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산장(상) ----- 차 례 ----- 1. 누가 천하제일의 검객인가? 2. 십 년간의 원한과 사랑 3. 놀라운 삼소야의 검법 4. 쓸모 없는 사내 5. 성난 주먹 6. 죽엽청이라는 사내 1. 누가 천하제일의 검객인가? 劍氣縱橫三萬里, 一劍光寒十九洲. 검의 기운은 삼 만 리나 뻗치고, 한 자루의 검이 뿜어내는 광채는 천하를 떨게 하네. 늦가을. 나뭇잎은 차가운 바람에 스치고 석양빛이 온 누리를 가득 덮고 있었다. 소슬한 나뭇잎 아래에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마치 가을빛에 녹아버린 것 같았다. 그는 너무나 조용했다. 그는 너무나 차가웠다. 뼈에 스미는 차가움과 유별나게 사람을 압박하는 피냄새 풍기는 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어쩌면 그는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르며 어떤 사람들은 죽이지 말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다만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한 자루의 검은 물고기의 껍질로 만든 검집에 손잡이가 황금이고 그 위에는 열세 알의 콩알만한 명주(明珠)가 박혀 있었다. 강호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 검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며 그 검의 주인을 모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 검의 주인은 열 일곱 살 때에 이미 강호에 명성을 떨쳤다. 지금 그는 중년에 가까웠으나 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그가 그 검을 내려놓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검을 내려놓을 때 그의 목숨도 끝장이었다. 명성은 영원히 떨쳐 버릴 수 없는 하나의 짐인 것이다. --구월 열 아흐레 날. 유시(酉時) 낙양(洛陽)성 밖의 고도(古道) 근처의 고목(古木) 아래로 목덜미를 잘 씻고 너의 검을 가지고 오너라. 유시. 날이 저물고 있었다. 가을은 이미 깊었고 낙엽은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성큼성큼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선명하고도 화려한 옷차림에 한 자루의 장검을 비스듬히 등뒤에 메고 있었다. 한 쌍의 눈동자는 막 칼집에서 뽑혀진 검처럼 예리했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 힘찼으며 무척 빨랐다. 일곱 자 밖에 선 그는 불쑥 물었다. "당신이 연십삼(燕十三)인가?" "그렇다." "당신의 탈명십삼검은 정말 천하무적인가?"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그 사람은 웃었다. 냉혹한 비웃음이었다. "내가 바로 고통(高通)이다. 일검천심(一劍穿心)이라는 별명을 지닌......" "알고 있다." "왜 나를 불렀는가?" "나는 그대가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당신을 찾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반드시 당신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연십삼은 담담히 말했다.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매우 많지. 당신 한 사람이 아니지." 고통은 대꾸했다. "당신은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당신을 죽이기만 한다면 즉시 명성을 떨칠 수가 있지......" 그는 냉소를 띠고 다시 말했다. "강호에서 명성을 얻기란 수월하지 않지. 이런 방법이 비교적 수월하다고 할 수 있지." 연십삼은 담담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고통은 차갑게 내뱉었다. "나는 이미 왔다. 내 검을 가지고, 내 목을 깨끗이 씻고 온 것이다." "좋아." "당신의 지금 심정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 미안한 말이지만......" "관속에 들어가야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군. 받아랏!" 검의 광채가 번쩍하면서 검은 이미 검집에서 뽑혀졌고 번개같이 연십삼의 심장을 찔러 들어왔다. 일검천심. 과연 한칼에 상대방의 심장을 꿰뚫을 것만 같은 쾌속한 검법이었다. 단지 이 일검(一劍)으로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심장을 꿰뚫었는지 모른다. 이는 본래 치명적인 살수(殺手)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연십삼의 심장을 꿰뚫지 못했다. 그의 그 일검이 뻗쳐 나갔을 때 그는 목덜미에 얼음처럼 차가운 감각을 느꼈다. 연십삼의 검이 이미 그의 목덜미를 꿰뚫은 것이었다. 칼날은 한 치 삼 푼의 깊이로 파고들었다. 고통의 검은 땅바닥에 떨어졌으나 사람은 아직 죽지 않았다. 연십삼은 담담히 말했다. "명성을 떨치는 것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겠지?" 고통은 그를 노려보았다. 눈망울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졌다. 연십삼은 담담히 말했다. "당신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해." 그는 그의 검을 천천히 고통의 목에서 뽑았다. 매우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피는 그의 뿜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런 경험이 풍부했다. 옷에 피를 묻히면 깨끗이 씻기가 귀찮았다. 손에 묻은 피비린내를 씻어 내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황혼빛은 더욱 붉게 변했다. 칼날을 타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마지막 한 방울의 피가 칼날을 타고 땅바닥에 스며들었다. * * * 검이 검집에 꽂혔을 때, 황혼빛 아래 네 사람이 나타났다. 네 사람에 네 자루의 검! 네 사람의 옷차림은 모두 지극히 화려했으며 기세가 등등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수염과 머리칼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가장 젊은 사람은 소년(少年)이었다. 연십삼은 그들을 본 적이 없었으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명성을 떨친지 이미 사십 년이나 되고 변방에서 독창적인 비응십삼자(飛鷹十三刺)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가 이번에 중원으로 들어온 것은 바로 연십삼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의 비응십삼자가 연십삼의 탈명십삼검(奪命十三劍)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나이가 제일 젊은 사람은 강호의 후기지수(後起之秀)로 점창파(點蒼派)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그는 천부적으로 무술을 하기에 좋은 체질을 지녔으며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도 모질었다. 그는 출도(出道)한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무정소자(無情小子) 조빙(曹氷)의 이름은 이미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 역시 고수였다. 청풍검(淸風劍)은 검법이 날렵하고 표홀(飄忽)하여 검을 뻗쳐 내면 마치 바람이 날아드는 것 같았다. 철검진삼산(鐵劍鎭三山)의 검범은 묵직하면서도 웅혼(雄渾)했다. 그가 사용하는 한 자루의 검은 서른 세 근이나 나갔다. 연십삼은 그들의 내력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찾아온 것은 원래 그가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네 사람은 일제히 그를 노려보았으며 그 누구도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손을 쓰기 전에 자기 자신들의 예기가 꺾이기를 원치 않았다. 땅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누구든 그들과는 상관이 없었다. 다만 자신들이 살아 있으면 충분하고 다른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연십삼은 빙그레 웃었다. 웃음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당신들이 일제히 오다니 다행이군." 관내비응(關內飛鷹)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당신이 나 혼자만 부른 줄 알았지." 연십삼은 담담히 말했다.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번거롭게 여러번 반복할 필요는 없지." 조빙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 사람이 왔는데 누가 먼저 손을 쓰겠소?" 그는 무척 성급했다. 그는 명성을 떨치려고 서둘렀으며 연십삼을 한시 바삐 죽이려고 설치고 있었다. 철검진삼산은 말했다. "우리 가위 바위 보를 하세. 이긴 사람이 손을 쓰도록 하지." "그럴 필요 없다." "그럴 필요 없다니?" 연십삼은 담담히 말했다. "당신들은 한꺼번에 덤벼도 돼." 관내비응은 벌컥 화를 냈다. "우리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어떻게 네 명이 한 명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싫단 말인가?" "물론이지." 연십삼은 어디까지나 무표정했다. "나는 좋아." 그의 검은 이미 검집에서 뽑혀지고 있었다. 검의 광채는 마치 무지개 같았고 번개처럼 빨랐다. 네 사람의 눈앞에서 동시에 번쩍 검이 빛났다. 그들은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네 자루 검은 동시에 검집에 뽑혀졌다. 조빙의 솜씨가 가장 빨랐고 악랄했다. 관내비응은 이미 몸을 훌쩍 날려 허공에서 덮쳐 들고 있었다. 비응십삼식은 본래 칠금장(七禽掌) 계통의 무술로 높은 곳에서 아래를 공격하고 강함으로 약함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적수는 더욱 강했다. 조빙은 삽시간에 아홉번을 찔러댔다. 그는 다른 사람은 주의하지 않았다. 다만 연십삼을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그를 자기의 검으로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검은 모두 빗나갔다. 눈앞의 연십삼은 이미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흠칫했다. 곧이어 한가지 무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땅바닥에는 죽은 사람이 세 명 더 늘어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목덜미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관내비응, 청풍검, 철검진삼산이라는 세 명의 일류 검객은 눈 깜짝할 사이 모두 연십삼의 검에 찔려 죽어버린 것이었다. 조빙은 자신의 몸이 굳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제서야 연십삼이 멀리 한 그루의 고목 아래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인 검은 이미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조빙은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나를......" 연십삼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아직 자네를 죽이고 싶지 않네." "왜?" "자네에게 나를 죽일 기회를 주고 싶기 때문이지." 조빙의 불끈 쥔 주먹 위로 푸른 심줄이 돋아났고 이마에 비지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이는 모욕이었다. 그러나 그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연십삼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돌아가서 검법을 삼 년 동안 연마한 뒤 나를 다시 찾아와도 되네." 조빙은 입술을 깨물었다. 연십삼은 덧붙여 말했다. "점창파의 검범은 매우 그럴싸하네. 자네가 연마한다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네." "삼 년 동안에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죽는다면?" 연십삼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나를 죽인 그 사람을 죽이게." 조빙은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이 남에게 살해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연십삼은 대답했다. "나 역시 그러기를 바라네!" * * * 땅거미가 이미 온 누리를 뒤덮고 있었다. 연십삼은 천천히 몸을 돌리고 어둠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안녕하시오?" 한참 후에 어둠 속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 왔다. "안녕하지 못하오." 얼음과 같이 차가운 음성은 목이 쉰 것 같으면서도 나직했다. 한 사람이 천천히 어둠 속에서 걸어나왔다. 검은 옷에 검은 머리카락, 새카만 검, 거무튀튀한 얼굴에는 죽음의 빛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오직 한 쌍의 칠흑과 같은 눈동자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느리게 걸었지만 몸은 두둥실 나는 것 같았고 그의 발걸음은 숫제 땅위를 밟지 않고 있는 것이, 어둠 속에 유령이 나타난 것 같았다. 연십삼의 동공이 갑자기 수축하더니 불쑥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무림의 까마귀 오아(烏鴉)?" "그렇다." 연십삼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오아도 응수했다. "날 만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은 못 되지." 정말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오아 저 까마귀를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까마귀가 나타나게 될 때는 반드시 재앙이 들이닥친다. 이번에 그가 가져온 재앙은 어떤 것일까? --어쩌면 그 자신이 재앙이며 피할 수 없는 재앙의 일종인지도 몰랐다. 별 수 없다면 굳이 번거롭게 생각하고 걱정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연십삼은 이미 냉정을 회복했다. 오아는 그를 노려보았고 그의 검을 노려보았다. "훌륭한 검이군." 연십삼은 되물었다. "당신은 검을 좋아하는가?" 오아는 대답했다. "나는 다만 훌륭한 검을 좋아할 뿐이지. 자네는 비단 한 수의 훌륭한 검법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한 자루의 훌륭한 검을 가지고 있군." "가지고 싶은가?" "그렇다." 그의 대답은 진지했다. 연십삼은 빙그레 웃었다. 이번에 그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에는 피곤한 빛이 서려 있지 않고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참된 적수를 만난 것이었다. 오아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하지만 까마귀가 전하는 것은 근심과 재앙이지." "자네는 재앙을 전하러 왔는가?" "그렇지." 연십삼은 다시 물었다. "나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지." 연십삼은 다시 물었다. "나에게 재앙을 주는 사람은 바로 자네인가?" "아니지." "자네가 아니면 누구인가?" "자네의 검!" 필부(匹夫)에겐 죄가 없어도 가슴에 숨긴 옥구슬이 죄라고 하던가? 이 이치를 연십삼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명성은 바로 사향의 향기였고, 그의 검은 영양(羚羊)의 뿔이었다. 오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열 일곱 자루의 검을 수집했지."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이는 듯 했다. "적지 않군." 오아는 자랑하듯 말했다. "열 일곱 자루의 검은 모두 다 명검(名劍)이지." "자네가 죽인 고수들이 적지 않군." 오아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고통과 비응의 검도 내가 가져가야 하겠군."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주면 네 자루의 검을 모두 자네에게 주지." 오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검을 요구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야." 연십삼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는 죽은 사람의 검만 요구하는군." "맞았네." 연십삼은 웃었다. "자네가 나를 죽이면 나의 검도 자네에게 돌아갈 거야." 오아는 응수했다. "그야 물론이지." "좋아." 오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지 않아." "좋지 않다니, 뭐가?" "나는 아직 자네를 죽일 자신이 없네." 연십삼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는 갑자기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아는 다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더군다나 자네가 조금 전에 관내비응을 찔러 죽이던 그 일검은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낼 수 없지." 연십삼은 웃으며 물었다. "자네는 그 일검을 깨뜨릴 수 없는가?" "그 누구도 그 일검을 깨뜨릴 수 없을 것 같군." 연십삼은 넌지시 물었다. "자네는 그것이 천하무쌍의 검법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칠대검파와 사대세가(四大世家)의 모든 고수를 모두 만나 보았지." "그들에 대해서 어떻게 느꼈는가?" "그들의 검법은 너무나 보수적이지. 자기의 목숨을 너무나 중시하기 때문에 자네만 못하더군." "자네의 눈썰미가 무척 좋은 편이군. 하지만 견식은 넓지 않군." "그런가?" 연십삼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나의 그 일검을 쉽게 깨뜨릴 수 있는 한 싸람을 알고 있네." 오아의 표정이 변했다. "자네는 그 사람의 검법을 보았나?"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아, 그야말로 천하무쌍의 검법이었지." "그 사람은 누구인가?" 연십삼은 직접 대답하지 않고 세 개의 손가락을 펴서 앞으로 내밀었다. 오아는 물었다. "삼수검(三手劍) 금비(金飛)?" 삼수검은 마치 세 개의 손을 가진 것처럼 무공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한 자루의 검이 세 자루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의 검법의 재빠름과 변화막측함은 상상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십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는 세 손이 필요 없고 세 자루의 검도 필요 없네." 정말 사람을 죽이는 데는 한 자루의 검이면 충분하다. 오아는 물었다. "그가 아니란 말인가?"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가 아니지." "그렇다면 누군가?" "삼소야(三少爺)." 오아는 여전히 물었다. "어느 집의 삼소야 말인가?" "취운봉(翠雲峰) 아래, 녹수호(綠水湖) 앞." 오아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연십삼은 천천히 말했다. "그의 검은 천하무쌍의 보검이지." 오아의 동공이 수축하고 있었다. 연십삼은 충고하듯 말했다. "분명히 경고하는데 자네는 결코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을 하지 말게." 오아는 갑자기 웃었다. 그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그의 웃음은 생경하고 어색했다. 연십삼은 오아를 바라보았다. "왜 웃나? 농담인 줄 아나?" "자네 때문에 웃었지." 연십삼은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곳에 온 이상 자네를 결코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자네는 잘 알고 있네."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네를 죽일 자신이 없지만 자네 역시 나를 죽일 자신이 없지." 연십삼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아는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그래서 나를 충동질해 취운봉으로 보내서 먼저 그 삼소야와 싸우도록 할 생각이겠지." 연십삼이 빙긋 웃었다. 오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왜 웃나? 내 말이 틀렸나?" "아닐세. 내 자신 때문에 웃었네." 오아는 의아했다. "뭐?" "왜냐하면 내 마음을 자네가 단번에 꿰뚫어 보았으니 말일세." 오아는 물었다. "자네는 나와 싸우기 싫은가?" 연십삼은 순순히 대답했다. "무척 싫군." "어째서지?" "나에게는 아직도 약속이 있기 때문이네." "어떤 약속인가?" "죽음의 약속이지." "장소는 어디인가?" "취운봉 아래 녹수호 앞." "자네는 그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갈 텐가?" "죽음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일세." "설마하니 자네는 일부러 죽으러 가겠다는 것인가?" 연십삼은 빙그레 웃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는 살아 있는 것이 무척 재미있나 보군." 오아는 입을 다물었다. 연십삼은 아직도 웃고 있었다. 비아냥거리는 웃음이었다. "검을 연마한 사람은 언제나 남의 검 아래 죽게 되어 있네. 피할 곳이 없지." 오아는 침묵했다. 연십삼은 다시 말했다. "나는 한평생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였네. 만약 내가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아래 죽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네." 오아는 그를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좋아! 자네는 가 보게." 연십삼은 두 손을 마주잡아 보이고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러나 그는 멀리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추었다. 오아가 줄곧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오아 역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연십삼은 넌지시 말했다. "나는 자네의 뜻을 알고 있네." 오아는 메마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런가?" "내가 갈 수 있는데 자네라고 못 가라는 법은 없겠지." * * * 오아는 웃었다. "자네는 우둔하지 않군." 연십삼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자넨 반드시 나를 따라올 작정인가?" "반드시 따라가려네." "어째서?" "자네들의 그 일전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고수들이 서로 다투면 반드시 전력을 기울이게 되지. 나는 옆에서 방관하는 것이니까 틀림없이 자네들의 검법에 있을 빈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네." 연십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일리 있는 말이군." 오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일전에 자네들 중에 누가 이기든, 최후에 살아 남은 사람은 반드시 내가 될 거야." 연십삼은 그 말을 받았다. "싸움에 이긴 사람은 지칠대로 지쳐 있을 것이고 자네는 그의 검법의 빈틈을 알아냈을 테니까. 만약에 그를 죽이고자 한다면 가장 좋은 절호의 기회가 되겠군." 오아가 그 말을 받았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연십삼은 수긍했다. "그럴 수 있겠군."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네는 한가지를 잘못 알고 있네." "어떤 점을?" "삼소야의 검법에는 빈틈이라곤 전혀 없네." * * * 그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가장 훌륭한 주루에서 가장 훌륭한 술을 말이다. 그들은 언제나 호기로운 사람들이었다. 연십삼은 입을 열었다. "사람을 죽인 후에 나는 반드시 술을 마시지."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나는 술을 마시네." 연십삼은 덧붙이듯 말했다. "술을 마신 후에 나는 반드시 여자를 찾아가지."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여자를 찾아가네." 연십삼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하! 자네가 주색(酒色)을 탐하다니, 뜻밖인 걸?" 오아는 간단히 응수했다. "피차 일반이지." 그들은 정말 적지 않게 마셨다. 연십삼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여보게. 자네 역시 주색을 탐하니, 오늘은 내가 한번 양보하지." "무엇을 양보한단 말인가?" "자네가 셈을 치르도록 양보하지." 오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양보할 필요 없네. 양보할 필요도 없어." "이번에는 반드시 양보해야겠네." 오아는 그 말을 받았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그러는군." 연십삼은 잘라 말했다. "그럴 필요가 있지." 다른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먹을 때 대개 서로 술값을 내겠다고 나서는데 그들은 서로 양보하겠다고 다투고 있었다. 연십삼은 설명하듯 말했다.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 나는 언제나 짐이 되는 물건을 가지고 다니지 않지. 방해가 되거든." "오!" 연십삼은 덧붙여 말했다. "은자는 가장 짐이 되는 물건이지." 오아는 동의했다. "사람의 몸에 만약 수백 냥의 은자를 지닌다면 어떻게 날렵한 신법을 펼칠 수가 있겠는가?" "자네는 은표(銀標)를 지니지 않았나?" 연십삼은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나는 은표를 싫어하네." "어째서?" "한 장의 은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었는지 모를 정도니까. 너무 더러워." 오아는 다시 새로운 제안을 했다. "자네 검에 박힌 명주는 은자와 바꿀 수 있을 것이네." 연십삼은 다시 웃었다. "내 말이 우스운가?" "물론이지." 그는 갑자기 음성을 낮추었다. "이 명주들은 모두 다 가짜야. 진짜라면 내가 벌써 팔아먹었을 거야." 오아는 어리둥절해졌다. 연십삼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반드시 사양을 해야겠고 자네에게 반드시 양보를 해야겠네." "만약에 내가 자네를 따라오지 않았다면?" 연십삼은 대답했다. "그렇다면 물론 다른 방법이 있었겠지. 그러나 지금 자네가 이미 이곳에 나타났으니 내가 다른 방법을 생각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하......" "자네는 왜 웃나?" 오아는 대답했다. "자네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을 보니 우습군." 그는 음성을 낮추었다. "나도 자네처럼 오늘 사람을 죽이려고 했었네." "자네 역시 은표를 싫어하는가?" "죽도록 싫어하네." 연십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아는 덧붙여 말했다. "그래서 오늘 나도 반드시 사양해야겠고 자네에게 양보해야겠네. 돈이 없는데 무슨 수로 술값을 내겠나?" 연십삼이 한숨을 내쉴 때에 주인장이 다가오더니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서로 사양할 필요 없습니다. 두 분의 셈은 이미 아래층에서 어떤 분이 끝냈습니다." 누가 셈을 치른 것일까? 어째서 그들을 위하여 셈을 치른 것일까? 그들은 물어 보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공짜로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척 유쾌한 일이었다. 사람이 무척 유쾌할 때는 언제나 평소보다 더 마시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취하지 않았다. 그들이 약간 취기가 올랐을 때 아래층에서 갑자기 두 명의 여인이 올라왔다. 두 명의 여인은 아름답게 생겼고 치장도 꽤 멋지게 했다. 바로 남자의 마음을 가장 움직이게 하는 그런 여인들이었다. 거나하게 취했을 때는 색욕이 동하는 법이다. 연십삼과 오아는 방법을 강구하여 그녀들을 한번 꼬셔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꼬실 필요가 없었다. 그녀들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 "저는 소홍(小紅)이라 해요." "저는 소취(小翠)라고 해요." 두 여인의 웃음은 달콤하고 고혹적이었다. "우리는 특별히 두 분의 시중을 들려고 왔어요." 연십삼은 오아를 바라보았고 오아는 연십삼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검 아래 죽은 사람들이 만약 지금 그들의 모습을 본다면 틀림없이 무척 억울하다고 느꼈으리라. 지금의 그들은 명성이 자자하고 무정한 검객같지 않았다. 소홍은 방긋 웃었다. "두 분은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싶어요? 아니면 저희들이 있는 곳으로 가실래요?" 소취도 덩달아 말했다. "어찌되었건 두 분의 셈을 이미 치루었으니, 술값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희를 데리고 노는 화대 걱정도 할 필요 없구요."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좋은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일은 드물었다. 오아는 연십삼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자네의 운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운이 좋은 것인가?" 연십삼은 당연하다는 듯 그 말을 받았다. "물론 내 운이 좋은 것이지." "어째서?" "사람이 죽음에 가까울 적에는 운이 좋게 트인다고 하더군." 이것이 첫날이었다.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 그들을 위해 셈을 치르는 사람이 있었다. 누가 셈을 치른 것일까? 무엇 때문일까? 그들은 여전히 묻지도 않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 * 그들은 늦잠을 잤으며 일어나는 것도 일정치 않았다. 매일 그들이 객잔의 문을 나서기만 하면 밖에는 한 대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밤에 너무나 여자와 노는데 지쳐서 걸음을 옮겨 놓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마차를 타지 않고 걷고 싶었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았다. 오아는 물었다. "취운봉은 먼가?" "그리 멀지 않네." "이렇게 가는 것이라면 멀수록 좋을 것 같군." 연십삼은 그 말에 대답했다. "우리들은 천천히 가도록 하세." 앞쪽에 매우 넓은 숲이 나왔다. 아직도 파란 나뭇잎이 많았다. 연십삼은 입을 열었다. "우리 숲속에 가서 술 한잔 하는 것이 어떨까?" "술이 어디 있나?" "안심하게. 우리가 마시고 싶다면 물론 가져다 줄 사람이 있을 걸세." 햇살은 따사로웠다. 그들은 햇살을 받으며 길을 따라 걸었다. 마차는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갑자기 다른 한쪽의 길에서도 한 대의 마차가 달려오더니 숲속으로 들어가 멎었다. 마차에서 세 사람이 내려섰다. 두 사람은 어른이고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다. 어른들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청의에 작은 모자를 쓴 똑똑하게 생긴 소년은 이쪽으로 걸어 나오더니 하나의 커다란 붉은 띠를 바깥쪽 나뭇가지에 매었다. 그리고 소년 역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연십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우리들은 장소를 바꾸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좋겠군." "이곳이 나쁜가?" "무척 훌륭하네." "그럼 어째서 바꿔야 하나?" "저것 때문이지." 그는 나뭇가지에 걸린 붉은 띠를 가리켰다. 오아는 여전히 모르는 듯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저 띠는 이곳이 잠시 금지구역이 되었으니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지." 오아는 냉소했다. "그것은 누구의 규칙인가?" 연십삼이 대답하기 전에 숲속에서 갑자기 칠현금을 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윽하면서도 귀를 즐겁게 하는 음률에는 행복감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오아의 손에 불끈 힘이 주어졌다. 바로 이 때에 길 저쪽에서 갑자기 열 한 필의 쾌마가 달려왔다. 말을 타고 있는 기사들은 간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고 매우 사납고 무서워 보였다. 모든 사람은 등에 큰칼을 메고 있었는데 칼에 묶여 있는 붉은 비단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쾌마들은 일제히 숲속으로 달려들어갔고 기사들은 훌쩍 몸을 날려 말에서 뛰어 내리는데 하나같이 움직임이 날렵하고 민첩했다. 강호에 참된 고수들은 많지 않았으나 그들 열 한 사람은 모두 다 고수였다. 움직임이 가장 빠른 사람은 외팔이 괴한이었다. 그는 숲속으로 달려들어가자 호통을 쳤다. "너희들은 목숨을 바쳐라!" 숲속의 칠현금을 뜯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듣기에 매우 그윽했으며 귀를 즐겁게 할 뿐 아니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흐뭇함을 느끼게 했다. 괴한들은 우르르 달려들어갔다. "저 사람들은 태행산(太行山)에서 온 사람들이 아닌가?"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태행산의 대도(大盜)는 정말 용기가 대단하군." 연십삼은 나직히 대답을 했다. "응!" "자네가 보기에 그들은 무엇하러 온 것 같은가?" "죽으러 온 것일세."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숲속에서 한 사람이 날아 나와 세차게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그리고 땅바닥에 나뒹굴어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소리 한번 지르지 못했다. 이 사람은 바로 가장 사납고 흉악하게 생긴 외팔이의 괴한이었다. 그윽한 칠현금 소리는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숲속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날아 나왔다. 하나에 이어 다른 하나가 이어지는데 모두 열 한 사람이었다. 열 한 사람이 모두 날아 나와 땅바닥에 나가떨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달려들어갈 때의 움직임은 무척 빨랐다. 그들이 나올 때는 더욱 빨랐다. 오아는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정말 죽으러 왔었군." 연십삼은 그 말을 받았다. "아마도 죽으러 오는 사람들은 그들 몇 명으로 끝날 것 같지 않군." 오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있네." "아직 자네 차례는 되지 않았어." 오아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이미 두 사람이 길을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은 어른이고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다. 어른의 나이는 그렇게 많지 않아 기껏해야 서른 정도였다. 그러나 여인은 보기에 무척 가냘퍼 보였고 청순했으며 얼굴에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슬픈 빛을 띄우고 있었다. 지금 나타난 소년은 한 쌍의 커다란 눈망울을 디룩디룩 굴리고 있었다. 무척 총명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 어린 소년은 총명하면서도 귀여워 보였다. 그러나 그가 하는 짓을 보니 총명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곧장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아까지도 차마 그들이 죽으러 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그들의 앞을 막으려고 했다. 그들은 나뭇가지 위에 매어 있는 붉은 띠를 보았다. 초록색 적삼을 입은 아낙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풀어라!" 어린 소년은 발돋움을 하며 그 붉은 띠를 풀고, 그 대신에 초록색의 띠를 가지에 두르더니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천천히 숲속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마치 땅바닥에 늘어져 있는 시체들을 보지 못한 것 같았고 오아와 연십삼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오아는 본래 그들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뜻을 바꾸고 말았다. 연십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무척 이상하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바로 이 때 숲속에서 들려 오던 칠현금 소리가 갑자기 멈추어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은 살랑거리고 햇살은 온 누리에 뿌려지고 있었다. 칠현금의 소리가 멎은 후 숲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칠현금을 퉁기던 사람은 누구일까? 칠현금 소리는 왜 갑자기 멈추어졌을까? 그 젊은 아낙과 소년 역시 던져져서 나오게 될 것인가? 이러한 일들은 그 누구라도 반드시 알고 싶을 것이다. 오아와 연십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며 그들의 뒤를 따르는 마부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하고 있었다. 볼만한 구경거리는 없었다. 그 누구도 던져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낙엽을 밟는 소리는 무척 가볍고 무척 느렸다. * * * 가장 앞서서 나온 사람은 처음에 붉은 띠를 나뭇가지에 맨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두 사람이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나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남자이고 한 사람은 여자였다. 보기에는 부부 같았다. 그들의 나이는 모두 다 그리 많지 않았고 옷차림도 매우 단정하고 호사스러웠으며 기품이 넘쳐 흘렀다. 남자는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다. 영민하고 준수하면서도 훤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여자는 아름답고 온화하고 유순해 보였다. 그들이 부부라면 실로 남의 부러움을 살 만한 한 쌍이었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져 있었으며 마음속으로 화를 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마차에 오르려고 하다가 숲 밖에 서 있는 오아와 연십삼을 보더니 생각을 바꾼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나직히 그 소년에게 몇 마디 했다. 그 어린 소년은 오아와 연십삼이 서 있는 곳으로 달려오더니 커다란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이곳에 온지 오래 되었죠?"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의 일을 당신들은 모두 다 보았죠?" "당신들은 우리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죠?" "화염산(火焰山), 홍운곡(紅雲谷), 하후산장(夏候山莊)이 아니냐?" 어린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적지 않군요." 그의 음성엔 어린애의 치기가 서려 있었으나 말투나 표정은 어른처럼 능란했다. "너는 이름이 뭐냐?" 어린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당신은 내 이름을 물어 볼 필요가 없소. 나는 당신들과 사귀려고 온 것은 아니오." "그럼 무엇하러 왔느냐?" "우리 공자께서는 당신들에게 세 가지의 물건을 빌리려고 하는 것이오. 한 사람당 세 가지의 물건을 말이오." 오아는 다시 물었다. "그 어떤 세 가지냐?" "하나의 혓바닥과 두 개의 눈동자요." 연십삼이 웃자 오아 역시 웃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손을 뻗었다.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의 팔을 잡고 한 사람은 다리를 잡고는 동시에 외쳤다. "날아라! 이 녀석아!" 어린애는 곧바로 날아 올라갔다. 휙, 하는 소리를 내며 마치 화살처럼 곧장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공자는 뒷짐을 진 채 아예 보지 못한 것처럼 가장하고 있었고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참 후에야 까마득한 허공에 날아 올랐던 소년의 몸이 떨어졌다. 소년은 너무나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앗! 살려주세요!" 오아와 연십삼은 동시에 손을 뻗어 가볍게 그를 받아 들고 땅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어린 소년은 놀라서 온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었고, 바짓가랭이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연십삼은 미소를 띄우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젠 괜찮다. 나는 어릴 적에 자주 그렇게 던져졌단다." "흐흐...... 그래야 담력을 키울 수 있지." 어린 소년은 눈알을 희번득거리며 이미 뺑소니를 치려고 했다. 연십삼은 소년의 팔을 잡아 당기며 넌지시 물었다. "꼬마야, 네가 가지러 온 물건을 가지고 가지 못한다면 돌아가서 어떻게 변명할래?" 어린애는 흠칫했다. "저는......" 연십삼은 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너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지." 어린애는 귀를 기울였다. 연십삼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공자는 하후 공자지?" 어린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십삼은 확인하듯 말했다. "그가 너보고 그 물건을 가져오라고 했었지?" 어린애는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십삼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돌아가서 그에게 말해주어라. 그 세 가지 물건을 가지고 싶으면 어째서 그 자신이 직접 와서 가져가지 않느냐고." 어린애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연십삼의 손을 뿌리치고 죽어라 도망쳤다. 하후 공자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의 처가 다가왔다. 그녀가 걸어오는 자태는 우아하고도 고귀한 기품이 흘러 넘쳤으며 음성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는 고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설가인(薛可人)이라고 해요. 저쪽에 계신 분은 바로 저의 남편인 하후성(夏侯星)이에요." 연십삼은 담담히 말했다. "알고 보니 홍운곡의 소장주(少莊主)였군요." 설가인은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두 분께서 그 이름을 들어보셨으면 그가 어떤 분이신지 잘 아실 거예요." . "나는 잘 모르고 있소." 설가인은 설명하듯 말했다. "그는 천재예요. 문무를 겸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검법의 고명함은 견줄 사람이 드물어요." 아낙네들은 자기 남편에 대해서 탄복할지라도 좀처럼 남 앞에서 자기의 남편을 칭찬하지 않으며, 몇 마디 칭찬한다고 해도 얼굴이 빨개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얼굴을 붉히지 않았고 조금도 겸연쩍은 빛이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남편에 대한 그녀의 애모(愛慕)와 존경(尊敬)의 빛이 가득했다. 연십삼은 속으로 탄식했다. --이런 아낙을 아내로 맞아들인 사람은 큰 복을 타고난 것이다. 설가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런 분을 상대로 두 분께서는 물론 손을 쓰시지 않겠죠?" 연십삼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왜냐하면 그의 가문은 혁혁할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그토록 훌륭하니, 두 분이 만약에 그에게 손을 쓴다면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는 두분에게 권하는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순순히 혓바닥을 자르고 눈알을 도려내어 주라는 말인가요?" 설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렇게 되면 모양은 약간 흉하겟지만 그래도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좋지 않겠어요?" 연십삼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문무를 겸비한 당신의 남편은 벙어리인가요?" "물론 아니지요." 연십삼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가 직접 말하지 않소?" 오아가 냉랭히 끼어들었다. "그가 벙어리라 해도 똥구멍은 있을 게야. 그런데 어째서 직접 와서 개방귀를 뀌지 않지?" 하후성의 안색이 변했다. 연십삼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가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그곳으로 갈 수도 있지. 개방귀 냄새를 맡는 일이 뭐가 그렇게 힘들려구?" 오아는 그 말을 받았다. "그렇지." "자네가 가겠는가? 아니면 내가 갈까?" "자네!" "소문을 들으니 그의 우단사련(藕斷絲連), 만천성우(滿天星雨)의 천사검(千蛇劍)은 훌륭한 검이며, 한 자루의 괴검(怪劍)이라고 하더군." 오아는 연십삼을 바라보았다. "흠! 그래? 구미가 당기기 시작하는군. "그가 만약 죽는다면 그의 검은 누구의 것이 될까?" "자네 것이지." "자네는 그 검을 가지고 싶지 않은가?" 오아는 다시 대답했다. "가지고 싶지." "자네는 어째서 빨리 보검을 손에 넣지 않지?" "왜냐하면 저런 개새끼를 상대로 손을 쓰는 것이 귀찮아서 그러네. 보기만 해도 혐오감이 치미는군." 그 한마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하후성이 어느덧 그의 면전에 다가서서 냉랭히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혓바닥과 눈알이오!" 오아는 냉랭히 응수했다. "그렇다면 빨리 검을 뽑으시지." 하후성의 검이 이미 뽑혀졌다. 천사검. 정말 한 자루의 괴검이었다. 그가 손을 한번 떨치자 한 자루의 검은 수백 수천 마리의 은빛 뱀으로 변한 것 같았고 온 하늘에 별로 된 비를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이 한 자루의 검은 갑자기 무수한 조각으로 나누어져서는 모든 조각이 사람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드는 것 같았다. 오아의 요혈이었다. 오아는 날 줄 알았으나 날 수가 없었다. 몸을 빙글 돌리더니 한 줄기의 검광을 뻗쳐내 몸을 보호했다. 착! 소리가 나면서 수백 수천의 조각난 검이 갑자기 다시 합쳐져서 그의 목을 찔러 들어왔다. 이 검에는 놀랍게도 기이하고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용수철이 장치되어 있어 합쳐질 수도 있고 나누어질 수도 있었다. 합쳐지면 한 자루의 장검이 되고, 나누어지면 수백 수천 개의 암기가 되는데 그 암기들은 다만 하나의 은빛 실에 연결되어 있었다. 은빛 실이 바짝 조여들면 용수철이 작동해서 다시 한 자루의 검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연십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번 싸움에는 내가 나서야 했는데. 저 한 자루의 검은 나도 가지고 싶군." 별안간 잇달아 쩡쩡,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세찬 소나기가 창문을 두드리고 구슬이 옥쟁반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바로 이 순간에 오아 역시 49검을 찔러 내었다. 모든 검은 천사검의 한 조각 한 조각의 쇄검(碎劍)을 찔렀다. 천사검은 그만 축 늘어져 은빛 광채가 번쩍거리는 기다란 채찍처럼 변했다. 오아의 검 역시 어느덧 채찍 끝을 휘말고 있었다. 하후성의 안색이 변하더니 몸이 빙글 돌아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채찍의 끝이 어느덧 그의 몸을 따라 돌더니 착, 하는 소리가 나면서 다시 한 자루의 검으로 합쳐졌다. 연십삼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번 싸움에 당신들은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이제 내가 나서겠소." 하후성은 냉소하며 사방을 한번 살펴보더니 갑자기 안색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갑자기 한 사람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소년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미 혈도를 찍힌 것 같았다. 설가인이 보이지 않았다. 하후성은 발로 소년의 혈도를 걷어차더니 호통쳐 물었다. "누가 손을 쓴 것이냐?" 어린 소년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저 부인이요." "그녀는?" "부인은 이미 도망쳤어요." 소년은 여전히 땅바닥에 앉아 울고 있었고 하후성은 재빨리 그녀를 뒤쫓았다. 연십삼과 오아는 막지 않았다. 아내가 도망쳤을 때는 어떤 느낌이 들까? 그들은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토록 온순하고 현숙하며 그토록 자기 남편에꼐 탄복하던 여인이 자기 남편이 남과 목숨을 걸고 싸울 때 갑자기 도망칠 줄은 몰랐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어울리는 한 쌍이었고, 연십삼마저도 속으로 무척 부러워했던 것이다. 그녀는 어째서 도망을 쳤을까? 연십삼은 갑자기 비애를 느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물론 하후성을 위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는 인간사에 비애를 느낀 것이었다. 인류. --인류에게는 뜻대로 되지 않고 행복하지 못하고 즐겁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행복해 보이고 즐거워 보이는 일들 가운데 숨겨져 있는 비애가 얼마나 많은가? 어린 소년도 어느덧 떠나 버리고 말았다. * * * 그 때였다. 숲속에서 다른 한 명의 어린 소년이 싱글벙글 웃으며 달려왔다. 그는 단숨에 연십삼과 오아 앞에 이르렀다. 그는 기껏해야 열 살 정도로 보였다.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에게 그런 경공법이 있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연십삼과 오아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친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 소년은 그들을 보고 귀여운 웃음을 지었다. 오아는 어린애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어린애들을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여겨 왔다. 어린애를 보기만 하면 멀찌감치 피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피하지 않고 그 소년에게 물었다. "네 이름은 뭐냐?" 소년은 대답했다. "저는 소토염(小討廉), 싫증나는 꼬마예요." 오아는 물었다. "너는 분명히 조금도 싫지 않은 귀여운 어린애인데 어째서 너를 소토염이라고 부르느냐?" 소토염은 대답했다. "당신은 분명히 사람인데 어째서 오아라고 부르지요?" 연십삼은 우습다는 듯 물었다. "너는 그가 오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니?" 소토염은 대답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죠." 그랬다. 소토염이 몰랐다면 그를 오아라고 부를 리가 없었다. "나는 그가 오아라고 불리는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연십삼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옛날에 연칠이라는 고수가 있었고, 연오라는 고수도 있었죠. 당신은 그들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 더욱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연십삼이라고 자칭한 거 아닌가요?" 연십삼은 속으로 움찔 놀랐다. 그것은 사실 그 자신의 비밀이었다. 그는 이 소토염이 어떻게 알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소토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당신이 몇째인지 몰라요. 이 일은 우리 누님의 말씀을 듣고 안 거예요." 이 또한 뜻밖이었다. 조금 전 그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갔던 젊은 아낙은 보기에 그의 어머니 같았었다. 연십삼은 물었다. "너의 누님은 이름이 없느냐?" "물론 있죠." 연십삼은 넌지시 물었다.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냐?" 소토염은 되물었다. "당신은 벙어리인가요?" 연십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은 다리가 없나요?" 연십삼은 고개를 숙었다. 정말 자기에게 아직 다리가 달려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것 같았다. 소토염은 한마디를 했다. "당신에게 다리가 있고 벙어리가 아니라면 어째서 직접 그녀에게 묻지 못하세요?" 연십삼은 빙그레 웃었다. "왜냐하면 나는 장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볼 수가 있거든."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연십삼은 나뭇가지에 매어 있는 녹색의 띠를 손가락질했다. "저 띠는 네가 두른 것이니, 너는 물론 그 뜻을 알고 있을 것이 아니냐?" 소토염은 말했다. "그것은 누구든지 벙어리가 아닌 사람이 들어가면 벙어리가 되고 다리가 있는 사람이 들어가면 다리가 없어진다는 뜻이에요." 2. 십 년간의 원한과 사랑 연십삼은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무림 사대세가(四大世家)의 규칙이며 강호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묵인하고 있었다. 깊은 원한이 없는 한 강호인들은 이 규칙을 깨뜨리지 않았다. 강호에서 빌어먹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강호의 규칙을 지키려고 했다. 연십삼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토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애석하게도 당신은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는데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군요." 연십삼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뭘?" "지금 당신은 들어가지 않으려 해도 안 돼요." "어째서?" "왜냐하면 지금 우리 누님이 당신보고 들어오라고 했으니까요." 숲속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웠으며 발로 낙엽을 디디는 소리는 무척 운치가 있었다.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가을빛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오아는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누님은 한 사람만 만나고 싶어하시거든요." 그녀는 왜 연십삼을 만나려 할까? 더군다나 한 사람만 만나 보려고 할까? 연십삼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미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오래 된 단풍나무 아래 새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돗자리 위에는 하나의 칠현금과 하나의 향로, 그리고 주전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는 틀림없이 하후성이 남긴 것이다. 그가 이곳을 떠날 때 무척 서둘렀던 것이 틀림없다. --설마하니 그 역시 쫓겨간 것일까? 지금 바로 이 나무 아래에 앉아서 우울한 빛을 띄우고 있는 여인에게 쫓겨간 것일까? 그녀는 우울해 보일 뿐 아니라 너무나 가냘퍼서 조그만 타격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연십삼은 천천히 다가갔다. 마치 그녀를 놀라게 할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물기가 촉촉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바로 탈명검객 연십삼인가요?"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소저는 취운봉에서 왔소?" 그는 밖의 나뭇가지에 맨 그 녹색의 띠가 바로 취운봉 녹수호의 표지라는 것을 알아보앗던 것이었다. 그녀는 뜻밖에도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연십삼은 취운봉의 사람이 아닌데도 어떻게 감히 취운봉의 표지를 사용하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강남 칠성당(七星塘)에서 왔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의 음성은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무척 나지막했다. "내 이름은 모용추적(慕容秋荻)이라고 해요." 연십삼은 더욱 놀랐다. 강남 칠성당 역시 무림의 사대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모용추적은 강호에서 유명한 미인일 뿐 아니라 이름난 효녀였다. 그녀는 병든 부모를 돌보기 위해서 여러 차례에 걸친 혼사를 물리쳤고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다운 청춘을 희생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설마 칠성당의 주인 강남대협(江南大俠) 모용정(慕容正)이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일까? 칠성당의 명성은 결코 취운봉에 못지 않았다. 그녀는 어째서 남의 표지를 훔쳐야 하는 것일까? 모용추적은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본 듯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님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병이 깊기는 해도 삼사 년 안으로는 돌아가시지 않을 거예요." 연십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쪼록 그분의 몸이 건강하셔서 몇 년 더 사시길 바라오이다."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모용정은 정말 정직하고 의협심이 강한 협사였다. 이런 사람은 강호에서 많지 않았다. 모용추적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내가 나선 것은 몰래 빠져 나온 것으로, 그 분은 전혀 모르고 있어요." 연십삼은 참을 수 없어서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질문을 던지기 전에 모용추적은 이미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한 사람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우울한 눈빛에 갑자기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원한이 드러났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연십삼은 감히 물을 수도 없었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는 무림 사대세가의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모용추적의 눈은 마치 까마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했고 그녀 자신도 마치 까마득한 곳에 가 있는 듯 했다. 한참 후에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틀림없이 모두 내가 효녀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칠 년 동안 이미 나는 세 사람의 청혼을 거절했어요." 칠성당으로 가서 청혼을 하는 사람이라면 물론 강호의 명문 자제일 것이다. "당신은 왜 내가 거절했는지 아시나요?" "당신이 병든 영존의 곁을 차마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겠죠." "틀렸어요." 연십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모용추적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결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그런 효녀가 아니에요. 나는...... 나는......" 그녀는 갑자기 힘주어 자기의 손을 불끈 쥐었다. "나는 다만 거짓말쟁이에 불과해요. 다른 사람을 속였을 뿐 아니라 내 자신마저도 속였어요." 연십삼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녀의 눈가는 이미 불그레해졌으며 눈물이 금새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는 여인이 우는 것을 보기 싫었고 여인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의 혼사를 거절한 것은 다만 그 사랍이 청혼해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에요." 그는 누구인가? 혹시 그녀가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닐까? 모용추적은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반드시 나에게 오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었어요."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한 무정한 남자는 혼사를 미끼로 해서 한 가정과 한 소녀를 기만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코 그녀 혼자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자고로 이런 비극은 얼마나 일어났는지 모를 일이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연십삼은 결코 그녀를 위해서 슬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직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만이 참된 비극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비극은 좀처럼 연십삼과 같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열 여섯 살 되던 그 해에 그를 알았으며 그는 나에게 십 년을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십 년! 이 얼마나 기나긴 세월인가? 열 여섯에서 스물 여섯까지...... 여인의 생애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인가? 한 사람의 생애에 그런 십 년이 얼마나 되는가? 연십삼은 속으로 이미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 그가 당신에게 십 년을 기다리라고 한 것은 이미 당신을 속인 것이다. 그는 당신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기다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것이고 십 년 이후에는 반드시 그를 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연십삼은 남자였다. 남자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기나긴 십 년이라는 세월이 그녀에게 있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으며 얼마나 쓰라린 나날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모용추적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본 그 애는 결코 내 동생이 아니에요." "아니라면?" "그는 나의 아들이에요. 나와 그 사람 사이의 사생아예요." 연십삼은 그제서야 그녀가 십 년을 기다리고 그 사람을 증오하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결코 그대가 나를 위해서 괴로워해 주기를 바라서가 아니에요." 그녀의 음성은 갑자기 무척 차갑게 변했으며 우울한 눈빛도 갑자기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그녀는 냉랭히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이 가서 나를 대신해서 한 사람을 죽여주기를 바래요." "바로 그 사람이오?" "그래요." "나는 다만 두 종류의 사람만 죽일 뿐이오." "당신과 원한 있는 사람?"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종류는 나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이 한 가지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라오." 모용추적은 조용히 말했다. "말해 보세요." "당신이 한 사람을 죽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직접 손을 쓰시오. 자기 스스로 맺은 매듭은 반드시 자기 자신이 풀어야 하는 것이오." 모용추적은 말했다. "그러나 나는 갈 수가 없어요." "어째서?" 모용추적은 약간 더듬거렸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나는 그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혹시 당신은 그를 직접 만나게 되면 차마 손을 쓸 수 없게 될까 두려운 것이오?" 모용추적의 손이 다시 불끈 쥐어졌다. 연십삼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못할 짓이라면 굳이 그를 죽일 필요가 없지 않소?" 모용추적은 그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불쑥 입을 열었다. "나 역시 당신이 한가지 사실을 알아주길 바래요." "말하시오." "나는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야 하며 반드시 당신이 죽여야겠어요." "어째서?"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이름이 사효봉(謝曉峯)이기 때문이에요." 연십삼의 안색이 변했다. "녹수호 신검산장(神劍山莊)의 사효봉?" 모용추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예요." 취운봉 옆의 녹수호, 녹수호변의 신검산장(神劍山莊). 신검산장의 대청에는 한 조각의 무척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그 위에는 금색 글자로 다섯 글자가 쓰여 있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이것은 결코 그들 스스로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래 전에 강호에서 모든 이름이 있는 검객들이 화산(華山)의 절정에서 논검대회(論劍大會)를 가진 후에 모든 사람이 황금을 내놓아 그 다섯 글자를 주조해서 신검산장을 세운 사천(謝天)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사천은 바로 신검산장의 제 일대 주인이었다. 이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편액의 금자는 여전히 광채가 눈부셨으나 천하제일검이라는 명성은 지금은 더 누리고 있지 못했다. 최근 백 년 동안 강호에는 명검객(名劍客)이 속속 배출되었으며 그 누구도 천하제일검으로 공인받지 못하고 있었다. 신검산장의 광채도 점차 빛을 잃어 갔다. 그러나 지금의 대에 이르러 신검산장에는 다시 대단한 사람이 나타났고 그 사람의 엄청나고도 놀라운 재간 때문에 천하 사람들은 신검산장을 다시 보아야 했다. 이 사람은 13년 전에 이미 화산파(華山派)에서 첫번째로 손꼽히는 검객 화옥곤(華玉坤)을 패배시켰다. 그 당시 그의 나이가 서른 한 살이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하늘의 여러 신들의 모든 축복과 영광을 부여받은 것 같았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 누린 모든 영광과 모든 총애는 그 어느 누구도 견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강호에서 불세출의 검객이었으며 무림에서 공인하는 재자(才子)였다. 그는 총명하고 영특했으며 준수했을 뿐 아니라 신체 건강하고 의협심이 깊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에게서는 한 점의 결점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바로 녹수호 신검산장의 셋째 도령, 사효봉이었다. 숲속 안은 더욱 조용해졌으며 시원한 바람 속에 낙엽 냄새가 스며 있었다. 연십삼은 사효봉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소." "당신은 물론 알 거예요. 당신들은 그와 만나지 않으면 헤어지지 않을 죽음의 약속을 하지 않았나요?" 연십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정말 그를 찾아가겠다고 약속했었소." 모용추적은 신중히 말했다. "약속한 일을 당신은 한번도 바꾼 적이 없어요." 연십삼은 수긍했다. "그렇소." "그렇다면 이번의 약속은 당신의 마지막 약속이 될 거예요." 연십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오." 모용추적은 그를 마주보았다. "나는 당신의 검법을 보았어요. 당신은 결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어요." 연십삼은 씁쓸히 웃었다. "당신이 알고 있다면 어째서 나보고 그를 죽이라고 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당신은 나를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 말은......?" 모용추적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의 검법은 인간의 극한(極限)예 도달해 있어요. 하지만 사효봉은......" 연십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검의 귀재요. 나 역시 그가 검 쓰는 것을 보았었소." "당신은 그의 검법 가운데에 있는 빈틈을 보았나요?" "그의 검법에는 빈틈이 없소. 절대 없소." "있어요." "정말 있소?" 모용추적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절대로 있어요. 다만 한 점에 지나지 않지만......" "당신이 알고 있소?" "오직 나만이 알 뿐이에요." 연십삼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었다. 세상에서 삼소야 사효봉의 검법에 있는 빈틈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그녀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그 아이를 갖게 된 순간 그들의 심령은 완전히 서로 통하게 되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그와 사랑을 나눈 사람만이 그의 비밀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천하무적의 한 검객에게 있어서 그 검법의 빈틈은 바로 그의 가장 큰 비밀이었다. 연십삼의 눈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이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목덜미의 혈관에서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검을 연마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그의 사랑과 생명을 모두 그의 검에게 바치고 있었다. 승리를 거두는 순간의 그 휘황한 광채는 그의 생명을 빛내기에 충분했다. 본래 그가 검을 연마한 목적은 승리를 얻고자 한 것이었고 남에게 죽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이길 기회가 있다면 그 누가 포기하겠는가? 모용추적은 그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이미 그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고 있었다. 즉시 그녀는 말을 이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오직 나만이 당신을 도와 그를 격패시킬 수 있으며, 오직 당신만이 나를 대신해서 그를 죽일 수 있는 거예요." "어째서 나 한 사람뿐이오?" "왜냐하면 당신의 탈명십삼검 가운데 한 수를 조금만 변화시키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몇번째 검초요?" "제 십사 검이에요." 분명히 탈명십삼검인데 어떻게 해서 십사검이 있는 것일까? 다른 사람은 틀림없이 모를 것이다. 그러나 연십삼은 이해했다. 탈명십삼검의 검초는 열세 가지에 불과했으나 변화는 열네 가지나 되었다. 그 한 수의 변화야말로 그의 초식 중의 진수라 할 수 있으며 검법 가운데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혼이란 볼 수가 없지만 그 누구도 그 존재를 부인하지 못한다! 모용추적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보기에 여전히 가냘프고 취약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칼날 같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연십삼을 바라보며 한자 한자 또렷이 말했다. "이제 내가 사효봉이에요." 그 한마디가 끝나자 그녀의 눈빛은 다시 사람을 핍박하는 살기로 변했다. 무수한 사람을 죽인 고수들만이 가지는 살기였다. 설마하니 이 가냘프고 연약한 명문가의 규수 역시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일까? 연십삼은 묻지 않았으며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모용추적은 한 토막의 나뭇가지를 꺾어 들었다. "이것은 검이에요." 그 한 토막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그녀의 손에 들어가자 그녀는 다시 변했다. 그 무엇이라도 부수어 버릴 수 있고 항거할 수 없는 살기는 그녀의 눈동자 뿐만 아니라 이미 그녀의 몸에서 뻗쳐 나가고 있었다. 뻗쳐 나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당신은 보세요. 자세히 보세요. 이것은 그의 검법 가운데 유일한 빈틈이에요." 일진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갑자기 무척 차갑게 변한 듯했다. 그녀와 검은 이미 움직임을 보였다. 일종의 지극히 느리면서도 지극히 우아한 동작으로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바람이 불어왔을 때 그 누가 대항할 수 있을까? 그 누가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있을 것인가? 연십삼의 동공은 수축되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뻗쳐 나왔다. 가장 불가사의한 부위에서 뻗쳐 나왔는데 뻗쳐 났왔을 때 갑자기 가장 불가사의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 변화 사이에 과연 한 점의 빈틈이 보였다! 광풍이 온 누리에 휘몰아치게 되었을 때도 빠트린 곳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광풍이 불어닥치게 되었을 때 누가 그런 점을 주의할 수 있단 말인가? 연십삼은 갑자기 자기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 때 그녀의 동작은 멈추어졌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연십삼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알아 보았나요?"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추적은 말했다. "당신이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동작이 그가 손을 쓸 때보다 스물 네 배나 느렸기 때문이에요." 연십삼은 그녀의 계산이 절대로 정확하다는 것을 믿었다. 참된 고수는 검의 속도를 헤아림에 있어 전당포의 주인이 상품의 가치를 헤아리는 것보다 열 배나 더 정확한 법이다. 모용추적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정말로 손을 쓰게 되면 그 사람보다는 조금 느리지만 결코 많이 느리지는 않을 거예요." 연십삼은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이 가냘프고 연약한 여인이 실제 있어서는 그가 한평생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고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용추적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나는 손을 쓰게 될 거예요." "누구를 상대로 손을 쓰는 것이오?" "당신." 연십삼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당신은 내가 그 일 검을 깨뜨릴 수 있는지 보려는 것이오?" "그래요." "만약 내가 그 일 검을 깨뜨리게 된다면 당신은 바로 내 검 아래 죽을 것이 아니겠소?" "그 점은 걱정하지 말아요." "만약에 내가 여전히 그 일 검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이 죽게 되겠죠." 그녀는 냉랭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직도 그 일검을 깨뜨릴 수 없다면 살아 있을 가치가 없고, 당신이나 나에게 득이 될 것이 없으니 당신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낫죠." 사람은 침묵하고 있었고 숲속은 조용하기만 했다. 연십삼은 그녀의 손에 들린 메마른 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당신은 어째서 아직도 검을 뽑지 않아요?" "나의 검은 이미 손에 쥐어져 있소. 언제라도 뽑을 수 있소. 당신은?" "이것이 바로 나의 검이에요." 연십삼은 부정했다. "그것은 검이 아니오." "내 손에 들리게 되면 바로 살인의 예리한 무기가 되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그것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그 자체는 한 토막의 나뭇가지에 불과하오." "사람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나뭇가지와 검이 다를 게 무엇이겠어요?" "다르오." 모용추적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연십삼은 설명하듯 말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일 순 있으나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소. 하지만 나의 검은 다르오......" 그는 가볍게 자기의 검을 어루만졌다. "이 한 자루의 검은 이미 나를 십구 년 동안 지켜 왔으며 이 검 아래 죽은 사람은 예순 세 명이나 되오." 모용추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나는 당신이 적지 않은 사람들을 죽인 것을 알고 있어요." 연십삼은 설명하듯 말했다. "본래 이 한 자루 역시 평범한 검에 지나지 않았소. 그러나 그는 이미 예순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피를 마셨소. 예순 세 명의 원혼(寃魂)이 서려 있단 말이오." 그는 계속 그의 검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한 자루의 검에 이미 생명이 깃들어 다른 사람의 피를 맛보고자 갈망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검 날 아래에 죽는 것을 갈망하고 있소." 모용추적은 냉소했다. "그것이 당신에게 말해 주던가요?" 연십삼은 대답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가 있소." 모용추적은 물었다. "무엇을 느낀다는 거예요?" 연십삼은 대답했다. "이것이 검집에서 벗어나면 반드시 사람을 죽여야 하오. 심지어 내 자신마저도 억제할 수가 없소." 그는 결코 허황된 신화(神話)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당신에게 그런 검이 한 자루 있고 만약 그 검으로 예순 세 사람을 죽였다면 당신도 반드시 그런 느낌을 갖게 되리라. 연십삼은 그녀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손에 있는 그 나뭇가지는 결코 사람을 죽이겠다는 갈망은 품지 않았을 것이며 당신 자신도 결코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오......" 그는 고개를 쳐들고 물끄러미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재차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결코 사효봉이 아니기 때문이오." 모용추적의 입술은 이미 창백해졌다. 한 잎의 낙엽이 두둥실 떨어지고 그녀는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 잎사귀는 죽은 것이 아닌가요?"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러나 이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으며 살아 있었어요." 낙엽이 지기 전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었다. "사람의 생명도 이 잎사귀와 같지 않을까요?"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의 뜻을 알고 있소." 모용추적은 다짐받듯 물었다. "정말로 알고 있나요?" "당신은 그 아이를 낳고 키우기 위해 틀림없이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오. 따라서 당신이 그에게 품은 사랑은 당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원한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을 것이오. 미움이 큰만큼 사랑도 큰 법이니까." 모용추적은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신은 자기의 목숨에 대해서 전혀 미련을 갖지 않소. 내가 그 일검을 깨뜨리기만 한다면 당신은 내 검 아래 기꺼이 죽으려 할 것이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은 틀렸소." "틀렸다구요?" 연십삼은 천천히 말했다. "내가 당신의 그 일 검을 깨뜨린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효봉의 검을 깨뜨린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듯 하면서 말했다. "왜냐하면 당신이 사용하는 것은 결코 사람을 죽이는 검이 아니고 당신 역시 사효봉이 아니기 때문이오." 모용추적의 손이 갑자기 아래로 맥없이 떨어졌으며 살기도 갑자기 사그라졌다. 어느덧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연십삼은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나에게 기회만 있다면 반드시 그를 죽이겠다고 약속하겠소." 모용추적은 다시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당신은 어느 정도의 자신이 있나요?" 연십삼은 쓸쓸히 웃었다. "원래 일 성(一成)도 없었소." "지금은?" "지금은 적어도 사, 오 성은 되오." "당신은 이미 깨뜨리는 수법을 생각해 냈어요?" 연십삼은 갑자기 한 토막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꺾어 들었다. "보시오!" 그의 움직임은 단순하면서도 우둔해 보였다. 그러나 모용추적의 눈동자에 놀란 빛이 여실히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이미 찾아낸 것을 알 수 있었다. 삼소야의 검법이 자물통이라면 그는 이미 자물통을 딸 열쇠를 찾은 것이었다. 일검을 찔러냈을 때에 바람이 불었다. 연십삼의 손에 든 앙상한 나뭇가지가 갑자기 가루가 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이 한 자루의 검이었고 그 일검이 뻗쳐졌다면 얼마나 위력적이었을까! 모용추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제 가 보세요." * * * 연십삼이 숲속에서 걸어나왔을 때 소토염은 아직도 밖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오직 소토염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왼손엔 닭다리를 들고 입으로 뜯고 있었다. 부근에는 숫제 과일이나 육포 같은 것을 파는 곳이 없었다. 그 닭다리는 어디서 구했을까? 연십삼은 그 어린애를 보자 호감을 느꼈다. 그의 신세를 생각하면 더욱 동정이 갔다. 다행히 그 어린애는 자기 자신을 잘 돌보고 있었다. 소토염은 한 쌍의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십삼은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빨리 돌아가거라. 너의 누님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왜 날 기다리죠?"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녀는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서 무엇 한다는 거죠?" "너는 그 누구도 너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한 사람도 없었어요. 반쪽의 사람도 없었단 말이에요. 나는 소토염이에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아요." 그는 다시 닭다리를 한번 깨물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요." 연십삼은 그의 조그마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 부근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물었다. "나의 그 친구는?" "당신의 어느 친구 말이에요?" 연십삼은 간단히 대답했다. "오아!" "이 숲속에는 까마귀는 없고 참새만 있어요." "나는 조금 전 나와 함께 있던 오아라고 불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보관비를 냈어요? 나보고 그를 보관해 달라고 했어요?" "아니." 소토염은 말했다. "아니라면 어째서 나에게 묻는 거죠?" "왜냐하면...... 왜냐하면 나는 네가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토염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물론 알고 있죠. 그러나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말해야 하죠?" 연십삼은 쓸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의 묻는 말은 종종 그로 하여금 대답할 바를 잃게 했다. 소토염은 다시 닭다리를 깨물어 뜯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알려줄 수 없는 것은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나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느냐?" "당신이 나에게 물어 보려면 약간이나마 나에게 질문하는 값을 내야 해요." 연십삼은 어느덧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뒤졌으나 아무것도 꺼내 놓지 못했다. "당신은 매우 그럴싸하게 입고 있는데 설마하니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연십삼은 쓸쓸히 웃었다. "한번도 질문하는 값을 받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토염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무에서는 기름을 짤 수 없는 것이니, 나는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네요. 당신은 각서나 한 장 써 주세요." "각서라니?" "당신이 물어보려면 값을 치러야 할 것 아니에요? 지금은 돈이 없어도 나중에는 생길 것이 아니에요?" "이곳에 붓이나 종이가 없는데 어떻게 돈을 빌렸다는 각서를 쓸 수 있겠느냐?" "당신의 검으로 나무껍질을 잘라 내고 다시 당신의 검으로 그 나무껍질에 글자를 쓰면 돼요." 연십삼은 쓸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정말 치밀하구나." * * * "얼마나 쓰랴?" "이왕 쓸 바에야 많이 써야 되겠죠." 그는 눈동자를 한번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일만 냥만 써주세요." 연십삼은 그를 바라보았다. 꼼꼼하게 아래위로 여러번 훑어보았다. 일개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가 대뜸 일만 냥이라니, 나중에 크게 되면 어떻게 될까? 소토염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지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어린애가 벌써부터 바가지를 씌우니 커서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어떻게 내 속생각을 알아차렸느냐?" "그런 말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들었기 때문이에요." "끄럴 때 너는 뭐라고 변명했느냐?" "어린애가 바가지를 씌울 수 있다면 어른이 되었을 때 떼부자가 될 것이라고 했지요. 이렇게 단순한 이치마저도 당신은 모른단 말예요?" 연십삼은 웃었다. 이 어린 소년이 자신을 돌볼 줄 아는 데 대해 다행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어린애가 자기 자신마저도 돌보지 못한다면 큰일이 아닌가? 연십삼이 쓴 빚은 일만 냥이 아니라 오만 냥이었다. "일만 냥을 달라고 했더니 오만 냥을 주시네? 당신이란 사람은 가난하지만 통이 제법 크군요?" "통이 큰 사람은 대체로 가난하지." 소토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에요." "가난하고 싶지 않다면 돈을 쓸 때 흥청망청하면 못 쓴다는 것을 명심해라." "돈이 있는데 쓰지 않으면 무엇해요? 그렇다면 돈이 있는 것과 없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어요?" 연십삼은 다시 웃었다. 그는 정말 이 아이가 무척 귀엽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사실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 아이의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강호인이었다. 강호인의 생각은 이렇게 모순된 것이다. 오만 냥의 빚을 졌다는 각서, 틀림없이 돈을 되받을 수 있다는 각서를 소토염은 아무렇게나 옷자락에 쑤셔 넣었다. 마치 쓸모 없는 휴지를 다루는 것 같았다. 연십삼은 넌지시 말했다. "나는 지금 돈이 없지만 나중에는 돈이 생길 수 있다." 소토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 수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째서 각서를 받아 두겠어요?" "너는 언제라도 나를 만나게 되면 돈을 달라고 해라." "물론이에요." "그러니 너는 그 각서를 잘 갈무리해라. 잃어버리지 않도록 말이다." 소토염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잃어버리게 된다면 당신은 운이 좋은 편이고 나는 재수 옴 붙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그는 눈을 깜박였다. "당신이 죽게 된다면 나는 재수 옴 붙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요. 당신과 같은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연십삼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강호에 몸을 담는다는 것은 바로 바람 앞의 촛불과 같고 물속의 부평초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의 웃음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소토염은 입을 열었다. "당신의 그 친구는 앞쪽에 있는 저 산비탈 뒤로 갔어요." "무엇 하러 갔지?"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간 것 같아요." "목숨을 걸고 싸우다니? 누구와?" "무슨 빙(氷)이라는 녀석이에요." 조빙인가? 설마 줄곧 그들의 뒤를 따라와서 길을 오는 동안 비용을 부담한 사람이 그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오아와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것일까? 연십삼은 결코 오아를 위해서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조빙이 결코 오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잘못이었다. * * * 산비탈 뒤쪽의 시들은 풀밭은 새빨간 핏물에 젖어 있었다. 오아의 피였다. 오아는 비탈길에 쓰러져 있었다. 선혈은 가을의 풀을 붉게 물들여 놓고 그의 상의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피는 그의 목덜미 아래에 있는 쇄골(鎖骨)에서 흘러나왔다. 목덜미에서 겨우 세 치밖에 되지 않는 부위였다. 그 세 치의 차이로 그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를 찔러 상처를 입힌 사람은 누구인가? 연십삼은 달려들었다. "조빙인가?" 연십삼은 놀랍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일부러 양보했는가?" 연십삼은 더욱 놀랐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오아는 쓸쓸히 웃었다. "자네가 믿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네.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네. 나는 그 녀석에게 당했네." 연십삼은 그 말을 받았다. "하지만 자네는......" "나는 본래 그를 삼 초안으로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네. 절대적인 자신감이었지." 연십삼은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쓰러져 있는 사람은 자네일세." "그것은 내가 틀렸기 때문일세." "어느 점이 틀렸단 말인가?" 오아는 설명하듯 말했다. "나는 예전에 그가 손쓰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며 그의 검법의 변화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네. 점창파의 검법으로는 나의 옷깃조차 건드릴 수 없었네. 나는 그가 그의 검법을 쓸 줄 알고 있었어. "그가 이번에 사용한 것이 점창파의 검법이 아니란 말인가?" "절대 아니네." "그가 사용한 것은 어떤 검법이었나?" 오아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모르네." 연십삼은 급히 물었다. "자네는 이렇게 당하고도 알아볼 수 없었단 말인가?" 오아는 힘없이 말했다. "그 일초의 변화는 상상을 불허했네." 연십삼은 크게 눈을 떴다. "그 일초? 그가 단 일초를 썼는데 자네는 그의 검에 상처를 입었단 말인가?" 오아는 차갑게 대답했다. "만약 자네였다 하더라도 역시 그 일초를 받아 내지 못했을 것이네......" 그는 갑자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 누가 그 일초를 받아낼 수 있을지 생각이 나지 않는군." 연십삼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지극히 느리고 우아한 동작이었다. 그것은 마치 바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그의 검은 천천히 앞으로 찔러 나갔다. 가장 불가사의한 부분에서 찔러 나왔고 찔러 나온 후에는 갑자기 가장 불가사의한 변화를 일으켰다. 오아는 놀랍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가 불쑥 고함을 질렀다. "맞았네. 그가 펼친 것은 바로 그 일초였네." 가을 풀은 시들어 있었고 피는 말라 있었다. 연십삼은 묵묵히 앉았다. 오아의 맞은편 산비탈에 앉은 것이었다. 오아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자네는 그 일초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가 그 일초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자네를 격패시킬 수 없었겠지." 오아는 신중하게 말했다. "그것은 결코 점창파의 검법이 아니며, 절대로 자네의 검법도 아니었네." "물론 아니지." "그 일초는 누구의 것인가?" 연십삼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네." "바로 삼소야의 검법이란 말인가?" 연십삼은 수긍했다. "그를 제외하고 누가 있겠는가?" "적어도 자네가 있고 조빙이 있네!" 연십삼은 쓸쓸히 웃었다. 그는 조빙이 몰래 그 일초를 훔쳐 배우리라곤 생각 못했다. 그 때 그는 온 정신을 그 일초에 쏟고 있었기 때문에 숲속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주의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조빙이 오아를 상대로 검법을 시험해 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다만 한가지 사실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조빙이 다음에 찾아갈 사람은 분명히 사효봉이다. 신검산장의 삼소야 사효봉. 연십삼이 숲속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으며 삼소야의 절묘한 검초를 어떻게 배울 수 있었는지 오아는 묻지 않았다. 그는 이미 연십삼이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네가 신검산장으로 가고 싶으면 빨리 가게. 나는 가지 않겠네." 연십삼은 서둘러 달려가고 싶었다. 조빙이 삼소야의 일초를 훔쳐 배웠다면 물론 똑같이 연십삼의 그 일초도 훔쳐 배웠을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검법으로 삼소야의 검법을 깨뜨리는 것이 싫었다. 이는 그의 영광이요, 권리였다. 삼소야의 검법을 깨뜨리지 못할 경우에 죽어야 할 사람 역시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자네가 이미 상처를 입고 혼자서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은......" 그는 오아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까마귀는 결코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새는 아니었다. 오아는 절대로 환영받는 사람이 못 되었다. 오아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많을 것이다. 오아는 냉소했다. "안심하게. 죽지 않을 것이네. 자네는 자네 자신이나 걱정하게." "내 자신을?" "이곳에서 녹수호까지는 결코 멀지 않네. 길을 오는 동안 그 어떤 사람이 이미 자네를 위해 비용을 부담하지 않았던가?" 조빙은 틀림없이 가장 신속하고 쾌속한 마차나 탈것을 찾았을 것이며 가장 빠른 길로 나아갔으리라. 오아는 말을 이었다. "자네의 운수가 대통하다면 곧 쾌마를 탄 돈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 먼저 그의 돈을 빼앗고 다시 그의 말을 가로채도록 하게." 연십삼은 웃었다. "안심하게. 내가 그런 짓을 못할 것 같은가?" 오아는 웃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동시에 손을 내밀어 꼭 쥐었다. 오아는 재촉했다. "빨리 가 보게. 자네가 죽지 않는다면 자네가 반드시 나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내 걱정은 말게." "만약에 내가 죽게 된다면 틀림없이 사람을 시켜 내 검을 자네에게 건네주도록 하지." 오아는 그 말을 받았다. "자네는 다 죽게 된 사람의 운수는 언제나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한 적이 있지." "아무래도 자네의 운이 지금은 다시 좋아진 것 같네." 달려오고 있는 것은 한 대의 마차였다. 재빠른 쾌마가 끄는 가벼운 그 수레는 무척 빨리 달려왔다. 그들이 막 수레바퀴가 구르는 소리와 말 우는소리를 들었을 때 마차는 이미 산비탈 저쪽에서 돌아 나왔다. "나는 그런 일을 자네가 틀림없이 잘 해내리라 믿네." "물론이지." 그는 입으로는 호언장담하고 있었으나 사실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강도 노릇도 생각처럼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마차가 이미 그들의 곁을 지나서 달려가는 것을 두 눈을 멀거니 뜨고 보고 있으면서도 그는 손을 쓰지 못했다. 오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좋은 운은 결코 자주 오는 것이 아닐세." "어쩌면 나는......"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마차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가 손을 쓰지 않았는데도 마차는 스스로 멈추어 선 것이었다. 수레 안에서 목 쉰 듯한 음성이 들렸다. "길을 급히 재촉하는 사람이라면 수레에 오르시오." 오아는 연십삼을 바라보았다. 연십삼 역시 오아를 바라보았다. 오아는 불쑥 한 마디 내뱉었다. "운수가 유난히 좋은 사람이 반드시 금방 죽는 것은 아니겠지?" 연십삼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수레 문은 열려 있었다. 그는 훌쩍 몸을 날려 수레 위로 오르더니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내가 죽지 않는다면 자네가 틀림없이 나를 다시 만날 것을 보장하네. 자네가 나를 피하려고 해도 되지 않을 걸?" 수레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 * * 깨끗하고 쾌적한 수레 안에는 한 사람이 넓은 흑포(黑袍)를 걸치고 검은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검은 수건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앉아 있었다. 연십삼은 바로 그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다만 한마디를 물었다. "당신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나를 취운봉 녹수호 쪽으로 데려다 줄 수 있겠소?" 그 사람은 대답했다. "할 수 있죠." 그 말을 듣고 연십삼은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눈마저 감아 버렸다. 그는 본래 많은 말들을 물어 보았어야 했으나 한 마디도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결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흑의인은 그에게 호기심을 느낀 것 같았다. 검은 수건 밖으로 드러난 한 쌍의 눈동자로 줄곧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한 쌍의 눈동자는 무척 맑았다. 마차는 무척 빨리 달렸다. 연십삼은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잠을 자고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흑의인이 방석 아래에서 한 병의 술을 꺼내 마시게 되었을 때에 그의 목젖도 움직였기 때문이다. 잠이 든 사람은 술 향기를 맡고 침을 삼킬 수 없는 것이다. 흑의인은 눈웃음을 치더니 술병을 내밀었다. "한 모금 마시겠소?" 물론 마셔야 했다. 연십삼은 손을 내밀어 술병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만약 그가 눈을 떴더라면 그 흑의인의 한 쌍의 손이 무척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 그 어떤 사내라 해도 이런 손을 가질 수는 없다. 사실 이렇게 예쁜 손을 가진 여자도 드물었다. 섬세하면서도 예쁘고 기다란 손가락...... 살결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매끄럽지 않은가! 연십삼은 거의 다 비워진 술병을 되돌려 주다가 그 한 쌍의 손과 부딪히게 되었다. 그에게 느낌이 있었다면 그 한 쌍의 손이 지니고 있는 부드러움과 섬세함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그는 조금도 느낌이 없는 듯 했다. 흑의인은 다시 그를 한참 동안이나 말끄러미 바라보더니 불쑥 물었다. "당신은 사람이오?" 그 음성은 여전히 그토록 목 쉰 듯하고 이상야릇했다. 그렇게 한 쌍의 아름다운 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와 같은 음성을 내는 것이 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연십삼의 대답은 무척 간단했다. "나는 사람이오!" "산 사람이오?" "지금까지는 그렇소." 흑의인은 궁금한 듯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나 보군?" "나는 당신도 사람이라는 것.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것으로 충분하오?" "그것으로 충분하오." 흑의인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나의 마차는 훔쳐 온 것도 아니고 술도 훔쳐 온 것이 아니오. 내가 어째서 까닭 없이 당신을 마차에 태워서 녹수호까지 바래다주고 술까지 대접하는지 궁금하지 않소?" 연십삼은 덤덤히 대답했다. "그거야 당신이 좋아서 하는 노릇이겠지요." 흑의인은 갑자기 웃었다. 이제 음성이 변했다. 무척 아름다우면서도 간드러진 음성이었다. 이제 그 누구라도 흑의인이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더군다나 무척 아름다운 여자같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언제나 예쁘게 생긴 여인 보기를 좋아했다. "당신은 나를 보고 싶지 않나요?" 연십삼은 간단히 대답했다. "생각 없소." "어째서죠?" "번거로움을 자초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흑의인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내가 번거로운 일을 안겨줄 거라고 생각하나요?" 연십삼은 순순히 대답했다. "까닭 없이 마차에 태워 주고 술을 대접하는 사람에겐 그런 폐단이 있기 마련이오." "폐단인가요? 아니면 번거로움인가요?" 연십삼은 천천히 대답했다. "폐단이 있는 사람은 번거로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오." 흑의인은 다시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간드러졌다. "어쩌면 당신은 나를 보게 된 후에는 내가 약간 번거로운 일을 일으키는 대신에 더 큰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연십삼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글쎄요." "왜냐하면 나는 여인인데다가 무척 예쁘기 때문이에요." 연십삼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글쎄요." "무척 예쁘게 생긴 여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봐주기를 바라죠." 연십삼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가요?" 흑의인은 안타까운 듯 말했다. "누가 만약 그녀를 거들떠 보지 않는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틀림없이 상심하게 될 거예요......" 그녀는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여인이 상심하면 종종 이상한 일을 저지르게 되지요." "예를 들면 어떤 일이오?" "예를 든다면 그녀는 갑자기 자기가 청해 들인 손님을 수레에서 내쫓을지도 모르지요." 연십삼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다음 순간 즉시 그는 눈을 감았다. 그가 본 것은 온 몸의 아래위를 검은 옷으로 감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논란 것은 물론 귀신을 보아서가 아니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그렇게 예쁜 귀신은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여인이었다. 알몸의 여인이었다. 온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으며 속옷조차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살결은 윤기가 나고 매끄러웠으며 비단결처럼 아름다웠다. 연십삼의 본명은 연십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본래 이름은 결코 벽창호가 아니었다. 그는 여인을 접한 적이 있었다. 가지각색의 여인을 접한 적이 있었다. 어떤 여인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어떤 여인들은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어떤 여인은 본래 옷을 입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옷을 벗었다. 어떤 여인은 무척 빠르게 벗어 젖히기도 했다. 그는 여인 때문에 그토록 놀란 적은 없었다. 그가 놀란 것은 결코 그 여인이 아름다웠기 때문만이 아니었고, 그녀의 허리가 한 줌밖에 안될 정도로 가늘기 때문도 아니었고 젖가슴이 머리통처럼 크기 때문도 아니었다. 물론 그녀의 한 쌍의 탄탄하게 쭉 뻗고 곡선이 아름다운 다리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 일들은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을 뿐 결코 그를 놀라게 하지는 못했다. 그가 놀란 것은 그 여인이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조금 전에 만나 본 여인이었으며, 그를 놀라게 만들었던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물론 모용추적은 아니었다. 그 여인은 놀랍게도 바로 하후성의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현숙하고 지혜로운 아내이자 화염산 홍운곡 하후세가의 큰며느리였던 것이다. 하후성의 검법은 어쩌면 그렇게 무섭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은 무척 무서웠다. 화염산 홍운곡의 하후씨 가문은 명성이 혁혁할 뿐 아니라 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거기다가 집안의 규율이 가장 엄했다. 하후산장의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절대 남에게 능멸을 당하지 않았다. 하후산장의 여인이 출타하면 다른 사람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눈알을 도려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하후씨 집안의 큰며느리가 불쑥 벌거숭이가 되어 자기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남자가 있겠는가? 맞은편에 앉아 있다면 그런대로 좀 나을 것이다. 지금 설가인은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너무 가까워서 그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의 귓가에...... 연십삼은 이미 숨을 멈춘 것 같았다. 그는 결코 우둔하지 않았다. 자기 도취에 빠지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 마차에 오르게 된 후에 번거로운 일을 당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번거로움이 도대체 얼마만큼 큰지는 알지 못했다. 이제 그는 알았다. 만약에 그가 이 번거로움이 얼마나 큰지 알았더라면 차라리 기어서 녹수호로 가는 쪽을 택했지 이 마차에 오르지는 않았으리라. 벌거숭이 미녀가 곁에 찰싹 붙어 앉아서 귓가에 가볍게 숨결을 내쉬고 있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짜릿하고 흥분되는 일인가? 연십삼이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이 여인이 너무나 위험해서 수시로 터지는 활화산과 같다고 해도, 그가 숨을 쉬지 않고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지 못한다고 해도, 빨리 뛰는 심장의 박동을 느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심장은 무척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내다보았더라면 결코 이 마차를 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의 귓가에는 뜨거운 입김이 훅훅 끼쳐오고 감미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어째서 나를 보지 않나요? 감히 볼 수가 없나요?" 연십삼의 눈이 어느덧 떠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가인은 방긋 웃었다. "당신은 어찌 되었든 역시 남자였군요. 그리고 어찌 되었든간에 약간 용기가 있네요." 연십삼은 씁쓸히 웃었다. "그러나 내가 사흘 낮, 사흘 밤을 두고 살펴본다고 해도 알 수가 없을 것이오."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거죠?" "당신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당신은 마땅히 알아야 해요." 그녀는 젖가슴을 그의 얼굴 앞으로 불쑥 내밀고 두 다리를 살짝 벌렸다. "내가 여자같지 않나요?" 눈이 있다면 그녀가 사람일 뿐 아니라 여인이고, 살아 있는 여인일 뿐 아니라 여인 가운데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으리라. "당신은 한 여인을 무척 닮았지만 당신이 한 일은 닮지 않았구려." "당신은 내가 어째서 이러는지 모르는 모양이꾼요?" "내가 알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닐 것이오." "당신은 당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나요?" "그렇게 못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당신은 늙었나요?" "그렇게 늙었다고도 할 수 없소." "어떤 결함이라도 있나요?" "없소." "당신을 좋아한 여인이 있었나요?" "몇 명 있었소." "그렇다면 왜 이상하게 생각하나요?" "만약 당신이 다른 여인이라면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도 사양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당신은......" 설가인은 다그치듯 물었다. "내가 어쨌다는 거예요?" "당신에게는 남편이 있소." "여자는 시집가게 마련이에요. 시집을 가면 남편이 있게 마련이죠." 이는 극히 당연한 군소리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다음 한 마디가 무척 절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맞아들인 지아비가 사람이 아니라면 남편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이 한마디의 질문은 너무나 절묘했고 다음의 한마디는 더욱 절묘했다. "만약 한 여인이 한 마리의 돼지, 한 마리의 개, 한 조각의 나무토막에 시집을 갔다면 그녀에게 남편이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연십삼은 실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다음과 같이 되물었을 뿐이었다. "하후성이 돼지란 말이오?" "아니에요." 연십삼은 즉시 질문을 던졌다. "나무토막이오?" "그것도 아니에요." 연십삼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개란 말이오?" "그렇다면 좀 더 나았을 거에요." "그게 무슨 소리요?" "개는 적어도 사람의 뜻을 조금은 알고 있으며 어느 정도 총기가 있어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무척 슬프고 한스러운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후성은 돼지보다도 더 게으르고 나무토막보다도 더 무뚝뚝하고 개보다도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하는 등신이에요. 그러면서도 자기자신이 매우 대단한 줄 안단 말이에요. 나는 그에게 시집을 간지 삼 년이 되었지만 하루도 즐거웠던 적이 없었고, 매일같이 도망치고 싶었어요." "당신은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평소에 그는 그의 곁을 한 걸음도 떠나지 못하도록 했어요." 연십삼은 눈을 뜨고 마차 안을 살피고 있었다. 술병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술병으로 자기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었다. 술병은 그의 맞은편에 있었다. 그는 재빨리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술병으로 자기의 입을 틀어막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입을 이미 다른 한가지의 물건이 틀어막은 것이었다. 향긋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대다수의 사내들은 입술이 그런 것에 틀어 막혔을 때 한가지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다. 젖먹이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연십삼의 반응을 달랐다. 그는 갑자기 입 속에 독사라도 기어든 것처럼 반응했다. 매우 지독한 독사 말이다. 이런 반응은 결코 정상이라고 할 수 없었으며 사람을 그렇게 유쾌하게 만들지도 못했다. 설가인은 하마터면 성을 낼 뻔했다. 그녀는 뾰로통하니 물었다. "내 몸에 독이 있나요?" "아마 없는 것 같소." "당신에게 있나요?" "아마 없을 것이오." "당신은 뭐가 두려운가요?" "나는 다만 한가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오." "어떤 일인가요?" "나는 다만 당신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하는 것인지 알고 싶소." "내가 당신에게 일을 시키려고 이러는 줄 아세요?" 3. 놀라운 삼소야의 검법 설가인은 화가 났다. 정말 화가 났다. 그러나 성을 낸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는 끝내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실 이번이 내가 처음 도망친 것이 아니에요. 나는 일곱번이나 도망을 쳤었어요." "아, 그ㄹ소?" "당신은 내가 몇번이나 잡혀 갔다고 생각해요?" "일곱번." "하후성이란 사람은 다른 재간은 없고 다만 한가지 커다란 재간은 있어요." "어떤?" "내가 어디로 뺑소니 치든간에 나를 잡아서 데리고 가는 재간이죠." 연십삼은 빙그레 웃었다. "그 재간은 정말 대단하구려." "그는 이번에도 조만간 나를 찾아낼 거예요. 그러나 다행히도 이번은 달라질 거예요." "뭐가 달라진다는 것이오?" "이번에 그가 나를 잡았을 때 나는 이미 당신의 사람이 되어 있을 거예요." 그녀는 연십삼이 부인할 여지없이 다시 토를 달았다. "적어도 그는 내가 이미 당신의 사람이 되었다고 여길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와 당신이 이미 살을 섞었다고 생각할 거예요." 연십삼은 웃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도 하지 않았다. 누가 보든, 그들의 지금 모습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설가인은 나직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에겐 또 다른 한가지 재간이 있어요. 그것은 무척 질투를 한다는 거예요. 그는 무척 강짜가 세죠." 이런 재간은 사내들에게 대체로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우리의 이 모습을 본다면 틀림없이 당신을 죽일 거예요." 연십삼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설가인은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 반드시 당신을 죽이려고 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그러나 그녀는 연십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 자신이 대답했다. "당신은 물론 그를 죽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제 그는 그녀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설가인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한숨을 쉴 필요가 없어요. 당신은 결코 손해볼 것이 없잖아요. 많은 사내들이 미녀를 얻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거든요." "많은 남자들이 그럴 것이오. 그러나 나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어떻게 나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소?" 설가인은 힘주어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 때 당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에요." 갑자기 그녀는 와락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때 당신이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가 당신을 죽이고 말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지금 차라리 나를......"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떤 것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입이 다른 사람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연십삼은 그녀를 독사처럼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이미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바로 이 때 수레를 끌고 가던 말이 갑자기 놀라 히힝,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하나의 수레바퀴가 마차의 창문 곁에서 데굴데굴 앞쪽으로 글러가고 있었다. 바로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의 바퀴였다. 그 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보는 순간 마차는 이미 길옆에 쳐박혔다. 마차가 넘어지며 창문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위에서 차갑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준수하면서도 차갑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인데 눈에는 원한의 빛이 그득했다. 설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보기에 그는 제법 재간이 있죠?" 연십삼은 씁쓸히 웃었다. "그렇구려." 하후성은 무림세가의 자제였다. 무림세가의 자제들은 대체로 무척 교양이 있었으며 좀처럼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꺼지라고 할 때에도 대체적으로 존댓말을 썼다. 그러나 때로는 품위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있는데 지금 하후성이 그런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가 펄쩍펄쩍 뛰면서 마구 욕을 하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인내심을 과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다만 한마디 욕을 했을 뿐이었다. "이 계집년! 냉큼 기어 나와." 설가인은 놀랍게도 무척 순종적이었다. 그녀보고 나서라고 하자 그녀는 즉시 나섰다. 그녀는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하후성은 그 모양을 보자 황급히 소리쳤다. "잠깐! 나오지 말아라." "당신은 내가 언제나 당신의 말에 순종한다는 것을 잘 알 거예요. 그러나 나보고 기어서 나오라고 했다가 나가지 말라고 하니 이 몸은 어찌하면 좋아요?" 하후성의 창백하던 얼굴은 이미 치미는 울화에 검붉게 변해 있었다. "너는...... 너는...... 너는......" 그는 입담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다급해지고 울화가 치밀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설가인은 연십삼에게 말했다. "저 모양을 보건대 그는 아마도 당신보고 기어 나가라고 하는 것 같군요." "절대 아니오." "아니라구요?" "왜냐하면 나는 계집년도 아니고 길 줄도 모르기 때문이오." 그는 빙그레 웃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하공자가 무척 교양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니 그가 나에게 나오라고 할 때는 분명히 깍듯이 존댓말을 할 것이오." 하후성의 안색은 다시 검붉은 빛에서 창백한 빛으로 변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발...... 제발...... 제발......" 그는 잇달아 제발이란 말을 되풀이했다. 연십삼이 밖으로 나간 후에도 그는 그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당신은 나보고 제발 무엇을 해 달라는 것이오?" "제발 죽으시오." 길 앞쪽 멀리 한 대의 마차가 멈추어 있었다. 수레의 문 앞에는 하후세가의 표지가 그려져 있었다. 어린 소년과 마차를 모는 마부는 모두 다 앞쪽의 자리에 앉아 연십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를 모는 마부는 백발이 성성했으며 비쩍 마르고 키가 작은 늙은이였다. 그 일을 한지 오ㄹ 되었는지 수레를 모는 데는 이골이 난 듯한 모양새였다. 그 어린 소년은 솜씨가 민활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물론 무공을 연마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후성을 도와 손을 쓸 방법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연십삼이 상대할 싸람은 하후성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연십삼은 적이 마음이 놓였다. 하후성은 그렇게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 천사검만 하더라도 무서운 외문(外門)의 무기였다. 그러나 한 자루의 검을 지니고 있는 연십삼은 결코 그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만 이 일이 약간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가 하후성이란 사람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개 아녀자를 위해서 그녀의 남편을 죽인다는 것은...... 하지만 그는 더 고려해 볼 여유가 없었다. 하후성의 천사검은 이미 만천은우(滿天銀雨)의 수법으로 수백 수천 마리의 독사처럼 그에게로 뻗쳐 왔다. 그는 탈명십삼검 가운데 어떠한 일식으로도 그 일초를 깨뜨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그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조빙이 그 검초를 이용해서 오아를 시험했는데 나라고 이 기회에 삼소야의 그 일검이 지니고 있는 위력을 시험해 보지 못하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치는 순간 그의 검은 이미 검집에서 뽑혀져 휘둘러지고 있었다. 마치 바람처럼 자연스러웠고 석양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웠다. 그가 펼친 것은 바로 삼소야의 그 일검이었다. 그 일검에 대해서 그는 그렇게 익숙하게 펼칠 수가 없었다. 그 자신이 펼치면서도 그 위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결과가 바로 눈 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하후성의 그 독사와 같은 공격이 그 맑은 바람과 같은 검광 아래에 깨끗이 와해된 것이었다. 마치 버들강아지가 춘풍에 날려 흩어지고 얼음과 눈이 햇살 아래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하후성이란 사람마저도 충격을 받고 멀리 날아갔다. 멀리 칠팔 장까지 날아가서는 그 자신이 타고 온 마차 지붕 위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연십삼 자신도 놀라고 말았다. 늙은 마부는 재빨리 하후성을 돌보았다. 어린 소년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랍다는 듯 연십삼을 바라보았다. 설가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한가닥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한숨은 가짜였고 웃음이 진짜였다. 그녀의 웃음은 무척 달콤했다. "당신의 검법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연십삼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나도 생각 못했소." 그의 한숨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고 웃음은 쓰디쓴 것이었다. 그 자신도 자기의 탈명십삼검을 펼쳤더라면 결코 그런 위력을 발하지 못했을 거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만약 모용추적의 지적이 없었더라면 연십삼이 어떻게 삼소야의 그 일검을 감당해 낼 수 있었겠는가? 이제 그가 삼소야를 깨끗이 이긴다 하더라도 그런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연십삼은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손목을 슬쩍 돌리는 순간에 예리한 검은 이미 검집에 들어갔다. 그는 숫제 하후성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는 그 사람을 다시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하후성은 이미 그의 앞에 서서 그를 냉랭히 바라보고 있었다. 연십삼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또 어쩌자는 것인가?" "귀하......" "여전히 나보고 죽어 달라는 것인가?" 하후성은 이번에는 놀랍게도 화를 누르고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귀하가 방금 보인 그 일검은 정말로 천하무쌍의 검법이었소." 연십삼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하후성의 말은 진정이 서려 있었으며 감탄하는 빛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그것은 그의 검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후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불초가 이곳에 선 것은 다시 한번 귀하의 그 일검을 가르침 받기 위해서이오." "당신은 다시 한번 더 그 일검을 받아 보겠다는 것이오?" "그렇소." --이 녀석이 감히 다시 그 일검을 받으려 하다니, 실성한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어떤 자신을 가지고 있을 게다. 하지만 그는 실성한 것 같지는 않구나. 설마하니 그는 이미 이 일검을 깨뜨리는 수법을 생각해 냈단 말인가? 그러나 연심삽은 무척 자신이 있었다. 연십삼은 이 세상에 어떤 수법이 그 일검을 깨뜨릴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 하후성은 여전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십삼은 단지 한마디했다. "덤벼라!" 그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후성은 다시 손을 썼다. 천사검은 다시 하늘을 가득 덮은 은빛 뱀들이 하늘에서 춤을 추는 듯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 일검은 보기에 허초(虛招) 같았다. 연십삼은 알아볼 수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상대방이 펼치는 것이 허초이건 실초이건 마찬가지였다. 삼소야의 그 일검은 똑같이 상대해낼 수 있었다. 이번에 그는 비교적 익숙하게 펼쳐낼 수 있었다. 바로 그가 일검을 휘둘러 변화를 펼치게 되었을 때에 착, 하는 소리가 나면서 온 하늘을 뒤덮는 것 같은 은빛 뱀들은 이미 한 자루의 검으로 합성이 되었다. 하후성의 일검이 찔러 들어왔다.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일검이었다. 간단하면서도 졸렬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노리고 들어온 것은 바로 삼소야의 그 일검의 유일한 빈틈이었다. 연십삼은 정말 경악하고 말았다. 하후성이 펼치는 그 수법은 바로 자기가 모용추적 앞에서 펼친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모용추적마저도 삼소야의 그 일 검을 유일하게 깨뜨리는 방법이라고 인정했던 바로 그 수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신이 펼치는 것은 바로 삼소야의 그 일검이었다. 하후성이 펼치는 것은 자기가 생각해 낸 깨뜨리는 수법으로서, 바로 삼소야를 죽이려고 했던 연십삼 자신의 초식이었다. 하후성의 검법은 이미 펼쳐지고 있었다.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검법이었다! 설마 연십삼은 바로 자기가 생각해 낸 검법 아래 죽게 되는 것일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자기가 펼친 그 일검에 빈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상대방의 일검이 찌르는 곳이 그 치명적인 한 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그 일검이 그 한 점을 찔러 들어오게 된 이후에 그가 펼치던 그 일검이 갑자기 변화를 일으켰다. 그 자신마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였으며 결코 그 자신이 생각해 낸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삼소야의 그 일검 자체의 변화 가운데 있는 변화였다. 그것은 마치 높은 산 위에서 흘러내리는 폭포가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 당신이 분명히 그 가운데의 빈틈을 보았으나 당신이 손을 뻗쳐 내는 순간에 폭포의 물이 이미 그 빈틈을 가득 메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쩡!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사검은 부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수백 수천개의 쇳조각으로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리고 하후성이란 사람 역시 충격을 받은 나머지 더욱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이번엔 늙은 마부 역시 놀랍다는 듯 연십삼을 바라보았으며 하후성을 돌보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이번에 설가인은 웃었을 뿐만 아니라 손뼉까지 쳤다. 그러나 이번에 연십삼 자신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호수 밑으로 깊이 깊이 가라앉았다. 이제서야 그는 삼소야의 검법 가운데에 있는 빈틈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빈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 일검을 절대로 깨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절대로 그런 사람은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만약에 깨뜨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조빙이 만약에 달려갔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에 그 일검을 깨뜨리게 된다면 조빙의 영광일 것이지만 만약 깨뜨리지 못한다면 당연히 죽음을 맞게 될 것이었다. 하후성은 땅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늙은 마부와 어린 소년의 얼굴에 놀란 빛이 역력했다. 연십삼은 신검산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설사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달려가고 싶었다. 결코 조빙이 그 대신 죽도록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강호인이기 때문이었다. 강호인들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개성이 있었다. * * * 바로 이 때 그는 누가 기침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 명의 더럽고 다 해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온 몸에서는 더럽게 악취가 풍기는 거지같은 사내가 끊임없이 기침을 하면서 숲속에서 걸어나왔다. 조금 전 그들은 이 사람을 보지 못했었다. 조금 전 숲속에는 숫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분명히 숲속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무척 느렸으며 기침은 무척 심한 편이었다. 방금 있었던 그 간담을 놀라게 하고 혼백을 뒤흔들어 놓았던 격전과 무지개빛이 온 하늘을 뒤덮는 듯한 놀라운 검의 광채를 그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벌거숭이의 미녀, 그녀의 몸뚱이는 이미 반 이상 수레의 창문 밖으로 나와 있었다. 숲에서 걸어 나온 그 사람은 연십삼을 보지 않고 있었다. 절대(絶代)의 검객, 손아귀에 아직도 살기를 싸늘히 뿜어내는 검을 쥐고 있는 연십삼을 그는 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그 왜소하고 비쩍 마른 마부를 보고 있었다. 늙은 마부는 이미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거지같은 사내는 끊임없이 기침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수레 앞이었다. 늙은 마부는 더욱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지같은 사내는 기침이 일순 멈추고 갑자기 노마부를 향해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좋구려." 늙은 마부는 그 말을 받았다. "좋다니, 뭐가 좋단 말이오?" 거지같은 사내는 여전히 늙은 마부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좋다는 것이오." "나의 어디가 좋단 말이오?" "그대의 모든 점이 다 좋구려." 늙은 마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마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누추한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만약에 그대 자신이 나섰더라면 지금쯤 저 사람은 이미 죽었을 것이오." 이 한마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끊임없이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떴다. 늙은 마부는 놀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놀랍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연십삼은 알듯 말듯했다. 그래서 뒤쫓아가 다시 물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사람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종적을 감추고 만 것이었다. 심지어는 기침하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설가인은 혼자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상하군. 이상해. 그 사람은 어째서 그토록 눈에 익을까?" "이상하군.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연십삼은 성큼성큼 그 마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말을 다른 사람은 알아 듣지 못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소." "아......" 연십삼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인장도 알고 있소." 늙은 마부는 입을 다물고 놀라고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십 년 전, 홍운곡에서 가장 강한 고수는 결코 지금의 장주인 하후중산(夏候重山)이 아니었소." "노장주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오?" "그의 동생인 하후비산(夏候飛山)이었소." "하지만......" 연십삼은 그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하후비산은 이십 년 전에 갑자기 실종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소." "아마도 그 어르신께서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을 것이오." "강호에서는 모두 다 그가 죽은 줄 알고 있지만 이제 나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소."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나는 이미 그의 행방을 알았소." "그 어르신은 어디에 계시오?" 연십삼은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거침없이 말했다. "바로 이곳에 있소." 그는 늙은 마부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자 한자 또렷하게 말했다. "하후비산은 바로 당신이오!" 저녁 놀이 서쪽 하늘을 피처럼 붉게 물들이고 바람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늙은 마부는 움츠렸던 몸을 천천히 똑바로 폈다. 늙고 피곤했던 눈동자에 갑자기 광채가 감돌았다. 참된 고수만이 뿜어낼 수 있는 신광(神光)이었다. "이십 년 전에 그대는 이미 탈명십삼검을 상대해 본 적이 있소." "이십 년 전, 화산의 절정봉에서 그대와 저의 선친 사이에 벌어졌던 그 일전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고 있소." 늙은 마부의 손에 불끈 힘이 주어졌다. "그 일전에 그대는 선친의 검 아래에 졌소. 이십 년 동안 그대는 탈명십삼검에 대해서 틀림없이 매우 투철하게 연구했을 것이오. 왜냐하면 그대는 줄곧 기회를 찾아서 앙갚음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오." 늙은 마부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너무 일찍 죽어버렸지." 연십삼은 그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말만 했다. "그대가 탈명십삼검에 대해서 무척 투철하게 연구했기 때문에 십삼검 외에도 제 십사검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대는 조금 전 내가 펼친 그 일초를 깨뜨리는 수법을 생각해 낼 수가 있었던 것이오." "아. 그대 외에 이 세상에 탈명십삼검을 깨뜨릴 다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오." 늙은 마부는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설가인이 어디로 도망치든 하후성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햇던 것도 모두 다 그대 때문이 아니오?" "음!" "화염신응(火焰神鷹) 하후비산이 사람을 추적하고 수색하고 잡는 재간은 이십 년 전 강호에서 으뜸이었소." 늙은 마부는 담담히 말했다. "자네는 알고 있는 일이 적지 않은 것 같군." "정말 적지 않소." 늙은 마부의 눈동자가 갑자기 칼날 같은 싸늘한 광채를 쏘아 냈다. "자네는 내가 어째서 실종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실종된 후에 어째서 신분을 낮추어 종놈이 되고 하후성의 마부가 되었는지 아는가?" 연십삼은 담담히 응수했다. "그런 일들을 나는 알 필요가 없는 것이오." 이런 일들을 그는 정말 알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른 사람의 비밀이었고 다른 사람의 사사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형제간의 싸움과 숙질(叔姪)간의 비밀, 한 때의 실수로 인하여 백 년의 여한을 남기네. 이것은 본래 명문거족에서 종종 보는 비극이었으며 결코 하후씨의 세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휘황한 명성과 광채는 충분히 세상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게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추악하고 비참한 일을 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후비산이 옛날에 실종된 것은 그와 형수의 은밀한 정 때문이 아닐까? 그가 실종된 후에 살그머니 돌아와서 신분을 낮추고 종놈이 되어 하후성의 마부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설마하니 하후성은 바로 그와 같은 사악한 인연으로 생겨난 아들일까?' 이런 일들을 연십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사사로운 비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늙은 마부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한 쌍의 빛나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연십삼은 결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물론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면 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라도 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늙은 마부는 갑자기 물었다. "자네의 현재 성씨는 뭔가?" "연. 제비 연이오." "자네가 바로 연십삼인가?" "그렇소." "자네가 정말 하(何) 늙은이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렇소." 이 몇 마디의 질문은 이상할 뿐만 아니라 정말 아리송하기만 했다. 대답도 아리송했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잔소리에 불과했다. 잔소리는 본래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연십삼은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말들이 결코 잔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늙은 마부의 다음 한마디는 더 잔소리일 수가 없었다. "자네가 하 늙은이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내 손에 죽어야지." 연십삼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노인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강호인의 마음과 눈으로 잴 때 실패의 치욕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원한이었다. 원한은 반드시 갚아야 했다. "조금 전에 나는 바로 자네의 검법을 펼쳐서 자네를 죽이고 싶었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후성의 손 씀씀이가 너무나 부드럽고 자네의 그 일검의 변화가 너무나 무서웠지." "그의 손 씀씀이는 결코 부드럽지 않았소. 다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미 믿음을 잃고 있었소." 늙은 마부는 침묵했다. "나의 그 일검은 결코 익숙하게 펼쳐지지 않았소. 그래서 조금전 손을 쓴 것이 그대였다면 어쩌면 나는 이미 그대 검 아래 죽었을지도 모르오." 늙은 마부 역시 인정했다. 그 거지처럼 누추한 떠돌이 사내는 정말 정확하게 본 것이었다. 그는 도대체 무엇하는 사람일까? 풍진(風塵) 세상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본래 무척 많았다. 상대방에서 자기의 신분을 들추어내려고 하지 않는 이상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연십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이제는 달라졌네." "뭐가 달라졌는지요?" "이제 자네는 그 일검에 이미 믿음을 가지게 되어 나마저도 깨뜨릴 수가 없게 되었네." 연십삼은 넌지시 말했다. "적어도 한번쯤 시험해 볼 수는 있지 않겠소?" "그럴 필요 없네." "필요 없다구요?" "어떤 일은 자네가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일세. 따라서 어떤 일들은 나도 다시 시험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그는 연십삼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십 년 전, 나는 자네 부친의 검 아래에 졌네. 그리고 이십 년 후 하후성이 다시 자네의 검 아래에 졌는데 내가 굳이 다시 시험해 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의 어조는 무척 담담했다. 그러나 그 음성에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서글픔이 서려 있었다. 연십삼은 그의 뜻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가 서글퍼하는 것은 어쩌면 옛날의 그 일전이 아니라 오늘의 실패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기의 아들마저도 원수의 아들에게 패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실패였고 철저한 실패였다. 그런 실패는 절대적으로 만회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설사 다른 사람의 아들을 죽인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늙은 마부는 천천히 말했다. "하후씨는 오늘 완전히 졌네. 하후씨 집안의 사람을 자네는 데리고 가도록 하게." 설가인을 데려가라는 말이었다. 그는 이제 그런 며느리를 다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 어떤 사람도 데려갈 생각이 없소." "자네는 정말 그럴 생각이 없는가?" "그러나 나는......" 늙은 마부의 동공이 수축되었다. "자네가 설사 내 머리통을 달라고 하더라도 나는 줄 수가 있네." 연십삼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만 한 필의 말, 쾌마를 얻고 싶소." 정말 쾌마였다. 연십삼은 말을 몰아 미친 듯이 달렸다. 만 마리 가운데에서 한 마리 고르기 힘든 쾌마를 조금도 아끼지 않고 다그쳐 몰았다. 자기 자신의 체력도 그는 아끼지 않았다. 이 일전에 대해서 그는 전혀 자신이 없었고 희망도 없었다. 그는 그 누구도 삼소야의 그 일 검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절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다만 조빙보다 먼저 녹수호에 도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녹수호는 취운봉 아래에 있었다. 신검산장은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매우 오래 되고 으리으리하게 넓었다. 호수의 다른 한쪽은 작은 촌락(村落)이었다. 이 마을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사(謝)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검산장으로 가는 사람들은 이 마을을 경유해야만 했다. 주막이 있는 이 마을은 행화촌(杏花村)이라 했다. 조그만 고을이었다. 연십삼이 행화촌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말은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사씨(謝氏)가 경영하는 주막집에 들어가 물어보려고 했다. 조빙이 이미 신검산장에 도착하지 않았는지를...... 그러나 그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달려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해답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살아 있는 대답이었다. 조그마한 주막에는 다만 두 사람이 있었다. 연십삼은 달려들어가자마자 즉시 조빙을 볼 수가 있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조빙이었다. 조빙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가 이미 삼소야를 상대로 싸웠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설마하니 삼소야가 이미 그의 검 아래 죽었단 말인가? 연십삼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빙은 결코 그렇게 참을성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곳에 도달했으면 틀림없이 신검산장으로 뛰어들었으리라. 그는 결코 이곳에 남아서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 누구든 신검산장에 뛰어들었다가 살아서 나왔다면, 그는 이미 신검산장에서 제일 무서운 한 사람을 격패시켰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조빙은 정말 삼소야를 격패시켰을까? 그는 어떤 수법을 써서 삼소야의 그 일검을 깨뜨렸을까? 연십삼은 무척 묻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빙은 아직 살아 있었지만 이미 취해 있었다. 크게 취해 곤죽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주점에는 또 한 명의 취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 친구는 보기에 평소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닌 것 같구려. 겨우 반 근의 술을 마셨을 뿐인데 꼬박 하루 동안 취해 있다니 말이외다."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던 사람이 어째서 취했을까? 승리 후의 공허감을 메꾸려고? 아니면 결전을 벌리기 전에 약간 술을 마셔서라도 용기를 내고자 했던 것이 그만 취한 것일까? 연십삼은 참을 수 없어서 물었다. "당신이 바로 이곳의 주인장이시오?"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숨을 내쉬던 그 사람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이 친구가 이미 사씨 집안의 삼소야를 만나 보았는지 아니면 만나 보지 못했는지 아시오?" 주막집 주인 사장궤(射掌櫃)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모르오." "그는 이미 신검산장에 갔었소?" 사장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모르오." "지금 삼소야라는 사람은?" 주막집 주인은 여전히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 "모르오."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소?" "나는 다만 귀하가 연십삼이라는 것, 그리고 귀하가 신검산장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오." 연십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을 이 사람은 모르고 있으면서 마땅히 몰라야 할 일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줄 수 없겠소?" "할 수 있소." 녹수호의 물은 짙은 파란빛이었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늦가을이라 호반에는 수양버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한 척의 쾌선만이 있었다. "이 배는 오로지 당신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오. 나는 이미 사흘 동안 준비하고 있었소." 그들은 배에 올랐다. 배 위에는 술과 음식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칠현금과 하나의 바둑판, 그리고 한 권의 책과 한 조각의 매끄럽고 딱딱한 돌이 있었다. "이건 뭐요?" "이것은 마검석(磨劍石:숫돌)이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신검산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보았소. 모든 사람들은 이 배에 오른 후에 하는 일들이 같지 않더구려." 연십삼은 귀를 기울여 듣기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배에 오르자마자 죽어라 하고 술을 퍼마셨소." "술을 마시면 담력을 키울 수 있지요." 그러면서 그는 한 잔의 술을 따라서 쭉 들이켰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것이 반드시 담력을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지요." "어떤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것은 다만 술을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연십삼은 다시 석 잔의 술을 마셨다. "어떤 사람들은 금(琴)을 퉁기기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혼자서 바둑을 두는 것을 좋아하더구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다 사람의 심신을 느슨하게 하고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다 숫돌에 검을 갈기를 좋아하더구려." 검을 가는 것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전혀 머리를 쓸 필요가 없었다. 주막집 주인은 연십삼의 검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마검석이라오." "나의 검은 숫돌에 갈지 않소." "숫돌을 쓰지 않으면 무엇을 이용하지요?" "목을 이용하지요. 원수의 목을 말이지요." 물결은 일렁이고 있었고 거꾸로 비친 온 하늘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멀리 있는 취운봉은 더욱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선실 안은 무척 조용했다. 주막집 주인은 이미 입을 다문 것이었다. 그는 결코 자기의 목이 다른 사람의 숫돌로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히 그 한 자루의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위에는 열세 알의 명주(明珠)가 박혀 있었다. 이것은 보검은 아니었으나 명검이었다. 무척 유명한 검이었다. 연십삼은 선실 창밖의 호수빛과 산색(山色)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물론 삼소야를 만나 보았겠지요?" 주막집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그가 어떤 모양의 검을 사용하는지 아시오?" 그는 삼소야가 손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멀리서 한번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검을 똑똑히 보지 못했다. 삼소야의 손 씀씀이가 너무나 빨랐다. 그래서 그는 참을 수 없어 질문했던 것인데 묻고 보니 부질없는 질문을 던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주막집 주인이 틀림없이 모른다고 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잘못 짚었다. 주막집 주인은 생각해 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그 화산논검(華山論劍)의 일을 아시오?" 연십삼은 알고 있었다. 주막집 주인은 말을 이었다. "삼소야가 사용하는 것은 그 당시의 바로 그 검이오." "천하제일검?" 주막집 주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천하제일의 무적의 명검이오." "그것은 사실이오." 주막집 주인은 넌지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배를 타는 것은 모두 다 그 한 자루의 검을 구경하려는 것이었소." "매번 도전자들을 맞아들이고 전송을 책임진 사람은 당신이오?" "대체로 그렇지요. 갈 때는 그들을 상대로 바둑을 두거나 술을 마시지요." "돌아올 때는?" 주막집 주인은 빙그레 웃었다. "돌아올 때는 대체로 나 혼자 돌아온다오." 연십삼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째서?" 주막집 주인은 담담히 말했다. "알고 계시면서 왜 물으시오? 그들은 한번 갔다가는 좀처럼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오." 석양빛이 스러지고 어스름빛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멀리 있는 푸른 산은 이미 점점 짙은 어스름빛 속에 잠기고 있었다. 마치 한 폭의 색이 바래진 그림 같았다. 선실 안은 더욱 조용했다. 연십삼 역시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는 갑자기 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생각지 말아야 할 많은 일들이었다.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고 젊었을 때의 놀이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검 아래 죽어 간 사람들도 상기했다.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을까? 그는 다시 처음으로 그와 잠을 잔 여인을 떠올렸다. 그 때 그는 아직도 어린애였다. 그런데 그녀는 무척 경험이 풍부했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 일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공교롭게도 갑자기 머리에 떠올랐다. 심지어 설가인마저 머리에 떠올랐다. 이제 그녀는 하후성을 따라서 돌아가고 있을까? 하후성은 여전히 그녀를 아내로 인정할까? 이런 일들은 숫제 그가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본래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모두 다 떠올린 것이었다. 생각은 매우 어지러웠다. 바로 그의 생각이 가장 어지럽게 되었을 때, 그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가을의 노을빛이 내려앉는 녹수호 가에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사람이 생각이 가장 어지럽게 되었을 때는 좀처럼 다른 사람을 볼 수 없었고 다른 일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연십삼은 생각이 가장 어지럽게 되었을 때에 그 사람을 본 것이었다. 사실이었다. 그 사람은 결코 유별나지 않았다. 중년을 넘어섰을 나이였다. 그의 귀밑머리는 이미 하얗게 세어 있었고 눈에는 이미 늙은이의 피로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무척 소박하게 입고 있었다. 하나의 청삼(靑杉)에 하얀 버선, 베로 만들어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 보기에 그는 무척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냥 녹수호의 호반까지 걸어왔다가 늦가을의 산과 호수로 어우러진 풍광을 감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너무나 평범했고 마치 늦가을의 노을빛처럼 평범했기 때문에 연십삼은 그를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무나 평범한 사람은 너무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연십삼은 그를 보았다. 그 사람을 바라보니 차분함과 쾌적함, 그리고 안온함이 느껴졌을 뿐이고 조금도 의아함이나 놀라움, 공포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주막집 주인은 그 사람을 보고 놀람과 의아한 빛을 띄웠다. 심지어는 약간 두려움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연십삼은 참을 수 없어서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구요?" 주막집 주인은 되물었다. "당신은 신검산장의 장주가 누구인지 모르시오?" "사왕손이지오." "당신이 보고 있는 저 사람이 바로 현재의 장주이신 사왕손이시오." 사왕손은 결코 강호를 질타하고 위세를 무림에 떨친 협객이 아니었다. 그는 천하에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다만 그가 신검산장의 장주이기 때문이었다. 연십삼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에 잘 알려진 사장주가 이토록 소탈할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보기에 그는 그렇게 늙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의 생명은 이미 황혼녘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치 이 늦가을의 황혼처럼 평화롭고 조용했으며 이 세상에는 그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손 역시 메마르고 따뜻했다. 그는 연십삼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필요가 없소. 나는 당신을 알고 있소." 연십삼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선배님......" "절대로 나를 선배라고 부르지 마시오. 이곳에 오면 바로 나의 손님이 되는 것이오." 연십삼은 더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잡힌 손목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그러나 다른 한 손은 여전히 그의 검을 꼭 쥐고 있었다. "우리 집은 바로 저 앞에 있으니 천천히 걸어서 갑시다." "이토록 훌륭한 날씨에 당신과 같은 사람과 산책을 하며 한담을 나누게 되니, 무척 유쾌하구려." 석양은 이미 등성이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으나 산비탈의 단풍잎은 여전히 화사했다. 밤바람 속에 나뭇잎의 싱그러운 향기가 실려오고 있었다. 양쪽에 길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단풍나무 숲 사이에 하나의 조그마한 돌길이 나 있었다. 연십삼은 마음속으로 불현듯 오랫동안 느껴 보지 못했던 쾌적함과 안정감을 느꼈다. 그는 나직히 시를 읊었다. "멀리 차가운 산에 난 길은 가파르지 않고, 하얀 구름 깊숙한 곳에 인가가 있네. 수레를 멈추고 단풍 숲의 저녁빛 속에 앉아 있으려니, 서리에 젖은 나뭇잎이 이월의 꽃처럼 붉구나." 이와 같은 경치는 바로 이 시의 의경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곁에서 걸음을 옮겨 놓고 있는 사람은 바로 시 속의 사람이고 그림 속의 사람이 아니런가? 사왕손은 무척 천천히 걸었다. 그에게 있어서 생명이란 무척 짧고, 그렇기에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초조해 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멀리 신검산장의 그 웅장하고 오래 된 저택이 어렴풋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왕손은 설명했다. "저것은 우리 조상들이 백 년 전에 세운 것인데 지금까지도 조금도 변함이 없소." 그의 음성에는 약간의 감개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다 변했구려. 많이 변했소." 사왕손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 산장을 세운 사람들은 바로 제 일대 조상이었소. 당신도 아마 그 분을 알고 있을 것이오." 백 년 전 천하의 고수들이 화산에 모여 무공을 논하고 검술을 겨루었다.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었을까? 그 때의 천하제일검이 되어 만인의 존경을 받았던 사람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을까? "물론 그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에, 후예들 가운데 그 어르신에 견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소. 그러나 사씨 집안의 매 일대의 조상들은 찬란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또한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는 일들을 했었소." 그는 빙그레 웃고는 말을 이었다. "다만 나, 나만이 무척 평범하고 사씨 집안의 자손이 될 만한 자격이 없지요." 그의 웃음은 차분했으며 편안한 것이었다. "바로 나 자신이 평범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편안하고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소." 연십삼은 그냥 듣기만 했다. 이 노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두 딸과 세 아들이 있었소. 큰딸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에게 시집을 갔소.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무 교만했다고 할까, 그래서 그들 뿌뿌는 매우 일찍 죽어 버리고 말았구려." 연십삼은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사씨 집안의 큰 사위는 당시 강호에서 가장 사납고 용감한 검객이었다. 그들은 정말 일찍 죽었는데 바로 그들이 동방 화촉을 밝히는 그 날 밤에 암살을 당해서 신방에서 죽고 만 것이었다. "나의 둘째 딸도 일찍 죽었소. 상사병으로 죽은 것이오. 그녀는 마음속으로 한 사람을 좋아했는데 바로 그 상대자가 우리 집의 하인이었소. 그녀는 감히 말을 하지 못했고 우리들도 몰랐소. 그래서 우리들은 그녀를 다른 한 사람에게 짝지워 주려고 했는데 혼인을 하기도 전에 그 애는 죽고 말았소." "아, 글쎄...... 그 애가 마음속의 생각을 털어놓았다면 우리들은 결코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오. 나의 그 하인은 결코 못된 애가 아니었으니까......"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내불은 탄식이었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사왕손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의 큰아들은 백치였소. 어릴 적에 요절하고 말았지. 그리고 차남은 누님과 자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달려가더니 음산(陰山)에서 싸우다 죽고 말았구려." 사씨 집안의 큰 소저를 암살한 음산의 고수들 역시 그 일전에서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다. 사왕손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 집안의 불행이지만 나는 결코 그 어떤 사람을 원망해 본 적이 없소......" 그의 음성은 여전히 무척 차분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자신의 운명이 있는 것이오. 행운이든 불행이든 다른 사람을 원망할 필요는 없는 것이오. 이 몇 년 동안 나도 점점 인생을 달관하게 되었구려!" 사람이 많은 슬픔과 불행한 일을 당한 후에 심경(心境)의 평정(平靜)을 유지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연십삼은 정말로 무척 탄복했다. "이제 나는 정말 달관했소. 이런 불행한 일들은 어쩌면 우리 사씨 집안 조상들의 살육(殺戮)이 너무나 심했던 업보가 아닌지......"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더욱 듣는 사람을 탄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왜 그는 이런 일들을 남에게 알려주는 것일까? 이는 본래 남에게 감추려고 하는 자기 가족간의 사사로운 일이니 남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것은 혹시 나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했기 때문이 아닐까?오직 죽은 사람만이 영원히 어떤 비밀도 누설하지 않는 것이다.' 연십삼은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 역시도 달관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남이 그를 어떻게 보든 전혀 마음에 두지 않게 된 것이었다. 사왕손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물론 나에게 셋째 아들 사효봉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오." "알고 있습니다." "그 애는 정말로 매우 총명했소. 사씨 집안의 영기는 모조리 그 한 몸에 모인 듯했소." "저는 그가 젊었을 적에 명검객인 화소곤을 격패시킨 사실을 알고 있지요." "화소곤의 검법은 소문처럼 그토록 고강하지 않았으며 너무나 교만했소. 그래서 열 몇 살 먹은 어린애를 안중에 두지 않았던 탓에......" "한 사람이 검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마음을 성실히 하고 올바르게 해야 하며 절대로 교만해선 아니 되오. 교만하면 방심하게 되고 추호라도 방심하게 되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오." 이는 정말 금옥(金玉)같은 좋은 말이었다. 연십삼은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사왕손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우리 애는 결코 그런 폐단이 없었소. 그는 어릴 적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나 한번도 그 누구를 얕잡아 본 적이 없었소." 연십삼은 참을 수 없어 길게 한숨을 불어 냈다. "아아...... 단지 그 점만 하더라도 그가 천하 무적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군요." 사왕손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것 역시 그의 불행이었소." "어째서인가요?" "그는 한번도 그 어느 누구를 얕잡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적을 상대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반드시 전력을 기울인다오." 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연십삼은 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전력을 기울인다면 반드시 상대방을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삼소야의 검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왕손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가 한 평생 중 저지른 가장 커다란 잘못은 바로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오." "그것은 결코 그의 잘못이 아니지요." "물론이오." "어쩌면 그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지요. 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네가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 연십삼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 한 사람이 강호에서 활동하게 되면 때로는 많은 일에 있어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지요.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사왕손은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토록 그를 잘 이해할 줄은 몰랐소." "나 역시도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무척 그를 죽이고 싶소?" "그렇습니다." "당신은 무척 성실하군."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반드시 성실해야 하지요.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남의 검 아래에 죽게 된답니다." --검법을 배운 사람들은 마음을 성실히 하고 뜻을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사왕손은 한참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눈동자에는 매우 이상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그는 불쑥 입을 열었다. "좋소. 당신은 나를 따라오시오."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무척 평범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때 이 시각에 그가 그 한마디를 내뱉게 되자 그 말은 무척 이상하게 들렸다. 어째서 그는 사의를 표하는 것일까? 노인이 그를 이해해 주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노인이 그를 죽을 장소로 안내하기 때문일까? 그는 본래 죽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밤. 어둠이 온 누리를 뒤덮자 신검산장에는 어느덧 등불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청 옆에 있는 한 칸의 집으로 들어섰다. 대청에는 등불이 휘황하게 커져 있었으나 이 집안에는 등불이 모두 어둠침침하고 암담했다. 집안의 모든 물건들은 검은 베 조각으로 둘러 씌워 놓았기 때문에 더욱 음산하고 조용했다. 사왕손은 어째서 대청에서 빈객을 맞아들이지 않았을까? 어째서 그는 연십삼을 이곳까지 데려왔을까? 연십삼은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사왕손은 어느덧 한 조각의 검은 베를 들치고 한 조각의 편액을 들추어 내었다. 그러자 그 위에 금빛 찬란한 글자들이 드러났다. <천하제일검.> 사왕손은 입을 열었다. "이것은 자고로 강호에서 일찍이 그 누구도 얻어 보지 못한 영예요. 사씨 집안의 자손들은 줄곧 이를 무척 아껴 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무척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소." "부끄럽다니요?" "그 어르신이 돌아가시게 된 후 사씨 집안의 자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이 다섯 글자를 얻을만한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오." 연십삼은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강호에서는 한 사람이 다섯 글자의 영광을 가질 만한 자격이 있다고 공인되고 있지 않습니까?" 오직 한 사람만이 있었다. 바로 사씨 집안의 삼소야였다. 사왕손은 넌지시 말했다. "그래서 그 어르신이 과거에 화산에서 사용하던 검을 나는 그에게 전해 준 것이오." 그는 강조하듯 입을 열었다. "그 한 자루의 검은 오랫동안 사용해 보지 못했던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전해주었소." 연십삼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 이외에 그 누가 있어 그 한 자루의 검을 지닐 자격이 있겠는가? "당신은 그 검을 구경하고 싶지 않소?" "구경하고 싶습니다. 무척 구경하고 싶군요." 다시 한 조각의 검은 베가 젖혀지고 나무로 된 시렁이 드러났다. 시렁 위에는 한 자루의 검이 걸려 있었다. 검집은 새카만 것이었다. 비록 오래 묵은 것이긴 하나 무척 완정(完整)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노란색의 검수의 빛깔은 이미 바래져 있었다. 형식이 고아한 검은 여전히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왕손은 조용히 그 검 앞에 섰다. 마치 자기의 마음속에서 가장 존경하고 있는 신을 대하는 듯 한 태도였다. 연십삼의 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심정은 심지어 사왕손보다 더욱 경건하고 성실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오직 그 한 자루의 검만이 그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왕손은 불쑥 입을 열었다. "이것은 명사(名師)가 만든 예리한 무기도 아니고 고검(古劍)도 아니오." "이 검은 천하무쌍의 명검이지요." "그렇긴 하오." 연십삼은 그 말을 받아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보고자 한 것은 결코 이 검이 아닙니다." 사왕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연십삼은 힘주어 말했다. "제가 보고자 하는 것은 이 검의 주인이지요. 현재의 주인 말입니다." "지금 당신은 이미 그를 마주 보고 있는 셈이오." 연십삼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은 검을 놓아두는 나무로 된 시렁이었다. 그런데 그 나무로 된 시렁 위에는 검은 보자기로 가린 물건이 있었다. 하나의 기다랗고 네모난 물건이었다. 연십삼은 가슴속으로부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싸늘해졌다. 그는 이미 어떤 불길한 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감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믿을 수도 없었고 믿기도 싫었다. 다만 그런 느낌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잘못 느끼지 않았다. 그 검은 베가 들추어지고 드러난 것은 하나의 관이었다. 새로 만들어진 관에는 여덟 글자가 쓰여 있었다. 사효봉이라는 세 글자가 연십삼의 눈을 자극했다. "사효봉이......" 대청 안의 등불은 여전히 휘황찬란했다. 그러나 아무리 휘황찬란한 등불 빛이라고 하더라도 연십삼의 마음을 밝힐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의 광채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검의 광채가 이미 사라졌다. 유일하게 그를 죽일 수 있는 그 한 자루의 검! "효봉은 죽은 지 열 이레가 되었구려." 그렇다면 물론 조빙의 검 아래 죽은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를 격패시킬 수 없었다.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그를 격패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운명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자신의 운명이 있다. 어쩌면 그의 생명이 너무나 휘황하기 때문에 그토록 짧고 촉박한지도 몰랐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웠으나 무척 조용한 것이었다. 노인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서려 있었으나 그 음성은 여전히 조용했다. "나는 결코 괴롭지 않소. 왜냐하면 그는 이미 살만큼 살았기 때문이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연십삼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묵묵히 한평생을 보내겠소? 아니면 그처럼 짧은 인생을 살고 싶소?" 연십삼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유성이 되고자 하는가? 아니면 촛불이 되고 싶은가? --유성의 광채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휘황하고 아름다우니, 어찌 수천 수만 자루의 촛불에 비교할 것인가? 대청에는 등불 빛이 휘황했으나 연십삼은 차라리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멀리 보이는 산마루에는 빛이 없는 어둠만이 깃들어 있었다. 연십삼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그런 일을 저에게 말씀하신 것은 결코 저를 죽은 사람으로 여겨서가 아니었군요." 물론 아니었다. 삼소야는 이미 죽었는데 그 누가 연십삼을 죽이겠는가? 연십삼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사왕손은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런 일들을 나에게 이야기했습니까?" "나는 당신이 죽으러 온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연십삼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고 있었다구요?" "나는 당신의 효봉에 대한 탄복과 존경심을 읽을 수 있었고, 당신이 절대로 그를 격패시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소." "그러나 죽으러 온다는 것은 결코 존경받을 만한 일이 못 되지요." 사왕손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거렸다. "그렇소."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은 약간 처량한 것이었다. "적어도 나는 당신을 존경하오.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만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 뿐 아니라 이미 늙었소......"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낮아져서 한숨 소리처럼 나직하고 무거웠다. 가을 바람 역시 나직하고 무거운 탄식처럼 불어오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어둠 속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번쩍하고 달려나왔다. 한 자루의 검이 질풍처럼 찔러 들어왔다. 한 사람과 한 자루의 검. 사람의 움직임은 민첩하기가 독수리와 같았고 검은 번개처럼 쾌속했다. 그 사람은 바로 사왕손의 등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한 자루의 검은 거침없이 사왕손의 등을 찌르려고 하고 있었다. 연십삼이 이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를 위해 막아 줄 수가 없었다. 사왕손 자신은 전혀 느끼지 못한 듯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굽히고 한 잎의 말라 비틀어진 잎사귀를 주었다. 그의 동작은 무척 느렸다. 그가 그 말라 비틀어진 나뭇잎을 줍는 것은 다만 마음속의 감회를 억누르기 힘들기 때문 같았다. 그의 생명은 한 잎의 앙상하게 비틀어진 나뭇잎처럼 시들어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번개와 같은 일검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순간 검의 광채는 분명히 그의 등뒤를 찌르고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그 간격은 그저 실낱같은 차이밖에 되지 않았다. 달려들던 사람은 이미 힘을 모조리 쏟아 낸 관계로 멈출 수가 없었다. 온몸이 사왕손의 등을 타고 넘어 손에 들린 검으로 맞은 편에 있는 연십삼을 찔러 갔다. 그 일검은 여전히 위력적이었고 사람을 찔러 죽일 힘이 실려 있었다. 연십삼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의 검은 이미 검집에서 뽑혀졌다. 검의 광채가 번쩍였다. 그 사람은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일곱 자 밖에 내려섰다. 술에 취해 새빨개진 얼굴이었다. "조빙!" 연십삼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는 삼 푼의 놀람과 칠 푼의 애석함이 섞여 있었다. 조빙은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놀람과 의혹, 그리고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입을 열고 무슨 말을 할 듯 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에서는 갑자기 한 가닥의 선혈이 용솟음쳤다. 곧 그는 픽 쓰러지고 말았다. 가을 바람은 여전히 쓸쓸했다. 사왕손은 천천히 그 앙상하게 비틀어진 잎사귀를 집어들고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아직도 방금 일어난 일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바로 이 순간, 한 사람의 목숨은 시들어버린 낙엽처럼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나뭇잎의 생명은 비록 짧은 것이지만 내년에는 다시 돋아날 수 있었다. 사람은? 사왕손은 다시 천천히 허리를 구부리고 가볍게 그 앙상한 나뭇잎을 바닥에 놓았다. 연십삼은 줄곧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흠모와 존경의 빛이 서려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는 이 노인이야말로 진정 깊이 감추고서 드러내지 않는 고수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무공은 그야말로 이미 화경(化境)에 접어들었고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접어들어 위대한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그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혹한이 들이닥치게 되었을 때에 당신은 그 힘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혹한은 이미 무형 중에 물을 얼음으로 변하게 하고 사람을 얼어죽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는 다만 한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오...... 하지만 세상에 몇 사람이 이런 평범함을 단련해 낼 수 있겠는가? 연십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많은 일을 알아볼 수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왕손 역시 담담하게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밤이 무척 깊었으니 당신은 가야겠구려." "그렇군요." 그래서 그는 떠났다. 밤 빛은 더욱 깊었으며 사왕손은 천천히 어두운 정문을 가로질러 후원에 있는 조그만 누각 위로 올라갔다. 조그만 누각 위의 등불은 처량했다. 쇠약하고 늙고 초췌해진 한 명의 부인이 묵묵히 외로운 등불 가에 앉아 있었다. 마치 그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왕손은 그녀를 발견하자 두 눈이 연민의 빛으로 가득해졌다. 그들은 서로 목숨처럼 의지하는 부부였으며 이미 인간 세상의 모든 슬픔과 환락, 그리고 고난을 함께 겪은 것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물었다. "아길(阿吉)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요?" 사왕손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의 쇠약하고 늙어서 피폐해진 눈동자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띄엄띄엄 늘어놓는 음성에는 자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가 늦건 빠르건 반드시 돌아오리라 믿어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나도 그렇게 믿고 있소." 한 사람에게 한 점의 희망이 있기만 하다면 생명이 고귀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인간 세상에 남아 있기를 원하리라. * * * 밤빛은 깊고 무겁게 깔려 있었다. 어두운 호숫가에는 한 점의 불빛밖에 없었다. 불빛은 한 폐선의 선실 창문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주막집 주인 사장궤는 등불 아래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연십삼은 묵묵히 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말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아 한 잔의 술을 따랐다. 사장궤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웃음이 서렸다. 배는 나루에서 떠나 천천히 처량한 밤빛 속으로, 조용한 호수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연십삼은 이미 석 잔의 술을 마셨다. 그는 불쑥 물었다. "당신은 내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사장궤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째서 당신을 기다렸겠소?" 연십삼은 고개를 쳐들고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또 무엇을 알고 있소?" "나는 이 술이 무척 맛이 훌륭하기 때문에 좀 더 마셔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일리 있는 말이오." 가벼운 배는 이미 호수 한복판에 이르러 있었다. 사장궤는 어느덧 거나하게 취했다. 그는 갑자기 불쑥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그 검을 보았소?" 연십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 자루의 검이 이곳에 있는 이상, 신검산장은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오."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설사 사람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검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오." 연십삼의 손에도 검이 있었다. 그는 자기 손에 들린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는 선실 밖으로 걸어가 뱃머리에 올라섰다. 호수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뱃머리에 열 십자를 새겼다. 그러더니 이미 그를 이십 년이나 따랐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그 한 자루의 검을 호수 한복판에 내던졌다. 한차례 물보라가 일더니 호수는 다시 잔잔해졌다. 그러나 그 검은 이미 물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장궤는 놀랐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참을 수 없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째서 그 검을 버리는 것이오?" "언젠가 그 검이 필요하다면 이 배를 찾으면 될 것이오" "그래서 당신은 뱃머리에 열 십자를 새겨서 표식을 남겼구려?" "이것을 바로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고 하지요." "당신은 그런 일이 얼마나 우둔한지 잘 알고 있지 않소?" "알고 있소."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그런 짓을 하였소?" "갑자기 나는 한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많든 적든 마땅히 몇 가지 우둔한 일을 저질러야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그의 웃음에는 깊은 뜻이 서려 있었다. "어떤 일들은 궁극적으로 우둔한 것인지 슬기로운 것인지 그 누구도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답니다." 잔잔한 호수, 조용한 밤빛......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명검은 이미 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4. 쓸모 없는 사내 --오늘 밤 술에서 깨어날 곳은 어디인가? --수양버들이 늘어진 언덕에 새벽 바람 불어오고 하늘엔 일그러진 달만 떠 있구나. 깊은 가을이 흘러가고 겨울이 닥쳐왔다. 혹한이 들이닥쳤다. 차가운 바람은 칼날 같았고 온누리는 황량했으며 푸른 하늘은 매정했다. 떠돌이에게 눈물이 마른지 이미 오래 되었다. 아길은 얼굴에 덮치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홑옷을 바짝 여미며 한가항(韓家巷)에서 걸어나왔다. 그는 갈 곳이 없었다. 그의 몸에는 이제 겨우 스물 세 닢의 엽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이곳을 떠나야 했고, 어찌 되었건 그에게 호의로 대하던 사람들 곁을 떠나야 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떠돌이에게는 이미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피가 남아 있었다. 이제 그 피마저 더 이상 뜨겁지 않고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 붙어 있었다. * * * 한가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한대내내(韓大 )였다. 한대내내는 한가루(韓家樓)에 있었다. 한가루는 청루(靑樓:기녀원)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한대내내를 만난 것은 얼음같이 차갑고 습기찬 침대 위에서였다. 차갑고 딱딱한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침대 곳곳에 그가 토한 흔적이 남아 있어 아주 불결했고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그 자신의 처지도 그 침대보다 나을게 없었다. 그는 이미 닷새 동안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깨어났을 때 목이 마르고 혓바닥이 타 들어가는 듯 했으며 머리가 뻐개질 것처럼 아팠다. 한대내내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침대 앞에 버티고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키는 칠 척이 넘었으며 허리는 절구통처럼 굵었다. 굵고 짧은 손가락에는 황금반지와 비취반지가 잔뜩 끼워져 있었다. 둥근 얼굴은 팽팽하게 살이 올라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기분이 좋을 때는 눈동자에 어린애같은 장난기 어린 웃음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동자에는 웃음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길은 눈을 비비고 바라보았다. 침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똑똑히 보려는 것 같았다. 아길은 바동거리며 일어나 앉으려 했다.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저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퍼마시고 술에 취한 고양이 꼴을 보였구려?" 한대내내는 그 말을 받았다. "술에 취한 고양이를 닮지 않고 죽은 개새끼를 닮았더군......" 그녀는 냉랭히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미 꼬박 닷새 동안 취해 있었네." 아길은 힘주어 자기의 머리를 돌렸다. 그는 이 닷새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고 말았다. "자네는 타향에서 온 사람인가?" 그는 타향에서 온 사람이었다. 까마득한 타향 멀어서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자네, 돈이 있나?" 아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점은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에게 마지막 남아 있던 은자는 이미 술을 사 먹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한대내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도 자네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우리들은 이미 자네의 온 몸을 샅샅이 뒤져보았지. 자네는 그야말로 죽은 개새끼보다 가난하더군." 아길은 눈을 감았다. 더 자고 싶었다. 뼛속까지 파고든 술기운은 이미 그의 체력을 소모시켰다. 그는 하품을 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직도 나에게 물어 볼 말이 있는 것이오?" "딱 한 마디 있네." "듣고 있소." "돈이 없는 사람이 무엇으로 셈을 치르지?" "셈을 치르다니?" "이 닷새 동안 자네는 이곳에서 칠십 구 냥의 술을 마셨네." "많지는 않구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네에게는 한 냥도 없네." "돈이 없어 셈을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상대하지." 아길은 듣고 있었다. "자네는 한쪽 다리가 부러지고 싶은가? 아니면 세 대의 갈비뼈가 부러지고 싶나?" "마음대로 하시오." "자네는 개의치 않나?" 아길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빨리 손을 써 주었으면 하오. 빨리 계산이 끝나야 내가 빨리 길을 떠날 것이 아니겠소?" 한대내내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짙은 호기심이 떠올랐다. 이 젊은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째서 이토록 자포자기하여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행동할까? 그의 마음속에는 혹시 깊은 절망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나도 슬픈 과거가 있어서 그것을 잊기 위해 자기를 학대하고 있는 것일까? 한대내내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자네는 서둘러 떠나려고 하는데 어디로 갈 생각인가?" "모르오." 한대내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네 자신도 모른단 말인가?" "발길 가는 대로 갈 뿐이오." 한대내내는 그를 한참 노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자네는 아직도 젊네. 그리고 아직도 힘이 있는데 어째서 일을 해서 빚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나?" 그녀의 눈빛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이곳에 마침 자네가 할만한 일이 있네. 하루에 오 푼의 삯으로 계산하겠네. 하겠나?" "마음대로 하시오." "자네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자네가 할 일이 어떤 일인지 알고 싶지 않나?" "아무 일이나 하겠소." 한대내내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먼저 뒤에 있는 주방으로 가서 한 통의 뜨거운 물로 자네 몸을 좀 씻게. 지금 자네는 죽은 개새끼 같군. 마치 한 마리의 썩은 물고기처럼 악취를 풍기고 있네." 그녀의 눈에 웃음이 서렸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하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기엔 사람의 몰골을 유지하고 있다네." 주방에는 흰 쌀밥과 고깃국 ㄴ새가 구수하게 풍겨 나왔다. 그 안에 들어가니 따뜻하고 쾌적했다. 주방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한 쌍의 부부였다. 남자는 허우대가 컸으나 벙어리였다. 여자는 비쩍 마르고 왜소했으나 표독한 인상이었다. 그들 부부 외에도 주방에는 다섯 사람이 더 있었다.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하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여자들이었다. 얼굴에 어젯밤 발랏던 지분이 남아 있었으며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다. 열 다섯에서 서른 다섯 살 사이의 여자들이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여인은 젖가슴이 불룩 솟아 있었고 한 쌍의 부은 눈은 음탕한 욕구로 번들거렸다. 나중에야 아길이 안 사실이지만 그녀가 바로 이 곳 아가씨들의 큰 언니였다. 손님들은 그녀를 대상(大象)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이가 가장 어린 여자는 열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데 아직도 가슴이 밋밋했고 엉덩이도 그리 풍만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인기가 좋았다. 이것은 사내들이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까닭이었다. 아길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녀들은 얼굴에 호기심과 의아함을 드러냈다. 다행히 한대내내도 따라 들어왔다. 아가씨들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대내내는 입을 열었다. "이제서야 제대로 허드렛일을 할 마땅한 사람을 찾았다." 그녀는 아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이 암캐들에게 자네의 이름이 뭔지 알려주게." "나는 아길(阿吉)이라 하오." "자네에겐 성이 없나?" "난 아길이라고 하오." 한대내내는 힘껏 그의 머리에 알밤을 먹이더니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이 녀석에게는 성이 없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지." 그녀는 매우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말이 많지 않다는 것이야." 입은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데 사용할 뿐이며 수다를 떠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길은 언제나 과묵했다. 그는 묵묵히 한 대야의 뜨거운 물을 떠서 쭈그려 앉아 얼굴을 씻으려고 했다. 갑자기 누군가 발길질로 그의 대야를 차서 뒤엎어 놓았다. 그 통통한 발은 꽃을 수놓은 붉은 비단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길은 일어나 살결이 팽팽한 둥근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인들이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까마득한 곳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대상이 큰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 발을 적셔 놓았다. 빨리 걸레로 닦아." 아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 벙어리가 그에게 준 발닦이로 그녀의 통통한 발을 닦아주었다. "착한 녀석, 밤에 내 방에 손님이 들지 않았을 때는 몰래 들어와도 돼. 나는 돈을 받지 않을 테니까." "필요 없소." "그만한 담력도 없단 말이야?"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오. 나는 이번에 돈을 벌어 빚을 갚아야 하오." 그 때부터 그에게 별명이 붙어 다니게 되었다. 쓸모 없는 아길.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불이 커질 무렵에 여인들은 번쩍번쩍 빛나는 꽃무늬 옷으로 갈아 입고 얼굴에 짙게 분을 발랐다. "쓸모 없는 아길, 빨리 손님에게 차를 따라라." "쓸모 없는 아길, 주점에 가서 술을 몇 근 받아 오너라." 밤이 깊은 후에야 그는 주방의 한 모퉁이로 가서 잠시 쉴 수 있었다. 이럴 때 벙어리는 커다란 사발에 홍소육(紅燒肉)이 담긴 쌀밥을 담아서 그에게 주고, 그가 먹는 모습을 연민의 정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아길은 한번도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아길은 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무뚝뚝한 사람처럼 보였다. 아길은 전혀 용기도 없고 쓸모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명의 칼을 든 젊은이가 신나게 마시고 오입질을 한 후에 돈을 내지 않고 가려고 했을 때야 사람들은 아길에게 또 다른 일면이 있으며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칼을 가진 젊은이들이 그냥 떠나려고 했을 때 놀랍게도 쓸모 없는 아길이 그들 앞을 막아선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냉소했다. "죽고 싶으냐?" "나는 죽고 싶지 않고 굶어 죽기도 싫다. 너희들이 만약 셈을 치르지 않고 그냥 간다면 그것은 내 밥그릇을 깨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한마디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자루의 칼이 그의 몸 안으로 찔러 들어왔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눈썹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일곱, 여덟 번 칼을 받았다. 젊은이들은 놀라 그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순순히 돈을 꺼내 셈을 치르고 서둘러 떠났다. 모두들 놀란 표정으로 아길을 바라보았으며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뿌리치고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떴다. 그는 곧장 후원에 있는 조그만 방안으로 들어간 후에 차갑고 딱딱한 침대 위에 쓰러져 이를 깨물며 식은땀을 흘리면서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는 결코 남들이 자기를 영웅 호걸로 보아주기를 바라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끼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그만 방의 문에 달린 벳조각으로 만들어진 휘장이 살며시 들춰지며 한 사람이 기척도 없이 들어와서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그 사람은 문설주에 기대고 서서 연민의 정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아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을 지니고 있었고 무척 섬세하고도 예쁜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소려(小麗)라는 소녀로, 손님들은 그녀를 소요정(小妖精)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다가와 그녀의 그 하얗고 부드러운 손으로 그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 있는 땀을 훔쳐 주었다. "당신은 어째서 그런 일을 ㅎ어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오." 그의 대답은 무척 간단했다. "나는 이 집에서 일을 해야 하오." "그러나 당신은 아직도 젊어요.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가 있잖아요." 그녀는 지극한 관심과 동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길은 그녀를 한번 바라보지도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할 일이 있는데 어째서 가지 않소?" 소려는 여전히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마음속에 많은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 일은 없소." "틀림없이 옛날에 한 여인이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했죠?" 아길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군." "당신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어째서 지금 이 모양이 되었죠?" "내가 게으르고 술을 좋아했기 때문이오." "당신은 여자를 밝혔지요?" 아길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부인하기조차도 귀찮은 듯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여자를 만져 보지 않은 것이 오래 되었어요. 나는 알고 있다고요." 그녀의 음성은 갑자기 매우 야릇하고 부드럽게 변했다. 갑자기 그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의 아랫배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는 얇은 비단 옷 밑에 놀랍게도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였다. 그는 그녀 아랫배의 뜨거운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칼에 난 상처와 핏자국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욕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입은 상처가 가볍지 않은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와 정을 나눈다면 틀림없이 고통을 잊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장담할 수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손을 잡고 그녀의 온몸을 어루만지도록 했다. 그녀의 팽팽한 젖무덤은 조그맣고 단단했다. "꺼져!" 그러면서 한 대의 따귀를 덧붙였다. 그녀는 벌렁 뒤로 쓰러졌다. 그러나 얼굴에는 환희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해주기를 바랬던 것 같았다. "당신은 정말 건장하네요." 아길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몸에 나 있는 칼의 상처는 마치 불에 닿는 것처럼 화끈거리고 아팠다. 그의 마음속에도 뜨거운 한 줄기의 불꽃이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전력을 다해서 자기 자신을 억제해야 했다. 그녀는 이미 결심한 듯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갑자기 한쪽 손으로 그의 다리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허리띠를 풀었다. 그녀는 나직이 신음 소리를 내며 허리를 비틀어 댔다. 그녀는 이미 축축이 젖어 있었다. 바로 이 때, 하나의 손이 뻗쳐 오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통통하고 거친 손에는 가지각색의 반지들이 끼어 있었다. 한대내내는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손에 술병을 들고 있었다. "그 암캐는 타고난 화냥이야." 그녀는 취기 어린 눈동자로 아길을 바라보았다. "그년은 사내들이 자기를 때려주는 것을 좋아하지. 심하게 때려줄수록 그 년은 좋아하지." 아길은 눈을 감았다. 그는 이 늙어가는 뚱뚱한 여인의 눈동자에서 소려의 눈에 떠올랐던 욕정이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기가 싫었다. "자, 한 잔 들게. 술벌레가 자네의 목구멍을 간지럽히고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네." 그녀는 킥킥 웃으며 술병을 그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오늘 자네가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해주었으니 나는 멋지게 자네에게 보상을 해야겠네." 아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대내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하니 자네는 정말 쓸모 없는 사내란 말인가?" "그렇소." 하지만 한대대는 그를 가만히 놔주지 않았다. "너는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을 갚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단 말이다. 알아 들었지?" 아길은 눈을 꼭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대내내는 그의 바지를 벗겼다. 아길이 눈을 뜨게 되었을 때 한대내내는 이미 가고 없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침대 머리에 한 덩이의 은자를 남겨 놓고 갔다. "이것은 자네가 번 돈이야. 그 누구든 일곱, 여덟 번의 칼질을 공짜로 당할 수는 없지." "우리가 살을 섞었던 사실을 잊는 편이 좋을 거야." 아길은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문밖으로 사라지자마자 구역질을 했다. 이 일을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구역질이 끝나자 그는 걸어 나갔다. 은자를 벙어리의 밥솥 안에 집어넣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곳을 떠났다. 그는 더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 * 이른 아침. 찻집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길은 한 사발의 뜨거운 차를 마셨다. 이곳에서는 탕포(湯包)와 튀김도 팔았다. 그는 무척 배가 고팠다. 그러나 그는 찻물을 마셨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스물 세 냥의 엽전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더 살고 싶었다. 근래에 그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생계를 꾸려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지 예전의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려고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미장이는 미장이대로 패거리가 있었다. 목공은 목공대로 패거리가 있었다. 심지어 짐꾼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패거리가 있었다. 패거리에 들지 못하면 일거리를 찾기 힘들었다. * * * 그는 이틀을 굶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는 차를 마실 수도 없게 되었다. 그는 찻집 밖에서 바람을 마셔야 했다. 그가 굶주려 쓰러져 눕고 싶을 때 갑자기 누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똥을 푸는 일을 하겠는가? 하루에 오 푼일세." 아길은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 마디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목구멍은 이미 막혀 있었다. 그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그에게 준 것은 똥을 푸는 일거리였지만 생명을 준 것이었다. 그는 이제 살아 남게 된 것이었다. 그 사람은 노묘자(老苗子)라 했다. 노묘자는 정말로 묘족 출신이었다. 그는 우람하고 건장했으며 추악하면서 튼튼했다. 웃을 적에 허연 이빨이 어금니까지 드러났다. 그의 왼쪽 귀는 매우 길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귀걸이를 달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는 점심 무렵에 잠시 쉬는 동안 불쑥 물었다. "자네는 며칠이나 굶었나?" "당신은 내가 굶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소?" "오늘 자네는 세 번이나 쓰러질 뻔 했었네." 아길은 자기 발을 바라보았다. 발등에는 아직도 똥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노묘자는 입을 열었다. "이것은 무척 힘든 일일세. 나는 자네가 견뎌내지 못할까 걱정이네." "그러면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키려고 했소?" "왜냐하면 내가 처음 이곳에 오게 되었을 때도 똥 푸는 일조차 찾을 수가 없었네." 그는 품안에서 종이 봉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두 개의 낙병(烙餠)과 통째로 소금에 절인 단무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아길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길은 받아서 먹었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노묘자는 그를 바라보더니 눈에 웃음이 번지며 갑자기 물었다. "오늘 밤 자네는 어디서 자려고 하는가?" "모르오." "나에게는 집이 있네. 우리 집은 무척 큰 편이지. 자네는 우리 집으로 가서 잠을 자지 않겠나?" "좋습니다." 노묘자의 집은 결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비둘기장보다는 컸다. 그들이 들어가니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이 분은 우리 어머니야. 정말 음식 솜씨가 좋네." 아길은 솥에 들어 있는 현미로 끓인 죽을 바라보았다. "냄새가 정말 구수하구려." 노파는 웃으며 큰 그릇에 죽을 잔뜩 떠서 그에게 주었다. 아길은 받아서 먹었다. 역시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노묘자는 눈에 만족스런 빛을 띄웠다. "이 사람은 아길이라 하지요. 좋은 녀석입니다." 노파는 나무 국자로 그의 아들의 머리를 살짝 때리며 말했다. "나도 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먹을 것을 주었겠느냐?" "오늘 밤 그가 우리와 함께 자는 것도 괜찮겠지요?" 노파는 실눈을 뜨고 아길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우리 아들과 한 침대에서 잘 수 있겠는가?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네는 한족 사람이지. 한족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묘족 사람들을 구린내가 난다고 여기지." "저는 한족 사람입니다만 그보다 더 구린내가 납니다." 노파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나무 국자로 그의 머리를 툭툭 때렸다. 마치 그의 아들의 머리를 때리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하! 빨리 들게. 뜨거울 때 먹어야지. 배불리 먹고는 침대 위로 올라가 잠을 자도록 하게. 그래야 내일 일할 기운이 생길 것이네." 아길은 이미 먹고 있었다. 무척 빨리 먹었다. "하지만 침대 위에 오르기 전에 자네는 한가지 일을 해주어야 하네." "무슨 일인지요?" "우선 자네의 발을 깨끗이 씻게. 그렇지 않으면 왜왜(娃娃)가 화를 낼 것일세." "왜왜가 누구입니까?" "나의 딸이며 저 녀석의 누이동생이지." "하지만 그녀는 본래 공주였어야 했다네. 그 애는 태어날 때부터 공주였어야 했지." 뒤쪽에 있는 방안에는 세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부드러운 침대는 물론 공주의 것이었다. 아길 역시 공주를 무척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피곤했다. 뜨끈뜨끈한 반찬과 죽을 먹고 나자 눈까풀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노묘자와 같은 커다란 사내와 꼭 붙어서 침대 위에서 잔다는 것이 무척 불편스러웠지만 그는 빨리 잠이 들었다. 밤중에 그는 잠에서 깬 적이 있었다. 몽롱한 속에서 머리카락이 무척 긴 여자 애가 침대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가 자세히 보려고 했을 때 그녀는 이미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그들이 일하러 나갈 때 그녀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덮고 자고 있었다. 아길은 그녀의 새카맣고 부드러운 긴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베갯머리에 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날은 아직 환히 밝기 전이었다. 차가운 안개는 무척 짙었다. 그들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갔다. 노묘자는 갑자기 물었다. "자네는 왜왜를 보았나?" 아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만 보았을 뿐이었다. 노묘자는 설명해 주었다. "그 애는 어느 무척 큰 공관(公館)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잠이 들어야 돌아올 수 있네." 그는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비교적 늦게 자는 편이 아닌가 말일세." "알고 있소." "하지만 자네는 조만간 그 애를 보게 될 것일세." 그는 눈동자에 자랑스러운 빛을 띄웠다. "자네가 그 애를 보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그 애를 좋아하게 될 것일세. 우리들은 그 애를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네." 아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자 애가 틀림없이 공주일 것이라고 믿었다. 점심 때 그는 노파가 그의 주머니에 넣어 준 커다란 만두를 먹고 있었다. 갑자기 세 사람이 다가왔다. 옷차림이 남루했으며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허리에는 한 자루의 조그만 칼을 차고 있었다. 아길의 몸에 난 칼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고 여전히 아팠다. 세 사람 가운데 나이가 비교적 많은 사람은 세모꼴 눈으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요?" "자네는 새로 온 사람이지? 이 고장의 규칙을 모르나?" 아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규칙이오?" 세모꼴의 눈은 대답했다. "자네의 품값을 내놔. 나는 삼성(三成)을 갖는데 한달 치 품값에서 삼성을 미리 떼어달란 말이야." "나에게는 세 닢의 동전밖에 없소." "세 닢의 동전밖에 없다면서도 허연 밀가루 만두를 먹고 있다니?" 그는 손을 들어 아길의 손에 들린 만두를 쳤다. 만두는 굴러서 똥물이 널려 있는 곳으로 굴러갔다. 아길은 묵묵히 만두를 집어들고 바깥의 껍질을 한 겹 벗겼다. 그는 반드시 이 만두를 먹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똥을 풀 기운이 없었다. 세모꼴 눈은 소리내어 웃었다. "만두에 똥물이 묻으면 무슨 맛이 날까?" 아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도 너는 먹느냐? 너는 도대체 사람이냐, 개새끼냐?" "당신 맘대로 부르시오." 그는 만두를 한 입 깨물었다. "나는 세 닢의 엽전밖에 없으니 달라면 주겠소."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아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는 차부(車 )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느냐?" 아길은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세모꼴의 눈은 다시 말했다. "차부는 철두 대형(鐵頭大兄)을 받드는 사람이다. 철두 대형은 바로 대노판(大老板)의 아우다." 그는 자기의 코끝을 가리켰다. "나는 바로 차부의 아우인데 내가 자네의 구린내 나는 세 닢을 받을 것 같은가?" 아길은 냉큼 그 말을 받았다. "싫으면 관두시오." 세모꼴의 눈은 소리내어 웃더니 갑자기 발을 들어서 그의 불알을 걷어찼다. 아길은 아파서 허리를 구부렸다. 세모꼴의 눈은 입을 열었다. "내가 네 녀석에게 쓴맛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네 녀석은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 모를 거다." 세 사람이 쓴맛을 보여줄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뛰어들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람은 그들보다 키가 훨씬 컸다. 세모꼴의 눈은 뒤로 반 걸음 물러서며 큰소리로 말했다. "노묘자, 너는 쓸데없는 일에 관계하지 말아라." "이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오." 그는 아길을 일으켰다. "이 사람은 내 아우란 말이오." 세모꼴의 눈은 노묘자의 커다랗고 거친 손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자네의 아우라고? 자네는 그가 삯을 받으면 우리에게 삼성을 지불할 것을 보장하겠는가?" "그는 지불할 것이오." 황혼 무렵, 그들은 온몸에 피로와 구린내를 싣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아길의 얼굴에는 아직도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 사람의 발길질은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노묘자는 그를 바라보며 불쑥 물었다. "다른 사람이 자네를 때릴 때 자네는 언제나 가만히 있는가?" 아길은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한 청루에서 노복으로 일한 적이 있지요. 그곳의 사람들은 저에게 별명을 지어 주었답니다." "어떤 별명인가?" "그들은 모두 다 나를 쓸모 없는 아길이라고 불렀지요." 주방 안은 따뜻하고 건조했다. 그들이 문밖에 이르자 노파의 유쾌한 음성이 들렸다. "오늘은 우리 공주가 집으로 돌아와서 밥을 먹겠대. 우리 모두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어린애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한 조각씩 나눌 수 있지. 매우 큼직한 덩어리로 말이야." 노파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언제나 아길은 가슴속으로 유쾌하고 따뜻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왜냐하면 그는 공주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 * * 협소한 부엌 안에는 많은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여러 사람이 앉아 밥을 먹을 때 비집고 앉아야 했으나 언제나 하나의 의자만은 비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주를 위해서 남겨둔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바로 그 의자에 앉아 아길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한 쌍의 커다란 눈망울과 한 쌍의 섬세하고 예쁜 손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것이 비단결 같았다. 태도도 고귀하고 온화했다. 보기에 그녀는 정말 한 명의 공주 같았다. 만약 아길이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더라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에 대해서 존경과 총애를 하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본 것은 바로 한대내내의 주방이었으며 대상의 곁에 앉아서 한 쌍의 다리를 높다랗게 탁자 위에 걸치고 한 쌍의 섬세하고 예쁜 발을 드러내 놓고 있을 때였다. 그는 그녀를 눈 여겨 바라보지 않았지만 그녀는 줄곧 그를 주의하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그는 그녀가 바로 한대대내가 데리고 있는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젊은 아가씨였으며 장사가 제일 잘 되는 창녀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그곳에서 불려지는 이름은 소려(小麗)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소요정(小妖精)이라고 불렀다. 두번째로 그가 그녀를 본 것은 바로 그가 칼을 맞은 날 밤이었다. 그의 조그마한 방안에서였다. 그는 줄곧 그녀의 얇은 비단 아래에 있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알몸의 보드라움을 잊을 수 없었다. 그 때 안간힘을 써서 감정을 억누르고 한마디를 했던 것이었다. "꺼져." 그는 본래 그것이 그들 사이의 마지막 상면이라고 여겼었는데 뜻밖에도 지금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 방탕하고 변태적인 소요정이 바로 그들의 왜왜이며 공주처럼 고귀할 뿐 아니라 그들 온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를 먹여주고 재워주었으며 그를 마치 그들의 형제처럼 여겼다. 아길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마음은 찌르는 듯이 아파 왔다. 그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아픔을 느꼈다. 노파가 다가와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웃었다. "빨리 우리 공주님께 인사를 드리게." 아길은 별 수 없이 한마디를 했다. "안녕하시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전혀 표정이라고는 없었다. 마치 그라는 사람을 한번도 만나 보지 못한 듯 그저 담담히 한마디 했다. "앉아서 고기를 드세요." 아길은 앉으며 ㅌ연을 까짱하여 한 마띠 ㅎ다. "공주, 고맙소." 노묘자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하! 자네는 그 애를 공주라고 부를 필요 없네. 자네는 우리처럼 그 애를 왜왜라고 부르게." 그는 한 덩이의 가장 두껍고 가장 큰 절인 고기를 아길에게 집어 주었다. "빨리 고기를 먹게. 배불리 먹어야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지 않나?" 아길은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밤은 이미 깊었다. 그의 옆에서 자고 있는 노묘자는 이미 우레와 같이 코를 골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건너가면 그 쪽 침대에서 왜왜가 잠들어 있는 것이다. 아길은 침대 위에 누워 식은땀을 흘렸다. 이것은 마음속으로 남 모르는 고통을 당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 난 칼의 상처가 악화된 것이었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똥을 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칼에 입은 상처는 줄곧 아물지 않았다. 그는 상처를 한번 살펴본 적도 없었다. 그는 때로 똥통을 어깨에 멜 때 칼의 상처가 다시 터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텨온 것이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숫제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오후 몇 곳의 상처가 썩어 문드러지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침대 위에 눕자마자 그는 온몸에 고통을 느끼고 끊임없이 식은땀을 흘렸다. 갑자기 그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모든 상처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억지로 자기 자신을 억제하려고 하면서 고통을 참고 견디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온몸이 아래로 꺼져 들고, 끝없는 암흑의 심연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다. 혼미한 상태에서 그의 친구들이 놀라서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들은 것 같았으나 똑똑히 들리지도 않았다. 멀리서 누가 그를 부르고 그의 이름을 외치는 것 같았으나 그 음성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는 한 명의 빌어먹게 되어 쓰러진 젊은이요, 눈물마저도 모두 말러버린 떠돌이였으며, 바람을 맞은 낙엽 같았고 물에 떠 있는 부평초처럼 의지할 뿌리조차 없었다. 그를 그리워하고 관심을 지닌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일까? * * * 아길은 줄곧 혼미 상태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 그는 몇번이나 깨어난 적이 있었다. 매번 깨어날 때마다 그는 누가 그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 조심스레 그의 땀을 닦아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똑똑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정신이 들기가 무섭게 곧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 사람을 똑똑히 본 것은 창 밖에서 스며들어 오는 햇살이 그녀의 새카맣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관심과 슬픔으로 가득했다. 아길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멸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탓하지 않았어요." 놀랍게도 그녀는 무척 침착했다. 그녀 역시도 애써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신의 마음속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많은 고통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죽어라 하고 당신 자신을 괴롭힐 필요는 없는 거예요." 방안은 무척 조용해서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노묘자는 물론 일터로 나갔을 것이다. 그는 결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길은 갑자기 눈을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왜왜는 알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죽을 사람이었다면 이미 여러 차례 죽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은 왜 일을 하러 가지 않소?" "나는 가지 않겠어요." 그녀의 음성은 무척 차분했다. 그녀는 담담히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그곳에 가지 않을 거예요." 아길은 참을 수 없어서 물었다. "어째서?" 왜왜는 갑자기 차가운 표정이 되었다. "당신은 내가 천성적으로 그런 일을 좋아한다고 여기나요?" 아길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 같았다. "당신은 언제부터 가지 않기로 결정했소?" "오늘요." 아길은 입을 다물었다. 마음속에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 누구도 천성적으로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삶을 누려야 하며 밥을 먹어야 한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와 오라비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녀는 그들에게 고기를 먹여주고 있다.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으리라. 그녀의 방탕함과 천박함은 그녀의 마음속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죽어라 하고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자기 자신을 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제 그녀는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더 이상 그가 그녀를 능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길에게 만약 눈물이 있었더라면 지금쯤 이미 눈물이 흘러내렸으리라. 그러나 그는 떠돌이에 불과했다. 떠돌이는 무정하고 눈물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반드시 떠나야 했으며 반드시 이곳을 떠나야 했다. 기어서라도 나가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녀가 자기에게 품은 감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집안 사람들은 그에게 생명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 일찍이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과 보살핌을 안겨 주었다. 그는 결코 그들이 다시 상심하도록 할 수가 없었다. 왜왜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했다. "당신은 다시 떠날 생각이죠?" 아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온힘을 다해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았다. 왜왜는 그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이 사람의 몸뚱이가 무쇠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강철과 같은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눈동자에는 이미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아길 역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체력으로는 멀리 갈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상처에서 다시 고통이 찾아 들었다. 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다가 시궁창에 쓰러져 쥐새끼처럼 초라한 몰골로 죽는다 해도 상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문을 나서기도 전에 노파가 어느덧 채소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으며 자상한 눈동자에 꾸짖는 듯한 빛을 띄웠다. "자네는 일어나지 말아야 했네. 나는 자네를 위해서 고깃국을 끓이려고 재료를 사러 갔었네. 잘 먹어야 기운을 차릴 것이 아닌가? 빨리 침대로 돌아가서 기다리도록 하게." 아길은 눈을 감았다. -- 떠돌이는 정말 정이 없는 것일까? 정말 눈물이 없는 것일까? 그는 다시 갑자기 온힘을 다해서 노파의 곁을 지나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 * * 좁다란 골목길 안은 음침하고 습기차 있었다. 햇살마저도 이곳까지 비쳐 들지 않았다. 그는 이빨을 깨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바람을 맞으며 걸어나갔다. 골목길 어귀에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었다. 옷에 걸치고 있는 옷자락은 이미 선혈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얼굴의 일부분도 이미 갈라져 있었다. "노묘자!" 아길은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다. 노묘자도 달려왔다. 두 사람은 굳게 얼싸 안았다. "자네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는데 무엇하러 나왔는가?" 노묘자 자신의 상처는 더욱 심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개의치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역시 그의 친구였다. 아길은 이를 악물었다. "나는...... 나는......" 노묘자는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자네는 떠나겠다는 것인가?" 아길은 힘주어 그의 친구를 끌어안았다. "나는 가지 않겠네. 때려 죽인다 해도 가지 않겠네." * * * 다섯 곳의 칼에 찔린 상처, 그리고 네 대의 늑골이 부러졌다.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닐진대 어떻게 그 고통을 견딜 수 있겠는가? 노파는 그의 아들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노묘자는 여전히 웃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하! 하! 하! 이까짓 상처까 뭐가 대수로울 게 있겠어요? 내일 아침에는 말짱해질 거예요." "너는 어쩌다가 상처를 입었느냐?" "나는 넘어졌어요. 계단 위에서 나뒹굴었는데 아래로 떨어졌죠." 누가 봐도 이것은 결코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해도 이렇게 심한 상처는 입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노파는 다른 노파들과 달랐다. 그녀는 이것이 결코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아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다만 눈물을 흘리며 한마디 했다. "다음에 계단을 내려올 때는 조심하도록 해라." 그리고 그녀는 걸어 나가 자기가 끓이고 있는 고깃국을 보러 갔다. 그녀는 사내들이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아낙들이 쓸데없이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그 아낙이 어머니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길은 그녀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으나 붉으레하게 변해 있었다. -- 얼마나 위대한 여인인가? -- 이 인간 세상에 저런 여인이 있기 때문에 인류는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가 주방 안으로 들어서자 아길은 고개를 돌려 노묘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소?" 노묘자는 다시 웃었다. "누가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겠는가? 누가 감히 나를 때릴 수가 있겠는가?" "나는 당신이 나에게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소.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서 물어봐야 하겠군요." 노묘자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가 얻어맞아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이것은 내 자신의 일이니 자네가 가서 물어 볼 필요는 없네." 줄곧 먼발치에 있는 창문 앞에 서 있던 왜왜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는 당신이 갔다가 얻어맞을까 봐 두려운 거예요." 아길은 입을 열었다. "나는......" 왜왜는 그 말을 가로채며 냉소했다. "사실 오라버니는 그런 점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오라버니가 당신 때문에 얻어맞았다 해도 당신은 결코 오라버니를 위해서 복수를 해주지는 않을 거니까요." 그녀는 냉랭히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이 쓸모 없는 아길은 한번도 싸우는 것을 좋아한 적이 없으니까요." 아길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머리도 수그러졌다. 이제 그는 그의 친구가 어째서 얻어맞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 흉악한 세모꼴의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왜왜의 말이 바늘처럼 그의 가슴을 찔렀으나 아길은 자기 친구를 위해서 복수를 할 수 없었고 가서 싸움을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미웠다.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바로 이 때, 그는 한 사람의 차가운 음성을 들었다. "그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얻어맞는 것을 무서워하는 거야." 이것은 세모꼴 눈의 음성이었다. 찾아온 사람은 혼자가 아니었다. 허리춤에 칼을 찬 두 명의 젊은이가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 맨 뒤의 한 사람은 얼굴이 길고 다리도 무척 긴 사람인데 두 손을 허리에 짚고 뒤쪽에 서 있었다. 그는 몸에 번쩍거리는 비단 옷을 걸치고 있었다. 세모꼴의 눈은 엄지손가락을 세워 맨뒤에 있는 그 사람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분이 바로 우리들의 형이신 <차부>이시다. 이 두 글자는 전당포로 가져가서 저당을 잡혀도 수백 냥의 은자를 받을 수 있을 거야."" 노묘자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신들이 어쩌려고 이곳에 왔소?" 세모꼴의 눈은 음산하게 웃었다. "자네는 안심하게. 우리가 이번에 온 것은 자네를 귀찮게 굴려는 것이 아니야." 그는 다가와 아길의 머리를 툭툭 가볍게 때렸다. "이 녀석은 후레자식이니, 이 나리들이 이까짓 녀석을 찾아올 만큼 한가하지는 않지." "당신들은 누구를 찾아왔소?" 세모꼴의 눈은 대답했다. "자네의 누이동생." 그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왜왜를 노려보았다. 세모꼴의 눈에서 흉악한 광채가 번쩍였다. "이봐 아가씨, 우리와 함께 가지." 왜왜의 안색이 변했다. "당신...... 당신들은 나보고 어디로 가자는 거예요?" 세모꼴의 눈은 냉소를 띄웠다.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거지. 너는 오리발을 내밀지 말아라." 왜왜는 몸을 움츠렸다. "설마하니 나는 하루도 쉴 수 없다는 거예요?" 세모꼴의 눈은 씨부렁거렸다. "너는 한대내내의 집에서 가장 총애를 받는 사람이야. 하루라도 장사를 하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은자가 줄어드는지 알겠지? 벌어들일 은자가 없다면 우리 형제들은 무엇을 먹고 산단 말이냐?" 왜왜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대내내는 나에게 약속을 했어요. 그녀는......" 세모꼴의 눈은 그 말을 가로챘다. 5. 성난 주먹 "그녀의 말은 개방귀에 지나지 않아. 만약 우리 형제들이 아니었다면 그녀 역시 오늘 날 일개 화냥년, 늙은 화냥년에 불과햇을 걸? 하루 화냥질을 했으면 ㅉ는 날까지 팔아야......" 왜왜는 그가 마지막 한 마디를 말하지 못하게 큰소리로 그 말을 가로챘다. "제발 부탁이에요. 이틀간만 저를 놓아주세요. 그들은 상처를 입었어요. 상처가 가볍지 않아요." 세모꼴의 눈은 입을 열었다. "그들이라니? 그들이 누구냐? 한 명은 너의 오라버니라 치고, 또 한 명은 누구냐?" 두 명의 칼을 가진 젊은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우리도 저 녀석을 알고 있지. 그는 한대대내의 주루에서 잡부로 일하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저 어린 갈보와 어떤 관계가 있을 거야." 세모꼴의 눈은 그 말을 받았다. "좋아. 정말 잘 되었군." 그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냅다 손등으로 아길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 녀석이 이 갈보년의 기둥서방이라니, 정말 뜻밖이로군. 이 년아, 네가 순순히 우리들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먼저 이 녀석을 고자로 만들어 놓을 테다." 그는 다시 발을 쳐들었다. 아길의 사타구니를 걷어차려고 하자, 왜왜가 달려들어 아길의 몸을 덮치며 애절하게 부르짖었다. "나는 죽어도 당신들을 쫓아가지 않을 거에요. 당신들은 먼저 나를 죽여요." 세모꼴의 눈은 매섭게 쏘아 부쳤다. "이 냄새나는 갈보년아! 너는 정말 죽고 싶으냐?" 이번에 그는 발길질을 하지 않았다. 노묘자가 어느새 그의 어깻죽지를 잡았던 것이었다. "당신은 그 애를 뭐라고 불렀지?" "갈보라고 했다. 냄새나는 갈보라고 했어." 노묘자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사발만한 주먹으로 한 방 내질렀다. 세모꼴의 눈은 그의 주먹을 한 대 얻어맞았다. 그러나 노묘자 역시 옆에 있는 사6람에게 두 번이나 발길질을 당해서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노파는 부엌에서 달려 나왔다. 손에는 채소를 써는 부엌칼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목멘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 강도놈들아, 이 할미가 너희와 사생결단을 내겠다." 그러더니 한 칼로 세모꼴 눈의 목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적중시킬 수 없었다. 그녀의 칼은 어느덧 세모꼴 눈에게 덥석 빼앗기고 말았고 그녀 자신도 세모꼴의 눈에 의해서 땅바닥에 머리를 찧고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왜왜는 달려가 그녀 얼싸안고 울부짖었다. 온갖 애욕살이를 겪고 이미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가 어떻게 그런 패대기질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세모꼴의 눈은 냉랭히 말했다. "이것은 그 년이 죽음을 자초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묘자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면서 비틀거리며 달려들었다. 그는 이미 온몸에 상처를 입고 있어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걸고 덤벼들었다. 그는 이미 목숨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모꼴의 눈은 매섭게 다그쳤다. "너도 죽고 싶냐?" 그의 손에는 조금 전에 빼앗았던 채도(菜刀)가 들려 있었다. 어떤 칼이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그대로 칼을 한번 내질러 노묘자의 가슴을 찔러갔다. 노묘자의 눈은 이미 출혈되었고 숫제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칼은 공교롭게도 허공을 치고 말았다. 칼날이 막 몸을 파고들려고 했을 때 노묘자는 이미 옆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아길에게 밀려 난 것이었다. 아길 자신도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세모꼴의 눈앞에 서서 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 당신은 너무나 사람을 능멸하는군. 사람을 너무나 능멸하고 있어......" 그의 음성은 목이 메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세모꼴의 눈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설마 그들을 위해서 원수라도 갚겠다는 것이냐?" 아길은 말을 더듬었다. "나는...... 나는......" 세모꼴의 눈은 버럭 소리쳤다. "너에게 담력이 있다면 이 채도로 나를 죽여 보아라." 놀랍게도 정말 그는 채도를 ㄴ밀었다. "너에게 사람을 죽일 용기가 있다면 너에게 승복하마. 그리고 너를 남자라고 인정해주겠다." 아길은 그 칼을 잡지 않았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전신을 와들와들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 세모꼴의 눈은 소리내어 웃더니, 덥석 왜왜의 머리채를 휘어감고 매섭게 외쳤다. "가자!" 왜왜는 그를 한사코 반항했다. "놔! 이 놈들아!" "아니, 이 년이......" 세모꼴 눈이 손을 쳐들어 왜왜의 따귀를 때리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갑자기 다른 손에 의해 쥐어졌다. 한 쌍의 굳세고 힘찬 손이었다. 세모꼴 눈은 손이 으스러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 손은 놀랍게도 아길의 손이었다. 세모꼴 눈은 놀란 눈으로 아길을 쳐다보았다. "네가...... 네가 감히 나를 건드려?" 아길은 그 말을 받았다. "나는 감히 그러지 못하오. 나는 사대답지도 못하고 감히 사람을 죽일 수도 없소.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싶지도 않소." 그의 손은 차츰 풀어졌다. 세모꼴의 눈은 미친 듯이 호통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 그는 한 칼로 아길의 목줄기를 따려고 했다. 아길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다만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세모꼴의 눈이 먼저 손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칼이 상대방을 내려찍기 전에 아길의 주먹이 어느새 그의 아래턱을 내질러 버렸다. 그의 몸이 붕 떠서 날아갔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을 꿰뚫고 멀리 날아가더니 다시 쿵,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나지막한 담에 부딪쳐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온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일제히 놀라 아길을 바라보았다. 아길은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한 쌍의 눈동자는 공허하기만 했다. 전혀 표정이 없는 것 같았으며 고통이 가득한 것 같았다. 줄곧 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문 앞에 서 있던 차부가 갑자기 껑충 뛰어오르며 호통 소리를 내질렀다. "그를 걸어라." 이것은 시정 무뢰배들이 말하는 은어로, 그를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칼을 가진 젊은이는 잠시 망설였으나 끝내 칼을 뽑아 들었다. 두 자루의 칼이 어느 덧 아길의 몸을 여덟 번이나 찌른 터였다. 그런데 이제 또 다시 허리 아래에 있는 요혈을 찔러 갔다. 그러나 매번 허공을 찌르고 있었다. 두 명의 건장한 젊은이는 갑자기 쓰러지더니 한 무더기의 진흙 덩이처럼 맥없이 주저앉았다. 아길의 두 손이 나누어지면서 바로 그들의 목덜미를 후려쳤던 것이었다. 그들은 쓰러질 때 비명소리 한번 내지 못했다. 차부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져서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길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거기 서." 차부는 놀랍게도 무척 말을 잘 들었다. 정말 그 자리에 선 것이었다. "나는 원래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너희들은 어째서 나를 핍박하느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눈에는 슬픔과 고통이 가득했다. 왜냐하면 그 한 쌍의 손이 다시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차부는 갑자기 가슴을 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를 죽인다 해도 너는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아길은 그 말을 받았다. "나는 절대 도망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내뱉었다. "왜냐하면 나는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차부는 그가 고개를 숙이자 갑자기 한 자루의 비도를 그의 가슴을 향해 내던졌다. 그러나 그 한 자루의 칼은 되날아가 자기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관절이 있는 곳까지 들어가 박혔다. 이제부터 그는 그 팔로 다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아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너를 살려 보내 너의 철두 대형과 너희 대노판에게 사람을 죽인 것이 나라는 것을 알려주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들이 원수를 갚고 싶다면 바로 나를 찾아와야지 쓸데없이 무고한 사람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 차부는 이마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이를 깨물었다. "좋다 이 녀석. 네가 사내라고 해 두겠다." 그는 몸을 돌려 나는 듯이 달려가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네가 진짜 사내라면 이름을 밝혀라." "나는 아길, 쓸모 없는 아길이라고 한다." 어두운 밤, 침침한 등불. 처량하고 참담한 등불 빛은 죽어 있는 침대 위의 노파를 비쳐 주고 왜왜와 노묘자의 창백해진 얼굴도 비쳐 주고 있었다. 노파는 그들의 어머니였다. 그들의 성장을 위해서 한 평생 애욕살이를 했는데 그들은 그녀에게 어떤 보답을 했는가? 아길은 멀리 길모퉁이의 후미진 곳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마치 감히 그들을 쳐다 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노인은 원래 죽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용기있게 일을 처리했다면 그녀는 결코 죽지 않았으리라. 노묘자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가게!" 그의 얼굴은 비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자네가 우리들의 어머니를 위해 원수를 갚아 준 것에 대해 우리는 본래 감사를 드려야 하겠지만...... 지금 우리는 자네를 다시 붙잡아 둘 수가 없네." 아길은 움직이지 않았고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는 노묘자의 뜻을 알고 있었다. 노묘자가 그에게 가라고 하는 것은 다시는 아길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길은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다. 노묘자는 갑자기 호통을 내질렀다. "설사 우리가 자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하더라도 자네는 이미 보답을 했는데 어째서 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네." "무슨 방법인가?" "나를 때려 죽여 시체를 떠메고 나가도록 하게." 노묘자는 그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눈물이 왈칵 두 눈에서 쏟아졌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재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렇다고 그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기나? 자네는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모르네." "그들에게는 돈도 있고 세력도 있네. 그들의 대노판은 많은 타수(打手)들을 거느리고 있네. 적어도 삼 사백 명은 될 걸세. 그들 중에 가장 무서운 자들이 있지. 한 명은 철두(鐵頭)라고 하고 한 명은 철수(鐵手)라고 하고 또 한 명은 철호(鐵虎)라고 하네. 소문에 들으니 살인을 밥먹듯한 강양대도(江洋大盜)들인데 관가의 추격이 심해서 성명을 바꾸고 이곳으로 숨어 들어온 것이라고 하더군." 그는 다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자네의 재간이 아무리 훌륭하다 ㅎ도 그들 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죽음의 길밖에 없을 거네." "나는 본래 갈 곳이 없는 사람이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짙은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노묘자는 그의 얼굴 표정을 볼 수 없었으나 그의 목소리에 서려 있는 비통함과 결심을 들을 수 있었다. 비통 또한 일종의 힘이었고 사람으로 하여금 평소에 감히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해낼 수 있도록 만든다. 노묘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자네가 죽겠다면 우리와 함께 죽는 것도 좋겠지." 이 때 한 사람이 문 밖에서 냉랭히 그 말을 받았다. "좋아. 정말 잘 되었군." 쿵, 하는 소리가 나면서 매우 두꺼운 나무문에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하나의 주먹이 밖에서부터 불쑥 불거졌다가 다시 움추러들었다. 곧이어 꽝, 하는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고 옆의 벽돌로 쌓은 담벼락에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이 사람은 무척 단단한 주먹을 지니고 있었다. 아길은 천천히 다가가 문을 열었다. 한 떼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체구가 가장 크고 옷차림이 가장 화려한 한 명이 왼손으로 오른쪽 주먹을 거머잡고 곁눈질로 아길을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바로 그 쓸모 없는 아길이냐?" "바로 그렇다." 그 사람은 입을 열었다. "나는 철권(鐵拳) 아용(阿勇)이라고 한다." "네 이름이 무엇이든 나는 관심 없다." 철권아용은 냉랭히 대꾸했다. "나의 주먹은 무쇠보다 단단하다." 아길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ㄹ?" 철권 아용은 다시 입을 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너는 무척 사내답다고 하더군. 네가 감히 나의 한 주먹을 받아낼 수 있다면 네가 정말 사내라고 인정해 주마." 아길은 순순히 응했다. "좋다." 노묘자의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왜왜는 힘주어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은 모두 다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들은 모두 다 아길이 삶을 포기햇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한 방으로 벽돌담에 구멍을 뻥 뚫는 철권을 맞으려고 하겠는가 말이다. 어쨌거나 그들에겐 죽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일찍 죽어도 죽는 것이고, 늦게 죽어도 죽는 것이었다. 죽는다고 해서 대수로울 게 무엇인가? "죽으면 그만이다." 노묘자는 갑자기 달려나가며 호통을 질렀다. "네가 사내라면 먼저 나를 한 대 때려 보아라." 철권 아용은 대뜸 응했다. "그것도 좋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한 대의 주먹으로 노묘자의 얼굴을 내지르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은 뼈마디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부서진 것은 노묘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부서진 것은 철권 아용의 주먹이었다. 아길이 불쑥 손을 써서는 한 대의 주먹으로 그의 주먹을 내려쳤다. 그리고는 냅다 바깥쪽으로 주먹을 뻗쳐 내서 맹렬히 그의 아랫배를 베듯이 후려친 것이었다. 철권 아용은 고통 때문에 온몸이 새우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는 극도의 고통에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길은 그의 등뒤에 서 있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 떼의 사람들은 모두 다 칼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너희들은 대노판에게 가서 전해라. 내 목숨을 빼앗으려면 훌륭한 고수를 보내라고 해. 이런 잔챙이들은 상대하기 싫다." * * * 후원의 단풍잎은 이미 붉게 변했다. 가을의 국화꽃도 황금처럼 찬란했다. 대노판은 뒷짐을 지고 국화 옆에 서서 혼자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양징호(洋澄湖)의 많은 커다란 게들이 운반되어 올 때쯤이면 이 국화들이 가장 흐드러지게 피겠군." 그는 유쾌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건 정말 멋질 거야. 정말 멋져." 그의 등뒤에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한 명의 남색 장삼을 걸치고 낙방 수재같은 중년인이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손에 벳조각을 감은 철권 아용은 가장 먼 곳에 서 있었다. 가깝든 멀든, 대노판이 꽃구경을 할 때는 그 누구도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 대노판은 허리를 구부렸다. 마치 꽃향기를 맡기라도 하려는 것 같더니 갑자기 손을 내밀어 두 개의 손가락으로 한 마리의 날아다니는 벌레를 움켜잡은 후에야 느릿하게 물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뭐라고?" 청삼인(靑衫人)은 철권 아용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길, 쓸모 없는 아길이라고 합니다." 대노판은 반문했다. "아길? 쓸모 없는 아길?" 그는 두 손가락을 눌러서 날벌레를 죽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서 철권 아용을 노려보았다. "그는 쓸모 없는 아길이라고 불리는데 자네는 철권 아용이라고 불리지?" "네." "자네의 주먹이 센가? 아니면 그의 주먹이 센가?" 철권 아용은 고개를 숙이고 하얀 베로 감은 주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주먹이 셉니다." 대노판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용감한가? 아니면 그인가?" "그 사람입니다." 대노판은 여전히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쓸모 없는가? 아니면 그인가?" "접니다." 대노판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렇다면 아무래도 자네 이름은 잘못 지은 것 같군." 철권 아용은 순순히 대답했다. "네." 대노판은 반문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어째서 이름을 바꾸어 폐철물(廢鐵物) 아구(阿狗)라고 하지 않는가?" 철권 아용의 창백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편에 묵묵히 서 있던 청삼인은 갑자기 허리를 구부렸다. "그는 전력을 다했습니다." 대노판은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내저었다. "그에게 꺼지라고 하게." "네." "은자를 마련해서 그에게 주게. 가서 조섭을 하고 상처가 다 낫거든 다시 나를 만나러 오라고 하게." 청삼인은 즉시 큰 소리로 말했다. "대노판께서는 당신보고 장방(帳房)으로 가서 일 천냥의 은자를 받으라고 하셨소.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으시오?" 철권 아용은 즉시 절을 했다. 대노판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청삼인을 바라보더니 쓸쓸히 웃었다. "천 냥을 주다니, 자네는 정말 통이 크군." 청삼인은 미소를 지었다. "하인은 주인을 닮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노판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자네의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솔직하다는 것이네." 그의 웃음이 멈추기를 기다려서 청삼인은 살그머니 말했다. "저는 몇 마디 더 솔직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대노판은 손을 내저었다. "물러들 가라." 모든 사람은 즉시 물러섰다. 정원 안은 조용해졌다. 단풍잎은 붉고 국화는 샛노란데 석양은 이미 기울어져서 대노판의 그림자가 길게 땅바닥에 눕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그림자를 감상하는 것 같았다. 그는 비대하면서도 왜소했기 때문에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사람을 부러워했다. 청삼인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다. 그가 허리를 구부리자 대노판은 고개를 쳐들어서 그를 바라볼 필요가 없었다. "그 쓸모 없는 아길은 결코 쓸모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노판은 듣고 있었다. 이 사람이 말하면 대노판은 언제나 매우 주의 깊게 들었다. 청삼인은 여전히 조용조용히 말했다. "철권 아용은 공동파 출신입니다. 근래에 공동파에는 인재가 없었습니다만 그들의 독문무공은 여전히 독한 점이 있습니다." 대노판은 수긍했다. "공동파는 쓸만하지." 청삼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공동파의 제자들 가운데 철권 아용은 가장 강한 고수였지요. 문파에서 축출 당하기 전에 소림사의 대화상(大和尙) 네 명과 무당파의 두 검객을 해치웠습니다." 대노판은 그 말을 받았다. "그런 일들은 나도 알고 있네. 그렇지 않다면 내가 한 달에 팔백 냥의 은자를 써서 그를 고용했겠는가?" "그러나 그 쓸모 없는 아길은 단번에 그를 망가뜨렸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길이란 사람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대노판은 냉소했다. 청삼인은 여전히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이상하게도 근방의 수백 리 안의 사람들 가운데 그의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노판은 그제야 물었다. "자네는 조사해 보았나?" "저는 이미 예순 세 명을 내보냈습니다. 모두 다 이 바닥에서는 이목이 가장 좋은 편이지요. 지금까지 서른 한 명이 돌아왔는데 모두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대노판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네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그를 이 근방에 남겨 둔다는 것은 언제나 화근이 될 것입니다." 대노판은 그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빨리 사람을 시켜서 그를 처치하게." "누굴 시킬까요?" "철두." "대강(大剛)의 유두관정(油頭貫頂)이라는 재간은 정말 천하에 적수를 찾기 힘들지요." 대노판은 그 말을 받았다. "나는 친히 그가 머리로 한 그루의 나무를 받아서 분지르는 것을 보았네." 청삼인은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길은 나무가 아닙니다." 대노판은 그 말을 수긍했다. "그의 경공(硬功) 역시 훌륭해." "철권 아용의 철권공(鐵拳功)도 역시 약하진 않았지요." "자네는 그 역시 쓸모 없는 아길은 상대해 낼 수 없다는 건가?" "다만 자신이 없을 뿐입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대노판께서 분부하신 바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신 없는 일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노판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기억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자기가 한 모든 말을 기억해 주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했다. 청삼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 저리 생각을 해봐도 우리 쪽에 그를 상대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입니다." 대노판은 반문했다. "철호?" 청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노판께서는 물론 그의 내력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심지가 깊고 평소에 한번도 그의 진짜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만 철권 아용보다는 훨씬 고강한 편이지요." "그는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가?" "그가 이번에 맡은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리 빨라도 열흘은 기다려야 될 것 같습니다." 대노판은 얼굴을 굳혔다. "그 때까지 쓸모 없는 아길을 상대할 방법이 없단 말인가?" "물론 있지요." 그는 미소를 짓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다만 한 가지의 방법으로 그를 상대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인가?" "아길 스스로 지치게 만드는 겁니다." 그는 보충해서 설명했다. "우리들은 얼마든지 시간이 있고 돈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밥벌이가 힘들고 우리들이 그를 찾아가게 될까봐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나흘이나 너댓새를 끌게 된다면 우리들이 손을 쓰기 전에 그는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대노판은 소리내어 웃으며 힘주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아. 자네는 정말 대단해. 다른 사람들이 자네를 죽엽청(竹葉靑)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죽엽청은 술의 이름이었다. 마신 사람들 가운데 취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죽엽청은 또한 독사의 이름이기도 했다. 지독해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었다. 대노판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그를 찾아가지 않는데 그가 만약 우리를 찾아온다면?"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하면서 중상을 입은 우둔한 사내와 몸을 파는 갈보를 데리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대노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수 없지." "그가 만약 우리를 찾아온다면 틀림없이 그 묘자(苗子)를 남겨 둘 것입니다." 대노판은 그 말을 받았다. "그는 그들을 숨길 수가 있지." 죽엽청은 반문했다.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 편일 뿐 아니라 저는 이미 그들의 집 근처에 감시하는 사람들을 풀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그가 사람을 어디에 숨기겠습니까?" 대노판은 냉소했다. "그들이 지렁이처럼 땅속으로 기어들 리는 없겠지?" 죽엽청은 장담하듯 말했다. "이번에 아길이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것은 바로 그 남매 두 사람을 위한 것이지요. 그 남매가 우리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면 아길이 대노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대노판은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하! 좋아! 우리는 이곳에서 꽃구경을 하며 술을 마시면서 그들이 죽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지." 죽엽청은 미소를 지었다. "사흘을 넘기지 않아서 그들이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황혼. 왜왜가 고깃국을 한 그릇 받쳐들었을 때 눈물이 방울방울 대접 속으로 떨어졌다. 고깃국은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은 이 고기를 사서 국을 끓인 사람이었다. 고깃국은 아직도 남아 있었으나 사람은 이미 황토에 묻히고 말았다. 이 고깃국을 누가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반드시 그들에게 먹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체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체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나서 두 그릇의 국과 두 개의 만두를 목판에 담아서 받쳐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아길은 여전히 집안의 후미진 곳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먼저 한 그릇의 국과 한 개의 만두를 그 앞의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길은 움직이지 않았으며 입을 열지도 않았다. 왜왜는 다시 나무 목판을 그녀의 오라버니 앞으로 받쳐들고 가서는 나직이 말했다. "국은 아직 뜨끈뜨끈해요. 그러니 빨리 드세요." "너는?" "저는...... 저는 배고프지 않아요." 그녀는 정말 배고프지 않은 것일까? 이틀 낮 하룻밤 동안 물 한 모금 쌀 한 톨 입에 넣지 않은 사람이 배가 고프지 않다니? 그녀가 배고프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음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녀보다 더욱 체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노묘자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나는 뱃속이 거북하구나. 이토록 많이 먹을 수 없으니 우리 반씩 나누어 먹자." 왜왜 역시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저는 먹고 싶지 않아요" 노묘자는 버럭 소리쳤다. "안 돼!" 그가 막 만두를 반쯤 쪼개서 그녀에게 나누어주려고 했을 때에 아길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왜왜, 이 국을 먹어." 노묘자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안 돼. 그것은 자네의 국이다." 아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성큼성큼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왜왜는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나가서 밥을 먹으려고." "집안에 음식이 있는데 어째서 밖에서 먹어야 하지요?" "만두가 먹기 싫군." 왜왜는 그를 노려보았다. "만두가 먹기 싫으면 뭐가 먹고 싶어요? 혹시 무쇠 대가리라도 먹고 싶은가요?" 아길은 입을 다물었다. 왜왜는 끝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는 그대의 뜻을 알아요. 이렇게 질질 끄니까 저도 견딜 수가 없어요. 더군다나. 그대가...... 그러나......" 그녀는 비오듯 눈물을 흘리며 침울히 말했다. "그러나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 편이니 그대가 굳이 죽으러 갈 건 없지 않아요?" "설사 죽으러 간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기다리다 죽는 것보다 낫지." 밤빛은 처량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밤빛이라도 처량한 사람의 눈에는 처량하게만 보이는 법이다. 가을 바람이 이미 불어오고 있었다. 당초속자(糖炒粟子)를 파는 아낙이 머리에 푸른 수건을 두르고 목을 움츠린 채 좁은 골목길에서 당초속자를 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골목길 어귀 바깥쪽에는 구걸을 하는 장님 거지도 있었다. 그는 벽 모서리에 웅크린 채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 아길은 지나가려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을 파는 거요?" "당초속자. 구수하고 달콤한 당초속자에요. 한 근에 스물 다섯 닢이에요." 아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싸지 않군." "얼마나 사실 작정이에요?" "백 근." "그러나 저에게는 모두 열 몇 근밖에 없는데요?" "당신까지 합치면 백 근이 되겠지. 나는 당신이란 사람을 함께 사도록 하지." 아낙은 뒤로 몸을 움츠리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저는 속자만 팔 뿐 고기는 팔지 않아요." "나는 반드시 사야겠어." 그는 손을 써서 대뜸 그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아낙은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강도다. 여자를 강간하려 한다......" 그녀는 더 울부짖었으나 아래턱마저 그만 움켜잡히고 말았다. 아길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네가 계집애라면 어째서 수염이 났지?" 그 사람의 아래턱은 무척 깨끗이 면도질이 되어 있었으나 여전히 면도를 한 흔적은 남아 있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틀림없이 미치광이이다. 미치광이들은 모두 맞아 죽어야 해." 그 사람은 죽어라 하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켁켁거렸다. "나는...... 나는 아니오. 나는 미치지 않았소." "네가 만약 미치지 않았다면 어째서 이곳에 와서 당초속자를 판단 말이냐? 이곳의 사람들은 가난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람은 눈동자에 공포의 빛을 떠올렸다. 아길은 천천히 말했다. "네가 맞아 죽기 싫다면 순순히 누가 너를 이곳에 보냈는지 털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 * * 그 사람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벽 모서리에 있던 비렁뱅이 장님이 나는 듯이 도망을 쳤다. 이곳에 사람들은 가난해서 먹을 밥도 없다. 가난한 동네에 거지가 웬말인가? 아길을 냉소를 띄우고 다시 물었다. "이제 당신의 동료는 도망쳤다.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얻어맞아 들개처럼 죽어서 이곳에 나뒹굴게 되면 시체를 걷어 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죽엽청이 보냈습니다. "죽엽청은 어떤 사람이냐?" "대노판의 군사(軍師)이며 대노판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죠." 아길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또 한 명은 누구냐?" "철호입니다. 그의 재간은 철두보다도 훨씬 고강한 편이지요. 한 사람은 문에 능하고 한 사람은 무예에 통달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답니다." "너는 그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듣기에는 외지로 일을 처리하러 갔다는데 반 달 후에야 돌아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길은 다시 다그쳤다. "철두는?" 그 사람은 내키지 않는 듯 했으나 대답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첩이 있는데 세번째의 첩이 가장 총애를 받고 있지요. 그녀는 노름을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평소에 그는 대체로 그곳에 있지요." 아길은 그를 바라보았다. "네 집은 어디에 있느냐?" 그 사람은 깜짝 놀라 말했다. "소인의 집을 물어서 어쩌시겠다는 것인지요?" "내가 묻는 말에 얼른 대답해라. 죽은 사람에게는 집이 없는 법이다." 그 사람은 울상을 지었다. "지마항(芝麻巷)에 있습니다." "너희 식구는 몇 명이냐?" "아내와 아이, 그리고 한 명의 하녀까지 모두 여섯 명입니다." 아길은 넌지시 말했다. "이제 여덟 명으로 불어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어째서인가요?" 아길은 설명했다. "왜냐하면 두 분 손님을 네 집으로 모셔다가 이틀 정도 머물도록 하려고 한다. 만약에 네가 조금이라도 소문을 낸다면 나는 너의 집에 다만 한 사람만 남게 되리라. 이건 경고하는 것이다." 그는 냉랭히 말을 이었다. "다만 그 하녀만 남게 될 것이란 말이다." * * * 밤. 등불 빛은 철두 대강의 대머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 대머리는 마치 막 기름통에서 꺼낸 호로처럼 광채가 났다. 그의 기분이 좋을수록 머리가 번들거렸다. 오늘밤에는 손님들은 유난히 많은 편이었고 건 돈도 특별히 많았다. 개평을 떼고 계산하지 않아도 그 자신과 그의 셋째 첩은 이미 천 냥이나 되는 은자를 딴 것이었다. 이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한 장의 패는 <이사(二四)> 여섯 점이었다.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편도 아니었다. 다른 한 장의 패는 바로 그의 셋째 첩의 손에 들려 있었다. 셋째 첩의 앞자락이 벌어져 눈처럼 흰 목이 드러났다. 그녀는 한 쌍의 파뿌리처럼 고운 섬섬옥수로 자기의 한 장 패를 얼싸안을 듯 하고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때요?" "당신이 바라는 게 뭐야?" "금육(金六) 은오(銀五) 소판등(小板橙)이에요." 철두 대강은 정신이 번쩍 들어 호통을 내질렀다. "금육 은오 소판등이라니, 정말 딱 들어맞는군." 척,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한 장의 <사육>이 어느덧 탁자 위에 힘있게 던져졌다. 셋째 첩은 즉시 환한 표정으로 낄낄 웃었다. "내가 바란 것은 바로 당신의 이 수컷 원숭이예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패는 놀랍게도 바로 <정삼(丁三)>이었다. 철두 대강은 소리내어 웃었다. "내가 바라는 것도 바로 당신의 암컷 원숭이였어. 우리는 정말 천생연분이군." <정삼>에 <사육>을 짝 지우면 후왕대( 王對)로서 지존보(至尊寶)가 되는 것이었다. 철두 대강은 소리쳤다. "지존보다! 다 먹었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탁자 위에 있는 은자들을 모조리 자기 앞으로 쓸어 가려고 했다. 갑자기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안 돼!" 셋째 첩의 집에서는 노름판이 종종 벌어졌다. 잃어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가 있었다. 따라서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철두 대강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누가 소란을 피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보기에 무척 낯설었으며 도박을 하러 온 것 같지도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너무나 더럽고 다 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보지 못했다. 철두 대강은 눈을 부릅떴다. "방금 네가 개방귀를 뀐 것이냐?" 그 사람의 모습은 초라했지만 태도는 무척 냉정했고 담담하게 응수했다. "나는 개방귀를 뀌는 것이 아니고 공평한 말을 하는 것이다." "너는 안 된다고 했겠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이냐?" "너는 무엇을 믿고 다 따간단 말이냐?" "바로 이 한 쌍의 후왕패를 보고 한 소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패가 너의 손에 들어간다면 후왕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지." 철두 대강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누르고 물었다. "그렇다면 뭐라고 하지?" "머리를 빡빡 깎은 저팔계가 되어 모조리 토해내야 한다." 철두 대강은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모든 사람의 안색도 변하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은 이미 그 녀석이 일부러 시비를 걸러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누구길래 이토록 간덩이가 부어서 감히 철두 대형에게 시비를 거는 것일까? 모두들 일어나서 다투어 호통을 질렀다. "이 후레자식 같으니. 너의 성이 뭐냐? 그리고 이름이 뭐냐?" "나는 아길이라고 한다. 쓸모 없는 아길이라고 한다." 모든 소리는 즉시 멈추어지고 말았다. 성안의 형제들은 물론 이미 아길이라는 이름을 들은 바가 있었다. 철두 대강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하! 하! 하! 이런 녀석 보았나. 제법이군. 제법이야. 감히 나를 찾아오다니." 아길은 담담히 응수했다. "나는 다만 와서 보려고 했다." "무엇을 보겠다는 것이냐?" "너의 머리를 보려는 것이다. 진짜 철두인가 말이다." 철두 대강은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좋다. 나는 너의 시야를 넓혀 주도록 하지."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판을 얹은 탁자가 그의 두 손에 들려졌다. 적어도 칠 팔십 근이 나가는 탁자였다. 돌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대리석은 가장 명귀(名貴)한 종류일 뿐만 아니라 가장 단단한 종류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머리로 박치기를 한 것이었다.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시루떡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더 두꺼운 대리석이 그의 박치기에 그만 박살이 났다. 그의 머리는 여전히 기름통에서 막 건져낸 호로처럼 반질거렸다. 형제들은 큰 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훌륭하오!" 그들의 갈채 소리가 멎기를 기다려 아길은 천천히 말했다. "좋아...... 좋아...... 정말 훌륭한 저팔계로군." 한창 안하무인이 되어 우쭐해져 있던 철두 대강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입에서 노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너는 뭐라고 했느냐?" "네가 저팔계라고 했다. 돼지 외에 그 누가 우둔하게 자기 머리통으로 돌을 들이받겠느냐?" 철두 대강은 흉측하게 웃었다. "나는 그럼 무엇에다가 박치기를 해야 하느냐? 너에게다 박치기를 할까?" 아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한마디가 막 입에서 벗어나자마자 철두 대강은 마치 호랑이처럼 그에게 덮쳐 들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탁자를 잡았던 것처럼 아길을 꽉 움켜 잡았다. 철두대강은 머리만 무서울 뿐 아니라 이 동작들은 빠르면서도 정확했다. 그는 박치기 하려는 대상이 탁자가 아니라 손발이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손을 쓰자마자 아길의 견정혈(肩井穴)을 붙잡아 그를 꼼짝하지 못하게 한 다음에 머리로 박치기를 하려고 했다. 그 누구도 그의 그 무쇠와 같은 머리로 박치기하는 것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쓸모 없는 아길은 목숨이 떨어진 아길로 변하고 말 것 같았다. 형제들은 다시 큰 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갈채 소리가 무척 빠르게 멈추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길의 머리가 박살나지 않고 무쇠 머리인 철두 대강이 오히려 맞아서 머리통이 박살나고 만 것이었다. 일격에 박살이 나고 만 것이었다. 그 누구라도 견정혈을 잡히게 되면 한 쌍의 손을 절대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뜻밖에도 아길의 손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철두 대강의 머리는 본래 쇠망치로 두들겨도 깨어지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그의 한 손이 가볍게 후려치는 것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발버둥은 이미 멈추어졌다. 방안에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아길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곳에 서 있었다. 흑갈색의 눈동자에는 전혀 표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마치 밑바닥을 볼 수 없는 바다처럼 깊어 보였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몸에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쓸모 없는 아길이 온종일 칼끝에 피를 묻히고 사는 자들의 마음속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심어준 것이었다. --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 그는 사람을 죽인 후에도 어떻게 그토록 냉정할 수 있는가? -- 그는 예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 지금 그는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누구도 그가 마음속으로 절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또 사람을 죽였다. 나는 어째서 또 사람을 죽여야 했는가?" 가을바람이 불어와 창호지를 흔들어 놓았다. 아길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요염하고 사람을 유혹하는 매력이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철두 대강의 셋째 첩인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에게 무척 가깝게 서서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동자에는 매우 복잡한 정서가 서려 있었다.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약간의 기이함과 의혹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살그머니 빠져나갔고 그녀 혼자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길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의 남편을 죽였소." "그가 당신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조만간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될 거예요." 그녀의 음성은 냉혹하리만큼 차분했다. "그는 사람을 파리 죽이듯 한 망나니였어요." 아길은 무자비할 정도로 냉혹했다. "나는 당신도 죽일 것이오. 당신은 진작 이곳을 떠났어야 했소." 셋째 첩은 그 말에 응수했다. "떠나야 할 사람은 당신이에요." 아길은 차갑게 웃었다. 셋째 첩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철두를 죽였으니 대노판은 절대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아길은 싸늘히 대답했다. "나는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셋째 첩은 그를 바라보았다. 눈초리가 무척 야릇했다. 그녀는 불쑥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알아요. 나는 예전에 틀림없이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아길은 냉랭히 대꾸했다. "당신은 틀림없이 사람을 잘못 봤소." "절대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는 갈보예요. 열 네 살 때부터 갈보 노릇을 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내들을 겪어 왔는지 몰라요. 그러나 당신과 같은 사내는 결코 많지 않았어요." 아길의 눈동자에 갑자기 한 가닥 기이한 빛이 번쩍하고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 나가려고 했다. 셋째 첩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녀는 그 말을 다할 수가 없었다. 아길은 어느새 번개처럼 몸을 돌려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의 허리를 얼싸안은 것이었다. 그는 이 여인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반드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어떤 사람에게도 그의 비밀을 알려서는 안 되었다. 침실의 등불 빛은 부드러웠다. 그는 그녀를 침대 위에 내던졌다. 그녀는 침대 위에 반듯이 드러누워 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침울하게 내뱉듯이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하다가 이 꼴이 되었나요? 어째서 이렇게 많이 변했나요?"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오." "당신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알아볼 수 있어요." 그녀는 눈물을 참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세요, 모르세요? 제가 한 평생 유일하게 진정으로 좋아했던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어요. 당신은 물론 알 리 없겠지요. 왜냐하면 나는 한갓 당신의 많은 여인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할 뿐이고 천하디 천한 갈보이기 때문이죠." 아길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음성이 무척 부드럽게 변했다. "이제 나도 당신이 누구인지 알았소. 당신은 금란화(金蘭花)라고 불렸었지." 그녀는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소리내어 울부짖으며 와락 그를 얼싸 안았다. "당신이 나를 기억해 주기만 한다면 나는 죽는다 해도 달갑게 죽겠어요."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잊어주기를 바라고 있소." 그녀는 힘차게 그를 얼싸안았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얼굴에 넘쳐흘렀다. "알고 있어요. 나는 당신의 말을 들을 거예요. 절대로 당신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거예요.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예요." * * * 대노판은 한 평생 가장 자랑할만한 일이 세 가지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침대가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클 뿐 아니라 가장 기묘하고 가장 호화스러웠다. 이런 침대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지금은 아직도 오전이었다. 대노판은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그의 가장 총애하는 아홉 명의 희첩(姬妾)들은 모두 침대 위에서 그를 모시고 있었다. 한 명의 하녀가 살그머니 걸어 들어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엽선생께서 요긴한 일로 반드시 나으리를 뵙고 싶대요." 대노판은 일어나 앉으려고 하다가 다시 드러누웠다. "들어오라고 해라." 그의 희첩들은 즉시 항의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영감님은 어째서 다른 사내를 불러들여요?" 대노판은 미소했다. "이 사내는 상관이 없다." "어째서죠?" 대노판은 담담히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 있어서 너희들 아홉 사람을 합친 것보다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밤을 지새우면서 한 잠도 못 잤지만 죽엽청은 여전히 신수가 훤했고 전혀 피곤한 빛이 없었다. 대노판은 그가 마치 베틀처럼 대노판이 움직이라고 하면 결코 멈추는 법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대노판의 침대 앞에 서서 곁눈질 한번 하지 않았다. 침대 위에 있는 아홉 명의 꽃과 같은 미인들은 그의 눈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 같았다. 이 점에 관해서 대노판은 무척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죽엽청에게 자리를 권하고 물었다. "자네는 무척 요긴한 일이라고 했는데 무슨 일인가?" 죽엽청은 앉으라는 명을 받고 앉기는 했으나 즉시 다시 일어나서 두 손을 늘어뜨리고 공손히 입을 열었다. "아길은 제가 심어 놓은 염탐꾼들을 발견하고 묘자의 남매들을 데려갔습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것은 제가 소홀했던 탓입니다. 저는 그 쓸모 없는 아길을 너무 과소평가 했습니다. 대노판께서는 엄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는 먼저 가장 간단한 말로 요약하여 사건의 경과를 얘기했다. 그리고 나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처분 받기를 청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일을 하는 일관된 작풍(作風)이었다. 그는 한번도 자기의 잘못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작풍은 대노판이 가장 높이 사는 점이었다. 대노판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음성은 그렇게 엄하고 매섭지 않았다. "누구든지 실수가 있는 법이다. 자네는 우선 앉아서 얘기하게." 죽엽청은 공손히 대답했다. "네." 그가 앉기를 기다려 대노판은 물었다. "그 일이 언제 일어난 것인가?" "어젯밤 자시 전후입니다." 대노판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도 자네는 그들을 찾지 못했는가?" 죽엽청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아길의 행적은 저희들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묘자 남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행방불명입니다." 대노판은 눈을 껌벅거렸다. "아길은 어디에 있는가?" "줄곧 대강의 셋째 첩의 집에 있습니다." 대노판의 안색이 굳어졌다. "철두가 그에게......?" 죽엽청은 순순히 대답했다. "네." 대노판은 약간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언제쯤 거기에 갔느냐?" 죽엽청은 여전히 공손했다. "막 자시가 지났을 무렵이라고 했습니다." 대노판은 안색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가 묘자 남매를 숨겼는데 자네들은 밤새도록 찾아도 여태 못 찾았다는 것인가?" 죽엽청은 다시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숙였다. "성안에 그들 남매가 숨어 있을 곳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사람을 보내 가능한 모든 곳을 철저히 살펴보았으나 그 누구도 그들을 보지 못했답니다." 대노판은 냉소했다. "놀랍게도 자네마저 쓸모 없는 아길을 상대해내지 못한다니, 뜻밖이군." 죽엽청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이번에 대노판은 그에게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그는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철두는 그에게 직접 살해당한 것인가?" "목격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일장에 철두의 머리통을 박살냈다고 합니다." 대노판의 안색이 다시 한번 변했다. "그가 어떤 문파의 무공을 사용했는지 알아내었느냐?" 죽엽청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그는 다시 덧붙여서 말했다. "그의 무공과 내력을 알아낸 사람이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큰 내력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강호에 갑자기 실종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죽엽청은 모든 질문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점에 대해서 저도 알아보았습니다. 최근에 갑자기 종적을 감추고 잠잠해진 무림 고수로는 오직 대도(大盜) 조독행(趙獨行)과 천살성(天殺星) 전공(戰空), 그리고 검객 연십삼 뿐입니다." 대노판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 세 사람의 명성을 그는 물론 들은 적이 있었다. 죽엽청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나 그들 세 사람의 몸매나 모습, 그리고 나이로 미루어 볼 때 아길과 부합되는 점이 없습니다." 대노판은 냉소를 머금었다. "설마하니 그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거냐? 아니면 땅 밑에서 쑥 솟았다는 거냐?" 그는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 힘주어 침대 머리에 놓여 있는 낮은 괘안을 두드리며 표독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가 어디서 왔던 간에 먼저 처치한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의 내력을 알아 볼 필요가 없는 것이야." 6. 죽엽청이라는 사내 "네." 대노판은 더욱 힘주어 말했다. "자네가 어떤 방법을 쓰든, 어떤 대가를 치르든, 그의 목숨을 빼앗도록 하게." 죽엽청은 고개를 숙였다. "네." 대노판의 명령은 언제나 즉시 집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 죽엽청은 여전히 그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대노판은 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자네에게 무슨 할 말이 또 있단 말인가?" 죽엽청은 주저하다가 끝내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는 외톨이입니다. 우리들이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우리들의 희생 또한 틀림없이 막대할 것입니다." 대노판은 넌지시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뜻은?" "이 사람은 마치 검집에서 빠져 나온 한 자루의 검과 같아 그가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느냐가 관건이지요." 대노판은 대뜸 그의 뜻을 짐작했다. "그 한 자루의 칼을 사라는 것인가?" 죽엽청은 대노판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가 묘자 남매를 비호하는 것은 그들이 그에게 조그마한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지요. 대노판께서 만약에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가 대노판을 위해서 충성을 바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노판의 안색이 점점 누그러졌다. "자네는 우리가 그를 매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모든 사람에게는 그만한 값어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적어도 한번 시험해 보아야겠죠." 대노판은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를 보낼까?" 죽엽청은 허리를 구부렸다. "이번엔 제 자신이 한번 가볼 생각입니다." 대노판은 짐짓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가 이미 검집에서 빠져 나온 칼이라면 마주치기만 하면 피를 볼지 모르는데 자네가 모험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죽엽청은 더욱 공손해졌다. "저의 온몸이 대노판의 것인데 그까짓 몇 방울 피쯤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대노판은 갑자기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잡았다. "자네는 바로 나의 아들이네. 아무쪼록 조심하게." 죽엽청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뜨거운 눈물이 왈칵 눈에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마저도 감동하고 말았다. 그가 물러가자 대노판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희첩들에게 말했다. "그가 너희 아홉 사람을 합친 것보다 쓸모 있다는 것을 알아보겠느냐?" 입가에 점이 있고 눈가에 정을 머금고 있는 한 여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는 단 한 가지만은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대노판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떤 한 가지냐?" "그는 실로 우리 아홉 사람을 합친 것보다도 아첨을 잘합니다." 대노판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하! 말 한번 잘했다. 말 한번 잘했어."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그 여인을 노려보았다. "내가 너에게 시키는 일을 너는 마다하지 않고 하겠느냐?" 그 여인은 이 기회를 빌어 아양을 떨려고 뱀처럼 그에게 휘감겼다. "나으리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시키려고 하시는데요?" 대노판은 냉랭히 말했다. "너에게 요구하는데 너는 오늘 저녁부터 그를 모시도록 해라." * * * 아길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피곤해서 잠을 푹 자야 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반드시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그가 깨어났을 때 금란화는 여전히 그의 곁에 누워 있었다.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에는 부드러운 정으로 그득했다. 아길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젯밤 아무도 오지 않았소?" "아니오." 아길은 전신의 근육을 느슨하게 했으나 마음은 도리어 바짝 긴장되었다. 그는 폭풍우가 치기 전이 가장 무겁고 답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날이 밝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최후는 어떻게 마무리될까?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다만 이번 일이 이제는 그에게 칭칭 감기듯 달라붙어서 이미 손을 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손을 떼기만 하면 노묘자와 왜왜, 금란화는 죽고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더욱 중요한 한 가지는 이 성안에는 아직도 그들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불덩이 속에서 그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 * * 바깥 마루에서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발자국 소리는 무척 무거웠다. 일부러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 같았다. 이어서 아길은 그 누가 다시 기침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 사람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한참 기다렸으나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금란화의 안색은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 왔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감히 일장에 철두를 박살낸 아길을 상대하고자 한다면 틀림없이 믿는 구석이 있으리라. 아길은 그녀의 머리를 다독거리며 천천히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그는 이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철두의 시체는 이미 사람들에 의해 들려져 나간 이후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집어들었던 그 지존보는 여전히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죽엽청은 탁자 가에 앉아서 손으로 가볍게 그 패를 어루만지며 미소를 띠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한 사람이 이런 패를 잡을 기회는 만 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더구려. 다시 말해서 오십 년 동안 줄곧 패구(牌九)라는 노름을 하고 매일 도박을 한다 해도 이 패를 가질 기회는 기껏해야 서른 번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오." 그는 결코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길이 이미 걸어나와서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띠고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따라서 누구든 이런 패를 집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딸 수 있을 것이오." 아길은 그 말을 받았다. "어젯밤 그 패를 가진 사람은 결코 재수가 좋지 못했소." 죽엽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바로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소. 죽었으니 재수가 좋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죽은 사람은 재수가 나쁜 것이오." 그는 고개를 들고 아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따라서 사람이란 기회가 왔을 때 반드시 잘 움켜잡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오." "당신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소?" 죽엽청은 운을 띠었다. "이제 그대에게 기회가 왔소." "무슨 기회요?" 죽엽청은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한평생 고생하며 말처럼 뛰어다니며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겠소? 다만 명리(名利)라는 두 글자에 불과한 것이오." 그는 미소를 띄우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그대에게 그런 기회가 도래한 것이오. 실로 축하할 만하고 기뻐할 만한 일이오." 아길은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마치 못이 박힌 듯한 시선이었다. 그러다가 불쑥 물었다. "당신이 바로 죽엽청이오?" 죽엽청은 여전히 미소를 띠었다. "나의 성은 엽이며 이름은 엽청죽(葉靑竹)이라고 하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엽청이라고 부른다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 웃음은 아주 기괴했다. 아길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대노판이 당신을 보낸 것이 아니오?" 죽엽청은 인정했다. "그렇소." 아길은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당신에게 한가지 알려줄 것이 있소." "무슨 일이오?" 아길은 또박또박 말했다. "어떤 사람이 바동거리며 한 평생을 싸우는 것은 명리 두 자 만을 위하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오." "그것 말고 무엇이 있소?" "두 자가 더 있는데 그것은 이상이오." 죽엽청은 그 말을 받아 읊조렸다. "이상?" 그는 정말 그 두 자의 의미를 잘 모르는 듯 했다. "그대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오?" 아길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 자신이 원하는 세월을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싶소." 그는 이 한 마디의 뜻을 죽엽청이 더욱 모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팔아 넘기지만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누리려 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에 고생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소?" "나의 많은 친구들은 모두 다 그런 사람이오. 다른 많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당신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그래서......" 죽엽청은 그 말을 받았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오?" 아길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신들이 나보고 떠나가라고 하려면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을 뿐이오." "어떤 조건이오?" "당신들이 그 사람들을 풀어 주기만 한다면 나는 당신들을 내버려두겠소. 대노판 자신이 직접 나에게 응낙하고 다시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어떤 일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떠나겠소." 죽엽청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반드시 대노판이 직접 당신에게 말해야 하겠소?" 아길의 대답은 간단했다. "반드시." 죽엽청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십만 냥으로 당신의 뜻을 바꿀 수 없겠소?" 아길은 약간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불가능하오." 죽엽청은 고려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로 대노판과 만나기를 원하오?" "오늘 나는 바로 그를 만나 보기를 원하오." 죽엽청은 좀더 냉정해졌다. "어디서 만나 보겠소?" 아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어디든 그가 좋아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정하도록!" 죽엽청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대내내의 집은 괜찮겠소?" "괜찮소." "저녁을 먹을 때도 좋겠소?" 아길의 대답은 여전히 간단했다. "좋소." 죽엽청은 즉시 몸을 일으켜 갈 차비를 하다가 갑자기 웃음었다. "난 아직 그대의 존성대명을 여쭤 보지 못했구려." "난 아길이라 하오. 쓸모 없는 아길이라 하오." 죽엽청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길은 다시 그 지존보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죽엽청이 조금 전에 한 말을 새겨 보고 있는 것이었다. --기회가 왔을 때는 반드시 잘 붙잡아야 하고 절대 놓치지 말아라. 그들은 그에게 어떤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일까? 그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갑자기 끔찍한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 안쪽에 있는 방안으로 뛰어 들었을 때에 금란화는 과연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 * * 대노판은 그 넓적하고 쾌적한 교의(交倚) 위에 앉아 그의 앞에 서 있는 죽엽청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부터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이미 그를 위해서 6년이나 일해 왔으며 그 누구보다도 고생을 했으면서도 누리는 것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적었다. 지금 그는 밤새도록 눈을 붙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물 한 모금 쌀 한 톨 입에 넣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원망하거나 피곤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대노판을 위해서 일을 한다면 이미 그것은 그의 가장 큰 광영과 위로가 된다는 얼굴빛이 아닌가 말이다. -- 이렇게 충성스럽고 부지런한 사람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대노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나서 물었다. "자네는 아길을 만나 보았나?" 죽엽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정말 한 자루의 검집에서 벗어난 칼과 같았을 뿐 아니라 매우 잘 드는 칼이었습니다." "자네는 그를 매수했는가?" "아직은 못했습니다." 대노판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요구하는 값이 너무 높기 때문인가?" 죽엽청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저는 십만 냥의 은표를 가지고 갔습니다만 그를 만났을 때 열 배 더 많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째서?" 죽엽청은 조용한 말로 설명했다. "내가 그곳으로 찾아 들었을 때 탁자 위에는 은자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대지도 않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보충해서 설명했다. "그는 가난해서 밥도 먹지 못할 형편인데도 그토록 많은 은자를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결코 그것 때문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지요." 대노판은 약간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만 한 가지의 조건입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모든 사람이 스스로 원하는 세월을 보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죽엽청은 설명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장사를 모조리 멈추라고 요구하는 것이죠." 대노판의 얼굴이 대뜸 굳어졌다. 죽엽청은 살며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대노판과 한번 만나 뵙고 몸소 그 조건을 약속하는 대답을 듣고자 합니다." 대노판은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뭐라고 했는가?" "저는 이미 대노판이 그를 오늘 저녁 한대내내의 집에서 만나 볼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대노판은 눈에 노기를 띄우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언제부터 나를 대신해서 약속을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죽엽청은 고개를 숙였다. "그 누구도 감히 대노판을 대신해서 약속을 할 수 없습니다." 대노판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네는?" 죽엽청은 공손히 대답했다. "저는 다만 대노판을 위해서 올가미를 만들어 그 스스로 그 목을 들이밀도록 한 것이지요." 대노판은 앉았던 자세를 바꾸었다. 얼굴의 안색도 훨씬 누그러졌다. 죽엽청은 다소곳이 다시 말을 잇고 있었다. "제가 그와 밖에서 담판을 짓고 있었을 때에 한가지 괴상한 일을 갑자기 발견했습니다." "무슨 일이었나?" "저는 철두의 셋째 첩이 줄곧 안쪽에서 문틈 사이로 훔쳐보고 있을 뿐 아니라 줄곧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척 관심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대노판의 두 주먹에 불끈 힘이 주어졌다. "그 계집은 철두가 어디서 데려온 것인가?" "그 여인은 금란화라고 하지요. 본래 회양(淮揚) 일대의 유명한 기생이며 강호에 적지 않은 명인들이 모두 다 그녀의 치마폭에서 놀아난 적이 있지요." 대노판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자네는 그녀가 예전에 틀림없이 그 쓸모 없는 아길을 알고 있었다고 보는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오래 전에 정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노판은 그 말을 받았다. "그 년은 틀림없이 아길의 내력을 알고 있을 거라는 거겠지?" 죽엽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대노판은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 년은 물론 아길이 있는 곳에 없겠지?" 죽엽청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대노판은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그 년은 어디에 있나?" "바로 밖에 있습니다. 묘자 남매와 같이 있지요." 대노판은 눈빛을 더욱 빛냈다. "자네는 어떻게 그들을 찾아냈는가?" "저는 성안에 그들이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한 곳을 모조리 뒤졌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대노판은 눈빛을 번뜩였다. "그래서 자네는 가장 불가능한 곳을 찾았겠군?" 죽엽청은 두 눈에 존경과 탄복의 빛을 띠었다. "제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대노판께서 헤아려 보고 계셨겠지요?" "자네는 어디서 그들을 찾았는가?" "제가 망을 보도록 보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대우(大牛)라고 하지요. 비록 눈치가 빠르나 담력이 무척 작은 편이며 가족을 무척 생각하는 사내로서 벌어들인 돈 태반을 모두 집으로 가져가는 자이지요." 대노판은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자네는 아길이 대우를 위협해서 묘자의 남매를 그의 집에다 숨겼을 것이라고 생각했겠군." 죽엽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다만 커다랗게 살아 있는 두 사람이 어찌 되었건 간에 단번에 종적을 감출 수 없으리라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대노판은 미소를 띠었다. "그 한 수는 아길이 정말 총명하게 처리했군.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나에게 그보다 더 총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었군." 죽엽청의 태도는 더욱 공손해졌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떨어뜨린 채 대답했다. "그것도 다만 제가 한번도 대노판께서 평소에 하신 교훈을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대노판은 더욱 유쾌하게 웃었다. "이제 우리는 먼저 금란화의 입으로부터 아길의 내력을 알아보고 그 다음에 묘자 남매를 미끼로 삼는다면 그가 순순히 목을 디밀지 않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죽엽청은 약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저는 금란화가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할까봐 걱정입니다." "그녀는 갈보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자네는 정말 정이 많고 올바른 뜻을 가진 갈보를 본 적이 있는가?" 죽엽청은 공손히 대답했다. "없습니다." "자네는 돈을 마다하고 목숨도 마다하는 갈보를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대노판은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도 없네." * * * 이불자락은 눈처럼 희고 깨끗했으며 난초 꽃의 향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아길은 그 이불자락을 찢었다. 한 조각씩 한 조각씩 찢어 자기 몸에 있는 상처를 싸매었다. 그는 대노판이 결코 자기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또한 오늘 밤 반드시 격전을 벌이게 되리라는 것도 짐작했다.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금란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는 반드시 당신의 말을 들을 거예요.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그의 얼굴에 남긴 눈물 자국은 이미 메말라 있었으나 그녀의 음성은 아직도 그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그런 말을 그는 믿어야 할까? 그녀가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를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아길은 힘주어 벳조각을 앞가슴에서 매듭 지었다. 그는 마음속에도 매듭을 지었다. 수천 수만의 풀지 못할 매듭을 짓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과거가 있었다. 스러져 간 그 한 토막의 세월 속에서 그는 비참함을 느끼기도 했고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으며 또한 여인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그는 한번도 여인을 믿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눈에 여인은 그저 일종의 장신구에 불과하고 일종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그녀들을 필요로 했을 때 그녀들은 모두 다 마치 고양이처럼 순순히 그의 품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그가 혐오감을 느끼고 싫증을 느끼게 되면 그는 그녀들을 쓰레기처럼 내던졌다. 이런 점에 대해서 그는 한번도 감춘 적이 없었고 가책을 받은 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그 자신은 천성적으로 여인의 총애를 누려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어떤 여인이 있어 그를 사랑하고 죽도록 좋아해서 그의 품속에서 죽기를 원할 정도로 사랑한다면 그는 오히려 난처하게 여겼다. 만약 금란화가 그를 배신한다면 그는 매우 골치가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미 목숨을 내걸고 싸울 채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숨은 하나밖에 없다. 죽을 각오로 싸울 준비를 했다면 연연해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 그는 정말로 연연해하지 않는 것일까? -- 그는 속으로 남에게 호소하지 못할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닐까? -- 그는 어떤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닐까? 누가 알겠는가? 그 자신마저도 거의 잊고 있었으니...... 적어도 그는 스스로를 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으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 * * 탁자 위에는 일곡(一斛)의 진주와 칼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탁자 옆에는 세 사람이, 대노판, 죽엽청, 금란화가 있었다. 대노판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필요 없을 때 그는 언제나 입을 열지 않았다. -- 어떤 사람이 그가 하려고 하는 말을 대신하는데 그가 입을 열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물론 죽엽청이었다. 그가 말하는 음성은 언제나 느릿하면서도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이것은 가장 훌륭한 진주야. 예쁜 여자의 몸에 장식하면 더욱 아름답게 빛나지. 설사 예쁘지 않은 여자의 몸에 장식하더라도 많은 사내들은 그녀가 갑자기 매우 예쁘게 보인다고 느끼게 될 거야." 금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죽엽청은 넌지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매우 예쁜 여자이지만 모든 여인들은 늙을 때가 있지." 금란화는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알고 있어요." "아무리 예쁜 여자라 하더라도 늙그막에는 모두 쪼그라들게 마련이지." 금란화는 똑같은 대답이었다. "알고 있어요." 죽엽청의 음성은 여전히 은근했다. "모든 여자들은 사내를 필요로 하지. 그러나 때가 되면 당신은 진주가 사내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거야." 금란화는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알고 있어요." 죽엽청은 가볍게 칼집을 어루만졌다. "이것은 한 자루의 칼,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칼이지." 금란화의 대답은 여전했다. "알고 있어요." 죽엽청은 음성은 여전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고 하더라도 이 칼이 그녀의 염통에 박히면 진주는 그녀에게 쓸모가 없어지고 사내들도 그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지." 금란화는 여전히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알고 있어요." "자네는 남의 칼에 찔리겠는가? 아니면 진주를 좋아하겠는가?" 금란화는 이번에는 다른 말로 대답했다. "진주." 죽엽청은 그녀를 오랫동안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자네는 그 쓸모 없는 아길의 성이 무엇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리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겠지?" 금란화의 대답은 간단했다. "몰라요." 죽엽청은 빙그레 웃었다. 바로 그가 막 빙그레 웃었을 때 칼은 어느덧 그의 손에 쥐어져 칼빛이 번쩍하는 순간 금란화의 귀를 스쳤다. 이 한 칼은 결코 허장성세(虛張聲勢)가 아니었다. 그는 시뻘건 피만이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금란화의 전신이 두려움으로 인해 수축 되었다. 그녀는 자기의 피를 보았고 피를 따라 떨어지는 반쪽의 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공포 때문에 그녀는 고통마저도 느낄 수 없었다. 죽엽청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을 띄우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한쪽 귀가 반으로 잘라진 것은 그래도 머리카락으로 덮을 수 있지만 코가 반쪽 떨어져 나가게 된다면 매우 흉하게 되지." 금란화는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말하겠어요." 죽엽청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린 칼을 내려놓았다. "자네가 말은 한다면 이 진주들은 자네 것일세." 금란화는 안간힘을 쓰듯이 말했다. "사실 우리들이 말할 필요조차 없이 그가 누구인지 모두들 알고 있을 거예요." 죽엽청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그는 바로 당신들의 목숨을 달라고 하는 염라대왕이에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탁자 쪽으로 덮치듯 달려들었고 두 손으로 탁자 위에 놓인 칼을 움켜쥐더니 자기의 가슴을 찔렀다. 대노판의 안색이 변해서 덥석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매섭게 소리쳤다. "너는 갈보에 불과한데 어째서 한 사내를 위해서 죽는 거냐?" 금란화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입가로 선혈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한 가닥의 숨은 붙어 있어서 마음속의 말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만이 진정한 사내이기 때문이다. 네놈들은 한 떼의 개, 돼지만도 못한 잡종들이다. 내가 그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에 대해 나는...... 나는......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전혀 기척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네가 그와 약속한 시간은 오늘 저녁이랬지?" "네." 대노판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자네는 서둘러서 안배해 놓도록 하게." "대노판께서는 정말로 그곳에 가시렵니까?" 대노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만나 보고자 하네." 다시 그는 설명했다. "왜냐하면 나는 한번도 세상에 정말 그런 멋진 사내가 있어서 일개 갈보가 기꺼이 그를 위해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네. 도대체 그에게 어떤 특별한 점이 있는지 보려는 것일세." 죽엽청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대노판이 결정을 내리면 그 누구도 바꿔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노판은 다른 때와는 달리 그에게 물었다. "자네의 뜻은 어떤가?" 죽엽청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일은 너무 중대했다. 절대로 한 점의 소홀함이나 착오가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그는 반드시 자세히 고려해 보아야 했다. 대노판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내가 위험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나?" 죽엽청은 생각해 보고 나서 천천히 말했다. "묘자 남매들이 아직도 우리들의 손에 있는 이상 그는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노판은 수긍했다. "그 점은 나도 이미 생각했네." "그러나 한 갈보가 그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을 볼 때 그 작자는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인가?" 죽엽청은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 친구에 대해서 무척 의리를 지키지만 필요하게 되었을 때에는 친구를 희생시키는 것을 서슴치 않습니다." "필요하게 되었을 때가 언제인가?" "한 가지 큰 일을 결심했을 때입니다." 대노판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물론 죽엽청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든 그를 죽이면 틀림없이 강호를 진동시키는 큰 일이 될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저는 반드시 모든 고수들을 한대내내 쪽으로 모으겠습니다. 우리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고수들은 적어도 뛰어난 사람만 해도 서너 명은 될 겁니다." "그들이 나를 보호하는데도 부족한가?" "어쩌면 충분하고 어쩌면 부족하지요. 하지만 한푼이라도 위험이 있다면 저는 감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대노판은 오금이 저리는 듯 했다. "그들이 앞에서 막아 준다면 나는 적어도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을 걸세." 죽엽청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오직 대노판 한 사람 뿐입니다. 우리들이 한 푼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그는 손을 쓸 가능성이 큽니다. 그가 손을 써서 가해 온 일격을 어쩌면 그 누구도 막아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만약 철호가 있다면 상황은 물론 전혀 달라지겠지요." "자네의 뜻은 내가 갈 수 없다는 것인가?" 죽엽청은 약간 머뭇거리며 말했다. "대노판께서 반드시 그를 만나 보시겠다면 물론 가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노판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다는 건가?" 죽엽청은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대노판이 그와 상면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는 더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대노판이 즉시 자기의 뜻을 알아차릴 것을 알고 있었다. 대노판과 같은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요행이 아니었다. 반드시 다른 사람이 견줄 수 없는 재능과 기지가 있어야 했다. 대노판은 과연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한번도 나를 본 적이 없으니까 우리들이 아무렇게나 한 사람을 찾아내서 나로 가장시켜 그를 만나도록 하고 나는 시종으로 분장하고 뒤를 따라가면 여전히 그를 볼 수 있다는 거겠지." "만약에 그가 손을 쓰게 되면 맨 처음 당하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겠지요. 대노판께서는 반드시 무사히 빠져 나올 수가 있습니다." 대노판은 미소를 띠었다. "좋아. 좋은 생각이야." 문밖에서 갑자기 그 누가 말했다. "좋지 않아요. 조금도 좋지 않소." 이곳은 대노판의 서재였다. 또 그와 그의 탁월한 막료들이 기밀을 논하는 곳이기도 했다. 대노판의 허락이 없는 한 그 누구도 감히 곧장 문밖까지 다가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문밖에 와 있었다. 대노판의 뜻을 한번도 감히 반박한 사람이 없었고 대노판이 좋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좋았으며 다른 사람은 감히 꼬투리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외였다. 대노판의 면전에서 오직 이 사람만이 다른 사람이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이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대노판을 위해서 조처한 일들은 절대 다른 사람은 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음성을 듣자 대노판은 이미 기쁜 빛을 얼굴에 띠었다. "철호가 돌아왔군!" * * * 한 사발의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쇠고기 국수가 막 날라져 왔다. 국물은 알짜배기 곰국이고 그 위에는 네 개의 계란과 두 대의 갈비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아길은 속으로는 그 맛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렇게 맛좋은 것을 먹어 보지 못한 터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이미 무척 호사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것을 그의 친구들과 누리고 싶었다. 그는 대우의 집으로 가서 묘자와 왜왜를 만나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철두의 첩의 집에서 떠나올 때 탁자 위에는 여전히 어젯밤 도박에 걸었던 은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작은 덩어리를 하나 집어 왔을 뿐이었다. 그는 반드시 체력을 보완할 수 있는 음식물을 먹어야 했다. 그는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다. 이곳은 무척 조그만 국수집이었다. 좁고 어둠침침했다. 아길은 가장 어둡고 그늘진 모퉁이에 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국수를 먹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볼 생각이 없었고 또한 다른 사람이 그를 보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저 조용히 이 국수를 다 먹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편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막 두 번째 계란을 먹었을 때, 헌 판대기로 맏든 지붕 위에서 갑자기 한 웅큼 먼지가 떨어졌다. 바로 그의 국수 그릇 안에 떨어진 것이었다. 곧이어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나면서 지붕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리고 한 사람이 날렵하게 뛰어내리더니 바로 그의 등뒤에서 나직히 입을 열었다. "쉿! 움직이지 말아라. 말하지도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의 목숨을 빼앗고 말겠다." 아길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하지도 않았다. 국수집의 하나밖에 없는 사환은 놀라서 그만 다리에 맥이 빠지고 말았다. 그는 이미 그 사람의 손에 시퍼런 칼이 들린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또한 그 사람의 야수와 같은 눈동자를 볼 수가 있었다. 사냥꾼에게 쫓겨서 갈 데가 없어진 한 마리의 야수와 같은 그자의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너는 앉아. 천천히 앉아." 그 사람은 국수집의 사환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사환은 즉시 하나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온몸이 파김치처럼 맥이 빠져 있었다. 그 사람은 다시 아길에게 명령했다. "계속 국수를 먹어. 당신은 그것을 다 먹어 치워." 아길은 계속해서 국수를 먹었다. 똥물에 떨어진 만두도 그는 먹을 수가 있었는데 국수 그릇에 먼지가 좀 떨어졌기로서니 신경쓸 것이 있겠는가? 그는 등뒤의 사람이 느끼는 긴장과 공포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 때, 그는 체구가 우람한 사람이 가슴을 떡 편 채 고개를 번쩍 쳐들고 문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대한(大漢)을 보자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시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였다. 아길의 등뒤에 숨어 있던 사람은 숨소리가 대뜸 더 급박해졌으며 전신을 와들와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저 대한일까? -- 저 대한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째서 사람들을 그토록 두려워하게 하는 것일까? 아길이 다시 고개를 숙였을 때에 그 대한이 국수집 안을 흘낏 바라보는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그 눈초리는 마치 매서운 번갯불 같았다. 다행히 그는 한번 눈길을 주었을 뿐 성큼성큼 걸어서 지나갔다. 이 때서야 아길은 그의 등 뒤 허리띠에 밧줄이 묶여 있었으며 여섯 사람이 밧줄에 꿰어서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여섯 사람들의 옷차림은 모두 화려한 편이었다. 심지어는 허리띠에도 장식을 했고 모자에도 장식을 했으며 신발도 무척 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섯 사람들은 모두 다 얻어맞아 코가 깨어지고 눈이 퉁퉁 부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팔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마치 개처럼 그 대한의 밧줄에 끌려서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아길의 등뒤에 숨어 있는 사람은 그제야 한번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에 잡았던 칼자루에 쏟았던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저 사람들이 모두 당신의 친구요?" 그 사람은 호통을 쳤다. "닥쳐라." 아길은 닥치지 않고 다시 물었다. "당신이 도망칠 수 있었다면 어째서 그들을 구해주지 않았소?" 그 한 마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 자루의 칼이 그의 목에 닿았다. "네가 다시 입을 벌린다면 너의 목숨을 빼앗고 말겠다." 그런데 그 한 마디 역시도 다 끝나기 전에 그 누가 냉랭히 그 말을 받았다. "네가 입을 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너의 목숨을 빼앗고 말겠다." 조금 전에 분명히 문 밖으로 지나쳐 갔던 대한이 갑자기 다시 되돌아와 홀연 아길의 앞에 섰다. 그의 한 쌍의 눈동자에서는 번갯불과 같은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얼굴엔 광대뼈가 높다랗게 솟아 있었고 매부리코에 입이 메기처럼 넓적했다. 아길은 고개를 숙인 채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 숨은 사람은 칼을 그의 목에 갖다 대고 위협했다. "당신이 손을 쓰기만 한다면 나는 먼저 이 사람을 죽여 버리겠소!" 대한은 응수했다. "네가 그를 죽인다면 나는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의 음성은 무겁고 냉혹하게 다시 이어졌다. "나는 당장 죽이지 않고 네가 삼 년간 크나큰 고통을 당하도록 해주마." 아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 숨은 사람은 이미 나는 듯이 몸을 솟구치더니 번쩍 칼을 빛내며 그 대한의 정수리를 노리고 내려쳤다. 대한은 몸을 꿈쩍도 하지 않고 머리 한번 움직이지 않은 채 손을 뻗쳐 그 사람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의 손목이 부러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그 사람은 무릎을 꿇었다. 대한은 냉랭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갈 테냐? 안 갈 테냐?" 그 사람은 고통에 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겠소." 대한은 냉소하더니 그를 데리고 걸어나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아길을 바라보았다. 아길은 여전히 국수를 먹고 있었다. 대한은 냉소를 띠었다. "당신은 꽤나 침착하군." 아길은 고개를 쳐들지 않았다. "나는 몹시 배가 고프오. 그저 국수를 먹고 싶을 뿐이오." 대한은 한참 동안 그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국수집의 사환에게 말했다. "저 한 그릇 국수의 값은 내가 치르겠다." 사환은 공손히 응했다. "네." 아길은 한마디 했다. "고맙소." "천만에." 밧줄에는 또 한 사람이 묶이게 되었다. 일곱 사람이 밧줄에 묶여서 개처럼 대한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아길은 끝내 그의 국수를 다 먹었다. 그가 이 한 그릇의 국수를 다 먹겠다고 결심한 이상 반드시 다 먹어야 했다. 그 한 그릇의 국수 안에 먼지가 있어도 좋고 피가 있어도 좋았으며 눈물이 있어도 좋았다. 그런 후에 그는 몸을 일으키고 국수집의 사환 앞에 서서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요?" 사환은 놀란 혼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조금 전 나에게 국수를 사겠다고 한 사람 말이오." 사환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음성을 낮추고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건드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뭐요?" "철호, 철호라고 하는데 무쇠로 만들어진 호랑입니다. 그러나 무쇠보다도 단단하고 호랑이보다 더 흉악합니다." 아길은 웃었다. 웃음 속에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저 일곱 마리의 이리들을 개처럼 끌고 가는 사람이라면 물론 호랑이보다 더 흉악하겠지." 사환은 음성을 더욱 낮추고 살그머니 물어 보았다. "손님은 그 사람을 아시나요?" "모르오." 아길은 더욱 이상한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이 곧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네." * * * "철호가 돌아왔소." 이제 그는 대노판의 앞에 서 있었다. 허리는 별로 굽히지 않았다. 얼굴에는 어떤 사람도 드러낼 수 없는 자만의 빛이 서려 있었다. 자만을 하는 것은 그가 그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을 위해 한 가지 일을 또 해냈기 때문이었다. 대노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돌아왔군." 철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 한 떼의 이리들은 이리가 아니라 개새끼들이었기 때문이죠." 대노판은 미소를 띠었다. "자네 앞에서야 진짜 이리라 하더라도 개가되고 말겠지." 철호는 웃었다. 그는 결코 교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찬사를 듣기 좋아했다. 특히 대노판의 칭찬을. "그 개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여섯 마리의 죽은 개들은 이미 이리들에게 먹이고 일곱 마리의 살아 있는 개들은 모두 데려왔습니다." "한 마리도 빠뜨리지 않았는가?" "오는 도중에 한 마리가 뺑소니치다시피 했지요. 저는 그가 바지 가랑이에 한 자루의 칼을 숨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대노판은 호기심이 이는 모양이었다. "그 칼은?" "그 칼은 지금 그의 똥구멍 속에 들어 있습니다." 대노판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하!" 그는 철호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좋아했다. 철호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직접적이고 간단했으며 가장 효과적이었다. 철호는 불쑥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대노판께서 봐야 하겠다고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는 아길이라고 한다네." 철호는 그 이름을 되씹었다. "아길이라고요?" 대노판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자네는 틀림없이 그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네. 왜냐하면 그는 숫제 이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자기 자신을 쓸모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를 좋아한다네." 철호는 그 말을 받았다. "필시 그는 무척 쓸모가 있겠군요?" 대노판은 수긍했다. "무척 쓸모가 있을 뿐 아니라 틀림없이 과거에 무척 유명했을 것이네. 다만 명성이 너무 자자한 사람은 때로 다른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 철호는 그 뜻을 알았다.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자기 자신의 진짜 이름을 수년간 감추어 오고 있었다. 대노판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본래 오늘밤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지만 소엽(小葉)은 내가 변을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네." 철호는 냉소했다. "소엽의 간덩이는 잎사귀보다 작죠." 대노판은 그 말을 받았다. "자네는 그를 나무랄 수가 없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조심하는 것은 어쨌건 나쁜 일이 아닐세." 죽엽청은 줄곧 듣고만 있었으며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철호가 입을 다물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저로서는 유난히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호형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물론 지금은 다르오." 그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다른 사람을 매우 떨떠름하게 만들었다. "이제 대노판께서 만약 한 사람을 만나고자 하시고 호형이 손을 쓰기만 하면 즉시 그 사람을 잡아올 수 있을 것이 아니겠소?" 철호는 그를 노려보았다. "자네는 내가 그럴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나?" 죽엽청은 다소곳이 말했다. "이 세상에 호형이 처리하지 못할 일이 있다면 누가 있어 그 일을 처리할 수 있겠소?" 철호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대노판은 갑자기 불쑥 입을 열었다. "자네는 피곤하겠군." 그는 죽엽청에게 다시 말했다. "이제 철호가 돌아왔으니 자네는 처소로 돌아가서 한 두 시간 잠을 자두는 것이 좋겠구먼." 죽엽청은 공손히 응했다. "네." 대노판은 당부했다. "만약에 자네 침대 위에 자네와 잠자기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놀라지도 말고 사양하지도 말게." 죽엽청은 여전히 공손했다. "네." 대노판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사람이 누구든 마찬가지일세." 죽엽청은 머리를 숙였다. "네." 그는 즉시 물러났으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대노판의 분부라면 그는 영원히 순종하기만 했지 언제나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죽엽청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 철호는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힘주어 쥔 두 주먹엔 힘줄이 불끈 솟아 있었고 눈꼬리도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눈꼬리가 경련을 일으킬 때 모두 다 멀찌감치 피해 버렸다. 될 수 있는 한 멀리 비키는 것이었다. 대노판은 그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눈꼬리를 바라보더니 불쑥 물었다. "자네가 나를 따른지 얼마나 되었지?" "오 년입니다." 대노판은 그 말을 받았다. "오 년이 아닐세. 사 년 하고도 아홉 달, 그리고 스무 나흘째가 되었네." 철호의 눈꼬리에서 경련이 멈추었다. 눈동자에는 즉시 탄복과 존경의 빛을 떠올랐다. 그는 대노판이 그렇게 조그만 일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기억력이 그토록 훌륭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남의 존경과 탄복을 받게 마련이었다. 대노판은 다시 물었다. "자네는 소엽이 나를 따른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그는 저보다 오래 되었죠!" 대노판은 힘주어 말했다. "그는 나를 따른지 육 년이나 되었네. 육 년 석 달 하고도 열 사흘이 되었네." 철호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대노판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나를 따르면서 이미 사십 칠만 냥이라는 은자를 썼으며 이미 일흔 아홉 명의 여자를 바꿔치기 했네. 그런데 그는 어떤가?" 철호는 알 수가 없었다. 대노판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회계선생에게 통지해서 자네들 두 사람이 얼마를 쓰던 간에 그대로 지불하도록 하라고 했네. 그러나 그는 이 육 년 동안 겨우 세 냥을 썼을 뿐이네." 철호는 참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쓸 줄 알지만 어떤 사람은 모릅니다." 대노판은 다시 말했.다. "그는 여인도 없네." 철호는 다시 한참 동안을 참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는 숫제 사내 구실을 못하는지도 모르지요." 대노판은 반박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가 나를 위해서 한 일은 결코 자네보다 적지 않네." 철호는 인정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감히 부인할 수도 없었다. 대노판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가 나를 위해서 한 것은 자기의 조상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었네. 그런데도 그는 돈이나 여자를 마다했는데 그게 무엇 때문일까?" 철호는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대노판은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이 모든 것 가운데에 명리와 여자를 제외하고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철호는 알고 있었지만 감히 말할 수가 없었다. "권력이지!" 한 사내가 만약에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 무엇을 얻지 못하겠는가? 대노판은 다시 설명하듯 말했다.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어쩌면 그가 바라는 것은 나의 자리인지도 모르지." 철호의 눈이 빛났다. "대노판께서 한마디만 하신다면 언제라도 저는 그를 처치하겠습니다." "자네는 자신있나?" 철호는 그 질문에 무거운 압박감을 느꼈다. "저는......" 대노판은 그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자네의 재간을 알고 있으며 자네가 얼마나 많은 유명한 사람을 처치했는지도 알고 있네." 철호는 부인하지도 않았고 또 겸손해 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노판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육 년 나는 한번도 소엽에게 어떤 행동에 참가해 달라고 하지 않았네. 왜냐하면 나마저도 그가 재간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세." 철호는 그 말을 받았다. "그는 본래 재간이 없습니다." 대노판은 그 말을 부인했다. "자네는 틀렸네. 나도 틀렸어." 철호는 약간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 같았다. "아!" 대노판은 말을 이었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나는 그 역시 고수라는 것을 알았네." 철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떤 고수인지요?" "칼을 쓰는 고수일세." "대노판은 그가 칼 쓰는 것을 보셨습니까?" "오늘에서야 보았는데 그가 칼 쓰는 수법은 내가 본 어떠한 사람보다도 훌륭했었네." 칼빛이 뻔쩍하는 순간에 금란화의 반쪽 귀가 잘려져 떨어졌던 것이었다. 대노판은 다시 생각하듯 입을 열었다. "그는 칼을 빨리 썼을 뿐만 아니라 정확했네. 그러나 그는 줄곧 깊숙이 갈무리한 채 드러내지 않았네. 어쩌면 그는 지금도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는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는 잘못 알고 있네. 돼지고기를 먹어 보지 못한 사람도 돼지가 어떻게 걸음을 옮겨 놓는지는 보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웃음은 더욱 차분해졌다. 철호는 그 순간 이미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쩌는 칼 쓰는 사람을 상대해 본 적이 있습니다." 대노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고 있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만승도(萬勝刀), 칠교도(七巧刀), 태행쾌도(太行快刀) 문하의 고수들 가운데 자네의 손아래 ㅉ은 사람만 ㅎ도 적어도 이삼십 명은 될 것이네." 철호는 그 말을 받았다. "오늘의 비랑도(飛狼刀) 강중(江中)까지 꼭 서른 명입니다." 대노판은 자신 있게 말했다. "나도 틀림없이 자네가 그를 해치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철호는 힘주어 말했다. "언제라도 가능하지요." 대노판은 고개를 살짝 가로 저었다. "그러나 아직은 필요 없네." "어째서인가요?" "왜냐하면 나는 그가 지금까지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철호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 "대노판께서 아시게 되었을 때엔 이미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죠." 대노판은 자신 있게 말했다. "결코 너무 늦는 일은 없을 것이네." 철호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어째서죠?" "왜냐하면 그 역시 사내일세. 그 어떤 사내라 할지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좀처럼 자기 마음속의 간직하고 있는 비밀을 지키기가 어렵다네." 탁자 위에는 꽃병이 놓여 있었고 꽃병에는 꽃이 꽂혀 있었다. 그는 꽃병에서 한 송이의 국화를 뽑아 들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만약 그 여인이 총명하고 그의 베개 가에서 시중을 들게 된다면 설사 그가 얘기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여인은 알아차리게 될 것이네." "그도 좋아하는 여인이 있나요?" "물론이지." "누굽니까?" "자령(紫鈴)!" 그는 틀림없이 자령이 누구인지 모르리라고 생각하고 다시 설명했다. "자령이란 바로 입꼬리에 점이 있는 그 여자라네." 철호는 결코 우둔하지 않았다. "또한 오늘 침대 위에서 그와 함께 잠자기를 기다리는 그 여인이겠죠?" 대노판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미 철호에게 두 가지 사실을 명백히 해두었다. - 첫째, 대노판은 결코 만만하게 상대할 사람이 아니며 결코 다른 사람의 기만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둘째, 대노판의 참된 심복은 오로지 철호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었다. <제1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