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 폭염(暴炎) 그것은 실로 수십년만에 보는 지독한 무더위였다. 태양은 연일 하늘이 라도 녹여버릴 듯이 뜨겁게 이글거렸고 대지는 그로 인해 마치 열탕속 에 빠진 것처럼 심하게 달아올랐다. 밖으로 나서면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듯한 그 살인적인 더위에 길가 에는 대부분의 점포들이 거의 문을 닫았고, 또한 이미 행인들의 자취도 매우 드물어졌다. 만일 그와 같은 날씨에 여행을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거의 목숨 을 거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늘상 어떤 예외를 가지고 있는 법이어서, 실로 그러한 폭염속에서도 뜻밖에도애써서 굳이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들이 있었다.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의 어느 큰길에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서너 개의 상여를 둘러매고 떠들썩하게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상여들은 하나 같이 온갖 빛깔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대단히 화려해 보였다. 그 큰길가에 하나의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즐비한 장원(莊園)이 있 고, 그 장원의 어느 별채에 우연히도 방안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나이 어린 서생(書生)이 있었는데, 그 서생은 한동안 그와 같은 광경 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직하게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아아, 저들은 어찌하여 저토록 애통해 하는 것일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정녕 슬프게만 보이는 것일까?" 서생의 옆에는 한 명의 늙은 하인이 서서 부채를 부쳐주고 있었는데, 서 생의 말을 듣고 나자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어 한마디를 던졌다. "그야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죠. 그러니 막내 공자님께서도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시고 부지런히 학문을 배워서 경륜을 쌓으셔야 합니다. 물론 무공(武功)을 배우셔도 좋구요. 만일 이렇 게 계속 놀기만 하시다가는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시게 되실 것입니다." 서생의 이름은 백방생(白方生)이라고 했다.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그 늙은 하인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럼 학문을 배우고 경륜을 쌓는다면 죽지 않게 된다는 말인가?" 하인은 그만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물론 그렇게야 할수 없는 노릇이죠. 하지만 실은 이 세상에 있어서 죽 음보다도 무서운 것은 바로 이 가난이라는 것입니다. 막내공자님께서 만 일 노력하시지 않는다면 그 많은 재산을 모두 잃고 가난해지게 되실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백방생은 문득 쓴 웃음을 지었다. "또 그런 말이로군. 하지만 나 역시 노력하는데도 잘 되지 않는 것을 어 떡하나. 게다가 이미 시기적으로 늦어 버린 것 같기도 하고......" 하인은 부채질을 멈추고서 물었다. "노야(老爺)께서 오늘 부르신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더 사시지는 못할 거야. 나에게 큰 재산을 맡기 실 리는 없고 나는 결국에는 빈털터리가 되어 이 장원에서 쫓겨나게 되 겠지." 하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것은 막내공자님께서 지난날 노야를 너무나도 실망시켜 드렸기 때문이죠. 죄송하지만 사람들이 막내공자님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 까?" 백방생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바보 공자님이겠지." 하인은 자조섞인 어조로 말하는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부채질을 해 주며 말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요즈음의 막내 공자님의 모 습은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졌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 앞에서 말도 제 대로 하지 못하셨죠. 지금이라도 좀더 나아지신 그 모습을 노야께 보여 드리면 아마도 노야께선 막내 공자님을 더 많이 생각해 주실 것입니다." 백방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에 와서 그런 것은 이젠 관심이 없네. 나는 그저 할아버지께서 좀 더 오래 사시기를 바랄 뿐이지. 그나저나 이 날씨는 정말 너무 덥군 그 래. 할아버지께선 아마 견디지 못하실 거야." 하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노야께선 항상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 계시니 이 더위와는 상관이 없습 니다. 본래 돈이 많은 부자들은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그 더위 때문에 죽는 일은 없는 법입니다." 백방생은 의아한 듯이 손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럼 저 세 명의 부자들은 더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 인가? 하인은 가볍게 냉소했다. "막내공자님께서는 아직 모르시고 계시는군요. 소문은 제법 그럴듯하게 퍼져 있지만 사실 그들은 더위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실 상 모두 다른 어떤 이유들 때문에 죽은 것이지요. 단지 그것을 드러내 놓 고 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저 그렇게 더위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속인 것에 불과합니다." 백방생은 문득 정말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뭐라고! 무슨 이유가 있다는 말이지?" 하인은 그 대답을 할까 말까 하고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이윽고 다 시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전에 장백산(長白山)에서 한 심마니가 삼백년이나 묵은 산삼 두 뿌리를 캤는데 그것이 우연히 이 근방으로 흘러들어와 전(錢) 부자와 조(趙) 부자가 각각 하나씩 나눠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이윽 고 그 산삼들을 각기 조심스럽게 복용을 했지요. 그런데 그들은 그 다 음날 똑같이 침상위에서 이상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백방생은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럼 그 산삼이 잘못된 것인가?" 하인은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장백산의 산삼은 예로부터 천하에서 알아주는 최고의 명물입니다. 게 다가 그 두 뿌리의 산삼은 삼백년이나 묵은 것이라 그야말로 희귀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 또한 약효도 훌륭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먹고 잘못될 리는 없는 것이죠." 백방생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자네는 그들이 그 산삼들을 복용하고 죽었다고 하지 않았는 가?" 하인은 말했다. "저는 그들이 산삼을 복용하고 나서 죽었다고 했지 그 산삼 때문에 죽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죠." 백방생은 물었다. "그럼 그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죽었다는 말인가?" 하인은 말했다. "아까 제가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마른 장작개비처럼 괴상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흡혈귀(吸血鬼)의 소행이라고 말하 고들 있습니다." 백방생은 그 말을 듣고 약간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흡혈귀라고? 설마하니 정말로 그와 같은 귀신들이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하인은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정말로 귀신이 있는 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 두 부자가 천하의 영약인 수백년 묵은 산삼을 복용했기 때문에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전에 다른 성시(城市)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이 있었다고도 하고요." 백방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다른 한명의 부자와 한명의 처녀가 죽은 것도 그와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인가?" 말을 하는 동안에 대로상의 그 상여들의 행렬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인은 텅 비어버린 대로상을 힐끗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처녀가 죽은 이유는 갑자기 미쳐서 기가 넘어 갔기 때문이고, 그 다른 한명의 부자가 죽은 이유는 그의 외아들 때문 입니다." 백방생은 웃으며 물었다. "그 외아들 역시 미쳐서 자신의 부친을 살해하기라도 했다는 말인 가?" 하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외아들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그 외아들에게 모두 물려주기로 작정을 했었구요. 그런데 어느날 그 외아들 이 자신의 부친에게 돈을 달라고 했는데 웬일인지 그 부자가 돈을 주지 않자 갑자기 칼을 들고 달려들어서는 그 부자의 목을 베고 집안의 모 든 돈을 털어서는 달아났다고 합니다." 백방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상한 일입니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서 그러는지 지금 천하 곳곳에도 미친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지금 무 림계(武林界)의 조짐이 아주 심상치 않다고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들 같은 사람들은 세상이 멸망하지만 않는다면 그저 그렇게 살아 가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부자는 편안하게 살고 가난한 사람은 평생 개 처럼 빌어먹게 되는 것이죠." 백방생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결국 자네는 내게 역시 정신을 차리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로 군?" 하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솔직히 저야 막내공자님께서 어떻게 되시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몸입 니다. 하지만 보기에 워낙에 딱하니까 이런 말씀도 드리는 것입니다. 가 급적 오해는 없으시기 바랍니다." 백방생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해는 하지 않네. 그건 그렇고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된듯 하니 할아 버지께 가 봐야 하겠군. 자네는 날 따라올 것은 없네." 대로상에는 그 뜨겁고 숨막히는 열기속으로 이제 다시 정적만이 가 득 흐르고 있었다. 그 정적은 일면 한가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마 치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백방생은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2 장 백의관음(白衣觀音) 백방생은 다소 일찍 자신의 거처를 나선 셈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날 씨는 생각보다도 더욱 무더운 것 같았다. 이런 날에는 밖에서 오래 걸어다니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러 나 백방생은 도리어 그럴 수록 밖에서 좀더 오랫동안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직 본채로 곧장 들어가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다소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일부러 산책을 하듯 서서히 후 원(後園)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백노야(白老爺)의 장원에 있는 후원은 이미 성안에서도 이름이 알려 져 있었다. 많은 돈을 써서 가꾼 정원이라 경치가 수려하여 매년 이때 쯤이면 많은 사람들이 놀러 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놀러 오 지 않았을 것이다. 백노야가 병환이 깊어진 이후로 실질적인 이 장원의 주인이라고 할 수가 있는 백방생의 백부 백귀현(白歸玄)은 사람들에게 잠시 그곳으로 놀러 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불과 한식경도 지나지 않아 백방생은 후원에 이르렀다. 후원의 경치는 정말로 언제나 보아도 아름다왔다. 기암괴석과 온갖 아름다운 나무들,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넓 은 연못과 가산(假山)에서 허옇게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들..., 그리고 화 려하게 채색된 정자(亭子)에 이르기 까지 여기엔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 었다. 아마도 여기엔 황금을 그대로 깔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었다. 역시 여기에 오자 더위가 한풀 꺾이는 것 같기도 했다. 백방생은 잠시 정자의 주위를 거닐다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일단 연못의 앞에 서자 그의 생각은 다소 달라졌다. 과연 이곳 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이곳으로 온 바에는 좀더 분명하게 놀다 가 야 하지 않을까? 세 개의 가산 가운데 하나에는 인공동굴이 만들어져 있었다. 하나의 폭 포수가 그 입구를 가리고 있는데,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서 안으로 들 어가면 그곳은 바로 커다란 목욕탕이었다. 기관장치에 의해 지하수를 퍼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물은 매우 시원 했다. 백방생은 일단 겉옷을 벗어 든 다음에 그 동굴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겉옷을 벗어든 것은 폭포수에 젖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난 데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봐요, 거기 잠시 말 좀 물어 보겠어요." 백방생은 순간 솔직히 가슴이 약간 뜨끔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백부인 백귀현은 사람들에게 이곳으로 오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는데, 아무리 포기한 상태라고 해도 자신으로선 누구에게 들키면 그건 미안한 노릇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문득 다음 순간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왠지 그 음성이 귀에 익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니 맞은 편의 가산 중턱에 한 명의 백의소녀 (白衣少女)가 서 있었다. 과연 그 백의소녀의 모습은 매우 낯설었다. 백방생은 문득 웃음이 나왔다. 하기는 이곳에 낯선 사람이 찾아 와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백의소녀는 백방생이 혼자 웃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이 봐요, 왜 사람을 보고 그렇게 웃는 거죠?" 백방생은 그제서야 생각에서 깨어나서 미소하며 그 백의소녀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오. 사정이 있어서 그랬으니 양해해 주시오. 헌데 소저께선 어 디에서 온 누구시오?" 알고 보니 그 백의소녀의 용모는 그야말로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왔 다. 나이는 그 보다 서너 살 정도 아래인 십칠 팔 세로 보였는데, 그 야말로 투명한 옥으로 깎아 만든 인형이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비록 이제까지 많은 여자들을 보아왔지만 그처럼 예쁘게 생긴 여자는 처음이었다. 백의소녀는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고 있다가 이 내 대꾸했다. "내가 누구이건 당신이 알 바 없어요. 당신은 다만 내가 묻는 말에 몇 마디의 대답만 해 주면 돼요." 백의소녀는 비록 용모는 대단히 아름답지만 성격은 다소 오만하고 차가운 것 같았다. 보아하니 그녀가 한번 눈썹을 찌푸리자 그 백옥같은 작은 얼굴에는 서리가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백방생은 상대가 아무리 무경우하다고 해도 이미 그러한 것 을 무수히 겪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하며 이내 대꾸했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물어 보시오. 내 아는 대로 대답해 드리겠 소." 백의소녀는 상대방이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오히려 다소 의외인 모양이었다. 사실 백방생은 그녀가 낯선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편한 상대였다. 백의소녀는 말했다. "당신은 백노야의 방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요?" 백방생은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아, 소저는 알고 보니 바로 그곳을 찾고 있던 중이었구려? 물론 나는 알고 있소. 헌데 그곳은 무엇 때문에 찾으시오?" 백의소녀는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런 것까지 알 필요가 없어요. 그저 나에게 지금 그곳의 위치를 가르쳐 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백방생은 문득 웃으며 대꾸했다. "만일 내가 지금 그 곳의 위치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어쩌시겠소?" 백의소녀는 문득 우수를 들어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자 백방생의 옆에 있던 연못의 물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서 백방생 의 온몸에 물벼락을 씌워버렸다. (어이쿠!) 백방생은 그만 깜짝 놀랐다. 그는 다소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눈앞의 이 나이 어린 소녀가 그와 같은 상승(上乘)의 무공을 지닌 고수 일줄은 미처 예상도 하지 못했다. 조금전의 그 수법은 물론 장력(掌力)이었다. 하지만 장력을 날려서 물 을 옆으로 날아가게 하다니 그것은 결코 평범한 수법이 아닌 것이다. (빌어먹을, 성질이 급하기도 하군...) 백방생이 내심 화를 내고 있는데 그의 귓가에 다시 그 백의소녀의 음 성이 들려왔다. "만일 다시 한 번 그런 소릴 한다면 당신을 그 물속에 쳐박아 버리겠어 요." 백방생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백의소녀는 여전히 싸늘한 신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방생은 어이가 없고 내심 화가 나기도 했지 만 그러나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씁쓰레하니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거, 소생이 무심코 한 말에 소저께서 그토록 화를 내실 줄은 몰랐 소이다. 그곳의 위치를 가르쳐 드리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요, 하하...." 이어 백방생은 차근차근 백노야의 거처를 백의소녀에게 가르쳐 주었 다. 백의소녀는 그 얘길 다 듣더니 이윽고 가볍게 냉소를 날렸다. "권하는 술은 마시지 않고 일부러 벌주를 마시다니 정말 멍청한 작자 로군!" 백방생이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에는 그녀의 신형은 이미 안개처 럼 변하여 빠르게 가산 너머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녀가 서있던 곳에서 가산의 꼭대기까지는 거리가 최소한 십 장은 넘는다. 그런데 그 거리를 단번에 가볍게 날아서 넘어간다고 하는 것 은 실로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백방생은 그것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무공(武功)도 많이 보편화 되었다. 백방생도 이미 어렸을 적부터 글방사부 이외에도 무학사부를 따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아 본 바가 있 었다. 비록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백방생은 자질이 형편없어서 거의 무공을 배우지 못했지만, 그러나 다행히 무학에 관한 상식은 많이 얻어 들어서 안목은 제법 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조금전에 백의소녀가 펼친 그 장법과 경공(輕空)은 바로 상승의 무학이었다. 백방생은 말로만 듣던 상승의 무학을 다시 한번 보자 눈이 휘둥그래졌 는데, 거기에 다시 그녀의 나이가 이제 겨우 십칠 팔 세 정도라는 것을 상기하자 그만 절로 넋나간 표정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무학이 상승의 경지에 이르게 하려면 훌륭한 자질 이외에 도 이갑자(二甲子)라는 공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일갑자의 공력이란 바로 육십년동안 부단히 노력하여 얻는 공력을 말하는 것인데, 대체 그녀는 어떻게 그 나이에 그와 같은 막대한 공력을 얻게 된 것일까? 지금 백방생의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는 것은 바로 과거 그가 무학을 배울 때의 광경이었다. 당시 그는 마음속의 잡념이 너무 많아서 무학은 물론 학문마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만일 당시 그가 다른 사람들만큼만 배울 수가 있어서 지금 이류(二流) 의 경지에만 올라 있었어도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신망을 잃게 되지는 않았었을 것이었다. 백방생은 잠시 후에 상념에서 깨어났는데 그의 머릿속은 마치 더위를 먹은 것처럼 혼탁하고 어지러웠다. 그의 의복은 이미 들고 있는 겉옷까 지 흠뻑 젖어 있었지만 얼굴은 이미 말라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백방생은 폭포뒤의 동굴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제는 시간도 많이 지났거니와 굳이 그렇게 물속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 도 사라졌다. 기왕에 물벼락을 맞았으니 한번 들어가서 물속에 몸을 담그면 시원 해지겠지만 그는 굳이 겉옷을 걸치고 몸을 돌렸다. 햇볕이 이렇게 뜨거 우니 의복은 가다 보면 다 마를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마악 걸음을 옮겨 놓으려고 하는 데 갑자기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 참, 노야께선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야. 백세가 넘으셔서 그와 같 은 중병(重病)이 드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그와 같은 무림의...사람들을 부르시다니, 대체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 "내 생각에는 말이야...그러니까 다섯이나 온 것이 아닌가 말이야...최 소한...." 폭포수의 소리 때문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 음성들은 바로 다름아 닌 백방생도 잘 알고 있는 하인들의 말소리였다. 아마도 그들은 우연히 이 부근을 지나치며 얘기를 주고 받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그들에게 여기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면 좋지 않을 것 이라고 생각하고는 얼른 다시 몸을 돌려서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하인 들의 말소리는 점점 가까와 지고 있었다. "하하...아무리 그래도 그 바보가...재산을 지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 려운 일이지. 아마도 그는 어리숙하게 굴다가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다 날려버리게 될 것일세." "아니 어째서 내게는 그와 같은 복이 굴러 들어오지 않는다지!" "에이, 이 사람아! 그것도 다 복을 타고 나야 하는 법이라구. 듣자니 그 바보는 마음씨 하나는 착한 모양이던데?" "빌어먹을, 착하기만 하면 뭣 하나? 그것이 바로 멍청하다는 증거라구. 어디 이 세상이 착하기만 해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란 말인가?" "허허허, 하긴 그래. 헌데 말이야...이상한 소문이 들리더군. 그 바보같은 멍청이 막내공자가 말이야...노야의 친손자라고 하더군...." "이봐 그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아니야. 내 얘기는 말이야, 그러니까...." 백방생은 지금 하인들이 말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장원내의 하인들과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에 대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치욕스런 악담들을 해 왔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백방생은 그것이 오로지 자신의 책임이라고만 생각을 했었 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자연스런 움직임이라면, 어떻게 거짓말처럼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인들은 말을 하다가 말고 갑자기 잠시 조용해 지는듯 하더니 이내 빠르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아마도 아까 그 백의소녀가 엎질러 놓았던 물이 다 마르지 않은 것을 보고, 누군가 이 부근에 있을 것이라 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인들의 발걸음 소리가 그렇게 완전히 멀어지고 나자 백방생은 그 제서야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한낮의 열기는 여전 히 뜨겁게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차라리...이대로가 나을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닐까?) 백방생은 속으로 몇마디 중얼거리다가 이윽고 본채의 건물을 향해 걸음 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방생이 본채의 건물앞에 도착했을 때는 그로부터 다시 한식경의 시간 이 흐른 뒤였다. 이 본채의 건물은 모두 오층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웅장하여 그런 점 만 생각한다면 역시 찾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본채의 일층 중앙에는 커다란 대청이 있고 백노야의 거처는 삼층에 있었다. 본채의 앞에는 연무장(鍊武場)을 방불케 하는 널찍한 마당이 있었는데, 지금 그 곳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물론 이 백노야의 장원은 규모가 방대하기 때문에 거기에 의탁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다. 하인들 뿐만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도 많고 집사들만 해도 여러명이나 된다. 지금 마당의 중앙에는 병기가(兵器架)와 모래주머니, 전파(箭把), 석 고(石鼓), 석쇄(石鎖) 등의 무공을 연마하는 기구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 었고, 한 사람이 그 옆에서 바닥에 박혀있는 매화춘(梅花椿)들을 밟아 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자못 날렵했을 뿐만 아니라, 그 용모도 눈에 익었다. 간혹 사람들의 우뢰와 같은 탄성소리가 울려나오면 그 시전자는 마치 거기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공중으로 몸을 일장 이상이나 띄워올려 공 중제비를 돌곤 했다. 그럴 때마다 더욱 여기저기에서 대단하다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본래 이 백노야의 장원은 장사꾼의 집안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지 무슨 무학세가의 집안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러 무공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기는 해도 백노야는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 다. 이곳에서는 무학보다는 차라리 학문이 더욱 어울렸을 것이다. 물론 마 당에 지금처럼 연무도구를 갖다놓고 공공연하게 시범을 보이는 일도 없 었다. 그런데 이게 갑자기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금 시범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건장한 체구의 소년으로 바로 백방 생의 큰조카인 백철우(白鐵牛)였다. 그는 바로 백방생의 큰형인 백방각 (白方覺)의 맏아들로서 나이는 지금 열 여덟이었고 일신에 제법 고절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무공수준은 이류급이었다. 사실 말하자면, 백방생은 어려서부터 무공을 그와 같이 배우다시피 했었는데 이제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 는 격차가 생긴 것이었다. 백방생은 공연히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옆으로 돌아서 지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마치 그가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백철우가 즉시 허공에 서 두어 번 공중제비를 돌더니 그의 앞에 날아 내렸다. "막내삼촌, 어딜 가십니까?" 백방생은 그가 지금 오장 이상이나 날아온 것을 보고 그의 무공이 다시 증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백방생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 게 집중되는 것을 보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는 할아버지께 가는 길이다." 백철우는 그 말을 듣고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막내삼촌, 그러지 말고 지금 나와 함께 무공시범을 펼쳐보이는 게 어 때요? 막내삼촌도 나와 함께 배우지 않았습니까?" 백방생은 그것이 자신에게 물을 먹이려는 수작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는 지난 날 너무나도 많이 그런 수법에 당했었다. 백방생은 이 무공이 고강하고 능글맞은 조카를 상대하기가 곤란했다. 백방생은 겸연쩍게 웃 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나는 너 보다 실력이 없고 또한 바쁘니 그럴 수가 없구나." 백철우는 다소 실망했다는 듯이 능글맞게 웃으며 손으로 백방생의 어깨를 툭, 쳤다. "에이, 그러니까 또 내가 멋쩍어 지잖아요. 시간이 없다는 말은 거짓일 테고...어디 나의 장력(掌力)이나 한번 받아 볼래요?" 그런데 백철우가 그저 가볍게만 보이는 동작으로 어깨를 툭 치자 백 방생은 갑자기 전신이 시큰해지고 뼈마디가 뒤틀리는 듯한 감각을 느 꼈다.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었기 때문에 백방생은 미처 소리도 지르 지 못하고 당황해졌다. 백철우는 그가 아무런 말도 못하자 즉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소리를 질렀다. "자 그럼 준비하세요!" 말과 동시에 백철우는 양손을 오른쪽 옆구리에 모으고 허리를 구부리 고 왼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장력을 내쏟을 자세를 취했다. 헌데 그의 장력이 미처 발출되기도 전에 돌연 백방생이 가만히 있다가 벌렁 나동그 라지며 땅바닥에서 마구 뒹구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일순 대소(大笑)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때 한 명의 비단장삼을 걸친 키다리 중년인이 나서서 백철우에게 한마디를 했다. "철우야, 너의 막내삼촌은 몸이 허약한데 그렇게 무공으로 놀라게 해서야 되겠느냐?" 그 키다리 중년인은 바로 백방생의 둘째형인 백방행(白方行)이었다. 지 금 그의 옆에는 역시 한 명의 키가 큰 소년이 서 있었는데, 그는 바로 백방행의 아들이자 백방생의 둘째조카인 백철산(白鐵山)이었다. 백철산은 다소 음침한 시선으로 쓰러져 뒹굴고 있는 백방생을 내려 다 보고 있었다. 백철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 했다. "아니예요. 저는 보다시피, 전혀 장력을 내쏟지도 않았는데도 저렇게 된걸요. 아마도 막내삼촌이 평소에 간질이 있었나 봐요."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왁자하니 웃고 떠들었다. 백방행은 고개를 저으며 백방생에게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한번 가볍게 친 다음에 그의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그가 친 위치는 공교롭게도 아 까 백철우가 친 자리와 똑같았다. "그럴 리야 있겠느냐? 어서 이 막내삼촌께 와서 사과하지 않겠느냐?" 백방생이 물론 어떤 질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전에 백철우가 그의 어깨에 펼친 것은 이른바 금나수법(擒拿手法)의 일종인 분근착골수 (分筋錯骨手)라고 하는 것으로,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으로 각혈도(穴 道)를제압하면갑자기기혈(氣血)이역류하고전신근육에 마비가 오며 뼈마 디가 뒤틀려서 커다란 고통을 느끼게 하는 잔혹한 무공이었다. 백철우는 다만 그것을 오직 내경(內勁)만을 사용하여 펼쳤기 때문에 다 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백방생이 갑자기 이유도 없이 발작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백방행은 옆에서 부축해 주는 척 하면서 슬쩍 그 수법을 해소시켜서 흔적을 알 수 없게 했다. 백철우는 백방행의 말을 듣자 정말로 앞으로 다가오더니 능글맞게 웃으며 공손히 사과의 말을 했다. "미안해요 막내삼촌, 만일 무슨 병이 있다면 진작에 말해 주셨어야 죠. 그런 줄도 모르고 난 그저 나 때문에 놀라서 그러시는 줄 알았어 요." 백방생은 이제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분근착골수가 해소되었으니 고통도 사라진 것이다. 다만 지금 백방생은 전신에 흙먼지를 잔뜩 뒤 집어 쓰고 있었다. 아까 물벼락을 맞은 것이 다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땅바닥을 굴렀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장 할아버지를 뵈러 가야 할 텐데 이것은 낭패가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웃으며 상대를 대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네가 나에게 미안할 것은 없다." 백철우 등은 백방생이 오히려 웃자 다소 의아한 표정들이었다. 백철우 는 눈빛을 음험하게 빛내며 다시 물었다. "정말로 기분 나쁘지 않나요?" 백방생은 일부러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하하, 나는 이제 그만 가야겠다.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백철우 등은 사실 지금 모두 옷을 단정하고 깨끗하게 차려입고 있었 다. 백방생은 그들이 흙먼지를 싫어 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그 예상은 맞았다. 백방생이 세차게 먼지를 털자 비단 백철우 뿐만 아니라 주위의 백방행 마저도 얼른 뒤로 물러났다. 백방생으로서는 지금과 같은 흙먼지가 뒤범벅이 된 차림으로는 할아버 지를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러면 보나마나 할아버지는 더욱 실망할 것이었다. 하지만 보아하니 눈앞의 이들은 그가 결코 옷을 갈아입는 것을 허락할 것 같지가 않았다. 과거에 이들은 그에게 결코 이처럼 노골적으로 음해를 가해 오지 않았 었다. 그것은 백방생도 그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아는 것도 불사하고 이처럼 노골적인 수법을 가 해 오다니...,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변화일까? "할아버지의 임종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일까...?" 과연 아니나 다를까, 백방생이 미처 옷을 갈아입으러 가기도 전에 문득 집사 하나가 달려나오더니 말을 전했다. "노야께서 공자님들과 도련님들을 부르십니다!" 공자님들이란 백방생 등을 말한 것이고 도련님들이란 백철우 등을 말한 것이다. 백방행은 그 말을 듣자 이내 백방생의 곁으로 다가와서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번에 그는 내력(內力)을 사용하여 백방생이 조금도 반항할 수 없게 했 다. 겉보기에는 다정해 보이지만 이것은 백방생에게는 억울한 일이었다. 하 지만 지금 그가 억울함을 하소연한다고 해도 들어줄 사람은 하나도 없 다는 것을 백방생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 할아버님께서 자네를 보고 싶어 하시니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 네. 여기에서의 일은 이 형님이 잘 말씀드려 주지. 어서 가세!" 백방생은 그제서야 비로소 이 백방행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그는 이 둘째형의 무공을 시전하는 광경을 거의 보지 못 했다. 아니 그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내력에서 느껴지는 무공의 깊이는 가히 백철우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류(一流)에서도 아주 강한 편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곧 황화예(黃化蘂)의 절정(絶頂) 경지에 임박했다는 말이었다. 여기에서 절정의 경지는 곧 상승의 경지이다. 기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 있지만 백노야와 그 가족들의 무공 은 분명히 어떤 족보가 있는 것이었다. 발해(渤海)의 일맥(一脈)인 자부 문(紫府門)의 한 갈래로서 그 비전절기들은 아주 훌륭하고 정통적인 것 들이었다. 백방생의 조부인 백노야가 백방생이 무학의 둔재인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한 것도 그러한 이유가 숨어 있었다. 대개 무학이란 자질이 없으면 배울 수가 없다. 심오한 고급의 무학일 수록 그것은 더욱 그러했다. 백방생은 이 백방 행이 그 자부무학(紫府武學)을 언제 그렇게 열심히 연마한 것인지 잘 이 해가 되지 않았다. 이윽고 본채의 삼층에 올라가서 하나의 방문을 열자 상당히 넓고 고 급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침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방안에는 사 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태사의에 앉아 있었는데 하나 같이 백방생에게는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백부이자 이 장원의 실권자이기 도 한 백귀현과 그의 아들 딸들인 백방각, 백방도(白方道), 백방몽(白方 夢) 등과 그 식구들이었다. 집사들은 공손히 서있다가 백방생 등이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안쪽으로 인도했는데, 그 의자들의 윗쪽에 하나의 화려한 느낌이 드는 침상이 있고 그 침상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다름아닌 그 가 바로 이 장원의 주인인 백노야 백행치(白行癡)였다. 백행치는 지금 나이 백 두살로서 둥글고 마른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 했으며 체구는 다소 작은 편이었다. 백방생은 할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자 왠지 눈물이 치솟는 듯 하여 얼른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려 고 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무심코 침상의 좌우를 향하게 되자 문득 그의 얼굴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다름 아니라, 지금 침상의 좌우에는 모두 여섯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바로 얼마전에 후원에서 보았던 그 백의소녀도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것은 그다지 이 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백의소녀도 바로 이곳으로 온다고 했었기 때문 이다. 그 백의소녀 역시 백방생을 알아보고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아버님을 뵈옵니다." 백방생이 큰절을 올리자 이윽고 백행치는 침상위에서 서서히 일어나 앉으며 그를 내려다 보았다. 침상의 휘장은 걷혀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백행치의 얼굴에 검은 기운이 가득하여 이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백행치는 입을 열었는데 그 목소리는 숨이 차있기는 하지만 아직 들을만 했다. "음..., 생아(生兒)냐? 헌데...너의 그 옷차림은 왜 그렇지?" 백방생은 물벼락을 맞은 다음에 땅바닥에서 굴렀기 때문에 이곳 실 내에서 가장 지저분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과거 백행치는 직접 백방생에게 무공을 가르치려다가 그만 포기하고 만 일이 있다. 그 뒤로 다만 무학사부를 따로 두어서 백방생을 가르치게 했을 뿐 거의 자신의 가까이에 두고서 보살핀 적이 없었다. 백방생은 엎드린 채로 대답했다. "이곳으로 오다가 넘어져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할아버님께서 질책을 내려 주십시오." 만일 얼마전이었으면 백행치는 그만눈살을 찌푸리고 야단을 쳤을 것이 었다. 하지만 오늘 백행치는 잠시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 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곧 가까운 의자에 앉아 있는 백귀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보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귀현은 키가 헌칠하고 다소 마른 듯한 체구에 준수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모두 검고 윤기가 흘렀지만 그러나 그의 나이는 기실 육십을 넘은 상태였다. 백귀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방생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 백행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옛날 자네의 동생인 귀원(歸元)이가 출가를 해서 집을 나갈 때에는 나 는 그만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네. 그런데 어느날 그 녀석은 갑자기 저 아이를 데리고 불쑥 나타났지.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 네...." 백행치는 숨이 가쁜지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나는 당시 억지로 저 아이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원망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네. 이제 생각해 보면 내가 저 아이에게 그간 너무 무심해 왔었던 것 같네....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착한 마음이 돌아온다 고 하던가?" 말을 마치자 백행치는 턱에 받치는괴로운 기침을 십여차례나 했다. 백 귀현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제 그만 말씀하시고 몸을 보존하십시오." 백행치는 고개를 저었다. 기침을 다한 연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 다. "아니야, 이제 때가 되었으니 할 얘기는 해야지. 내...얘기를 막지 말도 록 하게." 백귀현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그럼 말씀하십시오." 백행치는 손가락으로 백방생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는 아직 백방 생에게 일어서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저 녀석이 불과 얼마전 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숫기가 없어서 남들 의 앞에서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 나는 볼때마다 야단을 쳤지 만 그래도 가장 못마땅했던 것은 바로 그런 점이었네. 사람이 무공을 익혀야만 반드시 잘 살게 되는 것은 아니지.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 인관계일세. 이 복주성내에도 비록 무공은 없지만 나보다 부자인 사람 들이 여러 명이나 되거든...." 실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백행치에게 시선을 집중하 고 그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백행치는 이제는 기침이 나오지 않는 지 잠시 쉬었다가 말을 계속했다. "저 녀석은 아직도 무공을 전혀 배우지 못했고 또한 저러한 몰골로 나타났네. 나는 마땅히 다시 화를 내야 하겠지만 그러나 자네도 한번 잘 보게. 저 아이의 태도는 이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편안해 보이 고 말도 제법 잘 하고 있네. 자네도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백귀현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그러고 보니...그렇군요." 백행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문득 신기하고 반가운 생각이 드네. 본래는 내가 죽은 후의 저 아 이의 장래를 걱정했었는데, 이제는 웬일인지 저렇게 되었으니 약간 안 심이 되네. 하지만 저 아이가 아직 부족할 것이니 자네가 나중에 많이 도와 주어야만 하네. 알겠는가?" 백귀현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백행치는 이번에는 다시 백방생에게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생아야, 너는 내가 오늘 너를 왜 불렀는지 아느냐?" 백방생은 고개를 들어 백행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것은...소손이 미욱하여 아직 잘 모르고 있습니다." 백행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모르는 것을 그대로 모른다고 대답할 수 있는 그 마음자세가 마 음에 든다. 보다시피 나는 오늘 많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렀는데 그 것은 내가 죽기전에 몇가지 처리해야할 사안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너의 장래에 관한 사안도 들어 있다. 이해하겠느냐?" 백방생은 갑자기 코끝이 찡하게 울려오는 것 같아서 잠시 심호흡을 하다가 대답했다. "소손은 본시 미욱하기 이를 데 없어서 할아버님의 심려만 끼쳐드려 왔습니다. 이제 겨우 세상물정을 이해하고 좀더 노력하여 할아버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떠나신다는 말만을 하시니, 저로서 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백행치는 가볍게 웃었다. 비록 가벼운 웃음이라고는 하나 그의 거뭇한 얼굴에는 은은한 홍조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착하구나. 본래 너는 마음이 그렇게 너무도 착했지. 하지만 세상은 착 한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너는 비록 마음은 착하지만 독하지 못한 것이 흠이다. 예로부터 독하지 않으면 군자 가 아니라고도 했느니라. 사실 너는 그러고 보면 머리도 제법 총명한 편 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아까 백방생을 데리고 들어왔던 백방행 등도 이미 좌우의 의자에 자 리한 채 집중해서 백행치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곳 실내는 여러 가지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설치가 잘 되어 있어서 인지 더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백행치의 말을 워낙 주 의 깊게 듣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분위기가 긴장된 느낌이 들었다. 백행치는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나는 본래 너에게 많은 기대를 했었던 것은 사실이지. 그러나 내가 그동안 너에게 그토록 무심한 듯 행동했던 것은 단지 실망했기 때문만 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네가 좀더 고생을 해서 마음이 독해지기를 바란 것이다. 물론 나의 그러한 의도한 바가 지금 얼마나 이 루어 졌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생아야, 너는 아직도 나를 원망하느 냐?" 백방생은 처음으로 그러한 할아버지의 심중의 말을 듣는 것이었다. 그 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는 아직 단 한번도 할아버님을 원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못난 제자신을 항상 부끄럽게 여겼을 따름입니다." 백행치는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 그는 가볍게 기침을 몇차례 한 다 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스로를 반성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본래는 너에게 끝까지 원망을 들으려고 하고 있었다. 네가 만약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나는 아까 벌써 너를 다시 쫓아버렸을 것이다. 바보에게 보 석을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도리어 그를 해치고 명을 짧게 할 뿐이다. 3 장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 백행치는 다시 백귀현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네가 보기엔 저 아이가 이젠 제법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백귀현은 눈빛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어느덧 다소 음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백행치의 질문을 받고 나자 급히 눈빛을 굴리며 대답했다. "예, 제가 보기엔...아버님의 말씀이 옳으신 것 같습니다." 백귀현은 이 순간 백행치의 의도를 자세히 알 수가 없어서 모호한 대답을 한 것이었다. 백행치는 가볍게 미소하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네의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지 않군. 저 아이는 지금 내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다고 원망하고 있네. 나는 본래 저 아이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이미 그와 같이 사람이 달라졌으니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겠군. 자네는 나의 전재산이 모두 얼마 나 된다고 보는가?" (교활한 늙은이!....) 백귀현은 내심 욕을 하면서도 급히 생각을 굴려 대답했다. "한...백오십만 냥 정도가 아닙니까?"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고 했으니, 그것은 곧 서민에게 있 어서 천냥이란 많은 돈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즉 말만 잘하면 천냥이나 되는 많은 빚도 해소시킬 수가 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백귀현은 무려 백오십만 냥이라고 했으니 그것은 실로 상상할 수도 없는 금액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백행치는 잠시 미소하다가 말을 받았다. "나의 전재산은 모든 땅과 가옥 등 까지 계산해 볼 때 우수리를 제 하고 대략 이백오십만 냥 정도일세. 그러니까 황금으로 따지자면 십만 냥 정도이지." 백노야 백행치는 이제까지 모든 사업을 백귀현에게 맡겨오다 시피 했었는데 그러나 재산관리 만큼은 여전히 자신이 스스로 해 오고 있었 다. 실내의 사람들은 백행치의 입으로 직접 그와 같은 막대한 재산이 있다 는 얘기를 듣게 되자 절로 눈이 휘둥그래 졌다. 백귀현까지도 이때만큼 은 탐욕스런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백행치는 다시 말을 이었 다. "나는 그간 열심히 해 준 자네의 노고를 잊지 않고 있네. 따라서 그 보답으로 나의 그 전재산의 대부분은 자네에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네. 물론 또한 자네는 나중에 그 재산을 아들들에게 분배해 주게 되겠지. 그 러나...나는 아직 저 아이에 대해서는 마음이 불안하네. 그는 사람이 너 무 숫기가 없어서 필시 나중에 제몫도 다 챙겨먹지 못하게 될 것일세. 따라서 나는 특별히 저 아이에게 만은 분명히 유산을 분배해 주고 싶은 데 자네는 어느 정도의 금액이 적당하리라고 보는가?" 백귀현은 눈빛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이 순간이 지극히 중요하다 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기에 즉시 백행치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한..., 백만냥 정도가 어떻겠습니까?" 백행치는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 그는 백귀현의 눈빛이 불안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미소하며 말했다. "내 아까도 말했듯이, 자네는 내가 죽은 뒤에 저 아이를 잘 보살펴 주 어야 하네. 저 아이는 이제까지 외톨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만일 자네 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세상을 살아갈 능력을 잃고 말 것이네. 그런데... 이 백만냥의 은자는 너무도 많군." 백귀현이 말한 액수는 사실 무턱대고 말한 금액은 아니었다. 그런데 백 행치가 그것이 너무 많다고 하자 그의 눈빛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럼 얼마로 하시겠습니까?" 백행치는 백귀현의 얼굴을 바라보고 이어 실내의 사람들의 얼굴을 두루 바라본 뒤에 대답했다. "나는 저 아이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으 면 오히려 좋지 않네. 즉 나는 황금 만냥을 주려고 하네. 자, 그것에 대해 서 조금이라도 이의가 있는 사람은 지금 말하도록 해라." 이 장원에서는 아직 백노야의 말 한마디가 그대로 곧 법이었다. 조금도 이의가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황금 만 냥은 곧 이십오만 냥을 말하 는 것이니 아까 백귀현이 말한 백만 냥의 사분지 일에 불과했다. 즉 그것은 전재산의 십분지 일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백행치가 전재산 의 반을 백방생에게 준다고 해도 누구도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적은 액수라고 보고 백귀현 등의 얼굴에는 안도의 표정이 흐르는 것 같았다. 백귀현은 사람들을 대표하여 공손히 대답했 다. "아버님께서 하시는 일에 저희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뜻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백행치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나의 뜻을 이해해 준다니 고마운 일이로군. 나머지 황금 구만 냥의 유산은 모두 자네에게 돌아가는 것일세. 그것들은 이미 내가 죽으 면 자연히 자네의 소유가 되도록 서류정리를 끝내 놓았네. 자, 그 서류 들이 모두 여기에 있는데 이젠 이것을 자네에게 줘야 하겠군." 말과 함께 백행치는 뒤쪽의 이부자리를 들추었는데 거기에는 하나의 커다란 가방이 있었다. 백행치는 그 가방을 들어서 백귀현에게 건네 주 었다. 백귀현은 금방 그 가방을 열어서 내용물을 조사해 보았는데, 이윽고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 되었는지 가방을 다시 닫고 백행치를 향해 공손 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는 물론 그 서류들이 백행치의 마음 하나로 다시 휴지조각처럼 변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아직 유산이 완전히 상속된 것이 아닌 것이다. 백행치는 이어 품속에서 하나의 서류 봉투를 꺼냈는데 그것을 앞에 엎드려 있는 백방생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너에게 주는 나의 유산이다. 네가 불편할 것 같아서 모두 금표(金票)로 준비를 했으니 지금 즉시 꺼내어 검토해 보아라." 백방생은 앞으로 다가가서 그 서류봉투를 받아들고 내용물을 꺼내 보았는데, 거기에는 정말로 한묶음의 금표가 들어 있었고 세어 보니 백냥짜리 금표가 모두 백장이었다. 즉 모두 정확히 황금 일만 냥인 것 이다. 그 금표들은 모두 황금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대부분 탐욕의 빛이 이글거렸다. 밖의 날씨가 아무 리 뜨겁다고 해도 그들의 시선보다 뜨겁다고는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 백귀현은 백행치가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해 두었으면서 도 자신과 상의하는 척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내심으로 욕을 했다. (빌어먹을, 음흉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백방생이 금표의 묶음을 다시 서류봉투에 넣고 그것을 품속에 깊이 갈무리하자, 백행치는 그에게 물러나서 가까운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이어 백행치는 다시 말했다.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제법 막대한 부를 누렸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죽는 마당에 그것을 이렇게 모두 나누어 주니 차라리 홀가분하 여 기분이 좋군. 역시 사람은 빈 손으로 돌아가는게 아니겠는가? 다만 내게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하나 있기는 하네." 백귀현은 공손히 물었다. "그것은 무슨 일입니까?" 백행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내 이미 얼마전에 달마하원(達摩下院)과 남해보타도(南海普陀島)에도 얼마간의 시주를 했고, 또한 그 밖의 인연있는 사람들에게도 만나 얼 마간의 돈을 나누어 주었네. 이제 그러한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으니 남 은 것은 오직 하나일세. 그것은 바로 세상에 유일하게 있는 나의 하나 뿐인 친구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네." 평소 백노야 백행치의 행동은 신비로운 구석이 있어서 누구도 그의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 백귀현도 아직 그에게 그처럼 절친한 친구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내 의아해 져서 물었다. "그 친구는 누구입니까?" 백행치는 잠시 과거의 상념에 젖는 듯 하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그의 법명은 도생(渡生)이라고 하네. 나이도 나 보다 스무 살 이상이 나 어린 친구지." 백귀현은 눈이 다소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면 지금 그 사람은 어느 사찰의...고승(高僧)이십니까?" 백행치는 백귀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바로 숭산에 있는 소림본사(少林本寺)의 장로(長老)이지. 과거 내가 그 와 만나게 된 것은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네. 나는 우연히 한 조의 오백 나한상(五百羅漢像)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불심(佛心)이 일게 되었던 것이네. 게다가 불법에 해박한 지식 을 가지고 있는 그 친구를 만나게 되자 절로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 게 되었지. 그는 나의 열성에 감탄하고 나는 그의 고매한 인품에 반하 여 우리는 그만 망년지우(忘年之友)가 되고 말았던 것이네." 백행치는 잠시 과거를 상기하는 듯 했으나 막상 얘기를 하기 시작하 자 그 말이 막히지 않고 줄줄이 흘러나왔다. "나는 간혹 소림사에 들러서 그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오백나한상에 대해서 얘기를 들려 주었고 그는 제법 관심을 보였네. 하지만 나는 차마 그 아끼던 물건을 그에게라도 줄 수가 없었지. 그런데 말이야...이렇게 막상 죽음이 임박하고 보니 유독 그 일이 마음에 걸리더군. 마치 내가 친구에게 진실하지 못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네. 그래서 내 얼마전에 소림사의 그 친구에게 사람을 보내 그 오백나한상을 보내겠다고 했 지." 그것은 마치 동화속에서 나오는 것 같이 구수한 얘기였다. 실제로 백행치는 도가의 무공을 배웠지만 불법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백귀 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귀현은 역시 그 오백나한상에 관한 얘기 는 처음이었다. 백귀현은 물었다. "그럼 그 오백나한상은 이미 보내셨습니까?" 백행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보내지 않았네. 그래서 내가 특별히 이번에 저 사람들을 불러 온 것이 아닌가?" 백행치는 말과 함께 자신의 좌우에 서있는 여섯사람을 가리켰다. 그들 은 정확히 말하면 다섯명의 중년승려들과 한 명의 절세적인 용모를 가 지고 있는 미소녀였다. 백귀현은 내심 그렇지 않아도 그 다섯명의 중년승려들의 내력이 범상 치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백행치가 갑자기 그들을 부른 의도를 몰라 내심 의아해 하고 있던 판이었다. 그 다섯명의 중년승려들은 하나같이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머리에는 승모를 쓰고 있었으나 체구나 용모는 모두가 제각기 달랐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은은한 청광(淸光)이 발산되고 있었는데 백귀현은 그것이 그들의 무공이 고강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짐작하고 있었 다. 하지만 한쪽에 서 있는 백의소녀는 무공이 그다지 높은 것은 아니었다. 오백나한상을 운송하는 것이라면 그저 그 다섯명의 승려만 있어도 충분 할 것인데 그 소녀는 또 무엇 때문에 거기에 끼여 있는 것인지 백귀현 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다섯명의 중년승려들은 백행치가 은근히 자신들을 소개했는데도 전혀 모르는 척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물론 그 옆의 백의소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백귀현은 그들의 내력도 분명히 알아낼 겸해서 다시 백행치에게 물었다. "아 그러셨군요. 헌데 저분들은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 제게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백행치는 가볍게 웃었다. "이들은 당연히 달마하원과 남해보타도에서 온 사람들일세. 자네의 안 목이 제법인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별로이군 그래?" 백귀현은 다소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설마 했더니 저분들은 바로 달마하원의 후기지수들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달마오수(達摩五秀)이셨군요. 게다가 저 분 소저는 바로 다름아닌 남해보타도의 백의관음(白衣觀音).... 불초가 이렇게 대단한 분 들을 뵙게 되니 영광이외다!" 백귀현은 나중에는 직접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들을 향해 정식으로 포 권의 인사까지 했다. 그 달마오수와 백의소녀는 백귀현이 그렇게까지 나 오자 계속 가만히만 있을 수가 없어서 각기 그를 향해 답례했다. "아미타불...." "과찬의 말씀이예요!" 백귀현은 그들과의 수인사를 마치자 이윽고 다시 백행치를 향해 물었다. "저런 무림의 젊은 영웅들과 사귀시다니 아버님께서는 정말 대단하십니 다. 헌데 저에게는 그 신비하다는 오백나한상을 보여주시지 않으실 생각 이십니까?" 백행치는 가볍게 웃었다. "내 어찌 네게 보여주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내 지금 마악 그것을 보여주려던 참이다." 말이 끝나자 백행치는 몸을 돌려서 침상 뒤쪽에 있는 두터운 휘장을 걷어 올렸다. 휘장이 걷혀진 벽면에는 하나의 금박을 입힌 철불상(鐵佛 像)이 커다랗게 양각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백행치가 그 철불상의 좌우에 촛불을 켜놓 고 침상위에서 불공을 드려 왔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백행치 는 갑자기 품속에서 황금빛 열쇠를 하나 꺼내들더니 그 불상의 배꼽속 에 넣고 돌렸다. 그러자 느닷없이 그 불상의 배가 좌우로 소리없이 갈라지면서 거기에 제법 넓은 벽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정교하기 짝이 없는 기관장치가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하나 같이 놀랐다. 그 벽장안에는 다섯개의 튼 튼해 보이는 철상자가 들어 있었는데, 백행치가 지시를 하자 달마오수가 각기 그것을 하나씩 들고 나와서 사람들의 앞에 섰다. 백행치는 이어 벽면의 여러곳을 어루만졌는데 그러자 신기하게도 불 상의 배가 원상태로 돌아오며 황금빛 열쇠도 그의 손에 떨어졌다. 보아 하니 기관장치를 작동하는 것은 그 열쇠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윽고 백행치는 벽면의 휘장도 다시 내리고 나서 달마오수에게 말 했다. "그대들은 지금 그 상자를 열어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 여 주도록 하게." 달마오수는 지체하지 않고 각기 들고 있는 철상자의 뚜껑을 열어서 그 내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순간 실내가 문득 황금빛으로 뒤덮 히는 것 같았다. "아!...." "아미타불...." 비단 백귀현 등뿐만 아니라 심지어 달마오수도 다소 놀라는 것 같았다. 오백나한상, 그것은 모두가 다 황금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비단 금빛이 찬연하여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조각이 어찌나 정교한지 표정도 생생 하여 마치 모두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것이 황금이라는 데에 놀란 것이고 달마오수는 그 숭고해 보이는 기상에 놀란 것이었다. 사람들은 일시 모두가 그 오백나한상을 보고 놀라서 입을 딱 벌렸으며, 그로 인해 실내가 아주 조용해졌다. 백행치가 입을 열어 그 침묵을 깨뜨렸다. "그것은 옛날에 어떤 불심 깊은 사람이 조각한 것이라고 하네. 내가 살펴보니 그 나한상들은 모두가 속이 비어 있고 무게가 열 냥 정도이 니 모두 합하면 황금이 오천냥이 들어가 있는 셈이네. 이 황금 오천냥이 비록 많은 금액이기는 하지만 결코 금전적인 욕심을 내서는 안 되는 것 일세. 자네도 물론 마찬가지이지." 나중의 말은 백행치가 백귀현에게 한 것이었다. 백귀현은 두눈에서 탐욕 의 빛이 떠올랐으나 이내 급히 지우고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정말로 아버님께서 자랑하실 만한 물건이로군요. 제가 한번 가서 만 져봐도 되겠습니까?" 백행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하지만 하나라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네." 백귀현은 즉시 달마오수의 앞에 다가가서 그 나한상들 중의 몇 개를 직접 하나씩 들어보고는 내려놓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사실 나한상의 예술적 가치보다는 먼저 그 무게를 알고 싶었던 것이었 다. 백행치의 말대로 과연 그 나한상들의 무게는 똑같이 열냥씩이었다. 하 지만 진짜 가치가 과연 열냥밖에 안 될까? 그것들은 실로 엄청난 보물 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백행치는 백귀현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나한상들은 이미 소림본사로 보내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만큼 만 일 그것이 도둑을 맞게 되면 소림본사에서 직접 사람들이 와서 찾게 되 어 있네. 따라서 저런 것에 욕심을 낸다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 니지." 백귀현은 안색이 다소 붉게 변하여 손을 내저었다. "아버님께서는 저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저는 이미 받은 유산으로도 만 족합니다. 결코 저 나한상들에게 욕심을 내지는 않겠습니다." 백행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다시 백방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이들을 부른 것은 오백나한상을 무사히 호송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역시 나를 대신해서 한 사람이 대표가 되어 책임지고 그 곳엘 다녀와야 할 것이다. 마침 너는 이미 유산도 모두 받았고 어차피 이곳에 서 나가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니, 기분전환을 할 겸해서 그곳이나 한 번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느냐?" 백방생은 이미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머지 않아 이 곳 장원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왕에 떠나는 것이라면 가는 길에 할아버지의 마지막 지시가 될 지도 모르는 그 일을 한번 맡아서 수행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백방생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능력이 보잘 것이 없어서 그 일을 감당 해낼 수가 있을 지가 의문입니다." 백행치는 미소하며 말을 받았다. "내 너를 보아하니 성격이 소심하여 큰 일을 이루기는 어렵겠고 작은 일이라면 그럭저럭 잘 해낼 수가 있겠구나. 소심한 성격 탓에 큰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니 오히려 그러한 점이 마음에 든다. 이번 일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항은 내 달마오수에게 미리 말해 두었으니 너는 그저 몸 만 따라가면 된다. 게다가 나는 이미 너를 위하여 수신호위(守身護衛) 를 준비해 두었느니라." 말이 끝나자 백행치는 한쪽에 서있는 예의 그 백의소녀를 불러 가까이 오도록 했다. 사람들은 은근히 그녀에게도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백행치가 그 런 말끝에 다시 백의소녀를 부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다소 놀랐다. 그것은 백방생 역시 마찬가지 였다. (설마하니 그녀가 나의 수신호위라는 말인가?) 그 백의소녀는 이때 이미 표정이 침착해져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다소 놀랐으나 이미 모든 사실을 수긍한 모양이었다. 백행치가 간단하게 소개해 주자 그녀는 거의 무심한 표정으로 포권의 예를 취해 보였다. "나의 성은 진(陳)이라고 해요." 백방생은 내심 공교롭고도 어이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얼른 몸을 일으켜서 포권으로 답례했다. "인사가 늦었군요. 소생은 백방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서 기쁩니다." 백의소녀는 백방생이 굳이 아까의 그 난처한 얘기를 들추지 않는 것을 보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을 가볍게 빛냈다. 백방생은 그제서야 그녀의 허리춤에 한 자루의 연검(軟劍)이 꽂혀 있다 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행치는 그 백의소녀에 대해서 부연하며 설명했다. "이 진낭자는 바로 남해보타도의 제자인데 아직 삭발은 하지 않았다. 비단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나이에 비해 무공이 아주 높은 편이어서 그녀를 너의 수신호위로 임명했다. 그 기간은 네가 소림본사에 다녀올 때까지 이니 너는 그녀를 일개 호위라고 생각하지 말고 잘 대우해 주어야 한다. 너는 성격이 소심하여 여러모로 보나 여 자호위가 적당할 것 같아서 그녀로 택한 것이다." 백방생은 다시 한번 포권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진낭자,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진낭자는 역시 마주 포권하며 대꾸했다. "너무 과분한 말씀이시군요, 백공자." 그 때 좌중에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증조할아버지, 그 막내삼촌은 바보 천치라는 것을 세상사람들이 다 아 는데 어째서 그 일을 저희 아버지께 시키지 않으십니까? 아마도 그보다 백배는 더 잘해내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백철우였다. 그는 백행치가 백방생만 편애한다고 생각을 했는 지 두 눈에 원독의 광망을 일으키고 있었다. 갑자기 실내에 때아닌 찬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백철우의 부친인 백방각은 그 옆에 앉아 있었으나 자식의 행동을 말리지는 않았다. 백행치는 그것을 보자 일순 매우 불쾌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돌려 백귀현에게 물었다. "일찍이 내 집안에 저런 몰상식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전에 수도 없이 생아를 꾸짖었으나 그는 항상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지금 내가 생아를 소림본사에 보내는 것은 그가 이 장원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라 고 분명히 일러줬거늘....저런 인간말종이 대체 어디에서 온 물건이란 말인가? 남들이 알게 될까 걱정이로구나." 말이 끝나자 마자 백행치는 우수를 가볍게 흔들었는데, 순간 백철우가 앉아 있던 의자가 느닷없이 위로 날아 오르더니 쾅, 하고 폭발하는 것 이었다. "아악!" 사람들은 일순 크게 놀랐다. 그들은 이제까지 백행치가 무공을 펼치는 광경을 거의 보지 못했었다. 설마하니 백행치가 다 죽어 가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놀라 운 무공을 펼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백행치가 기척도 없이 유독 그 의자만 떠올려서 폭파시킨 것은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무공이 었던 것이다. 물론 백철우는 비록 허공으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일순 그 폭발에 휘말려 비명소리와 함께 구석으로 날려갔다. 그의 모친되는 여자가 달 려가서 안아드니 백철우는 이미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혼절해 있었다. 백귀현도 물론 백행치가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와 같은 무공을 펼치 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백행치는 그 무공을 펼치고 나서 안색이 더욱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백귀현은 내심 크게 당황해져서 급히 백방각의 앞으로 날아가 세차 게 따귀를 때렸다. 그저 퍽퍽퍽, 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리는 가운데 백방각의 안면은 이미 수십대의 따귀를 맞아 피를 줄줄이 흘리고 있었 다. 백귀현은 이어 어느새 되돌아와 백행치에게 공손히 말했다. "아버님 제가 무능하여 자식들을 잘못 가르친 때문입니다. 제가 나중에 훈계를 내릴 것이니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백귀현이 이 순간 자신의 큰아들인 백방각에게 갖다 온 동작은 너무나 도 빨라 마치 환각을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가 아주 짧은 순간에 수십대의 따귀를 때린 것은 한마디로 그의 무공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 고 할 수가 있었는데, 물론 그 따귀를 맞은 백방각은 역시 혼절해 있었 다. 그로 인해 조용하던 실내는 갑자기 난장판이 된 것 같았다. 백행치는 힘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모든 것이 다 귀찮다. 어서 모두 물러가라. 나는 이제 그만 쉬고 싶구 나!" 백귀현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럼 편히 쉬십시오." 이어 백행치가 다시 자리에 눕는 것을 보고, 백귀현은 급히 사람들을 다 밖으로 나가게 했다. 백방생은 달마오수가 이미 그 오백나한상들을 거두고 백행치를 호위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려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노야의 침실에서 그와 같은 난리가 났으므로 바깥의 분위기 또한 어수선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방생은 비교적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일층의 대청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 의논을 하다가 그를 바라보고는 냉랭 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백방생은 혹시 그들이 자신의 돈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 했다. 하지만 그들은 간혹 그를 노려보며 원독에 가득찬 광망을 내뿜 을 뿐 아직 이렇다할 행동은 취하지 않고 있었다. 백방생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다가 이윽고 대청의 밖으로 나와 본채 의 건물을 벗어났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사람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진낭자였다. 백방생은 아무래도 그녀에 대해서 어색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진낭자 역시 어색한 기분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그 어색한 기분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애써 미소를 띄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것도 참으로 인연이라고 할만 할 것이오. 나는 설마하니 낭자가 나의 수신호위가 될 줄은 몰랐소." 진낭자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당신은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소? 다만 나는 너무 의외라는 것일 뿐이오. 나와 같은 사람이 낭자의 호위를 받는 다는 것은 실로 너무나도 과분 한 일일 것이오." 진낭자는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당신은 아까의 그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조금전에 당신 의 할아버지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하지 그랬어요?" 이미 두 사람은 본채의 마당을 벗어나서 다소 호젓한 길로 접어 들고 있는 중이었다. 백방생은 미소하며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로서는 나의 할아버지의 의견을 존중해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형편이오. 아 이러면 어떻겠소? 내가 당신이 나의 할아버지께 받을 금액 을 주고, 당신은 나의 할아버지에게 가서 이 일을 맡을 수가 없다고 하 는 것이오." 진낭자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내가 돈 때문에 이 일을 맡고 있는 줄 아나요?" 백방생은 대꾸했다. "아, 그렇다면 오히려 더욱 잘 된 일이 아니오? 당신은 보아하니 이 일을 맡고 싶지 않은 것 같고, 나 역시 당신이 나를 호위해 주는 것을 원하지 않소." 진낭자는 안색이 다소 냉랭해 졌다. "당신은 어째서 내가 이 일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는 것을 알죠?" 백방생은 대답했다. "당신은 처음부터 이곳을 무단히 침입해 들어왔소. 만일 당신이 조금이 라도 좋은 감정이 있었다면 결코 그렇게 처음부터 무례하게 나오지 않았을 것이오." 진낭자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그래 겨우 내게 물벼락을 한번 맞은 것 때문에 그러나요? 정 말 속 좁은 인간이로군요!"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만일 그 일을 염두에 두었다면 차라리 아까 그 자리에서 말해버 렸을 것이오. 나는 당시 내가 당한 일을 잊었기 때문에 할아버지께 말 씀드리지 않은 것이오. 하지만, 내가 당신의 호위를 받으라면 그건 문 제가 조금 다르오. 당신처럼 무경우하게 날뛰고 게다가 이 일에 재미를 못느끼는 사람에게 나는 보호받고 싶지가 않소. 나는 차라리 나 혼자가 나을 것이오." 백방생은 말이 끝나자 마자 이내 신형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 다. 진낭자는 즉시 그 뒤를 따르며 표독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감히 자신의 할아버지를 믿고 함부로 말하는 군요. 당신이 그만 두라고 해서 내가 그 말을 따를 것 같은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당신이야말로 정말로 말을 함부로 하는군. 당신같이 무경우한 여자가 감히 누구를 보호할 수가 있다는 말이오? 당신이 만약 끝까지 나의 곁 에 머물고 싶다면 그거야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오. 지겹지만 기껏해야 밥상위에 숟가락 하나 더 올려놓기밖에 더하겠소?" 순간 백방생의 얼굴에 매서운 따귀가 서너차례나 퍽퍽퍽, 하고 올라붙 었다. 진낭자는 그렇게 따귀를 때리고나서 화가 나서 소리쳤다. "좋아, 이 개 자식아! 내가 다시는 너와 같은 자식의 호위를 맡나 봐 라!" 말이 끝나자 마자 진낭자는 훌쩍 신형을 날려 휑하니 건물 사이로 사 라져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너무나도 심하게 따귀를 맞았기 때문에 한동안 정신이 얼얼해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윽고 그는 시뻘겋게 부풀 은 양 뺨을 쓰다듬으며 어이없다는 듯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적반하장이라고 해야겠군. 아 어째서 사람들은 하 나같이 그렇게 염치가 없는 것일까...?" 백방생은 이어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방생이 이윽고 자신의 거처인별채에 거의 다 이르렀을 무렵의 일이 었다. 문득 한 사람이 훌쩍 나타나더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 람은 바로 둘째형의 아들인 백철산이었다. 그 백철산은 빼빼마르고 키가 커서 마치 하나의 나무토막을 연상시키 는 소년이었다. 올해 나이 열 일곱, 하지만 이미 무공을 닦아서 웬만한 시정잡배들 쯤은 우습게 여기는 상태였다. 그 백철산이 나타나서 음험한 표정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것을 보고 백방생은 물었다. "무슨 일이냐?" 백철산은 두 눈에서 음험한 광채를 발하며 계속 백방생을 쏘아보더니 이윽고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어서 내 놓으시오!" 백방생은 웃으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뭘 달라는 말이냐? 내가 혹시 네 물건을 가져가기라도 했다는 말이 냐?" 백철산은 음침하게 웃더니 서서히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렇소. 그것은 내 물건이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 는 것이오?" 백방생은 백철산이 흉흉한 기세로 다가드는 것을 보면서도 알 수 없다 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를 일이군. 그래 네 물건이란 대체 뭐냐?" 백철산은 다가와서 그의 품속을 일일이 뒤지더니 이윽고 예의 그 금 표가 들어있는 서류봉투를 꺼내면서 음흉하게 대답했다. "바로 이것이오. 막내삼촌, 이건 내 것이니 내게 줄 수 있겠지?" 백방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는데? 그게 어째서 네것이란 말이냐? 혹시 착각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백철산은 그 서류봉투를 이내 자신의 품속에다 집어 넣으며 음흉하게 대꾸했다. "착각은 전혀 없소. 막내삼촌, 이제 가 봐도 되겠지?" 백방생은 이에 문득 빙그레 웃었다. "알고 보니 너는 그 돈에 욕심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하지만 나도 그 돈을 쓸 데가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면 몰라도 모두 다 줄 수는 없다. 그러니 어서 이리 돌려다오." 백철산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흉악하게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내것이라니까 지랄이야! 정말 죽고 싶어?"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좋다. 하지만 네가 정히 원한다면 그런 가짜 돈뭉치를 가져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백철산은 마악 뒤로 물러나 도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백방생의 말을 듣 고 일시 어리둥절해 져서 얼른 그 서류봉투를 다시 꺼내들고 조사해 보려고 했다. "뭐, 뭐라고...?" 헌데 바로 그 때의 일이었다. 백방생은 그가 잠시 한눈을 파는 틈을 타 서 빠르게 그의 앞으로 덮쳤다. 그런데 미처 백방생의 손이 그 서류봉 투에 닿기도 전에 일순 백철산이 서류봉투를 치우며 음산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흥, 내 이럴줄 알았다. 정말 죽음을 자초하는 구나!" 4 장 두 가지의 조건 백철산은 흉악한 기세로 백방생의 팔을 부러뜨릴 듯이 후려쳐 갔다. 헌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철산은 자신이 빠르게 손을 쓰는 만큼 반드시 백방생의 팔이 부러지 거나 탈골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백방생의 신형 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그의 아랫턱이 마치 부서질 듯이 아파오는 것이 아닌가? "으악!" 백철산은 그대로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고 백방생은 그 틈을 타서 서류 봉투를 다시 빼앗았다. 그러니까 백철산이 다소 방심을 하고 있는 사이 에 백방생이 그의 공격을 피하고 그의 아랫턱을 갈겨버린 것이었다. 서류봉투에 들어있던 금표는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안전했다. 백방생이 서류봉투의 안을 조사하고 이어 다시 품속에 갈무리하자, 이윽고 그제서 야 정신을 차린 백철산이 벌떡 일어나 흉악한 고함을 지르며 다시 공 격해 왔다. "주, 죽여버린다!" 백철산의 이번의 공격은 그야말로 흉흉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갑자기 낭패를 보게 되자 그만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것이다. 백방생은 그만 주 춤해졌다. 백철산이 지금 펼치고 있는 것은 천하에 널리 알려진 나한복호권(羅 漢伏虎拳)이라는 것이었는데, 일순 그의 주먹과 다리가 허공을 뒤덮어 서 마치 일시에 광풍이 휘몰아 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백철산이 최근에 마르고 닳도록 연마한 무공인 것이다. 백방생은 처음에는 그것을 피하려고 급급히 뒤로 물러섰으나 이내 그의 다리에 걸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저만큼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백철산 은 그것을 보자 이내 회심의 흉소(兇笑)를 날리며 다가들었다. "흐흐 이 피래미 같은 자식이!" 백방생은 땅바닥에 나가떨어져 있다가 급급히 다시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백철산은 허공을 일 장이나 날아가서 그의 안면을 두 번이나 돌 려찼다. 이 나한복호권에서는 주먹보다는 오히려 다리를 쓰는 기술을 더욱 중 요시하고 있었다. 백철산은 자신이 자랑하는 그 회심의 공격에 백방생 의 아랫턱이 최소한 박살이 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었다. 헌데 그 때였다. 마악 일어서려던 백방생의 신형이 마치 술먹은 듯이 비틀거리더니 어느새 그 발길질을 피해서 그의 좌측으로 다가와 있는 것이 아닌가? 백철산은 일순 믿을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해 졌다. 그는 전력으로 공격 한 것이기 때문에 일시 후속타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미처 이런 경 우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대로 멍청히 서서 상대의 주먹을 맞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백방생의 그 주먹은 평범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어설프게 느껴 졌다. 처음 맞았을 때의 느낌도 그저 가슴이 조금 뜨끔할 정도였다. 그러나 백철산은 이내 하늘이 노래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악!" 백철산은 쓰러지면서 내심으로 다시 소리쳤다. (그 무공은 바로...?) 백방생은 쓰러져 누워있는 백철산의 앞으로 가서 살폈다. 그는 조금전 에 실로 난생 처음으로 무공을 펼친 것이었다. 그는 본래 자신이 전혀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조금전에 돌발 적으로 무공을 펼쳤고 자신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그럼 그는 무공 을 약간이라도 터득한 것이란 말인가? 백철산은 혼절을 했을 뿐 아직 죽지 않았고 잠시 후면 깨어날 것 같았 다. 백철산은 백방생의 일권(一拳)에 치명요해를 맞고 쓰러진 것이었다. 만일 그의 내공이 강했다면 백철산은 즉시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 다. 백방생이 일어서서 백철산을 내버려 두고 다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려 고 할 때 문득 그의 귓전에 낯익은 한 사람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무공을 할 줄 모른다고 하더니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군요. 당신이 날 쫓아낸 것은 바로 그 무공을 믿고 한 것이었나요?" 백방생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진낭자가 다시 서 있었다. 그녀는 아직 가지 않고 그의 주위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진낭자는 말했다. "아까 당신이 처음에 보법(步法)을 펼쳐서 저 사람의 공격을 피하고 일 권을 날린 것과 두번째로 내력(內力)을 가슴에 모으고 일부러 발길질에 맞아 준 것, 그리고 마지막의 보법과 권법(拳法)은 모두가 무공인데 그래 아니라고 우기실 생각이신가요?" 사실 진낭자의 말 그대로였다. 백방생은 스스로도 내심 어리둥절해 하 고 있던 참이어서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는 왠지 요즈음 무공이 한눈에 들어오는듯 해서 생각대로 한 번 해 본 것이지만 정말로 그것이 무공이 될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소." 진낭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치 못했다고요? 세상에 그것을 믿어줄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백방생은 스스로도 모호한 표정을 보이며 대답했다. "나는 이전에 무공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좌절을 느끼며 자라왔기 때문에 미처...하지만 어쨌든 내가 무공을 할 줄 알게 되었다니 그것은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로군요." 진낭자는 나직하게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그야말로 뱃속에 구렁이가 열 마리쯤은 들어가 있는 것 같군 요. 어떻게 그렇게 거짓말을 진짜처럼 말할 수가 있죠?" 백방생은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거짓말을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진낭자는 말했다. "당신은 아까 처음부터 저 사람에게 아주 대담하고도 여유있게 상대했 어요. 그의 무공은 최소한 삼류(三流)의 수준은 되는데, 대체 당신은 스 스로 무공에 자신감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처음부터 대담하게 상 대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것은 실로 예리한 질문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나는 요즈음 왠지 무공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진 것이 사실이오. 게다가 상대방에 대해서도 그다지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소. 하지 만 아까의 그 행동은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오. 내가 그토록 여유가 있었다니, 그것은...그것은 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야겠군." 진낭자는 다시 말했다. "거짓말 하지 말아요. 무공이라는 생각도 없이 어떻게 무공을 펼칠 수가 있겠어요?" 백방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게 되었으니 어쩌겠소? 그것은...음...헌데 당신 은 어째서 다시 돌아왔소?" 진낭자는 백방생이 말하다 말고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 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내 말했다. "나는 당신이 한 말을 실천할 용의가 있는지 물어 보러 왔어요." 백방생은 물었다. "뭘 물어보러 왔다는 것이오?" 진낭자는 대답했다. "당신은 내가 돌아가는 조건으로 수고비를 대신 주겠다고 하지 않았 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이번에 돈을 전혀 받지 않기로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 소?" 진낭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예요. 나는 단지 돈 때문이 아니라고 했 지, 돈이 전혀 걸려있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백방생으로서는 갑자기 자신이 무공을 할 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일종의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일을 두루 생각해 보느 라 정신이 어지러워 머리가 다 흔들리는 것 같았다. 따라서 의식이 모 호하여 눈앞의 상황마저 잘 분별되지 않았다. "그럼 대체 얼마를 받게 되어 있다는 말이오?" 진낭자는 손가락을 하나 치켜세워 보였다. "황금 일만 냥이예요." 백방생은 즉시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니오?" 진낭자는 가볍게 냉소했다. "정녕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다시 가서 직접 당신의 할아버지에 게 물어보면 될 게 아니예요." 백방생은 내심 어이가 없어 하며 대꾸했다. "황금 만 냥이라면 지금 내가 가진 돈의 전부요. 당신의 말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줄 수도 없소." 진낭자는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은 한 입에 두말을 하는 건가요?" 백방생은 반문했다. "당신이야말로 아까 내 따귀를 때려 가면서 다시 나의 호위를 맡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떠난 사람이 아니오?" 백방생의 얼굴은 아직 시뻘겋게 양뺨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진낭자는 다소 안색을 붉히며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여자니까 한 입에 두말을 할 수도 있는 거죠." 백방생은 냉소를 하며 신형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오." 진낭자는 이에 다소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이윽고 다시 그의 뒤에 바싹 따라오며 말했다. "이봐요, 우리 그럼 서로가 조금씩 양보를 해서 협상을 하는 게 어때 요?" 진낭자는 이번 일을 그다지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번 일을 반드시 맡으려는 것도 어떤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무슨 협상을 하자는 것이오?" 진낭자는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물을 끼얹고 또한 따귀를 때린 것은 사과하죠. 하지만 대신 당신도 앞으로 날 귀빈처럼 대접해 줘야 해요." 백방생은 싸늘하게 냉소했다.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는 구만. 나는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같은 호위는 필요없다고 하지 않았소! 당신이 그러한 막되먹은 행 동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귀빈처럼 대접해 달라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오." 진낭자는 표정이 냉랭해졌다. "이봐요, 정말 그렇게 끝까지 더럽게 나올 건가요? 내가 지금 기분이 좋아서 이렇게 하고 있는 줄 아나요?" 백방생은 대꾸했다. "나는 단지 당신과 같은 호위는 싫다는 것인데 거기에 더러울 것이 뭐가 있겠소?" 진낭자는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유독 나만은 싫다는 거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저 몇만냥의 은자만 쓴다면 열심히 나를 호위하려는 사람들이 구름 처럼 몰려들 것이오. 당신처럼 억지로 일하려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고 용하겠소?" 진낭자는 말했다. "그럼 나도 앞으로 열심히 호위를 맡으면 될 일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직시하며 대꾸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대체 무엇 때문에 나의 호위를 맡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어떻겠소?" (아니야, 사부님께서도 당신의 얘기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진낭자는 마악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 그 동안에 백방생은 다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별채의 앞에 도달했다. 진낭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즉시 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별채의 안으로 들어선 이후 뒤따라온 진낭자는 전혀 상관 도 하지 않고 행동했다. 즉시 욕실로 들어가 시원하게 목욕을 하고 새옷 으로 갈아입은 다음 돈을 잘 갈무리하고 거실로 다시 나왔다. 거실에는 진낭자가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옷을 갈아입으니 제법 그럴 듯 하게 보이는 군요." 백방생은 대꾸도 없이 곧장 식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식탁에는 이 미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창밖에는 붉은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백방생이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진낭자도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역 시 함께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도 말이 없었다. 식탁위의 음식은 아주 풍성해서 그녀가 함께 먹는다고 해도 전혀 상관 이 없었다. 이윽고 식사를 끝내고 나자 백방생은 비로소 진낭자에게 입을 열었다. "낭자의 방명(芳名)은 어떻게 되시오? 서로 함께 일을 하려면 최소한 이름은 알고 지내야 하지 않겠소?" 진낭자는 그가 비로소 자신의 호위를 인정했다는 것을 알고 내심 득의 했으나 겉으로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호위를 맡는 일에 굳이 이름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원하니 내 특별히 가르쳐 드리죠. 내 이름은 의화(儀和)예요." 백방생은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실로 눈앞의 이 여자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인이 차(茶)를 가지고 와서 두 사람의 앞에 각기 내려놓고 물러갔 다. 백방생은 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이 진의화(陳儀和)라는 말이오? 당신은 어째서 본명을 말하지 않는 것이오?" 진낭자는 도리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본명을 말하지 않느냐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나의 그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고만 생각을 하는 거죠?" 백방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남해보타도의 비구니들의 항렬이 지금 원의정(圓儀淨)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일이오. 당신의 그 이름은 법명(法名) 이 틀림없을 텐데 어째서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오?" 진낭자는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대체 당신은 나의 어떤 이름을 알고자 하는 거죠?" 백방생은 그녀가 자꾸 귀찮게 말장난을 걸어오는 듯 하자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이미 말했지만 본명을 듣고자 하는 것이오." 진낭자는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의 그 의화라는 법명은 본명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다소 짜증이 났다. "백의관음(白衣觀音) 의화(儀和)라는 명호(名號)는 나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일부러 또 당신에게 그것을 묻겠소? 내 가 당신의 이름을 반드시 알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이렇게 계 속 장난하듯 나온다면 나와 함께 일을 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 소." 그렇다. 남해보타도에 있는 이 작은 비구니의 명성과 미모에 대한 것은 이미 이 근방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백방생은 처음에는 긴 가민가 했었지만 나중에 백귀현 등의 말을 듣고서 그녀가 바로 말로만 듣던 백의관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낭자는 그 말을 듣자 일순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더니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 그런가요? 나는 미처 당신마저 나의 명호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 화 내지 말고 이해해 줘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속 명(俗名)을 알고 싶다는 말이군요?" 백방생은 눈살을 다소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렇소." 진낭자는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면서 다시 말했다. "나는 본래 아직 삭발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의 일을 마치고 돌아 가면 삭발을 하고 정식으로 비구니가 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의 법명을 본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당신이 만일 나의 속명을 듣기를 원한다면 그야 어려울 것은 없어요. 단지 그 이름은 여자의 은 밀한 부분이기 때문에 저도 그냥은 가르쳐 드릴 수가 없을 뿐이죠." 백방생은 눈앞의 이 아름다운 여자가 이제 얼마 후면 비구니가 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내심 다소 놀랐다. 하지만 그는 이내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해야 그 이름을 가르쳐준다는 말이오?" 진낭자는 마치 백방생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웃고 있다가 대답했다. "그것은...당신은 두 가지 일만 해준다고 약속을 하면 돼요." 백방생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 두 가지 일이란 뭐요?" 진낭자는 대답했다. "우선 하나는, 내가 앞으로 당신을 호위하는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당신은 반드시 나에게 적극 협조해 줘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 또 하나는, 그러는 동안에 당신은 혹시 나에게 사적인 관심을 가져 서 나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내가 간혹 더러운 녀석들이 흑심을 품고 다가들려는 것을 보아 왔었기 때문에 하는 소리예요." 진낭자의 얼굴은 처음에는 다소 미소를 띄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점 차로 정색을 하고 엄숙해져서 그것이 그녀의 진심임을 알게 했다. 게다 가 그녀는 이미 조금전에 자신은 비구니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가? 백방생은 듣고 있다가 이내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것은 조건이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니오? 설마하니 내가 고작 이름 하나 들으려고 그와 같은 일들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오?" 진낭자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럼 당신은 결국 내게 사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는 말이군요?"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만에, 내 말은 그 반대요. 내 이미 당신이 필요없다고 까지 말했었 는데 또 무슨 사적인 관심을 갖겠소? 당신은 자신에 대한 값을 너무나 도 후하게 매길 뿐만 아니라 또한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 구려. 나는 다 만 당신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그 대목에서, 고작 이름 하나 들으려고 그와 같은 막대한 희생을 치를 필요가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 이오." 진낭자는 가볍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렇기만 하다면 그건 다행이로군요. 하지만 한 가지 실망되는 바도 없지는 않는데요?" 백방생은 물었다. "뭐가 그리 실망스럽다는 말이오?" 진낭자는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성격이 소심하기는 해도 군자라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형편없는 소인이로군요." 백방생은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내가 그 조건을 수락해 줘야 군자가 될 수 있단 말이오?" 진낭자는 대답했다. "나는 여자인 데다가 또한 나이가 당신보다도 몇 살 적을 거예요. 비록 무공이 높아서 당신의 호위를 맡기는 했지만, 당신이 군자라면 그런 나에 게 이렇게 빡빡하게 나올 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어이 없어 하며 웃었다. "그건 바로 당신이 무조건 모든 일에 협조하라고 하니까 그러는 것 이오. 만일 이유가 타당하다면 나는 물론 당신을 호위로 인정한 만큼 당 연히 적절하게 협조할 것이오." 진낭자는 기이한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그러니까당신은최소한진심으로협조할자세를가지고있겠다는 뜻인가 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진낭자는 이에 만족한 듯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좋아요.그럼만일당신이그두가지일을어겼을경우에는어떻게 되는 거죠?" 백방생은 웃으며 되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진낭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만일 당신이 그 두 가지 일을 어겼을 때에는 정말로 나에게 황금 일만 냥을 내놓는 거예요. 물론 그것도 안된다면 목이라도 내놓아야죠. 당신 은 이에 동의하나요?" 백방생은 그만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 이름을 듣는 값 한번 비싸기 그지없구려. 하지만 내가 협조한다는 것은 정당한 경우에 한하는 것이니 그거야 당연한 노릇이고, 게다가 내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니...좋소.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이제 어서 당신의 그 보배같은 이름이나 말하는 것이 어떻겠소? 만일 당신이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안 될 일일 것이 오." 진낭자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물론 나는 결코 거짓 이름을 대지는 않아요. 내 속명은 바로 소유(小 柔)예요. 성은 물론 이미 말한대로 진(陳)이고요. 당신은 이제 잘 알아 들었나요?" 백방생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 성과 이름을 합하면 진소유(陳小柔)라는 말이오? 어 이거 내가 왠지 속은 느낌이 드는데?" 진낭자는 의아해져서 물었다. "어째서 속은 느낌이 든다는 거죠?" 백방생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필시 당신의 이름이 보배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소. 그래서 그 엄청난 조건들을 수락한 것이기도 하고.... 헌데 진소유라면 그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이름이 아니오?" 진낭자, 즉 진소유는 그 말에 약간 화가 난 표정이 되었다. "어쨌거나 우리의 거래는 이미 끝났으니 명심하도록 하세요. 게다가 나 는 당신이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어요." (이거야 곁에 암호랑이를 두고 사는 것 같겠군.)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잠시 농담을 한 것이니 용서해 주시오. 내 약속은 틀림없이 지 키도록 하겠소. 하지만 그 대신 낭자도 나를 호위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해 주어야만 하오?" 진소유는 안색을 가볍게 굳히며 대답했다.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당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당신의 조부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떠날 것이지만 일단 지금부터 당 신의 호위를 맡으라고 당신의 조부가 말했으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백방생은 일부러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거 고마운 일이구려. 그러면 지금부터 내가 협조해야할 사항은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진소유는 간략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그저 내가 묵을 방 하나만 마련해 주면 돼요." 진소유는 별채안의 남아있는 방들 가운데에서 하나를 비워주자 그 안 에 간단하게 여장을 푼 다음에 욕실로 세수를 하러 들어갔다. 어느새 황혼이 깊어지고 사위에는 어둠이 몰려들고 있었다. 백방생은 서재에 들어 가서 촛불을 켜 놓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 책을 읽었다. 그가 보고 있는 책들은 모두 여덟권이었는데 어떤 것은 두께가 두껍고 어떤 것은 얇았다. 그것들은 간혹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들 이 섞여 있었는데 다름아닌 무공비급들이었다. 백방생이 한창 대구천수(大九天手)라고 제목이 적혀진 비급을 숙독하 고 있는데 문득 서재의 방문이 열리며 진소유가 들어섰다. "이봐요, 지금까지 자지않고 뭐하고 있죠?" 그녀는 여전히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고 세수를 한 탓인지 산뜻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가운데 난초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듯 했다. 백방 생은 그제서야 비급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나는 아까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서 지금 무공비급들을 다시 보 고 있는 중이오. 헌데 당신은 왜 아직 자지 않고 있소?" 진소유는 나직하게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당신이 자지 않고 있는데 내가 어찌 잠을 잘 수가 있겠어요? 남을 호위하는 일이 무슨 장난인줄 아나요?" 백방생은 그녀의 안색이 다소 긴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그럼 미안하게 되었소. 헌데 이제 조금만 더 읽으면 되니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시겠소?" 진소유는 대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책만 보고 있는 것이라면 나에게도 별 지장이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좀 더 보도록 해요. 헌데 그건 무슨 무공비급이죠?" 본래 무공비급이라는 것은 결코 남에게 보여줘서도 안 되고 또한 남 의 무공비급을 보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 강호의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백방생은 이내 주저없이 자신이 보던 것을 진소유에게 보여주었다. "가전(家傳)의 절학(絶學)들 가운데의 하나이오." 진소유는 다가와서 건성으로 비급을 몇 장 넘겨보는 듯 하더니 말했다. "이건 수준높은 금나수법이로군요. 아까 당신이 펼친 무공도 여기에 있는 것들이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 그랬었던 것 같소. 내가 보기엔 아마도 여기에 있는 내공심법과 권법, 그리고 보법을 약간 사용했던것 같소." 진소유는 비급이 갖가지로 모두 여덟권이나 되는 것을 보고 내심 다 소 놀라와 했다. 게다가 그 비급들이 하나같이 매우 낡아있는 것을 보고 다시 물었다. "당신은 이 비급들을 보아온 지 오래 되었나요?" 백방생은 대답했다. "이 비급들은 나의 할아버지께서 내가 어렸을 적에 만들어 주신 것들 이오. 나는 그동안 애써 그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었지만 잘 되 지 않았었소. 헌데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소?" 진소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것들은 보아하니 하나같이 높은 수준의 무학들이 수록되어 있는비 급들이예요. 당신이 어려서부터 이것들을 보아왔으면서도 그렇게 무공 이 형편없다니 정말 이상하군요. 당신은 그럼 이 비급들의 내용을 아 직 암기하지 못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당시 할아버지의 강요로 이 비급들의 내용을 모두 암기했었지 요. 그리고 틈나는 대로 그 내용들을 떠올려 보았는데, 갑자기 아까 이상한 능력이 생김에 따라 의아해져서 혹시나 하고 다시 한 번 비급 들을 읽어보고 있는 중이오." 진소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암기하고 있는 것과 비급들의 내용이 서로 다르던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조금 남아 있기는 하지만 여태 틀린 부분은 없었소. 헌데 왜 그러시오?" 진소유는 다소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당신은 복을 많이 받고 태어나서 항상 최고의 무공비급들을 볼 수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그렇지 못해요. 즉, 당신에게 이와 같은 무공비급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천하 각처에서 악한들이 빼 앗으려고 달려들 것이고, 그러면 혈전(血戰)이 벌어지게 되고 우리도 무사하지 못하게 될거예요. 그러니까 즉, 당신이 그 비급들을 모두 암기 했으면 이제는 그것을 태워버리자는 말이예요." 백방생도 물론 그러한 이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소하며 대꾸했 다. "알겠소. 헌데 기왕에 들어왔으니 나의 질문에 한가지만 대답해 주시겠 소?" 진소유는 되물었다. "무슨 질문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마음이 혼란스럽다면 비록 그 수법을 알아도 펼쳐지지 않는 것은 당연 한 일일 것이오. 허나 만일 마음이 혼란스럽지 않는 데도 그 아는 수 법이 펼쳐지지 않고 도리어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이 오?" 진소유는 약간 의아해져서 반문했다. "그건 어떤 무공을 두고 하는 말이죠?" 백방생은 대답했다. "내공심법이나 그밖의 장법(掌法), 권법 등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 지 이오." 진소유는 다시 물었다. "그건 당신 본인의 얘기 아닌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진소유는 잠시 그의 왼손의 맥문을 잡아 보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저도 아직 무공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배우기 는 어렵고 실패하기는 매우 쉬운 것이예요. 예를 들어서 자신이 뜻대로 진기(眞氣)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수도 있고, 게다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그 수법에 있어서도 사실은 아 직 뭔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는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당 신은 우선 내공(內功)이 부족한 것 같군요." 백방생은 그 말을 듣고 나서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 내공이라는 것도 일단은 진기를 움직여야만 얻어지 게 되는 것이 아니오?" 진소유는 가볍게 웃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그럼 당신의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당신에게 그 내공심법을 연마하라 고 하셨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나의 할아버님은 처음에는 다른 도인술(導引術)을 연마하게 하 셨고 간혹 그 내공심법을 설명해 주셨을 뿐 연마하라고는 하지않으셨소. 그리고나중에야실망을하시고모두암기하라고하신 것이오." 진소유는 듣고 나서 다시 물었다. "당신은 이제 갓 태어난 아기에게 달음박질을 시킨다면 그게 가능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나요?" 백방생은 이에 문득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물론 당신의 말뜻을 이해하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 금부터 다시 도인술부터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는 일이예요. 세상에는 실로 당신보다 더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내 가 보기에 당신이 지금 암기하고 있는 그 내공심법 등은 너무나도 심오 하여 마치 처음부터 달음박질을 하기를 바래는 것 같아요. 만일 내공 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그런 것을 억지로 연마하려고 한다면 자칫 주화 입마(走火入魔)를 초래할 수도 있을 거예요." 백방생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만일 갑자기 내공이 생긴다면 굳이 그런 도인술 등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오?" 진소유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오히려 더욱 위험해요. 그것은 마치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무거운 철퇴를 휘두르는 것과 같은 것으로, 십중팔구는 자신이 휘두르 는 철퇴에 맞아죽게 될 거예요. 이른바 내공이란 것은, 간혹 그것을 갑자기 얻어서 잘 흡수할 수가 있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것을 열심히 단 련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긴 시간이 소요되게 되므로, 역시 처음 부터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 올라가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거예요."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럼 당신도 처음부터 그렇게 순서를 밟아 올라왔는데도 벌써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한 것이오?" 진소유는 다소 겸연쩍은 듯이 웃었다. "무공을 배워가는 속도는 자연 그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자질과 환경 의 좋고 나쁨에 따르게 되는 데, 나의 성취는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예요."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다시 질문했다. "나는 아까 나의 둘째조카를 격퇴시켰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진소유는 대답했다. "그건 아마도 당신이 머리를 잘 써서 잠시 상대의 허를 찌른 것이지 진실한 무학은 아니라고 봐요. 만일 그가 좀더 당신을 경계하고 싸웠다 면 당신에게 지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윽고 포권의 예를 취했다. "고맙소. 이렇게 낭자의 얘기를 들으니 마음속이 다 시원해 지는 것 같소이다." 진소유는 미소하며 대꾸했다. "당신이 무공을 배우게 되면 나도 좀더 편해지게 될 거예요. 따라서 나 역시 당신이 무공을 배우게 되기를 바라니, 앞으로도 의문이 있으면 물어 보도록 하세요." 5 장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수법 다음날 아침 일찍이 백방생이 마당에 나와 비급들을 태우고 있을 때, 문득 백철산이 그를 찾아왔다. 백철산은 느릿느릿하게 그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윽고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막내삼촌,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백방생은 그가 참으로 낯가죽도 두꺼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보아하 니 어제 낮의 그 일로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백방생은 다시 시선 을 옮겨 다 타고 난 재를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쓸모없는 책들을 태우는 중이다. 너는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백철산은 대답을 회피하고 주위를 기웃거리며 다시 물어왔다. "그래 식사는 하셨나요?" 백방생은 여전히 무례한 녀석이로구나 하고 생각을 하며 다시 대답해 주었다. "나는 아직 안 먹었다. 너는 이미 식사를 했느냐?" 백철산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백방생의 질문은 들은척 만척하고 다시 말했다. "헤헤, 실은 셋째 삼촌과 고모가 식사후에 막내삼촌을 한 번 보자고 하세요. 셋째 삼촌의 집으로 오라고 하는데, 헤헤 막내삼촌께선 틀림없 이 오실 거죠?" 백방생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막되먹은 행동을 하고 있는 백철산의 얼굴 을 바라보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너는 어제 오후에는 내돈이 네돈이라고 우기면서 달려들더니 그래 오늘 아침에는 또 그런 얘기냐? 내가 너의 그런 말을 믿어줄 것 같으 냐?" 백철산은 다소 안색이 변해서 얼른 변명을 했다. "헤헤 어제는 낮에 더위를 먹었었나봐요. 자다가 일어나니까 이상하게 도 땅바닥에 누워 있더라구요. 헤헤헤, 하지만 이번의 일은 진짜예요." 백방생은 차갑게 대꾸했다. "어쨌든 내가 한번 생각해 보고 시간이 나면 네 말이 진짜인지 거짓 인지 가서 확인해 보도록 하마." 백철산은 그 말에 화가 나는지 안색이 벌개졌다. 하지만 그때 별채에서 진소유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얼른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번 얘기는 진짜니까 막내삼촌이 알아서 하세요. 만일 제시간 에 오지 않는다면 셋째삼촌과 고모 등이 직접 이곳으로 찾아올 지도 몰 라요!" 백철산이 이어 서둘러 사라져 버리자 진소유가 다가와서 물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온 것인가요?" 백방생은 조금전에 백철산이 했던 말을 그대로 가르쳐 주었다. 진소유는 그 말을 듣고 나자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그 곳에 갈 생각인가요?" 백방생은 되물었다. "당신이 보기엔 어떻소?" 진소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은 당신에게 결코 좋은 뜻이 있지는 않을 것 같아 요. 만일 가서 사고를 당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을 것 같으니 가급적이면 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나도 가지 않아도 되는 제법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 놨으니, 그 럼 가지 않도록 하겠소. 게다가 따로 해야할 일도 있고...." 진소유는 물었다. "따로 해야할 일이란 뭐죠?" 백방생은 이미 모두 재가 되어 버린 비급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것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오." 진소유는 이미 그것들이 비급들을 태운 것임을 알고 미소하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말을 잘 듣는 어른이로군요." 백방생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소. 여태까지는 아마 그런 편이었지...." 진소유는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이제부터 무공을 팔단금(八段錦)과 같은 도인술로부터 다 시 시작해 보겠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와는 반대이오. 내게는 그다지 여유가 많은 것 같지 않으니 모험을 한 번 해보려고 하오." 진소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갑자기 내공을 증가시켜 보겠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위험한 줄은 알지만 그러나 혹시 일이 잘 될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 겠소? 그래서 오전에 거리에 한 번 나가볼까 하오." 진소유는 이내 백방생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그게 잘 될까?) 백방생의 별채는 장원의 후미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후원과는 그다지 멀지 않았고 정문보다는 후문이 가까와 오히려 대부분 후문을 이용하 는 편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계획한 대로 진소유와 함께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자 간단하게 준비를 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까지 그래도 다소의 말벗이 되어 주던 그 늙은 하인은 오늘은 왠지 조금 멀어진 느낌이어 서 나와 보지도 않았다. 백방생은 이미 내심으로 그러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개의치 않고 그저 편안한 표정으로 후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와 진소유가 마악 후문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다가와서 그들 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백방도와 백방몽 등이었다. 백철산은 나중에야 후문밖에서 슬금슬금 걸어나와서 그들의 뒤에 섰는 데, 일견하기로 그들의 태도는 명백해 보였다. 그들 가운데 백방몽이 싸늘하게 웃으며 백방생에게 물어왔다. "방생(方生),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백방생은 이미 그들이 거의 작정을 하고 자신의 앞을 막아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방생은 짐짓 웃으며 대꾸했다. "거리에나 한 번 나갔다 오려고 합니다. 누님께선 여기에 웬일이십니 까?" 백방몽은 나이가 서른 살이고 몸집은 약간 뚱뚱한 편이었는데 오늘따 라 그녀의 배가 더욱 뚱뚱해 보였다. 백방몽은 백방생의 옆에 서 있는 진소유의 얼굴을 한 번 돌아보더니 이어 냉랭하게 다시 말했다. "너는 우리가 오라는 소리도 못 들었느냐? 어서 우리와 함께 가자!" 백방생은 이미 많이 당해왔기 때문에 대강 이와 같은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과거라면 물론 두말없이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저를 오라고 했었다고요? 저는 금시초문인데요? 아까 저 조카 녀석이 와서 이런 말을 하기는 했죠. 식사후에 반드시 돈을 가지고 셋째형님의 집으로 가라고요. 하지만 저는 두 분이 결코 그처럼 강도 같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하고 그 얘기를 믿지 않은 것이죠." 백방생의 그 말에 눈앞의 사람들은 다 함께 안색이 변했다. 백철산이 화가 나서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막내삼촌, 내가 언제 돈 얘기를 했다고 그래요?" 백방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네가 어제 저녁에도 돈 얘기를 하고 오늘 아침에도 돈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백철산은 백방생이 갑자기 다시 어제의 일을 말하자 그만 다소 멍해 져서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백방몽이 냉소를 하며 다시 말했다. "방생, 네가 요즘 갑자기 많이 컸구나. 감히 우리 두 사람을 강도라고 말하다니!" 백방생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누님, 나는 두 분이 결코 강도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강도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백방몽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어서 지금 즉시 우리를 따라 가자." 백방생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지금 즉시 가자는 말입니까?" 백방몽은 차갑게 말했다. "그건 가 보면 곧 알게 된다." 백방생은 다시 물었다. "셋째형님의 집으로 가자는 말입니까?" 백방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두 분을 따라갈 수가 없겠군요." 백방몽은 더욱 화가 나서 말했다. "뭐라구? 네가 감히 우리의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냐?"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무조건 두 분의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사정 이 있어서 두 분의 말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 역시 해야할 일이 있는 사람이고 보면 아무래도 두 분께서 미리 저에게 말씀해 주 셨어야죠. 게다가 두 분께선 아마도 제가 두 분의 하인이 아니라는 것 을 잠시 잊으신 듯 합니다. 저도 저의 일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 니까요." 백방몽은 백방생이 그처럼 웃으며 태연하게 대꾸하는 것을 보고 그야 말로 화가 있는 대로 치밀어 즉시 달려들어 출수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까지 묵묵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던 백방도가 그녀의 행동 을 제지하고 백방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방생, 너는 그동안 간담만 부어오른 것이 아니라 말재주까지 늘었구 나. 잘라서 말하겠다. 너는 지금 우리를 따라 갈 거냐 안 갈거냐?" 백방도는 서른세살의 나이에 역시 살이 쪄서 둥글둥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둥그런 얼굴에는 음침한 기운이 깔려 있었다. 백방생 은 웃으며 그를 향해 되물었다. "제가 무슨 일로 가야 하는 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백방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말해줄 수 없다. 너는 갈 건지 안갈 건지만 결정해라." 백방생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못가겠소." 순간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백방도가 삼 장을 날아와서 백방생의 가슴 팍을 향해 금나수법을 펼쳤다. 일시에 백방도의 우수가 흐릿해 지더니 곧 네 개의 손으로 변했고, 그 네 개의 손이 이내 백방생의 양 어깨와 가슴, 그리고 목덜미를 한꺼번에 꿰뚫을 듯이 날카롭게 덮쳐 들었다. 백방도의 이 한 수의 공격은 갑작스럽고도 다분히 위력적이어서, 실로 그가 이미 미리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했다. 하지만 물 론 백방생의 옆에 서 있던 진소유도 역시 가만히만 있지는 않았다. "멈춰요!" 진소유는 한 소리 뾰족한 외침을 발한 다음에 즉시 백방생의 앞으로 끼어 들었다. 그녀의 우수가 가볍게 흔들리는 듯 하더니 백색의 환영(幻 影)으로 변하여 백방도의 금나수를 막아갔다. 백방도의 그 네 개의 손 그림자는 그 한 수에 차단되었다. 백방도는 이에 화가 나서 소리치며 그녀를 향해 일권(一拳)을 날렸다. "죽어랏!" 이번의 백방도의 공격은 아까보다 더욱 위력적이었다. 능히 그가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소유는 그것을 보고도 아 직 여유가 있었다. 백방도의 좌권이 다섯개의 환영을 일으키며 파고드는 것을 보고 그녀 역시 좌권을 날렸다. 비록 그녀의 좌권은 그처럼 많은 환영을 일으키 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빨랐다. 퍽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백방도가 발출한 권경(拳勁)은 일순 모두 무 산되었다. 허나 이때 백방도는 신형(身形)을 휘청거리면서도 오히려 백 방생의 앞으로 다가드는 것이 아닌가? (앗! 이건....) 진소유는 순간 자신이 상대방의 술수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백방생을 덮쳐가는 백방도의 우수에서는 무려 여섯개의 환영이 일어 나고 있었다. 게다가 어느 틈에 다가들었는지 백방몽이 백방생의 뒤쪽 으로 와서 강한 장력(掌力)을 발출하고 있었다. 진소유는 물론 눈앞의 백방도의 금나수는 막아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금전에 백방도의 좌권을 상대하느라고 한눈을 팔았기 때문에 미처 반대쪽에 있는 백방몽의 공격은 막아낼 수가 없었다. 백방도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진소유는 다급한 나머지 백방몽에게 지력 (指力)을 세 번 튕겼다. 백방생은 진소유가 백방도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을 보고 자신도 얼른 움직여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새 백방몽이 퇴로를 차단하며 공격해 들어올 뿐만 아니라 백철산이 아래로 굴러 들어와서 다리를 힘껏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무려 십수년간이나 수련하여 내공을 단련시킨 백철산이 강철같은 두 손으로 다리를 붙잡자, 백방생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가운데 문득 위기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갑자기 펑펑펑,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고 한두사람 이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저만큼 나가 떨어졌다. 나가떨어진 사람들은 바로 백방도와 백철산이었는데, 백방몽은 그저 조금전의 그 자리에 멍 하니 서 있었다. 진소유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직도 서 있는 백방생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백방생은 다소 창백한 안색으로 몸을 휘청거리다가 이윽고 겨우 중 심을 잡았다. 백방몽의 장력을 맞은 그의 등에는 옷이 몇군데가 찢겨져 있었다. 함께 온 하인들이 빠르게 백철산의 몸을 안아들었고, 백방도는 급히 다 가와 혈도가 제압되어 있는 백방몽을 안아들고 달아나며 악독한 어조 로 소리쳤다. "어디 두고 보자!" 그야말로 장내는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사라진 것 같았다. 진소 유는 이윽고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것을 보고 백방생에게 물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죠?" 백방생은 창백한 안색으로 서서히 숨을 고르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 다. "나도 잘 모르겠소." 진소유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 여자의 장력을 맞고도 멀쩡하고 도리어 그 조카란 사람이 날아갔는데,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모른다면 그게 어디 말이나 되나 요?" 그렇다. 백방몽이 혈도가 제압된 것은 진소유의 지력에 의한 것이었지 만, 백철산이 갑자기 날아간 것은 전혀 엉뚱한 일이었던 것이다. 백방생은 숨을 고르면서 두어 번 숨을 길게 내쉬다가 이윽고 손짓으 로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일단 장소가 좋지 않으니 밖에 나가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진소유는 내심 궁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백방생의 말이 옳은 듯 도 하여, 잠시 염두를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윽고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천천히 후문밖으 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날씨가 비록 무더웠지만 아직은 아침나절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선선 한 기운이 약간은 감돌고 있었다. 대로상에는 그 때문인지 오가는 사 람들이 제법 있었다. 대부분 편안한 옷차림새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약간은 서두르는 것 같은 느낌들을 주었다. 아마도 시간이 흘러 바깥의 공기가 더욱 뜨 거워지기 전에 빨리 쉴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진소유는 그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듯 미처 후문을 십 장도 벗어나지 못했는데 고개를 돌리고 다시 질문을 던져왔다. "아까의 그 수법(手法)은 바로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수법이었나요?" 백방생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시오?" 진소유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나는 그저 추측해 본 것에 지나지 않아요. 내공도 없는 당신이 그 순 간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로 그런 방법밖에는 없겠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나도 오직 그 생각만 떠올랐소. 이를테면 사량발천근(四兩撥 千斤)이라는 것인데, 조카의 완력을 옮겨 누이의 장력을 받고 다시 누 이의 장력을 옮겨 조카에게 적중시켜야 겠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그렇 게 된 거요. 나도 그것은 처음 해보는 것이기 때문에 대체 어찌된 노릇인 지는 잘 모르겠소." 진소유는 어이가 없어하며 눈살을 더욱 심하게 찌푸렸다. "이봐요, 내가 조금전에 말한 이화접목이란 수법은 단지 그저 한 번 추 측해 본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건 물론 이론적으로는 가능해요. 하 지만 그것은 공력이 상승의 경지에 올라야만 비로소 그처럼 자유로이 펼칠 수가 있는 거예요. 당신은 아직 공력이 거의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수가 있겠어요?" 백방생은 그제서야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그렇게 하지 않았소? 나도 대 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아니, 설마하니 당신은 그 일로 지금 나를 의심 하고 있는 것이오?" 진소유는 다소 싸늘하게 냉소했다. "당신이 만약 진실한 무공을 감춘 고인(高人)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필요도 없는 것이겠죠." 백방생은 그녀가 그만 단단히 오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어처구 니가 없어졌다. "뭐라고요? 아니 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속이겠소? 게다가 당 신은 이미 나의 맥문까지 잡아본 상태가 아니오?" 진소유는 막상 백방생이 그렇게 펄쩍 뛰며 나오자 오히려 내심 더욱 의아해졌다. 기실 어젯밤에 그의 맥문을 잡아 보았을 때에는 정말로 내공 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지금까지의백방생의처지를고려해볼때그가그런의외의 공력을 쌓 았을 가능성은 결코 없었다. (그럼 정말로 그의 말대로 기(氣)의 운용능력이 남달리 뛰어나서 그런 것이라는 말인가?) 백방생은 진소유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보고 문득 생각난 듯 다시 말했다. "아, 혹시 그 때 누군가가 숨어서 몰래 나를 도운 것인지도 모르겠 소." 진소유는 상념에서 깨어나며 다소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 당시에 누가 도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그건 바로 당신의 힘이 었어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진면목을 감춘 무림의 고수(高手)란 말인 가? 만일 그렇다면 좋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이거 영 믿기지 않는 일인 데...?" 진소유는 그 모습을 보고 그만 가볍게 웃고 말았다. 그녀는 일부러 웃 음을 감추며 다시 말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가능성은 더욱 없어요. 당신은 그저 강호의 무명소졸(無名小卒)이지 결코 무림고수는 아니예 요. 내가 잠시 너무 민감하게 생각했었나 봐요. 자, 이제 어서 가기나 해 요." 백방생은 그 말에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나는 무명소졸이 더 어울리겠지...." 백방생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늘에는구름한점없었고눈부시게내리쬐는햇살은더욱뜨겁게 느껴지기 시 작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잠시 더 걷다가 문득 머리가 어지러워 지는 것을 느꼈다. 그 는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러기에는 이마에 서 흘러내리는 땀이 갑자기 너무 많아졌다. 그는 이윽고 자신이 조금전 에 내상(內傷)을 입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진소유는 그의 얼굴이 몹시 창백한 것을 보고 물었다. "가슴이 많이 아픈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소유는 이 더운 날에 땀 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의 안색에는 아직도 차가 운 서리가 내릴 것만 같았다. (무공이 높아서 전혀 더위를 타지 않는 모양이군.) 백방생은 내심 생각을 굴리며 대답했다. "가슴이 조금 뜨끔거리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머리가 어지럽소." 진소유는 이에 가볍게 미소하며 품속에서 하나의 옥병을 꺼내 거기 에서 작은 알약 하나를 쏟아서 건네 주었다. "그냥 삼켜보세요. 내상약(內傷藥)이니 금방 효과가 있을 거예요.? 백방생이받아들고보니그것은검은빛깔의새알만한환약이었다. 그는 진소유 가 다시 그 옥병을 품속에 소중하게 갈무리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 "이 약의 이름은 뭐라는 거요?" 진소유는 미소하며 대답해 주었다. "그것은 본문(本門)의 내상약으로 이름은 대비단(大悲丹)이라고 하는 거예요." 백방생이 그 대비단을 입속에 넣고 꿀꺽 삼키자 정말로 이내 가슴이 시원해 지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내심 기뻐서 다시 물 었다. "이 약의 이름에 대(大)자가 들어 있으니 역시 소림사의 그 유명하다는 대환단(大還丹)과 흡사한 것이오?" 진소유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림사의 대환단은 큰 약효가 있으며 만들기가 어려워서 소림본사에도 몇 개 없다고 해요. 본문의 이 대비단은 내상약으로서 대라는 글자는 대비(大悲)라는 의미이지 약효가 크다는 뜻은 아니예요. 본문에도 대환단 과 비슷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대비신단(大悲神丹)으로서 내가 함부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백방생은 내심 추측을 하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낭자는 이미 그 대비신단을 몇 개 정도 맛을 본 것이 아니 오?" 진소유는 백방생이 그렇게 말하는 의도를 눈치채고 웃으며 대답해 주 었다. "나는 다행히도 사부님의 총애를 받아서 이미 두 개의 대비신단을 복 용할 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과 같은 경우는 안 되요. 만일 그것을 복용할 수준이 되지 못했는데도 복용을 한다면 십중팔구는 주화입마에 걸리게 되니까요." 백방생은 그저 입맛을 다실 뿐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 이 미 그의 내상이 거의 치료되었다. 남해보타도의 그 내상약은 정말 약효 가 신통했다. 백방생은 생각 같아서는 다시 그녀에게 대비신단을 하나라도 얻게 해줄 수가 없겠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감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각대 문파들은 그러한 비전성약(秘傳聖藥)들을 결코 외부인들에게 팔지 않는다 는 것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내심으로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한참 묵묵히 앞서서 걸음을 옮기다가 이윽고 하나의 커다란 점포 앞에 이르러 말했다. "바로 여기요." 백방생은 이제까지 거의 장원을 떠나서 돌아다닌 일이 드물었기 때 문에 성안의 지리에도 그다지 능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인들의 얘기를 자주 들어서 아직 이곳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인심약포(仁心藥鋪)라고 간판이 새겨진 이 점포는 성안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약재를 파는 가게였다. 백방생과 진소유가 점포의 안으로 들어서자 점포를 지키고 있던 둥근 얼굴의 중늙은이가 부채를 부치며 그들을 맞았다. "무엇을 사러 오셨수?" 중늙은이는 진소유의 얼굴이 대단히 아름다운 것을 보고 연신 힐금거렸 다. 진소유는 안색을 다소 찌푸렸으나 백방생은 가게 안을 한번 둘러보다 가 이내 말했다. "여기에 혹시 장백산의 산삼처럼 사람의 기혈을 크게 도와주는 좋은 영약이 없소?" 중늙은이는 백방생의 말을 듣고 일순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구요?" 백방생은 품속에서 천냥짜리 은표 한장을 꺼내서 보여주며 다시 말했 다. "여기에 좋은 영약이 들어오지 않았느냐는 말이오." 그 천냥짜리 은표는 백방생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돈들 중에서 가장 액수가 큰 것이었다. 중늙은이는 무려 천냥짜리나 되는 은표를 보자 갑자 기 태도가 달라졌다. "아 예, 들어왔죠. 들어왔구 말구요." 중늙은이는 한참 부치고 있던 부채까지 던져버리고 다가왔다. 백방생 은 그의 눈에 탐욕의 빛이 가득한 것을 보고 은표를 다시 품속에 집어 넣으며 물었다. "그럼 그 물건은 어디에 있소?" 중늙은이는 백방생이 은표를 다시 품속에 집어 넣는 것을 보고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다가 말했다. "아...성미가 약간 급하시군요. 그런 중요한 일이라면 우선 이쪽으로 앉 으셔서 잠시 쉬시면서 상의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백방생과 진소유는 중늙은이가 인도해준 대로 편하게 자리에 앉으며다 시가게안을차근차근하게둘러보았다.중늙은이는두사람의 앞으로 와서 부채 를 부쳐주며 다시 물었다. "말투를 들어보니 이 지방의 사람인 것 같은데, 실례지만 공자께서는 어 디에 사는 뉘십니까?" 백방생은 본래 이미 성안에 자신에 대한 소문이 나쁘게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늙은이의 그러한 질문은 그의 약점을 건드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것 보시오. 물건을 사고 파는데 그런 것을 알아서 무엇 하겠다는 것 이오? 만일 이 곳에 물건이 있다면 사는 것이고 없다면 즉시 다른 곳 으로 가면 되는 것이오. 대체 여기에 물건이 있소, 없소? 혹시 지금 물 건도 없으면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오?" 중늙은이는 그 말을 듣자 약간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다만 그와 같은 물건은 급하게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혹시 주소를 가르쳐 주시고 한 열흘만 말미를 주시면?" 백방생은 탁자를 쾅, 하고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바쁜 몸이니 지금 당장 없다면 그만이오? 내가 무슨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인줄 아시오? 아까는 이미 들어와 있다고 해놓고서 이제 는 열흘을 기다리라니, 이게 사람을 희롱하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백방생이 약간 화를 내며 그렇게 밖을 향해 걸어 나가자, 중늙은이는 얼른 따라나와 다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헤헤헤, 정말로 성미가 너무나도 급하시군요.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요. 지금 드리면 될 게 아닙니까요?" 중늙은이는 너무나도 흥분이 되는 지 이마에 줄줄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은 헤헤, 얼마전에 구입한 장백산의 산삼이 하나 있기는 하죠. 그것은 본래 이 성안의 한 부자가 주문을 했던 것인데 아 가격만 맞으 면 지금 당장 손님께 드릴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헤헤...그 장백산 의 산삼은 원래 희귀한 것이라서 가격이 워낙...." 백방생은 약간 지겨운 느낌이 들어서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물건만 좋다면 가격은 원하는 대로 드릴 수가 있소. 그러니까 아까의 그 금액의 열 배도 지금 당장 줄 수가 있다는 말이오." 중늙은이는 그 말을 듣자 절로 놀라서 입이 다 벌어졌다. "일, 일만 냥이나...헤헤, 그러시군요,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알겠습 니다. 여기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면 내 금방 가져다 드리지요." 중늙은이는 말과 함께 이내 안쪽으로 달려들어 갔다. 진소유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백방생을 향해 물었다. "정말로 그 많은 돈을 주고 산삼을 살 건가요?" 백방생은 되물었다. "무슨 잘못된 점이라도 있소?" 진소유는 대답했다. "이런 곳에 정말로 좋은 산삼이 뒹굴고 있을 리가 없어요. 게다가 그 일만냥이란 돈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죠." 백방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만냥의 돈은 비록 많지만 내 재산의 십분지 일도 되지 않소. 게다가 내가 힘이 없으면 그 돈을 모두 잃어 버리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니, 좋은 약만 구할 수 있다면 그 돈이 어찌 많다고 할 수가 있겠 소? 난 사실 다시 그것의 열 배도 드릴 용의가 있소." 진소유는 이에 눈살을 찌푸리고 다소 생각하는 듯 하다가 다시 말했 다. "당신이 만약 그렇게 원한다면 사실 내게도 방법은 없는 것이 아니예 요." 백방생은 눈이 번쩍 뜨이는 듯 해서 그녀를 바라보며 즉시 물었다. "정말로 낭자가 영약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다소 안색을 붉히며 대답했다. "사실 이 영단(靈丹)이라는 것은 무림인들이 누구나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가지고 다닐 수도 없고, 또한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을 할 수는 없어요. 사실 나의 사부님께서는 이번의 일이 위험할 지도 모른 다고 하시면서 내가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내상약 이외에도 따로 한 알의 대비신단을 주셨지요.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없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백방생은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 대비신단을 낭자가 내게 주겠단 말이오?" 진소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단지 당신이 그렇게 원하고 있고, 게다가 이런 상인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백방생은 그만 기뻐서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진소유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어쨌든 이건 정말로 고맙기 그지 없는 일이오. 대체 내가 이 일을 무엇 으로 보답하면 좋겠소?" 진소유는 슬쩍 손을 빼고서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만일 부담을 느낀다면 그저 아까 그 은표 한장만 나에게 주면 돼요." 백방생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으나 너무나도 기뻐서 그런 것을 개의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소, 그럴 수는 없소. 그 대비신단은 그야말로 낭자의 목 숨이 위급해 졌을 때 사용할 것이었으므로, 지금 그것을 나에게 준다는 것은 거의 절반쯤 목숨을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낭자의 목숨값이 그렇게 적을 리가 있겠소? 나는 반드시 그것의 백배인 십만 냥을 드리 리다." 진소유는 그 말에 웃으며 말했다. "그 대비신단은 지금 나에게 있지만 어차피 집에 가서 복용해야 할 것이므로 그다지 급한 것은 아니예요. 아무래도 지금 급한 것은 저 사람 들인 것 같군요." 백방생은 자신이 일시 너무 흥분하여 누가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는 것을 알았다. 진소유의 손짓을 따라 바라보니 어느새 점포의 안에는 새 로 덩치 커다란 세 명의 대한들이 들어와 있었다. 백방생은 마악 품속에서 예의 그 금표 묶음을 꺼내려다가 얼른 다시 잘 갈무리했다. 그 대한들은 안으로 들어와서 주인은 찾지 않고 두 사람 만 주시하고 있었는데, 일견하기로 그 눈빛들이 흉악해 보였다. "아, 그렇군요." 백방생이 가볍게 안색을 굳히자, 다시 진소유가 말했다. (많은 돈을 드러내놓고 자랑하면 그것이 곧 화를 부르게 된다는 이치 를 그대로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닌가요?) 그런데 이번의 진소유의 말은 마치 모깃소리처럼 가늘어서 마치 귓속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보니 진소유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입술만 가볍게 달삭거리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것이 곧 이른바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수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이내 그 대한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그 대한들 가운데 덩치가 가장 커다란 대한이 앞으로 나서며 대꾸했다. "우리는 약을 사러 온 사람들이다. 지금 주인은 어디에 있느냐?" 백방생은 손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들어갔으니 만일 급하다면 안으로 들어가서 찾아 보시 오." 대한은 이내 그 흉흉한 기색을 드러냈다. "우리는 그렇게 한가하지가 못하다. 네놈이 들어가서 찾아 오너라."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한가하지는 못하오. 역시 당신들이 직접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좋겠소." 대한은 흉악하게 웃더니 대뜸 안면에 살기를 일으키며 다가들었다. "네놈은 감히 우리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냐?" (괜찮겠나요?) 진소유의 전음에 백방생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이고 는 대한을 향해 마주 다가갔다. "네놈은 대체 어디에서 놀던 수작이냐?" 6 장 무공입문(武功入門) 순간 두 사람의 육체가 갑자기 뒤엉켰다. 백방생은 키가 육척이나 되어 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그 대한의 키는 무려 칠척이나 되는 것 같았 고 체구도 백방생의 세 배는 되는 것 같았다. 대한의 우람한 두 팔이 백방생의 어깨를 감아 버리자 백방생의 어깨 는 이내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순간 기우뚱 하더니 바닥에 나가떨어지는 것은 오히려 그 대한이었다. "어이쿠!" 결과는 너무도 쉽게 끝났다. 대한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나머지 두 명 의 대한이 각기 허리춤에서 병장기를 뽑아들려고 했지만, 이내 하얀 그 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그 두사람이 정신없이 뒤로 나가떨어졌고 안쪽에서 그 중늙은이가 날아나왔다. 물론 그것은 진소유가 잠시 재간을 부린 것이었다. 그녀는 두 명의 대 한을 물리친 이후 그 중늙은이가 안쪽에 숨어서 이쪽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잡아온 것이었다. 백방생은 느닷없이 그 중늙은이가 탁자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 놀 랐지만 이내 그가 사시나무 떨 듯 하는 것을 보고 절로 웃음이 나왔 다. 진소유는 그 중늙은이의 몸에 몇차례의 지풍을 가하더니 물었다. "네 놈은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어서 대답해라!" 지금 진소유가 중늙은이의 몸에 펼친 것은 바로 분근착골수였다. 백방 생도 이전에 당한 바가 있었지만 그것은 강호인들이 즐겨 쓰는 고문수 법의 하나로 그 고통이 지극히 심하여 일반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늙은이는 이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뒹굴며 비명을 지르 기 시작했다. 진소유는 중늙은이가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다시 지풍을 날려 쓰러져 있는 세 명의 대한에게도 분근착골수를 펼쳤다. "으아악!" 네 사람이 일제히 뒹굴며 비명을 질러대자 마치 이 자리가 아비규환 의 지옥인 것 같았다. 진소유는 이윽고 중늙은이의 혈도를 풀어 주어 분근착골수의 수법을 해소시켜 주며 다시 물었다. "네 놈은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어서 대답해라!" 중늙은이는 체력에 한계가 있어서 이미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극도의 고통을 겪은 터라 진소유의 목소리만 들어도 혼백이 떨려 왔다. 그는 감히 추호도 수작을 부릴 수가 없어서 사실대로 급히 대답했 다. "예 그저 이 미천한 늙은 것이 잠시 눈이 뒤집혔나 봅니다. 저분 상공 께서 많은 돈을 보이시자 나도 모르게 저들을 불러서...." 진소유는 재촉했다. "불러서 어떻게 했단 말이지?" 중늙은이는 다급히 벌벌 떨며 대답했다. "사, 상공의 돈을 모조리 빼앗으라고 했었습니다. 아이구, 살려만 주 십시오?" 이미 이곳에서 비명소리가 울려퍼지자 십여명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구경을 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진소유는 이미 중늙은이의 죄를 밝혀냈기 때문에 더이상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즉시 지풍을 날려 세 명의 대한들의 분근착골수를 해소시켜 주 며 백방생의 손을 잡고 신형을 날렸다. 두 사람이 그렇게 단숨에 허공을 날아서 지붕 위로 사라져 가자 몰려든 사람들은 하나 같이 경악에 찬 소리들을 질렀다. (이제 다시는 저 약포를 찾아갈 수가 없겠군.) 백방생이 내심으로 중얼거리는 사이에 진소유는 그의 손을 잡은 상태에 서 무려 십여장씩이나 휙휙 날아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연속해서 지붕들을 밟고 날아가는 것이어서 절로 백방생으로 하여금 놀라게 했다. 실로 이 진소유의 무공은 생각할 수록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진소유가 자신을 어느 한 골목길에 내려주자 백방생은 참지 못하고 마침내 그 한마디를 했다. "낭자의 무공은 정말로 대단해서 갈수록 감탄하게 되는 구려." 진소유는 그렇게 한차례 무공을 사용했는데도 여전히 숨이 가쁘지 않았고 이마에 땀방울 하나 흐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과찬의 말이예요. 나의 무공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당신이 아까 그 대한을 사량발천근의 수법으로 충격을 주고 가볍게 넘어뜨린 것이야 말 로 실로 놀라운 것이예요. 지금 내공이 없는데도 그러한데 만일 나중에 내공을 얻게 되면 얼마나 그 능력이 대단하겠어요? 아마도 나의 호위는 필요없을 지도 몰라요." 백방생은 얼른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럴 리는 없을 것이오." 진소유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이만 돌아가도록 해요." 백방생은 마악 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다소 멍청한 표정이 되어 진소 유에게 물었다. "낭자는 혹시 이 부근의 지리에 대해서 잘 아시오?"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저는 절강성(浙江省)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곳의 지리는 잘 몰라요." 백방생은 그 말에 다소 난처한 표정이 되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은 나도 성안의 지리는 잘 몰라서 말이오. 하하 이거, 고생 좀 하겠구려...." 진소유는 그제서야 백방생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어이없어 하며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 "우리는 단지 아까 그 길을 옆으로 되돌아 온 거예요. 자신의 집이 바 로 코앞에 있는 데도 못찾는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일순 어리둥절해 졌다. 확인해 보기 위해 골목길을 나서 보니 정말로 대로의 맞은 편에 자신의 거처인 별채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 닌가? (어? 언제 우리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지...?) 백방생이 다소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보고 진소유가 다가와서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자 어서 가요. 당신은 계속 이렇게 서있기만 할 건가요?" 백방생과 진소유는 다시 후문을 통해서 별채로 돌아왔다. 아직 오전이 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조용하던 별채는 더욱 조용하게 느껴졌다. 하인들도 일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지 별채의 내부는 텅 비어 있 었다. 두 사람은 별채로 들어서자 마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곧장 서재로 갔는데, 백방생은 의자위에 앉자 마자 즉시 품속에서 금표묶음 을 꺼내 들었다. 백방생은 그 가운데에서 사십장을 세어서 진소유에게 주려고 했다. 그런 데 진소유가 그것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십만 냥의 은자는 너무나 많아요. 좋아요? 당신이 만약 그렇게 내게 성의를 표시하고 싶다면 그 가운데 열 장만 주도록 하세요." 백냥짜리 금표가 열 장이면 은자로 치면 이만 오천냥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백방생은 그래도 계속 돈을 좀더 줘야 하겠다고 우겼으나 나중에는 결국 그녀가 말한대로 백냥짜리 금표 열장을 주고 말았다. 진소유는 금표 열장을 받아서 품속에 잘 갈무리한 다음에 이윽고 소중 하게 간직했던 작은 옥병 하나를 꺼내서 백방생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대비신단이예요. 하지만 지금 그 안에 있는 대비신단을 복 용하려면 먼저 나의 얘기를 들어야 해요." 백방생은 그 작은 옥병을 받자마자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꺼냈다. 그 안에는 밀랍으로 봉해져 있는 한 알의 호도알만한 환약이 들어 있 었는데, 아직 밀랍을 벗겨내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기이한 향기가 주위 를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마악 그 밀랍을 벗겨내려 하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무슨 얘기요?" 진소유는 길게 한숨을 내쉰뒤에 맞은 편의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우선 이 일은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야 해요. 본래 본문의 신단(神 丹)은 결코 타인에게 거래하는 식으로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내가 당신의 딱한 사정을 보다못해 이렇게 되었으니, 이 일이 알려지면 나는 다시는 사부님을 뵈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 당신은 앞으로 누구에게도 내 게서 그 신단을 받았다는 말을 하면 안돼요." 백방생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가 무엇 때문에 남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겠소?" 진소유는 문득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물었다. "당신은 혹시 나의 사부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소? 단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하나 가 그곳에 있다는 얘기를 가끔 들었을 뿐이오." 진소유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알고 있다는 사람은 대체 누구죠?" 백방생은 대답했다. "그 분은...바로 나의 어머니요." 진소유는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을 보였다. "어머니라고요? 그것은...그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로군요. 그러면 당신 의 아버지는 대체 어디에 있죠? 혹시 이미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돌아가신 것은 아니오. 아버님은 이미 오래전에 출가를 하여 달마하원 에 계신다고 들었소." 진소유는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분도 역시 스님인가요?"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소. 말하자면 나의 탄생은 약간 기구한 점이 있었다고 할 수가 있었소." 진소유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아 그래서 당신은 원래 부모가 없는 것처럼 보였군요. 헌데 아버님이 달마하원에 계신다면 어째서 그곳에 가서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었죠?" 백방생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 두 분은 조용한 것을 원하셨기 때문에 내가 찾아가는 것을 허락하 지 않으셨었소. 그래서 나는 사실 아직까지 한 번도 두 분을 뵌 적이 없 는 처지이오." 진소유는 다소 어리둥절해 하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 백노야가 세상을 떠나면 그 장례식은 달마하원에 가 서 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혹시 당신의 부모도 거기에서 뵐 수 있지 않을까요?"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아직 잘 모르겠소." 진소유는 백방생의 표정이 왠지 우울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화제 를 돌렸다. "어쨌든 그건 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나와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만 해요. 게다가 이 다음의 것은 더욱 중요하지요. 그것은 즉, 당신은 그 신단을 복용하기 전에 나에게 일종의 기초적인 내공입문(內功入門)의 구결(口訣)을 전수받아야만 한다는 거예요." 백방생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아니 어째서 갑자기 내공구결을 전수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내가 이미 말한 바가 있지만, 당신이 지금 암기하고 있는 내공심법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심오하여 현재의 당신의 능력으로는 완전히 소화해 낼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는 내공이 거의 없어서 큰 부작용이 없었지만, 그러나 만일 당신이 갑자기 큰 내공력으로 그 내공심법을 성취하려고 한다면 대번에 십중팔구 주화입마에 걸리게 될 거예요. 만일 당신이 중요한 시기에 자칫 정신을 산만하게 하여 막대한 진기를 엉뚱한 방향 으로 흐르게 한다면, 그 때는 나로서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요." 백방생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거기에 다시 새로운 내공심법을 전수받는다고 해서 문제가 달라진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나는 내공심법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것을 전수하려는 거예요. 그러니까 즉, 나는 당신의 호위를 맡은 사람으로서 당신이 위험에 처하 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다는 거지요. 나는 당신이 가장 기초 적인 도인술에서 부터 시작하여 내공을 점진적으로 조금씩 쌓아 가기를 바랬지만, 그러나 당신은 결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니 결국 차선책을 택하는 것이지요. 당신이 그 심오한 내공심법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건네준 신단의 약효를 능히 흡수할 수 있으리라고 봐요." 백방생은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내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겠소?" 진소유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예요. 본래 일문(一門)의 제자가 그와 같은 영약을 복용했을 때에는 진기가 강성해지기 때문에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할 때에는 문 파의 어른이 나서서 본신의 진기로 제자의 행공을 도와주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운기행공의 길이 잘 닦이고 나면 그제서야 제자가 혼자서 운기행공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나는 당신이 그래도 운기법 문(運氣法門)에 능한 편이라고 생각되어 혼자 시작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역시 만약을 대비하여 내가 옆에서 호법(護法)을 서주어야 하는 거죠." 백방생은 이에 그만 할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대체 그 내공심법은 어떤 것이오?" 진소유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내가 가르치려는 내공심법은 바로 본문의 입문심법인 항마공(降魔功)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예요.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입문심법이 기 때문에 당신이 나중에 다른 내공을 연마하는데도 전혀 지장을 주 게 되지 않을 거예요. 잘 들어요! 그것은...." 이어 진소유는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그 내공구결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제법 길었다. 백방생은 묵묵히 들었는데 역시 가장 기초적인 것이라 굳이 이해하 려고 할 필요도 없었다. 진소유는 이윽고 내공구결을 다 말하고 나자 다시 입을 열어 물었 다. "당신은 그 내용 가운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미 다 이해했소." 이어 백방생은 조금전에 진소유가 말한 내용을 들은 대로 처음부터 끝 까지 다 말하기 시작했다. 백방생이 그렇게 한꺼번에 다 외듯이 말하고 나자 진소유는 다소 안색을 붉혔다. "남의 문파의 입문무공구결을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하 지만 당신의 머리는 알고보니 제법이로군요?" 백방생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 들어서 다소 나아진 편이오." 진소유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지금 즉시 신단을 복용하려고 하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어 백방생은 드디어 그 환약의 밀랍을 벗겨내고 입속에 넣고 우물 거리다가 삼켰다. 그 대비신단의 빛깔은 누런 색깔이었는데 입속에 들어 가자 일순 지독하게 쓴 맛이 일어서 모든 것이 다 올라올 듯 했다. 하지만 억지로 그것을 삼키자 이내 가슴속이 시원해 지는 듯 했고, 이 어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일어서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이에 의자에서 내려와서 한쪽 구석의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서서히 운기행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전에 진소유가 가르쳐준 내공심법에 따라 일어나는 진기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점차로 그의 안색이 붉어지다가 이윽고 몰아지경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진소유는 아까 백방생이 앉았던 의자에 옮겨 앉아서 백방생이 운기 행공하는 광경을 지켜보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차로 그녀의 안색이 신중하게 변해갔다. 백방생은 이 무렵에 다소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견하기로 무아지경에 들어간 그의 코에서는 호흡과 함께 아지랭이와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 그의 안색이 점차 로 더욱 시뻘겋게 변해 가는 것이었다. 진소유는 그것을 보고 일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수한 내공심법은 상승내공이 아닌 초보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실 약력(藥力)을 모두 흡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경로로 기를 운행하는 것이며 나머지의 기운들은 자연히 다른 경맥들 속으로 스며들어 잠재되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 전체의 기운을 모두 일으키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차차 그 약력들을 흡수 하도록 안배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지?) 백방생의 안색이 점차 시뻘개지고 있다는 것은 그 약력들이 이상적으 로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진소유는 어째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혹시 내가 가르쳐준 내공심법을 거부하는 것일까?) 운기행공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 내공심법에 의외의 변수가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백방생의 코에서는 이윽고 점차 안개처럼 짙어진 기운이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안면은 시뻘개지다 못해서 점차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비단 안면 뿐만 아니라 그의 몸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잠재되어야할 기운들이 잠재되지 않고 모조리 들고 일어나 는 것일까?) 진소유는 그만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지금 백방생의 코에서 안개와 같 은 기운이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이미 그의 내공이 이류 (二流)의 수준인 사십년 정도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본래 진소유가 전수한 내공은 삼류급에 불과한 것이었다. 삼류급의 내 공심법으로 이류급의 내공을 감당하려고 한다면 그건 무리한 짓이었다. 그런데 지금 계속해서 백방생의 안면이 부풀어 가고 있는 상태가 아닌 가? (아 안돼...!) 진소유는 그만 당황해서 신형을 벌떡 일으켜 백방생의 앞으로 다가 갔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내공으로 백방생 의 기운을 움직여서 진정시키는 것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남에게 그와 같은 일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두려움이 왈칵 치솟았다. 하지만 이대로 백방생이 몸이 터져나가며 죽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진소유는 내심 입술을 깨물고 내공을 일으킨 다음에 백방생의 앞으로 다가가서 마주 앉았다. 헌데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백방생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진소유가 마악 그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그의 안면이 바람이 빠진 듯이 붓기가 빠지더니 그의 호흡 역시 거짓말처럼 깊고 조용해 지는 것 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괴이한 변화였다. 진소유는 일순 행동을 멈추 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백방생의 안색까지 이미 평온한 제 빛깔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지?) 진소유는 잠시 망연히 앉아 있다가 이윽고 물러나와 백방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을 거듭했다. 우선 분명한 것은 그녀가 전수해준 내공심법 에는 이런 괴이한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가 정말로 가전의 내공심법을 일으킨 것이라는 말인 가?) 진소유는 내심 여러번이나 그런 추측을 부인했다. 그것은 그녀가 이미 안 된다고 공언했던 것이었다. 백방생의 가전의 내공심법은 이른바 최상승(最上乘) 이상의 심오한 내 공심법이기 때문에 신단을 복용하고 그 심법을 일으킨다면 거의 주화입 마에 걸릴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 현상은 그 이외의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이미 백방생의 운기행공이 차분한 안정권에 들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의 코에서는 지금 아까보다도 더욱 짙은 안개와도 같은 기운이 흘러 나와 오르내리며 주위를 은은히 감싸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신색은 갈수록 더욱 조용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까 혼란스러웠을 때와는 전혀 딴판의 모습이었다. 진소유는 그것을 보고 내심으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윽고 중얼거렸다. (설마하니...저 자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최고의 무학기재(武學 奇才)였단 말인가? 사부님께서는 이른바 최고의 무학기재들만이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었는데.... 헌데 그렇다면 대체 그는 또 어째서 지금까지 그렇게 전혀 무공을 배우지 못했었던 것이지...?) 진소유는 내심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주위를 서성거리며 생각을 해보다가, 다시 의자위에 앉아서 이리저리 분석하며 자신의 무학 지식을 총동원해 보았다. 하지만 결론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그저 시간만 흘러갈 뿐이었다. 문득 앞쪽에서 가벼운 인기척이 들리더니 이윽고 한 사람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비로소 백방생이 운기행공을 마치고 다가온 것이었 다. 진소유는 이미 거의 끝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새삼 놀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백방생은 확실히 운공하기 전보다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혈색이 좋아지고 피부에 윤기가 흐르며 전신에서 은근히 부드러운 기 운이 일어나고 있는듯 하여 결코 이전처럼 허약해 보이지 않았다. 백방생의 용모는 본래 다소 마르고 수척하기는 했지만 유심히 바라보 면 상당히 잘생긴 편이었다. 진소유는 지금 달라진 백방생의 얼굴을 보 고 비로소 그가 제법 준수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다가와서 그녀와 얼굴을 마주 대하자 이내 포권하며 말했다. "정말 고마웠소. 만일 낭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가 결코 이만한 성취 를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오." 백방생의 눈빛은 고요해 보였고 음성도 이전과는 달리 부드럽고 은 은하게 울려나오고 있었다. 진소유는 그것을 보자 문득 다시 한가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대비신단을 복용하면 대개 일갑자(一甲子)의 공력을 얻게 되니, 지금 그의 경지는 아마도 자매판(紫枚瓣)의 일류급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아직 그의 양쪽 태양혈(太陽穴)은 밋밋하고 눈에서는 정광(精光)이 조금도 일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진소유는 이윽고 서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내심의 의 문을 떨치기라도 하듯 다소 쌀쌀맞게 대꾸했다. "내가 뭐 특별히 도와준게 있나요? 그 신단은 당신과 정당하게 거래 한 것이고, 그밖의 일로는 오히려 당신이 나 때문에 화를 당할뻔하지 않 았나요?" 백방생은 지금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터라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상대방이 냉소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오히려 화를 내고 싶지가 않았다. "어쨌든 당신이 나를 위해 호법을 서주었고 또한 그런저런 도움이 있 었기에 나의 운공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여지오. 특히 나의 운공이 잠시 잘못되었던 부분에 있어서도 역시 나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하오." 진소유는 자신이 오판했던 일에 대해서 백방생이 너그럽게 나오자 자신의 마음 역시 부드러워 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냉소하며 다시 물었다. "아마 당신은 이미 그 가전의 내공심법을 성취하였겠지요?" 백방생은 다소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겨우 기초적인 성취를 이루었을 뿐이오. 모두가 낭자의 덕택이라 고 보고 있소." 진소유는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게 당신은 모두가 나의 덕택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럼 대체 당 신은 무엇으로 그것에 보답할 생각인가요?" 백방생은 의아해 졌다. "낭자는 무엇을 바라고 있소?" 진소유는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단지 당신이 나의 질문 몇가지에 대답해 주기를 바래요." 백방생은 물었다. "어떤 질문이오." 진소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는 듯 하다가 이내 말했다. "당신은 갑자기 그렇게 대단한 성취를 이루게 됐는데, 어째서 과거에는 무학을 전혀 배울 수가 없었다는 거죠?" 백방생은 실소하며 대답했다. "그건 이미 말하지 않았소? 내가 이전에는 마음이 복잡해서 그랬었다 고." 진소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어째서 마음이 그렇게 복잡했었다는 거죠?" 백방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그런 이유까지 설명해 줘야 하오?" 진소유는 말했다. "물론이예요. 당신은 이미 나에게 보답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그건, 내 마음이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오." 진소유는 다시 물었다. "얽매이다니, 대체 무엇에 얽매였다는 거죠?"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소." 진소유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무엇에 얽매였는지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그래 당신은 이제 거기에서 벗어났나요?" 백방생은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소." 진소유는 의아해져서 말했다. "당신은 지금 나와 장난을 하자는 건가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럴리가 있겠소? 나도 모르기 때문에 모른다고 대답한 것이오. 그래 서 내가 그런 얘기는 잘 하지 않는 것이라오." 진소유는 어리둥절하여 잠시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방생의 말 은 횡설수설하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일부러 꾸며서 하는 말 같지는 않 았다. 그때 문득 밖에서 점심상을 차려놓았다고 하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사이에 이미 하인들이 들어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진소유가 자신을 보고 말을 꺼낼 듯 말 듯한 것을 보고, 왠지 답답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 다. "자,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우선 식사부터 하고 난 뒤에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음식은 식으면 맛이 없게 되 는 법이라오." 진소유는 다소 망설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백방생은 먼저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서 찢어진 의복을 갈아입은 다음 에 진소유와 함께 거실로 나갔다. 과연 식탁위에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고 하인들이 바쁘게 움 직이고 있었다. 백방생과 진소유가 각기 자리하자 하인들은 뜨겁게 데 운 음식들을 마지막으로 날라왔다. 그런데 백방생이 마악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문득 한 명의 하인이 다가와 공손히 입을 열었다. 그는 바로 예의 그 늙은 하인이 었다. "저어 넷째공자님, 조금전에 셋째공자님께서 큰공자님댁으로 다녀가라 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백방생은 그 하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어 진소유에게 시선을 보내 며 내심 생각했다. (정말로 그는 나에게 도무지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군.) 백방생은 아까 후문앞에서의 광경을 다시 상기하며 하인에게 물었다. "그래? 대체 무슨 일이라던가?" 이 늙은 하인은 진소유가 그의 호위를 맡은 이후에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다소 달라졌다. 그를 막내공자가 아닌 넷째공자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능히 알 수가 있었다. 마음은 그를 멀리하지만 겉으로는 감히 예의를 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인은 대답했다. "예, 큰공자님댁에서 갑자기 큰 환란이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넷째공 자님께서도 그곳에 한번 가보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환란이 일어났다고? 대체 무슨 환란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하인은 대답했다. "예 잘은 모르지만, 오늘 큰공자님께서 그만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하 는 것 같았습니다." 백방생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큰형님이 돌아가셨다고? 대체 큰형님께서 무엇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하인은 대답했다. "그건 소인도 잘 모르지만, 아마도...흡혈귀 때문이라고 하는 것 같았 습니다." 백방생은 어이없어 웃으며 말했다. "흡혈귀 때문이라고? 자네는 잘 모른다면서 많이도 알고 있군 그 래." 하인은 말했다. "그것은, 소인이 말씀드린 것은 바로 그 내막을 잘 모른다고 한 것이 었죠." 백방생은 하인을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큰형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는 말은 사실이었단 말인가?" 하인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사실입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와 같은 거짓말을 할 수가 있겠 습니까? 만일 소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면 장차 지옥의 불구덩이속 에 떨어져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백방생은 웃으며 다시 물었다. "큰형님이 오늘 언제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하인은 대답했다.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백방생은 가볍게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 새벽에 흡혈귀에게 당해서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하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예.... 소인은 잘 모르오니 넷째 공자님께서 직접 가 보시면 소상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알겠네. 자네는 그만 물러가 보게." 그 늙은 하인이 물러가고 나자 이윽고 진소유가 듣고 있다가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죠? 문상을 갈건가요 안 갈건가요?"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웃으며 되물었다. "낭자는 오늘 새벽에 흡혈귀에게 당해서 죽었다는 말에 대해서 어떻 게 생각하시오?" 진소유는 대답했다. "오늘 새벽이라면 그들이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을 텐데...당신은 그의 말을 의심하나요?"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나의 편이 아니오. 아니 차라리 나의 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오. 그들 은 지금 한통속이 되어 나의 돈을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의 말을 쉽게 믿을수가 있겠소?" 진소유는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때는 어쩌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의 큰형의 무공은 그의 형제들 가운데에서도 발군이라고 했었으니 결코 간단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오. 게다가 흡혈귀 때문이라니....하지 만 만약 그가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해도 정말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소." 진소유는 물었다. "그들이 결국 당신의 돈을 빼앗기 위해 부른 것이라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면 죽이려는 것인지도 모르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갖가지의 방법을 동원하여 싫다는 나를 억지로 불러내어서는 그렇게 치욕과 수 모를 주었었소. 큰형은 그 가운데의 우두머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소. 지금 그가 설령 죽은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이번에 나를 부른 것은 그저 문상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만은 아닐 것이오." 진소유는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아직도 믿기지 않는 일이로군요. 당신들이 친사촌 형제가 아니 라는 그 소문은 사실인가요?" 7 장 마음속에 초식(招式)이 있다.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의 백부인 백귀현이라는 사람은 나의 할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오. 나의 아버지가 일찍 출가를 하자, 나의 할아버지는 외아들을 잃은 허전 함을 달래기 위해 양자를 두었던 것이오. 그리고 나중에는 그의 이름 까지 아예 비슷하게 바꾸어 주었소." 진소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당신과 그사람들의 용모가 전혀 닮지 않은 것 같더군요. 헌데 어째서 당신의 조부는 그러한 일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미리 그 화근을 제거하지 않았을까요?" 백방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를테면 할아버지의 일종의 고집일 것이오. 그분은 나 의 부친이 출가한 사실에 대해 몹시 유감이 많으셨었는데, 그런저런 이 유로 해서 한 번 정하신 것은 다시 바꾸려고 하지 않으시려는 모양이 오." 진소유는 왠지 백방생의 안색이 우울하다고 느껴진 듯 가볍게 눈살 을 찌푸리며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거죠?" 백방생은 잠시 생각을 해보는 듯 하다가 대답했다. "지금 나는 그 사실을 확실히 믿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믿을 수 있다고 해도 역시 무턱대고 그곳으로 가볼 수도 없는 입장이오. 따 라서...." 진소유는 물었다. "그러니까 기다리자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다행히도 나는 아직 그저 하인에게서 그 얘기를 들었을 뿐 누 구에게 정식으로 통보받은 것이 아니니, 나중에 누가 와서 뭐라고 한 다고 해도 최소한 변명을 할 여지는 남아 있게 될 것이오." 진소유는 그 말에 수긍하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겠군요. 어쨌든 앞으로의 상황이 편안해 지지는 않겠군요?" 백방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백방생은 그렇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자 진소유를 거실에서 지켜보게 한 뒤에 자신은 혼자서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그것은 앞으로 언제 닥칠 지 모르는 험악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서둘러 약간의 힘이라도 갖추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즉, 바로 무공을 한 번 연마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른바 무공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내공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씨름꾼이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해도 기술을 겸비해야 하듯이, 내공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 지 못하면 아직 그 내공은 자신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공은 그 사용하는 방법에 의해 완전히 소화되고 단련되는 것이며, 그 무기(武技)는 또한 내공에 의해 제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인 만큼 역시 그 두가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서재의 안으로 들어서자 우선 탁자와 의자들을 모두 구석으 로 치워놓은 다음 텅 비어있는 중앙에 우뚝 섰다. 그가 먼저 연마해 보려 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장법이었다. 그가 암기하고 있는 자부문의 팔대절학(八大絶學) 가운데 장법이 하나 있었는데 개천장(蓋天掌)이라고 했다. 대개 병장기를 연마함에 있어서 처음에는 칼을 쓰고 다음에는 창을 쓰고 마지막에 가서야 검을 배우게 되는 것 처럼, 이 도수무예를 연마 함에 있어서도 일종의 순서가 있어서 처음에는 장법을 배우고 다음에 는 지법을 배우고 나중에 가서야 권법을 배우게 되는 것은 거의 상식이 라고 할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것은 칼과 장법이 비슷하게 연마하기가 비교적 수월하고 기본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그러나 이 개천장은 결코 그런 기본적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가 있는 무공이었다. 즉 이른바 초상승(超上乘)의 최고절기인 것이었다. 백방생은 우선 장력이 발출되는 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 우뚝 선 상 태에서 허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이어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서 양손 바닥을 모았다가 서서히 우장(右掌)을 내뻗었다. 지금 그가 표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의자였는데 그 거리가 대략 일장 남짓 되었다. 그런데 한번 장력을 내뻗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소리도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표적인 의자도 멀쩡했다. 백방생은 혹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여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하여 장력을 발출해 보았다. 그런데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어? 내가 혹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른바 기(氣)는 단전에 모이지만 등에서 발사된다. 일반적으로 상승의 무공은 힘을 빌어서 그 기를 발사하게 되어 있지만 이 개천장에서는 오직 마음을 이용하여 기를 발사하라고 하고 있었다. 즉 마음을 이용하 여 기를 내려가면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백방생은 두 번에 걸친 시험에도 장력이 발출되는 것 같지가 않자 그 만 그와 같은 구결을 다시 상기하며 의아해 했다. 그는 과거 내공을 얻기 이전에도 약간의 장력을 발출하여 촛불을 끈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공이 갑자기 급증했는데도 오히려 장력이 발출되 지 않는다니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백방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번에는 어디 전력을 다해서 장력을 발출해 봐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우장을 겨드랑이 아래로 움직이며 정 신을 모았다. 헌데 그가 마악 장력을 내뻗으려고 하는 순간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표 적이던 의자의 한부분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내심 기뻐서 소리 쳤다. (아? 이것은...이것은 바로 나의 개천장이 이미 발출되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렇다. 조금전에 그는 장력 발출에 실패했던 것이 아니라 성공했던 것 이다. 장력이 거의 미세한 소음도 일으키지 않는 무형장력(無形掌力)이 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실패한 줄 알았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비록 거의 개천장의 구결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지만 설마 하니 이렇게 빨리 그 요체를 시전할 수 있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하 고 있었던 것이다. 백방생은 얼른 달려가서 한쪽이 부서진 의자의 부서진 면을 면밀히 확인하고, 이어 거기에서 다시 한토막의 나무를 뽑아 든 다음에 거듭 확인하기 위해 이번에는 가볍게 오른손가락으로 지풍(指風)을 날려 보았 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백방생이 지풍을 날린 연후에 손가락으로 나무토 막을 어루만져 보니 그것은 이미 수십군데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이 아닌 가? (어이쿠, 정말이군. 정말 놀라운 위력이로군?) 백방생은 자신이 그저 가볍게 날린 지풍에 나무토막이 구멍이 뻥뻥 뚫려버리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놀라워했다. 그는 처음으로 무공다운 무공을 펼쳐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그러한 위력은 그 자신마저도 다소 질리게 했다. 지금 진소유는 거실에서 촉각을 이쪽으로 곤두세우며 앉아 있는 상 태였다. 그녀가 아무리 호위라고 해도 그가 무공을 연마하는 광경을 훔쳐 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일 그녀가 그러한 광경을 직접 보았다면 대체 무슨 말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문득 백방생의 뇌리를 스쳤다. 백방생은 이어 가급적 방안의 기물들을 부수지 않기 위해 공력을 최대 한 약하게 한 상태에서 우선 장법부터 오묘한 수법과 변화를 익숙하게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지런히 연마하기 시작했다. 오묘한 수법이나 그 변화는 부단히 연마할 수록 더욱 익숙해 지고 정묘해 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방생은 왠지 그러한 수법들이나 변화들 이 생각보다도 훨씬 잘 펼쳐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대략 반시진이 지나자 백방생은 장법과 지법에 이어 권법에 도전하 게 되었다. 권법의 명칭은 과산신권(過山神拳)이라고 했다. 하지만 백방 생은 이미 자신의 공력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권법을 연마할 때에는 처음부터 가벼운 공력만을 사용했다. 건원지(乾元指)의 위력마저 뜻대로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 과산신 권에 도전하는 그의 마음은 차분한 편이었다. 백방생은 이제까지 무공은 단 한가지도 배우지 못했었지만 십여년의 세월동안 그 팔대절학의 구결은 수도 없이 암기하고 또한 검토해온 터 였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그 구결에 대해서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마음이 차분해 지자 무공에 익숙해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게 되 어 다시 반시진의 시간이 흐르자 그는 금나수법인 대구천수(大九天手)마 저 끝내게 되었다. 물론 그는 거의 겉핥기 식으로 연마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 서 일단 그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이윽고 보법인 일류연(一溜烟)이라는 무공으로 넘어갔다. 그 일 류연의 보법은 그야말로 변화가 지극히 심하여 어찌보면 무질서하다고 까지 느껴지는 그런 보법이었다. 천하에 그렇게 복잡한 보법도 매우 드물 것이었다. 그것은 느린 듯 하 면서도 빠르고 빠른 듯 하면서도 느리며, 변화가 적은 듯 하면서도 많 고 많은 듯 하면서도 변화가 적은 그러한 보법이었다. 백방생은 여전히 가벼운 공력만을 사용하여 그 보법을 연마했는데 그 것도 처음에는 역시 어렵지 않았다. 전날 내공이 거의 없을 때도 백방생은 그 보법을 약간이나마 사용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소 심오한 부분으로 넘어가게 되자 백방생은 뜻밖에도 느닷없이 여기에서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대개 일반적인 상승절학들은 많은 육체적인 움직임을 필요로 하는데 반해, 이 자부문의 팔대절학들은 하나같이 육체적인 움직임을 오히려 최소화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백방생의 취향에 걸맞았었다. 그는 이제까지 이론적인 면에 능통해 있었기 때문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무공에 있어서는 그런대로 실제에 적용하기가 유리했다. 그러나 이 일류연은 보법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단은 몸을 움직여야만 했 다. 백방생은 한창 보법을 밟아 나가다가 점차로 속도가 빨라지게 되자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지게 되었고, 이내 그것은 진기의 운용이 혼란 해 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몸이 빠르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헛발질을 하게 되면 곧 낭패를 보게 되는 것이다. 백방생의 신형은 몇 번이나 심하게 균형을 잃고 비틀거 리다가 끝내는 세차게 서가쪽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아이쿠!" 백방생이 보법을 펼치던 와중에는 강한 공력이 운용되고 있었으므로 자연 그가 튕겨져 나가 서가에 부딪치자 일순 그 공력이 서가에 작용하 게 되었다. 느닷없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서가의 한쪽이 완전히 박살이 되어 날아가고 무수한 서책들이 한꺼번에 백방생의 머리위로 쏟아져 버렸다. 백방생은 느닷없이 그런 변을 당하게 되었지만 잠깐 동안은 아직 머리 가 심하게 어지러워서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했다. 책과 먼지속에 묻혀 있었지만 그는 열심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가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머리속이 개운해 지는 것을 느끼며 내심으로 소리 쳤다. (그렇다! 전개해도 전개하지 않은 것이고 전개하지 않아도 이미 전개한 것이다.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고 움직이지 않아도 이미 움직인 것이다. 마음속에 초식(招式)이 있으니 외형상의 변화에 집착할 것이 무엇인가?) 순간적으로 그토록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보법의 오묘하고도 복잡한 변화들이 한눈에 들어왔고, 머리속이 훤하게 밝아진 듯 했으며 조금도 어지럽지가 않았다. 비록 보법이 제아무리 복잡해진다고 해도 마음은 항상 고요하니 어찌 어지러움이 일겠는가? 백방생은 이제까지 거의 격렬하게 움직이는 운 동을 해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미처 자신이 움직이는데 대해서 적응이 거의 잘 되지 않았었 는데, 그러나 뜻밖에도 지금 한가지 긴요한 요결을 깨달아서 그 장애를 벗어나게 되었다. 백방생은 그것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 팔대절학들은 모두가 외형상의 변화를 초월하는 무학들이 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그처럼 일류연의 보법에 대해서 자신감이 붙게 되자 여전히 책더미속에 누워있는 상태로 기뻐하며 다시 생각을 굴렸다. (내가 일류연을 펼쳐보지 않았다면 그런 장애도 몰랐을 것이고 또한 실로 그 요결도 분명히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이론은 실제에 비해 부족한 편이지. 음...혹시 그 요결을 이미 내가 연마해본 권법과 금나수법 등에 적용시켜 보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도 상 당한 변화의 차이가 있을....) 그때였다. 백방생이 한창 빠르게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그의 상념을 깨뜨리는 놀란 음성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진소유의 음성이 었다. "이봐요 백공자! 괜찮나요?" 백방생은 가능하면 자신의 생각을 중단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요결 이 언제나 쉽게 깨달아 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녀가 나타남으로써 그의 생각은 중단되었다. 백방생은 이런 상태로 더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내심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방생은 그제서야 서가가 이렇게 박살이 났는데도 어째서 자신은 무 사할까 하고 생각하며 다소 의아해 했다. 진소유는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백방생이 멀쩡한 모습으 로 책속에서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일순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백방생은 그녀를 향해 한번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시선 을 이내 옆으로 돌렸다. 지금 진소유의 옆에는 상당히 낯익은 한 사람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바로 달마오수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모두 무슨 일들이오?" 백방생이 먼지를 털고 나서 묻자, 진소유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무슨 일이냐고요? 내가 잠시 이분 스님을 대접하고 있는데 당신이 그와 같은 난리를 피울 줄은 몰랐어요." 백방생은 방안을 한번 돌아보고는 그만 안색이 벌개졌다. "정말 난리는 난리로군. 언제 이렇게 엉망이 되었을까?" 백방생은 무공을 연마하는데 정신이 팔려 그동안 자신의 서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있었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심하게 장난하다가 들킨 것과 흡사하지 않 은가? 백방생은 그 무안함을 감추기라도 하듯 고개를 돌려 중년승려를 바라보며 물었다. "스님께서는 바로 저의 할아버님을 호위하고 계신 분들중의 한 분이시 군요. 혹시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셔서 오신 것입니까?" 그 중년승려는 칠척이나 되는 큰 키에 후리후리한 체구를 가지고 있 었고, 상당히 준수한 외모에 매우 인자하고도 맑은 성품이 느껴져서 흡사 인중용봉(人中龍鳳)을 연상케 하는 사람이었다. 백방생의 키가 비록 헌칠하게 느껴지기는 한다고 해도 이 중년승려에 비하면 머리 하나가 작았다. 비록 달마오수 중에서는 그보다 키가 더 큰 사람도 있었지만 은연중 그가 윗사람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백방생은 이미 전날에 느 끼고 있었던 터였다. 중년승려는 합장을 하고 가볍게 불호를 외우며 대답했다. "아미타불....백노야 백노 시주께서는 일찍이 우리에게 일정기한동안 백 공자의 안전에 관해서도 신경써 달라고 말씀하셨소이다. 듣자니 장원 내에 험악한 문제가 발생한 듯 하므로 소승이 백공자를 보호하기 위해 온 것이외다." 백방생은 그들의 무공이 진소유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백방생은 확실히 해두기 위해 다시 물었다. "백공자라면 바로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오?" 중년승려는 다시 합장하며 대답했다. "아미타불, 물론이외다. 백공자는 곧 넷째공자를 두고 하는 말이지 요." 백방생은 그의 말에 왠지 뼈가 있는 듯도 하여 이번에는 정중히 포권하 며 질문했다. "실례지만 스님의 높으신 법명을 들려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중년승려는 담담히 미소하며 대답했다. "아미타불 과찬의 말씀이오. 소승의 법명은 대인(大仁)이외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 대인스님이셨군요. 헌데 조금전에 듣자니 무슨 험악한 문제가 발 생했다고 하시는 것 같던데, 대체 정말로 장원내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 난 것입니까?" 진소유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끼어들어 말했다. "나는 조금전에 그런 문제로 스님과 얘기를 나누어 보았어요. 그런데 당 신의 그 큰형이라는 사람이 죽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시더군요." 백방생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뭐라고요? 그렇다면...아 그렇다면 정말로 나의 큰형이 돌아가신 것이 라는 말이오? 나는 믿을 수가 없군요." 대인스님은 미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외다. 본래 공이었던 것이 다시 공으로 돌아 갔으니 애통해할 필요가 뭐가 있겠소이까. 아미타불....그 보다 지금 우리 는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외다." 백방생은 사실 백방각의 죽음에 대해서 그다지 심한 슬픔은 느끼지 않고 있었다. 단지 워낙 느닷없는 일이라 다소 어리둥절 해졌을 뿐이 었다. 대인 스님의 말을 듣자 그는 이내 정색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알겠소이다 스님, 제가 지금 몸이 더러우므로 잠시 털고 나갈테니 거 실에서 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대인스님은 합장했다. "물론이오 아미타불...." 백방생은 겉옷을 벗어서 먼지를 모두 털어낸 다음에 욕실에 가서 세 수까지 간단하게 하고 나서야 다시 거실로 나갔다. 진소유와 대인스님은 아까 마시던 것인 듯 차가 절반쯤 남아 있는 찻 잔들을 앞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백방생은 다가가 그들의 옆에 있는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대인스님, 대체 저의 큰형이 어떻게 해서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대인은 대답했다. "거기에는 간단치 않은 내막이 있는 듯 하오. 아미타불, 세속에는 지금 흡혈귀니 하는 소문들이 떠돌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와전된 것이오." 백방생은 갑자기 대인의 입에서 흡혈귀에 대한 얘기가 다시 나오는 것을 보고 약간 놀라며 즉시 물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저의 큰형이 돌아가신 이유가 바로 그 흡혈귀 때문 이라는 말입니까? 게다가 오늘 새벽에요?" 대인은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백공자께서도 이미 그 얘기는 들으셨군요. 아미타불, 그렇소이다. 하 지만 소승의 말대로 그것은 진짜 귀신이 아니외다." 백방생은 의아해졌다. "그럼 피를 빨아먹는 사람도 있습니까?" 진소유가 웃으며 끼어들어 말했다. "그건 바로 강호무림(江湖武林)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예요." 아마도 그녀는 흡혈귀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 었다. 백방생은 그녀에게 물었다. "강호무림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이오?" 진소유는 대답했다. "피를 빨아먹는다는 것은 바로 흡력공(吸力功)을 말하는데, 당금에 세 력을 뻗치고 있는 일월신교(日月神敎)에는 예로부터 흡성대법(吸星大 法)이라는 유명한 흡력공이 있었어요." 백방생은 다시 물었다. "일월신교는 또 무엇이오?" 진소유는 가볍게 웃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당금의 강호정세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군요. 일월신교는 세외 팔세(世外八勢)의 하나인데 그걸 아직 모르다니 말이 되나요?" 백방생은 안색을 다소 붉혔다. "난 사실 그럴만한 기회가 별로 없었소. 그 세외팔세는 구파일방 오대 세가에 비교하면 어떻소?" 대인은 백방생이 무안해 하는 것을 보고 웃으며 옆에서 설명해 주었다. "세외팔세란 바로 이 중원대륙 뿐만 아니라 천하를 통틀어서 가장 세력 이 막강한 여덟개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오. 아미타불, 그들은 세력은 막강하지만 심처에 깊이 은둔하여 강호에 나서지 않으므로 특별히 세 외(世外)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오." 백방생도 그 얘기를 듣고 나니 기억이 희미하지만 문득 이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백방생은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일월신교는 중원에 있는 문파입니까?" 대인은 말했다. "본래 중원대륙은 천하무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세외팔세의 무학도 모두가 중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소. 하지만 그 일 월신교는 본래 중원에서 만들어 졌으나 서역(西域)으로 가서 지금 그 곳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상태이오." 백방생은 의아해 졌다. "그럼 그 일월신교는 과거에는 서역으로 갔다가 이번에는 다시 중원으 로 돌아오려고 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까?" 대인은 말했다. "그들은 이제까지 세외라는 두 글자의 의미를 지켜왔으므로 앞으로도 그들이 강호에 나서서 어떤 혈겁(血劫)을 일으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 소. 하지만 아미타불, 근래에 이르러 그들 가운데 몇몇의 세력이 강호상 에서 약간의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오." 백방생은 물었다. "그럼 일월신교 이외에도 어떤 문파들이 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말입니까?" 진소유가 대답했다. "현현사(玄玄社)와 태양마교(太陽魔敎)예요." 백방생은 그녀를 향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두 문파도 역시 피를 빨아먹는 흡력공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눈살을 다소 찌푸렸다. "뭐가 피를 빨아먹고 말고예요. 흡력공이라면 당연히 상대방의 내공이 나 원기를 흡수하여 자신의 내공을 보충시키는 것이지. 현현사와 태양마 교는 그런 흡력공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특이한 심령대법(心 靈大法)과 주술대법(呪術大法)을 사용하죠." 백방생은 문득 얼마전에 성안에서 벌어졌다는 그 사건들이 생각나서 흠칫해서 물었다. "그럼 그런 대법에 걸리면 사람이 미치기도 하는 것이오?" 진소유는 대답했다. "현현사의 심령대법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걸린 사람은 미치게 되기가 쉽죠. 그리고 태양마교의 주술대법은 강한 마약(麻藥)과 같은 것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거기에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기가 어려워요. 즉 한번 마약에 중독된사람은 그 마약을 다시 복용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거죠." 백방생은 그 말을 듣자 저번에 들었던 외아들이 아비를 무참하게 살해 하고 재산을 털어서 도주했다는 말이 실감나는 듯 해서 왠지 가슴속이 서늘했다. 지금의 천하정세가 실로 그러하다면 정녕 말세 운운하는 사람들의 말도 무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결국 세 개의 문파가 천하를 온통 대혼란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로군. 하지만 무림에는 오직 그 문파들만 있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다시 물었다. "그 현현사와 태양마교도 역시 본거지가 중원에는 없는 것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은 세외팔세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듯 하므로 내가 그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도록 하겠어요. 과거 달마조사(達摩祖師)께서 남천축(南天竺)에서 중원으로 들어오셔서 불법을 전하신 지도 이미 어언 삼천여년이나 흘렀어요. 그 동안 많은 문파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더 러는 멸망했다가도 다시 부활하는 등의 부침이 있어 왔지만 그래도 가장 오랫동안 강호상에서 명성을 날려오고 있는 문파들은 역시 구파일방 (九派一幇)과 오대세가(五大世家)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백방생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근래 만화교(萬花敎)나 수라교(修羅敎), 녹림맹(綠林盟)과 같은 흑도의 문파들도 구파일방 등에 못지 않다고 듣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 것들은 빼는 것이오?" 진소유는 눈살을 찌푸렸다. "강호상의 문파는 수도 없이 많고 또한 그 중에는 그처럼 세력이 강대 한 문파들이 있기는 해요. 하지만 나는 가장 전통이 우수한 문파들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백방생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알겠소. 방해하지 않을 테니 어서 말해 보시오." 진소유는 말했다. "그런데 대략 천년 전쯤에 무림에 한 사람의 불세출의 무학기재가 나 타났어요. 그는 자칭 천수자(天隨子)라고 하며 천륭무가(天隆武家)를 세 웠는데 그것이 바로 세외팔세의 시초가 되었죠. 그 이후로 강호의 무 학은 발전을 거듭하여 천년동안에 다시 일곱명의 절대고수(絶對高手)들 을 배출하게 되었는데, 역시 그들도 각기 후예를 남겨서 세외팔세 가운데 나머지의 문파들을 이루게 된 거죠. 즉 칠백년전에 성모궁(聖母宮)과 성수곡(聖手谷), 검총(劒塚)이 생겨났고, 오백년전엔 도막(刀幕)이, 그 리고 사백년전에는 일월신교, 태양마교, 현현사가 거의 동시에 생겨났 죠." 백방생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외팔세가 천년동안에 생겨난 문파라면 아마도 그 사이에 그와 비 슷한 문파들도 더러 생겨났었을 것이오. 그런데 유독 그 문파들만 특별 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요?" 진소유는 말했다. "우선 그 여덟문파에 전해져 내려오는 무학들은 그야말로 최상의 것들 이어서 도저히 유래가 없을 정도예요. 과거 천년전에 천수자가 나타나서 새로운 무학의 경지를 보여주자 일부의 사람들은 그것을 파천황적인 일대사건이라고 하면서 그를 무학의 절대종사(絶代宗師)라고 하여 떠 받들기까지 했다고 하죠. 당시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하던 소림본사에도 실로 그와 같은 경지의 무학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두번째의 이유는 그들이 한결같이 은둔하여 강호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 첫번째의 이유와 서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들 문파의 무학들이 너무나도 심오하기 때문에 오히려 정작 그것들 을 연성해낼 수 있는 최고의 무학기재들을 찾기가 어려워서 그들은 거 의 단맥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죠. 숫자도 적고 항상 무학연마에 정진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강호에 나설 여가가 없다는 거예요." 백방생은 다시 물었다. "그들 문파의 무학이 대체 어떤 경지에 있길래 그렇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대답했다. "바로 대홍락(大紅落)의 광검(光劒) 이상이라고 해요." 백방생은 그만 두 눈이 휘둥그래 졌다. (과, 광검 이상이라고? 그럼 최소한 광검이란 말인가?) 대개 무학의 경지를 나누는데 있어서 무슨 일류니 절정이니 하고 말하 기도 하지만, 그러나 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모두 네 단계로 나 눌 수가 있다. 즉 자매판과 황화예, 백연탄(白筵彈)과 대홍락이 바로 그 것이다. 자매판은 흔히 말하는 하류(下流)의 무공에서 일류까지 나누는 것으로 무학의 가장 기초에 해당된다. 소위 힘으로 무학을 운용하는 경지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거기에 일류라는 말이 붙은 것을 보면 수천년 전에는 단지 그것이 최고의 무공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매판의 경 지는 내공이 이갑자(二甲子)에 이를 때까지인데, 과거에는 더이상 내공 을 높이는 방법을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매판의 경지에서 어느날 갑자기 상승내공(上乘內功)의 터득으로 오르 게 된 경지가 바로 다음의 단계인 황화예인데, 그것을 일명 절정(絶頂) 의 경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왜냐하면 갑자기 내공의 운용에 장애가 없어지는 경지가 나타나자 그것을 최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진소유가 도달해 있는 경지가 바로 그것으로서, 백방생은 불과 얼 마전까지만 해도 그것을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모른다. 소위 기예(技 藝)로써 무학을 운용한다는 신비막측한 황화예의 경지에 이르러 자신이 상상하던 모든 무학들을 펼쳐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대주천반운(大周天搬運)의 대성(大成)을 이루어야 성취 가 가능하다. 이어 상승내공으로 인해 사람의 수명도 늘어나고 내공을 얻는 방법도 발달되게 되자 드디어 사갑자(四甲子)의 공력에 이르러 또다 른 무학경지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미 절정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최절정(最絶頂) 혹은 최상승(最上乘)이라고 불렀다. 즉 백연탄의 경지인 것이다. 이 경지 는 소위 선천화(先天化)된 진기를 사용한다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사현 관(生死玄關)을 타통하고 천인합일(天人合一)하여 반박귀진(返樸歸眞) 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꿈속에서도 그리던 선천진기(先天眞氣)를 사용하게 되었 으므로 그것이야말로 인간무학의 최고봉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천진 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정말로 환상적인 무학 을 펼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로 무학의 길에는 끝이 없었다. 소위 육신을 초월하여 마음으 로 무학을 펼치는 경지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내공이 육갑자 (六甲子)에 이르면 그러한 경지의 초입(初入)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경 지는 초월의 의미가 있다고 해서 초절정(超絶頂) 혹은 초상승이라고 불렀 다. 즉 대홍락의 경지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대홍락의 무학경지는 다시 네 개의 단계로 나뉘는데, 초입과 심검 (心劒), 광검(光劒), 무형검(無形劒)이 바로 그것이었다. 심검은 내공이 칠갑자(七甲子), 광검은 내공이 구갑자(九甲子)가 있어 야만 터득이 가능하며, 인간무학 최후의 경지라는 무형검은 내공이 최 소한 십갑자(十甲子)는 있어야 터득이 가능하다고 했다. 말이 구갑자나 십갑자이지 인간이 그만한 내공을 터득 한다는 것이 어 찌 그리 쉽겠는가? 그러나 이 대홍락의 경지는 오로지 무학의 오의에 대한 깨달음에 의해 터득되는 것인 만큼, 제아무리 고심한 내공이 있다고 해도 정작 깨달음 이 없다면 아무것도 터득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난해한 일이라는 것 이었다. 백방생은 지난 날 무학사부들에게서 여러가지의 얘기를 들었었기 때문 에 당시 배운 무학은 별로 없었어도 얻어들은 무학상식은 제법 있었다. 설령 지금 강호를 종횡하고 있는 무림인들이라고 해도 모두가 반드시 무학에 대한 상식을 그 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 다. (심검을 초인(超人)의 경지라고 했고, 광검을 신입화(神入化)의 경지, 무형검을 신입(神入)의 경지라고 했으니 그럼 그들은 최소한 신인의 경 지에 들어가는 과정의 무학들을 배우고 있다는 말인가?) 같은 대홍락의 경지라도 차이는 많다. 예를 들어 심검과 광검의 경지는 서로 비슷한 듯 해도 기실 그 위력 이 하늘과 땅처럼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백방생은 잠시 아주 빠르게 그러한 모든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생각을 굴리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왠지 너무나도 엄청나서 황당하다는 느 낌까지 들었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망연해 지려는 생각을 급히 지우면서 진소유에게 다시 질 문했다. "하지만 듣자니 지금 그 세외팔세의 일부가 강호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아니오?" 진소유는 그가 잠시 넋나간 듯한 놀란 표정으로 생각을 굴리는 듯 하 다가 다시 질문하는 것을 보고 웃으며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본래 세외팔세 가운데에는 처음부터 천륭무가처럼 새로 생겨난 것도 있지만 본래부터 존재하다가 갑자기 세력이 강성해져서 세외팔세에 들 게 된 것들도 있어요.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자연 주류와 비주류로 나 뉘게 되는 거죠. 주류는 그야말로 최고의 무학을 연성한 소수의 사람들 인데 반해 비주류는 자연 그 숫자가 많고 전통적인 단체의식들이 몸에 배어 있겠죠." 백방생은 물었다. "그럼 지금 나타나고 있는 일월신교 등의 무리는 바로 그 비주류라는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아직으로선 그럴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겠죠." 8 장 공포의 흡력공(吸力功) 백방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주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로군. 헌데 어째서 나는 이제까지 그들의 얘기를 별로 듣지 못했을까?" 진소유는 말했다. "세외팔세의 뿌리는 내가 이미 말했다시피 중원무림이 분명할 거예요. 하지만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존재할 수가 없듯이, 그들은 점 차로 멀리 흩어지게 되었죠. 즉 동쪽 바다끝에 태양마교의 본거지가 있으며, 현현사는 북해(北海)에, 도막과 일월신교는 서역에, 검총은 동 해 부상국(扶桑國)에, 성모궁은 대설산에, 그리고 천륭무가는 곤륜산에, 성수곡은 무릉산에 있게 된 거죠. 그들은 이제까지 은둔하여 세상에 나 서지 않았으니 생각해 보면 당신이 듣지 못한 것이 무리는 아닐 거예 요." 백방생은 말했다. "어쨌든 그 가운데의 하나인 일월신교의 마수(魔手)가 이미 이곳 장원 에까지 미쳤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오. 그만큼 알았으니 이제 우리가 어 떻게 해야할 지에 대해서도 논의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니오? 참, 지금 할아버님께서는 별고 없으시겠지요?" 나중의 말은 대인에게 질문한 것이었다. 진소유는 그 말을 듣고 웃으 며 끼어들었다. "정말 빨리도 조부의 안부를 묻는군요?" 대인은 미소하며 합장한 뒤에 대답했다. "백노시주의 신변은 전과 거의 다름이 없소이다. 아미타불...." 백방생은 다시 대인에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안전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대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대답했다. "아미타불, 모든 일을 미리 정해놓을 필요는 없소이다. 앞으로 상황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소승이 임기응변식으로 방법을 말씀드리도록 하 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우리 지금 즉시 할 아버님을 뵈러 갔다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마악 대답하려다가 문득 왠지 눈빛을 번쩍 빛내 더니 고개를 저었다. "좋겠지요. 그러나 아미타불....지금은 안됩니다." 백방생은 약간 의아해 졌다. "아니 어째서 안된다는 말입니까?" 대인은 잠시 현관쪽을 바라보더니 그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손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백공자 백시주의 백부되시는 분 이 오신 듯 합니다." (백부가 왔다고...?) 백방생은 순간 왠지 깜짝 놀라는 기분이었다. 그는 대인이라는 든든한 수호자를 곁에 두게 되어 마음의 경계심이 다소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백부인 백귀현이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게 되자 반사 적으로 그만 더욱 놀라게 된 것이었다. 확실히 그 백귀현이라는 사람은 아직도 그에게 있어서 소름끼치는 존재가 아닐 수가 없었다. 백방생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날까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마음을 차분 하게 갖고 의자위에 앉은 그대로 그쪽으로 귀를 기울여 보았다. 마음을 안정시킬 겸 해서 조금전에 연마했던 자신의 무공을 한번 다른 방면으 로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 백연탄의 경지에 있는 무공들 가운데 백리지청술(百里地聽術)이라는 것 이 있다. 백방생은 비록 공력이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잘 되지 않 더라도 한번 흉내라도 내 보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특이한 무공들에 관한 내용은 내공심법인 자부금단선공(紫 府金丹仙功)의 구결중에서 다소나마 언급하고 있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일순 그의 귓전에 출입구쪽에서 사람들이 움직 이는 듯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더니, 이윽고 정말로 현관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들이 들어섰다. 정말로 앞장을 서서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그의 백부 백귀현이었다. 백 방생은 문득 대인에게 탄복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가 기척을 듣고서 파악한 것이라는 것은 알 수가 있었지만 그렇게 분명하게 간파할 수 있는 그 능력에 감탄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제서야 신형을 일으켜서 다소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 백부님께서 여기엔 웬일이십니까?" 지금 백귀현의 뒤에는 백방행과 백방몽, 백철산 등이 줄줄이 따르고 있었다. 백귀현은 백방생의 앞에 이르러 음랭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 웬일이냐구? 네녀석은 정말 내가 무엇 때문에 온 것인지 모른 다는 말이냐?" 평소에도 음산하게 느껴지던 백귀현의 눈초리가 이순간 더욱 험악하게 변해 있었다. 옛날이었으면 백방생은 아마 그 눈초리만 대해도 벌써 질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백방생은 이제는 그때처럼 그렇게 당황해 하지는 않았 다. 백방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 이유야 당연히 큰형님 때문에 오셨겠죠. 하지만 저는 백부님께서 바쁘실 텐데 이렇게 굳이 저를 찾아오실 줄은 몰랐던 거죠." 순간 백귀현의 손바닥이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백방생의 따귀를 후려 치려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무공을 연마하며 그러한 순간적인 반 응이 빨라졌다. 하지만 백귀현의 그 한수는 평범한 듯 해도 기실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전날 백방각이 따귀를 맞던 광경이 눈에 선했다. 백방생은 도저히 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가만히 서서 맞으려고 했다. 그런데 순간 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그 손바닥을 막아내는 손길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로 대인이었다. 백귀현은 자신의 그 한수가 가로막히자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대인은 백귀현을 막아냈던 손을 거두고 합장하며 대꾸했다. "아미타불, 소승은 백노시주께 이분백공자를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받 았소이다. 아무쪼록 말씀은 하시되 폭력은 삼가하시기 바랍니다." 백귀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소리쳤다. "뭐라구? 나는 지금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백부로서 조카에게 훈 계를 내리고 있는 것이네. 자네와 같은 사람이 나설 일이 아니야." 대인은 여전히 합장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자고로 훈계라는 것도 지나치면 말썽이 일게 되는 것입니 다. 만일 잘못된 훈계를 하고 있다면 옆사람이 말려줄 수도 있는 일이 죠. 보아하니 백시주께서는 이분 백공자께 다짜고짜 폭력을 쓰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백철산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이봐 중대가리! 네녀석이 뭘 안다고 나서고 지랄이야? 내가 보기에도 저 염병할 자식의 잘못이 분명한데 당장 쫓겨나고 싶다는 말인가?" 백철산의 그 말은 비단 상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지독히도 무례했다. 대 인은 그 말을 듣고도 그저 담담히 웃을뿐 전혀 화를 내는 기색이 아니었 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내심 탄식하며 백귀현에게 입을 열었다. "저에게 지금 훈계를 하고자 하신다는데, 그래 어디 한 번 저의 잘못을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백방생은 본래 과거에는 이 백귀현을 두려워서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조금전에 그가 옛날처럼 또다시 따귀를 치려고 하는 것을 본 순간 왠지 그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문득 그의 음험한 마음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듯 했기 때문 이었다. 백귀현은 백방생이 뜻밖에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태연히 그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보고 약간 흠칫한 표정을 보였다. "네놈이 감히 나에게 따지고 묻겠다는 것이냐?" 백방생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지금 분명히 말하지만, 앞으로 누구에게든 이유없는 매는 맞지 않겠소." 백귀현은 그 말에 일순 두눈에서 섬광(閃光)같은 안광을 발하며 음산하 게 웃었다. 백방생은 그 시선을 마주 대하자 마치 두 눈이 바늘로 찌 르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흐흐흐, 네놈이 감히 나에게 대들겠다고?" 백방생은 자신의 두 눈이 따끔거리는 것이 바로 상대방에게서 발출되 는 일종의 무형지기(無形之氣) 때문임을 알고 내심 약간 놀랐다. 상대방 의 무공이 상상 이상으로 높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는 당신에게 대들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잘잘못을 가리자는 것이 오." 진소유는 상황이 험악하게 흐르자 이윽고 백방생의 곁으로 다가와 섰 다. 백귀현은 백방생이 갑자기 사람이 크게 달라진 듯 하자 노려보며 염두를 굴리는 듯 금방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뒤에 있던 백 방몽이 소리쳤다. "네녀석은 큰오빠의 소식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도 어째서 아직 문상을 오지 않고 이러고 있느냐? 그러고도 정말 죄가 없다고 말할 수가 있 느냐?" 백방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불과 조금전에야 비로소 이분 스님께 그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 소. 내가 벌써 들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뭐라구?" 백방몽은 그 말에 즉시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예의 그 늙은 하인 이 마치 이미 기다리고 있었는 듯 빠르게 다가왔다. 백방몽은 그에게 이 내 물었다. "너는 저녀석에게 분명히 그 말을 전했느냐?" 하인은 이미 상황을 뒤에서 살피고 있었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 면서 대답했다. "예 물론입니다요. 소인은 분명히 큰공자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전해 드렸습죠. 게다가 넷째공자님께서는 이상한 말씀까지 하셨는 걸요." 백방몽은 말했다. "그가 무슨 이상한 말을 했느냐?" 하인은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리면서 대답했다. "소인이 잠시 들은 대로 큰공자님의 상태를 가르쳐 드리자 문득 그건 바로 흡력공이라는 것이다, 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소인은 이내 이렇게 생각했습죠. 저 공자님은 무공도 모르시는데 어떻게 그것에 대 해 그토록 소상하게 알고 있을까...?" 백방몽은 눈썹을 찌푸리다가 다시 말했다. "그는 또 무엇이라고 했느냐?" 하인은 예예, 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넷째공자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 나서도 그다지 놀라는 표정이 아니셨죠. 오히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큰형은 전날 매를 심 하게 맞았으니 혹시 그것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새벽에 흡력공에 당하지 않았어도 이미 죽었을 것이다, 라고요. 따라서 소인은 속으로 이 렇게 생각했습죠. 나는 아직 그 시간을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어떻 게 큰공자님께서 새벽에 당하신 것을 알고 있을까, 하고요." 백방몽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런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하지 않느냐?" 하인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천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그때 다른 하인들도 주위에 있었 으니 그들에게 물어보시면 자연 아시게 될 것입니다." 진소유는 백방생의 옆에서 줄곧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백방생이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했을 때 약간 의아해 졌었다. 그런데 이윽고 하인의 얘기를 듣게 되자 그녀는 내심 분노가 치미는 것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하인은 너무나도 간악스럽고도 대담하게 거짓말을 해대고 있었다. 아마 도 그것은 백방몽 등과 사전에 짜고 입을 맞추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진소유는 자신이 직접 들었기 때문에 그 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백방몽은 하인의 말이 끝나자 이윽고 고개를 돌려 백방생을 바라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자, 너도 들었겠지? 이래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발뺌을 할 것이 냐?" 백방생은 그래도 여전히 태연하게 듣고 있다가 대답했다. "내가 전날 방안에서 몇대의 상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저 하인에게 물었을 때, 그가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소. 저 상여들 가운데 둘은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신에게 당한 것이고 나머지 둘은 미쳐 죽거나 혹은 미 친 사람에게 당한 것이다. 지금 성안에는 그러한 미친자들과 흡혈귀신 들이 마구 돌아다니고 있으니 결코 함부로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나 의 충고를 무시하면 큰 코를 다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를 위해 말 한 것이니 오해는 하지 말아라, 라고요." 백방몽은 힐끗 하인을 바라보았다. 하인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백방생에게 다시 말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 그녀는 말을 들어 보니 백방생의 말이 거짓인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 이었다. 게다가 하인은 자신이 했던 말이 약간 틀리기는 하지만 그러나 거의 비슷한 것 같기도 하여 쉽게 항변을 못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동안 저 하인들에게도 놀림감이 되고 있었소. 오죽했으면 그가 내 앞에서 그런 무례한 말을 했겠소? 나는 그가 내게 충고니, 혹은 오해 를 하지 말라니, 하는 등의 말을 할 때 속으로 화가 치밀었지만 이내 이렇게 생각했소. 나는 일개 대부호의 공자이니 그런 하인들과 다투 어서는 안 된다. 그가 그런 무례한 말을 하더라도 나는 그저 한쪽 귀로 듣고 웃으며 한쪽 귀로 흘려버리자, 라고요." 백방몽은 차갑게 냉소하며 말을 받았다. "그건 바로 네 자신이 멍청해서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이다. 대체 누구 를 원망한단 말이냐?"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물론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소. 하지만 정작 그가 아까 그와 같은 중대한 소식을 들려주며 큰형님이 새벽에 흡혈귀에 의해 돌아가셨다고 했을 때, 나는 결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소. 따라서 나는 조금전에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었소. 큰형님이 한낱 그런 흡혈귀에 게 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그런 큰일이 생겼 다면 결코 저런 하인을 보내 나에게 알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 문이오." 백방몽은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 듯 하자 눈살을 크게 찌푸리 며 다시 말했다. "정말로 너는 말주변이 늘었구나. 하지만 너는 어째서 그 얘기를 듣고 조금도 확인을 해 보지 않았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어제 저녁에는 저 조카 녀석까지 나에게 유산으로 받은 돈을 달라고 달려들었고, 또한 오늘 아침에는 당신들이 나를 해치려고 공격해 들어 왔었소. 이 진낭자가 없었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 지도 모르오. 그런데 내가 감히 그곳으로 확인하러 가 볼 수가 있겠소?" 백철산이 얼굴이 시뻘개져서 소리쳤다. "이 염병할 자식아! 내가 언제 돈을 달라고 했다고 그래?" 백방생은 그 욕설을 들으면서도 태연히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바로 조금전에야 비로소 정말로 큰형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고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소. 그런데 보아하니 당신들은 저런 막되먹은 하인의 말만 믿고서 그를 벌주지 않고 나를 매도하는 구려." 백귀현이 듣고 있다가 음산하게 말했다. "그래서 대체 어쨌다는 것이냐?" 백방생은 옆에 있는 진소유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말이 진실인지는 이 진낭자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녀는 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오. 당신 들처럼...당신들은 그와 같이 온갖 방법으로 나를 협박하고 음해해왔으 며 또한 나를 완전히 바보천치로 만들어 버렸소. 사람으로서 그와 같은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속 편할 것이오. 당신은 지금 나를 훈 계하겠다고 먼저 폭력부터 휘두르려고 했지만 그것은 정말로 훈계가 아 니고, 또한 당신 자신도 나의 백부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오. 백부로서 조카를 망가뜨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백부라고는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오." 백귀현은 음산하게 다시 말했다. "설마하니 너는 지금 나와 인연이라도 끊자는 말이냐?" 백방생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렇소. 당신은 나의 할아버지의 양자로 들어와서 이제까지 욕심을 부려 잘한 것보다 잘못한 일들이 훨씬 많았소. 더욱이 나에게는 조금도 잘한 일이 없었소. 따라서...나는 이제부터 당신의 조카가 아니고 당신 역시 나의 백부가 아니오. 저기에 있는 사람들도 역시 나의 형제도 아 니고 조카도 아니오." 백방생의 그러한 선언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백귀현 은 일시 다소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차가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흐흐핫핫핫! 정말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 녀석이 겁도 없이 별 소릴 다 하는군. 좋다! 네놈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역시 별로 애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너의 할아버지가 나를 아들로 인정하고 있는데도 네놈은 나를 백부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태연히 대꾸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이고 나는 나요. 할아버지는 인정을 하더라도 나는 인정하지 않겠소. 대인스님, 저의 이 선언은 물론 정당한 것이겠 지요?" 나중의 말을 할 때는 백방생은 고개를 대인에게 돌렸다. 대인은 여전히 합장을 한 자세 그대로 유지하며 엄숙히 대답했다. "아미타불, 본래 친혈육간에도 인연을 끊으면 남남이 될 수가 있는 것 이오. 하물며 백공자에게는 그 정당한 사유가 있고 또한 전혀 친혈육간이 아니므로 백공자의 그 선언은 실효가 있는 것이오. 아미타불, 지금부터 백공자는 백시주 및 그 이하의 가족들과 전혀 상관도 없는 남남임을 소 승이 인증하겠소이다?" 백철산이 듣고 있다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이 개자식아? 그럼 받은 유산도 돌려줘야 하는 게 아냐?" 백방생은 표정이 차분해 져서 대꾸했다. "나는 그대들과는 인연을 끊었지만 할아버지와는 인연을 끊은 것이 아니다. 내가 할아버지께 말씀드리면 오히려 할아버지께서 그대들과 인연을 끊고 쫓아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백철산은 그 말에 두 눈을 악독하게 빛냈지만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백방생은 백귀현을 향해 다시 말했다. "자, 이제 여러분은 더이상 내게 볼일이 없을 테니 그만 나의 처소에서 물러가 주시는 것이 어떻겠소?" 백귀현은 대인까지 그러한 말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만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안색을 냉랭하게 굳히고 있다가 이내 차갑게 대꾸했다. "너의 소원이 정녕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러나 그렇 다고 해서 벌써 너에 대한 나의 볼일이 정말로 모두 끝나버린 것은 아니다." 이어 백귀현은 밖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쳤다. "어서 그것을 이리로 들여오너라?" 그러자 문득 현관문이 다시 열리면서 두사람이 하나의 관을 앞뒤로 들고 나타났는데, 그들은 다름아닌 백방도와 백철우였다. 백방도는 음침한 표정이었고 백철우는 시뻘개진 두 눈에서 원독의 광망 을 발출하고 있었는데 그 관은 아직 뚜껑을 덮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서자 대뜸 거실의 중앙에 관을 내려놓고 한쪽으로 물러섰는데 백철우의 두눈에서는 연신 백방생을 향해 악독한 광망이 줄 기줄기 폭사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백방생이 불구대천의 원수이기 때문에 원한이 사무쳐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백방생과 진소유 등은 이내 그 관이 누구의 관인지 알 수가 있었다. 말 할것도 없이 바로 오늘 새벽에 죽었다는 백방각의 관인 것이다. 백귀현은 두 사람이 물러서자 이윽고 백방생을 향해 음험하게 다시 말했다. "너는 설마하니 저기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백방생은 설마하니 그들이 벌써부터 관까지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 을 줄은 몰랐다. 지금 관속에는 시체위에 하얀 천이 덮여져 있었다. 백 방생은 내심 착잡한 심정이 들어서 생각했다. (나는 이제까지 그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전혀 없다. 게다가 내가 지금 그들과 인연을 끊은 것도 따지고 보면 역시 그들에게 전혀 해가 없는 것 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끊임없이 악독하게 나를 음해하려고만 하 는 것일까?)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대강 알만 하오. 그는 바로 당신의 맏아들이었던 백방각이 아니 오?" 백귀현은 두눈 가득 흉측한 표정을 떠올렸다. "좋다.이미 알고 있다니 얘기하기가좀 더 편해지겠구나. 그는 바로 내 맏아들이었지. 그런데 너는 왜 그를 죽였느냐?" 백방생은 내심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건 또 무슨 뚱딴지 같 은 누명인가? 백방생은 내심 화가 나기도 했지만 차분한 태도로 대꾸했 다. "당신은 무슨 근거로 내게 그런 더러운 누명을 씌우는 것이오?" 백귀현은 백철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분명한 증인이 있는데도 발뺌을 하겠다는 말이냐?" 백철우가 그 말을 듣자마자 앞으로 나서며 원한에 가득찬 목소리로 소리쳐 말했다. "네놈은 오늘 새벽에 주무시는 나의 아버님을 살해하고 도주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내가 달려들자 이렇게 옷까지 벗어 버리고 도망 쳤지. 여기에 이렇게 증거품이 있는데도 발뺌을 할 작정이란 말이냐?" 백철우는 말을 끝내자 마자 소매속에 감추어 두고 있던 물건 두 개를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그것은 하나의 옷과 하나의 합죽선(合竹扇)이었 다. 진소유는 여전히 백방생의 옆에서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짐을 느꼈다. 오늘 새벽이라면 그녀가 계속 백방생을 주시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그와 같은 짓을 저지를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 백철우 가 증거물이라고 들고 있는 그 옷도 바로 아침에 후문앞에서 격돌하다가 찢어진 것이 분명했다. 백방생은 점심식사 전에 그 옷을 갈아 입었는데 언제 그것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백방생은 가볍게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당신들은 그야말로 얼굴이 두껍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군. 자신들의 이 익을 위해 시신까지 동원을 하고 그와 같은 더러운 거짓말을 하다니... 그야말로 하늘이 무섭지도 않다는 말인가?" 이제까지 물러가지 않고 서 있던 하인이 이어 소리쳤다. "장주님, 그러고 보니 저 자는 오늘 새벽에 웃통을 벗어버리고 헐레벌 떡 이곳으로 들어왔었지요. 소인이 어디갔다 오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매우 당황해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요. 잠시 산책을 갔다 오는 것이라 구요. 하지만 소인은 생각했습죠. 어째서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저렇 게 웃통을 벗고 뛰어다니냐고요... 대인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문득 백귀현을 향해 물었다. "백시주, 소승이 한 번 저 시신을 봐도 되겠습니까?" 백귀현은 약간 머뭇거리는 듯 하다가 대꾸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혹시 거기에 보물이라도 들었을까봐 그러시오?" 대인은 엄숙하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말과 함께 대인은 관속을 향해 우수를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일순 시 신을 덮었던 하얀 천이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하듯 서서히 떠올라서 옆으 로 치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놀라운 격공섭물의 절기였다. 백귀현도 그런 절기를 대하 자 일순 두눈에서 이채를 떠올렸다. 하얀 천이 치워지자 그 아래의 시신의 모습이 드러났다. 과연 그것은 다 름아닌 백방각의 시신이었다. 그런데 백방생은 그것을 보게 되자 문득 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백방각은 본래 체형이 부친인 백귀현을 닮아서 헌칠한 편이었다. 결코 백방행처럼 길쭉하게 빼빼마른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백방각의 시신은 그야말로 뼈마디에 살가죽만 붙어 있는 것처럼 앙상하게 말라서 오히려 백방행보다도 더욱 길쭉하게 보였던 것 이다. 만일 그의 얼굴이 눈에 익지 않았다면 쉽게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백 방생은 그것을 보고 놀라 내심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흡력공에 의해 원기가 빨려죽은 모습이란 말인가?) 백방각의 얼굴은 아직도 경악과 공포에 가득찬 표정이 완전히 지워 지지 않아 일그러진 상태였다. 그것은 그가 죽기전에 얼마나 놀랐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전날에 자신의 부친에게 따귀를 심하게 얻어 맞았었다. 물론 그 것은 백귀현이 백노야를 의식하여 보란듯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다음날 죽음을 당한 모습이 되어 있었을 줄은 누구도 예측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인은 그 자리에 서서 시신의 상태를 주시한 다음에 이윽고 다시 하얀 천으로 시신을 덮어주고 나서 백귀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백귀현의 얼굴 에는 독기가 시퍼렇게 깔려 있었다. "이제는 충분히 구경을 하셨소?" 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백귀현은 다시 물었다. "그래 거기에 대해서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소?" 대인은 약간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미타불, 이것은 틀림없는 흡성대법(吸星大法)에 당한 것입니다. 게 다가 소승은 또 한가지의 특이한 점을 알아냈습니다." 백귀현은 두 눈에 가벼운 이채를 떠올렸다. "그 특이한 점이란 뭐요?" 대인은 말을 이었다. "흡성대법이란 본래 공력이 높은 사람이 공력이 낮은 사람에게 사용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공력을 흡수하다가 도리어 역으로 당하 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죠. 그러한 면들을 종합해서 살펴볼 때 흉수는 공력이 최소한 이갑자 이상인 사람일 것입니다." 백귀현은 말했다. "그게 바로 특이한 점이라는 말이오?" 대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미타불, 이른바 흡성대법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의 내공심법과는 그 원리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그저 한번 시험해 보 기만 해도 그 사람이 흡성대법을 연성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흉수가 이 안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내 간단하게 잡아낼 수가 있 게 되는 것이죠." 백귀현은 차갑게 냉소했다. "그대가 그렇게 흡성대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라면 혹시 그대 자신이 흉수일 지도 모르겠군?" 대인은 그 말에 상관하지 않고 문득 시선을 돌려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백방도였다. 백방도는 대인이 갑자기 자신만을 주시하자 의 아해져서 절로 안색을 음침하게 굳혔다. 대인은 그에게 문득 질문했다. "아미타불, 그대는 내가 왜 그대를 주목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 소?" 백방도는 어리둥절해 져서 대꾸했다. "내가 당신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어찌 알겠 소?" 대인은 다시 질문했다. "그대는 오늘 점심때 무엇을 자셨소?" 백방도는 더욱 어리둥절해 져서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그것을 꼭 당신에게 말해줘야 한다는 말이 오?" 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지금 당신에게서는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소. 오늘 점심때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줘야 나는 가려낼 수가 있겠소." 백방도는 그 말을 듣자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다소 화를 내며 대 꾸했다. "나에게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러시오? 빌어먹을, 혹시 네놈에게서 중 대가리의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냐?" 대인은 말했다. "아미타불, 소승은 소채만을 먹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특이한 냄새에 대해서는 후각이 매우 예민해 진다오. 지금 시주에게서는 그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는데, 만일 그래도 말하지 않는다면 소승이 그 만 손을 쓰겠소이다." 백방도는 그 말을 듣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색이 여러번 변 했다. 그는 느닷없는 일을 당하게 되어 크게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었다. 백귀현이 그것을 보고 냉랭한 음성으로 대인에게 말했다.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오?" 대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미타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승은 지금 바로 그 특이한 점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외다. 백시주께선 듣고 싶지 않으시오?" 백귀현은 표정이 더욱 냉랭해 져서 대꾸했다. "대체 그 특이한 점이라는 것이 무엇인데 그러시오. 혹시 흉수에 대해 서 알아 내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대인은 말했다. "흉수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 단서는 될 듯하구려. 나는 조금전에 시신을 살피는 동안에 사실은 시신보다도 주위의 사 람들에 대해서 좀더 주의를 기울였소이다." 백귀현은 그가 백방도를 지적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귀현은 냉소했다. "그래, 나의 셋째아들에게서 정말로 어떤 냄새라도 난다는 말이오?" 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미타불, 뿐만 아니라 그는 아까 소승이 시신을 살피는 동안 갑자기 암기(暗器)를 꺼내더니 당신의 등 뒤를 겨누고 있더군요. 소승으로선 대체 그가 무엇을 두려워한 것인지가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백귀현은 그 말을 듣자 다소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냉소하 며 대꾸했다. "대인대사!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소?" 대인은 합장하며 말했다. "믿고 안믿고는 백시주의 마음대로입니다. 하지만 단서를 포착하는 것 은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 법입니다. 보아하니 지금 저 아드님은 소매속 의 그 암기장치를 애써 감추려고 하고 있군요." 백귀현은 본래 냉철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런 얘기까지 듣고 나자 문득 한 번 백방도를 돌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방도는 안색이 다소 창백하게 변하여 소리치고 있었다. "이 돌팔이 중놈아, 지금 누구를 모함하고 있는 것이냐?" 한쪽에 서 있던 백방몽도 말했다. "아버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백귀현은 가벼운 웃음을 떠올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우리의 결백을 입증해 보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셋째야, 이리 오너라." 백방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설마하니 아버님께서는 저 돌팔이 중놈의 말을 믿으신다는 말입니 까?" 백귀현은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내 간단하게 조사만 할 것이다." 백방도는 다소 망설이며 눈빛을 굴리는 듯 하다가 문득 다시 말했 다. "저야 물론 결백하니 아버님께 조사를 받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겠지요. 하지만 저 방생이라는 녀석이 그 새에 달아날까봐 걱정이로군요. 혹시 그 자리에 기관장치가 있을... 아? 그러고 보니 어느새 그 녀석이 보이 지 않는군요?" 백방도는 나중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 은 대부분 백방생에게 볼일이 있었으므로 일시 그 말을 듣자 즉시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내 의아해졌다. 그쪽에 백방생은 여전히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의아해져서 다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갑자기 흡사 솜털처럼 가느다란 무수한 강침(鋼針)들이 소리도 없이 그들을 덮쳐왔다. 9 장 귀신보다도 더 무서운 자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대인의 그와 같은 말을 믿지 않았었다. 백방 도가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의 부친의 등뒤를 겨누고 있었겠는가? 하지만 이내 그와 같은 솜털같은 무수한 암기들이 날아오자 그것이 정말로 백방도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 이외 에 그런 짓을 할 다른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은 느렸지만 현실은 다급했다. 그 소리도 없이 날아오는 암기는 그야말로 놀라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놀란 외침을 발하는 가 운데 저마다 무공을 펼쳐서 그 암기들을 막아내려고 했다. 그 암기는 비단 기척이 없을 뿐만 아니라 속도가 대단히 빨라서, 그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이미 지척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신법 (身法)을 펼쳐서 피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실내에 잿빛의 그림자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일순 그 무수하던 암기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다름아닌 대인이 손을 쓴 것이었 다. 대인은 소매바람을 일으켜 암기들을 모두 받아버린 것 같았는데, 생각 보다도 그의 무공은 훨씬 정교하고 대단해 보였다. 백방생은 마악 장력을 발출하려다가 그만 두고는 급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사이에 실내의 상황은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암기에 맞아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지만 이미 한 사람이 바닥에 쓰 러져 뒹굴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백방도였다. 아마도 암기를 날린 다음에 달아나려다가 즉시 제압된 모양이었다. 백귀현은 어느새 그의 앞에 서있었는데 표정이 괴이쩍었다. 그는 자신 의 아들이 그런 짓을 한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백방도는 쓰러져 누운 채로 자신의 부친을 향해 간절하게 말했다. "제가 큰형님을 해친 것은 아닙니다. 제발 그것만은 믿어 주세요, 아버 지...." 백귀현은 음랭하게 말했다. "너의 그 함사사영(含沙射影)은 어디서 구한 것이냐?" 백방도는 대답했다. ?이것은 소자가 돈을 주고 따로 구한 것이옵니다.? 백귀현은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너는 그것으로 나를 쏘려고 했지?" 백방도는 대답했다. "아버님을 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다만 두려웠기 때 문에... 아아악!..." 백방도는 대답을 하다가 말고 돌연 비명을 내지르며 미친듯이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그것은 느닷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발작을 하 듯 입에서 게거품이 일어나고 눈알이 허옇게 돌아갔다. 백방생은 처음에 는 그것이 백귀현의 짓인 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순간 백귀현의 표정도 경악과 당혹감으로 물드는 것이 아닌가? 백방도는 어째서 그와 같이 미친 듯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일 까? 백귀현은 점차로 백방도의 얼굴이 시꺼멓게 변해가며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하자 지풍을 날려 그의 혼수혈을 제압해 버렸다. 백방도는 혼수혈이 제압당하자 이내 늘어져서 죽은 듯이 잠들어 버렸다. 백귀현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윽고 다시 걸음을 옮겨 백방생 의 앞으로 걸어왔다. 백귀현은 백방생을 향해 말했다. "너는 순순히 나를 따라 가는 게 어떠냐?" 백방생은 그가 다시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나를 데려가고자 하는 것이오?" 백귀현은 음침하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 한 가지 조사할 일이 있다." 백방생은 말했다. "당신은 내게 무엇을 조사하겠다는 것이오?" 백귀현은 말했다. "그건 네가 가 보면 알게 된다." 백방생은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계속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것이오? 내게 무슨 커다란 잘못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만일 내가 당신의 유산을 건드릴까봐 그러 는 것이라면 마음을 놓으시오.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원한을 맺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 말이오." 백귀현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조사하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당신은 아직도 내가 흉수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오?" 백귀현은 말했다. "너는 아무래도 흉수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증거품들이 나 왔으니 반드시 조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백방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바로 저 사람들이 조작한 것들이 아니오." 백방생이 손짓으로 백방몽 등을 가리켰으나, 백귀현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한쪽의 얘기만 듣고 모든 일을 판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나를 따라 가야 한다." 백방생은 그만 질기기 짝이 없는 백귀현의 태도에 질려버리고 말았 다. 대인이 합장을 하며 백귀현에게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이미 시주의 아드님이 함사사영이란 암기를 사용하다가 실패 하였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소. 자신이 흉수는 아닐 지라도 필시 그는 흉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아미타불, 그런데 굳이 백공자를 데려가겠다는 것은 다소 지나친 독단이 아니오?" 백귀현은 두 눈에서 차가운 광망을 내뿜었다. "그래서 그대가 한 번 막아 보겠다는 것인가?" 대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피하지는 않겠소이다." 백귀현은 두 눈에서 음험한 살기를 일으켰다.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군!" 말이 끝나자 마자 백귀현은 드디어 일순 대인을 향해 공격해 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이 갑자기 흐릿해 지는듯 하더니 어느새 대인 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것은 거의 귀신같은 몸놀림이었다. 게다가 어느새 그의 우수가 수십 개의 장인(掌印)으로 변해 대인의 전신을 에워싸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진짜로 손이 여러개로 변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손의 변화(變化)가 빠르기 때문에 그런 환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들이 모두 허초(虛招)는 아니었다. 만일 그 수십개의 환상(幻像)의 장인을 모두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 장인들 가운데 일부가 모두 실초(實招)로 변하여 상대방의 몸을 박살내는 것이었다. (아, 저건 바로 개천장(蓋天掌)이로군!) 백방생은 눈에 익은 무공을 보게 되자 내심 놀라서 절로 중얼거렸다. 기실 백귀현도 백노야에게 무공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자부문의 절학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었다. 백방생은 자신도 모르게 백귀현의 그 개천장의 수법과 자신의 수법을 비교해 보려고 했다. "아미타불!" 백귀현의 공격을 받게 되자 대인은 즉시 불호소리와 함께 신형을 허공 위로 떠올렸다. 이 거실은 천정이 높았기 때문에 그러기에 아무런 불편 도 없었다. 다만 일단 몸을 허공에 띄워올리면 의지할 곳이 없어져서 싸움이 불리 하게 되기 마련인데, 대인은 어째서 처음부터 갑자기 몸을 떠올렸는지 궁금해졌다. 백귀현은 대인이 몸을 허공에 띄우자 즉시 우수로 그쪽으로 방향을 돌려 장력을 날리는 한편 좌수로는 어지러이 지풍을 날려 공격하기 시 작했다. 그 지풍은 바로 다름아닌 건원지였는데, 수십개의 지력이 한꺼번에 상 대방의 급소를 노리며 빠르게 날아가는 데도 역시 장력처럼 소리가 거 의 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소리없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폭풍이 휘몰아치 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대인의 몸놀림은 처음엔 다소 둔한 듯이 보이기도 했으나 이내 그러한 공격을 맞이하게 되자 생각보다 훨씬 유연하고 영활해졌다. 그는 허공에 비스듬히 누워 몸을 팽이처럼 휘돌림과 동시에 장력을 내뻗어 반격을 꾀했는데, 그의 손바닥이 마치 허공을 가득 뒤덮은 듯한 가운데 연신 쩡쩡, 하는 쇳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대인의 신형이 점차 자신과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문득 생각했다. (아, 그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상대를 멀리 유인하는 구나!) 그때 문득 주위에서 다른 새로운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진소유 의 전음이 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바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예요?) 백방생이 얼른 경각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제법 많은 사람들 이 그의 근처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백방행과 백방몽은 벌써 진소유와 격렬한 싸움을 벌이 기 시작하고 있었고, 백철우와 백철산이 음흉하게 눈빛을 빛내면서 그의 지척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백방생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백철우에게 당해서 곤욕을 치른 적 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그 두사람이 한꺼번에 덤빈다고 해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백철우가 먼저 장력을 발출하며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백방생은 마악 반격하여 두 사람을 물리치려다가 문득 생각했다. (혹시 아직은 내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백방생은 즉시 지당문(地堂門)의 수법처럼 바닥을 빙글빙글 몇차례 굴러서 백철우의 장력을 피한 다음에 서재 쪽으로 뛰어갔다. 백방생의 그 모습은 흡사 무공을 거의 모르는 사람과 비슷해 보였다. 백철우는 비 록 첫번째의 공격을 실패했지만 이내 음침하게 웃으며 백철산과 함께 그 뒤를 추격해 가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서재에 들어서자 중앙에 가서 몸을 바로 세웠다. 백철우와 백철산은 금방 추격해 들어와서 백방생이 도망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다소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다시 공격해 들어 오기 시작했다. 백철산의 무공은 여전히 나한복호권으로 발재간이 눈부시게 보였다. 그는 키가 커서 유난히 다리가 긴데다가 거기에 무려 삼사십년의 공력 이 작용하자 마치 두 다리가 태풍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는 저번의 실패를 생각했음인지 아래쪽부터 공격해 들어왔는데, 만일 그 다리에 맞으면 나무토막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기실 백철산과 같은 공격수법은 보기에는 그럴듯한지 모르지만 진짜 위력에 있어서는 그다지 대단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백철 우의 수법이 훨씬 위력적이었다. 백철우의 빠른 보법을 이용하여 종횡으로 움직이며 장법을 펼치고 간간이 금나수법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비단 그 각도가 예리할 뿐만 아니 라 대부분이 급소를 정확하고도 빠르게 공격해 들어오고 있어서 사뭇 위협적이었다. 마치 백철우의 공격은 위력이 살아 있다고나 할까? 백방생은 처음에는 슬슬 피하기만 하면서 그들의 공격수단을 엿보았 다. 그는 무공을 연마한 후 처음으로 대전경험을 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신중한 기분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이미 배운 일류연의 보법을 성의껏 펼쳤으나 이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부터는 일부러 보법을 엉성하 고 느리게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임기응변의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는 아무래도 그들이 전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무공은 너무 수준이 낮아서 자 신의 수련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백방생 은 드디어 손을 써 보기로 했다. 백철우와 백철산은 처음에는 백방생의 보법이 신기한 것을 보고 놀랐으 나 이내 그의 몸놀림이 둔해지는 것을 보고 금방 잡을 수 있을 것이라 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문득 다시 그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백방생이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무공도 결코 하류인 것은 아니어서 역시 나름대로의 견식이 있는 것이 었다. 바로 그 무렵 백방생의 우수가 먼저 백철우를 향해 펼쳐졌다. 그것은 대 구천수 가운데의 가장 기초적인 초식이었는데도 벌써 백철우는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백방생이 손을 쓰는 순간에 갑자기 자신의 중요대혈 다섯 군데가 꼼짝 없이 제압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백철우의 눈동자가 교활하게 돌아갔다. 백철우는 갑자기 신형을 멈춰세우고 한쪽 서가의 뒷편을 가리키며 소리 쳤다. "앗, 저게 뭐냐?" 그것은 물론 백철우의 술수였다. 기왕에 패배할 것이라면 한번 모험이 라도 해 보자는 속셈이었다. 백방생은 확실히 아직 대전경험이 풍부하지 못했다. 그는 상대방이 갑자기 그렇게 엉뚱하게 나오므로 절로 어리둥절해 져서 공격을 멈추고 그 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순간 그의 두 눈이 휘둥그 래 졌다. (바보 같은 자식!) 백철우는 백방생이 정말로 자신의 술수에 넘어가 공격을 중단하고 그 쪽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내심 득의하며 주먹으로 퍽퍽퍽, 하고 가슴을 후려쳤다. 지금 그가 후려친 곳은 바로 사람의 치명요해에 해당되는 대혈들이었다. 마땅히 백철우의 이전의 생각대로 라면 백방생은 이내 신음을 토하며 쓰 러지거나 아니면 최소한 막대한 타격을 입었어야 했다. 그런데 백철우는 순간 기이하게도 주먹으로 마치 솜뭉치를 두드린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백방생은 막대한 타격을 입기는 커녕 곧장 우 수를 움직여 그의 멱살을 잡고 한쪽으로 집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아이쿠!" 백철우는 내심 낭패스러운 생각에 소리치며 즉시 허공에서 몸을 뒤집 어 자신의 몸이 서가에 부딪치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다. 그는 이미 남의 힘을 빌리는 수법을 약간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허공에서 급히 몸을 뒤 집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마악 몸을 뒤집어 얼굴을 서가쪽으로 돌렸을 때의 일이었 다. 느닷없이 그의 시야에 얼굴이 험상er고 눈매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지 는 한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의 모습이 빠르게 확대되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백철우는 순간 심장이 멎을 정도로 깜짝 놀라서 다급히 그 노인을 향해 장력을 날리며 내심 부르짖었다. (아니 이거 정말로 여기에 사람이 있었잖아!) 그렇다. 백방생은 아직 경험이 없어서 대전중에 한눈을 팔고 말았지만, 그러나 요행히도 그러다가 정말로 그곳에 숨어있는 한 흑의노인을 발견 하게 되었다. 그 흑의노인은 서가의 뒤에서 은밀하게 방안의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 는데, 느닷없이 백철우가 그쪽을 가리키는 바람에 일순 흠칫하다가 그 만 백방생에게 들키게 된 것이었다. 흑의노인은 일단 그렇게 들키게 되자 즉시 일장으로 소리없이 서가 를 부숴버리며 앞으로 나섰는데, 백방생은 그때 흑의노인의 그 일장의 위력에 놀라 자칫 멍청히 바라보기만 할 뻔 했다. 흑의노인의 그 일장의 위력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공교롭게도 백철우가 그의 가슴을 후려쳐서 아프게 하는 바 람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이내 다른 것을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즉시 백철우를 집어서 그쪽으로 내던지고는 밖을 향해 신형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흑의노인의 눈빛이 유난히 흉 악하게 느껴져서 그랬던 것이었을까? "으악!" 백철우와 백철산의 비명소리가 마치 합창하듯 울려나온 순간 백방생은 이미 등뒤에 그 흑의노인의 기척을 느꼈다. 흑의노인의 신법은 그야말로 소름끼칠 정도로 빨랐다. 백방생은 아직 서재의 문을 나서지 못한 상태였다. 백철우와 백철산의 상태를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백방생은 다급한 순간에 예의 그 책 더미 속에서 깨우친 무학요결을 상기했다. (마음속에 초식이 있다....) 백방생의 신형은 갑자기 우측으로 석자 정도 움직였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느닷없이 백방생의 앞쪽에 있었던 서재의 문이 통째로 소리없 이 부서져 나가며 흑의노인의 어, 하는 약간 놀란 외침소리가 들려왔 다. 백방생이 만일 계속 그쪽으로 나가려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 지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백방생은 이제까지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무 학의 고수는 처음으로 상대해 보는 것이라 절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흑의노인은 어느새 다시 그의 뒤에 접근해 있었다. 백방생은 흡사 반 쯤은 정신이 나간 듯한 상태에서 다시 연속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신형 은 좌측으로 나갈 듯 하면서 순식간에 서른일곱번이나 움직였다. 그것은 마치 한줄기의 연기가 흐느적거리며 흔적도 없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순식간에 다시 백방생의 앞쪽의 벽이 소리없이 박살이 나서 무너져 버렸다. 흑의노인의 이 기척도 없고 빠르기 짝이 없는 장력은 실로 무섭 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간신히 전력을 다해 그와 같은 장력을 피해냈으나 갑자기 전신에 심한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즉 흑의노인의 장력은 일종의 음한장력(陰寒掌力)인 것이다. 게다가 흑 의노인은 백방생이 자신의 장력을 모두 피해내자 문득 욕을 하면서 왼손 으로 냉전(冷箭)과도 같은 지풍을 펼치기 시작했다. "미꾸라지 같은 녀석!" 흑의노인의 이 소리없고 화살처럼 빠른 지풍은 피하기가 더욱 힘들었 다. 하지만 그 수십개의 지풍 중에서 하나만 맞아도 육신에 구멍이 뻥 뚫릴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백방생은 너무나도 진력(眞力)을 과도하게 소모하자 일순 하늘이 노랗 게 보이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이런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아직 무 리였다. 무턱대고 달아나려고 하다가는 금방 잡혀 죽게 되고 말 것 같 았다. 백방생은 그야말로 안간힘을 다해 자신이 알고 있는 한가지의 수법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개천장이었다. 백방생의 신형이 앞으로 나가는 듯 하더니 빙글빙글 돌면서 어느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서 쌍수를 펼쳤는데 일순 그의 전신 이 그 장인(掌印)의 그림자들 속에 파묻혀 버린것 같았다. 흑의노인은 그가 반격까지 해오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백방생 은 갑자기 전신이 불에 데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퍽퍽퍽, 하는 소 음과 함께 그는 아찔한 충격을 느끼며 뒤로 날려갔다. 그는 순간 흡사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며 만년빙굴속에 갇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뜨거웠는데 어째서 그것이 나중에는 이렇게 차갑게 느껴지는 것일까? 백방생은 의식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다행히 속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어느새 거실과 가까운 마루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아마도 그 흑의노인과의 마지막 일장의 교환으로 그의 몸이 서재를 빠져나가 여기까지 날려온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급히 서재쪽을 살폈으나 왠지 흑의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일까?) 백방생은 잠시 의아해 하다가 이내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지금 그의 부근에서는 한창 백귀현과 대인의 숨막히는 격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격돌은 이제 그 절정에 달해 몸놀림이 거의 보이지도 않고 있었 다. 아까와는 달리 광풍(狂風)이 그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집안의 구조물들이 그로 인해 마구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 두 사람의 싸움은 거의 막상막하로 보였다. 실로 그와 같은 무서운 고수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 것이었 다. 그들은 아까 백철우 등의 비명소리를 듣고 함께 이쪽으로 다가온 모양 이었다. 흑의노인은 계속 백방생을 추격하고 싶었으나 밖에 그 두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오히려 모습을 감춘 것일 것이다. 백방생은 문득 백철우 등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는 흑의노인이 두려워서 감히 다시 그 서재안으로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신에 뼈를 깎는 듯한 지독한 한기가 스며들었었으나 잠시 눈을 감고 내공을 운용하자 이내 그 한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내 공심법이 훨씬 증진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책더미 속에서 깨달은 그 무학요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잠시 계속 누운 채로 운공을 하며 조금전의 그 격전을 생각해 보았다. 실로 그것은 아직도 꿈속에서 귀신과 한바탕의 악전고투를 치른 듯한 느낌 이었다. 지금 그 흑의노인도 보이지 않으니 어찌 그것을 현실이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문득 거실 저쪽에서 새하얀 장영(掌影)이 흡사 꽃처럼 무수히 나부끼 는 듯 하더니 펑펑펑, 하는 소리와 함께 진소유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백방생이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자 마음이 급해져서 공력을 일으 켜 백방행과 백방몽을 일거에 물리치고 달려온 것이었다. "이봐요, 많이 다쳤나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에 가벼운 홍조가 일어나 있는 것을 보고 웃으 며 몸을 일으켰다. 앞쪽의 천정위에서는 여전히 백귀현과 대인이 집을 부수면서 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서운 경풍(勁風)들과 환영들이 종횡으로 쾌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실로 그것은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백귀현의 무공과 백방행 등의 무공 은 전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백방생도 이전에는 백귀현의 무공이 이토록 고강하리라고는 거의 생각 을 못했었다.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았소." 진소유는 백방생의 의복이 마치 장검에 베인 듯이 여기저기가 무수 히 찢어져 있는 것을 보고 다소 의아해 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를 상대로 싸운 거죠? 그들이 병기를 가지고 덤볐나 요? 헌데 지금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죠?" 백방생은 서재안을 가리켰다. "그들은 모두 저 안에 있을 거요. " 진소유는 다소 어리둥절해 졌다. "그럼 그들은 모두 당신에게 당한 것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소." (잘 모르다니... 자신이 싸워 놓고도 잘 모른다는 말인가?) 진소유는 내심 의아해 하여 한번 서재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다. 백방 생은 손을 저어 그녀를 만류했다. "잠깐, 지금 그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진소유는 고개를 돌려 백방생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저 안에 혹시 귀신이라도 숨어 있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실은 귀신보다도 더 무서운 자가 숨어 있소이다.) 그런데 백방생은 마악 대답을 하려다가 문득 흠칫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이어 중얼거렸다. (아니, 혹시 그 자가 바로 항간에 떠도는 소문인 그 흡혈귀라는 작자가 아닐까?) 마침 이 장원내에서 백방각이 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추측은 전혀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었다. 백방생은 그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절로 멍청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진소유가 그것을 보고 웃으며 다가와 다시 물었다. "이봐요,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죠?" 백방생은 생각에서 깨어나서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저 안에 혹시 정말로 귀신이 숨어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소." 진소유는 그 말에 가볍게 안색을 변화시켰다. 대개 여자들은 귀신을 무서워 하는데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내 어이없다 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세상에 귀신이 어디에 있어요? 게다가 지금은 대낮인데..." 그러나 그녀는 왠지 꺼림칙한지 다시 서재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백귀현과 대인의 격돌은 이제 거의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 같았다. 허공에 온갖 장영(掌影)들과 수영(手影)들이 가득하고 그로 인 해 막대한 장력이 휘몰아쳐서 지붕이 한순간에 날려가 버릴 것만 같았 다. 그러다가 이윽고 문득 정말로 쾅쾅쾅, 하는 굉음이 작렬하더니 천정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이 두어차례 들썩거리고는 이내 조용해 졌다. 백방생과 진소유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니, 어느새 그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추고 지면에 내려서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얼핏 보니 두 사람의 얼굴은 모두 지친 구석이 없었고 누가 패한 것 같지도 않았다. 백귀현이 차갑게 냉소하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달마오수가 대단하다고들 하더니, 정말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대인이 합장을 하며 마주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과찬의 말씀이시오." 백귀현은 고개를 돌려 주위의 광경을 한차례 바라보더니 이윽고 백방 생을 향해 말했다. "내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만, 그러나 다음에 또 오겠다. 네놈이 과연 끝까지 버틸 수 있을 지 두고 보겠다!" 백방생은 차분한 표정으로 포권하며 대꾸했다. "배웅은 하지 않겠소." 백귀현은 이어 서재안으로 들어가서 백철우와 백철산을 안아들고 나와 서는, 백방행 등에게 관과 백방도를 들고 따르게 하고는 모두가 함께 밖 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마치 태풍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가 몰려가는 것과 흡사했다. 한바탕의 격전이 휩쓸고 지나간 백방생의 거처는 마치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하인들의 대부분이 백귀현 등을 따라가 버렸기 때문 에 실내를 치워줄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대인은 먼저 백방생에게 다가와 그의 맥문을 잡고 상세를 살폈는데, 이어 가볍게 미소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시주의 공력이 매우 훌륭하구려. 잠시 내상을 입었으나 이내 스스로 치유가 된 것 같구료." 백방생은 모두 다시 의자에 앉도록 한 다음에 조금전의 그 흑의노인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는 대인에게 자신의 무공을 속일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거의 사실대로 설명해 주었다. 대인과 진소유는 그 얘기를 듣자 둘 다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특히 진소유는 안색마저 변하여 말했다. "그런 자가 있었다면 즉시 수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대인은 말했다. "아마 지금쯤 멀리 떠나 버리고 없을 것이오. 하지만 일단 잠시 가서 수색을 해 보도록 하겠소." 대인은 이어 신법을 펼쳐 그 서재에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다시 나왔는 데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역시 보이지 않소. 단지 방안에 펼쳐진 무공수법으로 볼 때, 무공이 대단한 자라는 생각이 드는 구려." 백방생은 그 말을 듣고 문득 내심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이 장원내에 그와 같은 무학고수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게 되었을까?" 과거 이 장원에서는 진소유와 같은 절정고수가 찾아오는 일도 매우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백방생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윽고 대인이 자리 에 앉자 말했다. "그 백귀현과 싸운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스님께서 이기셨습니 까?" 대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은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여 싸움을 중단한 것이지 아직 승부가 난 것은 아닙니다. 그 분 백시주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소승은 간혹 상황이 어려워질 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진짜 승부를 가리려면 최 소한 하루밤낮은 싸워야할 것입니다." 백방생은 대인의 말에서 그가 겸손해 하는 것으로, 실은 그가 약간의 승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백방생은 기왕 무공얘기가 나온 김에 자신의 무공내력도 간단하게 들려주었다. 대인은 이미 약간 진소유에게서 그 얘기를 들은 터였다. 하지만 역시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백방생은 이어 그 흑의노인의 무공과 추측되는 정체에 대해서 의논했 는데 대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천하에 음한의 무공을 사용하는 문파는 제법 많습니다. 그것으로 그 노인이 흉수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일전에 소승은 그 일월신교에도 그러한 음한장력 등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 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공의 특성상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진소유가 말했다. "그들의 흡성대법이 그럼 음한의 공력인가요?" 대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 문파의 이름에 일월(日月)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들 의 공력에도 음양의 기운이 함께 있습니다. 그들에게 또 하나의 유명한 무공인 건곤대나이(乾坤大移)라는 것이 있는데, 실로 그 명칭만 봐도 능 히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지요. 다만, 그들의 공력은 특성상 타인의 것 을 흡수하여 매우 불순한 상태입니다. 그 불순한 기운을 억제하기 위해서 그들은 양강의 무공보다는 음유(陰柔)의 무공을 많이 쓰게 된다는 것이 죠." 백방생은 다시 물었다. "아까 스님께서는 그 백방도의 행동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계시는 것 같던데, 그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습니까?" 대인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소승은 갑자기 그들이 시신을 가 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혹시 그 중의 일부가 흉수와 연관되어 있지 않을 까 하고 생각한 것이죠. 게다가 마침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을 주시하 고 있는데 그 시주가 소매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 같기에 한번 나 서 본 것일 뿐입니다." 백방생은 대인이 좀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은근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백방생으로서도 굳이 일부러 캐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모든 의문은 앞으로 차차 밝혀질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 새로 이곳에 배정되었는지 일단의 하인들이 몰려들어 와서 청소를 하기 시작했으므 로 그들은 일단 대화를 중지했다. 어느새 창밖으로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밤이 훌쩍 지나갔다. 백방생은 그 날의 그런 사건이 있 은 이후에 혹시 누군가가 자신을 또 습격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걱정했 었다. 대인과 진소유 역시 잠시도 쉬지 않고 그의 신변을 지키는 모양이었 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그 이후의 사흘 밤은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갔 다. 다시 오겠다고 하던 백귀현의 식구들도 그 사이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 무시무시하던 흑의노인도 다시 그를 습격하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다. 백방생은 처음 하룻동안은 계속 마음속으로 긴장을 하며 지냈으나 그 이후로도 아무런 일이 없자 이내 그 긴장감이 다소 느슨해 지기 시작 했다. 그는 대신 무공연마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는데, 내공을 성취했기 때문 에 더위를 타지 않아서 인지 그렇게 살아가는 요즈음은 제법 살 맛이 나 는 것 같았다. 하인들도 이제는 그에게 감히 무례하게 대하지 못하고 아주 공손해 졌다. 백방생은 그렇게 사흘 밤을 보내고 나서 아침이 되자, 어제와 마찬가 지로 간단히 무공을 연마한 다음에 대인과 진소유를 마주하고 아침식 사를 했다. 대인은 본래 불문의 승려였기 때문에 그다지 말이 많지 않았지만, 진 소유도 이제는 왠지 말수가 더욱 적어진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것이 혹 시 자신의 무공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고 있었다. 거의 말도 없이 무덤덤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다음에 백방생은 다시 자신의 침실로 달려들어 갔다. 사흘전의 그러한 사건 이후 그는 서재의 사용을 일부러 자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침실쪽이 더 안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침실은 상당히 실내가 넓어서 침상이 놓여져 있는 공간을 빼고도 대략 사방 스무자의 공간은 남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거기에 놓여져 있던 탁자나 의자 등을 치우고서 그 자리에서 무공연마를 해 왔었다. 현재 그는 자부문의 팔대절학 가운데 검법인 자부검해(紫府劍匯까지 대강의 연마를 마치고서 이제 과천풍(過天風)이라는 신법 하나만을 남겨 두고 있었는데, 그 과천풍이라는 신법은 사실 이곳에서 연마하기가 다 소 곤란했다. 그 신법을 펼쳐보자면 아주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 었다. 백방생은 어제까지 연마한 자부검해까지의 무공들을 한차례 두루 복습 해 보다가 이어 나무막대기 같은 것을 내려놓고 답답한 지 다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의 공력으로는 자부문의 팔대절학들을 더 이상 연마해볼 수 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신법인 과천풍 뿐인데,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그것을 여기에서 어떻게 연마하겠는가? 백방생은 침상위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다가 문득 속으로 중얼 거렸다. (아니야, 내공을 거의 쓰지 말고 한번 연습해 볼까?) 10 장 의문의 연속 이런 비좁은 실내에서 그와 같은 초인적(超人的)인 신법을 연마한다는 것은 사실 다소 무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이제 마음놓고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생각에 그 만 답답한 기분이 들어서, 다소 무리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한 번 그것 을 시험삼아 연마해 보기로 했다. 이미 무공연마에 제법 많은 시간을 들 여 왔었기 때문에 그의 내공운용의 능력은 사흘전보다 훨씬 능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무릇 이 신법이라고 하는 것은 보법과 그 원리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원리는 비슷하되 다만 그 가운데에서 적용되는 내용이 서 로 다를 뿐인 것이다. 백방생은 이미 일류연이라는 보법을 능숙하게 연마했기 때문에 따라서 이 과천풍이라는 신법에 대해서도 그다지 어려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는 움직인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생소한 기분이 들지만 그러 나 위급한 순간에는 보법으로 대처하면 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우선 마음속으로 이미 알고 있는 신법의 구결들을 한동안 더욱 익숙해 지도록 암송해본 다음에, 이윽고 차분한 마음으로 앞으로 한 발을 내딛어 보았다. 그러자 과연 거의 운기하지 않았는데도 신기하게도 그의 몸이 앞으로 부드럽게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의 몸은 마치 한순간 구름위에서 미끄러 지듯이 가볍게 일 장 이상이나 나아갔다. 백방생은 그렇게 다시 새로운 무학의 이치를 체험하게 되자 절로 마음 이 들떠서 혼자 꿈속에 있는 듯이 기분이 몽롱해 지게 되었다. 그는 실 내의 거의 중앙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대로 두다가는 자연히 몸이 벽 에 부딪치게 될 것 같았다. 따라서 그는 순간 정지하기 위한 구결을 생각했는데 과연 아니나 다 를까, 역시 이내 그의 신형은 벽면의 바로 앞에서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정지하는 것이었다. 자세가 조금도 불안하거나 거칠지도 않았다. 백방생이 사흘 전에 흑의노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펼쳤었던 것은 그저 보법의 변형이었지, 지금의 이 과천풍처럼 진짜 신법은 아니었다. 백방생은 본래 너무나도 무학을 배우지 못해서 심하게 안달하던 사 람이었기 때문에, 요사이 이러한 무학들을 하나씩 배워가는 백방생의 심정은 매우 기쁜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는 조금전에 기분이 잠시 우울해져 있었는데, 이제 드디어 그 신법 을 한 번 성공적으로 펼치게 되자 그만 마음이 절로 시원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더욱이 그는 이번에 정지하는 과정에서 전혀 보법의 구결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신법의 구결만을 사용했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 의 미는 컸다. 백방생은 그렇게 한 번의 시전에 벌써 다소의 자신감을 갖게 되자, 잠시 좀 더 생각을 해 보다가 이내 다시 서서히 계속해서 신법을 펼쳐 보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느린 속도로 방안을 좌측, 혹은 우측으로 움직였고, 이 내 점차로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과거에 백방생은 괴이할 정 도로 무학의 연성이 되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더욱 괴이할 정 도로 무학의 연성이 잘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매우 신기하게 여겨졌다. 백방생은 이내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점차 신법의 구결들을 빠르게 수련 해 가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는 비단 방바닥 뿐만 아니라 벽면과 천정으로까지 신법을 펼쳐서 마음대로 걸어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리하여 불과 반시진도 지나지 않아서 그는 그 신법의 모든 구결들에 아주 익숙해 지게 되었다. 이제는 단지 아직 공력을 많이 사용하여 신법을 빠르게 연마해 보지 못한 것 정도가 문제가 될 뿐이었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며 사람이 안으로 들어선 것은 바로 그 무렵 의 일이었다. 백방생은 마침 천정위에다 발바닥을 붙이고 거꾸로 서서 걸어다니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는 너무나도 신법의 연마에 열중하느라고 미처 방문 앞에 누가 다가오는 기척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바로 진소유였다. 백방생은 자신이 무공을 연마 하는 광경을 그녀에게 들키게 되자 공연히 어색한 기분이 드는 듯 해 서,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내 그녀의 앞에 가볍게 떨어져 내려갔다. "아 무슨 일이시오, 진낭자?" 진소유는 그가 천정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신법으로 가볍게 지면으로 내려서는 것을 특이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말했다. "당신의 무공은 갈수록 놀라워 지는 듯 하군요." 그것은 실로 그러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백방생은 진소유의 그 상승경공에 대해 심히 부러워하지 않았던가. 백방생은 공연히 안색이 붉 어지는 듯 하여 포권하며 말을 받았다. "과찬의 말씀이시오." 진소유는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는 듯 하다가 다시 말했다. "손님들이 왔어요." 백방생은 다소 의아해 졌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를 찾아올 손님들 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이오?" 진소유는 그저 간단하게 대답했다. "쉽게 알만한 사람들이예요." 백방생이 진소유를 따라 거실로 나가 보니 과연 그곳에 이미 두 명 의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백철우와 백철산이었다. 백방생은 느닷없이 그렇게 다시 나타난 그들을 대하게 되자 그만 크 게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사흘전에 심하게 다친 듯 했었는데 이제는 상처를 모두 치료했다는 말인가? 백방생이 다소 어리둥절해져 있는 것을 보고, 백철우가 차를 마시고 있다가 백철산과 함께 일어서며 인삿말을 건네왔다. "막내삼촌, 그동안 안녕히 잘 계셨나요?" 백방생은 눈앞의 백철우 등이 능글맞게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너희들의 삼촌이 아니니 나에게 그런 인사를 차릴 필요는 없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왔느냐?" 백철우는 능글맞게 웃던 얼굴을 이내 음침하게 바꾸더니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본론부터 우선 말하기로 하죠. 헤헤, 당신은 지금 감 히 우리를 따라 나설 용기가 있나요?" 백방생은 그 말을 듣고 내심 가볍게 쓴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눈앞의 이 두 명의 영악스런 소년들은 필시 또 무슨 흉계(凶計)를 성사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 같았다. 백방생은 두려운 마음은 없었지만 그러나 내심 경각하지 않을 수가 없 었다. 백귀현이 결코 이 두 명의 소년들만을 보냈을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다소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만일 지금 너희들을 따라 나선다면 그럼 용기가 있는 것이 된 다는 말이냐?" 백철산에 비해 백철우가 비교적 말재간이 뛰어났다. 그래서인지 백철 산은 묵묵하고 계속 백철우만 입을 열고 있었다. 백철우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물론이죠. 우리는 이미 당신이 용기없는 졸장부가 아니라는 것 을 알고 있어요." 백방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사실 형편없는 졸장부에 불과하지. 그것은 이미 너희들 도 알고 있는 사항이 아니냐?" 백철우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우리를 따라 가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다." 백철우는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지금 당신을 만나고자 하시는 분은 바로 우리 할아버님이세요. 당신은 그런데도 무조건 이렇게 계속 여기에서 버티고 있을 작정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가 이번엔 또 무슨 이유로 나를 만나고자 하는 것이란 말이냐?" 백철우는 문득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말했다. "물론 당신은 값이 비싸기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쉽게 나서려고 하지 않겠죠. 하지만 오직 이 한가지의 일에 만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 한가지의 일이란 뭐냐?" 백철우는 잠시 백방생의 얼굴을 빤히 주시하더니 말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그 숨겨진 유산이 발견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죠." 백방생은 일순 어이없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제서야 눈앞의 이 두 명의 소년들이 일종의 지연작전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방생은 가볍게 주위를 둘러 보며 말했다. "내 유산이라구? 내게 따로 은밀하게 전해지는 유산이라도 있었단 말이냐?" 백철우는 백방생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다가 말했다. "당신에게 그러한 것이 정말로 없었다면 그건 이상한 노릇이죠. 어쨌든 가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냥 돌아가 버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백방생은 백철우와 백철산이 정말로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 하는 것을 보고 다소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무려 사흘만에 마음먹고 다시 찾아온 것이라면 필시 어떤 흉 계에 의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그저 싱겁게 몇마디의 말을 던지고 그냥 돌아간다면 그건 다소 이상하지 않 은가. 과연 아니나 다를까, 백철우는 금방이라도 돌아가 버릴 듯 하더니 이내 서너걸음도 채 걷지 않아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리며 이 렇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참,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군요. 물어 봐도 되나요?" 백방생은 내심 어느 정도 그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이내 대꾸 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냐?" 백철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실내를 두리번거리는 듯 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저번에 보니까, 여기에 한 분의 스님께서 와 계시더군요. 헌데 지금 그 분은 어디에 계시죠?" 백방생은 말했다. "지금 그 분은 방안에 계실 것이다. 헌데 너는 왜 그러느냐?" 기실대인은요사이보이지않는가운데백방생의호위를엄밀하게 수행해 오 고 있었다. 백방생이 그가 방안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사실은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헌데 백철우는 어째서 갑자기 그 대인의 거취를 들먹이는 것 일까. 백철우는 다시 말했다. "나는 지금 그에게 몇마디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당신은 지금 그를 이리로 잠깐 불러주지 않겠나요?" 백방생은 백철우의 눈빛이 매우 교활하게 이리저리 돌아가는 것을 보고, 혹시 이미 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졌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실로 심상치 않은 일인 것이었다. 백방생은 내 심 비로소 그들의 마각을 어느 정도 보는 듯 하여 크게 경각하며 말했 다. "그는 지금 혹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나라고 해도 함부로 부를수가 없다. 내가 대신 진낭자에게 부탁을 해볼테니 너는 잠시 여기에서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어 백방생은 정말로 진소유를 돌아보며 대인에게 다녀와 달라고 부탁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백철우가 그 전에 다시 말하는 것이 었다. "헤헤헤, 그러나 사실은 나는 그에게 별로 볼 일이 없소." 백방생은 의아해 하며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철우는 두눈에 서 음침한 웃음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조금전에 무엇 때문에 그를 불러 달라고 했느냐?" 백철우는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바로 당신에게 한 가지의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요." 백방생은 이제 백철우 등의 눈빛에 흉악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내심 가슴이 크게 뜨끔해졌다. 거기에서 일종의 사악한 자신감을 읽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자신들이 그간에 너무 경계에 소홀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갑자 기 백방생의 뇌리를 스쳐갔다. 백방생은 말했다. "네가 나에게 뭘 가르쳐 주겠다는 말이냐?" 백철우는 말했다. "그것은 바로, 그 중대가리는 이제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는 사실이오." 백철우는 이제는 예의 그 치기어린 경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 래서인지 백방생은 그가 갑자기 좀 더 커져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백방생은 내심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즉시 진소유에게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말했다. (지금 곧 스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찾아봐 주지 않겠소?) 확실히 그것은 백방생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전해 본 전음입밀의 수 법이었다. 진소유는 그 말을 듣자 다소 흠칫해 하는 듯 하더니 이어 즉시 역시 전음으로 말해왔다. (나는 이미 아까부터 그를 찾아내어 전음으로 얘기를 교환하고 있던 중이예요. 듣자니 그는 지금 방안에서 적을 만나게 되었다는 군요.) 백방생은 내심 크게 어리둥절해 졌다. (적이라구요? 대체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오?) 백방생은 그렇게 전음을 날리면서 겉으로는 다시 백철우에게 말했다.그 의 전음 수법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이어서 백철우도 간파하 기가 어려웠다. "실로 너의 말은 애매모호하구나." 백철우는 기이한 웃음을 머금었다. "뭐가 그리 애매하다는 말이오?" 그와 동시에 진소유의 전음도 백방생의 귓속으로 날아들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말하지 않았어요. 다만 잠시 이렇게 기다리면 곧 나오겠다고 했어요.) 백방생은 두 사람에게 동시에 말을 해야 했기 때문에 즉시 마음을 둘로 나누어 먼저 복화술(腹話術)의 수법으로 입술을 전혀 움직이지 않 고 진소유에게 전음을 날린 다음에, 이어 백철우에게 입을 열어 말했다. (혹시 우리가 그곳으로 들어가 봐야 하는 것이 아니오?) "네 말은 그러니까, 그와 나 중에서 누구에게 먼저 이상이 생긴다는 말 이냐? 진소유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다가 대꾸했다. (아니예요. 그는 우리에게 여기에 계속 가만히 있기만 하라고 그랬어 요.) 백철우가 말했다. "그야...흐흐흐, 아무래도 당신에게 먼저 이상이 생기게 될 것이오." 백방생은 진소유의 전음을 듣고 내심 중얼거렸다. (이것 참, 대체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겠군.) 백방생은 이어 백철산에게 말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백철산은 이제까지 묵묵히 음침하게 웃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물론이오. 당신은 이제 곧 황천길로 떠나게 될 것이오." 백방생은 그 두 사람이 그토록 자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시 거기에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체 지금 저 방안에서 대인과 겨 루고 있다는 사람은 누구일까? 혹시 저번에 서재에 나타났던 예의 그 흑의노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만일 지금 이 순간 백귀현이 여기에 다시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백방생은 실로 상황이 심각하고도 다급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안색을 가볍게 굳혔다. 백방생은 말했다. "내가 지금 너희들을 제압하지 못하리라고 보느냐?" 백철우는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당신은 그럴 능력이 있을 것이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이미 늦었소." 백방생은 다소 어리둥절해 졌다. "시간이 늦었다고?" 바로 그 때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한 사람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서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시간이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지?" 백방생은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것은 매우 귀에 익은 음 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 보니 거기에 예의 그 흉악한 눈매의 흑의노인이 나타나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내심 놀라서 생각했다. (나는 그래도 이들이 한 편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러나 이것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흑의노인은 이번에는 저번과는 달리 행동에 매우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것은 오히려 백방생에게 일종의 위기감을 가중시켰다. 흑의노인은 천 천히 걸어서 백방생의 앞에 이르더니 이어 말했다. "네놈은 역시 이번에도 달아날 수 있으리라고 보느냐?" 백방생은 다급히 전신의 공력을 끌어 올린 상태에서 말했다. "당신은 이미 오랫동안 문밖에 서 있었소?" 흑의노인은 서두르지 않고 순순히 대꾸해 주었다. "나는 제법 기다리며 너희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지." 이 노인의 음성은 몹시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심한 외지의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그것 때문에 백방생은 조금전에 목소리만 듣고도 이내 누 가 나타났는 지를 알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황급히 속으로 대책을 세우려고 애쓰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는 말이오?" 문득 옆에서 진소유가 다소 놀란 듯한 음성으로 전음을 날려왔다. (저 사람이 바로 당신이 전에 말하던 그 서재에서 나타났었다는 그 사람인가요?) 백방생은 즉시 전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렇소.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흑의노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틀렸다. 나는 지금 너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 그 승리라는 두 글자 는 사용할 수가 없지. 마땅히 성공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백방생은 흑의노인이 너무나도 느긋한 것 같자 내심 더욱 의아해 하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보아하니 다른 협조자가 있는 모양인데, 지금 저 방안에서 싸우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해서 가르쳐 줄 수가 있겠소?" 흑의노인은 다소 의외라는 듯이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 다. "너의 눈치가 제법이로구나.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차라리 저 아 이들에게 물어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흑의노인은 손짓으로 백철우와 백철산을 가리켰다. 백방생은 순간 내심 으로 대단히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시선만 돌린 채로 백철우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저 방안에서 나의 호위와 싸우고 있는 사람이 바로 너 희 할아버지였다는 말이냐?" 백철우는 이미 노골적으로 흉악한 성품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렇다, 이 후레자식 같은 놈아! 우리는 본래 네놈을 그 중대가리와 떨어지게 하기 위해 왔던 것인데 아직도 그것을 몰랐단 말이냐, 이 병신 같은 자식아!" 백철우 등은 이미 옆에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기 때문인 지 자신들이 평소에 백방생에게 가지고 있었던 악감정을 거의 그대로 드러내고 있 었다. 백방생은 그 말을 듣자 내심 경악하여 말이 다 나오지 않았다. 하기는 흑의노인이 백철우 등과 함께 어울리고 있으니, 생각해 보면 백귀현이 그 렇게 협조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최소한 이들이 한패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양쪽의 힘을 역이 용하려고 했었는데, 아 이렇게 되면 일이 정말 곤란하게 되어 버렸구 나?) 백방생은 내심 빠르게 생각을 굴리며 급히 진소유에게 다시 전음을 날렸다. (이 노인과 백귀현이 서로 한패라고 하니, 우리는 이제 전력을 다해 피 해야 하겠소.) 진소유는 일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대신 흑의노인이 다시 앞으로 다가들며 입을 열었는데, 어느새 그의 두 눈에는 예의 그 흉악한 살광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자, 너도 이제 어느 정도 의문을 풀었을 테니 그만 지옥으로 가는 게 어떠냐?" 흑의노인은 처음에는 느릿하게 다가들었으나 나중에는 그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그가 마지막 말을 끝냈을 때는 이미 거의 허깨비처럼 변해서 백방생의 몸을 향해 덮쳐들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믿기 어려운 속도였다. 옆에 서 있던 진소유가 그것을 보 고 놀랐는지 그만 아?하는 외침을 발했다. 백방생은 이미 무공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흑의노인이 미리 예 고를 한 뒤에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비록 위태롭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피할 여유가 있었다. 흑의노인의 허깨비와도 같은 신형이 백방생의 전신을 뒤덮어 버리는 듯한 순간, 백방생은 흡사 꺼지듯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어느새 뒤로 일장 정도 물러나 있었다. 흑의노인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쾌속하게 백방생의 신형을 향해 따라 붙었다. 그의 속도는 얼핏 보기에도 백방생보다도 훨씬 빨라 보였다. 백방생의 신형이 기묘하게 방향을 틀어 백철산의 전면에 이르렀을 때 이미 흑의노인은 그의 지척에 이르러 앙상하게 마른 손을 내뻗고 있었 다. 백방생의 등줄기는 금방이라도 그 무서운 손길에 잡힐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슬아슬하게도 백방생의 신형은 절묘하게 회전을 일으키며 백철산의 등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백방생의 무공은 지난 사흘간 내공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으나 무학의 운용에 있어서는 더욱 익숙해 졌다고 할 수가 있었다. 비록 속도에 있어 서는 당할 수가 없다고 해도 임기응변의 변화에 있어서는 능히 흑의노 인을 당혹하게 만들기에 족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백철산은 느닷없이 백방생이 자신의 등 뒤로 돌아가자 절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는 움직일 수도 없었고 또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지금백방생과흑의노인이움직이는속도는보통사람들의눈으로는 도저히 따 라잡을 수가 없이 빨랐기 때문에, 그로서는 일시 도무지 어떻게 대처해 야 할 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흑의노인 역시 백방생이 백철산을 방패로 잡고 피하자 다소 난처한 상 황이 되고 말았다. 그는 백철산을 다치게 할 수가 없어서 자연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아미타불...하는 강한 불호소 리와 함께 한쪽 방의 벽면이 그대로 허물어져 내리더니, 갑자기 그 안 에서 두 사람이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의 용모는 각기 낯익었다. 바로 다름아닌 백귀현과 대인이었던 것 이었다. 그들은 이미 방안에서 한바탕의 악전고투를 치뤘는 지 각기 의 복이 여기저기가 심하게 찢겨져 있었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자 마자 즉시 백방생 등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려 고 했지만, 이내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어울려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 다. 즉 대인은 가려고 하고 백귀현은 막고 있는 것이었다. 느닷없는 그 두 사람의 출현에 실내의 사람들은 모두 다 놀라는 표정들 이었다. 특히 간신히 백철산의 몸을 방패로 삼아 몸을 피하고 있던 백 방생은 내심 기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라도 든든한 수호자인 대인을 보게 되니 반가운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야 하겠다고 생각했 다. 백방생은 문득 저번의 상황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흑의노인은 자리를 피하기는 커녕 그 두사람이 나 타나자 더욱 맹렬하게 백방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순간 흑의노인의 손그림자가 백철산을 중심으로 한 일장방원을 완전 히 뒤덮었다. 그 손그림자는 마치 환영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지만 그 러나 기실 한번 맞으면 횡액을 면치 못하게 하는 가공할 살수들인 것이 었다. 거실의 양쪽에서 그렇게 가공할 무학들이 발출 되기 시작하자 이 넓 은 거실의 천정은 한꺼번에 거대한 압력으로 터져나가 버릴 것만 같았 다. 백철산은 자신의 주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 게 돌아가며 무시무시한 살수들이 자신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며 연신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내심 악랄한 심정이 치밀어서 부르짖었다. "이 염병을 할 후레자식놈아! 어째서 빨리 박살이 나서 뒈지지 않고 이 렇게 미친 개새끼처럼 나에게 달라붙어 지랄을 하느냐? 어서 빨리 골 수가 터져서 십팔층 지옥이나 떨어져 버려라?" 백방생은 어느새 대인이 삼장 이내까지 다가왔으며 또한 백철산의 안색이 썩은 돼지의 간처럼 푸르죽죽하게 변해있는 것을 보고 문득 생 각했다. (혹시 이 녀석을 발버둥을 치게 하면 좀 더 낫지 않을까?) 백방생은 다급히 흑의노인의 살수를 피하는 와중에도 백철산의 겨드랑 이의 혈도를 짚어서 그로 하여금 우스워서 견딜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미처 지풍을 날리기도 전의 일이었다. 갑자기 그의 등줄 기 부분이 화살에 맞은 듯이 뜨끔거리더니, 흡사 만년빙굴속에 던져진 것처럼 극심한 오한이 일며 전신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마비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갑작스럽고도 이상한 일이었다. 백방생은 지금 적들을 마주 보며 상대하고 있는데 그것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라는 말인가? 설마 하니 흑의노인에게 감춰두고 있었던 비장의 수단이라도 있었다는 말인 가? 퍽! 하는 둔탁한 음향과 함께 백방생은 흑의노인의 장력에 맞아서 뒤로 훌훌 날려갔다. 백방생은 내심 의혹속에서도 정신이 급격히 아득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백방생은 혹시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고통은 없었지만 그러나 이대로 덧없이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다소 아쉽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그 때의 일이었다. 백방생의 신형이 허공에 올라가 있어 서 보였던 것이었으리라. 느닷없이 백방생의 시야에 한 명의 흑의노인이 창밖으로 빠르게 사라져 가는 광경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물론 조금전까지 백방생을 공격했던 그 흑의노인의 모습은 아 닐 것이었다. 백방생은 비로소 자신이 그 또 다른 흑의노인에게 암산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방생은 너무나도 놀라 꺼져가는 의식을 겨우 일깨우며 생각했다. (흑의노인은 본래 자신의 동료가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그것을 감추려 고 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 생각을 끝으로, 백방생은 이내 의식이 아득한 심연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윽고 백방생이 다시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인 것 같았다. 온 몸은 마치 천근이나 되는 듯이 무겁고 답답했으며, 의식은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듯이 희미하고 몽롱했다. 게다가 점차로 가슴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강렬하게 느껴지기 시 작했는데, 그것은 오히려 그의 의식을 보다 빨리 회복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어디에선가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귀에 익지 않은 음성들이었으나 그러나 또한 그 어조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 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그러나 이내 점차로 분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곧 우리의 천하대업(天下大業)이 성공적으로...곧 교환을 하게 되 어...당주(堂主)님께서...손을 대면 안된다고 하셨으니, 우리는...비급과 교환 을 하기 전까지는 죽이지 말고 잘 보호해 줘야 하네." "정말로 괴상한 녀석이야. 다른사람들 같으면 일단 그 당주님의 음풍도 (陰風刀)의 한수를 격중당하면 거의 살아나기 힘들게 되는데, 저 녀석은 이제 불과 사흘도 안됐는데 벌써 내상이 호전되고 있지 않은가?" "혹시 녀석이 벌써 깨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아. 당주님께서도 최소한 깨어나려면 닷새는 걸린다고 했으 니까. 헌데 흠...당주님께서는 언제 이곳에 도착하신다고 하던가?" "아마 앞으로 한시진 정도 지나면 이곳에 도착하시게 될 걸세. 우리는 그 사이에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하네. 저녀석과 비급을 교환하고 난 뒤에 우리는 즉시 본교(本敎)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교주께서도 이번에 총교(總敎)의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하셨네." 백방생은 몽롱한 의식속에서 그러한 무슨 대업이니 총교니 하는 말들을 듣고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내가 지금 이곳에 붙잡혀 와 있는 중이지? 헌데 벌써 사흘이나 지났단 말인가...?" 갑자기 의식을 잃기 직전의 일들을 상기해 보려고 하니 머리가 깨지는 듯이 아파왔다. 백방생이 내심 신음을 발하고 있는데, 문득 예의 그 말소리들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의 목적은 분명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지. 하지만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애써 잡아온 녀 석을 그렇게 쉽게 돌려보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로서는...." "자네는 바로 그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렇네. 마침 당주님께서 이곳에 도착하시기까지 한시진 정도가 남았다 고 했으니 충분히 그때까지...녀석은 지금 혼절해 있으니 아무것도 모를 것이고, 게다가 결국 죽이지만 않으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럴까...? 하기는 나도 실은 저런 녀석을 그냥 고스란히 돌려보낸다 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네. 마침 지금 여기는 우리 두사람밖에 없으니, 좋아! 우리 공평하게 각기 반갑자 정도로 나누도록 하자구." 백방생도 처음에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지 못했다. 단지 그저 그들이 갑자기 자신과 관련된 모종의 일을 벌이려는 모양이라고만 생 각을 했었다. 너무나도 고통이 심했던 탓일까? 잠시 다시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었 다. 백방생은 재차의식을 회복하고는 다소 놀랐다.마치가슴을일일이 칼로 도려내는 듯한 극도의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느닷없이 한가지 아주 이상야릇한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흡사 양쪽 손바닥으로 누군가에게 맹렬히 피를 빨리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피를 빨리게 되다니? 그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얘기이겠는가? 백방생은 이내 그것이 환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친 고통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 일종의 환각이 나타나게 될 수도 있을 테 니까. 그러나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의식이 점차 뚜렷해져 오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그 이상야릇한 감각도 역시 분명해 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실이란 말인가? 백방생은 정신을 모아서 눈을 떠 보았다. 간신히 희미하게 떠진 그의 눈속으로 하나의 괴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그것은 두 사람의 노인이 각기 그의 손을 하나씩 잡고서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자 그만 놀라서 모골이 송연해 지는 것 같았다. 문 득 한가지의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일월신교에는 흡성대법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그 흑의노인은 십중팔구 그곳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들이 펼치고 있는 것이 바 로 그 흡성대법이 아니겠는가?) 백방생은 이미 흡성대법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들었었다. 그 흑의노인이 반드시 일월신교의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조금전에 들은 얘기들을 상기해 보면 그것은 가장 가능성이 큰 일이 아니겠는가? 그때 문득 좌측의 노인이 입을 열어 백방생을 놀라게 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어째서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일까? 자네는 그렇지 않은가?" 분명히 아까 듣던 그 목소리였다. 백방생은 내심 크게 경각심을 일으켜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우측의 노인이 이에 역시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실은 나도...나에게 문제가 있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자네도 그랬 군." 좌측의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본교의 흡성대법은 이미 수천년이나 전해져 내려오면서 갈고 닦여진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리가 없네.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 녀석에게 있는 것이겠지." 그 말은 실로 백방생에게는 벼락치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이미 그 러리라고 추측도 해 보았다. 그러나 백방생은 그러한 말을 듣고도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백방생은 너 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일시 멍하니 있다가 내심 자조하듯 웃으며 생각 했다. (정말로 흡성대법이었군. 정말로 흡성대법을 펼치는 거였어...나와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10 장 이상한 노인들 순간적으로 많은 감상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백방생은 다시 생각했다. (하기는 내가 이미 패배하여 이렇게 잡혀온 것만 해도 생사를 예측하기 가 어렵게 된 것이었다. 설령 내가 그렇게 고목처럼 말라서 죽어간다고 한들 그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우측의 노인이 다시 말을 받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여기에서 그만 중단해 버릴까?" 좌측의 노인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고 하니... 나는 설마하니 본교의 흡성대법이 통하 지 않는 녀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본래 운공을 하는 도중에는 말을 하지 못함은 물론이요,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두 사람은 비록 눈은 뜨지 않고 있지만 말은 자유 롭게 주고 받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들은 내공이 이미 깊은 경지에 들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백방생은 문득 사태가 이상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지레짐작하고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노인들의 그러한 말들을 다시 듣고 나서 자신의 몸속을 조사해 보니 실 로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우선 백방생은 자신의 의식이 상당히 명료해졌을 뿐만 아니라 가슴의 통증마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래 내상을 치료하는 데는 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만일 그가 진기를 빼앗겼다면 오히려 내상이 악화되었어야 했을 것이 었다. 그런데 지금은 체내에 중기(中氣)가 가득하여 점차로 내상을 급 속도로 호전시켜 가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게다가 기실 백방생은 전신대혈이 완전히 제압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 데 지금은 그 혈도들이 하나씩 풀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바 로 그의 체내에 진기가 강성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것일까? 백방생이 손바닥으로 진기를 움직여 보니, 뜻밖에도 안쪽으로 진기가 빠져나가는 반면 바깥쪽으로는 도로 진기가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까 가슴이 칼로 도려내는 듯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두 노인의 흡인 력이 그만큼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가는 것은 아주 적고 끈끈 한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분량이 아주 많은 반면에 구조가 허술해서 잘 느껴지지 않았다. 두 노인은 지금 자신들의 진기가 도로 나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 었다. 그것은 바로 나가는 것이 잘 감지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노인의 흡인력은 갈수록 강해졌다. 그러나 기실 역시 나가는 것은 적고 들어오는 기운만 더욱 더 많아질 뿐인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게 되자 이내 대강의 모든 이치를 알게 되었다. 본래 이 흡성대법은 자신보다 공력이 고강한 사람에게는 사용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자칫하면 진기가 역류(逆流)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 었다. 백방생은 물론 두 노인보다 공력이 고강하지 못했다. 두 노인도 물론 미리부터 그 점은 파악하고 일을 시작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기이하게 도 백방생의 내공수련의 경지는 그들보다 높았다. 따라서 두 노인은 그의 공력을 흡수하려고 하지만 도리어 지금 자신들 의 공력을 흡수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상 백방생의 경우처럼 그와 같은 공력으로 그와 같은 높은 수준의 내공경지를 터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그것은 실로 아주 특수한 경우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그 두 노 인도 미처 그런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백방생도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기는 했다. 그의 공력이 흡 수당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들의 진기가 도리어 그에게 부지불식간에 계속해서 흡수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백방생이 더욱 심오한 흡성대법을 연마한 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백방생은 결코 이제까지 흡성대법과 같은 무공은 연마한 적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결코 그러한 의문을 파고들고 있을 상황이 아니 었다. 백방생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자 일순 왠지 한줄기의 서광이 보 이는 듯 해서 내심 매우 기뻐했으며, 이내 가능한한 최대한으로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려고 했다. 만일 그들의 공력을 흡수하여 이곳으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그 얼마 나 좋은 일이겠는가. 백방생은 즉시 마음을 조용하게 가라앉히고 은밀하게 내공을 운용하 는 한편으로, 들어온 진기들을 모아서 자신의 몸에 제압된 혈도들을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매우 수월했다. 백방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상에 의해 막 혔던 혈맥들도 모두 타통시키고, 제압된 혈도들도 대부분 해결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물론 그의 내공이 그만큼 훌륭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일이 생겼다. 백방생은 이제 그저 한 두개의 혈도만 해결시키면 몸이 자유로와 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가벼운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두 노인은 그 바람에 즉시 손을 떼고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방 생도 내심 뜨끔하여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방안에 다시 한 명의 흑의 노인이 늘어나 있었다. 그 흑의노인은 힐끗 백방생을 바라보더니 두 노인에게 말했다. "상황이 달라졌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전하기 위해 급히 온 것일 세." 두 노인은 의아해하며 거의 동시에 물었다. "무슨 상황이 달라졌다는 말인가?" 흑의노인은 말했다. "배교(排敎)쪽에서 사람을 보내 저녀석을 넘겨달라고 했네. 당주님께 서는 사실 따로 비급을 넘겨 받으실 계책이 있으셨기 때문에 나더러 저 녀석을 그쪽으로 인도해 가라고 했네." 두 노인은 그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래 졌다. "배교라면 바로 태양마교(太陽魔敎)의 놈들이 아닌가?" 기실 백방생은 더욱 놀랐다. 지금 노인들이 말하고 있는 태양마교란 바로 일전에 들은 바 있는 세외팔세의 한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흑의노인의 말은 이어졌다. "그렇지. 일전에 그 백노야의 섯째손자란 녀석이 배교에 포섭당해서 우 리의 일에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준적이 있지. 앞으로는 모두가 한 패가 될 것이지만 말이야.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신세를 졌는 데, 이번에 그들이 부탁하니 한 번 그 부탁을 들어주자는 것이지. 하하 하, 대업을 위해서는 모두가 하나로 뭉쳐야 할 것이 아닌가?" 백노야의 셋째손자라면 바로 백방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들 의 얘기를 듣고도 일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좌측의 노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당주님께서는 이곳에 언제쯤 오신다고 그러던가?" 흑의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이곳에는 오시지 않을 것일세. 자네들은 즉시 나를 도와서 저녀 석을 옮기라고 지시하셨네." 말이 끝나자 마자 흑의노인은 느닷없이 우수를 부챗살처럼 펼치더니 지풍을 날려 백방생의 전신혈도를 제압했다. 백방생은 마침 계속해서 혈도를 풀고 있었는데 마지막 하나를 남겨 둔 상태에서 그 꼴을 당하자 절로 놀라고 어리둥절해 졌다. 백방생은 자신의 마각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우측의 노인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가?" 흑의노인은 다소 겸연쩍게 웃더니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닐세. 나는 당주님께서 워낙에 엄격하게 하라고 하시기에, 또 워낙에 이상한 녀석이라고 하기에 철저하게 하려는 것일세." 그 말을 듣고 가장 안도의 숨을 내쉰 사람은 바로 백방생이었다. 흑의 노인이 모른다면 최소한 다시 시도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측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이제까지 지키고 있었는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었겠는가?" 흑의노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럼 자네들은 여태 몸수색 한 번 해보지 않았다는 말인가?" 우측의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그의 몸에 털끝만큼이라도 손을 댔다면 성을 갈고 말겠네." 흑의노인은 즉시 백방생의 앞으로 다가들더니 품속에서 서류봉투 하나 를 꺼내 보며 말했다. "저녀석이 이미 백노야에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다고 하던데, 그 말 이 실로 사실이었군." 백방생도 아직 자신의 돈이 품속에 그대로 있었을 줄은 몰랐다. 실로 무림고수라고 해도 돈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두 노인은 흑의노인이 집어든 서류봉투에서 거의 백 장에 달하는 그 많 은 금표들을 보고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는 정확히 구십장의 백냥짜리 금표가 들어 있었다. 흑의노인이 탐욕의 눈빛을 빛내는 두 노인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모두 뜻밖의 횡재를 하게 되었으니 잠시 후면 부자가 될 걸 세. 하지만 지금은 바쁘니 일단 장소를 옮겨서 나누는 것이 좋겠군." 두 노인은 흑의노인이 서류봉투를 자신의 품속에 넣는 것을 보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백방생을 안아들었다. 백방생이 이제까지 누워있던 곳은 바로 깊은 산속에 있는 한 모옥의 작은 방이었다. 그 방은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는 지 매우 낡아 있었다. 한 명의 노인이 백방생의 몸을 안아들고 움직이자 나머지 두 노인도 즉시 그 뒤를 따라 모옥을 떠나기 시작했다. 때는 이른 아침나절이었 다. 백방생은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그런지 아침햇살이 눈을 찌르는 것 을 느꼈다. 그 세명의 노인들의 무공은 기실 하나같이 대단했다. 모두가 한 번 걸음을 내딛자 십여장씩 부드럽게 나아가고 있었다. 산세는 비록 험준 했으나 그들의 앞에는 그저 평지나 다름이 없었다. 계곡이든 절벽이든 가리지 않고 그들은 계속 그렇게 나아갔다. 그것은 진소유의 경공과는 또 다른 것이라고 백방생은 생각했다. 진소유도 저번 에 한번에 십여장씩 나아갔지만, 그러나 지금 이들의 발걸음은 달려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산보를 하듯 자연스럽고 힘을 하나도 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윽고 앞서서 길을 인도하던 흑의노인이 어느 은밀한 골짜기에 도달 하자 신형을 멈춰세우고 말했다. "자, 이곳이 조용한 것 같으니 우선 우리 여기에서 돈을 분배한 다음에 다시 떠나기로 하세." 한 노인이 물었다. "목적지는 여기에서 멀었는가?" 흑의노인은 품속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그 안의 금표를 다시 세어 보 면서 대꾸했다. "그다지 멀지 않네. 남쪽으로 한 백여리만 가면 되지. 이 무이산(武夷 山)은 정말 넓군, 그렇지 않은가?" 다른 노인이 말했다. "만일 저녀석이 우리가 돈을 가진 것을 불어버리면 어쩌지? 당주님께 서 심한 문책을 내리실 것이 아닌가?" 흑의노인은 그 노인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근다는 말이네. 자네는 보기보다 겁이 많군. 저녀석이 제아무리 말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부인을 하는 이상 누구도 저녀석의 말을 믿지는 않을 걸세. 아예 차라리 저녀석을 반쯤 죽 여놓던가?" 흑의노인은 이미 금표들을 세 묶음으로 나누었다. 그는 다시 한번 주 의하여 세 묶음의 금표들을 살피고는 그것들 중의 하나를 한 노인에게 내밀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흑의노인은 갑자기 손을 내밀다가 말고 입도 손도 그대로 굳 어졌다. 갑자기 그 노인의 뒤에서 다른 한 손이 튀어나와 기척도 빛깔 도 없는 무형(無形)의 지력을 발출했기 때문이었다. 그 지력은 대단히 빠르고 또한 변화막측하며 위력적이었다. 평소라도 피 하지 못했을 텐데, 흑의노인은 약간 한눈을 팔다가 그대로 꼼짝없이 당 하고 만 것이었다. 그의 시선에는 일순 경악과 불신 등의 표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물론 느닷없이 나타나 지풍을 발출한 그 손의 임자는 바로 다름아닌 백방생이었다. 그는 다음순간 뻣뻣하게 굳어버린 세 명의 노인들 사이를 빠져나와 이미 회수한 금표들을 다시 서류봉투에 넣어 품속에 보관하 고 있었다. 기실 흑의노인이 다시 백방생의 혈도를 제압하기는 했어도 그 위력 은 이전에 제압된 것보다 훨씬 미약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남은 하나의 혈도와 그 혈도들을 모 조리 풀어버리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바로 조금전에 흑의노 인 등이 금표에 잠시 한눈을 파는 것을 보고 날벼락처럼 움직이며 그들 세 사람의 혈도를 동시에 제압해 버렸던 것이었다. 백방생의 몸은 이제 거의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의 공력은 과거보다 거의 일갑자 정도나 불어나 있었다. 만일 정식으로 대적한다면 그 노인들을 쉽게 이기지 못할 것이지만, 그 러나 순간적인 암습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가능했다. 백방생은 금표들을 품속에 잘 갈무리한 다음에 그들 세 노인들의 혈도 를 다시 세심하게 점하여 그들이 빨리 깨어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 리고 그들 세 사람을 근처의 작은 동굴로 데려가서 그 안에 넣어 두었다. (이제 드디어 자유로구나!) 백방생은 그 일들을 마치고 나자 그야말로 마음이 기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백방생은 그러나 애써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서 즉시 장원을 향해 신형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까 듣기로 이곳은 무이산중이라고 했다. 동쪽으로 가면 복주성이 나 오게 될 것이었다. 백방생은 지난 사흘동안 장원이 어떻게 변했는 지 몹시 궁금했기 때 문에 발길을 재촉했다. 공력을 끌어 올리자 그는 무려 삼십여장씩 날아 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최고도로 경신술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백방생은 처음으 로 그렇게 과천풍의 경신술을 진짜로 전개하게 되자 그야말로 심신이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잘만 하면 오 육십장의 거리도 문제없이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헌데 그가 그렇게 신법을 펼치기 시작한 지 미처 일각도 채 되지 못 했을 때의 일이었다. 백방생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매우 눈에 익은 듯한 사람들이 마악 산등성이를 넘어서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잿빛 승포를 입은 두 사람의 중년승려였는데, 한 사람은 작고 둥글둥글 했으며 다른 한사람은 몹시 길고 비쩍 말라 있었다. 바로 달마오수 가운데의 두 사람이었다. 백방생은 그들의 모습이 워낙 에 특이한 점이 있어서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갑자기 이 곳에서 그들을 만나게 되자 그만 반가운 생각이 들어서 소리쳐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우선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그들의 신법이 몹시 빨랐으며, 대 인이라면 몰라도 그들과는 아직 안면이 없었기 때문에 소리쳐 부르기 가 다소 멋쩍었다. 백방생은 다소 주저하는 사이에 그들의 모습이 이내 산등성이 너머 로 사라져 버리자 그만 실망이 되어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나 때문에 비급을 가지고 온 모양이로군. 그것은 대체 무슨 비급인데 그럴까...? 어쨌든 나는 아직도 무능력하여 항상 남들을 피곤하 게 만드는 구나.) 백방생은 신법을 재촉하여 그들을 따라가려다가 이내 도리어 신법의 속도를 늦추고 오솔길을 따라 나아갔다. 그것은 갑자기 그의 마음이 산란해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내공이 아직 순수해지지 못했기 때문일까? 백방생은 아무래도 어디서 잠시 운기행공을 해서 그 노인들에게서 흡수한 공력들을 완전히 다스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오솔길이 끝나자 문득 약간 넓어진 길이 나왔다. 그 길의 한쪽에는 커 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느닷없이 웬 홍의노인(紅衣老人)이 그 위 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 홍의노인은 얼핏 보기에는 용모가 다소 이상스러웠는데, 비단 의복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과 얼굴까지 모조리 붉은 빛이어서 흡사 불타오르 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세상에는 정말 별 희안한 사람들도 다 있군.) 백방생이 속으로 웃으며 마악 그 앞을 지나치려는데 문득 그 홍의노 인이 불렀다. "얘야, 어디로 가느냐? 잠깐 이리로 와 보지 않겠느냐?" 백방생은 처음에는 그것이 다른 사람을 부르는 소리인 줄로만 생각 했었다. 그 음성에는 짙은 친근감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방 생은 이윽고 걸음을 멈추고 서서 되물었다. "지금 노인장께서는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홍의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아니면 여기에 또 너와 같은 어린아이가 있기라도 하다는 말이 냐? 그런데 이상하군. 정말로 이상한데...?" 홍의노인은 말을 끝내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 홍의노인은 그러면서 백방생의 전신을 핥듯이 계속 바라보았는데, 백방 생은 문득 마치 그에게 뱃속을 들여다 보이는 듯한 괴이한 느낌을 받았 다. 백방생은 갑자기 산중에서 별 희안한 일도 다 겪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다시 질문했다. "노인장께서는 소생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홍의노인은 잠시 백방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볼 일? 그거야 물론 있지. 그것은 네가 워낙에 이상한 녀석이기 때문 이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소생의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다는 말씀이십니까?" 홍의노인은 눈빛을 번쩍였다. 알고보니 그 홍의노인은 두 눈까지 붉은 빛이어서 흡사 거기에 두 개의 홍보석을 박아넣은 것 같았다. 백방생은 실로 태어나서 그런 사람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었다. "어디가 이상한 지 말해달라고? 좋다! 잠시 따라 오너라." 홍의노인은 말과 함께 우수를 가볍게 저었다. 그것은 마치 백방생을 멀 리서 들어올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방생은 즉시 자신은 빨리 집으로 돌아 가 봐야 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순간에 백방생의 신 형은 허공에 떠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백방생은 일전에 사람이 무학을 극도로 연마하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는 아직 정말로 하늘을 나는 사람을 본적이 없었다. 게다가 자기 자신이 느닷없이 그렇게 되리라고는 정말로 생각해 보지 못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백방생의 신형이 허공에 떠오른 순간 어느새 그의 옆에는 예의 그 홍의노인이 둥둥 떠서 함께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 볼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너무나도 놀라서 미처 입을 열지도 못했다. 홍의노인은 전혀 그의 몸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치 하나로 붙은 듯 이 그대로 날아가고 있었다. 백방생은 무심코 아래쪽을 내려다 보다가 일순 깜짝 놀랐다. 아래쪽에는 그저 모든 물체들이 검고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럴 만큼 두 사람의 날아가는 속도는 빠른 것이었다. 그런데도 백방생 은 그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니... 백방생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신 법이 펼쳐질 수가 있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방생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그는 땅위에 내려졌 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이미 많은 거리를 지나 온 것이었다. 그 곳은 어느 높은 산봉우리의 꼭대기였는데 시원한 산바람이 느껴지고 있 었다. 백방생의 앞에는 한 명의 초라한 모습의 늙은 선비가 보였는데, 홍의노 인은 바닥에 내려서자 마자 그 늙은 선비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제가 보기에도 저 아이가 아주 이상해 보이는데요." 뜻밖에도 홍의노인은 그 늙은 선비에게 매우 공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늙은 선비는 시선을 들어 백방생을 한 번 바라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방생은 그 시선이 마치 거울처럼 맑고 투명하다고 생각했 다. 흡사 신(神)이 창생(蒼生)을 내려다 보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하긴 조금 이상하군." 늙은 선비의 음성도 왠지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홍의노인은 마치 어른에게 칭찬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얼굴에 환한 미 소를 띄고는 다시 말했다. "그렇지요? 저 녀석은 마치 가슴속에 심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 다." 그때, 느닷없이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며 다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심장이 없는 아이라고?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 사람은 바로 한 명의 흑의노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의복의 색깔과는 달리 머리카락이나 피부의 색깔 등이 모두가 회색빛이었다. 그야말로 절로 음산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용모의 노인이었다. 그 흑의노인은 나 타나자 마자 그 괴상한 회색빛의 눈으로 백방생의 가슴을 정말로 뚫어 지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갑자기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정신이 하나도 없어졌 다. 그는 혹시 이것이 꿈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왠지 몸도 말을 듣 지 않았고 입을 열어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홍의노인이 말했다. "내가 심장이 없다는 말은 바로 마음이 없다는 말이야. 즉, 무심(無心) 이지." 흑의노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정말로 그런데? 이상한 일이군. 사람으로서 마음이 없다니... 헌데 그게 대체 어쨌다는 말인가?" 홍의노인은 늙은 선비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과거에 그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한 노인(老人)이 있었네. 그 때문에 우리는 사실 백년전까지만 해도 전혀 꼼짝도 할 수가 없었지." 흑의노인은 말했다. "그 무명노인(無名老人) 말인가?" 홍의노인은 늙은 선비가 아무런 말도 없자 다시 말했다. "그렇네. 그는 이미 백년전에 죽었지. 하지만 만일 그와 같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우리의 대업은 그야말로 물거품이 되어 버릴 것이네." 흑의노인은 말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 아이가 장차 그 무명노인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인가?" 홍의노인은 말했다. "반드시 그렇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네. 그러나 저 아이가 달마하원주의 아들이고, 또한 그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으니 경계하자는 것이네. 우리 의 대업은 이미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될 테니까." (달마하원주의 아들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백방생은 갑자기 너무나도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되어 갑자기 머리속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마치 꿈속에서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흑의노인은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저 아이를 아예 없애버리자는 말인가?" 홍의노인은 늙은 선비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워낙에 특이한 일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일단은 지켜보고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면 하는 생각이네. 항상 경계하고 있으면 별 탈도 없을 것이고." 흑의노인이 돌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만일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즉각 제거해 버려야지! 자네는 또 옛날의 그 버릇이 나오는 구먼. 그러다가 만일 대업이 실패라도 하게 되면 그 때는 어떻게 할 텐가?" 홍의노인은 그 말에 얼굴이 더욱 붉어지는 것 같았다. 늙은 선비는 이제까지 비교적 묵묵하다가 이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결정했네. 저 아이는 살려두도록 하지. 저 아이가 만일 자라서 나의 일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천명(天命)이 되겠지. 나는 그 천명에 따르도록 하겠네. 하하, 내가 만일 저런 아이까지 일 일이 죽인다면 사람들이 나중에 나를 소심하다고 비웃지 않겠는가?" 늙은 선비의 말에는 그 흑의노인도 십분 공경하는 것 같았다. 일시 불 만을 느끼는 듯 했으나 이내 묵묵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이윽고 늙은 선비는 백방생에게 말했다. "너는 앞으로 이 순간부터 우리들을 만난 기억을 모두 상실하게 될 것이다. 자고로 가인박명이라고 했으니, 그 또한 여기에 해당될 수가 있다. 네가 만일 오래도록 살고자 한다면 앞으로 너무 총명하게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백방생은 마침 크게 어리둥절해 져서 그 늙은 선비를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순간 마치 그 늙은 선비의 눈빛에서 갑자기 투명한 날벼락이 날아와서 그의 머리를 후려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고통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뜨거운 태양빛속에 던져진 듯한 눈부심이었다. 그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늙은 선비는 이어 홍의노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데려가게. 마무리를 잘 하도록 하고." 홍의노인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이어 홍의노인은 아직 멍하니 서있는 백방생과 함께 신형을 솟구치기 시작했다. 불과 잠깐 동안에 홍의노인은 먼 거리를 지나서 백방생을 다시 바닥 에 내려 놓았다. 그 곳은 작은 계곡이 있는 분지였다. 물론 아직 첩첩산 중이라 주위에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홍의노인은 백방생을 하나의 넓은 바위위에 뉘여 놓으며 문득 혼잣말 로 중얼 거렸다. "정말로 세상에는 너무 똑똑한 것도 죄가 되는 구나. 사실 네가 무슨 신 통한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지. 단지 대업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너는 앞으로 가능하면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이 좋 다." 말이 끝나자 홍의노인은 갑자기 두눈에서 기이한 광채를 발했는데, 순간 느닷없이 누워있는 백방생의 몸에서 연신 퍽퍽퍽, 하는 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기실 그것은 바로 홍의노인이 백방생의 단전을 파괴하고, 내공을 완전 히 소멸시키며, 게다가 전신의 중요한 경락들을 가닥가닥 끊어 놓는 소 리였다. 홍의노인은 이어 말했다. "너는 앞으로 전혀 무공을 익힐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생각도 너무 많이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즉 한평생을 바보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니, 실로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생활하는 데는 그다지 큰 불편은 없게 될 것 이다." 말이 끝나자 홍의노인은 느닷없이 허공속으로 빨려들 듯이 사라져 갔 는데, 그것은 마치 환각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어느새 홍의노인의 모습은 부근에서 다시 보이지 않았다. 헌데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홍의노인이 사라진 직후, 갑자기 그 자리에는 다시 한 사람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바로 그는 예의 그 흑의노인이었다. 흑의노인은 그 회색빛의 괴괴한 시선으로 방금 전에 홍의노인이 사 라져간 방향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백방생에게 시선을 돌리며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단전이 파괴되고 팔맥(八脈)이 모두 대부분 끊어지기는 했지만 그러 나 아직 백맥(百脈)은 서로 융통되고 있고 세맥(細脈)들도 모조리 살 아 있는 상태이다. 정말로 쓸데없는 자비심을 베풀었군! 왜 이런 녀석을 깨끗이 죽여버리지 못하느냔 말이야?" 흑의노인의 두눈에서 특이한 광채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문득 백방생 의 신형이 홀연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별안간 심하게 꿈틀거리면서 우두둑우두둑!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신의 근육과 골격들이 심하게 이탈되기 시작하는 소리였다. "만일 잠력들을 격발시켜서 잘 운용하기만 한다면 다시 팔맥을 타통시 키고 파경중원(破鏡重圓)을 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정말 일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이녀석의 공력이 이미 대홍락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을 설마하니 모른다는 말인가? 빌어먹을, 그대들은 무슨 덕을 베풀려는 모양인데 나는 결코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겠다." 말을 하는 가운데에도 백방생의 몸의 변화는 계속되었다. 실로 그 흑의노인은 홍의노인 만큼이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듯 했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백방생에게 갑자기 덮쳐들고 있는 엄청난 횡 액이고 거듭된 재난이었다. 정말로 백방생이 그와 같은 것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갑자기 퍽퍽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백방생의 칠공과 전신의 모공에서 선혈이 줄줄이 흘러나와 그의 의복을 시뻘겋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백맥과 세맥들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잠력들이 격발되어 몸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광경이었다. 백방생이 만일 그것을 알았다면 크게 절망하지 않았을까? 다행인지는 몰라도 백방생은 지금 혼절해서 의식을 잃고 있는 상태였 다. 그는 아마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진원지기(眞元之氣)가 모조리 터져나가고 전신의 경락들이 대 부분 파괴되어 버렸다면 그것은 아마도 거의 죽은 목숨일 것이다. 아 니, 사실 백방생과 같은 초상승의 심오한 내공이 없는 보통사람이었다면 그는 이미 수백번도 더 죽음을 당했었을 것이었다. 백방생의 육신은 약간의 저항이라도 하려는 듯이 처음에는 다소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으나, 이내 시간이 흐르자 그것도 점차로 조용해 졌다. 나 중에는 그럴만한 힘마저 사라진 모양이었다. 백방생의 육신에는 이제 겨우 한가닥의 숨결만 붙어 있는 상태였는데 실은 그것도 매우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백방생의 육신은 다시 바위위에 내려졌는데, 흑의노인은 마치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감상하듯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흠, 이제야 된 것 같군. 보아하니 지금 당장은 죽지 않을 것 같고 아 마도 삼 년은 살게 될 것이다. 즉 서서히 죽어 가게 되는 것이지. 마치 고질병을 앓다가 죽어 가는 것처럼 흐흐흐....누군가 꾸준히 진기를 주입 시키고 경락들을 다시 이어간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잘 되지 않을 것이 다. 백맥은 이을 수가 있다고 해도 세맥들은 이을 수가 없다. 세맥들 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모래위에 물을 붓는 격이 되겠지. 우리들 여덟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흐흐흐! 어쨌든 이 녀석은 앞으로 다 시는 무공을 배울 수가 없을 것이다. 생사가 늘 간들간들하니 어떤 모 험도 할 수가 없을 것이고.... 좋다! 이정도면 그도 나를 질책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완벽히 또 하나의 장애물을 제거한 셈이지. 재미있군, 재 미있어?" 이윽고 흑의노인도 사라져 갔다. 그가 사라져 가는 광경도 아까의 그 홍의노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한바탕의 꿈이 펼쳐 진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러나 사실 꿈은 아니다. 비록 그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한 사람은 그동안에 너무나 도 많이, 그리고 너무나도 참혹하게 처지가 변해 있었다. 백방생이 만일 지금 그것을 알았다면 우선 먼저 자신이 왜 이런 희귀 하고도 괴이하며 혹독한 재난을 겪어야만 했는지를 생각하기에도 골머 리가 아플 것이었다. 그저 운이 나빴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일까? 그러나 백방생은 좀처럼 혼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가 바위위에 누워 있는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다. 동쪽하늘에 떠오른 태양이 서서히 중천으 로 향하고 있었다. 점차로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말라가기 시작했다. 주위는 갈수록 더욱 더 조용해 지는 것 같았다. 헌데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주위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이상한 일이군. 저 쪽에서 피냄새가 나고 있어?" "요새 웬일인지 이 부근에 많은 무림고수들이 몰려들고 있어. 혹시 또 누군가가 싸움을 벌인 모양이군." "내 말은 그러니까 저 쪽이 바로 아까 그 노인이 말하던 그 장소와 일치된다는 거야." "아미타불, 설마하니 자네는 그런 괴상한 노인의 말을 믿는다는 말인 가? 백공자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 와서 잠을 자겠는가?" "하지만 자네도 결국은 궁금하니까 이쪽으로 따라온 것이 아닌가? 혹시 백공자가 무슨 변을 당했을지 알 수가 없으니까 우리는 일단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찾아봐야 하네." "빌어먹을! 이번 일은 울화가 치밀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그 래." 11 장 기적과도 같은 회생(回生) 이어 장내에는 홀연 두 사람의 중년승려가 나타났다. 뜻밖에도 그들은 바로 달아오수 가운데의 두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백방생의 행적을 수소문하다가 느닷없이 홍의노인 등 의 전갈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들 중 하나는 체구가 아주 크고 우람했 고, 다른 하나는 상당히 단정하고 우아한 편이었다. 그들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살피다가 이내 바위위에 뉘여져 있는 백방생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 이었으나 이윽고 크게 놀라서 소리치며 달려가서 급히 백방생의 몸을 안아들었다. "아니 백공자! 백시주! 아미타불, 아니 이럴수가!..." 그들은 백방생의 몸이 실제로 보기보다 더욱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만 너무나도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한 표정만을 지었다. 백방생은 이미 초죽음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그들로서는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었다. 한참 후에야 백방생의 몸을 안아든 그 우람한 체구의 승려가 한숨을 내쉬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이럴 수가... 이걸 대체 어쩐다지? 정말 지독스럽기도 하구 만! 대체 누구에게 당했길래 이 모양이라지? 빌어먹을, 혹시... 혹시 그 괴상한 노인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단아한 체구의 승려도 비로소 한숨을 길게 내쉬며 그제서야 입을 열며 고개를 저었다. "아미타불!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네. 어서 빨리 장원으로 데려가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자칫 어떻게 잘못될 지도 모르겠네." 우람한 체구의 승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군...." 이어 두 사람의 신형은 백방생과 함께 빠르게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 다. 대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아니 불과 잠깐동안 잠들어 있었 던 것 같기도 했다. 백방생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을 때는 그는 이미 자신의 침 실에서 깨끗하게 새옷으로 갈아입혀진 상태에서 눕혀져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고 의식은 희미하기만 했다. 백방생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의식이 점차로 회복 되리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의식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물을 떠먹여 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비로소 의식이 약간 밝아져서 그는 눈을 뜨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야도 아주 흐릿했고 사람의 얼굴이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백방생은 문득 그 사람이 진소유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백방생이 깨어난 것을 눈치챘는지 문득 진소유가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지금 무려 사흘만에 깨어나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도 남들은 기 적이라고 말 할 거예요." 백방생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이 잘 되지 않았다. 진소유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지금 말을 하면 안 되요. 단지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잠을 자도 록 해요. 잠을 자고 나면 좀 더 나아질 거예요." 진소유의 말에는 무슨 신통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백방생은 그 얘기를 듣자 마자 즉시 잠이 쏟아져서 다시 혼돈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이번에는 매우 오랫동안 잠을 자는 것 같았다. 그는 상당히 많은 꿈을 꾸었고 또한 많은 고통과 번뇌를 느꼈다. 그의 꿈들은 하나같이 흉악한 악몽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윽고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그녀의 말대로 정 말로 그의 의식은 많이 나아져 있었다. 여전히 그의 옆에는 진소유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첫마디의 말은 이 러했다. "당신은 또 사흘만에 깨어나는 군요." (사흘이라?...) 진소유는 다시 말했다. "당신의 몸은 이제 괜찮나요?" 백방생은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시력도 이제는 좋 아져서 모든 것들이 분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의 몸은 전혀 말을 듣 지 않았다. "이제는 괜찮소." 백방생은 말을 끝내고 시선만을 돌려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 곳 침실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의문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는 질문하 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단 말을 꺼낸다면 도저히 현실을 감당해낼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대신 이렇게 질문했다. "다들 어디로 갔소?" 진소유는 가볍게 냉소하듯이 대꾸했다. "당신은 아직도 남들을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겨우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사이 장원내의 일들은 어떻게 되었소? 나의 할아버지는 또 어떻게 되셨고...." 진소유는 다소 주저하는 듯 하다가 이윽고 대꾸했다. "당신의 심장은 아직 견딜만 한가요?" 이어 들려주는 진소유의 얘기는 그야말로 놀라울만한 것이었다. 본래 백방생이 납치되던 그 날, 일단의 흑의노인들이 백노야의 방으로 침범을 했었다. 당시 대인 등은 미처 그것을 예측하지 못하고 백방생을 구하기 위해 추적했었다. 그런데 그것을 기묘하게 노리고 다른 곳에 숨어있던 흑의노 인들이 백노야의 침실로 침범을 하여 무시무시한 난동을 부리기 시작 했다. 당시 백방생을 구하기 위해 대인과 다른 한 명이 나갔었기 때문에 백노야의 침실을 지키는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다. 다행히 그들 세 명은 전력을 다해서 저항하여 오백나한상은 빼앗기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격전의 여파로 백노야가 그만 기운을 쓰는 바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게다가 대인 등도 미처 백방생을 구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백방생의 부친인 홍엽선사(紅葉禪師)가 그 전갈을 받고 장원에 나타난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홍엽선사의 속가명은 바로 백귀원(白歸元)으 로, 실상은 백노야의 외아들이었던 셈이었다. 그는 자신이 불문에 있었기 때문에 오지 못했으나, 이윽고 백노야가 그런 변괴를 당하자 나타난 것이 었다. 백방생은 아직 모르고 있었으나 그의 부친인 홍엽선사는 이미 달마 하원의 주지가 되어 있었다. 달마오수는 바로 그가 보냈던 것이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십년동안의 폐관참수를 끝낸 직후였기 때문에 이름이 그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홍엽선사가 전래의 장문방장인 덕일선사(德一禪師)에게서 주지의 직책 을 물려받은 것은 거의 최근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십여년 전에, 홍엽선사는 일찍이 약관의 나이 에 출가하여 거의 불혹의 나이가 되는 동안 벌써 불도와 무학에 정진하 여 후기지수로서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어느 날 남해보타도에서 역시 후기지수로서 명성을 얻고 있는 비구니 원심(圓心)과 선방에서 열심히 불법을 토론하게 되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거의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갑자기 욕정 을 느끼게 되어 계율을 범하게 되었다. 바로 거기에서 태어난 자식이 백방생이었던 것이었다. 원심사태는 아기를 낳게 되자 그 아기를 홍엽선사의 의견에 따라 백 노야에게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이후에 자진해서 십년간 의 면벽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연히도 원심사태는 홍엽선사와 마찬가지로 남해보타도의 주지가 되어 있었다. 일명 남해신니(南海神尼)가 바로 그녀였다. 진소유도 그러 한 사실을 며칠전에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흑의노인들은 바로 다름아닌 일월신교의 무리들이었다. 장원에는 그들 외에도 다른 무리들도 함께 뒤섞여 나타났다. 그들은 일단 처음의 공격에 실패하자 협상을 하자는 쪽으로 나왔다. 그 들이 요구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오백나한상이 아니라 한 권의 무학비 급이었다. 즉, 달마하원의 적전내공(嫡傳內功)이라고 할 수가 있는 대승 반야선공(大乘般若禪功)이 실려 있는 한 권의 비급이었다. 그 대승반야선공은 과거 달마하원에서 배출된 걸출한 선승인 법혜선사 (法慧禪師)가 달마역근경을 보고 그 심득에 의해 창안한 내공이었는데, 이미 그 훌륭함은 공인되고 있었고 또한 그 비급은 달마하원의 진사지 보(眞寺之寶)라고 할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 일월신교 등에서 무엇 때문에 굳이 그 비급을 악착같 이 강탈하려고 하는 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홍엽선사는 의외에도 선뜻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어 달마오수 로 하여금 그 비급을 가지고 가서 백방생과 교환해 오라고 지시를 내 렸다. 헌데 그 무렵에 갑자기 상상도 못할 변괴가 일어났다. 느닷없이 달마오 수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홍엽선사가 가슴이 뻥 뚫려버린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로 인해 이 장원의 내부는 혼란에 뒤덮히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홍엽선사가 그렇게 죽은 원인이 어떤 굉장한 위력을 지닌 폭 약 때문이라고 단정을 지었다. 그 이외에는 홍엽선사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 다. 그렇다면 홍엽선사를 그렇게 만든 폭약은 어떤 것이며 원흉은 누구인 가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어지러워서 당시 미처 그런 원인들을 자세히 밝혀내 지 못했다. 게다가 다시 또 하나의 큰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해보타도 의 도주인 남해신니 원심사태가 장원에 나타나서는 홍엽선사의 시신을 보고 느닷없이 스스로 심맥을 끊어서 자결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원심사태는 너무나도 홍엽선사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한 문 파에는 잠시라도 주지의 자리가 비워져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달마 하원에는 오엽선사(悟葉禪師)가, 그리고 남해보타도에는 원성사태(圓性 師太)가 각각 그 뒤를 이어 장문인의 자리에 올랐다. 현재 대부분의 일 들은 그들이 중심이 되어 처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그 많은 변화가 이 장원내에서 일어났다. 달마오수는 비급을 가지고 가서 백방생과 교환하려고 했으나 일시 그들의 교란책으로 백방생을 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들에게는 사부인 홍엽선사의 죽음이 너무나도 충격이 컸기 때문에 미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다시 백방생을 찾는 것을 계속하여 엿새 전에는 드디어 피투성이가 된 백방생을 구해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본래 거의 다 죽은 목숨이었으나 달마하원의 적극적인 도움으 로 점차 다시 소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백방생을 위해 달마하원의 귀중한 영약들도 아끼지 않았다. 백방 생은 지금까지 그가 먹은 것이 단지 물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그 것은 달마하원의 영약들을 녹여서 만든 탕약들이었다. 그것 때문에 백방생은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백방 생의 몸은 조금도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백방생은 그 많은 얘기를 듣고 나자 절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 는 그 많은 얘기들이 사실인 지 알 수도 없었고 또한 실감이 가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그저 덤덤한 것 같았다. 그런데 왠지 그의 눈가에서는 자 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약간 당황 해졌다. 그래서 그는 급히 다시 질문했다. "그 백귀현의 가족들은 어찌 되었소?" 진소유는 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들은 이제까지 달라진 것은 없어요. 단지 백노야가 이미 죽었으니 이 제는 그만 이 집을 비워달라는 군요. 그래서 우리는 일단 당신이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예요." 백방생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진소유는 말했다. "당신은 지금 뭘 생각하죠?" 백방생은 대답했다. "나는 지금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오. 알 고 당한다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모르고 당하는 것은 더욱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당신은 그래 알아 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고개는 역시 그의 말을 듣 지 않았다. "모르겠소." 진소유는 눈빛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대체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잘 모르겠소. 나는 그것에 관해서 하나도 기억나지 않소." 진소유는 백방생이 피곤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당신의 품속에는 아직 그 돈은 그대로 있었어요. 당신은 이제 어디로 갈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일단 여행을 떠나고 싶소." 진소유는 다소 어이가 없어 하며 말했다. "그 몸으로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게다가 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은 들어 드리고 싶소. 나는 소림 사로... 가겠소." 진소유는 어이가 없어 하다가 다시 말했다. "선사께서는 홍엽선사와 함께 유골이 합쳐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세 분의 시신은 모두 달마하원으로 가 있어요. 달마오수도 오백나한상 을 그쪽으로 옮겨 놓았구요. 그들은 당신이 시신들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 곳에 가볼 생각인가요?" 백방생은 사실 아직도 부모의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백방생은 두 눈을 깜빡거렸다. "갑시다." 백방생은 이어 다시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 잠이 들었다. 확실히 이 잠 이라고 하는 것은 간혹 매우 편리한 것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잠을 자는 동안에는 그 악몽같은 현실을 모두 잊어버릴 수가 있었다. 다만 그는 진짜 악몽을 꾸고 시달렸다. 꿈과 현실중 어느 것이 진실인 가? 백방생은 어느 때 그런 생각까지 해 보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당 시 꿈을 꾸는 시간이 깨어있는 것 보다 더 길었고 더 진실인 것 같았다. 백방생은 이번에는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지옥의 겁화(劫火)속에서영겁토록육신이삶아지는것같은느낌을 받았다. 그는 때로 는 차분한 마음으로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나중에결국그는역시사흘동안잠을잤을뿐이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 그가 누워있는 곳은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그 곳은 바로 복 주성에서 남쪽으로 이백여 리 떨어져 있는 달마하원의 어느 한 선방이 었다. 그 선방은 매우 낯설고 침상도 딱딱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곁에는 역시 진소유라는 여자가 시중을 들어 주고 있었다. 달마하원은 선종이며 향화객을 받지 않는다. 여자는 이곳에 출입을 할 수가없다. 다만 이번에 특별한 배려로그녀를 이곳으로 들어오게 한 모 양이었다. 다행히도 백방생의 몸은 지난 사흘동안 대단히 많이 좋아져 있었다. 그는 이제는 손과 발을 움직일 수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침상위 에서 몸을 일으켜 앉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의식도 옛날과 다름이 없이 청명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를 돌봐주고 있는 달마하원의 한 스님은 이제 그가 미음 따위를 먹어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백방생은 이제야 자신이 일단은 살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방생은 진소유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나의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오?" 진소유는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곧 사람들이 당신을 데리러 올 거예요." 과연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일단의 스님들이 안 으로 들어섰다. 붉은 색의 가사를 걸치고 있는 팔십대의 노승과 함께 달마오수의 두 사람도 안으로 들어섰는데, 그 붉은 가사를 걸친 노승이 바로 다름아닌 이번에 장문인직을 승계받은 오엽선사였다. 전에 홍엽선사가 육십대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장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워낙에 그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었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선 몸이 좀 어떠시오?" 오엽방장이 묻는 말에 백방생은 겨우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이제 좋아졌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오엽방장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성미가 급하시군요. 좋습니다. 마침 지금 마악 다비식을 치 르려던 참이었으므로 함께 나가도록 하십시다." 다비식이란 바로 유골을 화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백방생은 억지로 몸 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달마오수의 두 사람이 작은 들것과 같 은 것을 가지고 와서 그를 태우고 밖으로 향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전 에 백방생을 발견했었던 그들이었다. 달마하원은 이미 역사가 수천년에 달해서 매우 유서깊은 곳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고래등 같은 법당들에는 세월의 연륜을 느끼게 하 는 이끼들이 가득 끼어 있었고, 공기는 또한 맑으며 분위기는 조용하 고 엄숙했다. 누구라도 이 안에 들어서면 세속의 번뇌가 모조리 제거되는 것을 느끼 지 않을 수가 없을 듯 했다. 백방생은 선방을 나와서 그러한 웅장한 사찰의 정경을 구경하자 절 로 감탄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백방생은 마음속에 마치 일진의 안개가 가득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일행은 오엽방장의 뒤를 따라서 즉시 다비식이 준비되어 있는 장소 로 향했다. 백방생은 작은 들것위에 조용히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는 것이 마치 사찰에 유람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덤덤해 보였다. 다비식이 열리는 장 소는 선방에서 상당히 멀었다. 그러나 일행이 거기에 도착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날씨는 그간 다소 서늘해진 것 같기도 했다. 계곡처럼 보이는 작은 분 지위에 모든 것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 많은 승려들이 엄숙한 표 정으로 둘러앉아서 소리높여 불호를 외우거나 불경을 낭송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이내 시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먼저 그가 대한 것은 할아버지의 시신이었는데 죽은 지 이미 오래 되 어서 인지 안색이 온통 검푸르게 보였다. 그리고 이어 그와는 따로 떨어져 있는 곳에 놓여져 있는 부모의 시신 들41. 백방생은 공연히 그 시신들의 얼굴이 낯설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 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두 시신의 얼굴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 시신들의 용모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비록 눈에 익은 얼굴 들은 아니지만 낯설은 느낌은 없었다. 한 사람의 얼굴은 청수했고 다 른 사람의 얼굴은 우아해 보였는데, 그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일순 자 비로운 미소가 번져나올 것만 같았다. 백방생이 오랫동안 시신들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자, 옆에 서있던 노승 이 물었다. "다 보셨소?"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하늘로 던졌다. 태양빛은 아직도 뜨거 웠지만 많은 구름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제 곧 비가 올 것이다. 문 득 비가 내린 것처럼 백방생의 양 뺨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달마오수 들 가운데 두사람이 들것을 가지고 물러서자 드디어 두곳에서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번뇌의 불길인 것 같았다. 화마 (火魔)가 치솟기 시작하자 승려들은 일제히 불경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그 날 선방으로 돌아오자 진소유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그만 떠납시다." 진소유는 말했다. "방장스님께서는 내일 아침에나 떠나라고 하던데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고 싶지가 않소." 진소유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주시했다. "당신은 지금 떠나도 몸이 버틸 수가 있겠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버틸 수가 있소. 하지만 버틸 수가 없게 된다고 해도 역시 그만 이 아니겠소?" 지금 백방생의 몸에 대해서는 달마하원의 그 훌륭한 의승(醫僧)들도 하 나같이 두 손을 다 든 바가 있었다. 백방생이 이렇게 의식을 회복하게 된 것만 해도 거의 기적이라는 것이 었다. 현재 사실 백방생은 엄청난 양의 영약들을 복용하였고, 그 약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진소유는 가능하면 백방생을 좀 더 치료받게 하고 싶었으나, 그의 의사가 그러하므로 즉시 장문방장에게 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달마오수와 백방생, 그리고 진소유의 일곱사람은 그 날 오후에 달마하 원을 출발하여 저녁무렵에는 다시 그 복주성에 이르렀다. 소림사로 가려면 아무래도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빠르겠으므로 일단 복주성에 들러서 하루 쉬면서 마차를 구하기로 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달마오수의 나머지와 정식으로 각기 인사를 나누었다. 키 가 크고 우람한 승려가 대의(大義)이고 키가 작고 둥글둥글한 승려가 대례(大禮), 그리고 단아한 용모의 승려가 대지(大智)이고 키가 크고 비 쩍 마른 승려가 대신(大信)이었다. 현재 달마하원의 일대제자(一代弟子)의 항렬은 법명이 대(大)로 시작하 고 있었고 나이는 대개 육십대였다. 이 달마오수는 지금 나이가 서른 여섯인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와 같은 항렬에 들었으니 그것은 그들의 자질과 능력이 심히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즉 그들의 선사(先師)인 홍엽선사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가 있었다. 법명을 보면 알 수가 있듯이, 한가지 특이한 일은 그들 다섯명이 모두 같은 형제로서 고아이며 다섯쌍둥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일면 재미 있고도 희귀한 일이었다. 과거 백노야는 우연히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달마하원에 보냈었는데, 그들은 홍엽선사의 제자가 되어 오늘날의 달마오수가 있게 된 것이었다. 일행은 백노야의 장원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한 객점에 여장을 풀고 서 저녁식사를 했는데, 이윽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백방생이 그저 멍하니 침상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진소유가 들어와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고 있는 거죠?" 백방생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 "할아버지의 유산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오." 진소유는 약간 의아해 져서 다시 물었다. "당신의 몫은 이미 상속을 받았잖아요. 또 다른 유산이 있다는 말인가 요?" 백방생은 우울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진소유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당신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백방생이 말하는 사람들이란 바로 백철우 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전에 백철우는 느닷없이 그런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백방생은 갑자기 그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글쎄요.... 과거 나의 조부님께서는 다소 기행(奇行)을 일삼는 분이라고 할 수가 있었소. 혹시 나 몰래 어떤 유산을 남겨두셨을 지도 모르는 일 이기는 하오." 진소유는 호기심이 이는 듯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이제 거기에 관해서 무슨 생각이라도 났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진소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까지 겨우 헛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계속 누워만 있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오." 진소유는 우울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최소한 어떤 단서는 있었을 것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다가 대꾸했다. "단서가 될 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소." 진소유는 말했다. "그게 뭐죠?" 백방생은 말했다. "조부님께서는 평소에 거의 나를 만나주시지 않으셨소. 특히 지난 몇년 간은 거의 얼굴도 뵙지 못했던 상태였소." 진소유는 말했다. "그럼 결국 유산을 따로 남겼다면 역시 그 날 당신에게 준 물건에 어 떤 암시를 남겼을 가능성이 가장 크겠군요. 혹시 그 금표가 들어 있는 봉투에 무슨 글씨를 남긴 것이 아닐까요?" 백방생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얼마전에 조사해보았지만 글씨는 없었소. 그보다 나는 다른 한가지를 생각하고 있소." 진소유는 말했다. "그럼 금표에 적어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오백나한상이오." "오백나한상?" 진소유는 문득 절로 어리둥절해 져서 말했다. "그건 바로 당신의 조부가 달마오수에게 맡겨 놓았던 것이 아닌가 요?"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조부님께서는 굳이 나에게 그 일의 책임을 감당하라고 하셨소. 조부님께서 만일 어떤 다른 유산을 남기셨다면 필시 아마도 그 오백나 한상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오." (그렇구나!) 진소유는 내심 감탄을 하며 백방생이 그토록 몸이 부자유스러운데도 불구하고 두뇌가 영민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 오백나한상은 물론 지금 달마오수가 묵고 있는 다른 방에 있었다. 진소유는 말했다. "그럼 내가 지금 가서 그 오백나한상을 갖다달라고 부탁을 할까요?" 달마오수는 마침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직 연공에 들어가기 전이었기 때문에 진소유의 그 전갈을 듣고서 모두 함께 바로 오백나한상을 들고 왔다. 백방생은 그들이 들어오자 입가에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공연한 호기심으로 여러분을 귀찮게 해드린 것이 아닌 지 모르 겠습니다." 대인은 달마오수의 수장격이어서 이내 합장하며 불호와 함께 대꾸했 다. "아미타불 천만의 말씀이오. 우리는 사실 백공자의 일을 도와주는 것 뿐 인데 어찌 번거롭다고 말할 수가 있겠소?" 백방생은 마주 웃으며 포권했다. "고맙습니다." 다섯개의 철상자를 침상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자 일시 방안이 황금빛 의 물결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달마오수는 즉시 사방으로 나뉘어서 호법을 엄중하게 섰다. 백방생은 그 오백개의 나한상들을 하나하나 살폈는데 그의 얼굴에는 이렇다할 표정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진소유가 옆에서 바라보다가 이윽고 답답한지 물었다. "어떤 단서라도 찾아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그 황금나한상들은 모두가 각기 모습이 서로 달랐고 자세 또한 일정 하지 않았다. 크기는 주먹보다도 더 컸지만 무게는 열냥 정도만 나가는 것으로 보아 속이 비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 중 몇개의 몸통 을 열어 보니 안이 비어 있었다. 그 뚜껑을 여는 열쇠는 배꼽이었는데, 그 배꼽의 작게 튀어나온 부분 을 돌리자 쉽게 몸통부분이 열렸다. (어째서 이것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일까?) 진소유는 백방생이 뚜껑이 열려져 있는 나한상들을 이리저리 조사해 보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물었다. "그게 좀 이상한가요?? 이 나한상들은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므로 그 구조가 설령 이상하다고 해도 백노야와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백방생은 고개를 저으 며 대답하려고 했다. 헌데 그때 문득 열어본 한 나한상의 뱃속에서 돌연 작은 두루마리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이었다. 진소유는 그것을 보고 그만 놀라서 말했다. "아, 정말로 백노야의 유언이 들어있나 봐요!" 백방생도 다소 놀랐다. 그 두루마리는 나한상과는 달리 종이가 오래묵 은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가 미처 그 두루마리를 꺼내보기도 전에 문득 대인이 입을 열더 니 불호와 함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이제는 그만 말씀드려야 하겠군요. 실은, 그런 것이 아니외 다?" 백방생과 진소유는 둘 다 어리둥절해 졌다. 두 사람은 미처 신기해 하 기도 전에 판이 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인의 그러한 어조에는 다 소 냉소적인 분위기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스님께서는 달리 하실 말씀이 있으신 모양이로군요. 어서 말씀하시지 요." 대인은 불호를 외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듯 하더니 이어 말했다. "아미타불, 그것은 백노야의 유언이 아니외다." 진소유가 급히 그 두루마리를 집어 들어 살펴보니 정말로 그것은 무슨 유언을 적은 것이 아니라 아마도 무슨 책자 같았다. 거기에는 작고 깨알같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고 게다가 무슨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백방생은 대인이 그것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므로 포권하며 말 했다. "그럼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대인은 주위의 동료들을 한 번 돌아 보더니 불호와 함께 대꾸했다. "아미타불, 천만부당하외다. 본래 이것은 소승 등이 백공자께 미리 말씀 드렸어야 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사안이 워낙에 중대했기 때문에 미 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 계속되는 대인의 말은 실로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내용 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았다. 본래 달마하원에는 얼마전에 소림본사로부터 일종의 부탁의 말이 인편을 통해 전해졌었다. 그 말은 즉, 한가지의 사정으로 달마하원의 적전내공을 담은 비급을 잠시 빌려볼 수가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실상 소림본사와 달마하원은 그 뿌리는 같을 지 몰라도 이전까지 서 로 별로 왕래하는 바가 없었고 마치 별개의 두 문파처럼 여겨지고 있는 상태였다. 갑자기 남의 문파의 그것도 적전내공의 비급을 빌려달라는 것은 실로 무리한 부탁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림방장인 도액선사(渡厄禪師)는 친히 장로 한사람을 보내서 아 주 정중하게 그 부탁을 해왔다. 그는 소림사의 비전영단이라는 대환단 을 무려 서른여섯알이나 보내왔고 그 가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얘기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진소유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질문을 해왔다. "소림사에 그렇게 많은 대환단이 있었다는 말인가요?" 대인은 말했다. "대환단은 본래 불문의 성약(聖藥)으로서 여러가지의 공효가 있으며 만들기가 어려워서 소림본사에도 몇 개 없었소. 그 서른여섯알의 대환단 은바로이번에소림사의약승(藥僧)들이천륭무가의도움으로 만든 것이었소." 진소유는 더욱 어리둥절해 졌다. "천륭무가가 이번의 그 일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요?" 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그렇소." 천륭무가는 바로 세외팔세의 하나로서 그 본거지가 곤륜산의 어딘가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실상 소림본사에서 이번에 그러한 부탁을 해 오게 된 것은 오로지 그 천륭무가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12 장 황금충(黃金蟲)의 전설 본래 천륭무가는 자손들이 하나같이 특이한 신체를 타고 나기 때문에 불과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무학이 대홍락의 경지에 오르는 등, 실제로 세외팔세 가운데에서도 가장 막강한 세력으로 꼽히고 있는 곳이 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천륭무가주의 무공은 그야말로 천하제일이라고 했 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말로 완벽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토록 위대한 천륭무가의 석씨가문(石氏家門)에 한가지의 절망적인 결 함사항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들의 신체가 극도로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대신 수명이 매우 짧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일컬어 예로부터 천상절맥(天上絶脈)이라고 불러왔다. 천상절맥이라는 말 가운데에서 앞의 두글자는 자질이 흡사 천인(天人) 을 방불케 한다는 뜻의 좋은 말이고, 뒤의 두글자는 말 그대로 절망스 런 그들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절맥이라고 하 면 흔히 거론되는 삼음절맥(三陰絶脈)이니 구음절맥(九陰絶脈)이니 하는 것들을 연상하게 되지만 여기에서의 절맥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 었다. 절맥이라는 말은 즉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천륭무가의 석 씨가문의 사람들이 일찍 죽음을 당하는 원인은 무슨 인체의 경락이 끊어져서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원지기가 너무 빨리 고갈되 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즉 너무나도 빨리 진원지기를 소모해 버리고 일찍 세상을 떠나 는 것이었다.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단 백연탄의 경지에 이르면 본신의 기운이 선천의 진기(眞氣)로 화하여 진원지기를 보충하게 되는데 어떻 게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있느냐고? 하지만 이해할 수 없게도 그런 일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천륭무가에서는 그간에 그 천상절맥의 결함을 고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 진원지기가 빨리 소모되는 것은 결코 병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좀더 오래 살고 싶으면 진원지기를 좀더 아껴쓰면 될 것이다. 이 진원지기라는 것은 사람마다 그 양이 비슷하고 한계가 있어서 더 생성 되는 것도 아니고 수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야말 로 세상은 공평하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진원지기의 양을 늘리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시도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까지는 대체 그 진원지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과거에 사람들은 백연탄의 선천진기(先天眞氣)야말로 진원지기일 것이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진소유가 듣고 있다가 문득 다시 말했다. "그럼 이번의 일은 그것과 관계가 있나요?" 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천륭무가에서는 이번에 그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오." 진소유는 어리둥절해 졌다. "그럼 그 진원지기라는 것은 대체 뭐라는 말인가요?" 대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소. 다만 그 진원지기를 늘 리는 일이 달마역근경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오." "달마역근경이라고요!" 진소유는 일시 놀라서 부르짖었다. 달마역근경은 이미 수천년 전에 달 마조사가 창안해 놓았다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불문의 무학들은 대개 거기에서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누구도 배우지 않는 무학의 전통쯤으로 생각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그것이 진원지기와 관련이 있다고 하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 다. 대인은 말했다. "달마역근경은 지금으로부터 삼천여년 전에 달마조사께서 제자들의 심신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창안하신 것으로, 당시에는 그저 도가의 팔단금이나 참춘공처럼 양생도인술 정도인줄로만 알았었소. 하지만 세 월이 지남에 따라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심오한 뜻이 발견되기 시작하 여, 거기에서 많은 무학들이 창안되었고 게다가 아직도 거기에는 풀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다고들 하오." 진소유는 말했다. "아하, 그래서 그들은 달마하원의 무학비급을 원하게 되었군요?" 대인은 말했다. "달마역근경에는 불법의 심오한 이치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그 의미를 풀어 낼 수가 없소. 즉, 불법과 무학 두가지에 통달한 인재만이 그것의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가 있다는 것이오. 이제까지 달마역근경이 환영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던 것은 그것이 너무나도 난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하지만 소림본사에도 그 달마역근경의 무학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굳이 달마하원에까지 그런 부탁을 하게 된 이유는 뭐죠?" 대인은 기왕에 모두 말하기로 작정을 했는지 시원시원하게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달마역근경의 무학들 가운데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내공(內功) 이고, 게다가 그것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되 었소. 즉 소림본사의 대반야금강공(大般若金剛功)과 우리 달마하원의 대승반야선공이오. 천륭무가에서는 달마역근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연 우리 달마하원의 적전내공도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오." 진소유는 과거 무학을 배울 때 달마역근경은 원시적이고 그다지 대단하 지 않은 무학비급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그와 같은 얘기를 듣게 되자 아연 놀랍고 의아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문득 한가지 일을 상기하고 다시 말했다. "헌데 대체 그 일월신교 등에서는 어째서 또 그 비급을 빼앗으려고 했 던 것일까요? 그들도 무슨 진원지기의 정체를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었 나요?" 대인은 가볍게 미소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소. 현재 천륭무가 가주의 수명은 대개 사십대 중반으로 보 고 있소. 그들은 그런 상태에서 이미 무학의 끝인 무형검(無形劒)의 경 지에 이르러 있다고 하오. 즉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세외팔세 가운데에서 도 수위를 차지하고 있소.만일그들의 수명이 이삼십년정도 늘어나게 된 다면 어떻게 되겠소?" 진소유는 마치 꿈속에서 깨어난 듯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들은 지금까지의 세외팔세의 균형이 무너지고 천 륭무가가 천하를 집어 삼킬까봐 두려워 했던 것이었군요?" 대인은 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러한 얘기는 사실 소승의 추측이외다. 어쨌든 우리 달마 하원에서 그러한 조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니 곧 전모가 드러나게 될 것이오." 진소유는 다시 말했다. "헌데 그렇다면 어째서 그 무리들은 달마하원으로 가지 않고 도리어 백공자를 납치하는 등의 백대장원을 공격했을까요?" 대인은 말했다. "현재 천륭무가의 가주는 소림본사에서 달마역근경의 연공에 들어가 있다고 하오. 아미타불, 그는 소림방장에게 부탁을 하여 우리에게 사람 을 보냈던 것이었지요. 선사께서는...." 대인은 잠시 우울한 표정으로 말을 끊다가 이윽고 다시 말을 계속했다. "선사께서는 누구라도 그와 같은 무학을 배우려는 것은 가상한 일이 기 때문에 적극 도와줘야 한다고 하셨소. 그래서 즉시 비급의 사본을 만들어서 이 나한상들의 몸속에 넣어서 소림사로 보내게 한 것이오. 그 무리들은 아마도 우리들의 몸속에 그 비급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소." 백방생과 진소유는 그제서야 죽은 홍엽선사가 기실은 일석이조를 노렸 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백노야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에 비급을 그 안에 넣어서 소림 사로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이내 그렇게 커다란 화 를 불러왔다. 진소유는 그제서야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이 정말로 대승반야선공의 사본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의 문파의 무학구결을 함부로 볼 수가 없으므로 그녀는 얼른 다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나한상의 몸속에 넣고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시 비급의 진본은 그들에게 주었지만 여기에 있는 사본은 무사하다는 말이로군요?" 대인은 말했다. "여기에는 사실 내공의 구결뿐만 아니라 다른 무학들의 구결도 함께 들어 있소. 그것은 선사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오. 게다가 선사께서는 그 들이 보내온 서른여섯개의 대환단을 받지 않으시고 돌려보내라고 하셨는 데, 그래서 이 안에는 그것들도 들어 있는 중이오. 아미타불!" 진소유는 이 나한상들의 뱃속에 비단 무학비급들 뿐만 아니라 서른 여섯개의 대환단도 들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만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만일 이 비밀이 새어 나가면 강호에는 그것들을 강탈하기 위해 몰려드 는 무림인들로 인해 한차례 거대한 피바람이 불어올 지도 모르는 일이 다. 진소유는 그제서야 달마오수가 그토록 오백나한상을 엄중하게 보호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소유는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에 달마하원의 주지 등이 죽은 것도 사실은 그 천륭무가의 부탁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도 이번에 굳이 그렇게 그것들을 그들 에게 갖다줘야만 하는 것인가요?" 대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미타불, 불문의 제자는 신의를 어기지 않소. 이번의 일은 이미 보내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니 당연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보내줘야 할 것이오. 게다가, 그 천륭무가는 세외팔세 가운데에서도 정도(正道)를 추 구하는 세력이며, 이제까지 강호를 위해 좋은 일만을 해왔기 때문에 더더 욱 그렇다고 할 수가 있소.? (그렇겠군.) 진소유는 내심 크게 수긍하는 기분이 들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 실 이번에 백방생 등이 그렇게 당한 것은 그렇게 보자면 단순히 운이 없 었다고 해야할 것이었다. 세외팔세 가운데에서 천륭무가와 성수곡, 성모궁을 제외한 나머지 세외 오세(世外五勢)는 각기 그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었 다. 헌데 만일 천륭무가가 지금보다 힘이 월등해져서 그 균형을 무너뜨리 고 천하를 정복하거나 한다면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정말로 그 달마역근경에 의하면 진원지기가 보강될 수가 있는 것일 까?) 진소유는 생각을 굴리며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방생은 지금 뚜껑이 열려 있었던 나한상들을 원상태로 회복시켜 놓고서 천천히 그 형태들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진소유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어쩌죠? 불행하게도 당신의 기대는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 았군요. 할아버지의 유산은 없는 것이 되어 버렸으니 섭섭하지 않나 요?" 백방생은 이에 수긍하기라도 하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헌데 정작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유산은 없는 것이 아니오." 진소유는처음에는그말을잘이해하지못했다.그녀는어리둥절해 하다가 말 했다. "하긴 당신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겠죠. 그 자신이 그렇게 말했었으 니." 백방생은 마치 버릇이 되어 버린 것처럼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치 금방이라도 울 듯한 아주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바보였소." 진소유는 그가 이제까지 별로 눈물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지금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다소 어리둥절해 졌으나 이내 크게 측은한 마음이 일어서 말했다. "당신은 너무 그렇게 자학하지 말아요. 아마 누구라도 그와 같은 상황 에는 어쩔 수가 없었을 거예요." 백방생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그는 제법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 순간은 왠지 크게 흐트러진 듯한 태도였 다. "아니오. 나는 지나치게 우유부단했소. 만일 내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에 와서 이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었을 것이오." 진소유는 백방생이 갑자기 웬 감상이 그리 많아진 것일까 하고 의아해 졌다. 그런데 문득 그녀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백방생은 알고보니 지금 오직 하나의 나한상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소유는 그만 놀라 물었다. "당신은 그럼 조부의 다른 유산을 발견했단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고있던 그 나한상을 집어 들었다. "그런 것 같소." 진소유는 일시 어리둥절 했다. 그녀로선 금방 그것이 다른 것들과 무엇 이 다른 지 파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나한상은 물론 그 형상이나 재질이 다른 것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진소유는 그 나한상의 얼굴을 보고 어딘가 이 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얼굴의 인상이 어딘가 낯익은 느낌 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이 다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사실 내가 이것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소." (그렇구나! 맞았어....) 진소유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 나한상의 얼굴이 누구를 닮았는 지를 알게 되었다. 그 나한상의 얼굴은 어이없게도 이미 죽은 백노야를 닮 고 있었다. 진소유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알아차리지 못 한 것이었다. 사실 이 나한상들은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어떻게 얼마전에 죽은 백노야의 얼굴이 조각될 수가 있겠는가? 진소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그 나한상은 설마하니 얼마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인가 요?" 백방생은 가볍게 미소했다. "낭자는 정말 총명하구려. 그렇소,이 하나는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실 상 다른 것들과는 다르오." 백방생은 자신이 들고 있는 나한상의 아랫부분을 보여주며 부연했다. "여기에는 이것을 제작한 금포(金鋪)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데, 아마 다른 것들에는 없을 것이오. 이것은 일부러 오래묵은 것처럼 교묘 하게 만든 가짜이오." 진소유가 다른 것들을 들어서 조사해 보니 그것은 정말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차이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아서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진소유는 더욱 어리둥절한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보물이라는 오백나한 상 가운데 가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 까?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대인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인 등도 이 순간 크게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대 인은 합장을 하더니 대답했다. "아미타불, 그것은 우리들도 처음으로 대하는 것이오. 백시주께서는 그 러니까 그것이 백노시주께서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고 생 각하시오?" 백방생은 이제는 안색이 다소 평온해진 모습이었다. 다만 눈가의 그늘 이 더욱 짙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의 조부님이나 여러분들 모두가 그 가운데의 어느 하나 라도 잃어버릴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마도 저의 조부님 이 일부러 당신의 모습을 조각하게 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진소유는 말했다. "그럼 바로 그 나한상이 유산을 찾는 열쇠라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내 생각에는 음, 조부님은 나에게 재산을 좀 더 물려주시기 위해 이 런 방법을 쓰신 것 같소." 진소유는 말했다. "그럼 그 유산은 어떻게 찾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간단하오. 즉, 조부님은 이 오백나한상이 소림사에 안전하게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하셨소. 그런데지금 분명히 하나가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오? 우리가 그 진짜를 찾는다면 자연 유산은 어디에 있는 지 알게 될 것이오." (정말 간단하기도 하겠군!) 진소유는 백방생이 이내 모든 것을 알아버린 듯이 말하는 것을 보고 다소 의아해 했다. 그녀는 말했다. "그럼 그 진짜는 어디에 가서 찾으면 되죠?" 백방생은 말했다. "내가 조금전에 말했지만, 이 나한상의 밑바닥에는 제작한 금포의 이 름이 새겨져 있소. 필시 이 가짜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짜를 보여주었을 것이므로 아마 그곳에 가면 찾을 수가 있게 될 것이오." 진소유가 살펴보니 그 나한상의 밑바닥에 새겨져 있는 금포의 이름 은 대보(大寶)였다. 진소유는 다시 말했다. "당신은 그 곳의 위치를 알고 있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이 성안의 지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오. 그러나 언젠가 그 이름은 한번 들은 것 같소. 우리가 지금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물 어보면 이내 찾아갈 수가 있을 것이오." 일행의 목적은 오백나한상을 안전하게 운송하는데 있으므로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없어진 이상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의와 대지, 대신은 여전히 객방에 남아서 오백나한상을 지키기로 하 고 대인과 대례는 진소유 백방생과 함께 즉시 진짜 나한상을 찾으러 나 섰다. 과연 백방생의 말대로 그 대보금포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일이 너무나도 간단했기 때문에 진소유는 혹시나 백방생이 미리 알 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금포는 남쪽 번화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규모도 크지만 역사도 매우 오래된 것 같았다. 일행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한밤중이어서 점포가 문을 닫은 상태였는데, 대례가 다가가서 문을 두 드리자 이윽고 한 명의 허약해 보이는 체구의 사내가 어슬렁거리며 다 가왔다. "무슨 일들이십니까?" 그 사내는 다리도 한쪽을 약간 저는 것 같았는데 인상은 그리 험악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점포의 옆에 붙어 있는 작은 건물의 안에서 걸어 나온 것이었다. 진소유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당신은 이 금포에서 일하는 사람인가요?" 사내는 느닷없이 한밤중에 웬 절색의 가인을 만나게 되자 절로 눈이 휘둥그래 졌지만 이내 말했다. "소인이야 물론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입죠. 여러분들은 금포에 볼일이 있어서 찾아오신 것입니까?" 사내는 나타난 사람들의 기질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는지 처 음부터 매우 공손한 자세였다. 일행은 그러한 사람을 대하게되자 일단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사내의 말은 그대로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실상 금포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까 그가 나온 그 작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곳은 바로 온갖 금은보석들을 조각하고 세공하는 장소로서, 사내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온 기술자인 셈이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진소유가 내민 그 나한상을 보자 대뜸 알아보고 반색하는 표정 을 지었다. "아, 여러분은 바로 백노야의 장원에서 오셨군요?" 일행으로서는 그야말로 운좋게도 아주 빠르게 적당한 사람을 만난 셈 이었다. "당신은 그럼 이것에 관해서 알고 있나요?" 진소유의 질문에 사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죠. 그것은 바로 소인이 만든 것인데 왜 소인이 모르겠습니까 요. 그렇지 않아도 여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 어서 소인을 따라 오십 시오." 일행은 일이 이렇게 쉽게 풀려나가자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들이 되었다. 백방생은 마차에서 내려서 대인과 대례가 들어주는 들것을 타 고 진소유와 함께 사내의 뒤를 따라 그 작은 건물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혹시 알 수 없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 가면서 주위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는 보기보 다 성격이 소탈하여 그렇게 무슨 암계를 꾸밀 것 같지가 않았다. 사내는 작고 밀폐된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튼튼한 금고의 안에서 두 개의 물건을 꺼냈다. 그것들은 바로 다른 두 개의 나한상들이었다. 일행은 여기에서 다시 다 른 두 개의 나한상들을 보게 되자 다소 놀랐다. 사내는 얼른 금고의 문 을 닫고 나서 말했다. "본래 이런 곳에는 값비싼 물건들을 두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소인 은 특별히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매일 도둑이 들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이제 물건들을 무사히 돌려 드리게 되어 다행입니 다." 사내가 들고 있는 두 개의 나한상들은 진소유가 가지고 있는 것과 하나 는 얼굴이 달랐고 다른 하나는 몸체의 형상이 달랐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다른 나한상이야말로 진짜 나한상임이 분명했다. 진소유는 그 사내가 그 두개의 나한상들을 서슴없이 자신에게 건네주는 것을 보고 약간 의아해 져서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우리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그런 것들을 줘도 되나 요?" 사내는 오히려 다소 어리둥절해 하다가 대답했다. "소인이 백노야께 들은 바로는 그저 그 소인이 만든 나한상만 가져오면 이 물건들을 드리라고 했습니다요. 소인은 오직 그 말씀대로 하는 것입 죠. 소인은 원래부터가 병신이기 때문에 감히 남의 것을 훔칠 엄두는 내지 못합니다요. 그래서 소인이 그래도 이 자리에서 오래 버티고 있는 것입죠." 사내의 어조는 정직해 보였다. 그는 오히려 진소유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줄로 아는 모양이었다. 진소유는 다시 말했다. "백노야는 그 외에 또 무슨 말들을 했죠?" 사내는 그 두가지의 물건을 진소유에게 넘겨준 다음에 대답했다. "본래 소인이 먼저 그 나한상을 백노야의 주문대로 만들었습죠. 그런 데 그것이 끝나자 백노야께서는 다시 한개의 나한상을 더 만들라고 했습니다요. 그러니까, 먼저의 그 나한상은 몸통이 너무 쉽게 열리기 때문에 특별히 그곳에 자물쇠를 만들라고 했습죠." 알고보니 두번째의 가짜 나한상에는 배꼽에 하나의 금열쇠가 꽂혀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실로 엉뚱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백노야는 어째서 그 나한상에 자물쇠를 만들라고 했던 것일까? 일행이 사내에게서 들은 얘기는 그 외에는 별로 없었다. 백노야는 사내에게 이미 많은 대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그가 모든 것을 만들고 관리하는데 정성을 다했었다는 내용 정도였다. 일행은 어쨌든 진짜 나한상을 되찾았기 때문에 다시 예의 그 객점으로 돌아왔다. 진소유는 백방생이 침상위에 눕기를 기다려 다시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그것에 유산에 대한 단서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달마오수는 아직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시각은 이미 자정에 가까와지고 있는 상태였다. 백방생은 그 두번째의 가짜 나한상 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대답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소. 조부님께서는 아마도 나에게 어떤 암시를 주시고자 하신 모양이오." 진소유는 다소 어리둥절해 졌다. "대체 어떤 암시를 주셨다는 것이죠?" 백방생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듯 하다가 말했다. "과거에, 한때는 나와 조부님의 사이가 제법 좋았던 시절이 있었소. 당시 어느 날, 조부님께서는 나를 부르시더니 어디로 함께 가자고 하 시는 것이었소. 그래서 부근에 있는 어느 사찰에 따라갔는데, 거기에는 이제 마악 만들어 놓은 커다란 돌부처의 상이 있었소.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조부님께서 사찰에 헌납하신 것이라고 하셨었소." 진소유는 말했다. "그 사찰의 이름은 뭐죠?" 백방생은 말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백운사(白蕓寺)였던 것 같소." 진소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나한상들은 바로 그 불상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군요. 헌데 그렇다면 열쇠와 자물쇠는 또 뭐죠?" 백방생은 말했다. "이전에 조부님께서는 장원에서 저 오백나한상을 꺼낼 때 열쇠를 사 용하셨던 적이 있었소." 진소유는 순간 깨달은 듯 외쳤다. "좋아요. 그럼 우리 즉시 그곳으로 다시 나가보도록 해요!" 백방생의 기억력은 아주 정확했다. 복주성의 서쪽 변두리 지역에 분 명히 백운사라는 작은 절이 하나 있었고 또한 그 절의 내부에 만들어진 지 이미 오래된 커다란 석불상이 하나 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대인과 대례는 백방생을 마차에 태워가지고 진소유 와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 그 석불상은 쉽게 찾아낼 수가 있었다. 마침 마악 자정을 넘긴 시각이 어서 사찰의 내부는 아주 어둡고 조용했다. 대인과 대례는 역시 마찬가지로 들것에 백방생을 태워가지고 진소유 와 함께 사찰의 담을 넘어서 조심스럽게 석불상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 은 본래 승려인데도 지금 남의 사찰의 담을 넘어 들어간 셈이었다. 석불상은 다소 낡아버린 듯 했으나 왠지 친근한 느낌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진소유는 백방생이 석불상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급히 전음으로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석불상의 몸체가 컸기 때문에 배꼽도 거의 주먹만해 보였다. 진소유는 나한상에서 뽑아든 열쇠를 들고 석불상을 살폈으나 금방 자물쇠가 있 을 만한 곳이 발견되지 않았다.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찾았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이어가짜나한상하나를들어머리부터배꼽속으로들이밀자순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나한상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진소유 등은 그것을 보고 다소 놀랐다. 설마하니 그 나한상 자체가 열쇠가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석불상은 나한상 하나가 들어갔는데도 전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백방생이 두번째의 가짜 나한상을 안으로 들이밀자 순간 철컥철컥, 하 는 가벼운 소음과 함께 석불상의 배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정교하기 짝이 없는 기관장치였다. 백노야는 대체 언제 이러한 장치를 해 놓았을까? 진소유는 그보다도 사실 백방생이 어떻게 이러한 모든 일을 쉽게 파악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것에 더욱 의문이 컸 다. 이윽고 기관장치가 모두 열리자 그 안에 작은 가방 하나가 들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백방생은 그것을 집어들었는데 생각보다 그것은 매우 가벼웠다. 백방생 은 그 외에 다른 물건이 전혀 없음을 알고 석불상의 배를 다시 닫았다. 이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석불상의 배는 흔적도 없이 잘 닫혀졌고 그러나 반면에 안으로 들어간 가짜나한상들은 나오지 않았다. 백방생은 이제 그 기관장치가 스스로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두개의 나한상도 이미 깊이 들어가 버려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마치 백노야의 살아있을 적의 고집을 보여주는 듯 했다. (사람들은 이 석불상의 배가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설마하니 그 아래 에 또한 황금이 스무냥이나 들어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하겠지!) 이미 목적을 달성하였으므로 일행은 즉시 다시 객점으로 향했다. 일단 어두운 상황에서는 가방안의 내용물을 살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객방에서 오백나한상을 지키고 있던 그 달마오수의 세 사람도 돌아온 일행의 얘기를 듣고는 저마다 약간씩 흥분하는 표정들이었다. "어서 그 가방을 열어봐요!" 백방생이 미처 침상위에 앉기도 전에 진소유가 궁금증을 참을수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백방생은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즉시 가방의 뚜껑을 열었다. 가방의 뚜껑을 여는 것은 평범하여 어렵지 않았다.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서는 하나의 서찰과 여러개의 다발로 묶여져 있는 금표들이 나타났 다. "과연 엄청난 돈이 있구나!" 진소유는 그만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백냥짜리 금표가 백장의 묶음으 로 열 개나 있었는데, 그 액수는 물경 황금 십만 냥에 달했기 때문이었 다. 이전에 백귀현이 받은 유산도 그보다는 많지 않았다. 백방생은 즉시 그 서찰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백노 야 백행치가 그에게 보내는 서찰이었다. <나는 이 재산이 생아, 너에게 전해지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만일 인 연이 닿지 않는다면 할 수가 없으리라. 능력도 없는 몸으로 지나치게 많 은 재산을 지니게 된다면 필시 그 화가 몸에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러한 나의 고충을 이해해라....> 서찰의 글귀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처음에는 몇마디의 사소한 얘기들만이 거론되는 듯 하더니 나중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한가지의 얘기를 담고 있었다. <... 하지만 이 한가지의 사실만은 가르쳐 주고 싶구나. 네가 만일 이 서찰을 보지 못한다면 그 사실은 거의 미궁속으로 묻혀 버리고 말겠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오백나한상에 관한 것이다. 오백나한상은 내가 우 연히 입수한 것이라고 했지만 기실은 그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황금충 (黃金蟲)의 재산을 찾을 수가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 황금충은 우리의 조상이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어쨌 든 내가 그 오백나한상을 물려받게 되어 평생동안 연구를 해 보았지만 결국에는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네 아비에게 그것을 전하 려고 했으나 그가 받지 않으므로 결국 그것을 소림사로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네가 가능하면 그 비밀을 풀어서....> 백방생은 서찰을 모두 읽고 나자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진소유에게 물었다. "황금충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요?" 진소유와 달마오수는 이순간 크게 어리벙벙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진소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도 아직 몰라요? 그는 중원의 부자들 가운데 가장 전설적인 인물 이었는데." 백방생은 말했다. "전설적이었다고? 그럼 그의 재산이 그렇게도 많았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의 재산은 너무나도 많아서 만일 황금으로 계산한다 면 산을 만들 수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천하제일의 부자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고금제일(古今第一)의 부자라고 말하기도 해요. 이런 얘기도 아직 당신이 모르고 있었다니 알 만 하군요."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럼 그가 그렇게 많은 재산을 남겼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황금충에 관한 얘기는 그밖에는 모두 의문속에 묻혀 있어요. 그는 백년 전쯤에 갑자기 사라졌다는데, 대체 그의 재산도 어디로 가버렸는 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헌데, 그가 당신의 조상이었을 지도 모른다니 그것은 정말 뜻밖이로군요. 게다가...." 말끝을 흐리면서 진소유는 한쪽에 놓여 있는 오백나한상을 가리켰다. 그것은 물론 그녀의 말하지 않은 내용을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백방생이 고개를 돌려보니 달마오수도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만일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아마도 한차례의 거대한 혈겁(血劫)이 휘몰아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무림인들이 돈에 초연하다고 해도 그러한 것에는 필시 목숨을 걸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지금 이곳에서 그러한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백방생을 제외하고는 불문의 승려들이거나 혹은 비구니가 되 기를 소망하는 여자였다. 백방생은 그들이 서찰을 한차례 읽어 볼 수 있도록 한 다음에 이윽 고 그것을 촛불에 태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백방생은 작은 가방을 챙기며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야말로 여기에 있는 상속받은 유산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오. 그 황금충에 관한 일은 솔직히 믿을 수도 없지만, 일단 묻 어두고 오백나한상을 여전히 소림사로보내기로 합시다. 만일 나중에 복이 많은 사람이 있다면 혹시 절로 그 비밀을 풀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소?" 13 장 신병이기(神兵利器) 진소유도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 황금충의 얘기는 너무나도 현실에 맞지 않고 황당하다고 생각 하고 있는 중이예요." 이윽고 잠시 후에 달마오수는 그 오백나한상이 들어 있는 가방들을 들고 옆의 객방으로 쉬러 갔고, 진소유는 그대로 남았다. 백방생은 물었다. "당신은 쉬러 가지 않으시오?" 진소유는 말했다. "사실 지금 이곳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보물들과 금전들이 가득 쌓여있 는 상태예요. 당신이라면 쉽게 잠이 오겠어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여기에서 밤을 지샐 작정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가장 큰 보물은 역시 오백나한상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달마 오수가 지키고 있으니, 저는 아무래도 당신의 그 새로 찾은 유산이나 지 키도록 해야겠어요. 황금십만냥이 무슨 장난인줄 아나요?" 백방생은 진소유의 손에 여전히 예의 그 황금열쇠가 들려져 있는 것 을 문득 보았다. 그것은 물론 바로 다름아닌 그 가짜 나한상의 배에 꽂 혀있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가볍게 고소하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 내가 불구자이기 때문에 어떤 소문이 나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로군." 진소유는 역시 웃으며 대꾸했다. "그걸 그렇게 지금 꼭 말로 해야만 하겠어요?" 다소 피로한 기색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진소유는 정말로 밤새도 록 백방생의 옆에서 그와 그의 재산을 지켜주었다. 무학이 이미 상승경지 에 이르러 있기 때문에 물론 며칠밤을 지샌다고 해도 몸에 그다지 커다 란 지장은 없는 그녀였다. 다음날 아침, 무사히 하룻밤을 보낸 그들 일곱명의 일행은 예정대로 서 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서 소림본사가 있는 하남성(河南省)을 향해 즉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진소유가 했던 말 그대로, 엄청나게 많은 돈과 보물들이 실려있는 상태 였기 때문에 설사 달마오수라고 해도 물론 이 일에 추호도 안일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부담이 너무 많아서 가능하다면 하루빨리 이 일을 끝마 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워낙에 중환자인 백방생이 타고 있었 기 때문에 마차를 급하게 몰아갈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마차의 속도는 느렸지만 그러나 도중에 변변히 쉬지도 못했다. 강물을 따라서 하루종일 나아가자 일행은 저녁 무렵에 어느덧 하나의 작은 읍 성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읍성은 규모는 비록 작았지만 복주성과 가깝기 때문인지 요식업이 나 상업 등이 발달하여 제법 번화해 보였다. 일행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에는 이미 날이 상당히 어두워져 있는 상태였다. 길거리는 번화해 보였지 만 그래서인지 오가는 행인들은 별로 없었다. 일행은 곧장 하룻밤을 쉬어갈 객점을 구했다. 헌데 느닷없이 한가지의 뜻밖의 일을 당하게 되었다. 유달리 객점 등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일 행은 당연히 쉽게 객점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상하게도 성내의 모든 객점들이 이미 거의 다 투숙객들로 만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읍성은 비록 번화한 구석은 있지만 그러나 별로 대단해 보이는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느닷없이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묵고 있었다니 이 어찌 범상한 일이겠는가? 이미 무수한 사건들을 겪었고 또한 자신들의 일에 긴장을 하고 있던 일행은 그만 그것을 보고 왠지 흠칫한 기분이 들어서 절로 경각심을 가 지게 되었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재보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 처럼 몰려든 것이라면 그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인 것이었 다. 한참동안 성안을 뒤지던 일행은 문득 그렇다면 성밖의 시골농가를 찾아가서 하룻밤을 쉬어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 지만 역시 무슨 일인지 확인도 해 보기 전에 겁부터 낸다는 것은 현명 하지 못한 처사인 것이었다. 우선 식사부터 하면서 분명한 사실을 조사해 볼 생각으로 일행은 일단 성안에서 가장 큰 네거리에 있는 한 반점으로 들어갔다. 그 반점의 이 름은 황룡반점(黃龍飯店)이었는데 이층과 삼층에는 객방들을 꾸며 놓아 서 객점을 겸하고 있었다. 반점에 직접 들어간 사람들은 대인과 대지였다. 백방생의 몸이 불편하 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주위를 정탐한 다음 음식을 싸가지고 나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갔던 대인과 대지 는 식사도 하지 않고 이내 그냥 나왔다. 그것은 반점이 이미 영업을 끝냈 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객방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어이없고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까 실은 일행 은 이 황룡반점에 와 보지 않았다. 가장 커다란 객점이니 당연히 역 시 만원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작 그와 같은 객점이 아직 비어 있다니 그것은 실로 엉뚱한 일이 아닐 수 가 없었다. "혹시 여기의 숙박료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 아닐까?" 대례가 한마디를 던졌다. 달마오수는 대부분 묵묵한 성격들이었지만 그 래도 그 가운데에서 대례는 다소 말을 하는 편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시주?" 대인이 백방생에게 물었다. 어쨌든 이번 일의 책임자는 백방생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하루종일 마차안에서 시달리고 나자 지금은 상태가 더욱 악화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도중에 심하게 더위를 먹었을 뿐만 아니라 멀미까지 했다. 비록 거의 녹초가 되어 말할 기운도 없었지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으므로 억지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면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객방이 남아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일단은 거기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모든 일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소림사로 가는 길은 실상 멀고도 험란한 여정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만일 벌써부터 무리를 하여 중병이 나거나 한다면 어떻게 거기까지 무 사히 갈 수가 있겠는가? 달마오수로서는 안전위주로 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러나 백방생의 말을 차마 반박할 수가 없는 듯 그들은 이내 모두 수긍하는 표정을 보 였다. 대인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어서 마차를 저 객점의 안으로 몰아야 하겠군요, 아미타불! " 마차를 황룡반점의 안으로 몰고 들어가자 점원들이 달려나와 즉시 일행을 맞이하고 일을 거들었다. 대의와 대신은 들것에 백방생을 태웠으 며 나머지는 가방들과 간단한 짐들을 챙겼다. 한명의 점원이 마차를 뒷마당쪽으로 옮겨가자 다른 한명의 점원은 눈치 빠르게 얼른 일행을 안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객방들은 이층이나 삼층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 일행은 주루 겸 반점으 로 사용되고 있는 일층을 거쳐야 했다. 주루의 입구쪽에는 커다란 계산대 가 있었는데 대인은 즉시 그곳으로 가서 객방들을 빌렸다. 백방생은 여 전히 들것위에 누운 채로 그 사이에 천천히 주루의 내부를 둘러볼 수가 있었다. 이미 주루의 영업을 끝냈기 때문일까? 실내는 아주 조용한 편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썰렁한 적막감마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 만 거기에 이상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이미 영업이 끝났다고 하는 이 실내에 등불들은 여전히 환하게 밝혀져 있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또한 한쪽의 구석진 자리에 아직 술 을 마시고 있는 손님들도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명의 노인과 두 명의 젊은 남녀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그 노인이었다. 두 명의 젊은 남녀들은 그 옆에 각기 서있었다. 백방생은 그 술을 마시고 있는 노인의 태도와 행색이 왠지 심상치 않아 보여서 문득 내심으로 생각했다. (저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우리를 노리고 찾아온 사람들이라면 혹시 백귀현이 보낸 사람들이 아닐까? 아니 그렇지 않다면 세외팔세 중에서 보내온 사람들일 지도 모르지. 게다가 그것도 아니라면....) 백방생은 우선 이렇게라도 일단 마차를 벗어나고 보니 그래도 답답 했던 가슴이 다소 트이는 것 같았다. 만일 지금과 같은 상황만 아니었 다면 그는 좀더 이곳 주루에 머물고 싶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제 객방으로 들어가면 침상위에 갇히는 듯한 신세가 될 것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라고 해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좋아 할 리는 없는 것이다. 백방생은 약간 긴장을 하여 그 세사람의 동태를 살피며 그들이 지금 습격해올 기미가 있는 지를 살폈다. 다행히도 그들 은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일행을 향해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이윽고 대인이 돌아오자 일행은 아까의 그 점원의 인도에 따라 빌린 객방들이 있는 이층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그들 삼인의 손님들이 일행이 계단으로 올라서고 있는데도 역시 무관심한 척한 것을 보고 다소 안도의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그러 나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그들의 동태를 계속 은근하게 주시했다. 만약 지금 사건이 벌어져서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다면 백방생으로서는 약간 면목이 서지 않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건은 그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부터 벌어 졌다. 느닷없이 계단 윗쪽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려와서 고개를 돌린 백방 생은 문득 깜짝 놀랐다. 갑자기 의외에도 계단 윗쪽에 수십명의 사람들 이 나타나서 길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실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가 청색의 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하나같 이 가슴팍에 초승달의 모양을 수놓고 있었는데, 역시 특이하게도 허리춤 에 똑같이 한자루씩의 만도(彎刀)를 차고 있었다. 그들은 필시 모두가 한 문파의 패거리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의 인상은 하나같이 험악했고 두 눈에서 제각기 칼날처럼 날카로운 살광(殺光)을 흉흉하게 일으키고 있었 다. 만일 달마오수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상대는 오금이 저리고 말았을 것이다. 백방생도 일시 놀라서 안색이 다 창백해 졌다. 문득 그의 귓전으로 다소 경직된 듯한 진소유의 전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바로 반월문(半月門)의 사람들이니 조심해요!) 백방생은 그말에 문득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거의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운 판국에 어떻게 저들의 칼날아래 몸을 조 심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진소유의 말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 만 백방생은 절로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상대방의 숫자가 많으므로 아무래도 일장의 도살극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달마오수는 과연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 고 그를 구하려고 할까? 하긴 처지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대로 죽는다 고 해도 아까울 것은 없으리라는 생각까지 백방생은 해 보았다. 청의인들, 즉 반월문의 사람들은 일시 주춤하는 듯 하다가 이내 서서히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은 비록 넓고 길었지만 그들은 결국 마주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백방생도 언젠가 그 반월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반월문은 바로 다름아닌 이곳 복건성을 주름잡고 횡행하는 거대한 녹림흑도(綠 林黑道)의 단체였기 때문이다. 듣자니 그 반월문은 천하를 지배하는 녹림맹(綠林盟)의 복건성지부라는 말까지 있었다. 게다가 그 문주인 현 월(玄月)이라는 사람은 무공이 이미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했다. 쌍방의 거리가 점차로 가까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달마오수는 가볍게 안색을 굳히는듯 했고 진소유도 얼른 백방생의 곁으로 다가왔다. 유사시 를 대비하여 전신의 공력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주위의 공기 가 팽팽한 긴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헌데 그 때의 일이었다. 실로 느닷없는 일이 발생했다. 금방이라도 덤 벼들 것처럼 보였던 그들 청의인들이 갑자기 일행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서더니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차가운 기색으로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 었다. "웬 놈들인데 감히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냐? 즉시 개죽 음을 당하지 못해서 환장이라도 했단 말이냐?" 그것은 실로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바싹 긴장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맥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이없게 도 지금 이들은 일행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일부러 꾸밀 수도 있겠지만, 일행은 한눈에 그것을 알아차렸다. 이러한 현실을 누가 감히 예상이나 했었겠는가?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결과는 일행에게 다시없이 좋은 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다소 맥이 빠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안도의 마음이었다. 그 앞장선 청의사내의 말은 사뭇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일행 은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마치 커다란 구원자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행여 무슨 사건이 정말로 벌어질까 두려워하며 일행은 즉시 한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열어 주었다. 그 사이로 수십명의 청의인들이 이내 내 려갔는데, 일행은 그 순간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하여 절로 정신 이 아찔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윽고 청의인들은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 살벌한 눈빛들과 함께 제각 기 그 만도를 소리내어 뽑아들었다. 만도는 초승달의 모양으로 칼날이 둥그레한 것인데, 그것은 그들의 가슴에 수놓아진 모양과 흡사했다. 필 시 그들 문파의 독특한 병기임이 틀림없었다. 백방생은 그들이 아래쪽에서 병기를 뽑아들자 혹시 그들이 계교를 부려 서 일행을 아래 위로 공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경계했다. 그러나 위 를 올려다 보아도 이층에서 다시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게다가 그 청의인들은 계속해서 다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방향은 주루의 구석진 곳이었다. 백방생은 그제 서야 한가지의 사실을 깨달았다. 알고보니 그 청의인들의 목표는 바로 아까 그 주루에 남아 있던 세 명의 사람들이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일행은 갑자기 그런 뜻밖의 엉뚱한 일을 당하게 되자 그만 어리둥절해 져서 잠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멈추고 그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청의인들은 이내 그 한명의 노인과 두명의 남녀의 주위를 둥글게 에워 싸 버렸다. 청의인들이 뽑아들고 있는 만도의 칼날이 불빛에 반사되자 일순 그 살벌한 기운이 실내를 가득 메우는 것 같았다. (여기에 무슨 다른 사건이라도 있단 말인가?) 백방생은 자연히 다시 한번 그 세사람의 행색을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지금 그 세 사람은 청의인들의 살벌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연한 기색을 바꾸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일면 미묘한 상황의 분위기 를 느끼게 했다.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는 노인은 얼핏 보기에 그다지 특색이 느껴지 지 않는 사람이었다. 체격도 왜소하고 다소 마른 편이었으며 안색도 누렇 게 그을려 보여서 흡사 시골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촌로(村老)와도 같 았다.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해서 나이를 추측하기 어렵지만, 보아하니 그 눈빛마저도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잠시 여러가지의 상황을 종합해 본다면 이내 그를 일개 촌노 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우선 지금의 살벌한 상황에서 조금도 위축을 받지 않는다는 점 이외에도 최소한 그가 마시고 있는 술 에 대해서 생각해 보더라도 그렇다. 그는 비록 천천히 마시고 있기는 하 지만 꾸준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아직 얼굴에 전혀 술에 취한 기색이 없다는 것이다. 백방생은 그 노인이 과연 누구일까 하고 생각해 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강호사정에 어두운 그는 비록 설명을 듣는다고 해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남은 두 명의 남녀는 바로 다름아닌 그 노인의 시종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시종 매우 공손하게 좌우에서 시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히 옆자리에도 앉지 못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각기 푸르고 붉은 옷을 걸치고 있는 그 두사람의 용모를 살 피다가 이내 다소 흠칫했다. 그들의 용모에서는 분명하게 무공을 연성한 기질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낮지 않은 수준의 경지일 것이었 다. 일행을 안내하던 점원은 이미 혼비백산하여 달아난지 오래였다. 백방 생도 빨리 이층으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그러나 보다 분명한 상황을 파 악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노인이 이윽고 술병을 기울여 그 속에 남은 술을 모두 술잔에 따르는 것을 보고 백방생은 이제 곧 바야흐로 사건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 각했다. 이제 그 노인이 그 술잔속의 술을 마시고 나면 뭔가 행동을 취할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백방생의 그러한 예측을 깨고 다시 주루의 입구와 후 문쪽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려오더니 일단의 청의인들이 한꺼번에 주루 의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 청의인들의 차림새는 이미 있던 사람들과 조 금도 다르지 않았다. 즉 같은 패거리들인 것이 분명했다. 백방생은 그 청의인들이 힘이 부족하여 같은 패거리들이 원조를 온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원조자들이 도착하자 오히려 전의 청의인들은 포위망을 풀더니 나중의 청의인들과 함께 보다 널찍한 포위망을 형성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루의 사방은 백여명의 청의인들로 인해 가득 메워졌고 단 지 중앙부위만이 널찍하게 빈 공간이 남았다. 백방생은 그 노인에 대해 서도 알 수가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이 반월문의 사람들이라는 청의인 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노인을 치려는 것인지 아니면 보호하려는 것인지 쉽게 판 단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문득 그들 가운데 혹시 반월문주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은근히 살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마치 그러한 백방생의 궁금증을 해소 시켜 주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그 노인의 옆에서 청의사내가 날카로운 어조로 이렇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현월(玄月) 혁련휘(赫連輝)! 네놈 따위가 감히 이렇게 우리 어르신네의 위엄을 거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이냐?" 현월이라면 바로 반월문주를 말하는 것이므로 쉽게 그 사람도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감히 그렇 게 소리칠 수 있는 청의사내는 대체 얼마만한 배경이 있기에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일까? 청의사내의 나이는 삼십대 후반으로 보였고 용모는 호리호리하며 아주 말쑥해 보였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청의사내의 그 말이 떨어지자 느닷없이 청의인 들 가운데에서 한 명의 청의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이는 칠십대 로 보였는데 체구가 여전히 건장했고 가슴팍에는 유난히 돋보이는 황 금색의 커다란 초승달을 수놓고 있었다. 그는 역시 한자루의 만도를 허리에 차고 아직 뽑지는 않은 상태였는데 그 사각진 커다란 턱밑에는 이미 허옇게 세어버린 구레나룻이 가득했다. 백방생은 그의 기도나 용모가 청의인들 가운데에서 출중한 점 등을 생각해 보며 문득 내심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하다는 현월이라는 말인가?) 사실 백방생의 그러한 예측은 바로 들어맞았다. 헌데 그렇다면 그 반 월문이라는 녹림흑도집단의 괴수는 어째서 갑자기 이 객점에 나타나게 된 것일까? 청의사내의 언사는 사실 매우 무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청의노인은 마치 그러한 것을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곧장 노인을 바라보더니 정 중히 포권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손선배님, 불초 혁련휘가 삼가 선배님께 문안인사를 올리는 바입니 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노인은 혁련휘가 다가왔는데도 역시 전혀 못본척하며 남은 술을 들이키 고 있었다. 대신 그 옆에 서있던 홍의여인이 입을 열어 말했다. "혁련휘! 당신은 근래들어 갈수록 대담해지기만 하는군요?" 홍의여인의 나이는 청의사내와 비슷하였고 체구는 호리호리 하였는데 얼굴에는 사뭇 요염하고 차가운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백방생은 혁련휘가 처음부터 너무나도 저자세였기 때문에 혹시 그가 아닌가 하고 의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헌데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되자, 대체 혁련휘에게 그토록 깍듯한 예의를 받는 저 노인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다시 들었다. 혁련휘는 이번에는 홍의여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혈요(血妖), 노부는 손선배님께 한가지 부탁을 드리려는 것이지 결코 무례한 짓을 하려던 것은 아니네." 그말에 문득 혈요라고 불리운 홍의여인의 두눈에 기이한 광망이 떠올 랐다. 그녀는 한차례 요염한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부탁이라고요? 그건 대체 어떤 부탁이죠?" 헌데 그 순간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혈요의 신형이 갑자기 흐릿하게 변 하는 듯 하더니 홀연 한줄기의 붉은 그림자로 향하여 바깥쪽으로 날아 가는 것이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매우 신속하고도 환상적이었다. 눈앞에 홍영(紅影)이 어른거린다고 느껴진 순간 그녀의 신형은 어느새 포위한 청의인들의 면전에 도달해 있었고, 또한 그보다 약간 앞서서 이미 그녀의 허리춤에 서 한줄기의 검은 기운이 흡사 뱀의 혓바닥처럼 청의인들의 목줄을 휘감 아 가고 있었다. "으악!" 느닷없이 여러마디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며 주루의 바닥에 선혈들이 질펀하게 튀기 시작했다. 그녀의 허리춤에서 발출된 것은 바로 하나의 작은 채찍이었다. 아까 그녀는 일단 요염하게 웃으며 상대의 긴장을 늦추어 놓은 다음에 날벼락같이 출수했다. 청의인들은 비록 거의 칼을 뽑아들고 있었지만 조 금도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기실 가장 중요한 것은 혈요의 무 공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신법에도 능했기 때문에 짧은 순간에 이미 대여섯명이나 되 는 청의인들을 살상했다. 드디어 장내에는 살벌한 피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일행은 상황이 점차 살벌해지는 것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그 렇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에서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지금의 상황을 분명히 파악해야 무엇이라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의인들이 크게 경악하여 저마다 만도를 휘두르며 반격하려고 했을 때는 어느새 혈요는 다시 아까의 그 자리로 채찍을 거두고 돌아가 있었 다. 그야말로 목이 잘려나가거나 팔다리가 끊어진 청의인들이 보이지 않았다면 마치 착각처럼 느껴질 만큼 현란하고 감쪽같은 몸동작이었 다. 혈요는 이어 자신의 작품을 한차례 돌아보더니 다시 혁련휘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우리가 허수아비인줄 아나요?" (여우같은 년!) 혁련휘는 혈요의 급작스런 악랄한 공격에 내심 이를 갈았지만 이내 표 정을 바꾸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물론 그대는 조금도 허수아비가 아니지. 그래서 노부가 이미 무례를 범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닌가?" 혈요는 교태로운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당신은 말은 제법 번드르르 하군요. 그렇다면 대체 지금 저 쓸모없는 졸개들을 모조리 끌고온 이유는 뭐죠?" 반월문의 무리들은 자신들을 쓸모없는 졸개들이라고 욕한 사실에 화가 나서 저마다 두 눈에 살광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조금전의 그녀의 무공 을 상기하며 누구도 감히 쉽게 발작하지 못했다. 혁련휘는 음침하게 웃으며 노인을 한차례 주시한 뒤에 말했다. "그것은 흐흐, 나로서도 고충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네. 나는 오직 손선배님께서 나의 부탁을 들어주시기를 바랄 뿐이지." 이에 그 청의사내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렇다면 그 부탁이란 대체 무엇이냐?" 혁련휘는 청의사내의 무례한 언사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은근히 노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건 바로, 손선배님께서 한가지의 일을 양해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지." 순간의 일이었다. 청의사내가 갑자기 번개처럼 날아서 혁련휘를 향해 공격해 갔다. 그의 두손에는 어느새 날이 새파란 두 자루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세상에 병기는 많지만 이렇게 아주 짧은 병기인 단검을 사용하는 예는 그다지 흔하지 않다. 그것은 짧은 단검으로 긴 장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도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연 확실히 청의사내의 무공은 혈요보다도 다소 월등해 보였다. 그는 두개의 단검을 양손으로 휘두르며 덤벼들었으며 그 순간 마치 삼사십개 의 단검이 한꺼번에 혁련휘를 공격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그것은 물론 그의 손놀림이 그만큼 빠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말하자면 하나의 단검의 환영은 곧 하나의 검초식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실 혁련휘의 무공도 그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청의사내의 단 검이 덮쳐드는 순간 역시 그의 양손도 비슷한 숫자로 늘어났다. 그의 양손은 일일이 청의사내의 단검과 마주치고 있었는데 그 순간에서의 확실한 변화는 너무도 빨라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맨손으로 병기 를 들고 있는 청의사내의 공격을 받아내는 혁련휘의 무공은 그보다 확 실히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청의사내는 자신이 병 장기를 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격분하여 공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러자 마침내 혁련휘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는 듯 천천히 뒤로 한발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헌데 그 때였다. 이제까지 묵묵히 아무런 말도 없던 노인이 느닷없이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옥사(玉蛇), 이제 그만 물러서라. 너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청의사내의 명호가 바로 옥사인 모양이었다. 옥사는 즉시 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뒤로 물러나서 손을 거두고 노인의 곁으로 돌아갔다. 혁련휘는 노인이 모처럼 입을 열었기 때문에 다소 긴장하여 노인의 얼굴을 바라 보고 있었다. 노인은 문득 혁련휘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나의 이 물건을 갖고 싶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무심코 노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두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알고보니 노인의 앞 탁자위에는 술병 이외에도 한 개의 길쭉한 보따리가 올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보따리는 보자기를 둘둘 말아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그 크기는 장검과 흡사했다. 게다가 보아하니 많은 청의인들의 시선이 은연중 그 길쭉한 물건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그들의 시선에 어떤 탐욕의 빛이 어려있다는 것을 알고 문득 생각했다. (대체 저것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이 저토록 욕심내고 있는 것일까? 보아하니 그렇다면 저들은 모두 저것 때문에 이런 사건을 일으키고 있 는 모양이다.) 일단 자신의 일행과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백방생은 다소 안도 의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일단 그런 얘기들을 듣고 나자 이내 그 물건에 대한 궁금증이 치솟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대개 강호의 무림인들이 욕심을 내고 달려드는 것에는 몇가지가 정 해져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신공비급이나 신비영약, 혹은 보검이나 기타 보물 따위이다. 그렇다면 지금 저 탁자위에 놓여져 있는 물건은 혹시 어 떤 신병이기(神兵利器)가 아닐까? 혁련휘는 노인의 질문에 일순 가볍게 흠칫해 하더니 즉시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만도를 뽑아들었다. 그는 조금전에 옥사를 상대할 때도 전 혀 병기를 뽑지 않았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그 만도는 다소 특이한 것 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무려 수십자루 이상의 만도들이 뽑혀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혁련휘의 손에 들려져 있는 그 만도는 흡사 사람 가운데 한마리의 용(龍)을 대하듯, 그러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것은 일단 뽑아서 손에 들자 순수하기 짝이 없는 푸른 도광(刀光)이 무려 한자는 뻗치는 것 같았으며, 게다가 그로 인해서 주위가 일시 서 늘한 기운으로 가득차는 것 같았다. 혁련휘는 이어 자신의 머리카락 몇개를 뽑아서 그 만도의 칼날위에 올려놓았는데, 순간 그 머리카락은 저절로 보라는 듯이 깨끗하게 베어 져 떨어지는 것이었다. 지금 혁련휘가 가지고 있는 그 만도는 실로 대단한 보도(寶刀)임에 분 명했다. 아마도 그것은 반월문 자체를 상징하는 수뇌의 신물(信物)일 지 도 모르는 일이다. 혁련휘는 일단 그렇게 한차례 보여주고 나서 노인을 향해 공손히 읍하며 말했다. "저는 그것을 잠시 빌리는 댓가로 저의 이 냉월보도(冷月寶刀)를 드리겠 습니다." 백방생은 그 얘기를 듣고는 일순 깜짝 놀랐다. 그 냉월보도만 해도 이미 최고의 이기(利器)일 것이며 충분히 많은 무림인들이 욕심낼 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단지 잠시 빌리는 댓가로 그 물건을 주겠다니, 대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보물이기에 그렇게 하겠다는 말인가? 그런데 정작 노인은 쉽게 응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음산한 시선으 로 혁련휘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이내 다시 말했다. "자네는 만일 내가 응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이것을 가져가야 하겠 다는 말인가?" 혁련휘는 약간 주저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소인은 그저 선배님께 부탁의 말씀을 드리는 것일 뿐이지, 감히 무례를 범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노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정작 무례를 범할 사람은 따로 있겠군. 그렇지 않은가?" 혁련휘는 그 말에 일순 깜짝 놀란 듯이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느닷없이 주루의 입구쪽에서 한줄기의 창 노한 음성이 들려와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만 청조각(淸朝閣)의 주인인 손노각주(孫老閣主) 해로공(海老公) 손 강봉(孫剛峯)의 무공과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더니 과연 헛되이 전해진 것은 아니었군? 이렇게 우리를 빨리 불러내다니 말이야." 어느새 그 주루의 입구쪽에는 새로 세 명의 사람이 나타나 있었다. 회 의노인(灰衣老人)과 흑의노인(黑衣老人), 그리고 한명의 백의노파(白衣 老婆)였다. 백방생 등은 그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데도 그들이 언제 그곳에 나타났는지 알 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무공이 실로 말할 수 없이 심오하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그들은 옷색깔이 서로 특이하고 음산하게 어울리고 있어서 실로 괴이 쩍은 분위기까지 자아내고 있었다. 백방생은 이런 작은 읍성에서 그처럼 대단한 무림고수들을 연거푸 보게 되자 그만 정신이 하나도 없어질 지경이었다. 특히 달마오수조차도 이번에는 다소 놀라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 세명의 사람들은 이어 천천히 걸어서 노인의 앞에 이르렀다. 기실 그들은 천천히 움직였다고 하나 흡사 미끄러지듯이 움직였기 때문에 불과 잠깐 사이에 이미 혁련휘의 옆에 이르러 있었다. 조금전에 입을 열었던 사람은 바로 가운데의 그 회의노인이었다. 과연 그 손강봉이라는 노인은 그 세사람을 보게 되자 가볍게 안색이 변해 있었다. 그는 특히 가운데의 그 회의노인을 주시하며 말했다. "구양(歐陽)늙은이! 네가 아직 죽지않고 살아 있었군. 게다가 저 막(薄 가와 설낭자(薛娘子)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니 이건 놀라운 일인걸?" 회의노인은 잠시 손강봉의 동태를 살피는 듯하다가 다시 말했다. "우리는 이미 한집안의 사람들이니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지. 그보다 당신은 그 물건이나 공손히 우리에게 바치는게 어떤가?" 14 장 철혈부(鐵血府)의 등장 손강봉은 한차례 음산하게 웃더니 대꾸했다. "핫핫핫, 철혈부(鐵血府)가 이미 결성되었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군. 나같은 늙은이는 아예 빨리 집으로 돌아가 편안히 여생이 나 즐겨야 하겠지?" 순간 손강봉이 그 길쭉한 물건을 집어드는 것과 동시에 실내에 느닷 없이 금빛의 기운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일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놀라 부르짖는 찰나, 어느새 손강봉은 뒤쪽의 벽면을 뚫고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가공할 신법이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그가 갑자기 그렇게 도주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음 순간에 예의 그 세 명의 노인들도 모습이 보 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 네 사람의 노인이 눈깜짝할 사이에 앞뒤로 사라져 버리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일순 크게 허둥거렸다. 하지만 이내 옥사와 혈요, 두 남녀가 뒤따라 급히 사라지자, 혁련휘는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역시 그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아주 잠깐 사이에 실내는 격렬한 소란이 벌어졌으며 이내 다시 지극히 조용해 졌다. 백방생은 문득 생각했다. (대체 그 물건이 무엇인지 정체가 매우 궁금하구나. 설마하니 그 노인이 대만 청조각의 주인이었을 줄이야!) 어쨌든 그리하여 걱정스러웠던 사건들이 멀리 사라져 버린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 물건 때문에 이 작은 읍성에 많은 손님들이 들이 닥치고 또한 이 객점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었다면, 이제는 오히려 홀가분하게 되어 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일행은 다시 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객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이어 음식을 주문하여 간단하게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난 일행은 그제서야 다소 한가한 기분까지 느끼게 되 었다. 전날처럼 달마오수는 옆의 객방으로 자러 가고 백방생의 옆에는 진소유가 남았다. 그녀는 이번에는 아예 방을 따로 잡지도 않았다. 백방생은 침상위에 누워서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진소유를 향해 물 었다. "낭자는 그 철혈부(鐵血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시오?" 진소유는 탁자앞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백방생의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그녀는 이내 대답했다. "철혈부라고요? 당신도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요?" 백방생은 흡사 놀란 토끼같은 표정을 짓는 진소유를 바라보며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조금전에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뿐이오. 그래서 내 당신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오?" 진소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나도 실은 그들에 대해서 들은 것이 많지는 않아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까 듣자니 그 철혈부라는 것은 대단한 것인 듯 하던데 대체 그것은 무엇이오?" 진소유는 물끄러미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긴, 당신도 이제 강호에 발을 내딛는 셈이니 약간의 지식은 알아두 어야 하겠지요. 그 철혈부는 바로 요근래 들어 새로 생긴 흑도무림맹(黑 道武林盟)을 말하는 거예요. 일명 강남무림맹(江南武林盟)이라고 하기 도 하죠." 백방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흑도무림맹이라니? 그럼 강호에 있는 백도(白道)에도 또다른 무림맹이 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고운 아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무슨 흑도고 백도예요? 우리들이 흑도 혹은 백도라고 부르는 것은 바 로 강호의 정파와 사파의 무림인들을 말하는 것이라고요. 따라서 반드시 흑도무림맹이 있다고 해서 백도에도 무림맹이 있어야 한다는 법이 있 겠어요?" 백방생은 다소 안색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군. 헌데 그 철혈부에는 어떤 문파들이 가입되어 있소?" 진소유는 말했다. "이미 말했지만 사파의 모든 무림방파들이지요." 백방생은 말했다. "내 말은 그러니까, 그 사파무림의 방파들이 어떤 것들이 있느냐는 것 이오." 진소유는 고개를 돌려서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러고 보니 아직 강호의 사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군요? 현재 중원의 대표적인 사마외도들에는 수라교(修羅敎), 녹림맹(綠林 盟), 만화교(萬花敎), 흑루(黑樓)가 있죠." 백방생은 진소유가 다소 귀찮아 하는 것을 보고 좀더 자세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질문했다. "그럼 아까 그 세 명의 노인들도 모두 철혈부의 사람들이란 말이오?" 진소유는 거의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까 그 수라교주와 금전방주(金錢幇主), 나찰교주(羅刹敎主)는 당연히 모두 철혈부의 사람들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그 청조각의 주인이라는 사람은 철혈부의 사람이 아니오?"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철혈부는 해외(海外)의 문파들은 포함시키지 않아요. 내가 이미 말했잖 아요. 철혈부는 중원의 흑도무림맹이라고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그 반월문은 철혈부의 소속이오?" 진소유는 그만 다소 짜증이 난다는 듯이 말했다. "그 반월문은 바로 대응교(大鷹敎)의 소속이예요. 그러니 어찌 철혈 부의 소속이 아니겠어요?" 백방생은 그녀가 그처럼 노골적으로 짜증을 부리자 안색이 가볍게 붉어 지더니 웃었다. "미안하오. 내가 잠시 내 생각만 했구려. 이제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오." 진소유는 잠시 신경질을 부리기는 했으나 이내 쉽게 안색이 풀어졌다. 그녀는 즉시 자신의 잘못을 알았는지 역시 다소 안색을 붉히며 말했 다. "미안해요.오히려 제가 못된 계집이죠. 다만 저는 아직 성인군자는 아 니라는 것을 알아두세요." 백방생은 비로소 그녀가 자신을 몹시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 실을 간파하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억지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알겠소. 나는 이제 피곤해서 쉴 테니 그대도 좀 쉬도록 하오." 진소유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한쪽의 바닥으로 가 서 가부좌를 틀고 주저앉더니 이내 운공조식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백 방생은 몸은 피곤하고 천근같이 무겁기는 했으나 쉽게 잠은 오지 않았 다. 이윽고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진소유의 전신에서 흡사 안개와 같은 기운이 스며나오더니 서서히 그녀의 전신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아마도 삼매지경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백방생도 이제는 내공에 관한한 문외한 은 아니었다. 앞으로 진소유의 공력이 깊어질 수록 그녀를 둘러싸고 있 는 안개같은 기운의 양도 많고 짙어질 것이다. 백방생은 문득 단향과 어우러진 은은하고 싱그러운 난초의 향기를 느꼈다. 그것은 진소유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일까? 백방생은 내심 길게 탄식을 하며 애써 잠을 청했다. 간밤에 터질뻔한 사건이 터지지 않고 사라졌기 때문인지 다음날 아 침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백방생은 몸의 상태가 제법 나아졌으므로 일 행과 함께 주루에 내려가서 식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가 먹는 음식이라야 고작 약간의 미음 정도에 불과했지만, 간밤에 있었던 그 반월문 문도들의 시신은 물론 흔적도 없이 치워져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약간의 마른 음식들을 준비한 다음에 일행은 역시 예정 대로 마차를 몰고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험난한 일을 겪지 않 고 무사히 나아가게 되어서 기쁜지 달마오수의 표정들도 밝아졌고 진 소유의 안색도 오늘은 제법 부드러워 보였다. 묵묵히 한시진 정도를 아침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달렸다. 숙달되어서인 지 이제는 백방생도 그다지 멀미를 하지 않았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는 달마오수의 두어 명은 신법을 펼쳐서 가고 있었으므로 마차의 안에는 몇개의 가방들과 백방생과 진소유만이 남아 있었다. 백방생이 아침 내내 자신을 향해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진소유는 문득 웃 으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는 좀 기분이 나빴죠?내가 며칠동안 몸이 피곤해서 그랬던 것이니 좀 이해를 해 줘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간밤에는 좀 쉬셨소?" 진소유는 그가 밝은 표정으로 대응해주는 것을 보고 절로 안심되는 듯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간밤에는 제법 숙면을 취할 수가 있었어요. 당신도 편히 쉬었나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편히 쉬었냐고요? 하하, 세상에 나처럼 항상 편히 쉬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오." 진소유는 그의 말중에 어딘가 그늘이 깔려있는 듯 하여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제가 당신에 대해 약간의 부담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예요. 그러 나 그렇다고 해도 어제처럼 그러한 저의 태도는 옳지 못한 것이었죠. 앞으로는 잘 대해 줄테니 그만 기분을 푸세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나의 질문에 잘 대답해 주겠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미소하며 말했다. "물론이예요. 궁금한 점이 있다면 지금 뭐든지 물어보도록 하세요. 그래 당신은 뭐가 그리 궁금하다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낭자가 보기에는 그 물건이 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진소유는 다소 의아하다는 눈빛을 했다. "왜요? 당신도 그것에 관심이 있단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어찌 그런 것에 욕심을 가질 수가 있겠소. 나는 단 지 호기심이 생길 뿐이오." 진소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간단히 대답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건 검(劒)이라고 해요. 당신은 아까 주루에서 남들이 주고받던 얘기를 듣지도 못했나요?" 백방생이 만일 과거 그 공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아까 아침식사 때 주루에서 남들이 하던 얘기를 모조리 엿들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 러나 몸이 쇠약해지면 귀도 제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인 모양이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알고보니 아주 무시무시한 신검(神劒)이었던 모양이군. 그렇지 않 소?" 진소유는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아요. 어제 당신도 보았겠지만, 그 냉월보도만 해도 세상에 보기 드문 보도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보다 훨 씬 훌륭한 병기가 있을 수가 있겠어요? 이건 필시.... 어떤 음모와 함정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어떤 음모와 함정이 있단 말이오?" 진소유는 잠시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말꼬리를 돌렸 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말이지요. 누가 알아요? 철혈부에서 천하를 집어삼 키려고 그런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런지."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마차는 계속해서 강가를 따라서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 좌측은 야산 의 기슭이고 우측은 벼랑인데, 벼랑 아래에는 제법 넓다란 강물이 유유하 게 흘러 내리고 있었다. 비록 더위는 여전했지만 아침나절이어서 그런 지 좌우의 풍경이 제법 산뜻해 보였다. 백방생은 그러한 풍경들을잠시 바라보며 문득 가만히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올 여름은 정말 길기도 하군!) 사실 백방생에게 있어서 그 새로 나타났다는 무림의 보물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다만 진소유와 몇마디의 대화를 하기 위해 그런 쓸데없는 대화들을 한 것이었다. 실상 그에게는 그런 신검이 있다고 해도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잠시의 침묵이 지나갔다. 진소유는 백방생의 표정이 왠지 무거워지는 듯 하여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강호의 상황에 대해서 좀더 알고싶지 않으세요?"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낭자가 나에게 그 얘길 해주겠단 말이오?" 진소유는 미소하며 말했다. "현재 당금의 강호무림은 세외팔세와 해외의 여러문파들을 제외하고, 당신도 이미 알겠지만 구파일방(九派一幇) 오대세가(五大世家) 등의 무 림정파와 지금 말하고 있는 철혈부, 그렇게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어 요. 물론 강호에 정사중간의 문파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가급 적 강호에서 활동을 하지 않으니 논의로 하기로 하죠."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알고보니 낭자는 철혈부에 관해서 말해주려는 것이구려?" 진소유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외팔세는 아무래도 지금으로서는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 고 봐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과거부터 전해져 오던 그대로이고, 그 런 점에서 본다면 역시 당금의 강호무림에서 가장 주목시 되고 있는 것 은 바로 철혈부라는 새로운 연합세력이죠. 그것에 대해 조금만 안다면 강호에서 살아나가는데 큰 불편은 없으리라고 봐요." 백방생은 말했다. "알고보니 진낭자는 본래 강호사정에 정통한 사람이었구려?" 진소유는 다소 안색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의 이 미미한 지식으로 감히 강호사정에 정통하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저는 겨우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림인들의 능력이나 습관 등에 대해서도 모두 다 자세히 알고 있다고들 하죠. 제가 지금 철혈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사실 별게 아니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나에 비하면 훨씬 정통한 편일 것이오." 진소유는 대꾸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철혈부는 요 근래에 수라교 등의 흑도의 사대거파(四大巨派)의 수뇌들 이 은밀히 모여서 결성한 집합체죠. 그들은 일단 연맹을 비밀에 붙이려 고 했으나 현재 강호에서 그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어요. 아마도 머지않아 그들은 철혈부의 창설을 공식화 하게 될 거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 철혈부의 부주(府主)는 누구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철혈부에서는 그를 부주라고 하지 않고 맹주(盟主)라고 부르죠. 현재 철혈부의 맹주는 만리독보행(萬里獨步行) 용천기(龍天奇)라는 사람이라 고 해요. 그 이외에는 저도 잘 몰라요. 그리고 그 밑에는 사대원로(四大 元老)가 있다는데, 바로 흑도의 사대거파의 수뇌들이 각각 차지하고 있 는 것이죠." 백방생은 그 철혈부의 맹주라는 사람에 대해서 처음으로 들을 뿐만 아니라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짐짓 웃으며 다시 질문했 다. "어제 우리가 본 사람 가운데 그 사대원로의 하나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소?" 진소유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우리가 본 사람들 중에 그 가운데의 회색옷을 입은 노인은 바 로 당금의 수라교주인 수라괴로(修羅魁老) 구양통(歐陽通) 이었으니 바로 그 사대원로 중의 하나가 맞는 셈이죠."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어제저녁에 큰 안계를 넓힌 셈이 되었구 려?" 진소유는 미미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그 외의 흰 옷을 입은 할머니인 천잔비자(天殘秘子) 설소운(薛 素蕓)이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인 천수인도(千手人屠) 막계(錨　에 대 해서 알고 있나요?" 백방생은 모두 처음 듣는 이름들 뿐이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진소유는 말했다. "그 설소운이라는 여자는 바로 나찰교의 교주이고 막계라는 노인은 바로 금전방의 방주예요. 그 금전방과 나찰교는 무이산중에 있어서 이곳 과는 멀지 않은데 설마 그들마저 전혀 몰랐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간혹 이름을 듣기는 했지만 그 방파가 어떤 일을 하는 곳들인 줄은 몰랐소." 진소유는 말했다. "금전방은 바로 청부 살수 업체죠.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곳은 흑루 의 지단이라는 말이 있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흑루는 바로 흑도의 사대거파 가운데의 하나가 아니오?" 진소유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기억력은 아직 좋군요. 그래요. 그 흑루는 중원제일(中原第一) 의 살수집단이며 모든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곳들 중의 하나이죠. 금전방 이외에도 하북성의 비수회(匕首會), 호북성의 일품당 (一品堂), 그리고 광서성의 삼월파(三月派) 등이 그곳의 지단이라고 하기 도 하죠." 백방생은 뜻밖에도 하나의 살수집단이 중원전역에 광범위하게 세력을 두고 있는 것을 보고 다소 놀랐다. 그는 말했다. "그럼 흑루의 총단은 어디에 있소?" 진소유는 말했다. "사천성 민산(岷山) 부근에 있다는 말이 있어요. 하지만 그 얘기는 아 직 확실히 믿을 수는 없죠. 그 문파의 특성상 그런 곳은 의당 자신들의 본거지를 숨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수라교에는 지단이 없소?" 진소유는 말했다. "수라교에는 독특한 아수라상(阿修羅像)을 숭배하고 있죠. 하지만 그 들은 그 때문에 지단을 세우지 못하고 있어요. 요는 타협하는 바가 없 다는 점이죠. 강호상에는 현재 팔괘교(八卦敎)나 서장홍교(西藏紅敎), 마교(魔敎), 배교(排敎) 따위의 종교적인 문파가 있기는 하지만 수라교 와는 전혀 다른 문파들이예요." 진소유의 입술은 마치 하나의 아름다운 요술주머니와 같았다. 주문만 하면 그 많은 문파의 이름들이 줄줄 쏟아져 나오니 신기하기까지 했 다. 백방생은 강호상에도 그와 같은 많은 종교집단이 있었을 줄은 몰랐 다. "그럼 나찰교는 바로 만화교의 지단이겠구려?" 진소유는 말했다. "당신은 정말 총명하군요. 만화교(萬花敎)는 역시 흑도의 사대거파중의 하나인데 역시 모두 네 개의 지단을 두고 있죠. 나찰교를 비롯하여 강서 성의 백화방(百花幇), 사천성의 오선교(五仙敎), 그리고 섬서성의 천욕 궁(天慾宮)이 바로 그것들이죠. 그 총단은 귀주성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 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그 네 문파 가운데 어느 곳이 가장 강한 것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어느 곳이 강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만 역시 세력으로 본다면 녹림 맹이 한수 위라고 할 수가 있죠. 녹림맹은 호남성의 남쪽에 총단을 두고 있는데, 신강성의 흑사방(黑死幇), 귀주성의 만벌방(萬筏幇), 강서성의 대응교(大鷹敎), 절강성의 새신회(賽神會), 그리고 동해의 사해방(四海 幇)의 지단들 외에도, 당신도 어제 보다시피 그 지단들 아래에 다시 무 수한 방파들이 줄을 잇고 있죠. 그러니까 강서성만 해도 백교방(白蛟幇) 과 칠봉루(七鳳樓) 등이 있는 상태예요." 백방생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반월문도 그 대응교의 수하에 있는 방파라는 말이구려?" 진소유는 말했다. "실질상으로 대응교 등이 휘하의 군소방파들을 다스리고 있기는 하지 만 듣자니 녹림맹에서는 그런 상하관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해요. 도둑질을 하는데 있어서 그들 모두는 한 형제라는 것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아직 한가지의 의문이 있소. 낭자는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남 해보타도에 있으면서 열심히 불법만 닦았을 텐데 어떻게 언제 그렇게 강 호사정을 훤히 알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오." 진소유는 다소 안색을 붉혔다. 그녀는 약간 주저하는 듯 하다가 이윽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이것은 모두 내가 본파를 떠나기 전에 사부님께서 내게 가르 쳐 주신 내용들이예요. 당신의 어머니이신 그분 사부님께서는, 그 외에도 여러가지를 내게 가르쳐 주셨죠." 백방생은 이내 웃으며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기혈이 치솟아서 머리끝이 뻣뻣해 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마차의 창밖 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강물은 여전히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백방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기혈을 조절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대신 머리끝에서 앞쪽으로 흡사 핏물과도 같은 뜨끈뜨끈한 액체가 눈으로 흘러나왔다. 불현듯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백방생은 문득 생각 했다. (아직도 내가 이런 습기가 남아 있었던가? 나는 이미 모두 다 잊은 줄로 알았는데, 하하....) 진소유는 백방생의 심정이 다시 우울해졌다는 것을 알았는지 잠시 묵묵히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백방생은 눈물을 얼른 닦아내고 나 서 붉어진 눈주위를 보이지 않으려고 계속 창밖의 풍경만 바라보았다. 일각 정도 지나서 눈주위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오면 잠이나 청해보려고 했다. 헌데 그때였다. 느닷없이 마차가 덜컥하는 듯 하더니 서서히 정지했 다. 그리고 앞쪽에서 대인의 불호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아미타불, 어떤 시주분들이시오? 우리에게 어떤 볼일들이 있으신 것이 외까?" 백방생은 궁금해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쪽을 바라보려고 했다. 진 소유가 먼저 앞쪽을 내다보고는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앞쪽에 길을 누군가가 막아 놓았어요. 아마도 무슨 심상치 않은 일들 이 벌어질 것 같아요." 백방생도 이윽고 고개를 길게 빼고 바라보니 과연 전면의 길이 많은 통나무와 바위들로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대인이 마차의 앞으로 나가 묻고 있었고 지금 그 통나무를 넘어서 일단의 청의인들이 가득하게 다 가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바로 반월문의 사람들인 것이었다. 사실 대개 이곳 복건성에서 누군가가 강도짓을 당했다면 그것은 반월 문과 연관이 있다고 봐야할 것이었다. 마치 그것을 입증해 주기라도 하듯이 이미 청의인들의 앞에는 수뇌인 현월 혁련휘가 서 있었다. 그들은 마차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춰서서 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대로상에는 그들 이외에도 이미 많은 사 람들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들은 간밤에 그 작 은 읍성에서 묵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혁련휘는 잠시 마차를 살피는듯 하다가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마차에서 내려라!" 그야말로 안하무인격인 엉뚱한 말에 대인 등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정중히 다시 말했다.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이 마차를 가로막은 데 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시다는 말씀이오?" 혁련휘가 다소 화가 난 듯이 소리쳤다. "이유는 없다! 어서 모두 마차에서 떠나라는데 무슨 말이 많느냐? 혹 시 모두 뒈지고 싶어서 환장이라도 했다는 말이냐?" 대인 등은 이제까지 그와 같은 무례한 언사를 들은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러나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잠시 불호를 외우더니 말 했다. "아미타불, 살생이란 실로 대계를 범하는 일인 것이오.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한 것이니, 만일 시주께서 이유를 밝혀 주시면 즉시 고려해 보 겠소이다." 달마오수의 기도는 사실 보통의 승려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 대인의 침착하고도 의젓한 태도에 그만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혁련휘가 잠시 멈칫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마차안을 뒤져서 찾아 낼 것이 있다. 그러니 어서 모두 즉 시 마차를 떠나라?" 대인은 그 말을 듣자 잠시 불호를 외우면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윽 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 말씀은 따를 수가 없겠소이다. 지금 마차안에는 위중한 환자가 타고 계시는 중이오. 따라서 시주의 요구에 응하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혁련휘는 뜻밖에도 상대가 이렇게 완강하게 나올 줄을 몰랐는 지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아니 뭐, 뭣이라구? 감히 떠나지 않겠다구?" 대인은 합장하며 재차 말했다. "아미타불, 부디 시주들께서 호생지덕을 베푸셔서 소승 등이 그냥 지나 갈 수 있게 해주시길 바라겠소이다." 혁련휘는 금새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네놈들이 감히 본좌의 말을 거역하다니,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고 벌 주를 마시겠단 말이냐?" 혁련휘는 말과 동시에 일장을 후려쳤는데, 그 바람에 그의 앞에는 자 욱한 흙먼지와 함께 커다란 웅덩이가 생겨났다. 그것은 가히 그의 공 력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청의인들 이 일제히 움직여서 단숨에 마차의 주변을 포위해 버렸다. 백방생은 상황이 이렇게 험악하게 변하자 자연 긴장을 하고 마음의 대 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들은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그들 의 마차를 습격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들의 마차속에 실린 금전과 보물들에 대해서 이미 소문이 퍼져나간 것이 아닐까? 달마오수는 상황이 급변하자 모두가 안색을 다소 굳히고 사방으로 마차 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섰다. 청의인들은 이미 예의 그 만도들을 수중에 뽑아들고 있었다. 혁련휘 역시 허리춤의 예의 그 냉월보도를 뽑아들고 마차를 향해 다가들기 시작했다. 대인은 그것을 보자 즉시 공력을 돋구어서 아미타불! 하고 불호를 다 시 외웠다. 그것은 비로소 그들의 무공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청의인들 로 하여금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 자, 과연 청의인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세등등하던 혁련휘조차 크게 움찔하여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느닷없이 한줄기의 음성이 들려오며 장내에 다시 세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그 세 사람, 그들은 너무나도 느닷없이 등장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갑자기 땅속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해로공(海老公)! 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연극을 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오. 이미 우리를 유인하려던 자들도 저렇게 잡혔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그렇다. 그들은 바로 다름아닌 어제저녁에 반점에 나타났던 그 두 노인 과 한 노파였던 것이었다. 진소유는 그들이 바로 수라괴로(修羅魁老) 구 양통(歐陽통)과 천수인도(千手人屠) 막계(錨　, 그리고 천잔비자(天殘 秘子) 설소운(薛素蕓)이라고 했다. 그들은 어젯밤에 그 청조각의 괴상 한 노인을 쫓아갔었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던 모양이었다. 백방생 들은 설마하니 그들까지 이렇게 마차의 앞을 가로막고 나타 날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 수라괴로 구양통은 말을 끝내자 뒤쪽을 가리켰는데, 느닷없이 그쪽에 회의인(灰衣人)들에 의해 낯익은 두 명의 남녀가 끌려나오는데, 그들은 바로 다름아닌 옥사와 혈요였던 것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그 사람들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일까? 하지만 가장 기이한 것은 조금전의 그 구양통의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청조각의 해로공이라는 노인은 지금 그 신검이라는 물건을 가지고 마 차의 주변에 있다는 말인가? 사실 조금전의 혁련휘의 태도나 지금의 이 살벌한 광경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 는 것이다. 비단 쉽게 이해가 될 뿐만 아니라 경악스러운 사태인 것이 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서 그 노인이 달마오수 등도 모르게 마차에 숨어들 수가 있었겠는가? 백방생은 내심 생각했다. (혹시 그는 일부러 사람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청조각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뒤쫓아 왔단 말인가?) 백방생은 과연 정말로 그 노인이 마차에 숨어 있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몸을 좀더 일으켜 고개를 두리번거려 보았다. 헌데 바로 그 때였 다. 느닷없이 백방생이 앉아있는 쪽의 마차의 아래에서 흡사 거짓말처럼 한 사람이 미끄러지듯 나오더니 백방생을 향해 가볍게 미소짓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은 바로 예의 그 해로공이라는 노인이었다. 그는 바로 이제까지 마차의 아래쪽에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가 이미 그와 진소 유와의 얘기를 죄다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 하고는 안색이 은근히 붉어 졌다. 다만 다행이라면 그가 정작 그의 보물들에 관한 얘기는 한 마디 도 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해로공이라는 노인의 눈초리와 웃음은 자못 기이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가슴을 단숨에 찢어놓을 수 있을 듯한 눈빛과 미소였다. 가히 살인적인 미소라고나 할까? 백방생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해로공 손강봉은 즉시 그 세 노인 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구양늙은이야, 이거 정말 너무하는군. 내가 정말로 너희들이 두려워서 피하고 있는 줄 아느냐?" 해로공의 손에는 역시 예의 그 길쭉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구양통 등 은 정말로 해로공이 나타나자 다소 흠칫해 하다가 이내 냉소를 터뜨렸 다. "그렇다면 어서 다시 도망쳐 보지 그러느냐?" 아마도 그들은 이번에는 어떤 단단한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해 로공이 나타나자 갑자기 달마오수 등의 일행은 꿀먹은 벙어리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해로공은 힐끗 회의인들에게 제압되어 있는 옥사와 혈요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 그 아이들로 나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냐?" 백의노파인 천잔비자 설소운이 냉소하며 말했다. "손가야! 우리는 네가 이런 쓸모없는 녀석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 을 잘 알고 있다." 해로공은 잠시 음산하게 웃었다. "호호호, 정말 알뜰히도 나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군!" 갑자기 주위 사람들의 험악한 시선을 의식한 듯 잡혀있는 혈요가 애원 하듯 소리쳤다. "노각주(老閣主)님! 제발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주세요." 소문에 의하면 그 길쭉한 물건인 신검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다. 혈요도 손강봉이 결코 자신들의 목숨과 그 물건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록 무수한 살인을 저질러온 그녀라고 해도 일단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자 공포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해로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하는 혈요의 모습을 본척도 하지 않고 문득 고개를 돌려 다시 백방생을 바라보았다. "소형제, 잘 있었나?" 그 해로공의 눈빛은 그야말로 한줄기의 칼날처럼 섬뜩하여 결코 평범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비록 웃고 있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감춰져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백방생은 그야말로 무명소졸은 되지 못한다고 할 수가 있으므로, 그와 같은 신분의 사람이 그에게 깍듯이 소형제라고 불러준 것은 영광 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그렇지 않아도 의아해 하고 있다가 뜻밖의 질문을 받고 오 히려 당황하는 기분이 들었다. 백방생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고 안색을 바로 하며 대꾸했다. "당신이 나를 잘 안다는 말이오?" 15 장 자객(刺客)들 백방생의 질문은 다소 당돌하다는 기분도 들었으나, 그러나 해로공은 거기에 개의하지 않는 듯 여전히 미소하며 말했다. "물론이네. 자네는 바로 그 백노야의 멍청이 손자가 아닌가?" 백방생은 뜻밖에도 상대방이 금새 자신의 정체를 알아맞추는 것을 보 고 다소 마음의 충격을 받았다. (나에 대한 소문이 이렇게 널리 퍼져 있었단 말인가?) 복주성의 백노야는 거물이었고 백방생의 얘기가 심심치 않게 복주성내 를 떠돌았던 것도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청조각의 최대의 거물 손강봉은 무림의 보기드문 기인인데, 그런 그가 자신의 행색에 대 해서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백방생이 다소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해로공은 좀더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불쑥 손에 들고 있던 그 길쭉한 물건을 내밀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이것은... 자, 자네가 갖도록 하게!" 해로공은 백방생이 미처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그 물건을 그의 옆자리 에 내려놓고 돌아갔으며, 백방생은 더욱 어리둥절한 느낌을 갖게 되었 다. 듣자니 그 물건은 아주 귀한 신검(神劍)이라던데, 그런 것을 이렇게 처음보는 자신에게 쉽게 줄 수도 있는 것일까? 백방생은 일시 너무도 기 이한 나머지 미처 그 물건을 검토해볼 생각도 없이 멍하니 해로공의 행 동만 주시했다. 해로공은 이때 다시 구양통 등을 향해 소리치며 신형을 날리고 있었 다. "자, 이제는 그 아이들을 풀어주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해로공의 신형은 정말 빠르고 기척도 거의 없었다. 그의 행동은 저번 보다 더욱 빨라진 것 같았다. 말이 끝나는 순간 어느새 그의 신형은 회 의인들의 앞에 이르렀으며 그와 동시에 그 회의인들이 맥없이 퍽퍽 쓰러져 나가는 것이었다. "으악!" 서너명의 회의인들이 거의 동시에 합창을 하듯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는데 이미 그들의 뇌수가 허옇게 쪼개져 있었다. 해로공의 손속은 그야말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누구도 그가 어떻게 무공을 펼쳤는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천잔비자 설소운 등은 바로 그 부근에 있었 으므로 마악 손을 써서 해로공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구양 통에 의해 가로막혔다. 구양통은 웬일인지 해로공이 자신의 수하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도 모르 는척 오히려 말리는 것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해로공의 신형은 옥사와 혈요를 동반하고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고 말았다. 아무도 해로공의 뒤를 추격해 가 지 않았다. 반월문의 사람들은 문주인 혁련휘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고 혁련휘는 그 세 노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세 명의 노인들 역시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사방에서 숨죽이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몰려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백방생도 물론 그렇게 어리둥절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해로공의 행동과 상황의 흐름을 쉽게 납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무심코 해로 공이 남기고 간 그 길쭉한 물건을 바라보았다. 이제 은연중 그 물건이 모든 사람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었다. 옆에 있던 진소유가 급히 전음으로 말했다. (어서 그 물건을 확인해 봐요!) 백방생도 마침 그럴 생각이어서 얼른 그곳으로 손을 움직였다. 만일 그것이 정말로 신검이라는 물건이 아니라면 공연히 억울한 사건만 치 르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헌데 마악 그 보따리를 풀어 보려던 백방생은 잠시 주춤했다. 뜻밖에도 그 물건은 상당히 무거워서 전혀 움직일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아까 해로공이 아주 가볍게 들고 다니던 것을 상기했다. 백방생은 내 심 중얼거리며 놀라와했다. (보아하니 이 물건은 무게가 백 근은 나가는 것 같다. 그다지 두껍게 보이지도 않는데, 세상에 이렇게 무거운 물체가 있을 수 있다니?) 긴급한 상황이라 백방생의 사정을 눈치채고 진소유가 얼른 다가와서 그 물건을 집어들고 대신 보자기를 풀어 보았다. 비록 간단하게 들기는 했지만 그녀도 내심 그 무게에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이윽고 보자기가 모두 풀려지자 그 물건의 정체가 드러났다. 보자기를 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예상했던 바대로 한 자루의 장검이었다. 우선 보기에도 아주 고색창연하며, 진소유가 즉시 검날을 뽑아서 들 자 이내 그 몸체를 드러냈다. 그 검신은 검은 빛으로 아주 칙칙한 느낌 을 주며 아무런 광채도 없었다. 하지만 진소유가 그것으로 옆의 마차 의 나무를 치자 나무는 전혀 소리도 없이 깨끗하게 베어져 나갔다. 진 소유는 그것을 보자 그만 아! 하고 놀란 외침을 발하고 말았다. 실로 놀랍도록 예리한 장검이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급히 다시 장검을 검집속에 넣으려는 순간에 어느새 일행의 옆 에는 한 사람이 다가와 있었다. 바로 수라괴로 구양통이었다. 또한 그 순간에 좌우에서 대인과 대의 등의 놀란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시주들, 멈추시오!" 천수인도 막계와 천잔비자 설소운은 이미 달마오수에 의해 길이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구양통이 벌써 다가와 있는 것을 보면 자못 의미가 심장했다. 구양통의 무공은 달마오수보다 훨씬 강하다는 결론이 아니겠는가? "어서 그 물건을 이리 내놓아라!" 구양통은 그 앙상한 손을 내밀며 음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이미 마음만 먹었으면 쉽게 그 검을 빼앗아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도 해로공의 무슨 함정이 있는 것이 아 닌가를 의심한 모양이었다. 진소유는 잠시 망설이는듯 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백방생에게 물었 다. "이 장검은 그가 당신에게 준 것이니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 해로공이라는 노인은 어째서 처음보는 나에게 이 장검을 주었을 까? 정말로 저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신검이라는 것일까?) 백방생은 아직 꿈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달마오수는 비록 마음 은 굴뚝같았으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감히 이곳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문득 빠르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낭자는 그것이 정말로 신병이기라고 생각하시오?" 진소유는 마음이 초조한 지 옆의 구양통을 힐끗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백방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예로부터 보물은 덕이 있는 사람이 갖게 된다고 하지 않았소? 나는 아직 그러한 덕도 능력도 없는 몸이니 그것을 저 사람에게 주도록 하는 게 좋겠소." 진소유가 그 사이에 다시 바라보니 그 장검의 모양은 다른 것들과 별차이가 없었으나 다만 한쪽의 검날에 여의지존(如意至尊)이라는 글씨 가 전자체로 음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 장검이 가장 훌륭한 최 고의 신병이기라고 자칭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의 말을 듣고 나자 진소유는 내심 가벼운 한숨을 지었다. 그녀 역시 장검을 사용하는 여검사(女劍士)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녀 는 지금 연검을 허리에 두르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러나 이런 특별한 장 검을 손에 들게 되자 얼른 돌려주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그녀는 한 번 장검에 진기를 주입해 보았다. 헌데 그 순간의 일이었다. 갑자기 장검에서 눈부신 금광(金光)이 번쩍 일어나더니 그 검기(劍氣)가 석자나 뻗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 진소유는 그만 놀라 경호성을 발했다. 그녀는 그저 가볍게 시험삼아 진 기를 약간 주입했을 뿐이었는데 실로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리라고 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말이 석 자지, 장검에서 그와 같 이 기다란 검기가 일어난다는 것은 별로 흔히 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 었다. 아마도 그것은 일전에 해로공이 반점에서 일으키던 금광과 동일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소유는 미처 그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한번 더 놀라 서 안색이 변해야 했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그 장검과 검집은 그 구양통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던 것 이었다. 아까 사람들은 해로공의 솜씨를 보고 놀랐지만, 지금 그 구양통의 솜씨도 결코 그에 못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구양통은 일단 그 장검을 손에 넣자 이내 크게 득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그 장검을 바라보기에 바빴다. 일순 조금전보다 더 찬란한 금빛 검광이 주위를 눈부시게 했다. 확실히 구양통이 손에 들자 그 장검도 더욱 위력을 발휘 하는 모양이었다. 일순 사방이 갑자기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백방생은 비록 마차안에 누 워서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이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구양통의 손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의 시 선이 제각각일 것이며 표정들도 다양할 것이다. 문득 주위의 그러한 시선을 의식한 듯 구양통은 장검을 검집속에 넣더 니 다시 고개를 돌려 음흉하게 말했다. "흐흐흐! 네놈이 제법 현명하구나! 때를 알고 이 물건을 노부에게 양 도하다니...좋다. 노부는 그 보답으로 일단 너희들을 더이상 괴롭히지 않도록 하지!"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들으라는 식의 소리였다. 즉, 그 신검은 자신이 백방생에게서 정식으로 받은 것이므로 누구도 억지를 부리지 말라는 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구양통은 그 말이 끝나고 나자 과연 더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이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가고 말았 다. 구양통은 이번에는 다소 느린 신법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그것은 자 신의 여유를 보여주자는 의도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결코 길 지 않았다. 그의 신형은 이내 일행의 시야에서 멀리 사라져 버리고 말 았고, 또한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 뒤를 이어 마치 썰물처럼 모조리 사 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일면 괴이한 광경이었고 어이없어 보이기도 했다. "정말 모두 떠나가 버리고 말았군요...." 모든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라져서 아주 조용하게 변한 주위를 둘러보 며 진소유는 문득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달마오수는 이미 앞으로 나가서 마차가 나아갈 수 있도록 돌과 나무들을 치우고 땅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마치 솜뭉치를 옮 기는 것처럼, 잠깐동안 움직이더니 이내 길을 터 놓고 이쪽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백방생은 진소유의 안색이 다소 상기되어 있는 것을 보고 문득 물었 다. "그 장검을 다시 돌려주게 되어서 마음이 섭섭하오?" 진소유는 마침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즉시 대꾸했다. "섭섭하냐고요? 당신은 아마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어찌...." 진소유는 열심히 대꾸하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그녀는 백방생 도 이전에는 높은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한 것이었다. 제아 무리 그녀가 섭섭하더라도 갑자기 그 높은 무공이 전폐당하고 이어 폐인 이 되다시피한 백방생의 상심에 비유하겠는가? 진소유는 백방생이 너무 태연해 보여서 잠시 그의 처지마저 망각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녀가 갑자기 겸연쩍은 표정으로 안색을 다소 붉히는 것을 보고 내심 그녀의 심중을 짐작하고 이내 웃으며 다시 말을 받았다. "하긴 그럴만도 할 것이오. 하지만 어차피 우리로서는 그 신검을 지켜 낼 힘도 부족했고, 이제는 또 우리가 무사하게 되어 다행한 일이 아니겠 소?" 진소유는 조금전에 그의 심사를 건드린듯 하여 마음이 다소 불편했 던 터라 이내 동조해 주었다. "그래요. 대개 보물은 화를 부르기 쉬운 법이죠." 마차는 이미 다시 나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헌데 나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소. 대체 그 청조각의 해로공이라는 노인이 어째서 갑자기 그 신검을 내게 주었느냐는 것이오." 진소유는 오히려 알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럼 당신도 그 이유를 몰랐단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그저 그에게 갑자기 그 신검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을 뿐이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수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 검을 내게 주어버린 것이 아니겠소?"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게만 생각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예요. 그 신검은 내가 보기에는 특이하여 무공이 그와 같이 대단한 사람들도 탐내기에 족한 것인듯 했 어요. 해로공이 당신과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면 그렇게 간단하게 신검을 포기했을 이유가 없는 거죠." "글쎄, 그럼 대체 무슨 이유에서 일까?" 무릇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알 수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 가? 몸이 허약한 탓에 백방생은 그 의문을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하고 이 내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나는 앞으로는 아까와 같은 일이 없이 무사히 소림사까지 갔으면 좋겠소. 솔직히 나는 아까 얼마나 놀랐는지...." 진소유도 알겠다는듯 이 웃으며 말했다. "그 해로공이 우리 마차의 아래에 숨어있던 일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소하며 말했다. "우리가 재보 등에 관해서 얘기하지 않기를 천만 다행이오." 진소유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당신은 이제 안전하리라고 생각하나요?"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 마차에 신검이 있는 줄로 알고 달려들 지도 모르지. 따라서 우리는 가능하면 앞 으로 언행에 주의하고 또한 주위를 잘 살피며 나아가야 할 것이오." 진소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도 소림사에 가 보기도 전에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백방생과 진소유는 그 뒤로 별로 말도 없이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보 냈다. 마차는 계속해서 나아가서 복건성의 경계인 무이산(武夷山)과 가까 와지게 되었는데, 백방생의 몸이 다소 좋아졌기 때문인지 마차는 좀더 속력을 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소 무리한 탓인지 오히려 저녁무렵에는 쉬어갈 마을을 찾지 못하고 거의 한밤중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의 작은 현성에 도달 하게 되었는데, 그 현성은 비록 크기도 작았지만 건물들도 보잘것이 없었고 객점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다행히도 일행이 그 현성에서 객점 하나를 찾았을 때에는 이미 매우 시장하고 피로하여, 백방생은 그저 씻는 것은 고사하고 식사나 한 다음 에 편히 쉬었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객점은 비교적 조용했다. 백방생은 문득 전에 보았던 그 많던 무림 인들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들이 있다면 이 객점이 이렇게 조용할리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 많은 무림인들은 이미 모두 제각기 다른 방향으 로 떠나버리고 만 모양이었다. 신검은 이미 수라교주의 손에 들어갔다. 수라교의 세력권인 이 무이산의 근방에서 누가 감히 그에게서 신검을 빼 앗을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흑도의 무림은 이미 철혈부 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통합이 되었다고 했거늘.... 일행이 객점의 안으로 들어설 때에는 너무도 주위가 조용하여 일행은 혹시 주인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내 안에서 사십대의 텁석부리 장한이 하나 나와서 주인행세를 했다. 텁석부리는 밤늦게 도착한 일행의 의도를 이미 짐작한 듯 묵묵히 마차 를 받아서 한쪽에 정거해 주었고, 그리고 두 필의 말을 나무에 묶어놓 은 다음에 돌아왔다. 이 작은 객점에는 으레 그렇듯 주막이 딸려 있었 다. 방안이 비좁을 것을 감안하여 일행은 먼저 이 주루에서 식사를 하 고 난 뒤에 안으로 들어가 쉬기로 했다. 가방 등을 모두 탁자옆에 내려놓고 앉아서 일행이 잠시 기다리자 그 텁석부리 장한은 이윽고 알아서 음식물들을 내 왔다. 가져온 음식들은 삶은 국수나 만두, 그리고 소채와 약간의 돼지고기 등이었다. 술도 작 은 것으로 한병 있었지만 실로 일행중에는 그 술을 마실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한쪽에 방치해 두었다. 백방생은 아직 국수 등을 먹기에는 몸이 그다지 회복되지 않았다. 진 소유가 그 텁석부리 장한을 향해 말했다. "여기 쌀밥이나 미음 등은 없나요?" 텁석부리 장한은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는데 역시 무뚝뚝하게 대답했 다. "식은 밥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미음은 없소." 아마도 이 텁석부리의 시야에도 일행의 차림새 등이 다소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었다. 으레 이런 주막의 주인들은 별로 돈벌이가 되지 않는 그런 특별하고 귀찮은 손님들을 좋아하지 않기 마련이다. 진소유는 텁석 부리의 태도를 상관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그럼 식은 밥을 끓여서 미음을 만들어 와요. 수고비는 넉넉하게 줄 테니." 진소유의 말을 듣고 나자 텁석부리는 이내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달마오수는 수행중인 승려들이라 별로 음식을 밝히지 않았고 진소유 도 여자의 몸이라 그저 약간의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일행의 식사하는 광경은 단촐하고도 조용하기 이를데 없었다. 한쪽에서 유등이 소리없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백방생은 문득 맹숭맹숭한 느낌이 들어서 입을 열 었다. "이곳의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군. 그야말로 강가의 조용한 시골풍경 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모로 짐이 되고 있는 것 은 미안하오." 진소유가 국수를 먹다가 문득 물었다. "소림사에 도착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거죠?"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디 갈 곳이 없을까봐 그러시오? 하하, 내가 화상이 되는 것은 어떻겠소?" 백방생이 웃음을 짓자 진소유도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흥, 화상이 되는 것은 뭐 그리 쉬운 일인줄 아나요? 만일 소림사가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일 거예 요." 백방생은 말했다. "하하, 천하의 소림사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이오. 나는 이미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 계획이 다 세워져 있으니 내 걱 정은 하지들 마시오. 여러분의 의무는 오직 나를 소림사까지 호송하는 것 까지이니까." 진소유는 약간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헌데 이 주인장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길래 아직도 미음 을 가져올 생각을 않는다지?" 묵묵히 식사만 하고 있던 대인이 문득 말했다. 헌데 그것은 전음이었 다. (그는 결코 미음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오.) 백방생과 진소유는 거의 동시에 그 전음을 받았기 때문에 깜짝 놀라 서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대인이 즉시 손을 들어서 제지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진소유가 즉시 상황파악을 하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럼 이 곳이 흑점(黑店)이었다는 말인가요?) 진소유의 전음을 백방생은 듣지 못했지만 이내 능히 그 의도를 알 수가 있었다. 대인은 전음으로 대답했다. (본래는 흑점이 아니었지만 아마 우리가 들어서자 흑점이 되었던 것 같소.) 대인은 백방생과 진소유에게 동시에 전음으로 말했기 때문에 백방생에 게도 그 흑점이란 말이 전달되었다. 흑점이란 이른바 행인이나 투숙객들 을 상대로 강도짓을 하는 객점 등을 말한다. 태연하게 두 곳으로 동시 에 전음을 펼치는 대인을 보고 백방생은 그가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 을 재삼 인식할 수가 있었지만, 그러나 백방생은 그보다 긴장감이 앞 섰다. 그들은 이미 누군가가 그들을 습격하지나 않을까 하고 잔뜩 경계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당황해 하지는 않았다. 진소유가 말 했다.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어떻게 알게 되었죠?) 대인은 여전히 동시에 두 사람을 향해 전음으로 대답했다. (이 음식들에는 독(毒)이 들어 있었소.) 진소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뭐라고요?" 그녀는 사실 주위가 아주 조용한 것을 보고 혹시 주위에 누군가가 숨 어있는 것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 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미 자신들이 먹고 있던 음식물에 독이 들어 있었을 줄이야? 진소유는 내심 크게 당황하여 급히 몸속의 진기를 운행시켜 보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때 그녀의 몸속의 진기는 전혀 막힘이 없이 융통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소 의아한 진소유의 표정을 보고 대인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렇게 조사해볼 필요는 없소. 여시주는 독에 중독되지 않았으니 까. 나는 아까 이미 최초에 음식에 들어있던 독을 모두 제거해 버렸었 소." 진소유는 그제서야 자신이 그렇게 무사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 다. 하지만 그렇게 되자 자신이 마치 상대의 말을 의심하여 확인해본 것 같아서 다소 미안한 감정까지 들었다. 진소유는 애써 태연을 유지하고 다시 전음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죠?) 대인은 말했다. "우선은 우리를 노리는 적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오." 진소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 독은 어떤 것이었죠?" 대인은 말했다. "십향미혼산(十香迷魂散)이라고 하는 산공독(散功毒)의 일종이었소." 진소유는 물었다. "그 독은 또 어떤 것이죠?" 대인은 말했다. "백약문(百藥門)의 것으로 그 성분의 배합이 특이하기 때문에 평소에 는 누구라도 쉽게 눈치챌 수 없는 것이오. 나도 대신이 말해주지 않았다 면 모를 뻔 했소." 이 달마오수는 무공 외에도 각기 특성에 따라서 각각의 특유한 재주 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진소유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신이 그 가운데에서도 독에 대해서 잘 알며, 그가 음식물에 독이 들어있는 것을 알아냈다는 말이었다. 무공에는 운기를 하여 독기를 몰아내는 어기집독(御氣集毒) 따위의 절 기들이 있기 때문에 진소유는 달마오수가 독을 해소시킨 일에 대해서 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백약문이 지금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말인가요?" 이 백약문은 사실 정사중간의 집단으로서, 묘강의 독문(毒門)과 함께 이대독문(二大毒門)으로 꼽히고 있는 곳인 만큼 그들이 일행을 노리고 있다면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백 약문의 사람들은 교묘한 수법으로 독을 펼치는데 그 수법에 당해내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대인은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말할 수가 없소. 누구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그곳의 독약을 구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니까 말이오." 진소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혹시 그들은 신검을 우리에게서 다시 찾으려는 무리들이 아닐까요? 낮에 보았던 그 일을 그들은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거죠." 대인은 말했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소. 왜냐하면 이 제 곧 중독될 시간이 되었으니, 그들이 자연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 이오." 진소유는 공감했다. "아, 그렇군요!" 이어 마치 중독된 것처럼 그들 여섯명의 사람이 차례로 탁자위에 쓰러 졌다. 그러자 잠시 후에, 과연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사방의 어둠속에서 일단의 검은 그림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내심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중환자이므로 자연 음 식을 먹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중독되지 않았다는 것을 적들도 잘 알 고 있을 것이므로 그도 따라서 거짓으로 중독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 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하면 적들에게 더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는 가? 대신 그는 이 여섯사람의 연극을 보다 실감나게 도와주기 위해 소 리쳐 불렀다. "낭자, 낭자! 모두 왜 그러시오? 이거 보시오? 주인장! 주인장!...." 과연 백방생의 그러한 연극은 매우 효과가 있었다. 주위에서 잠시 머 뭇거리던 어둠속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자 이내 주저하지 않고 일행 에게 다가들었다. 모두가 흑의로 복면을 한 흑의인들이었다. 백방생은 그들의 차림새를 보자 문득 어딘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름아닌 낮에 보았던 금전방의 주인인 천수인도 막계의 차림새가 그와 비슷했던 것이다. (금전방(金錢幇)이 이 무이산의 부근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 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살수들을 보냈다는 말인가?) 금전방은 바로 복건성 등지에서 아주 유명한 청부살인의 단체이다. 전에 진소유도 그곳이 흑루의 일개 지단이라는 얘기를 한적이 있었다. 이십여명의 흑의복면인들은 포위를 하듯 일행을 에워쌌지만 다소 어리 둥절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아니 이거 정말로 모두 맥없이 가버리고 말았잖아?" "어, 저기 중독되지 않은 놈이 하나 있다?" 흑의복면인들은 대개 몸에 특별한 병장기들을 지니지 않고 있었다. 그것 은 바로 금전방 사람들의 독특한 모습중의 하나였다. 금전방 사람들은 암기나 그밖의 독특한 숨겨진 병기들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흑의복면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백방생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모두 일 이 너무 쉽게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긴장하지 않은 모습들이었다. 백방생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가만히 앉은 채 소리쳤다. "모두들 무슨 일이오? 당신들은 누구요?" 흑의복면인들은 그의 질문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알고보니 시체나 다름없는 녀석이었군 그래?"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앞으로 다가들더니 백방생의 옆에 놓여있는 가방을 집어들려고 했다. 그 가방은 바로 백방생의 유산인 황금 십만 냥 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들이 먼저 자신의 그 가방부터 노 리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혹시 그 가방안에 예의 신검이라도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까? 유산으로 받은 황금 십만냥을 그냥 맥없이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백방생은 그렇다고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없어서 즉시 발로 그 가방을 차서 탁자 밑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 흑의복면인은 이에 그만 허탕을 치고 백방생을 올려다 보았다. 물 론 백방생은 전혀 그에게 항거할 힘이 없었다. 이제 흑의복면인은 그저 탁자를 치우기만 하면 가방을 손에 넣을 수가 있을 것이다. 백방생으로는 당연히 옆에서 거짓으로 쓰러진척 하고 있는 달마오수 등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흑의복면인은 백방생의 그러한 행동에 다소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는 탁자를 치울 생각은 하지 않고 잠시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는 데 그 눈빛이 다소 심상치 않았다. 백방생은 그 눈빛이 왠지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흑의복면인은 이때 다소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는 먼 저 백방생을 제거해야 할 지 아니면 탁자밑의 가방을 들어야 할 지를 주저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백방생은 지금 그가 손을 쓰면 전혀 피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 다. 하지만 흑의복면인이 하필이면 중요한 순간에 왜 그와 같은 불구자 를 먼저 죽이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이때 백방생의 그러한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탁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듯 하더니 돌연 그 흑의복면인은 백방생의 얼굴을 향해 손 을 뻗쳐오는 것이 아닌가? 그 수법은 매우 신속하기 짝이 없었다. 흑의복면인은 아마도 그의 두 눈 을 찌르려는 듯 두 손가락으로 찔러오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어떤 심상 치 않은 변화가 깃들어 있었다. 백방생은 과거 무공이 폐지되지 않았 을 때에도 그 수법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는 거 의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피할 수가 있겠는가? 순식간에 흡사 자신의 두 눈알이 뽑혀나가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백방생은 그 수법의 변화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았다. 따라서 그 결 과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극심한 공포감에 전율을 느꼈기 때문일까? 백방생은 순간적으로 머리속에 어떤 섬광이 번뜩이는 것을 느꼈고 자신 도 모르게 소리쳤다. "백귀현, 당신이!...." 아마 달마오수도 미처 흑의복면인이 백방생에게 그런 살수를 펼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때 흑의복면인은 갑자기 도중에 서 손을 멈추었다. 다소 경악한 듯한 표정이 그의 두 눈에 떠오르고 있었 다. 그 잠깐의 시간이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느닷없이 달마오 수가 날벼락처럼 신형을 솟구쳐 올려서 출수를 했고 흑의복면인들이 여 기저기에서 나가떨어졌다. "앗." "으악!" 백방생은 아찔하는 순간에 대인이 어느새 자신의 앞으로 다가들어 흑 의복면인을 막아내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실로 촌각의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물론 달마오수의 무공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날벼락이 떨어지듯이 장내에 거센 풍운이 휘 몰아치고 그 바람에 근처의 유등도 꺼졌다. 칠흑같이 어두워진 장내에 서 무수한 경호성과 비명소리가 갑자기 합창하듯 일어났고 그리고 이 어 갑자기 다시 조용해졌다. 아니 조용해졌는가 싶더니 이어 다시 격렬한 격돌이 쌍방간에 일어 나는가 싶었고 파공성이 주위를 진동시켰다. 백방생은 몸이 편찮아서 시력도 많이 나빠졌다. 그는 비단 주위 사람들의 격돌하는 광경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인지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방의 의도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대강 간파했기 때문 에 이미 발끝으로 돈가방의 위치를 변경시켜 놓았다. 따라서 격돌중에 탁자가 치워졌어도 그 아래에는 가방이 없었다. 어둠속의 격돌은 두어 차례 계속되었고 주위의 기물들이 박살이 나는 소리들도 들렸다. 달마오수가 보호하기 때문인지 백방생에게는 어떤 살수 도 다가오지 않았다. 백방생은 은근히 진소유가 걱정되었다. 그녀의 무공은 비록 높다하나 아 직 격전의 경험이 부족해서 이런 어둠속의 싸움에는 자칫 상처를 입을 우려도 높기 때문이었다. 헌데 갑자기 가슴과 아랫배 등지에서 화끈한 느낌이 들더니 문득 다시 주위가 조용해졌고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파공성이 점차 멀어지는 것으 로 보아 아마도 적들이 모두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문득 그 가운데에서 진소유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요, 괜찮나요?" 백방생은 그 음성을 듣자 우선 매우 반가왔다. 그것은 진소유가 아직 무 사하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었다. 사실 조금전과 같은 그런 악전고투 는 흔한 일이 아니어서, 설사 무공이 높다고 해도 실수할 가능성이 높 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즉시 말했다. "나는 괜찮소." 갑자기 누군가가 유등을 찾아서 불을 밝혔다. 주위는 이미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다만 예상대로 백방생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 대부 분의 곳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서진 파편들 외에도 다른 것들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각종의 암기(暗器)와 동 전들이었다. 16 장 망해사(望海寺)의 예불 진소유는 옷차림이 다소 흐트러지고 옷자락 등이 약간 찢어지기는 했으 나 크게 부상당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달마오수도 모두 무사해 보였으며 게다가 백방생의 가방이나 오백나한상이 들어있는 가방들도 모두 무사해 보였다. 이것은 거의 기적적인 승리라고 할 수가 있었다. "아미타불!" 달마오수 중에서 대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진소유도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역시 금전방(金錢幇)의 놈들이었군요." 금전방의 사람들은 대개 암기 등을 사용하며 특히 그들 가운데 몇몇은 동전을 암기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들이었다. 이어 진소유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백방생을 향해 물었다. "헌데 당신의 아까 그 말은 대체 무엇이었죠?" 백방생은 모두의 시선이 은근히 집중되는 것을 보고 다소 고소하며 대답했다. "아까 그 흑의복면인은 바로 백귀현이었던 것 같소. 그가 금전방의 사 람들 가운데에 끼어 있었던 것이오." 진소유는 한편으로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 의아해 하며 말했다. "그래요? 헌데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죠?" 백방생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실로 우연이었소." 기실 백방생이 그 순간에 백귀현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무공수법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두뇌나 기타의 잠재력은 왕왕 위기 의 순간에 크게 작용하게 되는 수도 있는 것이었다. 본래 평상시였다면 백방생은 그 짧은 순간에 상대를 알아차리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두 눈을 찌르자 위기의 영감이 작용 하여 한순간에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만 것이었다. 백귀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 당시 스스로의 무공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 두 손가락을 사용한 무공은 백방생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부문의 절학인 대구 천수(大九天手)였던 것이었다. (내가 그것을 몰랐다면 이미 장님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달마오수 가운데 대인이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아미타불, 그렇소. 그 흑의복면인은 바로 그 백귀현 백시주였소. 소 승은 그들과 싸워보았기 때문에 자연 잘 알지요. 그리고 나머지는 금 전방의 사람들이었소." 진소유는 놀라서 물었다. "그럼 대체 그가 무엇 때문에 일부러 살수를 고용하여 우리들의 앞에 나타났던 것이었을까요?" 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음... 아마 우리가 어떤 유산을 찾았다는 것은 아직 모를 것이오. 다만 계속 우리의 행적을 수소문하다가 수상하다고 여겨서 뒤쫓아온 모양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그럼 그들은 신검 때문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대인은 말했다. "이번에 찾아온 사람들은 오직 그들 뿐이니 신검 때문은 아닐 것이오. 아미타불! 하지만 이번에 그들은 크게 패퇴하여 물러갔으니 다시 우리 의 앞에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오." 진소유는 물었다. "그가 상처를 입었나요?" 대인은 말했다. "본래 그는 소승과 호적수였소. 하지만 거기에 대례가 합공을 하자 그는 심한 상처를 입고 물러가게 된 것이오. 그의 상처는 중하여 보름안 에는 치유되기 어려울 것이니, 다시 재산을 노리고 그와 같은 모험을 하 지는 못하게 될 것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금전방의 사람들은 어땠나요?" 대지가 듣고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그 금전방주인 천수인도(千手人屠) 막계 (錨　였소. 나와 대의가 합공을 하여 싸웠는데, 그 역시 중상을 입고 도주하고 말았소. 이제 이 근방에서 다시 우리에게 도전하게 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오." 그렇다. 이 부근에 나타난 고수들 중에 수라교주가 다소 위험하지만 그는 얼마 전에 신검을 얻어 정신이 없을 것이고, 또한 청조각주도 은근히 그 뒤 를 추적하고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진소유는 조금전에 금전방주가 직접 왔었다는 얘기를 듣고 크게 놀랐다. 조금전 격전중에 많은 사상자가 생기는 것 같았는데 금전방에서는 그 들을 모두 데려갔으니 실로 신속한 행동들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진소유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의 일을 교훈삼아서 더욱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거예요." 대인은 합장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옳은 말씀이오." 진소유는 어서 장소를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백방생의 표정이 다소 괴이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알고보니 백방생의 전신 에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마, 상처를 입었군요?" 진소유는 그만 깜짝 놀라서 다가 갔다. 백방생도 조금전에야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아마도 그만큼 몸의 감각도 무디 어진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별 대단한 상처는 아니오." 기실 별 대단한 상처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백방생은 모두 일곱 군데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비교적 가벼웠고, 또 어떤 것들은 위 험한 부분을 지난 것들도 있었다. 피는 바로 그런 부분들로부터 흘러내리고 있었다. 특히 가슴과 아랫배 그리고 한쪽 허벅지에 생긴 상처는 꽤나 깊고 뚜렷했는데, 다행이라면 그 런 곳들도 내장은 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진소유는 백방생의 몸에서 급히 세 개나 되는 동전들을 뽑아냈다. 또 하나의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백방생의 몸에 맞은 암기들에는 전 혀 독(毒)이 칠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독이 칠해져 있었다면 백방생은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소유는 재빨리 백방생의 몸에 지혈을 하고 약을 바르며 물었다. "이 동전들에 독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혹시 금전방주가 사용한 것이 아닐까요?" 대지가 조용히 생각하는듯 하더니 말을 받았다. "금전방의 사람들은 대개 동전에는 독을 묻히지 않고 있소. 하지만 보 아하니 대신의 호위를 뚫고도 그런 상처를 냈을 정도이니 아마도 금전 방주의 짓이었던 것 같소." 정말로 백방생의 돈가방이나 오백나한상 등은 무사했다. 백방생의 몸을 치료하고 이어 물품들을 확인해본 다음에 이윽고 일행은 다시 떠날 준 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계속 하룻밤을 묵어간다는 것 은 위험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마침 달마오수 등은 식사도 마친 후가 아닌가? 그 주막의 주인 등은 예상대로 금전방의 사람들에게 이미 제압당하여 헛간의 구석진 곳에 처박혀 있는 상태였다. 일행은 일단 그들을 풀어주고 나서 떠날 준비를 했다. 우선 마차를 뜯어서 좀더 견고한 들것을 만든 다음에 백방생과 가방 들을 그 위에 안전하게 실었다. 들것은 번갈아서 들기로 하고 먼저 대의 와 대신이 각기 앞뒤에서 들고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본래 그들의 무 공은 대단한 편이었다. 그들은 이내 광풍(狂風)을 휘몰고 신법을 전개하 여 어둠속에서 북방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진소유는 들것의 옆에서 역시 신법을 전개하여 뒤를 따랐다. 그녀의 경 신술은 조예가 깊어서 한동안은 끄떡없이 달마오수와 보조를 맞출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래도 그녀는 공력이 이내 소모되어서 호 흡이 거칠어 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저 옆에서 따라가고 있는데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심 달마오수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가능하면 그녀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기실 진소유보다 더욱 입장이 나빠진 사람은 백방생이었다. 그 는 실상 몸이 이제 겨우 약간 호전되고 있었는데 그와 같은 상처를 다 시 입자 그만 서서히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증상은 얼핏 몸살과 비슷했다. 전신에 열이 심하고 가끔씩 헛소리를 해대곤 했다. 그리하여 달마오수는 자주 걸음을 멈추어 백방생의 병세를 살펴야 했고 따라서 나아가는 것이 지연되곤 했다. 나중에 달마오수는 진소유에게 아예 들것 위에 올라서 백방생을 간호하 고 있으라고 했는데, 백방생의 핑계를 대더라도 진소유는 차마 그럴 수 가 없었다. 어떻게 무거운 들것 위에 다시 그녀가 올라탈 수가 있겠는 가? 하지만 이내 그녀는 달마오수의 고집에 못이겨서 지고 말았고 들것 위에 올랐다. 진소유는 비록 성심껏 백방생의 몸을 간호하기는 했으나 매우 달마 오수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기실 그녀가 들것위에 올라타자 달마오수의 달리는 속도는 아까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라졌다. 그야말로 그들 능력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이다. 기실 아마도 이런 방법으로 처음부터 달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달마 오수는 진소유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쉬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리 하여 다음날 새벽 무렵에는 무려 수백리나 나아가 있었고, 그 때쯤에는 드디어 백방생도 병세가 호전되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이미 무이산맥을 넘은지도 오래되었고 이윽고 으슥한 길로 계속 달려서 일행은 저녁무렵에 하나의 거대한 성시(城市)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곳은 복주성보다도 더 큰 곳이었고 근처에 파양호라는 거대한 호수를 두고 있었는데, 다름아닌 중원의 유명한 성시인 남창(南昌)이었다. 저녁무렵에 남창에 도착하자 일행은 우선 잠시 쉬어가기 위해 묵어갈 객점부터 구했다. 그 남창은 매우 번화하여 커다란 객점들도 즐비했고 일행이 편히 쉬면서 식사할 수 있는 곳들도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 일 행은 좋은 객점을 잡아서 방을 빌리고 그 객방에서 식사를 한 다음에 오랜만에 목욕 등을 하고 푹 쉬었다. 다음 날, 백방생은 새벽녘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소유를 불렀다. 진소 유는 모처럼 편히 쉬기 위해 옆방에서 수면을 취했었는데, 백방생이 부 르자 금방 달려왔다. 편히 쉬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안색은 무척 밝아 보 였다. 물론 오늘따라 백방생의 표정도 매우 밝아 보였다. 어찌된 셈인지 그의 몸은 오히려 그저께 상처를 입기전보다 더욱 좋아진 것 같았다. "무슨 일이죠?" 아직 태양이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주위는 여명의 빛으로 훤하게 밝아 져 있었다. 백방생은 잠시 그 여명의 빛을 바라보다가 진소유에게 시선 을 주었다. 투명한 우유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살갗은 이순간 흡사 새벽의 안개속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들이 오늘 떠나자고 하오?" 백방생은 약간 우울한듯 하면서도 왠지 눈빛이 맑아진 것 같았다. 진소 유는 그의 표정을 은근히 살피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이만하면 적들의 추격도 따돌렸을 것이고, 따라서 오늘 하 루는 이곳에서 쉬면서 당신의 병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 이예요." 여기에서 그들이란 물론 달마오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아, 그것 참 잘됐구려. 내 그렇지 않아도 오늘 이곳에서 해야할 일을 한가지 생각해 냈었는데." 진소유는 거의 거동도 못하는 백방생의 생각이 너무나도 분수를 모른 다고 느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지고 있건만 거기에 또 무슨 일 을 하겠다는 말인가? 진소유는 물었다. "해야할 일은 뭐죠?" 백방생은 약간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낭자는 다소 귀찮겠지만, 그러나 아마 낭자도 나의 이런 입장이 되고 보면 그저 가만히 세월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될 것이오. 솔직히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지도 모 르고, 게다가 이번의 그 일은 나에게는 제법 중요한 일이라오." 그렇다. 진소유는 사실 얼마간의 심한 짜증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이 아직 백방생의 심중을 충분히 헤아 리지 못한 것 같았다. 만일 누군가가 백방생과 같은 처지가 된다면 실로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진소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 다. "좋아요. 당신의 몸은 좀 견딜만 한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왠지 오늘따라 매우 편안한 느낌이 드는구려." 진소유는 다가와서 그의 상처를 살폈다. 기이하게도 그의 몸속의 상처 도 이미 빠른 속도로 아물었고 겨우 외상 정도로만 보였다. 그것은 아 마도 백방생이 그간에 엄청난 영약들을 복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다지 반가운 사실은 못된다. 이럴 경우에 백방생은 쉽게 낫지도 않으면서 또한 죽기도 힘든 체질로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진소유는 그의 몸을 다시 붕대로 잘 감싸준 다 음에 흥미있다는 표정을 하고 물었다. "그럼 대체 오늘 당신이 해야할 일이라는 것은 뭐죠?"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비밀이오." 진소유는 짐짓 눈을 크게 떴다. "비밀이라고요?"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즉시 낭자에게 부탁해야할 일이 있소." 진소유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것은 정말 어거지로군요. 말은 안해주고 오히려 부려먹기만 하겠다 니?"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낭자가 잘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소.?" 진소유는 웃으며 말했다. "대체 뭘 해달라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밖으로 나가서 물어보면 아마도 이 남창성의 부근에 망해사(望海寺)라 는 절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오. 낭자는 즉시 그 망해사로 가서 그곳의 스님 한 사람을 데려다 주시오." 진소유는 의아해 했다. "스님을 데려다 달라고요? 혹시무슨 불사라도 벌이려고 하나요?" 백방생은 가볍게 실소하며 말했다. "이거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만, 하하...돌아가신 조부님께서 생전 에 늘상 그곳을 자주 찾으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소. 사실 내가 이 번에 소림사로 가면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이니?" 진소유는 말했다. "그것은 소림사에 가서 하면 되지 않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저었다. "소림사는 선종이므로 달마하원과 마찬가지로 법사(法事)와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게다가 나는 왠지 오늘은 심신이 상쾌하여... 오 늘과 같은 날에 미리 그런 것을 해드리고 싶구려." 진소유는 그제서야 약간 수긍이 가는지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뒤늦게 받은 유산에 대한 답례도 겸해서 말인가요?" 백방생은 다소 안색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소. 나는 다만 순수하게 할아버님의 극락왕생을 비는 마음 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의 할아버지는 이미 극락으로 가셨을 것 같군요. 하지 만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니, 내가 나가서 금방 알아보도록 하 지요." 진소유는 이내 순순히 백방생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과연 백방생의 말대로 이 남창의 부근에 망해사라는 절이 하나 있었다. 그 절은 남창의 북쪽, 그러니까 파양호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다지 유명한 절 은 아니었다. 진소유는 어렵게 몇사람에게 물어서야 그 위치를 알아낼 수가 있었는데, 그 절은 비단 매우 낡았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시원치 않았다. 진소유는 정말로 백방생과 같은 과거의 백면서생이 어떻게 이런 초라한 사찰을 알고 있을까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기까지 했다. 사찰에서 법사를 벌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비록 절차는 까 다로울지 몰라도 일단 돈만 들이면 그런 것도 수월하게 해결되기 마련 이었다. 그 망해사라는 절의 늙은 주지는 갑자기 크게 법사를 벌이려는 시주객들을 만나게 되자 내심 놀라고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 같 았다. 진소유가 말하자 그 주지는 즉각 그 절의 중년승려 한사람을 보내 왔다. 백방생은 간단하게 아침겸 점심식사를 한 다음에 진소유에게 돈을 주어 그 중년승려와 함께 서둘러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기실 이쪽의 사정을 알게 된 그 중년승려는 가능하면 일을 복잡하게 하지 않고 서둘러 물품 들을 구입하고 오후에 법사를 치를 수 있도록 했다. 복잡한 절차는 이 쪽에서도 원하지 않고 그쪽 사찰에서도 실속만 챙기면 된다는 생각이 었다. 달마오수는 백방생이 느닷없이 대법사를 벌이려고 한다는 말을 듣자 도무지 시큰둥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본래 그러한 일들을 달갑게 생각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개 백방생과 같은 처지가 되면 마음 또한 약해지 지 않겠는가? 그런 심리를 불사에 의지하고자 하는 것을 억지로 만류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본래 객방에 남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백방생의 말을 들어보고 나서 이내 생각이 달라졌다. 백방생은 굳이 그 오백나한상을 가지고 가 서 그것을 앞에 두고 절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 위험성에 대한 백방생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그저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오. 사찰의 모든 스님들을 모두 내 보내고 우리들끼리 경계하는 가운데 그 일을 치르면 될 일이 아니 오?" 정오가 약간 못되어서 일행은 간단한 차림으로 마차 등을 빌려서 망해 사로 향했다. 망해사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일행이 망해사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십여명이나 되는 망해사 의 스님들이 나와서 정중히 맞이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몸이 불편했기 때문에 자연 법사는 더욱 간소하게 치뤄지 게 되었다. 백방생은 사찰 안의 승려들에게 갖은 의복과 예물들을 선사 했고, 따라서 그 사찰의 늙은 주지는 법사를 치르고 나서 백방생을 향 해 끊임없이 칭찬하는 말을 했다. 그는 백방생이 그야말로 뛰어난 효자이며 반드시 그의 조부님은 극 락으로 왕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백방생이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효도를 다하려는 마음에 크게 감복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찰안의 스님들은 숫자가 스무명도 채 안되었기 때문에 백방생이 가져 간 예물 들은 많이 남았다. 백방생은 게다가 그들 모두에게 각기 작 은 은원보를 하나씩 주었으며 이윽고 주지를 불러 다시 말했다. "나는 오늘 밤 할아버님과의 추억을 회상해 보기 위해 이곳에서 머물고 자 하오. 그런데 시끄러우면 좋지 않으므로 오늘 하룻밤만은 이곳을 우 리에게 맡기고 모두 자리를 비워주지 않겠소?" 이어 백방생이 백냥짜리 금표들을 꺼내자 그 주지스님은 놀라 눈이 휘 둥그래졌다. 그저 백냥짜리 금표를 하나만 보는 것도 어려운데 백방생 의 품속에서는 끝없이 그것이 흘러나오는 것 같지 않은가? 그 주지스님은 그야말로 자신이 오늘 재신(財神)이나 다름없는 대시주 를 만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일에 조금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백방생은 그에게 모두 일천냥의 금표를 시줏돈으로 주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금액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노주지는 평생 그런 거금을 만져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그 노주지는 당연히 두말없이 일행이 쉬어갈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갖춰주고 하룻동안 스님들과 함 께 절을 떠나갔다. 그들에게 그것은 실로 일도 아닌 셈이었다. 달마오수와 진소유에게 있어서 백방생의 그러한 행동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백방생이 갑자기 심한 감상에 빠져서 그러한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일단 본래의 임무에 커다란 장애를 주지않는 한 그 일을 말리지는 않았다. 사실 그들은 비록 납득하지는 못해도 약간 백방 생의 처지를 동정하기는 했기 때문이었다. 실상 누구나 백방생과 같은 처지가 되면 갑자기 미치지 않는 것만 해도 이상하다고 해야할 것이었 다. 백방생은 저녁무렵에는 천천히 진소유와 함께 사찰의 경내를 산책했다. 스님들마저 모조리 물러간 이 사찰의 경내는 비록 낡았지만 맑은 공 기가 흐르고 있었다. 진소유도 백방생의 뒤를 따르면서 왠지 자신이 다 시 사문(師門)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백방생은 혼자 걸어서 대략 사찰의 경내를 두어 바퀴 돌더니 이윽고 선방으로 돌아가서 함께 식사를 했다. 주지스님 등이 미리 저녁공양을 지어 놓고 떠났었기 때문에 일행에 게 불편한 점은 거의 없었다. 백방생은 그 저녁식사에서 비로소 스스로 밥을 약간이나마 입으로 먹을 수가 있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백방생이 문득 진소유에게 말했다. "참, 한가지 잊은 곳이 있소. 전날 조부님께서는 이 망해사의 석굴에 서 얼마간 참선을 하시곤 하셨다는데, 날이 완전히 어둡기 전에 그곳에 한번 들러야 하겠소." 진소유는 하루종일 귀찮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이때는 약간 짜증이 나 있었다. 그녀는 비록 백방생이 불쌍해도 그의 투정을 있는대로 받 아주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물었다. "거기에도 상을 차려야 하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촛불만 몇개 있으면 되오. 오백나한상을 가져갈 생각이니 달마오 수에게 연락해 주시구려." 백방생은 곧장 촛불을 밝혀 들고서 일행과 함께 옆에 있는 석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 석굴은 사찰의 한쪽편에 있는 작은 돌산의 중턱에 있었는데, 일행이 다가가니 석굴은 하나뿐이 아니라 그 숫자가 무수히 많았다. 그러니까 흡사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처럼 돌산의 중턱을 따라서 크고 작은 석굴들이 무수히 뚫려 있는 것이었다.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크기가 컸고 어떤 것들은 깊게 뚫려 있었 으며, 어떤 것들은 그저 흔적만 남아있는 곳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들의 공통적인 점은 바로 그 모두가 그 옛날 사찰이 번성했을 당시 그 하나하나의 석굴에는 참선을 하기 위한 자리들이 마련되었었다는 사 실이다. "아니 이거 대체 어느 곳인지 모르겠는걸?" 백방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돌산을 두어바퀴나 돌았다. 오늘따라 그의 몸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것은 실로 불행중 다행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 돌산은 물론 이 근방에서 유일한 산은 아니었다. 이 부근에는 야산 들도 있었고 또한 기암괴석의 수려함을 자랑하는 산봉우리들과 폭포수 가 장관인 깊은 계곡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돌산은 다소 특이한 모양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 돌산의 모양은 마치 하나의 종을 닮은것 같기도 하고 혹은 커다란 돌위에 작은 돌이 올려져 있는 듯한, 돌로 만들어진 사람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그 중턱에 삥 돌아가며 무수한 석굴들이 생겨나 있으니, 바로 그러한 기이한 형상 때문에 이곳에 망해사라는 사찰도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윽고 어느 한 방향을 정하더니 중턱의 한 석굴을 향해 오 르기 시작했다. 그는 물론 혼자서 암벽을 기어 오르기에는 아직 무리 였다. 진소유가 당연히 옆에서 많이 부축해 주었다. 달마오수는 거의 군소리 없이 가방들을 들고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백방생은 이미 오백나한상을 두고 예불을 올리겠다고 했었다. 그들은 이 제 백방생이 더이상 귀찮은 일들을 벌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백방생의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 흐르고 그의 호흡이 턱에 닿았을 무 렵에 이윽고 일행은 하나의 작은 석굴앞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 석굴은 그다지 깊지도 않았고 또한 다른 석굴과 다른 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백방생은 이내 그 석굴이 틀림이 없다고 좋아했다. 그 석굴은 폭이 비좁은 데다가 온갖 먼지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거미 줄이 가득 내부를 메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징그러운 벌레들이 왔 다갔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사람이 한꺼번에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 려웠다. 달마오수는 본시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성품들이었다. 게다가 안으로 들어가려면 자연히 많은 벌레들을 해치게 될 것이므로 그들은 별로 안 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단지 오백나한상을 지키는 것 뿐이라면 그들은 석굴의 입구만을 지키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백방생 은 엉뚱하게도 거기에서부터는 누구의 시중도 받지 않을 눈치였으므로 달마오수는 자연히 석굴의 입구에 남았다. 진소유만이 백방생의 시중을 약간 들어 주었는데, 지금 백방생의 안색이 매우 엄숙해 보이는 것을 보고 그녀도 감히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그 석굴의 안쪽에는 과연 이 전에 누군가가 불공을 드리던 흔적이 있 었다. 석굴의 끝부분에는 하나의 오래된 석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위에 는 수십개의 작은 돌부처들이 올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우선 주위를 깨끗하게 청소한 다음에 촛불들을 좀더 밝히 고 그 석탁위의 돌부처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는 대신 그 위에 오백 나한상들을 올려놓으려는 것이었다. 그 오백나한상은 갑자기 촛불아래 모습을 드러내자 그야말로 휘황한 광채를 발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달마오수는 이에 혹시 그 광채가 새 어나가서 귀찮은 일이 벌어질까봐 더욱 주위의 경계를 철저히 했다. 진소유의 도움을 받으며 그 오백나한상을 단위에 올려놓은 다음에 백방생은 향불을 피우고 그 앞에 꿇어 앉았다. 무슨 염불을 외우거나 곡을 하지는 않았으나 백방생은 그렇게 있는 상태로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진소유는 잠시 기다렸으나 그래도 백방생이 여전히 그러한 자세를 고 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 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고 있죠?" 백방생은 문득 꿈속에서 깨어난 듯이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나는 과거 조부님과의 추억을 생각하고 있었소. 그건 그렇고, 지금 낭 자는 나를 좀 도와줘야 하겠소." 진소유는 의아해 하며 말했다. "또 해야할 일이 있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저 오백나한상의 몸속에는 지금 여러가지 부정한 물건들이 들어가 있는 상태이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예불을 올릴 수가 있겠소? 낭자는 어서 그 물건들을 모두 꺼내서 달마오수에게 갖다 주시오." 지금 오백나한상의 몸속에는 무학구결을 적어놓은 두루마리들과 영약인 대환단들이 들어 있었다. 기실 그것들이 무슨 부정한 물건들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방생은 지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진소유는 내심 심한 짜증이 나 있었다. 그녀는 다소 신경질이 났으나 이 내 그 격동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묵묵히 오백나한상의 몸속에서 물건들 을 꺼내기 시작했다. 소림사의 영약이라고 신비스럽게 전해지던 대환단은 역시 정확히 서 른 여섯개가 있었다. 그리고 무공의 구결들을 적어놓은 두루마리들은 그 보다 훨씬 많았다. 그 내용물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분실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진소유는 다소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빠르게 손 을 놀려서 내용물들을 모두 꺼내고 그것들을 작은 보자기에 쌌다. 백 방생의 말대로 달마오수에게 일단 갖다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진소유는 무심코 마지막 나한상을 석단위에 올려놓다가 문득 한가지 기이한 사실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보니 그 석단은 크기가 적당하여 오백나한상을 올려놓기에 딱 맞았고, 게다가 석단의 위에는 은근히 같은 숫자의 홈이 패여져 있어서 오백나한상들은 마치 제자리에 들어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여기에도 누가 이전에 나한상들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하지만 진소유의 그러한 생각은 그저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것에 불 과했다. 그녀는 이내 백방생의 시선을 의식하자 다시 절로 한숨이 나와서 그 보따리를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됐군!) 백방생은 그것을 보자 문득 내심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사실 지 금과 같은 시간을 몹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 에 품고 있던 어떤 도박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진소유가 밖으로 나가고 나자 백방생은 즉시 석단 아래의 작은 돌출된 부위를 건드렸다. 그러자 실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소리없이 석단의 윗부분이 움직이더니 뒤쪽의 석벽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이 아닌 사람은 누구라도 그러한 변화를 예측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오래되고 낡은 석굴속에 그처럼 훌륭한 기관장치가 만들 어져 있다니? 하지만 백방생은 아까 이미 그러한 기관장치와 그 동작의 열쇠를 미리 발견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치에 따르는 것이 보통일 것이니 그 러한 이치를 안다면 그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그 오백나한상을 실은 석단의 윗부분이 석벽의 안으로 밀려들어가자 갑자기 주위가 황금빛이 사라져서 약간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지금 석단이 있던 자리에는 낮은 석단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 석단의 윗부분 은 아주 평평하여 흡사 조금전에 잘려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물론 그것은 석단의 윗부분이 잘려 들어가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났다. 그것은 물론 아주 짧은 정지된 순간이었는데, 그것이 끝나자 문득 잘려 져 나간 석단의 절반이 다시 잘려져서 석벽의 안으로 들어가며 남은 석 단의 위에 하나의 작은 철가방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고 즉시 그 가방의 뚜껑을 열어 보았 다. 가방의 뚜껑은 쉽게 열렸고, 그 안에는 하나의 작은 양피지 두루마 리와 괴이한 재질의 철장부(鐵帳簿)들이 가득하게 들어 있었다. 철장부는 백권 정도였고 그 철장부 한권에는 아주 얇게 보이는 철지(鐵紙)들이 백 장 가량 들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보통의 쇠로는 그렇게 얇은 철판을 만 들기 어렵다. 하물며 그것들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으니 대체 어떤 재질인 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워낙에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되어 백방생은 우선 양피지만을 집어든 다음에 가방의 뚜껑을 도로 닫고 아래로 눌렀다. 그러자 즉시 다시 석벽안에서 두 개의 석단이 돌아와서 원래대로 모양을 갖추는 것 이었다. 그것은 실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기관장치였다. 모든 것은 다행히도 백방생의 의도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오백나한상 은 다시 멀쩡히 나타났고 석단이나 뒤의 석벽도 원상태로 돌아와서 전 혀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대체 누가 이렇게 신기한 기관장치를 이곳 에 만들어 놓은 것일까? 백방생은 양피지를 품속에 감추고 나서 뒤에 진소유가 돌아오는 기척 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벌써 예불이 끝났나요?"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낭자가 오지 않으니 나 혼자서 예불을 마칠 수밖에 없었소." 진소유는 다소 아미를 찌푸렸다. "그들은 당신이 그 물건들을 꺼내도록 한 일에 대해서 다소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그들을 이해시키느라 다소 시간을 지체하게 되 었죠." 백방생은 말했다. "어쨌든 일을 마쳤으니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합시다." 진소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가서 다시 그 보따리를 가져올까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기왕에 꺼낸 것이니 일부러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오. 우리 는 우선 저 나한상들부터 챙기도록 합시다." 진소유는 이에 그만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정말 수작을 부리는군요. 내가 모를 줄 아나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져서 말했다. "아니 내가 무슨 수작을 부린다는 것이오?" 진소유는 쌀쌀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 물건들에 욕심을 내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것을 모를 줄 아나요?" 17 장 달마하원(達摩下院)의 무학들 백방생은 혹시 진소유가 모든 것을 눈치챈 것이 아닌가 하고 내심 가슴이 철렁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녀는 사실 나한상속의 물건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이에 은근히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 리며 말했다. "하하, 낭자에게는 당할 수가 없겠구려. 하지만 그 물건들은 본래 선 친의 물건이었는데 내가 잠시 도중에서 구경을 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소?" 진소유는 뜻밖에도 그가 그렇게 순순히 시인을 하자 가볍게 웃고 말 았다. "하지만 달마오수는 결코 그런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면 낭자가 중간에서 잘 처리해 주면 될 일이 아니오?" 진소유는 짐짓 냉소를 했다. "나더러 수고하라고요? 대체 내가 무슨 이익이 있다고 그런 일들을 대 신 해주어야 한다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건, 낭자가 남달리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오." 이에 문득 진소유는 왠지 갑자기 안색이 굳어지는 듯 하더니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좋아요? 내 당신의 부탁을 다시 들어주기로 하죠. 그러나 나를 그런 식으로 보면 곤란해요. 나는 절대로 착한 사람이 아니예요." 백방생은 그녀가 그렇게 갑자기 표정을 바꾸자 절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말 가운데 어떤 것이 그녀를 화나게 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쉽게 알아낼 수는 없었다. 백방생은 이에 어색하게 웃 으며 말했다. "물론이오. 당신은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오. 다만 악독하기 짝이 없 는 사람일 뿐이지." 백방생은 일부러 장난 비슷하게 말했다. 그러나 진소유는 정색을 하고 다시 웃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해주어야 하죠?" 백방생은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선 이 나한상들을 가방안에 다시 집어넣고 밖으로 나갑시다. 그리고 밖으로 가서 그 물건들을 달마오수에게 받아서 내가 선방에서 구경할 수 있게 해 주시오." 백방생은 이곳 석굴속의 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서 일부러 자신이 그 물건들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과연 모든 일들이 그의 뜻대 로 되어 갈 지는 아직 의문이지만...방안에 넣고 백방생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석굴의 밖에서는 대인이 예의 그 보따리를 들고서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오는 백방생과 진소유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아미타불, 예불은 끝났소이까?" 백방생은 손짓으로 진소유가 들고 온 가방들을 가리켰다. "지금 조사해 보시오. 다만 나는 여러분께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대인은 물었다. "무슨 부탁이오?" 이미 대의와 대례 등이 달려들어서 가방속의 오백나한상을 검토해 보고 있었다. 그들은 금새 점검을 끝내고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표정 들을 지었다. 백방생은 그것을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가 조금전에 그 물건들을 나한상의 몸속에서 꺼내게 되었는데 그 점을 양해해 주시오." 대인은 웃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부탁이란 겨우 그런 것이었소이까?" 백방생은 말했다. "그 물건들은 모두 불문의 무가지보라고 할 수가 있는 것들로서, 만일 내가 비록 특별한 이유에서라도 그것들을 밖으로 꺼내게 되었다면 그 만큼 속기와 접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인은 말했다. "아미타불, 실로 자비스런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시주의 그런 효성스런 마음은 더욱 귀한 것이므로 소승 등은 그다지 책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 소이다." 백방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제가 다시 그와 비슷한 한가지의 부탁을 드려 도 좋다는 말입니까?" 대인은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아미타불, 헌데 대체 무슨 부탁이지요?" 백방생은 말했다. "저는 방금전에 예불을 올리는 도중에 문득 생각했었습니다. 혹시 선친 께서 남기신 그 물건들을 구경해 본다면 저의 몸이 나아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저의 몸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효도를 다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그 물건들을 오늘 밤 잠시 선방에서 구 경해 볼 수가 있겠습니까?" 대인은 이에 잠시 멈칫했다. 본래 그 물건들 가운데에서 두루마리 하나 라도 분실되면 그들은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실 오백나한상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 두루마리에 더욱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었다. 비록 말은 수월하게 하지만, 만일 백방생이 그것 들을 구경하다가 단지 하나라도 분실하거나 한다면 그 책임은 대체 누 가 지겠는가? 그러나 대인은 이내 대답했다. "아미타불, 그 물건들은 본래 시주의 선친의 물건들이었소이다. 비록 소승 등이 호송의 임무를 맡고 있기는 하지만 책임자는 역시 시주이 므로, 시주께서 그렇게 하고자 하신다면 어찌 말리겠소이까?" 진소유는 본래 스스로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미처 그녀가 나서 기도 전에 이미 사건은 해결되어 달마오수가 승낙해 버리는 것이 아닌 가? 그녀는 달마오수가 이렇게 쉽사리 승낙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하여 다소 어리둥절한 느낌까지 들었다. 백방생은 대인이 이어 그 물건들이 담겨져 있는 보따리까지 건네 주자 옆의 진소유를 바라보며 웃은 뒤에 다시 대인을 향해 감사의 말을 했 다. "고맙습니다. 만일 제가 오늘밤에 이것들을 인연으로 몸이 다시 좋아지 게 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스님들의 덕분이라고 해야 하겠군요?" 대인을 비롯한 달마오수는 거의 동시에 합장을 하며 말을 받았다. "아미타불, 과분한 말씀이시오!" 백방생은 이윽고 그 작은 보따리를 들고서 달마오수 등의 호위를 받아 가며 다시 선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미 미리 말을 해두었기 때문에 그 가 그 작은 보따리 속의 물건들을 꺼내보는 동안 달마오수 등은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진소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조 금전에 약간 화가 났었는지 산아래로 내려온 이후에는 혼자 쉴곳으로 돌아간 다음에 그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백방생은 물론 그러한 분위기와 상황을 미리 예측한 것이었다. 그는 물론 그러한 상황을 미리 꾸몄다. 그것은 역시 그의 최후의 도박이라 고 할 수도 있는 한가지의 가능성을 실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제까지 제법 노력을 하며 살아왔으나 그 모든 노력들은 허망 하게 결실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사실 너무도 포기하기엔 억 울한 것이었다. 다만 상황은 너무나도 절망적이긴 했다. 하지만 백방생은 오직 그 안에서도 묵묵히 한가지의 희망을 찾아냈던 것이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철저히 무너졌어도 그것이 그의 정신까지 망가뜨리지는 못했 던 것이었으므로, 최후의 한가지의 희망,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달마오수가 건네준 그 비 급과 명단의 보따리일까?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단 한장의 양피지였 다. 그것은 비록 작은 양피지 한조각에 불과했지만 지금 백방생에게는 설사 수천냥의 황금보다도 귀중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그것만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백방생은 사실 그 양피지 때문에 지금 이 망해사에 온 것이기도 했다. 지금 이 선방의 주위에는 달마오수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 어서 그 비급들은 오백나한상보다 더욱 중요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 지만 백방생은 비교적 침착하게 행동했다. 단단히 방문을 잠근 그는 촛 불 아래에서 그 보따리를 풀고 그 안의 내용물들을 꺼내는 척 했다. 하 지만 기실 그가 꺼내든 것은 바로 그 양피지 한장이었다. 그 양피지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전설상의 부자였다 는 과거의 황금충(黃金蟲)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기실 그 자세한 얘 기를 하려면 좀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전날, 백방생이 무심코 황금충의 보물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 겉으 로는 무심한 척 했지만 그는 매우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 면 온통 절망뿐인 상황하에서 그것은 희망을 가져다줄 수가 있었기 때 문이었다. 사실 그 오백나한상의 비밀은 아직 누구도 풀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 만 백방생은 절박한 상황하에서 그 비밀을 푸는 일에 은근히 몰두해 왔었기 때문에 한가지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마치 그것은 무의식의 영감이라고나 할까? 그가 착안한 것은 바로 오백나한상의 몸속이 하나같이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것이 특이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생각하겠지만, 그러 나 그 생각은 좀 더 진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황금충은 어째서 그렇게 나한상들의 몸속을 비워놓았을까? 물론 그것은 그의 황금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암시일 것이다. 그는 대체 거기에 무엇을 채워놓으려고 한 것일까? 그 것은 혹시 역시 황금이 아닐까? 아니 그가 전혀 거기에 무엇을 채워 놓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도 좋다. 또한 그가 황금에 관한 암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고 해도 좋다. 하지 만 최소한 거기에는 어떤 뜻이 있을 것이다. 사실 그것만으로 오백나한상의 비밀을 풀어낸다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오백나한상의 표정이나 동작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연구하고 조사해 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방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한 가지만을 뇌리에 떠올렸다. 이 망해사는 사실 그대로 과거 백노야가 간혹 들러서 법사를 열곤 했던 곳이라고 했다. 백방생이 그 기억을 떠올렸던 것은 불과 얼마전의 일이 었다. 바로 달마오수의 들것에 실려서 누운 채로 오던 중이었다. 과거 이 망해사는 그 이름이 만공사(萬空寺)라고 했다. 백방생은 혹시 그 나한상의 속이 비어있는 것과 그 만공사라는 사찰의 이름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었다. 사실 하나의 나한상이 비어 있는 것 은 일공(一空)이라고 할 수가 있고, 따라서 오백나한상이 비어져 있는 것은 오백공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백공은 즉 만공(萬空)과 통하 는 것이며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가 있다. 아마도 천하에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찰들은 한두개가 아닐 것이 다. 백방생은 그 사찰이 조상들과 연관이 있다는 점을 중시했다. 게다 가 그 이름이 이제는 망해사가 된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본래 만공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이 사찰의 경내에 있는 한 산봉우리 의 중턱에 많은 동굴이 있기 때문에 생겨났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망해 사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주변에는 바다는 없다. 있다면 오직 거대한 호수인 파양호가 있을 뿐이다. 혹시 그 파양호를 바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얘기 가 쉬워진다. 정말로 이 사찰은 파양호를 굽어보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백방생은 그것이 혹시 발해(渤海)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 것이 정말로 바다라면 그것은 실제의 바다가 아닌 마음의 바다이다. 그 리고 그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은 불문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 체 누가 있어서 발해를 굽어본다는 말인가? 혹시 그것은 나한(羅漢)이 아닐까? 그것은 오백나한이어도 좋고 한 명 의 나한이어도 좋다. 그렇다면 정말로 망해사에는 그럴듯한 나한이 있 는 것이 아닐까? 그 나한의 뱃속이 비어있는 것이라면 더욱 걸맞을 것 이다. 백방생은 본래 확신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이 사찰안에 들어와서 경내를 둘러보고는 거의 확신을 할 수가 있었다. 본래 그 동 굴이 뚫려있는 산봉우리는 전혀 나한상과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 누구 도 그 산이 사람을 닮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오히려 그 산 은 소나 말 등을 닮았다고 하는 것이 적격일 것이었다. 그러나 종종 의 식은 그 생각을 변하게 만든다. 백방생은 금방 와서 보고 그 산이 흡사 눈사람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 다. 사실 그것은 눈사람이 아니라 나한상을 닮은 것일 것이다. 백방생 은 드디어 그 나한상의 배꼽에 해당되는 부분을 영감으로 찾아내고는 이렇게 양피지를 손에 들게 되었던 것이었다. 과연 이 양피지는 정말로 황금충의 유물일까? 그리고 그렇다면 어째서 그의 조부 등은 아직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과연 백방생 의 그러한 추리는 고명하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일까? 양피지를 꺼내 든 백방생의 마음은 자못 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머 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지금 달마오수는 그가 비급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 겠지만, 자칫 머뭇거리면 도리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백방생은 곧 장 양피지를 펼쳐들고 읽었다. 거기에는 철장부 백개의 사용방법과 무슨 비밀번호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간단했다. 무슨 그것을 남긴 사람의 서명이나 남기는 말 따위가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마치 장난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그 사용방법에 보면, 철장부속에 들어있는 철지들을 뜯어서 전 장으로 가져가면 비밀번호를 검사한 후에 황금 만 냥을 준다고 했다. 철 장부속의 철지는 모두 백장이고, 또한 그 철장부가 모두 백권인데 그 철 지 한장에 황금 만냥을 준다면 어찌 엄청나지 않겠는가? 누구도 그와 같 은 사실은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사실 백방생이 바랬던 것은 양피지에 적혀있을 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남기는 말이었다. 과연 이것은 정말로 황금충의 유물일까? 솔직히 지 금의 백방생으로서는 몸이 부실하여 그 많은 재산이 있다고 해도 전혀 쓸모가 없을 정도였다. 백방생은 양피지의 내용을 여러번 살펴보고 숙지한 다음에 이윽고 그 양피지를 즉시 촛불에 태워버렸다. 양피지는 특수한 재질이 아니어서 이내 촛불에 화광을 발하며 타버렸고 검은 재만을 수북이 남겼다. 그것 은 약간의 미련이라도 가지고 있는 백방생에게 절망과 단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대신 그것은 독특한 냄새를 일으켜서 그 연기로 인해 바깥의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대의 등은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가 이내 기침을 하 며 다가와 방문을 열었다. "아미타불, 혹시 시주께서는 비급을 태우고 계신 것이 아니오이까?" 대의와 대지가 다가왔고 그 중에서 말문을 연 것은 바로 대의였다.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있겠소? 이것들은 소림사에 전해져야 할 물건들인데 감히 내가 훼손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나는 다만 나의 사사로운 문서를 태웠을 뿐입니다. 두분께서 정히 의심스럽다면 이리 들어와서 보십시오. 제가 태운 것은 여늬 종이가 아닙니다." 대의와 대지는 그 말에 약간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들이 보 기에도 서찰 등의 용도로 쓰이는 두루마리와 방금 태운 양피지는 타고 난 이후의 모습도 달랐다. 대지가 이내 합장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러셨군요. 시주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의당 소승 등은 믿어 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소승 등은 단지 시주께서 잠시 잊으셨나 해서 방문을 열어본 것일 뿐입니다." 백방생은 말했다. "호의는 고맙소. 나는 내일 아침까지 이 비급들을 구경할 생각인데, 그 렇다면 이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소?" 대지와 대의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다시 한번 타고난 양피지의 재 를 살펴본 다음에 물러갔다. "아미타불, 알겠소이다. 그럼." 그들이 방문을 닫고 물러간 뒤에 백방생은 이번에는 정말로 비급을 읽어볼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가 굳이 그 비급들을 선방에 가져온 것 은 바로 일종의 연막전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즉 달마오수 등으로 하여금 조금도 그의 행동에 의심이 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결코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희망이 작은 실수 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성 격이었다. 따라서 일단 양피지를 태우고 나자 이번에는 정말로 비급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사실 백방생은 이전에 무공을 연성한 적이 있어서 실제 는 몰라도 이론에는 아주 정통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기실 그가 이 제까지 그 비급들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들 때문이었다. 비록 금방 무공이 폐쇄되기는 했지만 그는 거의 자부문 절학의 극한까지 연성했었던 사람이 아니던가? 작은 두루마리들인 비급들에는 예상대로 아주 깨알같이 작은 글귀들이 적혀져 있었다. 백방생은 이내 그 내용이 어떤 무공이라는 것을 간파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자부문의 팔대절학을 연성했다. 하지만 지금 비급에 적혀있는 것은 달마하원의 칠대절학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장법과 하나의 권 법, 하나의 지법과 하나의 금나수법, 그리고 하나의 경신보법과 하나의 검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의 내공심법이었다. 백방생은 우선 각각의 무공들을 관찰하듯이 훑어보았고 이어 자신이 알고있는 무학의 요지와 비교해 보았다. 사실 그는 오직 한 문파의 무학 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상외로 달마하원의 그 불문무학들은 생소하면 서도 충격적이었다. 이를테면 자부문의 무공은 훨씬 예리하고 복잡하며 심오한 데가 있 었다. 그에 비해서 처음에 보기에는 달마하원의 무공은 매우 단순하고 평범한 것 같았다. 처음에 그 구결들은 매우 기초적이고 당연하며 간단 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이어 백방생도 알지 못했던 그런 평범한, 아 니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중요한 무학의 요지들이 세밀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자신이 무학의 기초적인 부분은 이미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보니 그 비급에는 그도 모르는 그런 근본이치들이 상당히 많이 실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대개 기초가 잘못되면 그 다음이 튼튼할 수가 없는 법이다. 따라서 백방생은 자신이 무학에 관해서 이제까지 많은 부분을 오해하고 있었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무심코 보기 시작한 이 무학의 구결들은 갑자기 많은 변화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이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백방생은 이제까지 자부문의 절학이 매우 심오하고 복잡하다고 생각하 고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생각해 보니 그것은 마치 한쪽만을 떼어놓은 것 같은 불완전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생각은 백팔번뇌무(百八煩惱舞)와 팔만사천검법(八萬四千劍法) 이라는 두 가지의 무공을 보고나서 더욱 심해졌다. 그 무공들은 얼핏 보 기에 아주 평범한 요지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보편적인 평범 함은 서로가 가장 안정적인 균형을 이루고, 그리하여 끝없는 변화와 오 묘한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평범속에 평범이 있고 변화속에 변화가 있으며 흐름속에 흐름이 있었다. 그러한 전체적인 흐름은 마치 거대하고 추측이 불가능한 대자연의 흐름과도 같았다. 백방생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비로 소 소림무학이 천하무학의 정종(正宗)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가 있었 다. 확실히 그는 이제까지 무학에 대해서 지레 과소 평가를 해오고 있었 던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신선한 충격인 셈이었다. 그는 뜻하지 않게 복 병을 만난 것이었다. 게다가 그 복병은 아주 유리하게 작용하여 그에 게 일종의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사실 정종의 무학은 가장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높은 깨달음이 없 다면 그 성취가 더딘 것이 흠이었다. 사마외도의 무학이나 방문좌도, 혹은 새로운 조류의 무학들이 보다 빠른 성취를 위해 보편적 평범한 진 리를 무시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사람의 여건이란 대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 그 편법이나 속성의 법을 택하는 것이었다. 지금 백방생은 무공은 비록 폐쇄되었지만 오히려 무학에 대한 견식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무학에 관한 의문들을 한순간에 거의 다 해소시킬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작은 틀이 깨지고 완전한 툭 트인 시야가 열리는 셈이었다. 백방생은 설마 이런 무학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라 고 흠뻑 빠져들어서 그만 시간가는 줄 모르게 되었다. 특히 그는 내공 심법인 대승반야선공(大乘般若禪功)의 구결에 있어서 더욱 심취했다. 그 대승반야선공은 바로 달마역근경을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소림본 사에서 가장 원하던 것이기도 했다. 백방생은 거기에서 더욱 무학에 대 한 시야가 트이게 되었다. 그러한 일련의 변화는 전혀 백방생 자신이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본래 황금충의 유물에 약간의 기대를 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대 개 모든 변화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지척의 원인에서... 진소유는 밤이 깊도록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까 백방생에게 어떤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었다. 사 실 이러한 것은 결코 자신이 바랬던 일이 아니었다. 만일 특별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진소유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일일이 백방생의 시중을 들 어 주었었겠는가? 거의 인시가 다 되도록 뒤척이며 잠못이루다가 진소유는 드디어 몸을 일으켜서 백방생의 선방으로 향했다. 뜻밖에도 백방생의 방안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주위에 대례와 대신이 경계를 서고 있었으나 모두 멀찍히 물러서서 따분한 태도들을 보이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걸까?) 선방의 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가만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문득 무엇을 하는 지 앉아있는 백방생의 모습이 보였고 또한 그 옆에 예의 그 보따리가 있었다. 비록 방안에 불은 밝혀져 있지 않았으나 진 소유는 대강의 광경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마치 앉은 채로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진소유는 그의 호흡이 약간 긴장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 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진소유가 방문을 닫고 다가가자 백방생의 목소리 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오?" 진소유는 비록 처녀이기는 하지만 그와 이렇게 한밤중에 함께 있는 것 은 그다지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때로 그녀는 처녀로서 감당하기 어 려운 백방생의 시중을 들었어야 했던 것이다. "당신은 잠을 자지 않고 있나요?" 진소유는 비교적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꾸하며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백방생은 그 자세 그대로 진소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낭자는 내가 편히 잠들어야 마음을 놓는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나는 갑자기 당신에게 해야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오히려 당신이 자지 않고 있다니 다행스런 일이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래 내게 해야할 말이란 뭐요?" 진소유는 잠시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몸을 일으켜서 묵묵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내 삽시간에 알몸이 되었다. 비록 어둠속이라고는 하나 그녀의 알몸은 매우 눈부셨다. 백방생은 느닷없는 광경에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했다. "낭자 이건, 대체 왜 그러는 것이오?" 진소유는 갑자기 백방생의 품속이 그리워서 찾아온 것일까? 그것이 아 니었다. 사실 백방생에게는 그럴 능력도 전혀 없을 것이었다. 도리어 진소유의 대꾸하는 음성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당신은 잘 보았나요?" 백방생은 더욱 어리둥절해 졌다. "잘 보다니, 대체 뭘 잘 보라는 말이오?" 진소유는 비록 나직하나마 쌀쌀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나는 이제까지 어떤 남자에게도 내 알몸을 보인 일이 없어요. 그런 만큼 지금 이 일은 결코 장난이 아니예요. 당신은 후회하기 전에 나의 몸을 잘 보아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진소유의 알몸은 일견하기로도 몹시 아름다왔다. 비록 어둠속이라 잘 보 이지는 않으나 그녀의 알몸속에서는 강한 체취가 풍겨나오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실제로 그런 냄새가 난다는 것과는 달랐다. 이것은 실로 아주 보기드물고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백방생도 물론 남자라고 할 수가 있었다. 물론 지금 그가 불구에 가깝다고 해도 그렇다고 눈마저 불구인 것은 아니었다. 실로 그와 같은 광경을 싫어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백방생은 반대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낭자의 뜻은 잘 알겠소. 그러니 이제 그만 옷을 입으시오." 진소유는 그 말이 떨어지자 즉시 주저하지 않고 다시 옷을 빠르게 걸 쳤다. 그녀의 표정은 시종 냉랭했으며 조금전의 그 야릇한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어 옷을 다 입은 후에 다시 백방생의 앞에 마주 앉으며 싸늘하게 물었다. "당신은 대체 무엇을 잘 알겠다는 거죠?" 백방생은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의 안색은 다소 심하게 우울해져 있었다. "당신은 이제 나의 곁을 떠나겠다는 말이 아니오?" 진소유는 말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예요. 하지만 지금부터 나의 결심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우리가 소림사에 도착한 다음에는 혼자 떠나갈 거예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소. 나도 그러리라고 미리 짐작하고 있었소. 하지만 조금전 과 같은 일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는데!" 진소유의 음성이 좀더 차가와졌다. "거기에 당신의 감정을 섞을 필요는 없어요. 내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 었으니까 그 책임도 내가 지겠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나의 어머니 때문이오?" 진소유는 그제서야 약간 길게 숨을 몰아쉬며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알고보니 당신도 대강 짐작하고 있었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낭자는 나의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소?" 진소유는 잠시 멍하니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내가 그럼, 좋게 생각할 줄로 알고 있었나요?" 백방생은 고소를 지었다. "그분은 바로 낭자의 사부님이 아니시오?" 진소유는 음성이 다시 냉랭해졌다. "물론 그녀는 나를 어려서부터 이만큼 길러주었고 또한 모든 것들을 가르쳐 주었죠. 하지만, 그녀로 인해 결국에는 나의 장래가 망쳐지고 말았다는 것을 모르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어째서 망쳐졌다고 생각하시오?" 진소유는 말했다. "나는 본래 당신을 데려다 주고 소림사에서 헤어져 본문으로 돌아가 려고 했어요. 그런데 마침내 당신의 어머니는 나에게 와서 이런 유언을 남기셨죠. 당신을 잘 부탁한다고요. 대체 저에게 뭘 바란다는 거죠?" 과거 백방생의 어머니가 유언을 남길때는 백방생이 혼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백방생으로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더러 당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는 말이로군." 진소유는 말했다. "나는 이미 당신에게 알몸을 보였으니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수는 없어 요. 즉 이미 나는 당신에게 몸을 던진 셈이예요. 따라서 나로서는 할 일 을 다한 셈이므로 내가 앞으로 본문에 돌아가서 출가하는 일에 당신이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백방생은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하지만 낭자는 내게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소. 사실 나도 소림사에 가면 낭자와 헤어질 생각이었소." 진소유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내 개인의 마음이니 당신이 상관할 필요는 없어요. 단지 앞으 로는 우리 사이의 관계가 좀 더 분명하게 정리되었으면 하고 바래 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다만 그러자면 나에게 한 가지 부 탁이 있소." 진소유는 말했다. "그 부탁이란 뭐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이번에 소림사로 가면 오랫동안 몸을 치료해볼 생각이며, 혹은 거 기에서 영영 살아나오지 못할 지도 모르오. 따라서... 내가 거기에서 많 은 재산을 지니고 있는 것은 곤란하므로 내가 다시 찾아갈 때까지 나의 그 황금 십만냥이 들어있는 유산가방을 그대가 맡아주었으면 하는 것 이오.? 진소유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만일 당신이 찾으러 오지 않으면 어쩌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내가 소림사에서 죽은 것이니, 만일 삼년내에 찾 으러 가지 않는다면 그것을 수고비라고 생각해도 좋소. 바로 낭자의 것 이 될 것이오." 진소유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이어 그녀는 말했다. "왜 하필이면 그것을 나에게 맡기겠다는 거죠? 달마오수에게 맡겨도 되는 것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 그들은 세속의 욕심을 멀리한 믿을 만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나 는 왠지 그동안 내 시중을 들어준 낭자가 더욱 미덥게 느껴졌기 때문이 오. 낭자, 나의 이 부탁은 들어주겠지요?" 진소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러한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앞으로 소 림사에 당도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 당신은 너무 그렇게 서 둘러서 모든 일을 결정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백방생은 만족한 듯 미소했다. "어쨌든 낭자가 일단 그 일을 맡아 주겠다니 고맙소. 나는 이제야 왠 지 마음이 편해지는듯 하구려. 음... 이제야 졸음이 밀려오는군." 진소유는 옆에 놓여있는 작은 보따리를 한번 바라본 뒤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잠을 자도록 하세요. 나는 물러가서 좀더 눈을 붙이도록 하겠어요. 저 물건들은 내가 가져갈까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냥 놔두시오." 진소유는 이윽고 방문을 열고 서서히 밖으로 나갔다. 조금전에 알몸을 보여주던 그 어색함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백방생은 잠시 그 렇게 앉은 채로 사라져 가는 진소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 득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총각귀신은 면하게 되었군.) 가볍게 열려진 문틈 사이로 어느덧 새벽의 여명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이미 결심을 한 바가 있었다. 이것은 실로 그의 중대한 일종 의 도박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그 기회마저 영 영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 것이며 살아본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백방생은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생각을 거듭했고 신중을 기했다. 그리 고 드디어, 그는 모종의 심법(心法)을 떠올린 상태에서 양손에 들려있는 환약들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물론 서른 여섯알 의 소림사의 대환단이었다. 그것들은 일단 모두 뱃속으로 들어가자 엄청난 열기를 일으키기 시작 했다. 그것은 사람의 육신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백방생은 극 심한 열기 속에서 점차 전신을 뒤틀며 혼미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 다. 문득 누군가가 다가들면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 같기도 했다. "백시주, 백시주! 아니 이게 대체 어찌 된 노릇이지? 아미타불! 빨리 어서..." 18 장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 백방생의 처지를 아는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가 이미 삶에 대한 용기마저 잃어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그의 상황 을 보았다면 결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백방생은 용감했다. 아니 비단 용감했을 뿐만 아니라 일면 무모해 보이 기까지 했다. 아무리 나이가 많고 노쇠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결코 자기 스스로 죽기를 바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백방생은 갑자기 자신의 목숨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그러 한 도박에 그는 미련없이 몸을 던진 것이다. 그렇다면 백방생은 어리석은 사람일까? 그렇지 않았다. 우선 상황은 그 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고, 또한 기실 내면에는 그 나름대로 의 신념과 의지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소림사의 대환단이 비록 성약(聖藥)이기는 하나, 그것을 과 량으로 복용했을 경우는 오히려 세상의 그 어떠한 독보다도 해로운 극독이 된다. 백방생의 경우는 비단 서른여섯알이 아니라 단 두세알 정 도만 해도 이미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몸은 이미 평범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신 의 경맥(經脈)들은 이미 가닥가닥 끊어지고 흩어져서 도저히 그 약력을 감당해낼 수가 없고 곧 숨이 멎게 될 것이다. 다만 백방생이 믿고 있는 것은 조금전에 보았던 달마하원의 그 무학비 결들과 거기에서 깨우친 그 요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백방생은 일종의 심법에 몸을 내맡긴 채 그 서른여섯알 대환단의 약력 이 전신의 세맥 등에 골고루 스며들게 했다. 그것은 물론 그러함에도 세 상에서 가장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러나 백방생에게는 기실 그 이외에 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백방생이 다시 깨어날 지 어떨지는 그 의 운이 말해주게 될 것이었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의식도 몽롱하고 시간의 개념이 매 우 희미하게 느껴졌다. 아니 백방생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마저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분명히 백방생은 살아있는 상태였다. 이 얼마나 대단하고 불가사의한 일이겠는가? 그렇다면 백방생의 의도는 모두 성공된 것일까? 하지만 아직 믿을 수는 없었다. 헌데 비록 믿을 수 없기는 해도 그에게 간혹 현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들이 간헐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머리위에서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일어나서 전신으로 내려오는 것이었 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 이후에는 몸도 마음도 조금씩 편안 해 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외에는 아주 지루한 적막의 시간이 계속되었는데, 그 동안 의 답답함과 점차 느껴지기 시작하는 전신의 고통을 그가 무의식적으 로 그 심법을 계속 운용함에 따라서 점차로 미약해져 갔다. 그것은 실 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변화들이었다. 게다가 이윽고 백방생은 드 디어 다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의식을 차리고 눈을 뜨게 되었다. 처음에 백방생이 눈을 뜬 다음에 알 수가 있었던 것은 바로 환경의 변화였다. 그가 혼절하던 당시에는 그는 선방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하나의 어둑어둑한 깊은 동굴속에 누워 있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아직은 알 길이 없었다. 대체 이곳 은 어디일까, 혹시 정말로 소림사가 아닐까? 뜻밖에도 그가 의식을 회복한 곳은 바로 다름아닌 정말로 소림본사 (少林本寺)였다. 즉 하남성 숭산의 소림사인 것이다. 그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그는 바로 소림사의 조사동(祖師洞)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었는데, 그 에게 우선 대강의 사정을 알려준 사람들은 바로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세 명의 노승(老僧)들이었다. 즉 현재 소림사의 최고배분의 사람들이며 소위 소림삼신승(少林三神僧)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물론 조사동에서 오랫동안 면벽참선을 해오고 있는 입적을 앞 두고 있는 고승들이었다. 그런데 달마오수 등이 갑자기 나타나서 백방생 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자, 여러가지 경로를 거쳐서 그들이 이곳에서 백 방생을 치료하게 된 것이었다. 혼절 도중에 정수리에서 간혹 느꼈던 그 뜨거운 기운들은 바로 소림삼 신승이 제각기 백방생을 개정대법(開頂大法)으로 치료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본래 백방생의 상태는 몹시 위중하여 거의 회복하기가 불가능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방생의 특유의 심법(心法)에다 소림삼신승의 무 상의 불문내공이 합쳐지자 비로소 기적적인 차도를 보이게 된 것이었다. 소림사로서는 비급과 나한상을 전해주기 위해 그 많은 희생을 치른 백방생 등에게 대한 당연한 수고라고나 할까? 백방생이 혼절에서 깨어난 것은 그가 쓰러진 지 거의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이미 달마오수나 진소유는 백방생을 소림사에 맡겨두 고 떠나가 버린 상태였다. 이제 백방생은 그야말로 혼자라고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외로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는 다시 끝없는 도전과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오늘은 몸이 좀 나아진 것 같은가?) 그것은 소림삼신승 가운데 고승(苦乘)대사의 전음이었다. 그는 다소 평범해 보이는 용모로 백방생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 다. 백방생이 고개를 돌리니 그 고승대사는 어느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 보며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곳은 참선하는 장소이므로 누구도 함부로 떠들 수가 없다. 따라서 고승대사는 전음으로 말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비록 오래 사귀지는 않았으나 그가 삼신승 가 운데에서 가장 정이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물론 아직 백방생은 말을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그의 운공(運功)에 있어서 아 주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단지 백방생이 얼굴에 어떤 표정을 떠 올리면 고승대사는 그것으로 그의 심리를 알아 맞추는 것이었다. 이번에 도 역시 고승대사가 그의 심리를 눈치채고 다시 전음을 던져왔다. (자네는 과장이 매우 심하군. 벌써 그렇게 회복되었을 리는 없는 일이 니, 너무 연극을 할 필요는 없네. 마음을 느긋하게 갖도록 하게. 본파에서 는 자네를 누구도 쫓아내지 않을 걸세.) 지금 이 동굴의 내부는 밖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들어서 그래도 사람의 얼굴은 구분할만 했다. 백방생은 이 고승대사의 마음이 매우 따뜻하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몹시 외로운 투쟁을 하는 그에게 이런 노승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다행스런 일이라고도 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이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자 고승대사는 전음으로 다시 말했다. (하긴 자네가 언제까지나 그렇게 누워만 있을 수는 없겠지. 틀린 말이 아니야, 아미타불.... 그러나나는ㅁ 자네가 좀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기 를 바라네.) 백방생은 다시 한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고승대사는 미소하며 다시 전음으로 말했다. (그렇게 고마워할 것은 없네. 솔직히 말해서 노납이 이미 백살이 넘었 다고 해도 자네와 친구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게 아닌가...) 이때 안쪽에서 고혜(苦慧)대사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기 때문에 고승 대사는 얼른 전음을 중단하고 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고혜대사는 아주 후덕하게 느껴지는 용모의 노승으로 이 삼신승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옆의 고지(苦智), 고승대사와 함께 소림사의 최고배분의 원로들 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고승대사는 비록 여유있는 척 했으나 사실 사 형인 고혜대사의 눈총을 감히 두려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조용해지자 백방생은 다시 고개를 돌려 천정위를 바라보았다. 요즈음 그는 사실 누운채로 한가지 일에 몰두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정위에 조각해 놓은 수많은 나한상들의 형상들이었다. 비록 같은 나한상들이라고는 하나 백노야가 소림사에 기증한 그 황금 나한상들과 지금 이 나한상들과는 모습에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다. 전 자는 모두 좌정해 있는 형상들이었지만 지금의 이것들은 모두 일어서 거나 몸을 엎드려서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역시 많은 글자 들이 양각되어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본래 이 내부는 어두운 편이었지만 그 천정부위는 교묘하게 햇빛을 유인하여 글자가 훤하게 보이도록 하고 있었다. 그 안배는 매우 훌륭 하게 보였고 게다가 조각품들의 연대는 매우 오래된 것 같았다. 물론 그것들은 무공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우연히 심심해서 그 내용을 읽어보다가 그 심오함에 은근히 놀랐고, 이어 고승대사에게서 설명을 듣고 내심 더욱 놀랐다. 알고보니 그 그림과 글자들은 바로 소림사에서 그 유명한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 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달마역근경 하면 아마 천하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 을 것이다. 소림사의 칠십이종의 절기들 가운데 거기에 기초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 지난 세월동안 무학들은 무한히 연 구 발전되었으며 보완 수정되기도 했다. 소림사의 칠십이종의 절학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때 달마역근경은 과거의 보수적인 산물로 현재와는 걸맞지 않는다는 말이 대두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소림사에서는 그 달마역근경을 버리지 않고 이런 곳곳에 조각을 해두어 잊혀지지 않게 했던 것이다. 이른바 달마역근경은 소림무학의 뿌리요 전통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 다. 게다가 고승대사는 곁들여 이런 말을 했었다. 그 달마역근경이야말 로 아직 완전히 그 이치를 밝혀내지 못한 불가해(不可匯의 무학이라고, 그렇다. 확실히 이번에 천륭무가에서 찾고자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가 아니겠는가? 백방생이 지금 연성하고 있는 대승반야선공도 역시 달마역근경에 기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백방생은 그 내용에 있어서 통 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실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그 심오하고 보편적인 이치에 있어서는 달마역근경이 훨씬 앞서는 것 같았다. 그것은 기실 또 한번의 백방생이 크게 눈을 뜨게 되는 계기라고 할 수가 있었다. 이제까지 백방생은 거의 매일같이 그 내용을 보아왔고 또한 흥미를 가 졌었기 때문에 이미 그 나한상들의 움직임이나 구결의 내용을 줄줄 외 울 수 있을 정도로 숙달하고 있는 상태였다. 백방생은 대승반야선공을 수련하고 있었지만 자연히 달마역근경상의 무학의 깨달음이 거기에 더해지게 되었다. 처음에 백방생은 낮에는 볼 수가 있었지만 밤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조각을 볼 수가 없 었다. 그래서 밤에는 쉬고 낮에는 수련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이 제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암기하고 있었으므로 밤낮없이 수련에 임할 수가 있었다. 대개 무학은 잠시 중단하면 그만큼 손해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일단 그 렇게 밤낮없이 수련에 임할 수 있게 되자 그만큼 그의 성취속도는 급격 하게 빨라졌다. 그것은 예전에 백방생이 미처 예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 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는 것도 꿈은 아닐 것 같았다. 무릇 무학을 터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 하승의 무학은 정(精)을 단련하게 되므로 움직임을 주로하고, 중승(中乘) 의 무학은 기(氣)를 단련하게 되므로 연기(練氣)를 주로하고, 상승의 무 학은 신(神)을 단련하게 되므로 마음의 수련을 주로 하게 되는 법이 다. 물론 여기에서의 상승이란 강호무림에서의 상승무학과는 크게 다르다. 말이라는 것은 필요에 의해 쓰이는 것이므로 그 의미만 통한다면 구태 여 그 말 자체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법이다. 대개 무학이 이른바 초상승의 경지에 접어든 사람들은 마음을 맑게 하여 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오르게 되기를 노력하는 것이다. 마음에 욕심과 잡념들을 제거할 것이요, 기왕이면 나 자신을 잊고 무학이라는 것까지 잊어버리는 무검무아(無劍無我) 물아양 망(物我兩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데 백방생은 그와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얼마동안 그는 새로운 심법을 골몰하기 위해 노력하는듯 했으나, 이내 그 모든 것을 잊고 그 저 멍하니 깊은 명상속에 잠기곤 했다. 그는 시선은 천정의 조각들을 바라보는듯 했으나 알고보면 마음은 허공을 더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 어느 것도 보지 않고 있는듯 하다고나 할까? 사실상 달마역근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러한 데에 있었다. 달마역근경의 핵심은 어떤 동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운기행공(運氣行 功)에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의 수련에 있는 것도 아니었 다. 바로 깊은 수행을 쌓은 고승들도 마침내 그것을 풀지 못한 것은 바로 거기에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어디에도 핵심이 없으며 또한 어디 에도 핵심이 있는 것이다. 백방생은 다행히도 다른 것은 몰라도 그러한 이치에는 무척 밝은 편이 어서 한참 후에야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스스로 달마역근경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저 멍하니 깊은 명상속에 잠겨서 누워 있는 것이었다. 지금의 그의 상황에서 오히려 운기를 포기하고 그처럼 가만히 누워있 기만 하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가 어렵고 무모한, 그래서 위험천만한 일 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신기한 일은 이윽고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 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전신에 무한한 생기(生氣)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전신 의 모든 미세한 경맥들이 다시 재생되고 이어지며,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본래 그의 체내에서는 서른 여섯개의 대환단의 어마어마한 약력(藥力) 이 쌓여서 엄청난 폭약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었다. 만일 그 가 일반적인 방법으로 운기행공을 했다면 끊어진 경맥들로는 도저히 그 막대한 힘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요, 마침내 주화입마를 하거나 혹 은 몸이 터져버리고 말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백방 생의 몸의 기현상은 그러한 위험성을 완전히 불식시키고 있었다. 처음에 그 영약들은 모든 경맥들이 완전히 회복되거나 재생될 때까지 조금도 방해하지 않고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게다가 이윽고 그 일이 끝나자 그것들은 조용히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전신의 경맥속으로 스며 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서 백방생은 비단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 스레 과거의 무공까지 되찾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믿기 어려운 변 화들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남은 것이라면 오직 육체적 인 단련이 있을 뿐이었다. 그간의 변화는 백방생이 생각하기에도 마치 꿈속에서 벌어진 일인듯 했다. 현실은 사실이 아닌듯 했다. 하지만 기실 현실은 그러하며 백방 생으로서는 일단 확인하는 것이 순서인 것이었다. 다시 얼마만의 행동일까?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고승대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앉아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는 깊은 정이 충만해 있었다. 백방생은 문득 미소하 며 그 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사님!" 그것은 실로 백방생이 이곳 소림사에 와서 처음으로 하는 말이었다. 게 다가 백방생은 즉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고승대사는 그것을 보자 반가 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놀라서 눈을 휘둥그래 떴다. 마치 낮도깨비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백방생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거의 다 죽어가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말을 하며 일어났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사실 귀신도 그보다는 더 놀랍지 않을 것이다. 백방생은 실로 오랜만이라 발음도 분명하지 않았고 일어나는 과정에서 다소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고승대사로 하 여금 놀라서 죽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마침내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고승대사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로 자네 몸이 괜찮은가?" 백방생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아직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많이 좋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고승대사는 그런 얘기까지 듣자 그만 더 의심을 하지 못하고 연신 합장을 하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백방생은 그 순수한 감동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하며 말했다. "대사께서 그동안 저를 많이 걱정해 주셨으니 앞으로 어떻게 갚아드려 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비로소 이 느닷없는 변화를 보고 참선하던 고혜대사와 고지대사 가 다가왔다. 고혜대사는 후덕하게 생긴 노승이고 고지대사는 반대로 다소 마르고 키가 큰 노승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표정 역시 놀라 서 고승대사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미타불, 선재로다! 선재로다!" 고혜대사는 먼저 두어 차례의 불호를 외운 후에 손을 내밀며 말했다. "노납이 자네의 맥을 짚어 보아도 되겠는가?" 백방생은 순순히 응해 주었다. 본래 맥문(脈門)은 인간의 급소중의 하 나로서 무림인들은 결코 남에게 그곳을 맡기지 않는 것이 상례이나, 사실 지금 백방생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고혜대사는 잠시 백방생의 맥문을 잡고 맥을 짚어보는듯 하다가 이윽 고 불호와 함께 입을 열어 말했다. "아미타불, 불은을 입었음이다! 시주의 전신경락은 아직 망가져 있고 끊어져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전 신의 기운은 하나로 통하고 있구려. 아주 특별하고도 신기한 일이외다. 아미타불!" 사실 백방생도 다소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까 눈을 감고 누워 있었을 때에는 전신의 경락이 모두 새로 재생된 것인줄 알았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우선 그의 몸은 지나치게 뚱뚱 하게 변모해 있었다. 그것은 물론 지난날 대환단들의 약력이 잠재되어 그렇게 변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깨달음은 아직 육체적인 모습을 바 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전신의 경맥들 역시 사실은 아직 끊어지고 망가 진 채로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미 기운이 모두 통하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아마도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모종 의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실로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백방생은 고혜대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모두 여러분들의 덕택입니다. 저도 이렇게 좋아질 줄은 미처 예상치 못 했었습니다." 고지대사가 말했다. "우리들이야 무슨 일을 한 것이 있겠소. 모두 시주가 특별한 인연이 닿아서 그런 것이지, 아미타불!" 백방생은 말했다. "어쨌든 세 분의 노스님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소생은 오늘 이렇게 회복 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고혜대사가 합장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실로 부처와 같은 마음이로다. 앞으로 계속 치료를 하여 부 디 건강해져서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소이다." 백방생은 아무래도 달마하원과 연관이 있으니 앞으로 소림사와는 인연 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사실 백방생은 모종의 인연에 의하여 이곳 에 머물고 있으나, 그 인연이 다하게 되면 당연히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백방생으로서는 내심 이곳의 제자가 되려는 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일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 유명한 세 명의 고 승들의 담담한 호의에 매우 감사를 느꼈다. 소림삼신승은 그 뒤로도 연신 여러가지의 축하의 말을 해주며 상태를 물어본 다음에 이어 다시 근처의 참선하는 장소로 돌아갔다. 그 삼신승의 일과는 매우 단조로웠다. 그들은 식사를 하거나 용변을 보는 등의 가장 기본적인 일 이외에는 나머지 시간은 계속 참선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반사람들이라면 아마 그렇게 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백방생은 비로소 일어나 앉게 되어 주위를 제대로 둘러볼 수가 있었다. 이 조사동은 돌로 이루어진 천연동굴로서 간혹 인공적인 구조를 가미 한 곳이었다. 동굴이 깊어서 인지 사방이 매우 어두웠으며 아주 조용하고 엄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조사동이라면 아마도 지하에는 조사들의 사리들이 봉안되어 있기도 할 것이다. 신기하게도 백방생은 이제 실내가 전처럼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비록 내부가 어두웠으나 그의 시력은 크게 달라져서 그 어둠속을 완전히 꿰 뚫고 있었다. 백방생은 동굴의 내부를 찬찬히 둘러본 다음에 이윽고 그 가 밤낮없이 보고 생각했던 달마역근경의 조각과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과거 그것들은 희미하게 겨우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이제는 아주 뚜렷 하고 정밀하게 볼 수가 있었다. 아니, 설령 시력이 아니더라도 백방생 의 마음에는 그것들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을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 제 자신의 몸이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당연히 이 렇게 된 사실이 꿈속처럼 생각되었다. 실상 이런 깊은 동굴속에 있는다 면 바깥의 세상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게 되는 것이요, 세월의 흐름마저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백방생은 일단 몸의 건강이 회복되자 즉시 밖으로 나가서 한시 라도 빨리 그 곳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어졌다. 그러나 백방생은 아주 침착했다. 그가 이제까지의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면서 달라진 것은 바로 그렇게 좀더 침착해지고 조용해 졌다는 사실이었다. 백방생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달마역근경의 조각대로 차례대로 그 형상을 취해가기 시작했다. 이 달마역근경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근골을 단련하는 데에서 시작하 는 것이니, 거기에는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서 가장 심오한 부분까지 모 두 망라되어 있었다. 가장 기초적인 부분은 육체적인 방향이고 가장 심 오한 부분은 정신적인 방향이다. 백방생은 이미 심오한 정신적인 부분 을 터득한 다음에 비로소 기초적인 육체적인 부분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먼저 나는 것을 통달한 다음에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흡사 했다. 만일 일반 무림인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경악하고 이를 믿 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백방생은 육체적인 상처를 치료하고 근골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그 수련 을 시작한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그의 수련하는 태도는 신중하고 엄 숙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마치 점차로 걸음마에 익숙 해져 간다고나 할까? 백방생이 일어나 앉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혼절에서 깨어난 지 거의 한달만의 일이었다. 그는 이후로 며칠간 계속 역근경의 제일단계의 기초 적인 수련을 계속했으며 몸의 근골은 점차로 나아져갔다. 그는 이제 멀 쩡히 걸어다닐 수가 있었으며 식욕이 왕성하여 일반인들과 똑같이 식 사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곳에는 별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 변 해가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헌데 그 날 뜻밖에도 갑자기 조사동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들었 다. 물론 그들은 당연히 소림본사의 승려들이었다. 백방생은 그날도 열 심히 기초적인 역근경의 수련을 행하다가 그들을 맞이했다. 백방생으 로서는 그들이 매우 낯설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백방생을 낯설어 하 지 않았다. 백방생은 당금의 소림사에 크게 도움을 준 특별한 사람으로서, 그에 대해서는 소림사의 사미승들 조차도 모두 다 잘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근래들어 백방생의 상세가 크게 호전되자 그것을 매우 신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연신 백방생의 몸을 이리저리 바라보는 것이 었다. 삼신승은 백방생을 위해 이내 그들을 백방생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 들은 모두 장로급의 인물들이었는데 나이는 대략 팔십세 전후로 보였다. 그들 가운데 붉은 색의 가사를 걸친 노승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도액 선사(渡厄禪師)로 당금의 소림방장이라고 했다. 그 도액선사는 키가 크고 몸이 마른 편이며 용모는 청수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눈빛은 신광이 조금도 발출되지 않고 평범하게 보였는데, 만일 그가 그처럼 황포에 붉은 가사를 걸치지 않고 소림사의 밖에 있 었다면 그저 한 명의 초라한 늙은 승려로 생각할 만한 모습이었다. 백방 생은 물론 그 도액선사가 아주 능력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 보았다. 그것은 마치 너무나도 훌륭하여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는 것이라 고나 할까? 나머지 누런 승포를 걸치고 있는 장로급의 노승들 가운데에서 백방생 이 그래도 관심을 가진 사람은 바로 도생(渡生)이라는 노승이었다. 그 도생선사는 바로 백노야가 오백나한상을 전하라고 했던 그 인물이었다. 물론 그 오백나한상은 이미 안전하게 잘 전해졌을 것이었다. 도생선사는 생각했던 대로 그다지 멋있는 모습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 다. 그의 안색은 수척했고 또한 용모는 평범하여 청수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는 일종의 늙은 선비와 같은 기질이 흐르고 있 었는데 그것도 너무나 초췌한 느낌에 파묻혀서 쉽게 드러나지 않고 있 었다. 그러나 도생선사는 백방생을 보자 친근한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소림사의 노승들은 이미 백방생을 본 바가 있었다. 비록 너무 빠르 게 회복된 것이 다소 신기하여 두어 번 주시하기는 했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고 모두가 삼신승과 함께 조사동의 안쪽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 다. 물론 도생선사도 마찬가지였다. 백방생은 보기 드물다는 그들의 모 임에 대해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갑자기 소림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백방생으로서는 당연히 소림사의 중요한 회의에 끼어들 수는 없는 노 릇이었다. 그는 따라서 혼자 남아서 계속 아까처럼 달마역근경을 수련하 기 시작했다. 며칠동안 수련을 하여 행동에 지장이 없어졌어도 허리가 뚱뚱해진 것은 좀처럼 줄어들지가 않았다. 백방생은 지난 한달여의 시간동안 그다지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렇게 몸이 뚱뚱해지게 된 것은 오로지 대환단의 약 력 때문일 것이었다. 틀림없이 서른여섯알의 대환단의 약효가 일부분이 녹아들어서 그의 허리에 뚱뚱한 살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백방생 으로서는 그 막대한 양의 약력을 한꺼번에 모두 흡수할 수가 없었다. 솔 직히 지금 그의 몸속을 흐르고 있는 내공의 양만 해도 엄청나서 그가 다 스리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대략 한시진 가량의 시간이 흘렀는데 드디어 안으로 들어갔던 일단의 승려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백방생은 수련을 마치고 바닥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 다. 그는 비록 이곳 소림사의 제자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 노승들은 모두 강호의 대선배들이 분명하므로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었다. 그런데 미처 배웅을 하기도 전에 문득 노승들 가운데에서 도생선사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백시주, 잠깐 나와 얘기 좀 나눌 수가 없겠소?" 백방생으로서는 당장 누구와 노닥거리고 싶어서 거의 안달이 다 나있는 상태였다. 마침 도생선사가 얘기를 나누자고 하자 즉시 마음이 움직였다. 그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인 셈이었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백방생이 공손히 묻자, 도생선사는 손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괜찮다면 밖으로 나가도록 하세. 내 긴히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네." 본래 이 조사동에는 소림사의 제자들이라고 해도 장문방장의 허락이 없는한 함부로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도생선사가 밖으로 나가자 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구속에 얽매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백방생 은 즉시 그 뒤를 따랐다. "알겠습니다." 백방생은 사실 그동안 도생선사에 대해서 호기심이 적지 않았다. 과거 백노야의 얘기는 아무리 해도 백방생에게 궁금증이 일게 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런 마당에 도생선사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절로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둘러 도생선사를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서늘한 가을이었고 대낮이었다. 백방생은 그 얼마만에 푸른 하늘을 보는 것인가? 백방생은 잠시 감개가 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 는 자칫했으면 조사동에서 죽어서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 다. 문득 지난 여름날의 무덥던 나날들을 상기하니 왠지 소름이 오싹 끼쳐 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 이후에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겪어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러한 것들도 세월속에 묻혀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소림방장 도액선사 등을 배웅하고 나서 도생선사는 혼자서 백방생을 한쪽으로 이끌었다. 조사동의 앞쪽에는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으 며, 그 계곡물을 따라서 약간 올라가자 이윽고 작고 시원스런 폭포수가 눈앞에 들어왔다. 이 부근은 바로 소림본사의 가장 후미진 곳으로 인적이 없을 뿐만 아 니라 사찰의 건물들도 없었다. 폭포수의 주변은 매우 조용했고 또한 폭포 수의 아래쪽에 생긴 연못은 아주 깊고 맑아서 푸른 빛을 내고 있었다. 주변의 산들은 이미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고 매우 아름다운 풍 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도생선사는 그 폭포수의 한쪽에 있는 바위위에 걸터앉았고 백방생에 게도 맞은 편에 앉게 했다. 백방생은 묵묵히 주위를 둘러 보며 앉았고 한참 그 풍광을 즐기는듯 했다. 그는 마치 혼자 이곳에 온 사람처럼 행동했고 먼저 입을 열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도생선사는 한참을 주저하 는듯 하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자네의 조부님이 보내주신 그 오백나한상은 이미 잘 받았네. 본사의 방 장사형은 그것들을 본사의 나한당(羅漢堂)에 봉안하도록 했지. 어쨌든 그로써 본사에는 한가지의 보물이 늘어난 셈이니 노승이 자네에게 감 사를 드리네." 백방생은 그를 향해 미소하며 말을 받았다. "그것은 저의 조부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이니 당연히 저는 해 야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그건 그렇고, 그 나한상들은 하자가 없었습니 까?" 도생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모두 조사해 보았는데 조금도 하자가 없었네. 재삼 자네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네. 우리네 선종의 승려들이야 마땅히 색신(色身) 은 무상한 것으로 보고 무엇에도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하지만, 그러나 우 리는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들이니 그런 나한상들을 보는데도 자연 기쁨 이 없을 수야 없지. 더군다나 그 나한상들은 실로 생각보다 훨씬 정교 하고 훌륭한 것들이었네." 백방생은 담담히 웃으며 시선을 연못으로 던졌다. 연못속에서는 무수 한 물고기들이 자유로이 유영을 하고 있었다. "대사께서 너무 그렇게 추켜세워 주시니 소생은 그만 몸둘바를 모르 겠군요. 할아버지께서 그 말씀을 들으셨다면 필시 좋아하셨을 것입니 다." 도생선사는 가볍게 침음성을 터뜨리더니 다시 말했다. "음, 자네의 할아버지는 사실 기인(奇人)이라고 할 수가 있었지. 사실 나는 정말로 그가 이번에 나한상을 보내올 줄은 몰랐었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무덤이라도 찾아보려고 내가 이번에 다녀온 것이지. 헌데 갑 자기 그곳에 변고가 생겨서.... 그래서 내가 급히 자네와 만나 얘기를 나 누는 것이라네." 도생선사는 비록 심하게 수척해졌지만 아직 말을 하는데도 서생과 흡사 한 기질이 엿보이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얘기를 나누는 것은 어딘가 한가하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아마 이번에 그는 남쪽 달마하원으로 갔다온 모양이었다. 백방생도 그쪽에 변고가 생겼다고 하자 절로 궁금증 이 일었다. "그 곳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도생선사는 다소 머뭇거리는듯 하다가 말했다. "음, 우선 그 말을 하기에 앞서 자네의 쾌유를 축하해 줘야겠지. 자네 가 건강해진 것을 축하하네. 음...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곳의 그 두 문파 가 갑자기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더군."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문득 크게 놀라서 말했다. "두 문파라면, 그러면 설마하니... 설마하니 달마하원에도 문제가 생겼다 는 말입니까?" 도생선사는 말했다. "내가 말하는 두 문파는 바로 달마하원과 남해보타도 일세. 내가 그곳 에 도착해 보니 이미 멸문지화를 당한지도 오래 되었다고 하더군." 20 장 불어오는 난세(亂世)의 바람 갑작스런 달마하원과 남해보타도의 멸문지화의 소식! 이것은 실로 백방생에게 있어서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것은 실로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에 백방생은 일시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급히 다시 확인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도생선사는 매우 측 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그만 가슴 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안색이 변해 말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아,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대체 어째서 그 달마하 원과 남해보타도가 갑자기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말입니까?" 달마하원은 비록 그 성세가 소림본사만은 못하다고 해도 이미 다른 무림대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명문정파였고 남해보타도 역시 거기에 버금가는 문파였다. 그 두개의 문파가 갑자기 멸문지화를 당했다 는 소식은 비단 백방생에게 뿐만 아니라 강호무림에도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지난 날 백방생의 부모와 조부는 나란히 달마하원에서 화장을 했었 다. 헌데 이미 달마하원 등이 멸문되었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되었을 까? 게다가 소림사에서 돌아간 달마오수와 진소유는 또 어떻게 되었을 까? 백방생은 갑자기 밀려드는 충격과 의문으로 인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도생선사는 말했다. "나는 미처 그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었네. 본사에 중대한 일이 생겨 서 올라와야 했지. 다만 내가 생각하기로 그 일은 아마도 자네의 부모 등과 어떤 연관이 있을 듯 싶으네." 백방생은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럼 흉수를 조사하다가 일월신교(日月神敎) 등의 무리에게 당했다는 말씀입니까?" 도생은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네. 최근에 일어난 철혈부의 짓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 나, 내가 보기에는 그들의 능력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이네." 도생선사는 말끝에 아미타불! 하고 불호를 외웠으나 안색이 더욱 수척 해진 느낌이었다. 하긴 그렇다. 달마하원과 남해보타도가 동시에 그렇게 당했다면 그것 은 세외팔세 가운데의 세력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었다. 백방생은 부모의 무덤들을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혹시 저번의 저의 동료들이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르십니 까?" 도생선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미타불, 모르네. 다만 그 일은 그들이 돌아가기 이전에 일어났으니, 그 달마오수라는 사람들과 한 분의 여시주는 아마도 무사했을 가능성 도 있겠지. 흠, 어쨌든 사람의 몸뚱이는 한번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백방생은 달마오수 등이 비교적 무사하리라는 말에 다소 안심하며 말했다. "저를 위로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어차피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왔 던 사람이니까요. 어쨌든... 그 일로 소림사에서도 놀라와 했겠군요?" 도생선사는 고개를 돌려 연못물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본사에서는 미처 그 일을 신경쓸 여지가 없었지. 이번에 무림정파에서 는 정의맹(正義盟)을 창단하기로 했는데, 본사에서는 그 일로 바쁘니까 말이야." 백방생은 마음이 답답해져서 몸을 일으켰다. "아, 그래서 조금전에 장문방장이 삼신승과 의논을 했던 것이었군요?" 도생은 멍하니 주위를 향해 시선을 보내다가 말했다. "본사의 장문사형은 맹주의 직위에 대해서 제의를 받았지. 오늘은 그 일을 의논한 것이었네." 철혈부가 강남의 흑도무림을 통합한 것이라면 이번에 창단된다는 정의 맹은 강북의 정도무림을 통합하는 것이리라.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었군요. 소림사가 무림의 정의를 위해 애쓴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 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도생선사는 초췌한 신색으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정의맹은 앞으로 두 달 후에 복우산에서 창단을 하게 되어 있지. 음, 자네가 만일... 만일 몸이 좋아진다면 말이네... 이것은 내가 자네를 아주 가깝게 생각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네만... 그러니까...." 이어 도생선사는 뭔가 말을 할듯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귀를 기울이는 백방생을 향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자네도 어느 정도 들었겠지만, 나와 자네의 조부와는 제법 막역한 사이였네. 사실 그 분은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었고 나는... 나는 별로 대단하지 못했지. 허허, 나는 겉만 번드레했을 뿐이야. 지금에 와서 모든 일에 후회만 앞서고 불도도 정진된 바가 없네... 어쨌든 나와 자네의 조부 와는 제법 막역했지. 그는 나의 친구였네. 자네도 들었는가?" 백방생은 그가 이번에 내려가서 조부 등의 무덤을 보았는가 하고 물 어보려다가 왠지 그의 표정이 너무 처연하여 참았다. "예, 저도 들었습니다." 도생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보아하니 아주 좋은 사람이로군. 하긴 듣자니 자네의 부친도 대 단한 사람이었었다고 하더군. 어쨌든 오늘은 이만 하고, 앞으로 가능하 면 자주 만나도록 하세. 음, 내가 장문사형의 허락을 받아 자네를 만나 러 오도록 하지. 나에게 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얘기하게!" 도생선사는 이미 몸을 일으켜서 동굴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 고 있었다. 다소 처연하고 초췌하나 이 노스님에게는 어떤 한가하고도 초연한 기질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무공도 역시 간단한것은 아니었 다. 무심코 걸어가는 발길이 한걸음에 무려 일장씩 가볍게 나아가고 있었 다. 백방생은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지금은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도생선사는 신형을 멈추고 백방생을 바라보며 뭔가 말을 하려는 듯 하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신형을 움직였다. "그럼 우리는 다음에 다시 보기로 하세." 도생선사는 그 길로 바로 떠나갔으므로 백방생은 혼자 계곡에 남았다. 백방생은 잠시 모처럼의 주위의 풍광을 둘러보려고 했으나, 이내 왠지 마 음이 무거워 지는듯 하여 조사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얼마전에 달마하원 과 남해보타도가 멸문되었을 줄이야. 어딘가 엄청난 대변혁의 흐름이 강 호에서 일어나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날 조사동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달마역근경의 수련을 계속 했다. 그 달마역근경의 수련은 육체적으로 비교적 많은 움직임도 없었고 또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오래도록 꾸준히 수련하는데 어 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효과는 육신을 상상외로 강건하게 만드는 것 이었다. 강호상에서 모르는 사람들은 소림사의 무학을 강하기만 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 다. 소림사의 무학은 마음의 공부를 먼저 하고 그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 다. 결코 외형상의 모습만 보고 소림사의 무학을 평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달마역근경은 바로 그러한 소림무학의 근본이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고 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의 육신은 그것을 수련하는 동안에 서서히 단련되어 점차 적당하게 변모해 가기 시작했다. 일단 그렇게 도생선사를 따라서 동굴의 밖으로 나가본 다음에는 백 방생은 가끔 혼자서도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고 또한 그것을 즐겼다. 소림사의 후미인 이곳은 그다지 넓지는 않았으나 그런대로 산책을 하 기에는 적당했다. 백방생은 소림사의 경내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또한 소림사의 밖으로 나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 로 그 폭포수의 주변에서 맴돌았다. 소림삼신승은 그 일이 있은 연후에 오히려 백방생에 의해 참선에 방해 를 받게 되는 것을 꺼려하는 듯 의식적으로 그를 멀리하는 것 같았다. 따라서 백방생으로서는 더욱 밖으로 나가 산보를 함으로써 머리를 식힐 수 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자주 도생선사와도 만났다. 도생선사는 비교 적 자주 그를 만나러 와 주었고 또한 가능하면 그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그는 다소 시적인 운치를 느끼게 해주는 보기 드문 승려였다. 도생선사 는 매번 만날 때마다 거의 과거 백노야와 사귀던 당시의 상황을 추억 처럼 얘기해 주었고 또한 여러가지 강호의 얘기들도 해 주었다. 백방생 은 이제까지 강호의 사정에 대해 어두웠으나 그로 인해 강호의 고사(古 事) 등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아졌다. 백방생은 자연 그러한 모든 강호의 사정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만큼 강호 무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지게 되었 다. 도생선사는 간간이 백방생에게 필요한 물건이나 무공비급 등을 가져다 주기도 했고 백방생과의 대화를 즐기는 것 같았다. 그 노승이 좋아하는 것은 불법에 관한 것보다는 차라리 사춘기적 감상과도 같은 인생 전반 에 걸친 처연한 분위기였다. 백방생도 점차로 세월이 흘러가자 몸이 좋아져서 그와 여러가지의 얘 기를 주고 받게 되었다. 그 두명의 노소는 매우 의기투합하는 것 같기 도 했다. 단지 그 도생선사는 왠지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무공은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 있으나 쉽게 안색이 초췌해 지고 피곤해 하는 눈 치였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늙어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으며, 더욱 이 병들어 있는 몸뚱아리를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날, 백방생이 일어나 앉은 지 다시 한달 정도가 되는 날에 백방생은 여전히 그 폭포수의 부근에서 도생선사와 만나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동안 꾸준히 수련을 해 온 보람이 있어서 체내의 많은 경맥 들이 치료되고 몸을 움직이는데 거의 불편이 없어졌다. 백방생은 이제 한달 정도만 더 수련하면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몸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더욱 좋아지고 있으므로 그가 건강한 몸으로 소림사를 떠나는 날은 기필코 오고 말 것이다. 혹시 그 날은 의외 로 빨리 올 지도 모른다. 도생선사는 그와는 반대로 몸이 매우 수척하여 깡말라 있었다. 그의 안색은 거뭇하게 변해 있었고 병고(病苦)에 시달려서 누렇게 뜬 피부와 눈빛은 다소 공허해 보였다. 허나 오늘따라 도생선사는 유달리 많은 말 을 했다. "보아하니 자네의 무학상의 자질도 상당해 보이네. 만일 몸이 그렇게 다치지만 않았어도 무학의 대성(大成)을 이룰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 예를 들어서 과거의 달마조사나 무당의 장삼봉(張三峯)진인처럼 대종사 (大宗師)가 되는 것 말이네. 자네, 요 근래에 본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 하나가 배출되었는데 그것을 알고 있는가?" 백방생은 도생선사에게서 이미 많은 강호문파의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정작 소림사에 관한 것은 처음이므로 말했다. "근래에 소림사에서 어떤 인재가 배출되었습니까?" 도생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주위의 경관은 다시 변하여 단풍잎 들이 짙게 물들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비록 한낮이기는 하지만 햇살이 그다지 따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도생선사는 마치 그 햇살을 눈부시다는 듯이 가늘게 눈을 뜨고 바라보 다가 말을 계속했다. "그는 지(知) 자배의 사람으로 법명을 지공(知空)이라고 하지. 본사의 최근의 배분은 고도지불일징(苦渡知不一澄)으로 되어있으니, 말하자면 그는 일대제자(一代弟子)인 셈이네." 백방생은 말했다. "그의 무공은 높습니까?" 도생은 그를 보며 말했다. "자네가 보기에 이 늙은이의 무공은 어떤가?" 백방생은 말했다. "스님의 무공은 매우 높으신 것 같습니다." 도생은 말했다. "나의 무공은 그러니까 음, 겨우 무형지기(無形之氣)를 보고 있네." 무형지기를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초상승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이다. 백방생도 이미 그의 무공경지를 다소나마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 만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수위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몹시 드문 법이었 다. 그것은 즉 도생선사의 소탈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노스님께서 이미 대홍락(大紅落)의 경지에 오르셨다니, 축하드리겠습 니다." 그러나 도생선사는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두어 번 고개 를 가로 젓더니 불쑥 다시 말했다. "그 지공이라는 사람의 무공도 대강 나와 비슷할 것이네."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그가 알고보니 소림사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후기지수(後 起之秀)였군요?" 일대제자는 바로 장로급의 아래를 말한다. 대개 배분이 한단계 높으면 무학도 그만큼 높아지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같은 배분내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보여서 윗대의 사람들과 능력이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그 러한 사람들은 차기의 문파를 주도해 갈 영도자의 인물로 꼽히는 것이 었다. 지공이라는 스님의 무공이 도생선사와 흡사하다고 하자 백방생이 이내 그를 차기의 장령제자(掌令弟子)로 꼽은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 서였다. 그런데 도생은 다시 말했다. "자네는 그의 나이가 지금 몇 살인지 아는가?" 백방생은 말했다. "육십세의 전후가 아닙니까?" 현재 소림사의 지자배분의 평균 연령은 대개 육십대였고, 그 아래의 불(不)자배의 평균연령은 사십대였다. 백방생은 당연히 그 지공이라는 사람도 오륙십대의 초로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생선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의 지금 나이는 겨우 서른 여섯일 뿐이네." "서른 여섯이라고요?" 이번에는 백방생도 다소 놀랐다. "아니 겨우 서른 여섯에 어떻게 그런 배분에 들 수 있다는 말입니 까?" 도생선사는 말했다. "그는 바로 장문사형인 도액선사의 마지막 관문제자(關門弟子)인 것이 지. 그러므로 자연히 지자배분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네." 백방생은 말했다. "겨우 나이 서른 여섯에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르다니, 정말로 놀라운 일 이로군요." 기실 백방생은 불과 얼마전에도 그러한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다. 달마오수(達摩五秀), 그들은 공교롭게도 나이도 서른 여섯이며 또한 무학 도 비슷한 경지가 아니던가? 그러한 인재들은 흔히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다는데, 거의 같은 해에 그렇게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는 것은 다소 기이한 일이었다. 하긴 그렇게 보자면 더욱 기이한 것은 백방생 본인이라고 할 수가 있 었다. 그는 기실 공력도 부족하면서 이전에 벌써 그러한 무학경지에 오 르지 않았던가? 도생선사는 말했다. "그 소림일수(少林一秀) 지공은 근 백년 이래로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고 할 수가 있지. 아미타불? 본래 본사의 무학들은 타문파의 것 과는 달리 지나치게 정통적인 것들이어서 속성을 하기에는 어려운 것 들이었네. 그런데 지공은 그야말로 가장 빠른 기록들을 남기며 그 무학 들을 성취했지. 그것은 일종의 신화(神話)처럼 전해지고 있네. 우리들은 혹시 그가 제이의 달마조사와 같은 인물이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해 보고 있는 중이네." 백방생은 문득 헤어진 지 이미 오래된 달마오수 등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진소유는.... 본래 달마오수는 달마하원의 역사상 가장 무학의 성취가 빨랐다는 백방 생의 부친의 지도를 받아서 그렇게 성취할 수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비록 비슷한 결과이기는 하나 그 지공이라는 사람은 보다 완고한 환경 속에서 그런 성취를 이루어 냈다니 실로 그 능력이 더욱 탁월한 것 같았다. (정말 천하에는 인재(人才)들도 많이 있군.) 이른바 영웅은 난세를 부르고 난세는 영웅을 부른다는 말이 있다. 지 금 그와 같은 인재들이 돌출하는 것은 그럼 난세가 도래해 오고 있기 때문일까? 백방생은 말했다. "대단한 사람이군요. 그를 한 번 만나볼 수가 있을까요?" 도생선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금 본사의 밖으로 나가있기 때문에 만나볼 수는 없네. 다만 내 가 그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그것은 자네에게 생각을 해보도록 하기 위함이네." 백방생은 가볍게 미소했다. "저를 게으르다고 생각하시는 군요?" 도생선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문득 가벼운 바람이 불어서 나뭇잎 하나가 날려와서 연못에 떨어졌다. 그의 시선은 그것에 잠시 머물다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렇지는 않네. 자네는 편안한 듯 하면서도 결코 게으른 사람은 아니 지. 음, 어떤 면으로 본다면 자네의 그러한 마음의 여유는 보기 드문 것 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다만, 나는 앞으로의 일이 순탄치만은 않으리라 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네." 백방생은 말했다. "비록 제이의 대종사는 되지 못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지킬 힘은 가져야 한다는 말이로군요?" 도생선사는 말했다. "나는 사실 이미 말했지만 자네의 선조부와의 인연 때문에 이러한 관 심을 가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자네의 성품은 자네의 선조부와 그리 닮지 않았지. 그러나 나는 왠지 그러한 자네가 더욱 마음 에 드는군. 아미타불...! 자네는 아다시피 이번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네. 앞으로 다시 이러한 일을 겪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 게 아닌가?"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앞으로 노스님께서 저를 잘 도와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혹시 제 가 귀찮아 지신 것이 아닙니까?" 도생선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의 마음은 조금도 사심이 없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죽은 후에 벌 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겠지. 아미타불, 나는 사실 앞으로 오래 살지 못하네. 그리고 앞으로 다시 이곳으로 자네를 만나러 오지도 않겠 네." 백방생은 다소 놀라서 말했다. "아니 그것은 어째서입니까?" 도생선사는 불호를 외운 후에 처연한 신색으로 말했다. "아미타불, 색신은 무상(無常)한 법이라, 누군들 죽지 않을손가? 나는 이미 중병이 들었네. 설령 중병이 낫는다고 해도 역시 죽지 않을 수가 있을까?" 도생선사의 어조는 사뭇 떨리고 비감에 젖었다. 그는 한평생을 불도에 몸바쳐온 사람이었지만 마지막에는 이렇게 처연한 감상에 젖고 있는 것 이었다. 사실 백방생은 이미 그가 중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 었다. 단지 갑자기 그가 이제는 작별을 하자고 하는 바람에 매우 곤혹 한 느낌이 들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작별을 해야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하신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이제 제가 귀찮아지신 모양이로군요?" 도생선사는 그의 얼굴을 촛점없는 흐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자네를 귀찮아 한다고?"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단지 내일 하루라도 다시 저와 만 나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도생선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어. 내일 다시 만난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 는가? 게다가, 사실 나는 지금 매우 고통스러운 입장이네. 이젠 그만 쉬 고 싶을 뿐이야. 앞으로는 오려고 해도 올 수가 없을 거네." 백방생은 말했다.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리신 것입니까?" 도생선사는 말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병이네. 아니, 늙음이라는 병이기도 하지. 사실 나는 이미 마음이 병들고 지쳐버렸네. 마음이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더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백방생은 내심 매우 안타까운 생각에 생각을 굴리다가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뵈올 수 없다니 너무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도생선사는 가벼운 미소를 떠올렸다. "자네는 착한 녀석이로군. 본래 모든 것은 그렇게 무상한 법이네. 해탈하여 열반에 오르면 그 생사(生死)마저 초월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네. 아미타불! 생각해 보면 나는 너무 감상에 젖는 바가 많아서 일을 그르친 것이지." 백방생은 말했다. "저는 앞으로 노스님의 도움과 그 깊은 가르침을 잊지 않을 것입니 다." 도생선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좋아! 좋아! 자 그럼 이제 말해보게. 자네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 인가?" 백방생은 말했다. "저더러 이제는 소림사를 떠나라는 말씀이시군요?" 도생선사는 말했다. "나는 앞으로 한 달을 채 살지 못할 것이네. 게다가 앞으로 본사는 강 호의 혼란에 끼어들어서 자네를 돌봐줄 여유가 없게 될 것이네. 나는 자네가 쓸데없이 이곳에서 남에게 계속 피해를 주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라네." 도생선사의 수명이 앞으로 한 달도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자 일순 백방생은 안색이 무거워 졌다. 도생선사는 비록 처연한 감상에 젖기는 하지만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여 회피하려는 졸장부는 아닌 모양이었 다. 그는 어딘가 초연한 여유가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마치 친한 친구와 작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는 앞으로 한달 후에 이곳을 떠나 강호로 나갈 생각입니다." 백방생의 말을 듣자, 도생선사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좋아! 내 그럴 줄 알았네." 도생선사는 이미 신형을 옮겨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백방생은 즉시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그럼 이대로 돌아가시는 것입니까?" 도생선사는 신형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어차피 인생은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돌아가는 것이네. 어떻게 모든 일 을 예고할 수가 있겠는가? 앞으로 잘 지내게. 아미타불" 나직한 불호소리와 함께 도생선사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다만 이번에 그의 신형은 아까와는 달리 상당히 빨랐다. 마치 안개나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더니 어느새 수십장 밖으로 멀어져 있었다. 그의 신형은 표흘하여 마치 환상과 같았다. 백방생은 미처 뒤쫓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도생선사가 사라져 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도생선사의 신형은 마치 유령처럼 어른거리더 니 이윽고 산모퉁이를 돌면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의 뇌리에 는 언제나 그의 음성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도생선사와 헤어진 이후, 백방생은 조사동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마음 이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뭔가 중요한 일을 미처 하지 않 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가 그렇게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도 소림삼신승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거의 백방생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온종일 참선에만 주력하는 모습들이었다. 앞으로 열반하는데 앞서서 좀더 불심에 접근해 보려고 하는 것일까? 백방생은 이미 이곳의 사정에 거의 능통했다. 과거 몇달전만 해도 백 방생은 그야말로 강호의 문외한이요 애송이였다. 하지만 그는 도생선사와 한달여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미 그러한 모든 개괄적인 강호의 사정 과 그 습성에 대해 능통해져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더욱 침착해져 있는 상태였다. 본래 소림삼신승의 우두머리인 고혜선사는 바로 전대의 소림방장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 방장의 직위를 대제자인 도액선사에게 물려주고 줄 곧 사제들과 함께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현임장문 인 도액선사도 정작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이곳에 와서 함께 상의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고승대사는 바로 사형인 고혜대사의 지시를 받고 참선에 몰두하 고 있었다. 그는 비록 속으로는 백방생과 어울리고 싶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었다. 백방생은 동굴의 내부에서 대화를 나눌 상대를 찾지 못하자 다시 이상 한 호기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달마역근경의 수련은 왠지 하기 싫어진듯 했다. 그는 찬찬히 동굴의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소림삼 신승은 참선을 하기 위해 동굴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린 상태였 다. 백방생이 이 동굴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전에 그는 그저 간단한 구조만을 관심을 가지고 보았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종의 욕구불만인 모양으로 인해서, 끈질긴 시선으로 주위 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 동굴의 곳곳에는 무수한 부처의 조각들이 있고 또한 그 아래에는 돌로 만들어진 방석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백방생은 삼신승이 간혹 그 런 곳에서 참선하던 광경을 본적이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그 움푹 패 인 돌방석은 본래는 평평한 바위였다고 했다. 그런데 고승들이 무수한 세월에 걸쳐서 앉아서 참선의 수행을 하다보니, 그만 모양이 그렇게 변하게 되었다고 했다. 백방생은 그 가운데의 한 곳으로 다가갔다. 동굴의 내부를 온통 뒤덮다 시피 한 조각품들은 별로 그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단지 그의 시선을 끈 것은 그 돌방석의 뒤에 조각되어 있는 하나의 아름다운 연꽃이었다. 그 연꽃은 비단 매우 정교하고 생생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매만졌는지 끝부분이 모두 반들반들하 게 닳아서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백방생은 문득 그 모습이 왠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백방생이 다가가서 그 연꽃의 꽃잎들을 매만지자 갑자기 이상한 감각이 전해졌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서늘한 감각이었다. 대개 돌로 만들어진 조각품들은 차갑기는 하지만 이것은 왠지 좀 더 차 가운 것 같았다. 게다가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손때가 많이 묻어 있어 서, 그러함에도 조금도 형상이 훼손되지 않고 정교하게 남아있는 것이 다시 기이하게 생각되었다. 백방생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며 생각하다가 내심 중얼거렸다. (그럼 이 연꽃이 바로 돌이 아닌 무쇠로 만들어진 조각품이라는 말인 가?) 그렇다. 다소 특이하기는 하지만 정말로 그 조각품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돌조각품이 아닌 철제조각품이었다. 대체 어째서 그런 철제조각품을 이곳에 박아놓은 것일까? 백방생은 잠시 궁리하다가 문득 그 연꽃의 꽃잎들을 눌렀다. 그러자 갑자기 그 꽃잎들은 하나씩 석벽의 안으로 들어갔다. 알고보니 그것은 일종의 기관장치였던 것이었다. 이윽고 그 꽃잎들이 모조리 안으로 들어 가고 나자, 느닷없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석벽이 뒤로 물러나더니 그 자리에 하나의 작은 지하계단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지하계단은 둥글게 아래로 길게 뻗어 내려가고 있었다. 백방생은 이 미 시력이 대단히 좋아져서 그러한 어둠속을 간단하게 꿰뚫어 볼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일시 어리둥절해 했다. 갑자기 지하계단이 나타나다니,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혹시 조사전(祖師殿)으로 통하는 입구가 아닐까?) 이 조사동에는 과거 달마조사의 영정 등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또한 당연히 이곳은 소림사의 안에서도 매우 신성시 되는 곳이었다. 백방생은 자연 이곳에서 감히 경거망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조사전이 아마도 동굴의 안쪽에 있을 것이라고만 미루어 짐작하 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이런 지하계단이 나타났으니 혹시 조사전의 입구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백방생은 문득 삼신승이 이것을 눈치챌까 저어하는 마음이 생겼다. 솔직히 그는 지금 탐구하는 마음이 강렬한 상황인데, 삼신승에게 들켜 서 지금과 같은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방생은 즉시 신형을 움직여서 지하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단 그가 돌방석에서 일어나 지하계단의 아래로 내려가자 그 석벽은 다시 움직여서 원상태로 돌아갔다. 아마도 그 돌방석에도 모종의 기관 장치가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계단의 입구가 닫혀버리자 내부는 일순 어두컴컴하게 변했다. 만일 백방생의 시력이 좋지 않았다면 매우 당황했을 것이었다. 지하계단은 아래로 원형을 그리며 내려가서 이윽고 하나의 석문앞에 이르렀다. 그 석문은 비교적 단순하게 생겼는데 보기에 몹시 두터워 보였 다. 이 석문에도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일까? 백방생이 가볍게 밀 자 뜻밖에도 그 석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석문의 뒤는 좁은 지하통로였다. 통로의 좌측에는 화석(火石)과 화도 (火刀) 등이 횃불의 도구와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백방생은 우선 걸음을 멈추고 화석과 화도 등을 사용하여 횃불에 불을 붙였다. 이 작은 동굴의 어디에 외부와 통하는 환기구멍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곳에 그런 것을 미리 준비했다면 필시 환기구멍도 있을 것이다. 횃불을 들고 안으로 약간 들어가자 다시 하나의 석문이 앞을 가로막았 다. 그 석문은 아까의 그 석문과 크기나 모양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석문의 윗쪽에는 하나의 문패가 박혀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소림중지(少林重地) 조사전(祖師殿). 문패에는 그와 같이 전자체로 음각되어 있었다. 그 글자들이 손가락의 굵기로 힘찬 기상이 엿보이는 것이 웅후한 느낌을 갖게 했다. 마치 누군 가가 화강석위에 직접 지력(指力)을 이용하여 써내려간 것 같았다. 사 실 그렇게 하는 것은 수천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학이 최상승(最上乘)의 경지에 올라 있다면 능히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곳이 정말로 소림사의 조사동이었군?) 조사동이라면 당연히 달마조사를 비롯하여 무수한 조사들의 유물이나 위패들을 모신 곳일 것이다. 백방생은 이미 조사동에서 두달 이상이나 있으면서도 정작 조사동은 구경하지 못했다. 이른바 이러한 곳은 강호의 문파에서 소위 금지(禁地)로 여겨지는 곳 들이었다. 흔히 조사전 등에 그 문파의 비전이나 유물 등을 보관해 두 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백방생은 비록 그러한 사실을 알기는 했으나 이미 내친김이라 결코 뒤로 물러나고 싶은 생각은 일지 않았다. 그 석문은 아까의 석문과는 달리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이 석문은 필시 어떤 기관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 틀림이 없었다. 기관장치에 관한 학문은 백방생은 그다지 많이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백방생은 전날 망해사에서 도 예상보다 쉽게 그 기관장치의 흐름을 찾아냈었다. 지금도 왠지 잠시 생각해 보자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른바 사람은 어떤 기관을 많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기관이 더 욱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 사람들은 청각에 주의하지 않아서 별로 그 능력이 발달하지 않지만, 그러나 왕왕 장님의 청각은 그보다 더욱 발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아마도 백방생의 경우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가 있으리라. 그는 지난 몇달간 거의 시체처럼 누워있기만 했던 적이 있었다. 자연 그의 영감은 전보다 더욱 발달한 것이 아닐까? 석문의 우측 벽에는 작은 연화대 모양의 조각이 있었다. 그 형상은 아까 조사동에서의 것과 흡사했다. 그러나 백방생은 손가락으로 그 위 의 한 점을 눌렀다. 이상하게도 그 손가락은 안으로 한치나 푹 들어갔 다. 그가 갑자기 무공을 전개한 것일까? 아니었다. 기실 백방생은 전신의 혈맥들이 두루 통하고 있는듯 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마치 실날같은 것이어서 아직 과거의 추측처럼 무공이 회복 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의 무공이 회복되려면 일단 전신의 기혈이 시 원스럽게 융통되어야 하는 것이고, 또한 융통되기 위해서는 이미 끊어 지고 파괴된 경락들이 다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런 경락들을 원상복구 하기도 전에 무리하게 먼저 무공을 회복 시키려고 한다면 필시 중대한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백방생은 바로 그것 때문에 우선 달마역근경을 수련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보다 분명하게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솔직히 지금 그의 그러한 몸으로도 실날같은 혈맥의 흐름이 두루 이어 지고 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20 장 동굴속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그런 실날같은 흐름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거의 지장을 주지 않게 된 다. 그러나 무공이라는 것은 평소보다 훨씬 엄청난 양의 기(氣)를 사용하 게 되는 것이었다. 자연 그것을 위해서는 기의 운행통로가 훨씬 넓어 야 하고 두루 막힘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백방생은 만일 훌륭한 의원을 만나게 되어 끊어지고 손실된 경락 들을 복구하게 되면, 다시 무공을 사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솔직히 다시 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백방생 의 실망은 적지 않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이내 바 뀌었다. 그는 사실 거의 죽을 뻔한 사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된 것도 그저 감 지덕지할 일인 것이다. 지금은 결코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계속 달마역근경의 수련으로 기초적인 체력을 단련시키고, 이어서 나 중의 인연이나 좋은 치료기회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그의 몸에 무한한 잠재력이 생긴 이상에는 다시 몸을 치료하는 것이 그다지 불가능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각설하고, 지금 백방생은 손가락이 석벽의 속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었 던 것은 물론 기관장치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그 손 가락을 그대로 집어넣은 채 둥글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정말로 석벽에 는 연화대 위에 둥근 원형이 생겨났다. 그리고 백방생이 손가락을 떼자 이내 스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석문이 조용히 옆으로 밀려나는 것이었 다. 이 기관장치는 마치 당연한 듯이 불법의 이치를 형상화 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즉시 주저하지 않고 횃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뒤의 석문 은 다시 조용히 닫혀졌고 횃불은 오랜 어둠을 헤치고 그 내부를 비추었 다. 석문의 안쪽은 하나의 넓은 대전이었다. 대전의 맞은 편에는 하나의 단 이 있고 단 위에는 여러명의 신상들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 장 돋보이는 뚱뚱한 형상의 신상이 바로 달마조사를 상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조사전은 매우 낡았고 또한 먼지가 가득했으며 초라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외에 대전안에는 별로 특이할 만한 물건들이 없었다. 단지 사면의 석벽에는 크고 작은 조각이나 글자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백방생은 따라서 약간 실망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대전의 사방에 새겨져 있는 것들은 아마도 소림사의 중요한 칠십이종의 무학들 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이 칠십이종의 절예는 하나같이 달마조사가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중에 고승들이 달마역근경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만 들었기 때문에 전혀 다르다고도 말할 수가 없었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따라서 칠십이종의 절학들을 이 대전안에 새겨놓아서 달마조사의 위업을 기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잠시 그 절학들을 구경하려다가 이내 귀찮은 생각에 포기해 버렸다. 그는 이미 달마하원의 절학들을 배운 바가 있으므로 더이상의 무학구결들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서 무학의 성향이나 흐름도 변하게 마련이었 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이치는 남아있는 법이 었다. 그것은 무학이라는 것이 결국은 어떤 정해진 이치 안에서 터득되고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변하는 것은 그 표현방식이나 사용법이지 그 몸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 소림사의 절기들도 마치 그 몸체에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가장 정통적(正統的)인 것들로서 근본에 충실하며 또한 지극히 심오한 바가 있었다. 그것들은 일면 단순해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배울수록 끝이 없다는 느낌이 들도록 하는 최고의 절학들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그것들 의 인기는 사라지고 있었다. 과거 소림사의 절학들은 강호상에서 그 인기가 대단했었다. 당시는 그 한권의 비급으로도 강호상에 피바람이 휘몰아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 금에 이르러 우선 무학비급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고 비슷비슷한 것들 이 우후죽순격으로 발출됨에 따라서 어디서나 원하는 비급들을 노력여 하에 따라서 구입하는 것이 용이해졌다. 일반인들은 몰라도, 당금에 이르러 아직 무학비급이 없어서 무공을 배 우지 못한다는 말은 사라지게 되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이 달라졌다. 당금에 이르러 사람들은 매우 오랫동안 고통을 겪으면서 기초를 충실히 다지고 터득해야 하는 정통적인 무공들 보다는, 비교적 빠르고 쉽게 연성할 수 있으며 위력도 강한 무학들을 원하고 있었다. 과거 그것들은 단순히 방문좌도(傍門左 道), 혹은 이단으로 분류되어 강호인들의 눈총을 받았었다. 그 속성의 무학들은 비록 처음에는 위력이 강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악랄하게 만 들고 주화입마를 몰고 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그 속성무학에 대한 연구는 크게 발전되어 부족 한 점이나 단점들이 많이 보완되고 수정되어 거의 문제가 되지 않게 되 었다. 즉, 말하자면 소위 세외팔세(世外八勢) 등이 그래서 나타나게 되었 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이후에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무학들에 관심을 갖 지 않기에 이르렀다.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학들은 과거에 비해 꾸준히 그 위력과 내용이 상승되어 훨씬 훌륭한 최고의 무학들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무학들을 선호하지 않았다. 현재 따라서 그 무학들은 비전(秘 傳)이되 비전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소림사에서도 남들이 자신들 의 무학을 배우는 것을 그다지 꺼리지 않는다고 한다. 소림사의 절기들이 이 조사전에서 한낱 상징적인 것들로 변모하게 된 것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 였다. 대전의 사방에는 각기 고만고만한 석문들이 많이 있었다. 그 석문들에는 대체 어떤 것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백방생은 그것들을 조사해 보 기 위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가 거의 대전의 중앙에 이르렀을 때 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빠르게 덮쳐드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갑자기 깜짝 놀라서 그만 횃불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 습격 자는 이미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 버렸던 것이었다. 그러한 감각은 너 무나도 생생하여 백방생은 등골이 오싹해 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무사했다. 조금전에 그 사람은 선장(禪杖)으로 그의 어깨를 후려쳤었다. 그럼에도 무사할 수가 있었던 것은 지금 그것은 바로 그림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백방생은 지금 횃불을 손에 들고 있는 상태 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림자가 그의 몸을 습격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내 그 이유를 알 게 되었다. 지금 이 대전의 천정에는 무수한 조각들이 기관의 작동에 의해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그 벽면에는 강렬한 빛이 일어나 고 있어서 그림자가 생기고 있었다. 그 조각들은 비록 작으나 그렇게 되어서 백방생은 조금전에 실로 진짜 사람이 자신을 습격하는 것으로 오인했었다. 백방생은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실로 정묘한 기관 장치의 극치였다. 물론 지금 그 천정에 일어나고 있는 빛은 바로 그가 들고있는 횃불의 불빛이 집광판에 의해 반사되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 다. 실로 말은 쉽지만 정말로 그렇게 만들기는 어렵다. 게다가 지금 조 각들은 모두 백여개나 되는데 그 움직임은 하나같이 심오한 무학의 이 치를 담고있는 것이 아닌가? 조각상들이 점차로 빠르게 움직임에 따라서 백방생을 공격하는 그림자 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빨라졌다. 그러한 공격들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 어져서 마치 거대한 파도들이 연속적으로 후려쳐 오는 것과도 같았다. 그 공격은 사면팔방에서 쉬지않고 계속되고 있었으며 마치 백방생은 태 풍의 격랑속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조각배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것은 진법(陣法)이로군!) 백방생은 소림사에 그 유명한 나한진(羅漢陣)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소림사의 나한진은 오백나한진과 백팔나한진, 그리고 십팔나한 진이 있는데 지금의 것은 보아하니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인 모양이었 다. 과거 소림사는 그 백팔나한진 하나로서 무적(無敵)을 구가하기도 했 었다. 백방생은 이내 소림사에서 그 백팔나한진을 어렵게 이곳에 만들어 놓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대전은 간혹 연무장(鍊武場)으로 사용되기 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 대전의 내부에 물건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고 필요한 것들은 모두 저 석실안에 넣어두었을 것이다. 물론 달 마조사의 신상 뒤에도 석문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필시 그곳에 또 하 나의 조사당이 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곳이라면 무학을 연마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소림사에서는 사람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런 오묘한 기관장치를 개설한 것이리라. 백방생은 그 백팔나한진의 그림자가 끝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다가 이윽고 다시 걸음을 옮겼 다. 헌데 그가 마악 하나의 석문을 향해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한 줄기의 소리가 들려와서 그를 긴장시켰다. 백방생은 갑자기 소름이 오 싹 끼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 이 그림자의 움직임들은 과거에 만들어 놓은 것이니 상관할 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들리고 있는 이 말소리는 결코 과거인들의 것이 아니지않는가? 혹시 여기에 무슨 유령 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걸음을 멈추고 즉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는 매우 괴이했다. 마치 한탄을 하는듯 하기도 하고 혹은 즐거운 쾌감에 젖 어있는듯 하기도 했다. 아니 그 여운은 고통스럽게 들린다고나 할까? 백방생은 이처럼 괴이(怪異)한 소리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었다. 그 소 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저히 견딜 수 없게 하는 이상한 마력을 지니 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결코 유령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왠지 소림 사의 승려가 내는 말소리도 아닌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 내고 있는 것이며 필시 거기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다. 백 방생은 즉시 마음을 고치고 그 음성의 출처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소리는 은근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기 때문에 백방생은 그것이 들려 오는 방향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그 소리는 이상한 신음소리였다. 그것 도 보통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아주 기분나쁜, 이를테면 악마(惡魔)의 신음소리 같기도 했다. 소림사에 와서 그러한 소리를 다 듣게 되다니...! 백방생은 그 소리가 다른 하나의 석문쪽에서 들려오는 것을 알았다. 그 석문을 여는 방법 역시 다르지 않았으므로 백방생은 즉시 석문을 열고 나갔다. 그 밖은 역시 좁은 통로였다. 그러나 그 통로는 좀더 길었 고 게다가 약간 깨끗한 것 같았다. 아마도 그 통로는 조사전으로 이 르는 또 다른 통로인 것 같았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통로에 이르자 그 신음소리는 좀더 분명하게 들려 왔다. 그 통로는 길게 계속되었는데 도중에 다시 여러개의 석문들이 좌 우에 나타났다. 백방생은 그 석문들 가운데 한 곳에서 소리가 나는 것 을 알고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내부는 역시 통로였다. 그것은 마치 어떤 미로(迷路)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이어 계속해서 서너개의 석문과 통로를 가로질렀는 데, 이윽고 하나의 작은 동굴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동굴은 거의 천연적인 것이었다. 비록 입구가 멀지는 않으나 그 입 구가 막혀 있어서 거의 빛이 스며들지 않는다는 것이 다소 조사동과 흡 사해 보이기는 했다. 백방생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서 들려오던 그 괴이한 신음소리는 갑자기 멎었다. 백방생은 이내 그 동굴의 바닥에서 한 명의 괴인(怪人)이 봉두난발을 하고 바위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가 있었다. 그 괴인의 모습은 일견하기로도 특이한 느낌을 주었다. 우선 그 괴인 은 전신이 거의 팔뚝만한 굵기의 쇠밧줄로 꽁꽁 결박되어 그 아래의 커다란 바위와 함께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모습은 어리둥절하게 보일 정도였다. 소림사의 내부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혹시 괴인은 극악한 죄를 저지른 대마두가 아닐까? 그러나 다시 보니 괴인의 머리는 봉두난발일 지라도 의복은 제법 깨 끗한 옥색(玉色)의 비단옷이었으며 용모도 대단히 준수해 보였다. 어떻 게 이런 상황이 있을 수가 있을까? 백방생은 자신이 마치 환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괴인의 두눈은 이순간 시뻘겋게 보였으며 거기에서 괴이한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을 받자 백방생은 마치 전신이 잘게 찢기는 듯한 고통 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괴인의 시선은 점차로 안정이 되어 붉은 기 운이 사라졌으며 담담하게 변해갔다. 백방생은 그제서야 몸과 마음이 다 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괴인의 음성은 맑고 온화하기까지 했다. 백방생은 그의 태도가 아까와는 크게 달라진 것을 보고 다소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생은 이곳에 잠시 머물고 있는 사람이온데, 우연히 이렇게 선배님의 불편을 끼쳐드리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괴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자네는 스스로 겸손해할 필요가 없네. 나는 사실 조 금전에 자네의 도움을 받은 것이지." 말과 함께 괴인은 시선을 떨구어 자신의 손아래를 가리켰다. 지금 그의 손아래는 많은 비급들이 뒹굴고 있었다. 게다가 거기에는 백방생에게 매우 낯익은 것들도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전에 백방생이 망해사 에서 보았던 달마하원의 두루마리들이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괴인은 이제까지 이 어둠속에서도 비급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게다 가 알고보니 그의 머리는 비단 봉두난발일 뿐만 아니라 하나같이 눈부 신 백색(白色)이었다. 마치 얼굴은 사십대인데 머리카락은 팔십대라고나 할까? 그밖에도 이 괴인에게는 괴상한 점들이 수두룩하게 많았다. 백방생은 말했다. "제가 어떻게 선배님을 도와드렸다는 말씀입니까?" 괴인은 말했다. "나는 사실 부끄럽네만, 조금전에 마음에 착란이 일어나서 자칫 심마 (心魔)에 빠져들뻔 했네. 자네가 이해할 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네가나 타나서 내게 정신을 차리게 해 주었네." 백방생은 그제서야 조금전에 괴인이 이상한 소리를 질렀던 것은 바로 주화입마의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공이 극한의 경지에 오르 면 육체적인 주화입마를 초월하게 된다. 이때의 상황은 바로 심마를 말하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어쨌든 일이 잘 되었다니 무척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괴인은 백방생이 포권하며 말하는 것을 보고 다소 기이하다는 시선으 로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자네는 알고보니 이상한 사람이로군." 괴인과 같은 사람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 백방생은 절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제가 이상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괴인은 말했다. "사실 지금의 나의 상황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약간 이상하네. 그런데 자네는 그것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더욱 이상하지 않 겠는가?" 백방생은 가볍게 미소하며 말했다. "선배님은 매우 재미있으신 분이로군요." 괴인은 어리둥절해 졌다. "뭐라구? 이게 재미있다는 말인가?" "저는 이미 선배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백방생은 괴인이 다소 놀라는 것을 보며 즉시 말을 이었다. "선배님은 바로 다름아닌 천수자(天隨子)가 아니십니까?" 괴인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아니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렇다. 이 괴인은 바로 다름아닌 천륭무가(天隆武家)의 당금의 가주인 천수자였던 것이었다. 그는 세외팔세의 우두머리인 천륭무가의 주인이므 로 무공도 당연히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고 했다. 백방생은 그런 사람 을 갑자기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백방생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저는 성은 백(白)이요 이름은 방생(方生)으로서, 달마하원의 주지와 관 련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번에 그런 일로 소림사에 오게 되었는데, 그 래서 금방 선배님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천륭무가에는 대대로 천형(天刑)인 천상절맥(天上絶脈)이라는 것이 있 었다. 이 천수자가 소림사에 그 절맥을 치료하기 위해 왔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었다. 천수자는 즉시 자신의 무릎에 놓인 작은 두루 마리들을 내려다 보고 이내 가볍게 고소하며 말했다. "알고보니 그랬군. 나는 또 자네가 무슨 신통력(神通力)이라도 있는 줄 로 알았네. 음, 자네의 이름이 백방생이라고? 매우 좋은 이름이로군. 게다 가 달마하원주와 연분이 있다니...." 그는 아직 달마하원 등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포권하며 말했다. "사실 이런 곳에서 선배님을 뵙게 되니 매우 영광입니다. 선배님의 명성 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입니다." 천수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이런 곳에서 보게 되어서 영광이 아니라 사실은 뜻밖이라고 해야 하겠지. 게다가 내가 기실은 소문보다 크게 별볼일이 없다는 것 을 알았을 것이고.... 음, 자네는 이곳에 오래 머무를 것인가?" 백방생은 말했다. "저는 몸이 좋지 않아서 한달 정도 더 있을 예정입니다. 선배님은하 시는 일이 잘 되십니까?" 천수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도 보다시피 잘 되지 않네. 하긴 확신을 가지고 하는 일도 아니니 41. 내가 이렇게 쇠사슬을 짊어지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 네. 흠, 헌데 자네는 정말로 몸이 좋지 않군. 아주 특이한 일이네. 그러나 내가 지금 자네에게 도움을 줄 여유도 없고 말이야.... 내가 지금 자네 의 몸을 한번 보아줄까?" 백방생은 말했다.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몸이 나아져 가고있는 상황 이니 선배님의 도움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백방생은 사실 그 천륭무가의 일로 부모를 잃고 온갖 횡액을 당했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는 당연히 그들에게 어떤 보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해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백방생은 전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일단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 싫었던 것일 까? 천수자는 백방생이 자신에게 왠지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간파 한 듯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원하지 않는다니 그럼 어쩔수가 없겠군. 그러나 내가 보기에 우 리는 제법 상당한 인연이 있는 모양이네. 앞으로도 만일 어떤 어려운 일 이 생긴다면 나에게 얘기해 주게." 백방생은 포권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선배님의 후의는 잘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방생은 이미 이 동굴의 내부를 충분히 살폈다. 그는 자신이 정식으로 거리를 두는 한 이곳에 더이상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백방생은 가볍게 읍하며 인사한 다음에 횃불을 들고 다시 안쪽으로 향했다. 문득 그의 등뒤에서 천수자의 말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하하, 자네는 천하에서 첫번째로 나의 호의를 거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가? 하하, 다음에 또 오게!" 백방생의 부모는 천륭무가로 인해 횡액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백방생은 더욱 그와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사실 천수자의 의도 는 나쁜 것이 아니므로 그의 죄는 없다고 해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백방 생의 꺼리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말릴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백 방생은 은연중 길게 탄식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천수자를 만나고 온 다음부터 백방생은 여전히 수련을 계속했다. 그는 간혹 몰래 조사전에 다시 내려가 보고 또한 각 석실속의 유물들이나 달 마대사의 영정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는 심심한 때를 이용하여 소림사 의 칠십이종절학이나 백팔나한진 등을 검토하고 그 이치를 배우기도 했 다. 소림삼신승은 거의 조사동의 안쪽에 들어가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참선에 들었기 때문에 그와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도생선사 는 정말로 그날 이후로 그를 다시 찾아오지 않았으며, 백방생이 볼 수 있는 사람은 그저 음식들을 날라다 주는 시중드는 승려들 뿐이었다. 그 들은 모두 거의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방생은 사실 지루하게 시간 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세월은 빠르게 흘러서 한 달 정 도가 지나게 되었다. 백방생은 그날 이후 다시는 천수자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는 왠지 그곳에 가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거의 소림사를 떠날 때가 다 되자 백방생은 문득 그 생각을 떠올 렸다. "다시 한번 찾아가 볼까?" 한번 생각을 떠올리자 그 괴인에 대해서 모든 것이 궁금해 지게 되었 다. 그 천수자는 본래 무학이 천하제일이라는 사람인데, 과연 정말로 달마역근경을 통해서 그 천형을 극복할 수가 있을까? 과연 지금 그는 아직 심마에 빠져서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관심은 사실 백 방생의 처지로는 다소 주제넘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는 무학과 식견이 그리 높고 능력도 대단하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백방생은 자 신 스스로를 잘 정리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그렇다. 내가 지금 그를 만난다고 해서 무엇을 할수 있을 것인가? 부 모를 팔아서 어떤 이득이라도 얻자는 것인가?" 백방생이 그런 생각을 곰곰히 하고 있는데 문득 동굴밖에서 한 명의 승려가 찾아와 그를 불렀다. "함께 가셔야 하겠습니다." 그 승려는 이제까지 이곳을 드나들며 온갖 시중을 들어주던 승려가 아니었다. 백방생은 느닷없이 잿빛옷의 낯선 승려를 대하게 되자 다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승려는 나이가 오십대로 보였는데 상당히 무뚝뚝하고 인상도 험한 편이었다. 두눈에서는 간혹 맑고 예리한 광채 가 번뜩였는데 그것은 그의 무공수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 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 승려는 말했다. "도생사숙님을 알고 계시겠죠?" 백방생은 그 호칭으로 미루어 역시 그가 소림사의 일대제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의아해 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입니까?" 그 승려는 느닷없이 대답도 하지 않고 신형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다소 무례하게 느껴지는 태도였는데, 그것은 마치 따라올려면 오고 말려면 말라는 식인 것 같았다. 하지만 백방생이 어떻게 그냥 보낼 수가 있겠는가? 백방생은 급히 그 뒤를 따르며 말을 재촉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 승려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구름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빨라서 백방생은 달려서 따라가야 했다. 백 방생은 이제까지 거의 이 조사동이 있는 부근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 다. 이제 그는 엉겁결에 그 부근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백방생이 거의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쫓아가자 이윽고 계곡의 어느 모퉁이를 돌 아서 한적한 장소에 이르자 그 승려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 다. "소승은 지관(知觀)이라고 하오." 백방생은 그의 태도가 약간 부드러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는 숨이 턱에 차올라서 한참을 호흡을 가다듬다가 말했다. "아41, 지관대사이시군요?" 지관이라는 승려는 웃으며 백방생의 안색을 살핀 후에 말했다. "나에게 대사라는 호칭은 과분한 것이오. 나는 그저 보잘것 없는 수행 승일 뿐이지." 백방생은 비교적 그와 사이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길게 호흡을 가눈 다음에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어쨌든 소생의 눈에는 대사께서 대단한 분으로 보입니다." 지관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문득 다시 말했다. "도생사숙과는 친하시오?" 백방생은 말했다. "예, 그런 편이지요. 혹시 그에게 무슨 문제라도 일어난 것입니까?" 지관은 말했다. "사숙께서는 열반하셨습니다." 미리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백방생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지난날의 도생선사의 그 초 연한 듯한 감상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듯 했다. 도생선사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않았던가? 백방생은 안색을 무겁게 하며 길게 탄식을 터뜨렸다. "그랬었군요." 지관은 백방생의 안색을 살피며 다시 말했다. "색신은 본래 무상한 것이니 너무 그렇게 괴로와 하지 마시오." 백방생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분은 이미 한달전에 저에게 작별인사를 하셨었지요. 나는 그 분의 죽음을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분을 다시 뵈올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게 섭섭할 뿐입니다." 지관은 말했다. "내가 시주를 찾은 것은 사숙께서 열반하기에 앞서서 몇가지 시주께 전해주라고 한 물건들이 있어서 입니다. 자 함께 가시지요!" 지관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백방생은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 "그 분의 유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관은 말했다. "아마도 지금 다비식을 하고 있을 것이오. 아니 이미 끝났을 지도 모르 지." 백방생은 말했다. "저를 우선 그곳으로 데려다 줄 수는 없겠습니까?" 지관은 고개를 돌려 백방생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더니 묵묵히 계속 걸음을 옮겼다. 몇개의 산모퉁이를 돌자 이내 거대한 사찰의 모습이 눈안에 들어왔다. 그것이 바로 중원무학의 근원이라고 하는 소림본사의 모습이었다. 소림 사의 건축물들은 과거 백방생이 보았던 달마하원의 모습보다 웅장했다. 그 건축물들은 달마하원의 것들보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보다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그런 것으로 소림사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천년간의 불문의 성지(聖地)가 엄숙함 속에 자리하고 있 는 것이다. 소실산(少室山)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소림본사는 그 규모가 거대하여 그 건물들이 좌우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관은 그 소림사의 내부로 곧장 가지 않고 좌측으로 나있는 소롯길 로 나아갔다. 그 길은 다소 외진 기분이 들었으나 그다지 험하지는 않았 다. 몇개의 산구비를 돌자 드디어 하나의 제법 널찍한 광장이 눈앞에 들 어왔다. 그 광장의 주위는 상당히 어지러운 모습이었고 그러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광장의 중앙에 불을 놓은 흔적이 있고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곳이 바로 소림사에서 다비식을 치르는 장소인 것이었다. 그 뒷편에는 무수한 사리탑들이 가득하게 솟아 있었는데 그것이 소위 탑림(塔林)이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미 도생선사의 다비식은 끝난 것이었다. 몇 명의 승려들이 재를 뒤적여서 그 속에 있는 사리들을 항아리에 담 고 있었다. 주위의 분위기는 황량한 느낌이 들었으며 매우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백방생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벌써 끝난 모양이로군." 지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아미타불...." 백방생은 그 자리에 서서 계속 멍하니 수북이 쌓인 재들을 바라보았다. 지관이 말했다. "가서 한번 보겠소?" 백방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가서 본 들 무엇하겠소?" 지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옳은 생각이오. 모든 것은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니 거기에 미련을 가져서 무엇하겠소?" 지관은 이어 신형을 돌려 오던 길로 걷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잠시 넋 나간 사람처럼 계속 광장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항아리를 든 승려들이 떠나고 나서야 지관을 따라 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가니 지관이 길 옆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관은 말했다. "우리는 이미 당신에 대해서 듣고 있었소. 그런데 당신에 대한 그 소문 은 정말로 사실이로군." 백방생은 그가 일어나 걷기 시작하자 함께 보조를 맞추며 말했다. "제가 거의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났다는 얘기 말입니까?" 지관은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어딘가 다른 면모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오." 백방생은 고소하며 말했다. "저는 이미 무공도 잃어버린 상태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입니다. 뭐가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지관은 말했다. "세상에는 더러 특이한 팔자를 지닌 특이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오. 나 는 여태 살아오면서 그런 사람을 세번째 보았소."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혹시 거기에는 대사의 사제인 지공선사도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지관은 잠시 백방생을 돌아보고는 이내 대꾸했다. "한사람은 천륭무가의 가주인 석천수(石天隨)이고, 다른 한사람은 역 시 그 말대로 나의 그 지공사제요." 백방생은 지관이 자신을 그 두사람에 비교하고 있다고 하자 다소 우스 운 생각이 들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 지공대사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지요? 헌데 저를 그런 훌륭한 분과 비교하시다니 정말로 믿을 수가 없군요." 지관은 잠시 백방생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는듯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그렇소. 나의 그 지공사제는 실로 천하에서 다시 보기 어려운 인 재이지요. 우리 모두는 그가 앞으로 본사를 다시 한번 크게 일으켜 줄 것을 고대하고 있소. 혹시 지공사제를 만나 본 적이 있소?"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 그런 기회가 닿지 않았습니다. 혹시 지금 여기에 계시다면 한번 만나게 해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지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금 여기에 없소. 자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어서 갑시다?" 지관은 아까 그 갈라진 길에 이르러 이번에는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 길 은 역시 소롯길이었으며 사람이 다닌 흔적이 별로 없었다. 아마도 지 관은 은밀히 그를 목적지로 데려가려는 모양이었다. 소림사의 건축물들은 확실히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웅후한 기운을 느끼 게 해주었다. 언덕을 내려가자 몇채의 전각들이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들 었고, 그 전각들의 옆으로 돌아가자 크고 작은 건물들이 끊임없이 눈앞 에 펼쳐졌다. 이곳의 건물들은 약간 낡은 듯한 것들이었다. 전각들을 지나는 동안 백방생은 몇몇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소림사에 들어온 지는 오래 되었지만 실상 이곳에는 처음 들 어와 보는지라 사람들을 보는 시각에도 관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승려들은 백방생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무를 하고빨래 를너는등의일상적인일들을하고있었으나대부분묵묵할 뿐 이쪽으로 시선조 차 보내지 않았다. 백방생은 절로 아쉬운 느낌에 자연 그들의 몸놀림을 살피게 되었다. 그 들은 비록 장작을 쪼개고 의복을 손질하는 등의 번잡스러운 일을 하고 있었으나 하나같이 하체의 근골이 충실하고 눈빛에는 정광이 흐르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가서야 비로소 작은 공지에서 일단의 승려들이 무공수련 을 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나타나자 그 우두머리 인초로의회의 승려는 즉시 수련을 멈추게하고 다가와 물었다. "사제, 그가 바로 그 백시주인가?" 지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안에는 지금 누가 계시오?" 그 회의승려는 백방생의 전신을 한차례 훑어보더니 말했다. "도겁(渡劫)사백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어서 들어가 보게!" 말과 함께 그 회의승려는 아까의 그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회의승려는 다시 승려들에게 무학수련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소림사의 절기인 금강반야장(金剛般若掌)의 수법인 것 같았다. 21 장 강호출도(江湖出道) 백방생은 지관에게 물었다. "그는 도생선사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오?" 지관은 약간 뜻밖이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바로 도생사숙의 제자요. 헌데 그걸 어떻게 알았소?" 백방생은 고소하며 말했다. "그냥 추측해 본 것이오." 사실 백방생은 자신에 대한 소림승려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지만, 백방생이 특별하 게도 그들의 성지인 조사동에서 그토록 오래도록 머물렀다는 것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인 것이었다. 그 회의승려는 왠지 약간 적대감 마저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백방생은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 지관은 말을 이었다. "지덕(知德)사형은 본래 성격이 저렇게 괴팍하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오." 갑자기 다소 웅장한 건물의 앞에 이르러 지관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 다. 안에서 홀연 창로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관이냐?" 지관은 공손히 합장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안에서 다시 그 창로하면서도 냉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서 들어 오너라. 그 시주는 데리고 왔느냐?" 지관은 이미 백방생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전각의 내 부는 다소 이상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다른 승려들은 없었는데 이윽고 작은 거실을 지나서 선방에 들어가자 한 명의 노승이 눈에 들어왔다. 그 노승은 나이가 팔십은 넘은듯 하고 황색의 승포를 걸쳤으며 회색빛 눈 썹이 길게 자라나 있었다. 지관은 그를 대하자 즉시 백방생에게 전음 을 날렸다. (계율원(戒律院)의 수좌(首座)이신 도겁사백이시오. 어서 인사를 올리시 오?) 바로 아까 그 지덕이라는 승려가 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 다. 백방생은 즉시 포권을 하며 그 황포노승에게 인사를 했다. "다시 뵙는군요.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사실 백방생은 그 노승을 이전에 조사동에서 본 적이 있었다. 도겁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선 그간에 몸이 더욱 좋아지셨군. 모두가 부처님의 가호라고 생각하오." 이어 지관에게 눈짓을 하자 지관은 즉시 물러갔다. 백방생은 지관이 물 러가는 것을 바라본 뒤에 말했다. "이곳이 도생선사께서 생전에 거처하시던 곳입니까?" 도겁은 미소하며 말했다. "그렇소. 아미타불! 시주가 이렇게 도생사제와 인연을 맺었으니 실로 이는 더없는 축복인가 하오." 이 선방은 비록 누추하지는 않으나 이불도 없었고 또한 그 흔한 불경 조차 하나도 없었다. 오직 한쪽에 탁자 하나만 덩그마니 놓여 있을 뿐이 었다. 그 탁자위에는 지금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백방생은 은근 히 그 상자에 시선이 갔다. 아까 지관의 말로는 도생선사가 그에게 뭔 가 물건들을 남겼다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모두가 선사께서 소생을 잘 보아주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도겁은 과연 손을 내밀어 그 상자를 집어서 백방생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사제가 시주에게 전해주라고 했던 것이오. 이제 이것은 시주 의 물건이니 한번 열어 보시오!" 백방생은 그 상자를 받아들고 즉시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약 간 뜻밖의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바로 한 벌의 비단옷과 책자, 그리고 은표나 금표들이 들어있는 작은 주머니였다. 그런 물건들을 남겼다면 필시 다른 서찰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백 방생이 아무리 뒤져도 그런 서찰은 나오지 않았다. 도생선사는 과연 이 미 모든 할말을 다했기 때문에 약간의 서찰조차 남기지 않은 것일까? 그 한권의 책자는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는데 아직 묵향이 가시 지 않았고 강호인물록(江湖人物錄)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었다. 백 방생은 문득 그 글귀를 보자 콧날이 시큰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도생선사의 필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아마도 도생 선사는 백방생이 아직 강호의 사정에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책을 남긴 모양이었다. 주머니안의 돈은 대략 황금 칠천여냥이었다. 그것은 바로 백방생이 이 소림사로 들어왔을 때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도생선사는 그것을 따로 보관하고 있다가 이렇게 백방생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헌데 마지막 한 벌의 비단의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문의 고 승과 이 비단의복은 어떻게 어울리는 것일까? 도겁은 아직 가지않고 있다가 다시 말했다. "시주는 사제가 남긴 뜻을 알 수가 있겠소?" 백방생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도생스님께서는 저더러 빨리 이곳을 떠나서 자립하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렇다. 도생선사가 비단의복을 준비하고 그런 책자를 남긴 것은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도겁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선재로다! 시주께서 이토록 총명하시니 열반한 사제도 마음을 놓을 것이오. 그럼 이제 언제 떠날 생각이시오?" 도겁의 그러한 질문은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러나 이내 대답했다. "내일 아침에 삼신승을 배알하고 바로 떠날까 합니다." 백방생은 본래 얼마 남지않은 정의맹의 창단식에 함께 끼어서 소림사 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왠지 소림사의 승려들이 그다지 자신을 좋 아하지 않는 것을 느끼고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헌데 도겁은 고개를 저 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 세 분은 다시 만날 필요가 없소이다. 만일 그곳에 남겨둔 물건이 있 다면 노납이 가져다 줄 것이오. 시주는 내일 떠나겠다면 오늘 밤은 그 냥 이곳에서 유하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백방생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사실 삼신승과 작 별인사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그의 인사를 받아줄 지도 의문이기는 했다. 그러나 왠지 도겁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다 소 지나치게 야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나는 이곳의 불제자도 아니니 당연히 이제는 그만 나가야 하겠 지.) 백방생은 이 소림사의 승려들이 다가오는 정의맹 창단식에 참가하기 위해 매우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방생은 순간적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저 대신에 그분들께 작별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소생은 각별 한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곳에 남 겨둔 다른 물건은 없고, 그럼 내일 아침에 일찍 이곳을 떠나기로 하겠습 니다." 도겁은 말했다. "아미타불, 인간의 은원관계 역시 무상한 것이요. 마음에 둘 필요가 없는 것이외다. 그러나 시주께서 그렇게 원하시니 노납은 그렇게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소이다. 그럼 내일 아침에는 뵙지 못할테니 이곳에서 지 금 작별을 고하도록 하겠소." 말과 함께 도겁은 신형을 일으키며 합장했다. "부디 시주의 앞날에 항상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기원드리겠소 이다." 백방생도 부득이 마주 일어서서 포권했다. "그럼 대사님도 안녕히 계십시오." 도겁은 그 다음에 곧장 방문을 열고 나가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약 간 귀신에라도 홀린 듯이 멍하니 선방에 앉아 있다가 문득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 방에서 도생선사는 열반한 것이었을까?) 사실 그러한 중얼거림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흡사 공 허한 메아리와도 같았다. 그것은 그의 가슴속을 울렸다. 백방생은 마치 느닷없는 일을 당한 것처럼 마음이 쓸쓸해졌다. 하긴 세상에 나가면 이보 다 더한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곳의 무례함과 무뚝뚝함은 그것에 비하면 차라리 친절과 진실로 받아들여 도 좋을 것이다. 마음이 일단 그렇게 안정되고 나자 백방생은 할 일이 없어서 다시 그 물건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허름한 회색승포를 걸치 고 있던 상태였다. 그것은 본래 회색이 아닌 본래는 검은 색이었는데 너무나도 낡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일단 그 승포를 벗고 도생선사가 마련해준 비단의복을 갈아입 었다. 의복은 제법 그의 몸에 잘 맞았다. 거기에는 속옷들도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방생은 오랜만에 완전히 새옷으로 갈아입은 새신랑과 도 같았다. 다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수염이 다소 자라나 있었고 봉두 난발을 한 것이 차이를 보일 뿐이었다. 백방생은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다가 문득 과거 자신의 머리를 빗어주고 묶어주던 진소유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백의관음(白衣觀音)이라는 별호에 걸맞도록 대단히 아름답고 고고하던 그 십칠세의 소녀.... 백방생은 문득 자신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생 각하고 일부러 자신의 허리를 꾹꾹 눌러 보았다. 사실 그는 지금 과거 와는 비교도 안되게 허리가 뚱뚱해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살집이 가득했고 전체적으로 아주 둥글둥글한 모습이었다. 의삼의 품이 제법 넓지 않았다면 약간 곤란할 뻔 했다. 백방생은 그렇게 자신의 몸을 훑어보다가 금표 등이 들어있는 주머니 를 품속에 잘 갈무리 하고, 이윽고 그 강호인물록이라는 책자를 읽어보 기 시작했다. 그 책자는 과연 현재의 강호에 활약하는 강호인들의 모습과 특성 등을 간략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알고있는 바가 적지 않 았으나 그것으로 인해 더욱 강호의 사정을 훤하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돌연 거기에서 백방생에게 놀라운 일이 한가지 일어났다. 다름아닌 그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달마오수와 진소유에 대한 행방이 적혀 있었던 것이 었다. 아마도 도생선사는 백방생에게 그 선물을 남기기 위해 이 강호인물록 을 작성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책자에 의하면 달마오수와 진소 유는 낙양(洛陽) 부근에 와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소유는 전에 얘기했던 비구니와는 전혀 다른 생을 살고 있으며, 게다 가 더욱 놀라운 것은 어느새 달마오수가 이미 환속을 하여 세속의 이름 을 사용하고 별호를 천상오룡(天上五龍)이라고 한다는 사실이었다. 책 자에는 그들이 최근에 들어 있는 천상회(天上會)라는 단체에 대해서 간 략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천상회는 신흥의 단체로서 아직 그 실체가 거 의 강호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대개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불과 백일 정도의 세월이 흘렀을 뿐인데, 강호의 사정은 급속히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았 다. 도생선사가 남긴 달마오수 등에 관한 정보는 백방생에게 매우 유익 한 것이었다. 그는 이제 강호에 나가서 해야할 일의 실마리를 잡은 셈이 었다. 우선은 역시 그들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백방생은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쫓기듯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어이없어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한시라도 빨리 강호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지 경이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일단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앞으로 강호에 나 가게 되면 다시는 전과 같은 실수는 없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 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어느새 누군가가 방문앞에 저녁 공양을 갖다놓은 후였다. 백방생 은 일단 식사부터 하고서, 이윽고 밤을 새워가며 그 책자를 읽기 시작했 다. 그런 책자를 항상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처사는 아 니었다. 오직 머리속에 기억시켜 놓아야만 사용되는 것이고 망실당할 염 려도 없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으로선 달리 할 일도 없는 상태가 아닌가? 다음날 아침 백방생은 마침내 그 책자를 모조리 기억하고 소각시킬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소 후회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밤새도록 너무나도 애쓴 나머지 아침이 되자 오히려 지나치게 피로하고 졸려왔다. 이런 상태로 소림사를 떠나 여행을 오래 할 수도 없는 입장이 아닌 가? 백방생은 궁리끝에 겨우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낼 수가 있었다. 그것 은 바로 마차를 불러서 이곳을 떠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침식사를 하 기 전에 백방생은 식사를 가져온 그 승려에게 마차를 빌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식사후에 그 승려가 웃는 낯으로 다가왔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마침 소채 등을 운반하던 달구지가 아직 가지않고 있는데 그것이라도 타고 가시겠소?" 하긴 이런 곳에서 마차를 부른다는 것도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쉽지 않은 노릇일 것이었다. 걸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백방생 은 무엇이라도 마다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백방생은 즉시 수락하며 약간의 은자를 꺼내서 그 승려에게 수고비 로 주었다. 그 승려는 이 소림사에서 정식 제자라기 보다는 그저 허드렛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자연 많은 일들을 하다 보니 이재에 욕심이 생겨 서 은자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 승려는 내심 기뻐하며 은자를 받자 은근히 더욱 신경을 써주는 듯 했다. 이윽고 달구지는 모든 떠날 준비를 마치고 백방생을 기다렸지만, 백방 생은 또한 누군가가 나타나서 자신의 작별인사를 받아주길 바랬다. 장 문인이나 도겁대사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 지관스님이라도 나와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의 정오가 될때까지 기다렸으나 누구도 와보지 않았다. 참다 못해 그 승려가 가서 알아보니, 지관스님은 백방생에게 그냥 떠나면 된 다고 했다고 했다. 백방생은 그만 쓴웃음을 지으며 달구지에 올라 소림 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 소가 끄는 달구지는 소림사의 정문이 아닌 작은 뒷문으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백방생은 설마하니 그렇게 자신이 후 문으로 그 모양으로 소림사를 떠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백방생은 그날 오후에 달구지를 타고서 절반은 졸다시피 하며 등봉 현(登封縣)에 이르렀다. 그 등봉현은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예로부터 아주 유명했다. 백방생은 일단 객점에 들러서 하룻밤 푹 쉬어 가기로 했다. 백방생은 등봉현내에 있는 한 객점에 묵었는데, 비록 형색이 이상하기 는 하나 화려한 비단의복을 입었기 때문에 객점의 점원들은 그를 환대 했다. 백방생은 우선 이층의 상방에 자리를 잡고 깨끗이 오랜만에 목욕을 하고 면도까지 한 다음에 서찰을 작성하여 사람을 시켜 보내게 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진소유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진소유는 강호인물록에 의하면 달마오수, 아니 천상오룡과 거의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낸 지금 그의 앞으로의 행로는 이미 대강 정해졌다. 진소 유가 낙양에 있다고 하니 그도 일단은 그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진소유는 지금 그의 재산인 황금 십만냥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백방생은 당연히 자신의 그 재산을 찾아야 한다. 당시는 그의 생사가 불분명했지만 이제는 일단 삶은 확보된 것이다. 만일 그가 그것으로 평범한 촌부(村夫)의 삶을 원한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라면 그의 몸은 건강하게 백세까지 장수할 수가 있을 것이다. 백방생이 진소유를 만나서 하려는 일은 기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백방생은 그것을 정해놓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를 만나 고 나면 앞으로의 해야할 일들이 생각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진소유(陳 小柔)! 그녀는 이미 그에게 알몸까지 보인 사랑스런 소녀가 아니던가? 백방생은 일단 그렇게 일을 마치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갑자기 세 상에 다시 나와서인지 상당히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전에 고 향인 복주에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는 자라면서 실로 심한 우여곡절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들이 마치 한낮의 꿈처럼 생각되는 것은 어인 일인가? 과거 그의 부모가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나서 그도 횡액을 무수하게 당했던 것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아득한 과거 처럼, 그 과거의 환상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금 그의 두뇌가 지나치게 피 곤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소림사에서 보낸 지난 백일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어쨌든 이제 앞으로의 세상은 그가 과거에 겪 었던 세상과 판이하게 달라진 것 같았다. 등봉현에서 마차를 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을 먹는 것보다 쉬웠다. 만일 그 사람이 충분한 은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고 나서 아침식사를 한 백방생은 드디어 오전나절에 마차 를 타고 낙양으로 향했다. 등봉현에서 낙양으로 가려면 길을 따라서 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달리면 된다. 그 여정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만일 좋은 말로 달린다면 하루만이라 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전날밤에 보내라고 했던 서찰은 이미 가 장 빠른 인편으로 보냈다고 했다. 진소유는 아마도 그가 다시 나타난 것 을 보고 매우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숙녀에게 느닷없는 행위를 하는 것 은 무례다. 백방생은 가능하면 그녀로 하여금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자 했다. 자연히 백방생은 마차를 보다 천천히 몰도록 했다. 마부는 초로의 늙은이였는데 이 고장의 풍물에 대해서 잘 알았다. 백방생은 우선 시장에 들러서 몇가지의 값비싼 의복들을 사서 갈아입고 그리고 필요한 물품들을 몇가지 샀다. 이어 그는 모자까지 하나 사서 썼는데 그 것은 스스로 선비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를 전날의 그 나약하고 소심한 귀공자로 생각할 사람은 하나도 없 을 것이다. 그는 눈빛이 맑고 고요하며 침착해졌고, 게다가 전신이 뚱뚱 하고 말쑥하며 화려해졌다. 이제는 대개 사람들은 그를 어떤 돈많은 귀 공자나 장사꾼 정도로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 초로의 마부는 장사하는 법을 알아서 그에게 끊임없는 아부의 말 을 해주었으며 백방생은 그에게 약간의 은자를 답례로 주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은자만이 가장 순종하게 만들 수 있는 법이다. 마 부는 일단 은자를 받자 매우 태도가 공손해졌으며 지시한 대로 마차를 아주 느릿하고 조용하게 몰았다. 게다가 근래에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 들을 시키지 않아도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그것은 백방생이 혹시 심심해 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마부의 듣기좋은 얘기를 들으며 마치 유람을 하는 선비처럼 행세했다. 그는 반쯤은 졸았으며 반쯤은 잠을 잤다. 그러는 가운데 마차 는 오후 무렵에 하나의 마을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문득 마부가 입을 열 어 말했다. "나으리, 이 마을에서 잠시 쉬어갈까요?" 백방생은 급히 선잠에서 깨어나 졸린 눈을 부비다가 고개를 끄덕였 다. "좋소. 이런 곳에서 풍취가 있는 술한잔을 하지 않고 그냥 간다면 그건 선비의 행색이라고는 할 수가 없지." 열냥짜리 은표 한장에 마부는 이미 그의 시종처럼 행세했다. 그는 직 접 마차를 몰아서 그 마을에서 가장 좋은 주점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 주점의 이름은 선인루(仙人樓)라고 했다. 백방생은 이미 돈많은 선비의 행색을 하기로 했으므로 마음이 아주 느긋해졌다. 그는 주점의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점원에게 열냥짜리 은표 한장을 내밀었다. "나를 가장 전망좋은 곳으로 안내해 주게!" 점원은 일단 수고비를 그렇게 많이 받고나자 허리가 갑자기 굽어졌다. 그는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서 백방생을 이층의 전망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일층에는 험상굳은 인상의 사내들이 삼삼오오로 탁자들을 차지하고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백방생은 무공이 전폐된 상황이라 그들과 상대하는 것이 은근히 두려웠다. 따라서 그는 일단 이층의 조용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이층에도 병장기를 들고 있는 사내들은 있었다. 그러나 비어있는 자리 들이 많아서 주위 분위기는 험악하지 않았고 게다가 선비들이나 상인 들도 있었다. 백방생은 우선 점원에게 아주 값비싸고 맛좋은 요리와 술을 시킨 다음 에 안심을 하고 물을 마시면서 내심 궁리를 했다. (내가 이렇게 부자의 행색을 하고 또한 수중에 많은 돈을 지니고 있으 면서 아무런 방비도 없다면 도적을 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특히 그러다 간 진낭자를 만나보기도 전에 죽음을 당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혹시 그럴듯한 동료나 호위무사를 만나면 좋을텐데.) 은근히 주위로 시선을 돌려보니 문득 갑자기 그의 눈에 크게 띄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황삼서생(黃衫書生). 그는 백방생의 반대편인 주 루의 입구와 가까운 구석에 홀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선 그는 용모나 자태가 뛰어나게 수려했을 뿐만 아니라 어딘가 범하 지 못할 기질이 풍겨나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다섯 정도이고 키는 백방 생과 비슷한 육척 정도이며 체구는 아주 늘씬하고 수척한 편이었다. 백방생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장 눈여겨 본 것은 그 황삼서 생의 기질과 눈빛이었다. 이 눈빛이나 기질은 왕왕 무림인들로서는 자 신의 무공수위를 감출 수 없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일반인은 보 고서도 그 수위를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백방생은 안목만은 아직 녹슬 지 않았다. 그는 순간 그가 무공이 매우 고강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게다가 그 눈 빛에서 그의 심성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나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일단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미처 음식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났 다. (우선 나라는 사람의 인상을 뚜렷하게 심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백방생은 즉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다가간 곳은 그 황삼서생이 있는 곳이 아니라 다른 탁자였다. 그 탁자에는 방금전에 올라온 청의 소녀(靑衣少女) 하나가 앉아 있었는데, 일행이 없었고 혼자인듯 했다. 이런 주루에 소녀 혼자서 올라온다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니다. 게다 가 눈빛에 정광이 흐르고 허리에 한자루의 장검을 찬 것이 필시 강호여 인이었다. 백방생은 그녀의 앞에 다가가서 정중히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제가 낭자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청의소녀는 느닷없이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고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백방생 의 위 아래를 살펴보다가 말했다. "말씀하세요. 대체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죠?" 그 낭자의 나이는 대략 십팔세 정도, 맑은 기질이 있어서인지 보기 드 문 미인이었고 체격은 왜소하고 날씬한 편이었다. 그 청색의 경장차림 이 매우 잘 어울려서 허리가 잘룩해 보였고 목소리도 청아하여 듣기 좋 았다. 백방생은 순간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검토하면서 다시 말했다. "사실 소생에게는 한 가지의 딱한 일이 있습니다. 낭자에게 말하려는 것은 즉 한가지의 부탁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청의소녀는 눈앞의 백의서생(白衣書生)이 용모가 둥글둥글하고 인상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말씨도 부드러운 것을 보고 즉각 마음이 놓이며 말 했다. "무슨 부탁을 하겠다는 거죠?" 백방생은 즉시 품속에서 한 장의 금표를 꺼내서 그녀의 탁자앞에 내 려놓았다. 백냥짜리 금표였는데 사실 그것은 그가 이미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청의소녀는 그가 느닷없이 자신에게 돈을 내놓는 것을 보고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소생은 이번에 외지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유람을 즐기다가 졸지에 도적을 만나서 외톨이가 되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운이 좋아서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는군요. 제가 아는 사람이 낙양에 살고 있는데 낭자께서 만일 저를 무사히 호송해 주신다면 그것 을 수고비로 드리겠습니다." 은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다. 그 백냥짜리 금표 는 현은(現銀) 이천오백냥과 맞먹으므로 그것은 큰 돈이었다. 청의소녀는 도리어 놀라서 어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수고비로요? 이 많은 돈을 준다고요? 저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 요?" 백방생은 은연중 장검의 손잡이를 잡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파뿌리처럼 희고 고왔다. 그러나 그것은 장검을 잡은 채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느닷없는 사람을 만나서 느닷없는 제의 를 받게 되어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강호의 햇병아리로군?" 백방생은 이미 강호에서 오래 굴러먹은 사람처럼 쉽게 상대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그는 다소 웃으며 말했다. "만일 부족하다면 좀 더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낭자는 강 호의 여협(女俠)이신 것 같은데, 부디 이 힘없는 선비에게 도움을 좀 주 십시오." 청의소녀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다소 난감해 하다가 말했다. "저는 무슨 여협이 아니예요. 저는 그리고 별로 무공도 높지 못하고또 한 경험도 없기 때문에...나의 동료들에게...." 청의소녀는 말을 어렵게 시작했는데 막상 말을 하다가 말고 입을 다물 었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탁자위에 놓인 그 금표를 집어들었기 때문이 었다. 그 손의 임자는 결코 백방생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옆의 탁자에 둘러앉아서 술을 마시던 세 명의 대한들 가운데 구레나룻을 기른 텁석부리 사내였다. 그는 갑자기 금표를 보게 되자 돌연 욕심이 일게 되어서 다가와 손을 쓴 것이다. 청의소녀는 그것 을 보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안색이 변했다. 백방생은 즉시 고개를 돌려서 그 텁석부리를 향해 말했다. "아니 어째서 귀하가 그 금표를 갖는 것이오?" 텁석부리의 뒤에는 이미 나머지 두 대한이 다가와 있었다. 하나는 뱀눈의 사내였고 다른 하나는 얼굴에 기다란 흉터가 있는 사내 였는데 보기에 험악하게 생겼고 또한 각기 칼이나 채찍 같은 병장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텁석부리는 백방생을 향해 음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왜 내가 이 금표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그 흉흉한 눈빛을 대하자 자연 기가 죽어서 고개가 수그러 들었다. 텁석부리는 어느새 허리춤에서 낫과 같이 생긴 병장기를 들고 어루만지고 있었는데, 그 시퍼런 날이 금방이라도 피를 부를 듯 흉폭해 보였다. 백방생은 즉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오. 하하, 호걸께서 그 금표를 가지시겠다면 소생이 말릴 도리야 없는 것이지요. 아니, 소생이 그냥 그 금표를 드리지요. 이렇게 호걸과 같은 분을 만난 것도 기념일테니." 이때 점원들은 음식을 가지고 올라왔다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잠시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 텁석부리는 그 얘기를 듣자 한번 백방생 의 위 아래를 살피더니 돌연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정말 네녀석은 분수를 아는 녀석이로구나. 감히 이 금표를 내게 바칠 생각을 하다니?" 그 때 비로소 그것을 보고 있던 청의소녀가 일어서며 보다못해 한마 디를 했다. "이봐요! 당신은 어서 그 금표를 돌려주지 뭇하나요?" "뭐라구?" 그 텁석부리는 과연 대단히 화를 냈다. 그는 청의소녀를 향해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네년이 감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단 말이냐? 이 어르신의 일에 끼 어들다니?" 청의소녀는 오른손으로 장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으나 아직 경험이 없어서인지 그 손이 새파랬고 안색도 새파래져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흔히 상대에게 안도감을 주는 법이다. 청의소녀는 그러나 약간의 기질이 있어서 마주 응대하려고 했다. 백방생은 결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 다. 그는 즉시 손을 저어서 청의소녀를 제지하며 말했다. "아 소저께서는 가만히 계시오! 그것은 제가 이미 말했다시피 호걸께 호의로 드린 것이니. 상관이 없습니다. 소생에게는 그래도 아직 한 장의 금표가 남아 있으니 우리 그것으로 흥정을 하도록 하십시다?" 청의소녀는 다소 머뭇거렸다. "하, 하지만 그것은...." 백방생은 웃으면서 말했다. "하 하, 소생은 그다지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이 한 목숨을 지키려는 것이지요. 만일 이 목숨이 사라지고 나면 은자도 결국은 소용 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은자는 앞으로 낙양에 가면 또 구할 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청의소녀는 다소 머뭇거렸다.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겪는 사건인 것 같 았다. 그녀는 아직 장검에 놓인 손을 치우지 않은 채 생각하다가 문득 물었다. "정말로 당신은 우리에게 경호를 원하나요?" 청의소녀는 아까도 은근히 말했었지만 지금은 또 우리라는 표현을 썼다. 알고보니 그녀에게는 역시 일행이 있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 했다. "물론입니다. 알고보니 정말로 낭자께서는 강호의 협녀로서 대단하신 분 이로군요. 낭자와 같은 분이라면 제가 안심할 수가 있지요." 청의소녀는 그가 자신을 추켜세우자 창백했던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는 약간 망설이는 듯 하다가 말했다. "나에 대한 그런 칭찬은 잘못된 것이예요. 저는 무공도 그리 높지 못하고 또한 결정할 권한도 없어요. 모든 일은 잠시 후에 저의 사형들이 오시면 그때 의논하세요. 그분들은 무공도 모두 고강하거든요." 백방생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알고보니 일행이 계셨군요?" 청의소녀는 이제야 한숨이 나오는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점 원들은 음식을 백방생의 탁자에 모두 갖다놓았고 사건이 진정될듯 하자 다시 일하러 가버렸다. 백방생은 다소 망설이는 듯하다가 말했다. "그럼 좋습니다. 소생으로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요. 저는 잠시 제 자리로 가서 기다릴테니 금방 일행이 오시면 알려주십시오?" 말과 함께 백방생은 포권을 한 뒤에 자신의 자리로 가기 위해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 다. 알고보니 그 텁석부리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백방 생은 다소 놀라며 말했다. "아니, 세 분 호걸께서는 아직도 소생에게 볼 일이 남은 것입니까?" 그 텁석부리는 한차례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그 뒤에 있던 뱀눈 의 사내와 흉터있는 사내는 따라서 동조하듯이 흐흐흐! 하고 흉소를 터 뜨렸다. 텁석부리는 이어 말했다. "너는 감히 본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크게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감히 소생이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호걸께서 소생에게 볼일 이 있다면 하 하, 어서 말씀을 하십시오." 텁석부리는 음흉하게 바라보다가 불쑥 우수를 내밀었다. "어서 내 놓아라?" 백방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순간 텁석부리는 우수에 들고 있던 쇠낫을 휘둘러 탁자를 후려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 탁자의 한부분이 낫에 잘려져 나갔다. 텁석부리는 이어 소리쳤다. "네 놈이 감히 수작을 부린다는 말이냐? 이 어르신께서는 너의 그 금표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백방생은 이미 상대의 흉폭한 태도를 보고 기가 죽었다. 그는 즉시 웃 으며 말했다. "그, 그것은..., 하 하 보여드려야지요. 소생이 감히,감히 그럴 수야 있겠 습니까? 헌데 대체 무슨 일이신지?" 갑자기 텁석부리의 뒤에 서있던 뱀눈의 사내가 음침하게 웃으며 말 했다. "그야 형님의 금표를 혹시 네가 갖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어서 내놓 지 못하겠느냐? 우리 형님께서는 나처럼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말이다?" 백방생은 잠시 주저주저 하다가 마침내 다시 한 장의 금표를 꺼내들 었다. 22 장 백색(白色)의 공포 백방생은 그 금표를 텁석부리의 손위에 올려주며 말했다. "네, 잘... 잘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만일 호걸의 것이라면, 하하 그냥 가지셔도 좋습니다." 텁석부리는 백방생이 심하게 쩔쩔매는 것을 바라보며 눈알을 부라렸다. 그는 금표를 받은 즉시 그것을 보지도 않고 다시 품속에 집어 넣었다. "네 놈은 감히 나의 말을 의심한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허리를 굽신거렸다. "아, 아닙니다. 호걸께서는 어서 그것을 가지고 안녕히 가십시오. 모두 호걸의 것이니까요." "으흐흐흐!" 텁석부리는 한차례 흉소를 터뜨리더니 이윽고 다시 말했다. "이 녀석! 너는 비록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뉘우치는 감이 있으니 이 호걸께서 잠시 용서해 주도록 하겠다. 너는 오늘 운수대통했다는 것 을 알아야 하느니라!" 백방생은 안색이 흙빛이 되어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 "예, 예. 소생은 운수가 대통한 것이지요. 그럼 어서 호걸께서는 안녕 히 가십시오!" 그러나 그 텁석부리는 왠지 아직 미련이 남는지 몸을 돌리지 않고 머 뭇거렸다. 그는 다소 주저하다가 이윽고 백방생에게 다시 말했다. "이 녀석, 네놈은 정말로 본 호걸에게 솔직하게 대했겠지?" 백방생은 일시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의아해 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순간 텁석부리는 쇠낫으로 다시 탁자를 후려쳤다. 이내 그 탁자는 쾅하는 소리와 함께 두동강이가 나서 흩어졌다. 그 쇠낫의 날은 시퍼렇 고 텁석부리의 위협은 결코 장난이 아니라 무시무시했다. "어서 네 놈의 주머니를 모두 털어서 탁자위에 올려 놓으라는 말이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실로 그것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백방생은 순간적으로 이미 계산을 마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회가 쉽게 올 줄은 몰랐다. 백방생은 즉시 안색을 변화시키며 말했다. "아이쿠, 그것만은 제발 안됩니다! 불과 얼마 남지 않은 그 은자들은 반드시 있어야 소생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 아닙니까? 제발 용서해 주 십시오?" 텁석부리는 발로 부서진 탁자를 걷어차며 흉악하게 소리쳤다. "정말 말로 해서는 안되는 녀석이로군. 본 호걸이 너를 호송해 주겠다 는데도 감히 말을 듣지 않아?" 텁석부리는 다가들어서 백방생의 멱살을 움켜쥐려고 했다. 헌데 그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한 줄기의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그 사람을 놓아주지 못하겠느냐?" 바로 그 청의소녀였다. 그녀는 이제까지의 상황을 보다 못해 마침내 장 검을 뽑아들고 정식으로 나선 것이었다. 그녀는 비록 하얗게 변한 입 술을 가늘게 떨고는 있었으나 일단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자 제법 그럴 싸한 기도를 풍겨주고 있었다. 백방생은 문득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알고보니 제법 귀여운 아가씨로군!) 하지만 이미 그의 신형은 부지런히 대한들을 피해서 한쪽으로 달려가 고 있었다. 바로 다름아닌 그 황삼서생의 앞이었다. "살려주십시오. 부디 살려주십시오. 그들은 소생을 죽이려고 합니다. 만일 소생을 도와주신다면 나중에 필히 후사하겠습니다?" 백방생이 입술을 덜덜 떨면서 그렇게 말하자 그 황삼서생은 처음에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미소를 지었다. (어이쿠, 웬 남자가 이렇게 예쁘게 웃는다는 말인가?) 백방생이 그 조용한 미소에 넋이 달아나려고 하는데 그 황삼서생이 입을 열어 말했다. "걱정 마시오. 그들은 당신을 해칠 수가 없을 테니." 황삼서생의 그 음성은 한없이 부드럽고 또한 한없이 따뜻한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런 음성을 처음으로 들어보는 것 같았다. 그는 사실 대담하 게 행동하기는 하나 역시 위험한 것은 사실이었다. 상대방이 일단 그렇 게 말해주자 내심 기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지옥에서 지장보살(地藏菩 薩)을 만난 것과 같았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선생께서 저들을 물리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황삼서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복우파(伏牛派)의 도적들인데 무공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 다." 백방생은 황삼서생의 눈빛이 지극히 맑고 부드러운 것을 보고 내심 이상하게 생각했다. (세상에 아무리 잘난 남자가 있다고 해도 눈빛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백방생은 은근히 그의 체구를 살피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들이 듣고 화라도 난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기분좋은 일은 아니지 않 습니까?" 그런데 그 세 명의 대한은 이때 백방생 등을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 다. 그들은 조금전에 청의소녀가 나서는 것을 보고 약간 긴장하여 마주 손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계단이 가볍게 울리더니 서너명의 사내들이 빠르게 올라와 청의소녀와 아는 체를 했던 것이었다. "사매(師妹), 무슨 일이야?" 그 네 명의 사내들은 삼 사십대의 인물들이었는데 한결같이 두눈에서 날카로운 정광을 발산시키고 있었다. 대한들은 그들이 나타나자 저마다 시선을 교환하며 주춤거렸다. 청의소녀는 반색하며 그 네 명의 사내들을 맞았다. "아, 가셨던 일들은 잘 되었나요?" 사내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중년사내가 말했다. "음, 헌데 저들은 대체 누구지?" 그 세명의 대한은 자신들이 결코 새로 나타난 자들의 상대가 안된다 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느릿하게 창가 로 다가가는듯 하더니 갑자기 창밖으로 몸을 날려 사라져 버리는 것이 었다. 청의소녀는 일시 뭐라고 얘기해야 할 지 몰라서 주춤거리고 있다 가, 문득 그것을 보고 아, 하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녀는 대한들을 놓치는 것이 자못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고 다른 사내가 말했다. "사매, 지금의 상황은 실로 복잡하고 또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방금전에 그 소식을 알아보고 왔는데, 지금 그런 시정잡배들과 노닥거릴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야. 무슨 특별한 일이 없다면 어서 가도 록 하자?" 청의소녀는 다소 머뭇거리는듯 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 내들은 급히 올라왔다가 다시 급하게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청의소녀는 그들을 따라 내려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백방생을 바라보았는데, 백 방생도 마침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라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왠지 청의소녀는 안색이 다소 붉어지는듯 하다가 뭔가 말을 하려 는듯 하더니 이내 곧장 뒤따라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주루안의 상황은 이내 진정되고 정리되었다. 사건은 아주 멀쩡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점원들이 부서진 탁자들을 치우는 것을 보고 백방생 은 그들에게 탁자위의 음식을 자기쪽으로 옮겨달라고 했다. 점원들이 음식을 날라다 주자 이윽고 백방생은 엽차를 마시고 목을 축이면서 다 시 황삼서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소생을 도와주셨으니 실로 고맙기 이를데 없습니다. 반드시 후 사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삼서생은 가볍게 미소하며 말했다. "제게 후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을 도운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까 의 그 왕옥파(王屋派)의 소낭자(少娘子)이니까요." 백방생은 비록 강호인물록을 숙지하기는 했으나 그런 나이어린 사람들 까지 모두 알 수는 없었다. 그는 약간 놀라며 말했다. "아까 그 사람들이 그럼 왕옥파의 사람들이었습니까?" 황삼서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도 무림의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왕옥파(王屋派), 이 문파는 바로 도가의 성지라고도 하는 왕옥산(王屋 山)에 거주하고 있는 문파를 말하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그 문파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왕옥파는 구파일방 오대세가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 버금가는 문파라 고 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문득 아까 그 청의소녀가 나갈때 보여주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혹시 이곳에서 엉겁결에 그들과 인연을 만들게 된 것이 아닐까?) (제가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백방생은 거의 형식적으로 말을 받은 다음에 이어 말했다. "다만 왕옥산이 여기서 멀지 않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황삼서생은 말했다. "왕옥산은 여기서 낙양을 거쳐 황하(黃河)를 건너면 바로 볼 수가 있는 곳이지요. 만일 당신이 그곳을 유람하고자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백방생은 그가 은근히 그 청의소녀를 들추는 것을 보고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화제를 바꾸었다. 그는 마악 음식을 먹으려던 참이라 황삼 서생에게 말했다. "저어 함께 드시지 않겠습니까?" 백방생이 시킨 이 음식들은 비단 고급품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양도 매우 많았다. 세 사람이 함께 먹어도 남을 정도였다. 백방생은 자신이 시킨 음식을 그에게 먹으라고 하는 것은 약간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되 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황삼서생은 성격이 다소 소탈한 것 같았다. 백 방생이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미소하더니 즉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음식은 매우 맛이 좋군요." 황삼서생의 탁자에는 이미 몇가지의 간단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백 방생은 그 식단을 보고 그가 다소 검소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방생은 음식그릇들을 그가 있는 쪽으로 밀어주었다. "아 그런가요? 저도 이곳에는 처음으로 와 보는데 음식이 맛있다니 다행이로군요." 말과 함께 백방생은 자신도 그 닭고기조림을 집어들어 먹기 시작했다. 두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그 두사람은 매우 친근해 진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물론 백방생이 일부러 꾸민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황삼서생에게는 독특한 기질이 있는 것 같았 다. 그는 일단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쉽게 친해지게 하 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와 나이 차이가 다소 있기는 하지 만 금방 친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황삼서생은 잠시 음식을 먹더니 문득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정말로 낙양까지 호위해줄 사람을 구하십니까?" 백방생은 그가 뜻밖에도 그렇게 물어오자 다소 의외의 심정이 되었 다. 백방생은 수건으로 입을 닦고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직 복이 없어서 그런 분을 만나지 못하는 군요." 황삼서생은 역시 수건으로 입을 닦고 미소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낙양까지 호송해 줘도 보수는 주실 것입니 까?" 백방생은 약간 어리벙벙해 졌다. 그는 본래 어떻게 해서 이 황삼서생의 호위를 받을까 궁리하던 차에 그런 제의를 받게 되자 뭔가 이게 너무 일이 쉽게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귀하께서요? 정말 그래주시겠습니까?" 황삼서생은 가볍게 웃으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소제는 어차피 낙양 쪽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만일 형께서 돈을 벌 게 해 주신다면 그야 다행한 일이기 때문이죠. 사실 저도 강호를 혼자 유람하고 있는데 마침 노잣돈이 약간 부족했던 참이었거든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면 얼마를 원하십니까?" 황삼서생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보수는 형께서 마음대로 주십시오." 백방생은 일이 이렇게 쉽게 풀려가자 다소 어리둥절한 느낌이 있었으 나 이미 더이상 생각하고 주저할 상황은 아닌것 같았다. 그는 즉시 품 속에서 백냥짜리 금표 석장을 꺼내서 탁자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황삼서생은 그것을 보고 액수가 커서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형장께선 아까 이 많은 돈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백방생은 웃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개 장삿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은 믿을수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소생은 비록 힘이 없어도 그리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이 몸이 소중 해도 단지 그런 이유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지는 않습니다. 아까는 소생이 잠시 그들을 장난한 것이지요." 황삼서생은 약간 뜻밖이었는지 백방생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하하, 형장께선 알고보니 매우 재미있으신 분이었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소생에게는 그밖에도 약간의 재산이 더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 히 그렇기 때문에 귀하와 같은 호위를 구하려는 것이고요." 황삼서생은 주위의 시선이 다시 그 금표들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 고 얼른 그것을 집어서 자신의 품속에 갈무리했다. 이어 그는 웃으며 말했다. "형장께서는 소제를 처음 만났는데 그래 소제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 까?" 백방생은 말했다. "소생이 비록 오래 살지는 않았으나 사람보는 눈은 약간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미 귀하께서 정인군자(正人君子)라는 것을 내다 보았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저의 재산을 밝히지는 않았을 것입 니다." 황삼서생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약간 감복한 듯 즉시 일어서며 포권 과 함께 말했다. "실로 과찬의 말씀입니다. 소제는 황의(黃儀)라고 합니다." 백방생은 즉시 일어서며 포권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저는 백방생입니다." 황삼서생 황의는 백방생을 향해 다소 기이하게 웃더니 이어 말했다. "소제가 이미 백형(白兄)의 은자를 받았으니 앞으로 낙양까지 무슨 일 이 있더라도 잘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백방생은 이어 모두 자리에 앉자 다시 말했다. "황소협과 같은 분이 호위해 주신다면 저로서는 전혀 위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황의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가 말했다. "낙양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그곳에 혹시 친척이라도 계십니까?"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저 친구들이 있을 뿐입니다." 황의는 백방생이 왠지 그런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 싫어하는 것을 보 고 말했다. "근래 이 부근에는 강호상의 많은 변화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 다. 백공자께서는 그런 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와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그런 일에 관여하겠습니까?" 황의는 말했다. "백공자는 남쪽지방의 분이신가요? 말투가 그렇게 들리는군요." 백방생은 그의 식견에 다소 놀라며 말했다. "예. 저는 복주가 고향이지요. 실례지만 황소협의 출신지는 어디인지 물 어봐도 되겠습니까?" 황의는 말했다. "저는 호남성(湖南省)에서 왔습니다." 백방생은 아, 하며 말했다. "바로 동정호가 있는 곳 말입니까? 듣기에 그 곳은 풍광이 매우 수려 하다고 하여 제가 한번 놀러가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지요." 이미 해가 많이 기울어서 저녁때가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백방생 은 비록 급하지는 않으나 일단 숙박할 곳은 정해두어야 하겠다고 생각 했다. 그는 마부에게 객점을 알아보게 할 생각으로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혹시 마부가 신통하게 그의 마음을 알아채고 주루의 이층으로 올라오지 않나 해서였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주루의 입구에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백방 생은 일시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바로 다름아닌 진소유가 거기 에 서있었던 것이었다. 진소유는 낙양에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백방생이 서찰을 보낸 것은 아직 하루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그를 마중하러 나올리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보아서인지 그녀의 인상이 약간 달라보였다. 그 백의소녀(白衣少女)는 잠시 백방생을 응시하는 듯 하다가 이내 신형을 돌려 도로 밖으로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진낭자!" 백방생은 이에 일순 크게 놀라 소리치며 일어났다. "무슨 일이오?" 황의의 묻는 말에 백방생은 말하고 그 백의소녀를 뒤쫓아 가기 시작했 다. "나의 친구를 만난 것 같소." 황의도 그말에 다소 어리둥절해 하더니 즉시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 했다. 백방생은 곧장 밖으로 달려나와 진소유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그 백의소녀는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마치 신기루와 도 같았다. 백방생은 마치 한순간 눈의 착각을 일으킨 것 같았다. 백방 생은 급히 주위의 골목길이나 대로상을 둘러보며 찾다가 마침내 찾지 못하자 내심 어리벙벙해 하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정말로 진낭자였을까? 혹시 그녀와 닮은 사람을 본 것이 아닐 까? 허나 그녀가 진낭자가 아니라면 어째서 나를 보고 그렇게 황급히 도 망쳐 버렸을까? 아니, 그녀가 정말 진낭자였다고 해도 나를 보고 그렇게 달아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이 알 수 없는 수수께끼 때문에 마치 자신이 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야. 사실 생김새는 약간 닮기는 했으나 어딘가 진낭자와 약간 다 른 것 같았어. 혹시 그녀는 진낭자의 쌍둥이 형제가 아닐까?) 백방생이 그렇게 넋을 놓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황의가 다가와서 물었 다. "친구분을 찾으셨소?"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잠시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소." 그 때 마부와 주루의 점원이 그를 향해 함께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백방생은 이윽고 주루의 점원에게 모든 계산을 치르고 나서 마부와 함 께 객점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 작은 마을에는 객점이 그다지 많지 않았 고 또한 대부분이 허름하고 작은 곳들 뿐이었다. 백방생은 그래도 일찍부터 방을 구했기 때문에 두 개의 허름한 객방 을 구할 수가 있었다. 마부는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서 내일 아침에 객점 으로 다시 오겠다고 했다. 황의가 옆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백방생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아까 보았던 그 백의소녀 에 대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백형의 친구분은 매우 미인이신 모양이오." 황의는 아까 그 백의소녀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었다. 과연 그녀는 정 말 진소유일까, 아닐까? 만일 그녀가 진소유라면 어째서 그녀는 백방생 을 보자 달아나 버리고 만 것일까? 백방생은 점원을 불러서 약간의 술과 안주를 시켰다. 옛말에 천가지의 시름을 술로 씻어버린다고 했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술을 마실수록 마 음속의 시름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혹시 그녀는 내가 그 돈을 돌려달라고 할까봐 그러는 것일까? 아아, 그것은 그녀의 오해다. 나는 그런 돈은 필요하지도 않고 따라서 돌려달라 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그 날 나는 그녀에게 그 돈을 선물삼아 주 었던 셈이 아니겠는가?) 백방생은 결코 술과 친근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왠지 술 이 잘 받았다. 그는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술 한병을 비우고 다시 점 원을 불러 술을 주문하려고 했다. 그는 일단 큰일들을 겪고 나자 사람이 달라져서 술주정뱅이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막상 술을 주문하려고 신형을 일으켰던 때였다. 갑자기 반쯤 열려진 창밖으로 눈에 익은 백색의 눈부신 의삼자락이 보 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백방생은 마치 본능처럼 소리치며 밖으로 달 려나갔다. "진낭자!" 백방생은 급히 달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진소유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방생은 마악 창밖에 도달했을 때 다시 멍해지고 말 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과연 그는 환각을 본 것일까? (환각이 아니다. 바로 진낭자였다!) 백방생은 내심 소리치며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그 러자 과연 아니나 다를까? 좌측의 건너편 지붕위에 예의 그 희끗한 그림 자가 번뜩하며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닌가? "진낭자, 왜 나를 피하는 것이오? 이리 와서 나와 얘기 좀 합시다?" 백방생은 소리치며 즉시 그 쪽을 향해 달렸다. 그는 지금 무공을 전혀 사용할 수가 없었다. 만일 혼자서 움직인다면 위험이 뒤따르겠지만, 그러나 그는 황의가 뒤를 따르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무공도 없는 백방생이 정말로 진소유를 추격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상대는 정말로 진소유인지도 알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객점의 주위에 많은 농가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이 마을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백방생이 방향을 정하고 잠시 달리자 이내 마을에 서 벗어나 어느 한적한 벌판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벌판은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시야에 장애가 별로 없었다. 단지 많은 나무들이 곳곳에 숲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백방생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 때 갑자기 다시 좌측의 숲에서 백색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즉시 그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진낭자, 달아나지 마시오?" 이미 황혼녘이었다. 백방생이 그 숲에 뛰어들었을 때는 주위가 약간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런데 백방생이 마악 그 백색의삼에 가까와졌을 때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우측에서 한 자루의 칼날이 튀어나와 그의 목에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아니?) 백방생은 순간 목이 섬뜩하고 등골이 오싹해져서 깜짝 놀랐다. 그는 너 무나도 진소유만을 생각하던 나머지 설마하니 이 곳에 적들이 매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백방생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주위에서 세 명의 대한들이 다가들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낯익었다. 뜻밖에도 아까 그 주루에서 백방생의 금표를 두 장이나 가져갔던 무뢰한들이었던 것이었다. 백방생 은 뜻밖에도 그들을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자 이거야말로 어이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흐흐흐! 애송이가 정말로 걸려들었군!" 뱀눈의 사내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백방생의 목에 귀두도(鬼頭 刀)를 들이댄 사람은 흉터가 있는 사내였다. 흉터가 있는 사내는 마치 겁을 주기라도 하듯이 칼날을 가볍게 움직이며 으시시하게 웃었다. 그 칼날에는 아직 피가 약간 묻어 있었다. 그 피는 백방생의 것이 아니었 다. 백방생은 문득 아까 그가 보고 뛰어들었던 그 백색의삼을 생각했다. 즉 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니 눈앞에 한 명의 백의소녀가 쓰러져 있었 다. 그녀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에 얼굴은 알 수가 없 었으나 그 피는 그녀의 것인듯 했다. 짙은 피비린내가 그녀에게서 흘러나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백의소녀는 그렇다면 죽은 것일까? "흐흐흐, 이 계집이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말이냐?" 뱀눈의 사내가 다가가서 그 백의소녀의 몸을 발로 뒤집었다. 그러자 그 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얼굴이 비단 곰보에다 약간 살이 쪄 있 었다. 진소유는 아니었다. 아마도 이 근방의 처녀인 것 같았다. 처녀의 가슴은 쩌억 벌어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시뻘건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 고 있었다. 황혼무렵에 그 모습은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백방생은 문득 안도감과 함께 가슴이 허전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 다면 아까 그가 본 것은 환상이며 진소유가 아니라는 말인가? 하기는 정상대로라면 그녀는 서찰을 받고 내일 쯤 그를 찾아오게 될 것이다. 백방생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이토록 절실하다는 사실에 놀랐 다. 하지만 이 현실은 그로 하여금 도저히 그런 감상에 젖어 있게 하 지 않았다. 백방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들은 내게 무엇을 원하시오?" 텁석부리가 음산하게 말했다. "우리가 네게 무엇을 원할 것 같으냐?" 백방생은 말했다. "나의 은자를 노린다는 말이오?" 백방생은 그렇게 일단 말을 해놓고 나서 문득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보아하니 이들은 방금전에 백의소녀를 죽인 것 같았다. 백의소녀는 그 외의 부분은 멀쩡했으며 결코 폭행을 당한 흔적이 없었 다. 이런 도적들이 강간을 하기 위해서 여자를 납치해다 살해한다면 그것 은 강호상의 흔하게 있는 일이다. 헌데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그 백의소녀가 도적들과 무슨 원한이라도 맺었다는 말인가? 백의소녀의 용모를 보더라도 결코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단순히 나의 은자를 빼앗기 위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 않는가?) 그 텁석부리는 그러나 기이하게 웃으며 단순히 그것을 시인했다. "그렇다. 네놈은 감히 지금에 와서도 수작을 부릴 셈이냐?" 백방생은 다소 어리둥절해 졌다. 필시 이번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대담하게 임 기응변하기로 했다. "아니 나에게 은자가 더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소?" 그 텁석부리 등은 일순 눈빛을 기이하게 번뜩였다. 흉터있는 사내가 칼 을 들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우리를 순 바보멍청이로 아느냐?" 백방생은 그 주먹을 가슴에 얻어맞아서 뒤로 벌렁 나뒹굴게 되었다. 그 러나 그는 그 바람에 귀두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백방생은 상 황이 그렇게 되자 금방 일어나지 않고 급히 머리를 굴렸다. 그는 즉시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많은 은자를 모두 찾으려면 반드시 나의 충고를 듣지 않으 면 안 될 것이오. 그 은자는 바로 내가...." 순간 백방생은 두 주먹으로 가득 움켜쥐고 있었던 흙뭉치를 두 사내 에게 뿌리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런 황량한 벌판에서 저런 삼류의 도적들에게 죽음을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우라질!" 텁석부리와 흉터있는 사내는 백방생의 얘기에 은연중 귀가 솔깃하여 다가오다가 두 눈에 흙이 들어가서 소리치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 벌판 의 흙은 누런 황토(黃土)여서 그들은 일시 눈을 뜨지 못하고 아파서 두 손으로 눈을 감쌌다. 다만 남은 것은 뱀눈의 사내였는데 그도 역시 뜻밖의 일을 당하게 되어 어리둥절 했다. 백방생은 흙을 뿌려서 두 명을 처치하고 나서 즉시 몸통을 날려 그 뱀눈의 사내에게 덮쳐들어갔다. 백방생의 머리는 순식간에 그 뱀눈의 사내를 들이받아서 그로 하여금 뒤로 벌렁 나뒹굴게 했다. 비록 뱀눈의 사내는 무공이 적지 않았으나 백방생의 기습적인 회심의 일격에 그만 허를 찔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백방생도 무공이 너무나도 없는 편이었다. 그는 일단 뱀눈의 사내마저 물리친 다음에 더이상 그를 당할 자신이 없어서 즉시 달아나 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몸을 돌려서 미처 삼 장도 채 달리지 못했을 때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채찍이 날아오는 것 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그 뱀눈의 사내가 자신의 병기로 백방생을 공격해 온 것이 었다. 백방생은 일시 아득해졌다. 만일 그 채찍에 얻어맞게 되면 전신이 저려와서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 일 것이다. 백방생은 그만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채찍을 잡아갔다. 그것은 바로 그의 거의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그는 과거에 무공을 지니고 있었 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에 과거의 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지금 거의 내공을 운용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만약 과거였다면 그가 한순간에 채찍을 잡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 다. 그러나 그는 순간 손을 헛짚고 채찍이 도리어 자신의 손목을 휘감 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따끔하고 화끈한 통증과 함께 강한 기운을 느꼈다. 백방생은 그것을 느끼자 크게 당황하여 즉시 손을 빠르게 흔들었 다. 헌데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백방생은 몸을 무리하게 뒤로 젖혔기 때문 에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귓가에는 한줄기의 고통스런 비명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악!" 백방생은 일순 고개를 돌려 살펴보고는 다소 어리둥절해 졌다. 그 뱀 눈의 사내는 이 순간 자신의 채찍의 손잡이에 맞아서 머리통이 터져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조금전의 일은 괴이했다. 백방생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과거에 배웠던 무학들 가운데 하나를 펼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량 발천근(四兩撥千斤)으로 운좋게도 효과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반탄(反彈)의 원리에 의해 교묘하게 넉냥의 힘으로 상대의 천 근의 힘을 되돌린다는 것으로서 가히 운기법문(運氣法門)의 극치라고도 할 수가 있었다. 조금전에 뱀눈의 사내가 채찍으로 휘감아 백방생을 당기자, 백방생은 사량발천근의 초식으로 상대의 힘을 되돌림으로써 그를 반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즉 파도같은 힘이 되돌아 가자 뱀눈의 사내는 채찍을 놓치게 되었고 그것은 도리어 그의 머리를 후려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것은 그의 손아귀가 약간 찢어져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아도 능히 알 수가 있는 일이었다. 백방생은 순식간에 그러한 사정을 훤히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마치 갑자 기 이상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눈이 휘둥그래져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한가지의 놀라움이기도 했다. 아니 어떤 서광을 보는 것이라고나 할까? 과거 백방생은 무공이 거의 대홍락의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그 대홍 락의 단계는 마음으로 깨치는 단계이니, 비록 그가 내공이 상실되었다고 는 하나 그러한 무학의 오의(奧意)에 대한 깨달음마저 상실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내공은 사라졌으나 무학에 대한 안목은 물론 그 이치에 대해서는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다만 그는 내공의 상실을 극심하게 겪 었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한 선입견으 로 그는 자신이 최소한의 무학지식도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무학의 최고경지라는 대홍락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 내공이 없었을 때에도 약간의 운기법문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하물 며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육신이 거의 죽어가던 때는 전혀 무공을 펼칠 수가 없었으나, 이제는 그래도 약간이나마 전신에 기운이 돌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러한 상황에서 백방생이 그런 무공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과거 백방생을 잔혹하게 파괴시키려고 했던 그 이상한 노인들은 백방생 의 두뇌마저 망가뜨려서 그를 바보로 만들려고 했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실로 의외의 일도 있는 법이다. 백방생은 그러한 수법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그의 정신은 오히려 멀쩡하게 남아있게 되었던 것이었 다. 결국 백방생은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능력을 이 세 명의 도적들 을 만남으로써 알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였다. 23 장 달라진 세상 텁석부리와 흉터가 있는 장한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은 느닷없이 동료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미처 눈 을 뜨지도 못하고 그들은 황급히 병장기를 주워들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머리가 얻어터진 뱀눈의 사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방생은 그들이 멀리 달아나 버리는 것을 계속 누운 채 멍하니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벌판위에 홀로 남게 되자 길게 한숨을 내 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의복은 이미 황토흙이 묻어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 만 그가 조금전에 발견한 자신의 능력에 비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왠지 백방생은 맥이 빠지고 마음이 우울해 지는 것 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조금전에 내공을 약간이라도 운용하게 되어 신체에 무리가 왔기 때문일까? 백방생은 대강 몸의 먼지를 털고 나자 객점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문 득 다시 신형을 돌려 걸어갔다. 그의 앞에는 어느덧 아까 그 백의소녀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백방생은 문득 생각했다. (나는 과연 환각을 보았던 것이었을까?) 백방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문득 백의소녀의 시신을 땅에 묻을까 하다가 생각했다. (이미 식신(識神)이 육신을 떠나갔으니 남은 육신이야 상관이 없을 것 이다. 묻은 들 어떻고 묻지 않은 들 어떨 것인가?) 백방생은 다시 신형을 돌려 객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헌데 그가 불 과 몇걸음 걷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다시 그의 눈앞에 희끗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지금 주위는 매우 어두워져 있는 상황 이었다. 하지만 백방생은 순간 확실히 그 물체를 바라볼 수가 있었다. (진낭자!) 백방생은 내심 소리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가 거의 삼십여 장 쯤 달렸을 때였다. 과연 그의 앞에는 한 사람의 백의소녀가 서있는 것이 었다. 그녀는 바로 다름아닌 아까 백방생이 주루에서 보았던 그 소녀 였다. 그리고 또한 그녀는 백방생이 생각했던 대로 진소유가 분명하기도 했다. 백방생은 그녀를 보자 그만 왈칵 반가운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 달려 들면서 소리쳤다. "진낭자! 정말로 그대였구려?" 진소유는 그러나 다소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그저 백방생이 달 려드는 것을 보고 신형을 움직여 옆으로 피해버렸다. 허공을 움켜쥐게 되자 백방생은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웃으며 말했다. "진낭자, 내가 그대를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진소유는 그제서야 입을 열어 말했다. 그녀의 차림새는 과거보다 더욱 화려하고 우아해진 듯 해도 목소리만은 여전히 차가운 감이 있었다. "저도 당신이 그렇게 빨리 건강을 회복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백방생은 역시 그녀의 진심을 알기가 어려웠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그대들이 염려해준 덕분이오. 헌데 내가 보낸 서찰은 받았 소?" 진소유는 반문했다. "서찰이라뇨?" 백방생은 진소유가 아직 그의 서찰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하긴 그녀는 서찰을 받고 왔다면 이렇게 빨리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필시 소림사의 사정을 살피고 있다가 미리 백방생이 강호에 나오 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헌데 어째서 아까는 나를 피한 것이오? 나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소?" 백방생은 문득 자신의 몸이 몰라보게 뚱뚱해진 것을 실감했다. 그런데 진소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진소유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였다. 과거의 그 탈속적이고 청 순한 기질은 많이 사라졌지만 도리어 그녀는 더욱 아름다와진 것 같았 다. 백방생으로서는 그녀의 그러한 변화가 다소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그녀의 모습이 넋을 뽑아 놓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방생은 의아해 져서 물었다. "그럼 알고도 나를 피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이에 싸늘하게 냉소했다. "물론이예요. 당신의 옆에는 바로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는데, 그래 나더러 거기에 비위나 맞추고 있으라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졌다. "여자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진소유는 거듭 냉소했다. "흥,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는 모양이로군요?" 백방생은 그녀의 냉소하는 모습을 보자 문득 고향에 온 것 같은 푸근 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미 그녀와 적지 않은 인연을 쌓았고, 그러한 그녀의 성품은 그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는 그간에 서른여섯명의 여자를 사귀었던 것이 사실이오. 그러 나 그대가 질투를 일으킬만한 사람은 없었는데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 이오?" 진소유는 백방생이 장난을 치고있는 것을 보고 쳇, 하고 웃더니 다시 싸 늘하게 말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남자라고 당신에게 말한 모양이로군요?" 백방생은 그제서야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의 호위를 맡고 있는 황삼서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 황의는 본래 처음 만나면서부터 어 딘가 여자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단지 백방생은 미처 그가 여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백방생은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가 여자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낭자는 나의 그 임시호위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는 모양이로군요?" 진소유는 손을 내저었다. "그 남장여자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는 별로 없어요. 당신이 궁금하다면 나중에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 아닌가요?" 진소유는 이미 백방생과 황의의 사이를 새롭게 인식한 듯 했다. 백방 생은 그녀가 대답을 회피하므로 굳이 다시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 그 동안은 어떻게 지냈소？ 달마하원과 남해보타도가 멸문되었 다는 소식은 내 이미 듣고 있었소." 진소유는 그 얘기를 듣자 문득 표정이 다소 달라졌다. 그녀는 약간 멈 칫하는 듯 하다가 돌연 전음으로 말했다. (그들이 와요!) 백방생은 그녀가 갑자기 전음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 그런 데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정말로 그쪽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다섯명이었다. 하나같이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모자를 썼 으며 허리에는 한자루의 보검(寶劒) 을 걸었는데 아주 보기 드물게 인 물들이 수려한 모습들이었다. 백방생은 다가오는 그들을 살피다가 일시 너무 놀라서 숨이 다 막힐뻔 했다. 그 다섯명은 다름아닌 달마오수였던 것이다. 이제는 천상오룡(天 上五龍)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백방생은 문득 자신이 읽은 강호인물 록의 내용을 상기했다. 백방생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간 너무나도 변모한 그들의 모습에 백방생은 하마터면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뻔 했다. 아직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들의 특징적인 체구와 거기에서 느껴지는 웅후한 기도였다. 모자를 쓰고 있는 그들의 머리카락은 이미 상당히 자라나 있는 상태였다. "오랜만이군!" 대인이 먼저 입을 열어 비교적 친근한 태도로 말했다. 백방생은 내심 이 렇게 생각했다. (하긴, 나도 과거와 같은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갑습니다, 스님!" 백방생의 말에 문득 대지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야, 우리는 이미 환속했네. 모두 이(李)씨 성을 붙여서 부르기로 했지. 나로 말하면 즉 이대지(李大智)가 되는 것이지. 스님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네." 백방생은 문득 다시 한번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알고보니 그들은 하나 같이 정말로 환속한 모양이었다. 달마하원이 멸문했으므로 갈 곳이 없 어서 그랬던 것이었을까? 백방생은 조금전에 진소유의 달라진 모습을 보았지만 그녀의 변모는 이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거 달마오수는 비록 검소한 의복들을 걸치고 있었으나 그래도 입으 로는 연신 아미타불을 외우고 또한 기품이 느껴지곤 했었다. 지금의 천 상오룡은 그러나 더욱 화려해지기는 했으나 아미타불을 외우지는 않았 고 게다가 그다지 기품도 일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왠지 말할 수 없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백방생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저도 이미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강호상에 이미 천상오룡(天上五龍) 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대례(李大禮)가 말했다. "그건 과찬의 말씀이네. 그나저나 자네가 이렇게 빨리 몸이 회복하게 되었다니 축하해야 할 일이로군!" 백방생은 말했다. "저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단지 소림사가 답답 해서 뛰쳐나왔을 뿐입니다. 앞으로 무능한 저를 여러분께서 많이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대신(李大信)이 말했다. "소림사의 법력(法力)은 과연 대단하군. 달마하원에서도 고치지 못했 던 그대의 상처를 그렇게 고쳐주다니!" 백방생은 이대신의 어조에 어딘가 비꼬는 듯한 느낌이 실려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다섯분의 법력은 더욱 높으신 것 같습니다. 석달도 채 되지 않 아서 강호를 제패하셨다니!" 이대례가 말했다. "우리가 이미 강호를 제패한 것은 아니네. 강호에는 그야말로 뛰어난 기인이사들이 모래알처럼 많아서 우리들은 그저 한 구석의 자리를 차지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할 형편이지. 그건 그렇고, 앞으로 우리가 강호 에서 서로 적대시하지 않게 되길 바랄 뿐이네."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서로 적대시 하다니요?" 이대지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달마하원과 인연을 끊고 천상회(天上會)라는 조직에 가입 하고 있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이미 선택한 일이니 자네가 왈가왈부 할 성질이 아니지. 따라서 자네가 만일 우리 천상회와 적대시한다면 그 것은 우리와도 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네. 실로 강호의 일이라는 것 은 복잡하고 미묘해지는 것이니 말이네." 백방생으로서는 그들이 어째서 그렇게 환속을 하고 달라졌는가를 의아 해 하는 심정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로서는 그들에게 그것을 물어 볼 자격은 없었다. 백방생은 사실 달마오수를 친근하게 대해 왔었다. 하지만 달마오수는 그 렇지 않았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천상오룡으로 이미 변모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은 본래 어떤 모습이 진짜였 을까？ 백방생은 도리어 지금 그들에게는 천상오룡의 모습이 더욱 어 울리고 있는 것을 보고 다소 가슴이 허전해 왔다. 백방생은 그들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포권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 역시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되기를 바라겠습 니다." 진소유는 천상오룡이 나타난 이후에 별로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 례가 말했다.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 낙양에서 진소저의 일을 도 와 주고 있네. 자네가 만일 그곳으로 가기를 원한다면 함께 가기로 하 지." 백방생은 진소유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역시 묵묵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백방생은 이에 그녀도 수락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좋습니다. 저는 본래 그쪽으로 가려던 길이었으니까요. 헌데 객점에 함께 가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곳에 잠시 들렀다 가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 객점에는 백방생의 의복들도 있었다. 백방생의 말에 이대인이 선선히 고 개를 끄덕였다. "좋네. 일단 그곳에 들렀다가 마차만 빌려서 밤새워 가도록 하지." 백방생은 천상오룡 등과 함께 객점으로 돌아왔다. 그는 진소유 등은 부 근에서 기다리게 한 다음에 혼자서 황의가 묵고 있는 객방의 방문을 두 드렸다. "황형?" 그러나 왠지 안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진소유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남 자가 아니라 남장을 한 여자라고 했다. 필시 그녀는 여자라면 대단한 미 인일 것이다. 백방생은 안에서 소식이 없자 즉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갔다. 방안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백방생은 잠시 생각했다. 황의는 갑자기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는 혹시 아까 백방생의 뒤를 따라서 벌판으로 갔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혹시 그와 진소유와의 대화를 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촛불의 아래에 한 장의 종이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 종이에는 익숙한 달필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미 일행을 찾았으니 나는 필요없을 것이오. 나중에 다시 봅시다.> 그 글귀를 남긴 자의 서명은 없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능히 그 글귀를 남긴 자가 누구인지 추측할 수가 있었다. 글씨체는 매우 아름다운 모양이었고 또한 그 종이에는 아직 은은한 향기(香氣)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혹시 그녀가 자신이 남장여 인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어쨌든 황의는 필시 아까 백방생과 진소유의 대화를 어느 정도 엿듣고 서 떠난 모양이었다. 나중에 다시 보자고 했으니 아마 다시 보게 될 것 이다. 백방생으로서는 이미 일이 이렇게 잘 풀린 이상에는 그 까짓 삼 백냥의 황금은 별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미 엄청난 부자나 다름이 없겠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머지않아 망해사의 보물을 취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백방생은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가서 옷보따리와 기타의 물건들을 챙기 고 의복도 새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밖으로 나와 일을 처리했다. 객 점의 주인에게 모든 값을 치르고, 이어 내일 아침에 마부가 오면 전해주 라고 약간의 수고비를 남긴 다음에 진소유와 합류했다. 이미 천상오룡은 마차를 한대 준비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백방생이 마차에 오르자 천상오룡은 마차를 몰며 빠르게 나아갔다. 마차의 안에는 백방생 외에 진소유만이 타고 있었다. 천상오룡은 밖에 서 마차를 몰거나 경신술(輕身術)을 펼쳤다. 무공이 고강한 그들에게는 차라리 그 편이 어울릴 것이다. 이러한 광경 은 일면 과거의 어떤 상황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하지만 과거는 다시 찾 아오지 않고 지금도 과거가 아니다. 백방생은 환자가 아니며 진소유도 그다지 순수한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천상오룡이 백방생의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소유는 마차에 올랐었어도 별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싸늘한 신색을 하고서 그저 창밖만 바라보기만 했다. 주위가 어두우니 창밖의 풍경이 보일리가 없는데도 그녀는 마치 그 무엇인가를 열심히 주시하는 것 같 았다. 대체 그녀는 무엇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혹시 그 녀 스스로의 마음이 아닐까? 백방생은 침묵이 계속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입을 열어 말했 다. "진낭자, 그간 어떻게 지냈소? 그대는 그간 더욱 아름다와진 것 같구 려." 진소유는 백방생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입가에 기묘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래요? 당신도 그런 것을 아나요?" 백방생은 그녀의 태도가 자못 냉소적인 것을 보고 다시 화제를 돌렸다. "음, 이렇게 만나게 되니 꿈만같은 생각이 드는구려. 나는 미처 이렇 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었소. 마치 그러니까 우리가 매우 오 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낭자는 혹시 그 약속에 대해서 기억하시 오?" 진소유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약속이라뇨?" 백방생은 말했다. "이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낭자는 당시 비구니가 되겠다고 나더 러 어떤 관심도 갖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만일 그 약속을 어기면......." 진소유도 그 말뜻을 알았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잘랐다. "당신은 부자이니 그 약속은 어겨도 목을 내놓지는 않아도 되겠군 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어째서 달마하원과 남해보타도가 동시에 멸망하게 되었는지 매우 궁금하오. 나중에 가서 조사해 보기는 하겠지만." 진소유는 그를 향해 냉소했다. "그래요? 정말 그럴까요?" 백방생은 의아해 졌다. "무슨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당신과 당신의 부모는 어떻게 당하게 되었죠? 그런데도 전혀 모르겠다 고 할 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긴 솔직히 그로서는 전혀 짐 작이 가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아마도 달마하원이나 남해보타 도도 그와 비슷하게 당했을 수도 있다. 백방생은 안색이 변해서 물었다. "그럼 그 두곳도 세외오세(世外五勢)의 침략을 받았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 저도 잘 모르고 있어요. 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온통 폐허 뿐이었으니까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오고 말았어 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러니까 남해보타도로 갔다가 그 참변을 보고 그만 다시 이 곳으 로 오게 되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그래요. 나는 당신의 그 돈을 밑천으로 하여 제법 사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죠. 하지만 이제 당신이 돌아왔으니 나는 그것을 당연히 모두 당신 에게 돌려드리도록 하겠어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만 두시오. 내가 이번에 낭자를 찾아가는 것은 그저 보고싶었기 때 문이지 무슨 돈을 찾으러 가는 것은 아니오. 사실 그 돈은 당시 내가 낭 자에게 감사의 표시로 주었던 것인데 그것을 아직 몰랐단 말이오?" 진소유는 백방생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오. 나는 당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핑계삼아 당신에게 그것을 주었던 것이오. 만일 그냥 주면 당신이 받지 않을까봐 그런 편법을 썼던 것이오. 지금 당신의 그 재산과 사업은 고스 란히 당신의 것이니, 앞으로 내게 주려고 생각도 하지 마시오. 나는 그 저 당신과 이렇게 친구가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오." 진소유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좋아요. 나도 그렇다면 당신을 친구로 여기기로 하죠. 하지만 거기에 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백방생은 그녀의 말에 얼굴이 환해져서 물었다. "그 조건이란 무엇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당신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음...... 아직 정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느긋하게 천하를 유람하면서 살아가거나...... 아니면 한 곳에 붙어서 살게 되겠지. 낭자와 이웃해서 살 아도 좋을 것이고." 마지막의 백방생의 말은 그의 진심을 은근히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진소유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당신은 그럼 부모의 원수도 갚지 않을 생각인가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갑자기 진소유가 그런 말을 하리라고 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낭자도 마찬가지가 아니오?" 진소유는 차갑게 말했다. "그건, 나의 경우는 약간 달라요. 나는 비록 사문(師門)이 멸문당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나의 책임은 아니기 때문이예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진소유는 비구니가 되려고 하기는 했으나 사문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나 역시 무슨 힘이 있어야 복수를 하든가 할 것이 아니오?" 진소유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정말 사내가 아니로군요. 그렇다면 나의 친구로서의 자격이 없어요. 사내는 일단 자신의 책임이라면 힘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것을 회피하지는 않는 법이죠." 백방생은 문득 어째서 그녀가 갑자기 이런 충동질을 하는가 하고 생각 해 보았다. (혹시 그녀는 나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나를 떼어내려는 것이 아닐 까?) 백방생으로서는 만일 진소유가 자신을 버린다면 그 역시 그녀에게 어떤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다. 백방생은 상황에 따라서 행동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좀더 생각해 봐야 하겠 군.) 백방생은 말했다. "좋소. 나는 앞으로 부모의 원수를 갚는 일에 전력하겠다고 약속을 하 지. 그렇게만 한다면 앞으로 낭자와 계속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오?" 진소유는 그 말에 비교적 만족한 듯이 웃었으나 흘러나오는 말은 여 전히 냉소적이었다. "왜 당신은 나의 옆에만 붙으려고 하죠？ 아까의 그 황의낭자도 무척 아름다운 미인인 것 같던데?" 백방생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내 이미 그녀는 잠깐 만난 사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게다가 이 제 헤어졌으니 다시 만나지도 않을 것이오." 진소유는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흥, 과연 그럴까요?" 백방생은 다시 말했다. "헌데 대체 당신들은 어떻게 또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소?" 진소유는 말했다. "내가 이곳에 와서 그들을 찾았죠. 사업을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한 법 이니까요. 그게 이상한가요?" 백방생은 그녀의 표정이 다시 딱딱해지는 것을 보고 더이상 질문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오. 헌데, 당신은 내가 그동안 어떻게 해서 몸을 치료하게 되었는 지 아시오?" 진소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어요." 백방생은 자신의 얘기를 시작했다. "당시 나는 그 소림삼신승이 교대로 불문의 무상대법(無上大法)으로 개 정대법(開頂大法)을 시술해 주는 바람에 서서히 정신을 차리게 되었소. 들어보니 나는 그 때 혼절한 지 보름만에 깨어났다고 하더군. 나는 물론 그 뒤로도 정신이 영 맑지가 못했는데 그저 무의식적으로 내가 배웠 던 달마하원의 내공심법을 수련하게 되었지. 그것이 어느 정도 정신을 맑게 해 주었소. 헌데 당시 내가 누워있던 조사동의 천정에 무엇이 있었 는지 아시겠소?" 진소유는 유심히 듣고 있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건 뭐죠?" 백방생은 말했다. "바로 달마역근경의 원본비급이 조각되어 있었던 것이오." 진소유는 아미를 깊게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결국 그 달마역근경 때문에 당신의 병을 치료하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지. 나는 그 달마역근경을 수련하기 시작한 지 거의 한달만에 일어나 앉게 되었소. 즉 그 사이에 이미 몸이 많이 낳았던 것이지." 진소유는 다소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당신은 그 신공(神功)을 대성하였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런 셈이지." 진소유는 문득 나직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럴리가 없어요. 이제는 허풍까지 치는 군요. 만일 당신이 달마역 근경을 대성(大成)할 수가 있었다면 어째서 그렇게 아직 무공이 형편없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그러니까 내가 이른바 그것을 거꾸로 수련했기 때문이오." 진소유는 어리둥절해 졌다. "거꾸로 수련했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마치 날개달린 새가 먼저 나는 법을 배운 다음에 걷는 것을 연습하는 것과도 같소. 나는 먼저 어려운 부분을 성취한 다음에 낮은 부분을 배우고 있는 것이오. 그러나 나는 지금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걷지도 날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오." 진소유는 가볍게 냉소했다. "당신의 그 말은 정말로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낭자가 믿지 못하겠다면 나도 할 수 없는 일이오. 하지만 내가이렇게 다시 살아나올 수가 있었던 것은 첫번째는 소림삼신승이 나를 다시 살 려놓은 것이고, 두번째는 달마역근경을 만났기 때문이었소. 나도 그 달마역근경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인지는 미처 몰랐었소." 진소유는 문득 생각하는 듯 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나는 그 얘기를 믿겠어요." 백방생은 내심 반가운 생각에 놀라며 말했다. "정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물론이예요.그 달마역근경이라면 바로 천륭무가의 가주도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나요?" 백방생은 문득 손뼉을 쳤다. "그렇군!" 이어 백방생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 동굴속에 있던 천수자가 정말로 그 달마역근경을 이용하여 절맥증 을 치료했는지 모르겠군!) 마차는 밤새도록 빠르게 나아갔다. 천상오룡은 이미 무학이 대홍락의 경지에 올라있는 사람들이니 만큼 마차를 모는 것도 자연 어렵지 않 았다. 그들은 간혹 말을 쉬게 하는 시간 외에는 계속 마차를 몰아서 드 디어 다음날 새벽에는 낙양(洛陽)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진소유와 얼마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이내 마차안에서 잠들었 다. 오랜만에 무공을 사용했기 때문에 약간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백방생 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마차는 이미 낙양성내에 들어와 있었다. 진 소유는 전혀 잠을 자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이 곳은 어디요?" "낙양성 안이예요. 당신은 우선 여기에 잠시 있도록 해요. 내가 일단 집을 정리한 다음에 다시 당신을 데리러 오겠어요." 그곳은 낙양성내의 대로변의 어느 한 주루의 앞이었다. 그 주루는 삼층 의 호화로운 건물이었는데 이름은 황금빛의 글씨로 단봉루(丹鳳樓)라고 새겨져 있었다. "알겠소." 진소유의 뜻이 그러했으므로 백방생은 부득이 그 주루에 남게 되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 주루는 이미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하고 있 었다. 백방생은 곧장 일 이층을 지나 삼층으로 올라갔다. 이 삼층은 상당히 분 위기가 고급스러울 뿐만 아니라 탁자들이 크고 널찍하여 드문드문 있어서 일견하기로도 매우 값비싼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 백방생은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있었으므로 점원들은 그를 환영하며 창가에 있는 한 자리에 앉혔다. 이 탁자는 마치 대청의 팔선탁처럼 넓고 고급스러워서 일면 어리둥절 한 느낌을 주었다. 사실 이런 곳에서 시킬 수 있는 음식은 아래층과는 다를 것이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손님?"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실내에 앉아 있는 손님은 백방생 하나밖 에 없었다. "여기는 어떤 음식들이 되오?" 점원은 옷차림도 단정했고 예의도 분명했으며 기억력도 좋은 것 같았 다. 그는 즉시 이삼십가지나 되는 음식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고 또한 거기에 자신의 의견도 덧붙여 주었다. 이를테면 지금은 어떤 음식 을 시키는 것이 나으리라는 것 등이었다. 과연 그 점원이 말하는 음식들 은 하나같이 허름한 현성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값비싼 음식들이었 다. 백방생은 마침 배가 매우 고팠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서 얼마나 기다려 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점원이 말한대로 여러가지의 음식들을 주 문하고 또한 친히 세 병의 죽엽청을 주문했다. 백방생은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창밖을 구경했고 이어 생각했다. (정말로 진낭자는 나를 싫어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잠시 그녀를 다시 만나보고 다시 이곳을 떠나야지. 그럼 어디로 갈까? 음......복주로 가는 것 은 아직 위험할 것이고, 일단은 남창의 망해사로 가서 보물이나 찾아 볼까? ) 비록 쉽게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백방생은 문득 가슴에 찬바람이 불 어오는 것을 느꼈다. 진소유, 그녀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도 대단했던가? 백방생은 왠지 가슴이 초조해 지는듯 하여 그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시선을 창밖의 풍경으로 집중했다. 창밖의 대로(大路)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말과 마차들과 함께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비록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들의 행동은 하나같이 활기 가 보였다. (모두들 열심히 사는 것 같군. 오직 나 혼자만 이렇게 비척거리고 있다 는 말인가? ) 그때 문득 눈앞에서 멀쩡히 나아가던 마차를 끌던 말이 갑자기 시뻘건 피를 내뿜으며 나동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마차가 심하게 뒤흔들리며 바 닥에 부딪쳤다. 그것은 조용하던 대로상에서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백방생은 갑자기 자신이 그런 특별한 사건을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으아악!" 멀쩡히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은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지자 저마다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대로상이 갑자기 아수라 장(阿修羅場)이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든 서너개의 인영(人影)들이 빠른 속도로 바닥에 처박힌 마차를 향해 날아갔고 그들의 수중에는 병장기들이 들려있는 것 같았다. 얼핏 보기에도 병장기에 반사된 광채가 번쩍번쩍 살기(殺氣) 를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대번에 마차를 박살내려는 것 같았다. 그러 나 그 순간에 도리어 박살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었다. 느닷없이 마차의 내부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황금(黃金) 빛의 광채 가 번쩍 일어나더니 일제히 그 서너명의 몸뚱아리를 베어버렸던 것이었 다. 일순 그들에게서 터져나온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기이하게도 그들의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 들의 비명소리가 다시 울려퍼졌을 뿐이었다. "으아악, 사, 살인이다!" 그와 동시에 마차에서 한 사람이 빠르게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 사람 의 모습은 분명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수중에는 어떤 황금빛의 물체가 들려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문득 그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그것은 전에 백방생이 보았던 신병이기라는 신검(神劍)과 그 광채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 것은 수라교주 구양통(歐陽通)이 가져갔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시 강호 에 흘러나오게 되었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게다가 더욱 놀라게 되었다. 그 괴인은 다름아닌 그가 있는 주루의 삼층을 향해 올라오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백방생은 이제까지 방관자였는데 돌연 그 폭풍의 중심에 빠져 들게 된 것 같아서 안색이 변했다. 만일 저런 쟁탈전의 와중에 휩쓸리게 되면 비록 고의가 아니 라고 해도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 아닌가? 24 장 귀신같은 의원, 귀신같은 환자 그런데 다행히도 다시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괴인이 삼층으로 오르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누군가가 이층에서 무수한 암기(暗器)를 내던 졌던 것이다. 그 암기들은 무슨 동전이나 쇠못같은 종류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일단 공력이 실린 것들이라 강한 파공음과 함께 빠르게 괴인을 향해 덮쳐드는 것이었다. 괴인이 그쪽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이미 그 암기들은 그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사람들은 위를 쳐다보고 있다가 저마다 아, 하며 신음성을 발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오산이었다. 암기가 꿰뚫은 순간 괴인의 몸은 어 느새 그보다 일장 아래에 있었다. 즉 괴인이 순간적으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는데, 그것이 너무 빨라서 한 순간 환각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었다. 도리어 괴인의 그러한 임기응변 이 놀라운지 이층의 주루안에서 어, 하는 놀란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상황은 그 암중인(暗中人)이 다시 암기를 던질 수 있도록 허락 되지 않았다. 괴인은 이미 발을 이층의 난간에 대고 있었으며 그와 동 시에 아주 빠르게 이층의 내부를 향해 덮쳐갔던 것이었다. 괴인의 신법은 보기에도 매우 빨랐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금빛 이 번쩍 하더니 안에서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이층의 내부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쉬지않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층에는 상당히 많은 무림고수들이 잠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 다. 대로상은 이미 상당히 어수선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재빨리 흩어져 버리 고 땅바닥에는 피비린내가 가득 진동했다. 더러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 은 주위에 서서 이 느닷없는 끔찍한 사건을 구경하기 위해 고개를 길게 뽑아들고 있었다. 백방생은 아래층에서 연신 들려오는 격타음을 듣고 계속 좌불안석이 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화산의 위에 서있는 것 같 았다. 이 주루 전체가 크게 어수선한 탓인지 시킨 음식도 올라오지 않았고 또한 점원들도 올라오지 않았다. 백방생은 과연 이 곳을 벗어나야 할 지 고민했다. 그가 이 곳을 나가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층 으로 내려가기도 곤란한 상황이 아닌가? 백방생은 따라서 즉시 자신이 그 무공으로 이 삼층에서 창밖으로 내 려갈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했다. 그의 무공은 이른바 내공이 없으니 오직 차력타력(借力打力)의 수법일 뿐이다. 과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데도 어디에 버틸 힘이 있다는 말인가?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백방생이 한참 그 일로 고민하고 있는데 느닷없 이 그의 좌측의 바닥이 마치 등껍질처럼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서 금빛의 광채가 솟구쳤으며 이내 소리없이 한 명의 사람이 거짓말처 럼 올라오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마침 걱정하고 있던 참이라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그 사람 은 바로 다름아닌 아까 이 삼층으로 올라오려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사십대 중반의 중년인으로 체구가 장대했는데 피부는 검었 고 또한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통 붉은 피를 뒤 집어 써서 온통 그가 핏물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살인마(殺人 魔)! 누구나 그 괴인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그 괴인의 태도는 다소 이상했다. 우선 그의 우측 가슴 과 아랫배에 각기 한자루씩의 단도(短刀)가 깊숙히 박혀 있었다. 게다가 가슴의 중앙에는 뭔가 불쑥 삐져나온 것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것은 장 검이 등뒤에 박혀 가슴까지 꿰뚫고 나온 것이 아닌가? 실로 그러한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서 삼층까지 올라왔다는 것은 믿기 가 어려웠다. 게다가 지금 괴인의 몸에는 암기들을 비롯하여 무수한 상 처가 나 있는 상태가 아닌가? 확실히 괴인은 흉폭해 보였으나, 눈빛은 이미 제 빛을 잃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가 나타난 것을 보고 크게 놀랐으나 이내 그 괴인이 비틀거 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무리들은 아직 없었다. 아마도 그 병기의 주인들 은 모두 죽거나 심한 부상을 당하여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는 모양이었 다. 백방생은 괴인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불과 조금전까지만 해도 금빛을 발하던 물건이 들려져 있었다. 백방생은 그것이 필시 그가 보았던 신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칼(刀)이지 검이 아니지 않는 가? 예리한 날은 한쪽밖에 없었으며 다른 면은 칼등으로서 두터웠다. 백 방생은 그것을 보는 순간 일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면 이 신병이기라는 것은 하나가 아니라는 말인가? 저번에는 신검이 나 오더니 이번에는 소위 신도(神刀)가 나온 것이라는 말인가? 이상하게도 단지 검이 아닌 칼의 모양을 하고 있을 뿐이지 아까의 그 황금빛이나 지금의 형상은 과거의 그 신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칼 의 몸은 광택이 없는 검은 빛깔이었으며, 그저 내려놓은듯 했는데도 칼날 이 바닥에 깊이 파고들어가 있으니 그 예리함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 이었다. 그 칼의 분위기는 과거의 신검과 똑같았다. 마치 어느 누가 그새 신검을 개조하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백방생이 고 개를 숙여 바라보니 과연 그 칼날의 중앙에는 전의신검과 똑같이 여의 지존(如意至尊)이라는 글자가 전자체로 뚜렷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아, 이럴수가?) 헌데 그 때의 일이었다. 백방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라고 있는데, 느닷없이 그 괴인이 쓰러져 있는 탁자의 아래쪽에서 마치 어두운 그림 자처럼 하나의 인영이 소리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그것을 보자 그만 모골이 송연해지고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쪽의 탁자 아래에 그 사람이 잠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 백방생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괴인의 앞에 이르 러 약간 주저하는듯 하더니 서서히 손을 괴인의 우수를 향해 내미는 것 이었다. 그 괴인은 조금전에 갑자기 쓰러지더니 마치 어느새 죽은 것 같 았다. 그는 안색이 이미 푸르딩딩해졌으며 숨도 쉬지 않고 있는 것 같 았다. 그 사람의 행동은 몹시 신중해 보였다. 그는 아마도 괴인을 몹시 두려 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왼손이 마악 괴인의 손에 들린 칼을 잡으려고 할 때였다. 느닷없이 그 사람은 칼을 빼앗지는 않고 손가락을 갑자기 기이하게 구부려서 괴인의 손목을 잡으며 우수로는 번쩍 검광(劒光)을 발출하는 것이 아닌가? 그 그림자와 같은 사람의 손속은 매우 빨랐을뿐만 아니라 잔인하고 철저했다. 그는 괴인이 마지막으로 병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동 시에 그의 목숨마저 취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우수에서 뻗어나온 것은 하나의 연검(軟劒)이었는데 그것을 또한 쾌검으로 펼치고 있었다. 이 연검은 평소 허리에 차는 부드러운 것으로 일단 그것을 진기를 주입하여 곧게 펴면서 빠르게 상대를 찌른다는 것 은 결코 수월한 노릇이 아니었다. 필시 그는 그 방면에 많은 노력을 기울 였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순간에 다시 마치 환상처럼 금광이 번쩍였다. 다름 아닌 그 신도(神刀)가 그림자와 같은 사람의 몸을 관통한 것이었다. 백 방생은 느닷없이 그림자와 같은 사람의 등에서 금빛 도광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고 또한 피가 튀는 것을 느꼈다. 즉 그 사람의 허리가 이미 절 반이나 갈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 사람은 처음에는 멍청한 태도였으나 이내 풀썩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그 신도의 도광(刀光)에 그의 영혼마저 빨려들어가 버린 것 같은 괴이한 광경이었다. 즉, 괴인은 마지막까지 죽지 않고 기운을 모으고 있다가 상대가 자신의 손목을 잡기 직전에 반격을 가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그 신검에서 무려 엄청난 검광이 저절로 솟아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괴인은 신도를 움직일 필요도 없이 그 도광으로 상 대를 제압한 것이다. 실내는 다시 아주 조용해졌다. 마치 무덤속과도 같은 정적이 흘러갔고 백방생은 점차 번민했다. 대체 저러한 신병이기가 무엇이길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일까? 필시 그것들은 그만한 효용가치가 있을 것이다. 백방생은 혹시 괴인이 일어서서 자신마저 해치려는 것이 아닌가 하 고 걱정했다. 그러나 이윽고 그는 그것이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괴인은 이미 완전히 죽어 있었다. 그 그림자와 같던 사람의 연검이 어느새 괴인의 머리를 앞뒤로 꿰뚫 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실로 악랄하게도 괴인의 얼굴을 꿰뚫어서 두 사람이 동시에 황천길로 가게 된 것이었다. 실로 그 사람의 쾌검 역 시 녹녹치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어느새 그 사람의 허리에서 흘러나온 잘려나간 내장의 부스러기가 불그죽죽한 피와 함께 바닥에 흥 건하게 고이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자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그는 빨리 결정을 내려 야 한다. 이제 얼마후면 다른 사람들이 몰려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 다면 그는 당연히 그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냥 달아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자칫 그가 신도를 숨긴 것으로 소문이 잘못나면 그는 이 세상에 서있을 땅이 없게 될 것 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 칼을 입수하게 되는 것은 더욱 그를 어렵게 만들 것이 아니겠는가? 옛말에 필부는 죄가 없지만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고 했다. 백방생은 그러나 지금 설령 그 보물을 갖지 않아도 위험하게 된 상황이었다. 그는 다소 주저하다가 마침내 하는 수 없다는 생각에 달려가서 그 신도 를 집어들었다. (이미 운명이 그렇다면 피하지 말고 부딪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혹시 이것이 나를 보호하는 수단이 될 지도 모르지 않는가?) 과연 그 신도는 과거의 신검처럼 무게가 엄청나서 거의 백근 이상이 었다. 게다가 그것은 구조상 검보다 더 무거워서, 만일 백방생이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들었다면 손목이 부러질 뻔 했다. 백방생은 그 신도를 두손으로 겨우 들고 서서는 문득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설사 천하에서 가장 무거운 쇠라는 현철(玄鐵)도 이렇게 무겁지는 않 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백근도 훨씬 넘는 것 같다. 이렇게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워서야 어떻게 이것을 사용할 수가 있겠는가?) 백방생은 실로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어느새 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바쁘게 들려오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 때 문득 한가지 좋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그 신도를 하나의 탁자위에 잘 올려놓고서 아까 그 괴인의 머리통에 박힌 연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본래 연검은 진기를 주입하 지 않으면 흐물흐물해지므로 그는 이내 그것을 다시 버리고 태연하게 탁자의 주위에 섰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단의 무림인들이 가지각색의 복장을 하고서 창문과 입구쪽으로 빠르게 들이닥쳤다. 백 방생은 물론 그들의 정체를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에 살기 가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게다가 저마다 눈빛이 밝지 못한 것을 보고 백방생은 생각했다. (대부분 흑도의 무림인들이로군.) 백방생은 태연한 신색으로 그들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당신들은 정말로 예의를 모르는군. 내가 모처럼 우아하게 식사를 하 기 위해 이렇게 몇달을 별러서 이곳에 왔는데 이 일을 이 모양으로 망 쳐놓다니? 아아, 하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생각하지 않는 무리들은 피바람을 일으키며 강호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는구나! 아아, 당신 들은 목숨보다 저 한낱 쇠붙이에 불과한 물건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 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은 백방생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뒷짐까지 지고 서있는 것을 보고 다소 어리둥절해져서 도리어 달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탁자위에 신도가 있는 것을 가장 먼저 보았지만 속으로 설마하며 믿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가 백방생을 향해 소리쳤다. "애송아, 그럼 저게 정말로 그 여의지존의 지존신도(至尊神刀)라는 말 이냐?" 백방생은지존신도라는말은처음으로듣지만이내그의미는이해할 수가 있 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애송이라니, 나는 이른바 성현(聖贅)의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이니 그 렇게 불러서는 아니되오. 반드시 학사(學士)라고 불러야할 것이오. 그 리고 그 지존신도니 뭐니 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 있으니 누구든 가져가 고 싶으면 가져가도록 하오. 아아, 정녕 모든 피바람을 잊고 은거할 수는 없는 일일까? 어째서 사람들은 성현의 가르침을 옆에 두고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백방생은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잠시 선비의 흉내를 낸 것이었 다. 마침 그의 차림새도 그러했으므로 상반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지막지한 흑도의 망나니들이었으므로 그의 반쯤은 시큼한 성현 운운하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 직 신도에 있었는데, 백방생의 말을 듣고도 일시 믿기지 않는지 모두 망 설였다. 아마 꿈에도 열망하던 지존신도가 그렇게 멀쩡하게 놓여 있으리 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무리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행동이 빠른 사람이 하나 있어서 즉시 신법을 날려 그 탁자로 다가왔다. 백방생은 이미 탁자에서 물러나 선비의 흉내를 내며 구석에 서 있는 상태였다. 그 호리호리한 체구의 자의인(紫衣人)은 다소 경계하며 탁자위에서 신 도를 집어들었는데 문득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아니 이건 가짜가 아닌가? 그렇다면 진짜는 어디에 있지?"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듣고 약간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헌데 그 자의인 이 신도를 계속 손에 든채로 주위를 살피며 서서히 물러나려고 하는 것 이 아닌가? 그러자 비교적 눈치가 빠른 사람 하나가 쌍도(雙刀)를 휘두 르며 그 자의인에게 덮쳤다. "이 위(魏)가야! 잠시 그 칼을 이리 줘 보아라?" 자의인은 몰래 달아나려고 했는데 그만 들통이 나자 안색이 크게 변했 다. 그는 즉시 신법을 빠르게 펼쳐서 쌍도의 공세를 피함과 동시에 달아 나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결코 녹녹지는 않았다. 그가 미처 달아나기도 전 에 이미 가득하게 그의 주위를 에워싸는 것이었다. 자의인은 이에 안색이 크게 변해서 신도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일순 예의 그 황금빛 도광(刀光)이 번쩍 일어나며 비명소리가 크 게 일어났다. 마치 추풍낙엽처럼 핏방울이 난무하며 사람들이 쓰러지고 통로가 생겨났다. 자의인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그쪽으로 몸 을 날렸다. "진짜 지존신도다!" 사람들은 소리치며 그 자의인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썰물이 빠지는 것과 흡사했다. 갑자기 심한 부상을 당하거나 죽은 사 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빠르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실내는 다시 정 적에 파묻혔다. (이제 다 되었군.) 백방생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제서야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 런데 문득 그의 뒤쪽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정말 대담하군!" 백방생은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아서 크게 놀라며 급히 신형을 돌렸다. 그의 시야에는 어느새 매우 낯익은 사람이 나타나 있었 다. 바로 예의 그 황의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장미녀 황삼서생이었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약간 안도의 숨을 내쉼과 동시에 반가운 느낌이 들어 서 소리쳤다. "아, 바로 당신이었군!" 황삼서생 황의도 반가운지 입가에 미소를 띄며 말했다. "백형, 그간 잘 있었소?" 백방생은 문득 그도 낙양으로 온다고 했던 것을 상기했다. (혹시 그가 우리를 미행했던 것이 아닐까?) 백방생은 순간적으로 생각을 굴려보며 말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소." 황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곳은 위험하니 우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소?" 백방생은 다소 머뭇거렸다. 그것을 보고 황의는 다시 말했다. "그 진소저는 백형이 어디에 있든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니 그런 염 려는 하지 않으셔도 좋소." 백방생은 그러한 말에 다소 안색이 붉어졌다. "정말로 우리의 뒤를 따라왔던 것이로군. 헌데 그는 정말로 여자일 까?" "황형은 아까부터 이곳에 있었소?" 황의는 그 말뜻을 알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솔직히 백형의 일행인 그 다섯사람의 무공은 너무나도 초절하여 감히 내가 다가갈 수도 없었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단지 머 리를 좀 썼기 때문일 뿐이오." 백방생은 황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천상오룡의 무공은 극고하여 도저히 그가 수작을 부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백방생은 순순히 황의를 따라서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이 화려하던 주루는 엉망진창이 되어 마치 무덤속처럼 변해 있었다. 점원들도 감히 나와서 살피지도 못하고 달아나 버린 상태였다. 주루를 벗어나서 대로상을 걸어가며 황의는 문득 다시 말했다. "백형은 혹시 그 신도가 욕심나지 않으셨소?" 백방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니겠소? 솔직히 나로서는 그 칼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 버리기 는 했지만, 그러나 막상 그들이 가져가는 것을 보니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소." 황의는 말했다. "하하,백형과같은사람도그런욕심이있다니 하하, 어쨌든 백형은 솔직한 편이구려." 백방생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황의는 비록 일부러 호탕한 척 말하 고 있었으나 역시 여성다운 면모는 숨길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백방생 이 주의해서 살피자 황의는 안색이 가볍게 붉어지는 것 같았다. 이에 백방생은 그녀가 무안해 할 것 같아서 다시 고개를 돌려 걷기 시작했 다. 황의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백형은 혹시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 시오?" 백방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서로 진실된 마음으로 우의를 느낀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오." 황의는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만일 남자가 아닌 여자라면 어떻게 하겠소? 여자 도 남자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백방생은 이미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눈치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그것은 이른바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려." 순간 갑자기 황의는 묶어서 남자처럼 틀어 올렸던 머리를 풀어내리고 누런 장삼을 벗어들며 말했다. "그럼 저도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겠네요?" 이미 그녀의 음성은 완전히 여인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백방생은 그 녀가 이미 장삼속에 담황색의 여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일견하기로 백방생은 크게 눈부신 것을 느꼈다. 실로 눈앞의 이 황의낭자는 아주 아름다왔다. 백방생은 이제까지 진소 유를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것을 수정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위에서 길을 가던 사람들도 모두 놀란 듯이 이 두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백방생처럼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백방생은 솔직히 놀란것 보 다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남자의 모습을 한 황의의 용모가 대단히 아름답다고 생각을 했었는 데, 지금 구름같은 머리카락을 그대로 늘어뜨린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넋이 달아나게 만들었다. 백방생은 문득 절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마 당신이 친구가 되겠다고 하면 누구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오." 황의낭자의 음성은 지극히 부드럽고 온유하며 또한 아름다왔다. "지금 당신은 아마도 친구가 필요할 거예요. 아까 당신의 그 수법은 매 우 위험하여, 만일 누구라도 당신을 다시 노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 죠."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시인했다. "당신이 나의 뒤를 쫓은 것은 내게서 돈을 받았기 때문이오?" 황의낭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 두죠. 어쨌든 빚을 진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은 아니니까 요." 백방생은 말했다. "당신은 언제까지 나를 따라다닐 작정이오?" 황의낭자는 말했다. "나의 진짜 이름은 황진의(黃眞儀)예요. 우리는 우선 가까운 주루에 가서 식사부터 하는 것이 어떤가요?" 백방생은 자신이 들고 있는 옷보따리를 매만지며 가볍게 웃었다. 황진 의(黃眞儀), 그녀는 전에 자신의 이름 가운데에서 진(眞)자 하나를 빼 놓았던 것이다. 진실이 없어졌으니 거짓이라고나 할까" "좋소." 황진의는 이윽고 백방생을 하나의 고풍스런 주루로 인도했는데 그 주 루의 이름은 피진주루(避塵酒樓)였다. 흡사 도가의 전각을 연상케 하는 이 건물은 모두 이층이었는데, 이름에 주(酒)자가 들어 있어서인지 그 전체에 술냄새가 그윽하게 풍기는 것 같았다. 비록 시설이 그다지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주 편하게 술을 마 실 수 있는 장소라고 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아직도 식사전이었으므로 우선 음식부터 시켰다. 그런데 이 런 곳에서는 일단 자리에 앉으면 술을 마셔야 하는 것인지 주문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술부터 한 병 나왔다. 백방생은 이층의 창가에서 아래쪽 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점원이 두개의 술잔에 가득하게 술을 따르는 것을 보고 다소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나 문득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보니 그 술잔에 가득 따라진 술은 그야말로 푸릇한 기운이 어려있는 것이 진하고 뭐라 말할 수 없는 훌 륭한 주향(酒香)을 가득 풍겨내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점원에게 따지 려다가 도리어 이렇게 물었다. "이곳에는 이런 술이 또 있소?" 점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본루(本樓)에서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좋은 죽엽청(竹葉靑)만을 엄선 하여 판매하고 있습죠. 이 한 병은 맛뵈기로 드리는 것인데, 만일 손 님께서 더 드시고자 하신다면 주문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야말로 은근하고도 기분좋은 상술이라고도 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왠지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우선 술부터 같은 것으로 두 병 더 가져오시오." 훌륭한 장삿꾼은 결코 얄팍한 속임수는 쓰지 않는다. 점원이 나중에 가 져온 두병의 술도 처음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 죽엽청은 아주 독하여 입속에 들어가자 화끈거리며 목구멍을 태워버릴듯 했다. 하지만 백방생 은 왠지 그러한 느낌이 오히려 감미롭게 느껴졌다. 백방생이 혼자서 한 병의 술을 거의 다 비우고 이어 다시 한 병의 술을 반쯤 비웠을 때 문득 황진의는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몸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주량도 그다지 넓지 않을 거예요. 대체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나요?" 백방생은 약간 붉어진 안색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보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당신은 마치 술독에 빠져죽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보이 는 군요?" 백방생은 가볍게 웃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말릴 생각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저었다. "남들에게 맞아죽기 보다는 차라리 술독에 빠져서 죽는 것이 나을 거예요." 백방생은 의아해 져서 물었다. "그건 어째서 그렇소?" 황진의는 말했다. "당신은 옛날 주선(酒仙) 이태백이 술에 취해 죽었다는 소리를 들어보 지도 못했나요?"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들고 있던 술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당신은 재미있는 여자로구려." 황진의는 말했다. "나는 비단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유익하기도 해요." 백방생은 말했다. "유익하다니 그건 무슨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나는 왕왕 친구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의원 (醫員)이죠." "의원이라고, 당신이?" 백방생이 가볍게 킬킬거리고 있는데 드디어 점원들이 음식들을 가져와 서 탁자위에 늘어놓고 물러갔다. 황진의는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면서 다시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의 몸은 아주 괴이하군요." 백방생은 역시 음식을 먹다가 말했다. "괴이하다고? 그것은 의학상으로 바라본 것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예요. 게다가 유명한 의원은 일단 그런 사람을 보았다면 결코 그 냥 보내지 않죠. 그건 마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술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과 같은 거예요." 백방생은 그 얘기를 듣고 있다가 가볍게 웃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정말로 명의(名醫)라는 말이군. 그렇다면 지금 나의 증세를 알아볼 수가 있겠소?" 황진의는 말했다. "그야 어렵지 않아요.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의 몸은 천하에서 가장 기 이해요. 당신의 몸은 단전이 파괴되었고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부서졌으 며 백맥(百脈)이 흩어지고 온갖 세맥(細脈)들마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요. 만일 보통사람이라면 이미 수백번은 죽었어야 할 몸이죠. 그러 나 당신은 비단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렇게 살아있으며 술까 지 마시고 있죠. 나는 당신이 혹시 귀신(鬼神)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백방생은 일순 놀라서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것은 황진의가 그의 상 태를 너무나도 잘 말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정말로 귀신은 그녀가 아 닐까? 하지만 백방생은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는 귀신인데 당신은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는 말이오?" 백방생의 큰소리에 일찍부터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귀신이 아니예요. 오히려 당신은 아주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죠." 백방생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귀신이 될수 없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따뜻한 마음이 있으니 자연귀신은 될수가 없죠. 다만 그는 환자가 될 수 있을 뿐이예요." 백방생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환자가 되고 싶지는 않소. 나는 차라리 귀신이 되고싶을 뿐이 지."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혹시 풍류귀신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아시오?" 황진의는 말했다. "그거야 당신이 그 진낭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나는 당신같은 사람을 처음 보았어요." 그녀의 말은 약간 애매한 듯 하면서도 의미심장해 보였다. 백방생은 갑 자기 빈속에 독한 죽엽청을 한병 반이나 마시게 되어 벌써 반쯤은 취한 것 같았다. 그는 혹시 자신이 정말로 여우에게 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여우라면 당연히 꼬리가 있어야지.) 그러나 막상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자 그런 그의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부드럽고 밝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갑자기 너무 취한 것이 틀림없어!) 백방생은 고개를 흔들고 나서 빨리 술에서 깨기 위해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한사람의 모 습이 특이하게 들어왔다. 그 사람은 대로상에서 심하게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입 에서 연신 게거품을 흘리고 있었으며 눈을 허옇게 까뒤집었고 안색은 이미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으나 지나 가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고 그저 사방을 긁어대는 손끝에서 피만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취했군, 너무 취했어!" 백방생은 무의식중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문득 황진의가 그 말 을 받았다. "그 사람은 취한 것이 아니예요. 단지 중독(中毒)되었을 뿐이죠." 백방생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중독되었다고?" 황진의는 말했다. "당신은 마약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일명 앵속(罌粟)이라고 하기도 하 죠." 백방생은 멍해졌다. "저 사람이 마약에 중독되었다는 말인가?" 황진의는 말했다. "당금의 천하에 저런 사람들은 이미 수도 없이 많이 있죠. 그것은 커다 란 문제라고 할 수가 있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당신은 의원이라면서 어째서 그것을 고치지 않소!" 황진의는 말했다. "명의라고 해도 그들을 구할 수는 없어요. 저런 사람을 구해주면 이내 다시 마약을 복용하게 되고, 그러면 또 저렇게 되는 것이죠. 그들을 구 하는 방법은 그들 스스로가 그런 마약을 끊는 도리밖에 없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나는 고칠 수가 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아마 천하의 대부분의 의원들은당신을 고칠 수가 없을 거예요. 하지 만 저는 당신을 고칠 수가 있죠. 그럴 가능성이 없다면 나는 아예 얘기 도 꺼내지 않았을 거예요." 백방생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군?" 황진의는 말했다. "당신은 운이 좋다고 해야할 거예요. 설마하니 내가 전문적인 의원일 줄 은 몰랐겠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믿지 못하겠소." 황진의는 말했다. "나는 그럴수록 더욱 더 당신을 치료하고 싶어지는 군요." 백방생은 가볍게 웃더니 화제를 돌렸다. "당신은 아까의 그 칼에 대해서 내력을 알고 있소?" 황진의는 말했다. "잘은 몰라요. 다만 현 강호에 갑자기 도검창곤(刀劒槍棍)의 네가지의 신병이기(神兵利器)가 출현하여 강호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 뿐이죠." (도검창곤, 네 가지라고?) 백방생은 이제까지 검과 도뿐인 줄로 알았는데 거기에 다시 창과 곤 이 합쳐져서 네가지의 신병이기가 출현했다고 하자 그만 어이가 없어 서 놀랐다. 갑자기 그런 신병이기가 하나만 나타나도 놀라운데 그런 것 들이 무려 네 개가 한꺼번에 나타났다니 이것은 더욱 이상한 노릇이 아 닌가? (혹시 그것은 바로 난세(亂世)의 조짐이라는 말인가...?) 25 장 강호영재(江湖英才)들 황진의는 다시 말했다. "당신은 현 무림정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백방생은 말했다. "무얼 어떻게 생각한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현재 강호무림(江湖武林)은 폭풍전야라고 할 수가 있죠. 천하는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보느냐 하는 거 예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진의는 이때만큼은 정색을 하고 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사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백방생은 말했다. "현재 남쪽에는 철혈부가 날뛰고 있기는 하지만 이곳에는 이제 정의 맹이 창단되려고 하고 있소. 그 철혈부의 세력이 그렇게도 막강하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철혈부는 드러나 있죠. 나는 지금 드러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는 거 예요. 대개 드러나지 않은 것은 드러나 있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경우 가 많은 법이죠. 저는 이번에 달마하원과 남해보타도가 멸문당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예요." 백방생은 일시 충격을 느꼈으며 마음이 답답해 지는 것 같았다. 그는 얼른 술 한잔을 들이 마시며 말했다. "낭자는 나에 대해서 알고 있소? 내가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하오?" 황진의는 말했다. "우리는 친구가 아닌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친구지. 비록 짧게 사귀었다고는 하나 친구는 친구니까." 황진의는 말했다. "당신은 그 진낭자를 위해 나와 헤어지는 것을 원하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글쎄......, 하하하! 우리가 뭐 벌써 헤어지고 말고 할 것이 있겠소?" 그때 갑자기 주루의 입구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이층으로 올라왔다. 그 리고 그들은 곧장 황진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약간 어리둥절해 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일견하기로도 매우 영기발랄하고 준수한 젊은이들이었다. 백방 생은 비록 달마오수 등과 지내오기는 했었지만 강호에 다시 나와서 그 런 사람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의 기질은 보기 드물게 당당하고 또한 의연해 보이기조차 했다. 모두 오남오녀로서 열 명이었는데, 또한 뜻밖에도 거기에 한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바로 얼마전에 주루에서 만났던 왕옥파(王屋派)의 그 청의경장 소녀였다. 그녀도 역시 백방생을 보고 알아차렸는지 다소 흠 칫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앞장섰던 한 청년이 어 느새 포권하며 황진의에게 입을 열고 있었다. "황소저! 한참동안 찾았소이다. 낙양에 오셨다고 하기에 찾아뵈려고 하였더니, 바로 이 곳에 계셨었군요!" 그 청년은 일신에 화려한 비단장삼을 걸쳤는데 정말 세상에서 보기 드물게 수려하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키는 육척 정도였고 체격은 호리 호리했는데 등뒤에 매달은 한자루의 장검이 그렇게 멋들어져 보일 수가 없었다. 백방생은 이제까지 그렇게 눈부시게 잘생긴 청년을 처음으로 보 는 것 같았다. 황진의도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웃으며 몸을 일으켜 그들 을 마주 대했다. "아, 남궁소협(南宮少俠)이시군요! 이렇게 저를 찾으셨다니, 무슨 일 이라도 있나요?" 그 비단장삼의 청년은 낭랑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올시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황소저를 뵙는 것도 큰 영광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어찌 귀찮게 해드릴 수가 있겠소이까?"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남궁소협께서는 저를 곤란하게 만드시는군요." 비단장삼의 청년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다가 아직도 자리에서 일어 나지 않고 있는 백방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헌데 이 분은 뉘신지 불초에게 가르쳐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그는 바로 백공자예요." 백방생은 그제서야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먼저 그 청의경장 소녀에게 시선을 던진 후에 포권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여러분." 백방생의 지금의 모습은 그저 호화롭고 뚱뚱한 부잣집의 공자처럼 보여서 모두들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단지 그들은 이 멍 청해 보이는 서생이 어째서 황진의와 함께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백방생이 먼저 포권의 인사를 했으나 누구도 답례하지 않았다. 단지 그 비단장삼의 청년이 다시 그에게 정색을 하고 물었을 뿐 이었다. "실례지만 귀하의 성함과 출신내력을 말해주실 수가 있겠소?" (너는 어째서 먼저 말하지 않고 나에게 묻느냐?) 경우에 따라서 자신의 출신내력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이 강호의 상 례였다. 백방생은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선선 히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소생의 성은 백이고 이름은 방생, 복주의 태생이외다." 청년은 백방생이 복주의 태생이라는 말에 일시 눈빛을 기이하게 빛냈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 곳의 부호이신 백노야(白老爺)와는 어떤 관계라도 있으신지?" (어, 우리 할아버지의 명성이 이미 이곳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말인 가?)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 분이 나의 친조부님이셨소. 하지만 얼마전에 돌아가시고 말았 지요." 청년은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드디어 포권하며 말했다. "불초는 남궁검상(南宮劍常)이오. 백형과 같은 분을 만나게 되니 영광이 오." 남궁검상(南宮劍常), 그의 나이는 현재 스물 세 살, 백방생은 이내 그에 관해서 훤히 파악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이미 강호인 물록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적혀있는 바에 의하면, 이 비단장삼 의 청년은 남궁세가(南宮世家)의 둘째공자로서 별호는 옥면검(玉面劍), 무공은 절정경지의 코앞에이르러 있다고 한다. 백방생은 비록 한눈에 알 아보지는 못하지만 그저 이름만 들으면 그러한 강호의 주요인물들은 이내 그 신상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알고보니 이들은 바로 당금의 무림오대세가의 젊은이들이었군! 어쩐지 모두가 영기발랄하더라니.) "아, 바로 남궁형이었구려!" 백방생이 마주 포권하는 사이에 이미 형식적인 인사를 마친 비단장 삼의 청년 남궁검상은 어느새 다시 황진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 다. "황소저, 불초가 지금 절친한 친구들을 이렇게 데려왔는데 황소저를 혹 시 그들에게 소개시켜도 되겠습니까?" 남궁검상이 이렇게 황진의를 찾아온 것이라면 이미 그의 동료들이 황진 의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은 다만 인사치레로 그런 말을 하 고 있는 것이었다. 황진의는 미소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남궁소협께서 좋으실 대로 하세요." 남궁검상은 이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동료들에게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여러분, 아시겠소？ 바로 이 황소저께서 당금의 유명한 후기지수인 성 수곡(聖手谷)의 소군주 성수약왕(聖手藥王) 황진의 소저외다. 자, 모두 들 인사를 드리시오!" 백방생은 정작 그 말을 듣자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내심 으로 설마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녀가 강호의술의 제일인자가 있 는 성수곡의 소군주였을 줄이야. 백방생은 아까 그녀의 의술에 관한 얘 기를 들으면서도 종래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 신의 장래와도 연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성수곡은 바로 그 문제의 세외팔세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이름이 황진의라고 해서 설마했는데 그것이 사실이었군. 아미타불, 그 녀가 바로 그 유명하다는 성수약왕이었을 줄이야. 이 얼마나 공교로운 일이겠는가?) 강호인물록에는 그녀가 성수곡의 소곡주인 황의중(黃倚重)의 딸이며, 현재나이 이십오세, 오빠인 소신의(少神醫) 황백승(黃百勝)과 함께 강호 에서 보기 드문 신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무학은 최절정의 경지라고 하 던가? 그 나머지 사남오녀는 남궁검상의 얘기가 끝나자 과연 나서서 저마다 포권하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들은 대개 오대세가의 자제들이 었는데, 황진의는 그저 마주 포권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아마 그녀도 대강 그들의 신분을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백방생도 역시 물론 그들의 성명을 듣는 순간에 그들에 관해서 알 수가 있었다. 우선 남자만 보자면, 키가 육척에 헌칠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준수한 용모의 스물두살의 홍의청년은 황보세가의 소공자인 섬전권(閃電拳) 황보 헌(皇甫軒)이었고, 오척여섯치의 키에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열아 홉살의 황의청년은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소공자인 당독(唐獨),그리고 각 기 육척세치정도의 키에 하나는 깡마르고 하나는 우람하며 각기 백색 의 장삼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은 하북팽가의 사람들인 스물한살의 팽영 (閤　과 열여덟살의 팽웅(陜9)형제였다. 그들 모두의 무공은 거의 일 류급이었는데, 앞서 나선 남궁검상에 비해서는 다소 뒤진 감이 있었다. 이어 여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은 역시 남궁검상이 직접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소개한 남궁지약(南宮芝若)이었다. 옥호리(玉狐狸) 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나이는 스물한살이며 오척일곱치 정도 의 키에 상당히 마르고 섬약한 듯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푸르 고 아름다운 비단의삼을 잘 차려입고 있었는데, 순백색의 피부로 인해 마치 순결하고 섬약한 미소녀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실 별호는 그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어딘가 그녀의 아름다운 눈빛속에는 영 악한 기질이 스며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어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사천당문의 낭자로 당독의 누이되는 사람 이었는데, 황진의와 비슷한 담황색의 비단장삼을 걸치고 있었으며 오 척여덟치의 키에 늘씬하고 깡마르며 건강하고 매혹적인 피부를 가지고 있는 미인이었다. 강호인물록에는 그녀의 무공이 오히려 당독보다 월등 하며 남궁검상과 가까운 처지라고 적혀 있었다. 이어 한 명의 녹의낭자가 인사를 했는데 나이는 열아홉이고 오척일곱 치의 키에 늘씬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황보헌의 여동생인 황보능파(皇甫凌波)로 황보세가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다. 이어 소개된 두 낭자는 오대세가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당금 화산파(華山派)의 여제자이며 화산장문인 화산수사(華山秀士) 채문 광(蔡文廣)의 무남독녀인 화산옥녀(華山玉女) 채청문(蔡靑文)과 이미 이전에 보았던 그 왕옥파의 청의경장소녀였다. 화산옥녀 채청문은 오척일 곱치의 키에 화의경장을 늘씬하게 차려입은 미소녀였고, 바로 이른바 그 왕옥파의 경장소녀는 이름이 증평(曾萍)이라고 했다. 비록 허리가 날씬 하기는 했으나 키가 오척다섯치로서 그녀의 키가 그들중에서 가장 작아 보였다. 채청문의 나이는 스물세살 정도였는데, 연신 그녀의 손을 증평 이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친분관계가 매우 가까운 것 같았 다. 눈앞의 이 열 명의 남녀들은 하나같이 비단 용모가 수려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무림의 거대한 세력들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들 이 애초부터 태도가 당당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록 강호인물록 에 의해 쉽게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있었지만, 백방생으로서는 갑 자기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과 대면하게 되자 갑자기 정신이 다 없어지 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소개하고 인사를 나누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그러나 백방생은 한쪽에 서서 생각을 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다소 길게도 느껴졌다. 황진의는 일일이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자 이어 모 두 함께 자리하도록 했다. 황보헌이나 팽영 등은 즉시 주위의 탁자를 가져와서 옆에 붙이고 자리를 넓혀놓았다. 한쪽의 탁자위에는 이미 많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백방생으로서는 약간 처지가 궁 색해졌다. 자신을 보잘것 없이 보고있기 때문에 함께 식사하자고 하기도 멋쩍은 느낌이 들었다. 백방생이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식사를 마저하고 있는데, 남궁검상이 이 윽고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당금의 무림정세는 그야말로 가증스럽다고도 할 수가 있지요. 황소저 께서는 혹시 정의맹(正義盟)의 창단식에 참가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남궁소협께서는 과찬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천하에 인재는 많고도 많은데 어찌 저와 같은 여자가 그런 큰 일을 염두에 둘 수가 있겠습니 까? 제가 이곳에 오게된 것은 그저 우연이지 무슨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람한 체구의 팽웅이 눈빛을 차갑게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당금의 무림을 건지기 위해서는 작은 힘이라도 강호를 위해 내던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저는 물론 그러고 싶지만 아직 능력이 부족하니 남들에게 욕을 먹 을까봐 걱정이네요." 남궁검상이 서둘러 말을 받았다. "황소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저희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황소저께서 겸손하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요. 요 근래들어 성수약왕께서 무림의 빈민들을 구제해 주시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니까요." 황진의는 말했다. "저는 단지 의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예요.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면 의당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백방생도 이미 황진의가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의료시술을 해 주어서 명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계속 묵묵히 들으며 식사만 하고 있는데, 문득 남궁지약이 느닷없이 그에게 질문을 던져왔 다. "당신은 듣자니 백노야로부터 제법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하던데, 그렇게 재산이 많은가요?" 백방생은 이 낭자가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하 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낭자께서도 재산에 관심이 있으신 모양이로군 요?" 남궁지약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에 은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렇다면 잘 됐군.) 백방생은 내심 중얼거리며 즉시 품속을 뒤져서 열 장의 금표를 꺼냈 다. 그것들은 각기 열냥짜리 금표였는데 백방생이 그것들을 각기 한사람 씩 돌리자 그들은 저마다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인지 조사해 보기도 했다. 그들도 그런 큰돈은 만 져보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남궁지약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과연 백공자께서는 부자가 틀림없으시군요. 이렇게 커다란 선물을 선 뜻 주시다니." 백방생은 마주 포권하며 말했다. "소생으로서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여러분들과 좀더 친 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죠. 단지 소생의 능력이 별로 없기에 그런 약소한 선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역시 금표 한장을 받아든 황보헌이 말했다. "이것을 약소하다고 한다면 세상에 약소하지 않은 선물이 없게 될 것이오." 백방생은 역시 그들이 일제히 자신을 향해 호의를 보이는 것을 보고 약간 만족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증평에게 그 금표를 건넸을 때였 다. 왠지 그 청의경장소녀는 안색을 붉게 물들이며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저, 저는 그것을 받을 수가 없어요." 백방생은 다소 어색한 처지가 되어 말했다. "아니, 어째서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오?" 비단 백방생 뿐만 아니라 실내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집중되었 다. 증평은 더욱 당황해 하며 말했다. "당신은 이미 저로 인해서 많은 돈을 손해보았는데 제가 어떻게 그 것을 받을 수가 있겠어요?" 백방생은 그제서야 그녀가 이전에 백방생이 복우파의 그 도적들에게 금표를 빼앗긴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그것은 그녀 때문이 아니라 백방생이 일부러 그랬던 것이 아니던가? (이거 보기보다 순진한 낭자로군!)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마음에 두지 마시오. 이미 내가 모두 그 돈을 회수했으니. 게 다가 낭자가 계속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내가 매우 난처해 지지 않겠 소?" 옆에 앉아있던 화산옥녀 채청문도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증매, 그러지 말고 받아.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 야." 증평은 그제서야 손을 내밀어 그 금표를 받았다. 그러나 왠지 그녀의 눈빛은 상기된 가운데 어떤 강한 기운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알겠어요......." 팽영이 낭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이거 우리가 백형과 함께 있기만 하면 은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소이다!"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소생에게 장기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은자가 넉넉하다는 것 뿐인데, 만일 소생이 그것에 인색해진다면 어찌 감히 여러분과 친 구가 될 수 있겠소이까?" 팽웅도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다면 역시 당신은 우리의 친구요, 하하하......." 이어 그는 다소 시장한지 탁자위의 음식들을 거침없이 집어먹기 시작 했다. 그는 그렇게 먹으면서 연신 아 이거 맛 좋은데 하고 칭찬을 연발 했다. 백방생은 남궁검상에게 말했다. "소생은 사실 처지가 외롭고 또한 힘이 없어서 믿을만한 호위(護衛)를 몇 분 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보수는 넉넉하게 드릴 생각이지요.여러분 들 가운데 사람을 추천(推薦)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만......." 그러나 남궁검상 등은 모두 돈 많은 무림세가의 자제들이라 그저 웃을 뿐 쉽게 응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황보헌이 대신 이런 말을 했을 뿐이 었다. "하긴 그렇군요. 재산이 있으되 지킬 능력이 없다면, 그것도 문제가 되기는 하겠지요." 남궁지약이 불쑥 말했다. "당신은 여자호위도 상관없나요?" 백방생은 즉시 말했다. "물론입니다. 소생이 어디 이것 저것을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남궁지약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저 해 본 소리예요. 저는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따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도와드릴 수는 없어요." 백방생은 그녀의 눈빛이 빠르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과연 섬약하고 순결하게 보이기는 해도 역시 옥호리라는 별호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 했다. 아마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사람은 앞으로 그 사랑스런 재롱에 다소 시달리게 될 것이다. (혹시 정말로 천만금을 준다면 네가 거절할 수가 있을까?) 백방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궁검상이 황진의에게 다시 물었 다. "황소저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황진의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저는 뭐 아직 별다른 계획은 없어요. 기왕에 이곳에 왔으니 며칠 구 경이나 하다 갈까 생각중이예요." 남궁검상은 말했다. "그럼 이틀 후의 그 정의맹 창단식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황진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드시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반드시 참가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없어요. 강호에는 저와 같은 아녀자가 나서지 않아도 일을 처리 해줄 기인이사들이 구름처럼 많으니까요." 남궁검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황소저를 그저 일반의 여염집 숙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백방생은 잠시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왠지 그 와 그들과는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어떤 장벽이 놓여있는 듯했기 때문 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뒷간으로 가는 척하고 사라지려 고 하자, 문득 그것을 눈치챘는지 그의 귓전에 황진의의 전음소리가 들 려왔다. (나중에 저를 찾으시려면 요 앞의 맞은편에 있는 객점으로 찾아오세 요. 저는 당분간 거기에 묵을 생각이니까요.) 백방생은 비단 전음입밀을 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음성 으로 대답하기도 곤란했다. 그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제는 나를 쫓아다니지는 않을 모양이군.) 백방생은 남궁검상등이 자신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않고 있는 것을 보 고 이내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와 계산을 마치고 주루를 벗어났 다. 밖으로 나서자 오전의 기후가 제법 쌀쌀하여 취기를 다소 잊게 만 들었다. 날씨는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몸속은 빈속 에 마신 독한 술기운으로 인해서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취기를 이겨내기에는 몸이 너무나도 쇠약해진 것일까? 그런데 그 때 문득 그의 뒤쪽에서 가냘프고 귀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백공자!" 그 음성은 다소 주저하는듯 하면서도 수줍음이 배어있는 것이기는 하나 분명히 백방생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고개를 돌렸다. 주루의 입구에 어느새 증평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방금전에 서둘러 백방생 의 뒤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전날 주막에서 복우파의 건달들을 상대할때 의 그 앙칼지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매우 여리고 부끄러 워 보였다. "무슨 일이오?" 백방생이 묻자 증평은 다소 주저주저 하면서 말했다. "저어 한가지 드릴 말이 있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말해 보시오." 증평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아까 말씀하신, 그 얘기는 누구에게나 해당된다고 하셨지요? 수신호 위(守身護衛)를 구하신다는 그 말씀 말이예요." 증평은 비록 다른 강호 여인들에 비해서는 작은편에 속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다지 작은 키는 아니었고, 게다가 매우 청순하고 날씬하며 수줍은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는 한자 루의 장검은 마치 멋진 장식물인양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백방생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그럼 낭자가 나의 수신호위가 되어 보겠다는 말이오?" 증평은 말했다. "저는 비록 무공은 보잘것이 없지만 그러나 당신에게 약간의 도움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비록 사문의 허락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나를 꾸짖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그다지 많은 보수를 바라지도 않겠 어요." 백방생은 본래 보다 무공이 높은 사람의 시중이나 보호를 받게 되기 를 원했었다. 증평이라면 백방생에게 그다지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자칫 귀찮은 짐이 될 지도 모른다. 강호의 부랑아들을 상대하는 것 정도는 이제 백방생 혼자서 능히 감당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문득 그녀가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보여주는 것을 보고 가슴 한쪽이 따뜻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태도를 바꾸어 웃으며 말했다. "아, 이전의 그 사형제들은 모두 잘 있소?" 증평은 가슴을 졸이고 있다가 백방생이 미소를 짓자 이내 그녀의 안색 도 환하게 밝아졌다. "예. 우리는 함께 이곳으로 왔는데 갑자기 사형들은 볼일이 생겨서 떠 나가고 저는 마침 알고 있던 채언니와 만나서 그들과 어울리게 되었던 거예요." 백방생은 주위의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게 된 것은 매우 좋소. 그들은 가히 강호무림의 기재(奇才)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증평은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과 함께 다니게 될 거예요. 이미 그들에게도 그렇 게 말하고 나왔으니까요." 백방생은 문득 열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바램을 그대로 묵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증평은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왔다. 백방생은 이윽고 다소 한적한 장소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낭자에게 보수를 얼마나 주었으면 좋겠소?" 증평은 안면을 상기시키고 있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직시하며 다시 물었다. "정말 나의 호위가 되고 싶소? 낭자는 혹시 내가 다른 응큼한 생각을 할까 두렵지도 않다는 말이오?" 증평은 백방생의 시선을 마주 받을 수 없는 지 피했다. 그러나 이내 그 의 얼굴을 한번 훔쳐보며 대답했다. "호호, 저는 당신이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아주 훌륭한 정인군자(正人君子)시죠." (대체 나를 언제부터 보았다고 벌써 그렇게 믿는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증평이 입가에 웃는듯 마는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 고 다시 말했다. "오늘 나는 매우 불안한 처지이오. 그러니 누가 데리러 올때까지만 나 를 지켜주시겠소? 한 백냥 정도에 말이오." 백냥은 저번에 백방생이 제시했었던 바로 그 금액이었다. 물론그것은 중 원에서 흔히 사용되는 백은(白銀)이 아니라 황금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 다. 백방생은 말과 함께 정말로 한 장의 백냥짜리 금표 한장을 꺼내 그 녀에게 내밀었다. 본래 이 황금 백냥은 은자 이천냥도 더 넘는 것이어서 단지 하룻동안의 호위비용으로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었다. 저번에 증평은 따라서 매우 놀라고 의아해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 갑자기 그녀는 두말없이 그 백냥짜리 금표를 받아들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좋아요. 하지만 이 액수는 너무나도 많으니 제가 앞으로 한달간 당신 의 수신호위가 되어 드리는 것으로 하죠. 이제 우리의 계약은 성사된 것인가요?" 백방생은 갑자기 멍해졌다. 그는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돈을 쉽게 받을 줄은 몰랐고, 또한 게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더욱 몰랐다. 그로서는 다소 처지가 난처해 지게 되었다. 그는 증평의 호위를 받는 것을 바라 지 않지만, 그러나 지금 그녀의 호위를 너무 길다고 말할 수도 없고, 게다가 그만큼 은자를 돌려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이 조그만 낭자가 나를 아주 곤란하게 만드는군.) 백방생은 이제 잠시후면 진소유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상기했다. 혹시 그때가 되면 증평에 대해서 진소유가 어떤 오해를 하게 될 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차마 그는 증평의 호의를 거 절할수가 없었다. 그는 그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셈이군. 낭자! 어쨌든 앞으로 어떤 불편한 일이 있어도 공연히 나 를 탓하지 마시오! 그것은 낭자가 자청한 것이니까." 그런데 느닷없이 증평은 두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그렇게 울먹이며 기쁜 음성으로 말했다. "고마와요! 저는 필시 당신이 이 일에 반대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요. 그런데 저를 받아주시다니.......알고보니 당신은 저의 생각보다 더욱 훌륭한 분이시군요." 백방생은 다시 한번 멍한 기분이 들었다. 알고보니 증평은 이미 그의 생각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는 차라리 거절을 해도 상관 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다시 그 일을 번복할수가있 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마치 갑자기 그녀에게 한차례 놀림을 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그는 그녀가 그와 같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무리하게 굳이 자신의 호위가 되려고 했던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더욱 알 수 없고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태도를 보면서 문득 다시 생각했다. (혹시 그녀는 갑자기 내가 마음에 든 것이 아닐까?) 사실 남녀간의 상사(相思)라고 하는 것은 흡사 불꽃이 튀는 것과도 같 아서 찰나지간에도 이루어질 수가 있는 법이었다. 백방생과 증평이 만난 것이 비록 잠깐동안이고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것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백방생은 문득 자신의 뚱뚱해진 허리를 내려다 보고는 내심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나처럼 못생긴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아마도 그녀는 무슨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 백방생은 말했다. "과찬의 말이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 그건 그렇고, 일단 우리가 계약을 성립시켰으니 어디 마땅한 곳으 로 가서 기념으로 차나 나누도록 합시다." 증평은 그 말을 듣자 이내 눈물을 거두고 방긋 웃었다. 그녀는 즉시 금표를 품속에 잘 갈무리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헌데 백방생이 마악 다시 번화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때였 다. 갑자기 전면에서 한 명의 중년인이 술에 심하게 취한 듯 비틀거리더 니 바로 백방생의 코앞에 와서 넘어지는 것이었다. 얼핏 느끼기에도 그 중년인에게서는 심한 술냄새가 풍겨왔다. 백방생도 비록 아침부터 취 하기는 했지만 이 친구는 다소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디서 무슨 술을 빌어먹었는지 전신에 오물까지 잔뜩 묻어 있어서 흡사 타락한 술 주정뱅이 인 것 같았다. 백방생과 증평은 그 더러운 술주정뱅이가 그들의 코앞에 와서 갑자기 넘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게 되었다. 자칫했으면 그 술주 정뱅이와 부딪칠 뻔 했었기 때문에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증평은 자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 순간에 바로 맞은편에서 급하게 다가오던 한 행인(行人)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만 술주정뱅이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그 행인은 그만 깨끗한 비단옷을 술주정뱅이의 더러운 옷과 부딪치게 되어서 버둥거리게 되었다. 증평은 그 행인이 매우 화가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이때 벌어졌다. 갑자기 행인은 고개 를 쳐들더니 화를 내기는 커녕 눈빛을 빛내면서 앞을 향해 번쩍 달려드 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과 증평은 아직 뒤로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행인의 손에는 어느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장검이 들려져 있었다. 그 장검은 자 칫 백방생의 몸을 찌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행인은 그만 너무 화 가 나서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행인은 결코 미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보니 그 장검의 검끝 은 분명히 백방생의 심장어림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한순간 뻗어가 는 그 장검의 움직임은 지독히 신속했을 뿐만 아니라 악랄했다.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암습이었다. 증평은 뒤늦게야 그것을 보고 자객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그녀가 경각하기에는 때가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갑자기 백방생의 몸 이 그 장검에 꼬치처럼 꿰이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헌데 일순 느닷없 는 일이 벌어졌다. 장검의 끝이 약간 파고 들어간 순간 백방생의 몸이 거의 기적적으로 빠르게 우측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증평은 그것을 보고도 약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26 장 백련화(白蓮花) 그 자객도 일순 놀랐는지 두번째의 공격은 하지 못하고 다소 주춤거렸 다. 헌데 바로 그 순간에 다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제까지 엎드려 있던 술주정뱅이가 고개를 들더니 역시 품속에서 장검을 뽑아들더니 백방생을 향해 덮쳐들었던 것이었다. 증평은 그만 갑작스럽게 밀어닥치는 느닷없는 횡액에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알고보니 그 술주정뱅이 역시 다름아닌 살수였던 모 양이었다. 그의 조금전의 취기 가득했던 두눈에는 취기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오직 잔혹한 살기(殺氣)만 가득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 어떤 사람들이길래 그와 같은 위장을 하여 한꺼 번에 백방생의 목숨을 노리는 것일까? 백방생의 상황은 그야말로 풍전 등화로 보였다. 증평은 옆에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그 자의 장검이 역시 백방생의 몸을 산적꿰듯 꿰뚫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때 술주정뱅이가 덮쳐듬과 때를 같이하여 마침 근처에서 길을 가던 사내 하나가 그것을 보고 백방생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 다. 그 사내가 들고 있었던 병기는 바로 한자루의 흔한 파풍도(破風刀) 였다. "멈춰라!" 술주정뱅이는 물론 그 사내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의 무 공은 예상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비록 다소 늦게 출수했으나 술주 정뱅이가 미처 백방생의 몸을 찌르기 전에 그의 장검을 가로막고 있었 다. 증평은 이에 다소 안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헌데 이 때 더욱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느닷없이 술주정뱅이의 장검을 막는듯 했던 사내의 칼날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서 백방생의 목젖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혼비백산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알고보니 그 사내마 저 기실은 백방생을 살해하기 위해 고용되었던 살수였던 모양이었다. 증평은 비단 술주정뱅이의 장검 뿐만 아니라 그 사내의 칼날마저 빠르게 쇄도해 들어가자 그만 멍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 헌데 바로 그 순간에 가벼운 병장기의 마찰음과 함께 갑자기 장내의 상황이 빠르게 격변되었 다. 증평은 겨우 눈을 뜨고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눈을 의심할 뻔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백방생은 이번에는 피하지 못하고 산적처럼 병장기 에 찔려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 지 아까 처음의 그 행인의 장검이 먼저 튀어나와 사내의 칼날을 튕겨버 리고 사내의 가슴에 꽂혔으며, 이어 사내의 칼날은 술주정뱅이의 장검 을 튕겨내고 그자의 어깨에 깊이 박혔으며 술주정뱅이의 장검은 행인 의 아랫배에 꽂혀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한편의 괴이하고도 불가 사의한 연극을 보고있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연극이 아니 라 현실이었다. 그 세 명의 살수들은 모두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피를 심하게 흘리고 있었으며 안색은 거뭇하게 죽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게 혹시 착각이 아닐까?) 어쨌거나 증평은 백방생이 아직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놀라며 기뻐 서 소리쳤다. "백공자! 많이 다치지는 않았나요?" 백방생의 몸에서도 약간의 피는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가슴부분이 예리하게 찢어져 있었으며 허리부분도 또한 길게 베어져 있었다. 하지 만 백방생의 상태는 상대방에 비해 매우 경상이었다. 그의 몸에서 다소 피가 흘렀으나 이내 모두 지혈되었다. 그와 반대로 그 세 명의 살수는 일 제히 쿵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어느새 그들은 모두 싸늘한 시신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도 무공이 높아 보였는데, 단지 그러한 부상을 입 었다고 해서 금방 그렇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 이상해 보였다. 증평은 반사적으로 백방생의 안색을 살폈다. 이 순간 백방생의 안색은 매우 창 백하여 마치 백지장과도 같았다. 게다가 이어 비틀거리며 맥없이 바닥 에 쓰러지려고 하는 것이었다. 증평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백공자, 괜찮나요?" 백방생은 가까스로 몸을 가누어 바로 서며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기실 백방생은 조금전에 다름아닌 예의 그 사량발천근의 무공을 사용 한 것이었다. 다만 이번의 경우는 날카로운 병장기여서 조금 다르다고 나 할까? 백방생은 위기의 순간에 반탄력(反彈力)을 일으켜서 장검을 옆으로 튕겨낸 다음, 이어 행인이 다시 공격하는 것을 보고 그의 장검 을 재차 반탄시켜서 교묘하게도 세 사람을 모두 처치했던 것이었다. 이 번에 그가 사용한 수법은 이전과는 달리 지극히 오묘한 것이어서 한순 간에 많은 공력이 소모되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래서 한순간 기력이 탈진되어 비틀거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증평도 이유는 잘 몰랐지만 어쨌든 백방생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안심하며 시선을 그 세 명의 살수에게 옮겼다. "대체 저들은 누구죠?" 그 세 명의 살수들의 얼굴은 이미 시커멓게 변해서 악취와 함께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백방생이 비록 위기의 순간에 급하게 손을 쓰기는 했으 나 그것이 당장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수 법 역시 그렇게 악독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필시 그 살수들이 자신들 의 실패를 자인하고 입속에 숨겨둔 극독을 깨물어 삼킨 것이 분명했다. 증평의 얼굴에는 따라서 더욱 놀랍고 공포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백방생은 가벼운 탄식과 함께 말했다. "흑루(黑樓)의 산하에는 일품당(一品堂)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서 흔 히 장검과 독을 함께 사용하고 있소." 증평도 이미 그들이 일반적인 강호인이 아닌 전문적인 직업살수라는것 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놀라운 것이었는데, 뜻밖에 도 백방생의 기이한 능력을 만나서 그만 갑자기 좌절하고 만 것이었다. 증평은 다시 놀라서 물었다. "당신은 일품당과 무슨 원한관계라도 있나요?" 일품당은 바로 이곳 하남성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그들 의 손속은 실로 무정하고 잔혹해서 많은 사람들의 공포를 사 왔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들에겐 아마도 그런 것이 있는 모양이오." 증평은 그 대답을 듣고서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개 그들 살수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살인을 하는 것이며, 청부살 인 이외에는 오히려 별로 살수를 펼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떤 사람이 백공자에게 살수를 보냈는지 모르겠군?" 증평은 더이상 묻지 않고 말했다. 주위로 많은 행인들이 몰려들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요." 백방생의 몸이 거의 녹초가 다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증평은 주저없이 그의 몸을 부축하며 신형을 날렸다. 대번에 삼사장씩 날아서 그들은 빠 르게 그 장소를 벗어났다. 백방생의 상처는 정말 그다지 심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피가 다시 흘 렀지만 혈도를 점혈하여 지혈시키자 이내 멎었다. 증평은 한적한 곳에 이르자 그의 상처에 지니고 있던 모종의 금창약(金瘡藥)을 꺼내 발라주었 다. 백방생은 비로소 한숨을 돌리고 나자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낭자 의 도움을 받는구려. 낭자가 없었다면 곤란할 뻔 했소." 증평은 백방생의 상처를 싸매주며 다소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문 득 수줍은 듯이 말했다. "저의 능력은 사실 보잘것이 없어요. 하지만 흔히 백지장도 맞들면 낫 다고 하지 않나요? 저는 앞으로도 계속 당신의 호위를 맡아드릴 거예 요." 사실 조금전과 같은 경우는 아주 드물다. 하지만 기왕에 그렇게 되었으 니 백방생은 그녀의 호의를 거절할 방법이 더욱 궁해지게 되었다. 백 방생은 궁색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알겠소. 옷을 좀 갈아입을 테니 자리를 잠시 비켜주겠소?" 백방생은 아무래도 잠시 후에 진소유의 장원으로 가봐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의복으로는 갈 수가 없었으므로 옷 보따리에서 새로운 화려한 비단옷을 꺼내어 갈아입고는 입던 옷은 소 지품을 꺼내고 근처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저 겉옷만 갈아입는 것이었 으므로 골목길이라고 해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고 또한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백방생은 옷을 모두 갈아입고 나자 다시 화려한 청삼을 걸친 부잣집 귀공자로 변모했다. 증평은 잠시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 다. 그 골목길을 벗어나자 전혀 새롭고 낯설은 큰길에 이르렀다. 백방생 은 혹시 진소유가 자신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다. 헌데 그 때 한 명의 중년사내가 느릿하게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증평 은 이미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백방생의 소매를 잡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런데 그 중년사내는 백방생의 앞에 다가오더니 문득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혹시 백공자님이 아니십니까?" 천하에 흔하디 흔한 것이 백씨성을 가진 사람들이고, 또한 백씨성을 가 진 무림인들도 적지는 않다. "나는 백방생인데 무슨 일이오?" 그 중년사내는 즉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희 아가씨께서 백공자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어서 함께 가시 지요." "아가씨라면 진낭자 말이오?" 중년사내는 친근한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습니다." 백방생은 그 중년사내의 모습을 은근히 살폈다. 그 사내의 골격은 매우 튼튼하고 강인해 보였으며 게다가 두 손의 마디에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었다. 그것은 결코 노동으로 인해 생긴것이 아니라 바로 무공을 연마하다 생긴 것이었다. 마치 그것을 입증해 주기라도 하듯이 그자의 두눈에서는 화광과도 같은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자는 보아하니 무공을 익히기에 좋은 골격을 가지고 있고 현재의 무공 또한 절정(絶頂)의 상승경지인데 정말로 진낭자의 수하란 말인 가?) 백방생은 어딘가 의심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무턱대 고 의심만 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결국 그자의 뒤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 중년사내의 뒤를 따라서 잠시 걷자 길옆에 하나의 작은 마차가 대 기하고 있었다. 만일 저자가 정말로 진소유의 수하라면 그렇다면 진소유 의 이목은 실로 대단하다는 말이 된다. 진소유(陳小柔), 헤어진 지 불과 백여일만에 그녀는 정말 그렇게 대단해졌다는 말인가? 마차는 시종 여유있게 대로상을 달려갔다. 백방생은 증평과 함께 마차 위에 앉아서 묵묵히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증평도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차는 이윽고 잠시동안을 달 려 하나의 솟을대문이 있는 커다란 장원(莊園)앞에 이르러 멈추었다. "내리십시오." 중년사내의 태도는 우려하던 바와는 달리 시종 공손했다. 백방생이 증 평과 함께 마차에서 내리자, 중년사내는 곧장 그들을 다시 장원의 안쪽으 로 인도했다. 장원의 내부에는 십여명의 하인들이 오가며 일을 하고 있 었지만 두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중년사내는 이윽고 자리 에 앉게 했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중년사내가 물러가자 이내 시녀 하나가 나와서 차를 따라주고 물러 갔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문득 증평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죠?" 백방생은 흡사 벌레씹은 듯한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실내를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믿기지 않아서 그러오. 나의 그 친구가 이런 곳에서 살고 있으 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소." 증평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그 친구분은 매우 아름다우신가 보죠?"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어떻게 그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아냈소?" 증평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들은 으레 그러한 느낌에 민감한 법이예요. 당신은 아마 그녀를 매 우 사랑하시는 모양이로군요. 그렇다면 저도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군요." 백방생은 문득 과거 망해사에서의 일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녀는 그날 밤에 그의 앞에서 알몸이 되었었다. 그것은 사실 여자로서는 대단한 용 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당시 그녀의 알몸은 그 얼마나 눈부시고 육감적이었던지... 백방생은 당시 몸이 허약하여 감히 욕정을 일으킬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는 그것으로 인해서 기이한 마음의 감동을 받았 고 강한 용기를 얻었다. 백방생은 그래서 감사의 뜻으로 자신의 그 물 려받은 유산인 황금 십만냥을 그대로 그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연한 짓이 아니었으며 지금으로서도 결코 후회하는 일이 아니었다.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훌륭하고 나는 보잘것이 없소. 그런데 어찌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소? 나는 그저 그녀의 친구로서 만족한다오." 증평은 이에 뭐라고 반박의 말을 하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 때 객청의 안쪽에서 한 명의 백의소녀(白衣少女)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증평은 입을 다물고 그 쪽을 바라보다가 다소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진소유, 그녀였다. 백방생은 내심 반신 반의하는 심정으로 기다렸다가 막상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자 왠지 기 묘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이런 대저택의 주인이 되었을 줄이야? 물론 자유롭게 돈을 사용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이런 세속적인 분위기 는 왠지 그녀의 기질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많이 기다렸나요?" 진소유의 질문에, 백방생은 흡사 갑자기 정신이 든 사람처럼 몸을 일으 키며 그녀를 대했다. "아니오. 이 곳의 분위기가 편해서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소." 진소유는 여전히 아름답고 수려했다. 사실 그녀는 천하제일의 미녀는 아 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순결하고 오만한 듯한 기질이 있으 며, 백방생은 그 기질을 유독 사랑했다. 진소유는 백방생의 시선을 외면하며 다시 말했다. "그동안 식사는 했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조금 전에 먹었소." 진소유는 그의 얼굴을 한차례 바라보더니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은 밥은 안 먹고 술만 마신 것 같군요. 그래서야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가 있겠나요?" 백방생은 문득 그녀가 자신에게 부모의 혈채 운운하던 것을 상기했 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실 나는 무능력하며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소." 그때 문득 말없이 있던 증평이 불쑥 입을 열었다. "만일 백공자가 소인배라면 이 세상에 성인군자는 하나도 없을 거예 요." 진소유는 그제서야 증평의 존재를 의식한 듯 백방생을 향해 냉소하며 말했다. "알고보니 당신의 재주는 제법 놀랍군요. 불과 잠깐 사이에 여자를 또 한명 사귀다니!" 백방생은 안색을 붉히며 말했다. "그녀는 바로 왕옥파의 제자이며 증낭자이오. 나와는 그저 계약관계 로, 나의 호위청부를 맡았기에 이렇게 함께 오게 된 것이오." 진소유는 증평의 얼굴을 다시 한번 살펴보더니 연이어 냉소를 터뜨렸 다. "흥, 굳이 그렇게 변명할 필요가 있나요?" 증평은 안색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즉시 눈빛을 빛내며 포권 하며 진소유에게 말했다. "그건 진소저께서 오해하신 거예요. 백공자는 항상 진소저 당신만을 그 리워 했을 뿐 다른 여자들은 안중에도 없었지요. 제가 그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예요." 진소유는 시종 냉랭한 표정이었으나 이때만큼은 안색이 다소 상기되는 듯 했다. 그녀는 눈빛을 빛내다가 증평에게 물었다. "낭자는 나를 알고 있나요?" 증평은 부드럽게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금의 강호와 낙양에 혜성처럼 등장한 천상오룡(天上五 龍)과 백의관음(白衣觀音)의 이름을 누가 모르겠어요? 게다가 그 중에서 도 백의관음은 모든 여인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당신은 그것 을 몰랐단 말인가요?" 진소유는 말했다. "내가 질투의 대상이 되다니 그건 무슨 소리죠?" 증평은 말했다. "당금의 남자들은 대부분이 그 백의관음을 보고 가슴을 태우게 되었죠. 그런데도 그 남자들의 여인들이 당신을 질투하지 않겠어요?" 증평은 부드럽게 미소하며 말했기 때문에 그녀의 의도가 나쁘지 않다 는 것을 느끼게 했다. 세상에 아름답다고 해서 기분나쁜 여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백방생은 증평을 그저 순진하고 청초한 강호의 애송이로 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녀의 그러한 태도로 인해 실내의 분위기는 많이 부드러워지는 듯 했다. 진소유는 증평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더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시선 을 다시 백방생에게 돌렸다. "당신은 나와 얘기 좀 나누지 않겠어요?" 백방생은 옆의 증평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증평을 그 객청에 그대로 있게 하고서 백방생은 진소유의 뒤를 따라서 하나의 호화스러운 방에 이르렀다. 그 방은 침실이었다. 한쪽의 벽면앞에 침상이 휘장에 싸인 채 자리하고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고급의 자단목 으로 만들어진 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이런 호화로운 실내의 분위기는 사 실 백방생으로서는 매우 익숙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자라오 면서 호사스런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탁자의 앞에 앉자, 진소유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손수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백방생은 그녀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자 문득 가슴이 크게 울렁 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냉엄한 기질의 백련화(白蓮花) 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백방생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 공연히 미안한 느낌이 들어서 시선을 돌려 실내를 둘러보며 대답 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으니, 하하 과거에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 소. 하지만 왠지 지금은 입이 간질거리는 구려." 진소유는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해 봐요." 백방생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천상오룡, 그들은 지금 여기에 없소?" 진소유는 말했다. "그게 하고 싶은 말이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 본 것이오." 진소유는 가볍게 아미를 찌푸렸다. "그들은 천상회(天上會)의 소속이니 자연 다른 곳에 있고 간혹 이곳으 로 들를 뿐이죠. 그런 것 말고, 나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 보다 중요한 것을 물어봐요." (대체 그대는 내가 무엇을 물어보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잠시 생각한 뒤에 다시 말했다. "당신이 이 저택의 주인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이건 당신의 돈으로 구입한 저택이니 원래는 당신의 것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백방생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소? 그 돈은 내가 당신에게 그냥 준 것이라고. 그러니 이 저택도 당연히 당신의 것이 되는 것이오. 무슨 일이있더라도 그것을 돌려 달라고 하지는 않을테니 그것은 염려하지 마시오." 진소유는 잠시 그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당신은 아직도 부모의 복수를 할 생각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오.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우리를 안내했던 사람은 당신의 수하 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그들은 천상회에서 파견나온 사람들이예요. 천상오룡은 그들을 보내 서 저를 도와주고 있죠. 당신은... 그래 어떤 방법으로 복수를 할 생각이 죠?"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랬었군. 헌데 나는... 나는 사실은...." 백방생이 주저하며 말끝을 흐리자 진소유는 물었다. "사실은 뭐죠?" 백방생은 그녀의 눈치를 살핀 뒤 웃으며 말했다. "사실 당신도 알겠지만, 내가 무슨 능력이 있겠소? 우리 부모도 돌아 가실 정도였는데, 차라리 그럴 바에는 모든 것을 잊고 살고 싶을 뿐이 오. 내가 만일 여기에서 함께 살고자 한다면 어떻겠소? 나를 받아주겠 소?" 순간 갑자기 진소유의 우수가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백방생은 양뺨이 연속적으로 서너차례나 불이 나는 것을 느꼈다. 철썩철썩철썩! 백방생 은 전혀 방비도 하지 못하고 그 따귀를 맞았으며 그 반동으로 뒤로 벌 렁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백방생은 갑자기 자신이 멍청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로 느닷없이 당한 일이었다. 진소 유는 어째서 이렇게 화가 난 것일까? 만일 양뺨이 심하게 달아 오르 지 않았다면 백방생은 계속 바닥에 누워서 그 생각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몸을 일으키고 보니, 어느새 진소유는 일어나서 몸을 돌리고 저 만큼 서 있었다. 백방생은 자신이 따귀를 맞고도 오히려 죄진 듯한 기분이 들어서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백방생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어 서 이윽고 어렵게 말했다. "하하, 내가 잠시 실언을 했었던 모양이오. 내가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얘기는 취소하도록 하겠소. 그러면 되지 않겠소?" 묵묵히 서있던 진소유는 그제서야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왠지 그녀의 두눈에는 눈물이 고여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불식시키기 라도 하듯이 그녀의 음성은 더욱 냉랭해져 있었다. "당신은 이미 나와 약속을 했어요. 이제와서 그것을 어기겠다는 말인 가요?" 백방생은 자신이 얻어맞고도 죄진 꼴이 되자 내심 어이가 없었지만 우 물우물 항변했다. "하하, 나는 단지 당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서 그랬을 뿐 이오. 이제는 당신의 생각을 알았으니 앞으로 다시 그런 말은 하지 않 겠소." 진소유는 말했다. "나는 당신이 복수를 하든 말든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결코 당신같은 사람과 함께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백방생은 안색이 가볍게 변했으나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알았소. 하하!" 진소유는 말했다. "갑자기 당신을 때린 것은 미안해요. 금방 식사가 나올테니 식사를 여 기서 하도록 해요." 말이 끝나자 이내 진소유는 찬바람과 함께 방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과연 진소유가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서너명의 하녀들이 음식들을 부지런히 들여왔다. 백방생은 무심결에 그 음식들을 먹고 마시며 생각에 곰곰히 잠겼다. 음식의 맛은 하나같이 훌륭한 것이었으나 백방생은 왠지 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먹고 마시다가 문득 결정한 듯 중얼거렸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부담스러워진 모양이다. 마침 이미 그 유산을 그 녀에게 모두 준 셈이니, 그만 그녀의 곁을 떠나야 하겠다. 떠나서는 무 엇을 할까? 음..., 그녀의 말대로 힘을 키워서 복수를 하든지 해야겠 지?" 일단 작정이 그렇게 서자 백방생은 음식을 먹다말고 자리에서 일어섰 다. 그는 장원을 떠나기 전에 먼저 증평을 찾았다. 증평은 여전히 그 객청에 홀로 앉아서 백방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방 생이 다소 굳은 표정을 하고 혼자서 돌아오자 그녀는 매우 의아한 기색 이었다. 그러나 백방생이 말없이 객청을 나서자 그녀도 묵묵히 뒤를 따 랐다. 두 사람이 장원을 떠나는데 있어서 말리거나 간섭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까 그들은 비록 반갑게 환영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초청 된 손님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행색이 초라하게만 보였다. 저택의 대문을 나서자 이윽고 증평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진낭자와의 얘기는 잘 되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얘기가 잘되지 못할 것은 또 뭐가 있겠소?" 증평은 그가 진소유와의 일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얼른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이제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백방생은 그저 장원을 떠나왔지만 아무런 생각도 없이 걷고 있다가 문 득 그 얘기를 듣고 경각했다. 이곳 낙양에는 진소유 등을 제외한다면 아는 사람이 없다. 객점의 방을 구하는 것은 쉬운 노릇이지만 백방생은 왠지 허전한 기분이 몰려드는 것 같았다. 그 때 문득 그의 뇌리에 한 가 지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겠다며 찾아오라고 하 던 황진의에 관한 것이었다. "마침 가야할 곳이 있소." 백방생이 계속 대로상으로 걸음을 옮기자 증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의 뒤를 따르다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저어, 그 진낭자는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더군요. 하지만 나는 백공자 의 말이 하나는 맞지만 다른 하나는 틀리다는 것을 알았어요." 백방생은 그녀를 주시하며 말했다. "뭐가 맞고 틀리다는 말이오?" 증평은 말했다. "그녀는 대단히 아름다운 여자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게다가 매우 총 명하고.... 하지만 그녀는 결코 선녀(仙女)는 아니예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졌다. "아니 내가 그녀를 선녀라고 했었다는 말이오?" 증평은 말했다. "백공자는 그녀에게 열렬한 사랑을 보이시는데 그것은 마치 그녀가 선녀가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일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역시 세 속의 사람이었어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반드시 선녀가 아니면 안되기라도 하다는 말이오?" 증평은 말했다. "제가 보기에 그녀는 당신이 그토록 헌신적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럴까?" 증평은 그의 얼굴을 옆으로 올려다 보며 물었다.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한 것인가요?" 백방생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물론이오. 게다가 낭자는 사람을 정확히 본 것도 아니니 쓸데없는 소리 를 한 셈이오. 그녀는 사실 보기보다는 훌륭한 여자요." 증평은 잠시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왠지 처연한 듯한 기색이 그녀의 옆얼굴에 머물고 있었다. 백방생은 이에 말했다. "낭자는 일행이 있는 것 같던데, 그래도 앞으로도 나를 수행해 줄 수가 있겠소?" 증평은 그의 얼굴을 돌아보더니 다시 빙그레 웃었다. "저의 사형들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현재 왕옥파의 장문인인 철배창룡(鐵背蒼龍) 하굉명(夏宏 明), 하노사(夏老師)는 낭자와는 어떤 관계요?" 증평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무림인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강호의 지식이 해박하군요. 그 분 은 바로 저의 사부님이세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었군." 증평은 말을 이었다. "이번에 우리 사형제가 강호로 나온것은 물론 정의맹의 창단식과 무관 하지는 않아요. 강남에서 철혈부가 크게 득세하고 있고, 그들이 종래에 는 강북으로까지 침입하려고 하므로 우리로서도 자구책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 철혈부의 위세가 그렇게도 막강해졌다는 말이오?" 증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몇달 사이에 그들은 경이적인 세력을 형성했죠. 이제는 강남은 그 저 철혈부의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즉 우리가 방관만 한다면 반드시 머지 않아서 그들이 쳐들어올 것은 뻔한 일이라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헌데 어째서 낭자는 일행과 함께 복우산의 창단식이 열리는 곳으로 가지 않고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이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오?" 증평은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 "현재 이 부근에는 그야말로 천하에서 무수한 무림고수들이 운집해 있는 상태예요. 저와 같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그만이죠. 게다가 지금 저의 사형들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죠." 백방생은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물었다. "도검창곤의 사대신병(四大神兵)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말이 오?" 증평은 그의 얼굴을 옆으로 올려다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래서 저는 부득이 일행과 헤어지게 된 것이죠. 아마 저는 그 일에 방해만 될 것이므로, 나중에 제가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간다면 사부님도 나무라지는 않을 거예요." 백방생은 다시 표정이 평온해진 듯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면 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청의경장을 하고 있는 소녀는 비록 아름답기는 하지만 진소유에 비하면 차이가 있다. 하지만 비록 강호의 초년생인 애 송이일 지라도 어딘가 지혜로운 기질이 숨어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 다. 백방생이 대꾸를 하지도 않았는데 증평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아주 어렸을 적에 부모를 잃은 천애고아였었죠. 사부님께서 우연히 저를 보시고 데려가서 구해주셨죠. 저는 그 은혜를 항상 잊지않 고 있어요. 하지만 역시 저도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었으므로 일단 강호에 나와서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백방생은 물었다. "당신의 그 사부나 사형들이 기분나빠하지 않겠소?" 증평은 말했다. "물론 그분들의 심정이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백방생은 말했다. "세상살이는 험악하오. 대개의 사람들은 방패막이로 그들과 얽매이기를 원하는데 낭자는 그 반대라는 말이오?" 증평은 말했다. "저는 저 스스로 독립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들에게 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청의경장소녀의 말은 분명히 어 떤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기보다 지혜로운 것 같았고 또한 용기가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간혹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보았고 마치 새롭게 그녀를 대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녀의 얼굴에 문득 진소유의 얼굴이 겹쳐서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 두 사람은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계속 느릿하게 대로를 걸어서 어느덧 시간이 흐르자 눈에 익은 장소에 도달하게 되었다. 바로 백방생이 황진의와 술을 마시던 그 주점의 앞이었다. 27 장 전설속의 천재(天才)들 주루에 올라가 보니 황진의와 남궁검상 등은 이미 주루를 떠나고 보이 지 않았다. 단지 점심때가 약간 지나서 제법 많은 손님들이 자리를 꽉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백방생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건너편에 있는 한 객점으로 향했다. 아까 황진의가 그곳에 있겠다는 얘기를 했었기 때 문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일찍부터 객방을 얻어서 머물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백방생이 객점에 가서 물어 보니 정 말로 황진의와 같은 낭자가 이미 방하나를 빌려서 들어와 있다는 것이 었다. 백방생은 증평과 함께 그 방으로 향했는데 과연 황진의를 이내 만날 수가 있었다. 황진의는 침상 앞의 탁자에 홀로 앉아서 창밖을 내려다 보며 술을 마 시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쓸쓸해 보였다. 백방생이 증평과 함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황진의는 마악 술잔을 비우려다 말고 반 색하는 표정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백공자, 어서 오세요?" 백방생은 여자 혼자서 머물고 있는 방안에 들어가기가 곤란했으나 그녀가 그렇게 서스럼없이 맞아 주자 행동하기가 편안해 졌다. 황진의는 증평에게도 마찬가지로 친절하게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자리하고 나자 백방생은 황진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른 친구분들은 모두 헤어졌습니까?" 황진의는 옆의 증평을 한번 바라본 뒤에 말했다. "그들은 아까 백공자가 떠난 이후에곧장 볼일을 보러 다른곳으로 가버 렸어요. 증낭자가 그들과 만나야 하나요?" 증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이미 이 분 백공자의 수신호위가 되었답니다. 그러니 일부러 그들을 찾아갈 필요는 없어요. 시간도 없고요." "그렇게 되었었군요." 황진의는 다소 특이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말했다. "그렇다면 매우 잘 된 일이예요. 백공자는 무공이 없으니 증낭자가 잘 보살펴 주신다면 매우 좋을 거예요." 증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그는 무공을 어느 정도는 할 줄 아는걸요." 이어 증평은 백방생이 나설 사이도 없이 간략하게 아까 노상에서 벌어 졌던 자객들의 암습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황진의는 그 얘기를 듣자 안색이 다소 굳어지는듯 하더니 이어 웃으 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실 백공자는 은근히 노리는 사람들이 많으니 위험한 편이죠. 게다가 본래 백공자는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나 나중에 그 무공을 상실당하게 된 것이예요. 그 말이 맞죠?" 백방생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말에는 못당하겠군." 황진의는 웃으며 대꾸했다. "과찬의 말씀이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증낭자가 항상 옆에서 보호해 주는 것이 좋겠군요." 백방생은 화제를 돌려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낭자가 나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찾아온 것인데 그게 사실이오?" 황진의는 만면에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예요. 저의 그러한 말을 잊지 않고 찾아와 주니, 당신은 매우 착한 사람이로군요." 백방생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그렇다고 볼 수도 없소.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온 것이니." 황진의는 웃으며 문득 물었다. "당신의 갔던 일은 잘 되었나요?" (이 여자는 마치 이미 나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말투로군.) 백방생은 내심 고소하며 말했다. "잘 되었소. 사실 뭐 그리 잘 될 일도 없었지만 말이오." 황진의는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앞으로 그 진낭자와 함께 살 건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그녀는 그녀이고 나는 난데 어찌 함께 살 수가 있겠소? 나는 이 근처에 머물 작정이오." 황진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잠시 마음 속을 살피는 듯 하다가 이윽고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치료하기가 한결 수월해 지겠군요. 우선 옆에 있는 방을 하나 빌려 주시겠어요?" 증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은 내가 하고 오겠어요." 증평이 방밖으로 나가고 나자 문득 왠지 어색한 침묵이 실내에 흐르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 침묵을 깨기 위해 탁자위의 술병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군가를 그리워 하고 있었소?" 황진의는 가볍게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왜요?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아직 여자가 홀로 방안에서 술을 즐긴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소. 즉, 그런 여자는 어떤 그리움을 마시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 오." 황진의는 잠시 백방생을 정시하더니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군요. 그래요, 사실 말하기는 부끄 럽지만 제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사실이예요." 백방생은 물었다. "혹시 그 당사자는 내가 아니오?" 황진의는 가볍게 웃었다. "당신은 농담도 잘 하는군요. 저는 당신과 만난지 이제 얼마 되지도 않 았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어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 당신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행복한 사람은 대체 누구 요?" 황진의는 문득 꿈결에 젖은 듯한 눈빛을 하더니 대답했다. "그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의 기재예요. 남자중의 남자이고, 그리고 아 주 수려하게 생긴 영웅(英雄)이기도 하죠." 백방생은 다소 놀라며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도 별로 믿어지지 않겠죠?" 백방생은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으나 이내 황진의의 태도가 뜻밖에도 심각한 것을 보고 의아해 졌다. 그는 다소 생각하며 말했다. (하긴 천하가 넓으니 그런 인물(人物)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겠지.) 황진의는 이에 그를 향해 오히려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알아낼 수가 있겠어요?" 백방생은 약간 어리둥절해 졌다. 그는 사실 이 황진의에게 그런 상사의 감정이 있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하기는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물론 천하에 그런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오." 황진의는 묵묵히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것은 곧 그에게 어떤 요구 사항이 있다는 뜻이었다. 백방생은 말을 이었다. "혹시 세외팔세의 하나이자 최강(最强)의 세력이라는 천륭무가(天隆武 家)의 소공자가 아니오?" 천하최강세력의 후계자, 그런 사람이라면 거의 요건에 들어맞는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천륭무가의 소공자가 비록 후계자로서 대단히 뛰어난 능력 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코 최고의영웅은 아니예요. 영웅(英雄)이란 그 타고난 능력보다는 마음의 포용력이 더욱 중요한 법이거든요." 백방생은 다소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당금의 천륭무가의 소가주(少家主)보다 훌륭한 영걸이 있다 는 얘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금방 호기심이 들어서 말했다. "그럼 그 영웅은 대체 누구라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당신이 한번 더 생각해 보세요." 천하에 그렇게 대단한 인물들이 많을 수는 없다. 백방생은 그런 면에 서 황진의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즉시 그가 알고 있 는 강호의 지식을 동원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실로 적당한 인물을 찾아 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생각다 못해 말했다. "혹시, 그렇다면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기재라는 대공자(大公子) 무영검 (無影劒) 남궁검민(南宮劒民)이 아니오?" 백방생이 그런 말을 한 것은 그 이외에는 성수곡(聖手谷)의 소공자 소신의(少神醫) 황백승(黃百勝) 정도가 있을 뿐인데, 그 사람은 바로 황 진의의 친오빠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누구를 사모한다면 그 대상이 자신의 친오빠일 리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황진의는 다시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어 말했다. "남궁검민은 강호의 절정고수로서 보기드문 후기지수(後起之秀)이기는 하죠. 그러나 아직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어요. 큰 재목이 될지도 아직 알 수가 없고요." 백방생은 그만 어리둥절해 져서 당황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소생으로서는 알 수가 없구려. 대체 낭자를 감탄케한 당대의 그 영웅호걸은 누구시오?" 황진의는 가볍게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웃은 뒤에 말했다. "사실은 당신이 쉽게 알아내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해요. 그는 당신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인물이죠." 백방생은 의아해져서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을 놀리는 듯한 그녀의 눈빛은 다소 꿈길을 더듬는 듯 몽롱한 빛을 띠었다. 그러다 가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삼십 오년전의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나 요?" 백방생이 강호의 사정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오래전의 어떤 사건에 대해서 지금 훤하게 알고 있을 리는 없었다. "모르오. 그 때 무슨 경천동지할 일이라도 있었다는 말이오?" 삼십 오년전의 일이라면 황진의도 아직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었을 것 이다. 황진의는 마치 그 일을 자신이 친히 겪은 듯이 말했다. "그 당시 어떤 유명한 노학자(老學者)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장차 천하에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칠색령기(七色靈氣)를 지닌 일곱명의 천재 (天才)들이 나타나 마침내 중원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요." 백방생은 열심히 듣고 있다가 문득 어이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겨우 그런 얘기였소? 그런 심심풀이로 오가는 얘기들을 믿는다 는 말이오?" 황진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 노학자는 당시에 역리(易理)에 관한 한 지대한 능력을 인정받는 터 였고, 게다가 그런 예언을 한 사람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 부분의 역학자들이 인정을 했죠. 즉 그야말로 우주(宇宙)의 질서에 극 히 보기 드문 현상이 벌어진다는 거죠. 그리고 그 일곱명의 천재들이 탄 생한다는 싯점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삼십 오년전의 일이예요." 백방생은 문득 어이가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럼 그들이 지금 모두 서른여섯이 되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들 가운데의 한 사람이 제가 사모하는 분이예요." 백방생은 그만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사실 황진의의 나이를 생각 해서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들을 생각했지 그렇게 나이많은 사람 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사실 얘기는 달라진다. 게다 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무슨 그 칠색령기(七色靈氣)를 타고난 사람 들 중 하나라고 하니 더욱 궁금한 느낌이 들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그리 속단할 수가 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그 칠색령기를 타고난 사람들은 특별하여 결코 일반사람들과 같을 수는 없어요. 당연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이죠. 즉 천양신골(天陽神骨)과 천음신골(天陰神骨), 오행신골(五行神骨)을 각각 타고나게 되는 것이니 까요." 백방생은 그 얘기를 듣고 나자 문득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천상오룡과 소림사의 지공(知空)스님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그가 알고 있는 삼십대 중반의 가장 뛰어난 무림인들에 속하는 사 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들이 그 예언된 일곱명의 천재들 중의 사람들이라면 결국 이 천하는 그들의 차지가 되고 만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그 얘기가 전혀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소림사의 지공에 대해 서는 아직 잘 모르지만, 솔직히 천상오룡의 경우는 너무나도 특별한 구 석이 많았다. 우선 다섯명이 쌍둥이로서 나이가 같다는 사실도 그렇고 그 품성도 우 연인지는 몰라도 공교롭게도 오행의 특성을 거의 닮고 있었다. 게다가 또한 그들의 능력은 지나치게 뛰어난 것이었으므로, 설령 백방생의 선친 인 그들의 사부가 워낙 잘 가르쳤다고 해도 그러한 성취는 거의 비정상 적인 것이다. (사실 믿을 수 없는 얘기이기는 하지만, 전혀 아니라고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로군.)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다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낭자가 지공스님을 사모했을 리는 없고 또 한 달마오수와도 무슨 인연이 있었을 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천하에 또 다른 한명의 인재가 있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이어 즉시 물었다. "그럼 낭자가 사모한다는 그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오?" 사실 일개 여자가 스스로 남자를 사모한다는 얘기를 한다는 것은 흔 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황진의는 강호의 여인으로서 초탈한 성품을 가지고 있기에 백방생에게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황진의는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이 주저않고 대답했다. "그 사람은 바로 천양신골(天陽神骨)을 타고난 사람이죠. 제가 지금 말 하면 당신도 이내 아실 거예요." 백방생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죠. 하지만 세상에 알려져 있는 것은 그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욱 많고, 게다가 잘못 알려져 있 는 것들이 많아요." 백방생은 더욱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는 듯이 말했다. "이제는 그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지 않겠소?" 황진의는 이내 대답했다. "그는 바로 용천기(龍天奇)예요." 백방생은 순간 크게 놀라서 소리치듯이 말했다. "뭐라고? 당금의 철혈부주(鐵血府主)인 녹림왕(綠林王) 만리독보행(萬 里獨步行)을 말하는 것이오?" 황진의는 주저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백방생은 다소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가 아직 그러한 사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 만리독보행 용천기라는 사람은 바로 당금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서 백방생이 알지 않 으려고 해도 이미 그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바로 당금 강남의 흑 도무림의 연맹체인 철혈부의 주인인 것이다. 백방생이 놀란 것은 설마 황진의가 그런 흑도의 거물(巨物)을 사모할 까 했었기 때문이었다. 하기는 이미 강호인물록에도 그가 혜성같이 등 장한 흑도의 최고의 기재라고 적혀있지 않았던가? 백방생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얘기가 사실이었구려. 그 용천기라는 사람이 성수곡(聖 手谷)에 있었다는 것이!" 황진의는 시원시원했다. 그녀는 너무나도 시원시원하게 대답했기 때문 에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래요. 그는 바로 나의 사형(師兄)이었지요." 백방생은 그저 멍한 표정이 되었다. 황진의는 그를 향해 계속 말을 이 었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우리 성수곡에 들어왔었는데 너무나도 자질이 뛰어나서 무공이 나중에는 그의 사부였던 저의 아버님을 능가하게 되 었지요. 그리고 그는 나중에 사문(師門)을 배반하고 녹림맹(綠林盟)으 로 들어가게 된 거예요." 백방생은 그녀를 주시하며 말했다. "듣자니 그 용천기는 바로 녹림맹주인 만리신통(萬里神通) 용비천(龍飛 天)의 외아들로서,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용비천에 의해 은밀히성 수곡에 어렸을때 보내졌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용비천은 뜻밖에도 귀한 아들을 얻게 되자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 몰래 버리는 것처럼 꾸며서 본곡(本谷)에 보냈었었죠. 그리고 나중 에는 다시 연락을 취해서 자신의 그 아들을 장성한 뒤에 데려간 거예 요." 백방생은 그 용비천의 귀한 아들이라는 용천기의 무공이 이미 거의 최고 경지인 대홍락의 심검(心劒)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익히 알 고 있었다. 강호인물록에는 그러한 내용을 비교적 차근차근히 적어놓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수라교(修羅敎)나 흑루(黑樓), 만화교(萬花敎), 녹림맹의 흑 도의 사대거파(四大巨派)의 수뇌들은 그 무공이 심검의 경지에 올라 있다 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기실 그것도 그들의 나이가 대부분 팔십대 의 고령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지금 용천기의 경우처럼 삼십대 중 반에 그러한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바로 황 진의가 그를 천하제일의 기재라고 인정할만 한 것이다. 백방생은 다시 물었다. "그럼 결국 그는 사문을 배신한 패륜아로서 이제는 낭자의 사형도 아닌데 그를 그렇게 훌륭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소?" 황진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 분은 결코 그런 나쁜 사람은 아니예요. 단지 대의 (大義)를 위해 작은 것들을 버리신 것이죠." 백방생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이 되었다. "아니, 지금처럼 이렇게 천하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것도 대의라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 분은 무림의 천하통일(天下統一)을 이루려는 것 같아 요. 그런 거대한 목표를 위해서 작은 문제들은 포용하려고 하는 거 죠." 백방생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정의맹의 창단에 그렇게 관심이 없는 것이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헌데 그때 방문이 다시 열리면서 증평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방안의 분위기를 살피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었다. "그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옆에 방을 두 개나 얻어 놓았는데, 그것을 지금 다시 취소할까요?" 황진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일이 잘 되었군요. 우리는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 안심해요." 증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방생은 내심 왠지 씁쓰레한 기분이 들어서 웃으며 말했다. "그래, 방을 구하는 일은 귀찮지 않았소?" 증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마침 옆의 방이 두 개나 비어 있었어요." 증평이 빌려놓은 옆 방은 구조나 모양이 황진의의 방과 비슷했다. 백방 생은 이윽고 그 방의 침실에 길게 누웠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 였다. 황진의는 이미 자신의 방에서 의료기구 등을 이쪽으로 가져다 놓았고 증평은 옆에서 도와주기 위해 섰다. 황진의는 한참동안 백방생의 맥문(脈 門)에 손가락을 대고 진맥을 하다가 이윽고 말했다. "당신은 나를 믿을 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잠을 자는 듯 하다가 눈을 뜨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당신의 몸은 매우 특수할 뿐만 아니라 몹시 위험해요. 사실 내가 아무리 장담을 한다고 해도 만에 하나 사고가 생길 수도 있는 법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사실 불안하기는 하오." 황진의는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어쨌든 치료하지 않는다고 해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 오. 게다가, 솔직히 이제는 당신이 성수곡의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지기 도 하오." 그러나 기실 백방생은 그 때 문득 진소유의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특히 그녀가 했던 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대부분 틀리지 않다. 게다가, 나는 이미 복수를 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어떻게든 시도를 해야할 것이 아닌가?)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이제서야 내가 성수곡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니, 실로 눈물겨운 일이로군요?" 백방생은 문득 기다리기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은 그렇게 말이 많아야만 치료가 잘 되는 것이오?" 황진의는 다시 미소했다. "당신같은 사람도 두려움을 느끼다니 재미있군요. 자, 이제 만일을 대 비해서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나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 말을 반드시 해야하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나는 지금 본곡의 속명신단(續命神丹)을 복용시킨 다음에 금침대법(金針大法)과 개정대법(開頂大法)을 병행하여 시술할 생 각이예요. 그 시간은 대략 하루밤낮이 걸릴 텐데, 만일 성공한다면 당신 은 깨어나서 자신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복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 을 거예요. 만일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금 유언을 남겨두는 것 이 좋겠죠." 백방생은 문득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필시 죽지 않을 것이오. 그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나는 유언을 말 하지 않겠소." 황진의는 백방생이 마치 아이처럼 고집을 부리는 것을 보고 가볍게 웃 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증평에게 말했다. "어서 그의 옷이나 벗겨요." 증평은 느닷없는 그 말에 놀라서 말했다. "옷, 옷을 벗기라고요?" 황진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이예요. 이 치료는 워낙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나로서도 쉽게 장 담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다른 사소한 예절에 구애받을 수는 없는 노 릇이 아니겠어요?" "하,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증평은 주저하며 백방생의 얼굴을 살폈다. 어느새 백방생은 혼혈이 제압 당했는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대체 황진의는 어째서 그녀에게 백방 생의 옷을 벗기라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식했기 때문에, 증평은 더이상 시간만 끌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을 수그린 채 그녀는 백방생의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백방생은 태어날 때와 비슷한 알몸이 되었다. 그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지만 설마하니 두 명의 미녀가 그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줄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백방생의 몸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훌 륭한 것은 못되었다. 아니, 그의 몸은 오히려 약간 흉측해 보였다. 그의 육신은 약간 기형적으로 뚱뚱해 보였으며 게다가 피부의 색깔도 검붉 은 기운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증평은 처음에는 심한 수치감을 느꼈으나 이내 그의 몸의 상태가 심 상치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런 사실때문에, 잠시 그녀는 자신이 처녀의 몸으로 어째서 남자의 알몸을 보고 있는 것인지조차 망 각하고 있었다. 크게 당황해 하는 증평과는 달리 황진의는 역시 소문난 명의(名醫)답게 차분하고 신중했다. 그녀는 마치 눈앞에 지금 어떤 나무토막을 대하고 있는 듯이 세세하게 살피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품속에서 한 개의 약 병을 꺼내어 거기에서 다시 붉은 단환(丹丸) 하나를 꺼내 백방생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크기가 작은 호두알만한 그 붉은 단환은 백방생의 입 속에 들어가자 이내 스르르 녹아서 액체로 변해서 그의 목구멍으로 넘 어갔는데, 이윽고 백방생의 몸에 은은한 붉은 기운이 서리기 시작하자 황진의는 주위에 마련해 놓은 금침(金針)들을 집어들어 백방생의 몸에 하 나씩 꽂기 시작했다. 그 금침들은 하나같이 몹시 가늘고 부드러워서 흡사 머리카락과도 같은 것들이었는데 어떤 것들은 깊게 어떤 것들은 얕게 백방생의 몸속 으로 파고 들어갔다. 백방생의 몸에는 이윽고 수백개의 금침들이 온갖 방향으로 꽂히게 되었다. 증평은 이미 이 황진의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와 같은 실력자라면 아마 눈을 감고 던져도 정확하게 금침을 백방생의 몸 에 꽂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이렇게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금침술을 시전하는 것은 그만큼 백방생의 몸이 위중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황진의는 백방생의 몸에 금침들을 꽂는 데에 무려 두 시진이라는 시간 을 소모했고 이어 백방생의 천령개(天靈蓋)에 장심(掌心)을 대고 개정대 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개정대법이라는 것은 다소의 차이가 있겠으나 대부분이 가장 위 험한 치료방법으로서 극도의 주의를 요하고 또한 극도의 공력을 소모시 키는 것이었다. 증평은 황진의가 그렇게 개정대법을 시작하자 호법(護 法)을 서주기 위해 공력을 끌어올리고 긴장했다. 황진의는 백방생의 머리맡에 앉아 있었고 백방생도 이미 앉혀져 있었 다. 황진의의 양손에서는 느닷없이 은은한 황금빛의 투명한 기운이 발 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마치 둥근 그물을 뒤집어 씌우듯이 둥글 게 확산되어 두 사람의 몸을 덮어 버렸고, 이내 그 두 사람은 찬란한 황금빛의 광채 속에서 모습을 감춘 채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것을 바라보던 증평은 그만 놀라서 내심 소리쳤다. (아, 부공삼매(浮空三매)! 황소저의 무공이 이미 최절정(最絶頂)에 이 르렀다고 하더니 과연 그게 헛소리는 아니었구나? 아냐, 혹시 그 보다 더욱 무공이 높은 지도 몰라?) 확실히 황진의의 무공은 놀라운 경지였다. 그녀의 나이에 그러한 성취 를 이루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기 실 지금 그녀가 펼치고 있는 의술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 는 지식을 총동원하고 있었고, 가문 비전(秘傳)의 영약과 금침술과 개 정대법의 일부를 시전하고 있었다. 지금 백방생의 몸에는 엄청난 양 의 잠재력이 있지만 그러나 반대로 이어지고 있는 기운의 양은 극소였 다. 사실 그러한 점 때문에 황진의는 금침술을 전개하면서도 혹시 그녀의 금침술로 인해 그의 심맥(心脈)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을까 하고 우려 를 했다. 황진의가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점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고비를 일단 통과하게 되자 황진의는 다소 움직임이 빨 라지기 시작했다. 금침들을 제거한 후에 운기조식을 잠깐 했고, 이어 다시 다른 방법으로 금침대법을 전개하며 개정대법을 펼치는 것이 여러번 반복되자, 어느새 시간도 빠르게 흘러 정말로 예고되었던 하룻밤과 하루낮이 꿈결처럼 흘 러갔다. 치료가 모두 끝났지만 백방생의 몸은 외형상 그리 달라진 것 같지가 않았다. 단지 그의 몸에 있었던 외상(外傷)이 거의 다 나아서 빠른 치료 를 보였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황진의의 표정은 다소 피곤한 듯 하지 만 밝아 보였고, 그러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증평은 치료가 이미 성공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백방생의 몸은 다시 예전처럼 의복이 모두 입혀진 상태였다. 증평은 역 시 그 일을 도왔다. 처녀의 몸으로서 어이없게도 그런 일을 도와야 한 다는 사실에 오히려 반발심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녀였다. 지금은 피로 감마저 잊고 있었다. 백방생은 드디어 눈을 떴다. 마치 오랫동안 잠을 자다가 눈을 뜬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반쯤 졸리는 듯한 그의 얼굴에서 흘러나온 말은 더욱 엉뚱한 것이었다. "아니 어째서 모두 그러고 있소? 치료는 하지 않을 작정이오?" 증평은 마침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말했다. "이미 모두 치료를 마친 상태예요." 백방생은 그제서야 다소 놀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눈을 휘둥 그래 뜨고 잠시 자신의 몸을 점검해 보는 듯 하더니 이윽고 안면에 서 서히 희색을 띠기 시작했다. "그렇군. 정말로 단전(丹田)과 기경팔맥이 모두 복구되었군? 그렇다면 정말로 시간이 만 하루가 흘렀다는 말인가?" 시선을 돌려 황진의를 바라보자 다소 초췌해 보이는 모습으로 그녀 는 미소하며 말했다. "축하해요. 당신은 이제 비록 기초적이기는 하나 무공을 할 수 있게 되 었어요. 물론 조용히 살고자 한다면 장수를 누리게 될 것이고요." 백방생은 잠시 너무나도 감격한 듯이 황진의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포권하며 말했다. "고맙소. 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모르겠소." 황진의는 이에 미소하며 말했다. "그건 간단해요." 백방생은 즉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나는 이미 아시다시피 이제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고쳐주느라 돈을 별로 벌 지 못했어요. 그래서 간혹 부자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바 가지를 씌우게 되는 거죠. 일단 남을 도와주려고 해도 돈은 있어야 하니 까요. 그래서 말인데...." 백방생은 말을 자르며 물었다. "나에게 치료비를 내라는 말이오?"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둔하지 않군요." 백방생은 다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말했다. "둔하지 않다고? 내가?" 황진의는 말했다. "그럼 당신은 내가 거저 당신을 고쳐주리라고 생각했었다는 말인가 요?" 백방생은 침상위에 걸터앉으며 다시 말했다. "만일 내가 치료비를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소?" 황진의는 가볍게 미소했다. "그야 마땅한 대책이 있으니까 그랬던 거죠." 백방생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알고보니 강도에게 치료를 받았던 모양이군. 그래 치료비는 얼마 를 내면 되오?" 황진의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백방생은 말했다. "일천냥? 그리 많지는 않군?"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저 간단한 개복수술을 하는데도 일천냥은 받아요. 나는 당신을 치 료하기 위해 무려 열두시진이나 심혈을 기울이고 또한 속명신단을 한알이나 소비했으니 일천냥은 너무 적어요." 백방생은 물었다. "그럼 일만 냥이라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다시 가로 저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저번에 당신이 내게 주었던 금액에 다시 황금 일천 냥을 더한 것이예요. 그러면 우리 사이의 계산은 완전히 끝나게 되는 거죠." 황금 일천냥은 백은 일만냥보다 두배 이상이나 더 많은 액수이다. 백방생은 짐짓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말했다. "이건 그야말로 칼만 안들었지 강도나 다름없는 셈이로군. 세상에 치료 비가 그렇게 비싸다면 누구도 그런 치료는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오." 황진의는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도 천하에 나와 같은 의원을 찾는 것도 쉽지는 않을 거예요. 어서 엄살 그만 좀 부리고 돈이나 내놓도록 하세요." 28 장 황금 십만냥의 거래 증평은 백방생이 돈에 관한 한은 호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백방생은 정말로 그 치료비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과 연 백방생은 이내 품속을 뒤져서 백냥짜리 금표 열 장을 직접 세어서 건네주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어 말했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이 정도의 금액은 그다지 대수로운 것은 아니 오. 보다 중요한 것은 힘을 기르는데 있는 것이지." 황진의는 금표를 받아서 품속에 잘 갈무리하며 말했다. "내가 일단 기경팔맥을 복원시켜 주었으니 그 점에 있어서는 만족을 하시겠군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소. 나는 이제 겨우 삼류 정도의 공력을 회복한 것일 게요. 그런 정도로 무엇을 할 수가 있겠소?"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내게 호위라도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증평을 바라보았다. 증평은 이 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백방생의 시선이 와서 닿자 왠지 안절부절 을 못하는 기색이 되었다. 백방생은 다시 황진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도 당신은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것이오." 황진의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예요. 사실 나에게도 따로 해야할 일이 있어요." 백방생은 어제 그녀가 했던 말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녀는 용천기를 내심 사모하고 있으니, 아마도 어떤 해야할 일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백방생은 말했다. "낭자는 소위 말하는 무림계의 삼대법보(三大法寶)가 무엇이라고 생각 하시오?" 증평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저도 그 얘긴 들었어요. 그것은 바로 영단과 비급, 그리고 병장기가 아닌가요?" 황진의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강호(江湖)에서는 무공을 삼푼이요, 경험은 칠푼이라는 얘기도 있지요."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구하려는 것은 무력(武力)이지 무슨 경험은 아니지 않소?" 황진의는 미소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럼 당신은 지금 내게서 무슨 영단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것인가 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그것을 구입하고자 하는 것이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내게는 속명신단이 아홉알이 더 있기는 해요. 하지만 그것은 누 구에게 팔려고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성수곡의 속명신단은 예로부터 알려져 있는 것이오. 내가 만일 그것 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어찌 은자를 아끼겠소?" 황진의는 말했다. "속명신단은 치료에는 효과가 크지만 무슨 소위 공력을 급증시키는데 효과가 큰 영단은 아니예요. 그 효과는 사실 소림사의 대환단보다 못 하다고 할 수가 있지요." 백방생은 말했다. "내 몸은 사실 불안하고 병이 생기기 쉬운 편이오. 나에게는 사실 그 런 영단이 더욱 필요한 것이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집념이 강하군요. 좋아요? 대체 나의 이 속명신단을 모두 얼마에 사려는 거죠?" 백방생은 즉시 생각을 굴린 뒤에 입을 열었다. "황금 일천냥이오." 과거 백방생은 진소유에게서 그 금액으로 대비신단 한 알을 구입한 적이있었다. 비록 이번에 구입하는것은 모두 아홉알의 영단이었지만, 일단은 가장 낮은 가격으로 흥정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 한 그의 의도는 이내 맥이 빠지고 말았다. 뜻밖에도 황진의가 그 가격에 순순히 응했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과연 당신은 제법 그 가치를 아는군요. 당신이 그토록 원한다 니 그럼 그렇게 교환하기로 하죠." 말과 더불어 황진의는 품속에서 예의 그 자기로 만들어진 약병을 꺼 내 백방생에게 내밀었다. 백방생이 즉시 받아서 살펴보니 과연 그 안에 아홉알의 붉은 영단(靈丹)이 들어 있었다. "이거 혹시 가짜가 아닐까?"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어리둥절해 하는 증평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 윽고 자신도 금표를 꺼내서 황진의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백방생이 약병 을 갈무리 하자 황진의 역시 금표를 잘 갈무리하더니 말했다. "이제 모든 거래가 완전히 끝났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도 되겠죠?"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요. 고맙소? 사실 이런 치료는 금전으로 보답하기 어려운 것이 었는데...." 황진의는 자신의 물건들을 집어들고 방밖으로 나가며 미소와 함께 대꾸 했다. "그런 것을 알기는 아는군요." 이윽고, 황진의가 나가고 나자 증평은 다소 주저하다가 백방생을 향해 말했다. "치료를 무사히 마치신 것을 축하드려요. 하지만, 저는 뜻밖이었어요." 백방생은 황진의를 보낸 뒤에 다시 침상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뭐가 그리 뜻밖이었다는 말이오?" 증평은 말했다. "비록 그 치료나 영단이 귀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그 계산은 틀렸다고 생각해요." 백방생은 말했다. "내가 너무 많은 은자를 주었다는 말이오?" 증평은 말했다. "그 황금 천냥만 있으면 평생을 남부럽지 않게 살 수가 있을 거예 요."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병이 들고 나면 그런 은자도 모두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소?" 증평은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백공자는 그녀에게 단지 천냥만 주었어도 상관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백방생은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하며 그런 얘기를 해주는 것을 보고 미소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사실 내게는 그보다 더 많은 돈이 있소. 자, 지금 여기에 도 황금이 오천냥이나 있는데 한번 보시겠소?" 백방생이 말과 함께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서 금표의 뭉치를 모두 보여 주자 증평은 그만 크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막대한 금액을 본 것이었다. 무림인들은 비록 생활에 곤 란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자가 필요없을 정도는 아니다. 누구라도 생활하기 위해서는 은자는 필요한 물건인 것이다. 증평은 다소 상기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이어 백방생이 돈봉투를 갈 무리 하기를 기다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저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셨죠?" 백방생은 의아해 물었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이오?" 증평은 말했다. "이전에 저와 만났을 때는 이렇게 많은 돈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백방생은 문득 전날의 그 주루에서의 광경을 뇌리에 떠올렸다. 당시 그 는 복우산의 그 도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일부러 약간의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가?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바로 그 때 그 도적들을 상대하기 위해서였소. 내가 무엇 때문에 낭자에게 일부러 거짓말을 하겠소?" 증평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그 말을 듣자 백방생에게 시선을 던 졌다. 그녀의 눈빛이 어느새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랬었군요. 저는... 미처 몰랐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낭자가 황낭자를 도와서 나를 치료 해준 것은 매우 고맙소. 내가 이미 준 돈은 그 수고비로 대신하는 것이 어떻겠소?" 증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별로 한 일도 없고요...분명히 한달간 당신을 보호해 드리겠어요." 백방생은 그녀의 눈빛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 미소하며 말했다. "그렇게 해 주겠다면 나로서도 고마운 일이오. 자, 그만 피곤할 텐데 가 서 쉬는 것이 어떻겠소?" 증평은 약간 서운한 눈치였으나 이내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그럼 백공자도 쉬세요. 저는 옆방에서 자고 있을 테니, 만일 무슨 일 이 생긴다면 소리쳐서 부르도록 하세요." 백방생은 조용히 물러가는 그녀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백방 생은 증평의 호위가 필요없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정성이 그 토록 지극한데 어찌 마다할 수가 있으랴. 황진의가 그의 기경팔맥과 단전을 복구시켰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었 다. 비록 완전히 융통된 것은 아니었지만, 백방생은 비로소 그 길을 따라서 기초적인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백방생에게 어려운 것은 종(縱)의 경맥(經脈)들 보다는 횡(橫)의 낙맥 (絡脈)들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기경팔맥은 황진의에 의해 개통되었지 만, 그 팔맥을 하나로 포괄하게 하는 중간중간의 낙맥들의 흐름은 그 내 공(內功)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개통시키기가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백방생은 이제 겨우 기초적인 상승내공(上乘內功)의 운공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공력도 어느 정도 모을 수가 있었다. 그 경지는 사십년 정도로서 삼류무사의 수준이었다. 침상위에 정좌하고서 한 시진 가량을 운기행공에 몰두하다가 백방생은 이윽고 자신이 알고 있는 무학들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가 알고있는무학 들은 소림본원(少林本院)과 달마하원의것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자 부문의 무학들은 왠지 이제는 어딘가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그가 알고 있는 무학들이 한정되어 있으나, 기실 그는 무학의 본원(本源)을 탐색하여 거의 대부분의 무학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방생이 지금 운공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달마역근경 상의 내공(內功) 이었다. 그것은 그 스스로가 터득한 이제까지와는 다른 법문이기도 했 다. 그러나 그 무학들이 그렇다고 해서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백방생은 문득 그가 생각하고 있는 무학들 가운데 비교적 수월한 반야 장(般若掌)의 구결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소림사의 칠십이종(七十 二種)의 절예 가운데의 하나로서, 그다지 강한 내공력을 필요로 하지 않 는 것에 속했다. 일단 뇌리에 구결을 떠올리자 그의 우수는 자연스럽게 그 구결을 따라 서 움직이게 되었고 또한 내력이 단전에 고여 있다가 발출되었다. 헌데 순간의 일이었다. 백방생의 우수가 마악 중간에서 변초(變招)하여 서너 개의 환영(幻影)을 일으키려고 하는 순간에, 느닷없이 정신이 아득하더니 머리가 어지러워 지는 것이 아닌가? 본래 이 반야장은 처음 수련을 시작할 때에 그다지 강한 내공력을 필요 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비교적 변화 위주의 장법으로서 내공 력이 약하면 그만큼 가볍게 펼치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백 방생의 경우는 그와 조금 달라서 미묘한 것이었다. 기실 그는 이미 반 야장의 심오한 부분의 변화까지도 모조리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 신도 모르게 시전하는 순간에 그 많은 변화를 모조리 생각하게 되었고, 고도의 무학초식을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감당하지 못할 무거운 철퇴를 휘두르려고 하 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기초적인 변화와는 달리 심오한 부분에 있어 서는 반야장도 높은 내공을 필요로 하게 되어 있었다. 백방생은 갑자기 막대한 공력을 소모하게 되자 그만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작은 주화입마(走火入魔)의 현상이었다. 다행히 백방생은 그런 이치마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화도 당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반야장의 시전을 중단하고 즉시 운공조식을 하여 내공을 보충 한 다음에 다시 눈을 뜨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공력을 적게 소모하는 무공을 써야 하겠는데,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이어 다시 주화입마를 당해서인지 문득 심한 피로감과 함께 졸음이 쏟아졌다. (너무 한꺼번에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겠지. 일단은 쉬고 나서 생각하기로 하자.) 이미 시각은 자정에 가까와 지고 있었다. 백방생은 즉시 촛불을 끄고잠 자리에들었다. 황진의와 증평이 머물고 있을 좌우의 방에서는 모두 잠 들었는지 조금도 기척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일 정오에 정의맹의 창단식이 열린다고 하는데, 가봐야 할 지 모르 겠군?)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리다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백방생이 잠든 지 한 시진 가량 지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아마도 내공을 갖게 되어 신체의 감각도 그만큼 강하게 작용하게 되었던 모양이었다. 백방 생은 깊이 잠을 자다가 말고 문득 미미한 기척소리에 잠을 깼다.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고 조용했다. 아마 축시 정도로 생각되었다. 백방생은 처음에는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착각은 아니었다. 그의 방문은 어느 새 열려 있었고, 이어 서서히 닫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방문을 닫고 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거의 기척을 내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강도인가?) 백방생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방문을 모두 닫고 나서 몸을 돌리자 이내 그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몸매는 몹시 낯익었다. 백방생은 혹시 그녀가 증평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증 평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증평보다는 키가 두 치 정도는 더 컸고 또한 날씬했다. 몸놀림이 매우 섬세했는데, 그러나 그렇다고 황진의도 아니었 다. 황진의는 키가 그녀보다도 최소한 세 치는 더 클 것이다. 백방생은 느닷없이 자다말고 어떤 여자의 방문을 받게 되자 약간 당황 해져서 머뭇거렸다. 그는 지금 즉시 일어나서 소리쳐야 할 지 망설였다. 따라서 이윽고 그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자 그야말로 심 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마구 쿵쾅거렸다. 백방생은 그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백방생이 마악 손을 쓰려고 하는 찰나였다. 느닷없이 오히려 그 여자가 먼저 그를 향해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부러 모른 척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당신과 얘기를 하기 위해 온 것이니까요." 순간 백방생은 갑자기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 여자의 음성 은 그렇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다름아닌 진소유였다. 그 녀의 눈부신 백의(白衣)가 어둠속에서도 순결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 았다. (내가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백방생이 미처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그녀가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잠시 누운 채로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아, 바로 당신이었군." 진소유는 백방생의 얼굴을 자세히 주시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뜻밖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소." 하지만 백방생의 내심은 혼자서 소리치고 있었다. (뜻밖이오, 뜻밖이오. 정말로 이렇게 당신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 소!) 진소유는 그 말에 문득 나직한 탄식을 발했다. 그녀의 탄식하는 소리는 어찌나 부드럽고 아름다운지 마치 어떤 강철같은 심장이라도 단숨에 녹아버릴것 같았다. "그렇다면 얘기하기가 비교적 수월하겠군요. 당신은...이미 내가 이곳 을 찾아오게 될 줄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로군요?" 백방생은 반박할 수가 없어서 말을 돌렸다. "하지만 굳이 이런 자리에서 얘기해야할 필요가 있겠소?"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지금 당신과 한가지의 거래를 하기 위해 온 것이예요. 그 거래는 이런 자리가 아니면 곤란하기 때문이죠. 당신은...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있나요? 백방생은 마치 둘이서 한밤의 밀어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물론 이해하오. 내가 어찌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진소유는 백방생의 표정을 살피는 듯 하다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당신은 마음대로 행동하도록하세요. 누구도 당신의 행동을 속 박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사실, 당신에게는 부모의 복수보다는 차 라리 시골에 가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더욱 어울릴 거예요." 백방생은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당연히 당신과 나는 남남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제까지 내가 당신에 게 잘못해 왔던 일은 지금 사과드리겠어요. 앞으로는 우리 서로의 일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말기로 해요." 백방생은 더욱 어이가 없는 기분이 들어서 말했다. "관여하지 말자니, 그럼 우리가 앞으로 헤어지자는 말이오?" 진소유는 그 말에 음성이 다소 싸늘해 졌다. "당신은 내 얘기를 듣지 않고 있었군요. 당연히 우리는 만난 것도 아 니니 헤어질 것도 없는 것이죠." 백방생은 그녀가 다소 기분이 나빠진 것을 보고 흠칫하여 물었다. "그렇다면 낭자는 지금 나에게 부탁이 있다는 말이오?" 그말에 진소유의 눈빛과 음성이 다소 부드러워 졌다. "그것은 다만 당신이 사내대장부로서 한번 약속한 일은 지켜달라는 거예요. 물론, 원한다면 나도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수는 있어요." 백방생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더러 부모의 원한을 반드시 갚으라는 말이오?" 진소유는 이에 문득 눈빛이 극도로 차가와 졌다. 이어 자신도 모르게 우장을 들어서 백방생의 얼굴을 내리치려는듯 하다가 억지로 참는 기 색이었다. 백방생은 그제서야 그녀가 뭔가 아주 심각한 일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백방생은 가슴이 콩알만해 져서 내심 그녀의 의 중을 생각해 보았다. 진소유는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은 듯 다시 입을 열 고 있었다. "좋아요. 다시 말해 주죠. 나는 이미 우리가 서로의 일에 대해서 추호 도 관여하지 말자는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부모의 복수를 하든 말든 그것은 상관이 없는 일이 죠. 단지 당신이 나를 생각해 주고 있는 면에 있어서...." 백방생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나더러 앞으로는 절대로 당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물론 나 역시 앞으로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음, 그 러니까 앞으로 한적한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으며 숨어사는 것이 좋겠 어요." 백방생은 아연해 져서 말했다. "나더러 복수는 포기하라는 말이오?" 진소유는 그의 얼굴을 직시하며 대꾸했다. "당신은 스스로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하긴, 내게는 추호도 그럴 능력이 없지."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나는 앞으로 모든 것을 잊고 산수간에 묻혀 살아가라는 말이 오?" 진소유는 말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생각해 주는 면에 있어서, 그런 것을 잊을 수가 없다면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예요. 그것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니까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졌다.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오?" 진소유는 그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바로 당신이 그 약속을 지켜주면 되는 거예요." 백방생은 다시 물었다. "무슨 약속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당신은 이미 그 유산을 나에게 모두 맡기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백방생은 순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알고보니 진소유는 지금 그가 조 부에게서 받은 유산인 황금 십만 냥 때문에 온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 미 그 돈을 모두 그녀에게 주겠다고 약조를 한 바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것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황금 십만 냥, 그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하지만 백방생은 문득 왠지 서운해 지 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알고보니 그 돈을 주고 깨끗이 물러나면 앞으로 나에 대해서도 간 섭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로군. 그 돈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말인가?) 진소유는 차가운 시선으로 백방생의 표정을 살피더니 이어 물었다. "자, 이젠 생각이 달라졌나요? 빨리 말해요." 백방생은 내심 생각했다. (달라지지 않았소.) 하지만 뜻밖에도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말은 생각과는 정 반대 였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소." 진소유는 과연 그 말에 안광이 차가와지고 음성도 냉랭해 졌다. 그녀는 수치심을 억누르고 이곳을 찾아온것인데 그만 보람이 없어진 셈이었다.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죠?" 진소유의 음성에 서리가 풀풀 날리는듯 했으나 이제는 백방생은 오히 려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진소유의 얼굴을 직시하며 말했다. "나는 낭자를 이제까지 많이 생각해 왔었는데 이대로 보내줄 수는 없 소." 그 말에 문득 진소유는 오히려 안색이 굳어졌다. 그녀는 일순 가벼운 실 소까지 날리며 말했다. "흥, 그 얘기는 내가 이미 하지 않았나요? 당신의 기분을 풀어 주겠다 고 말이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정말이오?" 진소유는 뜻밖에도 선선히 대꾸했다. "물론이예요. 그 황금 십만 냥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니까요. 단, 거 기에는 조건이 있어요. 당신은 나를 소유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오직 오 늘 밤에 한한다는 것이예요. 만일 나중에도 딴소리를 한다면 그것은, 스 스로의 명을 재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거예요." 말을 하는 동안에 진소유의 눈에서는 일종의 강한 살기마저 느껴졌기 때문에 백방생은 내심 생각했다. (이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로군.) "알겠소." 백방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과연 진소유는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 다. 과거 백방생은 그녀의 알몸을 한번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경우와는 같지 않았다. 당시 백방생은 거의 폐인의 몸이었을 뿐 만 아니라 거의 절망적인 상태였다. 단지 놀란 심정으로 그녀의 알몸을 바라보았을 뿐이었지, 당시 거기에서 그녀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백방생은 이미 건강해진 몸이었고 또한 내심으로 강한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런 지나친 욕구에 대한 감정은 빨리 풀어버리는 것이 나으리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 것은 당연히 그의 앞으로의 행로에 속박이 될 수가 있겠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이 이미 그녀에게 유산을 돌려주었음에도 굳이 지금 그것을 핑계 삼아 보려는 의도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진소유는 금새 알몸이 되었다. 그것은 이미 그녀의 의지가 굳어진 것이 기 때문이기도 했다. 백방생은 그녀의 눈부신 알몸이 마치 나무토막과 같다고 느꼈다. 필시 그녀의 몸은 차갑게 굳어져 있을 것이다. 백방생이 잠시 망연해 있는 사이에 이미 그녀의 몸은 침상의 이불속으 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누운 채로 가만히 있었다. 백방생 은 처음에는 다소 망설이다가 이윽고 서서히 그녀를 어루만졌다. 그녀 의 몸은 매우 부드러웠고 또한 뜨거웠다. 백방생은 이내 그 뜨거운 체온 에 용기를 얻어서 더욱 적극적으로 그녀를 안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도 옷을 벗고 알몸이 되었으며 그녀와 한몸이 되려는 시도를 하기에 이 르렀다. 헌데 그 무렵의 일이었다. 백방생은 문득 얼음처럼 차가운 물기를 느끼 고 고개를 들었는데, 느닷없이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소유(陳小柔). 그녀는 몸은 뜨거웠으나 마음은 차가왔다. 그녀의 마 음은 울고 있었던 것이다. 백방생은 이미 몸과 마음이 흥분될대로 흥분되어서 마치 활시위를 당기려는 듯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의 눈물을 본 순간 그의 그러한 흥분된 마음은 그대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그대로 행동을 멈추었으며 이내 입으로는 깊은 한숨을 불어 내쉬었다. 만일 백방생이 그 순간에 행동을 멈추지 않고 끝내 그녀의 몸을 소유 했었다면 그는 드디어 그녀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행동이 멈춰진 이상에는 도리어 그는 그녀에게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사랑도 뭣도 아닌 무거운 사슬이었다. 아주불길한 조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백방 생의 마음속 한쪽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외치고 있는 듯 했다. (차라리 벗어날 수 없다고 해도 좋다. 이건... 이건 아니야!) 백방생이 갑자기 도로 옷을 입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문득 진소유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당신 지금 뭣하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 진소유는 문득 눈빛을 기이하게 빛냈다. "당신은 후회하지 않겠나요?" 백방생은 이미 후회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는 이미 옷을 다 입은 후였 기 때문이다. 백방생은 그녀에게 옷을 던져주며 말했다. "그보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지 나에게 가르쳐 주겠 소?" 순간 진소유는 표정이 갑자기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는 한기가 풀풀 날 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이미 말했을 텐데요? 앞으로 내 일에 관여하려고 한다면 용서하 지 않겠다고 말이예요." 진소유의 두눈에는 어느새 조금전의 그 눈물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 조차 보이지 않았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 돈은 이미 당신의 것이니 알아서 하도록 하시오." 진소유는 자신의 옷을 집어들고 침상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어째서 당신은 이렇게 하는 거죠? 몸은 더러운 가죽부대와 같아서집 착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육신 보다는 마음을 얻으려는 것이오." 진소유는 순간 매우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 미쳤군요? 감히... 나를 능멸하려고 하다니?" 백방생은 여유있게 대꾸했다. "내가 만일 당신을 능멸하려고 했었다면 이렇게 시간을 끌지도 않았을 것이오. 과거 나는 당신을 특이하게 느끼기 시작했소. 게다가 그 이유 를 알지 못했소. 하지만 이제는 왠지 알듯 하오." 진소유는 잠시 망연한 표정으로 백방생을 노려보다가 이윽고 정색을 하며 다시 말했다. "사람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그 마음도 역시 허망한 거예요. 그러니 어 서 마음을 돌리도록 해요. 자,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당신에게 좀더 기회를 주도록 하죠." 백방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에게 더이상 기회를 줄 필요는 없소. 그보다 나는 지금 한가지 낭자 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소유(小柔)! 어째서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오?" 백방생이 갑자기 그렇게 애칭을 부르며 말하자, 진소유는 표정이 더욱 냉막하게 변해버렸다. 그녀는 즉시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이어 옷을 모 두 걸치고 나자 문득 그녀의 우수가 가볍게 움직이며 백방생의 목에 차가운 기운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허리띠처럼 사용하던 한자루의 연검(軟劍)이었다. "이 바보같은 자식! 그렇게 말을 해도 못 알아 듣다니? 죽고 싶으 냐?" 갑자기 서슬이 시퍼런 그녀의 말과 행동에 백방생은 일순 등골이 오싹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진소유가 너무나도 화가 난 나머지 정말로 그 의 목을 베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진소유는 정말 로 그의 목을 베지는 않았다. 백방생은 짐짓 여유있게 웃으며 말했다. "알겠소. 내 귀찮게 하지는 않을 테니 제발 이 칼좀 치우시오." 진소유는 잠시 백방생을 노려보더니 이윽고 연검을 도로 허리춤으로 거두면서 차갑게 말했다. "좋다. 하지만 네놈도 이것은 알아 둬야 할 것이다. 나는 단지 아쉬워 서 몸을 허락했을 뿐이지 너와 같이 어수룩한 녀석에게는 조금도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만일 네놈이 앞으로조금이라도 나의 일에 간섭을 한다 면, 나는 결단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의 목을 베어 버리고 말 것 이다?" 그야말로 독기가 풀풀 날리는 그말을 남기고 진소유는 훌쩍 사라져 버렸다. 신법이 정교한 그녀의 모습은 표흘하여 마치 바람과 같았다. 단지 아직도 그녀가 누워있던 자리에는 그 체온이 식지 않았을 뿐이었 다. 백방생은 문득 그녀의 체취를 상기하고는 침상위에 벌렁 드러누우 며 중얼거렸다. (하긴 그렇겠군. 나와 같이 무능력하고 못생긴 작자에게 그녀가 어찌 관심이나 두겠는가?) 백방생은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 그는 밤새도록 진소유에 대해서 생각을 거듭했는데, 그런 생각이 거듭될 수록 왠지 그의 몸은 허공에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내심 그러 한 자기 자신에 대해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는 그녀에 관한 생각을 멈추 기도 어려웠다. (내가 혹시 그녀에 대해 상사병(相思病)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닐 까?) 최초에 그녀를 만났을 때는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마음속에는 진소유의 모습이 마치 하나의 신념처럼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방생은 드디어 새벽녘에 한가지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나더러 시골에 숨어 살라고 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아니 오히려 앞으로 더욱 나서서 나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살 려서 부모의 원한도 갚고 또한 강호의영웅(英雄)도되겠다. 그래야 그녀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백방생은 특히 진소유가 눈물을 흘렸던 이유에 대해서 궁금한 생각 이 들었다. (반드시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지 알아내고 야 말겠다!) 백방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려는데 문득 증평이 문을 열고 안 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는 간밤에 잠을 자지 않은 듯 의복이 이슬에 젖어 있었고 또한 몹시 피곤해 보였다. 백방생은 이제까지 그녀가옆방 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 줄로 생각하다가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증낭자, 무슨 일이오?" 증평은 안색이 다소 초췌해 보였으나 그렇다고 해도 아직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차례 호흡을 가다듬고 이어 주저하는 듯 하 더니 말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떠나려고 하다가 이렇게 돌아왔어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서 미안해요?" 29 장 혈풍천하(血風天下) 백방생은 이미 이 증평이라는 처녀의 성품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매 우 성실하고 신의가 있는 편이어서 쉽게 약속을 저버릴 사람은 아니었 다. 게다가 그녀는 백방생을 호위해 주는 일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 지 않았던가? 갑자기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백방생은 말했다. "낭자는 이미 나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었으니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오. 헌데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증평은 그 말에 일순 눈자위가 붉어 지며 처연한 기색이 되었다. "실은, 철혈부(鐵血府)의 놈들이 갑자기 대거 공격해 들어와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우리 왕옥파(王屋派)에 변괴가 생겼어요. 저는 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마도 그녀는 간밤에 연락을 받아 마악 어디를 다녀온 모양이었고, 또 한 지금도 매우 바쁜 모양이었다. 이 철혈부의 일은 황진의와도 어느 정 도 관계가 있다. 백방생은 문득 황진의를 상기해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말릴 수가 없구려. 부디 돌아가서 일을 잘 처리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겠소." 증평은 다소 주저주저 하다가 말했다. "저는 사실 능력이 없어서 공자님을 도와드릴 수는 없었어요. 그러니, 앞으로 황낭자에게 부탁을 해서 그녀의 호위를 받는다면 보다 안전해지 게 되실 거예요." 백방생은 그 말을 듣자 내심 가볍게 탄식했다. (저 낭자는 자신의 일이 바쁜데도 나의 일을 신경써 주고 있구나. 어째 서 나는 그처럼 마음착한 여자들만 만나게 되는 것일까?) 증평은 말을 끝내자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듯 하다가 이내 다시 방문을 열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이어 세수를 하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정말로 그 증낭자의 말처럼 내가 그 황낭자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일 까?) 세수를 마치고 나서 옆방으로 건너가니 마침 황진의는 단정하게 차려 입고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간밤에 잘 잤소?" 백방생이 짐짓 유쾌한 듯한 표정으로 인사하자 황진의는 음식을 들다 가 말고 미소하며 대꾸했다. "몸의 상태가 제법 좋아 보이는 군요. 부작용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 예요." 백방생은 황진의의 맞은 편에 앉았다. "좀 들어도 되겠소?" 황진의는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늘 따라 유난히 표정이 맑아 보였다. "드세요. 그렇지 않아도 백공자를 부르러 갈까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어 요." 음식들은 비록 최고급품들은 아니었지만 양이 많았고 그리고 제법 맛도 훌륭했다. 백방생은 주저없이 몇 조각의 음식들을 집어 먹다가 말했다. "헌데, 밖의 소식은 들었소? 철혈부에서 대거 이쪽으로 침공해 들어 왔 다고 하던데?" 황진의는 이내 그의 말뜻을 짐작하고 웃으며 말했다. "정의맹이 창단되면 불리할 테니 그들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 한 일이겠지요. 증낭자는 그 일로 왕옥파로 돌아갔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소. 그녀는 조금전에 다시 나를 찾아 왔었는데, 나더러 당신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더군요."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그녀는 실로 당신에게 애틋한 정(情)을 가지고 있군요. 당신은 그런 것 을 모른척 하면 안 될 거예요. 그나저나, 앞으로는 어떻게 하기로 했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해볼 생각이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나를 당신의 호위무사로 고용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거예요. 나 는 따로 해야할 일들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요. 다만 지금은 별 로 큰 일이 없으니 조금이나마 당신의 일을 돕도록 하죠." 백방생은 말했다. "당신은 정의맹의 창단식에 가볼 생각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비록 그 일 자체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러나 그곳에는 무림 정파(正 派)의 많은 인물들이 모였을 테니 일단 가서 안계라도 넓히는 것이 좋 겠군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실은 같은 생각이오. 헌데 낭자는 만일 철혈부의 인물들을 만나 게 되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황진의는 그 말에 안색이 다소 달라졌다. 그녀는 다소 정색을 하고서 말 했다. "내가 비록 용사형을 그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철혈부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예요. 철혈부는 당금의 막강한 사마외도(邪魔外 道)의 단체로서 나의 용사형과 같게 생각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곧 유사시에는 철혈부를 타도하겠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었 다. 백방생은 그 엄정한 듯한 기색을 보자 문득 다시 진소유의 그 냉엄 한 기질을 떠올렸다. (아, 나는 그녀에게 아직 정의맹의 창단식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군. 그 녀가 앞으로 어떻게 할 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백방생이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황진의가 다시 말했다. "당신도 지금 즉시 복우산(伏牛山)으로 갈 건가요?" 복우산에서 오는 길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백방생은 전에 그쪽 에서 온 적이 있다.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기야 하겠지만 지금 즉시는 아니오. 나는 우선 들러야할 곳이 한 군 데 있구려." 황진의는 굳이 그에게 어디로 들르려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는 대 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복우산까지는 오백리도 넘어요. 만일 당신이 오늘 가려고 한다면 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군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바로 맞추었소. 낭자가 나를 거기까지 호위해준다면 내 원하는 대로 드리겠소." 황진의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내가 무슨 돈독이 오른 수전노로 보이는 모양이군요. 나는 이미 어젯밤 에 충분한 돈을 벌었으니 그런 일쯤은 공짜로 해 드릴 수가 있죠." 백방생은 내심 생각하며 눈살을 은근히 찌푸렸다. (그렇다면 곤란한데! 그녀가 저렇게돈에 관심이 없어서야 앞으로 내가 어떻게 호위로 부려먹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황진의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일단 그곳에 도착한 뒤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욕심이 많군요. 무림의 일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하기가 어려 운 것이죠. 그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결정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렇겠구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백방생은 황진의와 함께 일찌감치 짐을 꾸려서 밖으로 나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길거리는 매우 썰렁하고 음산한 분위기였다. 백방생은 곧장 진소유의 장원으로 향했다. (왜 또 왔냐고 그러면 갑자기 돌려줄 물건이 생겨서 그랬다고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은근히 앞으로의 계획도 탐지해 보고.......) 백방생은 길을 가면서 내내 황진의에게 구입한 그 속명신단의 약병을 어루만졌다. 무릇 무림인에게 있어서 훌륭한 내상약(內傷藥)은 몹시 필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소유는 단신으로 그 험한 무림계에 뛰어 들었으니 필시 그 내상약이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백방생은 자 신이 어렵게 구입한 속명신단을 아예 병째로 진소유에게 건네줄 결심 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저택에 이르렀을 때 백방생은 문득 실망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집을 지키는 하인들의 말로는 진소유는 이미 간밤에 사람 들과 함께 저택을 떠나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중에 다시 돌아오기야 하겠지만 백방생은 조급한 심정에 그렇게 여유를 가지 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혹시 정의맹의 창단식으로 간것이 아닐까?) 진소유는 계속 강호인들과 교류를 가지고 있었으며 오히려 과거보다도 지금이 더 적극적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정의맹의 창단식에 갔다 는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일 것이다. (물고기는 그 먹이 때문에 죽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애쓰다가 무너지는 것이다. 진낭자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일부러 그런 험난한 여정을 자초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그녀가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일단 상황이 그렇게 되었으니 백방생은 우선 복우산으로 향하는 수밖 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백방생은 황진의와 잠시 상의한 후에 곧장 복우 산의 정의맹의 창단식이 열리는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백방생의 공력이라면 경신술을 사용한다고 해도 말보다 빠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진의의 무공은 과연 대단했다. 그녀의 무공은 이미 백 방생이 알고 있는대로 최상승(最上乘)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백방생 의 손을 잡은 채 그저 가볍게 달리는듯 한데도 한걸음에 무려 십여 장씩 나아갔으며, 백방생은 마치 천리마를 탄 것처럼 안정된 속도감을 느꼈다. 기실 그 두사람의 속력은 천리마보다도 훨씬 빠른 것이었다. 드넓은 평원 가운데에서 아득히 먼 곳이었던 전면의 광경이 갑자기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들고, 두 사람은 마치 갈대잎을 밟으며 구름을 타듯 이 나아가기를 한참, 이윽고 하늘에 태양이 눈부시게 솟아올라 사방은 온통 황금색의 갈대들의 물결을이루고 있었다. 이런 곳은 개간하지 못한 황무지들로, 이렇게 갈대잎으로 가득 뒤덮인 평원들이 간혹 끝없이 계속 되었다. 백방생은 가능하면 황진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스스로 알고 있는 경신술의 구결을 떠올렸으나, 이내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그만 그것을 멈추었다. 그것을 알고 황진의가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과거 당신은 무공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나요?" 백방생은 내심 생각했다.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뿐이었겠소?) 과거 백방생은 지금은 천상오룡인 달마오수조차 대단치 않게 보였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능력이 당시에 이미 그들을 능가한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지금은 왠지 그 일이 마치 멀고 먼 전생(前 生)의 일처럼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달마오수가 그 일곱명의 천재들 가운데의 다섯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또 어떤 사람일까? 나는 어째서 어떤 예언가들에 의해서도 조금도 거 론되지 않았던 것일까?) 황진의는 백방생이 묵묵한 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당신은 체내의 백맥(百脈)들을 모두 복구시키고 싶은가요?" 그것은 실로 백방생의 귀가 번쩍 뜨이게 하는 말이었다. (백맥이 모두 복구되면 나는 그것을 모조리 타통시켜서 원래의 공력을 모두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백방생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가능하기나 하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세찬 파공음이 울리고 있었으나 그 녀의 음성은 백방생의 귓속에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물론이예요. 하지만 사실 그것은 나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죠." 백방생은 물었다. "또 누가 필요하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어떤 물건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것들은 우리 성 수곡에 가야만 비로소 구할 수가 있는데, 만일 당신에게 시간이 있다면 정의맹의 총단에 가본 다음에는 바로 몸을 치료하러 가 보는 것이 어 떤가요?" 그것은 사실 백방생에게 어떤 강한 희망을 가지게 하는 놀라운 말이었 다. 만일 공력만 회복한다면 백방생으로서는 일약 무림의 고수(高手)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긴, 어차피 황금충(黃金蟲)의 보물을 가지러 가려고 했던 것이니, 망 해사를 거쳐서 따라가 보면 되겠군.) 백방생은 지금 돈을 물처럼 쓰고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망해사의 그 보물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힘을 강화시키기로 작정했 다. 따라서 그러기 위해서는 황금충의 보물을 찾아서 사용하는 것이 필 수적인 것인 것이다. 백방생은 마침 은근히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황 진의의 얘기를 듣자 은근히 마음이 기뻤다. 철혈부의 세력권내인 강남땅 으로 혼자 가야한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기 때문이었다. 백방 생은 즉시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때 갑자기 전면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이 다!" 황진의도 백방생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전에 나온 소리는 누군가가 커다랗게 진기(眞氣) 를 실어서 소리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멀리까지 생생하게 들 린 것이었다. 황진의가 신법을 재촉하자 두사람의 신형은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전면으로 짓쳐나갔다. 작은 분지. 드넓은 평원의 한쪽에 이루어진 이 작은 분지에는 갈대잎은 없었고 주위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자라나 있어서 마치 인위적인 장소를 보는듯 했다. 황진의는 이내 그 앞에 이르러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고 가볍게 백방생과 함께 한 나무의 가지많은 부위에 몸을 숨겼다. 강호상에서 오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두 가지 비결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아주 노련한 노강호(老江湖)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강 호상의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기실 제아무리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강호의 모든 일에 나서다 보면 오래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것 이다. 황진의는 이미 다가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고 필시 이곳 에서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장내에 도착하자 즉시 신형을 솟구쳐서 마른 나뭇가지의 사이에 몸을 숨긴 것 이었다. 단풍잎이 거의 떨어진 나뭇가지는 몸을 숨기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지 만, 그러나 장내의 상황은 워낙에 격렬하여 그들에게 주의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엉겁결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이렇 게 느닷없이 피비린내 나는 사건과 부딪치게 될 줄은 몰랐다. 분지의 중앙에는 지금 이삼백 명의 청의인(靑衣人)들이 온갖 병장기들 을 난무하며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중 더러는 복면을 하기도 했 는데 그들의 목표는 바로 중앙이었다. 중앙에는 지금 십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서서 그들과 마주 격돌하고 있었는데 사태가 몹 시 험악해 보였다. 수백명의 청의인들은 험악하게 공격해 들어가고 있 었고 중앙의 사람들은 모두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흡사 두 개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면 부딪치면서 소음을 내듯이 그들 사이에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피가 튀기고 살갗이 찢어졌다. 비명소리 와 함께 시체들은 갈수록 늘어갔다. 청의인들은 모두가 살기를 띠고서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 다. 그러나 피해를 보고 있는 쪽은 오히려 그들 쪽이었다. 비명을 지르 고 시체가 늘어가고 있는 쪽은 청의인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광기(狂氣)에 젖어서 죽음도 불사하 고 있는 것이라는 말인가? 백방생은 문득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마치 합창하듯 울려퍼지는 가운데 매우 눈에 익은 금광(金光)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 자 일순 가슴이 크게 뜨끔해 졌다. 그것은 어린시절에 무슨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은 당황한 심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신도(神刀)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니 그것은 모두 기우였다. 지금 그 한명의 대머리 노인(老人)의 손에 들린 채 금광을 발하고 있는 것은 백방생이 수작을 부 렸던 그 칼은 아니었다. 빛깔은 흡사 했으나 그 모양은 단창(短槍)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쪽에서 자연 사상자가 가장 많이 늘어났다. 그 대머리 노인이 검은 창을 슬쩍 움직이자 이내 그곳에서 금빛의 광망(光 芒)이 흡사 화살처럼 쏟아져 나와 청의인들을 일거에 도륙시키는 것이었 다. 청의인들은 이에 자연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 기는 아직 살벌하고 험악하기만 했다. 그것은 바로 지금 그들의 뒤에 서있는 일단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일견 하기로 여자들과 라마승들로 가지각색인 그들의 숫자는 십여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네 명의 복면인들의 눈빛이 가장 사나와 보였다. 네 명의 복 면인들 가운데 두 명의 청의복면인들은 지금 청의인들을 소리치며 지휘 하고 있었고, 다른 두 명의 복면인들은 한 명의 노라마와 함께 서 있었 는데, 그 중의 하나는 여자로 보였다. 청의인들이 악착같이 공세를 늦추지 않고, 또한 중앙의 사람들이 초조 해 하는 이유도 바로 그들 때문인 것 같았다. 백방생은 문득 금광을 발하는 그 단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창(槍)은 바로 강호에 나타났다는 도검창곤(刀劒槍棍)의 사대신병 가운데 하나인 신창(神槍)이라는 말인가?) 장내의 상황은 너무나도 참혹스럽고 험악하여 그로 하여금 더이상 마음 편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백방생은 문득 포위망의 중앙을 살펴 보다가 가볍게 놀랐다. 거기에는 뜻밖에도 매우 낯익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증평(曾萍). 바로 얼마전에 객점에서 작별했던 그녀가 아닌가? 백방생 은 일시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여러번 바라보았다. 틀림없는 증평, 그 녀였다. 그녀는 아까 헤어진 이후 곧장 이쪽으로 달려와서 저런 변을 당 하고 있는 것일까? 증평이 지금 포위망의 중앙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앞에는 한 명의 초로의 노인이 거대한 체구를 하고서 길게 누워 있었다. 증 평은 지금 그 사람의 상처를 간호하고 있었는데 필시 그녀와는 보통의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초로인의 상처가 매우 위중한 지 증평은 오직 그 사람을 간호하는데 전력하며 주위의 상황은 돌아보지도 않고 있었 다. 백방생은 그 주변에 많은 시신들이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들은 매우 낯익어서 혹시 과거 증평의 사형제들이 아니었던가 하 고 생각되었다. 하여튼 상황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누구나 신창의 위력을 두려워 하면 서 계속 그쪽으로 탐욕의 시선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쪽으로 청의인들 의 공세가 더욱 치열해 지는 것도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 신창을 들고 있는 대머리 노인 이외에도 그쪽에서 제법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이 둘이나 더 있었는데, 하나는 아주 나이 많은 노도사(老道 士)였고, 다른 하나는 기이하게도 곱추였다. 하지만 그 곱추는 나이도 아주 많아서 머리카락이 은백색임에도 불구하고 체구가 커서 그 키가 거의 보통사람만 했다. 곱추노인은 커다란 쇠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한번 휘둘러 지면 마치 작은 회오리 폭풍이 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검을 쓰는 그 노도사나 곱추노인 보다도 훨씬 사태가 무시 무시한 쪽은 그 신창을 들고 있는 대머리노인 쪽이었다. 그 대머리 노 인은 키도 그다지 크지 않고 평범한 용모에 딸기코를 하고 있었는데 마 치 창을 움직이는 광경이 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한꺼번에 수십명의 청의인들이 결사적으로 달려들었으나 그 대머리 노인은 다시 그저 가벼운 동작으로 그 청의인들을 일시에 물리쳐 버렸 다. 그의 손에서는 그 신창이 마치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창의 끝에서는 눈부신 금광이 발출되어 흡사 거대한 금창 (金槍)으로 변한 것 같았고, 그 광채에 부딪친 것은 사람이든 병장기든 여지없이 부서져 나가는 것이었다. 백방생도 이미 신검과 신도에서 그러한 것을 경험했으므로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놀라고 있는 것은 어떻게 그와 같은 희세의 신병이기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나타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문득 황진의의 전음이 그의 귓속으로 들려왔다. (지금 저 증낭자를 구해주고 싶은 거죠? 하지만 저들의 무공은 나 보 다도 훨씬 높으니 경거망동하지 말아요.)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황진의를 바라 보았다. 정말로 따뜻한 우정의 기운이 그녀의 눈빛에 흐르는 것 같았다. (과연 남녀사이에 우정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백방생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쨌든 황진의는 그 우의 에 의해 처음부터 그에게 호감을 보였고, 게다가 지금도 이런 수고를 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그녀에게 작은 귓속말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목적은 증낭자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소."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귓속말에 귀가 약간 간지러워 졌는지 그녀 는 가볍게 웃으며 전음으로 말했다. (맞아요. 그들의 목적은 저 여의신창(如意神槍)에 있는거죠.) 백방생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저 창이 바로 그 새로 나타난 사대신병(四大神兵) 중의 하나라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철혈부에서 대거 저들을 공격하지는 않았었을 거예요." 백방생은 그제서야 청의인들이 바로 철혈부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거의 두 패로 나뉘어져 있었고 또한 각기 한명씩의 청의 복면인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백방생은 혹시 그들이 이 근처에서 유명 하다는 녹림집단인 백룡문(白龍門)과 천하방(天下幇)의 무리들이 아닐 까 하고 추측해 보았다. 백방생은 비록 책자를 읽어서 강호의 지식을 더러 알고 있었으나 정작 사람을 보면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백방생은 빠르게 그 두 편의 사람들의 신분을 헤아려 보았다. 그때, 청의인들이 다시 수십명이나 죽어 나자빠지자 일순 흑의복면인 하나가 음랭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손(孫) 늙은이! 정말 그렇게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다는 말이냐?" 말과 동시에 그는 우수를 가볍게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느닷없 이 그의 품속에서 대여섯 자루의 비수가 날아가더니 안쪽의 대여섯명의 사내들의 목줄기에 틀어 박히는 것이었다. 그 속도는 몹시 빨랐다. 너 무나 빨라서 그 당사자들은 대체 어찌된 셈인지도 모르고 죽어갔는데, 그 놀란 표정들로 보아 실로 가공스러운 솜씨임이 분명했다. 흑의복면인에 의해 자기네편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렇게 대여섯명이나 죽어버리자 그 대머리 노인은 크게 화가 난 듯이 마주 보고 소리쳤다. "이 잔인무도한 탈명마군(奪命魔君) 요광(搖光) 요늙은이야! 네놈은 하 늘이 두렵지도 않다는 말이냐?" 갑자기 대여섯명이나 죽어버리는 바람에 대머리의 편은 사람들의 숫 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붉은 옷을 입고 복면을 하고 있는 여자가 이에 차갑게 냉소하며 소리쳤다. "흥, 손늙은이야! 너희 공공문(空空門)이 살인을 하면 정당한 것이고, 우리가 살인을 하면 부당한 것이라는 말이냐?" 백방생은 그제서야 그 대머리에 딸기코를 한 노인이 바로 공공문의 현임문주 대치도인(大痴道人) 손삼통(孫三通)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그 대치도인 손삼통은 나이가 이미 구십을 넘어섰으며 평생 기행(奇 行)을 일삼아 와서 정사중간의 풍진이인으로 꼽히는 중요한 사람들 중 의 하나였다. 그 강호의 괴인이 오늘은 신병이기를 들고서 저렇게 설 쳐대고 있는 것이다. 손삼통은 잠시 입맛이 쓴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돌연 신형을 솟구치 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 너희들이 한번 나를 잡아 보아라!" 이 손삼통은 평생 괴행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경공술(輕空術) 의 달인이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달아나지 않았는 지는 몰라도, 일단 그 렇게 줄행랑을 놓자 이내 그의 신형은 허공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아득 히 사라져 버렸다. 그것 역시 누구도 쉽게 예측못한 느닷없는 괴행이라 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 두 명의 복면인과 한 명의 노라마는 그것을 보자 일순 놀라서 다급 히 뒤를 추격했다. "멈춰라!" 사실 갑작스럽기는 해도 손삼통의 그러한 행동은 동료들을 안전하게 해 주는 일이었다. 손삼통이 그렇게 떠나가자 나머지 두 명의 청의복면 인도 급히 청의인들을 인솔하여 그 뒤를 따랐으며, 그리고 라마들과 여 인들 뿐만 아니라 이쪽 편의 노도사와 곱추노인 등도 일행과 함께 빠르 게 그 뒤를 추격하여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느닷없이 이 작은 분지에는 많은 시신들과 함께 몇몇의 사람 들만이 침묵속에 남았다. 백방생은 상황이 갑자기 그렇게 변해버리자 다소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윽고 황진의와 함께 나무에서 내려왔다. 장내의 중앙에는 여전히 증평 이 초로인을 간호하며 앉아 있었고, 그 외에도 두어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중에서 두명의 사내는 백방생도 익히 알고 있는 증평의 사형이라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이가 삼십대 후반으로 다소 준수하게 생긴 중년인이었다. 그 중년인은 피묻은 장검을 들고 다가와 초로인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아버님!" 알고 보니 증평이 간호하던 그 초로인은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 중년인은 초로인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남아 있는 그 세 명의 사내들도 모두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오직 부상이 없는 사람은 증평, 한 사 람 뿐이었다. 그 중년인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자 나머지 두 명의 사내도 뒤를 따라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백방생은 그냥 지나칠 수도 없어서 다소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증평 에게 다가갔다. 증평은 이내 그를 알아보고 안면에 화색을 일으키며 말 했다. "아, 백공자!" 백방생은 왠지 미안한 마음이 일어서 말했다. "증낭자, 혹시 다치지는 않았소?" 증평은 어느새 생기를 되찾은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저의 대사형과 인사를 나누세요. 저 분은 바로 회룡검(廻龍劒) 하(夏) 사형으로......." 백방생은 증평의 손짓을 따라 그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서야 이 중년인이 바로 왕옥파의 소문주인 회룡검 하귀(夏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실은, 지금 바닥에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거구의 초로인 은 바로 왕옥파의 문주인 철배창룡(鐵背蒼龍) 하굉명(夏宏明)이었던 것 이다. 철배창룡 하굉명은 한평생을 한자루의 장검에 의지해 왔고, 또한 그 스스로 창안한 특이한 운신술(運身術)에 장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 으로 그는 그러한 별호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비록 무공은 그리 높지 못했으나 의기가 강해서 정사중간이라고 불리우면서도 많은 정파인들 의 칭송을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누워있는 주위의 수십구의 시신들은 대부분이 왕옥 파 제자들의 것이었다. 하굉명은 비록 의기는 높았으나 무공이 부족하 여 그만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 최후를 마치고 만 것이었다. 회룡검 하귀는 마침 오열하고 있다가 백방생 등을 주시하던 참이었다. 그는 증평이 자신을 소개하려고 하자 이내 안면을 크게 일그러 뜨리며 소리쳤다. "증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인데 구태여 서로 아는 척을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말이다!" 증평은 이에 놀라서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대사형을 매우 두 려워 했던 모양이었다. "대사형, 나는 그게 아니라......." 하귀는 차가운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증매, 우리는 이제 거의 문파의 대가 끊기게 되었다. 나는 무능하여 문파의 대를 이을 수도 없을 것이니, 앞으로 너는 우리를 상관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독기어린 음성에 증평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저는 오직 여기에 남아 있겠어요." 백방생은 그 하귀의 용모가 비록 준수하기는 하나 미간이 좁고 쉽게 발끈하는 것이 성격이 다소 편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부친의 죽음에 너무 상심하여 앞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리라. 사 실 조금전의 싸움에서 그들만이 무고하게 많은 희생을 당했다면 울분 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리라고 생각되었다. 백방생은 구태여 그들 사형제지간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즉시 증평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럼 증낭자, 몸조심하기를 바라며 다음에 뵙도록 하겠소." 증평은 엉거주춤한 태도로 마주 인사했다. "예, 백공자. 그럼......." 백방생은 문득 증평의 시선에 어떤 강한 열망이 스쳐지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다소 멈칫했으나 이내 신형을 돌렸다. 황진의가 증평 을 바라보는듯 하다가 이윽고 백방생의 뒤를 따라왔다. 이 작은 분지위에 햇살은 비치고 있었건만 풍경은 너무나도 참혹하고 황량해 보였다. 그것은 단순히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시체들이 늘어져 있기 때문만도 아닌 것 같았다. 백방생은 계속해서 증평의 그 텅 비어버 린 듯한 간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바로 이러한 곳이 소위 말하는 강호(江湖)가 아닐까? 강호는 무정(無情)하다. 황진의는 이윽고 다시 백방생의 손을 잡고 남쪽으로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황진의는 다소 침울해져 있는 백방생의 옆 모습을 살피며 문 득 입을 열었다. "그 증낭자가 불쌍하지 않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유독 그녀만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증낭자는 어렸을 적부터 천애고아로서 철배창룡 하굉명에 의해 길러 졌어요. 본래부터 마음씨가 착하여 하굉명은 마치 그녀를 딸처럼 생각했 지요. 그래서 오히려 무공전수는 등한시 하게 되어 그녀의 무공은 겨우 이류급의 수준이지요. 하지만 이제 하굉명이 죽고 왕옥파가 쑥밭이 되 었으니 가장 불쌍해질 사람은 바로 증낭자와 같은 경우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어째서 이번에 왕옥파가 쑥밭이 되었다고 생각하시오?" 황진의는 말했다. "하굉명은 평소에 친구도 많았지만 흔히 너무 잘 나서는 것이 흠이었 어요. 평시라면 몰라도 지금과 같은 혼란기에는 그것이 치명적인 결함이 되었던 거죠. 그는 친구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가 오히려 자신의 초가삼 간만 다 태운 격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의 분수를 잘 알 아야 한다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유독 증낭자만 불쌍해 진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대개 상황이 나빠지면 곤란을 당하는 것은 여자들 쪽이죠. 근본적으로 연약한 여자들은 그런 상황을 이겨낼 힘이 없는 거예요. 게다가 하귀가 증낭자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좋지 못했어요. 아마도 하귀는 증낭자에게 어떤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죠." (질투심?) 과연 남자가 여자에게도 질투심을 느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버지라는 대상을 두고. 30 정의맹(正義盟)의 총단(總壇) 백방생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이윽고 화제를 돌렸다. "낭자는 어째서 철혈부의 인물들이 그곳에 나타날 수 있었다고 생각하 시오?" 황진의는 그가 일부러 화제를 돌리자 미소하며 말했다. "그야, 정의맹의 사람들은 모두 복우산으로 집결해 있으니 그들의 행동이 편해진 것이 아닐까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그들이 그 기회를 노렸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들이 정의맹을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요?" 백방생은 말했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오. 다만 이전에도 그들은 낙양에서 활 동을 하고 있었었소. 아까 그 비수회(匕首會)의 주인을 보니, 전날 내가 일품당(一品堂)의 살수들에게 당한 기억이 나오." 황진의는 아까 그 흑의복면인의 무공을 상기하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탈명마군(奪命魔君) 요광(搖光)의 비수던지는 솜씨는 정말로 무섭 죠. 아마 나라도 피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이 곧 철혈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예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정의맹이 지금 무사하리라고 본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면, 이미 한 판의 격전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일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그곳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많겠 군." "글쎄요..." 용천기의 얘기를 꺼내자 황진의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더니 앞쪽만 바라보며 신법을 재촉했다. 백방생이 바라보니 문득 그녀의 옆모습에는 어딘가 우울한 그림자가 깔려 있는 것 같았다. 도무지 근심이 없을듯 하 던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떤 어두운 심정이 들어 있다는 말인가? 아니 면 그녀는 혹시 알지 못할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장난삼아 한 말인듯 하던 황진의의 말은 비교적 들어 맞았다. 분 명히 창단식의 주위에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었던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복우산으로 다가가면서 보이는 시체들의 숫자로 쉽게 입증되 었다. 복우산으로 다가갈수록 시신들도 많아졌고 격전의 흔적도 많이 남아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이 부근에서 벌어진 것일까? 그리고 정말로 정의맹의 창단식은 발족된 것인가? 백방생은 그 장소로 다가갈수록 궁 금증이 더해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흡사 거대한 소가 누워 있는 것 같다는 복우산 정상의 줄기에 이르러 아래를 내려다 보자, 아득한 계곡 아래에 흡사 신선들의 누각인 것처럼 무수한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필시 새로 건립된 정의맹(正 義盟)의 총단(總壇)일 것이다. 그 곳의 분위기는 뜻밖에도 한가로웠다. 비단 건물들도 망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이것은 어찌된 일일까? (어쨌든 정의맹이 습격을 당하지 않고 정당하게 발족되었다면 축하해 야할 일이 되겠지.) 백방생은 이내 황진의와 함께 신법을 펼쳐서 그 총단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예측했던 대로 과연 그 곳은 정의맹의 새로 건립된 총단이 었다. 건물들 뿐만 아니라 도로도 대부분 새로 닦여져 있어서 다소 황 량해 보이기도 하고 혹은 신선해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총단이 가까 워 지자 신법을 펼치지 않고 걸었다. 이윽고 급조하여 만들어진 듯한 정문(正門)에 이르자 그곳을 수호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각색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하나같이 두눈에서 정광(精光)을 번뜩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다가가자 문득 서 너 명의 청년들이 나서서 앞을 가로 막았다. 두 사람에게 다른 일행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 가운데 키가 몹 시 크고 다소 마른 청년이 수상쩍다는 듯이 입을 열어 말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이 곳에 나타났느냐?" 황진의는 매우 여유있는 느릿한 태도였다. 그녀는 즉시 그 키다리 청년에게 말했다. "이곳이 정의맹의 총단이 아닌가요?" 키다리 청년은 무의식중에 손을 움직여 등 뒤의 칼자루를 잡으며 말 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느냐?" 백방생은 황진의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를 꺼려하여 자칫 서로간에 오해를 사는 일이 생길까봐 즉시 입을 열어 말했다. "소생은 소림사의 지관(知觀) 스님과 아는 사이인데, 이번에 이곳에 오 셨다기에 찾아뵈려고 온 것이오." 그 청년들은 황진의가 비록 대단히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래도 남자에게 주장이 있다고 생각되었는지 백방생에게 다시 시선을 보냈다. "뭐라고? 네가 소림사의 지관대사와 잘 아는 처지라고? 그렇다면 철혈 부의 놈들이 아니라는 말이냐?" 백방생은 그 키다리 청년이 정색을 하고 그렇게 물어 보는 것을 보고 그만 약간 어이가 없어졌다. "철혈부의 놈들과 한패라뇨? 소생은 그런 사마외도의 무리들과는 어울 리지 않소이다." 본래 사마외도의 무리들은 결코 스스로를 사마외도라고 칭하지 않는 다. 기실 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바로 그말이기 때문이었다. 키다리 청년은 백방생이 철혈부를 사마외도의 무리라고 말하자 다소 안도하는 눈치였으나 그래도 아직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런 험한 산속을 쉽게 찾아올 정도라면 백방생 등이 결코 녹녹한 인물들은 아니 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키다리 청년은 말했다. "그럼 무슨 증표라도 가지고 있나?" 백방생은 문득 생각했다. (나에게 지금 무슨 증표가 될 만한 물건은 없다. 하지만 일단 내 이름 을 들으면 알게 될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품속에서 금표 한장을 꺼내서 청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소생 백방생이 잠시 만나고자 한다고 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청년은 느닷없이 금표 한 장을 받게 되자 다소 어리둥절해 했다. 그는 처음에는 그것이 강호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명첩의 일종인 줄로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살펴봐도 흠 하나 없는 깨끗한 열냥짜리 금표가 아닌가? 키다리 청년이 다소 우물쭈물 하는데 이윽고 건물 뒤에서 한 명의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그는 등 뒤에 한자루의 커다란 칼을 매고 있었는 데 키가 육척을 훨씬 넘었고 체구도 매우 우람했다. 백방생은 그 중년사 내의 얼굴이 어딘가 키다리 청년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무슨 일이냐?" 키다리 청년은 이내 공손히 읍하며 그 중년사내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예, 아버님. 그러니까 저 두사람이 바로 소림사의 지관..." 그런데 키다리 청년의 말은 그 중년사내에 의해 제지되었다. 그 중년사 내는 키다리 청년을 제지시키더니 곧장 황진의를 향해 포권을 하며 아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 이거 누구신가 했더니 바로 황소저가 아니시오?" 황진의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게 되자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 다. 사실 그녀는 스스로 나서기가 어색해서 일 뿐이지 무슨 숨겨야할 비밀이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황진의는 즉각 마주 포권하며 인사했다. "팽선배님이시군요?" 그 중년사내는 약간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선배라니 당치 않소. 성주곡의 소군주를 알아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선배라는 칭호를 들을 수가 있겠소이까?" 중년사내는 의도적으로 황진의의 신분을 발설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했다. 그 키다리 청년을 비롯한 사람들은 비로소 황진의의 신분을 알고 저마다 놀라며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사 람을 못 알아보고 무례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중년사내의 말에는 은연중 그런 질책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알고보니 바로 하북팽가(河北咸;)의 소가주인 패천도(覇天刀) 팽덕의 (涵藎積였군!) 백방생은 역시 나름대로 그제서야 그 중년사내의 신분을 알 수가 있었 다. 소가주라고는 하지만 그는 나이가 이미 쉰 살을 넘어섰으며, 거의 실질적으로 하북팽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백방생은 이전에 주루에서 황진의와 함께 그의 셋째와 넷째 아들인 팽영(閤　과 팽웅(陜 9)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이 키다리 청년은 바로 둘째아 들인 팽걸(咸匯인 것이었다. 강호에서는 흔히 그 맏아들인 팽호(杭　와 함께 이들 사형제를 팽문사호(陷6四虎)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방생은 지금 이 정의맹의 정문을 하북팽가의 부자가 맡고 있는 줄은 몰랐다. 아마도 패천도 팽덕의가 이 곳 정문경계의 총책임자인 모양이었 다. 팽덕의는 그렇게 짐짓 겸양의 말을 하고 나서 다시 백방생을 가리키며 황진의에게 말했다. "헌데 이 분은 황소저께서 아는 소협이시오?"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그는 저의 친구인데, 함께 정의맹의 일을 돕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예요!" 팽덕의는 그 말에 백방생을 한차례 살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함께 안으로 들어 가셔야죠. 공연히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실 강호의 무림인들은 은근히 천륭무가나 성수곡 등의 세외단체를 꺼려하고 있었다. 성수곡에서 비록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그들은 굳이 그들과의 사이에 선을 그었다. 왜냐하면 완전히 능력의 차원이 다른 단체 인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본래 강호에서는 배분을 중시한다. 그 러나 그 배분이라는 것도 기실 무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팽덕의는 비록 쉰 살을 넘었어도 무공이 황진의보다 부족한 것이 현실 이었다. 그런 저런 이유로 그는 감히 황진의에게 까다롭게 굴 수가 없었 다. 백방생과 황진의가 정문의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마침 금표를 들고 우물쭈물 하던 팽걸이 다소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백방생의 신분을 확인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 돌려줘야 하는 지 분간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백방생의 신분을 굳이 확인해 야할 필요는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안에 굴 러들어온 떡인 황금 열냥을 고스란히 그냥 돌려줄 수도 없는 기분이 아 닌가? 그런데 마치 그러한 팽걸의 심리를 알기라도 하듯이 백방생이 그 옆을 지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팽형,그명첩(名帖)은 돌려줄 필요가 없소. 팽형을 만난 기념으로 내 가 주는 선물로 생각하시구려." 정문을 지나자 그래도 제법 잘 정돈된 길이 나타났고 건물들이 눈에 들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오가고 있었으며 대부분이 구파일방 (九派一幇), 오대세가(五大世家)의 사람들이었다. 누구에게 친한 사람 들이 아니어서인지 거의 아무도 두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팽 덕의는 청년 하나에게 두 사람의 안내를 맡겼는데, 백방생은 주위를 돌아 보다가 그 청년에게 말했다. "이 곳에는 철혈부의 놈들이 쳐들어 오지 않았다는 말이오?" 청년은 자신의 상관인 팽덕의가 직접 안내를 지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매우 공손했다. "웬걸요? 아까 정오무렵에 놈들이 대거 침입해 왔었죠. 그런데 본맹 (本盟)에서 워낙 강하게 나가니까 곧장 물러가 버리고 말았죠." 백방생은 정말로 철혈부의 사람들이 공격해 왔었다는 말을 듣고 더욱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철혈부의 주인이 용천기라면 물론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미리 알아보지도 않고 나타나서 그렇게 어이없이 간단한 패배를 당하고 물러갔다는 말인가? 보아하니 이 부근 에는 무슨 격전의 흔적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수수께 끼가 음모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청년은 두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듯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놈들은 본맹의 창단식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 서 우리들이 당하고만 있을 사람들은 아니었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창단식은 이미 치뤄졌다는 말이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묻지도 않은 사항까지 선선하게 잘 대답 해 주었다. "그러믄입쇼. 우리 정의맹은 이미 만장일치로 소림사의 도액방장(渡厄方 丈)을 맹주로 모시게 되었죠. 지금은 중앙의 연무장(鍊武場)에서 간단한 연회를 열고 있을 것입니다." 백방생은 이미 예정대로 정의맹의 창단식이 순조롭게 되었다는 데에 다소 의아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심각한 상황인데 오히려 결과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태평스럽게도 연회를 열고 있다지 않은가?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겠지.) 잠시 걷는 사이에 건물들의 사이를 돌자 이윽고 청년이 말하던 연무장 이나타났다. 청년의 말대로 그 연무장의 앞쪽에서는 지금 많은 휘장들이 쳐져 있는 가운데 한가로운 연석이 열리고 있었다. 많은사람들이 휘장속 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자못 흥청거리는 분위 기까지 만들어 졌다. 청년은 이윽고 연회장에서 일하는 다른 청년에게 두 사람을 맡기고 정문쪽으로 다시 물러갔다. 연회장에는 두 사람에게 낯익은 사람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특히 소림사의 승려들은 한쪽의 휘장을 차지하고 앉아서 차와 과자를 들고 있었는데, 더러 백방생을 보았어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구태여 여러사람들과 어울려 귀찮은 일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청년이 안내해 주는 대로 한 한적한 자리에 앉았다. 황진의는 생각보다 강호인들과 친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많은 강호인들 이 그녀의 신분을 알아채고 놀란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직접 다가와서 아는 체를 하지 않았고, 황진의도 상당히 태연하여 마치 산책 을 나온 것 같은 태도였다. 다만 백방생은 속으로 어떤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자리에 앉은 이후에도 연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바로 진소 유가 이곳에 혹시 오지 않았나 해서 그녀의 모습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항상 눈부신 백색의 옷을 입고 있어서 늘상 모든 사람들 가운 데 눈에 띄곤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는 비교적 많은 여강호(女江湖)들이 왔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백색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거의 삼사천명에 달하 는 이 많은 북적이는 인원들 중에서 한 사람의 여자를 찾아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실 백방생도 비록 속으로 애타게 찾고는 있었지만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이쪽으로 떠났다는 얘기만 들었지 진소유가 반 드시 이곳에 왔다는 확증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앉아있는 사이에 청년들이 탁자위에 푸짐한 술과 음식들, 그리고 간단한 과자와 차 등을 가져다 주고 물러갔다. 백방생은 이미 진소유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이 곳은 실로 정파무림인들의 집결장이라고도 할 수가 있었다. 많은 강호의 선배고인 들을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이미 강호의 영웅이 되 기로 결심한 백방생이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일단의 작은 무리가 곧장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탁자 를 향해 다가왔다. 백방생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두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다섯명의 젊은 남녀로서 일녀사남(一女四男)이었 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눈에 익었다. 백방생이 다소 뜻밖이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들의 기도였다. 그들은 실로 하나같이 뛰어난 기도들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앞으로 장래의 무 림을 짊어지고 나갈 인재들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 같았 다. 백방생이 눈에 익은 그 한 사람은 바로 남궁세가의 둘째 아들이자 천 하의 미남자(美男子)로 알려진 옥면검(玉面劒) 남궁검상이었다. 그는 전 과 달리 나머지 네 사람들을 겸손한 태도로 데려오고 있었는데, 결코 자 신의 위치가 그들보다 우월하지 못하다는 표정이었다. 황진의는 그들이 다가오자 이내 입가에 자연스런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미 그들과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과연 그들은 황진의의 앞에 와서 일제히 포권으로 인사를 했다. "그간 안녕하셨소, 황소저?"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도 그 동안에 신수가 더욱 훤해진 듯 하군요. 그리고 저 분 남궁 세가의 이공자께서는 자주 뵙는군요." 남궁검상은 그 답지 않게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는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 많은 데 어째서 저를 들먹이십니 까? 우선 저의 형님만 해도 그렇고요." 백방생은 자연스럽게 남궁검상이 가리키는 사람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사람은 이제 나이가 스물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키가 거의 육척에 달하고 체구가 헌칠하고 어깨가 우람했으며 용모 또한 준 수했다. 두 눈에서는 예리한 정광 대신에 은은하고 맑은 기운이 흐르 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그를 마치 이 사람들 가운데의 군계일학(群鷄 一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정기(正氣)가 넘치고 영기가 탁 월한 젊은이로 보였다. 그는 남궁검상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기질은 정 반대였다. 남궁검상이 그저 기생오라비처럼 잘 생긴 얼굴이라면 그 청년 은 그야말로 대장부(大丈夫)를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바로 남궁세가의 맏아들인 대공자(大公子) 무영검(無影劒) 남궁 검민(南宮劒民)이라는 말인가?" 백방생은 내심 약간 놀라며 생각을 굴렸다. 그 강호인물록에 의하면 이 남궁검민은 그야말로 당금의 강호상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라고 했었다. 그의 무공은 동생인 남궁검상과는 달리 이미 절정(絶頂)의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 남궁검민은 조금도 당황하지않고 담담하고 낭랑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황소저께서 강호의 일에 나서주시니 고맙소. 본래 황소저께서 지나치게 강호의 일에 소극적이라서 다소 불만이었는데. 본래 강호인들 은 동도(同道)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시면 우리가 원치 않아도 자연 거 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겠소?"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남궁공자의 그 말씀은 고맙게 듣겠어요. 하지만 저는 아녀자의 몸이라 무림의 일에 감히 나서기가 곤란하군요. 또한 저렇게 많은 분들이 계시 고요." 남궁검민은 황진의가 난처해 하는것 같아서인지 더이상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대신 맞은 편의 자리에 앉은 백방생을 가리키며 다 시 말했다. "실례지만 같이 오신 그 분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을 가르쳐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남궁검상은 미리 백방생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얘기하지 않은 모양이었 다. 그러나 성수곡의 황진의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라면 결코 녹녹한 사 람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일 것이었다. 백방생을 바라보는 남궁검민의 표정은 매우 진지해 보였다. 황진의는 그들의 심사를 짐작했는지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 분은 바로 백방생, 백공자로서 복주 출신이세요." 남궁검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직접 백방생을 향해 포권하며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백형(白兄)이었구려. 불초는 남궁검민이라고 하는데, 앞으 로 잘 도와주셨으면 바라겠소." 백방생은 몸을 일으키며 마주 포권하고 말했다. "과찬의 말씀이오. 오히려 남궁형께서 소생에게 도움을 주셔야지요." 남궁검민은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더니 백방생에게 다시 말했다. "보아하니 백형께서는 이미 일신에 무학을 지니고 계시는 듯 하군요. 소제에게 출신내력을 가르쳐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확실히 이 남궁검민의 안목은 다른 사람들보다 고명한 것 같았다. 백 방생의 모습은 그저 뚱뚱하고 혈색좋은 부잣집의 귀공자로 보였지 결 코 무림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심지어 남궁검상조차도 그 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궁검민은 아마도 그 가 운데 어떤 특별한 기질이라도 느낀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일순 그런 질문을 받게 되자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다소 당 황했으나 이내 대답했다. "사실 소생은 달마하원(達摩下院)의 속가제자(俗家弟子)입니다." 솔직히 백방생은 무학을 많이 배우기는 했어도 내세울 만한 사문이 없었다. 가문에 대대로 자부문의 일맥(一脈)이 전해지고 있기는 했어도 그것은 이미 백귀현에게 전해졌다. 그는 소림사의 무학도 배웠으나 지 금 이 자리에 소림사의 승려들이 가득하니, 만일 그가 그 얘기를 했다가 는 오히려 혼줄이 나고 말 것이다. 백방생은 궁여지책으로 달마하원의 속가제자라고 했다. 비록 정식제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달마하원이 멸 망한 이래 그에게 그런 것을 따져 물을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기실 백 방생의 부친은 과거 달마하원의 주지여서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 는가? 백방생의 그러한 대답은 남궁검민 뿐만 아니라 남궁검상, 그리고 심지어 듣고 있던 황진의에게까지 놀라게 만든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제까지 그 런 얘기를 처음으로 들었는데, 잠시 백방생을 주시하는 시선에 반짝하고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눈앞에 서있는 다른 사람들도 역시 놀라기는 마찬 가지였다. "아, 바로 그러셨군요. 실례가 많았소이다?" 백방생의 그 대답에 따라서 주위의 시선이 많이 집중되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러나 내심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본래 그는 강호 의 영웅이 되기로 작정했다. 부모의 복수도 해야한다. 그러자면 원조하는 자가 많아야 하는데, 아직 저 강호의 영재들은 그를 너무나도 하찮게 여기고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다. 이제 그가 달마하원의 속가제자였다고 하니 같은 무림정파(武林正派)의 입장에서 그들의 호의와 격려가 깊어질 것이 뻔했다. 남궁검민이 다시 인사를 차리자, 남궁검상이 다시 말했다. "백형께서는 그럼 누구에게 사사를 받으셨소?" 백방생은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생의 선친이 바로 전대의 달마원주였던 홍엽선사(紅葉扇師)셨습니 다." 그것은 결코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아까보다 사람들에게 더 욱 큰 충격을 준 것 같았다. 남궁검상의 얼굴이 갑자기 놀란 눈빛으로 가득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경악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검민이 놀란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홍엽선사라면 불초도 이미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달마하원 의 역사상 보기 드문 신승(神僧)이셨다고 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 변괴를 당할 줄이야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소이다." 남궁검민의 표정은 어느덧 경계하는 마음에서 호의적인 것으로 변해갔 다.문득 옆에서 얘기를 듣고 만 있던 한명의 여자가 남궁검민을 향해 말했다. "민오라버니! 우리를 계속 이렇게 서 있게 만들 거예요?" 백방생은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이제 방년 스물 정도, 키는 보통이었으나 체구는 다소 마른 편이었고 수려한 용모에 다소 병약한 듯한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눈빛이 마치 깊은 호수처럼 조용하여 매우 심기가 현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남궁검민은 그제서야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거 참 내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군." 황진의를 바라보며 남궁검민은 말을 이었다. "헌데 우선 황소저께 여기 한 사람을 소개해 드려야 하겠군요." 남궁검민이 가리킨 사람은 한쪽에 서 있던 아주 키가 크고 체구도 우 람한 거구의 청년이었다. 그의 키는 무려 칠척이나 됐다. 백방생은 그를 보자 아까 정문에서 만났던 그 키다리 청년 팽걸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 청년은 키도 그와 비슷하지만 체구는 오히려 더욱 우람하여 마치 철 탑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의 용모가 팽걸과 흡사한 것을 보 고 혹시 그의 형인 하북팽가의 대공자 흑풍도(黑風刀) 팽호(杭　가 아닌 가 하고 생각했다. 나이도 대략 스물 일곱 정도 되어 보였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남궁검민이 소개하는 말도 그와 같았다. "황소저, 이 친구는 바로 강호에서 그 유명한 팽문사호(陷6四虎) 가 운데의 맏이인 흑풍도 팽호로서, 특히 도법이 뛰어난 사람이지요. 황소 저께서도 친해두시면 그가 얼마나 호기가 넘치는 청년영웅인지 아시게 되실 것입니다." 그야말로 거창한 자기소개에 그 흑풍도 팽호는 그만 거뭇한 얼굴이 불그레하게 변했다. 그는 이미 황진의를 알고 있었는지 즉시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강호에서 그 유명한 성수약왕(聖手藥王)을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 니다. 앞으로 귀찮은 일이 생기면 어디라도 불러만 주시면 지체없이 달 려가겠습니다." 팽호의 태도는 그 커다란 몸집 만큼이나 호방해 보였다. 황진의는 웃으 며 마주 포권하며 인사해 주었다. "팽소협께서는 당당한 강호의 영웅호걸이신데 제가 감히 부를수야 있나요? 그저 앞으로 친구로 생각해 준다면 다행스런 일이지요." 이어 남궁검민은 백방생을 위해 다른 두사람도 소개해 주었다. 그 일남일녀는 바로 오대세가의 하나인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자녀들로서 역시 강호에서 유명한 영재들이었다. 오빠인 제갈승지(諸葛丞志)는 일명 소제갈(少諸葛)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으로, 스물 세살의 나이에 육척의 키의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준수한 서생 타입의 청년 이었다. 여동생인 제갈심의(諸葛心意)는 별호가 병중화(病中花)로서 아 까 남궁검민에게 얘기를 꺼냈던 사람이며, 역시 남궁검민에 대해서 느 끼는 감정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일단 서로간의 수인사가 끝나게 되자 함께 탁자를 사이에 두 고 앉았다. 본래 그들 다섯은 잠시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으나 상황이 변하여 이렇게 마주앉게 되었던 것이다. 일단 자리에 앉고 나자 미처 숨을 돌리기도 전에 남궁검상이 다시 입을 열어 백방생에게 말했다. "홍엽선사가 선친이라고 했었는데, 그럼 그 달마하원의 사건에 대해 서 말씀해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백방생은 생각나는 대로 간단하게 대꾸했다. "저는 당시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 시 가 보니 일이 그렇게 되었더군요." 남궁검상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실례지만 달마하원의 무공 가운데 몇가지만 보여주실 수 가 있겠습니까?" 남궁검상은 갑자기 믿기지 않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백방생의 말을 쉽게 수긍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백방생은 미리 그럴 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내공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사실 저는 나중에 적들에게 공격을 받아 공력을 거의 상실당하게 되었 습니다. 부모의 복수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요. 다행히 조부님의 유산이 많아서 이곳으로 탈출하여 어떻게든 복수를 해 보려고 하고 있 는 중입니다." 백방생이 말하는 그러한 말들은 모두 듣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 하고 처음 듣는 것들이었다. 백방생은 말을 끝내자 마자 가볍게 우수를 펼쳐 준비하고 있던 내공과 함께 전면으로 떨쳤다. 그러자 일순 그의 우수가 장(掌)으로 되면서 일장이 이장으로 변하고 이장이 사장으로 변했다. 백방생은 겨우 그것을 마치고 피로한 듯이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 이면서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미 좌중에서는 매우 놀란 경호성과 함 께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남궁검민이 팽호에게 물었다. "팽형, 어떻게 보셨소?" 팽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말했다. "그건 분명히 달마하원의 천수여래장(千手如來掌)이오. 게다가 그 내 공도 필시 대승반야선공(大乘般若禪功)인 것 같소." 천수여래장은 본래 일장이 백스물여덟개의 장영(掌影)까지 계속 늘어가 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내공이 부족하여 그것을 겨우 기초적인 수준에서 전개하고 그만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공은 그가 스스로 달마역근경 에서 터득한 것이지 비슷하기는해도 결코 달마하원의 대승반야선공은 아 니었다. 남궁검민은 옆의 제갈승지에게도 물었다. "제갈동생의 생각은 어떻소?" 제갈승지는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되는 수재(秀才)와 같은 외모였다. 그 는 이제까지 아무말도 없다가 그제서야 입을 열어 조용히 말했다. "저도 일전에 복주 백노야의 손자가 잠시 소림사로 가서 몸을 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백공자의 사정이 그러하다면 그것은 무림 전체의 일이요, 그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 모두가 그의 일을 도와야 하겠지요." 남궁검민도 동감인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백형, 그 일은 우리 무림 전체의 일이니 앞으로 모두와 상의하도록 하십시다." 문득 제갈심의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이 황진의에게 말했다. "황언니, 조금전에 왔다면 아직 우리 정의맹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모르시겠군요?" 백방생은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으로 보아 필시 이번에 오대세가가 상대적으로 많은 입지를 굳혔다는 것을 느낄 수 가 있었다. 황진의는 간단히 대꾸했다. "나는 그저 소림방장이 정의맹주가 된 것 정도만 알 뿐이지. 제갈동생 이 자세히 말해주겠어?" 제갈심의는 자신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안색을 다소 상기시키 며 말했다. "자세한 것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다 만 몇 가지 말씀드리죠. 현재 맹주의 아래에는 모두 세 명의 호법(護 法)을 두었는데 가히 부맹주라고 해도 무방하죠. 무당파의 원로이신 자 허진인(紫虛眞人)과 개방의 태상장로이신 개왕 금일붕(金一鵬) 노선배, 그리고 바로 남궁세가의 노가주이신 제왕검(帝王劒) 남궁장산(南宮長山) 노선배님께서 바로 그분들이세요." 과거 오대세가는 구파일방에 비해 항상 마치 이류(二流)처럼 대접받곤 했다. 만일 어떤 맹을 결성할 때면 구파일방에서 맹주가 나오고 중요 인물들이 나오곤 했지 이렇게 남궁세가가 중용된 적이 드물었다. 가히 오대세가 사람들이 신이 날만 했다. 물론 그것은 그간의 그들의 나름대 로의 노력이 지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황진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분들이라면 과연 그럴만 하군. 나도 역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어." 제갈심의는 약간 신이 났는지 말을 계속했다. "그 외에 총순찰(總巡察)과 오당(五堂)이 생겼는데 언니는 거기에 누 가 임명되었는지 아세요?" 황진의는 웃으며 물었다. "혹시 동생의 부친께서 그렇게 되신 것은 아니야?" 제갈심의는 안색을 다소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 아버님은 그저 피리만 잘 불고 다니지 도무지 무공에는 관심 이 없어요. 그래서 오죽하면 금적서생(金笛書生)이라는 별호가 붙었겠어 요." 황진의는 말했다. "만일 진정으로 인생을 이해하고 깊게 그 맛을 음미하는 분이라면 굳 이 무공은 높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해. 사실 동생의 부친은 아주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31 장 백발(白髮)의 미청년(美靑年) 남궁검민이 나서서 제갈심의를 대신해 말했다. "오당은 다함께 천지풍운룡(天地風蕓龍)이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중의 천당(天堂)은 무당장문인이신 옥양진인(玉陽眞人)께서 맡으셨고, 지당(地 堂)은 저의 조부님께서, 그리고 풍당(風堂)은 개방 방주이신 백결개 금 부(金浮) 노선배님께서 맡으셨고, 그리고 운당(蕓堂)은 저 제갈동생의 증 조부님께서, 그리고 용당(龍堂)은 저 팽형의 조부님께서 맡으셨지요." 남궁검민의 조부는 바로 현임 남궁세가의 가주인 파천신검(破天神劍) 남궁건원(南宮乾元)이고, 제갈승지의 증조부는 바로 제갈세가의 노가 주인 철금노인(鐵琴老人) 제갈황이고, 팽호의 조부는 바로 하북팽가의 가주인 삼도무적(三刀無敵) 팽대력(涵у浦이었다. 백방생은 속으로 곰곰 히 그 얘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지식을 되살려 보았다. 들어 보니 확실히 이번에 오대세가의 사람들이 중용된 것이 틀림없었다. 오대세가에서는 오당주(五堂主)의 지위에 세 명이나 올라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 용당의 당주가 된 삼도무적 팽대력의 경우는 더욱 뜻밖의 일로 느껴졌다. 지금 들은 나머지 사당주들은 무공이 모두 초절 정의 경지에 오른 최고명숙들인데 반해 팽대력은 아직 무공이 최절정의 경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화산파나 무슨 청성파 등에서 초절정의 고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유독 그런 사람을 기용한 것은 아마 도 그 용당의 특성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다. 아까 하북팽가의 소가주가 정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 일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남궁검민은 황진의를 향해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남은 한 사람 총순찰에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 기용되었는데 그게 누군줄 아십니까?" 황진의는 미소하며 대꾸했다. "대단한 강호의 영웅이 기용되었겠군요?" 남궁검민은 말했다. "실로 대단한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죠. 이제까지의 직책을 맡으신 분들 은 모두가 육십을 넘어선 분들이었는데 오직 그 사람 하나만은 삼십대 의 젊은이 입니다. 실상 오래전부터 그 기재가 심심치 않게 알려져 오 던 분이었는데, 바로 그는 소림사의 일수(一秀) 지공대사(知空大師)입니 다." 백방생은 문득 은근히 그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는 지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느닷없이 남궁검민의 입에서 그러한 소리가 들려나오자 그만 가슴이 흠칫하는 느낌이 들었다. 황진의도 다소 놀란 표정이었으나 이내 수긍하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요. 사실 그 사람이라면 가히 후기지수(後起之秀)들 가운데 제일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황진의는 굳이 지공을 후기지수들 가운데의 제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면 그녀가 그토록 신봉하는 용천기는 이미 후기지수가 아니라는 말인 가？ 백방생이 옆에서 그런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문득 이제까지 잠 잠하던 남궁검상이 말했다. "그를 사실 제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를 마치 신화적(神話 的)인 존재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 만한 사람은 따져보면 많이 있습니 다. 그 철혈부의 부주도 역시 나이가 그 정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황진의는 용천기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역시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녀가 다소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남궁검민이 말했다. "하지만 반드시 무공이 높다고 해서 영웅호걸은 아니다. 영웅호걸이란 반드시 장부의 풍모를 갖춰야 하는 것이지 그릇된 길로 빠지는 사람은 아니다." 남궁검상은 친형의 말에 불복하는 듯 다시 말했다. "영웅호걸요? 그게 대체 얼마나 한답니까?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 목 숨을 버리기라도 한다면 누가 알아 주기라도 한답니까? 이번에 나타나 서 우리를 도와준 그 천상회주(天上會主)도 그렇다면 역시 영웅호걸이라 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방생은 무심코 듣고 있다가 문득 천상회주라는 말에 갑자기귀가 틔었다. 순간 역시 그랬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조금 전의 의문들이 한 꺼번에 풀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빠르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녀도 그들을 따라서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닐까?) 남궁검민은 갑자기 동생과 불화가 생기게 되자 그만 못난꼴을 보인 셈 이 되어 잠시 안색이 붉어졌다. 황진의가 그런 무안한 기분을 지워주려 는 듯 웃으며 질문했다. "천상회주라는 사람이 이곳에 왔었습니까?" 제갈승지가 대신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그 천상회주는 사실 말하자면 천륭무가의 소가주입니다. 아, 황소저께 서도 잘 하면 아시겠군요! 그는 이번에 나름대로 천상회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휘하에 천상오룡(天上五龍)이라는 사람들이 있어 서 능력이 뛰어나고, 아무튼 오늘 정오에 철혈부의 인물들이 대거 공격 해 왔을 때 그들이 도와줘서 물리친 것이 사실입니다." 천륭무가의 소가주가 천상회주라면 그는 바로 석륭안(石隆安)이라는 사 람으로 나이도 현재 스물 셋 밖에 안 된다. 하지만 그의 무공은 이미 심 검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천륭무가의 사람들이 대대로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것은 모두 천상절맥(天上絶 脈)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즉 그것은 자신의 원기를 지나치게 소모 하여 흡사 촛불이 꺼지기 직전에 강렬하게 타오르는 것과 비슷한 현상 이며, 천부적인 자질이라고 보기 보다는 지극히 괴이한 천형으로서 보 는 것이다. 현재 천륭무가의 가주는 천하제일인이라고 한다. 거기에 다시 요절하게 되는 새로운 무학천재(武學天才)인 젊은이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 었다. 백방생은 문득 이전에 소림사의 동굴에서 보았던 천륭무가주 석 장생(石長生)에 관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과연 그곳에서 천형을 극 복하는 수련을 성공할 수가 있을까? 본래 철혈부에서 모든 준비를 하고 왔다가 갑자기 그렇게 물러나게 된 데에는 알고보니 그런 이유가 있었다. 천상회주라는 새로운 변수가 나타나자 그만 갑자기 형세가 크게 기울어 도주하고 말았던 것이리라. 백방생은 필시 그 천상회의 무리속에 진소유도 함께 있는 것처럼 생각 되었다. (그렇다면 아마 이 무리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녀는 어디에 있 을까?) 백방생은 내심 크게 궁금했지만 지금 그런 의문들을 물어볼 수는 없 었다. 황진의는 다시 말했다. "아, 그럼 그도 정의맹에 가입을 한 것인가요?" 제갈승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그는 몸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본맹에 가입하지는 않으 나 그저 앞으로 돕기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황진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뭔가 깊이 생각하는 눈치 였다. 그 때 문득 휘장밖에서 다시 일단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가들어 왔다. 백방생이 바라보니 그들은 모두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내심 급히 물어보고 싶던 말을 그대로 꿀꺽 삼키지 않을 수가 없 었다. 다시 휘장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뜻밖에도 바로 다름아닌 전날 남궁 검상과 함께 술집에서 보았던 사천당가의 남매와 황보세가의 남매들이 었다. 아마도 아까부터 그들은 남궁검민 등과 함께 어울리고 있었던 모양 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사람들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들이 모두 찾아나선 모양이었다. "아니, 여기서 다들 무엇을 하고 있죠?" 맑은 음성으로 소리치며 말한 사람은 바로 남궁지약(南宮芝若)이었다. 그녀는 말을 한 후 자신의 두 오빠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황진의와 백방생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 궁검민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 저기 황소저와 백공자를 만나서 무림의 일을 얘기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그 두 형제가 서로 다소 안색을 붉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남 궁지약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기는요? 이제 곧 단상에서 무림명숙들이 연설을 한다고 하는데 계속 이렇게 있기만 할 건가요?" 남궁검민 등은 그 말에 다소 흠칫해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만 어서 가 봐야지." 남궁검민이 몸을 일으키자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따라서 몸을 일으 켰다. 백방생과 황진의도 함께가기를 권유받았다. 백방생은 마침 진소유 를 찾아보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수십개의 휘장들이 쳐져 있는 연무장의 앞쪽에는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은 단(壇)이 있었고, 지금 그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모두들 강호에서 내노라 하는 고수들이기 때문에 전신에서 강한 기도가 흐르고 있었고, 또한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한껏 기분들을 냈 었기 때문에 얼굴들이 달아올라있었다. 실로 정파의 수천명의 군웅(群 雄)들이 모이는 이런 자리는 실로 보기 드문 것이었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누군가가 단 옆에서 소리친 다음에 이윽고 한 사람이 단위로 올라갔다. 바로 이번에 정의맹주(正義盟主)가 된 소림방장 도액선사였다. 그가 단 위에 서자 군웅들은 잠시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도액선사는 불호와 함께 입을 열어 말했다. "아미타불! 아무튼 여러 군웅들께서 이렇게 강호의 안녕을 위해 마음을 모아 주시니 고맙소이다. 이미 정해진 대로 본맹(本盟)은 지금부터 정 식으로 발족한 것이오. 아미타불...육성되었겠지만, 그러나 아직 상황이 여의치 못하므로 부득이 각문파에서 차출해야 하겠소. 그리고 지금은 유 사시이기 때문에 당분간 이 곳에 머물면서 각문파는 본산(本山)과 연락 을 취하면서 협력해 주셔야 하겠소. 그리고 이미 각 문파의 장문인들께 서 본맹의 십오대장로(十五大長老)가 되시어 본맹의 일에 협조하기로 하 셨소이다." 청수하고 마른 용모의 노승 도액선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비록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그 카랑카랑한 음성에 군웅들은 절로 정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어 도액선사가 옆으로 물러나 면서 손짓으로 가리키자 일순 장내에서는 거대한 환호 소리가 일어났 다. 백방생이 바라보니 단위에는 지금 십여명의 노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 다. 그들 가운데 도사(道士)도 있었으며, 거지도 있었고 학자가 있는가 하 면 노사태(老師太)나 노검객(老劒客)들도 있었다. 그들이 당금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장문인들임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그들은 가히 당금의 정파 무림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과거의 달마하원이나 남 해보타도 같은 근래들어 급성장한 정파세력들이 없지 않았으나, 아직은 그들을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유구한 전통(傳統)과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정사중간이나 사마외도의 무리들이 훨씬 숫자가 많고 강성해 지기는 해도 아직 그들은 충분히 버텨내고 있었다. 지금 단위에 서있는 사람의 숫자는 모두 열다섯명이 못되었는데, 그것 은 그들 가운데 정의맹의 요직을 겸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 다. 지금 단위에 서있는 사람들은 실로 실질적으로 강호의 정파무림계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대홍락의 초입인 초절정(超絶頂)의 경지에 올라 있었고, 또한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성원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 난 지 한참이나 되었는데도 계속 환호하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백방생은 계속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진소유를 찾는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 역시 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 백 방생은 문득 낯익은 사람 하나를 발견해냈다. 바로 그녀는 일전에 남궁 검상, 증평 등과 함께 어울렸던 화산옥녀(華山玉女) 채청문(蔡靑文)으 로, 아마도 그곳은 구파일방의 후진들이 모여있는 자리인 모양이었다. (이미 가 버린 것이 아닐까?) 이때 단위에서는 그 십오대장로들이 모두 물러가고 다시 그 단 옆에 있던 사람이 소리치고 있었다. "여러분, 잠시 조용히 하시오! 중요한 손님이 다시 찾아 오셨소이다!" 그 소리치는 사람은 등에 한자루의 칼을 매었으며 키는 육척에 불과했 으나 용모는 팽호와 흡사하게 느껴지는 노인(老人)이었다. 백방생은 그 가 혹시 이번에 용당주(龍堂主)로 발탁된 삼도무적(三刀無敵) 팽대력(涵 у浦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윽고 다시 단위에 일단의 사람들이 올라서고 있었다. 그들은 한 무 리로서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은 아주 특이하게 생긴 스물 셋 정도의 청 년이었다. 그는 용모가 대단히 수려했는데 괴이(怪異)하게도 머리카락이 찬란하게 빛나는 은백색이었다. 백발미청년(白髮美靑年), 그는 허리에 한자루의 검고 특이한 광택을 일으키는 장검을 차고 있었는데, 그것은 흡사 백방생이 이전에 보았던 여의지존신검(如意至尊神劍)과 모양이 비슷했다. 그는 실로 뛰어나고 영웅적인 기질로 단숨에 장내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실 백방생이 주시한 사람은 백발미청년이 아니라 바로 그 옆 에 서있는 사람들이었다. 백방생은 일순 놀랐다. 그들은 바로 다름아닌 천상오룡(天上五龍)과 진소유가 아닌가? 마침 진소유를 애타게 찾고 있던 백방생은 그만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랬다. 그것은 다분히 의외성 보다는 그가 너무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렇다면 저 자가 바로 그 천상회주(天上會主)라는 석륭안(石隆 安)이라는 말인가?) 백방생은 황급히 단아래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 때 누군가가 따뜻 한 손으로 그를 잡았다. 바로 황진의였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전음소리가 백방생의 귀를 간지럽혔다.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백방생은 문득 그녀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그럼 혹시 그녀도 나와 소유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인가?) 황진의는 이내 손을 놓았으나 왠지 그녀의 미소는 의미심장하게 여겨 졌다. 그 때 백발미청년인 천상회주 석륭안이 단아래를 향해 한마디를 하고 있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이미 뭇 선배 여러분들의 특별한 호의를 받았습니다. 나는 비록 일신상의 이유로 적극 적으로 정의맹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한 뿌리 라는 것입니다. 만일 정의맹이 어떤 위험에 처한다면 알려 주십시오. 즉각 달려와서 신명을 다바쳐서 도와드릴 것입니다!" 석륭안은 당금 천륭무가의 소가주로서 그의 지위는 강호상에서도 지대 한 것이었다. 비단 천상회주라는 직함이 아니더라도, 그가 다소 오만하 게 말하는데에 있어서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 만큼 천륭무가의 힘은 강호상에서도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석륭안이 그렇게 말을 끝내자, 이내 군웅들의 열성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 은 심지어 환호하며 그에게 정의맹주가 되어 달라고 호소하는 사람 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열띤 분위기 속에서도 백방생의 시선은 그 주위를 맴돌았 다. 천상오룡의 표정은 다소 오만한듯 하면서도 냉막하여 석륭안의 표정 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사실 무서울 것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진소유, 그녀는 지금 역시 순백색의 의삼을 걸치고 있었으며 안 색이 매우 냉정해 보였다. 마치 무심(無心)한 듯이 보이는 그녀의시선 에는 눈앞의 군웅들 조차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석륭안은 일단 그렇게 말한 후 환호하는 군웅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다시 단 뒤쪽으로 사라져 갔다. 천상오룡과 진소유 등도 역시 그 뒤를 따라 묵묵히 걸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이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단 뒤쪽을 향해 달렸다. 황진의도 이 번에는 막지 않았으며 그는 혼자였다. 매우 멀게만 느껴졌지만 그러나 백방생이 단 뒤쪽으로 돌아간 것은 아주 잠깐 후의 일이었다. 단위에는 다시 누군가가 올라와서 환성이 터 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백방생의 안중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바라보니 천상회의 그 일행은 마악 뒤쪽의 건물들 사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백방생은 계속 그쪽으로 내달으며 혹시 뒤쫓지 못할까봐 소리쳤 다. "진, 진낭자! 소유(小柔)!" 천상회의 일행은 모두 십여 명이었는데 백방생이 직접 진소유의 이름 을 말하자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았다. 특히 그 가운데에 서 천상오룡의 시선이 특별하게 빛났고 천상회주인 석륭안도 다소 특이한 시선으로 진소유와 백방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에 반해서 진 소유는 안색이 매우 냉막해져 있었다. 그녀는 백방생이 다가오기를 기다 렸다가 이내 쌀쌀하게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나를 불렀죠?" 백방생은 그녀의 음성보다 오히려 그 눈빛이 의외로 더욱 차가운 것을 보고 내심 왠지 당황하는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기호지세 (騎虎之勢)라고 생각되어 비교적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우선 진소유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 석륭안을 향해 포권하며 인사 를 했다. "조금전에 연설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매우 훌륭하시더군요. 저는 천 상회(天上會)가 좋은 방면으로 강호에 뿌리를 내리기를 기원하는 바입니 다." 석륭안은 상당히 기이한 시선으로 뚱뚱한 그의 외모를 아래 위로 뜯어 보다가 일순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이 석륭안의 나이는 백방생보다 두살이나 더 많다. 따라서 백방생은 그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은 지나친 인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백방생 은 재차 포권하고 읍하며 말했다. "저는 진낭자와 같은 남쪽 태생으로 성은 백(白)이고 이름은 방생(方生) 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일이 있어서 이렇게 실례를 저지르게 되었으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백방생의 그러한 태도는 십분 공손했다. 설사 아까부터 석륭안에게 환 성을 지르던 강호의 청년협사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리지 는 않았을 것이다. 백방생은 그러나 여전히 진소유가 불안해서 그녀를 은근히 의식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진소유는 매우 침착할 뿐만 아니라 그를 제지하지 도 않았고 이어 나서서 말하거나 변명하지도 않았다. 천상오룡 역시 지나 칠 정도로 침묵을 지킨 채 냉정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오히려 다시 나서서 입을 연 사람은 석륭안이었다. 그는 기이한 시선으 로 백방생의 얼굴을 투시(透視)할 듯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백방생이라고? 그렇다면 그대가 바로 옛복주의 대부호인 백행치(白 行癡)의 친손자라던 그 사람인가?" 백방생은 그 말에 일순 다소 놀랐다. 그는 뜻밖에도 상대인 석륭안이 그 렇게도 자신을 쉽게 알아볼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천상오룡과 진소유가 천상 회의 일에 손을 맞추게 되었을 때 어찌 백노야의 장원에서 벌어졌던 그 당시의 인연(因緣)을 말하지 않았었겠는가? 그런 얘기를 들었다면 백방생 자신이라고 해도 아마 그 기이한 운명의 소년에게 관심을 느꼈 었을 것이었다. 다만 그가 자신의 돌아가신 조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백방생은 내심 개의치 않고 즉각 웃으며 말했다. "예, 저를 알고 계시는 군요? 그렇다면 실로 다행입니다. 보다시피 저 와 진낭자는 서로 친구사이인데, 지금 잠시 대화를 나누려고 합니다. 아 무쪼록 그대께서 잠시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석륭안은 그 말을 듣자 역시 기이하게 웃더니 말했다. "사실 진낭자는 우리와 친구사이일 뿐이지 무슨 나의 수하는 아니오. 그런데 그 일로 나에게 굳이 허락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겠소?" 백방생은 은근히 진소유쪽을 의식하는 석륭안의 말 또한 매우 의미심장 하다고 생각했다. 백방생이 나타났기 때문에 갑자기 그들 사이에는 어 색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진소유 에게 말했다. "진낭자, 그럼 우리 잠시 얘기 좀 나눌 수가 있겠소?" 진소유는 무심한 듯한 시선으로 백방생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나를 따라 와요!" 백방생은 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가려다가 그가 아직 천상오룡에게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즉시 그들에게 일일이 포권하며 말했 다. "여러분, 다시 보게 되어 반가우나 소생은 바빠서 미처 인사를 나눌 시 간도 없구려." 이대인(李大仁)이 말했다. "백공자, 뭘 그리 걱정하시오? 어서 그냥 진소저를 따라 가면 될 것이 아니오?" 다소 냉막한 듯한 그의 말투에 백방생은 기분이 다소 어색해졌으나 이내 서둘러 읍을 한 뒤에 진소유가 걸어간 방향으로 뒤쫓아 갔다. 진소유, 그녀는 건물들의 사이를 돌아서 어느 한 으슥한 골목길에 서서 백방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방생이 다가가자 그녀는 즉시 질문을 던져 왔다 "당신은 어째서 또 날 찾아왔죠?" 백방생은 그녀가 아까보다 더욱 화가 나 있는 듯한 것을 보고 내심 크게 당황해 졌다. "나는, 우선 당신에게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려고 했소. 그리고...... 진소유는 그의 말을 자르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내게 준 그 유산이 아까와서 찾아온 것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나는 이미 말했다시피 그 돈은 당신에게 속한 것으로...... 진소유는 시간이 없다는 듯 그의 말을 자르며 다시 말했다. "그럼 고의로 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함인가요?" 백방생은 그녀가 이토록 가시돋친 듯이 차갑게 나오자 잠시 머뭇거리 다가 이내 결심한 듯 소리쳤다. "그렇소! 나는 사실은 당신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온 것이오!" 진소유는 백방생의 의외의 말에 놀란 듯 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아니 뭐라고요?" 백방생은 그녀의 싸늘한 시선에 절로 기가 질릴 정도였으나 이미 기 호지세라 자신도 지지 않고 그녀를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지금 하려는 일에 대해서 나는 대강 알고 있소. 당신은 바로자 신의 영화를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거대한 목적을 위해서 그들에게 달라붙고 있는 것이오. 그것은 바로 사문(師門)의 복수를 위 한 것이 아니오?" 진소유는 그 말에 다소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당황스런 표정이 었으나 이내 다시 정색을 하고 비웃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말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당신은 과거 그렇게도 불문의 비구니가 되려고 했소. 비록 사부인 우 리 어머니는 원망했으면서도 한사코 비구니가 되려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었소. 그것은 실로 당신의 소원이었기 때문이오. 당신은 그런데, 비록 갑자기 사문이 멸망했다고 해도 이렇게 호사스런 생활을 할 수가 있겠 소？ 사실 당신은 지금 그 천상회의 힘을 빌려서 복수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오." 진소유는 그의 말을 묵묵히 다 듣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런 나의 일을 방해하고 나서 나더러 당신와 함께 살자 고 하고 있는 것인가요?" 백방생은 왠지 너무 쉽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은 정말, 그렇게 해주겠다는 것이오?" 순간 갑자기 심한 통증과 백방생의 얼굴이 좌우로 돌아갔다. 퍽퍽퍽! 진소유의 우수가 맹렬하게 그의 따귀를 후려갈긴 것이었다. 백방생은 일 순 고통보다는 머리가 흔들려서 정신이 다 없어지는 것 같았다. 대번에 그의 양뺨이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그런 그의 얼굴에 대고 진소유의 악에 받친 듯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미친 자식아! 네 놈은 정말 나와 무슨 원수가 졌길래 이 지랄이 냐! 뭐 나의 일을 일일이 방해하겠다고? 호호호, 방해해봣 이 자식아! 내가 나중에 네놈을 죽이지 않으면 성을 갈고야 말겠다! 뭐 복수를 하 려고 하냐구? 호호호! 그래, 복수를 위한 거다! 이 자식아! 나는 뭐 그런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구? 이 자식아, 지금 내게 저주를 하고 있는 거냐?" 백방생은 따귀를 맞은 것보다도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와르르 쏟아 져 나온 말들에 대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럼 내 생각이 틀렸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긴 일부러 그렇게 복잡하고 까다롭게 복수하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백방생은 내심 급히 생각을 굴리며 말했다. "아, 알겠소. 내가 말을 취소하겠소! 당신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니오?" 진소유는 금방이라도 일장(一掌)을 후려칠 듯한 기세였으나 이내 그 말 에 다소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차가운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어째서 아직 가지 않고 서 있느냐?" 백방생은 흡사 불길을 내뿜는 듯한 그녀의 안광에 기가 질릴 정도였으 나 간신히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것은, 음 그러니까 내게 아직 한가지 해야할 말이 있기 때문이 오." 진소유는 그래도 백방생의 마음이 가상하다고 생각은 되었는지 더욱 어조를 낮추며 말했다. "그래, 그건 뭐지?" 백방생은 다소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음, 그것은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반드시 노력하여 무공을 회복하고 강호의 영웅(英雄)이 되어 부모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오." 진소유는 그 말에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더니 더욱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결국은 나더러 혼인을 하지말고 기다리란 말인가요?" 백방생은 그녀의 말이 부드러울 수록 더욱 위험해 진다는 것을 방금 경험했으므로, 급히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대꾸했다. "그, 그렇소. 나는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있소." 진소유는 이에 문득 다시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다시 물었다. "당신의 그 초라한 몰골을 보고 말인가요? 나더러 사랑을 해달라고 요?" 백방생은 그말이 마디마디가 마치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서 절 로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 "여, 역시 안되겠소?" 진소유는 의외로 가볍게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예요. 나는 당신도 보았다시피 그 석공자(石公子)에게 마음이 있 어요. 당신은 스스로 그와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비교할 수 있다!) 백방생은 내심 그렇게 소리쳤으나 그것은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빛은 절로 암담해 졌고 어깨는 축 늘어졌으며 시선은 자꾸만 무겁게 아래로 내리 쳐졌다. "그, 그랬었군. 당신의 말도 무리는 아니오. 나는...... 설마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소." 진소유는 금새 냉정해져서 소리쳤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 가지 않고 있는 거죠?" 백방생은 겨우 용기를 내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냉엄하고 서릿 발이 어린듯 하지만 흡사 백색의 연꽃같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한숨을 길게 불어쉬며 말했다. "물론 일이 그렇게 된 이상, 나는 당신에게 더이상 미련을 갖을 수가 없게 되었소. 더이상 사랑을 애원하지도 않겠고 또한 돈도 물론 돌려달라 고하지 않겠소. 다만......주고 싶은 것이 있소." 진소유는 냉정하게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말해요. 그건 뭐죠?" 백방생은 즉시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비록 당신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당신을 깊이 사랑하오. 나는 당신이 누구와 살더라도 행복해지기를 원하오. 그래서 말인데, 그런 사 람들과 다니다 보면 내상(內傷)을 입기가 쉬울 테니, 이것을 가지고 다 니다가 사용하도록 하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선물이오."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속명신단이 들어있는 약병이었다. 백방생은 아직 그것이 기실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말이 끝나자 고개를 숙이면서 그 약병을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 그녀를 더이상 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치 서운함이 가 슴으로 저며드는 것 같았다. 헌데 그 때였다. 백방생은 갑자기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날아 갔다. 그는 뒤의 벽면에 심하게 머리를 부딪치며 나뒹굴었는데 어느새 뒷머리에는 혹이 하나 나 있었다. 진소유가 느닷없이 발길질로 내지른 것이었다. 백방생이 허둥지둥 일어나 앉으며 고개를 드니 그의 머리 위 로 진소유의 칼날같은 교갈이 내리 쏟아지고 있었다. "이 청한 자식아! 누굴 거지로 아느냐? 그런것은 너나 가져! 만일 다시 한번 내 앞에 나타나서 내 일을 방해한다면 그 때는 뼈도 못추릴 줄 알 아, 이 병신같은 자식아!" 말이 끝나자 그녀는 곧장 신법을 펼쳐서 왔던 길로 휑하니 사라져 가 고 있었다. (정말 매정하고도 난폭한 아가씨로군!) 백방생은 문득 아직도 안전하게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약병을 내려 다 보며 내심 다시 생각했다. (하긴, 그녀가 이것을 쉽게 받으리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않았었지.) 백방생은 잠시 후에 몸을 일으켰다. 그는 겨우 약병을 품속에 갈무리 하고 걸음을 옮기려고 했으나 일순 진소유에게 맞은 부위가 아파서 도 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약병에서 속명신단을 한알 꺼내서 복용한 후에 간단히 조식(調息)을 했다. 진소유에게 맞은 상처의 자리는 마치 차가운 얼음조각을 박아놓은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속명신단의 약효가 발휘되기 시작하자 그것은 이내 깨끗하게 나았다. 마치 뱃속에 열기가 일어서 그 차가운 얼음조각 을 다 녹여버리는 것 같았다. (이제 그녀는 잊도록 하자. 그녀는 나의 호의조차 싫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분명한 대답을 들었는데 어찌 행(行)하지 않으리!) 백방생은 조식을 마친 뒤에 먼지를 툭툭 털고 속으로 중얼중얼 거리며 걸어갔다. 그 곳은 진소유가 사라져간 곳과 반대방향이었다. 당연히 그 쪽으로 가면 정의맹의 안쪽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백방 생은 이윽고 도리어 연무장쪽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 건물 들의 배치가 일종의 심오한 기문진법(奇門陣法)에 의해 설치되었기 때 문이었다. 백방생처럼 정신없는 상태가 아니라고 해도, 어떤 사람이라 도 쉽게 안쪽으로 접근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백방생은 자신이 다시 연무장으로 나왔으나 그것도 역시 개의하지 않 았다. 그의 눈동자는 약간 맥이 풀려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약간 술취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대체 어디로 가야할까? 나는 대체 무엇을 해야할까......?) 연무장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서성대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멍청한 모습의 서생을 주의하지 않았다. 백방생은 그런 가운데 서서히 정의맹의 연무장을 벗어났고 이어 정문도 벗어났다. 정문을 지키고 있 던 팽걸 등도 다소 괴이쩍게 바라볼 뿐, 백방생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 다. 백방생의 내상은 이미 조금전의 내식으로 다 나아 있었다. 오히려 속명신단의 복용으로 그의 공력이 삼십년 정도 늘어서 이류(二流)급인 일갑자(一甲子) 정도 되었다. 백방생은 정신없이 나아가고 있었으나 어느덧 경신술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일종의 무학의 깨달음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 깨달은 무학의 경지야말로 사실 대단한 것이었다. 32 장 소녀의 지혜(智慧) 백방생은 스스로의 생각에 몰입하여 정신없이 산과 계곡을 넘어 달렸다. 지금 그가 일갑자의 공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고해도 최소한 산과 계곡의 장애물 정도는 쉽게 생각할 정도는 되었다. 어느덧 사방에는 뉘엿뉘엿 저무는 태양으로 인해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산속의 밤은 빨리 찾아오게 마련이다. 백방생은 어느 조용한 계곡의 앞에 이르러 있었다. 지금 옆에 황진의 가 있다면 그에게 다소의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방생은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멍하니 신형을 멈춰 세우고 서서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하나의 거의 다 쓰러져 가 는 모옥이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곳이라면 과거에는 사냥꾼의 임시 거처였을지는 모르나 이제는 짐승도 살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러 나 지금 이 순간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실로 공교로움이라고나 할까? 백방생은 문득 그 목소리들 가운데에서 매우 귀에 익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마치 그것에 반사적으로 이끌리기라도 하듯이, 백방생은 이윽고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워졌기 때문일까? 모옥의 내부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괴이한 시체 썩는 냄새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주검들. 백방생은 그 옆에서 모두 네 명의 살아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바로 다름아닌 아까 정의맹으로 가던길에헤어졌던 증평(曾萍)과 그녀의 일행이 었다. 밖에서 들은 목소리는 바로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오늘밤은 이 곳에서 묵으려는 모양이었다. 문득 침묵이 흘러간 뒤에 증평이 입을 열어 말했다. "저는 정말로 몰라요. 만일 사부님께서 저에게 그토록 무공을 가르치 고자 하셨다면 어째서 저의 무공이 아직 이 정도에 불과하겠어요?" 회룡검 하귀는 그녀의 맞은편에서 눈빛을 굴리며 음침하게 웃고 있다 가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함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아버지 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무엇 때문에 되지도 않을 싸움에 끼어 들었었 겠느냐?" 옆에 있던 다른 사형 하나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소제도 보았는데, 그 당시 사부님께서는 그 공공문(空空 門)의 노문주 대치도인(大痴道人) 손삼통(孫三通)에게 마치 빚을 지고 있 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그 여의신창(如意神槍)을 손에 넣을 때 우리 사부님께서도 큰 몫을 하신 것이 사실이죠." 증평은 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장(張) 사형도 그 공공문에서 준 절기비급이 지금 내 품에 있 을 것이라는 말인가요?" 장사형이란 자는 음험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야 대사형께서 그렇게 보시니까 그렇지. 대사형의 말씀은 항상 옳 은 것이거든." 하귀가 차갑게 증평에게 말했다. "어서 빨리 그 물건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동문(同門)의 의리도 돌보지 않을 것이다?" 증평은 고개를 들어 하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설마하니 저의 몸을 수색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요?" 하귀는 싸늘한 조소와 함께 말했다. "너는 감히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고 보느냐?" 일순 증평은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흐느끼 기 시작했다. "사부님께서 계실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사부님이 돌아가시고 나자 나를 금방 이렇게 대하는 군요. 저는 본문(本門)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대사형께서 장문인이 되실 것이고요.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절 몰아세우시는 거죠?" 하귀는 두어 차례 냉소하며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말이 없던 다 른 사내가 음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당시 네가 사부님의 곁에 있었고, 또한 어디를 갔다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앞으로 본파의 흥망성쇠는 그 일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는 감히 혼자서 독식하려고 한다는 말이냐?" 증평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답답하군요. 유(儒)사형! 아다시피 본파에는 대사형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사부님께서 대체 무엇이 답답해서 그 귀중한 것을 한낱 나약하고 쓸모없는 소매에게 맡기겠어요?" 그 유사형이란 자는 그 말에 다소 변명할 말이 궁해진 듯 묵묵했다. 하귀가 냉소하며 다시 말했다. "흥! 네년은 정말 순진한 척 하면서도 교활하구나! 내가 모를 줄 아느 냐?" 증평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이 말했다. "대체 뭘 알고 있다는 거죠?" 하귀는 잠시 주저하는듯 하다가 이윽고 두 눈에 흉심(兇心)을 떠올리 며 말했다. "본래 나의 아버지는 문파의 일 때문에 억지로 우리 어머니와 혼인 하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저주했지. 나의 용모가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나 마저도 증오했던 것 이다." 증평은 그 말을 듣자 안색이 변하며 도리질을 했다. 지금 하귀가 그런 말을 하는 심리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하귀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그것은 곧 만일 증평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나가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사부님께서는 저에게 늘 이렇게 말했는걸 요. 자신은 사실 돌아가신 부인을 미워했던 것이 아니며 또한 대사형을 사랑하고 계시다고. 그리고 늘 미안하기 때문에 가까이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하귀는 입을 크게 벌리며 흉측하게 웃어댔다. "호호호, 그야말로 나를 가지고 놀려고 하는군. 자식을 사랑한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으냐? 그리고 너와 우리 아버지와 의 관계를 모를 줄 아느냐?" 증평은 안색이 대변해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하귀는 천정을 한번 올려다 본 뒤에 자신의 부친의 시신을 돌아보고 음산하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본래 나의 어머니와 혼인하기 이전에 다른 한 여자를 알고 있었지. 두 사람은 사랑을 했는데, 나의 아버지가 나의 어머니에게 장가를 들자 그 여자는 실연을 당해서 괴로와 하다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낳은 딸이 바로 너지. 나의 아버지는 항상 그 여자를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네가 천애고아가 되자 데려다가 길렀 다. 그것은 네 용모가 그 여자를 매우 닮았기 때문이지. 이래도 내가 너희 두사람의 추악한 관계를 모를줄로 아느냐?" 증평은 안색이 점차로 창백해져 가다가 이내 어이가 없어 하며 소리 쳤다. "다, 당신 미쳤군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하귀는 이미 갈대로 갔다는 식으로 잔인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야 당연히 할 수가 있지. 사실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그 비급도 내 아버지가 네게 준 것이 아니냐?" 증평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당혹해 하다가 이윽고 바닥에 엎드 리며 하늘을 향해 맹세하듯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맹세할 수 있어요. 만일 나의 이 말이 거짓이라 면 하늘은 즉각 벼락을 내리실 것이고 나는 이내 죽어서 지옥의 겁화(劫 火)속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며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될 거예요?" 하귀는 증평이 그렇게 분명한 맹세의 말을 하자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네년은 무슨 진실을 말하겠다는 거냐?" 증평은 다소 의외의 표정들을 짓고 있는 두 사형을 번갈아 돌아본 뒤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돌아가신 사부님은 아주 좋으신 분이셨어요. 대사형이 생각하는 것과 아주 거리가 멀어요. 그 분은 아주 정의(正義)로우셨고 그리고 항상 인자 하셨죠. 대사형은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할 수가 있죠? 사실..., 그 분이 과거 저의 어머니와 작은 인연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예요. 하 지만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금술이 좋으셨고, 그리고 사부님께서도 나 중에는 사모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요. 대사형을 사랑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구요. 하지만 한번 벌어진 사이는 다시 돌이킬 수가 없기에 그 분은 많은 고민을 하신다고 했어요. 그 분이 대사형께 쏟는 관심은 지대하셨죠. 아마 머지 않아 대사형을 강호의 영웅호걸로 키우려는 복안 이 세워져 있었던가 봐요. 하지만 그 분은 항상 왠지 자신이 저의 어 머니께 일종의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저에게도 각별히 잘해주시곤 하셨던 거예요. 그 분의 저에 대한 마음은 그저 미안 함 뿐이고, 오로지 사랑은 대사형께만 있었던 것인데 어째서 대사형은 그런 것을 몰라주죠?" 하귀는 증평의 긴 얘기를 듣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네 얘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지금 이 자리엔 그것을 증명해 줄 사람이 없는데 어떡하겠느냐?" 증평은 놀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정녕 끝까지 나를 핍박할 것이란 말인가요?" 하귀는 그녀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이미 말했다시피, 네가 오늘 그 물건을 내놓지 않는다면 너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증평은 멍하니 하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술을 깨물고 말했 다. "좋아요. 저는 힘이 없으니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사부님 께서는 저를 잘 대해 주셨는데 대사형이 이러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정 말 돌아가신 사부님께서 채 눈도 감지 못하실 거예요." "어서 그 물건이나 내 놓아라?" 하귀는 즉각 증평의 손목을 잡아 거칠게 일으키며 소리쳤다. 증평은 꼼짝없이 이끌려 일어났으며 이내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가득해졌다. 그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모옥의 안에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오며 소리쳤 다. "그만 두시오! 그 낭자를 놓아 주시오!" 그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백방생이었다. 하귀는 이에 잠시 손을 놓고 그의 몰골을 바라보았다. 지금 백방생의 몰골은 한참동안 정신없이 헤 맸기 때문에 전처럼 단정하지가 못했다. 하지만 하귀는 이내 그가 바 로 아까 만난적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웬 녀석이냐?" 반사적으로 두 사형제가 달려가 백방생을 좌우로 포위하자, 백방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러지 마시오.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단지 협상을 하러 왔을 뿐이오." 하귀도 아까 백방생의 옆에 황진의가 있었던 것을 보았었으므로 쉽게 대하지 않고 자신의 두 사제들을 제지시켰다. "그만 두게! 그가 대체 무슨 협상을 하려는 것인지 두고 보기나 하 게." 하귀는 말을 끝내자 전면의 증평을 돌아보았다. 필시 두 사람의 사이 가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증평은 이순간 안색이 다소 상 기되고 두눈에는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으나 심하게 주저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두 사내가 제지하지 않자 이내 하귀의 앞으로 걸어와서 증평 의 옆에 서며 말했다. "대체 이 낭자의 값이 얼마나 되오?" 증평은 감히 꼼짝도 못하고 백방생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그가 그런 말을 하자 놀라서 말했다. "백공자님?" 하지만 백방생은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하귀의 얼굴만 노려 보았다. 하귀는 일순 두 눈에 특이한 광채를 발하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음탕하게 말했다. "정말 간덩이가 부은 녀석이로군. 네가 감히 돈으로 내 사매를 사려고 한다는 말이냐?" 하귀의 두눈에서 발하는 광채는 흡사 송곳으로 찌르는 듯이 강렬했 다. 그것은 그가 거의 이갑자(二甲子)에 달하는 공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비록 그의 무공은 선친처럼 상승(上乘)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 했으나, 어느새 거기에 바싹 접근해 가고 있는 상태였다. 백방생은 은 근히 그 기세가 두려웠으나 개의하지 않고 말했다. "그렇소. 설령 돈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고 해도 좋소." 하귀는 백방생이 태연한 기색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의 신색을 다시 한번 훑어 보았다. 비록 다소 어지러워지기는 했지만 백방생이 걸 치고 있는 의복들은 여전히 고급의 비단 옷들이었다. 하귀는 냉소하며 말했다. "하지만 내 사매는 지금 한가지 물건 때문에 그 가치를 매길 수가 없다. 너는 아느냐?" 백방생은 한차례 증평을 돌아본 뒤에 말했다. "내 이미 밖에서 약간 들었소. 보아하니, 당신은 공연히 증낭자를 미워 하여 있지도 않은 보물타령을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한다고 해도 결 국은 보물이 나오지도 않을 것인데 무슨 이익이 있겠소? 결국 그저 이 한 명의 낭자만 괴롭히는 것이 되지 않겠소?" 하귀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다가 말했다. "보물이 있고 없고는 네가 알 바가 아니다. 너는 대체 내게 얼마의 액 수를 제시할 작정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 여의신창이라는 것도 사실은 별게 아니오. 게다가 그것을 위해서 내놓은 물건이라니, 그 역시 대단치는 않을 것이오. 설령 있다고 해도 말이오. 그래서 말인데, 그 가격은 당신이 어서 말해보시오. 나는 아직 이런 거래를 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오." 하귀는 싸늘하게 웃었다. "너는 내가 이런 거래에 매우 경험이 많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 냐?" 백방생은 비아냥거리는 그의 말을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평하게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겠 소?" 하귀는 그 말에 즉시 모옥의 문밖을 응시했다. 기실 그는 백방생이 이 토록 대담한 것을 보아 필시 그 무공이 고절한 황삼소녀와 함께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귀도 어느 정도 그녀의 신분을 짐 작하고 있었던 터라 가볍게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 "이런 일은 쓸데없이 남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나는 거래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너의 생각을 한번 들어보자는 것뿐인데 무 슨 잔말이 많으냐?" 백방생은 그 말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소. 나는 지금 황금 오천냥이 있는데 그거라도 된다면 거래를 합시다." "황금 오천냥?" 비단 하귀 뿐만 아니라 옆의 사내들까지도 일순 놀라며 눈을 휘둥그래 떴다. 사실 어떤 부잣집 도령이 은자 수백냥이나 혹은 천냥 정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그다지 특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황금 오천냥은 커도 액수가 너무 컸다. 하귀 등은 일시 자신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허나 백방생은 그들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뭔가 부족해서 그러는 가 하여 다시 말했다. "만일 부족하다면 이 속명신단 여덟알도 함께 드리겠소. 이 속명신단은 한알을 복용하면 공력을 반갑자나 높여줄 수 있는 최고의 내상약(內 傷藥)으로 바로 성수곡의 물건이라오." 하귀는 일시 어이없는 표정을 하며 백방생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는 실 로 이 어리숙한 서생의 몸에 그렇게 많은 금은재보가 숨겨져 있는 줄은 몰랐다. 만일 그 사실이 알려졌으면 이 서생은 밖으로 마음놓고 다니지 도 못했었을 것이다. 일순 긴장이 되는 지 하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 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방생에게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너의 그 말이 사실이냐?" 백방생은 역시 그 말을 다소 오해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생각과 목적 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물론이오. 그 이외에는 이제 어떤 물건도 더 없소." 하귀는 오른손을 불쑥 내보였다. "그럼 그것을 내놔 보아라." 백방생은 우선 옆의 증평을 돌아보았다. 왠지 그녀는 이번에는 말리지 않고 오히려 편안한 기색이었다. 백방생은 즉시 품속에서 금표가 들어있 는 봉투를 꺼내서 하귀에게 건네주었다. 하귀는 이내 그 봉투에서 금표 들을 꺼내서 일일이 진위여부를 살펴보았고 옆의 그 두명의 사제들도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귀는 이미 나이가 삼십대 중반을 넘고 있으며 강호의 경험이 적지 않았다. 그가 살펴본 바 에 의하면 그 금표들은 추호도 거짓이 없는 진짜였다. 하귀는 이윽고 그 것을 확인한 뒤에 재빨리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너는 후회하지 않겠느냐?"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또 돈을 구할 수가 있는데 무슨 후회를 하겠소?" 이어 다시 그 속명신단이 들어있는 약병을 하귀에게 건네주었다. 하귀 는 이미 그것의 냄새만 맡아도 진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을 옆에서 바라보는 두 사제들의 눈자위가 은근하게 붉어졌다. 하귀는 역시 그 약병도 품속에 넣으며 소리치듯 말했다. "좋다! 이로써 결정되었다. 너는 그 증낭자를 데려가도록 해라?" 백방생은 그가 이렇게 쉽게 승낙해 버리자 다소 의심이 일어 말했다. "정말 이제 다시는 증낭자를 찾아 괴롭히지 않는 것이오?" 하귀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안면이 상기되어 있다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 증평은 이제 우리 왕옥파의 사람도 아니고, 또한 나와의 관 계도 끝난 것이다. 그런데 어찌 다시 찾아가겠느냐?" 백방생은 그가 그렇게 다시 한 번 말하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비로소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서 맹세를 하시오. 다시는 증낭자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말이오." 그러나, 하귀는 왠지 정신이 없는 모양인지 대꾸도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아마도 앞으로의 일을 급히 생각해 보는 모양이었다. 그 여덟개의 속명신단은 사실 보통의 물건이 아니다. 그것만 있으면 그가 장차 최상 승의 고수가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 오천냥에 달하는 황금은 얼마나 모든 일들을 편리하게 만들어줄 것인가? 바야흐로 그의 눈앞에 무지개빛 미래가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귀는 혼자 한참 생각에 빠져 있다가 뒤늦게야 백방생이 계속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아니, 너는 어째서 아직 가지 않고 있느냐?" 백방생은 이 사람이 더이상 자신을 상대하지 않는것을 보고 증평의 손을 잡아 끌었다. "자, 갑시다?" 그러자 증평은 가볍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잠깐만요." 백방생이 의아해 하는데, 문득 증평은 하굉명의 시신 앞으로 다가가서 절을 하면서 나직하게 한차례 흐느끼는 곡을 하는 것이었다. 하귀는 그런 것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계속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증 평은 이윽고 물기 젖은 눈을 하고서 몸을 일으켜서 백방생의 손을 잡 고 밖을 향해 이끌었다. "자, 이제 어서 가요!" 백방생은 하귀의 태도가 다소 수상하고 또한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마지못해 그냥 증평의 손에 밖으로 끌려 나 왔다. 밖은 어느새 짙은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증평은 계속 백 방생의 손을 잡고 걸었다. 그녀는 이 부근의 지리에 대해서는 잘 아는지 길을 가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또한 거침이 없었다. 두 사람은 계속 말없 이 걸었는데 이윽고 대략 한 시진 정도가 흘러서 어느 바위산 위에 올라 서자 백방생이 문득 말했다. 어느새 서로 손을 풀기는 했지만 왠지 그냥 계속 침묵을 지키기가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사위는 온통 캄캄했 고 하늘에는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낭자는 어디로 갈 생각이오?" 증평은 그 말에 오히려 의아한 듯이 말했다. "아니 저는 이미 당신의 것인데 어디로 가다뇨?"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낭자는 그 일을 정말로 믿고 있군. 하하, 그것은 그저 낭자가 위기에 처한 것 같아서 내가 나서서 방법을 다해 구해준 것일 뿐이오. 어찌 정 말로 내가 낭자를 살 수가 있겠소?" 증평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저 저를 돕기 위해 그 많은 황금을 쓰셨다는 말인가 요?" 백방생은 말했다. "사실 그 하귀라는 사람이 낭자의 부모도 아닌데 어떻게 낭자를 나에 게 팔 수가 있겠소? 그것은 내가 고의로 그의 욕심을 부추겨서 낭자를 구한 일에 지나지 않소. 음...상관하지 마시오." 증평은 문득 물끄러미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일순 두줄기의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백방생은 느닷없는 광경에 의아해 져서 말했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한 것이오?" 증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당신의 그 욕심없이 착하신 모습이 꼭 돌아가신 우리 아버 지를 닮은 것 같아서 눈물이 나온 거예요." 백방생은 의아해졌다. "낭자는 천애고아라고 하지 않았소?" 증평은 말했다. "아까 그 하선배의 얘기와는 내용이 좀 달라요. 저의 어머니는 나이가 많아서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혼인한 남자는 아주 착하고 훌 륭한 서생(書生)이셨지요. 결국 일찍 돌아가셔서 제가 열 한살때 고아 가 되기는 했지만, 어머니는 그 분을 매우 사랑하셨다고 해요."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 본래 그렇게 된 것이었군." 증평은 즉시 그의 손을 다시 잡으며 말했다. "우리 어서 그 곳으로 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어디로 가자는 말이오?" 증평은 말했다. "보물(寶物)을 찾으러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보물은 없다고 하지 않았었소?" 증평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아까는 이유가 있어서 말하지 않은 것 뿐이지 요. 사실...." 백방생은 말했다. "헌데 어째서 아까는 보물이 없다고 했었소?" 증평은 문득 고개를 들어 구름에 가려져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마음도 그와 같은 듯이 안색이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백방생은 이때 다소 놀라고 있었다. 그는 솔직히 증평을 여전히 그저 순진하고 청순한 소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의 그런 행동들이 거짓 이었다면, 그것은 보통 대담하고 꾀가 많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증평은 문득 말했다. "본래 저의 사부님은 공공문의 노문주에게 일해주는 댓가로 한 보따리 의 물건을 받았지요. 바로 말하자면 무공비급이었어요. 저는 그것을 받 아서 일정한 장소에 숨겨두었죠.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절대로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저는 부득이 그렇게 하지 않 으면 안 되었던 거예요." 백방생은 즉시 그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려다가 참았다. 이미 증평 이 비급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사실 백방생은 이미 충분한 무공 비급들을 보아 왔었기 때문에 그 어떤 비급도 그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 다. 증평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무공비급들은 바로 여인들만이 볼 수 있는 무공비급이었어요. 사 부님께서는 늘상 저의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제게 보답을 해주려고 하셨죠. 그러다가 그 물건을 입수하게 되자 곧 장 저를 불러서 주시면서 당부를 하셨죠. 그 물건은 자칫 강호의 피바 람을 일으킬 지도 모르는 것이니, 반드시 조심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라고요. 그리고 그 하선배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니 말하지 말 라고 하셨어요. 그것은 그분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어떻게 제가 어길 수가 있었겠어요?" 백방생은 갑자기 증평의 그 작고 가녀린 체구가 의연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증평은 아직 하굉명을 사부라고 부르면서도 유독 하귀에게만은 하선배라는 호칭을 써서 그와의 관계가 끝났다는 것 을 표시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군. 그런데 그 보물은 여기서 먼 곳에 있소?" 증평은 그를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야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에 있죠."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낭자는 그곳으로 가도록 하시오. 나는 이만 떠나도록 하겠소." 증평은 의아해 져서 물었다. "갑자기 무슨 해야할 일이라도 있나요?" 백방생은 한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말했다. "할 일은 없고 오라는 데는 없지만 갈 길은 많다. 그것이 나의 솔직한 지금의 심정이라오. 나와 같은 사람이 무슨 할 일이 그리 있겠소?" 증평은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보물찾기는 그만두고 당신을 따라가도록 하겠어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돌아 보았다. "아니 그건 어째서요?" 순간 증평은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하게 고이면서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도 제가 미운가 보죠? 정말 그러시다면 저도 더 이상 귀찮게 해드리지 않겠어요. 그저 이렇게 의미없이 사느니 죽어버리고 말거예요." 백방생은 느닷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놀라서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낭자는 낭자이고 나는 나인데 어째서 내가 아니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오?" 증평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이미 당신의 것인데, 당신이 거절하시면 대체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 나가겠어요." 백방생은 펄쩍 뛰며 말했다. "아니 그것은 이미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소? 그저 임기응변으로 한 말이라고. 그리고 혹시 그가 다시 마음을 바꿔먹을 지도 모르는 일이 오." 증평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시 저는 정말로 그들에게 온갖 고초를 다 겪을뻔 했어요. 그것은 실로 죽음보다 더 못한 일이었죠. 저는 사부님의 은혜를 생각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상공(相公)께서 나타나 저를 구해주 셨죠. 상공께서는 단순히 위기를 구해주셨다고 했는데, 기실은 저의 생명 을 구해주셨던 거예요. 여인의 정조는 생명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니까 요." 백방생은 입장이 곤혹스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저 가볍게 생각하고 도와주었던 것인데, 이러면 오히려 부담이 되지 않겠소?" 증평은 말했다. "당시 저는 충분히 당신의 도움을 거절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신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예요. 옛 말에 은혜가 있으면 갚아야 하는 것이라고 했죠? 저는 그 도움을 받으 면서 진실로 앞으로 상공을 따르면서 시중을 들어드리기로 작정했어 요. 그런데 만일 이제와서 상공께서 저의 시중을 거절하시니, 이는 제가 괴롭게 되었군요." 백방생은 그녀의 표정이 암담해지는것을 보고 혹시 다시 죽겠다고 할까 봐 급히 말했다. "그때의 그 도움은 혹시 효과가 없었는지도 모르오. 나중에 그가 다시 찾아와서 낭자를 괴롭히면 내 도움은 없는 것이 되지 않겠소?" 증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가 거래를 후회할 것이라고요? 결코 그럴리가 없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어째서 후회하지 않는다는 거요?" 증평은 말했다. "당신은 아직 자신이 얼마나 많은 거금(巨金)을 사용했는지 모르고 계시 는군요. 실로 그 금액의 십분지 일이라고 해도 한 여자를 살 수 있어 요. 더욱이 저와 같은 계집은 그만한 값어치도 없는 셈이죠. 헌데 당 신은 거기에다 성수곡의 그 보물까지 주었어요. 그것은 말할 필요가 없 는 셈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래도 한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겠소?" 증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잘 알아요. 그가 나를 미워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성품을 잘 기억하게 되었지요.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곧장 그 곳을 나와서 보물을 찾으러 올 수가 있었겠어요?" 백방생은 이 증평이라는 낭자에 대해서 갈수록 다른 점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왠지 이번에는 그녀의 두눈에 혜광(慧光)이 어려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소?" 증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일이 바뀔리가 없어요." 백방생은 의아해 졌다. "무슨 상황이라는 말이오?" 증평은 그의 얼굴을 바라본 뒤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상공께서는 너무 저의 일에만 신경 쓰시느라 미처 잘 보지 못하셨군요. 사실 그 때 하선배는 공연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옆에서 두 사 람이 탐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데도 말이예요." "공연히?" 백방생은 갑자기 가슴이 흥분되고 심장이 거세게 뛰는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 하귀는 당시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말인 가?) 증평은 말했다. "당시 두 사형은 이미 그의 과거까지 알고 있었고, 또한 그가 일단 보 물들을 가지고 있는 이상에는 항상 어딘가 경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았겠죠. 하선배는 앞으로 나날이 뻗어나갈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필 요없기도 하고 말이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공격하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방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단 말이오?" 증평은 말했다. "방심한 모습이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적을 유인하면 상대하기 가 쉬워지는 법이죠. 본래 하선배는 냉정한 사람이어서 결코 그 정도의 재물에 넋이 나가는 사람은 아니예요. 저는 그 점을 알고 있기에 마각(魔 角)을 눈치챘죠. 하지만 그 두 사형은 이미 물욕에 눈이 어두워져서 냉 정한 사리판단을 잃고 있는 것 같았어요." 백방생은 왠지 가슴이 섬뜩해 지는 것 같아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그들을 해치고 나서 다시 이쪽으로 추격해 올 수도 있는 일이 아니오?" 증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는 없어요. 그는 우선 내가결코 그 재산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 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게다가 그는 다른 한 사람 때문에 감히 저 를 추적하지 못하고 몰래 숨어 버리고 말거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게 누구요?" 백방생은 물었으나 이내 그녀의 눈빛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 다. 기실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증평은 미소하며 되물었다. "그 황소저는 같이 오지 않았나요?" 33 장 사공노인 백방생은 내심 증평의 지혜로움에 은근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참고 있다가 이제야 그 질문을 해 오는 것이었다. 백방 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그녀와는 아까 이미 헤어졌소." 증평은 이에 다시 방긋 미소를 떠올렸다. "나도 왠지 보이지 않길래 그런 줄로 알고 있었어요. 헌데, 그녀도 없는 마당에 저를 자꾸만 멀리하려고 하다니,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 요?" 백방생은 그녀가 또 다시 자결하겠다고 말할까봐 급히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난 그저 그렇게 되면 낭자에게 손해가 되고 또한 앞으로 나쁜 소문이 나면 혹시 낭자의 혼삿길을 망치게 되지 않을까 해서 걱정되어서 한 소리요." 증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이미 상공의 하녀(下女)가 되기로 결심했으니 결코 후회는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시집가지 않을 것이니 그런 걱정은 말아요." (혹시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백방생은 문득 질린 심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그의 몸은 비록 황진의의 시술로 약간 좋아졌다고 하나 너무나도 비대하여 도무지 매 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백방생은 확신할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왜 증평이 이렇게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이었다.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낭자가 그런 각오라면 나를 따라오는 것은 말리지 않겠소. 하지만 나 는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큰 기대는 하지 마시오." 순간 증평은 기뻐 날뛰며 즉시 신형을 날려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백방생의 목을 껴안고 한쪽 볼에 입을 맞추며 말하는 것이었다. "고마와요. 저는 상공께서 이런 분이실줄 알고 있었어요. 앞으로 정성 을 다해서 보필하되 결코 조금의 부담도 드리지 않겠어요. 상공께서 어 떤 여자를 만나서 사귀든, 혹은 혼인까지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어요. 끝까지 저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예요." 백방생은 갑자기 소녀의 향긋한 입김과 함께 가슴의 불룩한 융기가 느껴지고 볼에 입맞춤까지 당하게 되자 급히 떼어내려고 했으나, 일순 그녀의 말이 매우 무거운 것을 알고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증평은 어느새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쁨의 눈물이었 다. 백방생은 이에 문득 자신에게 반문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도 대단한 사람이었던가?) 백방생은 그녀가 무안해질 까봐 천천히 떼어내며 말했다. "보물은 이 근방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있다고 했는데, 대체 어디요?" 증평도 그제서야 눈물을 옷소매로 닦고 웃으며 말했다. "그다지 멀지는 않지만, 그러나 찾으려면 날이 밝아야 해요. 우리 그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 가도록 해요." 백방생은 증평의 손에 이끌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그 제서야 정신이 약간 돌아온 듯 했으며 문득 생각했다. (미처 황낭자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았군. 나를 치료해 주겠다고 했 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백방생은 일단 증평에게 그 문제의 보물을 찾게 한 다음에 역시 황진 의를 찾아가 함께 강남으로 내려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증평은 길을 걸으며 밤새도록 얘기를 했다. 모두가 백방생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듣고 나면 유익한 점이 많았다. 대부 분이 그녀가 자라오던 과거의 얘기였는데, 그녀는 비단 지식도 많을 뿐 만 아니라 말을 조리있게 잘 해서 백방생으로 하여금 즐겁게 했다. 백 방생은 그녀를 만나기 이전에는 정신이 몽롱했었으나 이제 갈수록 정신 이 또렷하게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증평이 어떤 삶 의 의지를 조금씩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날이 새고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어느 덧 하나의 강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강가에는 누렇게 변한 갈대잎들 이 무성한데, 타고 건널 배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저 쪽으로 가 봐요." 증평의 손짓에 따라서 강의 상류쪽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전면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십여명의 중년장한들이 저마다 손에 병장기를 들고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휘몰고 다가오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간밤에 도적질을 하고 돌아오는 녹림의 무리들인 것 같았다. 심하게 몰아대므로 어린아이들은 쉬지 않고 울어댔으나 그럴 수록 장한 들은 더욱 그 아이들에게 매질을 가했다. 그 포로로 잡힌 무리중에는 남자도 더러 있었는데 모두 늙어서 기동도 못할 정도였다. "이 부근 복우파(伏牛派)의 놈들이예요. 얼마전에 이 곳에 정의맹이 들 어서서 모두 달아났다가 이번에 철혈부의 놈들과 함께 올라와서 저렇 게 노략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장한들은 어린아이를 어떻게 할수가 없자 이번에는 그 어머니를 채찍으 로 후려쳤는데, 이내 의복이 찢어지고 피가 낭자하기 시작했다. 백방생이 만일 과거의 공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즉시 달려들어 놈들을 몰아냈겠지만, 지금은 저런 녹림의 하류도배들도 상대하기 어려운 입장 이었다. 두 사람은 그들을 피해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들이 마악 돌아가려고 신형을 돌렸을 때, 느닷없이 전면에서 한 명의 늙은 노인이 걸어오는 것이었다. 그 노인은 정말 지독하게 늙 어서 얼굴에 주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온몸이 성한 곳이 없는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겨우 겨우 걸어 오고 있었다. 그는 귀가 먹어서 전면에 그 흉한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겨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위태롭게 걸어오고 있는 노인 에게 백방생은 옆으로 지나치면서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노인장, 몸을 피하시지요?" 노인이 만약 계속 간다면 금방 저 복우파의 도적들과 부딪치게 될 것이다. 백방생은 그것이 안타까워 서 그렇게 말해준 것이었는데, 과연 아니나 다를까 그 노인은 정말로 귀 가 약간 먹어 있었다. "뭐라구?" 즉각 고개를 쳐들어 그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물어왔다. 노인의 눈빛 는 매우 혼탁하여 마치 그것처럼 귀도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백 방생은 공연히 그 노인으로 인해 발길이 늦어지게 되자 다소 당황해 졌다. 그는 그냥 가야할까 어쩔까 하고 생각하며 다시 노인에게 말했 다. "지금 저기에 나쁜 놈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빨리 몸을 피하시지요?" 증평은 벌써 저 만큼 앞서 가서 백방생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노인은 고개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뭐라고, 나쁜 놈들이라구? 대체 누가 나쁜데 그래?" 그때 이미 복우파의 도적들은 십여장 밖에 이르렀다. 백방생은 내심 속 이 타서 급히 생각을 굴리며 말했다. "그게 아니구요. 저의 말은 지금 빨리 이곳을 피하시라는 것입니다. 도적들이 오고 있다니까요." 백방생은 노인이 자꾸 자기만 보고 오해를 하는것 같아서 손짓으로 전면을 가리켰다. 노인은 그제서야 그 쪽을 보고는 가볍게 낯빛이 변하 는 눈치였다. "이런 이런, 저런 나쁜 놈들이 또 왔군 그래. 아주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이고 말고..." 백방생은 노인이 흔들흔들 하면서 계속 중얼거리기만 하는 것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어서 피하셔야죠. 왜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노인은 이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냐, 피하긴 내가 어디로 피하나? 이제 죽을 때도 다 되었는데 저놈들에게 한바탕 훈계라도 하고 죽어야 하겠네. 어디 저게 사람의 할 짓인가? 천벌을 받지? 암, 천벌을 받고 말고." 백방생은 더이상 이 노인을 말로 설복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노인을 이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잠 시 주저하다가 그는 그만 빠르게 노인을 등에 업어 버렸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살고 봐야죠. 자, 노인장! 어서 저와 함께 이 자 리를 피하시죠!" 하지만 노인은 실수인지 몰라도 뒤로 벌렁 넘어갈 뻔 했기 때문에 백방생은 다시 시간을 지체해야 했고, 이어 노인이 그의 등에서 바로 안정을 했을 때는 이미 자리를 떠날 기회를 잃고 있었다. 백방생은 기실 노인을 업은 다음에는 놈들의 앞에서 달아나기만 하는 일은 그리 어렵 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흐흐, 네놈은 또 뭐냐?" 갑자기 서너 명의 장한들이 그의 앞 길을 가로막으며 흉측하게 웃고 있었다.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이야." 노인이 연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백방생은 미소와 함께 말했 다. "나는 지나가던 사람인데 길을 가려고 하니 좀 비켜주시오." 그 장한들 가운데의 하나가 뜨악하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업은 그의 행색을 살피며 말했다. "뭐라구? 네가 감히 이 어르신께 이래라 저래라 말을 한다는 말이 냐?" 백방생이 보아하니 그 장한은 태양혈도 거의 밋밋하고 공력의 조예도 높지 않은 것 같아서 역시 자신보다는 한 수 아래인 것 같았다. 백방생 은 뒤를 한번 돌아보고 다소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말했다. "나는 다만 길을 가려는 것일 뿐이니 나를 막지 마시오." 등에 업힌 노인은 여전히 그 중얼거리는 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갈수록 목소리가 커졌다. 아마도 주위의 광경을 보고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 지만 그렇다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백방생은 그가 가능하면 목소리를 죽여주기를 바랬다. 공연히 이들을 건드려 봐야 이로울 것이 없 지 않은가? 이때 등뒤에서 어린아이의 우는 소리가 더욱 심해지더니 누군가가 무엇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한 여자의 애절한 외침 소리가 들려오 는 것이었다. "아가야!" 백방생은 급히 신형을 돌려 보았다. 그는 이내 안색이 대변했다. 누가 집어던진 것은 이제 갓 돌도 되지 않은 듯한 어린아이였는데, 여인이 그 아이를 향해 달려가자 근처의 한 장한이 칼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두동 강 냈던 것이다. 그 광경은 참으로 목불인견이었다. 여인은 이내 절명 했으며 반쪽으로 갈라진 그녀의 몸통에서는 붉은 핏물과 함께 내장조각 들이 섞여나와 바닥과 아이의 몸을 흥건하게 적셨다. 갑자기 지독한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아가!" 여인의 시부모인듯한 두 명의 노부부가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황망히 앞으로 내달렸다. 그들은 아이만이라도 살려 보려는 모양이었 다. 아이는 그 충격 때문인지 이제는 울지 않고 있었다. 백방생은 다른 장한들이 그 노부부를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순간 스스로 약 간 망설였다. 이 일을 그냥 두고 보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백방생은 이미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느닷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백방생은 등줄기 부분의 혈도(穴道) 가 마치 어떤 무거운 것에 짓눌린 듯 답답해져 오면서 전신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어이없게도 그가 업은 노인이 그렇게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노인의 미친듯이 중얼거리던 소리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면 노인은 이제까지 거짓으로 병약한척 했다는 말인가? 백방생이 만일 지금 뒤를 돌아볼 수 있다면 즉시 그 노인의 혼탁하던 두 눈에서 마치 칼날과도 같은 안광이 폭사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은 일부러 백방생을 노리고 있는 살수(殺手)라는 말인 가? 백방생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지는 그 와중에도 갑자기 전면에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느닷없이 아이를 구하려고 달려들던 두 노부부가 돌연 두눈에서 엄청난 살광(殺光)을 발하더니 장검(長劒)을 손에 들고 극쾌하게 백방생의 몸을 덮쳐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 속도는 가히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다. 뒤에서 증평의 앗, 하고 놀라는 외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알고보니 그 노부부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살수가 변장을 한 모습이었던 것 이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장한들은 처음과는 달리 재빨리 두사람에게 장검 만 건네주고 물러가 버리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만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그는 이제까지 죽음의 고비도 많이 넘긴 셈이었다. 그러나 기실 이렇게 직접적으로 강한 위기를 느껴본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적 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치밀했고 각본도 매우 완벽해 보였다. 등뒤에 서 완전히 제압하고 있으니 이제 전면에서 덮쳐드는 두 사람의 장검 이 그의 몸을 관통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기실 그것으로 그의 몸이 가장 죽음에 근접했다고는 말할 수 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이것보다 훨씬 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이 많았다. 단지 이것은 그에게 일종의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죽음 에 대해서 보다 안정되었기 때문일까? 뜻밖에도 그러한 전신을 파고드 는 강렬한 위기감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강한 활력을 일으키고 있었다. 백방생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이르자 이제까지 없던 강인한 정신력이 발 휘되어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사실 비록 공력은 상실되었으나 무학은 그의 몸과 마음속에 살아있 는 상태였다. 그가 일단 무아지경(無我之境)에서 움직이자 일순 그러한 잠재된 능력이 발작적으로 튀어 나왔다. 두 사람의 장검이 백방생의 몸을 꿰뚫는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이미 그의 몸은 어느새 옆으로 한 자나 미끄러졌다. 그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환상적인 동작이었다. 두 노인의 장검이 허공을 베는 순간에 이미 백방생의 등은 옆으로 기우뚱해져서 그 두개의 검날을 향해 부딪쳐 가고 있었다. 등뒤에는 그 노인이 올라타고 있었다. 노인은 자연 그 두개의 장검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의 주의력이 약간 분산된 틈을 이용하여 백방생은 급작스럽게 노인을 들어 눈앞의 두 사람에게 던 져 버렸다. 그 두 노인은 급히 장검을 회수하여 백방생을 향해 재차 공격 을 시도하려다가 크게 놀라서 잠시 주춤했다. 그 순간의 호기를 놓칠 백방생이 아니었다. 그는 즉각 따라붙어서 그 세 노인의 헛점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헌데 이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느닷없는 일이 발생했다. 백방생의 우수가 마악 노인의 등뒤의 혈도를 누르려는 순간에 갑자기 그의 몸이 아래로 뚝 떨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갑자기 맥 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러한 일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이 불가능했 다. 백방생으로서는 스스로 그 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자신도 알기 어려웠다. 다만 처음에는 위기상황이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었는데 나중에는 상대가 수비상태로 전환하게 되자 왠지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긴 당사자도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상대방이야 어떻게 알 수가 있겠 는가? 그 세 명의 살수는 백방생이 갑자기 그렇게 바닥에 뚝 떨어져서 주저 앉아 버리자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백방생이 믿을 수 없는 괴력(怪力)을 발휘하므로 눈알이 튀어 나올 정도 로 놀랐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어리둥절해지는 것이었다. 지금 백방생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운이 하나도 없는 파김치처럼 늘 어진 병약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는 함부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양쪽은 그리하여 서로 잠시동안 괴이한 대치상태를 유지했다. 그때 갑자기 백방생의 눈앞에 연푸른 비단장삼이 어른거렸다. 그것은 바로 증평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달려들어 와서 백방생의 몸을 안고 뛰 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그녀로서는 목숨을 건 모험을 하고 있는 것 이리라. 백방생이 그렇게 증평에게 들려서 달아나자 그 세명의 노살수도 다소 눈치를 채고 추격했다. 사실 그들 세 명의 무공은 증평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증평을 추격하는 것은 그들로선 어렵지 않았다. 다만 조금전에 한 차례 뜨거운 맛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느새 증평이 정신없이 달리다가 하나의 나룻터에 이르렀다. 아까 그 만행을 벌이던 복우파의 도적들은 이제는 보이지도 않았다. 증평은 그 야말로 최선을 다해 달려서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백방생의 몸이 무공이 높았으나 공력이 상실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백방생이 조금전에 너무 심하게 몸을 움직이다가 주화 입마한 것이 아닐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룻터에는 하나의 나룻배가 묶여져 있었으며 그 배위에는 지금 한창 덩치좋게 생긴 사공이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증평은 그것을 보자 얼른 나룻배를 타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여유있게 추격하던 세 노살수들이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즉시 앞을 가로막았으며 삼면에서 증평을 포위하고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그 들의 장검에서 검은 기운이 무려 한자나 뻗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미 최고의 공력을 일으켰음을 알게 했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문득 말했다. "나를 내려 놓으시오." 웬일인지 백방생은 이제는 거의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운을 잃 고 있었다. 그것은 아까 그가 무의식중에 지나치게 진기를 소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증평은 내심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백방생을 바닥에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 다. 그녀는 백방생을 내려놓은 후에도 감히 떠나지 못하고 백방생을 보며 울먹였다. "이제 어떻게 하죠?" 말을 듣는 도중에도 주위의 검기(劒氣)들이 난무(亂舞)하여 그와 그녀 의 의복이 갈가리 찢겨져 휘날렸다. 백방생은 이제 사태가 지극히 위 태하다는 것을 알았다. 만일 날카로운 병장기가 아니라면 그가 어떻게 사량발천근 등의 무공을 사용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력을 상실당 한 지금에 있어서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수법이란 바로 그러한 것들 밖 에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병기는 날카로운 장검이니 무슨 이력타력 (以力打力)의 수법을 쓰기도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백방생은 문득 빠르게 아까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아까 그는 분명 히 등에 업힌 노인에게 제압되어 있어서 무슨 이력타력의 수법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 순간에 기적같이 움 직여서 적의 공격을 피했으며 게다가 노인을 집어 던지기 까지 하지 않았는가?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강한 심리적인 격발로 그 힘이 나왔다는 것은 백방생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용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게 다가 지금은 상황이 위급한 유사시가 아닌가? 백방생은 잠시 쓴웃음을 짓다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 장검을 나에게 주시오." 증평은 본래 장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으므로 두말없이 곧장 그 장검 을 풀어서 백방생에게 건네 주었다.그때까지도 그 세명의 노살수(老殺 手)들은 기수식만 취할 뿐 본격적인 공격은 가해오지 않고 있었다. 그 들은 백방생이 실로 불가사의한 괴력(怪力)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으로서는 이제 장검을 휘두를 힘조차 없는듯 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두어 번 경쾌하게 장검을 휘저어 본 다음에 웃으며 증평에게 말 했다. "이제 당신은 가 보시오." 솔직히 이번의 그 살수들은 무공이 워낙 대단하여 백방생으로서는 도저히 배겨낼 재주가 없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바로 마지막 작 별인사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증평이라도 무사하기를 바랬기에 백방생 은 일부러 그렇게 건성처럼 말했던 것이었다. 증평은 그말을 듣자 다소 어리둥절해하는듯 하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증평은 곧장 걸어서 세 노인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지금 그 세 노인이 펼치는 포위망에는 실로 무시무시한 무형(無形)의 검기가 소용돌이를 일 으키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간단하게 증평을 해치 울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평은 비록 그 검기의 포위망을 벗어나 면서 의복들이 찢기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주 무사했다. 그것은 사실 세 노인의 시선이 오직 백방생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증평은 일단 그렇게 대담하게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러나 백방생의 기 대와는 달리, 그녀는 곧장 멀리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주위 십 장밖에서 편안히 쪼그리고 앉아서 백방생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백방생 은 그녀가 기실은 자신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그녀가 잠시 비켜 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백방생은 그녀의 그런 고집스런 행동에 마 음이 답답해 졌지만, 그러나 지금은 더이상 뭐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 을 깨달았다. 증평은 물론 그의 의도를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알면서도 한사 코 떠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녀는 보기보다 은근히 고집이 강해서 백 방생이 다시 말해도 듣지 않을 것이 그야말로 뻔했다. 백방생은 하는 수 없이 증평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 세 노인을 바라 보았다. 사실 이제까지 그 무형의 검기는 계속 증가하여 그 검기의 벽 (壁)이 그의 몸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보기 드문 최상승 (最上乘)의 검술이었다. 그들은 백방생이 손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백방생이 만일 그 압 박에 못이겨서 조금이라도 손을 쓴다면 그들은 즉각 정해진 경로를 따라서 공격해 들어올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상 교묘하게 배합된 일종의 검진(劒陣)이었다. 그들 살수들은 만약의 고강한 적을 만났을 경우를 대 비하여 그 합격술을 익혀둔 것이 분명했다. 백방생은 어쨌거나 지금은 그가 먼저 움직여서 변화를 일으키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공력이 부족하므로 이렇게 대치가 계속 된다면 결국 질식해서 죽게 되고 말 것이다. 백방생은 장검을 들어 둥 글게 위로 호선을 그었다. 그것은 무슨 초식이라기 보다는 아이들의 장 난과 흡사한 의미없는 동작처럼 보였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갑자기 한쪽에서 커다란 종이 깨지는 듯한 고함 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웬 녀석들이길래 이 어르신의 낮잠을 방해하느냐?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지금 그 세명의 살수들은 오직 공격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서 설사 바로 옆에서 벼락이 작렬한다고 해도 동작을 멈추지 않을 사람들이 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은 그 고함소리를 듣게 되자 저절로 공격을 멈 추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마치 갑자기 내상을 입은 것처럼 안색 이 창백해져서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이었다. 물론 어느새 그가 득하던 검기의 폭풍도 사라졌으며 백방생 역시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 고함소리는 비록 종이 깨지는 것처럼 크고 시끄럽기는 했지만 그러나 기실 천둥벽력처럼 큰 소리는 아니었다. 그 렇다면 그 소리 자체에 어떤 강한 힘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느닷없이 방금전에 소리친 그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아직까지 나룻배 의 안에서 낮잠을 자던 그 사람이었다. 아직 이른 시각이고 또한 날씨가 낮잠을 즐기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사공은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세명의 노살수들은 한번 그렇게 당한 후에 저마다 경악과 의혹이 섞 인 표정으로 그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전의(戰意)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다만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의혹 때문 이었다. 불문에는 소위 사자( ?獅子吼)라는 신공이 있다. 그들은 이제까 지 태어나서 이렇게 위력적인 음공(音功)을 들어보지 못했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사공은 배안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걸어 나왔다. 그는 뜻밖에도 늙은 노인이었는데 체구가 매우 우람하고 키도 칠척이나 되었으며 피부와 두 눈과 머리카락까지 모두 은은한 자색(紫色)을 띠고 있어서 몹시 이국적인 느낌을 주었다. 만일 그런 사람을 평소에 보았다면 쉽게 질겁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에게 일종의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간파하자, 증평은 갑자기 표 정이 달라졌다. 그녀는 즉시 쪼르르 그 사공에게 달려가서 웃으며 말을 붙였다. "날씨가 다소 쌀쌀하군요. 주무시기에는 약간 춥지 않나요?" 사공은 백방생 등이 있는 곳으로 걸어 가다가 말고 증평을 보며 어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누군데 감히 나의 일을 걱정하고 있느냐?" 이번의 그 늙은 사공의 말은 비록 거칠기는 하지만 크게 울리지는 않 았다. 그러나 그 말투로 미루어 보아 필시 오만한 성격의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증평은 사실 왕옥파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왔으 니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할 수 있고, 이미 강호에는 상상못할 괴인들 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얘기를 귀가 아프도록 들어 온 터였다. 확실히 이 사공노인은 그런 소문보다 더욱 괴이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증 평이 겁을 미리부터 먹을 리는 없었다. "흔히 사해(四海)는 한형제요, 무림인은 동도(同道)다, 라는 말을 들어보 지도 못했나요? 나는 당신의 형제요 동도인데 어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겠나요?" 사공노인은 작고 가냘픈 증평이 앞에 서서 조금도 겁먹지 않고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을 보고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다가, 이내 차갑게 말했다. "내 나이가 얼마인데 너와 친구가 되겠느냐? 그건 그렇고, 어서 가서 너의 그 친구를 불러와라!" 증평은 사공노인이 백방생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다소 흠칫하며 말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러죠?" 사공노인은 가볍게 혀를 찼다. "너희들은 조금전에 강을 건너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지금 바로 그 일을 해주겠다는데 웬 잔말이 그리 많으냐?" 증평은 이내 사공 노인의 말속에 자신들을 도와줄 생각이 있는 것을 알고 내심 크게 기뻐하여 즉시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그 세명의 노인들은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실 그들은 이미 심한 내상(內傷)을 입어서 더이상 공격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증평은 은근히 그들이 두려웠으나 이내 백방생에게 다 가가서 그의 손을 잡고 나룻배가 있는 쪽을 향해 돌아서 달렸다. 백방 생은 장검이 자꾸 걸리기 때문에 일단 그것을 그녀의 검집에 넣어주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증평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조금 지나서야 겨우 긴장을 풀고 백방생 에게 말했다. "그가 우리를 구해 주겠다고 했어요." 사실 세 노인은 이제 더이상 공격할 수가 없으므로 사공노인도 두 사람 을 더이상 구해줄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일단은 그 사 공노인을 만나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백방생과 증평이 이내 가까이 이르자 그 사공노인은 백방생을 주시하 고 있다가 문득 말했다. "정말 훌륭한 인재(人才)로군. 정말 훌륭한 인재야. 내 이 나이에 이르러 여기에서 이런 인재를 만나게 될 줄이야." 백방생은 사공노인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웃고 있다 가 말했다. "노인장께서 저희들을 구해 주셨군요. 감사드리겠습니다." 사공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큰머리가 흔들리자 강물이 다 출렁거 리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이제까지 천상오룡의 이대의(李大義)와 하북팽 가의 팽호이외에 이렇게 거구의 사람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구해준 것은 아니지. 그 보다, 강을 건너겠다면 타지 않겠나?" 사공노인은 손으로 나룻배를 가리켰다. 이 사공노인은 뜻밖에도 백방생 에게는 매우 정중하게 대우해 주고 있었다. 증평은 옆에서 듣고 있으면 서 그 때문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그녀가 의도적으로 친밀하게 굴었을 때는 무시했던 기억조차 갑자기 그녀의 뇌리속에서 사라진듯 했다. 백방생은 그렇다고 사공노인의 말을 반박할 수도 없어서 그만 고 개를 끄덕였다. "강을 건너게 해 주신다면 타지요." 백방생과 증평이 나룻배로 가서 올라 타자, 이윽고 사공노인이 다가와 서 한손으로 나룻배를 밀고 훌쩍 올라탔다. 나룻배를 다루는 사공노인 의 솜씨는 매우 완숙해 보였다. 마치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짓만 하며 살아와서 눈을 감고도 잘 할 수가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노인은 비단 한손으로 가볍게 나룻배를 밀었을 뿐만 아니라 뒤이어 올라타는 데도 나룻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처럼 거구의 노인이 올라탔 는데도 그렇다는 것은 실로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백방생은 이미 짐작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사공노인이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 게 되었다. 그것도 물론 아주 고절(高絶)한 경지의 것일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한 명의 이인(異人)을 만나는군.) 강호는 넓고 넓어서 그 안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구름처럼 많다 고 하던가? 사공노인은 이내 가볍게 노를 저어서 배를 강의 깊은 곳으로 몰고 갔으며 잠시 후에는 문득 노젓는 것을 멈추었다. 증평은 아까 그 언덕에서 세 명의 노살수들이 사라져 가는 광경을 눈 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사공노인이 노젓는 것을 멈추자 증평은 곧장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왜 갑자기 멈추는 거죠?" 사공노인은 문득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손을 내저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는 것인가? 이 나이를 먹은 나도 급하지 않은데 너 희들이 뭐가 그리 급하다는 것인가?" 증평은 그가 은근히 나이 운운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흥, 정말 나이를 먹었다고 거들먹 거리는군. 고작해야 나보다 백살도 더 먹지 않았을 텐데, 아니 혹시 그보다도 더 먹은 것이 아닐까?" 이때 사공노인은 백방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자네 혹시 신선(神仙)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실로 엉뚱하고도 뜻밖의 질문이 아닐 수가 없었다. 벌써 해가 중천으 로 떠오르고 있었으나 날씨가 흐려서 주위는 우중충한 분위기가 감돌 고 있었다. 황하(黃河)로 흘러드는 이 강물도 혼탁했고 그리 깨끗하지가 못했다. 백방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어렸을 적에 간혹 책자에서 읽어본 적은 있지요." 사공노인의 두번째의 질문은 더욱 엉뚱했다. "자네 혹시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나?" 백방생은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보고 여전히 웃으며 대꾸했다. "제가 신선이 될 자격이 있겠습니까?" 사공노인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말했다. "자네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혹시 강물속에 산다는 신선인 하백(河伯)이 아니십니까?" 사공노인은 이에 눈빛을 특이하게 빛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잠시 내가 자네의 근골을 검사해 봐도 되겠는 가?" 백방생은 느닷없이 자신의 몸을 조사해 보겠다는 사공노인의 제의가 다소 이상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거절할 것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 다. "물론입니다. 저는 노인장께서 실망하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사공노인은 이에 즉시 두말하지 않고 두 손을 번갈아 움직이며 백방 생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대번에 백방생의 몸을 위로 들어올 리기도 했고 혹은 안마하기도 했으며 혹은 침을 놓듯이 꾹꾹 찌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동작들은 기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 랐다는 사실이었다. 사공노인이 이름을 감춘 고인(高人)이라는 것이 정 말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34 장 차(茶)와 신(神) 이윽고 잠시의 시간이 지났다. 사공노인은 드디어 손을 멈추고 일어나 서 입가에 괴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좋다는 것인지 나쁘다는 것인지 복잡해서 쉽게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이윽고 노인은 먼 산을 바라보며 짧게 탄식을 터뜨리기도 했다. 증평은 보고 있다가 궁금해 져 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 "우리 상공께선 어떻죠?" 노인은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윽고 증평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좋다." 증평은 어리둥절해 졌다. 실로 이 사공노인은 모습이나 행동거지에 이르 기까지 괴이하지 않은 면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뭐가 좋다는 거죠?" 사공노인은 힐끗 백방생의 몸을 한번 더 보더니 기이하게 웃으며 말 했다. "신선이 될 팔자(八字)다." 증평은 그만 싱겁게 웃고 말았다. "정말 훌륭한 신선이시군요. 헌데 어떻게 해서 우리 상공을 신선으로 만들 생각이죠?" 사공노인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우선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여자부터 멀리해야 하고......." 증평은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면 아예 신선이 되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사공은 그 말에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마치 그는 증평의 말을 질책 하는 것 같았으나 이어 흘러나온 그의 말은 달랐다. "만일 그 운명(運命)을 거역하게 되면 죽음이 따르게 된다." 증평은 사공노인의 표정 때문에 공연히 심각해질 것 같아서 얼른 애 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 길을 피해가는 방법도 있지 않겠나요?" 사공노인은 말했다. "그 방법은 없다. 있다면 오직 바보가 되는 수밖에." 증평은 아미를 곱게 찌푸렸다. "하지만 만약 바보가 된다면 죽는 것보다 뭐가 더 낫겠어요?" 이때, 문득 가만히 있던 백방생이 입을 열어 말했다. "실로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치앞도 모르고 서로 뒤엉켜 싸웁 니다. 저도 물론 싸우지요.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그 싸움을 멈춘다면 정말로 착한 바보가 아니겠습니까?" 증평은 그 말을 듣고 문득 생각했다. (아니야. 만일 정말로 바보라면 착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악독 한 바보도 싫지만 멍청한 바보도 싫어. 나는 갈 수록 현명해 졌으면 해!) 그런데 사공노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이내 백방생을 유심히 살피더니 이윽고 껄껄 앙천대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우하하핫! 정말 통쾌한 소리로군. 좋아, 그런 바보라면 좀더 오래 살 수 있지. 신선이 되기 싫다면, 자네는 그런 바보가 되도록 하게! 후 하핫, 신선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니까 말이야!" 말이 끝나자 마자 노인은 가볍게 우수를 휘둘러서 강물에 일장(一掌)을 날렸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룻배가 갑자기 건너편의 나룻터 를 향해 그야말로 쏜살같이 나아가는 것이었다. 정말로 갑작스런 일이 어서 증평 등이 미처 놀랄 여유도 없었다. 이윽고 배가 나룻터에 도착하자 사공은 먼저 훌쩍 신형을 날려 사라 져 갔다. 그의 뒷모습은 표표하면서도 거침이 없어 보였다. "이봐요, 뱃삯도 안받아 가나요?" 증평이 뒤늦게 소리를 질렀으나 사공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이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증평은 그것을 보자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백방생에게 말했다. "정말 괴상한 노인이로군요!" 백방생은 여전히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증평을 마주 바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신선같은 노인이라고 할 수가 있지." 증평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이윽고 근처에 복우파의 무리와 같 은 적들이 없음을 알고 안심하며 말했다. "그럼 우리 어서 가요. 이러다간 정말로 늦어지겠어요!" 그녀는 늦게 가면 보물이 없어진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증평은 즉시 백방생의 손을 잡고 걸었으며, 어느새 백방생도 그 사이 에 조식이 되어서 길을 가는데도 불편이 없었다. 사공노인은 한참동안 그의 몸을 만졌으나 해가 될 짓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증평은 불과 반시진도 안 되는 아주 잠깐 사이에 백방생을 이끌어서 어느 한 마을에 도착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이 부근의 지리에 익 숙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한차례의 도적들이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인지 마을에는 인기척도 별로 없었고 매우 조용하고 황량한 기류 가 흐르고 있었다. 증평은 그 마을길을 지나서 한참 가다가 이윽고 외딴 곳에 있는 어느 다 쓰러져 가는 모옥의 앞에 도착했다. 그 모옥은 이 미 버려진 지 오래인 듯 사람들이 살지 않았고 마을에서도 멀어서 경작 하던 농토들도 모두 들풀이 가득하게 메말라 있었다. 백방생은 이제는 거의 허물어져 가는 담벼락을 바라보며 증평에게 말했다. "이곳에 바로 보물이 있다는 말이오?" 증평은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면서 방긋 웃었다. "전혀 그러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셨겠죠?"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어 보였다.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뜻밖인 것은 사실이오. 아니야! 가만 생각해 보니 사실 이런 곳이야말로 보물이 있겠는데?" "정말 잘도 아시는 군요!" 증평은 쳇, 하고 웃으며 백방생의 손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그 모옥 은 비록 낡고 오래되서 여기저기 무너져 있었지만 그러나 사람이 들어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방들은 이미 무너진지 오래이기에 두 사람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증평은 안으로 들어서자 그 누추한 실내를 가리키며 자랑하듯 말했다. "자, 여기의 어디에 보물이 있는지 아시겠어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낡고 초라한 부엌에는 거의 아 무것도 없고 오직 거의 망가진 아궁이 위에 녹슬은 무쇠솥이 하나 걸려 있을 뿐이었다. 사방의 벽이 허술해서 무엇 하나 감출만한 곳이 없었고 천정이나 아래쪽도 마찬가지 였다. 백방생의 시선은 자연히 그 하나 남은 무쇠솥에 향했다. "저 곳에 있다는 말이오?" 증평은 대답대신 즉시 달려가 직접 그 무쇠솥의 뚜껑을 들고, 이어 그 전체도 들어 보였다. 무쇠솥의 안에는 당연히 아무 것도 없었고 또한 그 아래에도 그저 시커먼 구덩이만 패여 있을뿐, 아무것도 없었다. 백방 생은 그것을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증평은 마치 그와 일종의 수수께끼 장난을 시작한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려 백방생을 바라보더니 상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마침 쌀이 떨어져서 솥에다 밥을 지을 수 없군요. 만약 쌀이 없다 면 어디로 가야 하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야 쌀을 가지러 광에 가야지." 증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댁은 아마도 이런 곳의 생활을 잘 모르는 모양이로군요. 이런 때에는 광에 가도 쌀은 없어요. 쌀은 없고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이 집의 여주인 은 항상 가는 곳이 있었죠." 이어 증평은 몸을 돌려 부엌의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낡은 궤짝 같은 것을 치우고 그 아래를 파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쟁기 같은 것이 들려져 있었고, 그녀의 공력이 가세하자 이내 두 자 정도의 구덩이가 파여졌다. 이어 그녀는 그 속에서 하나의 작은 보따리 같은 것을 꺼냈는데 그것을 들고 그녀는 백방생을 향해 다시 말했다. "본래 이 안에는 작은 항아리가 묻혀 있고 또한 거기에다 쌀을 조금 씩 덜어서 저축해 두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 쌀도 없고 게다가 작은 항아리도 없군요. 그저 이 하나의 보물밖에는 없어요." 백방생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증평의 얼굴에는 무슨 땀방 울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실 땀이 아니라 속눈썹에 맺힌 이슬 같 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지금 웃고 있었으나 왠지 울고 있는 것 같 은 느낌을 주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헌데 낭자는 어떻게 그렇게 이 집의 여주인의 습성을 잘 알고 있 소?" 증평은 그 말에 혀를 길게 내밀며 웃었다. "그야 당연하죠. 제가 그 여주인의 습성을 항상 보면서 자랐으니까 요." 그렇다. 바로 이 곳은 그녀의 과거 자라나던 생가였던 것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또한 이곳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으리 라. 백방생은 처음에는 뜻밖이라 놀랐으나 이내 그 심리가 충분히 이해 되는 것이었다. 증평은 갑자기 사부로부터 그 커다란 보물을 전달받게 되자 절로 자신의 옛 고향으로 찾아가서 생가에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그 생가의 주변에는 부모님의 시신이 묻혀 있다. 필시 그 부모님의 혼백 이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백방생은 막상 이 곳이 증평이 자라나던 생가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자연 한번 더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거기에서 어떤 그녀의 어릴 때의 추 억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이 모옥은 전체가 너무나도 낡 아서 조금도 그런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한결같이 황량하고 쓸 쓸한 분위기만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증평은 곧장 보따리를 들고서 뒷문을 열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뒷산은 자그마한 야산이었는데 거기에 이름모를 두개의 무덤이 누런 풀들에 뒤덮인 채 자리하고 있었다. 비록 묘비가 없기는 해도 백방생은 뒤에서 지켜보며 그것이 누구의 것들인 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바로 증평 의 부모의 무덤들인 것이었다. 증평은 곧장 그 무덤들의 앞으로 가서 손으로 말라빠진 풀들을 뜯어 묘소를 단정하게 하고, 이어 한참 동안 그 앞에 꿇어 앉아 있었다. 대 체 그녀가 무엇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참 후에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그녀의 두 눈은 시뻘겋게 퉁퉁 부어 있었다. 하지만 증평은 짐짓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보물을 꺼내봐야 하지 않겠어요?" 백방생이 다가가자 증평은 이어 그 보따리를 무덤 앞에 풀어 놓았 다. 그 작은 보따리 안에는 예상대로 책자들이 들어 있었는데 모두 십여 권이나 됐고 모두가 하나같이 고색창연한 느낌이 들었다. 한결같이 양 피지로 되어 있는 것들이었는데 몹시 연대가 오래된 것들 같았다. 백방생은 생각했다. (알고보니 뜻밖에도 모두가 정말로 진본의 무공비급들이었군 그래.)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훌륭한 물건은 겉으로 봐도 쉽게 그 진가 가 느껴지기도 한다. 백방생은 즉시 바닥에 앉아서 그 제목들을 살펴 보 았다. 첫번째의 책자의 제목은 바로 대자대비관음선공(大慈大悲觀音禪 功)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거 불문의 비급이로구나 하고 생각하겠지 만 백방생의 느낌은 다소 달랐다. (아니 이건......!) 두번째의 비급은 대자대비천엽수(大慈大悲千葉手)였으 며 세번째의 비급은 반선수(般禪手)였고 네번째의 비급은 대비신장(大 悲神掌)이었다. 그 모두가 백방생의 기억에 익숙한 제목들이었다. 알 고보니 하나같이 이미 멸문당한 과거의 남해보타도(南海普陀島)의 무공 비급들이었다. 백방생은 다소 놀랍기도 하고 뜻밖이기도 했다. 그 멸문 당한 남해보타도의 무공비급들이 느닷없이 이런 곳에 나타나게 되다니 대체 어찌된 일일까？ 만일 백방생이 그 남해보타도와 그토록 인연이 깊지 않았다면 관심도 별로 갖지 못했었을 것이고, 또한 이렇게 분명한 판단을 내리지도 못했었을 것이었다. 백방생의 표정이 다소 이상한 것을 보고 증평이 물었다. "상공, 무슨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나요?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죠？ " 백방생은 말했다. "이 비급들은 공공문의 문주에게서 얻었다고 했소?" 증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의 사부님께서는 그들의 일을 도와주는 댓가로 이 비급들을 선사받은 것이죠." 백방생은 그제서야 알 수가 있었다. 문득 공공문의 조직상의 생리가 떠 오른 것이었다. 과거 남해보타도는 갑자기 세외오세의 무리에게 멸문을 당했었을 것이라면, 그들이 남해보타도의 무슨 무공비급들을 탐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공공문에서는 온갖 잡스러운 사람들이 다 모여 있으므 로, 이를테면 그 중의 한 무덤을 도굴하는 작자가 멸문당한 남해보타 도의 보물을 찾던 중 그 비급들을 가지고 왔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백방생은 이내 그런 이치를 증평에게 간략하게 가르쳐 주었다. 증평은 말을 다 듣고 나자 다소 당황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얘기를 저는 들은 적이 없어요. 단지 이 무공비급은 여인에게 적 합한 것이니 저에게 잘 간직하고 무공을 배우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죠. 헌데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죠? 이것을 누구에게 돌려줘야 하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은 남해보타도가 없어졌으니 돌려주려고 해도 돌려줄 사람이 없 을 것이오. 단지 내게 적당한 사람이 하나 생각나기는 하는데, 그러나 일단 이 비급들은 증낭자가 얻었으니 배우도록 하고 그것을 돌려주는 것은 나중의 일이오." 증평은 그 말을 듣자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 그래도 되겠죠? 저는 혹시 제가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여 어찌 나 가슴을 졸였는지......." 사실 백방생이 말한 그 적당한 사람이란 바로 다름아닌 진소유를 가리 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진소유는 남해보타도와 인연을 멀리하고 있 다고 했으므로 과연 준다고 해도 받을 지가 의문이라는 것이백방생의생 각이었다.백방생이 잠시 좀더 비급들을 뒤적여보는 사이에 증평이 어 느새 절을 마치고는 와서 말했다. "이제 그만 가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소?" 증평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아니예요. 하지만 여기는 먹을 것도 없고, 아직 아침식사도 못했는데 대접할 것이 있어야죠. 내가 좀더 큰 현성에 나가면 점심을 사드리겠어 요." 증평은 아마도 백방생이 자신의 일에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것을 싫어 하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떠나자고 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서 계속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백방생이 몸을 일으키자 증평이 그 보따리를 다시 잘 싸서 들었다. 그리고는 백방생에게 말했다. "상공께 이 결정을 일임하겠어요. 제가 이것을 가지고 다녀도 될까 요?" 백방생은 그녀가 무공을 익히려고 하는 것을 알았다. 무공이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하는만큼 그렇게 하고도 싶을 것이다. 백방생은 말했다. "앞으로 혹시 도적을 만나서 그 물건을 빼앗길 지도 모르는데 그래 도 되겠소?" 증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소위 신외지물(身外之物)이라고 하는데, 만일 일이 그렇게 된다면 그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버리면 되죠. 한평생사는데 그게 반드시 있 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어요?" 백방생은 증평이 한사코 그런 고집을 부리는 것은 이제 다시는 이곳으 로 찾아오지 않으려는 생각임을 알았다. 그녀는 오직 앞으로 백방생이 가는 길만 따라가려는 것이리라. 백방생은 문득 갑자기 얻은 이 기특한 동행자에게 깊은 다정함을 느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간혹 내가 무학에 관해서 가르쳐 주도록 하지. 사실 내가 알고 있는 무공은 적지 않은 것이라오." "정말인가요?" 증평은 몹시 기쁜 듯이 소리치며 팔짝 뛰어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백방생은 그녀의 한쪽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준 뒤에 말했다. "그럼 어서 갑시다." 백방생은 일부러 먼저 밖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증평은 우선 보따리를 길쭉하게 만들어서 등에 짊어진 다음에 한참 동안 다시 부모 의 무덤앞에 서 있다가 뒤따라 왔다. 바라보니그녀의눈가가 다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이 객지에서 기동을 하자면 우선 은자가 필요한 법이다. 백방생은 이제까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서 아쉬운 것을 몰랐으나, 이제 그의 수 중에 남은 것은 그저 열냥짜리 금표 두어장 하고 은자 십여 냥 정도였 다. 백방생은 일단 돈을 구하기 위해 강남의 망해사로 가는 수밖에 없겠 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곳의 보물이 진짜 가치가 있어서 그에게 많은 횡 재를 하게 해줄 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백방생은 왠지 거기에 믿음 이 가는 편이었다. 두 사람은 남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단 두 사람의 차림새가 약간 초라하게 변했으므로 근처의 현성을 돌아서 나아가기로 했다. 증평은 어릴적에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사실 다른 부근의 지형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두 사람은 일단 현성을 찾아야 했기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 지리를 물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도적들이 출몰해서 인지 대부분 피난을 가버려서 인가 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겨우 나중에야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한 장한을 만날 수가 있었다. 증평은 즉시 그 장한에게 물었다. "이 부근에서 가장 가까운 현성으로 가자면 어디로 가야 하죠?" 두 사람은 장한이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필시 그에게서 어떤 대답을 들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고개를 훼훼 내저으며 한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증평은 그의 얼굴을 보고 다소 놀랐다. 그 장한은 두 눈이 허옇게 떠져 있는 봉사였다. 게다가 귀는 들리지만 벙 어리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물을 익숙하게 긷고 있는 것 인지 다소 신기하기 까지 했다. 아마도 그는 이미 이곳에서 오래도록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벙어리가 무슨 뜻으로 한쪽을 자꾸만 가리키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증평이 말했다.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줄 사람을 찾아 주겠다는 말인가요?" 벙어리 장한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어려운 숙제라도 풀 어낸 듯이 크게 기쁜 기색을 드러내더니 이어 곧장 물지게를 매고 그 쪽 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것이지만 장한의 걷는 모습은 보통사람과 다를 바가 없이 자유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그 의 등뒤의 어깨근육은 유난히 발달하여 우람한 느낌까지 주었다. 증평 은 누가 이렇게 하인을 잘 부려먹었나를 알고 싶어졌다. 이 벙어리 장한 은 그들을 자신의 상전에게로 데려가는 것이리라. 장한은 한참동안 걸어서 어느 이름모를 계곡에 도달했다. 이에 썰렁한 초겨울의 냄새를 풍기는 계절이지만 그 계곡의 주변은 풍취가 제법 아 늑하고 조용했고, 또한 물빛이 맑아서 아취가 있어 보였다. 백방생은 갑 자기 그 장한이 어째서 그 먼곳까지 물을 길으러 갔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도 벽수(碧水)로서 먹는 데에 조금도 지장이 없는 것이었다. 계곡의 안쪽으로 약간 들어가자 제법 넓은 과일나무 밭이 나타났고 이어 그 가운데에 아담하게 잘 지어진 기와집들이 보였다. 벙어리 장한은 두 사람을 그 기와집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백방생과 증평은 이렇게 경치가 좋은 것을 보면 필시 이 부근에 많 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실 다가가 보니 오히려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단지 대청마루에 한 명의 늙은 촌로(村老)가 망연한 기색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래, 물은 길어 왔느냐?" 촌로의 말에 벙어리 장한은 즉시 다가가서 물통을 내려놓은 뒤에 뒤 따라온 백방생과 증평을 가리키며 뭐라고 손발을 다 사용해 가며 얘기 했다. 두 사람은 대체 무슨 얘기인 지 알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그 촌 로는 알아 듣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 노인은 고개를 끄덕여 벙어리 장 한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 웬일로 아침에 까치가 요란하게 울어대더니 이렇게 귀한 손님들 이 찾아올 줄을 내 미리 알았소이다. 자, 길을 아는 것은 급하지 않소. 잠시 이리 와서 차(茶)나 한 잔 마시다 가지 않겠소?" 그 노인의 음성은 창로한듯 하면서도 왠지 귓속을 울렸다. 증평은 그 노인이 차까지 마시자고 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유심히 그 노인을 살폈다. 얼굴에 심한 주름살이 패여져 있어서 그런지 나이는 잘 알아볼 수가 없고 체구는 다소 왜소한 편이고 일신에 남청색의 의복을 걸쳤다. 다만 기이한 것은 피부도 검푸르고 눈빛도 검푸르며 심지어 모발까지 아직 검푸른 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증평은 그것을 보자 문득 왠지 아까 강에서 만난 사공노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알고보니 차를 끓이기 위해서 일부러 먼 곳에서 물을 길어오게 한 것이로군.) 백방생은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며 이윽고 대청앞에 이르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대청마루로 올라서자 그 노인은 미미하게 웃고 있다가 다 시 입을 열었다. "내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았지만 아직 버리지 못한 습관 하나가 바로 차를 마시는 것이라오. 내 시동녀석이 제법 차를 끓일 줄 아오. 두 분은 한번 차를 드셔 보겠소?" 백방생은 포권하며 말했다. "저희들은 지금 바삐 사람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일단은 현 성을 찾아 쉬어야 하겠기에 길을 물으려던 것이었지요. 초면에 이렇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니 실로 고마울 뿐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근자에 도적들이 다시 출몰하여 이 부근의 백성들에게는 아주 피해 가 심하지요. 내 두 분의 관상(觀相)을 보아하니 실로 비범함이 있어 묻는 것인데, 당금의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백방생은 말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희들은 모두 일개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니 무슨 특별한 식견이야 있겠습니까? 단지 천하가 좀더 태평해 졌으면 하 고 바랄 뿐입니다." 증평은 노인이 무슨 비범하다는 말을 하는것을 보고 속으로 곰곰히 생각했다. (정말로 우리에게 그런 비범함이 있다는 말인가? 상공이라면 몰라도 나까지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데?) 노인은 증평을 한차례 바라보더니 말했다. "비록 평범하다고 해도 그 가운데에 비범함이 있는 법이고, 또한 비범 하다고 해도 그 가운데 평범함이 있는 법이외다. 내가 바라본 바에 의 하면 두 분은 장차 귀하게 될 상(相)들이오. 나의 이 말에 이의가 있 소?" 증평은 노인이 갑자기 자신에게 물어오는 것을 보고 그만 흠칫하고 놀라서 겨우 대답했다. "예, 저는 아직 관상이 좋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관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상(心相)이요, 그 다음이 바로 골상(骨 相)이라고 하오. 얼굴의 생김새는 사실 중요하기는 하나 지엽(枝葉)에 지나지 않소." 증평은 은근히 흥미가 일어서 노인을 향해 말했다. "그럼 우리 두 사람의 마음씨가 좋다는 말인가요?" 노인은 은근히 그 대답을 회피하는듯 하면서 말했다. "심상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하지만 왠지 두 분의 등뒤에 서광(瑞光)이 보여서 이리로 모시게 한 것이오. 묻겠는데, 만약 신(神)이 있어서 이 세상을 다스린다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시오?" 나중의 질문은 백방생에게 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느닷없는 질문에 어 리둥절해 하다가 말했다. "그야, 나쁘지는 않겠지요." 증평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말했다. "하지만 그 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요? 착한 신일 수도 있고 나쁜 귀신(鬼神)일 수도 있고......." 노인은 다시 말했다. "내 생각에는 천하가 이토록 어지러운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탐욕 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네. 만일 신이 나타나서 새로운 세상을 꾸 미고 그러한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한다면 어떻게 될까?" 증평은 문득 기이하게 생각했다. (전의 그 사공노인은 무슨 신선의 얘기를 하더니 오늘 오후에는 또 이 런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까? 그저 길만 가르쳐 주면 될 일이지 무슨 신이 어떻고.......) 하지만 증평은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그건 너무한 일이 아닐까요?" 노인은 다소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하지만 정말 고통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준다면 그게 좋지 않은가?" 증평은 약간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 까요？ 저는 언젠가 아주 부자가 되면 고통이 없 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한번은 어떤 부자를 보았 는데 그렇게 행복한 것 같지가 않더라고요." 노인은 눈빛이 다소 차가와 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백방생을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그야 그대가 좁은 안목으로 보았으니까 그렇지.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 백방생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이상한 쪽으로 발끈하는 노인의 태도에 의아해 하면서도 말했다. "나라에 어떤 왕이 나타나서 다스린다는 것은 이해가 되나 무슨 신이 나타나서 다스린다는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군요. 저로서는 모든 일이 그저 잘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노인은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다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강요된 행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강요된 행복을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 보다는 차라리 자유를 원합니다." 노인은 두 눈에 미미하게 남색의 광채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떠오 른 순간 즉시 사라졌다. "자유를 원한다고? 그렇다면 불행스런 자유를 원한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이 불행스러울 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 이 통제된 행복보다는 자유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노인은 특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의 피비린내 나는 강호의 현실이 눈에 보이는 데도 그런 얘기를 한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군요. 역시 그런 불행은 없어지도록 해야 하겠지요." 이때 그 벙어리 장한이 공손하게 석잔의 차를 날라왔다. 백방생과 증평 은 마침 둘 다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차는 보기에도 빛깔이 좋았을 뿐 만 아니라 맛과 향기도 아주 일품이었다. 백방생이나 증평도 이제까지 그런 훌륭한 차는 마셔보지 못한 것 같았다. 두사람이 차를 마시고 나 자 그 노인은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매우 훌륭해 보이기에 내 청하여 한 마디를 한 것이네. 앞으 로 두 사람은 하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항상 명심하여 천하의 창생들 의 일을 모른척 하지 말기를 바라네." 말이 끝나자 노인은 즉시 안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 은 그냥 밖으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그 벙어리 장한이 나와서 그들을 기 다리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자꾸만 앞 쪽을 가리켰다. 증평이 말했다. "길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인가요?" 벙어리 장한은 고개를 즉시 끄덕이더니 먼저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 다. 백방생과 증평은 그 뒤를 따랐다. 벙어리 장한은 이윽고 두 사람을 현성으로 통하는 어느 길목까지 안 내해 주었다. 그가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증평은 문득 자신이 생각 하던 바를 말했다. "오늘 만난 그 두 명의 노인은 모두 이상한 사람이예요. 그렇지 않나요? 저 하인의 주인이라는 사람도 이곳의 토박이 같지는 않고......."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들은 뭔가 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일 거요. 혹시 나름대로 어떤 일들을 구상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윽고 두 사람은 가까운 현성에 들어가서 식사부터 한 다음에 시장 에 들러 의복이나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증평은 그런 과정에서 오직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을 쓰기를 고집했는데, 백방생은 이미 많은 돈을 썼으니 무슨 돈이 또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마시장에 가서 말을 고르려고 하는데 문득 반가운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황진의였다. 백방생은 그녀를 이러한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었으므로 말했 다. "아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 이곳은 정의맹의 총단보다 오히려 북쪽이다. 예상대로라면 그녀는 오히 려 남쪽으로 내려갔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황진의는 자신이 고른 백색(白色)의 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말을 좀 보고 있었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낭자도 말을 타고 내려갈 생각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상황이 어수선해서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어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헌데 지금 혹시 함께 내려갈 수가 있겠소?"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예요." 강남으로 내려가는 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마차 한대를 빌려서 가능하 면 밤낮없이 달렸는데, 도중에 별다른 도적들을 만나지 않았다. 지금 한 창 정의맹과 철혈부의 정사대전(正邪大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생 각하면 그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본래는 호북성을 지나서 호남성으로 들어서려고 했으나 백방생이 망해 사에 갈 것을 고집했으므로 일행은 강서성(江西省)으로 향했다. 비록 같은 길은 아니었지만 백방생에게는 그만큼 고향과 가까와 지는 느낌이 었다. 그렇다면 그 고향은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소위 아늑한 느낌의 곳 일까？ 하지만 불행히도 백방생에게 있어서 그 고향은 마치 한잔의 독 한 술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그에게는 달콤한 추억은 없고 오직 쓰디 쓴 추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백방생이 지금 비록 갈 수가 있다고 해도 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다시 며칠이 흘러 일행은 어느덧 남창성(南昌城)에 이르렀다. 이 성시 는 백방생에게 다소 낯익은 곳이었다. 당시 백방생은 매우 불편한 몸 으로 이 성시에 왔었다. 달마오수가 호위를 해주고 있었고 또한 진소유가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실로 그런 것을 생각하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망해사는 과거 만공사(萬空寺)라고 불리웠으며 그 경내에 하나의 거대 한 종모양의 돌산이 있다. 그 돌산의 중턱에는 무수한 작은 동굴들이 뚫려 있었는데, 백방생이 그 가운데의 한 곳에 황금충의 보물을 그냥 놔 두고 왔었다. 백방생으로서는 이제 거의 수중의 은자가 바닥이 난 상황이라 매우 심 경이 민감해 지는 바가 많았다. 우선 그 철장부들이 그대로 있을 것인지 에 대한 걱정도 되었고, 또한 그것이 과연 진짜로 돈이 되겠느냐의 얘 기였다. 35 장 부(富)와 소림일수(少林一秀) 남창성까지 오는 동안에 황진의와 증평 두 여자는 아주 사이좋게 잘 어울렸다. 증평은 며칠동안 마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시간을 비급을 보 는 일에 소일했는데, 그때마다 황진의가 옆에서 많은 도움을 주곤 했 다. 백방생이 비록 무공에 대한 식견이 대단했지만 역시 여자가 익히는 무공은 여자가 도와주는 것이 편했다. 특히 증평은 성격이 매우 붙임성이 있고 다정해서 황진의와는 금새 친구가 되었는데, 그러한 것이 백방생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전에는 백방생이 황진의와 어울리는 시간이많았는데, 이제는 두사람이 어울리자 백방생은 상대적으로 약간 소외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도 일행이 객점에 방을 정하고 휴식을 취하게 되었을 때, 증평이 황진의의 방에 가서 함께 다정하게 웃고 담소하는 것을 보고 백방생은 몰래 그 객점을 빠져나왔다. 그는 이미 과거 병약하던 시절의 그가 아니 었다. 그에게는 이미 일갑자의 공력도 있으며 그에 걸맞는 무공도 갖추 고 있었다. 그는 남창성을 벗어나자 곧장 북쪽으로 신법을 펼쳐 달렸다. 지금 그의 무공은 비록 이류급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예의 그 철상자를 가져오는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한밤중이라 그를 방 해하는 사람도 물론 없었다. 이윽고 망해사에 도착하자 그는 곧장 살그머니 몸을 숨기고 예의 그 동굴로 향했다. 이곳의 지리나 위치는 그가 이미 확인을 해 놓아서 혼란 에 처할 염려는 없었다. 망해사의 한밤중은 여전히 조용했다. 단지 그가 전날 시주를 한 탓인지 경내에 몇 개의 구조물들이 더 늘어서 있는 것 들이 변화였다. 백방생은 드디어 동굴안으로 들어서자 안쪽으로 들어가 예의 그 기관장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그 요체를 알고 있으므로 기관장치를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백나한상이 없더라도 물론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그대로 있었군!) 과연 그 철상자는 그대로 있었다. 백방생은 그것을 꺼내서 그 안의 내용 물까지 안전하게 있는 것을 확인하자 곧장 들고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 다. 그 철상자의 무게는 대략 백 근 정도로, 일반사람들에게는 무거울 지 모르나 그에게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백방생이 철상자를 들고 돌아올 때에도 황진의와 증평은 여전히 둘 이서 정답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백방생이 자신의 방으로 철상자를 들고 들어가자 증평이 따라 나와서 말했다. "그게 뭐죠?" 백방생은 모처럼 중요한 일을 했으므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면 서 말했다. "내가 찾고자 했던 물건이오." 막상 황금충의 보물을 찾기는 했지만 정작 그것을 확인해 보는 데에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당시 남겨진 양피지의 내용에 의하면 그 양 이 매우 엄청났다. 철지(鐵紙) 하나에 황금 일만냥이고 그 철지들이 모 두 일만개나 있으니 그 금액은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너무나도 엄 청나기에 쉽게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한 도적을 맞을 까 봐 겁도 나는 것이다. 물론 그 철지들은 비밀번호가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일단 도적을 맞아도 그다지 위험은 없겠지만, 그러나 일단 가슴이 떨리는 것은 금할 길이 없었다. 만일 천하에 그 금액의 십분지 일만 있다고 해도 최고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방생은 다소 상황이 궁해지더라도 곧장 돈을 찾지 않고 하남성으로 넘어가기로 했 다. 황진의와 증평은 백방생이 중요한 것을 찾았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았지만 그밖의 일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 후에 호남성 장사성(長沙城)에 도착하자 일행은 오랜만에 편히 쉬 기로 하고 하나의 커다란 객점에 방을 정했다. 일행중 백방생과 증평이 이곳에서 기다리는 동안 황진의는 이삼일의 여유를 잡고 성수곡(聖手谷) 에 다녀오기로 했다. 성수곡은 호남성 무릉산(武陵山)의 심처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아직 백방생 등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것은 사실 백방생에게도 어느 정도는 잘 된 일이었다. 황진의가 그를 치료할 물건들을 가지러 간 사이에 그 역시 따로 해야할 회심의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자 백방생은 증평을 재촉하여 번화한 거리로 나섰다. 이미 계절은 완연한 겨울철이었으나 이 곳 강남지역은 아직 얼음이 얼지 않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 고 그 사람들의 활기속에서 겨울의 한기는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백 방생이 향해 간 곳은 바로 다름아닌 금포(金鋪)였다. 그곳은 금은보석을 사고 팔며 금표를 발행하기도 하지만 약간의 예금과 대출기능도 한다. 이를테면 전장(錢莊)이었다. 사회가 혼란할 수록 예금을 하는 사람들은 줄어든 반면에 금표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것은 금표는 중원 전체적인 신용망을 갖추어 어느 곳에서도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철지를 사용하는 것과 흡사한 이치였다. 그 철상자속에 들어있던 양피지의 내용에 의하면, 그 철지는 이른바 특수한 전표(錢票) 와 같은 것으로 천하의 어느 전장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했었기 때 문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하나의 금포를 발견하고서 그 안에 들어갔다. 대로변 에 있는 커다란 건물로서 제법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점원들은 실내에서 바쁘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백방생이 한 점원에게 그 특수전표 하나를 내밀자 그 점원은 즉시 가볍게 안색이 변하더니 곧 장 안으로 들어가서 다소 나이가 많은 중년의 책임자를 데리고 나왔다. 그 중년인은 백방생을 살피더니 말했다. "실례지만 손님께서 이 전표의 주인이십니까?" 백방생은 일단 그것이 전표라는 것이 확인되자 저으기 안심이 되었 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만, 무슨 잘못이라도 있소?" 중년인은 공손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쪽의 조용한 자리로 안내한 뒤에 말했다. "과거 천하의 모든 금포들은 하나로 일원화 하게 되었지요. 그 때 모두 에게 통용될 수 있는, 말하자면 금포들끼리 통하게 되어 있는 특수한 전표들을 만들었고, 이어 그것에 따라서 금표들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사소한 사건이 생기게 되었지요. 그 특수한 전표들의 일부가 사 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백방생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모든 금표(金票)들의 모체라는 말이군. 그런데 갑자기 사라 지다니, 혹시 도적이라도 맞은 것이 아니오?" 중년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도적을 맞다뇨? 단지 누군가가 어디선가 많은 금은보석을 가지고 와서 그 특수전표들을 바꿔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 그것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했는데 나중에서야 문제점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백방생은 철상자속의 양피지를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흥, 일부라고?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특수전표가 황금충에 의해 그렇 게 되었을 것이다.) 중년인은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당시 그 금은보석들을 예치시키고 다시 그 만큼의 특수전표들 을 만들었죠. 하지만 그 특수전표들은 본래 액수가 고액권이라서 오직 금포들 사이의 거래에만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일만고 객이 그 특수전표를 한꺼번에 사용하기라도 한다면, 비록 고객이 원하 는 대로 환불은 가능하지만 신용(信用)이 생명인 저희 업계는 자칫 심 각한 타격을 입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찌감치 그 특수전표 를 모두 회수하기로 방침을 굳혔던 것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래서 제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중년인은 그와 옆의 증평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소인이 비록 미천하지만 그러나 제법 사람보는 안목은 있습니다. 두 분은 모두 대단한 능력을 지닌 분들이실 것입니다. 강호인(江湖人)들 같군요." 증평이 말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 중년인은 말했다. "저희 금융계는 비록 더러 섞이기도 하지만 신용을 위해서 가급적 강호 인들과의 거래는 금하고 있습니다. 만일 저희 금융계의 질서가 무너지 면 천하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두 분의 협조를 바랍니다. 부디 그 특수전표를 가지고 계시면 모두 저희들에게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냥이 아니라 정당하게 환불해 드리려는 것이죠." 느닷없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그 노력은 이해할 만 했다. 그러나 백방생이 생각해 보니 이런 하나의 금포에서 그 많은 금액을 모두 환불 해 줄 역량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시일이 걸릴 것이고, 그것을 기다 리는 동안에 소문이 퍼지면 몹시 귀찮게 되지 않겠는가?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그 말을 이해는 하겠지만, 그러나 그 특수전표가 하나밖에는 없군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우연히 구입한 것입니다. 나중에 더 구하게 되면 다시 이리로 가져오도록 하죠."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중년인이 기이한 표정으로 말을 받자, 이내 백방생은 그 전표의 비밀 번호를 말해 주었다. "비밀번호까지 알고 계시니 당연히 환불해드려야죠. 환불은 금표로 해 드릴까요?" 중년인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증평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백방 생에게 말했다. "대체 언제 저런 것을 가지고 계셨었죠? 혹시 전날 남창에서 가져왔던 그 물건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해 주도록 하겠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이윽고 중년인이 금표의 묶음을 가져 왔는데, 그것들은 금방 발행한 것으로 천냥짜리 아홉장과 백냥짜리 열 장이었다. 말하자면 과연 황금 일만냥인 셈이었다. 그 철장부의 철지들이 모두가 정말로 황금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백방생은 그만 너무도 기뻐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차피 금포들에서는 그 전표들을 받으려고 하니 그것들을 교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백방생은 본래 철장부들을 모두 예금장부로 바꾸려고 했으나 이에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어찌보면 철장부들이 더욱 안전할 것 같았기 때문 이었다. 황금 일만냥은 말이 일만냥이지 실로 엄청난 액수다. 증평은 정말로 중년인이 그 액수를 갖다주는 것을 보고 그만 놀랐다. 중년인은 백방생 에게서 혹시 다른 전표들이 나올 것을 기대했는지 매우 친절했다. 그는 백방생이 금표들을 일일이 확인한 다음에 봉투에 넣어 주었고 이어 필 요하다면 잔액으로 바꾸어 주면서 말했다. "저희 금포는 천하에 점포망이 개업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신용하 여 예금을 하고 있습니다. 손님께서도 만일 휴대하시기가 불편하시다면 일정한 금액을 예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그렇다면 다른 점포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는 말이오?" 중년인은 웃으며 말했다. "저희 점포는 천하에 퍼져 있고 또한 동일한 장부로 거래하고 있습 니다. 만일 지금 거래하시면 그 거래사항은 전서구(傳書鳩)로 천하각처 의 점포에 최소한 사흘 안에는 전달하게 됩니다. 만일 손님께서 장부와 인장을 가지시고 어느 점포이든 비밀번호만 말씀하시면 마치 이곳처럼 쉽게 예금을 인출하실 수가 있는 것이죠. 저희 점포는 특히 신용과 정 직을 생명으로 하는 만큼, 보다 안전하게 고객의 자금을 맡아서 관리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백방생은 그 말을 듣고 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참, 그렇게 하면 편리하겠군?) 백방생은 이윽고 금표봉투를 갈무리하고는 증평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증평은 기쁜 표정으로 그의 옆을 따르다가 물었다. "상공께선 또 어떤 일을 계획하고 계신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이미 맹세한 일이 있소. 그 일을 위해 모든 일을 착착 준비해 가고 있는 것이오." 증평은 말했다. "이번에는 이떤 일을 하실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힘을 길러야 하오. 무공을 연마하는 것도 그 한가지 방법이지 만, 그러나 때로는 자금도 그 커다란 힘이 되어 주기도 하오." 증평은 말했다. "그럼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전에 우리는 먼저 잠시 바람이나 쏘이는 것이 어떻겠소?" 장사성에서 동정호(洞庭湖)까지는 다소 멀어서 대략 이백여 리에 가까왔 다. 백방생은 마차를 빌리더니 느닷없이 동정호로 유람을 가자고 했다. 물론 수중에 많은 돈이 생겼으니 놀러 가는 것은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증평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다소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마차는 하루종일을 달려서 드디어 저녁무렵에 동정호에 이르렀다. 겨울 철이라서 그다지 유람선은 많지 않았지만 그러나 동정호의 풍경은 역시 말로 듣던 그대로 아름다왔다. 이제까지 강북에서만 살며 이런 거 대한 호수의 풍경을 구경 못한 증평은 가볍게 환호성을 질렀다. 사실 파양호의 주변에서는 미처 구경을 할 겨를이 없었다. 마부의 소개로 제법 큼직한 유람선을 한 척 빌리자, 백방생은 그 위에 술과 음식들을 싣게 하고 본격적으로 호심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사위에 어둠이 밀려들고 유람선의 휘황한 궁등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자 제 법 풍취가 그윽하게 전해져 왔다. 증평은 마치 어린 계집아이처럼 연신 즐거워하며 수선을 떨었다. "정말 근사하군요! 마치 우리가 꿈속을 여행하는 것 같지 않나요?" 사공들은 묵묵히 노를 저었고 백방생은 배위에서 가끔 술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증평은 저 혼자서 수선을 떨며 좋아하다가 이윽고 백방생 에게 돌아왔는데 백방생을 보고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표정이 우울하죠? 이곳에 온 것이 즐겁지 않나요?" 백방생은 깊은 시름을 덜어내듯 한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오. 나는 지금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백방생은 증평에게 진소유와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증평은 그의 앞에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백방생이 얘기를 다 끝냈 을 때에는 그녀의 안색도 다소 취기가 올라 상기되어 있었다. 백방생은 이어 말했다. "그녀는 내가 필요없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나에게 많은 돈이 생긴 지 금에도 과연 그녀가 나를 뿌리칠 것인가가 생각나는 것이오. 혹시 이 많 은 돈이라면 그녀가 다시 마음을 돌려주지는 않겠소?" 증평은 그 말을 듣고 나자 짧게 한숨을 불어 쉬더니 한잔의 술을 비 우면서 말했다. "상공께 그런 상사(相思)의 심정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러나, 대개의 여인들은 현실을 따르는 법이지요. 내 생각에는 그녀가 그 정도의 재산 을 가졌다면 더이상의 재산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봐요. 세상에는 돈만이 모든 것은 아니니까요." 백방생은 뽀얗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낭자도 그와 같다는 말이오?" 증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돈이나 세상의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상공 의 곁에 머물 수 있기만을 바라죠. 저는 이미 상공의 시종이니까요." 백방생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마운 말이로군.) 이어 백방생은 쉬지 않고 술을 마셔댔는데 마치 가지고 갔던 술을 혼자 서 다 마셔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또한 그의 주량은 그다지 고명하지 못했다. 백방생이 이윽고 몹시 취하게 되자 증평은 은근히 사공 에게 배를 다시 뭍으로 저어 가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그들이 미처 뭍에 배를 도착시키기도 전에 일행은 하나의 작은 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배는 따로 사공이 있지 않았다. 그저 타고 있는 사람이 사공이고 주인이며 취객(醉客_이었다. 마치 그 날은 술취한 사람들이 가득한 날 같았다. 그 사공은 젊은이였는데 기이하게도 승려 였다. 백방생은 너무 만취해서 거의 비몽사몽간이었으나 취한 상대가 젊은이 이고 또한 승려라는 사실에 참을 수가 없는 듯이 배를 그쪽으로 몰라고 했다. 백방생은 그 배에 가까이 가자 소리쳐서 불렀다. "이 보시오. 당신이 만약 사람이라면 물러가고 술취한 귀신(鬼神)이 라 면 이리 와서 한잔 합시다!" 그 승려는 처음에는 상관하지 않는듯 했으나 이어 백방생이 다시 소리 치자 그만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럼 당신은 술귀신도 아니면서 술을 마시고 있단 말이오?" 그 승려는 고개를 돌려 백방생을 바라보는듯 하더니 이내 천천히 걸 어서 이쪽 유람선으로 건너 뛰었다. 뜻밖에도 그의 몸가짐은 단정했고 그리고 그가 움직이는 데도 그 작은 배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증평은 그것을 보고 그 승려가 무림의 고수라는 사실을 알았다. 혹시 화를 불러 들인 것이 아닌가 하고 긴장해서 바라보았는데, 그러나 백방생은 너무 취해서 인지 전혀 그런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승려가 다가와서 그의 앞자리에 앉자 이미 대취하여 시뻘개진 얼굴을 흔들면서 가가대소(呵呵 大笑)를 했다. "하하하! 역시 술귀신은 술을 알아보는 구만! 이 좋은 밤중에 어찌 취 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겠소?" 승려는 말이 없었다. 그는 백방생이 따라주는 술을 그저 잠자코 마실 뿐 이지 더이상의 다른 행동이 일절 없었다. 증평은 처음에는 긴장해서 보 았으나 이내 다소 마음을 진정시키게 되자 그 승려를 자세히 살피게 되 었는데 다소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 승려는 나이가 삼십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그야말로 용모가 깨끗하 고 준미수려하여 혹시 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태도나 강인한 눈빛은 여자는 결코 아니었다. 증평 은 왠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아서 감히 다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백방생은 잠시 두어 잔의 술잔을 교환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술귀신이라고 했지만 어느 누가 술귀신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 소? 말할... 수가 없지. 차라리 저 물속으로 풍덩 빠져 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오." 그런데 젊은승려는 그 말을 듣자 일순 가볍게 냉소를 했다. 백방생은 마악 다시 술잔을 들다말고 의아해져서 말했다. "아니... 뭐가 잘못 되었소?" 순간 젊은승려의 추수(秋水)와도 같은 두눈에서 맑은 기운이 번쩍 일어 나는 것 같았다. "흥, 네놈은 기왕에 나타났으면 말을 하면 그만이지 이렇게 연극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백방생은 그 말을 듣자 일순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엉겁결에 뒤로 물러나서 일어서서는 잠시 그 젊은승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뭐라구? 알고보니 정말 이상한 녀석이로군. 나는 술친구인 것 같아서 오라고 했더니, 알고 보니 이상한 녀석이야. 그렇지 않느냐?" 나중의 말은 옆의 증평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증평은 아무런 말 도 못했다. 젊은승려의 차가운 시선이 백방생의 몸을 주시하고 있어서 갑자기 이 배위에는 살얼음이 돋는 것 같은 긴장이 흘렀다. 백방생은 금 방 술이 깼으나 이내 다시 취했다. "정말 나쁜 녀석이로군, 정말 나쁜 녀석이야. 나의 주도(酒道)를 이렇게 몰라주다니...,증낭자! 저쪽에 상을 다시 차리시오. 내 다른 곳에서 마셔 야 하겠소!" 백방생은 혼자 횡설수설을 하더니 이윽고 비틀거리며 걸어가 다른 쪽 에 주저앉았다. 그는 이어 술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증평이 술상을 가져다 주자 혼자 몇 잔을 마시고는 이내 쓰러져서 잠들고 말 았다. 다음날 백방생이 눈을 떠 보니 자신은 배의 선실에 누워 있었다. 알고 보니 이 유람선은 아직 동정호의 호수위에 떠 있는 상태였다. 머리가 깨 지는 듯이 아파왔지만 백방생은 약간의 생각을 정리하고 조식을 한 다음에 밖으로 나갔다. 때는 이미 아침무렵이었다. 뜻밖에도 배의 앞부분에는 여전히 술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앉아서 술을 마시는 자는 그 어젯밤의 젊은승려였고 앞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은 증평이었다. 증평은 그 젊은승려와 마주 앉아서 술을 따라주며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몹시 밝 아 보였다. 백방생은 이제까지 그녀가 그토록 밝게 웃는 광경을 보지 못 한 것 같았다. (어, 이거 무슨 일이지?) 백방생이 다가가자 증평은 얼른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이제 깨어나셨군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홍조가 어려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헌데 이 사람은 누구요?" 증평은 백방생이 그 젊은승려를 가리키자 웃으며 말했다. "어젯밤에 상공께서 청하시고도 모르시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모를리가 있겠소? 단지 나는 어제 그 무례한 사람을 보낸 것으로 아는데 어째서 여기에 아직 있느냐는 말이오." 증평은 안색이 다소 붉어졌다. "그것은, 제가 붙잡았어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이때 이제까지 묵묵히 있던 젊은승려가 몸을 일으키더니 백방생을 향해 합장하며 말했다. "소승은 지공(知空)이라고 하오. 어젯밤은 실례가 많았소이다." 백방생은 그 말을 듣자 왠지 더욱 놀란 것 같았다. "뭐라고요? 그럼 당신이 바로 그 소림일수(少林一秀) 지공이라는 말이 오?" 백방생이 놀랍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계속 상대의 전신을 주시하자, 이 윽고 증평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상공께선 그것도 모르시고 초청했단 말인가요? 호호, 물론 지공 스님이 천하에 두 분이 계시는 것은 아니지요." 백방생은 의아한 지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이 바로 이번에 정의맹의 총순찰(總巡察)이 된 그 지공이라 는 말이오?" 지공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미타불, 간밤에는 소승이 그만 오해를 하고 말았소이다. 그 점 이해 해 주시기를 바라오."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을 보니 정말로 가짜 중은 아닌 모양이군!) 백방생은 이제까지 이 지공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들어왔다. 처음에는 소림사에서 였고, 이어 정의맹에서도 그 얘기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왠 지 줄곧 그 모습을 대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서야 이렇게 뜻밖에도 만나 서로 수인사를 나누게 된 것이었다. 이 지공은 이미 천하에 이름을 날렸 을 뿐만 아니라 일전에 황진의가 말했던 천하의 일곱명의 무학천재(武 學天才)들 가운데의 하나이니 물론 실력이 대단할 것이다.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증평에게 물었다. "그래 두 분은 밤새도록 이 자리에서 술을 마셨다는 말이오?" 증평은 다소 수줍은 듯이 말했다. "저 분은 술을 마셨지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이어 다시 지공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나와 함께 한잔하지 않겠소? 간밤에는 서로간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공은 미소하며 말했다. "이 돌팔이 중을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그럴 수가 있소이다." 이 지공의 음성은 맑고 은은하게 울려나오고 있어서 흡사 사람의 혼 을 잡아 끄는 마력을 지닌 것 같았다. 백방생이 봐도 그는 몹시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것도 얼굴의 윤곽이 갸름하게 생긴 것이 영락없는 천하절 색여인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히 여자는 아니었다. 백 방생은 저번에 황진의에게 속은 경험이 있어서 자세히 보았으나 그는 분명히 남자였다. 남자의 얼굴이지만 오히려 여자보다도 더욱 수려하고 깨끗한 얼굴, 그러한 몸뚱이에 회색의 승포를 걸쳤으니 거의 어울리지 않 는 것 같았다. 그는 증평이 갑자기 수줍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 마 백방생이 여자라고 해도 반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증평은 백방생을 향해 말했다. "다시 술상을 볼까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밤새도록 배위에 있었더니 그만 멀미가 나려는 것 같소. 우리 이번에는 뭍에 나가서 한잔씩 하도록 합시다." 이어 백방생은 사공들에게 배를 뭍으로 저어 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사공들은 이미 하룻밤이 지나서 피곤해 졌으므로 그 말을 듣자 힘껏 노를 저었다. 그리하여 잠시 후에는 그들은 호숫가의 나룻터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 나룻터는 물론 일행이 어젯밤에 지나왔던 곳이었다. 그런데 아침이어서 그런지 그 곳에는 배들이 몇 척 정박되어 있었고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들이 마치 작업 을 떠나기에 앞서서 무슨 의식을 치르는 듯한 것을 보고 다소 신기하게 생각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소?" 선착장의 앞쪽에는 옷소매를 걷어붙인 우람한 장한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백방생이 말을 붙이자 그들은 모두 들은척 만척 했다. 마치 사람 을 앞에 두고 졸리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백방생의 신형이 그 사이를 지나가자 갑자기 주먹이 날아왔다. (어이쿠, 이거 내가 뭘 잘못했나?) 백방생은 이미 공력의 기초를 갖추고 있어서 이런 하류배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슬쩍 주먹을 피하면서 바라보니, 그 공격한 자는 두눈 을 부라리며 달려들고, 이어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자신을 향해 달려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쿠! 이건 문제가 다르군.) 백방생은 비로소 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 빈손이었지만 그 가운데 병장기를 뽑아드는 자들도 있었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서 이삼십 명. 백방생은 이제까지 제법 많은 암격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멍청한 공격들은 처음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대체 누가 시켰는지도 모르고 당해 야만 했지만, 이제는 또 가장 미련하게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의 무공은 모두가 하류급에 불과하며 개중의 제법 설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해도 백방생의 눈에는 굼벵이처럼 느리게 보였다. 그는 그저 간단하게 신법을 펼쳐서 그들 모두의 사이를 빠져나갈 수가 있었으 며 이어 뒤에서 지휘하던 한 명의 텁석부리 장한을 제압했다. 그 텁석 부리 장한의 무공은 제법 괜찮아서 이류급에 속했다. 그러나 백방생이 일단 초식을 펼치자 몇번 반항하다가 이내 혈도(穴道)가 제압당하고 말았 다. 그렇게 우두머리가 제압을 당하고 나자 나머지 장한들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처럼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백방생은 그 텁석부리에게 말했다. "너는 어째서 나를 공격했느냐?" 그 텁석부리는 그저 눈을 허옇게 부라릴 뿐 쉽게 대꾸하지 않았다. 백방생은 그 때 문득 뒤쪽의 나무더미에서 한 사람이 달아나는 것을 발 견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이 비록 타격을 입었다고는 하나 그는 이미 무림인이었다. 대번에 신법을 펼쳐서 두어 번 추격하자 그 자는 미처 십 장도 달아나지 못하고 제압되고 말았다. 그 자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낯설은 느낌이었다. 백방생은 그가 왜 자신을 보고 달아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방생은 어쨌든 그가 이 장한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텁석부리가 있는 쪽으로 데려갔다. 증평은 비록 이류급이라고 하나 무공이 그다지 낮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하류도배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가 있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백방생이 돌아오니 그녀는 역시 한바탕 자신의 솜씨를 발휘하고 있었 다. 그녀를 깔보고 잡으려고 했던 장한들이 여기저기에서 나가떨어져 있었고, 게다가 어떤 자는 심하게 비명까지 질러대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 두 명을 대질시켜 보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다가온 증평 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녀석을 알아요!" (아는 사람이라고?) 백방생이 의아해져서 바라보니 증평의 말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바로 어제 아침의 그 금포의 점원이었어요." 백방생은 그 말을 듣자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사실 어제 아침 에 금포에 들어갔을 때 오직 한가지에 관심이 있었지 어떤 점원이 어떻 게 생겼는가 하는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증평은 당시 영문을 몰라서 일단은 그 내부를 자세히 둘러 보았던 것이다. 백방생은 그 점원녀석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너는 그 책임자의 지시를 받은 것이냐?" 그 점원은 이내 모든 것이 들통나자 그만 얼굴이 붉어지며 실토했다. "저는 당시 그 얘기를 옆에서 듣고 있다가 독자적으로 이곳으로 달려 온 것입니다. 평소에 저 수채(水寨)의 분들과는 안면이 있기 때문이죠." 백방생은 고개를 돌리며 텁석부리를 바라보곤 물었다. "수채라고?" 그 텁석부리는 마지 못해서 대답했다. "우리는 바로 동정십팔채(洞庭十八寨)의 호걸들이다. 죽이려면 죽이고 마음대로 해라?" (동정십팔채?) 동정십팔채라면 바로 이 동정호의 일대에서 도적질을 해먹는 유명한 도둑의 소굴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녹림맹(綠林盟)의 소속이 되어 오랫동안 번창해 왔다고 했다. 백방생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일 이 귀찮아 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내 장한들의 혈도를 풀어주고 말했다. "나는 너희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그러니 앞으로 알아서 행동해라! 만일 앞으로도 다시 나에게 이와 같은 짓을 한다면 결코 그냥 보내지 는 않을 것이다." 텁석부리를 비롯한 장한들과 그 점원은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 듯 하 다가 이내 잘됐다는 듯이 빠르게 줄행랑을 쳐버리고 말았다. 동정십팔채 의 수적들은 그 배들을 타고 왔었는데 이번에는 그 배들도 돌아보지 못 하고 달아난 것이었다. 백방생이 지공을 부르려고 하는데 이때 문득 지공이 다가와서 말했다. "백공자! 상황만 허락한다면 백공자와 한 잔 나누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하겠구려." 백방생은 의아해져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일이 생기기라도 하셨소?" 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밤에는 너무 후한 대접을 받았소이다. 그 때문에 잠시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을 잊었소이다." 백방생은 문득 그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사실 그는 불문의 유명한 승려로서 남들의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백방 생은 다소 섭섭하기는 했으나 그것을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에 소생이 다시 좋은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요." 백방생이 그렇게 말하자 지공은 이어 증평을 바라보았다. 증평은 이내 뭐라고 말을 할듯 하다가 결국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공은 잠 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신형을 날려 느릿하게 사라져 버 리고 말았다. 36 장 떠나는 자(者)와 남는 자(者) 두 사람은 더 이상 술을 마실 흥취도 사라졌고 하여 곧장 식사를 한 다음에 장사성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차가 빠르게 질주하는 동안에 증평은 오늘따라 왠지 별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어딘가 멀고 먼 곳을 더듬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백방생은 혹시 자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여 계속 말을 붙여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빛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리 해도 여전히 우울한 표정인 것이었다. 마치 어떤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 그녀에게 닥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백방생은 그리하 여 문득 의아해져서 생각했다. (간밤에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두 사람이 장사성에 도착했을 때는 역시 저녁무렵이었다. 두 사람은 즉 시 예약해 놓은 객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객방에 도착했을 때 느닷없이 일은 벌어져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들의 방이 엉망으로 뒤 집혀져 있었고 또한 그들의 물건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것이 아 닌가? 얼마나 놀랐는지 이제까지 말이 없던 증평도 정신이 번쩍 들어서 소리치며 말했다. "바로 그 금포의 놈들의 짓이예요? 그놈들이 적극적으로 이 일에 개입했음이 틀림없어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실은 그 점원 하나가 동정십팔채를 움직였으리라고는 생각하 지 않았었소." 증평은 화가 나서 말했다. "그렇다면 어서 가요? 빨리 놈들이 가져간 물건들을 찾아야만 해 요." 백방생은 미소했다. "하지만 서두를 것은 없소." 증평은 놀라 말했다. "왜죠? 그 비급들과 물건들은 바로...." 백방생은 말했다. "중요한 것들이니 잊어버릴 수는 없지." 증평은 말했다. "헌데 어째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죠? 자칫하다가 그들이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해 버리면 끝장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선 해야할 일은 있소." 증평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게 뭐죠?"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일은 심상치 않고 또한 간단하지 않소. 필시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손오공처럼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 있어야할 것 같소." 증평은 무슨 특별한 얘기인가 하고 듣고 있다가 그만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당신은 신통력을 얻는 방법을 알아내기라도 했나요?" 백방생은 그녀를 보며 되물었다. "당신은 손오공이 어떻게 해서 그런 신통력을 가지게 됐다고 생각하 오?" 증평은 어처구니 없는 질문과 느긋함에 어이가 없어 하다가 대꾸했다. "그야, 신선에게서 술법을 닦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백방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내가 알고 있는 바에는 손오공은 그 뒤에도 하늘나라에 잡혀 들어갔지만 이어 천도복숭아를 먹고 나서 무적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 소." 증평은 백방생이 거듭 긴박한 순간에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자 그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래, 당신은 그 천도복숭아를 구할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다는 말인 가요?" 백방생은 그녀를 보며 반문했다. "낭자는 혹시 이 부근에 천도복숭아 나무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소?" 증평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들은 적이 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래서 내가 지금 그곳으로 가보려는 것이 아니겠소? 따라 와 보시오!" 이윽고 백방생이 증평을 데리고 간 곳은 객점의 후원에 있는 어느 커다란 나무의 아래였다. 주위에 어둠이 짙게 깔려서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고 그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의 이름도 알 수가 없었다. 증평은 백방생이 갑자기 이렇게 이상하게 나오자 그만 웃으며 말했 다. "당신은 설마하니 이 부근에 천도복숭아가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인 가요?" 백방생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실 지금 이 나무의 자리에는 원래 복숭아나무가 있었다고 하 는데, 혹시 이 아래에 옛날의 천도복숭아가 하나쯤은 묻혀 있을 지도 모르오." 이어 백방생은 가지고 간 연장을 사용하여 정말로 그 나무의 아래를 파기 시작했다. 백방생이 그렇게 까지 하자 증평은 그만 머리가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그가 심한 충격을 받아서 혹시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윽고 백방생은 땅을 두 자 정도 파더니 거기에서 느닷없이 두개의 물건을 꺼내올리는 것이었다. "아, 여기 있군? 이걸 보시오. 이것들이 다 천도복숭아가 아니오?" 증평은 웬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돌려 그 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가볍 게 놀라고 말았다. 느닷없이 백방생이 구덩이에서 파낸 물건들은 바로 다름아닌 그의 철상자와 증평의 비급보따리가 아닌가? 증평이 멍하니 바라보자 백방생은 그저 조용히 웃고 있었다. 증평은 비로소 자신이 그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증평은 그만 백방생에게 달려들어서 그의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여태까지 나를 속였군요?"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속인 게 아니오. 나는 다만 낭자를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오. 이 정도 면 낭자가 이전에 보물을 파낼 때와 비슷하지 않겠소?" 증평은 웃다가 점차로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럼, 저들이 우리의 방들을 뒤진 것은 사실이란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때문에 애써서 이 물건들을 이런 곳에 빼돌려 놓았었겠소?" 증평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제 아침에는 별로 시간이 없었는데 그는 언제 이런 일을 해 놓았던 것일까?) 증평은 속으로 생각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다시 찾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본래 적들이 나를 정탐하고자 하면 그렇게 하도록 해주는 것이 오히려 귀찮음을 더는 비결이오. 나는 그래서 일부러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동정호로 갔던 것이오. 결국 그래서 적들은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아마 다시 나에게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 지도 모르오. 물 론 그 전에 물건들을 잘 숨겨놓는 것도 좋겠지만." 증평은 백방생의 그러한 말을 듣고 나자 그만 어이가 없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백방생의 모습이 다르게 여겨지기도 했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여태 백방생의 옆에서 즐기기만 하지 않았는가? 확실히 백방생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뛰어난 사람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 득 그녀의 뇌리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증평은 갑자기 정신이 아 득해 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내심 생각했다. (이것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야? 누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해도 좋아.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겠어!)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백방생은 촛불의 흔들리는 그림자 아래에서 혼자 곰곰히 생각했다. (저 철상자를 계속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무래도 귀찮은 느낌이 든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몇개의 예금장부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 다. 음, 물론 전부 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고 그 일부만....) 그 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증평이 안으로 들어섰다. 백방생은 잠옷 차림이었기 때문에 약간 당황했다. 비록 주종간이기는 해도 그들은 서 로 예의를 엄격히 지켜오지 않았던가? 백방생은 증평이 갑자기 이 밤중에 자신의 방을 찾을 바에는 혹시 다른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했다. 그러나 지금 증평 은 단정하게 의복을 잘 차려입고 있었고, 게다가 장검을 허리에 찼으며 손에는 그 보따리까지 들고 있었다. 촛불아래 드러난 그녀의 안색은 다소 창백하게 느껴졌다. 백방생은 얼른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리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있소?" 증평은 방문을 닫고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한가지 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이어 그녀는 들고 있던 그 비급보따리를 그에게 건네 주었다. "이 비급들은 알고보니 그 진낭자에게 돌아가야 하겠더군요. 사실은 그 녀가 남해보타도의 실질적인 후계자가 될 뻔 했으니까요." 백방생은 그 비급들을 받고 나자 왠지 가슴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진소유는 지금 불문과 떠나 있고 따라서 증평이 이것을 그녀에게 돌려 줘야할 아무런 의무도 없는 것이었다. 단지 그녀는 백방생이 진소유 를 매우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어떤 부탁할 일이 없다면 증평은 결코 쉽게 그 비급들을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백방생은 왠지 다소 잠긴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꼭 떠나야만 하겠소?" 증평은 자신의 의도가 이내 간파당하자 그만 눈시울이 붉어지고 양 뺨이 벌개졌다. 그녀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했다. "저는 본래 그다지 좋은 계집은 아니예요. 상공께서 그토록 저에게 잘 대해 주셨는데, 저는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고 마는군요. 그 은혜는 반드시 내세에서 상공의 시종이 되어 갚도록 하겠어요." 백방생은 문득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중이면서 중 같지 않고, 남자이면서도 남자같지 않은 천하의 무학천재요 절세미남자(絶世美男 子)! 그 유혹의 힘이 이다지도 강했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품속에서 금표가 들어있는 봉투를 꺼내서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내가 낭자와 했던 약속은 사실 내가 부담없이 좋아서 한 일이었으 니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되오. 그리고 아마도 혼자서 객지를 떠돌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것이오." 그 봉투는 백방생이 금포에서 받은 일만냥이 거의 다 들어있는 것으로 많은 액수였다. 그 정도만 있다면 누구라도 한평생을 호의호식하며 부자 로 살 수 있을 것이고, 결코 그런 처녀의 몸으로서는 쉽게 만져볼 수 없 는 금액이었다. 증평은 그것을 확인하자 손을 떨면서 말했다. "저는 이 것을 받을 수가 없어요." 증평은 그 봉투를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백방생은 받지 않았다. "장차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 돈은 매우 필요할 것이오. 정히 미안 하다면 비급과 바꾼 계산이라고 생각하시오." 증평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백방생을 바라봤다. 백방생은 왠지 허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이었다. 증평은 이에 그만 심하게 울음을 터뜨리 며 봉투를 갈무리하고 밖으로 달려나가 버리고 말았다. 증평이 그렇게 사라지자, 백방생은 일어나서 방문을 닫은 뒤에 걸어와 서 거울앞에 섰다. 제법 호사스런 객방이라 거울도 매우 크고 훌륭했다. 그 거울에 그의 등신상(等身像)이 나타났는데, 몸뚱이는 비대할 뿐만 아 니라 시뻘겋게 보였고 게다가 얼굴은 다소 일그러져서 어색하고도 이상 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낯설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 는 듯 했다. 백방생은 문득 중얼거렸다. (과연 그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여 떠날만 하군. 이 몸뚱아리 어디에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다음날 아침, 식사부터 하고 난 백방생은 외형상으로 아주 바쁜 사람 처럼 보였다. 증평마저 떠나버려서 혼자가 되어버린 지금, 그는 그야말 로 홀가분해 져서 유쾌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우선 귀찮은 물건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철상자는 모두 필요하 지 않으므로 그 속에서 열 개의 철장부만 꺼내고 나머지는 그만이 찾을 수 있는 모처에 잘 보관해 놓았다. 그것은 오래 두어도 썩지 않는 물건이니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꺼낸 열 개의 철장부로 성내의 가장 커다란 열 곳의 금포로 찾아가서 각기 하나씩 열 개의 예금장부를 만들었다. 하나의 철장부에는 모두 백개의 특수전표가 들어 있으니 물 경 예금장부 하나에 황금 백만냥이 입금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런 예금장 부 하나만 있다고 해도 희귀한 일일텐데, 그런 것이 모두 열 개가 있고 게다가 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숨겨져 있는 것이니, 보통 사 람들은 가히 상상도 못할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사정을 훤히 알고 해서 이번에는 조금도 말썽이 나지 않게 주도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고, 이어 모든 것이 안전하게 되었 다. 예금장부와 인장은 가볍고 다루기도 손쉬워서 정말 이제는 거부(巨 富)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남은 짐은 열두권의 비급이 들어 있는 보 따리 뿐이었는데, 그것은 철상자와 비교할 수 없이 가벼울 뿐만 아니 라, 그는 본래 서생의 복장을 좋아하니 등에 지고 다니기가 적당한 셈이 었다. 백방생은 그렇게 일신의 귀찮은 짐들을 정리하고 나자, 나중에는 다시 그 예금장부들 가운데에서 하나를 사용하여 일부를 인출하여 거부로서 의 즐거움을 만끽하려고 했다. 그는 십만냥의 금표를 찾았는데, 그것은 천냥짜리 금표와 백냥짜리 금표가 각기 구십개와 백개가 되어서 두툼 한 두 다발의 금표뭉치였다. 백방생은 이어 비급보따리를 등에 짊어진 채로 번화한 시장속을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구입하였는데, 아무리 좋은 의복들을 사 입고 물건들을 구입하였어도 겨우 백냥짜리 금표 하나도 다 사용하지 못했다. 이윽고 백방생이 다시 객점안에 앉아서 차를 마시 고 있는데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바로 며칠전에 성수곡으로 떠났 던 황진의였다.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이윽고 차를 마 시는 백방생을 발견하자 입가에 억지로 미소를 떠올렸다. 백방생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왜 갔던 일이 잘 되지 않았소?"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우선 방으로 가도록 하죠." 뭔가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백방생의 방에 도착하자 방문을 닫은 뒤에 황진의가 백방생에게 말했 다. "헌데 증낭자는 잠시 어디로 갔나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떠났소." 이어 증평이 어떻게 지공에게 반하게 되어 떠났다는 얘기를 간략하게 들려 주었다. 황진의는 백방생이 보여주는 비급보따리까지 바라보더니 문득 얼굴에 수심을 떠올렸다. "그 증낭자는 보기에 매우 총명하고 아름다와 보이던데, 일이 그만 그 렇게 되고 말았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이 반드시 그녀에게 나쁘게 되리라는 법이 있겠소?"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필시 증낭자가 백공자의 부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뭐, 물론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되는 것도 상관이 없겠지요. 그러나 지금 의 상대는 승려이고 또한 그는 너무나도 잘난 사람이니...빌어야 하겠지 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도 아마도 팔자일 게요." 황진의는 온갖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백방생을 바라보며 문 득 웃으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그새 또 돈을 벌었군요?" 백방생은 약간 거드름을 피우듯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나는 그야말로 신통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쉽게 증낭자에게 만냥이라도 줄 수가 있었겠소? 하 하,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해서 돈을 벌게 되었는 지 그 방법은 묻지 마시오?" 백방생은 이어 품속에서 정말로 천냥짜리 금표뭉치를 꺼내 보이더니 그 가운데의 한 장을 황진의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이건 그 비밀을 지켜달라는 뜻에서 주는 것이오." 금표는 비단 가치도 높을 뿐만 아니라 모양도 아름답다. 황진의는 거절 하지 않고 그 금표를 받아들더니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제 당신의 곁에만 있으면 나는 자연히 갑부가 되겠군 요?" 백방생은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헌데 보아하니 안색이 좋지 않은데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오?" 황진의는 다소 안색을 굳히더니 말했다. "지금 강호의 정세가 이상해요. 저는 요 근래의 강호정세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조사를 해 보았지요. 그랬더니 바로?" 백방생은 참지 못하고 다그쳐 물었다. "혹시 난리라도 났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철혈부(鐵血府)가 붕괴되었어요." 백방생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난리가 났다고하여 혹시 정의맹이 붕괴된 것인 줄로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붕괴된 것은 오히려 철혈부라지 않는가? 하긴, 백방생은 황진의가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이 이해가 갔다. 철혈부에는 그녀의 연인인 용천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아, 나도 어쩐지 이곳 강남으로 오면서 그들의 활약이 너무도 허술하 다고 생각했지. 혹시 정의맹에서 단숨에 공격하여 격파한 것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리 정의맹의 세력이 막강하다고 해도 단숨에 철혈부를 격파할 수는 없어요. 지금 철혈부가 붕괴된 것은 그 내부사정에 있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나머지 문파들이 녹림맹에 반기를 들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철혈부가 붕괴된 것은 그 부주(府主)가 스스로 사퇴했 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어요." 철혈부의 부주라면 바로 만리독보행(萬里獨步行) 용천기(龍天奇)다. 백 방생은 자연 황진의가 그토록 상심해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록 자세히는 모르지만 필시 용천기가 스스로 대업(大業)을 포기했을 때는 거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철혈부가 붕괴 되었다면 정의맹의 사람들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백방 생은 지금 그것을 기뻐해야 할 지 상심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황진의의 안색을 살피며 다시 말했다. "혹시 그 용천기의 신변(身邊)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겼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히는 몰라요. 들리는 바에 의하면 용사형 (龍師兄)은 신변에 전혀 이상이 없지만 갑자기 모든 일에 염증을 느껴서 은거했다고 하기도 해요. 어쨌든 용사형이 아직 안전한 것은 틀림이 없 어요. 문제는 지금 천하의 정세에 있어요." 백방생은 의아해 져서 말했다. "천하를 철혈부가 물러나고 정의맹이 통치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 아니 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현재 정의맹은 사실 강북을 통치하기에도 역부족인 상황이죠. 헌데 요사이 철혈부가 붕괴되자 그 대신에 갑자기 제삼세력 (第三勢力)이 나타나서 활기를 치기 시작했죠."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졌다. "제삼세력이라니?" 황진의는 말했다. "저번에 술집에서 마약에 중독된 사람을 본 기억이 나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오. 헌데 그들이 무슨 세력을 형성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마약에 당한 사람은 이지가 흐려 있으니 당연히 무슨 세력을 만들 수 가 없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마약을 사용하는 쪽이예요. 말하 자면 마약과 흡성대법(吸星大法),그리고 심령술(心靈術)을 사용하는 무 리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예요. 그들은 심지어 정의맹의 경 내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하고 있죠." 백방생은 흡성대법이라는 귀에 익숙한 말을 다시 듣게 되자 갑자기 가슴이 뜨끔하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과거의 철혈부보다는 못할 것이 아니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이번의 그 세력은 오히려 철혈부의 힘을 능가해요. 내가 알 기로는 이미 다섯 개의 문파가 거기에 관련되었죠. 게다가 그들의 세력은 그 뿐만이 아니라고 해요." 백방생은 그 말을 들으며 문득 그녀가 신통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체 그 녀는 어디서 그런 정보들을 다 수집해 오는 것일까? 사내대장부인 자신 은 여전히 이런 객점에만 처박혀서 쓸모없이 지내는데.... 백방생은 고 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늑대가 물러가자 호랑이가 산중을 지배하게 된 셈이군?"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비유는 다소 틀려요. 철혈부는 비록 야망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해치기는 했지만 그러나 모든 뿌리까지 썩게 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지 금의 그들은 온갖 사악한 짓들을 자행하여 사람들을 그 근본부터 병들 게 하고 있죠. 그 피해는 이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예요." (그러니까 거꾸로 호랑이가 물러가자 하이에나가 들이닥쳤다는 소리로 군.) 백방생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다소 심드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무슨 뾰족한 수단이 있겠소?" 황진의는 말했다. "지금 정의맹도 그 일로 고심하고 있는 모양이예요. 당신도 만일 무공을 회복한다면 그들을 돕는 것이 좋겠죠." (정말 그렇게 될 수가 있을까?) 백방생은 그제서야 황진의가 가져온 보따리에 시선을 던졌다. "그야... 그렇겠지! 헌데, 지금 나를 치료해줄 수가 있겠소? 만일 나를 치료해 준다면 내 필히 많은 돈으로 후사하겠소!"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당신을 고치는 것은 어려워요. 특히 몸을 예전처럼 완전하게 돌려놓 는 것은 더 더욱 어렵죠. 하지만 이번에 다행히 본곡(本谷)에 돌아가서 귀한 약재들을 구할 수 있게 되었죠. 당신은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 고 할 수가 있어요." 백방생은 생각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내는 것을 보니 필시 더 많은 돈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닐까?" 백방생은 생각을 굴린 뒤에 말했다. "만일 나를 치료해 주면 황금 만냥을 주겠소. 아니 그 이상도 괜찮아. 황금 십만냥을 넘지 않으면 되오. 황금 십만냥은 왠지 내가 너무 손해 를 보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만일 당신이 나를 호위해 주겠다면 그 때도 역시 계산을 쳐서 주겠소." 황진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번의 시술은 전혀 돈을 받지 않겠어요. 저는 이미 많은 돈을 당신 에게서 받았으니까요." 백방생은 의아해 하며 생각했다. (왜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일까? 돈은 귀신도 부린다고 했는데, 설마하 니 돈이 싫다는 말일까? 아니야, 혹시 나를 잠재워 놓고 나의 재산을 모 두 가져가려는 속셈인 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은 상관없다. 예금장부 는 비밀번호를 모르는 한은 아무리 인장이 있어도 소용없는 것이고, 나 는 예금장부를 도둑맞아도 나중에 금포에 가서 비밀번호를 말하고 장부 와 인장을 다시 만들면 되니까. 고작해야 그녀는 십만냥의 금표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겠어? 그거야 상관없지!) 백방생은 말했다. "치료는 언제부터 시작할 거요?" 황진의는 말했다. "빠를 수록 좋을 테니, 오늘 밤부터 곧장 들어가도록 하죠. 그리고 최 소한 사흘밤낮은 계속해야 해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러면 어디까지 치료가 되는 것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만일 치료가 성공한다면 당신의 백맥(百脈)은 모두 원래대로 복구될 것이고 절정경지(絶頂境地)까지 무공수련이 가능해요." 백방생은 의아해 졌다. "아니 백맥이 온전해 진다면서 어째서 최상승의 경지는 안된다는 말이 오?" 황진의는 말했다. "최상승의 경지는 진기를 백맥으로 두루 융통시키는 것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세맥(細脈)들의 협조가 뒤따르게 되어 있는 거예요. 당신은 세 맥이 모두 파괴되어 있으니 그 일이 불가능해요." 백방생은 약간 실망스러워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세맥들도 모두 복구시킬 수가 있는 것이오?"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당신은 욕심이 아주 많군요. 만일 이 치료가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예요. 그리고 나머지 그 세맥은 인간의 의술(醫術) 로서는 치료할 수가 없어요." 백방생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몸을 완전히 치료할 수가 없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그 세맥은 비단 지극히 찾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쉽게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시각마다 그 특성을 완전히 알고 있지 않으면 손 을 쓸 수가 없어요. 혹시 전설의 의성(醫聖)인 대라금선(大羅金仙)이라면 가능할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당신의 그 세맥을 치료할 의원은 없지만 그런 사람은 있죠."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그게 누구요? 그 사람은 의원이 아니란 말이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 사람은 의원이 아니죠. 의원은 바로 저이니까요. 당신이 만약 의원이라면 제가 필요하지도 않았었을 거예요." 백방생은 문득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어리둥절해 져서 말했다. "아니, 그렇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나라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세맥은 결코 남이 치료해줄 수가 없지만 만일 현공(玄功)에 의지할 경우 스스로 치료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물론 백맥이 우선적으로 완 전해졌을 때의 일이죠. 따라서 당신도 앞으로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스스 로 몸을 모두 치료할 수가 있다는 말이예요." 백방생은 문득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나의 치료를 끝내고 나면 당신은 어디로 갈 생각이오?" 어쨌든 황진의는 백방생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 왔다. 백방생은 그녀가 그의 치료를 마친 뒤에 훌쩍 떠나버릴까봐 미리 선수를 치고 있는 것이 었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또 볼일이 있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가볍게 짐짓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이번에 보다시피 금전을 엄청나게 많이 벌었소. 아까 낭자가 보았 던 것보다도 기실 내 재산은 훨씬 많고도 많소. 헌데 필부는 죄가 없어 도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는 말이 늘 마음에 걸리는 구려?" 황진의는 기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더러 호위를 해달라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솔직히 이번에 치료가 끝난다고 해도 내 무공은 그저 그럴 것이니, 일단은 낙양으로 다시 가게 되었을때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십중 팔구는 다시 패가망신하게 될 것이오. 황낭자가 나의 호위를 맡아주면 무림의 일도 하고 또한 나의 재산도 지키게 되니 그 얼마나 좋겠소?"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끝나면 갈 곳이 있는데요?" 백방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용천기라는 사람을 찾아보려는 것이 아니오?" 황진의는 안색이 다소 붉어졌다.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소위 낭자는 강호의 훌륭한 여걸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도탄에 빠진 무림을 버려두고 사사로운 정에만 집착해서야 되겠소? 그 용천기라는 사람은 능력도 뛰어나고 아직 안전하다고 하니, 그렇다면 나중에 찾아봐 도 늦지 않을 것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호위노릇을 하는 것이 어째서 무림을 위하는 길이 된 다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천하의 정세를 풀려면 무릇 그 뿌리부터 살펴야 하는 것이오. 그 제삼세력은 이를테면 뿌리없는 풀이오. 그렇다면 어디가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하겠소? 정의맹이 장애가 될 테니 그들은 자연 그쪽으로 집착하 지 않겠소? 낭자가 나와 함께 그곳으로 가면 자연 천하에 이로울 것이 니 어찌 무림을 위하는 길이 되지 않겠소? 그와는 반대로 만일 낭자가 더 남쪽으로 내려가, 이를테면 녹림맹의 본부가 있는 부근에서 방황한다 면, 그것은 또한 무림에 하등의 이익이 못되는 행위가 아니겠소?" 백방생은 기이하게도 모처럼 줄줄이 말을 늘어 놓았다. 황진의는 다소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자신의 말이 먹혀들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이윽고 결론적으로 말을 덧붙 였다. "만일 낭자가 앞으로 나의 호위를 일년만 맡아준다면 내 지금 즉시 선 불로 황금 일만, 아니 오... 오만냥을 주도록 하겠소?" 황금 오만냥이 일년간의 보수라면 하루에 은자 수천냥이나 되는 엄청 난 보수다. 황진의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이윽고 반쯤 미소하며 말했 다. "황금 오만냥이라면 너무 많지 않을까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많지 않소, 많지 않소. 사실 말이지, 내가 이전에는 그 정도 의 액수가 없었기에 감히 황낭자를 청하지 못했던 것이오. 그리고 또 한 물론 앞으로도 황낭자를 친절하게 잘 모시도록 하겠소. 만일 내가 어떤 나쁜 짓을 해서 화가 난다면, 그래서 낭자가 나를 떠나간다면 그 때는 그 돈을 돌려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소." 백방생은 문득 말하는 도중에 생각했다. (이거 이러면 혹시 내가 너무 손해보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쨌든 말이 나왔으므로 백방생은 즉시 품속에서 금표의 다 발을 꺼내서 정확히 천냥짜리로 오십장을 세어 건네주었다. 황진의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이윽고 그것을 받아서 품속에 갈무 리 했다. 그리고 말했다. "사실 아직은 뚜렷하게 해야할 일이 있지는 않던 참이었어요. 하지만 나 에게는 한가지의 조건이 있어요." 백방생은 의외로 그녀가 순순히 응하자 속으로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었지만 즉시 말했다. "무슨 조건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도중에 일이 생기면 자리를 비울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의 호위를 전적으로 나에게만 일임하면 안 되요. 어쨌든 자신의 몸은 자신 이 책임지는 것이죠." (빌어먹을, 그렇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호위를 산단 말인가? 아이 구, 이거 한꺼번에 황금 오만냥이 날라가게 생겼군?) 그러나 백방생은 내심과는 달리 기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오. 모든 일은 낭자가 편한 대로 하시오. 하하, 그럼 지금 이 시간부터 황낭자는 나의 수신호위(守身護衛)가 된 것이니, 나 는 그렇게 믿고 마음을 놓도록 하겠소. 하하하!" 황진의는 미소하며 신형을 일으켰다. "그럼 지금부터 저녁때까지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하세요!" 37 장 돌아온 갑부(甲富) 이윽고 시간이 흘러 약속한 저녁때가 되자 황진의는 백방생의 방에서 그의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우선 치료하기에앞서서 자신이 치 료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번에 그녀가 어렵게 가져온 것은 바로 한 병의 희세영약인 만년옥장 (萬年玉漿)이었다. 그 만년옥장은 지극히 작은 옥병에 들어 있었는데 전 설에 의하면 능히 죽은이도 살릴 수가 있고 한방울만 복용해도 일갑자 의 공력을 얻게 한다는 신비한 약효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로 그 것이 사실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지만, 어쨌든 황진의의 태도에서 그것이 아주 희귀하고 값진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어 그녀가 가져 온 이른바 생사금침(生死金針)이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으로 생사금침대 법을 펼치며 게다가 최고의 의술인 소전륜도액개정대법(小轉輪渡厄開頂 大法)을 시술한다는 것이다. 간략하게 설명했기에 백방생은 대강 흐름 을 알 수 있었으나 그 자세한 부분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황진의는 만년옥장을 복용시키고 시술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만년옥장은 약간 향기로운듯 하고 꿀과 비슷한 모양이지 만 그러나 의외로 맛이나 자극은 거의 없었다. 백방생은 그 옥병속의 만년옥장을 모두 마시고 나자 갑자기 깊은 졸음이 쏟아져서 잠에 빠지 고 말았다. 황진의는 그것을 보자 약간 긴장하는듯 하더니 빠르게 손을 쓰기 시작했다. 우선 그녀는 방문을 잘 잠그고 점원들에게도 여러가지 주의를 시킨 연후에 백방생의 의복을 남김없이 벗겼다. 남녀간의 사이라 그녀는 차마 옷을 벗겨야 한다는 얘기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엄연한 의원의 자세로 돌아갔으므로 상관이 없었 다. 그녀는 이어 생사금침을 사용하여 백방생의 전신의 기혈을 다스리고 약기운을 격발시키기 시작했다. 빠르게 혹은 느리게 백방생의 몸에 무 수한 금침(金針)들이 꽂히기 시작했다. 황진의의 이마에는 어느덧 땀방 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실로 이 시술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단적으로 말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가 꽂아가고 있는 금침들은 일반의 상 리(常理)를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대개 사혈(死穴)은 위험해서 금침을 꽂을 수가 없지만 지금 그녀는 오히려 전적으로 사혈들만을 골라가며 금침을 꽂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소위 생사금침대법의 특이한 점 인 것이다. 그것은 비단 어렵고 위험할 뿐만 아니라 만일 성공하면 높 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꽂혀진 금침들이 체내의 약기 운을 격발시키자 이내 금침들을 밀어내는 내력(內力)이 작용하기 시작했 다. 황진의는 단정히 앉아서 이번에는 금침들을 하나씩 던져서 꽂아가기 시작했다. 갈수록 그 일은 더욱 어려워 졌다. 황진의는 이번에는 능공 섭물(凌空攝物)의 접인력을 좌장으로 일으켜서 백방생의 몸을 침상위로 한 자 정도 떠오르게 한 뒤에 금침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수법 은 당연히 내력을 많이 소모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 시 진 가량을 치료한 뒤에 금침을 거두고 휴식을 취했고, 잠시 조식을 취 한 후에는 다시 치료를 시작했다. 그녀가 시술한 금침대법의 종류는 모두 열 두가지였으며, 그것을 그녀는 각각 한시진씩에 걸쳐서 시술했다. 그리고 그렇게 차례대로 시술이 끝나 열두시진이 지나자, 그녀는 돌연 백방생을 단정하게 앉히고는 자신이 돌 연 훌쩍 몸을 날려 거꾸로 그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즉, 그녀의 머리 가 그의 머리와 맞닿아 있고 그녀의 다리는 위로 가부좌를 튼 채 올라가 있는 것이었다. 실은 그것이 바로 소위 소전륜도액개정대법이라는 것이 었다. 이번의 수법은 사실상 매우 어려워서 황진의도 몹시 주의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전신에서 시작된 투명한 진기(眞氣)의 막(幕)이 머리쪽 으로 크게 확대되더니 일순 두 사람의 몸을 뒤덮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에 두 사람의 몸이 둥실 허공위로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소위 부공 삼매(浮空三昧)의 현상이었다. 하지만 아마 천하를 뒤져도 그처럼 희안 한 부공삼매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윽고 꼬박 사흘 밤낮이 지나갔다. 황진의는 그렇게 같은 치료법을 각 기 열두시진씩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마침내 세번째의 소전륜도액대법도 끝이 났고, 황진의는 잠시 조식을 취한 다음에 백방생의 옷을 입혀주고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드디어 생각대로 치료는 완전히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다. 황진의는 그동안 비단 식사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잠도 한숨 자지 못했다. 하지만 일이 성공하여 피로한 가운데에서도 마음은 기쁘고 흐뭇하며, 그녀는 그저 이 순간만은 의원으로서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 다. 지금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은 그저 목욕을 하고 한숨 푹 자는 일이었 다. 그녀는 창문을 약간 열어서 환기를 시켜놓고 밖으로 나갔다. 백방생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는데 처음 느껴진 것은 갑자기 전신이 날아갈 듯이 상쾌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너무나도 달게 잠을 잤기 때문에 전신의 피로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 고 평소 둔하던 몸이 매우 가벼워진 것 같았다. 백방생은 마치 오랫동안 좋은 꿈을 꾸고 난 듯한 기분이었다. 이윽고 눈을 뜨니 눈앞에 황진의가 가볍게 미소를 지은 채 앉아 있었 다. 백방생은 침상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내가 며칠이나 잠을 잤소?" 황진의는 산뜻하게 새옷으로 갈아입고 약간의 단장까지 한 상태라 몹시 우아하고 아름다왔다. 그녀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사흘낮과 나흘밤을 내내 주무셨죠. 무슨 급하게 해야 할일이라도 있 나요?" 백방생은 그녀가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보고 왠지 어색하고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난 그저 왠지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아서 말이오. 그래 내 몸의 치료는 성공했소?" 황진의는 말했다. "그야 본인이 직접 확인하면 더 잘 알게 될 것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이미 황진의의 표정을 보고 치료가 성공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는 즉시 정색을 하고 그녀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실로 은혜를 입었소. 소생은 본래 그렇게 반쯤은 불구의 몸으로 살아 가야 했었는데, 이제 낭자에 의해 몸이 회복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그 은 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모르겠소?" 황진의는 굳이 그 인사를 피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고개를 약간 기울여 답례하며 말했다. "아마 시장하실 거예요. 지금 제방에 아침식사를 차려 놓았으니 그럼 어서 세수를 하시고 건너오도록 하세요." 황진의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나자 백방생은 침상아래로 내려섰 다. 하지만 그는 지금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 치료가 성공적이었다면 과연 그 내용이 어느 정도인지, 자신의 몸이 그동안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것이 더욱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즉시 자신의 몸의 안과 밖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백방 생은 몇가지 자신의 몸이 크게 달라진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우선 외형상 으로 달라진 것은 자신의 몸무게였다. 치료하기 이전에는 그의 체구는 비정상일 정도로 매우 비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보기좋을 정도로 살이 줄어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거울속에서 매우 살이 빠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서 백방생은 혹시 그게 자신의 모습이 아닌게 아닌가 하 는 착각을 할 뻔 했다. 이어 내적으로 달라진 것은 바로 무공이었다. 치료하기 이전에 백방 생의 몸에는 이미 일갑자의 공력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몸에는 무려 이갑자(二甲子)에 달하는 공력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지금 그 공력은 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전신의 혈도를 순환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황진의의 말대로 정말로 그의 백맥이 모두 복구되었다는 의 미인 것이었다. 백방생은 내친김에 잠시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한 다음에 장력을 운용 해 보았다. 그의 공력은 아직 대주천반운(大周天搬運)이 융통되지 않 았기에 절정의 경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공이 최소한 일류경 지에는 들어서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간단하게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옆방으로 가니, 황진의는 정말 로 음식상을 차려놓고 그를 기다리다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의 몸의 상태에 대해서는 만족하나요?" 황진의는 이미 백방생이 자신의 몸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시험해 봤 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공연히 입만 벌리고 있다 가는 앞으로의 일도 잘 안될 것 같아서 말했다. "좋기는 하지만 아직 한가지의 문제가 있소." 황진의는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문제가 있다는 말이죠?" 백방생은 걸어와서 황진의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먼 저 찻잔을 들어서 차를 한모금 마셨다. (음, 이 차는 최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대로의 아취와 풍미가 있 군?) 백방생은 문득 자신이 차를 얻어 마셨던 그 노인에 대해서 생각했다. 확실히 그 노인은 지금 생각해 봐도 기이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대체 그 노인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백방생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황진의를 향해 찻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후유증이오." 황진의는 다소 어리둥절해 졌다. "그럼 그 치료받은 후유증이 지금 느껴진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 느껴지지는 않소. 하지만, 낭자는 정말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완전하다고 확신한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문득 백방생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녀는 미소하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또 나에게 무엇을 원한다는 말이죠?" 백방생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미 말했다 시피 낭자는 수시로 내 곁을 떠날 수도 있소. 하지만 역시 나의 치료의 후유증도 언제라도 발생할 수가 있는 것이오. 따라서 나 는 낭자가 어떤 보완할 수 있는 영단을 주었으면 하오." 성수곡은 천하에서 가장 의술이 뛰어난 곳이기에 백방생이 이렇게 떼를 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황진의는 다소 의아한 듯이 말했다. "속명신단은 이미 일전에 제가 드리지 않았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이미 내가 다른 사람에게 모두 주어 버렸소. 따라서 지금은 하나도 없소." 이어 백방생은 자신이 속명신단 등을 주어서 증평을 구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황진의는 그 말을 듣자 그만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당신의 그러한 뜻이야 가상하지만, 그러나 당신은 그 약의 가치를 너 무나도 몰라주는 군요. 당신이 만약 조금만 생각이 있었다면 그 약은 주 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백방생은 황진의가 그 일을 이렇게 책망할 줄은 몰랐기에 의아해 하며 말했다. "아니 그럼 이제는 약을 줄 수가 없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속명신단은 사실 천하에서 다시 구하기 어려운 내상성약(內傷聖藥)으 로, 만들기가 너무나도 어려워서 기실 돈만 있으면 누구든지 구할 수 있 는 그런 단약이 아니예요. 저도 사실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가급적 사용하지 않죠." 백방생은 다소 안색이 붉어졌다. "그렇다면 주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니오? 나도 사실 반드시 그것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의 몸은 상하기가 쉽기 때문에 사실은 그런 단약이 필요해요. 그 렇지 않다면 제가 무엇 때문에 그것을 아홉개나 드렸겠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이미 없는데 더이상 말해서 무엇하겠소?" 황진의는 잠시 생각하다가 품속에서 하나의 약병을 꺼내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 본곡에서 나올 때 혹시나 하여 이것을 하나 더 가지고 나왔었는데, 그럼 이것을 갖도록 하세요. 하지만 이것을 가볍게 여긴다면 다시는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셔야 할 거예요." 백방생이 즉시 그 약병을 받아들고 보니 다름아닌 그 속명신단이 열알 이나 들어있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자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약병을 품속에 넣고 이어 금표뭉치를 꺼내 거기에서 일만냥이나 되는 액수를 세어서는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고맙소. 이것은 나의 성의이니 받도록 하시오?" 황진의는 그것을 보자 금방 금표들을 받지 않고 눈살을 다소 찌푸렸다. "당신은 모든 것을 그렇게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군요?" 백방생은 태연히 말했다. "이것은 마치 낭자가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술(仁術)을 베푸는 것과 도 같은 것이오. 낭자가 만일 나의 돈을 받고 그것 때문에 더 많은 사 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도 역시 많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니겠 소?" 황진의는 그만 웃으며 그 금표들을 받았다. "당신은 알고보니 무공이 증진된 것이 아니라 구공(口功)이 증진되고 말았군요?" 백방생은 그녀가 가볍게 책망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 다시 말했다. "만일 낭자가 정말로 나의 무공을 증진시켜 준다면 나는 다시 황금 만 냥을 드리겠소." 황진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더러 어떻게 도와달라는 말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성수곡에는 비단 내상영단 뿐만 아니라 내공을 증진시키는 신단들도 많이 있다고 알고 있소. 만일 낭자가 지금 그 가운데에서 몇개를 나에게 준다면 나는 그것을 복용하고 스스로 세맥을 타통해 갈 수도 있을 것 이오." 황진의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이윽고 웃으며 품속에서 다시 하나 의 작은 옥병을 꺼내 들었다. "당신의 말은 비록 억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로군요. 이 대라금단(大羅金丹)은 바로 그러한 신단으로 한 알에 일갑자의 공력을 증진시킬 수가 있죠. 하지만 지금의 당신으로서는 이것 을 복용해서는 안 되요. 반드시 먼저 내공을 잘 조절한 이후라야 가능 하죠." 그 옥병은 속명신단을 담은 옥병과 크기도 같고 모양도 같았지만 다만 색깔만이 달랐다. 속명신단의 약병은 은은한 주홍색을 띠는 데 반해 그것 은 은은한 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속의 내용물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옥병의 뚜껑을 열어 보니 안에는 역 시 속명신단과 크기가 비슷한 단환(丹丸)이 금빛을 내며 열 알이나 들어 있었다. 백방생은 그것들이 한 알에 일갑자의 공력을 증진시켜 준다는 말 에 내심 매우 기뻤다. 그는 즉시 그 옥병도 받아서 얼른 갈무리 하며 황진의에게 다시 만 냥의 금표를 세어 주었다. 이제 그의 몸속의 금표뭉 치는 줄어들었지만 백방생은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솔직히 이 환약은 하나에 능히 황금 천냥 정도에 해당되는 것이 틀 림없다. 전에 아홉개를 천냥에 샀는데, 지금 그녀는 마치 거저 준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이미 이전에 진낭자에게 대비신단을 금표 천냥에 샀던 적도 있고......딴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백방생은 이어 말했다. "어쨌든 고맙소. 이 한 몸은 낭자의 덕택으로 살아난 것과 같으니, 앞 으로 잊지 않고 천천히 갚도록 하겠소이다. 자, 시장할 테니 어서 식사나 하십시다!" 백방생은 식사를 마치고 나자 객방의 숙박료를 계산한 다음, 서둘러서 마차와 기타 필요한 물품들을 구했다. 그는 기왕에 이곳에 온 소기의 목 적을 달성했으니 가능하면 빨리 낙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시장에서 의 류품이나 건량들, 그리고 그럴듯하게 보이는 장검까지 한자루 산 다음 에는 그것들을 모두 마차에 싣고 황진의와 함께 곧장 북쪽을 향해 출발 했다. 그 마차는 백방생이 친히 거금을 들여 가며 빌린 것으로 비단 크고 호사스러울 뿐만 아니라 내부에 침상까지 갖추고 있었고 또한 쉬지 않 고 계속해서 달릴 수가 있었다. 힘은 없고 은자가 많은 백방생은 가능하 면 도중에 사건이 터지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에 마차를 밤낮없이 달리 게 하고 두 사람은 그 마차의 내부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생활하기 로 했다. 확실히 은자의 힘은 무서운 것이었다. 온갖 시중을 들어주고 정성을 다하는 그 마차의 마부들에 의해, 두 사람은 수일 후에 장강을 건 너고 또한 호북성을 가로 질러서 이윽고 매우 편안하게 목적지인 낙양 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날은 하늘에서 흰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줄곧 운기행공 으로 내공을 단련하며 마차안에서 지내오던 백방생은 이윽고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문득 하늘에서 눈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 가볍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첫눈이로군. 이것은 혹시 우리를 환영한다는 상서로운 징조가 아 닐까?" 마차가 당도한 곳은 낙양성내의 어느 한 거대한 호화객점의 앞이었 다. 이미 거액의 수고비를 받은 마부들은 이미 그 객점의 상방 예약까지 끝내놓고 있었다. 백방생과 황진의가 마차에서 내리자, 그들은 두 사람 의 짐을 객방에 가져다 놓고 일제히 인사를 한 뒤에 사라져 갔다. 지난 며칠동안 거의 함께 마차를 타고 오면서 황진의와 백방생은 거 의 말이 없었다. 백방생은 혼자 무공연마에 열심이었고 황진의는 본래 말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목적지에 도착 하여 마차에서 내리자, 백방생은 새로운 기분이 된 듯이 웃으며 황진의 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나는 이 곳에서 부자노릇을 한번 해볼 생각이오. 낭자는 역시 나를 도와 주겠지요?" 황진의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나는 이미 당신의 호위이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객방은 나란히 두 개를 빌렸는데 그 중의 하나는 백방생이 사용하는 것으로 워낙 화려하고 넓어서 마치 하나의 장원의 내부와도 같았다. 두 사람은 곧장 그 방안으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짐을 정리한 다음에 탁자 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서 휴식을 취하며 차를 마셨다. 백방생이 문득 황진의에게 말했다. "내가 부자 노릇을 하자면 이미 아다시피 거처해야 할 장원(莊園)을 구입해야 하고 또한 하인들과 일하는 사람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소?" 황진의는 말했다. "당신은 장사를 할 생각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장사를 한다면 그 일 때문에 어떻게 큰 일을 하겠소?" 황진의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무슨 큰 일을 하려고 하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한번 강호의 영웅이 되어 봐야 하겠소. 그러자면 당연히 어떤 세력이 있어야만 하지 않겠소?" 황진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이번에는 그 진낭자를 찾아가지 않을 생각인가요?" 백방생은 잠시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문득 자신의 비급 보따리 를 생각하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한 번은 찾아가 봐야 하겠지.)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우선 무림의 친구들과 만나볼 생각이오." 백방생은 말하면서 다시 생각했다. (그쪽에 가면 아마도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겠지.) 백방생은 일단 거부가 되자 자연히 진소유에게 다시 미련을 갖기 시작 했다. 그의 그러한 배경이라면 진소유가 한번 관심을 가져주지 않겠느냐 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 낙양에 돌아오자 그의 생각은 약간 달라 졌다. 과거 당하던 일이 생각나면서 왠지 더욱 만나기가 꺼려지는 것이 었다. 황진의는 찻잔을 내려 놓으며 신형을 일으켰다. "그럼 내가 일단 나가서 알아보고 올까요." 백방생은 따라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가능하면 장원과 일할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아 봐 주시오." 황진의가 떠나고 나자 백방생은 방문을 닫아 걸고 혼자 침상위에 누 워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이 침상은 귀한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몹시 푹신푹신하여 누워 있자니 마치 구름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 을 불러 일으켰다. 이 호화스런 방의 하루 이용요금은 무려 은자 오십 냥, 황금으로 치자면 두 냥이다. 보통의 생활수준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꿈도 꿔 볼 수가 없는 그러한 액수였다. 그러나 이미 실제로 천하제일의 부자(富者)가 되어버린 백방생으로서는 그런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이 제는 그 쪽이 더욱 어울릴 것이다. 잠시 생각을 하다 보니 홀연 피곤함에 못이겨 잠이 든 것일까? 문득 왠지 얼굴이 서늘하다는 느낌에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창문이 반쯤 열려 있고 휘장이 가볍게 흔들거리는 가운데 방안에는 한 사람이 나타 나 있었다. 백방생은 다소 어리둥절해 졌다. 급히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 켜서 바라보니 눈앞의 그 사람은 매우 낯익은 사람이었다. 늘씬한 키와 몸매에 화의(華衣)경장을 산뜻하게 차려입은 스물 셋 가량의 미소녀(美少 女), 바로 전날 백방생이 술집에서 황진의와 함께 남궁검상 등을 보았을 때 같이 어울리고 있었던 화산파 장문인의 여식이라는 화산옥녀(華山玉 女) 채청문(蔡靑文)이었다. 당시 그녀는 증평과 매우 친밀한 듯이 보였 었다. 백방생은 잠을 자다가 갑자기 그런 일을 당하게 되자 마치 낮도깨비를 만난 듯한 기분이 되었다. "아니 낭자가 여기엔 웬일이시오?" 그 화의소녀 채청문은 그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직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 군요?" 채청문은 습관적인지, 자연스레 우수를 늘어뜨려 자신의 허리춤의 검자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모습은 마치 수줍은 처녀의 다소곳 한태도와 흡사하여 공연히 상대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갖게 했다. 백방생은 다시 말했다. "갑자기 소생을 찾아 오시다니, 무슨 특별한 볼일이라도 있으시오?" 다행히 백방생은 옷을 입은 채 잠들었기 때문에 실례되는 점은 피할 수가 있었다. 채청문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저는 한 가지 묻고 싶은 일이 있기는 해요. 백공자께서도 아시겠지요? 왕옥파의 그 증소매(曾少妹)......, 그녀를 공자께서 데려갔다는 말이 있는 데 그건 사실인가요?" 백방생은 이미 정신이 점차로 회복되어 명료한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 다. 느닷없는 침입에의 당황감에서 벗어나 그는 차츰 이 채청문이라는 낭자가 확실히 강호의 정보에 밝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강호의 정보 에 밝지 못하다면, 하다못해 그가 낙양에 도착했다는 것을 어떻게 벌써 알 수가 있겠는가？ 백방생은 겉으로 아, 하는 새삼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소.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녀와는 호남땅에서 헤어지고 말 았소. 그녀는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에 떠나 버리고 말았던 것이오. 낭 자가 그 증낭자를 만날 목적이었다면 매우 실망하게 되었소이다." 백방생은 물론 이 채청문이라는 여자에게 일일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흔히 해가 되는 일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청문은 그 말을 듣자 오히려 미소 를 짓더니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망하지는 않아요. 사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목적은 다른 곳에 있으니까요." 백방생은 가볍게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제보니 훨씬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 의 옷차림은 화려했고 안색에는 화기(和氣)가 넘쳐 흐르고 있었으며 눈 빛은 강렬하고 그윽해 보였다. 백방생은 그녀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느 닷없이 남의 남자의 침실로 뛰어들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문득 속 으로 중얼거렸다. (당시 나에게 어떤 보이지 않는 매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채청문은 어리둥절해 져서 자신을 바라보는 백방생에게 마치 확인 하듯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제가 이렇게 다소 무례하다고 해도 화를 내지는 않겠지요? 저의 볼일을 지금 말해도 되나요?" 백방생은 왠지 긴장이 되는것 같아서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안색을 붉히며 말했다. "물론이오. 마음을...... 편히 가지시오." 그러자 느닷없이 채청문은 자신이 들어온 창문쪽을 향해 이렇게 소리 치는 것이었다. "장사형(張師兄)! 길사매(吉師妹)! 상사매(常師妹)! 여긴 이제 됐으니 어서 들어오도록 하세요!" 백방생은 그만 어리둥절해 졌다. 갑자기 그 창문쪽에서 휘장이 펄럭이 더니 서너명의 사람들이 차례로 빠르게 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것이었 다. 지금 이 객실은 삼층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저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무공이 이미 녹녹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 다. 그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소 백방생의 눈에 익었다. 비록 서로 만나서 정식으로 수인사를 나눈 적은 없지만, 저번에 정의맹의 총단에서 백방생은 그들을 본 기억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백방생은 느닷없 이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그만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꿈을 꾸려다가 느닷없이 찬 물을 맞은 격이었다. 그것은 사실 채청문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녀가 아주 교묘하게 그러는 백방생의 심리를 이용했다 고도 볼 수가 있었다. 자신의 동료들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채청문 의 두 눈은 다소 득의함으로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쿠, 이거 그야말로 제대로 걸린 셈이로군!) 백방생은 창백해진 안색을 겨우 추스리며 즉시 들어온 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이남이녀(二男二女)인데, 그 중의 한 사내는 다른 남 자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남자들은 서있는 사람이 스물일곱 정도였고 들려져 있는 사람은 그보다 더 들어 보였으며, 여자들은 모두 스물 네 살 안팎의 꽃다운 영기발랄한 나이들이었다. 백방생은 그들이 아마도 구파일방 소속의 제자들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채사매(蔡師妹), 이 분에게 우리의 말씀은 잘 드렸소?" 그 사람을 들고 서있는 청년이 채청문에게 말했다. 그는 이미 들어올 때 부터 백방생의 얼굴을 핥듯이 한번 훑어본 후였다. 백방생은 그들이 사 형 사매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혹시 같은 화산파의 제자들이 아닐까 하 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오대세가와 마찬가 지로 구파일방의 제자들도 결속력이 대단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 부터 서로 사형 사제하고 호칭하는 것을 예사로 하고 있었다. 채청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백방생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는 애교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말씀드리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이 분 백공자는 이해심이 아주 많 으신 분이니 반드시 우리의 처지를 이해해 주실 거예요." 백방생은 겉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도 문득 채청문의 그 말에 왠지 화가 치밀었다. 어딘가 이 사람들은 자신을 깔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한 사람의 순수한 감정을 이렇게 쉽게 농락할 수가 있다 는 말인가? (하기는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었으니 이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 청년은 알겠다는 듯이 짐짓 두어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백방생을 향해 포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불초는 장전상(張全詳)이라고 하오. 초면에 이거 실례가 많았소이다. 백공자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주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서 급히 달 려온 것이오. 헌데 함께 계시는 그 황소저는 지금 어디로 가셨소?" 백방생은 그가 장전상이라는 말을 듣자 이내 그가 다름아닌 점창파(點 蒼派)의 뛰어난 제자들 중의 하나인 십방수재(十方秀才) 장전상(張全詳) 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백방생은 이에 강호인물록(江湖人物錄)의 내 용을 꿰고 있기 때문에, 비록 초면에 얼굴만 가지고는 몰라도 이름만 들으면 능히 그가 누구인지 거의 알 수가 있었다. 그 책자에 적혀있는 바에 의하면, 이 장전상은 현재나이 스물일곱이고 무공은 일류급(一流 級)이고 공력은 이갑자의 수준이며 한자루의 부채를 독특하게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역시 이들이 구파일방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이 거 의 확인된 셈이었다. 백방생은 그가 다짜고짜 황진의를 찾는 것을 보고 이내 그가 들고 있 는 그 사람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을 간파했다. 그 사람은 고개가 숙여 져 있어서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복색이 그 청년 장전상과 비슷하니 같은 점창파의 제자일 것이고, 체구는 몹시 마른 것처럼 보 였다. 백방생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 볼일이 생겨서 잠시 밖으로 나갔소이다. 아마 머지 않아서 돌아오게 될 것이오." 벌써 창문밖에는 음산한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 저녁 무렵인 것이다. 눈발은 아직도 흩날리고 있었고 오히려 그 눈송이가 더 욱 굵어져 있었다. 그들은 백방생의 말을 듣자 일순 다소 맥이 빠지는 듯 하더니 이윽고 한숨들을 내쉬며 각기 탁자나 의자 등에 걸터앉았다. 그 때 문득 방문을 누군가가 가볍게 두들겼다. 백방생이 얼른 가서 방 문을 열고 보니 다름아닌 이 객점의 점원이었다. 단정하게 잘 차려입은 점원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더니 말했다. "무엇 필요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리고 저녁식사는 어떻게 하시겠 습니까?" 백방생은 기분도 어수선하고 해서 고개를 저으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 꾸었다. 그는 몇가지의 좋은 음식을 시킨 다음에 이어 금표를 주며 필요 한 물품들을 몇가지 사다 달라고 시켰다. 점원이 절을 하고 돌아가자, 백방생은 다시 방문을 닫아 걸고 안으로 돌아갔다. 안에서는 그 다섯명의 사람들이 여기저기를 접하고 있으면서 다소 신기한지 호화로운 가구나 물건들을 만지고 움직여 보곤 하고 있었다. 그 장전상이라는 청년은 이미 백방생의 침상위에 데려온 사람을 눕혀 놓았다. 주인의 허락도 없는 그러한 행동은 백방생에게 매우 커다란 불 쾌감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 백방생의 몸에 있는 귀중한 물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백방생이 특별히 잘 보관해 두기는 했지만, 만일 그 들이 그것들마저 건드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백방생은 이내 화가 나서 그들에게 뭐라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다시 한번 침상위에 누운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 사 람의 용모는 백방생이 거의 처음으로 보는 낯설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 독하게 깡마른 해골같은 그 모습은 결코 그가 처음으로 대하는 것이 아 니었다. 그는 그것을 보자 일순 크게 놀랐으며 갑자기 과거의 일 하나 를 무의식중에 떠올리게 되었다. 백방생은 우선 방안의 궁등(宮燈)들을 모조리 밝혔으며 그들에게 천천 히 다가갔다. 장전상은 침상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다소 의심쩍은 듯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백방생에게 다시 말을 걸어 왔다. "혹시 황소저가 오신 것이 아니오?"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객점의 점원이 와서 내가 약간의 식사를 시킨것이오. 여러분은 모 두 식사를 하셨습니까?" 장전상은 문득 싸늘하게 웃더니 미소하며 말했다. "듣자니 백공자는 소문난 부자라고 하던데 과연 이런 좋은 곳에서 머물고 계시는 군요. 그렇다면 백공자가 먹는 음식들도 과연 대단한 것들 이겠지요?" 38 장 사람을 구하다 백방생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돈이 많다고 하는 것은 사실 거의 헛소문에 불과합니다. 그저 제 가 한 때 호기를 부려 본 것에 불과하지요. 제가 비록 여기에서 묵고 있 지만 먹는 것이야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만일 아직 식사 를 하지 않으셨다면 제가 다시 점원을 불러서 좀 더 시키기로 하지요." 백방생은 본래 째째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돈도 함부로 사 용하면 그 위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음식을 이삼인분 정도만 시킨 것이었다. 장전상은 과연 그 말을 듣자 안색이 다소 변했 다. 그는 잠시 멈칫 하더니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야 있겠소? 우리도 무슨 굶고 사는 처지도 아닌데. 그보다 황소저가 언제 돌아올 지에 대해서 말해 보시오."? 백방생은 방안으로 들어선 다음에도 계속 자신의 짐에 대해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의복이나 비급보따리, 그리고 장검 등을 포함한 그의 짐은 옷장속의 서랍속에 넣어 두었다. 채청문과 다른 두 명의 여 자들은 실내의 가구들을 돌아보면서 화장대나 욕실등을 구경할 뿐 아직 옷장은 열어보지 않고 있었다. 그 서랍은 열쇠를 채워 놓았기 때문에 당장은 안전하다고는 하나 역시 중요한 물건은 따로 보관해야 할 것 같았다. 백방생은 은근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잠시 후에는 돌아올 것 같소." 장전상은 잠시 백방생의 태도를 살피더니 문득 부채 하나를 꺼내들 고 그것을 넓게 확, 펼치며 다시 말했다. "듣자니 백공자는 금전으로 수신호위를 구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 실이오?" 그 합죽선(合竹扇)은 과연 보통의 물건은 아닌지 부챗살에는 은은한 쇠기운이 흐르고 하얀 천도 그저 창호지는 아닌 것 같았다. 크기도 다소 클 뿐만 아니라 거기에 나름대로의 수려한 산수화와 글씨를 적어놓고 있어서 제법 멋을 풍겼다. 십방수재(十方秀才)라는 별호도 아마 거기에 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겨울에 창문을 열어 놓고 부채를 부치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백방생은 말했다. "사실이긴 합니다만, 실상 어느 영웅호걸이 한낱 돈때문에 귀찮은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 다." 그 때, 채청문이 문득 주위로 다가오며 말했다. "하지만 어째서 그 분 장사형에게 청하지를 않죠? 사람마다 생각이 같 을 수는 없을 텐데." 백방생은 힐끗 누워있는 사내의 모습을 바라본 뒤에 다시 장전상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지금 장소협(張少俠)께서는 전혀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군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또 한번 그에게 황금 오만냥으로 흥정을 해 보는 건 데." 순간 장전상은 눈빛을 번쩍 빛내며백방생을 바라보았다. 채청문도 잠 시 멍한 표정이더니 이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백방생을 주시했다. 장 전상은 잠시 어이없다는 듯이 웃더니 말했다. "이미 당신과 그 황금 오만냥으로 흥정을 해 본 사람이 있단 말이오?"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탁자앞으로 걸어가서 의자에 앉으며 차를 따라 천천히 마셨다. 여기저기 제멋대로 구경하고 다니던 나머지 두 여자도 이 때 조금전의 그 얘기를 들었는지 어느새 가까이 돌아와 있었다. 채청문이 중얼거리듯 이 말했다. "은자도 아니고 황금 오만냥이라고요? 당신은 혹시 오백냥을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요?" 갑자기 실내의 분위기가 기이하게 변모한 것 같았다. 그것은 백방생이 말한 액수가 너무나도 엄청나서 상상밖이었기 때문이었다. 황금 오만 냥, 그것은 실로 한 사람이 기꺼이 목숨을 걸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다 른 두명의 여자도 다소 안색이 창백해진 채 꿈에 젖은 듯한 표정들이었 다. 백방생은 차를 서서히 음미하듯이 마시다가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 다. "채낭자께서는 소생을 너무 과소평가 하시는 군요. 소생이 그래, 겨우 황금 오백냥으로 그런 흥정을 할 것 같습니까?" 채청문은 그가 도리어 그런 태도를 보이자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잃었 다. 장전상이 갑자기 부채를 탁, 소리나게 접으면서 말했다. "당신에게 정말로 그런 금액이 있다는 말이오?" 백방생은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물론 그런 거액을 함부로 가지고 다닐 수는 없소이다. 다만, 내가 필요 할 경우 열두시진 안에 그 금액을 구해올 수는 있지요. 사실, 내 몸이 안 전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의 금액은 희생해도 무방한 것이 저의 입장입 니다." (입장?..., 그것이 입장이라고?) 채청문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정신없이 다시 말했다. "그럼 그 흥정은 이미 성공했나요? 대체 그 대상자는 누구였죠?"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황낭자가 어째서 나의 곁에 머물고 있겠소?" 그 말을 듣자 일순 실내의 사람들은 다함께 크게 놀란 모습을 보였다. 채청문이 놀라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황, 그 황소저가 그럼 이미 당신의 호위라고요?" 백방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그 흥정도 내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이루어진 것이오." 잠시 실내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기이한 침묵이었다. 이윽고 채청 문과 그 두명의 여자가 백방생의 주위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은근히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채청문이 다시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신이 그런 거액으로 호위무사를 구한다는 얘기는 아직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백방생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당시에는 마침 내 수중에 적절한 여유가 없었소. 하지만 이제는 다소 생각이 달라졌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오." 채청문은 새삼 그의 옷차림 등을 살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 다. 이윽고 다른 한 명의 여자가 잠자코 있다가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은 이미 그런 호위를 구했다고 하면서도 다시 사람을 구하나 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겨우 그녀와 일년을 계약한 것이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것인데 고작 일년이라는 기간은 너무 짧다고 할 수 있소. 게다가 나는 앞으로 모종의 중요한 일을 해보려고 하는데, 거기에 있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오." 채청문 등은 그래도 최소한 십년 정도의 계약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작 일년의 계약에 그 많은 거금을 들였다고 하니 그만 더욱 어이가 없고 믿을 수가 없는 표정들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돈을 벌기가 수월하다면 누구나 가난뱅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여자가 다시 말했다. "나로서는 시간도 그리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력도 그 황소저보다 는 못하다고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와 같이 할 수는 없고, 그저 한달 계약에 황금 천냥 정도로 할 수가 있겠는데 가능하겠어요?" 한달에 황금 천냥이라면 하루에는 대략 황금 삼십여냥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무려 백은으로 치자면 칠백냥 정도에 해당되는데, 그 여자는 사실 무공실력에 비해서 너무나 분수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내심 그런 생각을 굴리면서 겉으로는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예, 그런 정도라면 좋겠지만 그러나 한달의 계약은 기간이 너무나도 짧군요. 소생은 바야흐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일을 추진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기간은 소생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 삼 년 정도의 기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입을 열었던 사람은 그만 쉽게 결정할 수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다른 여자가 변호하듯 말했다. "우리는 한 문파에 매어있는 사람들인 만큼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내는 것은 무리한 일이예요. 혹시 여건이 달라진다면 또 모르지만." 백방생은 다소 경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시군요! 사실은 제가 미처 두 분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실 례를 저지르고 말았군요. 실례지만 혹시 두 분의 방명(芳名)을 소생에게 가르쳐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이제까지 다소 긴장하고 있던 두 여자들은 그만 까르르 교소 를터뜨리고 말았다. 백방생이 이제서야 이름을 물어보는 모습이 다소 멍청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채청문은 웃고 있다가 나섰다. "저의 잘못이예요. 미처 여러분을 소개해 드리지 못했군요." 이어 그녀는 간략하게 두 여자의 신분과 성명을 말해 주었다. 일반의 여염집 규수들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 하지만, 그러나 강호의 여인들은 그와는 다르다. 만일 일일이 그렇게 세속의 예절에 구애받게 된다면 험난한 혈풍강호(血風江湖)의 안에서 적응하기 가 어려워질 것이다. 먼저 입을 열었던 사람은 청성파(靑城派)의 장문인인 백초선옹(百草仙 翁) 길군평(吉君平)의 손녀인 화호접(花蝴蝶) 길완청(吉婉淸)이었고, 나중에 말한 여자는 종남파(終南派)의 장문인인 종남일검(終南一劒) 상 장풍(常長風)의 여식인 종남일향(終南一香) 상금하(常錦霞)였다. 두 사 람은 역시 비교적 문파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방생은 이내 그녀들에 대해서 소상히 알게 되었다. 청성파의 화호접 길완청은 나이가 금년에 스물세살이고 무공이 일류의 경지에 올라 있으며 일갑자 정도의 공력을 닦고 있고, 종남파의 종남일 향 상금하는 금년 나이가 스물다섯에 역시 길완청과 비슷한 경지의 무 공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용모로 본다면 길완청의 외모가 보다 늘씬하고 갸름한 편이어서 아 름다왔고, 상금하는 수려한 용모이기는 하나 다소 작은 키에 둥근 형의 용모를 하고 있었다. 길완청은 활발한 편이었고 상금하는 침착했다. 두 사람 모두 장검을 사용하는 지 허리에 채청문과 마찬가지로 장검을 매달고 있었다. 백방생은 은근히 채청문이 그 침상위에 누워있는 사람에 대해서 가르 쳐 주기를 바랬으나, 채청문은 백방생이 은근히 궁금한 표정을 지었어도 그 쪽은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 장전상은 이쪽으로 관심을 보이면서 도 연신 그 사내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 정성으로 미루어 보아 그 사내는 같은 점창파의 인물인 모양이었다. 길완청과 상금하는 잠자코 채청문이 자신들을 소개하는 말을 듣고 있다 가 이윽고 그 말이 모두 끝나게 되자 다시 백방생의 재산에 대해 관심 을 보였다. 길완청이 미묘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평소에 돈에 구애받고 사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러나 당 신의 그 엄청난 액수에는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군요. 대체 당신의 재산 은 얼마나 있길래 그런 거액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소생의 재산이야 사실 별로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안전하게 모든 일 을 도모하려는 것이죠. 그저 여러분의 말대로 평소에 돈에 구애를 받고 살아가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길완청과 백방생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 가는 정도가 다를 것이다. 길완청은 그 말을 듣고 다시 새삼스럽게 호화 로운 실내를 둘러 보았다. 그 때 갑자기 다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백방생이 다가가서 문을 열어주니 다름아닌 점원들이 음식을 가지 고 온 것이었다. 백방생은 점원들에게 음식을 침실의 탁자에 차려놓을 것을 지시했다. 그 리고 점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에 백방생은 옷장을 뒤져서 뭔가 찾아냈다. 그것은 백방생이 이전에 진소유를 생각하며 무심코 구입한 귀 중품 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은 하나같이 값이 많이 나가는 것들이었는 데, 백방생은 그 중에서 작은 금강석(金剛石)으로 만들어진 반지와, 홍보석(紅寶石), 청보석(靑寶石)으로 만들어진 반지들을 골라서 각각 채 청문과 상금하, 그리고 길완청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소생이 만난 기념으로 드리는 것이니 받으십시오." 그 반지들은 그 작은 금강석의 반지를 포함해서 최소한 가격이 각기 황금 열냥은 나가는 것들이었다. 그 세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은 갑자기 그와 같은 횡재(橫財)를 하게 되자 절로 입을 크게 벌리며 좋아했다. 백방생은 이어 장전상에게도 말했다. "저 분 장소협께는 마땅히 드릴 것이 없으니, 다만 이 금표로 예의를 삼는 것이 어떻겠소?" 말이 끝나는 순간에 이미 열냥짜리 금표는 서서히 장전상에게 날아가 고 있었다. 그 금표는 일면 빠른듯 했으나 이윽고 장전상의 앞에 이르러 속도를 줄이면서 가볍게 그의 손 위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장전상 은 그것을 보고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이번의 한 수는 백방생이 일부 러 자신의 솜씨를 내 보인 것이었다. 장전상은 비로소 그의 무공이 자신 들과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우연히 그런 광경을 목격하게 된 점원들은 이들이 무공이 높은 사람 들이라고 생각하고 내심 기겁을 하여 모두 서둘러 차려놓고 물러가버 리고말았다. 백방생은 이어 핑계김에 침상위에 누운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에게도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소생에게 소개를 시켜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장전상은 금표를 받아서 품속에 넣었으나 이내 싸늘하게 냉소(冷笑)하 며 말했다. "그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으니 상관하지 마시오." 백방생은 그 말에 다소 화가 났으나 참았다. 필시 그들은 황진의에게 치 료를 부탁하기 위해 왔을 것이다. 그 침상위의 사내는 지금 거의 기식이 엄엄한 상태였다. 하지만 황진의는 지금 백방생의 호위이니 그가 치료하 지 말라고 요구하면 그녀의 생각도 다소 달라질 수가 있는 일이 아니 겠는가? 애초에 자신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남의 침상위에 환자를 눕힌 일부터가 기분이 나빴는데, 이제 선물까지 주고 나서도 그런 대접을 받자 백방생의 기분은 썩 좋지가 않았다. 사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선 물로 주는 액수는 은자 열냥이나, 혹은 백냥 정도가 고작이었고,그것도 아주 친밀할 경우에만 주는 것이상례였다. 하지만 백방생은 지금 처음보 는 그들에게 그것은 몇배 혹은 수십배의 선물을 주고 있는데도 푸대접 을 받다니 이것은 확실히 체면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백방생은 손에 들었던 열냥짜리 금표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돌아 서서 짐을 정리하고 이어 자물쇠까지 채운 후 탁자에 앉았다. 음식은 대부분 훌륭한 것들이었다. 백방생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으므로 다시 권하지도 않고 혼자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사실 이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들을 쫓아내지 않는 것만도 크게 봐 주는 일인 것이다. 장전상과 백방생의 사이가 냉랭해 지자 자연 따라서 나머지 세 소녀들 도 백방생과 얘기를 나누기가 어렵게 되었다. 잠시 백방생이 보란듯이 좋은 냄새를 풍기며 식사를 하는동안에 방안에는 그야말로 숨막힐 듯 한 기묘한 침묵이 흘러갔다. 문득 백방생이 밥을 반 쯤 먹고 있는데 장전상이 갑자기 부채를 크 게 펼쳤다가 접더니 뒷짐을 지고 다가왔다. "백공자, 내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백방생은 그의 얼굴에 일종의 음험한 기운이 깔려있는 것을 보고 내심 긴장했다. "무슨 일이오?" 장전상은 백방생의 바로 앞까지 와서 차가운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주시하더니 음침하게 웃었다. "백공자의 목숨값은 얼마나 되오?" 백방생은 태연하게 음식을 먹고 있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는 도저히 계속 먹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이거 영 좋지 않군, 하고 생 각하며 신형을 일으켰다. "귀하가 내 목숨을 사려고 하오?" 장전상은 뒷짐을 지고 있는 두 손을 앞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의 두눈 에는 이미 흉악한 살광(殺光)이 떠올라 있었다. "왜, 내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이미 말투까지 변해서 실내에는 완연한 긴장된 기류가 감돌았다. 그 세명의 소녀들은 이 일을 그저 관전만 할 뿐 나서서 말리려는 기색이 없었다. 사실 그들은 모두 한 패인 것이다. 백방생은 다소 당혹스런 심정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럴수록 태연하게 말했다. "물론이오. 당신은 내 호위를 이길 수가 있겠소?" 말과 함께 백방생은 은근히 창문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상대의 시선 을 그쪽으로 돌리게 하여 먼저 헛점을 노리고 공격하자는 계책이었다. 장전상 역시 자신들이 그쪽으로 들어 왔으므로 자연 놀라서 뒤를 돌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놀란 사람은 오히려 백방생이었다. 그는 다음 순간에 정말 로 그 창문앞에 황진의가 나타난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도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였기 때문에 백방생은 잠시 자신의 눈조차 의 심할 뻔 했다. 장전상은 과연 황진의를 보자 대뜸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그는 즉시 태도를 누그러뜨림과 함께 황진의를 향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소저이시군요. 소생 장전상이 인사 올리겠소이다!" 황진의는 그저 차분한 기색이었는데 백방생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가 이어 장전상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알고 있나요?" 장전상은 문득 채청문과 은밀히 전음으로 대화하는 듯 하다가 다시 말했다. "성수곡의 황소저의 영명은 무림을 떨어 울리고 있는데 누가 모르겠소 이까?" 사실은 장전상은 황진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한번 전음으로 채 청문에게 물어본 모양이었다. 채청문은 물론 일전에 황진의와 수인사를 나누었었기 때문에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황진의를 향해 매우 반갑다 는 듯이 그녀는 포권하며 말했다. "황소저, 이렇게 다시 만나니 정말 기쁘군요?" 그러나 황진의는 그녀를 아랑곳하지도 않고 곧장 이번에는 백방생을 향해 말했다. "백공자, 그들이 당신에게 혹시 해를 끼치지는 않았나요?" 그것은 이른바 백방생의 뜻대로 일을 추진하겠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순간 장전상의 얼굴에는 긴장된 빛이 떠올랐다. 그런데 백방생은 웃으 며 말했다. "글쎄요. 다소 손해라고나 할까? 하하, 나는 그들에게 각기 반지들과 금표를 선물로 주었지요. 사실 그런 손해는 내가 늘상 당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이를테면 기분 좋은 손해라고나 할까요?" 황진의는 백방생을 향한 시선에 가벼운 변화를 일으켰다. 그녀는 여전 히 차분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당신의 친구라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친구? 하하, 그렇다고 할 수가 있지요. 우리는 조금전에 마침 심심해 서 장난을 하고 있었던 참이었소." 백방생은 이어 장전상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소, 장형(張兄)?" 백방생이 갑자기 장형이라고 불러오자 장전상은 일시 당황해 하는 듯 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 그렇다고 할 수가 있지요." 백방생은 이에 황진의를 향해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황낭자는 가급적이면 그가 원하는 바를 들어 주었으면 좋 겠소." 황진의는 백방생을 향해 가벼운 한숨을 짓더니 장전상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당신은 그 환자를 내게 보이기 위해 온 것인가요?" 장전상은 당황한 표정으로 상황을 살피다가 말했다. "그렇소." 황진의는 이에 곧장 그 침상 앞으로 걸어갔다. 침상위에 누워있는 사내 는 아직도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황진의는 그의 앞에 이르더니 곧장 눈꺼풀을 들어 보고 이어 손목의 맥을 짚어 보다가 빠르게 지풍 을 날려 환자의 혈도(穴道)를 제압했다. 그리고 수십개의 금침을 꺼내서 환자의 몸에 꽂는 것이었다. 과연 그러한 빠르고 신속한 동작은 그녀 가 소문난 명의(名醫)라는 것을 입증하게 했다. 환자는 지독하게 기력이 탕진되고 깡마르기는 했으나 나이는 겨우 삼 십대 초반이고 예전엔 준수했던 것으로 보였다. 금침을 꽂고 나자 창백 하고 거무죽죽하던 환자의 얼굴에 은은한 생기(生氣)가 돌기 시작하고, 이어 가벼운 홍조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갑자기 호흡이 부드러워 졌으며 환자는 마치 깊이 편안하게 잠든 것 같았다. 백방생은 옆에서 보건데 혹 시 황진의가 환자의 남은 잠력마저 격발시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 다. 황진의는 이어 검은 환약(丸藥)같은 것을 꺼내어 환자의 입속에 넣어 주 었다. 이미 생기가 일어났기 때문인지 그 환약은 환자의 목구멍에서 꾸 르륵, 하고 소리를 내며 뱃속으로 내려갔다. 장전상 등은 과연 황진의가 명불허전(名不虛傳)이어서 금방 숨이 넘어갈 듯 하던 환자를 살려놓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고 기뻐하는 모습들이었다. 황진의는 마지막으로 일종의 약방문을 적어서 장전상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즉시 거기에 적혀 있는대로 성안의 약포(藥鋪)를 찾아가서 조제하 되, 탕제를 복용시키고 절대 안정을 취하도록 하세요. 만일 환자가 깨 어나더라도 삼삼은 구, 아흐레 동안은 절대 운기(運氣)를 해서는 안된다 고 하세요." 장전상은 이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예예를 거듭했다. 아마 백방생 에게 살기를 드러내며 기고만장해 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것을 보고 백방생은 문득 생각했다. (나도 의원이나 될 것을 그랬나? 저렇게 대접을 받을 줄 알았다면.) 장전상등은 이미 백방생에게 무례하게 나왔었기 때문에 감히 더 이상 머물수도 없었고 또한 그러한 염치도 없었다. 그들은 황진의가 그러한 치료를 마치고 나자 이내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창문을 닫은 다음에 침상위의 이불과 요를 걷어 버리며 황진의에게 탁자위의 음식을 함께 들자고 했다. 백방생은 조금전에 갑자기 느닷없는 일을 당했었기 때문에 역시 나름대 로 다시금 조용한 정적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황진의는 탁자앞에 앉아서 혼자서 차를 따라서 마시고 있다가 이윽고 백방생이 마주 자리하자 입 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그래도 아주 바보는 아니로군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장전상을 대한 일 말이오?" 황진의는 찻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지금 당신이 그들과 반목하게 되면 당신은 설 자리가 없게 될 거예요. 대체 당신은 어째서 그들과 다투게 되었죠?" 백방생은 고소(苦笑)하며 간략하게 그간의 사정을 말해 주었다. 이어 말했다. "그들이 그렇게 나오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황진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그렇게 공공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다니 정말 대단 한 사람이로군요." 백방생은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래 아까 그 환자는 어떤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었소?" 황진의는 말했다. "그는 바로 점창파(點蒼派)의 장문인인 점창일학(點蒼一鶴) 진익(陳翼), 진노사(陳老師)의 친손자가 되는 분광검(分光劒) 진청허(陳淸虛)라는 사 람이었는데, 그것은 병이 아니었어요." 점창파 장문인의 손자인 분광검 진청허. 그것은 사실 백방생이 은근히 예측하고 있던 바이기도 했다. 백방생은 약간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흡성대법(吸星大法)에 당한 것이라는 말이 오?"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단지 상대의 조예가 대단치 않아서 그는 아직 목숨을 부지하 고 있었던 거죠." 백방생은 내심 재차 과거의 광경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천하에 그 제삼세력(第三勢力)인가 하는 것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확실한 모양이군. 여기에서도 그 지경이라니?)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화제를 돌려 다시 물었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소?" 황진의는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피진주루(避塵酒樓) 옆에 있는 태평객잔(太平客棧) 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물론 비교적 정의맹에서 맡은 일이 없는 젊 은 사람들이죠. 지금 정의맹의 총단에서는 현실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 한 군웅대회(群雄大會)가 열리고 있다고 하고요." 피진주루란 바로 두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남궁검상 등을 만나게 되 었던 바로 그 술집이다. 백방생은 은근히 그녀의 말속에 진소유에 대 한 소식을 듣게 되기를 바랬으나 그러한 기대는 이내 무너지고 말았다. 황진의는 마치 그러한 그의 심정을 조금도 몰라주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백방생은 스스로 다시 그 얘기를 꺼내기도 거북하여 화제를 은 근히 돌렸다. "앞으로 나를 도와줄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아 보셨소?"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당신이 일단 장원을 매입하고 나서 은자를 써서 사람들을 부른다 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군요. 게다가 이미 당신이 그렇게 요란하게 광고를 해댔으니 더러 호위무사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나타날 것 같아요." 백방생은 그녀가 은근히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보고 포권하며 말했다. "내가일을그렇게만든것은결코고의가아니었소.하지만앞으로 내 당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소. 안심하십시오." 황진의는 약간 싸늘하게 코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그래, 당신은 어느 정도의 사업을 벌리려는 거죠? 대체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어느 정도나 되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건 당신이 한번 알아맞춰 보시오." 황진의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대략 황금 백만냥은 되나요?" 황금 백만냥이라고 해도 일단은 엄청난 금액이 된다. 백방생은 미소하 며 말했다. "글쎄요. 만일 그렇다면?" 그 때 문득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백방생은 곤란한 상황에서 벗 어날 수 있는 핑계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무슨 일이죠?" 백방생은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마 내가 아까 시켰던 일이 다 되었나 보오." 방문을 여니 과연 점원이 아까 백방생이 시킨 물건들을 잔뜩 구입해 가지고 와서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는 백방생에게서 받게 될 수고 비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곧장 수고비 등을 계산하고 서 점원을 보내고 물건들을 안으로 날라왔다. 그는 짐들을 다시 정리하 며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니 우리는 내일 아침에 일단 그 태평객잔부터 들러보기 로 합시다. 장원을 구입하고 사람을 구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더 해 야할 말이라도 있소?" 황진의는 표정이 약간 쌀쌀해지며 신형을 일으켰다. "늑대를 잡으니까 사냥개도 이제는필요 없다는 식이로군요. 좋아요, 내 일 뵙기로 하죠." "잘 자시오." 황진의를 보내고 나서 책보따리 등을 다시 정리하면서 백방생은 문 득 생각했다. (아, 미처 진낭자가 있는 곳을 물어 보지 않았군. 일단 이것은 그녀에 게 전해줘야 귀찮아지지 않을 텐데.) 백방생에게 필요없는 비급이었기에 그러한 것은 그에게 일종의 거추장 스런 짐에 불과했다. 만일 진소유가 살고 있는 곳을 알았다면 이 한밤중 에라도 몰래 가서 던져주고 돌아오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백방생은 이윽고 짐정리를 마치자 생각하고 있던 일을 감행하기 시작 했다. 그것은 이른바 그의 내공력을 높이는 일이었다. 지금 그의 공력은 이갑자이나 무공은 그저 일갑자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다소 무리 한 일이 될 지도 모르나, 며칠전 곰곰히 연구해본 결과 일단은 공력을 더욱 높여놓는 것이 첩경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것은 물론 그가 무학 의 이치에 정통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백방생은 일단 주머니를 뒤져서 두 개의 약병을 찾아내고, 이어 그 중에서 공력에 효과가 크다는 대라금단을 무려 두 알이나 한꺼번에 복 용했다. 그는 이전에 마차속에서는 은연중 황진의의 감시속에 있었기 때문에 대라금단은 사용할 엄두도 못내고 있었었다. 한꺼번에 금단(金丹)을 두 알이나 복용하자 갑자기 그의 몸속은 불길이 일어난 것처럼 뜨거워 졌다. 이에 백방생은 바닥에 단좌하고 나서 운기 행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운기행공의 법문(法門)은 다소 특이 했다. 그것은 바로 달마역근경에서 그가 스스로 찾아낸 내공심법(內功 心法)이었다. 그것은 가장 기초에 충실하면서도 안전한 것이기도 했다. 이윽고 점차로 체내의 열기가 잡혀가기 시작하자 그의 콧속에서 호흡 과 함께 짙은 안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내공심법 이 일류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증거였다. 사실 그러한 때가 매우 위험한 시기이기도 했다. 내력이 심하게 일어날 수록 점차로 그의 양쪽의 태양혈(太陽穴)이 불 룩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 태양혈은 십이정경(十二正經)이나 기경팔 맥(奇經八脈)의 어느 곳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이를테면 경외기혈 (經外奇穴)이라고 일컫는다. 내공이 상승의 경지에 오르기 이전에는 그 곳에 진기가 모이게 되는데, 사람에 따라서 갈수록 그것이 심하게 돌출 되어 나오게 된다. 백방생은 본래 외가(外家)의 공력과는 무관하여 정좌 를 위주로 하는 깨달음의 무공을닦아왔으니 그런 모양은 일어나지 않았 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진기가 다른 곳으로 새고 있다는 증거였다. 백방생은 이미 그 심각한 증상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 상승공력에 도달하지 않았는데도 무리하게 사갑자(四甲子)의 공력을 운용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작은 개울 로 많은 양의 물을 방류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 금 백방생은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미처 둑이 터지 는 위험에 직면하기도 전에 진기들은 은근히 사방으로 새어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더욱 안좋은 현상이기도 했다. 진기가 다른 곳으로 새고 있다는 것은 세맥들이 절단났기 때문이었다. 그 무수 한 작은 구멍들 속으로 진기는 새어나가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었 다. 백방생은 여기에 이르자 약간 당황해 졌다. 이것은 사실 황진의도 경 고했던 바이기도 했다. 주화입마(走火入魔), 그것은 무림인이라면 누구 나 공포스럽게 여기고 두려워 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 백방생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는 없었다. (현관(玄關)들을 타통하여 빨리 대주천반운을 융통시켜야 한다. 그러 면 운기행공에 장애가 없어져서 밖으로 새는 진기의 양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다행히 그러한 상승경지에 오르는 일은 일전에 백방생이 한번 경험한 적이 있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정신을 모아서 진기의 양을 모으고 그 힘으로 여러번 현관을 향해 부딪쳐 갔다. 그 힘은 아주 막강했다. 그 일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으나 백방생은 도중에 그만둘 수가 없었 다. 불행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그의 코에서 흘러나온 안개와도 같은 기운이 흔적도 없이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즉 모공(毛孔) 속으 로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 다섯가지 빛깔의 기 운이 나타나고 그 속에서 세 가지 빛깔의 꽃이 피어났다. 곧 삼화취정 (三花頂) 오기조원(五氣朝元)이다. 39 장 실연(失戀)당한 사람들 그것은 곧 백방생의 공력이 상승경지(上乘境地)에 올랐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일시에 전신의 주요 수십개의 혈관들이 터져 나가며 시원하게 융통되어 전신의 진기가 매우 부드럽고 맑으며 허(虛)해지게 되었다. 소위 유실반허(由實返虛) 자진귀박(自眞歸樸)이라고 불리우는 것 이다. 이제 주화입마의 위험성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진기를 뜻대로 사용할 수 가 있다고는 해도, 일단 세맥들의 상처가 있는 한은 그 공력의 일부밖 에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공력은 사갑자이나 내공은 이갑자이고 게다가 사용가능한 것은 결국 일갑자의 무공(武功)이라..., 정말 엉망진창이요 알 수 없게 되었군!)이 미 비지땀으로 목욕을 하다시피 한 백방생은 문득 그렇게 넋놓고 중얼거 렸다. 하지만 앞으로 길을 열어 놓았으니 잘만 하면 터전을 닦아서 상달 (上達)로 가는 길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백방생은 지쳐서 쓰러지듯 침상위에 누워 잠을 잤다. 이윽고 다음날 아 침에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비급보따리와 병장기, 귀중품 등을 모조리 챙기고 아래로 내려가자, 일층의 반점(飯店)에서는 황진의 가 이미 식사를 시켜서 차려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진의는 그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안색이 매우 좋아 보이는군요. 간밤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 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좋지 못했소. 어서 밥이나 먹고 태평객잔으로 가 보도록 합시다." 이 호화객점인 영춘빈관(迎春賓館)은 하나같이 최고급의 물품만 취급 하기 때문에 음식의 맛도 몹시 훌륭했다. 황진의도 이제는 돈을 아끼지 않는 지 매우 풍성한 음식들을 차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먹는 백방생의 마음은 그다지 편안하지가 못했다. 그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연 신 뭐라고 투덜댔고 흡사 모래를 씹는 듯한 표정이었다. 황진의는 그것을 바라보며 그저 약간의 음식만 먹었을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백방생은 먼저 가까운 금포(金鋪)에 들러서 황금 십만냥에 달하는 금표를 더 찾았다. 그는 이번에는 황진의가 보는 앞에 서 공공연히 인출을 했는데, 그가 금표뭉치를 확인하고 나서 돌아오는 것을 보고도 황진의는 거의 이렇다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쇠로 만든 조각인형과 같은 모습이었다. 태평객잔(太平客棧)은 모두 삼층의 건물로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중급 의 객점이었다. 두 사람이 거기에 도착했을 때에는 객점에는 사람들이 거 의 없었고 대개는 옆의 피진주루로 갔다는 것이었다. 그 객점에는 따 로 반점이 없으니 그쪽으로 식사를 하러 간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약간 허탈해진 기분으로 다시 객점을 나와 피진주루를 향해 걸었다. 헌데 두 사람이 미처 피진주루의 앞에 이르기 전의 일이었다. 갑자기 백방생은 아주 득의에 찬듯한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듣고 신형을 멈춰 세우게 되었다. 그가 기분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그 음성이 매우 귀에 익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백방생은 그 쪽을 바라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니 저 자가 왜 저기서 웃고 있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상(大路上)이었다. 백방생이 그 사람을 찾 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사람은 바로 남궁검상(南宮劍常)이 었다. 남궁검상은 한 명의 청의검사(靑衣劍士)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는데 대번에 그의 득의에 찬 기분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방생은 이미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으므로 즉시 그쪽을 향해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 청의무사는 남궁검상의 수하인 듯 열심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하고 있었는데 아부의 기색이 역력했다. 남궁검상은 말했다. "좋아, 틀림없다면 내 즉시 가서 만나 봐야지. 그녀는 무공도 높고 또한 절세미인이며 당금의 무림의 떠오르는 샛별과도 같은 존재이니 당연히 나에게 이로울 것이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이 일을 누구에게도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그 청의무사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예, 그 여자가 혹시 너무나도 지루해서 벌써 가버렸을 지도 모르겠습 니다. 그러니 어서 도련님께서는 그곳으로 가 보십시오." 남궁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향해 한번 더 웃었다. "요사이 그녀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더니 내 미리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 흐흐, 이것은 바로 내가 출세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 다." 말이 끝나자 남궁검상은 청의무사를 보내고 나서 혼자서 한쪽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쪽은 피진주루와는 반대방향이었다. 백방생은 그 것을 보자 왠지 일이 궁금해 졌다. 그는 남궁검상이 대체 어떤 여자 를 만나려는가 하고 추적하고 싶어졌다. 그때 옆에서 그 광경을 함께 바라보고 있던 황진의가 왠지 입가에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그저 놀러가는 것이 아닐테니 우리는 일단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백방생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오." 두 사람은 이윽고 남궁검상의 뒤를 멀찍이 떨어져서 추적했다. 남궁검 상은 무공이 이미 제법 상당하기 때문에 자칫 눈치 채일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왠지 남궁검상은 한가지 일로 마음이 들 떠 있는 지 뒤는 전혀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걸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몇 번의 골목길을 돌아가자 하나의 허름한 술집이 나타났다. 그 술집은 주머니가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곳으로 자연 시설이나 분위기가 깨끗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남궁검상이 그 곳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 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궁검상은 한번 실내를 두리번 거 리더니 이내 싱글벙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따라서 그 주루의 앞에 바싹 다가가서 내부의 광경을 살폈 다. 백방생은 혹시 남궁검상이 그에게 친근한 듯이 보이던 사천당문(四川 唐門)의 소서시(笑西施) 당리(唐莉)와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다. 그가 이전에 본 바에 의하면 당리는 용모나 무공 등이 뛰어 나고 대단히 똑똑하며 당찬 여자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이런 곳에서 은밀히 만나 혼인하기 이전에 무슨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그런 광경을 일부러 훔쳐보는 것이 과연 정인 군자(正人君子)다운 행동일까? 그러나 막상 실내의 광경을 바라본 백방생은 그만 깜짝 놀라서 얼굴색 이 변하고 말았다. 지금 실내에서 남궁검상과 자리를 마주하고 있는 사 람은 눈부신 백의(白衣)를 입고 있었다. 당리는 보통 누런 황색의 옷 을 잘 입는 여자였다. 물론 그런 당리라고 해서 한번쯤 그런 값비싸고 아름다운 백의를 입어보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백방생이 어찌 그 백색의 의삼속에 숨겨진 그녀의 자태와 냉 오한 기질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백방생이 꿈 속에서도 그리던 진소유였다. 백방생은 갑자기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 맞은 듯이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꼈다. 백방생은 불현듯 자신의 손에 와 닿는 한줄기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 바로 황진의였다. 그녀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그녀는 전음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렇게도 우유부단한 거죠? 당신은 이렇게 허약해서 나중에 영웅(英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겠어요?" 백방생은 그녀의 눈빛을 본 순간 겨우 마음이 다소 진정되어 새롭게 안쪽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백의관음(白衣觀音), 그러한 별호에 걸맞게 진소유의 모습은 마치 더러 운 분위기 가운데 고고하게 피어 있는 한 떨기의 순백한 연꽃과도 흡사 했다. 사실 그녀가 일으키는 냉엄한 기질은 은근히 장내를 압도하여 강 한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비록 소서시 당리가 아름답고 똑똑하다고 는 해도 결코 그녀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백방생은 비로소 아까 남궁검상이 그토록 득의에 차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숨어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남자가 할일이 아니다!) 백방생은 문득 그렇게 결정하자 즉각 혼자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궁검상은 한참 입가에 득의에 찬 미소를 떠올리며 진소유에게 속 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방생에게는 도무지 그러한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단단히 어떤 열병에라도 걸린 듯이 멍한 상태에 서, 백방생은 갑자기 그들의 탁자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진소 유와 남궁검상은 느닷없는 상황에 놀란 듯이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었 다. 백방생은 그렇듯 멍한 상태에서 진소유를 향해 말했다. "나와 얘기 좀 나눌 수가 없겠소?" 아마도 백방생의 목소리는 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치는 것으 로 들렸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백방생은 밖으로 나와서 골목길에 진소유와 함께 서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백방생은 문득 스스로 탄식했 다. (이 애욕(愛慾)의 사슬은 정말 무겁고도 질긴 것이다. 나는 어째서 여 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백방생이 계속 멍하니 서있기만 하자 진소유는 답답한 지 싸늘한 표 정으로 질책하듯 말했다. "사람을 불렀으면 얘기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요? 어째서 그렇게 꿀벙 어리죠? 갑자기 입이 얼어 붙기라도 했나요?" 진소유의 싸늘한 음성은 마치 차가운 얼음물과도 같아서 그의 심화 (心火)를 대번에 씻어주는 듯 했다. 백방생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 강남(江南)에 다녀왔소." 진소유는 입가에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어쩐지 그동안 보이지 않길래 난 죽은 줄로만 알았지요. 그래 나를 보자고 한 것이 고작 그런 말을 하기 위함이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줄 것이 있소." 진소유는 냉소(冷笑)했다. "당신은 계속 저에게 주기만 하는 사람이로군요. 대체 이번에 저에게 주려는 것은 어떤 물건이죠? 돈인가요 아니면 무슨 사랑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줄 것은 돈도 사랑도 아니고 그저 열두권의 무공비급이오.? 진소유는 그 말에 비아냥거리던 태도가 약간 달라졌다. 백방생은 즉시 허리에 차고 있던 괴나리봇짐과 같은 책보따리를 꺼내어 진소유에게 건 네주었다. 진소유는 그것들을 보자 갑자기 안색이 달라졌다. 당연히 그 녀에게 몹시 익숙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약간 흥분한 듯 백 방생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얻었죠?" 진소유는 지금 겨우 절정경지였다. 당연히 앞으로 배워야할 부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앞으로 남해보타도를 재건시키려면 그 것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보물(寶物)이었다. 그녀는 당시 남해보타도 로 달려갔으나 이미 사문은 멸문당하고 그 비급들도 또한 찾을 수가 없 었었다. 백방생은 그 비급들만큼은 그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 오는 대로 거짓말을 했다. "나는, 우연히 강남에서 한 비구니를 만나게 되었소. 그녀는 나이가 많 고... 어쨌든 다 죽어가고 있었는데 이것을 당신에게 전해달라고 하더구 려. 당신이 그것을 갖고 안갖고는 마음대로 하시오." 진소유는 다소 의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그럼 당신이 나의 사백이나 사숙을 만났단 말인가요?" 백방생은 공연히 자세히 말했다가는 마각이 드러나게 될 것이므로 대강 얼버무렸다. "모르겠소. 당시는 워낙 촉망중이어서. 당신이 만약 그것을 갖지 않겠 다면 나에게 도로 주시오. 내 지금 불태워 버리겠소." 그런데 진소유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예요. 요새 무학상(武學上)의 의문점이 많았는데 이 비급들을 가 져다 주니 고맙군요. 어디서나 무공은 늘 필요한 것이니까요. 당신은 오 랜만에 제법 좋은 일을 한 셈이예요. 이 비급들은 내가 가질 것이니 일 부러 신경써서 태울 필요는 없어요." 백방생은 그녀가 의외로 그렇게 말해 주자 실로 한가지의 짐은 덜어 낸 셈이었다. 진소유가 얼른 보따리를 도로 싸서 자신의 허리 안쪽에 차는 것을 보다가 백방생은 다시 말했다. "그 석륭안과는 헤어진 것이오? 어째서 그 남궁가(南宮家)의 이공자 (二公子)와 사귀는 것이오?" 진소유는 모처럼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있다가 그말에 이내 표정이 다시 냉랭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싸늘하게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내 이전에 이미 뭐라고 했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 나요? 내 이번에는 비록 좋은 일을 해서 당신을 그냥 두고 있지만, 그 렇다고 해서 감히 나의 일에 간섭을 하려는 것인가요? 그렇게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겠나요?" 백방생은 그만 다시 기분이 암담해 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사실 내 처지를 잘 모르겠소. 그게 어쨌다는 말이오?" 백방생은 말을 하고 나서 그녀의 발길이 날아올 것을 예상했다. 아니 오히려 기대했는 지도 모른다. 만일 그녀의 발길에 맞아 갈비뼈 등이 몇 개 부러진다고 해도 마음만은 후련해 질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 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소유는 이번에는 거칠게 나오지 않고 오히려 부드 럽게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럼 당신은 아직도 나에게 사랑을 원한다는 말인가요?" 진소유의 눈빛은 기묘하게 반짝이고있었다. 흡사 그 검은 바다속에 무 한한 보석의 마력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 갸름하고 가냘프 게만 보이는 그 얼굴에 어떻게 저런 강한 기질(氣質)들이 어울릴 수 있 을까 하고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그 부드러운 시선을 받자 백 방생은 마치 뼈속까지 녹는듯 하여 정신이 완전히 흐물흐물해 졌다. 백방생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그, 그렇소. 나는 이번에 돈도 많이 벌고, 또한 몸도 치료하여 그것 을 바탕으로 하여 좋은 일도 한번 해보려고 하오. 당신이 만약 그 남궁 검상을 사귀려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에게 오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진소유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당신은 남들처럼 그렇게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되요. 나는 물론 목적 이 있지만 그것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아요. 그러니 역시 당신은 앞으로 도 나를 멀리하는 게 좋아요. 이것은 비급을 가져다 주었기에 내가 해 주는 마지막 충고예요." 백방생은 그녀의 그런 진심이 깃든 듯한 정색을 한 말을 듣자 가슴이 더욱 벌겋게 달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언성을 높여서 소리쳤다. "나는 그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겠소. 나는 언젠가는 당신을 반드시 내 아내로 맞아들일 거요?" 진소유는 그 말에 안색이 다시 심하게 찌푸러져 버렸다. "당신이 만약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온다면 나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 을 거예요. 마음대로 해요!" 진소유는 그 말과 함께 신형을 돌렸다. 백방생은 감히 그녀를 잡지 못 하고 뒤를 보며 소리쳤다. "당신은 돈이 더 필요하지는 않소? 나는 이번에 많은 금은보화를 샀는데 그것을 가져가 주시오! 소유! 잠깐 나 좀 보시오!" 그러나 진소유는 이후 전혀 신형을 돌리지 않고 곧장 신법을 펼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그만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넋을 잃은 듯 했다. 문득 그 때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당신은 알보고니 위군자(僞君子)로군요. 어째서 좀더 적극적으로 그녀 에게 다가서지 않는 거죠?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떼를 쓴다고 해서 해결 될 일이 아니잖아요." 바로 황진의였다. 백방생은 그녀의 말에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멍하니 황진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정말로 그렇게 보였소?"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말한 위군자라는 말은 사실 잘못된 거예요. 바로 말하자면 거짓사 랑이란 말이죠. 저는 위군자는 참을 수가 있어도 간혹 사랑을 거짓으로 하는 사람은 참을 수가 없어져요." 황진의는 차가운 안색으로 백방생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일순 그녀의 두눈에서 깊은 혜광(慧光)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저는 느낌으로 알 수가 있죠. 당신은 지금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 라 일종의 연극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일정한 목적을 위해 그녀를 사랑하 는 척 하는 거죠." 백방생은 저도 모르게 어이가 없는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내게 목적이 있다고?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사랑이 순수해진 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사랑이란 최소한 뜨거운 가슴으로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지금 당신에게는 그런 뜨거운 가슴이 없어요." 백방생은 그저 넋나간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낭자는 그래서 진낭자가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모르죠. 그녀는 역시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는 지도 모르니까 요." 백방생은 천천히 대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옆에서 황진의가 따라 오고 있었다.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실 나에게는 따뜻한 가슴이 남아있지 않은 지도 모르오." 황진의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정말로 백방생이 그런 것을 시인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설마하니 백방생은 거짓으로 사랑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게 무슨 말이죠?" 백방생은 이내 자신의 성장과정과 지난날 사고가 나던 당시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동안의 자신의 절망과 온갖 고통, 그리고 진소유와의 관계도 털어놓았다. 그는 이윽고 말했다. "나는 요사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소. 그래서 나는 모든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고, 또한 그렇게 비겁해졌는 지도 모르오. 나는 솔직히 그녀와 운명처럼 그렇게 가까와지게 되었지만, 그러나 겉으로는 사랑한 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녀가 정말로 내게 올 경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우려하고 있소. 나는 점차로 바보가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오." 황진의는 묵묵히 오랜 얘기를 듣고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작 그녀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잘 모르겠소. 다만 나는 한가지 일만은 후회하고 있소." 황진의는 말했다. "그녀에게 돈을 준 일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그건 내가 지금도 잘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들 중의 하나이 지.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날 밤에 어째서 그녀를 갖지 않 고 그냥 보냈느냐 하는 것이오." 황진의는 시선을 백방생에게 보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그녀에게 욕정 때문에 끌리고 있다고 생각하 나요?" 백방생은 안색이 벌개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소. 이건 여자인 당신에게 말할 바는 아니지만, 나는 밤 중뿐만 아니라 간혹 낮에도 그녀의 알몸을 보는 꿈을 꾼다오." 황진의는 다소 안색을 붉히며 공박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그날 그녀를 범하지 않았죠? 정당한 거래가 아니었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마도 그 때는 어떤 귀신에 씌였던 것 같소. 만일 그 때 내가 그녀 를 가졌더라면 아마도... 그녀에 대해 이렇게 미련을 두지도 않게 되었 었을 것이오." 황진의는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당신의 얘기를 들으니 나도 바보가 되는 것 같군요. 당신은 그 날 절대로 귀신에 씌였던 것이 아니었어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졌다. "뭐라구요? 낭자가 그걸 알 수가 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깊이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잘 알수는 없지만, 그러나 왠지 느낌으로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내가 그날 일부러 그랬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알고보면 스스로를 멸시하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그 녀에게는 일종의 위안을 느꼈을 거예요. 그녀는 당신의 부모와도 밀접 한 연관이 있으니까요. 당연히 당신은 스스로에게는 함부로 하면서도 그 녀는 잘 되기를 바랬던 거죠. 따라서 당신은 온갖 방법을 다해서 사랑을 가장하여 그녀에게 잘해주려는 거죠. 당신이 그녀를 몰래 욕정의 대상 으로 삼는 것은 그러한 행위에 대한 일종의 자기보상심리와 같은 거 죠. 즉 당신은 자신마저도 초월하여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 예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졌다. "그건 아까와는 얘기가 다르지 않소." 황진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까는 내가 그저 겉만 보고 판단했던 거예요. 무릇 인간의 심리를 안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신은 오히려 스스로의 사랑의 감정마저 버리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결국 당신은 나중에 스 스로 그녀를 뼈에 사무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백방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고?) 황진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사실은 나도 말을 하고서도 잘 모르겠어요. 이럴 때는 그저 더이상 생각하지 말고 술이나 한 잔 하는 것이 좋겠죠. 자, 어서 저 술집으로 가도록 하죠." 어느새 두 사람은 피진주루의 앞에 이르러 있었다. 두 사람은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그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 술집은 이전에 특이한 기억이 있었던 곳으로 인상이 깊었다. 또한백 방생은거기에서남궁검상등의젊은이들과만날수가있었다. 게다가 증평이 뒤 따라온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문득 그 생각을 하자 백방생은 불현듯 증 평이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만일 그녀의 뜻대로 되었다면 지공과 새살림을 차리고 있을 지도 모르 는 일이다. 그렇게 추억이 깃든 주루의 이층으로 올라가자 과연 그들을 맞는 사람 들이 있기는 했다. 그들은 역시 백방생이 이전에 이곳에서 만났던 오 대세가의 젊은 남녀들이었다. 옛추억이 어린 곳에서 그 옛사람들을 만 났으니 과거의 정취가 우러날만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백방생은 오히 려 그들을 대하자 배가 아프고 무기력 해지는 자신을 느끼게 되었다. "아, 저기 백공자와 황소저께서 오시는군?" 누군가가 좌중에서 그렇게 소리쳤다. 바로 섬전권(閃電拳) 황보헌(皇甫 軒)이었다. 다행히도 남궁검상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 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두 개의 탁자를 하나로 합치고서 삼녀사남(三女四男), 일곱명이나 둥글게 앉아 있었다. 그곳은 창가의 전망좋은 자리였으나 그 들은 이미 더러 취기가 도도해져서 창밖의 풍경 정도는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백방생은 급히 되돌아 나가고 싶었으나 그만 그들에게 들키게 되어 그럴수도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겨 그들의 앞에 다가갔 다. "여러분이 즐겁게 식사를 하시는데 소생이 그만 방해가 되고 말았군 요?" 일순 옆에 앉아 있던 팽영(閤　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팔을 잡아서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백형! 그렇게 고지식하게 인사를 차릴 건 뭐가 있겠소? 그저 사내답게 같이 앉아서 한 잔 하면 되는 것이지." 팽영은 약간 취한 것 같았다. 그는 억지로 백방생을 자리에 앉혔는데 그만 그 자리가 황보능파(皇甫凌波)의 옆이었다. 팽영은 또한 말로 적당 히 장난하듯 하여 황진의를 그 옆에 앉게 했다. 그리고는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자, 우리 이렇게 다시 새로운 손님을 모셨으니 건배를 해야 하지 않겠 소? 자, 모두 한잔씩 따랐으면 술을 들도록 하십시오. 이 끝없이 혼란스 러운 세상에 우리가 한 잔 한들 무슨 잘못이 있겠소?" 팽영은 그렇게 말하고 나자 스스로 술잔을 들어 마시고 이어 두 잔을 더 따라 마셨다. 좌중에서는 그처럼 석잔의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혹은 한 잔의 술만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혹은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백방생은 눈치껏 비어 있는 술잔에 술을 따라서 한 잔 들이켰다. 이 집의 술맛은 그야말로 일품(一品)이었다. 그야말로 세상을 핑계삼더라도 한 잔 마시지 않을 수가 없는 풍취가 거기에 있었다. 백방 생은 손수 따라서 황진의에게도 한 잔을 권했다. 이미 술을 마시고 싶다 고 했으므로 그녀 역시 미소를 지으며 한 잔을 마셨다. 백방생은 그녀가 다시 따라주는 술잔을 받으며 역시 가까이 있는 사 람과는 인사를 해야 하겠기에 옆의 황보능파에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저는 강남에 다녀왔는데 모두들 이 곳에 계셨었 군요?" 황보능파는 약간 상기된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기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 헌데 백공자께서는 아직도 호법을 구하신다면서요? 게다가 아주 거액을 걸고 말이예요." 백방생은 다소 고소하며 말했다. "예, 그 얘기가 여기까지 알려졌군요.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다지 거 액인 것은 아닙니다." 황보능파는 문득 전음으로 말했다. (듣자니 저기 황소저도 일년에 오만냥의 황금을 주고 산 호위라고 하던 데, 제가 만약 호법이 된다면 얼마를 주실 거죠?) 백방생은 그녀가 갑자기 전음으로 물어오자 다소 입장이 난처해졌다. 만일 함께 전음을 펼친다면 그것은 황진의를 은근히 놀리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는 육성으로 대답했다. "낭자께서 만일 응하신다면 일년에 황금 만 냥을 드리겠습니다." 황진의와 황보능파와의 무공의 격차등을 따져볼 때 그것은 사실 오히려 많이 생각해 준 액수였다. 하지만 황보능파는 왠지 다소 실망하는 기색 을 보였다. "겨우 그것밖에는 안 되나요?" 백방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금액도 낭자에게는 과분한 것이오.) 팽영이 다시 다가와서 백방생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백형! 어째서 그동안 그리 격조하셨소? 우리들이야 이런 곳에서 술만 마시고 있지만 백형은 그동안 달리 세상을 구할 방법이라도 생각해 냈 다는 말이오?" 백방생은 술잔을 받으며 말했다. "팽형께서는 너무 과찬의 말씀을 하시는 군요." 그때였다. 갑자기 당독(唐獨)이 오른손으로 탁자를 쾅, 하고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당형!" 황보헌이 옆에서 손을 잡으며 말리자 당독은 그것을 뿌리치며 소리쳤 다. "날 내버려 두시오? 황보형은 그래 이런 상황에서도 나더러 참으라는 말이오?" 그것을 보고 갑자기 남궁지약(南宮芝若)이 벌떡 일어서며 뾰족한 음성 으로 소리쳤다. "그래, 네가 못참겠다면 어쩔 테야? 나에게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말이 냐?" 당독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만 고개를 돌리고 아래층으로 내 려가 버렸다. "좋아, 내가 참지요." 백방생은 은근히 이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갑자기 이런 변괴가 생겨날 줄은 몰랐다. 황진의는 여전히 태연자약한 모습이지만 그는 마치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듯한 기분이었 다. 남궁지약도 역시 휑하니 나가버렸고 실내에는 썰렁한 기운만이 감돌 았다. 황보헌이 황진의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황소저,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우리 젊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다가 서로 싸우기도 하는 것은 예사가 아니겠소?" 하지만 백방생은 문득 어째서 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는지 알것 같았다. 바로 지금 이자리에 빠지고 없는 남궁검상 때문이었다. 그가 진소유를 사귀고 있다는 얘기가 알려지자 이와 같은 분란이 벌어 지고 있는 것이리라. 비록 강호무림이라고 해도 여전히 정조는 중요시 되는 관념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그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한다. 만일 소서시 당리가 남궁검상과 사귀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면, 또한 그것이 양가의 합의하에 혼인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라 면 갑작스런 남궁검상의 변심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게다가 사천당문은 역시 자존심이 높기로 소문난 명문의 무림세가가 아니던 가? 사실 그와 같은 추측은 백방생의 자유이기는 해도, 지금 그의 맞 은편에서 혼자서 무심(無心)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 당리(唐莉) 의 얼굴만 봐도 능히 그 추측은 어느 정도 확신할 수가 있었다. 강호의 여인은 강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앞에서도 강할지가 의문이었다. 황진의는 미소하며 황보헌에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저도 늘 그런 것을 대하며 사는 걸요. 여기에 계신 이 백방 생 백공자도 실은 실연(失戀)을 당하여 항상 마음의 병(病)을 앓고 있 죠.? 백방생은 문득 황진의가 공연히 자신의 일을 끌어들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그녀 자신도 한사람을 날마다 그리워 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 것일까?" 황보능파가 다소 놀랍다는 표정으로 백방생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어마, 백공자께서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세상에 그런 갑부에게 실연의 아픔을 주는 사람도 있나요?" 백방생은 고소(苦笑)하며 말했다. "내 자신이 못났기 때문이오. 본래 돈이라는 것은 그저 적당히 있으면 되는 거지요.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의 됨됨이 인데, 나는 보다시피 이렇 게 어리숙하게 생겨 먹었으니 실연(失戀)을 당해도 마땅한 것이오." 황보능파가 말했다. "그럼 당신에게 실연의 아픔을 준 사람은 그 증평, 증낭자였나요?"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그녀는 비록 떠나기는 했지만 나 역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소." 황진의가 말했다. "그에게 실연의 아픔을 선사한 사람은 바로 진소유(陳小柔), 진낭자예 요. 두 사람은 본래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번에 이별을 하게 되었다는 거죠." 백방생은 황진의가 그런 얘기까지 해버리자 그만 쓴 웃음을 짓고 말았 다. 이것은 백방생이 그녀를 들먹인데 대한 일종의 보복적인 행위로 여겨 졌다. 40 장 신(神)과 가까운 사람들 이미 백의관음 진소유에 대한 소문은 많이 알려져 있었다. 특히 좌중 의 사람들은 그 얘기에 더욱 놀라고 의아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백 방생은 문득 맞은편의 그 당리가 자신을 한차례 바라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황보능파가 매우 놀랍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진소저는 지금 천상회와 가까운데 대체 언제 백공자와 인연이 있었 다는 거죠?"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 진소저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전재산인 황금 십만냥도 본래는 이 백공자가 그냥 선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일년의 수고비로 황금 오만냥을 받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셈이죠.? 황보능파는 그 말을 듣자 약간 넋나간 표정을 지었다. 마치 꿈꾸는 듯 한 표정으로 백방생을 바라 보았는데, 그 표정은 마치 백방생을 재신? 財??? 쯤으로 보는 것 같았다. 사실 십만냥의 황금을 받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한번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백방생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만 더이상 자리에 앉아 있기가 곤란해 졌다. 그는 은근히 자신을 이러한 수단으로 질책하는 듯한 황 진의의 시선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황보능파가 문득 까르르 웃더니 백방생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혹시 나를 애인으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늘씬한 키에 매우 지성적인 미모를 갖춘 이제 열아홉의 소녀. 약간의 취기에 발갛게 달아있는 홍조띤 그녀의 얼굴 가운데 흡사 타오르는 듯 한 눈빛은 백방생으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백방생은 엉거주춤 자 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잠시 뒷간에 갔다 오겠소.?" 핑계삼아 일어섰지만 정말로 뒷간에 다녀온 다음, 백방생은 바로 이층 에는 올라가지 못하고 그저 일층의 한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로서 는 지금 황진의가 필요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서 불러낼 용기는 없었다. 그저 이렇게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내려오면 다른 행동을 개시할 생각이었다. 다가온 점원에게 간단한 술과 음식들을 주문한 백방생은 천천히 주위 를 둘러보며 생각에 골몰했다. 이 주루의 일층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은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이거나 장삿꾼들이 많았다. 백방생은 자신이 지금 어떻게 해서 편리하게 장원을 구입하고 일할 사람들을 구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했다. 그로서는 사실 조금전에 보았던 그 팽씨형제나 황보헌 등이 은근히 욕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라면 자신이 하기 에 따라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그가 이곳으로 온 목적도 바로 그러한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다시 한번 가서 그들에게 나중에 한번 만나자고 말을 건네볼까?" 백방생이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쪽으로 시선을 던지는데 문득 그 쪽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 백방생은 그 사람이 황보헌이나 팽씨형제, 혹은황 진의일것을바랬으나뜻밖에도그사람은당리였다.백방생은 솔직히 그녀에게 어딘가 미안하기도 하고 어색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오직 진 소유와 남궁검상 때문에 생겨난 감정이었다. 백방생은 진소유가 남궁검 상을 유혹했기 때문에 그가 당리를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렇다고 해서 백방생이 무슨 그녀에게 어떤 죄의식이라도 갖는 것은 아 니었다. 사실은 그 모든 추측들이 사실이 아닌, 그야말로 백방생만의 일 방적인 것이 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당리는 키가 황진의처럼 크지는 않지만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마른 체구이기 때문에 매우 길쭉하고 건강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그녀의 피부는 백옥같다고 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그러나 눈빛이 강렬하여 매력을 느끼게 해 주고, 또한 용모는 대단한 미인형이었다. 만일 그녀에게서 지나칠 정도의 강인함이 표출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그녀에게 접근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백방생은 이전에는 별로 자세히 보지 않았지만 지금에야 다시 한번 살펴보고는 생각했다. "과연 그 기생오라비 같은 남궁검상이 좋아했을 만한 얼굴이로군. 헌데 그 두사람은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문제라도 있는 것일 까?" 당리는 백방생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지 곧장 이쪽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혼자였고 무슨 다른 볼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약간 취해서 흐느적거리는 것 같았고, 입가에는 가벼운 조소같은 것을 흘리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녀가 자신을 향해 내려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그녀가 자신의 맞은편의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서야 약간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나에게 술 한잔 주시지 않겠어요?" 그녀에게서는 언뜻 말리향의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본래 매우 냉혹한 편이어서 이렇게 흐느적거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공연히 백 방생의 마음도 울적했기 때문일까? 왠지 실연을 당한 듯한 그녀의 모 습은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았다. 백방생은 즉시 술잔을 비워서 술을 따라주고는 말했다. "무슨 상심되는 일이라도 있으시오?" 당리는 곧장 술잔을 비우더니 그를 향해 비웃듯이 말했다. "내가 그렇게 보이나요?" 백방생은 그녀가 겉으로는 취한 듯이 보이나 기실 그녀의 눈빛은 취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그것도 착각일 지는 모르지만, 어쨌 든 백방생은 그런 강인한 매력을 풍기는 여자를 대하게 되자 가슴이 뛰 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나는 낭자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소. 나는 낭자가 설령 남궁소 협에 대해 불만이 있더라도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을 것 같소.? 당리는 눈빛을 기이하게 빛냈다. "당신도 그 일을 알고 있나요?" 이런 다른 사람들의 애정관계를 말한다는 것은 항상 조심스러운 일 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진낭자가 남궁소협과 한번 만나는 것을 본적이 있소. 하지만 나 는 지금 그런 일 때문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 었소.? 당리는 말했다. "어떻게 알게 되었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낭자가 실은 아주 강하다는 것이오. 그런 사람은 원래 그런 시 시한 문제로 상심하지는 않는 법이오. 그래서 나는 내 추측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소.? 당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의 생각은 비록 옳았지만 그러나 사실과는 달라요.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단순하지가 않죠. 그 복잡한 일들을 처리해 나가기 위해서는 늘 골머리가 아파와요. 하지만, 늘상 그런 모든 일들도 한가지의 단순한 일 에 의해 구멍이 뚫리고 마는 경우도 있죠.? 당리의말은언뜻쉽게이해하기가어려웠다.그녀는대강의사항을 그저 뭉뚱그 려서 말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나름대로 그 말을 이해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낭자는 다른 일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말씀이오?" 당리는 가볍게 웃었다. "잘 알고 계시는 군요.? 당리는 이어 빈 술잔을 건네주고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아직 이층 에서 사람들은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 술을 비우며 당리에 게 말했다. "낭자께서 만일 소생에게 부탁하실 일이 있다면 서슴치 말고 하십시오. 소생은 그리 째째한 사람은 아닙니다.? 백방생은 필시 이 여자가 자신에게 무슨 목적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생각했다.그렇지않으면이런미녀가자신에게자청해서다가올리가 없는 것이 다. 당리는 빈 술잔을 받아서 스스로 술을 따르며 말했다. "째째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럼 제가 어떤 부탁을 드려도 상관이 없다 는 말씀인가요?" 백방생은 왠지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은 증평마저 자기 자신을 떠나갔기 때문에 찾아오는 허전함이 어딘가 메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 었다. 백방생은 대충 머리를 굴려보며 말했다. "만일 소생이 크게 곤란해 지지 않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지요. 사실 소 생도 몹시 외로운 처지이기 때문에 당낭자와 같은 분과 가까와지는 길 이라면 다소 손해를 봐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당리는 말했다. "그럼 저에게도 황금 십만냥을 주실 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당연히 그녀가 돈을 요구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그 녀가 그에게 요구할 것은 그것 밖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십만냥이라니? 이건 액수가 다소 많은 것 같았다. 게다가 그냥 달라는 눈치가 아닌가? 그러나 백방생은 당리가 결코 이런 부탁을 쉽게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저 미소하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야, 가능하죠. 헌데 지금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까?" 당리는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리고는 미소하며 말했다. "당신은 거저 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편파적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또한낭 자도즐겁지는않을것입니다.저는낭자가마땅한핑계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리는 말했다. "좋아요. 제 몸을 드리는 것으로 하면 어떤가요?" 백방생은 안색이 붉어졌다. 흔히 여자들이 수줍음을 잘 탄다고 하지만 사실은 반대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오히려 여자는 필요에 따라 그런 말 을 쉽게 해 버릴 수가 있고 남자는 오히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다. 특 히 순진한 사람일 경우 더욱 붉어지는 농도가 짙을 것이다. 백방생은 속 으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정말로 순진한가?" 백방생은 말했다. "농담을 하시는 군요. 만일 남궁소협이 이런 얘기를 들었다가는 저는 앞으로 강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당리는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당신은 대체 어떤 댓가를 원한다는 거죠?" 백방생은 문득 당리가 결코 장난삼아 자신과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소 긴장이 되어 정색하고 말했다. "그럼 그냥 드리기로 하죠.? 당리는 가볍게 냉소하며 말했다. "당신은 그럴 수도 없고, 또한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을 거예 요.? 그것은 사실이다. 그가 만일 거저 누구에게 십만냥의 황금을 주었다고 한다면 그의 집에는 늘상 많은 거지떼들로 들끓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확실히 모든 일에는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백방생은 약간 고심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만일 다른 문제가 없다면 낭자께서 나의 호법노릇을 잠시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소, 한 일년 정도로.? 당리는 말했다. "그럼 황금 일만냥을 주겠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실 무슨 십만냥이 아무렇게나 불리워질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그녀가 한번 불러보기에 백방생도 그저 대꾸해 준 것일 뿐이지, 백방 생은 확실히 이 현실적이고 냉정한 여자에게 공연히 손해를 보고 망신 을 당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리는 가볍게 조소하듯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거기에 있는 다른 문제라는 것은 또 뭐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야 물론, 남궁소협도 찬성해야 한다는 것이오. 나는 사실 강호에서 살 아가려면 누구에게 잘못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당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이제부터 그는 그이고 나는 나예요. 나의 일을 그와 결부시키지 말아요. 대체 그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정리가 됐다는 말이오?" 당리는 말했다. "물론이예요.그가진낭자와사귀는것을보고도모르나요?나는 그렇게 천박한 여자가 아니예요.? 백방생은 이 당리라는 여자가 보기보다는 상당한 실연의 충격을 받았 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감히 더 이상 그녀의 감정을 건드릴 수가 없어 서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러시다면 됐습니다. 만일 낭자가 저의 호위가 되어 주시기로 한다면 지금 즉시 금액을 선불로 드리기로 하죠.? 당리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긍정적인 대답으로 보였다. 백방생은 즉시 품속에서 하나의 작은 봉투를 꺼냈다. 그 봉투에는 천냥 짜리 금표가 열아홉장이 들어 있었다. 백방생은 그 가운데에서 열 장을 세어서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들은 천하의 유명한 신용있는 금포의 금표들인데, 만일 의심스럽다 면, 즉시 확인해 보셔도 무방합니다.? 황금 만냥은 백은으로 무려 이십여만냥이나 된다. 그런 금액을 증서도 작성하지 않고 이렇게 쉽게 건네줄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간단하지가 않다. 당리는다소흔들리는듯한눈빛으로 그금표들을받아들었다.이어 몇 번 살 펴보고 품속에 갈무리 하더니 말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면 되죠?" 백방생은 말했다. "시간은 편리한 대로 해도 무방합니다. 만일 오늘부터 일을 시작하시려면 제가 묵고 있는 영춘빈관의 삼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만일 낭자께 서 특이한 호신병기가 있다면 그것들을 저에게 달리 파셔도 되고요.?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이층에서 내려 왔으므로 백방생과 당리는 신형을일으켰다.바로황진의와황보헌등의모든일행이었다. 황보능파가 알 겠다는 듯이 말했다. "어마, 알고보니 여기서 두 분이 사귀고 계셨었군요? 실연당한 두 분이 라면 마음이 잘 맞겠는데요?" 당리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며 그녀의 팔을 꼬집었다. "황보동생, 그런 말 하지도 마.? 백방생은 황진의를 향해 말했다. "저는 이곳에서 당낭자와 사업상의 일을 논의하고 있었죠. 헌데 황낭자 께선 얘기가 다 끝나셨습니까?"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사실은이층에서사업상의일을논의하고있었어요.우리가 뭐 지금까지 계속 놀고만 있었던 줄로 아나요?" 다시 보니 사람들의 눈빛이 아까와는 달리 맑게 빛나고 있었다. 백방 생은 그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져서 말했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황진의는 말했다. "당신은 이제까지 그저 입버릇처럼 사람을 구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요? 그래서 내가 잠시 얘기를 나누었죠. 여기서 말할 것이 아니라 우 선 저분들이 묵고 계신 객점에라도 가서 상의하는 것이 어떤가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졌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일행은 이윽고 태평객잔으로 가서 일행이 머물고 있는 방들 중에서 가 장 커다란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차와 찻잔들이 있었는데, 황보능파 가 찻잔들을 돌렸고 모두가 차를 마시며 한숨을 돌렸다. 백방생이 웃으 며 말했다. "모두들 저의 일을 도와주시기로 하셨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황보헌이 말했다. "사실 우리는 이번에 이곳으로 오기는 했지만 정작 윗분들의 뜻에 의해 단지 여기에서 머물며 대기할 뿐 조금도 활약은 못하고 있소. 사실우리로 서는답답하며매일무위도식을하는꼴이라,남는시간을 이용하여 여비나 벌어 보려는 것이오.? 백방생은 의아해졌다.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여비를 벌어 보겠다고요?" 황보헌이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우리는 많은 시간동안 백형을 도와드리지 못하오. 그래서 단지 한달 정도만 도와드리기로 한 것이오.? 백방생은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서 황진의를 돌아보았다. 황진의 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당신은 계속 일년이상의 기간을 바라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예요. 모든 것은 처음부터 잘 되지 않는 법이죠. 당신은 우선 장원을 구입하는 등의 자리잡는 것이 급하니, 이들과 한 달 정도만 일을 한다면 자리도 잡힐 것이고, 그 이후에는 더욱 사람을 구 하기도 쉬워질 거예요.? 백방생은 듣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군요.? 황진의는 이어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이 한달의 수고비로 황금 일천냥을 줄 것이라고 했 어요. 그건 괜찮겠지요?" 백방생은 그녀가 이미 그들에게 수고비까지 정해놓은 것을 보고 다 소 어이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괜찮지만, 나는 이거 정신이 하나도 없구려.? 그 말에 좌중의 사람들은 한번 왁자하게 웃었다. 백방생은 이윽고 그들 이 다 웃고 나자 말했다. "그럼 정리하기로 하지요. 지금부터 여러분은 한달 동안 저의 수신호위? 守身護衛?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가끔 제가 부탁하는 일도 해 주셔야 합니다.? 팽영이 소리치며 말했다. "백형께선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한번 백형을 위해 일을 해주기로 했 으면 그만이지 무슨 일일이 따질 것이 있겠소? 이 동생은 지금 할 일이 생겼기 때문에 신이 다 나는 기분이오.? 백방생이 둘러보니 모두의 뜻이 이미 일치하고 있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들에게 각기 천냥짜리 금표를 하나씩 건네준 다음에 말했다. "그럼 제가 수고비를 미리 드린 것이니 모두 잘 부탁드립니다. 우선 당 면한 문제는 제가 거처할 장원을 구입하는 것이고, 다음 문제는 사람들 을 좀 더 구하는 일입니다. 물론 그 비용은 제가 따로 드리도록 하겠습 니다. 그 점에 있어서 의견이 있으신 분은 말씀하십시오.? 천냥짜리 금표는 백은으로 수만냥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그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져보는 거액이었다. 비록 말로는 들었지만, 백방 생이 그토록 간단하게 그런 돈을 꺼내는 것을 보고 모두가 기뻐하면서 도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득 팽웅?陜9?이 웃으며 말했다. "이거 혹시 가짜가 아니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만일 그것이 가짜라면 저의 일을 해 주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황보헌이 말했다. "백형께서 이렇게 시원시원하시니 매우 마음에 드오. 우리는 별로 사람 을끌어모으는재주는없으니우선나와팽씨형제가함께나가서 장원을 알아보 고 오는 것이 어떻겠소?"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일단 제가 머무는 영춘빈관의 삼층에 방을 예약해 놓을 테니, 일을 마치면 그곳으로 짐을 정리해서 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보헌과팽씨형제는그말을듣고이내밖으로나갔다.황보능파가 웃으며 말 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죠? 백공자의 호위를 맡아주면 되나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도 일단 여기에서 짐을 정리하신 다음에 제가 머물고 있는 곳으 로 와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후의 일은 함께 논의하며 해 나가기로 하지 요.? 백방생은 다시 황진의와 함께 영춘빈관으로 돌아왔다. 일층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다가 문득 황진의가 백방생을 향해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강남에 한번 더 다녀와야 하겠어요.? 백방생은 확실히 그녀가 먼저 서두는 감이 있어서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백방생은 다소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그 용사형이라는 분을 찾아보려는 것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목적은 그것이지만, 아마 그외에도 해야할 일들이 있을 거예요. 당신의 호위는 그들이 맡을 것이니 거의 문제가 없을 것이고, 잠시 다녀오는 것 은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니 상관이 없겠죠?"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어쩐지 당신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그들을 일하게 할 때 이상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올 예정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오래머물지는않겠어요.설령용사형을만나지못하더라도,그가 있는 곳이나 그 내부사정을 알게 된다면 이내 돌아오도록 하겠어요." 황진의는 비록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오랫동안 용천기를 연모하여 마음속에 그 우울함이 쌓여있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더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 나서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좋소. 하지만 나로서는 한가지 그편에 부탁드릴 일이 있소." 황진의는 말했다. "그게 뭐죠?" 백방생은 말했다. "강남으로 가려면 아마도 정의맹의 총단을 거치게 될 것이 아니오"그 곳에 가서 이 금액을 군자금으로 써 달라고 전해 달라는 것이오." 백방생은 말과 함께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바로 오늘 아침에 찾은 황금 십만냥의 금표뭉치가 들어 있었다. 황진의는 그것을 받 아서 내용물을 살펴 보고는 이내 안색이 가볍게 변하며 말했다. "당신은 보기 보다는 현명하군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을 받았다. "나도 이제는 그들에게 아부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터득 한 셈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이 금액은 결코 적지 않아요. 당신은 내가 이 금액을 가지고 달아나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쩌려고 그러죠?" 백방생은 말했다. "아마 당신에게는 그 열 배를 준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황진의는 가볍게 미소했다. "고맙군요.나를그렇게믿어주니그런의미에서이일은잘처리해 드리도록 하겠 어요. 다만 다른 사람들을 너무 믿는 것은 곤란해요. 이를테면, 다른 사 람들에게 내가?" 백방생은 말을 자르며 말했다. "낭자가 멀리 떠났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그래요. 그리고 너무 많은 돈을 맡기는 것도 좋지는 않을 거예요. 견 물생심이라고 했으니까요." "알겠소." 식사후에 황진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짐을 정리한 다음에 바로 떠나갔다.백방생은황보헌등이머물두개의객실을더예약한 다음에 곧장 다시 시간이 늦기 전에 근처의 금포를 찾았다. 늘상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오히려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금포에는 흔히 남의 물건들을 보관시켜 주는 금고?金庫?라는 것이 있는데, 백방생은 자신의 예금장부 가운데 여덟개를 각기 분산해서 금 고안에 넣어 두었다. 그렇게 하면 설령 사고가 난다고 해도 한 두개일 것이고, 또한 그 예금장부의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거의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백방생은 가벼운 기분으로 십 만냥의 금표를 더 찾은 다음에 숙소로 돌아갔다. 헌데 백방생이 마악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의 일이었다. 느닷 없는 강한 기운이 그를 엄습했다. 그것은 누런 빛깔을 띠는 기운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빛줄기였는데, 백방생이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의 몸 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듯 뜨거워지고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 었다.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겪었던 그 어떤 암습보다도 무섭고 가공 스러운 손속이었다. "혼절했군요." 흡사허공에서울려나오는듯한음성이흘러나왔다.방문이닫히고 어느새 백 방생의 주위에는 두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 약초를 캐며 먹고 사는 늙은 부부처럼 보였는데, 그러나 자세히 보면 생김새도 다소 이상하고 어딘가 평범하지 않은 느 낌이 들게 했다. 하기는 조금전과 같은 수법을 펼쳐낸 사람들이어찌평 범하다고할수가있겠는가?다만백방생에게다행스런 일은 그 수법이 심하 게 작용하지 않아서 아직 그의 몸에는 거의 지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누런색의 옷을 입고 있는 노인은 피부도 누랬고 눈이나 모발까지도 한결같이 누런 색깔이었다. 그리고 백색의 옷을 입고 있는 노파는 피부 도 눈부시게 하얗고 눈이나 머리카락도 역시 하얀 색깔이었다. 백방생이 만일 지금 의식을 차렸다면 그들의 모습이 언젠가 보았던 사람들과 어 딘가 흡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필시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 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눈빛은 사람보다는 오히려 신 쪽에 더욱 가까 와져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을 공격한 사람은 황의노인 이었는데,이윽고그는 가볍게 손을 떨 쳐서 백방생을 침상위에 눕게 했다. 백방생은 마치 낙엽처럼 자연스럽 게 날아가 침상위에 누웠다. 문득 그 옆에서 잠시 백방생의 몸을 살피다가 백의노파(白衣老婆)가 다 시 말했다. "그의 몸은 어떻죠?" 황의노인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다. "그대가 보기에는 어떻소?" 백의노파는 잠시 숙고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의 몸과 마음은 재기하기가 어려울 만큼 둔하게 되어 버린 것 같군요." 황의노인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선(邪仙)과 마선(魔仙)의 이 수법은 확실히 고명한 것 같 소." 백의노파는 그 투명한 얼굴에 우려의 빛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일들이 천선(天仙)의 뜻대로 되어 가는 것인가 요?" 황의노인은 가볍게 침음성을 발했다. "과거에 무명노인(無名老人)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의 야망을 제지할 수가 있었소. 하지만 그는 이미 백년전에 죽었소. 아니 열반에 들었지?" 어디로 가서 그를 제지할 사람을 찾아야 할 지 모르겠소." 백의노파는 약간 화난 기색이었다. "당신은 그래도 이제까지는 그 당신의 잘난 후손인 계집아이를 통해서 그의 몸을 치료해 오지 않았나요 사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녀석은이 정도의회복도불가능했을거예요.그런데이제와서모든 희망을 포기하자는 말인가요?" 황의노인은 말했다. "사실 천선 하나만 해도 우리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소. 게다가 나머 지 다섯도 그를 추종하고 있으니, 우리가 그를 거역한다는 것은 이를테 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이오. 사실 그동안 내가 그를 돌봐왔던 것도 다소 위험스런 일이었소. 아마 앞으로는 천선이 더이상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오." 백의노파는 가볍게 한숨을 불어 쉬었다. "정말로 천하는 그의 것이 되어 가겠군요. 애초에 무명노인이 사라진 이상은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백의노파는 이어 마악 창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황의노인 이 손을 들어 제지하며 말했다. "잠깐, 한가지 이 녀석에게 기이한 일이 있소." 백의노파는 신형을 멈추며 말했다. "그게 뭐죠?" 황의노인은 백방생의 불룩한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은 어디서 생겨났는지 갑자기 많은 돈을 사용하고 있소. 혹시 그것이 황금충 의 보물을 찾은 것이 아닌가 해서요." 백의노파는 의아해 했다. "황금충의 보물을 찾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가요?" 황의노인은 말했다. "물론 많은 돈은 언제라도 중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 황 금충이 무명노인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오. 그 둘이 존재했던 시기는 거 의 비슷했고 또한 그 말년도 둘다 신비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오." 백의노파는 매우 놀란 표정을 했다. "아, 그렇다면 혹시 그 무명노인의 진전이 이 아이에게 전해졌을 지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황의노인은 말했다. "그건 오직 나의 추측일 뿐이오. 나로서는 그렇게 되었기를 바라지만 그 러나, 그럴 희망은 아무래도 없는 것 같소." 황의노인은 재차 백방생의 몸을 구석구석 살피며 눈빛이 무거워져 갔다. 백의노파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말아요. 모든 일들은 순리대로 되어 가겠죠. 그 가 대업(大業)을 성취하는 것이 운명이라면 우리도 그만 그 운명에 따 라야 하지 않겠어요"이렇게 우리가 오래 이곳에 머물다간 천선이 눈치를 채고 화를 내겠어요. 그도 사실은 이 아이에게 조금은 신경을 쓰는 눈치 이더군요." 황의노인은 가볍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어 그는 우수를 가볍게 쳐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황금빛의 기 운이 뻗어나와 백방생의 몸을 휘감는 것이었다. 백방생의 몸은 마치 그 서광속에 휘감긴 것 같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이윽고 그 의 몸이 다시 침상위에 내려졌을 때, 어느새 그 황금빛의 서광도 사라지 고 그 두 명의 기이한 노부부도 모습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백방생은 마치 오랜 단잠을 자고 난 사람과도 같았다. 그가 눈을 뜨자 느닷없이 눈앞에 낯익은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당리와 황 보헌 등의 다섯사람이었다. 백방생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니 그대들은 언제 여기에 와 있었소?" 그러고보니밖은어느새어둑어둑해져있었다.황보능파가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저녁무렵에 이곳에 왔죠. 헌데 당신이 너무나도 곤하게 자고 있 길래 깨우지 않은 거예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문득 자신이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정신이 아득했던 것을 상기했다. 그러나 왠지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침상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급히 품속을 만져 보았으나 그의 물건들은 모두 다 안전했다. 게다가 뜻밖에 도 그의 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쾌한 기운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 가"아마도 그가 오래도록 자고 있었던 것은 그 기운 때문인 것 같았 다. 백방생은 무심코 운기를 해보다가 경악을 하고 말았다. "아니 세맥(細脈)들이 모두 복구되었잖아?" 이제까지 있었던 진기가 새는 듯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전신 의 활력이 넘치면서 운기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닌가"비록 아직 세맥들 을 타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러나 이제 그것이 복구된 이상 은 앞으로 무학이 정진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백 방생은 이 기적과도 같고 꿈같은 현실을 일시 믿을 수가 없는 기분이 었다. "혹시 황낭자가 몰래 돌아와서 나를 치료해 주고 떠난 것이 아닐까?" 백방생은 일단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눈앞에 사람들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41 영웅(英雄)이라 불리우다 백방생은 먼저 다섯명 가운데 황보헌에게 말했다. "그래, 갔던 일은 소득이 있었소?" 황보헌은 미소하며 말했다. "사실 그런 일은 처음이지만, 그러나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있 겠습니까"우리는 되도록 많은 곳을 보아 두려고 했는데 그 중의 한 곳 은 새로 지은 집이었는데 대지는 백묘(畝) 남짓이고 큰 집들이 세 채가 있었는데 모두 이십오만냥을 달라고 하더군요." 중원에는 백은(白銀)이 기준이 되는 것이므로 그것을 황금으로 환산하 면 대략 만 냥 정도가 된다. 대지가 백묘 정도라면 그다지 커다란 장원인 것은 아니다. 백방생은 말했다. "금방 지은 것이라고"어째서 그런 집이 아직 임자가 없다는 말이 오?" 황보헌은 말했다. "본래 한 부자가 그곳에서 살려고 했는데 갑자기 파산을 하는 바람에 입주도 못하고 도로 내놓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가 본 바에 의하 면 건물들도 모두 훌륭하고 정원의 조성 등이 완벽하여 입주 후에도 별 로 일이 없게 되어 있었소이다." 더러 값이 많은 건물일 경우 그렇게 팔리지 않고 남아있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다.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그 가운데 하자가 있을 지도 모르오. 황보형께서는 내일 그곳으 로 가서 흥정을 하되 가격을 십오만냥정도까지 생각해보도록 하고, 그 리고 다른 곳도 함께 알아보도록 해 주시오." 황보헌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모두 가서 쉬시도록 하고 식사는 일층의 반점에서 하도록 하 시오. 그런 모든 계산은 내가 모두 할테니 수시로 청구하도록 하시오." 이어 각자 쉬어야 할 객실들을 정해주자 다섯사람은 모두 밖으로 나갔 다. 백방생은 혼자 남게 되자 다시 자신의 물건들을 확실히 조사한 뒤 에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감히 내 몸에 손을 대지 못했군. 만일 그랬으면 커다란 행운을 잡게 될 뻔 하지 않았는가?" 백방생은 방문을 잠근 다음에 욕실에서 몸을 씻고 새옷으로 갈아 입었 다. 그런데 그가 마악 잠자리에 들려는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당리가 점원들을 데리고 나타나는것 이었다.점원들은거실의탁자에술과음식들을늘어놓고 돌아갔고 당리는 방 문을 다시 안에서 잠그었다.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져서 말했다. "아니 나는 음식을 청한 적이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오?" 사실 백방생은 점심식사를 너무 늦게 해서 식욕이 별로 없었다. 스스 로 몸이 이상하기도 하여 그는 일찌감치 침상위에 올라 운기행공을 해 보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당리는 약간 싸늘한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나 역시 음식을 먹을 기분은 아니예요. 하지만 필요한 대화는 해야 하 는 것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 그렇다면 좋지요. 사실 그대들은 거의 내 부근에서 있어야할 사람 들이니 의문나는 점이 있다면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거기 앉으시 오?" 당리는 이미 새옷으로 갈아 입었고 또한 낮의 술취한 상태가 아니어서 왠지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했다. "황소저는 어디 갔나요?" 백방생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사했던 이유를 다소 알 것 같았다. 황보헌 등은 황진의가 무서워서라도 감히 일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녀는 일이 있어서 잠시 어디로 갔소. 헌데 무슨 일이오?" 당리는 말했다. "당신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죠?"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낭자는 물론 아름답고 능력 있으며 훌륭한 여자이오. 내가 혹시 낭자 에게 잘못한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당리는 말했다. "그건 아니예요. 다만 당신이 나를 신뢰하고 있다면 나의 부탁 한가지 는 들어줄 수 있을 것 같군요." 백방생은 사실 그녀가 이렇게 일부러 자리를 마련한 데에는 필시 무슨 부탁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백방생은 차갑게 눈빛을 빛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부탁이오?" 당리는 간단하게 말했다. "나에게 백만냥을 빌려 주세요. 그럼 모든 일이 잘 풀리게 될 거예 요." 백만냥이라면 바로 은자를 말하는 것이고 황금으로는 사만냥이다. 백방 생은 이미 그녀에게 황금 일만냥을 주었었기 때문에 다소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혹시 자존심이 높아서 황진의와 같은 액수로 계 약하고 싶어진 것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당리는 표정은 싸늘했지만 눈빛은 정색(正色)을 하고 있었다. 비록 간단하게 말한 듯 이 보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방생 은 필시 지금의 그 말이 함부로 생각할 수 없다고 느껴져서 신중하게 말 을 받았다. "만일 내가 그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낭자는 더이상 나와 거래를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들리는 구려?" 아까 당리는 대번에 십만냥의 황금을 말했었다. 헌데 다시 그런 얘기 를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일은 결코 농담이 아닌 사연이 있는 것 같았 다. 당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래요." 백방생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품속에서 금표의 뭉치를 꺼냈다. 그는 비록 지금 그녀의 사연을 알 수는 없었으나 이런 순간에서의 효과적인 대응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연을 말하 고 싶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기왕에 그녀를 신뢰하려는 것이라면 이럴 때에는 두말없이 주는 것이 좋다. 그것은 두 가지의 경우로, 좋다면 좋 은 것이고 싫다면 싫은 것이다. 백방생이 금표의 다발에서 사십개의 천냥짜리 금표를 세어서 건네주자, 일순 당리는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금표다발을 받았다. 그리고 품속에 잘 갈무리한 뒤에 말했다. "당신은..., 이제까지 제가 잘못 평가한 것 같군요." 백방생은 일단 일이 해결되자 마음이 편해져서 금표다발을 간수하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왜, 내가 돈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더라는 말이오?" 당리는 말했다. "최소한 이렇게 쉽게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어요." 백방생은 갑자기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식욕이 생기는지 허겁지겁 음식을 떠먹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너무 낭비가 심하다는 말이오?" 당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돈은 흔히들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들 하죠. 특히 이런 거액의 돈은, 그야말로 사람의 목숨도 살 수가 있는 법이예요. 많은 사람들이 돈을 더럽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것이 그만큼 필요하기 때문에 생긴 말 이예요. 심지어 사탕을 사먹는 삼척동자라도 그런 돈의 가치를 모르지는 않아요." 백방생은 고개를 쳐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했어야만 했다는 말이오?" 당리는 말했다. "여자에게는 흔히 순결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기도 하죠. 하지만 더러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생길 수도 있는 법이예요. 그것은 이를테면 최후의 자존심이고 현실이죠. 여자는 그런 것을 말하기를 원하지 않아 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잘했다는 말이오?" 당리는 말했다. "나는 이제까지 당신을 그저 어수룩하게만 보아 왔죠. 그러나 이런 미 묘한 일에 있어서 분명한 판단력과 결단력, 그리고 포용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예요. 흔히 한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다고 했죠. 당신은 알고보니 숨은 영웅(英雄)이었군요." (영웅이라고"내가...?) 확실히 남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기분이 나쁘지 않다. 게다가 황금을 사만냥이나 썼는데 그런 칭찬 한마디 듣지 못한다면 오히려 억울한 마 음이 들지도 모른다. 백방생은 웃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고맙소. 그렇게 나를 잘 봐주니. 앞으로 나를 좀 많이 도와주시기를 바라겠소." 당리는 잠시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은 앞으로 이 많은 액수를어떻게 돌려받을 것인지 생각해 보았 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마도 당신은 가난한 편일테니 그게 쉽지 않을 것이오. 아, 이러면 어떻겠소"한 사년 정도 더 나를 위해 일해주는 것이. 거기에서 일년 정 도는 감해줄 수도 있소만." 당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이미 나이가 찼으니 그렇게 오랫동안 시집을 가지 않고 당신의 호위를 맡아 줄수는 없어요. 그러나한가지 방법이 있죠. 그건 당신이 그 돈으로 저를 사는 거예요." 백방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다니"그게 무슨 말이오"그럼 당신이 기꺼이 나의 부인이 되겠다는 말이오?" 당리는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그저 저를 정실(正室)이 아닌 첩으로만 생각 해도 좋아요. 저는 당신이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맞아들이려고 할 경 우, 그것을 질투하지는 않겠어요." 백방생은 그만 놀라서 입이 다 벌어졌다. 갑자기 눈앞의 당리의 모습이 지극히 요염한 꽃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실 여자들은 그와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 당리는 비록 강호의 여인이기는 해도 여자다. 그녀는 지금 할 수 없는 말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 아주 민감한 사항을 백방생은 결코 장난삼아 대할 수가 없었다. 백방생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에게 너무 손해보는 일이 아니오?" 당리는 가볍게 자조의 웃음을 떠올렸다. "그것이 저의 정해진 운명(運命)이라면 결코 손해본다고 생각할 수도 없죠."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나는 생각하기에, 우리가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가 나중에 우리가 서로 좋아지게 되면 혼인을 할 것이고 나의 재산도 그 대의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오. 그러면 거기에 무슨 부채가 남아 있겠소"그리고 만일 당신이 나중에 다른 돈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더 라도 또한 능히 그 돈은 갚아줄 수가 있는 것이 아니오?" 당리는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위해서 선택을 뒤로 미루자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런 셈이오. 사실 나는 기왕에 준 것이니 그 돈은 앞으로 받지 않아 도 무방하오. 그러니 공연히 서둘러서 스스로의 모든 꿈을 포기하지는 말라는 말이오." 당리는 말했다. "당신은 혹시 내가 싫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전에 사실 가능하면 증낭자와 살림을 차리려고 했었소. 그녀의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오. 헌데 그녀도 나를 버리고 떠 났고 이제 나는 외톨이인데 어찌 감히 낭자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소"사실 낭자는 세상에서 내가 본 세 명의 아름다운 낭자들 가운데 의 하나요." 당리는 말했다. "혹시 그 두 명은 황소저와 진소저가 아닌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실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낭자인데 그 녀는 나를 멀리하고 있고, 또한 황낭자는 다른 사랑하는 연인이 있소. 내가 만일 낭자와 인연이 맺어지게 된다면 그것은 나의 커다란 행운일 것이오." 당리는 그 말을 듣자 일순 몸을 일으켜서 그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한쪽 뺨에 깊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와요." 백방생은 일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자에게 입맞춤을 당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문득 진한 말리향(茉莉香)의 향기가 가슴 깊이 느껴 지는 것 같았다. 당리는 이어 잠시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백방생은 갑자기 입맞춤을 당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 참후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는 마치 허기진 배를 채우기라도 하듯이 부지런히 먹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그는 열심히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없어! 믿을 수가 없어!) 그날 밤에 백방생은 너무나도 과식을 한데다 정신이 혼란스럽고 몸이 달아올라서 도저히 운기행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간신히 새 벽녘에 잠을 잘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백방생이 뒤늦게야 잠이 들어 거의 점심때까지 골아 떨어졌을 때 이윽 고 그를 깨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리와 황보능파였다. 당리는 특히 어 제보다도 산뜻한 담황색의 의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표정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가 않았다. 대체로 말이 없는 편이었고 오히려 말이 많은 쪽은 황보능파 였다. 백방생은 그녀의 표정이 지나치게 냉정해 보여서 혹시 간밤에는 혼자서 꿈을 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황보능파는 겨우 게으름을 피우며 일어난 백방생을 향해 말했다. "오늘 아침 일찍이 저의 오라버니와 팽씨형제는 다시 그 장원으로 가서 거래를 해 보았어요. 그리고 다시 돌아왔는데 흥정이 매우 어렵다고 하 는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황보능파는 말했다. "지금 일층의 반점에서 식사를 하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옷을 갈아입고 내려갈 테니 거기에 내 아침식사도 주문해 놓으 라고 하시오." 당리와 황보능파는 이에 아래층으로내려갔다. 하지만 이내 당리는 다시 위로 올라와서 말했다. "당신은 모든 일을 까다롭게 할 생각인가요?" 백방생은 세수를 마치고 나서 새옷으로 갈아입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 다. "아니오. 나는 돈보다는 일할 사람이 더 필요한 상태요." 당리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겠어요." 백방생은 이내 그녀의 말뜻을 헤아렸다. 사실 황보헌 등은 지모도 출 중하고 보통의 젊은이들이 아니다. 당리의 말은 그들이 이미 적당한 선에서 흥정을 마쳤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실 그들은 명문의 자제들로서 그런 일을 맡아할 위인들이 아니었다. 이번에 보다 많은 국물을 먹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결코 신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백방생 은 무엇보다도 그런 얘기를 몰래 와서 해 주는 당리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게 여겨졌다. "알겠소." 백방생이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자, 당리는 문득 가볍게 웃더니 스스로 손을 풀고 아래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자연 그 뒷모 습을 보며 간장을 태웠다. (말 사람의 애를 녹이는군?) 이윽고 백방생이 장검을 허리에 차고 옷과 귀중품 보따리까지 들고 아래로 내려가자 과연 다섯 명의 사람들은 음식을 시켜놓고 그를 기다 리고 있었다. "모두 잘 주무셨소?" 백방생이 인사를 하며 자리하자, 황보헌이 곧장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 장원의 매입문제는 오늘 아침에 가서 마지막 흥정을 했습니다. 그 쪽에서는 이십사만냥 이하로는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다 른 곳을 새로 알아보도록 할까요?" 이십사만냥이라면 원래의 이십오만냥에서 겨우 은자 만 냥을 깎은 것이 된다. 그것은 백방생이 십만냥을 깎으라고 한 말에 비하면 어림도 없는 액수인 것이다. 백방생은 속으로 약간 화가 나서 생각했다. (세상에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네가 만약 십 만냥을 깎은 것이라면 나머지 구만냥은 거저 먹으려는 속셈이라는 말 인가?) 사람들은 그가 곰곰히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보고 다소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때 문득 당리의 전음소리가 들려왔다. (상공!) 백방생은 당리의 얼굴을 돌아 보았다. 당리는 약간 초조한 듯한 기색 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방생은 기실 그녀가 상공이라고 부르는 말에 매우 기분이 좋아져서 그녀를 본 것이었다. 그는 즉시 전음으로 말 했다. (걱정 마시오. 이 낭군은 바보가 아니오.) 당리는 그 말에 다소 안색이 붉어졌다. 백방생은 이어 황보헌과 팽씨형 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대략 십오만냥이면 될 줄로 알았는데 그 저택의 주인은 흥정에 있어서 분수를 모르는군. 하지만 사실 급한 것은 우리쪽이니 할 수 없는 일이오. 내가 그까짓 돈 몇푼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오. 다 른 곳을 알아볼 필요는 없고, 그 장원으로 정하도록 합시다. 에에...은 만냥으로는 우리가 오늘 저녁에 그곳에 입주해서 치르는 입주식의 비 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소?" 황보헌 등은 내심 초조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그와 같은 화통한 소리를 듣고 저마다 무심결에 기쁜 기색들을 드러냈다. 황보헌은다소 생각하다 가 말했다. "백형, 그렇게는 안 되겠소."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우리가 오늘 입주할 수 없다는 말이오"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소?" 황보헌은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오. 분명히 오늘 입주할 수가 있고 이미 말한 그대로이 오. 하지만 그 남은 일만냥의 은자를 그토록 헛되이 쓴다는 것은...,아무 래도 안 되겠소이다. 만일 그렇게 낭비한다면 남들이 우리에게 손가락질 을 하지 않겠소"입주식의 비용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시오. 내 기필코 그 주인에게 몇천냥의 은자를 더 감하게 하여 그것으로 비용을 쓰도록 하겠소." 백방생은 속으로 웃었지만 겉으로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게 해 주겠소"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나로서는 대환영이오.그 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오늘밤부터는 내집에서 지내도록 합시다. 일할 사람들을 빨리 구해 놓으시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 여러분은 앞으로도 계 속 수고해 주셨으면 하오." 황보헌은 그제서야 다소 예의를 갖추며 포권하며 말했다. "알겠소. 우리는 이미 수고비를 받았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시오." 백방생은 즉시 품속에서 일만냥에 해당되는 금표를 세어 주었다. 그 가운데 나머지 은자 만 냥은 기타 입주하는데 드는 비용으로 주는 것 이었다. "저녁때까지는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불초는 이만 떠나도록 하겠 소." 황보헌 등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 세 사람이 함께 밖으로 나 가자 백방생은 이윽고 두 명의 미소녀와 식사를 했다. 황보능파는 문득 식사를 하다가 궁금한 듯이 말했다. "백공자는 제가 보기에는 정말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 요.저는 이제까지 일만냥의 은자를그토록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사실 그럴만 하니까 그러는 것이오. 여러분은 장차 무림을 짊어지고 나 갈 기둥이 되실 분들인데, 이렇게 나를 도와주시니 어찌 감히 푼돈을 아 낄 수가 있겠소?" 황보능파는 다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백공자의 재산은 대략 얼마나 되죠"한 황금 백만냥 정도 되나요?" 백방생은 미소했다. 그것은 황보능파가 스스로 한껏 생각한 금액일 것 이다. 백방생은 지금 가지고 있는 예금장부들의 금액도 그와 비슷하므로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가 보오." 황보능파는 일순 크게 놀란 빛을 보이며 짐짓 큰절을 하는 시늉을 했 다. "그렇다면 앞으로 저희가 더욱 잘 보여야 하겠군요. 그래야만 갑부이신 백공자께서도 저희들에게 잘 대해 주실 것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여러분은 저에게 잘 하고 있으니 염려 마시오. 그보다, 오후에 는 두 분이 휴식을 취할 겸 시장에나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소?" 백방생은 역시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그는 당리와 황보능파를 번화 가의 시장으로 보내놓고 다시 자신의 객실로 돌아왔다. 그는 바로 간 밤에 못다한 일들을 해보려는 것이었다. 장원이 비록 그의 것이기는 하 겠지만 황보헌 등과 함께 있게 되면 자칫 무공을 연마할 시간이 없어지 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일단 객실의 침실에 들어선 다음에 안팎의 모든 문들을 닫고 바닥에 정좌하고서 운기행공(運氣行功)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공력이 상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맥 들이 복구되기 전의 일이었고, 지금은 오히려 세맥들의 작용으로 그 흐 름이 순탄하지가 않았다. 만일 그것을 내버려 두면 점점 더 운기에 장애를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심마(心魔)와도 통하는 것이었 다. 그러한 것들을 제거하는 데는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없었을 때는 작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생겨남으로써 작용하게 되 는 것이므로, 백방생은 필히 상승의 공력을 오래도록 단련시켜서 그 새 로 생겨난 세맥들의 작용을 순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을 게 을리 하게 되면 서로간의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심하면 결국에는 진기가 서로 부딪치고 사방으로 흘러가서 반신불수나 사망에 이르게 하 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단련시키는 것이므로 다소 어렵 고도 지루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백방생과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더 라도 이러한 과정은 대부분 거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백방생은 끈기있는 마음으로 진기를 움직이고 이어 빠르게 혹은 느리게, 무겁게 혹은 가볍게 그가 알고 있는 내공심법(內功心法)에 의해 십이주 천(十二周天)을 했다. 진기의 흐름은 처음에는 과연 순탄하지 못했다. 그의 공력은 황화예의 경지에 올라 있었으나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무공도 일류경지였다. 그것 은 세맥들이 회복된 지금의 경우에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대주천반운 (大周天搬運)에 완전히 장애가 없어져야 비로소 그 무공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처음에 백방생은 서서히 운기되도록 했으므로 전신에서 스며나오는 안개와 같은 기운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주천이 거듭될 수록 그 기운의 양은 많아져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맥들이 안정되고 탁한 기운이 사라지며 백맥(百脈)들이 서로 호응하게 되자 비로소 그의 체내에 머물고 있던 사갑자(四甲子)의 공력이 모두 발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이미 구주천(九周天)으로 접어들고 있었으므로 막대한 진기가 일어나도 그다지 위험성은 없었다. 비로소 보통 사람들처럼 체내의 공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직 약간의 탁기가 남아 있기는 해도 그것은 심한 장애가 되 지 못했다. 이윽고 그의 전신이 하나의 둥근 공과 같은 막(幕)에 휩싸여 보이지 않게 되자 그의 운기행공도 서서히 정점(頂點)에 오르기 시작했 다. 마지막 십이주천에 이르러서는 문득 그의 머리위 세 치 정도에 다 섯빛깔의 오장(五腸)의 기(氣)가 모이고 이어 그 속의 정(精)으로부터 홍 화(紅花)가 나타나고 기(氣)에서 은화(銀花)가 나타나고 신(神)에서 금화 (金花)가 나타났다. 바로 오기조원 삼화취정의 재현인 것이다. 그것은 이제 그의 공력이 순후해 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로서 그의 운공은 일단 성공한 셈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운공을 끝내고 나자 갑자기 전신을 감싸던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 다. 물론 삼화취정 오기조원의 현상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의 두눈에 서는 아주 맑고 부드러운 기운이 흐르는데, 안색은 혈색이 좋았고 뚱뚱 했던 허리의 살도 어느 정도는 줄어든 것 같았다. 백방생은 이제 자신 의 무공이 명실공히 절정경지에서도 마지막 부분인 사갑자의 경지에 이 르렀음을 알고 기뻐하며 내심 생각했다. (누군가 나의 세맥들을 회복시켜 주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경지에도 오르기 어려웠으리라. 황낭자는 그것이 어렵다고 했는데 혹시 다른어떤 사람들의소행이아닐까?그날나를습격했던.... 어쨌든 일단 내가 이렇게 되 었으니 다행이다. 앞으로는 좀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살아갈 수가 있 겠군!) 백방생은문득자신이이러한경지에서사용할수있는무공수법에 대해서 생 각해 보았다. (소림본사의 무공을 써야할까, 아니면 달마하원의 무공을 써야할까"아 무래도 달마하원의 무공과 그 자부문의 무공을 가끔씩 섞어서?) 그 때 문득 그의 귓전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매우 귀익은 음성이었 는데 바로 시장을 나갔던 당리와 황보능파의 음성이었다. 아마도 그녀 들은 이제 마악 돌아와서 방문앞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 었다. 백방생의 무공이 크게 진전되어 그런 일종의 천청대법(天聽大法) 의 기초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언니는 어째서 그렇게 갈수록 여유가 없어지는 거죠? 어째서 남궁언니 를 보고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나요"남궁 둘째 오라버니가 정말로 그 진소저와 혼인할 것 같은가요?" 황보능파의 말에 당리는 다소 냉랭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아무런 말도 마. 나는 고작 그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게 아냐. 나는 이미 참을 수 없는 굴욕을 경험했어. 다시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아." 황보능파는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대체 앞으로 어쩌려는 거죠?언니의 아버님께서 그 일을 가만 히 두고 보실 것 같은가요" 제가 보기엔 역시 언니가 참는 게 좋겠어요. 남자들이란 으레 한번씩은 다 그런다고 하지 않나요?" 당리는 말했다. "그럼 나더러 기다리다가 그가 돌아오면 남편으로 맞아들이라고?" 황보능파는 말했다. "그럼 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요? 혹시..., 언니는 그 (白公 子)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당리는 무겁게 말했다. "그, 백공자는 좋은 사람이야." 이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당리가 말을 하고 나서 바 로 문을 두드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한 입에 두말을 하는 여자는 아니로군!)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몸을 일으켜서 나가 방문을 열었다. 밖에서와 는 달리 황보능파는 안으로 들어서자 다소 호들갑을 떨었다. "어마, 무슨 일을 했길래 이 방안은 이렇게 후덥지근하죠"밖은 한겨울인 데 이곳은 한여름이로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하도 심심하고 해서 잠시 운동 좀 했소." 황보능파는 대강 그의 안색을 살피다가 말했다. "백공자, 우리가 이번에 밖에서 누굴 만났는지 아나요?" 백방생은 당리를 돌아 보았다. 당리의 표정은 왠지 더욱 싸늘해져 있었 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혹시 친구분들을 만나고 온 것이 아니오?" 황보능파는 웃으며 손뼉을 쳤다. "어마 어떻게 그리 잘 알죠"우리는 방금전에 당언니의 남동생인 당독 (唐獨)과 남궁지약(南宮芝若), 남궁언니를 만나고 왔죠. 그들은 지금 요 아래에 있는데, 한번 만나 보시지 않겠어요?" 백방생은 문득 이전에 당독과 남궁지약이 서로 다투던 광경을 떠올렸 다. 사실 그로서는 그들 가운데의 누구와도 반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침 이곳을 정리하고 나가려던 참이었소. 자, 잠시만 기다렸다 가 함께 나가기로 합시다?" 중요한 물건들은 모두 품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정작 백방생이 손에 드는 물건은 별로 없었다. 그는 이곳을 떠날 작정으로 짐을 정리한 다 음에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계산을 마쳤다.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 지는 저 녁 무렵이었다. 당리, 황보능파와 함께 반점으로 나가 보니 과연 눈에 익 은 두 사람이 탁자의 한쪽씩을 차지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이미 식사를 마쳤는 지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백방생이 다가갔으나 그 두 사람은 일어나지 않았고 시종 냉랭한 분위 기는 마찬가지였다. 백방생은 다소 무안한 기분이 들었으나 먼저 그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다시 만나는 군요.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다행입니 다." 백방생이 말과 함께 자리하자 문득 남궁지약이 다소 퉁명스럽게 내쏘 았다. "당신이 우리를 만나고 싶었다고요"그건 대체 무슨 이유에서 이 죠?" 백방생은 두 사람이 자신을 대하는 시선이 곱지 못한 것을 보고 미소 하며 말했다. "두 분은 강호의 기재(奇才)요 가인(佳人)들이십니다. 소생은 무능부덕한 사람으로서 평소에 두 분을 흠모해온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당리와 황보능파는 백방생의 좌우에 앉아서 초조한 기색을 하고 있었으 므로 좌중의 분위기는 흡사 살얼 음판을 지나는 것 같았다. 남궁지약이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정말 말로만 번드르르 하게 하는군요"좋아, 묻겠어요"대체 당신은 어째 서 우리 양 가문(家門)의 일에 나서서 분란을 조성하는 거죠"우리 두 가 문이 그리 만만하게 보이나요?" 백방생은 가볍게 웃었다. "소생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낭자께선 혹시 무슨 근거라도 있 습니까?" 남궁지약은 오른손으로 탁자를 쾅,하고 내리쳤다. 그 바람에 값비싼 탁자가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네놈은 지금 온갖 수단을 부려서 저사람들을 수하로 부리고 또한 당 낭자를 우리 가문과 멀어지게 하니 그게 분란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주변의 점원들은 그렇지 않아도 근처에서 전전긍긍해 하며 지켜보고 있다가 남궁지약이 탁자를 망가뜨리는 것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이런 빈관의 탁자는 결코 일반 반점의 탁자들처럼 평범한 것들이 아니었다. 최고급의 재료를 사용하여 단체로 주문한 것이며, 거의 여유가 없으므 로 망가지면 또 단체로 새로 주문해야 한다. 아니 설령 그 탁자 하나만 계산해도 은자 수백냥은 될 것이다. 하지만 일행이 모두 병장기를 휴대 하고 있고 또한 남궁지약의 손속이 실로 무서웠는지라 아직 누구도 다 가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낭자께선 오해하고 계시는 구려. 지금 내가 이분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이분들이 자청하여 하는 정당한 거래일 뿐이지 무슨 수하로 부리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누구의 분란을 조성하는 것도 아니외다." 남궁지약은 다시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렇다면 어서 즉시 그 모든 계약을 취소해라!"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낭자는 너무 사람을 업신여기는 구려. 우리들의 거래는 정당한 것으로 서 내가 취소를 하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데 그럼 낭자가 그 책임을 지실 수가 있다는 말이오?" 남궁지약은 즉시 우수를 장검의 손잡이로 가져가며 말했다. "미친 놈! 나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만일 네가 즉시 내 말을 따르지 않 으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백방생은 이 암코양이와 같이 생긴 낭자가 극단적으로 발분하여 나오 자 그만 입장이 난처해 졌다. 42 장 찾아오는 손님들 백방생은 난처한 입장을 모면하기 위해 옆의 황보능파에게 말했다. "낭자 ! 저 남궁낭자가 내 말은 믿지 않으니 직접 말씀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소" 지금 우리의 거래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시오"" 황보능파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남궁지약을 향해 말했다. "그건 맞아요,남궁언니.우리는 먼저 황소저와 의논을 했고,그리고 모두가 찬성을 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나름대로 이익을 보고 있고요." 남궁지약은 말했다. "그럼 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는 말이냐?" 황보능파는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저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는 문제죠. 나중에 모든 사람 들과 상의를 해야..., 그리고 우리의 일은 언니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넌가요 " 언니는 어째서 당사자는 놔두고 저희에게만 그만 두라고 하는 거죠"" 남궁지약은 이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럼 당리. 너 혼자서 일을 그만 두도록 해. 우리 오빠는 지금 한눈을 팔고 있지만 그러나 금방 돌아오게 될 거야. 네가 어떻게 감히 우리 가문 을 배신할 수가 있다고 생각해"" 당리의 나이는 남궁지약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그러나 당리는 남궁 지약의 말에 그저 화를 내는 기씩도 없이 묵묵부답이었다. 그것을 보던 당독이 이윽고 가볍게 탁자를 치면서 말했다. "어째서 우리 누이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시오"우리 누이는 피해자일 뿐이오. 오히려 배신한 쪽은 상형(常兄) 이 아니오"" 남궁지약은 눈살을 찌푸리며 당독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정말로 우리 가문과 인연을 끊겠다는 소린가"" 당독은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니오. 하지만 만일 검상형이 정말로 그 진낭자와 혼인을 해버려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 때는 어찧게 하겠소" 우리 누이는 그 저 기다리다가 굴욕을 당하는 것이 아니겠소"" 남궁지약은 다소 안색이 변했으나 지지 않고 말했다.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우리 오라버니는 결국 돌아오겠지만 그러나 설령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나의 아버넘께서 응당한 보상을 해 주실 거다. 우리 남궁세가는 너희 사천당문처럼 가난뱅이는 아냐. 그렇게 되 면 너희들은 오히려 앉아서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냐" 따라서 만일 너희들에게 양심이 남아 있다면......." 당독이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설마하니 첩실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말이오?" 남궁지약은 말했다. "물론이다. 그 은자 백만냥이 무슨 아이 이름인줄 아느냐"" 당독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우리 누이는 비륵 정혼(定婚)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아직 혼례를 치른 것은 아니오. 그런식으로 나온다면 결코 그 혼인을 못하게 하고야 말겠소 !" 남궁지약은 싸늘하게 웃었다. "우선 그녀에게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 " 이어 그녀는 당리를 주시했다. 당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녀는 남 궁지약이 그렇게 소리쳐도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한 표정이었다. 이에 옆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백방생은 몸을 일으켰다. 좌중의 시선이 모이자 그는 정색하고 웃으며 말했다. "좋소,좋소 ! 내 모든 책임을 지겠소.내가 감히 무림의 양대 가문을 해롭게 할 주는 없는 일이오 이 일은 나로 비롯되었다고 합시다. 내가 저분 남궁낭자의 뜻대로 하기로 하겠소. 나는 이제까지 여러분에게 선 불로 일을 해줄것을 계약했는데. 그러나 내 스스로가 그 계약을 취소하 니 그 금액들은 모두 돌려받지 않는 것으로 합시다. 당낭자, 황보낭자 ! 두 사람은 이제 나의 호위가 아닌 자유이오. 그리고 그 내가 준 돈들, 이를테면 어떤식이든 간에 내가 준 그 돈들은 모두 앞으로 갚을 필요가 없는 것이며 그대들이 전액 다 갖도록 하시오. 나에게 돌려줄 필요가 없소. 나는 그것이 없더라도 여전히 얼마간의 돈은 있으니까. 그리고 이 러한 사실을 나머지 세사람에게도 알려주도록 하오 ! " 백방생의 그 말은 느닷없는 것이었고 또한 매우 뜻밖이었다. 황보 능파 둥과 심지어 남궁지약, 당독까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백방생을 바 라보았다. 사실 백방생의 그 말은 당리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그는 자 신이 빌려줬던 그 돈이 그녀에게 몹시 필요한 것임을 간파하고, 그녀가 보여주었던 다정함에 대한 댓가로 그것을 그냥 주기로 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러한 내용을 분명하게 인식시키느라 잠시 횡설수설하는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당리는 그 말뜻을 알았는지 여전히 무 표정하고 묵묵했다. 반대로 옆의 황보능파는 공짜로 많은 돈을 갖게 된 셈이라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백방생은 이어 남궁지약에게 말했다. "낭자, 나는 이만하면 모든 성의를 보인 셈인데, 이 정도면 만족하겠 소?" 남궁지약은 안색을 어느새 다시 차갑게 굳히고 말했다. "흥 ! 이제서야 제법 철이 든 모양이군." 백방생은 더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포권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자,그럼 소생은 더이상 필요가 없을테니 이만 실례하기로 하겠소.당 낭자, 황보낭자 ! 그간 고생하셨으며 다음에 다시 뵙게 되기를 바라겠 소" 이어 백방생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그 때 마침 황보헌이 팽씨 형제 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황보헌은 이미 그 저택을 매입하고 모 든 장부와 서류를 가지고 오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 장부들을 받은 다 음에 이윽고 다른 자리에 알아서 조금전에 자신이 말한 취지를 간략하 게 설명했다. 황보헌과 팽씨형제는 다소 기이한 표정으로 그쪽의 탁자를 건네다 보았다. 그러나 기실 그들은 이번에 이미 많은 돈을 도중에서 착복했다. 앞으로 다시 그런 기회가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오히 려 은근히 잘됐다는 얼굴들이었다. 백방생은 그들과도 작별하고 이윽고 자신의 새로운 장원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황보헌 등이 매입한 그 작은 저택은 확실히 잘 지어진 새집이었고 또한 곳곳의 구조물들이 흘룽했다. 황보헌 등은 비록 중간에서 많은 은자를 착 복했지만 그래도 집은 좋은 것으로 고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금방 그 장원을 찾을 수가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그 장 원의 크기는 진소유의 것보다는 다소 작은 편이었으나 매우 호화로운 느 낌을 주었다.장원의 안팎에는 무수한 둥불들이 걸려 있어서 환하게 밝 혀주고 있었고 몇몇 일하는 사람들이 주변을 정리하고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황보헌 등이 불러놓은 사람들인 것이다. 백방생은 세 개의 전각들 가운데 가장 큰 본채의 안으로 들어가서 이 를테면 가주가 사용할 만한 가장 훌륭하고 편안한 거실로 올라갔다. 그 옆에는 역시 호화로운 침실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정말 이런 곳이라면 평생 살아도 부족함이 없갰군 ! ) 단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혼자 적적한 분위기를 느꼈으나 이내 침실로 가서 잠들어 버리고 말았 다, 오후에 심한 운기행공을 했기 때문에 그런지 잠을 자는 데에는 별 로 문제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식탁위에는 음식상이 차려져 있었 다. 바로 겨우 열명도 안되는 하인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백방생 은 곧장 그들을 불렀다. 그들을 부리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먼저 자신이 이 장원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시킨 후에, 이윽고 각 자에게 적당한 보수를 정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다행히 근처의 빈민가에 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일도 잘했지만 별로 야만심이 없었다. 백방생은 그들과 얼마간의 대화를 나누고 나서 비로소 사람을 구하는 것이 실상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집사가 될 사람을 뽑았고. 이어 그쪽에서 좀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 요리사와 시녀, 장원의 호위 둥을 포함한 남녀 하인들의 숫자를 모두 삼십여명으로 늘려 놓앗다. 빈민가에는 늘상 일하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역시 어렵지 않았다. 백방생은 집사에게만 다소 차등을 두고 나머지에게는 모두 일률적으로 은자 백 냥씨의 월급을 선불로 주었는데, 그 액수가 매우 파격적이어서 하인들의 사기도 높아졌다. 그렇게 많은 식구가 한꺼번에 장원내에서 살게 되자 그 비용도 자연 많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백방생은 집사에게 월급을 포 함하여 오천냥의 은자를 맡겨 놓고서야 비로소 편안해 질 수가 있었다 그렇게 장원내의 일을 하는 동안에 어느덧 사흘이 홀러가게 되었는데, 백방생은 그날 저녁에야 비로소 그 장원이 자신의 소유라는 기분을 느 낄 수가 있게 되었다. 그의 거처 주변에는 빈민가에서 잘 가려뽑은 두 명의 십오륙세 가량의 소녀들로 시중을 들게했는데, 그녀 들도 이미 고 액의 급여를 받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고 백방생은 장원의 안에서 편 안하고 쾌적한 생활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장원을 이루기를 소망했는데 뜻밖에도 그것이 쉽게 이루어진 셈이었다. 헌데 다음날 백방생이 아침산책을 마치고 나서 시녀아이가 따라 주는 차를 마시고 있는데 문득 그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현재 백방생을 찾아올 만한 손님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백방생은 느 닷없이 웬 도인(道人)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혹시 누군가 잘 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따. 그런데 뜻밖에도 그게 아니었다. 백방생이 서둘러 나가보니 용모가 몹시 청수하고 고아한 기질이 풍기는 노도인 이었는데 등에 장검을 메고 있었고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백 방생은 문득 그 기억을 떠을리고는 다소 놀라서 말했다. "아니,흑시 무당파(武當派)의 옥양(玉陽)장문인이 아니십니까"" 바로 현재 정의맹에서 천당 (天堂)의 당주직을 맡고 있는 그 사람인 것이다. 백방생은 물론 그를 당시 정의맹의 총단에서 보았었다. 비록 무 림의 최고원로급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무당장문인의 위치는 대 단한 것이었다. 백방생은 설마하니 그가 한명의 시동도 데리고 오지 않고 흔자서 방문하게 될줄은 몰랐다. 물론 그가 갑자기 백방생을 방문 한 원인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백방생이 건네주라고 한 그 십만냥의 금표뭉치 때문일것이다. 정의맹의 천당의 당주가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 을 보면 필시 황진의가 정확히 그 금액을 전달한 모양이었다. 옥양도장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미소하며 말했다. "무량수불, 무림의 신예(新銳)인 백공자를 이렇게 보게 되니 반갑소 보아하니 듣던 것보다 더욱 신수가 훌륭하구려!" 백방생은 문득 가슴이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그의 무공경지는 갑 자기 크게 진전된 것이었다. 그것은 황진의도 아직 모르며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옥양도장은 금새 그러한 경 지를 알아보는 것 같지 않은가"백방생이 바라보니 지금 옥양도장의 두눈 에서는 흡사 찌르는 듯한 맑은 신기(神氣)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 다. 백방생은 역시 무당 장문인은 명불허전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말했 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도장께서 소생의 누추한 집에 찾아 주시 니, 실로 뭐라고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 요 !" 옥양도장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더니 그를 따라 장원 의 안으로 들어섰다. 이 장원은 새로 지은 것이고 또한 하인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무척 깨끗하고 화려하며 고아한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는 상태였다. 옥양도장은 그런 광경을 두어 번 살피는 듯 하더니 백방생을 향해 말했다. "백공자께서는 나이도 많지 않은데 이렇게 다복(多福}하시구려 이런 복을 만민(舊民}과 함께 누리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백방생은 그가 자신의 지나친 호사를 나무라는 듯이 말하는 것을 들었 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대꾸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윽고 백방생은 옥양진인을 전청(前廳)의 자리에 모시고 시녀들로 하 여금 다과를 내오게 했다. 한모금의 차를 마시고 나자 양진인은 불호와 함께 말했다. "이번에 백시주께서 본맹에 그 많은 자금을 기부하신 것을 맹주(盟主) 께서도 매우 고마와 하고 계시오이다. 백시주께서 젊은 나이에 그와 갈은 식견을 가지고 계시다니 실로 다행한 일이오." 백방생은 그가 긴 수염을 어루 만지는 것을 보고 미소하며 말했다. "소생은 그저 미력한 힘이나마 강호의 일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고 바랬을 뿐입니다. 또한 전날의 맹주님과도 인연이 있었고요. 하지만 만 일 이떻게 감히 도장님을 오시게 할 줄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옥양진인은 다소 우려의 빛을 떠올렸다. "무량수불, 당금의 무림정세는 실로 혼미하여 결코 나 개인의 위치만을 고집할 수 있는 때가 아니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발벗고 나서도 될까 말까한 현실이지요. 백공자는 무립의 현정세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시오 "" 백방생은 말했다. "관심은 있지만 아직 잘은 모릅니다. 저는 많은 친구들과 사귀고 싶지 만 그것도 어렵고요. 그것은 소생이 비천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옥양진인은 기다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볐다. "백공자는 달마하원의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 말씀이 사실이오"" 당연히 옥양진인은 이곳으로 오기 이전에 백방생에 관해서 많은 조사 를 했었을 것이다. 백방생은 말했다. "저의 선친께서 바로 이전의 달마하원의 주지였던 홍엽선사(紅葉禪師) 였지요. 그래서 덕분에 그곳의 무학들을 배우기는 했으나,정식의 제 자는 아닙니다." 옥양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엽도우에 대해서는 나도 익히 들은 바가 있소. 비록 한번 만 나보지 는 못했지만 그는 달마하원 사상 뛰어난 기재라고 했었는데, 무량수불 ! 그 후인이 백공자라니 다행이외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저 선친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옥양진인은 그의 얼굴을 한번 주시한 후에 말했다. "달마하원과 남해보타도가 그렇게 멸문당하고 말았다는 얘기는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오. 듣자니 백공자는 사람들을 구하고 있다는데 흑시 그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이오?" 백방생은 말했다. "저는 조부님과 부모님이 그떻게 갑자기 참변을 당하셨기 때문에 물론 그 일올 규명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일은 강호 무림의 일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요. 하지만 워낙에 저의 능력이 부 족하다 보니 누구도 저를 믿지는 않는 것 갈습니다." 옥양진인은 말했다. "무량수불.내 지금 와서 친히 백공자를 보니 현재 강호의 소문이 와전 된 것임을 알 수가 있겠소이다. 백공자는 비단 다복할 뿐만 아니라 무 공도 대단히 높은 기재(奇才}이오 역시 홍엽도우의 기재를 물려받은 듯 하오. 만일 백공자가 옳은 일을 하고자 한다면 누가 돕지 않겠소""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소생이 감히 여러 친구들을 사귀고 싶어서 정의맹의 선배 고인 들께 귀찮음을 드리게 된다고 해도 도장께서는 허락하신다는 말씀이십 니까"" 옥양진인은 웃으며 말했다. "당금의 무림은 편을 가르며 자신의 이익만을 다툴 때가 아니오. 백공 자가 여러 사람들과 친해지고자 한다면 누가 말리겠소"우리는 이미 백 공자가 진정으로 무림을 위하는 사람이며 우리 정의맹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앞으로 백공자는 뜻대로 본 맹에 오실 수가 있 소." 백방생은 허리를 숙이며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도장의 그러하신 말씀은 마치 외롭고 쓸쓸한 저에게 밝은 광명을 던져주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어 백방생은 품속에서 오만냥에 해당되는 금표를 세어서 봉투에 넣 어서 옥양진인에게 드렸다. "앞으로 정의맹에서 하시는 일들이 모두 순조롭게 잘 되기를 바라겠습 니다." 현재 정의맹의 총인원이 오천명 정도라고 해도 그 많은 인원이 움직 이려면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유사시의 상황이니 일반 문파의 비용과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정의맹에서는 처음에는 그다지 비용 에 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는 은근히 그 일로 곤란을 겪 게 되었다. 마침 그럴 때 백방생의 기부금이 당도했으니 그들이 기뻐하 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금 백방생이 건네준 것까지 무려 황금 십오만 냥이니. 잘 사용하면 일년간은 버텨낼 수가 있을 것이다. 옥양진인은 그 금표뭉치를 받게 되자 즉시 신형을 일으키며 포권을 하고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백시주가 이토록 천하창생(天下蒼生)들을 아끼시니 이는 만 인의 홍복이오. 아무쪼록 이 금액은 무림을 위해서 쓰도록 하겠소이다." 백방생은 마주 포권하며 말했다. "소생은 별로 다른 능력은 없으니, 만일 또 다른 필요한 점이 있다면 불러 주십시오. 성심을 다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무량수불 !" 백방생은 감히 더이상 이 무림의 명망높은 노도장을 잡아둘 수가 없 었다. "소생의 생각 같아서는 며칠이라도 도장님을 이곳에 모시고 가르침을 받고 싶지만, 그러나 도장님께서는 강호의 일로 바쁘실 테니 감히 동도 (同道)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군요." 옥양진인은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백시주는 정말로 분수를 아는구려. 앞으로 필요한 일이 있다면 한번 노도에게 들려 주시오. 내 필히 가능하다면 도움을 드리리다." "감사합니다." 백방생이 포권하며 읍하자 이윽고 옥양진인은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시 작했다. 두 사람이 장원의 대문밖으로 나가 보니 어느새 거기에는 두명의 무당파의 중년도인들이 서서 옥양진인을 기다커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 에서 흡사 추수처럼 맑은 광채가 일어나는 것을 보니 무공이 이미 최상 숭(最上乘)의 경지에 이른 듯 했다. 알고보니 옥양진인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두명의 중년도인들은 주변에서 은근히 호위를 하 고 있다가 이제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백방생을 보았으나 전 혀 무표정했다. "그럼 편안히 돌아가십시오." 백방생이 작별인사를 하자 옥양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신형을 날려 아득하게 사라져 갔다. 그 두명의 중년도인들도 어느새 모습이 보 이지 않았다. (정말로 강호에는 사람들도 많군 ! ) 백방생이 다시 자신의 거처인 본채로 돌아오자 뜻밖에도 거기에는 다시 다른 손님들이 찾아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들이 다소 놀 란 표정들을 하고 있길래 누각의 가장 윗층인 삼층으로 올라가보니, 백방 생이 늘상 거처하는 그 거실에는 지금 낯익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이곳 저곳으로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인들이 놀랄만 했다. 바로 남궁검상과 황보헌 등의 오대세가의 젊은 남녀들이었던 것이다. 백방생은 남궁검상이 그들과 어울려 있는 것을 보고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한차례 바라 보니 그들 가운데 오직 당리만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비록 느닷없이 쳐들어온 불청객들이기는 해도 곧장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모두 어서 오시오. 이거 미리 모셔서 인사를 차렸어야 하는 건데 바쁘 다 보니 그간 결례가 많았소이다." 눈앞의 젊은이들은 옛날에 비해 기세도 살아나고 웃차림도 다소 화 려해 보였다.그들은 지난번에 거의 한사람당 은자 오만냥에 달하는 거 액을 백방생의 덕분으로 손에 넣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크게 그들의 기세를 살려준 모양이었다. 남궁지약과 당독 등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딘가 새파란 독기(毒氣)를 픔고 있었다.백방생은 필시 이들이 좋 지 않은 목 적으로 왔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황보헌이 먼저 포권하며 말을 받 았다. "그건 겸손의 말씀이오. 우리는 저번에 일을 해드리지도 못하고 그냥 은자를 받고 말았으니. 아직 미안할 뿐이외다. 그래 백형의 이 사업은 잘 되시오""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소생은 지금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놀고 먹는 것 뿐이니,사업이 잘될 것이라고는 없소이다." 황보헌은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 있었기에 이렇게 장원이 잘 정비된 것이 아니겠소"" 백방생은 그의 말이 어딘가 이상한 것을 보고 다소 의아해 했다. "이 장원은 소생이 하인들과 상의하여 인원을 늘리고 정비한 것입니다. 황보형은 대체 누가 있다고 그러시는 것이오"" 황보헌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 곳에 당낭자가 있지 않다는 말씀이오"" 백방생은 그 말에 약간 어이가 없어졌다. 당리가 그들 일행중에 없어서 다소 뜻밖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들이 지금 그 일로 자 신을 찾아왔을 줄은 몰랐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펀 이미 황보형도 보시지 않았소" 나는 그날 여러분과 혜어진 이후 에 역시 당낭자도 보지 못했소 내가 어찌 이런 일로 여러분을 속이겠습 니까?" 문득 남궁검상이 말했다 "백형께서는 아마도 소인을 미워하시는 모양이구려.하지만 소인은 이 미 그 진소저와의 인연을 끊었소이다. 아니 무슨 끊을 만한 인연도 없 었지만 말이오. 어쨌든 그녀는 다시 그 석륭안(石隆安)에게 돌아갔으니 오해하지 마시오." 백방생은 진소유가 석륭안에게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모두가 상상하던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방생은 남궁검상이 여전 히 자신을 의심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내가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곳에는 당낭자는 없소. 나는 그 날 이후에 다시 그녀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았소?" 남궁검상은 눈을 험악하게 떴다. "그 말 정말이오"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책임을 지겠소?"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너무 말이 심하시구려. 소생은 바로 이제까지의 피해자외다. 소 생은 남궁형의 그 일로 실로 막대한 손해를 봤소이다. 헌데 소생이 과 연 무슨 잘못을 했다는 말이오" 여러분이 이렇게 막무 가내로 와서 따질 정도로 잘못이라도 했다는 말이오"" 남궁지약이 문득 허리춤에서 창. 하고 장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네가 어서 그 당리가 어디에 갔는지 말하면 될 게 아냐""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은 정녕 소생이 그녀를 보지 못했다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오"" 당독이 불쑥 말했다. "누이는 그날 밤에 갑자기 사라졌소. 그떻다면 대체 내 누이가 어디로 갔겠소?"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반드시 그녀가 내게로 왔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겠 소? 이건 좀 우습지 않겠소?" 갑자기 쇄액,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백방생은 목밑이 서늘함을 느꼈 다. 느닷없이 남궁지약이 뽑아든 장검으로 그의 목 아래를 갖다 댄 것 이었다. "뭐가 우습다고" 그녀는 그날 네게 가겠다고 했다는데도 이곳으로 오 지 않았다는 말이냐?" 서슬푸른 남궁지약의 태도에 백방생은 약간 갈등을 일으켰다. 그가 이제까지 참고 양보한 것은 그들과의 마찰을 피하자는 생각에서 다.그런데 상대방이 이떻게 까지 나오자 백방생은 과연 이렇게 할 필요까 지 있을까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만일 그가 미리 대응 하려고 했다면 남궁지약이 결코 이렇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방생은 가볍게 그 검날을 잡아 밀어내며 말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든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오. 만일 그대들 이 의심이 간다면 저 하인들에게라도 물어보면 될 일이 아니오?" 남궁지약이 장검을 겨누고 있는 상황은 그저 들고 있는 것이 아니었 다. 그것은 상대를 제압한 것으로. 상대가 조금도 저항을 할 수 없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백방생은 어떻게 했는지 어느새 그녀의 검날을 잡았고 이어 천천히 밖으로 밀었다. 그것은 마치 장난과도 같아 서 조금도 힘이 드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인 남궁지약은 달랐 다. 갑자기 백방생이 검날을 잡았을 때부터 장검에 공력을 주입시켰는 데, 이어 자신의 전공력이 밀리기 시작하자 안색이 시뻘겋개 변하고 있 었다. 그것을 무심코 바라보던 실내의 사람들은 모두 한순간 경악하고 말 았다. 지금 그들 가운데에서 가장 무공이 높은 사람은 남궁검상 이었 다. 하지만 그라도 그렇게 제압된 상황에서 감히 그렇게 손을 쓰지 못 할 것이다. 가장 단적인 예로 서로의 공력을 비교하는 순간 그 우열은 분명히 드러났다. 남궁지약은 전력을 다하고 있는 반면에 백방생은 전혀 힘도 들이지 않고 그것을 간단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현재 남궁지약의 공력은 일갑자 이상인데 그럼 백방생의 공력은 얼 마라는 말인가" 이제까지 남궁검상 등은 백방생의 무공이 그저 하류급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사실 과거의 그들의 판단은 거의 비슷했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 다. 솔직히 백방생의 무공은 그들보다 훨씬 뛰어나며 그 들이 감히 범할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백방생은 말을 끝내자 상대가 무안해질 것을 감안하여 손을 놓은 후에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순간 남궁지약은 악독한 표정을 지으며 장검을 휘두르며 공격해 들어왔다.일순 빽빽하고 삼엄한 검기(劍氣)가 실내에 가득차며 구름같은 검세(劍勢)가 백방생의 몸을 도륙낼 듯 했 다. 바로 남궁세가의 절기들 가운데의 하나인 창궁십이검(蒼窮十二劍)이 라고 하는데,마치 하늘의 변화가 끝없이 일어나듯이 검세가 끝없이 일 어나며 증폭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것은 바로 남궁세가의 가장 근 본적인 상승절예(上乘絶藝}이지만 그러나 가장 남궁세가다운 검법이라고 도 불리운다. 남궁지약은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검세가 매섭고 또 한 악독한 심보가 깔려 있어서 검봉(劍錄}은 계속 백방생의 치명요해를 노리고 있었다. (정말 참고 있으니 분수를 모르는 구나.) 백방생은 즉시 뒤로 물러나지 않고 우수를 뻗었다. 그가 장검을 가지 지 않고 맨손으로 장검에 대항하는 것은 얼핏 무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그의 손끝에서 수영{手影)들이 십여개가 환상처럼 일어났 다. 그 손그림자 들은 일시에 검세를 무너뜨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다시 그워 손끝은 남궁지약의 검끝을 잡고 있었다. 남궁지약은 그것을 보자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다른 사람들도 급허 병장기를 뽑아들려고 했으나 이내 그것을 보자 손을 거두는 표정들이었다. "손을 놓으시오 ! " 백방생의 한 마디에 남궁지약은 그만 크게 심맥이 진동되어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장검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비틀거리는 그녀는 뭐라 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내상이 심하여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매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왁, 하고 한모금의 선혈을 바닥에 내쏟고야 말았다. 백방생은 결국 어찌 되었던 간에 그들과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사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끝없이 양보만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백방생은 빼앗은 장검을 그들의 앞에 있는 탁자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내 이미 좋은 말로 여러번 설명했지만 무례는 여러분이 범한 것이오. 내 이제까지 여러번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참아왔던 것은 여러분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였소. 하지만 여러분이 이렇게 계속 무고한 사람을 핍 박하고 업신여기니, 나로서는 항상 손해를 보고 당하고만은 살 수가 없 는 일이오. 자 이제 여러분은 내 친구가 아니니 모두 돌아가 주시오 !" 그것은 그야말로 공식적인 축객령이었다. 사실 그들은 불청객이므로 그 러한 것은 뒤늦은 감조차 있었다. 남궁검상 등은 안색이 저마다 딱딱하 게 굳어졌다. 강호상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대세이겠으나 그래도 무 공이 고강한 것은 어쩔 수가 엄다, 확실히 그들이 백방생의 능력을 몰 랐던 것은 실수였다.그들은 누구도 백방생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금 방 알게 되었다.낮궁검상이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백방생 ! 네놈이 감히 숨기고 있던 발톱을 드러냈구나. 하지만 네놈이 감히 나를 어쩔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백방생은 가볍게 탁자위에 놓인 장검을 향해 일지(一指)를 날렸다. 순칸 땅, 하는 경쾌한 쇳소리와 함께 어느새 백방생은 장검을 손에 쥐고 그 검날로 남궁검상의 목올 겨누고 있었다. 검날의 서늘한 감촉이 느껴지자 남궁검상은 절로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번의 백방생의 손속 은 너무나도 빨라서 그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과 백방생의 무학 의 격차가 이렇게 심할 줄은 미처 몰랐다. 백방생은 약간 차가와진 음 성으로 말했다. "나는 지금 정의맹을 돕고 있다. 아까 무당장문인도 그 때문에 다녀가 신 것이지. 따라서 너희들을 죽일 수는 없겠지만 어디 한곳 망가뜨릴 수 는 있다. 지금 이 일은 너희들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한번 시험해 보겠 느냐?" 갑자기 장내에는 차갑고 기이한 침묵의 기류가 홀렀다. 백방생은 남궁 검상이 독기어린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자 가볍게 탄식을 하며 장검을 날 렸다. 그러자 그 장검은 교묘하게도 곧장 남궁지약의 검집속으로 들어가 는 것이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퍼지자 백방생은 다시 말했 다. "여러분은 나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사람이 좋다 고 하니까 공연히 본인의 잘못을 아무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떠넘기 고 또한 여러가지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소. 황보형, 팽형, 나 는 이미 그대들이 적지 않게 나의 재산을 착복했음을 알고 있소. 만일 그 모든 돈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잠자코 있는 것이 좋을 것이오. 나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바보가 아니니까 말이오." 황보헌과 황보능파,그리고 팽영 등은 이제까지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 고 있다가 백방생의 말에 그만 안색이 벌겋게 물들고 말았다. 그들은 자 신들의 잘못을 알고 또한 백방생의 놀라운 실력을 보았기에 아무런 소 리도 못했다. 남궁검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네놈이, 네놈이 감히 우리를 우습게 알다니 언젠가는 반드시 보복을 당하게 되고 말 것이다 ! "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정말 분수도 모르고 사리판단도 형편이 없군. 남을 업신여긴 것 은 그대들이지 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텐데 ! 그대들은 감히 이 곳으로 무단침입하여 행패를 부리려고 했었다는 말인가"나중에 보복을 하겠다면 얼마든지 목숨을 걸고 찾아와도 좋다. 하지만 지금 더이상 그대들이 머뭇거리고 있는다면 나는 정말로 내가 자비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 이어 백방생은 문득 의자 하나를 들어올려 우수를 떨쳤다. 의자는 허공 에 떠올랐으나 이내 가득하게 일어난 장영(掌影)에 의해 일순 간에 소 리없이 가루가 되고 말았다. 다만 먼지와도 같은 가루가 바닥에 떨어져 쌓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크게 놀란 표정들을 지었다. 그들은 결코 그 와 같은 절기(絶技)를 펼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일종의 장력(掌力)으로 펼치는 검기(劍氣)로서, 절정의 경지에 올랐어도 공력 이 최소한 삼갑자 이상이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고 보자 ! " 한차례의 악독한 외침과 함께 남궁검상 등의 일곱명은 한순간 신법을 펼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43 장 천상회(天上會) 왠지 한쪽 날개가 꺾인 듯한 심정인 백방생은 남궁검상등이 가버린 거실에 앉아서 잠시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 (나 혼자서 모든 사람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무모하다. 그러나 어쨌든 실 력은 키워 놓아야 할 것이 아닌가"곁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백방생은 문득 자신의 무공을 최상승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문제를 생각했다. 그는 이전에 이미 대홍락의 경지까지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이제 몸이 완전히 치료된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여겨 졌다. 헌데 문득 다시 생각했다. (대체 그 당낭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그리고 나에게 오겠다고 한 말 은 또 무엇일까"그들이 결코 거짓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 았는데?) 생각을 굴리다가 문득 백방생은 한 사람의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보았을 뿐인데 이어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 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실로 믿기지 않는 사람을 본 것이 다. 그는 그 사람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사람은 마당에서 만류하는 하인들을 오히려 거느리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본채의 대청을 지나 계단을 통해 삼층에 이르렀다. 백방생은 이미 무심한 표정이 되어서 입구쪽을 바라보고 있 었다. 이윽고 그 사람이 나타나자 백방생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철우(鐵牛)! 네가 여기까지 왔을 줄이야, 그래 무슨 일이냐?" 그렇다. 방금 나타난 사람은 놀랍게도 바로 남쪽 복건성 복주부에 지금 있어야할 백철우(白鐵牛)였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자신은 이렇게 낙양에 올라와 있지만 설마하니 백철우마저도 이곳에 올라와 있었을 줄은 상 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또한 그가 이렇게 느닷없이 혈혈단신으로 백 주에 백방생의 장원으로 찾아올 줄이야" 백철우의 체구는 그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그의 눈빛이 보다 날카로와진 것 같았다. 그는 눈빛을 음침하게 빛내더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여기까지 왔는데 나라고 해서 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 소?" 이미 그들간의 숙질관계는 끊어진 지 오래다. 백방생은 말했다. "네 할아버지도 이곳으로 왔느냐?" 백철우는 그 말에 눈알이 시뻘겋게 변했다. "내 할아버지가 이곳에 오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말과 함께 돌연 그는 기습적으로 백방생의 가슴을 향해 돌격해 들어 왔다. 확실히 백철우의 무공은 지난번보다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우선 권법상의 초식에서 위력이 정묘(精妙)해 지고 움직임이 안정되어 있었 다. 이미 일류 경지에 오른 모양이었다. 그러나 백방생이 마악 내심 칭 찬을 하기도 전에 이미 백철우의 손에서는 연신 독수(毒手)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주먹이 미처 백방생의 면전에 도달하기도 전에 느닷없이 그의 소매와 발끝에서 무수한 독침(毒針)들과 강침(鋼針)들이 격사되어 나왔던 것이었다. 이어 백철우는 옆으로 빙글 몸을 굴리면서 한 줌의 검은 연 기같은 것을 집어 던졌는데, 그것은 바로 성분이 악독한 미혼분(迷魂粉) 이었다. 확실히 백철우는 비단 무공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이런 치졸한 수법까지 늘어난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소매에서 나온 독침들은 역시 소매를 휘둘러서 접인공으로 막아버렸고 발끝에서 나온 강침들은 역시 발끝으로 바람을 일으켜서 차 버렸다. 하지만 실수로 약간의 미혼분을 흡입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백방 생은 대환단을 다량으로 복용하고 백독불침(百毒不侵)의 몸이 되었으므 로 다행히도 해를 입지 않았다. 백방생은 금방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내심 매우 화가 났 다. 그는 즉시 한 발을 휘둘러서 순식간에 백철우의 몸을 서른 여섯번이 나 걷어찼다. 연이어 퍽퍽퍽! 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백철우는 전신의 요혈들만 교묘하게 얻어 맞아서 감히 아무런 소리도 지르지 못했지만 안색이 시 꺼멓게 변했다. 그는 삽시간에 심한 내외상을 입은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어 발길질로 백철우의 안면을 걷어차려고 했다. 그때 백철우가 다급히 소리쳤다. "나는 전할 말이 있소!" 백방생은 발길질을 멈추고 말했다. "무슨 말이냐?" 백철우는 바닥에 누운 채로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거기에 서찰이 있소." 백방생은 백철우가 그만 서찰도 꺼내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고 약간 의아해져서 다가갔다. "누가 나에게 서찰을 보냈다는 말이냐?"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백방생이 그의 가슴팍을 더듬으려고 하는 찰나 에 느닷없이 그 중간에서 세 알의 검은 공같은 물체가 상중하로 백방생 의 요혈들을 노리고 날아왔다. 그 속도는 실로 믿기지 않을 만큼 빨랐다. 백방생이 그것을 경각하는 순간 이미 그것들은 그의 몸 가까이에 도달해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순간 빠르게 임기응변식으로 움직였다. 그 세 알의 검은 물체는 얼핏 처리하기에 쉬워 보였다. 그러나 상대가 백 철우이고 보면 결코 처리하기 쉬운 것은 내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백방생은 감히 그 세 개의 검은 공같은 물체들을 손으로 막아 내지 못하고 황급히 좌측으로 몸을 이동하여 가까스로 피해냈다. 헌데 그 순간을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수십개의 미세한 강침들이 그의 몸을 뒤덮는 것이었다. 그 강침들은 물론 백철우가 발출한 것이고 뜻밖 에도 그것들은 그의 이빨 사이에서 튀어 나왔다. 그것들은 비단 미세하 여 잘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속도가 빨라서 전혀 피할 기회를 주 지 않는 것이었다. 백방생이 설령 지금 궁지에 몰려있지 않더라도 어 려웠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백방생의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강침들이 밖으로 모조리 튕겨나가는 것이 아닌가"그것은 사실 달마하원 의 수미산장(須彌山掌)에 천수여래장(千手如來掌)을 접목한 이를테면 수미금강장(須彌金剛掌)이라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백방생의 장심이 금빛 으로 변하면서 무쇠처럼 강해져서 한번에 수십개의 변화를 일으키며 강침들을 막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기실 말로는 쉽지만 그것은 백방생이 궁여지책으로 발출해낸 것이고 그는 실로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해서 진땀을 빼고 말았다. 백철 우의 그러한 공격들은 실로 악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숨돌릴 틈을 주 지 않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일단 공격을 막아내자 감히 더이상 머뭇거릴수가 없었다. 그는 즉각 반야장(般若掌)의 한수를 펼쳐서 백철우의 전신을 서너차례 가격하고 입에서 피를 토하는 백철우의 손발의 관절을 부러뜨렸으며 동시에 전신의 혈도까지 제압해 버렸다. 그러한 일련의 손속은 너무나도 빠르고 한순간에 물흐르듯 행해진 것으로서, 실로 과거의 백방생의 면모 를 은연중 다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이제까지 거의 손을 쓰지 못했으나 지금 갑자기 뜨겁게 손을 써 보게 된 것이다. 다음 순간에 갑자기 콰쾅! 하는 굉음과 함께 한쪽의 벽면이 통째로 박살이 나며 날아갔다. 알고보니 아까 백철우가 발출했던 그 세 알의 검은 공은 바로 작고 위력이 강한 벽력탄(霹靂彈)이었던 것이었다. 만 일 백방생이 당시 방심을 하여 맨몸으로 받았다면 그 결과는 능히 알고 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매캐한 화약냄새가 코를 찌르고 한 쪽이 완전히 날아간 벽이 있었던 자리로 휑한 공간이 드러나 보였다. 백방생은 한순간에 백철우를 제압하기는 했으나 그러한 광경을 보고 놀라서 빠르게 그의 옷을 벗겼으며 모든 기관장치 등을 찾아냈다. 백방 생은 이어 그 모든 기관장치들을 제거하고 분근착골의 수법을 전개했 다. 백철우는 다소 인내심이 강해졌는지 안면이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너, 너의 무공은 폐지되었다고 하던데 그게 아니었군." 백방생은 대답대신 그의 단전(丹田)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이번의 장 력은 부드럽고 위력이 집중된 것으로 백철우는 순간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안면이 붉게 달아 올랐다가 다시 창백하게 변했다. 바로 단전이 파 괴되어 무공이 전폐 당한 것이다.백철우는 이에 원독의 빛을 발했다. 그 러나 백방생은 개의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그토록 악 랄한 살수(殺手)를 펼치고도 아직 살려준 것만 해도 많이 봐준 일인 것 이다. 백철우는 무공까지 폐쇄되자 이제는 더이상 분근착골의 고통을 참을 수가 없는지 급히 태도를 바꾸어 소리쳤다. "진소저를 보고싶지 않단 말이오?" 백방생은 그가 올 때부터 이미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 다. 그의 입에서 느닷없이 진소유의 얘기가 나와서 다소 뜻밖이었으나 마음은 별로 놀라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너무도 충분히 놀랐기 때문일까"이 백철우는 비단 처음부터 백방생을 증오했을 뿐만 아니 라 나중에 자신의 부친의 죽음을 백방생 때문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 다. 백방생으로서는 이미 지겹게 그들 가족들에게 당했었기 때문에 별 로 새삼스런 기분도 아니었다. 백방생은 여전히 분근착골수를 풀지 않은 채 말했다. "너의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백철우는 백방생의 차가운 태도를 보고 이미 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 는지 헉헉거리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얼마전에 낙,낙양으로 이사왔지.우리모두가..., 나를 풀어 주지 않을 생 각이오?" 백방생은 말했다. "내가 너의 말을 믿을 것 같으냐?" 백철우는 얘기가 길어지자 크게 당황하여 급히 말했다. "아니오. 우리는... 그 달마하원이 무너졌는데... 감히 어떻게 그곳에서 계 속, 계속 살아갈 수가 있겠소..."모두가 우리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쪽으로 왔소."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어째서 너희들이 하필이면 낙양으로 왔단 말이냐?" 백철우는 크게 곤혹스러운 태도였다. 그는 이제 비단 고통을 이기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도 거의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건... 천상오룡(天上五龍) 때문이었소. 그들이 우리들을 이곳으로 데 려왔소?" 백방생은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천상오룡이라면 바로 석년의 달 마오수이다. 백귀현 등이 달마하원의 멸문과 관계되어 오해를 받는 입 장이라면 어째서 또 천상오룡이 그들을 이리로 데려온 것일까"보아하 니 백귀현 등은 억지로 끌려온 것 같지는 않은 모습이 아닌가"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너희는 어째서 이제야 모습을 보인 것이냐?" 백철우는 말했다. "우리는 일단 남들의 눈에 띄지말라고 들었소. 그렇지 않았으면... 당 신은 이제까지 살 지도 못했을 것이오." 백방생은 일순 그의 꿈틀거리는 몸을 들어서 화덕이 있는 곳으로 다 가갔다. 거실의 한쪽에 있는 화덕에서는 이순간 마른장작에 의해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백철우는 문득 안색이 크게 변했다. "무, 무엇을 하려는 것이오?"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머지 않아 너의 할아버지에게 죽음을 당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말과 동시에 백방생은 정말로 그의 몸을 화덕속에 집어 넣었다. 순간 지독한 누린내와 함께 백철우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악! 살려주시오! 진소저를 보고 싶지도 않다는 말이오?"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이윽고 소맷바람으로 백철우를 다시 끄집어내었다. 이미 백철우는 심한 화상을 입고 혼절지경이었다. 얼마 나 놀랐는지 분근착골의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도 않았고 전신의 의복 은 아직도 타들어 가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를 향해 말했다. "만일 얘기가 거짓이라면 다시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 진낭자가 어쨌다는 것이지?" 백철우는 아직도 타고 있는 불길을 꺼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런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말했다. "나는 천상오룡의 심부름으로 온 것이오. 당신이 만약 진소저를 보고 싶다면 나와 함께 갑시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들은 어째서 나를 찾는다는 것이냐?" 백철우는 말했다. "그들은 당신이 천상회에 가입하기를 바라는듯 했소. 나도 그 이상은 잘 모르겠소." 백방생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그래 그 장소가 어디냐?" 백철우는 문득 혼비백산하여 안색을 검게 물들이며 말했다. "내, 내가 말할 것 같소. 당신은... 나를 죽일 수가 없을 것이오." 의복이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았기에 그의 피부는 시뻘겋게 익어가는 중이었으나 백철우는 공포감에 그만 그런 감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러니 어서 그 장소를 대라." 백철우는 더욱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나는 대지 않겠소! 나는 대지 않겠소!" 백방생은 바락바락 악을 쓰는 백철우를 향해 다시 말했다. "그럼 너는 어서 일어나도록 해라." 이상하게도 이미 백철우의 혈도나 분근착골의 수법 등은 모두 풀려 있 었다. 단지 탈골되고 부러진 손발이 문제이긴 했으나 그런 것은 이제 아 무래도 좋았다. 백철우는 급히 몸을 일으켜서 자신의 몸에 붙은 불을 끄 고 겨우 부러진 팔다리를 맞추었다. 백방생은 손뼉을 쳐서 시녀들을 불렀다. 시녀들은 이미 멀리서 구경하 고 있었기에 안면 가득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이 녀석에게 의복 한벌을 가져다 주도록 하고 집사를 데려오도록 해 라." 시녀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백철우가 이윽고 옷을 갈아입고 다소 움직 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집사가 놀란 표정을 하고 나타났다. 백방생은 그 에게 은자를 내어 주고 이 거실을 모두 고치고 청소하도록 지시한 다음 에, 타고 갈 마차도 준비하라고 했다. 집사는 나이도 있고 제법 노련 하여 즉시 눈치빠르게 움직였다. 백방생이 백철우와 함께 대문밖으로 나갔을 때에는 이미 장원내의 마부 가 마차를 끌어내어 대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백철우와 함께 마차에 오른 다음 그에게 지리를 물었다. 백철우는 이미 혼줄이 나고 내상과 외상이 극도에 달했으며 무공까지 사라져서 두말없이 고 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마차는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상을 달렸다. 그런데 이윽고 마차 가 멈춰선 곳은 바로 다름아닌 진소유의 그 장원이었다. 백철우는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자 백방생을 주시하며 창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부근에는 나의 할아버지가 있을 것이므로 당신은 나에게 손을 댈 수가 없을 것이오." 백방생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걱정은 마라. 나는 이미 너를 죽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앞 으로도 너를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백철우는 백방생이 그렇게 부드럽게 나올수록 왠지 더욱 모골이 송연해 지는 것 같아서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그는 생각했다. (거짓말"너는 제발 다시 나를 만나게 되기를 바라겠지.) 백방생은 이윽고 백철우를 문앞에 내려주고 자신도 마차에서 내린 다 음에 마차는 마부와 함께 장원으로 돌려보냈다. 정문에는 미리 대기하 고 있던 하인이 있었는데 그의 눈빛에서는 시퍼런 광채가 흐르고있었 다. 그것은 즉 무공이 이미 최상승(最上乘)의 경지에 올라 있다는 의미 이다. 필시 그 하인은 천상회의 일원이 백방생을 맞이하기 위해 변장 한 것일 것이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백방생은 그 하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 장원의 모습은 저번과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하인이 안내하는 곳도 역시 객청(客廳)으로서 이전에 백방생이 증평과 들렸던 곳이었다. 그런데 막상 백방생이 그 안 으로 들어서 보니 거기에는 이미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그를 기다 리고 있었다. 주요인물들만 해도 여자가 둘이고 남자가 여섯이었다. 여자들 중 하나는 진소유이고 다른 하나는 용모는 지극히 뛰어난 소녀였으나 낯설었다. 천상오룡은 좌우에 앉아 있고 석륭안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위에서 다소 오만하게 아래를 내려다 보는 모양이 흡사 그가 이 집의 주인이 된 것 같았다. "어서 오시오, 백공자?" 석륭안은 뜻밖에도 몸을 일으키며 반갑다는 듯이 백방생을 맞이했다. 백방생은 슬쩍 진소유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 정했다. 백방생은 천상오룡 등의 얼굴도 둘러보다가 말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용건은 무엇이오?" 석륭안은 다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게 미리부터 겁을 먹을 필요는 없소. 우선 자리에 앉는 것이 어떻 겠소?" 백방생은 아무래도 진소유의 곁에 앉는 것이 나으므로 은근히 그쪽으 로 다가가서 자리했다. 진소유는 그를 보고도 별다른 표정도 보이지 않았 다. 석륭안이 웃으며 말했다. "이미 심부름을 갔던 아이에게 대강의 얘기는 들었을 것이오. 어떻소 "백공자는 우리 천상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천상회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석륭안은 백방생의 모습을 주시하다가 말했다. "나는 확실히 이제까지 백공자를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소.보 아하니 백공자의 무공은 이전보다 가일층 진보한 것 같구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과찬의 말씀이시군요. 솔직히 다소 나아졌다고는 하나, 저의 무공은 석 공자의 일개 수하들 보다도 훨씬 못합니다. 그것이 무슨 대수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석륭안은 말했다. "좋소.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솔직히 인재가 능력이 있으면 쓰 는것이오.나는 백공자가 정의맹에 많은 군자금을 기부했다는 것을 들어 서 알고 있소." "그러니까 나보다는 내 재산에 침을 흘리고 있는 것이로군?" 백방생은 내심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더러 이 천상회의 재정을 담당해 달라는 말이로군요. 그렇 다면 저는 무슨 이익이 있겠소이까?" 석륭안은 미소하며 말했다. "우리 천상회는 머지 않아서 강호의 중심이 되어 나서게 될 것이오. 그 때가 되면 자연 그대에게도 혜택이 돌아가지 않겠소?"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내가 맡게될 일은 무엇이며 직책은 무엇이오?" 석륭안은 말했다. "지금 저 천상오룡은 사실 본회의 오당주(五堂主)를 맡고 있소. 따라서 백공자는 그와는 조금 다른 향주(香主)의 직책을 맡아보는 것이 어떻겠 소"물론 우리는 백공자의 재산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업수완을 얻 으려는 것이오." (그게 바로 그거지!) 백방생은 실은 향주라는 직책이 천상오룡의 오당주보다는 아래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석륭안의 제의는 느닷없는 낮도깨비와 같은 것이었 다. 그렇게 해서는 누구라도 잘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실 그는 백방생의 심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진소유 가 이곳에 있는 한은 일단 그 제의에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백방생은 은근히 계속해서 진소유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의 표 정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 무표정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이윽고 말했다. "나는 잠시 진낭자와 얘기를 나누고 싶소. 그래도 되겠소?" 석륭안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마치 그의 은백색의 모발 전체가 광채를 발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진소유를 주시하더니 고개를 끄 덕였다. "좋소.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시오. 나는 그다지 인내 심이 강한 편은 아니니까." 진소유는 그 말을 듣자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서 대청의 옆문으로 나갔 다. 백방생은 잠시 멈칫 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이윽고 진소유는 하나의 작은 방안으로 들어서서 백방생을 향해 말했 다. "당신은 어떻게 왔죠?" 보아하니 진소유는 미처 백방생이 오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한 모양이었 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야 저들이 불러서 온 것이오. 내게 누가 왔는지 아시오"바로 예전 의 내 조카였던 백철우요.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 그를...." 그러나 진소유는 백철우의 얘기에도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루하다는 듯이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죠?" 백방생은 그녀의 맑고 빛나는 두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진소유는 말했다. "돌아가요.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예요." 진소유의 음성은 여전히 나직하고 무표정했다. 그러나 백방생은 문득 그속에서 말할 수 없는 어떤 정감을 깊이 느꼈다. 그것은 이를테면 육감 과도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동시에 왠지 어떤 확신 같은 것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제까지는 혼란스러웠으나 지금은 조용한 그녀의 모습에서 진정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그녀는 정말 나를 위해 주고 있구나. 나만 그런 것이 아니 라...어쩌면 속으로 사랑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녀가 굳이 이 곳에서 나를 멀리하려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바로 복수를 위한 것일 것이다!) 백방생은 그러한 생각을 하고 나자 갑자기 마음이 매우 기뻐지며 뜨거 운 열정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느꼈다. 그녀는 작고 가냘프지만 정말로 강하다. 백방생은 문득 자신의 가슴으로 그녀의 전신을 휘감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백방생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아니오. 나는 돌아가지 않겠소. 나는 여기에서 그 노릇을 하고야 말겠 소!" 진소유는 다소 아미를 찌푸렸으나 이내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그들은 당신을 이용하려는 것이예요. 그런데도 이곳에 있겠다는 것인 가요?" 백방생은 그녀가 애써 감정을 누르고 낮은 소리로 말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용담호혈이며 그녀보다 무공이 고강한 사람들 이 부지기수로 있는 것이다. 백방생은 마치 엿듣는 그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곳에 있겠소! 그들이 나를 이용해도 상관이 없소! 그래봤자 결 국 내 재산의 일부만 날리면 되는 것이 아니겠소?" 진소유는 잠시 차가운 시선으로 백방생을 주시하다가 말했다.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해요." 진소유는 그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백방생은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그들이 다시 그 대청안에 들어서자 석륭안이 웃으며 입을 열었 다. "그래, 어떤 결정을 내렸소?"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귀회(貴會)에 가입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석륭안은 가볍게 웃었다. "그래요. 그것 참 잘 되었군요. 마침 여기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오 늘 밤에 입회식(入會式)을 거행하도록 합시다. 아, 우선 사람부터 소개해 야 하겠군!" 말과 함께 자신의 우측에 서 있는 예의 그 옥색(玉色)의 의상을 걸치고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그녀는 얼굴빛이 투명하고 얼굴의 윤곽도 수 려했으며 체구는 날씬했고 키는 진소유와 비슷했는데 나이는 스물을 이제 갓 지난 것처럼 보였다. 백방생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칼날과도 같은 맑은 예기(銳氣)가 번뜩이고 있어서 실로 무공이 평범하지 않다 는 것을 알게 했다. "인사하시오. 그녀는 바로 나의 친동생인 석채릉(石彩陵)으로, 본가(本 家)에서 얼마전에 내려온 것이오." 백방생은 약간 놀랐다. 석륭안의 친동생이라면 바로 천륭무가의 소군주 인 것이다. 정말로 그녀의 전신에는 고귀함과 오만함이 절절하게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특이한 점은 그녀의 오라비인 석륭안은 머리가 은백 색인데 반해 그녀의 머리카락은 정상적인 흑색이라는 사실이었다. 허리 에는 한자루의 옥색(玉色)의 장검을 차고 있었는데, 실로 한눈에 보아 도 보검(寶劒)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방생은 갑자기 천륭무가의 또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자 그만 어리둥절 해 졌지만 이내 포권하며 인사했다. "소군주님이시군요. 석낭자"처음으로 뵙겠소이다." 그 석채릉은 백방생이 자신에게 함부로 낭자라는 호칭을 쓰는 것을 보고 다소 못마땅한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의 얘기는 이미 들은 바가 있어요. 헌데 듣던 것보다 더한 것 같군요?" 석채릉의 말은 그러니까 백방생이 소문보다 낫다는 것인지 못하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모호하게 했다. 그러나 백방생은 그러한 것에 개의하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과찬의 말씀이오." 석륭안이 문득 다시 웃으며 말했다. "내 여동생은 이제까지 본가에서 무예수련(武藝修練)에만 몰두하느라 미처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었소. 백공자가 만일 관심이 있다면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오." 백방생은 옆의 진소유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생은 본래 미천하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 분에 넘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석채릉이 문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전재산이 황금 백만냥도 넘는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백방생은 일순 어리둥절해 졌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석채릉은 말했다. "만일 당신에게 그 정도의 재산이 있다면 나에게 시도해 봐도 무방해 요. 나는 주로 황금을 좋아하니까요. 어쩌면 당신이 그 전재산을 모두 나에게 준다면 내가 당신에게 시집가게 될 지도 모르죠?" 백방생은 대체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 그렇게 알게 되었 는지 의아해 하면서도 굳이 부인하지는 않고 말했다. "그건 천만의 말씀이오." 석륭안도 문득 나무래듯이 말했다. "릉아(陵兒), 우리는 백공자의 수완을 사려는 것이지 결코 그의 재산을 탐내는 것은 아니다. 그런 얘기는 하지도 말아라." 백방생은 이윽고 천상오룡에게도 인사를 했다.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되어서 다행이오. 나는 사실 여러분도 보고 싶 었는데." 이대인이 말했다. "네가 본회에 들어오면 당연히 맡은 일만 충실하면 될 것이다. 그런 쓸 데없는 감정은 버리는 것이 좋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한때 고락(苦樂)을 같이 한 사인데 그것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소이까?" 이대신이 차갑게 웃으며 팔척이나 되는 거구로 내려다 보며 말했다. "네가 잊을 수가 없다면 혹시 우리에게 사례라도 하려는 것이냐?" 백방생은 품속에서 금표 뭉치를 꺼냈으나 거기에는 백냥짜리가 수십 장이 있을 뿐, 천냥짜리는 고작 다섯장 밖에 없었다. 백방생은 그 오천 냥의 금표를 내밀며 말했다. "마침 가진 것이 이것 밖에는 없군요. 이것이라도 성의라고 생각하신 다면 받아 주십시오." 황금오천냥은 거액이다. 이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백방생이 그와 같이 하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미 이대신이 앞으 로 나서서 그것들을 받고 있었다. "좋다. 나는 이것을 네가 본회에 들어오는 첫 예물이라고 생각하겠 다." 그 말은 즉, 앞으로도 계속 예물을 요구하겠다는 뜻의 노골적인 말인 것이었다. 이대인은 말을 하려다가 그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고, 석채릉 이 말했다. "어째서 나에게는 아직 예물이 하나도 없죠?" 백방생은 아직 입회식도 치르지 않았는데도 벌써 그들은 백방생에게 노골적으로 손을 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석륭안도 다소 미안한지 핑 계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대신은 석채릉에게 그 오천냥 의 금표를 도로 내밀며 말했다. "그럼 이것을 대신 가지십시오. 저희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석채릉은 두말없이 다가와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래요?" 주저없이 금표를 받아들고 신기한 듯이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희 색이 만면했다. 그녀는 이어 의미심장하게 백방생을 바라보며 웃었다. 비록 그 용모는 천하절색(天下絶色)이었으나 그렇게 보니 왠지 사갈같은 냄새가 느껴졌다. 백방생은 진소유에게 말했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는데 저에게 밥을 좀 주시겠소?" 진소유는 두말없이 옆문을 통해 걸어 나갔다. 백방생은 즉시 그 뒤를 따라갔다. 그 곳은 작고 아담한 거실이었는데 분위기가 아름답고 조용할 뿐만 아니라 다분히 소녀다운 취향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곳은 필시 진소 유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거실인 것 같았다. 백방생이 하나의 태사의에 앉자, 진소유는 옆의 장농의 서랍에서 갖가지의 과자와 떡 등을 꺼내서 는 그에게 건네주었다. 진소유는 그래도 아직 열일곱의 나이어린소녀이 다. 그녀는 이렇게 온갖 음식들을 갖춰놓고 외롭거나 쓸쓸할 때는 혼자 서 먹으면서 그 고뇌를 달래는 모양이었다. 그 과자와 떡, 완자 등은 모 두가 정교하게 만든 것으로서 맛이나 빛깔 등이 모두 훌륭하고 또한 느 끼하지 않았다. 진소유는 일단 그 방안에 들어온 이후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백방생 은 사실 별로 배가 고픈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의 그 음식의 맛을 느 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감히 먼저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이윽고 말했 다. "혹시 천상회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겠소?" 진소유는 말했다. "나도 듣기만 한 얘기예요. 천상회는 회주 이하 오룡(五龍)과 십이원 로(十二元老), 삼십육천강, 칠십이지살(七十二地煞), 백팔귀대(百八鬼隊) 로 되어 있다고 했어요." 백방생은 낯선 이름들을 듣게 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가운데 오 룡이라면 바로 천상오룡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생각보다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백방생은 진소유에게 말했다. "그럼 당신은 어느 소속이오?" 진소유는 그의 앞 맞은편의 태사의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그들과 동업자의 관계이지 그 소속은 아니예요." (아, 그랬었지?) 백방생은 과거의 기억을 다시 상기시키며 말했다. "그들은 지금 이곳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것이오"그렇다면 나머지의 인 원들은 어디에 있소?" 진소유는 말했다. "그들의 본거지는 천륭무가(天隆武家)가 있는 대곤륜산(大崑崙山)의 심 처예요. 그들은 현재 낙양의 다른 곳에 임시로 분타를 마련하고 있는데, 여기는 그저 들른 거예요. 지금 그들과 함께 온 것은 칠십이지살과 백팔 귀대중의 일부이죠." 진소유는 뜻밖에도 순순히 많은 대답을 해 주었다. 백방생은 내심 그래서 기쁘기도 했지만 생각했다. (아까 그 사람들이 칠십이지살과 백팔귀대중의 사람들이라고?) 44 장 도주 진소유는 말했다. "지금 드러나 있는 그들의 세력은 겨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요. 천하는 정말로 장차 그들의 손아래 놓이게 될 거예요." 백방생은 의아해 졌다. "아니 그게 무슨말이오"석륭안과 천상오룡이 우두머리라면 그저 그런 것일 뿐이지 무슨 또 다른 세력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천상회에서 천상오룡의 지위가 다음가는 것은 그들이 재능이 특출 하고 앞으로 발전성이 있기 때문이예요. 무슨 무공이 고강하기 때문인 줄로 아나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졌다. "아니 그럼 그들보다 무공이 고강한 사람들도 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천륭무가에는 사람들이 많아요. 현재 백팔귀대에도 저와 같은 수준일 뿐 저보다 무공이 낮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게다가 칠십이지살은 최상승의 무공을 터득한 사람들이고 또한 삼십육천강은 초상승(超上乘) 의 무공을 터득한 사람이며, 십이원로는 모두가 심검(心劒)의 경지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요." 백방생은 그 얘기를 듣자 그만 너무나도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 졌다. 그 는 사실 천상오룡이 천상회의 수뇌급의 고수들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로 그들과무공이 비슷하거나 우월한 사람들이 최소 한 수십명도 더 넘는 것이 아닌가" "뭐라고"정말...... 믿을 수가 없군!" 백방생은 그제서야 아까 보았던 하인이 칠십이지살의 하나라는 사실 이 이해가 갔다. 그들은 강호에 나서면 무림명숙임에 손색이 없지만 천상회에서는 고작 하인과 같은 신분에 불과한 것이다. 진소유의 말은 계속됐다. "하지만 더욱 커다란 힘은 천륭무가 그 자체에 있어요. 그들의 힘은 오 래도록 전해져 와서 그 크기를 짐작할 수가 없는 일이죠." 백방생은 그만 진소유가 말한 빙산의 일각이란 것이 실감이 갔다. 그 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넋을 잃은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의 위치는 어디일까？ 향주라고？ 그것은 백팔귀대의 위일까, 아니면 칠십이지살의 위일까?" 진소유는 문득 잠자코 있었다. 그것은 곧 백방생의 지위가 그 어느 것 의 위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백방생은 문 득 다시 생각했다. (지금 천하는 혼란기에 있다. 헌데 이들은 어째서 그 막강한 힘을 가 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방관하고만 있는것일까"과연 이들의 목적은 무엇 일까?) 천상회의 힘은 실로 막강하여 능히 정의맹 전체의 힘과 비견될 수있을 것같았다. 만일 그들까지 나선다면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겠는가" 진소유가 문득 말했다. "당신에게 황금 백만냥이 있다는 말은 사실인가요?" 백방생은 급히 상념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사실이오. 사실은 그보다 좀 더 있는데......, 그 얘기는 이미 내가 말 하지 않았소？ 저번에 강남에 갔다가 부자가 되어서 돌아왔다고." 백방생은 황금충의 재산에 대해서 얘기하려다가 문득 이 주위에 엿듣 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것을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진소유는 그 말에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그것을 내게 보여줄 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품속의 물건을 내 보였다. "물론이오." 백방생이 내보인 것은 작은 금표봉투와 예금장부 두 개, 그리고 약간 의 귀중품 보따리와 약병 두 개였다. 진소유는 그중에서 오직 예금장부 두개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 예금장부에는 각기 백만냥과 육십구만냥의 황금이 기재되어 있었다. 진소유는 그 액수를 보고 나자 절로 가늘게 손 을 떨었다. "정말이로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금포에 들러서 거기에서 돈을 더 찾아야 할 텐데 미처 그러지를 못했 소. 낭자가 만일 돈이 더 필요하면 쓰도록 하시오. 아니면 그 돈들을 모두 가져도 좋고." 진소유는 문득 놀라며 멍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이 돈들을 전부 가져도 좋다고요?"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소？ 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어 도 아깝지 않다고. 나는 정말로 당신이 행복해 지기를 바라오." 백방생은 문득 말을 하다가 생각했다. (아니, 이미 그녀는 석륭안에게 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면 혹시 그의 여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는데......, 아아! 그러나 어쨌든 그녀가 기 쁘게 그 돈들을 사용한다면 역시 기쁘지 않겠는가?) 백방생은 이어 다른 물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이 물건들도 평범한 것들은 아니오. 여기 이 귀중 품들은 내가 당신을 생각하며 산 것이니 당신이 가져줬으면 좋겠고, 그 리고 이 약병들은 바로......." 진소유는 문득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내가 이것들을 가질 수는 없어요. 당신은, 당신은 역시 빨리 이 돈 들을 가지고 숨어 사는 것이 좋겠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혹시, 당신은 이미 그 석륭안과 혼인을 약속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러니 어서......."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소. 나는 반드시 이곳에서 당신을 지켜주 며 살아갈 생각이오.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한 나는 걱정없소." 진소유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내가 그렇게 정말로 좋은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오. 사실 내가 당신이 없다면 숨어 산들 무엇하겠소?" 문득 진소유는 전음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어서 짐을 싸도록 해요.) 백방생은 다소 어리둥절해 졌으나 이내 그녀의 말대로 물건들을 다시 품속에 집어 넣었다. 진소유는 여전히 전음으로 말했다. (나도 사실은 별로 자신이 없었어요. 우리 지금 이곳을 버리고 곧장 떠 나도록 해요. 그들에게는 돈을 찾으러 간다고 하면 좋겠군요.) (좋은 생각이오!) 백방생은 엉겁결에 그렇게 전음으로 대꾸해 놓고는 일순 어리둥절해 하며 생각했다. (헌데 어째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것일까？ 혹시 그녀가 해를 당하기 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백방생은 일순 다시 크게 기뻐하며 전음으로 말했다. (나도 사실 당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서 사서 고생을 하 겠소?) 진소유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이제 전음을 사용할 줄도 아는군요.) 백방생은 대꾸했다. (몸이 치료되어 무공이 다소 높아졌소.) 진소유는 이에 즉시 실내를 오가며 간단하게 챙길 것만을 몸에 지니고 다시 백방생에게 다가왔다. (어서 가요!) 백방생은 비록 좋기는 하지만 느닷없는 변화라서 그저 어리둥절해 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몇차례의 방문을 지나서 드디어 마당에 내려서게 되었다. 그들이 마악 대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문득 한 명의 하인이 다가왔다. 그의 두눈에서는 시퍼런 기운이 맑게 피어오르 고 있었는데, 그러나 백방생이 이미 보았던 그 하인은 아니었다. 그 하인은 필시 칠십이지살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곧장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진소유는 말했다. "우리는 지금 금포에 갔다 오려는 거예요. 그는 우선 얼마를 찾아서 입회식때 기부금을 내고 싶다고 하는 군요." 백방생은 실로 그녀가 쉽게 이 장원을 포기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장원은 본래 그녀의 소유이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녀는 이곳에 갇힌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 하인은 일시 진소유의 두툼한 허리 를 수상쩍은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신분으로서 감히 그녀의 허리춤을 들춰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 진소유는 남해보타도의 그 비급들을 작은 보따리로 만들어서 허리의 옷속에 찬 상태였다. 하인은 이윽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두 사람은 건성으로 답례하는듯 하고는 곧장 대문을 나섰다. 두 사람 은 이어 정말로 대로를 지나서 한참 걸어다니다가 금포에 들렀다. 백방생 은 그 금포에 들러서 이십만냥의 금표들을 찾은 뒤에 그 중에서 십만 냥은 진소유에게 주었다. 진소유는 묵묵히 그 금표뭉치를 받아서 잘 간 수했다. 그리고 백방생은 이윽고 은밀히 신법을 전개하여 진소유와 함께 자신의 장원으로 향했다. 마침 장원의 본채에는 일하는 목수 등이 몰려와서 거실의 부서진 기둥 과 벽면들을 보수하려고 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집사의 안내로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다가 후채로 갔다. 그 후채는 모두 이층의 건물인데 역시 고래등같은 기와집이고 새집이어서 더욱 휘황하고 아름다운 점이 있었다. 시녀들은 이미 청소하는 여자들과 함께 그곳의 가장 큰 거실과 침실 등을 치워놓고 있었다. 두 사람이 거실의 탁자앞에 앉자 시녀가 차를 날라왔다. 백방생은 후원의 연못과 정원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곳이 비록 당신의 집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훨씬 새집인 것은 사 실이 아니오?" 진소유는 왠지 얼굴 가득하게 수심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그 사이에 많은 돈을 벌었군요. 나는......, 별로 이제 까지 한 일이 없어요." 백방생은 그녀가 매우 우울해 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것은 내가 횡재(橫財)를 했기 때문이지. 그보다, 그들이 우리를 뒤 쫓지는 않을까?" 진소유는 말했다. "아마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예요. 필시 뒤쫓아 오겠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면 어서 달아나도록 합시다."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천하의 그 어느 곳도 그들의 눈을 피하게 할 수는 없어 요. 우리는, 아무래도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그들과 협상을 하자는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지금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오?" 진소유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혹시 전재산을 잃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 예금장부에 있는 것 말이오"한 황금 백만냥 정도는 상관이 없 소." 진소유는 말했다. "우리는 당장에 무림을 떠날 수는 없어요. 일단은 그들과 일종의 동업관 계에 있어야 하는 거죠. 그렇지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 예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일단 우리가 혼인을 하기로 했다고 하고, 그 쪽에 황금 백만냥 으로 흥정을 해 보도록 합시다." 진소유는 문득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직시하며 말했다. "당신은 나와 혼인하기를 원하나요?" 백방생은 다소 움찔하여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만, 당신은, 당신은 혹시 또 비구니가 되려는 것이 아 니오？" 진소유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의 사문(師門)은 이미 무너졌고 제가 몸을 의탁할 곳은 없어졌어요. 설령 다른 절에서 저를 받아준다고 해도 이미 내집같은 느낌은없게될 거예요.이것은 사실 나의 운명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요. 나는 환속하기 로 결심했어요." 백방생은 기뻐하며 말했다. "맞소. 세속에서도 일심으로 부처님을 받들면 그것도 역시 다를 바가 없 다고 하였소." 진소유는 말했다. "사실 저의 사문이 무너지면서 저의 꿈도 모두 사라졌다고 할 수가 있지요. 나는 당신에게 시집가도록 하겠어요." 백방생은 그 말을 듣자 일순 크게 기뻐서 생각했다. (그렇구나! 그녀는 정말로 석륭안을 사랑한 것도, 그리고 그를 남편으 로 맞아들인 것도 아니었구나!) 백방생은 마침내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가 덥석 달려들어 진소유의 몸을 안아버렸다. 그녀는 아직 허리에 비급들을 감고 있었지 만 그러나 역시 아름다운 난초의 향기가 났다. 그리고 투명한 연꽃과도 같은 눈부신 얼굴! 백방생은 이어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 다. 진소유는 가볍게 안색을 붉혔을 뿐 반항하지 않았다. 백방생은 그만 황홀경에 도취되어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려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괴로와 하고 있는데 나 혼자서 이렇게 기분을 내서는 안 된다.) 백방생은 깊이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는 물러나 자 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리고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소." 진소유는 묵묵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백방생은 물론 그녀의 허리에 감 긴 비급들을 상기하고는 말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소. 우리 그들이 오기 전에 우선 무공부터 높여두 는 것이 어떻겠소?" 진소유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말했다. "어떻게 해서 무공을 높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우리 무림인들의 삼대법보(三大法寶)가 무엇이오?" 진소유는 약간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이미 무림인이 다 되었군요. 그건 무공비급과 단약(丹藥), 그 리고 병장기가 아닌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지금 무공비급과 병장기는 그대에게 있으니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 소?" 진소유는 말했다. "혹시 좋은 영단이라도 당신에게 있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이제까지 그녀에게 구박만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그녀 가 부드럽게 대해주자 너무나도 기뻐서 그만 뼈까지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겨우 끓어 오르는 열정을 자제하며 말했다. "물론이오. 내가 이미 아까 말하지 않았소?" 이어 백방생은 품속에서 예의 그 두개의 약병을 꺼내 놓았다. "이것은 속명신단이고 이것은 대라금단인데 모두가 성수곡의 물건들이 오." 진소유는 아까 미처 그것들을 주의해서 보지 못했다. 그녀는 뜻밖에도 그러한 것을 보게 되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사실 그런 영단들은 그녀 가 이제까지 수도 없이 들었던 것들이었다. "아니 이런 것들을 어떻게 구입하게 되었죠?" 사실 이 성수곡의 영단들은 워낙에 귀하여 설령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구입하기가 어려운 것들이었다. 백방생은 이윽고 자신이 소림사를 나와서 황진의와 만나게 된 사연, 그리고 그 뒤에 치료를 하며 약병을 받은 일과 증평을 만나서 하나의 약병을 남에게 준 일 등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어 백방생은 다시 황진의에게 두개의 약병을 받은 일을 설명한 후에 다시 말했다. "그녀는 연인이 남쪽에서 활약하고 있는데, 최근에 나의 호위가 되었 다가 그녀 자신의 연인을 찾으러 떠나 버리고 말았소." 하지만 백방생은 얼른 무공수련을 할욕심으로 무슨 황금충의 재산 얘 기나 당리 등의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진소유는 가볍게 탄식하더 니 말했다. "정말 기이한 인연이로군요. 그녀가 당신을 좋게 봤음이 분명해요. 나 중에 그녀를 보면 고맙다고 인사를 하세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녀는 머지 않아서 내 앞에 연인을 데리고 나타날지도 모르오. 그때 내 당신에게 소개시켜 주겠소." 진소유는 말했다. "하지만 그 약들은 당신의 몸을 치료하기 위한 것인데, 제가 복용해서 야 되겠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세상에는 정말 기이한 일도 많소. 뜻밖에도 어느날 갑자기 나의 몸 이 완벽하게 치료가 된 것이오. 자, 한번 만져 보시오! 이제 나는 사 실 어떤 치료약도 필요없게 되었소." 진소유는 손가락으로 그의 손목을 진맥해 본 이후에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아마 당신은, 매우 운이 좋은가 봐요. 저는 모든 일이 잘 되지 않고 있는데."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함께 살게 되면 둘다 운수대통하게 될 것이 아니오"자, 어서 이 속명신단은 내상약(內傷藥)이니 놔두고, 대라금단을 네알씩 복용하도록 합시다." 진소유는 그만 웃었다. "대라금단은 한번에 일갑자의 공력을 증가시키는데 그렇게 많이 복용 하면 어떡해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이전에 대환단을 서른여섯개나 복용한 적도 있는데?" 진소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뚱보가 되고 만것이 아닌가요?" (혹시 내가 뚱보가 되어 보기가 싫다는 것일까?) 백방생은 내심 가슴을 졸이며 다시 우기지 못했다. 그는 말했다. "그럼 우리 각자 두 알씩만 복용하도록 합시다."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우선 한 알씩 복용하도록 해요." 백방생은 결국 진소유의 권유를 받아들여 대라금단을 한알씩만 복용 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백방생은 시녀들에게 간단한 주의사항을 지시한 다음에 침실의 방문과 창문들을 모조리 닫 아 걸고 이어 다시 품속에서 대라금단만 두 알을 꺼내 들었다. "한 사람은 호법을 서야 할 테니 그대가 먼저 운기행공을 시작하구 려." 백방생이 그 금단(金丹)을 하나 건네주자 진소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솟기 시작하고 전신의 모공에서 안개같은 기운이 일 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두 사람의 경지는 상승의 경지이기 때문 에 비록 운기행공 도중이라고 해도 별다른 주화입마의 위험은 없었다. 단지 백방생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실행하기 위해서 호법을 서는 척 했던 것이었다. 점차로 진소유의 전신의 기운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진소유의 내공은 삼갑자 정도였다. 이제 그녀는 일갑자의 내공을 더하여 절정의 정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녀의 모습이 둥근 백색의 공 모양속에 들어가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곧장 가부 좌를 틀고 그 앞에서 운기행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대라금단을 두 알을 복용했다. 얇은 밀납의 껍질을 벗겨내자 왠지 그윽한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고 여전히 맛은 없었다. 일순 뱃 속에서 열기가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체내의 진기와 합류 했다. 백방생의 몸에는 이미 진기가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융화관통된 대주천반운이 장애가 없어지기는 했으나 워낙에 진기가 막대해 짐에 따 라서 전신의 혈관들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대개 그러한 현상은 이른바 다른 경지로 상달(上達)하는 조짐이며 대부분이 위험해 지 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경지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폐관수련을 하여 전신의 혈맥들을 안마하고 트이게 하며 혹은 문파의 선배고인들 의 보호와 벌모세수(伐毛洗髓)의 개정대법을 받기도 한다. 자칫 심마에 빠져서 진기가 다른 방향으로 새어버리거나 혹은 역류(逆流)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결코 그런 상황에서 무리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이미 그러한 경지를 돌파한 경험이 있었고 또한 전신 의 치료가 완료된 지금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감히 이런 위치에서 대라금단을 두알이나 복용하지는 못했었을 것이었 다. 이내 전신의 대주천반운상의 진기가 가득차서 더이상 수용할 수가 없게 되자, 백방생은 드디어 백맥을 포괄하는 지선(支線)들에도 진기를 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미 내공심법의 종류가 달라진 최상승(最上乘) 의 내공심법이라는 것이었다. 대주천반운의 간선(幹線)에서 숨이 막힐 듯 이 답답하게 죄어 있던 진기가 지선의 문이 트이기 시작하자 그 쪽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지선의 흐름은 빨랐고 간선의 흐름은 늦었다. 그만큼 간선의 압박은 약화되었지만 지선에서는 이미 위험한 고비가 예고되고 있었다. 진기가 강력하여 그 지선의 속도가 빨라졌으므 로 좀처럼 제어하기가 어려워 졌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분산된 다면 즉시 반신불수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일에 자 신이 붙은 백방생은 오히려 그 지선의 속도를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그가 알고있는 최상승의 내공심법에 의해 거의 한순간에 백팔개의 대소 혈맥(大小穴脈)들이 관통되게 되었고 그 기운은 다시 대주천반운의 간 선의 흐름과 합쳐졌다. 전신의 진기의 흐름이 그와 같은 변화를 보이게 되자 문득 전신에서 어떤 심상치 않은 조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신의 혈맥들이 열려가 고 그 기운들이 세맥들에도 전해지게 되자 지극히 상쾌한 느낌과 함께 진기들이 어딘가 새로운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해저 (海底)에서 충맥(衝脈)을 통해 거대한 진기가 이환궁(泥丸宮)으로 일직선 으로 치솟았다. 대개 그렇게 막강한 진기를 갑자기 대하게 되면 자칫 머 리가 이상해 지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백방생은 이미 경험이 있고 또한 이환궁이 완전히 닫혀져 있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생각보다 아주 쉽게 두정(頭頂)이 열렸다. 두정이 열 렸다고 하는 것은 실제가 아닌 느낌이다. 일순 백방생은 분수처럼 퍼져 나가는 자신의 기운이 우주(宇宙)와 하나가 되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이어 그 우주의 기운이 자신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곧 그것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이다. 바로 그것을 일명 생사현관(生死玄 關)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후천진기(後天眞氣)는 우주의 기운과 화 합하여 선천진기(先天眞氣)로 바뀌며, 그 선천화된 진기가 그의 몸을 구석구석 누비면서 백팔혈맥을 완전히 융통시키고 전신의 일천세맥 (一千細脈)과 팔만사천모공(八萬四千毛孔)을 크게 열어 놓았다. 진소유는 비록 다른 경지로 도약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공력을 일갑 자를 더하여 단숨에 사갑자의 절정최고의 경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무학에 대한 이해와 자질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대주천반운상의 진기가 점차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면서 짙은 안개기운속에서 눈을 떴다. 그러나 그 안개기운 들은 이내 흔적도 없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두눈에서는 일순 강렬한 기운이 내비쳤으나 이내 부드럽고 온화한 광 채로 변했다. 운기행공을 하는 도중에 주변의 여건은 달라지지 않았다. 천상회에서 도 아직은 그들의 뒤를 추격하지는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 득 백방생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한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백방생, 그는 이순간 투명한 공 모양의 진기들에 가득 싸여서 몸이 허공으로 한자나 둥실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부공삼매(浮空三 昧)의 현상이다. 즉 최상승의 내공이 완전히 성취된 모습이었으며, 게다 가 그 경지도 이미 최고의 상황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백방생의 전신의 피부는 그야말로 맑게 빛나기 시작하고 마치 상서로운 듯한 기운이 실 내에 감돌았다. 또한 점차로 그 기운이 강렬해 져서 진소유는 거의 제 대로 바라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진소유는 사실 백방생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백방 생의 무공이 설마하니 이러한 경지에 까지 이르렀을 줄은 몰랐다. 문 득 과거 백노야의 장원에서 거의 불가사의한 전경을 보이던 백방생의 무공이 그녀의 뇌리에 섬전처럼 떠올랐다. 백방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최절정의 경지에 완전히 이르게 되자 매우 마음이 흡족했다. 그는 문득 빛을 감추었고 서서히 지면으로 내 려온 다음에 눈을 떴다. 그의 몸에서 피어나던 투명한 진기는 사라졌지 만 그러나 그의 피부는 아직도 은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의 눈에서는 일순 추수처럼 맑고도 예리한 광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 다. 백방생은 눈을 뜨고 나서 뭔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진소유를 보고 는 의아해 져서 말했다. "아니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오?" 백방생은 자신의 목소리도 아주 맑고 낭랑하게 변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진소유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은 대라금단 두 알을 한꺼번에 복용했나요?" 백방생은 그 말에 그만 안색을 붉히고 쩔쩔매며 변명했다. "아, 아니 나는 그저 당신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고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아서.......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화가 났소 소유(小柔)?"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나는 그 일을 나무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는 어쨌든 가 능하면 힘을 키우는 것이 좋을 거예요. 당신은 아까 네 알을 복용하자고 말하지 않았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그것은 나의 착오였소. 지금내공력은 육갑자(六甲子)인데, 만일 더이상 공력을 증가시켰다면 곤란해질 뻔 했소. 다음 단계인 대홍락(大 紅落)은 마음으로 깨닫는 무공인데, 그런 깨달음도 없이 공력만 증가시 켰다가는 오히려 주화입마를 당하기 쉬운 것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당신은 머지 않아서 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이미 그 경험이 있고 또한 지식도 가지고 있소. 다만 그것을 신체에 적용하는 것이 남아있을 뿐이니, 아마도 머지 않아서 그렇게 될 수가 있을 것이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고 이어 심검의 경지에 오르 게 되면 아마도 그들을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진소유는 문득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아버님의 무공이 어느 정도였는지 아나요?" 백방생은 느닷없는 그녀의 질문에 다소 어리둥절해 하다가 말했다. "아마, 혹시 초절정의 경지는 아니었을까?"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분의 제자들이 바로 천상오룡이예요. 그들의 무공이 이미 그 경지 인데 당신의 아버님의 무공이 겨우 그 경지라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혹시 심검이나 광검(光劒)의 경지는 아니었을까?"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분은 달마일신승(達摩一神僧)이라는 별호까지 붙었을 정도로 유명 하신 분이었어요. 다만 폐관을 너무 많이 해서 강호인들이 잘 모르고 있 는 것이죠. 게다가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분의 무공은 이미 최고경지 인 무형검(無形劒)에 이르렀었다고 해요." 백방생은 그만 눈이 휘둥그래 졌다. "무형검이라고? 아니 그런데도 누구에게 당했다는 말인가? 세외오세(世 外五勢), 그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었을 텐데?"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져서 말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현재 무공이 무형검의 경지에 올라있는 사람은 천륭무가의 가주(家主) 밖에는 없다고 해요." 백방생은 안색이 변했다. "아니 그럼 그 천륭무가의 가주 석장생(石長生)이 우리 부모님의 원수 라는 말인가?"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 당시 그 석장생은 분명히 소림사에 있었다고 하 더군요. 게다가 그가 반드시 당신의 부친을 이긴다고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당신의 부모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당하고 말았죠." 백방생은 문득 전신이 서늘해 지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그것은 일 종의 보이지 않는 공포감(恐佈感)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천하에 다른 알 수 없는 절세고수(絶世高手)가 있어서 나의 부모를 해치고 말았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가 이제까지 알아낸 얘기는 겨우 그것에 불과해요. 저도 더이상은 알 수가 없어요. 저의 얘기는 그러니까 당신은 설령 무형검의 경지에 오른 다고 해도 절대로 자만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죠."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져서 말했다. "아니, 무형검이 최고의 경지인데 어떻게 또 다른 경지에 오른다는 말이 오?" 진소유는 문득 입을 다물고 묵묵했다. 그녀는 무슨 깊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다시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정말로 세상에 신선(神仙)이 있다는 말인가?" 진소유는 말을 하지 않아서 얼핏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 해하기 어려웠다. (내 아버지의 무공이 당시에 이미 무형검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고?) 백방생이 혼자서 곰곰히 생각을 굴리는데 문득 진소유가 그를 향해 다시 말했다. "나는 가야겠어요." 백방생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냉랭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당신은 계속 여기에서 살도록 해요. 다시 내가 있는 곳으로 오지 말 고.......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어요." 백방생은 그만 가슴이 철렁해짐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 아해 져서 말했다. "아니 이미 나와 함께 살기로 하지 않았소?" 진소유는 싸늘하게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백방생은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이제 차갑 고도 완고하여 결코 마음을 돌릴 것 같지가 않았다. 백방생은 그만 참 지 못하고 으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그녀의 몸을 얼싸안았다. 진소 유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백방생은 그녀의 몸을 안아들고 미친듯이 애 무를 하고 입맞춤을 하다가 이윽고 침상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을 가져 버리겠소. 그래야 다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테 니까." 그래도 진소유는 그저 목석처럼 있을 뿐 아무런 반항이나 움직임도 없었다. 백방생은 그녀의 몸을 침상위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는 마악 그녀의 옷을 벗기려다가 멈칫했다. 진소유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고 전혀 동요되는 기색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문득 절망감을 느끼며 소리쳤다. "날 보고 어쩌란 말이오? 날 보고 어쩌란 말이오? 대체 나에게 이렇게 대할 수가 있소? 나를 죽일 작정이오?" 45 장 반전 그 때 갑자기 어디선가 음산하고도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너를 죽이려는 게 아니다. 그것이 바로 너를 살리려는 것이 다!" 그 음성은 매우 귀에 익었다. 그리고 매우 소름끼치는 느낌을 주는 것 이기도 했다. 백방생은 깜짝 놀라서 급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분명히 안에서 잠궜었는데 방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사람이 어 느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천상회주인 석륭안이었다. 주위는 벌써 어둑어둑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석륭안의 그 은백색의 머리카락 은 그 가운데에서도 음산하게 흡사 귀화(鬼火)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 다. 백방생은 그 석륭안의 입술이 다소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백 방생은 놀라서 안색이 변했으나 이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이 나를 놀리려는 것이오"그럼 어디 한번 나와 싸워봅시다!" 석륭안은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달라진 모습을 보 았는지 다소 놀란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너는 참으로 놀라운 녀석이로구나. 불과 잠깐 사이에 무공이 신기하 게도 늘었군. 하지만 지금 나는 너와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니 염려하 지 마라." 그 때 진소유는 이미 침상위에서 몸을 일으켜서 석륭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당신은 나 때문에 왔나요?" 진소유의 말에 석륭안은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렇소. 듣자니 당신은 무슨 볼일이 있어 나갔다는데, 어째서 둘이서 이런 곳에 있는 것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무공이 증진되어서인지 그녀의 용모는 더욱 부드러 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금포에 들른 다음에 잠시 그의 장원에 들른 거예요. 그는 이전부터 나를 좋아했으니 자연 나에게 관심이 많죠." 석륭안은 말했다. "그럼 당신도 그에게 관심이 많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나도 물론 그를 측은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가 이토록 매사에 적극 적이니 나도 장차 그를 좋아하게 될 지도 모르겠군요." 석륭안은 안면이 다소 일그러졌다. "그래서 이곳에 있을 작정이오?"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곳은 그의 집이고 나의 집은 따로 있어요. 내가 내집이 있는데 어째서 이곳에 있겠어요?" 석륭안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어서 갑시다?" 진소유는 즉시 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마주 잡았다. 석륭안은 그녀의 손에서 체온을 확인하자 비로소 마음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백방생 은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 때 백방생이 신법을 날 려 그 앞을 가로 막았다. 석륭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백방생은 마치 온몸을 맡기는 듯이 석륭안에게 손을 맡기고 있는 진소 유를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나도 같이 가야겠소. 나도 천상회의 일원이니 함께 갑시다." 석륭안은 그것을 보고 말했다. "너는 아직 입회식을 치르지 않았으니 천상회의 일원이 아니다. 게다가 너는 앞으로도 입회식을 치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우리를 따라 갈 필요가 없고 그저 이곳에서만 살면 된다." 석륭안의 말은 확고부동해 보였다. 그의 말은 그대로가 결정이었으며 누구라도 그 지시를 어길 수가 없을 것 같은 오만함을 담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가 이제는 자신을 천상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을 생각해 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오?" 석륭안은 기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필요한 곳은 바로 이곳일 것이다. 너는 그저 이곳에서 씨나 뿌리고 밭을 일궈서 농사나 짓는 것이 어떠냐?" 백방생은 그 시선이 너무나도 강렬해 보여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 사 이에 석륭안은 이미 진소유를 데리고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마치 거 짓말처럼 석륭안은 허공을 밟으며 날아가고 있었다. 백방생은 급히 정신 을 차리고 그 뒤를 추격해 보았다. 하지만 석륭안의 신형은 진소유와 함께 어느새 아득히 건물들의 사이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게다 가 백방생은 문득 뒤이어 그 뒤를 쫓는 다섯개의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 다. 바로 그들은 다름아닌 천상오룡이었다. 필시 이 장원에 이미 매복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그 기세(氣勢)를 보자 이마에 문득 식은땀이 흐르며 감히 더 추격할 수가 없었다. 백방생이 머뭇거리자 이내 그들은 멀리 사라졌다. 백방생은 문득 넋을 잃은 듯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것은 실로 꿈이 아닐까" 정말로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는구나!) 백방생은 사실 석륭안과 진소유가 어디로 갔는 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갈 수가 없었다. 필시 이번에 그가 가게 되면 다시 돌아올 수가 없 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그러나 갈 수도 없었지만 이곳에 편 안히 머물 수도 없었다. 그는 곰곰히 진소유의 의도를 생각했다. 그녀 는 정말로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그리고 정말로 복수를 꾀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그녀는 어째서 그에게 더욱 무공에 정진할 것을 말 했다는 말인가" 백방생으로서는 게다가 혹시 천상회에서 누군가가 와서 자신을 해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며칠이 흐르는 동안 그는 그 일로 인해 제대로 잠도 잘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공수련도 역시 할 수 가 없었다. 그는 세수도 하지 않고 수염을 길렀으며 거칠하게 변해서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의 주변은 늘 조용했다. 그를 습 격할듯 하던 천상회의 사람들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실로 기이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백방생이 이레째 밤을 보내고 났을때 비로소 본채가 완전하게 수리되 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백방생은 그날은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은 다 음에 새옷 차림으로 본채로 나아갔다. 본채의 거실은 정말로 옛날처럼 감쪽같이 수리되어 있었고 모든 것들이 잘 치워져 있었다. 한쪽의 벽 난로에서는 잘 다듬은 참나무 장작들이 기세좋게 타오르고 있었고 거 실의 내부는 훈훈했다. 백방생은 모처럼 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새 로운 분위기에 젖었다. 이렇게 분위기를 바꾸니 왠지 뭔가 일이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창밖을 내려다 보니 밖에는 어느새 눈이 내려서 사방이 하얗게 덮여가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왠지 시녀들이라도 불러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화아(花兒)와 향아(香兒)라고 불리우는 그 두 명의 나이어린 시 녀들은 오늘따라 의복을 산뜻하게 잘 차려입고 있었다. 그런데 백방생이 그녀들을 불렀을 때에는 뜻밖에도 그녀들은 오지 않고 다른 한 사람이 거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옥색의 의상을 경장으로 잘 차려입은 절색의 미 소녀(美少女). 백방생은 그리 친숙하지는 않아도 한눈에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바로 석채릉이었다. 백방생은 정말로 석륭안의 동 생인 그녀가 이곳으로 찾아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하인들의 연 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여기까지 오면서 약간의 완력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어서 오시오. 이런 누추한 자리에 와 주다니 뜻밖이오." 석채릉은 그의 얼굴을 강한 시선으로 주시하다가 문득 배시시 웃었다. "내가 여기에 와서 기분이 좋은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글쎄.... 뜻밖인 것은 사실이오. 어쨌든 기왕에 온 것이니 그 자리에 앉 는 것이 어떻겠소?" 석채릉은 그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그의 맞은편의 태사의에 풀 썩 주저 앉았다. 백방생은 필시 여기에 그녀 혼자서 오지는 않았을 것이 라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그가 기다리던 천상회의 공격이 시작된 것 이다. "소유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백방생은 문득 진소유의 얼굴을 그려 보았으나 이어 석채릉에게 말 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소?" 석채릉은 기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은 나의 올케가 될 사람을 유혹했었다죠"그래 그 재미는 좀 보셨나요?" 안하무인격으로 건방지게 말하는 석채릉에게 백방생은 당장에 나가라 고 호통을 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여전히 태연 을 유지하며 말했다. "이곳은 내 집이오. 만일 낭자가 다른 볼일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 주었 으면 좋겠소." 석채릉은 그의 명백한 축객령에도 전혀 눈썹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녀 는 마치 눈앞의 남자 정도는 얼마든지 요리할 자신이 있다는 것 같은 표 정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지 않겠다면요"설마하니 완력으로 쫓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말인 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야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나는 낭자가 이곳을 나가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소." 석채릉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에게 많은 돈을 주어서 보낼 생각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에게 돈을 줄 필요는 없소. 다만 당신에게는 한가지만이 필요할 뿐이오." 이어 말을 끝냄과 동시에 백방생은 신형을 움직여 그녀의 앞으로 날아 갔다. 백방생의 무공은 확실히 그의 공력에 걸맞게 증진되어 있었다. 그 가 일단 움직이자, 자리에 그의 환영이 미처 사라지지도 않았는데도 벌 써 그의 우수는 그물처럼 변해서 상대방을 죄어가고 있었다. 사실 석채릉의 무공은 백방생과 그다지 많은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고작 일갑자 정도의 차이였다. 그런데 그녀는 백방생이 이렇게 갑자기 선공을 취해올 줄은 몰랐다. 그의 무공이 이렇게 갑자기 증진되었을 줄도 미처 몰랐다. 일순간 장내에 펑펑펑! 하는 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리면서 벽난로의 불빛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석채릉은 경악하며 급히 쌍장을 모아서 백방 생의 공격에 대응해 갔다. 그것은 마치 손과 발이 여러개가 달린 귀신들 이 일시에 수십개의 환영을 일으키며 싸우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매우 짧았다. 석채릉은 처음에는 겨우 막아 내기는 했으나 이 내 그물이 조여들 듯 하여 결국 백방생에게 일장을 얻어맞고 제압당하 고 말았다. 그들이 처음 싸움을 시작할 때는 태사의가 있는 쪽이었는 데 어느새 그들은 거실의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소군주님!" 백방생이 석채릉의 손을 잡아서 끌려고 할 때, 문득 뒤에서 약간 늙수 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백방생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거 실안에는 두 명의 백의노인(白衣老人)이 나타나 있었다. 그들의 머리카 락은 아직도 검은 빛이었는데 두눈에서는 각기 사람의 몸이라도 베 어버릴 듯한 무형의 기운이 발출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소위 무형지 기(無形之氣)다. 바로 초절정 이상의 고수에게서 느껴지는 심오한 예기 인 것이다. 백방생은 그 두명의 노인이 바로 석채릉을 호위해 온 것이며 다름아닌 삼십육천강의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백방생으로서는 물 론 그 중의 하나라도 상대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그의 수중에는 석 채릉이라는 인질이 잡혀 있는 것이다. 백방생은 여유있게 웃으며 우장을 그녀의 뒤통수에 갖다댔다. "여러분의 무공을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하지만 그 전에 이 여자는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그 두명의 백의노인은 백방생이 그렇게 엄포를 놓자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백방생은 이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서 그냥 돌아 가는 것이 어떻겠소"나는 그렇게 많은 손님을 달가와 하지 않소." 백의노인들은 여전히 망설였다. 석채릉이 말했다. "모두 돌아가요. 내 걱정은 말고." "소군주님...?" 두 백의노인들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싶었으나 이내 할 수 없다는 듯 창문을 열고 밖으로 휭하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그녀의 몸 을 번쩍 안아들고 자신의 태사의로 돌아왔다. 석채릉은 백방생이 말없이 자신을 옆 자리에 앉히자 이내 웃으며 말했 다. "당신의 무공이 높아졌다고 하길래 믿지 않았더니, 정말이었군요"당 신은 보기보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인 줄을 몰랐어요." 백방생은 말없이 그녀의 아혈마저 제압하여 말도 못하게 해 놓고, 이어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석채릉은 처음에는 그가 단지 겁을 주기 위해 그러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백방생은 묵묵히 쉬지않았고 그 리하여 마침내는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겨버리고 말았다. 석채릉은 처음에 는 안색이 창백하고 분노의 빛을 띠었으나 이내 마지막 고의마저 떨어 져 나가자 두눈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마치 목석처럼 그녀의 알몸을 한차례 훑어보더 니 이어 한손으로 그 알몸을 안아들고 벽난로 쪽으로 다가갔다. 벽난로 에는 불이 훤하게 타오르고 있었으므로 약간 따뜻하긴 했으나 석채릉은 순간 소름이 끼치고 등골이 오싹해 지는 것 같았다. 백방생의 무표정한 얼굴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지금 그 백의노인들은 창밖에서 발을 구르고 있을 것이다. 그 들은 물론 정말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석채릉이 그렇게 알몸이 되어 버렸으니 어떻게 감히 구하러 들어올 수가 있겠는가" 백방생은 벽난로 옆의 의자위에 석채릉을 반듯하게 눕혀 놓았다. 그리 고 한자루의 장검을 불 속에 집어 넣었다. 그것은 바로 석채릉이 차고 다 니던 그 옥색(玉色)의 보검이었다. 그 보검은 불속에 들어가자 이내 끝부분이 발그레하니 달아올랐다. 백방생은 그것을 들어 이윽고 석채 릉의 몸에 대려다가 문득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내 목숨과 당신의 한목숨을 바꾸는 것이?" 석채릉의 얼굴은 공포와 분노, 그리고 극도의 수치감 등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하고자 했다. 헌데 어느새 아혈은 다 시 풀려져 있었다. 그녀는 날벼락처럼 소리쳤다. "네놈이 감히! 감히 이러고도 살아 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백방생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소" 한목숨과 한목숨을 바꾸는 것이라고. 나는 이 미 삶의 즐거움도 잊어버린 사람이니, 당신과 함께 죽는 것도 그리 나 쁘지는 않을 것이오." 말과 함께 백방생은 그 옥보검으로 그녀의 얼굴에 검날을 가져갔다. 비 록 아직 날이 닿지 않았지만 서늘하고 뜨거운 기운이 얼굴위에 느껴졌 다. 석채릉은 이미 그 보검이 금석을 무우 자르듯 한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 소리쳤다.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다만 편안해 지기를 바라오." 석채릉은 말했다. "나는 너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 백방생은 말했다. "당신은 이미 나의 두 시녀들을 죽이지 않았소?" 석채릉은 일순 놀라며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 음, 그렇다고 나를 이렇게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앞으로 나를 번거롭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풀어 주겠소." 석채릉은 말했다. "물론 나는 절대로 너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 그러자, 백방생은 느닷없이 지풍을 날려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석채릉은 일순 어리둥절해 졌으나 이내 놀란 토끼처럼 날아서 자신의 의 복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나 백방생의 신형은 어느새 여전히 그녀의 곁에 바싹 달라붙고 있었다. 석채릉은 그가 자신이 옷을 입는 광경을 보 았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석채릉은 옷을 다 입고 나서 은근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백의노인들은 여전히 창밖에서만 머무르고 있을 뿐 조 금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석채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 했다. "당신은 정말 약속을 지키는군요. 나는 정말로 당신이 나를 풀어줄 줄은 미처 몰랐어요." 백방생은 시퍼런 살기(殺氣)가 번뜩이는 그녀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말 했다. "나는 본래 그런 편이오." 석채릉은 그의 우수가 아직도 자신의 전신을 제압하고 있는 것을 의식 하고 웃으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결코 나를 어쩌지 못해요. 하지만 나는 결국 당신을 해치게 될 거예요.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죠?"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당신을 소유와 교환할 생각이오." 석채릉은 싸늘하게 웃었다.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우리 오라버니가 당신을 그냥 둘 줄로 아 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사겠소!" 석채릉은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사겠다고요" 대체 얼마에 사겠다는 거죠?" 백방생은 품속에서 한 장의 금표를 꺼내 들었다. 석채릉이 차갑게 말 했다. "그건 겨우 천냥짜리 금표가 아닌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이것으로 당신을 사겠다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이것으로 밖에있 는 두사람에게 심부름을 보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을 침실로 데려가 겠소." 석채릉은 안색이 싹 변했다. "네가, 감히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내가 당신을 처리하는 것은 아까의 일보다도 오히려 쉬운 일이지. 하 지만 사실 나는 별로 그런 것을 좋아하지는 않소." 석채릉은 속으로 어떻게 해야 이 괴상한 녀석에게서 떨어질까 하고 궁리했다. 그녀는 말했다. "그럼 내가 너를 잊어주기만 하면 너는 내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겠다 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 그렇소. 하지만 당신은 잠시틈만나면 밖에 있는 저 사람들을 부 를 것이 아니오?" 석채릉은 천륭무가에서 공주처럼 귀하게 자라온 몸으로 실로 오늘처 럼 그런 심한 꼴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까 너무나도 놀랐었기 때문에 아직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 어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죠. 그리고 아까 말한 그 시녀들 은 아직 죽은 것이 아니예요. 나는 그저 혈도(穴道)만 짚어 놓았을 뿐 이죠.?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그 얘기를 믿을 수가 없으니 당신은 계속 이곳에 남아 있도록 하시오." 그 때 갑자기 거실의 문이 열리며 두 시녀인 화아와 향아가 놀란 외침 과 함께 안으로 뛰어 들었다.아마도 밖의 두 백의노인이 석채릉의 말을 입증시켜 주기 위해 안으로 들여보낸 모양이었다. "이 곳은 위험하니 너희들은 다시 이곳으로 일하러 올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돈은 집사에게 주어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갖도록 해라." 백방생은 조금전에 꺼냈던 그 금표를 두 시녀에게 주었고, 그 두명의 시녀는 놀라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 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겁게 질린 그녀들의 발걸음이 완전히 멀어 지고 나서야 백방생은 다시 지풍을 재빨리 날려 석채릉을 제압했다. 석 채릉은 비록 감히 반항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다시 제압을 당하자 만면에 그만 분노한 기색을 떠올렸다. 백방생은 곧 그녀 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백방생 은 안으로 들어서자 우선 모든 방문과 창문들을 안에서 닫아 건 다음에 침상으로 다가가 그녀를 침상위에 내려 놓았다. 석채릉은 분노한 기색 으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이렇게 나올 건가요?" 백방생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렇소." 석채릉은 그가 다시 옷을 벗기기 시작하자 소리쳤다. "나를 믿어요. 나는 결코 당신을 해치지 않겠어요." 백방생은 문득 그녀의 아혈도 제압해 버렸다. 그리고 이어 그녀의 옷 을 다시 모조리 벗겨 버렸다. 지금 창밖에서는 두 명의 백의노인들이 초조해 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허술한 듯해도 도무 지 기회를 잡을 수가 없어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 자신도 이내 옷을 모조리 벗고 석채릉과 함께 한 이불속으 로 들어갔다. 백방생은 마치 신혼부부가 하듯이 그렇게 천천히석채릉의몸 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몸을 안으려고 하자 문득 석채릉 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간절한 애원이 실 려 있었다. 백방생은 내심 탄식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놓아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경우에는 그는 그녀에게 좀더 깊은 흔적을 남길 수록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문득 백방생은 탄식과 함께 몸을 일으켰고 자신 먼저 옷을 모두입은 다음에 다시 그녀의 혈도를풀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거실로 나가버렸고 그녀가 옷을 입고 어디로 가는지도 상관하지 않았 다. 이윽고 백방생이 거실에 앉아서 밖에 쌓여있는 눈을 바라보고 있는 데 침실의 문이 열리며 다시 석채릉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뒤에는 예의 그 백의노인들이 시립하고 서있었다. 백방생은 그쪽을 한번 바라보았으나 이내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석채릉은 이윽고 그 의 맞은편의 자리로 가더니 가볍게 앉았다. 지금의 이 대치는 최초와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 다른 것은 석채릉의 양옆에 백의노인들이 시립 하고 서있다는 사실이었다.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녀 의 얼굴에선 이제 눈물의 흔적은 없었다. 어차피 그것은 연극이었을 지 도 모르는 일이다. 석채릉은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보기 보다는 간담이 매우 크군요. 그래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시오?" 석채릉은 웃으며 말했다. "본래 내가 원하던 것은 바로 당신의 재산이었어요. 난 당신의 재산이 탐이 나서 온 것이죠. 하지만 이젠 달라졌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이오?" 석채릉은 말했다. "난 지금 당신을 원해요. 이를테면 당신의 고통같은것.... 당신은 설마하 니 이 변화를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겠죠?"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바보였소." 석채릉은 말했다. "후회하고 있는 모양이죠?"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후회하고 있소." 석채릉은 문득 일어서서 자신의 보검을 찾아 허리에 꽂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나도 겁이 없어요! 혹시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러는 지도 모르는 일이죠." 말과 동시에 석채릉은 우수를 가볍게 휘저었다. 그것이 바로 신호였다. 그 두명의 백의노인들은 즉시 백방생을 향해 좌우에서 엄습해 들었다. 그들의 공격은 실로 경천동지할 정도였다. 한순간에 그들의 수영(手影)이 거실을 가득 뒤덮었으며 어느새 그것들은 눈꽃이 날리듯이 날벼락처 럼 백방생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백방생은 사실 그들을 상대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눈앞에서 무서운 손속들이 덮쳐드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가만히 있었다. 일순간 흡사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백방생의 전신에는 수십줄기의 피가 치솟았으며 그의 육신은 썩은 짚단처럼 무 너져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엄청난 고통속에서 안면을 일그러뜨렸으 나 이내 이빨을 깨물고 참았다. 백의노인들은 단 한번에 자신들의 손속이 성공하자 이내 뒤로 물러섰 다. 석채릉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서 백방생이 고통속에서 전신을 꿈틀 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백의노인들은 이미 대단히 백방생에게 화가 나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공격에 고문수법의 일종인 역경혈맥(逆經穴脈) 을 가미시켰던 것이었다. 그 수법은 분근착골의 경우처럼 눈에 띄는 점 은 없으나 당하는 사람은 전신의 혈맥에 마치 수천마리의 개미가 기어 다니는 듯한 고통과 가려움증 때문에 거의 미칠듯이 괴로와 하게 되 는 것이다. 석채릉은 잠시 백방생이 억지로 그 고통을 참는 것을 바라보 다가 이윽고 지풍을 날려서 그 수법을 해소시켜 주었다. 백방생은 그 엄청난 고문수법에서 헤어나자 마치 한 더미의 고깃덩어 리가 된 것처럼 늘어졌다. 그의 몸에 나있는 수십군데의 상처에서는 아직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러나 치명적인 것들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지금 지독한 내상(內傷)을 입어서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석채릉은 노인들에게 백방생을 태사의에 앉히게 한 다음에 자신도 다시 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당신은 정말 무모하군요. 겨우 이 정도를 하려고 나를 그렇게 괴롭 혔었나요?" 백방생은 겨우 입을 열어 어렵게 말했다. "그랬나 보오." 석채릉은 천천히 걸어서 그의 바로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수십번의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연신 퍽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 의 손이 거의 보이지도 않게 움직였고 이어 백방생의 양쪽뺨과 입술 등 이 터져나가며 피가 흘러나왔다. 백방생은 거의 무공이 상실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였다. 이어 백방생이 거의 혼절할 즈음이 되어서야 석채릉은 손을 멈추었다. 어느새 그녀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원독의 빛이 가득하게 흐르고 있었다. 언제 그녀가 그러 한 수모를 받았었던가"백방생은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황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으나 아무런 말도 없었다. 석채릉은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반드시 너를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백방생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석채릉은 이에 백의노인 한 사 람에게 말했다. "그를 어서 침실로 데려가서 눕혀놓도록 해요!" 말을 하는 그녀의 두눈에서는 일종의 원독의 잔인한 광기(狂氣)가 흐 르고 있었다. 그녀는 백방생을 그곳으로 데려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 두 명의 백의노인 중에서 한 사람이 백방생을 들고 침실로 데려갔다. 그 는 곧장 백방생을 침상위에 눕혀 놓았다. 석채릉이 곧장 그 뒤를 따라 왔는데, 그녀는 입가에 가득 잔혹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윽고 백 의노인이 밖으로 나가고 나자 석채릉은 문득 자신의 보검을 뽑아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백방생도 이때는 다소 정신을 차렸으므로 놀라며 말했 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오?" 석채릉은 보검을 그의 눈앞에서 휘저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너의 그 흉측한 물건을 잘라 내려는 것이다. 감히 내 앞에서 지 랄 발광을 했으니 잘려나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백방생은 오히려 여유있게 미소하며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손해는 있을 지언정 이익은 없을 것이오." 석채릉은 마악 보검을 그의 몸으로 가져가려다가 멈칫하며 말했다. "손해는 있을 지언정 이익이 없을 거라구"그게 무슨 말이지?"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저 당신을 겁주었던 것이지 무슨 털끝 하나 다치게 했던 것은 아니오. 마지막의 상황에서 오히려 내가 양보 를 한 것이지. 헌데 당신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소?" 석채릉은 음산하게 웃었다. "정말 병신같은 말을 하는 구나. 내가 지금 너를 그저 고자를 만드는선 에서 끝날 줄로 아느냐"나는 너를 죽이거나 혹은 아예 무공을 전폐시키 고 불구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너는 차라리 나를 범했어야 했다. 그 래야만 죽어도 눈을 감았을 지도 모르지." 백방생은 가볍게 탄식했다. "그 말은 정말 낭자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잔인하구려." 석채릉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너는 내가 정말로 아름답다고 여기느냐?"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오. 아니면 내가 왜 그 일을 하려다가 중도에서 그만 두었겠 소?" 석채릉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럼 너는 내 손에서 행복하게 죽을 수가 있겠군?" 백방생은 말했다. "이미 말했지만 그것은 손해만 있지 이익이 없는 일이오. 예컨대 낭자 는 지금부터 언제라도 나를 제거할 수가 있소. 그런데 굳이 그 많은 돈 을 날려야만 하겠소?" 석채릉은 이미 백방생을 몇차례 가격 함으로써 내심의 분노가 많이 사라졌다. 마음이 일단 냉정해 지자 그녀의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 였다. 석채릉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정말로 네게 백만냥이나 되는 황금이 있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즉시 품속에서 두 개의 예금장부 등을 꺼내 보였다. 석채릉은 즉시 그 내용을 읽어 보았으며 자연 두 눈이 크게 휘둥그래 졌다. 그 녀는 본래 많은 돈을 얻어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전혀 그녀가 이곳에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개 의 예금장부에는 무려 백오십만냥에 달하는 황금이 기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낭자도 그것이 현은(現銀)과 같다는 것을 잘 알 것이오." 석채릉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것은 혹시 네가 만들어 놓은 가짜가 아니냐?" 백방생은 말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직접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게 될 것이 아니오?" 석채릉은 문득 보검을 그의 목밑에다 갖다 댔다. 그 옥색의 시퍼런 검 날이 슬쩍 백방생의 목밑에 닿아 실날같은 선혈을 흘려냈다. 석채릉은 음산하게 말했다. "이제 너는 죽어도 할 말이 없겠지?"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낭자는 아직 그런 예금장부의 사용법을 모르는 모양이군" 그것들은 만 일 당사자의 비밀번호를 모르는 한은 절대로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오." 석채릉은 즉시 다시 말했다. "어서 비밀번호를 대라!" 백방생은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을 목숨인데 뭣 때문에 그런 남좋은 일을 하겠소" 그보 다는 차라리, 나와 협상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 석채릉은 말했다. "무슨 협상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건 간단하오. 바로 나는 몸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것이고 낭자는 그 많은 돈을 갖게 되는 것이오. 물론 낭자가 나중에라도 다시 약속을 어기고 나를 핍박할 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지만." 석채릉은 약간 발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결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아니다!"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낭자가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소. 하지만 내가 급한 현실이니 어쩔 수가 없지." 석채릉은 보검으로 위협하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 그러니 어서 빨리 비밀번호를 대라!" 석채릉이 흥분해서 인지 다시 백방생의 목밑에서는 가벼운 상처가 생겨났다. 46 장 현현대법(玄玄大法)과 불가사의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우선 안전을 위해서 내가 쓰던 예금장부의 비밀번호를 말해 주겠소. 하지만 일단은 한가지의 조건을 들어줘야 하오." 석채릉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다시 재촉했다. "무슨 조건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지금 매우 고통스럽고 그야말로 혼절하기 일보직전이오. 이런 상 황에서는 말할 수가 없소. 내가 애써 모은 재산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석채릉은 아미를 찌푸렸다. "그럼 네게 의원이라도 불러달라는 말이냐?"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호강까지는 필요 없소. 나는 그저 낭자가 차 한잔만 끓여다 주 면 되오." 석채릉은 싸늘하게 조소했다. "너는 그야말로 이런 상황에서도 근사한 취미를 가졌구나?"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온갖 고난에 시달렸기에 늦게나마 그런 생활을 해보 고자 하는 것이오. 게다가 낭자의 차 한잔을 마시게 되면 그것은 실로 천 금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석채릉은 그를 보며 말했다. "너는 설마하니 그 사이에 달아나려는 것은 아니겠지?" 백방생은 말했다. "설령 내가 몸이 온전하다고 해도 지금은 달아날 수가 없을 것이오." 석채릉은 다시 그에게 보검을 바싹 들이댔다. "내가 먼저 너의 그것을 잘라내기 전에 말하는 것이 어떠냐?" 백방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낭자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오. 다만, 낭자 가 그 내 부탁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나는 필시 한가지 보답을 할 것이 오." 석채릉은 말했다. "너는 무슨 보답을 한다는 것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우선 쓰던 것이 아닌 백만냥이 들어있는 예금장부의 비밀번호를 말해주겠소. 그러면 낭자는 남은 예금장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될 것 이고 나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석채릉은 문득 구미가 당기는 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너는 아직도 돈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오. 돈이라는것은, 즉 사람이 숨을 붙이고 살아있는 동안은 언 제나 필요한 것이 아니겠소?" 석채릉은 잠시 그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보검을 거두어 허리에 차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백방생은 그녀가 나가는 즉시 약병에서 두 알의 속명신단을 꺼내어 입속에 넣고 삼켰다. 사실 그가 차를 마시고 싶 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럴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두알의 속명신단 은 이내 그의 몸속에서 녹아서 그의 치명적인 내상을 치료하기 시작했 다. 그것은 비로소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어 공력을 끌어올려 안색을 창백하게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석채릉은 이윽고 잠시 후에 차 한잔을 들고 들어왔다. 그것은 물론 그 녀가 새로 끓인 것이 아니라 그저 있던 것을 벽난로에 한번 데운 것에 불과했다. "고맙소." 백방생은 겨우 몸을 일으켜서 마치 그것을 보약이나 되는 것처럼 천천 히 불어가며 마셨다. 이윽고 그가 빈 찻잔을 돌려주자 석채릉은 말했다. "이젠 약속을 지킬 때가 아니냐?" 백방생은 그녀에게 비밀번호를 말해준 뒤에 이어 말했다.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는 그 작은 예금장부는 돌려주시오." 석채릉은 냉소하며 말했다. "내가 너의 말을 믿을 줄로 아느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내가 가짜 비밀번호를 말했다는 것이오?" 석채릉은 말했다. "내가 금방 가서 확인해 보면 그 진위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니 너는 여기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도록 해라!" 말을 마치자 석채릉은 정말로 그 두개의 예금장부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백방생은 그것을 바라보며 문득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이미 석채릉이 몸소 그 예금장부의 비밀번호를 확인하러 갈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작은 쪽이었다면 수하를 보냈었겠지만, 그러나 많은 액수 쪽이었기에 그녀는 감히 수하에게 그것을 맡기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으로 볼때 백방생은 그녀에게 있어서 독안에 든 쥐의 형상 이 아니겠는가" 석채릉이 사라지고 나자 과연 두 명의 백의노인이 백방생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음산한 표정으로 백방생을 주시하더니 이어 백방생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들의 무공은 초절정의 단계로서 백방생보다도 한 단계가 높았다. 백방생의 상태가 온전하다고 해도 그 중의 한사람의 감시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두 사람이 모두가 엄중 하게 감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석채릉은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백방생에 대해서는 안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실 그것이 바로 실 수였을 줄이야" 갑자기 멀쩡히 있던 두 명의 백의 노인이 졸기 시작했다. 그 두 사람은 무공이 가히 초인적인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로서 결코 이와 같은 시기에 졸리가 없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마치 어떤 사고를 확실히 보여주 기라도 하듯이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 리고 느닷없이 그 옆에 한 사람이 흡사 귀신처럼 나타났다. 그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점장이 노인이었는데 용모도 또한 기이했다. 검은 색의 피부와 눈, 그리고 머리카락도 아주 시커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백방생 이 만일 그와 같은 광경을 보았다면 필시 언젠가 본 노인들과 비슷하다 고 생각을 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백방생도 이순간 곯 아 떨어져 있었다. 마치 갑자기 이 방안의 움직임이 모두 정지된 것 같 았다. 그 사이로 흑의노인이 조용히 움직였다. 그는 대체 언제 이 방안 에 들어온 것이었을까" 흑의노인은 정작 두 명의 백의노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유독 백방생에게만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침상의 앞에 이르러 잠시 백방생 의 몸속을 주시하던 그는 갑자기 두눈에서 기이한 현광(玄光)을 발산 했다. 그리고 흡사 지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음산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눈을 떠라!" 백방생은 조금 전까지 깊은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일단 그 기이한 광채에 닿자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떴고 즉시 무표정하 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백방생이오." 흑의노인은 싸늘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나는 너의 주인이다. 그러니 모두 솔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알겠느 냐?" 백방생은 흡사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말했다. "알겠소, 당신은 나의 주인이오." 흑의노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너는 아까 그 계집애에게 비밀번호를 말해 주었는데, 그것은 진짜냐 가 짜냐?" 백방생은 주저없이 말했다. "당연히 가짜요. 내가 만일 진짜를 말한다면 그녀는 당장 나를 죽일 것 이 아니겠소?" 흑의노인은 득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랬었군"하지만 나는 한번 더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너는 정 말로 황금충(黃金蟲)의 재산을 취득했느냐?" 백방생은 멍하니 흑의노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사실은 아니오. 그건... 나의 연극이오." 흑의노인은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연극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세외오세에게 복수를 하려고 본래 마음 먹었었소. 하지만 워낙 에 힘이 없으니 일단은 그런 점을 과장시켜서 좀더 상황에 유리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오." "지금 그 계집애처럼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소." 흑의노인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그럼 지금 네가 사용하고 있는 돈은 모두 어디서 난 것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사실 나의 돌아가신 조부께서 젊은 시절에 남모르게 모아 두었 던 재산을 뒤늦게 내가 찾아낸 것이오. 나의 조부는 사실 남들이 생각하 는 것보다도 훨씬 부자였소." 흑의노인은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네게는 더이상의 돈은 없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멍청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사실 그게 모두 전부요." 흑의노인은 잠시 백방생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나와의 대화내용을 모조리 잊도록 해라. 이것은 거역 할 수가 없는 주인의 명령이니 결코 반항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만 자도록 해라!" 백방생은 그 말에 정말로 눈을 감더니 다시 깊이 잠을 자기 시작했다. 흑의노인은 그러한 백방생의 전신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갸웃거 리며 중얼거렸다. "나의 이 현현대법(玄玄大法)은 여태 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 녀석의 모든 것은 별 볼일이 없다는 말인가?" 흑의노인은 천천히 방안을 거닐면서 다시 말했다. "보아하니 그 의선(醫仙)과 화선(花仙)이 정말로 다녀간 모양이군. 사 선과 마선이 파괴시킨 몸을 다시 정상으로 만들어 놨어. 하지만 그것은 곧 그들이 포기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흐흐흐, 과연 천선(天仙)의 안목 은 예리하군. 그는 그 두명의 반대자를 처단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굴 복시키니 포용력이 있다고도 할 수가 있겠군. 이제 천하는 곧 그의 것 이 되겠지." 흑의노인은 마악 떠나려다가 백방생을 바라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음, 저 군살들은 대체 무엇일까"그렇군. 녀석이 미련하게도 대환단을 서른 여섯알이나 복용했다고 하던데, 그 약력(藥力)이 체내에 녹아 들어 가 잠재되어 그런 모습이 되어 버렸군. 하지만, 그가 설령 무형검의 경 지에 오르고 그 모든 약력을 흡수하여 공력으로 만든다고 해도 별 것은 아니다. 흐흐흐...게다가 녀석은 요절할 상(相)이니 잠시 후면 그 계 집아이에게 온갖 고난을 당하다가 죽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흑의노인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그의 부탁은 들어 주었군. 천선은 이런 일에는 공연히 민감 하단 말이야?" 말이 끝나는 순간 흑의노인은 갑자기 신형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아득 하게 사라져 버렸다. 노인이 사라져 버리자 이윽고 잠을 자던 세 사람도 서서히 의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깨어난 사람은 백방생이었 는데, 그는 깨어나자 마자 즉시 약병의 뚜껑을 열어서 다섯알이 남아있 는 대라금단을 모조리 복용해 버렸다. 그리고 그가 다시 약병을 잘 갈 무리 하고 나자 이윽고 백의노인들이 정신을 차렸다. 백의노인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백방생의 모습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소리치며 그의 옆으로 달려갔다. "네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백방생은 마악 금단들을 복용한 후이라 그 엄청난 약기운에 의해 얼 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몹시 고통스런 표정으로 전신을 비틀고 손발을 휘저었다. 그것을 보자 백의노인들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들을 지었다. 설마하니 영약을 복용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가 혹시 주화입마를 당하여 발작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 었다. "혹시 누군가가 왔다간 것이 아닐까?" 그때, 이윽고 방문이 열리면서 석채릉이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녀는 몹 시 화가 나 있었다. 즉 금포에 들러보니 그 비밀번호는 맞지 않는 것이었 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최소한 백방생의 몸에 죽지 않을 정도 의 상처를 내 주려고 했다. 그런 다음에 다시 흥정을 하려고 했다. 그 런데 문득 상황이 이상한 것을 보고 그녀는 멈칫하며 백의노인들에게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백의노인들은 감히 자신들이 졸았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별 일이 아닙니다." 만일 백의노인들이 좀 더 세심하게 살폈다면 백방생의 몸이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었다. 백방생의 몸은 완전히 피칠을 한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그의 전신이 한꺼번 에 터져나가려는 것 같았다. 석채릉은 약간 화가 나서 말했다. "별 일이 아니라니"당신들이 혹시 그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요?" 백의노인들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어 결코 그런 적이 없다고 변명 하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들의 눈앞에 하나의 붉은 인영(人影) 이 환상처럼 날아들었다. 그 인영은 놀랍게도 침상에 누워있던 백방생 이었다. 전신에 진기가 가득 차게 됨에 따라서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육 신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으며 의복들이 찢겨져 나가고 시뻘건 알몸 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 두 명의 노인들은 갑자기 눈앞에 적이 날아드는 것을 느꼈으나 다음 순간 에는 어이없게도 전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빠, 빠르다!) 그 두명의 노인이 그렇게 되었으니 그보다 무공이 약한 석채릉이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녀는 미처 무엇인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한순간 에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이어 곧장 침실을 나가서 거실을 지나 다른 방안으로 들어갔 다. 그 방은 넓은 서재였는데 워낙에 공간이 넓어서 비어 있는 공간이 많았다. 백방생은 알몸인 채로 되는 대로 서둘러서 그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사실 지금은 아주 위험한 시기였다. 그는 이미 속명신단 두알로 진기가 촉발된 마당에서 무려 다섯알이나 되는 대라금단을 복 용했다. 하지만 기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육갑자나 되는 공력이 이미 잠재하고 있던 백방생의 체내에 대환단의 약력을 격발시키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힘에 의해 백방생의 몸은 크게 부풀어 올 랐다. 그런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황에서 무공을 펼친다는 것은 절 대로 무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백방생은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서 무공을 펼쳐서 그 세 사람을 완전히 혼절시켜 놓았고 이어 서재에 도달 한 것이었다. 지금 무리하게 운기한 탓에 그의 정신은 거의 아득해져 가 는 상황이었다. 만일 그가 일찍이 소림사의 후원 조사동의 동굴에서 죽음과 싸우며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을 대성(大成)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 위기를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마치 이제까지 그 자신의 진면목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한탄해 오기라 도 한 듯이, 백방생의 몸과 마음은 일제히 그 깨달음속으로 녹아 들어갔 다. 그것은 일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의 신형은 이내 허공으로 석 자나 올라가서 계속해서 무수히 격렬한 변화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쉴새없이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 으며 백방생의 알몸은 끊임없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수십가지의 색 깔의 빛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으며 또한 수십번이나 전신의 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이어 마지막으로 황금(黃金)빛으로 모든 빛들이 녹아들 었을 때 문득 주위가 조용해졌다. 갑자기 모든 변화가 끝나고 그의 몸이 휘황한 노을빛의 서광(瑞光)속에 자리한 것처럼 보였다. 이미 전신의 세맥들과 팔만사천모공(八萬四千毛 孔)이 완전히 개통(開通)되고, 또한 무학이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 에 도달한 것이다. 비록 위험한 시기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는 결국 성공 했다.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그 깨달음을 실제로 몸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문득 그 노을빛 서광도 사라지고 서서히 지면에 내려앉자, 백방생의 입가에는 다소 만족한 듯한 미소가 걸렸다. 석채릉은 한참만에야 눈을 떠 보고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거실의 태사의 위에 앉아 있었는데 맞은편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얼핏 낯익으면서도 왠지 낯설어 보였다. 백방생(白方 生). 이 사람은 갑자기 너무나도 변했다. 우선 이전에 아주 뚱뚱하고 볼 품이 없던 그의 체구가 그야말로 헌칠하고 늘씬하게 변했고, 이어 피부 에서도 백옥(白玉)과도 같은 투명한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석채릉은 백방생이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었던가 하고 생각해 보고는 스스로 왠지 안색이 붉어졌다. 그녀는 따라서이사람은 백방생이 아니라고 생각했 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그 사람은 정말로 백방생 그 사람이 었다. "그새 잘 잤소?" 왠지 고요해 보이는 시선으로 그렇게 묻는 백방생을 바라보며 석채릉 은 암암리에 안색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그 백방생인가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왜"아닌 것 같소?" 석채릉은 뒤를 돌아 보았다. 그 두 명의 백의노인은 그녀의 뒤에 그저 뻣뻣하게 서있었는데 아마도 혈도(穴道)가 제압당한 것 같았다. 석채릉 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석 채릉은 자신의 몸은 혈도가 제압되어 있지도 않고 또한 당한 흔적도 없는 것을 알고 말했다.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변했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사실 이전에는 다소 병이 들어 있었는데 이제 다 나은 것이 오." 석채릉은 말했다. "당신, 내 손에서 그 예금장부와 인장들을 가져갔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들은 본래 나의 것이 아니었소"그러니 내가 갖는 것이 정당한 일 일텐데?" 석채릉은 그가 아까 비밀번호를 거짓으로 말했던 것을 상기하며 화 가 나서 말했다. "당신은 감히,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이미 한번 후회할 짓을 했으니 다시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소. 자,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이미 창밖에는 서서히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석채릉은 백방생의 여 유있는 태도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듯이 눈을 크게 떴다. "우리에게 돌아 가라고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소. 이곳에서 정말로 나와 함께 잠을 잘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 소?" 석채릉은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물론 나는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돌아갈 거예요. 헌데 우리를 정말로 보내 주겠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소. 일단 가면 다시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오." 말과 함께 몸을 돌리는 것을 보고 석채릉은 문득 의아해 하며 생각했 다. (만일 내가 가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면 어쩌려고 저렇게 여유만만 하게 나오는 것일까"혹시 그의 무공이 갑자기 증진된 것이 아닐까?) 그녀가 보기에는 백방생의 뒷모습은 무공의 경지에 대해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기이했다. 그녀는 감히 시험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시 생각했다. "좋아. 어쨌든 돌아가서 오라버니와 의논하는 것이 더 낫겠지. 지금 저 들은 혈도가 제압되어 있어 힘도 쓰지 못하는 상태이고!" 석채릉은 아까 어째서 혼절하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다가 문득 말했다. "좋아요. 우리는 일단 이만 돌아가기로하죠. 하지만 뜻을 성취하지 못 한 이상에는 반드시 내일이고 모레고 다시 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거예요. 그때는, 흥! 당신이 감히 나를 건드린 것을 후회하게 만들겠어 요!" 말과 함께 석채릉은 거실의 아래쪽으로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 뒤 를 백의노인들이 간신히 뒤따라서 사라져 버렸다. 백방생은 그렇게 서서 석채릉과 백의노인들이 완전히 장원을 떠나고 난 뒤에야 문득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집사, 무슨 일이오?" 오십대초로의 백발노인인 집사가 이윽고 그 두명의 시녀들과 함께 나 타났다. 집사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주인어르신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백방생은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집사는 한 장의 금표를 조심스럽게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까 백방생이 두 시녀에게 주었던 그 천냥짜리 금표였다. 백방생은 의아해 하며 말했다. "아니 여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 집사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사실 그 금표의 진위 여부도 조사를 했었지요. 하지만 이내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희들 은 이미 많은 보수를 받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은 거금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백방생은 그제서야 그들의 의사를 알고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아까 내가 이곳의 상황이 위험해 지자 여러분을 위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이 진정되었고 또한 여러분이 이토록 진실하 게 나를 대하니, 문득 다시 욕심이 나는군요. 여러분은 모두 다시 이 곳에서 나를 위해 일을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물론 급여는 전과 동일하고 일자리도 동일합니다. 다만 그 금표는 일단 집사께서 맡아 두 셨다가 만일 장원내에 무슨 일이 생기고 내가 그 보상을 해드리지 못하 게 되었을 때 여러분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집사는 그만 그 말에 감격한 듯이 전신을 부르르 떨며 거듭 고개를 조 아렸다. "고맙습니다, 주인어르신! 저희들은 사실 일자리가 목숨만큼이나 소중 한 것입니다. 모두들 그렇지 않아도 계속 일하겠다고 하고 있었지요. 주 인어르신께서 게다가 선뜻 이 거금을 맡겨 놓으시니 저희들은 다소 위 험이 있을지라도 안심하고 일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주 인어르신!" 사실 집사 등도 이곳에서 과연 안정되게 계속 일할 수가 있을 지 은근 히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정도의 금액이라면 설령 이곳을 그 만 두더라도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동안 사용하는데 충분하고도 남 음이 있을 것이다. 과연 시녀들도 모두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식탁위에 음식들을 차려놓고 있었다. 백방생은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에 문득 거실에서 조용히 좌선명 상을 했다. 이때는 그의 무공은 운기행공이 전혀 필요없고 그저 좌선명 상만 하면 되는 경지가 되어 있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백방생이 천천히 후원의 연못가를 거닐고 있을 때 문 득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바로 다름아닌 당리(唐莉)였다. 백방생은 뜻밖에도 오랜만에 그녀를대하게 되자 일순 기쁜 마음에 웃으 며 그녀를 맞았다. "아니 이게 얼마 만이오"그래 용케 내가 사는 곳을 알아 내셨소이 다?" 당리는 비록 아름답고 깨끗한 담황색의 의삼을 걸치고 있었으나 안색 은 다소 수척해 보였다. 그녀는 다소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본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요." 백방생은 그녀에게 많은 하고싶은 말이 있는 것을 보고 본채로 그녀를 안내했다. 시녀들은 눈치 빠르게 거실에 차를 내왔고, 두사람은 훈훈한 실내에서 따뜻하고 향긋한 차(茶)를 마시며 마주했다. 백방생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으므로 당리는 이윽고 먼저 말 하기 시작했다. "저는 그동안 멀리 다녀왔어요. 당신이 저때문에 곤란을 겪었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당리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게 어디를 다녀왔냐고 묻지 않으니 다행이로군요. 별로 할 말도 없지만..., 헌데 당신은 그간 살이 좀 빠지고 몸은 오히려 더욱 나아진것 같군요.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당리의 말하는 태도는 그윽하면서도 약간의 풍정이 서려 있었다. 백방 생은 그녀가 이렇게 멋을 아는 여자일 줄은 몰랐기에 다소 뜻밖이었다. 이전에는 매우 강렬하고 냉정하게만 보이더니 이제는 그저 가만히 있기 만 해도 부드러운 정회(情懷)가 우러나는 것 같지 않은가" 백방생은 그녀의 모습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여러가지의 일이 있었소.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별일이 아니라는 생각 이 드는구려." 당리는 그의 얼굴을 잠시 찬찬히 바라 보았다. 이어 약간 웃으며 말했 다. "나는 처음에 사람을 잘못 찾은 것이 아닌가 했어요. 사별삼일(士別三 日)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고 하더니, 정말 당신은 보면 볼수록 훨 씬 달라진 것 같군요. 하지만 저는 굳이 당신의 그 얘기를 들으려는 것 은 아니예요." 백방생은 포권하며 말했다. "낭자께선 소생께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시오?" 당리는 약간 웃으며 말했다. "저는 독하게 마음먹고 살아왔지만 그러나 염치없는 계집은 아니예요. 제가 해야할 바는 반드시 하며 살아가려고 하죠. 제가 이번에 이곳에 온 것은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예요." 백방생은 순간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알고보니 당리는 이전에 그와 했 던 일종의 약조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멍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하지만 그 얘기는 이미 없었던 것이 되고 만 것이 아니오?" 당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비록 변변찮은 계집이지만 그러나 정조가 무엇인지 알고, 그리고 아무렇게나 마음을 바꾸는 사람은 아닙니다. 전날 당신이 나에게 은혜 를 베풀었고 그 때에 이미 저는 당신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리 고 이어 당신이 그 돈을 저에게 그냥 주셨을 때에는 오히려 그러한 결 심이 굳어지게 되었지요. 제가 이번에 멀리 갔다온 것은 바로 그러한 것 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어요." 백방생은 문득 그녀가 자신에게 가겠다며 떠났었다는 얘기를 기억에 떠올렸다. 당리는 지금 조용해보였지만 그러나 그녀의 내심에는 강한 신념과 의지가 고집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 고집을 꺾 는 것은 무리인 것으로 보였다. 백방생은 내심 약간 어리둥절해 졌지만 이내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이 달라지게 되면 떠나겠지?)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이 곳의 안주인이 되겠다는 말이오?" 당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주인이라는 말은 당치 않아요. 그저 저를 첩실 정도로 여기고 버리지 만 않는다면 저는 만족할 거예요. 저는 다시 마음을 바꾸지 않고 한마음 으로 당신을 받들고 섬기도록 하겠어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사실 나는 그대의 그러한 마음씨가 너무 나도 고마와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소.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었으 니 나로서도 약간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고..., 일단 그대가 이곳에서 마음대로 지내되 우리 사이의 일은 약간의 유예기간을 갖는 것이 어떻겠소?" 당리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 때 한 명의 시녀가 다가와서 공손히 물었다. "아침식사는 어디에다 차릴까요, 주인님?" 백방생은 거실에다 차리도록 한 다음에 그 전에 집사에게 오라고 했 다. 집사는 이내 달려왔는데, 백방생은 그에게 당리가 앞으로 이 집에서 함께 살 사람이니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게 하라고 했다. 당리는 무 림세가에서 자라난 사람으로 그렇게 하인들과 대하는 것이 익숙했다.그녀 는 금방 일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인사를 나누고 거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백방생과 당리가 마악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다시 한 명의 여자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다름아닌 석채릉이었다. 어제저녁에 그토록 다짐을 하고 돌아갔던 그녀가 오늘은 웬일로 혼자서 장원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백방생은 내심 이거 또 귀찮게됐군, 하고 생각하며 당리에게 석채릉에 관해서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당리는 처 음에는 의아해 했으나 나중에는 매우 긴장하는 표정이었다. 백방생은 그 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그녀를 상대할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이윽고 석채릉은 다소 오만한 기색으로 하인들과 함께 삼층의 거실로 올라왔다. 백방생은 하인들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한 다음에 석채릉에게 말했다. "오늘도 또 왔구려. 그래 아침식사는 했소?" 석채릉은 물론 일찍 식사를 하고 왔다. 하지만 지금 백방생이 한 여자 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눈빛을 기이하게 굴리더니 말했다. "호호, 만일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 저에게도 밥을 줄 건가요?" 백방생은 스스럼없는 표정을 보였다. "물론이오. 이쪽의 자리에 와서 앉는 것이 어떻겠소?" 석채릉은 다소 생각해 보는듯 하다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쪽의 자리 에 앉았다. "아니예요. 저는 사실 식사는 이미 하고 왔어요. 그러니 여기에서 두 분이 식사를 하는 모습이나 구경해야 하겠군요?" 백방생은 묵묵했다. 그는 석채릉이 식사를 했다고 하자 다시 권하지 않 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당리도 전혀 입을 열지 않고 게다가 그녀를 별 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석채릉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두분이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은 마치 한폭의 그림과도 같군요"헌데 저 아가씨는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은데 대체 누구인지 소개시켜 주실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당리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마땅히 소개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리는 사천당문의 사람이니 석채릉이 감히 그녀를 해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리의 절정경지에도 오르지 못한 무공으로 어떻게 이미 최상승(最上乘)의 경지에 오른 석채 릉의 무 공을 당하겠는가" 백방생은 즉각 석채릉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바로 사천당문의 소낭자인 당리, 당낭자요. 이번에 일이 있어 서 이곳에 온 것인데, 아마 석낭자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석채릉은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보니 당신을 사모하여 오대세가간에 분란을 조성했다는 바로 그 당리, 당낭자로군요"이봐요"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군요. 나에 대 해서는 이미 저 남자에게 들었겠죠?" 백방생은 당리가 혹시 그 얘기를 듣고 화를 낼까봐 우려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당리는 아주 조용하고 침착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돌려 석채릉을 바라본 뒤에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여 답례하는 것이었 다. 석채릉은 그것을 보며 입가에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마치 자신이 먹으려던 음식을 남에게 빼앗기게 되어 이글거리는 듯한 맹수의 눈빛 이라고나 할까"그런 점에서 백방생은 석채릉이 마치 암사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석채릉은 다시 백방생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오늘 매우 한가해 보이는군요. 물론 나와 얘기를 나눌 시간도 있으시겠죠?" 백방생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신 뒤에 당리와 함께 차를 따라 서 마시기 시작했다. 47 장 용천기(龍天奇)의 사연 백방생은 한 모금의 차를 마신 뒤에 말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석채릉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물론 피차에 좋은 일이 아니겠어요?" 백방생은 시녀들에게 탁자위를 치울 시간을 주기 위해 천천히 아래층으 로 내려갔다. 당리가 그 뒤를 따랐으며 석채릉도 뒤를 따라왔다. 백방생 은 후원으로 갔다. 후원의 연못가에서 발길을 멈추고 연못속의 고기들이 노니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 이윽고 석채릉이 뒤에 다가와서 약간 약 이 오른 듯이 말했다. "당신은 감히 나를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백방생은 옆을 돌아보았다. 당리가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는 지금의 위기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한쪽의 정원석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보이오"천하의 천륭무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에 있겠소?" 석채릉은 잠시 그의 얼굴을 노려보는듯 하더니 이윽고 싸늘하게 웃으 며 말했다. "좋아요. 그 점에 있어서는 당신의 말을 믿기로 하죠. 우선 내가 오늘 온 용건에 대해 말해야 하겠는데, 나는 오늘 당신의 호법(護法)직을 수 락하기 위해 왔어요." 백방생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호법을 맡겠다고" 하하, 차라리 당신이 나를 해치지 않기를 바 라는 편이 더 나을 것이오." 석채릉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게 바로 그게 아닌가요" 내가 당신을 노리지 않으면 자연 당신은 무사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백방생이 돌아보니 당리는 여전히 가만히 서 있었다. 백방생은 말했 다. "그럼 당신은 대체 내게 얼마를 받겠다는 것이오?" 석채릉은 눈빛을 빛내더니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였다. "적어도 한 장, 일백만냥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이거보시오 석낭자, 세상에 아직 그렇게 큰 액수의 은표가 없다는 것을 모르시오?" 석채릉은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예요. 제가 말하는 것은 백은이 아닌 황금 일백만냥을 말하는 거예요. 오늘 하루 당신이 만일 나를 제대로 대접한다면 내가 다시 당신을 해치지 않기로 약속하죠."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그 약속은 믿을 수가 있겠소?" 석채릉은 말했다. "그거야 당신의 마음대로가 아닌가요"어쨌든 아쉬운 쪽은 당신일 테 니까요." 백방생은 문득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것 봐요 석낭자"내 비록 어제 무례를 범하기도 하고 또한 내가 많이 당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난 어제의 일이오. 만일 다시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는 참을 수가 없소. 그러니 쓸데없는 농담은 그 만두고 어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석채릉은 그 말에 크게 분노한 듯이 안색이 빨갛게 변했다. 그녀는 소 리쳤다. "당신이 감히 이렇게 나를 무시할 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것을 보고 석채릉은 참지 못 하고 신형을 날려 덮쳐 들어갔다. 당리는 옆에서 그녀의 행동을 예의 주 시하고 있다가 그만 놀라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상상외로 석채릉의 공격이 빠르고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흡사 석채릉의 상체가 길쭉하게 늘 어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그녀의 우수가 장검을 집었고, 그 장검은 길 쭉하게 수십개의 날이 있는 창처럼 변하여 백방생의 등을 찔러 들어가 고 있었다. 그 광경은 그저 한순간에 벌어진 것이어서 당리는 그저 놀라기만 할 뿐 전혀 손을 쓸수도 없었고, 이내 백방생의 몸은 갈가리 찢겨져서 난 자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기실 그것은 바로 정녕 착각 이었다. 또한 믿을 수 없는 착각이기도 했다. 백방생은 별로 몸을 움직 인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석채릉의 공격은 환상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장검을 들고서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 다. 석채릉은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으나 흡사 넋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백방생은 그저 한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 이 윽고 태연히 밖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리는 그 광경을 보고 있다 가 이윽고 아, 하고 감탄과 기쁨의 탄성을 발하며 그 뒤를 쫓기 시작했 다. 백방생은 천천히 걸어서 전채의 객청에 이르렀다. 어느새 그의 옆에는 당리가 바싹 따르고 있었다. 당리는 비록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몹시 기 뻐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문득 저 멀리서 석채릉이 느릿하게 따라오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 지은 집이고 또한 하인들이 윤이 번 쩍번쩍 나도록 잘 닦고 청소했으므로 이 객청 역시 예외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왔다. 백방생이 태사의에 앉아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드 디어 석채릉이 다가와서 한쪽의 자리에 앉았다. 석채릉은 아까 그 일때문인지 다소 기가 꺾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녀는 겨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내가 한달 일해주는 조건으로 그저 십만냥의 황금만 받기로 하죠. 이건 내가 많이 생각해준 금액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당리는 한쪽의 의자에 앉아서 듣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그만 너무 나도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필시 그녀보다도 능력이 뛰어날 황진의도 일년동안의 보수를 오만냥의 황금으로 계산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잠 자코 있으면서 백방생의 반응을 살폈다. 백방생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 다. 마치 눈앞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어떤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석채릉은 가볍게 안색이 변했으나 이어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그의 손 을 툭 치며 웃으며 말했다. "정말 보기보다 째째하군요. 좋아요"내가 더 양보하기로 하죠. 한달에 오만냥은 어때요"아니 다만 만냥이라도?" 백방생은 문득 정신을 차린 듯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그녀 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말했다. "아니, 아직도 돌아가지 않았소?" 석채릉은 안색이 다시 한번 더 변하며 말했다. "좋아요. 한달에 천냥이라고 해요. 이건 내가 마지막으로 양보한 금 액이예요."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제멋대로인 낭자로군.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는 줄 로 아는 모양이지"내가 무엇 때문에 쓸데없이 낭자를 고용하겠소?황금 천냥이 아니라 단돈 한푼도 줄 수가 없으니 그리 알고 그만 물러가 주기 를 바라오." 순간 석채릉의 안색은 순식간에 여러차례나 변했다. 그녀는 당리를 돌아보더니 더욱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거듭 분노한 듯이 호흡을 가다 듬고 나서 그녀는 싸늘하게 소리쳤다. "좋아요! 내 물러가기는 하죠. 그러나 호호, 내가 다시 올 때에는 각오해 야만 할 거예요! 당신은 그야말로 오늘 나에게 한 짓을 두고두고 후회 하게 만들 테니까요." 석채릉은 이어 자신이 화난 모습을 좀더 보여주지 못해 한이 된다는 듯한 모습으로 찬바람이 나게 신형을 돌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은 바깥채이므로 정문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그러나 석채릉은 정문으로 나가지 않고 일단 마당에 내려서자 신법을 일으켜 날아갔다. 무려 수십 장이나 한꺼번에 날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문득 그 주위를 지나던 하인 몇몇이 놀라 멍청한 표정들을 보이고 있었다. 확실히 석채릉의 무 공은 당금의 여강호(女江湖)들 가운데에서도 손꼽히는 바가 있었다. 그 놀라운 무공들은 같은 여강호인 당리도 경악하는 바가 아닐 수가 없었 다. 그런데, 석채릉이 마악 장원의 담장을 넘어서 사라졌을 때, 문득 정문 쪽으로 다시 한 명의 여자가 안으로 들어 오고 있었다. 당리는 문득 눈 을 크게 떴다. 그 여자가 일순 매우 눈에 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 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바로 황진의(黃眞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 가" 백방생은 더욱 놀라고 반가운 표정이었다. 그는 즉시 일어서서 그 쪽 으로 다가갔으며 황진의를 맞이했다. 황진의는 별로 과거와 달라진 구 석이 없었다. 다만 왠지 외롭고 지친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무심코 백방생을 대하다가 문득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그 백방생, 백공자가 맞나요?" 백방생은 스스로도 이미 자신의 변화를 알고 있었으므로 황진의의 놀라는 표정이 이해가 갔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틀림없이 나요. 헌데 지금 객청에 당리, 당낭자가 와서 머물고 있는 중이오. 가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소?" 황진의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죠. 헌데, 정말로 제 눈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로군요." 백방생과 황진의는 그 길로 곧장 객청으로 들어와서 당리와 함께 자 리했다.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난 다음에 황진의가 다시 백방생에게 말했 다. "당신의 몸은 어떻게 되서 이렇게 달라지게 되었죠"그 고질병은 치료하 게 되었나요?" 백방생은 그 질문에 대하여 전에 객방에서 느닷없이 혼절했다가 깨어 난 이후 세맥이 모두 치료되어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백방생은 그 얘기 를 하면서 시종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오히려 그 얘기를 듣는 황진의는 다소 담담한 표정이었다. 백방생은 그 뒤의 얘기는 대강 얼버 무렸다. 이어 그는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요. 그래 그 용사형(龍師兄)은 찾아 냈습니 까?" 황진의는 자신의 일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묻자 은근히 안색을 붉혔다. "만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다행히 그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그동안의 사연에 대해서 알게 되었죠." 백방생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우리 그 얘기는 일단 본채로 돌아가서 시작하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저도 이 장원을 보고 감탄했어요. 당신은 과연 훌륭한 집에서 살고 계시는 군요." 거실은 이미 모두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시녀들이 가져다 주는 다 과를 먹고 마시면서 세 사람은 이윽고 거실의 탁자앞에 마주 앉았다. 황 진의가 말했다. "나는 무슨 문제가 있었는 줄로 알았었는데 사실은 당연히 있어야만 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였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있어야만 할 일들이라니요"그럼 철혈부가 그렇게 무너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마치 자식이 부모를 찾고 부모가 자식을 찾듯 아주 당연한 일 이었죠. 당신은 다 큰 자식이 부모를 찾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 죠?"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그 용천기는 의당 부모가 있으니 다시 찾고 어쩌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겠소?"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용천기 용사형은 이제까지 다른 사람을 부모라고 생각 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 사람은 그의 친부모가 아니었어요." 백방생은 의아해졌다. "아니, 녹림맹주인 만리신통(萬里神通) 용비천(龍飛天)이 부친이 아니었 다면 대체 누가 친부모였단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옛날에 멸망한 형산파(衡山派)에는 역시 용씨(龍氏)성을 지닌 한 사람 이 장문인으로 있었었죠. 환상검(幻想劒) 용불범(龍不凡)이라고, 그는 무 공은 그리 대단한 기재가 아니었지만 정말 뛰어난 기재를 지닌 한 아이 를 낳게 되었죠. 결국 그래서 형산파가 멸문을 당하게 되었지만...." 이 전대(前代)의 비사(秘事)! 백방생은 느닷없는 그런 얘기를 듣게 되 자 절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당리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 용천기의 부친은 용불범인데! 용비천이 그 아들을 갖기 위해 형산파를 멸문시켰다는 것인가요?"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용비천은 본래 야망이 강하여 결코 녹림맹주의 자리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는 용천기 용사형의 뛰어난 기재를 보자 그만 욕심에 눈이 어두워 져서 형산파를 멸망시키고 그 아이를 빼앗은 다음 에, 이윽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 성수곡에 보내게 되었던 거죠."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아니 그럼 그 일을 용천기가 어떻게 알게 되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용비천은 본래 이 일을 극도의 비밀에 붙였었어요. 하지만 결국 완전 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었죠. 용사형은 그러한 사실을 알자 이내 철혈부를 떠나서 사라져 버렸던 거예요."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당신의 얘기를 듣고는 그 용천기가 용비천과는 성격상으로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왠지 느끼고 있었소. 헌데 그 용천기는자신의 친부모의 원수인 용비천을 죽이지 않고 그냥 떠났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래도 용비천은 나름대로 용사형을 꽤나 생각해 주었던 모양이예요. 그러니까 용사형은 결국 그를 죽이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다는 거죠."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생각해 보았다. 그에게도 처절한 사연이 있었다. 하지만 보아하니 그 용천기라는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에게도 정말로 기구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인생사는 복 잡하고 사연도 많다는 말을 실감할 만한 일인 듯 했다. 그는 다소 착잡한 심사가 되어 말했다. "헌데 어째서 당신은 그에게 가서 좀더 위로해 주지 않았소?" 황진의는 다소 안색을 붉히며 말했다. "사실 그는 나를 그저 아직도 조그만 계집아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죠. 저를 본다고 해도 위로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게다가, 이제 머지 않아서 그는 자연 이곳으로 올 테니 당연히 만나게 되지 않겠어 요?" 백방생은 말했다. "하긴 그렇다면..., 헌데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오"이곳으 로 온다니?"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그야 당금의 강호정세를 보면 당연한 일이죠. 당신은 설마하니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무슨 소식이오?" 백방생이 고개를 돌려 당리를 보자 그녀는 다소 안색을 상기시킨 채 잠자코 있었다. 백방생이 다시 황진의를 바라보자 황진의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당신은 이 곳에서 그저 푹 파묻혀 살기만 한 모양이로군요. 하지만 일단 강호에 발을 디딘 사람이면 반드시 돌아가는 정세에는 눈 을 돌려야만 해요. 내가 말해주죠. 세외오세(世外五勢)가 출현했어요." 그 말은 마치 백방생의 머리를 쇠망치로 두드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 다. 백방생은 순간 안색이 급변하여 멍해지며 소리쳐 말했다. "뭐라고, 세외오세가 출현했다고?"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을 보충했다. "그러니까 세외팔세에서 천륭무가와 성모궁(聖母宮), 성수곡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개의 문파인 일월신교, 도막, 현현사, 검총, 태양마교(太陽 魔敎)가 나타난 것이죠." 그 세외오세는 현재까지 달마하원과 남해보타도를 멸망시킨 주범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백방생은 갑자기 머리에 피가 치솟는 듯 하여 흥분하 며 말했다. "그들이 언제부터 나타났다는 것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그것은 얼마되지 않아요. 하지만 모두가 해외(海外)에서 건너온 이방인 들이니 그들이 오기 시작한 것은 오래 되었다고 봐야 하겠죠"즉 달마 하원의 멸망 등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까 서쪽은 일월신교이 고 서북쪽은 도막(刀幕), 그리고 북쪽은 현현사(玄玄社), 동쪽은 검총 (劒塚), 남쪽은 태양마교로서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소림사에 있는 천 륭무가를 노리고 있죠." 백방생은 천륭무가가 어째서 소림사에 있다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것은 그곳의 가주가 현재 소림사에 머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방생 은 의아해 하며 말했다. "아니 어째서 그들은 천륭무가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현재 천하(天下)는 그들 세외팔세가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예요. 그 세외오세는 각기 천하의 일부분을 다스리고 있죠. 하지만 만 약 천륭무가가 천상절맥(天上絶脈)이 해소되고 나면 힘의 균형이 무 너져서 그들이 지배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예요." 백방생은 이미 복주에서도 세외오세가 달마역근경의 심득본이라고 할 수가 있는 달마하원의 무공비급들이 소림사에 전해지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실 그 때문에 그의 부모도 죽게 된 것 이 아니겠는가"백방생은 그렇다면 그 천륭무가의 가주가 이미 거의 천 상절맥의 해소에 성공해 가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백방생은 말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천륭무가주를 제거하려고 한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기이한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어쨌든 천하의 각처에서 세외오세가 피바람을 부르며 소림사로 몰려 들기 시작하고, 그 괴뢰들과 정의맹도 소림사로 떠나가 버렸어요. 천하는 바야흐로 거대한 피의 폭풍전야에 돌입한 것이죠. 이런 상황이니 저의 용사형이 오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괴뢰라니 그건 또 뭐요?"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야말로 강호의 사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군요. 전에 내가 얘기했던 그 제삼세력인 마교(魔敎) 배교(拜敎), 팔괘교(八卦敎), 흑루(黑 樓), 공동파는 이미 그 세외오세의 괴뢰들인 것으로 밝혀졌어요. 그러니 까 사실은 마교는 일월신교의 사주를 받은 것이고, 배교는 태양마교의, 팔괘교는 현현사의, 흑루는 검총의, 그리고 공동파는 도막의 사주를 받 고 활동한 것이었죠. 그들은 지난 얼마동안 강호에 온갖 마약과 괴물, 정신병자들을 심어놓고 혼란으로 빠뜨렸으니 정말로 세외오세가 나타나 는데 충분한 다리역할을 한 셈이죠." 당리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그 얘기를 듣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 다. 하지만 백방생은 정말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래 강호의 사 이비 집단들인 배교나 팔괘교 등은 그렇다고 쳐도, 흑루에 이어 구파일 방의 하나인 공동파까지 거기에 들어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필시 정의맹이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또한 소림사로 옮겨간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결국 모든 이 혼란은 세외오세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말이 아니 오?" 황진의는 다소 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셈이지요. 지금 강호무림은 거의 아수라장이나 다름이 없어요. 결코 이 중원(中原)을 해외의 이민족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소림사로 몰려가고 있기도 하죠." 백방생은 문득 생각했다. "혹시 그렇다면 소유 등도 이미 소림사로 가 버린 것이 아닐까?" 석륭안과 진소유 등이 소림사로 갔을 것이라는 추측은 실현 가능성 이아주 농후했다. 왜냐하면 석륭안이 결코 천륭무가의 일을 모른척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어째서 석채릉이 아직 그곳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그곳으로 가봐야 하지 않겠소?" 황진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 웃으며 말했다. "진낭자의 장원에는 제가 이미 조금전에 들러 보았어요. 거기에는 그저 약간의 하인들만 있을 뿐 텅텅 비어 있더군요. 그들은 이미 소림사로 떠난지 오래라는 말을 들었어요." 백방생은 자신의 심중을 간파당하자 왠지 안색이 붉어졌으나 모른척 하고 신형을 일으켰다. "두 분은 이제 돌아오신 지가 얼마 안되는데 이렇게 다시 떠나도 괜찮 을 지 모르겠구려"피곤하지 않겠소?"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공연히 능청을 떠는 군요. 당신은 그래도 결국 우리와 함께 가자 고 할 것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바로 그 날로 집사에게 장원의 일을 맡기고 곧장 말을 타고 두 사람과 함께 소림사로 향했다. 소림사는 낙양에서 고작 수백리의 여정에 불과 하므로 만일 세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만에도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백방생은 오후 늦게서야 출발을 했으므로 미 처 소림사 부근에 도착하지 못하고 도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 길은 과거 백방생이 소림사를 떠날 때에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것으로서 백방생에게는 다소 익숙한 편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황진의의 말에 의하면 천하가 지금 세외오세와 그 괴뢰들에 의해 혼란스럽다고 했는데, 그러나 일행은 길을 가는 도중 전혀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 했다. 게다가 소림사의 사람들이나 정의맹의 사람들도 만나지못했다. 마치 이 부근은 무림인들이 하나도 없는 텅비어 버린 강호처럼 여겨졌 다. 그러나, 그것은 혹시 태풍의 눈이기 때문에 오히려 조용한 것은 아닐 런지" 해가 지고 어둑어둑할 무렵에 도착한 한 현성에서 일행은 객점을 찾아 가 방을 세 개 빌렸는데, 이런 곳에서는 그저 그런 객방들 뿐이라 다소 누추하더라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식사를 주문하고 말에게 먹이를 잘 먹이라고 지시한 다음에 백방생은 객방으로 돌아갔다. 황진의와 당리는 각기 하나씩의 객방을 빌렸었다. 하지만 마땅히 씻을 곳도 없고 하여 둘 다 백방생의 방에 모여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사위에는 곳 곳에 잔설의 흔적들이 있고 본격적인 한겨울의 냉기가 휘몰아 치고 있 었다. 비록 그 방안은 난방이 시원치 않았으나 이미 다들 일신에 높은 무공들을 소유하고 있어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당낭자와 당신과의 얘기를 듣고 있었어요." 황진의의 말이었다. 백방생이 바라보니 당리의 안색은 다소 붉어져 있 었고 황진의의 표정은 장난끼가 가득해 보였다. 아마도 그녀가 백방생 의 첩실 비슷하게 된 사연을 말한 모양이었다. 황진의는 지금 나이가 스 물다섯으로 당리보다 세 살이나 많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벌써부터 언니 동생하고 잘 어울리고 있었다. 백방생은 두 사람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황진의는 주저없이 말했다. "본래 약속은 그 남궁공자가 깬 것이었으니 이 당낭자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죠. 제가 보기에 당낭자는 당신의 부인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것 같아요." 백방생은 슬쩍 당리를 돌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아 래로 보내고 있었으나 그의 언행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눈치였다. 백방생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제가 복을 많이 받게 된 셈이지요. 그런데 이번에 성수곡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습니까?" 황진의는 느닷없이 백방생이 그쪽으로 화제를 돌리자 다소 당황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즉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성수곡은 그저 은거하는 집단이지 무슨 강호의 세력은 아니예요. 나중에 참가할 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장담할 수는 없어요." 백방생은 문득 이 황진의가 어딘가 솔직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 같다 고 생각했다. 하기는 그녀의 말이 다소 수상쩍기는 해도 일리가 없는 것 은 아니었다. 성수곡은 대대로 강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의술로써 인 술(仁術)을 펼치기만 했을 뿐 전혀 강호의 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그 것은 마치 고칠 수 없는 불문율과도 같았다. (하지만 만일 중원천하가 외인(外人)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면 그 때 도 방관하기만 할 것인가?) 백방생은 황진의가 왠지 거북해 하는 것을 보고 다시 화제를 돌려 말했다. "어쨌든 낭자가 내게 좋은 영단들을 주어서 이번에 그 빛을 보게 되었 소이다. 재삼 감사드리는 바이오." 이어 백방생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속명신단과 대라금단을 복용하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높은 경지의 무공을 터득하게 되었는 지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황진의는 듣고 나서 어이가 없어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공력은 무려 십이갑자(十二甲子)라는 말인가 요?" 백방생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모르겠소. 확실한 것은 이제서야 과거에 생각하고 있었던 무공들을 뜻대로 펼칠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오." 당리가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옆에서 끼어 들었다. "아,언젠가 듣기로 당신은 복주에서 대홍락의 경지에 올랐었다고 하는 것 같았어요." 백방생은 의아해 졌다. "낭자는 그 얘기를 어떻게 알게 되었소?" 당리는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저 알게 되었어요." 황진의는 문득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아마도 세상에서 당신처럼 무학을 빠른 시간에 성취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당신이 설령 어렸을 때부터 일정한 심득(心得)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나는 문득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이 세 상의 일은 정말로...." 백방생은 그녀의 말을 자르고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 전에 말했던 그 일곱명의 무학천재(武學天才)들 말이오" 나도 그 대열에 끼일 수가 있겠소" 하지만 나중에 그들이 천하를 지배하게 된다 는 예언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결국 나보다 더한 경지에 오르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그 때 문득 방문이 열리면서 점원들이 음식상을 날라왔다. 백방생은 공 연히 밖에 나가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는 것이 귀찮아서 식사를 방 안으로 주문한 것이었다. 확실히 황진의와 당리 뿐만 아니라 백방생의 모습도 이제는 충분히 남들의 시선을 집중시킬만 했다. 이런 객점의 점원 들은 더욱 그런 판단에 민감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음식들을 탁자위에 나르면서도 은근히 일행을 공경하고 깍듯이 대하는 척 했다. 그것은 어 떤 국물을 바라기 때문일 것이었다. 백방생도 두 여자와 동행하는 마당에 그들이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아무래도 이 점원들에게 푼돈이라도 건네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품 속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체구가 다소 헌칠하고 마 른 듯한 점원이 하나 들어와서는 백방생에게 곧장 다가왔다. 백방생은 그에게 한다발의 꽃송이가 들려있는 것을 보고 대체 누가 자신에게 꽃을 보낸 것일까 하고 의아해 했다. 현재 백방생을 알고 있는 여자들은 적지 않지만 그러나 꽃을 보낼만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백방생은 그 가운데에서 문득 진소유와 증평을 뇌리에 떠올렸다. 진소유는 석륭안과 함께 있는 사람이고 또한 그에게 꽃을 보낼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증평일까" (증낭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아직도 그 지공과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증평은 다소 순수한 열정을 간직한 소녀였다. 그녀의 그 순수함이 때 로는 백방생으로 하여금 회상에 젖게 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는 그의 마 음에 사랑을 일으키지 못했을 지라도. 백방생은 혹시 이번에 소림사에 가면 그녀를 한번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헌데 이 때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백방생은 점원이 꽃을 내미 는 것을 보고 그저 무심코 손을 내밀어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그 꽃속에서 보기에도 섬뜩한 백색의 섬광(閃光)이 그를 향해 발산되는 것 이 아닌가"그것은 얼핏 하나인 것 같았지만 여러개였고, 그 수십개의 섬광은 일시에 은은한 자광(紫光)으로 변하여 백방생의 전신을 뒤덮어 버릴듯 했다. 그것은 실로 보기 드문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또한 그 것은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것 같았다. 동시에 옆에서 당리와 황진의의 놀란 외침소리가 전해져 왔다. "앗!" 백방생의 신형은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몸은 이미 그러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의 몸은 이미 그렇게 움 직이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면서 그는 문득 생각했다. (어쩐지 눈에 익다고 생각했지!) 조금전에 이 점원의 체형은 매우 낯익은 것이었다. 다만 백방생은 내심 그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사실 이 아닌가" 옆에서 황진의가 이미 그를 돕기 위해서 행동을 개시한 모양이었다. 그녀로서는 거의 기겁을 할 만큼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천만의 말씀, 백방생에게는 그러한 도움조차 필요가 없는 처지였다. 수십 수백개의 별빛같은 자색의 검광(劒光)들이 한순간 백방생의 몸을 휩쓸었으나 어느새 백방생의 몸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아니 그곳에 있 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신형은 한번 흐릿해진 사이에 상대의 그 무시무시 한 암격을 간단히 피해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과거 달마하원에서 금 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이라고 불리우던 불문의 절학이었다.마치 움직 인듯 움직이지 않은, 하지만실제는 움직였으되 그대로 있었는 듯한, 그 심오한 절기는 이제까지 터득한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던 가"백방생에 의해 느닷없이 그 절기는 시전된 것이다. 그 점원은 백방생이 그처럼 기이하게 자신의 공격을 피해내자 너무나 도 놀라서 그만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도 제이의 살수(殺手)를 전개하고 있었다. 일순 집어던진 꽃송이들이 하 나 하나가 모조리 무시무시한 살검(殺劒)이 되어 백방생의 전신으로 덮 쳐들고 있었다. 그 공격은 이번에는 방안을 온통 뒤덮고 있어서 어떤 암기술보다도 무섭고 어떤 공격보다도 강렬하여 도무지 피할 곳은 없 어 보였다. 하지만 기실 그 수법도 백방생에게는 눈에 익은 것이었다. 바로 자부검해(紫府劒匯의 절초들 가운데의 하나인 것이다. 백방생은 갑자기 우수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우수는 돌연 마치 함지박만 하게 커진 것 같았다. 아니 그것들은 갑자기 무수한 작은 조각 으로 나뉘어진 것 같기도 했고 이어 그 크고 작은 손바닥들이 마치 환 상처럼 겹쳐졌다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얼핏 눈속임처럼 여겨 졌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다음 순간에 그 무시무시하던 꽃송이들은 어 느새 백방생의 손아귀에 장난처럼 잡혀져 있었다. 백방생은 이미 그 꽃 들을 들어 향기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좌수를 내뻗었다. 하지만 그 좌 수의 움직임은 공격이 아니라 말리려는 행동이었다. "그만 두시오!" 이미 황진의의 공격이 그 점원의 등판을 가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 점원의 무공은 분명히 황진의보다는 우위였다. 그러나 그는 거듭 되는 백방생의 무공에 그만 넋을 잃었다. 황진의가 공격을 할 순간 그 는 거의 무방비의 상태로 백방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진의는 이미 백 방생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절기 가운데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 것은 바로 세외팔세 가운데의 하나인 성수곡이 자랑하는 무학인 장력 이었다. 백방생은 그 장력을 막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황진의의 황 금빛이 빛나는 장력을 그는 다 막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장력과 그 녀의 장력이 어울리자 중간의 그 사람에게 묘한 작용을 불러 일으켰다. 그 사람의 몸은 한차례 크게 진동함과 더불어 바람빠진 것처럼 변했다. 즉 단전이 파괴되고 무공이 모두 상실된 것이다. 48 장 다시 찾은 소림사(少林寺). 그 사람은 이미 고개를 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있는 점원의 얼굴은 과연 낯익었다. 그는 바로 백귀현(白歸玄)이었던 것이었다. (빌어먹을!) 백방생은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그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 야. 그리고 그가 이렇게 이런 수법으로 암살하기 위해 찾아올 줄이야 "비록 상황의 변화가 그러했고, 또한 그러한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 었다고 해도 왠지 백방생은 서글퍼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백 귀현은 그가 미워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사 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되었길래 이 백귀현은 지금 이 자리에 와서 백방생을 습격하게 되었던 것이었을까"백방생의 뇌리에는 문득 백철우의 모습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만이군요?" 백방생은 아직도 넋을 놓은 듯한 백귀현을 향해 말했다. 백귀현은 잠시 그를 노려보더니 이윽고 길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어서 나를 죽여라!"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백방생은 이미 차분한 표정이 되어 있었 다.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하는 두 여자들을 돌아본 뒤에 말했다. "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지는 않소. 그러니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 소" 백귀현은 이를 갈며 두 눈에서 원독의 광채를 발했다. "나를 이렇게 해놓고 고작 인심을 쓰는 척 한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은 본래 고아였는데 나의 조부님께서 거두어 주셨으므로 응당 감사했어야할 것이오. 그런데도 이렇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음해하 고 살해하려고 하다니?" "어디 두고 보자!" 백귀현은 두눈에 가득 저주의 빛을 발하면서 노려보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비록 전신에 원독이 충만해 있었으나 몸놀림은 과 거처럼 가볍지 못하고 몹시 둔하고 무기력하게 보였다. 백방생은 그가 떠난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다가 이윽고 가벼운 탄식과 함께 말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구나." 당리가 말했다. "그는 누구죠"아는 사람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는 과거 나의 백부였소." 이어 백방생은 간략하게 그가 복주에서 자라나던 일 등을 말해 주었다. 당리와 황진의는 그의 과거가 몹시 특이할 뿐만 아니라, 그런 자와의 은원이 심하게 얽혀 있는 것을 알고 모두 기이하게 생각했다. 황진의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사람이 너무 좋아서 계속 그렇게 당하는 군요." 당리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그렇게 무공을 상실당했으니 다시 상공을 괴롭히 지 못할 거예요. 그런 나이에 무공이 폐쇄되면 다시 무공을 회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죠." 백방생은 문득 중얼거렸다.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라고"사실 나는 그 보다 더한 어려운 일도 이루 어 냈소." 황진의는 문득 급히 밖으로 신형을 날려 객점의 주위를 돌아보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이어 방안에 차려진 음식들을 모두 일일 이 점검한 뒤에 말했다. "그 한사람 이외에 다른 흉수(兇手)는 없어요. 이 음식들도 모두 이상 이 없고요." 황진의는 가히 강호의 명의로 불리우는 여자다. 그녀가 그렇게 보증을 하니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곧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 했다. 이제 소림사에 가면 그나마 제때에 식사를 할 수 있을 지도 의문 이기 때문이었다. 당리가 문득 백방생이 탁자의 한쪽에 내려놓은 꽃다발을 보며 말했다. "헌데 저것은 대체 누가 보낸 것일까요?" 백방생은 말했다. "누가 보낸 것이냐니"바로 아까 그 백귀현이 가져온 것이 아니오?" 당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 백귀현은 듣자니 당신에게 무슨 꽃을 선물할 사람 같지는 않아요"필시 누군가 그것을 보낸 사람이 있을 거예요." 백방생은 쓸데없는 일에 공연히 촉각을 곤두 세우는 당리의 의중이 알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그럼 대체 누가 그 꽃을 보냈다는 말이오?" "그야 필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겠죠." 백방생은 문득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나의 재산만을 사랑할 뿐이오." 과연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반쯤 열려져 있는 방문 사이로 한 명의 낯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석채릉이었다. 백방생은 백귀현의 출현이 그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백귀현은 본래 복주 에서 호의호식하며 말년을 즐길 수가 있는 거부였고 또한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음독하고 발악적인 사람으로 만 들었을까" 이번의 석채릉의 출현은 비록 예상되었으나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녀는 아마도 몰래 일행의 행동거지를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 었다. 석채릉은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자 기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과연 나를 잘 아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순순히 나에게 그 재산 을 바치는 것이 어떻겠어요?" 백방생은 갑자기 석채릉마저 나타나자 이미 삼켰던 음식마저 밖으로 튀어 나오려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수저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낭자의 수단은 과연 고명하오. 나는 하마터면 좋은 구경을 할 뻔했 지. 그래 기왕에 나타난 것이라면 어서 이리로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 소?" 석채릉은 황진의 등을 바라본 뒤에 말했다. "나는 사양하도록 하겠어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죠. 당신들이 소림 사로 간다고 하니 나 역시 그곳에 가서 미리 기다리고 있기로 하겠어요. 나는 거기에서도 당신이 나를 업신여길 수 있는 지 두고 보겠어요?" 석채릉은 이어 찬바람이 일도록 싸늘한 기색으로 몸을 돌렸는데, 정말 로 신법을 펼쳐서 멀리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도 설마하니 백방생이 백귀현의 살수를 피할 수 있을지는 몰랐을 것이고, 따라서 겉 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내심의 당황함은 그만큼 컸을 것이라는 것이 당 연한 일이었다. 백방생은 다시 수저를 들어 음식을 먹으면서 간략하게 석채릉을 만난 얘기 등을 두 사람에게 가르쳐 주었다. 석채릉이 소림사에 가서 백방생 등을 음해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황진의 등은 다소 신경쓰는 눈치였다. 식사가 끝나고 나자 황진의는 자러 가겠다고 하고 옆방으로 갔다. 그 러나 점원들이 상을 치우고 뜨거운 차와 찻잔들을 새로 갖다 놓았을 때 에도 당리는 아직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당리는 문득 차 를 백방생의 찻잔에 따라주며 말했다. "당신은 황언니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 알고 있나요?" 백방생은 잠자코 그 찻잔을 들어 마시려다가 의아한 듯이 말했다. "아니 어떤 마음이라니" 그녀는 항상 강호의 정의(正義)를 위해 애쓰 는 사람이 아니오?" 당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내 얘기는 그녀가 대체 누구에게 관심이 있느냐는 거죠. 당 신은 그녀가 오직 용천기에게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그럼 누구에게 관심이 있단 말이오?" 당리는 혼자서 차를 따라 마시면서 말했다. "대개 녹림맹의 총단이 있는 남령(南嶺)까지 갔다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걸릴 거예요. 결국 그녀는 사실상 별로 조사도 해보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것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건 그녀가 나와 호법으로 계약이 되어 있기 때문이오. 그녀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 내가 위험해질까봐 다소 서두른 모양이 오?" 당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는 돌아왔을 때는 몹시 외로와 보였어요. 하지만 이윽고 당신과 함 께 있게 되자 마음의 여유를 찾고 편안해 보였어요. 대개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잘 알 수가 있는 거죠. 저는 느낌으로 알 수가 있어요." 백방생은 어이가 없어 말했다. "그녀가 내게 관심이 있다는 말이오?" 당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증거는 댈수가 없지만 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일은 당신에게도 무척 좋은 일이고요. 저는 그 황언니가 비록 나이가 다소 많기는 해도 가장 훌륭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의 그 진소저보다도 제가 보기에는 더욱 나아 보여요. 저는 상공이 그녀를 놓치기 말기를 바래요." 백방생은 어이가 없어 하며 말했다. "당신은 생각이 다소 과민한듯 하구려. 사실 그녀는 나보다도 더욱 훌 륭하다고 할 수가 있지. 많은 사람들의 신망도 두텁고, 하지만 그녀에게 는 그 위대한 용사형이 있소. 낭자는 모든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 는 것 같소?" 당리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녀가 만일 원한다면 부인으로 맞아들일 용의는 있나 요?"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실 낭자도 보았겠지만 우리는 서로 좋은 친구 사이이오. 그녀가 그럴 리도 없겠지만, 솔직히 그런다고 해도 나는 그저 친구 이상의 감정 은 들 지 않을 것이오. 어떻게 혼인을 할 수가 있겠소"그런 소리는 하지 말도록 합시다." 당리는 그 말에 잠시 뭔가 깊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이어 말했다. "자, 이제 나는 그만 쉬어야 하겠으니 낭자도 그만 쉬시는 것이 어떻겠 소" 당리는 말했다. "나는 오늘 여기에서 자겠어요." 백방생은 어리둥절 했다. "뭐라구요?" 당리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오늘 상공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백방생은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약간 당혹스럽기도 하여 그만 난처 해 졌다. 본래 그런 말은 남자쪽에서 보다 적극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여자가 그렇게 나오고 나니 마치 백방생은 자신이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할 이유라도 있다는 말이오?" 당리는 말했다. "저는 어차피 당신의 첩실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밤이 길면 꿈이 많은 법, 시간이 흐를 수록 왠지 마음이 불안해 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밤에 아예 그대의 여자가 되려는 거예요." 백방생은 사실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었다. 조금전의 그 살벌한 광경 도 그러했고, 게다가 이런 궁벽한 시골의 싸구려 객방에서 그녀를 소유 한다는 것은 그다지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혼인은 인륜지대 사인 것이다. 어찌 이렇게 함부로 간단하게 처리할 수가 있겠는가" (혹시 그녀는 남궁검상과 전에 그렇고 그런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 을까?) 백방생으로서는 또한 당리가 전혀 순결하리라는 믿음은 가질 수가 없 는 입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백방생은 아무래도 여자인 당리가 그런 말을 꺼낸 이 마당에 자칫 잘못하면 마음의 상처를 줄 수가 있다고 생각되 어 가능하면 부드럽게 대하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대의 생각은 내 잘 알겠소. 물론 그 생각은 매우 고맙소. 하지만 절 대로 그대를 이런 초라한 곳에서 첫날밤을 보내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 이 드는구려. 우리는 나중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것이오." 당리는 손이 잡힌 채로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백방생은 생각했다. (혹시 그녀가 이번에는 대신 입맞춤을 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정 말로 그녀는 나에게 시집오기로 생각을 굳힌 것일까?) "무슨 부탁이오?" 뜻밖에도 당리의 부탁은 다른 것이었다. "나에게 술을 한 잔 사주세요." 백방생은 의아해 졌다. "아니 이 밤중에 말이오?" 당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요 앞에 나가면 주점이 있을 거예요. 그곳에 가서 술을 한 잔 사주세요. 그러면 혼자서도 잠이 잘 올 것 같아요." 백방생은 당리의 속셈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좋소. 그럼 우리 황낭자도 불러서 같이 갑시다." 그런데 당리는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오늘은 당신과 단 둘이서만 마시고 싶어요." 객점의 앞쪽에는 과연 하나의 주루가 있었다. 비록 초라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고 술을 마시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사위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고 단지 등불들만이 어둠을밝히고 있었다.주루의내부에는사람들이그리많지는않았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 어서서 한 탁자를 차지하고 앉자, 한 점원이 걸레를 가지고 와서 탁자위 를 한번 쓱 닦으며 말했다. "술을 드시겠습니까?" 백방생은 점원이 들고 있는 걸레가 몹시 지저분한 것을 보고 다소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술과 몇가지의 안주를 시켰다. 당리는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즐거워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대체 그녀는 무엇 때문에 갑자기 술이 먹고 싶어진 것일까" 점원은 이내 술과 안주들을 가져왔다. 그 술은 별로 좋지 못한 것으로 그다지 독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시큼하고 떫은 듯한 냄새까지 났 다. 백방생은 당리의 기분이 좋지 못한 것 같아서 계속 이런 저런 얘기 를 해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다. 그런데 당리는 정말로 술이 마시고 싶었는지 계속 혼자서 마셔댔다. 무림인은 내공이 있으니 의당 술이 강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녀는 여자라서 금방 안색이 홍조를 띠게 되었 다. 백방생은 은근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찮겠소?" 당리는 거의 혼자서 술을 한병 이상이나 마셔서 눈빛이 거의 게슴츠레 하게 보였다. 당리는 웃으며 말했다. "왜요"제가 부담스러우신가요?" 백방생은 입장이 난처해 져서 달래듯이 말했다. "그렇지 않소. 그대가 원한다면 우리 이번에 장원으로 돌아가게 되면 곧장 혼례를 치르도록 합시다." "혼례를 치른다고?" 주위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취객중의 하나는 그 말을 듣자 공연히 심사가 뒤틀리는 지 그렇게 떠들어 댔다. 그는 마악 병을 거꾸로 들어 서 나발을 불고 있었는데 이내 병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 다. 그리고는 게다가 이쪽의 자리로 일어서서 다가오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 취객의 말소리가 이상하게 심사를 긁고 있었기에 왠지 대화가 끊어져서 자연히 그 쪽을 보게 되었다. 그 취객은 다가와서 백방 생에게 마치 시비를 걸 듯이 말했다. "이것 봐, 돈많은 부잣집 귀공자! 내가 이 자리에 잠시 앉아도 될까?" 백방생은 솔직히 이런 주정뱅이를 자리에 앉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상대의 기세가 너무 난폭해 보여서 쉽게 거절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백방생은 당리를 바라보았다. 당리는 약간 취기가 돈 것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이 곳에 사시는 분인 모양이군요. 거기 앉으시오." 밤이 깊어갈 수록 등불은 더욱 환한 빛을 발했다. 추위 또한 깊어져서 이제 이 주점에는 손님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하기에는 쉽지 만, 이런 겨울에 술을 마시며 낭만스럽게 별빛을 찾는다는 것은 생각보 다는 그리 낭만스럽지 못하다. 취객은 털썩 자리에 앉더니 문득 자신의 손에 들린 그 빈병을 탁자위에 내려 놓았다. 아니 그는 마치 박살을 내 려는 듯이 탁자와 힘껏 부딪쳤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병은 깨지지도 않 고 곧장 탁자의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이 뜻밖의 상황에 놀라 그 취객을 바라보았다. 취객의 솜씨는 바로 다름아닌 무공절기(武功絶技)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술병에 기검 (氣劍)을 운용한 것으로서, 무공이 최소한 상승경지에 오르지 않고는 흉내도 낼 수가 없는 절기였다. 즉 술병에 일종의 검기가 작용함으로 써먼저 탁자위를 부수었고, 그리하여 약한 빈병은 오히려 깨지지 않은 것이다. 만일 그러한 이치를 모르는 일반인이 본다면 절로 눈이 휘둥그 래질 일일 것이다. 백방생은 말했다. "알고보니 귀하께서는 무림의 고인(高人)이셨군요?" 백방생은 상대가 일단 실력을 드러낸 바에는 다소 예의를 갖출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취객은 오히려 표정이 더욱 냉랭해 지 는 것이었다. "나와 같은 사람을 고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남들이 딸을 팔아먹 었다고 비웃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백방생은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가능하면 다투지 않으려고 했다. "아, 귀하께서는 남모르는 사연이 계시는 군요?" 취객은 그 말에 더욱 분노한 듯이 보였다. 그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 며 말했다. "뭐라고"감히 네가 모른다고 잡아뗄 수가 있다는 말이냐?" 갑자기 다시 사건이 일어났다. 취객이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자, 술잔속 에 담겨져 있던 술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으며 이어 그것들은 무수한 방울이 되어 각기 백방생의 면전으로 엄습하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것 을 보자 그만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그 수법은 실로 무서운 암기술(暗 器術)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백방생이 놀란 것은 그 수법이 가지고 있 는 이름과 명성이었다. 그러한 수법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 었다. 당금의 천하에서 그러한 암기술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곳이 오직 한곳이 있다. 백방생은 문득 반사적으로 당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당리는 취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취객도 마찬가지 였다. 비로소 백방생은 당 리가 이곳으로 오자고 한 것이 일종의 목적에 의한 유인책이었음을 알 아차렸다. 백방생은 비단 그 취객의 정체도 알아차렸을 뿐만 아니라 그 목적도 거의 알아차렸다. 당리는 시선을 돌리고 있었으며 아무런 말도 없었다. 백방생은 무형중에 흔적도 없이 그 술방울들을 제거한 후에 가 벼운 탄식을 발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이토록 복잡하다. 좀더 순수해질 수는 없을까" 취객, 아니 사천당문의 소가주이자 바로 당리의 부친인 팔비추혼(八臂 追魂) 당정룡(唐廷龍)은 백방생이 너무도 간단하게 자신의 변형된 일종 의 만천화우(滿天花雨) 수법을 해소시키는 것을 보자 놀랐으나, 이내 다 시 차갑게 소리쳐 말했다. "자, 이제 네놈이 어떻게 해야할 지 말해 보아라"감히 내 딸년을 데리 고 희롱을 해 놓고선 발뺌을 하지는 못하겠지?" 백방생은 확인할 겸 포권하며 정중히 말했다. "혹시 팔비추혼 당선배님이십니까?" 당정룡은 음침하게 말했다. "네놈의 눈이 아직 멀지는 않았군. 하지만 나는 너같은 후배를 둔적 이 없으니 나를 선배라고 부를 것은 없다?" 당정룡의 태도는 너무나도 냉혹하여 감히 말도 붙여보기 어렵게 했다. 백방생은 그에게 자신을 사위로 인정하려는 의사가 추호도 없음을 알 아차렸다. 백방생은 말했다. "소생은 사실 조금전에 주제넘은 소리를 한 것을 시인하겠습니다. 귀하 께서는 소생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당정룡은 음산하게 말했다. "네놈이 조금전에 한 말로써 내 딸년은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조차 어렵게 되었으며 내 명예 또한 더럽혀지고 말았다. 네놈도 사리가 있다면 잘 알 것이다. 만일 네놈이 강호의 공도(公道)를 지키고자 한다면 의당 목숨을 바쳐야할 것이다?" 백방생은 그 말을 듣자 크게 어이가 없는 한편 약간 화도 났다. 본래 혼 인의 얘기는 오히려 당리가 먼저 꺼낸 것이고 또한 그녀가 주장한 것이 었다. 백방생은 그저 듣다못해 그런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그는 그 래도 당리의 체면을 보아서 그 말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 런데 다짜고짜 목숨을 바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여전히 먼산만 바라보듯 하는 당리를 슬쩍 바라본 뒤에 말했 다. "귀하께서는 너무 하시는 군요. 저의 목숨은 그냥 드릴 수가 없습니 다. 소위 남녀간의 일은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그것이 무슨 죽을 죄가 되 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정룡은 다시 탁자를 후려치며 분노하여 소리쳤다. "그럼 네놈은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말이냐?" 이번에는 무공을 펼치지 않아 물방울도 튕기지 않았다. 그러나 백방생 의 안색은 더욱 찌푸러졌다. 백방생은 아직도 잠자코 있는 당리가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말했다. "제가 조금전에 한 말이 귀하께 폐가 되었다면 역시 의당 보상을 해 드려야 하겠지요." 백방생으로서는 그래도 당리의 체면을 보아서 가장 관대하게 대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당정룡은 그 말에 일순 눈빛을 기이하게 빛냈다. "그럼 네놈은 나에게 배상금(賠償金)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말이 냐?" 백방생은 문득 왠지 이 자리가 몹시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그는 말했다. "귀하께서는 얼마를 원하십니까?" 당정룡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네가 만일 목숨을 바치고 싶지 않다면 나에게 전재산을 주어야 하 겠다." 이에 당리가 문득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부친에게 소리쳤다. "아버지!" 하지만 당정룡은 다시 태연하게 백방생에게 말했다. "너는 이미 나에게 배상금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렇다면 어서 너 의 전재산을 넘기는 것이 어떠냐?" 백방생은 정말 터무니 없는 억지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전재산은 드릴 수가 없소. 황금 만냥이라면 드리겠소." 당정룡은 그 말에 일순 두 눈에 핏발을 띄웠다. 그도 사실은 백방생의 전 재산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당 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황금 십만냥으로 하자. 만일 네가 그 돈을 준다면 나의 저 딸을 네가 데려가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저 단순히 말한번 잘못한 죄값치고 황금 만냥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 다. 백방생은 게다가 이제까지 솟아 오르던 당리에 대한 호감이 이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당리는 결국 이렇게 그를 함정에 집어넣기 위해 그를 찾아 왔던가" 지금 이순간에 당정룡이 그에게 황금 십만냥을 달라는 것은 그야말 로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다. 그는 아마도 흥정을 하기에 앞서 가능한 한 크게 불러본 것일 것이다. 그러나 백방생은 왠지 마음이 몹시 귀찮고 피곤해 지는 것을 느꼈다. 만일 몇마디만 더 하면 그 액수를 절반 이하로 깎는 것은 일도 아닐 것 이다. 하지만 그는 문득 품속에서 금표봉투를 꺼내 즉시 천냥짜리 아흔 아홉개와 백냥짜리 열개를 세어서 당정룡에게 건네주었다. 당정룡은 그 금표들을 받자 일순 너무나도 기뻐서 두 눈이 휘둥그래 졌다. 그는 다소 떨리는 손으로 금표들을 매만지며 그 진짜와 가짜를 가리느라 정 신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모두 진짜임을 확인하고 품속에 갈무리 하자, 백방생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소생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백방생은 당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만일 그와 혼인을 한 이후에 얼마 를 달라고 하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식의 일은 사 람으로 하여금 불신감이 들게 했다. 당정룡은 이제 데려가도 좋다는 말 을 했지만 백방생으로서는 천만의 말씀이었다. 자신의 인사를 받는 듯 마 는 듯한 당정룡과 작별을 하고 나서 주루의 밖으로 나오니 밖에는 찬바 람이 휭하니 불고 있었다. 백방생은 왠지 자신의 마음속에도 그런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정작 이런 때야말로 술한잔을 하고 싶었으나 그는 그만 참고 속으로 웃으며 자신의 객방으로 돌아갔다. 옆방의 황진의는 잠을 자고 있는 지 기척도 없었다. 백방생은 그녀를 깨워서 얘기나 나눠볼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는 이내 그냥 침상위에 쓰러져서 잠들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백방생은 무공이 높아진 이후 수면중에서 의 감각도 몹시 예민해 졌다. 게다가 아까 살수를 만났었던 일이 그를 더욱 신경이 예민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문득 눈을 뜨니 방문이 열리면 서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사람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안 으로 잠근 다음에 천천히 백방생의 곁으로 다가왔다. 불신감까지 깊어진 백방생으로서는 다소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실 그는 긴 장하지 않아도 좋았다. 어둠속의 그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당리였던 것이 다. 당리는 이윽고 탁자앞에 이르더니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움직이지도 않았고 말도 없었다. 백방생은 은근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윽고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또 온 것이오?" 당리는 잠시 몸을 움직이는 듯 했으나 역시 묵묵했다. 백방생은 다시 말 했다. "나에게 또 받을 것이 있어서 온 것이오?" 당리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이제 당신에게 받을 것은 없어요." 백방생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또 온 것이오"이제는 서로간의 사이가 정리된 것이 아니오?" 당리는 묵묵했다. 백방생은 다시 말했다. "대체 나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 말씀해 주시겠소?" 당리는 말했다. "그런 것은 없어요." 백방생은 그만 화가 나서 소리를 칠 뻔 했다. 하지만 문득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는 당리의 모습이 심상치 않게 생각되었다. 백방생은 짧게 탄식 하고는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즉시 그녀의 몸을 뒤에서 안아 보았다. 당리는 가만히 있었다. 백방생은 문득 말했다. "이제 당신은 나의 여자라는 말이오?" 당리는 역시 묵묵했다. 다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적극적으로 그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녀에게서는 여전히 향긋한 말리향의 냄새가 났 으며 몸매는 탄력적이고 아름다왔다. 그리고 문득 흐르는 그녀의 눈물이 있었다. 백방생은 그녀의 몸을 안아들고 침상으로 올랐다. 당리는 반항하지 않고 오히려 순종적이었다. 백방생은 그녀를 끝없이 부드럽게 어루만졌 고 그녀 역시 그 황홀감에 젖어 들었다. 두 사람은 끝도 알 수가 없는 항해를 시작했으며 그것은 백방생 뿐만 아니라 당리에게도 첫번째의 경험이었다. 백방생은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 같았고 황홀경을 노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 항해는 끝이 나고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웠 다. 두 사람은 이미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이미 완전히 부부 의 인연을 맺은 것이다. 백방생은 당리가 이제까지 정조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도 좋았지만 무 엇보다도 그녀가 그렇게 순종적인 사실에 더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 을 느꼈다. 백방생은 문득 말했다. "당신은 정말 어리석군. 하지만 현명하기도 하오, 아리(阿莉)." 아리는 백방생이 방금 생각해 낸 당리의 애칭이었다. 당리는 그 말을 듣자 크게 기쁜 듯이 눈빛을 빛냈다. "저는 당신이 크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기뻐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아직도 몹시 화가 나는데?" 당리는 말했다. "사실 저는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그건 저희 가문의 수치스러운 일 이었기 때문이죠. 지금에야 말씀드리면, 저희 가문에서는 최근에 여러가 지 일로 인해서 도처에 많은 빚을 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남궁검상 과 정혼을 하면서 지참금 대신 오히려 그쪽에서 백은 백만냥을 받기로 한 거죠. 저는 물론 괴로왔지만 그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헌데, 이번에 그것이 깨지게 되자 아버지는 오히려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게 된 거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이미 대강 알고 있었소. 사실 장인어른께서는 명문과의 혼담이 깨 졌으니 나에게 그런 억지를 쓰실만 한거지." 당리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여전히 장인어른이라고 불러주자 내심마 음이 기뻐서 다시 그의 품속으로파고들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 했다. "고마와요, 상공." 백방생은 말없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서로 미우나 고우나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백방생은 자연히 다시 그 녀의 몸을 더듬게 되었고 이어 움직임이 보다 뜨거워 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모두 지나치게 건강한 사람들이며 밤은 아직 깊었다. 만일 그 들이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길고도 짧은 밤을 지내고 나서 백방생이 눈을 뜨자 당리가 이미 아름답 게 단장을 하고 세숫물을 떠다놓고 있었다. 백방생은 세수를 마치고 옷 을 갈아입은 다음에 옆방의 황진의를 불러 함께 셋이서 식사를 했다. 황진의는 아마도 대강 둘 사이의 일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안색은 명랑 했으며 모르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들은 이내 숙박료를 지불하고 다시 소림사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 에서 소림사까지는 말을 타고 그다지 멀 지 않았다. 일행은 정오무렵에 벌써 숭산(崇山)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부터는 별로 말이 필요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말을 길옆의 한 농가에 맡겨 두고 각기 경신 술(輕身術)을 전개하여 나아가기 시작했다. 소림사의 근처에 이르자 과연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 이 천하각파의 무림인들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심지어 사마외도의 사람 들도 보였다. 모두가 중원무림(中原武林)을 사수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말이 실감이 가고 있었다. 소림사는 숭산 소실봉(少室峯)의 산허리에 있다. 백방생은 과거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소림사 주변의 모습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랐다. 도처에 많은 무림인들이 천막들을 쳐놓고 숙영을 하고 있었으 며, 소림사로 올라가는 송림숲의 길목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다. 헌데 세 사람이 마악 검문을 받으려고 다가가는데 문득 한 사람의 낯익 은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깜짝 놀랐다. 바로 소림일수(少 林一秀) 지공(知空)이었던 것이었다. 지공은 아마도 이 검문검색의 총책 임을 맡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그를 보자 자연 증평에 대한 소식 이 궁금해 졌다. 지공은 다시 소림사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공을 쫓아갔던 증평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지공도 백방생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거의 한달 가까이 지났지만 그의 수려한 모습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백방생이 미처 아는 체를 하 기도 전에 지공이 먼저 다가와서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만나 뵈었으면 하던 참이었소." <제 4권 끝> 49 장 술에 취하는 사람들 백방생은 지공이 느닷없이 자신에게 그렇듯 특별한 관심을 표시하자 다소 놀랐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도 체면상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짐짓 보기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단 말이오"신수가 더욱 훤해지신 것 같구 려?" 지공은 문득 말없이 백방생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는 사람들이 많 은 곳을 벗어나자 이윽고 신법(身法)을 펼치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그 뒤를 따랐으며 황진의와 당리도 자연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백방생은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달리게 되자 의아해 져서 말했다. "아니 대체 어디로 우리를 데려가려는 것이오?" 지공은 웃으며 말했다. "귀하를 만나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소이다. 잠시만 더 가면 되 오." 지공은 대체 누구에게 백방생 등을 인도하려는 것일까"백방생은 더이 상 묻지 못하고 따르면서도 내심 궁금해 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증평을 만나게 해주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백방생은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과 같은 중대한 시기에 지공이 겨우 그런 일로 자리를 비울 리가 없으며, 또한 증평도 이런 곳에 와서 살고 있을 리가 없겠기 때문이었다. 산허리를 몇 개 돌아서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계곡을 면한 자리에 작고 아담한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그 마을에는 겨우 십여 채의 모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지공은 일행을 그 중의 한 모옥으로 이끌었다. 모옥에서는 마침 한 아낙네가 물동이를 이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지 공은 즉시 그 아낙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 사람이 왔소." 백방생은 문득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그 아낙네가 바로 증평이었기 때 문이었다. 백방생은 자신을 바라보는 증평을 보고는 잠시 당황하여 어 찌할 바를 몰랐다. 아낙네의 차림을 한 증평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매 우 소박한 차림이었는데 아직 앳되고 수려한 용모는 감출 수가 없었다. 증평은 잠시 백방생을 바라보다가 이내 모옥의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지공은 백방생의 손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모옥의 마당에는 낡고 작 은 평상이 있었다. 주위의 분위기는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백방생 등의 네사람이 각기 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증평이 다시 밖으로 나왔는데 소소한 주안상을 마련해서 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평상위에 그 주안상을 올려 놓았다. 한겨울이라서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실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게다가 안주는 한가지의 투박한 소채 뿐이고 또한 술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증평은 주안상을 평상위에 내려놓은 다음에 한쪽에 시립하듯이 섰다. 지공이 술을 따르며 백방생에게 말했다. "뜻밖이라고 생각하시오?" 백방생으로서는 확실히 뜻밖이었다. 비록 함께 살게 될 것을 예상하기 는 했으나 이런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증평은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 럼 무표정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째서 이렇게 백방생을 보고서도 전혀 아무말도 없는 것일까"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뜻밖이오. 나는 미처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구려." 양쪽의 술을 따른 뒤에 지공은 먼저 자신이 한 잔 하며 말했다. "당신이 나의 아내에게 돈을 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소. 어쨌든 잘 쓰고 있으니 고맙소." (아내"아내라니?) 백방생은 증평과 지공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두 분이 이미 혼인을 했다는 말이오?" 지공은 말했다. "강호인들은 세속의 예절에는 구애되지 않는 법이오. 우리가 이미 마 음속으로 언약을 하였으니 그게 바로 혼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소"백형 은 실망하셨소"내가 계율을 깨뜨린 파계승이라서 말이오."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껄껄 웃었다. "스님께서 돌팔이라는 것은 이미 이전부터 알고 있었소이다. 내가 궁금 한 것은 저 분 증, 아니 영부인(令夫人)께서 지금 행복하게 사시는가 하는 점이오." 문득 그 때 증평이 불쑥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지금 행복해요. 그런 점에 있어서는 백공자께서 신경쓰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워낙 그녀의 말과 표정이 차가왔기 때문에 백방생은 그만 다소 무안해 지고 말았다. 과연 그녀는 행복한 것일까"행복하다면 어째서 저런 허망 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인가"백방생은 이어 문득 생각했다. (혹시 그 돈을 모두 지공에게 주고 그의 환심을 샀던 것이 아닐까"그 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녀는 지금 저렇게 빈곤하게 보이는 것일까?) 지공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자, 우리 그런 얘기는 그만두고 어서 술이나 마시는 것이 어떻겠 소?" 이어 지공은 스스로 석 잔의 술을 따라 마시고 백방생에게도 석잔의 술을 따라 주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술을 마시자 이내 술병은 바닥이 났다. 지공은 증평에게 말했다. "술이 부족하군. 준비해둔 술이 좀 더 없는가?" 증평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없어요." 백방생은 그녀의 무표정함에서 언뜻 그녀가 지금 불행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게다가 너무나도 가난하여 술 한병을 구할 수 없는 처지를 보자 문득 지공에 대해서 분노가 치밀었다. 증평은 이제 겨우 열 여덟의 꽃다운 나이로서 나이가 지공의 절반밖에 안 된다. 지공이 아무리잘났 다고해도 일단은 그녀를 귀여워해 주고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백방생은 다시 빈곤하고 불행해진 증평을 보자 즉시 따귀라 도 후려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백방생은 품속에서 잡히는 대로 금표봉투를 꺼내서 증평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돈으로 술을 사오고 남은 것은 아기의 선물을 사도록 하시구 려." 증평은 문득 그 얘기를 듣자 안색이 다소 붉어졌다. 그녀는 사실 임신 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직 한달도 안됐는데 백방생이 어떻게 알 고 있을까 하고 의아해 졌다. 지금 백방생이 건네준 봉투에는 모두 백 냥짜리 금표가 거의 칠십여 장이나 들어 있었다. 증평은 잠시 멍한 표 정으로 백방생을 바라보다가 모옥의 안으로 물러갔다. 백방생은 전음으로 당리에게 말했다. (어서 가서 그녀를 좀 도와주도록 하오.) 당리는 두말없이 그를 향해 미소한 뒤에 증평을 따라 모옥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 두사람은 아마 뒷문을 통해 술을 사러 간 모양이었다. 안 으로 들어간 뒤에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백방생은 이에 지공이 소피를 보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황진의에게 작은 액수가 들어 있는 예금 장부를 꺼내서 인장과 함께 주며 말했다. "황낭자께서 나를 위해 잠시 수고해 주시지 않으시겠소?" 마침 무료해 지던 참이라 황진의는 웃으며 선선히 그 물건들을 받았다. "나더러 돈을 찾아오라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제법 큰 성시(城市)라면 금포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오. 거기에서 이십구만 냥을 찾아다 주시오." 이어 전음으로 비밀번호와 그밖의 사항들을 일러주자 황진의는 미소하 며 즉시 떠나갔다. 그녀는 무공이 높으니 마음만 먹으면 설사 낙양에 라도 다시 갔다올 수가 있을 것이다. 지공이 이윽고 돌아와서 말했다. "또 다른 분은 심부름을 보낸 것이오?" 백방생은 증평 때문에 은근히 지공을 미워하고 있었다. (이 음탕한 중놈이 다시 다른 여자에게 눈독을 들인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웃으며 말했다. "예. 헌데 스님께선 이렇게 이런 시간에 술을 마셔도 되는 것입니 까?" 지공은 예리한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내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소?" (마음에 들지 않다 뿐이냐?) 백방생은 속으로 연신 욕을 하면서도 겉으로 미소하며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 소림사에서 스님을 찾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오." 지공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소. 그들은 이미 내가 어쩔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 니까. 백형도 우리 소림사에 있었다고 하더니만, 그게 사실이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사실입니다. 헌데 당시는 유감스럽게도 스님을 뵙지 못했지요. 단지 그 저 신화적(神話的)인 스님의 얘기만을 들었을 뿐." 지공은 문득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신화적이라고"흥, 나를 비웃고 있군!" 백방생은 그가 갑자기 표정이 달라지자 도리어 어리둥절해 졌다. "비웃고 있다니요"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공은 말했다. "그럼 백형은 아직 나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이오?" 백방생은 그가 그렇게 냉정하게 추궁해 오자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 다. "제가 스님에 대해서 뭘 안다는 말입니까?" 지공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아직 얘기가 전해지지는 않은 모양이군!" 백방생은 의아해져서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공은 잠시 침묵을 지키 다가 말했다. "일전에 동정호에서 내가 누구를 기다렸었는지 아시오"나는 사실 그들 때문에 이미 그 얘기가 강호에 퍼진 것으로 알고 있었소." 백방생은 말했다. "무슨 얘기 말입니까?" 지공은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에 말했다. "그건 나의 신세내력이오." (신세내력?) 백방생은 아직 지공의 신세내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었기 때문 에 마치 갑자기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혹시 그에게 무슨 특별한 내력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흔히 속세인이 일단 출가를 하고 나면 그 내력은 상관하지 않기 때문 에 백방생도 미처 그런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었다. 흡사 절색의 여인 을 연상하리만큼 수려한 용모를 가진 지공에게 대체 어떤 내력이 있을 까" 백방생은 궁금했지만 일부러 묻지 않고 참았다. 그것이 바로 상대로 하여금 말을 계속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지공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한 아이가 있었소.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모든 사람들의 귀여움 을 받았으며 동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소. 그런데 자신의 사 부가 바로 자신의 부친이고, 또한 그 부친이 천박한 여자와 만나 불륜의 씨앗을 잉태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과 연 그 아이는 어떻게 되겠소?" 백방생은 그 얘기가 바로 지공 자신의 얘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백방생은 문득 한가지 사실을 알고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다. (아니 그의 사부라면 바로 소림방장 도액선사인데, 과연 그가 그런 불 륜의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아직도 계속 아무런 일도 없이 장문인의 직위를 유지하고있는거지"혹시 그에게 다른 사부라 도 있었던 것일까?) 백방생은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가 없어서 말했다. "비록 남들이 천박하다고 말해도 정작 그 당사자에게는 최고로 아름 다운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또한 의외로 성품이 고귀한 사람일 수도 있는 법이 아닐까요?" 지공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의외로 성품이 고귀할 수도 있다고？ 흐흐흐, 그래 백형께선 그 악명 높은 만화선자(萬花仙子) 음소이(陰小怡)가 성품이 고귀하다고 생각하시 오?" 백방생은 일순 너무나도 놀라서 심장이 멎어 버리는 것 같았다. (만화선자 음소이" 그녀는 바로 만화교(萬花敎)의 주인이 아닌가?) 만화교는 바로 이전에 철혈부의 주요세력들인 녹림맹, 수라교 등의 사대세력의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서 천하의 모든 화류계 여인들의 집단 인 사마외도의 단체였다. 그 산하에 나찰교(羅刹敎), 백화방(百花幇), 오 선교(五仙敎), 천욕궁(天慾宮)이 있는데, 그 세력은 중원 천하에 퍼져 있어서 누구도 무시할 수가 없다고 했다. 만일 지금 지공의 말대로 그의 부모가 바로 소림방장과 만화교의 교주 라면 이는 정말로 엄청난 현실이 아닌가？ 지공은 마치 자조적인 독설 을 퍼붓듯이 그런 얘기를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군요." 그 때 술을 사러 갔던 증평과 당리가 돌아와서 많은 좋은 술과 안주들 을 평상위에 늘어 놓았다. 당리는 황진의가 보이지 않아서 다소 의아해 했으나 일부러 백방생에게 묻지는 않았다. 증평은 아까처럼 여전히 말이 없기는 했으나 이제는 안색에 다소나마 생기가 돌고 있었다. 당리는 옆 에서 술을 따랐고 두 사람은 연달아 마시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무공이 대단했으므로 자연 술을 마시는 주량도 대해처럼 넓었다. 이내 두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서 잊기 시작했고 지공은 웃으 며 말했다. "백형은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요?" 백방생은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그일로 인해 도무지 취기가 돌지 않 는 것 같았다. 사실 지공의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무림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일대 사건으로서, 의당 일단은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백방생은 말했다. "누구라도 믿을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런데 스님께선 어째서 그 얘기 를 소생에게 하는 것이오?" 지공은 쓰디 쓰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어쨌다는 말이오" 우리는 좀더 특별한 사이가 아니오" 물론 그 얘기는 이제 머지 않아서 누구나 알게 될 것이지만, 백형과 내 아내는 본래는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었소"내가 없었다면 두사람은 혼인을 했었겠지"차라리 그편이 나았었겠지만...... 사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동 서가 아니겠소?" 백방생은 안색이 다소 붉어졌다. "그럼 당신은 증낭자의 순결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이오?" 지공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내 말은 그런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오. 그녀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 당신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 지금 이렇게 굳이 당신을 이 쪽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겠소?" 대화내용이 다소 어지러워 지자 증평은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 다. 당리는 옆에서 가끔씩 대작을 해 주며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 켜 주었다. 점차로 날이 어두워 졌다. 증평은 등불을 내다가 밖에 걸어 주었다. 황량한 주변이 그 등불로 인해 다소나마 분위기를 일으켜 주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계속 왠지 감상에 젖어서 술을 마셨는데, 그 사 이에 당리는 증평과 함께 무려 세 번이나 술을 사러 갔다 왔어야만 했다. 이윽고 대화의 내용은 백방생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이어지고 있었 다. 두 사람은 모두 독한 죽엽청을 수십병이나 마셨기 때문에 정신은 맑아도 얼굴은 취기가 일어나서 벌겋게 변해 있었다. 술이라는 것은 비단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흥분시키기도 하지만 그 사람에게 일종 의 용기까지 준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었을 얘기를 백방생은 쓸데없이 줄줄이 늘어 놓았고, 지공도 쓸데없이 공연히 심각한 표정을 하고 들으며 계속 말참견을 하고 있었다. 어느 싯점에서는 두 사람은 갑자기 핏대를 올리며 싸우기도 했다. 그들은 마치 현재의 모든 것을 잊고 술에 미치 고 싶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째서 그들은 중요한 일들을 놔두고 이런 쓸쓸하고 보잘것 없는 자리에 와서 쓸데없는 주정들만 하는 것인가" 황진의는 주위에 완연히 어둠이 깔린 술시 무렵에야 비로소 돌아왔 다. 그녀는 백방생을 위해 일부러 보이지 않도록 예금장부와 인장, 그 리고 찾은 금표들을 하나의 큰 봉투에 넣어서 건네주었다. 백방생은 그것 을 받아 품속에 넣고서도 계속 지공과 언쟁을 했다. 그러나 이윽고 술이 또 떨어지자 두 사람은 얘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 다. 마치 그것은 밥을 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기계와도 같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쳐서 술을 찾았다. 그러나 여자들은 이제 더이상 술을 사오는 것을 반대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고 해도 지나친 음 주는 몸에 해로울 것이다. 두 사람은 이제까지 세시진 가량을 계속 술을 떠마시다시피 하여 일반의 주도(酒道)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증평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이 술을 달라고 소리쳐도 방안에서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당리는 본래 백방생의 말에 순종하는 여자였지만 지금에는 자금을 증평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술이 더이상 나오지 않자 한참동안 주정을 해대다가 이윽고 지쳐서 시들해 지고 말았다. 황진의까지 가세하여 말리자 두 사람은 마 침내 포기했고 열기가 가득했던 이 토론장은 이내 썰렁해 지고 말았 다. 백방생은 곧장 소림사로 가겠다고 했고 지공이 데려다 주겠다고 했 다. 보아하니 증평은 백방생 등이 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 다. 지금 이 시각에는 소림사에 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백방생 등은 자연 지공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 허름한 모옥을 뒤로 하고 일행 네 명은 곧장 신법을 전개하 여 소림사로 향했다. 백방생은 그간 무공이나 신법 등도 크게 달라졌지만 지공이나 증평도 그런 외모 등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 다. 왠 지 어떤 비극적인 끈끈한 유대감이 술을 마시는 동안 서로간에 형성된 것 같았다. 일행 가운데에서 가장 무공이 낮은 사람은 당리였는데 그녀 는 계속 백방생의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마치 백방생과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녀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 지는 것을 보고 이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당리는 다소 힘들어 하다가 백방생의 손끝에서 이루 형 용할 수 없는 달콤하고 시원한 기운이 전해지자 안색이 이내 훤하게 펴 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꿈을 꾸듯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 보았으며 마치 금방이라도 그 품에 안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듯한 모습이 었다. 일행은 그야말로 거칠게 치솟은 나무들이나 벼랑, 계곡 들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날아서 이내 반시진도 되지 않아서 어느덧 소 림사의 경내에 이르렀다. 소림사의 경내는 실로 경계가 엄중했다. "누구냐!" 일행이 마악 어느 공지에 내려섰을 때 느닷없이 어둠속에서 십여 명의 승려들이 튀어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계도(戒 刀) 등의 병장기들이 들려 있어 흉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다." 지공은 나서서 말하고 그들을 격려했다. 지금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가 사십대의 화상들로 대부분이 지공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지공은 배 분이 높아서 그는 육십대의 노승들과 함께하는 일대제자(一代弟子)였 다. 따라서 화상들은 모두가 공손히 그를 대하는 것이었다. 일행들 가 운데 두어 명이나 술에 취해서 술냄새가 진동해도 그들은 감히 아무런 소리도 못하고 물러갔다. 지공은 일행을 객사 쪽으로 안내하더니 말했다. "내가 여러분이 묵을 방을 구해볼 테니 이 곳에서 잠시 기다리시오." 일행 세 명이 객사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지공은 금방 돌아 오지 않았는데 문득 어디선가 불빛이 충천하는 것이 보였다. 백방생이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가니 대웅전의 앞 뜰이었는데 거기에서 지금 화 톳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들은 얼핏 보기에도 매우 눈에 익었다. 다름아닌 백방생이 꿈에 도 그리던 진소유와 석륭안, 석채릉, 그리고 천상오룡 등이었다. 이런 불 문의 성지에서 함부로 화톳불을 피워놓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신성모독 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당금의 천하에서 그들 천상회의 사람들 이 아니면 누구도 그런 짓들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백방생은 석채릉이 어느새 이곳에 와 있는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는 왠 지 천상오룡의 허리춤들을 주시했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각기 병장기들 이 걸려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세 개가 특이했다. 모두가 검은 빛 이었고 제각기 은은한 금광을 발산시키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전에 석 륭안이 차고 있던 신검을 비롯하여 이전에 공공문의 노문주가 탈취했 던 신창(神槍), 그리고 같은 재질의 곤(棍)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신병이 기(神兵利器) 도검창곤 중에서 도를 제외한 세가지를 차지한 모양이었 다. 그것은 실로 천상회(天上會)의 위력을 실감케 해 주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석륭안은 백방생을 발견하자 이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백공자, 그대도 왔군. 정말 그대가 여기까지 오다니 뜻밖이야." 백방생은 진소유를 보자 마음이 쓰렸지만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즉시 포권하며 말했다. "나 역시 뜻밖이오.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겠소이다." 석륭안은 웃으며 손을 들었다. "아, 뭐 그리 급한 일이라도 있는가？ 기왕에 왔으니 잠시 여기에 앉는 것이 어떤가"마침 해야할 말도 있고 말이야." 백방생은 혼자라면 그냥 떠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아내가 된 당리 등이 보고 있으므로 모든 일들을 그렇게 흐리멍텅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그 화톳불의 주위로 다가가서 앉았다. 사실 그는 이제는 무공에서는 석륭안이 두려울 것이 없으므로 기왕이면 대담해 지기로 한 것이다. 당리와 황진의는 그의 좌우에 나누어 앉았고 잠시 탁탁탁, 하고 거세게 타오르는 화톳불의 불 길아래 무겁고 답답한 침묵이 흘러갔다. 석륭안이 문득 그 침묵을 깨며 황진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황소저, 오랜만이오. 그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 백공자와 함께 다니 는 것이오?" 황진의는 그저 가볍게 미소하며 대꾸했다. "저는 그의 호위무사직을 맡고 있어요. 그러니 함께 다니는 것이 당연 하지 않겠어요?" 석륭안은 짐짓 포권하며 말했다. "탄복했소, 탄복했소! 황소저는 천하만민을 구하기 위해 그런 천한 일자리도 마다하지 않는구려?" 반쯤 비아냥거리는 석륭안의 태도에 황진의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 다. "과찬의 말씀이예요." 백방생은 황진의가 석륭안과 이미 초면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소 놀랐 으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특이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세외팔세의 후기지수들로 아무래도 서로 유의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백방생은 진소유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백방생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 를 돌려 그저 환하게 타오르는 화톳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백방생 등이 나타난 것을 모르는듯 했다. 석채릉은 기묘하고 차가운 시선 으로 백방생의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고 천상오룡은 그저 무심하고 냉 막한 표정들이었다. 백방생은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소유, 그간 잘 지냈소?" 진소유는 여전히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입을 연 사람은 석륭안 이었다. 석륭안은 그를 보며 말했다. "백공자, 오늘 내가 그대에게 해줄 말이라는게 뭔지 아는가?" 백방생은 말했다. "무슨 말을 하겠다는 것이오?" 석륭안은 진소유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들은 앞으로 한달 후에 혼인식을 올리기로 하였네. 자네가 국수를 먹으러 와 주었으면 하는 것이지." 지금부터 한달 후라면 바로 설날을 말하는 것이다. 백방생은 갑자기 심 장이 쿵, 하고 울리며 정신이 어지러워 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사 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말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급히 고개 를 돌려 진소유를 바라보니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할 뿐이었다. 무언은 곧 긍정이 아니겠는가" (설날에 혼인식을 올리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소유는 어째서 그 렇게 급하게 혼인식을 치르려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이미 부인이 된 당리 뿐만 아니라 황진의도 와 있다. 백방생은 급히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듯한 의식을 되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더욱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진소유에게 말했다. "소유, 그게 사실이오?" 진소유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 냉정한 음성으로 그 녀는 말했다. "그래요. 사람의 생각이란 늘 변하기 마련이죠. 앞으로 나에게 그런 호 칭은 삼가해 주셨으면 해요. 남의 부인에게 그런 천박한 호칭을 사용한 다는 것은 스스로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이 것은 도로 돌려드려야 하겠군요?" 이어 진소유는 품속에서 하나의 봉투를 내밀었다. 그것은 바로 백방생 이 저번에 새로 주었던 황금 십만냥짜리 금표뭉치였다. 백방생은 진소유 의 그런 냉정한 말을 듣는 순간 마치 가슴이 심하게 쓰라려오는것같았다. 그러나 그는 겨우 안색을 펴며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은 상관없소. 내가 주는 예물로 생각하면 될 테니까. 그 보다, 그 일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볼 수는 없겠소?" 석채릉이 잠자코 있다가 더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어 말했다. "흥! 정말로 못 봐주겠군! 혼인식에 초대를 해줬더니 어이없게도 그 혼 인을 훼방놀 작정이냐" 정말 막 돼먹은 녀석이로군!" 진소유는 말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이고 되돌릴 수는 없어요. 게다가 제가 지금 마음을 바꾼다고 해서 당신이 어쩌겠다는 거죠？ 당신에게도 이미 사랑하는사 람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요"당신이 만일 저를 위한다면 저를 위해 행복 을 빌어줄 수도 있지 않겠어요?" 백방생은 그 말을 듣고 그만 할 말이 막혔다. 사실 진소유나 석채릉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이미 옆에 당리가 있는데 그가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인가？ 백방생이 멍하니 앉아 있는 동안 석 채릉이 먼저 소리치며 일어섰다. "흥! 정말 수치를 모르는 녀석이로군?" 석륭안이 뒤를 이어 일어섰으며 진소유도 봉투를 다시 갈무리하고 천상오룡 등과 함께 이내 걸어서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들 일행이 멀리 전각들의 사이로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백방생은 그만 나직한 탄식을 발했다. 비록 겉으로는 나직한 탄식이었지만 기실 그의 마음은 크게 무너져 내리고 있을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가 혹시 지공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지공보다도 키가 머리하나쯤은더크고체구가우람했으며머리카락을기르고있었다. 문득 옆에서 아, 하는 놀란 외침을 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황진의 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일순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으며 기쁨의 빛깔이 물결 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용사형(龍師兄)!" 백방생은 그 말을 듣고 다소 놀라고 긴장하여 급히 다시 다가오는 그 사람을 살폈다. (정말로 그가 바로 그 용천기(龍天奇)라는 말인가?) 용천기. 백방생은 그 이름을 실로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 게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또한 이렇게 느닷없이 보게 되리라고는 전 혀 생각지도 못했다. 용천기, 황진의가 가히 최고의 인재라고 평했던 그 천하 일곱명의 천재 들 가운데의 최고인 그 사람의 용모는 얼핏 보기에도 매우 뛰어나 보였 다. 전신의 골격은 우람하면서도 군살이 하나도 없어서 잘 발달되고 균 형이 잡힌 전형적인 무골(武骨)이었으며, 게다가 매우 준수한 얼굴은 선 이 굵고 각이 진 사각의 턱에 구레나룻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있었다. 그저 한번만 봐도 이내 영웅(英雄)의 기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모습으로 서 상대를 질리게 하기에 족했다. 백방생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산이 다 가오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실로 그는 황진의가 했던 칭찬의 말을 모조리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얼마전의 사파무림인 강 남무림맹 철혈부의 주인이었던 사람인 것이다. 실로 백방생은 그를 이런 곳에서 쉽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황진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백방생과 당리의 시선도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용사형!" 그 용천기는 다가오다가 문득 황진의를 발견하고는 매우 의외이고 반가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이거 소진(小眞)이 아니냐"이거 오랜만인걸?" 소진이란 바로 황진의의 아명이자 애칭인 모양이었다. 용천기는 놀라그 렇게 소리치며 두팔을 벌렸다. 황진의는 급히 달려가 그 팔에 안길 듯 하다가 다소 쑥스러운 듯이 그 손을 잡았다. "사형, 대체 그동안 어째서 연락 한번 하지 않았죠"정말 저는 보고싶 어 죽는 줄로 알았어요." 황진의의 말투에는 애정이 가득했고 또한 금방이라도 주위에 사람이 없으면 안길 듯한 태도였다. 백방생은 실로 그녀가 일편단심(一片丹心)으 로 그를 사랑해 왔었다는 것을 의심할수가 없었다. 그는 가급적 슬그머니 이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하하! 그랬었나"정말 그랬다면 이 사형이 정말 미안한 짓을 한 셈 이지. 그래 어떻게 해야 소진에게 보상을 해주는 것이 되나?" 호방하고 격식에 구애되지 않는 용천기의 말에 황진의는 다소 안색 을 붉히며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늘 사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게만 된다면 만족해요." 황진의는 어제까지는 의젓한 모습이었는데 지금 그녀의 사형을 만나게 되자 흡사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용천기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헌데 소진, 보아하니 여기에 네 친구들이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게 소개시켜 주지 않겠느냐?" 본래 평범하게라면 용천기는 당연히황진의의 부모와 할아버지인 사부와 사조 등의 안부를 물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문을 뛰 쳐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스스로 사 형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격식에 구애되지 않는 그의 호방한 성격에 의한 것이었다. 황진의도 마침 그 점이 꺼림칙하던 참이라 즉시 백방생 등에게 다가와 서 용천기에게 두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백방생과 당리는 일어서서 용천기에게 수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백방생은 용천기가 방황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지금 그의 얼굴 에는 전혀 가문의 혈한(血恨) 등으로 인해 어둠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서는 새롭고 희망찬 강한 기백이 느껴지고 있었다. 백방 생은 문득 자연히 한 사람의 얼굴을 뇌리에 떠올렸다. 지공의 모습은 부 드럽고 여성적이며 우울한데 반하여 이 사람은 강하고 남성적이며 진 취적인 기상이 넘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강호의 기재들이지만 성 품은 정 반대인 것 같았다. 용천기는 수인사를 나누면서 유심히 백방생을 주시하고 있다가 말했다. "본인은 본래 귀하가 그 천상회주인 석륭안인 줄로 알았소. 헌데 과연 강호는 넓고 인재는 많구려. 여기에서 또 한분의 영웅을 보게 되다니!" 백방생은 그가 자신을 영웅이라고 칭하자 절로 안색이 붉어졌다. 그가 바라보니 용천기의 두눈에서는 무쇠라도 녹일 듯한 강한 기운이 일어나 고 있었다. 백방생은 다소 어색한 기분으로 말했다. "과찬의 말씀이외다. 소생이 어찌 영웅이 될 수가 있겠소. 다만 황낭자 가 소생에게 많은 도움을 주시는 지라 함께 지내고 있는 것일 뿐이 오." 50 장 영웅과 영웅 백방생은 황진의를 위해 가급적이면 그와 그녀와의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 주려고 한 것이었다. 용천기는 이에 슬쩍 황 진의를 한번 돌아보더니 호방하게 웃었다. "핫핫핫, 어쨌든 이렇게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니 불초의 강북행이 전 혀 쓸모없지는 않았소이다. 그래 이 곳에 그 석륭안이 있다고 하길래 왔 는데, 혹시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소?" 백방생은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어서 일찍 작별을 고했다. "그들은 방금 전에 이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소 이다. 그럼 소생은 바빠서 이만 실례할 테니 두 분은 대화를 나누시도 록 하십시오." 용천기는 굳이 붙잡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해 보였다. 황진 의는 다소 안색을 붉히는듯 했으나 역시 백방생을 따라오지 않고 그 자 리에 남았다. 백방생은 당리와 함께 걸어서 아까의 그 객사의 앞으로 갔 다. 바로 그 때 지공이 마침 그 안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헌데 지금 의 그의 모습이 다소 이상했다. 얼굴의 양쪽이 심하게 부풀어 있었고 심지어는 시퍼런 멍이 든 곳도 있었다. 아마도 그 사이에 누구에게인가 끌려가서 혼줄이 난 모양이었다. 대체 누가 그를 이렇게 혼내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구려. 내 잠시 볼일이 생겨서 좀 늦었소. 어서 갑시다, 방을 마련했으니..., 헌데 어째서 다른 한분은 보이지 않소?" 백방생은 내심 매우 씁쓸한 기분이 되어 웃으며 말했다. "황낭자는 잠시 그녀의 친구를 만나고 있는 중이오. 나중에 보게 될 테 니 그냥 가도록 하지요." 지공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은 어느 커다란 객사의 앞에 이르렀는데, 그 객사의 안에는 많은 방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공은 그 가운데에서 나란히 붙은 두 개의 방을 안내 해 주었다. "보아하니 두 분은 함께 이 방을 쓰도록 하고, 그 황소저에게는 이 방을 쓰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런 시국에 이런 방을 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닐 것이 다. 백방생은 크게 고마운 마음에 말했다. "정말 고맙소. 헌데 스님께선 어느 곳에서 주무시겠소?" 지공은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말했다. "나는 지금 사방에서 부르는 사람이니 여러분과 함께 있을 수가 없겠소. 내 나중에 시간을 내어 다시 오리다." 지공은 백방생의 손을 잡더니 이어 말했다. "그리고, 백형은 귀하고 아름다운 내 아내를 내게 선물로 주었는데 내 어찌 고작 이런 것으로 감사의 인사를 받을 수가 있겠소?" 지공은 그 말과 함께 훌쩍 신형을 날려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미 해시 경이어서 밤이 매우 깊었다. 귀를 기울여 보니 이 객사에도 수많은 사람 들이 머물고 있는듯 했고 또한 객방들이 거의 불이 다 켜져 있었다. 백 방생과 당리는 왠지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어져서 즉시 그 객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의 구조는 간단하여 겨우 이불 하나와 낡은 탁자 하나가 고작이었 고 내부도 비좁았다. 그러나 실내에는 은은하게 등잔불이 타오르고 있 었고 그래도 제법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 했다. 당리는 안으로 들어서자 묵묵히 이불을 펼쳐서 잠자리를 만들었고 이어 백방생의 시중을 들려고 했다. 백방생은 이에 문득 말했다. "아리, 거기 좀 앉아 보시오." 당리는 약간 의아해져서 말했다. "왜요,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백방생은 그녀와 마주 앉으며 품속에서 그 황금 이십만냥이 남은 예금 장부를 꺼내 인장과 함께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놀라 의아해 하 는 그녀에게 비밀번호를 말해준 다음에 말했다. "내 아까 부득이 이것을 황낭자에게 맡겼었소. 헌데 그대는 혹시 섭섭 하지 않았었소?" 당리는 문득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이미 그대의 은총을 너무도 충분히 받은 몸인걸요. 이 제 그대가 저를 괄시하신다고 해도 저는 만족해요." 백방생은 그녀가 다소나마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고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그저 급한 생각에 황낭자를 시켰던 것이오. 하지만 이제부터 그 예금장부는 그대가 가지고 있다가 나에게 필요할 때마다 찾아 주도록 하시오. 사실 그대는 나의 부인이니 그 돈은 그대의 것이기도 한 것이 오." 당리는 눈물을 닦고 그것들을 잘 갈무리한 뒤에 그의 품속으로 안겨 들었다. "저는 상공께 이런 사랑을 받으니 당장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거 예요." 백방생은 미소했다. "하지만 결코 나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서는 아니 되오. 반드시 검 은 머리가 하얗게 필 때까지 나를 사랑해 주고 위해 줘야지." 백방생은 말과 함께 그녀를 힘껏 포옹하고 깊은 입맞춤을 했다. 당리의 입술은 촉촉하고 또한 뜨거웠다. 가녀린 그 몸뚱이는 깊은 사랑의 열정으 로 뜨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불문의 도량이고 또한 주위 에 이목이 있을 지도 모르므로 더이상의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백방 생과 당리는 서로 뜨거운 입맞춤과 애무를 나누다가 이윽고 아쉽게 떨 어졌다. 백방생은 이불위에 비스듬히 눕자 당리가 그위에 다소곳이 안기며 입 을 열었다. "황소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방생은 그녀의 몸을 사랑스럽게 어루 만지며 말했다. "으음"그녀는 이제 좋은 사형을 만났으니 행복해질 것이 아니오?" 당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진소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정말로 그녀의 혼인식에 참석하 실 것인가요?" 백방생은 가볍게 안색이 흐려졌다. 백방생은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소. 일단은 좀 더 생각해본 연후에..." 당리는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당신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훌륭하고 멋진 분이예요. 저는 이미 말했다 시피 당신을 독차지할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그 때 문득 백방생이 그녀의 간지러운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에 그녀는 돌연 말을 하다가 말고 호호호,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백방생은 이어 은어처럼 파들거리는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확인하기 시작했 다. 두 사람은 모두 뜨겁게 달아 올랐다가 겨우 떨어졌다. 백방생은 문득 몸을 일으켰다. "잠시 주위를 돌아본 다음에 돌아오겠소." 지금 이 곳은 정의맹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그녀에겐 어떤 위험도 없을 것이었다. 당리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미소하며 말했 다. "저는 이곳에서 기다릴 테니 걱정말고 다녀 오세요." 사실 백방생은 아직 무림의 동향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가 주 위의 상황을 정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방생은 당리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어준 다음에 가볍게 창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 즈음의 백방생의 무공은 가히 누구도 두렵지 않을 만한 경지에 이 르러 있었다. 설령 당금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고 일컫는 천륭무 가의 가주마저도 백방생을 따를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객사의 밖 에는 이미 철통같은 경계망이 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 백방생에게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백방생은 우선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연히 아까의 그 화톳불이 있는 대웅전의 앞뜰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소림사의 전역은 대체로 깊은 정적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러나 이것 은 그저 단순한 고요가 아니라 그야말로 와호장룡지지(臥虎藏龍之地)요 폭풍전야 속의 고요라고 할 수가 있었다. 모두가 내일의 격전을 기다리며 무거운 침묵들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백방생의 신형은 어두운 허공 아득한 곳에 구름처럼 둥실 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순간에 소리없이 아래쪽으로 하강했다. 그 화톳불은 이미 거의 사그러져서 화광은 사라지고 그저 붉은 숯불의 빛깔만이 남아 있었다. 그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문득 나직하게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용천기와 황진의 두 사람이었다. 백방생 은 어느 틈엔가 대웅전의 으슥한 부분으로 스며들어서 두 사람의 대화 를 엿듣기 시작했다. 용천기가 불쑥 다소 큰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그렇다면, 정말로 천하에 그런 신선(神仙)들이 있다는 말인 가?" 황진의는 말했다. "저도 본곡의 조사님을 뵈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본적이 없어요. 하지만 분명히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어요. 게다가..." 용천기는 다소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머지 않아서 그들이 천하를 집어삼킬 것이란 말이지" 또한 당금의 이 환란들도 모두 그들의 수하에 놀아난 것이고?" 황진의는 말했다. "조용히 하세요. 그들 중 누군가가 들으면 큰 일이 나요. 용사형의 실 력은 알지만, 그러나 제가 들은 바로는 천하의 그 누구도 그들 중 한 사람을 당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 극비리에 일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해요." 용천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 화제를 돌렸다. "그건 일단 내가 생각해 볼테니 소진사매는 걱정마오. 헌데, 혼자서 이렇게 강호를 떠돌아 다니다니 고생스럽지 않은가?" 용천기는 말과 함께 나란히 앉은 황진의의 허리에 손을 가볍게 둘렀 다. 황진의는 잠시 움찔 했으나 가만히 있었다. "괜찮아요 저는..., 강호인들이 모두 본곡의 사람들을 우대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 보다 저는 항상 용사형의 걱정만 했는 걸요?" 용천기는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음, 사매의 명성이 이미 강호에 파다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헌데 사매가 나 때문에 걱정을 했다고 하니 이거 미안한데?" 황진의는 용천기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게 되자 그만 안색이 다소 붉 어지며 말했다. "사형, 사형은 그동안 여자친구를 사귀지는 않았나요?" 용천기는 잠시 안색이 변했으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나이에 아직 여자를 모른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고, 솔직히 말하면 여자들과 놀아본 적은 있으나 아직 좋은 여자는 만나지 못했다고나 할 까?"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사형께서는 이제까지 늘상 바쁜 분이었으니까요. 곡에 있 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용천기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도 찼고 해서 한번 좋은 여자를 만나볼 셈이야. 헌데 사매는 이미 다 자랐군. 내가 보았을 때는 아직 어린 나이였는 데." 황진의는 점점 그의 얼굴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절로 안색이 붉어졌다. 그녀는 은근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는 사형의 부인이 되실 분은 장차 행복해 지실 것이라고 생각해 요." 용천기는 문득 두 눈에서 뜨거운 빛을 발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사매가 이토록 훌륭하게 자라줄 줄은 몰랐어. 내가 이제까지 본 중에서도 사매는 단연 최고의 여자라고 할 수가 있지. 사문에는 내가 따 로 말씀드리지. 사매, 마침 그대도 나를 계속 사모하고 있었다고 하니, 한번 나와 함께 백년을 해로해 보지 않겠어"나는 앞으로 사매가 원하 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해줄 수가 있어." 그것은 그야말로 정식적인 청혼이었다. 황진의는 이제까지 거의 꿈속에 서도 용천기를 연모해 왔었다. 따라서 그의 그같은 말은 기실 그녀가 바 라 마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용천기는 실상 그녀가 생각했던 이상 으로 훌륭하고 완벽한 남자였다. 황진의는 그 말에 다소 안색이 붉어지 며 말했다. "고마와요, 하지만 그건 다소 서두르는 것이 아닐까요?" 용천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나는 이제까지 사람을 잘못 보아온 적이 없어. 사매는 그야 말로 훌륭한 여자야. 더 생각해볼 여지는 없어. 사매는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안색은 이미 거의 홍당무처럼 붉 게 변해 있었다. "아니예요. 사형은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남자일 거예요. 가장 훌륭한 신랑감이고요." 용천기는 그녀의 말에 기쁜 표정을 떠올렸다. "그런데 대체 사매는 뭘 망설이지"사문에 허락을 받기가 어려워서 그 런가?"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그런 것은 아니예요. 다만 저는 사실 그런 문제는 중대한 것이므로 좀더 신중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용사형을 위한 거예요. 사형, 저는 이미 아시다시피 이제까지 늘상 용사형을 그 리며 살아왔어요. 그러므로 제가 용사형의 부인이 된다면 그건 행복한 일이죠. 하지만 만일 용사형이 저와 서둘러 혼인을 하고 나서 이윽고 후회하시게 된다면, 그것은 안되겠기에 드리는 말씀이예요." 용천기는 그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런 점이라면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나 용천기는 이래뵈 도 당당한 사내 대장부요. 한번 한다고 하면 하는 것이고 도중에서 후 회하는 일은 없소. 물론 그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사랑을 할 거요. 이제 되었소"그대는 그대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군?" 이어 용천기는 기쁜 나머지 양 팔을 벌려서 황진의를 안고 입을 맞추려 고 했다. 그러자 문득 황진의는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예요, 잠깐만"여긴 사람의 눈도 많은데 사형께선 너무 짓굳으시 군요. 물론 저는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런 곳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을 거예요." 용천기는 그만 다소 안색이 굳어졌다. "사매는 나를 싫어 하는가?" 황진의는 입장이 더욱 난처해 졌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왠지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이렇게 하기가 다소 어색하군요." 용천기는 그녀가 어색한 표정으로 황망히 대답하는 것을 보고 다소 눈 살을 찌푸렸다. "단지 그 뿐인가?" 황진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시고 그저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해 주세요. 저는 용사형만을 그리고 있는데 제가 어딜 가겠어요?" 용천기는 잠시 황진의의 투명한 듯한 두 눈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 했다. "그럼 얘기해 주지. 지금 이곳에는 무림맹(武林盟)이 창설되었어." 황진의는 이미 빨갛게 식어가는 화톳불을 공연히 뒤적거리며 말했 다. "그럼 정의맹과 철혈부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정사무림맹(正邪武林 盟) 인가요?" 용천기는 황진의가 철혈부 운운하자 문득 과거의 기억이 씁쓸한 지 웃으며 말했다. "옛날의 그 일은 내가 너무나도 철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고, 지금 중원 무림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사흑백양도(黑白兩道)를 막론하고 다시 뭉쳐야 하는 것이지." 용천기는 과연 영웅이라는 소리를 들을만 했다. 그는 조금전의 안타까움 에도 아랑곳 없이 천하의 정세를 얘기하자 금새 강인한 패기와 기상이 살아나서 눈빛이 은은한 푸른 광채를 발했다. 황진의는 그를 바라보며 다 시 말했다. "그럼 그 무림맹의 맹주는 누가 맡고 있나요"용사형도 한 자리 차지 하셨나요?" 용천기는 웃으며 말했다. "맹주는 여전히 소림방장이오. 나는 부맹주의 직위를 맡았고, 그 이외 에는 이전의 정의맹과 같다고 하는데, 이전과는 달리 맹주의 위에 태 상맹주(太上盟主)의 직위가 생겨났소. 그리고 총군사(總軍師)의 직위도 생겨났고." 황진의는 말했다. "그럼 그 태상맹주와 총군사의 직위에는 누가 올랐나요?" 용천기는 말했다. "바로 천륭무가의 가주와 소가주가 앉았소. 천륭무가주는 아직 겉으로 나서지 못했기에 태상맹주가 된 것이고, 그 아들인 석륭안은 무공이 높 기에 그 직위에 올라 아비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오." 황진의는 아직 상기된 안색이 가라앉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랬군요. 헌데 정사무림맹이라면서 강남사세(江南四勢)인 그 들은 참가하지 않는 것인가요?" 용천기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그 사세 중에서 녹림맹과 만화교가 참가의 뜻을 전해왔소. 하지만 아 직 확정된 것은 아니오." 황진의는 그가 녹림맹에 관해서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 흘렀다. 황진의는 다소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듣자니 바로 내일 쯤으로 그들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하더군요. 그에 대한 대비는 잘 되어 있나요?" 용천기는 말했다. "우리는 일단은 천륭무가주의 보호를 염두에 두고 있소. 따라서 이곳 을 사수하기로 결정을 하고, 소림사의 아래쪽에서부터 많은 함정과 매 복진지들을 만들어 놓고 대기하고 있소. 우리는 일단 적들을 유인한 후 에 섬멸할 생각이오. 사문에서는 어떻게 하려는지 알고 있소?"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잠시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끊어졌다. 왠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 는 것 같았다. 이미 화톳불은 완전히 재를 남기고 꺼져 있었다. 그 남 은 불씨를 뒤적이다가 문득 황진의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우리쪽의 승리를 확신하나요?" 용천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으로서는 불투명하오. 그쪽에는 쉽게 말해서 광검의 고수들이 다 섯명이 나있을 것이므로, 만일 천륭무가주가 연공을 마치고 나와서 도 와주지 않는다면 일이 어렵게 되어 있소." 황진의는 말했다. "그럼 그 천륭무가주는 이미 연공의성취가 임박한 것인가요?" 용천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도 같소. 헌데 만일 사문에서 도와준다면 좀더 일이 쉽게 풀릴 텐데?..., 강호의 일에 나서지 않으려고 하시니 나인들 어쩔 수가 없지."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번에도 강호에 나서지는 않으실 거예요." 용천기는 계속 타버린 재를 뒤적거리는 황진의를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그 백공자는 좋은 사람인가?" 황진의는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게 되자 다소 놀란 표정이 되어 웃으 며 대답했다. "그래요. 좋은 사람이죠." 용천기는 말했다. "하기는 나도 그렇게 보았지. 나는 전에 석륭안이야말로 대단한 인물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아까 그 사람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어. 그는 내가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야. 뭔가 알 수 없는 사람이 지." 황진의는 말했다. "뭐가 알 수 없다는 거죠?" 용천기는 말했다. "대개의 사람은 나름대로의 그릇이나 그 능력의 정도가 느껴지게 마련 이지. 그러나 그에게선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어. 능력이 있는듯 하면서도 혹은 무능해 보이고, 그릇이 큰듯 하면서도 종잡을 수가 없 게 하지. 나는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상할 지경이야.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지." "뭐가 분명하다는 말이죠?" 황진의는 용천기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용천기는 그녀를 마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가 최소한 석륭안에 비해서 뒤지지 않는 인물이라는 거야. 사매가 그 런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도 일리가 있는 것이고." 황진의는 순간 안색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녀는 가슴이 심하게 박동하 는 것을 느끼면서 도저히 마주 용천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 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말이세요, 그는 이미 부인이 하나 있는데?" 용천기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야. 그런 영웅호걸에게 부인 하나로는 부족한 법이지. 그야말로 삼처사첩이 흉이 되지 않는다는 거 야." 황진의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예요. 그는 다정하여 부인에게 잘 대해 줄 뿐 나에게는 그저 친구 로서의 우정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죠. 저는... 앞으로 시집을 가지 않 겠어요." 말이 끝나자 황진의는 일순 빠르게 객사 쪽으로 신법을 펼쳐서 달려가 버렸다. 그녀의 신법이 워낙 빨랐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은 이내 어둠속 으로 사라졌다. 용천기는 그런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는 대신 하늘을 우러러 한차례 장탄식을 토한 다음에 허리춤을 뒤적여 하나의 술병을 찾아냈다. 그리고 고개를 젖히고 그 술병속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기개가 남달라 서 술을 마시는 모습도 호방하기 짝이 없었다. 대번에 꿀꺽꿀꺽 하고 한 병의 술을 남김없이 비워버렸다. 그리고 그 빈술병을 아무렇게나 내던지 며 그는 소리쳐 말했다. "아직도 가지 않고 있다면 어서 이리 나와 한 잔 합시다?" 백방생은 아직도 으슥한 곳에 숨어 있었는데 그 얘기를 듣자 순간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랐다. 사실 아까 그가 용천기가 황진의를 안으려고 할 때에 무심코 기척을 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이미 그가 자신을 알아차리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이 용천기는 비단 기개도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판단력이나 지모에도 손색이 없었다. 그 렇지 않았다면 결코 강남의 그 무수한 군웅들이 그의 부하 되기를 자 청하지는 않았었을 것이었다. 확실히 백방생은 이제까지의 광경을 보고 내심 감탄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이 용천기는 실로 강호의 보기 드문 영웅으로서 이전에 보았던 석륭안 등의 사람들과는 매우 달랐다. 백방생이 으슥한 곳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자 용천기는 일순 나직하 게 코웃음을 쳤다. "과연 그대였군?" 백방생은 이미 그가 정신없이 자신을 추켜세웠던 것을 귀가 아프도록 듣고 있었던 터였다. 매우 난처한 기분이 들어서 백방생은 포권하며 말 했다. "이렇게 엿들을 생각은 없었소이다. 본의가 아니었으니 부디 용서해 주 시기 바라오." 백방생은 그가 황진의의 일로 기분이 매우 나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 그가 그 일로 자신에게 화를 낸다면 그것은 곤혹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이 용천기는 호남아였다. 그는 그저 한번 씨익 웃더니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서 백방생에게 내밀었 다. "그렇다면 그 벌로 이거나 마시시오. 만일 마시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 을 테니." 알고보니 그것은 아까와 똑같은 하나의 개봉하지 않은 도자기 술병 이었다. 이어 용천기는 다시 품속에서 또 하나의 술병을 꺼내서 마개를 열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의 그 허리춤에는 여러개의 술병이 달려 있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그는 다시 두 개의 술병을 꺼내서 모조리 단숨에 비워 버렸다. 술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독하고 좋은 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어 용천기는 아직도 서서 멍청하게 바라보는 백방생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자고로 영웅호걸이 서로 친해지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하다고 했소. 강 호의 드문 인재들을 만나는데 어찌 한잔의 술이 없을손가" 그래서 내 석륭안과 만나기 위해 나가서 급히 술을 몇병 사온 것이오. 백공자는 나 의 이런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소?" 이미 이 신성한 대웅전의 앞뜰에는 서너개의 빈 술병들이 버려져서 지저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오히려 그의 앞으로 다가 앉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찌 마음에 들지 않겠소. 나는 용선배야 말로 진정한 강호의 영웅호 걸이라고 보고 있소이다." 용천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미 백형은 무공도 나에 못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선배니 후배니 하시오"그저 용천기라고 불러주시오. 아니면 아우라고 하든지."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우라니 천만의 말씀이오. 그럼 용형이라고 부르지요. 아까 용형의 얘기를 들었소. 헌데 과연 당금의 무림정세가 그토록 위험한 것이오?" 용천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얘기는 지금 하지 맙시다. 나는 본래 천륭무가에서 무림을 구할 사람이 나오리라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지금은 다소 생각이 달라졌소. 지금은 당신과 같은 드러나지 않은 인재가 무림을 구할 것이라고 믿 는 바이오." 용천기는 다시 품속에서 술을 한병 꺼내서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백 방생도 받아든 술병의 마개를 열고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그 술은 과연 귀한 것으로 소위 수십년은 묵은 노주(老酒)였다. 용천기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백형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 밖에는 없 소." 백방생은 말했다. "소생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무림의 일에 나서라는 것입니까?" 용천기는 그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내가 바라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요. 백형이 나의 그 소진사매 와 함께 맺어져서 지금 곧 무림을 잊고 심산유곡에 숨어 버렸으면 하는 것이오." 백방생은 용천기의 그 말에서 어딘가 깊은 우울함을 느꼈다. 그가 그 런 말을 하는 것은 당금의 강호현실이 그 만큼 어렵다는 것을 반증해 주 는 일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나는 이미 무림의 일에 나서기로 하였으니 무슨 심산유곡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오. 게다가 황낭자는 당신만을 그 리워했던 사람인데 함께 맺어지다니 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용천기는 웃으며 말했다. "백형은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군. 나는 거의 한눈에 두 사람의 사이가 이미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소. 이미 보았겠지만 소진사매도 벌써 그런 것을 알았겠지. 한번 가서 확인해 보시오." 백방생은 역시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을 것이오. 그녀가 혹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있을 지 는 모르지만 나는 아닐 것이오." 용천기는 굳이 고집을 부리지 않고 화제를 돌려 다시 말했다. "그녀와 나는 어린시절을 거의 함께 보내다시피 했지. 비록 내가 계속 폐관 수련을 하느라고 별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항상 그 총명하고 아름다 운 꼬마 아가씨는 내 마음속에 있었소. 백형은 내가 왜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은 줄을 아시오" 시간이 없었다고"그런것은 아니오." 백방생은 말을 받았다. "당신도 역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구려?" 용천기는 말했다. "하지만 나와 그녀의 사이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많아서 도저히 그 사랑 을 고백할 수가 없었소. 그런데, 이제야 사랑을 고백하려니 이미 그녀 의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버렸구려. 하지만 나는 그녀가 행복해 지기를 원할 뿐, 그녀를 반드시 소유해야 겠다는 생각은 없소. 아니, 나와 같은 거칠은 사람에게 시집을 온다면 불행해질 테니 차라리 신랑감은 백형 같은 분이 어울릴 것이오." 용천기는 말을 이었다. "나는 그보다는 한가지 기필코 이루려는 염원이 있소. 백형은 그게 무 언지 아시오"그것은 바로 내 뜻에 의해 강호무림을 하나로 일통(一統)하 는 것이오!" 백방생은 그 말을 듣다가 문득 감탄하여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소리쳤다. "정말 영웅의 포부요 영웅의 기상이외다. 정말 감탄했소!" 용천기는 가볍게 웃더니 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며 말을 계속했다. "나는 백형도 이미 아시다시피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소. 그리고 방황 도 좀 했소. 그러나 결국 깨달음은 바로 그런 것이었소. 만일 당금의 천하가 이토록 어지럽지 않았다면 나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르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흔히들 난세는 영웅을 부른다고 하지 않았소?" 용천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를 영웅이라고 말하지 마시오. 내가 만일 영웅이라면 어찌 이렇게 무력하겠소"어찌 나 같은 자를 영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소?" 백방생은 말했다. "그래도 역시 내가 본 중에는 용형이 가장 영웅호걸에 드는 것 같소. 또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니오"누군가 나타나서 이 어려운 난국을 타개 하고 용형의 일을 도와줄지." 용천기는 백방생을 바라 보았다. "백형이 그럴 능력이 있다는 말이오?" 백방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게 무슨 그런 능력이 있겠소. 백년전에 한 무명노인(無名老人)이라 는 사람이 있어서 천하를 다스렸다 하는데, 혹시 그 후예가 나타날 지 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오. 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면 천하는 평 온해질 것이고 용형은 하고자 하는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 아니오?" 용천기는 그 얘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이윽고 들고 있던 술병을 모조리 비운 다음에 그것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어쨌든 백형은 나의 그 소진사매를 찾아가 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둘 이 마음이 맞으면 은거를 생각해 보도록 하고...,자 나는 석륭안을 만나 러 가 봐야 하겠소! 다음에 다시 봅시다." 용천기는 이어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떠날 때도 격식에 구애 되지 않고 호방한 기질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백방생은 용천기가 느닷없이 가 버리자 잠시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황낭자가 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고"그렇다면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인걸?" 마치 용천기의 행동을 흉내내기라도 하듯이 백방생은 곧장 남은 술병을 기울여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리 고 또한 그것을 뜰앞에 던져 버렸다. 이어 길게 트림을 토하며 자신의 객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지 금 무림맹의 사정은 들어서 알게 되었다. 현재로서 태상맹주나 맹주를 만 나는 일은 쉬울 것 같지가 않고, 그러고 보면 나머지 중요인물들은 거 의 만나본 셈이 되었다. 백방생은 문득 당리가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혹시 그 많은 무림인들 속에서 어떤 곤란을 겪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실 진소유를 찾아볼 생각이 있었으나, 용 천기가 그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그만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헌데 백방생이 마악 반쯤 흔들거리는 걸음으로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 을때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그의 미간을 향해 한줄기의 새파란 광채가 소리없이 덮쳐드는 것이었다. 그 새파란 광채는 바로 다름아닌 하나의 비수(匕首)였다. 그것은 지독하게 빨랐으며 또한 정확했다. 만일 백방 생의 무공이 과거와 같았더라면 도저히 그 습격을 피할 수가 없었을 것 이다. 그런데 그 비수가 마악 백방생의 미간을 꿰뚫으려는 찰나, 느닷없이 등뒤에서도 무시무시한 살기가 엄습했다. 어느새 반달모양의 새파란 광채 들이 거의 주위를 뒤덮으며 엄습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51 장 살수와 강호명숙(江湖名宿)들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십분 흉험했다. 아마 당금의 강호인들 중 누 구도 그러한 흉험한 협공을 받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백방생은 또한 뒤 를 이어 십여개의 비수가 그의 전신요혈로 파고들고 있으며 마치 반딧 불처럼 무수한 동전들이 그의 몸을 가득 뒤덮은 것을 알아차렸다. 그 찰나지간의 광경은 마치 밤하늘의 무수한 성좌들이 내려와 앉은 것과 흡사하여 가히 찬란하기 까지 했다. 그 협공은 실로 배합이 절묘 했으며 도무지 피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가 비수를 피하려고 하면 등뒤의 반월형의 칼날들에 당할 것이고, 애써 그것마저 피해낸다고 해도 역시 무수한 동전들은 막아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생각을 굴릴 시간은 없었다. 또한 무서운 것은 마악 좌측에서 달려들고 있는 한 명의 흑의복면인 이었다. 그는 지금 마치 몸을 내던지기라도 하듯이 백방생을 향해 장검 을 떨치며 달려들고 있었는데, 그 검끝에서는 실로 무수한 한성(寒星)이 일어나 백방생의 몸으로 육박해 들고 있었다. 그는 필시 백방생이 약 간의 부상이라도 입기만 하면 결사적으로 그의 몸에 구멍을 내려고 할 것이다. 이 네 사람의 합공. 그것은 그야말로 백방생조차도 놀라 눈이 휘둥그 래질 정도였다. 그들의 공격은 하나같이 기척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극쾌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최상승(最上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었 다. 그런 사람과 하나 상대하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네 사람이 이토록 치밀하게 합공을 하다니"만일 그 공격을 피해낼 수가 있다면 그것은 가 히 기적이라고 불러도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백방생의 무공은 이미 일반인의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었 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기가 일제히 백방생의 몸에 틀어박히는 것을 보았다. 전혀 피할 공간이 없어서 일까"백방생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헌데 그 때였다. 다시 아래쪽에서 하나의 장검이 치솟아 올라 백방생의 하체를 꿰뚫는 것이었다. 그 공격은 실로 느닷없었다. 그 속도는 최소한 이제까지의 것들 보다 열 배는 빠른 것 같았다. 마악 땅속에서 섬광이 일어난 순간 이미 그것은 목표물에 적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때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어찌된 셈인지 백방생은 그대 로 있는데 그의 앞에는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서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네 사람은 격렬한 충격속에서 이미 자신들의 공격이 실패로 돌 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하늘을 뒤덮을듯 하던 어마어마한 공격들 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백방생은 그 흑의복면인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사실 순간적으 로 신법을 전개하여 땅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었다. 미리부터 그는 주 된 공격수가 땅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몸이 꿰뚫린 것 같았지만 그것은 실상이 아니었다. 그의 신법이 너무나도 빨랐 기 때문에 일어난 허상에 불과했다. 그 땅속의 흑의복면인은 스스로 백방생을 찔렀다고 생각했지만 어찌 된셈인지다음순간에는그렇게백방생에게멱살이잡혀서끌려 나오게 된 것이 었다. 앞뒤와 좌측에서 공격해 들어오던 네 명의 다른 흑의복면인들도 이순간 그저 멍한 표정들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대체 누군데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흑의복면인은 이제까지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 얘기를 듣자 크게 정신이 깨어난 듯 소스라치게 놀란 모습을 보였다. 이어 그는 두 눈에서 경악과 의혹, 불신(不信) 등의 광채를 발하다가 일순 아주 가증스 러운 기색을 떠올렸다. 사람이 한순간에 그런 복잡한 표정을 떠올리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어 그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이 입을 움 직였다. 헌데 순간 그의 두 눈이 자색으로 물들어 가며 금방이라도 튀 어나올 듯이 크게 확장되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속으로 놀라서 생각했다. (천마해체대법(天魔紅뙋ц浦이라는게 있다던데 혹시 이것이 아닐까?) 천마해체대법이란 최고의 살수들이 간혹 사용한다는 이른바 폭혈신공 (暴血神功)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가 적을 죽이지 못했을 경 우 최후로 체내의 잠력을 최대한으로 폭발시켜 몸을 터뜨림으로써 상 대와 동패구상을 당하는, 함께 지옥으로 가는 무서운 수법이었다. 백방생 은 말로만 들었던 그런 가증스런 수법이 다시 나타나리라고는 믿을 수 가 없었지만, 놀라는 순간에 이미 무형(無形)의 손속이 가해지고 있었 다. 그의 무공은 이미 천의무봉의 경지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생각한 순 간 상대의 주요 요혈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과연 그 흑의복면인의 부릅떠진 두 눈은 더이상 커지지 않았다. 하지 만 이미 그의 안색은 시커멓게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독(毒)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폭혈공에는 으레 극독을 함께 사용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그 핏물에 그저 스치기만 해도 상대는 그 핏물에 녹아 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흑 의복면인은 이제 오히려 그 독이 체내로 스며들어 그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백방생이 이미 그를 구할 기회는 늦었다. 그는 이미 죽어서 구천으로 떠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본의 아니게 백방생은 이 놀라 운 무림고수를 죽인 셈이 되었다. 황급히 손을 놓자 그 흑의복면인은 쿵, 하고 바닥에 쓰러지더니 이내 지독한 냄새와 함께 육신이 썩어 들 어가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이때 다시 주위에서 쿵쿵, 하고 지면이 울리는 소리를 들어 야 했다. 그것은 주위에 있던 그 네명의 흑의복면인들도 똑같이 극독을 깨물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주위에는 그야말로 시체가 썩 어가는 악독한 냄새로 진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방생은 억지로 그 숨 막힐 듯한 냄새를 참아야만 했다. 우선 이들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 었다. 백방생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일시에 그들 다섯명의 복 면이 벗겨졌다. 그들 대부분은 백방생이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다만 앞쪽 에서 비수와 동전들을 던졌던 두 노인들의 모습은 다소 낯익은 것 같기 도 했다. 백방생은 그들의 무공이 하나같이 최상승의 것들이었음을 상기 하며 내심 생각했다. (이들은 분명히 일반의 무공이 아닌 특수한, 이를테면 고도의 살수무공 을 터득한 사람들이다. 만일 그렇다면, 저 자가 금전방주인 천수인도 막 계이고, 또한 저 자가 비수회(匕首會)의 주인이며 각기 일품당(一品堂)과 삼월파(三月派)의 주인이라면, 결국 저 땅속에서 공격한 자는 흑루(黑 樓)의 주인인 잠마(潛魔)라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가?) 흑루는 당금 최고의 살수조직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만큼 엄청나서 백방생의 그러한 생각은 일순 황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 만 문득 백방생은 이제까지 그를 향해 심심치 않게 전개되었던 온갖 암 격들을 생각해 보았다. (나를 공격했던 자들은 대개가 일품당의 살수들이었고 또한 흑루의 산하였다. 그렇다면 대체 어느 누가 꾸준히 나를 노리고 그와 같은 살수 들을 보냈던 것이었을까?) 나중에 백방생을 땅속에서 습격했던 흑의복면인의 무공은 이미 거의 심검(心劒)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게다가 어딘가 그의 차림새는 중원인이 아닌 동영의 복장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러니 백방생으로 하여금 그가 혹시 흑루의 루주로 알려진 보이지 않은 살인마 잠마가 아 닐까 하는 추측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어이없게도 오늘 밤에 그 무시무시한 강호의 살수집단은 전멸을 당하고 만 것이 아니겠는 가" 백방생은 그들의 품속을 뒤져서 소지품을 검사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극독의 위력이 워낙 강력하여 그럴 여지를 주지 않고 있었다. 칙칙 하게 피어 오르는 검푸른 연기를 조금만 맡아도 이내 중독될 것 같았 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이미 백독불침의 몸이었지만 그것이 두려움까 지 감소시켜 주지는 못했다. 백방생은 궁리끝에 접인공을 사용해 보려 고 했다. 손 하나 대지 않고 그들의 소지품들을 꺼내 놓는 것이었다. 헌 데 그 때 사위에서 촉급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필시 이 괴상한 냄새 를 맡고 경계를 서는 무림인들이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문득 백 방생의 귀에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시끄러운 소음의 소리가 들려왔 다. 백방생은 워낙 그 쪽에 관심이 있고 또한 경계를 서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들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즉시 신형을 날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백방생이 아주 잠깐 사이에 다시 객사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귀찮 은 문제가 점차로 극성스러워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놀라운 습격을 당했었기 때문에 자연 긴장을 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나서지 않고 우선 으슥한 곳에 숨어서 장내를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바로 다름아닌 백방생과 당리 가 묵고 있는 그 방이었다. 이미 방문은 박살이 나서 주위에 흩어져 있었 고 당리는 방안에 서서 대항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옆에는 눈에 익 은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황진의였다. 보아하니 조금전에 당리가 위 급한 꼴을 당하자 황진의가 나타나서 일시적으로 그녀를 구해준 모양 이었다. 당리의 두 눈에는 가증스러운 빛이 가득했고 분노한 기색이 넘 쳐 보였다. 지금 방의 밖에 우르르 몰려와서 당리와 입씨름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은 바로 다름아닌 남궁검상 등의 일행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뒤에는 지금 처음 보는 낯설은 두 명의 백발노인들이 서 있었는데 보기에 매우 범 상치 않았다. 비단 두 눈에서 실날같이 맑고 예리한 광채가 일어날 뿐 만 아니라, 등에 장검을 맨 노인의 눈빛은 오히려 평범해 보였다. 하 지만 백방생은 그 노인의 평범해 보이는 눈빛에서 무서운 무형지기 (無形之氣)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들 일까"자정을 넘긴 시각에 이런 곳에서 소란을 벌이다니 필시 어떤 목적 이 있을 듯 했다. 남궁검상이 원독에 가득찬 표정으로 장검을 손에 뽑아든 상태로 소리치 고 있었다. "당리, 네년이 감히 무림의 규약을 어기고도 살아날 것 같으냐" 어서 너의 아비를 불러 오라는데 웬 잔말이 많으냐"만약 계속 안에서 그 렇게 버티기만 한다면 우리가 들어갈 것이다?" 당리는 싸늘한 한광을 발하면서 마주 소리쳤다. "당신들이 만약 이렇게 계속 무경우하게 나온다면 나도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겠어요?" 당리는 옷차림이 다소 어수선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약간의 낭패 를 당한 모양이었다. 비단 여기저기가 찢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은은히 피까지 내비치는 곳도 있었다. 본래 그녀는 그들에게 별로 대들지 않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핍박을 당한 나머지 화가 난 것 같았다. 손 에 든 검은 채찍은 부르르 작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남궁검상은 음험하게 웃었다. "네년은 저 황소저를 믿고 그러는 것이냐"아니면 그 잘난 서방을 믿고 그러는 것이냐"흐흐흐, 그러나 누구라도 우리 남궁세가의 위엄을 거슬 린다면 좋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지?" 당리는 그 말에 두 눈이 붉어졌다. "너희들은 혹시 이미 우리 상공을 해친 것이 아니냐?" 남궁검상은 살벌하게 장검을 휘두르면서 말했다. "물론 너의 그 백가놈은 이미 황천으로 떠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황소저로는 도저히 우리의 상대가 안 된다. 네년은 어서 순순히 나와서 항복을 받는 것이 어떠냐?" 백방생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그럼 아까의 그 살수들이 저들과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어쩐지 너무도 쉽게 소림사에 잠입해 왔다고 생각했더니 설마...?" 당리는 그 말에 일순 눈물이 핑 돌았으나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강호의 도의는 너희들이 먼저 어겼다. 그리고 나는 이미 상공의 여자 가 된 몸인데 나를 잡아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남궁검상은 음흉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어쨌든 모든일은 우리 증조 할아버님께서 맡아서 처리하실 것이다. 이 제는 네년의 아비가 와서 사정을 한다고 해도 어려울 것이다. 감히 본 가의 명예를 짓밟고도 네년놈들이 편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더라는 말이냐?" 남궁검상은 말을 하면서 뒤의 그 두명의 노인들을 돌아보았는데, 그것 은 은연중 과시의 뜻이 있었다. 헌데 백방생은 그 말을 듣고 다소 놀 랐다. (저 장검을 맨 백발의 노인네가 그의 증조부인 제왕검(帝王劒) 남궁장 산(南宮長山)이라면 바로 무림맹의 삼대 호법중의 하나가 아닌가"그리 고 보아하니 그렇다면 옆의 노인은 제갈세가의 노가주인철금노인(鐵琴 老人) 제갈황(諸葛煌)일것이고..., 흠,과연 그가 작은 악기를 가지고 있기 는 하군.) 그렇다면 지금 남궁검상이 크게 으스댈만 했다. 그의 증조부인 제왕검 남궁장산 뿐만 아니라, 지금 그 옆의 철금노인 제갈황도 현재 무림맹의 오당 중의 하나인 운당(蕓堂)의 당주였기 때문이었다. 황진의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그 두사람 중의 하나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 두 노인들은 마치 방관자처럼 뒤에 서 있었는데 황진의의 거동을 은근히 주 시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들이 대체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 서 잠시 더 사태의 추이를 살펴 보기로 했다. 당리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일순 우수를 저었다. 그러자 느닷없이 그녀의 손에 들린 채찍이 뻣뻣하게 변하여 그녀 자신의 목을 찔러가는 것이 아닌가"황진의는 내 심 주위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미처 당리가 자결을 시도할 줄은 몰 랐다. 비록 그녀는 무공이 높았지만 미처 당리의 자결을 제지할 시간적 인 여유가 없었다. 헌데 그 때 갑자기 당리는 아, 하는 신음과 함께 채찍을 바닥에 떨구었다. 바로 두 백발 노인들 중의 하나가 손을 써서 그녀의 채찍을 떨어뜨리게 한 것이었다. 그 두사람의 무공은 워낙 높았 기 때문에 당리로서는 도무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황진의가 급히 앞을 막아서자, 남궁검상은 바싹 그 앞으로 다가섰다. "흐흐흐, 네 년이 자결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냐" 만약 그 런다면 네년의 시체를 개에게 주어 능욕하게 만들 것이다!" 차마 듣지도 못할 더러운 욕설에 당리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황진의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봐요, 당신들은 말로는 정의 운운하면서도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나 요?" 그 때 백발노인들 중에서 한 사람인 남궁장산이 입을 열어 말했다. "이 일은 우리 가문의 일이니 낭자는 나서지 마시오. 어째서 성수곡에 서 본가의 일에 나서는가?" 황진의는 말했다. "그들은 갑자기 암습을 하여 당낭자를 능욕하려고 했어요. 제가 아니었 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그들의 호위를 맡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예요." 황진의는 평소에 온건하여 결코 그런 정파의 사람들과 다투는 사람 이 아니었다. 백방생은 당리가 남궁검상 등의 암습과 협공을 받아서제압 을 당해 거의 능욕을 당할뻔 했다는사실을 알수 있었다. 다행히 아직은 아무런 일도 없고 제때에 황진의가 나타나서 도와준 모양이었다. 즉 황진 의가 나타나서 그녀를 풀어 주자, 양쪽은 새롭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 인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본좌가 손을 써야만 물러나겠다는 말인가?" 남궁장산은 말과 함께 옆의 제갈황을 돌아보더니 서서히 앞으로 나섰 다. 남궁검상 등은 그것을 보자 즉시 희색이 만면하여 옆으로 비켜섰 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약간 화가 났다. 본래 그는 사건이 커지기 전에 나서서 수습하려고 했으나 이에 생각이 다소 달라졌다. 그는 일부러 남 궁장산이 손을 쓰기를 기다렸다. 남궁장산은 앞으로 나서자 과연 즉시 황진의를 향해 손을 썼다. 장검 도 뽑지 않고 그저 오른 손을 떨쳤을 뿐인데 즉시 우뢰와 같은 무형의 기운이 밀려나갔다. 황진의는 그것을 보자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즉시 반격하려고 했지만 사방이 일시 그 우뢰와 같은 기운으로 가득차 버린 듯한 것이었다. 황진의는 비록 자신이 간신히 몸을 보호할 수 있다고 해 도 뒤의 당리는 책임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 히 이를 악물고 성수곡의 선천공(先天功)을 끌어 올렸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느닷없이 조수처럼 밀려들던 남궁장산의 공격이 씻은 듯이 사라지면서 황진의의 옆에 한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백방생이었다. 백방생이 그렇게 나타나자 역시 가장 놀란 사 람은 남궁장산 등이었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당리 등이었다. "상공!" 당리가 소리치며 달려들자 백방생은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주고는 옆의 황진의를 향해 말했다. "황낭자, 이렇게 도와줘서 고맙소. 그대가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했소." 황진의도 백방생이 일시에 나타나서 그와 같은 무공을 보여주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황진의는 다소 놀라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당리도 그의 품속에서 말했다. "그들은 저를 능욕하려고 했지만, 저는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자결하고 말았었을거예요. 그리고 저는 방금전에 당신이 돌아가신 줄로 알고 따라 죽으려고 했어요." 백방생은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지순한 사랑의 감정을 알고 미 소하며 말했다. "그러나 다시는 자결해서는 아니되오." 당리는 기뻐하며 대답했다. "예, 상공." 백방생은 당리를 옆으로 떼어 놓고 이어 전면을 바라 보았다. 그 남궁 장산등은 다소 의아해하고 경악해하는 표정들이었다. 남궁검상 등이 부 지런히 전음을 펼치는지 입술을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남궁 검상의 전음이 끝났는지 남궁장산이 백방생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바로 요즘 달마하원의 후예를 자처한다는 그 백공자인가?"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그렇소만, 대체 귀하들은 누구시오"어째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의 내자를 해치려는 것이오?" 남궁장산은 이미 자신이 손속을 펼쳤던터라 말이 궁해지고말았다. 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의 수법을 해소시킨 것은 가히 경악할 만 한 노릇이었다. 그는 도저히 당금의 무림에 그런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 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을 보고 옆의 그 제갈황이 나서서 말했다. "우리는 바로 이 아이들의 집안어른들일세. 헌데 자네의 그 무공은 생 소해 보이는데 어디에서 온 것인가?" 백방생은 그 제갈황의 눈빛이 매우 심기가 깊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그가 고의로 화제를 돌리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나의 무공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당신의 견문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 이오. 그보다 나와 내자는 이미 장인어른께도 인정을 받은 터인데, 어째 서 나이 많은 분들이 나서서 나의 내자를 능욕하려는 것이오" 거기에 무 슨 합당한 이유라도 있소?" 제갈황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 상대가 녹녹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대의 부인을 능욕하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우리는 다만 집안일을 좋 게 해결하려는데 외부인이 나서서 그만 손을 쓰게 된 것일세."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당신들은 나의 내자와 어떤 일을 해결하려고 했소"필시 그 일은 나와도 관계가 있겠구려?" 남궁장산이 말했다. "본래 우리는 너희들이 고의로 죄를 범한 줄로 알았다. 그러나 이 일을 사천당문에서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선 그쪽에 가서 따져야 겠다." 말과 함께 남궁장산은 슬그머니 제갈황과 함께 자리를 떠나려고 했 다. 백방생은 그러나 어느새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아까 사 람들은 미처 백방생의 무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펼쳐진 그 귀 신같은 신법을 보고는 저마다 놀라서 안색이 변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에 있겠소"당신들은 나의 내자를 저렇게 만들었으니 우선 따지러 가기 전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소?" 남궁장산은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무슨 책임을 지라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여인의 정조는 생명과도 같은 것, 당신들은 나의 내자를 그렇게 괴롭혔으니 목숨이라도 바쳐야 하지 않겠소?" 제갈황은 이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자네에게 미처 말해주지 않았군. 우리는 바로 무림맹의 호법과 당주의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일세. 그런데도 자네가 꼭 이렇게 나와야 하 겠는가?" 백방생은 미소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설령 무림맹의 맹주라고 해도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할 것이오. 하물며 당신들은 힘없이 나약한 어린 여자를 괴롭히도록 방조했으니 어 찌 그냥 둘 수가 있겠소?" 문득 남궁검상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나서서 소리쳤다. "우리는 너의 여자에게 아직 손끝하나 대지 않았다. 우리가 미처 그녀 를 제압하기도 전에 황낭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역시 너희들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으면 될 게 아니 냐?" 말이 끝나는 순간에 갑자기 남궁검상의 신형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 다. 그는 마치 재주를 넘듯이 허공에서 여러차례나 맴돌았는데 다시 자 리에 내려섰을 때에는 안색이 시뻘겋게 변하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 었다. 바로 백방생이 순식간에 무형지기를 발산하여 남궁검상의 단전을 파괴하고 무공을 폐지시킨 것이었다. 남궁검상은 게다가 심한 내상까지 입어서 입으로 왈칵 피를 토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이어 두 노인에게 말 했다. "이제는 당신들의 차례가 아니오?" 그 두 노인은 이미 강호에서 호랑이 같은 명성을 날려온 인물들로 그리 녹녹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딜?" 백방생의 말에, 그들은 즉시 장검과 칠현금을 휘두르며 날벼락같이 공 격해 들어왔다. 일시에 수천개의 장검이 장내를 뒤덮는듯 하고 칠현금 의 기세가 파도처럼 일렁이는듯 했다. 그 두사람의 합공은 가공스러워 서 일시 그것을 바라보던 당리도 아, 하고 놀란 외침을 발했다. 백방생의 신형은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는 그의 육신이 천조각 만조각으로 갈라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상하게 도 그런 공세가 씻은 듯이 사라진 순간 백방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반면에 그 두 노인은 그저 멍청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게다가 갑자기 괴이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홀연 두 노인의 안 색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빛을 잃고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허리가 굽어지며 피부가 쭈글쭈글하게 늙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백방생이 그들의 무공을 폐쇄하고 혈도를 제압해 버렸기 때 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팔 구십여세의 고령인데다 여태 높은 내공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제 그 내공이 사라지자 그토록 급격하게 늙어 버리는 것은 당연했다. 백방생은 이어 빠르게 손을 썼다. 그는 한번 바라보는 사이에 이미 남궁 지약과 황보헌, 황보능파, 팽씨형제 등의 혈도를 제압하고 무공을 폐쇄시 켜 버렸다. 잠시 장내에는 경악과 공포의 분위기가 흘렀다. 백방생은 이 어 그 두 노인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이 만일 후손들을 생각한다면 필시 내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오." 두 노인은 기운을 잃어서 이미 두 눈에 촛점을 잃고 있었다. 너무나도 무력하게 당했기 때문인지 그저 눈빛이 허망해 보였다. 두 사람 중에서 그래도 나이가 적은 제갈황이 다소 상태가 나았는데, 그는 한숨을 내쉬 며 말했다. "무슨 말이냐?" 백방생이 말했다. "나는 조금전에 웬 낯선 사람들에게서 습격을 받았었소. 그런데 들어 보 니 당신들과 연관이 있는 것 같구려. 대체 당신들은 흑루와 무슨 관계가 있소?" 제갈황은 이내 아까 남궁검상이 한말을 두고 그가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흑루는 우리와는 앙숙인데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사실 우리는 그대의 부인이 남궁세가의 비위를 거슬렸다는 말을 듣고 조사해 보려고 했던 것이네. 그 동안의 얘기는 저 아이가 아무렇게나 지껄인 것일 뿐 사실과 는 무관하네." 백방생은 내심 의혹이 앞섰지만 그러나 증거가 없었으므로 더 이상 추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문제를 거론했다. "그래 조사를 해보려는 사람들이 일개 여자를 능욕하도록 방조했다는 말이오?" 제갈황은 웃으며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네. 본래 엄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는 다고 했지. 하지만 역시 강호는 힘이 지배를 하는 것이네. 우리가 잘 못을 했고, 또한 자네에게 당할 수가 없으니 할 말이 없지. 하지만 아 직 자네의 부인은 능욕을 당하지도 않았고 무사하니 걱정하지 말게."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만일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될뻔 하지 않았소?" 남궁장산이 숨을 거칠게 몰아 쉬다가 두 눈에 원독의 광망을 발하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테냐" 내가 어이없게도 너와 같은 애숭이에게 당할 것 같으냐?"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서서히 우수를 내밀었다. "나는 제법 많은 수법들을 알고 있소. 당신은 애숭이라고 하지만, 어디 지금 그 애숭이의 맛을 한번 보시겠소?" 백방생의 말은 시종일관 온건했고 그의 안색은 부드러워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득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장내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나며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무량수불, 백시주 이제 그만 하시게"우리들이 이미 모든 것을 보았으 니 더 이상 나설 것이 없네." 백방생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들은 무당장문인 옥양진인과 무림 맹주인 도액방장, 그리고 남은 두 명의 호법들과 사당주, 그 외의 장 로들이었다. 나타나면서 소리친 사람은 무당장문인이었는데, 그는 이미 이전에 백방생과 만난 적이 있었다. 사실 백방생은 벌써부터 그들이 주위에 나타나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궁장산과 제갈황은 무공이 상실되어 미처 그것을 느끼지 못했고 백방생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스스로 죄를 실토하게 만든 것이었다. 과연 군웅들이 나타나자 남궁장산과 제 갈황의 안색은 시커멓게 변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혀를 깨물어 자결할 능력도 없었다. 지당의 당주인 파천신검(破天神劒) 남궁건원(南宮乾元) 등이 달려가 보살피며 혈도를 풀어 주려고 했으나 도저히 어떻게 제압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리의 우두머리격인 도액방장이 불호와 함께 나서서 말 했다. "백시주, 우리는 구면이구려?" 백방생은 그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소생은 일찍이 이 소림사에서 은덕을 입었었지요." 도액방장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미 백시주가 금전적으로 우리 맹(盟)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것 을 알고있소. 그러므로 이번에도 여러분들을 위해 그만 손을 거두어 주 지 않겠소?"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방장대사의 말씀이니 의당 소생은 따라야 하겠지요. 하지만 저들의 폐 지된 무공은 되돌릴 수가 없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옥양진인이 도호를 외우며 말했다. "무량수불, 그 점은 우리도 알고 있으니 심려하지 마시오." 확실히 무림맹의 내부에도 팔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사이에는 어딘가 경쟁의식이 존재하고 있는것 같았다. 오대세가의 최고거물이라고 할 수가 있는 남궁장산이 그렇게 당하고 말았는데도 옥양진인 등은 전혀 언짢은표정이 아닌 것이다. 백방생은 새삼스럽게 그에게 정중히 포권의 인사를 올린 다음에 슬쩍 우수를 휘저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제까지 전혀 움직이지 못했던 사람들 이 일제히 움직이고 쓰러지며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 이었다. "아이쿠, 이 더러운 자식!" "아버님!" 사천당문을 제외한 오대세가의 모든 가문들이 이 일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모두 소란스럽게 움직이자 장내는 갑자기 크게 어수선하 게 변했다. 아직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남궁지약 등은 여전히 백방생 을 욕하고 있었고 남궁장산은 노화가 치밀고 쇠락하여 기절했으며,다만 가장 차분한 사람은 제갈황이었다.그는 자신을 부축하는 아들에게 탄식 하며 말했다. "천려일실이라, 모든 일에 용의주도하다가 이런 한번의 실수로 모든 것 을 다 잃다니 무슨 꼴이냐. 어서 그만 가자!" 사람들은 더러는 원독의 눈길로 백방생을 쳐다보고 더러는 눈물을 흘리며 각기 부상자들을 데리고 사라져 갔다. 백방생은 그런 것을 보고 서도 그저 담담한 기색이었다. 그는 곧장 황진의와 당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 가려고 했다. 그 때, 문득 옥양진인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자네 잠깐 우리와 얘기를 나누지 않겠는가?" 백방생은 아직 대다수의 군웅들이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실재로 이 무림맹의 주축들인 것이었다. 백방생이 황진의와 당리를 다시 바라보자 옥양진인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녀들은 우리가 안전하게 보호해 주겠네. 그리고 설사 우리가 보호 하지 않더라도 앞으로는 누구도 그녀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네." 백방생은 이에 가볍게 웃으며 옥양진인에게 말했다. "예. 소생이 어찌 감히 응하지 않겠습니까?" 백방생이 도액방장과 옥양진인 등의 뒤를 따라가자 이윽고 도달한 곳은 소림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고 있는 이른바 방장실(方丈室) 이었다. 도액방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좌정하고 나자 이윽고 다시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백방생이 보기에 그들은 모두 낯설 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수인사를 나누는 과정에서 대강 그들의 신 분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바로 그들은 이른바 강호에서 정사중간의 문 파로 통하는 세력들의 수장들이었다. 저번에 정의맹에는 참여하지 않았 으나 이번 무림맹에는 참가하여 중원무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천산검문(天山劒門)의 노문주인 소요노인(逍遙老 人) 을지천록(乙遲天祿)과 무산신녀문(巫山神女門)의 노문주인 무산신모 (巫山神母) 이인화(李燐花), 그리고 해남검파(海南劒派)의 장문인인 천환 검노(天幻劒老) 주술계, 청해파(靑海派)의 장문인인 청해일수(靑海一搜) 도해(圖海), 공공문(空空門)의 노문주인 대치도인(大痴道人) 손삼통(孫 三通)과 대막백타궁(大漠白駝宮)의 노궁주인 신타옹(神駝翁) 단목원(端 木元)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 백방생은 저번에 신창(神槍)의 쟁탈전에서 신분은 잘 몰랐지만 대치도인 손삼통이나 청해일수 도해, 그리고 신타 옹 단목원 등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신창이 석륭안의 일행에게 돌아가 서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들은 모두 상처없이 멀쩡한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본래 강호의 흑백양도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며 오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여 오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번에 세외오세가 중원을 정벌하면 자신들도 위태로울 것이므로 이렇게 나서게 된 것이었다. 42 장 사랑과 공포(恐佈) 그야말로 방안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고희를 넘은 강호의 유명 한 수뇌급의 명숙들이었다. 백방생은 거의 유일하게 젊은 사람으로서 그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백방생은 은근히 젊은 축에 속하는 지공을 찾 았으나 지공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도액방장은 여러 사람들 이 좌정했으나 쉽게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 들도 마찬가지 였다. 백방생은 혹시 이들이 다른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시중을 드는 사미승들이 다시 일단의 사람들을 데려왔는데 그들은 매우 낯익었다. 바로 다름아닌 석륭안 등의 천상회 의 인물들과 아까 보았던 용천기 였다. 백방생은 방안에 젊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서자 매우 마음이 기뻤다. 게다가 아름다운 진소유의 모습 도 보게 되었으므로 그의 가슴은 조금씩 뛰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러한 모든 사람들이 가득하게 자리하고 나자 도액방장이 낮은 불호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여 주셔서 감사하오. 본래는 좀 더 많은 분들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잠시 부득이한 사정이 생기는 바 람에 그들은 오지 못하게 되었소." 백방생은 소림방장이 말하는 얘기가 바로 자신과 오대세가의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가슴이 다소 뜨끔했으나 이내 내색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열리는 이 회의는 아 마도 내일의 결전을 대비하기 위한 중요한 회합인 모양이었다. 모두들 표정들이 엄숙하고 긴장되어 있었다. 도액방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재차 모인 것은 마지막으로 내일의 결전에 대 비하기 위한 것이오. 여기에 대해서 다른 의견이 계신 분은 즉시 기탄없 는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라오." 문득 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바로 구십이 가까운 나이의 천산검문의 노문주인 소요노인 을지천록이었다. "노부가 알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요. 이미 태상맹주로 추대되신 천륭무가의 가주께서 내일 정말로 출관(出關)하실 수가 있느냐는 것이 오." 도액방장은 말했다. "그 문제는 노승으로서는 잘 알 수가 없고, 저기 우리의 총군사(總軍 師)께서 말씀해 주실 것이오." 백방생도 이미 석륭안이 총군사의 직위에 올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과연 석륭안은 즉시 좌중을 향해 입을 여는 것이었다. "여러분, 나는 이미 오늘 오후에도 연공중인 아버님을 뵈었었습니다. 거기에서 아버님은 말씀하셨지요. 내일 격전에는 필히 참가할 것이라 고! 그러니 여러분은 그 점에 있어서는 불초를 믿어 주시기 바랍니 다." 확실히 천륭무가의 존재는 강호상에서 지대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 다. 게다가 이번의 격전은 바로 그 천륭무가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 겠는가"석륭안의 말에 다소 안도의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문득 해남검파의 노장문인인 천환검노 주술계(朱術桂)가 말했다. "하지만 싸움은 결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외다. 독불장군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이까" 그래서 노부는 이번 기회에 녹림맹(綠林盟)과 만화교(萬 花敎)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보고 있소이다. 여기에 대해서 방장대사의 말씀을 바라오." 정사중간의 사람들은 사실 한 사람도 무림맹에서의 요직을 차지하지 못했다. 즉 그들이 이번의 싸움에 참가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며, 그 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무림맹의 소속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 다. 도액방장에 대해서도 그들은 맹주라고 하지 않고 그저 방장대사라고 만 부르고 있었다. 한 사람이 웅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바로 두 호법 가운데의 하나 인 무당파의 원로(元老) 자허진인(紫虛眞人)이었다. "녹림맹과 만화교는 본맹(本盟)에 포함시킬 수가 없소이다." 주술계는 약간 화가 난 듯 소리쳤다. "아니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이오"그럼 중원무림이 이대로 절단나도록 가만히 있자는 말씀이오"차라리 우리들도 내쫓으시지 그러셨소?" 무당장문인 옥양진인보다도 배분이 오히려 높은 자허진인은 그 말에 잠시 노하여 안색이 붉어졌으나 이내 다시 말했다. "녹림맹과 만화교가 중원무림을 위해서 노력을 다하는 것은 상관이 없겠으나 그렇다고 모든 것을 허용할 수는 없는 법이외다. 솔직히 노도 등은 아직도 그들을 믿을 수가 없소." 대막백타궁의 노궁주 신타옹 단목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얘기를 우리의 부맹주께서 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소?" 부맹주는 바로 용천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방생은 그가 이름 만 거창할 뿐 실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저 철혈부의 전주인 으로서 그를 대우해 주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가 만일 실권을 가지려 면 그 역시 나름대로의 수하에 세력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용천기는 자 신이 지목을 받자 뜸을 들이지 않고 곧장 말했다. "나는 이미 그들과의 인연을 끊은 사람으로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소이다. 역시 맹주의 의견대로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단목원은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이 부맹주를 위해서 나서고 있는데도 말이오?" 용천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나이고 사내대장부로서 남에게 의존하지 않소. 비록 그들이 나 를 핑계삼아 무슨 일을 저지른다고해도 그것은 그들의 일일뿐이며 나 와는 상관이 없소. 그러니 여러분들도 그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고 바 랄 뿐입니다." 대치도인 손삼통이 말했다. "지금의 문제는 그런 체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중원을 지켜내느냐 하는 것이 아니오"게다가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소이다. 모두들 자신들의 명성은 소중하고 중원무림의 존망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오?" 같은 팔파일방의 사람들 간에는 서로 이미 의견조정이 되어 있을 것 이다. 따라서 의견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히 정사중간의 문파들과의 사이에서였다. 화산이로(華山二老)의 하나인 성질급한 담청(譚靑)이 크게 분개하여 소 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오"누가 중원무림의 안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했소"대 체 당신들은 가만히 나둬도 될 일을 여기 와서 따지는 이유가 뭐요?" 주술계가 말했다. "이 일은 방장대사와도 관련이 있소. 만일 당신들이 정말로 그렇게 깨 끗한 것만을 고집한다면 필시 이 일을 해명해야 할 것이오. 그 만화교 는 사실 저 부맹주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오. 이 점을 해명해 주시겠소?" 도액방장은 안색이 다소 붉어졌으며 은근히 석륭안쪽을 바라보았다. 석 륭안은 그저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더욱 딱딱해 지는 것 같았다. 두 호법의 하나이자 개방의 태상장로(太上長老)인 개왕 금일붕(金一鵬) 이 소리쳐 말했다. "정말 갈수록 형편없는 사람들이로군"정말 그렇게 계속 트집을 잡을 작정이면 모두 떠나시오! 우리가 정말 사람들이 없어서 당신들을 잡고 있는 줄로 아시오?" 개왕 금일붕의 말은 다소 거칠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 말에 정사중간의 사람들은 다소 뜨끔한 모습들이었다. 사실 그들은 평소에는 무림의 일에 상관하지 않다가 이제 스스로 아쉬우니까 찾아온 것이었던 것이다. 강 호의 최고 원로들 중의 하나인 금일붕이 그렇게 말하자 너무하다고 말 하는 사람도 없었다. 좌중의 분위기가 다소 어색하고 냉랭해 지자 무당장문인 옥양진인이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지금 이 자리는 그렇게 탁상공론만 벌일 때가 아니외다. 그 러니 우선 실질적인 일을 논의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청성파의 장문인 백초선옹(百草仙翁) 길군평(吉君平)이 말했다. "당금의 상황은 많은 숫자 보다는 정작 최고의 고수들이 필요한 싯점 이오. 그래 소림삼신승(少林三神僧)께서는정말내일출전하시는 것입니 까?" 도액방장은 불호와 함께 말했다. "그 일은 이미 노승이 의논을 드렸습니다. 필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 입니다." 옥양진인이 다시 말했다. "조금전에 흑루의 고수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신이 이곳의 내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소지품들이 없어서 신원을 밝혀내지는 못했 지만 이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잠시전에는 오대세가에 서 오신 분들이 볼일이 있어서 미처 이곳에 참석하지못했습니다. 상황 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데 우리는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하지 못했지 요. 무량수불,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좋은 의견을 바랍니다." 무산신모 이인화가 가볍게 냉소하며 말했다. "장문인께서는 혹시 이미 그럴듯한 의견이라도 있으신 것이 아닙니 까?" 옥양진인은 말했다. "사실 그분들이 다른 곳으로 가신 것은 아닙니다. 사태가 해결되면 역시 내일의 격전에 임하게 되실 것입니다. 게다가 만일 누군가에 의해 정말 로 흑루가 멸망된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반가운 일이고 말입니다. 말하 자면 우리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되 어쩔 수 없이 한마음으로 뭉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 이 순간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한 사람 이 있습니다." 옥양진인은 이어 백방생을 가리켰다. 마침 정사중간의 고수들은 백방생 을 눈여겨 보고 있었던 참이라 즉시 그를 향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옥 양진인은 말했다. "그는 바로 이전의 달마하원의 주지였던 홍엽선사(紅葉禪師)의 출가하 기 전의 아들로서, 또한 얼마전에 우리 정의맹에 거액의 군자금을 기부 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제 급성장한 무림의 재목이니 여러분의 많은 관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본래 백방생은 홍엽선사가 출가한 이후에 난 자식이었지만 옥양진인은 일부러 그렇게 말해준 것이었다. 이미 구파일방쪽의 사람들은 아까 백방 생의 능력을 목격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정사중간의 고수들은 웬 애숭 이를 그렇게 칭찬하는 가 하는 듯한 뜨악한 눈초리들을 하고서 바라보 고 있었다. 백방생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두루 포권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백방생이 여러분들께 인사 올립니다. 후진말학(後進末學)이오니 앞으 로 여러 선배고인들의 질책과 가르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문득 주술계가 말했다. "내 조금전에 들은 바가 있소. 그가 바로 남궁노가주와 제갈노가주를 굴 복시켰다는 바로 그 사람이오?" 옥양진인은 웃으며 말했다. "무량수불, 그렇소이다. 그 일은 서로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니 따질 것은 없고, 어쨌든 이런 사람이 본맹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따라서 노도는 그에게도 일종의 직책을 마련해 주었으 면 하는 생각입니다." 주술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눈치였으나 나머지 정사중간의 고수 들은 별로 반응이 없었다. 사실 그들 자신도 무슨 무림맹에서의 정식 직위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개방의 현임방주이자 금일붕의 아들인 백결개 금부(金浮)가 입을 열어 백방생에게 말했다. 그 사람은 현재 풍당(風堂)의 당주로 있어서 강 호의 모든 정보에 밝은 편이었다. "백공자는 비교적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또한 이미 멸문당한 달마하 원 등의 복수를 위해 노력한다고 들었소이다. 성수곡의 소군주와 친한 일, 그리고 오대세가의 사람들과의 반목,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젖혀두 고 우선 현재의 강호 상황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보시지 않겠소?" 백방생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그 말에 대답했다. "당금의 강호가 어지럽고 또한 그 세외오세(世外五勢)가 막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원무림의 존망에 대해서 위기의식을 가지 고 있지요. 하지만 본래 중원(中原)은 천하 무학의 본산(本山)으로서, 결코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미파의 장문인인 관심사태(觀心師太)가 불호와 함께 말했다. "아미타불, 그렇다면 시주께서는 혹시 다른 고견이라도 있으시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저에게 무슨 다른 계책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정의(正義)로써 불의 를 응징하고,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적들을 상대한다면 적 들을 물리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백방생은 사실 스스로 이미 무학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아 직 그러한 것을 내세울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되는 대로 그럴 듯하 게 대답한 것이었다. 기실 사람들은 이 젊은 서생에게 무슨 특별한 계 책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백방생의 대답이 그렇게 너무도 평범하자 그만 다소 실망에 빠지고 말았다. 따라서 갑자기 집중되었던 좌 중의 관심도 서서히 줄어 들었다. 아까부터 백방생에게 어떤 직책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던 옥양진인도 좌중의 시선이 그러하자 슬그머니 그 제의를 거두고 말았다. 사람들은 다시 무림맹의 체제에 관해서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백방 생의 직책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더러 세외오세와 공동파 등에 관해서 말을 하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백방생의 관심도 줄어들 게 되었다. 사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바로 백 방생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므로 백방 생도 구태여 그들에게 알아달라고 말하기도 어려워 졌다. 그때 갑자기 진소유가 소피를 보려는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홀로 밖으로 나갔다. 백방생은 은근히 그쪽을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그것 을 보자 이내 자신도 역시 뒷간으로 가는척 하며 슬그머니 그 뒤를 따 라 나갔다. 진소유는 소피를 보려고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방장실의 앞에는 제법 널찍한 연못이 있었는데 그 물은 이미 얼음이 얼어 있었다. 진소유 는 그 얼어붙은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나 주위가 어두워서 그 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알기 어려웠다. 백방생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진소유는 그가 다가간 것 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가만히 서 있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소유, 무슨 근심이라도 있소?" 진소유는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나에게 그런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안색은 다소 초췌해 보였고 또한 시선도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백방생은 문득 울컥하는 심사에 화가 나서 소리쳤다. "나는 당신의 말을 따를 수가 없소"당신을 남과 혼인하게 할 수는 없 소?" 진소유는 가볍게 웃었다. "당신은 어린아이와 같군요. 나에게 지금 떼를 쓸 참인가요?" 그 때 백방생의 고함소리에 놀랐는지 방장실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자 즉시 주저하지 않고 진소유 를 안아들고 훌쩍 신형을 날렸다. 백방생의 경신술은 너무나도 빨랐다. 다른 사람들이 추격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진소유도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이미 두 사람은 소림사를 벗어나서 깊은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백방생은 이윽고 눈앞에 작은 동굴이 보이자 그 안으로 들어갔다. 실 상 그는 이미 무공이 높아서 어둠도 대낮처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 을 지니고 있었다. 그 안은 천연의 동굴이었는데 바닥이 평평했고 또 한 습기도 별로 없어 축축하지 않았다. 백방생은 무공을 마음대로 사용했 다. 그는 가볍게 한 수 한 수를 펼쳐서 근처의 마른 갈잎들을 옮겨와서 동굴의 내부에 가득하게 깔았고 진소유를 그 위에 앉혔다. 진소유는 처 음에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이윽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백방생은 이어 그녀의 앞에 마주 앉으며 말했다. "소유, 나는 지금 곧 당신과 부부가 될 생각이오." 그리고 뜨겁게 그녀의 손을 잡았으나 왠지 그녀는 담담했다. 진소유는 그에게 손을 잡힌 채로 말했다. "당신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후회?) 그것은 전에 석채릉이 말했던 것이기도 했다. 백방생은 과연 그 천상 회의 사람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백방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들을 두려워 하지 않소." 진소유는 조용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의 그녀의 시선은 아까보다는 훨씬 따뜻해 보였다. 너무나도 황량해서 백방생으로 하여금 격동하게 만들던 그런 시선이 아니었다. 백방생은 그 시선을 대 하자 마치 자신이 어떤 황홀한 광채속에 뒤덮이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 다. "내가 말하는 것은 천륭무가주나 석륭안이 아니예요." 진소유의 말은 차분했지만 그러나 그녀의 말속에 담긴 뜻은 결코 조용 한 것이 아니었다. 백방생은 놀라서 말했다. "그럼 정말로 그들의 뒤에 어떤 다른 사람들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문득 쓸쓸하게 웃었다. "당신의 무공이 대단히 높아졌다는 것은 알아요. 저는 그런 것을 기대 했었죠. 하지만, 그들이 당신을 살해하지 못한 것은 정말로 능력이 없 어서 인줄 아나요?" 진소유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가 백방생의 가슴을 뒤집고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놀라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흑루에 나를 살해하라고 사주한 것은 바로 그들이 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저도 얼마전까지는 그저 추측만 하고 있었을 뿐이예요. 하지만 그들은 이제 곧 모습을 드러내게 될 거예요.당신은...내가 왜 그들과 함께 있었는 지 알겠나요?" 백방생은 조금 전에는 욕정이 치밀었었지만 이제는 머리끝이 뻣뻣해 지며 뜨끈뜨끈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일순 격분하여 전신이 터져나 갈 것 같았다. "그러니까 복수를 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하지만 저는 자신이 없고 또한 너무나도 무능력해요. 그들은 바로 당신의 부모님도 간단하게 제거한 사람들이죠. 저 혼자서는 도저히 당 할수가 없어요. 저는 그래서 사실 당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죠. 만일 당신이 저를 사랑한다면, 더욱 무공을 닦아서 저의 복수를 해 주세 요." 진소유의 말은 온건해 보였고 눈빛도 그저 조용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백방생의 눈에서 왠지 눈물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만일 그자의 아기를 가지게 된다면, 아니 혼인만 한다고 해도 문제가 복잡해 지지 않겠소?" 진소유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에 와서는 오직 그 방법밖에는 없어요. 우리는 결코 작은 것에 연 연할 수가 없어요." 백방생은 안면을 일그러 뜨리며 말했다. "우리 그러지 말고 이대로 달아납시다. 이제는 나의 무공도 웬만하여 능 히 숨어살 수도 있을 것이오. 만일 우리가 혼인을 하여 아들 딸 낳고 잘 살게 되면, 복수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지 않겠소?"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제 그들은 당신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결코 그들의 손아귀 를 벗어날 수는 없어요. 설령 당신의 능력이 돌아가신 아버님보다 높 다고 할지라도...그들을 당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때문에 그 들의 공격을 받게 될 거예요. 그들은, 결코 보통의 사람들이 아니예요." 백방생은 문득 과거 언젠가 보았던 그 이상한 사공노인등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정말로 이 땅에 무서운 신선(神仙)들이라도 나타나려는 것일까?"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그들에게 당하게 될 것이라면 어차피 우리가 함께 살다가 죽는 것이 나을 것이오."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사실 당신에 대해서 지금 많은 기대를 걸고 있어요. 왠지 오직 당신만이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예요. 만일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그들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사문(師門)의 은덕에 보답하고 불은에 보답하는 길이 될 거예요. 저는 이 가능성을 놓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진소유의 말은, 그녀가 혼인을 하여 시간을 버는 동안에 백방 생으로하여금 복수할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마음이 괴로와 져서 소리쳤다.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소. 나는 영웅(英雄)이 아니므로 평범하게 살아 가겠소. 만일 이 무공이 그들에게 거슬린다면 즉시 제거해 버리면 될 것 이 아니오?" 진소유는 눈빛을 다소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당신이 어떤 길을 택하든 그건 당신의 자유예요. 당신이 만일 지금 나를 소유하려고 해도 나는 반항하지 않겠어요. 당신의 뜻대로 하세 요. 당신이 원한다면 저도 기꺼이 따르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앞으 로 이 세상을 구할 사람이 있다면, 그 영웅은 오직 당신뿐이라는 거 예요. 당신은 사실 아주 훌륭하고 좋으신 분이니까요." 백방생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전신이 덜덜 떨려왔다. 너무나도 마음의 갈등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금 그의 눈앞에 있고 또한 자리도 마련되어 있고 게다가 기꺼이 몸을 바치겠다고 하지 않는가" (제기랄, 내가 원한다면... 내가 원한다면, 그 말은 곧 나더러 하지 말 라는 말과 뭐가 다르겠는가?) 백방생은 금방이라도 그녀의 몸을 힘껏 껴안고 그녀의 몸을 완전히 소 유해 버리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난초의 향기는 이순 간 그의 가슴속에 욕정을 불을 지를만 했다. 그의 두 손은 어느새 그녀의 어깨를 힘껏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잊고 짐승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기실 짐승이 아닌 사람이 었다. 이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진소유 의 눈빛은 너무나도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 이 기회를 놓치면 나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나는 결코 그녀를 보낼 수가 없어!) 백방생의 생각은 갈수록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는 한순간 격렬한 갈등 을 일으키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진소유에게 덮쳐들었다. 그는 모든 갈 등을 정리하고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그는 힘차게 그녀의 입술을 찍어 눌렀다. 헌데 그 때였다. 그의 입안에 찝찌름한 액체가 스며들었다. 그것은 바로 진소 유의 눈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전히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백방생은 일순 멍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진소유의 두눈에서는 마치 무한한 사랑과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이어 몸을 돌려서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진소유는 몸을 일으키고 옷차림을 단정히 했다. 그리고 문득 전음으로 말했다. (당신, 정말 잘 생각했어요.) 문득 백방생은 동굴의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 다. 그는 다름아닌 석륭안이었다. 백방생이 밖으로 나오자 석륭안은 음 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감히 내 정혼녀를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백방생은 당장이라도 그의 따귀를 후려치고 싶은 강한 분노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문득 훌쩍 말없이 신형을 날리고 말았다. 그의 신형은 이윽고 아득한 암천(暗天)을 날아서 소림사로 돌아갔다. 백방생이 다시 객방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거의 인시경이 다 되어 있었 다. 황진의의 객방에서 당리와 황진의는 거의 밤을 지새며 뭔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백방생은 진소유 때문에 여기저기를 방황한 일 에 대해서 문득 당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실 그녀는 이미 백 방생의 아내인 것이다. 백방생은 이제부터 그녀를 위해서라도 진소유는 잊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는 훌쩍 방안으로 들어갔다. 황진의와 당리는 갑자기 그가 나타나자 약간 놀라면서도 그러나 당황 해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당리가 웃으며 말했다. "회의가 이미 끝났다는데 당신이 오시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회의는 유익한 것이었나요?" 백방생은 일부러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 주며 말했다. "회의는 그저 그랬소. 헌데 내가 너무 늦어서 무섭지 않았소?" 당리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황언니가 계속 이곳에서 저의 말벗이 되어 주셔서 무섭지 않았어 요." 백방생은 문득 아까의 일도 사례하지 않은것을 알고 즉시 황진의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황낭자, 이렇게 늘상 우리 두사람을 보살펴 주시니 고맙기 이를데가 없소이다." 황진의는 다소 어색하게 웃으며 마주 답했다. "천만의 말씀이예요. 저는 다만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예요. 저는 본래가 당신의 호법이 아닌가요?" 당리가 나서서 말했다. "아이, 두 분은 무슨 인사를 그렇게 재미없게 나누지요"모두 한 집안 사람들이나 다름이 없는데 말이예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소. 황낭자에게는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소"나는 늘상 그저 황낭자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 오." 당리는 거의 울상이 되어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갑자기 그렇게 달라지시면 제가 곤란하잖 아요. 마치 제가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상공, 저를 위해서 이전처럼 지내주실 수가 없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바로 황낭자를 위한 것이오. 만일 잘못하여 황낭자의 그 분이 오해라도 한다면 정말로 면목이 없게 되는 일이 아 니겠소?" 당리는 그 말에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는 듯이 황진의를 향해 두 손을 벌리고 혀를 길게 내밀어 보였다.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저는 상관없지만 백공자께서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래 하시는 일은 잘 되어 가고 있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별로 잘 되는 일도 없고, 그저 그렇소이다. 단지 한 가지 일이 갑자 기 마음에 걸릴 뿐이외다." 백방생은 기왕에 이방안에서 새벽까지 기다려야 하겠기에 그 말을 꺼내 보기로 했다. 백방생이 방안에 자리하자 당리와 황진의는 나란히 그를 바라보며 앉았다.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있어서 마음에 걸린다는 거죠?" 백방생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불쑥 말했다. "혹시 이 세상에 진짜 신선이 있소?" 황진의는 문득 어리둥절해 졌다. "신선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죠?" 백방생은 말했다. "무공이 너무나도 높아서 헤아릴 수가 없고, 또한 불로장생(不老長 生)하는 신선이 정말로 있느냐는 것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 하다가 말했다. "글쎄요. 서책에 보면 있다고들 하죠, 아마?"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지금 무림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오." 황진의는 그 말에 문득 안색이 크게 달라졌다. 그녀는 갑자기 다소 놀 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본 적은 없지만 들은 바는 있소. 내 말은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오." 황진의는 일순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어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존재해요. 하지만 그들은 세상밖에 존재하죠." 황진의의 표정은 회한에 찬 듯이 기이하게 빛났다. 거기에는 마치 많은 비밀들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것이야말로 이제까지 그녀를 신비하게 보이도록 만든 요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항상 뭔가 비밀을 간직한 듯한 여자, 과연 황진의는 무슨 비밀을 간직 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옆에서 당리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들의 무공이 천륭무가주보다 뛰어나다는 말인가요?" 황진의는 이미 모든 것을 말하기로 결심한 듯이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 였다. "내가 알기로는 그들을 상대할 만한 무림고수는 아직 이 천하에 없 어." 당리는 일순 왠지 한기가 스며드는 것 같아서 몸을 가늘게 떨었다. 상 대할 만한 고수들이 없다면 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혹시 정말로 그들은 신선들이라는 말인가"당리는 처음으로 듣는 그런 얘기에 그저 놀 라고 의아해할 뿐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보아하니 황낭자는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구려. 나에게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소?" 황진의는 연이어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런 얘기를 일부러 감추려고 했던 것은 아니예요. 다만 때가 되 면 말씀드리려고 했던 거죠. 우선 오해가 없기를 바래요." 당리가 옆에서 끼어 들었다. "그럼 이제는 그 때가 된 것인가요?" 황진의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들이 신선이 아닌가 했지만, 그래요. 그들은 가히 신선이라 고 불리울 만한 사람들이죠. 당신은, 혹시 세외팔세(世外八勢)의 창시자 들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들은 모두 천년에서 사백년 전의 사람들이 아니오?" 황진의는 말했다. "그렇죠. 만일 그들이 지금 모두 살아있다고 한다면 어떻겠어요?" 당리가 웃으며 말했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는데 설마, 그렇게 오래 살 수가 있겠어 요?" 황진의는 말했다. "아냐. 쉽게 믿기지는 않겠지만 그게 사실인 것을 어쩌겠어." 당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점차 그녀의 두 동공이 크게 확대되기 시작 했다. 이어 입이 벌어지고 놀란 그녀의 외침이 기어나오듯이 억눌린 채 로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지금 그 세외팔세의 창시자들이 바로 아까 말한 그 신선같 은 사람들이라는 말인가요?" 놀라기는 백방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설마하니 그 세외팔세를 창시하 고 중흥시킨 사람들이 아직 생존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문득 과거에 만났던 사공노인과 그 괴이한 차를 마시는 촌로(村老)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들이 만일 세외팔세의 창시자 중의 하나라면, 그 두사람은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일까?" 황진의는 말했다. "그들을 가리켜서 세외팔선(世外八仙)이라고 하기도 하지." 당리가 눈이 휘둥그래지며 말했다. "그럼 언니는 이미 그 성수곡의 조상님을 만나 보셨나요?"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조상은 의선(醫仙)이라고 하시지. 나는 한 두번 그 분과 만난 적이 있어." 직접 만났다는데 더 이상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당리는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말 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저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요." 53 장 예고된 혈전(血戰) 황진의는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사람의 무공이 무형검(無形劍)의 경지에 오르거나 혹은 그에 버금가는 경지에 오르되 공력이 깊어지게 되면 이른바 또 다른 자기 자신인 원 영(元瓔)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지. 그 원영은 진기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완전한 금강불괴(金剛不壞)일 뿐만 아니라 불로장수의 요인이 된다고 하 지. 혹은 그 원영신(元瓔身)에만 의존하여 육신을 바꾸고 살아가기 때문 에 육신은 죽어도 그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수 있다고들 하기도 하 지. 어쨌든 그 세외팔선은 모두가 그런 원영신들을 성취한 사람들로 서, 이미 반인반선(半人半仙)의 지상선(地上仙)의 경지에 올라 있는 사 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지. 듣기로 그들은 이미 불로장생의 금강불괴지 신을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육구신통(六具神通)을 이루었다고도 하기도 하지." 당리가 놀라 말했다. "그 육구신통이라는 것은 또 뭐죠?" 황진의는 말했다. "그건 도가의 서책에 나와 있어. 즉흔히 천안통(天眼通),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신경통(神境通), 누진통(漏盡通)이라고 하고 있지." 당리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럼 이미 신선이 다 된 것이 아닌가요?"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도가의 서책에는 과장하는 바가 적지 않아. 게다가 그들은 아직 신선 이 된 것은 아니지. 내가 보기에는 그들은 아마 약간의 투시력(透視力) 과 투청력(透聽力), 독심술(讀心術), 예지력(豫知力), 그리고 축지성촌(縮 地成寸)의 능력과 정(精)이 전혀 새지 않는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 같 아." 당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설령 그 정도라고 해도 정말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고 있는 것은 분명 하지요. 그들의 무공은 더욱 대단하겠죠?" 황진의는 말했다. "내가 듣기로 빛으로 상대를 해칠 수가 있는 광검(光劍)을 사용한다고 하는 것 같았어." 당리는 의아해 하며 말했다. "광검이라면, 그건 무형검보다도 높은 경지인가요?" 황진의는 말했다. "아냐. 흔히 오히려 광검을 무형검보다 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지만, 그러나 기실 광검과 무형검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야. 광검 은 무형검이 되기 이전에도 생겨나며 또한 무형검도 광검으로 발출되 기도 하지. 게다가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짜가 아닌 진짜 광 검이야. 세외팔선이 사용하는 광검은 진짜로서 흡사 번갯불을 닮은 것 이지." 당리는 듣고 있다가 절로 흥이 나서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아요! 저도 언젠가 책자에서 하늘의 신이 번갯불로 나쁜 사람들을 상대했다는 얘기를 본 것 같아요." 황진의는 말했다. "세외팔선은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밖에서 살아왔지만 그러 나 누군가에 의해 시종 그 자신들의 뜻을 펼쳐볼 수가 없었지. 그러다가 이제 그 장애가 사라지게 되자 나타나서 그 뜻을 펼치려고 하는 거야." 당리는 의아해 하며 말했다. "헌데 그들을 꼼짝못하게 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또 어떤 사람이죠 "정말로 신선이었나요?"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도 잘 알수가 없어. 어쨌든 그 세외팔선 가운데의 우두머리인 천선 (天仙)은 이제 머지 않아 천하를 지배하려는 것 같아. 그들은 갑자기 등장하게 된 거야. 아니 오늘 당장에 나타나게 될 지도 모르지. 따라서 우리 조상께서는 그 일을 심려하시고 나를 만나셨던 거야." 당리는 안색이 펴지며 말했다. "아, 그러니까 세외팔선 가운데에서도 뜻이 다른 사람들이 있었군요?" 황진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워낙 천선의 능력과 그 추종자들의 숫자가 많아서 한 두사 람의 뜻으로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지. 만일 옛날의 그 무명노인의 후예가 나타난다면 또 모르지만?" 황진의는 말을 하면서 은근히 백방생을 건너다 보았다. 백방생은 묵묵 히 듣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리가 그를 위 해서 열심히 질문을 해 주었다. "무명노인이란 바로 그 세외팔선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는 그 신비의 사람인가요?"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명노인은 백년전에 죽었다고 했지. 그래서 세외팔선이 지금 야망을 실천하려고 하는 거야." 당리는 백방생과 황진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혹시 그 세외팔선이 상공의 부모님의 원수와 연관이 있지 않을 까요?"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글쎄, 그들의 행동은 신비하고 능력이 탁월하니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 혹시 그들이 지금 우리의 대화마저도 엿듣고 있는 지 도 모르고." 당리는 그 말을 듣자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갑자기 그들이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 같았다. 당 리는 백방생과 황진의의 표정이 담담한것을 보고서야 다소 안심을 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다시 말했다. "대체 그들은 천하에 나타나서 무슨 음모를 꾸미겠다는 거죠?"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그것 뿐이야. 그런 것들은 앞으로 그들이 나타 나 봐야지만 알 수가 있겠지. 천하인들은 대부분 그들의 존재를 모르고 있으니..." 당리는 내심 수긍을 하며 문득 속으로 생각했다. (헌데 정말로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그런 사람들이 과연 나타날 까?) 백방생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이윽고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낭자가 우리에게 그런 어려운 얘기를 해주다니 고맙소. 아마도 쉽지 않 을 얘기를...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소. 그래서 내 부 족하지만 한가지 건의를 할까 하오." 황진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더러 호위를 이제 그만 두라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마음은 속일 수가 없구려. 그렇소. 사실 낭자는 이미 그에 충 분한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오. 앞으로 굳이 계속 나의 호의를 맡지 않 아도 되오. 나는 낭자가 이 일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그건 제가 공짜로 많은 돈을 벌게 된 것이니 저에게 좋은 일이지요. 뭐 오해할 것이 있나요"마침 저도 그 직책을 사퇴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됐군요." 당리는 백방생이 황진의를 보내려고 하는 것을 알고 놀라 급히 말했다. "하지만 언니는 떠나시면 안 되요. 보다시피 저는 아주 외롭고 힘이 없기 때문에 언니마저 떠나시면 고통스러울 거예요. 황언니, 부디 저 와 의자매가 되어 얼마간 저의 곁에 머무를 수가 없나요?" 황진의는 막상 떠나려니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당리가 손을 잡고 그렇게 진심으로 간청하는 지라 하는 수 없이 웃으며 말했 다. "좋아. 그러면 기왕에 돈도 많이 벌었으니 내 동생의 의언니가 되어 한달 정도는 함께 머물러 주지." 당리는 그만 만세를 부르며 기뻐 황진의를 얼싸안았다. "어마, 정말 고마와요 언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죠?" "호호호!" 황진의는 약간 간지러운지 그녀를 마주 안고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썰렁한 이 객방안에 두 사람의 여자들로 인해 화사한 꽃들이 만개하는 것 같았다. 두 여자는 옆의 백방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정답게 얼싸 안고 얘기를 나누었으므로 오히려 백방생이 불편해 지게 되었다. 그는 그 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이미 새벽녘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주위는 조용하고 어둠은 더욱 깊 어졌지만 왠지 평안하고 아늑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늘은 격전이 예 상되는 날이기 때문에 모두가 거의 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 을 것이었다. 백방생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는 문이 부서져 있 었지만 소림사의 화상들이 문을 다시 고쳐놓은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아직 취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으므로 방안에 홀로 정좌하고 앉아서 좌선명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격전을 앞두었고 앞으로 무서운 적들이 들이닥칠 것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일종의 운기행공은 필요한 것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만일 누군가가 운공조식을 하고 있을 경우에는 건드리 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소림승려들은 여러번 음 식을 가지고 방앞에 왔지만 백방생이 좌선명상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는 깨우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더욱이 당리와 황진의는 더욱 백방생 을 방해하지 않도록 노력하여, 백방생은 매우 오랫동안 편안하게 수련에 임할 수가 있었다. 그가 이윽고 그 좌선명상에서 깨어났을 때는 어느새 하루의 한낮이 다 가고 어느덧 저녁무렵이 다 되어 있었다. 백방생은 밖 으로 나와서 당리 등이 있는 방쪽으로 걸어가며 내심 생각했다. "이렇게 조용하다니, 그럼 적들이 아직 쳐들어 오지 않았다는 말인 가?" 방문을 열자 당리와 황진의가 새롭게 단장을 하고 아직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 백방생은 말했다. "아직 아무런 일도 없소?" 당리가 말했다. "아마 그런가 봐요. 혹시 적들이 그새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닐까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리가 없소." 그 때 갑자기 소림승려들이 뛰어들며 소리쳐 말했다. "여러분, 이미 적들이 왔소! 어서 연무장 쪽으로 모여 주시기 바라 오!" 황진의가 그 말을 듣고 의미심장하게 고소하며 말했다. "과연 그들은 왔군요." 과연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사방에서 아득하게 격전을 벌이는 소리, 비 명소리,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등이 요란하게 울려오기 시작했다. 백방생 은 마악 연무장 쪽으로 향하려다가 문득 당리와 황진의를 바라보며 말 했다. "두 분은 어떻게 하시겠소?" 당리가 즉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당연히 상공을 따라서 싸워야지요. 우리가 여기에 있는다고 해서 무 사할 것 같은가요?" 백방생은 황진의도 함께 갈 것 같았으므로 굳이 그러한 의도를 말리지 않았다.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갑시다!" 연무장에 도착하기 전에는 그저 고함소리 등만 들렸을 뿐 진짜 싸움 을 벌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과연 연무장에 도착하자 백방생은 그 곳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싸우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가 있었다. 드넓은 연무장에는 무림맹쪽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무리를 지 어, 혹은 개인적으로 계속 사방에서 밀어닥치는 무리들과 혼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대번에 사위에는 흙먼지와 사람들의 움직이는 모습들로 가득 차고 처음에는 도저히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백방생과 당리, 황진의는 이내 그들과 같이 그 싸움에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는데, 백방생은 여유가 있어서 자세히 장내의 상황을 살필 수가 있었다. 지금 한창 격전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무림각파의 사람들과 배교, 팔 괘교, 공동파 등의 무리였고 아직 싸우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연무장의 한쪽에 서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간밤에 방장실에 모였 던 이른바 무림각파의 수뇌급의 인물들이었는데, 간혹 달려들어서 제자 들을 돕기도 했지만 우선은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격전은 이미 삽시간에 소림사의 전역으로 번진 것 같았다. 그것은 사실 무림맹의 작전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아마도 그들의 작전이 갑자기 무너졌기에 다 소 당황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대세가의 사람들도 대부분 복귀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지공은 보이지 않았고 용천기는 다른 쪽에서 열심히 한 떼의 무리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석륭안 등은 아직 한쪽으로 물러서서 사태를 방관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보았던 그 정사중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 마도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었다. 백방생은 은근히 석륭안의 옆 에 서있는 진소유를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천상회의 인원은 이백명도 넘는다고 했는데 어째서 이곳에는 별로 없는 것일까"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문득 눈앞에 팔괘도포를 입고 도관을 쓴 서너명의 노인들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덤벼들었다. 백방생은 장검을 뽑아서 그들과 맞섰다. 백방생의 신형은 마치 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그저 단순하게 손발 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신기하게 상대들의 공격을 벗어나고 이어 그의 장검은 가볍게 그들의 혈도를 찌르는 것이었다. 비록 가볍게라고는 하나 그들 모두는 혈도가 제압되어 그 자리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 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림맹의 인원들이 비명을 질 러대며 뒤로 날려갔다. 그것은 바로 배교의 무리들이 폭약을 사용한 것이 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고 폭약에 목숨을 잃었으며 그러는 가운데 에서도 피가 튀기는 혈전(血戰)은 계속되고 있었다. 백방생은 당리 등이 있는 곳에서도 폭약이 터지는 것을 보고 다소 놀랐으나 이내 황진의가 그녀를 데리고 적절히 피하는 것을 보고 마음 을 놓았다. 그는 비록 그들을 모두 물리칠 수가 있지만 앞으로의 상황 변화를 살피기 위해 손속을 자제하기로 했다. 서너명의 상대를 물리치자 이번에는 다시 칠팔명의 적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원(中原)의 사람들이 아니라 해외(海外)인들의 복장을 한사람들이그 가운데 섞여 있었다. 즉 바야흐로 세외오세(世外五勢)의 사람들의 공격 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의 의복들은 대개 한가지로 통일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격전시에 적과의 구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남색(藍色)의 의복을 걸 친 무리들은 부상국에서 건너온 검총(劍塚)의 무리들이었고, 회의(灰衣) 를 걸친 무리들은 일월신교(日月神敎)의 무리들이었다. 자의(紫衣)를 걸 친 무리들은 도막(刀幕)의 무리들이었고, 흑의(黑衣)를 걸친 무리들은 북해(北海)에서 내려온 현현사(玄玄社)의 무리들이었다. 그리고 홍의(紅 衣)를 걸친 무리들은 멀리 동남쪽의 먼 바다끝에서 건너온 태양마교 (太陽魔敎)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비단 각기 키가 크거나 작거나 혹은 체격도 매우 달랐고 언어나 행동습관, 그리고 의복, 병장기나 무공도 매우 달랐고 차이를 보였으며 괴이했다. 어떤 사람들은 눈이 새파랗기 도 했고 또한 어떤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붉거나 노랗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그들의 무공들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비단 괴이했을 뿐만 아니라 높았다. 지금의 이 싸움은 마치 너무나도 정해진 틀대로 하는 것 같아서 장난같기도 했다. 이런 싸움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습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외오 세는 마치 보란듯이 예측된 시각에 나타나 공격을 개시했고 그리고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무공이 그만큼 대 단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무림맹의 대비책이 허망하게 무너진 주된 원인이었다. 실력의 차이가 너무도 뚜렷할 경우, 어떤 계책도 잘 통하지 않는 법이기도 했다. 이미 무림맹측의 사람들이 분분히 패퇴하며 사상자를 내기 시작했고 한쪽에서 방관하던 고수들과 천상회의 인물들도 석륭안과 진소유를 제 외하고는 격전장에 뛰어들었다. 싸움은 지금 무림맹에서 만들어 놓은 온갖 계교들도 소용이 없어진 상태로 소림사의 전역에서 펼쳐지고있었 고, 지금 이 연무장을 보더라도 사람들의 숫자는 비슷해 보였다. 아니 무림맹 쪽이 약간 많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무공면을 본다면 확실 히 세외오세 등의 쪽이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갈 경 우 시간이 흐를수록 결과는 뻔할 것이다. 백방생은 문득 도액선사 등이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아마도 천륭무가 주 등을 기다리고 있는 중일 것이다. "아악!" 갑자기 귀에 익은 비명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바로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여자인 종남일향(終南一香) 상금하(常錦霞)가 가슴이 갈라지면서 내뱉는 단말마의 비명소리였다. 상대는 동영의 중년무사였는데, 아직도 피가 흐르는 장검을 쥐고 갈라진 옷 사이로 언뜻 보이는 상금하의 젖가 슴의 융기를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것을 보 고 문득 그 주위에 있던 한 사람이 공격해 들어갔다. 바로 역시 본적이 있던 십방수재(十方秀才) 장전상(張全詳)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채는 미 처 그 동영의 무사를 베지 못했다. 그 전에 이미 다른 자의를 입은 서양 무사에게 칼로 오른팔이 잘려져 나가고 있었다. 일순 피가 솟구치자 장전상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고통을 느 낄 여유는 없었다. 그는 급히 신형을 움직여 피하면서 왼손으로 오른 팔의 혈도를 찔러 지혈을 시키기에 바빴다. 백방생은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다소 마음이 아팠다. 만일 이순간 그가 전력을 다한다면 그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럴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지금 기다리고 있었다. 세외팔 선(世外八仙)! 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과연 백방생이 이전에 본적 이 있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전혀 낯설은 사람들일까"백방생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한은 결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싸울 수가 없었다. 문득 가슴으로 한자루의 칼날이 섬뜩하게 파고 들어왔다. 백방생이 다소 방심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헌데 백방생의 신형은 그 순간에 기이하 게 옆으로 휘어졌다. 사람의 몸은 결코 종잇장처럼 비틀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백방생의 몸은 그렇게 변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순간적으로 정면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도 연차적으로 밀려들고있는서너 개의 병장기들의 날을 교묘하게벗어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그것을 보 고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이미 백방생의 손에 들린 장검은 마치 엿가락처럼 늘어나서 그들 모두의 혈도를 재빠르게 찍어가고 있었다. 일개 장검은 무쇠를 부어서 단련시킨것으로 결코엿가락 이 아니건만, 그의 현란한 무공은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 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아미타불!" 갑자기 웅후한 불호소리와 함께 도액방장의 주변에 네 사람이 허공 을 날아서 나타났다. 그들 가운데의 세 사람은 백방생에게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바로 소림삼신승(少林三神僧)인 고혜(苦慧), 고승(苦乘), 고지(苦智) 선사가 아닌가"백방생은 그들을 보자 일순 친근감이 들어서 다가가서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들은 근래에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 지만 소림사가 위태해지자 출관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 중의 고혜선사 는 사실 도액방장의 사부로서 전대의 장문방장의 직책을 맡았던 사람이 기도 했다. 그들이 나타나자 무림맹쪽의 사기는 다소 올라갔다. 그런데 백방생은 다음 순간 나머지 그 한사람을 보고는 다소 멈칫하고 말았다. 그 순간에 한 동영무사의 장검이 그의 허리를 베어 왔으나 기이 하게도 백방생의 몸은 마치 환영(幻影)처럼 베어지지 않았다. 동영무사 는 자신이 허공을 벤듯 하자 절로 놀라서 뭐라고 소리를지르고있었다. 실상 백방생의 무공은 이미 천의무봉하여 그가 다소 한눈을 팔더라도 저절로 그 무공들이 발휘되고 있는 상태인 것이었다. (천륭무가주(天隆武家主)다!) 백방생은 내심 소리를 질렀다. 그의 육신은 어느새 허공을 떠다니고 있 었지만 시선은 그쪽으로 못박혀 있었다. 그렇다. 지금 소림삼신승과 함 께 나타난 사람은 바로 이전에 백방생이 보았던 그 천륭무가주 천수자 (天隨子) 석장생(石長生)이었다. 그는 비단 백발의 빛나는 머리카락을 보지 않더라도 능히 알 수 있게 하는 독특한 기질을 가지고있었다.단지 오늘은 그날과는 달리 일신에 옥색의 비단옷을 단정하게 걸치고 있었 고 은백색의 머리카락도 잘 빗어 올리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석륭 안은 급히 진소유의 손을잡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버님!" 석장생은 아들을 향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 보였다. 마치 나중에 싸 움이 끝나면 보자고 하는 것 같았다. 잘 꾸며서인지 지금의 석장생의 모 습은 맑고 생기가 넘쳐 있었고 매우 건강해 보였다. 이제 그런 그가 나 타났으니 무림맹은 가히 안심해도 좋을 것이었다. 순간 석장생은 공력을 일으켜서 소리쳤다. "모두들 싸움을 멈추어라!" 지금 장내에서는 서로 죽느냐사느냐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긴박한 격전 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라도 그런 지시를 받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세외오세의 사람들은 모두가 중원어를 잘 모르는 사 람들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모든 싸움이 정말로 중지된 것이 다. 허공을 종횡하며 한창 격렬하게 싸우던 사람들은 그대로 초식을 거 두고 급살맞은 듯이 뒤로 물러섰으며, 모두가 놀라서 각자 무리들속으로 모여 버렸다. 그것은 비단 이 연무장 뿐만 아니라 소림사의 전역에서 펼쳐지던 싸움들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석장생의 그 고함소 리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무서운 공력에 의해 누구도 더이상 공격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저절로 싸움이 중단된 것이다. 그것은 실로 석장생이 한번 나타나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가 있 었다. 갑자기 장내에는 조용하고 무거운 침묵들이 흘렀다. 세외오세의 무리들 이 긴장을 하고 뒤쪽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자연 중앙에는 넓은 공간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때 갑자기 사방에서 십여명의 노인들이 하늘을 훨 훨 날아서 나타나 그 중앙에 이르렀다. 또한 장내의 후미에서도 그들과 동조하는 무리가 십여명이나 나타났다. 그들은 일제히 장내의 중앙에 이 르렀으며 그 가운데에서 홍의를 입은 한 노인이 소리쳐 말했다. 기이하 게도 그는 중원의 말에 아주 능숙했다. "석장생! 그대가 정말로 나타났군. 그러나 이 싸움은 오로지 그대가 자청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백방생은 자연 한가해 지게 되었다. 그는 당리와 황진의와 함께 그 나 타난 무리들을 예의 주시했다. 그런데 보아하니 비슷한듯 해도 그 이십여 명의 무리들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기도(氣道)가 다른 다섯명의 노인들 이 있었다. 바로 그들이야말로 세외오세의 주인들인 듯 했는데 하나같 이 각기 일신에 특이한 광채가 안개처럼 서리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백 방생이니 자세히 알아본 것이다. 다른 노인들의 무공은 심검의 경지이지 만 그들은 모두 광검(光劍)의 경지에 올라있는 듯 하니 역시 틀릴 리가 없는 것이다. 방금 말한 그 홍의노인도 그 다섯명 중의 하나였다. 석장생은 주위의 시선들을 의식하며 말했다. "그대들은 정말 너무 하는군. 내가 좀더 오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그 렇게도 못마땅하다는 말인가?" 그 태양마교의 교주인 홍의노인의 이름은 중원식의 별호로 성태양존자 (聖太陽尊子)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가 다시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여러말 할 것 없다! 우리는 본래 서로간에 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그 균형을 깨뜨리려고 했으니, 우리로서 는 이렇게 대항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너는 물론 이러한 것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했을지도 모르지만." 천수자 석장생은 가볍게 탄식한 뒤에 말했다. "나는 사실 그렇게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공연히 다른 사람들 을 다치게 하지 말고 나와 일전(一戰)을 벌이는 것이 어떠냐"설마 그런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 성태양존자는 잠시 우물쭈물 했다. 사실 석장생의 무공은 그로서도 매 우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만일 두려운 바가 없었다면 이렇게 쳐들어 오 지도 않았겠지만. 흑의를 입고 있는 현현사의 주인은 현현귀곡노사(玄 玄鬼谷老師)라고 불렀다. 그가 말했다. "흐흐, 우리는 사실 개인으로는 너를 상대할 수가 없다. 또한 다섯사 람이라고 해도 장담은 할 수가 없지. 따라서 네가 만일 우리들의 조건을 수락하면 너의 싸움에 응하겠다." 본래 무학은 천축에서 건너왔다는 말도 있지만 중원에서 크게 활성화 되었다. 그리고 이어 천하각처로 건너갔으므로 그 세외오세의 주인들이 미리 중원어를 배워두는 일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석장생은 말했다. "무슨 조건이냐?" 현현귀곡노사가 말했다. "그것은 네가 우리의 진법(陣法)을 하나 통과하는 것이다." 말이 끝나자 일순 다섯명을 제외한 나머지의 노인들이 갑자기 분수처 럼 흩어지며 장내에 커다란 진세(陣勢)를 형성했다. 그들의 숫자는 모 두 삼십명으로 하나같이 실상 심검의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 한 사람이 능히 도액방장을 상대할 수가 있는데 이렇게 수십명이 한꺼번 에 진법을 만들어 대항하다니 실로 가공할 위력일 것이었다. 석륭안은 옆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색이 변 하며 말했다. "아버님, 들어가면 안 됩니다?" 현현귀곡노사가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만일 싫다면 우리는 한꺼번에 공격할 것이니 자연 너희들의 피해도 커질 것이다. 흐흐흐, 석장생! 그대가 이 진법을 선택하고 않고는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백방생이 바라보니 그 노인들의 진법은 다섯가지 옷빛깔이 선명하여 마치 오행무극(五行無極)의 진법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간단 한 진법을 사용할리는 없는 것이다. 필시 그 내부에 구궁이나 팔괘(八 卦) 등의 변화가 감추어져 있을 것으로 판단 되었다. 일반적으로 진법을 펼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의 능력이 십분 살아나 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상생상극의 배합에 의해서 오히려 그 위력이 몇 배가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천하의 천륭무가주라고 해도 결코 그것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석장생은 상황이 이미 어쩔 수가 없다 고 생각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지만 너희들도 약속을 해야 한다. 만일 너희들이 나를 이기 게 되더라도 나를 죽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고 각자 중원을 떠나야 한다고 말이다. 너희들이 만약 이 약속을 하지 않으면 나도 방법을 바 꾸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다섯명의 수뇌들은 서로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현현귀곡노사가 다시 음침하게 말했다. "물론이다. 우리는 곧장 물러갈 것을 약속하마!" 석장생은 이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듯 하다가 이윽고 서서히 신형을 날려 그 진법의 중앙으로 들어갔다. 그가 그렇게 서서히 허공을 날아가 자 사람들은 은근히 긴장하고 가슴을 졸였다. 실상 허공을 빠르게 날아 가는 것보다 그렇게 천천히 날아가는 것이 훨씬 비교도 할 수 없이 어 렵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석장생이 지면에 내 려서자 돌연 진법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삼십명의 노인들이 빠 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신형이 사라졌다. 동시에 그들의 몸은 일제히 허공과 상하를 빠르게 날아서 둥글게 석장생의 몸을 에워싸 버렸 다. 실상 사람의 몸으로 그렇게 한다는 자체가 이미 불가능에 가까운 노릇인 것이다. 석장생은 따라서 금방 그 커다란 사람들의 공간에 갇힌 것 같이 되었 다. 그러나 석장생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허공에 둥실 떠오른 채로 가만 히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희안한 대결을 보고 모두 다 놀라고 어리둥절해 했다. 그들중 대부분은 그 깊은 사정을 모르기에 그저 놀라 고 희안하게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그저 희안하기만 한 노릇이 아니었다. 으레 무공 이란 실날같이 작은 오차라도 용납할 수가 없는 정교한 학문인 것이다. 백방생은 지금 그 삼십명의 노인들이 아직도 대강 오행무극의 진세(陣 勢)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실상 그것이 무서운 점이었 다. 그들은 서로가 상생상극의 기운으로 연결되어 막대한 힘으로 뭉쳐 져 있으며 겉으로는 허술해 보여도 실은 엄청난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 이다. 석장생은 그것을 보고 감히 섣불리 출수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이다. 그러나 백방생은 문득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출수할 때는 오히려 지금일 것이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문득 백방생은 그 노인들 중의 한 사람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 지는 것을 보았다. 아니 그것은 그 한사람 뿐만이 아니 었다. 서른명의 노인들이 모두 똑같이 안색이 일그러지고 두 눈이 툭툭 불 거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얼핏 공력이 딸려서 생기는 증상과 흡사 했다. 그러나 기실 그것과는 현실은 정 반대였다. 그것은 오히려 공력이 급증되어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갑자기 공 력이 그토록 급증하게 된 것일까"점차로 그들의 눈알 뿐만 아니라 얼 굴의 피부와 온 몸의 모공까지도 툭툭 불거져서 붉은 선혈이 내비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그들의 몸은 넘쳐나는 공력 때문에 터져버릴 것 같았 다. 백방생은 기실 그와 비슷한 광경을 얼마전에 본적이 있었다. 그는 문 득 놀라서 속으로 소리쳤다. (천마해체대법(天魔紅뙋ц浦이다!) 이전에 흑루의 고수들은 그 대법을 모두 펼치지 못해서 백방생은 아직 그 위력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고는 해도 그 진위를 분별 하는 것이 지장을 받게 된 정도는 아니었다. 백방생이 보는 바에 의하 면 지금 그 대법들은 바로 천마해체대법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실 지금 그렇게 보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움직이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파악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백방생은 필시 그 석장생도 그런 변화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는 다소 망연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가볍게 우수를 들어 올렸다. 그는 상대방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반격을 개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 순간에 석장생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다소 안색이 창백해 지 면서 잠시 공격을 주춤거렸다. 그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 였을까"백방 생은 그것을 보고 갑자기 사건이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느꼈다. 그 짧은 순간에 이미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갑자기 석장생을 휘감은 사람들의 거대한 막(幕)이 붉은 핏빛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와 거 의 동시에 장내에서는 꽝! 하는 천지를 흔들리게 하는 거대한 폭발음 과 함께 엄청난 흙먼지가 하늘과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것은 실로 수십 만근의 화약이 일시에 폭발한 것 같은 엄청난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그 여파에 더러 뒤로 날려가기도 하고 혹은 분분히 이를 피해서 뒤로 십 여 장이나 물러났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사람들은 이윽고 흙먼지들이 가라앉자 눈을 부릅뜨고서 장내를 주시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 악마(惡魔)의 천마해체대법이다!" 그렇다. 갑자기 장내는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천마해체대 법이 실현된 것이다. 그 신기막측한 무공을 펼치던 삼십명의 노인들은 이미 시체도 한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박살이 나고 흩어져서 보이지 않았다. 장내의 중앙에 보이는 것은 직경이 거의 십여장이나 되는 거대한 구덩이였다. 그것은 바로 그 삼십명의 노인들이 자신들의 육신을 폭발시켜 가면서 이룩해 놓은 작은 화산의 분화구와도 같은 것 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위에 한 사람이 둥둥 떠 있었다. 석장생! 바로 그였다. 사람들은 석장생이 아직 비교적 무사한 것을 보고 놀라는 한편 크게 안도해 하기도 했다. 그 엄청난 위력을 보였던 삼십명의 천마해체대법은 바로 그 힘이 오직 석장생에게 집중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이 거의 불가사의 하기도 했다. 그것은 곧 석장 생이 말로만 듣던 천하제일인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었다. 54 장 나타난 세외팔선(世外八仙) 사람들의 시선이 크게 집중된 가운데 석장생은 마치 입정한 수도승처 럼 눈을 감고 허공에 떠 있었다. 그의 안색이 다소 창백해 지기는 했으 나 의복에는 거의 먼지도 묻지 않았고 또한 거의 찢어진 곳도 없이 말 끔했다. 어떤 무림맹측의 사람들은 그 대단한 능력에 감탄하여 즉각 박 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최고수들은 이미 뭔가 상황이 달라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림인들이 느끼는 고도의 직감 력이었다. 그것은 왠지 몹시 태연해 보이는 석장생에게서 더욱 느껴졌 다. 태연한 것이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처음에는 다소 놀라고 어리둥절해 하던 세외오세 의 다섯 수뇌들은 일순간 그쪽으로 날아가서 둥글게 석장생의 몸을 에 워쌌다. 그것은 마치 여섯개의 괴이한 물체가 허공에 둥둥 떠있는 것 같 았다. 자의를 걸친 도막의 주인 도황제(刀皇帝)가 음산한 어조로 소리쳤다. "흐흐, 이미 승부가 났으면 굴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그렇게 억지로 참고 시간을 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 석장생은 그 말에 서서히 눈을 떴다.그런데 그것을 바라본 무림맹쪽의 사람들이 돌연 비명을 질렀다. 바로 석장생의 입에서 갑자기 분수같은 선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던것이다.그 선혈속에는 이미 잘려져 나간 내장부스러기도 섞여 있었다. 그렇다면 석장생의 내장은 겉보기와는 달 리 완전히 녹아버린 상태란 말인가"무림맹쪽과는 달리 그것을 보는 세 외오세의 사람들의 얼굴에는 일순 득의의 광채가 흘렀다. 그것은 세외 오세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회의를 입은 일월신교의 주인 일월신마성(日月神魔聖)이 음랭하 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우리는 이미 네가 아직 그 절맥(絶脈)을 치유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조금만 늦게 왔다면 너는 그 연공을 성공하 고말았겠지. 하지만, 그때라면 결코 우리는 이렇게 나타나지도 못했었 을 것이다." 석장생은 그렇게 피를 한꺼번에 쏟아내고 나자 안색이 마치 납덩이 처럼 시퍼렇게 변했다. 그의 신형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 는 입술을 열어 겨우 말했다. "좋다. 내가 졌으니 이제 너희들은 중원에서 물러가라." 이제까지 말이 없던 남의를 입은 검총의 주인 천검성자(天劒聖子)가 말했다. "정말 가소로운 소리를 하는군. 우리가 기왕에 온갖 고초를 겪으며 너를 제거했는데 그냥 순순히 본토로 돌아갈 것 같으냐?" 석장생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너희들은 이미 나와 사전에 약조하지 않았느냐?" 일월신마성이 음랭하게 말했다. "약속"약속이라구"그게 대체 몇푼이나 한다는 말이냐"우리는 이미 승자 이고 거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약속을 지킨다는 말이냐"이제부터 이 중원은 우리 세외오세가 다스리게 될 것이니라." 순간 석장생은 분노하여 우수를 들어 올렸다. 갑자기 투명한 듯한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그와 거의 동시에 다섯 사람들의 우수도 올라가고 있었다. 그 다섯사람의 손끝에서도 역 시 옷빛깔과 똑같은 다섯 가지 빛깔의 광채가 퍼져나와 석장생에게 덮 쳐갔다. 그 순간은 아주 찰나지간이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분명히 볼 수 가 있었다. 처음에는 석장생의 옥색(玉色)의 광채가 다섯사람을 뒤덮는 듯 했다. 그러나 이내 다섯가지 광채의 저항을 받아 주춤했고 이어 느 닷없이 그 옥색의 광채는 급격히 위력이 약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석장생의 공력이 이미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섯빛깔 의 광채는 그리하여 곧장 석장생의 몸에 정확하게 격중되었다. 그것은 이른바 광검(光劒)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따라서 그 신비하 다는 전설의 무학을 보게 되었다. 갑자기 주위가 휘황찬란한 광채속에 뒤 덮인 채로 석장생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다섯 개의 조 각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이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 라지고 말았다. 실로 그것은 너무나도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허망한 죽음이었다. 석장생이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그렇게 참혹하게 한순간에 가 버릴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오히려 갑자기 너무도 어이 가 없는 일이 벌어지다 보니 그만 의문점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었다. 과 연 그는 천하제일인이었던 석장생이 틀림없는 것일까" 하지만 누가 보 아도 그가 천륭무가주라는 사실은 의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제 남은 것은 냉혹한 현실인 것이다. "아버님!"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그 앞으로 달려나갔다. 바로 석륭안이었다. 하 지만 그가 아무리 뛰어난 둔재라고 해도 세외오세의 주인들을 이길 수 는 없는 일이었다. 천검성자가 즉시 다가오는 석륭안을 향해 우수를 쳐 들어서 공격하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일단의 사람들이 불호소리와 함 께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아미타불!" 그들은 바로 석장생과 함께 나타났던 소림삼신승이었다. 천검성자의 남 색(藍色)의 광검이 석륭안의 몸을 쪼개려는 순간에 문득 고혜선사의 손 끝에서도 한줄기의 노을빛 광채가 피어 올랐다. 놀랍게도 고혜선사도 역 시 광검의 경지에 오른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때까지 광검의 경지에 오 른 사람은 오직 세외팔세의 주인들 뿐이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실로 파 천황적인 사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실로 소림삼신승(少林三神僧)의 우 두머리라는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고혜선사의 활약으로 석륭안은 이내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고혜선사의 무공이 천검성자와 비슷한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의 광검이 서로 부딪친 순간, 고혜선사는 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것을 보고 천검성자가 다시 광검을 발출했으며 고혜선사는 다시 반격하여 재차 그는 두 걸음을 뒤로물러나고말았다. 그렇게 연달아 네걸음을 물러나자 고혜선사는 내상을 입었는지 그만 안 색이 창백해 지고 말았다. 하지만 비록 옆에 있어도 다른 사람들은 고혜선사를 구할 수가 없었다. 무학의 경지에 있어서 한 단계는 마치 그 차이가 하늘과 땅과도 같아 서, 심검의 경지로는 도저히 광검을 상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단지 천검성자 한사람도 상대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나머지 네 명의 고 수는 어떻게 상대하겠는가"무림맹쪽의 사람들은 그만 넋이 달아날 정도 로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이제 아무래도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장내가 중요하다고 해도 지금 모두가 죽어 버리면 장래도 없게 되는 것이 아 닌가"천검성자가 세번째의 광검을 날리는 순간에 백방생은 이미 신형을 이동하여 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의 오른손도 가볍게 올라갔으며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엇이 발출되었는 지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 간 갑자기 남색의 광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천검성자가 짧은 비 명소리와 함께 뒤쪽으로 피를 내쏟으며 날려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장내의 상황은 크게 일변했다. 이제까지 절망하여 공포감을 느끼던 무림맹의 사람들은 일순 어리둥절 해 하다가 환호성을 질렀고, 반대로 득의해 하던 세외오세의 사람들은 저마다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장래의 사람들이 똑같이 놀라고 있는 것은 동일한 경악감이었다. 그들은 백방생이 그토록 쉽게 세외오 세의 하나인 천검성자를 물리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이다. 백방생은 그러한 주위의 시선을 이미 의식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 래도 이 모든 싸움에는 깊은 음모(陰謀)가 내재되어 있을 것이므로 먼 저 세외오세의 주인들을 제압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다른 네 명의 수뇌들에게도 손을 쓰려고 우수를 연이어 들어 올렸다. 헌데 바 로 그 때였다. 느닷없이 하늘이 잠깐 어두워 지는 듯 하더니 차가운 한 차례의 고함과 함께 허공에 몇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멈춰라!" 백방생은 기왕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니 누구의 간섭도 필요없이 우 선 그들부터 제압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가슴에 쇠망치로 후려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그것은 그 목소리의 위력이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만 경악했다. 세상에 단지 목소리만으로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자가 정말로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비단 무공을 펼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순간 내상을 입고 뒤로 물러서며 한모금 의 선혈을 토했다. 그 무렵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래 져서 아득 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너무나도 놀라서 입을 다 물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비단 백방생 뿐만 아니라 세외오세의 나머지 네 명도 피를 내쏟으며 땅위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득한 허공 위에는 모두 여덟개의 점들이 나타나 있었다. 그 점들은 모두 찬연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고 노을이 물들어 가는 저녁무렵이라 마치 하늘에서 하강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들이었다. 또한 그 여덟개의 점들은 모두 사람들이었다. 마치 보석과도 같은 찬연한 광채를 발하는 그 여덟개의 사람들이 정말로 인간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웠지만, 그러나 이윽고 그들은 천천히 지면으로 하강했다. 일순 사위가 온통 휘황한 광 채로 물드는듯 했으며 마치 칠색영롱한 꽃가루가 휘날리고 있는 듯한 환상이 일어났다. 그 여덟명의 사람들"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기이한 모습 들이었다. 각기 홍흑회자남황백옥(紅黑灰紫藍黃白玉)의 빛깔로 되어 있 는 노인(老人)들이었는데 비단 눈 뿐만 아니라 피부와 모발까지도 그러한 광채를 발하며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은 온갖 훌륭한 광 채를 발하는 보석으로 신선(神仙)들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것 같은 모 습들이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사람들 중의 일부는 그들이 발하는 광채의 색깔이 혹시 세외오세의 주인들과 흡사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기실 그 두부류의 사람들은 마치 비슷한 색깔이기는 해도 쓸모없는 돌덩이와 황금(黃金)을 비교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백방생은 이미 어느 정도 확실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저들이었군. 저들이 바로 세외팔선(世外八仙)의 사람들이었어!) 그렇다! 방금 나타난 그 여덟명의 노신선들 가운데 자광(紫光)을 발하는 사람과 남광(藍光)을 발하는 사람들은 바로 전에 백방생이 보았던 그 사공노인과 촌로였던 것이었다. 비록 모습이 훨씬 수려해 지고 의복도 훌륭하게 잘 갖춰입었지만 그러나 본 기질은 숨길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백방생은 문득 정말로 그들의 실체를 바라보게 되자 왠지 전신에 맥이 빠지고 귀가 윙윙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것이 혹시 심마(心魔)의 현상 일 지도 모르므로 즉시 안간힘을 다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백방생이 그렇게 정신이 혼란해져 있을 때 어느새 장내의 사람들에게 는 흡사 하늘에서 울려오는 듯한 음성이 조용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장내 는 일순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 지고 마치 신성(神聖)한 듯한 분위기 가 깔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백방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그들의 음모라는 말인가"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는 일이 다!) 그 때 겨우 정신을 차린 백방생의 눈앞에 두 사람이 다가와서 서 있었 다. 바로 예의 그 사공노인과 촌로였던 두 신선 같은 노인들이었다. 사공노인이었던 노인이 불쑥 말했다. "우리는 세외팔선 가운데의 도선(刀仙)과 검선(劒仙)이다. 전에는 너 를 시험해본 것이었지. 의외라고 생각하느냐?" 백방생은 이미 세외팔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검 총의 빛깔을 닮은 촌로가 검선이고 도막의 빛깔을 닮은 사공노인이 도 선인 것이다. 사실 그들은 반인반선의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신선같은 노인들이었던 것이다. 백방생은 왠지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 하여 울분 을 참을 수가 없어서 반박하여 소리치려고 했다. 헌데 문득 그의 내부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 하지 않은가" (자중해야 해요?) 그것은 바로 진소유의 말이었다. 하지만 기실 그것은 진소유의 전음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살아있던 진소유의 말이기도 했다. 백방생은 이 에 문득 마음이 가라앉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한차례 길 게 탄식한 후에 말했다. "의외는 아니오. 나는 사실 당신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검선은 천천히 그의 마음속을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실로 너와 같은 자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아니야! 너는 우리들의 뜻에 찬성하느냐?" 백방생은 어렵게 그들이 군중들에게 말한 내용을 기억해 냈다. 그것은 세외팔선의 신분을 스스로 밝히고 이제부터 천하의 안정과 평화를 위 해 천륭무가의 조상인 천선(天仙)이 중심이 되어 천하에 신화제국(神化帝 國)을 건설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선 등은 석장생의 애석한 죽음 때문에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혼란스러운 이 천하를 다스려서 이상세계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옥색(玉色)으로 빛나는 천선 은 이어 수중에서 하나의 도(刀)를 꺼내 보이며 현재 강호에서 나도는 신병이기(神兵利器) 네가지는 기실 자신이 만든 것으로, 실수하여 강호 에 떠돌게 된 것인데 자신은 그것들을 찾으러 왔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은 그러한 말을 듣자 너무나도 놀라서 입이 도저히 다물어 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너무나도 놀라서 이성마저 마비된 것 같았다. 모두가 망연자실하여 넋을 잃고 그 노신선들의 지시와 말을 따르고 있었 다. 아니, 설령 그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누가 감히 이 가 공스런 여덟명의 노신선들을 당해낼 수가 있겠는가"백방생은 잠시 생각 하다가 문득 말했다. "찬성합니다. 세상을 안정되고 평화롭게 만든다는 것은 좋은 일이 죠." 백방생은 그러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실상 지금 검선이 묻는 것 은 거의 최후통첩이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반대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게 죽고 나면 그 다음도 없게 되 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선 등은 지금 석륭안 등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검선은 고개를 끄덕 이더니 말했다. "그럼 좋다. 어서 나를 따라 오너라." 백방생은 검선과 도선의 뒤를 따라서 천선의 앞으로 나아갔다. 세외팔 선이 나타나자 갑자기 장내의 분위기는 장난처럼 엄숙하게 변했다. 그것 은 그들의 능력이 너무나도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이 앞으로 다 가가자 천선은 잠시 시선을 돌려 유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옥광(玉光) 속에 투명한 빛을 발하는 천선(天仙)! 그의 모습은 마치 고아하고 수려 한 노문사(老文士)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옥빛의 머리카락과 피부는 조 각한 듯이 수려하고, 또한 투명하게 보이는 두 눈은 마치 하늘의 신좌가 창생(蒼生)을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 모습을 보자 왠지 가슴에 충격이 느껴졌다. 실상 조금전에 하늘에서 소리를 질러 그에게 내상(內傷)을 입힌 사람도 바로 그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천선은 문득 고아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 나를 유심히 보느냐"나의 모습이 이상하기라도 하다 는 말이냐?"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이상스럽게도 낯설지 않은 것 같아서 이상한 것 을요." 천선은 기이하게 웃었다. "그래"내가 낯설지 않다고?" 그 때 옆에서 검선이 공손히 말했다. "그는 우리들의 대업에 찬성한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어떤 직책을 주 는 것이 어떨까요?" 천선은 뜻밖이라는 듯이 웃었다. "그래 너는 무슨 직책을 맡기를 원하느냐?"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저는 찬성한다고는 했지만 직책을 맡고 싶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시골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천선은 어느새 백방생의 부근에 따라온 황진의와 당리를 돌아보고는 가볍게 웃었다. "저 여인들과 함께 말이냐" 음, 좋은 일이군. 하지만 너는 아직 한가 지 잊은 것이 있다. 앞으로 펼쳐지게 될 신화제국(神化帝國)은 모든 신 민(臣民)들이 협조해야만 이룩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방관자로 남을 수 는 없으며 그에 일조를 해야 한다." 만일 이 세외팔선과 항상 함께 있게 된다면 우선 숨이 막혀 버리고 말 것이다. 백방생은 문득 한가지 좋은 방책이 생각났다. 그는 즉시 품속에서 남은 백만냥의 황금이 수록되어 있는 예금장부와 인장, 비밀번 호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렇다면 저는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별로 강호의 일에 관심이 없으니 차라리 이게 나을 것입니다." 그 예금장부 등은 천천히 천선에게 날아갔다. 이윽고 천선은 그 예금 장부와 비밀번호 등을 살펴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군. 일단 신화제국의 건물을 신축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 테니까 이 액수는 제법 도움이 되겠어."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소생은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천선은 말했다. "좋다. 물러가서 조용히 살아라. 네가 조용히 살겠다면 누가 해치려고 하겠느냐?" 백방생을 바라보는 천선의 입가에는 기묘한 미소가 의미심장하게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이윽고 그에게 포권하며 읍하고 작별인사를 한 뒤에 당리와 황진의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진의와 당리는 묵묵히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했 다. 그러나 기실 잠시 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외팔선은 이제 세외오세의 사람들의 무공을 모조리 폐지시키고 있었다. 그쪽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고 또한 다른 한 곳으로도 관심이 다소 쏠려 있었다. 그곳으로는 소림사의 승려들과 다소의 무림맹의 수뇌들의 시선이 집중 되고 있었다. 다름아닌 소림사의 현임방장이요 무림맹의 맹주였던 도액 선사(渡厄禪師), 그가 숨을 거두었던 것이었다. 백방생도 그것을 보고 놀 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액방장, 그는 지금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칠 공에서는 죽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죽은 것은 확 실하지만 대체 그가 누구에게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 는 것 같았다. 비록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도액선사는 그래 도 이제까지 무림맹의 중추에서 제 역할을 해 냈었다. 백방생은 그 시 신을 보자 문득 지공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주위에서 소림사의 승려 등이 다소 우울하고 분노한 기색으로 그들의 장문인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지공의 모습은 아직 아무리 둘러봐 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백방생은 왠지 마음이 몹시 우울해 졌다. 문득 고개를 돌려 진소유를 찾으니 그녀는 아직도 석륭안의 옆에서 다소 멍 청한 표정으로 서있을 뿐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백방생은 문득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제 무림의 혼란은 갑자기 진정 된 것이다. 무림맹이나 세외오세 등의 구분도 필요없는듯 하고 그 위에 오직 신화제국만이 틀을 잡아가게 될 것이다. 신화제국이란 말 그대로 신을 닮아가는 거대한 제국이라는 말이며, 그들이 말하는 그 이상국가 에서 백방생이 해야할 일은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백방생은 그대 로 떠나기로 한 것이다. 이곳은 소림사이고 또한 고혜선사 등이 있었지 만 백방생은 도저히 그들과도 작별인사를 나눌 수가 없었다. 오직 허망 한 가슴을 부여안고 그저 맥없이 소림사의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백방생은 밖으로 걸어 나가는 동안 혹은 들떠있고 혹은 우울해져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러나 마치 넋이 나가 있는 사람처럼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 뒤를 묵묵히 따르는 황진의와 당리도 역 시 말이 없었다. 백방생은 곧장 당리, 황진의와 함께 증평이 살던 그 집을 찾아 보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집은 이미 텅비어 있었고 누구의 기척도 없었다. 백방생은 이미 그녀가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체 증평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마을에 가서 맡겨둔 말들을 찾아 가지고 백방생은 곧장 두 여인과 함 께 낙양으로 달렸다. 별로 할 일도 없어서 일행은 밤새도록 천천히 말 을 몰았고, 그리하여 오히려 다소 빠르게 다음날 아침 무렵에는 낙양 에 많이 가까와져 있었다. 별로 쉬고 싶은 마음도 없고 하여 일행은 그저 간단한 음식만을 시켜 서 먹고는 계속 길을 재촉했는데, 드디어 정오 무렵에는 백방생의 장 원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집사를 비롯하여 하인들은 일제히 나와서 세 사람을 맞이했다. 백방생의 장원은 아직 건재했다. 백방생은 그래도 이렇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니 아늑한 기분을 느 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피로감을 느꼈다. 내상을 입었던 것을 아직 조식하지 않아서 인가"여기까지 올 때에는 몰랐는데 막상 이곳에 도착해 보니 이상하게 전신이 무력하고 졸음이 쏟아졌고 그것은 두 여 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단순히 간밤을 꼬박 새며 여행했고 또한 그 전날밤도 자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으레 무림인 들은 체력이 강하며, 최소한 황진의와 같은 정도만 되도 설령 열흘동안을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해도 이토록 무기력해 지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 다. 백방생은 아직 몸을 씻지도 않았고 식사도 하지 않았지만 그저 사흘 밤낮은 쉬지않고 잠을 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본채로 올라가자 침상에 누워 죽은 듯이 사흘밤낮을 계속 잠자기 시작 했다. 시녀들은 여러번 그의 곁에 와 보았으나 감히 백방생의 잠을 깨우 지는 못했다. 백방생이 이윽고 사흘동안의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머리맡에 당리가 산뜻하고 고운 차림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백방생이 일어나자 곱게 웃으며 말했다. "지난 사흘간은 당신께서 혹시 아프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얼 마나 열심히 주무시는지..., 우선 씻으셔야 겠죠?"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침무렵이었다. 몹시 시장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일단은 몸을 씻어야 할 것 같았다. 백방생은 즉시 옆의 욕 실에 들어갔다. 당리는 굳이 그의 몸을 밀어 주겠다며 따라 들어왔다. 욕실에는 이미 맑고 깨끗한 물들이 알맞은 온도로 잘 데워져 있었다. 욕실은 넓었고 욕탕속의 물도 양이 많았다. 백방생은 그간의 온갖 때를 다 씻어낼 작정으로 풍덩 그 욕조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당리도 옷 을 벗고 알몸이 되어 그를 따라 욕조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알몸은 정 말 아름다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말라 보였지만 그러나 기실 벗은 모습을 보면 군살이 하나도 없이 곳곳에 아름답고 강한 여자만의 근육 이 보이고 또한 육체는 부드럽고 탄력있었으며 잘록한 허리에 비해 두 개의 허벅지와 엉덩이의 윤곽은 너무나도 잘 발달하여 지극히 육감적인 느낌을 주었다. 실로 그녀는 가장 매력적이고 육감적이며 실속있는 여자 로서 누구에게도 능히 욕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백방생은 때 를 씻으려고 욕조안으로 들어갔으나 오히려 방향을 바꾸어 그녀의 몸 을 어루만지게 되었고, 그리고 이어물속에서 그녀와 아름다운 사랑을 나 누게 되었다. 당리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처럼 그에게 안겨들었 으며 매우 행복하고 순종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 뜨거운 사랑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 잠시 쉬고 있는 사이에 백방 생은 그녀의 몸을 만지며 말했다. "그래, 그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소?" 당리는 그의 몸을 부드럽게 밀어주며 대답했다. "상공, 저는 황언니와 후채에서 머물고 있는데 편의를 위해서 시녀 두 사람을 더 고용했어요. 그 이외의 다른 일은 없어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집의 안주인은 당신이니 앞으로 그 예금장부에서 필요한 금 액을 찾아쓰도록 하고 사소한 일들은 당신이 알아서 하구려. 헌데, 그 황낭자는 아직도 가지 않고 있소?" 당리는 문득 몸을 가늘게 떨더니 말했다. "저는, 사실 매우 바보예요. 상공께서 만일 그녀와 맺어지신다면 저를 소홀히 하실 것인데, 그런데도 굳이 두 사람을 맺어 주려고 하다니." 백방생은 사랑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그렇소. 당신은 아주 바보요." 당리는 백방생이 목욕을 하는 동안 계속 찬찬히 시중을 들었다. 그리 고 이윽고 그가 새옷으로 갈아입도록 한 다음에 함께 식탁이 있는 곳 으로 나왔다. 식탁위에는 이미 풍성한 음식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백방생 은 시장기를 느끼자 정신없이 퍼 먹었다. 그리고 이어 식사를 마치자 서재로 들어가서 좌선명상으로 운기조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내상의 흔적과 수일간의 피로를 말끔히 풀 수가 있었다. 이윽고 그가 운기조식을 마치고 거실로 나가자 집사가 와서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백방생이 그와 얘기를 나누고 나서 후채로 가자, 후채의 후원에서는 한창 당리가 황진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 방생을 발견하자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켰는데 황진의가 웃으며 먼저 말 했다. "그간 신수가 더욱 훤해 지셨네요. 살도 좀 더 빠지신 것 같고, 혹시 그동안 어디 즐거운 곳에 다녀오신 것이 아니예요?" 황진의의 모습은 여전했으나 왠지 다소 초췌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녀 는 본래 살이 많지 않은 여자였는데 다소 야위게 되자 더욱 애처로운 느 낌을 갖게 했다. 당리는 이에 반해서 행복감으로 안색이 화사하게 피 어나고 있는 모습이었다.그녀는 바로 조금 전에도 낭군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래 무슨 얘기들을 나누고 있었소?" 당리가 말했다. "신화제국에 관한 얘기예요. 저는 그 천선이 왜 자신의 자손인 천륭무가 주를 죽이면서까지 그런 연극을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백방생은 황진의를 돌아 보았다. "황낭자는 무슨 말을 했소?" 황진의는 말했다. "천선이 그런 거대한 야망을 실천하려면 대의명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 죠. 그런 것을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라도 할 수가 있었을 거예요. 하 지만 저는 거기에 우연이 곁들여졌다고 생각해요." 백방생은 말했다. "우연이라니?" 황진의는 말했다. "그러니까 그 석장생은 아직 그 천형(天刑)을 벗어던지지 못한 거 죠. 이를테면 그는 이미 거의 죽은 목숨이기에 조상을 위해 희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당리가 말했다. "헌데 어째서 그 천륭무가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림사에서 연공을 계속했던 거죠?" 황진의는 다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에 관한 사실을 모두 밝히려면 아마도 쉽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미 신화제국의 힘이 뻗치고 있으니 쉽게 말할 수도 없고." 백방생은 말했다. "지금 그들의 동태는 어떻소?" 역시 정보에 밝은 황진의가 말했다. "그들은 지금 옛날의 정의맹의 총단이 있는 복우산(伏牛山)에 새롭고 거 대한 신화제국의 총단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어요. 세외오세의 세력은다시 해외(海外)로 쫓아버렸다고 하고, 지금 신화제국을 건설하고 있는 실질적 인 기둥은 바로 천상회(天上會)죠." 백방생은 이미 천상회의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 이 있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시녀 두사람이 차를 날라왔고, 당리는 새로 채용한 그 두명의 시 녀를 백방생에게 인사시켰다. 백방생은 그 인사를 받고 나서 이윽고 시 녀들이 물러간 뒤에 황진의에게 말했다. "성수곡은 어떻소"그리고 무림맹은 아직도 존재하오?" 황진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 성수곡은 본래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 래서 돌아가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무림맹은 이미 무너졌고 또한 무너지 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되었을 거예요." 백방생은 무림맹이 무너졌다고 하자 문득 다시 지공의 생각과 함께 용천기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 백방생은 용천기와 미처 인사도 하지 않고 소림사를 떠나 왔었다. 용천기는 그렇다면 신화제국에 협조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달아난 것인가"하지만 황진의의 모습이 애 처롭게 보여서 차마 그러한 것을 지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당리가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죠?" 백방생은 얼어붙은 연못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음,일단은 한번 복주에 내려가 봐야 하겠소. 가서 부모님의 묘소에 성묘도 하고, 그리고 가능하면 달마하원을 재건할 수 있었으면 하오." 황진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제는 그쪽으로 가는데 방해하는 사람들이 없겠군요?" 당리가 다소 주저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듣기로, 진소저의 혼인식은 일년후로 연기 되었다고 해요. 설날에는 신 화제국의 개창식이 있고, 그리고 곧장 그 석륭안이 폐관에 들어간다는 것이죠."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소 흐린 듯한 하늘을 올 려다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날이라?,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겠군." 백방생이 좀더 그녀들과 얘기를 나누며 후원을 걷고 있는데 문득 집 사가 나는 듯이 달려와서 말했다. "손님들이 찾아 오셨습니다." "손님이?" 백방생은 자신을 찾아올 손님들이 없다고 생각되어 내심 의아해 하며 두 여자와 함께 객청으로 향했다. 객청으로 가 보니 과연 두 명의 손 님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일남일녀였고 모두 얼굴이 낯설 었다. 백방생은 다가가서 말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오신 누구신지, 소생이 미처 알아볼 수가 없구 려." 그러자, 문득 두 사람이 크게 웃으며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두 사람 의 안면이 변화를 일으키며 낯익은 사람들로 변했다. 기실 그러한 진 기를 이용한 역용술(易容術)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은 것으로 축골법(縮 骨法)에 기초를 둔 것이었으나 백방생은 아직 경험이 적어서 알아보 지 못한 것이었다. 나타난 사람들은 바로 용천기와 지공이었다. 백방생은 그들을 보게 되자 그만 기쁘고 반가와서 소리쳤다. "아니 이럴수가"쇠신발이 닳도록 찾아 다녀도 찾을 수 없을 듯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손수 와 주다니, 이게 대체 꿈이요 현실이요?" 용천기는 즉시 다가와서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현실이오. 아 현실이니까 우리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 아니오?" 지공은 여자로 분장하고 있어서 얼굴에 지분까지 바르고 있었다. 머리 에 두른 두건까지 벗어버리자 그의 괴이한 모습에 백방생은 절로 배꼽 이 아프도록 우스울 정도였다. 백방생은 지공과 인사를 나누었고 황진의 와 당리도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당리는 시종 편안한 표정이었으나 황진의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안색이 다소 붉어졌으며 겨우 용천기와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55 장 은거(隱居) 다섯명의 사람이 둥글게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자리하자 시녀들이 빠 르게 다과를 내 왔다. 이윽고 차를 마시면서 백방생은 말했다. "강호의 소식은 대강 접했소. 헌데 증낭자는 저번에 가 보니 다른 곳 으로 가버렸더구려. 스님께선 혹시 그녀를 버린 것은 아닙니까?" 지공은 가볍게 웃을 뿐 말이 없었다. 용천기가 대신 말했다. "그녀는 이미 그 돌중의 아이를 배고 있는데 그가 어떻게 그녀를 버 릴 수가 있겠소"그녀는 지금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백방생은 말했다. "듣자니 무림맹이 무너졌다고 하던데 그래 두 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용천기는 그러나 황진의와는 달리 태도가 어색하지도 않았고 또한 여 전히 태연했다. 오히려 그 호방한 기질은 과거보다 더욱 강해진 것 같 았다. 용천기는 슬쩍 황진의 등을 돌아본 뒤에 말했다. "사실은 그 일 때문에 이렇게 온 것이외다. 우리는 지금 신화제국에 대항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는 있지만 정작 필요한 사람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온 것이오. 백형께서는 부디 우리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시오." 백방생은 그들이 정색을 하고 나오자 은근히 마음이 당황해 졌다. "무슨 부탁이십니까?" 용천기는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말했다. "부디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주시오?" 백방생은 크게 당황해 져서 그 자리에 일어나 마주 엎드리며 말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생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군요." 용천기는 말했다. "그럼 백형은 천하를 구할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까?" 백방생은 말했다. "천하를 구할 생각이야 있지요. 하지만 저를 지도자로 삼는 다는 것은 천만부당하군요." 용천기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지금 즉시 우리와 함께 가시겠소?" 백방생은 마주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용천기는 말했다. "아직 거처가 정해진 곳은 없소. 하지만 우리가 가는 곳이 곧 우리의 거처가 될 것이오." 용천기는 말과 함께 황진의와 당리를 돌아 보았다. 혹시 그녀들이 무 슨 말을 하는가 해서였다. 그러나 그 두사람은 그저 잠자코 앉아 있기만 했다.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나와 같은 사람은 별로 쓸모가 없는데 어째서 굳이 나를 데려가려 고 한다는 말이오?" 용천기는 눈빛을 빛내면서 말했다. "백형께선 너무 겸손하시군요. 저번에 사실 우리 모두는 백형의 진정한 능력을 보았소. 백형의 능력은 사실 그 석장생의 아래가 아니었소. 바 로 그러한 분이 우리들의 지도자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소?" 백방생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용형께서는 그만 사람을 잘못 보셨군요. 저의 능력은 석장생과 비교할 수는 없지요. 게다가 한 문파를 이끄는 일은 그저 무공만으로 되는 것 은 아니지 않습니까"역시 그 무리는 용형께서 이끄셔야 하겠군요." 용천기는 뚫어지게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말했다. "그럼 백형께서는 우리 영웅회(英雄會)의 산하에 들어 오시겠다는 말씀 이오?" 확실히 이 용천기는 비단 무공뿐만 아니라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불과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그는 어느새 새로 한 집단을 결성하고 발빠 르게 이름까지 지어놓고 있는 것이다. 보나마나 그가 그 영웅회의 회주 (會主)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과연 그 영웅회에는 어떤 사람 들이 있는 것일까"백방생은 내심 궁금하기도 했지만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냥 이곳에 남기로 하겠습니다." 용천기는 탁자를 쾅, 하고 내리치며 소리쳤다. "아니, 방금전에 백형께선 우리와 뜻을 함께 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소생은 그저 그런 뜻이 있다고 했을 뿐이지요. 스님께서도 들으셨을 것입니다." 용천기는 일순 분노하여 안색을 변화시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귀하는 정녕 천하를 이대로 좌시하겠다는 말이오"내가 정말 로 사람을 잘못 보았군?"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실 당신들이 나를 어떤 영웅쯤으로 보았다면 그건 잘못일 것이오. 이미 전에 천선에게도 말했지만 나는 그저 이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오. 솔직히 천하를 구할 생각은 별로 없소. 그저 이곳에 서 편안히 살고 싶은 필부일 뿐인 것이오." 백방생의 말에 용천기와 지공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리와 황진의까지 안색이 변했다. 용천기는 즉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갑시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군." 용천기는 이어 신형을 돌리더니 걸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지공도 이윽고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집사가 잠시 후에 달려 오더니 그 용천기와 지공이 이미 떠났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백방생은 잠시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윽고 길게 탄식하며 몸을 일으켰다. 백방생은 다소 무거운 안색을 하고 본채로 걸음을 옮겼다. 당리와 황 진의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문득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황진의에 게 말했다. "어째서 당신은 당신의 사형을 따라가지 않소?" 황진의는 그 말에 안색이 변했다. "제가 떠나기를 바라나요?" 백방생은 그녀를 주시하며 말했다. "낭자가 나의 내자에게 잘 대해주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이제 그 용천기와 나와의 사이는 벌어졌소. 따라서 이제 낭자와의 사이도 정리 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니오?" 황진의는 문득 두 눈이 눈물로 그렁그렁해 졌다.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를, 정말로 그렇게 보시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이미 보았다 시피 그는 일개 영웅호걸이고 나는 그저 비겁한 소인배 일 뿐이오. 그러니 낭자도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오. 나는 소인배이 기때문에 마음이 그다지 넓지 못하오. 솔직히 이제는 친구도 아닌 남 의 여자를 잘 대해 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백방생은 말이 끝나자 신형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 당리와 황진의는 그 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백방생이 본채의 거실에 올라갔을 때 이윽고 당리가 따라왔다. 그녀는 눈물마저 글썽이며 말했다. "상공,조금전엔 너무 하셨어요.그녀는상공을 아주 많이 생각하고 있는 데 그런 심한 말을 할 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탁자위에 놓여 있는 식은 차를 따라서 마시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용천기와 적이 되었고 또한 많은 무림인들의 지탄을 받게 될 텐데, 그런 여자마저 용납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그 녀도 이젠 떠나야 할 것이오." 당리는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제까지의 정리를 봐서 좀 더 좋게 헤어질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탄식하며 말했다. "어차피 그녀는 적의 여인이 될 것이니 상관이 없소. 즉 그녀도 적이 되는 것이지. 게다가 이런 남녀의 관계라는 것은 극단적인 것이라, 가까 울 때는 가깝지만 멀 때는 아주 먼 것이 좋소. 아리, 당신은 그녀보다는 이제 다른 한 사람을 걱정해야 할 것이오." 당리는 말했다. "그건 누구죠?" 백방생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대의 지아비인 이 사람이지. 앞으로 무공이 높다고 해도 모든 영웅호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니 어찌 걱정되지 않겠소?" 당리는 그 말에 문득 달려와 그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그건 걱정말아요. 세상에서 오직 저 하나만은 당신의 편이 되어 드리면 되지 않나요"당신이 설령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저는 오 직 이미 당신의 편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사천당문, 즉 당신의 친정에서 나를 헐뜯어도 말이오?" 당리는 안색을 굳히더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친정집과 저와의 관계는 이미 끊어졌어요. 전 팔 려온 것이고 상공께선 저를 사셔서 잘 대접해 주고 계시는 거죠. 저는 이제 오직 당신의 사람이지 어느 누구의 사람은 아니예요. 이것은 한평생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제가 이 맹세를 어긴다면 죽어서 지옥의 유황불속에 영겁으로 태워진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거예요." 백방생은 그제서야 그녀의 몸을 안으며 입을 맞추고 말했다. "좋소. 하지만 그런 험한 맹세를 할 필요는 없지. 역시 이 세상에서 나의 동반자는 그대 뿐이오." 그 때 문득 황진의가 거실로 올라왔다. 백방생은 당리를 놓아주고 함께 자리에 앉았다. 황진의는 다소 머뭇거리는듯 했으나 이윽고 백방생의 앞에 와서 앉았다. 그녀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듯 하다가 말했다.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마지막 부탁이라고 하면 들어 주겠소." 사실 황진의는 백방생에게 많은 도움을 주어 왔으므로 그런 부탁쯤 은 들어줄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황진의는 말했다. "마지막 부탁이라고 해도 좋아요. 제가 말하는 부탁이라는 것은, 제가 당신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으면 하는 거예요." 백방생은 다소 의외인 듯이 말했다. "겨우 그거요"난 또 돈이라도 달라고 하는 줄로 알았는데. 그런 것이라 면 간단하지. 어디가 좋겠소, 장소는 당신이 골라 보시오." 황진의는 주위를 둘러 보다가 서재를 가리켰다. "저 곳이 좋겠군요." 당리는 황진의가 일부러 부탁까지 한 상황이므로 이내 몸을 일으켜서 내려가 버렸다. "그럼 저는 잠시 후원에 가 있겠어요." 황진의는 귀를 기울여서 당리가 완전히 후원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 한 후에 서재로 들어갔다. 백방생은 의자위에 앉으며 말했다. "자, 이제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황진의는 약간 머뭇거리는듯 하다가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백방 생은 그것을 보고 놀라서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짓이오?" 그러나 황진의는 이내 옷을 다 벗어버렸다. 지금은 환한 대낮이다. 햇 빛아래 그녀의 아름답고 은밀한 육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의 온 몸은 정말 아름다왔고, 그 점에 있어서는 결코 당리와 비교될 바가 아 니었다. 사실 용천기가 말한 대로 그녀는 최고의 여자임에 부인할 수가 없는것이다. 잘룩한 허리 아래로 은밀한 부위가 수치스러움으로 놀라서 소스라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저의 알몸을 보인 일이 없어요. 당신은, 이제야 저를 용서하시겠나요?" 백방생은 도무지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당황해 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어서 옷을 입으시오." 황진의는 그 말에 순순히 다시 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마주 앉 으며 말했다. "제가 조상의 지시를 받고 당신을 치료했던 일은 나쁜 뜻이 있었던 것 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제가 처음부터 그 일을 속여왔던 것은 당신이 화가 날만 해요." 백방생은 그제서야 겨우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왠지 아직도 그녀의 벗은 알몸이 어른거리는 것 같아서 안색을 붉히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그런 일로 화가 난 게 아니오. 다만...." 황진의는 말했다. "다만 저를 적으로 간주했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궁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당신이 용천기를 사랑하니까 그렇지. 헌데, 헌데 방금 그런, 그 런 짓을 하다니 그것은...." 황진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미 당신께 알몸을 보였으니 용사형에게 돌아갈 수가 없다는 뜻인가요"호호, 그것은 염려 마세요. 사실 저는 이미 그에게 돌아가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으니까요." 백방생은 의아해 졌다. "그럼 이젠 그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예요. 저는 처음에는 용사형을 몹시 사랑하 고 있는 줄로 알았죠. 또한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도 당신을 만난 이후에 그토록 사무치는 듯한 그리움이 왠지 적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게다가 어느 날 제가 용사형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 강 남으로 내려갔을 때의 일이었어요. 저는 아직 용사형을 찾지도 못했는 데 갑자기 당신의 소식이 궁금해지는 것이었어요. 혹시 당신이 그 사이 에 누군가에게 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던 거죠." 황진의의 말은 조용하고 평이하여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백방생은 그녀 의 말을 들으며 기이해서 가끔 상기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 다. 황진의는 말을 계속 했다. "헌데 이상한 일이었어요. 일단 그런 걱정이 들자 왠지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잠도 잘 오지 않았으며 용사형의 일도 관심이 없어 지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밤낮을 달려 그 길로 쉬지않고 곧장 당신 을 찾아 돌아왔던 것이죠."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서 당시 그대의 모습이 그토록 초췌해져 있었던 것이었군?"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저도 당시에는 저의 그러한 혼이 빠져버린 듯한 심정을 잘 알지 못했 죠. 다만 제가 호법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런데 막상 제가 그 뒤에 용사형을 만났을 때의 일이었어요. 이상하게 도 그 용사형이 몹시 낯설고 서먹하게 느껴졌던 것이예요. 저는 그래서 크게 속으로 당황해 했어요. 제가 그동안 사랑했던 그 감정은 다 어디 로 가 버린 것일까"하고요." 백방생은 의아해 하며 말했다. "그 용천기는 그야말로 사내대장부들 가운데의 영웅이고 사랑할 만한 사람인데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단 말이오"그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것이 아니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당시 이미 용사형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 죠. 하지만 당신을 만난 것이 문제였어요. 왠지 당신을 보고 난 이후에 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가치없게 느껴져요. 저는 사실 용사형을 다시 보 고 갑자기 실망을 느끼게 되어 당황했던 거예요. 게다가 그제서야 제가 실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백방생도 기실 전날 소림사의 대웅전 앞뜰에서 용천기와 황진의가 나눈 대화를 엿들었기 때문에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러나 어리둥 절해 져서 말했다. "그럼 당신은 지금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옷을 벗어보일 바보같은 여자도 있단 말인가요?" 이어 황진의는 갑자기 백방생에게 다가와서 그의 품속으로 안겨들었 다. "저를 버리지 마세요, 정랑(情郎)! 저는 이미 용사형에게 마음을 두 고 있지 않고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에게 어디로 가 라고 하시는 거죠"만일 그대께서 저를 버리신다면 저는 그저 절에 들어 가서 비구니가 되는 수밖에 없어요. 성수곡의 일은 이제 저와는 상관도 없답니다." 다소 야윈 듯한 황진의의 그러한 말과 눈빛은 단숨에 백방생의 가슴 을 녹여버릴 것 같았다. 백방생은 당황해 져서 말했다. "그대의 마음이 그렇다면 나 역시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나는 이미 여자가 있는데 어떻게 그대를 또 받아들일 수가 있겠 소?" 황진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장부에게 삼처사첩은 흉이 되지 않아요. 당리동생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것이므로 염려하지 마세요. 저에게는 오직 당신의 사랑만이 중요 해요." 황진의는 말과 함께 그의 입술에 자진하여 입을 맞추었다. 백방생은 내심 그녀의 알몸을 보고 흥분하고 있었던 터라 즉시 그녀를 껴안지 않 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껴안고 격렬 하게 입을 맞추며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은 뜨 거웠고 또한 기실 오래전부터 깊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 이제서야 서로 확인되고 불이 붙은 것이다. 백방생은 도저히 그것만으로 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그녀를 안고 침실로 향했고 황진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소곳이 따랐다. 이윽고 침실에서 행해진 두 사람의 사랑의 행위는 뜨거웠으며, 그러나 황홀감보다는 편안한 행복감이 두 사람의 마음에 가득하게 했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었는 지도 모른다. 잠시후에 백방생은 침상위에 누운채로 나른하게 황진의의 알몸을 어루 만지며 말했다. "나는 바보요. 당신을 내쫓으려고 했으니, 나는 그랬다면 필시 후회하게 되었을 것이오." 황진의는 계속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당신은 저를 시험해본 것이죠. 저 를 버리실 분이 아니었다는 것을알고 있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저를 시험하지는 마시고 오직 이끌고 사랑해 주세요. 저는 당신이 하라고 하 시면 설사 지옥에라도 가겠어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정말 그대는 좋은 사람이군. 하지만 이 일을 아리가 알게 되면 어떨 까 걱정이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당동생은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신 경쓰시지 않게 제가 잘 처리하겠어요. 앞으로 우리가 자매처럼 친하게 당신을 모시면 되지 않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야 무슨 걱정이 있겠소. 헌데 아진(阿眞)! 앞으로 정말 나와 같은 사람과 살게 되어서 후회가 없겠소?" 황진의는 말했다. "저는 행복해요. 왜냐하면 당신은 저의 혼을 빼앗아간 분이시고 또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신 분이니까요. 사실 아까 용사형은 당신께 너무 결례를 범했던 거예요. 저는 알고 있으면서 속으로 화도 났지만 참고 있 었던 거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그가 무슨 결례를 했단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사실 상공께서 그들과 어울리지 않으시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도우 려는 것이죠. 당금의 천하에서 세외팔선이 주목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상공뿐이죠. 그들은 무슨 자칭 영웅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거창하게 움직 이고 있으나, 만일 세외팔선이 주목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도 살아남 지 못했을 거예요. 상공께서는 그래서 자신이 그들과 어울릴 경우 그들 에게도 피해가 돌아가게 될까봐 스스로 필부가 되어 이곳에 남으시려는 거죠. 상공께서는 그러한 뜻을가지고 있는데 그 바보같은 영천호걸들이 대체 무엇을 알겠어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 용천기는 그래도 그대의 사형이라고 하는데 그런 말은 다소 너무한 것이 아니오?" 황진의는 말했다. "사실 제가 당신을 만난 이후에 견식이 넓어진 것 같아요. 오늘 보니 그는 비단 무례할 뿐만 아니라 독선적이고 오만하고 고집스러우며 이 기적인 야심으로 가득차 있었죠. 대체 그런 사람을 내가 어째서 그렇게 관심을 두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는오늘 상공과 적이 되었으니 이제는 나와도 적이 된 거예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 얘기를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웃겠소. 천하에는 실로 그러한 사람도 많지 않으니까. 어쨌든 당신이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니 고맙소. 사 실 나도 당신을 떠나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소. 나도 사실 당신을 몹시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오." 말이 끝나자 백방생은 다시 그녀를 안았다. 또 한번의 뜨거운 사랑의 순간이 지나갔다. 지금은 대낮이지만 서로가 깊이 사랑하고 절실한지금 은 그러한 격식은 필요하지 않았다. 무공이 높은 두사람은 몸이 피로 해질 정도로 끝없이 사랑을 나누고 이어 함께 단잠에 빠져들었다. 백방생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저녁무렵이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옆에 누워있는 사람은 황진의가 아니라 바로 당리였다. 백방생이 어리둥 절해 하자 당리가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황언니의 얘기를 다 들었어요. 저는 물론 우리가 함께 사는 것을 원했지만 정말 질투가 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네요. 만일 당신이 또 저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저는 화가 나고 말 거예요." 백방생은 속으로 크게 뜨끔하여 중얼거렸다. (이크,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백방생은 흡사 꽃뱀처럼 휘감겨 드는 당리의 유혹에 견뎌낼 수가 없 었다. 그는 한참동안이나 그녀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고생을 해야 했 다. 이윽고 백방생이 간단하게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거실로 나가자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황진의와 당리가 어느새 산뜻한 차림새로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 두 사람의 모습이 더욱 아름답고 유혹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두 여자의 표 정은 어느새 차분하고 조용해져 있었다. 백방생은 그녀들의 앞에 앉으 며 말했다. "내가 너무 늦은 것이 아니오?" 백방생은 사실 상황이 달라지게 되자 함께 자리하는 것이 다소 어색 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황진의가 정색을 하고 미소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상공, 우리는 이미 친자매처럼 서로 돌보며 상공을 모시기로 했어 요. 모든 일은 상공의 뜻에 따르며 조금도 어기지 않겠어요. 비록 아직 혼인의 예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그러나 서로 굳은 마음이 있는 만큼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백방생은 황진의가 그렇게 말해주자 부담을 덜게 되어 미소하며 말했다. "좋소. 아진! 아리! 그대들은 모두 똑같이 나의 부인들이오. 나는 그 대들을 맞이하여 사랑하고 성실하게 보살펴 줄 것이오. 앞으로 집안의 사소한 일들은 그대들이 의논해서 정하도록 하고, 그리고 혼인식은 나중 에 좀 더 편안해졌을 때에 하도록 합시다." 당리가 품속에서 예금장부와 인장등을 꺼내서 황진의에게 내밀며 말했 다. "그럼 이것은 언니가 맡도록 하세요. 아무래도 위 아래가 있어야 할 테 니까요."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그건 그냥 동생이 가지고 있도록 해. 나도 돈이 없는 것은 아 니니까." 백방생도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아진에게는 내가 또 돈을 맡겨두면 되니까." 말과함께 백방생은 품속에서 자신이가지고 있던 금표봉투를 꺼내 황진 의에게 주었다. 그 봉투속에는 전날 황진의가 인출했던 이십구만냥의 황 금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백방생은 황진의가 그것을 받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나는 또 얼마든지 돈을 구할수가 있으니 두사람은 각기 그 안에서 돈 을 쓰도록 하고 또한 그것으로 각기하고 싶은 일을 해도 무방하오. 그리 고 만일 부족하다면 더 달라고 하구려." 당리와 황진의는 함께 기뻐하며 미소했다. "우리는 이렇게 돈이 많고 능력있는 남편을 두었으니 정말 걱정이 없겠 군요." 세 사람은 웃으며 함께 식사를 했다. 그 분위기는 애정과 평화가 넘쳐 흘러서 화락(和樂)했다. 황진의가 이윽고 다시 말했다. "제가 들은 바로는 그 영웅회는 녹림맹(綠林盟)과 만화교(萬花敎)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정사 중간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어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이오. 헌데 오대세가의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공을 폐지 시키지 않은 사람들이겠구려?" 황진의는 말했다. "예. 남궁검민과 제갈승지, 그리고 팽호, 팽걸 등이지요. 헌데 상공께서 는 정말 강남으로 내려가실 생각이신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에..., 지금은 별로 할 일도 없고 하니 함께 갔다오도록 합시다." 황진의가 다시 말했다. "근자에 이상한 소문이 하나 들리고 있어요. 당신은 아시나요?" 백방생은 그녀를 바라 보았다. "이상한 소문이라니?" 황진의는 말했다. "그 날 소림방장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지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천선의 짓이었다는 거예요." 백방생은 다소 놀라며 말했다. "거기에 무슨 근거라도 있소?" 황진의는 말했다.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도액선사는 만화교의 교주와 은밀히 사귀다가 지공화상을 낳게 되었죠. 그런데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천하의 웃음거 리가 될 것이므로 천륭무가주가 그것을 이용하여 협박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비밀을 지켜주는 댓가로 소림사에서 연공을 할 수 있게 하 고 또한 달마하원에 서신을 보내게 한 거죠. 하지만 결국 소림방장은 이 미 나중에 그 얘기가 밖으로흘러나간 것을 알고 천륭무가의 음모를 공 개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바로 그것 때문에 천선은 나타나자 마자 우선 그 부터 죽여버린 것이죠." 당리가 말했다. "천륭무가의 음모라니, 그건 대체 뭐죠?" 황진의가 말했다. "그 역시 소문이므로 확실한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그 석장생은 오히려 소림사에서 연공(練功)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거야." 당리가 의아해 져서 말했다. "아니 그가 소림사에서 연공을 하지 않았다면 대체 무엇을 했다는 거 죠?" 황진의가 말했다. "그는 단지 연극을 한 것이지." 당리는 더욱 의아해 져서 눈이 그만 휘둥그래 졌다. "연극이라고요?" 황진의가 말했다. "애초에 그가 달마역근경으로 천형을 해소하겠다는 자체가 엉뚱했다는 거야. 만일 그게 가능했다면 이번에 석륭안이 어째서 또 그런 연공에 들 어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폐관수련을 하려고 하겠어"게다가 누군가의 설명에 의하면 석장생이 연공을 한 흔적이 없다는 거야." 당리는 눈이 동그랗게 변하여 말했다. "그럼 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런 연극을 했다는 거죠?" 황진의는 말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이 이른바 천선 등이 등장하기 위한 명분을 만 들기 위해 필요했다는 거야. 즉, 일부러 천형을 해소한다고 해놓고 세외 오세를 불러들이고, 그리하여 무림을 혼란속에 빠뜨리고 구세주로서 천 선 등이 나타난 것이지." 당리는 입을 딱 벌렸다. "그렇다면 굳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달마하원에 연락을 하고, 또한 세 외오세를 나타나게 하여 달마하원을 멸망시켰다는 말인가요?" 황진의는 말했다. "그것은 아마 대내외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일 거야. 혹 시 다른 목적이 있을 지도 모르지." 당리는 말했다. "다른 목적이라뇨?" 황진의는 말했다. "그저 간단하게 보기에는 우선 소림사와 달마하원 사이의 거리가 너무 나도 멀고, 또한 세외오세가 한편이라면 애초부터 그들이 그렇게 잔인하 게 행동할 수가 없다는 거야." 당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맞아요! 저도 그 세외오세의 사람들이 모두가 무공만 폐지되었 을 뿐 다친 사람들이 없고, 또한 그들도 본국으로 가서 무공을 회복시 켜 줄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황진의는 말했다. "결국 상공의 부모님, 아니 이제는 우리의 시부모님이 되시지. 그 분 들은 어떤목적에 의해 세외오세나 혹은 세외팔선에게 목숨을 잃게 되었 을 지도 몰라. 아니 상공께서도 그때 다치셨던 것이고." 당리는 눈빛을 빛냈다. "하기는 세외오세와 세외팔선은 모두 한통속이니까요. 그럼 상공의 원수는 그 천선 등이 되는 건가요"헌데 그 원수는 어떻게 갚죠?" 황진의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백방생을 바라보았다. 백방생은 그저 묵묵히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그는 또 무엇 때문에 굳이 강남으로 가 보자는 것일까 "그는 정말로 절망에 빠져서 모든 희망과 복수를 포기한 것일까" 황진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외팔선은 오랜 시간동안 모든 것을 철저하게 조사해 보고 등장한 것이야.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상대할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수가 있지." 백방생은 그 뒤로 이삼일을 더 쉬면서 장원을 정리했다. 그는 이미 은 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장원을 싼 값에 팔아 버리고 금포의 금 고에서 숨겨놓은 예금장부들을 모두 찾았다. 그가 예금장부를 모두 찾 은 것은 일단은 그다지 위험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 그들은 어느날 마차를 타고 남쪽으로 길을 떠나기 시작했 다. 백방생의 그러한 결정에 황진의와 당리는 물론 군말없이 따라 주었다. 마차는 가능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천천히 남하했고, 그리하여 일행은 거의 한달이나 지나서 복주성의 부근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무렵에는 복우산에서 신화제국의 개창이 선포되고 있었고 복주성에 만 해도 흰눈이 내리는 가운데 신년새해가 시작되는 때였다. 백방생과 그의 두 부인들은 신화제국의 개창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상관할 것이 없었고 다만 설날에 눈이 내리자 다소 마음의 위로를 받는 기분들이었 다. 그 동안에 그들의 사이는 더욱 단란해 지고 화목해 져서 이미 모두가 거의 한 몸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게다가 그 두 여자는 이미 임신을 하여 초기에 있었다. 그러한 점들이 답답한 백방생의 마음에 어 느 정도의 위안을 주기는 했다. 백방생은 먼저 백노야의 장원에 들렀는데, 그곳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었다. 문득 과거의 회상에 잠기다가 이윽고 달마하원 으로 가니, 그곳은 정말로 완전히 폐허가 다 되어 있었다. 과거에 그토 록 웅장하고 화려하던 건물들은 모두 불타고 무너져서 흔적을 찾을 수 가 없고 온갖 불상들이나 장경각(藏經閣)의 서책들도 모조리 불타 버 리고 없었다. 그토록 웅장하고 화려하며 많은 승려들로 북적거리던 이 고찰이 이 런 폐허로 변해 버릴 줄이야 누구도 예상을 못했었을 것이었다. 백방생 은 곧장 부모와 조부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성묘를 하고 향화를 올 렸다. 56 장 피습(被襲) 그런데 마악 백방생이 향화를 마치고 한 모퉁이를 돌았을 때의 일이었 다. 갑자기 그들의 앞에 나타나 길을 가로 막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뜻밖에도 한 노승(老僧)이었는데, 용모도 보잘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 라 얼굴도 어찌나 늙었는지 온갖 주름살로 뒤덮여 있었다. "너희는 뭘 또 훔쳐가려고 이곳에 왔느냐?" 다짜고짜 그렇게 물어 오는 통에 그만 당리 등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 리고 말았다. 당리가 웃으며 말했다. "노화상, 우리는 뭘 훔쳐가려고온게 아니예요. 우리가 이런 곳에서 또 뭘 훔쳐가겠어요?" 노화상은 잠시 화려한 차림새의 세 사람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고개 를 끄덕였다. "하긴, 이 곳에는 이젠 훔쳐갈 만한 물건이 없지." 당리가 말했다. "노화상, 당신은 이 곳에 살고 있나요?" 노화상은 말했다. "그럼 여기에 살지 어디에 살겠는가?" 노화상의 차림새는 매우 추레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사는 것이 빈곤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노화상이 다소 멍청해 보이는 것을 보고 황 진의가 미소하며 말했다. "여기에 당신 말고 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노화상은 말했다. "있기는 있지만 그건 왜 물어보는 것인가?" 황진의는 말했다. "우리는 대시주로서 불공을 드리려고 해요. 그런데 일단 스님들을 보 아야 불공을 드리고 법사를 열든지 할 것이 아닌가요?" 황진의가 법사를 연다는 말에 노화상은 일순 눈이 휘둥그래 져서 다시 일행을 바라보았다. "저, 정말인가?" 황진의는 품속에서 작은 금원보(金元寶) 하나를 꺼내서 보여 주며 말 했다. "우리 부군(夫君)께서는 돈이 많으신 분이라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 예요. 만일 노화상께서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안내해 주신다면 이 원보를 드리죠." 그 금원보는 열냥짜리로서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저 법사를 연다고 해도 그것 하나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단지 수고비로 주겠다고 하자 그만 노화상의 눈이 휘둥그래 지고 말았다. 그는 믿기 어려운지 손을 벌렸다. "어, 어디 봅시다." 황진의는 즉시 그 원보를 노화상의 손에 건네 주었다. 노화상은 그 원 보를 한번 깨물어 보더니 진짜라는 것을 알자 이내 얼른 품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어서 따라 오시오." 비록 대단하지는 못하다고 해도 일단 화상이 살고 있으니 약간의 건 물과 사람들은 남아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이 잘못이었다. 일행은 즉시 그 노화상의 뒤를 따라 갔는데, 이윽고 두어 개의 야산을 돌고 보니 그저 한 채의 다 허물어져 가는 법당이 있을 뿐이었다. 기대했던 화상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낡은 단 위에 칠이 벗겨진 불상이 하나 올려져 있었고, 그리고 바닥에는 십여명의 거지아이들이 우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당리와 황진의는 백방생의 표정이 우울해 지는 것을 보고 가볍게 탄식 을 터뜨렸다. 거지아이들은 그 노화상이 웬 화려한 차림새의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을 보고 일순 의아해 하며 우르르 일행에게 몰려 들었다. 거지아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녀석들이 열 대여섯 정도였는데, 그들은 노화상을 보고 길을 가로막으며 놀리듯이 말했다. "화상! 저들은 또 누구지"왜 이리로 데려오느냔 말이야?" 그 노화상은 귀찮은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서 꺼져라! 밥값도 못하다니. 그리고 이 분들은 법사를 드리려는 분들이니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 "뭐라고, 법사를 연다고?" "하하, 정말 이거 웃기는데?" 거지아이들은 저마다 낄낄거리고 웃으며 일행의 주위로 다가섰다. 당리 는 성격이 냉정하여 그런 귀찮은 녀석들을 싫어했다. 그녀는 즉시 일장 을 날려 입구의 반쯤 무너진 난간을 후려쳤다. 그러자 느닷없이 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 돌난간이 박살이 나서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 고 음흉한 눈빛을 하고 달려들던 거지아이들은 그만 겁을 집어먹고 놀 라서 달아났다. 하지만 으악, 소리와 함께 달아났던 그녀석들도 잠시 후에는 다시 근처로 몰려와서 훔쳐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백방생은 황진의와 당리와 함께 그 법당의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낡고 많이 파손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붕이 멀쩡하여 능히 비바 람을 막아줄 만 했다. 백방생은 잠시 그 낡은 불상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탄식을 했다. 실로 이곳이 과거에 그의 부친 같은 절대의 고수를 길러 낸 곳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법사를 하지 않겠소?" 따라 들어와서 질문하는 노화상을 보고 백방생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 그는 우선 법사는 집어치우고 모든 의문을 풀어 보기로 한 것이다. (본래 이 절은 너무나도 큰 절이기 때문에 지원(支院)이나 분원(分院) 들이 각처에 적지 않을 것이다. 세외오세가 그들마저 멸망시켰을리는없 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본원(本院)이 멸망되었다고 해도 이윽고 나타 나서 절을 간수할 사람이 있을터인데 어째서 이렇게 황폐하게 방치되 고 있는 것일까?) 모두 간단하게 바닥에 앉도록 한 다음에 백방생은 노화상에게 말했 다. "이 절에 다른 사람들은 없소"왜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이오?" 노화상은 말했다. "그거야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지."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이 절에도 본래 딸린 토지가 있었을 것이 아니오?" 노화상은 말했다. "토지"없어. 본래는 이 절에도 물건들이 없지 않았지만 나중에 놈들 이 다 훔쳐가 버렸어." "토지가 없다고?" 백방생은 문득 뭔가를 깨닫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토지가 없을 리 는 없는 것이다. 절에 딸린 토지는 방대하며 그 소작료 등을 받아서 절 은 운영되어 온 것이다. 비록 직접 경작하던 곳도 있었지만 절반 정도는 남에게 땅을 빌려주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지난 가을에 이 절에서는 많은 수확을 거두거나 소작료를 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달마하원이 멸망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연고가 있 는 사람들이 전혀 나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비록 눈앞의 이익이 있 지만 신화제국 등의 힘을 두려워 하여 누구도 감히 나서서 그런 것들 을 챙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신화제국이 사라 져야만 다시 연고자들이 몰려들어 이 달마하원은 재건될 것인가" 백방생은 비록 강호에서 스스로 달마하원의 후예임을 자처했지만, 그러나 자신이 이 달마하원의 재건과는 인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달마하원은 앞으로 그 연고자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재건될 것이 다. 백방생은 일단 그런 확신이 서자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그것은 아마도 함께 멸망한 남해보타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백방생은 실내를 둘러보다가 노화상에게 다시 말했다. "이 곳에서 법사를 연다고 해도 능히 그것을 치를만한 도구들이 있 단 말이오?" 노화상은 다 낡은 불상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것은 음, 없는 것은 아니오. 구할 수가 있을 것이오." 백방생은 그 노화상이 기실은 이 절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떠돌이 중으로서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만일 그가 달마하원의 연고자라면 감히 이 곳에 와서 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게다 가 이곳이 텅비어 있자 그만 거지아이들의 소굴이 되고 만 것이었다. 노 화상의 말로 미루어 보아 당연히 여기에서는 법사를 연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당리와 황진의는 임신초기이지만 그래도 제법 움직일만 했다. 그녀들은 모두 건강하여 태아 역시 건강하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일단 이곳에 온 이상은 법사를 올려 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노화상에게 자리를 마련하 게 하고 두 여인들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서 제기 등의 모든 물품들을 구입해 오게 했다. 거지아이들은 처음에는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국물이라도 생길듯 하자 잽싸게 다가와서 일들을 거들었다. 백방 생은 그들이 이 추운 날에 아직 따뜻한 옷 한벌이 없는 것을 보고 황 진의와 당리에게 그들의 옷도 한벌씩 준비하라고 했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 드디어 법사를 열게 되었을 때, 백방생 등 은 다소 난처해 지고 말았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그 노화상은 완벽한 돌팔이로서 법사를 여는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외우고 있는 불경도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화상이 아닌 백방생 등이 그것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고 또한 다른 곳에서 사람을 청 해올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노화상과 함께 마치 제사를 하는 듯이 대강 법사를 치뤄낸 일행은 이윽고 모든 물건들을 노 화상과 거지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거지아이들은 갑자기 새옷들 을 입게 되자 절로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백방생은 그들과 노화상에 게 또다시 각기 얼마간의 돈들을 집어 주고 이윽고 마차에 올랐다. 그런 데 백방생과 그의 부인들이 탄마차가 미처 달마하원을 벗어나기도 전 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누가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 오는데 바로 그 노화 상이었다. 노화상은 뜻밖에도 하나의 커다란 보따리를 손에 들고 있었 다. "무슨 일이죠?" 당리가 고개를 내밀고 묻자, 노화상은 즉시 그 보따리를 풀어 보였다. 놀랍게도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바로 수십권의 불경들이었다. 백방생이 대충 훑어보니 그다지 귀한 서책들도 아니었고 또한 무학비급들은 아니 었다. 아마도 달마하원이 불타버릴때 남은 물건들인 모양이었다. 당리 가 말했다. "이걸 어쩌라는 거죠?" 노화상은 말했다. "사실 남은 물건이 전혀 없지는 않았소. 바로 이것들인데, 만일 그대 들이 원한다면 싼 값에 사가도록 하시오." 백방생과 황진의 등은 그 말을 듣자 내심 기가 막혔다. 노화상은 승려 의신분이고 아직 불경하나 외우지 못하면서도 그 불경들을 마치 돈이 되는 물건취급하고 있지 않은가"그것은 그야말로 자신이 돌팔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아마도 천하에 그와 같은 화상은 다시 없을 것이다. 혹시 그는 불경을 아예 읽을 줄도 모르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필시 노화상은 귀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불경들을 잘 숨겨 두었다가 이제 부자를 만나게 되자 팔려는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속으로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기왕에 불경이 발견되었으니 그것을 인연으로 한번 이들을 가르쳐 보자는 것이었다. 설령 나중에 연고자들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고 해도 이들이 잘 지켜준다고 하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백방생은 즉시 마차를 돌렸다. 백방생은 그날 밤에 그 황량한 법당에 머물면서 몇 권의 책자를 저술해 냈다. 그것은 거지아이들에게 어울리는 몇가지 달마하원의 무공을 담은 비급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심리는 잡아두기 어려우므로, 일단 무공 으로 마음을 잡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저술하는 무공비급은 그들에게 적합한 것이어서 스승이 없더라도 연성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은 없을 것 이었다. 그리고 그 거지아이들의 머리를 모조리 삭발하게 하고 때로는 불경을 읽으면서 이 달마하원에 머물게 했다. 물론 그들이 몇년 동안 밥을 빌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 충분한 황금과 은자를 그 곳에 남 겨두었다. 이어 백방생은 다음날 거지아이들을 모두 모아놓고 근검하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갈 것을 한차례 훈시한 후에 드디어 달마하원을 떠나왔다. 달마하원을 떠나 어느 정도 가자 문득 황진의가 말했다. "상공, 그 아이들이 정말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게 될까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당리가 말했다. "그럼 왜 그들에게 그 많은 것들을 베풀어 주셨죠?" 백방생은 말했다. "아마 그들 대다수는 다시 나쁜 길로 빠지고 말 것이오. 그러나 혹시 그 가운데 한두명이 간혹 내말을기억하고 실천할지도 모르지. 그것은 아마 그들의 삶의 등불이 되어줄 지도 모르오." 황진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상공께서는 그곳에 삶의 등불을 심어 놓고 오신 것이로군 요?" 백방생은 말했다. "혹시 나중에 그들 중에서 달마하원의 주지가 나올 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건 그렇고 우리는 이제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합시다." 당리가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남창(南昌)으로 갑시다." 남창은 이미 그들이 내려오면서 지나쳤던 곳이며 또한 백방생에게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했다. 그곳의 망해사에서 백방생은 황금충의 보물 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파양호와 인접한 그곳은 풍광이 수려했 다. 백방생은 바로 그곳을 자신의 은거지로 삼은 것이었다. 일행은 다시 거의 보름만에 남창에 도착했다. 그 때는 이미 겨울도 다 지나가고 하여 산하에는 봄기운이 일기 시작하고 있었다. 남창의 주변 에는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많았다. 백방생은 두 부인과 함께 그런 어느 이름모를 작은 호수의 주변에 집을 짓고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들 은 비단 부자일 뿐만 아니라 무공이 고강하여 그런 모든 것들을 준비하 는데 거의 힘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거의 보름만에 벌써 그 새로 지어 가는 집에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고 별다른 생활을 누려가게 되었다. 많은 목수들이 착착 집을 완성해 가는 동안에 부인들은 자신들이 낳을 아이들을 기를 장소 등을 마련하고 준비했고, 백방생은 간혹 근처의 호수에 낚시를 다녔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한동안은 아주 평온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백방생이 호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호수위에 두 개의 광채가 내려 앉았다. 다름아닌 그 광채는 하얗고 누런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세외팔선 가운데에서 의선 (醫仙)과 화선(花仙)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이에 갑자기 크게 놀랐다. 그 의선은 바로 황진의의 조상으로서 여태까지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고는 하나 아직 믿을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저들이 나타나다니"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세외팔선은 과연 세상을 지배하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고강했다. 백방 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그들은 백방생의 눈앞에 이 르렀다. 의선은 다소 인자한 모습이었고 화선은 세외팔선 중의 유일한 여자로서 여전히 고귀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었다. 의선이 불쑥 말했 다. "너는 우리를 아느냐?" 백방생은 낚싯대를 거두며 싱거운 듯이 웃었다. "당신들은 바로 의선과 화선이 아니오?" 의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너는 제법 멍청하지는 않구나. 그러면 너는 우리가 이곳에 왜 왔는지 아느냐?" 백방생은 말했다. "혹시 제가 잡은 물고기를 자시러 오신 것이 아니오?" 화선이 가볍게 미소했다. 눈부신 백발(白髮)이 아름답게 빛나는 그녀의 모습은 늙었어도 지극히 아름답고 고아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소진(小眞)이 네게 푹 빠졌다고 하기에 이상하게 생각했더니 무리는 아니었구나?" 소진은 바로 황진의의 아명(兒名)이다. 백방생은 말했다. "아진에게서 당신들의 얘기를 들은 바가 있소." 의선은 말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그 아이 때문이다." 백방생은 말했다. "혹시 내가 구박을 할까봐 그러는 것이오?" 의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만일 구박을 한다면 벌써 살아있지 못할 것이다?" 일순 그의 음성이 강해지자 호수의 물결이 그 여파에 의해 강하게 물결쳤다. 실로 세외팔선은 하나같이 무서운 존재들이 아닐 수가 없었 다. 백방생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른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화선이 말했다. "앞으로 그 아이에게 어떤 횡액이 닥칠 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우리의 부탁을 잘 들어 주었으니 의당 우리가 도와주려는 것이지." 백방생은 말했다. "그녀에게 대체 어떤 횡액이 닥친다는 것이오?" 의선이 말했다. "그건 네가 오늘 죽는 것이다?" (내가 오늘 죽는다고?) 백방생은 그만 놀라서 급히 하늘로 뛰어오를뻔 했다. 그의 무공은 이 미 뜻하는 바대로 행해지고 있어서 실로 그렇게 경망스럽게 펼쳐진다 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백방생은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듯 하여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건 농담이겠지요?" 의선은 눈살을 다시 찌푸렸다. "우리가 그런 농담을 할 만큼 할 일이 없는 줄로 아느냐?" 백방생은 그가 다시 정색을 하고 화를 내자 그만 안색이 복잡하게 변 했다. "그럼 나의 수명이 고작 그것 밖에는 안된다는 말입니까?" 화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걱정마라. 그래서 우리가 오지 않았느냐"우리가 온 이상은 너의 수 명은 더 늘어날 것이다. 네가 죽으면 황진의가 슬퍼할 텐데, 그래서는 안되지 않느냐?" (그게 정말 사실일까"그게 정말 진심일까?) 백방생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화선이 다시 말했다. "네가 믿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우리는 이미 모든 일을 생각하고 온 것이니까." 이에 백방생은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군?" 그러다가 문득 화선이 다시 자신을 보고 웃는 것을 보고 백방생은 연달아 흠칫했다. 계속 그가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는듯 했기 때문이었 다. 의선이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용건만 말하기로 하지. 잠시 후에 우리와 천선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영토 로 돌아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네게 들르는 것이지. 즉, 네가 귀찮은 존 재라고 여기고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도 막을 수는 없다. 다 만 우리는 약간의 수단을 부려서 네가 죽지는 않게만 해줄 수가 있다. 이상이 바로 우리가 나타난 이유이다." 백방생은 어리둥절해져서 말했다. "아니 그게 정말이오"내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소?" 의선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자유이다. 이제부터 수법을 펼칠테니 너는 가만히 있도록 해라?" (가만히 있으라고?) 백방생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기실 그는 가만히 있을 필 요도 없었다. 막대한 힘이 몰려와서 그가 저절로 가만히 있게 했던 것 이었다. 그의 신형은 이어 시체처럼 뻣뻣하게 변해서 허공으로 떠올랐 다. 화선이 그것을 보고 우수를 가볍게 쳐들었다. 그러자 일순 그녀의 손 끝에서 서릿발과도 같은 기이한 백색(白色)의 광채가 폭사되어 한순간 에백방생의 몸을 꿰뚫었다. 만일 평소라면 그 번갯불과도 같은 광채에 의해 백방생의 몸은 박살이 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간은 기이하게도 그 광채가 수도 없이 백방생의 몸을 휘돌면서 말 할 수 없는 쾌감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헌데 그 순간에 갑자기 의선은 장력(掌力)을 조용히 내뻗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대개 세외팔선은 이미 지상선의 경지에 도달하여 장력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의선의 양손바닥에서는 마치 둥그런 황금알이 생겨나는 것처럼 장력이 형체를 이루더니 서서히 백 방생의 몸으로 덮쳐가는 것이었다. (어"아니!) 백방생은 꼼짝도 못하고 눈을 휘둥그래 뜬 채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황금알은 마치 계란만한 것이었는데 백방생의 머리 백회혈(百會穴)에 이르자 돌연 얇은 막으로 변해서 그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그대로 씌워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황금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백방생 의 몸은 은은한 황금색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기묘한 쾌감 같기도 했고 혹은 어떤 갑옷을 입은 것 같기도 했다. 문득 백방생의 몸은 지면에 내려서 있었 고 그 두사람도 손속을 거둔 후였다. 의선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왠지 그 두사람의 안색은 다소 피곤해 보이 기도 했다. "그 수법은 일시적인 것으로 한달밖에는 효과가 없다. 그러나 그 한달 동안 그것은 너를 금강불괴(金剛不壞)로 만들어줄 것이다. 따라서 그 들은 너를 공격하고 무공을 폐지시킬 수는 있지만 죽이지는 못한다. 물 론 한달 후에는 너를 죽일 수가 있겠지만 그들은 자존심이 높으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너는 앞으로 그저 평범하게 살아간다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말이 끝나자 그 두 사람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홀연 사라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마치 그것은 꿈을 꾼 것 같은 광경이었다. 만일 백방생의 몸과 얼굴이 누렇게 변해있지 않았다면 그것을 의심할 뻔 했 다. 백방생은 잠시 어리둥절하여 그들이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생각했다. (천선이 신화제국을 건설하고 곳곳에 지부를 설치했다고 하더니, 이제 그들도 역할을 다했으니 각자의 영토로 떠나는 모양이군. 그들은 그곳 에서 역시 신(神)으로 군림하게 되겠지.) 백방생은 세외오선(世外五仙)이 나타난다는 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의선과 화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일까" 작은 어망에는 이미 잡아 놓은 두마리의 잉어가 퍼덕거리고 있었다. 백 방생은 그것들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잉어들아, 잉어들아!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우리의 밥이 되어 주어야 하겠다. 우리의 아기들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이 잉어탕을 나의 두 마누 라들이 먹어야 하거든, 너희들은 이번에 죽거든 내세에는 사람으로 태어 나거라.) 이미 사위가 미미한 노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백방생은 낚시도구들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헌데 그가 대략 중간 정도 갔을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강렬해 지는 노을빛 속에 서 문득 다섯 개의 광채가 찬란하게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홍 흑회남자(紅黑灰藍紫)! 그들은 바로 다름아닌 세외오선이었던 것이다. 실로 의선과 화선이 말한 바가 틀림이없음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백방생은 그들을 만나자 일순 어리둥절해 했으며, 다소 안색이 변했으 나 이내 포권하며 말했다. "아니 여러분들이 소생을 다 찾아오시고, 이거 웬일들이십니까?" 세외오선은 별로 그에게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마치 눈앞에 한 원숭이를 데려다 놓고 구경을 하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마선(魔仙)이 잿빛의 눈빛을 빛내며 귀선(鬼仙)을 향해 말했다. "아니 이거 저번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가?" 온통 검은 광채로 뒤덮인 귀선이 잠시 백방생의 모습을 살피다가 눈 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의선과 화선의 금강불괴체(金剛不壞體) 수법이네. 빌어먹을 늙은이들, 정말 천선의 노여움이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검선이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의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니 그들을 상관할 것은 없 네." 도선이 말했다. "그렇군. 그런데 이 녀석은 오늘 제법 운이 좋은 것 같군. 또 죽을 목숨이 살아나다니 말이야." 귀선이 말했다. "그러나 과연 살아있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일까"과연 이 녀석이 정말로 운이 좋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마선이 말했다. "흐흐흐, 동감이야. 살아있는 것이 때로는 아주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 백방생은 그들이 자신을 아랑곳하지않고 계속 그렇게 떠드는 것을 보고 약간 화가 나서 말했다. "뭐가 살아있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말이오"당신들도 살아있는 것이 고 통스럽다는 것이오?" 귀선은 음침한 시선으로 백방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무공을 모두 상실당하고 병신이 되는 데다가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네가 고통스럽지 않게 된다는 말이냐?" (어"미치게 된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백방생은 문득 의선과 화선의 얘기를 떠올려 보며 마주 대꾸했다. "나 역시 이미 무공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소. 오히려 무학 자체의 경 지에서는 당신들보다 안정되었다고 할 수가 있지. 그런 나를 당신들이 심마(心魔)에 들게 할 수가 있다는 말이오"도리어?..." 귀선은 백방생이 일부러 말을 길게 끌자 답답한 듯 말했다. "도리어 미치게 되는 쪽은 우리라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소. 당신은 아마 심령금제(心靈禁制)의 부작용에 대해서 잘 알 고 있을 것이오. 만일 그 사람의 심력(心力)이 당하는 사람보다 약할 경 우에는 도리어 시전자가 당하게 된다는 것이오." 귀선은 음산하게 웃었다. "그럼 너의 심력이 나보다 강하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믿지 않아도 무방하오. 어쨌든 나에게 당신들의 심령 대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하긴, 이 녀석은 조금 이상하다. 저번에도 몹시 이상한 점이 있었 다." 귀선은 속으로 생각했으나 이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헌데 네가 내게 그런것을 미리 알려주는 의도는 뭐냐" 설마하니, 네 가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은 아니겠지?" 백방생은 말했다. "천만에! 내가 만일 걱정한다면 차라리 거지를 택할 것이오. 나는 다만 당신이 미쳐서 세상에 좋지 않은 일을 하게 될까봐 미리 충고하는 것이오." 귀선은 음산하게 말했다. "으흐흐, 내가 그런 말을 믿을 정도로 순진한 줄로 아느냐?" 백방생은 가볍게 웃었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소"믿든 안 믿든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라고." 검선이 차갑게 백방생을 주시하며 말했다. "너는 그 사이에 말솜씨가 더욱 늘었구나. 너의 그 말에 의하면 네가 우리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아니겠지?" 백방생은 말했다. "일대일이라면 내가 이기겠지. 그리고 당신들이 한꺼번에 덤빈다면 그 결과는 알 수 없겠소." 검선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일대 일이라면 네가 이긴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바로 심령대법의 경우와 유사한 것이오. 즉, 당신들과 나와의 차이는 그저 공력에 있어서 수십배의 차이가 있을 뿐이오. 말하자면 무학 의 깨달음 그 자체에 있어서는 오히려 내가 한 수 위라는 말이지. 당신 은 말 한마디로 상대를 제압한다는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소?" 검선은 말했다. "네가 한마디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무학의 완전한 단계는 무엇이오?" 검선은 말했다. "그건 무형검(無形劒)이다." 백방생은 말했다. "헌데 당신들은 어째서 아직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소?" 검선은 기이하게 안광을 발하며 웃었다. "네가 그런 것을 어떻게 아느냐?" 백방생은 말했다. "대체 무형검의 정의(定義)가 무엇이오?" 사선이 말했다. "흐흐, 네가 우리에게 그 정의에 대해서 강의하려고 하느냐?"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공력은 몰라도 이 무학상의 오의(奧意)에 대해서는 나에게 물어야할 것 이오. 그런 점에서 당신들은 나의 한마디를 듣는 것이 몹시 이익일 것이 오." 마선이 말했다. "너는 그것으로 너의 목숨을 구걸하려는 것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천만의 말씀! 당신은 여태 듣지도 못했다는 말이오?" 마선은 순간 화가 나서 두 눈의 잿빛 광채가 무려 한 자나 피어 올 랐으나 이내 스러졌다. 백방생은 그들을 주시하며 말했다. "만일 무형검이 된 상태라면 그 사람은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 그러나 만일 아직 무형검에 오르기 이전이라면 당연히 결점이 생기고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오. 게다가 그 사람의 공력이 매우 높다면 장애도 덩달아 서 커지는 것이며, 거기에서 심마가 유발되는 것이오. 단 한마디로 상대 를 제압시킬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말이오. 즉 적의 마음의 헛점을 공격하여 그 공력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오." 사선이 말했다. "너의 말이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과연 완벽이라는 것이 있다 는 말이냐?" 백방생은 그를 향해 도리어 말했다. "당신은 그럼 나의 무공이 완전하지 않다는 말이오?" 사선은 말했다. "우리도 완전하지 못한데 네가 어찌완전할 수가 있겠느냐?"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완전하지만 당 신들은 완전하지 않소. 그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인 것이오. 당신들 은 어째서 당신들이 그런 색깔을 가지게 되는 지 알고 있소?" 사선은 마침 궁금했는지 말했다. "그건 어째서냐?" 백방생은 말했다. "무형검이란 이른바 뜻과 초식이사라지는 것이오. 당신들은 비록 이미 초식(招式)을 멸하기는 했지만 아직 뜻을 멸하지는 못했소. 뜻은 말 하자면 그 사람의 습성이나 욕망, 기질, 성격 등을 따르는 것이오. 당신들 은 뜻을 아직 멸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그런 빛깔을 띠는 것이오." 세외오선은 기실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도(道)를 닦은 사람들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백방생의 그러한 말에 아연 흥미로운 빛을 발 했다. 귀선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 뜻이란 또 뭐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이른바 지혜라고도 말할 수가 있소. 초식은 무학의 수련에 의해서 배울 수가 있소. 그러나 이 뜻은 그렇게는 배울 수가 없소. 이 른바 무학이 절정에 도달한 고수가 한낱 꾀많은 시정잡배에게 당하는 것도 실은, 그가 초식에만 골몰하여 뜻을 무시했기 때문이오. 뜻을 무시 한 초식은 무식하여 실로 우둔한 힘자랑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오. 이 초식과 뜻은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는 것이며 무학내에도 뜻이 있지만 무학외에도 뜻이 있소. 따라서 초식보다는 오히려 뜻이 더욱 어렵고 심오 하다고 해야할 것이오." 사선이 문득 다소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신화상제(神化上帝)도 아직 무형검에 도달하지 못했다 는 말이냐?" 신화상제라 함은 바로 당금의 신화제국의 주인이 된 천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47 장 방문객(訪問客)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오. 그걸 말이라고 물어 보는 것이오?" 사선은 그가 면박을 주자 시뻘건 얼굴이 더욱 붉게 변했다. 그의 두눈 은 더욱 빛을 발하여 마치 그 자체가 살아있는 하나의 불덩어리처럼 보 였다. 사선은 다소 화가 났으나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는 무슨 색깔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백방생은 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하늘은 무슨 색이오?" 사선은 말했다. "그건, 푸른 색이다." 지금의 하늘은 시커먼 어둠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사선은 일부러 상 대의 심리를 파악하고 그렇게 대답한 것이었다. 그들은 본래 상대의 심리를 알고 있으므로 누구에게도 당황하지 않았다. 헌데 분명히 상대 의 심리를 보면서도 이렇게 당황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멍청하지는 않군. 하지만 사실로 말하자면 어떤 색깔이 있는 것이 아니 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일부러 그런 없는 색깔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 상태가 온전하겠소?" 세외오선은 백방생을 처치하려고 들른 것이었으나 이 순간은 그의 얘 기에 심취하여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 한적한 오솔길은 갑자기 엄숙한 토론장이 되고 있었다. 사선은 안면을 두어 번 일그러 뜨리다가 말했다. "그건, 없는 색깔은 만들어질 수가 없다. 즉 가짜로 만든 것이니 자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너는 그럼 그 천형(天刑)을 말하는 것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천륭무가의 천형은 물론 그런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오. 즉 무리한 노 력이 화를 부른 것이지. 바로 그와 같이, 사람이 무형검의 경지에 오 르지 못한다면 항상 그 장애의 추격을 받게 되는 것이오. 그것은 공력이 높아질 수록 더욱 뚜렷하게 작용하며, 그리하여 심마가 되어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오. 설령 지상선의 경지에 올랐어도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은 그와 같은 이치이오." 실상 그러한 말은 세외오선이 항상 공감하는 바였고 가장 근심하고 두려워 하는 바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각기 한 방면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그 방면의 장애 때문에 간혹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백방생의 그 말은 그야말로 간질간질한 그들의 급소를 찌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근래에 천선이 갑자기 과격 해지고 뭔가 초조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제까지 별로 말이 없던 마선이 말했다. "그럼 그 뜻을 수련하는 방법이란 무엇이냐?" 백방생은 그를 돌아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마선(魔仙), 당신은 너무 뻔뻔스럽다고 생각지 않소?" 순간 마선은 그만 크게 화가 나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잿빛의 기운이 사위를 뒤덮었다. "뭐라고?" 비록 주위가 어두워졌다고는 하나 그러한 그의 모습은 실로 공포감을 느끼게 하기에 족했다. 마선은 이제까지 사람들에게 그런 무례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번 그렇게 화를 내자 주위 십장 의 안에 있는 나무들이 갑자기 가루가 되어 부스스 떨어지고 말았다. 그 러나 백방생은 태연했고, 또한 그의 몸도 멀쩡했다. 마선은 비록 크게 노하기는 했지만 아직 백방생을 죽일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백방생은 마선이 다시 몸을 가다듬는 것을 보고 말했다. "아마 세상에서 나를 제외하고는 그 질문에 대답해줄 사람이 없을 것 이오. 만일 당신이 나를 죽인다면 앞으로 당신도 머지 않아서 그 장애 로 죽게 되는 것이지. 그런데 내가 그런 대답을 그렇게 쉽게 해줄 것 같소?" 마선이 말했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해야 말하겠다는 것이냐?"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나는 지금 당장 죽는다면 말을 할 수가 없소. 즉 나는 이런 생활을 한 일년동안은 더 지속하고 싶은 것이오. 그 때가 되면 다시 당신들을 만날 기회가 있겠지. 물론 그 때 당신들이 나에게서 얘기를 들으려면 지금 내게 손을 대어서는 안 될 것이오." "으흐흐흐흐!" 일순 그 말을 듣고 세외오선이 일제히 음흉한 웃음을 터뜨리며 우수를 들어올렸다. 순간그 다섯가지 전광(電光)과도 같은 빛줄기가 무서운 위 력으로 백방생의 몸을 꿰뚫었다. 백방생은 일순 대응하려고 했다. 그러 나 그가 대응하기에는 그들의 공력은 너무나도 가공스러웠다. 백방생은 갑자기 끝없는 유황불의 지옥인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백방생은 입을 열어 비명이라도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비명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숨이 막혔으며 뜨거운 불길과 온갖 종류의 고통들 이 일시에 그의 육신과 영혼을 난자하는 듯 했다. 그것은 이른바 극한의 고통이었다. 백방생은 그러한 고통속에서 마침내 의식이 아득히 멀어 진다고 느꼈다. (빌어먹을, 정말 잘 안 되는군?) 백방생은 혼절했다. 그는 자신이 혹시 죽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 다. 그러나 아직 죽은 것은 아니었다. 의선과 화선의 그 수법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그의 몸에 씌워졌던 금빛의 기운은 사라졌으나 그의 육 신은 파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깨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그가 세외오선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세외오선은 사라졌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또 갑자기 그렇 게 사라져 버렸다. 사위에 어둠이 짙어지고 백방생의 신형은 바닥에 쓰 러져 있는 상태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문득 어둠속으로 두 개의 섬세한 인영(人影) 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문득 아, 하고 한 사람이 놀라는 외침이 들 려왔다. 바로 주위의 숲이 온통 불에 탄 것처럼 잿더미로 변한 것을 보 고 놀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녀들은 바로 황진의와 당리였다. 그녀들 은 조금전에 누구로부터 이 사태를 전달받고 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이 윽고 그녀들은 잿더미속에 누워있는 벌거숭이 모양의 백방생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과 눈썹 등은 모두 타서 대머리가 되어 있 었고 또한 의복 등도 흔적을 알 수 없었다. 품속에 중요한 물건이 없었 다고는 하나, 지금 그러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들은 백방생을 알아보지 못할뻔 했다. 백방생의 생사(生死)가 문제인 것이다. 그는 지금 혼절한 상태로 심맥(心脈)이 약하게 뛰고 있을 뿐이었다. "상, 상공!" 황진의와 당리는 둘 다 눈물을 뿌리며 그의 몸을 안아들고 오열했다. 그 러나 지금 그렇게 울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황진의는 얼른 백방생의 몸 을 자신의 벗은 옷으로 감싼 다음에 집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당 리는 울면서 그 뒤를 따랐다. 우선 작게 지어놓은 집의 방안에는 침상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황진의 는 집에 도착하자 우선 백방생을 침상위에 눕힌 다음에 옷을 입히고 몸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백방생의 몸에서 피가 흐르는 곳은 없었고 또 한 아직 미약하나마 호흡을 하고 있었다. 당리는 얼른 벽난로의 불을 키워 놓았고, 황진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의술을 펼칠 준비를 했 다. 그녀는 우선 백방생의 입을 벌려 속명신단을 복용시켰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것은 그저 입속에 있을 뿐 녹지 않는 것이었다. 황진의는 급히 내공을 주입시켰다. 그러자 속명신단은 그제서야 녹아서 그의 목 속으로 넘어갔다. 황진의는 내공을 주입시키면서 놀랬다. 과거 그녀는 공력의 차이 때문에 도저히 내공을 주입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은 마치 모래가 물을 흡수하듯이 즉시 그녀의 공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었다. 황진의는 이에 문득 한가지 사실을 직감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 는 즉시 금침술을 펼쳐보려고 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금침은 아무리 해도 백방생의 몸속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진의는 부득 이 다시 두 알의 속명신단을 복용시키고 진기를 주입하여 흡수되게 하고 서야 비로소 한숨을 놓을 수가 있었다. 그 속명신단은 그야말로 금방 숨이 넘어간 사람도 살릴수가 있다는 전설의 내상성약(內傷聖藥)이었다. 만일 백방생이 황진의라는 부인을 두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한 속명신단이 무려 세 알이나 들어가자 백방생의 몸은 드디어 호전되기 시작했다. 호흡과 맥박 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피부도 점차 제빛깔을 되찾기 시작했다. 황진의가 길게 심호흡을 하고 물러나는 것을 보고 당리가 다가와서 말했다. "상공께선 이제 괜찮나요?" 황진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이제는 다소 안심을 해도 될 것 같아." 당리는 백방생의 몸이 점차 혈색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이윽고 다가가 서 껴안고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들고 말했 다. "정말로 그 분이 말한 대로 세외오선이 이 분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요?" 황진의는 말했다. "이미 이런 일은 예상되어 있었던 거야. 상공께서 멀리 달아나지 않고 굳이 이곳에서 머무르신 이유를 알겠어!" 당리는 말했다. "그들에게서 달아날 수가 없기 때문인가요?" 황진의는 말했다. "지금 천하에는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고 또 변화하고 있지. 하지 만 그들이 모두 위험한 것은 아니야. 상공께선 그들을 피할 수가 없다면 마주치시기로 한 것이지." 당리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까요?"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 실로 이렇게 끝난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일단은 그들 은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다시 올 것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고, 기왕에 살려 주었다면 다시 나타나 손을 쓰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우 리 상공께서는 이미... 그들의 시선을 받을 가치가 없게 되셨을 거야." 당리는 놀라 말했다. "그럼 깨어나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상공께서는 그냥 공력이 전부 상실되었을 뿐이야. 지금 깨어나지 못하 시는 것은 바로 조상께서 펼치신 금강불괴체라는 의술 때문이지. 그 의 술 때문에 상공께선 앞으로 한달 동안 주무시게 될 거야." 당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 달 씩이나요?"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한 달 이후에는 공력은 없더라도 완전히 정상인이 되시는 거야. 그 정도라면 다행인 것 아냐?" 백방생은 가히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무공이 상실된 범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문득 당리는 절로 눈물이 나왔다. 그러나 어차피 세외오선과는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리하여 평온하 게 살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백방생은 머리카락 등이 하나도 없어서 마치 도를 닦는 화상같은 모습이었다. 당리 는 평소 백방생의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나중에 상공께서 충격을 받으시지 않으셔야 할 텐데.) 새해가 밝고 한달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상은 그야말로 개벽천지 의 대변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선 복우산의 신화제국(神化帝國)의 총단 에서는 거대한 황성(皇城)이 축조되어 가고 있었고 천하의 각처에는 지 부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신화제국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했다. 처 음에 신화제국의 창립에 반대를 하던 사람들도 이윽고 시간이 흐르자 찬성을 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과거 천상회의 소속이었던 사람들 의 힘은 막강했고 천하각처에서호응하는 사람들과 합쳐지게 되자 그야 말로 그 세력은 미증유(未曾有)의 거력(巨力)을 이루게 되었다. 흔히 힘이 곧 정의(正義)라는 말이 있다. 지도자인 신화상제, 곧 천선의 능력이 워낙 탁월했기에 애초에 그 어떤 반대세력도 상대가 되지 못했는 지도 모른다. 신화상제를 중심으로 한 신화제국의 건설은 그야말로 무섭도록 빠르고 손쉽게 이룩되었고 그 것은 얼핏 기이할 정도였다. 무림은 이내 평정되었고 신화제국의 힘은 날이 갈수록 하루가 다르게 강성해 졌다. 천선의 주위에는 의선과 화선 이 보좌하고 있고, 나머지 세외오선은 각자 자신들이 다스리게 될 땅으 로 돌아갔다는 말이 있었다. 바로 그 무렵에 천하에는 한가지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소림(少林)과 무당(武堂), 그리고 개방이 하루 아침에 멸문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소림사와 무당파, 그리고 개방은 수천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명문정파(名門正派)로서 강호인들의 오랜 정신적인 지주였는데 느닷없이 그렇게 멸문을 당했다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러는 세외오선이 들러서 소림삼신승(少林三神僧) 등을 죽이고 소림사 등을 멸문시켰다고 하기도 하고 또 혹자는 천선이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했다고 하기도 했다. 아니,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새롭게 태어나 고 있는 영웅회(英雄會)라는 조직에서 그런 일을 했다고 하기도 했다. 실로 유언비어가 무수하게 난무하고 그리고 공포가 느껴지는 무림천하 가 시작되고 있었다. 누구도 쉽게 아무런 말이나 내뱉을 수가 없었으며, 신화제국의 창립에 반대하는 자들은 노골적으로 숙청을 해대기 시작했 다. 천하의 각 지부에서는 강압적인 충성의 깃발이 드높이 올라갔고 그 야말로 중원천하를 신화상제의 뜻에 따라 획일화 하는 움직임이 파도처 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수천년의 무림사(武林史)에 있어서 전무후무할 파천황적인 일대 변화였다. 또한 믿기지 않는 변화이기도 했다. 지부의 권한이 하루아침에 강화되자 무림천하에 엄격한 통제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신화제국에선 그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중원밖 에 있는 세력들인 공포림(恐佈林)이나 청조각(淸朝閣), 혈붕도(血鵬島)나 만독궁(萬毒宮) 등의 고수들을 끌어 모았다는 얘기들도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 공포무림(恐佈武林) 혹은 암흑무림(暗黑武林)이라는 말이 나 돌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다시 한 달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백방생은 깨어났 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달게 잠을 자고 난 사람같은 표정이었다. 머리 카락 등도 제법 어느 정도 자랐고 몸과 마음은 매우 건강해 보였다. 그가 건강한 것은 황진의가 속명신단을 무려 한꺼번에 세 알이나 복용 시켰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 사이에 목수들에게 다그쳤던 집도 이층으로 깨끗하게 완성되었고, 두 부인의 배도 임신이 만 삼개월에 이르러서 약간 불룩해져 있는 상태였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었다. 이 강남땅에는 봄 이 일찍 찾아오는 법이었고 새로 건립된 장원의 주변에는 온갖 풀과 나무들이 건강한 잎들을 피어올리고 있었다. 실로 약동하는 봄이었다. 그 날씨좋은 봄날에 어느 날 백방생은 밖에 내다놓은 의자위에 앉아서 서책을 보면서 한가롭게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봄날의 날씨는 변덕스럽 지만 그러나 사람의 기분을 한껏 들뜨게 한다. 백방생이 그렇게 독서 를 하고 있을 때 문득 황진의와 당리가 모처럼 다과를 들고 집에서 나 와 백방생의 곁에 다가왔다. "심심하지는 않으신가요?" 황진의가 묻자, 백방생은 차를 받아서 마시며 빙그레 미소했다. "심심하지 않소. 여기서 이렇게 앉아서 천하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찌 심심할 수가 있겠소?" 문득 당리의 두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남편이 날개가 꺾 인 영웅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녀는 애써 눈물을 참 으며 짐짓 웃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요사이 영웅회가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요." 백방생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에 들린 과자를 집어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흠, 그 용천기가 지금의 내 꼴을 보면 속이 후련해 하겠군." 당리가 말했다. "하지만 상공께서는 그들보다 지혜가 월등하시잖아요?" 백방생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겨우 지혜만 월등한 것 같소"나는 요즈음 다시 공력을 늘려가 고 있는 중이오. 아마 머지 않아서 다시 높은 공력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오. 헌데 그 속명신단 남은 것을 보지 못했소?" 황진의가 말했다. "속명신단은 공력을 높이는 효과가 별로 없으니 제가 나중에 대라금단 을 몇 개 얻어다 드리도록 하겠어요." 백방생은 황진의를 향해 말했다. "근래에 성수곡에서는 무슨 다른 동향이라도 없소?" 황진의는 말했다. "여전히 그곳에서는 조용히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신화제국 의 일에 어느 정도 협조하지 않을 수는 없는 모양이예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곳 덕분에 아직 우리가 이렇게 무사하게 살고 있는 것이 지." 이어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당리에게 말했다. "사천당문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소?" 당리는 안색을 다소 붉히며 말했다. "저는 이미 그곳과 인연을 끊었어요. 그러니 그곳이 어찌 되든 상관이 없는 것이죠."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도 그렇지 않소. 어쨌든 그곳은 나의 처가이니, 당신은 가끔 필 요한 만큼 그곳에 은자와 물자를 보내주도록 하시오. 내게는 또 돈이 있 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대에게 준 예금장부의 금액은 그래서 내가 준 것 이 아니오?" 사천당문에서는 근래 아주 적극적으로 신화제국의 일에 나서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무림인들로부터 기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처지 였다. 당리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였다. "예, 상공." 당리가 공손히 대답하자, 백방생은 황진의를 향해 말했다. "근래 들어서 무림은 크게 경색되어 가고 있소.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황진의는 말했다. "무림인들을 힘으로 억압하려고 하니까 그런 현상이 오는 것 같아 요."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천선이 자신이 없었다면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텐데" 그는 자칭 이상국가를 만들겠다고 장담하지 않았소?" 황진의는 말했다. "저는 그것에 대해 한가지 기이한 소문을 들었어요." 백방생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문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화제궁(神化帝宮)에 갔다 온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곳에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다 마음이 변한다고 해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심령대법(心靈大法)을 펼친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그건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아요. 헌데 그 일로 강호가 점차로 안정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당리가 말했다. "만일 그런식으로 강호가 평온해진다면 정말 무섭겠어요. 그야말로 꼭 두각시가 되는 것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들이 우리를 잡아가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오." 그런데, 그 말이 씨가 된 것일까"갑자기 앞쪽의 길모퉁이에서 걸어 오 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다. 백방생 등은 깜짝 놀랐다. 그들이 몹시 낯 익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맨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은 천 상오룡(天上五龍)이었고 그 뒤에는 석채릉과 남궁검상 등이었고, 또한 그 옆으로 오는 사람들도 심상치 않았다. 바로 다름아닌 백귀현 등의 일 가 다섯명이었던 것이다. 실상 지금 다가오고 있는 사람들은 백방생이 가장 꺼려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다니, 이는 실로 최악의 순간이라고아니할 수가 없었다. 백방생은 마치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머리가 아찔하고 멍해졌으나 이내 겨우 마음을 잡고 진정했다. 옆의 황진의나 당리도 크게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하필 지금 그의 무공이 상실된 마당에 철천지의 원수들이 찾아오다니"실로 이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과 같은 일 이 아닌가"그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었으니 실 로 백방생의 마음은 무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로 산 너머 산이로구나?) 백방생이 내심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이윽고 그들 이십여 명의 사람 들이 면전에 도달했다. 한쪽엔 남창의 신화제국 지부의 사람들이 들고 있는 현란한 깃발의 무의가 가벼운 바람에 험한 기세로 펄럭였다. 백방 생은 마치 죄인이 되어 처벌을 기다리는 모습과 비슷한 신세였다. 그들 의 안색은 하나 같이 차갑고 무표정했다. 백방생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 며 그대로 의자위에 앉아 있기로 했다. 모두가 멈춰서자 문득 천상오룡 가운데 이대인이 말했다. "오랜만이로구나, 백방생." 그것은 그들이 이미 백방생의 몸의 상태를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다 소 조소하는듯 하고 차가운 이대인의 말에 백방생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군. 헌데 갑자기 다들 무슨일이오?" 백귀현이나 남궁검상 등은 모두 나서지 않고 차갑게 표정을 굳힌 채 가만히 있었다. 대신 석채릉이 냉소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나에게 볼일이 있다는 말이오"하하, 그렇다면 어서 볼일을 보시 오. 대체 무슨 일이오?" 이대인이 다시 말했다. "우리는 천선의 성지(聖旨)를 받들고 온 것이다!" 장내의 분위기는 몹시 음산하여 금방이라도 피가 튀길 것 같았다. 특히 이대인이 천선의 성지 운운하자 나머지 사람들은 급히 몸을 바로 세우며 몹시 우러르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한 자세는 짐짓 음사 (陰邪)한 느낌까지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백방생은 아직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말했 다. "그렇소"그렇다면 어서 그 성지를 보기나 합시다." 이대인은 즉시 품속에서 하나의 금칠을 한 붉은 두루마리를 꺼내더 니 펼쳐 들고 그 안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이는 본 상제(上帝)가 친림(親臨)한 것이니, 백방생은 삼가 명을 받 들라...!" 그 내용은 백방생으로 하여금 지부에 들게 하고 또한 나중에 신화제궁 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대인이 읽기를 마치고 나자 부복했던 사 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어 백방생이 말했다. "아니 거기에는 예외가 없소" 이를테면 환자는 따로 생각해 줄 수가 있 는 것이 아니오?" 이대신이 소리쳤다. "상제의 성지에는 예외란 없다! 다만, 네가 어떤 성의를 표시한다면 상제께서도 어느 정도는 생각해 주실 것이다?" 백방생은 의아해 하며 말했다. "성의"무슨 성의라는 말이오?" 이대례가 말했다. "흥, 시치미를 떼는군"우리는 네가 아직도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 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백방생은 그제서야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아"나더러 돈을 내라는 것이오?" 이대지가 말했다. "우리 제궁(帝宮)에서는 이번에 큰 사업을 많이 일으켜서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물론 각처에서 기부금을 받아도 무방하지만, 상제께서는 네가 가능하면 그 기금을 헌납하기를 바라신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백만냥의 황금을 드렸소. 그건 여러분도 보았던 것 이 아니오?" 이대지가 말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제께서는 너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네가 만일 다시 기금을 헌납한다면 앞으로 통제를 받지 않고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백방생은 이에 고개를 돌려 황진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가진 돈이 있소?" 황진의는 품속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건네 주었다. 그 안에는 십여만 냥의 금표들이 들어 있었다. 백방생은 그 가운데에서 만 냥의 금표를 세 어서 이대지에게 내밀었다. "자, 그럼 가져가시오?" 백방생의 방약무인한 듯한 태도에 천상오룡 등은 다함께 안색이 변했 다. 갑자기 멀쩡하게 서있던 백귀현이 번쩍 신형을 날리며 다가와서 백방 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감히 상제를 모독하다니?" 과거 백귀현은 백방생을 암습하다 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일시에 그를 제압하여 따귀를 후려쳤는데 옆에서 황진의 등이 막을 사이도 없이 퍽퍽퍽! 하며 백방 생의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흘러 나왔다. 황진의 등은 이미 그들이 모두 무공을 도로 되찾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백방생이 그렇 게 쉽게 당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백귀현은 잠시 백방생을 노려보다가 다시 신형을 날려 번쩍 하고 물러갔다. 백방생은 갑자기 심한 충격을 받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그 열 장의 금표마저 놓친 후였다. 그는 양뺨이 삽시간에 퉁퉁 부풀어 올랐지만 이 내 어색하게 웃으며 떨어진 금표들을 줏어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봉투와 함께 내밀며 말했다. "너무 성격이 급하시군. 적으면 적다고 말하면 될 일이 아니오?" 천상오룡은 잠시 차가운 표정으로 백방생을 주시했다. 마치 조금전에 그가 백귀현에게 맞은 사실을 속으로 자세히 검토해 보고 있는 모양이 었다. 이윽고 이대인이 나서서 그 금표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어 그는 말 했다. "네가 재산이 없다면 하는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니 우리는 지부에서 사흘 동안 기다리기로 하겠다. 만일 그 안에도 돈을 내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희들을 데려가지 않을 수가 없다." 말이 끝나자 천상오룡은 일제히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한꺼번에 와서 겨우 이 정도로 하고 그냥 물러가다니 실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백방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황진의에게 말했다. "그들은 매우 욕심이 많군. 대체 얼마를 더 내라는 말이지?" 황진의는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대책을 의논하는 것이 좋겠어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럽시다." 문득 양쪽 뺨이 후끈후끈 달아 올라서 백방생은 불어터진 양뺨을 두손 으로 감싸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헌데 그들의 무공을 누가 회복시켜 준 것일까?) 이층에는 거실을 겸하여 백방생의 서재가 시원스런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황진의는 백방생의 찢어진 입술을 치료해 주고 있었고 당리는 아래층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황진의는 말했다. "그들은 필시 다시 올 거예요. 아무래도 제가 성수곡에 연락을 취해야 하겠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무런 사고도 없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래 그쪽으로 연락을 취할 방 법은 있소?" 황진의가 말했다. "그건, 누군가가 그곳에 다녀와야 해요. 저는 당신을 보호해야 할 입장 이고 아무래도, 당동생이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백방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역시 임신중이 아니오"혹시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는 방법은 없겠소?"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수곡의 위치는 아무에게나 가르쳐 줄 수가 없어요. 게다가 다른 사 람이 가면 그들은 만나 주지도 않을 거예요." (제기랄, 정말 대단한 위세를 부리는군.) 백방생은 속으로 내심 욕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고 했 다.헌데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아래층에서 와장창! 하는 그릇 깨지 는 소리가 들리더니 당리의 외침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웬 놈이냐?" 백방생과 황진의는 이에 대화를 나누다가 말고 급히 아래층으로 달 려 내려갔다. 아래층의 부엌 바닥에는 과연 수십개의 그릇들이 깨지고 흩어져서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천정이며 사방의 벽들이 몹시 지저분했 는데, 당리는 비교적 무사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매우 화가 난 표정으로 전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앞쪽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바로 백방도와 백철우, 그리고 백철산이었다. 암기(暗器)들을 던진 사 람은 백철우인 모양이었는데, 그로 인해서 부엌이 완전히 난장판이 되 고 만 것이었다. 사실 백철우는 잘 몰랐지만 당리야 말로 사천당문의 비전(秘傳)을 전수받은 암기무예(暗器武藝)의 고수로 백철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뒤에서 당리를 급습했으나 오히려 당리가 그것 들을 모두 피하고 소리치는 것을 보고 다소 의아한 듯한 표정들이었다. 백방생은 급히 당리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괜찮소"어디 다치지는 않았소?" 당리는 안색이 다소 창백해 지기는 했으나 그다지 부상을 입은 모습은 아니었다. 사실 한두달전만해도 자칫 아기가 떨어질뻔 했을 것이다. 당 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하나도 다치지 않았어요." 당리의 말은 그동안 공들여서 장만한 그릇들과 부엌이 망가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에 다소 안심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이어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백방도 등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무슨 일로 이렇게 남의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백방도는 가만히 있었으나 백철우가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의 마누라들을 검사해 보고 있었다. 제법 둘 다 괜찮은데?" 백방생은 그들의 눈에 모두 다 원독의 빛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 웃으 며 말했다. "너희들은 내 아내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소위 개를 때리려면 주인을 먼저 봐야 한다고, 차후에 성수곡에서 좋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너희는 의선(醫仙)을 우습게 볼 수가 있겠느냐?" 황진의가 성수곡의 출신이라는 것은 백철우등도 모두 알고 있었다. 백 철우는 감히 성수곡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이내 흉악한 광채를 발하며 화제를 돌렸다. "백방생! 네놈은 결코 오늘 무사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백방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나는 너희들의 원하는 바를 알고 있지. 자,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차나 한잔 나누지 않겠느냐" 이곳의 차는 종류가 특이한데 너희들도 의 당 구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백철우는 차갑게 웃었다. "우리가 그까짓 차를 마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피를 마시는 것은 어떻겠느냐"술이나 차를 마시는 것보다는 좀더 호쾌한 일이 아니겠느냐?" 뜻밖의 말에 황진의와 당리도 백방생을 바라보았다. 백철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라고"대체 피를 어떻게 마시자는 말이냐?" 백방생은 즉시 부엌의 한쪽에 마련된 물통의 뚜껑을 열고 바가지로 물을 떠서 흘려 보이며 말했다. "간단한 일이지. 그냥 이렇게 마시면 되는 일이 아니냐?" 말이 끝나자 백방생은 직접 그 바가지의 물을 조금 마셔 보였다. 그리 고 왠지 특이하게 입맛을 다셔보는 것이었다. "음, 맛이 매우 특이하군?" 황진의와 당리는 그것을 기이하게 생각했지만 백철우등은 갑자기 안색 이 괴이하게 변했다. 백철우가 음악(陰惡)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그게 어째서 피란 말이냐?" 48 장 보이지 않는 손 황진의와 당리는 그 말을 듣고 다함께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백철우의 음성에서 왠지 영혼을 도려내는듯한 무서운 공포감을 느꼈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백방생은 도리어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네가 알고 있군. 그렇다. 이것은 다소 특별한 피지. 즉 색깔도 없으며 맛도 없고 투명한, 말하자면 하늘 에서 쏟아지는 듯한 성스러운 피다. 너는 마셔보지 않겠느냐?" 백철우는 눈빛이 괴이하게 변하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믿을 것 같으냐"그것은 물이다. 피가 아니란 말이야. 내가 그것을 마실 것 같으냐?" 백방생은 가볍게 웃었다. "너는 아직 모르고 있군?" 백철우는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내가 뭘 모른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이른바 하늘에서 내리는 피는 그야말로 귀하기 때문에 빨리 말라버리 는 것이다. 네가 이미 마셔버렸던 그 성스러운 피도 이미 거의 말라버렸 을 것이다. 너는 생각할 수록 빨리 달아난다는 말을 모르느냐?" 백철우는 문득 안면을 일그러 뜨리고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뭘 모르냐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너는 이미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불경을 저질렀다. 그는, 네게 더이상 생각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그랬으므로 너는 빨리 이 성스러운 피 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화를 낼 것이다." 백철우는 온 몸을 덜덜 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괴이한 것은 그 옆의 백방도나 백철산의 눈빛도 괴이해 지기시 작한다는 사실이었다. 현명한 황진의는 이내 그것이 백방생이 일종의 최면술로 상대의 심마(心魔)를 유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한 심마는 종종 멀쩡한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녀 는 즉시 전음을 날려 당리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상공께선 지금 장난을 하고 계시는 거야.) 백방생은 다시 말했다. "너는 감히 그의 위업을 거스르려고 하는구나. 그러지 말고 어서 이리 와서 조금만 마시는 것이 어떠냐"그러면 이내 마음이 편안해질 텐 데?" 백철우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옆의 백방도와 백 철산도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었다. "아냐, 난 마시지 않겠다." 마치 세 사람이 입술을 움직이지만 말은 한 사람이 하는 것과도 같았 다. 백방생은 물을 한바가지 떠서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지"그러다간 몸속의 그 성스러운 피 가 고갈되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가"어서 빨리 피가 말라버리기 전 에 마셔보는게 어때?" 이상하게도 백철우 등은 백방생이 한걸음 다가가자 이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아주 심한 공포에 젖은 듯한 표정들이었다. "가, 가까이 오지마?" 소리치는 백철우의 두 눈알이 하얗게 뒤집어 지는 것 같았다. 백방생 은 말했다. "너희들은 너무 두려워 하는군. 하지만 사실 그렇게 두려운 일은 아니 야. 자, 어서 이 피를 마셔보는 게 어때?" "이, 이 자식이...!" 백철우 등은 뒤로 물러나다가 그만 등이 벽에 닿아 깜짝 놀랐다. 그 때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던 백방생이 발에 무엇이 걸려 넘어질 듯 하며 바가지의 물을 그 쪽으로 확! 쏟아버렸다. 그 때였다. "으악!"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세 사람은 크게 경악하여 비명을 지르 며 일순간 벽을 뚫고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일순 가볍게 냉소를 터뜨렸다. "하하, 이제 녀석들은 감히 다시 이곳으로 오기 어렵겠지?" 당리는 사실 조금전의 그 광경을 보며 가슴이 조마조마 했었다. 이제 그들을 몰아내자 그녀의 입에서는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황진의가 이것을 보고 있다가 그녀에게 손으로 진기를 주입시켜 주었 다. 그러자 당리의 안색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대강 바닥과 천정, 벽면 등을 치우고 정리한 뒤에 황진의가 백방생에 게 말했다. "상공, 조금전의 그 수법은 범상치 않았어요. 대체 뭐라는 거죠?"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별 것 아니오. 그저 그들의 심리를 이용했던 것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대체 누가 그들의 무공을 회복시켜 주었을까 하는 생각 을 해 보았는데, 결론은 역시 그 신화상제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즉 천 선은 그들의 무공을 회복시키면서 아울러 심령금제술(心靈禁制術)을 걸 었으리라는 생각이오. 즉 그는 그런 것으로 아예 천하의 인간들을 개조시 켜서 자신의 이상제국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 본래 이 심령금제라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간혹장애(障碍)가발생하 게 되고, 또한 그것에 의해 심마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오. 나는 그 방 법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어 다시 이곳에 오지 못하 게 한 것이오." 당리는 그들이 파랗게 질리던 모습을 상기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씀들은 이상하여 멀쩡한 사람들도 공포감이 들게 만들었 어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그건 염려 마시오. 모든 것은 흘러가 버리는 것이니 곧 잊게 될 것이 오. 또한 무공이 최상승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그런 것에 대항할 힘이 강 해지게 되오." 당리는 그제서야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래서 황언니는 멀쩡했던 것이었군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최상승의 경지에 오르면 선천(先天)이라고 소위 말하는 진기(眞氣)를 얻게 되지. 그 경지에 오르게 되면 몸과 마음이 다 강해지게 되어 병마 (病魔)들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이오." 당리는 의아해 져서 말했다. "헌데 그 천륭무가는 어째서 오히려 무공이 높은 데도 일찍 단명하게 되는 거죠"정말로 그 천형은 고칠 수가 없는 것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 원인은 바로 번뇌에 있소. 번뇌가 있기 때문에 무공이 높으면서도 오히려 단명하게 되는 것이오. 사실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하 나 있기는 하오." 황진의가 놀라 말했다. "그게 뭐죠?" 백방생의 대답은 간단했다.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이오." 황진의와 당리는 다 함께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다. "정말인가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연마하여 대성한 바가 있소.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가 있는 것이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달마역근경에 대해서 잘못 이 해하고 있소. 더러는 아주 기초적인 도인공(導引功)으로, 혹은 절정의 내 공으로, 혹은 최상승의 무학으로, 그 모든 것들이 적용이 가능하오. 그러 나 기실 달마역근경은 근본부터 무학의 원리(原理)를 꿰뚫은 것으로 사 실상 무형검(無形劒)의 무학인 것이오. 진실로 지혜가 있는 자만이 그 속의 이치를 알고 그 무공을 터득하곤 하오."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말을 이었다. "얼마전에 천륭무가주가 그 달마역근경을 수련한 적이 있었었소. 그런 데 그가 만일 진실로 모든 것을 상관하지 않고 그 내용에 파고 들었더 라면 그래도 약간의 성과가 있을뻔 했소. 그는 사실 진짜 황금을 돌멩이 로 착각한 것이지." 점차로 사위가 어두워 지자 황진의는 방과 거실 등에 촛불들을 밝혀 놓았다. 당리를 성수곡으로 보낸 뒤에 백방생은 다소 마음이 초조해 지기 도 하여 아래층의 탁자앞에 앉아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대략 술시가 되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갑자기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더니 한 사 람이 익숙한 태도로 안으로 들어섰다. 백방생은 그녀가 혹시 당리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당리는 아니었 고 바로 석채릉이었다. 백방생은 석채릉이 그렇게 나타날 줄은 몰랐기 에 전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황진의는 부엌을 정돈하고 있다가 그것을 보고 즉시 백방생에게 다가왔다. 백방생은 읽고 있던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아니 무슨 일이오"나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거실의 한쪽에서는 아직도 난로를 때고 있어서 화덕에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석채릉은 그 불꽃을 한 번 바라본 뒤에 천천히 걸어서 촛불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마치 자신의 빼어난 미모를 잘 보여 주 려는 것 같았다. 촛불의 옆에 서서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내가 대체 무슨 볼일로 왔을 것 같아요?" 백방생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니 아직도 과거의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오?" 석채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과거의 일 때문에 온 것은 아니예 요. 나는 지금의 일 때문에 온 것 이죠. 저는 현재 남궁세가의 둘째공자와 정혼한 상태예요. 그러니 그 일 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겠어요?" 남궁세가의 둘째공자라면 바로 남궁검상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남궁검상은 용모가 빼어나서 아마도 석채릉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 다. 이번에 남궁검상 등이 그녀와 함께 나타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석채릉은 기묘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을 보니 자연 두 사람이 비교가 되는 군요. 나는 당신이 이렇게 멋있게 변할 줄은 미처 몰랐어요. 당신도 내가 이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백방생은 조용히 응대했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이오?" 석채릉은 말했다. "나는 그와의 정혼을 취소하고 당신과 혼인하고 싶어요. 물론 당신의 두 여자도 인정하는 것으로 하죠. 당신은 물론 이 일에 찬성하겠지요?" 백방생은 옆의 황진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묵묵히 곁에 앉아서 듣고 있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당신은 내가 당연히 찬성하리라고 생각하오?" 석채릉은 말했다. "물론이예요. 당신은 반드시 그렇게 할 거예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나는 오히려 반대하오." 문득 석채릉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이어 냉랭한 표정으로 백방생을 주시하며 말했다. "당신은 지금의 그 말에 책임질 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이 일은 처음부터가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석 채릉은 태도가 너무나도 당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필시 그녀 가 믿는 바가 있지 않겠는가" 백방생은 그게 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 며 은근히 근심했다. 마침 걱정하고 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줄곧 책임을 져 왔소." 석채릉은 이에 가볍게 한 숨을 불어 쉬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안됐군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정조는 무너지 게 되어 있으니까." 백방생은 일순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라고"지금 당신들이 아리를 잡고 있다는 말이오?" 석채릉은 차갑게 냉소했다. "아리인지 당리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달아나려는 한 암코양이는 데리 고 있죠. 당신의 결정은 뒤집을 수가 없는 것이겠죠?" 당리는 지금 임신중이었다. 비록 초기의 위험한 단계는 지났다고는 하나 그래도 백방생의 마음은 초조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그녀는 돈을 구하러 간 것이었소.당신들도 돈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 았소?" 석채릉은 싸늘하게 조소했다. "당신은 감히 거짓말을 하는군요. 우리를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 나요"아마도 그녀는 성수곡으로 구원병을 청하러 갔었겠죠?" 백방생은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들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소?" 석채릉은 가볍게 웃었다. "아 무사해요. 만일 당신이 내 부탁을 들어주면 그녀는 나의 형님이 될 것인데 내가 감히 몸을 건드릴 수야 있나요"게다가 그녀는 호호, 아이 까지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백방생은 당리가 필시 그녀의 일행에게 잡힌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직 당리가 무사한 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백방생은 말 했다. "우리가 그대를 제압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석채릉은 황진의를 돌아 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 "저 언니가 나 보다 무공이 약간 고강한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당신들 이 감히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것 같아요"만일 내가 어떻게 되면 당 신들은 결코 살아남지 못하게 될 거예요." 백방생은 기실 석채릉의 그 말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게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그녀를 들어오는 순간부터 제압하라고 했었 을 것이었다. 백방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소. 우리 좀 더 차분히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그대가 원하는 조건은 뭐요?" 석채릉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 모양이군. 그러나 다시 귀가 먹었다는 말인가요 "내가 그 조건을 말하지 않았나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조건은 오히려 그대에게 불리할 것 같구려. 생각해 보시오. 나는 이미 여자가 둘인 유부남이고 그대는 아직 순결한 처녀인데 상대 가 될 수 있겠소"게다가 그대는 지체도 높고 무공도 그리 높은데?"하 하, 그렇게 장난하지 말고 어서 나의 부인이나 돌려 주시오. 돈은 원 하는 대로 드릴테니." 석채릉은 약간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할 수 없군요. 우선 내가 가서 당신의 그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부터 보내 드리지요." 백방생은 그녀가 신형을 돌리는 것을 보고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 다. "좋소! 그대가 이겼으니 그대의뜻대로 하시오"내 당신과 혼인을 하 겠소. 그러니 어서 그녀를 데려 오시오." 석채릉은 그제서야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의 입가에는 득의한 미소 가 퍼져 있었다. "호호, 당신은 제법 사리를 판단할 줄 아는군요. 하지만, 그렇게 말만 가지고는 믿을 수가 없어요." 백방생은 의아해 졌다. "그럼 무슨 보증금이라도 내라는 말이오?" 석채릉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내가 혼인만 하면 그 돈들이 모두 내것이 될 텐데 보증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난 다른 분명한 보증을 원해요. 그건... 바로 당신 과 내가 지금 바로 잠을 자는 거예요." 백방생은 그 말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 졌다. 황진의를 바라보니 그녀는 그저 가볍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확실히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 는 것은 그녀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아무리 해도 일단은 따르는척 하는 도리밖에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 어 다시 생각했다. "만일 정말로 그녀와 관계를 가진다고 해도 반드시 혼인까지 해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런 일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 주는 것이 유리한 법이었다. 백방생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서 침실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서 따라 오시오!" 석채릉은 즉시 그의 뒤를 따라왔다. 황진의는 아까의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석채릉은 침실의 안으로 들어서자 급히 방문을 안에서 닫아 걸며 백방생의 곁으로 바싹 다가서서 말했다. "백방생, 당신은 사실 나의 악마이고 보기 드문 영웅호걸이예요. 당신 은 전에 나를 그토록 괴롭혔죠. 그래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괴롭힌다 면 어쩌려고 그러죠?" 석채릉은 말과 함께 백방생의 혈도를 제압하는 시늉을 했다. 백방생은 웃으며 침상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이미 당신에게 패배한 사람이니 당신이 괴롭히든 마음대로 하시 오. 패자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석채릉은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백방생의 겉옷을 벗기며 그녀는 말했 다. "좋아요. 당신이 이렇게 순순히나오니 나도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우 리는 지금 정당한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며 거래가 성사되면 부부가 되 는 거예요. 이것은 당신에게도 매우 좋은 일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속옷 차림으로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오. 헌데 당신은 정말로 이것을 후회하지 않겠소?" 석채릉은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을 하나씩 벗으면서 그녀는 고 혹적으로 웃었다. "후회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당신은 그날 나를 이미 발가벗기고 이곳 저 곳을 만져보지 않았나요" 호호, 나의 순결은 사실 그 때 깨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요." 백방생은 속으로 설마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석채릉이 그와 잠을 자려고 할 줄은 몰랐다. 그 점에 대해서 그는 자연 어리둥절해 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석채릉은 왜 하필이면 그렇게 일부러 자신과 관계를 가지려는 것일까" 백방생은 멍하니 속옷 바람으로 침상위에 앉아서 옷을 벗는 석채릉 을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기실은 혼자서 그러한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로서는 이 상황이 몹시 난처했다. 역시 어쨌든 당리를 혼자서 내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녀와 아이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지금 석채릉과 관계 를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실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궁의 수렁속으로 빠져드는 것과도 같이 될 지도 모른다. 백방생은 짧은 순간 에 가능한한 해결책을 생각해 내려고 했으나 해결책은 급한 마음이라 더욱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은 시간을 좀 끌어보는 수밖에 없겠군.) 석채릉은 이미 속옷까지 벗고 두 개의 작은 속곳인 젖가리개와 아래 의 고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방안은 어두웠다. 그러나 무공을 익혀서 시력이 좋은 두 사람에게는 그 어둠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석채릉 은 일단 거기까지 벗고 백방생에게 보라는 듯이 몸을 자극적으로 움직 여 보였다. 은은하게 창문으로 스며들어 오는 별빛에 반사되어 그녀의 육신은 흡사 은빛의 인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어 고혹적으로 웃으며 손을 젖가리개로 가져갔다. 헌데 바로 그 때의 일이었다. 마악 젖가리개를 떼어 내려던 석채릉은 갑자기 안색이 돌변해서 차가운 시선으로 소리쳤다. 그녀는 침상의 아 래쪽을 보고 있었다. "어서 나와라!" 백방생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줄로 알았다. 역시 그녀의 본심이 나오는가 싶어서 석채릉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석채릉이 두 눈에 살기(殺氣)까지 떠올리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정말 죽고 싶단 말이냐?" 순간 갑자기 침상이 절반으로 쫘악, 갈라졌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그 속에서 한자루의 장검과 함께 둥그런 물건이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 둥그런 물건은 바로 사람의 머리였다. 백방생은 갑자기 자신의 아래쪽에 서 사람이 튀어 나오자 깜짝 놀랐다. 게다가 정작 놀랄 일들은 계속 이 어지고 있었다. 순간 쏴쏴쏴!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섬광(閃光)들이 백방생의 몸을 뒤덮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장검으로 펼쳐내는 강력한 검기(劒 氣)들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무학의 조예가 높은 상태였다. 그는 벌써 그것이 남궁세가의 절예들 중의 하나인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劒雷)라는 것을 알았다. 그 섬전십삼검뢰는 바로 최상승의 절학으로 빠르고 강한 파괴력을 지 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것을 대성하려면 시전자는 검강의 경지에 이르 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전자는 전혀 그러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 했다. 비단 주요장점인 빠르기와 파괴력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백방생은 벌써 그 가운데의 헛점을 수십 곳이나 발견했다. 그러나 비록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실천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백방생은 비록 그것을 파해할 수법은 알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파 해할 능력은 없었다. 그는 현재 공력이 거의 상실된 상태인 것이다. 순간 침대의 이불 전체가 갈가리 찢겨져 날아갔다. 백방생의 의복에도 검세가 침투하여 붉은 선혈들이 튀어나고 의복이 찢겨지기 시작했다. 백방생은 다급한 순간이라 급히 몸을 굴려 아래로 떨어졌다. 그 검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끈질기게 그의 뒤를 추격했다. 헌데 바로 그 때 였다. 갑자기 희미한 옥색(玉色)의 손바닥들이 나타나더니 꽃잎처럼 그 검세에 부딪쳐 가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육장(肉掌)으로는 병장기의 예리한 날을 당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그 옥장(玉掌)들은 괴이하게도 거꾸로 검세들을 부수고 녹여가는 것이었다. 츳츳츳" 하는 가벼운 소리 와 함께 옥장은 삽시간에 검세를 파해하고 그 사람의 얼굴을 뒤덮었고 그 시전자는 그만 손을 거두어야 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시전 자의 진면목(眞面目)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얼굴을 바라본 백방생은 내심 아"하고 놀랐다. 그 시전자는 다름아 닌 바로 남궁검상이었던 것이다. 남궁검상은 이미 그녀와 정혼까지 했 다고 하지 않은가" 석채릉은 남궁검상이 장검을 들고 멍청히 서있자 그대로 그의 따귀를 쫙쫙쫙"하고 수십차례나 갈겼다. 이내 그의 양 뺨이 찐빵처럼 부풀어오 르고 코와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내 그의 두 눈이 허옇게 변해서야 석채릉은 손을 거두었다. 남궁검상은 갑자기 그렇게 수십차례 의 따귀를 얻어맞게 되자 내상까지 입어서 전신을 비틀거렸다. 석채릉은 크게 노한 모습으로 소리쳤다. "네 놈은 정말 죽고 싶으냐"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냐?" 남궁검상은 이미 퉁퉁하게 변한 양 뺨을 어루만지다가 문득 입을 우 물거리며 부러진 이빨을 세 개나 뱉어냈다. 그리고 멍하니 반 나체의 석채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대의 지아비가 될 사람인데 이럴 수는 없소?" 석채릉은 그가 멍하니 자신의 벗은모습을 바라보자 이내 발길질로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남궁검상의 몸이 뒤로 날려가고 벽이 허물어 지며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뭐가 이럴 수가 없다는 말이냐"내가 하면 하는 것이지 네까짓 것이 무엇인데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냐?" 남궁검상은 등이 벽에 부딪치자 입으로 피를 줄줄 흘리며 일어났다. 그런데 그는 괴이쩍게 웃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그렇게 서서 멍청하 게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하지않고 석채릉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방생은 얼른 겉옷을 찾아서 입은 다음에 일어나며 석채릉에게 말했 다. "그는 당신에게 일편단심(一片丹心)의 사랑을 갖고 있는 모양인데 좀 너무한 것이 아니오?" 석채릉은 크게 분개하여 바라보다가하는수 없이 옷을 도로 입으며 말했 다. "일편단심이라고요"웃기는 소리 말아요. 녀석에게 만일 그런 것이 있 다고 하면 개가 다 웃을 거예요. 감히 내 일을 방해하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군?" 백방생은 석채릉의 두 눈에 정말로 살기까지 비치는 것을 보고 혹시 그녀가 진짜로 그를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백방생은 말했다. "이제 그만 내 아내를 돌려주는 것이 어떻겠소?" 석채릉은 기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가 없군요. 그래 아직 우리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나 요?" 이어 그녀는 옷을 다 입자 천천히 남궁검상에게 다가갔다. 남궁검상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백방생은 문득 석채릉의 태도가 뭔 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의주위에서 안개와도 같은 기운이 일어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그녀가 공력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과 연 그녀는 남궁검상을 죽이려는 것일까"남궁검상은 그것을 아는 지 모 르는지 여전히 그렇게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마도 조 금전에 벽에 부딪쳤을 때 뇌에 어딘가 이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헌데 석채릉이 미처 남궁검상의 앞에 이르기도 전의 일이었다. 느닷없 이 창문이 벌컥 열리며 두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드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바로 남궁지약과 황보헌이었다. 그들은 각기 경신술을 전개하여 날아서 남궁검상의 앞을 가로막았다. 석채릉은 그것을 보고 분노하여 말 했다. "너희들이 감히,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황보헌은 창백한 안색이 되어서 말했다. "그를 죽이지 마시오. 저 백가녀석을 위해 그를 죽인다는 것은 너무한 일이 아니오?" 석채릉은 안면에 기이한 빛을 떠올렸다. "너는 내가 그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황보헌은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러나 어쨌든 소저의 선처를 바라오." 석채릉은 문득 두 눈에 강한 살기를 떠올렸다. "지금 너희들이 이러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 지 아느냐" 실로 멸 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할 것이다?" 황보헌은 그말에 크게 안색이 변했으나 그래도 자리를 비켜 서지는 않았다. 석채릉은 문득 남궁지약을 바라보더니 황보헌에게 다시 말했 다. "너는 이 계집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 겠지?" 황보헌은 그 말에 흠칫하며 은근히 두렵고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석 채릉이 무슨 짓을 하려는 지 대강 느낌이 왔기 때문이었다. 석채릉은 즉 시 남궁지약의 옷을 부욱, 찢어 버렸다. 설사 무공의 힘이 아니더라도 남궁지약이 입고 있는 의복은 연청색의 얇은 의삼이어서 쉽게 찢겨져 나갔다. 남궁지약은 스스로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가만히있었 다. 석채릉은 이어 그녀의 젖가리개도 찢어버렸다. 출렁 하고 두개의 젖 무덤이 소스라쳐 일어났으며 남궁지약은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황 보헌이 놀라 소리치며 달려 들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오?" 그러나 그와 석채릉과의 무공의 격차는 너무나도 심했다. 미처 황보헌 의 주먹이 석채릉의 옷깃에 닿기도 전에 이미 석채릉의 발바닥이 그의 면상을 걷어차고 있었다. 황보헌은 그만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코에서 피 를 흘리며 뒤로 날아갔다. 황보헌이 바닥을 뒹구는 것을 보고 석채릉은 능공섭물의 절기로 남궁검상의 장검을 손에 잡아들었다. 황보헌 은그것을 보고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소리쳤다. "그녀를, 그녀를 해치지 마시오?" 석채릉은 장검으로 봉긋하게 치솟은 남궁지약의 한쪽 유방을 도려냈다. 비록 그녀의 솜씨가 대단하여 깨끗하고 빠르게 도려냈다고는 하나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남궁지약은 으악, 하고 눈을 까 뒤집었으며 그곳에서는 선혈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너무나도 엄청난 일 을 보았기 때문인지 황보헌은 일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석 채릉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녀는 그대로 놔두면 죽는다. 그러니 어서 데려가서 지혈이나 해라 만일 그렇지 않고 계속 나의 일을 방해한다면 즉시 그녀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 황보헌은 일순 정신이 번쩍드는 것 같더니 벌벌 기어서 일어났다. 그는 미친 듯이 말했다. "아, 알겠소. 그녀를 건드리지 마시오. 내 모든 일을 하라는 대로 할 테 니 그녀를 해치지 마시오?" 석채릉은 잔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식의 웃음이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느닷없이 이제까지 가만 히 있던 남궁지약이 두 눈에 원독의 광망을 발산하며 소리치는 것이 아 닌가" "아헌(阿軒)! 나를 상관하지 말아요. 우리 오빠를 죽게 하지 말아요?" 말과 함께 느닷없이 석채릉의 앞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석채릉은 그것을 보고 일순 크게 놀랐다. 가슴에서 피를 내뿜으며 흉악하게안면을 일그러뜨리고 덤벼드는 그 모습은 흡사귀녀(鬼女)를 보는 듯 했기 때문 이었다. 석채릉은 자신도 모르게 공포스런 표정을 지으며 우수를 휘저었 다. 그녀의 장검에서는 대번에 츳츳츳! 하는 검강이 뻗어나가 남궁지약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았다. 그녀는 전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황천의 객이 되고 만 것이었다. 대번에 피와 살들이 범벅이 되어 흩어 지고 장내에는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참혹의 극치를 이루었다. 남궁지약 의 얼굴과 몸매는 무척 아름다운 편이었는데 이제는 어디에도 그 흔적 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황보헌은 다가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일순 멍청해졌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괴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황보헌은 그것을 보고 미친듯이 날뛰어도 부족하겠건만 돌연 허허, 하고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웃으면서 석채릉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 이 녀석이 미쳤군?" 석채릉은 이미 상황이 글러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더이상 주저 하지도 않았다. 다시 장검을 휘두르자 황보헌의 허리도 반쪽으로 갈라지 며 넘어갔다. 황보헌은 그렇게 죽으면서도 얼굴의 표정은 여전히 허 허, 하고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석채릉은 그 모습을 보자 왠지 소름이 오싹 끼쳐지는 것 같았다. "미친, 미친 놈들이야?" 석채릉은 마치 그들에게서 벗어나기라도 하듯이 연이어 장검을 휘둘렀 다.여전히 그녀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던 남궁검상의 얼굴이 돌연 바 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윽고 몸뚱이는 머리를 잃고 흔들거리다가 잠 시 후에야 피를 내쏟으며 쿵, 하고 쓰러졌다. 석채릉은 내던지듯 장검을 버리고 나서 대강 옷에 묻은 핏자국을 털어낸 뒤 백방생에게 돌아갔 다. 백방생은 워낙 순식간에 그 일이 벌어졌는 데다가 또한 시간이 있었 다고 해도 그것을 말릴 능력이 없었다. 그는 길게 탄식을 하고 있다가 석채릉에게 말했다. "그들은 낭자에게 나쁜 마음이 없었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겠 소?" 석채릉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차갑게 말했다. "흥! 그들이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해도 감히 항명을 하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어요! 잘 보아 주려고 했더니 비천한 것들이 감히 하늘 꼭대기 까지 기어 오르다니?" 백방생은 그녀가 추호도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실로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온갖 고생쯤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석채릉이 문득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내가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당신은 만족하시겠 죠?" 백방생은 어이가 없어 하며 말했다. "아니 그럼 내게 그런 안심을 시켜주기위해 그들을 모두 죽였다는 말이오?" 49 장 불가사의 백방생은 문득 과거 남궁검상 등과의 사건들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것 은 비록 유쾌하지는 않지만 지금에 이르러 착잡한 기분을 불러 일으켰 다. 남궁검상 등은 용모도 훌륭하고 또한 악독한 심사가 있었지만, 그 러나 지금에 와서 그보다 더욱 악독한 한 여자에게 죽음을 당하고 만 것 이었다. 석채릉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어쨌든 저는 이제 정혼자가 없어진 것이니 된 것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잠시 멍하니 생각에 사로잡혔다. 석채릉은 다시 옷을 벗으며 말했다. "자, 이제 방해자도 없고 하니 다시 우리의 거래를 시작하도록 해 요." 백방생은 일순 어이가 없어 하며 말했다. "아니 지금 여기 이곳에서 그 짓을 하자는 말이오?" 석채릉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대체 뭐가 문제죠" 좀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지금은 어두운 밤중이고, 게다가 우리는 그런 것들을 개의하지 않는 강호인들이 아 닌가요"당신, 그래 부인과 아기를 찾고 싶지 않은가 보죠?" 백방생은 확실히 자신이 이 여자에게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 인과 아기라는 말에 백방생은 말이 목에 막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백방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짐승이 아니니 이런곳에서 할수는 없지 않겠소"장소 를 다른 곳으로 옮겨 보도록 합시다." 석채릉은 기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보기보다 담이 적군요. 왜 이런 자리는 안된다는 거죠" 그건 바로 선입견이라는 거예요. 오히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이런 강한 자극 을 좋아하죠. 이런 곳에서 관계를 하는 것이 더욱 재미있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다르오." 석채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사람들은 대개가 다 거기에서 거긴 셈이죠. 당신이라고 해서 그런 자극적인 본능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어요. 자" 어서 나를 봐 요. 내가 틀림없이 당신을 흥분하게 해 주겠어요." 말과 함께 석채릉은 자신의 의복을 빠르게 벗어 버렸다. 이번에 그녀 는 두개의 속곳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벗어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은 은한 어둠속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나신이 우유빛으로 빛났다. 그녀의 육 신이 그렇게 은은한 기운을 발산하는 이유는 바로 무공이 이미 최상승 의 경지에 올라 있기 때문이었다. 무공이 그 경지에 오르게 되면 전신피 부의 불순물은 모두 제거되고 아주 맑고 투명한 광채가 은은하게 흐르 는 것이니, 자연 그 아름다움이 수십배를 더하게 되는 것이었다. 무학 을 연성한 여자가 훨씬 아름답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치에서이다. 게다가 강렬한 유혹을 담은 요염한 기운이 그 눈빛과 전신에 서려 있어 서 보통사람은 그저 말 한마디로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 다. 석채릉은 흡사 요염한 악녀(惡女)와도 같았다. 그녀는 백방생을 향해 요 염한 웃음을 지으며 일부러 두 다리를 슬쩍 벌려 보였다. 비록 지금의 상황이 참혹스럽다고는 해도 사내라면 그러한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백방생은 비록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지만 솔직히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길게 탄식을 터뜨렸다. 석채릉은 그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그런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보이나요"정말 영웅호걸답지 않군 요. 겨우 한 여자를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다니 그게 어디 영웅호걸이 할 짓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영웅호걸은 이런 상황에서는 당신을 덮쳐야 한다는 말이오?" 석채릉은 말했다. "적어도 자신의 본능에 솔직해져야 하는 거죠. 자신의 본능마저 속이 면서 그렇게 억지로 태연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요. 위 선(僞善)이죠. 자, 어서 이리로 와요! 나는 사실 제법 상식이 있기는 해도전혀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은 순결한 처녀예요. 나와 같은 여자를 소유한다는 것은 행복이 아닐까요?" 석채릉은 말과 함께 오른손으로 자신의 봉긋한 젖가슴과 아랫배, 그리 고 은밀한 부위 등을 어루만졌는데 순간 정말로 백방생은 신음소리를 지를뻔 했다. 석채릉의 그러한 모습은 실로 한 남자의 영혼을 빼앗아 버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상징도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백방생은 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영웅호걸이 아니오. 게다가 당신의 그 화려한 유혹이 일종의 덫이 라는 것을 알고 있지." 순간 백방생의 반응을 기다리던 석채릉은 마침내 화가 나서 소리쳤 다. "뭐라고"이 자식이 좋게 대해주니까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구나 "분명히 말하겠어"네가 만일 처자식을 구하고 싶다면 열을 세기 전에 옷 을 모두 벗도록 해!" 말이 끝나자 이어 그녀는 직접 백방생에게 다가가서 손수 옷을 벗기려 고 했다. 이에 백방생은 문득 웃으며 말했다. "정말 훌륭한 물건이로군. 보기좋은그림이야. 그러나 정말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으니 아쉽군." 석채릉은 그 말에 손을 멈추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백방생은 말했다. "석낭자, 그대의 알몸은 정말 그냥 보내기에는 아깝다는 말이오. 내 다 음에 기회가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겠소." 석채릉은 문득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갑자기 지풍을 날벼락처럼 날려 서 백방생의 전신대혈을 제압한 후에 독기가 가득한 눈초리로 말했다. "무슨 짓을 했느냐" 죽여버리기 전에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어서 밝혀라." 백방생은 침상위에 앉은 채로 움직일 수 있는 입만 벙긋거렸다. "나는 별로 한 일이 없소. 다만 나의 또 다른 마누라와 아기가 무사히 돌아왔다고 전음으로 알려 주는 구려."석채릉의 안면에 심한 경련을 일 으켰다. 당리는 지금 백귀현 등의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어서 설령 황 진의라고해도 그녀를 빼내올 수가 없다. 그런데 백방생의 말은 대체 뭐란 말인가" 석채릉은 크게 부인하며 말하려고 했다. 그 때, 문득 방문이 열리며 입구쪽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수치심을 느 낀 석채릉은 황급히 겉옷만을 걸쳐서 간신히 알몸을 가렸다. 놀랍게도 지금 나타난 사람은 정말로 황진의와 당리였다. 백방생이 바라보니 당리 의 모습은 다소 초췌해 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친 곳은하나도없는것같 았다. 석채릉은 당리가 나타난 것을 보고 내심 이를 뿌드득 갈며 생각 했다. (이, 이것들이 감히?) 그 때 문득 황진의 등의 뒤에 나타나는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바 로 죽은 남궁검상 등과 함께 왔었던 황보능파와 팽영, 팽웅이었다. 팽 영이 나타나는 즉시 포권하며 석채릉에게 말했다. "소저께 드릴 말씀이 있소." 석채릉은 이미 그들 세 사람이 일부러 당리를 놓아줬다는 사실을 알았 다. 물론 남궁검상 등이 죽은 것에 한을 품은 것이 분명했다. 석채릉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을 하겠다는 것이냐?" 팽영 등의 표정은 무표정했고 음산하기 까지 했다. 마치 시체와 같은 느낌마저 드는 것 같았다. 이미 신화제국에 반기를 들었으니 죽음마저 각오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팽영은 괴이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떠나려고 하오." 석채릉은 음산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떠나려면 떠나는 것이지 언제 누구의 허락을 받고 떠났느 냐?" 팽영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우리는 의당 그대를 따라왔으니 떠날 때도 형식을 갖추고자 하는 것 이오." 석채릉은 말했다. "그래"그렇다면 이제 절차가 끝났으니 떠나도 되겠군?" 팽영은 포권하며 말했다. "그럼 소저의 무운을 삼가 빌어 드리는 바이오." 말과 함께 그들은 즉각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그것을 보고 석채릉이 차갑게 불렀다. "잠깐,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팽영 등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팽영은 포권하며 말했다. "소저께선 혹시 다른 가르침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석채릉은 음산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가문(家門)을 돌보지 않을 셈이냐?" 팽영 등은 그 말에 흠칫하여 안색이 변했다. 황보능파가 창백한 안색으 로 소리쳤다. "당신은 감히 우리 오빠 등을 죽이고도 우리가 따르리라고 생각했다는 말인가요"결국 우리를 모두 죽일 것이니 아무도 따르지 않을 거예요?" 석채릉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팽씨형제에게 말했다. "알고보니 너희들은 저 계집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구나. 사실 나와 너 희들의 가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 자, 어떻느냐"저 하찮은 계집 하나와 너희들의 가문과 바꾸겠느냐"어서 지금 당장 그 계집을 죽여라 "그러면 너희들을 용서해 주겠다?" 석채릉의 그 말에 잠시 장내에 살벌한 침묵이 내리 깔렸다. 황보능파는 원한에 가득찬 표정으로 석채릉을 바라보았고 팽씨형제는 다소 주저하 는 기색을 지었다. 팽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포권하며 말했다. "소저의 그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소. 우리는 대의(大義)를 따라갈 뿐이며 거기에는 두려움이 없소." 헌데 그가 마악 신형을 돌렸을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동생인 팽웅이 다 가오더니 비수로 그의 가슴을 푹, 찌르는 것이 아닌가" 힘껏 찔렀기 때 문에 비수의 끝부분은 이내 등 뒤로 흉물처럼 뾰죽 튀어 나왔다. 갑작스 런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팽영은 일순 의아해져서 고개를 들고 팽웅에게 물었다. "왜 너는 나를 찌르는 거냐?" 팽웅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건, 그건 그녀가 시켰기 때문이야. 미안해, 형!" 팽웅은 황보능파를 가리켰으므로 팽영은 일시 그쪽을 바라보며 어리 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어 팽영은 힘없이 숨을 거두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팽웅은 팽영이 그 렇게 죽자 왠지 갑자기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비수를 던져 버리고 황보능파에게 다가갔다. 황보능파는 안색이 몹시 무표정했다. 그녀는 다가오는 팽웅을 향해 말했다. "수고했어요. 나는 지금 피곤하니 나를 안고 떠나 주겠어요?" 팽웅은 그야말로 헤벌쭉 웃었다. 그는 즉시 좋아서 입이 찢어지며 고개 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나는 정말 그대를 사랑해!" 이어 팽웅은 황보능파를 한손으로 번쩍들어 어깨에 매고는 밖으로 걸 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은 이내 사라졌다. 석채릉은 그것을 보 자 몹시 화가 나는지 연신 거친 호흡을 했다. 백방생은 말했다. "자, 이제 자신의 의도가 무산된 것을 알았으면 나를 풀어줘야 하지 않겠소?" 석채릉은 당리 등을 돌아보다가 일순 두 눈에서 독기(毒氣)를 강하게 일으켰다. 이어 그녀는 짐짓 입가에 부드럽고 교태스러운 미소를 떠올 리더니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죠. 비록 그녀가 돌아왔 다고 해도 당신이 저를 받아들인다면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이 아니겠 어요?" 말과 함께 석채릉은 아예 겉옷을 벗어 버렸다. 백방생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 졌다. 그는 석채릉이 자신의 부인들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일순 그녀의 은밀한 부위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백방 생은 저도 모르게 안색이 붉어지며 말했다. "내, 내가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하오?" 백방생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는 더욱 안색을 붉혔다. 석채릉은 자신있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예요. 나의 이 몸은 사실 천하의 누구도 갖기를 원하는 거예 요. 당신이 만일 나를 부인으로 맞이한다면 그건 크게 횡재한 셈이 되는 거죠." 말과 함께 석채릉은 그가 보기 좋으라고 다리를 슬쩍 벌리며 득의하게 웃었다. 백방생은 아내들이 보는 앞에서 얼굴까지 붉어지자 그야말로 못 난 꼴을 보인 셈이 되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고소(苦笑)하며 말했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 그렇게 자신만만하단 말이오?" 석채릉은 교소를 지으며 유혹적으로 자신의 몸을 어루만졌다. "물론이예요. 더군다나 나를 부인으로 맞이하면 우리 신화제국의 부마 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죠. 당신도 조금 전에 저를 갖고 싶다고 하지 않 았나요?" (이러다간 정말 야단나겠군?) 백방생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했다. "나는 사실 농담을 한 것이오. 그래 농담도 못한다는 말이오?" 석채릉은 그 말에 안색이 냉랭하게 변해서 잠시 살광이 번뜩이는 시선 으로 백방생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부득이 방법을 달리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런 강압 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모든 것은 당신의 책임이란 걸 알 아야 할 거예요." 이어 석채릉은 서둘러 자신의 옷을 모두 입더니 밖을 향해 말했다. "모두 들어와요!" 그러자 일단의 사람들이 다른 창문을 통째로 부수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천상오룡과 백귀현 등이었다. 그런데 백귀현의 오른손을 바라본 백 방생 등은 일순 크게 놀랐다. 그의 오른손에는 바로 조금전에 나간 팽 웅과 황보능파의 수급이 들려 있었던 것이었다. 백귀현은 아직도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두 개의 수급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한쪽에 무표정하 게 섰다. 그 뒤로 백방행 등이 차례대로 섰는데 마치 그들은 뻣뻣한 막 대기와도 같았다. 역시 가장 사람다운 사람들은 천상오룡 뿐이었다. 그들 의 눈빛은 차가왔지만 무표정하지는 않았다. 석채릉은 그들 열 명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그녀들을 모두 제압해요!" 천상오룡과 백귀현 등은 이에 천천히 당리 등에게 다가갔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그만 놀라 소리쳤다. "좋소! 내가 졌소! 당신들은 대체 얼마를 원하시오?" 이대신이 문득 신형을 멈추며 말했다. "우리는 황금 백만냥을 원한다." 백방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에게 그만한 돈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오?" 이대신이 기다란 체구를 흔들며 차갑게 말했다. "만일 그게 없다면 너의 이 계집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 되는 것이 다!" 백방생은 그 말에 가볍게 탄식하더니 돌연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렇게까지 핍박을 하니, 실로 어쩔 수가 없구려." 이어 백방생은 몸을 일으켜서 다른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오!" 사람들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다함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석채릉의 표정은 가장 변화가 심했다. 그녀는 경악과 의혹의 표정 으로 백방생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방생은 혈도가 제압되어 있었으며 그녀는 아직 그 혈도를 풀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윽고 백방생은 돌아와서 하나의 예금장부와 인장 등을 이대인에게 건네주었다. 그 예금장부에는 역시 백만냥의 황금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대인등은 그 예금장부를 살펴보는시선들이 매우 복잡했다. 백방생은 그들에게 말했다. "이젠 됐소?" 이대인은 잠시 그를 주시하다가 나직하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 다. "그렇네. 우리는 이 금액을 상제(上帝)께 드리기로 하지. 솔직히 자네에 대해서는 우리는 할 말이 없네." 백방생은 말했다. "가서 그를 만나는 김에 나의 이 얘기도 전해 주시오. 과연 어떤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느냐 하는 것이오. 물질이 풍족하다고 해서그사람 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오. 정말로 사명과 뜻을 가지고 널리 인간(人間) 을 이롭게 할 작정이라면, 우선은 그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고 말이오." 이대인을 비롯한 천상오룡은 착잡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 때 문득 석채릉이 소리쳤다. "나는, 승복할 수가 없어요!" 이어 그녀는 백귀현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저 건방진 백가 녀석을 죽여 버려요!" 백귀현은 그 말에 다소 머뭇거렸다. 그는 천상오룡을 바라보더니 돌연 멍청해 져서 말했다. "나는, 모르겠소.... 이것, 이것은 그 분의 뜻이 아니오." 석채릉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뭐가 그 분의 뜻이 아니란 말이예요"지금 내가 하라면 하는 거지. 모 두 죽기 싫으면 저 자를 죽여요?" 백방도와 백철우, 백철산은 왠지 백방생을 향해 두려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백귀현과 백방행이 마지 못해서 백방생을 향해 다가갔으나 백방행은 도중에 주춤하고 말았고, 백귀현은 다가가 백방생을 오른 주 먹으로 가격했다. 그러나 그 주먹은 반푼의 힘도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그저 퍽, 하고 백 방생의 옷의 먼지를 털어줄 뿐이었다. 이어 백귀현은 바보처럼 헤벌쭉 웃으며 돌아서서 석채릉에게 말했다. "헤헤, 그는 죽일 수가 없소. 보다시피, 보다시피... 헤헤헤." 석채릉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닥쳐요!" 이대인이 나서서 석채릉에게 말했다. "석소저, 상제께서는 이 일이 끝나면 바로 오라고 하셨소. 모든 일은 그 분이 주관하여 처리하실 것이오. 만일 석소저가 더이상 나서게 되면 그것은 월권을 하는 행위가 될 것이오." 석채릉은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돌아가자는 말인가요?" 이대인은 말했다. "그렇소. 그것은 상제께서 정하신 바이오." 석채릉은 잠시 백방생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밖으 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귀현 등이 멍청하게 그 뒤를 따르기 시 작했고 천상오룡은 맨 뒤에 나갔다. 하지만 천상오룡은 다시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내 그렇게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나자 황진의와 당리는 백방생의 옆으로 와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진의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그 혈도(穴道)를 풀 수가 있었죠?"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그들의 심리를 역이용한 것이오. 나는 본래 혈도에 제압당하지 않았소. 이혈대법(移穴大法)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가 있었거든." 황진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처럼 대담한 사람은 다시 없을 거예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우리는 당분간 안전해 지지 않았소"아 마도 그들은 당분간은 오지 않을 테니 말이오." 정말로 백방생의 말대로 신화제국에서는 다시 그들의 집을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화제국의 활동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 다. 오히려 그들은 활동을 가속화 하여 많은 사람들이 소위 신화제궁 에 다녀왔다. 그리고 점차로 급속도로 천하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어디에 서도 분쟁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과거의 거친 습성들이 사라지고 순한 양들처럼 신화제국의 지부의 명령에 잘 복종했다. 신화제국은 더불어 각종의 사업을 그들과 함께 일으켰고, 그러한 사업이 번창해 감에 따라서 많은 보수를 그들에게 주었다. 그들은 따라서 생활이 풍족해 지자 화평한 나날을 보내기 시 작하게 되었다. 그들중 누구도 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다. 신화제국의 사 람들은 그것을 진정한 이상제국이 도래한 것이라고했다. 그러나 다른 사 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차가운 암흑(暗黑)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평온한 강호에서 그래도 유독 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곳은 바 로 영웅회(英雄會)였다. 영웅회는 날마다 신화제국의 지부를 공격했고 가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신화제국에서는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그것은 마치 가소롭게 여기고 있는듯 하기도 했다. 아니, 그렇 게 함으로써 오히려 신화상제의 넓은 포용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이 흘렀다. 육개월여가 지나자 황진의와 당리가 각 기 아기들을 낳았고 황진의는 아들을 낳았는데 당리는 딸을 낳았다. 황 진의가 하루 먼저 아들을 낳았기에 그 녀석이 오빠가 되었고 당리가 낳 은 딸은 동생이 되었다. 당리는 자신이 낳은 아기가 딸이라는 사실에 섭섭해서 며칠동안 말도 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방생이 둘 다 귀여워 해주자 두 여인들은 다시 즐겁게 어울렸으며 그 장원에 웃음꽃이 피어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백일도 다 지나고 강호에는 한가지 큰 행사가 일 어났다. 그것은 바로 석륭안과 진소유가 다가오는 설날에 혼인식을 치른 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모처럼 남창성의 신화제국 지부에서도 백방생에게 친히 초청장을 보내왔고 그 무렵에 장원에는 일 단의 사람들이 찾아 들었다. 바로 용천기 등의 사람들이었다. 그날은 모처럼 많은 눈이 내려서 사방을 온통 하얗게 만들었다. 백방생 은 황진의와 난로앞에 마주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아기들에게 젖을 먹이던 당리가 돌연 소리쳤다. "아, 여보! 그들이 왔어요." 백방생이 돌아보니 찾아온 사람들은 실로 적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낯익은 사람들이라 문득 심한 감회를 불러 일으켰다. 또한 그들은 모두가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거기에서 가장 나이 많 은 사람들은 바로 용천기와 지공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이십대의 청춘남 녀들이었다. 우선 용천기와 지공을 비롯하여 남궁검민과 제갈승지, 제갈심의, 팽호, 팽걸 등의 오대세가의 사람들과, 과거 백방생을 괴롭혔던 화산파의 화 산옥녀(華山玉女) 채청문(蔡靑文)과 외팔이가 된 십방수재(十方秀才) 장 전상(張全詳), 그리고 청성파의 화호접(花蝴蝶) 길완청(吉婉淸)과 백방생 이 처음으로 대하는 정사중간의 인물들인 천산검문의 천산일수(天山一 秀) 을지민(乙遲民)과 무산신녀문의 빙화선(氷花仙) 이추수(李秋水), 해 남검파의 검수재(劒秀才) 주운비(朱蕓飛), 공공문의 옥수도(玉手盜) 손비 취(孫翡翠) 등이었다. 게다가 특이한 것은 당리의 동생인 당독(唐獨)이 그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증평(曾萍)이었다. 백방생은 그녀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몰라볼뻔 했다. 그녀는 사내 아기를 하나 안고 있었는데 이제 태어난 지 네달 정도 되었고 지공을 매우 닮았다. 그러나 그녀가 비구니가 된 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당리는 자연 동생을 오랜만에 만나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반가와 했다. 당독도 겉으로는 무뚝뚝했지만 매우 반가운 눈치였고 백방생에게도 인 사를 했다. 반면에 증평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짧은 인 사를 대신했고, 과거 백방생과 유감이 많았던 채청문이나 장전상 등도 그저 형식적인 포권의 인사를 차릴 뿐이었다. 새로 나타난 천산일수 을지 민이나 빙화선 이추수 등은 다소 호기심이 깃든 시선으로 백방생 등을 바라보고 있었고, 남궁검민 등은 다소 회한이 깃든 표정으로, 그러나 반 가운 표정들을 지었다. 백방생은 용천기와 지공을 맞아 상석으로 안내했 고 이윽고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새로 들어온 하녀들이 분주하 게 차와 음식들을 마련하는 동안에 백방생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이렇게 소생을 잊지 않고 찾아 주시니 고맙소. 마치 이번에 는 거창한 송년회를 하는 듯 하오." 용천기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는 황진의와 그저 형식적인 인사만을 주고 받았을 뿐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용건만 말씀드리겠소. 우리는 지금 바로 신화제궁으로 쳐들어갈 생각이오. 백형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소?"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신화상제를 상대할 자신이라도 있단 말이오?" 용천기는 말했다. "그의 무공은 초절하니 우리로서는 천년이 가도 그를 당해낼 수가 없소. 오직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폭약을 이용하는 것이오." "폭약?" 백방생이 다소 놀라자 용천기는 말했다. "그렇소. 우리는 이미 당형제의 자문을 받아서 충분한 양의 폭약을 준비했소. 마침 이번의 창립기념일에 나머지 세외오선도 모인다고 하 니, 그들 세외팔선이 제궁의 내부에 있을 때 한꺼번에 폭약으로 날려버 리는것이오. 만일 그들만 사라진다면 우리는 희망을 가질수가 있게 될 것이오." (아니 그럼 우리도 통구이가 될 뻔한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내심 놀라면서 겉으로는 미소했다. "여러분의 뜻은 장한 바이오. 하지만 소생은 이미 폐물이나 다름이 없 는데 어째서 이렇게 소생에게 미련을 두는 것이오?" 용천기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이미 천하의 곳곳에서는 천선의 심령금제에 대한 부작용이 늘어가고 있소. 게다가 세외오선은 이미 세외오세를 휘하에 거두었다는 소문이 있소. 이 모든 것들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명분은 충분하오. 흠, 백형의 불행한 소문은 들었소. 우리는 백형을 오해하지 않소. 다만 이번에 함 께 동참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오. 우리 모두가 합심해서 거사를 성취시 켰다면 보람있는 일이 아니겠소?" 백방생은 생각했다. (내가 이미 능력이 있을 때도 너희와 함께 일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내가 너희들과 함께 일할 것 같은가?)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점이라면 사양하겠소. 나는 별로 도움이 못 될뿐이니 차후에는 좀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은거하려고 하오." 백방생의 말이 그토록 굳건해 보이자 용천기는 돌연 두말없이 일어섰 다. 그리고 백방생을 잠시 주시하더니 이내 말없이 떠나버리고 말았다. 지공 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 뒤를 따라 갔다. 남궁검민등이 포권으로 작별인사를 했고, 증평과 당독이 한번 백방생을 바라보았을 뿐 이었다. 그리하여 그 많은 손님들은 갑자기 들이닥쳤다가 미처 다과를 대접할 사이도 없이 썰물처럼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당리는 망연한 표정이었고 황진의가 말했다. "그들은 폭약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성공할까요?" 백방생은 문득 고소하고 있다가 말했다. "만일 이 땅을 전부 없앨 수가 있다면 가능할 것이오." 당리는 동생을 생각하고 있다가 그만 눈이 휘둥그래 졌다. "그럼 세외팔선은 불사신이라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들의 이른바 원영신은 금강불괴이오. 그것은 범상한 방법으로는 파 괴시킬 수가 없소. 폭약으로는 될 수가 없고, 한 사람이 그들을 파괴할 수가 있을 것이오." 당리는 말했다 "그건 누구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건 바로 그들 자신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그들이 우리가 신화제궁으로 가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을까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방해하지는 않을 거요. 그 용천기는 비록 나를 믿지는 못하지만 그러 나 그런 일에 나를 가로 막지는 못하오. 왜냐면 그는 호기가 가득한 영 웅호걸이기 때문이오." 백방생과 두명의 아내, 그리고 아기들은 다음날 아침 신화제궁을 향해 출발했다. 시간이 넉넉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간혹 신법을 펼치고 마차를 타곤하여 여정을 단축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설날의 아침에 그들은 신화제궁의 정문앞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정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행을 맞이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대인이었 다. 오히려 서둘렀기에 일찍 도착한 듯 아직 성대한 의식은 치뤄지지 않고 있었다. "오늘 출관(出關)한 석륭안의 황태자(皇太子) 책봉식도 있다고 했는데 말이야?" "석공자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백방생은 다소 의아해 졌다. "석륭안이"그가 혼인을 하기 전에 나와 진소유를 만나보게 해 주려는 것일까?" 백방생은 가족들을 이끌고 주저없이 이대인의 뒤를 따라갔다. 이대인은 옆길로 해서 일행을 거대한 본채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이 신화제궁 은 그간에 공들여 지은 것으로 그 규모나 화려함에 있어서 과거의 정 의맹의 건물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대인은 백방생 등을 거대한 대청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오붓하게 진소유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백방생 의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 대청에는 비단 석륭안과 진소유 뿐만 아니라 나머지 천상사룡, 그리고 세외팔선까지 모두 있었던 것이었다. 석륭안은 과거보다 안색이 더욱 좋아 보였다. 두 눈에서 은은한 광채가 비치는 것이 이미 광검(光劒)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 다. 진소유의 모습은 더욱 마른듯 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모습이 더 욱 애처로운 사랑을 불러 일으켰다. 백방생은 본의 아니게 감히 진소유 등을 보지 못하고 곧장 천선을 향해 포권의 인사를 올렸다. "다시 뵙게 되는 군요. 그동안 적조했습니다." 태사의에 앉아서 흡사 천신(天神)과도 같은 위엄을 보여주고 있는 천선 은 유심히 백방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간 자네도 무사하게 지냈으니 나는 무척이나 기쁘게 생각하네." 백방생은 고개를 돌렸다. 의선과 화선이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해보인 다음에 백방생은 말했다. "사실 저는 이번에 혼인식을 보러 온 것은 아닙니다. 소유(小柔)를 데리 러 온 것입니다." 남의 혼인식에 와서 신부를 데려가겠다니 그게 과연 말이나 될까"석 륭안은 즉시 크게 분개한 표정을 지었고 진소유도 놀라 백방생을 바라 보았다. 느닷없이 단의 뒤에서 석채릉이 튀어 나오며 소리쳤다. "정말 미친 녀석이군! 정말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냐?" 천선이 문득 말했다. "백방생, 그대가 그게 소원이라면 사실 불가능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전에 한가지 조건이 있다." 백방생은 그를 바라 보았다. "그게 뭐죠?" 천선은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바로 네가 나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백방생은 천선의 그 투명한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체 무슨 말이 냐고 물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천선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는 듯 하면서 강하고 거대한 번갯불이 발출되어 백방생의 머리를 후려치 는 것이었다. 그 투명한 번갯불에 맞는 순간 백방생은 문득 아, 하고 소 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그의 의식은 뜨거운 태양(太陽)속에 던져진 것처럼 아득해 졌고 말소리는 흘러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언젠가 한번 당한 것 같은 충 격이기도 했다. 백방생의 안색은 이내 총명했던 것이 멍청하게 풀어졌다. 그러한 광경을 바라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게다가 당리와 황진의는 크 게 경악했다. 50 장 대단원 천선은 문득 다시 백방생에게 말했다. "너는 누구이고 나는 누구냐?" 백방생은 괴이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모, 모르겠소." 천선은 두눈에서 번쩍 득의의 광채를 발하며 말했다. "너는 나의 종이고 나는 너의 주인이다. 알겠느냐?" 백방생은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너의 종이고 너는 나의 주인이오." 천선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상제(上帝)라고 불러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 알겠소...." 천선은 눈빛을 빛내면서 말했다. "너의 소원은 무엇이냐?"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의 소원... 그것은, 소유와 자고 싶은 것이오." 천선은 진소유를 돌아 보았다. 진소유는 이순간 안색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실로 수도 없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심령금제(心 靈禁制)에 걸리는 것을 보아 왔던 것이다. 천선은 백방생을 향해 다시 말했다. "좋다. 그 소원을 들어줄 테니 앞으로 나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알겠 느냐?" 백방생은 즉시 넙죽 그 자리에 엎드리며 말했다. "헤헤헤, 알겠소. 나는 당신의 말을 잘 듣겠소." 천선은 말했다. "그럼 지금 즉시 그들을 죽여라!" 천선이 가리킨 사람들은 바로 세외팔선 중의 의선과 화선이었다. 장내 의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역시 가장 놀란 사람들은 그 당사자들과 황 진의, 당리였다. 그녀들은 갑자기 백방생이 그렇게 되어 버리자 안색이 핼쑥해 졌다. 그런데 정작 백방생 본인은 전혀 아무런 느낌도 없는 듯이 곧장 의선을 향해 야수처럼 날아갔다. 그러나 그 동작은 전혀 무공이 실 려 있지 않았고 또한 아무리 무공이 있었다고 해도 의선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의선이 몹시 난처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가볍게 백 방생의 공격을 피해낸 다음 천선을 향해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그래도 나는 서열이 낮지 않은데 이럴 수가 있 소?" 천선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평소에 그 녀석을 잘 대해 주지 않았느냐"내 이번에 그 죄를 씻을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어서 그녀석을 죽여 버려라?" 의선은 안면을 부르르 떨며 잠시 망설였다. 그것을 보고 황진의가 소리 쳤다. "안 되요! 그를 해치지 마세요! 그를 해치면 저도 죽을 거예요?" 그러나, 의선은 감히 정면으로 천선을 대적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가볍 게 한숨을 내쉬더니 우수를 내저었다. 그의 손끝에서 황금빛의 광채 가 전광처럼 날아갔다. 그것은 백방생의 몸을 정확히 관통했다. 저번의 일과 는 달리 이번의 그 광채는 무서운 살인적인 공격무기였다. 백방생은 마 침 의선을 향해 달려들던 참이라 이내 허공으로 떠오르며 입과 코 등으 로 피를 내뿜으며 바닥에 털썩 굴러 떨어졌다. 그의 두 눈은 괴이하게 부릅떠져 있고 두 손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안색은 급격하 게 검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의선은 차마 악독하게 살수를 쓰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백방생의 내 부의 팔맥이나 일천 세맥들을 절단내고 말았을 뿐 차마 그의 육신을 파 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경우와는 달리 살려주려는 의 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의 그 한 수로도 백방생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방생은 죽기 이전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 이었다. 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말 았다. "여보!" 황진의와 당리는 아기들을 안은 채로 다함께 달려들어 백방생의 몸 을 부여잡고 통곡을 했다. 천선은 이어 화선에게도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충성하겠는가?" 화선은 입술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으나 이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충성하겠어요." 그렇게 일이 대강 마무리 되고 나자 천선은 문득 고개를 돌려 진소유에 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너는 황태자비가 되기에 자격이 충분하다. 내가 이녀석에 게 말한 것은 의미없는 것이니, 너는 앞으로 조금전의 일은 잊고 황태 자를 잘 보필하도록 하여라." 석채릉도 웃으며 나서서 말했다. "그래요, 올케! 이제 모든 것이 정리되었으니 얼마나 좋을까" 나도 오 라버니의 동생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를 한번 도전해 볼 텐데 말이야. 아무튼 황태자비가 되어도 나를 괄시하면 안 되요?" 문득 진소유는 고개를 들어 멍한 표정을 짓더니 망연한 표정으로 고 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나는 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석륭안이 놀라 소리쳤다. "아니 소유, 그게 무슨말이오"당신은 황태자비가 되려고 그렇게 노력해 왔는데 이제 와서 하지 않겠다니, 그래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오?" 진소유는 석륭안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래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나는 오로지 목적에 의해서 당신에게 접근했던 거죠." 석륭안은 안색이 창백해 졌다. "그것은, 그것은 이미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당신이 사랑하지 않는다 고 해도 좋소. 왜 그 목적이 이루어 지려는데 이제와서 그런 얘기를 하 는 것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나는 스승과 사문의 원한, 그리고 나의 인생이 잘못된 데 대한 원한 으로 복수를 하려고 했어요. 저는 그동안 많이도 참아 왔죠. 하지만 이 제야 문득 깨닫는 군요." 석륭안은 소리쳤다. "뭘 깨달았다는 것이오?" 진소유는 황진의와 당리에게 둘러싸여 있는 백방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비록 원수를 알고 있지만 그 복수에 집착하지 않아요. 그는 가슴이 따뜻하여 부모의 죽음은 물론 자신의 목숨마저 가볍게 여긴 것 이죠. 당신들은 그의 마음마저 죽일 수는 없었을 거예요." 석륭안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은 것이 아니오?" 진소유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이미 삶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이 복수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부터 저는 죽을 결심을 했죠. 저의 몸과 마음은 이 미 그의 거예요. 저도 그를 따라 가겠어요." 문득 천선이 차갑게 말했다. "그 생각은 잘한 것이다. 나는 사실네게 황태자비가 되게 할 생각은 없 었다. 감히 나를 노리고 있는 계집에게 그런 일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 느냐"흐흐흐, 정말 대담한 계집이로구나"단지 지금 솔직하게 나오니 자 결을 허락하겠다. 지금 그 자리에서 죽어라!" 신화상제의 명령은 지엄하다. 석륭안도 비록 입은 벌렸지만 감히 항변 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진소유는 한차례 가벼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리고 허리춤에서 연검을 뽑아들었다. 이제 그녀의 나이 열 여덟살, 그 아름다운 몸으로 죽기에는 너무아까운 나이였다 .충분히 갈아서 날을 세 운 연검의 검신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다. 진소유는 그 연검을 높이 쳐들어서 바라보다가 이내 그것을 자신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는 연검이 도중에 서 정지된 것을 알았다. 그녀의 손은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리 고 그 사람은 바로 백방생이었다. 백방생은 어찌된 셈인지 아주 말끔한 모습이었다. 상처를 입은 아까의 그러한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 았다.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진소유에게 말했다. "나는 죽지 않았소. 그러니 그대도 죽을 필요가 없소." 진소유는 잠시 정신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두눈 에서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며 백방생의 가슴으로 안겨 들었다. 백방 생은 연검을 그녀의 허리춤에 다시 감아주고 그녀를 한동안 잠자코 안 아 주었다. 진소유는 비록 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나 한참 동안을 울었고,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니 주위의 분위기는 아주 기이하게 변모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의혹과 경악의 빛이 폭출되고 있었고 심지어 황진의와 당리마저 어찌된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백방 생이 언제 누워있는 상태에서 일어나 진소유를 구한 것인지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백방생은 천선에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해야 하지 않겠소?" 천선은 누구보다도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일 것이었다. 경악에 의해 눈을 부릅뜨고 있던 그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나를 속여 왔구나. 사실 나도 어딘가 이상하기는 했지."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오. 그러나, 이제 그 기회가 사라졌다 는 것도 알 것이오. 그것은, 그대가 만든 세상은 결코 행복이 아니기 때 문이오." 그 때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치며 백방생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로 석채 릉이었다. "이 미친 놈아! 감히 상제께 반말을 하다니?" 그러나 석채릉의 신형은 도중에 허공에서 갑자기 뚝, 떨어졌다. 그녀 의 무공은 돌연 완전히 상실된 것이다. 무공이 상실된 상태에서 바닥에 떨어지자 그녀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백방생은 다시 천선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천선은 말했다. "그대는 무명노인(無名老人)의 후예인가?"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천선은 눈빛을 빛냈다. "나는 한가지 의문이 있다. 내가 일으킨 가문의 천형(天刑)은 어떻게 하면 사라지는 것인가?" 백방생은 말했다. "본래 천형이란 없는 것이다. 번뇌로 인해 그것이 마치 있는 것처럼 여 겨질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거하려면 바른 도(道)를 닦아야 한다." 천선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그대는 우리를 죽일 것인가?"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대들 만한 성취를 이루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앞으로 이 안에 넣어서 보살피며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말과 함께 백방생은 왼쪽의 허리춤을 뒤졌다. 그곳에는 여섯 개의 작 은 호리병이 매달려 있었다. 순간 갑자기 천선의 몸이 엄청나게 커지면서 백방생을 향해 덮쳐들었 다. 그 몸은 투명하면서도 강인하여온갖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바로 원영신인 것이다. 그 원영신은 육체를 빠져나와 최소한 열 배는 더 커져서 백방생을 덮쳤다. 게다가 나머지 다섯명의 반인반선들도 똑 같이 원영신으로 변하여 백방생을 향해 덮쳤다. 만일 보통사람이 그 광 경을 보았다면 놀라서 그만 똥 오줌을 싸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백방 생은 시종 태연했다. 원영신은 금광불괴이고 또한 엄청난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뜻 밖에도 그것들은 일순간 백방생의 근처에 이르기도 전에 축소되어 각기 호리병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즉시 그 뚜껑을 닫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여섯사람의 늙은 육신들이 별안간 환상처럼 부스스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리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렇게 세외육선을 제압하고 나서 의선과 화선에게 말했다. "두 분은 이제 나와 함께 가시겠소?" 의선과 화선은 무겁게 장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우리가 거역할 수가 있겠소?" 백방생은 이어 다시 천상오룡에게 말했다. "그대들도 갑시다. 그대들이 해야할 일들이 있소." 강호무림(江湖武林)에 갑자기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갑자기 신화제 궁이 거대한 폭약에 의해 단숨에 날아갔고 세외팔선 등의 신화제궁의 사람들은 모조리 그 안에서 몰사하고 만 것이었다. 그 일을 해낸 것은 용천기가 주도하는 영웅회였다. 영웅회가 그 일을 해냈기때문에강호인들 은용천기를마치신(神)처럼받들었다.이어 빠른 속도로 붕괴된 신화제국의 지부들을 정리한 후에 용천기를 무림맹의 맹주(盟主)로 옹립했다. 그 야말로 그의 야망대로 용천기는 천하무림을 하나로 통일한 것이었다. 그 에 따라 구파일방 등의 문파들이 급속히 재건되었고 소림사의 장문방장 에는 지공이 올랐다. 이제 용천기와 지공선사는 무림을 이끌어 가는 실 질적인 대들보가 되었고 무림은 점차로 화평하게 되었다. 기이하게도 세 외팔선이 죽은 이후에 모든 사람들의 심령금제도 풀려 버렸기 때문이 었다. 다만 용천기가 그날어떻게하여 세외팔세를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는 지는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그 날 백방생은 사람들을 이끌고 대폭발이 있기 전에 신화제궁을 빠 져나와 거의 단숨에 파양호변의 자신의 장원으로 돌아갔다. 신화제궁을 폭발시키려던 영웅회의 사람들은 전혀 그들을 보지 못했음은 물론이었 다. 백방생은 서둘러 장원을 정리하게 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백방생은 진소유와 동침하게 되었다. 진소유는 아직 도 순결한 몸이었다. 요는 석륭안이 스스로 연공을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러한 것이 어떻게 되었다고 해도 상관이 없으리라. 백방생과 진소유는 그야말 로 온 밤을 지새며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끝없는 행복에 젖었다. 서로 간의 온갖 사랑의 애무와 행위가 끝난 다음에 새벽녘에 나른해진 몸 으로 문득 진소유는 기어코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당신, 언제부터 그런 능력을 갖게 되었죠?" 백방생은 말했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아마도 그때 의선이 나를 죽이려고 했을 때 갑자기 그런 능력이 생겼던 것 같소." 진소유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겨우 오늘에서야 그런 능력이 생겼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래서 당신의 공로가 크다는 것이 아니오. 사실, 황금충은 바로 무명 노인이었소." "흥, 믿을 수가 없어?" 진소유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백방생은 다시 그녀를 안았다. 진소유는 어느새 의문감을 잊어버리고 신음을 발했다. 석륭안과 석채릉은 사실 대폭발이 있기 이전에 곤륜산으로 돌아갔다. 백방생은 일부러 그들을 보내준 것이었다. 이어 백방생은 파양호변의 장원을 정리하여 발해(渤海)로 갔다. 발해에는 이름모를 섬들이 많았는 데 그는 그 중의 한 곳에 정착했다. 천상오룡과 같은 초절정고수들이있 으니 그런 섬하나를 개간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황금 충의 재산을 모조리 찾아 왔으므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되었다. 대륙 에서 적당한 사람들을 데려와 살게 해 주고 인재를 뽑아서 육성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는 호리병속에 감금한 세외육선과 의선, 화선을 마음 대로 부렸는데, 그들은 모든 일에 매우 쓸모가 있었다. 세외육선 등은 감히 백방생에게 대항할 꿈도 꾸지 못하고 그를 위해 열심히 크고 작은 일들을 했다. 백방생은 이어 중원에 은밀히 거대한 사업을 벌이기도 했고 또한 모집해 놓은 인재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의선과 화선은 기꺼이 그를 위해 보조선생들이 되어 주었다. 진소유는 이내 임신을 했는데 일년 후에는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낳 을 때는 워낙 힘들었지만 한꺼번에 두 아들을 얻게 되자 그녀는 매우 기뻐했다. 이어 황진의도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백방생은 기뻐하며 그 아기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 다시 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 백방생은 야산의 꼭대기에 있는 한 평평 한 바위 위에 누워서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문득 그의 앞에 홀연 두 늙은이가 나타났다. 바로 의선과 화선이었다. 의선이 공손히 말 했다. "주인님, 학동들을 가르치실 시간입니다. 이렇게 주무시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백방생은 겨우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뭐라고"그대들이 가서 대신 가르치면 될 일이 아니오?" 의선은 말했다. "그들은 벌써 두 달째 주인님의 모습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잠시 그들에게 가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백방생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주인님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니까"그리고 나는 지금 더욱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오." 화선이 웃으며 말했다. "혹시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낮잠을 주무시는 것이 아닌가요?" 백방생은 눈을 뜨고 그녀를 보더니 서둘러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천만에, 나는 지금 눈을 감고 명상의 상태에서 이 여섯명의 그대들의 친구들에게 도(道)를 전수해 주고 있는 중이오. 에, 도란 중요한 것이 지." 화선은 가볍게 웃으며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다. 백방생은 문득 의선에게 물었다. "그 오룡(五龍)은 일을 잘 해나가고 있소?" 의선은 말했다. "그들은 모든 일에 성실합니다. 단지 이대의가 학동들의 무공을 가르 치면서 다소 거친 면이 있는데, 그 점은 소인이 잘 타일러 주었습니다. 헌데, 이제 봄도 되었고 하니 혼인식을 올리셔야지요." 백방생은 이내 안색이 떨떠름해 졌다. 그는 마지못해 말했다. "그걸, 정말로 해야 하오?" 의선은 웃으며 말했다. "모든 일에는 형식도 중요한 법입니다. 우리가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명분도 중요하지요. 장차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 좋은 세상이라?"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학동들 을 가르치는 일은 의선과 화선, 두 사람만으로 충분하다. 백방생은 그 들이 이 일 때문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백방생은 가볍게 한숨까지 내 쉬며 말했다. "좋소. 그럼 그대들이 적당한 날을 골라 보시오." 의선과 화선은 허락이 떨어지자 비로소 안색을 펴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그 두 늙은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백방생은 밀려오는 졸음 을 이기지 못하고 길게 하품을 했다. "거 참, 봄날인데 날씨도 좋군?" 헌데 그가 마악 다시 잠들려고 했을 때였다. 느닷없이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름아닌 진소유가 두 아들과 한 딸을 데리고 이쪽으로 올라오 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순 언제 졸렸는가 싶게 백방생의 신형이 그쪽으 로 날아갔다. "아니 소유, 몸도 좋지 않을 터인데 언제 올라온 것이오?" 백방생은 조용히 자신을 반기는 진소유를 안고 행복한 듯 연신 입을 맞추었다. 세명의 아이들이 아빠, 를 찾으며 연신 그의 품속으로 달려 들었다. 이 때, 다소 떨어진 다른 봉우리의 위에서는 두 여인이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당리와 황진의였다. 당리는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황진 의에게 말했다. "상공께선 너무 진동생만 편애하시는 것 같아요. 간밤에도 그녀의 처 소에서 주무시고 또 저렇게 좋아하다니?"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진동생이 보다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지." 당리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그 신병이기 도검창곤 중에서 두 가지를 이미 그 아이들에게 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셨다는데도요?"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그게 심술이 나면 내가 상공께 다른 하나를 그대의 따님에게 주라 고 해 보지. 게다가 이미 상공께선 그대에게 대륙의 사업들 중의 하나 를 맡기기로 결정하신걸?" 당리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어마, 그게 정말이세요?" 황진의는 말했다. "게다가 오늘 밤에는 굳이 그대의 침소에 들겠다고 했단 말이야." 당리는 그만 기뻐서 안색이 붉어졌다. 황진의는 그녀의 손을 잡았고 두 여인은 함께 바라보며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때 근처에서 한 아이가 서책을 드문드문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다시 유마는 방향을 바꾸어 문수에게 물었다. 그대는 수많은 여러 국 토에서 놀았으나 어떤 국토에 가장 묘한 사자좌(獅子座)가 있던가"문수 대답하기를, 동방으로 한없는 국토를 지나면 수미상(須彌相)이라고 이 름하는 세계가 있는데, 그 곳에 수미등왕(須彌燈王)이라고 일컫는 부처 가 계신데 지금 현재도 높고 널찍한 사자좌 위에 계시다. 그 자리야말로 비길데 없이 묘한 것이다. 거사는 이 말을 듣자 곧 신통력을 나타내 어...." 대미(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