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1 07/08 06:19 10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 序... Ⅰ 천하가 모두 하얀 눈 아래 덮이는 계절이다. 중원의 5대 명산의 하 나인 화산(華山)의 겨울도 백설이 지배하고 있다. 간간이 사나운 추위 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매화 송이들이 설경의 운치를 더해지고 있었다. 화산은 수려한 경치와 아름다운 봉우리로 많은 시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숭산, 태산의 웅장함과는 또다른 멋을 이루고 있는데... 화산 위로 오르는 길은 단 하나 뿐이었다. 원래 있던 등산로는 언제 부터인가 쓰이지 않았고, 화산파에서 닦아놓은 청석로(靑石路)가 주로 이용되었다. 끝없이 쏟아질 것만 같던 눈발의 기세가 약간 수그러들었을 때였다. 파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화산 기슭에 나타났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를 갖춘 전형적인 문사풍의 사내였다. (반 시진 이내로 화산파에 도착할 수 있겠군.) 그는 빠른 속도로 청석로를 타고 화산파로 향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지극히 미미 한 발자국만이 남아있을 뿐, 전혀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무림 인이었던 것이다. 청삼객은 예상대로 반 시진이 채 걸리지 않아 화산파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까지 도착했다. 날이 약간 어두워질 무렵이라, 그는 잠시 망 설였다. (저녁 시간인데, 바로 들어가야 할까?) 그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돌연 대문이 열리면서 일곱 명의 화 산파 제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변명할 틈도 없이 검진을 펴서 청 삼객을 공격했다. "간이 얼마나 크길래 화산파 앞을 얼쩡거리는가!" 청삼객은 부아가 치밀었다. 그가 자기의 이름을 말한다면 즉각 오해 가 풀릴 터였지만, 사람을 초청하고도 이렇게 앞뒤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둔한 자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로 강호에서 한 자루 검으로 흑도의 고수들을 잇따라 격파하 여 명성을 휘날린 청죽검객(靑竹劍客) 연경소(燕卿嘯)였다. 연경소는 이 일곱 명의 화산제자들이 칠성검진(七星劍陣)을 펴고 있 는 것을 간파했다. 화산파에는 이것 이외에 천지쌍격(天地雙擊)이라는 연수합공법이 있어서 소림사의 나한진(羅漢陣), 무당파의 구궁진(九宮 陣)에 대항하는 오묘함을 갖추고 있었다. 일곱 자루의 검이 예리한 기세로 연경소를 압박해 들어갔다. 혼자서 는 연경소에게 한 초식도 견뎌내기 어려운 개개인의 구성원들도, 일곱 명이 힘을 합치자 그 위력이 크게 늘어났다. 연경소는 이미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천하 에 꺼리낄 적수가 없을 정도의 고수 대접이 겨우 이 정도란 말이냐 하 고 속으로 외치면서, 쌍장을 유연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가 쌍장을 한 번 휘두르자 무수한 손바닥의 그림자가 허공을 뒤덮 으면서 두 차례 공기가 휙, 휙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언뜻 보기엔 겨 우 한 번 손바닥을 뒤집은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여덟 가지 동작이 갈 무리된 장법이었다. 연경소는 천하에서 검으로 겨룰 자가 없다는 칭송을 받고 있는 고수 였다. 비록 그가 아직 청죽보검(靑竹寶劍)을 뽑지 않고 맨손으로 칠성 검진의 기세를 받아내고 있지만, 이렇게 한 번 손을 휘두르자 결코 빠 르지 않으면서도 피할 수 없는 기세가 장강의 대하처럼 밀려들었다. "칠성변광(七星變光), 정검탈혼(淨劍奪魂)!" 누군가가 이렇게 외치자 검진의 형태가 변하면서 한층 기세가 증폭 되었다. 일곱 사람이 일제히 나직한 기합소리를 내질렀다. 일곱 사람 중 다섯은 제자리에 서서 일정한 틀을 갖춘 검식으로 연경소의 행동을 봉쇄했고, 둘은 날카로운 살초로 급소를 찔러왔다. 이들 일곱과 연경소의 기세는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곱 사람이 한 사람에게 끌려가는 형세였다. 만약 전력으로 응수하지 않으면 연경소 한 사람에게 결단이 날 판이었다. 관전자에게 는 매우 위험한 장면인 동시에 흥미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찌르고 막는 일련의 동작들은 순간에 휙휙, 지나갔다. 누가 보고 있 다면 연경소가 위기에 몰려있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사 실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한 동작 반만에 칠성검진을 부술 수 있었 다. 화산파의 장로급 정도 되는 고수들이 펼쳤으면 모르되, 일반 무사 들이 펼친 검진은 내공의 뒷받침이 없는 것이다. 연경소는 검진을 이루는 자들의 내공이 10년 수위도 채 못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진을 격파하지 않고 운용되는 점을 계속 지 켜보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정묘한 운용과 깨끗한 연결동작에 감탄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나한진이나 구궁진보다는 위력이 떨어질 것이나, 검초의 정묘한 배 합에서는 오히려 능가하는구나.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그런데 어째 서 나를 몰라보고 이렇듯 공격하는 것일까! 장문인을 만나면 따져야겠 군.) 다시 백 초 가량이 지나자 연경소는 그들의 움직임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그는 소극적으로 방어만 하며 거의 출수를 하지 않고 있었지만, 진을 깨기로 결심한 이상 망설일 것 없이 허리에 꽂힌 청죽보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보검이 뽑혀져 나오면서 푸른 대나무빛의 정광(精光)을 폭사 했다. 연경소는 흠칫 놀라며 약간 물러서는 그들에게 말했다. "화산파의 절예를 견식하게 되었소만, 이젠 장문인을 만나야 겠소." 일곱 명의 화산 제자들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러 엄중한 방어망을 폈지만, 천하제일의 경지에 오른 연경소의 무예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청죽검이 몇 번 회전하는가 싶더니, 일곱 자루의 검이 모두 땅에 떨 어졌다. 화산 제자들은 무슨 영문인가 싶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이었다. 이때 누군가가 정문 안쪽에서 걸어나왔다.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2 07/08 06:20 102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Ⅱ 나타난 사람은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그를 보자 칠성검진 을 이루고 있던 제자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며 예를 갖추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들의 인사를 제지하고 말했다. "흥, 너희들이 장문인의 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검을 겨누다니! 천 하제일의 연 대협께서 그 정도에 눈 하나 깜짝이나 하신단 말이냐?" 연경소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는 단단히 따질 생각이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그의 혀놀림에 휘말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만면가득 웃음을 띄고 반기고 있는 이 사내는 바로 화산파의 주인, 태을진인(太 乙眞人) 나빈(羅賓)이었다. "사과의 뜻으로 화산의 특산품인 녹엽주(綠葉酒)를 올리겠습니다." 연경소는 별 의심없이 잔을 받아들었다. 한 눈에 보아도 수십 년 묶 힌 명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잔 가득 녹색 보석과 같은 광채가 넘 쳤다. 연경소는 이 잔이 독배(毒杯)라는 것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그 대로 들이켜 버렸다. 나빈은 계속 웃음을 띄고 있었다. "대협을 초대한 까닭은, 한 사람의 강적을 막아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연경소는 빈 잔을 건네어주며 말했다. "아니, 진인의 무공이 절세적인데 누가 감히 화산파에 도전할 생각 을 품겠습니까? 또한 칠성검진과 천지쌍격의 수법으로도 능히 만 명의 적을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노납은 이미 그자와 우연히 마주쳐 서 몸에 내상을 입었고, 일곱 분 장로들은 따로따로 암산당하여 모두 중상을 입었소이다." "그럴 수가! 상대는 누구요?"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죠." 태을진인은 연경소에게 숙소를 배정해 주고 나서, 삼양전(三陽展)으 로 불러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에게 도전하고 있는 인물은 무영객(無影客)이라는 흑도의 고수였 는데, 쾌검술과 용독(用毒)에 능한 보기드문 인물이었다. 화산파 전체 를 상대로 도전장을 내걸 정도의 배짱도 있는 자인 데다가, 미리 손을 써서 가장 강적인 화산칠로(華山七老)와 장문인의 무공을 잠시나마 폐 쇠시켜 두었다. 그의 성격은 지극히 포악해서 자기의 목적에 맞지 않으면 동료라도 가차없이 살해하며, 수많은 표국의 금과 표물을 강탈하고 양가집 규수 를 겁탈했다고 나빈은 역설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로군.) 연경소는 이렇게 단정내렸다. 자기가 나빈의 계책에 휘말려서 이미 산공독(散功毒)을 마셨으며, 그것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 는 차도살인지계(次刀殺人之計)의 서막이었음을 까맣게 모른채... 그는 자기 숙소로 돌아와 운기조식을 마치고 애검 청죽을 꺼내었다. 나빈이 그에게 마시게 한 산공독은 천축(天竺) 항룡사(抗龍寺)에서 거 금을 주고 사온 무향산공주(無香散功酒)라는 것으로, 삼일 후부터 효 력이 있는 것이었다. 무릇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모두 독에 대한 저 항력이 있기 마련이다. 연경소 정도 되는 절정의 고수가 눈치 채지 못 하도록 중독시키려면 그만큼 신묘한 약물이 필요했고, 태을진인이라는 간판은 그가 의심하지 않고 독을 마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 -+- 눈 깜빡할 사이에 사흘이 지나갔다. 그동안 연경소는 매일 연공하면 서 결투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자기가 화산파의 방수(幇 手)가 되고자 했으면, 최소한 적에게 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영객과 결투를 약속한 아침... 화산파의 정문은 활짝 열려지고, 대전을 위해 떠나는 고수들의 행렬 을 환영하고 있었다. 장문인과 연경소를 비롯해서 화산칠로와 대제자 등 8사형제, 그리고 비교적 몸이 날래고 무공이 뛰어난 제자 50여 명을 대동한 행차였다. 규모와 인선(人選)에서 나빈이 얼마나 이번 도전을 중요시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싸움에 동원되지 않은 화산파의 고수는 외지 에 나가있는 장문사제 철점구(鐵點丘)와 비화검(飛花劍) 육서(陸庶)밖 에 없었다. 일행은 아침의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화산의 2대 절경 중 하나라는 상심봉(傷芯峯)에 도착했다. 누가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었 지만, 또하나의 절경인 옥녀봉(玉女峯)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려한 풍 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암 기가 발사되었다. 아무렇게나 뿌린 듯한 암기는 일행이 앉아있는 곳으 로 직접 날아들어서 몇 명의 화산 제자가 쓰러졌는데, 연경소가 벌떡 일어나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越 일행이 올라온 길 뿐이었 다. 나빈은 일행들을 적당한 위치에 앉히고서 말했다. "무영객은 어서 나와서 포박을 받으라!" 그러자 어디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네 능력으로 안 되니까 방수를 요청해 왔구나. 화산파는 역시 숫자로 상대방을 누르는 무리들에 불과하구나!" 말이 끝나자마자 어디에선가 번쩍, 하는 반사광과 함께 몇 개의 암 기가 발사되었다. 아무렇게나 뿌린 듯한 암기는 일행이 앉아있는 곳으 로 직접 날아들어서 몇 명의 화산 제자가 쓰러졌는데, 연경소가 벌떡 일어나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3 07/10 17:24 104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연경소는 검과 몸이 한 덩어리가 되어[身劍合一] 한 점을 향해 몸을 날렸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 이어지는 것이다. 청죽검 의 파란 광채가 한 번 번뜩일 때마다 수많은 나뭇잎이 떨어져 내였다. 무영객은 그 신위(神威)에 겁을 먹었는지 감히 대적할 생각을 못하 고 수십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바야흐로 천하를 진동시킬만한 두 검객 의 대회전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으윽...!) 연경소는 청죽십이식(靑竹十二式)이라는 무공을 빠른 속도로 펼쳐내 고 있었다. 무영객은 일찌기 쾌검으로 이름을 날린 흑도의 고수였는데 도 결코 뒤지지 않는 속도였다. 화산파의 제자들의 귀에는 검이 부딪힌다기보다는, '째재재재쟁-'하 는 소리가 끝없이 길게 들릴 뿐이었다. 연경소가 신음소리를 낸 것은, 다름아닌 산공독이 서서히 약효를 발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그는 나빈이 암수를 쓴 것을 모 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지에 힘이 빠지고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틀림없는 기이한 독에 중독되었다. 하지만 누가 몰래 암수를 썼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연경소는 갑자기 일체의 동작을 멈추고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우 뚝섰다. 무영객도 잠시 멈칫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함부 로 공격하지 않았다. (지금 네가 날 공격한다면 세 동작도 안되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연경소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암암리에 혈도를 봉쇄하고 독을 단전으 로 몰아넣었다. 이 수법은 사문의 비법으로 폐혈제독(閉穴制毒)이라는 재간이었는데, 확실히 비범한 구석이 있어서 쉽게 응집되지 않는 산공 독을 몇 초만에 한 곳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는 검을 약간 치켜들었다. 너무 오랫동안 같은 자세를 취하면 무 영객의 쾌검이 참고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연경소는 돌연 길게 탄식했다.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 순간만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열한 암수를 쓴 자가 누구일까? 설마 나빈이...? 공력이 5할밖에 남지 않았군. 난 화산파에 죄진 일이 없다.) 그 순간 귀를 따갑게 하는 기합소리가 짧게 울리며 연경소가 평생을 두고 수련한 검법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받아라!" 무영객은 그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 같으면서도 검기가 매섭게 베어 오는 것을 보고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그의 내력은 절반으로 제한되었지만, 검법의 정묘함과 예리한 검기는 평생에 처음 보는 것이 었다. 연경소는 심후한 내력을 검끝으로 집중해서 조그만 꽃송이를 그렸다. 이때 그의 검은 무영객의 몸에서 거의 일 장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무 영객은 검끝에서 나오는 세찬 기세에 대항해서 내공을 돋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영객은 여태까지의 침묵을 깨고 말했다. "정말 대단한 검법이오. 이 객(客)에게 천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오 늘 화산에서 뼈를 묻을 수밖에 없겠소이다." 그리고는 몸을 살짝 옆으로 기울여 날카로운 검기에 몸이 상하는 것 을 피한 후 반격에 나섰다. 사실 연경소가 십할의 공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무영객은 잠시도 버 틸 수 없을 게 뻔했다. 천하제일검이라는 명성을 얻기까지 수십 차례 의 싸움에서 연경소는 한 번도 져본 일이 없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무공에 전념하여 날로 웅후한 풍모를 지녀가고 있었다. 무영객 도 흑도 고수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감히 천하제일이라는 칭송은 듣지 못하고 있었다. 연경소는 맑은 휘파람 소리를 길게 내며 검을 뒤집어 일일이 무영객 의 검세를 해소했다. 그의 청죽검은 과연 보검답게 조금의 상처도 입 지 않았으나, 무영객은 검날에 세 군데나 이가 빠진 것을 느끼고 적지 않게 당황했다. 어찌 연경소가 작은 틈이라도 허용하랴!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파죽삼명(破竹三冥)이라는 초식으로 무영객의 세 군데 요혈을 노렸는데 각각 천령(天靈), 태양(太陽), 인후(咽吼)의 치명적 사혈이었다. 이때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다섯 자밖에 되지 않아, 상대방의 얼굴 에 떠오른 표정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듯 근접한 거리에서 절묘 한 초식과 심후한 내공을 겨루는 데에는 장난이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실력만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다. 연경소는 힐끗 상대방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이미 패색이 만연하여 연달아 뒷걸음질치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분노하기보다는 슬픈 기색 이 얼굴에 감돌고 있었다. 이때 무영객도 연경소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 두 검객은 잠시 서로 를 멍하게 바라보았는데, 그들의 속마음은 아무도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 누가 있어서 영웅이 영웅을 알아보는 눈빛에 담긴 의미를 헤아리랴! 하지만 계속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연경소는 이 정도에서 승부를 마무리짓고자 했다. 상대방이 결코 듣 던만큼 악랄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화산파의 부탁을 들어준 이 상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한시라 도 빨리 안정을 취하며 독을 해소해야 했다. 그는 벼락같이 남아있는 공력의 8성 내경(內勁)을 돋구어 상대의 급 소를 찔러갔다. 이 한 수의 검초에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기 때문에 무영객이 쳐놓은 검망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적 중했다. "오늘은 졌소만, 2년 후에 다시 봅시다!" 무영객은 연경소의 내경이 밀어내는 기세를 타고 나는 듯이 도망쳐 버렸다. 연경소가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막 돌아서는데, 돌연 어마어마 한 장세가 가슴을 강타했다.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4 07/10 22:44 102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연경소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가슴에 불혈수(拂穴手) 의 수법으로 일장을 내지른 사람은 바로 화산 장문인 태을진인 나빈이 었다. 그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사방에서 공세가 시작되었다. 화산칠로 가 빈틈없는 자세로 칠성검진을 전개한 것이었는데 그 위력은 지난 번 에 보통 제자들이 펼친 것과는 판이하게 틀렸다. 연경소는 크게 몰릴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방심한 상태에서 일파의 장문인이 전력을 다해 쏟아낸 장력을 고스란히 맞은 데다가, 무영객과 3백여 초식을 겨루었고 산공독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모든 일 들이 함정이었다면, 실로 완벽하게 걸려든 셈이었다. "이 연모가 오늘 화산에서 뼈를 묻게 되겠소만, 이유라도 듣고 싶소 이다. 화산파가 이런 짓을 할 줄이야..." 그러나 나빈은 묵묵부답,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 순간에도 화산 칠로의 가공할 검세가 짓쳐들어오고 있어서 연경소는 더이상 딴곳에다 정신을 쏟을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이 검진의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면, 십 초도 지나지 않아 고혼(孤魂)이 되었을 것이다. 사흘 전 화산 제자들 과 뜻하지 않게 싸울 때, 연경소는 유심히 진법의 운용에 대해서 봐둔 바가 있었는데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위기에 몰릴 때 마다 그때의 변화에 비추어 적절한 동작으로 일곱 사람의 살초를 피해 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연경소는 다급해졌다. (위험하더라도 십이성 공력을 돋구어 한바탕 해 볼 수밖에 없다. 이 곳에서 뼈를 묻는다면 장차 위선을 탈을 쓴 화산파를 제지할만한 자가 다시 없을 것이다.) 독이 발작하더라도 한바탕 해보자는 마음을 굳힌 그는, 줄곧 막아내 기만 하던 수세에서 갑자기 공세로 바꾸었다. 빠져나갈 묘안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연경소는 돌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는 마치 한 마리 백학이 하늘을 노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화산칠로는 검진을 재구성하여 엄정한 포위망을 갖추고 공세를 시작했 는데, 아까보다 더 집요하게 연경소를 핍박했다. 하지만 천하제일검이 십이성 공력을 돋구었는데 어찌 상대가 되겠는 가! 그는 줄곧 내력을 펼 기회만을 찾으며 이십여 초식을 피하기만 했 다. 손에는 검이 들려있건만 쓰지를 않고 보법만을 이용해서 칠성검진 의 노도와 같은 공격을 피해낸 것이다. "탈명비화(奪名飛花)!" 연경소는 휘파람 소리 대신 이렇게 외치며 청죽십이식의 마지막 절 초를 펼쳤다. 이 초식에는 아홉 가지의 동작이 감추어져 있었고, 하나 하나마다 심혈이 담긴 구명절초(求命絶招)였다. 헉, 하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화산칠로 중 세 사람이 가슴을 움켜쥐 었다. 그중 두 사람은 치명상을 입고 더이상 검진을 유지할 수가 없었 고, 나머지 한 사람도 간신히 지탱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연경소는 크게 웃었다. "나빈, 네가 이렇듯 악랄하니 언젠가 혈귀(血鬼)가 왕림하리라!" 그 말만을 남기고 그는 표표히 사라졌다. -+- -+- -+- 무창성(武昌城)... 이곳은 한구(漢口), 한양(漢陽)과 함께 무한 삼진으로 불리운다. 장 강의 한 지류가 세 군데로 나뉘어 흐르는 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또 한 이곳은 호북성과 변방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교통과 상업 이 매우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워낙 상인들과 행인들의 출입이 잦아, 무창성 주변의 길들은 눈발이 쉴새없이 날리는 데에도 불구하고 눈이 거의 쌓여있지 않았고 객잔(客 棧)과 주점(酒店)이 군데군데 눈길을 끌었다. 관도 위를 세차게 달려오는 한 마리 준마가 있었다. 그 위에는 서생 인지 무인인지 언뜻 봐서는 구분이 잘 안 가는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유달리 안색이 침중하고 창백했다. 세찬 바람을 뚫고 청정객잔(淸淨客棧) 앞에 말을 멈춰세운 그는, 비 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서 주인에게 말했다. "방 있는가?" "마침 원소절이 다가오는지라..." 주인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그 사람은 말없이 한 덩어리의 은 자를 꺼내놓았다. 50냥 이상가는 액수의 은이었다. "하지만 방이 있긴 합죠. 원래 예약되어있는 방이지만, 손님이 안오 셔서 특별히 드리는 겁니다." "말에게는 삶은 콩과 보리를 먹이고 푹 쉬게 해 주시오. 남는 은자 는 그냥 가지시면 됩니다." 주인의 흐뭇한 웃음을 의식하면서, 그는 심부름하는 아이를 따라 방 에 들어갔다. 혼자서 하루 지내기에는 적절한 크기의 방이었다. 특별 히 사치스럽지도, 누추하지도 않은 깨끗한 분위기가 그의 마음에 들었 다. (지난 한 달 동안 독이 온몸에 퍼지고 말았다. 제발 오늘 밤만은 추 격자들이 나타나지 않아야 하는데... 대주천(大周天)을 한 번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대주천은 진기를 전신에 서른여섯 번 돌리는 운기조식법이다. 고수 들에게 있어서는 필수불가결한 피로회복 방법이자 내상을 치료하는 방 법이었는데, 한 달 동안 운기조식 한 번 못하고 쫓길 정도였으니 얼마 나 추격자들이 집요한 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창에 풍운을 몰고 온 사나이, 청죽신검 연경소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독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5 07/15 17:06 10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1. 피바람의 서곡 가 연경소는 운기조식 도중 눈을 떴다. 어디에선가 인기척이 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천이통(天耳通)을 수련한 바는 아니지만, 그는 살기가 팽배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지만, 이미 운기를 하고 있지 않았다. 언제라도 적의 내습에 받아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통 검수는 아니군.) 연경소는 경계심의 고삐를 더욱 잡아매었다. 자기를 노리고 있는 인 원이 셋이나 넷 정도 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숨소리가 고른 것으로 보아 결코 엉터리 검수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손을 써보지 않고 상대방의 실력을 알아보는 방법은 예 리한 관찰이 주가 되었다. 양쪽 태양혈이 높게 솟은 사람이 고수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숨소리에 기복이 없이 고르며 주기가 긴 것도 정심한 내공을 알 수 있는 기준이었는데, 연경소는 상 대방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무공은 충분 히 지니고 있었다. 숨막히는 시간은 계속 지나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어디엔가에서 자기를 노리고 있는 암살자들은 적지 않은 인내 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했다. 더욱 숨이 막히는 것은 운기조식도 못 하고 진땀만을 흘리고 있는 연경소였다. 평소라면 몇 번의 손동작으로 간단히 해치울 수 있으리라. 하지만 상황은 자기에게 불리하기만 하지 않은가! (화산파에 이렇게 인내심이 많은 자들이 있다니? 더구나 화산칠로와 버금가는 고수들을 어디서 이렇게 많이 구했단 말인가?) 생각의 실타래가 마구 엉켰지만, 그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평정을 되 찾기로 했다. 일단 암살자들의 공격이 시작되면 오직 일격필살(一擊必 殺), 한 번에 끝장을 내던가 당하던가 두 가지 결과만이 남을 뿐이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자기가 죽는다면 그뿐이었다. 천하를 종횡한 지 10여 년 동안 한 번의 패배를 용납치 않았던 그였지 만 진정으로 마음을 나눈 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다. 죽었다고 슬퍼해 줄 사람도, 복수해줄 사람도 없었다. "하하하!" 돌연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제일검객이라는 청죽신검 연경소란 호칭이 무슨 소용이던가! 어쩌면 사랑하는 연인 한 사람이 더 필요한 것을... 연경소는 크게 시흥이 돋아 읊조렸다. 강검(鋼劍) 한 자루에 몸을 싣고 천하를 종횡하여 오늘에 이르도다. 누가 감히 앞길을 막으랴. 세인들의 칭송이 하늘에 닿건만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무리가 있도다. 내 어찌 같은 하늘을 이고 살겠는가. 그의 시는 여기에서 뚝 그쳤다. 공포스러운 살기가 구체화되어 나타 난 것이다. 네 자루의 검이 방문을 뚫으며 각기 다른 방위를 노렸다. "시를 짓는 데 감히 끼어드느냐?" 연경소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청죽검을 검집 채로 들어 막았다. 간단한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네 자루의 검은 모조리 튕겨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검은 옷을 입은 네 암살자들도 밖으로 빠져나갔는데 소 리조차 나지 않았다. 연경소는 잠시동안 이게 어찌된 일인지 생각했으 나 그의 넓은 견식으로도 화산파에 이런 인물들이 있는지 기억해낼 수 가 없었다. 연경소는 청죽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가죽으로 만든 검집은 검을 뽑 아드는 순간 수십 조각으로 잘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연경소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좋다. 내 오늘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들을 황천으로 보내주마.) 그가 검과 한 덩어리가 되어 밖으로 뛰쳐나가자, 곧바로 네 개의 그 림자가 그 위를 쫓아왔다. 일부러 연경소는 명경보영(明鏡步影)이라는 절정의 신법을 펼쳐서 위세를 보이고자 했는데, 뜻밖에도 효과가 대단 했다. 어느새 객잔을 빠져나와 대로변에 선 연경소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 했다. "누가 먼저 원혼이 되고 싶으냐?" 누군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자기도 모르고 떨고 있었다. "넌... 이미 죽었어야 마땅했다." "그건 또 무슨 이유냐?" "불혈수에 내장이 상한 데다가 칠로의 검진을 빠져나오느라 원기를 상하지 않았느냐. 넌 이미 기진맥진해 있다." "착각은 자유지만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는 데 무슨 헛소리냐?" "허세부리지 마라!" 그의 손끝이 약간 움직이자, 입 구(口)자 형태로 연경소를 포위하고 있던 암살자들이 동시에 검진을 발동했다. 결코 칠성검진에 못지 않는 위력이요, 검끝에서는 은은히 바람소리 가 일었다. 특히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하던 사내는 초식을 거의 무시 하고 직선적인 공격을 퍼부었는데, 상대방으로 하여금 지극히 방비하 기가 어렵게 하는 독랄한 초식을 퍼부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6 07/17 20:18 126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2) 연경소는 청죽검을 옆으로 눕혀서 크게 반원을 그렸다. 네 사람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면서도 그는 추호도 당황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묘한 검술과 웅혼한 내공으로 상대방들을 핍박해갔다. 네 사람은 동서남북 네 방위에서 연경소를 에워싸고 공세를 펼치고 있었는데, 음산한 목소리의 그 사내가 손짓을 하자 일제히 뒤로 세 걸 음씩 물러섰다. 연경소는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이제라도 뉘우치고 돌아간다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오." "역시 천하제일검이로군. 그러나 내상을 입은 걸 감출 수는 없을 것 이다. 안색만 보아도 알 수가 있지." "좋을대로 생각하라고 말한 바 있소." 연경소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절반 가량의 공력이 묶여있는 상태이지만, 이 정도의 자객들이라면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염라대왕에게 가서 일러두게. 귀혼살(鬼魂殺)을 만났다고." 연경소는 어느 정도 강호 사정에 달통했는지라 이름을 듣는 즉시 기 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직접 손을 맞대고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사천성(四川城) 일대에서 악명을 날리는 귀혼살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말했다. "이 셋은 내가 말년에 거둔 제자들이지. 십 년만 있으면 강호엔 3명 의 새로운 귀혼살이 나타날 것이다. 첫 희생양은 청죽신검이 될 것이 고." "사천 일대에서 주름잡는다는 번데기 나으리시군." "뭐라고?" 귀혼살은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서 휙, 뿌렸다. 독사(毒沙)와 암기 를 한 줌 뿌린 것 같았는데, 어느새 연경소의 전신을 덮으며 날아갔다. 하지만 연경소는 옆으로 두어 걸음 움직여서 간단히 피했다. "벌써 귀가 안 들리나? 번데기라고 했는데. 사천성에서나 놀지 여기 엔 왜 왔나?" "죽기전에 말이나 거칠게 하자는 거로군." "염라대왕이 난 아직 안 와도 된다고 그러는데?" "저승사자가 강제로 잡아가게 해 주지. 사상쌍검진(四象雙劍陣)!" "번데기가 재주를 부리는군."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조금 전과는 판 이하게 다른 기세로 네 사람이 포진했고, 각각 허리춤에서 검을 한 자 루씩 더 꺼내들었다. 연경소는 진기를 끌어올려 요혈을 보호하는 한편 검을 아래로 축 늘 어뜨렸다. 귀혼살이 보니 영 이상한 자세였다. 적어도 자기가 상대해 본 적수 들 중에서는 이런 자세를 취한 사람이 없었고, 그런 자세가 있다고 생 각해 본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요 오를대로 오른 기세였다. 귀혼살은 손을 살짝 들었다. "실력으로 안 되니 암기를 쓰는구나!" 세 대의 조그만 화살이 푸른 빛을 번쩍거리며 연경소에게 날아갔다. 그는 나직이 어,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고개를 돌려 피해버렸다. 하지 만 그것은 허초였다. 암기의 기세만 세찼지 조준이 엉성해서 연경소도 대강 깨닫고 있었지만, 잠깐의 빈틈을 이용해서 진법이 발동한 것이었 다. 이 진법은 귀혼살이 우연히 얻은 고서를 일 년동안 연구하여 만들어 낸 것이었는데, 네 사람이 펼치기에는 아주 적절한 크기와 구성이었다. 처음에는 살초를 연발하여 진에 갇힌 상대를 위축시킨 후 두 명은 공 격하고 두 명은 수비하는 형세를 갖추어 상대의 기력을 고갈시키는 원 리였다. 일단 진이 발동되자 네 사람이 동시에 쌍검을 휘두르며 핍박해왔다. 세 명의 제자가 각각 다른 요혈을 겨냥하고 찔러오는 것은 별로 큰 위 협이 아니었으나, 귀혼살이 휘두르는 쌍검은 그들과 교묘하게 배합되 어 더욱 큰 위력을 발했다. 연경소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횡소천군(橫掃千軍)이라는 초식으 로 여섯 자루의 장검을 모조리 쳐내고 귀혼살의 공격에 대해서는 장풍 으로 맞섰다. 평범한 횡소천군 초식이었지만 연경소가 일단 힘을 주자 세 명의 제 자들은 뒤로 일 장 가량 물러났다. 특히 가운데에서 공격하던 사람은 큰 충격을 받아 몸을 제대로 겨누지 못할 정도였다. 귀혼살은 대경실색하여 쌍검을 뒤집어 공격했다. 매서운 한 줄기 바 람이 연경소의 오른쪽 뺨을 스쳤으나 상처는 나지 않았다. 살짝 얼굴 을 돌려 피했던 것이다. 연경소는 이내 몸을 빙글 돌리며 반격에 나섰다. 그 빠르기와 정확 도는 실로 놀라울 만한 것이어서, 한 번의 몸놀림으로 그는 줄곧 몰리 던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설 수 있었다. 귀혼살은 식은 땀을 주르르 흘렸다. 그의 표정은 두려움과 초조함에 완전히 질려 있었지만 굳이 나타내지 않으려고 했다. 잠시 뒤로 밀려났던 세 명의 제자가 달려들었지만 이미 연경소의 검 에 따라 끌려다닐 뿐이었다. 귀혼살은 혀를 깨물었다. (천하제일검, 천하제일검 하더니 정말 대단하군. 독에 중독된 데다 가 화산파 장문인의 일장을 고스란히 맞고 한 달 동안 잠도 못 자면서 도망다닌 인간이 저 정도라니. 내가 비록 십 년을 더 연마한다고 해도 적수가 될지 의문이다. 열 살때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공을 연마 했건만 나보다 어린 녀석보다 무공이 떨어지다니 무슨 창피인가? 아무 래도 오늘은 길보다는 흉이 많으니 도망쳐야 겠구나.) 연경소의 검법은 더욱 웅혼한 기세를 발하고 있어서, 한 번 검이 떨 쳤다 하면 네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으며 공중에 무수한 검화를 그려내 고 있었다. 이때 귀혼살 뿐만 아니라 세 제자들도 안색이 굳어져 있었는데 이미 도망가려는 생각을 굳힌 듯했다. "너희들은 모두 방위를 지키면서 사력을 다해 공격하라. 틈을 봐 녀 석을 처치하도록 하겠다." 다시 몇 초가 지나자 세 제자는 몸에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삼엄한 검진도 소용이 없어서, 연경소의 청죽검은 여기저기에 푸른 빛을 번쩍 이며 쌍검으로 겹겹이 둘러쳐진 방어망을 뚫고 있었다. 귀혼살은 그의 검세가 마치 촘촘한 그물과 같아, 자기는 그 안에 걸 린 한 마리의 조그만 물고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장기가 부딪히 는 소리 이외에는 일체의 잡소리가 들리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를 자아내었다. 연경소는 완전한 우세임을 확인하고 말했다. "이제 항복하는 것이 어떠하냐?"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 하자 말아라." "귀신의 혼도 죽일 수 있다는 번데기 나으리가 어째 이 모양이지?" 그 말이 자기를 분노시키려는 것임을 귀혼살이 모를 리가 없었지만,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놈은 지칠대로 지쳤음에도 자기를 가지 고 논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7 07/19 17:59 146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3) 귀혼살은 이제 식은 땀이 아니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상쌍검진 과 독암기로 사천 일대에 이름을 널리 떨쳤던 그였지만 연경소의 매서 운 공세를 제대로 피해내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연경소의 내력이 절 반 정도로 감소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 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우물쭈물하다가는 여기에서 죽고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귀혼살은 초식을 변화시켰다. 원래 고수들의 대결에 서는 반푼 정도의 힘을 빼놓고 초식을 전개하기 마련이었고, 공세에만 치중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상대방이 만의 하나 치밀한 방어로 공 격을 다 막아낸 후의 후속동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 일초로 남을 제 압할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다. 그런데 귀혼 살의 초식은 완전히 도리에 어긋나서, 동귀어진의 초식을 들고나왔다. 휙, 하는 바람소리만이 들렸지만 대로는 살기로 가득찼다. 귀혼살의 제자들은 이미 한 대씩을 얻어맞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연경소가 부상을 입지 않고, 사정을 두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최소한 무공을 쓸 수 없게 되었을 테지만. 연경소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이런 초식들의 목적은 다른 것이 었다는 점이다. 그는 훌륭한 무공을 갖추고 있었지만, 독랄한 점에 있 어서는 귀혼살의 대후배였던 셈이다. 귀혼살은 쌍검 중 한 자루를 거꾸로 쥐더니 고함을 지르면서 독룡출 동(毒龍出洞)의 검세로 연경소의 허리와 다리를 노리고 쓸어갔다. 연 경소는 오른쪽으로 반 걸음 정도 옮겨서 공격을 무마시킨 후 태산첨죽 (太山尖竹)이라는 기이한 초식을 펼쳤다. 원래 이 초식은 연경소가 태산을 유람하던 중 한 대나무밭의 모양새 가 이상함을 보고 만들어낸 것이었다. 연경소의 별호가 청죽검객 혹은 청죽신검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그가 가지고 다니는 보검의 이름이 청 죽검이며 푸른 광채를 띄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평소에 그의 취향이 대부분 대나무에 관련되어 있어서이기도 했다. 연경소는 대나무를 지극히 좋아해서 명승지를 유람할 때에는 언제나 대나무숲을 둘러보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아는 무림인은 없었다. 그 자신도 몰랐으니까. 어느날 태산의 이름없는 죽림(竹林)을 지나는데, 대나무의 끝부분이 모두 뾰족하게 잘려나가 있음을 발견한 그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가 무의식중에 검을 몇 번 휘두르게 되었는데, 그 위력이 상상을 초월 하여 검법 안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원래 대나무의 끝은 태산파의 문 하들이 검법을 연습하면서 잘라놓은 것이었으나 연경소는 거기에서 정 묘한 초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연경소가 이 한 수의 검을 떨쳐내자 주위가 모두 푸른 빛으로 꽉 차 는 것 같아서, 어디를 보나 검영이 아른거렸다. 이것은 검을 펼쳐내는 원리 중 산(散)의 요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귀혼살이 혼자서 막아내기엔 벅찬 것이었다. 세 제자가 진법을 갖추 고 대들었더라도 막아낼 수 없을만한 엄청난 기세였다. "번데기도 주름잡는 재주가 있네, 연경소!" 귀혼살은 이 일검을 맞고 왼팔이 잘려나가고야 말았다. 선혈이 폭포 처럼 흘러나오자, 연경소는 크게 놀랐다. (왜 막지를 않았을까?) 연경소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귀혼살이 큰 소리로 외치며 필살의 초식을 전개했다. 아주 작은 틈이었지만 귀혼살은 그 틈을 완벽하게 포착했다. 왼팔이 떨어지는 순간 연경소는 주춤했던 것이다. 그는 연경소의 엄청난 공격 을 정면으로 받아내도 막을 수 없음을 계산하고, 왼팔을 내주는 대신 몸을 뻐 궁리를 했다. 귀혼살은 공세가 펼쳐지기 직전에 이를 악물고 있었다. 왼팔을 내준 다는 계산을 미리 한 것이었는데, 과연 현명한 행동이었는지는 판단하 기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그 찰나의 순간에 귀혼살은 왼팔로 공격을 막지 않고 암기를 한 줌 뿌렸다. 연경소가 맞아주기를 기대한 것은 아 니었다. 정작 무서운, 그리고 계산된 한 동작은 다음에 이어졌다. 돌연 귀혼살은 장검의 중간 쯤을 잡더니 그 부분에 진기를 집중해서 꾹 눌렀다. 상대방의 심리를 완전히 파악하지 않는다면 도망갈 수조차 없었기 때문에 펼친 기발한 착상이었는데, 파검절편(破劍切片)이란 것 이었다. 그의 수중에 있던 강검은 산산조각으로 부숴져서 연경소의 전신으로 날아들었다. 아무리 하늘과 통하는 재주가 있어도 잠시 머뭇거리는 틈 을 탄 공격을 완전히 해소하고 반격할 여유는 없었다. 연경소는 위급 한 가운데 손을 뻗어 암기를 날려버리고, 뒤로 번개같이 물러났다. 실 로 위기일발이었다. "음..." 연경소는 눈살을 찌푸렸다. 작은 검편 하나가 무릎에 박혀 있었다. 조그만 녀석은 그를 조롱하려는 듯, 약간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연경 소는 그것을 당장 빼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세 명의 제자들에게 말했 다. "셋 셀 동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목숨을 책임질 수 없다!" 세 명의 제자들은 어디서 힘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 달아나기 시작했 다. 각자가 가진 경공술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 같았다. 연경소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상처를 치 료하기 위함이었다. (생각보다는 상처가 심하군.) 귀혼살 일당을 물리친 뒤라 피로가 극심했다. 아까 객잔의 방에 있 을 때에도 긴장감 때문에 휴식을 취하지 못한 탓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악적, 오늘에야 하늘이 도와 널 만났구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연경소는 싸늘한 바람이 일면서 억센 장풍이 면전에 와닿는 것을 느끼고 필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여섯 바퀴나 구르고 나서야 간신히 장풍을 피한 그는 재빨리 일어서 면서 무릎에 박힌 칼조각을 손가락으로 잡아빼었다. 피가 용솟음치듯 했지만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남색 옷을 입은 노인이 한 명 서 있었다. "죽을 준비는 되었느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연모는 노인장에게 죽을 죄를 지은 적이 없 습니다." "아직도 입은 살아있구나. 곧 그 입을 닫게 해 주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네 죄를 벌써 잊었느냐?" 남의 노인은 다짜고짜 두 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즉시 손 바닥 그림자가 난무하면서 매서운 장풍이 밀어닥쳤다. 노인이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부는 폼이, 음유한 공력을 익힌 듯 싶었다. 연경소는 무릎의 상처가 신경쓰였으나 약한 꼴을 보일 수 없었다. "노인은 어찌하여 사리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손을 쓰십니까. 제 손 속이 맵다고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가 나의 아끼는 제자를 무참히 베지 않았느냐?" "더욱 모를 말입니다." "잔말 할 것 없다. 네 사지를 비틀어 놓은 후 이야기하는 편이 빠를 것이다. 순순이 항복한다면 목숨은 살려줄 수 있다." 연경소는 내심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경우가 없는 일이 또 어디 있 겠는가 싶어서 황당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하필이면 이럴 때 나타 난 노인에게 분노가 생겼다. "연모, 여태까지 오십 일곱 명을 죽이고 백 한 명의 무공을 폐했지 만 악인은 하나도 없었소. 노인의 제자가 나에게 죽었다면 응당 받을 벌을 받았을 것이오." "뭐라구?"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더욱 세차게 손을 내둘렀다. 노 인은 분함에 못이겨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하고 있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8 07/20 17:48 16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5) 노인은 쌍장을 모아서 곧장 뻗쳐왔다. 신속하기가 전광석화와 같아 연경소는 깜짝 놀라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노인은 양손으 로 각기 다른 초식을 펴면서 그의 어깨와 미간을 치려고 했는데, 왼손 은 점창파의 육합검법(六合劍法) 중 기수식인 우내일청(宇內一靑)이었 고 오른손은 그 다음 초식인 무명적수(無鳴寂水)였다. 이 동작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정통검파인 점창파 검술의 정수를 담고 있어서 방비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원래 육합검법의 수법은 점창 파의 제자들에 의해 무림에 널리 퍼졌던 것이라 피하기가 어렵지 않았 지만, 이와 같은 순간에 양손을 따로 놀려 공격하니 위력이 몇 갑절로 증가했다. 연경소는 왼손으로 노인의 우내일청 초식을 정면으로 맞받아치고 검 을 쥔 오른손을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려서 나머지 한 초식마저 막아냈 다. 이 한 수의 교환은 연경소가 약간 손해를 보았다. 심한 내상을 입 은 뒤라서 장력끼리의 싸움에서는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비스듬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은 더욱 기세를 올려 왼손과 오른손을 따로 놀렸 는데, 불가사의하게도 전혀 불편해 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자연스러 울 따름이었다. 청죽신검 아니라 무신(武神)이라고 해도 도리없었다. 정황은 불리하 기만 했고, 앞에 나타난 노인만 해도 보기드문 고수였다. 내상에 중독 까지 되었으니 몸을 뺄 수도 없었고 단지 정교한 검초에 의지해서 상 대를 격퇴시킬 수밖에 없었다. 연경소는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신법을 써서 맹렬한 장풍을 피해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반보 앞으로 나오면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청죽십이식(靑竹十二式)의 절예를 펼치는 것이었다. 이 검법은 연경소 가 사부로부터 배운 열 가지의 초식에 두 가지를 더해 완성한 것인데, 아직까지 패배를 몰랐다. 하나의 동작은 여덟 가지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흔여섯 수가 검법의 요체를 이루고 있었다. 검을 쓰는 방법은 신묘(神妙)함과 장중함을 겸비하여 상대의 모든 공 격을 무위로 되돌림과 동시에 반격을 가하여 궁지에 몰아넣는 것을 원 리로 하고 있었다. 그가 노인을 막 다그쳐서 뒤로 물러나게 하자, 노인은 적잖이 당황 해 하는 것 같았다. 노인의 무공도 무림에서 큰소리 칠 정도는 되었지 만 일시에 연경소의 날렵하면서도 무게있는 검초를 감당하지 못한 것 이다. 연경소의 검법은 쾌속한 발출을 생명으로 삼아, 정교함이 뒤를 받쳐 주어 무적의 기세로 뻗쳐나갔다. 한번 손이 움직일 때마다 검도 덩달 아 춤추며 시퍼런 검의 광채가 한 자 가량이나 생겼다. 노인은 십 초가 지나자 완전한 수세에 몰렸으며, 다시 십 초가 지나 자 손발이 어지러워지면서 헛점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처음에는 그토 록 기고만장한 기세도 한풀 꺾여서 그야말로 연경소를 상대할 수가 없 었고 단지 심후한 내공에 의지해서 가까스로 버텨나갈 뿐이었다. 연경소는 무릎의 상처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오자 한소리 호통 을 내지르며 내공을 집중해서 세 번의 공격을 가했다. 그것은 바로 파 죽삼식(破竹三式)이라는 것이었는데, 청죽십이식과는 달리 일격필살의 매서운 기세가 갈무리되어 있었다. 노인은 드디어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열 걸음 이상 물러나 비틀거렸 다. 입가에는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는데, 그것은 그가 상당한 내상을 입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노인의 도포 앞자락은 길게 찢어져 있었 고 그 사이로는 쉴새없이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죽을만한 상처는 아 니었으나, 더이상 내공을 썼다가는 회생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노인은 털썩 주저앉았다. "하하하하! 역시 청죽신검이로다. 어찌하여 그 능력을 옳은 데 쓰지 않느냐? 그런 능력을 가지고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다니 어찌 대장부라 하겠느냐!" 연경소는 도대체 이름도 밝히지 않고 왜 노인이 그러는지 알수가 없 었다. 수십 번 손속을 교환하면서 연경소는 노인의 정체를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가 있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연경소도 같이 털썩 주저앉아 말했다. "도대체 무고하게 죽은 사람은 누구이고, 노인장은 누구시오?" "네가 나의 네번째 제자인 모용석(募容錫)을 죽이지 않았느냐!" 노인은 분한 듯 하늘을 바라보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 말을 듣 고서야 연경소는 대강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무공을 믿고 강도질을 했소." "뭣이?" "내말이 믿기 어렵다면 전원(錢元) 표국의 대표두인 강씨(姜氏)에게 가서 물어보시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생사문주(生死門主) 뇌수호 (雷水虎)에게 가서 생사도(生死刀)를 잃었다가 찾은 동기를 물어도 될 겁니다. 그래도 시원치 않으면..." "그만! 그게 모두 사실인가?" "연경소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연모의 목을 내놓겠소." "좋다. 한달동안 내 두 곳을 들려보겠다." "내가 점창파로 찾아가리다." "사실이 아니라면, 피값은 두 배로 받아내겠다." "글쎄 사실이나 확인하시구려." "좋다. 그런데 네가 화산파 장문인을 암산하였느냐?" "뭐요?" 연경소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암산당한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 아닌가? 피동과 사동의 관계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 었음을 느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화산파에서 비첩을 돌렸는데, 바로 청죽신검 연경소가 혼자서 화산 파를 벌컥 뒤집어놓고 장문인을 암산하려다 들켜서 도망갔는데 태을진 인이 일장을 맞았다는 게야. 그는 내장이 진동되어 수많은 의원을 불 었으나 차도가 없자 본문의 내공으로 치유하고자 했다고 하는데, 그래 도 효과가 없다면서 무림 각 문파에 공문을 보내어 자네를 잡아죽이자 고 했네. 아마 지금쯤 이 근방에는 각대문파의 고수들이 쫙 깔렸을 것 이네. 나는 태을진인의 성격이 편협한 것을 알기 때문에 믿지는 않았 지만 그는 자네가 제자를 죽였다고 했네. 그래서 이렇게 달려왔지." 연경소는 씁쓸하게 웃었다. "암산당한 것은 그가 아니라 접니다." "무엇이?"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장(張) 아무개가 칠십 평생에 문파 장문인이 암산을 가했다는 말은 처음 듣네! 자네는 그 말에 책임을 져야하네." "이걸 보십시오." 연경소도 자리에서 일어나 웃도리를 벗어보였다. 그의 윗몸에는 수 많은 상처들이 나 있었는데, 모두 한 달 동안 추격당하면서 입은 크고 작은 부상들이었다. 노인의 시선은 한 곳에 집중되었다. "불혈수!"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저를 공격했고, 화산칠로가 검진을 쳐서 절 가 로막았습니다. 살아나온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인은 연경소가 짐작한대로 점창파의 장문인 장척(張尺)이었다. 그 는 무림에서 학성(鶴聖)이라는 별호를 얻고 있었는데, 어진 성품과 신 중한 사리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을이 말하길, 일장을 맞는 순간에 반격을 했다고 하던데." "웃기는 소리입니다. 설령 그의 말이 실제였다고 해도, 감히 손자국 을 제 몸에 낼 수 있겠습니까!" 연경소는 돌연 하늘을 보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하는 소리가 쩌렁 쩌렁하게 울렸다. 장척은 그의 내공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네 말이 맞는것 같군. 일 년 전에 태을과 친선으로 겨룬 적이 있 는데 노부와 비슷하더군. 아무리 실력이 늘었어도 천하제일검과 겨루 어 일장을 적중시키기는 어려웠을텐데." 연경소는 그때를 생각하며 한참을 웃다가 말했다. 물론 답답한 가슴 을 식히기 위한 것이지 우스워서 웃은 것이 아니었다. "저는 그때 산공독 같은 것에 중독되어 있었고, 그의 초청으로 화산 에 가 있었습니다. 무영객이라는 자객을 막아달라는 것이었죠. 장문인 이 직접 부탁하길래 들어주었는데 그것이 함정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 습니까! 무영객이란 자를 제압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기 때문에 긴장 이 풀리고 진기도 흩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때 불의의 습격을 받았으니 견딜 재간이 없었지요." "자네, 정말 믿기 어려운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허언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그럼 장문인께선 청죽검객이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그 말은 내가 대신해 주지." 갑자기 휘날리는 눈보라 사이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9 07/24 14:27 178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6) "무슨 낯으로 또 나타났느냐?" 연경소는 크게 호통쳐서 나빈을 꾸짖었다. 그러나 나빈은 눈하나 깜 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가 먼저 나를 암습하지 않았느냐?" 연경소는 대충 그의 계략을 알 것 같았다. 자기를 암습해 놓고 오히 려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는 계획이었으며, 화산파의 장문인이라는 지 위를 이용해서 자기를 무림공적으로 몰아넣으려는 악랄한 생각이었다. "내가 산공독에 중독되지 않았다면 네 불혈수 따위가 나의 털끝이라 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으냐?" "하하하!" 나빈은 크게 웃었다. "지금부터 건드려 보겠다. 네 말이 맞는가 시험해 보기 위해서이지. 천하제일검이라는 연경소가 허언을 했는지 안했는지 볼까?" 연경소는 가슴이 철렁했으나, 이미 나빈이 나타날 때부터 각오한 일 이었다. 그의 상처는 최악이었다. 나빈은 이미 칠파일방의 한 수뇌로 절정고수였는데, 연경소는 칼에 찔리고 찢긴 상처만 수십 군데에 독상 과 내상을 같이 입었으며 무릎에는 암기가 꽂혀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학성 장척을 돌아보았다. 장척은 그의 눈빛을 의식했지만 뭐라 말하기가 곤란했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인지 확실치가 않아서였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 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네만. 태을, 자네가 설명이나 해보게." "뭘 어떻게 설명해 보라는 말인가?" "글쎄 아는대로 설명해보게." "장척, 자네는 끼어들어서는 안될 사건에 끼어들었으니 어서 점창으 로 가는게 좋을 걸세."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알고 싶은가..." 나빈은 갑자기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득의양양한 표정과는 거리가 먼 그것이었다. 잠시동안 생각에 잠겨 있 던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객잔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일신에는 아래위 모두 녹색 옷을 걸친 사람이었다. "연경소, 검을 내놓으면 살려주겠다." 연경소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대답 했다. "청죽검이 탐나느냐?" "말을 끌지 말기 바란다." 그의 목소리는 밑바닥까지 깔려 있었지만 음산하지는 않았다. 녹의 인은 전혀 표정이 없어서 말할 때에도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연경소 는 그것을 보고 그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인피면구를 쓰고 다니는 것을 보니 얼굴이 팔리는걸 싫어하는 모양 이로군. 그대가 누구인지 알아도 되겠는가?" "말을 돌리지 마라." 보다못한 장척이 말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태을진인에게 명령을 하는건 또 무슨 도리냐? 네 얼굴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나 보자!" 말을 끝내자 그는 몸을 구부리며 녹의인을 덮쳐갔다. 빠르기가 마치 독수리와 같아 녹의인은 좀처럼 피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러자 녹의 인은 왼쪽으로 몸을 돌리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불었다. 나빈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낌새 였지만 입을 열지 못하고 다만 심각한 표정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장척은 첫번째 공격이 무위로 끝나자 왼발을 축으로 삼아서 몸을 빙 글 돌려 녹의인의 하체를 노리고 발길질을 했다. 녹의인은 수도(手刀)를 세우고 장척의 오른쪽 정강이를 세차게 내려 쳤다. 아주 단순한 직선동작이었지만 재빠르고 힘차서 상대로 하여금 공격을 거두어들이게 만들었다. 녹의인은 장척의 두번째 공격조차 물리치고 나서 냉랭히 말했다. "점창파가 간이 부었군." "무엇이?" 장척은 눈썹을 찡그리며 무릎을 약간 굽히고 진력을 모았다. 태을진 인은 가만히 그 모양새를 보고 있다가 나직하게 신음하듯 말했다. "소양이십사장(少陽二十四掌)..." 장척은 쾌속하게 양손을 교차해 가면서 장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과연 일파의 종사답게 장풍에서 풍뢰소리가 나며 상대방을 압도해나갔 다. 녹의인은 지금의 공격이 아까보다 몇 배는 맹렬한 것을 알고 허리춤 에서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의 무기는 길이가 세 척 정도 되는 봉이었 는데, 녹색 바탕에 검은 글씨가 써 있었지만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 는 봉을 회전시켜서 장척과 맞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장척은 차츰 우세를 점해 나갔다. 24동작으로 이루어진 장법은 점창 파의 비전절기로 장로급 이상만 배울 수 있었다. 공격과 수비를 겸비 한 초식들이 계속해서 쏟아나왔다. 녹의인은 뒤로 몰렸다. 그는 봉으로 연신 괴이한 초식을 펼쳐내어서 간신히 장풍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소양이십사장은 후반부로 갈수록 위 력이 커지는 것이었다. 이때 장척은 열아홉 초식을 펼쳐내고 스무 번 째의 동작으로 변화했다. "펑!" 바람이 가득 들어있는 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녹의인은 뒤로 비틀비틀 밀려나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넘어지면서 툭, 하며 조 그만 목패 두 개가 땅에 떨어졌다. 나빈은 그 목패를 보자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갔다. 녹의인과의 거리 는 약 5장 정도였는데, 그가 두 번 발을 딛자 어느새 그의 바로 앞까 지 도달해서 목패를 집어들었다. 장척은 그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태을, 그것은 바로..." 나빈은 침중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바로 본파의 조사령이오." "그런데 어째서 그걸 저자가 가지고 있단 말이오?" "말하자면 길지만..." 이때 어디에선가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곡을 연주하는 것 같지는 않 았는데, 연경소는 깜짝 놀라했다. "투골쌍마(透骨雙魔)가 아직도 살아있다니?" 장척이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나빈이 목패를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그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괴성을 질렀는데, 장척이 가까이 다가가서 혈맥을 봉쇄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빈은 조금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머리를 땅에 부딪치기도 하고 오 른손을 들어서 땅을 맹렬하게 내리치기도 했다. 엄청난 고통을 견디어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맹렬히 울부짖다가 어느 순간 피를 한 대접만큼이나 토했는데, 그냥 선혈이 아니었다. 꿈틀거리는 벌레도 있었고 잘려진 내장 조각도 보였다. 그것을 보자 장척과 연경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외쳤다. "고독(蠱毒)!" 나빈의 신음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잦아들었다. 그는 죽어가는 가 운데에서도 목패를 꽉 움켜쥐더니 장척과 연경소에게 말했다. "조사령을 화산파로 가져다주시오. 연 대협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소 만, 저들이 조사의 영패를 가지고 명령했기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욱..." 나빈은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내저었다.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내장 을 긁어먹는 고통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연 대협이 최근에 얻었다는 한 자루의 신검을 노리고 있소. 부디 조심하시오... 구천에서 만나면 백번 사죄하리다. 어서 피하는게 좋을 것이오. 저 피리소리는 투골쌍마의 것이외다. 마주치지 않는것이 상책... 욱!" 다시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내고서야 나빈은 최후의 말을 할 수 있 었다. "한옥신검(寒玉神劍)을..." 그는 이제까지보다 더욱 괴로운 표정을 짖더니 왼손을 들어 자기의 천령혈(天靈穴)을 내리찍었다. 고독은 일종의 독벌레로서 어떤 사람의 몸을 숙주로 삼아 살다가 외부로부터 어떤 신호가 오면 맹렬히 생체활 동을 시작하여 숙주의 내장을 긁어먹는 것이었다. 이런 벌레는 희귀한 것이기는 했지만 묘강에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하는데, 한번 시술자가 신호를 보내면 온몸에서 독을 내뿜으며 내장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숙 주는 한 줌의 핏물로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나빈은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그가 죽 은 후에도 고독벌레들은 계속 활동을 계속하여 결국 그의 몸을 녹여버 렸다. 심지어는 그가 입은 옷까지 녹아내리고 말았다. 연경소는 머리속이 환히 밝아오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화산파 장문 인이 자기를 암습했으며 자기가 쫓겨야만 했는지 안 것이다. (우연히 얻었던 한옥신검이 모든 화의 근원이었군.)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10 07/25 16:02 264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3장... 투골쌍마의 출현 (1)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듯한 그 피리소리는 아주 가늘면서도 긴 여운 을 남기며 들려오고 있었는데, 소리가 아주 청아하고 높았다. 무슨 곡 을 연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귀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장척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어 버리고 말았네. 이 늙은이가 저 두 괴물을 잠시 막고 있 을테니 자네는 화산파에 그 신물을 가져다 주고 점창파로 가서 장문인 직위를 대제자 주표(朱飇)에게 계승하도록 하게나." 연경소도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미약하나 마 남은 힘을 다한다면 두 괴물과 백 초 정도는 겨룰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노선배님께서..." "흐흐흐... 자기들 맘이로군. 안 그런가 괴이(怪二)?" "그렇군요, 괴대(怪大). 정말 멋대로 아닙니까?" 장척과 연경소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투골쌍마는 그들이 생각 한 것보다 두 배는 빨리 도착한 것이었다. 분명히 피리소리는 한 마장 정도의 거리에서 들리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두 명의 노괴물은 아까 부터 와 있었다. 투골쌍마는 이십 년 전부터 끊임없이 무림의 곳곳에 출몰하며 악행 을 일삼는 흑도의 고수들로, 괴팍한 성격과 고강한 무예를 지니고 있 는 의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일종의 특이한 사공(邪功)을 연성하여, 도 검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많은 정도 협객들을 잡아죽였다. 독공에도 정 통하여 흑도의 고수들조차 그를 만나기 꺼려했는데, 그것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은 서로를 괴대, 괴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렀다. 형의 이 름은 사준(射俊), 아우의 이름은 벽풍(碧楓)이었지만 그것에 신경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두 괴물과는 안 만나는 것이 상책이었기 때문이 었다. 사준이 말했다. "점창파 장문인과는 볼일이 없으니 꺼져도 좋지." 벽풍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괴대의 말은 항상 옳지. 연경소라는 어린아이야, 어서 한옥검을 내 놓는게 좋을거야." 장척은 기가막혔다. 두 괴물을 동시에 상대한다면 승산이 없음을 알 고 있었지만 그래도 참기 어려웠다. '꺼져도 좋다'는 말은 어떤 경우 에도 기분나쁘게 마련인데, 일파의 장문인이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얼 마나 황당하겠는가. 연경소의 눈빛은 자못 심각했다. "한옥검은 나에게 없소. 그리고 당신들은 이미 보검과 부딪쳐도 깨 지지 않는 피리를 가지고 있지 않소." 벽풍은 두 눈을 껌뻑거렸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우린 네 검이 필요한데." "괴이, 일단 저 녀석을 제압하고 보자." "알겠습니다!" 벽풍은 장포를 펄럭이며 연경소의 가슴팍을 찍어갔다. 출수하는 속 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갈고리 모양의 손이 움직이는 각도는 지극 히 괴이하였다. 연경소는 지금 내공을 돋구어 싸우는 것이 위험천만임을 알고 있었 지만 도리없었다. 가만히 앉아 죽는 것보다는 백 번 나은 것이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장력으로 대항해 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여 장검 을 뽑아들었다. 청죽검은 빛을 발하며 그의 손놀림에 따라 현란한 움 직임을 보이며 영사처럼 달려들었다. "야, 대단한데?" "괴이, 혼자서는 힘들것 같군 그래." 사준도 역시 옷을 펄럭이며 앞뒤로 연경소를 포위했다. 장척은 거들 떠 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상대도 안 되니 제발 꺼져라, 하는 식이었 다. 장척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사준의 등짝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팔성 의 공력을 돋구어 맹렬히 갈긴 것이라 퍽,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우욱..." 사준은 신형을 잠깐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장척의 놀라 움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적양장(赤陽掌)을 정통으로 맞고도 끄떡도 하지 않다니. 과연 투골 쌍마... 하지만 이번 공격도 견디나 보자.) 장척은 공력을 십성으로 끌어올려 사준의 왼쪽 옆구리에 있는 장문 혈(章門穴)과 겨드랑이 바로 아래쪽을 맹렬히 때려갔다. 언뜻 보면 상 대를 얼싸안는 어정쩡한 자세였지만 손을 칼처럼 세워 휘둘렀기 때문 에 바람소리가 났다. "또 아프게 할껀가?" 사준은 고개를 뒤로 휙, 돌리더니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장척의 손 칼을 막아내고자 했다. 장척이 이를 보니 자기를 튕겨내려고 하는 수작인지라 다시 손을 뒤 집어 네 개의 손바닥을 마주보게 하여 부딪쳤다. 사준과 장척은 모두 점(點)자 요결을 써서 서로의 내력을 끌어당겼 기 때문에 네 개의 손바닥은 마치 질긴 아교풀로 붙인 듯 붙어서 미동 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내력의 겨룸이 되는데,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두 사람 은 손바닥을 떼어냈다. 이렇게 상대방의 내력을 끌고 당기는 것이 자 유자재가 되려면 적어도 수십 년의 고된 수련을 쌓아야 했는데, 이 둘 은 서로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네녀석은 독장을 맞았으니 십 초를 버티지 못할 게다.) (선천강기(先天剛氣)를 실처럼 뽑아 장심을 때렸으니 무공을 쓰기가 어려울 것이다.) 두 사람은 비틀거리면서 똑같이 세 발자국씩을 뒤로 물러났다. 무공 의 우열을 가릴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장척이 약간 더 손해 를 본 것 같았다. 본래 사준과 장척의 무공은 막상막하라고 볼 수 있었다. 공력에 있 어서는 장척이 약간 위였고, 사준은 괴이독랄한 초식과 독공을 써먹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척은 아까 연경소와 싸우느라 진기를 상당히 소비한 후였고, 자연히 사준에게 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시독(腐屍毒)에 중독된 걸 아느냐?" 장척은 장심에 검은 색의 독기가 어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독기 는 아주 느리게 퍼져나가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며칠 지나지 않 아 심장까지 도달할 것 같았다. 그는 왼팔의 혈도를 봉쇄하고 말했다. "지금쯤 어깨가 따가울텐데." 사준도 깜짝 놀랐다. 과연 그의 말대로 어깨가 따끔거리는 것이, 마 치 조그만 바늘이 핏줄을 타고 왔다갔다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응, 하고 잠시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야, 이건 선천강기로구나!" "괴대, 어떻게 된거야?" 벽풍은 펄쩍펄쩍 뛰어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사준은 여전히 알수 없다는 표정을 짓었다. "점창파의 늙은이도 한 가닥 재주가 있잖아? 괴이, 이거 잘못하다가 는 폐인이 되겠는데? 오늘은 저 두 사람을 후다닥 죽여버리고 도망가 자." "그럴까?" 연경소는 참을 수가 없어 크게 하하하, 하고 웃었다. "죽인 다음에는 도망가는 게 아니지." 사준은 큰 눈망울을 굴렸다. "아참, 그렇군. 알려줘서 고마워. 그런데 넌 왜 말꼬투리를 잡는 거 지? 기분나쁘게." "맞다. 노대에게 건방진 놈은 죽어야 해." 벽풍이 다시 연경소의 아랫배를 노리고 장풍을 휘둘렀다. 이때 연경소는 호흡을 고르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공격을 해오자 급한대로 청죽검을 한번 휘둘렀다. 검을 살짝 휘두르자 한 겹 한 겹의 푸른 기운이 피어올라 겹겹으로 벽풍의 공세를 차단했다. 벽풍은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사준을 보 고 말했다. "저 녀석의 무공이 상당히 괜찮은걸? 노대야, 이거 어떡하지?" "뭘 어떡해? 빨리 한옥검을 뺏고 도망가야지." 연경소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핏물을 간신히 되삼켰다. 이렇게 핏 물을 삼키는 것이 결코 몸에 이롭지 못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로서 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무사히 빠져 나갈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저 두 괴물은 단순하기 짝이 없으니 혀를 잘만 놀리면 빠져나갈 수 도 있겠다. 장 노선배님의 독상은 어떡한다...) 연경소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 투골쌍마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남의 검은 뺏어서 뭐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도망간다 는 말은 안 맞는다니까." 사준은 머리를 긁적긁적거렸다. "말꼬리 잡지마. 나 화나면 무섭다니까. 그리고 한옥검은 아주 좋은 검이니까 당연히 뺏어야지." "노대 말이 맞다. 어서 검을 내놔." "나도 죽을 고생해서 얻은 건데 왜 줘야하지?" "글쎄 내놓고 말하라니까." 만약 제 삼자가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실소를 금할 수 없었을 것이 다. 무림제일의 검객이라고 불리우는 연경소와 점창파의 장문인 장척, 그리고 마도의 지극히 까다로운 두 노물들이 아이들의 말싸움같은 설 전(舌戰)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연경소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말했다. "먼저 이 노선배님이나 치료하고 보자구." "미쳤니? 나도 지금 죽을 지경인데." 벽풍이 맞장구를 쳤다. "노대 말이 맞다. 아파도 같이 아파야 안 억울하지. 너도 좀 아프면 안 되겠냐?" 연경소는 투골쌍마가 하도 말을 빨리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좀 멍청한 둘을 이용하지 못하면 오늘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의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 가고 있었다. (도대체 뒤에서 모든 일들을 사주한 자가 누굴까? 그리고 이런 괴물 들을 매수할만한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저들이 직접... 아니다. 녹의 인이 아까 호각을 분 뒤에야 저들이 나타났으니 뭔가 배후가 있을텐데 나타나지를 않는군. 그거 참...) 연경소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서있으니까 다리 아프다. 앉아서 이야기하자." 그는 되도록이면 투골쌍마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들과 비슷 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사준과 벽풍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린 다리 안 아픈데. 노대, 아프냐?" "아니. 넌 왜 다리가 아프지? 앗! 그렇구나. 너도 아파야 내가 억울 하지가 앉다니까. 우린 나 하나만 아프고 너희는 둘다 아프고..." "한옥검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지?" 연경소는 직접 물어보았다. 그도 복잡해지다 못해 깨지려고 하는 머 리를 수습하느라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상처도 계속 쑤시고 있었다. "노이, 누가 그랬지?" "맞아 맞아... 그게 누군가 그랬을 꺼야."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누군가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랬 을 꺼라니... 연경소는 아예 뒤로 몸을 눕히고 비스듬히 몸을 세운 뒤 말했다. "누군가 그런건 뭐고 또 누군가 그런 사람은 누구지?" 벽풍이 음, 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무튼 누가 그랬는데, 네 검을 뺏어오면 된데." "그러니까, 누가 누구냐고 물었잖아?" "모르니까 누가 누군지 대답을 못하지." "답답하기 이를데 없군." 연경소는 곁눈질로 장척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운공에 여념이 없었 다. 적을 앞에 두고 운기조식을 한다는 것이 위험천만인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독기가 번지는 것을 막으려면 별수 없었다. 연경소가 보니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아서 얼른 말했다. "해약을 주면 선천강기를 해소시켜 주지." "정말?" 사준은 생각도 안 해보고 두 개의 알약을 손가락으로 퉁겨서 던져주 었다. 연경소는 그것을 받아 냄새를 맡아보았다. 향긋한 냄새 중에서도 약간 비릿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가짜 해약같 지는 않아 얼른 장척에게 복용시키고 자기도 허리춤에서 조그만 옥병 을 꺼내어 던져주었다. 사준도 얼른 옥병을 받아 마개를 열고 먹어버렸는데, 연경소는 이것 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말 단순하기 그지없군. 사람됨은 그리 악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무시무시한 악명을 떨친다고 알려졌을까. 저들 둘의 별호는 투 골쌍마가 아니라 투골동자(透骨童子)로 바뀌어야 옳은 것이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11 07/26 21:13 342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2) 학성 장척과 투골쌍마의 맏형 사준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 어갔다. 연경소가 사준에게 준 옥병에는 두 알의 소환단(小環丹)이 있 었는데, 원기를 보호하고 내상을 치유하는 데에는 더없이 적합한 약이 었다. 장척의 머리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는데 아주 평화로 운 표정으로 현문정종(玄門正宗)의 내공을 운행하여 독을 몰아내고 있 었다. 그에 비해서 사준은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을 격렬히 떨면서 한 줄기 의 선천강기를 몸 밖으로 몰아내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독을 밖으로 뿜어내는 것과 내상을 치료하는 것은 모두 엄청난 체력 의 소모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연경소는 자기도 이 때를 이용해서 진기를 운행하려고 한쪽에 앉아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 벽풍에게 말했다. "벽형께서는 잠시 호법을 봐 주시구려." 그러자 벽풍은 코방귀를 뀌는 시늉을 했다. "흥! 내가 왜 수고를 해야하지? 나는 귀찮은 건 질색이란 말야." "괴대를 지켜야 하지 않소?" "응? 응... 그렇군. 그럼 난 괴대만 지킬테야." 연경소는 자기자신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강호에서 악명을 휘날리며 수많은 악행을 했다고 전해지는 두 마두 앞에서 운기조식을 할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을 의심하거나 미워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무나도 순진하고 단순한 그들의 행동에 호감을 느낀 것이라 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스스로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일단 조식을 하고 봐야겠다.) 연경소는 이렇게 생각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무아지경에 돌입 했다. 벽풍은 혼자서 있기가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 다. 그가 아무리 어리숙하다고는 하지만 무공은 극히 고강하여 중요한 순간에 말을 시키거나 건드렸다가는 반신불수가 되거나 주화입마에 이 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연경소와 장척, 사준은 품(品)자 형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조식 을 했는데 모두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힘써 기를 온몸으로 돌렸다. 약 반 시진 가량이나 지나서야 사준이 가장 먼저 눈을 떴다. 소환단 의 효용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연경소는 강호에 출두할 무렵 열 환 을 제조해서 가지고 다녔는데, 마침 두 알이 남아서 사준에게 준 것이 었다. 사준이 눈을 뜨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벽풍이었다. "괴대, 이제야 깨어났군.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줄이나 알아? 정말로 반 시진이나 이리저리 서성거리는 건 질색이라구." "흐흐... 괴이는 참을성이 없군. 나도 몸 안에서 근질거리는 기운을 밖으로 뽑아내느라고 죽을 뻔 했지." "근데 저 젊은 연가 녀석은 마음에 드는걸?" "그래. 한평생 이 괴대의 마음에 든 사람은 다섯 사람도 안 되지." "누구누구인데?" "누구긴? 괴이와 우리 사부님 두 분, 그리고 얼마 전에 찾아왔던 그 녹색옷을 입은 사람이지." "그럼 여섯이 되었네?" "흐흐... 그래." 두 노괴물이 수작을 벌이고 있을 때 갑자기 녹색 그림자가 어른거리 더니 이들 앞에 나타났다. 새로 나타난 녹의인은 옷 뿐만 아니라 장갑과 검집, 면사까지도 온 통 녹색이라서 얼핏 보면 무성한 나무잎으로 몸을 가린 것 같다는 착 각을 불러일으킨 만 했다. 그는 운공을 하고 있는 장척과 연경소를 힐끗 바라보더니 의아한 표 정을 지으며 투골쌍마에게 물었다. "왜 두 사람을 죽이지 않았죠?" 벽풍이 먼저 나섰다. "우리 괴대와 내가 마음에 들었어. 우리 마음에 든 사람은 절대 안 죽인다. 그렇고말고." 자기가 말하고도 어깨를 으쓱거리는 폼이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 이었다. 사준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가씨도 우리 마음에 안 들었으면 죽었어." 녹의인은 움찔했다. "어떻게 내가 여자라고 말하죠?" 사준은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넌 여자가 아니란 말이냐? 분명히 여자였는데... 괴이, 여자 가 아니라는데?" "헤헤... 그럼 확인해 보면 되잖아." 벽풍은 오른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고 녹의인의 아랫도리를 잡아 뜯으려고 했다. 녹의인은 깜짝 놀라서 연달아 발길질을 해 대었는데, 내경은 강하지 않았지만 속도와 정확도가 조화되어 벽풍은 다시금 손을 움츠려들었다. "어, 왜그래? 남자면 거리낄 것이 없을텐데." 녹의인은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여자라고 해두죠. 그보다도 한옥검은 빼앗았나요?" "아니." 사준이 대답하면서 자기 코를 후벼 코딱지를 둥글게 만들어 엄지 손 가락과 중지 손가락 사이에 넣고 튕겨냈다. 녹의인은 더럽다는 생각을 했지만 사준은 전혀 거리낌없이 재미있는 장난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계속 그 동작을 되풀이해서 했다. "도대체 당신들 둘은 어떻게 된 사람인가요?" "어떻게 되긴? 잘 늙어가고 있지." 이번엔 벽풍이 끼어들어서 녹의인을 바짝 약올렸다. 이들 둘은 자연 스럽게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것이었지만 남들이 들으면 황당해 하거나 화가 나는 것이었다. 녹의인은 약간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임연(林蓮)이라고 해요. 일주일 전에 당신들은 나에게 한옥검을 가져다 준다고 했잖아요." 사준과 벽풍은 여전히 딴청이었다. 사준은 코딱지 장난(?)을 그만두 고 뒤로 벌렁 누워서 말했다. "이름 물어본 적 없는데. 그리고 한옥검은 나중에 주던지 말던지 할 테니까 걱정말라구." 녹의인, 아니 정확히 말해서 녹의녀는 화가 났지만 함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투골쌍마의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이었다. (이거야 말이 통해야지. 도대체 이게 뭐야...) 그녀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돌연 오른손을 들어 연경소를 향해 뭔가를 훽, 뿌렸다. 그녀의 손이 한 번 움직이자 한 대의 조그만 화살이 날아가 세상모 르고 운기에 몰두하고 있는 연경소의 이마를 노리고 공중에서 꿈틀거 렸다. "안돼! 그는 마음에 든단말야!" 사준이 크게 소리치더니 화살을 겨낭해서 손가락을 퉁겼다. 그의 손 가락 사이에서 날아간 것은 그가 동글동글하게 만들어서 가지고 놀던 (?) 코딱지였는데, 그것은 정확히 날아가 화살의 촉 부분을 때렸다. 녹의녀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 노괴물들은 역시 무공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구나.) 사준은 흥흥, 거리면서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한옥검은 뺏어 주던지 안 주던지 할 거라 고 말했자나?" 벽풍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맞아맞아! 괴대 말이 무조건 맞다." 녹의녀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그대들 두 사람은 왜 항상 그모양인가요? 일주일 전에는 하늘이 두 쪽나는 한이 있어도 한옥검을 뺏어준다고 하고는. 지금와서 딴소리 하 긴가요? 도대체 믿을 수가 있어야지. 주면 주는거고 안주면 안주는 거 지 주던지 안 주던지 하겠다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그녀의 말은 매우 빨라서 따다다, 하고 무슨 폭죽처럼 투골쌍마들을 몰아붙였다. 그말을 듣고 얼른 반격할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은 사준과 벽풍은 머리를 긁적거리기만 했다. 녹의녀가 또 뭐라고 쏘아붙이려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낭자는 뉘시오?" 바로 연경소였다. 그는 진기를 세 번 돌리고 나서야 외상을 대강 치 료하여 피를 멈추고 암기를 뽑았다. 아직 완전히 회복은 되지 않았지 만 아까처럼 죽을 맛은 아니었다. 사실 녹의녀가 암기를 던질 때만 해 도 그는 깨어 있었지만 일부러 미동도 하지 않고 다만 무릎 위에 얹어 두었던 손가락을 약간 위로 치켜올려서 화살이 가까이까지 다가왔을때 퉁겨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준이 대신 암기를 막았기 때문 에 그냥 운기하는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죠?" 연경소는 미소를 머금었다. "무슨 상관이기는 몰라서 묻소? 연모의 검을 빼앗아 달라고 두분 노 선배님께 사주한 장본인이거나 그 부하이지 않소. 게다가 조금 아까는 화살을 던져내서 나를 노렸으면서 무슨 상관이냐니... 나에겐 응당 물 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바이오." 녹의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더니 연경소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말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만 다음에 보죠. 그리고 한옥신검은 어디에서 얻었죠?" "그건 또 알아서 뭣하려는지 모르겠소. 내가 어디에서 무슨 검을 얻 었는지 낭자와는 무슨 상관이오?" "흥, 아까는 내가 상관있다고 하더니 이제는 딴말을 하시네요. 한옥 검은 무림의 지보(至寶)이니 어찌 상관이 없다고 하겠어요?" "그런 억지가 어디있소. 연모가 한옥검을 얻었든 얻지 못했든, 지금 내 손에는 없는 것이 사실이오. 아무래도 낭자의 주인은 재미있는 발 상을 잘 하시는 분인가 보구려. 가서 부군에게 전하시오. 연모가 검을 가지고 있더라도 내어줄 생각이 없으니 단념하라고." 녹의녀는 다시 눈망울을 굴리며 생각에 빠졌는데, 연경소가 보니 눈 빛이 부드럽고 눈썹은 빼어나서 상당한 미인인 것 같았다. 그녀는 조 금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오늘은 이만 가죠."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호각 같은 것을 꺼내어 삑, 하고 불었다. 어디 숨어 있었는지 한 마리의 백마가 말울음 소리를 내면서 그녀 앞 에 멈춰섰고,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백마의 고삐를 잡고 엉덩이를 가 볍게 때렸다.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순종으로 보이는 백마의 속도는 가히 일품이어서 얼마 안 지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연경소는 아직도 독을 몰아내는 데 여념이 없는 장척을 돌아보고 약 간 걱정이 되었다. (왜 한 시진이 다 되었는데도 독을 몰아내지 못하고 있을까? 부시독 이 아무리 무섭다지만 해약을 복용한 이상엔 금방 독을 몰아낼 수 있 을텐데.) 연경소는 사준을 바라보았는데, 이때 그는 뭐가 즐거운지 혼자 히죽 웃고 있었다. 그가 벽풍을 바라보니 그도 역시 히죽 웃고 있는게 아닌 가? 연경소는 급히 물어보았다. "뭘 그리 웃는 겁니까?" 사준은 계속해서 히죽히죽 웃다가 품속에서 조그만 자기병을 꺼내어 주면서 말했다. "히히, 저 늙은이는 나에게 속고 말았어. 내가 아까 준 건 해독약이 아니라 코딱지에 침을 바른 거였어. 그러니, 아무리 운공한다고 해도 효용이 있을 턱이 있나?" 연경소는 그만 기가막혀서 소리질렀다. "노선배께서는 정신이 있으시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연모는 노선배를 믿고 소환단을 주었는데, 무슨 짓입니까?" 그러자 벽풍이 입을 헤, 벌리고 말했다. "원래 우리 형제가 정신이 좀 없어서 말이야. 그약은 나하고 괴대가 천산을 한 달 동안이나 헤매어 잡은 독지네와 금사(金蛇)로 만든 것이 니 빨리 먹도록 해. 워낙 귀한 거라서 공기 중에 오래 놔두면 상하고 말거든. 좀 장난을 쳤기로서니, 왜 그렇게 핏대를 내고 그래?" "독지네와 뱀이라면 모두 독물 아닙니까?" "넌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 그런 간단한 상식 도 모르면서 천하제일검이나 뭐니 하다니." 연경소는 두말않고 약을 조심스럽게 장척의 입속으로 넣어주고 그의 인후를 가볍게 눌러서 약효가 더 빨리 나타나게 하려고 했다. 약도 아 닌 오물을 복용하고는 갖은 애를 다한 장척을 처지를 생각하면 쓴웃음 이 나올 지경이었으나 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마 그런다면, 장척 은 투골쌍마와 생사를 결하고 싸울 것 같았다. 그는 장척의 몇 군데 혈도를 문질러서 응어리진 독을 풀고는 투골쌍 마에게 말했다. "자, 노선배님들께선 도대체 어떻게 저 녹색 옷을 입은 낭자를 알게 되었지요?" 사준과 벽풍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재미있는 장난 을 할 때의 순진무구한 표정이어서 연경소는 자기도 모르고 미소를 머 금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몰라. 저 녹색 옷을 입은 계집애의 이름은 임연이라고 조금아 까 그러던데." 벽풍이 맞장구를 쳤다. "괴대 말이 맞아. 얼마전에 만나선 우리와 한참동안이나 말을 나누 었지. 우리는 석 달 동안이나 아무도 못 만나고 무공만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반갑기 그지없었지. 거의 해가 저물때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 는... 아니 그 계집애는 모르는 것도 없이 우리를 즐겁게 해 줬지. 만 약에 우리 마음에 안 들었다면 따귀를 세게 때려서 내쫓았을 거야." 연경소는 더욱더 종잡을 수가 없었고 머리속의 실타래가 엉켜서 도 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이 두 노괴물은 상대 를 하면 할수록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골라서 횡설수설하는데 그로서 는 태어난 이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연경소의 사부도 끝끝내 자기 이 름을 가르쳐 주지 않는 등 괴팍한 사람이었지만 이들 둘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당황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곧 날이 어둑어둑해질 것을 알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객잔에 방을 잡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제가 객잔 에 넉넉한 방을 잡아 두었으니 거기에서 이야기하시지요. 주인에게 잘 만 부탁하면 방 하나 더 잡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사준은 좋아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말하면 재미있을 거야. 그 녹색 기집애도 그랬거든." "괴대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지? 녹색 기집애라니. 분명히 그 아이 의 살결은 하얗던데?" "미안해, 미안해!" 사준은 두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그 모습은 우스꽝스 럽게 그지없었다. 연경소는 품 속의 목패를 한번 더듬어보고 말했다. "두 분께선 고개를 마구 흔드느라 정신이 없겠습니다." 벽풍은 재주를 넘어 물구나무를 서더니 한 손가락으로 버티고 서서 말했다. "너도 말을 재미있게 하는군. 근데 저 늙은이는 왜 안 깨어나지?" "괴이, 네가 좀 도와줘라. 난 지금 기운을 많이 써서 말이야." "알았다, 괴대." 벽풍은 한 손가락만으로 물구나무를 선 채 깡총깡총 뛰어(적어도 연 경소는 그렇게 생각했다) 장척의 뒤로 돌아가서야 가부좌를 틀고 앉았 다. 연경소는 자기가 직접 도와줄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금 자 기의 상태는 별로 좋지 못한데다가 잘못 내공을 운용하면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럴 때에는 자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 했다. 투골쌍마의 내공은 역시 심후해서, 벽풍이 장척의 운공을 도와주자 일 각도 안 되어 장척은 독을 장심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그는 등 뒤에서 운기를 돕는 손길이 연경소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벽풍이 땀을 흘리면서 도운 뒤 힘겨워하는 것을 보자 어리둥절 하면서 마지못해 인사를 했다. "고맙소." 연경소는 그가 눈을 뜨자 비로소 안심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몸을 폈 다. 그때 한 줄기의 시원한 겨울바람이 그의 귀밑을 스치며 불었는데, 연경소는 대뜸 커다란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솟구쳐서 카랑카랑한 목 소리를 돋구어 웃어대었다. "하하하하...!" 그러자 영문도 모르고 사준과 벽풍도 따라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하..." 장척은 처음에는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어 눈만 껌뻑거리면서 이들 세 사람이 미친듯이 웃어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곧 따라웃었다. "하하하하하!" 네 사람의 웃음은 하늘 끝에 닿을 듯 천지를 진동시켰다. 모든 것을 잊고 미친듯이 웃어대는 넷의 입가에는 진정한 만족감이 어리고 있었 다. 일찌기 느껴보지 못한 것일수도 있었다.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12 07/26 22:29 178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3) 마음 속까지 후련해지는 듯한 한바탕의 웃음을 가장 먼저 거둔 사람 은 학성 장척이었다. "비록 오늘 하루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진실로 복된 만남이었던 것 같네. 연노제 같은 영웅을 만났으니 필히 한 잔 하는 것이 도리이겠지 만, 점창파를 비워놓은 지가 너무나 오래되어 가봐야겠네. 언제 한 번 점창에 들르게나. 그때는 커다란 항아리째로 마셔보도록 하세. 그리고 두분께서도 같이 오도록 하십시오. 그럼..." 연경소가 일시 그를 제지했다.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수고스럽지만 화산파에 들러서 이걸 가져다 주시면 소제는 큰 짐을 덜게 되는 셈입니다. 장차 화산칠로 등의 죄악 상은 제가 직접 다스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러게나." 장척은 연경소에게서 조그만 화산파의 조사령패를 받아들더니 곧 사 라졌다. 70여 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의 웅심(雄心)은 조금 도 사라지지 않아 보였다. 연경소는 그가 작은 점으로 화할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뒷모습을 바 라보면서 간간이 손을 흔들었다. 색깔을 더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많 은 생각이 날 법도 했는데, 사준이 산통을 깼다. "이제 어떡하지?" "괴대는 정말 머리가 나쁘군." "그건 왜지?" "몰라서 몰어?" "뭘 모르는데." "글쎄?" "무슨 말이야?" "나도 모르겠는걸." 연경소는 반쯤은 씁쓸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골치가 띵 하 니 아프면서도 두 노괴물들이 말도 안 되는 입씨름을 계속하는 모양이 흥겹기만 했다. 연경소는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을 펼쳤을 때보다 저 무거운 발걸음 을 돌리며 투골쌍마에게 말을 건네었다. "장 선배님이 점창파로 돌아가셨으니 제 방에서 두 분이 묶도록 하 시지요." 벽풍은 생각도 안하고 말했다. "그러지 뭐. 물론 공짜로 재워주겠지?" 그러자 사준이 제법 근엄한 얼굴로 다그쳤다. "괴이는 왜 그렇게 경박하게 구는가? 투골쌍마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도 않은가?" "음? 갑자기 괴대가 이상하네." 벽풍은 아이처럼 신나서 떠들다가 잠깐 움츠려들었지만 사준도 역시 단순하기 그지없는 위인이었다. 세 발자국도 가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어두워지면 무서우니까 빨리 가자구." "괴대가 무서운 것도 있나?"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사 선배님은 두려울 것이 없는줄 알았는 데 이거 뜻밖입니다. 하하..." 사준은 코를 벌렁거렸다. "나라구 무서운게 없을줄 알아? 세상엔 얼마나 무서운게 많은데. 귀 신도 무섭고 염라사자도 무섭고 밤도 무섭지." "괴대는 나보다 더 말을 경박하게 하는군. 염라사자가 아니라 염라 대왕이야." "뭐 그렇다고 해둬." 세 사람은 굳이 경공을 펼 필요도 없이 몇 마디 말을 나누면서 청정 객잔에 있는 연경소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 방의 문짝은 아까 부숴졌 기 때문에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연경소는 주인을 불러 한 덩어리의 은자를 꺼내어 주었다. "다른 방 없겠나?" 이때의 시세로는 세 명이 하루동안 묶는데 십 전의 은자면 충분했는 데, 연경소가 주인에게 건내준 은덩어리는 한 냥 오십 전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주인은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서 좋아라고 대답했다. "물론 있읍죠. 바로 옆방입니다." "술과 안주를 조금 가져오게." 연경소는 몇 가지를 더 부탁하고 나서 투골쌍마와 함께 방안으로 들 어섰다. 사준과 벽풍은 따뜻한 방에서 편하게 앉아있는 것을 별로 즐기는 편 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마음에 드는 연경소를 만났으니 한 번 취해보 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연경소는 검을 상 아래 밀어넣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두분 노선배님께서는 아시는대로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아니, 자꾸 노선배니 뭐니 하지 않는게 좋겠다." "맞아. 괴대, 괴이라고 불러도 좋겠고." "아니다. 그건 좀 이상하니까... 형님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연 동생은 나이가 몇일까?" 연경소는 조용히 대답했다. 아까의 호탕하게 웃을 때와는 달리 차분 하게 가라앉은 부동의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올해로 서른 하나입니다." 벽풍이 히죽 웃었다. "그럼 나보다 어리군." 사준도 히죽 웃으며 말했다. "괴이는 나보다 어리니 내가 큰형님이 되었고, 괴이가 둘째, 괴삼은 세째가 되겠네. 하하하! 정말 재미있군." 벽풍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무 자주 갸우뚱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 런지, 한번 고개를 기울이자 좌우로 계속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진자 의 추 같았다. "괴대하고 괴이는 좋은데, 괴삼은 이상한데?" "왜 그렇지?" "연 아우는 괴상한 점이 전혀 없잖아." "그건 그런데. 그럼 뭐라고 부르지?" "나에게 다 생각이 있지." "허파에 바람구멍 나겠다. 빨리 말해!" "삼제(三弟)라고 하지 뭐. 강호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던데?" 이걸로 이야기는 끝이었다. 무슨 물을 한 잔 떠놓고 천지신명께 맹 세를 한다던가 하는 자질구레하고 귀찮은(적어도 투골쌍마로서는 그랬 다) 형식치레는 처음부터 필요없었다. 이로써 세 사람은 의형제로 맺 어진 것이었다. "술상입니다!" 밖에서 점소이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연경소는 심부름의 대 가로 줄 은자 몇 전을 챙겨들고 막 문을 열려는데, 그새를 못 참고 점 소이의 복창소리가 들려왔다. "술상입니다! 술상입니다!" 사준이 샐쭉 웃었다. "목소리 하나는 쓸만한데, 제자로 거두어버릴까?" 벽풍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럴까? 하지만 너무 나이가 많은데. 우린 열 살 이상은 제자로 거 둬들이지 않기로 했잖아." "괴이 말이 맞아." 연경소는 직접 술상을 차렸다. 금분미주와 진귀한 음식이 가득 차려 진 상은 아니었지만 대충 허기를 면하고 못을 축이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는 투골쌍마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오늘은 피로하니 몇 가지 이야기만 하고 자도록 하지요. 형님들." 사준과 벽풍은 각각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동생이 졸지에 하나 생겼네. 괴이보다 훨씬 나은걸.) (형님 소리는 처음듣는군. 나쁘지 않은데? 맨날 괴대하고만 살아서 그래... 흐흐흐.) 연경소가 그들의 생각을 알 리 없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제가 한옥신검을 손에 넣은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벽풍이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괴대가 말하지 그래. 난 알긴 하는데 도대체 어떤게 먼저인지 기억 이 안나서 말이야." "그럼 그렇지. 이 괴대의 솜씨를 보라구." 사준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13 07/27 21:04 234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4) "일주일 쯤 전에 우리 형제를 찾아온 한 아가씨가 있었지. 조금아까 찾아왔던 녹색 기집애가 바로 그 아이였는데, 우리 맘에 쏙 들었을 뿐 만 아니라 막 즐겁게 해줬지." 앞에선 아가씨, 뒤에선 기집애라고 하는 등 여전히 앞뒤가 헛갈리는 말을 벽풍이 이어받아 기침을 한 번 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거야 원 살 수가 있어야지. 그전까지 우리는 은거처에서 고된 수 련을 쌓고 있었는데 무지막지하게 심심했거든. 그러던 참에 그 아이가 우리를 찾아온거지." 사준이 말했다. "괴이가 계속 말하지 그래. 난 그때 마구마구 웃으라고 대체 정신을 오락가락 할 수가 있어야지." 연경소는 속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괜히 헛기침을 해대 었다. 말도 안되는 말이었지만 그걸 아주 자연스럽게 하는 투골쌍마의 별호는 고쳐져야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벽풍은 신나게 말했다. "그 아이와 우리는 거의 하루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지칠줄도 모르고 막, 막, 막 말도 하고 음식도 먹었지. 우리는 그냥 근처 계곡 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 대충 구워먹곤 했는데 여자아이라서 그런지 요 리도 잘 하고 양념도 가지고 다녔어. 그래서 하루종일 잘 놀았지." 벽풍은 핵심적인 이야기는 안 하고 자꾸만 딴 곳으로 빠졌다. 연경 소는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들의 천성을 어떻게 나무랄 수가 없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가끔씩 <그랬군요> 하고 맞장구를 쳐주 면 벽풍은 좋아라고 그때의 정황을 말 하나하나까지 정확하게 묘사했 고 사준도 같이 손짓발짓 해가면서 거들었다. 연경소는 거의 반 시진 동안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속으론 답 답하면서도 이들이 세세한 곳까지 기억하고 있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두분 노형님들께서는 어리숙한 듯 하면서도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 는 기억력을 지녔구나. 하루종일 떠든 말들을 거의 조금도 틀리지 않 고 저렇게 기억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하하... 이 연가의 형님이 될만 하구나. 무공도 고강하기 이를데 없으니 앞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데 많은 도움과 열쇠가 될 것이다.) 벽풍은 누가 뭐라고 그러건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그 치지 않았다. 반 시진 동안 너무 열심히 설명했기 때문에 땀이 흐르고 있는 것도 몰랐다. "거의 어둑어둑해져서 저녁밥을 먹고 난 후에 그 아이가 우릴 향해 서 말했지. 흐흐... 우리는 평생동안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모두 죽 였어. 요새들어서 많이 연약해지기는 했는데 말이야, 최근에는 죽이거 나 병신으로 만든 사람이 하나도 없거든. 이젠 늙었나봐? 흐흐..." 사준이 갑자기 호통을 쳤다. "괴이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난 안 늙을테다. 그리고 연약하 다니 무슨 소리지?" 벽풍은 무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은 계속 놀렸다. "아무튼 그 아이는 별별 교태를 다 부리면서 우리에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달라고 했지." 연경소가 무심결에 되물어 보았다. "그래서요?" 벽풍이 히죽 웃었다. 그때를 회상하면 흐뭇해 지는 것 같았다. "뭐 어째. 허락해 버렸지. 사실 우리는 매우 외롭고 힘들었는데, 밥 도 맛이 없었고 말이야..." "뭐라구? 괴이는 항상 내가 짓는 밥이 맛있다고 찬사를 늘어놓지 않 았나? 이제와서 딴소리를 하다니!" "맛없는걸 어떻게 맛있다고 하지? 나 투골괴이 벽풍은 태어나서 한 번도 거짓말을 안 했다구. 그런 괴대는 거짓말 한 적이 있나? 그럼 내 이야기나 듣지." "거짓말을 안 했다는건 거짓말이다. 얼마전에도 거짓말을 하고 딴소 리를 하다니? 한입으로 두말하는 건 괴이와 걸맞지 않다." "무슨 거짓말을 했다구 괴대는 눈심줄을 퍼렇게 돋구나? 그리고 한 입으로 두말만 하면 평생 심심해서 허파가 터질꺼라구. 내가 한 말은 적어도 수억 마디는 될껄." "정말 내가 지은 밥이 맛이 없었나?" "그럼 맛있다고 해두지. 헤헤..." "뭐!" 이러다가는 끝도 없이 다투기만 할 것 같아서 연경소는 그들의 말싸 움을 말리고 나섰다. "괴대 형님의 밥은 제가 나중에 먹어보고 결정하도록 하지요. 그럼 하던 말이나 계속합시다." 벽풍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까지 했지?" "남이 지은 밥을 그렇게 많이 먹고도 맛없다고 하니까 어디까지 한 지도 모르지!" 사준은 별것 아닌 일에 쌍심지를 돋구고 사사건건 끼어들었다. 연경 소는 또 말릴까 하다가, 다행히 그들의 다툼이 오래가지 않아 귀를 기 울였다. "그러니까... 그 부탁이란 다름이 아니고 세째 연노제에게 한옥신검 이라는 것을 빼앗아달라는 것이었어." "그때 연노제를 알았으면 허락 안했을 거야. 근데 괴이, 너는 왜 밥 맛 가지고 불평을 하지?" 벽풍은 견디다 못해 두손을 바짝들고 말았다. "아, 그래요. 괴대밥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으며 천하의 어떤 미주가 효가 따를수 없어 만고에 빛날 영원한 밥이로다..." "하하하하!" "암 그렇지. 나 괴대는 열 살 때부터 밥짓는 법을 무공과 같이 배웠 다구. 괴이는 원체 밥을 태우기만 해서 사부님이 포기해 버렸지만 말 이야. 내가 조식장법(造食掌法)을 만들어낸 것도 밥짓다가 창안한 무 공인줄 몰랐지?" 사준은 자기 배를 두드려 보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벽풍은 혀 를 한 번 쏙 내밀고 다시 말했다. "우리는 허락이라기보다는, 그냥 봐서 그러마 하고 말했지. 그때 그 아이는 연노제 정도는 우리가 쉽게 제압할 수 있을거라고 했는데 만나 고 보니 그게 아니었지. 그 아이도 거짓말을 한거야." (이상한 일이군. 내가 한옥신검을 손에 넣은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 었고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줄 알았는데 어떻게 전 무림이 다 알고 있 을까? 그리고 누가 화산파의 장문인 신물을 훔쳐가서 그것으로 태을진 인 나빈을 조종하여 결국은 죽게 만들었는지 도대체 모르겠구나. 하나 하나 풀어나갈 수밖에 없지만 앞길을 막막하기만 하여 짐작도 하기 어 렵구나.) 이렇게 생각한 연경소는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보물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노리는 자가 많기 마련, 사람 은 죄가 없으되 금은이 죄라고 하지 않던가. 과거에는 그 말이 강도들 만의 말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구나. 아무리 무공이 뛰어 나고 조심해야 겠다. 중원천지에는 좋은 사람도 많지만, 나쁜 사람도 그에 못지 않게 많을 것이다. 믿을만한 사람은 오히려 두분 형님과 같 은 사람이니...) 여기까지 생각한 연경소는 문득 사준과 벽풍이 말을 일체 멈추고 자 기만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 겸연쩍게 말했다. "제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선배님께서는 계속 이야기를 하시지 요." 사준이 자뭇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선배님이라고 할텐가? 우리가 의형제를 맺은 게 조금 전이 었는데 벌써 잊었나?" 연경소는 아차, 싶어서 얼른 대답했다. "소제가 실수를 했군요. 그럼 그 낭자가 부탁을 했을 때 생각도 않 고 그냥 허락을 했다는 말입니까?" 사준이 대답했다. "그거야... 사실 우리도 무림제일의 병기라는 한옥신검을 한 번이라 도 구경하고 싶었거든. 나중에 꼭 한 번 보여주게." "흐흐, 정말 재미있을거야. 검을 진짜 옥으로 만들었을까?" 연경소는 투골쌍마가 숨기는 것도 없고, 사실 숨길 위인들도 아니라 고 생각해서 더이상 묻는 것을 그만두고 나중에 검을 보여주겠다고 대 답했다. 짧은 하루였지만 사준과 연경소는 내상을 입었었기 때문에 운기행공 이 필요했고, 벽풍은 그냥 잠이 들어버렸다. 하지만 사준과 연경소의 내상은 그 정도가 틀렸다. 벽풍이 세상모르 고 자는 동안 운공을 먼저 끝낸 사준은 벽풍을 깨웠다. 벽풍이 투덜거 리며 왜 잠을 깨우느냐고 하자, 그는 연경소의 상세를 돕자고 했다. "괴대가 먼저 해. 난 망을 볼테야. 잘못해서 누가 막 때리면 골치아 퍼지거든." "괴이가 그런 생각도 할줄 알다니 난 감탄했어." 연경소는 무아지경에 돌입하여 아무것도 보거나 들을 수 없었고, 심 지어는 촉각과 미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이 외부와 차단되어 내상과 독 상 치료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사준이 먼저 그의 명문혈(命門穴)에 두 손을 갖다대고 진기를 주입 하기 시작하자, 연경소는 등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들어와서 단전에 조 금씩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중요한 시기라서 말을 할 수는 없 었지만 연경소의 의식과 무의식은 고마움을 느끼며 더욱 치료에 전념 했다. (삼제의 무공이 이 정도라니.) 벽풍은 연경소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세가 거의 두 시진이 지나도 록 변하지 않고 머리 위에서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흰색의 반투명한 기류가 형성되어 코로 흡수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분명 서른하나라고 했는데 어떻게 나보다 더 센 내력이 있을 수 있 을까? 나중에 그가 깨면 물어봐야겠다.) 벽풍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사준이 장심을 명문혈에서 떼고 나 직하게 말했다. "독상을 치료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니 괴이가 도와주게." 벽풍이 보니 땀을 꽤 흘리고 있었다. 그는 두말않고 연경소의 등 뒤 에 두손을 포개어 얹었는데, 사준과는 약간 틀린 자세였다. 독상을 치 료할 때에는 몸에 퍼진 독기운을 한 군데로 몰아 몸밖으로 모공(毛空) 이나 배설을 통해 뽑아내는 것이라 서서히 진기를 돌리면 족했지만 연 경소가 입은 내상은 산공독에 중독된 상태에서 불혈수(拂穴手)의 절세 기공에 당한 것이라 일단 날뛰는 기(氣)를 단전으로 잡아넣고 수일 간 조심하며 정양해야 하는 것이었다. 일단 두번째의 대주천이 시작되자, 사준도 벽풍과 같이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았다. (분명 내가 두 배는 나이가 많은데 어째서 신광(神光)이 안으로 갈 무리되어있고 진기를 운용할 때 기복이 없는 점을 비롯해서 검술까지, 도대체 우리 두 괴물들을 합쳐놓은 것보다 더 강한 것 같을 수가 있을 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군.) 사준과 벽풍은 역시 통하는 점이 있었다. 그도 연경소가 정신을 차 렸을 때 꼭 물어보리라고 속으로 단단히 다짐하고 주변을 살피며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돌발적인 사건에 대비했다. 천하제일검의 한 달에 걸친 수난은 이렇게 해서 화(禍)가 복(福)으 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장강처럼 말없 이 흘러가는 세월이지만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특히 살벌한 강호에 몸 담고 살아가는 무림인(武林人)들의 행동이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는 것이다. 인(寅)시가 조금 지나서야 연경소는 완전히 진기가 정상으로 돌아와 서 아래위로 움직이는 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는 청 죽검의 자루 부분을 돌려서 남아있는 두 알의 소환단을 복용한 뒤, 다 시 진기를 운용하여 회복된 상태를 확인한 후에야 달콤한 잠에 빠져들 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14 07/28 10:56 152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4장... 제자를 거둔 검객(劍客) (1) 이튿날 아침, 세 사람은 먼동이 터오기도 전에 일어나 길을 재촉했 다. 연경소는 투골쌍마의 은신처인 천마곡(天魔谷)에 들렀다가 자기가 평소에 머물던 숭산(嵩山)의 명심정(明心停)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면서 있지도 않은 짐을 챙기느라 수다를 떠는 사 준과 벽풍의 모습을 본 객잔의 손님들은 허리를 부여잡고 웃어대었다. 그들은 이 두 명의 노인들이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지 몰라서 한 행 동이었겠지만, 만일 무공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다 가는 어깨 위의 물건이 남아나질 않았을 것이다. '어깨 위의 물건'이란 말은 바로 머리통을 의미했는데, 사준이 특히 그런 표현을 즐겨썼고 벽풍은 '제사밥 얻어먹는다'라고 말하곤 했다. 연경소는 아직 상세가 덜 나아서 며칠 동안 정양을 해야 근원지기를 보호하고 원래의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을 타고 가지 않 고, 커다란 마차를 하나 빌리기로 하고 주인에게 부탁을 했다. 주인은 방 값의 몇 배나 되는 은자를 미리 받은 터라, 두말없이 커 다란 마차를 구해 주었다. "이거 뭐 타야되?" "괴이는 답답하겠지만 연노제는 아직 부상이 심하니 할수 없겠지." "괴대는 안 답답해?" "밥 맛있게 해줄께." 하룻밤 지났다고 투골쌍마의 횡설수설과 동문서답(東聞西答)이 바뀔 리가 없었다. 그들은 명절 아침에 새옷을 선물받은 아이들처럼 쉴새 없이 떠들었다. "이제 소제가 마지막 힘을 내서 몸속의 나쁜 기운을 몰아낼테니, 두 분 형님께서는 저를 좀 지켜주시지요." 투골쌍마는 그러마, 하고 약속하고 같이 마차에 올라 연경소의 좌우 에 나누어 올라탔다. 그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부에게 당부했다. "되도록이면 마차가 흔들리지 않게 몰아서 방해되지 않도록 하게나. 그리고... 넌 왜그리 수염이 많지?" 처음에는 제법 근엄하고 장중한 말투로 나가던 사준은 그의 긴 턱수 염을 보고 부러운 듯 물었다. 이 마부는 그들의 행동이 매우 경박한 것을 보고 깔보는 마음이 반 푼 정도 있었지만 이미 마차삯으로 한 냥 이십 전이라는 거금을 받았 기 때문에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의 이름은 마삼(馬三)인데, 저희 마씨 집안은 대대로 수염을 길 러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했습죠." 벽풍이 재미있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칭찬했다. "자네 집안은 정말 재미있군. 마씨 집안이니 말을 모는 것이 적당하 지 아니한가? 헤헤... 그러면 넌 셋째 아들이로구나." 마삼은 말투가 재미있는 손님을 만났으니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겠다 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렇습죠. 다만 우리 둘째 형님은 이름이 마차(馬次)였고 턱수염이 마치 미염공(美髥公:관우를 말한다)만큼이나 길었었는데, 군사 징집에 지원해서 나간 뒤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준은 그의 턱수염이 은근히 부러운 것 같았다. 그는 얼마 나지 않 아서 까칠까칠한 자기의 수염을 더듬으며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참 안됐군. 그럼 마차나 잘 몰아주게. 되도록이면 좀 돌아가더라 도 큰길로 가서 마차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게." 최대한 근엄하게 말을 마친 그는 벽풍과 함께 연경소의 옆으로 돌아 와서 앉았다. 사실 사준도 어제 선천강기의 충격에 정신을 추스리기가 어려울 지경이라서 같이 운기를 할 생각이었다.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벽풍 혼자인지라, 그는 심심해 죽겠다면서 투덜거렸지만 연경소와 사준은 상대도 하지 않고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마부랑 이야기나 해야겠군.) 이렇게 생각한 그는 마삼 옆에 앉아서 떠들기 시작했다. 운기행공에 방해가 될까봐 큰소리로 마음껏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마삼도 벽풍 못지않게 입담이 좋고 재미있는 사람이라서 벽풍은 그가 마음에 든다 고 느꼈다. (요새 만나는 사람은 다 좋네.) 마삼의 마차모는 솜씨는 상당했다. 귀밑머리가 날릴 정도로 빨리 달 리면서도 덜컹거리거나 옆으로 쏠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무창에서 천 마곡까지는 약 반나절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에 벽풍은 그리 어려운 일 없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하품이 타의에 의해서 멈춰진 것은 불과 그들이 청정객 잔을 떠나온 지 세 시진이 지났을 무렵,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었다. "마차를 멈추시오!" 갑자기 한 명의 건장한 사내가 마차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삼은 말 고삐를 급히 당겨 멈추어 선 후에 사준과 연경소를 보고 이상한 사람 이 나타나서 길을 막는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미 심상치 않은 기색 을 느낀 두 사람은 벽풍과 함께 사내 앞으로 내려섰다. 사내는 벽풍 뿐만 아니라 마차에서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의 신법이 유려하고 깨끗한 것이 상당한 경공재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만 괜히 허세를 부렸다. "여기는 함부로 통과할 수 없는 곳이니 자연 지나갈 수 없소." 벽풍이 쭈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나면서 슬며시 물었다. "이름이 뭐냐?" 사내는 무심결에 대답했다. "내 이름은 적환(赤歡)이며 적호방(赤虎幇)의 삼대 제자요." 벽풍은 싸늘하게 웃었는데, 그의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내는 겁부 터 먹었다. 그는 항상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고 있었지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죽일 때에는 싸늘한 냉소를 머금고 제사밥을 먹게 해 주 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의 얼굴이 마치 강시(彊屍)와 같아 전혀 표정 이 없었기 때문에 사내는 겁에 질렸다. "흐흐... 적호방의 적씨 제자라. 미안하지만 넌 내 맘에 안든다." 벽풍은 스르르 앞으로 미끌어져나가서 왼손을 들어 적환이라는 사내 의 미심혈(眉心穴)을 가볍게 찍었다. 그는 피할 생각마저 못하고 이마 에 조그만 구멍이 나 버렸다. 적환은 이제서야 자기가 보기드문 살성 (煞星)을 만났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그의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 니었다. 연경소는 적환이라는 사내가 몹시 건방진 것을 보고 별로 마음에 들 지 않았지만 벽풍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 다. "형님,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가 죄가 있을 때만 하시지요." 벽풍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죽어야 된다고 당연히 생각해 왔었는 데 연경소가 처음으로 자기를 제지하자 즉시 반발했다. "저 녀석은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래도 마음에 안 든다고 모두다 죽인다면 세상에 몇 사람이나 남 아나겠습니까?" "그건 그래. 괴삼 말이 맞다." 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 삼제 말이 맞아. 앞으로는 죽이지 말고 뼈나 몇 개 부러뜨려 놓 자구. 그래야 놈들의 할아버지가 울지 않을거 아닌가?" 자기 딴에는 제법 신중하게 한 말이었지만 마삼이 들어도 웃을 말이 었다. 세상에 어떤 신의(神醫)도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은 고칠 수가 없 을 것이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15 07/28 15:03 189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2) 세 사람은 모두 무림의 일류고수였다. 연경소는 무공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겸양의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심 무림 천하 에서 자기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사람도 안 될 것이라고 자부 하고 있었다. 투골쌍마야 말할 것도 없이 수십 년 동안 흑도의 절정고수 대열에서 빠져본 일이 없는 고수인데다가 무공에 못지않게 악명(惡名)을 날려왔 다. 멀리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먼 거리라서 겨우 모기소리만하게 들려왔지만, 이 세 의형제들에게는 충분히 거리계산이 되고도 남았다. 투골쌍마가 먼저 땅을 박차고 경공을 펴기 시작했다. 쇠붙이를 서로 부딪히는 소리는 굉장히 큰 법인데 개미소리만하게 들리니, 빨리 가지 않으면 상황이 끝나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준과 벽풍은 한 번 발을 딛을 때마다 두세 장씩 뛰어서 성큼 앞서 갔다. 그들은 부운괴영(浮雲怪影)이라는 독문(獨門)의 신법을 구사하 여 바람처럼 질주해갔다. 연경소도 빙그레 웃더니 능공허도(凌空虛途)의 경신법으로 투골쌍마 를 바싹 따라붙었다. 사준은 젊은 의동생의 검술 뿐만 아니라 경신법 도 자기보다 뛰어나 극히 경묘(輕妙)한 것을 알고 크게 기뻐했다. (연노제는 모든 면에서 뛰어나구나. 하하, 괴이와 날 합치면 동생만 큼은 될까 모르겠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은 무성한 송림(松林) 앞에 도착했다. 하늘을 찌 를 듯 솟아오른 소나무들은 사계절 푸른 잎을 뽐내고 있었고, 그 사이 에서 간간이 기합소리와 병장기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연경소와 투골쌍마는 무성히 우거진 풀숲 사이로 조심스럽게 나아갔 다. 소나무 사이에 자라난 이름모를 잡초는 상당히 억셌기 때문에, 가 끔가다가 연경소는 검으로 잘라내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얼마동안 앞으로 나가자 눈앞이 확 트이며 소나무숲 사이에 큰 공터 가 보였다. 일부러 누가 만들어 놓은 듯, 하얀 조약돌이 가득 깔려있 었고 한쪽에는 소나무를 베어 밑둥만 남겨놓은 임시 의자가 보였다. 연경소는 또 투골쌍마가 성질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마구 살인을 할까봐 미리 주의를 주었다. "두 형님께서는 제발 손속에 사정을 두셔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마 구 살인을 하다가는 수많은 원수들을 두게 될 겁니다." 그러자 벽풍이 발끈해서 외쳤다. "흥! 삼제는 감히 우리를 헤칠 원수가 있다고 보는가?" 그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커서, 공터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연경소는 깜짝 놀라서 벽풍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나직 히 말했다. "형님, 그렇게 큰 소리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감히 두 형 님을 헤칠 원수는 없다고 해도 날이면 날마다 원수들이 수십 명씩 나 타나서 괴롭힌다면 잠도 못 자고 결국엔 머리가 하얗게 되서 지쳐죽을 게 아닙니까?" 그는 말하고 나서 스스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설득하지 않으면 도무지 먹혀들지가 않는 벽풍이었다. 사준도 예외는 아니어서, 도저히 이치(理致)와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벽풍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 동생에게 감동의 눈길을 보냈다. "아, 그것도 그렇겠구나. 고마워." "괴이! 저것보게!" 갑자기 사준이 큰소리로 고함을 치더니,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벽풍 도 곧 두 소매를 걷어붙이고 공터로 뛰어나가 크게 싸우고 있는 두 패 거리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연경소도 천천히 걸어나와 양쪽의 형세를 살펴보았다. 한쪽은 이십여 명의 청년들이었는데, 대부분 손에는 제미곤(齊梶棍) 이나 거치도(巨齒刀)를 들고 흉악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패거 리의 우두머리는 맨앞에 서있는 한 노인으로 손에는 불진(拂塵)을 들 고 있었다. (아까 그 사내와 옷색깔이 같은걸 보니 필히 적호방의 사람들이겠구 나. 평소 적호방은 약간 사도(邪道)의 문파라서 무림에 행보를 드물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여기에서 대판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알수 없는 일이구나.) 연경소가 다시 다른 한 편을 보니 아홉 사람 뿐이었다. 그들은 연경 소등이 오기 전에도 한참을 싸웠는지 온몸에 상처를 입고 숨을 헐떡이 고 있었다. 언뜩 보기에도 형세는 이미 판가름난 것이었고, 다만 적호방의 사람 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덤비는 이쪽 편 때문에 끝장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홉 사람 중에서 실제로 싸움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은 일곱 명이었 다. 나머지 둘은 기껏해야 열 살 남짓한 사내아이와 소녀로, 뒤켠에서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었다. 일곱 명은 모두 십여 군데의 상처를 입 어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일종의 진법으로 간신히 버티나보다.) 연경소는 이렇게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 판단 뒤에 이어질 다른 판단은 쉽게 내릴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제 삼자인 자기가 어떻게 중재하여 어떤 식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불진을 든 노인이 투골쌍마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대들은 누구인데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이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만방자함이 가득찬 말투였다. 사준과 벽풍 이 그런 속뜻을 알 리가 없었지만, 뭔가 말하는 게 기분나쁘다고 생각 한 벽풍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넌 뭐길래 내가 끼어드는데 잔소리냐?" 그러자 노인도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는데, 좀전에 벽풍이 낸 목소리 보다 두 배는 큰 목소리였다. "먼저 끼어든건 당신이지 않소!" 노인이 내지른 호통에는 강한 내력을 바탕으로 한 현음타혈(玄音打 穴)의 수법이 내포되어 있어서, 몇 명을 제외하고는 고막이 울려서 상 당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목소리만 크면 다냐!" 벽풍도 그에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도 좀전보다 두 배는 커져서, 노인에 못지 않았다. 그 노인은 갑자기 어디서 끼어든 녀석이 자기의 내가공력이 담긴 목소리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도리어 큰소 리를 쳐대자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노인은 불진을 오른 손으로 옮겨쥐면서 왼손을 두루마기 안으로 집 어넣어 얇고 긴 통을 하나 꺼냈다. "쓸어버려라!"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십여 명의 장정들이 각기 무기를 들고 투골쌍마를 덮쳐갔다. 거치도와 제미곤은 둘 다 힘으로 쓰는 무기였으 며 외공(外功)에 적합했다. 이십여 명이 한꺼번에 기합소리를 내지르 면서 달려들자 그 위세는 매우 흉흉하여 두 명의 종잇장처럼 얇은 노 인들은 쓸려버릴 것 같았다. "왜 기세만 세고 속은 다들 비었지? 괴대, 나에게 맡기라구." 벽풍은 흐흐, 하고 웃으면서 양손을 내둘러 거센 장풍을 일으켰다. 사준은 그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조금 인원이 많다고 보고 자기도 맹렬 히 손을 휘두르면서 싸움판에 끼어들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한 자루의 불진이 그를 제지했다. "뭐야이건?" 사준은 대수롭지 않게 보고 불진을 잡아채어 부러뜨리려고 했다. 그 는 소금나수(小禽羅手)의 간단한 수법으로 불진을 잡아갔는데, 의외로 한 자루의 불진은 각도를 전혀 달리하여 그의 태양혈(太陽穴)을 찍어 왔다. 태양혈은 인체의 사혈 중 하나로 잘못 다치면 죽거나 반신불수가 될 가능성이 많았다. 흑도의 절정고수인 사준이 아무리 어리숙하다고 해 도 그런 기초지식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금나수에서 금종연타장 (金鐘連打掌)으로 변화시켜 불진의 중간부분을 세차게 때렸다. 순간 사준은 불진을 튕겨냈으나 손목이 은근히 저려오고 상대의 무 기가 무사한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놀란 것은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났을까?) 노인은 미종보(迷縱步)를 밟으며 잠시 싸움판 뒤로 물러나 들고있던 천리포(千里砲) 끝을 세게 눌렀다. 그러자 가늘고 긴 통 앞부분에서는 빠른 속도로 조그만 탄환이 쏘아올려져 이십 장 가량의 공중에서 터졌 다. (이크!) 사준은 아무일도 없는데 괜히 속으로 철렁해서 노인을 따라붙어가며 발길질을 했다. 노인은 불진으로 초식을 펼치며 보법을 미종보에서 용 형보(龍形步)로, 용형보에서 다시 팔괘보(八掛步)로 바꾸었지만 사준 은 끈질기게 그의 정강이를 노리고 발길질을 해 대었다. 노인은 한참동안 그렇게 피하기만 하더니 불진을 휙, 뿌려서 사준의 퇴골(腿骨)을 후려쳤다. 사준은 몸을 숙여서 불진을 피하고 다시 금종연타장을 연달아 발출 해서 노인을 조금씩 뒤로 몰아붙였다. (얼마 안 있어 끝나겠군.) 연경소는 이렇게 생각하고 일정한 진세를 이루고 있는 일곱 명의 다 른 한 패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그는 불과 세 걸음도 가지 못해, 날카 로운 목소리의 제지를 받았다. "거기 서요!" 그 목소리는 진법의 우익(右翼)을 맡고 있는 부인이 낸 소리였다. "더이상 가까이 오면 검을 탓하게 될 거예요." 부인은 계속 앙칼진 목소리로 응수했는데, 상당한 미녀였지만 오른 쪽 뺨에 상처를 입어 피가 입술로 흘러내리고 있어서 약간 섬뜩한 모 습이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16 07/28 22:52 19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3) 연경소는 그들과 손을 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두 손을 맞잡고 포 권의 예를 보였다. 얼굴에 상처를 입은 부인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 게 뜨고 바라보았다. 바로 이때, 연경소는 등뒤에서 살기를 느꼈다. 그는 왼손을 뒤로 돌 려서 다가오는 무형의 살기와 맞부딪쳤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서 위험을 제거한 연경소는 숨돌릴 틈도 없이 매우 어려운 싸움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아까 불진을 든 노인이 쏜 천 리포는 그들 일당을 불러들이는 신호였던 것이다. 소나무 숲의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 아서 넓다란 공터를 가득 메우고도 남을 것 같았다. 사실 그것은 눈의 착각이었지만, 어림짐작으로도 신호를 받고 달려온 사람들은 백 명을 훨씬 넘어보였다. 투골쌍마는 눈이 뒤집힐 만큼 많은 적들을 맞아 싸우게 되었지만 전 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불진을 든 노인과 사준은 벌써 이백여 초를 겨루고 있었는데, 사준은 간간이 달려드는 다른 사람들을 때려죽이는 여유를 가지고도 넉넉히 노인을 상대했다. 한편 연경소와 진법을 이룬 일곱 명도 거센 싸움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었다. 연경소는 청죽검을 빼어들고 주로 수비에 치중하고 있었는데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일검마다 찬란한 광채가 번뜩이면서 검기(劍氣)가 겹겹이 펼쳐지는 신위를 발했다. 역시 가장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일곱 명이었는데, 그들은 두 어 린아이를 보호하느라고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는 데다가 모두 부상자였 다. 연경소는 본격적으로 싸움을 하지 않고 다만 달려드는 자들의 손목 을 거세게 후려치거나 검기로 격공타혈(隔空打穴)의 묘기를 발휘하여, 잠시 움직이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일곱 명이 이룬 진세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성좌와 비슷한 모양을 유지하면서 변화무쌍하게 응접함으로써 간신히 그때그때 위기를 모면 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금방 와해될 것만 같았다. 특히 그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는 사내들 이외에도 세 방향에서 집 요하게 약점을 파고드는 두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청년이 있었다. 노인 들은 흰 베옷을 입었고 손에는 불진을 들었으며, 젊은이는 황삼(黃衫) 에 한 자루의 섭선을 무기로 삼고 있었다. 연경소는 시력을 집중해서 젊은이를 관찰했다. 그 젊은이의 무공은 매우 뛰어나서, 장내에 있는 적호방을 비롯해서 모든 적들 중 가장 높은 것 같았다. 그는 부채로는 북두진(北斗陣)의 예리한 공세를 막아내고 좌장으로 가끔가다가 휙! 휙! 하고 바람을 일 으키며 장풍을 날렸는데, 그때마다 진법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사내들의 복장이 각양각색인 것을 보아 적호방의 무리들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대강 상황을 보니 저 젊은이와 세 명의 불진을 든 노인 이 지휘자인 것 같은데, 일단 저들을 제압해야 일이 풀릴 것 같구나.) 연경소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세 자 가량 솟구쳐 일직선으로 젊은이 를 향해서 날아갔다. 제미곤을 든 세 명의 사내가 같이 몸을 날려서 막으려고 했지만, 연 경소는 세 번 지풍(指風)을 날려 간단히 해치우고 여전히 황삼을 입은 젊은이만을 향해 비신지검(飛身之劍)의 수법을 펼쳤다. "훗... 꽤 실력있는 조력자를 초청하셨군. 그런다고 내가 그 물건을 포기할 줄 아나?"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젊은이는 왼손을 짧게 흔들었다. 그의 왼손에 서는 세 자루의 비표(飛標)가 품(品)자 형태로 발사되어 세 곳의 요혈 을 노리고 날아왔다. (그 물건이라...) 연경소는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켜 공중제비를 돌아 암기를 피해내고 황삼의 젊은이 바로 앞에 내려섰다. "어?" 황삼의 젊은이는 잠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원래의 무심 하고 차가운 얼굴로 돌아가 부채를 움직이며 연경소를 공격해왔다. 연경소는 일단 그의 초식을 알아보기로 하고 수비에 치중하여, 허공 에 무수한 검화(劍花)를 그려내며 황삼 젊은이의 부채와 장력을 아예 봉쇄해 버렸다. 이때 아까 그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삼객(黃衫客) 엄잔휴(嚴殘休)의 섭선은 독이 든 암기로 가득 차 있으니 조심하세요!" 연경소는 그녀의 말을 듣고야 이 젊은이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황삼객 엄잔휴는 원래 곤륜파(崑崙派) 장문인 유진자(兪眞子)의 둘 째 제자로 장래가 촉망되는 후기지수(後起之秀)였는데, 어느날 부녀자 를 겁탈하고 징계를 겁내어 도망쳤다고 한다. 곤륜파로서는 유능한 후 계자를 잃은 셈이었지만, 무림은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로운 흑도의 고 수를 하나 만들어낸 셈이었다. 그는 일 년간 두문불출하며 한 번도 무 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다시 몸을 나타낸 것은 3년 전이었다. 재출사(再出師) 이후에 그는 언제나 누런 색의 장포를 걸치고 다녔기 때문에 황삼객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는데, 곤륜검법에 독특한 변화 를 가미해서 만든 부채 무공을 써서 많은 백도의 고수를 해치고 다녔 다. (내 오늘 무림의 해악을 하나 제거하는 셈 치고 그를 제압해야 겠구 나. 이 자로 인해서 곤륜파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고 말았다.) 연경소는 짧게 휘파람을 불고 나서 즉각 반격에 나섰다. 수비에 치 중하던 검세를 변화시켜 태산첨죽(太山尖竹)의 수법으로 날카롭게 황 삼객을 베어갔다. 이 일검은 날카롭기 그지없어서, 황삼객은 황망히 부채를 들어 막았 으나 소매가 뭉텅 베어지고 말았다. 그는 매우 당황하여 부채를 접고 왼손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일권을 내질렀다. 이 한 수의 권법은 바로 곤륜파의 정통 무공으로, 곤륜학권 (崑崙鶴券)이라는 것이었다. 연경소는 내심 이렇게 잘 알려진 초식을 쓰면 누가 당하겠는가, 하고 검을 가볍게 회전시켜 그의 손목을 내리 쳤다. 황삼객은 초식이 온정히 펼쳐지기도 전에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대로 손을 뻗친다면 연경소의 몸에 약간의 충격을 줄 수 있었 을 테지만, 손목이 그와 동시에 결단날 상황이었으니 도리없었다. 그는 다시 부채를 활짝 펴서 왼손과 함께 공격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번 몰리기 시작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격을 시도한 것은 그의 대담성과 올바른 판단력을 알 수 있는 증거 였지만, 불행히도 상대자는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천하제일검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청죽검객이었다. 연경소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지 십 초도 되지 않아, 황삼객은 가슴 부분의 옷이 길게 찢기고 말았다. 일부러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으리라. 찢겨진 사이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와 틈을 메꿔주고 있었다. (묘하게 바느질이 되는군.) 연경소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황삼객의 초식을 원천봉쇄해 나갔다. "넌 누구냐?" 황삼객은 아무리 공격해도 상대방이 교묘하게 막으면서 반격을 해와 효과를 거둘 수 없을 뿐더러 진기만 계속 소모하자 갑자기 손을 멈추 고 물어보았다. 연경소는 그의 눈에 핏발이 선 것을 보고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 지만, 사문을 배신한 자를 응징했다고 생각하여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숭산에서 온 연씨외다." 황삼객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 소림사에서 나왔단 말이냐?" 연경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이 연모는 화상이 될 생각은 없소. 내가 평소에 거처하는 곳은 명 심정이라는 곳인데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에 있어 아마도 형씨는 와보 지 못했을 거요." 그 말을 듣자 황삼객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아마도 그는 눈앞에 나 타난 강적의 정체를 짐작한 것이리라. "그러면... 귀하가 바로 중주재쌍검(中州在雙劍) 남북무적군(南北無 敵君), 이장공삼인(而掌功三人) 기대적상인(豈對敵上人)이라는 글귀에 나오는 쌍검 중 하나란 말이오?" 이 스무 자의 말은 몇 년 전부터 무림의 절정고수들을 일컫는 말이 었다. 드넓은 세상에 몸을 숨기고 사는 이가 한둘이랴마는, 그중 강호 에 자주 나타나고 무공이 뛰어난 사람들을 평한 말이었다. 이 말은 원 래 풍류객으로 유명한 주선옹(酒仙翁) 언철(言徹)이 취중에 지어낸 시 인데, 그 뜻은 풀면 다음과 같다. 중주에는 두 명의 검객이 있고, 무적의 남군과 북군이 있도다. 또한 장력에 능한 세 사람이 있으니 누가 이 사람들을 대적하겠는가? 두 명의 검객이란 바로 연경소와 흑도제일의 검수라는 검마(劍魔)를 지칭하는 말이었고, 남북군(南北君)이란 곧 백포사신(白布死神) 냉무 (冷武)와 음양마군(陰陽魔君) 제갈극(諸葛極)이었다. 장풍에 조예가 깊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 사람은 소림사의 주지스님인 혜심대사(慧心大師)와 천산벽력장(天山劈力掌) 정련(鄭蓮), 그리고 해남문주(海南門主)인 서평(徐平)이었다. 연경소는 묵묵히 긍정의 표시를 했다. "모두 후퇴한다!" 그가 긍정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황삼객은 커다란 목소리로 모두에 게 퇴각령을 내렸다. 황삼객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듯, 한 번 그의 사 자후(獅子喉)가 터지자 병장기로 뒤덮였던 공터는 마치 썰물이 빠지듯 사람들이 빠져나가서 텅 비고 말았다. 사준에게 몰려서 거의 초죽음이 되었던 노인도 불진을 내던진 채 도 망쳐 버렸는데, 사준은 그를 쫓지 않았다. "왜 안 쫓는 거지?" 벽풍이 참다못해서 물었다. "흐, 부시독을 맞췄거든." 연경소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혀를 내둘렀다. 승부를 가리지 않은 상태에서 헤어질 사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17 07/30 01:45 140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4) 황삼객을 비롯한 적호방의 일당들은 모두다 도망쳐 버리고, 넓은 공 터에는 모두 열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연경소 일행 셋과 아홉 명이 열둘이라는 수자를 채워넣었다. 연경소와 투골쌍마는 수많은 적들을 상대로 싸웠으나 그리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며 상처하나 없이 말짱했지만, 아홉 명의 일행은 두 어린 아이만 빼놓고 완전히 피투성이가 되어 혈귀(血鬼)를 방불케 하는 끔 찍한 모습이었다. 사방에서 공격을 퍼붓던 무리들이 완전히 물러가자 일종의 북두진법 을 이루고 있던 일곱 명은 일제히 병기를 내던지면서 자리에 털썩 주 저앉고 말았다. 바로 앞에 있는 연경소와 투골쌍마의 정체를 알 리가 없었고, 또한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태였지만 그들은 손가 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에 겨울 지경이었다. 일곱 사람의 영도자격으로 보이는 부인이 눈을 실날같이 뜨고는 연 경소와 투골쌍마를 쳐다보고 말했다. "우리를 도와준건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이시겠지." 벽풍은 눈앞에 펼쳐진 한 장의 수라도(修羅圖)를 보고도 전혀 두려 움이 없는 듯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인은 크게 분노하여 부르짖었다. "말이 지나친 것 같군요." 사준이 벽풍의 말을 가로채었다. "우리 괴이는 좀 성격이 이상해서 말이야. 네가 좀 참아라." 연경소가 가만히 듣고 있자니까, 아무래도 저들이 투골쌍마의 기이 한 말장난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서로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면 만들었지, 결코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제지하여 고 하는데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당신들을 본 적이 없으니 그런 말투를 삼가해 주셨으면 고맙겠 군요." 연경소는 감탄했다. (정말 여장부로구나!) 사준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이, "뭐라구? 난 너보다 나이가 많을테니 자연 너라고 불러도 될것인데, 왜 말을 삼가라는 거지? 거지하면 또 생각하는 거지가 있지. 왕거지들 중에서도 왕거지인 소호(小虎)는 우리 천마곡 근처에서 살면서 동냥을 했는데 불과 열 다섯 살밖에 안 되었는데도 무공이 뛰어나고 백가제자 의 학문에 능통해서 우리와 같이 놀곤 했지." 하며 괜스레 왼손과 오른손을 같이 들어서 부채질을 했다. 더위와는 거리가 먼 한겨울이었는데도 더워 죽겠다는 듯이 손바람을 연신 일으 켰는데, 사준이 한번 손을 움직이자 손 끝에서 세찬 바람이 일어나 머 리카락이 휘날렸다. 부인은 갑자기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투... 투골쌍마!" 갑자기 욱,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땅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일 곱 명 중 한 명의 사내가 피를 토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 부인은 이중으로 놀라움과 분노, 당황감에 싸여서 어쩔 줄을 몰 라했다. "저 아이는 우리 이름만 듣고도 피를 토해 죽는군." "나 괴대와 내 동생 괴이의 명성은 하늘에도 닿을 지경인데 그 무엇 이 두렵겠나?" 사준과 벽풍은 그렇게 수작을 부리고 나서 자랑스럽다는 듯이 서로 등을 두드려 주었다. 부인은 또 앙칼지게 말했다. "당신들이 그 마두들이라면 어서 우리의 목숨을 취하는 편이 속시원 하겠군요. 우리는 더이상 버틸 기력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아예 두눈을 감아버렸다. 연경소는 눈짓으로 두 의형의 말을 멈추게 하고 말했다. "저희들은 결코 부인 일행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먼저 상 세를 돌보고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품속에서 피를 멈추게 하는 가루약과 칼이나 병기에 난 상처에 바르는 약을 들고 조금 아까 앞으로 쓰러진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앉 았다. (이미 죽었군.) 그가 앞으로 넘어진 자세 그대로 있으면서 꼼짝도 앉자 연경소는 이 렇게 판단하고 사내를 똑바로 뉘였다. 혹시 살아있을까 해서 몇 군데 의 혈을 짚어보고 맥박을 재 보았지만 허사였다. 사내는 아까 피를 토 한 것이 세상에서 취한 마지막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미..." 연경소는 말꼬리를 흐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을 꿇고 앉았기 때 문에 죽은 자가 토한 피가 바지자락에 묻어 검붉은 무늬를 이루며 간 혹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우욱!" "왁!" 두 마디의 비명 아닌 비명이 짧게 들리더니 또 두 사람이 자빠졌다. 직감적으로 공터에 있던 모든 사람은 그들이 죽음의 세계 저편으로 여 행을 떠났음을 알 수 있었다. 길게 한숨을 쉰 연경소는 그 자신의 의무인 듯 바닥에 고인 선혈을 의식하지 않고 일일이 쓰러진 사람들이 죽었음을 확인하고 나머지 부 상자들을 돌보았다.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자는 누구길래 투골쌍마와 같이 다니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 다도 왜 투골쌍마와 같이 다니면서 무사할까? 아니다, 아니다. 투골쌍 마는 평소 살인을 즐겨하고 악행이란 악행은 안해본 것이 없는 마두라 는데 왜 우리들을 가만 놓아두는 걸까? 또 저들은 검보(劍譜)를 노리 고 온 것 같지도 않고... 파란 옷을 입은 청년은 무공이 고강하여 어 쩌면 투골쌍마보다도 센 것 같다. 도대체 이 이상한 일들은 어떻게 설 명해야 옳은가?) 그녀는 이 며칠동안 겪은 황당한 일들과 참변, 그리고 잔인한 적들 의 손에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강인한 성품을 가 졌다고는 해도 역시 여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말라버렸다고 느꼈 던 눈물샘이 다시 제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놀라워할 틈도 없이 흐느끼 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한번 감정이 일면 걷잡을 수 없는 법이다. 연경소 뿐 아니라 그녀의 일행들도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아 무도 말릴 생각을 품지 못했다. 사람들은 물론 벽풍까지도 약간 숙연한 감정에 젖어들어 스스로 모 르는 가운데 고개를 약간 낮추고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사 준만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큰소리를 뻥뻥 치다가 울다니 여자는 여자로군. 난 또 저 여자부인 이 자꾸자꾸 막 큰소리도 치고 무공도 패기가 넘치길래 여장 남자인줄 알았지. 이따 천마곡에 가면 맛있는 밥을 지어서 괴이의 불평을 콱 씻 어버리려고 했는데 오늘 번거롭게 되었네. 기냥... 망했다. 흐흐!)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18 07/30 10:30 153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5) 부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이내 눈물을 거두었으나 눈가에는 눈물의 흔적이 역력하여 그녀의 처연한 표정에 실제감을 더해주었다. 연경소는 투골쌍마가 또 쓸데없는 참견을 해서 분위기를 망쳐놓을까 봐 두려웠다. "형님들은 잠시동안 가만히 계셔 주십시오. 제가 한 번 말해 보겠습 니다." 사준도 천방지축으로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연경소가 자 시보다는 말주변이 좋고 점잖다는 걸 생각하고는 그러마, 하고 응낙했 다. 벽풍도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사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괴대, 우리 오랫만에 바둑이나 한 판 두지." "그거 좋다. 너와 난 똑같이 스무 번씩 이기고 스무 번씩 졌으니 오 늘 한 판을 두면 우열이 가려지겠군." 그들은 한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가서 웅크리고 앉아 판을 그리 기 시작했다. 먼저 사준이 장풍을 일으켜 먼지가 나는 가벼운 모래들을 치우고 지 력(指力)을 이용해서 가로세로로 열아홉 줄을 새겼다. 일 분만에 바둑 판이 훌륭하게 완성되자 그들은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바둑에만 열 중하기 시작했다. 연경소는 빙그레 웃고 나서 그들 일행이 기운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 기로 했다. "후... 후..." 이때 운기를 하고 있는 다섯 사람들 중 가장 어려보이는 한 명의 소 년의 호흡이 약간 흐트러지며 숨을 내쉴 때마다 괴로운 표정을 지어보 였다. 연경소는 즉시 그의 앞으로 다가서서 맥을 짚어 보았다. 그의 맥은 매우 불규칙해서, 빨라졌다 느려졌다 제멋대로인데다가 외상(外傷) 역 시 일행 중 가장 심한 것 같았다. 일단 온 몸에 난 상처를 돌보고 나서 속의 병을 다스리는 것이 일반 적인 순서였지만 이 소년의 상세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서 피투성 이의 겉모습보다 내부가 더 심각해 보였다. 얼굴도 역시 피로 얼룩져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로도 창백함이 다 드러나 보일 지경이었 다. "지금부터 내가 소협(小俠)을 도와 끊어질 듯 상처입은 혈맥을 잇고 내장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할테니 평소 때처럼 운기하게나." 소년은 말할 기력도 없어 고개만을 약간 끄덕이고는 허리를 세우고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연경소는 처음에는 이 소년이 어떤 종류의 심법(心法)을 연마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서서히 진기를 주입하며 소년이 인도하는대로 진기를 유통시켰는다. 부인은 막 운기를 끝내고 금창약을 몸 여기저기에 발랐다. (저자에게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그녀는 알수 없다고 느끼면서 긴 옷소매를 몇 가닥으로 찢어 금창약 과 지혈제를 바르고 그 위에 옷자락으로 상처부위를 싸매었다. (손발에 있는 상처는 비록 싸맸지만, 가슴과 등에 있는 상처는 도리 없겠구나.) 그녀는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사람들 있는 데에서 옷을 모두 벗을 수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받아온 예절교육의 고정관념이란 매우 무서운 것이어서, 비록 곧 죽는다고 해도 그런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 각한 것이다. 그녀는 비로소 정신을 약간 차리고 사방을 둘러 보았다. 3장 정도 오른쪽에서는 투골쌍마가 머리를 싸매도 바둑을 두는 모습 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들은 쉬지않고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선수를 쥔 벽풍이 오른쪽 아래의 귀에 한 수를 가일수하여 굳건하게 지켜두자, 사준이 입맛을 다셨다. "야, 거긴 내가 곧 쳐들어가려고 했는데 왜 지키지?" 벽풍도 지지 않았다. "흥! 괴대가 중앙쪽을 지키지 않고 이리로 쳐들어오면 아예 손 빼버 리고 중앙에 널린 형의 흑대마를 공격했을 거야." 사준은 땅에 그려진 바둑판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보통 사람이라 면 어지러워서 고개를 살레살레 저으며 물러났겠지만, 지풍으로 그려 넣은 선(線)과 돌의 경계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물론 무공의 덕 분으로 안력이 좋아진 탓이겠지만. 우선 네 군데의 귀(구석쪽의 땅)는 공평하게 두 군데씩 차지하고 있 었는데 아무래도 벽풍의 집이 조금 더 커 보였다. 그 차이가 대략 5집 에서 6집 정도라고 본 사준은 변(邊)과 중앙을 살폈다. 변에서는 서로 치열하게 싸운 끝에 사준이 벽풍의 백돌을 아홉 개를 포획했고, 벽풍은 사준의 흑돌을 열세 개나 포획 했다. 바둑알 수에서 는 벽풍이 네 개가 많았지만 사준은 벽풍의 돌을 통째로 삼켜서 주변 의 빈 공배들이 모두 집이 되어서 변의 집은 비슷비슷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중앙인데, 거기에서도 사준은 우세를 차지하지 못 했다. 모두 합쳐서 스무 알의 흑돌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는데, 벽풍의 군사들은 예리하게 급소에 배치되어 예봉의 끝을 흑 대군의 명치에 들 이대는 형국이었다. 물론 사준이 한 수를 들여 중앙을 지키고 벽풍 역 시 한 수로 귀를 지켰지만, 중앙쪽의 흑 일단은 너무나 엷어 두세 수 를 더 둔다고 해도 열 집 내기가 바쁠 지경이고 공격을 두려워하여 지 킨 수이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벽풍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면 상당 한 대가를 지불하게 생긴 모양이었다. "뭐 이래?" 사준이 형세가 어렵게 꼬인 것을 알고 푸념하자 벽풍이 혀를 빼어물 고 놀렸다. "뭐 이렇긴, 바둑이 이렇지. 바둑두는 사람 어디 갔나...아? 빨랑빨 랑 두라고." "괴이는 너무 재촉하는게 흠이야." 사준은 다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는데, 암만 봐도 묘수가 보이지 않았다. 딱 한 수로 중앙을 완벽하게 서로 연결하여 공격당하지 않게 만 할 수 있다면 불리하나마 끝까지 버텨서 역전을 노릴 수 있을 테지 만 엉성하게 수비하는 것으로는 시달림을 당해서 최악의 경우는 전멸, 잘한다고 해도 꼬리 몇 점을 떼어줘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바둑이 무공보다 더 어렵단 말이야." "헤헤, 패배를 인정하시지? 괴대는 100집 차이라도 끝까지 투석하지 않고 두기만 하니 예의에 어긋나지 않겠어. 헤헤..." "괴이는 놀리지 말게!" 사준은 다시는 푸념을 해서 괴이가 끼어들 틈을 안 주리라고 마음먹 고 열심히 수를 읽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심오한 기도(棋道)에 정진하여 수읽기에 몰두한 노기사로 착각할 정도로 열중한 모습이었지만 벽풍만은 그의 눈길을 따라다니면 서 도대체 어떤 수로도 나의 이 기세를 막을 수 없을 거야, 하고 으쓱 해 있었다. 한참동안 생각만 하던 사준이 하하, 하고 웃더니 말했다. "하하하! 괴이도 이런 수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준은 오른손 식지(食指)와 중지(中指)를 붙이고 한 줄기의 지풍을 쏘아 갑자기 우변(右邊)에 백진 깊숙히 돌을 하나 날렸다. 벽풍이 아무리 봐도 우변에서 그 흑돌이 살 수가 없는데도 침투해온 것이라서 그냥 튼튼하게 옆에서 몰아갔다. 그 한 수로써 흑은 살래야 살 수가 없었고 오히려 끝내기 상으로 두 집을 손해보았는데, 정작 사 준은 태역자약했다. "잘 보라구." 이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잡혀있던 열세 점을 움직이고 나갔다. 그제 서야 벽풍은 뭔가 있다는 듯이 무릎을 탁, 치고 말했다. "거길 움직이려고 그랬구나!" 사준은 이건 몰랐지, 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19 07/30 12:31 162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6) "일찌기 꽁수를 준비해 두고 있다니 괴대는 왜이렇게 치사하지?" "내가 치사하다니 기선(棋仙)이 울고갈 일이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이기지 이게 뭐야." 벽풍은 쉽사리 응수를 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손을 내밀었다 되물리 곤 했다. 원래 사준의 포획된 열세 점에는 약간의 뒷맛이 있었지만 움 직인다고 해도 겨우 두 수가 늘어진 패가 날 뿐이었다. 반면에는 벽풍 의 패감이 몇 개 많았기 때문에 그냥 방치하고 큰 곳을 막아둔 것인데 막상 이렇게 오니까 만만치 않았다. 만약 회생(回生)의 몸부림이 실패로 끝난다면 바둑도 끝나는 것이었 다. 지금 사준은 꼭 열 집 가량이 모자라는 형세인데, 이 돌이 살아나 가려면 상당한 몸부림을 해야했고 그 여파가 바깥쪽의 정세에 미쳐 거 의 오륙 집을 손해봐야만 했다. 그런데도 패에 져서 몰사하고 만다면, 볼장 다본 것이었다.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사준이 강경수단을 동원한 것은 아까 우변에 손해를 보고 뛰어들어 죽인 흑 한 점이 무궁한 뒷맛을 보유하고 있어 서였다. 물론 직접 움직여서는 살 방도가 없었다. 바둑은 번갈아 두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 두 번 두지 않는 이상에는 살 가망이 없었지만 패 감으로 이용할 수는 있었다. 무릇 바둑에 있어서 패 모양이 나면 서로 딸 수 있는 형태이지만 계속 따내기만 하면 바둑이 안 끝나기 때문에, '동형반복(同形反復)의 금지(禁止)'라는 규정이 있었다. 벽풍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기의 패감은 아무리 늘여서 써도 열 개 에 불과했지만, 사준의 패감은 아까 서너 개라고 보았는데 지금 그 변 에서만 해도 열 개는 충분히 나올 것 같았다. 아무리 두 수 늘어진 패 라고 해도 이길 도리가 없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벽풍이 잔뜩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괴대 실력이 꽤나 늘었네. 이건 뭐, 보통 수가 아니잖아? 그렇다고 아까 우변을 받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그래도 여길 하나 지 켜두었어야 균형이 맞을까?) 벽풍은 혀를 끌끌 차면서 일단 패를 따내고 보았다. 죽을 때 죽더라 도 패는 따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사준은 허리춤에서 술통을 꺼내어 반 모금을 마셨다. "흥, 쓸데없는 저항은 관두라구. 내 이미 다 봐뒀으니까." 사준은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우변에 심어둔 폭탄을 움직였다. 한 번 만 더 두면 안에서 살 수도 있고 바깥으로 터져나올 수도 있는 강수였 다. 사준은 여전히 의기양양했다. 순간 벽풍의 눈빛이 빛났다. (내가 아직 진건 아니네. 헤헤... 괴대도 지금 신나서 패감을 쓰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집을 보태주는걸 모르나보지. 위에서 척척 눌러버 리면 우변은 이십 집 정도 날텐데, 저렇게 안에서 몸부림치고 죽으면 스물 일곱 집은 더 날껄? 그러면...) 사준과 벽풍은 각각 머리를 굴려 어떻게 하면 20대 20이라는 승패에 균열을 일으켜 자기가 우세를 점할까 생각했다. 물론 둘의 속셈을 틀렸다. (이 열세 점만 살아가면 괴이의 집을 거의 서른 집이나 부수고 두집 이 생기는 것이니 완전히 역전임에 틀림없다.) (살려준다고 해도 이 괴이가 그냥 질순 없지. 괴대는 그게 살아가면 이기는 줄 알겠지만 그렇게 쉽지는 않을껄? 헤헤... 나도 복안이 있단 말씀이야. 괴대는 벌써 이거 살리느라고 여섯 집이나 손해를 자청했을 뿐더러 우변에서도 일곱 집은 넉넉히 손해보게 되어있지. 아니, 그 전 에 한점 둔게 두집 손해니까 이것저것 다 합치면 열다섯 집은 그냥 버 린 셈이지. 수를 낸다고 다 좋은게 아니란 말이야. 나도 모르는 묘수 를 둔 것이 괘씸해서라도 이거야 겠네.) 어떻게 보면 수는 사준이 더 잘 보고 계책은 벽풍이 더 잘 짜낸다고 볼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그럼 어떻게 한다? 패는 이겨낼 도리가 없구나. 패감이 세 개는 모 자라는 것 같으니 두 수 늘어졌어도 할수 없고. 음, 괴대의 대마를 살 려준다고 하면... 쩝~ 다섯 집 정도가 모자라는군. 가장 큰 끝내기 하 나를 해 버리면 집에서는 내가 서너 집 앞서지면 괴대의 선수니까, 결 국은 비슷비슷하게 되겠군.) 벽풍은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마침내 단안을 내리고 평범하게 패싸 움을 계속하기로 했다. (어, 괴이 저녀석 봐라? 웃잖아?) 사준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눈앞의 먹이를 놓칠 수 없다고 여겼 다. 그는 그야말로 날이 시퍼렇게 선 보도(寶刀)를 휘둘러 대마를 기 어이 갈려내고야 말았다. 딱 두 집을 내고 무사히 생환한 것이었다. 하지만 벽풍은 이미 생각대로 여기저기서 득을 보았기 때문에 서두 르지 않고 끝내기로 들어갔다. 형세는 근소한 차이로 우세한 형편이었 지만 사준이 둘 차례였기 때문에 역시 비슷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어 이거 만만치 않네? 그거 살려왔는데도." 벽풍이 음산하게 웃었다. "안을 돌보느라고 바깥을 소홀히 한 죄를 받는거거야. 괴대는 하나 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그러자 사준이 반격했다. "넌 사부의 말도 못들었냐? 그가 말하기를, 난 백 명에 한 명 날까 말까 한 기재라고 하셨다." "두기나 해." 사준은 다시 바둑판에 머리를 쳐박고 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한 무더기 의 암기가 날아들었다. "누구야!" 사준과 벽풍은 거의 동시에 소리치면서 암기가 날아오는 쪽으로 고 개를 돌리고 소매를 휘둘러 암기를 땅에 떨어뜨렸다. 사준은 형답게 연경소를 보고 소리쳤다. "연노제, 적의 공격일세!" 이미 연경소와 살아남은 부인 일행은 무기를 움켜쥐고 싸울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들은 무기를 휘둘러 빗발치듯 날아오는 암기를 막아 냈다. 연경소는 청죽검으로 수비자세를 취하여 몸 주위에 두 자 가량의 검 막(劍幕)을 만들었는데, 암기들은 그 막에 부딪치자 소리도 없이 땅에 떨어져 버렸다. 뒤에는 막 그의 진기로 부상을 치료한 소년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앉아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방어자세 를 일부러 크게 취하여 두 사람의 수비를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더 궁지에 몰려서 마침내 두 사람이 암기를 맞고 땅 에 쓰러졌다. 싸울 능력이 있는 중에서 네 명 중에서 두 사람이 쓰러 지자, 부인은 크게 당황했다. 이때 부인도 자기뿐만 아니라 두 아이를 보호해야만 하는 부담이 있 어서 몸놀림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다만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러서 날아오는 물체들을 떨어뜨렸다. 이런 동작은 조금도 쉬지 못하고 전력 을 다해야 하는 것이라 상처를 싸맨 옷자락 사이에서는 핏물이 배어나 왔다. "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남은 한 사람마저 쓰러지고 말았다. 아까 쓰 러진 둘과 마찬가지로, 그도 쓰러지면서 방어능력을 잃자마자 수십 개 의 화살과 이상한 암기들에 맞아 고슴도치가 되고 말았다. 부인은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전우무(田牛霧), 너까지 당했느냐?" 그녀도 이러는 사이에 비표(飛標)와 철령전(鐵靈箭)을 각각 어깨와 허벅지에 하나씩 맞았으나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지금 자기가 쓰러진 다면 곧 죽을 뿐만 아니라 두 아이의 생명도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상 기한 모양이었다. 암기공격은 얼마 후 멈추었다. 그야말로 눈코뜰새 없이 암기를 막아 내기 바빴던 투골쌍마와 연경소, 그리고 부인은 겨우 숨을 돌렸다. 공격이 멈춘 후, 수풀 사이 어디엔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 목소리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다가 잠시 공백을 두고 무슨 말을 하 려고 했는데, 연경소가 기선을 제압하여 말을 가로챘다. "철령전, 비표, 단비수(短匕首), 독사(毒沙), 옥주(玉珠) 이런 것들 로 잔꾀를 부리는 자가 감히 하늘과 땅 사이에서 웃을 자격이나 있느 냐?" 그러나 목소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연경소를 조롱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20 07/30 17:57 139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7) 연경소는 계속되는 살인행각을 벌이는 상대방에 대해서 분노를 억누 르고 있었지만 조롱하는 그 목소리를 듣고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비검탄기(飛劍彈氣)!" 돌연 연경소가 거침없는 기합을 내뱉더니 소리가 난 쪽으로 청죽검 을 뻗었다. 순간 투골쌍마와 부상을 입은 부인은 저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전신 의 내력을 완전히 회복한 청죽검객 연경소의 위세가 여실히 드러나 보 이는 이 일격은 어검술(馭劍術)보다는 약간 못했지만, 바로 그 기초가 되는 검기(劍氣)의 일종이었다. 어검술은 다른 말로 이기어검(以氣御 劍:御, 馭자는 같이 쓰임)이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자신의 진기로 써 검을 조종하여 마음대로 날릴 수 있는 검도 최상승의 경지였다. 자고로 이러한 상승(上承)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극히 드물어서, 어 떤 자들은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기술적인 면모 - 즉, 초식(招 式)에만 얽매이곤 한다. 그러나 심후한 내공, 천부적 자질, 검도에 대 한 깊은 이해, 오랜 수련의 4박자가 제대로 갖추어진다면 전혀 불가능 한 일은 아닌 것이다. 실제로 불문(佛門)무공의 최고 경지라는 금강불괴(金剛不壞)와 같은 것이 무공비급으로 존재하지만 천품(天品)이 없으면 이루기가 거의 불 가능한 탓에 승려들도 보통 주먹이나 병기를 쓰는 것부터 배우게 마련 이다. 이와 마찬가지의 원리가 검도에도 적용되어, 이기어검술의 진수 (鎭隨)는 거의 실종되고 몇몇 사람들의 연구에 의해서 겨우 명맥을 유 지하고 있었다. 검을 쓰는 법의 차원이 다른 이러한 일격은 타인의 존경과 더불어서 놀라움을 사기에 족한 것이었다. 투골쌍마야 원래 연경소의 무공을 어 느 정도 알고 있어서 놀라움이 덜했지만, 부인은 손에 잡고 있던 검을 떨어뜨릴 지경이었다. "대단하구나, 연경소!" 숲속에서 예의 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의 자 신만만하고 조롱하는 듯한 말투가 아니라 어느 정도 경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줄기의 섬광이 번쩍였다 싶었는데, 연경소가 검을 다시 검집으로 넣은 후에야 반응이 왔다. 검기(劍氣)는 물체로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 도 아니었고 두 손을 휘둘러서 방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원무 예계의 시조이며 소림사(小林寺)의 조사인 달마대사(達摩大師)가 72종 의 소림절예를 창안하고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手經)을 승려들에 게 가르친 지 수백 년이 지나면서 수많은 연구와 연구가 더해져 무공 들은 차츰 발전해왔다. 기술적인 면모로는 너무나 많은 발전을 해왔고 앞으로도 점점 개량될 수밖에 없었지만, 진정한 무(武)의 요체는 아직 미개척의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바로 인간의 근본적인 기(氣)를 바 탕으로 하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연경소의 검기는 장내의 상황과 분위기를 한 번 뒤흔들어 놓 았다. 일검으로써 상대방의 예봉을 꺾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대표적 인 예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곧 나뭇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들렸다. 무성한 소나무의 가지들 이 예리하게 잘려나가며 땅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연경소는 태연하게 말했다. "감히 상처입은 사람들을 다수로써 공격하다니, 적호방이 고작 그런 무리들이었더냐?" 사준과 벽풍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렇고 말고. 삼제 말이 맞다." "우리 괴대와 나 괴이는 항상 둘만 다녔지. 그리고 한 사람을 같이 공격한 적은 없다. 우리 신조에는 우리들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면 협 공을 안 하지." 그러자 음산한 목소리가 대꾸했다. "적호방은 감히 나를 수하로 거둘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 는 사람들은 늙어죽지도 않는 투골쌍마 아니신지?" 벽풍은 자기더러 죽지도 않는다고 하자 처음에는 무슨 자기의 만수 무강을 축원하는 것 같아서 크게 기뻐했는데, 잘 생각해 보니 그게 아 니었다. "내가 안죽으면 네가 좋을꺼 있냐?" 이번에는 사준이 응원해 주었다. "괴이 말이 맞다. 넌 마땅히 나와서 오랏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음산한 목소리가 말했다. "사 노괴물은 나라의 포졸도 아니면서 왜 나를 결박하려 하는가, 그 이유를 모르겠군. 아무튼 당신들은 모두 포위 되었으니 부인께서는 빨 리 검결을 내놓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게요." 부인은 화난 목소리로 대답했는데, 그 목소리가 얼마나 예리하고 앙 칼진지 한을 품고 죽은 귀신이 곡하는 것 같았다. "네가 지난 며칠동안 대라신검(大羅神劍)의 검결을 노리고 우리 일 가를 추적하여 마침내 지아비부터 모두 몰살시키고 겨우 셋만이 살아 남았다. 내가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너에게 이 물건을 넘겨줄 것 같으냐! 네가 나라도 안 그럴 것이다." 목소리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하하하하! 옳은 판단임에 틀림없군. 검결을 주어도 넌 살려두지 않 으려고 했다. 그리고 네 아들은 정말 뛰어난 골격을 가지고 있더구나. 그래서 그는 살려서 신지를 잃은 내 수하로 만들려고 했지. 어차피 죽 을 바에야 한 번 튕겨보고 죽는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자청해서 검결을 내놓는다면 한번 고려해 보지. 내 첩이 되면 확실히 살려줄 의 향이 있다." 부인은 화가 끝까지 치밀었으나 말 대신 피가 차올랐다. 엄중한 부 상의 정도가 점차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연경소가 응수했다. "너는 나의 검기에 이미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만일 그러고 도 자신이 있다면 이 연모와 한번 싸워보자." 목소리는 그말을 비웃었다. "하하~ 내가 즐겨 쓰는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너같으면 그러겠느 냐? 바로 이것이지. 만일 내가 나보다 무공이 강한 너와 싸우다 지면 부하들을 둔 보람이 없지 않겠느냐? 기실 적호방도 나의 세력 중 하나 에 불과하지." 연경소는 다시 그 목소리에 대해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뒤에서 사 준이 어깨를 지긋이 누르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과연 벽풍이 잔뜩 화가 나서 외쳤다. "왜 남의 바둑을 망치지? 내가 근소하게 이기고 있었는데!" 사준은 점잖을 뻐고 있었지만 그 말에는 참을 수 없었다. "뭐라구? 괴이는 왜 거짓말을 즐겨서 하는가! 내가 먼저 둘 차례였 으니 내가 유리했는데 무슨 소리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껄껄 웃어제꼈다. "하하...!" 그러나 그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준과 벽풍이 한꺼번에 몸을 날려 그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21 07/30 23:08 14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8) 사준과 벽풍은 일대마두라는 소리를 듣는 만큼 뛰어난 무공과 그에 걸맞는 경신술을 지니고 있었다. 표홀한 그들의 신법은 미처 방비할래 야 방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수풀 사이에 몸을 감추고 있던 음산한 목소리의 소유자는 갑자기 날 아오는 두 노마두를 맞아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진작부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전 신경을 곤두세워 동 정을 살피지 않았더라면 결코 투골쌍마의 협공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 이다. 그가 연경소의 검기에 의해 수 장의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간의 상해를 입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 서 사준이나 벽풍의 손에 가슴이 뚫렸을 것이나 다행히도 암암리에 공 력을 끌어올려 불의의 기습에 대응하던 채비를 하고 있어서 간신히 죽 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기습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준은 일종의 응조공(鷹 爪功)의 재간으로 그의 가슴팍을 쥐어뜯었고, 벽풍은 오른손의 중지와 식지를 바짝 붙이고 음수지(陰手指)를 발출하여 그의 소매에 2개의 구 멍을 뚫어버렸다. 그 사내는 간신히 투골쌍마의 협공을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도 못 했고 또한 도망가지도 못한 상태였다. "네 염통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주지." 하고 벽풍이 지풍을 사납게 날리자 그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도망치 지도 못하고 다만 두 손을 들어서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퍼퍽, 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벽풍의 지력은 정통으로 그의 미간에 맞았고 사준의 응조공은 어깨에 적중하여 비파골(肥琶骨)에 큰 상처를 남겼다. 천하에서 투골쌍마의 연수합공을 몸으로 받아내고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사람은 열 사람을 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이 음산한 목소리의 소유자는 그 안에 들지 못했다. 그는 으윽, 하는 신음성을 아주 조그맣게 냈지만 이미 절명하고 말 았다. 사준의 응조공은 어깨에 맞은 거라 고통 뿐이었지만, 벽풍이 발 출해낸 음수지는 두개골을 쪼개고 뇌해(腦海)에 들이박혀 설사 대라신 선이 온다고 해도 그를 구해낼 수 없었다. 금새 그는 눈을 까뒤집으며 죽고 말았다. "싱거운 녀석이로군." "괴이처럼 입만 살았는데." "헤헤... 괴대는 뭐 얼마나 잘나서 그러시나?" 투골쌍마는 한 사람을 죽이고도 전혀 느끼는 바가 없는 듯 말씨름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공터로 되돌아와 있었다. 연경소는 말했다. "제가 미약한 재주를 부려 격공살인(隔空殺人)을 하려 했어도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역시 형님들의 재주는 뛰어나군요." 사준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띄었다. "흐흐... 연노제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지만 우리들 두 괴물이 십 년을 더 연마하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도저히 노제의 그 검기인가 뭔가 하는 절기를 따라할 수 없을거야." "헤헤... 괴대 말이 맞고말구. 연노제가 더 대단해." 이들은 여유롭게 농담을 나누며 수풀 가득 숨어있는 적을 전혀 의식 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고의로 그들을 무시하려 한다기보다는 투골 쌍마와 연경소의 성격과 자신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연경소는 자기 의 무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 지난 한 달 동안 그야말 로 최악의 상황에 있다가 체력을 회복했기 때문에 기운이 펄펄 날 지 경이었다. 반면에 투골쌍마는 모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성 격을 지니고 있었다. 설사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위인들이었다. 세 의형제들이 즐겁게 서로를 추켜주고 있는데, 갑자기 아까보다 더 욱 음산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청을 때렸다. "으하하하! 너희들의 호방함을 보아서 특별히 살려줄 터이니, 이 공 터에서 어서 꺼지도록 하여라!" 단순한 위협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웃음소리는 공터와 주변의 풀 숲을 모조리 진동시키고도 모자라 여운이 길게 남으며 고막을 진동시 켰다. 이런 공력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지라 연경소는 약간 놀랐다. (결코 강호의 삼류무사가 낼 수 있는 웃음소리가 아니다. 적어도 몇 십년 동안 정심한 내공을 쌓아야 가능한 현음타혈(玄音打穴)의 절기가 아닌가? 나야 버틸 수 있다 해도...) 연경소는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어 부인 일행을 돌아보았다. 부인은 내공을 돋구어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있었지만 소년과 두 아이들은 무 척이나 괴로워하면서 곧 피를 토하고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얼른 자신의 옷자락을 길게 찢어 세 아이와 부인의 귀에 꽂아 주고 나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 정도로 이 연모에 항거하느냐. 정말 가소롭도다." 연경소의 웃음 속에는 불문의 사자후 공력이 섞여 있어서, 먼저 웃 은 사람의 목소리를 압도하여 수그러들게 만들었다. 괴대 사준은 자기의 무척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자뭇 한가한 표 정이었고, 벽풍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아까처럼 한 번만 더 목소리가 들리면 뛰어가서 단번에 요절을 내고야 말 표정이었다. "으하하, 정녕 천하제일검이로구나. 그러나 무공도 목청만큼 대단한 가 보자..." 이렇게 말하자 마자 숲속에서 수많은 장정들이 나타나 연경소 일행 을 둥글게 포위했다. 장정들은 아까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는데, 왜냐 하면 그들이 들고 있는 병기가 지기 전의 마지막 햇빛에 반사되어 붉 으스름한 광채를 내었기 때문이다. 현음타혈의 절기를 발휘한 사람은 금빛 장포로 몸을 휘감고 있었는 데 키가 무척 커서 연경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것 같았다. 턱이 세 모꼴로 각져서 독사머리를 보는 기분이 들었고, 팔자로 기른 콧수염은 얼굴과 묘한 부조화를 이루었다. 연경소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문득 속에 짚히는 인물이 있었다. "혹시 그대의 성이 송(宋)씨가 아니오?" 금색 장포를 입은 사내는 말했다. "나같은 무명소졸을 그대가 알아주니 고맙소. 그러는 연형은 천하제 일검이라는 위명을 얻고 있는 중주쌍검 중 하나인 청죽검객이 아니신 지요." 벽풍이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저놈이 누구이건 간에 아까 그녀석처럼 요절을 내 버리자구!" 연경소는 눈짓으로 그를 제지하고 나서 말했다. "은사께서는 안녕히 계신지요." 송씨 성의 사내는 금포의 아랫부분 자락을 일부러 펄럭이더니 연경 소를 노려보았다. "마군께서는 언제나 연형의 가르침을 고대하고 있소. 삼 년 후엔 빚 을 갚으로 올 것이오." "하하, 그때만 손꼽아 기다리겠소." 연경소는 더이상 말이 필요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뒤로 물러섰다. 사준은 그가 송씨 성을 가진 사내의 내력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몰 래 전음(傳音)으로 물어보았다. "저 녀석이 누구지?"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22 08/02 19:07 145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10) 연못에다 조그마한 돌멩이를 하나 던지면 곧 그 파문이 확산되어 겹 겹이 둘러쳐지게 마련이다. 장정들의 심리상태도 이와 같아서, 누군가 가 도망치기 시작하자 모두들 겁에 질려 무기를 내던지고 걸음아 나살 려라, 하고 도망쳐 버렸다. 귀마필 송혁이 아무리 위세를 부리려고 해 도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투골쌍마는 도망가는 장정들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끝까 지 상대의 실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덤비는 장정들은 죽여 버리거나 어 디를 부러뜨렸다. 연경소의 입김이 작용한 탓도 있었지만, 그들은 살 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질려 있었다. 과거였다면 마음에 안 든다는 이 유만으로 모두다 몰살시켰을 테지만. 넓다란 공터에는 얼마 안 가서 몇 사람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연경소 측은 투골쌍마와 부인 일행 네 사람이었고, 송혁 측은 두 노 인과 여덟 명의 장정이 남았다. 송혁은 연경소의 검법을 보고 크게 놀라 자신이 없어진 지 오래였으 나 자기 사부의 명성에 흠이 가는 행동을 할 수 없어서, 억지로 뻗대 었다. "검을 내놓으면 물러가겠소." 연경소는 웃음을 거두었다. "형세를 보고 말하시지." 송혁은 말했다. "당신은 끝내 음양마군과 대적할 셈이오?" 연경소는 또 나서려고 입을 씰룩거리는 벽풍을 제지했다. "불과 몇 년 사이지만 그 몇 줄의 시는 수정되어야 할 것 같소. 이 연모는 그 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으니 응당 빠져야 마땅할 것이요. 그 러나 연모는 누구의 협박에 굴한 적이 한 번도 없소!" 송혁은 자기 사부의 위명을 빌어서 연경소를 겁주려고 했으나 신통 치 않았다. 사실 그와 같은 발상 자체가 별로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니, 청죽검객이라는 이름은 강호에서 음양마군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 었다. 주선옹 언철이 읊은 시는 기준이 모호하여 정확한 바는 못 되었 으나 상당한 신빙성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하고 있으니 바로 그런 셈이 된다. 수중의 판관필을 거꾸로 옮겨쥔 송혁은 다시한번 떠보았다. "한옥검을 넘겨주면 평생 호의호식할 만한 은자를 주겠소." 연경소는 뭔가 앞뒤가 안 맞음을 깨달았다. (아까는 저 부인에게 대라신검을 운용하는 검보를 달라고 하더니 이 제와서는 또 검을 달라고 하는 이유가 뭘까? 도대체 요사이에 일어나 는 일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들 투성이로구나! 저자는 음양마군의 제자 로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니 한번 떠보아야 겠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고 송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대 사부는 검과 검보 중 어느 것을 원하오?" 송혁은 의외로 그의 말투가 부드러운 것을 느끼고 억지 웃음을 지었 다. "둘 다요. 만일 당신이 검을 넘겨주고 이 자리를 떠난다면 오십만냥 의 은자와 야명주(夜明珠) 스무 알을 주겠소." 보통 사람이 들으면 숨이 넘어갈 제안이었다. 그야말로 평생 호의호 식할 만한 거액이었다. 한 마을에서 가장 부자라는 사람도 재산이 5만 냥 정도였던 때라, 그 열 배에 달하는 액수는 가히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연경소 정도의 무공이 되면 자연히 성격이 오만해지고 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는 법이다. 성격이 오만해진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 이 안중에 없다는 뜻이고,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먹고사는 데 전혀 하 자가 없으므로 설득의 대상에 돈이 거래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송혁은 강호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이치는 모르고 다만 돈이 최고인줄 알고 있었다. 그는 돈으로써 무공이 고강한 무사 들 뿐만 아니라 이만 냥에 적호방 전체의 세력을 한 달 동안 빌려쓰는 권리를 얻었기 때문에 이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연경소는 계속 그의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그것가지고 절세의 신검을 준단 말이오?" 송혁은 그렇지, 하고 말했다. "그럼 백만 냥을 주겠소. 아마 자손 삼대가 매일같이 탕진해도 남을 것이오. 야명주는 당연히 주겠소만." 연경소는 말했다. "백만 냥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닐진대, 나는 음양마군이나 귀하가 억 만장자라는 말은 못 들었소. 두 분이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소식도 없 었는데 어디에서 그런 돈을 얻었는지 궁금하구려." 송혁은 연경소가 완전히 꼬임에 넘어간다고 생각했다. "연형이 검을 넘겨주고 이곳을 떠나기만 한다면 자연히 검보도 나의 차지가 될 것이니 백만 냥이 아깝다고만 할 수는 없지요. 그리고 굳이 알고 싶다면 이야기해 주겠소. 나는 우연히 천축의 한 폐찰에서 한 떼 의 도적 무리들이 절을 급습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모조리 떠려 죽였 는데, 그 절에는 백여 명의 대식국(大食國) 상인과 십여 명의 천축(天 竺) 상인들이 묶고 있었소. 그들은 이미 도적들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 문에 그들의 재물을 잠시 내가 맡기로 했소." 연경소는 그의 말이 십중팔구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네가 모두다 죽이고 빼앗았겠지, 도적들이 그들을 뭐하러 죽이겠느 냐? 천축 일대에 출몰하는 도적들은 살인을 하지 않고 다만 약탈을 해 서 먹고살며, 강도질을 한 후에는 낙타에 일주일 분의 식량과 물을 매 달아 쫓아버린다고 한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느냐...) 괘씸한 생각과는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부드러웠다. "그 잘난 돈은 혼자 가져가면 되겠고, 나는 당신을 한바탕 훈계하여 죽은 원혼들을 달래야겠소." 그의 어조는 너무나 부드럽고 완곡했기 때문에 송혁이 이 안의 신랄 함을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얼마 후 송혁은 몸을 부 르르 떨며 말했다. "네가 나를 이토록 업수이 여기니, 나도 참을 수 없다!" 연경소는 송혁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투골쌍마에게 말했다. "형님들, 이제 한 번 몸을 푸시죠. 두 자루의 판관필만 조심하면 못 난 녀석을 훈계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 사준과 벽풍은 아까부터 별러오던 참이라서, 망설이지도 않고 저마 다 최대한 근엄하다고 생각되는 말투로 송혁을 꾸짖으며 공격하기 시 작했다. "너는 감히... 그런 일을 하다니 혼나서 마땅할 것이다!" "괴대 말이 맞다!" 한꺼번에 투골쌍마가 덮쳐오는 기세는 마치 두 마리의 독수리가 창 공에서 급강하하여 양을 채가는 형상과 비슷했다. 다만 양보다 사나운 늑대 한 마리가 대신 반격을 가하는 것만이 틀린 뿐이었다. "받아라!" 존대말이고 뭐고 없었다. 송혁은 공력을 끝까지 끌어올리고 판관필 을 미친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23 08/03 01:24 30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11) 연경소는 송혁이 제아무리 두 자루의 판관필을 귀신처럼 잘 쓴다 해 도 투골쌍마를 격퇴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도제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준과 벽풍의 무공은 독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기 때 문에 누구도 경시할 수 없었다. 음양마군 제갈극이 직접 오면 모를까, 그의 제자 정도로는 이백 초식을 넘기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싸움에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는 부인의 상세 때문이 었다. 그녀는 매우 심한 내상과 외상을 두루 입어서 가부좌를 트는 것 도 힘들어했다. 허벅지와 장단지에도 어김없이 중상을 입은지라, 앉은 자세가 불안정했다. 조식이 불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경소는 그녀의 외상을 돌보려고 했으나 금창약도 없었고 기경팔맥 의(氣勁八脈) 기가 원활하게 소통된다면 기적적으로 이 부인을 회생시 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인의 뒤에 앉아 천천히 양손을 장문 혈에 갖다대고 진기를 주입시킬 준비를 했다. 철썩! 철썩! 부인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뒤로 돌아 연경소의 따귀를 때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장같이 차디찼다. "감히 유부녀의 몸에 손을 대다니, 천하제일검이라고 해서 예외인줄 아느냐?" 연경소는 어서 치료가 급한데 그녀가 고집을 부리자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때가 어느 때인데 예절을 챙기는 거야! 정말 한 치의 앞을 못 내다 보는군!) 비록 시로는 크게 났지만 고통은 거의 없었다. 뺨은 태양혈(太陽穴) 과 가까이에 있어서 살이 얇고 민감한 부분이라 고통도 크게 마련인데 전혀 느낌이 없다시피 하는 것은 부인의 손에 힘이 없다는 증거였다. 연경소는 좋게 타일렀다. "부인의 상세는 무척 엄중하니 일단 내상을 치료하겠습니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이런 막무가내 부인과 말다툼을 한다는 것은 시간의 낭비일 뿐 아무 것도 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재빨리 손을 써서 그녀의 마혈을 짚어버렸다. 만일 그녀가 마구 소리를 지르면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미 리 아혈(啞穴)도 짚어두었다. 그녀는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데다가 뭐라고 욕을 하고 싶어 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체념하고 내상 치료에 전념하기로 했다. 다 리의 상처 때문에 제대로 앉기조차 힘들었다. (청죽검객 연경소는 의를 분별할 줄 알고 지혜로우며 무공이 고강하 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구나.) 그녀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연경소의 거센 진기가 양쪽 옆구 리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으니, 그것을 받아들여 온몸의 뭉쳐 있는 피를 밖으로 뽑아내고 진기를 돌려봐야 했다. 이때 연경소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중년의 부인답지 않게 가는 허리와 매끄러운 곡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연경소는 자기의 양손에 매끈한 살결이 잡히는 느낌을 받고 괜스레 가슴이 진동되는 것 같았다. 그는 아직 여색을 가까이 하 지 않았지만, 그런 느낌은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 자연스러 운 것이다. 누가 알아챌 리도 없었지만, 설사 안다고 해도 나무랄 사 람도 없었다. (흔들려서는 아니 된다. 여태까지 무도의 길만을 추구하며 살아왔지 않았더냐?) 그는 재차 진기를 돋구어 장문혈로 흘려보냈다. 그는 민감한 양손을 통해 부인의 임맥(任脈)에 속한 중극(中極)과 관원(關元), 두 혈에 응 어리진 피가 있어서 진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것을 치료하는 법은 아주 간단했다. 앞쪽에서 직접 진기를 불어넣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면 부인의 가슴과 아랫배에 손을 대지 않을 수 가 없었기 때문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동의없이 그런 행동 을 하면 설사 치료를 한다고 해도 그녀는 자결해 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임맥을 직접 뚫는 것은 포기하고 진기를 좀더 증강시켜서 그녀의 몸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부인은 갑자기 옆구리로부터 쏟아지는 공력이 두 배로 증폭되자, 허 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아혈이 제압되어 있기 때문에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마혈이 짚힌 상태라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야말 로 속수무책,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다만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 으며 임맥을 뚫으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연경소와 그녀의 이마에는 어느덧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약 반식경 이 지난 뒤 그녀는 간신히 중극혈을 뚫어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있는 힘을 다한 것이다. 이제 관원혈만 뚫으면 내상의 팔할 정도는 나은 것 이나 다름없다. 순간, 벽풍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악!" 연경소는 들을 수는 있었지만 볼 수는 없었다.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후에 벽풍이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지 만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부인의 상세는 아직 엄중한데 둘째 형님이 쓰러 지다니... 지금쯤이면 도리어 송가 녀석이 땅바닥에 뒹굴어야 하지 않 는가? 설마 그가 무예를 숨기고 있단 말인가. 그런 것은 아닐진대...) 그는 사준이 온힘을 다하여 송혁을 공격하는 것을 느낌으로 알아채 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정황을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사내 대장부가 양물을 달고 태어났으면 정정당당히 싸워서 이길 일 이지, 암수를 써서 사람을 해하는 것은 무림에 없는 도리다! 괴대에게 는 그런 전례가 없으니 내 장을 받아라!" 곧이어 송혁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당신도 부시독을 쓰면서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소? 나는 정당한 방 어를 한 것 뿐이오." 사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 내가 만약 너의 판관필을 꺾어 입에 쳐넣지 않으면 후레자 식이다!" 두 사람은 맹렬히 싸우면서 욕설을 주고받았다. 사준은 동생이 독에 해를 입고 나가떨어졌기 때문에, 송혁은 뜻하지 않게 암습이 성공하여 둘다 흥분한 상태였다. 고수들의 대결에 있어서 이성을 잃는 것은 절 대금기였지만, 둘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고 보니 오히려 주먹을 휘두 르고 판관필로 막는 기세가 흉흉하여 바람소리마저 매섭게 들렸다. 휙! 휙! 사준이 전력을 다한 공세가 연속적으로 작렬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 송혁의 판관필은 한 쪽이 반쯤 부러져 나가고 말았다. (제기랄...) 송혁은 사태가 크게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러진 판관필을 사 준에게 던져버리고 공세로 전환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의도는 간단하게 꺾여버리고 오히려 더 수세에 몰렸다. 그는 백학필초(白鶴筆招)의 수법으로 판관필을 위에서 아래로 길게 내리그었다. 사준의 공세를 저지시키고 조금이나마 숨돌릴 틈을 만들 려는 계책이었다. 그러나 사준의 오른손은 갈고리 모양으로 빠르게 움 직여 그의 어깨살을 한 줌이나 뜯어내었다. "으..." 송혁은 부상당한 왼쪽 어깨를 싸맬 틈도 없이 황망히 뒤로 물러났지 만 사준은 뜯어낸 어깨살을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성난 호랑이 처럼 공격해 왔다. (내 살...) 그는 비참한 기분이 들어서 어깨의 통증도 잊고 미친듯이 손을 움직 였다. 성난 호랑이의 기세에 미친 독수리의 기세로 맞서는 것처럼 보 였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또다시 사준의 응조수(膺爪手)가 판관필의 방어망을 뚫고 오른쪽 어깨마저 할퀸 것이다. 어깨가 뜨끔하다고 생각 한 순간에는 이미 사준이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뱉어버리고 다른 한 덩 어리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물건을 입에 넣고 있었다. 송혁이 그걸 보 고 자기의 몸이었던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불과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고통이 온몸을 휩쓸었다. 어깨를 다쳤으니 자연 팔힘을 쓰 지 못하고 판관필을 떨어뜨렸다. 그의 방어력이 상실되자 사준의 응조 공은 금방 가슴팍에서 반 근이나 되는 살점을 뜯어내었다. "으악!!" 송혁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면서 뒹굴었다. 어깨와 가슴은 근육과 허연 뼈가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심한 상처였는데 흙먼지가 들어가자 더욱 심한 통증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해약을 내놓아라." 사준은 냉랭하게 물었다. 그의 입가에는 씹고 있는 생살에서 흘러나 온 핏물이 점점이 맺혀 있다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옥에 혈귀(血鬼)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할 정도로 끔찍하게 무서운 모습이었다. 송혁은 고통 때문에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만 할 뿐 해약을 꺼낼 수가 없었다. 고개로만 해약이 있는 허리춤을 가르켰지만 사준의 눈에는 무 슨 뜻인지 모를 일이었다. "해약을 내놓아라." 사준은 다시한번 이렇게 말하면서 갈고리 같은 손을 한번 더 휘둘렀 다. 송혁의 허벅지 살이 한 줌이나 더 뜯겨나갔다. "으아아아아악!! 여기..." 간신히 허리춤을 가리킨 송혁은 거의 기절 직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혼절하지 않고 그 고통을 모두 느꼈다. 차라리 기절했더라면 무시무시 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깨어 있음으로 인해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한다. 해약..."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혁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해약을 던져주었다. 사준은 재빨리 그 약을 나꿔채고 나서 말했다. "네 행동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또 반근의 살이 뜯겨나갔을 것이다." 사준은 약병의 마개를 열고 구석에서 반듯이 앉아 독을 몰아내는 운 기 중인 벽풍의 입에 털어넣고 남은 반 병은 상처에 부었다. 사용법을 미처 물어보지 못했지만 가루약의 생김새가 십중팔구 먹이는 것 같았 다. 혹시 몰라서 뿌리기도 한 것이다. 약을 먹이자 금방 효과가 나타났다. 벽풍의 미간에 끼어있던 검은색 의 그림자가 엷어지면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사준은 뭔가 잊은 것 이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서 송혁에게 다가섰다. "제... 제발..." 송혁은 애원하는 표정으로 온몸을 떨었다. 그가 와서 또 살점을 뜯 어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살점이 몇 근이나 몸을 떠났기 때 문에 공포감은 극대화되었다. 사준은 오면서 주워들은 판관필 조각을 내보였다. "약속을 지키겠다." 그는 송혁의 입을 벌리고 판관필을 쑤셔넣었다. 물론 목구멍에 박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네가 씹지 않으면 내가 씹게 만들어 주겠다. 조금전에 말했지만 너 에게 판관필을 씹도록 하지 않으면 난 후레자식이다." 송혁은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이를 악물었지만, 다 물어지지도 않는데 씹을 수는 없었다. 사준은 애원하는 그의 눈빛을 외면했다. "분명히 말했다. 씹지 않으면 씹게 해준다고." 사준은 그의 이마를 꽉 눌러 땅에 고정시키고 아래턱을 세게 퍽, 하 고 쳤다. "우으으으..." 입이 벌어지지 않은 상태라서 신음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 만 얼굴가득 고통과 분노가 담긴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사준은 전혀 그런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직 안 씹었군." 그는 다시 손을 들어 더 세게 쳤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소리가 들리며 송혁은 다시 돼지 멱따는 목소리, 아니 그 이상의 비참한 비명소리를 내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 었다. 사준의 일장으로 말미암아 턱뼈가 부숴지면서 입을 다물었는데, 철로 만들어 담금질한 판관필이 부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대가로 이빨 이 모조리 부러지고 판관필의 양쪽 뾰족한 부분이 살을 뚫고 바깥으로 삐져나온 것이었다. 송혁은 이 순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통은 일찌 기 겪어보거나 듣지 못했을 뿐더러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도 악랄한 손씀씀이로 악명을 날리며 숱한 사람들을 죽였지만 이런 수 법은 생각치도 못했는데, 자기가 직접 당해보니 자기손에 죽은 사람들 의 고통을 알 것 같았다. 사준은 그제서야 울분이 풀리는 듯 말했다. "고통을 만끽하고 있어라. 너에게는 지극히 가벼운 벌이다. 감히 괴 이를 건드린 사람은 이렇게 되어도 싸지." 평소 같았으면 상당히 재미있고 즐거운 놀이를 한 후처럼 즐거운 표 정을 지으며 벽풍과 농담을 떠벌일 만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비참하더 라도 그들 형제의 눈에는 재미난 장난거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어릴때부터 독을 만지고 마셔온 괴이가 중독되어 사선을 넘나들고 있는 것이었다. 웃고 떠들 일이 아니었다. (내가 도와주마. 괴이는 죽어선 안돼. 그럼 나 괴대는 평생동안 재 미없게 살아가게 되고야 말거야.) 사준은 송혁을 두번 다시 쳐다보지 않고 벽풍의 운공을 도와 진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한편, 연경소는 부인이 진기를 받아들이다 말고 갑자기 앞으로 쓰러 져서 일어나지 못하자 당황하여 그녀의 혈도를 풀고 직접 관원혈을 뚫 고자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자기도 모르게 손을 떼고야 말았다. (이건... 기혈이 막힌게 아니다. 금속 같은 파편이 교묘하게 혈맥을 가로막고 있구나!) 그는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다. 도무지 어떻게 손을 쓸 방도가 생 각나지 않았다. 부인은 죽어가고 있는데... 부인이 간신히 눈을 뜨고 실날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 아이를 부탁합니다. 부디 잘 키워주시길... 소년의 이름은 진묵 (陳墨)이고 계집아이는 화미방(華美方)이에요. 동생아이는 화..."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고개를 푹 떨구었다. 더이상 말할 기 력을 잃은 채 영원한 망각의 세계로 떠난 것이다. 연경소는 자신을 탓했다. (아까 처음부터 임맥을 뚫었으면 미리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 면 자연히 구할 수 있는 확률도 높아졌을텐데, 어찌 예의만을 따져 사 람을 죽였단 말이냐? 경소야... 경소야... 넌 아직 멀었구나!) 연경소는 탄식했다. (사내아이의 이름을 듣지 못했으니 이또한 큰일이구나. 혹시 누나나 저 소년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 나중에 물어봐야 겠다.) 그는 눈길을 돌려 투골쌍마가 해독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고 다른 생각을 했다. (화씨 남매는 내가 맡아서 키우고, 저 소년은 두분 형님에게 맡기면 훌륭한 고수로 자라날 것이다. 마침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러한 결심은 장차 무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향후 무림에 또하나의 청죽검객, 아니 그를 능가하는 절세기재가 나타나 남 북으로 종횡하며 협행일로(俠行一路)를 걸어가게 되니 곧 그가 소요검 협(笑謠劍俠)이 되는데 그것은 십여 년 후의 일이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24 08/03 13:01 10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5장... 자라나는 잠룡(潛龍) (1) 숭산은 중원오악 중에서도 웅장한 경치를 뽐내는 곳이다. 산의 중턱 에 위치한 한 채의 절이 그 위용을 더해주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수백 개의 대전이 늘어서 있는 이 사찰의 이름은 소림사(小林寺)였다. 산봉우리 아래쪽으로 나 있는 소림사의 정문을 나와 한식경 가량 걷 다보면 한 그루의 커다란 측백나무가 넓은 그림자를 향화객들에게 드 리워주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높이가 팔 장에 이르는 나무는 측백류 중에서는 단연 발군이었다. 이 나무의 밑둥 부근에는 반들반들하게 닦여진 두 개의 바위가 있어 서 나그네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게 되어있었다. 만약 거기에 앉아 숨 을 돌리던 나그네가 조금만 주의해서 뒤켠을 본다면, 나무 뒤로 한 줄 기의 오솔길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솔길의 너비는 다섯 자 정도였으며, 청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여간 주의하지 않고 서는 발견할 수 없는 곳이다. 용감한 나그네가 이 오솔길을 따라 한 시진 정도 간다면 그는 하나 의 조그마한 표지판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명심정(明心停) 입구(入口)>라는 팻말이다. -+- -+- -+- 날카로운 광채를 시퍼렇게 번뜩이면서 허공에 칼로 만든 꽃을 수놓 는 그림자가 현란하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아무 도 모르는 가운데 피어나는 기세는 하늘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처럼 매 서워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듯하다. 검날의 행보는 두텁게 낀 먹구름을 둘로 갈라놓는 것처럼 예리하면서도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다. 인적 드 문 곳에서 피어나는 잠룡의 검식인가. 한 자루의 묵검(墨劍)이 움직이는 모양새는 절도와 혼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상당히 무거운 듯, 검을 휘두르는 소년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 울이 송송이 맺혔다. 가끔씩 내뱉는 기합소리는 검초의 빠르기를 더해 주었다. 소년은 힘겨운 표정을 지었지만 검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그는 손목 과 어깨에 힘을 돋구어 검초를 계속 휘둘렀다. "어깨힘이 너무 들어갔다. 견골을 부드럽게 하고 진화(眞火)를 끌어 올린다고 생각하여라." 소년은 그 말을 듣자 뭔가 깨닫는 점이 있는 듯 어깨에 잔뜩 주었던 힘을 풀고 검끝에 내경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즉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생동감있는 초식이 전개되었다. 그는 몇번 더 검을 휘두르다가 돌연 옆에 흐르는 냇가의 물결 사이로 검을 내리꽂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훌륭하다. 마지막 탈명비화(奪命飛花) 일초가 좀더 정확해지면, 청 죽십이식의 검초 부분은 완전하게 되는 셈이다." "저는 좀더 해야할 것 같아요." "아니다. 좀 쉬자꾸나. 그리고 물고기를 하나 잡았으니 매운탕을 끓 여야 하지 않겠니?" 소년은 공손히 대답하고 물가에서 검을 끄집어 올렸다. 검의 끝에는 꽤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꿰어져 있었다. 스승과 제자는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다. 물고기를 끓여먹기 위 해서 갖은 양념이 든 물을 불 위에 올려놓았다. 사제(師弟)가 명심정에 머물러 은거한지도 어언 7년이 흘렀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부는 청죽검객 연경소요, 제자는 화씨 가문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태산의 한 공터에서 그 난리가 있은 후 투골쌍마는 이 아이를 자기 들의 전인으로 삼는다고 우겼다. 하지만 연경소는 쉽게 아이를 내주기 가 싫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울어 보채거나 하지 않는 타고난 침착 성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상승의 무공을 익히기에 적 합한 골격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한참이나 그렇게 다투던 연경소와 투골쌍마의 제자쟁탈전(?)은 연경 소의 잠정적인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준과 벽풍은 청죽검객의 절예를 물려주겠다며 의외로 강경하게 버티는 동생의 의견에 잠시 굽 혀서 진묵이라는 소년과 화미방이라는 소녀의 골격을 자세히 살펴보았 다. 확실히 둘다 사내아이보다는 못해도 훌륭한 골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투골쌍마는 화미방을 공동 전인으로 삼기로 하고, 자신들의 거 처인 천마곡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연경소는 진묵을 데리고 부근 객점으로 가서 사내아이의 이름을 물 어보았지만 그는 글을 몰랐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에게 직접 물어 보았지만 우물거릴 뿐 이름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연경소는 이 름을 하나 지어주리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 아이의 족보가 적힌 쪽지가 대라신검의 검보 안에 끼워져 있어서 화서운(華瑞雲)이라는 이 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화무, 어머니는 바로 그 부인으로 팽옥(彭鈺)이었다. 족보의 흔적은 구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중 연경소의 눈에 확 뜨인 인물은 화서운의 조부인 화결(華結)이었다. 연경소는 그걸 보 고 나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화결이라는 이름은 연경소가 어렸을 때 사부에게서 들은 일이 있었 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별호는 불패신군(不敗神君)으로 무림에 서 백 년에 한 번 날까말까한 기재였으며 무적으로 군림했다는 소리도 아울러 기억났다. 하지만 하늘은 천재를 시기하는 법이라 그는 서른둘 의 나이에 단명하고 말았는데, 그때부터 화씨가문의 가세는 기울기 시 작하여 무림세가의 명렬에서 이름을 감추고 말았다. 기껏해야 군소문 파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내력을 가진 화씨 문중일진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으며 또 대라신검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길래 가문 전체가 몰살당하게 되었는지 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연경소는 대라신검을 한 번 훑어보았다. 익혀보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 검보를 본 이후 그는 밤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검초에 있어 서의 중후함과 경쾌함 양면이 모두다 청죽십이식을 압도하는 것 같았 으며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초식을 동원해도 대라신검의 초식을 백초 이상 받아넘기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만약 화서운이 이것을 모두 익힌 다면 강호에서 보기드문 고수가 탄생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25 08/03 23:39 150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2) 한 마리의 물고기로 저녁을 때운 화서운은 다시 묵검을 집어들고 연 검 준비를 했다. 이 검은 자체로 무게가 81근이나 나가는 것으로, 관운장이 사용했다 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와 비견될 만한 중병기였다. 연경소가 평소 에 명심정에서 검을 연습할 때 쓰던 중검을 화서운이 대물림하여 쓰는 것이다. 검자루도 강철로 되어있어 무겁기 짝이 없었고, 거무튀튀한 색깔은 곤오석(昆烏石)을 약간 섞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다. 검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날이 없고 모두 둥글둥글하다는 것이다. 화서운은 그 외에도 몸에 오십 근이 넘는 납덩어리를 매달고 있었는 데, 처음에는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였다. 연경소는 힘겨워하는 화서운 에게 이것들의 효용을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 "네가 다른 사부를 섬기지 않는 이상, 나에게는 주로 검법을 전수받 을 것이다. 물론 기초적인 권장술은 가르쳐 줄 것이지만 보다 높은 기 준은 검에 설정해야 한다. 무릇 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검법(劍法) 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르다. 즉 낮은 수준부터 열거하자면 검술(劍術), 검예(劍藝), 검도(劍道)의 순이 되는 것이다. 네가 배워야 할 것은 검도이다. 보통 시정잡배들이나 일반 무림인들이 배우는 것은 검술이다. 말 그대로 검을 쓰는 기교이며, 오랜 연습으로 고수가 될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술을 배우고 익히며 그 것으로 평생 만족한다. 검술이 극치에 달한 사람은 다른 것을 꼭 배우 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다음의 경지가 검예로, 예술의 경지로 승 화시킨 고수를 말한다. 사실 이 경지에 이른 사람도 적지 않다. 마음 먹은대로 따라가는 신검의 경지이니, 일류고수들이나 각파 장문인들은 여기에 속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검의 길을 추구하는 무사들이 있으니, 당금 무림에서 다섯 사람도 안 될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직접 몸 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도 먼 거리에서 진기로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것 이다. 나도 무림에서 칼쓰는 사람 중 손꼽히는 위치에 있지만, 아직까 지 검도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검도의 극상승을 어검술(馭劍術) 혹 은 이기어검(以氣御劍)이라고도 하는데, 기로써 검을 다스려 능히 100 보 밖에 있는 적을 살상할 수 있음이다. 네 사부는 겨우 그 입문 단계 인 검기(劍氣)를 익혔을 뿐이다. 너는 골격이 청기(淸奇)하고 매우 총 명하니, 천품(天品)을 타고나서 무예를 익히기에 적합하다. 내가 먼저 제자에게 해줄 것은 체력을 강화하고 내공을 기르는 일이다. 명심정의 주변에서는 다행히 기이한 약초가 적지않게 나니, 그것으로 몸을 보전 하도록 하여라. 또하나 당부할 것은, 검을 연마할 때에는 언제나 몸에 납으로 된 장신구를 걸치고 하도록 해라. 아주 힘들 때가 아니면 항상 착용하되, 무리하지 않도록 해라. 어린 너에게는 어렵겠지만, 그 무게 는 오십 근 가까이 될 것이며 네가 써야하는 검은 관운장의 청룡언월 도만큼이나 무겁다. 이것은 기초 체력을 길러주고 내공의 증진을 돕는 것이니만큼 소홀히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주로 가벼움과 쾌속함을 장 기로 삼는 검법에 중후함을 더하여 상승의 경지에 빨리 이르도록 하려 는 배려이다." 올해로 화서운의 나이는 열여섯, 건강한 소년이었다. 처음 연경소를 따라 명심정에 왔을 때에는 그야말로 코흘리개 어린아이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키가 쑥쑥 자라 사부와 거의 비슷했다. 얼굴은 썩 잘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못생긴 편도 아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검미(劍眉)가 치켜올라간 무사형의 얼굴도 아니요, 체형과 적절을 이루는 문사풍(文 士風)의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소년은 언제나 잘 웃었으며, 성격이 쾌활했다. 명심정이 있는 계곡 에는 수 년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결코 투정을 부리거나 외 로워하지 않았다. 물론 심중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밖으로 드러내 지는 않았다. 소년은 언젠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사부님, 제 누나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나요? 장묵 형은요?" 연경소는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네 누나는 지금 이 사부의 두분 형님들이 맡아서 기르고 있으니 필 히 훌륭한 여협(女俠)이 되어 강호를 종횡할 것이다. 묵아는 스스로가 천하제일 무공의 본산지라는 소림사의 속가제자가 되기로 하여 그리로 갔단다. 네가 스무 살이 되면 자연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연경소는 화서운을 스무 살까지만 기르기로 했다. 아무와도 손을 써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한 실력은 알 수 없었지만, 내심 그는 화서운 이 지금 이대로 강호에 나간다고 해도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 라고 생각했다. 소년의 일과는 매우 바빴다. 새벽녘에 일어나서는 물을 긷고 장작을 패서 아침밥을 지어야 했다. 어렸을 때에는 물통을 짊어질 수 없어서 조그만 양동이에 여러번 옮기 곤 했지만 지금은 오십 근의 납덩어리를 매달고도 거뜬히 왕복하곤 한 다. 아침을 지어먹은 후에는 연경소에게 글을 배웠는데, 사부가 일대 석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웬만한 서당의 훈장만큼은 글을 알고 있어 서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한 후였다. 특히 화서운은 시와 글을 좋아해서, 당시선(唐詩選) 같은 책들을 탐 독했다. 무공보다도 글을 좋아하는가 싶었지만 무예에는 더 깊은 관심 을 보여서 연경소는 겨우 안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글을 배운 후에는 매일같이 연경소와 더불어 바둑을 한 판 두었다. 소년은 이상하리만치 바둑에 집착을 보여서, 연경소의 실력을 불과 일 년만에 따라잡았다. 연경소의 바둑은 황궁의 태사(太師) 석보(石寶)와 교류하면서 익힌 것이라 국수격의 수준급이었다. 화서운이 따로 바둑 을 연구할 시간이 없어서 연경소를 크게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맞두어 서 연경소가 이기는 경우는 열 판에 하나, 혹은 두 번에 불과했다. 이 들 사제가 바둑을 두는 이유는 정신을 가라앉히고 수양을 쌓기 위함이 었다. 또한 둘다 바둑두기를 어느것 못지 않게 좋아한다는 이유도 있 었다. 그리고 나서 화서운은 점심을 짓는다. 점심은 보통 사냥을 해서 고 기를 구워먹는데, 덕분에 화서운의 활솜씨는 많이 늘어서 날아가는 꿩 도 한 번에 맞출 정도가 되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야 본격적인 무예수련에 들어가는데, 연경소는 독 문의 심법이 아닌 대라신검 안에 포함된 독특한 내가운기법을 쓰도록 시켰다. 자기의 장기는 검법이지 내공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라신검은 확실히 뛰어난 곳이 있어서 '신(神)'자를 붙여도 손색없 는 것이었다. 서장과 연검(鍊劍), 그리고 종장(終章)으로 나눠져 있는 검보는 모두 어려운 말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경소가 번역본을 하나 만들어서 화서운에게 주었다. 물론 연경소는 화씨 가문의 유품이라 그 것을 익히지 않았지만, 옮겨적는 과정에서 깨달은 점은 하나둘이 아니 었다. 서장은 검을 운용할 때 발을 쓰는 법을 기술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부분부터 연경소의 놀라움이 가중되었다. 칠성보(七星步)로 명명되어 있는 이 수법은 청죽검객의 예리한 견식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 다. 다만 암암리에 육합(六合)과 팔괘(八卦)의 원리를 포함하여 무궁 무진한 변화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외에 서장에는 몇 수의 발길질이 실려 있었는데, 그것은 초보적인 것이라 연경소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기도 알고 있는 것이었 기 때문이다. 연검편에는 실제로 검을 쓰는 법이 나와 있었다. 모두 십팔로(十八 路)인 대라신검은 기수식 소요등선(笑謠登仙)에서부터 제 18로인 화룡 성채(火龍星彩)에 이르기까지 오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청죽십이식 과 비교해도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연경소가 한번 더 감탄, 아니 완전히 생각을 달리한 것은 마지막 종 장의 내용이었다. 종장에는 검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공력을 쌓는 방법, 즉 내가토납법(內家吐納法)의 일종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대수 로울 것이 없었다. 단지 그가 놀란 것은 최후의 네 장에 쓰인 내용 때 문이었다. <상승검리(上承劍理)>라는 제목이 붙여진 그 내용과 끝부분은 누구 라도 경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즉 세상에는 수많은 검술이 존재하며 누구나 최고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한낱 진기의 낭비에 불과하며, 실제 검의 세계는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내용이 골자를 이루고 있었다. 다 른 말로 한다면 어떤 사람이 초식의 오묘함만을 추구한다면 순간 그는 하승(下承)의 경지로 떨어져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것 이었다. 이 말은 새삼 천하제일검객을 일깨워 주었다. 연경소는 가끔 이러한 생각을 했다. (쌍검의 다른 하나인 검마(劍魔) 냉약은 이런 경지일까?) 물론 응답받을 수 없는 질문이건만 연경소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만병의 제왕이라는 검을 쓰는 무사 였기에.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26 08/04 17:14 13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3) 8년 동안 계속 되풀이되는 고된 수련은 화서운을 점차 고수로 변모 시키고 있었다. 내공과 검법의 기초가 확실히 닦이고, 초식의 정묘함 은 거의 연경소 수준이 되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연경소는 내공을 전 혀 쓰지 않고 초식으로만 화서운과 겨루는 논무(論武)를 했는데, 요새 들어서는 화서운의 전패에서 무승부로 끝나는 일이 허다했다. 화서운은 강호 각파의 무술을 닥치는대로 습득했다. 물론 역근경(易 筋經)이나 태극혜검(太極慧劍) 같은 비전절기는 익힐 수 없었지만, 강 호에 널리 알려진 수법들은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초식의 정교함으로 는 당해낼 자가 거의 없을 지경까지 수련을 쌓아간 것이다. 내공은 확실히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연경소는 계곡 과 산중을 샅샅이 뒤져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영약을 먹이곤 했다. 산삼 이나 영지 같은 영초(靈草)에서 소환단까지, 다양한 외부효과로 인해 화서운의 내공은 같은 기간을 수련한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높은 편 이었다. -+- -+- -+- 이튿날 아침, 연경소는 일찍부터 행장을 꾸렸다. "어디로 가시지요?" "조사할 것이 있다. 아직 네가 알 바가 아니다. 스무 살이 되면, 이 사부와 같이 강호를 종횡할 것인데 뭘그리 급해하느냐?" "아휴... 사부님두, 전 혼자서 협행을 할 거라구요." "하하... 그러려무나. 아무튼 지금은 내공을 쌓는 일에 열중해라." "시키실 일은 없어요?" "모옥 안에 단화(丹火)를 피워 놓았으니 사십일 동안은 절대 꺼뜨리 지 않도록 해라." "이번에는 또 무슨 약을 제조하려고 하죠?" "엄심단(俺心丹)을 한 서른 알 정도 만드려고 한다." "해독약 같은게 아니라요?" "해독약 따위는 사실 필요가 없단다. 남을 암산할 때에는 보통 기상 천외한 독을 쓰게 마련이지. 그리고 웬만한 독이라면 네 내공으로 몰 아낼 수 있지 않니?" "사부님께서 저에게 주신 옥합에는 아직 빈자리가 열 여덟개나 있는 데 엄심단이 들어가게 되나요?" "이미 천보환(天保丸)과 소환단은 열 알씩 넣었고, 제독단(制毒丹) 열 알도 넣었지?" "그래서 열여섯 개라니까요." "이 녀석 말투좀 봐라? 내 다녀와서 한바탕 혼을 내주어야 겠군. 하 하... 겁먹을 것 없다. 혼이 난 다음에는 내공이 또 늘어날테니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정말 그 칠성보를 역(逆)으로 딛으면서 검을 쓰는건 어려워요." "이번에 엄심단이 완성되면 여덟 알을 채워주고, 마지막 여덟 알은 나중에 또 생각해 보자꾸나." "사부님은 못하는게 없어요." "내 어찌 만 가지 일을 다 알겠느냐. 환약 만드는 법은 지난번에 황 궁의 상관백(上官栢) 노형이 가르쳐 줬단다." "그분은 의술이 뛰어난가요?" "하하... 황궁의 어의(御醫)인데 의술이 어떻겠느냐? 강호제일의 귀 수마의(鬼手魔醫)와 비교한다면 비슷하거나 더 높겠지. 나머지 사람들 은 감히 그와 견줄 수 없단다." "그래요? 이번엔 얼마 있다 오실거죠?" "엄심단이 완성될 때쯤 다시오마." "그러세요. 행장은 다 꾸리셨나요?" "하하... 그래." 연경소와 화서운의 대화는 이 정도로 끝났다. 청죽검객이 떠날 때가 온 것이다. 연경소는 매해 봄이 되면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외출을 하곤 했는데,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러 가는지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가끔 화 서운이 물어보아도 나중에 가르쳐 주겠다며 얼무어버리기가 일쑤였다. 사실 그는 강호에 나가서 몇 가지 일을 조사하고 있었다. 여행차 팔 도유람을 떠난다고 짐짓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강호의 커다란 비밀을 캐내고 있었다. 강호에 한 번 나갈 때마다 그는 투골쌍마의 행적을 찾았다. 원래 사 준과 벽풍은 천마곡에 머물면서 화서운의 누나인 화미방을 길러내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5년 전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었다. 또하나의 큰 목적은 그늘에 숨어서 강호의 많은 부분을 쥐고 흔들고 있으리라 예상되는 거대조직의 뒤를 쫓는 일이었다. 여태까지 별 성과 가 없기는 했지만, 연경소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암중에 무림을 장 악하려고 하는 문파, 혹은 단체가 있다는 것을. 유일한 단서는 나빈에 게 고독을 시전하여 꼭두각시처럼 부려먹은 신비의 녹의인과 투골쌍마 를 사주하여 한옥검을 노린 녹의녀였다. 그들의 정체를 벗겨낼 가능성 은 극히 희박했지만, 유일하게 표면에 드러난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수가 없는 이상 그쪽을 파고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암중에서 무림을 장악하려고 단단 히 준비를 한 그들이 쉽게 꼬리를 밟힐 리도 없었다. 가장 간단한 방 법은 그들이 궐기할 때까지 은거하여 살고 있다가, 완전히 정체가 드 러났을 때 부딪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나중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 될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마지막 목적은 다른 것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몇 년 동안 강호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져, 과거 주선옹 언철이 남겼던 몇 수의 시 는 더이상 통용되지 않고 있었다. 강호가 원래 변동이 심하고 영원한 패자가 없는 곳이기는 했지만 이 토록 격동을 보인다는 것은 풍운(風雲)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연경소는 자기가 무림의 패자가 된다는 계획을 한 적도 없고, 언감 생심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기의 무공과 덕이 부족함을 자기 스 스로가 통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무공이란 있을 수 없다. 마치 완전한 인격자가 없는 것돠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어찌 터럭만한 실수도 없 겠는가? 아마 공자도 생전에 많은 죄를 지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위선자라 칭할 수 없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만일 완벽한 무공이 탄 생한다면, 무림은 그 무공을 익힌 자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며 영영 헤 어나지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번개를 빌어 싸운다고 해도 헛점이 있 게 마련이다. 나의 청죽십이식 또한 과거에는 완벽하다고 느꼈으나 대 라신검만도 못하지 않은가? 무공으로 무림을 통일하여 군림한 역사가 없는 이상 어두움 가운데 있는 적은 필히 이상한 계교와 술책, 방문좌 도(傍門左道)의 무공이나 사술(邪術)로 세력을 넓혀올 것이다. 어쩌면 많은 고수들이 포섭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군자성인이라도 자기와 가까운 것을 먼저 찾는 것은 극히 당 연한 일이다. 연경소는 언제나 소용없는 줄을 알면서도 천마곡에 들려 서 투골쌍마의 흔적을 재확인하곤 했다. 그들의 행적을 찾는 것은 곧, 제자의 누나를 찾는 것이기도 했다. 연경소는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어쩌면 그 녹색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단순한 문파로서, 한옥 검이라는 희대의 신병이 탐이 나서 그런 술책을 꾸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지어 버리기에는 적지않은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면 왜 태을진인을 죽여가면서 그런 짓을 했을까? 그리고, 화 산파의 장문인 정도라면 설사 조사령이 적 수중이 있더라도 대의를 위 해 그들을 처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문파의 규율이 얼마나 엄격하며 조사령이 절대적인지에 대해 잘 모르고 하는 생각이었지만, 나빈이 다른 파의 장문인들에게 알리지 도 않고 그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은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죽을 뻔 했던 기억은 언제나 연경소의 등골에 식은 땀을 흐르게 만들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27 08/05 17:18 18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6장... 어두운 그림자(暗影) (1) 연경소는 떠나면서 한 가지의 물건을 내주었다. 허리에 두르는 띠 같이 생긴 검이었는데, 그는 단단히 주의를 주며 절대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오늘부터 이 검은 네 것이다. 나에게는 청죽검이 있지만 네게는 특 별히 쓸만한 검이 없어서 이것을 준다. 이 검의 이름은 한옥신검으로, 절세의 기병(奇兵)이니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말아라. 평소에는 요대(腰 帶)로 하고 다녀도 될 것이다. 적을 만났을 때에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뽑지 말되, 네가 아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뽑지 말아라. 천하에서 이 검을 보고 욕심내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까. 검을 뽑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허리띠를 풀듯이 오른쪽에서 잡아 빼어 손잡이를 잡고 손가락 끝에 내공을 주입시키면 된다. 네가 이 검 을 쓸 일이 없기를 바란다." 화서운은 혼자 넓다란 계곡 한가운데 남게 되자, 외로움과 홀가분함 을 함께 느꼈다. 자기 혼자 남게 되어서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 했 지만, 반면에 뭐든 눈치를 살피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만으 로도 얼마나 매력적인가! 소년은 감히 신검(神劍)이라는 이름을 붙인 자기의 칼이 얼마나 좋 은 것인지 알고 싶었다. (이렇게 허리에 오래 감고 있다가는 차가운 기운이 뼛속에 스며들어 버리겠는걸?) 허리에 감고 있을 때 한기가 스며드는 것은 한옥신검의 신기한 묘용 중 하나였다. 무공을 익힌 사람은 아주 뜨겁거나 차가운 기운이 몸 속 으로 침투하게 되면 자연히 운공해서 항거하는데, 그럼으로써 자연스 럽게 내공이 증진되는 것이다. 하루 열두 시진을 계속해서 허리에 두 르고 있으면 운기조식을 하지 않아도 내공이 저절로 늘어나는 법이니, 그야말로 날카로움에 못지 않은 묘용이었다. 이런 신기한 점은 연경소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명심정으로 돌아오자마자 연경소는 정자 아래에 숨겨두었던 한옥검 을 꺼내어 청죽십이식을 한 번 펼쳐 보았다. 눈을 감고도 펼쳐내는 익 숙한 검법이었는데, 그 위력이 판이하게 틀려진 것을 보고 놀라지 않 을 수가 없었다. 검극(劍極:칼의 끝부분)에서 한 줄기의 차가운 기운 이 석 자나 뻗쳐나가 일종의 두터운 보망(保網)을 만들어 내었다. 호 신강기를 검 끝에서 휘두르는 격이 된 것이다. 같은 무공수위가 아니 라 십 년 정도 무공을 더 쌓은 사람이라 해도 감당해낼 수 없을 것 같 았다. (이런 검이 악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을 해치는 데 사용 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은 사제가 공통적이었으니, 그만큼 한옥검의 위 력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쇠붙이와 옥을 무 베듯이 자른다는(단금절옥:斷金切玉) 옛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해 만들어진 말 같았다. 화서운은 이런 보검이 영원히 자기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니 무사된 사람으로서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 만, 무공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최고의 무공과 최고의 병기를 추 구하게 마련이었다. 장법이나 권법을 주로 쓰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병기를 쓰는 사람의 대부분은 검객이었고 검객이라면 누구나 꿈에서라 도 동경해 마지 않을 그런 신물이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이다. "하하하하..." 화서운은 크게 웃었다. 포복절도할 정도로 재미있어 웃은 것은 아니 었지만, 계곡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공력을 돋구어 사자후(獅子 喉)를 쏟아내고 나자 가슴이 후련해지며 만장이나 되는 웅심이 치솟하 오르는 것 같았다. "허허허허..." 화서운은 깜짝 놀랐다. "누구요?" "허허허허..." 누군가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정체를 드러내시오." 화서운은 한옥검을 다시 허리에 두르고 묵검을 집어들었다. 숨어있 는 사람이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불현듯 사부님의 당부가 생각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왔다. "정체를 드러내기가 싫은데? 허허허..." 목소리에는 적의가 없는 것 같았다. 화서운은 약간 노기를 품었으나 그의 목소리가 평온하고 거슬림이 없는 것을 듣고, 봄바람에 눈 녹듯 이 풀어버렸다. "고인은 누구신지 모습을 나타내시지요." 목소리가 대꾸했다. "나는 키가 그렇게 크지 않은걸. 내가 어렸을때 사람들은 날더러 난 장이라고 했지." 화서운은 이상하게도 그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당신은 누구시지요?" 그는 대답했다. "그저 신비객이라고 해두자꾸나." 화서운은 물어보았다. "스스로 신비한 체 하는건가요? 그건 그렇고 여긴 왜 왔는지 모르겠 군요." 신비객은 대답했다.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라. 난 다만 그 한옥신검이라는 것을 한 번 보려고 왔을 뿐이니까." 아무리 들어봐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화서운은 혹시 신비객이 투 골쌍마라는 사부님의 형이 아닐까 생각했다. "당신은 혹시 무림에서 투골쌍마라는 별명을 얻고 있지 않은가요?" 신비객은 코웃음쳤다. "그들은 나와 비견될 자격이 없다." 화서운은 의아해했다. (사부님이 말씀하시기를 투골쌍마는 무림에서 지극히 큰 위명을 얻 고 있으며 마도에서는 악명이 높아 상대하기를 꺼려한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누구길래 그분들을 무시하지?) "당신은 아무래도 모습을 나타내는 게 좋겠군요." 신비객은 나직하게 말했다. "내 나이 칠십이 다 되도록 당신이라는 말을 들어본 지가 꽤 오래되 었는데, 뜻밖에도 이런 곳에서 당신이라는 호칭을 듣는구나. 하하, 정 말 맹랑한 꼬마로다." 화서운은 염탐하듯 말했다. "당신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데 어떻게 젊은지 늙었는지, 괴물인지 사람인지 안단 말이에요?" 신비객은 가만히 타일렀다. "꼬마 녀석이 말에 가시가 있구나. 넌 지금 내가 괴물 같다고 놀리 는 것이냐?" "그런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름이라도 알아두는게 좋겠군요. 난, 화 씨 성을 가졌고 이름은 서운이라고 해요." 신비객은 한동안 잠잠하더니 갑자기 말했다. "참으로 좋은 이름이구나. 화씨라, 넌 불패신군 화결 노선배와는 어 떤 관계가 되지?" 화서운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앗, 그분은 제 조부님인데요?" 더욱 놀란 것은 신비객이었다. "네... 조부님이라고? 그렇다면 네 아버님의 성함은 혹시 외자로 무 자를 쓰지 않느냐?" "맞는데요, 당신은 아는게 많군요." "허허..." 기가 막힌 듯 혀를 찬 신비객은 높이가 십여 장이나 되는 나무 위에 서부터 낙영비연(落影飛燕)이라는 신법을 써서 떨어져 내렸다. 유려하 기 이를데 없는 동작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화서운도 그 경공술을 작년에 배웠지만 공력이 너무나도 떨어져서 제대로 펼칠 수 없었는데, 이렇듯 깨끗하게 펼치는 고수를 보자 그만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나는 세상에서 이 낙영비연이라는 한 수를 우리 사부님이 가장 잘 하시는줄 알았는데, 뜻밖에..." 화서운은 신비객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28 08/06 02:37 165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2) 신비객의 얼굴은 갓 마흔이 되었을까 말까한 중년 유생의 그것이었 다. 오십줄이라고 해도 고개를 내저을만한 얼굴이었는데, 숫제 칠십이 다된 나이라고 하니 누가 믿겠는가? "당신은 나쁜 사람이군요. 사부님은 남을 속이는 게 나쁘다고 했어 요." 신비객이 되물었다. "네 사부가 누구지?" 화서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만들었다. "아니, 당신은 아까부터 숨어있지 않았나요?" 신비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내가 온 건 반 각도 안 되었지." "그것 참 이상하군요." "왜 그러지?" 잠깐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냥 심각한 표정을 짓던 화서운은 금방 아까의 웃음짓는 얼굴로 돌아왔다. "아니, 당신은 아직 이름을 말 안했어요." 신비객은 딴청만 부리다가 돌연 엉뚱한 제안을 했다. "네가 날 제압하면 가르쳐 주마. 그리고 난 거짓말장이가 아니야." "아니면 허풍장이 아저씨겠지요. 어째서 칠십 살이라고 했나요? 늙 어보이는게 좋나요?" "허허... 아니란다. 노부는 주안술(朱顔術)을 익혀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늙어보이지 않고 젊었을 때의 모습을 간직하는 거란다." "그런 것이 있었나요? 그럼 왜 우리 사부님은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요?" 신비객은 이 소년이 사부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알았다. "네 사부가 누구지?" 화서운은 혀를 낼름 내밀었다. "이제보니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닌것 같군요. 하지만 아까 그 경공 을 보니 제 무공으로 제압하는건 안 되겠어요." 신비객은 자기가 딴소리를 하자 소년도 딴소리를 하는 걸 보고 여간 영특한 소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의 사부는 누구지? 그걸 알려주면 내 이름을 알려주겠다." 화서운의 눈동자가 한 바퀴 돌았다. 순수한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매 라서 구슬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당신은 나랑 흥정을 하자는 건가요?" 신비객은 어이가 없었다. "허허!! 노부 칠십 평생을 살면서, 스물셋에 출사표를 던지고 서른 둘에 명성을 얻어 마흔에 강호의 십대고수 반열에 들었거늘 흥정을 하 느냐는 소리는 처음 듣는구나." 소년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당신은 제갈공명도 아니면서 출사표를 던지나요?" 신비객은 소년이 귀여워졌다. "허허... 출사표를 던진다는 것은... 그러니까... 무림에 첫 걸음을 한다는 뜻이다." 화서운은 미소지어 보였다. "하! 그렇군요. 좋은걸 배웠어요. 저희 사부님 이름을 가르쳐 드릴 께요. 성은 연자를 쓰시고요..." "이름은 경소겠지?" "아니, 알면서 물어보셨군요? 역시 거짓말을 하는군요." 신비객도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해 보거라. 난 네 사부의 이름을 맞췄다 뿐이지 절대 거짓 말을 하지는 않았다." 화서운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요." 신비객은 흡족해했다. "내 이름은 위기자(圍棋子) 오붕(吳鵬)이라고 한다. 들어본 적이 있 느냐?" 화서운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런 이름을 못들어 본 것 같았다. "모르겠는데요." 오붕이라고 이름을 밝힌 신비객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좋아하다 못해 미치다시피 했지. 내 무 공도 자연히 바둑과 관계깊은 것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그래서 나의 별명을 위기자라고 했단다. 너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아뇨. 우리 사부님도 바둑을 좋아해서 저와 항상 바둑을 두곤 하셨 는데, 그런 말씀은 안하셨어요." "그렇다면 잘됐다. 나와 한 판 두자꾸나." 오붕은 갑자기 몸을 솟구쳐 아까 숨었던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 높 은 곳을 단번에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굴곡이 심한 나무결이라서 몇 번 발을 구르자 금방 가지 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짊어지고 다니 는 행랑을 가지고 내려왔다. "이 물건들은 내가 생명만큼이나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다." 그러면서 그는 행랑을 풀어 몇 가지의 물건들을 내놓았는데, 대부분 바둑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접을 수 있는 한치 두께의 바둑판과 돌로 만든 듯한 바둑알, 그리고 오래되고 낡아서 거의다 헤진 바둑책 한 권 이 모두였다. 그는 바둑알 통을 열어보더니 백돌이 든 통을 건네주었다. "자, 네가 먼저 두거라. 나는 세상에서 적수가 없다고 자부하는 사 람이니 정신 바짝 차려두지 않으면 십결을 모두 배우지도 못하고 항서 를 써야할 게다." 화서운은 앞뒷일이야 어찌됐건 간에, 상당히 좋아하는 바둑을 두게 되었으므로 기뻤다. 소년은 바둑판 앞에 단정하게 앉아서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오붕은 만족해서 웃었다. "허허... 제대로 배웠구나. 기재(棋才)가 있다면 노부의 제자로 삼 아도 좋을텐데 이미 사부를 모셨으니... 더군다나 그가 청죽검객 연경 소라면 노부가 한 수 양보해야 겠구나. 어서 두거라." 화서운은 오색 빛깔이 영롱하게 휘돌면서도 깨끗한 흰색이 돋보이는 백돌을 하나 집어 오른쪽 위의 화점(花點)에 착점했다. 손에서 백돌이 막 떨어지는 순간 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접착제로 붙은 듯 바 둑판에 밀착되었다. 소년은 탄성을 질렀다. "이야, 자석이군요?" "그래. 어찌 보물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노부는 평생동안 이것을 만 들었지만 단 두 조밖에 만들지 못했지. 한 조는 노부의 은신처에 있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워낙 바둑에 미쳤다보니, 달리는 말 위에 서건 흔들리는 배 위에서건 언제나 수를 연구했지. 그래서 자석 바둑 판을 생각해낸 것이지." "그렇군요." 오붕은 가만히 손을 들어 반대편의 소목(小目)에 돌을 올려놓았다. 소목이라는 곳은 귀의 네번째 세력선과 세번째 실리선이 일치하는 곳 으로, 상황에 따라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으며 한가할 때에는 날일자 나 눈목자로 두면 귀가 그대로 흑집이 되어버리는 다목적의 곳이었다. 화서운은 즉각 백돌을 집어 좌상 쪽의 외목(外目)에 착점하고는 오 붕에게 물어보았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29 08/09 22:33 178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3) "노선배님은 바둑을 잘 두겠네요." 오붕은 껄껄 웃었다. "허허... 둬 보지도 않고 어찌 실력을 논하겠느냐?" 그는 흑돌을 조심스럽게 들어서 남아있는 귀의 고목(高目)에 두었다. 화서운도 바둑이라면 무공만큼 좋아하는 터였다. 이 늙은 선배의 별 명이 위기자인 만큼 바둑과는 많은 관련이 있으며 얼마나 잘 둘지 몰 랐지만, 물러서지 않고 처음부터 과감한 작전을 시도했다. 오붕의 소목에 날일자로 걸쳐가자 그는 손을 빼고 자기의 화점에 날 일자로 걸쳐왔다. 화서운은 즉각 소목에 걸쳐간 한 점을 눈목자 모양 으로 크게 씌워서 이른바 대사백변(大斜百變)이라고 하는 정석을 들고 나왔다. 변화수가 극히 많고 수읽기가 까다로운 것이었지만 보통 두는 것은 몇 개 안 되었다. (오라, 어려운 걸 둬서 노부의 실력을 알아보고자 하는구나.) 오붕은 빙긋이 웃고는 가장 생각하기 어려운 쪽으로 돌을 몰아갔다. 평범하게 두면 뚝닥뚝닥하고 말 곳인데도 기묘하게 둠으로써 화서운은 머리를 푹 숙이고 생각에 몰두했다. 한 삼십여 수 정도 지나서 한 귀의 대형정석이 겨우 마무리되었는데, 그 결과는 화서운이 약간 손해를 보았다. 자기의 약점을 일시 돌보지 않고 먼저 단수를 한 결과 한 점을 잡았지만 두 점이 쓸모없는 폐석이 되어버린 것이다. 화서운은 난해한 부분을 다시 한 번 훑어보더니 그제서야 후회의 눈 빛으로 그 부분을 바라보았다. "위기 제 삼결, 공피고아(功彼顧我)의 원칙을 무시한 결과란다." 화서운은 여전히 아쉬운 표정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저기서는..." 흐려지는 말꼬리는 오붕에게 낚아채였다. "적을 공격할 때에는 나를 먼저 살피라는 말이다. 무예에 있어서 공 격은 최선의 수비라지만, 그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다. 서로의 실력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덤비는 것은 죽음을 자초할 뿐이지. 지 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다. 나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실력도 살펴야 하는 것이지." "노선배님은 정말 바둑을 잘 두는군요." 약간 불리한 상황에 처했지만 완전히 판세가 기울어진 것은 아니었 다. 화서운은 흑에게 이십 집 정도의 막대한 실리를 제공했지만, 대가 로 얻은 약간의 외세를 이용할 궁리를 했다. (정말 잘 두긴 잘 두니까 바둑(圍棋) 자체가 별칭이지. 그렇지만 나 도 사부님과 수백 판은 두었을 걸.) 이리저리 궁리를 하던 화서운은 오붕의 고목에 소목으로 걸쳐서 또 다른 싸움터를 모색하고 나섰다. 돌의 접촉에는 마력이 있어서, 까딱 하면 이제까지의 우세를 허물어뜨릴 위험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붕 은 고수답게 전혀 물러서지 않고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화서운은 이때다, 하고 반대편의 세력을 배경삼아 맹렬한 공격을 전 개했다. 오붕이 감탄했다. "힘이 세구나." "뭘요." 오붕은 이 한 판의 바둑에서 몇 가지의 원리를 가르쳐 주려고 했다. 화서운도 어느 정도 그 점을 알아채고는 있었지만 수가 딸리기 때문에 제대로 그의 의중을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공피고아라는 말은 소 년의 뇌리에 들이박혀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공피고아... 공피고아...) "안 두겠느냐?" 잠시 딴 생각에 잠겼던 화서운은 오붕의 재촉에 정신이 들어서 싸움 을 계속했다. "쯧쯧... 이번 수는 너무 서둘렀어. 이렇게 두면 곧 응징당하게 되 지." 오붕은 이렇게 말하고는 흑돌을 하나 들어 이상한 곳에 두었다. 지 금의 싸움과는 별로 관련이 없어보이는 곳이었다. 왜 두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서운은 손을 뺀 흑을 응징해서 용감하고 뚫고 나왔다. 흑 두 점이 완전히 고립되어 숨통을 트기가 극히 어려웠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발 버둥을 치면 간신히 한 수 늘어진 패를 만들어 살자고 하는 수는 있었 지만 그쯤 되면 죽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로써 백도 이십 집 정도의 집을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오붕은 전혀 당했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 장면에서는 위기 제 육결, 칠결에 어긋난 착수로 네 형세가 많 이 나빠졌다. 육결은 봉위수기(逢危須棄)요, 칠결은 신물경속(愼物輕 束)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육결은 위험을 만났을 때 모름지기 버림으 로써 위기를 벗어나라는 것이고, 칠결은 경솔하게 빨리 움직이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뜻이다. 너는 제 칠결을 어겼다. 나의 재촉에 신 중하게 생각지도 않은 강수를 두었지만, 내가 가볍게 돌을 버리고 새 로운 곳에 두었기 때문에 실제 이익을 얼마 되지 않고 말았다. 어떻게 보느냐?" 화서운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과연 그랬다. 자기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기보다 월등한 상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 치도 못했던 터에 강타를 맞은 셈이었다. "과연 그렇군요. 아까 어정쩡하게 둔 한 수가 천하 명점이네요. 사 방을 조명하고 있으니, 제가 나아가기도 그렇고 후퇴하기도 그런 위치 에서 압박을 하는 다목적 착점이로군요. 그럼 이건 어떤가요?" 그는 아까부터 두고두고 읽어놓았던 수를 두었다. 그 수도 역시 어 정쩡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아까 수를 최대한 견제하면서 백 영역 전 부를 튼튼히 걸어잠그는 자물쇠와 같은 수였다. 오붕은 크게 만족한 듯이 웃었다. "허허허... 너는 스스로 위기십결의 하나를 터득한 셈이구나. 네 행 마는 제 팔결인 동수상응(動手相應)에 해당하는 것인데, 움직일 때는 서로 호응하여 최대한의 효과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서운은 형세를 만회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국면은 아직 중반 에 불과했다. 반상에 놓인 돌은 오십여 개, 아직도 기회는 많았다. 다 만 그중에 역전의 기회가 있느냐가 문제였다. 귀중한 선수를 뽑은 오붕은 화서운의 마지막 남은 귀, 외목을 위에 서 씌워갔다. 아래로 걸칠 수도 있었지만 외세를 허용하는 게 싫었다. 아까 이십여 집을 제공하면서 얻은 백 세력과 이어지는 날에는 전체적 으로 흑이 엷어지기 때문에 설사 이길지라도 괴로운 행로를 할 가능성 이 많았다. 화서운도 그 정도는 헤아리고 있었다. 연경소도 결코 실력이 약하지 는 않은데, 그를 꺾을 정도이니 국수(國手)급은 못 되어도 고수(高手) 는 되는 수준이었다. 다시 한 번 전투가 벌어졌다. 높게 걸쳐온 흑돌에서 빛나는 광채를 시샘이라도 하듯 화서운의 백돌이 요기(妖氣)를 발하며 혀를 낼름거리 며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오붕이 그 정도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아직 위험한 지경은 아니 라고 생각하고 과감히 손을 빼서 아까 손해를 보면서 얻은 백 세력에 정찰병을 투입했다. "음?" 화서운은 짧은 경탄성을 발하고 이것을 어떻게 요리할까, 하는 생각 에 잠겼다. 기본적 방침은 세 가지 뿐이었다. 위에서 씌워서 포위작전 으로 나가느냐, 안쪽에서 받아서 집을 만드느냐, 아니면 손을 빼서 근 교원공(近較遠功)으로 나가느냐였다. 처음과 두번째 작전이 적극책이라면 세번째는 소극책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적극책을 쓸 수 없는 고민이 있었다. 안쪽에서 받자니 집이 모자랄 것 같고, 바깥쪽에서 씌워 잡으로 가도 도무지 잡 힐 돌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력이 쓸모없어지고 다 파괴될 것 같았다. 오붕이 화서운의 장고에 말을 붙였다. "위기 제 이결, 입계의완(入界宜緩)이다. 적의 세력권에 부득이하게 들어갈 경우에는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비록 네 자에 불 과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실력이 느는 지름길이다. 귀나 변에서의 싸움 은 이미 어느 정도는 결정지어진 지 오래이지만, 중앙은 개척되지 않 은 미지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경계선을 제대로 긋는 것이 바로 고수 이다." 화서운은 자기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각도로 생각하기 시 작했다. 아무리 봐도 적절한 생각이 떠오리지 않았다. 결국 딴 곳에서 부터 계책을 세우기로 한 그는 국면 전체를 바라보았다. 실리는 확연히 모자란 상태였다. 여기저기 백집을 다 합치면 어림잡 아 사십 집 정도였는데, 흑집은 그것보다 근 스무 집 가량이 많아보였 다. 세력에 있어서는 약간 앞선 듯 했지만 아까 어정쩡하게 둔 흑돌과 방금 둔 정찰병이 서로 호응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적절한 삭감을 하고 있었다. (어려운걸?) 소년은 이리저리 갸웃거리는 것을 멈추고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한 점에 대한 공략을 멈추고 아까 손뺀 흑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집의 균 형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30 08/10 11:21 246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4) 오붕은 판세의 유리함 때문인지 그 부분에서의 열세 때문인지, 절대 무리하지 않고 순순히 두어왔다. 덕분에 화서운은 열다섯 집의 실리를 확보하고 앞으로도 한 수만 두면 집이 늘어날 모양을 갖추었지만 한사 코 퍼붓던 공격은 모두 허공에 흩어지고 말았다. 실리의 균형은 오붕 이 약 대여섯 집 가량 앞서있는 상태였는데, 더구나 오붕은 백돌 하나 를 잘라줌으로써 선수를 빼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네가 이득을 봤다고 보느냐?" "집의 차이는 약간 줄여 놓았다고 봅니다." "글쎄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네 집과 내 집은 대여섯 집 정 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기자쟁선(棄子爭先)이라, 나는 돌 하나를 버리면서 선수를 잡았다. 위기 제 사결에 해당하는 말이다. 다음의 한 수로 진가를 발휘하는 게 옳겠지." 오붕은 세력을 삭감해 둔 한 점을 움직여서 아군 쪽으로 가볍게 달 아나 버렸다. 백이 모자라는 집의 균형을 제대로 바로잡으려면 그곳의 공방에서 득을 보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으로 그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오히려 중앙쪽에는 열 집 가량의 흑집이 생길 것 같았다. "위기 제 구결, 피강자보(彼强自保)이다. 상대가 강하면 먼저 나를 보호하여야 한다. 나는 비록 집이 많지만 네가 이쪽을 먼저 치고 나오 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곳을 지킨 것이지." 화서운은 정말 많은 것을 배우는 셈이라 머리속이 복잡하였다. 가까 스로 어지럽게 널려진 뇌리의 깨달음들을 정리할 때까지는 반각 정도 가 걸렸지만 오붕은 물끄러미 바라볼 뿐 다음 수를 재촉하지 않았다. 반각만에 착수한 백돌은 지극히 평범한 곳에 놓였다. 특별히 묘수도 아니었고 기발한 곳도 아니었다. 그야말론 반상최대, 가장 큰 곳으로 자기 집을 키우면서 상대 집을 줄여나가는 곳이었다. 오붕이 말했다. "너는 이제까지의 경험에 의해 위기 제 일결을 터득한 셈이다. 바로 부득탐승(不得貪勝), 이기기만을 탐내지 말고 원리원칙에 따라 두라는 것이다. 만약 네가 여기서 신기한 묘수를 두어서 국세를 반전시켰다고 해도 나는 별로 감동하지 않을 뿐더러 다시 재역전시킬 수 있었을 것 이다. 그러나 넌 정말 총명하면서도 침착하구나. 이런 식으로 다음 기 회를 노려야 뭔가를 해볼 수 있단다. 이제 너에게 가르쳐 줄 위기십결 은 마지막 일결만이 남았구나. 이 형세에서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을 런지는 모르겠다만." "이미 아홉 가지를 배운 셈이로군요." "그렇지." 오붕은 어떻게 하면 엉터리 수를 안 두고도 제 십결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가 장고에 빠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 일단은 이걸 받아라." 의외로 그 수는 치열한 수였다. 백이 듬성듬성 벌여놓은 진을 송두 리째 파괴하고자 하는 수, 그런 도발을 화서운이 어찌 가만히 보고 있 으랴! 같이 온 힘을 총동원해서 맞받아치고, 끊고, 물고, 물리고 하는 난전을 시종일관 훌륭하게 전개해갔다. 오붕도 의외로 강력한 반발에 놀라서 두번째 장고에 들어갔다. 그의 갈림길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지금 한 수를 두면 오붕의 거대한 말은 살아갈 수 있었다. 화평책을 쓸 경우 화서운도 외곽을 두텁게 보강해서 아까 지어둔 외세와 동수상 응할 수 있었다. 아니면 화서운의 약점을 끊고 나가 다시 한바탕 하는 작전인데, 이것은 까딱 잘못하면 후수가 되어서 이쪽의 거대한 흑말이 함몰할 가능성이 있었다. 화서운은 내심 전투 쪽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붕은 당연한 착수를 하는 듯 조용히 대마를 살아두었다. 화서운은 의아해 하면서 물어보았 다. 바깥 쪽을 보강한 것은 물론이다. "왜 싸우지 않죠?" "위기 제 십결, 세고취화(勢孤取和)에 따른 일착일 뿐이다. 원래 이 싸움은 너의 세력권 안에서 벌어진 싸움이라 나는 가볍게 타개하는 것 이 옳았다. 하지만 네 힘을 시험하고자 일부러 강공책을 펴서 맞선 게 야. 결국 대마가 갇혀서 생사지경을 헤매었지. 만약 내가 끊고 나간다 면 결과는 예상하기 어려울 뿐더러 내 수읽기로서는 수백 수에 달하는 모든 싸움을 읽기가 어렵단다. 물론 시간이 충분하다면 가능하겠지만, 몇 시진 동안 생각을 한다면 넌 어디론가 달아나고 말겠지. 그래서 형 세가 외로울 때에는 싸우지 말고 평화를 취하라는 말에 따라 먼저 살 아둔 것이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打)라는 말이 있다. 자기가 먼 저 안전함을 확인한 후, 즉 살아둔 후에 살수를 가하라는 말이다. 무 림에서도 적용되는 말이지." 이후의 진행은 그저 끝내기에 불과했다. 열두세 집 짜리의 큰 곳은 연경소의 차지가 되어 집차지는 거의 비슷한 듯 했지만, 오붕의 마술 같은 솜씨는 결코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아까 한 수 늘어진 패를 노림 수로 남겨두었던 곳마저 튼튼하게 지켜서 결국 이십구십삼 수만에 아 홉 집 승리를 거두었다. 화서운은 비록 졌지만, 결코 억울하지 않았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 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내심 오붕의 위기십결은 참으로 천고의 진리 요, 손자병법서(孫子兵法書)처럼 치세법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 다. 오붕이 말했다. "자, 이제 판을 치우고 다시 해보자꾸나." "네에?" "한 번 둔 판은 그것이 장난으로 둔 것이라면 모르지만 온갖 생각을 짜내어 의미있게 둔 것이라면 능히 재구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걸 다 른 말로는 복기(復棋)라고 하는데, 기력을 늘이고 마음을 차분히 하는 데에는 더없이 좋단다." "예..." 화서운도 자기가 둔 수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워낙 고생을 많이 한 판이라서, 그만큼 생각도 많이 했었다. 복기는 약 반 시진동안 진행되었는데, 실제 바둑둔 시간의 절반 정 도가 걸렸다. 그 결과 이 바둑에서 화서운은 자기 실력을 십할 모두 썼지만, 역시 근본적인 힘의 차이에서 밀린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오붕은 알기쉽 게 판을 마무리하며 적절한 선에서 후퇴했지만 미리 벌어둔 차이를 점 점 늘려 이긴 것이다. 기리(棋理)에 입각한 원리행마의 위력을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붕은 한 마디의 타이름으로 복기를 마무리지었다. "인생살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너도 조금 더 크면 강호로 뛰어들어 검을 휘두르는 무사가 될 것이다. 물론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볼 순 없 다. 네 사부가 무림에서 보기드문 고수이지만 천하제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다만 검법에서 훌륭한 성취를 이루었음은 확실하다. 나 위기자도 한 때에는 천하의 십대고수의 명렬에 들던 사람이지만, 나의 무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못하단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운(運)이 좌우하는 바가 크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지 않더냐. 바둑이나 장기에서도 자기의 묘수보다는 상대방의 실수로 이길 경우가 많다. 무림은 더군다나 그런 것이 강조되는 사회인데, 그런 가운데 네 가 원리에 충실하여 악행을 하지 않고 네 신념대로 살아간다면 불행한 일을 당할 확률은 적어지고 네 앞길에 이득이 있을 것이다. 나는 평생 바둑을 좋아하여 무공도 바둑과 관련된 것들이 많단다. 내가 천하에서 열 명 안에 든다는 칭송을 받은 것은 오직 세 가지의 무공 때문이다." "그게 뭐죠?" "가장 잘 써먹는 것이 바둑돌을 튕겨서 혈도를 찍거나 무기를 떨어 뜨리는 재간으로, 불문의 탄지신공(彈指神功)을 약간 변화시킨 것이지. 두번째는 나의 이 자석반(磁石盤)을 방패삼아 휘두르는 재간인데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 판 속에는 많은 단단한 쇠와 금강석이 들어있어, 웬 만한 보검이 아니라면 흠집조차 낼 수 없단다. 사실 내가 한옥검을 보 고자 한 것도 그 검이라면 어느 정도 흠집을 낼 수 있을까 해서였다." "마지막 재간은 뭐죠?" "허허... 급하기는 여전하구나. 사실 나의 어렸을 때 사문은 소림사 란다. 그래서 나의 기술에는 소림사의 무공이 많이 들어있지. 내 두번 째 바둑판 휘두르는 재간은 소림 72종 절예 중의 금강항마장법(金剛降 魔杖法)을 변형시킨 것이다. 또한 나의 조그만 재간의 마지막은, 별것 아니면서도 많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인데 위기십결(圍棋十訣)이라고 이름붙인 열 동작의 초식이다. 너는 총명하니, 이것을 한 달만 연습하 면 검법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오붕은 이렇게 말하고 위기십결을 처음부터 펼쳐보였다. 부득탐승, 입계의완, 공피고아, 기자쟁선, 사소취대로 이어지는 전 반부는 부드러운 기운이 넘쳐서 이유제강(以柔制强), 약한 것으로 강 건한 것을 제압하는 원리에 충실했다. 각 동작의 연결부분은 전혀 무 리가 없어서, 아까 바둑을 둘 때처럼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후반부의 봉위수기는 그야말로 매서운 초식이었다. 위험에 봉착하면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뜻과 같이, 몸의 일부분을 완전히 개방한 채로 전력을 다해 공격하여 적의 숨통을 끊어놓는 살초였다. 신물경속은 재 빠름의 극치요, 동수상응은 주먹과 발이 동시에 급소를 노렸다. 피강 자보는 이름답게 철통같은 수비 초식이었고, 마지막 세고취화는 이해 하기 어려운 동작으로 공격도 수비도 아닌 어정쩡한 것이었다. 한 번의 시전을 끝낸 오붕은 다시 한 번 열 동작을 이어서 펼쳐내었 는데, 화서운이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천천히 손발을 움직 였다. 동작을 마친 오붕은 말했다. "이제 알겠느냐?" "잠시만요..." 잠시 생각을 하던 화서운은 벌떡 일어나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발 길질을 하기도 했다. 별로 흠잡을 데 없는 동작이었지만, 역시 어색한 점이 많았다. "전반부는 별로 안 어려운데요, 봉위수기에서 신물경속으로 넘어가 는 부분이 이상해요." 오붕은 껄껄 웃었다. "허허허... 역시 기재로다, 기재야! 그 어려움을 알아채는 것도 어 려운 일이다. 다시 한 번 보여줄테니 잘 봐둬라." 반복해서 세 번을 보고서야 화서운은 그 기묘한 운용을 깨달았다. "아! 정말 오묘하군요. 사부님의 청죽십이식과 통하는 곳이 있는 것 같아요." 화서운은 청죽십이식 중의 태산첨죽(太山尖竹)을 손으로 펼쳐내었다. 즉시 예리한 강기가 손끝에서 발출되어 깨끗한 초식이 펼쳐졌는데, 그 기세가 봉위수기에서 신물경속으로 넘어가는 쾌속함과 매우 비슷했다. 오붕은 감탄했다. "과연 절세의 무공이다. 넌 사실 그것만 제대로 익혀도 천하에 적수 가 별로 없을 것이다." "사부님의 무공은 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높아요." "그렇겠지. 네 사부는 나이가 사십도 안 되었는데 나와 이름을 나란 히 하고 있단다. 대단한 사람이지." 오붕은 입을 다물고 다시한 번 위기십결을 빠르게 펼쳐내어 화서운 에게 외우도록 했다. 이미 40자의 짧은 구결은 바둑을 두면서 외우게 했으므로 특별히 말로 전할 것은 없었다. 그것이 끝나자 오붕은 금강항마장법을 실전적으로 변화시킨 것을 전 수했다. 이것은 넓다란 방패와 같은 병기를 쓸 데에 더욱 유리한 방법 으로, 상대방의 암기나 쾌검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원래 금강항마장법은 72종 절예 중에서도 익히기가 까다로운 것 중 하나이다. 한 삼 년만 열심히 익히면 그 진가를 알게 될 것이니, 지금 부터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오붕은 이렇게 말하며 다시 탄지신공을 가르쳐 주었다. 하루동안 이 렇게 많은 절예를 완전히 가르쳐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붕 은 이해가지 않는 부분은 반복해서 설명해 주는 방법으로, 완전히 전 수하기보다는 이해를 위주로 가르쳤다. "탄지신공과 금강항마장법은 소림의 절예이다. 그래서 함부로 전수 할 수는 없으되 나는 소림의 속가제자였었고, 지금은 제일배분에 가까 우니 감히 탓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시간이 별로 없기 때 문에 네 자질을 믿고 비급만을 남겨주겠다." 그러면서 오붕이 던져준 책자는 아주 얇았다. 불과 스무 장 내외의 도해(圖解)와 주석으로 가득찬 것이었는데, 이 두 가지의 무공이 상세 히 설명되어 있었다. 화서운이 언뜻 보니 혼자 연습해도 될 정도로 자 세했다. 오붕은 말했다. "위기십결은 이미 구결을 외우고 있고 동작에 무리가 없으니, 한 몇 달만 연습하면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지경에 도달할 것이다. 후에 날 만나게 되면 바둑이나 한판 두자꾸나." 말을 마친 그는 일학충천(一鶴沖天)의 경신법을 펴서 절벽 위를 솟 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화서운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노선배님!" "왜 그러느냐?" "바둑판과 돌은 안 가져가실 건가요?" "선물이다! 탄지공과 금강항마장법을 익히려면 꼭 필요할 것이다!" "한옥검은 안 보세요?" "나중에 보도록 하자!" 오붕은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몇 마디 하고는 껄껄 웃으며 사라졌다. "허허허허... 노부가 기재를 만나 한 가닥의 얄팍한 재주를 전수했 으니 여한이 없다. 그럼 잘 있거라..." 그는 금세 하나의 점이 되어서 사라졌다.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완 전히 벗어나자, 화서운은 문득 허탈감을 느꼈다. (정말 신비한 분이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31 08/10 19:25 149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5) 하루하루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빨리 지나갔다. 청죽검객 연경소가 명심정을 떠난 지 벌써 스무 날이 지나고, 위기 자 오붕과 화서운의 기이한 만남도 서서히 무한한 과거의 영역으로 빨 려 들어갔다. 화서운은 매일같이 단로의 엄심단을 살피고 무공을 연마하며 학문을 닦는 데 여념이 없었다. "흐앗... 신물경속!" 오붕이 전수해 준 위기십결 중에서 화서운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제 칠결, 신물경속이었다. 원래의 뜻은 경솔하게 빨리 움직이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하라, 하는 것이었다. 초식의 변화는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쾌(快)를 위주로 했다. 화서운은 이십일 동안 위기십결의 모든 초식을 검법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제 육결에서 칠결로 넘어가는 접목부분을 제외 하고는 구할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정말 어렵단 말야.) 이러한 고민은 당연한 것이었다. 전반부의 다섯 동작은 더없이 부드 럽고 꺾어지는 곳이 없어 잘 이어지는 것이 당연했고, 후반부의 나머 지 세 동작도 각각은 강맹하며 오묘한 점이 있었지만 각자의 초식에서 만 그러했다. 연결부분이 어려운 곳은 육결과 칠결 사이 뿐이었다. 그 곳을 제대로 연마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이건 동작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분명 어떤 결함이 있어서 그 럴꺼야.) 연경소는 그 결손된 부분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손동작뿐 아니라 검법으로 펼쳐 보아도 그 곳은 뭔가 어려운 구석이 있어서, 도 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오붕이 전수해 준 소림절학 탄지신공과 금강항마장법은 쉽게 연성할 수 있는 무예가 아니었다. 적어도 수 년 동안 고된 수련을 쌓아야 어 느 정도의 성취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화서운은 결코 서두르지 않 기로 했다. 시간은 많았기 때문이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어떤 결함이 있다는 심정은 굳어갔다. 세상에서 적수를 만날 수 없는 완전한 무공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 이자 연경소의 주장이었다. 그런 절학(絶學)이 존재한다면 이미 그 소 유자는 무림을 지배해서 절대로 자기의 내력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 을 것이며, 자손이나 제자들은 대대로 물려가며 무림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지 결코 지금처럼 수많은 방파들이 존재하며 서로 물고 뜯는 싸움 을 전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봉위수기(逢危須棄), 신물경속(愼物輕速)... 이 부분을 수십 수백 번 연습하고 되풀이한 화서운은 불현듯 약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못 되었지만, 불확실하면 서도 합리적이지 못한 연결부분을 좀더 완전하게 할 수 있는 대처방안 이 생각난 것이다. (그대로 해봐야 겠다.) 이렇게 마음먹은 소년은 다시 주야로 연습하기를 칠일, 완전히 새로 운 동작을 창출하여 기존의 위기십결에 더할 수 있었다. 하늘이 내린 재주, 즉 천품을 타고났다고나 할까... 화서운은 기재 임에 틀림없었다. 수십 년을 통해 얻은 위기자 오붕의 체득무공을 불 과 한 달만에 더 완벽하게 재구성해낸 것은 결코 경시할 일이 아니었 다. 본래 처음 창조된 무학에는 약점이 많은 법이고, 비록 화서운이 일 부를 수정했다고는 하지만 적지않은 헛점이 있으며 전적으로 초식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들 중에는 내공(內功)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초식의 불완전함과 미숙함도 그것을 통해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런 인간에게 내린 특혜에 비해서 하늘은 또 한 가지의 그물을 두 었다. 단시일내에 속성할 수 없다는 원칙을 내공수련에 부여하여 누구 도 노력 없이는 결과를 얻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아무리 깨달음이 높 고 학문지식이 방대하다고 해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게 한 것은 하늘 의 또다른 배려가 아닐런지. 아무튼 화서운은 요새 들어 부쩍 바빴다. 연경소가 출타한 뒤였지만 엄심단을 돌보는 일에 세 가지의 새로운 무공을 익히는 일과가 추가된 것이다. 대라신검(大羅神劍), 청죽십이식(靑竹十二式), 금강항마장법(金剛降 魔杖法), 탄지신공(彈指神功), 위기십결(圍棋十訣)... 하나같이 무림을 진동할 만한 절학이요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떤 무학이 뛰어나다는 것은 익히기가 쉽지 않다는 말도 된다. 지극 히 난해한 것만이 우수한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아이 장 난처럼 단순하고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화서운은 언젠가 연경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다. 검은 만병(萬兵)의 으뜸이며 수련하기가 가장 어렵지만, 위력이 가 장 뛰어난 것이다. 창(槍)은 백일의 수련으로 경지에 이르고 도(刀)는 천일의 수련으로 경지에 이르며, 검(劍)은 만일동안 수련을 쌓아야 경지에 이른다는 말 이 있다. 이 말은 단적으로 검법을 수련하는 사람의 어려움을 나타낸 말이다. 창법에는 찌르고 빼는 기술만이 있어서 단순하기 이를데 없다. 따라서 창법만을 수련한다면 고수가 되기 어려운 것이다. 단지 익숙해지는 데 에는 시간이 적게 소모될 것이다. 보통 홍가(洪家)의 창법이나 신창문 (神槍門)의 기술을 보면 창의 길다란 나무대를 이용해서 휘두르는 초 식이 적지않게 포함되어 있다. 곤(棍)이나 봉(棒)의 기술을 섞지 않으 면 그 위력은 지극히 단순해져서, 싸움터에서 장졸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덤벼드는 격 이상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는 곧 칼이라고도 한다. 도와 검의 차이점은 그 생김새에 있는 것 이라기보다는, 그 운용에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칼은 양날이며 도는 날이 한쪽에만 있다. 둘다 끝은 뾰 족하지만 도는 베는 데 그 목적을 두고 검은 찌르기와 베기, 둘 모두 에 운용의 묘(妙)가 있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도의 날은 검보다 두껍다. 대부분의 도법에는 장중함과 무거운 기세가 포함되며, 검법에는 날렵한 기술이 주를 이루 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서로의 장점만을 취하여 검법에 도 장중함이 섞이고 쾌도(快刀)의 수법도 발달되니, 쉽게 단정지을 일 은 아니다. 아무튼 기법에서 예술로, 예술에서 검도(劍道)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천품이 아울러 있어야 한다. 내가 너를 선뜻 제자로 삼 은 것도 네 자질이 훌륭하고 눈빛이 총총하며, 단전이 튼튼하면서 허 리가 부드러운 데다가 골격이 기이하게 뛰어난 이유가 포함되어 있다. 가히 백 년에 하나 있을까말까한 신체를 타고났음을 항상 생각할 것이 며, 무공을 익힘에 있어서 조금의 소홀함도 없게 하여라. 어렸을 때부 터 기초를 튼튼히 해야만 나중에 후회함이 없느니라. 만일(萬日)이면 거의 삼십 년에 이르는 세월이다. 태어나자마자 손 에 검을 들고 수련한다고 해도 삼십에 이르러서야 기초인 검술을 익혔 다고 할 수 있다. 그럴진대, 어려서부터 게으름을 부린다면 어찌 검도 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느냐? 물론 검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검예를 익힌 사람이 일순간의 깨달음으로 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수십 년 의 수련보다 한 순간의 득도(得道)함이 중요할 때도 있는 것이나 기초 도 없이 깨달음만을 얻으려 함은 말도 안 된다. 하늘이 너에게 부여한 천품과 골격을 최대한 이용하여 나중에 추호 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연경소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화서 운이 비록 약관에도 못미치는 소년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한 바 아니었다. 명심정 부근에 나는 약초와 영물들은 소년의 내력을 증진시키는 데 항상 큰 역할을 했고, 연경소는 한 달에 한 번씩 그믐날이면 한 알의 이상한 환약을 주면서 복용하라고 했다. 금색 빛이 감도는 그 약을 먹 고나면 괴이하게도 몸 속에서 더운 기운이 일어나며 기혈이 미친 듯이 발작하는데, 대주천하여 해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렇게 한 번씩 운공을 하고 나면 스스로 몰라볼 정도로 내공이 증진되 어 있는 것이다. 잠룡(潛龍)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잠재력을 격발 시키고 스스로의 더운 기운으로 내공을 늘여주며 신체를 보호하는 귀 원금단(歸元金丹)의 효용 못지않게 스스로의 노력이 실력의 밑을 받쳐 주면서 그 높이가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날도 고된 자기와의 싸움을 마치고 곤히 잠든 어린 잠룡은 행복한 꿈을 꿀 것이다. 어두운 그림자가 닥쳐오는 줄 모른 채...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32 08/12 18:17 157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6) 이튿날 아침 일찍이 일어난 화서운은 평소의 일과를 되풀이했다. 사십여 일 동안 절대 불을 꺼뜨리지 말아야 하는 엄심단의 제조과정 에 잘못된 점이 없나 확인한 후에는 단정히 앉아서 내공을 연마했다. (오늘 아침에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화서운은 아침 일찍부터 괴상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가 자기 뒤통 수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 뒤가 간질거렸다. (정말로 이상하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없는 데 왜 이런 괴상한 느낌이...) 화서운은 자면서 풀어두었던 납과 모래가 든 커다란 주머니를 다시 몸에 두르면서도 그 이상야릇한 느낌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남이 보면 매우 우스워할 만한 동작으로, 갑자기 걸어가다가 뒤를 돌 아보곤 했지만 마치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결코 눈에 띄지 는 않았다. 소년은 속으로 점점더 의심을 품게 되었고, 그 정도가 시간이 지남 에 따라 점차 심해졌다. 어쩌면 누군가가 아침부터 혹은 그전부터 자 신을 지켜보고 있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 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소년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찌됐든간에 이 자는 모습을 드러낼 때가 멀지 않았을 것이다. 검 법을 수련하는 척 하면서 정체를 드러내도록 해야 겠다. 다만 이 정도 의 경신법을 가지고 나의 이목을 속일 정도라면 내가 상대도 되지 않 을수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화서운의 장점 중 하나는 마음먹은 일을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시행 한다는 점이었다. 머지않은 훗날 강호에 나갔을 때, 그 급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화를 당할 뻔 한 적도 있었지만 과감한 결단력으로써 위기를 벗어나게 되는 일도 많게 되니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말이 맞 기는 한가 보다. 소년은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모래주머니와 납주머니를 모두 풀러 버렸다. 이와 같은 행동은 손을 쓸 경우를 대비해서 몸을 최소한 가볍 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위기 제 일결, 부득탐승!" "위기 제 이결, 입계의완!" "위기 제 삼결, 공피고아!" 세 번 청아한 음성이 명심정 주위의 계곡에 묘한 여운을 남기며 피 어올랐다. 화서운은 그 무겁고 거무튀튀한 검 대신에 한 줄기의 광망을 이리저 리 휘두르며 한옥신검의 자태를 바깥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위기 제 사결, 기자쟁선!" "위기 제 오결, 사소취...대!" 화서운은 일부러 취(取)자와 대(大)자 사이의 간격을 벌려서 호흡을 흐트러뜨리며 보법을 이상하게 바꾸어 몸을 회전시켰다. 휙! 하고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자기의 뒤로 돌아가 는 짧은 순간을 놓칠 소년이 아니었다. (과연 내 짐작이 틀림이 없구나. 이 자가 마각을 드러내기 전에 내 가 손을 써야겠다.) 이같은 생각을 머리속에 떠올리면서 얼굴에는 지극히 침착하고 집중 하는 빛을 띄웠다. "위기 제 육결, 봉위수기!" "위기 제 칠결, 신물경속!" 위기십결 가운데 가장 속도가 빠르고 초식이 정묘한 일곱 번째의 동 작을 펼치던 화서운은 돌연 허리를 완전히 꺾어서 뒤로 검을 쉭, 쉭하 고 두 번 떨쳤다. "훗!" 계속 화서운의 뒤를 따라다니던 그 인물은 뜻밖의 공격에 질겁을 하 고 짧은 외마디의 비명을 내질렀다. 의표를 찌르는 공격의 속도는 가 히 전광석화, 쉽게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는 절묘한 신법으로 간 단하게 일식을 피해버렸다. 화서운은 허리가 완전히 뒤로 젖혀진 상태였다. 철판교(鐵板僑)라는 신법보다 더 젖혀진 상태에서 초식을 전개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었 다. 짧은 시간동안 머리를 회전시킨 소년은 그 자세에서 그대로 넘어 지며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세찬 발길질을 해 대었다. 옷자락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다시 한 번 외마디의 신음소리 가 들렸다. 하지만 이번의 발길질은 실패였다. 그의 옷자락을 건드리 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결코 그자의 몸에는 닿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세구나.) 무예를 일정기간 이상 수련한 무사는 생각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법이다. 경력을 가득 끌어올린 화서운은 무영퇴(無影腿)의 수법을 써 서 적을 몇 발자국 물러서게 한 후 일어서서 검을 펼치려고 했다. "많이 늘었구나!" 괴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도리어 화서운의 가슴팍을 움켜쥐려고 했다. 만약 무영퇴로 끝까지 그를 걷어찬다면 무릎이나 정강이를 찰 수 있을 테지만 자기의 심장은 남아나지 못할 것 같았다. 화서운은 급히 발길질을 멈추고 평사낙안(平沙落安)이라는 수법으로 물러서고 보았다. 무영퇴가 잘 먹혀들어가지 않은 점도 있었지만 그보 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괴인은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화서운의 뒤 를 따라다니며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사람은 바로 청죽검객 연경소 였다. "넌 어디서 괴이한 재간을 배웠구나.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 것은 위기자 선배님의 절기같은데..." "맞았어요." 연경소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설마... 그를 사부로 삼았느냐?" 화서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그런 도리도 모를 것 같으세요? 저는 그분과 바둑 을 한 판 두었는데, 거기에서 열 가지 도리를 배웠지요. 이제는 사부 님과 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여기까지 말한 소년은 자기의 말이 옆으로 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분은 저에게 세 가지의 무공을 전수해 주셨는데, 사제의 연을 맺 지 않고 그냥 가르쳐 주셨답니다." 연경소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가 있느냐...?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기명제자도 아닌, 그는 네가 나의 제자임을 알았느냐?" "물론이지요." "그럴 수가... 그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연경소는 갑자기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듯 하더니 화서운의 완맥 을 잡아채었다. "사부님...?!" 화서운은 의아해하면서 피하려고 했지만, 발걸음을 내딛는가 싶었던 연경소는 이미 제자의 완맥을 제압하고 있었다. 이 한 수만 해도 청죽 검객의 무공수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그의 검법수위에 못지 않는 쾌속한 동작이었다. "이상하다. 그가 왜...?" 화서운은 왜 갑자기 사부님이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러는 거죠?" 연경소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33 08/12 18:18 148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7) "무림에서 사제의 관계는 다른 곳에서보다 각별하여, 함부로 무공을 전수하거나 받을 수 없음이 관례이다. 위기자 오붕이라면 천하에서 손 꼽히는 선배 고수이실진대 고절한 무공을 함부로 전수했을 리가 없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절대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사제의 연도 끊을 것이다." 화서운은 사부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팔년여 동안 같이 살아왔지만, 한 번도 이같이 크게 성을 내는 것을 보지 못 했기 때문에 소년은 의아해 하면서도 몹시 두려웠다. 화서운은 눈이 둥그레진 채 말했다. "하지만 제자는 그에게 절을 하지도 않았고,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지도 않았어요. 그가 좋아서 가르쳐 준 것인데요." 그로서는 사부의 이러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위기자라 는 사람은 바둑을 한 판 두고 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았던가? "만약 사부님이 화를 내신다면 저는 그 책자들을 모두다 버리겠어요. 그럼 되잖아요." 아무리 피나는 수련을 해서 다른 또래의 아이들보다 건장하고 어른 처럼 키가 크다고 해도 역시 소년은 소년이었다. 자꾸만 화를 내는 사 부를 이해하기보다는 이상하게 생각되기 마련이라, 화서운은 깨끗하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연경소는 잠깐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세상에 자기의 절기를 이유없이 전수하 는 고수가 있단 말이냐?) 중원 천하를 종횡무진 무적지경으로 치달으며 크게 협의의 길을 행 하던 청죽검객의 두뇌도 이 순간에는 아주 작게 축소되어 아무것도 판 단할 수 없었다. 연경소의 어투는 아직 무거운 채였다. "그 책자들이라니, 그가 너에게 비급을 주었느냐?" 연경소는 품속에 갈무리해 두었던 두 권의 비급을 꺼내었다. 비급이 라고는 하지만 아주 얇은 책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청죽검객에게 있어서 그 의미는 색다른 것이었다. 충격을 받 았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이건 소림사의 절학 아니냐?" 화서운은 혀를 쏙 내밀었다. "그거야 사부님이 더 잘 아실 것 아니에요. 아까부터 사부님은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고 계속 뭘 했느냐, 어쨌느냐, 왜 그러냐, 하고만 있으니 도무지 말이 안 통해요. 그가 무공을 전수한 이유를 제가 어떻 게 안단 말이에요?" 연경소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탄지신공은 능히 천하제일의 지공(指功)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손가락 끝으로 경력을 퉁겨내어 몇 장 밖의 적 이라도 상하게 할 수 있는 무공이다. 이런 종류의 절기는 오직 소림사 와 몇몇 절정의 내가고수들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화서운은 대답했다. "그런 절기는 왜 저에게 주어서 익히도록 했을까요?" 연경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다. 아마도 나쁜 뜻이 아니라면, 그는 너의 재주를 아껴서 진 심으로 후인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화서운은 그 말을 다 듣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저에게 전수했을까요?" 연경소는 자기도 알수 없는 질문을 자꾸 하는 제자가 얄궈었지만 이 미 오해는 반푼쯤 풀리고 난 후였다. 비급을 보았으면 도리어 의문이 가중되어 제자를 마구 다그쳐야 순서이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안 정되고 긍정적으로 모든 사리판단이 되었다. "바로 그것이다. 너는 백 년에 한 번 보기 어려운 기재임에는 틀림 없지만, 하필이면 위기자 오붕이 이곳 명심정에 나타나서 절예를 전해 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중원천지가 얼마나 넓은데 그런 기연이 있 겠느냐. 만일 그것이 정말로 순수한 뜻이었다면 진정 기이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화서운은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사부님은 왜 아까 절 그렇게 꾸짖었죠?" 연경소는 그 말에 일순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꾸짖는 것이 먼 저였다. (청죽검객이라는 조그만 명성을 얻고 있는 너 연경소야, 어째서 아 직도 그렇게 수양이 부족한 것이냐? 색(色)과 명예의 깊은 늪에 빠지 지 않았건만 아직도 도(道)를 깨우치기에는 정녕 멀었구나. 어찌 조그 마한 사리판단도 하지 않고 어린 아이를 그렇게 다그쳤단 말이냐?) 연경소는 겸연쩍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내 잠시 이성을 잃었다." 화서운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걸요." 사실 연경소의 의문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는 몇 가지의 질문 을 했는데, 마치 불꽃놀이를 할 때 화포(火砲)를 연달아 쏘듯 막힘이 없어서 제자로 하여금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했다. "그가 너에게 또 가르쳐 준 것이 무엇이냐? 사부에게 한 번 보여 줄 수 있겠느냐? 그동안 엄신단의 단로는 잘..." 화서운은 크게 한숨을 내쉬어서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말에 대답할 수는 없어요. 하나하나 차근히 말씀드릴께요." 연경소는 자기가 성급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화서운은 그 자리에 앉아서 말했다. "엄신단은 물론 잘 있어요. 오늘 아침에도 한 번 불길을 봐두었으니 까요. 파란 색으로 잘 조절되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드린 책자의 뒤 편에는 금강항마장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걸 열심히 익히면 바둑판 을 휘둘러 암기를 막는 데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했어요." 연경소는 그말을 듣고서야 다른 한 권의 비급은 소림 외공(外功) 중 의 절정신공인 금강항마장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 묘하다, 정말 묘해!" 화서운은 말했다. "어른들은 묘하다는 소리를 자주 하는군요. 오붕 노선배님도 저하고 바둑을 둘 때 그런 소리를 많이 했어요." 연경소는 웃으면서 두 권의 비급을 돌려주었다. "이 두 권의 비급은 그 선배님이 너에게 준 것이니 잘 갈무리하여라. 후에 꼭 쓸 데가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 비급이 가짜라서 네가 연 마할 때 주화입마(走禍入魔)되지 않을까 했는데, 상세한 도해와 주석 을 보아하니 결코 가짜는 아닌가 보구나." . 김종화 (monkd ) <소요검협(笑謠劍俠)> - 34 08/14 10:45 146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8) 사제간에 있었던 잠시의 갈등은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연경소 로서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오붕이 화서운에게 매력을 느끼고 절학 몇 수를 전해주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연경소와 화서운은 그날 밤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강호에서 있었 던 일은 절대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사부의 관례였고, 제자도 그렇게 알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자가 전해준 무공은 관심의 대상이 아 닐 수 없었다. "그가 정말로 바둑을 잘 두더냐?" 화서운은 그때의 몰리던 형세를 생각하면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 라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예. 제자는 최선을 다했지만 아홉 집을 지고 말았어요. 그것도, 오 선배님이 많이 봐줘서 그 정도였지요." 이 문제는 그 정도로 접어두기로 한 연경소는 이왕 얻은 절세기연이 니 만큼, 소림절학과 위기십결에 대해서 토론하기로 했다. "서운아, 너는 탄지신공과 금강항마장법의 차이를 아느냐?" 화서운은 대답했다. "그야 쉽지요. 탄지신공은 손가락 끝에서 기를 발출하는 내공(內功) 이고, 금강항마장법은 한 자루의 지팡이를 이용해서 휘두르는 외공(外 功) 아니에요." 연경소는 웃었다. "잘 보았다. 원래 금강항마장법은 장문인의 신물인 녹옥불장(錄玉佛 杖)을 휘둘러 문하의 반도를 제압하는 무공으로 소림 72종의 진산절예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화서운이 물었다. "탄지신공은요?" 연경소는 대답했다. "그역시 무림의 일절(一絶)이라 할 수 있다. 천하에 그와 다툴 지법 이 몇 되지 않고 오직 도가의 선천지(先天指)와 마교(魔敎)의 음양지 (陰陽指), 그리고 해남파의 노룡도(怒龍刀) 정도가 비슷하다고 전해질 뿐이다. 물론 천하는 넓고도 넓어서 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적 어도 손가락 무공의 최고봉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화서운은 물었다. "아... 그렇군요. 금강 무슨 항마장법이라는 것을 검법으로 변환시 킬 수는 없을까요?" 연경소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왜냐?" 화서운은 살짝 웃었다. "그건, 지팡이와 검을 한꺼번에 들고 다니려면 매우 무겁고 귀찮기 때문이에요. 더구나 한옥검은 절세의 보검이니, 소림사의 방장들이 익 히는 무공을 그냥 시전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소림 문하라고 착각 할 게 아니겠어요?" "그도 그렇겠구나." 연경소는 생각했다.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다. 탄지신공이야 무림에 비슷비슷한 절예가 많고 다른 방법으로 변화되어 쓰이는 것이 적지 않다지만, 금강항마장 법은 무림에서 어깨를 겨눌만한 다른 무공이 없다. 아무래도 그냥 그 것을 쓰는 것은 위험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연경소는 말했다. "장법의 비급을 잠깐만 다오." 화서운이 비급을 건네어 주자, 연경소는 한 손에 그것을 들고 이리 저리 훑어보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허공에서 이리저리 휘두르기도 하고, 갈고리 모양 으로 만들어 찍고, 찌르고, 훑고, 밀어내는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였 다. 화서운은 사부가 하는 일이 지극히 많은 정력을 소모하며, 금강항마 장법을 검법으로 바꾸는 것이 용이한지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추측에 불과했지만 어느 정도는 들어맞은 셈이었다. (아마도 저 실험은 오래 걸릴 듯하니 나는 다른 무공을 연습해야 겠 다.) 화서운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십 장 정도 걸어간 그는 시냇물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절예들이 워낙 어려우니 쉽게 익히기는 불가능하다. 아마 십 년은 수련해야 제대로 위력을 발할 수 있을 게 틀림없어.) 그는 곧 가부좌를 틀고 내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단전(丹田) 중앙 에서 한 가닥의 진화(眞火)를 끌어올려 기경팔맥과 사지로 따뜻한 기 운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직 임독(任毒)의 양맥(兩脈)이 타동되지 않아 운기에 적지않은 애 로점이 있었지만, 수많은 약들의 공능에 잠들어 있는 소년의 신체에는 그만큼의 잠재력이 뒤를 받쳐 주었다. 화서운의 내력은 그야말로 순양지기(純陽之氣)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연경소만 하더라도 내력의 깊이는 그가 비할 바 아니었지만, 그 기초 는 제자를 따를 수 없었다. 보통 내공을 수련할 때에는 양(陽)의 기운 을 띄거나 음(陰)의 기운을 띄는데, 두 가지의 기운이 서로 어느 정도 는 융합되기 마련이다. 고수가 될수록 어느 한 가지 기운에 노력을 기 울여 정순(精純)한 공력을 얻는 데 주력하지만, 한 가지 기운이 우세 하다 뿐이지 완전히 하나로 만들기는 어려운 법이다. 무림에는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과 같이 두 가지 기운을 하나로 섞 어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있었고, 특별한 경우로 순결을 잃지 않아야 만 그 효용이 크게 증대되는 동자공(童子功)이나 순양, 순음의 기운을 띄는 토납법(吐納法)이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대부분은 음양의 기운이 적절히 섞여 한 가지가 어느 정도 우세한 정도였다. 화서운의 내공이 순양지기로 이루어진 까닭은 두 가지였다. 그 첫째는 대라신검의 수법이 일반적인 검법과 크게 달라서, 보기에 는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암암리에 강맹한 기세를 포함하고 있기 때 문이었고, 두번째는 언제나 허리에 두르고 있는 한옥검이 효력을 나타 내서였다. 한옥검이 무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보물이라는 이유는 검날이 날 카롭고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도 적지않은 효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검을 만든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설에는 이 름없는 한 장인이 득도(得道)하여 일평생의 정력을 바쳐 만든 것이라 고도 한다. 그 특별한 효능의 첫번째는 검 자체에서 한기(寒氣)가 끊임없이 배 어나와서, 허리에 두르고 다니면 큰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 림인이라면 누구나 내공을 수련하고, 따라서 외부의 기운이 몸을 침범 하면 내공을 운용하여 대적하기 마련이다. 한옥검이 일부러 그렇게 만 들어졌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허리에 두르고 다닐 수 있는 면검(綿劍) 이었기 때문에 열두 시진 언제나 운기하는 효과가 있었다. 두번째의 효능은 첫번째와 관련된 것인데, 싸울 때의 기이한 효과였 다. 검의 끝에서 한 자가 넘는 기세가 저절로 뻗쳐나와 일종의 강막을 형성하는 꼴이니, 검기(劍氣)를 수련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 다. 이와 같은 보물이니, 무림인들이라면 꿈에서도 동경해 마지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사들에게 있어 가장 큰 소망은 뛰어난 무공비급을 얻 는 것이요, 두번째가 신물이기(神物利器)를 소유하는 것이지 않는가!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35 08/14 17:09 17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9) 화서운은 한 시진동안 꼼짝도 하지않고 진기를 사지백해에 가득 불 어넣었다. 이때 연경소는 금강항마장법을 검법으로 변환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명심정의 풍경은 그렇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연경소는 이리저리 휘두르던 청죽검을 거두고 생각했다. (지팡이로 펼치는 무공을 억지로 바꿔서 검법화하려는 것은 잘못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강항마장법의 기세는 웅혼하여, 검법으로 바꾼 다면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초식 자체가 너무 틀려 서 어렵구나...) 그는 청죽검을 힐끗 보았다. (푸른 빛이 감도는 나의 분신. 여태까지 나를 잘 돌봐주었다. 이제 새로운 무학의 창조도 도와주렴.) 연경소는 비급상의 무학을 다시 시전해 보고 있었다. 그는 금강항마 장법을 익힐 생각이 없었다. 원래 그런 복잡한 초식을 펼치려면 몇 년 동안 고되게 수련해야 했지만, 대충 보아서 검법으로의 전환이 가능한 지를 재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덧 연경소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의 안색은 굳어졌다. (그렇구나... 초식이 다 무엇이냐?) 그는 이순간 자기의 무학이 크게 진일보하여 또다른 경지에 들어선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머리 속이 맑아지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보 고 선 느낌이었다. 사람이 무엇을 익힘에 있어서 보통 천천히 수련을 쌓아나가 나중에 는 숙련자가 되지만,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 보니 뭔가 확 깨달아지는 것이 있어다' 라는 경우도 있었다. 무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초식 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일순간의 깨달음에 힘입는 것이 었다. 연경소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하하하...!" 그야말로 마음이 탁, 트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으랴 싶을 정도였다. "하하하하하하..." 그의 웃음소리에는 한껏 즐거움이 묻어나왔다. 공력을 실어 내뱉은 웃음은 아니었지만, 무아지경에 빠졌던 화서운이 어느덧 운공을 멈추 고 의아한 눈으로 쳐다볼 지경이었다. 화서운의 눈이 둥그레졌다. "사부님, 왜 웃으시는 거죠?" 연경소는 활짝 웃었다. "하하... 내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느냐? 천하에서 제일가는 정교 한 초식이라도 비길 수 없을 것이다. 검은 곧 마음에 있으니, 그 누가 감히 조잡한 초식으로 덤빌 수 있겠느냐?" 화서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듣자니 무슨 선문답(禪問答) 같아 이 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오성이 뛰어나다지만 무학에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단계가 있는 법이었다. 무공이 절정에 이른 강호의 일류고수 가 만일 이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영원히 일류고수에 만족할 수 밖에 없지만 만약, 정말로 만에 하나 마음 속에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 는 이미 초절정의 고수인 것이다. 연경소는 자기가 천재일우(千載一愚)의 기회를 올바로 얻어 득도했 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갈길은 멀고 무학의 끝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지만 가 장 어려운 관문 하나를 뛰어넘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스스로 자랑스러 워지는 것이었다. 천재일우에서 재(載)라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수자였다. 손자산경 (孫子算經)에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불경(佛經)에서 유래된 수자이다. 가장 큰 수자는 무량대수(無量大數)로 십에 십을 예순 여덟 번 곱하면 나오는 수이고, 재(載)는 십에 십을 마흔 네 번 곱해야 나오는 수자였 다.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을 말하는 것인데, 그런 것에 다시 천을 곱 한다면 가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포함할 것이다. ## 현대식으로는 10^44 * 1000 = 10^47이 됩니다. 어느 수학자는 10 ^50이 넘는 확률은 우주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습니 다. 얼마나 희박한지 상상이 안 가죠... 63빌딩만한 큰 통에 수 없이 많은 부품들을 넣고 흔들었을 때 우연히 747 비행기가 튀어 나올 확률보다 더 희박합니다. <-- 괜히 끼어들기 ## 연경소는 자기의 이런 상황이 바로 그런 확률에서 하나를 찾아낸 것 과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런 행운을 잡은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 문에 착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화서운은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연경소는 어린 제자에게 자신의 뜻을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 다. "네가 크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깨달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너라면 알 것이다." 화서운은 답답함을 금치 못했다. "하나도 못 알아 듣겠어요." 그도 그럴 일이다. 연경소만큼의 성취를 이루려면 아직 화서운은 까 마득하게 많은 수련과 경험을 쌓아야 했다. 게다가 그런 경지에 이른 다고 해도 평생동안 단 한 번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 다. 만약 화서운이 그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면 이 소년은 천재도 아닌 신이나 악마이지 결코 강호에 몸담고 살아가는 무사가 아닐 것이다. 연경소는 더이상 설명해 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짧게 말을 끝냈다. "이 사부는 오늘 조그마한 깨달음을 알아 비로소 무학에 눈을 조금 뜨게 되었단다. 너도 이런 기회가 닿는다면 좋겠구나. 사부는 네가 깨 달음을 얻을 때까지 항상 이끌어 주겠다." 화서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은 오늘따라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하는군요." 연경소는 손을 뻗쳐서 화서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사흘이면 엄심단이 완성될 것이다. 나는 강호에 볼 일이 있어 내일 다시 떠나 한달 가량 후에 돌아올 것이니, 엄심단을 꺼내서 잘 간수해 두도록 해라." 화서운은 의아한듯 물었다. "또 어딜 가시게요?" 연경소는 웃었다. "하하... 외로운 모양이구나. 내가 나가있어야 너도 편하지 않겠느 냐? 그동안 새로 배운 것들을 잘 연습해 두어라. 나중에 돌아와서 청 죽십이식과 대라신검을 얼마나 연습했는지 검사할테니." 화서운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아직 어디 가시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요." 연경소는 대답했다. "네게 절학을 전수해 주었다는 오붕 노선배님을 만나보려고 한단다. 그리고 두분 형님과 네 누이의 행방도 찾아봐야하고." 화서운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는 언제쯤에나 만날 수 있죠?" "하루라도 빨리 만나게 해 주기 위해서 내가 뛰어다니는 거란다. 금 방 만날 수 있을테니 걱정 말아라." "그랬으면 좋겠어요. 얼굴도 자칫하면 잊어버리겠어요." "하하... 그럴 일은 없을테다. 설혹 잊어먹는다 해도 다시 만나보면 기억나지 않겠느냐?" "요새는 정말 이상한 일들이 많군요." "크느라 그럴 것이다." 연경소는 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요 몇 년 사이에 이렇듯 크게 웃어보는 것은 실로 오랫만이었다. 투골쌍마와 처음 만나서 박장 대소(拍掌大笑)할 때가 문득 기억났다. (형님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는지, 왜 노제와는 인연이 닿지 않 습니까? 하하... 노제는 오늘에야 깨달음을 얻었으니, 낮게 깔렸던 수 심의 구름이 걷어지는 듯 합니다.) 이글이글 타며 머리 위를 내리쬐는 태양빛도 이 순간은 한없이 부 드러워진 것 같았다. 소실봉(小室峰) 전체에 은은하면서도 급박한 종소리가 울려퍼진 것 은 바로 이때였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36 08/14 21:15 163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10) 땡땡땡땡... 종소리는 점점 급박해져서 명심정에도 그 자취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런 종소리가 들려오는 적이 일찌기 없었기 때문에 화서운은 깜짝 놀랐다. "저게 뭐죠?" 연경소는 나직하게 신음했다. "소림사의 비상타종일 것이다. 여기까지의 거리는 꽤 되는데도 이렇 듯 분명하게 들리는 것을 보면 분명히...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중 들에게 급박한 일이라면 외적의 침입 정도일텐데, 누가 감히..."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말꼬리를 흐렸다. 짧은 몇 마디였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이었다. (누가 감히 소림사를 침범한단 말이냐? 천년고찰(千年古刹), 무공을 아는 돌중들이 삼천 명은 될게다.) 화서운도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종소리가 갈수록 빠르게 들 리는 것을 보니 분명 중대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사부님, 소림사에 재미난 구경이 난 것 같은데 가보지 않으세요?" 연경소는 그만 실소했다. "하하, 아마도 사부의 생각에는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구나. 팔 년 동안 잠잠하던 경종이 이렇게 울리니, 아마 강적이 침입한 모양이다." 화서운은 몸이 달았다. "소림사를 구해주면 사부님을 귀빈으로 모실텐데요." 연경소는 너무나 황당한 말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맹랑한 제자 분이로구나. 소림사는 녹녹한 문파가 아니란다." 화서운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뭔가 생각할 때 으레 나타나는 그의 버릇이었다. (이번 기회를 못치면 밖에 나가볼 기회가 몇 년 동안 없을 거야. 지 난번에 호랑이사냥을 갔을 때 빼고는 한 번도 외지에 나가보지 못했는 데 마침 잘 됐지 뭐야.) 마음을 다잡은 그는 계속 졸랐다. "한번 가봐요!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잖아요?" 연경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소림사에는 무공을 쓸 줄 아는 화상만 삼천 명은 될게다. 내가 간다고 해서 대국(大局)에 영향을 줄 수는 없을텐데, 괜히 참견 해서 무엇 하겠느냐.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무공이나 익혀라." 화서운은 혀를 쏙 내밀었다. 어떻게 보면 버릇없는 행동이었지만 소 년은 곧잘 그런 행동을 하곤 했다. 약오를 때의 습관이었다. "혹시 사부님의 형님들인지 알아요?" 연경소는 꾸짖었다. "말조심 하거라. 어찌 형님들이 그런 곳에 나타났겠느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마음은 어느정도 흔들리고 있었다. 투골쌍 마가 갑자기 소림사에 나타날 확률은 거의 없었다. 헤아릴 길이 없을 정도로 많은 강호의 무사들 중에서 하필이면 자기의 의형님들이, 발이 부르터서 다 다니지 못할 정도로 넓은 중원천지 중에서 아주 작은 점 에 불과한 숭산 소실봉에, 그것도 무예의 총본산이라는 소림사에 나타 나서 행패를 부릴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제자가 무심코 던진 말은 청죽검객의 마음을 크게 자극하고 있었다. 소림사를 뒤흔들어 놓을만한 마두(魔頭)가 나타났다면, 기회를 놓쳐 서 구경하지 못하는 것도 억울한 일이었다. 내심으로는 크게 진전되어 감히 노화순청(爐化純淸)의 경지에 접어들었다고 자부하는 자기의 검 술을 시험해볼 요량도 없지 않았다. 연경소는 마침내 허락했다. "그러자꾸나. 반 시진 이내에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나가려면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화서운은 신나게 대답했다. "예!" 차디찬 계곡물에 나란히 몸을 담근 두 사제 중 먼저 목욕을 마친 사 람은 화서운이었다. 어린 마음에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 대충 물 기만 적시고 나온 것이다. 연경소는 제자를 보고 점잖게 타일렀다. "너무 서두르지 말아라. 황제의 어림군이 왔다고 해도 소림사를 쉽 게 쓰러뜨리지 못할테니." 하지만 한창 꿈에 부푼 소년에게 그 말이 먹힐리가 없었다. 말이 끝 나기도 전에 맹랑한 제자는 흰색 유삼(儒衫)을 차려입고 있었다. 연경소는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왜 문사의를 입느냐?" 화서운은 대답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여러가지 입을 것이 많은 백 의를 다 걸쳐입은 후였다. "이 옷이 가장 깨끗해서요. 파란 색의 옷에는 진흙이 묻어서 지워지 지 않고, 회색 무복은 무릎이 찢어졌어요." 연경소는 내일 자기가 출타하면 새옷을 몇 벌 사다주어야 겠다고 생 각했다. 작년에 사준 문사의는 무척이나 커서 화서운이 입으면 커다란 푸대자루 속에 들어간 것 같았는데 벌써 꼭 들어맞았다. 처음 이곳 명 심정에 왔을 때보다 어린 제자의 키는 머리통 두 개는 더 자라있었다. 그도 천천히 옷을 집어들었다. 늘 즐겨입은 청색 무복이었는데, 언 제 했는지 깨끗하게 빨아서 줄무늬를 펴 두었다. 제자의 매끄러운 솜 씨였다. 속으로 흡족해 하면서 옷을 다 입었을 때, 화서운은 지루해 죽겠다 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연경소는 웃음으로 할말을 대신하고 청죽검과 은자꾸러미 같은 자질 구레한 것들을 챙겼다. 화서운은 흰색 옷이 품은 꼭 맞았지만 어른용이라서 발목이 약간 헐 렁거렸다. 사부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소년은 파란색 끈으로 그 곳을 맵시있게 묶고 손목에도 마찬가지로 팔찌를 대신해서 묶었다. 원 래 문사의는 헐렁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니기에는 편했지만 활동하 기에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비단끈 몇 개로 고정시켰는데, 그렇 게 하고보니 썩 잘생긴 얼굴이었다. 연경소는 그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멋대가리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사부와 살아서 제자도 그럴 줄 알 았더니, 나와는 영 딴판이군. 나중에 부인 하나는 예쁘겠는걸.) 화서운은 최대한 편하게 옷을 입고 허리에 한옥검을 두르고 있었다. 찰칵, 하는 소리가 나면서 희대의 보검은 완전한 허리띠 모양으로 둘 려졌다. 누가 보아도 검이라고 느낄 수 없었다. 다만 검 끝과 자루 부 분이 만나는 앞쪽 허리에 옅은 자색(紫色)으로 태극(太極)무늬가 그려 져 있었다. 그 부분을 잡아빼면서 진력을 주입하라는 표시 같았다. 연경소는 물가로 가서 자신의 의복에 잘못된 점은 없나하고 살펴보 았다. 그러자 화서운도 같이 달려와서 물가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았다. 순 간 물가에 뭔가가 비쳤다. "앗!" 화서운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연경소도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적지 않게 놀라서 음,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탄으로, 하늘에 쏘아올리면 일정한 높이까지 올 라가 터져서 사방에 발사자의 위치를 알리는 것이었다. 강호에서는 이 런 것들이 흔치않게 쓰여지고 있는데, 사제는 이것을 보고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와, 이건 마치 축포 같구나! 정말 멋있다.) (명심정 주위의 산들은 높이가 상당해서 웬만해서는 사위의 모든 것 이 보이지 않고 낮도 짧은데, 여기까지 비치는 것을 보니 신호탄이 꽤 높이 올라간 모양이다. 아마도 소림사에 침입한 사람이 방수(幇手)들 을 불러모으는 모양이다.) 연경소는 화서운에게 눈짓을 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37 08/15 13:26 146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11) 두 사제는 경공을 펼쳐서 산길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명심정 계곡 에서 큰길까지 가는 데에는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길이 험준하 여 상당한 애를 먹었다. 소림사에서 가장 높은 탑(塔)의 끝부분이 얼핏 보이는 곳까지 다다 랐을 때였다. "멈추시오!" 여덟 명의 승려들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연경소는 눈짓으로 화서운을 제지하고 나서 말했다. "귀사에 무슨 일이 있는지..." 승려들 중 왼편에 선 네 사람은 선장(禪杖)을 들었고, 나머지 네 사 람은 계도(戒刀)를 쥐고 있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막 지고 있는 태양의 반사광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화서운은 그 모습을 보고 킥, 하고 웃었다. "능청스럽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뭇느냐?" 두목격으로 보이는 승려가 대뜸 일갈하며 선장을 휘둘렀다. 선장 끝 에서 휭! 하는 바람소리가 나는 폼이 예사 중같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고강한 무공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무예를 배운 지 삼사년 정도 되는 승려인 것 같았다. 연경소는 소림사와 분규를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실력으로 안 되서라기보다는, 무의식중에 정도무림의 영도자 격인 소림에 대한 존 중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기 때문이었다. "손을 쓰려는 것이 아니오." 연경소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가볍게 선장을 피해버렸다.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승려는 얼굴이 약간 벌게졌다. 전력을 다한 한 수는 아니었지만 상대방이 자기의 계인벌악(戒人罰惡) 일초를 팔짱을 낀 채로 피해버리자 부아가 돋은 것이다. "불법무상(佛法無上)!" 그 승려가 이렇게 외치자 나머지 일곱 승려들이 연경소와 화서운 두 사람을 완전히 에워쌌다. 팔괘(八卦)의 방위를 완전히 차단당하자, 연 경소는 약간 난처한 기색이었다. 연경소는 여전히 검을 뽑아들지 않고 말했다. "손을 쓰기 원하지 않습니다." 화서운도 한 마디 했다. "사부님께선 검을 뽑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여덟 사람이 같이 공격하 는군요. 창피도 모르나봐!" 승려는 그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외쳤다. "일식(一式)!" 그러자 승려들의 무기가 일제히 가운데로 집중되었다. 연경소는 일 순 깜짝 놀라 철판교(鐵板橋) 신법을 펼치면서 검을 뽑아들었다. 어리 숙한 제자가 다른 사람과 손을 처음 쓰기 때문에 당하지는 않을까 우 려한 것이다. 쨍! 하고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연경소가 보호할 필요도 없 이 화서운은 허리에서 한옥검을 익숙하게 뽑아들어 한 개의 선장과 계 도를 막아냈다. 승려들은 첫번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우두머리 승려가 <이식(二 式)!> 이라고 외치는 것을 기다려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연경소와 화서운은 이미 검을 뽑은 후였다. "운아야, 태산첨죽이다!" 화서운은 대답할 시간도 없이 한옥검을 비스듬히 뉘었다가 치켜들며 태산첨죽 일초를 펼쳐냈다. 사실 그는 탄지신공으로 날아드는 병기를 퉁겨내려고 했는데, 아직 그의 공력이 부족하다고 본 연경소가 재빨리 초식을 수정해 준 것이었다. 청죽십이식 가운데 가장 날카로운 일식이 펼쳐지자, 화서운을 공격 하던 두 자루의 병기는 그만 잘려나가고 말았다. "앗!" "음?" 두 승려는 각각 자기의 선장과 계도를 내려다보면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겨우 열몇 살인 아이에게 병기가 잘리자, 부끄럽기도 했 지만 화가 났다. 연경소는 한 번의 동작으로 상대방의 무기를 잘라버린 제자가 자랑 스럽기도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소림사와 충돌한 격이 됐구나. 만약 삼천 명이나 되는 돌중들이 일 제히 달려든다면 팔이 열 개라도 죽고 말텐데.) 화서운은 자기도 모르고 한옥검을 들여다보았다. 둔탁해 보이는 선 장과 계도를 그저 쉭, 하는 소리만 났을 뿐 가볍게 잘라버린 신병이기 가 자기 손에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것 같았다. 연경소는 일부러 손에 사정을 두고 상대방의 공격을 막기만 했을 뿐 잘라버리지는 않았다. 그의 무공으로 본다면, 청죽검이 평범한 청강검 이라고 해도 경력을 주입하여 상대방 무기를 잘라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상대방 승려들이 모르는 것이 천만다행이었지만, 지금의 청 죽검객은 설사 소림사의 방장과 맞붙는다고 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 수 준이었다. 그야말로 일류의 수준을 벗어난 것이다. 승려들은 일제히 다섯 걸음을 물러나 일렬로 섰다. 두목인 듯한 승 려가 말했다. "시주의 검법은 우리로서는 막을 수 없으니, 단지 죽음으로 막을 뿐 이오. 자, 손을 쓰시오." 연경소는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원래 바로 소실봉의 한 구 석에 사는..." 그때, 여덟 명의 승려들 중 네 명이 힘없이 쓰러졌다. 우두머리 격 인 듯하던 승려는 즉시 쓰러진 동료 옆으로 가서 손목을 짚어보고 눈 을 까뒤집어보더니 말했다. "죽었소. 당신은 어째서 실력으로 하지 않소?" 그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팽! 하는 파공성을 들었고, 그것이 이승에 서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어디에서인가 날아들은 암기가 승려의 이마 에 정통으로 꽂혔다. 비명이고 자시고가 없었다. 또다른 세 개의 암기는 소리도 없이 날 아들어 그나마 남아있는 세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연경소는 대경실색하여 외쳤다. "누구냐?" 그는 이미 누군가가 암중에서 승려들을 해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미미한 기척과 암기가 날아온 방향을 판단해서 그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흐흐..." 대로 왼편의 숲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또다시 몇 개의 암기가 날아들었다. 연경소는 소리쳤다. "운아, 조심해라!" 이미 여덟 목숨을 앗아간 악독한 암기는 자기 뿐만 아니라 제자에게 도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38 08/15 21:48 134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7장... 납치 (1) 연경소는 솟구치던 몸을 다시 떨어뜨려서 암기에 대비할 수밖에 없 었다. 암기가 날아오는 기세는 거의 눈치챌 수 없었지만 살기에 가득찬 것 이었다. 어려서부터 전문적으로 귀와 눈을 영민하게 하는 훈련을 쌓아 온 사람이 아니라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듯한 악랄한 수법이었다. 피할 만한 방위는 거의 차단되었다. 연경소는 급히 소리쳤다. "운아, 음풍농월(吟風弄月)로 가슴과 배를 막아라!" 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소매를 휘둘렀다. 청삼 끝은 경력이 가득히 주입되어 마치 고무 풍선처럼 부풀었다. 화서운은 감히 그와 같은 재주를 부릴 생각을 못하고 청죽십이식 가 운데 수세(守勢)인 음풍농월을 펼쳐서 엄밀히 대비했다. 암기를 던진 사람의 손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먼저 뿌린 암기가 미 처 다다르기도 전에 다시 한줌이나 되는 암기를 뿌렸다. 수십 개의 검 은색 암기가 석양 사이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만천화우(滿天花雨)! 운아야..." 연경소는 소매 끝에 말려들어간 암기를 대충 살펴보고는 일종의 철 연탄(鐵煉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인체에 닿게 되면 즉시 타들어 가 면서 상당한 치명상을 입히는 것인데, 검 따위로 함부로 쳐내게 되면 오히려 병기의 이가 빠질 염려가 있었다. 무엇이든 닿게 되면 격렬히 타들어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와 같은 사실을 제자에게 알려줄 시간이 없었다. 상 대방은 한꺼번에 수십 개의 철연탄을 던졌는데, 아무렇게나 던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늘에 꽃비가 가득 차 내린다는 초식의 이름(滿天花雨)과 같이, 철 연탄은 인정사정없이 내리꽂혔다. 그것의 대부분은 연경소의 소매자락 속으로 빨려들어갔지만, 그의 제자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화서운은 다시 한 번 음풍농월의 한 수를 펼쳐서 요처를 보호했지만 그 많은 암기들을 모조리 쳐낼 수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공격은 이유 제강(以柔制强)의 원리에 따라 부드럽게 기세를 누그러뜨리거나, 아니 면 더욱 강맹한 수법으로 모조리 쳐서 떨어뜨려야 하는데 불행히도 화 서운의 무공은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이제 겨우 강호에 발을 내딛은 풋내기에 불과했다. 화서운은 그만 견디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댄 그 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부님, 적어도 세 개는 맞았어요." 소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여태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고통이 상처를 훑고 지나갔다. 몸에 단단히 박힌 철연자 세 개는 각기 다른 부위에서 격렬하게 타들어간 것이다. 화서운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하지만 타들어가는 기세가 뼈속 깊이 까지 침투했을 때, 더이상 견딜 수 있는 의식은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 다. "운아야!" 연경소는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밖에 나 온지 일각도 못 되어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모습을 본 사부가 격노하 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는 일순 제자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우선일지, 아니면 암중에서 승려들을 죽이고 제자를 공격한 인물을 추격하는 것이 우선일지 결정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약간 어두워진 주위 경관은 청죽검객의 낯 을 대부분 가려 주었지만, 일장 밖에 선 사람도 그의 분노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기다려라. 내 반드시 너를 찾아 두 배로 갚아주겠다.) 연경소는 추적을 포기하고 의식불명의 제자에게 다가섰다. 화서운은 기절한 가운데에서도 지극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 었다. (이런 악독한...) 그는 피가 배어나오는 부분을 찾았다. 아까 세 군데에 맞았다는 말 을 들었기 때문에 상처 부위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상처는 오른쪽 어깨에 둘, 무릎 바로 위에 에 하나였다. 타들어가고 있는 뼈와 살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는데,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선혈이 흘러나오고 그 주변은 노랗게 탈색되어 있었다. 연경소는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강호에서 쓰여지는 일반적 조 치법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의원이 아닌 이상 뼈속까지 사무친 상 처를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는 없었다. 그는 화서운을 안아들었다. 치료하기 좋은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또 방해를 받아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경소의 입술에서 약간의 피가 배어나왔다. 그는 마치 모든 분노를 이빨에 집중한 듯,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입술을 씹었다. 구슬처럼 군데군데 맺힌 땀방울이 입가로 흘러내리자, 피와 땀이 섞여서 만들어 진 액체가 턱까지 흘러내렸다. (내 제자가 무슨 상관이 있느냔 말이다.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오 늘 소림사에 침입한 너희들은 청죽검객 연모에게 한바탕 해명을 하지 않고서는 하산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는 일단 푹식한 풀밭 위에 어린 제자를 눕혀놓고 옷을 벗겨 상처 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오른손 식지(食指)에 약간 묻혔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암기에 독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인데, 선혈이라 면 아무 중독이 없다는 뜻이지만 만약 피 색깔이 검거나 푸른 빛을 띄 고 있다면 크건 작건간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다행 히 손가락 첫째마디에 맺힌 핏방울들의 색깔은 선홍색으로, 깨끗한 피 였다. 연경소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 중 다행이다.) 그는 상처를 자세히 돌볼 시간이 없어서 다만 흘러나오는 피를 멈추 고 금창약을 뿌렸다. 보통 피를 멈추는 작용이 있는 금창약은 바르는 형태의 것이었지만, 연경소가 가지고 다니는 것은 가루분말이어서 가 볍게 몇 번 뿌려주면 되는 것이었다. 이 약은 그가 강호에 다닐 때 설 산파(雪山派) 장문인 빙설도(氷雪刀) 손맹(孫孟)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한참 급했던 그는 미처 약을 만들어준 사람을 기억해낼 틈이 없었지만 이 약은 설산의 수도없이 많은 빙곡(氷谷)들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낸 약초들을 배합하여 만든 진귀한 것이었다. 약초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 한인 연경소는 알리가 만무했지만, 이 금창약에는 피를 멈추는 지혈작 용 뿐만 아니라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며 가벼운 독상이라면 해소시키 는 효능이 있었다. 대충 상처를 돌본 연경소는 자신의 소매 끝을 약간 찢어서 화서운의 상처들을 싸매주었다. 아직 암기를 꺼내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의 조 치면 더 악화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연경소는 손가락을 뻗쳐서 화서운의 수혈(垂穴)을 짚었다. 의식불명 이었던 소년은 잠깐 몸을 뒤척이더니 깊이 잠들었다. 고통을 안 느끼 도록 배려한 것이다. "자, 기다려라!" 연경소는 땅에 뉘여두었던 청죽검을 집어들고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 다. 미지(未知)의 적에 대한 도전의사의 표명이었다. 어떻게 보면, 도 전이 아니라 응징의 뜻이기도 했다. 무림천하가 아무리 넓다고 하지만 연경소의 자신감은 누구라도 무섭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유일한 어린 제자에게 무차별 살수를 가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39 08/16 20:43 159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2) 마지막으로 땅에 떨어진 한옥검을 조심스럽게 제자의 허리에 둘러준 연경소는 주변에 엿보는 사람이 없나 확인한 후 재빨리 몸을 날려 대 로상에 나섰다. 그는 마음이 타는 듯 급했다. 억지로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격동되는 감정을 참고 소림사 선문(禪門)쪽으로 무작정 달렸다. 침입한 자들이 누구인지 승려들에게 물어볼 참이었다. 나는 듯이 발걸음을 옮겨 산길을 올라온 지 반각, 그는 정문 앞에서 네 명의 화상(和尙)에게 저지당했다. 연경소는 눈썹이 탈 지경이었지만 소림사의 위명을 생각하고 정중하 게 말했다. "소생은 명심정에 사는 연경소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귀사의 방장대 사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그는 화상들을 자세히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석양빛 아래 회색 장삼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 명의 화상 은 일렬로 나란히 서 있었는데, 전혀 얼굴에 표정이 없어서 마치 돌로 깎아 만든 부처상 같았다. 소림사 선문 위에는 가로로 일 장이 넘는 횡액(橫額)에 힘있는 초서 체로 소림(小林)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져 있었다. 특별히 화 려하게 치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소박한 가운데에서도 기운이 흘러넘쳐 힘찬 기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화상 네 사람은 각각 다른 무기를 들고 있었다. 제일 왼쪽부터 불진 (拂塵), 선장(禪杖), 제미곤(齊梶棍), 철여의(鐵如意)를 손에 쥐고 있 었는데 하나같이 태양혈이 눈에 띌 정도로 솟아나와 있어 내공의 고수 임을 알 수 있었다. 연경소는 내심 감탄했다. (과연 소림사로구나. 고작 문을 지키는 화상들이 이 정도라니, 달마 조사 이래 천 년을 이어내려오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 을 것이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엄한 규율과 깊은 무공에서 근본적 인 힘이 우러나올 것이다. 언제 한 번 혜심선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 고 싶구나.) 그는 지금 한 시가 급할 때라는 것을 자각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금은 제자가 부상당해 있고, 소림에는 대적이 침입하거나 했으니 아마도 비상시일 것이다. 빨리 행동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말했다. "혜심대사를 만나뵐 수 없습니까?" 여전히 화상들은 묵묵부답,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제서야 연경소 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 알고 보니 이들은 혈도를 찍힌 것이로구나.) 그는 가까이 다가가서 가장 오른쪽이 있는 화상의 몸을 더듬어 보았 다. 대충 어느 곳의 혈을 봉쇄했는지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장문혈 부 근이 막힌 것을 알아낸 그는 서슴지 않고 손을 네 번 휘둘렀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네 명의 화상은 혈도가 풀린 듯 신음 소리를 냈다. 연경소는 이미 허공을 격하고 점혈과 해혈을 자유재자로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음..." "음..." 갑자기 한 명의 화상이 눈을 번쩍 뜨더니 그 자세를 그대로 하고 앞 으로 고꾸라졌다. 연경소는 깜짝 놀라서 그를 일으키려는데, 미처 무슨 수를 써보기도 전에 나머지 세 명의 화상들도 연달아 쓰러졌다. 그는 갑자기 초조해졌다.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이냐. 분명 맞는 혈도를 풀어 주었는데, 무림 에 이런 수법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연경소의 두뇌 회전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겉돌고 있었다. 그는 오늘 하루동안 열 둘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것 인데, 모두가 소림사의 승려들이었다. 도무지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되 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무당파(武當派)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 정종 무공의 총본산 소림의 승려를 살해하다니... 연경소는 잠시 후 결정을 내리고 소림사의 정문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 뭔가 예감이 좋지 않구나.) 그는 손에 힘을 주어 커다란 나무문을 슬쩍 밀고 들어갔다. 크기에 비해서 문은 그다지 무겁지 않았고, 미는대로 쉽게 열렸다. 이상한 느 낌을 한 번쯤 받아야 정상이련만 연경소는 이미 괴상한 사건을 신물나 게 겪은 뒤라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가 막 선문을 들어섰을 때였다. "시주, 소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연경소는 환영하는 인사말이 불문의 사자후 공력을 담고 있는 것을 알고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고막이 상하는 것을 막았다. 한 번 잘못 걸리면 귀머거리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칠공(七空)에서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이 바로 사자후였다. 그가 사자후보다 더 놀란 것은 안쪽의 광경이었다. 비록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맙소사!> 하는 탄성을 내지른 것 은 당연했다. 바로 두께가 한 자도 되지 않는 문 하나 차이인데, 바깥쪽의 광경과 안쪽의 광경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소림사의 대외 집회와 향화객(香花客)들이 부처님을 뵙고 기도를 올 리는 넓다란 앞마당이 꽉 메워져 있었다. 수천 명도 더 되어보이는 승 려들이 줄지어 반원을 그리며 도열해 앉아 있었고, 반원의 중심부에는 항렬이 높아보이는 고승들이 수십 명 앉아있었다. 연경소의 예리한 관 찰력은 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약간 어두운 때라 대낮보다는 식별이 어려웠지만, 사방에는 횃불이 거의 한 장 간격으로 꽂혀있고 마당의 구석 몇 군데에는 모닥불을 크 게 피워놓고 있어서 저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반원을 그리고 있는 승려들의 옷 색깔이 조금씩 틀린 것을 알 아챘지만 그 속뜻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이건 또 뭔가...) 그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다시 한 번 사자후 공력이 귀를 때렸다. "시주께서 오늘 역근경(易筋經)을 빌려가겠다고 하신 분이오?" 연경소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당연히 반문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되도록이면 소림사와 충돌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목소리에는 절반 가량의 공력만을 실었다. 그는 비록 사자후의 수법을 제대로 몰 랐지만 심후한 공력에 의지해서 그와 비슷한 위세로 마당 전체를 웅웅 거리게 만들 수 있었다. 반원의 중심부에서 터져나오는 사자후의 주인공은 조금씩 앞으로 걸 어나오면서 말했다. "이제와서 딴소리를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 아니겠소. 조사께서 남기신 역근경을 외인에게 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오. 그대가 끝끝내 이 물건을 보고자 한다면 오직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소림사의 방장이자 천산벽력장 정련과 어깨 를 나란히 하는 혜심대사(慧心大師)였다. 연경소는 길게 읍하고 말했다. "저는 역근경을 보려 온 것이 아닙니다." 혜심대사는 잠시 의아해 했지만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첫번째 방법은 시주가 불문에 귀의하여 본사의 제자가 되는 것이오. 역근경은 장로 이상만 볼 수 있으니 세월이 지나면 자연 보게 될 것이 오." 그는 잠깐 운을 떼었다가 말을 이었다. "두번째 방법은 바로 힘으로 빼앗는 것이오. 하지만 이 방법은 수월 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밝혀두겠소이다. 물론 절세의 공력을 지녔다면 매우 간단한 일이겠지만, 그저 본사에서는 몇 개의 관문을 준비해 두 었으니 생각이 있다면 시험해 보기 바라겠소." 연경소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머리 속에서는 계속 맴돌았지만 입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40 08/16 22:32 196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3) 혜심대사의 말은 계속되었다. "첫번째 관문은 본사의 영(靈)자 항렬의 제자와 겨루어 이기는 것이 오. 관문은 모두 여덟 개가 있지만, 아직 모두 통과한 사람은 거의 없 다오." 연경소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지 않고 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림사 는 거대한 위압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저는 명심정에 유거하는..." 그의 말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누군가가 절 바깥에서 천리전음(千里 傳音)의 수법으로 외친 것이었다. 억양이 겹겹이 울리는 것으로 보아 혼자 낸 소리 같지는 않았다. "연가야, 네 제자는 우리가 보호하고 있다. 화상들과 노닥거릴 시간 이 있는가 보구나." 목소리는 아주 천천히 울려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는 화상도 있었다. 바로 옆에서 귓속말로 하는 것 처럼 소리는 매우 가늘었지만 확실히 한마디 한마디를 알아들을 수 있 을 정도로 분명했다. 수천 명의 중들 사이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저건 사자후가 아닌데." "명심정이라면 청죽검객 연경소가 아닌가?" "그가 왜 우리 지객승과 사미승들을 죽였지?" "무승(武僧)들도 한 백 명은 죽거나 다쳤을 거야." 그 소리들은 전체적인 소요에 파묻혀 어느것 하나 퍼져나가지 못했 다. 만약 연경소가 그 말을 들었더라면 약간 상황이 달라졌을 테지만. 아무튼 그 전음을 들은 연경소는 더이상 소림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 다. 어차피 혜심대사를 만나고자 했던 것도 이곳에 쳐들어온 외부세력 의 정체를 알아내어 빚을 갚으려고 한 것인데, 하물며 제 입으로 여기 있노라 하는 데다가 제자를 보호하고 있으니 머뭇거릴 하등의 필요가 없었다. 연경소는 겸연쩍게 말했다. "소생은 다시 한 번 소림에 들러 이 오해를 풀도록 하겠습니다. 검 은 두고올 터이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한 번 길게 읍하고 바깥으로 걸어나가려고 했 다. 그러나 미처 다섯 발자국도 가지 못해 등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소림사는 마음대로 왔다가 가는 곳이 아니오!" "연경소 아니라 그 사부라도 해명을 해야할 것이오!" "쓴맛을 봐야 깨달을 시주로다!" 세 군데에서 터진 호통은 그 형체를 드러내며 성난 호랑이처럼 달려 들었다. 세 명의 승려들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연경소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 었다. 그 형세는 연경소가 크게 불리해 보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정 반대였다. 몸을 공중에 띄우면 오래 머물러 있을 수도 없을 뿐더러 행동에 제 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능공허보(凌空虛步)나 축척성촌(縮尺成寸)이 라는 절정의 경신법으로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새가 아닌 이상 무한정 공중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위에 서 아래로 공격한다는 기세 외에는 득볼 것이 없었다. 다른 문제점은 쌍방간 무공의 격차였다. 혜심대사 정도의 인물이 손 수 일장을 날린다면 모를까, 지금 연경소의 행보를 막으려고 하는 승 려들은 소림에서도 제 삼대에 속하는 영자 항렬의 무승들이었다. 살아 있는 승려들 중 가장높은 배분은 지(智)자 항렬로 장문인 혜심의 사숙 (師叔)뻘 되는 지명(智明)대사였지만 조사동(祖師洞)에 은거하여 모습 을 드러내지 않았다. 실제로 소림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혜(慧)자 항 렬의 노승들로이었는데 방장 혜심대사를 비롯해 사제인 혜문(慧紋) 등 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다음의 항렬은 일(一), 영(靈), 해(海)의 순서 로 이어지게 되는데 해자 항렬은 막 삭발하고 중이 된 소사미들에 해 당한다. 만약 일자 항렬 정도의 승려가 셋이서 합공을 했다면 연경소에게 어 느 정도 위협을 줄 수 있었겠지만, 그 제자들로서는 턱도 없었다. 나 이는 서로 비슷할지 몰라도 성취에 있어서는 도저히 천하에서 둘째가 라면 서러운 청죽검객을 따를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없습니다." 연경소는 이렇게 끊어 말하고는 퍽퍽퍽, 3장을 뒤로 후려쳤다. 돌아 보지도 않고 발출했지만 마치 뒤에도 눈이 달린 듯 세 줄기의 장력은 교묘하게 영자 항렬의 세 승려를 가로막았다. 이때 혜심대사는 마당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제자들이 당해내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몸을 날리면서 두 손을 모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이것을 본 몇몇 장로들이 소리쳤다. "백보신권(百步神券)!" 백걸음 밖에서도 능히 적을 때려 죽일 수 있다는 72종 절예의 백미 인 백보신권이 막상 소림사 방장의 손에서 펼쳐지자 과연 대단한 위력 을 발했다. 연경소는 이미 3장을 발출하여 영자 항렬의 세 승려를 막아낼 수 있 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등뒤에서 무서운 기세로 들이치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번개같이 몸을 돌렸다. 퍼퍼퍽,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와 거의 동시에 또 한번 맹렬히 손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것은 영자 항렬의 3승이 연경소의 장력 을 당해내지 못하고 간신히 손을 맞쓰기는 했지만 약간의 내상을 입은 상황이었고, 나중 것은 혜심대사의 백보신권이 연경소의 장력에 충돌 한 소리였다. 혜심대사가 연경소로부터 약 오 장 가량 떨어진 곳에 멈춰서서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자 승려들 가운데서 몇 명이 뛰어나와 부상자 세 사 람을 업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과연!) (아니...) 두 사람이 품은 생각을 글로 적는다면 서로 다르겠지만, 그 느낌은 비슷한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이나 느낌을 인간의 언 어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지만 대충 표현하자면 서로에게 감탄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교환에서는 연경소가 약간의 손해를 보았다. 만 약 범상한 무사였다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중상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의 무공은 화경에 접어들어 쉽사리 상해를 입지 않는 경지 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소림사의 백보신권이 절세기공이기는 하지만 그는 장력으로 어느 정도 그 강맹무비한 기운을 어느정도 해소했고 체 내의 진기로 들끓는 기혈을 다독거려서 별로 큰 손해를 입지는 않았다. 이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것이니, 연경소는 장법에 대한 조예가 깊 지 않았기 때문에 몇번만 더 이런 식으로 손속을 교환한다면 내가진력 이 모자라는 수가 있었다. 연경소는 손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위세 를 부리며 버티고 선 그는 암암리에 빠른 속도로 진기를 몇 바퀴 운행 시켜서 들끓는 기혈을 진정시키고 탁한 기운을 몸밖으로 뿜어낼 수 있 었다. 공력을 거의 대부분 회복한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대사님의 심후한 공력에 감탄했습니다. 소생을 믿지 못하신다면 저 의 분신과 같은 이 청죽검을 놓고 갈테니, 훗날 와서 죄를 빌고 찾아 가겠습니다." 연경소는 그냥 그 자리에 검을 꽂아두고 나가려다가 갑자기 호승심 이 이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고 검을 치켜서 수평으로 들어올렸다. 혜심대사도 그의 공력에 탄복하고 있었고, 정말로 청죽검객일 가능 성이 높다고 생각하여 가만히 호흡만 고르고 있었다. 엉뚱한 행동으로 위협을 가한다면 다시 한 번 백보신권의 맛을 보여줄 참이었다. 연경소는 다리를 딱 붙이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죄를 지은 벌로 검을 두고갑니다!" 그는 미소지으며 손가락 끝으로 검자루를 한 번 퉁겼다. (자, 얼마나 늘었는지 시험해 보자.) 사실 그 자신도 한 번의 깨달음으로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 답답하던 차에, 오히려 이런 기회가 주어져서 고마울 지경 이었다. 백보신권의 절기와 조우를 해 보았으니 견식을 한 번 넓힌 셈 이기도 했다. 살짝 퉁긴 것 같았지만 그의 손바닥 위에서 검은 빠른 속도로 회전 하기 시작했다. 연경소는 약간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춰서 날카로운 검날이 살을 베지 않도록 했다. 그러자 손바닥에는 조그만 상처도 생 기지 않고, 청죽검은 푸른 빛을 발하며 더욱 빠르게 돌아갔다. 연경소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쾌속하게 회전하는 검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기합소리를 내지르면서 손바닥에 경력을 주입했다. 그가 의도하는 것은 장내의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다만 손가락 한 번 퉁긴 것으로 검이 그렇게 맹렬히 돌고 또한 손바닥에 아무런 상처 가 없는 것을 보자 몇몇 승려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구경하고 있었다. "하하하..." 연경소는 길게 웃으며 아주 천천히 경력을 주입하던 손바닥에 힘을 증폭시켜 태극경(太極勁)의 수법으로 변화시켰다. "허허..." 그제서야 혜심대사를 비롯한 몇몇 장로들은 연경소가 무엇을 하려는 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진기로 검을 조종하려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들의 짐작은 거의 들어맞았다. 연경소의 손에서 떠난 검을 맹렬히 회전하는 기세를 늦추지 않으면서 혜심대사 쪽으로 날아갔다. 바로 어 검술의 기초가 되는 수법이었다. 검이 혜심대사에서 일 장 정도에 다다르자,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났 는지 두 명의 노승이 양옆에서 불진을 떨쳐내어 검의 기세를 멈추려고 했다. 연경소가 적잖게 놀라고 있는 사이에 혜심대사가 그들을 저지했 다. "연 시주는 나를 해치려는 게 아닐세. 이 기회에 절세의 검법을 한 번 구경하게나." 그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41 08/17 10:06 177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4) 검마 냉약과 함께 천하제일의 검수로 일컬어지는 청죽검객 연경소가 일생동안 익히고 추구해온 검학의 정수가 모조리 담긴 청죽검은 회전 을 계속했지만 더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일자 항렬의 최고참 격인 일현(一賢)대사가 찬사를 터뜨렸다. "저것은 어검술에 거의 근접한 경지이다! 잘 보아라, 어떻게 검초를 쓰느냐에 구애받음이 아니다. 아무리 정교한 초식도 웅혼한 내공이 담 긴 일장에 허물어지듯, 저것은... 저것은..." 그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승려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빙글빙글 회전하던 검은 끝에서 검기를 뿌려내어 모래를 파고들었다. 분명 연경소는 사 장 하고도 두세 자는 더 떨어져 있는데 검은 스스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무형의 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십여 차례 푸른 색의 섬광이 번뜩이더니, 청죽검은 기세를 잃고 아 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 떨어지는 모양새는 결코 힘없이 낙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손으로 들어 땅에 꽂는 듯한 박력이 넘쳐흐 르는 장면은 감동 그 자체였다. 푹! 마침내 청죽검이 화려한 춤사위를 멈추고 혜심대사에게서 정확히 일 장 앞 마당에 꽂혔다. 모래와 자갈로 덮인 바닥이었지만 먼지는 전혀 일지 않았다. 아까 검기에 파인 곳도 칼로 도려낸 듯 깨끗하기 이를데 없었다. 연경소는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며 귀를 기울여 아까 전음을 보 낸 사람이 어디쯤에 있을까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힘을 쓴 것 같지 않았지만, 그 정도의 고수도 한 번 검을 이렇게 운용하자 고무풍 선에서 바람이 반 정도 빠져나간 것처럼 힘이 쭉 빠진 것을 느끼고 황 급히 운공하여 내공을 보충했다. 연경소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혜심대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지은 죄는 다음에 한 잔 술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돌아섰다. 입이 반쯤 벌어진 소림사의 제자들을 뒤로 하고 당당하게 걸어나오는 기분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비 록 청죽검을 두고 오기는 했지만, 그로써 자기의 검술이 한층 진일보 했음을 확인하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기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은 아니 라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것은 천리전음의 주인공을 찾는 일 뿐이었다. -+- -+- -+- 화서운은 수혈을 짚혀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다만 상처가 너무 심하여 몇 번이나 혼절하고 깨어나기를 되풀이 하 면서 조금씩 통증을 삭이고 있었다. 깨어난지 일각도 못되어 다시 기 절하고, 또 얼마 안되어 깨어나는 고통은 일찌기 겪어보지 못한 것이 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린 그는 가부좌를 틀고 내공을 운기하려 했으 나 무릎이 철연탄에 의해 타들어간 후라서 앉기조차 어려웠다. 화서운의 기억은 아까 암기를 맞고 뼈가 타는 듯한 고통을 느낀 데 에서 끊겨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혼절과 깨어남을 거듭했던 것이다. (정말 악독한 암기다. 그냥 침처럼 박힌 것이 아니라 이건 뭐, 박힌 자리에서 그대로 타들어가고 마니 맞은 사람으로 하여금 꼼짝도 못하 게 한 거야.) 그는 조심스럽게 상처를 묶은 곳을 풀고 환부를 들여다 보았다. 하 지만 이미 연경소가 손을 써 놓았기 때문에 피는 더이상 나오지 않고 있었다. 화서운도 대충 그간의 사정을 짐작하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어디선가 비웃는 목소리가 들리며 조그만 돌멩이가 세차게 날 아오며 아랫배를 치려고 했다.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다니, 귀신과 말이라도 하려는 거냐..." 화서운은 그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어 재빨리 몸을 수그리며 오른쪽 엄지와 중지를 모았다가 중지를 퉁겨내며 돌멩이의 앞쪽을 세차게 때 렸다. 자기도 모르고 탄지신공의 공력이 들어간 셈인데, 돌멩이는 비록 땅 에 힘없이 떨어졌지만 화서운은 팔꿈치까지 저려오는 것을 느끼고 깜 짝 놀라 두 발자국이나 물러섰다. 기세에 의해 할 수 없이 물러선 것 이 아니고 무의식중에 뒷걸음질친 것이었다. "너는 소림사의 제자냐?" 이렇게 말하면서 누군가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화서운의 앞에 섰 다. 그 모습을 본 화서운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이렇게 못생긴 사람이 있다니.) 화서운은 그 사람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머리는 제법 단정하고 빗었 지만 들쑥날쑥하여 빗은만큼의 모양은 나지 않고, 이목구비는 어느 하 나도 제대로 박힌 것이 없었다. 푹 꺼진 두 눈과 약간 비뚤어진 코는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말을 할때마다 간간이 보이는 치열은 고르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앞니 두 쌍만 하더라도 앞뒤 간격이 일촌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 사람은 화서운이 멍하니 서있으면서 대답을 하지 않자 화가 치밀 었다. 마치 자기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 비웃는 것 같아서였다. "넌 내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느냐?" 화서운은 어리둥절했지만 속으로는 웃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걸 지금 나에게 묻다니, 물가에 가서 한 번 비춰 보시구려. 아마 도 도깨비도 당신보다는 미남일 거요.) 그는 역시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자 갑자기 만족한 표정을 지었 다. "내 이름은 위(魏)씨 성에 달(達)자를 쓴다. 저 염병할 소림사를 만 들었다는 달마인가 뭔가하는 자식과 불행히도 이름이 똑같지 뭐냐. 감 히 내 이름에 그 달자를 쓰다니, 부모님만 아니었다면 요절을 내고 말 았을 것이다." 화서운은 그가 소림사에 지극히 큰 원한을 가지고 있으며 어쩌면 정 신 상태가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름을 그렇게 엉망진창으 로 소개하는 것을 듣고는 의아했다. (염병할 소림사라니. 아마 당신의 무공이 하늘처럼 높다고 해도 소 림사와 겨루어 이길 수는 없을걸.) 위달은 힘주어 말했다. "미리 물어볼까봐 말하는데, 내 강호에서의 별호는... 염병할! 추노 괴(醜老怪)라고 한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만나기만 하면 모가지 를 열 번 정도 비뜰어서 엉덩이에 붙여버릴테다. 그러니 너도 어깨 위 에 모가지가 성할려면 이름을 부르거나 위 선배님이라고 해야지 안 그 러면 아마 너의 어머니가 날 잡아죽이려고 할 것이다." 화서운은 속으로 계속 웃고 있었다. 꽤나 욕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 거워졌다. (어머니, 나는 당신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있어요. 한 번이라도 다시 뵈오면 형생 잊어먹지 않을텐데... 않을텐데...) 이 되뇌임은 화서운이 그리울 때마다 혼자서 중얼거리곤 하는 것이 었다. 아직도 어린아이인 그는 가끔 견딜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곤 했 다. 사부는 그것이 심마(心魔)라며 견디고 이겨내야만 한다고 다그쳤 지만,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화서운이 얼굴 가득히 슬픈 표정을 짓자, 추노괴 위달은 물었다. "너는 왜 슬픈 표정을 짓는 거냐? 아무튼 나는 너를 잡아가야 하니 까 순순이 혈도를 짚이는게 고통이 없을거야. 난 원래 목을 비틀어 꼼 짝 못하게 하고 잡아가려고 했는데 그놈의 빌어먹을, 정말 빌어먹어야 하는 거지 발싸개같은 녀석이 널 산 채로 잡아오라고 하잖아. 하지만, 반항하면 일단 어디 하나 꺾어서 데려가겠다. 팔다리를 부러뜨리지 말 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화서운은 묘골이 송연해졌다. 이게 무슨 억지란 말인가. 하지만, 무 력이 모자라는 그로서는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약간 정신이 이상 한 듯한 사람과 논리로 따지는 것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고. 그때였다. 또다시 누군가가 나무 위에서 내려서면서 화서운의 혈도 를 짚어버리고는 말했다. "추노괴,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라. 나는 거지 같은 녀석이 아니라, 바로 거지란 말이다. 그리고 나더러 빌어먹으하고 한 것은 훌륭한 거 지가 되라고 한 말이겠지? 그렇다면 내가 한 번 참아주지. 나는 장차 개방보다 두 배쯤 큰 마도의 거지단체를 만들거란 말이다." 위달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너 병신 발바닥이나 평생 훑어먹고 살 것 같은 녀석이 잘도 지껄이 는데, 십 년만 기다려라. 나의 괴저(怪杵) 무공이 완성되면 너같은 어 중어 떠중이들은 만 명이 덤벼도 아마 일초지적도 안 될걸?" 자칭 거지라는 그 사람은 비웃었다. "너의 그 이상하게 생겨먹은 저라는 무기는 내가 맨손으로 툭 쳐내 기만 해도 산산이 부숴지고 말테니 걱정일랑 하지도 말라구. 이 병추 (病錘) 최봉(崔鳳) 나으리에게 도전하려면 한 백 년은 있어야 할거야. 그동안 내가 놀고 먹기만 한다는 조건 하에서지만." 화서운은 이미 혈도를 짚여서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이 이상한 괴 인들이 티격태격하는 것이 웃겼지만 마음 속은 급박하여 뭐라고 할 수 없는 비참한 기분과 마구 엉켰다.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혈도를 짚 힌 것도 억울했거니와 지금 스스로 혈도를 풀려고 했지만 내공이 모자 라서 계속 헛수고만 하고 있었다. 명심정에서 무예를 배운지 벌써 팔 년, 각종 점혈법과 해혈법을 배 웠지만 실제로 이렇게 마혈을 짚힌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 그는 입을 제외하고는 모든 신체기관이 중지된 셈이었는데, 그 답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42 08/17 12:06 162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5) 추노괴 위달은 화서운을 번쩍 안아들고 오른쪽 어깨 위에 걸쳐서 마 치 짐짝 들듯 거칠게 다루었다. 혈도를 봉쇄당해서 움직일 수 없더라 도 오감(五感)이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위달은 어깨 위에서 자꾸만 신음소리가 들리자 그 추한 얼굴을 더욱 찡그려서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화서운이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는 말했다. "자꾸만 신음소리를 내면 네 혓바닥을 끝까지 뽑아서 다시 네게 먹 여버릴 테다." 화서운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 말에 질려버렸다. 잔인하고 지 저분한 말만 골라하니 얼굴도 저 모양이지, 하고 속으로 욕을 했다. 최봉과 위달의 발걸음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느릿느릿하게 걸을 때 마다 위달을 오른쪽 어깨뼈에 부딪쳐서 딱딱, 하는 소리가 났다. 화서 운은 죽을 맛이었다. 한편으로는 의문도 없지 않았다. (이자들은 누군데 날 납치하는거지? 하지만 사부님이 아시면 가만두 지 않을걸?) 지금은 막 연경소가 소림에서 절기를 시전하고 있을 때였다. 이들은 그쪽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화서운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왜 나를 짐짝처럼 들고 소림사로 가는 거죠?" 최봉이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 이 거지 나으리가 가르쳐 주지. 네 스승은 지금 우리 대신에 소림사에서 삼천 명의 돌중들과 대치하고 있단다. 곧 물러나오게 만들 어야 대형(大兄)이 역근경의 수법을 훔쳐볼 수 있을 것이다." 화서운은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째서 당신 대형은 역근경을 훔치려고 하죠? 아마 쉽지 않을 텐데 요." 위달이 대답했다. "우리 대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들 천산칠괴(天山七怪)들 중에 서 유일하게 빌어먹을 놈이 아니지. 너는 천산도(天山刀)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리가 없지만, 아마 세상에서 그렇게까지 안 빌어먹 을 놈은 별로 없을 것이 틀림없다." 화서운은 어리벙벙해졌다. "당신들은 어째서 소림으로 온 거죠? 나를 납치한 이유는 또 무엇이 고요." 위달은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긁적했다. "우리들 중 둘째인 천산신녀(天山神女) 오소접(吳小蝶)이 저번에 약 초를 캐러 깊숙한 산중에 갔다가 우연히 정혈초(精血草)를 발견했는데 그만 그 영초를 지키고 있던 한 마리의 커다란 구렁이와 부딪쳐 싸우 게 됐지." 최봉이 그 말을 받아서 말했다. "그 구렁이는 이름도 엄청나게 긴... 무슨 적린벽안(赤隣碧眼) 수호 영초금사(守護靈草金蛇)던가? 아무튼 비늘 두께가 한 치나 되는데, 도 검으로도 상하지 않는 엄청난 구렁이였지." 갑자기 위달이 끼어들었다. "너 거지는 잠깐 가만히 있어. 가서 추를 쓰는 연습이나 하라구." 그러자 갑자기 최봉이 화를 냈다. "뭐라구? 너 이... 쳐죽일..." 위달은 능청을 떨었다. "너는 한 자루의 추를 매우 잘 쓰지만 일곱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맨 날 기침만 하지 않았어? 그래서 별호도 병추인 주제를 파악하셔야지." 화서운은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최봉이 당장이라도 손을 쓸 것만 같 아서 재빨리 두 사람을 말렸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남의 어깨 위에 올려진 채로 싸움을 말리는 것이 우습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두분 선배님들은 안 싸우는게 좋겠군요. 이제 소림사가 저쪽에 보 이네요." 하지만 최봉은 화를 삭이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젠 기침은 커녕 코도 안 푼단 말이다! 내 언젠가는 셋째를 꺽고 내가 추를 더 잘 쓴다는걸 증명하고야 말겠다." 위달은 비웃었다. "기침과 코푸는게 무슨 상관이냐? 넌 맨날 노인네마냥 기침만 했지. 쿨룩쿨룩... 쿨룩쿨룩... 옆에 있으면 얼굴이 다 노래질 지경이었어." 최봉은 화가 있는대로 뻗쳐서 추를 뽑아들고 달려드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위달도 막상 손을 쓰기는 거북했는지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 미안하다구. 아무튼 넷째 네가 셋째 유성추(流星錘) 양빈(揚殯) 에게 진건 사실이잖아." 최봉은 갑자기 둘째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소림사의 선문에서 불과 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온 것이었다. "조용히 해라. 아이의 마혈을 짚어두고. 이 아이는 연경소인가 뭔가 하는 녀석의 제자니까 잘 다루어야 해. 저녀석이 왜 끼어들었는지 모 르지만 아무튼 골치아프게 됐군. 대형이 아는 말이, 자기도 아마 저자 의 상대가 안 된다고 했어. 우리 일곱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또 모 를까, 조심하자구." 위달은 막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 화서운의 아혈(啞穴)을 짚어 버 렸다. 만약 몰래 숨어있는데 고함이라도 지르면 골치아프기 때문이었 다. 그들은 소림사 선문 앞에 쓰러져 있는 네 명의 승려 앞으로 다가가 서 그중 한 명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한참 동안 눈을 뒤집어 살펴보기 도 하고 몸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최봉은 드디어 알아냈다는 듯 기쁜 표정을 지었다. "여섯째의 솜씨로군. 아마 역혈수(逆血手)를 썼을 거야. 다른 사람 이 혈도를 짚인 줄 알고 풀어주려고 했겠지만 헛수고하고 말았겠지." 위달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갈묘(諸葛苗)는 서열은 여섯번째지만 아마 실력으로 말하자면 우 리보다 반 수쯤 위일거야. 옛날에 자객시절에는 날렸다는데." 최봉은 실실 웃었다. "흐흐... 하지만 대형의 천산도법(天山刀法)은 이기지 못했지. 불과 백여 초만에 나가떨어졌으니까. 하지만 우리들 중에 오십 초를 넘겼던 사람은 오소접 뿐이었는데 그 정도니 아마 무공으로는 반 수가 아니라 한 수쯤은 위일거야." 천산칠괴는 무림에 명성을 날린 지 십 년 정도 되는 일곱 명의 괴물 들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혹은 따로따로 다니면서 기이한 행적을 남 겼지만 때로는 정의로운 행동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괴상망측한 행동 을 하기도 해서 사도(邪道)로 통칭되고 있었다. 일곱 명 중 첫째인 천산도 을파(乙巴)는 천산도법이라는 독문절예에 능통하여 적수를 쉽게 만나보지 못한 정통 고수였는데, 나머지 여섯은 그에게 패한 뒤 마음을 돌려 의형제를 맺은 사람들이었다. 둘째는 천산신녀 오소접으로, 을파의 사매로 역시 천산도법에 정통 했으며 따로 추혼접(追魂蝶)이라는 암기를 만들어 가지고 다녔다. 보 통의 암기와는 달리 용수철로 날개가 펄럭이며 날아오는 나비처럼 생 긴 이 암기는, 한번 쳐낸다 해도 다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날아오는 끈질긴 암기였다. 게다가 날개에는 독이 묻어있어 잘못 쳐냈다가는 오 히려 독분(毒粉)에 당할 염려가 있었다. 셋째 유성추 양빈과 넷째 병추 최봉은 둘다 한 자루의 추를 무기로 쓰는데, 외공에 정통한 고수들로 둘이서 항상 추를 사용하는 고수라며 으르릉거리는 사이였다. 다섯째는 추노괴 위달로, 태어날 때부터 얼굴이 해괴망측하게 생겨 서 비뚤게 자란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공을 배운 이후로 나쁜 짓만 일 삼았는데 을파에게 패배한 후 어느정도 마음을 고쳐먹고 천산칠괴 중 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여섯째와 일곱째는 가답한 지 오 년도 안 된 신참이었다. 특히 살노 (殺老) 제갈묘는 역혈수라는 신기한 무공을 쓰는 자객이었고, 사의(死 醫) 구숙(勾肅)은 일곱 명 중 유일하게 의술을 익힌 의원이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43 08/17 16:58 153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6) 화서운은 연경소에게 이들 일곱 형제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지만, 자세한 부분까지는 듣지 못했다. 강호에 나가지 않고 명심정 안에서만 무예를 익히는 제자가 견식이 좁아지는 것을 좋아할 사부는 아마도 없 을 것이다. 연경소는 가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림의 정세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곤 했는데, 사실 이들 칠괴가 나타난 것은 10년 전이기 때 문에 연경소가 제자와 함께 은거하기까지 그들의 소문을 들을 시간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당금 강호에서 일곱 명씩 떼지어 다니는 무사들은 천산칠괴 외에 설 산칠검(雪山七劍)을 들 수 있었다. 설산파는 날카로운 초식에 그들 특 유의 독수가 숨어있어 지극히 방비하기 어려우며, 세력이 강대해서 화 산, 곤륜, 점창, 무당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문대파였다. 설산칠 검은 장문인 빙설도 손맹의 호법으로, 그가 손수 기른 정예고수들이었 다. 위달과 최봉의 대화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이들이 소림에 온 까닭은 둘째인 오소접이 정혈초라는 기이한 약초를 캐다가 영물을 수호하는지 아니면 우연히 나타났는지 모르는 구렁이의 독에 중독되었기 때문이었 다. 그녀는 몇날 며칠을 혼절해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상세는 갈수록 엄중해져서 뽀얗던 살결에는 남색의 기운이 드리워지도 배설물 에서 비릿내가 났다. 며칠동안 상세를 지켜보던 일곱째 구숙은 자기의 의술을 총동원하여 일단 독을 단전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했지만 완전히 제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일찌기 본 적이 없는 맹독이었던 것이다. 그를 비롯한 여섯은 온 천산을 뒤지며 영초가 없는지 헤매고 다녔지 만 결국 설련자(雪蓮子)나 설삼(雪蔘)을 찾지 못하고 하릴없이 시간만 축냈다. 갈수록 오소접의 상세는 심해져서 얼굴이 온통 검어질 지경이 었다. 구숙은 침과 뜸으로 독기를 한 달 정도 억제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 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치료방법이 있다면 강한 양기(陽氣)를 지니고 있는 약초를 복용하던가 아니면 꼭 맞는 해약을 복용해야 하는데 그것 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만약 한 달 이내에 해약을 찾는다면 몰라도 가 능성은 없다고 했다. 결국 고심 끝에 찾아낸 대안(代案)은 소림사에서 역근경과 같은 비급을 훔쳐다가 기초적인 운용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 었다. 이같은 생각을 한 사람은 여섯째 제갈묘였다. 그의 역혈수라는 무공 은 사람의 혈맥을 거꾸로 뒤집어버려 피가 역류하게 만드는 것인데 겉 으로 보기에는 혈도를 짚힌 것 같지만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픽 쓰러지 면서 죽어버리는 무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살수로 활동하 면서 딱 한 번 그 수법을 해소하는 것을 보았으니, 바로 소림사의 어 떤 고승이 자기에게 당한 사람에게 진기를 불어넣어 혈맥을 바로 잡아 주고 역근경을 전수하여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때의 그 충격 은 제갈묘에게 있어서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살려내다니, 그때부터 그는 소림사에 대한 청부는 절대로 받아 들이지 않는 이상한 관례가 생겼다. 첫째인 을파는 비밀리에 귀수마의(鬼手魔醫)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 는데,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동의했다. 그래서 오소 접을 돌봐야 하는 구숙과 약초를 찾기로 한 을파를 제외하고서 나머지 네 명이 모조리 소림사로 온 것이다. 하루 사이에 그들은 조심스럽게 장경각(藏經閣)으로 잠입해서 비급 을 훔쳐낼 틈만 노렸지만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고 도리어 장경각주인 일후(一厚)대사에게 발각되어 바깥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천산 칠괴가 어떤 사람들인가! 도망치면서 그들은 장경각에 있는 이상한 불 경 두세 권을 홧김에 들고 나왔고 막아서는 무승들을 십여 명 죽였는 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들고나온 불경 중에는 극히 희귀한 것으로 중 원과 천축을 통틀어 몇 권밖에 없는 것도 있었고, 심지어는 향화객 명 단까지 있었다. 게다가 사람을 죽였으니 소림사 측에서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몇 명의 장로들을 비롯한 수십 명의 고수로 이루어진 추적대 를 급히 편성하고 주위에는 열두 시진 내내 승려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한 것이다. 가장 성격이 불같은 유성추 양빈과 살노 제갈묘는 승려들을 보이는 대로 죽여버렸다. 연경소와 대치한 여덟 명을 모조리 죽이고 화서운에 게 철연자를 던져 상처를 입힌 사람도 제갈묘로, 자객 시절의 솜씨를 일부 발휘한 것이었다. 거의 백 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하루 동안 죽어나갔다. 주로 입산하 지 얼마 안 되는 승려들이 보초를 서다가 암산당한 것이었다. 이를 직 접 확인한 혜심대사는 비상종을 울려 바깥에 있던 승려들을 불러 선문 안쪽에서 결판을 내기로 하고 장로와 나한(羅漢)들을 총 집결시켰다. 하지만 바깥에 나간 승려들 중 살아서 돌아온 인원은 고작 세 명이 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서 적들이 역근경을 노린다고 말했다. 이에 분노한 혜심대사는 아예 역근경 진본을 들고 마당 앞에 나와서서 적을 기다리던 차에 멋도 모르고 연경소가 들어간 것이었다. -+- -+- -+- 수많은 중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늠름하게 버티고 서서 맞 서는 연경소의 모습을 본 화서운은 혈도만 풀려있다면, 하고 아쉬워했 다. 당장이라도 한 소리를 질러 응원해주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아혈이 짚혀서 목구멍까지는 올라온 말이 소리로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사부님, 잘하세요.) 속으로만 이렇게 응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화서운은 위달과 최봉이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도 최봉이 천리전음의 수법으로 연경소에게 자신을 억류하고 있는 사 실을 밝혔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만 쓴 맛을 보고나면 생각이 확실히 달라질걸. 조금 후에 보자. 아마 너는 청죽십이식을 절반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니 삼 초만 견뎌내도 장한 노릇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어느 정도 후련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담장 위에 바싹 붙어서 구경하고 있는 그들의 상황에 변화가 왔다. 소홀해 진 경비를 틈타 장경각을 뒤지던 제갈묘와 양빈이 역근경을 가져간 것 을 알고 돌아나오다가 위달 등과 만난 것이었다. 그들은 화서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후의 행동방향을 의논하는 것이었는데, 연경소가 바깥으로 나오려는 듯하자 재빨리 화서운을 쳐들고 소실봉 위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만 약 몇 초만 더 있었더라면 거의 어검술에 육박하는 신기를 볼 수 있었 을 테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복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못 본 것이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기가 죽어서는 될 일고 안 되기 때문이 다. 한참동안 달려가던 사괴가 멈춰선 것은 어느 바위 옆이었다.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길가에서 벗어나 나무숲을 조심스럽게 해치며 깊숙하게 들어갔다. 위달은 어깨 위의 화서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나무가지가 눈에 찔릴 뻔한 적도 있었다.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항의도 못하고, 완전 벙어리 냉가슴 앓는 꼴이 된 화서 운은 벙어리들의 고충을 조금쯤 알 것 같았다. (단 몇 시간인데도 이렇게 괴로운데 평생동안 말을 할 수 없다면 정 말 답답하겠구나. 아니, 만약 볼 수 없거나 들을 수 없다면 어떡하지? 특히 장님이 된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걷기도 어렵고 책도 읽을 수 없으니 아예 죽느니만 못알 것이다. 이런 일이 또 어디있담? 두고 보자! 언젠가 내가 고수가 되면 천산칠괴인지 뭔지를 하나씩 찾아가서 가장 아픈 혈도를 짚어줄테다.) 소년다운 복수방식이었지만 다행히 그것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네 명은 각기 의견을 내놓았는데 하나도 일치되는 것이 없었다. 역근경 탈취를 제안했던 제갈묘는 실력으로 밀고 들어가자는 것이었 다. "그냥 밀어붙이자구. 우리 넷이서 까짓 소림사 땡중 손안에 있는 책 하나 못 가져오겠어?" 위달의 의견은 그게 아니었다. "그런 소리 말라구. 소림사 땡중들 무공이 얼마나 센줄 알아? 아마 여섯째보다 센 사람만 해도 수십 명은 될거라구." 그러자 양빈이 참견했다. "장경각에 가서 불경들을 왕창 훔쳐낸 후에 역근경과 교환하자고 하 는게 어때?" 최봉은 코웃음쳤다. 하기야, 과거 유성추의 재간에 한 번 패한 이후 로는 양빈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어 있 는 그였다. "그게 쉬운줄 알아? 장경각을 지키는 무승들이 가장 무섭다구. 저번 에는 방심하고 있어서 어떻게 되었지, 이번에는 아마 똥줄이 빠져라고 도망치기 바쁠거야." 그들은 서로 반말을 썼다. 이들이 존칭어를 붙이는 것은 오직 대형, 천산도 을파 한 사람에 한해서였다. 네 사람 중 역시 가장 말을 험하게 하는 사람은 위달이었지만, 화서 운은 제갈묘의 말이 가장 섬뜩하다고 느꼈다. 역시 과거에 살수를 했 던 기질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44 08/18 20:12 218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7) 계속 티격태격하던 사괴는 의견이 엇갈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 었다. 거의 반 시진동안 떠드는 가운데 제갈묘와 양빈은 어떻게든 쳐 들어가자는 쪽으로, 위달과 최봉은 계략을 써서 빼오자는 쪽으로 뭉쳤 다. 하지만 서로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하여 골머리만 썩이고 있 었다. 이미 해는 완전히 떨어지고 시간은 유(酉)시에서 술(戌)시로 넘어가 고 있었다. 조금씩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양빈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에 게 앙심을 품고 있는 최봉이 즉시 쏘아붙였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는데 어딜 간단 말이냐?" 양빈은 애써 화를 참고 대답했다. "넷째는 왜 자꾸 시비를 거는 거지? 이야기들 하고 있게나. 저녁거 리를 장만해 올테니." 위달은 그 못생긴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배가 고픈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간에 어디가서 밥을 얻어오겠나?" 양빈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노루라도 한 마리 잡아오겠네. 우리는 소림사에서 위쪽으로 상당히 올라왔으니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야생 동물들이 뛰놀고 있을 걸세." 갑자기 제갈묘가 날카롭게 물었다. "잠깐, 만약 동물을 잡아오면 어떻게 먹지?" 양빈과 위달이 거의 비슷하게 대답했다. "그야 구워서..." 제갈묘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셋째와 다섯째는 자객이라는 빌어먹을 직업을 안 가져 보았다고 해 서 그런 것도 모르나? 당연히 불을 피우면 소림사의 땡중들과 그 무공 이 대단한 연경소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우리 위치를 알 것이야. 아마 우리 넷이 힘을 합쳐도 그 녀석을 감당하기는 어려울걸?" 넷 중에서 호승심이 가장 강한 양빈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 연가 녀석이 그렇게 대단하단 말인가?" 제갈묘는 대답했다. "비록 10년 전이지만 중주재쌍검이라는 말이 있었네. 중원에는 검객 이 둘 있다는 것인데, 바로 검마 냉약과 그 녀석을 가리키는 말이지." 위달은 흐흐, 하고 웃었다. "그건 십 년 전 아니야?" 제갈묘는 자기 말을 믿지 않는 이들이 한심했다. 만약 그들이 조금 만 더 소림사 앞에 머물러 있었다면 직접 어검술과 버금가는 연경소의 비검술(飛劍術)을 볼 수 있었겠지만 천산칠괴는 그가 무공을 쓰는 모 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제갈묘는 자객이 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라도 각대 문파와 낭인들의 무공 정도를 세세 히 파악하고 외워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그는 여덟 명의 중을 죽일 때 연경소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본능적으로 강하다는 느낌 을 받았다. 살수와 같은 부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의 본능은 다른 사람 보다 월등히 발달하게 마련이다. "못 믿겠으면 한 번 붙어보지 그래. 내가 역혈수를 십 년 더 연마한 다고 해도 강호의 소문이 맞는다면 십초를 버티지 못할거야." 양빈이 신음했다. "여섯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걸 보면 대단한 놈인가 보군." 최봉은 생각했다. (제갈묘 저녀석은 무공이 극히 고강한데도 십초를 버틸 수 없을거라 고 하면, 양빈은 자연히 오초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비록 그에 게 졌지만 육초는 버틸걸.) 단 한 번의 패배를 계속 마음에 두고 응어리진 것을 풀지 않으며 무 슨 일이 있을 때마다, 심지어는 그가 한 마디만 해도 자기가 패배했던 사실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최봉은 바로 그러한 희귀족에 속했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위달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일단 배나 채우고 보자구! 나는 배가 고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이야." 사실 그것은 자기자신에게 하는 소리 같았다. 여기에 있는 네 사람 은 각기 천산일괴의 구성원으로서 누구 하나도 무공이 약한 사람은 없 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역근경을 빼오는 것은 고사하고 한 끼를 먹 는 것도 고심해야 했다. 양빈은 투덜거렸다. "제기랄,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제갈묘가 역시 가장 침착했다. "오늘 내로 비급을 탈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계속 이 근방 어디 에서 숨어있으면서 기회를 노린다면 방비가 소홀해 질지도 몰라." 위달은 참지 못하고 욕을 쏟아내었다. "이런 빌어먹을 말이 또 어디 있나. 지금 산 밑에 있는 그 빌어먹을 무슨 객잔에서는 둘째가 막 죽어가고 있는데 한시라도 빨리 하지 않으 면 한 달은 금방 지나가고 말거야.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삼순하고 도 이틀이 지났으미 이제 남은 시간은 칠일밖에 없다는 환장할 말씀이 지. 개제기랄, 세상에 시간은 남고도 남아서 발가락에 낀 때 벗겨내는 일이 대부분인줄 알았더니 이렇게 촉박해 보기는 또 처음이군." 최봉도 욕이라면 뒤지지 않았다. "육시랄 소림자 돌중들 같으니, 왜 역근경을 안 빌려주는 거야. 자 비 좋아하시네, 사람이 죽어가는데 뭔 개뼈다귀 핥아먹는 원숭이 만도 못한 자비야!" 화서운은 듣고 속으로 웃었다. (당신들의 둘째 신녀인가 하는 여자가 다친 줄 소림사의 중들이 어 떻게 알겠어? 설령 안다고 해도 자비를 베푸는 것과 소림최고의 보물 을 빌려주는 것은 차원이 틀리지. 녹옥불장을 내놓으라는 말과 비슷하 잖아? 하하, 원숭이는 또 왜 개뼈다귀를 핥지? 앞뒤가 안 맞지만 그런 대로 훌륭한 욕이구나.) 양빈은 그 욕을 듣자 문득 정신을 차렸다. "맞아. 이제 겨우 칠일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설령 역근경을 손 에 넣는다고 해도 그녀가 그것을 보자마자 나으라는 법은 없잖아? 사 실 효과가 있을지도 확실치 않은 판국인데,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군. 기초적인 구결만 익혀도 독을 몰아낼 수 있을까?" 제갈묘도 그 말에 동의했다. "아무튼 우린 빨리 역근경을 빼내지 않으면 그대로 사매의 죽음만을 지켜봐야 할거야. 그러니 어서 생각이나 해 보자구. 밥은 이따가 산밑 에 내려가서 먹던가, 아니면 며칠 굶는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위달은 여전히 욕을 늘어놓았다. "왕창 십대에 걸쳐서 빌어먹어도 하루에 염소 똥 스물 네 조각 이상 은 얻지 못할만한 소리만 골라서 하네. 밥을 굶으면 내공이 아무리 세 도 제힘을 발휘하기 어렵단 말이야. 우리의 무공이 쌍, 인정하기는 싫 지는 그 무슨 연경소인가 하는 정도만 되더라도 정문에서 두 명만 행 패를 부리고 나머지 둘은 장경각을 다 쓸어버릴 수 있을텐데." 최봉은 양빈이 뭐라고 말하는 듯한 기미를 보이자 그를 무안주기 위 해 일부러 끼어들었다. "너는 왜 그렇게 욕만 늘어놓냐? 나는 앞으로 위대한 거지가 될 작 정인데 무슨 염소 똥이니 하는거냐. 아무튼 일단 밥 먹는 것도 그렇고 앉아서 몇 가지를 해결보자구." 위달은 한층 기세를 높였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소리 아니야? 우리들은 어쨌든 성공하지 않으 면 사매가 죽는 걸 보거나, 아니야. 혹시 대형이 무슨 약초를 찾아오 면 또 모르지만. 귀수마의도 고치지 못한 독을 세상에 고칠 사람이 또 있겠어? 대라신선(大羅神仙)이라는 빌어먹을 녀석이 하늘에서 어슬렁 거리다 심심해서 땅에 내려오면 좋겠네. 으아! 어쩌자고 그 무식한 구 렁이 녀석이 둘째를 콱, 물어버린 거지?" 양빈은 그를 놀렸다. "너 사실은 둘째를 좋아하고 있는거지?" 위달은 얼굴이 시뻘개졌다. "뭐라고?" 제갈묘도 합세했다. "네가 둘째를 몰래 좋아하고 있는 것은 대형도 알걸." 최봉도 한마디 했다. "오를 자리를 보고 나무를 탈 생각을 해야지. 드러눕기 전에는 항상 누울 자리를 보라고 하잖아?" 위달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생각이 들통나자 일단 소리쳤다. "뭐야? 이 단체로 빌어먹을 녀석들이..." 최봉은 즐거운듯이 히죽히죽 웃었다. "나는 장차 거지가 될테니 그건 욕이 아닌데." 위달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셋째에게 한 번 패한 것 가지고 평생동안 꽁해서 사는 녀석이 무슨 거지는 거지야? 넌 거지도 못 될꺼다. 길가는 사람이 염소 똥은 커녕 발로 뻥, 하고 지나간다면 그 자리에는 다시는 앉지 않을테니까." 최봉도 아픈 곳을 찔리자 잠시 동안 뻥해 있었다. 그로서는 다른 사 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위달이 무척 흥분한 상태에서 단도 직입적으로 쑤시고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때 양빈이 말했다. "우리끼리 싸우는건 그만두는 게 좋을거야." 최봉도 얼굴이 벌개져서 말했다. "넌 가만있어!" 명령조의 말투를 듣자 양빈의 낯빛도 약간 달라졌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허리춤의 유성추에 가서 닿았다. 싸늘한 감촉이 손끝에서 전해지 자 그는 전의(戰意)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번 해보자는 거냐..."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45 08/19 01:09 148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8) 최봉은 약간 뜨끔했지만 지지 않고 맞섰다. "해보긴 뭘 해봐? 이미 해 진지 두어 시간이나 지났는데!" 양빈은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분노가 극에 말한 모양이었다. "시비를 걸었으니 끝을 보자는 거겠지. 언제든지 재도전을 받아준다 고 했으니 덤빌테면 덤벼라." 최봉은 아직 실력으로는 그의 유성추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 고 섣불리 덤벼들지 않았지만 양빈의 말투 하나하나에 자기를 철저히 무시하는 기색이 담겨 있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그래, 오늘만 기다려왔다. 이 거지 어르신과 오백 합을 싸워보자!" 양빈은 비웃었다. 보는 사람의 기분을 완전히 짓이겨놓는 비릿한 웃 음이었다. "네가 무슨 연인 장비(張飛)도 아닌데 오백 합까지 필요 있겠느냐. 열 개로 딱 잘라 오십 초 안으로 끝내주마." 최봉도 안색을 굳히고 두 개의 철추(鐵錘)를 꺼내들었다. 양빈이 손 에 들고 있는 유성추는 약간 날씬한 데 반해서 완전히 둥근 쇠에 날카 로운 쇠침을 박아만든 것이었다. 그가 양손에 추를 하나씩 감고 몇 번 돌리자 웅웅, 하는 소리가 났다. "옳아... 말보다는 한 번 해보자는 거로구나." 양빈도 똑같이 유성추에 달린 쇠사슬을 양손의 엄지와 식지 사이에 껴 넣고 몇 바퀴 돌려서 단단히 감았다. 무거운 병기를 쓰려면 자연히 큰 힘을 받기 때문에 그의 손바닥과 호구(虎口: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에는 딱딱한 군살이 박혀 있었다. 보다못한 제갈묘가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요? 빨리 비급을 빼낼 궁리는 안 하고." 최봉은 내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요사이 들어 밤낮을 가리 지 않고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 내는데 몰두하고 있었는데, 모두다 무 거운 병기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양빈을 목표로 했음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역근경을 훔치러 오는 통에 완성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아직 초식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와 싸우는 것은 괄괄한 성질에 도 내키는 바가 아니었다. (오늘은 싸워봐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으니 아무래도 못 이기는 척 해야겠다.) 하지만 양빈은 그게 또 아니었다. "여섯째는 가만 있어봐. 오늘 저 녀석의 입을 조져놓지 않으면 유성 추 양빈이라는 이름을 갈아치고야 말겠다. 어서 덤비지 그래!" 위달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잽싸게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너희들 안 빌어먹을 녀석들은 싸우지 말라구. 대형이 알면 아마 경 을 칠걸? 그때 함부로 겨루었기 때문에 우리들까지 고생했잖아!" 첫째인 천산도 을파는 자기의 사매인 둘째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의 성질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써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고, 특히 서로 싸우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못박았다. 그 금지령은 용케도 몇 년동안 지켜졌는데 유성추 양빈에게 최봉이 그 별호를 자신에게 양도하라고 윽박지름으로써 깨지고 말았다. 두 사람의 실력차이는 제 삼자가 보기에도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손 을 쓴 지 불과 반 각도 되지 않아 최봉은 손목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일로 말미암아 을파는 불처럼 진노했고, 싸운 당사자들은 일 년간 강호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자기를 포함한 천산칠괴는 여섯 달 동안 천산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위달이 특별히 <안 빌어먹을> 이라는 말을 붙여가면서 역설한 내용은 바로 그 사건을 두고 한 말이었다. 최봉이 듣자니 모두 과거의 아픈 상처를 쇠꼬챙이로 찔러대는 말 뿐 이었다.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제기랄! 그래, 한 번 싸워보자." 최봉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오른손에 감겨 있던 철추를 날려서 양 빈의 얼굴을 찍어갔다. 워낙 무거운 병기였기 때문에 파공성 대신 벌 이 나는 듯한 소리가 웅웅, 하고 울렸다. 양빈은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면서 같이 유성추를 휘둘렀다. 그는 한꺼번에 두 손을 들어 유성추를 조종했는데, 그 무거운 것이 마치 종이 인형처럼 허공에서 움직이며 한 겹의 검은 기운이 피어올라 상대방의 공세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처럼 보였다. 최봉은 오른손의 철추를 몇 번 휘둘러도 방어망을 뚫을 수 없자, 왼 손의 철추마저 날려서 검은 그림자에 부딪쳐갔다. 서로 날리고 퉁겨내는 속도는 지극히 빨라서 도저히 수십 근짜리 추 라고 생각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양빈은 처음에는 계속 유성추를 가로세로로 휘둘러 방어만 하고 있 었지만 갈수록 최봉의 초식이 복잡해지면서 추의 몸체와 거기에 달려 있는 쇠사슬로 후려치는 기세가 강해지는 것을 보고 자기도 같이 공세 로 바꾸었다. 그가 일단 방어에 치중하던 초식을 변화시켜서 최봉을 향해 유성추 를 날리자 최봉은 깜짝 놀라 허공에서 두 손을 춤추듯 휘둘렀다. 이런 무거운 병기는 오직 한 가닥의 쇠사슬에 의해서 조종되기 때문에 커다 란 힘도 필요했지만 그 힘을 아주 정교하게 쓸 줄도 알아야 제대로 된 초식을 펼칠 수 있었다. 만약 그냥 내치기만 한다면 추를 거두어 들일 때라든지 회전시킬 때 조절이 되지 않아 역으로 자기 손에 다칠 우려 가 없지 않았다. 양빈은 자기의 유성추 두 개가 상당한 기세로 퉁겨나오는 것을 느끼 고 최봉의 무공이 많이 증진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자기와는 거 리가 있다고 느끼고 공력을 더욱 늘려서 유성추를 조정했다. 최봉의 철추는 공중에 무수한 원을 그리며 날아오는 유성추를 일일 이 퉁겨내고 있었는데, 엉성한 듯 하면서도 어느곳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양빈은 갑자기 기합을 넣으며 유성추를 거두어 들였다가 전력을 다 해 하나는 일직선으로 내던졌고 하나는 마치 뱀처럼 구불거리며 나가 게 했다. (앗!) 최봉은 크게 당황했다. 전에 싸울 때에도 이런 초식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잘못 생각한 것은, 자기가 수련할 때 양빈이 놀고만 있다고 가정하고 그를 꺾으려던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속이 크게 어지럽고 어떻게 방비하고 반격해야 할지 갈피를 미처 잡을 수 없었는데 어느덧 두 줄기의 검은 바람이 흉흉한 기세로 덮쳐왔다.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최봉은 손아귀가 찢어져라고 온힘을 집중하면서 철추를 빙글빙글 돌렸는데, 너무 빠르게 돌아간 나머지 추 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직 거무튀튀한 색깔을 띈 안개가 그의 앞쪽 에 생긴 것 같았다. 화서운은 온몸의 기능이 멎었지만 눈과 귀는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 에 그 대단한 기세를 보고 생각했다. (만약 저런 식으로 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그의 생각은 자기의 경우에 한정되어 있었다. 즉, 연경소와 같은 고 절한 내공을 소유한 고수는 검기를 발출하거나 심후한 내력으로 간단 하게 추를 밀어낼 수 있겠지만 자기처럼 내공이 약한 사람은 신기막측 한 초식이나 보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장차 공력이 세어지 면 별로 방비하기 어렵지 않은 문제였지만, 그는 어떻게 하면 그 공격 을 막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잠시동안의 상념에서 벗어난 것은 제갈묘의 부르짖음 때문이었다. "연경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화서운은 크게 기뻐서 눈동자를 돌려 사부님이 나타난 곳을 보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뒤쪽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46 08/19 14:37 159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8장... 천산도 을파 (1) 화서운은 누군가가 자기를 번쩍 치켜들자 재빨리 눈알을 굴려 사부 님이 어디 있는지 보려고 했으나 여전히 반대쪽에 있는 듯 무성한 수 풀만이 보일 뿐이었다. 다만 사부님이 왔다는 사실은 곧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를 내려놓아라!"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팔 년 동안 같이 생활했던 그 목소리 였다. 화서운은 자기가 아혈을 짚혔다는 것도 잊고 크게 소리쳐서 구 원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목구멍이 불에 덴 듯 쓰릴 뿐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는 풀이 죽어 힘을 쭉 빼고 귀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 조 그만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먼저 저자를 막아!" 그것은 위달의 목소리였다. 그는 필생의 공력이 담긴 주먹을 내질러 연경소의 하복부를 치려고 했지만 기이한 한 줄기의 힘이 주먹을 밀어 내는 바람에 오히려 튕겨나오듯 물러서고 말았다. 양빈과 최봉은 싸우던 손을 멈추고 싸움에 합류했다. 그들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위달이 단 한 주먹에 밀려 나는 것을 보았는지라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고 전력을 다해 유성추와 철추를 움직였다. 그들 둘이 움직이는 네 자루의 추는 영사처럼 구불구불 기면서 등과 뒷통수를 노리기도 했고 빠른 속도로 날아가 연경소의 가슴을 치려고 하기도 했다. 화서운은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손발을 놀려 마구 발버둥쳤지만 생각과는 달리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혈도라는 게 이렇게 무섭구나. 도무지 꼼짝을 할 수 없으니...) 그런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제갈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땅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화서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는 힘써서 혈도를 풀려고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게다. 역혈수라는 무공은 아주 신기막측해서, 잘못 혈도를 풀었다가는 그대로 황천 직행 길이지. 흐흐... 어린 나이에 안 됐다만 연경소라는 녀석의 손에 형제 들이 다 죽지 않게 하려면 너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제갈묘는 빠른 속도로 화서운의 십여 군데 혈도를 짚어갔는데, 손가 락 끝이 몸에 닿을 때마다 그 부분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한 가닥 의 악독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진기가 혈맥에 스며들면서 피의 흐름을 역행시키고 진기를 엉키게 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화서운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암기에 맞았을 때보다 더한 고통에 눈물이 찔끔 흘 러나올 지경이었다. 그는 화서운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히자 히죽 웃었다. "흐흐, 아프겠지만 좀 참아라. 연경소라는 녀석이 아무리 무공이 뛰 어나다고 해도 이 수법을 해소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는 냉정한 표정으로 몇 군데의 혈도를 더 짚었는데, 마지막 손가 락이 오른쪽 광대뼈 부근의 태양혈을 눌렀을 때 화서운은 그만 기절하 는 줄 알았다. 이제까지와는 또다른 무시무시한 통증이 손가락 끝에서 전해져서 그 여운이 발끝까지 내려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갈묘는 마지막으로 화서운의 턱 부근을 탁, 쳐서 아혈을 풀어주며 말했다. "이제 다시 가보실까..." 하지만 화서운은 아혈이 풀리는대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연경소는 한참 위달 등과 겨루다가 숲속에서 비명소리가 들리자, 곧 그것이 제자의 것임을 알고 소리쳤다. "만약 제자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제갈묘는 연경소의 부아를 돋구기 위해 일부러 화서운의 아혈을 풀 어준 것이었다. 그는 연경소가 뭐라고 고함치는 줄 알아듣지 못했지만 목소리에 화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화서 운의 아혈을 봉쇄하여 신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자,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검객을 한 번 꼼짝못하게 해 보실까?" 그는 화서운을 다시 어깨 위에 짊어지고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 로 갔다. 연경소는 낯선 사람의 어깨 위에 얹혀져 있는 제자를 보자, "서운아!" 하고 소리치면서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했으나 위달 등의 맹렬한 공 세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노기띤 시선으로 사괴를 흘겨보았다. "만약... 만약 내 제자에게 터럭만큼의 상처라도 있으면 너희 네 녀 석을 가만두지 않겠다." 그런 말을 듣고 가만있을 위달이 아니었다. 한바탕 욕지거리를 늘어 놓았다. "이건 소림사 안에서 그냥 코박고 빌어먹다 제자까지 죽일 비렁뱅이 녀석을 봤나, 이거나 받아라!" 이중 심기가 가장 깊은 제갈묘는 위달이 연경소의 화를 지나치게 돋 구면 끝이 좋지 않을까 하고 잠시 망설였지만, 차라리 그편이 유리하 다고 생각하고 그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화를 돋구기 위해서 화서운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연경소!" 연경소는 내심 청죽검을 소림사에 두고 온 것을 후회했다. 만약 그 의 손에 장검이라도 한 자루 들려 있었다면 이들 정도는 문제도 아니 었을테지만, 지금 그는 맨손이었다. 그 정도의 고수에게는 검이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었지만 그래 도 손에 익은 병기가 없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평소 에 장법을 따로 수련하지 않은 그로서는 오직 심후한 내공에 의지하여 네 자루의 추와 위달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는데, 손에 녹슨 청강검 한 자루만 있었다면 형세는 크게 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정교한 초식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경소가 이 네 사람 중에서 가장 신경이 쓰이고 또 살심이 이는 사 람은 바로 제갈묘였다. 물론 이름은 몰랐지만 제자를 괴롭혔음이 틀림 없고 또 눈 앞에서 내동댕이치는 꼴을 보았으니 곱게 보일 리가 없었 다. 그는 뒤로 세 걸음 정도 물러나 모든 공세를 피하고 말했다. "너 따위가 부르라고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아니다." 보통 때의 부드러운 말투와는 거리가 꽤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꽤 놀랄만한 냉정한 말투였지만 연경소는 이미 오늘 피를 보 리라고 결심한 후였기 때문에 말에도 거침이 없었다. "물론 그러시겠지. 하지만 제자는 어쩔꼬?" 순간 제갈묘는 연경소의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 았다. "분명히 말했다. 그 아이를 조금이라도 다치게 한다면 열 배로 갚아 주겠노라고." 제갈묘는 딴청을 부렸다. "날씨도 어두운데 슬슬 밥먹을 시간이군." 연경소는 그가 자신의 화를 돋구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알 수 없는 것은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적어도 청죽 검객이라는 네 글자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경망된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을텐데... 하는 고정관념에 반쯤 사로잡혀 있는 그였다. 무공 에 대한 적당한 자부심이라고 해도 좋은 생각이었다. "아마 밥 먹을 육체적 정신적 여유가 없을 것이다." 연경소는 이렇게 말하고 옆에 있는 나무가지를 하나 꺾어들었다. 이 름모를 나무였지만 제법 딱딱하여 목검 대용으로 쓸만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긴 말은 않겠다. 모두 한꺼번에 덤벼라."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에서 빗나간 것이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47 08/19 18:56 174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8장... 천산도 을파 (2) 제갈묘는 땅바닥에 화서운을 내버려두고 훌쩍 뛰어 양빈, 위달, 최 봉과 나란히 서서 말했다. "나는 분명히 당신 제자의 몸에 조금의 상처도 내지 않았소. 핏자국 하나 없을 것이오." 연경소는 당장으로서는 이자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또 자신의 제자 를 납치한 이유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럴 때에는 별다른 방 도없이 상대방이 나오는대로 받아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제자의 혈도를 풀어주어라." 위달은 또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퍼부려는데 제갈묘가 어깨를 지 긋이 누르는 바람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다시 삼켰다. 제갈묘의 서열은 천산칠괴 중 여섯째였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가 모 든 열쇠를 쥐고 있는 듯 보였다. 최소한 겉으로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귀하께서는 단지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연경소는 쓰러져 있는 화서운을 내려다 보았다. "긴말 않겠다고 했다. 셋을 셀 동안 혈도를 풀어 아이를 바로 이 자 리에 데려다 놓지 않으면 나뭇가지가 무정타 하지 못할 것이다." 위달은 자꾸만 눈앞에 나타난 연경소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자기 넷 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자 참지 못하고 버럭 큰 소리를 질렀다. "참 앞뒤도 못 가리는 성성이 뒷구멍 같은 놈이 어디서 큰소리냐?" 연경소는 싸늘하게 말했다. "하나..." 그가 숫자 세는 말투는 마치 백 장이나 되는 얼음장 위에 앉아 있을 때와의 기분과 비슷해서 조금도 인간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둘..." 미리 계획을 세워두었던 제갈묘로서도 이 순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이를 넘겨주어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버텨야 하나. 무공으로 말 하자면 우리 넷이 동시에 손을 쓴다고 해도 저이의 옷자락 하나 상하 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손에 검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아 무래도 이길 수는 없는 것 같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이를 넘겨준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가? 그 아이는 역혈수 에 당했으나 그가 재주를 부린답시고 허공에서 해혈을 하다가는 반신 불수가 되거나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한바탕 싸우다가 도망쳐야 하나? 문제는 우리가 도망칠 수 있느 냐는 것이다. 그가 제자를 돌볼지 아니면 쫓아올지 생각하기 어렵다.) 그의 생각은 더없이 빠르게 바뀌어서 아직 연경소가 셋을 세기 전이 었지만 금방이라도 그의 입에서 마지막 숫자가 나오고 동시에 쌍장이 불을 뿜을 것 같았다. 제갈묘는 평생 이와 같은 곤란한 순간을 경험해 본 일이 없었다. 자 기와 세 형제의 처지는 사냥매에 쫓기어 도망치다가 결국 포수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한 마리의 토끼 같다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좁디 좁은 석실에 갇혔을 때 사방의 벽이 좁혀드는 것과 같은 처지라고 생 각되기도 했다. 연경소의 얼굴에 그나마 남아있던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 "친구, 그 마지막은 잠시 보류해 두는 것이 어떻겠소." 연경소는 헛바람을 삼키고 '셋'이라는 말이 입천정에서 맴돌게 놔두 었다. 한 번 말한 것은 지키는 그였기 때문에 일단 셋이라는 말이 나 온 후의 결과는 자신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가 의아해 하는 동안 사괴의 안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대형!" 성격이 가장 단순한 위달이 제일 먼저 정적을 깨고 말했다. 그는 갑 자기 자기들의 의형이 나타난 이유를 따져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양빈도 신음하듯 말했다. "대형..." 제갈묘와 최봉도 마찬가지였다. <대형> 하는 말이 조그맣긴 하지만 분명하게 입에서 새어나왔다. 연경소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고인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시기 바라오. 연모는 오늘 살심이 일었으 니 이들이 곱게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오. 만약 저들을 도울 심산이 걸랑 어서 손을 쓰시오." 수풀이 옷자락에 스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백설(白雪)처럼 흰 옷 을 입은 선풍도골(禪風道骨)형의 한 중년인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 는 가슴에 한 자루의 도(刀)를 안고 있었는데 길이는 석 자 정도에 불 과했지만 등이 두텁고 검집에서는 향기가 배어나와서 상당한 거리임에 도 향긋한 냄새를 확실히 맡을 수 있었다. 화서운은 이때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을 보다 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만약 혈도가 풀려 있었다면 미친 듯이 날뛰면서 발작을 했을 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신의 요혈이 제압 되어 힘을 쓸 수 없었다. 이런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멀 쩡한 사람을 만 근이나 되는 쇳덩이 사이에 끼워넣어서 옴쭉달싹 못하 게 한 뒤 몸 속에 벌레를 집어넣어 오장육부를 조금씩 갉아먹게 해도 이보다는 못하리라... 하면서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실제로 이가 다물 어지지도 않았다. 백의 중년인은 사괴의 앞까지 가서야 멈춰서, 연경소에게 포권의 예 를 갖추어 말했다. "불초는 강호에서 천산도라고 불리우는 을씨 성에 이름은 외자로 파 자를 씁니다. 제 아우들이 심려를 끼쳐 드렸으니 대신 사과드립니다." 연경소는 검 대신 들고 있던 나무가지를 뒤쪽으로 던져버렸다. "을형께서는 어떻게 이곳을 아셨습니까?" 을파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연형이 이곳을 찾은 것과 같은 이치지요." 연경소의 입가에도 한 가닥의 미소가 어렸다. "정말 탄복했습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로군요." 을파는 재빨리 두 손을 좌우로 흔들어 보이며 사양의 뜻을 표했다. "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 말이 실례가 되지는 않았는지요." 사괴는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위달 이 또 괄괄한 성격을 죽이지 못하고 나섰다. "대형, 뭐 저런 후레자식과 긴 말 하는 겁니까? 그냥 잡아족..." 그는 따가운 을파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꽉 다물었다. 그의 앞가슴 에 안겨있는 칼이 당장이라도 춤사위를 벌여 자기의 혀를 제물로 삼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을파는 매섭게 꾸짖었다. "잘들 하는 짓이다. 내 이름을 대고 역근경을 정중히 빌려오거나 아 니면 고승께 부탁해서 사매를 치료하라고 했거늘 소림사 승려를 백 명 이나 해치고 또 연형과 같은 고수를 건드려? 차후에 벌을 내릴테니 근 신하고 있어라." 양빈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역근경을 조용히 빌려오려고 했는데 그만..." 을파의 어조가 높아졌다. "셋째는 변명하지 말아라! 더이상 말을 하다가는 연형보다 나의 천 산도가 분노할까 두렵다. 여섯째만 남기고 모두 청정객잔(淸淨客棧)에 가 있거라." 제갈묘를 제외한 세 사람은 그의 꾸짖음에 꼼짝도 못하고 모두 풀이 죽어 조용히 풀숲을 헤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연경소는 참견을 할까 했지만 그냥 보고만 있었다. 가장 꼴보기 싫은 녀석 - 제갈묘 - 은 남 아있었고, 화서운도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을파는 제갈묘에게 말했다. "연형의 제자는 어떠냐?" 제갈묘는 일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48 08/20 00:25 15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8장... 천산도 을파 (3) 을파는 다그쳐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연경소는 아무래도 염려가 되어 견딜 수 없었다. 성큼성큼 걸어가서 지풍을 날려 혈도로 풀어주려고 했다. 그러자 을파가 그의 손을 잡아 채려고 했다. "무슨 짓이오?" 연경소가 그렇게 쉽게 완맥을 제압당할 리 없었다. 비록 검은 없었 지만 마치 손을 칼날처럼 세워 거꾸로 을파의 손목을 내리치려고 했다. 을파는 그의 재빠름에 놀라면서도 다급히 말했다. "영제(英弟)의 몸에 손을 대면 안됩니다!" 그의 말투에 아까와는 달리 당황함과 조급함이 서려있는 것을 보고 연경소는 손을 거두었다.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었다. "왜 을형께서는..." 을파는 얼굴 가득히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가만히 화서운의 옆에 꿇 어앉아 진맥을 해 보았다. 제갈묘는 이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 다. 그는 한참 동안 화서운의 몸을 여기저기 짚어보다가 백회혈(百會穴) 에 이르러 손을 딱 멈추고 신음했다. (역혈수...) 을파는 벌떡 일어서서 제갈묘 앞에 섰다.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연경소는 뭔가 속에서 반짝이는 것이 있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 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길한 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 자의 목숨과 관련된 것인데 어찌 함부로 속단할 수 있으랴. 그만큼 사 제의 정은 깊었다. 제갈묘의 고개가 약간 치켜올라가자 을파는 자색 빛이 도는 칼을 땅 에 떨어뜨리고 다짜고짜 그의 따귀를 때렸다. 철썩! 철썩... 제갈묘는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하고 다만 고개가 좌우로 왔다갔다 할 뿐이었다. 굳이 호신기공을 돋구지 않아서인지 그의 양쪽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눈두덩이에서도 피가 배어나왔다. 코피는 이미 흐르다 멈 춘지 오래였다. 하지만 을파의 손은 십여 대를 더 때리고서야 멈추었다. 그의 표정 은 결코 사람을 벌줄 때의 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갈묘에게 다가 가서 말했다. "즉시 청정객잔으로 가서 일곱째 구숙을 불러오너라. 한시도 지체해 서는 안 된다. 만약 반 시진 이상이 걸린다면 한 생명이 사라지는 것 은 알 것이다." 제갈묘는 역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가 그말을 듣자 나는듯이 산 아래로 달려내려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을파는 갑자기 질퍽한 흙바 닥에 무릎을 꿇었다. "연형!" 이렇게 되자 놀란 것은 연경소 쪽이었다. 갑자기 자기 의형제의 따 귀를 부어 터지도록 때리고 나서는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듯한 의사표 시를 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황급히 을파의 두손을 맞잡고 일으키면서 말했다. "아니 을형, 이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 을파는 무릎에 묻은 흙을 털 생각도 하지 않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 다. "제 몹쓸 동생이, 아... 이 사람의 탈을 쓴 늑대같은 아우가 연형의 제자에게 그만..." 연경소는 그 말까지만 들었어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역혈수 라는 세 글자를 들은 것은 잠시 후였지만 무슨 악독한 수법에 걸린 것 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물었다.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을파는 하늘을 쳐다보고 다시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일단 아이를 푹신한 곳에 제대로 눕히고 생각합시다." 연경소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그 말에 잠시 이성을 되찾고 조심스럽게 제자를 푹신한 풀밭으로 옮겨 뉘였다. 화서운은 모든 상황 을 보고 듣고 할 수는 있었지만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몸짓도 못 했기 때문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당장 죽더라도 사부님에게 한 마디 만 했으면, 했지만 그것조차도 전달할 길이 없었다. 을파는 얼굴 가득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다시한 번 화서운의 전신경 락을 일일이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연형에게는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보다도 저 어린 제자에게 는 정말 불행입니다. 아니..." 그의 말에는 두서가 없어서 마치 횡설수설 같았다. 연경소도 충격을 받았지만 을파도 그에 못지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원래 약초 를 기적적으로 찾아 사매를 치료했기 때문에 기분이 극히 좋았는데 이 런 일이 생기자 하늘을 원망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만약 화서운이 무슨 소리만 속에서 되뇌이고 있는줄 알았다면 죄책 감은 더했을 것이다. (사부님... 사부님...) 속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지만 그것은 조금도 신체활동이 되 지 못했다. 눈물은 커녕 눈을 깜빡거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화서운의 몸은 지금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눈과 귀만이 살아있을 뿐 썩은 송 장과 같았다. 다만 송장과는 달리 신경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전신혈맥 이 역류하는 고통을 남김없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화서운은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고통 으로 인해 비명만 질렀을 뿐이지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엄두를 내지 못 했는데 지금은 단적인 것이나마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연경소도 애가 타서 물었다. "어떤 강력한 점혈수법에 당한 것이겠군요." 을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사실 여섯째 제갈묘는 역혈수라는 재간을 익혔는데 그것 을 한 번 펼치면 위력이 강할 뿐더러 지극히 악랄하여 사람의 피를 모 두 역류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그는 계속 뭐라고 설명을 했지만 연경소의 마음 속의 시선은 역혈수 라는 말을 들을 때부터 어디엔가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설명이 귀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무공 이름에서부터 물씬 풍기는 고통과 사 악한 기운... 피를 거꾸로 하는 손재간을 연마했다는 것이리라. 연경소는 그만 다리에 힘을 잃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다면, 서운이가 그것에..." 을파는 어느 정도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소협(小俠)의 신체가 강건하고 골격이 뛰어나니 아마 반 시진 내지는 거기에서 일이각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이상 간다면 반신불수 내지는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침착하기로 유명한 천산도 을파도 얼마나 당황했던지 어느정도 이성 을 되찾았다고 스스로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화서운을 부르는 말이 아 이에서 영제로, 영제에서 소협으로 바뀌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49 08/20 18:13 147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8장... 천산도 을파 (4) 연경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손을 함 부로 써서 제자를 다쳐놓은 제갈묘와 그의 맏형 격인 을파를 원망하는 말도 사람인 이상에야 없을 리 없건만, 그보다는 자신의 무기력에 한 탄했다. "검의 길 하나만을 추구하여 참으로 먼 길을 지치지도 않고 걸어왔 건만 이렇게 큰 슬픔을 안겨주는 하늘, 그대는 어째서 직접 나를 치지 않는가..." 을파는 그의 심정을 읽기라도 한 듯 뒤를 이어받아 말했다. "무심(無心)하게 맑기만 한 그대여, 차라리 찌푸린 그대가 아름답구 나." 연경소는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사실 시를 짓는다고 볼 수는 없 었다. 그냥 마음 속의 울분과 답답함을 뱉어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엉성하면서도 어느것 하나 놓히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러나 엉성하 기만 하구나." 을파는 속으로 그 대구(對句)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바람처럼 달려온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곱째!" 남색 옷을 입고 왼손에는 약상자를 든 한 인영은 연경소와 을파에게 가벼운 목례만 건네고 곧 화서운의 오른편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 다. 을파는 그를 소개했다. "연형도 짐작하셨을 때지만 이 아우는 절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은 치료하지 않아서 사의(死醫)라는 별명을 얻었던 구숙(勾肅) 일곱째 입니다." 연경소는 문득 그가 계속 높임말을 하는 것이 대해 저항감을 느꼈다. "이름은 익히 들었습니다. 을형, 말을 놓으시지요." 을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나이살을 대여섯 더 먹었다고 어찌 연형과 같은 분에게 반말 을 하겠습니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냥 두십시오." 연경소는 그에게 더이상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더 관심이 가 는 일은 제자의 생사여부였다. "운아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을파의 얼굴이 갑자기 흐려졌다. 역혈수라는 무공에 당한 사람을 수 백 번 보아오는 가운데 그 위력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살아난 사람이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기는 그런 능력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일곱째의 의술이라면..." 연경소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저는 안심하겠습니다." 갑자기 이야기의 실마리가 끊어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구숙이 여 기저기 짚어보고 누워있는 화서운의 몸을 살짝 건드려 보면서 반응을 엿보는 것을 구경하는 것 뿐이었다. 구숙은 말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진맥을 다 끝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단지 몇 마디만 했다. "팔성 공력 역혈수군요. 치료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말에 연경소는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혼자 몸일 때에는 혈혈단신 어느 것도 두려울 바 없이 귀신 굴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뜻밖에 제 자와의 정이 자신을 이렇게 괴롭힐 줄 몰랐다. 그는 황급히 물었다. "무슨 방법이 없겠나?" 구숙은 다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을파와 연경소의 얼굴을 쓱 보고 대 답했다. "있기야 합니다." 을파가 먼저 물었다. "일곱째, 무엇인가?" "먼저 제가 침술로 독을 최대한 빼내고 거꾸로 흐른 피로 인해 막힌 혈맥을 뚫어놓겠습니다. 하지만 피는 계속 역류해서 만약 반 시진내지 한 시진 정도만 더 지나면 그 피가 정맥에서 심장으로 흘러들어가 돌 이킬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그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갑자기 그는 말을 멈추고 몇 번 기침을 했는데 매우 괴로워보였다. "쿨럭쿨럭! 음, 너무 말을 많이... 필요한 것은 공엽초(空葉草)라는 약초인데 다행히 소실봉 정상 부근에는 많이 자라고 있다고들 합니다. 진한 자주색의 꽃잎이 매우 두툼하며 속은 텅 비어있습니다. 모양새의 특이점은 줄기가 녹색이 아니라 반투명하여 속이 들여다 보인다는 점 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또 기침을 해 대었다. 을파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 으며 말했다. "괜찮겠는가? 약초는 내가 곧 찾아오도록 하겠네." 그는 곧 풀숲을 헤치고 사라져 버렸다. 연경소가 그 뒤를 따라 자기 도 약초를 따러가려고 하자 구숙이 그를 막았다. "연형은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연경소는 물론 이의가 없었다. "어떻게 도우면 되겠나." "제가 침술로 어느 정도 혈맥을 뚫으면 연형은 내가진력을 백회혈에 서 불어넣어 주십시오." 그 말에 연경소는 깜짝 놀라며 의혹이 생겼다. "백회혈은 지극히 예민한 곳이라 그곳을 다치면 손을 쓸 수도 없는 곳 아닌가. 말 그대로 백 가지 혈도가 교차하는 곳이지 그곳을 다친다 면 결과는..." 구숙은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말 속에 기침이 섞여 있어 힘겨워 보였 다. "할수 없습니다. 지극히 조심하는 수밖에는. 백회혈로 진기를 내려 보내는 것은 반각만 하면 됩니다. 뇌에 고인 나쁜 피를 정화시켜 돌려 야 하기 때문... 쿨럭! 이죠. 그 뒤부터는 심맥(心脈) 가까운 혈도부 터 피의 흐름을 돌려주면 됩니다. 많은 진력을 소모하는 일이니 먼저 조식을 하고 하시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약초는 보혈(補血)의 기능이 있으니 하루에 두 번씩 아침저녁으로 보름 정도 복용하면 됩니다." "말대로 하겠소." "먼저 침을 놓을동안 쉬고 계십시오." 연경소는 2장 정도 뒤쪽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과 진기 를 고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에 제자의 목숨이 달렸다는 것을 생각 하니 쉽게 마음이 모아지지 않고 뜬구름처럼 붕 뜨다가 흩어지곤 했지 만 워낙 쌓아온 수련의 깊이가 있는 그였기 때문에 금방 안정을 찾았 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50 08/21 09:12 144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8장... 천산도 을파 (5) 구숙은 가지고 온 약상자를 열어 대나무로 된 침통을 꺼냈다. 그는 바닥에 보자기를 펴 놓고 침통을 거꾸로 해서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았 다. 손가락만한 대침부터 손톱만한 것까지 길이와 굵기가 다양한 침들의 공통점은 은(銀)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 뿐이었다. 구숙은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침술을 펼쳐야 하니 연형께서는 호법을 맡아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겠소." 연경소는 칠, 팔 장쯤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서 팔짱을 끼고 커다란 소나무에 기대어 섰다. 그는 손에 청죽검이 들려 있지 않다는 것이 이 렇듯 허전한 줄을 몰랐었는데 막상 빈손으로 있자 아주 중요한 물건을 잊어버렸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구숙이 화서운의 이마와 양쪽 태양혈, 코와 입 사이에 있는 인 중 급소에 차례로 침을 놓는 모습을 보고 식은 땀을 흘렸다. 사혈(死 穴)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부위에 침을 놓으면서도 구숙은 망설이거나 흔들림 없이 척척 꽂아나갔다. 연경소는 두손을 모아 몇 번 비비고 자기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제발 잘 해줘라. 백회혈에 잘못 힘을 썼다간 완전히 병신이 되거나 죽고 말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느라 구숙이 불러 외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천산칠괴 중 유일하게 의술을 익힌 구숙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 었다. 사실 그가 필사적으로 의원이 되고자 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성 격이 괴팍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몰라라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구숙의 기침은 감기 때문이 아니라 폐병 때 문에 나는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나빠서 의원이 들락날락거리던 구숙은 스무 살 이 되던 날 성년식(成年式)을 하다말고 심한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그의 부모님은 다시 의원을 불렀지만 그 의원은 고개를 흔들고 한동안 진맥한 결과를 말하지 않다가 말했다. "폐에 찬 바람이 가득 차고 내장이 상해서 삼 년 이상 살기가 어려 우니 지금부터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사형선고가 아니던가. 그 말을 무의식중에 들은 삼대독자 는 그날로 집을 뛰쳐나가 다시는 들어오지 않았다. 앞뒤 재보지 않고 가출하는 바람에 돈도 가져오지 않았고, 피복도 자리에 누워있을 때와 똑같은 환자복이었다. 마침 늦여름이라서 춥지는 않았지만 가을이 가 고 겨울이 왔을 때에는 밤마다 추워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남의 집 처마 밑에서 거지들처럼 덜덜 떨면서 구걸도 못하고 며칠동 안 굶으면서 새우잠을 자는 그를 발견하여 거둔 사람은 북경성 단가의 원(段家醫院)을 사대째 하고 있는 단호(段昊)라는 사람이었다. 의술은 대단치 않았지만 실력있는 젊은 의원들을 고용하여 많은 돈을 번 그는 다행히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어서 그 돈을 나쁜 데 쓰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치 않다고 해도 사대째 한 직업을 이어왔으면 조그만 재 주라도 있는 법이었다. 자연히 양자로 맞아들인 사람의 몸 속에 폐병 이라는 불치병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자 갖은 방법을 다해 완치시키 고자 했지만 돈만 날릴 뿐 성과가 없었다. 구숙은 자기가 더이상 있어봐야 짐이 될 뿐이라고 여겨서 어느날 떠 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천하를 주유하면서 인연이 닿는다면 신의(神 醫)라고 불리우는 전대의 백가보주(白家堡主) 백량(白良)이나 괴팍하 기로 소문난 귀수마의 궁목백(弓木栢), 혹은 도화선자(桃花仙子) 설빙 (雪氷)을 만나 자기의 불치병을 치료하고 새 인생을 살 수도 있을 것 이라는 희망도 깃든 결정이었다. 단호는 자기의 힘이 미치지 않음을 깨닫고 있던 터라 눈물로써 늦게 맞아들인 양아들을 보내주었다. 구숙도 의붓아버지가 손에 쥐어준 상 당한 양의 은자와 패물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짧은 만남에서도 정 은 싹트기 마련이다. 비록 일 년도 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구숙과 단 호 사이에는 혈육과 같은 정이 생겼다. 구숙은 지난 일 년 동안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 고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 수십 권의 의학서적을 보아 웬만한 의원 은 저리가라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관심을 가졌던 침 술과 뜸뜨는 기술은 단가의원에서도 으뜸이었다. 강호를 떠돌아 다니던 그는 주루에서 만난 한 인물에 반해서 사흘간 속마음까지 툭 털어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더욱 끌리는 자신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의형제를 맺었으니, 바로 천산칠괴의 막내가 된 까닭이었 다. 천산칠괴의 일곱째가 된 후 구숙은 을파의 소개를 받아 귀수마의 궁 목백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물론 천리길을 마다않고 찾아간 그는 강 호천지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잘못 보이는 사람은 치료해 주지 않는 궁목백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자기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 치료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정도 괴팍한 성격에 보조맞추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굴하지도 않고 큰소리 치지도 않는 구숙이 마음에 든 궁목백은 뜻 밖에 자기를 찾아온 사람의 의술이 고명한 것을 알고 며칠동안 마음을 모아 토론했지만 그로서도 천형(天荊)에 가까운 폐렴을 치료할 방도가 없었다. 십여 차례 뜸을 뜨고 혈도를 뚫어도 전혀 효과가 없자 궁목백 은 최후의 처방전을 내렸는데 그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구엽선초(九葉仙草)와 백 년 이상 된 설련자(雪蓮子)를 그늘에 한 달 동안 말려서 빻아 분말로 만들어 가지고 오면 내가 깨끗이 나을 약 을 조제해 주겠네." 구숙도 의원이었기 때문에 그 두 가지를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잘 알고 있었다. 구엽선초는 돈만 억수로 많다면 구하기 어렵지는 않 았다. 그 액수가 이십만 냥 정도라는 점이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더욱 곤란한 것은 설련자를 어디서 구하느냐는 점이었다. 산 하나를 샅샅이 그물 뒤집듯 훑어낸다고 해도 설련자 하나 찾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구숙은 단가의원에서 푸르스름한 색깔의 설련자 한 알을 본 적이 있었는데, 불과 십오 년 정도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 죽어가던 중년 무사가 펄펄하게 살아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경험이 있었다. 그때 중년 무사는 의붓아버지 단호의 오랜 친구가 써준 소개장을 들 고왔기 때문에 귀한 약을 내준 것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십만 냥을 두 고갔다. 실제로는 전표 한 장이었지만 그 가치는 엄청난 것이었다. 남 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해주는 머슴의 한 달 새경이 채 두 냥도 안 되 었으니 짐작이 안 갈만도 하다. 아무튼 백 년 이상 묵은 설련자는 그 색깔이 푸르면서도 붉은 기운 이 감도는 것을 최상품으로 쳤다. 하지만 세 개 중에서 두 개 정도는 붉은 기운 대신 회색이나 남색이 감도는데, 그런 것은 약효가 불과 일 할도 안 되는 것으로 일반 약재와 똑같이 취급했다. 궁목백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청홍설련(靑紅雪蓮)을 말하는 것이었으니 어찌 처방전이 나왔다고 기뻐할 수가 있으랴. 구숙은 그 뒤로 몸조리를 잘 하면서 조금씩 무공을 익혀 삼 년 밖에 는 살 수 없다고 하던 의원의 말을 뒤집고 벌써 칠 년째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어두웠다. 말을 길게 하기만 해도 피가 토해질 정도였으니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당장 잠들 면 그것으로 세상이 끝날 것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게 되면 보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하느님에게 감사하는 그였다. "연형!" 연경소는 퍼득 정신이 들어 팔짱을 풀고 뛰어왔다. "이제 시작하면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호흡을 고르고... 쿨럭쿨럭..." 구숙은 손을 입으로 가리고 걸걸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하며 일어서 서 저만치 떨어졌다. "백회혈, 장문혈, 명문혈의 순서입니다." 연경소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른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앉아있는 화서 운의 머리 위로 갖다대었다. 막 진력을 쏟아내려던 그는 제자가 계속 누워있기만 하다가 자기 힘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며 말을 걸려다가 꾹 참았다.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드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51 08/23 15:42 14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8장... 천산도 을파 (6) 연경소는 자기가 생각해도 소심하리만치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행동 했다. 구숙은 그의 태도가 지극히 신중하여 실수할 것 같지 않음을 보 고 안심했다. 그는 당부했다. "연형께서는 진력을 해소시켜 경락을 다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겠지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 결코 연형의 기를 움직여 대항 해서는 안됩니다... 쿨럭쿨럭! 마음 속으로 삼백까지 셀 동안 절대로 손을 떼거나 충격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 결과는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럼 저는 잠깐 약초를 찾으러 다녀오겠습니다. 대형이 처 음보는 약초라서 늦는군요. 백회혈에서 손을 떼기 전에 올테니 조심하 시기 바랍니다." 그는 한꺼번에 이렇듯 많은 말을 하자 목구멍에 탁한 기운이 가득차 고 핏물이 넘어왔지만 애써 기침을 참고 약상자를 챙긴 후 정상 쪽을 향해 걸어올라갔다. 연경소는 제자에게 타일르듯 말했다. "자, 이제 잘 해보자." (아마 넌 들을 수 없겠지.) 그는 화서운의 의식이 또렷또렷하여 보는 것과 드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음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피가 거꾸로 흐르는 고통도 고 스란히 받고 있는 것까지 알았다면 마음이 급해져서 어쩌면 일을 망쳤 을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기절한 상태이지만 안에서부터 터지는 고통 이 너무 심해서 무의식중에 조금씩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긴장을 풀기 위해 고개와 손목을 몇 번씩 돌려보고 나서야 손 끝에 진기를 약간 주입하기 시작했다. 화서운은 지금 가장 괴로운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운기행공 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신 혈도의 위치가 괴이하게 바뀌어 있었으 며 백회혈과 장문혈, 명문혈 등 몇 개를 제외한 혈도가 아예 없어지거 나 위치를 이동한 상태였다. 소년은 고스란히 모든 고통을 느껴야 했으며, 차라리 기절했으면 하 는 생각을 수도없이 했지만 역혈수의 무서운 수법은 그럴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조금 전에 구숙이 침술로 뭉친 피를 맑게 해주고 혈도의 위치를 어 느 정도 잡아 주었으나 화서운의 진력은 단전에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샘솟는 물처럼 넘쳐흘러 전신의 모든 경맥에 제멋대로 퍼졌다. 기해혈 (氣海穴)에는 단전에 남아있는 진기보다 수십 배는 되는 양이 고여있 었지만 실상은 고여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맹렬한 기세로 소 용돌이치다가 자기의 힘을 못이겨 다른 경락으로 터져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모든 경맥이 고무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포화상태와 비 슷했지만 약간 다른 것이어서 누가 혈도를 풀어주려고 내력을 주입하 기라도 하면 즉사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찰랑찰랑 넘치는 그릇을 조 금만 건드려도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지고 바람이 가득 든 기구를 바늘 로 살짝 찔러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였 다. 만약 화서운이 평소에 내공을 열심히 익히지 않고 소홀히 하여 조금 만 부실했거나 신체적으로 튼튼하지 못했다면 적어도 치료하는 데 두 배는 힘들었으리라. 연경소는 백회혈에 아주 미미한 충격을 주어 가닥가닥 갈라진 진기 를 조금이라도 엉겨붙게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맹렬히 파도치는 바 다에는 조약돌을 하나 던져도 아무 반응이 없겠지만 잔잔한 연못에 떨 어뜨린 것은 커다란 파문으로 확산되기 마련이다. 지금의 조치가 그와 같았다. 화서운의 몸속에 있는 진기는 서로 부 딪치기도 하고 소용돌이치기도 하며 성난 파도를 방불케 할 정도로 휘 몰아치고 있지만 오직 한 군데, 뇌해(腦海)만은 거의 영향이 없었다. 인체에는 수백 개의 혈도가 있지만 그 특성이나 인체에 끼치는 영향 은 각양각색이었다. 하늘의 정기를 받고 온몸의 흐름이 모인다는 정수 리의 백회혈이 있는가 하면 땅의 정기를 받는 발바닥의 용천혈(龍泉穴) 이 있다. 눌리면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혈도 있고 악영향은 없는 대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마혈도 있으며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아혈도 있다. 하지만 이들 혈도의 공통점은 크던 작던 사람의 기가 흐르는 길목이 라는 점이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던 원치 않던 하늘이 부여한 몸을 타고난 이상 병장기를 다루고 신체를 사용하는 외공(外功) 을 익히거나 원래부터 흐르는 기운을 발달시켜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하는 내공(內功)을 익혀야 했다. 물론 둘 중 어느 하나만 익히는 사람 은 거의 없고 병행하여 익히게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무사들은 내공심 법이라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다. 내공심법을 배우기 전에 기초적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 바로 인체의 혈도에 대한 공부였다. 주로 점혈(點穴)이나 그 반대인 해혈(解穴) 따 위의 무공은 제쳐 두고서라도 기를 운용하는 구결(口訣)은 대부분 어 느 혈도에 의식을 두고 거기에서 또 어디로 움직여라... 이런 식이 대 부분이었다. 어쨌든 사부가 제자에게 무공, 특히 내공을 전수할 때에는 각 혈도 의 특성에 대해서 전수해 주는 것은 거의 백이면 백 모두의 경우에 해 당한다. 그중에 어느 정도 제대로 실력을 갖춘 사부라면 어느 부분이 연약하고 치명적인지를 알게 마련인데, 연경소가 실력이 없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연경소는 그가 쏟아낸 가벼운 한 줄기의 진기가 백회혈을 통해 전신 으로 흩어지자마자 즉시 화서운의 몸속에 있는 기혈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이다.) 그는 백회혈에서 손을 떼고 조금의 여유도 두지 않은 채 양쪽 장문 혈을 세게 찔렀다. 이 한 수에는 강한 양기(陽氣)를 띤 진력이 갈무리 되어 있어서 화서운의 날뛰기 시작한 기혈을 조금씩이라도 서로 뭉치 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옆구리에 닿은 부위는 양손의 둘째와 셋째 손가락 끝이었다. 장심에 서 쏟아내는 진기보다 섬세한 반응을 알기 위해서 손가락 끝에만 접촉 이 있게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화서운의 몸은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으면서 미미하게 부르르 떠는 것을 멈추게 되었고 두 사람 모두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솟아났다. 연경소는 반각 정도 지났다고 생각되자 장문혈에서 손가락을 떼어내 고 두 손을 포개어 화서운의 등 뒤에 있는 명문혈을 가볍게 대었다. 그는 양장이 닿자마자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틀린 기의 흐름을 느끼 고 깜짝 놀랐다. 그가 두 손을 포개어 얹은 것은 장문혈에서 손가락을 뗀 지 불과 일 초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화서운의 명문혈에서는 수십 갈래로 갈 라졌던 진기의 흐름이 거대한 하나의 해류(海流)처럼 모여들어 맹렬한 기세로 맴돌고 있었다. 연경소는 자기 제자의 내공이 상상 외로 심후한 것을 알고 흐뭇했지 만 그 바람에 하마터면 운기행공해서 대항할 뻔했다. 그랬다면 화서운 은 이승과는 영영 작별이었을 것이다. 화서운의 명문혈에서는 지금 전신의 내공이 모여들어 집약되어 기둥 과 같이 뭉친 형태를 이루었다. 곧 그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덩어 리는 폭발할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연경소는 숨을 길게 내뱉고 앞 으로 밀려올 파도에 대비했다. 펑!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화서운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화려한 폭발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고통스러웠지만 아까의 그 답답함과 압 박감에는 비할 바 아니었다. 안마를 하면서 어깨를 두드릴 때 아프지 않고 시원하다는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아무튼 화서운에게 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아직 내공을 배운지 팔 년, 웅혼하다는 말을 쓰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화서운은 어렸을 때부터 사부님이 만들어준 각종 단약과 명 심정 부근의 수많은 약초를 정기적으로 복용했기 때문에 자기 또래의 소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뿐더러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었다. 잡티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양지기(純陽之氣)였기 때문에 그 밑바닥은 좀처럼 끝을 드러내지 않을 듯 보였다. 연경소는 드디어 화서운의 명문혈 부근에 모여있던 진기의 덩어리가 갈라지면서 수십 수백 줄기의 화살처럼 쏘아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애써 운기행공을 하지 않고 그 기운을 장심으로부터 받아서 유 연하게 해소하기 시작했다. 수련기간 치고는 대단한 진력이었기 때문 에 연경소의 머리 위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걸치고 있는 파란색 옷도 아까부터 배어나온 땀 때문인지 축축하게 젖 어 있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52 08/23 18:28 143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9장... 주화입마(走禍入魔) (1) 연경소는 간헐천이 한참동안 잠잠했다가 갑자기 물을 뿜어내듯 콸콸 쏟아져나오는 진기를 완벽하게 해소하고 있었다. 천하에서 오직 그만 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공이 그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보다 더 화서운을 아끼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어린아이답지 않은 강대한 진력을 해소하며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하고 있었다. 만약 연경소의 내공이 화서운보다 약하다면 - 그럴 리는 없겠지만 - 솜이 흡수할 수 있는 물에도 한계가 있듯이, 미처 빨아들이지 못한 물 이 흘러넘쳐서 사방으로 흩어질 위험이 있었다. 연경소가 앉은 주위는 열기로 인해서 후끈후끈한 기운이 감돌고 그 의 머리 위에서 조금씩 올라오는 하얀 색 연기는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흩어지고 있었다. 화서운의 명문혈에서 솟아나오는 진력은 이제 그 기세가 많이 약해 져서 비가 온 뒤 한창 물이 불어났다가 서서히 줄어드는 것을 연상케 했다. 어느정도 기혈이 안정되고 혈맥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연 경소는 몸이 뿌듯한 것을 느끼고 서서히 손에 힘을 더하기 시작했다. 독사에 물리면 상처 부위를 십자 모양으로 찢고 입안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그곳에 입을 대고 빨간 피가 나올 때까지 빨아야 한다. 독혈을 밖으로 빼내는 것이다. 마치 독혈을 빨아내듯이, 화서운의 몸속에서 날뛰던 불순한 기운들 은 모조리 명문혈을 통해 발산되어 해소된 상태였다. 아직 해를 입지 않은 깨끗한 진기는 그의 사지백해를 돌면서 혈맥을 정상으로 돌려놓 고 있었다. 연경소가 할 일은 유연하게 해소시켜낸 진기를 다시 제자의 기경팔 맥에 불어넣어 주는 일이었다. 무림고수들이 죽을 때 일신의 내가진력 을 모두 제자에게 넣어주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그 런 신기한 공력을 얻은 무사들은 그것을 모두 자기 것으로 흡수하지도 못하고 우쭐대다가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연경소가 하려는 일은 그와 비슷했다. 역혈수라는 무서운 무공은 화서운의 내공 을 불순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일단 사부의 몸으로 옮길 수밖에 없게 했다. 따라서 다시 주입할 내공을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서는 운기행공 을 몇 번 해서 완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화서운은 그제서야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연경소의 두 손에서 뿜어 나오는 홍수와 같은 진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보통 제자에게 내공 을 물려줄 때에는 직접 단전이나 경락으로 진기를 넣어주는데, 일반적 으로 그것을 금방 이용하지 못하고 수 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까닭은 진기가 주입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줄 몰라서였다. 연경소가 화서운의 몸에서 빠져나온 기운을 유연하게 해소한 이치와 똑같이, 연경소가 화서운에게 기를 넣어줄 때에도 그것을 유연하게 받 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곧 상승(上承)의 내공심법(內功心法)이었다. (일체부동(一體不動)...) 화서운은 대라신검의 검결 중에 들어있는 한 대목을 외면서 최대한 부드러운 기운을 살려 텅 빈 듯한 경락에 물밀듯 밀려들어오는 난폭한 진기를 융합시켜 나갔다. 그는 점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진화는 은근히 피어올라서 전신으로 고루고루 퍼졌으며, 마침내 단전에 꽉 찼던 진기는 기경팔맥 과 십이중루를 돌면서 거침없이 유통되었다. (사부님...) 화서운은 총명한 소년이었다. 연경소가 진기를 불어넣어 주면서, 자 기의 것을 더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녀석...) 연경소도 대충 그런 마음을 알아챘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며 냄새도 없는 신기한 무언가가 두 사람의 사 이에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요 불립문자(不立 文字)랄까, 그것의 원동력을 이루고 있는 핵심 물질은 바로 정(情)이 었다. 그는 화서운에게 넣어주는 진기에 삼푼 정도 힘을 더해 그가 스스로 노력하여 얻으려면 적어도 오 년은 걸리는 성취를 더해주었다. 자기에 게는 물론 그만큼 이득이 되지 못했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은 활동하는 데 불편이 없을 것 같았다. 상승의 검도를 깨우쳐 무공이 월등히 증진 된 마당이었기 때문에 생긴 자신감도 한 몫을 했다. 진기를 다 넣어주었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한 번 단전으로부터 새로 운 불길을 끌어올려 강맹함과 유약함이 적절히 조화되도록 화서운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한배 반이나 되는 성취를 받아들이기 에는 혼자 힘으로 어려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제는 다시 한 번 서로를 불렀다. 비록 서로가 알아들지는 못했 지만... (사부님...) (녀석...) 바로 이때였다. "잠깐!" 연경소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지금은 일종의 고 비였기 때문에 함부로 그러지 못하고 청력을 있는대로 기울여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집중했다. 그것은 화서운도 마찬가지였다. 곧이어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욱... 안돼!" 연경소는 그 목소리가 구숙의 것임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십여 장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임에 틀림없었는데 누가 갑자기 구숙을 암산했 다는 말인가! (반각... 아니, 반의 반각만 늦게 왔더라도 되지 않느냐!) 그는 다급해져서 속도를 빨리했다. 이럴 때에는 서두르는 것이 제일 가는 금기임을 알고 있었지만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그렇지가 않았다. 큰 일이 있을 때 떨면 안되는줄 알면서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혼자 무엇을 할 때에는 떨게 마련이다. 수련을 되풀이함으로써 극복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인위적인 결과일 뿐이다. 연경소는 짧게 기합을 넣고 손에 힘을 더해 폭포수같은 굵은 줄기의 내공을 부어주었다. 자기의 계산으로는 5, 6초 정도면 완전히 화서운 의 체내의 기식을 바로잡아주고 손을 또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운이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구숙을 해 치운 상대의 발걸음은 예상외로 빠르게 다가와서 발길질을 한 것이다. (안돼!) 그 말은 입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고 속에서만 맴돌았다. 바로 뒤까 지 다가온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의 발길질이 자기의 등짝에 맞았던 것이다. "시주는 무엇을 하시오?" 발길질은 세차지도 않았고 자는 사람을 깨울 때처럼 툭, 건드린 것 에 불과했다. 하지만 연경소와 화서운의 몸속은 지금 폭풍우가 몰아치 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가득 부푼 풍선을 터뜨리는 방법은 수지침이 나 바늘로 찌르는 법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고무풍선이 터질 정도로 바람을 가득 넣은 상태에서 다시 몇 번만 더 숨을 불어넣으면 외부의 아주 조그만 압력에도 터지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의 도리로써 연경소 는 그 심후한 내공에도 불구하고 아주 약한 발길질이 몸의 구석구석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연경소는 그 순간 벼락같이 손을 떼었다. 오륙 초는 지나고도 남았 다. 즉 제자는 구할 구푼 정도는 무사한 것이었는데, 문제는 자신이었 다. 만약 연경소가 계속 손을 대고 진력을 불어넣었다면 자신은 거의 무 사했을 것이다. 손바닥 가운데의 장심(掌心)을 타고 발길질의 충격 여 파가 화서운에게로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물론 제자의 목숨 은 염라대왕의 것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제자를 끔찍히도 아끼는 그 가 뻔히 알면서 그런 행동을 할 리 없었다. 결국 청죽검객 연경소에게 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53 08/24 13:07 140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9장... 주화입마(走禍入魔) (2) 연경소는 피를 한 모금 토하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화서운은 다행히 전혀 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만큼 연경소의 내상은 가중되는 것이었다. 화서운은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 번개같이 삼장을 쪼개갔다. 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네 명의 승려였는데, 무기를 든 자는 없었 다. 구숙이 지른 단말마의 비명은 혈도를 찍히면서 순간적으로 외쳤던 것이었다. 화서운이 노린 것은 당연히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발길질을 한 승려였 으며 조금도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는 연경소가 어떻게 되었는 지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 문에 일단 공격부터 하고 보았다. "연... 연경소?" 뒤쪽에 있던 한 승려가 소림사에 와서 절기를 보이고 간 그의 얼굴 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들은 소림사의 영(靈)자 항렬 승 려들로 각각 법명을 영묘(靈妙), 영법(靈法), 영산(靈山), 영하(靈河) 라고 했으며 발길질을 해서 연경소에게 충격을 준 사람은 그 우두머리 격인 영묘였다. 화서운은 자기의 삼장에 이전부터 더 커다란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느끼고 내심 기뻤으나 연경소가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보자 걱정이 되 어서 후속동작을 펼칠 수가 없었다. 자연히 장풍의 기세가 약화되어서 영묘는 가슴팍에 세 대를 고스란히 맞게 되었으나 별로 피해가 없었다. 영묘는 최근에 다 배운 산화장(散花掌)의 수법으로 그 장풍을 피해 보려고 했지만 소년의 손은 빠르기가 전광석화와 같고 변화가 절묘해 서 도저히 막아볼 도리가 없었다. 미처 손이 올라가기도 전에 세 번이 나 가슴을 맞고 말았다. 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두 발자국 정도 밀려났지만 곧 내상이 없음을 깨닫고 소년을 얕보는 마음이 생겼다. "겨우 그 정도냐?" 화서운은 그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연경소는 계속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그 양은 점점 많아져서 지금까지 흘린 것만 해도 큰 대접으로 세 번 정도는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의 색깔도 점점 선홍색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당신들은 소림사의 승려라면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사부님을 공 격한단 말이오?" 영묘도 소림사에 있었지만 연경소가 신공을 발휘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뒤쪽 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똑똑히 그 모습을 보았던 영하가 말했다. "정말... 그 연경소란 말이냐?" 화서운은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어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럼 누구겠냐!" 영묘는 영하가 또 뭐라고 말하는 것을 제지하고 자기가 말했다. "너 이 꼬마 녀석은 무엇인데 반말지꺼리냐?" 화서운은 그의 말에 신경쓰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어 연경소의 입가 에 흘러내리는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 동작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품위가 깃들여져 있어서 승려들은 자기도 모르게 멈칫할 수밖 에 없었다. 다만 영묘는 조그만 녀석이 반말을 한 데 대해서 꾸짖으려고 했다. "꼬마 녀석이 무슨..."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화서운은 피를 다 닦아준 뒤 품속에 서 하나의 옥합(玉盒)을 꺼내어 연경소에게 먹여주려던 참이었는데 영 묘가 자꾸 옆에서 떠들자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본 것이었다. 영묘는 한동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화서운이 슬며시 돌아본 데 에는 살기도 없었고 야수와 같은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 게 움츠려 든 것은 사실이었다. 얼음장과 같은 표정에 질린 것이 아닌 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화서운은 냉정하게 말했다. "내 성은 화씨고, 이름은 서운이니 함부로 꼬마 녀석이라고 하지 마 시오." 영묘는 갑자기 자존심이 팍 상했다. "너 조그만 녀석이 뭘 안다고 대들어?" 그는 손을 쓰지는 않았지만 마구 침을 튀겨가면서 흥분하고 있었다. 영하는 그의 귀를 잡고 조그만 소리로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영묘는 더욱 큰소리로 말했다. "뭐라구?" 그는 연경소를 한 번 노려본 후 말했다. "내 발길질 한 번에 쓰러진 녀석이 무슨 어검술은..." 그는 중간에 말을 그칠 수밖에 없었다. 화서운은 옥합에서 새로 만 든 엄심단 두 알을 꺼내어 복용시킨 후 연경소를 바로 눕히고 상세를 보고 있었는데, 영묘가 사부를 무시하는 말을 하자 한옥검을 뽑아들었 다. 영묘가 불문에 입문하여 무공을 배운 지 삼 년밖에 되지 않아 견식 이 넓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사방으로 싸늘한 얼음같은 기를 반사하는 은색의 검이 보통 물건이 아님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화서운은 싸늘하게 말했다. "믿기 싫지만 사부님은 주화입마당하신 것 같다. 너는 마땅히 목숨 으로 이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영묘는 기가 막혔다. "너 꼬마같은 녀석이 내 목숨을 취한다구? 나한당에 있는 나한상 열 여덟 개가 한꺼번에 웃어 나동그라지겠다." 그는 자기 가슴을 탕 쳤다. "어디 찌를 수 있으면 찔러보라구." 그는 아까 화서운이 교묘한 수법으로 가슴에 삼장을 먹이긴 했지만 기세가 대단치 않아 내공이 있으면 얼마나 있으랴 하는 생각으로 경시 했다. 하지만 수련한 기간만 따져본다고 해도 화서운은 영묘의 세 배 에 가까웠다. 처음부터 상대가 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화서운은 검을 천천히 들어올리면서 혈도가 눌려 몸이 굳어져 있는 구숙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유없이 사람의 혈을 누르고 또한 상하게 했으니 할말은 없으렷다. 소림사의 이름이 크다고 하더니 다 허명 뿐이구나." 영묘는 일부러 코웃음쳤다. "흥! 나는 소림사에서 한참 아래에 있는 화상에 불과하지만 너 꼬마 같은 녀석쯤이야..." 그는 또한번 말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꼬마의 손에 들린 은색의 검이 언제 움직였는지 자기의 승포 자락을 세 치 가량 잘라버린 것이 었다. 어느새 화서운은 제자리로 돌아가 승포 자락을 들어올렸는데 영 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꼬마 녀석이 사술(邪術)을 부리는구나!" 그는 영법 등에게 눈짓으로 같이 공격하자는 신호를 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54 08/24 17:00 156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9장... 주화입마(走禍入魔) (3) "멈추지 못하겠느냐!" 영묘를 비롯한 네 승려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못박은듯 굳어버렸다. 화서운도 막 손을 쓰려는데 나타나서 방해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두 명의 노승(老僧)이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보통의 승려들과는 한 노승은 자색 가사를 걸치고 흰 턱수염이 가슴까지 내려 왔고, 한 노승은 구숙을 어깨에 걸터메고 있었는데 회색 가사에 손에 는 녹색 빛이 나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영자 항렬의 사승(四僧)은 녹옥불장을 보자 무의식중에 손을 멈추고 부르짖었다. "방장대사님!" 큰소리로 꾸짖어 영자 항렬의 네 승려를 제지한 사람 중 녹옥불장을 들고 있는 노승은 소림사의 방장대사라는 엄청난 신분을 가지고 있는 혜심대사였다. 하지만 화서운이 알 바 아니었다. 사부님을 다치게 한 승려들과 같 은 옷을 입고 있는 그들을 보자 한패라고 생각하고 노기띤 눈으로 흘 기며 말했다. "당신들도 사부님을 해하려 왔소?" 누가 보면 질겁을 할 일이었다. 일개 소년이 소림사의 방장에게 반 말로 질문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혜심대사는 그 말에 잠시 대답을 유보하고 영자 항렬의 네 승려에게 다그쳤다. "너희들은 함부로 손을 써서 무방비 상태의 사람을 다치게 하였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당장 계율원(戒律院) 일좌(一座)에게 가서 죄를 말하고 기다려라. 살계(殺戒)에 버금가는 죄를 범했으니 결 코 일좌에게 거짓 고하여 벌을 적게받을 생각은 하지 말아라!" 영자 항렬의 승려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추상(秋霜)과도 같 은 추궁에 감히 변명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수그리고 있다가 당장 자리 를 뜨라는 명이 내려지자 나중이야 어찌됐든 곤란한 자리에서 피하기 위해 다투어 아래쪽으로 내달으려 했다. 그때 화서운이 소리쳤다. "날더러 꼬마라고 하던 당신은 남도록 해요." 영묘는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심정으로 영법 등에게 자기가 발길질 을 했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의 눈길을 간절하게 보내고 있었는데 무사히 넘겨서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런 순간에 화서 운이 소리치자, 내심으로는 한바탕 욕을 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혜심대 사 앞에서 그럴 수가 없어서 간신히 참았다.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혜심대사와 화서운을 번갈아 쳐다보자, 갑 자기 혜심대사 옆에 서있던 자색장삼의 노승이 조용히 말했다. "어서 가지 않고 무엇하느냐." 그말을 들은 영묘는 나는듯이 아래쪽으로 뛰어갔는데, 화서운은 이 상하게도 그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혜심대사보다 훨씬 무게있는 한 마디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결코 무공이 높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감히 거역할 마음을 먹을 수 없게 하는 위엄의 깊이를 혜심 대사보다 높게 쌓은 사람은 또 누구인가. 혜심대사는 말했다. "사숙께서는 고정하시지요." 자색장삼을 입은 노승은 조사원에 수십 년 동안 틀어박혀 모습을 드 러내지 않고 있던 지명대사였다. 그의 항렬은 혜심보다 한 단계 높았 기 때문에 장문인임에도 불구하고 공손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화 서운은 이같은 관계를 몰랐지만 혜심대사가 들고 있는 것이 소림의 장 문령(掌門領)인 녹옥불장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화서운은 녹옥불장을 든 노승이 구숙을 어깨에 떠메고 있는 것을 보 자 한옥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면서 말했다. "그를 내려놓으세요." 자기도 모르게 반말은 쏙 들어가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말투로 바뀐 것은 역시 지명대사의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혜심대사는 구숙을 내려놓으며 혈도를 쳐 풀어주었다. 구숙은 포권의 예로 답했다. "지명, 혜심 두 대사분을 만나뵈니 영광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명대사는 다 안다는 듯이 그 말을 끊었다. "어서 연 시주를 치료해 보게나." 구숙은 긴말 않고 쓰러져있는 연경소에게 다가가서 진맥을 하고 여 기저기 짚어보았다. 지명대사와 혜심대사가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화서운이 앞길을 막 았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당신네 중들은 믿을 수가 없어요." 지명과 혜심이 언제 이른 무례한 말을 들어보았겠는가. 절간에서 산 다지만 하루종일 듣는 말은 아부 아닌 아부였고 늘 <큰스님, ... 하시 지요> 하는 틀에 박힌 말들이었다. 더군다나 지명대사는 하루에 세 번 씩 끼니를 날라주는 소사미승을 제외하고는 사람과의 접촉을 일체 끊 고 불경과 무학에 심취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 다. "허허... 혜심아, 너는 먼저 돌아가서 객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하고 비워두어라. 아무래도 연 시주는 상해가 적지않은 것 같구나. 내가 직 접 손을 써도 힘들 것 같다." 혜심대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장삼을 펄럭이며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아까 영자 항렬의 승려들보다 세 배는 빨라 보였다. 지명대사는 그제서야 화서운에게 말했다. "내가 사부님을 보게 해 주겠니." 화서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요. 당신네 중은 믿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지명대사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지만 연경소를 한 번 바라보 고는 싹 웃음이 가셨다. "내가 네 사부님을 돌보면 한결 나을게다." 화서운은 어쩐지 그의 말에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을 마구 다그치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말대로 해야만 할 것 같았 다. 사부님이 쉽게 회복되기 어려운 것은 알았지만, 이 사람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뇌리를 지배했다. "당신의 이름은 뭐죠?" 지명대사는 잠시 눈을 들어 어두워진 하늘을 응시하더니 이내 대답 했다. "내 속세에서의 이름 말이냐, 아니면 부처님께 귀의한 뒤의 이름 말 이냐." 화서운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당신은 화상이니 법명을 알려주세요." 지명대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 화상이라... 내 법명은 알 지자에 밝을 명자를 써서 지명 이라고 한단다. 너는 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화서운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마침내 기억이 났는지 말했다. "그럼, 당신이 당금 무림에서 배분이 황당하게 높다는 그... 스님인 가요?" 지명대사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내 배분이 높은게 황당하다는 소리는 못 들었지만 아마 나에 게 하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게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55 08/25 12:05 140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9장... 주화입마(走禍入魔) (4) 지명대사는 연경소의 왼쪽에 가서 앉았는데 전혀 소리도 나지 않고 느낄 수조차 없었다. 구숙은 진맥에 여념이 없다가 그가 앉은 것을 알 아채고 말했다. "신승(神僧)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후배는 공력이 미천하여 시 정잡배만도 못한지라 감히 주화입마를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지명대사는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약간 흔들렸다. "내가 어찌 신승이라는 치료를 받겠소. 그저 지명이라고 불러주시면 되겠소. 그보다 연 시주의 내상은 어느 정도인지..." "원기까지 다친 듯 합니다." "그럴 수가? 사실 노납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른다오." 구숙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서운은 그것이 기침을 참으려는 동작임을 알고 한편으로는 측은한 생각이 들 었다. (나는 그 엄청난 고통에서 해방되었지만 아직 사부님과 저분은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구나!) "연형은 역혈수라는 무공에 상해를 입은 저 소년을 치료하고 있었습 니다. 제가 미약한 침술로 혈맥의 역행을 막아두었고, 연형이 내공으 로 독한 기운을 뽑아내어 다시 주입해주는 원리였지요." 지명대사는 짐짓 물었다. "저 소년은 바로..." "연형의 제자입니다." 아까 화서운이 사부 운운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모르는 바는 아니 었지만 확인해 둔 것이었다. 구숙은 설명을 계속했다. "그런데 네 명의 승려들이 나타나 갑자기 저의 혈도를 짚고, 연형의 등뒤에 발길질을 했지요." 지명대사는 나직히 말했다. "부처님 아래에 귀의한 사람들이 무슨 망발인가?" "그들은 아주 살살 때린 것에 불과했습니다만, 소제는 연형이 제자 에게 피해를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기를 봉쇄하고 장심에 모여있던 내가진력을 안으로 거두어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찌되었는가?" "연형의 진기는 크게 둘로 나뉘어 서로 부딪쳤고, 그것은 수십 갈래 로 나뉘어 서로 충돌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명대사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구숙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제 의술로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추측하건대 내공이 더 심후한 고 수가 흡성신공(吸星神功)으로 그의 내력을 빨아들이거나 그가 직접 스 스로의 무공을 포기하고 전신내력을 누군가에게 전해준다면 자연히 기 의 충돌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말꼬리를 흐린 것은 자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의식이 끝까지 말하는 것을 제지했으니 자의라고 봐도 좋을 수도 있다. 아무튼 두 가 지의 방법은 어느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지명대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 시주보다 내공이 심후한 고수를 몇 명이나 찾을 수 있겠는가?" 구숙은 대답했다. "무림에서 열 명이 안 되겠지요." 지명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은거한 전대의 기인들까지 모두 합친다고 해도 스물이 안 될 것이네. 아마 소림사에는 노납과 혜심 정도이겠지만, 혜심도 그와 비슷할 정도이지 능가한다고는 볼 수 없겠지." "그렇다면..." "계속 들어보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흡성신공을 익힌 사람이란 점 일세. 시주도 알겠지만 흡성신공은 흑도(黑道)에서만 전해지는 대법이 기 때문에 소림이나 무당 같은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네. 수법 자체가 사악한 것은 아니지만 자고로 남의 내력을 강제로 흡수하는 수법은 좋 은 데 쓰인 적이 별로 없지. 만약 흑도의 고수에게 연 시주의 내력을 더해준다면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돋친 격으로 그를 제지할 사람 은 아무도 없을 것일세." 구숙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어쩐단 말입니까." 지명대사는 대답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연경소를 쳐다보았다. 연경 소는 지금 속에서 부딪치는 기류 때문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지만 그 의 눈빛을 받자 알았다는 뜻으로 눈을 세 번이나 깜빡거렸다. 화서운은 원망스러운 듯 가만히 말했다. "이도저도 안되면 어쩐단 말이예요." 구숙도 지명대사의 뜻을 깨닫고 있었다. 연경소가 자기의 내력을 모 두 화서운에게 전해준다면 그 자신은 깨끗이 나을 수 있는 것이다. 하 지만 누가 그 엄청난 노력의 대가를 제자라고는 하지만 한 순간에 포 기하고 싶겠는가. 이런 것은 무림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강요할 수 없는 것이라서 문제는 더욱 컸다. 지명대사는 손끝을 튕겨 연경소의 몇 군데 혈도를 봉쇄했다. 혈맥이 뒤집히거나 손상받지 않도록 최소한의 심맥을 보호하고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그것은 바로 탄지신공의 수법이기도 했다. 화서운은 그것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탄지신공!" 지명대사는 깜짝 놀라 말했다. "네가 탄지신공을 어찌 안단 말이냐?" 화서운은 거짓말을 할 줄 몰라 사실대로 말했다. 위기자 오붕을 만 나서 금강항마장법과 탄지신공의 비결을 얻었지만 아직 제대로 익히지 는 못했다는 것까지 말하는 데에는 일각 가까운 시간이 소모되었다. "오붕... 그는... 허허... 그가 그토록 잘 되었구나." 구숙은 내심 이안에 뭔가 사연이 숨겨져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혹시 소림사의 비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입을 애써 다물었다. 지명대사는 연경소를 수평으로 안아들었다. "본사에 객방을 치워놓도록 했으니 일단 연 시주를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옮기도록 하세. 잘못하면 내장이 다치기 쉬우니 이런 곳에서는 함부로 치료를 하는게 아닐세." 구숙도 동의하고 묵묵히 그 말에 따랐다. 그가 아무말도 않는 것을 본 화서운도 그대로 하기로 하고 천천히 아래로 걸어내려가기 시작했 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56 08/25 14:04 149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9장... 주화입마(走禍入魔) (5) 지명대사는 연경소 사제와 구숙에게 각각 한 개씩의 객방을 내주도 록 하고 방바닥에 연경소를 반듯이 눕혔다. 그와 구숙은 연경소 좌우 에 앉았고, 화서운은 머리맡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구 시주, 연 시주를 깨울 방도가 따로 없는지요." 구숙은 연경소의 눈을 뒤집어 자세히 살펴보고 말했다. "아직 눈에 신기(神氣)가 살아있으니 깨울 수는 있겠지만 저의 침술 로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시주의 말은 노납이 손을 써야한다는 이야기겠구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소?" "제가 길이 반 촌(半寸)인 은침으로 신체 내의 잠력을 깨울 때 대사 께서 탄지신공의 수법으로 연형의 인중과 태양, 전중, 복결의 네 혈도 를 찌르되 탄자결(彈字訣)을 사용하여 기가 고르게 파고들게 해야합니 다."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또 두어번 기침을 했다. 애써 더이상 기침이 나오지 않게 한 그는 말을 이었다. "대사님은 전력을 다해서 찌를 필요는 없고 다만 고르게 순한 기운 이 퍼져들어가게 하며 주의할 점은 쾌속하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진 기는 지금 폭풍처럼 돌고 있어서 제가 볼 때에는 신체 어디를 찔러도 단전까지 가는 시간이 채 삼초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힘을 적절히 하셔야 합니다." "노납은 최선을 다하겠소. 내가 손을 써야할 때가 되면 고개를 끄덕 이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구숙은 손끝에 약간 흔들렸다. 사의라는 별명을 얻은 뒤 상당한 수 의 무림인을 치료했지만 연경소와 같은 거물급을 치료하는 것은 이번 이 처음이었다. 그는 손목을 몇 번 흔들어서 긴장을 해소시키고 마침내 짤막한 은침 을 신체 곳곳에 찔러넣기 시작했다. 그는 반드시 침을 찌르기 전에 촛 불에 갖다대어 소독을 하고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 그을음이 묻지 않게 했다. 보는 사람이 더 조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구숙은 구슬같은 땀방울 을 흘리면서도 동요하지 않고 하나하나 침을 꽂아나갔다. 은침의 길이 는 손가락 한 마디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꽂은 뒤에는 뒤편에 달린 붉은 색의 수실이 겨우 보일까 말까한 정도였다. 중요 혈도에 삼십여 개의 침을 꽂은 구숙은 손을 치우며 고개를 끄 덕거렸다. 지명대사는 머뭇거리지 않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쳐들었다. 장삼자 락이 방해받지 않게 걷어올린 그는 번개같이 손을 써서 네 개 혈도를 찔렀다. (아, 저게 바로 탄지신공이구나.) 화서운은 지금의 급박감을 잠시 잊어버릴 수 있었다. 아무리 구결을 외워도 어렵기만 하던 탄지신공의 한 부분을 깨우친 것이었다. 혼자서 연마하려면 몇 개월이고 걸리는 것을 한 번의 시전을 보고 깨우쳤으니 백분의 일쯤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제 얼마 후면 깨어날 것입니다." 구숙은 이렇게 말하고 약상자의 밑바닥을 열어 둥그런 모양의 검은 색 돌을 하나 꺼내어 침을 꽂은 부위에 갖다대었다. 그러자 하나씩 자 동으로 뽑아올려져 탕, 하는 소리는 내면서 검은 돌에 붙었고, 순식간 에 검은색 돌은 은침으로 가득 메워졌다. 그 모양을 보고있던 지명대사가 물었다. "그것은 은침인데 어찌 자석에 붙는가?" 구숙은 방긋 웃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보는 웃음이라서 어색한 느낌 이 들었다. "이것 하나하나는 모두 은으로 도금되었을 뿐 속은 모두 정강(精鋼) 입니다. 워낙 침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끝에 수실을 달아 뽑기 원활하 게 만들기는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자석으로 뽑는 것이 수월하고 안전 하지요." 그들이 몇 마디 주고받는동안 연경소는 몸을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 음을 깨닫고 즉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지명대사가 어깨를 누르는 바람 에 다시 누웠다. "시주는 우선 손발을 조금씩 움직여 보고 천천히 일어나도 늦지 않 을걸세." 몸이 굳어있다가 함부로 움직였을 때 나타나는 골절 등을 사전에 막 고자 함이었다. 연경소는 천천히 손발과 어깨 등을 움직여 보아서 아 무런 불편함이 없자 즉시 일어나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대사님, 구형... 정말 고맙습니다." 지명대사는 슬픈 기색을 떠올렸다. "연 시주는 몸이 어떠시오." 말은 간단했지만 사실은 <당신의 무공은 이제 쓸모없게 되고 말았으 니 몸이나 괜찮은지 살펴보시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명대사 는 그와 같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연경소가 두 번 다 시 무공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는 것을 알았다. 연경소는 운기행공을 하려고 하자 마치 토할 것 같이 메스껍고 전신 의 경락이 꽉 막혔을 뿐만 아니라 세맥(細脈)까지도 모두 이물질이 들 어찬 것처럼 무겁기 이를데 없음을 느꼈다. "이건..." 그는 구숙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의술에 정통한 그만이 해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숙은 대답하기가 극히 곤란했지만 자기의 몸인 이상 알 권리가 있 다고 생각하여 사실대로 말해주기로 했다. "연형의 기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갈래갈래 나눠져서 서로 부딪치며 내장과 경락을 손상시켰습니다. 잠시 제가 침술로 기를 억제 하고 대사꼐서 네 군데의 요혈을 봉쇄하여 기가 날뛰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에 운기행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네 혈도를 뚫는다면 잠시 동안은 잠잠하겠지만 두어 시진 정도가 지나면 다시 발작하여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는 중간에 연경소가 무엇을 물어볼까 두려운 듯 기침을 참고 날아 가는 화살처럼 빠르게 말을 마쳤다. 화서운은 재빨리 연경소의 얼굴표정을 주목했다. 틀림없이 일그러져 있거나 슬픔에 가득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의외 로 담담한 모습이었다. "시주께서는 두 가지 방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오." 연경소는 되묻지 않았다. "첫째는 흑도의 고수에게 흡성신공으로 시주의 내공을 모두 흡수하 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오. 그 방법은 노납 생각에는 가능성이 없을 것 같소이다." 연경소는 짧게 대답했다. "안 되지요." 구숙도 거들었다. "흡성대법을 펼치려면 상대방보다 내력이 강해야 하는데 그런 고수 가 해 줄지도 의문이거니와 만약 그 수법으로 연형의 내력을 취한다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 되어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연경소는 지명대사에게 물었다. "두번째 방책은 무엇입니까?" "두번째 방책은... 네 군데 혈도를 뚫은 뒤 두 시진 이내에 모든 내 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이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57 08/26 19:09 137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9장... 주화입마(走禍入魔) (6) 연경소는 의외로 덤덤한 표정을 잃지 않았지만 오직 화서운만은, 그 의 눈빛 속에 담긴 고뇌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면 좋다고 생각했다. 지난 삼십여 년 동 안 고되게 익히고 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건만 제자를 치료하다 고 작 소림사에 입사한 지 삼 년밖에 되지 않는 화상의 발길질에 맞아 무 공을 태반 잃는다고 생각하니 자기 자신이 한심해지는 것이었다. 구숙은 슬며시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의원으로서 자기가 할 일 은 모두 했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했고, 있어봐야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더구나 한 명의 절정고수가 내공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조 차 하기 어려운 고통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마음앓이라고 했다. 누가 때리고 협박하는 것은 그런대로 견딜만한 것이지만, 실제로 노심초사하며 밤 새워 대책을 궁리해서라도 번뇌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깊은 저곳으로부터 뼈저리게 느끼는 상실의 감정은 어 떠한가. 최소한 육체적인 어떤 고통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 하는 연인이 어느날 급사했을 때의 심정과 같았다. (나는 이제 평범한 일개 무부(武夫)로 돌아가야 하는가...) 지명대사는 나름대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연 시주... 시주가 만약 스스로를 희생하여 제자에게 내력을 전해 준다면 그야말로 아름다울 일일 것이요. 살신성인(殺身成仁)이 어디에 따로 있겠소. 아미타불...) 화서운은 연경소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사부님... 어서 일어나셔야 해요. 저에게 보여준 당신의 모습은 정 녕, 무적과 불패의 화신이었답니다!) 연경소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쳐들고 두 사람을 번갈아 그윽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서운아, 준비하거라. 대사님께서는 죄송하지만 호법을 봐주시기 바 랍니다." "분부대로 하겠네." 지명대사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장삼자락을 추스려올리 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문을 닫다가 이들 사제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소림사에 감히 들어올 적은 많지 않네만, 설혹 그들이 시주를 노린 다해도 지명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막겠네." "대사님께 수고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아닐세..." "그럼 부탁드립니다." "..." 지명대사는 이 대법이 적어도 한 시진 반 정도는 걸리는 것을 알고 객방 앞의 댓돌에 털썩, 주저앉아 항마경언(抗魔經言)을 낮게 외기 시 작했다. 연경소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는 화서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오직 지명대사가 천천히 읊고 있는 항마경언에 귀를 기울이고 정신을 집중했다. 화서운은 대법을 준비하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혼자 그 의미를 생각하다 못해서 물어보았다. "대법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의 이름은 수공전력(蒐功傳力)이라고 한다. 나는 이제 네 군데 의 혈도를 풀고 전신의 기운을 모을 것이다. 여기에는 심지어 내가 영 약을 복용하여 얻은 내력까지 모두 포함될 것이다. 너는 본문 심법 가 운에 점(點)자결을 이용하여 모든 내력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워낙 나 의 기운이 강맹하고 네 현관이 트이지 않아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아마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아까 네가 역혈수라는 무공에 당 했을 때에 비한다면 절반도 안될 것이다. 다만 내가 너의 기해혈에 넣 어주게 되는 순간에는 조금도 멈출 수 없고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몸이 꽉 차고 터질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너는 반드시 마음을 안 정시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당황해서는 안된다. 의식을 분산시키지 말 고 기해혈 부근으로 모아서 자연스럽게 진기를 받아들이도록 노력하여 라." 화서운은 연경소가 잠시 말을 멈춘 틈을 타서 말했다. "본문의 심법을 운용하지 말라시면...?" 연경소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대라신검의 검보 종장의 내공구결은 모두 익혔느냐?" "아직..." "당연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구결의 심오함은 소림의 최고 심법 인 역근경에 못지 않고 그것만으로도 무림의 일절(一絶)이라 할 것이 다. 하지만 전체의 구결은 모두 외우겠지?" "예..." "그렇다면 되었다. 조금 후에 나의 손바닥이 닿으면 즉시 흡(吸)자 결로 진기를 운용하면서 외부의 힘과 하나가 된다는 생각을 해라. 마 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절대 거부하거나 항거하지 말고 너와 일심동체 가 된다는 생각으로 솜에 스며들듯 네 몸 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 쨌든 이 사부는 너에게 모든 내력을 전해줄테니 오랜 수련이 쌓인다면 그것을 모두 네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의 기경팔맥 안으 로 진기를 충만하게 해주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허 용지물에 불과하지만 단전에 녹아들어 서서히, 그러나 다른 사람들 세 배는 빨리 내공이 늘어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해라... " 그는 더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푸른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부 친 그는 눈을 감고 운기행공에 들어간 화서운을 잠시 쳐다보고는 마음 이 일순 흔들렸다. (이로써 나는 정말 평범한 농사꾼이 되는 것이다. 연경소야, 연경소 야... 인생은 어차피 한 번 살고 가는 것이거늘 뭘 그렇게 망설이느냐. 네 제자는 강호에서 비상하는 용이 되어 새로운 광명이 될 것이다...) 그는 과감히 양손을 수평으로 들어올려 화서운의 기해혈 위에 가볍 게 올려놓고, 네 곳 혈도에 진기를 세차게 부딪쳐 간신히 잔잔해진 기 운을 격발시키며 혈을 뚫어버렸다. (시작하다... 서운아!) (사부님...) 화서운은 자기가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흐른 것은 아 니었다. 다만 마음 뿐... 마음의 눈물은 그대로 수정(水晶)이 되어 눈 에서 코로, 코에서 입으로, 다시 턱가로 흘러내려 보석처럼 맺혔다. (으으...욱...) 화서운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연경소가 미처 잊어버리고 주의를 주지 않았지만 절대 소리를 내서는 안 되며 신령한 기운이 새 어나가기 때문에 두 사람다 위험해질 소지가 있었다. 화서운은 배우지 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아채고 애써 소리를 내지 않았다. 주화입마에서 벗어나려는 궁여지책은 한 소년을 너무나 빨리 고수로 만들게 되는데... 화서운에게는 아직 그것이 실감나는 것이었다. 뜨거 운 김을 모락모락 피어올리고 있는(피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듯, 연경 소의 내공은 무서운 기세로 기해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58 08/29 20:29 143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9장... 주화입마(走禍入魔) (7) 화서운은 조금도 딴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진기의 흐름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해일(海溢) 같아서 쉴새없이 거센 흐름을 밀어넣고 화 산(火山)에서 뿜어져나오는 용암처럼 온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연경소가 한평생 익힌 공력은 과연 범상한 것이 아니었으니 비록 중 상을 입긴 했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밀려들어 마치 무형의 안개 가 한 겹 몸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정광개혈(正光開穴) 옥현귀진(玉玄歸眞) 일류탁기(一流濁氣) 정화 평심(淨化平心) 참마회원(斬魔回元)...) 몇 구절의 구결을 되풀이하여 외우며 거세다 못해 전신 경락에 흘러 넘치는 웅혼한 진력의 파도를 해소하는 제자와 모든 무공을 아무런 대 가없이 물려주는 사부... 그 모습에는 말로 하기 어려운 감동이 있었 다. 그 감동을 가장 깊게 느끼는 사람을 지명대사였다. (노납 일평생에 여태 연 시주만한 고수는 열 명도 보지 못했다. 시 주의 내공은 그 깊이와 두께에 있어 적수가 없을 지경인데 저리도 쉽 게 포기할 수 있다니... 노납이 저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저렇 게 마음을 비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구십 년 수도가 헛것이었단 말 이냐?) 그는 이어 이렇게 생각했다. (허어, 정말 어려운 관문이거늘 연 시주는 그것마저 달관한 진정한 고수라는 말인가. 그의 눈빛만 보아도 새로운 깨달음에 깨달음을 더하 여 가는 중임을 알 수 있다. 소림에도 그런 인재가 나와야 하는데, 오 붕아... 너는 오직 바둑에 미쳐 무공을 소홀히 하고도 천하에서 열 손 가락 안에 꼽힐 지경인데... 허허, 만약 불법과 무예에 정진했다면 본 사는 더욱 발전할 수 있으련만...) 연경소 사제가 폭풍과도 같은 자신과의 싸움을 진행하고 있을 동안, 지명대사의 기억은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위기자 오붕... 그는 소림사의 속가제자로 무림에 알려져 있지만 실 제로는 지명대사가 그를 내보낸 것이었다. 무재(武才)가 자신보다 뛰어남을 깨달은 지명대사는 그에게 가장 화 후가 깊었던 탄지신공과 금강항마장법을 가르쳤고, 오붕은 거의 유례 없는 속도로 모든 것을 흡수해 나갔다. 처음 배우는 나한권(羅漢券)과 산화장(散花掌)을 뗀 것이 겨우 열한 달 남짓한 때였다. 보통의 승려들보다 세 배나 빠른 속도였고, 불심도 돈독했으며 성격이 모난 것도 아니었다. 자연히 지명대사는 차기 장문 인으로 그를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당대의 장문인은 지명대사의 맏사형인 지향(知香)대사였는데, 그 역 시 오붕의 자질을 몹시 아껴서 혜법(慧法)이라는 법명을 주고 매우 아 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지향대사의 대제자인 혜관(慧觀)은 자질이 뛰어나고 성실했지만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죽어라고 계율을 안 지켰다. 십여 년 후에야 지향대사가 깨달은 것이지만, 그것은 본심 이 아니라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혜법에게 장문인 자리를 주기 위해서 였다. 누가 알았으랴! 혜법은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진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무공 의 자질도 뛰어났지만 바둑은 그 이상이었다. 처음 지향대사와 두었을 때에는 아홉 점을 놓고도 참패를 당했는데, 장경각의 바둑책을 꼼꼼이 읽고 며칠 밤을 새워가며 연구를 하더니 불과 두 달만에 맞바둑으로도 버틸 실력이 되었다. 지향대사는 국수(國手)급은 아니었지만 소림사에서는 적수를 만나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사제의 제자가 바둑을 그렇게 잘 두는 것을 알고는 기뻐했다. 그 후로도 혜법의 성장은 엄청나게 빨라서 지향대사가 두세 점을 깔아도 팽팽한 국면이 연출되곤 했다. 한데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혜법은 그후로 완전히 바둑에만 미 쳐서 무공도 멀리하고 겨우 탄지신공과 금강항마장법의 기초를 익혔을 뿐 계속해서 전수하는 역근경의 상승 심법과 반야공(盤若功) 등은 거 들떠보지도 않았다. 지향, 지명대사는 당연히 고민에 빠졌다. 이미 장문인의 구할 정도 확정된 상태였는데 혜법은 바둑에만 미쳐서 무공을 연습하라고 책자를 주고 강제로 시켜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에도 제대로 입 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머리 속에는 온통 하얀 돌과 검은 돌이 얽힌 그림만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혜관은 그런 줄도 모르고 망나니짓을 계속하다가 결국 법명을 포기 하고 속가제자로 돌아섰다. 원래 그것은 소림사의 법규상 안되는 일이 었지만 장문인이었던 지향대사의 입김이 닿아 얼무어버릴 수 있었다. 이제는 어쩐단 말인가. 혜법은 여전히 바둑에만 미쳐서 허락도 받지 않고 바둑판을 옆구리 에 낀 채 훌쩍 떠나서 며칠이고 바둑의 고수들을 찾아다니기 일쑤였으 며 일 년이 지나자 지향대사는 네 점으로도 힘들게 되었다. 가볍게 제 압하고 여기를 건드리는 척 하면서 저쪽을 부수는 등 종횡무진한 수법 에서 한 수 한 수가 중후한 맛을 가지게 되었다. 지향대사는 그와 바둑을 둘 때면 설사 이기더라도 식은 땀이 주르르 흘릴 지경이었다. 네 개나 되는 백돌 사이에 놓이는 흑돌이 가지는 무 게는 가히 천 근이었던 것이다. 어정쩡하게 보이는 수도 종당에는 삼 면을 노리는 묘수로 둔갑했고, 그냥 한두 집 이득을 보는 수가 어쩌다 대마의 생명을 위협하는 살수로 바뀌었다. 최소한 지향대사가 보기에 그의 바둑에는 살기가 있었고 결코 불가제자가 가져서 이득이 되는 것 은 아니었다. 마침내 그는 장로회의를 소집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일체 끊은 채 사 흘간 길고 긴 회의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혜법이라는 법명을 모든 기록에서 지우고 오붕이라는 속명을 돌려주어 하산시키는 것이었다. "받들겠습니다." 그 결과를 통보받은 혜법, 아니 오붕의 대답은 이렇듯 간단한 것이 었다. 그때는 몰랐었지만 장문인이라는 자리는 그에게 안중도 없었다. 오직 천하의 고수를 찾아다니며 진정한 승부를 결하는 것만이 가장 중 요한 삶의 과정이요 목적이기도 했다. 결국 약간 자질은 모자라지만 성격이 충후한 셋째제자 혜심이 대임 을 넘겨받았고, 얼마 뒤 지향대사는 조사동에 묻히는 몸이 되어버렸다. 지명대사가 무기한 폐관수련에 들어간 것은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오붕의 실력을 강자를 만날수록 강해졌고, 비록 전력을 다해 연마하 지 않은 무공이지만 소림 72 절예 중에서도 가장 으뜸 격인 두 가지를 통탈했으며 역근경의 기초가 탄탄했기 때문에 폭발적인 명성을 얻었다. 위기자 오붕이라는 이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게 되었 으며 다만 혜법이라는 법명은 완전히 사람들에게 망각되었다. 다만 지 명대사와 혜심대사는 그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도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 조사동에 묻히는 그 날까지...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지명대사는 감았던 눈을 뜨고 달이 어디에 걸려있는지 확인했다. 대 략 한 시진 반 정도가 지난 것 같았다. 그 정도면 끝날 법도 한데, 하 고 그는 방문을 아주 천천히 열어서 맑은 공기가 들어가도록 했다. "아니!" 지명대사는 방안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 황이 벌어진 것이다. 화서운은 온몸을 부들부들 사시나무처럼 떨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고 연경소는 양 미간 사이에서 땀방울이 아닌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 가닥으로 천천히 흐르긴 했지만 분명 선 혈이었다. 지명대사는 혹시 이들이 암습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곧 그 생 각을 지웠다. (내가 바깥에서 지키고 있었고 아직 노납의 두 귀는 멀쩡한데 그 누 가 있어 나의 이목을 속이고 들어갔으며, 또한 아무런 기척도 없이 둘 을 암습하고 방문을 연 뒤 흔적없이 닫고 유유히 사라질 수 있단 말인 가?) 아무튼 그게 급한 게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소리쳐서 옆방의 구숙 을 부르며 연경소의 미간에서 흐르는 피를 소매자락으로 대강 닦아냈 다. 그런데,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지명대사는 몸이 굳어버렸다. 에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59 08/31 20:28 139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0장... 살수(殺手) (1) 지명대사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심지가 흔들리는 것을 곧 경험하 게 되었지만 스스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연경소의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의 근원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넌즈시 화서운을 쳐다보고 안심했다. (다행히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아이는 모든 내력을 고스란히 받 아들이는 데에는 성공했구나. 다만 그의 자질과 앞으로의 노력에 따라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지는 달라질 것이니...) 그는 담담담 표정으로 마치 돌부처처럼 앉아있는 연경소를 편안하게 눕히며 옆방의 구숙을 소리쳐 불렀다. 구숙이 들어온 시간은 거의 걸리지 않았다. 옆구리에는 약상자와 침 통을 끼고 있었고 손에는 솜을 감고 있었다. "피를 닦아내겠습니다." 그는 지명대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연경소의 이마 주변에 묻은 핏자국을 말끔히 지웠다. "아니, 이건?" 안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한 구숙도 이마에 박힌 무엇인가를 보고는 혼비백산하여 소리쳤다. 지명대사는 수긍했다. "아마 시주의 생각이 맞을 것이네. 이건 바로 흑보정(黑寶丁)일세." "하지만 그 노마두는 이미 천산벽력장에게 삼장을 얻어맞고 죽지 않 았습니까?" "아닐 걸세. 시주는 잘 모르겠지만... 천산벽력장 역시 그 마두에게 흑보정 두 대를 맞고 말았네. 다행히 왼팔이라서 그는 자기의 팔을 잘 라버림으로써 생명을 구했지. 내 생각에 그 노마두는 죽지 않고 제자 를 거둔 것 같네." "그건... 후배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그 흑마신(黑 魔神) 당충(唐沖)이 일종의 이상야릇하고 괴이한 고목공(枯木功)을 연 마했다고 해도 어찌 벽력장법 아래 세 번을 정확히 요혈에 적중당하고 도 살아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글쎄, 그건 노납도 모르겠네. 그러나 이것이 흑보정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겠나?" 이들이 말하고 있는 대마두는 바로 백마신(白魔神) 두수(杜洙)와 함 께 흑백마신(黑白魔神)으로 강호에 악명을 날리던 흑마신 당충이었다. 지명대사는 흑보석 같은 광채가 영롱하게 빛나는 조그만 암기 같은 것 이 연경소의 이마에 박혀 있었는데 진기를 완전히 소모하자 모습을 나 타낸 것을 보고 당충에게 암습을 당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원래 이 흑백마신은 무공이 고강하여 지금의 투골쌍마보다 더 강했 다고 한다. 백마신은 절정의 경공과 섭혼술(攝魂術)로 악명을 날린 반 면에 흑마신은 악랄한 무공의 깊이와 독문 암기인 흑보정으로 더욱 공 포의 대상이었다.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들이 걸핏하면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확 실히 묵과될 수 없는 일이지만, 당하는 약자들에겐 더없이 무서운 일 이었다. 결국 그들을 잡기 위해 공동파의 여섯 장로가 일제히 강호를 이잡듯 이 뒤졌는데, 모두 살해되었다. 시신은 일단 팔다리와 머리를 토막내 서 여섯 명의 것을 서로 다른 사람에게 붙여서 보기만해도 섬뜩한 시 신을 만들었다. 그것은 같은 시간에 공동파를 비롯한 구파일방에 전달 되었고, 그들은 응징대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날고기는 재주가 있다고 한들 어찌하랴. 개방의 소식통으로 일단 소재가 파악되면 수십 명의 분타 제자들이 그들을 묶어놓았고, 다시 정예고수들 십수 명이 뒤를 따라갔다. 하지 만 그 결과는 번번이 허탕이었다. 흑백마신의 무공과 개방의 일개 거 지들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개방 제자만 해도 자기의 행적 을 캐고 다닌다고 해서 백여 명은 족히 죽였던 그들은 어느날 백여 명 의 거지떼를 만나게 되었고 모조리 죽일 마음을 품게 되었다. 곧 흑백마신은 손을 합쳐 거지떼들을 몰살시키려고 했는데, 그게 뜻 처럼 쉽지는 않았다. 각자의 무공을 따지자면 한두 동작이면 피곤죽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들이었지만 일종의 특이한 진세로 흑백마신을 에 워싸고 합공을 퍼부었다. 흑백마신은 온힘을 다해서 살수를 펼쳤지만 엄정한 진세를 이루면서 조금도 틈을 드러내지 않는 거지들에게는 속수무책, 점점 힘이 빠져갔 다. 싸움이 시작된 지 세 시진이 지나자 그들은 기진맥진했는데, 뜻밖 에도 거지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가 버렸다. 지명대사는 바로 그때 천산벽력장 정련과 함께 개방의 방주인 유면 소공(柔面小公) 노어(魯魚)를 만나 흑백마신을 제압하고 결박지어 다 시는 무공을 쓰지 못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실제로 지명대사는 손쓸 기회가 없었다. 남달리 호승심이 강 한 두 고수는 그가 나서기 전에 이미 일대일의 격투를 시작했다. 흑마 신은 정련이, 백마신은 노어가 맡았다. 지명대사가 보기에 그 싸움에서 흑백마신은 절대로 승산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지쳤고 게다가 정상적으로 겨룬다고 해도 저 두 절정 고수를 이겨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가만히 싸움터의 한 구석으로 물러나 경전 몇 개를 되풀이해서 암송했다. 마음을 안정시키려 한 점도 있었지만 백마 신의 섭혼술은 워낙 강호에 악명이 자자하여 수많은 아낙네들과 청년 들을 망쳤기 때문에 혹시 유면소공 노어가 다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 다. 싸움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먼저 노어 쪽의 싸움이 결말을 드 러냈다. 백마신의 무공은 흑마신에 비해 절반 수준밖에 안 되었다. 다 만 표홀한 신법은 무림의 일절(一絶)이었는데, 그는 노어의 일장을 아 랫배에 얻어맞자 그 반탄력을 이용해서 저멀리 도망쳐 버렸다. 노어는 망연자실했지만 쫓아가는 것이 소용없음을 알고 즉시 장풍을 휘둘러 흑마신 당충의 머리통을 쪼개갔다. 이때 당충은 팽팽하던 싸움의 끈이 풀어지기 시작한 상태여서 도저 히 팔이 열 개라도 그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죽을 각오를 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껄껄 웃으면서 전혀 정련의 무서운 장풍을 피하지 않았다. 정련의 별호는 천산벽력장이었다. 그야말로 뇌전이 떨어진 듯 엄청 난 힘을 지닌 장풍 세 대가 고스란히 당충의 가슴과 배에 떨어지고 말 았다. (아니다!) 지명대사는 이때 경을 외우다 말고 벌떡 일어나 정련을 저지하려 했 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자기의 몸을 대가로, 당충은 최고의 악랄 한 수법을 펼쳐 두 대의 흑보정을 정련의 왼팔에 박아넣었다. 그가 이 토록 지치지 않았더라면 정련의 목숨은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련은 주저없이 허리춤에서 날선 칼을 뽑아 자기의 왼팔을 자르고 는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자기의 삼장에 맞은 이상 견뎌 낼 장사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고, 실제로 그의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흑마신은 그 몸에 다시 한 번 노어의 일장을 얻어맞고 비틀 비틀거리다가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지명대사는 흑마신이 곧 죽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장 무 슨 영약을 먹이면 모를까 자신도 그렇게 네 번을 얻어맞는다면 살아날 방법이 따로 없었다. 정작 변고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의 일이었다. 도망갔던 백마신이 무슨 일인지 용기백배하여 오 장 가량을 날아와 가까이에 서있던 노어에게 이상한 철로 된 염주 같은 것을 던졌다. 노 어는 이것이 분명 악독한 암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받아내지 않고 몸을 재빨리 뒤로 날렸다. 펑! 소리는 요란했지만 불똥은 튀지 않았다. 대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연기가 피어올라 세 사람은 숨을 멈추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 막(煙幕) 속에 무슨 독이 섞여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이 눈을 떴을 때에는 흑마신의 만신창이가 된 반시체는 온데간데 없었 고 다만 그가 쓰러졌던 땅바닥에 급히 갈겨쓴 초서체의 글씨가 각인되 어 있었다. 글을 쓴 재료는 피였다. <혈채(血債)...!>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60 09/02 02:14 18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0장... 살수(殺手) (2) 지명대사는 의식적으로 기억을 더듬는 것을 멈추고 이제는 현실세계 로 돌아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딱 하나 그의 머리 속에 들어박 혀 나오지도 않고 형상화되지도 않는, 희뿌연 무엇인가가 있었다. 자 기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아예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한 인상 으로 남았던 가뭇가뭇한 기억의 파편이었다. (무엇이었을까...) 그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둥그런 모양의 흑보정을 천천히 빼서 장삼의 소매자락에 넣었다. 나중에 장경각주에게 정확한 이 물체의 정 체를 확인할 참이었다. 구숙은 방안에 들어온지 한참이 되도록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있 었는데, 침을 놓으려다가도 다시 손을 되물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 의 표정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연형, 어떠신지요." 구숙은 오랜 경험으로 연경소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 시주..." 지명대사도 짧게 그를 불러보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내공을 모두 잃 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안색이 파리하고 숨소리가 약간 거칠어졌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이마에서 엄청난 양의 피와 함께 뽑힌 흑보정이 있던 자리에는 붉은 구멍이 생겼지만 그리 크지는 않았다. 흑보정 자체가 던지기 불가능할 정도로 얇기 때문에 꽁무니 부분에 둥그런 옥(玉)을 달아 무게를 더하 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구멍이 생긴 것이지, 그것마저 없었더 라면 전혀 흔적도 없을 뻔했다. 마침내 연경소는 눈을 떴다. "연 시주!" "연형!" 하지만 그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이마의 상처에서 간간이 흐르는 피는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표정에는 괴로운 기색이 뚜렷하게 나 타났지만 오히려 개운하다고 느낄 때 나타나는 얼굴모양이 삼분의 일 정도는 섞여 있었다. 지명대사는 참으로 묘한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으흠..." 연경소는 다시 눈을 뜨면서 헛기침을 했다. "구형께서는 잠시 나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결코 다른 뜻이 있어서 는 아닙니다." 구숙은 영문을 몰랐지만 그러마, 하고 나가면서 말했다. "제가 있으면 안 될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군요." 연경소는 잔잔히 웃었다. "은인께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천만에요. 의자(醫子)의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지명대사는 구숙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 심중의 의문을 단숨에 쏟아 내고 싶었지만 꾹 참고 하나씩 물어보기로 했다. "노납은 나가지 않아도 되겠는가." 연경소는 눈빛으로 고개짓을 대신하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당금의 혼탁한 무림정세와 깊 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운아는 지금부터 적어도 두 시진 이상은 아 무 것도 듣지 못하고 볼 수도 없으니 마음놓고 이야기를 해도 될 것입 니다." 지명대사는 더욱 놀랐다. "무림정세라면 또 무슨 말인가?" 연경소는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제 이마 부근에서 하나의 구슬 같은 암기를 꺼내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네." "예..." 연경소는 흑보정을 받아들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잘 아실테니 설명은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겠습니다. 대사께서는 꽤 오래된 일이지만 분명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게 뭔가?" "바로 흑백마신, 당충과 두수입니다." "...!" 지명대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쪽집게 처럼 자기가 조금 전에 생각했던 것이 연경소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당시 백마신 두수는 개방 방주인 유면소공 노 선배님에게 쫓겨 달 아나고 흑마신 당충은 거의 죽음의 위기에 몰려서 결국 천산벽력장 정 선배의 한 팔을 잘르게 하는데 성공했지만 전신의 내장이 다 파열되고 말았습니다." 연경소는 소매자락을 얼굴로 가져가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훔 쳐내었다. 출혈은 약해졌지만 여전히 실날같은 핏줄기가 흘러내려 속 눈썹을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연막 속에서 백마신은 흑마신을 구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두 글자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지명대사의 표정은 의혹에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분 명히 그 자리에는 자기를 비롯해서 세 사람밖에 없었는데 연경소가 그 렇게 샅샅이 알고 있다니... "시주는 어찌 그렇게 잘 아는가?" "그것은... 그것은... 제가 당충에게 무공을 사사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이야기는 두수가 해 주었습니다." "뭐라고 했나?" 지명대사는 기절초풍했다. 당연한 것이다. 청죽검객 연경소가 그런 무리들의 제자라는 것은 누가 들어도 안 믿을 것이다. "제가 흑백마신에게 무공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뭐라고 했는가..." "저는 흑백마신의 제자입니다." "뭐라고!" 지명대사는 거기까지 듣더니 갑자기 오른손을 번개처럼 치켜들고 연 경소의 미심(眉心)을 향해 갈고리모양을 한 손끝을 찌르려고 했다. 다 만 속도뿐인 것 같은 일지(一指)에는 나한권과 항룡장(降龍掌)의 정수 가 숨어있어서 무공을 몽땅 잃은 연경소가 그것을 피한다는 것은 전혀 가망 없어보였다. 연경소는 피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지명대사는 그 웃음을 보고는 움찔하여 손을 멈추었지만 여전히 그의 손가락 끝은 요혈을 노리고 있었으며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마 그가 마음먹고 덤빈다면 천하에 배겨낼 자가 거의 없으리라! "대사께서는 제가 반격할 능력이 없음을 모르시는지요." "연 시주, 그대가 흑백마신의... 전인이란 것은 사실이오?" "그떠의 두 글자는 바로 혈채였을 것입니다. 피의 빚이라는 것이었 지요." "진정 전인이란 말이오?" "그 두 글자는..." 두 사람의 말은 동문서답(東問西答)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한 사 람은 계속 두 글자에 대한 말만 되풀이했고, 다른 한 사람은 흑백마신 의 제자라는 말에만 매달렸다. 연경소는 잠시 양보했다. "제가 언제 허언을 하고 다녔다는 말을 들으셨습니까?" 지명대사는 요혈을 겨누고 있던 손가락을 떨구며 아울러 고개도 숙 였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세." "실제로 가능해져서 이렇게 있습니다." "정말인가?" "그럼 거짓입니까?" 지명대사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삼십 년 동안 마음을 맑은 물처 럼 고요히 가졌던 그가 이렇게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는 것은 정말 오 래간만의 일이었다. "나로서는 참인지 거짓인지 가릴 수 없네."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시주더러 노납이 귀왕(鬼王) 최근(崔斤)의 제자라고 한다면 믿겠는 가?" "아마도 믿지 못하겠지요. 귀왕은 사파를 호령하며 반쯤은 우두머리 격이 아니었습니까." "노납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도 그럴테지만, 아무튼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명대사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믿겠네."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61 09/03 14:26 18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0장... 살수(殺手) (3) 연경소는 느릿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믿기 어려운 일도 많은 법입니다." 지명대사는 말로는 믿겠다고 했지만 아직도 의아한 표정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또한 믿어야만 하지만 사실인 일도 적은 것은 아닐세." 연경소는 화서운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저 아이는 이제 저를 사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비록 무공을 가 르쳤으나 저 아이마저 흑백마신의 제자가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겠지만..." "아닙니다. 저는 굳이 제자를 통해 명성을 날릴 생각은 없습니다." 지명대사의 눈빛은 점점 평정을 찾아갔다. 수십 년의 면벽수도는 그 에게 어떤 일에도 이성을 잃지 않는 굳건한 마음의 성(城)을 쌓게 해 주었다. "앞으로 어쩔 셈인가?" "조용한 곳으로 떠나겠습니다." "파묻혀 사려는가." "그렇습니다." "자네와 같은 사람은 그러지 못할 것이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공은..." "모든 내공을 전해 주었지만 제 현관은 이미 트여 있습니다. 탁기가 모두 배출되었으니 오히려 신체의 조건은 전보다 좋은 셈입니다. 다시 처음부터 하렵니다." "허허... 그런가..." 지명대사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지만 본심은 아니었다. 이 황당하 기 짝이 없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며, 또 그 내막은 무엇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는 것이 지당했다. 지명대사가 함부로 말을 않 는 이유는 연경소의 신분과 명성을 존중해서였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며칠동안 할 말을 모두다 쏟아낸 것처 럼 무기력하게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다가, 화서운에게 시선을 옮기기 도 했다. "노납에게 의문이 있는데 답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네." 연경소가 그 말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대사께서는 제가 어찌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는지를 알고 싶으신 것 이겠지요?" 지명대사는 대답했다. "시주는 역시 남의 마음을 잘 읽는군. 노납이 묻고 싶은 첫 질문은 바로 그것일세." 연경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자면 긴 사연입니다." -+- -+- -+- "막아라!" "안쪽으로 가지 못하게 해!" "멈춰라!" 연경소와 지명대사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한바탕의 소동에 대화를 멈 추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연경소는 누구에게라고 할 것까지도 없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군가가 난동을 피우고 있는 건가..." 지명대사도 중얼거리듯 말했다. "소림사는 웬만한 외적으로는 짖밟을 수 없을 것이네. 설사 팔십만 금군(禁軍)이 출동한다고 해도 승려들이 죽기로 항전한다면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날 싸움이 아니지. 저것은 다만 상당한 고수가 침입한 증거 일 뿐 별 것 아닐세." 연경소도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자기도 불과 한 나절 전에 소림사의 그 위용을 몸으로 체험할 뻔한 기회가 있지 않았 던가. "대사의 말씀은 옳은 듯 싶군요. 저보다 열 배 강한 고수라도 나한 진(羅漢陣)의 엄정한 불력(佛力)을 빠져나갈 수 없겠지요." 다시 한 번 와아, 하는 고함소리가 몇 번 들렸다. "상당한 자로군. 소리가 점점 객방이 있는 곳에 가까워지고 있지 않 은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침입자가 적어도 몇 수는 한다는 증거이네." "그렇지요." 지명대사는 계속 연경소가 그렇다는 대답만 하자 조금 겸연쩍은 듯 일부러 말소리를 약간 높였다. "이상하군." "그렇군요." 연경소는 계속해서 그렇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아무도 그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지명대사는 그를 슬쩍 떠보았 다. "연 시주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노납에게 들려줄 수 있겠나. 사실 노납도 한 가지가 이상한데, 그것이 시주의 생각과 일치하는 지 를 알고 싶다네." 연경소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소림사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자의 목적은 정해져 있을 것입니다." "장경각의 무공비급과 다른 기이한 책들이겠지." "아니면 장문인을 노리는 자객이던가, 혹시 조사동에 있다는 비밀을 캐려는 자일수도 있습니다." "또하나 시주가 모르는 것이 있네." "하하... 대사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혈미인(血美人)이 아닙니 까?" 지명대사의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시주... 시주는 그것을 어찌 알았는가?" 연경소는 웃음을 억지로 지어 보였지만 사실 그의 얼굴은 휘어진 대 사의 눈썹보다 두 배 이상 일그러져 있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일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때 짓는 표정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정확 한 묘사일 것이다. "제 사부를 자칭하는 당씨 성을 가진 벌레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지명대사는 음, 하는 신음성을 냈다. "시주는 독특한 표현을 쓰는구려." "그런 악인을 상대하려면 독특한 표현을 많이 연습해둘 필요가 있습 니다." "허허..." "혈미인이 장경각에 있지 않다고 해도, 객방 쪽으로 함성이 점점 가 까워지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버티면서 이쪽으로 밀고들어온다는 이야기로군요." "그런 셈이네." "목적이 무엇일까요?" 지명대사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자네는 혈미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연경소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어디에 있는지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이야 기는 모두 당충이란 작자의 악한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입은 화의 근원이지만 역시 복의 원천이기도 하네." "침묵은 웅변보다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좋은 말일세..." 연경소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만약 무림에서 가장 정확하고, 빠르고, 방비하기 어렵고, 거기에다 독랄한 점을 생각한다면 혈미인은 나머지 모든 암기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일 것입니다. 단지 오십여 년 전 강마웅(姜瑪熊)이 만들 어낸 은무영(銀無影)과 그의 둘째 제자인 석야(石爺)가 만든 삭골풍우 (削骨風雨)만이 혈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명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강마웅의 대제자인 만적(萬適)은 그 두 가지를 능가하는 공 포의 암기를 만들어내었지." "그것은 십오 년 전에 만적이 소림사에 들러서 그 물선을 맡긴 이후 로 소림 어디엔가에 틀어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요." "만 시주는 당시 노납을 비롯해 몇 사람이 듣는 가운데 자기가 십여 명의 무림명숙을 찾아가 오직 하나의 암기로 그들을 제압했다면서, 그 혈미인이라는 물건을 본사에 맡기고 대신 보호를 요청했네." 지명대사는 이어 말했다. "그는 개과천선하였으므로 본사에서는 그의 삭발을 허용했고 곧바로 혜심의 제자로 삼도록 했네. 하지만..." .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62 09/11 15:28 142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0장... 살수(殺手) (4) 연경소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요 어찌 되었습니까?" 지명대사는 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기억하기조 차 싫은 일이 있게 마련인데, 지명대사에게도 그런 일들이 몇 가지 있 었다. "그는 또하나의 혈미인을 만들어냈네." "예?" 연경소는 깜짝 놀랐다. "혈미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도대체가 그러한 악독한 장치를 둘이나 만들었다는 것입니까?" 지명대사는 말을 계속했다. "불행히도 그러하네. 혈미인의 형태는 사람처럼 생긴 것이 아니지만 그 위력은 가히 일류고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네. 지난 세월 동안 장경각에 보존되어왔던 혈미인은 혜심 등이 철저히 연구하여 간 신히 묘용을 알아냈지." 그가 여기까지 말하고 뜸을 들이며 다음 말을 잇기를 주저하자 즉각 연경소는 물어보았다. "어떤 묘용이었습니까?" 지명대사는 몸을 약간 떨었다. 무의식 중에도 그 엄청난 위력이 남 아있었다. "그것은 두 손에 벌려야 쥘 수 있는 하나의 원통이었네." 그는 혈미인의 생김새와 효용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사천(四川) 당가(唐家)와 새외(塞外)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뇌화문(雷火門), 그리고 강남(江南)의 무림세가 중 하나인 우가보(于 家堡)는 특이하고 매서운 암기의 제작으로 유명했다. 대대로 물려오면 서 조금씩 더해진 기술의 결정체는 좀더 정교하고 빠른 암기로 나타났 으며 그 결과 강호 전체에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지극히 커다 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들 세 가문은 묘한 경쟁 관계였다. 하지만 서로를 해치지는 않았 다. 각자 암기 제작과 그 운용법에서 상당한 조예를 쌓아왔으며 서로 의 수법도 쉬지않고 연구했지만, 무언 중에 형성된 상호불가침의 규율 은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서로 꺼렸기 때문이 었다. 당가는 암기술 이외에도 독을 쓰는 법과 여러 가지 벌레들을 부리는 데에 능숙해서 사천성 일대에서는 큰 위명을 떨치고 있었다. 악랄하기 이를데 없는 암기만 해도 뭇 사람들을 벌벌 떨게할 만한데, 거기에 독 공과 괴이한 독충들까지 쓸 줄 아니 그 누구도 경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옥문관(玉門關)을 넘어 사막과 초원이 대부분을 차지하 고 있는 새외 지역으로 가면 뇌화문의 명성이 여타 모든 문파들을 훨 씬 상회했다. 그들의 병기는 날렵하게 적을 살상하는 종류도 있었지만 문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화탄을 위주로 했다. 중원에서 위급할 때 호신용으로 쓰이고 있는 폭발물 종류의 화탄은 거의 팔 할 이상이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백 년이 넘도록 쌓아온 전문적인 기술과 그 기간의 두 배에 가까운 시간을 장인(匠人) 으로 대물림하여왔다. 뇌화문의 개파조사인 뇌화진군(雷火眞君) 마오 (馬懊)는 장인 집안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천부적인 손재주와 어려서부 터 익힌 무기와 암기 만드는 법을 하나로 꿰뚫어서 하나의 문파를 열 었다. 어떤 문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중원에만 해도 천여 개의 방파와 헤 아릴 수도 없는 무술 도장이 있었다. 어지러운 세상이라 너도나도 조 금 돈푼깨나 있는 집의 자제들은 선생을 초빙하여 무술을 배웠고 가난 한 농민이나 행상들도 애써 무예를 배웠다. 따라서 별의별 가짜 선생 들이 판을 치게 되었고, 방파라고 해서 전혀 그런 잡털이 섞이지 않을 리 없었다. 한 번 썩은 물이 흘러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물이 어디론가 흘러가지 않는 한 전체가 다 썩어버리기 마련이다. 혹은 고여있는 물이 제아무 리 깨끗하더라도 가만히 놔두기만 하면 썩어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이치로 제대로 된 방파는 불과 몇십 개를 넘지 않았으며, 나머지 천 개도 넘는 것들은 거의다 엉터리이거나 사기 집단이었던 것 이다. 화탄을 손에 쥐고 다닐 수 있는 암기로 제조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 무계한 일이었고, 만들더라도 엄청난 가격이 들 것 같았다. 강호 무림 인들이 뇌화문의 설립 소식을 한 명도 못 들었을 리 만무하지만, 반면 에 그들을 신경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야말로 그저 그런 문파려니 하 고 수수방관했던 것이다. 사천 당문의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 중의 하나도 바로 그것이었 다. 당시의 가주는 당울(唐鬱)이라는 키가 왜소한 노인으로 비화첩(飛 花牒)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의 키가 작은 점을 들어 왜구암왕 (倭軀暗王)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감히 그의 얼굴을 앞에 두고 말하지는 못했다. 평생에 가장 싫어하는 말이 키가 작다는 말이 요 따라서 고강한 무공과 암기술을 연마한 그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도 몰랐겠지만...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당울과 우가보의 보주였던 우양(于陽)에게 비 무를 신청하는 서신이 왔다. 초서체로 써내려간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 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디로 나오되 암기술로 승부를 내보자는 것 이었다. 당울과 우양이 어찌 거절하랴! 당울은 암기로는 천하제일이라는 자 부심을 품고 있었고, 우양은 자기의 전대부터 조금씩 당문에게 기울어 가는 대세를 뒤집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즉시 그 지시에 따르고 말았다.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는 말이 있다. 선한 사 람은 오지 않고 온 사람은 선하지 않다는 뜻이다. 뜻밖에 불쑥 찾아온 손님의 대부분은 엉뚱한 흑심을 품고 있다는 강호상의 말이었다. 하지 만 당울과 우양의 경우에는 그것이 반대가 되었다. 그들은 함정에 걸 려들고 만 것이다. 대결이니 비무이니 할 여유는 아예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울과 우양 이 갔던 협소한 계곡의 이름은 이름부터 음산한 사곡(邪谷)이었다. 그 들 둘은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괴이한 소리와 스산한 분위기 에 기분이 매우 나빴지만 체면상 겁먹은 것을 나타낼 수 없어서 천천 히 걸어들어갔다. 서로의 간격이 삼 장 이상 떨어져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백여 보 가량 들어갔을 때, 이끼가 낀 바위를 하나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끼가 희한한 모양으로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횃불을 비춰서 그 모양새를 살펴본 당울은 깜짝 놀라서 불을 꺼뜨리고 말았다. 이끼는 글자의 모양을 이루고 있었는데, 사곡의 앞 글자가 죽 을 사(死)자로 바뀌어 있었다. 본능이랄까, 그들 둘은 서로 적수임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마주쳐 이 것이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눈빛 교환은 아주 잠시 후에 계곡의 위쪽에서부터 죽음의 서곡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 었다. 웬만한 방 한 칸만한 바윗덩어리 사이에는 비황석(飛篁石), 철표(鐵 標), 수전(手箭), 대궁(大弓), 은침(銀針) 등의 암기가 쉴새없이 날아 왔고 심지어는 각종의 크고작은 화탄들이 불꽃을 수놓았다. 당울과 우양은 당대 최고의 고수였으며 암기와 무공 실력이 두루 강 했다. 그러나 피와 살을 가진 육체가 어찌 그런 공세를 맨몸으로 감당 할 수 있겠는가. 기적적으로 반 시진이나 버티고 섰던 두 사람은 차츰 밀려오는 피로를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우양이 어깨에 비황석과 은침 을 맞은 순간 방어하는 기세가 크게 약해졌다. 서로 의지하는 형세는 이미 그르쳤고, 당울은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겠다고 입술에서 피가 나도 록 버티던 왜구암왕 당울은 곁에 쓰러진 우양의 뒷통수에 거대한 바위 가 작렬하여 완전히 목숨을 끊어놓았을 때 비로소 쓰러졌다. 두 거장은 한 곳에서 몸을 겹친 채 숨지고 말았는데, 그 시체는 참 으로 끔찍했다. 검상(劍傷) 같은 직접적 원인은 전혀 없었고 다만 몸 구석구석마다 수십 수백 개의 암기 자국이 나 있었다. 더군다나 죽은 사람들의 시체는 나중에 떨어져 내린 바위들에 의해 머리통이 깨져 뇌 수가 흘러나오는 등 참혹하기 이를데 없었다. 김종화 (monkd ) [창작] <소요검협(笑謠劍俠)> - 63 09/12 08:05 13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0장... 살수(殺手) (5) 물론 그것은 뇌화문주인 마오의 흉계였다. 가장 강한 두 적수를 한 장소에서 간단하게 처리해 버린 것이었다. 그는 뇌화진군이라는 명성 에 만족하지 않고 무림 전체를 화약으로 지배하려고 했으며, 그 누구 도 피할 수 없는 신기한 암기들을 속속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화탄을 만들어 여러 유목민족들과 지방의 대귀족 들에게 납품하며 막대한 부(富)를 쌓았고, 무사들을 고용하여 천축 일 대의 패자(覇者)로 떠올라 급기야는 그 세력이 옥문관을 넘어 사천 지 방에까지 이르렀다. 뇌화진군은 무척 치밀한 사람이었다. 가장 뛰어난 기술을 소유한 장 문인 두 사람을 일거에 해치웠지만 결코 자기들보다 오랜 역사를 지니 고 이어온 당문과 우가장을 얕보지 않았다. 그는 암중에 사람들을 두 곳에 파견하여 새로운 암기를 만들어낸 직 후에 빼돌리곤 했고, 구심점을 잃은 두 가문은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당문은 몇 대에 걸친 기술의 층이 두텁고 교분이 워낙 활발하여 그 런대로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우가장은 마침내 문을 닫고 말 았다. 뇌화진군은 무척 흡족했지만 차마 강호상의 체면 때문에 웃지는 못하고 다만 한 통의 서신을 써서 위로를 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누가 알았으랴! 우가장의 소장주(小莊主)였던 우섭훈(于涉勳)은 가문에 전해져 내려 오는 모든 비법을 지니고 잠적하여 새로운 제자를 거두어 들이니 바로 그가 암기 제조의 천재인 강마웅(姜馬熊)이었다. 어린 소년이었던 강마웅은 우섭훈의 열성적인 지도와 타고난 솜씨로 욱일승천(旭日昇天) 실력이 늘었고, 삼십 세가 되던 해에는 마침내 필 생의 역작인 은무영을 만들어 내었다. 은무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커다란 쇠통 같은 것이었는데, 평소에는 허리에 차고 다니다 가 유사시에는 조립하여 팔뚝만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용수철과 화살, 폭약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었는데 이것 하나를 만드려고 십 년 이상을 고생한 것을 감안하면 결코 범상한 물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강마웅은 이것이 완성된 해에 우가장의 원수를 깨끗이 갚아버렸다. 단 신으로 뇌화문에 찾아가서 결투를 요청했고, 뇌화진군 마오의 아들인 마감(馬甘)은 흔쾌히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역시 삼십 세 정도의 나이였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건곤일척의 승부. 그러나 이 위대한 승부는 단 한 순간에 승부가 갈리고 말았다. 눈썹 이 한 번 휘날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강마웅의 은무영이라 는 쇠통은 마감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여덟 개의 화살에는 모두다 화약이 장전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 이상 의 충격을 받으면 즉시 폭발하게 되어있었다. 한 번 쓰고 나면 쇠통을 분해해서 화살을 채워넣고 화약을 발라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적 어도 마감은 그 일격을 받아낼 수 없었다. 동시에 손을 썼지만 손으로 던져낸 뇌화탄(雷火炭)은 용수철의 힘을 빌어 발사된 여덟 자루의 화살보다 느렸다. 두 개의 뇌화탄은 공중에 서 분해되어 버렸고, 화살 중 뇌화탄에 맞지 않은 여섯 개는 정통으로 마감의 몸에 작렬했다. 사람 팔뚝의 길이보다 약간 짧은 여섯 개의 화살이었지만 그 폭약의 위력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마감은 암기 뿐만 아니라 여러 고 수들을 초빙하여 무예를 배운 실력이 있어서 철포삼(鐵布衫)의 재간에 익숙해 있었지만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바닷가에 쌓은 모래성에 발길질을 한 번 하면 그대로 허물어지듯, 마감이라는 사람의 일대기는 거기에서 끝나고 말았다. 강마웅은 그 한 번의 싸움으로 무림에서 은퇴를 선언했고, 은무영이 라는 암기를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다. 어쩌면 그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자기를 귀찮게 굴 사태를 예상했는지도 몰랐다. 실제로 은퇴선언을 한 뒤에도 수많은 무림명숙들이 찾아와서 암기를 빌려달라 고 했으니까... 아무튼 그는 다시는 무림에 행보하지 않았고, 두 제자를 거두었으니 바로 혈미인을 만든 만적과 삭골풍우를 만든 석야였다. 그중에서도 대 제자인 만적의 걸작, 혈미인은 은무영보다 위력이 더 강맹하고 흉폭하 여 강마웅은 자기의 생전에 그 사용을 금지할 정도였다. 만적은 우선 황 가루와 인 가루를 섞고 폭약을 잘게 부수어서 절독 (絶毒)에 담그었다. 별로 희귀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닐곱 가지의 독액 과 풀을 섞어서 해독이 극히 난해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말려서 고약처럼 만든 후에, 은과 철을 섞어 만든 침에 바르고 햇빛과 그늘에서 삼일씩 말렸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암기를 소유한 셈이었다. 새털보다 가볍 고 머리카락 만큼이나 가는 은침에는 극독이 발리워져 있었고, 적당한 양의 폭약을 묻혔기 때문에 결코 사람 몸에 닿자마자 폭발하지 않았다. 몸속으로 파고들어 피를 본 후에야 비로소 폭약이 터져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악독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를 본 강마웅은 일찌기 이렇 게 탄식한 바 있었다. 見血必死 피를 보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니 呼無敵也 적이 없다고 부를 만 하도다 강마웅이 또한 번 놀란 것은 이 은침을 발사하는 침통이 만들어지고 난 뒤였다. 대제자의 실력은 이미 스승을 뛰어넘어서 청출어람(靑出於 藍)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실처럼 가는 은침이었기 때문에 크 기가 클 필요도 없었다. 석 달 가량을 외출했다가 돌아온 만적은 방안 에 틀어박혀서 두문불출, 침통을 만드는 데에만 몰두했다. 가끔 막히 는 곳이 있으면 스승이나 사제인 석야에게 묻곤 했다. 그때 막 둘째 제자인 석야는 삭골풍우라는 기이한 암기를 만들어 내 었고 실험에도 성공했다. 그것은 암기라기 보다는 군중에서 쓰는 병기 에 가까운 것으로, 한 대의 화차(火車)가 사방으로 암기를 쏘아대면서 무수한 적에게 살상을 입힐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끝났습니다." 어느날 새벽, 헐레벌떡 뛰어와 강마웅이 거처하고 있던 방문을 열어 젖힌 만적은 흥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강마웅 은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시신을 본 순간 만적은 기절할 뻔 했지만 벽에 쓰여진 글씨를 보고는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릴 수 있었다. <은무영은 우리가 접수한다. 아울러 삭골풍우라는 화차도 우리의 소 유로 하겠노라. 그대의 실력없음이 우씨(于氏) 가문의 마지막 후예를 살렸도다.> 만적은 설마하니 싶어 사제의 방으로 뛰어들어가 보았지만 역시 마 찬가지였다. 사제 석야의 시신도 이미 싸늘하게 식은 지 오래였다. 그 광경을 본 만적은 탄식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원래 성은 우향(于向)이었다. 우가장의 마지막 후예였는데, 뇌 화문에게 쫓길 때부터 성을 만씨로 고치고 이름도 바꾸어 버렸다. 복 수는 강마웅의 손에서 끝났지만, 아직 이름을 찾을 때가 아니라고 생 각한 그는 그냥 만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훗날 우가장을 다시 세울 때 제 이름을 찾을 셈이었다. 그러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강마웅과 석야는 기척도 없이 살해당했고 그들이 평생동안 만들어낸 은무영과 삭골풍우 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흉수들은 우향의 신세 내역을 파악하고 있었고, 아마 실력이 대단했 음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은무영과 같은 종류의 암기가 아직 완 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일부러 죽음의 행렬에 넣어주지 않은 것이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우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완성된 혈미인을 가지 고 소림사로 갔다. 세상에 자기 자신의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로서 는 일단 안전을 돌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무리 암기가 강력하다고는 하지만 우향은 근본적으로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암습에는 속 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비가 삼엄하고 무예가 고강 한 승려들이 많은 소림사로 피신하면서 혈미인을 장경각에 바친 것이 었다. . 문윤섭 (76MYS ) [재연재] [< 소요검협(笑謠劍俠) >] - 64 01/07 17:02 177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0장... 살수(殺手) (6) "흑마신 당충과 백마신 두수... 그들이 바로..." 연경소를 말을 꺼내려다 다시 삼켰다. 눈가에 경계하는 빛이 떠올랐 다. "바로... 무엇인가..." 지명대사는 귀를 기울였다. "귀를 가까이..." 지명대사는 귀를 연경소의 입 가까이 가져갔다. 굳이 필요없는 동작 임을 알면서도. 연경소의 눈에 순간적으로 회의(懷意)의 빛이 떠으르는가 싶더니 곧 강렬한 사기(邪氣)가 눈동자를 붉게 물들였다. "바로... 넌 죽은 목숨이라는 뜻이다!" 지명대사가 깜짝 놀라 연경소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순간, 연경소 의 쌍장이 십자 모양을 포개어진 채로 등 뒤의 명문혈을 강타했다. 일 격에 모든 것을 끝내려는 의지가 담긴 쌍장의 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익힌 내공이 발동했지만, 가공할 내경(內勁)은 불화살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듯 체내로 스며들어갔다. 지명대사는 욱, 하고 검붉은 피를 한 모금 토해내었다. "도대체 왜..." 연경소는 신경질적으로 지명대사를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마신(魔神)께서 너의 생명을 원하기 때문이지." 지명대사는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까 귀를 가까이 댄 것 처럼 쓸데없는 행동이었지만 불에 덴 듯한 통증을 그렇게라도 하지 않 으면 줄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시주... 어째서..." 연경소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다 못해 혈광(血光)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신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으하하하!!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리라!" 연경소는 손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찍었다. 손날은 지명대사의 천령 개를 향하고 있었다. "시주!!" 지명대사는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최초의 일격으로 절반이 넘는 내공을 상실해 버린 데다가 가슴팍이 불에 덴 듯하여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두 가지는 확실히 이치에 맞지 않았다. 첫째, 연경소는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둘때, 연경소는 분명히 화서운에게 내공을 전해 주었는데 이런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는가? 이 중에서 첫번째 의문은 확실치는 않지만 해답이 나와 있다고 보아 도 된다. 즉, 흑백마신 중 누군가가 세뇌를 해 놓았거나 사이한 마공 대법(魔功大法)으로 신지(神智)를 제압해 놓아서 어떤 상황이 되면 발 작하도록 해 놓았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두번째 의문은 아마도 지명대 사의 생애(얼마나 남아 있을런지는 알 수 없지만...) 동안에는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엇!" 지명대사는 남아있는 힘을 모조리 끌어올려 달마삼장(達摩三掌)으로 연경소의 일격을 막아냈다. 연경소가 짧게 신음한 것은 당연했다. 최초의 일격으로 피떡이 되어 있거나 최소한 반신불수가 되어야 정상인데 오히려 자기의 두번째 공 격을 막아내면서 불문의 사자후로 반격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흐흐... 마신께서는 네 죽음을 원하신다!" 연경소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되뇌이며 지명대사의 가슴팍을 때렸다. 이미 지명대사에게는 한 줌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저항 도 없었다. "시주... 도대체... 어찌된 일이요... 그 힘은...?" 연경소는 잔인하게 웃었다. "크크... 마신께서 나에게 흡성신공을 전수해 주셨지. 저 꼬마 녀석 에게 모든 내력을 줄만큼 내가 성인군자로 보이나? 구할 이상 다시 흡 수했단 말씀이야... 크크...!" "그... 그랬구려." "이만 입을 다물어 줘야 겠어." 연경소는 오른손 식지와 중지를 들어 지명대사의 천령개를 내려찍으 려고 했다. "큰스님!" 순간, 방문이 열렸다 닫히면서 소사미 하나가 질겁을 하고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지명대사가 지른 사자후를 차(茶) 대령 정도로 생각하고 왔다가 피투성이의 모습을 보고는 도망치는 것이리라. 연경소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소사미가 비명 을 질렀던 때와의 시차는 불과 2-3초에 불과했다. 소사미의 경공이 제 아무리 뛰어난들, 도망칠 여유가 없었다. "서라!" 소사미는 죽어라고 달렸지만 근본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경기였다. 매우 근면한(?) 토끼와 거북이가 시합을 벌인 격이었다. 연경소는 어느새 소사미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마신께서는 모든 이의 죽음을 원하신다." "넷?" "마신께서는 모든 이의..." 연경소는 말을 하다 말고 소사미의 혈을 짚어 땅바닥에 내던져 놓고 소리쳤다. "누구냥!" 돌아온 대답은 늙은 승려의 것이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어찌하여 살인을 하시는지." 연경소는 차갑게 대꾸했다. "마신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마신이라 하오시면...?" "크크크...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언젠가 한 번씩은 죽게 마련인 것 이다. 지금 죽든지 나중에 죽든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크하하하!" 승려는 잠시 넋이 나갔다. 눈앞에 서 있는 초절정의 미치광이 고수 를 상대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동안이나 승려가 말이 없자 연경소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이구나. 소림사에도 잿 밥에 눈이 어두운 중놈들이 많을테니 넌 이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좋겠다!" 연경소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날려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멈추시오." 거기까지 말한 승려는 더이상 딴 곳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소림사 내에서도 수위에 드는 무공의 소유자인 그였지만 연경소가 아무렇게나 미친 듯이 해대는 발길질을 일일이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연경소는 백마신 두수가 가르쳐 준 마환퇴(魔幻腿)라는 절기를 쓰고 있었다. 남이 보기에는 미치광이의 발길질 같은 무공이었지만, 사파의 절기답게 앞뒤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들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방비를 어 렵게 만드는 묘수가 숨어있었다. 그는 갑자기 발길질을 멈추었다. "방금 중요한 일이 생각났다." "아미타불..." 연경소의 발길질을 100초 가까이 피해낸 승려는 본사수호승(本寺守 護僧)이자 장문호법(掌門護法)의 임무를 맡고 있는 대원로, 18 금강나 한(金剛羅漢) 중의 한 사람으로 법명을 혜청(慧淸)이라고 했다. 배분 으로 따져도 현 장문인과 맞먹는 인물이었다. 그는 잠시 숨을 돌렸지 만 경솔하게 대답하지 않고 연경소의 눈동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연경소가 입을 떼었다. "방금 생각난 것이 뭐냐고? 그것 말이지." 숨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생애 최대의 적수를 만난 나한승 혜청 과 사이한 기운에 둘러싸인 연경소 사이에 생겨난 보이지 않는 안개구 름 같은 것이었다. 문윤섭 (76MYS ) [수정] [< 소요검협(笑謠劍俠) >] - 65 01/11 17:26 16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0장... 살수(殺手) (7) "방금 생각난 게 말이지, 마신께서는 네 죽음도 원하신다는 사실이 다." 연경소는 마환퇴의 수법에 칠성보(七星步)를 가미하여 혜청의 아랫 도리를 휘몰아쳤다. "하나... 둘... 셋... 넷... 잘도 버티는구나." 헤청의 이마에는 어느덧 굵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양쪽 어깨 에 족히 100근은 나가는 물통을 하나씩 지고 숭산을 다섯 번 오르락내 리락 해도 거뜬한 강인한 체력과 깊은 내공의 소유자인 헤청도 고전하 고 있는 것이다. "어라, 서른 번을 넘겼군! 서른 하나, 서른 둘..." 연경소의 발길질은 칠성보의 움직임에서 팔괘보(八掛步)로 변해가며 집요하게 혜청의 하반신을 노렸다. 혜청은 여태까지 미리보(迷鯉步)와 연환퇴(連還腿)의 기술로써 적의 맹공을 막아왔지만 힘으로 버티는 것 은 거기까지가 한계인듯 싶었다. 혜청대사는 거의 150초를 겨루느라 사지가 저리는 증세가 오고 있었 다. 누군가가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는 이상 자기는 죽은 목숨인 셈 이었는데, 여태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자기가 백 초 이상 지 탱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다면 도움을...) 연경소의 보법이 팔괘보로 변함과 동시에 혜청대사는 하반신을 피하 지 않고 양장에 무서운 힘을 실은 장풍을 발출했다. 어차피 승산이 없 는 겨룸이라면 몸을 빼던가 동귀어진(同歸於盡), 너 죽고 나 죽자하는 것이 최선이다. 십중팔구 형세가 유리한 쪽은 동귀어진하는 것을 피하 기 마련이라 혜청의 선택은 일반적으로 볼 때 옳았다고 보여진다. "틀렸다, 늙은이!" 그러나 연경소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혜청이 몰랐거나 간과한 것은 첫쨰로 연경소의 무공이요, 둘째로 신지가 맑지 못하여 얻어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이요, 마지막으로 사이한 기운에 가득차 있어 피를 보 아야 직성이 풀리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먼저 연경소의 오른발이 혜청의 왼쪽 무릎을 세차게 걷어차면서 그 부분의 관절을 완전히 부수어 놓았다. 그것과 동시에 십이성 공력으로 후려친 혜청의 소림권이 연경소의 손바닥과 마주닿았다. 연경소는 그 것까지 다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차게 걷어차여 뼈가 부수어지는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낼 부류의 사람은 기껏해야 동영의 인자 (忍者) 정도가 아닌가. 이런 판단이 순식간에 내려질 수 있었던 것은 연경소의 무공수위와 경험에서 온 것으로, 결코 혜청은 예측할 수 없 는 것이었다. "흡!" 혜청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남들이 보면 추태라고 하 겠지만 자기의 의지로 항거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늙은이, 혹시 별빛까지도 빨아들이는 무공에 대해서 들어보았나?" 연경소의 눈빛이 더욱 붉어지는가 싶더니 혜청은 맞닿은 장심을 통 해 무서운 속도오 내공이 빨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도대체... 아미타..." 혜청은 말할 수도 없었다. 불호를 끝까지 하기도 전에 장심이 불같 이 뜨거워지면서 손바닥 한가운데에 구멍이 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안된다!) 혜청은 전력으로 불문의 내가수법을 펼쳤다. 뭐라고 이름붙여진 것 은 없지만 흩어지는 마음을 모으고 공력을 단전에 모으는 심법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효력을 발휘하는지 손바닥에 나는 열이 조금 식으면 서 내공이 하단전에 쌓였다. 그러나 연경소의 계산은 그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공 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 한데 모아서 빨아들이기가 어렵다. 완전히 한데 모아진 내공을 흡수한다 해도 흡성신공의 수법으로는 사할 이상 을 흡수하기 어렵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흡성신공을 쓴다고 피해자 가 껍질만 남는 것은 아니요, 약 절반 가량의 내공을 잃고 두어 달 동 안 무공을 쓸 수 없을 뿐이었다. (늙은이, 고맙군!) 사악해질대로 사악해진 연경소는 이 말을 입밖에 낼 수 없음을 아쉽 게 어겼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입을 열었다가는 주 화입마할 가능성이 컸다. (아악...!) 헤청은 손바닥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아교풀로 여러 번 붙여놓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연경소의 강인한 내력이 흡자결(吸字訣)과 인(引)자 결을 써서 요지부동, 묶어놓고 있었다. 갖은 힘을 써도 손바닥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단전에서 한 줄기의 진기가 빠져나와 장심으로 향하자, 크게 당황한 노승은 이렇게 된 이 상 동귀어진하자는 심정으로 비파골 부위에까지 빨려올라간 진기를 더 욱 빠르게 장심으로 내뿜었다. 최심장(催心掌)이라는 장법으로 일장을 발출한 것이다. 최심장은 강호에도 널리 퍼진 수법으로 형태와 수법이 다양하여 철 사장(鐵沙掌)과 비견되는 흔한 무공이다. 그러나, 정말로 유용하게 발 전되어온 것은 크게 세 줄기였다. 그 하나가 소림사의 호법승인 십팔 금강나한과 백팔나한이 익히는 최심장이요, 하나는 해남(海南)의 패자 인 천산벽력수 정련의 4대조인 쇄심파옥수(碎心破玉手) 정휴(鄭休)가 최심장에 근간을 두고 창안해낸 최심십팔권(催心十八券)이며, 다른 하 나는 성숙해(星宿海)의 노괴물인 저방(沮方)이 기괴한 초식으로 바꾸 어 쓰고다니는 최심곤법(催心棍法)이었다. 노승이 전력을 다해 뿜어낸 일장은 연경소와 그를 떼어놓기에 충분 했으나 결과적으로 득을 보지는 못했다. 연경소는 그 일장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는 그 내력을 몸속으로 흡수하여 많은 시 간이 걸리는 흡성신공을 불과 수 초 사이에 끝낼 수 있었다. 헤청은 이미 내력을 사할 가까이 잃은 후이기 때문에 심신이 어지러 워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장심을 뗴어낸 그는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 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용서를 하도록 하지." 연경소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내공을 운용해야 하는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전체를 한바퀴 돌 릴 시간은 없지만 소주천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연경소는 가일층 진보된 공력을 얻었다. 거의 자신에 필적하는 고수인 혜청대사의 내력을 삼분지 일 이상 흡수한 후 유증이 약간 남아있었지만 나중에 조용한 곳을 찾아 운공하면 완전히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불문에서 수십 년간 닦은 정순한 내력이라 약 간 잡다한 연경소의 내력과는 약간 이질감이 있겠지만 크게 문제될 것 은 없다고 생각했다. 흡성신공의 최대약점인 기존의 진기와 흡수된 진 기가 충돌하는 현상은 흑백마신의 사부의 사부의 사부... 이렇게 일곱 번 거듭한 세대에 해결되어 있었다. 특수한 환약을 먹어 기의 충돌을 억제하고 본문의 심법으로 조금씩 융해시키는 방법이었다. "대사님!" 연경소가 막 일어났을 떄 빗자루를 들고 근방을 지나가던 소사미 하 나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혜청대사의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당신이 그랬는가?" 소사미는 아직 불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속세적인 말투 로 거리낌없이 연경소를 쏘아보며 말했다. 연경소는 실웃음을 흘렸다. "크흐흐... 그렇다면 어쩌겠는가?" "죄가를 받아야지!" "흐흐흐... 말투가 특이한... 그러나 마신께서 죽음을 원하는 중놈 이구나. 너도 좀 죽는 걸 생각해봐야 겠다!" 연경소는 왼발 뒤꿈치로 땅을 딛고 공중으로 두 자쯤 뛰어올라 소사 미를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소사미가 무공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느냐 싶어서 삼푼 정도의 힘으로 쳤는데, 뜻밖에도 소사미는 재빨리 피해버 리고 내당(內堂)을 향해 소리쳤다. "침입자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연경소는 깜짝 놀라 잠시동안 이성을 되찾았다. 소림사의 중들이 수 백 명 몰려온다면, 그중에서도 백팔나한 같은 조무래기(?)들이 나한진 이라도 치고 포위한다면 도저히 빠져나갈 재간이 없었다. (제기랄.) 연경소는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며 소사미가 도망치게 놔두었다. 그 문윤섭 (76MYS ) [창작] [< 소요검협(笑謠劍俠) >] - 66 01/12 10:59 175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0장... 살수(殺手) (8) 연경소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일부러 혜청의 입가에서 흘러나 온 피를 자기 옷에도 묻히고 부상당한 것처럼 꾸미려고 했다. (너무 엉성한데.)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다. 곧 그 소사미는 여러 중 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소사미는 오른쪽 식지(食指)를 들어 연경소를 똑바로 가리켰다. "바로 저 사람이에요. 대윤(大允)과 혜청대사님을 해쳤어요." (내가 죽인 소사미의 이름이 대윤인가 보군. 크크...) 연경소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 나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이 모든 것을 제정신으로 한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면 양심의 가책은 집어치우고서라도 여 태까지 쌓아온 공든 탑 - 즉, 명성과 협명(俠名)이 하루아침에 무너지 는 것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이나?" 연경소는 오히려 시미치를 뚝 떼고 이렇게 반문했다. "거짓말이에요! 시치미 떼지 마! 내가 봤단 말이야." 혜청과의 일을 본 소사미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연경소는 잠시 무릎을 꿇고 혜청대사를 살펴 보는 척 하면서 조심스 럽게 말했다. "어서 치료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혈맥이 굳어 평생동안 폐 인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승려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 꼬마의 말을 믿 는 것 같았다. 연경소는 움찔했지만 여전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손을 써야 합니다. 청죽검객의 말을 못 믿겠소?" 그중의 누군가가 급히 혜청을 들쳐업고 사라졌다. 이어서 다른 승려 가 대윤의 시체를 떠메고 어디론가 없어지자, 남아있는 십여 명의 승 려들 가운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뚱뚱한 화상이 말했다. "시주가 분명히 청죽검객이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했으니 자결해야 겠구려." "..." 연경소는 어째서 자기를 믿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문득 눈길이 아 까의 그 소사미에게 머물자,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 얽혀들었다. (어디선가 본 모습이다. 어디였지?) 연경소는 잠시 뚱뚱한 화상에게 대꾸를 멈추고 소사미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뭐지?" 소사미의 대답은 눈빛만큼이나 표독스러웠다. "당신은 내 이름을 알 자격이 없어요." 연경소는 웃었다. "하하하! 그 말은 내가 전에 많이 써먹던 말이다. 사마외도의 무리 들이 나에게 당하고 나서 이름을 묻곤 했지. 나는 이름 대신에 녀석들 의 발치에다가 '푸를 청[靑]'자를 써주곤 했다. 너도 그런 표시가 있 다면 알려주겠니?" 도저히 조금 전에 살육을 저지른 자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원래 십여 명의 승려들은 소사미의 말을 완전히 믿고 있었는데 조금씩 그 믿음에 금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대묵(大墨)이라고 해요." 친절한 연경소의 물음에 스스로를 대묵이라고 대답한 소사미의 어조 는 어느덧 부드러워져 있었다. "묵... 묵이라... 아!" 대묵은 상대방이 알았다는 표정을 짓자,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당신... 아니, 시주께서는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죠?" 연경소는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 네 속가의 성이 혹시 진(陳)씨가 아니더냐?" "...!" 대묵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몸이 휘청거리지는 않았지만 표독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던 눈동자에는 의아함과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훌륭히 자랐구나. 네가 소림사에 들어간 지 칠팔 년 정도 되었으니 지금은 산화장(散花掌)을 배우고 있겠구나." 연경소의 기억력은 정확했다. 소년의 이름은 진묵이었다. 바로 화서 운을 제자로 거두어들일 때 같이 구해내어 소림사에 맡겼던 그 아이가 이렇게 자란 것이었다. 이미 나이가 열일곱은 되었으리라. 그러나, 키 는 나이에 걸맞게 그렇게 크지 않았다. 제 또래들보다 한 치 가량 작 은 것 같았다. 화서운은 제 또래들보다 한 치 정도 크기 때문에 두 아 이의 나이 차이는 네 살이지만 키는 비슷할 것 같았다. 뚱뚱한 화상이 끼어들었다. "대묵은 지금 달마삼장(達摩三掌)을 배우고 있소." 연경소는 깜짝 놀랐다. 달마삼장이라면 산화장과 오행나한권(五行羅 漢券), 포달구식(布達九式) 등을 완전히 익힌 후에야 익힐 수 있는 소 림 72종 절예 중의 정묘한 부분이었다. 듣기에는 소림사의 제자들은 우선 삼 년 동안은 물 긷기나 다른 노 동을 통해서 기초 체력을 튼튼히 하고 불경과 다른 학문서를 읽어 마 음 수양을 한다고 했다. 그런 후 사 년 째에서야 기초적인 내공심법을 수련하고 외공(外功)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그 첫 단계가 철사장(鐵沙 掌)과 위타장(衛打掌)이었다. 그 다음이 산화장이었는데 진묵은 이미 입사한 지 칠 년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첫 과정에서 두번쩌로 넘어갔 으리라 생각하고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달마삼장을 배운 다니 깜짝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정말이냐? 소림에 기재가 내렸으니 정말 무림의 홍복이로구나. 하하하!!" 열일곱이라고는 하나 아직 어른은 아니었다. 갓 소년 티를 벗기 시 작하는 나이였다.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자 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했는데, 그만 산통이 깨지고 말았다. "제자들은 저자의 교묘한 화술에 넘어가지 말라. 어째서 혜청을 해 친 죄는 묻지 아니하고 그와 함께 노닥거리고 있는가? 더 지체하면 노 납이 직접 그를 심문하리라." 연경소는 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대강은 파악하고 있었으니 놀랍 게도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즉 방향은 알 수 있으되 거리는 알 수 없었다. 말소리는 웅웅 울려퍼져서 마치 사방에서 들리는 것 같았 다. (상당한 고수로구나.) 연경소는 반문했다. "당신은 어째서 내가 흉수라고 단정하는 게요." 대답은 약간 탁한 목소리였다. "장문제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대묵은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 이 없으며 한 번도 수련을 게을리한 적도 없다." 연경소는 진묵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가 장문제자란 말이오?" "악적! 말을 돌리지 말고 어서 네 죄를 인정하고 대가를 치루어라!" "잠깐, 내가 그랬다는 증거가 없지 않소?" "무엇이...!" 잠깐 휙, 하는 바람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옆 건물의 지붕 위에서 한 사람이 날아내렸다. 별로 높은 곳은 아니었지만 착지할 때 전혀 소리 가 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노승은 연경소의 일 장 정도 앞에 내려섰다. 그러자 화상들과 대묵 이 동시에 공손히 예를 갖추어 읍(揖)했다. "혜선(慧善)대사께 인사드립니다." "됐다." 혜선대사는 장포 소매자락을 걷어올리면서 말했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68 02/01 01:05 180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1장... 나한진(羅漢陣) (1) 원래 18 금강호법승들이 진세를 펼쳐야 하지만, 혜청대사는 연경소 의 흡성신공에 걸려 내공을 태반이나 잃고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 그 자리를 대묵이 메꾸고 들어간 것이다. 약관도 못 된 소년의 무공이 어 찌 호법승들과 맞먹으랴만, 대묵의 오성은 매우 뛰어나 제 또래 중에 서는 가장 성취가 돋보였으며 초식의 정교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호법 승보다 나은 바도 있었다. 연경소는 마음이 크게 어지럽고 갈피를 못잡는 상태였다. 기억이 나 는 것도 아니요 안 나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싸움을 한다 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 도 없지 않은가. "연모가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일의 전말은 차후 에 확실히 드러날 것, 세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역사가들에게로 들어가고 무림사는 나의 말을 대신해 줄 것입니다." 그말이 끝나자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던 노승이 말했다. "시주는 죽어도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게군." "승복... 승복이라 하셨습니까? 불가에서는 이런 경우에 뉘우친다고 하더군요.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하, 그래요. 회개라... 하지만, 연모는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갑자기 어떤 미친 마음이 나도 모르 게 구름처럼, 아니 태풍처럼 피어올라 온통 뒤덮였다가 다시 반쯤 개 이는 도중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나한진의 위력은 매우 고강하니 그대는 십중팔구 이곳에서 뼈를 묻 게 될 걸세.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노승 자운(紫雲)이 객원승 려로 이곳에 몸담았다가 아주 눌러앉은 지 삼십 하고도 삼 년일세. 사 람보는 눈은 육십다섯의 나이 때문인지 어느정도 있다고 자부하네. 어 쩐지 자네는 나쁜 사람이 아닐 것 같군." 자운이라고 법명을 밝힌 승려는 금강호법승 가운데에서도 두세째 서 열을 다투는 인물이었고 무공은 수좌(秀座)인 혜정(慧正)과 거의 맞먹 었다. 그의 사문은 천축(天竺)의 동쪽에 있는 항룡사(降龍寺)였다. 유 람차 중원에 나왔던 그는 소림사를 보고는 푹 빠져서 아예 눌러앉았다. 소림사 내부에서 반대의 소리가 없을 수 없었다. 중원 무림의 영도자 격인 소림이 외부인을 받아들였을 때 그 여파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에 서부터 끝없는 반론이 나왔다. 일파만파(一派萬派), 겉잡을 수 없도록 작은 돌멩이가 일으킨 파문이 태풍이 되면 어쩌겠냐는 강경파의 주장 도 만만치 않았다. 그 거센 소용돌이를 잠재운 사람은 바로 지명대사 였다. 어느날 자운은 지명대사의 호명을 받고 그의 선실로 불려갔다. 하루 에 두 번씩 식사를 날라 주는 소사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무슨 이야 기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호기심 많은 젊은 승려들이 소사미를 다그 치다시피 하면서 물어보았지만 소사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가 알고 있는 것은 소채가 거의 말끔하게 비워져 있다는 것 정도였다. "연모에게 청이 있다면 사문의 검을 돌려받고 싶소." "무엇이?" "본색을 드러내는군!" 구경과 감시 역을 맡고 있던 승려들의 수는 어느덧 30여 명으로 불 어나 있었는데, 그들 중 여기저기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돌출 되게 들린 것은 위의 두 마디였다. 다른 승려들은 일제히 자운과 혜정 을 바라보았다. 실질적인 금강호법승들의 우두머리는 그들이었다. 순간 혜정대사와 자운대사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그것은 잠시,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자운의 눈썹이 약간 휘어지며 재촉했다. 혜정에게 말하라는 것이었다. "연 시주에게 검을 가져다 드리거라." 이번에도 한 차례 웅성거림이 있었다. 혜정과 눈빛이 음질쳐 가면서도 의아 한 표정이었다. 자운대사가 재촉했 다. "어서 하지 못하겠느냐. 시주의 검은 장경각 병기고에 있을 것이다. 어서..." 연경소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재빨리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하려는 것이었다. 명문정파라는 소림사의 인물이, 그것도 장문인과 버 금간다는 금강호법승들이 암산을 가할 리는 없었다. 한바탕의 싸움을 치루려면 원기를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화서운에게 주었던 내 력을 10할 모두 빼올리지는 못했지만 혜청이라는 승려에게 뽑아낸 내 공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지에 흩어진 진기는 그전보다 풍부했다. 흡성신공을 써서 누군가의 진기를 완전히 흡수한다고 해도 완전하게 자신의 진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삼사할 정도만을 원기로 만들 수 있 을 뿐 나머지는 그냥 흩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혜청대사는 막내이기는 해도 금강호법승 중의 하나였다. 불도에 전념하면서 일체의 잡념을 없 앤 채 수십 년을 닦아온 정순한 내공, 그것의 삼분지 일만 흡수한다고 해도 연경소의 원래 힘에 더하면 세상을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심부름을 갔던 승려가 청죽검을 가져온 것과 연경소가 조식을 마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연경소는 가볍게 애검을 받아들고 한 바퀴 돌려 보았다. 설사 팔이 여섯 개 달리고 머리가 열두 개 있는 괴물일지라도 한번 붙어보고 싶을 정도로 힘이 솟았다. 손에 검이 들리면 천하에 두 려울 것이 없는 그였다. "죄를 짓겠습니다." 연경소는 왼발을 축으로 삼아 한바퀴 돌면서 청죽검의 끝으로 바닥 에 원을 하나 그렸다. 물론 다른 승려들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 다. 혜정대사가 손짓을 하자 구경하던 승려들은 열 발자국 정도 뒤로 물 러나면서 넓은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때 연경소는 그들 모두가 소 리나지 않게 병장기를 들거나 두 손을 가슴 쪽으로 모아 언제라도 장 력을 발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보았다. 한 마디로,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아무래도 사는 것은 어려울 것 같군. 그러나...) 연경소는 자기만 알아들을만한 크기로 휘파람을 한 번 불고 나서 크 게 말했다. "금강나한진 아래 죽었다면 세인들도 인정하겠지요. 강적과 만나 싸 우다가 죽는 것이 무인의 운명이라면 그것도 좋을 터! 연모는 오직 한 자루의 장검을 믿습니다. 그럼, 행운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연경소는 자기에게 승산이 있다면 일할의 반의 반, 그것의 반의 반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나 걱정되는 것은 자기의 정신이 분열되는 것이 었다. 이미 그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기억상실에서 시작된 여러 생 각과 흐릿하기만 한 머릿속. 풀리지 않는 실뭉치... 모든 것이 엉망이 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그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는 것이다. 한번 의 실수는 곧 죽음이었다. "발(發)... 동(動)!" 금강호법승 중 절반만이 병기를 들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빈 손이 었다. 얼핏 둘러보니 무기는 선장(禪杖)이 셋, 계도(戒刀)가 셋, 철봉 (鐵棒)이 셋이었다. 혜정대사의 발동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무서운 폭풍이 다가왔 다. 나한진 자체가 조금씩 오른쪽으로 선회하면서 반 보 정도 포위망 을 좁혔다. 그와 동시에 선장, 계도, 철봉이 한 자루씩 삼면에서 노리 고 짓쳐들어왔다. 한 종류의 무기가 세 자루이니 두 자루의 여분이 있 는 셈이다. 눈썰미가 좋은 연경소는 두 자루의 여분 중 하나는 공격하 는 무기를 엄호하고 있고 하나는 제 2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 다. 그뿐만 아니라 약간의 시차를 두고 사방에서 휙휙, 하는 파공성과 함께 6장이 날아들었다. 강맹함을 위주로 하는 금강수(金剛手)의 종류 였다. "과연!" 연경소의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법승들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멀리서 둘러싸고 있는 승려들에게까지 들릴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스스로도 거의 깨닫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무의식중에 감탄사가 튀어나온 것이다. 연경소의 머리가 대응책을 생각해내고 자시고 할 여유는 없었다. 억 지춘향격으로 적절한 초식을 생각해 내려면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다 음에 연구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기 때문에 감각적으 로 손이 먼저 나가는 것이리라. 연경소의 오른손에 들린 장검은 불가 사의한 각도로 꺾이며 예리한 검기를 발출했다. 나한진의 제 1격은 청죽검객을 대경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 경소는 거의 구할의 진력을 쏟아부어 검끝에 주입시켰다. 이미 초식으 로 대항할 수는 없었다. 일대 일로 싸운다 해도 혜정이나 자운은 어떻 게 딱 꼬집어 연경소의 아래라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내력에 있어서 는 뒤질 수도 있었다. 대묵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비슷한 고수들인지 라 속임수나 얄팍한 꾀가 먹혀들어갈 대목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급한대로 제 1격에 이은 2격까지 막아낸 연경소는 소매깃이 약간 잘 리는 손해를 입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나 사면초가(四面楚歌)같은 간단한 말도 생각해 내지 못할 정도의 위기상황이었다. 그의 옷자락을 살짝 베어낸 것은 자운대사의 계도였다. "태산첨죽!" 연경소가 자랑하는 청죽십이식의 절묘한 초식이 터져나오면서 처음 으로 공격하는 수가 나왔다. 하지만 정교하게 잘 짜여진 나한진을 한 번에 허물 수는 없었다. 직격을 받은 승려는 원래 반 보 정도 밀려날 수밖에 없었지만 양 옆에 있던 두 승려가 장력으로 받쳐주는 데다, 다 시 무기와 장풍이 어지럽게 날아들어 연경소는 초식을 펼치다 말고 거 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 미치게 만드는군.) 연경소는 나한진의 공격을 다섯 번째로 막아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막아내긴 했어도 어떻게 막았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 았다. 순전히 감각에 의지해서 왼손으로 일장을 쳐냈는데 그것이 우연 히 맞아떨어졌다. 만일 그것이 헛손질이 되었다면 상대방은 경상 정도 였을테지만 청죽검객은 이미 피떡이 되고도 남았으리라. 하지만 등골 이 오싹할 시간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69 02/01 05:29 174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1장... 나한진(羅漢陣) (2) 연경소는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강호에 출사한 이래로 이렇게 까지 힘든 싸움은 처음이었다. 굳이 전력을 다해 싸운 예를 찾자면 어 렵지 않게 서너 번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천양지차, 무 공의 수준이 달랐다. 자신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살심이 일 어 혜청대사의 내력을 흡수한 뒤로는 하루 전보다 훨씬 강대한 내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도 나한진은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다. 절정의 검식을 떨쳐낸다고 해도 아홉 자루의 병기와 아홉 줄기의 장 력을 모조리 막아낸다는 것은 삼두육비의 괴물이 아닌 이상 거의 불가 능이었다. 연경소는 보검에 진기를 잔뜩 주입하여 마치 암기처럼 검기 (劍氣)를 사방으로 쏘아대고 있었다. 10여 초 동안은 평수(平手)를 유 지할 수 있었지만 이와 같은 수법은 진기를 지극히 많이 소모하는 수 법이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런지 알 수 없었다. 십여 수를 교환하는 동안(사실은 일방적인 수세였다) 연경소는 어렴 풋이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누군가를 공격하면 그 사람 혼자서 막아 내는 것이 아니라 양 옆에 있는 두 사람이 그를 도와주고 나머지는 일 제히 배후를 찔러 할 수 없이 검을 거두도록 만든다는 점이었다. 어떻 게 하면 이 점을 유리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연경소는 궁리하기 시 작했다. (분심이용이라도 배워놓을 것을... 열여덟이서 하나를 치니 당해 낼 수가 있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잘못하면 목이 달아나게 생겼구 나.) 그는 청죽검을 비스듬이 세워 무공이 가장 약한 대묵을 찔러가는 시 늉을 했다. 사실은 허초였지만 허허실실(虛虛實實), 언제라도 진짜 초 식으로 돌변하여 상대방의 가슴에 십자선을 그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대묵의 왼쪽에 있던 혜정대사와 오른쪽에 있던 이름모를 호법승이 손 을 합쳐 대항해왔다. 이쯤되면 허초인 것을 드러내도 좋으리라. 연경소는 벼락같이 손목 을 뒤집어 오른쪽에 있던 호법승을 노리고 좌우로 검기를 그어댔다. "달마장(達摩掌)!" 그 승려의 무공도 만만치 않아서 두손을 모았다가 쌍장을 밀어냈다. 연경소는 나직하게 외치면서 검을 쥔 오른손을 등뒤로 뺐다. 호법승의 달마장은 수비 초식이었음을 간파한 것이다. 섬전(閃電)! 연경소가 평소 검마 냉약의 명성과 적어도 비견되거나, 혹은 능가하 는 이유를 알 수 있는 연결 동작이었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부드러우 면서도 폭풍우와 같이 매서운 살수들. 등뒤로 돌아간 오른손은 호선을 그리며 재빠르게 움직여 한 겹의 두 터운 검막(劍幕)을 형성했다. 실제로 천을 걸어둔 것처럼 흰 빛이 맴 돌며 세 자루의 병기가 튕겨나갔다. 그 수유의 순간을 이용해서 연경 소의 왼발이 정확히 대묵의 오른손 손목 부위를 가격하여 무기를 떨어 뜨리게 만들었다. 나한진에 빈틈이 생겼다. 소림사의 나한진은 크게 두 형태로 나누어 져 있었다. 하나는 백팔 명으로 구성되는 대나한진으로 일명 백팔나한 진이라고도 불리우는 것이다. 이 진법의 특징은 모든 승려가 나무재질 의 봉(棒)과 곤(棍)만을 사용하는 점이며, 주로 3대 제자급의 무공이 높지는 않지만 고른 나한들이 구성원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열 여덟의 금강나한들이 이루는 소나한진, 일명 금강나한진이라는 것으로 지금 연경소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대나한진 처럼 대규모의 적을 상대로 해서는 큰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지만 초절 정의 고수라 할지라도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꼼짝 못하는 묘용이 있었 다. "욱..." 대묵은 병기를 떨어뜨리자 왼손으로 일장을 갈기며 선장을 주으려고 했다. 하지만 막 집어올린 순간 신음을 내며 다시 덜어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번, 그것도 짧게 한 번 가격당했을 뿐인데 손목 부위의 뼈가 골절된 것 같았다. (무서운... 사람이다.) 대묵은 오른팔의 혈을 길게 짚어 잠시 통증을 잠재우고 왼손으로 연 속 3장을 쉭쉭쉭, 하고 날렸다. 연경소가 계속 자기를 공격한다면 비 록 좌우에서 도와준다고 해도 자신이 없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일런지도 모른다. 끈 질기게 방어하는 것보다는 일거에 두드려 부수는 편을 선호하는 본능 이 누구에겐들 없으랴. "파죽삼명!" 연경소가 낭랑히 외치며 청죽검을 회전시켜 한꺼번에 몰려드는 공세 를 모조리 튕겨냈다. 하지만 이때의 파죽삼명 초식은 청죽십이식 원래 의 모습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연경소는 그것을 깨닫고 매우 기 뻐하는 중이었다. (분명히 초식의 구애를 받지 않았다. 무학이 한층 진일보했을까. 아 무튼 나한진의 정교함은 태반이 감소되었을 테니 한 번 부딪쳐 볼만하 지 않은가!) 문득 크게 웅심이 이는 것을 느낀 연경소는 보검을 약간 내려뜨렸다 가 나선형으로 치켜올리며 치명적인 약점인 대묵의 목덜미와 상단전을 노리고 베어갔다. 흔히들 검(劍)과 도(刀)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 외형상 양날 이 있는 것이 검이요, 쪽날(한쪽날)만 있는 것이 도라고 간단히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병기의 차이점은 그 운용에 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검은 도에 비해 가볍다. 둘다 '칼'이라는 뜻이지만 실제 의 쓰임은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다. 가벼운 병기와 무거운 병기 의 차이점은 간단하지 않은가. 초식에 있어서도 검은 날렵하고 예리한 데 비해서 도는 무게있고 매섭다. 검은 베는 초식 이외에도 찌르는 것 이 가능하지만 단순히 베기만 하는 도에 비해서 위력은 미지수이다. 당대에 검으로 깊은 조예를 쌓은 사람 중에서 가장 알려져 있는 두 사람이 바로 청죽검객 연경소와 검마 냉약이다. 물론 숨은 기인이 구 름처럼 많고 무학의 끝을 아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들보다 고수가 없다 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현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을 기준으 로 한다면 단연 그들 둘을 꼽을 수 있다. 항간에는 서역(西域)의 최고 검수라는 백면검(百面劍)이 중원의 두 사람을 능가한다는 설이 떠돌았 던 적이 있었다. 검법 뿐만 아니라 역용술의 대가였던 그는 그 소문을 듣고 간이 부어 검마 냉약을 찾아가서 도전했는데, 그후로 소식이 끊 겼다. 정사를 대표하는 두 검수의 명성만을 높여준 셈이었다. 묘하게도 이 근래 십여 년 동안은 도법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 거 의 없었다. 기껏해야 왜국 인자들의 우두머리가 익힌다는 일도류(一刀 流)를 익혀 한몫 잡는 무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류에 불과했다. 천 산도 을파도 상당한 고수이긴 하지만 연경소 등에 비한다면 손색이 있 었고, 결론은 특출한 고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성숙해(星宿海) 에서 남서 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한 마을에 전대의 고수 한 명이 살 고 있다는 소문은 있었다. 만약 대묵의 손에 선장이 들려 있었다면 상황은 전혀 틀려졌겠지만, 불행히도 손목 뼈가 골절된 대묵은 수십 근이나 나가는 선장을 들 힘 이 없었다. 할수 없이 연경소를 정신없이 공격하는 틈을 타서 승려 한 사람의 계도를 받아들었다. 왼손으로 시전하기에 선장은 너무 무거웠 다. "검과 도의 대결인가?" 연경소의 말은 나직했지만 누구나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내공수 위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 나직한 만큼이나 평화로운 이 음색에서 위기감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시주!" 연경소는 배후를 거의 드러내 놓고 있었지만 나한진의 반대쪽 구성 원들은 그 약점을 짧은 순간 안에 헤집을 수 없었다. 신검합일(身劍合 一)의 자세로 오직 한 점, 대묵의 목덜미를 베어가는 연경소의 쾌속함 은 잔영만을 남기고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열쇠는 대묵의 좌우에 있는 두 호법승에게 있었다. 대묵은 연 경소와 비교해 볼때 힘, 내력, 무기, 기세, 경험 등 모든 면에서 열세 였다. 푸른 빛이 나는 보검과 정면으로 부딪쳤을 때 계도가 배겨날 것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설사 그보다 더한 보검이라고 해도 잔뜩 주입된 진력에 의해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오른쪽에 있던 호법승은 다시 한 번 달마장을 펼쳐서 연경소의 옆구 리를 때리려고 했다. '때리려고'라는 표현은 실패했다는 이야기, 그의 손은 죄없는 허공만을 움켜쥐었고 청죽검의 칼끝은 대묵의 목덜미에서 불과 열다섯 치 정도 떨어져 있었다. 사실 연경소에게 대묵을 죽일 마음은 없었다. 화서운을 제자로 거둬 들일 때 같이 구했다가 소림사에 맡긴 아이이며, 더군다나 대단한 기 재가 아닌가. 항차 소림의 영도자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를 죽이는 것 은 스스로가 용납하지 않았다. 용케도 이때는 최면 비슷한 상태에 있 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혜정대사는 이 악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전력을 다해서 쌍장을 격출했다. 넉 자 가량의 허공을 격하고 강한 기(氣)의 흐름이 성난 파 도처럼 밀려갔다. 호신강기 따위는 단숨에 뚫고 내장까지 스며들 만큼 강렬한 파도였다. (정말 너무하는군!) 연경소는 단지 대묵을 놀래켜 물러서게 하고 진정한 승부를 겨루고 싶었던 것인데 마음대로 되지 않자 화가 치밀었다. 만약 대묵의 목을 베어버린다면 그 기세대로 쏘아나가기 때문에 혜정대사의 일장에 받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림사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일 뿐더러 영원히 살인마로 낙인찍힐 것이 틀림 없었다. 눈 뻔히 뜨고 그런 꼴이 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연경소는 장검을 거두고 좌장을 들어 역시 전력을 다해 소천성(小天星) 장력을 쏟아냈다. 순간 챙! 하는 소리가 나며 대묵의 계도가 두동강 나고 연경소는 땅바닥에 내팽겨쳐졌다. 혜정대사의 안 색은 별일 없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평소때보다 훨씬 붉어져 있었으 며 뒤로 반 보쯤 밀려나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연경소는 검을 거두었으나 실려있던 내경까지는 거두지 못햇다. 그 럴 실력이 없었고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급한대로 비어있던 왼손으로 전력타를 때렸지만 쌍장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내동댕이쳐진 모 습이 된 것이다. 모두들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하고 있는 사람 은 당사자들 이외엔 자운대사 정도였지만 그도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어 손짓으로 공격을 제지하고 나섰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70 02/03 02:08 183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1장... 나한진(羅漢陣) (3) 말로만 듣던 나한진의 위력을 직접 체험한 연경소의 안색은 창백하 다 못해 질려 있었다. 세상에 자신을 백 초 이내에 어쩔 수 있는 무공 은 없었다고 믿었는데, 열여덟의 승려들이 손을 맞잡고 공격하는 데에 는 불과 이십 초가 지나지 않아 내경의 절반 가량을 소모해 버린 것이 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연경소는 청죽검을 한 자 정도 앞에 꽂고 가부좌 를 틀었다. 얼마동안은 공격이 없음을 예견한 것이었다. 어디서 그런 판단을 내릴 만한 근거를 찾았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평소에 이성적으 로 행동하며 작은 일에도 이유를 찾던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였다. 대묵은 시큰거리는 오른팔을 쥐며 슬그머니 물러섰고 반 걸음 물러 섰던 혜정대사는 연경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운공을 하고 있었다. (아직 진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을 실눈을 뜨고 모두 지켜 본 연경소는 일말의 불안감도 떨 쳐버린 채 소주천을 시작했다. 임독(任毒) 양맥(兩脈)이 뚫린 지 오래 였기 때문에 진기의 유통은 자유로웠다. 하긴 그점은 혜정대사도 마찬 가지겠지만. 연경소는 혜정대사보다 약간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만 해 도 죽을 것 같았지만 다시 기운을 회복하고 보니 마음이 또 달라졌다.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 할지라도 뚫고 지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앗!) 연경소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대묵의 빈 자리를 한 노승 이 메꾸고 서 있었는데, 그 승려는 바로 지명대사였다. 분명히 무공을 다시는 쓸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하게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상처 도 없이 눈앞에 버티고 선 거대한 산맥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청죽 검객 아니라 그보다 더한 사람이 온다고 해도 자신이 없어지는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아니다. 눈꼬리와 입가에 흐린 미소가 조금 틀린 것 같다. 만약 아 니라면 누가 저렇듯 지명대사와 같은 모습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역 용술로 변장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설사 본인 이라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크하하! 한번 더 죽으면 그만 아니겠 는가!) 그의 의식은 마치 최면에 걸려든 것처럼 급속도로 스스로를 잃어갔 다. 자기의 마음을 조절할 수 없게 되자 내면에 쌓여있던 분노가 살기 를 띠고 뿜어져 나왔다. "크크, 중놈들... 준비는 되었는가? 부처보다 하나 더 높은 염라대 왕과 면담을 하고 싶은 모양이군 그래. 당신들이 그렇게 받들어 모시 는 석가모니니 보살이니 하는 사기꾼들도 모두 다 염라대왕의 말 아래 에서는 설설 기게 마련이지. 극락은 고사하고 불지옥에 떨어지는 부처 를 상상해 봤나? 그런데 극락으로 간걸 보면 아마도 부처와 보살 따위 의 녀석들은 아부하는 기술이 신의 경지에 달한 모양이지." 연경소의 탄핵은 통렬했지만 광기서린 것이었다. 눈빛은 붉게 물들 어 지옥에서 뛰쳐나온 악마의 그것을 연상하게 했고, 단정하게 빗어내 려 묶은 머리는 파뿌리처럼 흩어져 무서운 느낌마저 주었다. 누가 보 더라도 아수라(阿修羅) 그 자체였다. 그는 침까지 튀겨가면서 말을 이었다. "내말이 틀렸는가? 어디 입이 뚫렸으면 대답이나 해 보시지 그러나? 부처가 염라대왕에게 속살 부드러운 계집애라도 바치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인세에까지 추앙받는 자리에 올랐으며 극락에서 한 자리 꿰어 차고 있을 수 있을지. 살아있을 때에는 꽁보리죽도 못 먹어서 절절 매 던 왕자 거지가 말이다!" 말투는 점점 시비조로 바뀌고 있었다. "모조리 헐어버려야 해. 암, 그렇고 말구. 모조리 헐어버려야 그 부 처인지 하는 놈팽이 사기꾼 거짓말쟁이 오입쟁이 말라깽이 겁쟁이같은 놈이 조금이라도 뉘우칠 것이 아닌가? 소림사는 오랫동안 숭산의 경관 좋은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 정도무림의 기둥인지 뭔지를 사칭하고 다 녔지." 보다못해 혜정대사가 한 마디 했다. "정신이 어지러울 때는 말을 않는 것이 좋을 듯 싶네." 완곡하지만 강경한 발언이었다. 이렇게 타일렀음에도 염치없이 계속 떠들어 댄다면 강제로 입을 막아버리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엄포에 기죽을 연경소가 아니다. "얼씨구! 돌중 중에서도 왕땡초 패거리의 호법자리 하나 꿰차고 있 는 놈이 터진 입이라고 마음껏 지껄여 대는구나. 하하! 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싶구나. 말에는 세금이 안 뱉으니!" 연경소는 침을 탁, 뱉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내가 잠자코 있지 않으면 강제로 내 입을 다물게 하겠다는 못된 심보이신 것 같은데, 오호통재라... 이 개 꼬리 털만도 못한 육시랄 중놈아! 네 입이 찢어지나 내 입이 찢어지나 내기 라도 해볼테냐?"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말들 뿐이요 참람한 욕설이었다. 점잖빼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혜정대사는 안면색을 싹 바꾸었다. "시주가 그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소." "뭐라고? 터진입! 말이면 단가?" 연경소는 아예 혜정대사를 터진입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개구(開口) 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신통할 정도로 무림의 규칙이나 선후배 사이같 은 전통들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부친 건장한 손끝에서 삿대질이 나오며 입에서 나오는 욕설과 어우러졌다. "이런 씹혀먹힐 돌중을 봤나. 차라리 악마와 정을 통하는 편이 나을 정도로구나! 아이고 구려. 역시 냄새나는 돌중이라 산문 전체에 진동 하는구나. 크크..." "그만하시게!" "그만하라니? 내 이름은 연경소지 그렇게 이상한 '그만하시게' 같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감히 부모님꼐서 지어준 이름을 바꾸려 하느냐? 에미애비도 없는 똥같은 녀석!" 가면 갈수록 가관이라더니, 이 경우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생 명을 도외시하고 자살할 마음을 굳힌 사람 같았다. "나한진 따위가 천하의 연경소를 가둘 수 있을줄 아느냐? 지명을 닮 은 광대 하나를 승복 입혀 세워 놓는다고 속을 나인 것 같으냐! 제기 랄!" 혜정대사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별로 이득이 없는 장사를 계속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단 제압해 놓은 후에야 헛소리를 해도 들어 주겠지만 지금은 저런 저속한 말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문제는 연경 소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그는 하나의 초절한 고수요, 경지에 있는 검수였다. 헤정 뿐만 아니라 다른 호법승들, 특히 자운대사의 놀라움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금강나한진의 폭풍우와 같은 공세 속에서 무려 이 십 초를 버티었고 틈틈이 매서운 반격까지 해 오니 놀라지 않을 수 없 없다. "모두다 꽁무니를 뺴려는 심산인가? 꼬리를 말겠다면 굳이 엉덩짝을 치는 나는 아니지 하지만 못난 강아지는 볼기를 때려야 해!" 연경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음 속에서 서로 싸우던 두 개의 완 전히 다른 자아가 정면충돌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잠시 정신이 혼미 해지는 현상이 온 것인데, 그것이 잠시에 그칠런지 죽을 때까지 갈런 지는 자신에게 달린 문제였다. 내공의 깊이나 무예의 고하에 상관없이 정신력과 수양에 따라 결정나는 게 보통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주화입 마에 빠지기 쉬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외부의 심한 압력을 받는다면 일촉즉발(一燭卽發)의 상황을 스스로 만드는 것 이나 다름없었다. "진을 펴도록 합시다."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좌중의 사람들은 소리도 없이 대묵 대 신 나한진을 구성한 인물을 쳐다보았고, 모두다 놀랐다. 연경소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소림방장이자 지명대사 다음 가는 무예의 소유자인 혜심대사가 가세했던 것이다. 혜심대사는 선장 대신 여든다섯 근짜리 항마저(降魔杵)를 들고 있었 다. "대사께서도 끼어드신다, 이 말씀이오?" 연경소는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그가 겁먹어서가 아니라 일순 제정신이 든 것이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한진을 우 습게 보다가 방장대사가 직접 진두지휘에 나서자 겁먹은 것이라고 수 근거렸다. "나한진이 오늘에 이르러 무림천지에 보기드문 강적을 만났으니 빈 승도 최선을 다할 것이오." 대사는 호법승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조사령의 권위로 명하건데, 연 시주를 죽이지 말고 생포하도록 하 시기 바랍니다. 그가 죽는다면 죄를 묻겠소. 녹옥불령(綠玉佛令)을 발 동합니다." 대묵은 아무도 모르게 혀를 찼다. (어디 하나 부러뜨리기 전에는 죽어도 굴하지 않을 사람이다. 흉수 이긴 하지만 정말 대장부인데, 녹옥불령까지 동원해서 생포하라니 죽 여서 잡기도 어려운데 조조(曹操)의 우(愚)를 또 범하는게 아닐까?) 조조는 삼국 시대의 인물로 평민에서 일약 왕위까지 오른 효웅이다. 대묵이 생각하고 그의 그릇됨은, 당양(當陽) 싸움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71 02/03 02:09 174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1장... 나한진(羅漢陣) (4) 대묵은 무예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나이에 비해서는 깊은 조예를 쌓 고 있었다. 사서삼경(四書三經)과 각종 시문(詩文), 경서(經書)는 물 론 역사와 민담(民談), 야화(野話)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식을 쌓았 는데 그 깊이는 웬만한 학사들도 따를 수 없었다. 소림사의 장경각 내 에는 무학서 뿐만 아니라 수만 권의 세상 학문서들이 분야별로 정리되 어 있었고 대묵은 그것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섭렵해 나갔는데 그 수가 거의 천 권에 이르고 있었다. 천 권이라면 적어보이는 것 같지만 일주일에 한 권씩 읽으면 20년, 매일 한 권씩 읽는다 해도 3년이 걸리 는 엄청난 분량이다. 어지간한 석학들도 경전 한 귀절 한 귀절에 매달 려가지고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을만큼 많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 讀五車書)라는 말이 있는데, 천 권이라면 다섯 수레는 충분하리라. 대묵이 떠올린 고사(故事) 이야기로 되돌아가도록 하자. 형주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탁하여 신야(新野)라는 조그만 현에 진을 치고 있던 유비(劉備)는 양양 서쪽의 융중에 살고 있던 제갈공명 (諸葛孔明:본명은 양(亮)이다)을 초빙하여 군세를 기르고 있었는데 어 느날 형주를 삼키려고 달려온 조조의 맹장 하후돈(夏侯惇)과 마주치게 되었다. 공명의 지략과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의 무훈에 힘입 어 10만의 대군을 힘겹게 물리친 유비는 곧이어 밀려오는 조조의 본진 을 감당하지 못하고 필사의 후퇴를 감행했지만 백성들이 따라오는 관 계로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을 하다 결국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당양벌에서 한바탕의 싸움이 벌어지고 유비는 간신히 몸을 빼냈지만 두 부인과 아들은 혼전 중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을 호위하는 역할 을 맡았던 조운, 자룡(子龍)은 필기단창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종횡무 진 휘저으며 수십 명의 대장을 베어넘기고 결국 유비의 아들을 구출해 내는데, 그 모습을 본 조조에게 서서(徐庶)는 이렇게 간한다. - 저자는 둘도 없는 명장이오니 반드시 사로잡아 거두셔야 합니다. 조조는 관우를 잡아두려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적 인 인재수집욕을 고치지 못했다. 활을 쏘지 말라고 명함으로써 조운이 그 험한 싸움터를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 운이 제아무리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었고 손에 보검도 아닌 신병을 들고 있었다 해도 사방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것을 모조리 막 아내면서 인간 숲을 헤쳐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경우는 약간 달랐지만 대묵은 혜심대사의 명이 그 자신의 뜻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지명대사가 의혹을 버리지 못하고 친히 조사하 려는 의도일 것이라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불과 십여 세의 소년이 이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헤심대 사의 '별로 내키지 않아하는' 표정과 미묘한 말투의 여운고 상황을 조 합하고 판단해서였다. "녀석이 자라면 크게 될 것이다. 학문과 무예에 능통하고 잡념이 없 으니 불심도 차차 깊어질 것이고 대자 항렬에서 으뜸임은 물론이고 소 림제일의 신승이 될게다." 시험삼아 한 달 동안 무예를 가르쳤던 지명대사가 이렇게 평할 만큼 대묵은 수재였다. 열심히 노력하는 데다가 천부적인 재능이 겹친 격이 니 금상첨화였다. 대묵은 이렇게 생각했다. (금강나한진이 천하무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저 별로 미워보이지 않는 흉수도 마찬가지이다. 아직까지 나한진이 완파된 경 우는 없었다. 방장스님이 진의 변화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것이 약 간 걸리지만 내가 저 자리에 서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결론은 연경소는 포획되고 말리라는 것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좀더 정확히 말해서 대묵의 관심사는 연경소가 몇 초식이나 버티겠냐 는 것과 호법승들 중 누군가가 부상을 입겠느냐는 것이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큰스님들 중 개개인의 무공으로 저자에 이 길 분은 없는 것 같다. 아마 방장스님이나 혜정, 자운대사님이라면 이 삼백 초식에서 오백 초까지는 끄떡없겠지만...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잘해야 평수를 유지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런 정도의 차이라면 합벽술 의 이점이 크게 작용할 것이다.) 대묵은 나름대로 결과를 예측해 보면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불가 사의한 것은 연경소의 나이가 불과 사십이 안 되어 보이는데도 내공의 깊이가 일갑자(60년)를 넘어보였다. 태어나자마자 수련을 한다고 해도 스무 살 이상 많은 호법승들보다 내공이 높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실 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이들 중 순수한 내력만으로는 가장 뛰어난 자 운대사도 그에게는 약간 손색이 있는 듯했다. 손바닥을 맞대고 싸워보 지는 않았지만 대묵의 눈썰미는 예리했다. 거의 틀린 적이 없었다 해 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을런지는 의문이었 다. (초식의 절묘함과 기회포착하는 눈이 예리하다. 조금 아까도 위험천 만이었지. 그가 중간에 살심을 거두고 방어에 치중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극락에 가고 있었을 것이다. 검법 하나만은 과연 천하에서 제일 간다는 소리를 들을 만...!) 대묵은 생각을 멈추고 싸움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손목 부위는 혜심 대사가 조치를 해 주었기 때문에 별로 아프지 않았다. 이 순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설혹 죽도록 아프더라도. 수개월 동안 수련하는 것보다 한 순간의 깨달음이 중요한 경우가 있 듯이 고수들간의 목숨을 건 대결을 보고 배우는 점도 적지 않다. 서로 가 목숨을 걸고 싸우며 최선을 다하지만 가끔씩은 무공이 훨씬 뒤떨어 지는 제자에게도 헛점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 약점을 상대방 이 포착하면 승부는 끝이지만 실력이 비슷할 경우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똑같이 긴장하고 당황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국수급의 전문가들도 실수를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아주 당 연한 수를 싫어하고 두고 싶은대로 기세껏 둘 수 있다. 실수를 범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며 때로는 초보자들이 발견하는 수를 못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훈수두는 사람이 더 잘 본다는 말이 그냥 거짓 말은 아니다. 사람의 심리를 아주 잘 대변해 주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 긴 금언이다. (아니...?) 십여 초식이 오갔다. 눈부시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의 간격은 점점 짧아지고 재빠른 발 놀림이 만들어내는 흙먼지는 지면에서 반 자 가량을 뒤덮었다. 보기드 문 광경이었다. 대묵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정말로 이상한... 하지만 자기 눈이 잘못된 것 같기도 했다. 다시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 도 하고 오리무중이었다. 다시 칠팔 초가 지나서야 대묵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한진이 아니다.) 두눈에 힘을 잔뜩 주고 십 초 이상을 더 관전하고 나서야 진법의 차 이점을 발견한 대묵이 그것을 확인한 것은 또다시 오 초가 지난 후였 다. (항마진! 저 진법은 이십여 년쯤 전에 서역의 노괴물 중 으뜸이라는 흑로(黑老)를 상대할 때 펼쳐졌던 진이라는데. 장경각에서 얼핏 보았 지만 한두 사람을 공격하면서 기력을 소모시켜 자연스럽게 이기는 데 에는 나한진보다 더 탁월한 효용이 있다고 써 있었다. 아차! 그렇구나. 일찍 알아봤어야 하는데.) 대묵은 모든 승려들이 항마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수 십 초식이 왔다가는 동안 병장기가 바뀐 것 하나도 제대로 못 보았다 니,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아직 어려서인지 가장 단순하고 별볼일 없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 다. 대묵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의 신선한 충격적 경험이었다. 평소에 소림사의 진짜 고수 승려들은 실력을 나타내 보이지 않고 고작 물긷기 나 기초 권법 연습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도 거의 안 보이는 데 에서 하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사부인 혜심대사나 가끔 무 공을 가르치는 지명대사와 호법승들, 먼저 입사한 승려들은 무학을 가 르치더라도 구결이나 가르쳐 주고 주의할 점 몇 가지를 알려주는 것으 로 끝이었다. 나머지는 혼자 익히라는 것이다. 어쩌다 시범을 보여준 다 해도 그것으로 실력을 알 수는 없었다. 일 년에 한번씩 자체 무술 대회가 있었지만 장문제자인 대묵에게는 출전 자격이 없어 또래들과의 시합은 거의 기회가 없었다. - 천금의 기회이다! 그렇기에 눈에 불을 켜고(?) 보는 것이었다. 싸움은 오십 초가 넘어가면서 약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렇다 고 해서 양손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서로 노려보는 것이 아니라 아까처 럼 번개같은 공격이나 번개같은 쾌검의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보는 사람에게는 흥미가 감소하는 것이지만 싸우는 사람에게는 오히 려 더 피를 말리는 상황이 되었다. 술이라면 지옥까지 찾아간다는 희 대의 주랑(酒郞) 벽몽(碧蒙)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무예에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어느날 강적을 물리치고 와서 한 잔 술을 하면서 했던 말이 강호에 퍼져 유명해졌다. - 싸움 중 가장 곤란한 것이 여자와 싸울 때이지. 아무데나 맘 놓고 공격할 수가 있나, 육탄공격을 할 수가 있나? 그다음 어려운 것은 내 공만으로 대결하는 거야. 손바닥을 딱, 맞대고 짧게는 반 각에서 길게 는 몇 시진까지 있어야 하니 죽을 맛이지. 서로 눈치만 보면서 대치하 는 것도 질색이야. 내공대결은 당장 생명줄이 달렸으니 그렇다 치더라 도 이건 너무 지겹거든. 싸움을 하려면 후다닥, 하는 게 좋지. 오늘은 치열하게 휘둘러 이겼으니 기분좋아 또 한잔. 진사람이 안 죽고, 나도 안 죽었으니 또 한잔. 역시 가장 기분좋고 이길 가능성이 많은 싸움은 술싸움이지 뭔가! 그런 의미에서 또 한잔하세... 연경소도 이때에는 나한진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로나마 파악하고 대 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었다. 서서히 자기를 지쳐서 쓰러뜨리려는 것만 같았는데 돌파구가 쉽지 않았다. 몸부림칠수록 점점 더 조여드는 그물 에 걸린 것이 아닌가 싶어서 더 초조해졌다. w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72 02/07 03:06 176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1장... 나한진(羅漢陣) (5) 탄력적이지만 극한까지 팽창되어 곧 터질 것만 같은 그물망은 계속 조여들어 연경소의 사지를 무섭게 압박했다. 고수는 싸울 때 서푼가량 의 힘은 남겨둔다는 말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 것 같았 다. 고수끼리의 대결에서는 '뒤를 남겨둔다'는 생각이 뇌리를 보통 지 배하기 마련이다. 전력을 다해 일격을 했을 경우, 필승을 거둘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즉 십할의 승산이 없는 이상 필살기를 발휘하기란 쉽 지 않다. 당연히 예상되는 적의 반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경소에게 더이상의 뒷 이야기는 없었다. 무형의 채찍은 조 금씩 중압감을 높여왔다. 상대편도 전력을 다하고 있으므로 갑자기 무 공이 증진되거나 일부러 압박을 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버티기가 점점 힘겨워지는 것이다. 시험삼아 이곳 저곳을 견드려 보았지만 항마진의 그물은 매우 촘촘 할 뿐더러 질기기 이를데 없었다. 원래 소림사에는 나한진만이 집단연 수합공의 형태로 존재했지만 특별히 무공이 뛰어난 고수를 포위공격할 때를 대비하여 나한진을 발전시켜 만든 것이 항마진이었다. 강력한 고 수들로 말할 것 같으면 무림 내에서 소림사의 십팔 금강나한승을 능가 하는 사람들을 찾기 어렵고, 진법으로 말하자면 나한진과 유사한 형태 인 항마진이 있었다. 연경소의 무공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어 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뭔가 부자연스러운데.) 연경소의 무예가 노화순청(爐火純靑)의 지경에 달했다고는 해도, 순 리대로라면 벌써 탈진하여 쓰러졌어야 말이 된다. 강호에는 무공이 깊 음을 나타내는 말들이 많았다. 노화순청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화 로의 불이 순수한 푸른 색이 된다는 뜻이다. 도자기 따위를 구울 때에 는 아궁이의 불을 때는데, 온도가 계속 올라다가 보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색 대신 푸른 색이 나온다. 도기장이들은 그것을 보면서 온도를 조절하는데, 노화순청이란 불꽃이 최고조에 달한 것과 같이 무 공 뿐만 아니라 경험과 임기응변 등이 조화된 경지를 뜻한다. 천산(=에베레스트) 위에 올라 내려다본다 해도 끝이 보이지 않게 넓 은 중원 무림이지만 노화순청의 경지에 달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 은 몇이나 도리 것이며 그런 추앙을 받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이런 연경소였기에 온몸이 터져나갈 것 같은 중압감 속에서도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 연경소는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었다. 단지 나한진과의 형태나 공격 형식이 다르다는 것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상대편의 호흡이 약간씩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자기는 수세에 몰리다 못해 궁지에 빠 져 있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따로 없을 정도로 처량하기조차 했는 데 감히 상대를 돌아볼 생각을 하겠는가. 싸움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시정 잡배들이 무턱대고 취중에 주먹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너 무나 몰리다 보면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청죽검객 연경소의 무공이 고강한 덕분도 있었지만 오랜 기 간동안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독특한 승부 호흡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연경소에게는 그런 것이 있었다. "금현탄검(琴絃彈劍)!" 청죽십이식이 연경소의 성명절기라면 금현탄검은 근래에 들어 창안 해낸 수비를 목적으로 하는 검법이었다. 총 아홉 수로 이루어진 절제 된 동작 속에는 공격을 목적으로 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자기 한 몸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아홉 동작을 창안해 내기 위해서 연경소는 2년 가량을 고심해야 했다. 막기만 하는 검법은 어느 모로 보아도 쓸모가 적었다.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막기 만 해서 이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대결에 있어서 계속 막으면서 상대방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격에 끝내는 것이 효율적임은 자명하다. 그런 실력이 있는 경우에 한하겠지만. 연경소가 고심한 까닭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부분을 만들어내 기 위함이었다. 초식의 구애를 받지 않는 수준까지는 성명절기가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는 계산 하에 매 동작마다 청죽십이식과 연결되는 미 묘한 움직임을 삽입해 넣었다. 언제라도 주춤하는 적의 아래턱에 칼날 을 들이밀 수 있게 한 것이다. "산화금성(散花金星)!" 거침없는 기합 소리가 터져나오며 연경소는 서서히 검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불변옹우(不變甕友)!" 연경소의 초식이 갑자기 느려지자 그에 따라 항마진의 공격 속도는 상대적으로 빨라 보엿다. 연경소가 당초 이 검법을 만들 때 초식의 이름에는 신경을 쓰지 않 았기 때문에 이름이 약간 우스운 초식도 있었다. 머리 위의 오른쪽 뒤 에서부터 대각선으로 그어내리며 적의 병장기를 퉁겨내는 구명초식 불 변옹우가 대표적이었다. 불변옹우란 항아리 친구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무슨 말이 그 러한가. 그것은 옛 고사에서 나온 말이었다. 옛사람이 항아리 속에 빠 진 친구를 구하기 위해 항아리를 돌로 깨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줄여 서 파옹구우(破甕求友)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그 일화는 두 사람 이 친해졌다는 말은 없었다. 지음(知音)과 같은 짙은 우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 기에는 생명을 구해줌으로써 돈독한 사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파옹구우는 그런 뜻이 아니다. 순간의 기지를 발휘해서 친구를 구하는 (어른을 부르지 않고 항아리를 깨는) 임기응변, 다시 말하면 근원조차 알 수 없는 낡은 규율이나 형식을 깨버리는 파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름을 좀 우스꽝스러웠지만 불변옹우는 확실히 잘 만들어진 초식이 었다. "채재쟁..." 하는 소리가 나면서 전면에서 날아오던 다섯 개의 선장이 일제히 뒤 로 튕겨져 나갔다. 보검인 청죽검의 예기에 눌린 선장들의 겉표면에는 한 치 가량의 흠집이 났다. 항마진이 잠시 머뭇거리는 틈을 타서 연경소의 수중에 들린 검은 완 만한 호선을 그리는 대신 원형의 궤적을 직선으로 바꾸어 가장 가까운 거리로 찌르며 공격으로 전환되었다. 실날같은 상황과 시간을 이용해 서 공세를 펴는 것은 그의 장기였다. 무림을 울리게 한 청죽십이식 원 형이 펼쳐졌다. "아미타불." 갑자기 난폭한 맹수로 돌변해서 미친듯이 공격을 해대는 연경소에게 혜심대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밖에 없었다. 속으로 불쌍한 중생을 구제헤 달라는 기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미타불, 하하...!" 연경소는 자기도 모르게 그 소리를 듣고는 노골적인 적의감을 표시 하면서 냉소를 흘렸다. "싸우다 안되니까 부처에게 의지하는군!" 연경소에게는 이때가 위기였다. 자기의 정신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 에 놓인 그였다. 다시 정신의 일시적인 착란 증세가 시작되면서 자세 가 흐트러졌다.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함으로 인해 진기가 흩어졌고, 항 마진은 울타리 안에 갇힌 한 인물을 더욱 몰아쳤다. "멈추게." 몇몇의 승려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싸움터 바깥쪽이 들어선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자 항마진은 거짓말같이 멈추었다. "연 시주는 노납과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그는 지명대사였다. "크크, 당신 아직 살아있었구려." "부처께서 아직 노납이 당신 곁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가 보네." "곧 보내드리지." 연경소는 이런 말도 거침없이 했다. 그말은 곧 죽이겠다는 단도직입 적인 선언이 아닌가. 혜심대사의 입술이 약간 씰룩였다. "혜심은 이 사부에게 잠시 동안 그를 맡겨 두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혜심은 두손을 맞잡아보이며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 역력했다. 중년을 지나 장년으로 가는 나이의 그였지만 아직까지 는 지명대사만큼 수양이 깊지 못했다. 지명대사는 두어번 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혜심대사는 깜짝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치명상을 입으셨다. 돌이킬 수 없을지도... 어째서 저자를 잠시 보 시자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명을 거역할 수도 없지 않은가?) 원칙대로 하자면 혜심대사는 녹옥불령을 내려 사부까지 다스릴 수도 있었다. 소림사에서 녹옥불장의 권위는 신성시되었기 때문에 감히 거 역이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녹옥불장이 분실된다면 그것은 최 고의 위급사태에 해당되는 것이다. 조사령일 뿐만 아니라 소림사 내의 전(全) 승려들을 부릴 수 있는 명령권이 있는 지팡이. 사부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누구라도 그렇게까지 냉정하게 사부를 대접하진 않 으리라. 한편 연경소는 이때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강인한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악마의 유혹이다.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되!) 하지만 최면 상태로의 유혹은 결코 뿌리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조금씩 살심(殺心)이 일기 시작해서 허리춤에 꽂아넣었던 청죽검 손잡 이로 오른손을 가져갔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73 02/09 08:54 125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1장... 나한진(羅漢陣) (6) 지명대사는 왼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단 전에 있던 진기는 산산이 흩어져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요양을 필요로 하는 중상을 입었다. 연경소의 살심은 겁없이 커져 갔다. 정대사가 지명대사쪽으로 걸어가는 연경소를 제지하고 나섰다. 정 확히 말하자면 제지하려고 몸을 날린 것이었는데, 연경소의 반응이 조 금더 빨랐다. "크하하!" 몸이 활처럼 구부러지면서 마치 경극단에서 열연하는 무용수의 모습 처럼 유연하게 뒤쪽으로 2장을 연속으로 퍼부었다. 공중에 반쯤 떠 있 던 혜정대사는 맞받아칠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선수를 미리 빼앗 기는 결과라고 판단했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장력을 피한다는 것이 결코 요원한 일은 아닌데 혜정대사는 늙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재빠 른 몸놀림으로 가볍게 옆으로 물러났다. "훌륭하오만!" 연경소는 혜정대사를 치자는 것이 아니었다. 뒤쪽으로 장력을 쏟아 내어 생긴 추진력에 땅을 박참으로써 생기는 부력을 이용하여 눈 깜빡 할 사이에 지명대사 앞까지 내달았다. "막아라!" 헤심대사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금강나한승들은 일순 벌어진 입 을 다물지 못했다. 연경소는 전광석화와 같은 솜씨로 지명대사를 부축 하고 있던 두 명의 승려를 제압해 버렸다. (저렇게 빠를 수가?) 대묵은 크게 놀랐다. 눈동자에 들어온 것이 도깨비불 마냥 신기루나 환상은 아닐진대 인간이 어떻게 저다지 빠를 수 있단 말인가. 저 정도 라면 날아가는 파리 잡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시간의 겨우 절반 가량. 그야말로 유성처럼 지나간 일련의 동작들이었다. 연경소가 땅을 박차고 한 치 정도 위로 떠오르자 지명대사의 좌우에 서 있던 승려들은 각각 왼손과 오른손을 내밀어 장력을 발출했다. 왼 쪽에 서있던 승려는 일각(一恪)이라는 승려로 산화장을, 오른쪽에 서 있던 승려는 일조(一條)라는 승려로 학권(鶴券)을 펼쳤다. 두 승려 중 에서는 일조 쪽이 약간 내공이 깊었다. 감히 금강호법승들에게 비할바 는 아니었지만 일자 항렬의 스님들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 는 수좌들이었다. 그러나 그 반항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전력을 다해 장력을 펼 쳐낸 때와 그것이 실망으로 바뀌었던 때의 시간차이는 불과 얼마 나지 않았던 것이다. 연경소는 본능적으로 오른쪽에 있는 승려의 공격이 좀더 강맹하다고 느꼈다. 앞서 나한진과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은 것과 같은 맥락의 것이었다. 두뇌가 그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피부로 느끼는 일종의 마력 이었던 것이다. 곧이어 머리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퍽, 퍽!" 좌중이 조용했기 때문에 유난히 큰 소리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났 다. 그 시간차가 지극히 짧았기 떄문에 알아챈 사람은 무공이 뛰어난 이십여 명과 귀가 영민한 대묵 정도였다. 두 사람의 호위승 중에서 좀더 불쌍한 꼴을 당한 것은 일조였다. 연 경소는 그가 더 강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왼손으로 일지(一指)를 펼쳐 내어 왼쪽의 승려, 일각을 먼저 제압하고 일조는 직접 무영퇴로 가슴 팍을 후려쳤다. 막을 시간적 여유도, 심리적 여유도 없었다. 눈앞에서 연경소가 뛰 어올랐다 싶었는데 어느새 한 사람은 그 자리에 뻣뻣이 굳어버렸고 한 사람은 가슴팍을 부여잡고 혼절해 버렸다. 갈비뼈 십여 개가 부러져버 린 것 같았다. "싸움은 이렇게 하는 거요. 부처 따위에게 의지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게 아니란 말이오! 만약 당신네 소림사가 전혀 뛰어난 무학과 전 중원에 걸친 교류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렇게 엄청난 세력을 떨칠 수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오?" 말 자체는 격한 감정에 처한 상태 아래에서 나왔기 때문에 통렬했지 만 그보다 연경소의 한손이 지명대사의 멱살을 잡고 있고 다른 손에는 청죽검이 시퍼런 살기를 띄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아무도 반박하지 않 았다. "크크... 젠장! 제기랄, 당신네 승려들은 나라에서도 봐준단 말이지. 그렇소 않소. 세금도 없고 소림사 정도 되면 굳이 아랫사람들이 쌀 시 주를 받으러 동네로 다닐 필요도 없겠지. 각처에서 들어오는 선물들과 사치품들을 조금씩만 팔아도 크게 한몫 얻을테니까. 만약 그것들이 없 었다면 이 덩치가 큰 사찰을 어떻게 버텼겠소." 대묵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당신은 궤변을 늘어놓고 있어요." "대묵아!" 혜심대사가 엄한 목소리로 대묵을 제지하자 연경소를 실웃음을 흘리 며 말했다. "후후, 맞소. 그래... 맞단 말이오! 내가 하는 말들이 모두 궤변이 라고 합시다. 그러면 당신들은 전혀 거리낄 것 없는 성인군자들이라는 말이오. 아니지, 아니지. 냄새나는 화상들은 살아있는 부처가 되길 원 하니까 서방의 극락정토(極樂淨土)애서 온 활불(活佛)이라도 된단 말 이오?" "그래도 궤변인 것은 인정해야 할 걸요!" 대묵은 지지 않고 덤벼들었다. 혜심대사는 철없이 날뛰는 대묵을 엄한 눈빛으로 막으려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어차피 지명대사는 연경소의 손에 떨어진 후였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무공을 시한적으로나마 완전히 소실한 지명대사의 생 명은 이미 없는 것과 진배없었다. 밑져야 손해라는 생각으로 대묵에게 기회를 준 것이었다. 아직 완전히 승려가 된 대묵이 아니었다. 아직 천진한 소년티와 장 난기가 남아있었다. 소림사의 후계자가 되려면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관문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말조심하거라.) 혜심대사는 이렇게 전음을 보냈다. 고수들은 남의 전음을 훔쳐 들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극도로 얇은 실처럼 목소리를 뽑아냈다. (알겠습니다. 제자가 일단 시간을 끌어 보겠으니 용서를 바랍니다.) 혜심대사는 깜짝 놀랐다. 대묵의 전음은 상당한 지경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74 02/09 08:55 152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1장... 나한진(羅漢陣) (7) 대묵은 헤심대사의 허가를 얻고 더욱 의기양양하여 따지고 들었다. "무슨 말인가요?" 연경소는 갑자기 시치미를 떼는 대묵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여 잠 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라니?"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영악하기는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 라는 점이 상대하기에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궤변이 무슨 말이냐고요." "내 궤변이라니?" "당신 궤변 말이에요. 남아가 한 번 한 말을 번복할 셈인가요?" 대묵의 짧고 툭툭 쏘아대는 듯한 말투는 안 그래도 가뜩이나 흐려져 있는 연경소의 정신을 더욱 흐려지게 만들었다. "너... 무슨 말은 하는 것이냐?"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요." "뭐라구?" 연경소는 자기도 모르게 지명대사를 등뒤로 하고 대묵을 똑바로 쳐 다보고 있엇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녔다고 인정받는 그였지만 정신 이 혼미한 가운데 한갓 어린아이에게 우롱당하는 것이다. "뭐라는 것이냐?" 그는 뒤를 힐끗 쳐다보며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지명대 사의 안색은 파리했지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다만 눈빛 가득 수심이 어려있을 뿐이었다. 그 눈빛의 의미는 누구도 알 수 없었 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눈빛이 연경소를 책망한다던가 하는 것은 아 니라는 점이다. "당신은 사람들을 죽였어요.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 또 헛소리만 하 겠죠. 하지만 물어보겠어요. 왜 죽였죠?" 연경소의 눈동자 주위가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광성(狂性)이 발 작하는 것을 진기로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 부르르 떨렸 다. (나를 공격하려고 그러나?) 대묵은 지레 겁먹었지만 혜심대사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 고 뒤로 물러서려는 발걸음을 간신히 제자리에 잡아놓았다. (말싸움으로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하지만 사조님을 구해낼 수 있을 러닞는 미지수인데. 괜히 그를 자극해서 그가 사조님을 공격한다면 나 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된다. 그러나!) 그냥 놔두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 돌변할 지 모르는 연 경소이고 보면 움직이는 화약고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고강한 무공 과 풍부한 경험이 노련미를 형성하여 십팔 금강나한진과 항마진이라는 엄청난 위세로도 그를 쉽게 묶어둘 수 없었다. 대묵은 잠시 입을 다물고 머리를 굴렸다. (앗! 그가 뭘 하려고 그러지?) 대묵은 연경소가 뒷걸음질쳐서 지명대사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깜 짝 놀라서 그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입이 채 떨어지기도 전 에 느릿느릿해 보이는 연경소의 발걸음은 구름처럼 사뿐히 내딛어 지 명대사의 여덟 개소의 혈도를 찌르고 있었다. 지명대사는 한 번 정도 그 공격을 퉁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두번째의 공격은 절대로 막아낼 수 없 었기 때문에고, 그다음의 이유는 첫번째의 공격을 확실하게 막아낼 자 신이 없었으며 표면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적으로 가장 절실했 던 마지막 이유는 연경소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고 대책을 강구하 기 위함이었다. (아미타불. 연 시주, 어서 정신을 차리시오.) 아혈까지 짚혔기 때문에 목소리로 되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지명대사 에게는 진정으로 연경소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만약 연경소가 그 것을 들었다면 한바탕 반박을 했겠지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대자대비 (大慈大悲)한 마음이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수양이 또다른 경지로 들 어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은 지명대사가 열반에 들게 되는 삼 년 후이 다. "진묵!" "...!" 연경소는 돌연 지명대사를 땅바닥에 앉히더니 대묵의 속가적 이름을 불렀다. 대묵은 대답할 뻔 했으나 목구멍까지 올라온 소리를 다시 꿀 꺽 삼켰다. "진묵!" "당신은 나의 속가적 이름을 자꾸 부르지 마시오. 나는 불가에 귀의 한 몸, 대묵이라는 법명이 따로 있소. 그것이 소승의 이름이오." 대묵은 꾹 참고 갑자기 어른스럽게 말했다. 비록 수 년 전이지만 소 년의 뇌리 속에는 그날의 참사가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가 마 음 속으로만 사모하던 화서운의 누나, 화미방과 헤어지게 되던 날 실 컷 울었던 그 기억도. 언제나 참선을 할 때면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것 을 간신히 떨쳐버렸나 싶었는데 연경소가 무심코 한 말이 소년의 가슴 을 그리고 뒤흔들어놓는 것이었다. 연경소는 정신이 혼미했기 때문에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녀석이 참 많이 컸군. 어른스러우면서도 벌써 고승의 기도가 은연 중에 우러나오지 않나. 정말 불가의 동량지재가 되겠군... 그런데, 왜 어린 녀석이 늙은 체 하면서 위선을 떠는거지? 냄새나는 중이 될 팔자 가 된 주제에. 크크! 마신... 당신은 저 아이의 죽음도 원하오? 그렇 다면 죽여드려야 겠지만, 이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소. 연 아무개가 아무리 간이 크다고 하지만 감히 소림사에서 사람들이 보 는 가운데 살인할 용기가 나겠소?) 자기가 이미 여러 사람을 죽였고 최고 배분의 지명대사마저 암산을 가해 일시적으로 무공을 쓸 수 없게 했으며 지금은 혈도를 찔러 강제 로 앉혀두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진묵! 미방이 보고 싶지 않은가?" 연경소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지 껄인다'는 낱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앞뒤가 맞지않고 논리에 어긋나며 조리에도 닿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 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한밤중에 집밖에 있는 화장실에 갈 때 등불이 없으면 느끼는 두려움과 같은 종류의 것이기도 하고 그냥 단순한 표현욕구이기도 했다. 아무튼 자기 조절이 안 되는 중이었다. 대묵은 입을 한 일자[一]로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가 시 절에, 사춘기에 채 들기 전부터 세상에 있어서 유일했던 여인. 천사처 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왔지만 손을 닿아도 뻗치지 않는 멀고 높은 곳에 있는 듯한 그녀를 연경소가 막상 들고 나오자 당혹감이 앞섰으나 쉽게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직도 벗어던지지 못했단 말이냐!) 혼자 있을 때면, 새벽 공양 때 높은 스님들과 함께 줄 끝에서 졸면 서 참선할 때면 늘 망막에 어렴풋이 맺히는 여인의 심상(心像)을 잊는 것이 그렇게도 힘들었거늘 그냥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것 같은 연경소 의 말 한 마디에 다시 생생하게 기억되는 이것은 무슨 악마의 속삭임 이란 말인가. "말을 돌리지 마시오." 대묵은 가까스로 이렇게 대답했으나 다음 말을 들을 용기가 나지 않 았다. 당장이라도 얼굴을 감싸쥐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몇 시간 동안 그녀를 생각해야만 할 것 같았다. 만나게 해 준다고 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75 02/11 11:36 174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1장... 나한진(羅漢陣) (8) 거의 대묵과 붙어있다시피 하며 생활하는 혜심대사는 대묵에게 모종 의 변화가 있음을 알아챘다. 마음 속으로 갈등이 생기는 것이 눈에 선 했다. (정해(情海)는 깊고 깊으니 오직 두터운 불심으로 억누를 수 있다는 것을 아느냐.) 혜심대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본 연경소는 무슨 지시를 하는가보다 하 고 귀를 기울여 엿들으려 했으나 허사였다. 원래부터 무슨 음성이 오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연경소는 혜심대사의 무공 수준에 대해 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일부러 보여주려는 것인가. 입술을 움직여서 전음을 보낸다는 것을 알아채게 한 후 엿들을 수 있으면 해보라는 것인가?) 혜심대사는 연경소가 그런 줄은 모르고 계속 중얼거렸다. (참선 때마다 생각하던 그 아이가 누구인줄은 모르나 차라리 만나게 해주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다. 그보다 눈앞에 대적이 있으니 슬기롭 게 대처해야 할텐데. 강호의 냉혹한 수법을 아는 것은 좋지만, 대묵이 그것을 배우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천년 소림의 앞날이 저 아이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면 노납의 지나친 근심일런지. 그러기만을 바라고 있지만 생각을 지우기 어렵구나.) 연경소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늙은이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여차하면 지명대 사를 방패막이로 삼아야 겠는데 그것은 이 청죽검객의 명성에 어울리 지 않는 치졸한 짓이다. 다른 돌파구는 없는 것일까?) 혜심대사는 물론 대묵도 연경소의 심리는 알 수 없었다. 살아야겠다 는 욕망이 있는 이상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범인들이 함부로 생명줄이 나 다름없는인질을 죽이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평생동안 불문에만 몸담고 살아온 혜심대사나 아직은 어린아 이 축에 드는 대묵이 그것을 헤아린다는 것은 원래부터가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혜심대사와 일대 일의 결투를... 아니다. 수락할 리가 만무할 뿐더 러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전력을 다한다면 이기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수일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고 말 것이다. 나참 이 런 경우가 또 있나.) 연경소는 아직도 자기가 한 행동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에 목숨이 위태롭기 때문에 어째서 소림사의 승려들이 자기를 공 격하는지 대해서 조금의 의앙함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미방...) 이때 대묵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던, 그래서 억지로 잊어야만 했던 어릴 적 사랑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 다. 큰눈과 작지만 입맞추고 싶은 충동을 일게끔 하는 도톰한 입술. 3류 소설에서나 나옴직한 말들이지만 화미방의 용모는 나이에 비해 너무나 성숙미를 풍겼다. 대묵은 감히 접근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환상을 깬 것은 연경소였다. "나는 네가 머리속에서 사랑놀음을 하는 것을 더이상 봐주고 서있을 수가 없구나." "......!" 대묵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말조심하시오." 연경소는 히죽 웃었다. "흐흐, 왜 또 말투가 그모야이냐. 화미방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더니 갑자기 말투가 공손해지더구나. 또 그 환상을 깨니까 본래의 무뚝뚝하 고 거지같은 냄새나는 중의 말투로 돌아간 것이냐? 오호통재라, 너 묵 이도 이젠 스님이라 이거로군. 젠장... 젠장!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 데 그걸 중으로 평생 살겠다고? 제기랄, 그게 말이나 되는 생각인 것 같으냐? 너만 손해라구. 차라리 뛰쳐나와서 계집질이나 한 번 해 보고 파문당하는 게 어떠냐!" 대묵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굳어있는 석상으로 착가하지 않은 것은 슬며시 팔짱을 꼈기 때문이었다. 연경소는 계속 놀래댔다. "왜 계집질이라는 말에서 안색이 훽 달라지는 거지? 도둑이 제발 저 린다고 혹시 그 아이와 이미 정을 통한 것은 아니냐? 흐흐! 하지만 그 렇지는 않을 거야. 그렇고 말고. 아마 손목 한 번 잡아보지 못했을 텐 데." 의도적으로 화를 돋구려는 행동이었지만 대묵으로선 참기 어려운 것 이었다. "말조심 하라고 했소." 연경소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라? 소림사의 냄새나는 돌중들 중에는 말고기를 먹는 사람도 있 나보지. 나 연모가 일찌기 중들도 고기를 먹고 땡깡을 부린다는 말을 들었지만 소고기나 개고기가 아닌 말고기까지 먹는다는 소리는 오늘에 와서야 처음 들었다. 좋은 말을 해주었군 그래. 저기 네 사부라는 대 머리도 말고기를 먹느냐?" "당신..." 대묵이 반격할 말 중에서 가장 신랄한 것을 찾느라 잠시 머뭇거리는 틈을 타서 연경소는 계속 몰아붙였다. "나는 네 부인이 아니다. 함부로 당신이라고 부르지 마. 차라리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어떠냐? 악당들은 내 이름을 부를 수 없어. 더러워 지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물에 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니. 언제까지 고 내가 죽기 전까지는 불리울 이름인데 되도록이면 깨끗이 쓰는게 좋 겠지." 대묵은 혀를 찼다. "횡설수설 하지 마시오." 연경소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너 예상 외로 멍청하지 않고 예리하구나. 하지만 너 언중유골 (言中有骨)이라는 말 들어봤지? 말 속에 뼈가 있다는 진리 말이야. 취 중진담(醉中眞談)이라는 말도 있어. 그걸 인정하는지 잘 모르겠네. 인 정하니?" 대묵은 대답했다. "자꾸 이상한 쪽으로 말을 하지 마시오." 연경소는 청죽검의 검집을 만지작거렸다. 그 동안에도 말은 청산유 수로 흘러나왔다. "인정하느냐고!" "뭘 말이오?" "너 혹시 귀머거리냐?" "무슨 소리요." "아니라는 거냐?" "그렇소." "그렇다면 벙어리가 틀림없겠군." "뭐요?" "어라, 말을 하네. 아까는 벙어리였는데 부처가 신통력이라도 내려 서 갑자기 말문이 트였나 보네. 아하, 그 부처 한 번 신통하군. 나도 한 번 믿어볼까? 흐흐... 아니지. 부처가 날 믿는 것이 훨씬 편할텐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도대체 무슨 소리요!" "모르겠냐?" 대묵은 머리속이 혼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친 사람을 상대로 더이 상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지만 그만둘 수도 없었다. 사조님이 적의 수중에 달려있기 때문에 헤심대사 등이 대책을 강구할 때까진 시 간을 끌어야 했다. 정작 문제는 혜심대사 등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무력으로 구출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진작 했을 테지만 그런 성질의 문제는 아 니었다. 항마진이나 나한진을 최대한 발동한다고 해도 일초에 연경소 를 제압할 수는 없었다. 지명대사의 생명을 도외시하고 전력을 다한다 면 혹시 약간의 상처를 입힐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르겠느냐고 물었다." 대묵은 머리속을 대강 정리하고 있었는데 연경소의 일갈이 묘한 시 기에 떨어지자 모든 것이 다시 흩어져버렸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76 02/11 13:43 95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1장... 나한진(羅漢陣) (9) "네가 이미 귀머거리가 아니라고 했지 않느냐. 들었는데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벙어리임에 틀림없지. 내말이 틀렸나? 모르겠느냐고 묻는데도 묵묵부답,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거냐? 계집질할 생 각만 하면 다냐?" 아무리 어리다지만 스님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대묵은 얼굴이 벌겋 게 흥분했지만 달리 응수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요컨데 아직도 완 전히 어렸을 때의 감정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아, 관두자. 너는 그런데 왜 그렇게 거기에 팔짱을 끼고 폼잡고 있 는 거냐?" 대묵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연경소는 그것 하나도 놓치 지 않고 있었다. "크크, 이유를 말해야지 고개를 가로젓다니? 나를 무시하는 것이 틀 림없군. 네가 감히 나와 검을 겨눌 용기가 있을 리가 없겠지만 소림사 의 땡중이니 혹시 모르지, 간이 부었을지도... 한번 붙어보는 것은 어 떠냐?" 이때 연경소의 등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연 시주, 이제 방황을 끝내시게." "...!" "...!" 놀라워하는 눈빛과 수많은 침묵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목소리의 주 인공이 그 자리에 굳어있어야만 할 지명대사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연경소의 눈동자에 강한 불신의 빛이 떠올랐지만 이내 사라졌다. 아 무리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무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배분을 지닌 기인이었다. 대묵과 입씨름을 하는 동안 필시 전력을 다해 혈도 를 풀어냈으리라. 지명대사는 힘겨워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말 한 마디 하는 데에 도 적지않은 힘이 소모되는 것 같았다. "역근경을 다년간 수련하면 신체가 타격을 입었을 때 자연적으로 치 유가 되는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강해진다네. 기회가 있으면 배 우도록 하게나." 지명대사의 말에는 적의가 없었다. 마치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 소중 한 물건도 한낱 휴지조각과 같아 스스럼없이 건네주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고 하듯이 자연스러웠다. 연경소의 고개가 좌우로 세차게 가로 저어지는 것을, 그 순간 누구나 볼 수 있었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그는 돌연 검을 땅바닥에 내리꽂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의 머리 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형, 기회입니다.) 혜정대사가 몰래 전음을 보냈다. 지명대사를 구해내고 연경소를 제 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고수끼리의 싸움에서 이정도로 빈틈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준비하시게.) 혜심대사도 이렇게 전음을 보내자 대묵을 제외한 열일곱의 승려들이 긴장된 얼굴빛을 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헤심대사의 신호만 떨어 지면 대묵을 중심으로 다시 새로운 진을 형성하여 일거에 연경소를 궁 지로 몰아넣을 태세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명대사의 안위는 별로 걱 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기 한 몸을 지켜내기도 급급하게 될 것이 분 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치밀한 준비는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명대사의 낮지 만 분명한 한 줄기의 음성이 그들의 손에서 힘을 빼어놓았다. "노납의 청일세. 연 시주를 공격하지 말게." "사부님!" 혜심대사는 원래 전음으로 전하려고 한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밖으 로 튀어나오자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타날 때보다 더 빠르게 곧 없어지긴 했지만 수십 년동안 수양을 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 로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는 점이 부끄러운 것이었다. "혜심아. 녹옥불령을 발동하면 모르지만 노납의 청을 한 번만이라도 들어다오." "사부님, 아까도..." "안다. 그렇지만 내 청이다." "그러겠습니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77 02/12 06:00 176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2장... 사건의 전모 (1) 지명대사는 갑자기 양처럼 순해진 연경소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따라오게나." 연경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그가 땅에 꽂아둔 청죽 검을 뽑아 들었을 때 혜심대사를 비롯한 몇몇의 눈썹이 여덟 팔[八]자 를 그리며 휘어졌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청죽검은 가만히 검집 속으로 빨려들어갔던 것이다. 일반적인 강호의 사건이었다면 혜심대사들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 는 상황이었다. 웬만한 검수라면 검을 빨리 뽑는 발검법(發劍法)을 연 마하게 마련이고 저항력이 미미한 지명대사 하나쯤은 처치하는데 몇초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혜심대사 등은 검집에 검을 꽂아넣는 행 동만으로 만족하고 안심했으니 강호의 경험이 부족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자운대사와 또 한 명의 승려가 지명대사의 좌우로 달려와 섰다. 혹 시 연경소의 마음이 돌변하여 미치지는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지금까 지도 예측불허이지 않았던가. 지명대사로도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연경소를 자극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 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혜유(慧柔)는 돌아가거라." 금강나한승 중의 중진격인 혜유대사는 멋적은 표정을 하였으나 금방 합장을 해 보이고 뒤로 물러섰다. "소승은..." 자운대사가 혜유를 물리치고 자신만을 동행시키는 지명대사의 저의 를 알지 못해 말꼬리를 흐렸다. 지명대사는 대답했다. "자운(紫雲)은 장경각에 가서 두 환의 소양단(小陽丹)과 천산설엽초 (天山雪葉草) 한 뿌리, 정심단(淨心丹) 네 환을 가져오도록 하라. 서 두르도록 해야 할 것이니라." 자운대사는 무림 중에서도 특히 배분이 높기 때문에 사실은 혜심대 사보다도 반쯤은 어른이었다. 금강나한승 중 최고배분인 혜정대사조차 그에게는 한 걸음 물러서는 판국이었으나 지명대사만은 어떻게 따져도 그보다 반 배분 이상 높기 때문에 반말을 하는 것이었다. 명령조의 말 이었지만 언제나 기분나쁘지 않게 말하는 지명대사였다. 자운은 고개 를 숙이고 물었다. "어디로 가져가야 하겠습니까?" 지명대사는 짧게 대답했다. "선사들이 잠드신 곳으로." 자운대사는 두 손을 모으고 읍하는 것으로 예를 대신했다. 그리고는 서두르라는 지명대사의 말을 상기하고 막 달려가려고 했으나 혜심대사 가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장문인, 무슨 일이오?" 혜심대사의 얼굴 표정은 심각했다. "사부께서는 그자의 미친 정신을 고치시려는 것 같소. 약재를 가져 다 드린 연후에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호법을 서주기 바라오. 만약에 사부님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소리를 질러 연락하고 그자를 잡아 두시 오." 자운대사는 혜심의 걱정을 알 것도 같았다. 자기가 약간 경시당하는 듯한 느낌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한데..." 자기가 연경소를 당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진정한 고수라면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법이다. 실력을 과신하여 만 용을 부리는 것은 시정잡배들이나 그러는 일, 고수가 목숨을 걸고 싸 우는 경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에나 그랬다. 실력이 없으면 과 감히 몸을 빼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운대사가 물은 것은 소양단에 관한 일이었다. 소림사의 귀한 약재 이며 자랑거리 중의 하나가 소양단이었다. 여섯 가지의 희귀한 약초로 제조된 소양단은 그 효력이 대환단(大丸丹)의 영능에는 미치지 못하지 만 요상(僚傷)과 원기 회복, 내력 증진에 탁월한 도움을 주는 것이었 다. "사부께서 작년에 대환단 하나와 소환단 여섯을 제조하시면서 소양 단도 서너 개 만들어 두셨다오. 장경각 서쪽의 환약실에 가면 영약들 만 모아둔 곳이 이을 것이오. 그곳을 잘 찾아보면 각종 환약들이 있을 것이오." 자운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명하겠습니다." 혜심대사도 고개를 쓰덕여 보였다. "조심하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자운대사는 몸을 날려 장경각 쪽으로 사라졌다. 뒷모습이 전각들 사이로 없어져 안 보이게 되자 그제서야 지명대사 는 연경소를 재촉했다. "연 시주, 나를 좀 부축해 주겠나. 몸이 늙어서 그런지 좀 힘드는구 만." 연경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한 팔을 자기의 어깨 위로 얹고 부축했다. 자기의 일격을 맞지 않았다면 이렇게 걷기조차 힘들 리 없 었다. 약간 죄책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경계심을 품지 않았다. 대묵의 눈빛이 약간 이상해 졌으나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연경소에 대한 경계의 눈빛은 아니었으 며 어린 승려에게 감동을 준 지명대사의 거인과 같은 풍모에 대한 존 경의 그것이었다. 선사들이 잠든 곳... 소림사의 금지구역 중의 한 곳은 조사동(祖師 洞)을 향해 지명대사와 연경소가 떠난 후 얼마 안 되어 두 명의 중년 스님들이 허겁지겁 뛰어와서 급박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두 떼의 괴인들이 나타나 소림사를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침 입해서 내전을 향해 공격해 오던 두 명은 잠시 물러갔으나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형편입니다." 혜심대사는 약간 놀랐다. "두 떼의 괴인들이라니? 그 수는 얼마나 되더냐." 왼쪽의 승려가 말했다. "한쪽은 여섯 사람입니다. 그들은 제자 세 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있 으며 계속 전진 중인데 명선(明宣) 사숙님과 명철(明哲) 사숙님이 도 와주셔서 간신히 막아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병기를 쓰는데 당해내기가 어렵습니다." "형제 승려가 고생하고 있구나. 외부에서 귀의한 승려들이지만 공을 세우는구나... 다른 한 곳은 어떠냐?" 이번에는 오른쪽 승려가 말했다. "그곳도 가히 좋지 않습니다. 무려 칠팔십 명의 괴인들이 머리에 검 은 두건을 두르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공격을 가해 오고 있습니다. 괴 인들은 세 종류의 옷을 입고 있는데 일종의 진법인 것 같습니다. 순식 간에 십여 명의 제자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혜심대사는 옷자락을 떨쳤다. "그 정도인가!" "예..." "제자들은 모두 후퇴하여 내전으로 들어오는 관문에 대나한진(大羅 漢陣)을 치도록 하라. 나한진의 형태는 대외적(對外敵) 관문방어(關門 防禦)로 만들도록." "예!" "뛰어가라. 시간이 없다." 두 승려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죽을 힘을 다해 뛰는 모습 이 역력했다. 혜심대사는 연경소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감 히 소림사에 뛰어들어 난동을 부리는 패거리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 웠다. (두 패거리라니... 서로 상관이 있는 패거리일까. 더군다나 두 사람 이 침입했다가 물러갔다니, 무슨 우연의 조화로 하루동안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인가? 게다가 연경소라는 희대의 고수의 난동까지 일어났 다. 무슨 일인가?) 아직은 알 길이 없었다. 혜심대사는 정신을 수습하고 남아있는 금강나한승들에게 말했다. "한 번 가보도록 합시다." 이들 중 아무나 한두 사람이 달려가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혜심 대사는 아무도 내전에 발걸음을 하지 못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78 02/13 04:01 151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2장... 사건의 전모 (2) 혜심대사는 의식불명인 혜청대사를 객방으로 옮겨 잘 돌봐주도록 조 치하고 자운대사를 제외한 열여섯의 금강나한승과 대묵 등 일자(一字) 와 대자(大字) 항렬의 제자들 오십여 명을 이끌고 연무장과 내전의 분 기점에 있는 현문에 도착했다. 전투는 소강상태였다. "방장스님이 오셨습니다!" 혜심대사의 허락을 받은 대묵이 크게 선포하자 좌중은 갑자기 조용 해졌다. 수십 명을 대동하고 나타난 혜심대사가 무언가 한 마디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현문 앞에는 백여덟 명의 제자들이 커다란 학의 날개 모양으로 늘어 서 있었다. 수많은 나한진의 변화들 중 바깥쪽에서의 압력에 효과적으 로 대응할 수 있는 관문방어의 형태로 학익진(鶴翊陣)의 간결한 모양 을 하고 있으나 적의 공격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화가 가능한 변화무쌍 한 진법이었다. 혜심대사는 그윽한 시선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혹시 저들은 천산칠괴가 아닌가?) 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왼쪽에 일렬로 서서 병장기를 움켜잡고 있는 여섯 사람이었다. 혜심대사는 그들 중 사의 구숙이 소림사 경내 로 들어왔다가 변을 당한 사실을 깜빡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천산칠괴라면 당연히 일곱이어야 하는데 한 명이 보이지 않는구나. 가운데에서 칼을 품고 있는 시주가 맏형 격인 천산도 을파겠구나. 강 호의 소문에서 듣자면 저들을 통솔하는 을 시주의 인품이 뛰어나서 아 우들의 성질을 억지로 누르고 있다던데, 잘못 들은 것 같기도 하구나. 어쩐 일로 소림에 뛰어들었을꼬.) 오른쪽에는 대략 오륙십 명 가량의 괴인들이 서 있었는데, 제자들의 보고와 같이 머리는 하나같이 풀어헤친 데다가 검은 두건을 덮어 쓰고 잇었다. 옷은 검은 색[黑], 붉은 색[赤], 푸른 색[靑]으로 나누어져서 일정한 대오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수가 엇비스름해 보였다. 혜심대사는 대묵이 소매를 흔드는 것을 느끼고 의아해하며 뒤를 돌 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대묵은 들릴락 말락하게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아마도 구궁진의 변칙 같습니다." 혜심대사는 총명한 제자의 견식이 풍부하고 학문이나 진법의 조예는 자신보다 훨씬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공은 형편없이 낮기 때문 에 자연 의심이 갔다. "그걸 어떻게 알겠느냐?" 대묵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실날 같았다. 자기의 의견에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틀리더라도 탓하지 않으시겠다면 한 번 저의 의견을 말해보지요." "말해보거라." 혜심대사는 선선히 응낙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자의 사견에 불과합니다만..." 대묵은 이렇게 서두를 꺼냈으나 잠시머뭇거렸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자기의 의견을 정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없는 것 같기 도 했다. 혜심대사는 재촉했다. "시간이 없다." 대묵은 말을 이었다. "저들의 인원수는 총 오십사 명입니다." "그 정도 되는 것 같구나." "사실 다 세어보지는 않고 이야기를 꺼냈지만 다시 세어보니 오십사 명이 맞습니다. 제 생각에 어느 정도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무슨 생각이냐?" 혜심대사는 더이상 재촉하지 않고 제자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놔두었 다. 대묵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바로 구궁진의 변칙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들의 인원은 총 쉰넷이며 세 패로 갈려 있습니다. 즉 한 무리가 열여덟으로 구궁진과는 별 관계 가 없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시면 열여덟의 한 패는 다시 아홉과 아홉 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혜심대사는 거기까지 듣고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마지막 부분 의 설명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홉과 아홉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분명히 옷 색 깔은 같지 않느냐?" 대묵은 빙긋 웃었다. "잘 보시면 그들의 손에 쥐어진 병기가 도(刀)와 검(劍)으로 다르다 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옳거니!" 혜심대사는 그제야 깨닫고 무릎을 쳤다. "즉 아홉 명이 기본 단위가 되어 여섯 패가 된 것입니다. 원래 전통 적인 구궁진을 펴려면 아홉에 아홉을 곱한 여든한 명이 있어야 합니다 만, 저들은 육합(六合)의 변화를 가미해서 변칙적인 구궁진을 따로 만 든 것 같습니다." 혜심대사는 그만하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것을 한 번 보고 모두 알아챘다는 말이냐?" "부끄럽습니다." "기재로다, 기재야! 과연 소림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갈 아이답게 총 명하구나." 헤심대사는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았지만 자기보다 오히려 몇 갑절 이나 빼어난 제자의 식견과 판단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대묵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나 정도에서 벗어난 것은 원래의 것을 이길 수 없는 법으로 나한 진의 학익 변화라면 능히 저들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혜심대사는 이상하게도 대묵의 말에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것을 처 음으로 발견했다. 그 말에 소림사의 나한진이 더욱 불파(不破)의 절진 (絶陣)으로 느껴지고 침입자들을 격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것이 었다. 대묵은 자기의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뒤로 반 걸음 정도 물러났다. "싸우지 않고 무슨 수작들이냐!" 검은 두건을 한 괴인들 중의 한 사람이 크게 소리쳤다. "싸우지 않고 무슨 수작이냐! 무슨 수작이냐!" 그 뒤를 이어 오십여 명이 합창을 하나 소림사 경내가 다 떠나갈 정 도로 쩌렁쩌렁 울렸다. 혜심대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싸움을 건 것은 당신들 쪽이니 이유를 따지던지 나한진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시오!" 웅후한 사자후(獅子吼)가 연무장 구석구석까지 퍼지자 한 구석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79 02/22 13:02 178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2장... 사건의 전모 (3) 연무장 구석에서 홀연히 나타난 두 사람의 키는 중간 정도로 엇비슷 했다. 평범하게 생긴 얼굴모양에 약간 지긋한 나이의 중년무사처럼 보 였는데, 그들의 전신에서 특이한 점을 찾자면 옷차림과 기이하게 생긴 병기 정도였다. 두 사람은 각각 희고 검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흰 옷은 눈부실 정도로 깨끗했고 검은 옷은 칠흑처럼 검어 티끌 하나 눈에 띄지 않았 다. 공통점은 흑백의 대비가 선명한 가운데, 왼쪽가슴 부근에 마신(魔 神)이라는 두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핏빛의 실로 수놓은 두 글자는 모든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혜심대사도 속에서 냉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행색과 신법(身法) 의 독특함으로 보건데 이들의 정체는 오직 하나로밖에 생각되지 않았 다. "늙은 중이 우리더러 싸워보라고 하는 것 같은데." "바로 맞추었어. 흐흐! 혜심이라고? 주제에 소림사라는 땡초 집단의 왕초 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흑백마신에게도 그 개수작이 통할지 모르겠군!" (개수작?) 대묵은 흑백마신의 말투가 오만한 정도를 벗어나 일부러 화를 돋구 고 있는 것을 알아챘지만 어째서 저렇게까지 예의에 벗어난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순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지만 강호의 기이 한 사람들을 아직 알지 못해서라고나 할까. 개중에는 그 누구도 안중 에 없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고, 그런 사 람이 있더라도 정도제일의 뿌리인 소림사에서는 한 걸음 양보해야한다 고 생각하고 있는 대묵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井底之蛙]라고 하면 어느 정도 과장된 표현이 되겠 지만, 적어도 흑백마신은 강호에서 두려워하는 사람이나 문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그만한 능력과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혜심대사의 눈썹이 약간 휘어졌다. 오랫동안 쌓아온 수양의 능력 덕분에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의아함을 억제하기 가 어려웠다.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 없지만 궁금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째서 흑백마신이 수십 년의 봉문을 깨고 세상으로 나와, 그것도 넓고 넓은 천지에 아무 상관도 없는 소림사를 찾아왔단 말인가? 천산 칠괴와 같은 날에 쳐들어 온 것은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아미타불 ... 잘못하면 살계를 열게 될 지도 모르겠구나.) 소림사로서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강적들이었다. 구궁진인 듯한 진 세를 이루고 있는 오십여 명의 괴인들의 어느 정도의 위력을 지녔는지 는 아직 미지수였지만 흑백마신의 무공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혜심대 사 자신도 둘 중 하나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고, 두 사람이 협공을 가한다면 자신이 없었다. 벌써 십수 년 전에 천하제일고수로 알려졌던 세 사람, 지명대사와 해남문주(海南門主), 개방 방주의 필사적인 협공 속에서 거의 호각의 싸움을 벌이다가 도망친 이들이고 보면 그동안 무 공이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약해졌을 리는 없었다. 추호도 방심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일대 일의 싸움이라도 승산을 점치는 것은 모험이었 다. 혜심대사는 문득 대묵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믿음이 가 는 아이였다. "묵아, 저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글쎄요." 혜심대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대묵과 살기등등하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흑백마신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 었다. "평소에는 글쎄, 라는 대답을 잘 하지 않더니 오늘은 웬일이냐? 무 슨 특별한 생각이라도 있는게냐." 대묵이 막 대답을 하려는 순간 흑백마신 쪽에서 도발을 해왔다. 오 십여 명의 괴인들이 여섯 갈래로 나뉘어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어떤 형 태를 갖추었다. "땡중들이 이런 것을 알기나 하겠느냐?" 흑마신 당충과 백마신 두수는 진법의 오묘함으로 소림사의 기를 꺾 어들어가려고 생각했다. 초반에 이긴다는 심리전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정면 대결로는 나한진을 꺾은 전례가 별로 없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작용한 선택이었다. 혜심대사가 언뜻 보니 일정한 형태인 것 같으면서도 불규칙한 것이,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강호에서의 경험이 풍부하지 못한 승려들의 약 점 중 하나였다. 강하지만 노련하지 못한 것이다.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대묵이 얼른 거들었다. "저들이 사부님의 견식을 시험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노납은 잘 모르겠구나." "모르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것은 원래 제갈무후(諸葛武侯)의 팔 진도(八陣圖)인데, 여덟 갈래의 병졸이나 기물(器物)이 필요함에도 불 구하고 여섯 갈래로 엉성하게 펼쳐낸 것입니다. 직접 부딪쳤을 때에는 별 것이 아닐지 몰라도 입으로 논할 때에는 변화무쌍하게 보여 상대편 의 기를 먼저 꺾고 들어가려는 수작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잠깐 맡기 시면 계략을 써 보이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침착함이었다. 혜심대사는 제자를 믿고 맡기겠 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묵은 한 번 씩 웃어보이고 혜 심대사의 오른쪽 앞으로 두 걸음 정도 나서서 소리쳤다. "그건 육진도(六陣圖)가 아니냐?" 안중에도 없는 듯한 말투는 물론이거니와, 팔진도를 변형시켜서 얕 은 수로 상대를 속여보려고 했던 의도가 낱낱이 파헤쳐지자 흑백마신 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주변이 뛰어난 백마신 두수가 흑마신의 양해를 구하고 수작을 걸어왔다. "그걸 알아보다니 놀랍구나. 어떻게 알았느냐?" 대묵은 껄껄 웃었다. 연무장은 실제로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불완전 한 공력이었지만 정순함을 바탕으로 불문의 사자후를 시전해야만 상대 편까지 들릴 수 있었다. "하하! 소림사의 나한진은 수백 년을 두고 전해지면서 수많은 진법 의 변화와 오묘함이 융해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비단 팔진도 뿐 만 아니라 천하의 각종 진법의 묘리가 이 안에 담겨있으니, 소림사 안 에서 나한진을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팔진도를 알아볼 수 있다." 두수는 어린아이의 말주변이 의외로 뛰어난 것을 알고 내심 혀를 내 둘렀다. "하지만 이것은 변칙이었는데. 소림사에서는 변칙도 가르친다냐?" 대묵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근본을 알면 그 줄기를 따라 가지와 잎도 알 수 있는 법, 팔진도를 알진대 어찌 엉터리로 변화시킨 육진도를 모를 것이냐?" 두수는 말했다. "그럼 파해법도 알겠구나." "물론이다." 대묵은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금 뒤로 물러서 혜심대사의 옆에 섰다. 진법의 파해는 간단한 지시만 내리면 백팔나한들이 할 수 있겠지만 그 방법에는 쌍방의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원치않는 소년 은 혜심대사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었다. "사부님, 불기(佛旗)를 몇 개 쓰게 해 주십시오." 혜심대사는 몇 개가 필요하냐고 물은 다음 소사미로 하여금 여섯 자 루의 깃발을 가져오도록 했다. 소림사의 상징으로도 가끔 쓰이는 소림 불기(少林佛旗)에는 앞면에 나한상(羅漢像)과 함께 소림이라는 두 글 자가 수놓아져 있고 뒷면에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글씨로 불경의 일부 분이 수록되어 있었다. 대묵은 여섯 자루의 깃발을 드는 것이 약간 힘들었지만 혜심대사가 남몰래 등뒤의 명문혈로 진기를 불어넣어주자, 한 손에 세 자루씩 들 고 다시금 사자후를 터뜨려 말했다. "귀마(鬼魔)의 힘은 불법(佛法)을 넘어설 수 없음을 모르느냐?" 백마신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다." 흑백마신에게도 복안이 서 있었다. 보나마나 나한진이 발동되어 팔 진도를 변형한 자신들의 진영을 공격할텐데, 그 순간에 재빨리 진법을 구궁진으로 바꾸어 대응하고 자신들 둘은 적의 머리인 혜심대사를 친 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산칠괴 정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묵이 하는 행동을 예측하지 못했다. 대묵은 양손에 들고 있던 여섯 자루의 깃발을 일제히 내던져서 육진도의 특정한 위치 에 꽂히게 만들었다. (아니!) 흑마신 당충은 자신들의 계획만을 추진할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백 마신 두수는 진법과 기타 학문에 밝은 사람이나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랫동안 친형제나 다름없이 생활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읽을 지경이 된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충은 두수가 경악하는 것을 얼굴 표정에 서 곧 읽어내고 물었다. "왜 그러나?" 두수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문윤섭 (76MYS ) [< 소요검협(笑謠劍俠) >] - 80 02/23 01:08 196 line [< 소요검협(笑謠劍俠) >] 제 12장... 사건의 전모 (4) "무서운 녀석입니다." "뭣이?" 숨이라도 넘어갈 듯한 두수의 말에 흑마신 당충이 되물은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자신이야 진법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두수는 전문가였다. 그가 이토록 긴장하고 있으니 보통 일은 아닐 게 틀림없었다. 속으로 짚히는 것이 없는 바도 아니었지만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능구 렁이 같은 당충의 습성이자 장점이었다. 그는 급한 듯하지만 신중하게 물어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두수는 잠시 숨을 돌리고 설명했다. "녀석은 진을 파괴한 겁니다." "뭣이?" "들어보세요. 저 진은 겉으로 보면 단순히 팔진도를 응용해서 만들 어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가 누군데 함부로 엉 터리 진법을 펼쳐내서 소림사를 상대하려고 하겠습니까? 거의 모든 지 혜를 짜내서 만든 진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 꼬마 녀석이 대번 에 알아챘으니." "뭣이?" 당충은 자기가 벌써 세 번째나 '뭣이?'하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두수의 이어지는 설명은 더욱 가관이었다. "여섯 갈래의 무리들은 각각 아홉 명 씩입니다. 뭔가 짚히는 거라도 없습니까?" 당충은 아까부터 심중에 품고 있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구궁진 아닌가?" 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겁니다. 팔진도의 변형에 구궁진을 섞었을 뿐더러 여섯 갈 래의 무리들은 서로서로를 지원하고 방어하며 힘을 합쳐 공격하는 기 능까지 있습니다. 제 평생에 이렇게 뛰어난 진법은 불과 서너 개밖에 만들어내지 못했지요." "그런데?" "그게 간단히 파괴되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형님, 저기 꽂혀있는 여섯 개의 깃발이 보이시지요." "그렇네만." "그것들은 아무렇게나 꽂힌 것 같지만 실제로는 기가 막힌 요소들에 박힌 셈입니다." 당충은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는데." 두수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와 네모를 허공에 그려보이며 설명해 나 갔다. "구궁진에 팔괘의 변화가 가미되었지만 변형된 관계로 실제로는 팔 괘라기보다는 육합(六合)에 가깝습니다. 적이 멋도 모르고 구궁진이나 팔괘진이라고 판단해서 들어온다면 쉽게 격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치명타를 안겨 줄 수도 있게 설계한 것이죠." "거기까진 알겠네." 두수도 진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당충에게 설명하려니 힘이 보 통 많이 드는 것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줘야만 할 것 같았다. "설혹 적이 팔괘와 구궁을 역으로 모두 짚어냈다고 해도 쉽게 이 진 법이 무너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 이유를 아실 수 있겠습니까?" 당충은 무겁게 대답했다. "아마도 여섯 갈래이기 때문이겠지." 두수는 엄지와 중지(中指)를 붙였다 떼면서 딱, 하는 소리를 내보였 다. "정확합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역시 노련하시군요." "아부는 나중에 해도 된다." 서열은 같았지만 흑백마신 사이에는 엄연한 위계질서가 있었다. 보 통 때에도 아우인 백마신 두수는 흑마신 당충에게 경어를 쓰고 조심스 럽게 예를 다했다. 두수는 멋적은 듯이 머리를 두어 번 긁고는 계속 말했다. "저 진에는 팔괘진에 반드시 있어야만 할 여덟 관문 중에서 생문(生 門)과 경문(警門)이 빠져 있습니다." "더 자세히..." "예. 대부분의 진법에는 창안자 자신이 걸려들었을 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생문을 두는 법입니다. 특히 팔괘진이 대표적인 경우지요." 당충이 아무 말도 없자 혜심대사 쪽을 힐끗 쳐다본 두수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적을 살상할 목적으로 쓰일 때가 아닐 경우도 있겠지요. 그 렇기 때문에 경고하는 의미로 강렬한 공격을 가하지만 죽이지는 않는 관문이 존재합니다. 경문이라고 보통 부르는데, 팔괘의 변화를 유지하 면서 여섯으로 줄이느라 생문과 경문을 빼버렸습니다." 당충이 물었다. "그래도 되는 건가?" 두수는 땅바닥에 몇 개의 원을 그려보였다. "이 도형들을 보십시오. 이것들이 팔괘진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들입 니다. 하지만 여기 생문과 여기의 경문이 빠져있지요. 이것이 치명적 인 약점이 되는 경우는 상대편이 단번에 진법의 구성을 꿰뚫어 볼 때 뿐입니다." 그제서야 당충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는 넌지시 짚어보았다. "그러니까, 저 꼬마 녀석이 진법의 구성을 단숨에 알아채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 아닌가?" 두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통상적으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데..." 당충이 맞장구를 쳤다. "저 맹랑한 꼬마녀석이 무례하게도 단번에 투시력을 발휘해서 이 진 법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말이로군. 깃발들은 왜 던진 건가?" "연결 고리입니다." "연결 고리?" 두수는 자기가 이것저것을 설명하느라 혜심대사 쪽이 지루해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말투가 빨라졌다. "여섯 무리들이 서로서로 지원하고 방어하며 힘을 합치는 그 연결맥 의 중앙 위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들만 골라서 박아넣은 꼴입니다. 저 몇 개의 깃발은... 정말 절묘하군요." 당충의 목소리에 화난 기색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그래서 어떻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야겠나?" 두수는 약간 겁을 먹었다. 무공으로만 따지만 의형인 당충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만약 저곳에 날아든 것이 깃발이 아니라 혜심대사의 절반, 아니 그 삼분지 일 정도만 되는 고수들이었다면 진법은 이미 풍지박산이 났을 테고 소림사에서는 나한진을 펼 필요도 없이 각개격파로 나왔겠지요." 당충은 스산하게 웃었다. "흐흐... 하지만 소림사에서는 그러지 않았지. 아우에게는 저따위의 엉터리 진 말고 좀 오래 버틸 수 있는 것이 없는가?" "있기는 한데..." "있기는 한데, 뭔가? 하긴 없으면 곤란할 뻔 했지." 누런 이를 다 들어내고 히죽 웃는 당충의 모습은 전율에 가까워보였 다. 두수조차도 평소에 겁을 먹을 정도이니. "전원이 옥쇄할 각오로 임전해야 할 겁니다." "그야 쉽지." 두수는 질린 표정이었다. "설마 흑보정의 금제를 발동시킬 예정이십니까?" 당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시인의 표시나 다름없었다. 두수의 물음이 곧이어 터져나왔다. "제자 연경소도 금제가 풀렸습니다. 어떤 충격이었는지 몰라도 그의 종적은 소림사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습니다. 혹, 금 제가 완벽하지 못하다면...?" 당충은 딱 잘라 말하면서 품속에서 조그만 피리를 꺼내들었다. "우리의 목적은 소림사에 남아있는 하나의 혈미인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