 할 가까이 풀린 것 이다. 이제 서문숭은 석대원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불똥을 떨어뜨릴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래를 향해 축 늘어진 방원도로 미루어 그것이 노기나 투지에 의한 것이 아님 을 알 수 있었다. 서문숭은 순수하게 경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역행한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달라붙듯, 기억의 편린들이 끼워 맞춰지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하늘 아래 오직 자신만이 우뚝할 뿐이라 자부하며 살던 홍안(紅顔)의 시절. 무양문으로 누군가가 찾아왔다. 낡은 청색 도포를 걸친 껑충한 노도사(老道士)였다. 노도사는 소철과 대결하려는 서문숭을 만류했다. 코웃음으로 일축한 서문숭. 노도사의 온화한 미소. 그리고 비무... 서문숭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가 무공으로 감복한 자가 있다면 혈랑곡주였다. 하지만 마음으로 감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자네는... 뭔가 감추고 있는 것이 있군." 서문숭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 희대의 패도지존도 억누르기 힘든 마음의 격동 앞에서는 목소리를 떨 수밖에 없었 던 모양이다. 석대원은 턱에 엉긴 핏물을 닦으며 혈랑검을 내렸다. 한 조각 뜻 모를 미소를 입술 끝에 매단 채로... 비무는 끝났다. 그리고 서문숭은 석대원이 사용한 무공의 내력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얼마나 그렇고 있었을까? 서문숭은 눈을 떴다. "양종(兩宗)의 절기가 한 사람에게 이어지다니... 자네는 천선자(天旋子) 선배와 무슨 관계인가?" 석대원이 사용한 무공... 그것은 석년(昔年)에 천선자가 서문숭을 상대로 시전한 바 있던 신비의 무공, 천선진 기(天旋眞氣)였던 것이다. 二十九章 對局 (1) 목연은 회랑(回廊) 복도 위를 걸어가는 자신의 발걸음이 너무 빠르다는 것을 알아차 렸다. 그러한 생각이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내가 바보처럼 왜 이럴까?' 목연은 혀를 찼다. 그녀의 나이도 벌써 스물 넷... 처녀로서는 결코 적다할 수 없는, 아니 오히려 넘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나이였 다. 그런 그녀가, 만나기를 청하는 외간남자의 말 한 마디에 꽁지에 불붙은 고양이처럼 허 둥거리다니! 마음을 다스린 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녀처럼 젊은 여자가 분홍빛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더욱 더 그랬다. "호오!" 목연은 이마를 짚으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찰그랑--- 한 줄기 청량한 소리가 치켜든 손에서 울렸다. 목연은 얼굴 앞에 어른거리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물고기처럼 늘씬한 손목 위, 손가락 만한 굵기의 옥환(玉環) 세 개... 곤륜서벽옥(崑崙西碧玉)으로 만든 옥환은 회랑 사창(絲窓)으로 비친 햇살을 받아 취 록색(翠綠色) 영롱한 광채를 토해내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귀물(貴物)인 듯... 목연의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평소 경박하다하여 요란한 단장(丹粧)을 멀리하던 그녀였다. 까마득한 소녀 시절, 부친이자 무양문의 대호법인 목군평(木君平)으로부터 선물 받은 이 취벽삼옥환(翠碧三玉環)이 햇빛 구경을 하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 팔찌들을 왜 꺼내었을까? 그리고 거울 앞에는 왜 그리도 오래 앉았던 것일까? 목연은 가볍게 도리질을 했다. '아마도... 나는 그를 좋아하나 보다...' 목연은 다시 한 번 나직이 한숨을 쉰 뒤, 그가 있는 객사(客舍)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방문 옆에는 호의(胡椅:접을 수 있는 간의 의자. 싸움터에서 많이 사용됨)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 하나 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앉아 있었다. 바닥을 짚은 것은 나무로 만든 지팡이. 그 윗부분을 감싸고 있는 꺼칠해 보이는 앙상한 손. 비뚜름하게 포갠 손등 위에는 강퍅한 턱... 목연은 정물(靜物)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한로의 모습에서 기이한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한로는 스스로 그의 종이라 말했다. 실제로 목연이 이레 동안 지켜본 바, 한로는 그의 매우 충직한 종이었다. 그가 밥을 먹기 전에는 절대로 젓가락을 잡으려 하지 않았고, 그가 잠들기 전에는 절 대로 침상에 들려 하지 않았다. 그가 세 가지 반찬을 받으면 두 가지 반찬에만 젓가락을 대었고, 그가 비단 이불을 덮 으면 뻣뻣한 마포 이불만을 고집했다. 저렇게 방문 앞에 앉아 있는 것만 해도 그랬다. 방문을 통째로 막아서 있으니, 누군가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로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적이든, 친구이든 간에... 혹은 비천한 하녀든, 무양문주 서문숭이든 간에... 아들뻘되는 주인에게 이런 식의 충심(忠心)을 보일 수 있는 종복이란 그리 흔치 않으 리라. 목연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뒤, 말문을 열었다. "한 노인, 석 공자께서는 안에 계신가요?" 목연의 말에 무겁게 닫혔던 한로의 눈까풀이 들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한로의 눈빛은 한 쌍의 냉전(冷電) 같았다. 하지만 목연은 언짢게 여기지 않았다. 원래가 그렇게 생겨먹은 눈초리였다. 며칠 겪다보니 어느 새 익숙해진 것이다. "목 소저였구려." 한로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석 공자께서 저를 보자고 하시기에..." 목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한로는 호의를 접으며 방문을 향해 손짓하였다. "들어가 보시구려. 서문 소저도 와 계시오." '서문 소저...?' 서문 소저가 관아를 가리키는 말임을 깨달은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요 계집애! 아침 먹기가 무섭게 달아나더니... 목연은 내심 고소를 지으며 문고리를 당겼다. 방문 안에는 이야기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러자 돌 원숭이는 코웃음을 치면서 근두(斤斗)를 불렀지. '좋다! 단숨에 십만 팔천 리를 나르는 제천대성님의 재주를 보여주지!'라고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세존(世尊)께서는 돌 원숭이의 무례함을 나무라지 않으셨지. '어디 마음껏 네 재주를 부려 보렴'하시며 빙그레 웃기만 하신 거야. 참! 근데 관아야! 너, 십만 팔천 리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 아니?" "몰라. 되게 먼가보지?" "암! 되게 멀다마다!" 석대원은 손오공과 세존이 말하는 대목에서는 목소리까지 바꿔가며 지껄이고 있었고, 침대 위에 걸터앉은 서문관아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석대원의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 다. 목연은 방문에 몸을 기댄 채 두 사람이 노는 수작을 미소 띤 얼굴로 지켜보았다. "...저 만치에는 높다란 기둥 다섯이 서 있었지. 그걸 본 돌 원숭이는 생각하기를 '옳지! 저게 하늘 끝이로구나!'하며, 한가운데 서 있는 기둥에다가 붓으로 '제천대성이 다녀 가다'라고 쓰고, 바지를 척 까고는 기둥 아래에다 오줌을 쌌단 말씀이야." "아유, 더러워!" 이야기는 당삼장(唐三藏)이 서천(西天)에서 불경을 가져오는 서유기(西遊記) 중,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돌 원숭이가 석가모니의 손바닥 안에서 맴도는 장면이었다. "...돌 원숭이가 한껏 뻐기니까, 이야기를 다 들은 세존께서는 껄껄 웃으시더니..." "웃으시더니...?" 석대원은 빙긋 웃은 뒤 손바닥을 활짝 펴 관아 앞에 내밀었다. "너는 지금껏 내 손바닥 안에서 놀았단다라고 하셨지." "손바닥?" "잘 보렴, 여기 원숭이가 쓴 글씨가 보이지?" 서문관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하늘 끝의 기둥처럼 큼직한 석대원의 손바닥을 들여 다보았다. 과연 그 가운뎃손가락에는 '제천대성이 다녀가다'는 글자가 깨알 만하게 쓰여 있었다. "어? 진짜네?" 서문관아는 깜짝 놀랐고, 석대원은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목연을 향해 눈을 찡긋거 렸다. 목연은 자신도 모르게 풋, 웃고 말았다. 석대원이 석가모니가 아닐진대, 원숭이가 석대원의 손바닥에 글을 남길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맡아봐라, 냄새도 나지?" 점입가경(漸入佳境)... 석대원은 손바닥을 서문관아의 얼굴에 바싹 갖다대었고, 서문관아는 정말로 지린내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코를 감싸쥐며 고개를 뒤로 뺐다. "호호! 손에 낙서하는 건 나쁜 버릇이에요, 석 공자." 목연이 웃으며 말하자, 석대원과 서문관아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모구나! 언제 왔어? 참! 이모도 더러운 원숭이 얘기 알아?" 아이는 정신없이 빠져 있던 이야기 탓인지 목연의 출현을 이제서야 알아차린 듯했다. "알다마다... 어디 그것뿐이니? 우리 관아도 며칠 전에 더러운 원숭이처럼..." "이-모---!" 서문관아는 모의가 새 나가는 걸 두려워하는 역적처럼 빽 소리를 지르며 목연의 말허 리를 잘랐다. 며칠 전 이불에 오줌을 지린 부끄러운 사실을 석대원에게 들키는 것은 아이에게 있어 서 역모의 누설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였다. "자! 이제 아저씨는 목 이모하고 할 얘기가 있으니, 관아는 여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주 겠니?" 서문관아는 석대원의 말에 첩에게 서방을 뺏긴 마누라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누라처럼 강짜를 부리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나 보다. "오래 걸려?" "아니." 서문관아는 잠시 눈알을 굴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말했다. "상숙(象叔)! 그럼 이모랑 얘기 끝나면 나, 구름 태워줘야 해! 알았지?" '상숙'이란 다름 아닌 석대원을 가리켰다. 처음 대면했을 때, 석대원이 이를 위로하기 위해 팔자에 없는 코끼리 흉내를 낸 뒤, 석대원의 호칭은 그대로 상숙이 되어버렸다. "물론이지!" 석대원은 코끼리처럼 큼직한 웃음을 지어 보인 뒤, 목연에게 자리를 권했다. "청해 놓고 딴청을 부려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관아하고는 벌써 무척이나 친해지신 것 같군요. 안 그런가요, 상숙?" 목연의 말에는 한 줄기 풍자(諷刺)가 담겨 있었다. 나이 어린 꼬마 계집애와는 쉽게 친해지면서 나이 든 자신에게는 도학자(道學者)처럼 점잔만 빼는 석대원을 비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소녀를 보자 하셨는지..." 석대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소저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부탁이라고? 목연의 눈동자에 한 가닥 기묘한 광채가 담겼다. 하지만 석대원은 뭔가 말하기 힘든 것이 있는지 쉽사리 뒷말을 이으려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목연이 채근했다. "말씀해 보세요." "험험!" 석대원은 목연의 채근을 받고 나서도 두어 차례나 헛기침을 한 후에야 본론을 꺼냈다. "양금(良金)을 쓸데가 있는데... 마침 목 소저께서 풍고(豊庫)를 관리하신다기에..." 목연의 가느다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부탁'이라는 말에 뭔가 낭만적인 기대를 가졌던 그녀였다. 그러던 차에 기껏 한다는 얘기가 금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으니, 그녀가 실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이 마음 속에는 약간의 배신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목연은 이내 평정을 회복했다. 차분하고 조신한 성격은 까닭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필요하시죠?" "그것이 조금 많습니다. 두 관(貫:1貫은 약 3.5kg) 정도..." 석대원은 겸연쩍은 듯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금 두 관이면 결코 작은 재물이 아니었다. 이제 안면을 튼 지 이레에 불과한 여인에게 그렇게 큰 재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보통 염치로는 하기 힘든 부탁이었다. "어디에 쓰시게요?" 목연의 물음에 석대원은 대답하지 못하고 뒤통수를 긁기만 했다. "으음..." 목연의 미간(眉間)에 잔주름이 잡혔다. 그녀의 직위는 호공당(戶工堂)의 부당주였다. 그리고 석대원의 말처럼 무양문의 모든 재보와 물품을 관리하는 풍고는 호공당의 하부 조직이었다. 풍고는 이름처럼 '풍성한 창고'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중원 각지에 흩어진 백련교도들의 수는 물경 백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삶을 이어가는 천민들에서부터 중원 제일의 거부로 알려진 북 경의 왕고(王庫)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도들이 매년 무양문을 위해 자신의 수입 중 일 부를 기부하니, 무양문의 재정이 웬만한 성도(省都)와 맞먹는다는 것도 별로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한 달 전 호공당에서 실시한 재정 조사에서 나타난 바에 의하면 무양문이 보 유한 황금은 자그마치 삼만 냥을 웃돌고 있었다. 금 두 관이 비록 범인들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거금이라 하지만, 풍고에 쌓인 재보를 감안한다면 가위(可謂) 구우일모(九牛一毛)라고 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액수에 불과했 다. 그러나... 목연은 난처했다. 물론 상대가 석대원임을 감안한다면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 았다. 만약 풍고가 그녀 개인의 것이라면 금 두 관뿐 아니라 여섯 개의 창고를 통째로 줘도 아깝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석대원은 어디까지나 무양문의 밥손님[食客]에 불과했다. 제갈휘의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문주 서문숭의 손님으로서 왔다 한들 밥손님은 밥손님 이었다. 더구나 금의 사용처를 밝히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용도 또한 지극히 개인적일 것이 분명했다. 무양문의 재물은 무양문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 문파의 재물이 밥손님의 사사로운 목적에 쓰이게 한다면, 이는 곧 관리자의 독직(瀆 職)이요, 남용(濫用)이었다. 목연은 그런 면에 있어서 염라대왕만큼이나 철저했다. 하지만 아무리 냉철한 이성(理性)이라 해도 머릿속을 맴도는 관념으로 전락할 때가 있는 법이다. 목연은 숫보기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석대원을 향해 청백리(淸白吏)가 지녀야 할 덕 목(德目)에 대한 강의를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곤란하신 모양이군요... 허헛." 목연의 대답이 늦어지자 석대원은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목 소저! 안 들으신 걸로..." 순간, 목연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아니에요! 드릴께요!"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석대원은 물론이거니와 침상 위에 앉은 관아까지도 눈을 동 그랗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목연은 금방 자신의 실책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보같이 소리를 지르다니! 마치 숯불을 끼얹은 것처럼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목연은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필요하신데요?" "그, 그게... 시일이 급한 건 아니고..." "오늘 저녁까지 마련해 드리죠! 그럼 소녀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목연은 총총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 목 소저! 가시게요?" 석대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방문 밖에서는 한로가 있었다. 의아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한로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어물거리다가는 마음 밑바닥까지 송두리째 들켜버릴 것 같은 기분에 그녀는 인사를 하 는 둥 마는 둥 걸음을 재촉했다. '내 힘으로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지...' 회랑을 모퉁이를 돌며 목연은 팔목에 걸린 세 개의 팔찌들을 만지작거렸다. 부족하면 안 쓰는 패물 두어 개를 함께 처분하면 될 것이다. * * * 세상에는 서푼 무게의 붓을 천근 바위보다 무겁게 느끼는 사람이 있었다. 석대원이 바로 그랬다. 글씨면 글씨 그림이면 그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으니, 그의 부친 석안이 그의 손에 일찌감치 검을 쥐어준 것은 참으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는 판단이었다 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붓과 석대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로도 잘 알고 있었다. 청류산 초옥의 벽에 걸린 모친의 초상(肖像) - 물론 시장판 싸구려 화공의 그림보다 도 훨씬 못한 - 을 붙잡고 한 달이나 끙끙거리던 석대원을 직접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 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목연은 팔방미인(八方美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한 번 그려볼까요?" 아마도 석대원이 아까운 종이를 낙서로 망치는 것을 보다 못한 참견이었으리라. "소저께서요?" 목연을 바라보는 석대원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천박한 그림 재주를 짓누르던 붓의 무게를 견디다 못한 탓이었다. "공자께서는 지금 꽃을 그리시려는 거죠?" 목연은 팔 소매를 둥둥 걷어붙이고 석대원의 손에 있던 화필(畵筆)을 받아들었다. 반 시진 가까이 그녀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석대원이 그리려는 것은 꽃이었다. 망친 종이마다 그려진 그림은 다 달랐지만, 생긴 모양으로 미루어서 그것이 꽃임을 어 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꽃이죠?" 목연이 석대원에게 물었다. 석대원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자신도 무슨 꽃을 그리려 했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화공(畵工)에게 하는 주문은 최대한 정확해야 한다. "뭐랄까, 극락에서나 볼 수 있는 예쁜 꽃을...그리려고 했소." 목연은 하마터면 소리를 내어 웃을 뻔했다. 석대원의 대답이 이상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목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하나같이 유부(幽府)에서나 만날 것 같은 몰골이었기 때문이다. "예쁘기만 하면 된단 말이죠?" 목연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각 후, 석대원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종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그림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 꽃이 종이 위에 활짝 피어 있었다. "훌륭한 솜씨외다! 소저는 이 길로 나가는 게 훨씬 나을 뻔했소!" 석대원의 감탄에 목연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칭찬으로 듣기에는 화공에 대한 세간(世間)의 인식이 너무 박했다. 이런 것을 보면 석대원은 아부와는 거리가 먼 위인이 분명했다. "소저 덕분에 일이 훨씬 빨라질 수 있게 되었소. 고맙소!" 석대원은 싱글벙글 웃으며 목연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거듭 던졌다. 그 모습이 그리 보기 나쁜 것은 아니어서, 목연의 마음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그런데 이걸로 뭣하시게요?" 목연은 아까부터 궁금하게 생각하던 질문을 꺼냈다. "이걸 보고 비싼 물건을 하나 만들어 볼 생각이지요." 석대원은 탁자 아래에서 몇 개의 물건을 꾸역꾸역 꺼내기 시작했다. 작은 술단지 만한 단로(丹爐), 목침보다 조금 작은 납덩이, 그리고 바늘처럼 가느다 란 소도(小刀) 몇 자루... 목연의 얼굴이 의혹이 어렸다. 저것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세공(細工)이다. 무엇을 재료로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만들려는 것일까? 바로 다음 순간, 목연의 시선이 탁자 위 어느 곳에 꽂혔다. 그곳에는 보자기로 싼 네모반듯한 물건이 있었다. 그녀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가져온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어 그녀의 시선이 탁자 위 다른 곳으로 옮아갔다. 그곳에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 한 장이 있었다. 그녀는 그 그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두 냥의 금과 예쁜 꽃... 석대원은 황금 꽃을 세공할 생각인 것이다. 이때 석대원이 한로를 향해 말했다. "물건이 다 되면 수고를 해주셔야겠군요." "기일(期日)까지 만들기나 하시구려." 한로의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2) 아이는 두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호오- 호오-" 하얀 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꽁꽁 언 손가락에 닿기도 전에 얼음장같은 눈보라에 휩쓸려 사라져버리 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는 입김 불기를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까지 얼려버릴 듯한 이 무지막지한 추위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우우우후훙---! 눈보라는 무저갱에서 기어 나온 귀신처럼 귓전에서 울부짖었다. 악몽에서나 만날 법한 맹수처럼 몸뚱이를 후려쳤다. "아앗!" 아이는 짧은 비명과 함께 두 손으로 머리에 쓴 털가죽 모자를 꼭 움켜쥐며 몸을 동그 랗게 말았다. 모자가 날아가기라도 한다면 그것을 줍기 위해 백설천지(白雪天地)를 얼마를 헤매야 할지 모르는 일이다. 다행히 모자는 손가락 사이에 걸렸고, 아이는 그것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이윽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잔뜩 웅크렸던 아이의 몸이 서서히 펴졌다. 아이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발 옆에 세워둔 나무통이었다. "칫!" 새파랗게 질린 아이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나무통은 쓰러져 있었다. 방금 전의 눈보라가 한 짓이었다. 그리고 나무통 안의 내용물의 절반은 눈 위에 쏟아져 있었다. 아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쏟아진 내용물을 손으로 퍼담기 시작했다. 원래 나무통 안에 들어 있지 않았던 눈덩이가 섞여 들어가는 것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무통 안에 들어 있던 놈들도 그것과 똑같은 눈이었기 때문이다. 퀴이이히힝---! 눈보라가 다시 한 번 조그만 몸뚱이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 * * 훈훈한 공기를 맛 본 북풍(北風)은 좀처럼 문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아이는 북풍을 내쫓기 위해 몸뚱이 전체로 밀어붙이다시피 문을 닫아야만 했다. 북풍은 휘파람 소리 같은 푸념을 남긴 채 결국 문밖으로 밀려나갔다. "쿨룩, 쿨룩!" 병기(病氣) 가득한 낮은 기침 소리가 아이를 반겼다. 아이는 걱정스런 눈초리로 기침 소리가 울린 쪽을 바라본 뒤, 나무통을 들고 집안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집 한편에는 커다란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큼직한 무쇠솥이 걸렸고, 무쇠솥 안에는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아이는 나무통을 기울여 무쇠솥 안에 눈덩이를 부었다. 첨벙, 소리와 함께 더운 물 몇 방울이 아이의 옷자락에 튀었지만, 아이는 그저 툭툭 털 뿐이었다. 아이는 이런 일에 무척이나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솥에 부은 눈덩이는 금방 물과 하나가 되었다. 아이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아궁이 속에 장작 몇 개를 던졌다. "쿨룩! 쿨... 크어억! 쿨룩! 쿨룩!" 돌연 기침 소리가 급해졌다. 아이는 안색이 변해 기침 소리가 울린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벽돌을 엉성하게 쌓아 만든 조잡한 캉[火+亢:중국 북부의 난방용 돌 침상. 온돌과 비슷하나 불을 때는 아궁이가 집안에 있는 것이 다름], 그리고 캉만큼이나 부 실해 보이는 노인 한 명이 있었다. 노인은 캉 위에서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기침을 억누르려 애쓰고 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아이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노인은 야윈 볼을 움직여 뭐라 말하려 하다가 다시 숨이 멎을 듯한 기침을 토해냈다. 노인이 제 숨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헉, 헉! 견... 견아(見兒)야... 모용 아우는...?" 말을 하는 노인의 이마에는 힘줄이 돋아 있었다. 그 몇 마디의 말과 생명의 일부를 맞바꾸는 듯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걱정 어린 눈망울로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 과홍견(過弘見)은 고사리 같은 손 으로 노인의 등줄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모용 할아버지는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할아버지, 약을 드릴까요?" "오냐, 이놈의 기침이... 쿨룩! 쿨룩! 좀처럼 멎지를... 쿨룩! 않는구나..." 약을 담은 바구니는 캉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이십여 포의 약 봉지가 들어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푸른 봉지였고, 대여섯 포만 붉은 봉지였다. 아이는 바구니를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그 중 붉은 봉지를 집어 내용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끅, 끄윽!" 노인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약 삼키기가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을 보면 노인의 내장은 이미 제 기능을 못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노인의 얼굴에 불그레한 화색(和色)이 돌기 시작했다. "헉, 후우---! 이제 좀 살겠구나..." 노인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이의 눈망울에 어린 안타까운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는 모용 할아버지가 이 목옥(木屋)을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 었다. - 네 할아버지의 병을 고칠 용한 의원을 데리고 오마. 먼길이니까 한 달쯤 걸릴 것이다. 그 사이 할아버지에게 약을 드리는 건 견아가 맡아다오. 약은 가급적 안 쓰는 것이 좋으니까 많이 아파하실 때만 약을 드리거라. 특히 붉은 봉지에 담긴 약은 절대로 많이 드시면 안되는 것이니 각별히 유의하고... 약초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없는 아이였지만, 심각한 모용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붉 은 봉지에 담긴 것이 양약(良藥)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모용 할아버지가 목옥을 떠난 뒤 얼마 동안, 아이는 할아버지가 약을 달라고 할 때마 다 푸른 봉지만 건넸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괴로워해도 양약이 아닌 것을 드릴 수는 없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푸른 봉지의 약은 갈수록 효력이 줄어들었다. 모용 할아버지가 목옥을 떠난 지 열흘 째 되는 날 밤, 할아버지는 창자가 쏟아질 것 같은 기침과 함께 검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놔두면 할아버지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다. 겁이 덜컥 난 아이는 할아버지에게 붉은 봉지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붉은 봉지는 요술 봉지였다. 그것을 먹자마자 할아버지의 토혈은 거짓말처럼 멎었고, 아이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 을 쉴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단 붉은 봉지를 사용하자 푸른 봉지는 전혀 듣지 않았다. 그날 이후 할아버지의 발작에는 오직 붉은 봉지만이 효과가 있을 따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붉은 봉지를 쓰는 주기(週期)마저도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다. 발작의 주기가 짧아진 것이다. 모용 할아버지가 목옥을 떠난 지 한 달이 되는 오늘... 급기야 할아버지는 하루에도 두어 번씩 붉은 봉지를 비워야 견딜 수 있는 처량한 신 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봐---! 배형(裵兄)---! 이쪽이야, 이쪽!" 문득, 아이의 표정이 변했다. 목옥 밖에서 걸걸한 사내의 외침이 들린 것이다. 이곳은 워낙 깊은 산골이라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이처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씨에서라면.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목옥 문이 열렸다. 아이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목옥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눈보라, 그것을 등진 채 서 있는 시 커먼 그림자... "우라질! 곱살한 계집애라도 하나 있길 바랬는데, 이건 다 죽어 가는 늙은이하고 애새끼뿐이잖 아?" 대뜸 귀에 거슬리는 육두문자(肉頭文字)를 퍼붓는 사람은 세모난 가죽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사십대 장한이었다. 하지만 가시처럼 숭숭 돋아난 턱수염에 허연 눈가루가 붙어 있어서 마치 환갑을 지난 늙은이처럼 보였다. "늙은이하고 애라고? 젠장!" 턱수염 사내 뒤로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어깨에 바람막이를 두른 그자 또한 턱수염 사내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아, 아저씨들은 누구신데 남의 집에 막 들어오시는 거예요?" 아이가 묻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꼬마야! 여기 서 계신 이 어르신들은 원래 네 집 내 집 가리지 않는, 마음이 넓은 분들이시 다!" "게다가 지금은 무척이나 배가 고픈 분들이기도 하고!" 턱수염이 말하자 바람막이가 받았다. 그러자 다시 턱수염이 말했다. "맞아, 배가 무척 고프지! 꼬마야! 네 야들야들한 골통을 와삭 깨부수기 전에 어서 술과 고기를 대령하거라!" 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애써 흉악한 인상과 거친 말투를 들먹일 필요가 있을까? 허리춤에 찬 두툼하고도 길쭉한 물건이 칼이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날씨에 산중을 헤매는 사람은 절대 평범한 양민(良民)일 리가 없었다. 턱수염과 바람막이는 정말로 네 집과 내 집을 가리지 않는지, 활개를 치며 목옥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선반과 문갑, 항아리 안을 뒤지는 품이 뭔가 귀중품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그들이 곧 실망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옥 안에는 저런 자들의 눈에 찰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 다. 과연 턱수염과 바람막이의 얼굴은 금방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뭔 놈의 집구석이 이 따위야? 벌써 어느 놈이 털어 갔나?" 턱수염이 투덜거리자 바람막이가 이죽거렸다. "잘하는 짓이다! 뭐? 이 길로 가면 국경(國境)까지 노자는 염려가 없다고? 장형(莊兄)은 항상 이런 식이란 말이야! 쥐뿔도 모르면서 곧 죽어도 아는 척 하기는!" 핀잔을 들은 턱수염의 얼굴이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울긋불긋 변했다. 그는 바람막이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이 새끼야! 나이도 어린놈이 귀가 먹었냐? 술, 고기를 가져오라는 어른 말씀이 안 들려?" 턱수염은 금방이라도 아이를 후려칠 듯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아이는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폈다. 이 흉측한 인간들로부터 병든 할아버지를 지킬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 것 이다. "우리집이 술집인가요? 왜 여기서 술, 고기를 찾아요? 그리고 남에 집에 불쑥 쳐들어와서 주인에게 이게 무슨 행패죠?" 턱수염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아이의 당돌한 반응에 놀란 것이다. "똑똑한 아이군, 똑똑한 아이야! 장형보다 훨씬 똑똑한 것 같군! 아주 말 잘했다!" 바람막이는 천성이 원래 그 모양으로 생겨 먹었던지, 또 한 번 턱수염을 향해 이죽거 렸다. "이...이..." 턱수염은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목옥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를 질렀다. "육시를 낼 쥐새끼 같은 놈! 감히 어디서 눈깔을 치켜 뜨고 쫑알거리는 거야!" 욕설과 동시에 무자비한 발길질이 아이의 가슴에 꽂혔다. 아이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허공을 붕 날아 노인이 누운 캉에 부딪쳤다. "이 새끼야! 내가 누군지 알아? 한 번 화나면 직정부(直定府) 오만 호(戶)가 벌벌 떠는 장태(莊兌)님이 바로 이 몸이 시다! 감히 누구 안전에서 지랄을 떠는 거야, 지랄을!" 턱수염은 한 번 발길질로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계속 씨근덕거렸다. "괜찮니, 견아야?" 캉 위에서 들려온 할아버지의 놀란 목소리가 아이의 오기를 부채질했다. 아이는 끙끙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이의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발길에 채어 나가떨어질 때 캉의 모서리에 세차게 부딪친 것이다. 하지만 주먹을 꼬옥 말아 쥔 아이의 두 눈동자에서는 분노의 불똥이 이글거리고 있었 다. "가져가고 싶은 건 마음대로 다 가져가! 하지만 할아버지한테 손대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 아이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 늠연한 태도가 턱수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일까? 턱수염은 이를 갈며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오냐! 그러면 이 어르신께서 네놈에게 늙은이 모가지를 비틀 때 무슨 소리가 나는지 알려주 마!" 아이는 품안에서 길이가 한 자쯤 되는 단검을 꺼냈다. "멈춰! 다가오면 찌를 거야!" 순간, 턱수염과 바람막이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아이가 꺼내 든 단검은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금빛 찬란한 손잡이와 요기(妖氣)가 어린 듯한 푸르스름한 검신... 그것은 일견하기에도 쉽게 만나볼 수 없는 귀물(貴物)이었다. "이것 봐라? 이게 웬 횡재야?" 갑자기 일어난 탐심(貪心) 때문인지, 턱수염은 어울리지 않는 큰 웃음을 벙긋 지으며 아이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직정부 오만 호를 벌벌 떨게 만드는 장태의 이름이 그저 허풍만은 아닌 듯, 기묘한 각 도로 휘어져 날아드는 금나수법(禽拿手法)은 제법 현란한 것이었다. "에익!" 아이는 눈을 질끈 감고 단검을 휘둘렀다. 쉭, 쉬익, 하는 매서운 파공성이 단검 끝에서 울려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단금절옥(斷金切玉)의 신병이기라도 열두 살 아이의 손안에 있을 때에 는 무딘 나무칼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턱수염의 왼손이 갈고리처럼 구부러지며 아이의 손목을 낚아챈 순간, 아이는 손목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단검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흐흐! 어때? 내 말이 맞지? 이쪽으로 오면 돈 될 만한 게 생긴다고 말했잖아?" 턱수염은 아이에게 빼앗은 단검을 요리조리 살피며 헤벌쭉이 웃었다. 뜻밖의 횡재에 덩달아 기뻐하던 바람막이는 문득, 끙끙거리는 아이를 일별(一瞥)한 뒤 턱수염에게 말했다. "포교(捕校)가 쫓아올지도 모르는데 이름을 덜컥 밝히면 어떻게 하려고? 국경까지 며칠이 걸리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턱수염은 별걱정을 다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람막이를 바라보았다. "이름을 밝혀? 이 꼬마 놈이? 흐흐... 이 새끼가 내 이름을 고자질할 상대는 포교가 아니라 염라대왕일걸?" 턱수염과 바람막이는 동시에 아이와 노인을 바라보았다. 옆으로 길게 누운 그들의 눈초리에는 음산한 살기가 풍겨 나왔다. "흐흐흐... 보검은 피가 묻지 않는다는데, 어디 한 번 시험해볼까?" 턱수염이 아이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자, 아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 다. 도와줄 사람 없는 눈 덮인 산중에서 이렇게 흉악한 살인대도(殺人大盜)를 둘씩이나 만 났으니, 열두 살짜리 아이가 병든 할아버지를 보호하려는 효심(孝心)으로 버티는 것에 도 한계가 있었다. 이때, 하나의 앙상한 손이 아이의 어깨를 짚었다. "...?"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짚은 손의 임자는 다름 아닌 아이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아이는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가 모용 할아버지의 등에 업혀 목옥에 온 지 벌써 두 달... 하지만 할아버지는 혼자 힘으로는 전혀 운신할 수 없어 대소변을 받는 것조차 아이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할아버지는 혼자 힘으로 몸을 일으킨 것이다. 비록 한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짚고 있었지만... "견아야, 과연 내 손자다! 지금까지는 용감하게 잘했단다! 이제부터는 할아버지가 알아서 하마..." 아이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노인은 놀랍게도 기침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항상 흐리멍덩하게 풀어졌던 두 눈에서도 은은한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허... 허헛!" 노인의 등장을 멍청히 바라보던 턱수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노인의 신색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웃음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홀쭉한 양 뺨은 두개골 모양이 그대로 드러날 지경이었고, 아이의 어깨를 짚은 한 손 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더구나 한쪽 다리는 먼저 관속으로 들여보냈는지, 허벅지 아래로는 아무것도 없는 허 방이었다. "배형, 저 병신이 하는 말 들었어? 지금부터는 자기가 알아서 한대!" 하지만 바람막이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허리춤에서 시퍼런 대감도(大 감刀)를 뽑아들었다. "조심하게! 보통 늙은이가 아닌 것 같아!" 바람막이의 경고가 객쩍은 잔소리로 들렸던지, 턱수염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배형은 조심성이 너무 많아 탈이야! 다 죽어 가는 송장을 보고도 벌벌 떨다니..." 턱수염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바람막이는 여전히 신중했다. 강호에서는 노인과 아이, 여자를 조심하라는 격언이 있었다. 바람막이는 이 순간에 그 격언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으로 미루어 그의 경험은 턱수염보다 훨씬 풍부한 것이 분명했다. "늙은이! 강호 물을 먹어본 자라면 강호인답게 이름이나 밝혀봐라! 나는 직정부의 배칠락(裵七樂)이다!" 짐짓 호기가 실린 문성명(問姓名)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아이를 향해 말했다. "견아야, 저들을 보지 말고 돌아서거라." 아이는 노인의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노인은 아이에게 앞으로 일어날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예, 할아버지!" 아이는 노인이 짚은 어깨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몸을 돌렸다. 아이의 눈에는 노인이 누워 있던 캉이 들어왔다. 조잡한 벽돌, 절반쯤 젖혀진 이불... 그러던 어느 순간, 아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불 위에 떨어진 몇 개의 붉은 종이들! 그것은 분명히 바구니 안에 들어 있던 약 봉지였다! 모용 할아버지가 함부로 드리지 말라던 바로 그 붉은 봉지였다! 할아버지는 남아 있던 붉은 봉지를 한꺼번에 다 드신 것이다! "할아버..." "돌아서 있으래도!" 아이의 경악 어린 목소리는 노인의 호된 일갈(一喝)에 쑥 들어가 버렸다. '아아!' 아이는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3) 벌써 사흘째였다. 하늘은 인간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통째로 생매장시킬 생각인 듯 무지막지한 눈 보라를 쏟아 붓고 있었다. 우후후후훙---! 성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자욱한 눈가루가 휘날렸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때로는 수평으로... 모용풍(慕容楓)은 그 속을 헤치며 걷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허벅지까지 파묻히는 눈 속을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공을 일으켜 경신술(輕身術)이라도 전개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이런 악천후 속에서는 마편(馬便)을 이용할 수도 없는 터... 사흘 동안 두 다리를 써서 칠백 리에 가까운 험로(險路)를 달렸으니, 진력이 고갈된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후우---!" 문득, 모용풍은 걸음을 멈추고 긴 탄식을 토했다. 목옥이 가까워 올수록 점점 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것은 더욱 더 높이 쌓여 가는 눈 때문도, 그리고 소금에 절은 고깃덩이처럼 축 늘 어진 육신 때문도 아니었다. 의형 과추운(過秋雲)의 병을 치료할 의원을 데려오기 위해 목옥을 떠난 뒤 한 달만의 귀환(歸還)... 하지만 지금 그의 주위에는 아무 동행자(同行者)도 없었다. 그는 혼자 돌아와서는 안됐다. 하지만 혼자 돌아오고 있었다. 혼자 돌아와서는 안되는 그가 혼자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절망이었고, 고개를 들기 힘든 자괴감이었다. 그것이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함께 오고자 했던 의원은 환신당(還神堂)의 주인이자 강호 제일의 신의(神醫)인 구양정인(歐陽定仁)이었다. 비록 많은 의원들이 과추운의 상태를 보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래도 모용풍은 포기하 지 않았다. 과추운의 병이 아무리 깊다 한들, 모용풍은 구양정인이 고개를 흔들기 전까지는 포기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모용풍의 심정은 그랬다. 구양정인은 강호오괴(江湖五怪)와 각별한 친분이 있었다. 모용풍이 원하면, 그리고 과추운이 죽어간다고 하면 만사를 젖혀두고 따라나서 줄 것 이 분명했다. 적어도 모용풍은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모용풍은 목옥으로부터 수천 리 떨어진 강남으로 구양정인을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모용풍은 구양정인의 자비롭고도 온화한 얼굴을 만나볼 수 없었다. 그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유씨(劉氏) 성을 지닌 중늙은이 집사(執事)였다. 그때 그 집사는 모용풍에게 이렇게 말했다. 구양정인은 이레 전에 아들의 약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북쪽으로 떠났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모용풍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디 아프냐는 집사의 말에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모용풍은 너무도 허탈하고 너무도 기가 막혔다. 수천 리를 달려온 것이 그 한순간에 공염불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구양정인의 행로를 추적해 그를 데려 올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구양정인과 함께 돌아간다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과추 운이 아니라 싸늘하게 식은 시신임에 틀림없었다. - 다 끝났구나... 다 끝났어... 모용풍은 넋이 빠진 사람처럼 힘없이 중얼거렸다. 결국 모용풍은 가슴에 품고 왔던 모든 희망을 환신당의 뜨락에 내던진 채 발길을 돌 렸다. 돌아오는 길이 유달리 암울했던 것은 욕설이 절로 나올 것 같은 더러운 날씨 때문만 은 아닐 것이다. 희망이 없는 길이란 원래 암울한 법이다. 이제 모용풍에게 유일한 바램이 있다면, 운명성(運命星)인 남두신(南斗神)이 잔인하 게 외면해버린 의형의 임종만이라도 지켜볼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 하나뿐... * * * 발 아래로 목옥이 보였다. 온통 뿌옇기만 한 시계(視界)였지만 모용풍은 목옥의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볼 수 있 었다. 그러다가 문득, 모용풍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목옥 문 앞에 길게 자빠져 있는 이상한 물건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분명 사람의 시신이었다. 바닥난 줄로만 알고 있던 진기가 몸뚱이 어느 구석인가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모용풍은 자신도 모르게 설상비(雪上飛)의 신법을 발휘하여 목옥을 향해 질풍처럼 달 려 내려갔다. 그것은 과연 사람의 시신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몸뚱이에 쌓인 눈의 높이로 미루어 이곳에 버려진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목옥 안의 상황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모용풍은 일단 시신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는 하나뿐인 손을 내밀어 시신들 위에 쌓인 눈을 치웠다. 가시 같은 턱수염이 난 우락부락한 사내와 턱 선이 유달리 뾰족한 사내... 턱수염이 난 사내의 사인을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코끼리에게 밟히기라도 한 것처럼 움푹 함몰된 가슴으로 계속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에 비해 턱 선이 뾰족한 사내의 시신은 온전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사인을 밝히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유달리 좁아서 살아 생전에 무척이나 속이 좁아 보였을 그의 미간에는,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둥근 구멍이 뚫려 있었다. 모용풍은 상처 주변에 얼어붙은 피딱지를 떼어내고 손가락을 그 안에 집어넣어 보았 다. 무엇인가 매끄럽고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모용풍은 주저 없이 그것을 후벼 꺼냈다. 둥글 납작한 돌... 피가 묻어 온통 붉었지만 그 바탕은 백설처럼 새하얀 것이었다. 순간, 모용풍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석(碁石)이었다. 바둑에 사용되는 흑백(黑白) 두 가지 기석 중 백석(白石)이었다. 강호에서 바둑돌을 던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내공을 지닌 사람은 제법 많을지도 몰 랐다. 하지만 항상 바둑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모용풍이 아는 한, 그 사람은 지금 절대로 무공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중환자 였다. "형님---!" 모용풍은 목옥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갔다. 목옥 안은 조용했다. 무쇠 솥이 걸린 아궁이 쪽에서 툭툭거리는 불규칙적인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아마도 물이 끓는 소리일 것이다. 모용풍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 줄기 선명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왔다. 모든 피비린내가 그렇겠지만, 지금 맡는 것은 유달리 불길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모용풍의 시선은 가느다란 떨림을 머금은 채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는 곳으로 옮아갔 다. 그곳은 목옥의 남쪽 구석, 벽돌로 만든 캉이 있는 곳이었다. "헉!" 모용풍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엎어져 있었다. 과추운과 과추운의 손자인 견아였다. 과추운은 죽은 듯이 캉 위에 누워 있었고, 견아는 과추운의 몸 위에 리를 묻은 채 바 닥에 무릎 꿇고 있었다. 꿀꺽! 모용풍은 마른침을 삼켰다. 문밖의 괴한들이 난입해 과추운과 견아를 죽인 것일까? 하지만 모용풍은 이내 그 생각을 부정했다. 만약 그렇다면 괴한들의 몸에 나 있는 과추운의 흔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 가? 평소 그렇게 영민하게 돌아가던 순풍이천조안(順風耳千照眼)의 두뇌도 이 순간만큼은 백치와 마찬가지였다. 이때 들릴 듯 말 듯한 가냘픈 목소리가 캉 쪽에서 흘러나왔다.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안... 돼요..." 견아의 목소리였다. 모용풍은 급히 그리로 다가갔다. 과추운의 가슴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댄 견아의 얼굴은 어두컴컴한 집안에서도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할...아버지... 안돼... 안돼..." 견아는 계속 뭐라고 중얼거렸다. 모용풍은 견아가 제 정신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캉 밑으로 축 늘어진 견아의 오른손이 불그스름하다는 사실을 발 견했다. 그는 급히 견아의 오른손을 들어보았다. "...!" 모용풍의 눈이 커졌다. 견아의 오른손 약지는 무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가 엉겨 손 전체가 붉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목옥 안을 감도는 피비린내의 발원지도 바로 이 손가락인 것 같았다. 도대체 누가 아이의 손가락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혹시...?' 모용풍은 황급히 과추운의 신색을 살폈다. 과추운은 숨도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누워 있었다. 너무도 고요해서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입가에는 붉은 핏덩이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 핏덩이를 발견한 순간, 모용풍은 견아의 손가락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 다. "바보 같은 놈!" 모용풍은 과추운의 가슴 위에 얹어 있던 견아의 머리를 다급히 치웠다. 견아의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까? 견아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견아는 모용풍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모용 할아버지! 마침내 오셨군요!" 하지만 모용풍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다정한 인사가 아닌 매서운 꾸중이었다. "얼간이 천치 같은 녀석!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환자에게 피를 먹이면 어떻게 하느냐!" 모용풍은 과추운의 상반신을 부축해 일으켜 캉 벽에 기대놓은 뒤, 손가락을 입 속에 억지로 쑤셔 넣어 입안에 끈끈하게 엉겨 붙은 붉은 덩어리들을 긁어냈다. 견아가 제 손가락을 깨물어 과추운의 입에 흘려 넣은 선지피였다. "제,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안 좋은 거예요?" 견아는 겁먹은 얼굴로 모용풍에게 물었다. "기도(氣道)에 핏덩이가 엉겨 막히는 날에는..." 하지만 재차 견아를 질책하던 모용풍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제 손가락을 물어뜯은 열두 살 짜리 아이를 어찌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모용풍은 입을 꽉 다물고 과추운의 등덜미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척추를 따라 내려가는 일련의 혈도들을 타통(打通)한 뒤 흉부를 몇 차례 강하게 누르 자, 과추운의 입에서 말라붙은 핏덩이가 시커먼 가래와 함께 튀어나왔다. "끄윽! 끄르르..." 과추운의 목구멍에서 듣기 거북한 가래 끓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모용풍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호흡이 막힌 고비는 간신히 넘긴 것이다. "대체 어찌된 일이냐?" 모용풍은 과추운을 다시 눕힌 뒤 견아에게 물었다. 견아는 목옥에서 일어난 일을 더듬더듬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과추운이 붉은 봉지의 약을 다섯 포나 복용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모용풍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다섯 포나?" 모용풍의 다급한 물음에 견아는 그것이 마치 제 책임이기라도 한 양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다... 계속 해봐라..." 모용풍이 이야기를 재촉했다. "...할아버지는 무공을 써서 도적들을 죽이셨어요. 저는 볼 수는 없었지만 도적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죠. 잠시 후 할아버지는 제게 도적들의 시체를 목옥 밖에다 내다 버리라고 하셨죠. 그런데... 제가 시체들은 전부 끌어내고 돌아오니까 할아버지는 바닥에 엎드려 계셨어요. 할아버지 입에서는 검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죠. 저는 할아버지를 일으켜 캉에 눕히고 한참 동안을 주물러 드렸어요. 하지만 아무리 주물러 드려도 눈을 뜨지 않으시고, 숨소리도 점점 가늘어지시는 거예 요. 그래서... 책에서 피를 먹이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본 기억이 나서... 그래서 손가락을..." 견아는 말을 맺지 못하고 울먹였다. "됐다... 넌 최선을 다했으니 그것으로 된 거야..." 모용풍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견아의 얼굴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저..." "뭐냐?" "모용 할아버지가 왔으니까 이제 할아버지는 괜찮은 거죠?" 견아는 희망과 기대가 뒤섞인 얼굴로 모용풍을 바라보았다. "으음..." 모용풍은 무거운 신음을 토하며 두 눈을 감았다. 원정(元精)을 소진해 일시적인 활력을 만드는 것이 바로 붉은 봉지에 들어 있는 약, 비귀산(痺鬼散)이었다. 그것을 다섯 포나 한꺼번에 먹었다면 멀쩡한 사람이라도 약효가 떨어진 뒤 빈사지경 (瀕死之境)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폐부(肺腑)와 장기(臟器)가 이미 송장과 다름없는 과추운이었으니, 이제는 구 양정인보다 더 용한 명의가 온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모용풍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 순간 그의 마음은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의 눈을 직시하고 있는 아이의 절실한 소원을 깨뜨려야만 하는 자신이 너무나 무기 력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견아... 이 못난 할애비는 의원을 만나보지도 못했단다." 모용풍의 힘없는 말에 아이의 눈이 커졌다. 커진 눈은 가장자리부터 심하게 떨리더니 급기야 뿌연 수막(水幕)이 차오르기 시작했 다. "그, 그러면... 할아버지는...?" 모용풍은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아이의 표정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 얼굴 위에 머물렀던 부푼 희망과 해맑은 기대가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망연자실한 표정... 그것은 열두 살 짜리 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열두 살 짜리 아이가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눈동자 아래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불쌍한 놈...' 모용풍은 눈시울이 확 달아올랐다. 두 살에 부모를 잃은 견아였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흐른 오늘, 이제는 유일한 혈육인 할아버지마저 돌아올 수 없는 곳 으로 떠나보내게 된 것이다. 어찌 불쌍하다 하지 않을까. 이때 모용풍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모용 아우... 자네가 온 건가...?"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분명 과추운이었다. 모용풍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잿빛으로 죽어가는 힘없는 동공과 마주칠 수 있었다. "형님! 정신이 좀 드시오?" 과추운의 입술 꼬리가 실룩거렸다. "흐으... 흐... 견아를, 견아를 못살게 구는 놈들이 있길래... 내가 본때를 보여줬지... 흐... 자네도 봤으면 좋았을 것을..." 평소의 과추운이었다면 호쾌하게 껄껄거리며 말했을 것이다. 어쩌면 조금 전 입술 꼬리가 실룩거린 것이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호쾌하게 보이지도, 또 웃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과추운은 잠시 말을 멈추고 바툰 숨을 내쉰 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자네를 못보고 가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어... 잘, 잘 돌아와 주었구먼..." "형님... 소제가 미욱하여 구양 신의를 데려오지..." "다 들었네... 됐어..." 모용풍을 바라보는 과추운의 잿빛 동공에 한 조각 따듯함이 맺혔다. 하지만 모용풍의 두 눈에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만이 맺혀 있을 따름이었다. "모용 아우...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귀비단(鬼痺丹)을 내게 주게... 마지막으로 해야할 일이 있어..." 귀비단은 모용풍이 지니고 다니는 몇 가지 진기한 약 중 하나였다. 그것은 귀비산의 결정(結晶)으로서 그 약효가 귀비산보다 훨씬 강한 만큼, 독성 또한 훨씬 강했다. "예, 형님..." 모용풍은 순순히 귀비단을 건넸다. 만약 한 달 전이라면 모용풍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과추운에게 귀비단을 주지 않았 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과추운의 생명은 한 올의 유사(遊絲)처럼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만약 발작이 한 번만 더 일어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귀비단은 그의 죽음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겠지만, 다만 몇 각(刻)이나마 정상인 같 은 활력을 공급해 줄 것이다. 과추운은 귀비단을 복용했다. 모용풍은 과추운을 앉혀놓은 뒤, 오른 손바닥을 그의 명문혈(命門穴)에 대고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과추운의 얼굴에 불그레한 생기가 감돌았다. "흐, 흐흐...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먼. 십 년은 더 견딜 것 같은 걸?" 하지만 과추운은 십 년커녕 내일의 태양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형님...! 과추운의 허세가 모용풍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했다. 과추운은 캉 아래에 서 있는 견아를 바라보았다. 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먹거리고 있었다. 불쌍한 놈... 과추운은 견아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앙상한 팔은 비틀어진 잡목 가지처럼 시원스럽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뼈대와 뼈대를 이어주는 힘줄이 뒤틀려버린 것 같았다. 목옥에 난입한 두 명의 악한을 처치하기 위해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탓이다. 하지만 과추운은 고통을 무릅쓰고 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팔이 통째로 없어진다 한들, 손자의 머리조차 쓰다듬어주지 못하는 힘없는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다. 견아는 울먹임을 멈추고 과추운을 바라보았다. "견아!" 과추운은 나지막이 손자의 이름을 불렀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엄숙한 목소리였다. "예... 할아버...지..." 견아는 꺽꺽거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우리 과씨 가문에는 대대로 두 종류의 무공과 한 가지의 기예(碁藝)가 전해 내려온 다. 너는 그 사실을 아느냐?" "예..." 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예전부터 이 할아비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지... 하긴 지루하기만 한 기예보다는 무공이 훨씬 재미있겠지. 나 또한 어릴 때는 그랬으니까..." 과추운은 말을 멈추고 잠시 목옥 천장을 응시했다. 많은 영상들이 천장 위에 떠올랐다. 그것은 홍안의 시절 부친의 회초리 아래에서 외우던 수많은 힐기(詰碁 : 바둑의 사활 문제) 기보(碁譜)이기도 했고, 철기반(鐵碁盤) 하나를 달랑 들고 강호를 종횡하던 찬 란한 청년 시절의 잔상(殘像)이기도 했다. 과추운의 입가에 자조의 웃음이 맺혔다. "할아비는 이제 과씨가 무공으로 이름 날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말이 의외였는지 견아는 울기를 멈추고 과추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꼬옥 깨문 아이의 입술은 그 말의 의미를 묻고 있었다. 과추운은 그 이유를 설명하려다가 생각을 달리 했다. 열두 살 짜리 아이가 죽어가는 노인의 회한(悔恨)을 이해해주길 바란다면, 그것은 욕 심일 것이다. "강호에 발을 들여놓지 말거라. 이 할아비의 마지막 바램이다." 과추운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강호인이라면 모름지기 은원(恩怨)을 잊어서는 안된다. 조부를 저렇게 만든 사람이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다면, 그 하늘을 함께 하지 않는 것이 후손된 자의 도리였다. 하지만 과추운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열혈로 평생을 치달려 온 그였지만, 죽음이 임박하고 나니 인간사의 모든 은원이 질곡 (桎梏)처럼 여겨진 것일까? 견아는 뭐라 항변하려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너는 왜 대답하지 않느냐?" 과추운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견아는 고개를 발딱 치켜들고 격앙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저는 무공을 익힐 거예요! 그것도 반드시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힐 거예요!" 과추운과 모용풍은 흠칫 놀랐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견아의 눈은 이 순간, 어떤 종류의 결의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저는 석대원이란 자를 죽이고 말 거예요!" 과추운은 책망 기가 담긴 눈으로 모용풍을 돌아보았다. '석대원'이란 이름을 견아에게 밝힐 사람은 모용풍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과추운은 이내 큰 한숨을 쉬었다. 모용풍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조부의 원수가 누구인지 알려는 손자의 절박한 심정을 막을 권리는, 천하의 누구라도 없을 것이다. "견아, 너는 그런 말을 해서는……." "싫어요! 싫어요!" 견아는 과추운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발작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놈!" 목옥의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굉장한 호통이었다. "어린놈이 뭘 안다고 함부로 떠드느냐!" "저는 다 알아요! 그 자가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저는 기필코 무공을 익힐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그 석대원이란 놈을..." 쫙! 견아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과추운의 손이 견아의 조그만 뺨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자상하기만 한 할아버지에게 따귀를 맞은 견아는 부릅뜬 눈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놈! 이 불효 막심한 놈! 할아비의 마지막 소원조차도 외면하려는 천하의 불효 막심한... 우욱! 쿨룩, 쿨룩!" 과추운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심중의 격동이 발작으로 이어지려 하는 것이다. "형님! 진정하십시오!" 곁에서 바라보던 모용풍은 당황했다. 그는 과추운이 단 한 번의 발작을 견딜 체력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견아도 터진 입술에서 핏물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과추운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과추운은 매정하게 견아의 손을 뿌리쳤다. "할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쿨룩, 쿨룩! 너는 이제부터 내 손자가, 쿨룩! 내 손자가 아니다!" "할아버지!" 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견아! 어서 할아버지께 용서를 빌어라!" 모용풍은 견아를 책망했다. 하지만 정말로 아이가 책망 당해야 할까? 조부를 잔인하게 쓰러뜨린 자에 대해 원수를 갚겠다는 열두 살 짜리 아이의 맹세가 잘 못된 것일까? 모용풍은 과추운의 말도 이해할 수 있었고, 견아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강호라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일상적인, 하지만 실로 우울한 비극 에 불과했다. 견아는 한동안 주먹을 꼬옥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힘없이 말했다. "할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쿨룩! 쿨룩! 정말...이냐?" 과추운은 고개를 들어 견아를 바라보았다. 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할 수 있느냐?" 견아는 입술을 깨문 채 대답을 못했다. "맹세할 수 있느냐?" 과추운이 되물었다. 견아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까 과추운에게 맞아 터진 것을 제 이빨로 짓씹기까지 한 탓에, 아이의 입술은 넝마 처럼 너덜거리고 있었다. "소손(小孫), 과홍견은... 앞으로 절대로 무공을 익히지 않겠습니다." "오냐, 그래야 내 손자지..." 과추운은 웃었다. 애써 다정함을 가장하지만,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처연한 웃음이었다. 모용풍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과추운의 등을 쓸던 손바닥을 떼었다. 일어나려던 발작은 간신히 진정된 것 같았다. 과추운은 모용풍이 떠다주는 미지근한 물로 입술을 축인 뒤, 한결 안색이 좋아졌다. "모용 아우, 바둑판을 가져다주겠나?" 설마 바둑을 두려는 것일까? 다 죽어가는 몸뚱이로? 하지만 모용풍은 아무 말 없이 바닥에 있던 무쇠 바둑판을 들어 과추운 앞에 내려놓았 다. 과추운은 자세를 고쳐 앉은 뒤 견아에게 말했다. "이리로 올라와 앉거라." 견아는 신발을 벗고 캉 위로 올라와,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과추운을 마주했다. "비록 과씨의 무공은 내 대(代)에서 끊어지지만, 과씨의 기예만은 절대로 끊어져서는 안된다! 앞으로 살아가며 이것을 하시(何時)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예... 할아버지." 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창(應暢)의 '기세(碁勢)'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냐?" 과추운은 견아에게 물었다. 응창은 후한말(後漢末) 삼국시대를 풍미했던 바둑 고수였다. 견아는 또렷한 목소리로 응창이 피력한 바둑 이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응창은 공격으로 이기는 길보다는 수비로 이기는 길이 정도(正道)라고 했습니다. 또한 응창은 호수(好手)를 두어 이기는 경우보다는 악수(惡手)를 두어 지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습니다." 과추운은 견아의 말에 덧붙였다. "하지만 응창 이후의 바둑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했다. 원말(元末)의 왕(王) 국수(國手)는 피동적인 수비에 급급하여 기세를 잃는 자를 가리 켜 겁자(怯者)라 맹렬히 비난했다. 이는 네 증조부이신 청류공(淸流公)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니, 내 대에 이르러서는 제 아무리 형세가 유리하다 할지라도 기세를 넘겨주지 않는 것을 장기로 삼게 되었다." 견아는 묵묵히 과추운의 말을 경청했다. "<망우청락집(忘憂淸樂集)>과 채홍(蔡洪)의 <위기부(圍棋賦)>, <팔괘유운기보(八卦柔 雲碁譜)> 상의 기국(碁局)들은 모두 외우고 있겠지?" "예!" 과추운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견아를 대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과씨의 기예를 이어갈 유일한 계승자가 된 견아에게 자신을 기재(棋才)가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과씨가 양명(揚名)할 수 있는 세계는 처음부터 강호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과추운은 시선을 돌려 수십 년 동안 손때를 묻혀온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바둑판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한 줄기 깊은 고랑이 망막을 아프게 찔러왔다. 두 달 전 곡리(穀理)에서의 펼쳐진 일장(一場) 대혈전(大血戰)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지난 일들은 잊자... 과추운은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그는 귀비단의 약력을 빌어 얻은 이 소중한 시간을,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고 싶었다. 과추운은 견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판을 만들거라!" 견아는 흑자(黑子 : 검은돌)를 들어 바둑판의 네 귀퉁이 성점(星點 : 화점)에 깔았다. 견아의 기예는 과추운의 그것과 네 점의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둑판을 힐끗 본 과추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 점을 떼거라." 견아가 놀란 표정으로 과추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과추운의 표정은 근엄하기만 했다. 견아는 쭈뼛거리는 손길로 좌하방에 있는 흑자 하나를 걷어냈다. "나는 네가 이겨주길 바란다." 과추운의 이 말은 생애 마지막이 될 대국에서 손자의 장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견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촌(寸), 촌(寸)." 과추운이 짧게 말했다. "...?" 견아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이내 과추운이 서현(徐鉉)의 호점(呼點 : 착점을 말로써 지시함)으로 판을 진 행하려 함을 깨달았다. 과추운은 이미 소생할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런 그였으니, 팔을 움직일 기력마저도 아껴가며 손자와 대국을 하려 하는 것이다. 견아는 백자(白子 : 흰돌)를 들어 과추운이 호점한 곳에 올려놓았다. 흑자 셋과 백자 하나... 바둑은 시작되었고 이제는 견아의 차례였다. 견아는 흑자 하나를 들어 한쪽 변에 넓은 세력을 포진했다. (註 : 서현의 호점 : 남당(南唐)의 문인(文人) 서현이 제안한 바둑판의 삼백 육십 일 점(三百六十一點)의 명칭. 바둑판의 상변에서 하변으로, 다시 우변에서 좌변으로 천(天)에서 용(容)까지 열 아홉 으로 나누어 각각의 합으로 삼백 육십 일 점을 모두 표시할 수 있다. 촌, 촌이면 위에서 상변에서 세 번째, 우변에서 세 번째의 점을 의미한다.) * * * 모용풍은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잡박(雜博)한 재주를 자랑하는 그였으니, 바둑에 대한 안목도 남들 못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범인들 사이에서의 이야기. 그의 기예는 지금 대국하는 두 사람의 착점을 이해할 정도로 높지는 못했다. 더구나 국면이 그리 여의치 않은 듯, 견아는 좀처럼 착수를 못하고 장고(長考)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모용풍은 모닥불 속으로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용풍에게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용 아우..." 모용풍은 고개를 돌려 과추운을 바라보았다. 과추운의 얼굴은 이미 칙칙하게 죽어 있었다. 그것은 과추운을 지탱해주던 귀비단의 약력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과연 이 한 판의 대국이 끝날 때까지 과추운이 버틸 수 있을까? 모용풍은 문득, 걱정이 되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난 괜찮아." 과추운은 모용풍의 심중을 읽은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얼굴이 왜 그리도 구슬프게 보이는지, 모용풍은 차마 더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과추운의 목소리가 다시 모용풍의 귓전에 울렸다. "모용 아우. 자네 취귀(醉鬼)가 보고싶지 않나?" 취귀라면 일 년 열두 달을 술로써 보낸다는 상취거사(常醉居士) 화비정(華非淨)을 가 리킨다. 기(棋), 취(醉), 화(火), 통(通), 조(造)의 강호오괴 중 취(醉)에 해당하는 술 귀신이 바로 그였다. "화 형님이 모습을 감춘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지 않소?" "그래, 이십 년... 벌써 이십 년이나 되었군. 무정한 사람, 살아 있기나 한 건지..." 모용풍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과추운을 바라보았다. "명년 봄에 날씨가 풀리면 소주(蘇州)의 귀조수(鬼造手) 놈과 함께 화 형님을 찾아봅 시다." 하지만 명년 봄의 과추운은 아무 곳도 갈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을, 모용풍과 과추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명년 봄이라... 하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겠지." 과추운의 입에서 탄식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딱. 견아의 장고가 끝났다. 견아는 조그만 손으로 바둑판 위를 야무지게 두드렸다. 바둑에서의 자신감이란 깊은 수읽기에서 나오는 법. 그토록 오랜 시간에 걸쳐 수를 읽었으니, 착점하는 손길에 힘이 넘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과추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멍청한 녀석! 취오(聚五)를 보지 못하다니!" 다 죽어가는 몸 어느 구석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과추운은 큰 소리로 견아를 꾸 짖었다. 그와 동시에... "촌(寸), 천(天)!" 차가운 음성이 바둑판 위로 떨어졌다. 견아는 백자를 집어 과추운이 가리킨 곳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견아의 얼굴이 홍시처럼 뻘개졌다. 수읽기에 큰 착오가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촌, 천의 백자는 그야말로 흑 대마(大馬)의 급소를 찌르고 있었다. 그 한 수의 치중(置中)으로 흑 대마는 고스란히 죽어버린 것이다. "<현현기경(玄玄棋經)>의 '이도삼사(二桃三士)'를 잊었느냐? 바로 그 모양이 아니더냐?" "아!" 견아는 그제야 바둑판 위 얽힌 흑백간의 모양이 낯설지 않음을 깨달았다. 과추운의 말처럼, 자신이 수백 번 반복해 놓아본 <현현기경> 안의 문제와 비슷한 모양인 것이다. 흑 대마가 죽음으로서 이미 석 점을 미리 둔 효과는 없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흑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세력이 될지, 곤마(困馬)가 될지 모르는 중앙의 두터운 맛 뿐... 하지만 견아는 이대로 판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과추운에게 남겨진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아직 바둑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견아는 고개를 들고 또박또박 말했다. 죽어가는 할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그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새로운 투지를 이끌어낸 것이다. "호오! 계속하겠다고?" "예! 아직 치석(置石 : 미리 깔아둔 돌)의 효(效)는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과잉된 투지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흑 대마가 소생할 수 있는 길은 없었지만, 그 대마에 얽혀 있는 백 대마 역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그 약점을 짚어 백으로 하여금 가장 많은 수를 들여 흑을 잡아가게 만든다면, 이러한 사석(捨石 : 버리는 돌. 死石과는 다름) 작전은 중앙을 둘러싼 흑의 두터움과 상응(相應)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견아는 백 대마의 형태를 면밀히 살핀 뒤, 어느 한 지점을 강인하게 끊어버렸다. 그곳은 실로 '대마의 척추'라고 일컬을 만한 급소였다. '허허! 내가 손자 놈 하나는 잘 둔 셈인가?' 그 착점의 날카로움에 과추운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의 한 수에 담긴 번뜩이는 재주를 읽은 것이다. 하지만 재주만으로 살기에는, 세상은 너무나도 험하고 기예는 너무나도 어렵다. 견아는 이제 막 개어놓은 진흙과 같았다. 그 진흙은 도공(陶工)의 입에 흐뭇한 미소를 맺히게 만들 정도로 양질의 것이었다. 이제 남은 일이란 아름다운 선을 빚고 고운 유약을 발라 적당한 불에 구워내는 것... 과추운은 지금 이 순간 견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 해답을 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좋은 진흙에게는 훌륭한 도공이 필요했다. '역시 그뿐인가...?' 과추운은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註 1 : 취오(聚五)란 현대의 바둑 용어로 오궁도화(五宮桃花)를 뜻한다. 이는 다섯 개의 눈을 내고 있으나 상대의 치중으로 인해 살 수 없는 안 좋은 형태이다. 양(梁)의 무제(武帝) 때 만들어진 <기부(棋賦)>에 의하면, 집의 모양에 있어서 직삼 (直三:직삼궁), 곡삼(曲三:곡삼궁), 방사(方四:삿갓형), 취오, 화육(花六:매화육궁) 등을 바둑에서의 대표적인 나쁜 형태로 정의하고 있다. 註 2 : 현현기경(玄玄棋經)이란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 출간된 묘수풀이집으로서, 각 문제마다 고사(故事)에서 유래된 다양한 명칭이 붙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도삼사는 현현기경 중 한 문제의 이름이다) * * * "촌(寸), 송(松)..." 힘없는 호점이었다. 그 수를 마지막으로 반상 위에 포진한 무수한 돌들의 가치 결정이 종료되었다. 과추운은 꺼칠한 눈을 들어 견아를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느냐...?" 묵묵히 반상(盤上)을 응시하고 있던 견아가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네 집 남겼습니다..." "장...하구나..." 과추운의 목과 어깨가 축 늘어졌다. "형님!" 곁에 있던 모용풍이 화들짝 놀라 과추운을 부축했다. 하지만 과추운은 이미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다. "할아버지---!" 견아는 바둑판을 타 넘어 과추운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옷자락에 쓸린 흑백의 돌들이 캉 위로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모용풍은 과추운의 명문에 다시 진기를 주입했다. 하지만 이제는 원정(元精)마저 완전히 소진된 듯 과추운의 몸은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익!" 모용풍은 과추운을 눕힌 뒤 왼쪽 가슴을 세차게 누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반혼추(返魂鎚)라는 요상법으로서, 심장에 강한 충격을 주어 떠나려는 영혼을 잠시 붙잡아두는 수법이었다. 반혼추의 효과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못 다한 말이 남았기 때문일까? "으음..." 축 처진 눈까풀이 가늘게 떨리며, 말라붙은 입술 틈으로 들릴 듯 말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제게 바둑을 더 가르쳐 주셔야죠!" 견아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과추운의 눈까풀이 열렸다. "모용 아우... 거기 있는가..." 눈을 뜨고 있건만, 과추운은 이미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예..." 모용풍의 눈에서도 두 줄기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 "말씀하세요, 형님..." "견아를... 견아를 한 사람에게 데려다 주게." "압니다, 형님! 소제는 벌써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모용풍은 과추운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견아의 기예를 지도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고마워... 정말이야..." 앙상한 손으로 애써 모용풍의 손을 더듬으려 하는 과추운의 주름진 눈까풀 끝에는 한 방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으흐흑!" 모용풍은 오열을 삼키며 과추운의 손을 잡았다. "견아..." 과추운은 이번에는 손자를 찾았다. 모용풍은 견아의 손을 이끌어 과추운의 손위에 포개 주었다. 과추운은 가쁜 숨을 내쉬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과추운은 견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공허한 동공에 한 줄기 뜨거운 열망의 빛이 담긴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너는, 너는 꼭..." 과추운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너는 꼭... 대국수(大國手)... 대국수가 되어야... 한...다..." 그 말을 끝으로 과추운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 꺼진 것이다. 대국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긴 채... "형님---!" "할아버지---!" 견아와 모용풍은 참았던 오열을 터뜨렸다. 밖에는 여전히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있었다. (4) 제남부(濟南府)의 개고기[狗肉]라 불리는 건달 이삼(李三)이 아이를 본 것은, 신무전 (神武殿)이 위치한 방천구(方天口)의 모든 시장과 가호가 원단(元旦)을 맞이한 기쁨으 로 흥청거리던 정월하고도 초나흘이었다. 그때 아이는 폭죽(爆竹)을 파는 상점 앞에 서 있었다. 몸에 걸친 상건(喪巾)과 참쇠(斬衰 : 중국의 상복)로 미루어 부모나 조부모의 상을 당한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이인지라, 형형색색 모양 좋게 만들어진 폭죽 을 보며 상제(喪制)로서의 처지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아이는 허름한 삼베 옷 차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쓸 만해 보였다. 타고난 천품이 경박하지 않을 것이니 번듯한 이목구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고, 자 라온 환경이 난잡하지 않을 것이니 조용한 몸가짐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상건 안 에 감춰진 두뇌 또한 명석할 것이니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 다. '흐음, 고것이 제법...?' 가뜩이나 갸름한 이삼의 눈이 더욱 더 가늘어졌다. 하기야 예쁜 아이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머금지 않는 자가 세상에 그 누구이겠냐 마 는, 이삼은 조금 다른 의미의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물론 이삼에게는 남색(男色) 같은 괴상한 취미는 없었다. 그는 여자, 그것도 침대 위에서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성숙한 여자를 좋아하 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내였다. 문제는 이삼이 아닌, 북곽(北廓)의 왕 대낭(王大娘)에게 있었다. 왕 대낭은 오십을 넘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미동(美童)만 보면 게거품을 무는 주책 바가지 할망구였고, 이삼은 바로 이 왕 대낭에게 쓸 만한 사내아이를 공급해주고 놀음 밑천이나 받아먹고 사는 그렇고 그런 건달이었던 것이다. 이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가 때이리만큼 시장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올해 마수걸이치고는 괜찮은 편이야!' 저 놈을 잡아다가 깨끗이 씻기고 잘 입히면 적어도 은자 열 냥은 받아낼 수 있을 것이 고, 은자 열 냥이면 요즘 들어 부쩍 앙탈이 심해진 열빈루(悅貧樓) 소향(素香)이를 식 초에 담근 해파리처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삼은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소향이의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사타구니가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이삼은 폭죽 가게를 향해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모든 이가 경원하는 건달의 그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으리 만치 묵직한 걸음걸이였다. "어험! 폭죽을 몇 개 사려 하오만..." 끝이 길게 이어지는 목소리 또한 건달의 것이 아니요, 여유로운 웃음이 맺힌 입가의 잔주름 또한 건달의 것이 아니다. 폭죽을 팔던 손씨(孫氏) 영감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저 개고기가 오늘은 무슨 패악(悖惡)을 부리려고 저렇게 점잔빼나?'하는 기색이었다. '이 영감쟁이가... 콱!' 이삼은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씨 영감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것은 과연 효과가 있어서, 손씨의 굳은 표정이 봄눈처럼 스르르 녹아 내렸다. "우리 애가 하도 보채서... 허허! 애들이 좋아할 만한 놈으로 골라 주시구려." 삼십을 넘기고도 허랑 방탕한 생활 때문에 후사(後嗣)는커녕 성가(成家)조차 못한 이 삼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귀여운 자식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그것과 똑같았다. 손씨는 진열된 폭죽 중에서 몇 개를 집어 종이에 싸 내밀었다. 얼마를 달라는 말 따위는 없었다. 당초부터 돈 받고 물건을 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삼은 동전 몇 문을 전낭에서 꺼내 손씨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하는 손씨를 향해 인사를 던지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많이 파시구려." 이삼은 볼일을 다 본 양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마치 폭죽을 구경하던 참쇠 차림의 아이를 그제야 처음 발견한 것처럼... 이삼은 아이에게 부드러운 말을 건넸다. "얘야, 너도 폭죽 놀이를 하고 싶으냐?" 아이가 고개를 돌려 이삼을 바라보았다. 이삼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정면에서 본 아이의 얼굴은 정말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똘똘하게 생겼던 것이다. 이 정도라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두 배는 더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속마음과는 달리 이삼의 얼굴에는 오히려 측은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 다. "쯧쯧! 불쌍하게도! 어린 나이에 상을 당한 모양이구나."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듯한 이삼의 말에 아이의 표정이 한순간에 우울해졌다. 그제야 쓸쓸하고 구슬픈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불쌍하게도... 나도 너 만한 아이가 있단다." 이삼은 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었고, 아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아이는 아이. 없는 자식을 팔아가면서까지 사기를 치는 이삼의 간특을 간파할 정도라면, 이미 아이 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아저씨가 괜한 말을 꺼낸 모양이구나!" 이삼은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종이에 싼 폭죽들 중에서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구구연화폭(九九蓮花爆)이라는 것이지. 여든 한 개의 연화폭죽(蓮花爆竹)이 연달아 터지는데, 그게 아주 볼 만하단다. 아저씨가 사과하는 듯에서 이걸 너에게 주마." 이삼은 아이가 사양할 겨를도 없이 작은 손에 폭죽을 쥐어주었다. 단단히 꼰 삼줄에 아이의 새끼손가락보다도 가느다란 울긋불긋한 원통을 잔뜩 매달아 놓은 것이었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이미 사양하기는 늦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그 폭죽을 갖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아이는 폭죽을 손에 쥔 채 꾸벅 머리를 숙였다. "고맙기는... 녀석!" 이삼은 아이의 어깨를 한 번 툭, 두드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마치 그제야 생각난 듯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참! 여기서는 폭죽이 있어도 놀 수 없겠구나." 이삼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런 시장통에서 참쇠를 입은 아이가 폭죽을 터뜨린다면, 최소한 아이를 칭찬하는 사 람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삼의 예상과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저쪽 공터에 가면 우리 아들놈이 나를 기다리고 있단다. 거기라면 폭죽을 터뜨려도 책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너는 거기서 우리와 함께 놀지 않겠느냐?" 너무나 덤덤해서, 마치 가도 그만이고 안 가도 그만인 투의 말이었다. 아이는 이삼의 얼굴과 쥐고 있던 폭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애는 몸이 약해서 친구가 없단다. 네가 와 주면 무척이나 좋아할 텐데..." 이번에는 덤덤한 투가 아니었다. 말끝을 흐리는 이삼의 얼굴에서는 병약한 아들을 안타까워하는 부정이 진하게 배어 나왔다. 아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객점에서 기다리시는데... 금방 올 수 있나요?" 이삼은 활짝 웃었다. "공터는 아주 가깝단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것만 터뜨리고 올래요." "그러렴, 허허!" 이삼은 기쁜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 뒤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뒤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아이가 따라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역시 타박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이삼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흐흐...' 이삼의 얼굴에는 비로소 개고기에 걸맞은 흉물스런 웃음이 어리기 시작했다. * * * 손씨는 아이가 이삼을 따라 멀어져 가는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속내평이야 알 수 없지만, 이삼이 아이에게 선덕(善德)을 베풀 리 없다는 사실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손씨였다. 아이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답답해도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누추한 장사라도 제대로 해먹기 위해서는 이삼 같은 음지인(陰地人)들의 일을 방해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비록 정파 무림의 영수(領首)인 신무전이 자리잡고 있는 방천구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 다. 부목이라도 댄 것처럼 모가지가 뻣뻣한 협사(俠士)라는 작자들은, 시장 구석에 좌판을 깔고 하루벌이로 근근히 연명하는 영세 상인들의 사정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높디 높은 구름 위에서 살기 때문이다. 울울(鬱鬱)한 현실은 사람의 마음을 울울(鬱鬱)하게 만든다. "카악, 퉤---!" 손씨는 가래를 울궈 뱉았다. 가난뱅이가 정이 많은 것은 마치 참새가 부엉이 날개를 단 것과 같다. 날개 무게에 버거워 참새가 날지 못하듯, 마음속의 정이 얄궂어 가난뱅이는 상처받기 마련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손씨처럼 세상을 오래 산 사람들은 이미 그 상처에 대한 특효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보고도 못 본 척, 보았으면 안 본 척하면 그만이었다. 협행(俠行)이야 협사들이나 실컷 하라지! 폭죽 장수는 폭죽만 잘 팔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 각 뒤, 손씨는 아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 다. * * * "상복이라... 했소?" 손씨는 눈앞에 서 있는 노인에게 되물었다. "그렇소이다. 상복 차림에다가 북쪽 사투리를 쓰는 열두 살 짜리 아이외다." 손씨에게 아이의 인상 착의를 설명하며 행방을 묻는 노인은 한 마디로 말해 기인(奇 人)이었다. 곡상봉(哭喪棒)을 쥔 것을 보면 상을 당한 것이 분명한데도 상복을 입지 않았고, 왼 팔 소매가 헐렁한 것을 보면 불구인 것이 분명한데도 얼굴에는 신기가 충만하며, 등에 는 큼직한 무쇠덩어리를 짊어진 것이 분명한데도 걸음걸이는 아이처럼 날렵했다. 이 어찌 기인이라 하지 않을까? "내가 요 앞 객점에서 목을 축이는 사이에 잠시 시장 구경이나 하겠다고 나갔는데, 술 한 병을 다 마시도록 소식이 감감하지 않겠소? 혹시 그렇게 생긴 아이를 못 보셨소?" 외팔이 노인의 말을 들으며 손씨는 큰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손씨는 이제라도 아이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살이가 아닌 사람이라면 마땅히 다음 날의 일도 걱정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입을 열었다는 사실을 이삼이 아는 날에는, 여섯 식구의 생계가 매달린 이 장사는 그날로 깨끗이 결단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손씨의 그런 심중의 갈등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외팔이 노인의 눈빛이 송곳처럼 날카로워졌다. "아이를 보셨소?" "아니, 그, 그게..." 손씨는 쉽게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외팔이 노인이 들고 있던 곡상봉으로 땅을 내리찍으며 외쳤다. "보았으면 본 것이고 안 보았으면 안 본 것이지, 아니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아니란 말인가!" 손씨의 눈이 화등잔만큼이나 커졌다. 외팔이 노인의 곡상봉은 본래 길이가 다섯 자가 넘는 것이었다. 그럼 물건이 이제는 자루 부분의 한 자만 남아 있었다. 그 나머지 부분이 수많은 사람들의 발 밑에서 바위처럼 단단하게 다져진 땅바닥을 뚫 고 들어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손씨는 외팔이 노인이 외양만 기인이 아님을 깨 달을 수 있었다. '강호기인(江湖奇人)이었구나!' 강호를 나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어떤 재주가 있는지, 신무전의 무사들을 지겹도록 보아 온 손씨가 모를 리가 없었다. "당장 알고 있는 것을 말해라! 안 그러면 다시는 폭죽을 못 팔게 만들어 주마!" 외팔이 노인은 땅속 깊이 꽂힌 곡상봉을 뽑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외팔이 노인이 강호에서 협객 소리를 듣던 아니면 마두 소리를 듣던,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손씨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노인 또한 이삼과 마찬가지로 그의 집 여섯 식구의 생계 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며, 그러한 일을 지금 당장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라 는 점이다. 결국 손씨는 이삼과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 * * 시장통의 인파를 헤치며 달리는 동안 몇 사람이나 자빠뜨렸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폭죽 가게 주인이 가리킨 방향만 바라보며 부리나케 달리고 있는 모용풍은 누가 보더 라도 그야말로 실성한 늙은이 같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가. 의형 과추운이 이 세상에 남긴 단 하나뿐인 혈육이 아닌가. 바둑 사부가 될 수 있는 사람에게 아이를 데려다주기 위해 의형의 장례도 변변히 치 르지 못하고 길을 떠났던 모용풍이었다. 그런데 그렇게도 귀중한 아이가 '개고기'라는 건달에게 유괴 당하다니! 모용풍의 머리가 반쯤 돌아버린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북적거리던 시장통을 빠져나오자 모용풍은 비로소 경신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얼음장처럼 싸늘한 바람을 가르며 얼마나 달렸을까? 석교(石橋)가 놓인 실개천 하나를 지나고 잡목이 우거진 나지막한 둔덕에 이르렀을 때, 모용풍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아이, 견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견아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이 앞에 서 있는 구부정한 허리의 늙은이와 그들 두 사람으로부터 조금 떨어 진 곳에 넝마처럼 널브러져 있는 피투성이 사내를 발견한 것도, 그것과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다행히도 견아는 아무 탈이 없는 것 같았다. 그 한 가지 사실이 바싹 졸아들었던 모용풍의 마음을 풀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닥 의혹이 일어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견아!" 모용풍은 큰 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구부정한 늙은이와 이야기 중이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모용풍을 바라보고는 반가운 기 색으로 마주 달려오기 시작했다. "모용 할아버지---!" 모용풍은 품안으로 와락 달려드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이 놈! 이 멍청한 놈! 할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을 따라가다니!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모용풍은 아이를 품에서 떼어놓고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아이는 말끝을 흐리며 허리가 굽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개고기라는 놈에게 강제로 끌고 가는 아이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그 노 인인 모양이었다. 모용풍은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노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인의 얼굴을 바라본 모용풍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노인의 얼굴이 너무도 낯익었기 때문이다. 노인 또한 모용풍의 등장에 무척 놀랐는지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모용풍을 향 해 천천히 걸어왔다. "모용 형, 오랜만이오." 조금 쉰 목소리로 모용풍에게 인사를 하는 노인은 작년 가을, 장성 부근의 곡리에서 헤어진 한로였다. "한 형이 어떻게..." 모용풍은 오직 해연(骸然)할 뿐이었다. 과추운에게 살수를 쓴 석대원에게 결별을 선언했을 때, 모용풍은 두 번 다시 석대원 의 얼굴을 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 결심이 석대원의 충성스러운 비복인 한로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임은 물론 이다. 그런데 그런 한로를 곡리에서 수 천리 떨어진 산동 땅에서 만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때 아이가 모용풍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 할아버지가 저를 구해 주셨어요." 모용풍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이와 한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로도 크게 어색한 듯 한두 번 헛기침을 하더니 쓰러져 있는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 다. "길을 지나다 보니 저 놈이 아이를 강제로 끌고 가는데, 아이가 말을 듣지 않자 칼을 꺼내 들고 위협하지 않겠소? 그래서 내가 참지 못하고 끼여든 것이라오." 땅바닥이 핏물로 흥건하게 젖은 것으로 미루어 개고기는 이미 절명한 같았다. 모용풍은 그제야 한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소, 한 형!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오." "그런데... 아이가 아주 똘똘하더이다. 모용 형의 손자요?"모용풍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의 '과(過)' 자를 성으로 쓴다오." "과..." '과'라는 성을 잠시 되뇌던 한로는 금방 안색이 변해 모용풍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혹시...?" 모용풍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한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의 할아버지인 과추운은 한로의 주인인 석대원의 손에 의해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모용풍은 한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주인은 할아버지를 죽이고 종은 손자를 구했다. 맹랑하다면 참으로 맹랑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모용풍은 망연해 하는 한로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길이 바빠 인사도 변변히 못하는 나를 용서해 주시오." 한 계절을 생사고락을 함께 한 그들 두 사람이었으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예도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냉담한 이별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용풍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슬픈 악연(惡緣)을 정면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이를 재촉해 서둘러 돌아서는 모용풍을 향해 뭐라고 인사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것 을 보면 말이다. (5) 등롱 걸린 나무 천화(千火)가 빛나니 타오르는 불꽃 칠지(七枝)에 맺혔네 燈樹千火照 火焰七枝開 수나라 양제(煬帝)는 원소절(元宵節 : 음력 1월 15일) 등회(燈會 : 등불 놀이)의 장관을 이렇게 노래했다. 원단의 즐거움을 돋구는 것이 요망한 산귀(山鬼)들을 물리치는 폭희(爆戱 : 불꽃놀 이)라면, 원소절의 밤을 장식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그 해의 첫 번째 보름달을 반기 는 등회이다. 원소지야(元宵之夜)!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미소를 자아내는 풍만한 달이 동산 위로 둥실 떠오르면, 태평 과 풍년을 기원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등롱이 천만 그루 나무마다 내 걸린다. 하늘의 달이 지상에 내려온 것인지, 지상의 등이 하늘로 올라간 것인지... 하늘과 땅, 달과 등의 풍요로운 흥취가 어우러진 가운데, 사람들은 세상의 무거운 근 심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아이처럼 천진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 * * 신무전의 군사(軍師) 운리소유는 손바닥 위의 희고 검은 물건은 찬찬히 살펴보았다. 잠시 후 운리소유는 시선을 들어 앞에 서 있는 정방(丁邦)을 바라보았다. 손바닥 위의 희고 검은 물건을 그에게 가져온 사람이었다. "정 대장(隊長), 이것을 내게 전하라고 한 사람이 누구라고요?" "모용풍, 모용 대협입니다!" 신무전 청룡대(靑龍臺) 소속 백인대장(百人隊長) 중 한 사람인 정방은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흐음..." 운리소유는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운리소유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다름 아닌 기자(碁子), 즉 바둑알이었다. 운리소유의 별호는 세 가지 재주가 뛰어난 선비, 삼절수사(三絶秀士)였다. 그는 겸양의 덕목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언제나 이 별호를 과분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만은 천하의 누구와 겨뤄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 다. 그것이 바로 종횡 십구로(十九路)의 기반(基盤) 위에서 천하의 대세를 다툰다는 바둑 이었다. 그렇다면 운리소유가 기자에 대한 안목이 탁월한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는 일이리라. 운리소유는 다시 두 알의 기자를 살펴보았다. 조금 전 자신이 감정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감정 결과는 조금 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흑자(黑子)는 천산(天山)에서 생산된다는 흑오석(黑烏石)으로 만든 것이요, 백자(白 子)는 동영(東瀛)에서 생산된다는 흰 대합조개의 껍질로 만든 것이다. 어지간한 애기가(愛棋家)라 해도 제대로 된 바둑 용품을 사용하기란 하늘에서 별 따 기인 세상이었다. 종이에 먹으로 줄을 그은 것이 기반이요, 흑백 구분만 얼추 되는 돌멩이가 기자 노릇 을 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운리소유의 손바닥 위에 있는 두 알의 기자는 가위(可謂) 진품(珍品)이라 칭송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연 이 물건의 주인이 누구일까? 권력의 단물에 흠뻑 젖은 고관대작? 아니면 황금 욕조에서 장미수(薔薇水)로 목욕하는 일대거상?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신이 아닌 이상 그들이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운리소유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강호 물을 마시는 사람으로서 이런 물건을 지닐 만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정방이 말한 모용풍이 아니었다. "어찌할까요?" 운리소유의 의중을 묻는 정방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우렁차지 못했다. 정방에게는 정방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다. 오늘이 정월 초나흘이었으니, 원소절도 이제 열흘 남짓 남은 셈이다. 어느 해 원소절이 분주하지 않을까 마는 올해 원소절은 다른 해와는 달리 특별한 의 미가 있었다. 신무전주 소철의 셋째 제자인 구양현과 강동의 명문으로 유명한 석씨세가(石氏世家)의 큰아가씨가 약혼하는 날이 바로 원소절인 것이다. 청룡대가 맡은 일이 전내(殿內)의 대소사인 만큼, 정방은 밀물처럼 몰려드는 손님들 을 영접하기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용풍이 찾아와 운리소유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벌어진 것 이다. 운리소유는 번잡한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만약 모용풍이 평범한 강호인이었던들, 정방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호에서의 모용풍의 명성은 그런 야박한 대접을 용납할 정도로 녹록하지 않 았다. '사파에 오마(五魔)가 있으면, 정파에는 오괴(五怪)가 있다'는 문구는 정방이 홍안이 던 시절부터 강호를 떠돌던 유명한 말이었으니, 그 오괴의 일 인인 모용풍을 정방이 어찌 홀대할 수 있을까. 결국 정방은 모용풍이 건네준 기자 두 개를 들고 운리소유를 찾아와, 이처럼 조심스 럽게 가르침을 청하게 된 것이다. "모용 대협은 지금 어디에 계시오?" 운리소유가 물었다. "급한 대로 묵죽청(墨竹廳)에 모셨습니다." 정방이 대답하자, 운리소유는 의자에 깊숙이 묻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안내해 주시오." 정방은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운리소유를 바라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한 운리소유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직접 몸을 움직인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방의 놀라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리소유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모용풍이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 * * 모용풍이 있는 방은 영빈관의 매란국죽(梅蘭菊竹) 네 청사(廳舍)들 중에서 가장 북쪽 에 위치한 묵죽청 이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모용풍이 신무전에서 얼마나 머물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던 정방은, 숙소로 사용되는 청매(靑梅) 홍란(紅蘭) 황국(黃菊)의 세 청사와는 달리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묵죽청에 그를 머물게 한 것이다. 운리소유가 방문을 열었을 때, 모용풍은 남쪽 창가에 기대어 서서 눈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신무전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서던 운리소유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방 한 구석의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상복 차림의 아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때 인기척을 느낀 모용풍이 창밖에 머물던 시선을 돌렸다. 운리소유는 두 손을 모아 모용풍을 향해 읍(揖)했다. "소생이 바로 '운리'라는 성(姓)을 쓰는 사람입니다. 모용 선생의 명성을 앙모한 지 오래였습니다. 오늘에서야 이렇게 뵙게 되니, 소생으로서는 무한한 광영입니다." 운리소유가 모용풍을 향해 올린 인사는 강호 예법이 아닌, 선비의 예법을 따른 것이다. 비록 인생의 대부분을 강호의 풍진 속에서 떠돌아다닌 모용풍이지만, 그 출신만큼은 한 시대를 학문과 경륜으로써 풍미한 천부모용가(天賦慕容家)였다. 스스로 유생임을 한시도 잊지 않고 지내던 운리소유가 모용풍을 선배 유가(儒家)로서 존중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였다. "모용풍이라 하오. 다망(多忙)하신 선생께 번잡함을 안겨드린 것 같아 송구스럽소이다." 모용풍 또한 예를 잃지 않았다. 이어 그는 상복 차림의 아이에게 말했다. "견아, 운리 선생께 인사 올려라." 상복 차림의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운리소유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과홍견이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아이와 운리소유 사이에 많은 연배 차가 있다고는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큰절이 필요하다면 천하의 모든 아이들은 늙은이에게 절하기 귀찮아서라도 바깥에 나다니지 못할 것이다. 운리소유는 이게 무슨 뜻이냐는 식의 표정으로 모용풍을 바라보았다. 모용풍은 아이가 절을 마치고 일어서는 것을 기다린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 기 시작했다. "이 사람도 경전(經典)을 통해 선현(先賢)의 가르침을 익혔으니, 초면에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염치없는 일인 줄은 잘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으니, 운리 선생께서는 양해해 주시 길 바라오." "우선 앉으시지요." 운리소유는 손을 내밀어 자리를 권했다. 모용풍이 얼마나 곤란한 부탁 들고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손님의 다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주인 된 도리가 아니다. 자리에 앉은 모용풍은 아이를 이끌어 옆에 세웠다. "운리 선생의 담백하신 성품은 익히 들어 아는 터, 용건만 간단히 말하겠소이다." 운리소유는 아무말 없이 모용풍의 뒷말을 기다렸다. 모용풍은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뒤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아이를 제자로 거둬 주시오." 운리소유는 모용풍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벽에 걸린 산수화(山水畵)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림을 감상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운리소유는 머리 속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이처럼 의미 없는 시선을 한 곳에 고 정시키곤 했다. 잠시 후, 운리소유의 눈길이 산수화의 유려한 필선(筆線)에서 떨어졌다. 운리소유는 모용풍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 선생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운리소유의 이 말은 모용풍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의외스러운 것이었다. 얼마나 의외였던지 모용풍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생겼다. "방금... 뭐라고 하셨소?" "모용 선생의 말씀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운리소유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귓불이 넓적한 것이 재주와 참을성을 동시에 갖춘 호상 (好相)이었다. 그 사실이 운리소유의 마음에 들었다. 운리소유는 다시 모용풍에게 말했다. "소생이 익힌 학문과 병법은 모두 부친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모용풍은 묵묵히 운리소유의 말을 경청했다. 운리소유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는 강호 제일의 정보통인 그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 본디 운리소유는 구름 속에 몸을 감춘 신룡(神龍)처럼 그 출신 내력이 신비스러운 사 람이었다. 운리소유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이십여 년 전... 소생은 부친으로부터 내침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문에서 쫓겨난 것이지요. 그때 부친께서 제게 내리신 엄명(嚴命)이 당신의 가르침을 타인에게 전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생은 마음에 드는 재목을 발견해도 문하로 거두지 못한 채, 이렇게 오십 줄 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모용풍은 그제야 운리소유에게 제자가 없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모용풍은 큰 의문을 느꼈다. 그렇다면 견아를 제자로 거두겠다는 조금 전의 말은 무슨 뜻일까? 모용풍의 의문은 금방 풀어졌다. "하지만 소생의 여러 재주 중에서 단 한 가지만은 부친과 아무 상관도 없는, 스스로 익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운리소유는 아이를 힐끗 바라본 뒤 다음 말을 이었다. "기예(棋藝)입니다." "아!" 모용풍은 드디어 견아를 제자로 거두겠다는 운리소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운리소유는 학문과 병법을 이을 제자는 둘 수 없지만, 바둑을 이을 제자는 둘 수 있다 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사라진 대신 놀람이 생겼다. 바둑이라니? 아직 입밖에도 꺼내지 않은 바둑 이야기를 운리소유가 어떻게 아는 것일까?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운리소유의 말은 한술 더 뜬 것이었다. "과 국수(國手)의 품격 높은 기예가 이 아이를 통해 끊어지지 않는다면, 소생도 바둑 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제 모용풍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과 국수가 그의 의형 과추운을 지칭함이 분명하다면, 운리소유는 그야말로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보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그것을...?" 모용풍이 참지 못하고 묻자, 운리소유는 대답 대신에 오른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두 개의 기자... 바로 모용풍이 정방에게 준 물건이었다. 과추운은 바둑에 미친 사람이었다. 모용풍은 그런 과추운의 의제였다. 하지만 그 두 가지 사실로부터 모용풍이 찾아온 용건과 견아의 내력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모용풍은 크게 탄식했다. "강호의 친구들이 이 사람을 순풍이천조안이라 부르고 있지만... 허허, 그 이름은 오히려 운리 선생에게 훨씬 어울리는 것을 오늘에야 깨달았소이다. 과연 선생의 혜안(慧眼)은 하나로부터 열을 이끌어 내시는구려." 모용풍의 목소리는 어딘지 맥이 풀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가 좋기로 말하자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하던 그가 아 닌가. 하지만 이제는 몇 살 연하인 운리소유의 혜지가 자신을 훨씬 능가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을... 과 국수께서 기예를 이어나갈 후예를 키우고 계시다는 소문을 수담(手談)을 나누는 벗 들에게 들은 적이 있을 뿐입니다." "아니외다! 북절남산(北絶南算)이란 말은 익히 들어왔소만... 허어, 그것 참!" 북절(北絶)은 강북 신무전의 삼절수사 운리소유를 가리키며, 남산(南算)은 강남 무양 문의 신산 육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강호인들은 일찍부터 이들 두 사람을 쌍뇌(雙腦)라 일컬었으니, 모용풍은 새삼스럽게 그것이 허명이나 과찬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운리소유는 견아를 바라보았다. 놀라움은 전염성이 강한 감정인 탓에, 견아 또한 경외의 염(念)이 담긴 눈빛으로 운 리소유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름이 홍견이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견아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도 이미 들었겠지만 나는 너를 제자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감사합니..." "하지만 아직 감사하기에는 일러." 운리소유는 견아의 말허리를 잘랐다. "비록 과 국수의 기예에 비하면 부끄러운 재주이지만, 그래도 나는 가르칠 만한 아이 를 가르치고 싶구나." 이것은 비단 운리소유뿐 아니라 모든 스승들의 공통된 마음을 것이다. 운리소유는 자리에서 일어서 바닥에 놓인 무쇠 바둑판 앞에 털썩 앉았다. "이리 앉거라." 견아는 운리소유와 마주 앉았다. "과 국수와는 어떻게 판을 만드느냐?" 견아는 잠시 생각했다. 비록 마지막 대국은 석 점이었지만, 그것은 할아버지의 기력이 극도로 쇠약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넉 점으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견아의 대답을 들은 운리소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이로 과 국수와 넉 점이라면 범상한 기력(棋力)은 아니지... 그것을 내게 보여 보거라." 그것을 내게 보여 보거라... 담담한 어조였지만 내포한 뜻은 무척 심각한 것이었다. 만약 재주를 보이지 못한다면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열두 살 짜리 아이에게 있어서는 평생 처음으로 맞이하는 중대한 시험... 견아는 벌써부터 자신의 심장이 콩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견아는 두 눈을 꼬옥 감고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할아버지의 혼백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자신의 어깨 너머로 이 대국을 지켜봐줄 것이다. 할아버지... 견아는 눈을 떴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네 개의 흑자를 반상에 얹었다. * * * 치기(置棋 : 접바둑)의 본질은, 교묘한 수순으로 혼전(混戰)을 획책하려는 상수와 치 석(置石)의 효과를 살려 국면을 단순하게 이끌어 나가려는 하수 사이의 대립 및 타협 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운리소유와 견아의 바둑 또한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삼십여 수 이상 진행된 반상은 이제 기본적인 포석(布石)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 있었 다. 운리소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반상 전체를 한 번 훑어보았다. 흑진은 단단하되 응축되었고, 백진은 허술하되 자유롭다. 활동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미 치석의 효과가 절반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이 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 없었다. 비록 뭉친 꼴이라고는 하지만 흑이 그런 식으로 튼튼하게 포진해 둔다면, 백의 입장 에서는 술수를 부릴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운리소유는 다음 착점으로 하변에 구축해놓은 백진을 한껏 넓히는 수를 취했다.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견아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천망(天網)은 비록 회회(恢恢)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어렵다는 옛말처럼, 허술 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백의 포진(布陣)은 의외로 약점을 찾아내기 힘들었다. 그대로 방치하자니 하변 전체가 백집이 되는 것이 부담스럽고, 깊숙이 침투하자니 선 공(先攻)을 당해 기선을 빼앗기는 것이 것이 싫었다. 두 가지 모두 마음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내 집이 많다.' 한동안 골몰히 궁리하던 견아의 선택은 유화책(柔和策)이었다. 백진에 대한 수단은 일단 보류한 채, 이미 확보해놓은 집을 더욱 공고히 굳히기로 작 정한 것이다. 이처럼 긴 호흡으로 대국을 이끈다면 최소한 크게 패하는 망신만은 피할 수 있을 것이 라는, 한껏 움츠러든 내심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소심한 착점이었다. 깃털처럼 훌쩍 날아 흑진을 가볍게 삭감하는 운리소유의 손길은 견아의 이런 소심함 을 정확하게 추궁하고 있었다. 운리소유와 견아의 바둑이 백여 수 남짓 진행되었다. 중앙을 크게 구축한 백은 그 두터움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흑을 괴롭히고 있었다. 백의 운신술은 그야말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달한 것 같았다. 흑이 물러서는 기미가 보이면 송곳처럼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고, 흑이 반격하는 기미 가 보이면 솜뭉치처럼 부드럽게 풀어진다. 이렇듯 매수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득을 취하니, 흑의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라고밖 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견아는 목이 바싹 타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 분의 기력은 결코 할아버지의 아래가 아니다.' 견아가 겪은 바, 운리소유의 바둑은 비록 과추운의 그것처럼 무지막지한 괴력을 지니 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과 돌 사이에서 발생하는 오묘한 조화의 힘은, 마치 잘 조련된 정병(精兵)들 처럼 각각의 위력을 한층 상승시키고 있었다. 운리소유의 바둑에는, 이른바 '착점과 착점은 서로 어울려야 한다'는 동수상응(同手 相應)이 묘용이 십분 담겨 있는 것이다. 과추운의 기예가 강성(剛性) 일변도의 패도(覇道)라면, 운리소유의 그것은 강유(剛 柔)가 잘 어울린 조화지도(造化之道)... 이들 두 대가에게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으니, 만약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룬다면 누구 도 감히 승리를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견아는 잠시 수읽기를 멈추고 형세를 헤아려 보았다. 하변에서 일어난 백의 세력이 이대로 집으로 바뀐다면, 세 귀와 한 변을 크게 확보한 흑으로서도 장담하기 힘든 국면이었다. 하지만 아무 대책도 없이 백의 세력 안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 행위, 뭔가 기발한 수단 을 찾아야만 했다. 이때 견아의 장고에 지루함을 느낀 듯, 운리소유는 창가에 서 있던 모용풍을 향해 말 했다. "선생께서는 환신당(還神堂)의 구양신의(歐陽神醫)와 친교가 두터우신 것으로 압니다 만...." 구양신의라면 강호에서 의술이 제일 뛰어나다고 알려진 구양정인(歐陽定仁)을 가리켰 다. 운리소유가 말을 이었다. "신의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알고 있소이다." 과추운을 살리기 위해 수천 리 겨울 길을 멀다 않고 구양정인을 찾았던 모용풍이었다. 구양정인이 아들 구양현의 약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거처를 비운 사실을 알았을 때 하 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던 일은 아직도 그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 다. 운리소유는 수염을 한 차례 매만지더니 다시 물었다. "신의의 며느리가 될 소저가 강동의 석씨세가 출신인 것도 아시겠군요." 모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전주께서 석대원이란 청년을 한 번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순간, 견아의 몸뚱이가 부르르 떨렸다. 견아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운리소유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석대원! 이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의 이름이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것을 못 보았을 리 없는 운리소유였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다만 뜻 모를 미소를 머금은 채 시선을 반상으로 옮길 뿐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이것도 시험의 일종이었다. 지금 석대원이 무양문이 있는 복건(福建)에 머무는 사실은 이미 신무전의 정보망에 걸려 있었다. 모용풍과 석대원이 결별했다는 것과, 그것이 과추운의 죽음에 기인한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리소유가 굳이 석대원의 이름을 들먹인 이유는 견아의 심중을 한 번 뒤흔들어놓기 위함이었다. 반전무인(盤前無人)이라는 말이 있다. 진정한 기객이 되려면 바둑판 앞에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부동(不動)의 정력(定 力)이 필요한 법... 운리소유는 견아의 심지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한동안 몸을 가늘게 떨던 견아는 흑자 하나를 들어 착수했다. 따-앙! 반상을 두드리는 요란한 돌 소리에는 견아의 격앙된 심중이 실려 있었다. 착점 또한 돌 소리만큼이나 과격했다. 백의 세력권 안으로 깊숙이 뛰어든 견아의 그 한 수는, 스스로의 박약함을 돌보지 않 은 채 백의 두터움에 지나치게 접근해버린 것이다. 운리소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형세가 외로울 때엔 화책(和策)을 취하라'는 세고취화(勢孤取和)의 기리(棋理) 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수를 둔 아이의 대국관(對局觀)이 못 마땅했다. '아직 어린 탓일까...?' 운리소유는 펼쳐두었던 백의 그물을 슬쩍 오므리며 흑 한 점을 멀리서 봉쇄했다. 그 수를 본 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운리소유의 착점은 진실로 기묘했다. 만약 운리소유가 침투한 흑에 대해 직접적인 공세를 퍼붓는다면, 견아의 입장에서도 흑 한 점을 사석(捨石)으로 처리하며 백의 세력을 깎아나갈 여지가 충분했다. 하지만 이처럼 넓게 포위한다면, 어쩔 수 없이 침투한 돌을 살려내야만 했다. 그것이 백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날에는 형세는 급전직하(急轉直下)로 떨어지고마는 것 이다. 견아는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흔들려 과수(過手)를 두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온 몸의 피를 정수리로 솟구치 게 만든 것이다. 견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한편, 운리소유는 견아와는 다른 곤혹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십여 수...' 운리소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공방이 십여 수 이어진다면 견아로부터 항서(降書)를 받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 후는 어떻게 해야 하나? 비록 크게 흡족하지는 않지만, 그 재질을 어여삐 여겨 제자로 받아들여야 하나? 운리소유는 바둑이 끝난 이후의 일에 대해 미리 생각해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견아를 바라보던 운리소유는, 차분한 성격답지 않게 깜 짝 놀라고 말았다. 견아의 입에서는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이빨로 세게 깨물었던지 입술 살점이 그대로 찢어진 것이다. 하지만 견아는 참쇠 앞자락이 붉게 물드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반상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의 모든 영혼이 바둑판과 바둑돌 위에 얹혀진 것 같았다. '이토록 절실했던 것일까?' 운리소유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 되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호착(好着)을 찾으려 애쓰는 견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견아가 드디어 한 수를 착점했다. 운리소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견아가 놓은 흑자를 바라보았다. 기백이 실린 강수(强手), 포위망을 헤치고 달아나기보다는 오히려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림으로써 백진 속에서 독자적인 삶을 꾀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수였다. 운리소유는 다시 견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견아는 아직도 입술의 상처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운리소유는 빙그레 웃었다. '배짱 하나만은 알아줄 만하군.' 안에서 살 수 있는 자신이 있는 것일까? 견아의 착수는 분명 무모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한 수만 벌 수 있다면, 흑은 넓게 포진한 백진 속에서 필사적으로 좌충우 돌한다면 반생반사(半生半死)의 패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견아는 과연 그러한 수순을 찾아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아이의 수읽기의 힘은 이미 절정의 수준이라 말할 수 있었다. 과씨의 기예가 전투에서 강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온 운리소유는 견아를 통해 그것을 감상하고 싶었다. 딱. 운리소유가 백자 하나를 가볍게 반상 위에 얹었다. 견아의 착수에 응대하지 않고 외곽의 그물을 더욱 튼튼히 굳히는 수였다. 그 수는 견아에게 '어디 마음껏 힘을 써 보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경우에 대한 수읽기가 이미 끝난 듯, 견아의 다음 착수는 무척 빨랐다. 이제 국면은 단순해졌다. 침투한 흑마(黑馬)의 생사가 승패와 직결되는 급박한 국면이 된 것이다. 생즉흑승(生卽黑勝)이요 사즉백승(死卽白勝)이라. 그런 가운데 운리소유가 예상했던 십여 수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 * * 운리소유는 백자를 들고 잠시 망설였다. 이제 백이 일선(一線)에서 젖혀 들어가면 예상했던 패가 난다. 견아는 백이 한 수 늦춘 틈을 비집어 최선의 수순을 찾아낸 것이다. 패가 일어난다면 흑으로서는 대만족, 패의 대가로 백 세력의 다른 일각을 뚫을 수 있 다면 탄탄한 흑의 집이 돋보이는 국면이었기 때문이다. 딱. 드디어 운리소유가 착수했다. 젖혀 패를 내는 대신 흑집 안에 들어 있던 백자를 셋으로 키운 것이다. 이것은 견아에 대한 마지막 시험이었다. 일종의 힐기(詰棋 : 묘수 풀이) 문제와도 같은 모양... 만약 견아가 정확히 응수한다면, 흑 대마는 패를 내지 않고도 삶을 꾀할 수 있었다. "아!" 그런데 갑자기 견아의 입에서 짤막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설마 운리소유가 둔 수에 담긴 술책을 간파하지 못한 채, 그 수로 흑 대마가 죽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하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아니었다. 견아는 이와 유사한 모양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늙어 꼬부라진다 한들 이 모양만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견아의 눈까풀이 가늘게 떨렸다. 견아는 눈을 떴다. 이어 손을 내밀어 흑자 하나를 두 점으로 나란히 세웠다. 그 순간, 흑집 안의 백 세 점은 움직일 곳이 사라졌다. 둔탁해 보이는 흑 두 점이 백 세 점의 공배를 교묘히 채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운리소유가 읽어 둔 정확한 응수... 그 수와 함께 바둑이 끝났다. 운리소유는 활짝 웃었다. "과 국수께서 아주 잘 가르치셨구나! 네가 이겼다." '네가 이겼다'는 운리소유의 말을 들은 견아는 마음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왈 칵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운리소유는 자애로운 목소리로 견아에게 말했다. "나의 기예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 중에서 신(信)을 지상(至上)의 덕목으로 삼는다. 기예가 오를수록 계교와 교만 또한 오르게 되니, 이는 무공이 오를수록 심마(心魔)의 벽이 높아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너에게는 이미 한 가문이 이룩해 온 기예가 쌓여 있다. 이제 너는 새로운 기예를 익히게 되었으니, 십 년이 지나면 아마도 적수를 찾기 힘들 터...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충실하여, 남과 나를 기만하지 않는 믿음의 바둑을 이루기를 바란다." 이것은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내리는 첫 번째 가르침... 견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무릎을 채 펴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오랜 시간 무릎 꿇고 앉았던 탓에 허리 아래의 감각이 사라진 탓이다. 하지만 견아는 두 손으로 무쇠 바둑판을 버티며 끝내 몸을 일으켰다. 이어 몸을 곧게 세우고 운리소유를 향해 말했다. "제자가 사부님을 뵙습니다!" 일 배, 또 일 배... 견아는 운리소유에게 배사지례(拜師之禮)를 올리기 시작했다. 열두 살 짜리 아이가 피가 통하지 않는 하체를 휘청거리며 숙배(肅拜)하는 광경은, 감동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비장해 보였다. 운리소유와 모용풍은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수를 두기 직전, 견아의 마음을 엄습한 격정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운리소유를 향해 절을 올리는 이 순간에도 견아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솟아나 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진정 과추운의 혼백이 있어 손자의 대국을 응원했던 것일까? 견아의 마지막 착수인 둘로써 셋을 잡는 묘수(妙手). 그것은 과추운이 최후의 대국에서 일깨워준 '이도삼사(二桃三士)'의 힐기(詰棋)였던 것이다. <註> 이도삼사(二桃三士) : 두 개의 복숭아로 세 명의 장수를 제거함. 춘추전국시대 제(齊) 경공(景公)은 세 명의 용맹한 장수가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고야자(古冶子), 전개강(田開强), 공손접(公孫接)이라고 했다. 그들 세 장수가 자신의 힘만을 믿고 점점 방자해지자 경공은 이들을 제거할 방도를 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제나라의 명재상 안자(晏子)가 하나의 계교를 생각해 내었다. 다음날 경공은 세 장수에게 두 개의 복숭아를 내리고, "누구든지 공이 큰 자, 이것을 먹어라."하며 권했다. 그러자 공손접이, "나는 범을 맨손으로 잡았으니 이를 먹을 자격이 있다." 말하며 한 개를 차지했다. 전개강 또한, "나는 적을 물리치고 국토를 넓혔으니 이를 먹을 자격이 있다." 말하며 남은 하나를 차지했다. 이에 화가 난 고야자는, "예전에 내가 괴물로부터 임금을 구하기 위해 백 리를 헤엄 쳤으니 내 공이 너희들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거늘, 내 복숭아는 어디에 있는가!"라 고 두 사람을 꾸짖었다. 이 말에 큰 부끄러움을 느낀 공손접과 전개강은 자결하였고, 이를 본 고야자 역시 친 구들을 따라 목숨을 끊었다. 이것이 이도삼사에 얽힌 유래이다. <현현기경>의 묘수풀이 중 이도삼사의 문제는, 두 개의 돌이 공배의 묘용을 발휘하여 세 개의 돌을 잡는 형태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