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검 성 제 1 권 제 1 장 하늘의 형벌(刑罰) 제 2 장 살인광상곡(殺人狂想曲) 제 3 장 음모(陰謀)의 덫 제 4 장 혈풍향(血風香) 제 5 장 이별(離別) 제 6 장 무도입문(武道入門) 제 7 장 기연(奇緣)이냐 악연(惡緣)이냐 제 8 장 괴승 광치(狂痴) 제 9 장 허허실실(虛虛實實) 제 10 장 쾌검일초(快劍一招) 제 11 장 신비의 마녀(魔女) 제 12 장 두둑한 배짱 제 13 장 수수께끼의 연속 제 14 장 일곱 개의 운명(運命) 제 15 장 엄청난 비사(秘事) ━━━━━━━━━━━━━━━━━━━━━━━━━━━━━━━━━━━ 제 1 장 하늘의 형벌(刑罰) ━━━━━━━━━━━━━━━━━━━━━━━━━━━━━━━━━━━ 세상에는 강한 인간들도 많지만 약한 인간들도 많다. 강한 인간들은 무쇠처럼 강인한 체력을 지니고 있는 반면, 약한 인간들은 하루살이보다 더 허약한 체질을 지니고 있다. 석씨 가문(石氏家門)은 후자의 경우에 비추어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저주받은 가문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 다. 저주받은 가문! 석씨 가문의 후손들은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여 도무지 서른 살 을 넘도록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열 살만 되면 전신이 온통 수염과 털로 뒤덮이고, 스무 살이 되면 그 수염과 털이 희끗희끗 세어지며 서른 살이 가까워지면 완전히 호호백발의 노인이 되어 죽어 버리는 것이다. 몸이 허약하다 보니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것 또한 남달리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가문에 시집을 온다거나 장가를 들려는 사 람이 아무도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무슨 짐승처럼 멀리하고 천대하며 멸시했 다. 신(神)에게서 철저히 버림받은 저주의 가문. 그것이 석씨 가문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슬픈 것은 석씨 가문의 사람 들이 바보스러울 만큼 착하고 어진 심성을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석씨 가문의 후손들은 그 숫자가 줄어들어 갔 다. 삼백 년 전, 돌연 석씨 가문은 살아남은 마지막 후손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을 찾아 떠나 버렸다.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누군가 물었다. － 사람들이 당신들을 냉대하고 멸시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오? 석씨 가문의 한 소녀가 대답했다. － 아니예요, 아니예요. 우리들은 다만 살아남기 위해 도망을 치 고 있을 뿐이에요. 그 사람은 또 물었다. － 도망이라니? 그럼 누군가 당신들을 죽이려고 달려오고 있기라 도 한단 말이오? 소녀는 웃었다. 몹시도 슬프게 웃어 보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 그래요. 그들은 우리 석씨 가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 을 죽이기 위해 달려오고 있어요. 믿기 어려우시더라도 믿으셔야 해요. 신(神)은 우리 가문에게 거역할 수 없는 저주와 더불어 앞 날을 내다보는 신비한 힘도 주셨으니까 말이에요. 그 때가 언제인 지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다만 그들은 신(神)이 우리 가문에 내 려준 저주보다 몇 곱절 되는 하늘의 형벌(刑罰)을 온 세상 사람들 에게 안겨 줄 것이라는 사실만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수수께끼 같은 소녀의 말과 함께 석씨 가문은 중원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오십 년이 흐른 이백오십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중원무림에 괴이한 사건이 벌어졌다. 똑같은 혈의 장포 차림에 똑같이 황금가면을 얼굴에 쓰고 이제까지 세상에 전 혀 알려지지 않은 기형병기를 든 서른여섯 명의 괴마인들이 한꺼 번에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가공할 피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으 며, 도무지 인간의 능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불가사의한 무공을 지닌데다 유사 이래 가장 잔혹한 피보라를 일으켜 천형삼 십육벌(天刑三十六罰)로 불려진 개세마인(蓋世魔人)들의 전설! 그렇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나타난 것 자체가 하나의 저주였으며, 신이 세상에 내린 참혹한 형벌이었다. 고금으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무림(武林)의 갖가지 기 담(奇談)과 괴사(怪事)를 수록한 무림통서(武林通書)에는 그 가공 할 혈사(血史)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천하에 그 위세를 떨치던 서부무림의 대문파 검 왕궁(劍王宮)의 천오백 고수와 궁주인 현검기자(玄劍奇子) 동천승 (童天乘)이 하룻밤 새 몰살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그리고 불과 닷새 후에는 설산(雪山)과 나부(羅浮)의 삼천여 고수 가 천형삼십육벌에게 깡그리 몰살당했다. 천하 각 파가 크게 놀라 각기 방비를 굳게 하고 그 진상을 조사하 려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강북무림의 남북오악맹(南北五嶽盟), 천외삼성(天外三聖)이 이끄 는 구방련(九幇聯)을 비롯한 일곡(一谷), 칠문(七門), 팔방(八 幇), 이교(二敎)가 한 달 간격으로 차례차례 멸문당하고 삼 년째 되던 해에는 무려 사십팔 개의 정사대소문파(正邪大小門派)들이 천형삼십육벌의 이름 아래 초토화되고 말았다. 경천동지(驚天動地)! 말 그대로 그 기세는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 단 서른여섯 명에 의한 그 죽음의 지옥대전(地獄大戰)은 미증유의 위력으로 폭풍처럼 천하를 휩쓸었다. 더욱이 소름끼치는 점은 천형삼십육벌이 일으킨 이 죽음의 폭풍이 정(正), 사(邪)의 파벌을 가리지도 않은데다 무슨 뚜렷한 목적하 에 행해지는 것도 아닌 무차별 살상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단지 죽음을 위한 악마들의 유희였다. 천형삼십육벌(天刑三十六罰). 무림사를 통틀어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이보다 더 가공할 이름은 그 어느 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풍전등화 격으로 위기를 맞이한 무림은 전전긍긍 대책을 강구하던 끝에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정과 사의 필연적인 결합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사(正邪)의 대표 이십오 인은 무산의 어느 은 밀한 장소에서 회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은밀한 회동에서 하나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천하 각 파가 일시적으로 봉문(封門)을 하여 천형삼십육벌 을 꺾을 수 있는 신공절예(神功絶藝)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천하 각 파의 봉문선언(封門宣言)은 즉시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다시 악몽 같은 세월이 지나 이 년이 흐른 뒤였다. 이십오 인의 정사지존들은 결국 각기 지닌 바 무공 중에 최고의 장점만을 모아 새로운 열 가지 무공을 창안해 내는 데 성공했다. 이십오 인은 이 열 가지 십 종 무예를 절대십천예(絶對十天藝)라 이름붙였다. 또한 그 무공들을 수록한 책자를 천화대종경(天華大宗經)이라 명 명하고, 그 날부터 그들은 공동으로 이 새로운 무공들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로 기이한 것은 이 절대십천예의 위력이었다. 비록 정사를 대표하는 이십오 인의 최고무예만을 모았다고 해도 그들에게서 나온 바에야 크게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게 상식이 다. 그러나 이 절대십천예는 아예 그들의 무공과는 차원이 달랐으며, 그 위력은 차라리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이십오 인은 그것이 모두 하늘의 도움이라 여기고 사심을 버린 채 그야말로 열심히 수련을 거듭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魔)가 끼친다 했던가.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날 천형삼십육벌이 그들의 수련장소를 급습 해 왔다. 끔찍한 대참사가 벌어졌다. 하루의 수련을 마치고 거의 탈진상태 에 빠져들어 잠들어 있던 이십오 인은 이렇다 할 반항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떼죽음을 당해 버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천만다행으로 소림사의 장문인 무우대사(無優 大師)만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천하대종경을 가지고 그 장소에서 탈출했다.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정사무림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으 며, 그 충격은 곧 해일 같은 분노로 뒤바뀌었다. 그러한 분노는 급기야 무려 일만여 명에 달하는 정사대연합군(正邪大聯合軍)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정사대연합군과 천형삼십육벌의 정면충돌은 이루어 지고 말았다. 유사 이래 최악의 대격돌.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대혈전이 장장 칠 주야나 계속되었다. 싸움은 정사대연합군의 승리로 장식되었다. 제아무리 파천의 능력 을 지닌 천형삼십육벌일지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벌 떼처럼 달려드 는 일만의 고수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 싸움이 얼마나 처절하고 끔찍했는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결국 천형사십육벌은 그렇게 이 땅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에 따 른 정사양도(正邪兩道)의 손실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세월, 그것은 모든 시름과 상처를 아물게 하는 묘약인가? 천하 각 파는 각기 세력회복에 힘쓴 끝에 수십 년이 흐르면서 서 서히 안정을 되찾아 갔다. 정과 사의 양대세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단합관계에서 대립관계로 되돌아갔다. 그런 가운데 언제부터인지 무림인들은 슬그머니 딴 곳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천화대종경. 누구의 입에서부터 나왔는지 그것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모 두가 탐욕과 욕망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천하 각 파는 각기 은밀히 천화대종경의 행방을 수색하기 시작했 다. 그것만 찾을 수 있다면 손실과 피해의 복구는 물론, 능히 천 하제일문(天下第一門)으로 탈바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천화대종경을 지니고 있다는 무우대사의 모습은 천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더욱 괴이한 일은 천하대종경을 찾아 나섰던 사람조차 속속 행방 불명이 되어 한 명도 돌아올 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는 각 파의 지존들도 상당수 끼어 있었으며, 나머지도 거의 수뇌급 고수 들이었다.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의문의 연속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연속 끝에 세월은 다시 유수같이 지나 이 백오십여 성상이 지나갔다. 천화대종경과 무우대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하나의 전설처럼 되 어 버렸고, 수수께끼의 실종사건들도 완전히 미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시기에 천하 각지에서는 이상한 조짐들이 하 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석씨 가문의 저주로부터 시작된 이 피의 전설. 그렇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 번째 혈사이며, 유사 이래 가장 참혹한 피의 이야기는……. ━━━━━━━━━━━━━━━━━━━━━━━━━━━━━━━━━━━ 제 2 장 살인광상곡(殺人狂想曲) ━━━━━━━━━━━━━━━━━━━━━━━━━━━━━━━━━━━ 대륙의 남단 광동성(廣東省). 배를 타고 오백 리 가량 가노라면 망망대해 한가운데 열 개의 섬 이 모여 있는 한 군도(群島)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두 여섯 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이 군도를 뱃사람들은 무명 군도(無名群島)라 불렀다. 무명군도는 그야말로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기암괴석투성이 로, 혹자는 죽음의 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이었다. 이 황폐한 무명군도에 놀 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처음 바위투성이 섬들의 도처에 푸른 나무들이 무성하 게 자라면서 시작되었다. 근처를 지나던 뱃사람들은 곧 섬 기슭에 온갖 꽃들이 구름처럼 가 득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흘렀을 때는 섬 도처에 새와 나비, 사슴이며 노루 등이 뛰노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뱃사람들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말하자면 보잘것 없던 무명군도가 불과 몇 년 새에 하나의 낙원처 럼 탈바꿈한 것이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몇몇 뱃사람들이 급기야 무명군도를 살피기에 이르렀다. 무명군도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뱃사람들은 난생 처음 대하는 별세계에 도취되어 여기저기를 헤매 다가 하나의 장원을 발견했다. 그 장원은 무명군도에서 가장 큰 섬의 중앙에 지어져 있었다. 장원의 주인은 삼십오륙 세 가량의 매우 수려한 인물로 한눈에도 신태가 범상치 않았다. 그 젊은 장주는 삼십 세 가량의 아름다운 미부인과 열 명 남짓한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식솔들 가운데는 나이가 젊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노인도 있었 고, 여인들도 섞여 있었다. 뱃사람들은 그들이 젊은 장주를 마치 하늘 대하듯 공경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한 낮에는 섬을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었고, 밤에는 한자 리에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노래를 불렀다. 뱃사람들은 그 화기애애한 광경과 섬의 환상 같은 아름다움에 넋 을 잃다시피 했다. 그 모든 광경은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야말로 그림에서나 보았던 무릉도원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 킬 지경이었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는 대신 젊은 장주에게 자신 들도 섬에 머물러 살게 해 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젊은 장주는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크게 환영해 주 었다. 그런 일은 그 후에도 꾸준히 생겨 무명군도에는 조금씩 사람들이 늘어 갔다. 결국 십여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육십여 가호에 이백여 명이 모여 사는 하나의 섬마을이 형성되었다. 어언 젊은 장주는 마흔다섯의 중년인이 되었으며, 섬마을 사람들 에게 도주(島主)로 받들어졌다. 그 사이 그의 슬하에는 귀여운 사내아이도 태어나 어느덧 열두 살 의 총명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무명군도의 사람들은 그러한 화복이 도주에게 덕망이 있기 때문이 라고 입을 모아 칭송했다. 사람들은 도주의 이름이 엽장천(葉長天)이라는 것만 알 뿐 그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상하고 온화한 이 섬마을의 도주였으며, 사람 들은 늘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명군도. 시기도 없고, 질투도 없으며, 싸움도 없는 섬. 오직 평화로움만이 가득한 별천지의 섬. 그래서인지 섬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이 사는 이섬을 선유도(仙遊島)라 부르기 시작했다. 또한 도주 엽장천이 기거하는 장원을 선유장(仙遊莊)이라 부르며 그를 살아 있는 신선처럼 공경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폭풍이 밀려오는 것일까? 어둠이 깔리면서 잔잔했던 바다는 사납게 용트림치며 광란하기 시 작했다. 먹장구름은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었고, 연이어 수만 마리의 늑대 가 울부짖는 듯 음산한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꽈르르릉－! 천둥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시퍼런 번갯줄기가 번쩍번쩍 암 천을 찢어발기며 수평선 너머로 꼬리를 감추고, 파도는 수십 장을 치솟아 거대한 악마의 아가리를 연상케 했다. 그렇다. 실로 무서운 대자연의 포효가 시작된 것이다. 선유도, 온갖 기화이초와 수목으로 그림같이 단장된 이 그림 같은 군도에도 폭풍은 예외 없이 밀려들었다. 콰아아－ 번쩍－! 이 곳은 도주 엽장천의 거처인 선유장. 고대의 건축양식으로 한껏 우아하게 지어진 이 장원은 세 개의 전 각과 하나의 별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원의 좌우에는 송림이 빽빽이 우거져 방풍림 구실을 했고, 뒤쪽 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병풍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어 일견 키에도 더할 나위 없는 명당자리였다. 때는 막 술시(戌時)를 넘어 해시(亥時)로 접어드는 시각이었다. 어느 한 실내, 일견키에도 서실(書室)임을 알 수 있었다. 삼면 벽 전체는 서가로 꾸며졌고, 서가마다 수많은 고서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한쪽 벽에는 고풍스런 산수화(山水畵)와 족자가 걸려 있어 한층 더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 실내의 창가 탁자 앞에는 한 소년이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대략 십이삼 세 가량 되었을까? 불빛 아래 드러난 소년의 용모는 백옥을 깎아 다듬은 듯 더할 나 위 없이 준수했다. 수려한 윤곽에 얼음처럼 희고 투명한 살결, 고고하고 맑은 정기가 서린 넓은 이마와 우뚝 솟은 콧날, 맑고 청정한 눈에는 총명과 영 기가 가득했으며 꽉 다문 입은 주사빛처럼 붉었다. 이 소년이 바로 선유장 장주 엽장천의 하나뿐인 엽소군(葉小君)이 었다. 엽소군의 얼굴에는 지금 그 또래에 어울리는 짓궂고 장난스런 미 소가 가득 어려 있었다. 사사삭－! 빠르게 움직이는 엽소군의 눈은 눈처럼 희고 깨끗해 보였다. 그의 손 움직임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빨라져 갔다. 엽소군이 만들고 있는 것은 하나의 탈바가지였다. 그것은 실로 무 시무시하게 생긴 마면탈이었다. 엽소군의 손이 계속 움직임에 따라 그것은 점차 완연한 악마의 얼 굴로 변해 갔다. 대략 향 한 자루가 타 들어갈 시간이 지났을 때 엽소군은 비로소 조각칼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마면탈이 모두 완성된 것이었다. 엽소군은 총기 어린 눈을 반짝이며 마면탈을 자세히 살피더니 만 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후후… 됐어." 엽소군은 마면탈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는 유모가 나를 잘도 놀렸겠다? 이제 그 빚을 갚아 줘야지." 엽소군은 마면탈을 얼굴에 썼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금세 소름끼 치는 형상으로 변했다. 마면탈! 그것은 금세라도 악마의 숨결을 토해 낼 듯 너무도 섬세 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겨우 십이 세 소년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엽소군은 방 한 구석에 있는 동경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시무시한 형상이 동경 가득 비춰졌다. "후후… 벽아주머니 간담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이것을 보면 분명 입에 거품을 물고 까무러칠 거야." 엽소군은 만족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몸 을 돌렸다. "흥! 거품을 물고 쓰러져도 마땅하지. 아무리 유모라고 해도 감히 사내대장부인 나 소군을 그렇게 놀리다니……." 엽소군은 곧 문을 열더니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가 하면 풀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날아가고 있었다. 소년 엽소군은 어릴 적부터 많은 폭풍을 경험한 탓에 이처럼 지독 한 바람에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까딱하다간 바람에 날려 갈 것 같구나." 엽소군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더니 쏜살같이 전면으로 뛰어갔다. 어느 방문 앞, 엽소군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서고 있었 다. 이 방은 엽소군을 어릴 적부터 줄곧 도맡아 가르치다시피 한 유모 벽서월(碧西月)의 침소였다. 엽소군은 조심스럽게 문 틈으로 귀를 대었다. 방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흠, 됐어. 분위기가 조용할수록 갑자기 들이닥치면 더욱 놀라게 마련이지.' 엽소군은 득의로운 웃음을 지으며 한 차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어 그는 방문을 냅다 걷어찼다. 쾅－! 방문이 부서질 듯 활짝 열렸다. 엽소군은 두 손을 높이 쳐들고 괴상한 부르짖음을 토하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와아악!" 까무러칠 듯 놀라 나자빠지는 유모 벽서월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엽소군은 어리둥절해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실내에는 희미한 황촉 불빛만이 흔들거리고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엽소군은 크게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유모가 어디를 갔지?" 그는 실망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마면탈을 벗어 들었다. 이어 실내 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딱 얼어붙었다.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린 것과 눈이 화등잔만하게 뜨여진 건 거의 동시였다. 피! 방바닥을 가로지르며 한 줄기 붉은 핏물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 피는 방 한쪽에 있는 욕실의 문 아래 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 다. "피… 피가……."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엽소군의 전신을 휩쓸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욕실 쪽으로 향했다. 그는 욕실의 문을 열려고 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는 곧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욕실 문을 왈칵 열었다. 순간이었다. '헉!' 엽소군은 눈앞에 벌어져 있는 광경에 머릿속에서 벼락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욕조 속에는 마흔 살 가량의 여인이 머리만 내놓고 누워 있었다. 목욕중에 변을 당한 듯,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이었다. 이미 숨을 거둔 듯 눈이 허옇게 까뒤집혀 있고, 혀를 길게 베어 문 모습. 그것은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창백하리만큼 흰 나신의 정수리에는 단검 한 자루가 자루만 남긴 채 깊숙이 꽂혀 있었다. 단검의 손잡이에는 똬리를 튼 붉은 뱀의 형상이 살아 있는 듯 생 생하게 조각되어 있어 섬뜩한 괴기를 풍겼다. 똑－ 또똑－! 이마를 타고 목 아래로 흘러내리는 붉은 피는 욕조에 채워져 있는 물을 온통 붉게 물들여 놓고 말았다. 툭－! 그의 손에서 마면탈이 힘없이 떨어졌다. "유… 유모……." 새파랗게 질린 그의 입술 새로 신음 같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욕조의 여인은 바로 엽소군의 유모인 벽서월이었다. 엽소군은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엽소군은 주춤주춤 벽서월에게 다가섰다. 혹시 아직 숨이 붙어 있 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엽소군은 이를 악물고 용기를 내어 그녀의 완맥을 짚어 보았다. 그러나 벽서월의 손은 이미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주, 죽었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듯한 공포감이 재차 무섭게 엽소군을 엄 습했다. 사람이 죽은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거니와 이렇듯 끔찍한 일은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엽소군은 몸을 홱 돌려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위우우웅－ 우지끈－! 폭풍은 점점 드세져 가고 있었다. 엽소군은 하마터면 부러져 내리는 나무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그는 건너편 쪽의 전각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 전각은 아버 지 엽장천과 어머니 임설정(林雪貞)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아버지!" 단숨에 당도하기가 무섭게 엽소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 다. "아버지! 유, 유모가……." 엽소군의 말이 돌연 중도에서 끊겼다.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침상 위였다. 거기에는 삼십 세 가량의 한 절세미부가 엎드린 자세로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미부는 원래 엷은 단삼을 입고 있었으나 지금은 다 찢겨져 나가 나신에 가까웠다. 눈이 부시도록 풍염하고 아름다운 그 몸은 실로 참혹하게 유린당 해 있었다. 속의 허연 뼈가 다 드러날 만큼 등 부위가 칼로 깊게 베어진 모 습! 아직도 채 식지 않은 피가 뭉클뭉클 그 몸에서 흘러 나와 침상 위 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엽소군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야말로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 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머니!" 엽소군은 미친 듯이 절규하며 침상으로 달려가 그녀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아아, 그토록 자상하고 아름다웠던 어머니는 이미 죽어 있었다. 엄청난 슬픔과 분노가 엽소군의 전신을 휩쓸었다. 몸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 그것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엽소군은 문득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버지를 모셔 오겠어요." 엽소군은 마치 살아 있는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처럼 울먹이며 말 했다. 그는 이를 꽉 깨물고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자신이 어느 곳으로 뛰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미 그에겐 방 향 같은 것 따윈 생각할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툭－! 그의 발끝에 돌부리가 차였다. 엽소군의 몸은 중심을 잃고 사정없 이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꽈당－! 코가 깨졌는지 비릿한 핏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엽소 군은 아픈 것도 모르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다시 달리려다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전면에 있는 한 그루 거목을 향해 있었다. 그 거목에는 턱수염을 짧게 기른 육순 가량의 황의노인이 기대어 서 있었다. 한 자루 장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고 나무에까지 박혀 있었던 것이다. 시신의 두 눈은 무섭게 부릅뜨여진 상태였다. 검, 황의노인을 죽인 그 장검 손잡이에도 한 마리 붉은 뱀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노… 노집사(魯執事)……." 엽소군은 망연한 신음성을 흘려 냈다. 이름이 노평(魯平)이라는 것 외에 엽소군은 노집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한 가지 안다면 노평이 평소 엽소군 자신을 마치 친손자처럼 끔찍 이 귀여워해 주었다는 것뿐이었다. "아아……." 엽소군은 충격이 거듭되자 이제는 놀람보다도 죽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 왈칵 솟구침을 느꼈다. "이것은 꿈이야……." 엽소군은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설령 꿈이라 해도 이건 보통 악몽이 아니었다. 하물며 현실인 바 에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엽소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폭풍은 이제 빗줄기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장공을 가르며 쏟아지듯 내리퍼붓는 폭우 속에서 엽소군은 미친 듯이 헤매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어린 소년을 공포에서 건져 내 주는 이가 없었다. "누구, 아무도 없어요?" 꽈쾅－! 뇌성과 번개가 천지를 찢어발기듯 작렬했다. 엽소군의 시야에 활짝 열려 있는 장원의 대문이 들어왔다. 그쪽으로 달리며 엽소군은 또 몇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 중에는 그가 심심할 때마다 말벗이 되어 주던 정원지기 막노인 도 있었고, 늘 잠자리를 보살펴 주던 취아주머니, 언제나 사람 좋 게 껄껄 웃던 뚱보 아저씨도 예외 없이 끼어 있었다. '아아,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 집에는 지금 나 혼자만 살아 있을 뿐이야!' 폭우를 헤치며 대문 밖을 나서는 엽소군의 뇌리에 번쩍 스친 생각 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또 다른 공포가 엽소군의 전신을 무섭 게 치달았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방금 저녁 식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들이 모두 죽어 있는 것이다. "헉헉……." 얼마나 뛰고 또 뛰었는지 모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무렵 멀 리 몇 채의 가옥이 보였다. 엽소군은 희미하게나마 몇 개의 그림자가 마을에서 어른거리는 것 을 보았다. '사람이다!' 엽소군은 젖먹던 기운까지 다해 그쪽으로 달렸다. 한데, 채 열 걸음도 더 나아가기 전이었다. "으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이 마을 쪽에서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엽소군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채 우뚝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바로 그 때다. 칠흑처럼 어두운 숲 속에서 돌연 하나의 손이 불쑥 나타나 엽소군의 허리를 휘감았다. 엽소군은 기겁하여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그 순간 하나의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거의 동시에 한 소리 나직한 음성이 급박하게 그의 귓속을 파고들 었다. "아버지다, 군아야!" "……!" 엽소군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그의 동공 가득 인자스럽 고도 근엄한 얼굴이 비쳐 들었다. 힘차게 뻗쳐 올라간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지닌 중년인. 파르스름한 면도 자국이 유난히 깨끗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주는 그의 풍도는 한눈에도 비범한 것이었다. 엽소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 아버지!" 그렇다. 중년인은 바로 버려진 무인고도를 낙원으로 만들어 놓은 선유도주 엽장천이었다. 이 순간 엽장천의 깨끗한 백의는 온통 피투성이로 얼룩져 있었다. 활화산처럼 무섭게 이글거리는 그의 두 눈에는 분노와 회한 등의 감정이 가득했다. 엽소군은 부친의 손에 핏물이 뚝뚝 흐르는 한 자루 장검이 들려 있음을 보았다. 일견키에도 악전고투를 치른 흔적이 역력한 모습 이었다. 엽소군은 경황중에서도 부친의 그런 모습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파리 한 마리도 죽이기를 꺼려 하는 아버지가 칼을…….' 엽소군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순 아들을 주시하는 엽장천의 눈에 짙은 연민의 빛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러한 빛은 나타날 때 보다도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엽장천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세한 것을 설명할 시간이 없다. 자, 가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엽소군의 허리를 안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슉－! 단숨에 오륙 장의 높이를 솟아오른 엽장천은 공중에 뜬 그대로 허 리를 틀어 번개같이 앞으로 쏘아갔다. 그 절묘한 신법(身法)은 마 치 독수리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 다. 엽소군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아, 아버지가 허공을 날다니…….' 그것은 엽소군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어찌 인간이 이토록 빠르게 날아가듯 몸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인 가?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아버지가 말이다. 뺨을 스치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엽소군은 눈을 꽉 내리 감았다. 엽장천의 모습은 장대처럼 쏟아져 내리는 폭우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 제 3 장 음모(陰謀)의 덫 ━━━━━━━━━━━━━━━━━━━━━━━━━━━━━━━━━━━ 선유도의 남쪽 끝단. 원래 이 곳에는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으나 지금은 밀려드 는 해일로 인해 몇몇 암초만이 보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광풍폭우와 광란하는 파도. 그야말로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듯 무시무시한 밤이었다. 이 때다. 휙－! 어둠을 뚫고 밤하늘의 유성이 떨어져 내리듯 하나의 그림자가 장 내에 내려섰다. 나타난 그림자는 절묘한 몸놀림으로 파도 가운데의 한 암초 위에 내려섰다. 그는 바로 아들 엽소군을 품에 안고 있는 선유도주 엽 장천이었다. 그는 초조한 기색으로 한참 동안 주위를 살폈다. "어찌 된 일인가? 그도 당했단 말인가?" 엽장천의 묵직한 독백성이 파도 소리에 묻혀 사라지는 순간이다. 돌연 어디선가 급박한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여깁니다, 도주님!" 그 외침 소리는 마치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바람처럼 엽장천의 고막을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시야를 돌리는 엽장천의 시야에 먼저 들어온 건 깎아 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바다와 맞닿은 그 절벽 아래에서 희미하게나마 누군가 손을 흔들 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엽장천은 번개같이 그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품에 엽소군을 안은 상황인데도 조금도 무리가 없는 동작이었다. 중도에서 날카로운 암초 서넛을 징검다리처럼 절묘하게 밟고 휙휙 파도 위를 날더니, 단숨에 삼십여 장을 지나 목적지에 당도한다. "대산(大山), 무사했구나?" "제가 어디 시시하게 죽을 위인입니까?" 호기 어린 음성과 함께 엽장천을 반기는 인물은 구 척 장신에 산 처럼 우람한 체구를 지닌 거한이었다. 구레나룻이 가득한 얼굴이며,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이 일견키에 도 위맹한 성품임을 엿보이게 했다. 엽소군이 그를 알아보고 부친의 품에서 뛰어내리며 크게 반색을 했다. "대산 아저씨!" 철대산(鐵大山). 그는 원래 집채만한 바위를 통째로 뽑아 던지는 괴력(怪力)의 소 유자로, 이 곳 선유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철대산은 어린 엽소군과 유달리 친하게 지내 왔던 터였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도련님?" 철대산은 엽소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엽소군의 눈에 다시 눈물이 글썽거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유모도, 노집사도… 다 죽었어."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 하지만 남아대장부는 이럴 때일수록 용 기를 잃지 않는 법입니다." 철대산의 이 한 마디는 심중의 격동을 채 억제하지 못했음인지 나 직하게 떨리고 있었다. 엽소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돌연 철대산의 거구가 중심을 잃고 휘청 흔들렸다. 엽소군 은 그제야 철대산의 몸이 온통 피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 대산 아저씨… 가슴이……." "조금 다쳤을 뿐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철대산은 애써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엽소군이 보기에도 심한 고통을 감내하는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철대산의 몸은 한마디로 숨을 쉬고 살아 있 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무슨 흉기에 베었는지 가슴은 온통 속뼈가 드러날 정도로 헤집어져 있었고, 옆구리와 두 다리에서도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엽장천이 묵직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대산, 얼마나 견딜 수 있겠느냐?" "서너 시간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철대산은 비록 태연하게 대답했으나 그 말은 곧 자신이 서너시간 후에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엽장천은 일시 복잡한 신색이더니 재차 침착하게 물었다. "내가 지시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일곱 개의 섬을 모조리 뒤졌지만 배는 한 척도 남김없이 파괴되 어 있었습니다." "간악한 놈들, 실로 철저하게 함정을 파 놓았구나!" "해서, 급히 뗏목을 하나 만들었습니다만 저 성난 파도를 견딜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철대산은 자신의 등뒤 쪽을 가리켰다. 그 뒤쪽 절벽 아래에는 소나무 십여 그루를 칡덩굴로 엮어 만든 뗏목이 매어져 있었다. 엽장천은 빠르게 뗏목을 대충 살피더니 위엄이 깃들인 음성으로 분부했다. "저 정도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대산, 어서 군아를 데리고 이 곳에서 떠나라." 철대산의 얼굴에 일순 놀람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도주님께선… 설마 떠나지 않고 이 곳에 그냥 머무르시겠단 말입 니까?" "나는 아직 할일이 남아 있다." "하지만 저는 중상을 입어 도련님을 끝까지 보호할 수가……." "대산, 여기에서 동쪽으로 십 리 가량 곧장 나아가면 조그만 돌섬 하나가 있다. 우선 군아를 그 곳에까지만이라도 무사히 데려다 주 기를 부탁한다." 엽장천의 이 한 마디는 철대산을 더욱 당혹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도저히 자신이 저 무서운 파도 속을 뚫고 엽장천이 말한 돌 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뿐인가? 설령 천운으로 그 곳까지 당도한다고 해도 자신은 곧 몸 에 입은 상처로 인해 죽을 몸이다. 그렇다면 그 후에는 도대체 누가 엽소군을 보살핀단 말인가? '도련님의 목숨보다 중요한 일이 대체 무엇이길래, 도주님께선 이 곳에 남으시려 한단 말인가?' 철대산은 그렇게 묻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았으나 꾹 눌러 참았 다. 그는 엽장천이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 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떨리는 어조로 이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거기에도 이미 놈들의 마수가 뻗어 있다면……."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엽장천의 대답은 무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확고부동했다. 철대산의 거구가 부르르 진동했다. 그는 곧 만면에 비장한 각오의 빛을 띤 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이 대산의 숨이 붙어 있는 한, 무엇도 도련님을 어 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맙다, 대산." 엽장천의 두 눈에 언뜻 고통의 빛이 스쳤다. 그의 시선이 문득 아 들 엽소군에게 향했다. 이미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엽소군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아버지……." "군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염려 마 라. 이 아버지는 절대 쉽게 죽을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엽장천은 사랑하는 아들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년 엽소군의 몸이 일순 격하게 떨렸다. 그는 눈물이 나오는 것 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내리숙였다. 엽장천의 온화하면서도 위엄 있는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군아야, 이 아비는 네가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영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서 듣거라." 엽소군은 대답 대신 고개를 힘있게 끄덕여 보이며 눈물 어린 눈으 로 부친을 올려다보았다. "첫째, 지금부터 네 성은 엽가가 아닌 사마(司馬)씨라는 것을 명 심해 두어라. 따라서 네 이름은 엽소군이 아닌 사마소군(司馬小 君)이다." '사마소군?' 엽소군의 맑은 눈망울이 일순 의아함으로 가득 물들었다. 엽장천은 그러한 아들의 얼굴을 은은한 정광이 서린 눈으로 응시 하며 위엄 있게 말을 이어 갔다. "의아해 할 것 없다. 이 아비의 본래 성이 사마씨였으니까. 시간 이 없어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없는 게 안타깝구나." 엽장천은 여기서 잠시 말을 끊더니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 었다. 그것은 하나의 동전이었다. 이 동전은 기이하게도 하얀 빛깔을 띠 고 있었으며, 다른 동전들처럼 가운데 구멍도 뚫려 있지 않았다. 엽소군이 무심결에 그것을 받아 살피니, 동전 가운데 하나의 글씨 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천(天)> 엽장천은 아들이 동전을 받아 들자, 문득 복잡한 신색으로 폭풍우 가 휘몰아치는 암천장공을 올려다보았다. "군아야, 만약 하늘의 도움으로 오늘의 액겁에서 벗어난다면 중원 으로 가서 천마사로(天魔四老)라는 분들을 찾도록 해라. 그리고 그분들에게 그 동전을 보여 주면 너를 맡아 줄 것이다. 그 후의 일은 그분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단 천마사로 외에는 어떤 인물에게도 그 동전을 보여 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만약 이 점을 망각한다면 너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버지……!" 엽소군은 고개를 숙이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 때 돌연, 삐익 하는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섬 쪽에서 들려 왔 다. 연이어 몇몇 그림자들이 유령처럼 빠르게 엽장천들을 향해 날아오 기 시작했다. 엽소군은 몇 차례 눈을 깜박이다가 깜짝 놀랐다. 그들의 믿을 수 없도록 빠른 몸놀림도 그렇거니와 모두 아는 얼굴들이었기 때문이 다. "아니? 저들은 공야노인과 황약사, 그리고 용씨 사형제가 아니예 요?" 순간, 엽장천의 두 눈에서 바위라도 꿰뚫을 듯한 무서운 신광이 뻗어 나왔다. "저들뿐만이 아니란다. 이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거의 태반이 지금 이 아비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이 한 마디는 엽소군을 엄청난 충격과 놀라움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몰려드는 마을 사람들과 부친의 얼굴 을 번갈아 응시했다. "어, 어찌 그런 일이……?" "모든 것이 내 실수다. 놈들은 이미 나를 겨냥해 오래 전부터 완 벽한 함정을 파고 있었는데, 나는 그러한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 고 있었던 것이다." 엽장천의 얼굴이 섬뜩하도록 무심하게 굳어졌다. 소년 엽소군은 그처럼 무서운 부친의 표정을 난생 처음 보았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함정이라니요? 아버지가 저들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이 아비는 저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다. 그리고 저 들 또한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저들은 단지 누 군가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들일 뿐이다." "누군가라면……?" 엽소군이 재차 묻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없다. 어서 떠나도록 해라, 대산!" 엽장천이 철대산을 향해 위엄이 담긴 어조로 무겁게 소리쳤다. 철대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는 순식간에 이십여 장 앞까지 다가온 무리들을 힐끔 응시한 후 재빨리 엽소군의 몸을 안아들었 다. 엽소군은 몸부림치며 그의 팔에서 빠져 나오려 했다. "안 돼요! 아버지도 같이 가야 해요!" 그러나 그 사이 철대산은 그의 몸을 껴안고 이미 뗏목 위에 몸을 날려 내려서고 있었다. 엽장천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들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걱정 말아라. 저들 정도로는 이 아비를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노리는 한 가지 물건이 있는 장소를 오직 나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마디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으나 엽소군은 깊이 음미해 볼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 그 순간 철대산이 뗏목에 연결된 밧줄을 풀고 몸을 우뚝 세웠다. 엽장천과 그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두 사람의 눈길은 마치 활화산의 불길처럼 뜨거웠다. "도주님……." "부탁한다, 대산!" 엽장천이 말했다. 철대산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엽장천이 희미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도 따라 웃어보였 으나 눈동자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꽈릉－! 돌연, 굉렬한 굉음이 진동하며 뗏목이 쭉 밀려 나갔다. 엽장천이 파도를 향해 일 장을 쳐내어 뗏목을 밀어 낸 것이었다. 엽소군이 부르짖었다. "아버지!" 그러나 엽장천은 마치 천 년 석상인 양 우뚝 선 채 한 마디 말도 없이 멀어져 가는 뗏목을 잠시 응시하더니 느릿하게 돌아섰다. 슉－! 그의 신형이 다음 순간 몰려오는 무리들 쪽 허공으로 높이 솟아올 랐다. 돌연 사위를 쩌렁쩌렁 울리는 웅후한 대갈성이 그의 입에서 터져 울렸다. "와하하하… 이 놈들아! 나, 사마장천이 여기에 있다!" 새하얀 섬광이 눈부시게 일어나며 무리들을 휘감아 갔다. 몰려들던 무리들이 놀라 사위로 분분히 흩어졌다. 무리 가운데 누군가 음산하게 소리쳤다. "포위해라!" 엽소군은 부친의 모습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다. 뗏목이 점차 멀어지면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 올 뿐 모든 것이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아버지!" 엽소군은 미친 듯이 목메어 소리쳤다. 그러나 그 외침 소리는 곧 광란하는 파도 소리에 삼켜지고 말았 다. 철대산은 행여 엽소군이 파도 속에 뛰어들세라 왼팔로 꽉 껴안았 다. 사력을 다해 나머지 오른팔로 뗏목을 저어 가는 그의 눈에도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제 4 장 혈풍향(血風香) ━━━━━━━━━━━━━━━━━━━━━━━━━━━━━━━━━━━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많다. 하늘과 땅을 바꿔 놓는 일이 그렇고, 바다를 흙으로 메워 놓는 일 이 그러하며, 사내로 하여금 아이를 낳게 하는 일이 그러하다. 어둠과 폭풍의 바다, 그것을 뚫고 이십 리 뱃길을 간다는 것은 사 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철대산이 천부의 괴력을 지녔다고는 하나, 목숨이 경각 에 달린 엄중한 중상의 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말할 나 위가 없다. 그러나 철대산을 끝내 해내고야 말았다. 집채만한 파 도더미에 몇 번이나 휩쓸릴 뻔한 위기를 극복하고 돌섬이라는 무 인도에 당도한 것이다. 그렇다. 생사를 도외시한 인간의 집념으로 해내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번쩍－ 꽈르르－! 이 조그만 돌섬에도 폭풍은 예외 없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철대산은 거의 탈진상태로 뗏목에서 내려서며 주위를 살폈다. 그의 얼굴에 문득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시 커먼 바위들만 가득할 뿐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놈들의 마수가 여기까지는 미치지 않은 모양이군." 긴장이 풀린 탓인가? 철대산은 하늘이 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때 의식을 잃고 있던 엽소군이 그의 품에서 가벼운 신음성과 함께 눈을 떴다. "대산 아저씨……." "도련님, 정신을 차리셨군요?" "여기가 어디……?" 말을 하다 말고 엽소군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악몽 같은 기억들 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는 비로소 여기가 어딘지 짐작한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철대산의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한 것을 발견했다. "대산 아저씨, 괜찮아요?" "허허… 아직 괜찮… 우욱!" 철대산은 대답하다 말고 갑자기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 다. 그것은 시커멓게 죽은 피였다. "대산 아저씨!" 엽소군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다음 순간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철대산의 얼굴에 불그스레한 화색이 감도는 것을 본 것이 다. 철대산의 손끝이 그 순간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며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은 이른바 죽음 직전의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이 라는 것을. 그것은 마치 촛불이 꺼지기 직전, 더욱 밝은 빛을 뿜 어 내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철대산은 그러한 내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빙그레 웃 어 보였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도련님." 그러나 상황을 모르는 엽소군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대산 아저씨마저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하고 걱 정했어요." "헛헛… 천하의 이 철대산이 겨우 이 정도로 쓰러진대서야 말이 안 되지요." 말은 비록 그렇게 했지만 그의 내심에는 형용할 수 없는 비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죽을 몸이다. 하지만 이런 풀 한 포기 없는 섬에 어 찌 도련님을 혼자 두고 편안히 숨을 거둘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설령 폭풍이 멎는다 해도 망망대해의 가운데 있는 이 섬 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며,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철대산은 무슨 수를 쓰든지 엽소군이 살아남을 수 있는 대책을 만 들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다.' 철대산은 풀먹인 솜처럼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몸 속의 피도 거의 다 메마른 듯 가슴의 상처 부위에는 더 이상 피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그는 휘청거리며 엽소군의 손을 잡았다. "도련님, 여기는 위험합니다. 가능한 높은 곳으로 가 있어야 파도 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엽소군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흠칫 놀랐다. 마치 얼음장을 만진 듯 철대산의 손이 차가웠던 것이다. "대, 대산 아저씨! 손이 왜 이렇게……." 엽소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철대산이 돌연 안색을 돌처 럼 딱딱하게 굳히며 재빨리 그의 몸을 보호하듯 껴안았다. 엽소군이 어리둥절하여 입을 열려는 순간이다. 철대산의 입에서 잔뜩 긴장이 담긴 외침성이 흘러 나왔다. "누구냐?" "……!" 엽소군은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힐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이 곧 크게 뜨여졌다. 오륙 장 앞, 어느 새 나타났는지 한 사람이 유령처럼 우뚝 서 있 었다. 철대산은 그가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어둠의 한 귀퉁이에서 솟아난 양 묵묵히 서 있는 그림자. 그는 일신에 먹물처럼 검은 흑의장포를 걸쳤고, 얼굴 또한 깊이 눌러 쓴 검은 죽립에 가려져 있어 용모조차 알 수 없었다. 왼손에는 검은 광채가 번들거리는 묵장(墨杖)을 들었는데, 그 괴 이한 형태로 보아 한눈에도 예사로운 병기가 아닐 성싶었다. 그러나 정작 철대산이 놀란 건 그 괴이한 겉모습 때문이 아니었 다. 그는 상대방에게서 알 수 없는 위압감과 사괴한 기운을 느꼈 다. 그것은 철대산이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강렬한 기운이었다. '고수다!' 철대산은 가슴에 찬바람이 이는 느낌이었다. 설마하니 이 곳에까지 놈들의 마수가 뻗쳤단 말인가? 철대산은 절망감을 느꼈다. 더욱이 몸조차도 가누기 어려운 자신 을 생각하자 눈앞이 깜깜할 지경이었다. "누구냐고 물었소?" "……." "귀하는 귀머거리요?" "……." 어찌 된 영문인지 흑의죽립인은 돌부처처럼 미동도 않고 선 채 전 혀 대답이 없었다. 철대산의 안색이 일시 복잡하게 변화를 일으켰다. '이 인물에게서는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문득 철대산은 상대가 선유도 의 피바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게 용건이 없다면 이만 실례하겠소." 철대산은 그러한 추측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휘청거리는 걸음걸이 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며 견딜 수 없도록 잠이 쏟 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죽음을 예고하는 잠이었다. 철대산은 여기서 쓰러지면 영원히 깨어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 다. 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의식을 회복하려 했다. "대산 아저씨!" "……!" 철대산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고개를 돌 려 흑의죽립인을 바라보았다. 흑의죽립인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애초부터 철대산이 몇 걸음 못 가 쓰러지리 라는 것을 예측이나 한 것처럼 보였다. 철대산의 얼굴근육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나… 철모는… 귀하가 누군지… 모르오. 그렇지만 한 가지 부탁 하오." "……." "만약 귀하에게 우리 도련님을… 죽일 마음이 있다면 고통 없이 단칼에 죽여 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 도련님을 중원까지 데 려다… 주시오. 만약 후자를 택하여 주신다면… 죽어서도 그 은혜 를……." 여기까지 간신히 말한 철대산은 갑자기 목에서 끄르륵 하는 소리 를 내더니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아저씨!" 엽소군의 안색이 창백해진 채 그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철대산은 다시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절명(絶命)이었다. 엽소군은 잠시 넋 나간 얼굴이더니 곧 대성통곡을 했다. 울지 않으려 했으나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 버지 엽장천과 헤어질 때부터 억눌러 왔던 울음이었다. 엽소군은 정말 서럽게 슬피 울었다. 그것은 철대산의 죽음을 슬퍼 하는 울음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충격과 고통을 달래기 위한 것이 기도 했다. 하지만 엽소군은 곧 울음을 그쳐야 했다. 흑의죽립인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제 나도 곧 죽을지 모르겠구나!' 엽소군은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 망치지는 않았다. 그는 흑의죽립인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짐 작하고 있었다. 자신은 달아날래야 달아날 수도 없고, 더욱이 여 기에는 달아날 장소조차 없는 것이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엽소군의 등뒤에서 멈추어졌다. 엽소군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내리감 았다. '모든 게 끝났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흑의죽립인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지 며 부드럽게 묻는 게 아닌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람 소리처럼 스산하면서도 위엄이 깃들인 음성이었다. 엽소군은 전신을 흠칫 떨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뜨고 흑의죽 립인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나를 죽이지 않을 건가요?" "나는 너를 죽일 아무런 이유도 없는 사람이다." "소군… 제 이름은 소군이에요." 엽소군은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흑의죽립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독백처럼 말했다. "성(姓)은 사마씨겠군." 이 나직한 한 마디는 엽소군을 재차 기이한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 다. 그는 부친 엽장천이 자신과 헤어질 때 남겼던 말을 퍼뜩 뇌리에 떠올렸다. 엽장천도 그에게 본래의 성(姓)이 사마씨라고 했지 않은가? '도대체 아버지는 왜 성을 바꾸고 살아오셨을까? 그리고 이 사람 은 아버지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갑자기 구름 같은 의혹이 밀려와 그를 휘감았다. 그렇다. 상황으로 보아 그의 성(姓)이 사마(司馬)라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었으며, 여기에는 깊은 내막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구나. 내 이름은 이제부터 사마소군이다. 나는 그 사실을 인 정해야만 한다.' 엽소군… 아니, 사마소군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 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내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 덕였다. "맞아요. 아저씨는 제 아버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방금 죽은 이 인물은 중원팔의(中原八義) 가운데 한 명인 대력패 왕(大力覇王) 철대산이다. 본래 중원팔의가 모시는 인물은 백의성 검(白衣聖劍) 사마장천임을 세상이 다 아는데… 어찌 내가 모르겠 느냐?" '중원팔의는 뭐고, 백의성검은 또 뭐란 말인가?' 사마소군은 갈수록 어리둥절한 느낌이었다. 그는 그제야 부친이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던 무림고수였음을 어렴 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마음의 평정을 찾은 사마소군은 곧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이제야 아저씨가 내게 아무런 악의도 없으며, 우리 섬마을 을 휩쓴 액겁과도 관련이 없음을 알겠어요." "……." "아저씨는… 누구세요?" "……." 흑의죽립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마소군을 응시한 채 잠시 침 묵하더니 이윽고 느릿하게 입을 떼었다. "말해 줘도 너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정 알고 싶다면 말해 주겠 다. 내 이름은 석우생(石羽生)이라고 한다." "석우생… 좋은 이름이군요. 그런데 아저씨는 무슨 일로 이런 외 딴 섬에 오게 됐지요?" 이 질문은 어찌 생각하면 매우 당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 이 사마소군의 입을 통해 나오자,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 다. 그것은 사마소군의 해맑은 두 눈과 넓은 이마에서 순진무구한 대범함이 발산되기 때문이었다. 흑의죽립인 석우생은 그러한 사마소군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느릿 하게 대답했다. "나는 본래 한 달 전부터 이 곳에 살고 있었다. 그것은 한 가지 조사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알려고 하지 마라." "……!" 사마소군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많은 질문을 한 것 같군요." "그 말은 틀렸다. 너는 많이 묻지 않았다. 내가 지금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지금 우리 주위에 엿듣는 쥐새끼들이 있기 때문이다." '쥐새끼들이라고?' 사마소군의 뇌리에 순간,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바싹 긴장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위에는 쥐 새끼는 고사하고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폭풍도 어느 샌가 잠잠해져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방에는 무거운 정 적만이 깔려 있었고, 가끔씩 빗방울이 마지막 몸부림처럼 떨어져 내릴 뿐이다. 검푸른 파도는 아직도 높게 일렁이고 있었으나 동녘 하늘에서는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여기저기 검은 바위와 암초들만이 음산한 괴기를 풍기며 간밤의 끔찍한 악몽을 되새겨 주는 듯했다. 사마소군은 갑자기 알 수 없는 슬픔이 조수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 꼈다. 그는 방금 전 석우생이 한 말은 어느 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때였다. 석우생이 손을 뻗어 사마소군의 어깨를 감싸안더니, 오른쪽 방향을 향해 차가운 음성을 흘려 냈다. "어느 방면의 쥐새끼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래 살고 싶으면 어서 빨리 이 곳에서 사라지는 게 좋을 것이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휙－ 휘익－! 주위의 크고 작은 바위들 틈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듯 일곱 그림자 가 나타나더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석우생과 사마소 군을 포위했다. 그러나 석우생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들을 차례로 쓸어 보았다. 그들 칠 인(人)은 모두 일신에 핏빛처럼 붉은 홍의를 입고 있었 다. 두 눈만을 제외하고는 얼굴까지도 붉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어 실 로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모습들이었다. 사마소군은 비로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석우생의 팔을 힘껏 붙들었다. '저 사람들의 눈빛은 너무도 독살스럽구나! 아마 유모에게 들었던 늑대들의 피에 주린 눈빛이 저와 같을 것이다.' 그런 그의 내심을 헤아린 듯 석우생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이야, 조금도 무서워할 것 없다. 그래 봐야 저들은 여전히 쥐 새끼들일 뿐이니까." 그 때 일곱 복면인들 가운데 한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살기 어린 음성을 발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네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겠다. 그러나 네가 진정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이 어른의 말을 잘 들어라." "귀를 씻고 경청하겠으니, 어서 말해 보게나." "그 아이를 이리 내놓고 어서 이 곳을 떠나거라." "그 두 가지를 다 들어 줄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들어 줄 수 있 네." 석우생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나직하게 웃더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내 물건도 아니니 내가 내놓을 처지가 못 되고, 내가 이 곳을 떠나도록 하겠다." "흐흐… 그것도 괜찮겠지." 우두머리인 듯한 홍의복면인은 음산하게 괴소를 지으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석우생은 손을 들어올리더니 죽립을 더욱 깊이 눌러 썼다. "하지만 나는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처리할 일이 있는데, 그대는 아량을 베풀어 편리를 봐줘야 될 걸세." "빌어먹을, 그게 무엇이냐?" 홍의복면인은 귀찮다는 듯이 냉막성으로 물었다. 석우생은 대답 대신 문득 사마소군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야, 너는 알겠느냐?" 느닷없는 이 질문에 사마소군은 움찔했으나, 그 순간 번개같이 뇌 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제 짐작이 맞을지 모르지만… 아마 쥐새끼들을 잡는 일이겠지 요." "호오! 바로 맞추었다." 석우생은 사마소군의 침착한 대답에 나직한 탄성을 발하더니 재차 물었다. "아이야, 너는 그 쥐새끼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겠구나?" "그 쥐새끼들은 정확히 일곱 마리로, 아저씨 앞에 있답니다." 사마소군은 빙긋이 웃었다. 그의 대답은 너무나 태연하고 여유만 만해서 석우생은 정말로 놀라고 말았다. '이 아이는 매우 영리하구나. 더욱이 굳은 심성을 지녔으며, 용기 와 담력 또한 보통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 이 전에 그의 입에서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핫핫핫… 네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다. 그러면 이 아저씨는 지금 부터 쥐새끼들을 없애 보겠다." 석우생의 이 웃음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기 이한 마력이 있었다. 사마소군은 그에 대한 인상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원래 석우생에게서는 잿빛 하늘처럼 음울하고 우울한 기운이 느껴 졌으나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만은 청명한 가을의 햇살 어린 하늘 처럼 환해지는 것이다. 사마소군도 따라서 웃었다. 그러나 이 웃음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홍의복면인이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듯 몸을 부 르르 떨더니 수중의 검을 번쩍 뽑아 든 것이다. "어리석은 놈! 네 목이 얼마나 질기고 단단한지 시험해 봐야겠 다!" 연달아 나머지 여섯 홍의복면인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숨막힐 듯한 살기의 소용돌이가 장내를 휩쓸었다. "죽여라!" 냉혹한 일갈이 울려 퍼졌다. 우측의 한 홍의복면인이 석우생의 가 슴을 노리고 득달같이 덮쳐 들었다. 그 기세는 벼락과도 같아 눈 깜짝하기도 전에 삼 검(三劍)을 발출 했다. 파파팟－! 그 검광은 지독하리만큼 빨라, 일순간에 석우생의 전후좌우를 차 단하며 조여 들었다. "삼십육식(三十六式) 단혼검법(斷魂劍法)? 이제 보니 너희들은 음 산(陰山) 유령곡의 유령칠괴(幽靈七怪)였구나?" 석우생의 어깨가 가볍게 진동했다. 공격해 오던 홍의복면인은 석우생이 피할 생각조차 않고 놀란 듯 물어 오자, 잔혹한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 너는 너무 늦게 알았……." 그의 말과 동작이 돌연 뚝 끊겼다. 어찌 된 판인지 석우생은 어느 새 유령처럼 옆으로 비켜나 있고, 자신의 검은 애꿎은 허공만 베 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뒤……!' 그가 대경실색하여 풍차급전(風車急轉)의 신법으로 빙글 돌아서는 순간이다. 그의 시야에 괴이하게 구부러진 손가락 세 개가 자신의 정수리를 향하여 쏘아져 오는 것이 보였다. "헉!" 피해야 한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미간이 뜨거운 인두로 지진 듯 화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퍼억－!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는 즉사했다. 두개골이 산산이 박살난 채 검을 떨어뜨리고 쓰러지는 시신의 모 습이 나머지 여섯 사람의 눈에 비쳤다. 그것은 너무나 창졸간에 벌어진 광경이었다. 여섯 홍의복면인들은 일시에 넋을 잃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석우생이 땅에 떨어지는 동료의 검자루를 절묘하게 발끝으로 차올 리는 것을 본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슈우욱－! 유성처럼 퉁겨 날아간 그 검은 쏜살같이 또 한 명의 목을 관통했 다. "으아악－!" 엄청난 경악과 불신에 담긴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목덜미에 검이 꿰어진 그 몸뚱어리는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나가 떨어졌다. "……!" 나머지 오 인(人)은 그대로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뜨여졌다. 그들은 창졸간에 벌어진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석우생이 무슨 수법을 펼쳐 자신의 동료들을 죽였 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석우생은 그들이 생각을 굴릴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어느 새 다시 괴이하게 오므라져 섬광처럼 앞으로 쏘아 져 나간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 비로소 그 수법을 알아본 듯 누군가의 입에서 경 악성이 터졌다. "이, 이제 보니 저것은 혈견휴천마혈선지(血見休天魔血線指)가 분 명하다!" 그 외침을 듣자, 모두가 눈빛이 사색이 된 채 급급히 몸을 날려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너무나 늦고 말았다. 연달아 살과 뼈가 터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퍼퍽－! "으아악!" "컥－!" 삽시간에 네 명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지듯 차례로 고꾸라져 갔다. 그들은 모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나뒹굴었는데, 신기하리만 큼 그 동작이 똑같았다. 그들의 미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네 줄기 피둥지가 둥근 호선을 그 리며 땅바닥으로 이어졌다. 이제 단 한 명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는 말 그대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석우생은 원래 서 있던 자리에 솜털처럼 가볍게 내려섰다. 그러한 그의 동작은 그야말로 호흡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그가 마치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 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세상에…….' 사마소군은 이처럼 놀라운 광경은 난생 처음 보는지라 무서움 보 다도 신기함이 앞섰다. 석우생의 눈부신 동작과 기괴한 솜씨, 사 마소군은 한바탕 환상을 본 듯했던 것이다. 이 때 홍의복면인의 공포에 찌든 음성이 울려 퍼졌다. "혀… 혈풍향(血風香)! 귀하는 과연 혈풍향이었구나!" "너무 늦게 알았다, 너는." 석우생의 무심한 대답이었다. 그 음성은 매우 나직해서 차라리 부 드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홍의복면인의 귀에는 그것이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크게 들렸다.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석우생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한 희미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 다. "유령곡의 인물들은 후퇴를 모른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그런 것만도 아니군." "우, 우리 유령곡과 귀하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찌 이리 잔혹 할 수가……." "나는 진작부터 유령곡과는 원한관계가 생기리라고 예측하고 있었 다." 석우생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홍의복면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더 이상 후퇴해 봐야 소용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순간, 그는 갑자기 짐승 같은 괴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좋다! 하지만 네놈은 언젠가 반드시 이번 일에 끼여 든 걸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다!" 이 저주에 찬 울부짖음이 끝나자, 그는 돌연 자신의 천령개를 손 끝으로 찍어 갔다. 퍽－! 붉은 피가 튀었다. 그는 비명도 없이 앞으로 고꾸라져 죽었다. 석우생은 그가 자결하리라는 것을 이미 예측했던 듯 물끄러미 시 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다소 질리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기묘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우생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그 때 석우생이 그를 향해 조용히 몸을 돌려 다가왔다. 그는 사마 소군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녀석, 뭘 그리 넋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느냐?" "혈풍향… 그것이 아저씨의 별호인가요?" "그렇다. 너는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없어요. 하지만……." 사마소군은 뜻 모를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단지 저들이 죽기 전 매우 놀라는 것으로 보아 무림계에서 상당 히 무서운 인물이라는 걸 알겠어요." "녀석……." 석우생은 때마침 밝아 오는 동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폭풍우는 완전히 가라앉았고 바다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석우생은 문득 몸을 돌려 해변가로 걷기 시작했다. "자, 이제 그만 떠나자." "어디로 말인가요?" "물론, 중원이다." "아……!" 사마소군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는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한 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 나를 도와 주는 것이지요?" "대력패왕 철대산은 너를 죽이거나, 아니면 중원(中原)으로 데려 다 주기를 원했다. 나는 너를 죽일 이유가 없으니 중원에 데려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 대답은 약간 괴상한 구석이 있었다. 또한 언뜻 들으면 무심하 고 삭막하여 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마 소군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배도 없는데, 무슨 수로……?" "녀석, 내가 이 섬에 날아온 줄 아느냐?" "그럼 배가 있단 말인가요?" "물론이다." 석우생의 뒷모습이 바위 저편으로 사라졌다. 사마소군의 두 눈에 맑은 광채가 반짝 빛났다. 그는 곧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죽은 철대산을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꼬리에 이슬이 맺혔다. "안녕, 아저씨는 내 마음 다 알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사마소군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 은 곧 석우생이 향한 방향으로 사라졌다.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한 태고의 적막 속에 가라앉았다. 해변가의 파도 소리만이 간간이 불어 오는 해풍(海風)에 뒤섞여 죽은 시신들 위를 스쳐갔다. ━━━━━━━━━━━━━━━━━━━━━━━━━━━━━━━━━━━ 제 5 장 이별(離別) ━━━━━━━━━━━━━━━━━━━━━━━━━━━━━━━━━━━ 복우산(伏牛山). 하남지방과 호북지방을 가로지르는 울창한 대산맥. 멀리서 보면 굽이쳐 흐르는 산세가 마치 거대한 한 마리 소가 웅 크리고 있는 듯하다 하여 달리 와우산(臥牛山)이라고도 불린다. 그 복우산맥을 따라 꽤 깊숙이 들어가면 외방악(外方嶽)이라는 준 령이 있는데, 그 험준함이 주위의 어느 산과도 비교할 바가 아니 었다. 하지만 이 외방악은 하남과 호북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가장 빠 른 지름길이었다. 자연 갈 길이 바쁜 과객들은 이 곳을 지나게 마련이었고, 그에 따 라 이 곳에는 조그만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 조그만 촌락을 주양관(朱陽關)이라 불렀다. 산세에 들러싸인 지형적 영향으로 늘 하늘이 자욱한 풍사(風沙)로 뒤덮여 태양이 언제나 붉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때는 매서운 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십일월 하순. 잿빛으로 잔뜩 흐린 하늘에 초저녁 무렵부터 눈발이 희끗희끗 흩 날리기 시작했다. 어느 한순간 그 눈발을 맞으며 주양관 입구에 두 과객이 나타났 다. 그들은 검은 죽립을 눌러 쓰고 검은 옷차림에 신발까지도 온통 검 은색으로 두른 흑의죽립인과 십이 세 가량으로 보이는 소년이었 다. "아함……." 여인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목젖이 다 보이도록 하품을 했다. 의미 없는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찔끔 묻어 나며 속눈썹을 적셨 다. 초점이 풀려 게슴츠레한 그 눈에는 권태와 졸음이 가득했다. 일견 사십 줄에 접어든 나이를 말해 주듯 그녀는 눈가의 잔주름을 짙은 화장으로 감추고 있었다. 몸에는 화려한 홍의를 입었는데, 용모로 말하자면 아름답지도 못 나지도 않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굳이 한 가지 특징을 찾는다면 젖가슴과 둔부가 유난히 크고 펑퍼 짐하다는 점이리라. 주양관의 촌민들은 이 여인을 장과부라고 불렀다. 그녀는 주양관 끝 언저리에 위치한 낡고 허름한 주막의 주인이었 다. 남편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는 점원 하나 없이 장사를 꾸려 나갔다. 평소 그녀는 입버릇처럼 자신이 젊었을 때는 낙양거리를 웃음하나 로 휘어잡았던 명기(名妓) 중의 명기였다고 자랑삼아 떠들어대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틀림없이 어느 싸구려 홍등가 출신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 장과부의 주막은 매우 작고 초라하여 일 년 내내 고작해야 열 명 남짓한 손님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녀 는 가끔 이웃 큰 성내(城內)의 마을로 나가 비싼 옷가지며 화장품 따위를 한 보따리씩 사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틀림없이 모든 손님에게 몸을 팔았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곳 주양관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장과부와 가까이 지내 려 하지를 않았다. 장과부, 그녀는 지금 삐걱거리는 낡은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망연 히 응시하고 있었다. 쌔애앵－! 스산한 바람이 싸락눈을 흩뿌리며 창문을 두드렸다. 장과부는 문득 추위를 느낀 듯 어깨를 추스르며 처량한 어조로 중 얼거렸다. "아아, 벌써 눈이 내리다니… 그렇다면 올해 장사도 끝났다는 말 인데……." 제아무리 이 곳으로 통하는 길이 하남과 호북을 잇는 첩경이라 해 도 눈이 내리면 그 누구든 고개를 넘을 엄두조차 못 내는 것이다. 장과부는 갑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행한 여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휴우, 이런 날에는 누가 와도 돈 한 푼 안 받고 선심을 쓸 텐 데." 그녀의 육체는 아직 뜨거웠다. 이렇게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은 어 쩐지 더욱 그랬다. "쯧, 보아하니 누구 하나 걸려들기는 틀린 것 같구나. 일찌감치 문이나 닫는 게 낫겠다." 장과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이 었다. '손님?'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뜨여지며 가득 이채로 물들었다. 두 과객이 막 주막의 입구에 나타난 것이다. 한 명은 온통 검은빛으로 전신을 두른 흑의인이었고, 또 한 명은 십이삼 세 가량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몸에 백의를 입고 있었으나 지금은 때에 찌들어 회의인지 흑의인지 아리송할 정도였다. 오랜 여행에 지친 듯 소년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년의 용모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 고 영준해 보였다. 그렇다. 이들은 바로 혈풍향 석우생과 사마소군이었다. '세상에, 어디서 저렇게 잘생긴 녀석이 나타났을까?' 장과부의 시선은 사마소군의 얼굴에 못박힌 채 좀처럼 떨어질 줄 을 몰랐다. 이 때 그녀의 귓속으로 바람 소리처럼 스산하면서도 위엄 있는 음 성이 파고들었다. "장사 안 하나?" 장과부는 그제야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밖에 세워 놓고 앉아만 있다니……." 말과 함께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쪼르르 달려나오며 호들갑스런 교소를 날렸다. "호호호… 장사를 안 하다니요? 자,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추운 데 어서 저 난롯가로 가 앉으세요." 반가워하는 폼이 마치 죽은 남편이라도 살아 돌아온 듯하다. 이윽고 석우생과 사마소군이 자리를 잡고 앉자, 그녀는 재차 교태 로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뭘 드릴까요? 웬만한 건 다 준비가 되겠지만 보다시피 여기는 궁 벽한 산촌이라……." "아무 술이나 한 병 하고 요기할 만한 것을 갖다 주게." "호호…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장과부는 풍만한 둔부를 한껏 교태롭게 살랑거리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음산한 옷차림새와 냉막한 어투가 다소 꺼림칙하긴 했으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녀는 야릇한 상상으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윽고 그녀는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석우생은 고개를 약간 내리숙인 채 말이 없었다. 사마소군도 묵묵히 창 밖을 응시하며 상념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사마소군은 품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조각칼로 보이는 조그만 소도와 하나의 목각상이었다. 목각상은 조그만 아기 사슴의 형상이었다. 이미 거의 만들어진 이 사슴 목각상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정교하 고 섬세했다. 그런데 이 사슴 목각상은 어쩐지 가련하고 슬퍼 보였다. 본래 사슴이란 가련하고 슬픈 동물이지만 한낱 목각상에서까지 이 런 기운이 나타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목각 상을 다듬는 사마소군의 마음 속에서 그러한 감정들이 응어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스슥－ 슥－! 사마소군은 이윽고 조심스럽게 목각상을 다듬기 시작했다. 무거운 정적 속으로 화롯불 타는 소리와 목각 다듬는 소리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울려 퍼졌다. 석우생은 그것을 보는지 안 보는지 여전히 돌부처처럼 아무런 반 응이 없었다. 이 때다. 장과부가 주방에서 모습을 나타내더니 술과 만두를 담은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까와는 달리 그녀의 상의 앞섶은 절반쯤 풀어 헤쳐져 있었다. 허리를 숙이는 순간, 그녀의 풍만한 유방이 살짝 내비쳤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음식을 다 내려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세 를 계속 유지한 채 요염함 웃음을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술은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대로 드세요. 여기 꼬 마 손님은 만두를……." 말하다 말고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사마소군의 손에 들려 진 사슴 목각상을 본 것이다.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손뼉을 치며 탄성을 터뜨렸다. "어머나! 어쩌면 이렇게 훌륭한 솜씨를 지녔지요?"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듯 계속 하던 일에만 열 중하고 있었다. 그러자 장과부는 사마소군의 옆에 바짝 다가앉더니 다시 한바탕 칭찬을 늘어놓은 후 은근한 어조로 물어 왔다. "어때요, 꼬마 손님? 만두값을 받지 않을 테니, 그 사슴 목각상을 내게 줄 수 없어요?" 사마소군을 대답 대신 고개를 묵묵히 내저었다. 장과부의 얼굴에 금세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안 돼요? 그럼 오늘밤……." 여기까지 말한 장과부는 문득 얼굴을 가볍게 붉히더니 급히 말머 리를 돌렸다. "나도 참 주책없지. 음,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만두 한 접 시를 더 주고 은자 세 닢을 얹어 주면." 사마소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장과부를 응시했다. "나도 주고 싶지만 안 돼요." "왜 안 된다는 거지요, 꼬마 도련님?" "이 사슴을 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거든요." "저런, 그게 누구지요?" 장과부가 서운한 듯 묻자, 사마소군은 대답 대신 시선을 들어 석 우생을 가리켰다. 장과부는 덩달아 석우생을 바라보더니 만면 가득 실망한 기색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분께 그것을 주려는 건가요?" 사마소군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장과부는 때마침 말을 걸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호호… 그럼 저분께 부탁해 볼까?" 장과부는 슬그머니 석우생의 옆자리에 앉더니, 의식적으로 몸을 그의 어깨에 기대며 콧소리 섞인 음성을 발했다. "이것 보세요, 손님.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한때 낙양에서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장음교(張陰敎)." 느닷없이 석우생의 입에서 흘러 나온 한 마디가 그녀의 말을 중단 시켰다. 장과부의 눈이 순간, 경악을 담고 크게 뜨여졌다. 그녀는 퉁기듯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자세를 바로잡더니 무섭 게 석우생을 노려보았다. 이 일련의 동작은 너무도 민첩하고 빨라 마치 그녀가 창졸간에 딴 사람으로 변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누구냐? 내 본명을 알고 있는 너는?" 소름끼치는 살기가 담긴 음성이며 비수처럼 예리한 눈빛이다. 여 차하면 당장이라도 살수를 펼쳐 낼 자세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그만 어리둥절해진 채 두 사람을 번 갈아 응시했다. 그는 방금 전만 해도 봄바람처럼 부드럽던 장과부가 갑자기 저렇 게 무서운 여인으로 변한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석우생은 여전히 원래의 고요한 자세를 잃지 않은 채 느릿 하게 술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장과부의 눈꼬리가 순간,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흥! 보아하니 따끔한 맛을 봐야……." 말하다 말고 그녀는 돌연 무엇을 보았는지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 다. 그녀의 시선은 막 술병을 기울이는 석우생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 다. 그러고 보니 석우생의 손은 사내의 손치고는 지나치리만큼 희고 섬세한 편이었다. 그 손의 약지(藥指)에는 푸른 광택이 영롱한 벽 록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장과부를 얼어붙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반지 때문인 듯했다. 그녀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황급히 허리 를 굽히고 코가 땅에 닿을 듯 절했다. "처, 천녀 장음교… 감히 석대야에게 불경죄를 지었습니다!" "됐다." 석우생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술잔을 들어올리더니 냉막 하게 말을 이었다. "네 방으로 들어가 있거라. 다시 부를 때까지……." "아, 알겠습니다." 장과부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뒷걸음질 치더니 황급히 안으로 사라졌다. 장내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마소군은 기이한 눈빛으로 석우생을 응시했으나 그는 묵묵히 술 잔만을 기울일 뿐이다. 석우생이 술을 마시는 모습은 약간 특이했다. 보통 사람은 술을 마시려면 대개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게 마련 이다. 그러나 석우생은 고개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단지 눌러 쓴 죽립 밑으로 술잔을 넣었다 뺄 뿐이었다. 그것은 식사를 할 때 도 마찬가지여서 사마소군은 아직까지도 그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나는 이 아저씨와 근 석 달 간이나 같이 있었는데도 아는 게 하 나도 없으니, 이처럼 우스운 일이 또 있을까?' 사마소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아저씨는 어떤 분이시지요?" 석우생은 기계적으로 술을 따르며 대꾸했다. "녀석, 너는 석 달 동안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한 줄 아느냐?" "아마 스무 번쯤……?" "그렇다면 이번에도 내 대답이 어떠리라는 것을 짐작하겠구나." 석우생의 담담한 대꾸에 사마소군은 실망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 다. "이름은 석우생, 별호는 혈풍향. 그것 말인가요?" "또 있지 않느냐?" "어떤 한 가지 일을 조사하기 위해 중원천하를 뒤지고 다닌다는 것 말인가요?" "그렇다." "휴……." 사마소군은 나직한 탄식성을 흘려 내며 그를 빤히 직시했다. "옛 성현들의 말씀 중에 한 사람을 가장 확실히 알고 싶을 때는 그 사람과 여행을 같이 해 보면 된다는 것이 있지요. 그러나 그 말도 틀린 말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겠어요."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정도만 해도 너는 이미 나 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우생의 조용한 이 대답은 사마소군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 말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만약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장을 한다 해도 너는 오래지 않아 알 아 낼 것이다. 그것은 네가 석 달 동안이나 나와 같이 행동하면서 내 체취를 익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럴 수가 없 지." "아……." 사마소군은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 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저씨를 보면 볼수록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 아지는 것 같으니 어쩌지요? 아저씨는 너무나 신비로운 사람이에 요." "뭐가 그리 신비하다는 것이냐?" "저는 처음에 아저씨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일 것이 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물론 무뚝뚝한 성품 때문이지요. 그러나 다니다 보니 정반대였어요." 사마소군은 잠시 사이를 두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예상 외로 아저씨는 많은 사람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방금 전의 아줌마처럼 깍듯이 아저씨께 공경을 표시했 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한 가지 결론을 내렸어요." "무슨 결론이지?" 석우생은 술잔을 느릿하게 내려놓으며 물었다. 사마소군은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으나 이윽고 결심한 듯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제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저씨는 어떤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분이에요. 그리고 그 조직은 중원의 어디를 가도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방대한 조직임이 분명해요. 제 추측이 틀렸 나요?" "……!" 막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석우생의 손이 순간, 흠칫 정지되는 듯했다. 눌러 쓴 검은 죽립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아래턱 이 화강암처럼 단단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기계적으로 술을 들이키며 억양 없는 음성을 흘 려 냈다. "만두가 식고 있다. 어서 먹어라." 이 한 마디는 결국 사마소군으로 하여금 아무리 따져 물어도 소용 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사마소군은 그만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만두를 먹지 않고 잠시 손을 멈추었던 사슴 목각상을 다시 다듬기 시작했다. 석우생의 나직하나 위엄 있는 음성이 재차 그의 귀를 두드렸다. "어서 먹으래도." "시간이 없어요. 이제 마지막 손질만이 남았으니, 다 끝내고 먹겠 어요." "시간이 없다니… 무슨 말이냐?" "며칠 전부터 느낀 생각이지만……." 사마소군은 계속 정성스럽게 사슴 목각을 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아저씨와 같이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게 분명해요. 그리고 이 산촌으로 들어오는 순간, 어쩌면 이 곳이 바로 아저씨 와 제가 헤어지게 되는 장소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 술잔을 들어올리던 석우생의 손이 다시 흠칫 경직되었다. '이 녀석은 나이에 비해 너무나 영리하구나.' 그는 한참 동안이나 사마소군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이윽고 조용 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 보았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뿐 이다." 사마소군은 고개를 들고 빙긋 웃었다. "역시 내 예감이 적중했군요." 언제나처럼 사마소군의 웃음은 맑고 보기가 좋았다. 그러나 석우 생은 그 웃음 뒤로 언뜻 스쳐가는 어두운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 다. 석우생은 습관처럼 손에 든 술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원래 나는 너를 중원땅에 올려놓은 후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 하 지만 왠지 네녀석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걱정 마세요. 설마하니 사내대장부가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겠 어요?" 사마소군은 짐짓 호기롭게 가슴을 펴 보였다. 석우생은 그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건 평범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내가 알기로 너는 어 떤 자들에 의해 암암리에 항상 쫓기고 있다." "……!" 사마소군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우울한 빛을 띠었다. 선유도의 그 악몽 같았던 하룻밤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석우생의 말대로 추적자들이 있었다면 바로 그 잔악한 무리들과 한패일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 곳으로 널 데려온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석우생은 천천히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외방악의 산중에는 내가 잘 아는 한 사람 이 살고 있다. 그는 비단 일신에 지닌 무공도 출중하거니와, 두뇌 로 말하자면 천하에 그 짝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사마소군의 맑은 두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니까 저를 이 곳으로 데려온 것은 바로 저를 그분께 맡기려 고……?" "그렇다. 하지만 그는 원래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라 잘 될지 모르 겠구나." 여기까지 말한 석우생은 문득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밖에는 어둠이 깔려 먹물이라도 뿌려 놓은 듯 깜깜했다. 사마소군은 그러한 그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 었다. "한 가지 물어도 돼요?" "무엇이냐?" "아저씨와 그분의 무예를 비교한다면 누가 더 높지요?" 이것은 매우 천진스러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석우생은 약간 뜻밖이었는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글쎄다. 그와 한 번도 싸워 보지 못해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절대 나의 아래는 아닐 것이다." 이 말이 떨어진 순간, 사마소군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가슴이 떨 리는 것을 느꼈다. '하늘이 도운다면 나는 어쩌면 아저씨처럼 뛰어난 무공을 배우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아버지 사마장천의 생사도 분명치 않고 자신은 추적자들에게 항상 생명의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에 있는 판이니, 무공은 반드시 배워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끔찍하게 죽은 어머니와 유모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서라 도 반드시 무공을 배워 복수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곧 석우생과 이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역시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아저씨……." 사마소군은 손에 들고 있던 사슴 목각을 그에게 내밀었다. 어느 새 그것은 정교한 형상을 드러낸 채 모두 완성되어 있었다. "이걸 받으세요." "왜 그것을 나에게 주려고 하지?" "아저씨는 제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훌륭하 신 분에게 데려다 주려 하고 있어요. 이건 비록 보잘것 없는 물건 이지만 은혜를 감사드리는 의미에서 드리는 거예요." "……." 석우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굳게 다문 채 사슴 목각상을 받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마소군은 자신의 선물이 하잘것 없는 것이라 그러는 줄 알고 얼 굴을 가볍게 붉혔다. "어서 받으세요. 지금은 가진 게 없어 이런 것밖에 드리지 못하지 만 이 다음에는 훨씬 좋은 것을 드리겠어요." 사마소군의 이 말은 구구절절 진심이 깃들여 있을 뿐 아니라 추호 의 가식도 없어 듣는 이를 감동케 하기에 충분했다. 석우생은 비로소 술잔을 내려놓더니 목각상을 받아 들었다. "고맙다." 사마소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석우생은 사슴 목각상을 찬찬히 살펴보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 더니 곧 조용한 음성을 흘려 냈다. "대신 나도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사마소군은 어깨를 활짝 펴며 힘있게 대꾸했다.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물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말씀해 보시라니까요."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나이가 많지 않다. 또한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몸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부터 나를 아저씨라 부르지 말고 형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석우생의 이 한 마디는 너무도 뜻밖의 것이어서 사마소군은 그만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말문조차 열지 못했다. 석우생의 입에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 나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왜? 내가 싫으냐?" "저, 정말 그렇게 불러도 되겠어요?" "그렇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 사마소군은 격동을 감추지 못하고 두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 눈물은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얼른 눈물 을 훔치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석우생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석형님께 아우 소군이 인사드립니다." 석우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마소군의 어깨를 잡고 일으 켜 세웠다. "일어나거라, 소군. 마음 같아서는 이 형이 너에게 자세한 신세내 력과 함께 얼굴을 보여 주고 싶다만은……." 여기까지 말한 석우생은 가벼운 탄식성을 발하더니 사마소군의 뺨 을 어루만졌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테니, 그 때까지는 괴상한 형을 두 었다고만 생각하거라." "그런 건 괜찮아요." 사마소군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 물이 맺혀 있었다. 석우생이 손을 움직여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라. 이 형은 여자처럼 눈물이나 흘리는 동생은 좋아하지 않는다." 사마소군은 활짝 웃어 보였다. 석우생은 그를 자리에 앉게 하더니 자신도 뒤따라 앉으며 품속에 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조그만 비단 보자기로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 었다. "받거라, 소군." "이건……?" "나중에 방에 들어가서 끌러 보거라." "알겠어요." 사마소군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고 비단 보자 기를 받아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석우생을 올려다보았다. "설마하니 형님께서는 지금……." "그렇다. 나는 지금 떠나려 한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 보다는 이 형이 미리 그를 방문해 의사를 타진하는 게 좋을 것 같 다." "……!" "늦어도 닷새 후에 돌아오도록 하마. 그 동안 너는 여기에 머물러 있도록 해라." "잘 알겠어요, 형님." 사마소군은 섭섭한 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닷새 후에 다시 볼 수 있다는 말에 위안을 삼았다. 그러자 석우생은 고개를 돌리더니 안쪽을 향해 나직한 일성을 흘 려 냈다. "장음교." 순간이다. 방문을 왈칵 밀어젖히며 장과부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그녀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극히 공경스런 어투로 입을 떼었다. "부르셨습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우를 잘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 본래의 그 무심하면서도 냉막한 음성이었다. 장과부의 허리가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그녀는 이미 안에서 모든 말을 다 엿듣고 있었던지라 지체 없이 사마소군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잘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장음교, 내 아우에게 되도록 쓸데없는 말은 삼가는 게 좋다." "명심하겠습니다." 장음교의 대답을 들으며 석우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마소군은 배웅을 하기 위해 따라 일어서려고 했으나, 석우생이 어깨를 가만히 누르는 바람에 다시 앉고 말았다. "이 형은 번거로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녀오마." 석우생은 곧 등을 돌리더니 문 밖으로 사라졌다. 장과부는 여전히 허리를 숙인 자세로 선 채 그를 배웅했다. 사마소군은 황급히 창가로 다가가 멀어져 가는 석우생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오늘따라 석우생의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하고 고독해 보인다 고 생각했다. '그래, 형님 말대로야. 지난 석 달 동안 형님의 체취를 피부로 느 낄 만큼 정이 들었나 보구나.' 자욱한 눈보라와 어둠이 석우생의 모습을 금세 삼켜 버렸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언제까지나 창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제 6 장 무도입문(武道入門) ━━━━━━━━━━━━━━━━━━━━━━━━━━━━━━━━━━━ 방은 초라했지만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거기다 장과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청소한 탓에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오랜 여로에 지쳐 있던 사마소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보금자리인 셈 이었다. 그러나 막상 잠자리에 들자, 생각과는 달리 좀처럼 잠이 오지 않 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사마소군은 몸을 뒤척이며 창문 밖으로 흩날리 는 눈발을 응시했다. 망연히 넋을 놓고 휘날리는 눈발을 바라다보니 문득 선유도에서의 처참했던 순간들이 다시 떠오르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날 벌어진 일들은 하나같이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뿐이 었다. 짐작이 가는 점들이 있다 하더라도 안개 속을 헤매는 듯 애매모호 할 뿐이었다. '아버님은 과연 무사하셨을까? 혹 돌아가신 건 아닐까? 그리고 아 버님이 찾아가 보라고 당부한 천마사로라는 분들은 어떤 분들이실 까?' 생각하면 그 모든 의혹들을 어디서 풀어야 될지 막막할 뿐이었다. 밤이 깊어 가면서 간간이 흩날리던 눈발은 폭설로 변하고, 바람도 세차게 변해 요란스럽게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마소군의 생각은 불현듯 석우생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석우생의 신비로운 무공 실력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역시 걱정 이 되었다. "쉬었다가 내일 가라고 할걸……." 생각해 보면 이제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에 게 석우생과 같은 의형(義兄)이 생긴 것은 그야말로 다행스런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석우생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그였으나, 온통 모든 관 심이 그에게 쏠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 때 문득 사마소군은 석우생이 남기고 간 비단 보자기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왜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사마소군은 맑은 두 눈에 이채를 떠올리며 침상의 머리맡 끝을 올 려다보았다. 석우생이 준 조그만 보따리가 거기에 있었다. 사마소군은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마침 잠도 안 오는 판이라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에 비단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풀자, 속에서 몇 가지 물건이 나 타났다. 그것은 한 통의 서찰과 가지런히 차곡차곡 쌓인 몇 장의 양피지, 그리고 손가락 굵기의 검은 원통이었다. 사마소군의 눈을 맨 처음 자극한 것은 바로 검은 광채가 번들거리 는 검은 원통이었다. 사마소군은 검은 원통을 집어 들다가 흠칫 놀랐다. 마치 얼음 덩 어리를 만진 듯 섬뜩한 한기가 손끝에 전해졌던 것이다. '대체 이게 뭐지?' 사마소군이 그 괴상한 물건을 이리저리 살피니, 아래쪽 겉부위에 두 개의 붉은 단추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붉은 단추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하 지만 그는 단추를 누르지는 못했다. 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등 줄기를 엄습했던 것이다. "서찰부터 읽어 보는 게 좋겠구나." 사마소군은 검은 원통을 내려놓고 서찰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한 마리 흑룡(黑龍)이 춤추듯 수려한 필체로 쓰여진 글귀가 나타났 다. <소군, 강호는 네 짐작보다 훨씬 험난한 곳이다. 언제 어디를 가 도 자신의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된다. 그러한 뜻에서 나는 한 가지 검법을 네가 혼자서라도 익힐 수 있 도록 쉽게 풀어 적어 놓았다. 너는 총명하니, 열심히 익힌다면 크게 깨닫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네 몸 하나만은 지킬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옆의 물건은 벽력신화통(霹靂神火筒)이라는 것으로, 무림 에서는 천하삼대마병(天下三大魔兵) 중 하나로 평가될 만큼 무서 운 암기통이니 조심스럽게 다루어라. 유사시에 벽력신화통의 붉은 단추를 누르게 되면 방원 오륙 장 이 내의 것은 모조리 잿더미로 변하게 된다. 거듭 세 번까지 사용이 가능하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네게 남 겨 두는 것이니, 최악의 사태가 아니면 절대 사용해선 안 될 것이 다.> 서찰의 내용은 그렇게 끝났다. 사마소군은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새삼 검은 원통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에, 이 조그만 물건에 그토록 가공할 위력이 담겨져 있었단 말인가?" 사마소군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았으나 석우생의 말이니 만큼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단추를 누르려고 했던 것을 상기하자, 등골 에 소름끼치는 것을 느꼈다. "휴우,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구나." 사마소군은 서찰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차곡차곡 쌓인 양피지 가 운데 맨 윗장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검(劍)이라는 것은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필승의 자신이 있을 때에만 뽑아야 한다. 이 도리를 무시하는 자는 결코 진정한 검객이라 말할 수 없다.> 매우 간단한 글귀였으나 언뜻 쉬운 듯하면서도 잘 이해가 가지 않 는 말이었다. 사마소군은 거듭 읽고 생각한 후에 다음 장을 펼쳐 들었다. <나는 네게 두 가지 검법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 첫째는 쾌(快)를 주맥으로 하는 검법이다. 이 검법은 원래 단 일 초뿐인 것으로 단천검법(斷天劍法)이라 부 른다. 단천검법은 일 대 일의 승부에 적합하며 비록 단 일 초뿐이라고는 하나, 그 속에는 기기묘묘한 수백 가지 변화가 숨어 있다. 두 번째 검법은 많은 적을 맞이했을 때 사용하는 세력 위주의 검 법으로, 이름은 탈정삼검(奪精三劍)이라 한다. 이 두 가지 검법만 완벽히 배운다면 강호의 어떤 고수라도 너를 함부로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단천검법, 탈정삼검……." 사마소군은 내심 흥분을 금치 못하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 무시무시한 이름만 보더라도 필시 보통 검법은 아닐 것이라고 사마소군은 추측했다. 비록 막연한 상상이지만 능히 그 엄청난 위 력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사마소군은 다른 일은 까맣게 잊고 세 번째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자세한 검법의 요결과 함께 익히는 방법, 자세 등이 그 림과 더불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맨 위에는 단천검법이라고 큰 글씨로 쓰여져 있고, 그 바로 밑에 는 이러한 글이 보였다. <쾌검의 첫번째 조검은 부동(不動)의 자세에 있다. 부동이라 함은 정(精), 기(氣), 신(神), 삼위일체의 상태를 일컬 음이다. 무릇 먹이를 노리는 맹수가 처음부터 득달같이 덤벼드는 법은 없 다. 사납고 광폭한 맹수일수록 일단 먹이를 눈앞에 두면 더욱 침 착하고 긴장하는 법이다. 봄바람처럼 느리고 부드럽게, 그리고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상대방 에게 다가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덮쳐 일격에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다. 그 기세는 마치 무엇인가 폭발하듯 사납고 빠르기 이를 데 없으 며, 일격필살의 확고한 신념이 깃들여 있는 공격인 것이다. 단천일검은 바로 그러한 일격필살의 방법과 신념에 바탕을 둔 것 이다. 최초에는 죽음 같은 부동의 자세에서 날벼락 같은 발검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바꾸어 말해 상대에게 전혀 방비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밑으로는 다시 수련방법과 자세가 그려져 있었다. 사마소군은 그림대로 약간 자세를 잡아 흉내를 내 보다가 다음 장 을 펼쳤다. 이 장에도 역시 검결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무릇 검을 쓰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가로 베고, 내리긋고, 휘젓고, 찌르는 것이다. 천하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검법이 있으나, 알고 보면 이 네 가지를 응용하고 변화시킨 것이다. 다음의 탈정삼검도 역시 그 네 가지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그 오묘무쌍한 변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탈정삼검은 대개 아홉 가지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 아홉 가지의 변화는 강물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져 다시 스물일곱 가지의 변화 를 창출한다. 제일초 표화결(飄化訣) 만화천광(滿花天光)은 마치 봄나비가 꽃을 찾아 날듯, 봄바람이 실버들을 희롱하듯, 수천 개의 꽃잎이 바람 을 타고 너울대며 하늘로 오르듯, 부드럽고 그윽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전개된다. 전삼식(前三式)은 공초(功招), 중삼식(中三式)은 수초(守招), 후 삼식(後三式)은 살초(殺招)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를 익히자면 아래 그림과 같이 오른쪽 발을 중궁의 위치에 밟고, 왼손은…….> 구결을 비롯한 자세와 생검의 방법이 그 아래로 그림과 함께 상세 히 이어지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본래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처지였지만, 워낙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 있는 까닭에 조금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간이 흘러 다시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사 마소군은 검결을 대충 다 외울 수가 있었다. "휴우, 무공이란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구나." 사마소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나는 어떤 고통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터득해야만 한다. 그 것이 내 모든 의혹을 풀 수 있는 길이고, 선유도의 평화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일 테니까." 사마소군은 한 차례 긴 호흡을 하며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내일부터는 실제로 연습을 해 보아야겠다." 사마소군은 내심 결정을 내리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기이한 흥분감이 나른한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이제 내일부터는 새로운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드디어 자신도 무림인이 되는 첫발을 내딛었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야릇한 흥분감과 기쁨 탓인가? 얼마 후 그가 잠에 깊숙이 빠져들었을 때도 그 입가에 맺혀 있는 미소는 가실 줄을 몰랐다. 남소현(南小顯). 이 촌락은 지형적으로는 주양관과 더불어 복우산 줄기에 같이 붙 어 있었으며, 풍광이 수려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주양관과는 반대편 방향인데 거리가 무려 이백 리 가량이 나 떨어져 있어 모든 생활환경은 판이하게 달랐다. 때는 밤이 깊어 사경을 헤아릴 무렵, 석우생은 어둠을 등에 지고 석상처럼 우뚝 선 채 언덕 아래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한 거대한 장원(莊院)을 굽어보고 있었다. "……." 쏟아져 내리는 폭설로 인해 장원의 모습은 희미한 윤곽만이 내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석우생의 초인적인 시야는 삼십여 장 전방에 있는 장원 내 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알아보고 있었다. "너무 늦었어. 저 시체들은 벌써 열흘째 저렇게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구나……." 시체(屍體). 그렇다. 장원 곳곳에는 수백 구의 시체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 굴고 있었다. 비록 쌓인 눈으로 인해 그 처참한 광경이 약간 가려지기는 했으나 그야말로 아수라지옥 같은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였다. 휘이잉－! 한 줄기 스산한 바람이 스쳐가는 듯하더니, 석우생의 등뒤로 몇 줄기 인영들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뒤따라 수십 줄기의 인영들이 그 뒤로 내려서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 가운데 먼저 도착했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두 손을 모으고 정중한 예를 취했다. "다녀왔습니다." 석우생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날렵한 체구의 인물이 그의 시야에 비쳤다. "역시 중원팔의 중 또 한 명이던가?" "중원팔의 중 둘째인 화룡신장(火龍神掌) 조영(曹英)이 틀림없었 습니다." 복면인의 허리가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언뜻 사십대 초반의 것으로 보여지는 그의 음성이 차분하게 이어 졌다. "조영을 비롯한 일가족 이백구십삼 명이 모두 몰살당했습니다." "……." 석우생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사마장천이 중원팔의를 모두 이끌고 선유도로 은거하지 않고 그 중 절반을 중원 각처에 풀어 놓은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복면인은 움찔하는 기색이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선유도로 은거하기 전 뭔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낀 게 분 명한 것 같습니다. 필시 중원팔의에게 무언가 준비를 시켜 놓았을 것입니다." "잘 봤어. 그러나 그게 뭘까?" 석우생의 물음이 재차 이어지자, 복면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석우생은 그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위엄 있는 어조 로 말문을 돌렸다. "중원팔의 중 첫째인 비룡유협(飛龍遊俠) 황보웅(皇甫雄)의 거처 는 파악했는가?" 복면인은 약간 주춤거리는 어조로 즉시 대답했다. "괴이하게도 그의 거처를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의문의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인가?" 석우생은 나직이 뇌까리더니 비수로 자르듯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 다. "되도록이면 그를 찾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답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장내에 부복해 있던 인물들이 일제히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석우생은 홀로 남게 되자 멀리 장원을 잠시 깊숙이 바라보는 듯하 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양관은 좁다. 바닥이 좁은 만큼 일어나는 소문은 금세 퍼지게 마련이었다. 또한 대개의 소문이 다 그렇듯이 누가 방귀를 뀌었다 면 몇몇 사람을 건너는 사이 똥을 쌌다는 말로 과장되게 마련이 다. 사마소군이 장과부의 주막에 머무르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주양관에는 하나의 웃지 못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글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다니까 그러네." "저런 망할 년 같으니! 아무리 사내가 그립다기로서니 그래, 자식 뻘밖에 안 되는 새파란 애송이를 죽은 서방 모시듯 해?" "죽은 서방 정도가 아니라네. 이건 아예 황제 모시듯 발까지 씻겨 주는 것은 물론이고, 욕실에서는 사타구니까지 씻겨 준다네." "저, 저런……." 이 떠들썩한 소문을 주양관 사람들이 다 아는 데에는 불과 반 나 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입으로는 하나같이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면서도 그들의 눈 빛은 대개 음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러한 소문을 신명나게 떠들어대는 위인들치고 기회만 주어진다 면 당장 장과부에게 뛰어가지 않을 사내는 없는 법이므로. 본래 사내들이란 제 마누라가 아무리 양귀비 같아도 옆집 곰보에 게 눈을 돌리는 속성이 있다던가. 어쨌든 이런저런 소문 끝에 또다시 이틀이 지나가고 있었다. "타앗－ 탓－!" 기합 소리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더없이 힘차고 낭랑하게 울려 퍼 졌다. 사마소군은 자신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목검(木劍)을 열심히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이 객점 뒤뜰에서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도 이미 이틀이 지났다. 매서운 날씨인데도 어찌나 열심히 수련하는지 그의 전신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목검 소리도 제법 예리해진 지 오래였다. 사마소군이 수련하고 있는 초식은 탈정삼검의 제일식인 표화결 만 화천광이었다. 사마소군이 전개해 보이는 만화천광의 흐름은 그런대로 능숙한 것 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과부는 멀찌감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녀 또한 무림인인지라 사마소군이 펼치는 만화천광의 흐름이 어 딘가 산만하고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혈풍향 석우생, 닷새 안으로 돌아온다고 한 그가 어찌 된 영문인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장과부는 어제 저녁 사마소군이 저녁식사도 거른 채 뜬눈으로 밤 을 지새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먼동이 트기도 전에 밖으로 뛰쳐나와 저렇게 목검을 맹렬 히 휘두르고 있는 사마소군의 모습을 장과부는 측은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다. "헉헉……." 사마소군이 지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동작을 멈추었다. 하얀 입김이 그의 얼굴을 덮는 듯하더니 허공으로 흩어져 날아갔 다. 이 때 장과부가 가볍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좀 쉬었다가 하세요, 소공자님." 그녀는 준비하고 있던 마른 수건을 내밀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밝아 오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 언제나처럼 하늘은 우중충한 잿빛 구름으로 가득 뒤덮여 있어 당 장이라도 눈이 펑펑 쏟아질 것만 같았다. 문득 사마소군은 그 어두운 하늘을 보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장아주머니." "예, 소공자님." "가능한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숨김없이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 다." "무슨……?" 장과부는 흠칫 의아로운 표정이 되었다. 사마소군은 그녀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중원에 발을 들여놓은 지 겨우 석 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사마소군은 가벼운 탄식을 흘러 내며 말을 이었다. "석형님을 형님이라 부르게 된 것도 엿새 전 바로 이 자리에서였 습니다." "……?" 장과부는 그가 무슨 질문을 할까 자못 불안한 기색이었다. 사마소군의 시선이 어떤 염원을 담고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장아주머니, 대체 석형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 어떤 사람이라 하심은……." "나는 석형님이 강호무림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나, 간단한 과 거내력 등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하, 하지만……." 장과부는 만면에 두려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그러한 내 심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주위를 한 차례 살폈다. 사마소군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석형님이 오셔도 못 들은 것으로 할 테니까요." "소공자님은 정말 저를 난처하게 만드시는군요." 장과부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의 손에는 식은땀 이 맺히고 있었다. 잠시 장내에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장과부는 한참 동안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고개 를 끄덕였다. "말씀드리지요……." "……." 사마소군은 그 말에 크게 반색을 지었다. 장과부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금무림에는 불과 오 년 새에 도합 예순일곱 번의 청부살인(請 負殺人)을 완벽하게 해낸 신화적인 직업살수가 한 명 있답니다. 때문에 강호에서는 그를 일컬어 천하제일의 살수라고 부르지요. 자, 이제 소공자님께서는 그분이 누군지 짐작하시겠어요?" "직업… 살수?" 사마소군은 너무도 뜻밖이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장과부는 목소리를 낮추고 두려움이 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하면 남에게 어떤 대가를 받고 대신 누군가를 죽여 주는 일을 하신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럴 수가……?" 사마소군의 안색이 일시에 복잡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설마하 니 석우생이 그런 무서운 부류의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 다. "그럼 석형님은 아무나 재물만 주면 원하는 자를 죽여 주는 그런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장과부의 표정이 순간, 엄숙하게 변했다. 그것은 달리 보면 존경 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이기도 했다. "그분께서는 청탁을 받으시면 일단 수락하기 전에 죽여야 할 사람 에 대해 철저히 분석을 하시지요. 그리하여 만약 그 사람이 죽여 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판단이 내려지면 설혹 청탁금이 억만금일 지라도 거절하시곤 했어요. 소공자님은 보통의 살수와 그분을 비 교하셔서는 안 될 거예요." 장과부의 이 한 마디는 사마소군을 약간 안심시켜 주었다. 그는 두 눈에 반짝 이채를 발하며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석형님께 죽은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사람들입니까?" "거의 대부분은 이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에요. 물 론 그 중에는 정파무림의 거물급 고수도 몇 명 있긴 하지만……." "정파무림의 거물이라면 좋은 사람일 텐데, 왜 죽인단 말이오?" 그 말에 장과부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사마소군을 뜻깊은 시선으로 깊숙이 응시하며 말했다. "소공자님, 그건 나중에 소공자님이 강호활동을 하시게 되면 자연 히 알게 되실 거예요. 바로 세상에는 양의 탈을 쓴 이리 떼도 적 지 않다는 뜻이지요." "말하자면 위선자들 말이오?" "후훗… 바로 맞추셨어요." 장과부는 자신도 모르게 본래의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그녀는 위선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심으로 엉뚱한 일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선유도의 악몽 같았던 밤을 떠 올리고 있었다. 위선자. 평소 그토록 착하고 선량해 보였던 섬사람들이 광풍폭우가 몰아치 던 그 날 밤에는 마치 피에 굶주린 악귀들처럼 자신과 아버지를 죽이려고 득달같이 달려들지 않았던가? 물론 섬사람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사마소군은 결코 그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사마소군은 한숨을 내쉬며 목검을 힘주어 불끈 잡았다. '어쨌든 다행한 일이로구나. 형님이 아무나 죽이는 무지막지한 살 인마가 아니라니…….' 그러한 그의 내심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장과부는 재빨리 말을 이 었다. "지금까지 그분의 표적이 되고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분은 또한 의표를 찌르는 깨끗한 살인수법과 완벽한 뒷처리로도 유명하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환상(幻想)의 살수라고 부르 는가 하면, 가장 치밀하고 냉혹한 불패(不敗)의 승부사(勝負師)라 고도 말하지요." 여기까지 말한 장과부는 사마소군의 표정을 살피며 숨을 돌리더니 약간 들뜬 어조로 다시 말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출신내력이나 생김새 등이 일체 비밀에 가려져 있어 중원제일의 신비객(神秘客)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사마소군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장과부가 지나치게 석우 생을 과장한다고 생각했다. "뭐가 그리 많습니까?" "사실이 그러하니까요." 장과부는 자못 엄숙한 얼굴로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이 석우생과 어떤 관계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희미하게나마 그녀가 석우생이 속한 조직과 어 떤 관계를 맺고 있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쌔앵－! 싸늘한 새벽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치며 장내를 스쳐 지났 다. 사마소군은 고개를 숙인 채 뭔가 생각하더니 한참 만에야 장과부 를 쳐다보았다. "장아주머니,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무슨……?" 장과부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사마소군은 두 눈에 맑고 깊숙한 광채를 빛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무작정 석형님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저 외 방악으로 들어가 석형님을 찾아 보겠습니다." 장과부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건 허락할 수 없어요! 그분은 곧 돌아오실 거예요." "이미 돌아온다고 약속한 날짜가 지났으니, 찾아 나서는 게 당연 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소공자님께서 떠나신 후에 그분께서 돌아오시기라 도 한다면 저는……." 장과부는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외방악이 얼마나 험한 고개이며, 특히 눈이 내릴 때는 절 대 들어갈 엄두조차 내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싱긋 미소지으며 어른스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요. 설령 그런 일이 일 어난다 하더라도 장아주머니는 내가 잠깐 산책을 나갔다고 말하시 면 책임을 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소군은 말을 마치자마자 목검을 옆구리에 쑤셔 넣고 몸을 돌 려 객잔을 떠나기 시작했다. 장과부는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안절부절 못할 뿐이었다. "그, 그럼 아침식사라도 하신 후에……." 다급한 김에 얼떨결에 흘려 낸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순간 사마소군은 이미 담벼락을 넘어 모습을 감춘 후였 다. "이, 이 일을 어쩌지?" 장과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운 중얼거림을 발했다. 그 때다.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그녀의 귓가 에 들려 왔다. "큭큭… 아주 가관이군 그래. 대가리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놈 을 붙잡지 못해 사족을 못 쓰는 꼴이라니……." "흐흐… 하기야 저 어린 놈도 죽을 맛이겠지. 쭈글쭈글한 뱃가죽 위에서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겠어?" 비록 그 대화 소리가 나직하기는 했지만 장과부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가뜩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만 태우고 있던 장과부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격이 되고 말았다. "이 망할 자식들! 이른 새벽부터 어디 할일이 없어 남의 마당을 기웃거리느냐!" 그녀는 성난 암표범처럼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뒤이어 놀람과 의혹이 뒤섞인 두 마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이쿠! 나 죽네!" "아니, 이 죽일 년이 이젠 안 하던 짓까지… 으악!" 그로부터 얼마 후 꽁지가 빠져라 장과부의 객잔 한 구석에서 달려 나오는 두 사내의 이빨 중 성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 제 7 장 기연(奇緣)이냐 악연(惡緣)이냐 ━━━━━━━━━━━━━━━━━━━━━━━━━━━━━━━━━━━ 이른 새벽의 공기는 맑고 서늘했다. 사마소군은 장과부의 객잔 뒤쪽으로 이삼 리 가량 떨어져 있는 한 언덕 위에 당도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폐부 깊숙이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숨을 돌리고 전방을 살펴보니 언덕 뒤로는 구불구불한 소로가 사 오 리 가량 길게 뻗어 있었다. 소로의 끝은 짙은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첩첩산중의 수많은 봉우리들. 사마소군은 그 험준한 봉우리들의 기세를 보자, 그만 기가 질리는 느낌이었다. "저 깊은 산중 어디에서 석형님을 찾는단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소로 위에는 밤새 쌓인 눈이 한 자 가량이나 되었 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면 필경 단 한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 것이 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설사 이보다 더한 경우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 었다. "재수가 좋다면 중도에서 석형님을 만날 수도 있을 거야." 사마소군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언덕을 거의 다 내려갔을 무렵이다. "비켜라, 이 놈아!" 느닷없이 뒤쪽에서 대갈 호통성이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사마소군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래 뜨여졌다. 언덕 위 꼭대기에서 한 사람이 무서운 눈초리로 사마소군을 내려 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사람이지, 그의 용모는 거의 괴물에 가까웠다. 대략 육십 세 가량 되었을까? 오 척 정도의 짧은 키에 노인의 모습은 믿을 수 없으리만큼 뚱뚱 해서 언뜻 보기에도 보통 사람 다섯은 합쳐 놓은 듯했다. '맙소사! 아예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구나!' 비곗살에 파묻혀 목은 전연 보이지도 않고 눈, 코, 귀, 입 등도 축축 늘어져 제 형상대로 붙어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몸에는 한여름에나 입는 짧은 단삼을 입었는데, 팔이며 무릎 아래 의 맨살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 팔다리조차 멀리서 보자니 마치 무슨 굵은 통나무처럼 보였다. '이제 보니 저것은 배부른 두꺼비와 똑같은 형상이다.' 사마소군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 때다. 돌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단삼노인이 그 뚱뚱한 거구를 일 장 가량 붕 떠올리더니,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오는 게 아닌가? 언덕은 눈이 가득 쌓인 상태였다. 단삼노인의 몸은 굴러 내려 오 면서 점차 부풀어 거대한 눈덩이로 변해 갔다. 우르르릉－! 굉렬한 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뒤흔들었다. 사마소군이 그 어이없는 광경에 기가 막혀 몇 차례 눈을 껌벅거리 는 순간, 그 거대한 눈덩이는 바로 그의 코앞까지 굴러왔다. 사마소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놀란 비명과 함께 황급히 옆으 로 피했다. 집채만하게 변한 그 눈덩이는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그의 곁은 스쳐 아래쪽의 한 거목에 요란하게 부딪쳤다. 쿠궁－! 그 모습에 사마소군은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큰일이다. 필시 크게 다쳤을 것이다!" 사마소군은 황급히 그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그러한 생각이 한낱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단삼노인이 부서진 눈 덩이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단삼노인은 완전히 눈덩이 속에서 빠져 나오자, 옷을 툭툭 털더니 힐끔 언덕 위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었다. "클클… 걸어 내려오려면 최소한 한 식경은 걸렸을 터인데, 굴러 내려오니 눈 깜짝할 새에 해결되는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는 지나치게 잘 돌아간단 말이야." 단삼노인은 만족한 표정으로 습관처럼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 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사마소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걷는 모습은 너무나 힘들어 보여 사마소군은 동정을 금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잠시에 불과했고, 사마소군은 곧 뭔가 이상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삼노인은 분명 거북이처럼 느리게 걷는데도 불구하고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장 가량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게 아닌가? 게다가 단삼노인이 지나간 눈 위에는 발자국은커녕 미세한 흔적조 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저럴 수가?' 사마소군은 재차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그는 흡사 귀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불과 뜨거운 차 한두 모금 마실 사이, 단삼노인의 모습은 자욱한 안개 너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마소군은 망연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내흔 들며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방금 그 노인은 무림의 고수인 모양이구나." 눈 위를 걷는 것은 매우 힘들었으나 사마소군은 아름다운 설경(雪 景)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는 어느 새 단삼노인의 일 같은 건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다. 마침내 사마소군은 소로의 끝에 당도했다. 그는 주위에 깔린 자욱한 안개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짙은 안개는 처음이구나. 잠시 기다렸다가 해가 뜬 후 나 아가는 게 좋겠다." 무리하게 앞으로 전진하다가 벼랑에라도 떨어지면 정말 개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동녘 하늘에는 이미 뿌옇게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 때다. "와아악! 비켜라!" 갑자기 그의 고막 속으로 괴상한 울부짖음이 파고들었다. 동시에 사마소군은 시커먼 물체가 자신의 눈앞으로 쏘아져 오는 것을 발 견했다. '앗!'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비단 쏘아져 오는 물체의 속 도도 빨랐거니와 너무나 느닷없는 일이어서 사마소군은 그대로 충 돌하고 말았다. 쿵－! "으윽……!"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사마소군은 공처럼 퉁겨져 나가 삼사 장 밖에 곤두박질쳤다. 그는 엉덩이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급히 상체를 일으켰 다. 다행히 눈이 수북이 쌓인 상태라 그는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그 러나 괴그림자와 정통으로 부딪쳤던 가슴 부위는 여간 아픈 게 아 니었다. "도, 도대체 누구요?" 사마소군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사방을 살폈다. 그의 시야에 곧 한 비대한 그림자가 번개같이 저만큼 멀어져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는 바로 얼마 전에 만났던 단삼노인이 아닌가? 사마소군은 어이없는 한편,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저 두꺼비 같은 노인은 대체 무엇 때문에 저리 바쁘게 왔다갔다 한단 말인가?" 그가 한탄을 하는 사이, 단삼노인의 모습은 다시 종적을 감추었 다. 사마소군은 몸을 일으키자 가슴에 참기 힘든 통증이 이는 것을 느 꼈다. 그러나 그는 이만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거구와 부딪쳤으니……." 사마소군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채 다섯 걸음도 떼어 놓기 전이었다. 등뒤에서 예리한 파공성이 들려 왔 다. 사마소군이 흠칫 뒤돌아보니 어느 새 나타났는지 단삼노인이 등뒤 에 유령처럼 서 있는 게 아닌가? 사마소군은 혼비백산했다. 저 엄청난 몸집이 이토록 빠른 것도 놀 랍거니와 막상 앞을 막아서자, 거대한 산이 내려앉은 듯 숨이 막 혔다. "노, 노인장은……?" "……." 단삼노인은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옆으로 눕힌 채 사마소군을 뚫 어지게 노려보았다. 축 늘어진 눈까풀 새로 쏟아져 나오는 그의 눈빛은 폐부를 찌를 듯 날카로웠다. 사마소군은 말 한 마디 없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응시하는 그를 보자, 당혹과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왜 그렇게… 저를 뚫어지게 보십니까?" 그러자 단삼노인은 불쑥 수긍하듯 되물었다. "꼬마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사마소군은 내심 뜨끔함을 느꼈다. 생면부지의 노인이 무엇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묻는단 말인가? '혹시 날 죽이기 위해 남해에서부터 쫓아온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사마소군은 내심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내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 이름은 사마소군입니다." 순간, 단삼노인의 안색이 홱 변했다. "너… 지금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느냐?" "사마소군이라고 했습니다." "그, 그러니까 네 이름이 분명 사마소군이란 말이냐?" 단삼노인이 거듭 확인하듯 묻자, 사마소군은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를 아십니까?" "……!" 단삼노인은 대답 대신 안색을 수십 차례 바꾸더니 사마소군의 전 신을 거듭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에 곧 절망적인 빛이 떠올랐다. 이어 그는 느닷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고, 아이고!" 사마소군은 그만 어리둥절해진 채 그 모습을 망연히 내려다보았 다. '이 노인이 갑자기 왜 이러지?' 단삼노인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으며, 갈수록 더욱 가관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그 늙지도 않은 놈이 정말 해도 너무했다. 이 천 리 길을 사흘 만에 달려와야 한다기에 허약한 몸을 이끌고 죽 자 살자 달려왔더니… 아이고, 이제 보니 겨우 저런 어린 거지 새 끼가 사마소군이라니……." 사마소군은 그 곡성을 듣자 더욱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때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가만 있자, 자고로 미친 사람은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한다던데 … 혹시 이 노인도 미친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굴리며 단삼노인을 새삼 살피자, 과연 영락없이 미친 늙은이 같았다. 사마소군은 한시라도 빨리 이 늙은이 곁에서 떠나는 것이 상수라 고 생각했다. "저… 더 이상 제게 볼일이 없다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과 함께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단삼노인이 거짓말처럼 대성통곡을 뚝 그치더니 그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그냥 가겠다고?" 사마소군은 내심 뜨끔했으나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또 하실 말씀이라도?" 그 순간 단삼노인이 벌떡 일어서더니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이 놈아, 너는 설마하니 사흘 동안 죽자고 달려온 노부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겠다 이거냐?" 사마소군은 마침내 이 미친 노인이 떼거리를 쓰고 있다고 결론지 었다. 그러나 그는 공손하게 물었다. "노인장께선 제가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자 단삼노인은 대답 대신 품속에 손을 쑥 집어 넣더니, 하나 의 푸른 옥병을 꺼내 들었다. 이어 그는 마개를 뽑아 푸른 알약 하나를 꺼내어 불쑥 사마소군에게 내밀었다. 사마소군은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의아한 듯 물었다. "저는 배탈도 나지 않았는데, 왜 약을 주십니까?" "멍청한 놈! 생긴 것은 그렇지 않은데, 대가리가 어찌 그렇게 안 돌아간단 말이냐? 그래, 네놈의 눈은 고작 이것이 한낱 배탈약으 로밖에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여기까지 울부짖듯 소리친 단삼노인은 금세라도 눈물을 쏟아 낼 듯 서글픈 표정이 되었다. 그는 양 손을 허공으로 높이 쳐들며 비감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노부가 평생에 걸쳐 단 세 알밖에 만들 지 못한 구구회천단(九九回天丹)이라는 것이다. 아아, 아깝고도 아깝도다!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아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겨 왔 던 이것을 생전 처음 본 녀석에게 선사해야 한다니……." 이 한 마디가 또 얼마나 비통하고 애석한지 그야말로 가슴이 미어 질 듯한 한탄이었다. 사마소군은 단삼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 나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들어 급히 손을 내저었다. "노인장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으 니, 어서 가던 길을 마저 가십시오." 그 말에 단삼노인은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 멍청하고 무식한 녀석아! 이게 어디 아픈 데 먹는 단약인줄 아느냐?" 이어 그는 언제 슬픈 얼굴이었느냐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만면에 득의 어린 괴소를 지었다. "흐흐… 이 구구회천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죽은 사람도 거뜬히 살려내는 기사회생의 효험이 있을 뿐 아니라, 만약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사람이 먹게 되면 근골(筋骨)이 세수되어 무공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골격으로 탈바꿈시켜 주는 효능이 있다. 어디 그뿐이냐? 일반 고수가 삼십 년을 쉬지 않고 고련한 만큼의 내공도 얻게 된다." "그럴 수가……?" 사마소군은 단삼노인이 한바탕 늘어놓은 말에 절로 눈을 크게 떴 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단삼노인이 약간 미쳤다고 내심 믿고 있던 판이 라 금세 태연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불쌍한 노인을 위해서 될 수 있는 한 놀라는 표정 을 짓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놀랍군요. 그 조그만 알약이 정말 그토록 신통한 효험이 있단 말 인가요?" "이놈아, 그럼 천하의 독심괴의(毒心怪醫) 여불해(呂不解)가 어린 네놈에게 거짓말을 할 것 같으냐?" "독심괴의 여불해? 노인장의 명호인가요?" 사마소군이 두 눈에 이채를 반짝 빛내며 물었다. 단삼노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괴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이제 보니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로구나. 가르쳐 주지 않아도 노부의 명호를 알아맞추다니. 바로 맞추었다. 노부가 바로 천하에 덕망 어린 인술을 베풀어 뭇 천하인들이 존경 해 마지않는 독심괴의 여불해 어른이시다." 사마소군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방금 스스로 명호를 말해 놓고는 무슨 소리람?' 사마소군은 눈앞의 노인이 약간 미쳤을 뿐 아니라 매우 허장성세 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마소군이 어찌 꿈엔들 알겠는가? 독심괴의 여불해. 이 이름은 확실히 당금무림을 쩌렁쩌렁 뒤흔들고 있었으며, 당금 무림의 이대신의(二大神醫)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 어떤 불치의 병이든 그의 손이 닿아 고치지 못할 병은 없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심괴의 여불해라는 이름이 높은 것은 그 신비로운 의술 보다는 그의 괴팍하기 짝이 없는 성품에 의존한 바 컸다. 어찌나 성품이 고약한지 그에게 한 번 진맥을 해 보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더 어려움은 물론이었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 고 그는 종종 엉터리 시술을 펼쳐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불 구로 만들곤 했다. 대가를 받고 치료를 해 주지만 마음에 든 자는 살리고, 들지 않는 자는 죽게 내버려 둘 때도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근래 몇십 년 간 독심괴의를 찾아와 치료를 부탁하 는 인물은 그야말로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그는 또한 일신에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는 그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그 지닌 바 괴팍한 성품만큼이나 무공 또한 심오하고 정심하 여 당금무림에 상대를 찾아보기 어려우리라는 추측이 나돌 뿐이었 다. 그러나 그런 내막을 전혀 알 길 없는 사마소군은 여전히 독심괴의 여불해가 쥐고 있는 구구회천단을 불안한 눈으로 흘끔거리고 있었 다. '만약 저것을 먹게 된다면 나는 정말 배탈이 날지도 모른다. 잘 달래서 이 자리를 빠져 나가는 게 상수다.' 내심 생각을 굴리던 사마소군은 짐짓 크게 감탄한 듯 천연덕스럽 게 말했다. "이제 보니 노인장께선 대단히 유명하신 분이군요." "으험, 이제야 네 혓바닥이 제대로 움직이는구나." "한데, 그렇게 신통한 약을 처음 보는 제게 주시려는 이유가 무엇 입니까?" "음?" 뜻밖의 질문이었던지 독심괴의 여불해는 멍한 얼굴로 대답을 하지 못하더니 돌연 크게 외쳤다. "빌어먹을, 그건 바로 네 이름이 사마소군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분명히 사마소군이지만 나는 그것을 받지 않겠습니 다." "뭐야? 너는 설마하니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을 만져 보지도 않 고 차 버리겠단 말이냐?" "노인장께서는 틀림없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이 틀림없습니다. 세상 에는 동명이인이 많으니 사마소군이라는 이름 또한 어찌 하나뿐이 겠습니까?" 사마소군은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노인장께서는 어서 다른 사람을 찾아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말을 마치자마자 사마소군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빠르게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여불해는 그만 얼떨떨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는 멀뚱히 사마소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안면근육이 실룩 경련을 일으켰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빌어먹을, 가뜩이나 아까운 판에 사 정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여불해는 생각 같아선 사마소군의 머리를 당장 박살내고 싶은 심 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노화를 애써 달랬다. 휙－! 여불해는 번개같이 육중한 거구를 날려 사마소군의 앞을 막아 섰 다. 사마소군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직 제게 볼일이 남았습니까?" 여불해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러니까 네녀석은 끝내 이 구구회천단을 받아 먹지 않겠단 말이 냐?" "그렇습니다. 나는 그것을 받기가 싫습니다." 사마소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불해는 급기야 노화를 참지 못하고 생각하지도 않은 말을 불쑥 내뱉고 말았다. "이 녀석아, 누군 주고 싶어서 주는 줄 아느냐? 그 늙지도 젊지도 않은 놈이 천하 없는 광세절학이라도 튼튼한 내공의 기초가 없으 면 모래 위에 사상누각을 세우는 것과 같다 하며 떼거리를 쓰는 통에 마지못해 주는 것이다!" "아까부터 늙지도 젊지도 않은 놈 운운하시는데, 누구를 말씀하시 는 것입니까?" "그건 바로……." 여불해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하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마소군은 그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재차 캐물었 다. "왜 말씀하시다 말고 그러십니까?" 여불해는 비곗살이 덮여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몇 차례 끔벅거리 더니, 갑자기 와락 사마소군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 맹랑한 놈! 네놈하고 더 이상 얘기를 하다가는 아무래도 실수 를 하겠다!" 사마소군은 움찔 놀랐다. 그가 숨이 콱 막히는 것은 느끼고 사지를 버둥거리며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이었다. 여불해가 다짜고짜 사마소군의 입 속에 구구회천단을 쑤셔 넣는 게 아닌가? '아, 안 돼……!' 사마소군은 놀라 안간힘을 다해 그것을 뱉어 내려 했으나 이미 늦 고 말았다. 그 단약은 혀끝에 닿기가 무섭게 녹아 내려 목구멍 속 으로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순간, 지독한 냄새가 입 안을 진동하며 울컥 구토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잠깐이었을 뿐 여불해가 가슴 부위을 탁 치자, 그 비릿한 액체는 다시 목구멍 속으로 꿀꺽 넘겨지고 말았다. 여불해는 그제야 비로소 잡았던 멱살을 놓으며 괴소를 지었다. "흐흐… 이렇게 하면 간단한 걸 가지고 괜히 시간만 허비했군." "욱욱……." 사마소군은 몇 차례 헛구역질을 하다가 이윽고 메스꺼운 느낌이 약간 가라앉자 화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것 보시오, 노인장! 내 아무리 나이가 어리기로서니 이렇게 함 부로 대하는 법이 어디 있소?" "흐흐… 이 놈아, 잔소리 말고 어서 그 자리에 가부좌나 틀고 앉 아라. 약기운이 곧 퍼질 테니까." "더 이상 노인장하고 같이 있다가는 나까지 미쳐 버리겠소." 사마소군은 냉소를 날리며 다시 몸을 돌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 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여섯 발자국을 걸어갔을까? 사마소군은 갑자기 아랫배에 형용키 어려운 고통을 느끼며 배를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어이구!" 마치 뜨거운 불덩이가 뱃속에서 좌충우돌하는 듯했다. 그 고통은 점차로 견딜 수 없이 커져 온 전신이 산산이 가루로 변해 날아가 는 것과도 같았다. "이, 이건……." "흐흐… 이제 보니 노인장은 나쁜 사람……." "그렇다. 노부는 매우 나쁜 사람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 내 말대 로 하지 않으면 전신의 혈관이 터져 금세 죽고 말 것이다." 여불해는 뒤뚱뒤뚱 다가오더니 사마소군의 뒷덜미를 잡아 억지로 바닥에 앉혔다. 사마소군은 고통과 분노로 얼굴이 온통 일그러진 채 소리쳤다. "이, 이것 놓으시오! 당신은……." 갑자기 사마소군은 입을 다물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번엔 등 위에 인두로 지지는 듯한 열기가 와 닿은 것이다. 사마소군은 경황중에서도 그것이 여불해의 손바닥이 와 닿기 때문 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우우……." 사마소군의 이마 힘줄이 불끈불끈 불거져 나왔다. 그것은 정말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고통이었다. 뱃속에는 수만 마리의 개미 떼가 달라붙어 오장육부를 갉아 내는 듯하고, 온몸이 마치 펄펄 끓는 용광로 속에라도 빠진 듯해서 정 신이 가물가물했다. 이 때다. 그 가물거리는 의식 속으로 여불해의 음성이 환청인 양 스며들었다. "지금부터 노부가 하는 말을 명심하고 들어서 구결을 일러 주는 대로 몸 속의 뜨거운 기운을 운행해야만 한다." 이 음성은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매우 진지했으며 기이한 위엄마 저 깃들어 있었다. 사마소군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상황인지라 물 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귀를 기울였 다. 여불해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아련히 그의 의식을 일깨우며 들리기 시작했다. "무릇 천지간의 주기는 음양이종으로 그 근본을 이루나니… 태양 태음 소양소음(太陽太陰小陽小陰)을 바탕으로 형성된 만물은 기 (氣)와 정(精)을 지녀 조화를 이룬다. 동(動)과 정(精)은 태주(太 柱)를 기다리고……." 이른바 내공을 운기(運氣)하는 요결이었다. 그것은 사마소군이 알아듣기에는 심오난해하기 짝이 없었지만 본 래 그의 총명함은 보통 소년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 않는가. 사마소군은 여불해의 장식을 통해 들어오는 열기와 단전 부위에 형성되어 있는 불덩이 같은 기운을 자연스럽게 흡수하여 사지백해 로 흘려 보내자, 자신도 모르게 그 구결대로 몸 속의 열기를 운행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마소군은 차츰 고통이 가시면서 한 줄기 시원한 느낌이 전신으 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에 따라 그의 시선은 물처럼 고요하고 평온하게 변해 갔다. 그렇게 뜨거운 차 한 잔쯤 마실 시각이 지났을 때였다. 여불해는 비로소 사마소군의 등뒤에서 손을 떼었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땀을 훔치며 비대한 몸을 일으키더니 사마소군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사마소군의 얼굴은 잠을 자듯 평온했다. 여불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생각보다 근골이 뛰어나고 자질이 우수하군." 축 늘어진 눈까풀 아래로 가느다란 그의 눈에 빠르게 기광이 스쳤 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오래지 않아 크게 이름을 떨칠 놈이야. 그 늙지도 젊지도 않은 놈, 천하가 좁다 하고 돌아다니더니 마침내 대어를 낚아채고야 말았구나." 여불해는 새삼 사마소군을 일별한 뒤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잘 있거라, 재수 좋은 놈아. 아마 나중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뒤뚱거리는 그의 뒷모습은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가 떠난 것을 알지 못했다. 무아지경 속에 빠져 있는 상태라 그가 중얼거린 몇 마디 말도 듣지 못했다. 그렇다. 사마소군은 난생 처음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신조차 잊어 버리는 신비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 제 8 장 괴승 광치(狂痴) ━━━━━━━━━━━━━━━━━━━━━━━━━━━━━━━━━━━ 휘이잉－! 바람이 분다. 십일월의 차가운 한풍은 무엇이든 얼려 버릴 듯한 기세로 산 구석구석에 몰아치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가벼운 한기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본래 그의 눈빛은 맑고 깨끗했으나 이 순간은 유난히 더 신비롭고 영롱한 광채를 발하는 듯했다. 그 영롱한 눈에 이내 가득 의혹의 빛이 어렸다. 잿빛의 하늘이었으나 그 구름 새로 내비친 태양은 정오의 시각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럼 내가 벌써 몇 시진을 이렇게 앉아 있었단 말인가?' 사마소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난 것을 보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데, 그 노인은 어디 갔지?' 사마소군은 여불해에게 생각이 미치자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엷게 흐르는 안개만이 주위에 가득할 뿐 뚱뚱한 여불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마소군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괴상한 노인이었어.' 사마소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그는 크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몸 전체가 마치 새털처럼 가벼워진 느낌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에는 느껴 보지도 못한 기이한 활력이 사지백해에 넘치고 있지 않은가? 사마소군은 그만 신음도 탄성도 아닌 괴상한 음성으로 부르짖고 말았다. "그럼 그 구구회천단인가 뭔가 하는 것이 정말 그토록 놀라운 효 능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잠시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던 그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반 짝 눈을 빛냈다. 그는 오른쪽에 있는 한 그루 소나무를 향해 다가섰다. 이어 그는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고 힘껏 소나무를 내리쳤다. 콰직－! 어른 허벅지만한 두께의 소나무가 맥없이 부서져 나갔다. 설마했던 사마소군은 재차 망연해진 채 부러져 나간 소나무와 자 신의 주먹을 번갈아 보았다. 주먹은 멀쩡했을 뿐 아니라,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사마소군은 놀람과 기쁨이 어린 탄성을 발했다. "그 노인의 말대로 내 몸 속에는 정말 삼십 년의 내공이 생긴 것 같구나." 사마소군은 비로소 자신이 예기치 못했던 큰 행운을 얻었음을 깨 달았다. "한데, 그 노인은 무엇 때문에 그 귀중한 신단(神丹)을 내게 주었 을까?" 새로운 궁금증이 그를 휩쓸었다. 그 때 여불해가 했던 한 마디 말 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ㅁ아, 듣자 하니 어떤 젊지도 늙지도 않은 사람이 시켜서 그랬다 고 했는데… 그가 대체 누굴까?" 사마소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인물은 석우생 외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석형님이……?" 사마소군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를 만나 봐야 알 일이었다. 사마소군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기로 결정 했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산길은 거칠고 험해져 갔다. 사마소군은 땀을 뻘뻘 흘리며 눈 덮인 산기슭을 올라가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산 하나를 넘는데 최소한 한 시진은 걸렸을 터였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산 두 개와 계곡 하나를 지나 여기까지 당도하 는데 불과 반 시진밖에 걸리지 않았다. 쉬지 않고 걸어온 탓에 비록 몸은 땀에 흥건히 젖었으나 그는 조 금도 힘든 줄을 몰랐다. 사마소군의 몸은 확실히 예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산기슭을 절반쯤 올랐을 즈음 그는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휴우, 외방악이 이렇게 깊고 험한 곳인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 구나." 사마소군은 앞쪽에 울창하게 펼쳐져 있는 침엽수림을 바라보며 새 삼 막막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대체 어디로 가야 석우생을 만날수 있단 말인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또르륵－ 똑－ 또르르－! 어디선가 기이한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사마소군이 흠칫하며 귀를 기울여 보니 그것은 목탁 소리와 흡사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매우 엄숙하고 묵직한 불호 소리가 들려 왔다. "나무아미타불 관세……." 소리는 바로 맞은편 수림 속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절도 아닌 이런 깊은 산중에서 범음이라니… 아마 천하를 주유하 는 행유승인가 보구나.' 사마소군은 약간 측은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일말의 존경심을 느끼 지 않을 수 없었다. 행유승들의 수도와 고행이 얼마나 힘들고 고난스러운 것인가는 그 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이 막 끝났을 때였다. 그토록 엄숙하고 경건했던 불호 소리가 갑자기 악을 쓰는 듯한 소 리로 돌변했다. "절간의 중놈들은 모두 도둑놈들이다! 열반이니 해탈이니 하는 것 은 술과 고기를 먹고 싶어 환장한 놈들이 세상 살맛을 잃고 푸념 하는 잠꼬대에 불과하다!" '엉?' 사마소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만약 석가세존이 들으면 당장 날벼락을 내려꽂을 악담 중의 악담 이었다. 사마소군은 당혹과 호기심을 금치 못하고 급히 소리가 들려 온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림 속은 워낙 울창한 탓에 햇빛조차 잘 스며들지 않을 정도였으 나 사물을 분간하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얼마 들어가지 않아 사마소군은 한 인물을 발견했다. 그는 수림 속의 한 공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나이는 대략 칠순 가량 되었을까. 광택이 나도록 반들반들한 대머리에 넝마 같거나 말거나 황색 가 사를 걸쳤으니, 분명 승려의 행색이다. 그러나 그 노승의 모습을 본 순간 사마소군의 눈은 화등잔처럼 크 게 뜨여지고 말았다. '세상에…….' 어처구니없게도 노승이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목탁이 아니라 사 람의 해골이었다. 그 해골 목탁을 두드리고 있는 것도 사람의 팔 이나 다리뼈가 분명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노승의 무릎 앞에 놓여 있는 물건이었다. 거기 에는 잘 튀겨진 통닭 한 마리가 기름 종이 위에 술병과 함께 버젓 이 올려져 있었다. 말하자면 영락없는 파계승의 몰골이었다. 그는 지금 사마소군이 곁에 다가온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술에 취 한 채 허공을 노려보며 악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자고로 절간의 중놈들치고 새벽마다 아랫도리 붙잡고 부들부들 떨지 않는 놈 없고, 시주 공양 온 여시주의 펑퍼짐한 엉덩이짝을 훔쳐보며 게침을 질질 흘리지 않는 놈 없으니… 오호라! 이 불쌍 한 중생들을 뉘라서 계도할까? 자고로 천지간에……." 노승의 음성이 문득 뚝 끊겼다. 그는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듯 사 마소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과 시선이 부딪쳤다. 노승은 빠르게 사마소군의 전신을 훑어보더니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리며 반색을 지었다. "어서 오너라, 불쌍한 중생이여! 얼마나 본 성승의 설법이 듣고 싶었으면 이 험한 산중까지 찾아왔을꼬?" 순간, 사마소군은 왠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내심 가능한 한 빨리 이 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아니, 저는 그게 아니고……." "알고 있으니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자고로 그 어떤 천하절경 도 배가 불러야 눈에 들어온다 했으니, 우선 이 닭다리부터 먹고 싶다 이 말이렸다?" 노승은 해골 목탁을 내려놓더니 닭다리를 뜯어 그에게 건넸다. 사마소군은 뭐라 말하려다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말을 듣 고 보니 갑자기 시장기가 동했던 것이다. 괴노승이 껄껄 웃었다. "헛헛… 아이야, 굴러 들어온 식복을 걷어차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느니라." 사마소군은 잠시 망설였으나 일단 배부터 채우기로 작정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괴노승의 앞에 앉았다. '아무리 파계승이지만 이 닭고기는 내가 먹는 게 부처님도 좋아하 실 거야.' 사마소군은 내심 생각을 굴리며 닭고기를 받아 들었다. 괴노승이 호기롭게 웃으며 말했다. "먹고 싶다면 이 닭을 모두 먹어도 괜찮다. 헛헛……!" "정말 그래도 괜찮습니까?" 괴노승은 파계승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자애롭게 웃었다. "물론이다. 사실 본 성승은 이미 조금 전 구운 통돼지 한 마리를 해치웠다." "그럼……." 사마소군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게눈 감추듯 닭고기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괴노승은 그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삽시간에 닭 한 마리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 다. 사마소군은 길게 기분 좋은 게트림을 했다. 괴노승이 술병을 내밀었다. "목마르면 이것도 조금 마시거라." 사마소군은 입 언저리를 쓰윽 닦으면서 씨익 웃었다. "보아하니 술인 것 같은데,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둔 후 넌지시 물었다. "대사님께선… 이 산 속에 사십니까?" 괴노승은 대답 대신 술을 한 모금 쭉 들이키더니 승포자락으로 입 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거주지를 따로 정할 게 무에 있느냐? 하늘 이 있고 땅이 있으면 모두 내 집이니라. 헛헛, 너는 이 광치화상 (光痴和尙)의 그러한 풍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건 멋진 풍류라 아니 할 수 없군요." 사마소군은 얻어먹은 게 유죄라 일단 맞장구를 쳐 주었다. "한데, 대사님의 법명이 광치(光痴)인가요?" "그렇다. 너는 그 법명이 본 성승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느 냐?" "글쎄, 어울리긴 하는 것 같습니다만 조금……." "헛헛… 이상할 것 없다. 그건 본 성승이 남달리 술과 고기를 즐 긴다고 해서 뭇중생들이 존경하는 마음에서 지어 준 것이다." "아… 알고 보니 원래 그랬었군요." 사마소군은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으나 겉으로는 천연덕스레 대꾸 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꿈에도 몰랐다. 광치화상, 이 이름이 당금천하 를 얼마나 쩌렁쩌렁하게 뒤흔드는가를. 본래 광치화상의 원래 법명은 정현(正賢)으로 알려졌다. 그는 일찍이 저 유명한 소림사(少林寺)에 입문하여 서른이 채 되 기도 전에 그 심오막측하다는 달마칠십이종절예(達磨七十二種絶 藝) 중 삼십팔 종이나 터득한 귀재 중의 귀재였다. 그러한 경지는 소림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이변이 없는 한 차기 장문인은 그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토록 장래가 유망했던 이 젊은 승려는 어느 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절반쯤 미쳐 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 그는 느닷없이 마을로 내려가 개를 잡더니 통째로 구워서 둘러메고는 소림사로 돌아와 성스러운 조사전 앞에서 술과 함께 포식하는 광태를 보였 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그 때부터 술에 취해 있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고, 선후배 가릴 것 없이 눈에 거슬리 면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뿐인가? 장문 방장실에서 술에 취해 구토를 해 놓는가 하면, 부처 님처럼 경건히 모셔야 할 장로들의 수염을 뽑아 버리는 일을 예사 로 저질렀다. 견디다 못한 소림의 수좌승들은 장로회의를 열어 그를 파문(破門) 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소림사를 쫓겨나 강호를 떠돌아다니면서도 그의 미친행각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광치화상, 이 명호는 그 때부터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그 무시무시한 손속에다 예측하기 어려운 흉폭한 성품으로 인해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천하에 다시 없는 악명을 떨치게끔 되었다. 하지만 광치화상의 미친 광기도 나이가 들면서 점차 사그라들었는 지 어느 날 갑자기 중원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것이 지 금으로부터 꼭 십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오늘 느닷없이 외방악의 한 깊숙한 산중에 출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력을 알 길 없는 사마소군은 그저 건성으로 계속 광치화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이 때 문득 광치화상이 생각난 듯 물었다. "아이야, 네 이름을 아직 듣지 못했구나." "참, 그렇군요. 제 이름은 사마소군이라고 합니다." "흠, 좋은 이름이다." 광치화상은 눈을 가느다랗게 내려뜨며 새삼 사마소군의 얼굴을 직 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소군은 그 눈빛을 대하자 왠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었다. 그는 아무래도 이쯤에서 일어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웃으며 옷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대사님. 저는 시간이 촉박한지라 이만……." "잠깐 기다려라." 광치화상이 느릿하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하더니 기이하게 웃었다. "너는 아직 본 성승과 한 가지 일이 남았으니, 그것을 해결하고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무슨……?" "헛헛… 너는 이승에서 옷깃 한 번 스친 사람은 전생에서 팔만사 천 번 마주친 인연이 있다는 말도 들어 보지 못했느냐?" 광치화상은 술에 얼큰히 취한 듯 약간 혀 꼬부라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본 성승과 너는 절대 우연히 이 산 속에서 만난 게 아 니다. 내 어찌 전생부터 깊은 인연을 맺은 너를 이대로 그냥 보낼 수 있겠느냐?" 사마소군이 어리둥절하여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광치화상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선물할 터이니, 너는 부담 없이 받도록 해라." "아, 아닙니다. 저는 닭고기를 얻어먹은 것만 해도……." 사마소군은 거절하려다 말고 황급히 입을 도로 다물었다. 광치화 상이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기 때문이 다. "놈! 본 성승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준다면 주는 것이다. 너는 그저 받기만 하면 된단 말이다!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사마소군은 갑자기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배가 고파도 참는 건데…….' 이 때다. 광치화상이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주위를 휘청걸음으로 맴돌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는 폼이 금세라도 퍽 하고 고꾸라질 것만 같다. 사마소군은 그가 준다는 선물은 주지 않고 자신의 주위만 빙글빙 글 돌자, 내심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시각이 흘렀을 때였다. 광치화상이 걸음을 뚝 멈추더니, 사마소군을 힐끔 쳐다보며 불쑥 물었다. "어떠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사마소군은 당혹성을 흘려 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그의 되물음에 광치화상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보기보다 아둔한 중생이로고. 네가 어찌 천하무쌍의 절세보법을 몰라본단 말이냐?" "예?" 사마소군은 움찔 놀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광치화상이 휘청거 리며 돌았던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대사님께서 제 주위를 거닐었던 그 걸음걸이가 바로 천하무쌍의 절세보법이란 말입니까?" 광치화상은 취기로 붉게 충혈된 눈에 자랑스런 빛을 발했다. "그렇다. 이것은 이름하여 잠종미리유성보(潛踪迷離流星步)라고 한다. 본 성승은 장장 사십 년이란 긴 세월을 바쳐 이 잠종미리유 성보를 창안해 냈다.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보법의 장점만을 분석 하고 종합하여 만든 것이니, 어찌 천하무쌍이 아니겠느냐? 이미 무림의 동도들은 이 보법을 일컬어 공전절후(空前絶後), 전무후무 (前無後無)의 일절이라고 극찬한 바 있느니라." "……!" 사마소군은 쉬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 아듣지는 못했으나 무슨 공전절후의 보법 어쩌고 하는 소리는 확 실히 들었다. "방금 그 쓰러지실 것 같은 걸음… 아니, 그 보법을 그토록 무림 고수들이 칭찬했단 말입니까?" 광치화상은 반신반의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껄껄 대소했다. "헛헛… 내 큰소리를 치는 게 아니라, 이 잠종미리유성보를 완벽 히 배워 둘 것 같으면 천하의 그 어떤 고수도 네 옷깃조차 건드릴 수 없게 함은 물론이고……." "……!"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의 콧구멍도 네 콧구멍처럼 자유자재로 청 소할 수 있음을 장담하는 바이다." 광치화상은 여기까지 말한 후 술을 한 모금 쭉 들이키더니 사마소 군이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재차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신차리고 똑똑히 보아라. 이제 기회는 단 두 번뿐이 다." '이제 보니 이게 바로 준다는 선물인 모양이구나.' 사마소군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유심히 살폈다. 광치화상은 아까보다 더욱 발걸음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이번엔 설명까지 곁들여 가며 흐느적거렸다. "이 잠종미리유성보로 말할 것 같으면 사상(四相)과 팔괘(八卦)의 변화를 혼합하고 거기다 다시 구궁(九宮)의 순서를 역행시킨 것으 로써, 이는 허허실실(虛虛實實)의 묘리를 가장 극대화시킨 보법이 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사마소군은 갑자기 골치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게 쉽게 말한 건가?' 광치화상의 움직임과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잘 보아라. 최초 이렇게 중궁(中宮)에서 감리(坎離)의 방향을 밟 는 것은 상대로 하여금 실(實)한 듯하면서도 허(虛)하게 보이기 위함이고……." 설명은 근 한 식경까지나 계속되었으며 실로 복잡하고 난해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보면 볼수록 광치화상의 보법이 흥미롭다는 것 을 느꼈다. 솟고, 내리고, 뻗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모두 오묘한 현기가 숨어 있었고, 흐름이며 변화가 오묘무쌍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눈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 은 눈 위에 뚜렷이 찍히는 그의 발자국이었다. 사마소군은 비로소 광치화상의 말이 허장성세가 아님을 깨달았다. 어느 사이엔가 그는 온 정신을 귀와 눈에 집중하고 광치화상의 가 르침에 깊숙이 몰입해 갔다. 이윽고 광치화상은 두 번째 시전을 마쳐 보이고 몸을 멈추더니 게 슴츠레한 눈길로 사마소군을 응시했다. "어떠냐? 이번에는 좀 깨닫는 게 있었느냐?" 사마소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다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 다. 광치화상은 기다리기가 지루했던지 사마소군이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술만 연신 들이켰다. 그러나 술병은 이내 바닥이 나고 말았 다. "빌어먹을……."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 때 사마소군이 조용히 눈을 떴다. 광치화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신비롭도록 맑고 영롱했다. "대사님, 한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은지요?" 광치화상은 한쪽 눈을 감고 술병 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물어 볼 것도 없다." "예?" "물어 볼 것도 없이 이 술병은 바닥났단 말이다." "그게 아니고… 혹시 대사님은 늙지도 젊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아 시는지요?" 순간, 광치화상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그는 기이한 눈빛으로 사마소군을 돌아다보았다. "어떻게 알았느냐? 본 성승이 그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사마소군의 눈에 빠르게 이채가 스쳤다. "역시 제 짐작이 맞았군요. 저는 얼마 전 독심괴의라는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다짜고짜 제게 희세의 영단을 주었는데, 지금 대사님께서 밑도 끝도 없이 잠종미리유성보를 전수해주시는 것과 매우 흡사했지요." 사마소군은 광치화상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도대체 그 젊지도 늙지도 않은 사람은 누구이고, 대사님과는 어 떤 관계인가요?" "이제 보니 그 돼지 같은 늙은이가 쓸데없는 말까지 했군." 광치화상은 대답 대신 혼자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살찐 돼지의 말은 다 필요 없는 것이니, 너는 애써 기억할 필 요가 없다. 또한 네가 기억할 필요가 없는 말을 물었으니, 나는 대답할 필요가 없지." '이게 무슨 소리지?' 사마소군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는 곧 광치화상이 교묘하게 대답을 회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사님, 그러나……." "좋다. 기왕 네가 질문을 했으니, 본 성승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를 말해 주겠다." "아……." "너는 이 산을 다 넘기 전에 또 한 명의 이상한 늙은이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한데 그 늙은이는 실로 성질이 괴팍하기 짝이 없다. 돼지 같은 여불해나 본 성승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지." 여기까지 말하고 난 광치화상은 갑자기 두 눈에 비수 같은 광채를 쭉 뿜었다. 그 눈빛을 대한 순간 사마소군은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사그라들 어 원래의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되돌아갔다. "헛헛… 비록 그 늙은이 역시 네가 말한 그 늙지도 젊지도 않은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이번 일에 참여하고 있 으나, 제 성미에 맞지 않으면 어느 누구와의 약속도 없었던 것으 로 해 버릴 위인이다." "제가 원하는 것은……." "듣기만 해라. 해서, 미리 주의를 주는 것인데… 네가 그 늙은이 를 만나서 처신하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가 무슨 수작을 부 리거나 감언이설로 유혹해도 절대 그의 뜻을 따르거나 동조하지 마라. 알겠느냐? 무조건 반대하고 무조건 거절하라는 뜻이다. 만 에 하나, 이 주의를 잊고 실수하면 너는 그 늙은이에게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할 것이다." 단숨에 여기까지 말한 광치화상은 다그치듯 사마소군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는 게냐? 알아들었느냐?" "……!" 사마소군은 그만 떨떠름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말들인가? 그야말로 한바탕 밑도 끝도 없는 횡설수설을 들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광치화상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한 것을 보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정말 괴팍하신 분 같군요. 명심해서 잊지 않도록 하겠 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그의 내심은 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면 도합 세 명이 그 늙지도 젊지도 않은 사람의 부탁을 받 고 내게 뭔가를 주려 한다는 것인데… 만에 하나, 그가 석형님이 아니라면 나는 이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리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 수수께끼의 인물을 여불해와 광치화상이 밝히지 않는 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고, 어찌 됐든 이것은 확실히 자신에 게 있어서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복연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편하게 생각을 고쳐 먹은 사마소군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직 한 번 더 볼 기회가 남아 있다고 그러셨습니까?" 광치화상은 그가 갑작스레 화제를 바꾸자 의아스러운 듯 되물었 다. "뭘 말이냐?" "잠종미리유성보." "아… 물론이다! 확실히 한 번 더 기회가 있지." "그럼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빨리 시전해 주시겠습니까?" "그거야 뭐 어렵겠느냐? 본 성승은 당장……." 광치화상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너 지금 빨리 시전해 보이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 광치화상은 놀란 눈으로 사마소군을 쳐다보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헛헛… 보아하니 너는 지금 실언을 한 것 같구나. 이런 경우에는 빨리 하라고 하는 것보다 되도록 늦게 해 달라고 말해야 맞는 것 이다. 왜냐하면 이 잠종미리유성보는 워낙 심오한 것이라 천천히 보결(步訣)을 음미……." "보결과 변화의 흐름은 이미 다 외웠습니다. 단지 대사님께서 워 낙 느리게 시전하시는지라 과연 유사시에 응용하면 어떤 위력이 나타나는지 궁금해서……." 사마소군은 여기까지 말한 후 약간 안색을 붉혔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전 대사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고 이왕이면 확실히 알아 두려는 것이니까요." "지,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광치화상은 펄쩍 뛸 듯이 놀라 소리쳤다. 그는 도저히 사마소군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 따져 물었다. "보결과 변화의 흐름을 이미 다 외웠다고?" 사마소군은 대답 대신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광치화상은 내심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잠종미리유성보는 그가 지난 사십 년 간의 장구한 세월을 바쳐 창 안해 낸 것이다. 그 심오한 변화는 절대 한두 번 보아서는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상당한 경지의 무공을 익힌 고 수의 경지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광치화상은 비록 겉으로는 단 두 번밖에 시전해 보이지 않 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내심 한 열 번 정도는 보여 주리라 작정 하던 터였다. 그런데 사마소군이 단 한 번 눈여겨보고 보결과 변화의 흐름을 외 웠다고 하니, 어찌 그가 놀라지 않겠는가? '이제 보니 이 녀석도 허풍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광치화상은 반신반의하다가 문득 엄숙한 신색을 지었다. "좋다. 네 소원대로 번개같이 해치울 테니 똑똑히 보아라. 이것은 마지막 기회이니, 나중에 딴소리해도 네 입만 아파질 것이다." "그런 일은 없을 터이니, 안심하십시오." 사마소군은 바싹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광치화상은 한 차례 가볍게 심호흡을 하더니, 한순간 흡사 용수철 이 퉁기듯 신형을 날렸다. 휘이익－! 그 때부터 사마소군은 광치화상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단지 희끄무레한 잔영(殘影)만이 주위를 가득 메우며 어른거릴 뿐 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전은 모두 끝났다. 광치화상은 마치 유령이 허공에서 솟아나듯 사마소군의 앞에 딱 정지했다. 전력을 기울인 탓인지 그의 이마에는 가벼운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괴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떠냐? 괜히 말을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사마소군은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최고예요. 저는 이제야 대사님의 말씀이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음 을 알았습니다." 그는 광치화상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성큼 앞으로 나서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제가 한 번 해 볼 테니, 대사님께서 보시고 틀린 점을 지적해 주십시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사마소군은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고 보결을 차근차근 떠올리며 천천히 발을 떼 놓기 시작했다. 그 순간 사마소군의 얼굴에는 도저히 그 나이 또래의 것이라 볼 수 없는 침착함과 냉철함이 가득 어려 있었다. 광치화상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린 채 유심히 그가 움직이는 모습 을 바라보았다. 최초 대여섯 걸음을 옮겨 놓았을 때 광치화상은 입가에 함박웃음 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출발이 매우 훌륭하다." 그로부터 다시 일 다경이 지났을 때에 광치화상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좋다, 매우 그럴 듯하다! 하지만 움직임이 둔하다. 물러남(退)에 힘을 삼키고, 나아감(進)에 힘을 토한다." 그 외침 소리에 기운을 얻은 듯 사마소군의 움직임이 점차로 빨라 져 갔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좌측을 피하면 우측을 접하고, 허(虛)를 보이되 실(實)을 찾는다. 상진하허(上眞下虛)!" 광치화상은 이제 침까지 튀기며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향 두 자루 가량 타 들어갈 시간이 지났을 때 광치 화상은 더 이상 고개를 끄덕이지도, 좋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과 입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확대되어 있었다. 그렇다. 그의 얼굴을 가득 덮고 있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지독한 불신의 빛이었다. 그리고 경악에 가까운 놀람이었다. 퍽－! 그의 손아귀에 술병이 박살나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광치화상은 그것도 깨닫지 못한 채 사마소군에게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휘이익－! 사마소군은 온몸에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정신없이 신형을 움직 이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무아지경에 몰입한 듯 당장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일순 광치화상의 몸이 격하게 진동했다. '오오, 어찌 이런 일이… 이런 믿을 수 없는 일이…….' 그는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마소군 은 거의 완벽하게 잠종미리유성보를 재현해 보이고 있었던 것이 다. 약간 속도가 느리고 상체가 부자연스러운 감은 없지 않았으나 보 결의 순서나 방위, 변화가 단 한 곳도 틀린 데가 없었다. 광치화상은 일시 자신의 잠종미리유성보에 대한 회의마저 일었다. 어쩌면 이 보법이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공전절후, 전무후무의 것 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 것도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광치화상은 곧 그러한 생각들을 떨쳐 버렸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실제로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싸움을 해 봤지만 아직까지 잠종미리유성보를 무색하게 만든 고수는 단 한 명도 없지 않았는가 말이다.' 결론은 하나뿐일 수밖에 없었다. 광치화상은 비로소 자신이 전무 후무한 무공의 귀재를 만났음을 깨달았다. '이 녀석이야말로 무공을 배우기 위해 태어난 놈이다. 천부의 자 질이란 바로 이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흥분의 물결이 지나가자 광치화상은 새로운 충격과 상념에 깊이 젖어들었다. '십 년… 늦어도 십 년 이내에 이 녀석은 이름 하나만으로도 무림 천하를 통째로 들었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다행한 일 이다. 잠종미리유성보가 저 녀석으로 인하여 더욱 빛을 발하게 되 었으니, 어찌 노납의 행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광치화상의 얼굴에 서서히 흡족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한순간 그는 소리도 없이 신형을 움직여 숲 속으로 향했다. 그의 모습이 곧 숲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가 사라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 보결을 밟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잠종미리유성보를 모두 재현해 보인 후 몸을 우뚝 멈 추었다. 이어 그는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 내며 고개를 돌렸다. "어떤가요, 대사님? 많이 틀렸……." 말하다 말고 그의 눈이 커졌다. "어? 어디 가셨지?" 사마소군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광치화상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하자 씁쓸하게 고소했다. "사라지는 방법도 독심괴의 노인과 똑같구나." 그는 자신의 주위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가 볍게 한숨을 지었다. "내가 제대로 배운 건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이 잠종미리유성보는 매우 재미가 있으니, 한 번만 더 연습해 보기로 하자." 휘이이익－! 사마소군은 재차 땀을 뻘뻘 흘리며 잠종미리유성보를 전개하기 시 작했다. 한 번만 더 한다고는 했으나 그는 거푸 다섯 번이나 연습을 마치 고서야 몸을 멈추었다. 그리고 마지막 시전이 끝났을 때에는 이미 절세미인의 눈썹 같은 조각달이 구름 새로 삐죽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제 9 장 허허실실(虛虛實實) ━━━━━━━━━━━━━━━━━━━━━━━━━━━━━━━━━━━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수림 속은 흡사 먹물을 뿌려 놓은 듯 어 두웠다. 음산한 바람이 불라치면 나뭇가지들은 춤추는 양 한꺼번에 흐느적 거렸다. 사마소군은 깊은 산중의 밤이 이토록 귀기로울 줄은 미처 알지 못 했다. 금세라도 무엇인가 눈앞에서 불쑥 뛰쳐나올 것만 같은 기분 이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수림 속을 거슬러 올라갔 다. 그리고 그는 이 칠흑 같은 어둠과 한 자 이상의 눈으로 덮인 산길을 자신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오르려 했던 것이 얼마나 무모 한 짓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예전 같았으면 난 이미 죽은 시체나 다름없었을 거야.' 그렇다. 독심괴의 여불해가 준 구구회천단을 복용하고 이십 년의 내공을 얻은 것은 그의 시력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눈이 좋아져 어둠 속을 희미하게나마 꿰뚫어볼 수 있음은 물론 잠 종미리유성보까지 배워 두었으니, 산길 정도는 문제가 될 수 없었 다. 이윽고 그는 산기슭의 정상에 당도했다. 그러나 광치화상이 말한 세 번째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연습을 하느라 너무 지체한 탓에 기다리다가 그냥 가 버린 걸까?' 어느 누구든 간에 만날 상대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득을 가져다 줄 사람이라면 가급적 빨리 만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이리라. 더구나 만날 사람이 절세의 복연(福緣)을 가져다 줄 상황이라면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었다. 사마소군이 약간 섭섭한 마음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몇 걸 음 나아갔을 때였다. 홀연히 어디선가 바람결에 실려 흐느끼듯 나직한 노랫소리가 처량 하게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아하, 이 놈의 세상! 살아서 무엇 할까? 세상은 넓고 넓어 사람은 많다만 보이느니 원수요, 만나느니 타인 이라……. 이 몸 홀홀단신 천애고인(天涯孤人)으로 세상을 헤매다 보니, 백 발만 삼천 장이라……. 아하, 한스럽고 한스럽다! 산들 낙이 없고, 죽은들 원통하게 울어 줄 이 없는 내 팔자야! 부러진 칼몸처럼 소용없는 신세여. 아하……! 그것은 그야말로 애간장을 녹일 듯 구슬픈 곡조였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슬픔 대신 기쁨이 치미는 것을 느껴야 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하지만 그는 반색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데, 여인이란 말인가!' 그렇다. 약간 쉰 듯 스산하게 귓가에 스며드는 음성은 분명 여인 의 것이었다. 그것도 늙은 노인의 음성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 큼 생생했다. '이상하구나. 광치화상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분명 늙은이라고 했는데…….' 사마소군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결국 노랫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가 보기로 결심했다. 한 십여 장 가량 비탈길을 내려갔을까? 그의 시야에 하나의 높은 바위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바위 위에서는 지금 실로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 다. 한 흑의여인이 바로 바위 옆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에 밧줄을 매달 고 막 목을 매려는 게 아닌가? '저, 저런!' 사마소군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위급한 상황도 상황이 거니와 그를 놀라게 한 것은 한 가지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스 며드는 달빛 아래로 드러난 여인의 용모였다. 그것은 정녕 추악하다 못해 차라리 소름끼치는 용모였다. 훌쩍 큰 키에 몸은 어찌나 말랐던지 마치 여러 개의 나뭇가지가 불균형하게 짝을 맞추어 조립된 듯이 보였다. 거기다가 허리 아래 종아리까지 치렁치렁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은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깎지 않은 것 같았고, 몸에 걸치고 있는 흑의도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군데군데 삭아 내려 있었다. 이쯤되면 영락없는 산송장의 모습인데, 그 얼굴은 또 어떠한가? 뽑다가 만 솔잎처럼 듬성듬성한 눈썹에, 지독한 곰보자국이며, 두 툼한 메기입 등 실로 천하에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박색이며 추녀 가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불룩한 젖가슴의 윤곽만 없었더라면 사내인지 여인인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사마소군으로서는 그녀의 용모가 아름답던 추악하던 간에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가 소리를 치며 막 달려가려는 순간이다. 그의 뇌리를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차! 혹시 저 괴상한 여인이 바로 광치화상이 말한 사람이라 면?' 일단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사마소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일부러 느릿하게 접근해 갔다. 그 때 이미 흑의여인은 밧줄을 완전히 목에 맨 상태였으며, 딛고 선 발 밑의 돌무더기만 차 버리면 당장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릴 판이었다. 그 위기의 순간, 그녀 앞에 당도한 사마소군이 태연자약하게 입을 떼었다. "지금 뭐하시는 중이십니까?" 흑의여인은 멈칫 고개를 돌려 그를 돌아다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딱 부딪쳤다. '소름끼치는 눈빛이군!' 사마소군은 순간, 바늘끝이 자신의 동공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이 었다. 그 때 흑의여인이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슬픈 어조로 입을 열었 다.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아이냐?" "저는 저 뒤쪽에서 왔으며, 이 앞쪽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것 참, 이상한 대답이군." 흑의여인은 우울하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허공을 우러르며 땅이 꺼 져라 탄식했다. "아하, 참으로 원통한 신세로다. 애써 아무도 없는 산 속을 찾아 세상을 하직하려 했거늘, 이런 곳에서까지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 야……." 실로 비탄에 잠긴 표정이 아닐 수 없었다. 금세라도 눈물을 떨구어 낼 듯한 그녀의 모습에 사마소군은 코끝 이 찡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의 말을 하려다 말고 내심 화들짝 놀랐다. '아차! 하마터면 또 광치화상이 했던 말을 잊을 뻔했구나.' － 무슨 말을 하든 너는 무조건 부정을 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동조를 하거나, 그렇다고 긍정을 하면 너는 그 늙은이에게서 아무 것도 얻어 낼 수 없다. 번개같이 광치화상이 했던 말을 상기한 사마소군은 재빨리 염두를 굴렸다. 그는 이내 흑의여인을 향해 공손하고 진중한 태도로 말했다. "제가 본의 아니게 기쁜 일을 방해할 뻔했군요. 저는 이만 가던 길을 계속 갈 테니, 어서 하던 일을 계속하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사마소군은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사마소군의 반응이 충격을 주었던지 흑의여인은 두 눈을 부릅뜨고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급히 밧줄 속에서 목을 빼고 사마소군을 향해 외쳤다. "그러니까… 너는 그냥 가겠다 이 말이냐?" 사마소군은 걸음을 우뚝 멈추고 측은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 다. "오죽 답답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겠습니까? 저도 세상 을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사는 게 고통스러운지 잘 알지요. 제게 할일이 남아 있지 않다면……." "어쩌겠다는 것이냐?" "저도 당장 따라서 같이 죽고 싶습니다. 아주머니가 정말 부럽군 요. 이렇게 좋은 장소에서 편히 죽을 수 있다니……." 사마소군의 대답은 실로 기상천외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흑의여인은 그만 멍청한 표정이더니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이 할머니는 네 말을 믿을 수 없다!" 사마소군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할머니라고? 역시 음성만 젊을 뿐 늙은이였구나! 내가 찾던 상대 가 틀림없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러한 내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태연히 대 꾸했다. "믿지 않으셔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기, 기다려라!" 흑의여인은 사마소군이 다시 떠나려 하자 황급히 불러 세웠다. 그녀의 안색은 괴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가뜩이나 볼품없는 얼 굴에 눈썹까지 찌푸리고 있으니 정말 가관이었다. "웬만하면 왜 자살을 하려 하는지 한 번쯤 물어 보기라도 하지 그 러느냐?" 이젠 거의 사정조였다. 사마소군은 잠시 턱 언저리를 쓰다듬으며 자못 심각한 표정이더니 마침내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역시 그냥 가는 게 좋겠습니다. 남의 일을 방해 하는 것은 나쁜 짓이니까요." 말을 마치자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흑의여인은 만면에 분노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부르르 몸 을 떨더니 버럭 고함을 쳤다. "이 인정머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놈아! 너는 이 늙은이가 이 러고 있는 것이 불쌍하지도 않단 말이냐?" 사마소군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 짐짓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상하군요. 제가 보기에는 아주머니는 조금도 늙지 않았는데 왜 스스로 늙었다고 하십니까?" "이런 젖냄새 나는 어린 개뼈다귀! 이 소수선랑(素手仙娘)의 나이 가 칠십하고도 다섯 살이나 먹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데, 무 슨 잡소리냐?" 당장이라도 사마소군을 잡아먹을 듯 살기등등한 기세였다. '마흔도 채 넘지 않은 것 같은데, 칠십다섯 살이나 먹었다고?' 사마소군은 내심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한 신색을 유지한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원래 아주머니가 아니고 할머니였……." 말하다 말고 그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말을 바꾸었 다. "아니, 역시 아주머니란 칭호가 더 어울리겠군요. 소수선랑(素手 仙娘)은 아주머니의 명호인가요?" 흑의여인은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 내 모습과 어울리는 명호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물으면서 그녀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설마하니 사람을 앞에 두고 남의 명호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예상은 다음 순간,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 다. "아닙니다. 그 명호는 아주머니에게 조금도 어울리지 않아요. 차 라리 소수선랑보다는 소수귀랑(素手鬼娘)이라고 하는 게 딱 어울 리겠습니다." 이 대답은 기실 사마소군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진작부터 소수귀랑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소수귀랑. 그녀는 삼십 년 전만 해도 울던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던 강호 제일의 여살성(女殺星)이었다. 이 이름은 또한 저 유명한 설산신궁(雪山神宮)의 설산성모(雪山星 母)와 남해 보타암주인 백죽신니(白竹神尼)와 더불어 천하삼대 여 고수 중 하나로 손꼽혔다. 설산성모와 백죽신니가 정도무림의 우 상으로 숭배받는 반면, 소수귀랑은 흑도무림의 대명사 격으로 불 리는 게 다를 뿐이다. 본래 그녀는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는 관심이 없는 괴녀 (怪女)였다. 때문에, 그녀의 악명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예를 들어 그녀는 단지 식전에 몸을 푼다는 구실로 살인을 한적이 있는가 하면, 접대음식이 맛이 없다는 이유로 한 문파(門波)를 아 수라장으로 만든 일도 있었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그녀를 저주하면서도 누구 한 명 감히 그녀의 괴행(怪行)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토록 그녀가 일신상에 지닌 흉 성(凶性)과 무공은 가공스럽고 사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악명 높은 소수귀랑도 삼십여 년 전 어떤 이유에서인지 홀연히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의 갑작스런 증발은 갖가지 추측과 풍문을 세상에 남겼으나 어느 누구도 확실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러한 그녀가 오늘 느닷없이 복우산의 외방악에 출연해 사마소군을 만나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내막을 모르는 사마소군으로서는 지금 자신이 죽음의 사신 앞에 서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그녀의 비위를 있는 대로 다 긁어 놓는 것이었으니……. 이 순간 사마소군을 바라보는 소수귀랑의 안색이 돼지 간을 씹은 듯 변해 있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문득 그녀는 흉한 안면근육을 실룩거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 보니 너는 그 죽지도 않는 땡 초 중늙은이에게 사전교육을 단단히 받은 모양이구나. 오냐, 그래 내가 졌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 무공 을 배우도록 해라. 알겠느냐?" 사마소군은 내심 뛸 듯이 기뻐 함박웃음을 지었다. "결국은……." 말하다 말고 그는 흠칫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그 짧은 순 간, 소수귀랑의 눈가에 번뜩 스치는 기광을 보았던 것이다. 사마소군은 또 한 차례 자신이 넘어갈 뻔했음을 깨달았다. '어이구, 하마터면 싸구려 무공을 배울 뻔했구나.' 그는 곧 또렷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배우지 않겠습니다." 소수귀랑의 얼굴은 차라리 동정이 갈 정도로 확 일그러져 버렸다. '이 젖비린내 나는 녀석의 심기가 어찌 이리 깊단 말인가?' 소수귀랑의 내심은 착잡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아아, 결국 저 어린 놈에게 내가 가장 아끼는 무공을 전수해야만 한단 말인가?' 본래 그녀는 이 세상의 어떤 계율이나 도리에도 따르지 않았으나 자신이 스스로 정한 계율에는 목숨을 걸 정도로 철저한 성품이었 다. 그녀의 무공은 일곱 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 마소군에게 한 질문의 함정도 꼭 여섯 번이었다. 따라서 이제 그 녀에게는 더 이상 함정을 팔 무공은 한 가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 다. 소수귀랑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울화통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사마소군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았다. "이 개뼈다귀 같은 놈아! 노신의 무공은 하나같이 무림인들이 꿈 속에서도 배우기를 소원하는 광세절기들뿐이다. 그런 것을 네가 감히 배우지 않겠단 말이냐?" 사마소군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으나 타고난 고집이 있었기에 완강히 버틸 수가 있었다. "그래도 저는 배우지 않겠습니다." "배워야 한다!" "싫습니다." "배워!" 소수귀랑의 날카로운 두 눈에는 일순 시퍼런 안광이 귀화(鬼火)인 양 뿜어져 나왔다. 사마소군은 그 눈빛을 바로 코앞에서 대하자, 그만 혼백이 다 달 아나는 느낌이었다. "싫다면 싫은 겁니다." "죽고 싶으냐?" "안 배우겠다는데 왜 자꾸 사람을 이렇게 들볶으십니까?" "망할 자식 같으니!" 소수귀랑은 사마소군의 몸을 홱 뿌리쳤다. 사마소군은 저만큼 나가떨어졌으나 재빨리 광치화상에게 배운 잠 종미리유성보를 사용해서 몸의 중심을 잡았다. 소수귀랑은 더 이상 사마소군에게 시선을 던지지도, 질문을 하지 도 않았다. 그녀는 두 손을 가슴 부위에 모으고는 즉시 무공초식을 펼쳐 보이 기 시작했다. "잘 보아라. 천하제일의 금나술(擒拏術)이자 노신의 최고절기인 용등십팔조(龍騰十八爪)다. 만약 네가 이 초식을 절반만 깨우쳐도 얻는 해택이 무궁무진할 것이다." '용등십팔조라고?' 사마소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비로소 모든 시험이 끝났다 는 것을 알았다. 그는 온 정신을 모으고 소수귀랑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본래 소수귀랑의 용등십팔조는 열 손가락을 마치 독수리 발톱처럼 구부려 그 어떤 병장기보다 무섭게 사용할 수 있는 절학이었다. 후후웅－! 그녀가 쌍수(雙手)를 굼벵이처럼 천천히 움직이는데도 주위의 공 기가 무섭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손이 움직이는 속 도는 조금씩 빨라져 갔다. 사마소군은 점차로 눈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칡뿌리처럼 앙상한 두 손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변화무쌍했다. 그 두 손은 때로 묘하게 끌어당겨 오므리는가 하면, 바위라도 부 술 듯 휘갈겨 떨치고,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벼락같이 내려 꽃히는가 하면, 파도가 일렁이듯 사납게 풀어 내곤 했다. 게다가 고비고비마다 부드러움(柔)과 강함(强)이 다르며 빨아들임(吸)과 퉁겨 냄(彈)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니, 실로 난해하기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더욱이 소수귀랑은 그 난해한 용등십팔조의 초식들을 선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시전해 보여서 사마소군으로 하여 금 탄성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이윽고 미친 듯이 춤추던 양 손의 움직임이 딱 정지되었다. 그녀는 사마소군을 힐끔 돌아보며 냉랭하게 물었다. "잘 보았느냐? 너는 이 용등십팔조에서 몇 가지 변화를 보았는지 말해 보아라." "그게……." "흥! 그렇게 부끄러워할 것 없다. 노신은 네가 단 열 가지만 보았 다고 해도 상으로 한 가지를 더 가르쳐 주겠다." 소수귀랑의 이 한 마디에는 어딘가 오만함이 담겨 있었다. 사마소군은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웃었다. "그러면 다행이군요. 저는 할머니의 손 움직임에서 도합 서른여섯 가지의 변화를 보았는데, 그 중 두 가지는 확실하게 외우지 못했 습니다." "뭣이라고?" 소수귀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단 한 번 보고 용등십팔조의 마흔두 가지 변화 중 서른여섯 가지 를 보고 그 중 서른네 가지를 완전히 외웠다면… 맙소사!' 소수귀랑은 뒤통수를 육중한 쇠망치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귀신이란 말인가?' 사마소군은 그녀의 안색이 이 순간에 수없이 변화를 일으키는 것 을 보고 의아스런 어조로 물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미친 놈! 네녀석은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단 말이냐?" 소수귀랑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마소군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할머니……." "입 닥쳐라! 대갈통을 부수어 놓기 전에." 소수귀랑은 두 눈을 무섭게 부라리더니, 재차 두 다리를 약간 벌 리고 기이한 자세를 취했다. "이번에 가르쳐 주는 것이야말로 노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성 명장법(盛名掌法)이다.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거니와 천하를 통틀 어 이 장법을 받아 낼 수 있는 자는 절대 다섯 명을 넘지 못한 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수귀랑은 우수를 똑바로 세워 가슴 앞에 수 직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돌연 뽀얀 백기(白氣)가 피어 오르며 그녀의 손이 투명하게 변했다. 얼음장처럼 하얗게 변해 어둠 속으로 빛나는 손. 그 광경은 신기 하다 못해 어찌 보자니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 짧은 순간 소수귀랑의 시선이 오륙 장 앞에 있는 거대한 바위 로 향했다. 거의 동시에 그녀는 우수를 느릿하게 앞으로 쭉 내뻗 더니 이내 원래의 자세로 되돌아갔다. 백옥처럼 투명한 광채가 그 녀의 손에서 사라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소수귀랑의 이 한 수는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과도 같아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천하의 장법…….'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느닷없이 경천동지할 굉음 이 그의 고막을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사마소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일순 그의 눈이 엄청난 경 악을 담고 부릅뜨여졌다. 소수귀랑의 시선이 향해 있던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 박살나있지 않은가? '세, 세상에…….' 사마소군은 마치 무슨 요술을 본 느낌이었다. 그가 미처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기도 전이었다. 소수귀랑의 득의 어린 음성이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름하여 소수무영장(素手無影掌). 이것은 본래 천축밀교(天竺密 敎)의 비전신공인 대유선천기공(大柔先天氣功)에 소림사의 백보신 권(百步神拳)을 융합하여 만들어진 장공이다." "……!" "발출할 때는 일체의 소리나 기척도 없으며, 목표물에 닿는 순간 일시에 폭발하여 가공할 파괴력을 발휘한다. 어떠냐? 이것이야말 로 배우고 싶지 않느냐?" 소수귀랑의 두 눈에 괴이한 광채가 번뜩 스쳤다. 사마소군은 일시지간 대답할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삐이익－! 갑자기 산 아래쪽에서 날카로운 대호적(大胡笛) 소리가 밤공기를 찢으며 울려 퍼졌다. 연이어 그 호적 소리에 답하기라도 하듯 이 곳 저 곳에서 한꺼번 에 대호적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삐익－ 삐이익－! 사마소군은 본능적으로 그 대호적 소리들이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수귀랑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며칠 전부터 괴상한 놈들이 외방악 주위를 어른거리더니, 기어코 귀찮은 일이 터진 것 같군." 소수귀랑은 곰보투성이의 얼굴을 가볍게 찌푸리며 중얼거리더니, 사마소군을 힐끔 응시했다. "이 놈아, 너는 확실히 운이 좋은 녀석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받아라." 소수귀랑은 품속에서 한 권의 얄팍한 책자를 꺼내 들더니 사마소 군에게 내밀었다. 사마소군이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드는 사이, 그녀의 말이 화난 듯 이어졌다. "네놈에게 소수무영장의 구결만 간단히 가르쳐 주고 떠나려 했는 데 뜻밖의 놈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이 책자를 통째로 주게 되었으 니, 네놈은 재수가 좋은 게 아니고 뭐냐?" "아……." "이 놈아, 놈들은 뜻밖의 고수들인 것 같다. 벌써 산중턱까지 접 근해 온 것을 보니 말이다." 소수귀랑의 두 눈에 언뜻 무시무시한 살기가 스쳤다. "네가 받은 책자에는 소수무영장을 익히는 방법이 자세하게 수록 되어 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여기 머무를 필요가 없으니, 어서 자리를 피하거라. 우물쭈물하다가는 귀찮은 일에 끼여들게 될 것 이다." 소수귀랑은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어디론가 가려다 말고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참, 깜빡 잊을 뻔했구나. 너는 그 계집도 사내도 아닌 녀석을 만 나고 싶거든, 너는 저 산 너머에 있는 폭포를 찾아가거라. 재수가 좋으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소군은 흠칫 두 눈에 이채를 발했다. '여불해 노인과 광치화상은 늙지도 젊지도 않은 사람이라더니, 이 번엔 사내도 계집도 아닌 사람이라고?' 내심을 스치는 의혹과 함께 그는 소수귀랑이 가리킨 산을 바라보 았다. 그러나 어둠 속의 첩첩산중이라 어느 산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사마소군은 질문과 함께 고개를 돌리다 말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느 새 소수귀랑은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새삼스레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독심괴의 여 불해와 광치화상이 사라질 때도 이와 똑같았으므로. 그 때다. 삐익－! 삑－! 대호적 소리가 바로 십여 장 전방에서 들려 왔다. 사마소군은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이미 떠나기에는 늦었다고 판 단한 그는 숨을 곳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곧 적당한 곳을 발견해 냈다. 그 곳은 열 발자국 정도 떨어 진 곳에 있는 거대한 소나무 밑이었다. 그 소나무의 밑둥치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는 눈 덮인 넝쿨이 수북하여 숨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사마소군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재빨리 구멍 속으로 몸을 숨겼 다. 구멍 안은 비좁은데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사마소군은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휙 하는 파공성과 함께 한 인물이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했구나.' 사마소군은 가슴을 졸이며 나타난 인물의 생김새를 살폈다. ━━━━━━━━━━━━━━━━━━━━━━━━━━━━━━━━━━━ 제 10 장 쾌검일초(快劍一招) ━━━━━━━━━━━━━━━━━━━━━━━━━━━━━━━━━━━ 나타난 인물은 이미 오래 전에 고희(古稀)를 넘긴 듯한 녹의장포 의 노인이었다. 길다랗게 늘어뜨린 수염이며 약간 푸른빛을 띤 눈썹 등이 한눈에 도 예사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쑥대밭처럼 헝클어진 머리는 물론이고, 입가에는 핏물이 맺혀 있는 모습이 한바탕 격전을 치른 흔적이 역력했다. 숨어서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곧 그의 아랫배가 길게 갈라져 희멀 건 속살이 삐죽 내비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녹의장포의 노인은 왼손으로 그 처참한 상처를 움켜쥐고 있었으나 연신 피가 흘러 나오는 것은 막지 못했다. '저런 상처라면 설령 전설의 화타나 편작이 나타난다 해도 고치기 가 불가능하겠구나.' 사마소군은 녹의장포의 노인이 그처럼 회생불가의 몸을 이끌고 아 직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 같았다. 한편 녹의장포의 노인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사위를 한 차례 살피 더니, 오른쪽 계곡을 향해 번쩍 신형을 날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노인이 쏘아져 가는 방향 맞은편 수림 속에 서 푸른 검광(劍光)이 뱀의 혓바닥인 양 번쩍 뻗어 나왔다. "욱!" 녹의장포 노인의 몸이 급살맞은 듯 퉁겨 났다. 그는 처음의 그 자리로 되돌아와 땅에 고꾸라졌다. 방금의 일격에 당한 상처인 듯 그의 어깻죽지는 허연 뼈가 보이도 록 갈라져 검붉은 피가 샘솟듯 뿜어져 나왔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채 반도 일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때였다. "후후… 백독신군(百毒神君) 염백추(閻白秋), 더 이상 달아날 생 각은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자리가 바로 당신이 묻힐 장소이니까 말이오." 살기에 찬 음성과 함께 숲 속에서 네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모두 푸른색의 도포 차림에 연환표대(連還飄帶)의 당건을 머리에 둘러맨 차림들이었다. 숨어서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그들이 바로 말로만 듣던 도인(道人) 임을 알았다. 한결같이 마흔 살 안팎의 나이인데, 네 도인은 손에도 역시 똑같 이 푸른빛 청강검을 들고 있었다. 한편 백독신군 염백추라고 불려진 녹의장포 노인은 그들을 발견한 순간, 만면에 분노와 절망의 기색을 띠고 있었다. "무당사검(武當四劍), 바로 너희들이었구나?" 무당사검. 그렇다. 이들 네 도인은 본래 현청(玄靑), 현학(玄鶴), 현우(玄 羽), 현진(玄眞)이라 불리는 무당파의 초강고수들이었다. 소림사와 더불어 정도무림의 양대산맥으로 일컬어지는 무당파는 특히 검법에 있어 천하무적을 자부해 온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다 이들 네 사람은 무당파의 현(玄)자 항렬 중 가장 뛰어난 실력 들을 지녀 무림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고수들이었다. 이 때 무당사검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현청도인이 냉막한 어투 로 입을 열었다. "영광이오. 무림제일의 독왕(毒王)께서 우리 같은 무명지졸들의 이름을 다 기억해 주시다니……." 비웃음이 내포된 한 마디였다. 백독신군 염백추가 그것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염백추는 두 눈에 자욱한 살기를 뿜어 내며 원독에 찬 괴소를 터 뜨렸다. "흐흐흐… 노부가 아무리 이 지경이지만 감히 손자뻘인 네놈들까 지 천방지축으로 날뛰다니." "무량수불… 그 따위 허장성세를 부리려면 일단 주위부터 한 번 둘러보시는 게 어떻소?" 현청도인의 이 말에 염백추는 흠칫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곧 크게 흔들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등 뒤에는 여덟 인영(人影)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유령처럼 나란히 서 있 었다. 그들의 차림새는 각기 달랐으며 무당사검처럼 젊지도 않았다. 또 한 그들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도는 하나같이 산악과도 같아, 어느 한 사람 염백추의 아래가 아니었다. 염백추의 시선이 맨 좌측의 노승에게 향했다. 노승은 언뜻 보기에도 칠 척이 넘어 보이는 거구였으며, 왼손에 선장(禪杖)을 짚고 선 자세가 그야말로 태산을 연상케 했다. 노승의 바로 옆에는 봉두난발에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지닌 거렁뱅이 차림의 노인이 두 눈에 새파란 안광을 뿜어 내며 염백추 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림의 초공(草空), 개방의 불사광개(不死狂 )……." 염백추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처럼 뇌까리며 눈길을 옮겼다. 붉은빛이 감도는 수염에 관운장처럼 검은 수염을 배꼽까지 늘어뜨 린 위맹한 인상의 인물이 세 번째로 그의 눈에 비쳤다.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천수여래(千手如來) 당욱(唐旭)… 맞는 가?" 염백추가 땀으로 뒤범벅된 얼굴에 경련하듯 억지웃음을 지으며 묻 자, 상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백추는 자신의 갈라진 배와 피투성이 처참한 몰골을 내려다보며 발작적으로 말했다. "흐… 흐핫핫… 좋아, 이 염모의 목숨을 취하고자 천하를 뒤흔드 는 사대문파(四大門派)의 고수들이 한꺼번에 나타났으니 그리 기 분이 나쁘지는 않군. 단지 이런 초라한 몰골로 인사를 하게 된 게 송구스럽소." 염백추는 말을 마치자 핏발 선 눈으로 나머지 다섯 사람을 쳐다보 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린아이처럼 작달막한 키에 울긋불긋한 오색채 의를 입었으며, 얼굴에는 새하얀 분을 바른 모습이었다. 그 괴상 한 몰골에다 입은 모두 피칠을 한 듯 붉어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 다. 이러한 모습은 만약 대낮에 본다면 우스울지 몰라도 지금처럼 깜 깜한 밤중에는 소름끼치기 짝이 없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염백추의 눈에 빠르게 당혹이 스쳤다. "너희들은… 묘강오독(苗疆五毒)이 아니냐?" 그러자 다섯 괴인들 중 가운데 인물이 시뻘건 입을 쩍 벌리며 간 사스런 웃음을 지었다. "헷헷… 꼭 십 년 만에 뵙소이다, 염선배." 염백추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너희들이 언제부터 백화맹(百花盟)의 발을 핥는 개가 됐느냐?" "헷헷… 염선배는 지금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구려. 지금 천하는 백화맹의 탁월한 영도력하에 유사 이래 최초의 무림통일을 두고 있다는 걸 왜 모르시오?" 잠시 사이를 두고 그는 소림의 초공대사와 개방의 불사광개 등을 돌아다보며 말을 이었다. "천하의 무림인들이 흑도(黑道)와 백도(白道)를 가릴 것 없이 모 두 백화맹에 충성을 약속하는 판이거늘, 어찌 우리만 개라고 욕하 는지 모르겠구려." "으음……." 염백추는 묘강오독을 무섭게 쏘아보더니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괴 소를 터뜨렸다. "핫핫… 어쨌든 환영한다. 저승길 친구가 하나라도 더 느는 건 반 가운 일이지." 살기가 묻어 날 듯 진하게 배인 한 마디였다. 그러나 장내의 어느 누구도 그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초공대사가 묵직한 불호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염시주께서는 개과천선하라는 맹주(盟主)의 수 차례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지난 삼 년 간 그 잔인한 독술(毒術)로 스물세 명의 무림동도들을 죽였소. 이 같은 살인행각은 어떤 이유 로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오. 동시에 백화맹이 선포한 무림교칙 (武林敎則) 제사조(第四條)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기도 하오. 따라 서 우리는 오늘 여하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염시주를……." "개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초공!" 염백추는 버럭 호통을 쳐서 초공대사의 입을 다물게 하더니, 활화 산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을 발했다. "간곡히 권유했다고? 칼을 뽑아 들고 억지로 강요하는 게 간곡한 권유란 말이오?" "그건 염시주께서……." "핫핫… 초공, 당신의 깨끗한 귀에 내 더러운 욕이 들어갈까 걱정 되는구려. 말짱 개수작들이지!" 염백추는 만면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가증스럽게도 너희들의 백화맹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는 그 시답 지 않은 무림교칙이라는 걸 발표해 놓고 이번 기회에 반대파 세력 들을 모두 말살시키려는 가공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아미타불… 반대파라는 표현을 쓰다니, 우스운 일이오. 백화맹은 단지 무림의 암적 존재들을 뿌리뽑으려는 것뿐이오." 초공대사의 신색이 준엄하게 변했다. 염백추는 그 말을 듣고 허탈하게 웃었다. "암적 존재라? 흐흐, 과히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나 당신들은 모 른다. 백화맹의 맹주가 무엇 때문에 기를 쓰고 노부를 죽이려고 하는지……." 순간, 초공대사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그는 염백추를 번갯불 같은 신광 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추궁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흐흐… 말해 줘도 믿지 않을걸. 하지만 한 가지만 충고해 주지. 초공, 당신은 그 음흉한 맹주와 부처님 중 한쪽을 선택하는 게 좋 을 거야." 염백추의 말은 의미심장한 것이었으나 초공대사는 도저히 알아들 을 수가 없었다. "아미타불… 그렇다면 맹주께서 고의로 시주를 죽이려 한단 말이 오?" 이 때 무당파의 현청도인이 앞으로 나서며 버럭 노성을 질렀다. "대사께서는 더 이상 그 간특한 자의 말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그는 궁지에 몰리다 보니 황당무계한 이간책을 쓰는 것입니다." 염백추의 무서운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간책이라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귀 기울여 들을 사람은 여기에 단 한 명 도 없소. 당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선택하 는 것뿐이오." 현청도인의 이 말에 장내의 모든 인물들은 다시 안색을 칼날같이 굳히며 동감의 눈짓을 표했다. 염백추는 갑자기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아랫배의 상처 부위가 극심한 고통을 안겨 준 탓이었다. 그것은 그가 분노로 인해 잠시 기혈을 억제하는 일에 소홀했던 때문이었다. 그는 안면근육을 씰룩거리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으나 곧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신 그는 입가에 살기 어린 괴소를 떠올린 채 주위를 쓸어 보았 다. "흐흐… 그렇군. 소 귀에 경을 읽는 격이다. 말해 봐야 입만 아프 지. 그러나 노부는 칠보추혼사(七步追魂沙)의 위력 앞에서도 너희 들이 그처럼 큰소리를 칠 수 있는지 지켜 보겠다." 순간, 장내 인물들의 안색이 일제히 홱 굳어졌다. 그들은 은연중 앞다투어 경계의 자세를 취했는데, 칠보추혼사라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때다. 천수여래 당욱이 그 멋들어진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오! 내가 기억하는 한, 저 자는 포위망을 뚫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니고 있던 독(毒)을 모두 소비했소. 그는 지금 도주 의 기회를 노리며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는 게 분명하오." 염백추는 힐끔 그를 쳐다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너는 수염이 석 자인데도 어찌 그리 혓바닥이 짧으냐? 도주라니? 너는 노부가 이 몸으로 도주를 한다고 해도 살아날 수 있다고 보 느냐?" "……." 당욱은 그만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 염백추의 상처는 너무나 엄중해서 누가 보더라도 한 시진 이상을 버틸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자 장내의 군웅들은 떨떠름한 표정이 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본래 칠보추혼사(七步追魂沙)는 백독신군 염백추가 가장 아끼는 독암기로써 남만산(南蠻産)의 미세한 모래에 온갖 극독을 다 섞어 만든 것이었다. 워낙 미세한 모래 암기인 탓에 미처 방비하기도 힘들 뿐 아니라, 살짝 스치기만 해도 즉시 살과 뼈가 문드러져 버리는 위력을 지니 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군웅들로서는 누구도 앞장 서서 나서려 할 리가 없었다. 그 때 염백추가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흐흐흐… 비켜라! 쥐새끼들처럼 서로 눈치만 보고 있지 말고 말 이다." 염백추의 이 한 마디는 군웅들의 안색을 벌겋게 만들어 놓았다. 이 무슨 수치스러운 일인가? 명색이 내노라 하는 무림거두들이 이미 다 죽어 가는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한 명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에 알려지면 망신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점을 의식한 탓인지 개방의 불사광개가 번쩍 신형을 날려 염백추의 앞을 막아 섰다. "노부가 감히 친구의 칠보추혼사를 견식코자 하네. 비웃지는 말아 주게." 염백추는 안색을 싸늘하게 굳혔다. "흐흐흐… 내 일찍이 불사광개의 칠십이로타구봉술(七十二路打拘 棒術)이 무림일절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어 왔다. 그러나 너 늙은 거지는 그 초식을 채 펼쳐 보이기도 전에 칠보추혼사의 제물 이 되고 말 것이다." 불사광개는 버럭 대갈성을 터뜨림과 동시에, 벼락같이 지면을 박 차며 염백추를 덮쳐 갔다. 슈슈슉－!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무수한 봉영(棒影)이 허공을 난무했다. 거대한 산이라도 허물어 버릴 듯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불사광개의 타구봉은 그야말로 거지의 지팡이처럼 볼품이 없었으 나, 그 위력은 천 근 만 근의 힘을 내포하고 있어 그 경기만으로 도 염백추의 몸을 휘청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염백추는 옷자락이 찢어질 듯 휘날리는 그 절대절명의 순 간에도 피하기는커녕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 "좋아, 매우 훌륭한 초식이야." 이 한 마디를 중얼거린 염백추는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퍼퍼퍽－! 타구봉은 그대로 염백추의 좌측 어깨와 우측 허벅지에 무자비하게 격중되었다. 아마도 뼈가 완전히 내려앉은 것이리라. 염백추는 온몸이 으스러져 내리는 듯한 고통이 엄습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마어마한 고통에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털썩－! 그의 몸이 썩은 짚단처럼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것은 아무도 예측치 못한 싱거운 결과였다. 이제 염백추는 단 일격이면 숨이 끊어질 판국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불사광개는 공격 대신 번개같이 뒤로 물 러섰다. 본래 그는 염백추가 자신의 몸을 미끼로 삼아 결정적인 순간, 반 격을 해 오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멀찌감치 내려선 불사광개는 곧 자신이 지레 겁을 먹고 실 수했음을 깨달았다. 염백추는 땅에 쓰러진 후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웅들은 순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현청도인이 크게 광소를 터뜨린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와하하핫… 역시 빈도의 추측이 맞았구나! 칠보추혼사는커녕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처지이면서 큰소리를 치다니……." 그는 재빨리 검을 불끈 꼬나쥐고 염백추의 몸 곁으로 접근했다. "각오하시오, 늙은 흉마!" 현청도인은 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염백추는 힘겹게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완전히 초점이 풀려 있었다. 형용할 수 없이 씁쓸한 미 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헛헛… 역시 무당의 대제자답게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는군. 훌륭해." 현청도인은 그 말에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는 두 눈을 부릅 뜬 채 소리쳤다. "흥! 너의 더러운 피를 내 검에 묻히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 무슨 망신을 더 당하게 될지 모르는 판국이라 현청도인은 그대로 검을 내리쳐 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숲 속에서 낭랑하면서도 다급한 외 침 소리가 들려 왔다. "안 됩니다! 멈추십시오!" "음?" 현청도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홱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군웅들의 시선도 자연히 모두 그쪽으로 옮겨졌다. 숲 속에서 한 소년이 막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렇다. 바로 사마소군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군웅들은 뜻밖의 방해자가 겨우 십이삼 세에 불과한 소년임을 알 자, 모두 긴장을 풀었으나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뜸 염백추의 앞부터 막아섰다. 현청도인은 빠르게 사마소군의 전신을 훑어보며 당혹에 찬 음성으 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제 이름은 사마소군입니다." "사마소군? 빈도가 묻는 건 네 이름이 아니다. 너는 왜 저기에 숨 어 있었으며, 지금 빈도를 막아 선 이유는 또 무엇이냐? 아니, 그 보다 이 깊은 산중에 들어온 이유는……?" 사마소군은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당돌하리만큼 떡 버티고 선 채 군웅들을 쓸어 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여러분들은 무림에서 상당히 명성을 떨치고 있는 분들 같은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비분이 가득 서린 그의 말이 힘있게 이어졌다. "여기 쓰러져 있는 이분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놔 두어도 금세 숨이 끊 어지리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알 터인즉, 여러분이 모를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소군은 흥분으로 얼굴이 은은히 붉어진 채 숨을 들이마시더니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또 한 번의 죽음을 내린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으 로서 할 짓이 아닐 겁니다!" 신랄하기 그지없는 힐책이 아닐 수 없었다. 소년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군웅들의 귓속 으로 파고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자 그렇지 않아도 내심 개운치 않은 느낌이 었던 군웅들은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들처럼 모두 얼굴을 붉혔다. 그 때 현청도인이 참지 못하고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이 놈, 네가 무엇을 안다고 어른들의 일에 나서느냐? 혼을 내주 기 전에 썩 비켜라!" 사마소군은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정시했다. "그러고도 당신은 도인이라 자처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내가 배우기로 도인은 모든 언행이 도가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 다고 하던데, 당신의 언행은 시정잡배나 조금도 다름없군요." 사마소군의 이 한 마디는 도저히 어린 소년의 말이라고는 믿어지 지 않을 만큼 준렬한 위엄이 담겨져 있었다. 현청도인은 일순 썩은 돼지간을 씹은 듯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세상의 도인들이 모두 당신 같다면 그들은 벌써부터 도인이 아닌 도둑이라고 불렸을 것입니다." "당장 이 곳을 떠나지 않는다면 네놈을 죽이겠다!" 현청도인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분노를 간신히 억제하며 호통 쳤다. 그야말로 수중의 검을 당장이라도 내리칠 기세였다. 사마소군은 그의 시퍼런 서슬을 보자 비로소 두려움이 엄습하며 약간 후회가 되었다. '나는 아직 죽어서는 안 될 몸이다. 염백추라는 이 노인이 어차피 죽을 사람이고 또 썩 좋은 사람 같지도 않은데, 괜히 나서서 나만 개죽음을 당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사마소군은 곧 그러한 생각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이대로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와 석형님이었어도 나와 똑같았을 거야.'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사마소군은 현청도인의 호통 소리보다 더 크게 그를 꾸짖었다. "나를 죽여 당신의 명성이 강호에서 더욱 빛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시오! 나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소!" "놈!" 현청도인은 급기야 대노하여 수중의 청강검을 무서운 기세로 내리 쳤다. 순간, 오공대사와 천수여래 당욱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설마하니 현청도인이 정말 일개 나이 어린 소년을 상대로 검을 쓸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번쩍－! 검광이 빛무리가 부서지듯 작렬했다. 그러나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마소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현청도인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단지 한 움큼의 머리칼 이 그에게서 잘려져 나가 허공에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 현청도인은 사마소군을 놀라게 하여 그 입을 틀어막을 심 산이었던 것이다. 지켜보던 초공대사와 당욱은 비로소 안도했으나 새로운 놀라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저 어린 녀석은 정말 간도 크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다니…….' 그러나 정작 충격을 받은 인물은 바로 현청도인이었다. 그는 일개 나이 어린 소년의 담력이 이토록 크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 던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사마소군의 입가에 떠오른 경멸의 미소를 본 순 간, 참을 수 없는 수치감으로 변했다. '이, 이 놈이?' 그 때 사마소군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훌륭한 검법이었소. 비록 굼벵이처럼 느려 터진 게 눈에 거 슬리긴 하지만 말이오." "무, 무엇이?" "하하… 내 깜빡 잊고 있었소. 그것은 얼마 전에 내가 약간의 검 법을 배웠다는 것이오. 방금 느낀 건데, 당신의 검법이 그와 같이 육방(肉房：정육점)에서 소나 돼지를 잡는 것처럼 느린 게 확실하 다면 난 절대 죽지 않을 것 같소." "……!" 현청도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극도의 분노였다. 대무당파의 일류고수로 칭송의 말을 무수히 들어 왔으나 이처럼 오장육부를 긁어대는 듯한 모욕은 난생 처음이었다. "발칙한 놈! 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니, 나를 원망 마라!" 현청도인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재차 장 검을 섬전같이 내뻗었다. 이번에는 정말 사마소군의 정수리를 두 쪽 내 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그 찰나지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현청도인의 검이 사마소군의 머리끝에서 한 치 가량 떨어진 상태 에서 거짓말처럼 딱 정지된 것이다. 동시 현청도인은 얼굴색이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하게 변한 채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 사마소군을 응시했다. 죽음 같은 정적이 장내에 찾아들었다. 군웅들은 처음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알지 못했으나 곧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목검, 그것은 사마소군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던 볼품없는 목검이 빚어 낸 괴변이었다. 놀랍게도 그 목검의 칼끝은 현청도인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그 리고 말할 것도 없이 검자루를 잡고 있는 손은 사마소군의 것이었 다. "……!" "……!" 장내의 모든 군웅들은 넋을 잃었다. 그들 가운데 사마소군이 언제 어떻게 목검을 뽑아 이처럼 놀라운 광경을 연출했는지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충격이 크다 한들 어찌 당사자인 현청도인에게 비 교가 되겠는가? 이 순간 그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한 것이었다. 아무리 상대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은 무방비 상태였다고는 하나,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 자신은 무당파에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고수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일은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황당한 대사건인 것이 다. 질식한 듯한 정적……. 흡사 삼라만상이 모두 그 움직임을 멈추어 버린 듯한 정적이 얼마 나 흘렀을까? 한순간 그 정적을 깨뜨리며 사마소군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 졌다. "내게 검법을 가르쳐 주신 형님이 그러셨지요. 무릇 검이란 필승 의 자신이 있을 때에만 뽑아야 하며, 이 도리를 무시하는 자는 진 정한 검객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사마소군은 목검을 거두어 다시 옆구리에 차서 매었다. 그것은 실로 늠름하기 그지없는 자세였다. 현청도인의 신색이 재차 수차례 참담한 변화를 일으켰다. 쨍그렁－! 그의 손에서 청강검이 맥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사마소군을 내려다보며 망연히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느냐?" "사마소군." "사마소군… 내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 그것이 끝이었다. 현청도인은 입술을 피가 맺히도록 깨물더니, 몸을 홱 돌려 장내에 서 떠나갔다. 현학도인과 현우도인 등이 다급히 그를 불러 세우려 했으나 이미 소용없었다. 그는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초공대사와 불사광개 등을 향 해 포권지례를 했다. "임무도 완수했고… 현청사형이 크게 상심한 듯하니, 저희들은 이 만 가 보아야겠습니다." "아미타불……." 초공대사가 마주 합장지례를 해 보였다. 현학도인과 현우도인 등은 즉시 현청도인이 사라진 곳을 향해 몸 을 돌렸다. 그들이 장내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춘 순간이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천수여래 당욱이 돌연 전신을 부르 르 떨며 신음했다. "이제 보니 그 검법은……." 옆에 있던 불사광개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오, 당노형?" 그러나 당욱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사마소군을 향해 떨리는 음 성으로 물었다. "너는 혈풍향과 어떤 사이냐?" 순간, 불사광개는 물론이고 초공대사를 비롯한 장내인물들의 안색 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일변했다. 불사광개가 황급히 당욱에게 물었다. "당노형,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혈풍향이라니?" 그러자 당욱은 사마소군의 얼굴에 시선을 못박은 채 신음하듯 중 얼거렸다. "부끄러운 과거라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소이다만, 삼 년 전 나 는 지금과 똑같은 일 검을 받은 적이 있소. 비단 똑같은 일격일 뿐 아니라, 그 사람도 방금 저 아이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했 었소." 당욱은 잠시 사이를 두고 망연한 신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었소. 혈풍향의 단천검 아래 목숨을 부지하 기는 그리 흔치 않다고. 자신은 죽이는 것보다는 살리는 것이 더 힘들다고 말이오." "오오, 그런 일이!" "그렇다면 저 아이가 바로 그 신화적인 살수라는 혈풍향과 관련이 있단 말이오?" 장내 군웅들의 충격 어린 시선이 일제히 사마소군에게 집중되었 다. 불사광개가 의혹에 찬 어투로 급히 물었다. "너는 방금 전 형님 운운했는데, 그럼 혹시……?" 사마소군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확실히 혈풍향의 동생입니다." "으음!" 설마했던 군웅들은 재차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혈풍향. 자타가 인정하는 천하제일의 살수이며, 이미 살아 있는 전설처럼 되어 버린 그 이름 앞에서 태연자약할 수 있는 인물은 당금천하에 는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장내 인물들은 일단 그와 적이 되면 단 하루도 마음을 놓 고 살아갈 수 없으며, 시한부 생명을 살아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 골치 아프게 생겼구나. 하필이면 혈풍향의 동생이 저 노마 염백추를 비호하고 나서다니…….' 군웅들은 난감한 신색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명, 눈알을 교활하게 굴리며 사마소군을 뚫 어지게 응시하는 자가 있었다. '지금까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혈풍향은 동생 같은 건 없었지 않은가? 그는 언제나 혼자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인물인데, 새삼스 레 저런 피붙이를 노출시킬 리도 없다.' 그는 바로 묘강오독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수독 (蒐毒)이었다. 그의 왼손은 아무도 모르는 새에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들고 있 었다. '저 어린 놈은 당욱의 착각에 옳구나 하고 재빨리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게 틀림없다. 흐흐,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백화맹에 공로를 세우고 묘강오독의 위신을 세울 기회이지.' 번개같이 생각을 굴린 수독은 느릿하게 앞으로 나서며 간사스런 웃음을 흘렸다. "헷헷… 아이야, 네가 정말 강호제일의 신비살수인 혈풍향의 친동 생이라면 이 아저씨가 한 가지 선물할 것이 있다." "선물? 그게 무엇입니까?" 사마소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 순간이었다. 수독이 돌연 안색을 악귀처럼 무섭게 굳히더니 버럭 호통성을 내 질렀다. "맹랑한 놈! 감히 누구 앞이라고 그 따위 거짓말을 하느냐?" 번쩍－! 그의 오른손 소맷자락에서 흰빛이 쏘아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사마소군은 크게 놀랐다. 상대가 이렇듯 비열하게 급습을 해 오리 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바로 지척 간이어서 피할 새도 없었다. '이미 늦었다!' 사마소군은 어느 새 자신의 목 밑까지 쇄도해 온 흰빛을 응시하며 내심 부르짖었다. 그런데 그 실낱 같은 위기의 찰나, 사마소군은 한 소리 미세한 파 공성과 함께 또 하나의 광채가 목덜미를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슉－! 동시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수독이 쏘아 낸 흰빛이 퉁겨 나가 바 닥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사마소군이 경황 중에 바라보니, 그것은 전체가 새하얀 한 마리 백사(白蛇)였다. 길이는 잘 해야 반 자도 되지 않을 듯했으나 새파란 눈빛을 지녀, 일견키에도 극독을 지닌 독사가 분명했다. '아……!' 사마소군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재차 자세히 살펴보니, 뱀의 정수리 부근에는 바늘 같은 솔잎 세 개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 때문에 그 섬뜩한 뱀은 전신을 괴로운 듯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금세 죽을 게 확실했다. 사마소군은 경탄과 의혹을 동시에 느꼈다. '누가 나를……?' 그 때 수독이 오른쪽 수림을 무섭게 쏘아보며 외쳤다. "누구냐? 어떤 놈이 감히 백화맹의 일을 간섭하느냐?" 교활한 성품답게 그는 경황 중에서도 백화맹이라는 세 글자를 언 급하는 걸 잊지 않았다. 군웅들과 사마소군의 시선이 일제히 오른쪽 숲 속으로 집중되었 다. 그러나 수림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죽음 같은 정적만이 음산하게 감돌 고 있을 뿐이다. ━━━━━━━━━━━━━━━━━━━━━━━━━━━━━━━━━━━ 제 11 장 신비의 마녀(魔女) ━━━━━━━━━━━━━━━━━━━━━━━━━━━━━━━━━━━ 수독은 기다려도 숲 속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난 또 대단한 고수라도 왕림하신 줄 알았더니, 머리는 감추 고 꼬리만 드러내는 두더쥐 같은 위인이셨군?" 말과 함께 수독은 재빨리 품속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끝부분이 세 갈래로 갈라진 기형단도(畸形短刀)였다. 단도의 끝은 새파란 광채가 감돌고 있어 한눈에 보아도 극독이 묻 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독은 단도를 앞가슴에 세운 채 숲 속으로 천천히 다가서기 시작 했다. 그가 막 세 발자국쯤 옮겼을 때였다. 숲 속에서 돌연 여인의 꿈결 같은 옥음이 들려 나왔다. "충고한다. 살고자 한다면 지금 즉시 저 소년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 곳을 떠나라."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장내의 군웅들은 심기가 크게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차갑기 그지없는 오만한 어투였으나 너무도 그 음성 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 음성은 비단 영롱하고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듣는 이의 영 혼을 송두리째 빨아들이는 듯한 마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장내의 군웅들은 일시에 모두 눈빛이 흐려진 채 몸이 얼어붙었다. 그렇다. 저렇듯 아름답고 신비로운 마력이 깃들인 음성이라면 설 사 제 목에 칼을 꽂으라고 해도 서슴없이 그대로 따를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평소 내력이 심후하고 수양이 깊기로 이름난 소림사의 초공대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공대사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 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빈승은 감히 어느 방면의 고수인가 묻고자 하오만… …." 말하는 사이에도 그는 암중으로 안력과 청력을 최대한으로 곤두세 워 상대방의 위치를 알아 내려 했다. 본래 그는 내공이 심후해서 십 장 밖에서 기어가는 벌레 소리라도 감지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방의 음성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 위치나 흔적을 알아 내지 못했다. 이 때 다시 그 아름다운 마력이 깃들인 옥음이 차갑게 들려 왔다. "어리석은 사람들,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라면 할 수 없지." 순간, 군웅들은 본능적으로 원형(圓形)을 형성한 채 경계의 자세 를 취했다. 바로 그 순간이다. 팍－! 돌연 동쪽 숲에서 어둠을 밝히며 하나의 불빛이 나타났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곳으로 향했다. 지등(紙燈), 그것은 팔각형의 조그만 지등이었다. 지등은 마치 피칠을 한 듯 극렬하게 붉었다. 어둠 속에서 그 지등은 숲을 완전히 핏빛으로 적신 채 불길한 저 주처럼 흔들거렸다. 더욱이 그 섬뜩한 지등의 겉표면에는 사람의 해골(骸骨)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 전율스러운 지등은 무림에 대해서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는 사 마소군이 보기에도 예사로운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마소군은 군웅들의 안색이 너 나 할 것 없이 하 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공포 어린 신음성을 발했다. "헉! 저… 것은……?" 그의 음성이 채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이번에는 서쪽과 남쪽에서 연달아 똑같은 지등이 차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파팍－! 눈 깜짝할 새에 지등은 일곱 개로 늘어났다. 군웅들은 대경실색한 채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격렬하 게 떨었다. 수독이 주춤주춤 뒤로 몰러서며 헛바람을 집어삼키듯 경악성을 터 뜨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구… 구루마등(九樓魔燈)! 한세마희(限世魔姬)다!" 그가 부르짖는 사이 여덟 번째의 지등이 남서 방향에서 나타났다. 순간, 군웅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약속이나 한 듯 아직 지등 이 나타나지 않은 북쪽 방향으로 신형을 날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공포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 며, 살아야겠다는 집념이 역력했다. 눈 깜짝할 새에 그들의 모습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장내에서 흔 적을 감추었다. 홀로 남은 사마소군은 이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지독히도 빠르게들 도망가는군. 그런데… 구루마등 한세마희라고 했던가?' 그는 호기심과 의혹을 느끼며 주위의 지등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여덟 개의 지등이 켜져 있구나. 구루마등(九樓魔燈)이라는 명호대라면 한 개가 더 켜져야 할 텐데, 이상하군.' 사마소군의 뇌리를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그의 그러한 추측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사 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홉 개의 등이 모두 켜지는 날엔 그 자신의 목숨도 끝장이라는 사실을. 구루마등. 본래 무림인들 사이에는 하나의 금기(禁忌)처럼 떠도는 말이 있었 다. － 지옥의 염라대왕을 만날지언정 깊은 밤 홀연히 밝혀지는 아홉 개의 지등은 보지 마라. 일단 아홉 개의 지등을 모두 보게 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이나 다 름없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수도 없었고, 상대가 누구이든 절대 예외가 없었다. 지난 십 년 이래 이 아홉 개의 지등을 모두 보고 살아남 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므로. 그러나 언제나 아홉 개의 지등이 한꺼번에 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상황에 따라서 한꺼번에 동시에 켜지는 때가 있는가 하 면 차례로 켜지는 때도 있었던 것이다. 구루마등이 출현하기 시작한 지난 십 년 이래 무림인들은 정확히 일곱 번에 걸쳐 그 출현을 목격했다. 그것은 그리 많은 횟수는 아니었다. 그 중 아홉 개의 지등이 모두 켜진 것은 다섯 번이었다. 그리고 그 아홉 개의 지등을 모두 목격한 인물은 정확히 여든일곱 명이었고, 그들 중 살아 숨쉬는 사람은 지금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연히 구루마등의 주인에 대해서 무림에 알려진 것은 전무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공포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구루마등의 주인 을 한세마희라고 지어 부를 뿐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러한 내막을 전혀 알 길 없는 사마소군은 태연 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비단 태연했을 뿐 아니라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주위를 둘러보더니, 매우 친근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님인지 아주머닌지 모르지만 매우 고맙군요. 얼굴을 나타내 주 신다면 정식으로 감사의 예를 표하고 싶습니다." "……." 그러나 숲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사마소군은 내심 기이한 기분이 들었으나 개의치 않고 재차 공손 히 말했다. "얼굴을 나타내시기가 싫으시다면 제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방법 을 말씀해 주십시오." "……." 이번에도 역시 묵묵무답이었다. '젠장, 입에 금칠을 했나? 그렇다고 내가 계속 사정을 할 줄 알았 다면 그건 오산이올시다.' 사마소군은 오기가 발동하자 즉시 몸을 돌려 버렸다. 그는 쓰러져 있는 염백추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때다. "사마소군." 숲 속에서 예의 그 신비스런 옥음이 들려 왔다. 사마소군은 일순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 내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이상하게 여길 것 없다. 방금 전 네가 그 자들에게 하는 말을 들 었을 뿐이다." "아… 이제 보니 귀하는 이미 오래 전에 오신 모양이군요?"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네가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기를 바란다." "질문? 좋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면 기꺼이 대답해 드리지요." 사마소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곧 못마땅한 표 정을 지었다. "그런데 귀하는 늘 이런 식으로 모습을 감추고 다른 사람들과 대 화를 하십니까?" "질문을 하는 사람은 네가 아니고 나다." "……?" 사마소군이 어리둥절해진 채 입을 다무는 사이, 재차 아름다운 옥 음이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네가 방금 전 무당의 도사에게 펼쳤던 검법은 확실히 혈풍향의 단천검법이었다. 너는 누구에게서 그 검법을 배웠느냐?" "귀하의 그 질문은 매우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네가 정말 혈풍향의 동생이란 말이냐?" "나는 반드시 친동생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소군의 이 한 마디는 여러 가지의 뜻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조금만 총명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숲 속에서 곧 가벼운 탄성이 흘러 나왔다. "혈풍향이 너와 의형제의 맹약을 했단 말이냐? 놀라운 일이군." "그게 그처럼 놀랄 일이라면 나도 놀라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사마소군의 약간 오기 서린 대답이었다. 숲 속에서는 잠시 아무 말도 들려 오지 않았다. 이윽고 그 침묵을 깨뜨리며 매우 부드러워진 옥음이 들려 왔다. "너는 비단 담이 클 뿐만 아니라 매우 재미있는 말솜씨를 지녔구 나. 좋다, 나는 네 말을 믿는다.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무엇입니까?" "너는 혈풍향의 의제이니,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것 이다." "그건 가르쳐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형님이 어디 계 신지 모르니까요." 사마소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이 한 마디는 우울한 감정이 뒤섞인데다 진실이 깃들인 것이어서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럼 너는 언제 혈풍향과 헤어졌느냐?" "엿새 전입니다." "엿새 전이라고? 어디서 말이냐?" 사마소군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는지 다급히 묻는 한세마희의 음성 에는 놀라는 빛이 역력했다. 사마소군은 의아한 심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여기서 멀지 않는 주양관이라는 곳입니다. 한데, 귀하는 형님과 어떤 사이신지요?" 그러나 한세마희는 그 질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다시 만날 약속을 했느냐?" "제가 주양관을 떠나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은… 바로 형님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마소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형님을 찾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아아, 그런 줄 알았다면 진작 서둘러 왔을 것을……." 한세마희의 후회 어린 탄식성이었다. 그 말을 들은 사마소군은 더욱 의아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어쩐지 석우생과 한세마희가 심상치 않은 관계일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이 때 다시 한세마희의 신비로운 옥음이 들려 왔다. "소군, 나는 처리할 일이 있어 급히 이 곳을 떠나야 한다. 너는 혈풍향의 의제이니, 다시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때 너는… …." 약간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너는 그에게 전해 다오. 음해당(陰海堂)은 아직도 연지호(蓮芝 湖)의 맹세를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노라고……." 사마소군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음해당이라는 이름을 뇌리에 깊숙이 간직하며 차분하게 말했 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다. 그럼……."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파파파팍－ 파팍－! 여덟 개의 자등이 모조리 꺼져 버리더니 사위가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사마소군은 잠시 망연한 신색으로 서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떠난 모양이구나.'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다 한바탕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염백추를 생각해 내고는 이 사건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차,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사마소군은 재빨리 몸을 돌려 염백추를 응시했다. 그는 염백추의 안색이 타다 남은 재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노인장, 노인장!"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염백추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염백추는 그가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흐느적거릴 뿐 미동 도 할 줄 몰랐다. 사마소군은 그가 이미 죽었다는 생각이 들자, 탄식을 금치 못했 다. "하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잘 묻어 주는 도리밖에 없구나." 사마소군은 염백추의 몸에서 손을 뗐다. 이어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염백추의 몸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사마소군은 크게 반색하며 그의 몸을 잡아 흔들었다. "노인장, 아직 살아 계셨군요?" 그러자 꽉 감겨 있던 염백추의 눈까풀이 힘겹게 뜨여졌다. 염백추는 안개가 낀 듯 흐린 시야에 애써 초점을 맞추며 사마소군 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한참 후에야 사마소군을 알아보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사마소군은 그가 마지막 유언을 남기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재빨 리 염백추의 입에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그러자 모기 소리만큼 희미한 소리가 그의 귓가에 스며들었으나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구요? 조금만 더 크게 말씀하십시오!" "내… 내 품에… 손을……." "……!" 사마소군은 급히 염백추의 품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러자 뭔가 두툼한 물건이 손에 잡혔다. 꺼내어 살피니, 그것은 하나의 가죽 주머니였다. 사마소군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이 가죽 주머니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 네가… 가져… 그리고……." 염백추의 호흡이 급격하게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사마소군은 그의 음성이 작아지자 더욱 바싹 귀를 갖다 대었다. "천마사로를… 찾아… 백화맹의… 맹주… 무서… 음모……."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염백추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축 늘어졌다. 사마소군은 그의 눈이 허옇게 까뒤집힌 것을 보고 숨이 끊어졌음 을 알았다. 사마소군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염백추의 죽은 얼굴을 내려다보다 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지만 이처럼 고통 속에서 쓸쓸하게 죽는 다는 것은 매우 슬프고 측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염백추는 살아 생전 무림을 뒤흔들던 고수였지만, 죽은 후의 모습 은 여느 늙은이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만약 무림인이 아니었더라면 이 노인은 이토록 비참하게 죽지 않 았을지도 모른다." 사마소군은 우울한 심정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염백추의 몸을 묻어 주기 위한 방법을 궁리했다. 땅이 꽁꽁 얼었으므로 아무래도 돌무덤을 만드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움직이다 말고 문득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안색이 대 변했다. "가만, 천마사로라고?" 그는 염백추가 죽기 전에 말했던 이름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는 천마사로라는 이름을 분명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 선유도에서 아버지는 분명 내게 살아남아 중원으로 갈 수 만 있다면 천마사로를 찾으라고 했었다. 아아, 내가 왜 그 말을 잊고 있었을까?" 그렇다. 그 당시 사마소군은 워낙 경황 중이라 자세히 새겨 듣지 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장소에서 염백추의 입을 통해 천마사로라는 이름을 다시 들은 것이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마사로… 그들은 대체 어떤 인물들일까? 아니, 그보다 아버지 와 염노인은 무엇 때문에 그들을 찾으라고 했을까?" 구름 같은 의혹이 그를 휩쓸었지만 분명하게 추측이 가는 것은 아 무것도 없었다. 그는 문득 품속에 손을 집어 넣어 동그란 물건 하나를 만지작거렸 다. 그것은 바로 천마사로를 찾아가 보여 주라고 부친이 말했던 동전, 천마철전(天魔鐵錢)이었다. 사마소군은 뒤늦게 후회감에 젖어들었다. "석형님께 물어 보았다면 뭔가 알 수가 있었을 텐데……." 부친 사마장천은 천마철전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 주어선 안 된 다고 말을 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석우생만큼은 예외 인 것이다. "할 수 없지. 다음에 만나면 보여 주고 물어 보는 수밖에……." 사마소군은 품에서 손을 떼내었다. 그의 눈길은 방금 염백추가 준 가죽 주머니로 향했다. 그는 이 가죽 주머니가 꽤 무겁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뭐가 들었을까?' 사마소군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가죽 주머니의 끈을 풀었다. 그 러자 안에서 한 권의 책자와 몇 개의 인형이 나타났다. 사마소군은 두 눈에 이채를 가득 빛냈다. 인형은 모두 아홉 개였으며 밀랍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염노인도 나처럼 인형을 만드는데 취미가 있었던 모양이군. 한 데, 이 인형들은 좀 이상한걸?' 인형들은 하나같이 벌거숭이 남자들이었는데, 거미줄 같은 붉은 줄이 온몸 가득 그려져 있었다. 또한 그 붉은 줄에는 각기 검은 점들이 무수하게 찍혀 있는 것도 보였다. '무슨 도형(圖形) 같기도 한데… 대체 무슨 그림일까? 역시 이것 도 나중에 석형님께 물어 봐야겠구나.' 사마소군은 인형에서 손을 떼고 이번에는 책자를 살폈다. 책자는 매우 얄팍한데다 오래된 골동품처럼 표지가 낡아 있었다. 주위가 워낙 어두운 탓에 사마소군은 한참 동안 애를 쓴 후에서야 어렴풋이 겉표지에 쓰여진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백독진경(百毒眞經)> "백독진경이라……." 사마소군은 두 눈에 반짝 기광을 발했다. "그렇다면 이 책자는 혹, 독(毒)에 관한 무공이 수록되어 있는 비 급이 아닐까?" 사마소군은 염백추의 명호가 백독신군이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급히 책자의 첫장을 넘겨 보았다. 거기에는 간단한 내용의 글귀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독(毒)으로 인해 성명(盛名)하였으매, 여기 독에 관한 평생의 심 득을 남기노라. 무림제일독왕 백독신군 염백추> "과연 내 추측이 맞았구나!" 사마소군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내내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리 자신이 여러 무공을 배워야 할 형편이지만 독(毒)은 어쩐지 꺼림칙했던 것이 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니다. 옛 성현들께서도 당하지 않으려면 배우라고 말씀하셨지 않은가? 좋든 나쁘든 배워 둬서 손해 볼 것은 없다." 사마소군은 생각을 굳히자, 백독진경과 인형들을 다시 가죽 주머 니에 넣어 품속에 잘 갈무리했다. 이어 그는 염백추의 시신을 향해 공손히 한 차례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워서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쌔애앵－! 찬바람이 할퀴듯 장내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마소군은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어두컴컴했으나 저만큼 희미한 달무리의 흔적을 본 순간, 그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다가는 산 속에서 꼬박 밤을 새겠구나.' 사마소군은 서둘러 염백추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눈 속에 묻혀 있는 돌덩이를 찾아 돌무덤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오래지 않아 그런대로 훌륭 한 돌무덤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일을 모두 끝냈을 때 사마소군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 다. 사마소군은 이마의 땀방울을 훔쳐 내며 무덤을 둘러보았다. 그는 죽은 염백추의 영혼도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편히 잠드십시오, 염노인. 부탁한 말은 잊지 않겠습니다." 사마소군은 무덤을 향해 한 차례 절을 한 후 몸을 돌렸다. 그는 총총걸음으로 소수귀랑이 가르쳐 주었던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달빛… 검은 구름 새로 희미하게 내비치는 침침한 달빛 한 자락이 막 생겨 난 돌무덤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 제 12 장 두둑한 배짱 ━━━━━━━━━━━━━━━━━━━━━━━━━━━━━━━━━━━ 우르르릉－! 폭포는 실로 웅장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끝을 올려다볼 수 없는 까마득한 곳에서 지축을 꿰뚫을 듯 내리꽂 히는 물기둥은 비단 그 모습도 웅장하거니와, 마치 한 마리 백룡 (白龍)이 승천을 위해 꿈틀거리는 듯해서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것은 비단 폭포뿐만이 아니었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수정처럼 투명한 물결이 고여 있 는 폭포 밑의 거대한 소(沼)는 아름답다 못해 차라리 신비롭기조 차 했다. 그 뒤로 흰 눈을 가득 짊어진 채 빽빽이 우거져 있는 태고의 원시 림은 또 어떤가? 그 모든 절경은 밝아 오는 여명의 빛무리와 자욱한 물안개로 단장 하여 마치 온 세상이 축복을 내리는 듯 보였다. 사마소군은 계곡의 입구에 우두커니 선 채 이미 오래 전부터 이 광경을 넋 나간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혹, 별유천지에라도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휩싸였다. 이 정도라면 지상낙원이라고 불려지던 선유도의 아름다움에 조금 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사마소군은 밤을 새워 산길을 헤쳐 나왔는데도 불 구하고, 피곤하기는커녕 심신이 그럴 수 없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 꼈다. "야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니……." 사마소군은 황홀감에 취한 듯 계곡 안의 절경을 둘러보며 거듭 감 탄성을 흘려 냈다. 그런데… 무엇일까? 불현듯 가슴 한 구석으로 피어 오르는 이 아련한 아픔은. 그렇다. 그것은 벌써 아득하게 먼 옛날로 느껴지는 선유도 시절의 향수였다. 그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에 찬 날들이었던가? 참으로 좋았던 시절… 그러나 두 번 다시 재현될 수 없는 가슴 아 픈 추억이었다. "제기, 느닷없이 웬 청승이람." 사마소군은 한순간 쓴웃음을 지으며 애써 그 생생한 추억들을 뇌 리에서 지웠다. 그는 문득 울적한 심사를 토해 내기라도 하려는 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야아아……!" 그의 외침 소리는 계곡 안을 오랫동안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사마소군은 언제부턴가 되도록 과거를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해 오 고 있었다. 아니, 가능하다면 아예 까맣게 잊어 버리고 싶었다. 물론 그가 잊고 싶어하는 것은 행복했던 시절들의 기억이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 악몽 같았던 밤이 큰 고통으로 그 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처참한 최후와 식솔들의 주검, 지금은 생사도 알 길 없 는 아버지와의 이별과, 철대산의 마지막 모습……. 시일이 흐를수록 그 기억들이 더욱 생생하게 뇌리 깊숙이 각인되 는 것은 아마 그 이전의 추억들이 너무나 즐거웠던 탓이리라. 한참을 소리지르고 난 후에서야 비로소 울적한 심사를 약간 가라 앉힌 사마소군은 처음으로 주의를 기울여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소수귀랑이 말한 그 사내도 계집도 아닌 사람을 반드시 찾아 내고야 말 작정이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그 사람은 여불해 노인과 광치화상이 말한, 늙 지도 젊지도 않은 인물과 동일인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인물이 바로 석우생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마소군이었으 나, 확실한 것은 만나 본 후에야 알 일이었다. 사마소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계곡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계곡은 밖에서 보기에는 협소했으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여기는 흡사 호로병처럼 생긴 곳이군." 사마소군은 나무나 바위 뒤, 심지어는 물 속까지 들여다보았지만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남은 곳이라고는 이제 하늘 위와 땅 밑뿐이었다. 사마소군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내가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닐까?" 시간이 흘러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 더 찾아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 가지였다. 사마소군은 기진맥진하여 폭포 밑의 연못 가장자리의 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연못은 매우 넓어 차라리 호수라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사마소군은 그 방대한 연못의 잔물결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쩌면 쓸데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 구나. 여불해 노인과 광치화상 등이 석형님의 부탁을 받고 날 만 난 게 분명하다면, 석형님은 내가 외방악에 들어올 것조차 미리 예측했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그것은 바꾸어 말해, 석형님이 뜻 만 있다면 언제든지 나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여기까지 생각한 사마소군은 갑자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그렇다면 석형님이 굳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역시 석형님에게 어떤 사고가? 아아, 모르겠구 나.' 사마소군은 이런저런 생각 끝에 차라리 부친 사마장천이 말한 천 마사로부터 찾아가 볼까 하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천마사로를 어느 곳에 가야 만날 수 있는지 나는 전혀 모 르지 않는가?' 사마소군은 급기야 골머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에라, 모르겠다!" 사마소군은 벌렁 바위 위에 드러누웠다. 그는 일단 간밤에 설친 잠을 한 번 푹 자 볼 심산이었다. 등 위의 촉감이 서늘하도록 차가웠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팔베개를 하고 누우니, 장쾌하게 내리꽂히는 폭포의 물기둥이 정 면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사마소군은 새삼 그 장관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다가 문득 의아 한 음성을 흘려 냈다. "음, 저건……?" 그의 시선은 폭포의 맨 아래 몇 개의 돌출된 바위 부근에 고정되 어 있었다. 폭포의 물기둥은 그 돌출된 바위에 부딪치며 새하얀 물보라를 사 방으로 미친 듯이 퉁겨 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바위 뒤, 다시 말해 폭포의 뒤쪽으로 환각처럼 검은 그 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 검은 그림자가 물보라 때문에 움직이는 것 처럼 보일 뿐,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님을 금세 알아 냈다. 하지만 그는 안력을 돋우어 한참 동안 유심히 살핀 끝에 놀라운 사실을 알아 냈다. "동굴이다!" 태어나서 자란 곳이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인지라 그는 절벽이나 바위 새로 나 있는 동굴을 숱하게 봐 왔었다. 때문에 그는 본능적 으로 그것이 동굴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런 곳에 동굴이라니… 한번 살펴봐야겠구나!" 사마소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곧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있는 곳과 문제의 동굴까지는 약 십여 장의 거리였다. 바다에서 자란 만큼 헤엄을 치는 솜씨야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 다. 문제는 바로 무시무시한 기세의 폭포 물기둥이었다. 동굴로 건너가려면 반드시 저 거대한 폭포를 뚫고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바위라도 으스러뜨릴 듯 맹렬한 저 물기둥을 무슨 방법으 로 통과한단 말인가? '저 정도의 기세라면 폭포의 근처도 접근하지 못하고 밀려날게 틀 림없다.' 사마소군은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자 더욱 동굴을 살펴봐야겠 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일단 호기심이 발동하면 반드시 풀고야 마 는 그 특유의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한참 동안 궁리하던 그의 눈에 일순 기광이 번뜩였다. "그렇지. 알고 보면 간단한 것을 가지고 괜히 어렵게 생각했구 나."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물 속으로 몸을 날렸다. 풍덩－! 뛰어드는 기세를 빌려 물 속을 쭉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유연하여 한 마리 물고기를 방불케 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폭포에 거의 접근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몸 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괴물이 밑에서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잡아당기는 것과 흡사했다. 그렇다. 그 무서운 흡인력을 폭포의 거대한 물기둥이 내리꽂히면 서 비롯된 소용돌이의 현상이었다. 위기의 순간, 사마소군은 헤엄치던 동작을 딱 정지하고 그 무서운 흡인력에 그대로 몸을 내맡겼다. 그러자 그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얼마나 밑으로 가라앉았을까? 무서운 흡인력은 점차로 조금씩 약해지더니, 급기야는 전혀 느끼 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 때다!' 사마소군은 갑자기 온 힘을 다해 앞으로 쭉 나아갔다. 그리하여 폭포를 지났다고 판단되었을 때, 그는 다시 전력을 다해 위로 솟 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슈욱－! 얼마쯤 올라가자, 이번에는 태산이 내려누르는 듯한 압력이 느껴 졌다. 사마소군은 그렇지 않아도 숨이 막히던 터에 무서운 압력을 받자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을 받았다. 그는 사력을 다해 위로 계속 헤엄쳐 올라갔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리 그의 헤엄 솜씨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벌써 물살에 휩쓸렸을 터였다. 그러나 구구회천단을 복용하고 몇 차례 의 기연을 만난 후부터 그의 능력은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우웁!' 사마소군은 안간힘을 다해 꾸준히 위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으나 숨이 가빠 오는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이마 힘줄이 불끈불끈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뿌옇게 흐려지는 그의 시선 속으로 비스듬히 경사진 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멀지 않았다!' 사마소군은 마지막으로 젖먹던 힘까지 쏟아 냈다. 그리하여 더 이 상 가쁜 숨을 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을 순간이었다. "푸우!" 마침내 그의 얼굴이 물 밖으로 빠져 나왔다. 신선한 공기가 그의 폐부 속으로 왈칵 스며들었다. 사마소군은 고개를 내흔들며 주위를 살폈다. 동굴, 과연 그의 시야에 하나의 동굴이 들어왔다. 사마소군은 재빨리 동굴 위로 기어올랐다. 동굴은 어두컴컴한데다가 자욱한 습기가 감돌고 있어 음침하기 짝 이 없었다. 사마소군은 잠시 숨을 돌리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대한 폭포의 물기둥이 바로 뒤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콰콰콱－! 고막을 터뜨릴 듯한 굉음과 함께 부서지는 그 물기둥을 보자, 사 마소군은 뒤늦게 간담이 서늘해졌다. "휴, 내가 저 곳을 지나왔다니… 까딱했으면 죽고 말았을 것이 다." 사마소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이어 그가 다 시 동굴 쪽을 향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사마소군은 돌연 목 부위에 싸늘한 기운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칼?' 사마소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바로 그 때 얼음장처럼 냉막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살고 싶으면 그대로 있어. 콱 쑤셔 버리기 전에!" "……!" 사마소군은 상대방의 음성을 듣자 놀라움보다 당혹이 앞섰다. 음성으로 미루어 상대의 나이는 많아야 십오륙 세 정도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누, 누구……?" "헛소리 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쑤셔 버리기 전에." 재차 냉막한 그 음성이 사마소군의 말을 잘랐다. 사마소군의 미간이 일순 가볍게 좁혀졌다. 대체 이 무슨 느닷없는 봉변인가? 다짜고짜 뒤에서 칼을 들이댄 것도 어리둥절한 판국에 계속 한다 는 말이 쑤신다, 어쩐다 하는 말뿐이다. 사마소군은 내심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 때 다시 상대의 싸늘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름은?" "몰라." 사마소군의 자르듯 퉁명스런 대꾸였다. 그는 목에 칼을 대고 협박하는 상대에게 이미 비위가 상할 대로 상한 터이라 다른 문제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몰라? 네놈은 네 이름도 모른단 말이냐?" "몰라." "이거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놈 아니야? 좋아, 그럼 나이를 말 해." "글쎄? 내 나이가 올해 몇이더라? 마흔다섯이던가? 일흔아홉이던 가? 이봐, 혹시 내 나이 모르나?" "뭐, 뭐야?" 상대는 일시 기가 막힌 듯 신음성을 흘려 내더니 이내 살기에 찬 음성을 발했다. "이 자식, 이제 보니 나를 놀리고 있잖아?" 사마소군의 목에 댄 칼에 힘이 가해졌다. 사마소군은 목 부위가 불에 덴 듯 따끔함을 느꼈다. 칼끝이 약간 살을 파고들며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 마소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목에 칼이 닿아 있는데, 내가 어찌 당신을 놀릴 수 있겠나?" "……!" 그 한 마디에 상대는 할 말을 잊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사마소 군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지만 은연중 상대를 비웃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이왕 내친 김이라는 듯 한술 더 떠서 손가락으 로 목을 가리켰다. "이것 봐. 당신의 칼솜씨가 대단한 것을 알았으니, 이만 이걸 치 우고 이야기하는 게 어때?" "이 놈 봐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인 줄 알았더니, 제법 강심장이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마소군은 목에서 칼이 거두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 들리는 음성은 아까와 딴판으로 많이 누그러져 있었 다. "좋아, 네놈의 두둑한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고맙군." 사마소군은 태연히 대꾸했으나 기실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하마터면 또 큰일날 뻔했구나. 난 대체 왜 이럴까? 사정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불끈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다니…….' 그러나 그는 그러한 내심을 전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곧 하나의 얼굴이 들어왔다. 상대는 과연 사마소군의 예측대로 십오륙 세 남짓한 흑의차림의 소년이었다. 약간 마른 몸집에 흑의(黑衣)를 걸쳤고,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와 꽉 다문 얄팍한 입술이 비정하면서도 다부진 인상을 풍겼다. 그것은 달리 한 번 손을 대면 반드시 끝장을 보고야 마는 독종(毒 種)의 기질이랄 수도 있었다. 이 순간 손에 시퍼런 비수를 들고 무표정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그 의 모습에서 사마소군은 문득 한 마리 독 오른 독사를 연상했다. '기분 나쁘게 생겼군.' 사마소군은 비록 그의 나이가 자신보다 두세 살 위였으나 계속 아 까의 기세로 밀고 나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턱끝을 약간 치켜들며 짐짓 오만하게 물었다. "내 이름은 사마소군이다. 그쪽은?" 흑의소년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냉자기(冷子己). 내 이름이다. 한데, 넌 원래 말버릇이 그 모양 이냐?" 사마소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왜? 뭐가 잘못되었어?" "보아하니 나보다 족히 두세 살은 어린 것 같은데, 말투를 좀 고 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냉자기의 가느다란 눈이 더욱 가늘게 찢어졌다. 사마소군은 자못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말투라? 그건 좀 곤란한 문제이긴 한데… 좋아!" 사마소군은 곧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쑥 손 을 내밀었다. "만나게 되어 반갑소, 형." "형?" 난데없는 호칭에 냉자기는 기막힌 표정으로 사마소군의 얼굴을 쳐 다보았다. 그 표정은 다시 사마소군이 내민 손을 본 순간 괴상하 게 변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마지막으로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후후… 좀 괴상한 구석이 있는 녀석 같다만, 다른 녀석들보다는 한결 시원스런 면이 있군. 좋아, 일단 마음에 들었다." 냉자기는 사마소군이 내민 손을 잡고 힘있게 악수를 했다. 사마소군은 씨익 웃으며 마치 오랜 지기라도 만난 듯 다정스럽게 그의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찬가지요. 그건 그렇고 지금 다른 녀석들이라고 했는데… 그럼 여기 형 말고 또 누가 있소?" 무심코 던진 사마소군의 이 질문에 냉자기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럼 너는 장한화(長恨花)를 받고 이 곳에 온 게 아니란 말이냐?" "장한화? 그게 뭐하는 물건이오?" 사마소군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 냉자기는 갑자기 옆구리에 꽂았던 비수를 재차 번개같이 뽑 아 들며 살기에 찬 눈빛을 발했다. "누구냐, 네놈은?" "……!" 사마소군은 일시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 생각 없이 단지 호기심만 지니고 이 곳에 들어왔을 뿐인데, 장한화 운 운하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마소군은 원래 총명한 소년이었다. 더욱이 근래 며칠 간 기이한 사건들을 겪는 동안 임기응변에 능해진 그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체득하고 있었다. 그는 곧 오히려 냉자기의 돌변한 태도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 리며 말했다. "이거 왜 이러는 거요? 이래 가지고서야 냉형하고 어디 농담이나 할 수 있겠소?" "농… 담?" "형이나 나나 모두 초면이 아니오? 그래서 한 번 그래 본 것이오. 그건 그렇고 형은 왜 그 녀석들하고 같이 있지 않고 여기 나와 있 소?" 사마소군은 그가 깊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다그치듯 물었다. 냉자기는 얼떨결에 눈을 껌벅이며 대꾸했다. "그, 그건 갑자기 소변이……." "그래, 볼일은 다 보았소?" "그, 그래." "자, 그럼 더 이상 여기서 지체할 게 아니라 그 녀석들이 있는 곳 으로 갑시다." 말과 함께 사마소군은 턱끝으로 냉자기의 뒤쪽을 가리켰다. 사마 소군은 동굴이 냉자기의 뒤쪽으로 뚫려 있는 것을 보고 대충 넘겨 짚은 것이었다. 그것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냉자기가 그제야 의심의 표정을 지우 고 비수를 거둔 것이다. "녀석,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가, 가자." 냉자기는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 작했다. 사마소군은 그 뒷모습을 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흘려 냈다. '휴,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구나.' 그러나 그는 은근히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구렁 이 담 넘어가듯 별 탈 없이 넘어갔으나 앞으로가 문제인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고 돌아나가는 건데, 잘못했나?'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저하는 순간이었다. 냉자기의 날카로운 음성이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너 계속 그 곳에 서 있기만 할 작정이냐?" 사마소군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짐짓 신경질적으로 대 꾸했다. "젠장, 나는 뭐 오줌도 안 누고 사는 사람인 줄 아오?" "그… 랬느냐? 그럼 어서 볼일을 보도록 해라." "알겠소." 사마소군은 퉁명스레 대꾸하며 바지자락을 끌러 내렸다. 애꿎은 소변만 해결한 후 바짓가랑이를 추스르며 힐끔 시선을 돌 리니, 냉자기가 여전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마침내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설마하니 죽기야 하려고.' 사마소군은 터벅터벅 큰 걸음으로 냉자기에게 다가갔다. 냉자기는 순간, 괴상한 눈빛으로 사마소군의 아래위를 훑어보았 다. 사마소군이 의아성을 흘려 냈다. "왜 또 그런 눈으로 바라보시오?" 냉자기는 씨익 괴이한 웃음을 지었다. "녀석, 체구는 작은 게 그 물건은 상당히 크구나." 그 한 마디를 툭 내뱉은 그는 다시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기, 난 또 무슨 말이라고…….' 사마소군은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냉자기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제 13 장 수수께끼의 연속 ━━━━━━━━━━━━━━━━━━━━━━━━━━━━━━━━━━━ 동굴은 약간 위로 경사를 이루고 있었으며 점차 안으로 들어갈수 록 넓어졌다. 축축한 습기가 곰팡내 같은 냄새와 어우러져 사마소군의 코끝을 자극했다. 갈수록 시야가 어두워지는데다 발밑이 여간 미끈거리는 것이 아니 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망신당하기 십상이었다. 일 다경쯤 나아가자니 희미한 불빛이 전방에 나타났다. 사마소군과 냉자기는 나란히 불빛이 흘러 나오는 곳에 당도했다. 그 곳은 다시 아래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원형의 넓은 공간이었 다. 흡사 거대한 웅덩이를 연상케 하는 이 공간의 사방벽에는 크 고 작은 동굴들이 무수히 뚫려 있었다. 불빛은 장내의 오른쪽 천장에 덩그러니 걸린 유등(油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그 불빛 아래 다섯 사람이 군집을 이룬 채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각기 편한 자세로 여기저기 누워 있거나 앉아 있기도 했 고, 혹자는 잔뜩 무릎을 쪼그린 모습이었다. 사마소군은 첫눈에 그들이 모두 냉자기와 비슷한 연령의 소년들이 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자도 있군.' 사마소군의 시선이 가장 멀리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그림자로 향 했다. 잔뜩 쪼그리고 앉은 채 얼굴을 무릎 새로 파묻은 탓에 얼굴을 알 아보기 어려웠으나 섬연한 몸매로 보아 분명 소녀(少女)였다. 허리 어림까지 땋아 내린 머리며, 그 머리에 꽂혀 있는 나비 모양 의 장신구, 잘록한 허리와 둔부에 꽉 끼는 홍의경장 차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고,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만 큼 괴괴하게 흐르는 정적은 질식할 듯한 중압감을 자아내고 있을 뿐이다. 사마소군과 냉자기가 들어섰는데도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기는커 녕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도 않았다. 냉자기는 좌우를 쓰윽 훑어보더니 왼쪽 가장자리 가까운 곳에 앉 아 있는 소년에게 물었다. "이봐, 그 꼽추 늙은이가 어디 갔지?" "궁금하면 직접 찾아 봐." 무뚝뚝한 대꾸를 내뱉는 소년은 마치 곰처럼 체구가 우람했다. 사마소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는 비단 체구가 우람했을 뿐 아니라 바윗덩어리처럼 단단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일신에는 다 떨어진 마의를 입고 있었는데,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모습이 언뜻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피부빛이 구리처럼 번들거리는군. 철대산 아저씨도 저랬었지!' 사마소군이 내심 탄성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냉자기가 냉소를 지으며 거구소년을 흘겨보더니 한 마디 툭 쏘았 다. "하긴 너같이 돼지 같은 놈에게 물어 본 내가 잘못이다." 냉자기는 투덜거리며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거구소년이 여전히 눈을 내리감은 채 묵직한 어투로 말했 다. "이빨 성할 때 말조심하는 게 좋다. 괜히 어디 부러지고 나서 후 회하지 말고." 냉자기는 고개를 홱 돌리며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뭐야?" 거구소년의 한쪽 눈이 슬그머니 뜨여졌다. 그는 입가에 조소를 떠 올렸다. "왜 한 번 해 보고 싶다 이거냐?" "이 자식이……!" 냉자기는 퉁기듯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비수가 들 려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를 엄습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옆에서 나직이 소근거리는 소리가 문득 두 사람의 귓속을 간지럽혔다. "이번엔 진짜 한판 붙을까?" "붙긴 뭘 붙어? 붙을 놈들 같았으면 벌써 한판 붙었지." "하긴……." "내가 그러잖아? 자고로 빈 수레가 더 요란한 법이라고……." 이 대화는 비록 나직했으나 장내에 있는 사람들 중 듣지 못한 이 는 한 명도 없었다. 냉자기는 쭉 찢어진 눈에 독기를 뿜으며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두 소년이 서로 이마를 마주 대고 앉아 있었다. 왼쪽의 소년은 앞이마가 기형적일 만큼 툭 튀어 나온데다 콧구멍 이 뻐끔히 위로 들려져 있어 실로 보기 드물게 못생긴 얼굴이었 다. 설상가상으로 입을 꽉 다물었는데도 윗니가 앞으로 튀어 나와 있어 몹시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였다. 반면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소년은 불그스레한 화안(和顔)에, 눈까풀과 양쪽 귀가 아래로 축 처져 있는 것이 흡사 미륵불을 연 상케 했다. 또한 그 인자스럽기 짝이 없는 그 얼굴에는 사람 좋은 웃음이 은은히 떠올라 있어, 그야말로 생긴 모습만 따진다면 부처 님이 따로 없었다. "방금 헛소리를 한 놈들이 너희들이냐?" 냉자기가 비수처럼 예리한 눈빛을 폭사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두 소년은 여전히 서로 이마를 마주 댄 채 고개조차 돌리 지 않았다. "그것 봐, 내 예상이 적중했지? 기다렸다는 듯 표적을 바꾸잖아?" "쯧쯧, 불쌍한 놈. 오죽이나 맞는 게 두려웠으면……." 이런 대화를 더 이상 듣고 있을 냉자기가 아니었다. 그는 득달같 이 두 소년을 향해 덮쳐 갔다. "후레자식들!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는 사정 볼 것도 없다는 듯 무자비하게 비수를 내리쳤다. 그러 나 어찌 된 판인지 두 소년은 여전히 꿈쩍도 할 줄 몰랐다. 찰나지간 냉자기의 비수가 두 소년의 목에서 한 자 가량 사이를 두고 멈칫 정지되었다. '이제 보니…….' 그는 두 소년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새로 두 마리 거미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짱구소년의 앞에 있는 거미는 몸집이 컸으며 적을 노려보고 있었 고, 반면 작은 거미는 공교롭게도 그 순간 몸을 돌려 미륵불소년 의 무릎 위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미륵불소년은 혀를 끌끌 차더니 문득 고개를 돌려 냉자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곧 의아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어? 너 오줌 누러 간다더니, 언제 왔냐?" "……!" "그건 그렇고 그 칼은 웬 거냐? 지금 뭘 하는 거지?" 냉자기의 얼굴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그건… 거미 싸움인가?" "그래. 이제 보니 구경하러 온 게로군. 그러나 칼은 필요 없어. 이건 구경만 하면 되는 거야. 같이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그 말은… 맞는 것 같군." 냉자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신음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놀림을 받은 것을 알았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 고 보자,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고 말았다. '못 본 척하고 그냥 쑤셔 버리는 건데… 빌어먹을!' 그는 내심 한탄하며 억지웃음을 떠올렸다. "그럼 계속 놀아라. 나는 내 자리로 가 볼 테니까." "왜 좀 더 구경하잖구? 이제 진짜 한판 붙여 보려는데." "됐어. 다음에 보지 뭐." 냉자기는 맥 빠진 어투로 대꾸하며 비수를 허리춤에 갈무리했다.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멋쩍은 낯으로 주위를 쓸어 보았다. 그러나 장내의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거구소년은 이미 눈을 다시 감은 채 졸고 있는 것 같았고, 짱구소 년과 미륵불소년은 이번엔 정말로 거미 싸움에 열중하고 있었다. 모든 게 처음과 달라진 게 없었다. 그 때 사마소군과 냉자기의 시선이 부딪쳤다. 사마소군은 씨익 웃어 보였다. 냉자기도 마지못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으나, 이내 허공을 괴상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오늘은 무슨 일이 이렇게 자꾸 꼬이지?' 사마소군은 그러한 그의 표정을 보고 내심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는 이 안에 있는 소년들이 한결같이 강렬한 인상을 지녔으며 예 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이 때 문득 사마소군의 시선이 가장 어두운 곳에 앉아 있는 나머 지 한 소년에게 옮겨졌다. 그 소년은 처음부터 말 한 마디 없이 줄곧 상념에 잠겨 있었다. 사마소군은 뒤늦게 그가 매우 준수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하고는 전혀 다른 분위기인걸?' 사마소군의 눈에 감탄이 섞인 이채가 빠르게 스쳤다. 소년은 일신에 눈처럼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으며, 피부빛 역시 창백하리만큼 희었다. 그러한 모습은 그를 적어도 지체 높은 고관대작이나 명문대가의 후예처럼 보이게 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겨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어찌 보자 니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졌으며, 마치 이 안의 다른 소년들과는 일 체 상관이 없는 다른 시계의 이방인 같았다. 사마소군은 한참 동안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난 후 장내는 다시 무덤 속 같은 정적이 감돌 고 있었다. 이 때다. 사마소군이 들어왔던 방향 쪽으로 서너 명의 발자국 소 리가 한꺼번에 들려 오기 시작했다. 사마소군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아직 입구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마침 맞은편에서 고개를 들던 홍의소녀와 그의 눈이 우연 히 마주쳤다. 사마소군은 진작부터 얼굴을 무릎 새에 파묻고 있던 그녀의 얼굴 이 보고 싶던 참이었으나, 막상 이렇게 시선이 마주치고 보자 아 찔한 충격을 느꼈다. '아름답구나, 아름다워!' 그렇다. 홍의소녀의 용모는 눈이 부시다거나 가슴이 떨린다는 말 정도로는 도대체가 부족했다. 그림 속의 천상선녀(天上仙女)라 한들 저보다는 아름답지 못하리 라. 백옥으로 빚은 듯 하얗게 빛나는 옥부(玉膚)며, 흑요석처럼 반짝 이는 시원스런 눈망울, 그리고 이슬을 머금은 듯 투명하면서도 붉 디붉은 입술…….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소녀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 태는 보는 이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그야말로 저런 정도의 미모라면 말 한 마디 하지 않고서도 천하의 뭇사내들을 황홀감에 빠뜨리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사내들은 그녀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인간이 되거나, 아니면 가장 악한 인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가? 홍의소녀의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기이하게도 보는 사람을 왠지 섬뜩하게 만드는 차가움과 독기가 서려 있었다. 사마소군은 그 이유가 바로 그녀의 눈빛 때문이라는 것을 곧 깨달 았다. 한마디로 그 눈빛은 따뜻한 정이나 감정 따위는 전혀 묻어 있지도 않았고, 오직 찬서리 같은 원독(怨毒)에 차 있을 뿐이었다. '쯧쯧, 저 눈빛만 부드러워질 수 있다면 양귀비나 서시라도 부러 워할 절색이 될 텐데…….'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내심 혀를 찼다. 홍의소녀는 그러한 사마소군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감정한 시선으로 입구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하더니 사마소군의 등뒤 쪽에 이르러 딱 멈추어졌다. 순간, 사마소군은 자신이 방금 전에 들었던 발자국 소리를 깜박 잊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뒤에……?' 사마소군이 막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손이 그의 어깨에 불쑥 와 닿았다. 사마소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몸은 석고상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이윽고 사마소군은 마음을 굳게 가라앉힌 채 고개를 돌렸다. 바로 등 뒤, 잘해야 사마소군만한 키에 등이 낙타처럼 불룩 솟아 오른 주름살투성이의 꼽추노인이 서 있었다. 칡넝쿨처럼 헝클어진 잿빛 머리칼은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리고 있 었고, 입에는 파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곰방대를 문 모 습이었다. 사마소군은 꼽추노인의 잿빛 머리칼 새로 쏟아져 나오는 날카로운 눈빛을 대하자, 수천 개의 바늘끝이 눈 속을 파고드는 듯한 고통 을 느꼈다. 그렇다. 이처럼 강렬하고 무서운 눈빛이라면 설령 꿈 속에서 본다 하더라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꼽추노인의 등 뒤로는 옷차림은 각기 달랐으나 똑같이 검은 복면 으로 얼굴을 가린 여섯 사람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비록 용모는 알아볼 수 없었으나 그들의 몸에서는 각기 상대를 질 식시킬 듯한 위압감이 풍겨 나오고 있어, 무림의 일류고수들이라 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사마소군에게는 미처 그들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 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어 놓고 있는 꼽추노인을 어떤 방법으로든 상대해야만 했다. '기왕 엎질러진 물이다. 까짓 일단 밀고 나가 보는 수밖에……!' 상대가 절대 냉자기처럼 얼렁뚱땅 넘어갈 인물이 아닌 터라, 그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석우생이 준 벽력신화통도 염두에 두었 다. 그렇게 결심이 단단히 서자, 그는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였을까? 사마소군은 곧 자신도 놀랄 만큼 침착한 태도로 씨 익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해 버렸다. "오랜만입니다, 영감님." 말해 놓고 나서 사마소군은 내심 아차했다. 넘겨짚어도 유분수지, 이건 너무 넉살이 지나쳐 버렸다. 사마소군은 암암리에 품속에 손을 넣어 벽력신화통을 더듬었다. 딱딱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져 왔다. 그 짧은 순간 꼽추노인은 사마소군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눈살 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사마소군은 전신의 피가 일시에 식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억겁처럼 지루한 촌각이 흘렀다. 드디어 꼽추노인의 입이 느릿하게 떼어졌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로구나." '뭐라고?' 사마소군은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는 설마하니 꼽추노인이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고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지?' 맹세코 말하건대 그는 눈앞의 이 꼽추노인을 꿈 속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뭐가 정말 오랜만이란 말인가? 더욱이 그 음성은 흡사 사마소군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 럼 부드러웠다. 사마소군은 그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 저를……." 아느냐고 물어 보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꼽추노인은 이미 그의 곁을 스쳐 지나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여섯 복면인들 가운데 한 명이 마치 쇠를 깎는 듯 귀에 거 슬리는 음성을 흘려 냈다. "비켜라, 꼬마." 사마소군은 그제야 자신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옆으로 비켜 서자, 여섯 복면인은 미끄러지듯 꼽추노인의 뒤 를 따라갔다. 꼽추노인은 공지 한가운데 당도하자 조용히 멈추어 섰다. 그러자 여섯 복면인들도 따라 걸음을 멈추더니 꼽추노인을 호위하 듯 나란히 섰다. 이윽고 꼽추노인은 곰방대를 뻑뻑 빨며 장내의 소년들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그러나 다섯 소년들은 어느 누구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 다. 그 때였다. 꼽추노인이 곰방대의 불을 끄고 허리춤에 갈무리 하더 니, 웃매무새를 한 차례 가다듬고는 한쪽 동굴벽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모두 모였습니다, 부주님." 그러자 복면인들도 즉시 뒤따라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그쪽을 응시하다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 동굴벽 쪽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순간 그 동굴벽에서 환청처럼 한 줄기 나직한 음성이 스며 나 왔다. "시작해라."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사마소군은 더욱 놀라 그 동굴벽을 응시했으나 역시 아무것도 알 아 낼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알 수 있는 건 여태껏 고개조차 들지 않던 소년들이 일 제히 번쩍 얼굴을 드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내심 당혹해 하고 있 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소년들은 이내 원래의 무관심한 자세를 회복했다. 그 때 꼽추노인이 허리를 펴더니 품속에서 둘둘 말린 두루마리 하 나를 꺼내 들었다. 이어 그는 좌우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아이는 즉시 이 앞으로 나오도록 해라." 그러나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기는커녕 들은 척도 않았다. 꼽추노인은 개의치 않고 두루마리를 좌르륵 펼쳐 들었다. "금사충(金仕忠)." 호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도 대답하는 이 가 없었다. 꼽추노인의 시선이 짱구소년과 미륵불소년 쪽으로 향했다. 두 소년은 이 때까지도 여전히 서로 이마를 맞댄 채 심각하게 거 미 싸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꼽추노인이 약간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금사충, 못 들었느냐?" 그러자 짱구소년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좌우를 휘둘러보며 신 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금사충인지 금나발인지 어서 기어나가지 않고 뭘 해? 저 영감이 자꾸 소리를 지르니까, 이제 막 한판 붙으려던 이 놈들이 다시 주 춤하잖아!" 순간, 마주 앉아 있는 미륵불소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지금 누구더러 금나발이랬느냐?" "누구긴 누구야? 금사충인지 뭔지 하는 자식……."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미륵불소년의 주먹이 번쩍 허공을 갈랐 다. 퍽－! "어이쿠!" 짱구소년이 턱을 감싸쥐며 벌렁 나가떨어졌다. 미륵불소년은 손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그 사람 좋은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난 다른 건 몰라도 날 모독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 짱구소년은 아픈 것도 잊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네가 금사충?"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다. 나 역시 네놈의 이름을 모르니까." 금사충은 말을 마치자 느릿하게 몸을 돌려 꼽추노인의 앞으로 걸 어나왔다. 어슬렁어슬렁 그는 꼽추노인의 앞에 우뚝 멈추어 서더니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금사충, 여기 나왔소이다." 꼽추노인은 별다른 표정 없이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시선을 두루 마리로 옮겼다. "성명 금사충, 나이는 십육 세. 출신은 고아이며 특기는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과 천재적인 산술능력(算術能力)임. 또한 천재적인 장사 수완을 지녀 이 년 전까지만 해도 광서지방의 제일거부로 알려진 나국창(羅國蒼)의 보국대전장(寶國大錢莊)에서 회계를 맡아 보았음.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주인 나국창을 살해, 지금까지 관부(官府)의 추적을 받고 있음. 가장 무거운 죄질의 중 범자로 분류된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 있어 흑도무 림에서는 살아 도망다니는 금덩어리로 취급하고 있음. 이상입니 다." 꼽추노인이 긴 설명을 단숨에 끝마친 순간이었다. 여기저기 소년 들에게서 비아냥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거 재미있군. 살아 도망다니는 금덩이라……." "같이 다니면 노자 걱정은 없겠는걸." 그러나 금사충은 그런 말을 듣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꼽추노인에게 말했다. "잘도 아시는군." 꼽추노인은 무표정하게 그를 마주 보았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 았다. 그 때 동굴벽에서 형체 없는 그 이상한 음성이 들려 왔다. "금사충에게 묻겠다." "뭘 말이오?" "너는 무엇 때문에 나국창을 살해했느냐?" "당연한 일이었소. 그가 먼저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금사충의 말투와 태도는 꼽추노인을 대할 때와 조금도 다른 게 없 었다. 그것이 눈에 거슬렸는지 꼽추노인이 무서운 눈빛을 폭사했다. "금사충, 진정한 장사꾼은 상대가 적일지라도 일단은 입을 조심하 고 공손한 태도를 지니는 법이다." 금사충의 눈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이제 보니 노인장께서는 별걸 다 아시는구려. 그러나 나는 장사 를 그만둔 지 오래 됐소." 여기까지 말한 금사충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동굴벽을 응 시하며 말을 이었다. "또 물을 게 있소?" "물론이다. 너는 왜 나국창이 널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내가 본의 아니게 그에 대해 너무 자세히 알아 버렸기 때문 이오. 사람들은 그가 전장(錢莊)과 골동품업을 통해 정정당당하게 부호가 된 줄 알고 있소. 나도 처음엔 그렇게 믿고 그의 밑에 들 어갔으니까. 그런데 그는 자신을 흠모하는 조그만 장사꾼에게 그 만 악명 높은 마약 밀매업자와 거래하고 있는 사실을 들켜 버린 것이오." 금사충은 여기까지 말한 후 매우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그가 내 목을 자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심정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소. 그러나 내가 자객에게 살해당하면 누가 나를 훌륭한 장사꾼이라고 칭찬해 주겠소?" 그 말에 꼽추노인이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그러면 네가 자객을 미리 피하고 도리어 나국창을 죽인 것은 오 직 훌륭한 장사꾼이라는 평판을 듣기 위해서였단 말이냐?" "그 일 자체가 하나의 정당한 장사였소." 금사충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대꾸했 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순간,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 때 동굴벽의 음성이 묵직하게 들려 나왔다. "됐다. 다음 호명을 해라, 적노(赤老)." "알겠습니다." 꼽추노인은 즉시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사마소군은 그의 이름이 바로 적노라는 것을 알았다. 적노는 다시 두루마리에 시선을 못박은 채 입을 떼었다. "냉자기." 순간,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냉자기를 돌아다보았다. 냉자기는 가장자리에 기대어 앉은 채 들은 척도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적노는 등뒤의 복면인들 중 하나에게 가벼운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 복면인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더니 냉 자기의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일어서라." 억양 없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냉자기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 다. 순간이다. 복면인이 갑자기 냉자기의 뒷덜미를 번개같이 낚아채더 니 사정없이 들어올렸다. 그 바람에 냉자기는 대롱대롱 공중에 매 달린 꼴이 되고 말았다. "어? 이거 안 놔?" 냉자기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그러나 복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적노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 겨 갔다. 냉자기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게 누굴 강아지 새끼인 줄 아나?" 그는 번개같이 비수를 뽑아 복면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들쑤셨 다.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흠칫 놀랐다. 복면인은 냉자기를 든 상태라 옆구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깡－! 찰나지간 비수는 마치 쇳덩어리에라도 부딪친 듯 복면인의 옆구리 에서 퉁겨져 나오는 게 아닌가? 냉자기는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어?" 그는 불신에 찬 시선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에 들려진 비수는 끝부분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이미 쓸모없 는 물건으로 변해 있었다. 반면, 복면인의 옆구리는 옷자락만 약 간 찢어졌을 뿐 피 한 방울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냉자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복면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바쁘지 않으면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말해 주겠소?" 그러나 복면인은 그의 얼빠진 듯한 물음조차 무시해 버렸다. 그는 냉자기를 적노의 앞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어이쿠!" 냉자기는 허리를 감싸쥐고 비명을 질렀다. 때맞추어 적노가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어 가기 시작했다. "성명 냉자기, 나이 십오 세. 떠돌이 광대패 출신. 임기응변과 위 기상황에 강한 싸움의 천재. 손이 빨라 한꺼번에 일곱 개의 비수 를 날릴 수 있으며, 일단 싸움을 시작하면 반드시 끝장을 내고야 마는 독종. 육 개월 전 관북(官北)의 어느 마을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그 지방 터줏대감 격인 흑월회(黑月會) 회주의 하나뿐인 아 들을 비롯, 그 동료 다섯을 살해. 이 사건은 곧 백화맹에 보고되 었으며, 백화맹에서는 발견 즉시 죽여도 좋다는 척살령(刺殺令)을 전 무림에 하달. 현재까지 쫓기고 있음." 순간, 냉자기가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살인마 같잖아! 난 처음부터 그들을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니라구! 그 빌어먹을 새끼가… 아니, 그 옆의 또 한 놈이 지나던 개가 쏟아 놓은 똥마저 핥아 먹으라고 했을 때 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어! 그것도 모르고 백화맹의 그 멍청한 놈 들은……." 냉자기는 갑자기 목이 잠긴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착각이었을까? 사마소군은 그 순간 냉자기의 눈에 이슬 같은 것이 반짝이는 걸 보았다. 그러나 냉자기는 그러한 내심의 격분을 감추려는 듯 허공에 눈길 을 던지더니 히죽 웃었다. "두고 봐. 난 내게 힘만 주어진다면 그 흑월회인지 뭔지 하는 개 뼈다귀들은 물론, 배불러서 눈먼 자들을 몽땅 이 땅에서 제거해 버릴 테니까." 장내가 일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 순간 사마소군은 똑똑히 보았다. 냉자기가 비록 입으로는 웃고 있었으나, 눈은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을. 그는 정말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 때 동굴벽의 음성이 조용한 위엄을 담고 흘러 나왔다. "좋다, 다음." 적노는 즉시 두루마리에 시선을 던졌다. "곡철화(曲鐵華)." 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엔 거구소년이 성큼 자리에서 일어났 다. 앉아 있을 때도 그랬지만 막상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의 체구는 그야말로 웅크렸던 산이 일어난 듯했다. 그는 일언반구도 없이 적노의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적노는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어 내렸다. "성명 곡철화, 나이 십칠 세, 출신 고아. 아름드리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리는 천생신력을 지녔으나, 본인은 그것을 감추고 살아왔 음. 열 살 이후 줄곧 금광의 광부로 일해 오던 중 일 년 전 같이 일해 오던 동료 광부 아홉 명을 무참히 살해. 역시 막대한 현상금 이 걸려 있으며, 관부의 추적을 받고 있는 중죄인입니다." 적노는 말을 마치자 거구소년 곡철화에게 눈짓을 보냈다. 곡철화는 그 눈짓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소. 그 일이 있기 전 나는 길에 쓰러진 채 죽어 가는 한 어린 소녀를 발견했소. 나는 그 소녀를 동료들과 기거하는 합숙소에 데려가 살려 냈소. 그 소녀를 살려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소. 그녀는 단지 너무 오랫동안 굶주렸던 것이오. 다 행히 살아난 그녀는 그 후 합숙소에 같이 기거하며 동료들의 빨래 며 잡일을 해 주었소. 그러던 어느 날이었소." 곡철화의 무표정한 얼굴근육이 언뜻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일의 뒷처리를 하느라 동료들보다 조금 늦게 합숙소에 돌아간 나 는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소. 그것은 동료들이 그 소녀의 사지를 묶어 놓고 겁탈을 하는 광경이었소.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홉 명이나 그녀를 겁탈한 뒤였고, 소녀는 나에게 꼭 한 마디만 남긴 채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었소. 소녀의 말은 자신 을 겁탈한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것이었소. 그 때 소녀의 나이는 겨우 열네 살이었소." 곡철화의 말은 그렇게 끝났다. 말을 마친 그는 두 눈을 지그시 내 리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해 보 였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의 눈매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 다. 동굴벽의 음성이 나직하게 들려 왔다. "소녀는 그 사람들을 용서해 주라고 했는데, 너는 어째서 그들을 모두 죽였느냐?" 곡철화는 눈을 내리감은 채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설혹 당신이었더라도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오." 이 한 마디를 끝으로 장내에는 다시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마소군은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왠지 답답한 그 무엇이 그의 가슴 속을 무겁게 짓누르며 지나가는 것 같았다. ━━━━━━━━━━━━━━━━━━━━━━━━━━━━━━━━━━━ 제 14 장 일곱 개의 운명(運命) ━━━━━━━━━━━━━━━━━━━━━━━━━━━━━━━━━━━ "계속해라, 적노." "예." 적노는 공손히 대답한 후 네 번째 호명을 했다. "공야치(公野致)." 그러자 금사충에게 턱을 얻어맞았던 짱구소년이 고개를 힐끔 들었 다. 그는 아직도 맞은 데가 아픈지 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내가 바로 공야치오만… 꼭 그리로 나가야 되오?" 그는 잔뜩 불만스런 어투로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난 다친 몸이오. 게다가 난 몹시 수줍음을 탄단 말이 오." "오기 싫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무방하다." 적노는 느릿하게 뒤의 복면인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공야치는 재빨리 벌떡 일어났다. "아… 됐소. 나는 강아지 취급까지 받고 싶지는 않소. 그리고 생 각해 보니 다친 건 턱이지, 다리가 아니었소." 그는 유유자적한 걸음걸이로 적노의 앞에 다가가 멈추더니 금사충 을 어깨로 툭 밀쳤다. "조심해라, 금가 녀석아. 나라는 인간은 빚을 지고도 갚지 못하면 잠을 못 자는 체질이니까 말이야." "나 같으면 빚을 갚지 못해도 잠은 자겠어." 금사충은 습관처럼 사람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 때 적노가 공야치의 내력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명 공야치, 나이 십오 세. 공야순이라는 말단관리의 팔 남매 중 장자(長子). 위조(僞造)와 도박(賭博)의 천재로 평가됨. 그 어 떤 물건도 똑같이 만들어 내는 놀라운 손재주를 지녔으며, 특히 열여섯 가지의 도박기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솜씨는 과거 사기도 박의 일인자로 불렸던 불패도왕(不敗賭王) 야율극과 비교됨. 이 년 전에 쾌활림(快活林)이라는 녹림의 지하조직에 가입했으며 실 력자로 부상하던 중 이 개월 전 쾌활림의 문주를 비롯, 그 일당 이십삼 인을 독살(毒殺)하고 잠적. 현재 전 녹림의 추적을 받고 있음." 말을 마치자 적노는 이번에도 힐끔 공야치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공야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내 손에 뒈진 그들이야말로 개자식들이라 할 수 있지. 내가 하는 일은 대개가 나쁜 짓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인데… 그래서 나는 나 쁜 놈인데, 최소한 나는 지저분하게 살아오지는 않았어. 그래, 그 들을 죽인 건 나 같은 악당이 보기에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지저분 한 악당들이었기 때문이야. 내 말뜻 알겠나?" 문득 공야치는 주위를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듯이 물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공야치는 다시 잔뜩 불만스런 표정이 되었다. "몰라? 할 수 없군. 그럼 그 지저분한 이야기를 해 줄 수밖에. 나 는 놈들이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했어. 위조문서를 만들라면 만 들었고, 사기도박을 하라면 해서 막대한 돈을 벌게 해 주었어. 물 론 그런 일을 대가 없이 해 줄 나는 아니야. 그들은 처음 약속하 기를 매달 내 배당금을 내 집으로 보내 주기로 했었어. 사기를 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덕으로 좋은 옷 입 고, 배불리 먹고 있을 내 동생들을 생각하면 까짓 괜찮았지." 여기까지 말한 공야치는 갑자기 어디가 모자란 백치처럼 킬킬거리 며 웃기 시작했다. "힛힛…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 놈들은 내 배당금을 꼬 박꼬박 아버지에게 전해 주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떠들었는데, 어 느 날 몰래 내 집으로 가 본 내 눈에 비친 광경은 완전 딴판이었 다 이거지." 공야치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는 그 추악하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입을 귀밑이 찢어져라 벌리며 그렇게 웃고 있 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사마소군의 눈에는 그가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 다. "힛힛… 아버지는 이미 육 개월 전에 이상한 괴질에 걸려 약 한 첩 써 보지 못한 채 죽어 있었고,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세 어린 동생은 집을 나간 지 오래였으며, 막내놈은 완전히 피골이 상접하 여 나를 보자마자 밥을 달라고……." 공야치의 웃음 띤 얼굴에 피르르 잔경련이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그의 안색이 화강암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지간의 변화였고, 그는 다시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 다. "그 지저분한 악당들이 나를 너무 어리게 보았던 거야. 그래, 내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야. 난 이미 우울해졌어. 그러니 더 이상 말도 시키지 말라구." 적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야치의 부탁 대로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재차 두루마리로 느릿하게 옮겨졌다. "다음은……." 적노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어두컴 컴한 구석 쪽을 가리켰다. "너, 이리 나와라." 적노가 가리킨 곳에는 바로 사마소군이 진작부터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백의미소년이 앉아 있었다. 명문대가의 후예다운 기품에 걸맞게 그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올리 며 적노를 마주 보았다. 그의 입가에 곧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나를 불렀소?" 침착함과 부드러움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또 한 번 감탄의 눈길을 보냈다. 백의미소년은 그야말로 여태까지의 소년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 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자신의 짐작대로 그가 어떤 엄청난 가문의 후예가 분 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노는 사마소군처럼 백의미소년에게 우호적이 아니었다. "너도 엉덩이가 무겁다면 굳이 수고하지 않아도 좋다." 냉막한 한 마디와 함께 그는 등 뒤의 복면인에게 눈짓을 했다. 백의미소년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자 리에서 일어났다. "그만두시오.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는 조용한 걸음걸이로 적노의 앞에 다가와 멈추어 섰다. 사마소군은 그의 옆구리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섭선(攝扇)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학(鶴)의 깃털로 만든 것으로 보여지는 그 흰 부채는 한눈에도 매 우 귀한 물건 같았다. 백의미소년은 그 섭선을 자연스럽게 뽑아 들더니 좌르륵 펼쳤다. 이어 그는 기품 있게 섭선을 부치며 적노에게 미소를 보냈다. "자, 나는 고백할 준비가 되었소." 순간, 이제까지 거의 무표정하던 적노의 얼굴이 기묘한 낯빛을 띠 었다. 그는 두루마리와 백의미소년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화옥(華玉), 뇌석빈(雷石彬), 육검릉(陸劍陵), 소무영(蘇武影)… 이것으로 다섯 번째 질문이다. 도대체 어느 것이 네 본명이냐?" 백의미소년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 나며 보석처럼 빛을 발했다. "다섯 번째 대답이오만… 방금 말하신 것들은 모두가 내 본명이 오." 적노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추궁하 지 않고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성명 불확실, 나이 대략 십육 세로 추정, 출신 불명. 스스로 황 가(皇家)의 후예니, 무림 팔대세가의 하나인 황산세가(黃山勢家) 의 독자(獨子)라느니 하며 고귀한 가문의 후손임을 자처하나, 확 인 결과 모두 거짓으로 판명됨. 변장의 천재. 원래 진면목을 보았 다거나 본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음. 동영어(東 瀛語)와 범어(梵語)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적노는 문득 입을 다물더니 백의미소년을 한 차례 힐끔 쳐다보았 다. 백의미소년은 여전히 유유롭게 섭선을 부치며 서 있었다. 적노의 시선이 다시 두루마리로 향하며 냉막한 어투로 말을 이었 다. "여기에 오기 전까지의 직업은 도둑." 그는 특히 도둑이라는 말에 억양을 주었다. 순간, 장내 여기저기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어났다. "뭐? 도둑?" "그러니까… 저 멀쩡하게 생긴 게 도둑이란 말이지?" "와! 도둑놈이네?" 그러나 가장 놀란 건 역시 사마소군이었다. 그는 도무지 적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으므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백의미소년을 바 라보았다. 적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근래 이 년 사이 도합 백마흔여섯 번의 도둑질을 완벽히 해낸 것 으로 조사 집계되었으며, 그 마지막 백마흔여섯 번째는 중원 굴지 의 표국인 금사표국(金獅標局)이 보관중이던 은자 칠십만 냥의 거 액을 훔친 것임. 당시 다수인에게 얼굴을 목격당해 초상화와 더불 어 관부는 물론 백화맹에서까지 추격중." 그 때 묵묵히 듣고 있던 백의미소년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후후… 멍청한 자들 같으니. 그 날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 는지 나도 기억할 수 없는데, 그 까짓 초상화를 수천만 장 그려 붙이면 뭘 해?" 적노는 약간 어이없는 눈빛이더니 문득 생각난 듯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은자 칠십만 냥을 어떻게 썼는지도 잊어 버렸느냐?" "옛날, 나는 이런 공상을 한 적이 있었소. 하늘에서 난데없이 돈 비가 와르르 쏟아지면 어떨까 하는……." "그럼 혹시 삼 개월 전에 북경 빈민가에 느닷없이 쏟아졌다는 돈 비가 바로……?" 적노의 눈에 기이한 광채가 번뜩 스쳤다. 백의미소년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본명은 화옥이오. 아직까지 약자나 가난한 자의 재물에는 한 번도 손을 댄 적이 없다는 말을 끝으로 본인의 소개를 마치는 게 좋겠소." 차라리 유들유들하게 느껴질 만큼 여유로운 그의 태도였다. 적노는 무표정한 신색을 회복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화옥."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내심 야릇한 심정이었다. 그는 왠지 백의미소년 화옥이 밉지가 않고 호감이 가는 것을 느꼈 다. 고관대작이나 명문대가의 후예일 것이라는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 지만 오히려 그가 더욱 신비롭게 보이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후후… 하지만 도둑이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저 사람의 본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대개 도둑이란 어느 사람에게도 혐오감을 주게 마련이었다. 그러 나 이 화옥이라는 도둑소년은 오히려 정반대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기이한 매력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것은 여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연심(戀心)을 품어 봄직한 그 의 기품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때다. "백약빙(白 氷)." 적노가 호명하는 소리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사마소군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소녀다!' 그의 시선이 쫓기듯 소녀에게 향했다. 그는 이번이야말로 소녀를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적노가 그녀에게만은 일어서라는 지시조차 내리지 않고 그대로 두 루마리의 내용을 읽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성명 백약빙, 십오 세, 창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줄곧 항주(杭州) 의 매음굴에서 성장. 사 개월 전 자신의 모친과 탐화랑군(探花郞 君) 장우림(張羽林)이라는 자를 함께 난자해 죽이고 도주,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 기도. 비명 삼십칠호에 의해 구출된 후 현재에 이 름." 이 설명은 사마소군으로 하여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을 느 끼게 했다. 그것은 다른 소년들도 마찬가지여서 모두가 크게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소녀가 살인을 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더구 나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단 말인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소년들은 한결같이 엄중한 사건을 저지르고 관부나 무림의 추격을 받고 있는 중범자들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 도 자신의 부모나 형제를 죽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임에 분 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 소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지 않은가? '어떻게 그런 일을…….' 사마소군은 충격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장내에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소녀는 마치 죽은 듯 미동도 않고 있었다. 이윽고 적노가 입을 떼었다. "부주께서는 네가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어미를 죽여야 했 는지 알고자 하신다." 홍의소녀는 얼마 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더니 문득 뇌까리듯 나직한 음성을 무릎 새로 흘려 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싫었어. 동전 한 닢, 우육(牛肉) 한 조각에도 아무에게나 몸을 파는 엄마가 죽도록 미웠어." 그녀의 음성에서는 억양이라든가 감정 따위의 것은 일체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글을 읽는 것 같았다. 사마소군을 비롯한 소년들은 귀를 잔뜩 기울인 채 숨소리 하나 내 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거의 알아듣기가 불가능할 만큼 그녀 의 음성은 나직했다. 홍의소녀 백약빙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언젠가 엄마에게 막 대든 적이 있었어. 그 지저분한 거리를 떠나 자고. 차라리 동냥질을 할망정 이렇게 살아가지는 말자고. 엄마는 몹시도 울었어. 울면서 그러더군. 죽고 싶다고… 벌레만도 못하게 이렇게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하지만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순전히 나 하나 헐벗고 굶주리지 않게 키우 기 위해서라고……." 백약빙의 어깨가 문득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나도 엄마를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후훗, 사실 그 때는 엄마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는지 몰라."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이라 기보다는 울음이라고 표현해야 더 정확할 것 같았다. 그녀의 잔등머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눈에 띄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간간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음성에는 축축한 물기가 배어 나오는 듯했다. "나중에야 알았어. 엄마의 말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걸. 아니, 어쩌면 그 때까지만 해도 엄마의 마음은 진정이었는지 몰 라.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엄마는 변하기 시작했어. 거의 미친 듯이 사내들을 끌고 오기 시작한 거야. 돈, 한마디로 그것에 미친 여자가 되어 버린 거지." 어둠 속에서 백약빙의 하얀 목덜미는 눈이 시리도록 하얗게 빛나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느껴질수록 그녀의 모습은 마치 벼랑 끝에 서기라도 한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후훗… 거기까지도 난 이해할 수 있었어. 돈을 벌기 위해서 발버 둥치는 엄마의 모습이 한없이 불쌍해 보였어. 그런데 어처구니없 는 일이 벌어졌어." 백약빙의 음성이 갑자기 섬뜩하리만큼 냉랭하게 변했다. "탐화랑군인지 뭔지 하는 그 자식이 온 바로 그 날, 어이없게도 엄마는 나더러 눈 딱 감고 한 번만 그 자식하고 그 짓을 하라고 하는 거야. 오십 냥의 은자를 받았다고 그랬어." 장내가 일순 찬물을 뒤집어쓴 듯 조용해졌다. 그것은 뭐라 표현하 기 어려운 고요함이었다. 백약빙의 음성은 여전히 나직했으나 모두의 귓가에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난 그 순간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어. 나 때문에 죽지 못해 그 짓을 한다던 엄마의 얼굴이 갑자기 악귀처럼 보였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아무것도… 때마침 내가 부엌에 있었고, 손에는 식 도(食刀)가 쥐어져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는지 몰라." 백약빙의 고개가 서서히 들려졌다. 무릎 새에 파묻혔던 그녀의 얼 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녀의 그 얼굴을 본 순간, 장내의 소년들은 모두 안색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녀의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눈빛! 아아, 그 눈빛을 어떻게 형용할 것인가? 단지 소름끼친다는 표현만으로도 부족한 그녀의 눈빛. 그것은 달 리 보면 온 세상을 경멸하는 듯한 비웃음 같았다. "찔렀어. 찌르고 또 찔렀어. 얼마나 찔렀는지 몰라. 방 구석에 벌 렁 나자빠진 채 얼이 빠져 있던 그 자식은 더 많이 찔렀어." 백약빙의 얼굴에 문득 광기(狂氣) 같은 것이 떠올랐다. 사마소군은 아름다운 얼굴일수록 오히려 더 무섭게 보일 수도 있 다는 사실을 난생 처음 깨달았다. 그녀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죄를 짓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 자식은 마땅히 죽어야 할 위인이었고, 엄마는 늘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백약빙은 핏기가 가신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난 죽어 가는 엄마에게 말했지. 죽고 싶어했으니까 죽여 준다고… 벌레 같은 인간들 틈에서 살아가는 건 몹시 우스운 일이 라고… 엄마를 이렇게 벌레로 만든 자들을 모조리 내 손으로 죽여 주겠노라고. 그래, 지금 엄마를 찌른 것의 열 배, 백 배로 찔러 죽이겠노라고 그랬어. 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 도 반드시 이 약속을 지키겠노라고." 백약빙은 갑자기 말을 뚝 끊더니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았 다. 한순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주르르 흘러 내렸다. "그리고 또 말했어. 이 약빙은 참으로… 참으로 엄마를 사랑했노 라고……." 돌연 그녀는 무릎 새에 얼굴을 파묻으며 왁 하고 오열을 터뜨렸 다. 장내의 분위기가 끝없는 무저의 공간으로 가라앉은 듯 침울하게 변했다.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소년들도 각기 괴상한 표정을 한 채 슬그머니 딴 곳으로 고 개를 돌렸다. 백약빙의 오열은 한동안 멈춰지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울음소 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잦아들었을 때였다. 동굴벽의 얼굴 없는 음성이 나직하나 위엄 있게 흘러 나왔다. "백약빙." "……." "너는 네 어미에게 그렇게 약속해 놓고 어째서 강물에 투신하였느 냐?" "현실은 냉정해서 나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않았어요." 어느 새 마음이 진정된 듯 백약빙은 본래의 억양 없는 어조로 대 꾸하더니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하늘에다 기원을 했지요. 살아서 이 한(恨)을 풀 수 없으 니, 죽은 영혼이나마 원귀(怨鬼)로 만들어 달라고 말이에요." 어찌 들으면 바보 같은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장내의어 느 누구도 그녀의 말이 우습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모든 희망과 살아갈 의욕을 잃은 한 어린 소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 한 방법이며, 가장 처절한 복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소군은 암암리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그랬었구나.' 그는 비로소 백약빙의 눈빛이 왜 그토록 섬뜩한 한기를 품고 있었 는지를 알았다. 바로 그 때였다. 적노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의 얼굴에 와 꽂혔다. 사마소군은 뒤늦게 그 시선을 의식하고 의아로운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적노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사마소군." '뭐?' 사마소군은 일순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 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퉁기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 지금 나를 부른 겁니까?" 어찌나 놀랐는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다. 도대체 적노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곧 얼마 전 냉자기와 통성명을 했던 사실을 상기하고 는 적노가 엿들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 적노가 다시 냉막성을 흘려 냈다. "이리 나와라." 사마소군은 복잡한 심정으로 엉거주춤 앞으로 나갔다. '그래, 내 짐작이 맞을 거야.' 그러나 그의 그러한 생각은 적노가 두루마리에 시선을 던지는걸 보는 순간, 완전히 뒤흔들리고 말았다. '설마… 저 두루마리에 내 이름이 적혀 있단 말인가?' 그의 의혹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적노가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성명 사마소군, 나이 십이 세. 백화맹의 제팔대(第八代) 맹주였 던 백의성검 사마장천의 독자(獨子)……." 듣고 있던 사마소군의 눈이 점점 더 커져 갔다. 적노가 도대체 어찌 자신의 내력을 알고 있으며, 또 아버지가 백 화맹의 제팔대 맹주였다는 말은 또 뭐란 말인가? 그도 역시 백화맹이라는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아직 한 가지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연 사마소군의 놀라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바, 방금……." 사마소군은 황급히 뭔가를 물으려고 했으나 적노는 못 들은 척 무 시하고 계속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무섭도록 뛰어난 두뇌를 지녔으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 는 일문십지(一聞十知)의 천재. 타고난 근골은 백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한 극품(極品)의 것으로 평가되며, 특히 강호제일의 살수라 일컬어지는 혈풍향과 의형제지간이라는 사실이 주목할 만함. 사 개월 전 백의성검 사마장천이 실종되고, 거주지인 무명군도라는 곳이 신비인들에 의해 참화를 당한 이후 줄곧 혈풍향과 함께 도피 행각을 해 왔음. 나흘 전에 독심괴의를 만난 것을 시발로 광치화 상, 소수귀랑 등에게 그들의 성명절학(盛名絶學)을 전수받았으며 ……." 사마소군은 흡사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지 않은가? 이건 마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것 같았 다. 꿈 같은 일이었다. 적노는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의 귀에는 웅웅거 리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적노는 두루마리의 내용을 모두 읽은 듯 그것을 다시 말아 품속에 넣었다. "이상입니다." 사마소군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비로소 한 줄기 공포심이 그의 등줄기를 엄습했다. 그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적노를 노려보았다. "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그의 손은 어느 새 목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적노는 깊숙한 시선으로 사마소군을 마주 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 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자세히 보자니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편 백약빙을 제외한 다섯 소년들은 이 순간 경악의 눈길로 일제 히 사마소군을 바라보았다.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신분을 지닌 사마소군 이 아닌가?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백화맹 제팔대 맹주의 독자라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전설적인 인물 혈풍향과 의형제지간이며 거기다 독심괴 의, 광치화상, 소수귀랑 등의 초절정 기인들과도 관련이 있다니… …. 이제까지 별 관심 없이 보았던 어린 사마소군에게 그처럼 어마어 마한 내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다. "뭐야? 이제 보니 이 자식 백화맹의 끄나풀 아냐?" 냉자기가 비수를 꼬나쥐고 만면에 살기를 발하며 사마소군을 덮치 려 했다. 적노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냉자기는 형체 없는 기운이 마치 그물처럼 자신의 몸을 옭아매 밀 어 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적노를 험악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소리쳤다. "비키시오!" "그 망가진 비수를 들고 어쩌겠다는 것이냐?" "당신이 방금 그랬잖소? 저 놈의 아비가 백화맹의 맹주라고!" "노부는 제팔대 맹주라고 말했다." "글쎄, 팔대고 구대고 간에……." 냉자기는 말을 하다 말고 무엇을 깨달았는지 흠칫 사마소군을 응 시했다. "가만 있자, 내가 알기로는 지금의 백화맹주가 십대(十代)……." "그렇다. 백의성검 사마정천이 재임할 당시, 너는 세상에 태어나 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그, 그렇군요. 하지만……." 냉자기는 그래도 뭔가 미심쩍은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적노의 번갯불 같은 시선이 그의 얼굴에 정면으로 꽂혔다. "노부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네녀석은 이 아이 또한 너희들과 똑 같은 배를 탔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된다." 냉자기의 표정이 기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새삼 사마소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젠장, 도통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 오늘은 무슨 일이 제대로 되는 게 없지?" 백화맹의 추적을 받으면서 누구보다도 원한이 깊게 쌓인 냉자기였 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뭔가 사마소군에게 사연이 있다는 것 을 직감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비 맞은 중처럼 투덜대며 몸을 돌렸다. 한편 사마소군은 이 때 뭔가 깊은 상념에 빠져 있어 냉자기의 말 따위는 아예 귀담아듣지도 않고 있었다. 장내에는 돌연 괴괴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서로의 시선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가운데 그 질식할 듯한 침묵 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어디선가 암중인(暗中人)의 나직한 음성이 독백처럼 울려 퍼 졌다. "최악의 조건과 최악의 환경 속에서 운명처럼 길들여진 일곱 명의 천재. 좋아! 어려운 선택을 매우 훌륭하게 해 주었다, 적노." "감사합니다." 적노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웃음이 선명하게 스쳐갔다. 장내 소년들의 신색이 일순 묘하게 변했다. '저 도깨비 같은 음성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까는 저 벽 쪽에 서 들리는 것 같더니, 이제는 방향조차 잡을 수 없잖아?' 모두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그렇다. 그 음성은 참으로 들으면 들을수록 신비로웠다. 어찌 들으면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 오는 듯했고, 달리 들으면 바 로 귓가에서 속삭이듯 가까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음성은 또한 젊은 사람의 것인가 하면 늙은 사람의 음성 같기 도 해서, 심지어는 저게 과연 사람의 음성인가 하는 의심이 갈 지 경이었다. 그 신비로운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일곱 명의 아이들에게도 말한다. 너희들이 태어나고 자라서 여기 까지 오게 된 것은 운명(運命)이랄 수 있다. 우연은 없다. 너희들 은 탄생과 함께 부여된 운명의 예정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운명치고는 개떡 같은 운명이군." 공야치가 불쑥 입을 열어 투덜거렸다. 암중인이 그 말을 긍정했다. "공야치의 말이 맞다. 그러나 너희들은 위대한 운명의 전환점에 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둠 속의 빛이 더욱 밝고 겨울에 피는 꽃이 그토록 향기롭듯, 너희는 지나 온 고통의 세월로 인해서 더 욱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장내의 소년들은 문득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뒤늦게 암중인의 음성이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 게 만들어 주는 기이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꾸어 말해 듣는 이에게 신뢰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음성 이기도 했다. "각기 최고의 기질을 타고났으되,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한 (恨)을 품고 살아가는 너희 일곱 명! 이 곳 장한별부(長恨別府)는 그런 너희들에게 세상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절대의 능력을 부 여할 것이다." 장내 소년들의 눈에 일순 한결같이 기이한 광채가 번뜩거리기 시 작했다. 모두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어떤 소년은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고, 어떤 소년은 오히려 더욱 창백해졌다. 암중인의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기한은 오 년(五年). 이 오 년 동안 너희들은 차마 피와 살로써 이루어진 인간으로선 견디기 어려운 혹독한 수련을 받게 될 것이 다. 그것은 너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라 해도 좋다." 잠시 사이를 두고 암중인의 음성이 위엄 있게 이어졌다. "아직은 이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너희들이 딛고 설 땅은 그 어디 에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진실로 강해지려면 가장 먼저 자신 부터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그러 나 그런데도 고통을 참기 어렵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라." 듣고 있던 사마소군은 마치 거대한 괴물에게 쫓겨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위기감을 느꼈다. '장한별부라 했던가? 여기서 우물쭈물하다가는 이상한 변을 당할 것 같군.' 그가 생각을 굴리는 사이 암중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끝으로 말하겠다. 오 년 뒤 이 자리에서 만날 때까지 한 명의 낙 오자도 없기를 바란다. 적노, 들으라." "예." 적노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준비는 다 되었는가?" "그렇습니다, 부주님." "좋아. 데려가도록." "알겠습니다." 적노는 재차 허리를 깊숙이 숙이더니, 이어 뒤에 시립해 있던 복 면인들에게 몸을 돌렸다. 그러자 복면인들이 일제히 몸을 움직여 소년들의 등뒤로 걸어갔 다. 그들은 각 소년들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선 후 걸음을 멈추었 다. 백약빙의 뒤에도 예외 없이 복면인이 섰다. 단 한 명, 사마소군은 계속 혼자였다. 소년들은 모두 비장한 신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 명, 화옥만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섭선을 거두어 옆구리에 꽂더니 문득 허공을 올려다 보며 물었다. "부주께 묻겠소." 그 모습에 적노가 냉막한 어투로 말했다. "부주님께서는 이미 떠나셨다. 노부에게 물어라." "좋소. 이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인데, 도 대체 조건이 무엇이오?" "조건……?" "무작정 우리들에게 선심을 쓰는 건 아닐 게 아니오? 나는 일전에 내게 장한화를 준 장한사자(長恨使者)인지 뭔지 하는 사람에게 똑 같은 질문을 했었소. 그러나 그는 부주님께 직접 물어 보라는 말 뿐이었소." 화옥의 이 물음에 장내 소년들의 시선이 일제히 적노에게 향했다. 적노는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미소를 떠올렸다. "역시 그 말은 부주님께 직접 듣는 게 좋겠다. 오 년 뒤에 말이 다." "오 년 뒤라?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는지 모르겠구려." 화옥은 기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오 년 뒤 당신의 부주께서 제시한 조건이 우리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할 경우엔 어떡하시겠소?" 화옥의 이 물음은 매우 교묘한 데가 있었다. 그는 우리라는 말로 다른 소년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소년들이 일제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적노 의 대답을 기다렸다. 적노는 잠시 난색을 짓더니 곧 느릿한 어투로 대꾸했다. "그 문제 역시 오 년 뒤에 확실히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답은 소년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 다. 화옥은 잠시 적노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복면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갑시다." "……." 복면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좌측에 나 있는 동굴 쪽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화옥은 유유자적한 걸음걸이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막 동굴 안에 들어서려다 말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뒤를 힐끔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수고하게, 친구들. 그리고 꼬마 너." 화옥은 문득 사마소군을 가리키더니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꼬마 너는 반드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알겠지?" 사마소군은 느닷없이 그가 친근한 어투로 말을 걸어 오자, 약간 어리둥절했으나 곧 마주 웃어 보였다. 화옥은 그제야 몸을 돌리고 동굴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가 동굴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춘 순간이었다. 쿠구궁－! 요란한 굉음과 함께 동굴 천장에서 육중한 철문이 내려와 입구를 봉쇄했다. 그 광경에 소년들의 안색이 가볍게 굳어졌다. 처음으로 그들의 얼 굴에 불안한 기색이 스쳐갔다. 그 때 나머지 복면인들이 각기 다른 동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년들의 눈빛이 빠르게 서로 얽혔다. 짧은 순간이나마 서로 뒤엉 키는 그 시선들 속엔 상대에 대한 격려와 염려가 담겨 있었다. 냉자기와 곡철화가 거의 동시에 다른 동굴로 각기 사라지고, 공야 치가 뒤따라 걸음을 막 떼어 놓으려다 금사충에게 악수를 청했다. "무사해라. 그래야 빚을 갚을 수 있을 테니까."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네녀석이나 잘해." 금사충은 힘주어 공야치가 내민 손을 잡았다. 기이하게도 이 순간, 그들은 서로 상대에 대한 정리를 느꼈다. 그 것은 서로의 신세를 알고 난 후 어떤 동병상련의 공감대가 형성됐 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곧 몸을 돌려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사마소군은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백약빙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막 복면인을 따라 동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개를 떨군 채 힘없이 걷고 있는 모습이 사마소군의 눈을 아프게 자극했다. 게다가 원래 가냘퍼 보이는 몸매인데다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타박타박 걸음을 떼어 놓는 모습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소리치고 말았다. "누나!" 백약빙의 발걸음이 멈칫 정지되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사마소군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우면서도 찬서리가 묻어 날 듯 차가운 표정이었다. 사마소군은 막상 부르긴 했으나 특별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라 궁색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곧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용기를 내요, 누나." 순간, 백약빙의 싸늘한 눈빛이 가볍게 빛을 잃었다. 그것은 그녀 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준 최초의 변화였다. 그녀는 그런 눈으로 사마소군을 한참 바라보더니 핏기 없는 입술 을 미미하게 달싹였다. "고마워……." 들릴 듯 말 듯 미약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의 귀에는 천 둥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일순, 사마소군은 가슴 깊은 곳에서 까닭 모를 기쁨이 치밀어오르 는 것을 느꼈다. 그가 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쿠구궁－! 백약빙이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때를 같이해 육중한 철문이 내려 닫히고 말았다. 사마소군은 멍하니 그 야속한 철문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아쉽고 허전한 기분이 들지?' 장내가 갑자기 텅 빈 듯 허전해졌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사마소군과 적노뿐이었다. '마치 꽉 차올랐던 바닷물이 모두 빠져 나간 것 같구나.' 그 때 적노의 냉막한 음성이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따라오너라." "……." 사마소군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 적노가 오른쪽에 있는 가장 큰 동굴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적노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다보았다. "왜 따라오지 않느냐?" "왜 따라가야 하는지를 모르니까요." 사마소군은 완강한 어조로 대꾸했다. 적노의 두 눈에 일순 번갯불 같은 신광이 어렸다. 예의 그 무시무 시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찰나지간의 변화였고, 그는 곧 원래의 무심한 안색을 회복했다. 이어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똑바로 걸어가 기 시작했다.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 다면 말이다." "……!" 사마소군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갈등이 뒤섞인 눈빛으로 적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아랫입 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침착한 걸음걸이로 적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육중한 철문이 두 사람의 모습을 삼킨 채 내려앉았다. 텅 비어 버린 공지에는 메아리처럼 철문 소리만이 오랫동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장차의 무림천하에 가장 큰 폭풍을 몰고 오게 되는 신비의 조직 칠인회(七人會). 그 첫 시발점이 이 곳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동굴 밖에서는 한동안 잠잠했던 흰 눈발이 폭포수와 함께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제 15 장 엄청난 비사(秘事) ━━━━━━━━━━━━━━━━━━━━━━━━━━━━━━━━━━━ 띵디딩－ 띠딩－ 삘리리－! 아름다운 피리 소리와 비파음이 들려 오기 시작한 것은 철문 안으 로 들어선 지 일 다경쯤 흐른 뒤였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사마소군은 의아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시야에 곧 하나의 석문(石門)이 들어왔다. 아름다운 선율은 바로 그 곳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저 안은 어떤 곳일까?' 사마소군은 뭔가 묻는 듯한 표정으로 적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묵묵히 걷고만 있을 뿐이었다. '저렇게 고집스런 얼굴은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거야. 과연 저 입 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나 여러 가지 수수께끼를 들을 수 있을까?' 사마소군은 내심 한탄을 금치 못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석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의 구조를 살핀 순간, 사마소군은 언뜻 두 눈에 의혹의 빛을 발했다. 내부는 극히 화려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며진 석실이었다. 마치 고관대작의 서재와 대부호의 침실을 하나로 합쳐 놓은 듯한 분위기라고나 할까? 오른쪽 벽에는 수천 권의 책자가 빽빽이 진열되어 있고, 맞은 편 에는 십장생도(十長生圖)가 그려진 팔 폭의 병풍이 놓여져 있었 다. 반대편 벽 쪽에는 휘장이 드리워진 세 개의 작은 문이 보였고, 바 닥에는 용봉(龍鳳)이 수놓아진 백색 융단이 화려하게 깔려 있었 다. 천장에는 야명주(夜明珠) 일곱 개가 북두칠성의 형상으로 박혀 있 었으며, 황촉불의 불빛을 받아 그것들은 실내를 더욱 신비롭게 꾸 며 주고 있었다. '이렇게 호화로운 방은 처음 보겠구나!' 사마소군은 눈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 때였다. 방 안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문 가운데 맨 오른쪽 문에 서 홍의궁장 차림의 네 미녀가 나타났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십칠팔 세 가량의 나이로 보였으며, 각기 비파 (琵琶)와 피리 등의 악기를 안고 있었다. "주인님을 영접하옵니다." 홍의궁장 미녀들이 일제히 날아갈 듯 사뿐히 절했다. 적노가 힐끔 사마소군을 돌아다보았다. "왜 그렇게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느냐? 인사를 받지 않고." '음?' 사마소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네 미녀와 적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니까, 방금 그 인사가 나를 향한 것이었단 말입니까?" "그렇다. 이 계집들은 앞으로 닷새 동안 너를 주인으로 모시며 시 중을 들어 줄 것이다." "도대체 밑도 끝도 없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사마소군." 적노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동안 사마소군을 바라보더니 글을 읽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너는 이 곳에서 닷새 동안 머무르게 된다. 이 닷새 동안 너는 최 대한의 자유와 휴식을 만끽하라." "……!" 사마소군의 미간이 가볍게 좁혀졌다. 뚱딴지같이 최대한의 자유와 휴식이라니? 이건 또 웬 말인가? 그러나 사마소군은 곧 그 영문을 짐작하고 피식 실소를 지었다. "말하자면 사형수를 죽이기 직전 마지막으로 먹고 마시게 하는 것 과 비슷한 호의로군요. 맞습니까?" "네 말은 비슷하게 맞았다." "귀하는 내가 그 오 년 간의 무공수련을 당연히 허락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마소군은 적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르듯 단호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모든 내막을 알기 전에는 손가락 하나도 당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 적노의 눈에 일순간 기묘한 이채가 스쳤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후 고개를 끄덕거리며 의외로 부드 러운 음성을 흘려 냈다. "네가 원하는 대답들은 부주께서 직접 해 주실 것이다." "그럼 부주라는 분은 닷새 후에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렇다." "그럼…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군요." 사마소군의 얼굴에 비로소 만족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빙긋 웃으며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난 최대한의 자유와 휴식을 취할 테니, 더 이상 볼일이 없다면 그만 자리를 피해 주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사마소군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홍 의궁장 미녀들을 바라보았다. "이 몸은 우선 잠부터 좀 자야겠소. 내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절대 깨우지 마시오. 아… 벌써 졸려 오는군. 침상이 어느 쪽이 오?" "저, 저쪽으로 들어가시면 되옵니다." 맨 오른쪽 궁장미녀가 실내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문 가운데 중간 것을 가리키며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마소군은 즉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휘장을 걷어젖히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와! 이건 난생 처음 보는 훌륭한 침상인걸?" 안에는 원형의 거대한 비단 금침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야말로 황 실 귀족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마소군은 대뜸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눕더니 잠을 청하기 시작했 다.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그의 얼굴은 매우 평화스러워 보였으며 희미한 미소까지 떠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적노의 얼굴에 일순 어이없는 빛이 떠올랐다. '기이한 녀석이군.' 대개 이런 경우에 처하면 강호의 노련한 인물들도 얼마간 불안해 하거나 위축되게 마련이다. 상대가 십이 세 정도의 소년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에게는 조금도 그런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적노는 곧 사마소군이 새근새근 코를 골아 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녀석, 제 집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모양이군." 그 말에 옆의 네 궁장미녀가 일제히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 다. 그녀들은 모두 만면에 야릇한 기색을 띤 채 웃음을 참고 있었는 데, 아마 사마소군에게 호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사마소군이 금방 잠이 든 것은 그가 태평스러운 탓만은 아 니었다. 기실 그는 근래 며칠 동안 제대로 편한 잠을 잔 적이 없 어 매우 피곤한 상태였던 것이다. 적노는 잠시 사마소군을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몸을 돌려 석실을 나섰다. 실내에서는 사마소군이 코를 고는 소리만이 한가로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드르릉… 쿨……!" 사마소군은 그야말로 늘어지게 자고 또 잤다. 그 자신도 도대체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선유도를 떠난 이래 이토록 깊은 잠에 빠져 든 건 처음 있는 일이 었다. 석실 안인지라 밤인지 낮인지조차 분간이 가지를 않았다. 하지만 사마소군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지 이미 오래였다. '어차피 때가 되면 데리러 오겠지.' 가끔씩 눈을 뜰 때마다 그의 뇌리를 스쳐 간 생각은 고작 그것뿐 이었다. 그러나 이틀쯤 지났다고 생각될 무렵, 드디어 그의 뇌리에는 새로 운 생각이 떠올랐다. '배가 고픈데…….'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배가 고프면 잠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마소군은 퉁퉁 부은 눈을 껌벅이며 부스스 침상에서 몸을 일으 켰다. 이어 그는 졸린 눈으로 무심코 주위를 살피다가 눈이 휘둥 그래졌다. 상… 생전 들어 보지도 못한 각종 진귀한 요리들이 빽빽하게 차려 져 있는 상이 침상 옆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은쟁반에 가득 가득 담겨져 있는 그 요리들은 대충 잡아도 오십여 가지는 넘을 것 같았다.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세상에, 황제의 밥상도 이보다 거창하지는 않겠다!' 그는 갑자기 견딜 수 없도록 배가 고파지는 것을 느꼈다. 누가 언제 이처럼 엄청난 상을 차려 놓았는지는 아예 의문조차 떠 올리지 않았다. 그는 벌떡 덤비듯이 상 앞으로 다가가 미친 듯이 음식을 집어삼키 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탓도 있었지만 음식들은 정말 기가 막히 게 맛이 있었다. 말 그대로 혀 끝에 닿기가 무섭게 녹아 내릴 정 도다. "끄윽, 잘 먹었다." 이윽고 배부르게 포식한 사마소군은 길게 게트림을 발하며 두 다 리를 쭉 뻗었다. 바로 그 때였다. 스르륵……! 옷자락 끄는 소리와 함께 한 섬세한 인영이 휘장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사마소군이 눈을 깜박이며 살피니, 십오륙 세 가량의 자의소녀였 다. 비록 절세의 용모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매우 귀엽고 깜찍한 미태를 자아내는 소녀였다. 자의소녀는 사마소군의 눈뜬 모습을 바라보고는 킥 손을 가리며 웃었다. 사마소군은 약간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의소녀는 금세 옥용을 가볍게 붉혔다. 그녀는 가볍게 허리 숙여 예를 표한 후, 생긋 웃으며 옥음으로 말 했다. "많이 드셨나요?" "그런 것 같소. 그런데 소저는 누구요? 그 궁장여인들은 어디 갔 소?" "그녀들은 주인님을 위해 아름다운 음률을 탄주하는 게 임무예요. 주인님께서 다시 주무시지만 않는다면 당장 대령시킬 수 있어요." "대체 나를 위해 몇 명이나 이 안에 있는 거요? 그리고 당신들은 이 장한별부에서 어떤……." 사마소군의 질문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홍의궁장 미녀들이 막 비 파와 피리를 연주하며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삘리리－ 삘리－! 자의소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무엇을 물어도 소용없어요. 저는 대답할 수가 없으니까 요. 우리는 단지 닷새 동안만 최선을 다해 주인님을 모실 뿐이에 요." "꼭 닷새만이라야 하오? 난 이 주인 일을 계속하고 싶은데……." 사마소군이 짐짓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하자, 자의소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몸을 돌렸다. "만약 오 년 후에도 주인님이 살아 계시다면 가능할지 모르지요. 저를 따라오세요." "소저의 그 무정한 태도를 보니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도 묻지 말 아야 할 것 같군." 사마소군은 가볍게 투덜거리며 그녀의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라갔 다. 네 궁장미녀가 여전히 은은한 선율을 뜯어 내며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자의소녀가 그를 안내한 곳은 맨 왼쪽의 작은 문 안이었다. 막 안으로 들어서던 사마소군은 이 곳이 바로 욕탕이라는 것을 깨 달았다. 자욱한 수증기가 후끈하게 장내를 가득 메운 가운데 원형의 대리 석 욕조가 보였다. 사방에 수십 마리의 용(龍)이 뒤엉켜 꿈틀거리는 조각이 새겨진 그 욕조는 화려하다 못해 위압감이 들 정도였다. 사마소군은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의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목욕을 하라 이거요?" "비단 목욕뿐 아니라 새 의복으로 갈아입으셔야 해요. 그 두 가지 야말로 몸과 마음의 피로를 동시에 풀어 주는 효과가 있지요." 자의소녀가 약간 쌀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후끈한 수증기 탓인지 그녀의 얼굴은 약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마소군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 곧 부주를 만날 테니까 몸을 깨끗이 하라는 뜻이겠지." 사마소군은 퉁명스런 한 마디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말 과는 달리 그는 내심 목욕을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솟아오르 고 있는 형편이었다. "좋아, 어쨌든 시키는 대로 하겠소." 사마소군은 무슨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성큼 성큼 욕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는 채 세 걸음도 옮겨 놓기 전에 그만 그 자리에 딱 얼 어붙고 말았다. "아니, 당신들은……?" 그의 앞, 뿌연 수증기를 등에 지고 막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네 여인이 있었다. 그녀들은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파를 뜯고 피리를 불던 네 홍의궁장 미녀였다. 그런데 그녀들은 이 순간 어느 새 모두 옷을 갈아입었는지 모두 다 속이 훤히 비치는 망사의 차림이지 않은가? 말이 망사의지 차라리 그것은 완전히 발가벗은 것보다 더 요염하 고 자극적인 모습들이었다. 터질 듯 팽팽한 젓가슴을 물론이고 잘룩한 허리와 둔부의 곡선, 그리고 그 밑의 비림(秘林)까지도 은은히 내비칠 정도였다. 사마소군은 아찔하는 현기증을 느끼며 불에 덴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무, 무슨 일이오?" "목욕 시중을 들어 드리려는 것이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네 여인은 만면에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공손히 입을 모았 다. 이어 그녀들은 사마소군의 몸을 에워싸더니 옷을 벗기기 시작 했다. 사마소군은 더욱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자의소녀 를 돌아다보았다. "소저는 이 여인들의 의무가 아름다운 음률을 탄주하는 것이라고 했잖소?" "목욕 시중을 드는 것도 그녀들의 일이에요." 자의소녀는 쌀쌀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녀의 눈가에 짓궂은 웃음이 스쳐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급히 무슨 말인가 다시 하려는 순간이었다. 자의소녀가 먼저 날아갈 듯이 절하며 옥음으로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어요. 제가 보기에 그녀들은 주인님의 목욕 시중을 매우 기쁜 마음으로 하려는 것 같으니,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여기까지 말한 자의소녀는 네 여인에게 빠른 눈짓을 보낸 후 잽싸 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마소군은 그제야 번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이제 보니 자의소녀는 이 여인들의 직속상관쯤 되는 게 틀림없 다.' 그가 생각을 굴리는 사이 네 반라여인(半裸女人)들은 이미 상의를 다 벗겨 내리고 하의 쪽으로 손을 뻗어 오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질겁하여 소리쳤다. "잠깐, 그건 벗지 않겠소!" "설마… 옷을 입은 채로 목욕을 하시겠단 말입니까?" "……!" 사마소군은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네 쌍의 커다란 젖가슴들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압도해들었 다. 그는 일순 두 눈을 질끈 감고 내심 부르짖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에 당할 일이라면 당당하게 사내대장부답게 나가자!' 그렇게 결심을 굳히자 그는 곧 눈을 뜬 채 그녀들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아래는 내가 벗겠소. 당신들은 가서 물이 뜨겁지나 않은지 확인 해 보시오." "분부를 따르겠사옵니다." 그녀들은 배시시 웃더니 모두 욕조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이번엔 허여멀건 엉덩이들이 사마소군의 시야를 압도했다. 사마소군은 내심 한탄하며 몸에 걸친 옷을 깡그리 벗어 던졌다. 이어 그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욕조 안에 들어섰다. 물은 알맞게 뜨거웠으며, 표면에는 장미 꽃잎이 둥둥 떠다니고 있 었다. 뿐이랴? 뽀얗게 하얀색으로 출렁이는 물의 색깔로 보아 양지유를 섞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이게 바로 책에서 읽었던 미수목욕이라는 것이구나. 젠장, 황제 들이나 하는 건줄 알았던 미수목욕을 내가 하게 되다니…….' 사마소군이 물 속으로 막 몸을 담그는 순간이었다. 네 반라여인이 인어처럼 다가오더니 뱀처럼 사마소군의 각 신체 부위를 휘감아 왔다. 그녀들은 그의 양 팔과 두 다리를 보물단지 처럼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정성껏 때를 밀기 시작했다. 사마소군은 처음엔 전신에 왕소름이 돋는 기분이었으나 곧 전신이 나른해지며 꿈을 꾸는 듯 황홀한 느낌에 젖어들었다. 네 여인은 어찌나 정성껏 때를 미는지 마치 조금만 세게 불어도 꺼져 버릴 거품을 매만지는 듯했다. 그녀들의 손이 점차로 사마소군의 몸 중심부로 진격해 왔다. '내 몸의 때, 완전히 씨몰살을 당하는 날이군.' 내심 흥얼거리던 그의 얼굴색이 문득 붉어졌다. '젖가슴으로 때를 미나?' 그녀들은 몸을 엎드린 채 점차 몸의 중심부까지 때를 밀어 오자, 자연 사마소군의 두 팔과 다리는 그녀들의 가슴 부위에 밀착될 수 밖에 없었다. 사마소군은 점차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 그는 난생 처음으로 단전 부위에 이상한 기운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거의 동시에 네 여인의 입에서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 "아……!" 순간, 사마소군의 입에서 화급한 일성이 흘러 나왔다. "잠깐, 거기는 내가 씻겠소." "예?" "그 곳의 때는 내가 친히 다스릴 테니, 모두 철수하란 말이오!" 사마소군의 표정이 자못 엄숙하게 변했다. 네 여인은 일제히 얼굴을 붉히더니 손을 떼었다. 사마소군은 내심 부끄럽기도 하고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젠장, 아무리 내 나이가 어리다기로서니 명색이 사내대장부인데 이 여인들은 어찌 되었길래 부끄러움도 모른단 말인가?' 내심 거기까지 생각을 굴리던 사마소군은 문득 묘한 웃음을 지으 며 네 여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던 한순간이었다. "와아! 야아아!" 사마소군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물을 첨벙거렸다. 물보라가 마구 사방으로 튀었다. 네 여인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며 비명을 질렀다. 사마소군은 그런 그녀들을 곁눈질로 살피며 내심 미소를 떠올렸 다. '후후…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군.' 그는 성큼성큼 욕조 밖으로 걸어나왔다. 구름 같은 침상에 파묻혀 늘어지게 자고, 끼니마다 희한하고 진귀 한 진수성찬을 맛보고, 미수목욕하고, 책 보고……. 그러는 가운데 나흘이 후딱 지나 어느 새 마지막 닷새째가 되었 다. 이 날 적노는 석실로 사마소군을 데리러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그 러나 그는 막 석실 안으로 들어서다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드르렁… 쿨……!" 사마소군의 코 고는 소리가 귓속에 들려 왔기 때문이다. 적노는 가볍게 고개를 내흔들었다. '지옥에 데려다 놔도 늘어지게 잘 아이로군.'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침실의 휘장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 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사마소군이 침상에 걸터앉아 그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러면서도 그는 장난스럽게 코 고는 소리를 계속 내고 있었 다. 적노는 어이없는 눈빛이 되었다. 그 때 사마소군이 코 고는 소리 를 뚝 그치더니,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적노는 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눈앞의 이 소년만 보면 왠지 자신이 끌려 들어가는 것 같다 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주객(主客)이 전도된 듯한 묘한 느낌이었다. "따라와라." 적노는 곧 조용히 등을 돌렸다. 사마소군은 그의 곱사등을 보며 묵묵히 뒤를 따랐다. 석실을 나서는 그의 표정에 약간 서운한 기색이 스쳤다. '자의소녀와 네 괴물들은 안 보이는구나. 이름도 안 밝혀 주고 사 라져 버릴 건 뭐람?' 어찌 됐든 즐겁게 보낸 닷새였다. 정이 많은 사마소군은 그녀들의 모습을 마음 한 구석에 접어 놓았다. 한편 적노는 석실을 나와 막다른 동굴벽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막다른 벽에 당도하더니, 한 귀퉁이 모서리 를 손으로 매만졌다. 순간, 동굴벽이 은은히 진동하더니 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안쪽에서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사마소군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재빨리 다가가 보니, 공간 아래 로는 돌계단이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아래로 나 있었다. '매우 음침한 기운이 풍기는걸.' 사마소군이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더욱 자세히 살피니, 입구의 천장 쪽에 희미하게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장한로(長恨路)> 그 때 적노의 묵직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사마소군, 지금부터는 한가하지 않다. 걸음을 빨리 해라." 계단은 도무지 끝이 없었다. '마흔다섯, 마흔여섯…….' 언제부턴지 헤아리기 시작한 계단의 숫자가 벌써 오십을 넘어서고 있었다. 앞서 아무런 생각 없이 내려온 계단의 숫자를 포함한다면 대충 잡 아도 팔구십은 넘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계단은 아직 끝날 기 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마다 벽에는 횃불이 걸린 채 음침한 불빛을 비추고 있 었다. 사마소군은 내심 경이로움과 함께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이렇게 끝도 없이 내려가다가는 혹시 십팔층 지옥을 만날지 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땅 속이란 인간에게 무덤과 죽음을 연상시키는 법이다. 그 땅 속 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필경 죽음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뚜벅뚜벅－! 쥐죽은 듯한 땅 속의 정적을 뒤흔들며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이 끝없이 괴괴롭게 울려 퍼졌다. 사마소군은 비록 인내심이 많은 편이었지만 마침내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젠장!' 그가 마침내 적노를 향해 무슨 말인가 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발 아래가 푹 꺼지듯 허전해지는 게 아닌가? 사마소군은 몸이 휘청 기울어지는 순간, 아차 싶었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쿠당탕－! "우욱!" 사정없이 곤두박질친 후에야 고개를 들어 보니 계단은 어느 샌가 끝나 있었다. 사마소군은 엉덩이가 깨지는 듯 아픈 것을 느끼며 오만상을 찌푸 렸다. '되게 재수없군. 하필 적노를 쳐다보는 순간에 계단이 딱 끝날게 뭐람.' 그는 내심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유령 같은 그림자를 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눈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는 그 하나뿐이 아니었다. 본래 그가 들어선 이 곳은 흡사 광장처럼 넓었으며, 둥근 공의 내 부를 연상케 했다. 그 중앙에는 지금 십여 명의 인물들이 제각기 편한 자세로 눕거나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옷차림새가 제각기 달랐으며 검(劍), 도(刀), 륜(輪) 등 가지각색의 병장기를 지닌 모습이었다. 사마소군은 그들을 처음 보는 순간,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으나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잠시 후에야 그 이유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들이 버젓이 눈을 뜨고 숨을 쉬는데도 전혀 살아 있는 인간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가 단지 그들이 깎아 놓은 목상(木像)인 양 털끝만큼도 움 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사마소군의 안색이 점차로 굳어져 갔다. 비록 전문적으로 무예 수업을 쌓아 본 적은 없지만, 타고난 자질 과 오성(悟性)이 다른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뛰어난 사 마소군이다. 더구나 혈풍향을 비롯한 일련의 절정기인들을 만나는 사이, 그의 안목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발전해 있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절정고수들이다. 모두 제멋대로의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완벽하리만큼 빈틈이 없다.' 사마소군은 내심 탄성을 발하면서도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처럼 기이한 장소와 저런 고수들을 거느린 장한별부의 주 인은 어떤 인물일까?' 이 때다. "저 아이입니까?" 사마소군이 맨 처음 보았던 눈앞의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적노는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즉시 대답했다. "그렇다네." "좋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알겠네." 적노는 즉시 몸을 돌려 계단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마소군은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사라지는 그를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제야 눈앞의 인물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이십오 세 가량의 청년이었다.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하다 못해 피부빛이나 일신에 걸친 청의경장 차림까지도 평범 했다. 그야말로 한 번 보아서는 돌아서는 즉시 잊어 버릴 얼굴이었다. 그나마 억지로 특징을 찾아 낸다면 이 청년에게서는 무사(武士)라 기보다 문사(文士)다운 기질이 풍긴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질은 옆구리에 찬 묵빛 장검과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사람은 매우 순박하고 어리숙한 삼류무사처럼 보이는구나. 하 지만 웬만한 무림고수들은 보나마나 이 사람의 일 초 반 식도 받 아내지 못할 거야.' 그 때 청년이 사마소군을 잠시 응시하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랬다. "무정쾌도(無情快刀) 능한비(陵限悲)라고 하네." "아… 그렇습니까? 나는……." "따라오게." 사마소군이 자기 소개를 하기도 전에 능한비는 몸을 돌려 걷기 시 작했다. 머쓱해진 사마소군은 내심 투덜거리며 뒤를 따랐다. '내가 어리다고 얕보는 게 분명해. 좋아, 무정쾌도라는 명호를 기 억해 두겠어.'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사마소군은 무심코 능한비의 뒷모습을 지켜 보다가 실로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바,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그렇다. 믿을 수 없게도 능한비의 두 발은 지면에서 한 치 가량 뜬 상태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마소군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딱 얼어붙고 말았다. 능한비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왜 따라오지 않는가?" "따, 따라가는 중이오!" 사마소군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능한비가 걷는 모습을 재차 바라보다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 다. 이번에는 자신과 똑같이 땅에 발이 닿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내가 헛것을 보았단 말인가?' 사마소군은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 능한비가 광장 맞은편 끝에 당도하더니 몸을 멈추었다. 거기에는 거대한 철문(鐵門) 하나가 나 있었다.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은 표면이 거울처럼 번들거리고 있어 아마도 특수한 철(鐵)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능한비는 철문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도착하였습니다, 부주님." 그러자 안에서 예의 부주(府主)의 음성이 위엄 있게 들려 왔다. "한비는 물러가고, 그 아이만 들여보내도록 해라." "예." 능한비는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곧 몸 을 돌려 사라져 갔다. 사마소군은 멀어지는 능한비와 철문 쪽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 때다. 우르르－!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한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의 동시에 사마소군이 딛고 선 땅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급히 신경을 가다듬었다. 그의 시야에 곧 거대한 철문이 좌우로 쩍 갈라지듯 열리는 광경이 보였다. 사마소군은 호기심이 동하여 온 신경을 열리는 철문 안쪽으로 집 중했다. 맨 처음 그가 느낀 것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는 기이한 향기였다. 그 향기는 너무나 청아하고 신비로운 것이어서 단지 서너 번 맡았 을 뿐인데도 심신이 날아갈 듯 상쾌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 황홀한 향기를 오래 음미할 여유도 없었다. 마침내 활짝 열린 철문 안쪽의 광경이 그를 얼떨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표정은 마치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했던 장님이 어느 날 갑 자기 눈이 뜨여 햇빛을 보았을 때와 흡사했다. 철문 안, 그 곳은 한마디로 빛의 세계라 할 수 있었다. 족히 오십여 장 높이는 될 듯 까마득한 천장에는 오색의 찬란한 보광을 발산하는 온갖 진귀보주가 수도 없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듯 한 장관이었다. 더욱이 청(靑), 홍(紅), 백(白), 적(赤) 등 여러 가지 광채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보여 주는 황홀극치의 빛무리는 한 마디로 환 상 속의 별천지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세상에, 이건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잖아?' 사마소군은 난생 처음 대하는 광경에 반쯤 넋을 잃었다. 그러던 한순간, 그의 시선이 마치 자석에라도 이끌리듯 내부의 좌 우로 움직였다. 그의 눈이 곧 새로운 경악으로 부릅뜨여졌다. '아니, 저건?' 어찌나 크게 놀랐던지 그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오색 빛무리가 가득한 철문 안쪽의 구조는 하나의 긴 회랑처럼 되 어 있었다. 그런데 그 회랑의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는 건 수백 개의 관(棺) 이 아닌가? 그 수백 개의 관은 하나같이 세워진 채로 뚜껑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관 속에는 예외 없이 회색 수의(灰色壽衣)로 전신을 칭칭 감은 시체들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 처음 그 황홀했던 첫인상은 이 괴기스런 광경을 보는 순 간,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사마소군이 언제 이처럼 무시무시한 장관을 상상이라도 했으랴? 아연실색한 상태로 그가 얼마 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을까? "들어오너라, 사마소군." 회랑의 저쪽 끝 맞은편에서 부주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사마소군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는 선뜻 안으 로 들어설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 리 있겠는가? 사마소군은 곧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결심을 단단히 했다. '이왕 엎질러진 물, 가는 데까지 가 보는 수밖에!' 그는 모질게 마음을 다진 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치 저승세계에라도 들어서는 듯 불길한 예감이 그를 엄습해 왔 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조금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가능한 양 옆 의 시신들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깊숙이 들어갔다. 한순간 등뒤 쪽에서 거대한 철문이 다시 굉음을 내며 닫히는 소리 가 들려 왔다. 사마소군은 내심 가슴이 철렁했으나 못 들은 척 허리를 꼿꼿이 세 우고 계속 걸어 들어갔다. 회랑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긴 것 같았다. 코를 찌르는 황홀한 향기도 안으로 들어설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관(棺)의 숫자는 대략 양쪽에 일백 개씩, 도합 이백여 개는 되어 보였다. 그 속의 시신들로 인하여 사마소군은 눈을 어지럽히는 빛의 조화 나 신비의 향기에 대해선 흥미를 잃은 지 이미 오래였다. '젠장, 시신들의 영접을 받으며 걷게 될 줄이야.' 마음을 다부지게 먹은 탓일까? 사마소군은 점차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원래의 차분함을 되찾아 갔다. 마침내 그는 맞은편 끝에 당도했다. 그러자 또 하나의 광경이 그 의 시야에 들어왔다. 통로의 끝에는 원래 대여섯 개의 흰 대리석 계단이 나 있었다. 계단의 맨 위쪽에는 대리석 제단이 마련되어 있는 가운데, 하나의 육중한 태사의가 놓여져 있었다. 그 태사의는 매우 크고 화려해서 한 대국(大國)의 황실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것이었다. 이 순간 태사의는 반대쪽으로 빙글 돌려져 있어 사마소군은 거기 에 어떤 인물이 앉아 있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태사의의 양쪽에는 두 개의 거대한 청동향로가 놓여져 있었다. 아스라한 향연을 가득 피워 내는 그 향로들을 보며 사마소군은 비 로소 장내에 가득한 향내가 바로 그 곳에서부터 퍼져 오른 것임을 깨달았다. 순간, 사마소군의 뇌리를 번뜩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언젠가 읽어 본 의경(醫經)에 의할 것 같으면 시체의 부패를 막 기 위해 피우는 천단신향(天丹神香)이라는 것이 있다더니, 아마 저게 그것인 것 같구나.' 어려서부터 많은 책자들을 읽은 그인지라 곧 천단신향이 만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것이며, 예로부터 황제(皇帝)들의 무덤에만 사용해 왔다는 내용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걸음을 멈춘 채 잠시 머뭇거리던 사마소군은 문득 계단 맨 아래쪽 에 하나의 빈 나무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게 내가 앉을 자린가?'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사마소군은 더 이상 망설이지도 않고 나무 의자에 다가가 자연스럽게 걸터앉았다. 그의 그러한 모습은 이제 십이 세에 불과한 소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여유롭고 침착한 것이었다. 한숨을 돌리고 새삼 태사의 쪽을 자세히 올려다보니 태사의에 파 묻힌 몸은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서리가 내린 듯 새하얀 머리칼이 조금 보였다. '부주가 틀림없다. 그런데 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담?' 사마소군은 부주의 진면목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참 고 기다리기로 했다. 부주가 자신을 부른 이상, 분명히 무슨 말인가 할 것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과는 달리 아무리 기다려도 태사의 쪽에서 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사마소군은 초조함이나 긴장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마음이 평온해져서 나중에는 지루함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는 따분한 표정으로 자세를 이리저리 최대한 편안하게 잡아 보 면서 생각을 굴렸다.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군. 이럴 때는 잠이라도 오면 좋을 텐 데…….' 언뜻 스쳐 간 생각이었지만 스스로도 엉뚱하게 느껴졌다. 우습게도 그는 방금 전 자신이 이 곳에 들어오면서 얼마나 놀랐는 가 하는 사실 따위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떤 위급한 상황이나 충격에도 금세 적응하고 평정을 되찾는 것 은 그의 천성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러한 선천적 대범함은 근래 몇 달 간 어려운 일을 겪는 사이, 그를 점차 다르게 성장시키고 있었다. 그렇다. 사마소군은 단순히 천재라는 찬사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몇 가지 특징들을 더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특징들은 어릴 때부터 그 나이 또래를 훨씬 상회하 는 낙천적 기질과 유합되어서 종종 주위 사람들을 당황시키곤 했 던 것이다. 특히 그의 해학적 기질은 이미 여섯 살 때부터 일가견 을 이루었을 정도다. 오죽하면 선유도의 섬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소노야(少老爺), 즉 애늙은이라는 애칭으로 불렀겠는가? 비록 선유도의 엄청난 혈겁(血劫)을 직접 체험하다시피 한 뒤, 그 러한 기질이 쓰라린 아픔에 눌려 없어진 듯했으나 타고난 천성은 지워지지가 않는 법인가 보다. 요즘 들어 그러한 성품들은 하나 둘 되살아남은 물론, 전에는 찾 아볼 수 없었던 숙성함마저 풍기고 있는 것이다. "……." 침묵은 길고 길었다. 태사의의 부주는 어쩌면 사마소군이 이 자리 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겨 들었다. 떠오르는 생각 중에 유난히 그를 지배한 것은 석우생에 대한 추억 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내린 결론이지만 석우생은 분명 이 장한별부와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는 추측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들이 결코 풀릴 수가 없었다. '그래, 어쩌면 저 부주와 깊은 관계인지도 몰라.' 거기까지 사마소군이 생각을 굴렸을 때였다. "사마소군." 마침내 태사의 너머에서 침묵을 깨고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 신비로운 음성이 차분히 이어졌다. "나는 너에게 지금 하나의 옛날 이야기를 해 주려 한다." 사마소군은 흠칫 상념에서 깨어났다. "옛날 이야기라고… 했습니까?"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슬픈 이야기이며, 무서운 저주의 이야기 이다. 그리고 이제는 전설처럼 신비로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으나,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공포의 전설이기도 하다." "……!" 사마소군의 안색이 가볍게 굳어졌다. 총명한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매우 중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감 지할 수 있었다. 부주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부터 약 이백 년 전, 중원에는 한 가문(家門)이 있었다. 그 가문은 이렇다 할 만한 것을 내세울 게 없는 극히 평범한 가문이 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세상 사람들은 그 가문을 일컬어 죽음 의 가문, 혹은 저주의 가문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듣고 있던 사마소군은 왠지 섬뜩한 예감을 느꼈다. 그것은 흡사 인간이 절대 들어서는 안 되는 저주의 주문(呪文)을 엿듣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그런 말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 가문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결코 서른 살을 넘기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죽었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그 가문에 몹쓸 병이라도?" "몹쓸 병이라……." 부주는 탄식처럼 중얼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오히려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무 병도 아니었다. 단순히 천부적으로 타고난 체질 때문이었다." "체질? 무슨 체질이길래 모두가 서른 살을 못 넘기고 죽는단 말입 니까?" 사마소군은 놀라 물었다. 부주는 깊은 탄식을 흘려 냈다. "바로 그것이 숨겨진 거대한 비밀이다. 그 비밀을 모르는 세상 사 람들은 그 가문을 손가락질하고 냉대하며 무슨 짐승을 대하듯 멸 시했다. 수명이 짧은 건 짐승의 특징이라고들 했다. 아무도 그 가 문과는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가문의 후손들 은 사실 짐승보다는 신(神)에 더 가까웠다는 것을. 본래 그 가문 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무섭도록 뛰어난 두뇌를 소유했 다.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무엇이든 스스로 깨우쳐 버리는 것 이다. 거기다가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인체의 모 든 감각이 발달했다. 듣고 싶지 않아도 십 장 이내의 벌레가 기어 가는 소리도 똑똑히 들을 수 있음은 물론, 보고 싶지 않아도 수십 장 떨어진 곳의 나무 위의 벌레가 몇 개의 발을 지녔는지 식별되 며, 깨닫고 싶지 않아도 일단 손끝만 스치면 그 물체의 성질이나 특성 등이 자연스럽게 판별될 정도다." 여기까지 들은 사마소군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어찌 사람으로서 그렇게까지 엄청난 능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인 가?' 그야말로 황당하게 느껴지는 말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저로선 잘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만약 그 렇다면 그건 하늘의 축복을 받은 가문이랄 수 있는데, 어찌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다 죽는단 말입니까?" "당연한 결과다. 보통 사람들이 수십 년에 걸쳐 배워야 할 것을 불과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모두 머릿속에 담게 되고, 보통 사람이 자야 할 시간에도 그 가문 사람들의 귀에는 옆집 사람의 코 고는 소리까지 들어야만 한다. 아무리 잊어 버리려고 애쓰거나 듣지 않 으려고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보통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 게 밥을 먹을 때도 그 가문의 사람들은 손에 잡힌 젓가락이 무슨 나무로 만들어진 것인지, 심지어 그 나무의 특성이며 평균 수명, 어떤 기후에서 잘 자라는가에 대해서까지 생각을 해야 한다." 부주는 무거운 탄식을 흘려 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마소군, 만약 네가 그 같은 경우라면 어떡하겠느냐?" "……!" 사마소군은 순간, 등줄기에 전율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먹어야 할 때도 마음 놓고 먹지 못하고, 자야 할 때도 마음 놓고 잘 수 없으며, 항상 무엇인가 초조하고 불안하게 생각을 지속해야 만 한다. 태어난 후 죽을 때까지 단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다. 잊고자 하면 더욱 생생하게 모든 생각이 떠오른다. 아아, 차라리 죽을 때까지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고 계속 중노동을 하는 게 낫겠군!' 사마소군은 망연해진 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부주의 말이 다시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렇다. 이것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으로선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참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그 가문의 사람들은 누구나 스무 살만 되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채 서른이 되기도 전에 호호백발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보다 수십 년을 앞당겨 살아가는데서 오는 일종의 조로현상(早老現狀)이지." "그렇… 군요." 사마소군은 신음처럼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주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말이 없었다. 괴괴한 정적이 장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부주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일 다경쯤 흐른 뒤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 가문의 사람들은 숫자가 줄어 갔다. 아무도 그 가문의 사람들과는 혼인을 하려고 하지 않아, 태어나는 후손은 없고 죽어 가는 사람들만 늘어나니 당연한 결과였지. 그런데… …." 부주의 입에서 계속 흘러 나오는 비사(秘事)는 아래와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가문의 사람들은 우연찮게 천색(天色) 을 살피던 중 하나의 놀라운 천기(天機)를 발견했다. 그것은 장차 이 땅 위 천하의 동, 서, 남, 북, 네 곳에서 엄청난 혈풍이 몰아칠 조짐이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 최초의 징후가 바로 그들 가문의 후손 중 한 명에게서 비롯될 거라는 점이었다. 본래 심성이 착하여 절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못하는 그 가문의 사람들은 크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마침내 그들은 하나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모두 함께 중원땅, 다시 말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완 전히 격리된 곳으로 이주한 후 최후의 한 사람마저도 그 곳에서 벗어나지 말자는 것이었다. 바로 최초의 징후만 미연에 없앤다면 다가올 혈겁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슬픈 운명을 지닌 착한 사람들의 가문, 그들은 드디어 정든 고향 을 등에 지고 정착지를 찾아 천하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가문의 사람들은 숫자가 더욱 줄어 불과 삼십 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그들은 천산(天山)의 애비사봉(哀悲斯峯：지 금의 히말라야) 근처의 계곡에 있는 하나의 마을을 발견했다. 그 마을은 너무도 황폐해서 마치 유령의 마을을 연상케 하는 곳이 었다.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죽음의 마을. 그러나 그 곳은 바로 그들 가문의 사람들이 찾아 헤맸던 장소였 다. 그들은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하며 그 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오랜 여행은 석씨 가문(石氏家門)의 지친 방랑길을 일단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석씨 가문? 그 가문은 본래 석씨 성을 지니고 있었나 보군요?" 사마소군은 부주의 이야기에 깊숙이 몰입해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떼었다. 부주의 그 신비로운 음성이 차분하게 이어졌다. "그렇다. 어느 날 사람들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건 그 마을이 그 당시로부터 오백 년 전에 존재했던 마교(魔敎)의 본거지였다는 가공할 사실이었다." "마교!" 순간,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이처럼 크게 놀라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마교(魔敎). 무림에 관해서라면 아는 게 전무(全無)한 그였지만, 이 이름에 대 한 기록만은 언젠가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다. 한때는 교도(敎徒)의 숫자만 해도 물경 이백만 명을 넘었다는 지 상최고의 종교이며, 그 사악한 교리(敎理)는 말 그대로 지옥의 율 법 그 자체였다는 마교! 그 마교를 발본색원 뿌리째 뽑기 위하여 황실군부와 정파무림인들 이 힘을 합해야 했고, 무려 오십만의 정예고수를 선발하고서도 장 장 삼 년에 걸친 대혈전을 치르고서야 간신히 그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때 당시 마교는 전멸되었다고 그 책자는 기록하고 있었 다. "그럼 그 마을에 그 때까지도 마교의 잔당들이 살아 있었단 말입 니까?" 사마소군의 황급한 물음이었다. 부주의 대답이 곧 들려 왔다. "살아 있는 잔당들은 없었다. 중원에서 도망쳐 달아난 몇몇 인물 들이 살다가 죽은 흔적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아……." 사마소군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 때 부주의 음성이 묵직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죽은 게 아니었다." "그럼……?" "그들은 그 마을에 마교 최대의 혼세마공(混世魔功)을 한 동굴벽 에 남겨 두었던 것이다. 훗날 누군가 그 마공을 익혀 마교를 중흥 해 주길 당부하는 글과 함께." "지독한……." 사마소군은 가볍게 진저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끈질기고 간악한 집념이 아닌가? "석씨 가문의 사람들은 비로소 장소를 잘못 찾아왔다는 걸 알고 후회를 했으나, 애써 마교에 대한 생각을 떨치고 살아갔다. 그 깊 숙한 천험의 절지마을에서 다시 떠나갈 여력이 그들에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는가? 그것이 끔찍한 불행의 시작이었 음을……." 부주의 입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엄청난 비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최초 몇 년 간은 아무런 탈도 없었다. 마교의 무공이 기록된 동굴은 절대 금역화(禁域化)하여 어느 누구 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다시 몇 년이 지났을 때 결국 뜻하지 않았던 사건이 터지 고 말았다. 어느 누군가가 아무도 몰래 수 년 간이나 그 마교의 사악한 무공을 배워 왔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문제의 인물은 그 때 겨우 십여 세밖에 되지 않았던 석천능(石天 能)이라는 소년이었다. 석씨 가문의 사람들은 크게 대노하여 소년 석천능을 추궁했다. 그러자 소년 석천능은 겁에 질려 대꾸했다. － 사실 처음부터 배우려고 했던 건 아니예요. 단순히 호기심으로 장난처럼 몇 번 흉내를 내 보았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배우다 보 니 나 자신도 모르게 흥미가 생겼어요. 자꾸 깊숙이 빠져드는 걸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빠져 나올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한 가지 놀라운 것을 발견했어요. 그것 은 그 마공을 익히기 시작하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를 괴롭혔던 예민한 감각이 조금씩 둔화되어 간다는 사실이에요. 그걸 알면서 부터 나는 더욱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이젠 잠도 편히 자고,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을 정도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나는 이제 서른 살이 넘어도 죽지 않게 되었단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비로소 석천능이 열 살이 넘어가고 있는데도 남들에게서 생기는 조로현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때 겁에 질려 있던 석천능의 얼굴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사악한 냉소였다. 사람들은 그 때에야 석천능이 가문의 법규를 어기고서도 전혀 죄 책감을 느끼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석천능의 표정에서 이미 멸망한 마교의 얼굴을 보았다. 섬뜩한 마기가 씌어져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이 그들은 휩쓸었다. 그토록 염려해 왔던 끔찍한 혈겁의 최초 징후가 마침내 현실로 나 타나고 있지 않은가? 그 날 밤 사람들은 숙의 끝에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석천능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알아차 린 석천능이 미리 도주를 해 버린 것이었다. 그는 단지 한 장의 서찰을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서찰에는 가히 끔찍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 다. <나는 죽지 않는다. 지금 내 몸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이 용솟음쳐 오르고 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우리 석씨 가문에 침을 뱉고 손가락질하면서 짐승처럼 냉대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석가(石家)는 결코 짐승이 아니었다는 것을 가르 쳐 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방법으로……!> 그것은 정녕 무서운 저주였다. 사람들은 아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책을 서둘러 강구해야만 했 다. 그들의 한결같은 의견은 우리들 스스로 뿌린 씨앗이니만큼 반드시 스스로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그들은 이제껏 가장 엄격하게 지켜 왔던 가문의 계율 제일계(第一戒), 다시 말해 무예수련의 금지조항을 깨고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석씨 가문이 무엇 때문에 무예수련을 가장 엄격히 금지해 왔단 말입니까?" 듣고 있던 사마소군이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부주는 나직이 탄식하더니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자신의 생명이 시한부임을 알고 있을 때 사람이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더구나 석씨 가문의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초인적인 감각과 두뇌를 지녔다. 한 번 본 것은 즉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음은 물론 하나에서 열을, 열에서는 백이 아 니라 천이라도 창조해 내는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 "다행히 그 가문의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심성이 착해 그런 금지를 시켰길래 망정이지, 만약 그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무예를 익히고 무림에 뛰어들었다면… 장담하건대 오늘의 무림은 아직까지도 그 가문의 통치 아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마소군은 그제야 확연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그 가문의 남은 사람들은 피땀을 흘리며 무예수업에 몰두했다. 비록 석천능처럼 마교의 무공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가르쳐 주는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훌륭하게 해 나갈 수 있었다. 스스 로 보고 깨우치는 그들에게 있어 갖가지 동물은 훌륭한 권격무예 의 스승이었고, 흐르는 물이나 굴러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서도 그 들은 놀라운 신법(身法)을 배우곤 했다." 부주의 이야기는 보통 사람으로선 믿겨지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대단하군! 그러나 그 정도로 과연 마교의 무공을 제압할 수 있을 지 의문이구나.' 사마소군은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도 불안한 감을 떨쳐 버릴 수 없 었다. 부주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세월을 흘렀다. 석씨 가문의 사람들은 짧은 수명으 로 인해 하나 둘씩 죽어 갔다. 그러나 그 숫자가 십여 명으로 줄 어들 때까지도 도주한 석천능의 소식은 들려 올 줄을 몰랐다. 비 로소 사람들은 석천능의 흉계를 깨닫게 되었다." "아… 석천능은 바로 그들이 머지않아 모두 죽을 걸 알고 기다리 기로 한 것이군요?" 사마소군이 신음 같은 일성을 흘려 냈다. 부주는 바로 맞추었다는 듯 묵직한 탄식성과 함께 말했다. "네 짐작이 맞았다.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밖으로 나가 여인들을 납치해 오기에 이르렀다. 석천능의 뜻대로 대(代)가 끊겨져 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비록 정당한 방법은 아니 었지만 대의를 위해선 불가피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마소군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주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어딘가 흥분이 깃들인 음성으로 천천 히 입을 떼었다. "석천능은 그 마을을 떠난 지 삼십오 년이 되는 해, 마침내 행동 을 개시했다." "……!" 사마소군은 일순 자신도 모르게 바싹 긴장했다. 어쩌면 전설 같은 한 가문의 이야기. 그러나 결코 평범할 수 없었 던 한 신비로운 이야기는 그를 사로잡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는 부주의 긴 설명을 들으면서 이 장한별부가 그 석씨 가문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부주는 바로 그 석씨 가문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사마소군은 내심 그 같은 심중을 단단히 굳히며 부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찌 된 판인지 부주는 갑자기 침묵을 지키며 말이 없었 다. 정적… 질식할 듯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사마소군은 한참을 기다려도 부주가 아무 말도 없자, 그만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겁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 …." 말하다 말고 돌연 그는 입을 다물었다. 돌려져 있던 태사의가 그 순간 이쪽으로 서서히 회전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 덩달아 이제껏 용모를 알아볼 수 없었던 부주의 모습이 조금씩 나 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태사의가 완전히 돌려지고 부주의 모습이 일목요 연하게 드러났을 때,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 다. 충격! 그것은 마치 한 줄기 벼락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꿰뚫고 지나가 는 듯한 느낌이었다. ━━━━━━━━━━━━━━━━━━━━━━━━━━━━━━━━━━━ ( 신검성 제 1 권 끝 ) 신 검 성 제 2 권 제 16 장 무서운 음모(陰謀) 제 17 장 천의조화신력(天衣造化神力) 제 18 장 당돌한 소녀(少女) 제 19 장 전화위복(轉禍爲福) 제 20 장 연속살인(連續殺人) 제 21 장 풍운(風雲)의 낙양성(洛陽城) 제 22 장 소리 없는 바람 제 23 장 낭천(狼天)과 유령부인(幽靈婦人) 제 24 장 추악(醜惡)한 거래 제 25 장 이중음모(二重陰謀) ━━━━━━━━━━━━━━━━━━━━━━━━━━━━━━━━━━━ 제 16 장 무서운 음모(陰謀) ━━━━━━━━━━━━━━━━━━━━━━━━━━━━━━━━━━━ 아름다움(美). 흔히 사람들은 그것을 논할 때 대자연의 별, 달, 꽃 등에 비유하 기를 즐겨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처럼 아름답거나 그 같은 향 기를 지녔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사마소군의 앞에 빛무리를 발하듯 드러난 이 얼굴 은 도대체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하기가 불가능했다. 그 얼굴에 담겨진 아름다움은 그토록 신비로웠고 특이했던 것이 다. 뭐랄까? 그 아름다움은 고귀한 성스러움이었고, 따뜻한 인자로움 인가 하면 어둠의 고요함, 빛의 찬란함이기도 했다. 나이는 대략 이십칠팔 세 가량 되었을까? 일신에는 눈처럼 흰 백의(白衣)를 걸쳤는데, 옷자락 밖으로 드러 난 살결은 그보다 더 희었다. 어찌나 희디흰지 저게 과연 사람의 손인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게다가 관옥청상(冠玉淸爽)에 우뚝 솟은 코, 귀밑까지 뻗어 오른 짙은 검미(劍眉), 신비로운 광채가 일렁이는 두 눈하며 거문고의 현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린 입술은 또 어떤가? 그야말로 하늘 아래 이런 미장부는 다시 없으리라.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단아하게 틀어 올린 머릿결이 기이하게도 눈처럼 희디흰 은발(銀髮)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머리색깔은 어찌 보면 그를 더욱 신비스럽게 부각 시켜 주는 듯했다. 그 때였다. 미청년이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물었다. "너는 내 얼굴에서 느낀 점이 없느냐?" 사마소군은 그제야 흠칫 정신을 차리고 안색을 가볍게 붉혔다. "귀하는 분명 사내인데도 여인보다도 더 아름답습니다. 단지 흠이 라면 젊은 나이인데도 그 하얀 머리 빛깔 때문에……." 말을 하다 말고 그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한 가 지 말이 그의 뇌리를 벼락같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 늙지도 젊지도 않고, 사내도 계집도 아닌……. 사마소군은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부주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혹시……?" "그래, 바로 나다." 부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순간, 사마소군은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 다. 방금 전 부주의 입에서 흘러 나온 음성,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달 리 너무나도 귀에 익은 음성이었던 것이다. 사마소군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석에라도 이끌리는 듯 부 주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났다. 시선과 시선이 뒤엉킨 가운데 억겁인지 일순인지 모를 시간이 흘 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의 입가에 가 느다란 미소가 똑같이 피어 올랐다. "정말… 확실한 겁니까?" 사마소군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부주는 천천히, 그러나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너는 결국 이 우형(愚兄)의 얼굴을 보고야 마는구나." "……!" 사마소군의 눈꼬리가 파르르 잔떨림을 일으켰다. 그 눈가에 곧 이 슬 같은 것이 반짝 소리 없이 맺혔다. 그렇다. 더 이상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한들 사마소군에게 이토록 부드러운 음성 으로 자신을 우형(愚兄)이라고 말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으니 까. 혈풍향 석우생! 바로 그였다. 늘 죽립 속에 가려져 있어 보지 못했던 얼굴. 그토록 보고 싶어했 어도 무슨 영문인지 완강하게 숨겨 버리던 얼굴이었으며, 의형제 의 맹약을 하면서도 볼 수가 없었던 얼굴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사마소군을 휩쓸었다. '저토록 아름다운 얼굴일 줄이야!' 생각 같아선 당장 뛰어가 힘껏 그를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치미는 반가움의 격정을 참아내며 다시 그 자 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너무 짓궂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바로 데리고 왔으면 될 것을 가지고 괜히 어려운 절차를 밟게 했 다고 말하는 게로구나." "그렇습니다." "녀석, 내 어찌 까닭 없이 너를 고생시키려 했겠느냐?" 석우생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본래 나는 이 장한별부를 근거지로 오래 전부터 한 가지 일을 추 진해 오고 있었다. 그 일은 얼마 전 네가 본 여섯 아이들과 관련 있는 것이다." "나는 진작부터 그 일에도 의혹을 느끼고 있던 참입니다." "녀석, 우선 너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구나. 나는 선유도에서 중원으로 돌아온 후 네녀석과 같이 다니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그 이유는 네가 이 우형이 필요로 하는 기재 중의 기재였기 때문 이다." "그 말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마소군은 의혹의 눈빛을 발했다. 석우생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의 일에 너를 끌어들이는 것은 비단 이 우형에게뿐만이 아니라 너에게도 막중한 중대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한번 뛰어들면 절대 빠져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피비린 내 나는 무림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려야만 한다." "형님의 표현은 너무 비관적이군요. 어차피 저는 무림인이 될 운 명인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네 말은 틀렸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인생이 있듯, 설사 칼 에 피를 묻히는 같은 무림인이라 해도 그 직분이나 인과(因果)에 따라서 천양지차의 차이를 지니는 법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 녀석이 좋아진 이후, 네가 가문의 혈채만 해결되면 이 무림을 떠 나서 살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석우생은 잠시 사이를 두고 특유의 나직하면서도 위엄 있는 어조 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도 너는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으니, 내 심정 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 고, 너에 관해 한 가지 도박을 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장음교의 주막을 떠난 후 내가 돌아가지 않을 경우 어쩌면 네녀석이 스스로 날 찾아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듣고 있던 사마소군이 가벼운 탄성을 발했다. "그렇다면 형님은……?" "맞았다. 이 우형은 네가 이 곳의 나를 스스로 찾아오면 맞아들이 되, 만약 찾아오지 못하면 그것으로 우리의 인연을 끝내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너에게 검법을 전수한 것이나 여불해, 광치화상, 소 수귀랑 등으로 하여금 복연을 얻도록 한 것은 바로 후자의 경우를 위해서였다. 혼자서 험한 강호에 뛰어들려면 자신을 지킬 힘 정도 는 있어야 되니까……." 석우생은 말꼬리를 흐리며 사마소군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 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네녀석은 결국 이 곳에 나타나고 말았다." 사마소군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어 버렸다. 언제나처럼 맑고 순수함이 넘치는 웃음이었다. 그렇다. 사마소군은 이제 비로소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생각할수록 자신의 장래를 위해 빈틈없이 안배를 해 주려 했 던 석우생에 대해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그런데 내게 신단을 주고 여러 무공을 전수해 준 세 분은 형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사마소군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석우생은 담담히 미소지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몇 년 전, 나는 그들이 가장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을 때 도와 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들은 그 보답으로 한 가지 약속을 했는 데, 그것은 언제든지 내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조건 한 가지를 들 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가장 아끼는 것들을 내게 주도록 만들었군 요." "그렇다. 하지만 너는 그리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 우 형은 그들과 친분을 쌓아 온 탓에 지금은 나이나 배분을 가리지 않고 서로 친구처럼 지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친구?' 사마소군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새삼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몰골들을 뇌리에 떠올리 며 미소지었다. 그 때 석우생이 깊숙한 시선으로 사마소군을 직시하더니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소군, 나는 네 가문을 멸문케 한 흉수들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 왔었다. 그리고 바로 이틀 전 입수된 정보들을 통해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 사마소군은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석유생이 한 자 한 자 자르듯 힘있게 말을 이었다. "그것은 네 가문을 멸망케 한 흉수와 이 우형이 상대하려는 조직 이 어쩌면 동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뭐라고요?"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시 잔잔했던 그의 마음이 재차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 했다. "제 가문의 흉수를 알아 냈단 말입니까?" "그렇게 흥분할 건 없다.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네가 오 년 동안 연공을 하는 동안에는 어떤 실마리가 잡 힐 것이다." 석우생의 이 한 마디는 사마소군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오 년? 형님은 정말 제가 오 년 동안이나 이 곳에서 연공하기를 바라십니까?" "소군, 분명히 말해 두지만 너는 강호의 노련한 흉마들에 비하면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 서둘러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 "언젠가 너는 주막에서 이 형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형 은 강호상에서 그 어떤 신비세력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 조직은 매우 방대할 것이라고. 네 짐작은 거의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러나 불행하게도 이 형과 네가 상대해야 할 조직은 그보다 몇십 배 더 방대하고 강하다. 그 거대한 세력에 비하면 이 우형의 조직 은 한마디로 조족지혈이라 할 수 있다." "그, 그럴 리가?" 사마소군은 경악성과 함께 재차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났다. 그가 받은 충격은 그만큼 적지 않았다. 이 장한별부에 들어와서 느낀 석우생의 힘만 해도 얼마나 대단했 던가? 더욱이 석우생은 천하 각지에 자신의 세력을 심어 놓았을 게 분명 한 터였다. 대충 짐작해도 그러한 석우생의 세력을 당해낼 외세(外勢)는 도무 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형님의 세력은 거의 천하무적일 게 틀림없어. 그런데도 조 족지혈이라고?' 순간이다. 그의 뇌리에 불길한 저주처럼 하나의 가공할 이름이 번 뜩 떠올랐다. "마교!" "녀석, 너는 이제야 뭔가 감을 잡았나 보구나." "그렇다면 아까 형님께서 했던 석씨 가문의 이야기는……?" "그건 바로 내 가문의 이야기다. 나는 바로 석가의 마지막 후예 다." 석우생의 조용한 이 대답은 사마소군을 새로운 충격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럼 이 안에 가득한 저 관 속의 시신들은 바로 석씨 가문의 선 조들이었단 말인가?' 사마소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황망히 물었다. "형님은 아까 분명 석씨 가문이 천산 애비사봉에 살았다고 했지 않습니까?" "확실히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석천능의 사건이 있은 직후 선조님들은 곧장 이리로 이동하여 장한별부를 세운 것이다." "아… 원래 그랬었군요." 사마소군은 비로소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 다. "그런데 형님이 어찌 석가(石家)의 마지막 후예가 되었습니까? 여 인들을 데려다가 손(孫)을 이었는데도……?" "이백 년 전, 우리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몰살당하는 위기를 맞이 했었다. 그 때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았으며, 지금까지 단맥(單 脈)으로 대를 이어 온 끝에 이 우형이 태어나기에 이른 것이다." 석우생의 수려한 얼굴에 일순 어두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다그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몰살의 위기?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단 말입니까?" "……." 석우생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시선을 허 공에 둔 채 조용히 입을 떼었다. "소군, 너는 천형삼십육벌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천형삼십육벌? 아… 언젠가 아버님께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 백 년 전 중원무림을 온통 시산혈해의 지옥으로 만든 가공할 살인 마들이라고……." 사마소군은 대답하다 말고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럼 혹시……?' 그 때 석우생의 질문이 다시 그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너는 그들 천형삼십육벌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들었느냐?" "그래요. 정(正)과 사(邪), 할 것 없이 수만에 달하는 전 무림고 수가 힘을 모아 태행산에서 몰살시켰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들 알고 있다." 석우생의 입가에 형언할 수 없이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마소군은 어리둥절한 신색이 되었다. "그럼… 그게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이다. 그 날 태행산에서 천형삼십육벌은 단 한 명도 죽지 않 았다. 천형삼십육벌의 시체로 발견된 것들은 모두 가짜였다. 어처 구니없는 사실이지만 그 날 싸우다 죽은 인물들은 모두 천형삼십 육벌을 죽이려 한 정사대연합군의 고수들뿐이었다." 석우생의 이 한 마디는 실로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마소군은 자신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엄청난 비사(秘事)를 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런 어이없는 일이……?" "모든 것이 천형삼십육벌의 간악한 흉계였다. 그 날, 태행산 일대 는 칠흑같이 어두운데다 억수 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정사 대연합군은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못하고 결국 같은 편끼리 일대 혼전을 범하는 우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럼 천형삼십육벌은……?" "그들은 싸움을 붙여 놓고 그럴 듯한 자신들의 가짜 시체를 던져 놓은 다음, 다른 장소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맙소사!' 사마소군은 하도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신음하듯 말했다. "믿기 어렵군요. 제아무리 어둡고 폭우가 쏟아졌다고 해도 명색이 무림고수들인데, 아무렴 적과 우군도 구별 못했단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혼전(混戰)의 무서움이다. 더욱이 당시 정사대연합 군은 각기 복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뚜렷한 영도자도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 많은 고수들이 단 삼십육 인을 찾아 내 죽여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악조건을 다 갖춘 셈이지." "……!" "그 상태에서 수만 명이 일단 혼전을 벌이게 되면 그 때부터는 적 이고 아군이고 구분하지 못한 채 무조건 죽이게 될 수밖에 없다. 천형삼십육벌에 대한 공포심이 그런 실수를 더욱 부채질하고, 사 람들은 일종의 자기 보호본능 아래 죽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내서……." 석우생의 깊숙한 두 눈에서 음울한 빛이 물결쳤다. 사마소군은 가볍게 치를 떨었다. "그러나……."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안다. 천형삼십육벌의 간악한 흉계가 그처럼 성공한 데에는 하나의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정사대연합 군은 분명 같은 편이기는 했으나, 천형삼십육벌이 등장하기 전만 해도 서로 원수처럼 적대시하던 관계였다. 때문에 상당수가 그 혼 전을 틈타 숙적을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이 그 대참사 를 유발시킨 도화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그렇군요!" 사마소군은 망연한 신색으로 신음성을 발했다. 그는 정말 무림(武林)이란 세계가 얼마나 무섭고 피비린내 나는 곳인지 절감할 수 있었다. 이 험난한 땅 위에서 정의를 지키면서 살아가기란 과연 얼마나 어 려운 일인가? "결국… 천형삼십육벌을 죽인 사람들은 따로 있었군요?" "너는 벌써 짐작했구나. 그렇다. 천형삼십육벌을 제거한 것은 우 리 석씨 가문의 사람들이다. 그 일을 자세히 말하기 전에 먼저 알 아 둘 것이 있다." 석우생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비사(秘事) 들뿐이었다. 그는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어투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건 바로 천형삼십육벌이 천산 애비사봉에서 마교의 무공을 터 득하고 탈출한 석천능이 만들어 낸 살인마들이라는 점이다." "아……!" "이미 그 사실을 암암리에 조사해 낸 선조님들은 태행산의 참사가 있었던 날, 그 부근에서 천형삼십육벌과 함께 있는 석천능을 발견 했다. 가증스럽게도 석천능은 심성이 포악하고 극악무도한 중원인 들을 포섭해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어찌 됐든 당시 석천능은 자신 외에는 모두 수명이 다해 죽었을 것이라 여겼던 선 조들이 나타나자 몹시 당황했다. 더구나 그 가문의 사람들은 이미 석천능이 알고 있었던 나약함 대신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을 지니 고 있었으니, 놀라움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무후무한 대접전이 벌어졌다." 석우생의 깊숙한 눈에서 별빛처럼 은은한 광채가 발해졌다.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천형삼십육벌은 비록 무적천하를 구가하고 있었으나 초인이나 다 름없는 선조들의 감각무예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 살인마들을 죽이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문제는 마교절학을 익힌 석천능 이었다. 본래 마교의 절학도 무섭지만, 그의 손에 의해 펼쳐지자 몇십 배나 더 무서운 위력을 나타냈다. 공전절후의 대혈전은 무려 열흘 간이나 이어졌다." "……." "석천능은 이미 인간이 아닌 악마의 화신(化神)과도 같았다. 그러 나 그가 아무리 뛰어났다 해도 수적으로 워낙 열세였다. 결국은 양패구상… 그도 죽고, 선조들도 몰살했다. 단 한 명만을 제외하 고." 석우생의 고요하던 신색에 처음으로 격동의 빛이 선명하게 떠올랐 다. 사마소군은 그의 눈빛에서 너무도 뛰어났기 때문에 멸망해야만 했 던 한 가문의 진한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정적, 죽음 같은 정적이 잠시 장내에 흐른 뒤 석우생의 말이 고요 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 지옥 같은 싸움은 이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난 것 같지 않다. 당시 석천능은 죽어 가면서 말했다. 비록 지금 나는 죽지만 반드시 부활할 것이며, 그 때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석씨 성을 가진 사람의 심장에 가장 먼저 칼을 꽂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한 마디는 사마소군을 오리무중의 당혹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 분했다. 그는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곤혹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부활? 형님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까?" 석우생의 두 눈에 깊숙한 광채가 은은히 뻗어 나왔다. "물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공연한 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마교가 그랬듯이 석천능 역시 만약 의 사태에 대비해 최후의 안배를 해 놓았으리라는 추측이다." 순간, 사마소군은 등줄기에 전율 같은 것이 스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석천능의 화신(化神)이……?" "만약 네 추측대로라면 제이의 석천능은 이미 오래 전에 탄생되었 을 뿐 아니라, 그 능력은 과거의 석천능을 훨씬 능가할 것이다." "……!"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천재란 우리 석씨 가문에 존재하지 않는 다. 때문에 석천능이 남겨 놓은 안배가 얼마나 치밀하고 완벽하리 라는 건 결론도 명약관화한 것이 아니겠느냐?" "과연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군요!" 사마소군은 왠지 기가 질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내심으로 그런 가공할 능력을 지닌 제이의 석천능이 정말 탄 생했다면, 그를 막아낼 수 있는 인물은 천하에 오직 석우생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이어 그의 뇌리를 번뜩 스친 하나의 영감이 있었다. "가만, 그럼 혹시 선유도의 억겁을 일으킨 흉수도 아까 형님이 말 한 대로라면 제이의 석천능……?" 사마소군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창백해진 안색으로 석우생을 뚫어 지게 쳐다보았다. 석우생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반드시 그일 것이라고 속단하지는 말아라. 그러나 너는 만약을 위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애매모호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 의 표정에서 그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마소군은 갑자기 온몸의 피가 무섭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정면으로 석우생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외람된 질문 같지만, 형님의 능력은 그 보이지 않는 흉수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충 내게 주어진 승산은 이 할 정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이상은 장담할 수 없는 게 냉혹한 현실이 다. 그러나 네가 나의 기대대로만 따라 준다면 승산은 훨씬 높아 질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사마소군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을 이었다. "형님이 그러할진대 저라고 해서 그를 무슨 수로 물리칠 수 있겠 습니까?" "소군." 석우생의 눈에 유현한 광채가 물결처럼 일렁였다. "석씨 가문의 사람들이 비록 통천의 두뇌와 능력을 지녔다고는 하 지만, 생명의 조로현상에서 오는 체질적 제약 때문에 그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석씨 가문의 사람들 이상의 잠 재력을 보유하고도 더욱 강인한 천부의 체질을 지닌 초귀재(超鬼 才)도 존재한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초귀재를 찾고 있었 으며 결국은 성공하고야 말았다. 그건 바로 너다." 이 설명이 끝나자 듣고 있던 사마소군은 그만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무슨 초귀재란 말입니까? 나는 이제껏 능글맞고 장난을 잘 친다는 소리는 무수히 들었어도 똑똑하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 은 적이 없습니다. 형님은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사마소군의 이 말은 모두가 사실이었다. 그의 부친 사마장천을 비롯, 선유도의 그 어떤 사람도 그를 특별 하다고 칭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우생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리며 오히려 사마소군 에게 되물었다. "너는 방금 한 번도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오히려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 보통의 아이들은 설령 바보라 해도 부모가 한두 번의 칭찬은 해 주게 마련이다." "……!" 사마소군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화를 일으켰다. 석우생은 위엄이 담긴 어투로 말을 이었다. "너의 부친은 일부러 네 자신이 평범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그 건 그분께서 매우 현명하시기 때문이다. 원래 천재(天才)들이란 누구나 교만해지기 쉽다. 보통의 인간들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천재들에게 있어 교만은 독약과도 같다. 타고난 천부적 능력과 재 질을 쇠퇴시키는 독약." 석우생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잔잔한 눈빛으로 사마소군을 바라보 았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너는 매우 희귀한 천재였다. 무인고도에서 태어나 갓난아이 시절부터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천재. 나는 석씨 가문의 피를 지닌 몸으로 너를 처 음 보는 순간, 한눈에 네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알겠느냐? 좋 든 싫든 간에 너는 이 우형을 능가하는 잠재력을 지녔다." '어이구!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사마소군은 그만 어리벙벙해지고 말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런 와중에서도 매우 기분이 흐뭇해진다는 점이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그토록 훌륭한 인간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 었으므로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하마터면 크게 웃어 버릴 뻔했다. 그러나 그는 석우생의 표정이 너무나 엄숙하고 진지한 것을 보고 그 충동을 끌꺽 삼켜 버렸다.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나는 형님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 다!' 내심 그렇게 염두를 굴린 사마소군은 곧 힘있는 어투로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나는 지금부터 스스로를 천재라고 믿어 버리겠습 니다. 아울러 형님이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제 한몸을 바쳐 도와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 석우생의 엄숙하던 얼굴에는 일순 부드럽게 화기가 번져 올랐다. 그는 조용히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켜 사마소군에게로 걸어 내려왔 다. 이어 그는 사마소군의 손을 으스러져라 굳게 잡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얼음처럼 투명하고 차갑게 느껴지던 그 손은 의 외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사마소군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소군, 고맙다. 방금 너는 이 우형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말을 해 주었다." "형님……." "너는 이미 이 장한별부에서 화옥이나 냉자기 같은 여섯 명의 친 구들을 만났을 것이다. 네가 그들과 힘을 합쳐 나를 도와 준다면, 이 우형은 거대한 적과의 싸움에서 사 할 이상의 승산을 점할 수 있다." "아니, 십 할입니다." 사마소군이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석우생도 따라 환하게 미소지었다. "녀석……!" 그러나 착각이었을까? 사마소군은 미소짓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뭔가 견딜 수 없는 아픔 같은 것을 엿보았다. 이 시대 제일의 신비인이자 환상의 살수라는 혈풍향의 이름만으로 도 더 이상 위대해질 수 없는 위대한 인간. 그러나 그 내면 속은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독으로 얼룩져 있는 것일까? '뭔가 아직도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어.' 순간적으로 사마소군의 뇌리를 번뜩 스쳐간 생각이었다. 그러나 석우생은 그러한 사마소군의 짐작이 기우라는 것을 증명이 라도 하듯 더욱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깥쪽을 향해 말하고 있었 다. "한비, 있느냐?" 그러자 허공 어디에선가 즉시 사마소군을 이 곳으로 안내해 왔던 능한비의 음성이 들려 왔다. "부름 계시오이까?" "술상을 준비하라. 그리고 전 중원의 형제들에게 전하라. 장한별 부의 소부주(少府主)가 탄생하였음을." 이 느닷없는 한 마디는 사마소군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황급히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능한비의 음성이 먼저 장내 에 울려 왔다. "알겠습니다." "아, 아니… 자, 잠깐!" 사마소군이 허겁지겁 석우생에게 따져 물었다. "가, 갑자기 소부주(訴府主)가 웬 말입니까?" "그럼 이 형님을 밀쳐 내고 부주 자리를 차지해야 만족하겠단 말 이냐? 으핫핫……!" 석우생은 껄껄 낭랑한 대소를 터뜨렸다. 사마소군은 망연해진 채 그런 그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만 있었다. ━━━━━━━━━━━━━━━━━━━━━━━━━━━━━━━━━━━ 제 17 장 천의조화신력(天衣造化神力) ━━━━━━━━━━━━━━━━━━━━━━━━━━━━━━━━━━━ 방(房), 이 방은 분명히 석실인데도 전혀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실내에 배치된 가구며 집기 등은 온통 푸른 광택이 감도는 대나무 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벽에 걸린 그림마저 도 저 유명한 당대(唐代)의 화성 왕숙경이 그린 월화청죽도(月花 靑竹圖)였다. 때문에 이 방에 있노라면 마치 푸른 대나무숲에 들어온 듯한 착각 을 일으키기 십상이었다. 별달리 특별한 장식이나 꾸밈이 없는데도 고아한 운치를 느끼게 하는 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아니, 오히려 값비싼 장식이 나 귀한 것을 갖다 놓으면 이러한 운치를 해칠 게 분명했다. 방 안 가운데에는 푸른 대나무 탁자가 놓여져 있었다. 탁자 양쪽에 마련된 두 의자에는 지금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 다. 바로 석우생과 사마소군이었다. 석우생은 손에 조그만 밀랍인형을 들고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이 밀랍인형을 구석구석 뚫어지게 살피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몇 개의 밀랍인형이 더 놓여져 있었다. 어딘가 괴기스런 기운을 풍기는 나한(裸漢)의 밀랍인형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사마소군이 백독신군 염백추에게서 받은 이 상한 물건들이었다. 이 때 한참 동안 밀랍인형에 그려진 선이며 점등을 짚어 보던 석 우생이 나직한 신음성을 흘려 냈다. "그렇군. 그럴지도 모른다!" "뭔가 알아 내셨습니까?" 사마소군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석우생은 대답 대신 밀랍인형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자 돌연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석우생의 손이 서서히 불그스름한 광채를 발하며 하얀 백기를 모 락모락 발산하는 게 아닌가? "어……?" 사마소군이 놀랍고 신기해 커다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 간이었다. 시뻘겋게 변한 석우생의 손에서 용광로처럼 무시무시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열기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마소군에게 피부가 후끈거리는 느낌을 가져다 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세상에, 어쩌면 사람의 손이……?' 사마소군은 아직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공(內功)의 화후가 입신 지경(入神之境)에 이르지 않고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극상승의 양수공(陽水功)이 지금 석우생에 의해 전개되고 있음을. 사마소군이 마름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이었다. 밀랍인형이 흡사 촛농처럼 석우생의 손아귀에서 조금씩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밀랍이 다 녹아 내리자, 그 속에서 또 다른 나무인형이 나타났다. 역시 사람의 형상을 완벽하게 갖춘 그 나무인형은 원래의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원래의 것은 어딘가 음산하고 섬뜩하게 느껴지는 반면, 이 새로운 형상은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 모습이라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 도였다. '아……!' 석우생과 함께 사마소군이 유심히 살펴보니 나무인형의 표면에도 역시 무수한 점(點)과 선(線)들이 그려져 있었다. '알고 보니 밀랍인형 속에는 같은 인형이 또 들어 있었구나. 한 데, 저 나무인형은 무엇 하는 것일까?' 사마소군이 의아하여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석우생이 약간 흥분한 기색으로 나머지 밀랍인형들을 차례로 모두 녹여 갔다. 새롭게 나타나는 나무인형들은 모두가 각기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것은 기쁘게 웃고 있는가 하면, 금세라도 눈물을 떨구어 낼 듯 울상인 것도 있었으며, 크게 화난 듯 성난 얼굴과 부처처럼 인 자스런 얼굴, 아예 표정이 없는 무심한 얼굴도 끼어 있었다. 석우생은 유현한 광채가 일렁이는 시선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 펴보더니 문득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그랬군." 벌써부터 그의 설명을 기다리고 있던 사마소군이 마침내 참지 못 하고 물었다. "뭐가 그렇단 말입니까?" 석우생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소군, 네가 그 날 백독신군을 막아선 것은 비록 위험천만한 일이 었지만 그로 인해 너는 엄청난 절세광연(絶世廣緣)을 만났다." "속태우지 말고 어서 시원스럽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 인형의 목에 그려진 그림들은 일종의 내공심법(內功心法) 구 결과 운기법을 나타낸 것이다." 사마소군은 흠칫 놀랐다. "내공? 그럼 저 그림이 무공구결이란 말입니까?" "단순한 내공이 아니다. 나는 감히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내공심 법을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 나도 이토록 심오하고 정심박대 한 내공은 처음이다." "아……!" 사마소군은 경이 어린 눈으로 탁자 위의 인형들을 응시했다. 석우생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불가(佛家)의 정대함과 도가(道家)의 현묘함, 그리고 유문(儒門) 의 심오함이 최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개의 경우 내공심법이 란 뚜렷한 이치가 없으면 사악한 기운을 지녀 십중팔구 주화입마 (走火入魔)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내공심법은 세 가지 이치가 하나로 혼합되었으면서도 전혀 어지럽지 않고 더욱 선명한 색깔을 지니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가히 내가공 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대단합니까?" 사마소군은 석우생이 웬만해서는 저처럼 극구 찬사를 늘어놓지 않 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석우생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더니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천하에 뉘가 있어 저 같은 절세의 내공심법을 창안해 낼 수 있었을까? 저런 심법은 단지 사람의 능 력만으로는 얻기가 힘들다.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조화일진대… …." 고개를 내흔들며 깊은 상념에 잠기기를 얼마 만일까? 문득 석우생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나 무인형들을 직시했다. 그의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정광이 뻗어 나왔다. "혹시, 이게 바로……?" 석우생의 그린 듯 수려한 얼굴에 보기 드물게 어떤 흥분의 빛이 떠올랐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과거 천형삼십육벌의 혈난시대에 비밀리 새로운 절대십천예(絶對十天藝)라는 무공을 창안하고도 비 운으로 인해 죽어 간 정사 이십오대 고수. 이건 그들과 관련이 있 을 것이다.' 그러나 석우생은 곧 고개를 내흔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지. 당시 절대십천예를 수록한 천화대종경은 무우대사가 지 니고 실종되었다고 알려졌다. 만약 이 내공심법이 그 때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찌 천화대종경이 아닌 이런 나무인형에 들어 있단 말 인가? 이것을 지니고 있던 백독신군이 살아 있었더라면 뭔가 단서 를 잡을 수 있었을 터인데…….' 커다란 난제에 부딪친 석우생의 신색은 수 차례 기이한 변화를 일 으켰다. 사마소군은 기다려도 그가 아무런 말이 없자, 벌써부터 궁금하게 여기던 점을 물었다.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그토록 뛰 어난 무공이라면 왜 그처럼 밀랍으로 위장을 해 두었을까요?" 석우생은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건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이 내공심법을 만든 사람이 광명정 대한 성품을 지닌데다 매우 조심스럽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아 무나 익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뜻이다. 원래 처음의 밀랍인형에 그려진 그림을 살피던 나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문좌 도(傍門左道)의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내공심법이었기 때문이 다." "……!" "그러나 그 심법구결에는 이 우형조차 찾아 내기 어려운 몇 군데 의 허점이 있었다. 만약 단순히 무공에 대한 탐욕만으로 어떤 인 물이 그것을 익혔더라면, 처음엔 엄청난 속도로 내공이 증진되지 만 어느 경지에 이르러 부작용이 나타난다. 내력이 심장을 침범하 여 최소한 반신불수가 아니면 전신불수가 되고, 급기야는 처절한 고통 속에 죽게 되는 것이다. 내가공부에선 그 같은 현상을 주화 입마(走火入魔)라고 하지." 사마소군은 그의 말을 잠시 되새겨 보더니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 를 끄덕거렸다. "형님 말이 맞습니다. 만약 저 내공심법을 만든 사람이 사악한 심 성의 소유자라면 그처럼 애를 써서 위장을 했을 리가 없을 겁니 다. 악(惡)은 또 다른 악이 탄생하는 것을 원했으면 원했지, 악 (惡)이 죽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녀석……." 석우생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의미 어린 눈으로 사마 소군을 응시했다. 사마소군은 씨익 웃음 지었다. "나중에 강호에 나가게 되면 이 내공심법을 만든 사람을 찾아 보 겠습니다." "녀석, 굳이 내 궁금증을 풀어 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석우생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엄숙하게 말을 이었 다. "소군,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너를 돕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내 공심법을 기초로 본 석씨 가문의 전통무예를 배운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격이다. 때문에 나는 이 내공심법에 천의조화신공(天衣 造化神功)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한다." "천의조화신공… 하늘로부터 내려온 옷을 입고 무궁한 조화를 부 린다는 뜻이로군요. 좋습니다. 썩 훌륭한 이름입니다." 사마소군은 가벼운 경탄성을 발했다. 석우생은 나무인형들을 모두 가죽 주머니에 넣어 사마소군에게 건 넸다. "이 우형이 직접 이 내공심법을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만 네 스스 로 깨닫는 게 더욱 큰 힘이 될 것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마소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받아 품속에 갈무리했다. 석우생이 따사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어 볼 게 많이 있다고 했는데, 이번엔 무엇이냐?" "바로 이 물건입니다." 사마소군이 대답과 함께 꺼내 든 것은 바로 부친에게서 받은 천마 철전이었다. 석우생은 이 특이하고 생소한 철전을 한참이나 자세히 살폈다. "이상한 동전이군." "아버님께선 내게 이것을 주며 천마사로라는 분들을 찾아가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사마소군은 악몽 같던 그 날이 생각나자,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석우생은 재차 의아스런 신색이 되었다. "천마사로?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그렇습니다." "기이한 일이군. 당금천하의 기인이사들에 관해선 단 한 명도 빠 뜨림 없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 우형이지만, 그런 명호는 들 은 적이 없다. 더군다나 네 부친께서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예사 인물들이 아닐 터인데……." "전혀 짐작조차 못하시겠단 말씀입니까?"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만면 가득 초조한 빛을 띠었다. 석우생은 잠시 천마철전을 살피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단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나중에 사천(四川) 지방 을 한 번 가 보도록 하거라. 그 이유는 이 철전을 만든 재료가 사 천지방에서만 난다는 한오철(寒嗚鐵)이기 때문이다." "사천……!" "그렇다. 그리고 이 철전은 네 부친과 천마사로라는 분들만이 알 고 있는 일종의 신표인 것 같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구나." 이 한 마디는 그나마 실망을 금치 못하던 사마소군에게 실낱 같은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사마소군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내흔들었다. "이거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시늉을 해야할 판이로군요." "녀석, 모르는 일에 손을 댈 때는 원래 최초로 발견된 단서를 따 라 시작하는 게 순서다.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석우생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더니 말머리를 돌렸다. "자, 이제 내게 묻고 싶은 건 몇 가지나 남았느냐?" "두 가지뿐입니다, 형님." 사마소군은 씨익 웃어 보인 후 침착한 어조로 또렷하게 물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백화맹에 관해서입니다. 나는 얼마 전에 저희 아버지께서 백화맹의 제팔대 맹주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끄러 운 얘기지만 나는 아버지의 과거내력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내력은 물론이고, 백화맹에 대해 자세히 말씀 해 주십시오." 말을 하는 사이 사마소군의 얼굴색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으로 굳 어져 가고 있었다. 사실 그는 진작부터 이 질문을 가장 먼저 하고 싶었으나 왠지 두 려운 마음이 앞서 이제까지 미뤄 왔던 것이었다. 석우생은 그러한 사마소군의 내심을 환히 짐작하기라도 한 듯 묵 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윽고 조용한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백화맹은 무림에서 발생하는 여러 복잡한 분규, 즉 문파 간의 알 력 다툼이나 시비, 또는 이해 문제 등이 크게 번질 우려가 있을 때 그러한 것들을 중재해 주는 무림맹(武林盟)을 지칭하는 말이 다. 맹주는 오 년마다 영웅검회(英雄劍會)라는 대회를 열어 선출 하는데 능력에 따라 연임할 수도 있다. 이미 오십 년 전에 창설된 백화맹의 권위는 당금무림에선 말 그대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천하 칠백사십구 개의 대소문파가 백화맹에 가담해 있으며, 백화 맹의 결정은 곧 무림의 법으로 통용된다." "그럼 백화맹과 형님의 세력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듣고 있던 사마소군은 두 눈에 이채를 반짝이며 물었다. 석우생은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외견상으로 볼 때 백화맹은 천하제일의 조직이라 봐도 무방하다. 천하의 유수한 명문거파들이 거의 다 백화맹에 가입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우형은 백화맹 자체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느냐?" 석우생의 아리송한 대답에 사마소군은 더 묻고 싶었지만 참고 고 개를 끄덕였다. 석우생은 깊숙한 눈빛으로 사마소군을 정시했다. "백화맹에 관해선 나중에 강호에 나가게 되면 알기 싫어도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석우생은 난색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부친에 관해선 나로서도 뭐라고 말을 하기가 어렵다. 본래 백 의성검 사마대협, 즉 네 부친은 사실상 출신내력이 아직까지도 밝 혀진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아들인 너에게조차 내력을 말해 주지 않았다는 건 피치 못할 어떤 고충이 있다는 풀이가 된 다. 어쩌면 그 문제는 네 부친께서 언급한 천마사로라는 분들을 찾으면 자연히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 는 이야기는 강호인들이 알고 있는 극히 일반적인 것들뿐이구나." "……." "백의성검 사마장천, 사람들은 한마디로 그를 이렇게 말한다. 그 는 역대 백화맹의 맹주 중 가장 뛰어난 인품과 무공을 지녔던 신 비 속의 거인이라고. 물론 그 말은 그분의 출신내력도 그렇거니와 어느 날 홀연히 중원팔의만 대동하고 강호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 붙여진 것이다." 듣고 있던 사마소군의 표정이 수 차례 복잡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 순간 그의 뇌리로 번뜩 스치는 한 가지 의혹이 있었다. '역대 맹주 중 가장 뛰어난 무공을 지니셨다면 전날 선유도에서는 왜 그처럼 고전을 하셨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의혹은 눈 깜짝할 새였다. 비록 자세히는 듣지 못했 지만 부친에 대한 강호의 찬사를 알게 되자, 가슴 속에 뭔가 뿌듯 하게 차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한 심정은 자랑스런 아버지를 둔 자식으로서의 당연한 기쁨이 었다. 그래서였을까? 사마소군은 오랜만에 안면 가득 환하게 웃음을 머 금었다. "그 정도면 되었습니다. 나머지 자세한 것은 훗날 제 스스로 알아 내도록 하지요. 이제 마지막 질문만이 남았습니다." "뭐냐?" "이건 좀 묻기가 쑥스러운 것이지만, 제가 알기로 형님은 강호제 일의 신비살수로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강호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면 다른 방법도 많았을 터인데, 왜 하필이면 청부살업 (請負殺業)의 살수가 되었습니까?" "장과부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모양이로군." 석우생은 기묘한 눈빛을 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마소군은 내심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우생이 미리 단단하 게 봉해 두었던 장음교의 입을 자신이 억지로 열게 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석우생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온화한 신색으로 말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너에게 한 가지 비밀을 알려 주겠다. 세상 사람들은 단지 나를 살수라고만 알고 있지만 사실 나는 열여섯 가 지의 다른 신분을 더 지니고 있다." "열여섯 가지라고요?" 사마소군은 놀라 자신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래졌다. 석우생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렇다. 그 열여섯 가지의 신분에 대해서는 훗날 너도 자세히 알 게 될 것이다. 지금은 우선 살수 혈풍향이란 신분에 대해서만 말 해 주겠다." 석우생의 두 눈에서 문득 은은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그는 칼로 자르듯 명료한 어투로 말을 이어 갔다. "무릇 조직과 조직의 싸움에 있어서 가장 큰 승부의 관건은 상대 에 관한 정보를 어느 쪽이 먼저, 그리고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달 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직 간의 싸움은 한마디로 정보전쟁 이라 할 수 있으며, 상대를 따라가기만 한다면 영원히 그 상대의 아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살수란 신분은 최 적격이었다. 살인을 의뢰하는 자에게선 으레 하나의 정보라도 얻 게 마련이고, 그 대상이 되는 자는 죽음에 처하게 되면 묻지 않아 도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은 물론이고 모든 비밀들을 털어놓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라 해도 언젠가는 대국을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게 마련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가 내가 살수를 택하게 된 첫번째 동 기이다." 석우생은 여기에서 말문을 끊고 잠시 사마소군을 기이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세상을 다스리는 치자(治者)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 나는 덕(德)이며, 다른 하나는 힘(力)이다. 덕을 쌓아 가자면 만 민 앞에 노출되게 마련이지만, 힘은 언제 어느 때든 아무도 모르 는 상태로 행사할 수가 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기에 많은 사람 들에게 의심을 받아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내 손으로 처리 해 온 백마흔아홉 번의 청부살인이 나름대로 악(惡)의 한 귀퉁이 를 무너뜨리는 데에 기여했다고 선조들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 사마소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석우생의 말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석우생은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마주 응시하더니 물었다. "이젠 묻고 싶은 것을 다 물었느냐?" "그렇습니다. 이젠 더 알고 싶은 것이 없……." 사마소군은 대답하다 말고 갑자기 생각난 듯 황망히 입을 다물었 다. '구루마등 한세마희! 내가 왜 그 일을 잊고 있었을까?' 석우생은 그의 표정이 돌연 기이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의아한 눈 빛으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형님은 혹시 구루마등 한세마희라는 이름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 까?" 사마소군이 재빨리 묻자, 석우생의 안색이 흠칫 경직되었다. 그것 은 석우생에게서는 드물게 보는 표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석우생은 곧 거짓말처럼 원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그녀에 대해 뭘 알고 싶으냐?" "알고 싶은 게 아니라, 그녀가 바로 저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을 때……." "그녀가 너를 도와 준 것은 이미 알고 있다. 네가 이미 이야기를 했지 않느냐?" "한 가지 빠뜨린 게 있습니다." 사마소군은 침착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형님을 만나면 이렇게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음해당 은 아직도 연지호의 맹세를 잊지 않고 있다고." "……." 일순 석우생의 눈빛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내 리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떼었다. "그녀와 나와의 관계는 훗날 그녀를 다시 한 번 만나면 자연히 알 게 될 것이다. 그 때 너는 그녀에게 전해라. 나는 연지호의 약속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석우생은 감았던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사마소군 을 향해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이야기는 그만 하자. 더 이상 하면 너를 혼내 주겠다. 네녀석 도 눈치가 있으면 더 이상 따지지 못할 거야." 그 말에 사마소군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 다. '형님은 그런 이야기를 왜 내게 전하라고 하십니까?' 이 한 마디를 그가 속으로 되뇌이는 순간이었다. 석우생이 웃음 띤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너와 함께 이 장한별부에 들어온 여섯 기재들은 어제부터 오 년 간의 수업(修業)에 들어갔다. 어떡하겠느냐? 며칠 더 쉬었다가 시 작하겠느냐? 아니면……." 사마소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성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 했고,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했습니다. 기왕에 시작할 일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석우생은 만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두어 차례 손 뼉을 쳤다. 짝짝－! 그러자 사마소군의 바로 등 뒤에서 한 줄기 인영(人影)이 환영처 럼 스르르 나타났다. "부름 계시오이까?" 사마소군은 흠칫 뒤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등 뒤에 나타난 인물은 족히 칠십 세는 넘어 보이는 노파였 는데, 깡마른 몸에 검은 흑의를 입고 있어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더군다나 쭈글쭈글한 얼굴에 온통 짙은 화장을 하고 있어 오래 쳐 다보면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이 때 그의 귓가로 석우생의 위엄 있는 음성이 스며들었다. "흑태랑(黑太狼), 향후 오 년 간 네 수족이 되어 수업(修業)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비록 네 수하이기는 하나 수업에 관한 한 털끝만큼도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말 그대로 사자 새끼를 길들일 냉혹한 조련사라고 할 수 있지." 그러자 흑태랑이라 불려진 노파가 사마소군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노신 흑태랑, 소부주(少府主)께 인사드립니다." 사마소군은 소부주라는 호칭에 일시 얼떨떨해 했으나 곧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를 끼치게 되었소." 흑태랑은 재차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웃는 둥 마는 둥 사마소군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칠해진 입술 새로 내비치는 그녀의 음성은 어쩐지 징그럽 고 음산하게 느껴졌다.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 사마소군은 내심 스스로를 위로하며 석우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가겠습니다. 형님." 석우생은 아주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 다.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도록 해 라. 우리가, 아니 네가 상대해야 할 적은 이 형 같은 사람이 열 명이 있어도 당해낼 수 없는 전능(全能)의 신 십전달인(十全達人) 일 것이다. 그런 자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보다 더욱 많이 알고 강해지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사마소군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 같은 투지와 용기가 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장난기 어린 웃음을 씨 익 지어 보이며 호방하게 말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괜히 그런 말로 사람 기죽이는 게 아닙니다. 까짓 것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면 될 게 아닙니까?" "녀석……." 석우생은 담담히 미소짓더니 흑태랑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흑태랑은 즉시 사마소군을 향해 공손히 입을 열었다. "소부주께서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말을 마치자, 그녀는 석우생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이더니 돌아서서 석실문을 나섰다.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정색을 한 채 잠시 석우생을 바라보았 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뒤엉켰다. 석우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마소군은 그제야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비로소 몸을 돌려 천천히 문 쪽으로 향했다. 이어 막 문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사마소군은 문득 걸음을 우뚝 멈추고 생각난 듯 석우생의 은빛 머릿결을 바라보았다. "참, 형님의 올해 나이는 얼마나 되었지요?" "스물넷이다." 석우생이 차분한 어투로 대답했다. 사마소군은 약간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스물넷… 그럼 오 년 후에는……." "녀석, 네녀석이 수업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는 죽고 싶어도 죽지 않는다." 석우생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사마소군은 그제야 밝은 표정을 지었다. "됐습니다. 그럼 오 년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가 막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소군." 석우생이 그를 조용히 불러 세웠다. 사마소군은 멈칫 그를 돌아다보았다. "……?" "너와 나는 난세의 사람, 해야 할 일이 많다. 사소한 정(情)에 얽 매어 큰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명심해서 새겨 두겠습니다." 사마소군은 별 생각 없이 대답한 후 가벼운 걸음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이내 문 앞에서 사라졌다. 석우생은 그 때까지도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러나 사마소군의 발자국 소리가 점차로 멀어지며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 순간, 석우생의 얼굴에선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대신 그 얼굴을 안개처럼 뒤덮는 것은 죽음처럼 어두운 고독의 그 림자였다. 그리고 그 고독의 저변에는 왠지 한 가닥 허무한 기운 마저 깔려 있는 것 같았다. 석우생은 오랫동안 사마소군이 나간 문 쪽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 다. 한참 후에야 그는 문에서 시선을 떼고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정교하고 섬세하게 조각된 사슴 목각상이었다. 바로 언젠 가 사마소군이 그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석우생은 한동안 사슴 목각상을 매만지며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사슴 목각상을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소군…….' 사마소군은 몇 개의 회랑과 동굴을 거쳐 기나긴 석로(石路) 속을 걷고 있었다. 이 지하석로는 매우 넓어 폭이 십여 장에, 높이는 족히 이십 장이 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사마소군은 평소 같았으면 깊은 호기심을 가지고 살폈을 이 거대한 석로에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표정은 왠지 어둡고 우울해 보였다.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 같지? 이런 느낌은 처 음이군.'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석우생과 헤어질 때는 전혀 느끼 지 못했던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갑자기 그를 엄습한 것이다. 그러한 느낌은 석우생이 있는 곳과 멀어질수록 점차로 뚜렷해졌 다. 사마소군은 이러한 느낌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흑태랑은 그의 앞에서 일 장 가량 사이를 둔 채 기계처럼 걷고 있 었다. 그로부터 대략 향 한 자루 탈 시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두 사람 은 마침내 육중하고 거대한 하나의 철문 앞에 당도했다. 철문은 얼마나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는지 온통 벌겋게 녹슬어 있 었다. 사마소군은 아무 생각 없이 이끼처럼 녹이 더덕더덕 낀 철문을 바 라보았다. 그 때 흑태랑이 그를 향해 뒤돌아서며 공손히 입을 열었다. "굳이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지만 노신의 직책상 불생사칙(不生四 則)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불생사칙?' "첫째, 게으른 자는 죽는다. 둘째, 규율을 어기는 자는 죽는다. 셋째, 도태하는 자는 죽는다. 마지막 넷째……." 문득 흑태랑의 음성이 뚝 멈추어졌다. 사마소군이 손을 들어 그녀 의 말을 중단시킨 것이었다. 사마소군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불생사칙도 좋고 오칙도 좋소. 어차피 시키는 대로 다 하기로 마 음먹은 지 오래니까. 그보다 한 가지만 묻겠소." 사마소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나를 당신의 상전이라 인정한다면 숨김없이 대답해 줘야 할 것이 오." "무슨 말씀이신지?" "형님 말이오. 나이가 스물넷이라는데, 정말 확실한 거요?" "……!" 순간, 흑태랑의 안색이 크게 돌변했다. 그녀는 설마하니 사마소군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리라고는 미처 예 상치 못한 듯했다. 사마소군은 당황하는 빛이 역력한 그녀의 표정을 보다 가슴이 철 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전율처럼 그의 뇌리를 스쳤다. "스물넷이 아니로군! 그럼 몇 살이오?" "그, 그건……." "어서 말하시오! 만약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한 발자국도 여기서 옮길 수 없소!" 사마소군은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외쳤다. 정말 그러고도 남을 살 벌한 기세였다. 흑태랑은 우물쭈물하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 "노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부주님은 올해 스물아홉이십니 다." "스물아홉이라고?" 사마소군은 순간, 뒤통수를 쇠망치로 호되게 얻어맞는 기분이었 다. 아찔한 현기증이 그를 휘청 한 걸음 물러서게 만들었다. "스물아홉… 석씨 가문의 사람들은 결코 서른 살을 넘기지 못한다 고 했으니, 그럼 고작 일 년……." 실성한 듯 중얼거리던 사마소군은 돌연 홱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미처 세 걸음도 떼어 놓기 전에 우뚝 멈추어 서야만 했다. 흑태랑이 어느 새 유령 같은 신법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엄숙한 눈빛으로 사마소군을 바라보며 무겁게 말했다. "스스로 포기하는 자는 죽는다. 이것이 아까 말씀드리려다 만 불 생사칙 중 마지막 귀절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사마소군의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 그는 무섭게 흑태랑을 노려보았다. "비키시오." "여기서 되돌아나간다는 건 곧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비키라고 말했소. 이건 명령이오." "노신을 먼저 죽이고 가십시오." "비켜!" 사마소군의 눈에 붉은 핏발이 섰다. 그러나 흑태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약 부주께서 이 모습을 보신다면 크게 실망하실 겁니다." "비키란 말야, 이 할망구야!" 사마소군은 그대로 흑태랑의 몸을 밀칠 듯 내달렸다. 그러나 그의 몸은 흑태랑의 몸에 부딪친 순간,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퉁겨 나갔다. 쿵－! 이 장 밖에 나가떨어진 사마소군은 엉덩이가 깨어질 듯 아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망연히 넋 나간 듯 천장 쪽을 우러르는 그의 시선 속으로 석우생 의 아름다운 얼굴이 환상처럼 피어 올랐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까지도 똑독히 들려 오는 것 같았다. － 너와 나는 난세의 사람, 사소한 정(情)에 얽매어 큰 일을 그르 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아니 됨을 명심해라. 사마소군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비로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쩐지 마지막 그의 말이 심상치 않은 여운을 풍기며 찌꺼기처럼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된다! 이런 식으로 헤어질 순 없 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어 그는 미친 듯이 재차 밖을 향 해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일 년 뒤에 시작하겠다! 그 때 시작해도 조금도 늦 지 않단 말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슉－! 흑태랑이 번개같이 그의 몸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것뿐이었다. 사마소군의 몸은 마치 물 먹은 솜처럼 그 자리에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때부터 사마소군은 아무런 생각 도 할 수 없었다. "……." 흑태랑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마소군을 쓸쓸한 눈빛으로 내려다 보았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노신을 용서하십시오." 그녀는 사마소군의 몸을 조심스럽게 옆구리에 껴안았다. 이어 그 녀가 철문 앞으로 다가가 어딘가를 매만진 순간이었다. 쿠르르릉－! 기다렸다는 듯 벌건 녹이 우수수 떨어지며 철문이 좌우로 쩍 열렸 다. 흑태랑은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철문은 저절로 굉음 을 내며 다시 움직이더니 원래대로 굳게 닫혔다. 마치 다시는 열 리지 않을 것처럼.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석우생은 마치 일순간에 생명이 모두 빠져 나간 사람처럼 태사의 에 몸을 깊이 파묻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마소군과 헤어진 그 순간부터 이미 그의 생명은 끝난 것인지도 몰랐다. 한순간 석우생은 일체 무심한 눈길을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더니 나직한 일성을 흘려 냈다. "적노, 거기 있는가?" 그러자 마치 천장에서 솟아난 듯 하나의 그림자가 환영처럼 내려 와 부복했다. 바로 적노였다. "부르셨습니까, 부주님." "준비는 다 되었나?" "물론… 입니다." 무슨 연유인가? 대답을 하는 적노의 신색은 평소 냉막하던 것과는 달리 짙은 고뇌의 빛을 담고 있었다. 그는 안면근육을 씰룩거리며 고개를 깊이 내리숙이더니 몹시 어려 운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부주님,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전혀 길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러실 것까지……." "그만 하게. 나를 잘 아는 그대가 그런 말을 하다니 이상하군." "부주님!" "적노, 이 방법은 석가의 조상들이 남긴 마지막 유언에 의해 행해 지는 것이다. 바로 석가의 모든 후예들이 마지막으로 이 땅에 남 기고 가는 승부수라 할 수 있지." 아… 대체 무슨 말인가? 석우생의 두 눈에 일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신비로운 광채가 번 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적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정녕…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란 말씀입니까?" "뒤를 부탁한다, 적노. 모든 일을 잘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그간 내가 당부한 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행해져야 할 것이다." "부주님……." 적노는 고개를 서서히 들어 석우생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 다. 눈물인가? 그의 냉막한 얼굴의 눈가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있었 다. "마지막 절은 받으십시오. 무림은… 분명히 부주님의 가문과 그 은혜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적노는 떨리는 음성과 함께 천천히 오체투지의 대례(大禮)를 올렸 다. 석우생은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적노는 보지 않고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석우생의 눈과 입가에 그 깊고 따스한 미소가 은 은히 배어 있음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웅웅웅……! 석우생이 앉아 있는 태사의의 뒤쪽 벽면에서 기이한 금속성이 울 려 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태사의가 서서히 밑으로 꺼져 내려가는 게 아닌가? 그러나 석우생의 몸은 따라 내려가지 않고 마치 보이지 않는 의자 에 앉은 듯 허공에 붕 떠 있었다. 그는 곧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더니 가부좌의 자세를 취했다. 거의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는 신비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 다. 스스스……! 그의 전신에서 새하얀 백기가 서려 나오며 장내를 가득 채우는 게 아닌가? 웅웅웅……! 연이어 태사의 뒤쪽의 벽면이 좌우로 쩍 갈라졌다. 석우생의 몸이 허공에 뜬 가부좌의 상태로 서서히 그 갈라진 벽면 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였다. 막 고개를 들던 적노는 그 신비로운 광경을 보고 전신을 심하게 경련했다. 그 순간 적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열린 벽면 속의 먹먹한 어 둠 저편으로 환상처럼 멀어져 가는 한 쌍의 눈(眼)을……. 한없이 깊고 신비로우며 신비로운 광채가 일렁이는 눈! 그러나 그 눈은 지금 이 세상의 누구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거 운 고뇌와 연민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부주님!" 적노는 자신도 모르게 처절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열린 벽면은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굳게 닫 히고 말았다. 쿠쿵－! 적노는 넋 나간 신색으로 망연히 그 벽면을 응시했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무서운 적막감이 그를 아득한 충격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공허함을 달래 주기라도 하듯 굳게 닫힌 벽면 저편으로부터 한 줄기 쓸쓸한 낭송(朗誦)이 환청처럼 들려 온 것도 바로 그 때였 다. 何處居行 何宿留行 殘牧田間 古 放土 何年恨魂 虛無生存 鳴呼愛弟 多情愛弟 不望回後 手구愛顔 閻燈握臂 揮手玆去 何爲再面 愁愁冬月 어느 세상 살다 가나? 뉘 집에 묵다 가나? 일구다 만 밭고랑 사이 낡은 쟁기 놓아 두고, 어느 세월 한 서린 염원, 덧없이 날아가나? 어허, 아우여! 내 사랑하는 아우여! 되돌아보지 말고, 슬픈 얼굴 거두어라. 염라풍등 손에 쥐고 손 휘저어 보내나니. 언제나 다시 볼 거나? 겨울 달빛 저리도 서러운데. ━━━━━━━━━━━━━━━━━━━━━━━━━━━━━━━━━━━ 제 18 장 당돌한 소녀(少女) ━━━━━━━━━━━━━━━━━━━━━━━━━━━━━━━━━━━ 세월여류(歲月如流). 흔히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는 것을 강물이 흘러가는 것에 비유한 다. 그 흐름은 혹자에게는 기쁨을 주고, 또 다른 자에게는 고통을 준 다. 그것은 또 하루살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긴 세월 이겠지만, 일 년을 하루로 살아가는 신선의 세계에선 광음(光陰) 처럼 짧은 시간이다. 오 년(年)……. 그것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수업자(修業者)의 입장에서 본다 면 억겁보다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칠 인(人)의 아이들. 그러나 이제는 아이라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기구한 운명의 주역 들은 과연 이 오 년 동안 무엇을 얼마만큼 배웠으며, 또 어떤 모 습으로 성장했을까? 아직은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암천(暗天)에 작렬하는 수천 줄기 뇌전의 흐름이 지상으로 향하 고,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이 일백 년 만에 중토로 범람한 그 해 십이월의 어느 날 밤! 견디다 못한 지상의 인간들이 혼돈과 광란의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던 바로 그 날 밤, 그 저주의 혼돈 속에서 복우산을 한 시 진 간격으로 소리 없이 떠나는 일곱 줄기 그림자가 있었으니……. 그로부터 육 개월 뒤, 이 땅에는 칠인회(七人會)라 불려지는 신비 의 조직이 새롭게 탄생했다. 이 칠인회(七人會)에 대한 것을 설명하자면 우선 이 시절의 현 무 림상황을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오 년 전만 해도 중원무림은 그지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본래 시기와 음모가 난무하고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그칠 새 없는 무림이 그처럼 잔잔할 수 있었던 것은 백화맹(白花盟)이 존재하고 있는 덕분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었다. 백화맹(白花盟)에 소속된 문파는 무려 칠백사십구 개 문파나 되었 고 거기에는 구대문파(九大門派)를 비롯, 내노라 하는 명문대파 (名門大派)들은 거의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한 백화맹의 응집력과 지배력은 그야말로 고금을 통틀어 유례 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백화맹. 명실공히 자타가 공인하는 그 천하제일의 세력에 거스릴 수 있는 인물이나 문파가 이 땅 어디에 있겠는가? 상선벌악(賞善罰惡),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명목하에 발표된 이른바 백화맹의 무림교칙(武林敎則)이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 는 절대적 율법이 되어 있음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바로 그 절대적 율법에 명백히 위배되는 가공할 사건이 오 년 전부터 삼 년 간에 걸쳐 발생하는 괴변이 벌어졌다. 그 내막은 아래와 같았다. 천 년의 뿌리를 두고 당당하게 군림해 온 열 개의 가문(家門). 아 니, 어느 단체나 문파에도 귀속됨이 없이 자랑스럽게 그 맥을 이 어 온 무림최고의 열 개 명문정파가 있었다. 그리하여 세인들로부터 십성세가(十聖勢家)라는 경외 서린 이름으 로 불리던 그 가문들이 단 삼 년에 걸쳐 완전히 몰락해 버린 것이 었다. 아니, 그것은 몰락한 정도가 아니었다. 십성세가는 그 흔적도 남 기지 못한 채 깡그리 재로 변해 초토화되었고, 이천오백여에 달하 는 열 개 가문의 식솔들 중 살아남은 생존자는 거짓말처럼 단 한 명도 없었다. 경천동지! 천하는 이 사건으로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백화맹은 물론이고, 관부에서까지 이 사건에 대해 진상을 캐내려 했다. 그러나 양쪽 모두가 실오라기 같은 단서 하나도 잡지 못하는 어이 없는 결과만을 남긴 채 조사는 끝나고 말았다. 흉수들은 그야말로 귀신을 방불케 할 만큼 완벽해서 티끌만한 단서도 남겨 두지 않았 던 것이다. 시신에 나타난 무공조차도 이제까지 무림에 전혀 알려진 바 없는 생소한 것이었으며, 기괴막측함과 독랄괴이한 수법은 그들의 상상 을 초월하고도 남았다. 당시 조사에 착수했던 인물들은 예외 없이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 었고, 그 중에는 아예 무림을 버리고 은거해 버리는 인물들도 적 지 않았다. 흉수들의 살인수법이 그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 는 전율스러운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요하던 무림은 어느 날 갑자기 공포시대를 맞이하고 있 었다. 평화가 마침내 깨어지고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사람들의 뇌리를 지배했다. 그 초비상 상태로 인해 그 해에 열릴 예정이었던 맹주 선발대회, 다시 말해 백화맹의 영웅검회(英雄劍會)는 무산됐다. 천하제파의 지존(至尊)들은 결국 구수회의를 열어 십성세가를 몰 락시킨 흉수를 잡을 때까지라는 단서하에 제구대 맹주 천벽검제 (天壁劍帝) 심목풍(深木風)이 계속 연임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 하기에 이르렀다. 심목풍의 성품이 다소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의 연임을 꺼려 하는 인물도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무 공내력과 명석한 판단력을 지녔다는 의견이 압도적인 우세로 나타 나 얻어진 결과였다. 그런 중론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연임이 확정된 그 해, 심목풍은 한층 강화된 내용의 제이차(第二次) 무림교칙을 전 무림에 발표했 다. 그 전문(全文)의 골자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선(善)이나 덕(德)은 천하를 지키는 데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될 때가 있다. 묵은 관습이나 전통 따위 또한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황산세가를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사라진 십성세가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본맹은 천하제위와 더불어 이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가운데 단호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에 앞서 본 맹주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흉수를 색 출, 처단할 것임을 동도제위 앞에 맹세하는 바이다. 약함은 어떤 경우에도 미덕이 될 수 없다. 힘의 바탕 위에 서지 않는 한, 그 무엇도 유지될 수 없는 법이다. 윤리나 도덕, 질서도 마찬가지이며 무림의 평화도 결코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본 맹주는 심사숙고한 끝에 다음과 같이 무림교칙을 개정 선포하는 바이니, 전 무림동도의 전폭적이고도 아낌없는 협조를 바라 마지않는다. 첫째…….> 대변신(大變身)! 그 때부터 백화맹은 단순히 군림해 오던 성격에서 벗어나 강력한 힘으로 천하문파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범죄나 죄악의 근원이 될 소지만 엿보이면 어떠한 인물이나 문파 도 가차없이 제거했다. 신도방(神刀 )이 멸망하고 흑마루(黑魔樓)가 폐문(閉門)을 당한 것이 그 구체적인 예라 할 수 있었고, 백화맹에 가입하라는 권유 를 묵살하고 제멋대로 횡행하던 사문오방칠제일곡(四門五 七祭一 谷)이 차례로 무림에서 제거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심목풍이 갈수록 과격해지자 무림에는 급기야 백화맹의 힘의 시위 에 찬반양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목풍은 그러한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 의 뜻을 강행시켰다. 그 기세가 너무도 당당했던 탓일까? 십성세가를 몰락하게 한 흉수들은 그 후 이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이 천벽검제 심목풍의 강력한 지배력 탓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백화맹, 아니 천벽검제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고 아무도 그 이름 앞에 거부나 반대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 시기에 심목풍은 장차 일어날 혈겁에 대비, 천하 각 파에 서 가장 자질이 뛰어난 제자 한 명씩을 선발하기에 이르렀다. 그 숫자는 백팔 인(人)이었다. 심목풍은 그들을 백팔정검대(百八 正劍隊)라 이름하고, 각자의 재질에 맞는 극고의 무예를 전수하여 불과 오 년 새에 절정고수들로 탈바꿈시켰다. 그 때부터 무림에 크고 작은 분규가 생기면 그들 백팔정검대가 파 견되었다. 그리고 백팔정검대는 상상 이상의 가공할 능력을 뭇 천하인들에게 보여 주기 시작했다. 백팔정검대. 평소에는 심목풍을 호위하는 그림자들이었으며, 일단 유사시에는 어떤 명령이든 해결해 버리는 비정의 승부사들! 언제부턴지 사람들은 심목풍과 백팔정검대를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게끔 되었다. 그만큼 백팔정검대의 젊은 승부사들은 빼어났으니, 그 이름은 찬 란히 떠오르는 해와도 같았다. 중원천하의 젊은 영웅들 사이에는 그 이름이야말로 경외의 대상이 었으며, 꿈 속에서도 그 가운데 자신이 끼기를 원했다. 백팔정검대의 일원이 될 수만 있다면 황제조차도 부럽지 않은 명 예와 권력을 누릴 수 있음은 물론, 가장 눈부신 생애를 살아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 가운데 무심히 흐른 다섯 개 성상(星霜)의 세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세인들이 백팔정검대만을 주목하는 사이 이 땅 다른 곳에서는 기구한 운명의 일곱 아이들이 불가사의한 기적 을 창조해 내면서 눈부시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뉘라서 짐작이나 할까? 오 년(年). 그렇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무서운 세월은 이렇게 지나 가고 말았다. 그리고 무림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풍운(大風雲)의 시대는 질식할 듯한 긴장 속에 서서히 그 막(幕)을 올리고 있었 다. 곤명산(混明山). 하남지방 제일의 대도(大都)인 낙양성에서 북쪽으로 삼십여 리 가 량 남겨 둔 채 솟아 있는 이 산은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산세가 거칠기로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풍경이 수려하기가 일품인데도 불구하고 사철 인적이 드물었다. 바로 그 곤명산 한가운데로 흐르는 골짜기의 물줄기가 있었다. 이 거센 급류는 황하(黃河)의 한 지류인데다 워낙 급경사를 이룬 물줄기라, 주위 십 리가 항상 자욱한 물안개로 뒤덮여 있을 정도 였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급류 곤명탄(混明灘)이라는 이름을 붙였겠는 가? 그 곤명탄의 하류에 곤명지(混明池)라는 하나의 호수가 형성되어 있으니,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때는 더위가 절정의 맹위를 떨치는 팔월의 어느 날이다. 오시(午時) 경에 접어들면서부터 대지는 흡사 한증막 같은 열기로 휩싸여 있었다. 무성한 송림의 나뭇가지들은 엿고물처럼 축축 늘어진 채 금방이라 도 녹아 내릴 것처럼 보였다. 가히 살인적인 폭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이다. 곤명지로 이어진 산중의 조그만 산길 저 쪽으로부터 낭랑한 노랫가락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棄置又棄置 精如刀劍傷 一夕九起嗟 夢短不到家 죽으라 죽으라는 원통한 팔자, 부러진 칼몸처럼 소용없는 신세여. 하룻만에 아홉 번이나 잠 깨어 한숨 쉬자니, 꿈길도 토막토막 집엔들 가겠느냐? 노래는 당대(唐代)에 맹교(孟敎)라는 사람이 과거에 낙방, 비분한 나머지 한숨으로 읊었다는 실의비가(失意悲歌)였다. 그래서였을까? 그 노래를 부르며 막 곤명호의 호숫가 동쪽의 소로 (小路)에 나타난 사람 또한 일견키에도 영락없는 낙천서생의 초라 한 몰골이었다. 낡은 백의자락은 군데군데 기운 흔적이 보였고 신고 있는 신발 새 로는 엄지발가락이 양쪽 다 삐죽 튀어 나와 있었다. 그야말로 궁색한 차림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 지나 차림새가 그러할 뿐, 이 청년에게는 어딘가 표현할 수 없는 매력 같은 것이 풍겼다. 그 매력은 처음 볼 때는 잘 모르지만 보면 볼수록 깊이 빨려드는 신비로운 것으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의 비범한 용모에서 비롯 되었다. 나이는 대략 십칠팔 세 가량 되었을까? 실로 수려한 눈썹은 마치 검날을 붙여 놓은 듯 기세 좋게 뻗어 올 라 있고, 세공하여 빚은 듯 오똑한 콧날이며, 불그스레한 주사빛 윤기가 감도는 입술은 부드러운 듯 강한 기운을 풍겼다. 어디 그뿐인가? 한담(寒潭)처럼 시리도록 맑은 눈동자는 다소 창백하게 느껴질 만 큼 흰 피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청년의 출중한 용모를 더욱 부각시켰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용모는 매우 귀족적인 기품을 풍겨서 출신 내력이 결코 범상치 않다는 것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피면 그의 전신에는 귀족적인 기품과는 약간 어울리지 않는 낙천적이고도 호방한 자유인(自由人)으로서의 기질이 다분히 깔려 있었다. 어찌 보면 그러한 기질이야말로 그의 진면목처럼 느껴질 정도였 다. 그렇다. 이러한 풍모의 소유자에겐 아무리 차가운 성품의 소유자 라 할지라도 쉽게 친밀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체 이 독특하고 신비로운 개성을 풍기는 백의청년은 누구일까? 읊조리고 있는 처량한 노랫가락에도 불구하고 입가에는 구김살 없 는 밝은 미소가 감돌고, 뒷짐을 진 채 터벅터벅 한가로이 걷는 모 습을 보자니 세상에 바쁠 것이 없는 풍류서생이 아닌가 하는 짐작 이 들게 했다. 이 때 백의서생은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가운데 곤명지의 물가에 당도했다. "어, 경치 좋다." 백의청년은 흡족한 독백성을 나직이 흘려 내며 주위를 천천히 둘 러보았다. 곤명지의 주변은 하나의 그림 같은 기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빙 둘러가며 솟아 있는 암석군(岩石群)도 볼 만하거니와, 잔잔한 취록빛의 수면에는 떠가는 하늘의 구름이 투영되어 조용히 일렁이 고 있으니 이런 절경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백의청년은 거듭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즐 거운 음성을 흘려 냈다. "내 아무리 바쁘기로서니 어찌 이런 곳을 무심히 지나칠 수 있으 랴?" 만약 누군가 옆에서 이 말을 들었더라면 틀림없이 그가 그럴 듯한 시구라도 한 귀절 뽑아 낼 게 분명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백의청년은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느 닷없이 옷을 훌렁훌렁 벗어 제치더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드러낸 것이다. 이게 웬일인가? 아무리 주위에 사람이 없다기로서니 백주 대낮에 알몸을 드러내다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아아, 눈부신 오후의 햇살 아래 드러난 그의 몸 근육을 어떻게 형 용할 것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아름답다는 표현밖에 할 도리가 없었다. 사내의 몸이 아름답다면 우스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달리 적 합한 말이 없었다. 마치 숙련된 석공이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잘 다듬은 백옥상(白玉 像) 같다고나 할까? 아니, 아무리 천하의 이름난 명장이라도 이처럼 완벽한 몸을 조형 해 내기란 불가능할 것 같았다. 표범의 그것처럼 잘록한 허리를 비롯해 들어가야 할 곳과 나와야 할 곳이 실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으며, 구석구석 섬세하게 발달 한 근육은 구리처럼 윤기가 흐르면서도 막 물 속을 박차 오른 물 개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풍겼다. 강인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이러한 몸이 과연 세상에 또 존재할까? 만약 누군가 이 자리에 있어 목격했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감 동을 느꼈을 것이다. 풍덩－! 청년이 물보라를 퉁기며 호수 속으로 뛰어든 것은 한순간에 벌어 진 일이었다. 시리도록 맑은 호숫물에 저토록 아름다운 몸이 헤엄쳐 나간다면 그것 또한 장관이리라. 그러나 그러한 예상과는 달리 청년은 수영 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목까지 차는 물 속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 들어가더니 소란 스럽게 온몸을 씻기 시작했다. "어어, 시원하다." 겨드랑이를 벅벅 문지르더니 사타구니 등으로 오가는 그의 손은 분명 때를 밀고 있었다. 한마디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림 같던 장내의 풍경은 졸지 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한참 동안 요란스럽게 온몸을 씻은 청년은 물 속에 머리를 푹 담 궜다가 빼내었다. "푸우!" 그는 물고기처럼 입으로 물을 뿜으며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 했다. 그러다 문득 무엇을 느꼈는지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딱 고정되었 다. "어……?" 그의 시선은 상류 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살 위에 고정되어 있었 다. 놀랍게도 그 물살의 색깔은 은은히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청년은 곧 그것이 사람의 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 구의 시신이 뒤따라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체를 발견한 순간 청년의 눈썹이 가볍게 찡그려졌다. 시체는 물살에 둥둥 떠내려오더니 순식간에 호수 중앙에 이르렀 다. 그러자 시체의 자세한 용모가 드러났다. 그는 대략 마흔 살 가량 의 중년인으로 화강암처럼 단단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인이었다. 하늘을 향해 누운 자세로 죽어 있는 그의 목덜미에는 이 순간에도 검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 나오고 있었다. 청년의 눈에 반짝 이채가 떠올랐다. "방금 전에 죽었군. 한 명뿐인가?" 청년의 시선이 재차 상류 쪽으로 옮겨졌다. 그러자 이번엔 두 구의 시체가 한꺼번에 떠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똑같이 황색무복 차림이었는데, 한 명은 목은 보이지 않고 몸뚱이만 떠내려오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복부가 길게 갈라져 내장이 새끼줄처럼 밖으로 튀어 나온 상태였다. 밝은 대낮에 벌어진 이 난데없는 광경은 실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뭐야? 대체 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청년은 일시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곧 피식 실소를 지었다. "빌어먹을, 어째 모처럼 기분 좋게 목욕 한 번 하는가 했더니… …." 가볍게 투덜거리며 그가 막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시 선이 흠칫 한 방향에 정지되었다. 획－!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한 섬세한 그림자가 호수 쪽으로 날 아오는 광경을 본 것이다. 다급한 몸놀림으로 보아 그 그림자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듯 했다. 점차 호수 쪽으로 다가오면서 상대방의 자세한 용모가 드러났다. '여인?' 청년의 눈가에 빠르게 이채가 스쳤다. 나타난 사람은 몸에 꽉 끼는 홍의를 입은 십칠 세 가량의 소녀였 다. 늘씬한 키에 무르익은 몸매의 굴곡이 매우 자극적이었는데, 멀리 서 보기에도 좀처럼 보기 힘든 절세미인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한가로이 홍의소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을 여 유가 없었다. '젠장, 하필이면 이쪽으로 온단 말인가?' 그는 낭패한 신색을 지었다.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 탓이다. 그는 빠르게 염두를 굴렸지만 곧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 위로 고개만 삐죽 내민 채 일단 사태를 관망하는 것 이 그 방법이었다. 그 때 홍의소녀는 그가 옷을 벗어 놓은 장소를 빠르게 지나치고 있었다. 물찬 제비처럼 날렵한 몸놀림으로 보아 그녀는 꽤 상당한 수준의 무예를 지닌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홍의소녀가 무엇을 느낀 듯 딱 신형을 정 지하더니, 청년이 벗어 놓은 옷가지를 되돌아보는 게 아닌가? 그녀의 시선이 곧 물가 쪽으로 옮겨지더니 청년을 발견하고는 그 대로 정지되었다. 청년은 내심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결국 보고야 마는군.' 두 사람의 시선이 곧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순간, 청년의 눈에 미미한 놀람이 스쳤다. 홍의소녀는 가까이서 보니 한층 더 아름다웠다. 특히 도툼하면서 도 물기 어린 주사빛 입술과 양 볼에 살짝 패여 있는 볼우물은 나 이를 상회하는 관능미와 염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대단한데?' 청년은 내심 감탄성을 흘려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홍의소녀는 그 순간 청년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많이, 그리 고 강도 깊게 놀라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목욕중인 사내가 있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그녀는 맹 세코 이토록 잘생긴 사내를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조차 망각한 채 청년에게 눈길을 돌릴 줄 몰랐다. 그 때 청년이 문득 싱긋 웃음 짓더니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 였다. "안녕하시오?" "……!" 뜻하지 않았던 청년의 인사말에 홍의소녀는 일시 어리둥절한 표정 을 감추지 못했다. 얼떨결이었지만 그녀는 청년의 웃음이 햇살처럼 눈부시다고 생각 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청년을 향해 환한 미소를 마주 지어 보였 다. 가지런한 그녀의 치아가 보석처럼 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청년을 향해 똑같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타고난 천성이 쾌활한 듯 그녀는 이어 묻지도 않은 말까지 덧붙였 다. "제 이름은 희옥상(姬玉霜)이에요. 나이는 열일곱이구요. 소협의 대명은 어떻게 부르지요?" '엉?' 이번에는 청년이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는 곧 눈앞의 홍의소 녀가 보통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곧 본래의 신색을 회복한 채 부드러운 어투로 입을 떼었다. "희옥상이라… 좋은 이름이오. 그건 그렇고 보아하니 소저는 매우 바쁜 몸 같은데 계속 그렇게 서 있어도 괜찮겠소?" 그러자 홍의소녀 희옥상은 뒤쪽을 힐끔 뒤돌아본 뒤 다시 청년을 바라보더니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생긋 웃었다. 무척 귀엽고 애교 스런 웃음이었다. "잘 보셨어요. 사실 나는 쫓기고 있거든요." "저런, 내가 알기로는 도망가는 사람은 소저처럼 한가로우면 안 되는 법이오. 어서 가던 길을 계속 가 보시오." "아니, 그렇지 않아요." 희옥상은 의외로 침착하게 대꾸했다. 청년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희옥상이 매혹적인 옥음으로 말을 이었다. "나를 쫓는 사람들은 매우 흉악하답니다. 게다가 숫자도 많아요. 때문에 나는 아무래도 그들의 추격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요." "듣고 보니 그것 배우 딱한 입장이구려. 그러나 소저의 자신만만 한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대책이 있는 듯하구려." "바로 보았어요. 나는 방금 소협을 보는 순간 기를 쓰고 달아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그것 다행이오. 소저는 매우 대단……." 청년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눈이 곧 휘둥그래 뜨여졌 다. 희옥상이 막 그가 있는 물 속으로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 오는 모습을 본 것이다. 풍덩－! 물보라가 하늘로 튀었다. 청년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희옥상은 이미 그의 앞에 바싹 내려 서 있었다.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그가 눈을 껌벅이며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이다. 불현듯 그는 물 속에 잠긴 배에 싸늘한 감촉이 와 닿는 것 을 느꼈다. '비수?' 청년은 보지 않고도 그것이 무엇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때 희옥상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움직이지 말아요. 살고 싶다면 말이에요." 비록 말하는 표정은 부드러웠으나 얼음장처럼 차디찬 한 마디였 다. 청년의 표정이 일순 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내가 알몸의 상태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다가와 비수를 들이댄다? 아름다운 것만큼이나 당돌하군 그래.' 정오의 태양은 더욱 후끈한 열기를 온누리에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호수 속의 두 남녀는 더위 따위를 잊은 지 이미 오래였다. 물에 젖어 착 달라붙은 옷 사이로 희옥상의 요염한 몸매가 도발적 으로 드러나 있었다. 청년은 물기에 젖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대하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나 청년은 그것이 더위 탓이라고 내심 억지로 결론지어 버렸 다. 그의 입에서 갑자기 무뚝뚝한 음성이 튀어 나온 것은 그 때였다. "이봐, 내게 무엇을 원하나?" "……!" 희옥상의 눈가에 일순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오히려 더욱 공손해져도 모자랄 판에 하대라?'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제법 담이 큰 사내로군. 좋아요. 일단 마음에 들었어요." "그거 잘 됐군. 어때?" "뭐가요?" "기왕 마음에 들었다니, 이 기회에 입맞춤이나 한 번 해 두는 게?" "……!" 희옥상은 어이없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여 멍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 배포가 크다고 자부해 온 자신이었으나 눈앞의 이 사내는 오 히려 한술 더 뜨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눈꼬리가 상큼 사납게 치켜올라갔다. 그러나 그녀는 곧 무 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금세 화난 표정을 지었다. "입맞춤은 할 수 없지만 나를 껴안는 것 정도는 허락하겠어요." 갈수록 가관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이내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 다. 그녀가 눈짓으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청년이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멀리 몇 줄기 흑영(黑影) 이 날아오는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그 쾌속한 신법(身法)으로 보아 하나같이 절정의 고수들임이 분명 했다. '말하자면 저들의 이목을 따돌리기 위해 임시로 정인(情人) 노릇 을 해 달라는 이야기인데…….' 그가 내심 생각을 굴리는 사이에도 추격자들은 점점 더 가까이 다 가오고 있었다. 일순 희옥상의 아름다운 얼굴에 초조와 갈등의 빛이 동시에 떠올 랐다. 그러나 희옥상은 이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야릇한 비음을 흘려 내며 청년에게 몸을 기대 왔다. "아아, 소협!" 터질 듯 무르익은 여체는 황홀한 감촉을 전하며 청년의 몸에 밀착 되었다. 그러나 청년은 선뜻 그녀를 껴안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순 간 물 속에서는 그녀의 비수가 더욱 날카롭게 그의 배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가 가만히 있자, 싸늘한 음성으로 나 직이 힐책했다. "뭘 그렇게 바보처럼 서 있어요? 어서 다정한 연인처럼 껴안아 주 지 않고!" "글쎄 뭐, 껴안는 건 어렵지가 않은데……." "아아, 사랑해요. 제 목숨보다도 더……." '거짓말 마라!' 청년은 내심 투덜거리며 재차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흑의 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아홉 명이었으며, 하나같이 눈매가 날카롭고 관자놀 이가 툭툭 불거져 나와 있어 내가고수들 특유의 강렬한 인상을 풍 기고 있었다. 청년은 곧 입가에 신비로운 웃음을 머금었다. '좋아, 이왕 도와 주는 것 화끈하게 도와 주도록 하지!' 갑자기 그는 희옥상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동시에 그는 한 손 으로 그녀의 상의를 번개같이 벗겨 내렸다. "어머나!" 희옥상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청년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트는 그녀를 더욱 완강하게 껴안으며 빙그레 웃었다. "놀랄 것 없어. 사내가 홀랑 벗고 있는데, 여자가 옷을 입고 있으 면 누가 봐도 어색할 테니까. 기왕 연극을 하려면 철저히 해야지. 안 그런가?" "……!" 희옥상의 맑고 커다란 눈망울이 더욱 커다랗게 확산되었다. 피할 새도 없이 졸지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녀의 상체는 분홍빛 젖가리개만 남긴 채 뽀얀 우윳빛 살결은 말할 것도 없고, 백사 같 은 흰 팔이며 둥그스름한 어깨 등이 고스란히 보여 실로 자극적이 아닐 수 없었다. 희옥상은 얼떨떨한 가운데에서도 부끄러움으로 인해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 당신……."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아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도록 해. 그들이 거의 다 접근해 왔으니까." 청년은 희옥상의 하얀 귓불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속삭이듯 부드럽게 말했다. 희옥상은 섬세한 동체를 파르르 떨며 만면에 당황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의 말에 따랐다. "어서… 더 껴안아 주세……." "물론이지, 내 귀여운 사슴." 청년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으스러져라 힘껏 그녀의 동체를 껴안았다. 희옥상은 순간,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사내의 가슴이 이토록 넓고 완강하다는 것을 그녀는 난생 처음 깨 달았다. 온몸으로 감겨 드는 사내의 몸 체취는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두려 움과 함께 기이한 쾌감도 함께 가져다 주었다. "하아……!" 희옥상은 전신에서 모든 힘이 썰물처럼 빠져 달아나는 것을 느꼈 다. 그러나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청년이 한술 더 떠서 입술 을 서서히 포개어 오기 시작한 것이다. 희옥상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입술을 피해야 한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만일 뿐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꼼 짝도 할 수가 없었다. '우웁!' 끝내 입술은 하나로 포개지고 말았다. 희옥상은 그만 아득한 벼랑으로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맨 처음 그녀의 뇌리를 스친 것은 수치감과 절망감이었다. 그러나 곧 그러한 생각은 등뒤로 느껴지는 추격자들의 따가운 시선을 염 두에 두자, 억지로나마 자위가 되었다. '그래, 이건 연극일 뿐이야!' 그녀는 단단하게 마음의 벽을 쌓았다.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마음 도 이내 모래성처럼 와르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청년의 혀가 거 침없이 그녀의 혀를 탐닉하며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희옥상은 일순 낚싯바늘에 걸린 한 마리 은어처럼 전신을 세차게 떨었다. 그녀는 돌연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연극치고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언뜻 스쳐가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을 오래 생각하기에는 사내의 혀가 너무 뜨거웠다. 그리고 믿기 싫었지만 너무 달콤했다. 그녀가 일찍이 느껴 보지 못했던 야릇한 쾌감이 하복부로부터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쾌감은 이내 전율처럼 그녀의 전신 구석구석으로 확산되었다. "으음……." 연극이 아닌 진짜 콧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 나왔다. 모든 번뇌가 그녀의 뇌리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조차 망각했다. 쥐고 있던 비수를 언제 손에서 놓았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그 따위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입맞춤은 그래서 격렬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때문에 누가 보더라 도 그들은 진짜 연인들 같았으며, 의심이 갈 데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두 사람의 귓가로 호수 밖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 온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 계집은 아닌 것 같군." "으음, 깜찍한 계집 같으니. 혼전을 틈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다니……." "혈호접(血蝴蝶) 희옥상, 그 계집이 여우처럼 교활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잡기만 하면 잔인하게 죽이리라!" "그건 그렇고 저 년놈들도 어지간한 철면피들이군.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시뻘건 대낮부터 부둥켜 안고 저 모양들이라니……." 서너 인물의 말소리가 차례로 들리는 듯하더니, 곧 누군가 버럭 외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언제까지 쓸데없는 구경만 할 건가? 지체하면 그 계집을 진짜 놓 치게 된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의인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장내에 서 떠나는 기척이 들렸다. 청년의 시선은 어느 새 바람처럼 멀어져 가는 흑의인들의 뒷모습 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희옥상은 여전히 무아지경 속에서 정신없이 그의 목을 으 스러져라 껴안고 있었다. '후후… 아예 정신이 없군!' 청년은 천천히 입술을 떼내었다. 그러자 희옥상이 초점 없는 눈으로 아쉬운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왜는 무슨 놈의 왜? 놈들이 갔는데도 마냥 붙어 있을 작정이오?" "……!" 희옥상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불에 덴 듯 황급히 그의 몸 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허리춤에 걸려 있는 상의를 후다닥 끌어올렸다. 청년은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았 다. 이윽고 옷차림새를 가다듬은 희옥상은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올렸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짓고 말았다. 그것은 희옥상도 마찬가지여서 두 사람은 동시에 실소를 발하는 듯하더니, 이내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커다랗게 대소를 터뜨렸 다. "하하하……!" "호호호……!" 무엇 때문에 웃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웃었다. 그러던 한순간이다. 희옥상이 문득 웃음을 멈추더니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어떡하죠?" "뭘?" "나, 이러다가 당신이 좋아져 버릴 것 같아요."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마음대로 해." 청년의 어투는 어이없으리만큼 소탈했다. 그것이 오히려 희옥상으로 하여금 친근한 느낌을 들게 했다. 청년의 말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자들의 말을 들을 것 같으면 무슨 물건을 당신이 가진 것 같은데, 대체 뭐지?" "그건……." 희옥상은 대답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청년의 표정이 갑자기 기묘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 그의 시선은 희옥상의 등뒤 호숫가 쪽으로 향해 있었다. "……?" 희옥상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슬그머니 뒤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그녀의 안색이 일변했다. 어느 새 나타났을까? 그 호숫가 쪽에는 세 인물이 우뚝 선 채 미 동도 않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가운데 인물은 작달막한 키에 핏칠을 한 듯 붉은 혈의(血衣)를 입 은 육순 노인이었다. 세 가닥으로 땋아 내린 염소수염과 조그만 쥐눈을 지닌 그는 첫눈에도 매우 음악한 인상을 풍겼다. 혈의노인의 좌우에는 반들반들한 대머리에 구 척 거구를 지닌 삼 십대의 거한(巨漢)들이 서 있었는데, 생긴 모습이 판에 박은 듯 똑같은 것으로 보아 쌍동이가 분명했다. 그들은 어깨를 드러낸 짧 은 단삼 차림이었다. 떡 벌어진 가슴과 말뚝처럼 굵은 팔은 물론이고, 구릿빛으로 번들 거리는 온몸 근육으로 보아 외문공부(外門功夫)에 상당한 경지를 지녔으리라는 것을 한눈에 짐작케 했다. 그들은 등뒤에 칼집도 없는 귀두도(鬼頭刀)를 메고 있었는데 보통 의 것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희옥상의 안색은 벌써부터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상대방 을 환히 알아본 것이다. 청년이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잘 아는 사이인가?" "적천도부(赤天屠夫)와 거령쌍패(巨靈雙覇)!" 신음처럼 희옥상이 대답했다. 그녀의 이 음성은 매우 나직했으나 호숫가의 삼 인은 모두 알아들 은 듯했다. 염소수염의 적천도부가 누런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음침한 괴소를 지었다. "흐흐… 노부를 알아보는 것 같으니, 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그러자 거령쌍패 중 형인 우극(尤克)이 희옥상을 향해 솥뚜껑 같 은 손을 흔들며 위협적으로 나오라는 신호를 했다. "귀여운 계집아이야, 좋게 말할 때 이리 기어나오는 게 신상에 이 롭다. 이 어르신을 화나게 하면 넌 영원히 물 속에 얼굴을 처박은 채 네 부모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 희옥상은 방금 전까지 보여 주었던 대담한 일면과는 반대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때 그녀의 등뒤로 청년의 음성이 독백처럼 흘러 나왔다. "적천도부와 거령쌍패라… 당신 같은 철심장이 난처해 하는 것을 보니, 꽤나 무서운 사람들인 모양이군." 희옥상이 당혹 어린 어투로 대답했다. "무서운 정도가 아니예요. 당신은 관서무림계(關西武林界)에 적천 도부라는 희대의 대마두가 있다는 소문도 못 들어 보았나요? 게다 가 저 자는 살인을 하면 반드시 상대의 몸을 두 가지로 분리시키 는 고약한 악취미를 지니고 있어요." "두 가지……?"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삽시간에 도려 놓는단 말이에요!" 희옥상은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청년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리더니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 다. "그대서 도부(屠夫)라는 명호를 얻었나 보군. 과연 무서운 사람인 걸. 그럼 거령쌍패라는 두 분은 또 얼마나 무서운지 말해 봐." "저들은 원래 적천도부의 조카들이에요. 말을 산 채로 찢어 죽이 는 무시무시한 괴력의 소유자들이지요. 저 세 사람은 언제나 함께 행동하기 때문에 무림인들은 저들을 만나는 걸 극히 싫어해요." 희옥상이 재차 두려움에 찬 어조로 설명해 주자, 청년은 자못 심 각한 표정이 되었다. "과연 무섭군. 무서워……." 희옥상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그를 뒤돌아보았다. "어떡하죠?" "어떡하긴? 어차피 연극하기도 틀렸고, 도망치기도 틀린 것 같으 니……." 청년은 잠시 고민스런 표정을 짓더니 곧 결심을 내린 듯 단호하게 말했다. "저 자들이 시키는 대로 당신이 순순히 나가는 게 제일 낫겠어." "뭐라구요?" 희옥상은 기가 막힌 듯 소리쳤다. "당신은 내 몸이 두 가지로 분리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겠단 말 이에요? "그럼 죄없는 이 몸까지 그 꼴이 되어야겠나?" "……!" 희옥상의 아름다운 얼굴이 분노와 절망으로 물들었다. 한 가닥 그 에게 걸었던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무정할 수가!" 바로 그 때다. 희옥상의 귓속으로 부드러운 한 줄기 전음성(傳音 聲)이 스며들었다. "실수하지 말라구. 무정한지 유정한지 일이 끝난 후에 결정할 일 이 아닌가?" 그 한 마디는 물론 희옥상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으며, 그녀에게 절망 대신 기쁨을 안겨다 주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에 가득 이채를 빛내며 청년을 올려다보았 다. "그, 그럼……?" "나가 봐. 그리고 잠시만 시간을 끌어 봐. 알겠나? 이렇게 홀랑 벗은 몸으로는 내 아무리 당신을 도와 주고 싶어도 무정할 수밖에 없어." 희옥상은 그를 완전히 믿고 의지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적이 위 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날 도와 주겠다는 거지요? 설마 당신에게 적 천도부와 거령쌍패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믿어 달라 는 건 아니겠지요? 혹시……." "……?" "나를 저 자들에게 내버려 두고 혼자 도망가려는 건 아니겠지요?" "이봐, 날 어지럽게 만들지 마." 청년은 몹시 피곤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희옥상은 여전히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않고 뭔가 다시 따지 려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시 입을 열 기회가 없었다. 청년이 갑자기 그녀의 몸을 두 팔로 안아 번쩍 들어올렸기 때문이 다. "말로 해서는 안 될 중생이군. 어이차!" 그는 냅다 호수 밖의 세 인물들을 향해 그녀의 몸을 던져 버려다. "어맛!" 희옥상은 대경하여 허공에서 재빨리 몸의 중심을 잡고는 급급히 땅 위에 착지했다. 그러나 그녀가 내려선 곳은 바로 적천도부 등의 면전이었다. 희옥상은 당황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기가 막힌 표정으로 호수 쪽 을 되돌아보았다. 그러자 청년이 씨익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광경이 보였 다. 희옥상은 두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여 화난 음성으로 빽 소리 쳤다. "저런 뻔뻔스런 날강도 같으니!" 그 말에 적천도부가 득의 어린 괴소를 흘리며 훈계조로 말했다. "계집아이야, 내가 보기에 저 애송이놈은 매우 생각을 잘한 것 같 으니, 그렇게 야단칠 필요가 없다. 괜히 애꿎은 일에 끼어들어 구 만 리 같은 청춘에 종지부를 찍는다면 저 애송이놈의 부모는 매우 슬퍼할 게 아니냐?" 말하는 사이 그는 어느 새 그녀에게 바짝 접근해 들었다. 희옥상은 입술을 야멸차게 깨물며 도망갈 궁리를 했으나 이미 양 옆의 퇴로는 거령쌍패가 차단한 뒤였다. 그녀는 드디어 자신이 뼈(骨)와 살(肉), 두 가지로 분리되는 기구 한 운명에 처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당장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터뜨리고 싶은 심정 이었다. "흐흐흐… 앙큼한 계집. 감히 무자혈경(無字血經)이 어떤 것이라 고 너 따위가 차지하려 든단 말이냐?" 적천도부의 눈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때려 죽일 듯 광폭한 살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이내 약간 괴이하게 변했다. 물기에 젖어 전신의 몸매가 구석구석 적나라하게 드러난 희옥상의 모습은 늙은 적천도부가 보기에도 요염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 다. 적천도부의 눈이 이내 붉게 충혈되었다. 그것은 음탕한 욕정의 빛 이었다. 그의 시선이 핥아 내리듯 희옥상의 팽팽한 젖가슴과 하체의 곡선 을 따라 움직였다. 희옥상은 그만 아까보다 더욱 끔찍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젖가슴을 가리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할아버지, 이 귀여운 손녀에게 무슨 볼일이죠?" "노부는 너 같은 손녀를 둔 적이 없다. 너는 일단 무자혈경부터 내놓는 게 좋겠구나." "나, 나는 무자혈경이 어떤 건지도 몰라요. 물론 가지고 있지도 않고요." "흐흐흐… 그렇겠지. 암 그렇고 말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재빨리 그녀를 향해 신형을 폭사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희옥상은 감히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 다. 비단폭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악!"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적천도부의 손이 갈고리처럼 그 녀의 완맥을 움켜쥔 뒤였다. 연이어 적천도부는 섬광이 무색하리만큼 빠른 속도로 그녀의 전신 요혈을 짚어 버렸다. 희옥상은 창졸간에 자신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처량한 신 세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자, 잠깐! 나는 방금에서야 무자혈경에 대해 기억이 났어요." "흐흐흐… 아니다. 그 까짓 무자혈경은 좀 더 있다가 기억해 내도 별 상관없느니라. 귀여운 것, 노부의 말만 잘 들으면 평생을 호의 호식하며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으리라." 적천도부는 게슴츠레한 눈을 희번덕거리며 희옥상의 동체를 바닥 에 눕혔다. 희옥상은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몸 부위를 쓸어 내릴 때마다 뱀이 기어가는 듯한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거령쌍패 또한 적천도부 못지않게 눈이 벌겋게 충혈된 지 이미 오 래였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음탕한 미소를 교환했다. 그 때 적천도부의 손이 희옥상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더니 서서히 젖가슴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앙탈은 부리지 않는 게 좋아. 내 비록 늙었지만 처녀를 다루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니라." "하, 할아버지! 다 큰 조카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부끄럽지 않나 요?" "흐흐… 바보 같은 소리. 저 녀석들에게 계집 다루는 법을 내 몸 소 시범 보인 지가 이미 옛날이니, 너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아아……!" 희옥상은 급기야 완전히 절망하고 말았다. 바로 그 때였다. 느닷없이 적천도부의 뒤쪽에서 한 소리 묵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나 좀 봅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그는 바로 아까 그 청년이었고, 그 음성은 어 느 새 주섬주섬 옷까지 챙겨 입은 그가 마지막으로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며 내뱉은 말이었다. ━━━━━━━━━━━━━━━━━━━━━━━━━━━━━━━━━━━ 제 19 장 전화위복(轉禍爲福) ━━━━━━━━━━━━━━━━━━━━━━━━━━━━━━━━━━━ 청년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적천도부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적천도부는 아예 고개조차 돌리 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그녀의 몸 위로 자신을 던졌다. 희옥상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안 돼! 놔, 놓으란 말야!" "흐흐… 괜찮아. 처음엔 누구나 다 그렇게 발버둥치더군. 하지만 잠시만 있으면 노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 적천도부는 말과 함께 자신의 한쪽 무릎을 희옥상의 가랑이 사이 에 집어 넣었다. 그 때 다시 청년의 음성이 들려 왔다. "웬만하면 나 좀 봐 주시지 그러오?" 순간, 거령쌍패의 안면근육이 흉하게 실룩였다. 이번의 음성은 바로 그들의 등뒤에서 들려 왔던 것이다. 아우인 우횡(尤橫)이 돌아보지도 않고 살기에 찬 음성을 위압적으 로 흘려 냈다. "찢어 죽이기 전에 어서 꺼져라. 내 마지막 호의다." 그러나 청년은 그의 호의를 별로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 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우횡의 어깨를 툭툭 치며 훈계조로 말 했다. "이 사람들, 이제 보니 말로 해서는 안 될 위인들이군." "이 자식이 정말!" 그는 솥뚜껑 같은 주먹을 불끈 꼬나쥔 채 홱 돌아섰다. 그러나 청년의 주먹이 더욱 빨랐다. 퍽－! 그 주먹은 비단 빨랐을 뿐만 아니라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 었다. 우횡의 육중한 체구가 활시위처럼 굽혀졌다. 그러나 우횡은 그 때 까지만 해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랐다. "허억!" 난생 처음으로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신음성을 토한 순간에야 그는 눈을 부릅떴고, 다음 순간 아랫배의 창자가 전부 빠져 달아 나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엄습하면서 하늘이 빙글 돌아가는 것을 보았을때 비로소 그의 뇌리에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내, 내가 이 애송이의 주먹 하나에……?' 그러나 그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의 얼굴색이 이내 노랗게 변하고 눈자위가 허옇게 뒤집혔다. 그 상태로 그는 썩은 고목처럼 정신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쿵－! 그 소리를 들으면서 우극은 히죽 웃었다. "웬만하면 죽이지는 말고 보내 줘라. 좋은 일을 앞에 두고 피를 보면 흥이 깨질 우려가 있다." 청년이 씨익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래서 간단히 보내 주었지. 덩치만 그럴 듯했지, 딱 한 방에 떨 어지는구만." "흐흐… 그래, 잘했……." 우극은 말하다 말고 흠칫 입을 다물었다. 비로소 아우의 음성이 아닌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이 곧 경악으로 부릅뜨여졌다. 게거품을 입에 문 채 땅바닥을 기고 있을 줄 알았던 애송이가 아 우 우횡의 몸을 깔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보다시피 이렇게 되었소." 청년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우극은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보고도 도저히 이 상황을 믿 을 수가 없었다. 원래 그는 아우와 함께 어렸을 때부터 철포삼(鐵布衫)이란 외문공 부를 연성해 왔다. 그 기공은 살갗을 쇳덩이처럼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지간한 병장기로는 자신들의 몸에 흠집조차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우 우횡이 어찌 저런 몰골로 쓰러져 있단 말인가? 우극은 바보스럽게 느껴지리만큼 멍청한 표정으로 청년과 아우 우 횡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니까, 애송이 네가 아우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그러자 청년이 되려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이 주먹으로 때리자 당신의 아우는 벌렁 나자빠졌소. 그게 뭐 잘못됐소?" "……!" 우극은 어이없는 얼굴로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안색을 시뻘겋게 붉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근육에서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 감히 우리들이 누군 줄 알고!" 극도로 화가 치민 탓인지 그는 말도 제대로 뱉어 내지 못했다. 그 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더니, 무서운 기세로 청년을 덮 쳐 갔다. 그가 노린 곳은 청년의 허리였다. 그는 청년을 껴안아 꼼짝 못하 게 만든 후 단숨에 허리를 부러뜨릴 작정이었다. 청년은 양 팔을 벌리고 덮쳐드는 우극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았 을 뿐 피하지도 않았다. 우극은 마침내 청년의 허리를 우악스럽게 껴안았다. 우극의 눈에 잔인한 광기가 떠올랐다. "흐흐흐… 이 놈!" 그는 온힘을 다해 청년의 허리를 조여 갔다. 아름드리 거목을 그대로 꺾어 버리는 그의 힘이었다. 때문에 그는 팔 안에 들어온 이 기생 오라비처럼 연약한 몸뚱이가 거품을 물면 서 뼈가 부러져 나가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자신의 두 팔이 상대를 조이기는커녕 오히려 양쪽으로 서서히 벌 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엉?' 우극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는 곧 그 이유를 알았다. 청년이 그의 팔을 붙잡은 채 서서히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우극은 그만 눈알이 튀어 나올 지경이었 다. 말 그대로 완전히 꿈을 꾸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 이건 말도 안 된다!" 우극은 실성한 듯 부르짖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두 팔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허수아 비처럼 활짝 벌어지고 말았다. 청년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걸렸다. "본래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왕왕 일어나는 법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퍽－! 청년의 주먹이 우극의 복부에 사정없이 작렬했다. "허억!" 우극은 자신이 뱃속에 불을 삼켰다고 생각했다. 뭔가 끊어지는 듯 한 섬뜩한 느낌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들은 이내 어 마어마한 고통으로 변했다. 그러나 우극에게는 그 고통을 느끼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뻑－! 청년의 두 번째 주먹이 그의 턱에 작렬한 것이었다. 우극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자신의 턱이 꺾어질 듯 돌아가는 것을 희미하게 느꼈다. 새빨간 피가 안개처럼 그의 눈앞에서 확 피어 올랐다. 그것뿐이었 다. 우극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뒤로 넘어졌다. 쿵－! 청년은 손을 툭툭 털며 이번엔 적천도부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 했다. 한편 그 순간, 적천도부는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채 자신의 바지춤을 막 끌러 내리려 하고 있었다. 희옥상은 사지를 꼼짝할 수가 없어 머리만 도리질치는 가운데 안 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안 돼, 안 된단 말야!" "흐흐흐… 요것아, 조금 있다가 내게 사정을 하지나 말아라." 적천도부는 말과 함께 혀끝을 싹 다시더니 희옥상의 입술을 향해 포개어 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돌부처로 변해 버리기라도 한 듯 적 천도부의 동작이 딱 정지되었다. 신발, 느닷없이 발가락이 삐죽 튀어 나와 있는 신발 하나가 그의 입술과 희옥상의 입술 사이를 가로막은 것이었다. 적천도부는 처음엔 그것이 신발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두어 차례 눈을 껌벅인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냄새 나는 신 발임을 알아차렸다. 그의 안면이 와락 구겨졌다. "웬 놈……?" 그의 시선이 신발을 더듬어 올라가다가 마침내 그 주인의 얼굴과 딱 마주쳤다. 순간, 적천도부의 안색이 엄청난 경악과 당혹으로 물들었다. "너, 너는……." "늙은이면 늙은이답게 행동하시오. 아시겠소?" 청년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잘랐다. 적천도부가 놀라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퍽－! 청년의 발끝이 적천도부의 콧잔등을 정통으로 내질렀다. "아이쿠!" 적천도부의 몸이 활에 맞은 짐승처럼 붕 떠오르는 듯하더니 나가 떨어졌다. 그는 아픈 것도 잊은 채 황급히 몸을 일으켰으나 이미 콧등은 처 참하게 박살이 난 후였다. 붉은 피가 줄줄 그의 코를 타고 쏟아져 내렸다. "이, 이런 개잡종 같은……." 말하다 말고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거령쌍 패가 피거품을 뿜어 내며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뻗어 있는 광경을 발견한 것이다. 적천도부는 비로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거령쌍패를 이토록 간단히 눕힐 수 있다면 절대 자신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오랜 강호경험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불신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청년 의 모습을 아무리 뜯어 봐도 거령쌍패를 때려 눕힐 정도의 무공이 있는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네, 네놈은 누구냐?" 그러나 청년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는커녕 시선조차 주지 않았 다. 곧장 희옥상에게 다가가 쓰러진 그녀를 부축해 일으킨 청년은 마 치 다독거리듯 부드러운 수법으로 제압된 전신혈도를 풀어 주었 다. 희옥상은 아직 악몽 같은 순간에서 벗어난 게 믿어지지 않는 듯 망연한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이 싱긋 웃으며 그녀의 옷을 툭툭 털어 주었다. "다친 데는 없나?" "……?" 희옥상은 그제야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코피를 줄줄 흘리며 서 있 는 적천도부와 청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당신이… 정말 저들을 때려 주었어요?" "그래, 몹시 세게 때려 주었지.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감동적인 눈길로 바라볼 필요는 없어. 별로 수고한 것도 없으니까 말이야." "……!" 희옥상은 새삼 눈을 크게 뜨고 청년을 바라보았다. 한편, 이 때 적천도부는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한 청년의 태도에 화가 치밀 대로 치밀었다. 그가 강호에 나온 이래 언제 이처럼 무시를 당한 적이 있었던가? 비록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청년이 사이한 술수를 사용해 거령쌍패를 제압한 게 분명하다고 믿었다. 그런 판국에 이미 묵사발이 된 자신의 얼굴을 생각하자 절로 뿌드 득 이가 갈렸다. "개잡종! 네놈의 몸뚱이를 수천 조각으로 도려내지 않는다면 내 사람이 아니다!" 그 말과 함께 적천도부는 허리춤에 번개같이 손을 가져갔다. 그가 빼어 든 것은 종잇장처럼 두께가 얇은 은면도(銀面刀)였다. 파릇한 광채를 섬뜩하게 내뿜는 이 칼은 본래 무림인들 사이에는 삭혼도(削魂刀)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이미 삼십여 명에 달하는 인간의 살점을 오려 낸 관록을 자랑하는 이 삭혼도가 다시 뱀의 혓바닥처럼 날렵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한두 번 삭혼도를 흔들어 본 적천도부는 언제나처럼 가 슴 속 깊은 곳에서 피에 대한 욕망이 무섭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 꼈다. "흐흐흐… 애송이놈! 아예 흔적도 남지 않게 난도질을 해 주겠 다!" 그러나 청년은 여전히 희옥상의 어깨만 감싸안고 있을 뿐,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적천도부는 내심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며 득달같이 청년의 등 을 덮쳐 갔다. 이어 사정없이 삭혼도를 내려치는 순간, 적천도부 는 돌연 무슨 요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일시에 모든 동작을 딱 멈 추었다. 그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청년이 막 그를 향해 빙글 돌아선 것뿐 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건만 적천도부는 행동을 멈추었던 것이다. 그것은 적천도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나는 휘두르던 칼을 멈추어야 했을까?' 그는 잠시 후에야 그 이유를 알아 냈다. 그것은 바로 청년의 눈빛 때문이었다. 막 돌아서는 순간, 청년의 깊숙한 동공에는 한 줄기 신비로운 광 채가 번쩍 떠올랐다가 사라졌는데… 그 눈빛은 비록 짧은 순간에 떠올랐다 사라졌지만 적천도부로 하여금 일찍이 한 번도 대한 적 이 없는 위압감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뭐랄까? 사람의 영혼과 몸을 하나로 묶어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 리는 눈빛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적천도부는 곧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그런 느낌들을 뇌리 에서 지워 버렸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신이 착각에 사로잡혔던 게 분명하다고 억지로 믿어 버렸다. 그 때 청년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그를 의아스런 표정으로 쳐다 보며 물었다. "당신, 지금 뭐하는 거요?" 적천도부는 움찔 엉거주춤한 자세를 가다듬었다. "보, 보면 모르느냐? 노부는 지금 너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부지중에 대답은 했으나,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대 답이었다. 청년은 피식 실소를 했다. "쯧쯧, 그러길래 처음부터 사정을 봐주는 게 아니었는데." 적천도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또다시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휩쓸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무리 자신이 계집 때문에 정신이 팔려 있었 다고는 하지만, 상대가 눈 깜짝할 새에 거령쌍패를 해치우고 코앞 까지 접근할 때까지 몰랐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만약 아까 그 때에 상대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대로 황천길을 갈 뻔했지 않은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적천도부는 등줄기에 얼음장 같은 전율을 느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났을까?' 생각할수록 치밀어올랐던 노화는 사그러지고 대신 알 수 없는 두 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그러나 그는 애써 그러한 내색을 감추었 다. 그는 짐짓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협박조로 말했다. "흐흐흐… 애송아, 아직도 늦지 않았다. 구만 리 같은 청춘이 아 깝다면 냉큼 여기서 떠나라." 그러자 청년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침중하게 말했다. "원래는 나도 그럴 생각이었소. 하지만 당신이 칼을 뽑는 걸 보고 본의 아니게 생각이 바뀌었소." "이 칼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시오. 내가 알기로 무사는 칼을 뽑기 전에 세 번을 거 듭 생각해야 하고, 일단 결심한 후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 라야 도리인 것이오. 한데, 만약 내가 그냥 가 버리면 어렵게 칼 을 뽑은 당신의 체면이 뭐가 되겠소?" "……?" 적천도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거리며 청년의 말뜻을 음미했다. 그 말이 자신을 희롱하는 것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질 급한 적천도부의 안색은 다시 붉으락푸르락 제멋대로 변해 버렸다. "이 노옴!" 그는 짐승처럼 한 소리 부르짖으며 맹렬한 기세로 삭혼도를 내뻗 었다. 수십 줄기의 도영(刀影)이 삽시간에 청년의 몸을 휘감았다. 이 도법은 매우 절륜한 것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빠져 나갈 구멍이 한 군데도 없는 것 같았다. 위기의 순간, 청년의 입에서 가벼운 칭찬이 흘러 나왔다. "좋소. 매우 훌륭한 도법이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허리를 가볍게 뒤틀었다. 그러자 적천도 부의 초식들이 마치 일부러 피해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조리 비 껴 지나가는 게 아닌가? 적천도부의 눈에서 무서운 폭광이 뿜어졌다. "미꾸라지 같은 놈! 어디 언제까지 피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그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삭혼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파파팟－! 번쩍거리는 눈부신 도광(刀光)이 해일처럼 일어나 청년에게 밀려 들었다. 바야흐로 적천도부로 하여금 관서무림계에서 터줏대감으로 행세하 게 한 삼십육식삭혼도법(三十六式削魂刀法)이 본격적으로 펼쳐지 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 도법은 마디마디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펼 쳐지면 그야말로 성난 파도가 휘몰아치듯 걷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한번 펼쳐지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마는 독랄한 도법(刀法) 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흐흐……!' 도법이 펼쳐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천도부의 마음은 자신감으 로 충만해졌다. 그는 삼십 년이 넘도록 패배를 모르고 지내 온 삼십육식삭혼도법 의 위력대로라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삼십 초 정도에는 눈앞의 이 애송이를 능히 저 세상으로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헉!' 삼십 초는 고사하고 미처 삼 초도 다 펼쳐 내기 전에 적천도부는 장승처럼 뻣뻣하게 굳어져야 했다. 그 이유는 바로 청년의 손가락 때문이었다. 어찌 된 판국인지 뭔가 번쩍 하는 광채를 본 순간, 적천도부는 청 년의 손가락 하나가 자신의 콧구멍 속에 박혀 있음을 발견했던 것 이다. 혼비백산! 적천도부는 안색이 흙빛으로 변한 채 이제는 벼락이 떨어져도 꼼 짝 않겠다는 듯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렸다. 그 때 청년이 스스로 움찔 놀라며 황급히 적천도부의 콧구멍 속에 서 손가락을 빼냈다. "어이쿠, 내 손가락이 왜 거기 들어가 있을까? 뭐 묻지는 않았는 지 모르겠군." 그는 황망스럽게 손가락을 적천도부의 옷자락에 비볐다. 실로 우스꽝스런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적천도부는 여전히 공포에 질린 얼굴로 미동도 하지 못했 다. 그의 노련한 강호경험에 의하면 이런 상황하에서 몸을 움직이는 건 곧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된다!' 적천도부의 아래턱이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너무 놀란 탓인지 입조차 잘 떨 어지지 않았다. 당금천하에 이렇듯 자신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고수가 있다는 것 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이… 이건 사술(邪術)이 틀림없다!"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가까스로 적천도부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청년이 빙그레 웃었다. "사술이든 요술이든 간에 당신이 연장자임을 감안하여 이쯤에서 손을 거두겠소." 말을 마치자,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희옥상 쪽으로 천천 히 돌아섰다. 순간, 그의 입에서 신비로운 미소와 함께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독백성이 흘러 나왔다. "잠종미리유성보… 배우기만 하면 천하 그 누구의 콧구멍이라도 자유자재로 청소할 수 있다고 한 광치화상의 말은 일단 증명된 셈 이군. 후후, 하지만 광치화상 그분도 나처럼 직접 시험을 해 보았 을까?" 그 음성은 너무나 작아 적천도부와 희옥상 두 사람이 다 듣지 못 했다. 적천도부는 청년이 등을 보인 채 터벅터벅 희옥상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넋 나간 듯 바라보았다. 그의 몸이 재차 부르르 진동했다.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이다!' 그는 비실비실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의 양쪽 눈알은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며 도망갈 퇴로를 찾았다. 그리하여 막 그가 몸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청년의 음성이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일순, 적천도부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심정이었다. 얼굴이 완전히 우거지상으로 일그러진 적천도부는 떨리는 음성으 로 다급히 말했다. "이, 이것 보게 젊은이! 사실 말은 안 했지만 이 늙은이의 집엔 이미 십 년 전부터 거동을 못하는 노모와 여덟 명의 어린 손자가, 아니 참 아홉 명이지! 아무튼 노부는 절대 죽어서는 안 될 몸이라 네. 내 말은 모두 정말이네!" 적천도부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 비통한 신색으로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그들은 누가 보살피겠는가? 내 말은 절대 거 짓이 아니네. 맹세라도 할 수 있네!" "나는 당신을 죽이겠다고 말한 적이 없소." 청년이 빙긋 웃었다. 적천도부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당신은 졸지에 조카를 둘씩이나 잃고 코뼈까지 부러졌으니, 그 피해가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괘, 괜찮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저 두 놈은 진작에 죽었 어야 마땅한 녀석들이었네. 내가 기억하기로 저 두 놈은 태어난 이래로 지금까지 좋은 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네. 나쁜 놈들 같으니!" 적천도부는 두 시신을 잡아 먹을 듯 노려보더니 청년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니 젊은이는 조금도 신경 쓸 것 없네. 그저 이 늙은이나 불 쌍하게 생각해 주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이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 래서 다소나마 위로를 해 주고 싶소." "……!" 그 말을 듣자 적천도부의 조그만 쥐눈이 반짝 광채를 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내심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저 놈은 또 지금 나를 놀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망할 잡종놈 같으니!' 적천도부는 내심 입이 터져라 욕을 했지만, 겉으로는 더욱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휴우,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지난날 다소나마 나쁜 짓을 한 게 더 욱 후회되네. 정말 젊은이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사람들 중 가 장 심성이 착하고 어진 사람이네. 내 무슨 면목으로 젊은이의 호 의를 받아들이겠나? 말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그러나 청년의 태도는 완강할 정도로 변함이 없었다. "아니오. 당신은 반드시 위로를 받아야 하오." 이어 그는 희옥상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순간, 희옥상은 아름다운 눈에 얼떨떨한 빛을 발하며 움찔 되물었 다. "뭘… 달라는 거죠?" "무자혈경인지 뭔지 하는 것 말야." "예?" 희옥상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 그러니까 내가 목숨을 걸고 가까스로 얻은 그것을 설마 하니 저 늙은이에게 주겠단 말인가요?" 청년은 바로 맞추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줘." "안 돼요, 절대 줄 수 없어요!" 희옥상은 마치 불에 덴 듯 양 손으로 가슴 부위를 감싸쥐며 뒤로 물러섰다. 청년은 깊숙한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정말 안 되겠나?" "안 돼요!" "정말인가?" "그래요!" "정말?" 청년이 세 번째 거듭 물었다. 희옥상은 순간, 목구멍까지 솟구쳐 오른 말을 꿀꺽 삼켜야만 했 다. 그것은 청년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녀의 섬세한 교구가 파르르 떨렸다. 상대로 하여금 질식할 듯한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눈빛. 희옥상은 지금까지 이토록 자신을 위축시키는 눈빛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어쩐지 거절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 다. 그 때 청년이 빙긋 웃으며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이리 줘." 희옥상의 아름다운 얼굴은 온통 울상이 되었다. "만약 당신이 필요해서 달라고 했다면 벌써 줬을 거예요. 하지만 ……." "줘." "……!" 희옥상은 더 이상 협상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청년의 말에 꼼짝 못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청년이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생명보다 귀중한 것은 없어. 알겠나? 지킬 능력이 없으면 보물은 공연히 살신지화(殺身之禍)만 안겨다 줄 뿐, 없느니만 못하다는 뜻이지." 이 한 마디는 희옥상의 마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조금 전에 있었던 위기를 상기해 냈다. 몸서리가 쳐지는 끔찍한 기억이었다. '그래, 만약 이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희옥상은 일순,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녀의 시선이 청년의 얼굴에서 뭔가 읽어 내려는 듯 기이하게 빛 났다. 본래 성품이 쾌활한 탓으로 이 순간에도 그녀에게선 우울한 기색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내 활짝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의 말이 옳은 것 같아요." 말과 함께 그녀는 품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러다 돌연 그녀는 안색이 크게 변한 채 황급히 품속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아니?" "됐어. 주기로 마음먹었다면 준 거나 다름없지." 청년이 빙그레 웃으며 품속에서 양피지로 엮어진 책자 하나를 꺼 내 들었다. 희옥상은 그 책자를 보고 눈을 휘둥그래 떴다. "무자혈경! 그게 왜 당신의 품속에서 나오는 거죠?" "그렇게 어려운 질문은 하는 게 아니야." 청년은 아리송한 대꾸를 하더니 무자혈경을 적천도부에게 내밀었 다. 적천도부는 그 책자를 대하자, 눈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무자혈경(無字血經)> 책자의 겉 표지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황급히 눈을 비 비고 다시 보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의심을 하려 해도 그것은 무자혈경이 틀림없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적천도부는 하마터면 번개같이 손이 나갈 뻔했다. 그러나 그는 그 충동을 가까스로 꾹 눌러 참았다. 그는 안면근육을 심하게 실룩거리며 확인하듯이 청년을 바라보았 다. "그, 그러니까… 이 늙은이를 위로해 주겠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걸 주겠다는 뜻이었나?" "그렇소." "……!" 적천도부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는 생각 같아선 입이 째져라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앞의 괴물 같은 놈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하랴? 하도 감격해서인지 적천도부는 눈물마저 글썽거리며 입을 떼었다. "젊은이, 이 늙은 것을 이토록 생각해 주니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내 본시 이런 물건에는 별 욕심이 없으나 자네의 호의 를 생각해서 받겠네." 말과 함께 내미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무자혈경이 갑자기 증발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그런 이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천도부는 마침내 청년의 손에서 무자혈경을 건네 받았다. 적천도부는 손 안 가득 전해져 오는 무자혈경의 감촉에 전신을 부 르르 떨었다. '흐흐흐… 분명 꿈은 아니다! 천하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차 지하려는 물건이 이토록 쉽게 내 손에 들어오다니!' 그는 두 조카가 죽고 자신의 코뼈가 부러진 게 오히려 전화위복 (轉禍爲福)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천도부는 강호의 능구렁이답게 여전히 그런 기쁨을 내색 치 않고 청년에게 한 마디 못을 박아 두는 걸 잊지 않았다. "젊은이, 자네는 정말 부처보다 어질고 착한 사람일세. 내 이 은 혜는 훗날 반드시 잊지 않고 갚겠네." 청년은 일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말은 고맙소이만, 당신에게 그런 날이 있을는지……." 독백처럼 나직한 음성이었다. 적천도부는 흠칫 안색이 경직되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냥 혼자 해 본 말이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사람의 운명이라서 말이오. 여하튼 당신의 볼일은 끝난 것 같으니, 이만 가 보시오." 청년의 이 대답은 어딘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적천도부에게는 그 말을 자세히 되새길 마음의 여유가 없 었다. "알겠네. 그럼 노부는 이만……." 적천도부는 뒷걸음질로 몇 발자국 떼어 놓더니 돌연 몸을 홱 돌렸 다. 동시에 그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산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그것은 적천도부 자신조차 놀랄 쾌속한 신법이었다. 몇 번인가 허공에 솟구쳤다 가라앉았다 하더니 그의 모습은 흔적 도 없이 사라졌다. 청년은 적천도부가 사라진 곳을 잠시 응시하더니 문득 나직한 한 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죄가 없으되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 하더니… 쯧쯧!"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죠?" 희옥상이 궁금한 듯 묻자, 그는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야. 그건 그렇고……." 청년은 좌우를 쓱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대충 우리도 볼일이 끝났으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 군." 그 말에 희옥상은 아름다운 눈을 휘둥그래 뜨며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본래의 안색을 회복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 다. "이제 보니 당신은 무공만 높은 게 아니라 농담도 무척 잘하시는 군요." "농담이라니?" 청년이 의아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별안간 희옥상의 아름다운 얼굴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럼 농담이지 뭐예요. 설마하니 당신은 멀쩡한 처녀 한 사람을 농락해 놓고 이대로 그냥 훌쩍 떠나겠단 말인가요?" "멀쩡한 처녀를 농락했다니? 내가 언제?" 청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희옥상은 순간 잡아 먹을 듯 매섭게 그를 흘겨보았다. "흥! 다짜고짜 입맞춤을 하고 내 몸을 떡 주무르듯 매만진 것은 누구죠?" "어어,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요구에 의한……." "이유야 어찌 되었든 결과는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마땅히 이번 일에 책임을 져야 해요." 희옥상은 아름다운 얼굴에 야멸찬 빛을 띠었다. 청년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허허… 이거야 순 떼거지로군." "떼거지면 어떻고 알거지면 어때요? 자, 이제 우리 이만 가요." 희옥상은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 가득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청년에게 바싹 접근했다. "여기는 싫어요. 피비린내가 역겹게 느껴져요." 이 음성은 거의 콧소리에 가까웠다.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얼렁뚱땅 청년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고 있었다. 청년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희옥상의 옥용에 고혹적인 미소가 아름답게 피어 올랐다. "아까는 당신이 좋아질 것 같다고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어 요. 저는 이미 당신이 좋아졌으니까 말예요." 희옥상은 그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새가 지저귀듯 말을 이었다. "저는 방금 무자혈경을 건네 주면서 결심했어요. 지금 이 순간부 터 죽을 때까지 당신을 쫓아다니기로. 그리고 당신이 원한다면 언 제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말이에요." "이것 봐, 하지만……." "저에 관해선 아무것도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저는 세상 천지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천애고아예요. 그리고 당신에게 이미 열 명 아니라, 수십 명의 여인이 있다고 해도 괜찮아요. 설령 몸종으 로라도 당신과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만족하겠어요." "……!" 청년은 그만 할 말을 잊고 희옥상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사랑 고백이라 할 수 있었다. 차마 여인으 로서는 하기 어려운 말을 그녀는 거침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희옥상은 애써 밝게 웃으며 명랑하게 떠들곤 있었 으나, 두 눈에는 차마 뿌리칠 수 없는 절박한 염원과 애원의 빛이 가득 충만했다. 그러한 빛은 자신이 천애고아라는 말을 할 때 더욱 여실히 나타났 으며, 몸종 운운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뽀얀 물기로 변해 번져 나왔다. 청년은 감동을 느꼈다. 그는 희옥상의 기이한 호소력에서 빠져 나 올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뿌리칠 수 없는 이유는 청년도 눈 앞의 이 귀엽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절대 싫지 않다는 데 있었다. "……." 청년은 천천히 손을 들어 희옥상의 복숭아 같은 뺨을 어루만졌다. 어느 새 그녀의 얼굴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름이 옥상이라 했었나?" 목이 잠긴 탓인지 희옥상은 대답은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한 그녀의 자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했다. 청년은 그녀의 팔짱 낀 팔을 가볍게 끌어당기며 힘있게 말했다. "가자." "……!" 희옥상의 섬세한 교구가 순간, 파르르 떨렸다. 치솟는 격정으로 인해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는 것도 잊어 버리 고 활짝 웃음 지었다. "거봐요! 난 진작부터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니까요!" "바보 같으니, 눈물이나 닦아." "흥!" 희옥상은 귀엽게 입술을 내밀더니 소맷자락으로 쓱쓱 눈가를 문질 렀다. 이어 그녀는 제 세상을 만난 어린아이처럼 청년의 팔에 매달린 채 깡총깡총 보조를 맞추며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그런데 한 열 발자국쯤 걸어갔을까? 희옥상이 문득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생각난 듯 청년에게 물었 다. "참, 당신 이름이 무엇이죠?" 청년은 짐짓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이런 엉터리 같은 경우가 있나? 아직 이름조차 모르는 사 람에게 평생을 맡길 생각을 했다니……." 희옥상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이어 그녀는 맑은 눈은 귀엽게 흘기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피이, 까짓 것 이름 따위가 뭐 대순가요? 좋아하면 그만이지." "그런데 왜 물어?" "그야……." 희옥상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데, 청년이 그런 그녀 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잘 들어. 내 이름은 소군이야. 성을 합치면 사마소군이 되지. 나 이는 너보다 한 살 많은 열여덟 살이니까 앞으론 오빠라고 부르도 록 해. 알겠나?" "사마소군… 사마소군……!" 희옥상은 꿈꾸는 듯한 눈길로 열심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렇다. 오 년의 세월. 숨겨진 세월 속에서 완전히 소년의 탈을 벗고 늠름한 대장부로 성 장한 사마소군의 첫 등장이었다. ━━━━━━━━━━━━━━━━━━━━━━━━━━━━━━━━━━━ 제 20 장 연속살인(連續殺人) ━━━━━━━━━━━━━━━━━━━━━━━━━━━━━━━━━━━ 아름답고 한적한 산길을 여인과 같이 걷는다는 것은 확실히 즐거 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 여인이 누구나 한 번쯤 술에 취한 듯 몽 롱한 눈길로 바라봐야 하는 절색이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희옥상과 나란히 산길을 걷는 사마소군의 심정은 약간 달랐다. 그는 즐거움은커녕 가능하다면 이후 여인과 두 번 다시 같은 길을 걷지 말아야겠다는 이상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 희옥상의 입, 작고도 도툼한 저 입술 어디에 그토록 많은 말이 숨 겨져 있었던 것일까? 아예 쉬지도 않는다. 도대체 숨을 쉬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 다. 크게는 강호무림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를 비롯, 작게는 길바닥 돌 멩이의 생김새에 이르기까지 화제로 연결, 쉴새없이 종알거리는 그녀였다. 대개의 사내들이 언젠가는 깨닫게 되는 것처럼 사마소군도 여인이 이토록 말 많은 동물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 수다에는 한 가지 귀여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홍수처 럼 많은 말을 쏟아 내면서도 의식적으로 사마소군의 신상에 대한 물음은 일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마소군은 그것이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희옥상의 섬 세한 마음씨임을 잘 느낄 수 있었다. 그 기특한 배려가 눈물겹도록 고마왔는지 나중에는 사마소군도 덩 달아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신나게 웃어제끼곤 했다. 때문에 만약 누군가 이들을 목격했다면 시샘이 날 정도로 정다운 연인(戀 人) 사이가 틀림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그토록 눈부시게 움직이던 희옥상의 입 술이 돌연 거짓말처럼 딱 정지했다. 길 앞쪽에 고정되어 있는 그녀의 시선에 당혹과 놀라움이 가득 물 들어 가는 것을 보고 사마소군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시체, 길가의 한 나무에 한 노인이 기대어 선 채 죽어 있었다. 그가 서 있는데도 시체라고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건 가슴과 복부 에 주먹만한 크기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괴이한 점은 내장과 뼈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전혀 피가 밖으 로 흘러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놀라온 시체는 바로 적천도부였다. 희옥상은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으나, 사마소군은 이미 예 측했던 일이라는 듯 전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무자혈경을 가지고 그렇게 기뻐 날뛰며 도망가더니, 결국 여기서 죽고 말았군." "저, 저 사람이 왜 여기서 죽어 있는 거죠?" 희옥상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으나 사마소군은 대답하지 않 고 시체에 가까이 접근했다. 그는 잠시 시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독백처럼 말했다. "단섬권(丹閃拳)에 심장과 복부가 꿰뚫렸군. 이건 바로 철권(鐵 拳)이라 불리는 파산신권(破山神拳) 여문기(如門其)의 솜씨가 분 명해." 뒤에서 듣고 있던 희옥상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산동제일(山東第一)의 권법가라는 파산신권 말인가요?" "그래." "그건 이상한 일이군요. 그는 좀처럼 강호에 나타나지 않는 은거 고수인데, 어찌 이런 곳에 나타나 적천도부를 죽였죠?" 사마소군은 시체에서 눈길을 거두며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내가 말했던 적이 있을걸. 사람은 죄가 없는데 보물을 가진것이 죄가 될 수 있다고……." "아……!" "아까 내가 적천도부에게 무자혈경을 내줄 때 주위에는 최소한 스 무 명 이상의 고수가 암암리에 몸을 숨긴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 었어. 내가 판단하기로 그 중 적천도부에 비해 무공수위가 떨어지 는 인물은 불과 다섯 정도였지." "그런……!" 희옥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비로소 사마소군이 왜 자신에게 무자혈경을 달라고 했는지 환히 깨달았다. '그 때 만약 내가 끝내 거절을 해서 이 사람이 화가 나 그냥 가 버렸다면?' 희옥상은 새삼 적천도부의 시체를 바라보며 가볍게 몸서리를 쳤 다.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적천도부만 해도 그녀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고수인데, 게다가 그 보다 뛰어난 고수가 무려 열다섯이나 있었다니… 뒷일은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하지 않은가? 이 때 사마소군이 다시 발걸음을 떼어 놓으며 그녀에게 눈짓을 보 냈다. 희옥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그를 따라 걷다가 곧 조심스럽 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지?" "당신은 어떻게 주위에 그처럼 많은 고수들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요?" 사마소군은 싱긋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내가 만약 삼십 장 밖의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면 믿겠나?" 이 한 마디는 희옥상을 또다시 큰 충격과 놀라움 속으로 몰아넣었 다. 그녀는 그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공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예로부터 천이통(天耳通)이라는 신공이 있어 오륙 장 이내의 어떤 소리도 감지해 낸다는 말은 그녀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삼십 장 밖이라면 눈으로 사람을 식별해 내기도 어려운 거 리인데, 어찌 그 곳에서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감지해 낼 수 있 단 말인가? 그야말로 꿈처럼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세상에, 그런 무공도 존재하나요?" 희옥상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피식 웃어 버렸을 뿐 개의치 않았다. "있지. 굳이 이름을 갖다 붙인다면 감각무예라고나 할까?" "이름을 갖다 붙인다고요? 그런 이름도 없는 무공이 그토록 뛰어 났단 말인가요? 감각무예라는 말은 또 무엇이죠?" 질문이 홍수처럼 와르르 희옥상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사마소군은 그런 그녀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라운 입심이군! 나중에 천천히 알게 될 테니 서두를 것 없어.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면 머리가 터질 우려가 있으니까." "아직 아는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터진 사람은 없으니, 대답해 줘요." "왜 없어? 바로 내 처남이 머리가 터져 죽었어." "피, 혼인도 안 한 사람이 무슨 처남이 있담?" 희옥상은 시무룩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무지 사마 소군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마소군은 정말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면을 그녀에게 안겨 주고 있었다. 생긴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요, 입신지경(入神之境)의 무공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고, 성품을 말하자면 여러가지 좋은 면만 골라서 지닌 것 같고, 예측불허의 행동을 하는가 하면 차림새는 상거지의 몰골이다. 희옥상은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강호의 이름난 여러 젊은 청년 고 수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 중 사마소군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아, 머리가 아파 오는군. 이러다가는 정말 이 사람 말대로 머 리가 터져 죽을지도 몰라.' 희옥상은 결국 의미 없는 한숨만 푹 내쉬고 말았다. 그런데 그 한숨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전방에 또 하나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광경이 나타났다. 희옥상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녀는 아까보다는 비록 덜했으나 놀라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시체예요." 희옥상은 자신도 모르게 사마소군에게 바짝 안겼다. 사마소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말했다. "만약 내 예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건 바로 파산신권 여무기일 것이다." "예?" 희옥상이 그 말에 새삼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살피니, 죽은 인물 은 얼굴이 고슴도치처럼 무성한 구레나룻으로 덮여 있고 일신에는 푸른 청의장포를 입은 모습이었다. 언뜻 보기에 육순 가량으로 보이는 그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있었 는데, 오른손이 기형적으로 크다는 점이었다.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그 주먹은 어찌나 단단해 보이 는지 인간의 손이라기보다는 쇠뭉치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러한 특징들은 희옥상으로 하여금 그가 파산신권 여무기가 틀림 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했다. "피부가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고 칠공(七孔)에서 누르스름한 피고 름을 흘리는 것을 보니, 독(毒)에 당한 게 분명해요." 희옥상이 쳐다보기도 끔찍하다는 듯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사마소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 자는 독중독(毒中毒)이라 불리는 화혈학정산(火血鶴精 散)에 당했군. 그럼 이 자를 죽인 인물이 절명독군(絶命毒君) 부 평탁(夫平卓)이라는 얘기지." 희옥상은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을 모르고 독을 말할 수는 없어. 한 번 보고 독의 종류와 사용 자를 알아 낼 정도라면 그 방면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고 마는구나.' 그러나 희옥상의 놀람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한 식경이 지나 대략 오 리(里)의 산길을 내려오는 동안 시체는 여덟 구나 더 발견되었다. 사마소군은 그 때마다 죽은 사람의 내력은 물론, 살인에 사용된 무공, 병기 등을 한눈에 파악했다. 때문에 희옥상은 이제 한 무더기의 시체를 봐도 놀라지 않을 정도 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사건 이 터질 때마다 호기심에 찬 눈을 자연스럽게 사마소군의 얼굴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아홉 번째 시체가 발견된 곳은 평지가 그리 멀지 않은 산구(山口) 어귀에서였다. 시체는 나뭇가지에 배를 걸친 채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시체의 몸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암기(暗器) 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몸뚱이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눈, 코, 입, 귓구멍에 이르기까지 각종 암기들이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지독하구나!' 희옥상은 절로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사마소군은 물끄러미 시체를 올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비도(飛刀), 비침(飛針), 신권(神圈), 혈적자(血赤子), 봉황전 (鳳凰箭)… 억세게 재수 없는 자로군. 이렇게 천하에 존재하는 모 든 암기를 골고루 맞고 죽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 그 말을 듣고 있던 희옥상이 뭔가 생각나는 게 있는 듯 깜짝 놀라 며 입을 떼었다. "그럼 이 자를 죽인 인물은……." "그래, 천하에 암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고수들은 많으나 이렇듯 삼십육 종(種)의 암기를 한꺼번에 쏟아 낼 수 있는 인물은 음산 (陰山) 혈영곡(血影谷)의 혈영대부인(血影大婦人)밖에 없다." "……!" 희옥상은 만면에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황망히 주위 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천수여래 당욱과 더불어 무림 이대 암기왕 (暗器王)으로 불리는 혈영대부인이 출현했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앞서 보아온 대로라면 그녀 역시 누군가에게 당했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희옥상의 그러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바로 십여 장 떨어진 전방에 열 번째의 시체는 나뒹굴고 있었으 며, 한눈에 보기에도 분명 여인지신(女人之身)이었다. 비록 싸늘하게 식은 시체였으나 그녀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사 내로 하여금 무서운 욕정(慾情)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화려한 미모 를 지니고 있었다. 삼십대의 중년부인(中年婦人)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피부는 십육 칠 세 소녀처럼 탄력이 있었다. 풍만하게 무르익은 온몸의 굴곡을 의식적으로 드러낸 듯 보이는 붉은 궁라의(宮羅衣) 차림은 평소 그녀의 성품이 얼마나 정열적이었는지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아름다운 그녀의 몸은 실로 처참하게 유린당해 있 었다. 얼굴 부위는 거짓말처럼 깨끗했으나 사타구니로부터 배 위 까지 촘촘이 상흔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 틈 사이로 마치 수십 마리의 시뻘건 벌이 뒤엉켜 있는 창자들 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렇다. 말할 것도 없이 그녀는 바로 혈영대부인이었다. '우웁!' 그 광경을 발견한 희옥상은 하마터면 구역질을 할 뻔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옥용을 일그러뜨리며 황급히 시선을 외면했다. 그 사이 사마소군은 벌써 그 시체로 다가가 자세히 살핀 후였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뜻밖인데? 월영신도(月影神刀) 사우량까지 나타났다니……." 고개를 돌리고 있던 희옥상이 자신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았다. "월영신도가 누구지요?" "쯧쯧, 어찌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은 기억하고 좀 쓸 만한 인물들 은 모르는가?" "아… 이제야 생각났어요. 좌수쾌도(左手快刀)의 일인자(一人者) 이며 무림십팔도객(武林十八刀客)의 우두머리라는 월영… 신도… 세상에!" 희옥상은 말하다 말고 그만 고개를 설레설레 내흔들었다. 그 이름 이야말로 그녀로서는 입에 담기조차 엄청난 가공스런 것이었기 때 문이다. 한마디로 월영신도 사우량 같은 존재라면 언제든지 마음먹기에 따 라 무림(武林)을 크게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거두라 할 수 있었 다. 이 때 망연자실해 있던 희옥상의 귓속으로 사마소군의 조용한 음 성이 스며들었다. "일 도(刀)에 열여덟 줄기의 도흔(刀痕)을 남길 수 있는 자는 그 자밖에 없어." 희옥상은 그 말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저 혈영대부인의 몸에는 단 하나의 도흔(刀痕)밖에 없 잖아요?"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야. 열여덟 개의 도흔은 점차 시간이 흐르 면서 하나씩 나타나게 되지. 모두 나타나려면 닷새의 시일이 걸린 다. 서서히 몸 전체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는 거야." "……!" 희옥상은 그 말을 듣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잠시 서 있다가 씁 쓸한 고소를 지었다. 이어 그녀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더니 탄식했다. "결국 무자혈경의 최종 임자는 월영신도 사우량이 되고 마는 군 요. 아직까지 천하의 그 누구에게도 패한 적이 없다는 불패(不敗) 의 도객이니까 말이에요." "그걸 단정짓기엔 아직 이르지." 사마소군은 그녀를 향해 느릿하게 돌아섰다. 희옥상은 아름다운 두 눈에 흠칫 어리둥절한 빛을 띠었다. "그럼 이 근처에 그를 죽이고 무자혈경을 빼앗을 수 있는 인물이 또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요?" "월영신도가 비록 좌수쾌도의 일인자이긴 하나, 천하 모든 도객 중 일인자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너는 곧 이 오빠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오빠라고?' 희옥상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볍게 붉혔다.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라도 하듯 사방을 살폈다. 믿기 어려웠지만 사마소군의 말대로라면 월영신도마저도 근처 어 딘가에서 시체로 변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시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사마소군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희옥상은 얼떨결에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사마소군은 마치 한가로운 풍류서생처럼 주위를 유유자적 살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혈영대부인이 월영신도에게 당하자, 다른 인물들은 무자혈경을 깨끗이 포기하고 떠났다. 보물보다는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 을 비로소 깨달은 거지. 반면 목적을 달성한 월영신도는 큰 길로 나서기보다는 으슥한 산길을 선택했다." 듣고 있던 희옥상은 갈수록 의아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마소군은 마치 옆에서 낱낱이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만만 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는 사마소군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말한 것은 한 번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옥상이 반신반의하는 사이에 사마소군은 숲길에서 벗어나 울창 한 어느 숲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대략 반 다경쯤 나아갔을까? 희옥상은 어두컴컴한 숲 속만 계속 이어질 뿐 결국 아무것도 보이 지 않자,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놀림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훌륭하신 오빠는 더 이상 점쟁이 노릇을 할 수 없게 된 것 같군요. 안 그런가요?" "후후… 버릇 없는 동생 같으니. 너는 그 말을 조금만 더 참는 게 나을 뻔했다." "……?" 희옥상이 그의 말뜻은 몰라 아름다운 눈망울을 크게 굴리는 순간 이었다. 사마소군이 걸음을 조용히 멈추고 오른쪽 커다란 바위 아래쪽 그 늘을 응시했다. 희옥상은 흠칫 그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기다가 만면에 경악의 빛을 띤 채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월영신도? 그, 그런데 살아 있잖아?' 한 사람, 어두컴컴한 그늘 쪽에 등을 보인 채 우뚝 서 있는 그림 자가 있었다. 그는 핏물에 담궜다가 뺀 듯 시뻘건 색깔의 혈의(血衣) 차림이었 다. 키는 약간 후리후리한 편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음산하면서도 유연 한 기운을 풍겼다. 등뒤로 빗어 내린 머리결은 옷 색깔에 반사된 탓인지 붉은빛을 발 했다. 그 붉고 긴 머리결은 때마침 불어 오는 숲 속 바람에 불길한 여운 을 풍기며 수초처럼 흐느적거렸다. '월영신도가 틀림없어!' 희옥상은 그의 옆구리에 매어진 칼집 없는 도(刀)를 보고 내심 부 르짖었다. 도(刀)가 왼쪽 옆구리에 매어져 있음은 물론, 그의 왼손이 막 칼 을 뽑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가? 월영신도는 어찌 된 판인지 그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더 이상 움직 이지도, 칼을 뽑지도 않았다. 이 때 사마소군이 공포에 질려 있는 희옥상의 귓가에 대고 소근대 듯이 말했다. "이리 와, 인사를 시켜 줄 테니." 말과 함께 그는 그녀가 반항할 여유도 주지 않고 손을 잡아 이끌 더니 월영신도의 앞쪽으로 걸어갔다. 순간, 희옥상의 시야에 상대의 용모가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서른 살 가량 되었을까? 약간 희어진 매부리코만 아니라면 보기 드물게 준수한 얼굴이었 다. 웬일인지 그의 두 눈은 이 순간 경악과 불신의 빛을 담은 채 찢어 질 듯 부릅뜨여져 있었다. 희옥상은 그 험악한 눈빛을 감히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고 사마소 군의 등뒤로 숨었다. "무, 무서워요… 오빠." "걱정할 것 없다.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예?" 희옥상은 그 말에 아름다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새삼 월영신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로소 상대가 전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그녀의 입에서 곧 당혹성이 흘러 나왔다. "주, 죽은 사람이 왜 멀쩡하게 서 있죠? 사람 간 떨어지……."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불현듯 월영신도의 얼굴 미간 부위에 한 줄기 희미한 혈선(血線)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을 본 때문이었다. 그 희미한 혈선은 점차 뚜렷하게 변하더니, 이마 아래로 길게 이 어지기 시작했다. '저, 저……!' 희옥상이 놀라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붉은 혈선이 어느 새 입술, 턱을 지나 목덜미까지 내려가더니 아랫배 쪽으로 뻗어 내렸 다. 그것은 흡사 붉은 지렁이가 그의 미간에서 빠져 나와 기어 내려가 듯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맙소사!' 희옥상은 아름다운 얼굴색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겁에 질려 사마 소군에게 안기듯 달라붙었다. 순간이다. 쩌적……! 마치 잘 익은 수박이 쪼개지듯 월영신도의 몸이 혈선을 따라 반쪽 으로 갈라졌다. 땅바닥은 삽시간에 시뻘건 혈수와 와르르 쏟아져 나온 내장 조각 등으로 어지럽혀졌다. "어맛!" 희옥상은 기겁을 하며 사마소군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마소군은 담담한 시선으로 조각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죽은 사람이 서 있을 수는 없지. 단지 이 자는 너무도 뛰어난 무 예를 지녔기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 완벽하게 몸의 중심을 유지하 고 있었을 뿐이야." "……!" "비명도 못 지르고 황천행을 했군. 한 발자국만 먼저 왔어도 우리 는 그가 죽는 광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도, 도대체 누가 저 사람을 죽였죠?" 희옥상은 여전히 시체를 외면한 채 가볍게 몸서리를 치며 물었다. 사마소군은 그녀의 섬세한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너도 봐서 알았겠지만 월영신도는 그 자신이 그토록 믿어 왔던 쾌도(快刀)를 미처 뽑아 보지도 못하고 단 일 도에 저 지경으로 당했다." 그 말에 희옥상은 방금 전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 있던 월영신도 의 흉측한 표정을 상기했다. 아니, 굳이 그 경악 어린 표정이 아 니더라도 엉거주춤했던 그 팔의 위치는 분명 칼을 뽑기 직전의 것 이었다. 순간, 희옥상은 또 다른 공포가 전율처럼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느낌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나! 천하제일의 좌수쾌도라는 월영신도가 미처 칼을 뽑기도 전에 그를 죽일 수 있는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희옥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 그토록 칼솜씨가 빠른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엄연히 벌어져 있는 현실을 어찌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죠?" "누가 이 자를 죽였느냐고 묻는 건가?" "그, 그래요." "말해 줘도 모를 거야." 사마소군은 신비롭게 미소지었다. 희옥상은 더욱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자꾸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요.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 죠?" "무정쾌도 능한비." 희옥상의 아름다운 옥용에 곤혹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월영쾌도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면 최소한 수십 번은 그 이름을 들어 보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리 기 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런 명호와 이름은 전연 생각해 낼 수가 없 었다. "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난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부해 오고 있 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바보가 되어 버린 느낌이에요." "그렇게 자신을 나무랄 필요는 없어. 아직까지는 이 세상 모든 사 람들이 모르는 이름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머지않아 세상 사람들 은 그 이름을 귀가 따갑도록 듣게 될 것이다. 아니, 그 이름 석 자를 입에 담기조차 꺼려 할 날이 곧 올 거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희옥상의 두려움은 어느 새 강렬한 호기심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어 가며 과장된 어투로 설명했 다. "암, 내가 아는 단 한 가지 도법(刀法)만으로 그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천하를 통틀어 절대 세 사람을 넘지 못하지." "어떤 세 사람을 말하는 것이죠?" "현재 백화맹의 맹주인 천벽검제 심목풍,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강 호제일의 신비살수라 불리는 혈풍향… 이 이름들은 세 살 먹은 어 린아이들도 알고 있을 테니, 너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 듣고 있던 희옥상은 그만 섬뜩섬뜩 가슴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 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이름들인가? 하나는 천하무림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당당히 실력으로 무림 맹주의 권좌에 오른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이요, 또 하나는 숱한 전설과 신화를 간직한 채 오늘도 신비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무림최고의 천재살수가 아닌가? 희옥상으로선 아직까지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무정쾌도 능 한비라는 사람이 감히 그런 거인들과 비견된다는 사실이 실로 놀 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마지막 한 사람은 또 누구죠?" "역시 말해 줘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아직 강호에 전 혀 알려진 바 없는 인물이니까." 사마소군의 거침없는 대답에 희옥상은 아름다운 눈망울을 반짝 빛 냈다. "혹시 오빠 자신이 아닌가요?" "나?" 사마소군은 짐짓 크게 놀랐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말했다. "너는 이 오빠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었구나. 정확히 말하자 면 난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전혀 쓸모없는 인간이다." "그게… 무슨 뜻이죠?" 희옥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녀가 그 애매모호한 말뜻을 깊이 생각할 여 유를 주지 않았다. "너는 환상비도(幻想秘徒) 냉자기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느냐?" "환상… 비도라고요?" 희옥상은 전혀 생소한 이름에 잠시 얼떨떨해 있다가 이내 피식 쓴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사마소군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신이 바보가 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평소 강호무림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해 왔지만 지 금은 이 무슨 꼴인가? 결국 희옥상은 풀죽은 얼굴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모르는 것이 전혀 없으니까 말예 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그래… 아무것도 모르지만 귀여운 동생아, 궁금한 게 뭐지?" "무정쾌도 능한비라는 사람은 오빠와 잘 아는 사이인가요?" "그렇다. 그는 나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몇 사람 가운데 하 나다." 사마소군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나 하고 물었던 희옥상은 금세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어떻게 생긴 사람이죠? 나이는 몇 살이나 되었나요? 오빠는 어떻게 해서 그 사람과 알게 됐지요?" 사마소군은 정신 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입을 놀란 듯 응시했다. "그렇데 궁금하면 네가 직접 물어 보려므나." "피이, 괜히 대답해 주기 싫으니까. 이름조차 처음 듣는 판에 그 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직접 물어 보라는 거예요?" 희옥상은 샐쭉 토라진 채 아름다운 두 눈을 매섭게 흘겼다. 사마소군은 순간, 신비롭게 미소지었다. "네가 그를 만나 보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다. 왜냐면 그는 지금 바로 네 등뒤에 있으니까 말이다." '등 뒤라고?' 희옥상은 움찔 놀랐다. 그러나 그녀가 그 말을 믿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사마소군이 자 신을 놀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피이, 이제 보니 오빠는 순 거짓말쟁……." 말하면서 그녀는 속는 셈치고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어머나!" 놀랍게도 그녀의 등뒤에는 정말 한 사람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짐작할 길이 없었다. 어찌 보면 그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희옥상의 시야에 비친 그의 모습은 그 토록 조용하고 고요한 것이었다. 외견상으로 짐작되는 나이는 서른 안팎이다. 일신에는 평범한 청의를 입었는데, 생김새는 그보다 더 평범하다 고 볼 수 있었다.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얼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살찐 것도 아니고 마른 것도 아닌 몸 할 것 없이 특별한 구석이라곤 찾 아볼 수가 없었다. 희옥상은 그러한 상대의 용모에 내심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런 인물이라면 설령 눈여겨 보았다고 해도 나중에 기억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평범한 시골 농부라고 봐주기에 딱 알맞은 그의 허리에는 매우 부 자연스러워 보이는 물건이 매어져 있었는데, 바로 묵빛 장검이었 다. 차라리 그가 책자를 들고 있었더라면 이보다는 덜 어색할 것 같았 다. '이 사람이 오빠가 그토록 칭찬한 무정쾌도 능한비란 말인가?' 새삼 다시 본 것은 물론이고, 아무리 거듭 눈을 씻고 보아도 거짓 말 같았다. 평범하다 못해 어딘지 어리숙하고 순박하게 느껴지는 이 인물이 월영신도 사우량을 단칼에 저승으로 보냈다고 누가 믿겠는가? 청의인, 아니 무정쾌도 능한비가 그러한 희옥상의 내심을 짐작이 라도 한 듯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것은 능한비로서는 그녀를 향한 호의의 표시였다. 그러나 그것 은 어디까지나 능한비의 생각에 불과했다. 그 웃음은 너무나 어색 해서 희옥상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그럴 것이 능한비가 태어난 이래로 남한테 웃음을 보인것은 맹세코 열 번을 넘지 못했다. 때문에 방금 전의 웃음도 남이 보기 엔 그저 입꼬리 근육이 약간 위로 말려 올라간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 씰룩거리는 듯한 웃음도 사마소군과 시선이 마주치자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능한비는 곧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능한비, 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마치 바람 소리처럼 무심한 음성이었다. 그 모습에 사마소군은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 거추장스런 인사 따위는 하지 말라고 내 이미 여러 차례 말했거늘……." "죄송합니다. 습관이 되어서……." 능한비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고개는 약간 아 래로 숙인 채였다. 그 광경에 희옥상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아연실색, 놀라 벌어 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이유야 구구절절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이젠 완전히 바보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 때 문득 사마소군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는 능한비의 뒤쪽 무성한 수림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꼬리가 있었군. 누군가?" 그러자 능한비는 침착한 음성으로 공손히 대답했다. "속하도 모릅니다. 벌써 반 나절이나 제 뒤를 미행하고 있었지만 살의가 없는 것 같아 그냥 놔 두었습니다. 분부하신다면 당장 처 리……." 그의 말은 중도에서 뚝 끊어졌다. 문제의 수림 속에서 그 순간 하 나의 그림자가 불쑥 걸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돌연히 나타난 이 인물은 실로 묘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낡은 황의를 입었는데 새끼줄로 팔 다리, 허리 등을 꽉 동여 매고 있어 언뜻 뱀을 잡아다가 파는 일로 생계를 이어 가는 땅꾼 을 연상시켰다. 게다가 몇 년 동안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듯한 머리칼은 뒤로 넘겨 진 게 아니라 앞으로 넘어와 있었다. 당연히 그의 얼굴은 무성한 머리칼로 온통 가려져 있어 알아보기가 불가능했다. 그 괴상한 얼굴을 흔들거리며 그는 사마소군에게 포권의 예를 표 했다. "제가 틀리게 찾아온 게 아니라면… 귀하는 사마대협이 맞습니 까?" '음?' 사마소군은 내심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낯선 인물이 어떻게 자신을 알아보았단 말인가? 갑자기 기이한 예감이 그를 엄습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눈앞의 인물을 제압해서 추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 인물에게 는 묘하게도 능한비의 말대로 사람을 안심시키는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나를 아는 듯한데, 당신은 누구요?" "주위를 물리쳐 주십시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산발괴인은 힐끔 희옥상과 능한비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궁금한 표정을 하고 있던 희옥상은 그 말에 상큼 눈썹을 치켜세웠다. 사마소군이 위엄 있게 말했다.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의 수족과도 같은 사람들이오. 염려 말 고 말하시오." "……." 산발괴인은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더니 어쩔 수 없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정히 그러시다면 이 곳에서 말만 전하고 가겠습니다." "……?" "낙양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서천(西賤)이란 곳에 상대루(上大 樓)라는 주루가 있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꼭 들러 주시기 바랍 니다. 그럼……." 말을 마치자마자 산발괴인은 정중히 예를 표하더니 고무공이 튀듯 탄력 있는 신법(身法)으로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사마소군은 흠칫 뭔가를 물으려 했으나 이미 산발괴인은 저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언뜻 신색이 굳어졌다. '서천 상대루!'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능한비를 응시했다. "그대는 정말 괴상한 꼬리를 달고 왔군." "죄송합니다, 부주님." "그런 말이 아니야. 그보다 지시한 것은 어찌 되었나?" "여기 있습니다." 능한비는 즉시 소맷자락에서 뭔가를 꺼내 사마소군에게 내밀었다. 순간, 희옥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자혈경!' 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분명 무자혈경이었다. 상황으로 보아 능한비가 월영신도를 해치운 후 손에 넣은 듯했다. 사마소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받아 들더니 품속에 갈무리했다. 마치 빌려 줬던 물건을 되돌려받듯 자연스러운 동작 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생각난 듯 희옥상을 힐끔 돌아다보았다. "줄까?" "아, 아니예요. 전 이제 그 책자만 보아도 소름이 돋아요." "흠, 그거 안됐군." 사마소군은 씨익 웃으며 무자혈경을 갈무리한 가슴 쪽을 툭툭 두 드렸다. "이로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무자칠서(無字七書) 중 세 권은 내 가 얻은 셈이군." "세, 세 권씩이나요?" "음." "그럼 오빠가 이 곳에 나타난 것은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나요?" 희옥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마소군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같은 말이라도 좀 듣기 좋도록 하는 버릇을 갖도록 노력해라. 예 를 들자면 계획적이라는 말보다는 의도하는 바가 있었느냐라든지 … 뭐 그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게 아니냐?" "……?" 희옥상이 어리둥절하여 재차 뭔가 물으려는 순간이다. 사마소군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툭 두드리더니 몸을 돌렸다. "가자."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발자국 장단에 맞춰 고래고래 악 까지 쓰기 시작했다. 희옥상은 넋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선 채 그의 뒷모 습만 쳐다보았다. 그렇다. 이젠 더 이상 놀랄 여력도 없었다. 사마소군을 만난 이래로 그녀의 예상대로 벌어진 일이라곤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온 천하가 찾고 있는 무자칠서 중 세 권이나 그가 갖고 있다는 건 더군다나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자칠서란 도대체 무엇인가? 본래 무자칠서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건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만박초자(萬博草子) 우문통(宇文通)이란 사람의 입을 통해서였 다. 우문통은 자칭 천하에서 모르는 비밀이 없다는 만사무불통지(萬事 無不通知)의 신인(神人)이라고 늘 자랑삼아 떠돌아다니던 괴인이 었다. 그는 기문둔갑이나 역리성복(易理星卜)에 남다른 일가견을 지니고 있었지만 직업은 한마디로 세객(說客)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재간 있는 만담꾼이었던 것이다. 객잔 같은 장소에서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전설이나 신비스런 신화(神話) 따위를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대신 약간의 은자를 받 아 생계를 이어 가는 세객들은 어디를 가나 한두 명씩 있게 마련 이었다. 우문통은 그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존재로, 특히 무림정세나 족 보내력 같은 것이라면 석 달 열흘이라도 줄줄 이야기를 쏟아 낼 수 있었다. 게다가 우문통은 상승의 해학과 익살을 이야기에 곁들일 줄 알았 다. 때문에 일단 우문통이 말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하면 울던 아 이도 입이 찢어지게 웃고, 방금 부모의 상(喪)을 치르고 나온 사 람일지라도 배꼽을 쥐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십여 개월 전이었다. 이 유명한 우문통이 평소 때와는 달리 매우 엄숙하고 침통한 표정 으로 개봉의 어느 주루에 나타났다. 금세라도 그 자리에 쓰러질 듯 비통하고 지친 그의 모습에 사람들 은 매우 놀라며 의아롭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날, 만박초자 우문통은 단 몇 마디 짤막한 말을 남기고 는 주루를 떠나 버렸다. 그 짤막한 말은 무슨 전설도 신화도 아닌,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었다. <머지않아 이 땅에는 온통 비밀에 휩싸인 일곱 권의 책자가 나타 날 것이다. 그것은 이름하여 무자칠서(無字七書)라 불려지리라. 또한 그 무자칠서에는 각기 한 가지씩의 비밀이 담겨져 있을 것이 다. 노부 감히 조상 십대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건대, 만약 무자칠서의 비밀을 모두 얻는 자가 있다면 그는 능히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 을 지상최강의 강자(强者)가 될 수 있으리라.> 그 날 이후 만박초자 우문통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그저 의아하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일개 세객의 말을 귀담아 믿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 모두가 우문통의 말을 까맣게 잊어 버릴 즈 음, 그 예언은 놀랍게도 현실로 나타났다. 무자칠서의 출현! 무림인들은 어느 곳에든 무자칠서 가운데 한 권이 나타났다 하면 벌 떼처럼 나타나 죽고 죽이는 참극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실제로 그것은 존재했던 것이다. 이 지상최강의 강자라는 말은 설령 삼류무사라 할지라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 아니겠는가? 오늘 적천도부와 월영신도 등의 죽음을 부르며 곤명산에 나타난 무자혈경은 지금까지 출현한 무자칠서 중 다섯 권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앞서 출현한 네 권의 무자칠서를 누가 획득했는지는 그야말로 오 리무중, 뜬소문만 무성할 뿐 알려진 바가 없었다. 알려진다는 건 곧 전 무림인의 표적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죽음과 연결되 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중 두 권이 이미 무림에는 이름조차 없는 사마소군이란 청년의 품에 들어가 있고, 다시 한 권이 더 들어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사실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무림은 또 한 차례 발칵 뒤집힐 게 분명했다. 경혼동백(驚魂動魄)! 이 순간 희옥상은 놀랍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정말 사마소군이 보면 볼수록 신비스런 사람이라고 생각했 다.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른 것이리라.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희옥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흔들며 탄식했다. 그녀가 주춤하는 사이 사마소군은 이미 산 아래 저만큼 멀어져 가 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느릿느릿 걸어가는 것 같은데도 실상은 행운유수처 럼 빠른 속도였다. 희옥상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 같이 가요!" 그녀는 행여 그를 놓칠세라 뾰족성을 지르며 황망히 달려가기 시 작했다. 오늘 같은 날이 사흘만 계속된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미쳐 버릴 것 이라고 생각하며. 태양(太陽), 살인적인 폭염을 내뿜던 팔월의 태양은 서서히 서천 (西天) 한 귀퉁이에 그 피곤한 몸을 눕히고 있었다. ━━━━━━━━━━━━━━━━━━━━━━━━━━━━━━━━━━━ 제 21 장 풍운(風雲)의 낙양성(洛陽城) ━━━━━━━━━━━━━━━━━━━━━━━━━━━━━━━━━━━ 낙양(洛陽). 주왕조(周王朝) 이래 후한(後漢), 위(魏), 진(晋), 서진(西晋), 북위(北魏), 수(隋), 당(唐) 등 아홉 왕조에 걸쳐 무려 구백삼십 사 년 간에 걸쳐 칠십 명의 황제가 영화를 누린 왕성의 땅. 북쪽으로는 망산(忘山)의 줄기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 는 용문산을 비롯 중악숭산(中嶽嵩山)의 산세가 장대하게 굽이쳐 흐른다. 이러한 지형의 형세는 굳이 병법가가 아니더라도 한눈에 병가필쟁 (兵家必爭)의 천연적 요새임을 실감케 해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누대에 걸쳐 숱한 왕조들이 거쳐 감에 따라 이 낙양은 자연스럽게 중원문화의 중심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이름난 기인이사들이 낙양땅에서 가장 많이 배출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비록 수 년 전에 대원제국이 멸망하고 명조(明朝)가 황도를 연경 (燕京)으로 정해 그 영화로움이 옛날에 비해선 많이 퇴색됐다고는 하나, 그 문화의 찬란함이나 문물의 번성함 등은 아직도 중원최대 의 고도(古都)로 손꼽히는 데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때는 한낮의 후끈한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팔월 아흐렛날 의 술시(戌時) 무렵이다. 이 곳 대도 낙양성 안에서는 실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청(大廳). 그것은 하나의 거대하고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대청이었다. 입구를 들어서면 맨 먼저 맞은편 정면으로 드높은 몇 계단의 석대 가 보인다. 석대로 오르는 계단들은 반들반들 광택을 발하는 것으로 보아 희 귀한 백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또한 눈에 비치는 바닥에는 온통 순홍색으로 푹신거리는 융단이 깔려져 있고 대청 중앙에는 시선을 압도하는 웅장한 원주(圓柱)가 세워져 있는데, 거기엔 빙 둘러가며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청룡상 (靑龍像)이 보기 좋게 양각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가히 웬만한 사람은 들어서기가 무섭게 숨을 죽일 수밖 에 없는 위세가 아닌가? 그렇다. 제아무리 낙양에 거장대택(巨莊大宅)이 많다고는 하나, 이처럼 시선을 압도하는 위엄으로 가득 찬 곳은 오직 한 군데밖에 없다. 이 곳은 바로 낙양성을 다스리는 성주(城主)의 집무처였다. 석대 위 용봉태사의에는 지금 일신에 자색관복(紫色官服)을 걸친 한 비대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아니, 앉아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 큰 태사의에 몸을 파묻고 있 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나이는 대략 오십 세 가량 되었을까? 그는 한마디로 전형적인 관료풍의 인물이었다. 짧은 턱수염에 완고하게 꽉 다물어진 입, 마치 졸음을 참고 있기 라도 한 것처럼 나태하게 내려뜬 눈,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피부 빛 등은 그의 성품이 얼마나 오만한지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인물은 이 곳 낙양성주인 왕극륜(王克輪)이었 다. 본래 왕극륜은 사람됨이 편협하고 소심하여, 아무리 후하게 봐 준 다 하더라도 낙양성 성주 같은 자리를 감당할 위인은 못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부의 그늘에 묻혀 이름조차 없던 그가 홀연 히 낙양성주라는 중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공공연한 수 수께끼라 할 수 있었다. 정가(政街)에서는 이미 왕극륜이 어마어마한 뇌물을 써서 벼락 출 세한 것을 훤히 알고 있었다. 단지 아직까지도 풀려지지 않은 수수께끼는 대체 그가 얼마만큼의 뇌물을 쏟아 부었길래, 다른 성(城)도 아닌 낙양성의 성주에 부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사람들이 오직 하나, 왕극륜을 무서워하는 게 있다면 그처럼 엄청 난 재물울 모아 바칠 수 있었던 신비스런 능력이리라. 영락제(永樂帝)가 천자로 등극하고 난 후 아직 중앙정가가 채 정 비되지 않은 상태라, 왕극륜 같은 벼락출세는 도처에서 왕왕 일어 나 화제를 뿌리고 있었다. 그런 인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왕극륜인 것이다. 각설하고, 이 순간 왕극륜은 태사의 옆에 놓인 곤옥탁자(坤玉卓 子)에 기계적으로 손을 가져가며 뭔가를 계속 입에 집어 넣고 있 었다. "음, 철 이른 포도는 약간 신 게 단점이란 말이야." 마치 잠꼬대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 독백 성. 곤옥탁자 위의 황금접시에 가득 놓여져 있는 건 푸르고 투명한 청 포도였다. 황금접시 바로 옆에 꽂혀 있는 은황촉의 불빛을 받아서 인지 굵은 포도송이들은 신비로운 광채를 뿌려 내 더욱 먹음직스 럽게 보였다. 그것을 연신 하나씩 떼어 내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는 왕극륜의 모 습은 어찌 보면 사람이 아닌 거대한 두꺼비처럼 느껴졌다. 그의 바로 등뒤 쪽에는 눈매가 귀밑까지 찢어진 마흔 살 가량의 갈의인이 팔짱을 낀 자세로 우뚝 서 있었다. 부리부리한 생김새에 기형적이리만큼 아래로 축 처진 매부리코가 용맹스런 독수리의 얼굴을 연상시켰다. 이 인물은 왕극륜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임무를 띤 탈혼마검(奪魂魔劍) 곡정기(曲正己)라는 위인이었다. 평소 그는 항상 팔짱을 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하나의 깊은 이유가 있었다. 그의 검(劍)은 종잇장처럼 부드럽고 연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 허 리에 요대처럼 감고 다닐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팔짱을 낀 그의 자세는 가장 신속하게 검을 뽑을 수 있는 최상의 자세가 되는 것 이다. 곡정기는 관병이 아니라, 왕극륜이 엄청난 급료를 주기로 하고 고 용한 무림고수였다. 대개의 소심한 관료들이 다 그렇듯 왕극륜도 수천 명의 관병들보 다는 한 명의 출중한 절정고수가 자신을 확실하게 보호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생각은 당사자인 곡정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직 책상 왕극륜을 철저히 보필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주인에 대한 어떤 경멸감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 해도 그랬다. '빌어먹을… 별로 하는 일도 없으면서 조금이라도 일거리 같은 게 생기면 꼭 뜸을 들인단 말이야.' 그의 눈은 왕극륜과 대청 아래에 서 있는 호부창랑(戶部倉郞) 조 상(曹常)을 습관처럼 번갈아 훑어보고 있었다. 평소 때라면 원래 이 시간에는 잠자리에 드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보고를 받는 날이었다. 물론 이 늦은 시간에 받는 보고가 공사(公事)에 관한 것일 리는 만무했다. 성내 재정의 전반을 맡고 있는 호부창랑 조상은 벌써 반 시진 전 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왕극륜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때다. 드디어 반 시진 만에 왕극륜의 입이 열렸다. "그러니까, 총액이 얼마라고?" "예, 성주님. 은자로 환산하여 합친 이번 달 수입은……." 조상은 황망히 입을 열다가 도로 급히 입을 다물었다. 왕극륜이 오른손을 느릿하게 들어 그의 말을 제지시켰기 때문이다. "이것 봐, 조상." "예?" 조상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 내며 수중의 장부에서 눈을 뗐다. 왕극륜은 입 안의 포도씨를 퉤 내뱉으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 다. "도대체 네 머릿속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느냐?" "무, 무슨 말씀이신지?" "지난달에도 가르쳐 주었잖아? 수입이란 말은 어딘가 듣기가 거북 하니 기부금이란 말로 고치고, 또 본래부터 본좌는 황금을 좋아하 니 환산총액을 말할 때는 항상 은자가 아닌 황금으로 말하라고. 기억하나?" "시, 시정하겠습니다." 조상은 그제야 왜 자신이 반 시진 동안이나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왕극륜은 포도알을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리며 느릿하게 조상을 내 려다보았다. "명심해. 또 한 번 실수하면 넌 그 날짜로 이거야. 알겠나?" 왕극륜은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조상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부르짖듯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러니까 이번 달 기부금 총액이 얼마라고?" "그러니까……." 조상은 재빨리 품속에서 주판을 꺼내어 땀을 뻘뻘 흘리며 계산을 하더니 대답했다. "총 황금 칠만팔천오백여섯 냥입니다." "틀림없나?" "그렇습니다." 조상은 비로소 내심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왕극륜은 갑자기 싸늘한 눈빛이 되었다. "그럼 지난달에 비해 고작 이만 냥밖에 늘지 않았단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이 자식들 봐라? 감히 나 왕극륜을 어떻게 보고?" 왕극륜은 신경질적으로 포도를 꼭꼭 씹더니 씨를 입술 쪽으로 몰 았다. "퉤! 좋아, 이 따위로 본좌를 무시하고 무사히 낙양땅에 발 붙이 고 살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조상은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알 수 없다 고 생각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음." 왕극륜은 뒷걸음질로 물러가는 조상을 바라보며 왕포도를 만지작 거렸다. 이윽고 조상이 대청을 벗어날 즈음에서야 그는 재차 불만 어린 중 얼거림을 흘려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가 돼먹지 않은 놈들이야. 내가 이 자리 를 차지하려고 쏟아 넣은 황금만 해도……." 말하다 말고 그는 흠칫 입을 도로 다물었다. 등뒤에 서 있는 탈혼 마검 곡정기를 의식한 것이다. 왕극륜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곡정기가 그를 향해 희미하게 마주 웃어 보였다. 굳이 숨 기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왕극륜은 내심 입맛을 다셨다. '징그러운 놈 같으니!' 그는 고개를 바로 돌리고 벌떡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곡정기가 정중히 예를 취했다. "침소로 드시겠습니까?" "음." 왕극륜은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곡정기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왕극륜을 침소까지 호위하는 건 그의 임무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막 계단을 내려온 순간이었다. "나 좀 봅시다, 성주나리." 돌연 낯선 음성 하나가 두 사람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왕극륜과 곡정기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와락 돌렸다. 일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듯 크게 놀랐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을까? 두 사람, 한 명은 어느 새 왕극륜이 앉았던 태사의에 몸을 파묻고 앉아 있었으며 다른 한 명은 그 옆에 유령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태사의에 앉은 인물은 대략 이십 세 전후로 그림처럼 수려한 용모 를 지니고 있었다. 우윳빛 투명한 피부는 여인의 그것이 무색할 지경이요, 주사빛 붉 은 입술에 상대의 혼을 빨아들일 듯 깊숙한 눈빛은 문자 그대로 성광(星光)이라! 뿐인가? 그 유려한 준안에 검은 머릿결은 단정히 뒤로 빗어 넘겼 고, 딱 균형 잡힌 몸에는 엷은 자색 광택이 흐르는 천축산 최고급 비단 용포를 걸쳤다. 그야말로 만인을 굽어보는 제왕의 기상이요, 고귀한 혈통을 자랑 하는 귀공자의 풍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반면 그와는 달리 옆에 서 있는 다른 한 명의 용모는 너무나도 대 조적이었다. 약간 창백해 보이는 안색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를 담고 있는 데다, 눈빛은 독사의 그것보다 냉혹하게 느껴졌다. 묶지도 않은 머릿결은 허리께까지 치렁치렁 흘러내려 있었고, 일신에는 먹빛보 다 검은 흑의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인상은 냉막하다 못해 찬바람이 일 듯했고, 일신에 서 풍기는 기도는 문자 그대로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이었다. "너, 너희들은……?" 왕극륜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놀랍다 못해 꿈을 꾸는 심정이었다. 저들이 대체 사람인가? 유령인가? 아니, 그보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하지만 그보다 더욱 놀란 건 바로 곡정기였다. 왕극륜이야 무공을 모르니 그렇다치고 자신은 어째서 저들의 출현 을 털끝만큼도 감지해 내지 못했단 말인가? 이 때 왕극륜이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누구냐? 네, 네놈들은 대체 이 곳에 어떻게 들어왔느냐?" 그러자 태사의의 자의귀공자가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물고 대꾸했다. "나는 화옥이라 하네. 이 친구는 냉자기라 하고." 오오, 화옥! 그리고 냉자기! 어찌 이 이름을 잊을 손가? 사마소군과 함께 장한별부에 들어갔던 여섯 아이 가운데 두 사람 이 드디어 몰라보도록 달라진 청년들로 성장하여 그 모습을 나타 낸 것이다. 한편, 그들의 내력을 알 길 없는 왕극륜은 당연히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화옥? 냉자기?"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이름에 왕극륜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곡정기가 호위고수답게 호통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닥쳐라. 네놈들은 설마하니 이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찾아온 건 아니렸다?" 그의 살벌한 기세에 화옥이 기품 있게 미소하며 대꾸했다. "낙양성 성주의 집무처가 아니겠는가? 내가 앉은 자리는 바로 성 주의 자리이고." "대가리에 피도 제대로 마르지 않은 젊은 놈이 그걸 알면서도 어 찌 그렇게 방자스레 언행을 돌릴 수 있단 말이냐? 이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곡정기는 대갈 호통성을 지른 뒤에 왕극륜에게 정중히 읍을 했다. "성주께선 잠시만 계십시오." "조심하게. 예삿놈들이 아닌 것 같으니." 왕극륜은 흐트러진 위엄을 되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곡정기는 살기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화옥과 냉자기를 번갈아 보며 앞으로 성큼 나섰다. "네놈들이 이 곳을 잘 알면서도 침입했다는 것은 곧 좋지 못한 뜻 을 품고 있다는 말인데… 맞나?" 순간, 냉자기가 힐끔 그를 쓸어 보며 처음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 다. "녀석, 밥만 축내는 식충이인 줄 알았더니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군." "……!" 곡정기의 안색이 홱 변했다. 음산한 그의 눈매가 파르르 경련했 다. "방금 그 말, 나에게 한 것이냐?" "쯧쯧, 역시 식충이였군. 한 번 말한 것을 못 알아듣는 걸 보니 말이야." "이 노옴!" 곡정기의 신형이 태사의 쪽으로 섬광처럼 폭사해 나갔다. 동시에 그의 허리에 감겨져 있던 연검이 번쩍 뽑혀지며 뱀의 혓바닥처럼 영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추리릭－! 그야말로 번개가 휘몰아치는 듯 눈부신 신법(身法)이자 발검이었 다. 상황을 지켜보던 왕극륜의 입가에 빠르게 득의의 미소가 스쳤다. '역시 그만한 황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놈이야.' 왕극륜은 곡정기가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젊은 놈들의 머리를 두 쪽으로 갈라 놓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찰나지간 번쩍 하는 검광(劍光)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마치 환상처럼 짧은 일 수유에 명멸한 빛줄기! 처음에 왕극륜은 그것이 곡정기가 발출해 낸 검광인 줄로만 알았 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만 해도 두 침입자는 손끝 하나 까딱 않고 원래의 자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빛줄기가 걷히는 순간, 곡정기는 두 상대의 바로 앞에서 얼어 붙은 듯 딱 동작을 멈추고 있었다. 그의 연검은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화옥의 머리와 불과 한 치 가 량의 간격을 둔 채였다. 약간만 더 팔을 뻗어도 화옥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곡정기는 팔을 더 이상 뻗을 수가 없었다. 털끝만큼이라도 더 움직였다가는 목덜미에 닿아 있는 낯선 칼이 먼저 자신의 목을 꿰뚫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칼! 그것은 곡정기의 연검보다 더욱 얇았으며 더욱 가늘었다. 그 러나 이 기형적이리만큼 가느다란 칼은 일체의 진동도 없이 빳빳 하게 세워진 채 곡정기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이 칼을 쥐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냉자기였다.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린 왕극륜은 안색이 대변했다. 티끌만큼도 움직이지 않은 것 같은데, 언제 저러한 상황이 벌어졌 단 말인가? 그러나 정작 혼백이 달아나도록 놀란 건 당사자인 곡정기였다. 그의 안색은 핏기를 잃은 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이……." 그의 안면근육이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지금 자신이 처 해 있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믿을 수 없으리만큼 차디찬 냉자기의 음성이 그의 귓속에 스며들었다. "이건 불행한 일이다. 나는 내 환상비도(幻想秘刀)의 첫번째 제물 을 저 따위 식충이로 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건 절……." 곡정기가 무슨 말인가 내뱉는 순간이었다. 냉자기의 칼이 좌우로 가볍게 움직였다. 슥－! 곡정기의 목이 거짓말처럼 잘려 나가며 아래로 툭 떨어졌다. 비명 을 지를 새도 없었다. 떨어진 머리와 몸체에서 동시에 피분수가 쭉 뿜어져 나왔다. 냉자기는 칼을 거두어 교묘하게 빙그르르 돌리더니, 허리춤에 가 져갔다. 그러자 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다. 기구하게도 죽은 곡정기가 연검을 허리에 감고 있었듯이 냉자기는 연도(軟刀)를 허리에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곡정기는 죽는 순간까지도 냉자기의 칼이 어디서 나타났는 지 알지 못했다. 그만큼 냉자기의 칼은 빨랐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두 사람의 확실한 차이점이기도 했다. 털썩－!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곡정기의 몸뚱이가 왕극륜의 발 아래서 축 늘어졌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왕극륜의 비곗살이 소리가 나도록 부르르 떨렸 다. 얼굴색이 썩은 돼지간 빛으로 변한 건 그 다음이었다. '빌어먹을, 왜 이렇게 다리가 떨리지?' 왕극륜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했다. 그 는 아래턱을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무엇을 원하시오? 도…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터이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오!" 화옥은 싱긋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은 무척 돈이 많은 모양이군?" "그, 그렇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 다." "목숨만 붙어 있으면 얼마든지 또다시 백성들로부터 기부금조의 착취를 해낼 수 있다, 이 말인가?" 화옥의 깊숙한 시선이 정면으로 왕극륜의 면상에 꽂혔다. 왕극륜의 얼굴색이 재차 흙빛으로 변했다. "그, 그건……." "당신은 한마디로 벌레만도 못한 쓰레기다. 맞나?" "매… 매우 적절한 표현이십니다." "당신 같은 쓰레기는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없어지는 게 나아. 맞 나?" 화옥의 수려한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왕극륜은 급기야 털썩 그 자리에 엎드리고 말았다. "나, 나리! 제발 목숨만……." 화옥은 그런 그의 모습을 기묘한 표정으로 잠시 내려다보더니 말 했다. "걱정할 것 없어. 제아무리 쓰레기 같은 인간일지라도 명색이 낙 양성의 성주가 아닌가? 국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살계를 펼칠 생각 은 없다." "사, 사실이십니까?" 왕극륜은 귀가 번쩍 트이는 기분이었다. 화옥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일을 이행해야 한다." "고맙습니다!" 왕극륜은 코가 땅에 닿도록 절했다. 서너 차례 연거푸 절을 하는 그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그야말로 지옥의 문턱에서 되돌아온 느낌이었던 것이다. 화옥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잘 들어라.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가장 싫어하니까." 왕극륜은 황망히 자세를 가다듬었다. "마, 말씀하십시오." "너는 지금 몹시 심심하고 배가 고프다." "예?" "죽고 싶나?" 화옥의 음성이 싸늘해졌다. 왕극륜은 놀라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아니,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몹시 춥고, 아니 심심하 고 배가 고픕니다." 화옥의 안색이 비로소 다시 부드러워졌다. "너는 오늘따라 잠도 오지 않는다." "완전히 불면증에 걸렸습니다." "골머리를 싸맨 궁리 끝에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성내의 모든 졸개들을 모조리 참석시키겠습니다!" "죽고 싶나?" "예?" "잔치는 너 혼자 한다. 정각 자시(子時)부터 축시(丑時)까지다." 화옥의 어투는 칼로 자르듯 명료했다. 왕극륜의 살찐 얼굴이 우거지상으로 변했다. "고독한… 잔치군요?"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주위 십 장 이내로는 그 누구도 얼씬거려 선 안 된다."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습니다!" "잔치가 끝나면 모든 일은 없었던 것으로 돌아간다. 그럴 사람도 없겠지만 나중에라도 누군가 물어 보면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만 대답한다." 그 말에 왕극륜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죽은 마누라의 제삿날이었다고 말할까요?" "정각 자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잔치 준비를 시작해라." "알겠… 참,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뭔가?" 화옥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왕극륜은 가슴을 졸이며 말했다. "잔칫상을 차리려면 아무래도 요리사들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 다. 그들이 만약……." "걱정할 것 없다. 그들은 아무도 우릴 볼 수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왕극륜은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밖을 향해 목 이 터져라 외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그것은 왕극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엄청나게 큰 소리였다. 가슴 속을 바위처럼 짓누르고 있는 공포를 쏟아 내려는 듯 그외침 성은 계속 이어졌다. "게 아무도 없느냔 말이다!" 곧 밖에서 누군가가 황망히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왕극륜은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외쳐댔다. "소와 돼지를 잡아라! 곰 발바닥과 웅장(熊掌), 상어 지느러미는 물론이요, 닭이란 닭은 있는 대로 다 잡아라! 술은 금존청(金尊 淸)과 옥호춘(玉壺春)으로 대령할 것이며… 아무튼 나는 지금 몹 시 심심하고 배가 고프단 말이다! 이 허수아비 같은 자식들아!" 왕극륜의 이 발악에는 성주인 자신이 이토록 위험지경에 처하도록 전혀 방비하지 못한 수하들의 무능력에 분통을 터뜨리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밖에서 정신 없이 주문을 받아 적는 수하는 내심 이 렇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에구, 내일 당장 여길 때려치우고 떠나든지 해야지. 저런 미친 놈 밑에 있다간 나까지 돌아버리겠군.' 한편, 화옥은 길길이 날뛰는 왕극륜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가 옆에 놓여 있는 금쟁반의 청포도에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그는 포도알 하나를 똑 따서 입 속에 넣더니, 우물거리며 뇌까렸 다. "안에서는 탐관오리가 성대한 잔치를 벌여 주고, 밖에서는 수천의 군졸들이 철통같이 지켜 준다. 천하에 이보다 더 안전하고 비밀스 런 집회장소가 또 어디 있겠는가?" 화옥은 빙긋 웃으며 냉자기를 돌아다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아우?" 냉자기의 차가운 얼굴에 처음으로 가느다란 미소가 번졌다. "그렇습니다. 막내는 몹시 기발한 생각을 해냈습니다." 깍듯한 존대어, 그리고 낯선 칭호가 오고 간다. 그렇다. 이는 지난 몇 년 사이 필시 칠 인(人) 사이에 어떤 묵계 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어쨌든 이 밤에 벌어지고 있는 일은 분명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 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밤의 다른 한 귀퉁이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일수록 먹고 사는 방법도 천차만별이다. 기침 소리 하나만으로도 보따리째 싸 오는 돈 꾸러미를 수도 없이 챙기는 권력자가 있는 반면, 불과 동전 몇 닢에도 사타구니를 벌 려 줘야 하는 밑바닥 야화(夜花)들의 인생도 있었다. 낙양성 서쪽을 가로지르며 형성되어 있는 서문로(西門路)는 말하 자면 그런 하류인생들이 모여 사는 홍등가(紅燈街)였다. 사내들에게 있어서는 몇 푼의 은자만 있어도 마음껏 환락과 쾌락 을 즐길 수 있는 유혹의 거리이지만, 밤의 여인들에게 있어선 숱 한 슬픔과 비애로 엮어져 나가는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 거리는 언제나 낮에 잠들었다가 어둠과 함께 깨어난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야를 흐리게 하는 온갖 색채의 울긋불 긋한 채등(彩燈)이 내걸리고, 손님을 호객하는 노류장화(路柳墻 花)들은 혼잡하게 거리로 쏟아져 나와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술시가 넘어 가면서부터 그 분위기는 더욱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으로 무르익어 갔다. 싸구려 지분 냄새와 더불어 사내들의 질탕한 웃음소리가 골목마다 울려 퍼졌다. 물론 고객들을 유혹하는 밤꽃들의 간드러진 교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와장창－! 돌연 음습한 공기를 뒤흔들며 박살나는 소리가 진동하더니, 연이 어 뾰족한 비명성이 터져 울렸다. "아악!"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곳으로 향했다. 금세라도 무너질 듯 낡고 작은 판잣집 문이 부서지며 한 여인이 퉁겨져 나와 나동그라지는 광경이 보였다. 거리의 여인들은 그 모습을 힐끔 응시하더니 이내 무관심한 얼굴 로 외면했다. "또 시작했군." "그럴 줄 알았다니까." 사내들의 눈길이 뒤따라 거두어지고, 더 이상 아무도 그 여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나동그라진 채 신음하는 그 여인은 족히 사십 줄에 접어든 듯한 나이였다. 얼굴엔 본래의 살색과 주름을 감추기 위해 지분을 떡칠하듯 했지 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축 늘어진 젖가슴은 둘째치고라도 이미 아이를 낳았어도 셋은 낳은 것같이 아랫배가 이리저리 튼 모습이었다. 일견키에도 이미 오래 전에 이 거리를 떠났어야 했을 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 부서져 나간 문 밖으로 한 사내가 바지를 추스르며 걸어 나 왔다. 사내는 쓰러진 여인을 힐끔 쳐다보더니 침을 탁 뱉었다. "퉤! 에이 재수 없어." 침은 잔뜩 웅크린 채 쓰러져 있는 여인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여인은 눈을 내리감은 채 피식 웃을 뿐이었다. "나쁜 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씩씩거리며 좋아하더니……." 그녀의 눈가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말을 들은 사내는 막 몸을 돌려 가려다 말고 사나운 눈길로 홱 돌렸다. "뭐가 어째?" 여인은 그제야 힘없이 눈을 떴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 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나쁜 놈이잖구? 내가 처음부터 그랬잖아. 둘째 아기 병이 나서 그러니, 더도 말고 은자 두 냥만 적선하는 셈치고 주라고. 그 때 가 벌써 한 달 전이야. 하지만 네놈은 은자를 주기는커녕 생각만 나면 수시로 찾아와서 욕심만 채우고 아직 동전 한 닢 준 적이 없 어. 그러고도 네가 나쁜 놈이 아니라면 세상에 나쁜 놈 하나도 없 을……." "이년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발길질이 작렬했다. 퍽－! 둔탁한 소리가 여인의 옆구리에서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한 바퀴 데구르르 굴렀다. 그러나 그녀는 눈 가만 약간 찡그렸을 뿐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넋 나간 듯한 그녀의 화장기 짙은 얼굴엔 삶을 체념하는 듯한 빛 이 어려 있었다. 흐느끼는 듯한 그녀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약 한 첩 써 보지 못하고 딸아이는 죽었다.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나를 찾아와 너는 또 강제로 욕심을 채웠어. 딸아이가 죽은 지 채 한 시진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게 그래도!" 사내의 눈에 붉은 핏발이 섰다. 그는 미친 듯이 그녀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퍼퍽－ 퍽－! 여인의 몸은 삽시간에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그녀는 온통 피로 얼룩진 얼굴로 땅바닥을 뒹굴면서도 끝내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 았다. 대신 그녀의 눈에선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저주의 빛이 뿜어 져 나왔다. "그래, 맘대로 해! 나도 더 이상은 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알아 둬. 네놈도 절대 오래 살지는 못할 거라는걸." "미친 계집!" 사내의 눈에 흉폭한 살기가 어렸다. 그는 대뜸 달려들어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였다. 사내는 돌연 누군가의 손길이 위에서 자신의 머 릿결을 쓰다듬는 것을 느꼈다. "어? 누구……?" 고개를 흠칫 들던 사내의 눈이 휘둥그래 뜨여졌다. 어느 새 나타났는지 한 여인이 그의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는 일신에 눈처럼 희디흰 백의궁장(白衣宮裝) 차림을 하고 있 었다. 사내의 머리를 매만진 섬세한 옥수(玉手)는 그 하얀 옷자락 밑에 서 신비롭게 느껴지리만큼 뽀얀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가 놀란 건 그녀의 옷이 너무 희어서도, 그 손이 눈부 시도록 아름다워서도 아니었다. '이, 이게 사람이냐? 요물이냐?'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황홀한 사향 내음에 취하고, 그녀의 백합꽃 같은 옥용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에 넋 나가고, 빚어 내린 듯 오똑한 코와 이슬을 머금은 듯 투명한 입술에 그는 눈멀 었다. 아니, 삼단으로 곱게 틀어 올린 흑단 같은 머릿결과 대조를 이루 며 우윳빛 광택을 발하는 가녀린 목덜미 아래로 안개 속에 비치듯 은은히 드러난 몸의 굴곡에는 아예 귀까지 먹었다. 그렇다. 사내는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미녀들을 보아 왔지 만 이렇듯 천하절색은 꿈 속에서조차 본 일이 없었다. 단지 흠이라면 거짓말처럼 무표정하여 어딘가 쌀쌀하게 느껴진다 는 점이었다. '내, 내가 왜 여태껏 이 거리에서 이런 노른자를 발견하지 못했 지?' 사내, 눈멀고 귀먹어 이 순간 제 정신을 거의 잃다시피 한 사내는 발밑에 깔고 목을 조르던 늙은 기녀 따위는 까맣게 잊어 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그의 두 눈에 무서운 욕정의 빛을 이글거리며 황망히 입을 열었 다. "이, 이것 봐. 네가 나를 불렀느냐? 아니, 그… 그런 것은 아무래 도 좋아. 네 이름은 뭐냐? 어느 기루에 있느냐?" 그러자 그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백의미녀의 붉은 입술이 가볍게 열렸다. "돈 있나?" "있고 말고! 자, 이게 다 돈이다!" 사내는 허겁지겁 품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이어 그가 꺼내 든 것은 상당한 은자 꾸러미였는데 약간의 금 조 각까지 섞여 있었다. "어떠냐? 이 정도면 너와 하룻밤 같이……." 사내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백의미녀가 갑자기 그의 은자 꾸러미를 낚아채더니 쓰러져 있는 여인에게 던졌기 때문이다. 피투성이의 여인은 눈이 휘둥그래진 채 자신의 앞에 놓인 은자 꾸 러미와 백의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 이건……." "놀랄 것 없어요. 그건 이 사내가 그 동안 욕심을 채운 화대이니 까요." "……!" 여인은 아연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표독스런 눈빛으로 사내를 노 려보았다. "흥! 너는 역시 나쁜 놈이야.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으면 서도 어찌 그럴 수가 있었지?" 사내는 얼떨떨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여인에겐 대꾸조차 않고 백의미녀를 향해 물었다. "그, 그 돈을 왜 저년에게 주느냐? 그건 네 몸값……." "입 다물어. 그 대신 내 신기한 구경을 시켜 주겠다." "구경……?" 사내는 느닷없는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였다. 백의미녀가 섬세한 두 옥수를 펼쳐 보였다.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게 뭐지?" "손바닥 위? 아무것도 없잖아?" "바보. 잘 봐." 백의미녀의 아름다운 시선이 정면으로 그의 얼굴에 박혔다. 그녀의 말이 조용히 이어졌다. "따라서 해. 손바닥 위에서 꽃이 핀다." 사내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이게 무슨 미친 지랄이지? 에이, 당장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끌고 가서……' 그러나 사내의 그러한 생각과는 달리 입에선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는 대답이 줄줄 흘러 나오고 있었다. "손바닥 위에서 꽃이 핀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백의미녀는 그가 이 이상한 일을 깊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꽃은 설매화(雪梅花)다." "꽃은 설매화……." 사내가 두 번째로 뒤따라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괴변이 일어났다. 백의미녀의 하얀 손바닥 위에서 작은 새싹이 돋아 나더니 순식간 에 쑥쑥 자라나며 네 가닥 가지로 갈라지는 게 아닌가? 사내의 얼굴이 엄청난 경악과 불신으로 물들었다. '헉!' 그것은 분명 설매화 나무였다. 네 가닥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고, 연이어 네 송이 아름다운 설 매화가 피어 오른 것도 눈 깜짝할 새였다. 백의미녀의 조용한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한 송이는 입으로 가고, 두 송이는 무릎으로 가고, 나머지 한송 이는 남게 된다." "한 송이는 입으로 가고, 두 송이는 무릎으로, 나머지 한 송이는 ……." 사내의 입에서 또다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뒤따라 음성이 새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파파팟－! 백의미녀의 손바닥 위에 핀 네 송이 설매화 중 세 송이가 허공으 로 둥실 떠오르더니 사내의 몸을 향해 빛살처럼 날아갔다. 동시에 사내는 자신의 두 무릎뼈에 불로 지진 듯 화끈한 충격을 느꼈다. 그가 흠칫 아래를 내려다보니 설매화 두 송이가 무릎에 딱 붙어 있었다. '왜, 왜 이리 아프지? 다리를 꼼짝할 수 없다!' 사내는 비로소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불길한 예감이 전 율처럼 그의 등줄기를 훑어 내렸다. 그는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뜻도 이루지 못했다. 목구멍 속이 뭔가에 막힌 듯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 것 이다. '꼬, 꽃송이?' 사내는 그제야 자신의 입 속에 틀어박힌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 다. 그 때 백의미녀가 아름다운 눈에 기이한 이채를 반짝이며 손을 들 어올렸다. 그녀의 오른손 손바닥 위에는 마지막 한 송이의 설매화 가 들려져 있었다. "잘 봐, 이건 설매화가 아니라 비수(匕首)다." '비수?' 사내가 흠칫 눈을 크게 뜨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인 설매화가 시퍼런 날이 번뜩이는 비 수로 돌변하는 게 아닌가?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가, 가만 그럼 내 입 속과 무릎에 틀어박힌 건……?' 사내의 눈이 찢어져라 크게 부릅뜨여졌다.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무릎에 붙어 있던 두 송이 설매화는 간 곳이 없고, 대신 시퍼런 비수 두 개가 자루만 남긴 채 깊숙이 꽂혀 있는 게 아닌가? '으아아아악……!' 사내는 엄청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명은 입 밖으로 튀어 나 오진 못했다. 목구멍 속에 박힌 물건 때문이었다. 그것 역시 설매화가 아닌 비수였으며, 자루 쪽이 목구멍 깊이 박 혀 있었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딱 벌리자, 그 형상은 마치 징그러 운 뱀이 혓바닥을 길게 베어 문 듯했다. '끄아아……!' 사내는 안간힘을 다해 손으로 입 속에 박힌 비수를 빼내려고 했 다. 두 다리는 무릎에 박힌 비수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두 팔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팔조차 꼼짝할 수 없는 신세라는 걸 알았 다. 백의미녀의 섬뜩하리만큼 조용한 음성이 그의 귓속을 파고든 건 바로 그 때였다. "넌 이미 죽은 시체나 다름없어. 왜냐하면 넌 자신의 뜻대로 움직 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절반쯤 남에게 빼앗긴 상태 니까. 네가 지금까지 본 신기한 구경은 모두 눈의 착각에 불과해. 넌 바로 섭혼대술(攝魂大術)의 위력에 놀아난 거야." '서, 섭혼대술!' 사내는 자신의 입과 두 무릎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는 것도, 그 어마어마한 고통도 일순간 까맣게 잊었다. 그렇다.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인간의 혼을 조종하고 빼앗는 사도 비전(邪道秘傳) 섭혼대술이라는 가공할 마공이 무림에 존재한다 고. 그러나 무림인들 사이에도 전설처럼 떠도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백의미녀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이처럼 신기한 구경은 아무나 보는 게 아니야. 대부분 곧 죽을 인간들만 보게 되지. 이제 알겠어? 난 너를 죽이고 싶은 거야." "끄륵… 끅!" "소리 내는 걸 보니 목이 약간 트인 모양이군. 그러나 될 수 있으 면 그 비수를 계속 그 더러운 입 속에 처박아 두는 게 좋을 것이 다. 왜냐하면 그걸로 난 네 목숨을 걸고 한 가지 시험을 할 작정 이니까." 백의미녀는 손에 든 비수를 들고 천천히 사내의 앞으로 다가섰다. 사내는 엄청난 공포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려는 동작이었다. 주위는 믿어지지 않으리만큼 조용했다. 흥청거리던 거리의 야화들 과 몇몇 손님들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석상들처럼 그 자리에 선 채 구경을 하고 있었다. 혹자는 두려운 표정으로, 혹자는 흥미로 운 표정으로.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를 도와 주려거나 동정하는 눈 빛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사내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 따위는 저들에게 아무런 문제로 되지 못한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난 지금부터 너의 열 손가락을 모두 자르겠다. 만약 일을 끝낼 때까지도 그 비수를 입에 문 채 비명 소리를 내지 않으면 널 살려 주겠다." 백의미녀의 비수가 사내의 손에 닿았다. 일순, 사내의 안색은 완전히 흙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백의미녀의 비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 혼자서 억울하게 당한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난 오래 전에 맹 세했어. 너 같은 놈들을 깡그리 죽여 없앨 거야. 그래, 이건 나를 낳은 한 여인과 세상을 위한 제사(祭祀)야. 난 그 제주(祭主)고." 그녀가 말하는 사이 잘려 나간 아홉 개의 손가락이 땅에 떨어져 벌레처럼 바닥을 굴렀다. 끔찍한 고통을 말해 주듯 사내의 얼굴이 악귀처럼 흉측하게 일그 러져 있었다. 이마의 힘줄이란 힘줄은 있는 대로 다 툭툭 불거져 나오고 코에서 는 하얀 김이 새어 나오는가 하면, 핏발 선 두 눈알은 금세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지막 하나만 남았군." 백의미녀의 비수가 이번엔 유달리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살을 파고든 후 뼈마디를 갉아 내고 있었으 며, 미세한 신경조직을 극히 냉철하고 잔인하게 자극해 갔다. 땅바닥은 이미 붉은 피로 흥건히 적셔져 있었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켰다. 그럴수록 입 안에 물린 비수 가 살을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그래도 악물어야만 했다. 그것은 지옥이었다. '조,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살 수 있다!' 사내는 거의 다 잘려 나간 덜렁거리는 마지막 손가락을 내려다보 며 속으로 수없이 부르짖었다. 그는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바로 그 때였다. 툭－!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사내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사내는 드디어 마지막 손가락이 잘려 나가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는 순간, 눈을 번쩍 뜨며 있는 힘을 다해 이제껏 참아 왔던 비 명을 질렀다. "우아아아악……!" 그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큰 비명 소리였다. 입 속에 물렸던 비수가 튀어 나오면서 응축됐던 비명 소리가 한꺼번 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명 소리는 죽음의 시험에 서 살아났다는 희열의 외침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내의 얼굴은 곧 쳐다보기도 끔찍할 정도로 참혹하게 일 그러져 버렸다. 손가락! 잘려져 나간 줄 알았던 마지막 손가락이 그대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그, 그럼……?" "미안해, 내가 그만 들고 있던 비수를 떨어뜨렸어." 백의미녀가 무심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내는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나, 난……." "넌 애석하게도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어." 백의미녀는 천천히 떨어뜨렸던 비수를 집어 들었다. 사내는 순간, 알 수 없는 괴성을 실성한 듯 토해 냈다. "우우… 극극… 끄르르……." 그 때 백의미녀의 손에서 비수가 번쩍 섬광을 발하며 날아갔다. 사람들은 그 비수가 사내의 입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번엔 아까처럼 자루 쪽이 먼저 박힌 게 아니었다. 사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비수는 그의 입 천장을 관통해 뒤통 수로 빠져 나와 있었다. 그의 눈자위가 허옇게 뒤집어졌다. 절명(絶命)이었다. 쿵－! 쓰러지는 시체를 뒤로 하고 백의미녀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쳇, 제사는 그런대로 지냈는데 제물이 별로 시원찮은 놈이었어. 하지만 나 백약빙이 과연 이 세상을 위한 제사의 제주(祭主)로 적 당한 존재인지 아직도 모르겠구나." 뜻 모를 중얼거림. 그렇다. 백약빙! 오 년 만에 새롭게 세상에 나온 그녀의 모습이었다. 이로써 거의 비슷한 시각에 두 명의 목숨이 낙양에서 사라진 셈이 었다. 그리고 살인발생의 조짐은 그 시각 이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패루(萬貝樓)라는 도박장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 제 22 장 소리 없는 바람 ━━━━━━━━━━━━━━━━━━━━━━━━━━━━━━━━━━━ "어떻게 된 거지?" "맙소사, 입에 게거품을 물고 눈알이 홱 돌아간 게 모두 송장처럼 되어 버렸잖아?" 사람들의 안색이 약속이나 한 듯 일시에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 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놀란 건 잔뜩 짓뭉개진 피투성이 얼굴로 막 비 틀거리며 일어난 흑묘태세였다. 공야치가 히죽 웃으며 그에게 비아냥거렸다. "젠장할, 이 어르신은 또 낙양 도박가를 더럽히는 몇몇 기생충 같 은 놈들이 있다기에 그래도 제법 한가닥하는 줄 알았더니 피라미 보다 못한 하류잡배들이 아닌가?" "……!" 흑묘태세의 몸이 수치와 모멸감으로 부르르 떨렸다. 그렇지 않아도 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이 완전히 썩은 돼지간 빛으 로 물들었다. 그러나 이미 상대의 신기에 가까운 무예를 본 후인 지라 발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 다. "대, 대체… 누구신지?" "젠장,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가 없어. 그리고……." 공야치는 질린 얼굴로 주위에 서 있는 인물들을 싹 쓸어보더니, 그 중 몇 명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거기 천선도각에서부터 쫓아온 놈, 그리고 그 옆에 금이빨, 또 너, 너, 너……." 공야치가 지목한 인물들은 대략 열다섯 명 가량이었는데, 하나같 이 눈빛이 음침하고 옷차림이 화려한 게 특징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금사충과 공야치에게 당한 낙양의 내노라 하는 전문도박가들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금사충과 공야치가 사기도박을 했다고 가장 큰 소리로 외치던 그들은 일제히 썩은 돼지간을 삼킨 듯한 표정으 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어딜 도망 가? 당장 이리 나와! 이 흑묘… 뭐라고 하는 녀석과 함께 꿇어앉지 않으면 모두 황천으로 보내 버리겠다." "……!" 지목당한 인물들은 그 말에 완전히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눈치가 비상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들 이 아닌가. 사태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깨닫자,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우르르 앞다투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가, 가르침을 주십시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공야치는 그 모습을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느릿 느릿 위엄 있게 말했다. "나는 천하를 질타할 대장부인데, 어찌 우매한 너희들에게 가르침 을 내리지 않겠느냐? 그럼 지금부터 내 말을 따라서 복창한다." 공야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착 가라앉은 음 성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사기도박꾼들입니다." 그 말에 도박사들은 우거지상이 된 채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더 듬더듬 입을 열었다. "우리는… 사기……." "이것들이 모기하고 사돈 맺을 일 있나? 왜 이리 앵앵거려?" 공야치가 험악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안색이 대변한 그들은 장내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고래고래 외쳤 다. "우리는 사기도박꾼들입니다!" "진작 그럴 일이지." 공야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차 느릿하게 말했다. "우리는 개만도 못한 놈들입니다." "우리는 개만도 못한 놈들입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은 개들을 먹여 살리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 셨습니까?" "그 동안 여러분들은……." 장내에는 갑자기 우습지도 않은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평생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겁에 질린 표정들이었으나 이내 키득거리기 시작 했다. "여러분은 두 번 다시 우리 같은 사기도박꾼들에게 걸려 재산을 날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도박사들이 목이 쉬어 제대로 외치지도 못할 상태에 이른 뒤에서 야 공야치의 가르침은 끝났다. 그는 각자를 일일이 노려보며 위엄 있게 말했다. "명심해라. 사기도 아무나 치는 게 아니다. 오늘 이후 얄팍한 솜 씨를 믿고 함부로 손가락을 놀렸다간 모조리 목을 비틀어 버리겠 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흑묘태세를 비롯한 도박사들은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절하며 부르 짖는 것을 보고 공야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갑시다, 사충형." 금사충은 약간 의외라는 듯 스치는 미소와 함께 물었다. "자시가 되려면 아직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는데, 좀 더 위엄을 과시하지 그러느냐?"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는 게 좋겠소. 위엄도 부릴 만한 상대 에게 부려야지, 저런 송사리들한테 턱에 힘주면 무슨 소용이 있겠 소?" "아우의 생각이 맞는 것 같군." 금사충은 뒷짐을 진 채 조용히 몸을 일으키더니 유유히 입구 쪽으 로 향했다. 공야치가 어슬렁어슬렁 그 뒤를 따라 걷는 듯하더니 문득 걸음을 딱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이봐, 거기 고양이 기르는 자." "예? 예!" 흑묘태세가 벌떡 자세를 가다듬고 섰다. 공야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기 푸대자루 속의 돈, 한 푼도 챙기지 말고 모두 주인을 찾아 돌려줘. 알겠나?" "예? 이건 모두 형님께서 따신……." "쥐 잡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도둑놈이냐? 사기도박해서 딴 돈 가 져가게." "아, 알겠습니다." 흑묘태세는 곤혹스런 표정이었으나 머뭇거렸다가는 또 무슨 날벼 락이 떨어질지 모르는지라 황망히 허리를 굽혔다. 장내 인물들의 얼굴에 일제히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 은 곧 엄청난 환호성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태반이 돈을 잃은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와아아!" 공야치는 감탄과 존경의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그들에게 누런 이까지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어 보이더니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덕분에 지루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냈소. 그럼……."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곧 입구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재차 환호성을 발했다. 그러나 그 환호성은 네 자루 돈 보따리를 다시 보는 순간, 쥐죽은 듯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도박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상최고의 액수! 기적 같은 결과가 거기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애초 이 일의 발단은 공야치와 금사충이 약속시간까지 할 일이 없었다는데 있었고, 그에 따른 심심풀이로 벌어졌던 이 기묘 한 사건은 낙양 도박가에 오랜 세월 동안 신화(神話)처럼 떠도는 얘깃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낙양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중주로는 밤이 되면 더욱 성시를 이 룬다. 내노라 하는 주루, 객점, 약포, 병점 등등이 대부분 이 곳에 집중 되어 있는데다 밤에는 야시장(夜市場)까지 형성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분주히 오가는 행인들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상인들로 인해 마치 아수라장 같았다. 그 혼잡한 인파 속, 두 명의 남녀가 이리저리 되는 대로 밀리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비록 혼잡한 인파 속이라 사람들은 이 두 남녀를 주시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의 행색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사내는 궁색한 낙방서생의 옷차림이고, 그와 반대로 여인은 눈이 번쩍 띌 만큼 절세의 미모를 지녔다. 바로 사마소군과 희옥상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두 사람은 완화루라는 객점에서 방금 저녁 요기를 하고 나오는 중 이었다. 특별히 무슨 비싼 요리를 배불리 먹은 것도 아니지만 사마소군은 연신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희옥상은 그런 그를 몹시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 희옥상이 아름다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오빠는 식사하고 나면 꼭 그렇게 이를 쑤시나요?" 사마소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곁눈으로 힐끔 그녀를 바라보았 다. "왜 보기가 안 좋으냐?" "아니예요. 보기 좋아요." 희옥상은 생글생글 웃음 짓더니 명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쑤시세요." 사마소군은 피식 실소했다. "별난 아가씨 다 보겠군. 이빨 쑤시는 걸 보기 좋다니……." "호호……!" 희옥상은 맑은 교소를 터뜨렸다. 사실 그녀는 사소한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도 깊숙이 빨려드는 자 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천하에 이 쑤시는 걸 좋게 봐 줄 요조숙녀가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 잇몸까지 드러내며 맹렬히 쑤셔대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눈살을 찌푸리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사마소군만은 예외였다. 눈살이 찌푸려지기는커녕 여간 재 미있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짓궂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한 구석이 엿보이는가 하면, 맹수 같은 야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적천도부 같은 고수를 떡 주무르듯 하는 무예에다 도무지 모르는 게 없다. 뿐이랴? 겉모습만 보면 식사 한 끼도 연명하기 어려운 낙방서생의 몰골인데, 월영신도 같은 절정도객을 단 일 초에 죽인 능한비를 수하로 두고 있는 것이다. 아니, 굳이 그러한 점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사마소군에게 는 뭔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잠시 취한 듯한 눈길로 사마소군을 바라보던 희옥상은 문득 생각 난 듯 물었다. "한데,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이오?" "잔칫집." "예?" "잔치가 벌어지려면 아직 한 시진쯤 남았으니, 부지런히 뱃속에 든 걸 소화시키도록 해." "……?" 희옥상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지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때다. 두두두－! 땅을 뒤흔드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갑자기 길 저편에서 들려 오 기 시작했다. "앗!" "으헛!" 행인들은 경호성과 함께 분분히 길 양 옆으로 몸을 피했다. 달려오는 건 한 필의 인마(人馬)로, 말과 사람이 모두 다 검은색 이었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질주해 오는지 마상 인물의 생김새는 알아보 기조차 어려웠다. 사마소군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허허… 무슨 일인지 몰라도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장터에서 저렇 게 말을 몰다니 정신 나간 작자로군." "그러게 말이에요." 희옥상이 동감을 표시했다. 그 때 가까이 접근해 온 마상 인물의 용모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났 다. 그는 서른 살 안팎의 나이로 약간 마른 몸집에 흑의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어딘가 냉막하게 보이는 인상에 형형한 눈빛은 일견키에 도 상당한 무예의 고수임을 짐작케 했다. 등에는 장검을 비껴 메고 있었는데 행인들이 놀라 비켜 나면서 뒤 엉켜 나자빠지는 모습을 보고도 전혀 무표정했다. 행인들이 소리 죽여 투덜거렸다. "쯧쯧, 완전히 안하무인이군." "당연하지. 저 자도 복장을 보아하니 유령장(幽靈莊)의 무사 같은 데, 낙양땅에서 감히 누가 저들의 비위를 거스릴 수 있겠나?" "하긴, 젠장할!" 사마소군이 행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희옥상이 갑자기 짤막한 외침성을 발했다. "어머, 저길 봐요." 사마소군이 흠칫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썰물처럼 행인 들이 밀려 나간 길 한복판에 강아지 한 마리가 아장아장 걸어나오 고 있었다. 강아지는 하얀 털로 뒤덮여 복실복실한 생김새가 여간 귀엽지 않 았다. 두두두－! 그러나 달려오는 흑마는 결코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강아지는 꼼짝없이 말발굽에 채여 죽을 판이다. 사람들은 일시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 짧은 찰나였다. 인파 속에서 한 그림자가 뛰쳐나오더니 섬전 같은 속도로 강아지를 향해 날아갔다. 휙－! 행인들의 입에서 한꺼번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런!" "미쳤구나!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다니!"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 그림자는 강아지를 껴안는데 성공했으나 이미 되돌아나올 여유 가 없었다. 마상(馬上)의 흑의인은 처음엔 흠칫하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입가 에 보일 듯 말 듯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대로 무자비하게 말을 몰았다. 사람들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희옥상도 차마 보지 못하 겠다는 듯 사마소군의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 보지 못했다. 사마소군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빠르게 스치 는 것을……. 그는 마치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 눈 하나 깜짝않고 상황을 똑바로 지켜보았다. 쿠궁－! 둔중한 소리가 모든 사람들의 귓속에 울려 퍼졌다. 말할 것도 없이 흑마가 사람을 깔아뭉개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뒤따라 들려 온 처절한 비명 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닌 흑마의 것 이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내심 의아하게 여기며 눈을 다시 뜨고 상황을 바 라보았다. 다음 순간, 행인들의 눈이 너 나 할 것 없이 휘둥그래 크게 뜨여 졌다. 놀랍게도 피떡이 되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인영(人影)이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느릿하게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방금 전까 지만 해도 기세 좋게 질주하던 흑마는 저만큼 나가떨어진 채 게거 품을 물고 있었다. 흑마는 몇 차례 네 다리를 경련하더니 곧 잠잠해진 채 미동도 하 지 않았다. 허옇게 까뒤집어진 말의 두 눈은 이미 숨을 거두었음 을 의미했다. 마상에 타고 있던 흑의인은 다행히 황급히 경신술을 펼친 탓에 약 간 떨어진 장소에 무사히 내려설 수 있었다. 자세를 가다듬은 흑의인의 얼굴엔 극도의 경악지색이 떠올라 있었 다. "이, 이게 대체?" 그는 망연한 기색으로 막 몸을 일으킨 인영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장장 구 척에 육박하는 엄청난 키에, 산 같은 몸집을 소유한 거인이었다. 마치 구리로 빚은 듯 번들거리는 그의 피부는 저녁 때인데도 불구 하고 뿌연 광택을 발하고 있었으며, 울퉁불퉁 사방으로 튀어 나온 근육들은 마치 바윗덩어리들이 춤추는 듯했다. 몸에는 호랑이 가죽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큰 체구를 가리기 위 해선 최소한 세 마리의 범이 소요됐을 게 분명했다. '저, 저게 과연 인간의 모습인가?' 흑의인은 비로소 흑마가 왜 나가떨어져야 했는지 이해가 갈 것 같 았다. 가슴에 찬바람이 인다는 기분이 바로 이러할까? 비단 흑의인뿐만 아니라, 장내의 모든 행인들은 이처럼 무시무시 하고 위압적인 거인을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쓰윽 쓸어 보는 거인의 활화산 같은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게 했 다. 대략 이십 세 후반으로 느껴지는 그의 인상은 철사줄 같은 구레나 룻 수염에도 불구하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무감각한 것 이었다. "쯧쯧… 이놈아, 조심해야지. 하마터면 깔려 죽을 뻔했다." 거구청년은 강아지를 왼손으로 안아 든 채 중얼거리더니 계속 주 위를 둘러보았다. 아마도 강아지의 임자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강아지는 연신 꼬리를 살랑거리며 거구청년의 얼굴을 핥았다. 활화산같이 이글거리던 거구청년의 눈빛이 금세 사그러들며 따뜻 한 웃음기를 띄웠다. "에구, 이 놈아! 간지럽다." 강아지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진 그는 이어 주위를 향해 웅혼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느 분이 이 강아지의 주인이시오? 어서 데려가시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만 멀뚱멀뚱 굴릴 뿐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거구청년은 한참을 기다려도 역시 주인이 나오지 않자, 힐끔 강아 지를 내려다보았다. "뭐야? 그럼 네녀석도 이 곡철화처럼 고아란 말이냐?" 그러나 강아지는 낑낑대며 부지런히 재롱만 피울 뿐이다. 그런데 방금 곡철화라 했는가! 그렇다. 장한별부의 일곱 동문들 가운데 가장 체구가 크고 우직했 던 곡철화! 그의 모습은 오 년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달라 져 있었다. 마치 철탑(鐵塔)을 방불케 하는 그의 신위는 오 년 동안 그가 얻 은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때 곡철화는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강아지를 솥 뚜껑 같은 두 손으로 감싸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잘 됐다. 피차 처지도 흡사한 것 같으니, 내가 네녀석을 데려가마." 강아지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곡철화는 그제야 몸을 움직여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이내 우뚝 정지되었다. 흑의인이 앞쪽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곡철화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별다른 말도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 갔다. 그가 점차 전진함에 따라 흑의인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후퇴했다. 한 발자국 다가가면 한 발자국 물러서고, 또 그렇게 반 복되고……. 우습지도 않은 광경이 얼마간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흑의인이 갑자기 꽈당 엉덩방아를 찧 으며 나자빠졌다. 뒤의 돌부리에 걸린 것이었다. 손에 땀을 쥐고 상황을 바라보던 행인들은 그 순간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핫……!" "와하하하……!" 흑의인은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는 황망히 일어 났다. 그 와중에도 곡철화는 계속 다가오고 있었던 터라 그는 하마터면 일어서는 순간 곡철화와 부딪칠 뻔했다.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바싹 마주 보고 선 형국이 되었다. 흑의인의 키도 작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곡철화와는 도무지 비교 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게 느껴졌다. 시선과 시선이 정면으로 딱 부딪쳤다. 곡철화의 입에서 일순 무뚝뚝한 일성이 흘러 나왔다. "비켜." 단지 그 한 마디뿐이었건만 흑의인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비 실비실 옆으로 물러났다. 곡철화는 성큼 그의 곁을 스치며 지나갔다. 흑의인은 망연히 그 뒷모습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 때였다. 행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오기 시 작했다. "대단하군. 완전히 고양이 쥐 다루는 듯하는걸?" "흐흐… 그 콧대 높던 유령장 놈이 쩔쩔매는 꼴을 보니, 십 년 묵 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기분이야!" 흑의인이라고 해서 그 말을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이, 이런 낭패가……!' 부끄러움과 노화로 인해 그는 몸을 벌벌 떨었다. 무림인에게 있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바로 명예가 아니던가? 그는 흉험한 눈빛으로 곡철화의 등을 쏘아보더니 번개같이 등 뒤 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멈춰라!" 살기 어린 대갈 외침성이었다. 그러나 곡철화는 들은 척도 않고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흑의인은 급기야 모멸감을 참지 못하고 번쩍 신형을 날렸다. "이 노옴!" 추리릭－! 그의 동작은 실로 섬광(閃光) 같았다. 뽑혀진 검날은 노도 같은 기세로 허공을 가르더니, 그대로 곡철화의 뒷덜미를 베어 갔다. 그러나 곡철화는 여전히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행인들이 놀라 소리쳤다. "저, 저런!" "비겁한 암격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흑의인의 일 검(劍)은 그대로 격 중되고 말았으니까.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챙－! 흑의인의 장검은 곡철화의 살갗에 닿자마자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 께 뚝 부러지며 퉁겨 나갔다. 흑의인은 찰나지간 손목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부러진 장검을 떨어뜨렸다. 경천동지(驚天動地)! 흑의인의 안색이 완전히 잿빛으로 변했다. "그, 금강불괴(金剛不壞)?" "……." 곡철화는 그제야 조용히 걸음을 멈추더니 어깨 너머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대체로 담담한 편이었다. 흑의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두 번 다시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곡철화는 굳게 다문 입술이 조용히 떼어졌다. "가라. 내일 아침에도 변함없이 뜨는 태양을 보고 싶다면." "……!" 흑의인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그는 홱 몸을 돌리더니 꽁지가 빠져라 신법 (身法)을 펼쳐 달아났다. 슈우욱－! 그가 삽시간에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곡철화는 천천 히 걸음을 옮겨 갔다. 이 때 사람들이 우르르 곡철화의 주위로 벌 떼처럼 모여들며 환호 성을 발했다. "대단하오!" "정말 놀라운 신위요! 내 칠십 평생 청년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 소!" 저마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한 마디씩 한 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 다. 이름이 뭐냐는 둥, 술 한 잔 사겠으니 거절하지 말라는 둥, 난리 법석이 일어났다. 곡철화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꼼짝할 수 없는 신세가 되자, 난처 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정신이 하나도 없군!'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급박스런 외침성이 터져 울린 건 바로 그 때였 다. "불이야! 불이 났다!"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일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어, 어디냐?" 곡철화도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때다. 누군가의 손이 곡철화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뭘 보는 거요? 이럴 때 달아나지 않고?" 곡철화가 흠칫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사마소군이 아닌가? 그는 크게 반색을 했다. "막내구나!" 사마소군은 빙긋 미소지었다. "어서 갑시다." "가만, 그럼 방금 소리친 사람은?" "거 뻔한 걸 자꾸 물어야겠소? 어서 가자니까." "그래, 가자." 곡철화는 서둘러 사마소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파 속을 빠져 나왔다. 이윽고 숨을 돌리게 되자, 곡철화는 쩝쩝 혀를 차며 품속의 강아 지를 어루만졌다. "이 놈 덕분에 진땀을 흘리는군. 한데……." 곡철화의 시선이 힐끔 희옥상에게 향했다. 아까부터 그녀가 사마 소군의 어깨에 바싹 매달리다시피 하며 따라오는 걸 느꼈기 때문 이었다. 부리부리한 곡철화의 눈길을 받자, 희옥상은 재빨리 사마소군의 몸 뒤로 숨더니 얼굴만 빠끔히 내밀었다. 곡철화는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누구냐? 못 보던 아가씨 같은데." "동생이오." "동생? 친동생?" "거 자꾸 그렇게 따져 묻는 게 아니오. 보시오. 동생 얼굴이 새빨 개졌잖소." 사마소군은 능청스레 말하자, 희옥상은 정말 얼굴이 빨개지고 말 았다. 곡철화는 그제야 대충 짐작을 한 듯 의미심장한 눈으로 희옥상을 바라보며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니까 그런… 동생이란 말이지?" "뭐 대충 그런 셈이오. 그건 그렇고 약빙누님은 어떻게 하고, 형 님 혼자만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거요?" 사마소군이 말머리를 돌리며 묻자, 곡철화는 갑자기 피곤한 표정 을 지으며 장탄식을 했다. "그 여자 얘긴 꺼내지도 마라. 말이 여자지, 그게 어디 사람이냐? 얼음 덩어리지." "약빙누님이 철화형을 못살게 굴기라도 했단 말이오?" 사마소군은 내심 짐작되는 것이 있었으나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 다. 곡철화는 그 말에 짐짓 험상궂은 표정이 되었다. "명심해. 너, 두 번 다시 약빙과 나를 한 조로 묶었다간 가만 두 지 않겠다." 이어 그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흔들며 말했다. "나도 본래 말이 없는 편이지만 세상에 그런 여자는 다시 없을 것 이다. 어떻게 된 여자가 짧으면 열흘, 길게는 한두 달 동안 말 한 마디 하는 걸 볼 수가 없으니……." 사마소군은 싱긋 웃으며 곡철화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원래 그런 사람이잖소? 철화형이 이해하시오. 그런데 어딜 간 거 요?" "모르겠다. 며칠 만에 나에게 한 첫마디가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 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지." "흠." 사마소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때 희옥상이 손가락 끝으로 사마소군의 허리를 쿡 찌르더니 조 그만 음성으로 물었다. "약빙누님이 누구죠? 여잔가요?" 사마소군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럼 내가 남자를 누님이라고 불렀단 말이냐?" 희옥상의 아름다운 눈에 바짝 이채가 떠올랐다. "몇 살인데요? 아름다운가요? 오빠랑은 어떠 사이죠?" 사마소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거리더니 이내 피곤한 기색을 지었다. "쯧쯧, 어째서 저 입이 한동안 잠자코 있는가 했더니 결국 한꺼번 에 발작하고 마는군." 그 말에 희옥상의 눈꼬리가 상큼 치켜 올라갔다. "뭐라구요? 발작? 정말 그런 식으로 말할 거예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뿐인데, 뭐가 잘못……." 말하다 말고 사마소군은 갑자기 괴상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희옥 상이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비틀었기 때문이다. "으아악!" 사마소군은 비명을 지르며 냅다 달아났다. 희옥상은 아름다운 옥용에 득의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 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곧 묘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사마소군이 고 개조차 돌리지 않고 계속 인파 속으로 멀어져 갔기 때문이다. 희옥상은 다급히 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 어딜 가는 것이에요?" 그러나 사마소군은 여전히 대답도 않고 태연자약한 걸음걸이로 저 만큼 멀어져 갈 뿐이다. 곡철화가 비로소 크게 소리쳤다. "막내, 어딜 가는 것이냐?" 그러자 사마소군은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 였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소. 약속장소까지 어김없이 갈 테니, 옥상 그 요란한 입을 잠시 맡아 주시오." "요, 요란한 입이라고?" 희옥상은 그제야 자신이 또 한 번 당했음을 깨닫고 발을 동동 굴 렀다. 곡철화가 그녀를 힐끔 돌아본 후 중얼거렸다. "대체 느닷없이 어딜 가려는 거지? 알 수 없군." "흥! 분명 상대루라는 곳에 가는 게 틀림없어요." 희옥상이 토라진 음성으로 대꾸하며 막 사마소군이 간 방향으로 달려가려는 순간이었다. 곡철화가 성큼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의아성으로 말했다. "상대루라면… 무슨 객잔 이름 같은데, 맞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가 봐야 알지." 희옥상은 저 멀리 사마소군의 모습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린 걸 보며 초조한 뾰족성을 발했다. 그녀는 다시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곡철화는 그 거대한 체구로 그녀를 막아선 채 좀처럼 길을 터 주지 않았다. "소저는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이오?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고 아는 건 아는 것인데, 모르는 걸 알고 있으니 소저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구려." 희옥상은 그만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어이없는 음성으로 되 물었다.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가만, 그러고 보니 나도 헛갈리는군.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 지?" 곡철화는 바보처럼 눈을 껌벅거렸다. 희옥상은 그만 울상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곡철화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그녀를 막기 위해 능구렁이처럼 그녀를 놀려 대 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떻게 오빠의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만 있지?'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얼마 전 자신이 사마소군을 만난 일과 산발괴인을 만났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해 주었다. 곡철화는 연방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말을 듣고 나더니, 혼잣 말로 중얼거렸다. "무슨 얘긴지 알아듣겠는데, 뭔가 중요한 부분이 빠진 것 같군." "당신은 정말……!" 희옥상은 그만 얼굴이 복숭아빛으로 빨개진 채 화난 음성으로 소 리쳤다. 곡철화는 더 이상 놀려 대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여겼 는지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니까, 막내는 지금 서천에 있다는 상대루로 정체불명의 인물 들을 만나러 간 것이군?" "그래요!" "그런데 왜 소저가 따라가겠다는 거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당신은 그분과 호형호제(呼兄呼弟) 하는 사이이면서도 어찌 걱정의 빛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지요?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모두가 당신……." 매섭게 따져 묻던 희옥상은 문득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곡철화가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떠올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 다. "이제 보니 소저는 막내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군?" "그, 그래요. 한데, 그건 왜 묻는 거죠?" "막내를 안다면 이렇게 조급하게 굴 리가 없지. 믿어지진 않겠지 만 당금천하에 그를 어찌할 수 있는 인물이나, 일은 존재하지 않 아." "……!" 희옥상은 흠칫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 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당금 천하에 그를 어찌할 수 있는 인물이나 일은 존재하지 않 는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가? 비록 어렴풋이 짐작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가공할 내 력의 소유자였단 말인가?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그녀의 귓속으로 곡철화의 묵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큰일이나 변고에 부딪치면 놀라거나 호들 갑을 떨게 마련이다. 그러나 막내는 오히려 무심한 정적에 파묻힌 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로 하여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추 측할 수 없게끔 만들어 버리지. 그런 막내가 저렇듯 극심한 반응 을 보였다는 건 이 일이 그 생애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한 중대 사태라는 걸 의미한다." "……!" 희옥상은 섬세한 교구를 가볍게 떨었다.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으 로 사마소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만 해도 그가 서 있던 자리였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남겨 진 체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혼란스러워진 야시장(夜市場) 전경만이 시야를 가득 메워 올 뿐. ━━━━━━━━━━━━━━━━━━━━━━━━━━━━━━━━━━━ 제 23 장 낭천(狼天)과 유령부인(幽靈婦人) ━━━━━━━━━━━━━━━━━━━━━━━━━━━━━━━━━━━ 서천(西賤). 원래 이 곳은 천하 각지에서 낙양으로 찾아오는 인물들이 잠시 머 물렀다 떠나는 유랑자의 마을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돈이 없거나 가난한 자들이 낙양에 일을 보러 왔 을 때 숙식을 하는 외곽지대로, 모든 물가가 성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큼 싼 것이 특징이었다. 낙양성과의 거리는 불과 이십여 리, 그러나 이 서천의 거리는 적 지 않은 사람들이 오가는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썰렁하고 한산한 느낌을 주었다. 사마소군은 이 스산한 서천거리를 무려 반 시진 가량이나 헤맨 뒤 에야 간신히 상대루라는 객잔을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나마 어둠 속에 익숙한 그가 아니었다면 상대루를 아예 찾지 못 할 뻔했다. 왜냐하면 이 서천 마을에 사는 사람들까지 상대루라는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루. 본래 이 곳은 십여 년 전,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일가식솔이 깡그 리 못살당한 한 고관대작의 장원이었다. 그 일가가 씨몰살을 당한 이후, 이 거대한 장원은 풍상에 내버려 진 채 완전히 흉가(凶家)로 변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나마 절반쯤은 불에 타 버린데다 잡초가 지붕 위까지 무성하게 덮여 있는지라, 대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장소였다. 그런데 이 무슨 어이없는 일인가? 사마소군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이 거대한 흉가의 정문위에 덜렁 걸려져 있는 간판을 발견한 것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간판에는 상대루라는 세 글자가 아무렇게나 쓰 여져 있었다. 사마소군은 잠시 망연히 서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정 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그러니까… 여기가 객잔이란 말이지?"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잡초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던 새들이 놀라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근래 몇 년 동안 손님이 없었던 모양이군." 사마소군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리며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이거 정말 내가 귀신에게 초대받은 건 아닐까?" 그는 전날 만났던 산발괴인의 모습을 뇌리에 떠올리며 잠시 그 자 리에 서 있다가 정면의 대청 쪽으로 걸음을 옮겨 갔다. 대청 문은 반쯤 열려져 있었는데, 거미줄이 엉겨붙어 있어 상당 기간 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가? 그 대청문을 바라보는 사마소군의 얼굴에 언뜻 긴장의 빛이 스쳐 가고 있었다. '인기척이다!' 그렇다. 그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 어 있었던 대청 내부 쪽에서 갑자기 하나 둘 사람의 숨결이 무섭 게 늘어나는 것을! '그렇다면 결론은 명백해지는군. 이 대청은 여러 개의 비밀 통로 로 지하에 열결되어 있다. 겉으로는 내버려진 흉가로 위장한 의미 심장한 요새라 할 수 있군.' 사마소군은 내심 생각을 굴리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대청문 을 열고 서서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안으로 들어선 사마소군은 대청 여기저기 어둠 속 에서 귀화처럼 번뜩이는 수십 쌍의 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그림자가 성큼 사마소군의 앞으로 다가와 허 리를 조아렸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사마소군이 살피니, 등이 구부정하게 휜 청수한 모습의 노인이었 다. 그의 눈에 번뜩 기광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오랜만이오. 그런데 당신은 언제 그렇게 늙어 버렸소?" "대단한 안목이십니다. 아직껏 저의 변장술은 한 번도 남에게 탄 로난 적이 없었는데, 한눈에 알아보시다니……." 노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 그는 바로 일전의 산발괴인이었다. 사마소군은 묘한 신색을 지었다. 그 때 산발괴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어둠 속의 인물들에게 분부했 다.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게 단단히 방비를 서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스스스……! 마치 연기가 꺼지듯 장내인물들의 신형이 일제히 거짓말처럼 증발 해 버렸다. 사마소군은 내심 찬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한 고수들이군.' 그 때 산발괴인이 그에게 공손히 예를 표하며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많은 인물들이 사마대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한 마디는 방금 전의 인물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초절정고수들 이 수두룩하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사마소군의 눈에 재차 기광이 번뜩 스쳤다. 그는 주저 없이 산발괴인을 따라 대청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부서진 마룻바닥 아래로 교묘하게 위장된 지하계 단이 나타났다. 그 계단을 일 각쯤 내려가자, 사위에 환한 횃불이 걸려진 철문 하 나가 나타났다. 산발괴인이 그 철문 앞에 일 장 가량 간격을 두고 접근한 순간이 었다. 쿠구궁－! 육중한 쇳소리와 함께 철문이 좌우로 쩍 갈라졌다. 동시에 철문안 의 광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놀랍게도 철문 안은 족히 일천여 명은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원 형의 지하광장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 광장 안에는 일견키에도 팔구백을 헤아리는 무림 인들이 태산을 압도할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로 가득 들어 차 있었 다. 그들은 이십대 초반에서부터 칠십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섞 여 있는 모습이었는데 차림새 또한 중원인, 만인(蠻人), 묘강인 (苗彊人), 남방인(南方人)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이 놀란 건 그들의 비범한 기도나 많은 숫자 때문 이 아니었다. "낭천(狼天)의 제자들이 공자를 뵈옵니다!" 오오……! 벽력성인들 이보다 더 굉렬할 손가? 장내의 팔백여 고수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부복하며 사마소군을 향해 웅장한 합성을 발한 것이다. 사마소군은 크게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이오?" "공자, 우선 상석에 좌정하십시오. 제가 자세히 설명을 해 드리겠 습니다." 산발괴인이 장내의 중앙 석대 위에 마련된 태사의를 가리켰다. 사마소군은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으나,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보기로 했다. 이윽고 사마소군이 태사의에 앉자, 부복했던 팔백여 고수들이 일 제히 몸을 일으킨 후 그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사마소군은 그들의 눈빛에서 어떤 흥분과 기대의 빛을 읽어 내고 더욱 의문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대체 이들은 누군가? 낭천이라는 단체의 이름은 아직껏 들어 본 일조차 없다. 천하의 군소방파들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는 내가 어 찌 이들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을까?' 그 때 산발괴인이 공손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우선 제 소개부터 올리겠습니다. 저는 묵양자(墨陽子)라고 합니 다. 그러나 공자님은 저를 모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직업 은 직업살수인데다 아직껏 단 한 번도 본 얼굴을 드러내거나 본명 을 사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직업살수?' "제가 대표로 공자님께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이들의 우두머리는 결코 아님을 두 번째로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겐 계급 의 고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해 여기에는 저를 능가하는 고수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묵양자는 잠시 사이를 두고 장내의 고수들을 힐끔 쓸어 보더니 침 착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본래 낭천이라 함은 하나의 문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떠 돌이 낭인무사를 비롯해서 중원 전 지역에 퍼져 있는 살수들을 통 칭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듣고 있던 사마소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좋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여러분들이 무슨 연유로 나를 보자마자 상전 대하듯 하는지 그 이유부터 설명해 주시오." 그러자 묵양자는 기이한 눈빛으로 사마소군을 깊숙이 응시하더니 돌연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혈풍향 석공자님을 가장 가까이서 대한 분이 공자님이시기 때문 입니다." "……!" 순간, 사마소군은 놀라움으로 인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는 두 눈에 무서운 광채를 발하며 신음처럼 나직한 일성을 발했 다. "자세히… 자세히 설명해 보시오." "혈풍향 석공자님은 우리 낭인무사들의 신(神)과도 같은 분이십니 다. 십여 년 전 우리는 그분의 아래로 모이기를 스스로 희망하여 우리만의 방법으로 그분에게 연락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활동을 일체 비밀리에 독자적으로 한다는 조건하에 우리들을 받아 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공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분은 이제 돌 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을 미리 통고 받아 알고 있었습 니다." "……!" "물론 직접 그분의 입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때 그분께서는 자신 의 뒤를 이어 진정한 이 땅의 수호자가 등장할 것이라 했습니다. 바로 공자님을 지칭한 것이지요." 묵양자는 여기까지 말한 후 재차 허리를 깊숙이 조아리며 극경의 예를 취했다. 사마소군은 돌연 주체할 수 없는 격동이 전신으로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아, 형님! 나에게도 말씀해 주시지 않은 최후를 이들에게 말씀 해 주셨단 말씀입니까?' 만약 이 세상에 사마소군을 단숨에 슬픔 속으로 몰아넣거나 반대 로 기쁨 속에 몰아넣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석우 생이라는 세 글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내심의 격동을 감춘 채 묵양자에게 물었다. "내가… 여러분들을 이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묵양자는 그의 이 한 마디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추호도 망설임 없이 힘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들의 힘은 공자님의 추측한 이상일 것입니다. 그 힘이란 절 대 흩어지지 않는 단결력과 살수 특유의 조심성을 나타내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혈풍향 그분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 년 간 공자님의 뒤를 미행해 나름대로 평가를 내렸던 우리들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반 년 간이나 나를 미행했었단 말이오?" 사마소군은 씁쓸하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내의 인물들을 한 차례 쓸어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 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구려. 석형님이 당신들 같은 단체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으셨다니……."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희 낭천은 혈풍향 그분의 다른 세력 과 일체 연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영 원히 외부에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공자님 께서도 저희들의 존재를 잊어 버리시도록 하십시오." "그렇다면 당신들의 존재가 무슨 필요성이 있단 말이오?" 사마소군은 두 눈에 당혹의 빛을 발했다. 묵양자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철저히 비밀을 요하는 일에 드러난 세력은 별 쓸모가 없는 법입 니다. 공자님께서 가장 은밀히 처리하시고자 하는 일이 발생할 때, 공자님께선 잊어 버렸던 우리를 기억해 내십시오." "음, 나는 이제야 석형님의 뜻을 알 것 같소."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탄성을 발했다. 그는 이어 두 눈 가득 이채를 띠운 채 물었다. "만약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분명 무언가를 조사해 왔을 것이오. 석형님이 당신들을 그냥 한가하게 내버려 두셨을리 가 없을 테니까." "바로 맞추셨습니다, 공자님." 묵양자가 탄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왠지 그순간 대답을 하는 그의 안색은 무겁게 굳어지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그의 그러한 안색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꼈 다. 그 때 묵양자의 입에서 전혀 뜻하지 않았던 놀라운 말이 흘러 나 왔다. "우리가 육 년 전 그분에게 명령을 받은 것은 바로 공자님의 부친 이신 사마대협의 움직임을 은밀히 조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 나 그 명령은 선유도가 갑작스레 액겁을 당한 후 그 흉수들을 추 적하라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추측하시는 대로입니다. 우리는 그 긴 시간 동안 각고의 노력끝 에 상당히 많은 것을 알아 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 년 전부터 이 조사를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묵양자의 안색이 더욱 무겁게 변했다. 사마소군은 격동을 애써 참으며 다그쳐 물었다. "왜 중단했단 말이오?" "한 가지 난제에 부딪쳤기 때문입니다." "……?" "공자님께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걸 용서하십시오. 혹 공자님의 모친께선 성함이 임설정(林雪貞)이 아니신지……?" 묵양자의 이 질문은 사마소군을 큰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전신을 가볍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이 내 어머님의 성함은 임설정이오." "그럼 이분이 분명합니까?" 묵양자는 돌연 가슴 속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내 들더니 사마 소군의 눈앞에 펼쳤다. 거기에는 한 선녀 같은 절세미모의 중년부인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머니……!' 그렇다. 그것은 자세히 살필 것도 없이 분명 모친 임설정의 모습 이었다. 사마소군은 치미는 격동을 애써 억누르며 묵양자를 주시했다. "내 어머님이시오. 한데, 돌아가신 내 어머님에 대해 이처럼 파헤 친 건 무슨 연유요?" "……." 묵양자는 어인 영문인지 복잡한 신색을 지을 뿐 대답을 할 줄 몰 랐다. 사마소군은 그를 정면으로 주시했다. "대답하시오." "공자님, 잠시 후 이 상대루의 앞길로 한 대의 마차가 지나갈 것 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군 요. 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는 오직 공자님만이 풀 수 있습니 다. 그리고……." 묵양자의 음성이 돌연 뚝 정지되었다. 갑자기 밖으로부터 나직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묵양자는 기이한 안색으로 사마소군을 바라보았다. "마침 연락이 왔군요. 공자님께서는 실로 적절한 순간에 오신 셈 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묵양자는 지하광장의 오른편을 눈짓으로 가리키더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광장의 벽쪽에는 위로 뚫린 동굴 계단이 나 있었다. 사마소군은 내심 당혹을 금할 수 없었으나 일단 묵양자의 말대로 따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장내 고수들의 정중한 예를 받으며 동굴 계단을 올랐다. 동굴 계단은 지상의 망루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망루 위에 오르자,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과 함께 주위의 광경이 일목요연하게 내비쳤다. 특히 상대루의 앞길을 오가는 인물들을 감시하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마춤이었다. "공자, 저쪽 골목에서 다가오는 마차의 안을 잘 살피십시오." 묵양자가 상대루의 오른쪽 골목을 가리킨 손을 채 내리기도 전이 었다. 두두두－! 한 대의 마차가 어둠 저편에서 빠르게 모습을 나타냈다. 마차는 쉽게 구경할 수 없는 팔두마차(八頭馬車)였는데, 일견키에 도 여간 호화롭지가 않았다. 보통의 마차와는 달리 이 마차는 양쪽 창문이 높이 달려 있어 행 인들은 안의 인물을 알아볼 수 없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이 서 있는 망루 위에서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창문에 쳐진 붉은 주렴으로 보아하니 여인이 타고 있는 모양이 군.' 사마소군은 무심코 생각을 굴리다가 마차의 양 옆 난간에 각각 네 명씩의 흑의무사가 호위하듯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고 당혹의 빛 을 발했다. '저들의 복장은 바로 대산형님이 낙양거리에서 상대했던 유령장의 인물과 똑같지 않은가?' 그 때 마차가 상대루의 앞길로 위엄을 과시하듯 미끄러져 지나갔 다. 그 짧은 순간, 사마소군은 붉은 주렴 사이로 내비치는 한 미부인 (美婦人)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순간이다. '헉!' 사마소군은 머릿속에서 벼락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변하고 있었 다. 두두두－! 마차는 어느 새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마치 한순간에 화석으로 화해 버린 양 그자리 에서 넋 나간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신음 같은 독백성, 그러나 그는 곧 거짓말처럼 원래의 고요한 안 색을 회복했다. 그는 묵양자를 힐끔 돌아다보더니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이제 당신의 말뜻을 알겠소. 과연 이 일은 내가 직접 부딪쳐야 할 것 같구려. 다음에 또 연락하겠소."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 은 이미 빛살처럼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마차가 사라진 방향으로 환상처럼 멀어져 갔다. "공자……." 묵양자는 망연한 신색으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부디 현명하신 판단을 바랍니다." 알 수 없는 말……. 분명한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사마소군이 강호에 출도한 이래 이처럼 남 앞에서 흔들린 표정을 보인 적은 결단코 없었다는 사실이다. 밤은 점점 더 깊어 가고 있었다. 연운로(燕雲路). 달리 제왕로(帝王路)라고도 불리는 이 거리엔 고대광실, 대택거상 들이 즐비하게 운집해 있었다. 숱한 왕조들과 연루된 귀족후예들을 비롯해서 명문대가의 고관대 작이나 거부대상(巨富大商)들이 모여 사는 이 거리는 항시 기묘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거리에 들어서기만 해도 그 무형의 위압감에 눌려 위축되게 마련이었다. 그 거리의 맨 끝,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채의 거대한 장원이 있었 다. 담 높이만도 일 장은 넘어 보이는 이 장원의 규모는 그야말로 하 나의 작은 성(城)을 방불케 했다. 이 웅대한 장원의 전경에는 한 가지 기이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대문, 담장, 지붕 할 것 없이 온통 검게 칠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장원은 대낮에도 암흑에 휩싸인 듯 음산한 분위기를 풍 겼다. 더욱이 주위의 다른 화려한 장원들과는 달리 이 장원엔 확실한 이 름조차 없었다. 대문에 현판조차 걸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이 장원을 유령장(幽靈莊)이라 부르 게 되었다. 유령장에 누가 살며,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건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유령장의 인물들은 모두 흑의를 입고 있으며, 하나같이 고강한 무 예의 소유자로 그들의 비위를 거슬렸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 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끔 그 흑의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거리에 나타나는 마 차의 여인이 유령대부인이라 불리게 된 것도 얼마 전부터의 일이 었다. 때는 어둠이 깊어 술시에 접어드는 시각이었다. 어둠 속에서 유령장은 거대한 한 마리 괴수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이 곳은 유령장 서쪽의 으슥한 담장 옆, 한 그루 거대한 은행나무 가 하늘을 찌를 듯 자라나 있었다. 그 은행나무의 중간 부위, 무성한 잎사귀 속에 언제부터인가 한 인영이 몸을 감추고 있었다. 그는 바로 사마소군이었다. 이 순간 그는 거의 손가락 굵기의 나뭇가지에 몸을 지탱한 채 서 있었다. 그러나 나뭇가지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며, 교묘하게 위치를 선 정한 탓에 설령 감시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를 발견하기란 불가능 했다. "……!" 사마소군은 그리 오래 살피지 않아 장원이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 씬 넓고 경계가 엄중함을 깨달았다. 우선 눈에 띄는 전각만 해도 십여 개에 달했다. 전각과 전각들 사이에는 가산(假山)과 인공연못, 그리고 화원 등 이 매우 운치 있게 가꾸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요소요소에는 밤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중무장을 한 흑의무사들이 경비를 섰거나 순찰을 돌고 있었다. 하지만 사마소군이 정작 신경을 쓰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 매복해 있는 고수들이었다. '많이도 숨어 있군. 이상한 일이구나. 단순한 경비라고 보기엔 너 무 지나친걸?' 사마소군의 눈에 번뜩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의 뇌리에 곧 떠오르는 한 가지 추측이 있었다. 사방을 살피는 흑의무사들의 긴장된 눈빛으로 보아 장원 내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는 추측이었다. '그건 그렇고, 유령부인이라는 그 여인의 거처는 어디지?' 사마소군은 잠시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턱대고 전각들을 하나하나 샅샅이 뒤져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놈 잡아서 족치는 도리밖에 없겠군.' 궁리 끝에 그렇게 결심한 사마소군은 곧 적당한 상대를 물색했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 번뜩 이채가 스쳤다. 멀리 순찰을 돌던 세 흑의무사 중 하나가 바지 고름을 풀며 약간 떨어진 숲 속으로 가 는 모습을 본 것이다. 슷－! 일순 사마소군의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속도는 실로 눈부신 것이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신형은 연기가 흩어지듯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일체의 기척이나 소리도 없음은 물론이었다. 한편 흑의무사는 자신의 물건을 끄집어 내놓고 시원스레 오줌 줄 기를 분출해 내고 있었다. 한순간 그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흡족한 일성을 흘려 냈다. "어, 시원하다." 흑의무사는 어깨를 추스르며 자신의 물건을 툭툭 털더니 바지를 끌어올렸다. 바로 그 때였다. 그의 등뒤에서 약간 장난기 어린 음성이 나직하 게 들려 왔다. "많이 시원한가?" "음, 아랫배가 터지도록 참았다가 힘차게 쏟아 내는 배설의 기쁨 은 언제나……." 흑의무사는 무심결에 대꾸하다 말고 흠칫 입을 다물었다. 매우 낯 선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누구……?" 흑의무사가 뒤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손이 불쑥 뻗어 와 갈고리처럼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헉!' 흑의무사는 숨도 쉬지 못하고 눈을 찢어지게 부릅떴다. 바로 앞, 생전 본 기억이 없는 낯선 청년 하나가 유령처럼 우뚝 서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바로 사마소군이었다. 흡사 쇠갈고리처럼 단단하게 움켜잡은 목에 힘이 가해지자, 흑의 무사의 안색은 대번에 시커멓게 변했다. 추스르다 만 그의 바지가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볼품없이 잔 뜩 쪼그라든 사내의 상징이 거기에 있었다. 비명도 못 지르고 사지만 바둥거리던 흑의무사는 엄청난 공포와 함께 점차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줄기 나직한 음성이 그의 귓속에 스며든 건 바로 그 때였다. "유령부인의 거소를 알고 싶은데, 말해 줄 수 있겠나?" 사고기능이 마비되어 가는 판국에 무엇인들 말하지 못하랴? 때맞추어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사마소군이 약간 느슨하게 목을 풀어 주자, 흑의무사는 정신 없이 혓바닥을 움직였다. "저, 저기… 후원 팔민각(八珉閣)……." 그것뿐이었다. 흑의무사는 이내 허리가 뜨끔해지는 걸 느끼며 아 득한 의식의 나락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마소군은 재빨리 축 늘어진 흑의무사의 몸뚱이를 숲 속에 숨겼 다. 이 때 멀리 앞서 가던 두 흑의무사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이, 장팔(張八)! 빨리 오지 않고 뭘 해?" 난처해진 사마소군은 재빨리 임기응변으로 괴상한 콧소리를 흘려 냈다. 그러자 두 흑의무사는 즉시 알아들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리고 멀어져 갔다. "제길, 작은 것 본다더니 큰일을 치르는 모양이군." "가세. 저 친구는 원래 변비 증세가 있네. 엉덩이를 까기만 했다 하면 최소한 반 시진이야." 두 흑의무사가 완전히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사마소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숲 속에서 빠져 나왔다. 이어 그는 사방을 살핀 뒤 미리 보아 두었던 매복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소리도 없이 허공으 로 신형을 날렸다. 나무 그늘이나 조그만 바위 하나까지도 훌륭한 은신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잠입술(潛入術)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는 그였다. 이 정 도 어둠 속에서라면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서도 자유자재로 어디 든 갈 수가 있었다. 휘스스……! 한 줄기 밤바람에 몸을 실어 숲을 가르고 두 개의 마당을 지나는 동안 그를 발견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불과 숨을 서너 번 몰아 쉬기도 전에 사마소군은 후원(後園)에 당 도했다. 그는 하나의 바위 뒤에 바싹 몸을 붙힌 채 예리하게 주위를 살폈 다. 한순간 그의 두 눈에 빠르게 기광이 스쳤다. '이것 봐라?' 전면에 펼쳐진 거대한 화원(花園)과 웅대한 전각에는 쥐죽은 듯 고요함만이 감돌 뿐, 경비무사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교교한 달빛만이 자욱하게 깔려 있는 이 곳엔 왠지 사람을 질식시 킬 듯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코끝에 전해져 오는 꽃향기가 사뭇 그윽하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지금 꽃향기를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전각이 바로 흑의무사가 말한 팔민각임을 믿 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몸을 숨기고 있는 곳과 팔민각의 거리는 어림잡아 이십여 장 가량 되어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날아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 화원은 언뜻 보기엔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 같지만 기실은 일 정한 순서와 질서의 배합을 이루고 있다.' 빌어먹을 경우였지만 그건 바로 일종의 상승진세(上乘陣勢)였다. 게다가 사마소군은 그 진세 속에서 숨쉬는 인간들의 체취까지 느 낄 수 있었다. 상황으로 보아 아무렇게 나뒹구는 낙엽 한 조각, 심지어 흐르는 공기에 이르기까지 건드릴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지독한 살기로군. 좌우측에 각기 한 명, 맞은편에도 한 명, 불과 세 명뿐이지만 고도의 훈련을 거친 일급고수들이다. 게다가 진세 (陣勢)를 이용할 건 뻔한 일. 멋모르고 뛰어들었다간 낭패를 당하 기 십상이다.' '좌우 어느 한쪽을 택한다면 나머지 두 곳에서 소리가 날 것이고 …….' 잠시 생각을 굴리던 그는 곧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할 수 없지. 정면을 택할 수밖에.' 생각은 즉시 실행으로 옮겨졌다. 팟－! 사마소군은 일부러 소리를 내며 화원 한가운데로 신형을 폭사했 다. 단숨에 화원을 반 이상 가로질렀을 때다. 번쩍－! 좌우의 꽃더미 속에서 싸늘한 검광이 폭풍처럼 솟구쳐 올랐다. 간 발의 간격을 두고 정면의 맞은편에서도 번갯줄기 같은 검광이 쏘 아져 왔다. 우측의 검광은 사마소군의 하반신, 좌측은 몸통을 노려 왔으며 맞 은편 것은 정수리를 수직으로 내려 쪼개는 기세였다. 위기일발! 누군가는 아예 묻지도 않는다. 화원에 무단 침입한 이상 이미 적 으로 간주된 듯, 아니 그런 건 둘째치고 기합성조차 없었다. 시간과 각도의 계산이 거의 완벽한 합공(合攻)이었다. 일체의 군더더기 동작을 배제한 채 최단 직선거리로 쏘아져 오는 세 줄기 검광! 그 속도는 지독하리만큼 빠른 것이었고, 설사 미리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도저히 피해낼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만약 이 합공이 격중된다면 하나의 몸뚱이가 꼼짝없이 목, 몸통, 하체의 삼등분으로 쪼개져야 할 판이었다. '지금이다!' 순간 야조(夜鳥)처럼 공기를 가르던 사마소군의 신형이 거짓말처 럼 허공에서 딱 정지되었다. 무섭게 날아가던 속도에 비하면 거의 불가능하리만큼 멈춰 선 것 인데, 멈췄다고 보이는 찰나 그의 몸은 어느 새 다시 무릎을 약간 굽힌 자세로 반 바퀴 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자 때마침 그의 하반신을 공격해 오던 일 검이 아슬아슬하게 비껴 났다. 찰나지간 사마소군은 그 비껴 나는 검의 손잡이 부분의 복부를 그 대로 꿰뚫었다. 피할 여유가 있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복부를 꿰뚫린 자가 황망중 에 재차 휘두른 검은 손목을 잡혀 본의 아니게 자신을 찌른 동료 의 목을 날려 버렸다. 이렇게 되자 좌우의 두 명은 서로 찌르고 벤 결과가 되고 말았는 데, 때마침 사마소군의 정수리를 베어 들던 수직의 검광은 복부를 꿰뚫린 채 고꾸라지던 자의 머리를 재차 비스듬히 베어 버렸다. 팟－! 머리가 갈라지며 확 시뻘건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그런데 그것이 공교롭게도 정면으로 덮쳐 온 자의 얼굴에 튀길 건 또 뭔가? 놀라 급급히 방향을 바꾸려던 그 자의 허리를 뭔가 번쩍 베고 지 나간 것도 그 때였다. 그는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채 고꾸라졌다. 시뻘건 혈수와 내장 부스러기가 바닥을 적시며 쏟아져 내렸다. 툭－ 데구르르－! 허공에 떠올랐던 다른 자의 머리통이 그제야 땅에 떨어지더니 바 닥을 굴렀다. 사마소군은 그 한가운데 빙글 신형을 회전시키며 조용히 내려섰 다. "……! 그의 손에는 언제 빼앗아 들었는지 하반신을 베어 왔던 자의 검이 들려져 있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이 일련의 상황은 실로 눈 깜작할 새에 마무리되 었다. 소리도 비명도 없이 창졸간에 세 명의 절정고수가 저 세상 으로 떠난 것이다. 쥐죽은 듯한 정적, 화원에 감돌던 고요한 밤공기는 조금도 흔들림 이 없었다. 실로 경혼동백(驚魂動魄)할 일이 아닌가? 사마소군, 그는 별로 신기하다거나 복잡한 무공을 펼친 것도 아니 었다. 그는 단지 빨랐다. 그것은 피와 살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 한 극단의 빠르기였다. 그가 전개한 동작 하나하나는 흡사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해 놓고 실습을 하기라도 한 듯 극히 자연스러웠으며,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상태의 동작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 그것은 최소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과를 노리는 실용무 예(實用武藝)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동작을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다는 것 은 사마소군에게 있어서 지난 오 년 간의 세월이 얼마나 혹독하고 처절했던 것인가를 은연중 말해 주고 있었다. 툭－! 사마소군은 들고 있던 검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동시에 그는 지체 없이 팔민각의 지붕 위로 새가 허공을 날 듯 신형을 날렸다. 지붕에 올라서자마자 그는 몸을 납작하게 엎드렸다. 이어 고개를 들던 그의 동작이 멈칫 정지되었다. 십여 장 앞 정면, 어둠 속에서 새파란 두 줄기 녹광(錄光)이 귀화 (鬼火)인 양 소름끼치게 빛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이 사람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라는 걸 알아보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지붕 위에까지 매복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구나.' 그 때 소름끼치는 안광이 서서히 그에게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사마소군은 비로소 상대의 용모를 알아보았다. 그는 삼각꼴의 눈 에 하관이 예리하게 각진 육십대 초반의 흑의노인이었다. 흑의노인은 사마소군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갑자기 나타난 상대를 보자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안색을 음산하게 굳 혔다. 상황으로 보아 흑의노인은 아직 화원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 는 듯했다. "흐흐… 웬 놈인지 간덩이도 크구나. 보아하니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놈 같은데, 감히 여기가 어디……." 흑의노인의 살기 어린 음성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사마 소군이 엉거주춤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며 불쑥 이렇게 말했기 때 문이다. "안녕하시오?" "음?" 흑의노인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사마소군은 그가 뭐라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어떻소? 한데, 부인께선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으셨소?" 흑의노인은 일시 어리둥절한 눈빛이 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마소군의 전신을 훑어보며 물었다. "넌 누구……." "쉿! 목소리가 너무 크오." 사마소군은 재빨리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어 입 다물라는 신호를 보낸 뒤 빠르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당신이 그렇게 큰 소리로 말을 하면 아랫사람들 이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게 되면 내 체면은 뭐가 되겠소? 한데, 당신의 명호는 무엇이오?" 흑의노인은 완전히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노, 노부는 흑효신(黑梟神) 정붕(鄭鵬)이라고 한다. 한데, 너는 지금 무슨 말을……." "허어, 아직도 목소리가 크구려. 당신은 부인께서 한번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섭다는 걸 모르시오? 그보다 이걸 보시오." 사마소군은 빙긋 웃더니 한 손을 가슴 앞에서 빙글 돌려 쭉 앞으 로 내뻗었다. 이어 그는 그 손을 다시 갈고리처럼 오므려 잡아당 기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흑효신 정붕은 언뜻 사내 녀석의 손치곤 그 손이 매우 희다고 느꼈을 뿐으로 어리둥절하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이미 두 차례 목소리가 크다고 지적을 받아서인지 정붕은 무의식 중에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 자네는 도대체 부인과 무슨……." 말하다 말고 돌연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와락 감싸쥐었다. 갑작 스럽게 머리에 빠개지는 고통을 느낀 것인데……. 그것이 고통이라는 걸 알기도 전에 그의 앞이마가 공처럼 불룩 튀 어 나오더니 퍽 하고 터졌다. 희멀건 뇌수와 피가 확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잔뜩 부풀었 던 고무공이 갑자기 터져 나간 것과 흡사한 광경이었다. 정붕의 몸이 휘청하더니 앞으로 기울어졌다. 사마소군은 번개같이 몸을 날려 쓰러지려는 정붕의 몸을 잡고는 바닥에 소리 없이 눕혔다. 흑효신 정붕, 사실 그는 이렇게 번번이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죽을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질문과 상식 밖의 행동으로 머리가 혼란스러워진 게 저승길을 가게 된 원인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최면 상태에서 당하고 만 것이다. 쓸데없는 헛소리에 정신을 팔다가 황천길을 가게 된 것이 몹시도 억울했음인가? 정붕의 두 눈은 튀어 나올 듯 무섭게 부릅떠져 있었다. 사마소군은 시신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혹 염라대왕께서 물어 보면 대답하시오. 저승길을 오면서 사만히 생각해 보니, 소수무영장(素手無影掌)의 흡자결(吸字訣)에 당한 것 같다고." 그러나 사자(死者)는 말이 없었다. 슥－! 사마소군은 다시 지붕에 납작 엎드려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그는 마치 거미가 기어가듯 신형을 소 리 없이 이동시켰다. 그 사이에도 그의 귀는 계속 지붕에 바싹 밀착된 상태였다. 전각이 큰 만큼 지붕 또한 매우 넓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다. 사마소군의 눈에 문득 이채가 스쳤다. 뭔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그것은 물소리였다. 목욕을 할 때 끼얹는 듯한 그 물소리는 매우 가까운 곳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조심스럽게 기왓장을 들어 내 틈새를 만든 후 눈을 대 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래는 화려하고 넓은 하나의 실내였다. 실내는 모서리가 없는 원형이었으며, 화장대와 하늘빛 휘장 등으 로 보아 첫눈에도 여인의 규방임을 알 수 있었다. 실내의 집기들은 하나같이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희귀한 것들이었 는데, 주인의 고귀한 신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사향 내음이 사마 소군의 코끝에까지 느껴졌다.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물소리는 실내의 한쪽으로 난 조그만 문 안쪽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그 문은 절반쯤 열려져 있었다. 뿌연 수증기가 보이는 가운데 물 끼얹는 소리는 규칙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촤아아－! 사마소군은 더 이상 이동하지 않고 계속 실내를 주시하며 기다리 기 시작했다. 목욕은 예상보다 오래 계속되었다. 반 식경쯤 흐른 뒤에서야 욕실 문이 열리며 한 나녀(裸女)가 걸어나왔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나오고 있는 탓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 다. 그러나……. 아아, 이 순간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 여체의 아름다움 을 어떻게 형용할 것인가? 촉촉이 물기에 젖은 채 허리께까지 흘러내린 수발(秀髮)은 해초가 하늘거리는 듯하고, 우윳빛 투명막이라도 한 겹 두른 듯 뽀얀 살 결은 막 목욕을 마쳐서인지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터질 듯 팽팽한 두 젖무덤은 물방울을 보석처럼 굴러 내려 고요한 기복을 일으켰다. 잘록한 허리의 곡선은 학(鶴)의 그것처럼 가녀린 목덜미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고, 꿈결 같은 아랫배의 능선 아래로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비림(秘林)이 희미하게 보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체, 그러나 평범한 여체가 아닌 폭 발적인 유혹과 아름다움을 지닌 여체였다. 그렇다. 이런 여체라면 설령 돌부처라 할지라도 눈을 번쩍 뜰 것 이다. 더욱이 멀쩡하게 살아 숨쉬는 사내라면 심기가 진탕된 채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사마소군의 눈빛은 거짓말처럼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얼음장처럼 더 차갑고 냉정하게 변하고 있 다고 말해야 옳으리라. 한편 그 순간, 나녀는 화장대 앞쪽으로 미끄러지듯 걸어가고 있었 다. 한 걸음씩 옮겨 놓을 때마다 눈부신 여체는 고무공같이 탄력적으 로 출렁였다. 가히 보는 이의 넋을 뽑아 놓을 만한 매력과 관능의 폭출이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런 것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가 뚫어지 게 바라보고 있는 건 수건으로 가려져 있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이윽고 여인은 큰 거울이 달린 화장대 앞에 당도했다. 그녀는 앞의 푹신한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하얀 대리석으로 빚어 내린 듯 늘씬한 두 다리가 가지런히 포개어진 채 동작을 멈춘 순 간이다. 마침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옥용이 적 나라하게 드러났다. 순간, 사마소군은 일시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유령부인(幽靈婦人), 마차에서 언뜻 보았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일견키에 삼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러나 사마소 군의 예리한 안목은 그 싱그럽고 탄력 있는 육체 속에 감추어진 실제 나이가 사십대 초반이라는 것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조물주가 붓으로 그린 듯 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목구비! 전체적으로 성숙한 기품과 고결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그 옥안(玉 顔)엔 다른 어떤 여인도 흉내 내지 못할 깊은 향기 같은 것이 있 었다. 그러나……. 오오, 그러나 그런 것이 대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이, 이럴 수가……?' 지붕 위에서 재차 유령부인의 얼굴을 확인한 사마소군은 머릿속에 서 벼락이 터지는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저 얼굴! 설령 불에 타서 재가 된다 하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저 얼 굴. 사마소군은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한 마디 외침을 참기 위해 거 의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 했다. '어머니……!' 믿어지지 않게도 유령부인의 모습은 어머니 임설정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았던 것이다. 아니,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보아도 분명 모친 임설정이었다. 사마소군이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 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사마소군은 모친 임설정이 죽어 있는 모습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 하고 있었다. 뱀이 똬리를 튼 형상이 새겨진 단검에 머리를 꿰뚫린 채 죽어 있 던 끔찍한 모습을 어찌 한순간이라도 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나 있는 저 모습은 분명 모친 임설정이 아닌가? 사마소군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얼마 전 길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착각을 한 게 분명 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자신의 판단을 확인하기 위해 이 곳까지 왔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나타나고 말았다. 그렇다. 마음 같아선 당장 지붕을 뚫고 아래로 내려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어떤 때 가장 냉철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슴을 터뜨릴 듯 폭풍처럼 치밀어오르는 격정의 소용돌이!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세상에 죽은 어머니와 똑같은 사람을 보고도 초연할 수 있는 자식 은 없다. 제아무리 인내심이 강하고 굳은 자일지라도 그건 불가능 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사마소군은 가히 무쇠 같은 자제력으로 그 불가능을 가능 으로 바꿔 놓고 있었다. 그러한 자제력은 지난 오 년 간의 세월 동안에 만들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오 년 중 최초의 일 년은 살수무예(殺手武藝)를 완벽하게 소화 하는 시기로 할애했으며, 그 살수무예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곧 인내와 자제력이었던 것이다. 그 자제력은 부동(不動), 즉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흔들리지 않아 야 하는 심력(心力)으로 엄청난 고통과 뼈저리는 시험을 거쳐서만 얻어질 수 있었다. 일체를 망각한 냉정! 사마소군의 눈빛이 원래의 고요함을 되찾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히며 새로운 눈길로 유령부인을 살폈 다. 한편 이 때 유령부인은 석고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 속에 비친 또 하나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러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유령부인의 하얀 손이 목덜미로 미끄러져 올라갔다. 그녀는 부드럽게 자신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더니, 가볍게 상체를 비틀며 이번엔 젖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백사(白蛇)가 꿈틀대듯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광경이 전개되기 시 작했다. 젖가슴을 희롱하던 그녀의 손은 다시 아래로 꿈틀대며 미끄러져 내리더니 매끄러운 아랫배 쪽으로 이동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처음엔 의아함을 느꼈으나 이내 그녀가 두 다리를 벌리는 걸 보고 비로소 직감했다. '그러나 설마……?' 그러나 그의 설마하는 추측은 이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벌려진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무성한 비림(秘林)이 내비치고, 인 간 본연의 뜨거운 본능이 살아 숨쉬는 욕망의 샘이 고요한 잠에서 깨어났다. 유령부인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잠시 망설이는 듯 수림 사이를 거 닐더니, 이내 미끄러지듯 태고의 비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다. 이제 사태는 명백해졌다. 자위행위(自慰行爲)! 유령부인은 지금 분명히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손놀림이 점차로 빨라져 갔다. 그런데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 어쨌거나 자위행위도 일종의 성행위이건만 그녀의 얼굴은 거짓말 처럼 무표정했다. 하다 못해 얼굴이 달아오른다거나 눈빛이 흐려 지는 건 고사하고 아예 호흡조차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다. 어찌 보자니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 는 사람 같아 보였다. 때로는 완만하게, 때로는 거칠게… 가느다란 손가락이 비경 속을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우윳빛처럼 뿌옇고 말간 음액이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육체적으로는 이미 적잖게 흥분이 됐다는 증거였다. 표정 없는 얼굴과는 달리 그녀의 나신은 점차 활시위처럼 뒤로 휘 어지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더 이상 보지 못하고 틈새에서 눈을 떼었다. 하늘을 향해 돌아눕는 그의 두 눈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 한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이내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비애가 그의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는 수음(手淫)을 하고 있는 저 여인이 어머니가 아니길 처음으 로 하늘에 기원했다. 한편, 그 순간 실내의 유령부인은 절정에 달해 몸을 파르르 경련 하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가 한껏 뒤로 꺾여지고 처음으로 그녀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곧이어 경련이 심해지더니 마침내 몸이 서서히 오그 라들었다. 화려한 폭죽이 명멸하듯 희열의 순간이 지나간 것이다. "후우……!" 마치 무거운 짐이라도 벗은 듯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욕실로 향했다. 얼마 후 들려 오는 물 끼얹는 소리를 들으며 사마소군은 내심 탄 식했다. 올려다보는 하늘엔 별들이 총총히 박혀 보석을 뿌려 놓은 듯 빛나 고 있었다. 그 하늘 한 구석으로 어린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선유도의 구름 같은 꽃밭을 거닐던 장면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참으로 행복했던 시절, 그러나 이젠 두 번 다시 재현될 수 없는 가슴 아픈 추억이었다. 물소리는 더 이상 들려 오지 않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잠시 더 기다렸다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다시 틈 새로 실내를 들여다보았다. '음……?' 그의 눈에 일순 이채가 빠르게 스쳤다. 욕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 다. 그런데 유령부인의 모습은 욕실에도, 실내에도 보이지 않았 다. '문을 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사마소군은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유령부인이란 명 호답게 유령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마소군은 잠시 생각을 굴린 후 하늘을 힐끔 바라보았다. 천색으로 보아 자시(子時)가 되려면 아직 반 시진 가량이 남아 있 는 듯했다. 스윽－! 사마소군은 즉시 기와 몇 장을 조심스럽게 더 뜯어 내기 시작했 다. 이어 그는 재빨리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든 후 소리 없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휙－! 한 바퀴 빙글 신형을 돌리며 방 밑에 내려선 사마소군은 실내 구 조를 예리하게 살폈다. 그는 유령부인이 사라진 데에는 필시 방 안 어딘가에 비밀통로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믿었다. 침상, 탁자, 화장대 등을 차례로 살피던 그의 시선이 문득 한쪽 벽에 걸린 거대한 화폭에 이르러 딱 고정되었다. 그 그림은 거대한 대호(大虎)가 죽림(竹林) 사이에서 포효하는 맹 호출림도(猛虎出林圖)였다. 사마소군은 곧장 그림 앞으로 다가간 후 조심스럽게 화폭을 손끝 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석씨 가문의 초인적인 감각을 무예 차원에서 최소한 팔 할 이상 터득하고 있는 그였다. 천하의 어떠한 눈속임수의 기관장치도 그 의 시야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화폭을 더듬어 가던 그의 손이 문득 정지되었다. 그의 손이 멎은 곳은 맹호(猛虎)의 왼쪽 눈이었다. 언뜻 보면 오른쪽 눈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림이란 종이 에 그리는 것이다. 한데, 손끝에 전해져 오는 감촉은 분명 유리의 표면처럼 딱딱한 질감이었다. '바로 이것이었군.' 사마소군의 눈에 빠르게 기광이 스쳤다. 그는 가볍게 맹호의 왼쪽 눈을 눌렀다. 순간이다. 맹호출림도가 걸린 벽면의 일부가 소리 없이 위로 이동 하며 어두컴컴한 지하통로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 사마소군은 잠시 청각과 시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희옥상에게도 말을 한 적이 있었듯이, 그의 오감은 방원 이십 장 이내의 어떤 움직임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통로 안에서 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 오지 않았다. 사마소군은 잠시 생각하다가 화장대 옆에 놓인 수건으로 재빨리 얼굴을 가렸다. 스윽－! 그는 조심스럽게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열려졌던 벽면이 저절로 스르르 내려오더니 원래대로 굳게 닫혔다. 사마소군은 멈칫했으나 뒤돌아보지 않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대략 반 다경쯤 아래로 내려가자 계단은 끝이 났다. 대신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협소한 통로가 그를 기다리고 있 었다. 별다른 손질도 없이 엉성하게 파여져 있는 이 통로는 두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도의 넓이였다. 바닥의 흙은 모래처럼 부 드러웠으며, 땅 속 특유의 음습한 습기가 가득 맴돌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전신근육을 잔뜩 긴장시킨채 앞 으로 전진했다. 거칠고 투박한 통로는 꼬불 꼬불거리며 꽤 길게 이어졌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이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상 관도 없었다. 칠흑 같은 그믐밤에 백 장 밖의 인물 생김새는 물론, 옷 색깔까지 알아볼 수 있는 그였기에 이 정도 어둠은 대낮이나 다름없었다. 대략 이십여 장쯤 그렇게 나아갔을까? 문득 사마소군은 전신으로 부딪쳐 오는 청량한 바람을 감지했다. '그렇다면……?' 사마소군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바로 앞에 휘어져 있는 모퉁이를 꺾어 돌자, 통로는 거기에서 끝 나 있었다. 밖은 빽빽이 우거져 있는 죽림(竹林)이었다. 스스스……! 바람에 흔들거리는 대나무 소리가 기묘한 여운을 풍기며 울려 퍼 지고 있었다. '역시 이 통로는 밖으로 이어져 있었군.' 대충 가늠해 보니, 이 곳은 유령장의 후원에서도 가장 뒤쪽이었 다. 사마소군은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죽림 안으로 향했다. 달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죽림 속이었지만 밖이라 그런지 통로보 다는 한결 밝은 편이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느꼈음인지 그의 동작이 민첩해졌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파공성은커녕 옷자락 날리는 소리조차 들 리지 않는다. 이 때다. 사마소군의 신형이 갑자기 딱 멈추어졌다. "……!" 전면 십여 장 앞, 죽림 속에 한 채의 모옥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다. 대나무로 얼키설키 엮어 만든 탓에 허술한 느낌이 없지는 않았지 만, 주위의 은밀한 풍광과 어울려 여간 풍치가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저기 틈새가 난 대나무벽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내부에는 분명 사람이 있었다. 사마소군이 얼마간 더 접근하는 사이, 나직한 대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하나는 사내의 음성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유령부인의 것이었다. 사마소군은 유령처럼 기척도 없이 모옥의 한 귀퉁이에 바싹 은신 했다. 이어 그는 벽에 나 있는 대나무 틈새로 눈길을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꿈틀 찌푸렸다. 방 안은 겉과는 달리 꽤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푹신 한 백색 양탄자가 깔려져 있었고, 자단목(紫丹木)으로 만든 탁자 와 의자가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선 굵은 황촉불이 흔 들거리며 은은히 타오르는 가운데 맨 안쪽으로 나무침상이 보였 다. 사마소군이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 건 바로 그 침상 위에서 벌어지 고 있는 광경 때문이었다. 그렇다. 침상 위에는 두 개의 희멀건 알몸이 뒤엉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연출하기 직전이었다. ━━━━━━━━━━━━━━━━━━━━━━━━━━━━━━━━━━━ 제 24 장 추악(醜惡)한 거래 ━━━━━━━━━━━━━━━━━━━━━━━━━━━━━━━━━━━ 여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침상에 반듯이 누워 있는 나녀 (裸女)는 바로 유령부인이었다. 침상 아래에 사내의 옷만 있는 것으로 보아 유령부인은 목욕을 마 치고 알몸인 그대로 이 곳까지 온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녀의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사내의 얼굴은 실로 괴이하 기 짝이 없었다. 양쪽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은 눈부신 금빛이고, 얼굴은 주름살 하나 없이 밋밋한데다 무섭도록 창백했다. 도저히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삭막 한 그 얼굴은 어찌 보자니 마치 계란 같기도 했다. 그렇다. 세상에 이런 얼굴은 둘도 없을 것이다. '저건 인피면구(人皮面具)일 것이다!' 사마소군은 한눈에 직감했다. 그런 그의 추측을 더욱 확실히 뒷받침해 주는 것은 사내의 몸이었 다. 약간 마른 듯하면서도 놀라우리만큼 잘 발달된 근육으로 뭉쳐 진 그 몸은 완전히 구릿빛이어서 얼굴색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금발사내는 유령부인을 향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었는데, 일 견 오만하고 위엄 있는 자세였다. 그의 몸에 배어 있는 그 위엄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 같았다. 은연중 상대방으로 하여금 질식할 듯한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그 런 부류의 인물.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는 천장을 똑바로 보고 누 워 있는 유령부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유령부인과 금발사내. 두 사람의 몸에 배인 위엄이 서로 다른 게 있다면 금발사내의 것 은 불길처럼 뜨거운 오만함이요, 유령부인의 것은 얼음장처럼 차 가운 오만함이라 할 수 있었다. 이 때다. 금발사내가 감상하듯 유령부인의 풍만한 알몸을 천천히 쓸어 보며 나직이 흥분 어린 찬사를 발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몸이오. 눈이 부시도록……." 말과 함께 금발사내가 서서히 손을 들어 유령부인의 몸을 만지려 는 순간이었다. 유령부인의 입에서 차갑고 무감정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당신은 아직 어떤 물건을 가져왔는지도 말하지 않았어요." 금발사내는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유령부인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 가며 나직하게 웃었다. "후후…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당신을 실망시 킨 적이 있었소?" 그는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어렵게 구한 것이오. 중원의 전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 헤매는 것이니까 말이오." 유령부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럼… 혹시?" "후후후… 역시 당신은 눈치가 비상하구려. 그렇소. 바로 무자혈 경이오." 금발사내의 득이로운 대답에 유령부인은 눈을 반짝 빛냈다. "몇 권이죠?" "욕심은… 아직 한 권밖에 구하지 못했소. 하지만 머지않아 두 권 이 더 내 수중에 들어올 것이오. 그렇게 되면 일전에 준 것과 합 쳐 무려 네 권이나 당신의 손에 들어가는 셈인 것이오." 금발사내는 유령부인의 뺨 언저리를 쓰다듬으며 느리게 말을 이었 다. "당신은 정말 행복한 여인이오. 무림 최고의 보물들을 이렇듯 손 쉽게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오." "……." 유령부인은 어느 새 원래대로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길로 금발사내 를 바라보더니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좋아요." 독백처럼 나직한 한 마디. 그녀는 눈을 반쯤 내리감더니 전신에 힘을 빼고 두 다리를 약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그것을 본 금발사내의 두 눈이 점차 불꽃처럼 이글거리기 시작했 다. 욕정의 불꽃은 일단 타오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마련이다. 그의 코끝에서 기이한 두 줄기 백무(白霧)가 새어 나오더니 유령 부인의 젖가슴 유실을 휘감았다. "오늘 결국… 당신은 내게 매달리게 되고 말 것이오." 뜻 모를 한 마디. 그의 숨결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그는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유령부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는 자신의 몸을 그녀의 위에 실었다. 한편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문득 역겨운 구토가 왈 칵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후 상황으로 판단하건대 유령부인은 금발사내와의 어떤 조건에 의해 육체를 허락하는 것 같았다. 그 대가가 놀랍게도 이번에는 무자혈경인 셈이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에게 있어 무자혈경은 이 순간 두 번째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유령부인이 정말 자신의 모친인가 하는 점이었다. 기실 그가 여기까지 따라 미행해 온 것도 어쩌면 그녀의 입을 통 해서 직접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추잡한 광경을 거듭 보게 되자, 그는 극도로 혼란 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유령부인이 단순히 어머니와 지독하게 닮은 여인에 불과하다 면 오늘 일은 못 본 것으로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만약 정말 모 친 임설정이라면 이 무슨 비참한 일이겠는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죽은 사람이 어찌 살아난단 말인가?' 사마소군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훌쩍 떠나 버릴까도 생 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건 유령부인이 너무도 죽은 어머니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사마소군은 이왕 내친 김에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확실한 단서를 얻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한편 이 때 방 안에는 후끈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금발사내는 유령부인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집요하게 애무 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백옥 같은 그녀의 허벅지를 거슬러 점차 위로 올라갔 다. "후우……!" 거친 숨결, 그러나 금발사내는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천천히, 그리고 지극히 열정적으로 그의 애무는 민감한 여체의 곳 곳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쯤 되면 돌로 만들어진 육체가 아닌 이상, 여인도 따라 흥분하 게 마련이었다. 애욕의 몸부림을 친다거나 최소한 신음 소리라도 내야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유령부인은 몸을 뒤틀지도, 신음 소 리를 흘려 내지도 않았다. 아니, 호흡조차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 었다. 천장을 응시하는 무표정한 얼굴, 그것은 마치 육체는 남겨 두고 영혼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과 흡사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금발사내의 입에서 거칠은 숨소리가 흘러 나오고 눈자위는 더욱 충혈되어 갈 뿐이었다. 그의 몸은 금 세라도 터져 버릴 듯 팽창된 채 무언가를 무섭게 갈구하고 있었 다. 그래도 사내는 참았다. 그는 그냥 유령부인의 몸을 정복하기는 싫 었다. 철저하게 그녀의 모든 것을 정복해야만 했다. 숱한 정사를 치러 오는 동안 그에게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바쳐 굴복하지 않은 여인은 없었다. 그러나 유령부인만은 달랐다. 그녀의 육체는 그에게 여태껏 경험 하지 못한 최상의 쾌락을 선사했지만, 정사(情事) 뒤에는 항시 극 도의 허무와 우울함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그 무서운 허탈감! 그것은 애초에 유령부인의 육체를 알기 전보다 더욱 그녀를 미친 듯이 갈구하도록 만들었으며, 다시 찾지 않고선 견딜 수 없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 난 이제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소." 광기(狂氣)처럼 번들거리는 욕정의 눈빛을 감추듯,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던 금발사내는 다시 샘물을 찾아 메마른 입술을 이 동시켰다. 그러나 그의 갈증을 해소하기엔 샘물이 너무 메말라 있 었다. "후우……!" 금발사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다시 그녀의 몸 위로 자신을 실으며 한쪽 무릎으로 그녀의 하체를 내리눌렀다. 그 바람에 그녀 의 두 다리가 약간 벌어졌다. 다음 순간, 유령부인의 긴 속눈썹이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찌푸 려졌다. 활짝 열려진 성문으로 마침내 육중한 이물질이 완강한 힘 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유령부인은 이내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금발 사내는 그 때부터 그야말로 엄청난 힘으로 그녀의 몸 을 공략해 갔다. 삐걱삐걱－! 그토록 튼튼해 보이는 침상이 금세라도 무너져 내릴 듯 비명을 지 르기 시작했다. "훅… 후욱……!" 금발사내는 거친 숨을 토하며 점차 동작을 빨리 해 갔다. 바윗덩 어리처럼 무섭게 짓누르는 그 힘은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차 보였다. 그러나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유령부인의 무표정했던 얼굴은 오히려 행위가 계속될수록 더욱 싸 늘하게 굳어져만 갔다. 그것은 차라리 무섭기까지 보이는 얼굴이 었다. 금발사내는 그녀의 전신을 아예 허물어뜨릴 듯 광폭한 기세로 밀 어붙였다. 그야말로 야수가 몸부림치는 듯한 기세였다. 사마소군은 이미 오래 전부터 눈을 감고 약간 파리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그는 어쩌면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최악의 고문을 당하 고 있는지도 몰랐다. 들려 오는 짐승 같은 신음 소리를 들으며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 다. 이건 정사(情事)가 아니었다. 사랑과 희열이 없는 정사는 결코 정 사라 말할 수 없었다. 희열이 없다는 것은 유령부인의 표정과 태도에서 확실히 알 수 있 었다. 그녀는 다만 어떤 목적을 위해 몸의 일부분만 빌려 주고 있 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손 치더라도 어찌 저럴 수가 있는가? 제아무리 그 짓에 신물이 난 창녀라 할지라도 일단 정사를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약간의 흥분은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유령부 인은 시종 완벽하게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문득 사마소군의 뇌리로 그녀가 방금 전 자위행위를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렇다. 저것은 천부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수련을 통해 가능해 진 결과다. 아까와 같은 자위행위 등으로…….'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었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유령부인은 지금 자신과 처절한 사투를 벌 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절제의 벽을 허물어뜨린다는 건 곧 그녀에게 패배를 의미하는 것 이다. 이 때다. 사마소군의 귓가에 금발사내가 토해 내는 짤막한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뒤이어 모든 사물이 그 움직임을 멈추고 시간 마저 정지한 듯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제야 끝난 모양이군!' 사마소군은 씁쓸한 심정으로 다시 눈길을 틈새로 가져갔다. 금발사내는 막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은 몸을 침상에 벌렁 돌아눕 히고 있었다. 그녀는 힐끔 곁눈질로 금발사내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어디 있죠?" "뭐 말인가?" 금발사내는 짐짓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유령부인의 싸늘한 눈에서 푸르스름한 광채가 뻗어 나왔다. "지금 날 놀리려는 건가요?" "아참, 그렇지! 무자혈경을 줘야지. 거기 내 옷 좀 집어 주겠나?" 금발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령부인은 그의 옷을 집어 들 더니 홱 던졌다. 금발사내는 옷을 받아 든 후 잠시 유령부인을 기이한 시선으로 응 시하더니, 품속을 뒤져 한 권의 책자를 꺼내 들었다. 이어 그가 책자를 내밀자, 유령부인은 빼앗듯 그것을 낚아챘다. 금발사내는 그런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나직이 괴소를 흘렸다. "후후후… 정말 대단한 집념이야. 오늘로 결국 난 당신의 반응을 얻는데 실패한 셈이군. 벌써 스무 번이나 관계를 가졌는데도 말이 야……." 금발사내는 잠시 사이를 두고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육체에 매력을 잃기는커녕 점점 더 빨려드는 느낌 이란 말야. 후후, 불가사의한 일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군." 그러나 말과는 달리 금발사내의 손끝은 미미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유령부인은 석고 조각처럼 미동도 않고 서서 그를 응시할 뿐이었 다. 금발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앞으로는 힘들 것이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당신이 남 편이 아닌 다른 사내의 품에서 헐떡거리는 모습을 보는 걸 일생 일대의 목표로 삼았으니까 말이오." 듣기에 따라서는 농담 같기도 했고, 무서운 협박 같기도 한 한 마 디였다. 그러나 유령부인은 그의 말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담담한 어 조로 물었다. "언제 또 오실 건가요?" "두 권의 무자혈경이 내 손에 들어오는 날이오. 하지만 그 날은 분명히 계산을 해야 할 것이오. 무자혈경이 두 권이면 당신도 두 번……." "얻는 대로 연락하세요." 유령부인은 그의 말을 가로채더니 문 쪽으로 향했다. 사마소군은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재빨리 한쪽으로 은신했다. 모옥 문이 열리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유령부인의 알몸이 나타났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내 죽림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허 리를 꼿꼿이 세운 채 멀어지는 그 뒷모습은 묘하게도 당당하고 아 름다운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두 다리가 가늘 게 경련하고 있음을……. 그것이 금발사내의 과도한 행위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사 마소군은 일말의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러한 자신을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내가 지금 누구를 동정하는 건가?' 유령부인이 어둠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사마소군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다. 모옥 안에서 금발사내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음성이 들려 나왔다. "정말 지독한 계집이야. 그러나 아무리 절개가 굳은 척해도 소용 없어. 그렇다고 해서 이미 더럽혀진 임설정, 네년의 몸이 깨끗해 지는 건 아니니까. 후후후……!" "……!" 듣고 있던 사마소군은 일순 뒤통수를 육중한 둔기로 호되게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오오, 임설정! 임설정이라니……? 사마소군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사지에서 온통 힘이 달아나는 기 분을 맛보았다. 아찔한 현기증으로 그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순 간이었다. 바삭－! 미세한 낙엽 소리가 그의 발 밑에서 울려 퍼졌다. 모옥 문이 쾅 떨어져 나가며 금발사내가 뛰쳐나온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 었다. "누구냐?" '아차!' 사마소군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러나 피하기엔 이 미 늦었다. 그는 태산처럼 우뚝 선 채 금발사내를 노려보았다. 금발사내는 하의를 입고 나서 막 상의를 걸치다가 뛰쳐나온 듯 풀 어 헤쳐진 옷 사이로 근육질의 가슴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시선과 시선이 정면으로 딱 부딪쳤다. 금발사내는 처음 사마소군을 발견한 순간 크게 곤혹스런 눈빛이더 니, 이내 바윗덩어리라도 꿰뚫을 듯 가공할 안광을 폭사했다. "누구냐, 네놈은?" 착 가라앉은 이 음성에는 어떤 형용 못할 위엄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이 그 정도의 위압감에 눈 하나 깜짝할 리가 없었 다. 이 때 그는 믿을 수 없으리만큼 빠르게 원래의 냉정을 회복하 고 있었다. 강철같이 차가우면서도 완강한 그의 시선은 정면으로 금발사내의 눈빛을 흡수했다. 일순 금발사내의 눈에 실낱 같은 이채가 거짓말처럼 빠르게 떠올 랐다가 사라졌다. 고수에겐 고수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법, 그는 전혀 흐트러짐 없이 바다처럼 고요한 상대의 자세를 보자 예사롭지 않은 상대를 만났음을 한눈에 깨달았다. 잠시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먼저 그 침묵을 깬 것은 사마소군이었다. 그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귀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겠소. 그러나 단 한 가지만은 반 드시 대답해 줘야겠소." 비록 상대를 존중하는 어투였으나 무쇠 같은 의지가 담긴 한 마디 가 아닐 수 없었다. 어찌 들으면 협박이랄 수 있는 위엄 서린 한 마디. 금발사내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는 이제껏 자신에게 이런 투로 말하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만난 기억이 없었다. 그는 냉소하듯 입술 언저리를 실룩하더니 냉막한 어투로 물었다. "만약 그 한 가지 질문마저 대답해 주지 않겠다면 어쩔 셈이냐?"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말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오." "……!" 금발사내는 어이없어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이내 흥 미가 담긴 기묘한 것으로 뒤바뀌었다. 그는 일단 연유를 들어 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애송이놈. 좋다. 후후후, 알고 싶은 게 무엇이냐?" 사마소군의 눈에 뇌전(雷電)처럼 무시무시한 광채가 번뜩 스쳤다. "조금 전 귀하의 입에서 나온 임설정이란 이름은 분명 유령부인의 것이오?" "……!" 금발사내의 눈빛이 흠칫 굳어졌다. 그의 전신에서 이내 무서운 살 기가 서려 나왔다. "네놈은 누구냐?" "귀하는 아직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소." "너는……." ━━━━━━━━━━━━━━━━━━━━━━━━━━━━━━━━━━━ 제 25 장 이중음모(二重陰謀) ━━━━━━━━━━━━━━━━━━━━━━━━━━━━━━━━━━━ 잔칫상은 화려했다. 아니, 화려한 정도가 아니라 눈이 핑핑 돌아 갈 지경이었다. 의사청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놓인 길고 긴 탁자(卓子). 붉은 비단보가 씌워져 있는 그 탁자 위에는 사마소군이 생전 듣지 도 보지도 못한 요리들이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가득 놓여 있 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였다. 온갖 진귀한 야채와 과일로 뱃속이 가득 채워진 비단구렁이가 통 째로 상 위에 올라가 있는가 하면, 서른두 가지 해물을 배합해 만 든다는 통구이 양(羊) 한 마리도 보였고, 상어 지느러미 요리에 표범의 태반도 있었다. 뿐인가? 곰 발바닥, 원숭이 골, 앵무새 혓바닥 등등… 어쩌다 한 번 스쳐 가는 말로만 들었을 뿐 생전 구경조차 해 보지 못했던 진귀요리들 이 빠짐없이 차려져 있는 것이다. 낙양성주 왕극륜의 평소 생활이 얼마만큼 화려했는지는 이 상하나 만 가지고서도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구수하고 맛있는 냄새가 대청 안을 진동했다. 그러나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도는 이 상을 앞에 두고 모인 인물들은 누구 하나 요 리에 손을 가져가는 이가 없었다. "……." 침묵으로 일관한 채 탁자 주위에 빙 둘러앉아 있는 인물들은 대략 이십여 명 가량 되었다. 중앙의 상석(上席)은 아직 비어 있었고, 그 좌우로는 각기 세 명 씩 앉아 있었다. 좌측은 바로 금사충, 공야치, 냉자기였고 우측은 곡철화, 화옥, 백약빙 순이었다. 그들은 각기 가장 편하고 느긋한 자세들을 취하 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맞은편 탁자 쪽에는 실로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행색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십이 인(人). 하나같이 각양각색의 복장을 했는데 얼굴에는 십이지간(十二支間)을 나타내는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형상의 가면을 뒤집어쓴 모습이었 다. 그러한 모습들로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니 마치 세상에 존 재하는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한자리에 모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 으켰다. 이들은 누구인가? 알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굳이 눈빛이나 전신에서 풍겨 나는 기도가 아니더라도 그들 개개 인의 위엄은 모두 상승의 무공을 소유한 절정고수들이라는 것을 한눈에 짐작케 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낙양성부를 지키는 밖의 삼천여 군졸들이 이 자리에 모여 든 이들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눈뜬 허수아비 꼴이 되었다는 사 실로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일이었다. 탁자의 양쪽 끝으로는 두 노인(老人)이 미동도 않고 시립해 있었 다. 오 척 단구의 꼽추노인과 먹물 같은 흑의 차림에 짙은 화장을 한 괴노파, 바로 적노와 흑태랑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장내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는 다 름아닌 왕극륜이었다. 한쪽 구석으로 치워진 태사의에서 고개를 떨구고 잠들어 있는 그 의 모습은 여간 처량해 보이지 않았다. 보나마나 수혈(睡穴)을 짚 혀 잠이 든 몰골이었다. 밖에서는 군졸들과 요리사들이 그에게 완전히 미쳤다느니, 변태라 느니,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잠이 들어 있는 것이다. 정적, 자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부터 시작된 좌중의 침묵은 어느덧 팽팽한 긴장감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이 때다. 공야치가 곡철화 쪽을 바라보며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 었다. "대형, 막내가 이토록 중요한 모임에 늦다니 어떻게 된 거요?" 곡철화는 이 때 품속의 어린 강아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있 었다. 어린 강아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엇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곡철화의 신색은 여간 태평스러운 게 아니 었다. "뭘 알고 싶은 거냐?" 여전히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그가 되물었다. 공야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형님이 그랬잖소? 저잣거리에서 분명히 막내를 만났다고." "그랬지." "한데, 왜 아직 안 돌아온단 말이오? 약속시간도 지났는데."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젠장, 무슨 사고라도 난 것 아니오?" 공야치는 곡철화의 느긋한 대꾸에 약간 신경질적인 어투가 되었 다. 곡철화는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방정맞은 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 재수 없는 소리는 지껄이는 게 아니야." "……!" 공야치는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젠장할,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그는 내심 투덜거리며 곡철화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잠깐 이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으리라.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 사마소군을 비롯한 칠 인은 오 년 간의 수업(修業)을 마치고 강호에 출도한 뒤 칠인회(七人會)라는 조직 을 결성했었다. 칠인회(七人會). 그것은 석우생의 유지(遺志)에 따라 결성된 조직이었다. 본래 석 우생은 사마소군을 제외한 여섯 사람에게 절대의 능력을 부여하는 대가로 그와 같은 조건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회주(會主)는 사마소군으로 하고, 나머지 육 인은 회주가 하는 일 에 적극 협조하라는 것이 그 구체적 내용이었다. 그러나 석우생은 영원히 그들을 구속하지는 않았다. 사마소군의 일만 마무리되면 각자 자유인(自由人)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단서 를 남겨 놓았던 것이다. 오 년 만에 다시 회동한 그들 육 인(人)은 처음에는 불만도 없지 않았다. 가장 나이 어린 사마소군의 수하가 된다는 건 사실 아무 리 생각해도 약간 떨떠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사마소군을 만난 순간부터 흔적도 없이 사 라지고 말았다. 오 년 사이에 눈부시도록 헌앙하게 성장한 사마소 군의 인품과 설득은 붙임성 있게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사마소군은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결의형제(結 義兄弟)라는 의식을 거치게 하여 막내로서 윗사람에 대한 예우를 깍듯이 했다. 그렇다. 육 인이 아무리 트집을 잡으려고 해도 그에겐 아집이나 독선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항상 다수의 의견을 따라 확고하게 행동하니 감탄할 도리밖에 없었다. 간혹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도리어 인간적인 호감을 풍기 는 것이었고, 그럴 때마다 사마소군이 씨익 웃으며 재롱을 떠는 데에는 모두가 손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결성된 칠인회는 나이순으로 서열을 정했으며, 만약 나이 가 같을 때에는 생일을 따져 형과 아우를 정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대형(大兄)에는 곡철화가 무리 없이 결정되었지 만, 그 아래로는 그야말로 시끌벅적한 산고가 있었다. 그러나 석우생이 워낙 개개인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해 놓은 덕분 으로 화옥이 둘째, 금사충이 셋째, 공야치는 넷째, 냉자기는 다섯 째,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백약빙과 사마소군의 순으로 결정되었 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결의형제로 맺어지게 되자, 본래 처지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인지 화강석보다 더 단단한 결속력으로 뭉쳐진 것 이다. 장내의 침묵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 때 문득 냉자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내가 나가서 다시 한 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대청의 오른쪽 벽에 나 있는 창 문 하나가 소리 없이 열리며 한 인영이 연기처럼 스르르 스며들었 다. 그 모습을 가장 먼저 본 것은 바로 막 몸을 일으킨 냉자기였다. 그의 냉막한 얼굴에 일순 기쁨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러한 기 색은 곧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화난 기 색으로 뒤덮였다.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그리고 그 어깨에 멘 그 자는 또 뭐 야?" 그렇다. 바로 사마소군이 나타난 것이었다. 장내 인물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마소군에게 집중되었다. 사마소군은 그들을 둘러보며 겸연쩍게 씨익 웃었다. "늦어서 미안하오. 딴에는 빨리 온다는 게 이렇게 늦어 버리고 말 았소. 그리고 이 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소." 그는 조금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신조차 잊어 버린 듯 밝은 음성으로 대꾸하더니, 성큼성큼 곡철화에게 다가가 목례를 보냈 다. "늦은 걸 용서하시오, 대형." "괜찮아, 앉아." 곡철화가 가볍게 웃어 넘기며 대꾸했다. 사마소군은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금발사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흑태랑을 응시했다. "흑파파(黑婆婆)." 흑태랑은 즉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노신 흑태랑, 회주님의 분부를 기다리옵니다." "이 자를 데려가도록 하시오." "예." 흑태랑은 신속하게 다가와 금발사내를 들어올리더니 허리에 끼고 분부를 기다렸다. 사마소군의 말이 조용히 이어졌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잘 보살펴 주시오." "보살피라 하심은……?" "그 자에게 흑파파가 왜 장한별부에서 악마의 조련사라고 불리는 지 가르쳐 주라는 뜻이오. 단 죽이지는 마시오." "알겠습니다, 회주님." 흑태랑은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눈가로 소름끼치는 안광이 번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사마소군의 시선이 다시 적노에게 옮겨졌다. "적노." "하명하십시오." "적노는 지금 즉시 장한십팔숙(長恨十八宿)을 대동, 유령장으로 가시오." "유령장… 입니까?" 적노의 깊숙한 눈에 특유의 전광(電光) 같은 광채가 빠르게 스쳤 다. 사마소군은 나직하나 위엄 있는 음성으로 분부했다. "유령장에 있는 사람들은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단 한 명도 밖으 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으시오." "분부를 거행하겠습니다." 적노는 대답을 마치기가 무섭게 뒷걸음으로 물러서더니 곧 장내에 서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사마소군은 그제야 비어 있는 맨 상석(上席)에 앉았다. 곡철화가 고개를 돌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령장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옥상은……?" "그 귀여운 아가씨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능한비가 지키고 있으 니까." "잘하셨소." 사마소군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는 비로소 맞은편에 자리해 있 는 십이 인을 응시했다. 때마침 가면을 쓰고 있는 맞은편의 열두 인물도 사마소군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마소군의 신색이 엄숙하게 변했다. 그는 그들을 차례로 천천히 쓸어 본 후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모두들 불원천리하고 본인의 초청에 이렇게 달려와 주어 매우 고 맙소." "……!" 십이지(十二支)의 가면인들의 눈빛이 일제히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마소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미 예상하고 있겠지만 본인이 여러분들을 뵙고자 한 건 장한별 부의 현임부주로서 한 번쯤은 조직의 계보와 특성 등을 파악할 필 요가 있었기 때문이오. 아울러 이 자리에서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 한 논의도 있을 것이오." 십이지 가면인들은 미동도 않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마소군의 음성은 한없이 부드러웠으나, 칼로 자르는 듯한 명쾌 함과 아울러 듣는 이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기이한 마력 같은 것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앞서 본인은 한 가지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하오." 장내의 공기가 일순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알게 모르게 장내를 압도해 버리는 사마소군의 위엄은 실로 대단 해서, 곡철화 등은 새삼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저럴 땐 전혀 다른 사람 같단 말이야.' 그 때 사마소군은 경직된 장내의 분위기를 풀기라도 하듯이 특유 의 미소를 씨익 지었다. "다 알다시피 본인은 어쩌다 재수가 좋다 보니 혈풍향 형님을 만 났고, 덤으로 그분의 조직까지 떠맡게 되었소. 당연히 여러분들 중에는 본인이 과연 회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고 있는 분 들도 있을 것이오." "……!" "그러나 본인에겐 여러분들에게 일일이 그러한 의혹을 풀어 드릴 만큼 한가한 여유가 없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사마소군의 두 눈에 은은히 깊숙한 광채가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지시를 진심으로 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 는 분은 거리낌없이 말하시오. 본인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그런 분은 조직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제외시켜 드리겠소. 물론 거기엔 조직의 모든 비밀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단서가 붙소." 태산이라도 허물어 버릴 듯 자신감에 찬 일종의 결의문(決議文)이 었다. 차라리 저돌적이라고 할 만큼 완강하게 밀어붙이는 그의 화법(話 法)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해서 혹시나 했던 십이지 가면인들은 완 전히 의혹을 풀어 버릴 수 있었다. 그렇다. 사마소군은 불과 차 한 잔 마실 시각이 흐르기도 전에 마 치 요술을 부리듯 그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이 전 주인인 석우생보다 훨씬 대하기 어려 운 상전을 만났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고 대하던 바였으며, 지극한 기쁨을 느끼게 만든 사실이었다. '하늘이 보살피셨다!' '대단하군, 대단해!' 십이지 가면인들의 눈에 일제히 경악의 빛이 떠오르고, 모두 가슴 앞에 합장지례를 하여 무언의 복종을 표시한 건 거의 동시에 벌어 진 일이었다. 사마소군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소.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께서는 각 조직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 바라오." 그러자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쥐(鼠)의 가면을 쓴 인물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속하가 관장하고 있는 천자문(千字文)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 다." 그가 사마소군에게 정중히 예를 표하며 설명을 시작하려는 바로 그 때였다. 공야치가 느닷없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잠깐." 곡철화가 힐끔 도끼눈을 뜨고 그를 주시했다. "넌 또 왜 나서는 것이냐?" "안 나서게 생겼소? 저 몰골들을 보시오. 이거야 원 동물농장이 지, 어찌 사람이 모인 장소라 하겠소?" 냉자기는 있는 대로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막내가 비록 나이는 어리다고는 하나 명색이 우리 조직의 두목인 데, 얼굴에 쓴 가면조차 벗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두목을 모욕하 는 경우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자 묘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공야치가 불쑥 말참견 을 했다. "녀석아, 이왕이면 고상한 표현을 써야지. 두목이 뭐야, 두목이? 우두머리라고 해야지." "젠장할, 그게 그것 아니오!" 냉자기의 눈이 질세라 더욱 크게 뜨여졌다. "어? 얘가 왜 이리 눈에 힘을 주고 난리야?" "어이구, 그냥……!" "얼씨구, 어쩔래?"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겨우 며칠 빨리 난 걸 가지고 그렇 게 형님 행세하는 게 아니오." "너 지금 반항하는 거냐?"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처럼 살벌한 기세로 옥 신각신했다. 십이지 가면인들은 그 모습에 당혹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마소군에게 집중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아수라 장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들의 눈길을 못 본 척 외면해 버렸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알 바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비단 그러한 반응은 곡철화를 비롯한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여서 모두가 딴청을 부릴 뿐이었다. 그 때 비로소 사마소군과 다른 인물들의 평소 유대관계가 어떤 것 인지 대강 짐작한 십이지 가면인들은 내심 또 한 차례 혀를 내두 르고 말았다. '맙소사, 강호에 들어 보지도 못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 하나 탄 생했군. 전 부주님에게 칠인회(七人會)의 성격에 대한 설명을 듣 긴 했지만, 설마 이런 것일 줄이야!' 모두의 뇌리에 똑같이 스친 생각이었다. 일어서 있던 쥐(鼠) 가면인이 황망히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럴 수밖에 없음을 일곱 분께서는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본래 우리 조직은 지금까지 철저한 비밀을 지킴으로써 흔들림 없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 조차 서로 얼굴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 다." 듣고 있던 공야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서로 얼굴조차 모르고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만약 이렇듯 중비(重秘)를 유지해 오지 않았다면 우 리 조직은 이미 오래 전에 노출되어 와해되었을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하오만……." 냉자기가 언제 언성을 높였느냐는 듯 호기심 어린 어투로 물었다. "만약 그러다가 강호에서 서로 시비라도 생기면 같은 편인지도 모 르고 동족상잔(同族相殘)할 수도 있지 않겠소?" 그 말에 공야치도 동감이라는 듯 엄숙하게 표정을 굳혔다. "맞아. 그건 그렇고, 대단한걸? 동족상잔이라는 어려운 표현을 쓰 다니……." 쥐(鼠) 가면인이 희미하게 눈읏음을 지으며 진중하게 대답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조직들은 어떠한 시비 가 발생하더라도 회주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싸움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목에 칼을 들이대는데도 말이오?" "물론입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대계(大計)가 없는 싸움은 하지 않습니다." "그, 그렇소?" 공야치는 할 말을 잊고 냉자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냉자기는 어 느 새 자리에 앉아 느긋한 자세로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자, 결국 공야치만 바보가 되어 버린 꼴이 었다. 금사충이 머쓱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는 공야치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더 망신당하기 전에 앉아." "그… 러지요, 뭐." 공야치는 엉거주춤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는 냉자기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며 내심 울화통을 삭혀야 했다. '저 물귀신 같은 놈 때문에 개망신만 당했군.' 이 때다. 사마소군이 담담한 음성으로 쥐 가면인에게 물었다. "하면, 본인은 당신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오?" "전대부주께선 속하들을 문주(門主)라고 부르셨습니다." 공경 어린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내심으로 사마소군에 게 어이없는 쓴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전대부주께서는 분명 우리들의 호칭뿐만이 아니라 생김새, 내력, 비밀 암호 전달방식까지 전해 주셨을 것이다. 그분의 치밀한 성품 에 허점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런데도 모른 척 딱 잡아떼는 저 모 습이라니……!' 그 때 사마소군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했 다. "좋소. 그럼 당신이 이끄는 세력이 천자문이라 했으니, 바로 천자 문주(千字文主)이시군. 하던 설명을 계속하도록 하시오." "예." 천자문주는 진중히 예를 표한 후 설명을 시작했다. 그 때부터 십이지 가면인들은 차례로 일어나 각 세력에 대한 설명 을 늘어놓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강 다음과 같았다. 천자문(千字文). 소속인원 일천오백(一千五百), 하나같이 몸이 불구이거나 기형의 인물들로만 형성된 조직. 주임무는 추적과 감시이며, 신체의 허점을 역이용하는 감각이 고 도로 발달되어 있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든 추적해 낼 수 있는 능력. 심지어는 흔적 없는 바람일지라도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추적의 손길을 벗 어날 수 없다고 알려짐. 천축문(天丑門). 소속인원 팔백(八百), 폭파 전문. 폭약에 관한 달인들로만 구성됨. 개개인의 몸에는 유사시를 대비 해 최소한 열 가지 이상의 폭약이 소지되어 있음. 천인문(天寅門). 소속인원 일천(一千), 살인 전문. 고도의 살인무예를 지닌 고수들 로 구성. 일단 살인 명령이 떨어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철저히 이 행. 천묘문(天卯門). 소속인원 오백(五百), 교란 전문. 환술(幻術), 사술(邪術)을 비롯 천하에서 산재하는 미공(迷功)에 능통한 술법가들로 구성. 천진문(天辰門). 소속인원 일천(一千), 전투 전문. 각종 정파무예에 능수능란한 자들로 형성. 연환진(連還陳)을 전개 할 수 있는 훈련된 정예들. 천사문(天巳門). 소속인원 일천(一千), 천진문과 마찬가지로 전투 전문. 그러나 반대로 사파무예의 고수들로 구성. 기습전투에 능함. 천오문(天午門). 소속인원 팔백, 연락 전문. 무서운 연락망을 보유. 천 리 길이든 만 리 길이든 하루 이내에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음. 천미문(天未門). 소속인원 오백, 암살 전문. 모두 여인들로 구성. 천하 각지의 환락가에 침투해 있음. 천신문(天申門). 소속인원 삼천(三千), 정보수집 전문. 온갖 신분으로 각기 천하 각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음.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구축, 무림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놓치지 않 음. 천유문(天酉門). 소속인원 이백, 용독(用毒) 전문. 언제 어느 때고 독을 펼쳐 낼 수 있는 독(毒)의 전문가들로 구성 되어 있음. 천술문(天戌門). 소속인원 이천, 재정(財政) 전문. 각 조직의 유지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 천하 각지에 도합 백팔십 칠 개(個)의 상업거점을 확보. 천해문(天亥門). 소속인원 오십, 그러나 각 조직 내에서 가장 뛰어난 모사(謀士), 책사(策士)들로 구성된 중요조직. 각 조직을 통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각종 용병지계(用 兵之計)의 신계귀계(神計鬼計)를 만들어 내는 귀재들의 집합처. 열두 조직 가운데 중추신경과도 같은 역할을 담당. 천해문주(天亥門主)의 보고까지 다 들은 사마소군은 입가에 만족 의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장한별부에서 이미 조직의 계보나 특성을 샅샅이 파악한 그였으 나, 정작 십이 문주(門主)의 입을 통해 듣게 되자 조직의 방대함 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실 이 정도면 강호의 그 어떤 문파라도 압도할 수 있음은 물론, 규모 면에선 천하제일이라고 불리는 개방( 幇)과 비교해도 손색 이 없었다. 게다가 놀랍도록 치밀하게 세분화가 되어 있으니, 그 위력이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일 수밖에 없었다. "……!" 이번엔 곡철화를 비롯한 육 인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놀란 얼굴 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장한별부의 세력이 그처럼 방대할 줄 은 사마소군을 제외하곤 모두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탓이었다. 문득 곡철화가 묵직한 어투로 뇌까렸다. "빌어먹을, 이제 보니 이 자리가 보통 뒤숭숭한 자리가 아니었군. 이것 벌써 엉덩이가 간지러워지는 기분인걸." 금사충이 만면에 사람 좋은 웃음을 가득 머금고 그 말을 받았다. "우린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벼락출세를 한 거요." 사마소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내심 새로운 감회에 젖어들 었다. 그의 뇌리 속을 가득 채우며 떠오르는 건 석우생의 영상이 었다. '형님, 실로 대단하십니다. 이 거대한 세력망에 형님이 만들어내 신 칠인회(七人會)가 장한별부의 정예들을 이끌고 합세했으니, 실 로 파천(破天)의 기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손끝이 가늘게 경련했다. 순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격정이 치밀어오른 탓이었다. 석우생을 생각하면 그는 아직도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 아름다 운 얼굴을 기억할 때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뛰며 눈물을 흘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형님, 이렇듯 거대한 조직이 아직껏 강호에 털끝만큼도 노출되지 않았다는 건 실로 존경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형님과는 반대로 강호에 전 조직을 노출시킬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마소군이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곡철화가 문득 슬그머 니 그의 옆구리를 손끝으로 찔렀다. "이봐, 가만 있으면 어떡해?" 사마소군은 비로소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곡철화에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좌중을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럼 이제부터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예?" "쯧쯧, 너는 잘 나가다가도 한 번씩 옆길로 빠지더구나." 곡철화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말했다. 사마소군은 의아스런 어조로 물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소?" "네 앞을 봐라." "봤소." "뭐가 보이느냐?" 곡철화는 약간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사마소군은 그제야 무슨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듯 소리쳤다. "와아아!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군요!" 곡철화는 만면 가득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떠냐? 완전히 휘어지기 전에 다소나마 상의 무게를 덜어 주는 것이. 그것이 잔칫상을 준비해 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그러나 공야치가 반색을 하며 그 말을 거들었다. "무조건 찬성이오! 나는 일찍부터 식은 음식은 맛이 현저하게 감 소된다는 사실을 밀도 있게 느껴 왔던 터이오. 게다가 오늘 같은 날, 아직껏 술 한 잔이 없었다는 건 남녀가 사랑을 할 때 여덟 겹 옷을 껴입고 있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오!" 옆의 금사충이 미륵불 같은 얼굴에 어리둥절한 기색을 지어 보였 다. "너 지금 뭐라고 한 거냐?" "나도 모르오." "뭐야?" "뭐 그렇게 골치 아프게 생각할 건 없소. 내 말은 일단 먹을 건 먹고 이야기하자 이거요." 이 말을 하는 공야치의 표정은 이를 데 없이 진지하고 엄숙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독히 못생긴 얼굴에 그 같은 표정을 짓자, 실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평소에 좀처럼 웃지 않는 냉자기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 거렸 다. 거의 같은 순간에 곡철화와 화옥은 폭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와하하……!" 장내의 분위기가 갑자기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십이 문주의 눈빛에도 예외 없이 엷은 웃음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노련한 그들은 이런 자리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칠 인에게 호감 을 느낄 수 있었다. 강자(强者), 진정으로 강한 강자만이 극적인 순간에도 여유를 잃 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야말로 유사시에 가장 무서운 능력을 보여 준다는 걸 산전수전 다 겪은 십이 문주 는 잘 알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넷째 형은 조금도 걱정할 게 없소. 나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게 있으니 말이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품속에서 열두 통의 밀봉된 봉서(封書) 를 꺼내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십이 문주에게 각기 한 통씩 나누어 주었다. 십이 문주는 의아한 눈빛으로 사마소군의 설명을 기다렸다. "궁금하시더라도 나중에 돌아가서 뜯어 보도록 하시오."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분부를……." 십이 문주는 내심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듯 지체 없이 봉서를 품 속에 갈무리했다. 사마소군은 좌중을 천천히 쓸어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자, 남의 거처에 너무 오래 머무르는 것도 객(客)의 도리가 아닐 것이오. 회의는 이것으로 마칠 테니, 이제부터는 가급적 먹고 마 시는 일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막내는 역시 내 마음에 들어!" 공야치가 엄지를 번쩍 세워 보이며 칭찬했다. 한바탕 대소가 재차 여기저기서 터져 울렸다. 그 때부터 잔치는 시작되었다. 칠 인이 웃고, 떠들며 마셔대는 기세는 실로 요란스럽다 못해 언 뜻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십이 문주는 처음 얼마간은 그 기세에 얼떨떨한 빛을 감추지 못했 다. 그들 중 어느 누구의 손도 좀처럼 상에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 다. 그렇다고 해서 칠 인 가운데 누구 하나 그들에게 술잔을 내민 다거나 음식을 권하는 이도 없었다. 한마디로 먹든 말든 각기 알 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눈부시게 먹고 마시는 칠 인을 어이없는 눈으로 망연히 응시하고 만 있던 그들이 정신을 차린 건 상 위의 음식이 절반쯤이나 없어 져 위기감이 피부에 닥쳐 왔을 때부터였다. 그들은 곧 칠 인과 마찬가지로 정신 없이 먹고 마시며 떠들어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이토록 맛있는 술을 마셔 본다는 사실을 느낀 것도 기이한 일이었고, 일단 칠 인과 대화를 나누며 동화가 되자 마치 백년지기를 만난 듯 금세 친밀감을 지니게 된 건 더욱 기이한 일 이었다. "핫핫핫……!"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마력 같은 분위기가 바로 사마소군 의 불가사의한 지도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십이 문주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다시 한참이 지나서였다. 십이 문주 또한 예외 없이 이 새로운 분위기에 빨려들 수밖에 없 었다. 그렇다. 사마소군과 술을 마시는 상대는 완벽하게 그를 좋아하거 나 아니면 철저히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모든 이를 빨아들이는 자석 같은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 십이 문주의 눈에 비친 사마소군은 그저 남보다 조금 잘생긴 남루한 차림의 서생에 불과했다. 저런 자의 어디에 무슨 능력이 있어 장한별부의 엄청난 세력을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의구심마저 지녔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의 모습은 불가사의하고 거대한 것으로 달 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인간의 향기(香氣)라고 해도 좋았 다. 십이 문주는 전대부주인 혈풍향 석우생에게서도 그러한 향기를 느 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향기는 근본적으로 다른 데가 있었다. 석우생이 잘 정제된 몸가짐에서 위엄을 내포한 엄정한 향기를 풍겼다면, 사 마소군은 다분히 즉흥적이며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기분 내키 는 대로 행동하는 자유인(自由人)으로서의 향기를 풍기는 것이다. 형식이나 예의 따위에는 일체 구애됨이 없다. 그는 철저하도록 완 벽한 자유인이었다. 그것은 구태의연한 관습과 케케묵은 전통만을 고수해 왔던 십이 문주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잔치는 밤과 함께 한없이 무르익어 갔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는가 보다. 정확하게 축시가 되자, 잔치는 끝났다. 그리고 모두가 떠났다. 모여들 때 그러했듯이 연기처럼 바람처럼 어디론가 소리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고나 할까? 텅 빈 대전에는 불 한 점 밝혀지지 않은 채 괴괴한 적막만이 감돌 고 있었다.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만이 어질더분한 상 위를 비추며 왁자했던 지난밤을 말해 줄 뿐이다. 누가 친절하게 옮겨 놓고 갔는지 구석에 처박혀 있던 태사의는 석 대 위의 원래 자리에 놓여져 있었다. 낙양성주 왕극륜은 여전히 태사의에서 잠든 모습인데, 이젠 가늘 게 코까지 골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을까? 돌연 왕극륜의 코 고는 소리가 뚝 멈추어졌다. 이어 한쪽으로 맥 없이 기울어져 있던 그의 상체가 스르르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그 의 고개가 바로 세워지고 눈까풀이 서서히 치켜진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그런데 가늘게 뜨여진 그 눈에서는 마치 귀화(鬼火)처럼 섬뜩한 광채가 쭉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닌가?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여태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왕 극륜의 눈빛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무림인의 눈빛이었으며, 그것도 어떤 사이한 무공 을 상당한 경지까지 익힌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었다. 괴이한 점은 또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 수혈을 제압당하면 최소한 세 시진은 경과해야 잠이 깨면서 제압된 혈도가 저절로 풀리는 법 이다. 그나마 세 시진이란 것도 최소한의 내공이 있는 무림인에게만 해 당되는 것이었고, 전혀 내공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대충 반 나 절을 꼬박 자게 마련이었다. 결국 왕극륜이 눈을 뜬 데에는 두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애 초부터 혈도를 짚히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가 혈도의 위치를 자유 자재로 옮겨 놓을 수 있을 만큼 상승의 무공을 지녔다는 추측이 다. 이 때 왕극륜은 푸른 광채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대청 안을 쓱 훑 어보더니 나직한 괴소를 흘렸다. "후후후… 딴에는 머리를 쓴다고 한 모양이다만, 이 곳을 회의장 소로 택한 건 엄천난 실수였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리라." 왕극륜은 곧 품속에 손을 집어 넣더니 꾸깃꾸깃 뭉쳐진 종이를 꺼 내 들었다. 그는 예의 섬뜩한 광채를 두 눈에 번뜩이며 종이를 펼쳐 들었다. 그러자 급히 휘갈겨 쓴 듯한 몇 글자 글귀가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그대의 집무청이 회의장소로 결정되었다. 만전을 기 하도록 하라. 천주(天主)> "후후… 만약 놈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혼비백산하고 말 거야." 왕극륜은 본래의 어딘가 나태해 보이는 거만한 자세를 완전히 회 복한 채 소리 없는 괴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선천적으로 잔인하고 변태적인 심성을 타고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 이 어르신이 직접 네놈들에게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쳐 주지." 왕극륜은 비대한 몸을 느릿하게 태사의에서 일으켰다. 이어 그는 수중의 종이를 꾸겨서 다시 품속에 갈무리하더니 육중한 걸음으로 한쪽 구석에 놓인 탁자를 향해 다가섰다. 탁자 아래의 서랍을 열자,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게 준비된 문방 사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극륜이 붓을 들어 막 무언가를 쓰려는 순간이었다. "왕극륜." 난데없이 그의 등뒤에서 바람 소리처럼 무심하게 느껴지는 일성이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왕극륜은 흠칫 안색이 대변한 채 고개를 돌렸다. 어느 틈에 나타났는가? 한 인영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왕극륜이 앉아 있던 태사의에 어둠 처럼 음산하게 앉아 있었다. 어둠(暗)……. 그렇다.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검은빛 일색이었다. 옷 빛깔도 검고, 겉에 두른 피풍도 검었으며, 허리에 두른 요대와 신발까지도 먹물에 담그었다 방금 꺼낸 듯 순 흑색이었다. 너무나 검다 못해 주위의 검은빛까지 흡수해 버릴 듯한 모습. 검지 않은 건 복면 사이로 드러난 얼음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눈뿐 이었다. 왕극륜의 거구가 일순 심하게 진동했다. 그는 마치 무덤 속에서 살아나온 조상을 대하기라도 한 듯 황망히 그 자리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소, 속하 왕극륜! 천주님께 존체를 알현하옵니다!" 중풍이라도 걸린 듯 심하게 떨려 나오는 음성이었다. 그런데 천주라면 바로 왕극륜의 품안에 있는 종이에 적혀져 있던 칭호가 아닌가? 이 때 태사의의 흑의복면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연기였다. 본좌조차 감탄할 정도로." "가, 감사합니다!" "오늘 일은 상당한 수확이 있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지." "하오나 한 가지 일이……." 왕극륜은 떨리는 음성으로 머뭇거렸다. 흑의복면인의 눈에 언뜻 기광이 스쳐갔다. "심천량(深天凉)과 유령장의 일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천주님." "네 생각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으냐?" "예. 유령부인이야 그렇다 손 치더라도……." 왕극륜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더니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심천량은 반드시 구해 내야 할 것입니다." "바보 같은 소리." "……!" "이백 년이 넘도록 숨어 있던 자들이 이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 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심천량을 구출해서 그들을 또다시 지하로 숨어들도록 만들 셈이냐?" 흑의복면인의 이 한 마디에는 듣는 이의 마음을 질식시키는 위엄 이 깃들여 있었다. 왕극륜은 절반쯤 들어올렸던 고개를 다시 황급히 바닥에 처박았 다. "하, 하오시면……." "어쩔 수 없다. 포기하는 수밖에."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물론 놈들은 심천량의 입을 통해서 적잖은 정보와 비밀을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네 머리로는 더 이상 설명해 줘도 알아듣기 힘들 테니, 더 이상 묻지 마라." 흑의복면인의 눈에 푸르스름한 전광(電光) 같은 것이 번뜩 떠올랐 다가 사라졌다. 그는 독백처럼 나직하게 뇌까렸다. "놈들의 능력이 미치는 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상관없다. 설령 우리의 조직이 전부 놈들의 수중에 들어가도 좋아. 아니, 가능하 다면 본좌는 놈들을 내 침상의 머리맡까지 끌어들이고 싶다." "……?" 듣고 있던 왕극륜은 내심 얼떨떨하여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 을 수가 없었다. 평소엔 그토록 자신의 두뇌가 뛰어나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이 순간은 마치 범 앞에서 하룻강아지가 눈알을 굴리는 것처럼 우스 꽝스런 꼴이었다. "저……." "이건 마치 낚시와도 같았다. 최후의 순간에 누가 먼저 상대의 입 속에 낚시바늘을 깊숙이 꽂느냐에 달린 것이다. 알겠나?" "예? 아… 알겠습니다. 천주께선 원래 낚시를 좋아하셨군요? 그런 줄 알았다면 지난번 선물을 보낼 때 남만산(南蠻山) 낚싯대를 보 낼 걸 그랬습니다." 왕극륜은 얼떨결에 당황한 음성으로 대답했는데, 가만히 되씹어 보니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스스로조차 이해가 되지 않 았다. 그는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힐끔 흑의복면인의 눈치를 살폈 다. 흑의복면인의 눈빛은 의외로 매우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왕극륜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흑의복면인이 온화한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왕극륜." "예, 천주님!" "그대가 낙양성주에 앉아 지낸 지 몇 년이나 되었나?"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대략 사 년 하고도 팔 개월이 된 것 같습니다." 왕극륜은 황망히 눈알을 굴리며 계산해 보고는 공손히 대답했다. 흑의복면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 년 오 개월이라… 꽤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렸군." '음?' 왕극륜은 순간 가슴이 덜컥 하는 충격을 느꼈다. 뭔가 불길한 예 감이 뇌리를 스친 것도 거의 동시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슬며시 들고 흑의복면인을 올려다보았 다. "무슨……."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뭔가 눈앞에서 번쩍하는 듯하더니 목덜미가 화끈해지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비수?' 그렇다. 그것은 거짓말 같았지만 분명히 비수였다. 그 날카로운 비수는 소리도 없이 왕극륜의 목을 관통해 뒤쪽 대청 바닥에 꽂힌 후였다. 왕극륜의 눈이 엄청난 경악과 불신의 빛을 담은 채 찢어질 듯 부 릅뜨여졌다. 그는 순식간에 몽롱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며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도… 도대체… 왜……?" 왕극륜의 음성은 거기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구멍 뚫린 목 에서 부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쭉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화살 맞은 짐승처럼 뒤뚱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철퍼덕－! 비곗살이 바닥에 마찰되는 소리가 묘한 여운을 풍기며 울려 퍼졌 다. 흑의복면인은 죽어 가는 그의 모습을 예의 투명한 눈길로 응시했 다. "너처럼 충실한 부하를 죽인다는 건 나로서도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나를 이해해 다오." 흑의복면인은 뒷짐을 진 채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람처 럼 무심한 그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이 하늘 하래 내가 칠인회의 한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너 하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네가 죽어야 하는 이유다." "극… 그륵……!" "그래, 너도 이젠 뭔가 좀 눈치를 챈 모양이구나. 하지만 원래 음 모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해야 한다. 두 사람이 아는 음모를 어찌 음모라 할 수 있겠느냐?" 이 음성은 놀랍도록 온화하고 조용했다. 도저히 살인을 하는 사람 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왕극륜은 피가 쏟아져 나오는 목덜미를 움켜잡고 옆으로 쓰러진 채 부들부들 사지를 경련하고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끝내 아무 말도 못 하고 축 늘어졌다. 숨을 거둔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부릅뜨여진 그의 눈은 무서운 분노의 빛을 담고 있 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의 빛인지도 몰 랐다. 저벅저벅－! 흑의복면인은 천천히 걸음을 움직여 바닥에 꽃혀 있는 비수를 뽑 아 들었다. 그런데 그 비수의 손잡이에는 놀랍게도 붉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 는 형상이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언젠가 선유도에 나타났던 것과 한치의 오차도 없 이 똑같은 형상이었다. "……." 흑의복면인은 조용히 몸을 돌려 창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막 열 걸음 정도 옮기는 순간이었다. 그의 뒷모습이 안개가 낀 듯 흐릿해지더니 신기루처럼 그 자리에 서 증발하는 게 아닌가! 경혼동백할 신법! 대체 그는 누구인가? － 이 하늘 아래 내가 칠인회(七人會)의 한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너 하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네가 죽어 줘야 하는 이유 다. 흑의복면인이 흘려 냈던 한 마디. 그렇다. 실로 무서운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밖에서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가 상을 치우기 위해 대청 안으로 몰려 들어온 낙양성부의 군졸들은 완전히 혼비 백산하고 말았다. "서, 성주님이 돌아가셨다!" 누군가의 입에서 맨 먼저 튀어 나온 이 부르짖음은 그 날 하루 온 종일 낙양성부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다음 날 중앙관부에서 급파되어 온 감찰 사는 왕극륜의 사인(死因)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낙양성주 왕극륜의 죽음에 관한 건(件). 원인：자살(自殺). 동기：극심한 정신분열 상태에서 저질러진 것으로 추측됨. 추측 근거：왕극륜은 평소에도 가끔 정상인으로서는 도저히 납득 하기 어려운 광태(光態)를 보여 왔으며, 사건 당일날 그가 보여 준 행동은 완전힌 광인(狂人)이나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 목격자 의 한결같은 증언이었음. 추신：성주의 궐석(闕席)은 자칫 민심의 동요를 유발시킬 수 있다 는 문제점으로 지목되는 바이며, 그 동기가 자살이라는 점에 있어 민심이 크게 흉흉해지고 있는 상태이므로 당분간 중앙관부의 강력 한 통제가 있어야 될 것으로 사료됨.> 후덥지근한 팔월의 그믐은 그렇게 뒤숭숭하게 지나가고, 음모와 대란지계(大亂之計)가 은밀히 그 얼굴을 드러내는 구월(九月)이 성큼 다가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초가을의 바람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 대풍운(大風雲)! 그 두 번째 막(幕)은 그렇게 오르고 있었다. ━━━━━━━━━━━━━━━━━━━━━━━━━━━━━━━━━━━ ( 신검성 제 2 권 끝 ) 신 검 성 제 3 권 제 26 장 음모(陰謨) 제 27 장 모자상봉(母子相逢) 제 28 장 백화맹주(白花盟主) 제 29 장 명기대전(名妓對戰) 제 30 장 기방풍운(妓房風雲) 제 31 장 천향원의 밤 제 32 장 칠인회동(七人會同) 제 33 장 살인행진(殺人行進) 제 34 장 마교출현(魔敎出現) 제 35 장 마지막 포석(布石) 제 36 장 나타나는 기인(奇人)들 제 37 장 종장(終章) ━━━━━━━━━━━━━━━━━━━━━━━━━━━━━━━━━━━ 제 26 장 음모(陰謨) ━━━━━━━━━━━━━━━━━━━━━━━━━━━━━━━━━━━ 어째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마치 나의 운명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가고 있다는 생 각이……. 사마소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생각이 아니라 차라리 느 낌에 가까웠다. 오히려 생각은 그럴 리가 없다며 이 느낌을 부인 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예감에 가까운 느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몸 속에 틀어앉아 차츰 그의 생각까지도 지배해 가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나의 삶은 우연으로만 일관되어 왔다. 무공을 익히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도 나 혼자만 선유도에서 살 아남았고… 석형님을 만난 것도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였다.' 여태까지 이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어쩌면 할 필요도 없는, 전혀 쓸모없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극륜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부터는 그 우연한 일들이 왠지 우연한 일로 여겨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인(死因)이야 어찌 됐든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단 말야……." 마차를 몰고 가며 사마소군은 입맛을 다셨다. 뭐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생각을 할 때면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이는 버릇이 생겨난 것이다. "유령장(幽靈莊)을 발견하고 유령부인을 보게 된 것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왠지 석연치가 않아." 그는 유령부인을 자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누군 가가 자신을 음모(陰謀)에 빠뜨리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유령장에서 납치해 온 금발사내의 정체를 알게 된 후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심목풍의 아들 심천량쯤 되는 놈이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 도 이해가 되지 않아. 이건 확실히 뭔가 있어. 우연만은 아니야. 절대로……." 심목풍이라면 현 백화맹(白花盟)의 맹주(盟主)가 아닌가? 황제조차도 부러워할 정도의 권세를 누리고 있는 백화맹주의 아들 이 한낱 여체에 눈이 멀어 있었다는 사실도 그는 믿을 수가 없었 다. 물론 부모가 잘났다고 해서 그 아들도 반드시 잘난 놈만 나오라는 법은 없다. 잘난 부모 밑에서 형편없는 망나니가 나오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오히려 세상사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것은 이 일이 계속되는 우연의 선상(線上)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연은 어디까지나 우연이다. 한두 번 계속될 수 있을지는 몰라 도 이렇듯 끝없이 반복되어지는 우연은 결코 있을 수 없어." 그렇다. 우연의 연속은 우연이 아니라 차라리 필연인 것이다. 그 렇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 그렇다면 이 필연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사마소군은 그것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알아 내야 만 하는 문제였다. 이것을 알아 내지 않고서는 선유도를 피로 물들인 흉수를 결코 잡 아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석우생이 말한 석천능의 후예의 정체 또한 결코 밝혀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두 놈이 한통속일지도 모르지만 말야……." 성(城) 밖의 한적한 숲길에서 그는 천천히 마차를 멈추었다. 이 어,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지금쯤 와 있을 텐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은 금세 한 사람의 신형(身形)을 포착해 냈다. 깡마른 얼굴에 검은 흑의를 입고 있는, 어딘지 모르게 보는 이로 하여금 음산한 느낌을 느끼게 하는 칠십 세 가량의 노파. 그렇다. 그녀는 흑태랑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그녀는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맨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다리가 아프면 어디 바위 같은 데에서 앉아 있을 것이지, 어째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거지? 옷이 더렵혀질 텐데 말야." 사마소군은 마차를 몰아 흑태랑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그는 앉아 있는 흑태랑의 키만큼이나 자라 있는 잡초에 묻 혀 있는 하나의 커다란 관(棺)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물론 그 관(棺)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마차를 멈추며 사마소군은 흑태랑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는 웃어 보였지만 흑태랑은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가 없었 는지도 모른다. 흑태랑은 오히려 맨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죄인(罪人) 흑태랑이 부주(府主)를 뵈옵니다." "죄인?" 사마소군은 짐짓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통 영문을 모르겠는데?" "부주(府主), 죄인을 벌하여 주소서!" "좀 일어나서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나요? 마차가 너무 높아서 내 려다보고 있자니 목이 다 뻐근하네요." "죄인을 벌로써 다스리지 않는다면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흑태랑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죄인 흑태랑을 벌로써 다스려야만 하옵니다." 사마소군도 더 이상 모른 체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그는 죽어도 마땅한 자요." "부주!" "흑태랑은 그를 관(棺)에 넣어 주었지만, 내가 당신이었다면 그의 목을 새끼줄로 묶어 질질 끌고 왔을 거요." 원래 사마소군은 금발사내의 문초를 흑태랑에게 맡겼었다. 그의 정체를 알아 내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라 흑태랑을 믿고 그에게 일임한 것이다. 흑태랑은 과연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금발사내가 심목풍의 아 들 심천량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던 것이다. 문제가 된 것은 심천량이 그녀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데에 있었다. 백화맹주의 아들이 고문 끝에 죽었다는 것은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커다란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장 백화맹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온 무림(武林)의 공적(公賊)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그녀가 죄인임을 자청하고 나선 까닭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면 무림의 공분을 다소나마 면할 수 있 기 때문에……. 그러나 사마소군의 생각은 흑태랑과 달랐다. 그는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백화맹을 파헤쳐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가 유령장에 가게 된 것이 누군가의 계략이었다면… 그는 분명 나와 백화맹과의 분쟁을 꾀하고 있음이렸다? 좋아, 우선은 그대로 따라 주지. 그래야 놈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테니까.' "흑태랑." 사마소군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흑태랑을 내려다보며 말했 다. "관은 내가 가지고 가겠소." "부주, 백화맹에서도 곧 이 일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주의 신변 이……." "관을 마차에 좀 실어 주겠소?" 묻고 나서 사마소군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부주……." 그 순간, 그녀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뭐라고 하든지 간 에 사마소군은 결코 이번 사건의 책임을 자신에게 지우지 않을 것 임을. 흑태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관을 마차에 실었다. 심천량의 시체를 지니고 다니는 것은 어쩌면 화약을 지니고 불 속 으로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충성심이 깊은 그녀는 그러한 예감에 관을 실으면서도 사마소군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하듯, 사마소군은 밝은 표정 으로 흑태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를 걱정할 필요는 없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리 고 형들에게 전해 주시오.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말도 못하고 갔다고." "알았습니다." 흑태랑은 사마소군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근심스런 표정의 흑태랑을 내려다보던 사마소군은 고삐를 쥐며 싱 긋 웃어 보였다. "얼굴 좀 펴요. 누가 보면 내가 죽으러 가는 걸로 오해하기 십상 이겠소." 말과 동시에 그는 가죽 채찍으로 말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마차는 즉시, 그러나 서서히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부주……." 흑태랑은 멀어져 가는 사마소군의 등을 향해 나직한 소리로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 * * "마침내 그가 떠났군." 그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뜻하는 대로 되었다는 듯 그의 얼굴에는 매우 만족한 표정이 떠올 라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말없이 서 있었다. 남자는 젊고 준수한 미청년이었고, 여자 또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미모의 소녀였다. 단지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준수한 남자는 지나칠 정도로 비정(非 情)해 보이고, 여자는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요염해 보이는 것 정 도랄까. 어쨌든 지나치게 비정하고 요염해 보이는 남녀(男女)는 자신들의 앞에서 느릿한 동작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내 앞에서 감히 숨도 크 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조차도 마주 볼 수 없는 듯, 그들의 시선은 사내의 허 리께에 머물러 있었다. 사내의 허리에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한 자루의 비수가 비스 듬히 꽂혀 있었다. 비수(匕首). 언뜻 보기에 비수는 더없이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비수의 손잡이 에 새겨져 있는 붉은 독사(毒蛇)의 문장(紋章)은 절대로 평범해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한 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듯한 문 장. 이것을 보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한 마리의 채색독사가 금세라 도 자신을 물려고 덤벼드는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붉은 뱀의 문장은 정교함의 도를 넘어 차라리 신비로운 마력을 지 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사내가 왔다갔다할 때마다 사내의 허리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있 는 붉은색의 독사 또한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내 앞에 서 있는 여자와 남자의 시선은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붉은 독사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말을 한 것은 분명 사내인데도 그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마치 붉은색의 독사가 말을 한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비검(悲劒)!" 나직한 부름과 동시에 사내의 걸음이 비정한 표정의 남자 앞에서 우뚝 멈추어졌다. 비검이라고 불린 남자는 마치 독사에게라도 물린 듯 움찔하며 허 리를 숙였다. "예!" "지금 곧 무림(武林)에 소문을 퍼뜨려라." 허리를 숙인 비검의 머리 위로 채색독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백화맹주의 아들을 그가 살해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무림에서 그 를 완전히 고립시켜라." "명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비검은 다시 한 번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난 후 훌쩍 몸을 날려 떠나갔다. 가볍게 몸을 한 번 비틀었을 뿐인데도 그의 모습은 어느 새 시야 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채색독사의 사내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돕지 않는다면 그는 자연 장한별부와 십이지 문(十二之門)을 비롯한 자신의 모든 세력을 총동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백화맹을 대적(對敵)해 나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요염한 미색의 소녀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사내의 말을 들을 수만 있을 뿐, 자신의 의견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 람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열린 것은 채색독사의 사내가 그녀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춘 후였으며, 아울러 나직한 부름이 그녀의 고막을 때린 후였다. "화검(花劒)!" "예!" "너는 가서 신이문(神耳門)을 깨워라. 그들로 하여금 석가(石家) 의 후예가 만들어 놓은 장한별부와 십이지문을 비롯한 모든 세력 의 움직임을 면밀히 탐지하여 그들의 위치와 전력(戰力)을 완전히 파악해 놓으라고 명하라!" 명령과 동시에 요염한 미색의 소녀 화검(花劒) 앞에 하나의 조그 맣고 둥근 패(牌)가 툭 던져졌다. 죽음을 상징하는 듯한 검은 한오철(寒烏鐵)의 중앙에 피처럼 붉은 색으로 <이(耳)>라고 쓰여져 있는 신패(信牌)였다. 화검은 땅에 떨어져 있는 신패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끓은 그녀는 신패를 향해 공손히 세 번의 절을 한 연후에 야 비로소 두 손으로 신패를 집어 들었다. "천녀(踐女) 화검, 신명을 바쳐 천주(天主)의 명을 이행하겠습니 다." 비검과 마찬가지로 말을 마친 그녀 또한 깊숙이 허리를 한 번 숙 이는 사이에 안개처럼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비검과 화검, 두 사람이 떠나간 후에도 채색독사의 사내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산책이라도 하듯 유유자적한 태도였다. 그러한 태도로 인하여 그 의 앞에는 마치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채색독사의 사내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거닐며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석가(釋家)의 후예가 만든 것은 그 어떠한 것도 무림에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후에는 백화맹도 존재할 이유가 없지. 금후 (今後)로 이 땅엔 마교(魔敎)만이 영원불멸(永遠不滅)하리라." 이 때였다. 채색독사의 사내가 있는 곳으로 한 명의 노파가 달려 와 그에게 고했다. "여기에 계셨군요." "무슨 일이 있었소, 흑태랑?" 흑태랑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부주께서 홀로 관(棺)을 가지고 떠나가셨습니다." 채색독사의 사내는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어디로 갔단 말이오?" "그건…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어허, 이런 일이 있나?" 채색독사의 사내는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다니? 안 되겠소.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지, 큰일나겠소." 가뜩이나 근심에 차 있던 흑태랑은 얼른 입을 열었다. "부(府)의 고수들을 소집할까요?" "그러는 게 좋겠소." 흑태랑은 황급히 몸을 돌려 사라져 갔다. 채색독사의 사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 고 있었다. * * * 황량한 곳이었다. 주위에는 인가(人家) 하나 없었다. 논도 밭도 없었고,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은 바람이 불 때마다 심한 흙먼지를 날리고 있었다. 한 채의 낡은 주막은 이런 황량한 벌판 위에 세워져 있었다. 주막(酒幕). 나무로 만들어진 주막은 몹시 낡아 있었다. 바람은 쉬지 않고 불어 왔고, 그 때마다 주막의 이 곳 저 곳에서 는 삐꺽이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려 왔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무너질까 겁나 들어가 있지도 못할 그런 주막 이었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이 때 두 개의 길다란 그림자 가 주막의 낡은 문을 비추었다.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얼굴이 완전히 가려질 정도로 커다란 죽립을 머리 에 쓰고 있었고, 일신에는 사슴 가죽으로 만들어진 피풍을 두르고 있었다. 피풍(避風)은 녹색이었다. 피풍뿐만이 아니었다. 무엇으로 물을 들였는지 몰라도 그들이 쓰 고 있는 죽립도 짙푸른 녹색이었고, 지금은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 았지만 그들이 신고 있는 신발 또한 녹색이라는 것은 조금의 안력 (眼力)만 있어도 금세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주막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의 죽립인은 즉시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삐이꺽……. 몹시 낡아 있었기 때문에 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 지금 막 문을 열고 들어온 두 사 람의 죽립인에게로 쏠렸다. 죽립인의 시선 또한 죽립 밑으로 해서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했 다. 뜻밖에도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족히 삼십여 명은 넘을 것 같았다. 이런 황량한 오지(奧地)에 어째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까? 두 사람의 죽립인을 주시하는 사람들의 눈초리에 정광이 번득이는 것으로 미루어 그들은 무공을 익힌 무림의 고수들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삼십 쌍이 넘는, 정광이 번득이는 시선을 한몸에 받는 것은 거북 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의아한 일일 뿐만 아니라, 두렵기 까지 한 일이다. 그런데도 두 명의 죽립인은 태연히 죽립을 벗어 죽립과 피풍에 쌓 인 먼지를 털어 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 죽립 속에서 드러난 두 사람의 얼굴로 향했 다. 두 사람의 얼굴은 똑같았다. 판에 박은 듯 똑같은 쌍둥이인 것이 다. 코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납작했고, 턱은 뾰족한 삼각형이 었으며, 두 쌍의 눈은 마치 뱀의 눈을 빼다 박아 놓은 듯 차갑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혀만 날름거린다면 영락없는 뱀이군!' 사람들은 녹색의 피풍을 두른 두 사람이 말없이 자리에 가서 앉는 것을 침묵으로 지켜 보고 있었다. 두 사람 또한 아무 말이 없었다. 일행이면서도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음식도 시키지 않았다. 이 때였다. 또다시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뛰듯이 안으로 들어왔 다. 청의무복을 입은 사내였다. "문주(門主)!" 청의무복의 사내는 뛰어 들어오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마차가 나타났습니다! 삼십 장 밖입니다! 우리의 예측대로 아주 느린 속도로 이쪽으로……." 장내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음인지 사내는 돌연 말꼬 리를 흐렸다. 동시에 한 사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사꾼의 복장을 한 중년의 사내였다. 그러나 균형 잡힌 몸매와 날카로운 눈초리는 이 중년인이 결코 장 사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중년인은 곧바로 녹색 피풍을 두른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갔다. "두 분도 마차를 노리고 오신 것이오?" 중년인의 말투는 정중했다. 아마도 앞에 있는 두 사람의 내력(來 歷)이 범상치 않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중년인의 물음에 답해 오는 것은 차갑고 딱딱할 뿐만 아니 라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었다. "우리는 낡아빠진 마차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우린 다만 그 안에 있는 하나의 살아 있는 사람과, 죽어 있는 사 람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음성은 냉혹했다. 만약 뱀이 사람의 말을 한다면 틀림없이 이런 음성으로 말을 할 것이다. 녹색피풍을 두른 두 사람이 차례로 말을 하자,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싸늘한 전율을 느꼈다. 이러한 전율로 인하여 두 사람의 무례한 어조는 오히려 지극히 당 연한 것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중년인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다시 입을 열었 다. "본인은 절정신객(絶情神客) 후정방(後正方)이라는 사람……." "네가 누군지도 우리는 관심이 없다." 녹색피풍을 두른 한 사람이 절정신객 후정방의 말을 끊어 버리자, 다른 한 사람이 똑같은 음성으로 즉시 말을 받았다. "우린 다만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은 모습뿐만이 아니라 목소리마저도 똑같았기 때문에 후정 방은 마치 한 사람이 말을 한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말을 한 두 사람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앞만 바라보고 앉아 있 었다. 후정방은 심한 모욕을 느꼈으나 이 두 사람의 내력을 알기 전에는 감히 화를 낼 수조차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화를 꾹 눌러 참고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백화맹주의 아들을 살해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 자의 무예 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두 분도 백화맹에 가입하 기 위해 공(功)을 세우시려는 것 같은데… 어떻소? 서로 힘을 합 하여 공(功)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우린 백화맹에 가입하기 위하여 아부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후정방의 말에 녹색피풍을 두른 두 사람 중 좌측에 앉은 사람이 싸늘한 어조로 답했다. "우리 백화맹의 귀빈으로서 맹주(盟主) 심목풍을 위해 단지 약간 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이 곳에 왔을 뿐이다." 말이 끝남과 함께 녹색피풍을 두른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두 사람이 밖으로 걸어 나가려 하자, 절정신객 후정 방은 본능적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목표로 하고 있는 마차가 지금쯤은 주막과 가까운 곳에 이르 러 있을 테고, 그 마차를 이름도 모르는 이 낯선 두 사람에게 순 순히 양보해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두 분, 잠깐 멈추시오." 후정방이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순간이었다. 또다시 좌측에 있 는 녹색피풍을 두른 사람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비켜라!" 짧은 외침, 명령과 다름없는 이 외침과 더불어 장내에 있는 사람 들은 푸른 섬광(閃光)이 순간적으로 번쩍였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 았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빛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언뜻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였다. 녹색피풍을 두른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던 절정신객 후정방의 몸이 휘청이는가 싶더니, 고목이 쓰러지듯 천 천히 뒤로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쓰러지는 후정방은 비록 두 눈을 뜨고 있었으나 그의 이마에는 새 끼손가락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그 의 얼굴을 붉게 물들여 놓기 시작하고 있었다. 와당탕－! 마침내 절정신객 후정방의 몸은 두 개의 식탁을 쓰러뜨리며 바닥 에 나뒹굴었다. 그는 비록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쓰러졌으나, 이 장면을 보고있던 다른 사람들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후총관이 죽었다!" "왼쪽에 있는 놈이 후총관을 죽였다!" 일어선 사람들의 손에는 어느 새 각기 날카로운 무기(武器)가 들 려 있었다. 금세라도 손을 쓸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정작 살인을 한 녹색피풍의 사내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히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며 그는 냉랭한 어조로 다시 말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벽혈쌍사(碧血雙蛇)의 앞을 막을 수는 없다!" "벽혈쌍사의 앞을 가로막는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뿐이다!" 두 사람의 음성은 비단 담담했을 뿐만 아니라 나직했다. 이런 혼 잡한 와중에서는 잘 알아들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어쩌면 살인에 대한 분노로 인하여 미처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벽혈쌍사를 에워싼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막 발초를 하려고 할 때 였다. 뒤에서 한 소리 다급한 외침이 들려 와 모든 사람들의 동작을 굳 어지게 했다. "멈춰라!"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사람들의 동작이 일제히 멈추었다. 뒤에서 들려 온 소리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을 뿐 아니라 그 정도로 위엄이 깃들여 있었다. 삼십여 명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당한 풍채를 한 칠순노인이 지금 막 의자에서 일어선 듯한 자세 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문주!" 사람들의 외침에 칠순노인은 위엄이 있으나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명령했다. "모두 무기를 거두어라!" 그의 명령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듯했다. 사람들은 모두 분노 에 차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무기를 거두었다. 오직 벽혈쌍사만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벽혈쌍사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한 사람이 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문주, 어째서 총관을 해친 원수를 그냥 보내는 것이옵니까?" "방금 그 자가 한 말을 듣지도 못했단 말이냐?" 칠순노인은 여전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벽혈쌍사는 무서운 인물이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여태 껏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비록 삼십 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앞으로 삼십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 "우리는 모두 오늘 운이 좋았다. 벽혈쌍사가 만약 살인을 하기위 해 살기(殺氣)를 아껴 두려고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쯤 모두 시체로 변해 버렸을 테니까." 사람들은 벽혈쌍사가 누군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벽혈쌍사가 한 참 활동을 할 시기에 그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모두 벽혈쌍사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여지껏 그 누구도 무서워해 본 적이 없는 신풍문(神風門)의 문주 왕검영(王劒影)이 지금 얼마나 두려움에 차 있는지 그들 모두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밖으로부터 마차 소리가 어둠을 타고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마차를 향해 달려나가려 하지 않았다. 마차를 향해 달려나가는 대신, 그들은 뒷문으로 해서 멀찌감치 달 아나 버렸다. 마차, 마차는 어둠을 헤치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해는 이미 완전히 저물어 실상 마차는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다 만 그 소리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벽혈쌍사는 마차 소리가 들려 오는 곳을 마주 향한 채 우뚝 서 있 었다. 마차의 바퀴 소리는 이제 아주 가까이 들려 오고 있었으나, 마차 의 실체는 어렴풋이 형체만 보이고 있었다. 벽혈쌍사의 몸에서는 마차가 가까워질수록 무형(無形)의 살기(殺 氣)가 차츰 두텁게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비록 변함이 없었지만 그들의 몸 주위에 둘러진 살 기는 지금 그들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었 다. '백화맹주의 아들을 죽인 고수다. 뿐만 아니라, 단신으로 그 시체 를 갖고 무림을 활보할 정도로 배포가 큰놈이다.' 마차의 형체는 점차 뚜렷해지고 있었다. 벽혈쌍사의 눈에서 푸른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록 긴장하고 있었으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의 형체가 눈에 비쳐 들기 시작했다 '정말로… 혼자군.' 태연히 앉아 마차를 모는 사람의 모습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그의 일거일동을 정확히 알아 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조금도 긴 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그의 고른 숨소리만으로도 충분 히 짐작해 낼 수 있는 벽혈쌍수였다. '지금쯤은 우리들의 살기를 능히 감지해 낼 수 있었을 텐데…….' 마차 안의 상대가 너무나 태연하자, 벽혈쌍사는 더욱 조심스런 생 각이 들었다. 살기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안으로 갈무리할 정도 의 고수라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단 말인가? 건방진 놈!' 마차가 이 장 밖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벽혈쌍수는 차갑게 소 리쳤다.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한 후에야 벽혈쌍사는 마차 안의 상대방이 약간의 동요를 일 으키는 것을 감지해 냈다. '나는 또 네놈이 완전히 무아(無我)의 경지에 도달한 최상급의 고 수인 줄 알았지.' 나직이 코웃음을 치며 벽혈쌍사는 다시 말했다. "검(劒)을 뽑아라!" 어둠 속에서 마차 안의 상대가 말했다. "무슨 일이오?" "그건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에게나 물어 봐라!" 말과 동시에, 벽혈쌍수는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이 검을 뽑아 든 것은 상대방의 무예를 자신들과 동등한 수준 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였다. 막 출초(出招)하려는 그들의 귀로 전혀 상상하 지 못했던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강도라면 이 마차를 드릴 터이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이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은 이미 공중에 떠 있었다. 그들의 신형은 마차를 향해 소리 하나 없이 날아가고 있었고, 소 리가 터져 나왔을 때는 이미 그들의 손에 들린 검(劒)이 초식을 반쯤 펼쳐 냈을 때였다. 그러나 벽혈쌍사는 비단 발초하는 데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초 식을 거두어들이는데에도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벽혈쌍사는 마차 바로 위에서 가볍게 신형을 뒤집더니, 머리를 땅 으로 향한 자세로 뚝 떨어져 내렸다. 날아오던 속도를 감안한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신법이었다. 땅으로 내려서는데도 그들은 날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미세한 인기 척 하나 내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깃털이 내려앉듯이 가볍게 마차 위에 내려선 그들은 안광이 번득이는 시선으로 마차 위의 사람을 주시했다. 마차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젊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마차 위의 청년은 얼굴 가득 곰보 자국이 있었고, 어느 모로 보나 심천량 같은 고수를 해칠 수 있는 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겁 많고 평범한 한 사람의 마부(馬夫)에 불과했다. 벽혈쌍사는 화가 나기도 했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손에 들린 검 을 거두어들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은 차갑게 물었다. "넌 누구냐?" "소, 소인은 양양에 살고 있는 전삼칠(全三七)이란 마부이옵니 다." 벽혈쌍사의 냉혹한 음성에 마부는 혼이 반쯤 날아가 버린 듯한 표 정으로 대답했다. 벽혈쌍사는 냉혹한 시선을 마부의 얼굴에 못박은 채 계속해서 물 었다. "이 마차는 너의 것이냐?" "소… 소인이 며칠 전에 닷 냥을 주고 산 것이옵니다." "이 마차를 판 사람은 어떻게 생긴 놈이냐?" "귀공자처럼 생긴 젊은 분이었습니다." 마부의 이 대답에 벽혈쌍사는 서로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마 부의 말이 정말이라면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 마차 를 판 사람이기 때문이다. 벽혈쌍사는 다시 물었다. "이 마차에는 하나의 관(棺)이 있느냐?" 젊은 마부는 화들짝 놀라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관이라뇨? 마차에는 몇 근의 감자밖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 "내가 직접 조사해 보겠다!" 벽혈쌍사는 차례로 말했다. "만약 마차에서 관이 나온다면 그 관 속에 네가 묻히게 될 것이 다!"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번쩍－! 마부는 돌연 눈앞에서 눈부신 광채가 번쩍이며 살을 에일 듯한 싸 늘한 한기(寒氣)가 온몸을 덮쳐 오는 것을 느끼며 그만 졸도를 해 버리고 말았다. "끄응……." 정신을 잃은 마부의 뒤쪽에서 마차가 두 동강이 나고 있었다. 마차의 휘장에 처음에는 하나의 가느다란 균열이 생기더니, 차츰 그 틈이 벌어지다가 나중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둘로 갈라진 것 이다. 검(劒)은 아무리 길어도 불과 삼 척(尺)에 불과한데, 어떻게 이토 록 커다란 마차를 단숨에 자를 수 있을까? 마차를 가른 것은 검이 아니라, 검에서 발해진 검기(劒氣)이리라. 내공(內功)의 기(氣)를 자유자재로 검신(劒身)을 통해 발출할 수 있는 것으로 미루어, 벽혈쌍사는 검공(劒功)에도 매우 높은 경지 의 무예를 터득한 것이 분명했다. 마차 안에는 과연 관(棺)이 실려 있지 않았다. 마차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마부의 말대로 몇 근의 감자밖에 없었다. "사마소군은 비단 무예가 출중할 뿐만 아니라, 제법 교활한 면도 지니고 있는 놈이었군." 벽혈쌍수 중의 하나가 검을 거두며 중얼거리자, 다른 하나가 차가 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가 어떤 놈이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그가 반 드시 벽혈쌍사의 손에 죽으리라는 사실이다." 검을 검집에 천천히 집어 넣은 벽혈쌍사는 등 뒤쪽으로 젖혀져 있 던 죽립을 다시 머리에 썼다. 그리고 그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동(東)쪽 으로 사라져 갔다. ━━━━━━━━━━━━━━━━━━━━━━━━━━━━━━━━━━━ 제 27 장 모자상봉(母子相逢) ━━━━━━━━━━━━━━━━━━━━━━━━━━━━━━━━━━━ 젊은 마부에게 마차를 판 사람은 사마소군이었다. 그는 바보가 아 니었다. 온 무림의 표적이 되는 마차를 타고 쓸데없이 시위를 할 바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가 마차를 타고 가겠다고 말을 한 것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耳 目)을 흐리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한두 사람을 속이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림 전체를 속이기는 정말로 쉽지가 않다. 무림을 속이려면 우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부터 속여야만 하는 것이다. 사마소군은 이러한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의문의 음모자(陰謀者)는 자신의 행적을 잘 알고 있으니, 혹시 측근에 배 신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남을 의심하기는 싫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할 수는 없 는 노릇이 아닌가? 지금 사마소군은 유령장에 잠입해 있었다. 그가 유령장에 들어온 것은 마차를 팔고 난 직후였다. "그녀가 내 어머니가 아니라 할지라도 어째서 내 어머니 행세를 하고 있는지는 알아 내야지." 해는 이미 저물었다. 주위는 조용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잠이 든 것 같았다. 산새들도 잠이 들 시간이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 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방심을 할 수가 없었다. 유령장에 매복이 많다 는 것은 그 전부터 알고 있는 일이고, 잠입해 들어와서 지금까지 그가 알아 낸 것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위험하게 느껴지는 곳이 바로 유령장이었다. "다른 놈들은 건드릴 필요가 없어. 유령부인만 잡으면 되는 거 다." 나직이 중얼거리며 사마소군은 팔민각으로 접근해 갔다. 처음에 왔을 때 그는 이 곳에서 흑효신 정붕과 경솔하게 마주치고 말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화원과 지붕 위의 매복은 그 때보다 더욱 철통 같아졌지만 사마소 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마소군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유령부인의 규방으로 잠입 해 들어가고 있었다. 규방은 그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욕실에서 들려 오는 물소리 마저도 그 때와 똑같았다. "매일같이 똑같은 시간에 목욕을 하는 모양이군." 이것이 목욕을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 다. "또다시 이런 장면을 훔쳐봐야 하다니, 졸지에 염치없는 놈이 되 어 버리는군." 사마소군은 문 틈새로 안을 엿보았다. 뽀오얀 수증기가 가득했다. 뽀오얀 수증기 속에는 과연 하나의 나 신(裸身)이 들어 있었다. 수증기보다도 더욱 뽀얗고 아름다운 나신이었다. 목욕을 막 끝낸 여체는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채 신선한 활력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뽀오얀 수증기 속이지만 사마소군은 그녀가 유령부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두 손이 자신의 젖가슴을 천천히 주무르고 있는 것도 알아볼 수 있었다. '전에는 그래도 욕실 밖으로 나와서 하더니…….' 사마소군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원래 이런 장면을 훔쳐보는 것은 매우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모습뿐만이 아니라 이름마저 똑같다는 사실이 그를 오히려 분노하 게 만들고 있었다. '저걸 확 죽여 버려? 그건 안 되지. 최소한 이유는 알아 내야 할 것 아냐.' 사마소군은 발작할 것만 같은 분노를 억누르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유령부인의 손은 젖가슴에서 아래로 흘러 미끄러지 듯 그녀의 사타구니로 옮겨 가고 있었다. 은밀한 쾌감이 전신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신(神)이 인체에 베풀어 준 가장 공평한 축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이 축복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고픈 마음이 전혀 없 었다. 그녀는 오히려 신을 저주했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애무하는 것은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 라, 오히려 신의 축복에 저항을 하기 위해서였다. 손가락은 끊임없이 그녀의 가장 신경이 예민한 곳을 자극하고 있 었다.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흐른다. 때로는 감미로운 느낌에 정신이 몽롱해지며 차츰 밀려드는 쾌감은 시간이 갈수록 농도를 더해 가고, 급기야는 호흡을 거칠게 한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그럴수록 오히려 맑아지고 있었다. 육체와 는 정반대의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랜 수련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오랜 굴욕의 결과이기도 했다. 마침내 그녀의 육체는 절정의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비소(秘所)의 윗부분을 애무하던 손가락은 그녀의 몸 깊숙한 곳까 지 이르러 있었고, 대리석같이 하얀 두 다리는 곧게 퍼진 채 절정 의 쾌락으로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그녀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 다. 불타는 장원과 여기저기 나뒹구는 시체들……. 그녀는 쾌감이 아닌 그 참혹함에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육체는 신음을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위하여 이를 악물었는지 몰라도, 그녀는 복수를 다짐하기 위하여 피가 배이도록 이를 악물 고 있었다. 육신을 가득 채우고 넘쳐 흘렀던 쾌락이 꿈결처럼 멀어져 가고 있 었다. 눈앞에 환상처럼 떠올랐던 참혹한 장면도 쾌락과 함께 사라져 가 고 있었다. 쾌락은 흔적도 없이 몸에서 빠져 나가지만 복수는 앙금처럼 그녀 의 가슴에 남았다. '심목풍…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죽이고야 말겠다.' 이를 악물며 그녀는 욕조에서 미끈한 몸을 살며시 빼냈다. 물기에 젖은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머리 위……!' 그녀는 머리 위에서 급작스럽게 다가오는 인기척에 흠칫 경각심을 높였다. 무예로 단련된 몸은 거의 본능적으로 위를 향해 초식을 발출해 내 려고 했다. 그러나 이 때였다. 머리 위쪽에서 느껴졌던 인기척은 순식간에 사 라져 버리고, 그녀의 등 뒤쪽으로부터 한 줄기 암경(暗勁)이 소리 없이 뻗어 오는 것이 아닌가? '앗!' 미처 놀랄 틈도 없었다. 그녀의 몸은 뒤에서 뻗어 온 하나의 손가락에 의해 석고상처럼 굳 어져 버리고 말았다. 뒤에서 뻗어 온 손가락은 그 빠르기가 비단 신속했을 뿐만 아니 라, 정확하기 이를 데 없어 그녀의 등에 있는 유문혈(幽門穴)을 단번에 짚어 버렸던 것이다. '무서운 고수다! 머리 위에서 등 뒤로 돌아가는데 조금의 인기척 도 내지 않았다!' 유문혈이 제압당한 그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 하나의 손가락이 그녀의 육체를 기쁘게 해 주었는데, 지금은 또다시 하나의 손가락이 그녀의 몸을 완전히 굳어지게 만 들었던 것이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등 뒤에 나타난 인물은 다행히 그녀의 아혈(啞穴)을 짚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신체 중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녀의 혓바닥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혀를 움직여 말했다. "누구냐?" 등 뒤에서 대답이 들려 왔다. "그렇게 묻는 넌 누구냐?" "내가 누군지도… 모른단 말이냐?" 그녀는 처음에 등 뒤에 있는 인물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생각을 이내 취소해 버렸다. 등 뒤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 왔기 때문이다. "묻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 바로 나다. 다시 묻겠다. 넌 누구냐?" "난 유령부인……." "임설정이 정녕 너의 본명(本名)이란 말이냐?" 그녀의 말을 끊고 물어 오는 목소리는 비단 위협적이었을 뿐만 아 니라, 가늘게 떨리고 있기까지 했다. 조롱을 하려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유령부인은 놀라움과 의혹을 금할 수가 없었다. 등 뒤의 상대는 대체 누구이기에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인 가? 또한 어째서 자신의 이름이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의아해 하며 그녀는 등뒤에서 들려 온 물음에 대답했다. "내 이름이 임설정이다." 대답을 한 그녀는 깜짝 놀랐다. 등 뒤에서 갑자기 흥분된 목소리 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거짓말! 네 이름은 임설정이 아니다! 말해라, 너의 본명이 무엇 이지?" 등뒤의 사람은 몹시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 의 정원에 몰래 잠입해 들어와서 이토록 큰 소리를 낼 리가 있겠 는가? 그는 어째서 자신의 이름이 임설정이라는 사실에 이토록 흥분하는 것일까? 그녀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는 구태여 그것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 스스로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여태까지 그녀는 숱한 얼굴들을 보아 왔다. 그러나 맹세코 지금 눈앞에 있는 얼굴처럼 그녀를 놀라게 한 얼굴 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 얼굴 가득 분노가 떠올라 있었고, 두 눈은 비록 붉게 충혈되어 있 었지만 매우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놀란 것은 얼굴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 가 놀란 것은 이 얼굴이 자신이 잘 아는 한 사람의 얼굴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소, 소군……?"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녀의 음성은 목에 걸려 나왔다. 매우 나직한, 쉰 듯한 음성이었지만 이 소리는 사마소군의 귀에 마치 천둥처럼 들려 왔다. "어, 어머니……?" 그녀와 마찬가지로 사마소군의 목소리 또한, 목에 콱 걸려 간신히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어머니가 아니라고 단정하고 있었지만 똑같은 모습에, 같은 이름, 같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 또한 그녀를 어머니라 부 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러 놓고 그는 곧 후회를 했다. 자신의 어머니를 모욕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령부인은 사마소군의 말을 듣고 돌연 주르륵 눈물을 흘 리는 것이 아닌가? "소군… 네가… 네가 정녕… 살아 있었단 말이냐?" 음성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비단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이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이 눈빛, 온갖 사랑과 자애로움이 가득한 이 눈빛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비록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의 눈빛에 비록 놀라움과 당혹함 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어, 어머니……." 어머니란 말로 아는 것이 아니었다. 생김새를 가지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어머니를 알 수 있는 것은… 그렇다! 온몸으로 전해져 오 는 느낌이 아닌가? 어머니에겐 어머니만의 눈빛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역용 술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사마소군은 바로 그것을 느낀 것이다. 떨리는… 나직한 중얼거림으로 어머니라고 불렀던 그는 이내 목메 어 그녀를 부르며 뛰어가 안겼다. "어머니!" 눈물이…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앞을 가렸다.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어도 눈물이 앞을 가려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유령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더냐? 이 오랜 세월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온 한(恨) 또한 그 얼마더냐? 그러나 지금, 그녀는 가슴 속의 한이 눈물이 되어 알알이 녹아 흐 르는 것을 느꼈다. 아아, 내 핏줄!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당장 죽어도 한이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 다. * * * 사마소군은 원래 백화맹주에 대해 조사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조사해 보고 싶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백화맹주와 자신이 도대 체 어떠한 관계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드디어 그 관계를 알 수 있었다. 그와 백화맹주 심목풍과의 관계를 알려 준 사람은 바로 유령부인 이었다. 백화맹주 심목풍은 바로 선유도를 피로 물들인 사람이고 그의 아 버지를 죽인 원수일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를 이 곳으로 데려 와 이토록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게끔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원래 심목풍과 임설정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잘 아는 사이일 뿐만 아니라, 심목풍은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임설정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비극의 발단은 바로 이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임설정이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하자, 심목풍 은 그녀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빼앗아 간 사마장천까지도 뼛속 깊이 미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겐 자신의 사랑을 다시 빼앗아 올 만한 무예가 없었 다. 물론 사랑을 힘으로 빼앗아 올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강제로라도 그녀를 빼앗아 오고 싶었던 것이다. 힘으로 사마장천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그 때 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선유도에 자신의 수하들을 배치해 두는 한편, 그는 사마장천이 무림에서 은거한 틈을 타 무림에서 차츰 독보적 인 위치를 구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마장천보다 약간 뒤떨어지기는 했지만 심목풍도 인물임에는 틀 림없었다. 비록 십 수년의 세월이 걸리긴 했어도 그는 마침내 자 신이 할 준비를 모두 끝마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유도를 공격했다. 자신의 사랑을 빼앗아 간 사마장천과 그의 부하들을 모두 죽이고, 그 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한(恨)을 피로써 씻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이미 남의 아이를 낳은 다른 사람의 여인이 었지, 결코 다시 그의 것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그녀를 검으로 내리쳤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랑,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화 풀이를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죽이진 못했다. 그녀에 대한 한(恨)이 너무나 깊고 커서 그녀를 쉽게 죽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를 다시 살려 내서 유령부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 에게 이렇게 말했다. "복수를 하고 싶겠지? 복수를 하려거든, 무공을 익혀라! 네가 원 한다면 온갖 무공비급을 가져다 주겠다. 그러나 비급에 대한 값은 반드시 치러야만 한다!" 비급에 대한 대가로 그는 그녀의 몸을 원했다. 그 자신이 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들을 시키기도 했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시키기도 했다. 심목풍은 단지 그녀를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를 짓밟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복수를 할 뿐만 아니라, 자신 을 배반한 그녀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택하지 않고, 사마장천을 택한 일을 뼈저리 게 후회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임설정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담담한 것은 그녀의 마음 이 평온해서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 왔고, 또한 계속해서 그러한 훈 련을 거듭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 어떠한 일로도 그녀의 표정을 변하게 할 수는 없게 되었던 것뿐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유령장을 벗어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져다 주는 무공이라도 배우는 길 외 에는 달리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마소군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머니의 고충을 이해할 것 같았다. 아니, 이해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 누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일은 그녀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마소군이 이해하는 것은 그녀가 느끼는 것의 백분의 일도 채 되 지 않을 것이다. 사마소군 자신도 그것을 안다. 그런데도 그는 가슴이 찢어질 정도 로 아팠다. 그러니 그녀는 또한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이 한(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한참 후에야 사마소군은 입을 열었다. "우리 모자(母子)의 모든 고초는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는 심목풍이 그 대가를 치를 차례가 온 것입니다. 어머니, 이제부터 는 소자가 편히 모시겠습니다." 사마소군은 그녀에게 나가기를 청했으나 임설정은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사마소군과 함께 유령장을 떠나려는 기색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어머니……!" 밖으로 나가려던 사마소군은 여전히 앉아 있는 임설정을 향해 의 아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의아한 시선 속에는 이미 불길한 예감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 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임설정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이미 유령부인이다. 나의 거처는 유령장이니, 너는 혼자서 이 곳을 떠나도록 하라." "……." "내 비록 몸은 이 곳에 있으나, 나의 마음은 언제나 너와 함께 있 을 것이다." "어머니, 소자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임설정은 사마소군의 말을 끊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너대로, 또한 나는 나대로… 서로의 방식대로 우리의 한 (恨)을 해결하도록 하자." 사마소군은 그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갑자기 유령장에서 사라진다면 자연 백화맹을 경각시 키게 될 것이고, 복수를 하기도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녀는 유령장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 다. "저는 어머니를 더 이상 이 곳에 머물러 계시게 할 수가 없습니 다. 소자는 소자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백화맹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사마소군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 말을 하는 도중에 임설정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완고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유령장을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그가 입을 다물자, 임설정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나의 온 삶은 이미 오직 복수의 길에 바쳐졌다. 백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이라도 복수의 가능성을 높일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 당 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아들이 나와 내 남편의 복 수를 대신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단숨에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사마소군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정녕 내 시체를 메고 이 곳을 나가고 싶으냐?" "어머니……." 사마소군은 그녀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은 그는 눈 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소자, 틀림없이 심목풍의 목을 베어 와 어머님과 아버님의 한(恨)을 풀어 드리고 어머님을 모시러 오겠습 니다." "부디… 몸조심하거라." 임설정은 말을 마치고 돌아앉았다. 그것은 무언(無言)의 축객령이 었다. 사마소군은 그녀의 등에다 대고 하직 인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소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눈물은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마소군이 창을 넘어 돌아가는 것을 인기척으로 알면서도 그녀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피는 역시 물보다 진한 것인가? 오랜 세월 동안 감정을 억제해 온 그녀였건만, 돌아앉은 그녀의 두 눈은 지금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게 결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눈물은 마음을 약하게 한다. 그녀는 자신의 눈물이 사마소군의 마 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사마소군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아들아, 잘 가거라." * * * 슬픔은 유령장을 나온 후에도 가시지 않았다. 사마소군은 원래 하루하루를 매우 기쁘게 살려고 노력했다. 또한 최소한 어머니를 만나기 이전까지는 하루하루가 부족함이 없었다. 그에겐 원한이 있었지만 그것은 지나간 것이었다. 그 자신에겐 무 예가 있고 세력이 있으니, 언젠가는 원한을 갚을 수도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제 더 이상 하루하루를 기쁘게 보낼 수 없게 되었다.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어머니… 그의 어머니의 원한은 과거가 아 니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날수록 어머니의 가슴에는 하루만큼의 원한이 쌓여 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원한은 그의 원한과도 직결되어 있었다. "아직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고, 밝혀 내야 할 것 또한 많지만 … 이제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다." 사마소군은 자신에게 말했다. "그 지옥 같은 곳에 더 이상 어머니를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 이 세상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자신의 어머니를 그러한 곳에 머무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루(酒樓), 이 곳은 악양에서 제일 큰 주루였다. 주루는 모두 삼층으로 되어 있는데, 좌석의 수를 모두 합하면 삼 백 석이나 되는 최고급 주루였다. 화향루(花香樓)라는 이름의 이 주루에 이른 아침 한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은 화향루에서 제일 비싼 요리인 연와탕을 시켜 아침을 먹 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연와탕을 다 먹고 후식까지 받아 먹은 후에도 그 손님이 여전히 돌아가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기로 한 모양이지?" 종업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반점들이 다 그렇듯이 점심때가 되자, 화향루에도 많은 손님 들이 모여들었다.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많은 손님들이 들이닥친 것은 화향루가 생 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종업원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너무나 바빠 처음에 왔던 손님의 일 도 잊어버렸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돌아가고 주루가 조금 한산해지는 시간이 있다면 그건 정오가 지난 미시(未時) 전후일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늘은 미시가 되어도 한가해지지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돌아갔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식사 를 마친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종업원들은 그제야 아침에 온 손님이 생각났다. 그 사람도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데, 아직도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종업원들은 곧 잊어버렸다. 저녁때의 손님을 맞기 위해서는 또다시 바쁘게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더 많은 손님이 모여들었다. 삼층까지 다 차고 남은 자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매일같이 이렇게 장사가 잘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에는 화향루의 주인까지 직접 나와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었으며, 특별히 후식도 최고급 과일을 사 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 다. 돌아간 사람보다는 남아 있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이다. 삼백 개의 좌석 중에서 비어 있는 것은 불과 이삼십 개도 되지 않 을 정도였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손님도 또한 계속해서 들어왔다. 식사 때가 아니기 때문에 들어오는 손님은 한 번에 두세 명 정도 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남아 있는 자리가 있어서 그들을 맞이할 수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나마 남아 있는 자리도 차츰 없어져 갔다. 나중에 들어온 손님들 중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 지만,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장사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주인은 이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손님을 쫓아 낼 수도 없지 않은가? "어차피 오늘은 충분한 수익을 올렸고, 이제 문을 닫을 시간도 얼 마 남지 않았으니까." 이제 남아 있는 자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밤이 깊었다.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 손님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까를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잠을 잘 시간이 되어 가는데, 뜻밖에도 다시 한 명의 손님이 화향 루의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손님……." 화향루의 주인은 문을 밀치고 들어온 손님을 되돌려 보내기 위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이며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하나의 손이 소리 없이 그 의 머리에 닿는 순간, 그는 돌연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비단 화향루의 주인뿐만이 아니었다. 주루의 각 층과 주방에 있던 종업원들도 같은 시간에 모두 의식을 잃어 버렸다. 수혈을 짚혀 깊은 잠에 빠져 버린 것이다. 마지막에 들어온 손님이 화향루의 주인을 번쩍 들어 하나의 의자 에 앉혀 놓자, 몇 명의 손님이 날렵하게 움직여 주루의 모든 문을 닫아 버렸다. 또한 곳곳에 켜져 있는 불도 대부분 꺼졌고, 장내에는 서너 개의 아주 작은 불만 밝혀 놓았다. 밖에서 보면 어느 누구라도 이 주루가 비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 다. 모든 문이 닫히고 어둠에 잠긴 주루……. 그제야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듯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한 데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 그들의 맨 앞에 나와 섰다. 맨 나중에 들어온 손님은 바로 사마소군이었다. "천오문(天午門)의 문주, 철무쌍(鐵無雙)이 삼가 회주(會主)를 뵈 오!" 사마소군은 자신의 발 앞에 부복한 천오문주를 담담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평범한 키에 평범한 체격,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하기 이를 데없는 중년의 사내였다. 거리에 나가 일각만 걸어다녀도 아마 이렇게 생긴 사람은 열 명, 스무 명도 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이 사람이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한눈 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상에 절대로 평범한 사람은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보다 더 잘나거나 특이하게 생긴 구석이 한 군데쯤 있게 마련이고, 그 렇지 않다면 하다 못해 못난 구석이라도 있게 마련인데… 이 사람 은 완벽할 정도로 평범하다." 사마소군은 철무쌍이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어떠한 경우라도 완벽하다는 것은 그가 매우 비범하며 유능하다 는 증거다.' 그렇다. 한 사람이 평범하게 보이는 것도 결코 쉬운 노릇은 아니 다. 천오문의 문주쯤 되는 위인이 평범하다는 것은 그가 하는 일이 남 에게 평범하게 보여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며, 그가 그 일 에 그만큼 완벽했다는 증거이리라. "그 날… 말(馬)의 가면을 쓰고 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소?" 잠시 침묵하던 사마소군이 묻자, 철무쌍은 부복한 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사마소군은 웃었다. "가면을 벗으니까 훨씬 보기 좋구려." "감사합니다." "감사할 건 없소. 내가 느낀 그대로를 말해 준 것뿐이니까." 철무쌍도 웃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하늘같이 높은 회주 앞에서 방정맞게 웃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웃고 난 후에야 그는 자기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황 급히 정색을 했다. "죄, 죄송합니다." 정색을 한 그를 향해 사마소군이 아까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어 말했다. "죄송할 것도 없소. 당신이 웃은 것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 니까." 철무쌍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더할 수 없이 편안해져 있었다. 상대는 분명 하늘 같이 높은 회주이건만, 그는 오랜 친구와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마소군이 다시 입을 연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그는 더 이상 농담을 하지 않았다. 그가 여기에서 사람을 모이게 한 것은 농담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일을 시작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 당신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고 하였소. 그러나 지금 나는 다시 한 번 묻겠소. 정녕 다른 십일문(十一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소?" 사마소군이 말하는 그 날이란 바로 낙양성부에서의 회합일을 말하 는 것이다. 그 날 열두 명의 문주들은 모두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고, 또한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고 말했었다. 그 날 말을 한 사람은 천자문의 문주였는데, 오늘 사마소군은 천 오문주인 철무쌍에게 다시 한 번 물은 것이다. "십이문(十二門)은 확실히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 다. 그러나……." 천오문주 철무쌍은 부복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본문(本門)은 본문의 성격상 사실 다른 십일문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회주께서 알고 싶은 것이 있 으시다면 무엇이든지 하문(下門)을 하십시오." 천오문은 각 문파간의 연락을 주요 업무로 하고 있었다. 자연 다 른 문파들보다 타문파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알고 싶은 것은 없소. 그 날 보고를 들은 것 정도로도 충 분하다고 생각하오." 사마소군은 철무쌍을 내려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 이렇게 천오문의 여러 고수들을 모이게 한 것은 십이문 모 두에게 특별히 지시할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오." 철무쌍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사마소군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명령이든지 일단 사마소군의 입에서 떨어지 면 즉시 실행에 옮기겠다는 굳은 의지가 떠올라 있었다. 사마소군이 말했다. "나는 이 땅에서 하나의 거대한 문파를 영원히 사라지게 하려고 하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철무쌍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철무쌍뿐만이 아니었다. 주루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말을 하고 있는 사마소군 자신도 약간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사마소군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입은 비록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렇게 묻고 있었 다. "그 문파가 어떤 문파입니까?" 십이문은 비록 그 역할이 분담되어 있지만 그 개개문파의 위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는 사실을 그들 모두는 알고 있었 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의아해하는 것이다. '회주에겐 장한별부라는 엄청난 세력이 있다. 칠인회 개개인의 능 력만으로도 웬만한 문파 하나둘은 간간이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도 십이문 모두가 한꺼번에 움직여야 한다니… 그 문파가 과연 어 떤 문파란 말인가?'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문파는 바로……." 사마소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백화맹이오." 철무쌍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 백화맹,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의 문파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무림(正派武林) 자체와 더불어 일곡이장삼 성(一谷二莊三城)을 비롯한 사파 백이십칠 개 문파로 대변되는 흑 도무림(黑道武林) 전체, 즉 정사무림(正邪武林) 전체를 말하는 것 이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백화맹을 이 땅에서 없애 버리겠다는 것은 현존하 는 무림의 체계를 완전히 뒤바꿔 놓겠다는 것으로밖에 풀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건 너무도 엄청난 계획이었다. 밤은 자꾸만 길어 갔다. 풍운(風雲)을 예고하는 밤이기도 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또한, 스스로의 앞날을 점칠 수는 없 으리라. 그래서 회담은 자꾸만 길어졌다. 그러나 끝이 없는 모임은 없는 법. 회담은 마침내 끝이 났으며, 화향루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각자 아무 일 이 없었다는 듯 떠나갔다. 그들은 각자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떠나갔으나, 그들이 앞으로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의 공통된 목적을 위해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이 밤이 끝나고 날이 밝듯이, 머지않아 그들은 이 일의 결 과 또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화향루의 주인과 종업원들이 눈을 뜬 것은 해가 뜨기 직전의 이른 아침이었다.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지?" 자신이 의자에 앉아서 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화향루의 주인 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화향루의 주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종업원들도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잠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는 의아함과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 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그 이유를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천오문의 고수들이 그들의 마혈을 짚어 전날의 기억을 모조리 지 워 버렸기 때문이다. ━━━━━━━━━━━━━━━━━━━━━━━━━━━━━━━━━━━ 제 28 장 백화맹주(白花盟主) ━━━━━━━━━━━━━━━━━━━━━━━━━━━━━━━━━━━ 백화맹이 추구하는 것은 힘에 의한 선(善)의 지배이다. 그러나 그들은 선(善)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하늘에는 해가 있 지만 달도 있다. 세상은 밝기도 하지만,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 또한 결코 낮보다 짧지가 않다. 어느 한쪽도 어느 한쪽을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무림(武林)도 마찬가지이다. 정(正)과 사(邪), 흑도(黑道)와 백도(白道), 이 둘은 비록 서로 상극(相剋)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어 느 한쪽도 어느 한쪽을 영원히 사라지게 하거나 지배할 수가 없 다. 만약 그러려고 한다면 이 땅 전체가 시체로 뒤덮이고, 강과 바다 는 온통 피로 물들 것이다. 땅 전체가 시체로 뒤덮여도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백화맹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흑도의 문파 나 사파의 고수들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백화맹의 규칙만 준수한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무림을 지배하는 것이 반드시 힘에 의한 선(善) 의 지배라고만은 얘기할 수 없다. 무림을 지배하는 것은 백화맹, 그 자체인 것이다. 장원. 크고 넓으며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채의 장원에는 <백화맹(白 花盟)>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었다. 장원의 문은 매우 넓고 높았으며, 현판이 걸린 위치도 웬만한 사 람이라면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까마득히 높았다. 시월(十月)의 따사로운 햇빛이 현판에 쓰인 금장(金粧)의 글자를 비추어 다만 금빛의 광채가 사방으로 눈부시게 흩뿌려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장원은 대로변에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 앞을 지나는 사람은 언 제나 많은 편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필시 마차를 소유하고 있거나 말(馬)을 탈 줄 아는 사람도 있을 텐데, 이 장원 앞에서는 웬일인지 마차와 말 을 타고 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간혹 마차나 말이 지나가는 경우가 있지만 그 마차와 말은 언제나 최대한 속도로 늦추어 먼지나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지나가게 마련이며,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도 마차에서 내려 도보로 걸어 가게 마련이다. 이것은 누가 시킨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어느 새 관습처럼 굳어져 아무도 어기는 사람 이 없게 되었다. 마차(馬車), 한 대의 이두마차(二頭馬車)가 흙먼지를 날리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두두－ 두두두두－! 거리는 매우 넓었으나, 지나가는 행인(行人)들이 온통 거리를 메 우고 있었다. 한 대의 마차가 달려오자, 사람들은 분분히 길 양 옆으로 물러났 다. "마차를 몰고 달려오다니? 대체 어떤 놈이 이 길에서 마차를 달리 는 거야?" 행인들은 저마다 마차를 손가락질하며 욕을 해댔다. 그들이 욕을 해대는 이유는 사람들이 많은 길로 마차가 달려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이 길 저쪽에 백화맹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차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아랑곳하지 않고 대로를 달려가 이윽 고 백화맹의 산문 앞에서 멈추었다. 산문 앞에는 두 명의 무사가 서 있었다. 두 명의 무사는 자신들의 앞에 다가와서 멈춘 마차와, 마차에 타 고 있는 두 명의 죽립인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는 이미 멈추었고 마차에 타고 있는 두 명의 죽립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건만, 그들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며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 백화맹의 문지기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백화맹 앞에 다가와 멈춘 마차와 자신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그저 마차를 바라보고 있기만 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눈빛엔 일종의 오만과 적의마저 깃들여 있는 듯 느껴지고 있었다. 마차에 타고 있는 두 명의 죽립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명의 무 사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여기가 백화맹의 총단인가?" 죽립인은 당연하다는 듯 하대를 했다. 그들의 앞에 있는 두 명의 무사는 어쨌든 문을 지키는 하급무사이 기 때문이다. 두 명의 무사 또한 그들의 이러한 하대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원래부터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음을 받은 지금 또한, 지극히 냉정하고 오만한 표정으로 대꾸했을 뿐이다. "당신들은 눈도 없소? 현판에 써 있는 그대로요." 그들은 하대를 하진 않았다. 그러나 하대를 한 죽립인의 말보다 그들의 대답이 훨씬 더 오만하게 느껴졌으며, 그 음성에는 상대를 멸시하는 듯한 느낌마저도 다분히 깃들여 있었다. 무사들의 이 대답에 죽립인들의 눈빛이 일순 싸늘하게 물들었다. 죽립인들은 짙푸른 녹의에 녹색피풍을 걸치고 푸른빛이 은은히 감 도는 죽립을 쓰고 있었는데, 이 순간 죽립에 반쯤 가려진 그들의 두 눈에서 녹색의 광채가 훅 뿜어져 나오는 것같이 느껴졌다. 이러한 무형(無形)의 살기(殺氣)는 삽시간에 주위의 공기를 차갑 게 얼어붙게 했다. 금세라도 살인을 할 듯한 기세였으나 죽립인들은 끝내 살수를 전 개하지는 않았다. "한 마리의 개를 때릴 때라도 주인의 신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니까, 오늘은 참기로 하지." 좌측의 죽립인이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리자, 우측의 죽립인이 두 명의 무사를 향해 명령을 내리듯 말했다. "맹주(盟主)께선 안에 계시는가? 계시다면 우리를 맹주께 안내하 라." 죽립인의 입에서 일단 맹주라는 이름이 나오자, 두 무사의 태도는 삽시간에 달라졌다. 그들은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공손히 물었다. "맹주를 찾아오셨습니까?" "그렇다." "배첩을 가지고 오셨는지요?" "배첩? 그런 건 모른다." 죽립인이 고개를 젓자, 무사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무사는 마치 심문이라도 하듯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맹주를 만나러 오셨다는 분이 배첩도 지니고 있지 않단 말이오?" 무사의 물음에 죽립인은 더욱 싸늘한 어조로 반문했다. "맹주를 만나려면 반드시 배첩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냐?" "그렇소." "나는 그러한 규정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당신들은 들어 본 적이 없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무수히 들어 보았으며, 또한 이 규정은 어느 누구라도 감히 어길 수 없는 것이 오." "너는 우리들보고 돌아가라는 말이냐?" "돌아가고 가지 않고는 당신들의 자유요. 그러나 배첩이 없이는 절대로 이 문을 통과할 수 없소." 죽립인은 여태껏 어느 누구와도 이렇게 많은 말을 한 적이 없었 다. 더욱이 이런 푸대접을 받아 본 적도 없었다. 여태까지 그들이 참았던 것은 오직 백화맹주의 체면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확실히 백화 맹주의 초청을 받았으며, 반드시 안으로 들어가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죽립인은 나직이 소리쳤다. 말하는 순간 그들의 손에는 어느 새 한 자루의 검이 들려졌으며, 들려진 검은 이미 두 무사의 목을 정 확하게 겨누고 있었다. 두 무사는 죽립인들이 언제 검을 뽑았는지 보지도 못했다. 다만 푸른빛이 번쩍이는 것과 동시에 죽립인들은 어느 새 마차에 서 내려왔고, 두 자루의 검이 각기 자신들의 목에 겨누어진 것이 다. 죽립인이 물었다. "이래도 우리가 저 문을 통과할 수 없단 말이냐?" 두 무사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고개를 저었다. "통과할 수 없소." "너희들이 정녕 죽고 싶단 말이냐?" 두 무사가 차례로 대답했다. "우리들이 죽더라도 배첩이 없다면 저 문을 통과할 수 없소." "당신들이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당장 시험을 해 보시오." 검 끝이 이미 목을 찔러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두 무사는 조 금도 두려운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죽립인들은 여태껏 이러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두 무사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죽여 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일개 하급무사들이 이토록 당당할 수도 있단 말인가? 죽립인들은 이들의 이러한 태도에 일종의 두려움마저 느꼈다. 그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은 눈앞에 있는 두 무사에 대해서가 아니라, 백화맹주 심목풍에 대해서였다. '일개 하급무사들까지도 이렇게 철저하게 충성을 바칠 수 있게 하 는 심목풍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인가?' 그들은 심목풍의 초대를 받고 온 것이지만 그를 만난 적은 아직 없었다. 그의 명성을 듣기는 했으나 모든 소문이 다 그렇듯이 그것도 과장 된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심목풍에 대한 소문 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다고까지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스스로 고강한 무예를 소유하는 것도 어렵지 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목숨을 바쳐 자신을 따르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예가 강한 사람은 스스로의 이름을 날릴 수 있을지언정 천하(天 下)를 다스릴 재목은 못 된다. 심목풍과 마찬가지로 오직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향해 목숨을 바칠 수 있게 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것 이다. 두 사람은 망설였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성격대로라면 그들은 벌써 두 명의 무사들을 죽였을 것이 다. 검 또한 이미 발해져 무사의 목에 겨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심목풍의 초대를 받고 온 사람이 어떻게 그의 부하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미 뽑아 든 검을 아무 명분도 없이 거두어들인다면 무림 에서 그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하급무사들이 지나치게 무례했으니, 이들을 죽여도 심목풍이 우 리를 가히 탓하지 않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두 명의 죽립인은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자신에게 무례하게 행동한 사람을 여태껏 살려 준 적이 없 었다. '이들을 죽인 후, 심목풍에게는 상세히 해명을 해도 늦지 않다.' 그들이 막 결정을 내렸을 때였다. 산문 안에서 돌연 한 사람이 걸 어 나오며 소리쳐 물었다. "두 분께서는 혹, 맹주의 초대를 받고 오신 벽혈쌍사가 아니신지 요?" 이 물음은 간단한 것이었지만 벽혈쌍사에게는 적절한 명분을 제공 해 주었다. 물음에 답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검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그렇소." "안으로 드시지요. 맹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벽혈쌍사는 안에서 걸어 나온, 얼굴과 두 손의 피부가 지나치리만 치 하얀 중년인을 주시했다. 중년인은 입고 있는 옷 색깔마저도 흰 백의(白衣)여서 몸 전체가 온통 하얗게만 보였다. 벽혈쌍사는 짐짓 차갑게 냉소했다. "배첩이 없이는 이 문을 절대로 통과할 수 없다고 하지 않소." "백화맹에서는 언제나 손님을 이렇게 푸대접하오?" 백의의 중년인이 웃는 얼굴로 답했다. "두 분께서는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무사 들의 잘못이 아니라 배첩을 발송하지 못한 본인의 실수이니, 제가 대신 사과를 하겠소." 벽혈쌍사는 마침내 굳은 얼굴을 풀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그들의 체면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대청, 넓은 대청에는 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흑도(黑道)에서 영향력 있는 문파를 이끌고 있는 일 파의 종주(宗主)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모두 아직 백화맹에 입맹 (入盟)하지 않은 몇 안 되는 패주들 중 일부였다. 심목풍이 자신을 초청했을 때 그들은 모두 심목풍이 입맹을 강요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이렇게 다짐을 했었 다. "소(牛)의 꼬리가 되느니, 차라리 개(太)의 머리가 되겠다. 만약 심목풍이 강제로 입맹시키려 한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 그러나 심목풍은 성대한 주연을 베풀어 이들을 환대했다. 무림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백화맹에 가입하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겸손했으며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의가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 심목풍에게 기울어 가고 있었다. 이 때였다. 얼굴이 하얀 중년인이 조용히 들어와 심목풍에게 공손 히 말했다. "맹주, 벽혈쌍사 두 분이 오셨습니다." 이 말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벽혈쌍사는 흑도무림 전체에서 손꼽히는 고수일 뿐만 아니라, 다 른 사람과 어울리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흑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 문에 벽혈쌍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두 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 * * 벽혈쌍사는 원래 술을 마실 줄 몰랐다. 심목풍이 권하는 술을 어쩔 수 없이 몇 잔 받아 마시긴 했지만 가 슴 속의 불만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술기운 때문에 점점 더 배알이 뒤틀리고 있었다. '우리를 초대해 놓고 저런 잡배들과 주연을 벌이다니…….' 벽혈쌍사는 심목풍이 자신들만 초대한 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주위의 다른 사람을 둘러보았다. 보잘것 없는 문파를 이끌고 쓸데없이 우쭐댈 줄이나 아는 형편없 는 무림인들이 자신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벽혈쌍사는 자신이 이런 사람들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이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어찌 된 일인지 백화맹주는 벽혈쌍사보다는 다른 사 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벽혈쌍사는 술을 마시지 못하니, 자연 이러한 주연엔 아무 흥미도 없었다. 일 각 일 각이 지루하고 따분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다. 그들은 심목풍의 초대를 받았을 때에 이미 백화맹에 입맹하고 싶 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평범한 대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무공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한 것만큼 거기에 상 응하는 예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불현듯 벽혈쌍사는 자신들이 심목풍에게 일조의 예물을 가지고 왔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예물이 어쩌면 이 지루한 주연을 끝맺어 주고, 자신들 또한 심 목풍으로부터 충분한 대우를 받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었다. 벽혈쌍사 중 첫째가 기회를 보아 입을 열었다. "본인들은 심맹주의 초대를 받고 그냥 맨손으로 오기가 쑥스러워 한 가지의 예물을 가지고 왔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드려도 되겠 소?" 주연이 흥겹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던 심목풍이 벽혈쌍사 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족한 심모에게 예물을 가지고 오셨다니… 감사히 받겠소." "잠시만 기다려 주신다면 마차에서 가지고 오겠소." 말과 동시에 벽혈쌍사는 일어나 대청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대청 밖으로부터 무거운 물건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들 려 오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대청 문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모두의 눈에는 이 예물 이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묵직한 소리가 날까 의아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직 심목풍만이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마 치 벽혈쌍사가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만 같 은 표정이었다. 이윽고 벽혈쌍사가 다시 나타났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예물로 향했 다.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관? 벽혈쌍사가 시체를 예물로 가지고 왔단 말인가?'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벽혈쌍사는 하나의 관을 대청 중앙에 가져다 놓았다. 검은 옻칠을 한 관(棺)은 삽시간에 장내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 다. 심목풍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미소를 띄우고 있을 때는 한 없이 온화하고 인자한 얼굴이었으나, 일단 미소를 거두자 그 얼굴 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엄 있는 얼굴로 변하였다. 정색을 한 얼굴에서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는 누구라도 감히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위엄이 있었다. 비단 눈빛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음성은 눈빛 보다도 더욱 위엄이 있었다. "두 분, 이게 무슨 짓이오?" 아무리 벽혈쌍사라 할지라도 심목풍의 눈빛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 않을 수 없었다. 벽혈쌍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이 런 눈빛을 접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 맹주……." 벽혈쌍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난 후 입을 열었다. "우리는 맹주의 초대를 받고 오던 중에 맹주의 영식에 대한 비보 를 접하게 되었소. 그래서……." 한 사람이 말을 하는 도중에 다른 한 사람이 관 뚜껑을 열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관 속으로 빨리듯 향했다. 관에서는 눈부신 광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소유하기를 원하는 광채, 그것은 금은보화 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였다. 검은 옻칠을 한 관 속에는 많은 양의 황금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황금 옆에는 한 구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시체는 깨끗한 수의를 걸치고 있었고, 얼굴에는 면포(面布)까지 씌워져 있었다. 관 속에 시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째서 황금이 들어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관을 가지고 온 벽혈쌍사 자신들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의문을 느끼고 있는데, 심목풍이 물어 왔다. "초대에 대한 예물치고는 너무 과한 것 같소. 두 분께서 내게 이 러한 예물을 주는 의도는 무엇이오?" "이건, 이것은……." "심모가 이 예물을 받는다면 강호상의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 하겠소." "이건 우리가 가지고 온 예물이 아니오!" "두 분이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면 이 예물을 심모가 가지고 왔다 는 말이오?" "……." 벽혈쌍사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관과 시체는 분명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이지만, 황금은… 어째서 이 황금이 시체와 함께 들어 있을까? 그러나 그들이 직접 이 관을 가지고 왔으니, 입이 열 개라도 변명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심목풍이 다시 말했다. "두 분께서 이러한 뇌물로 백화맹에 입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산이오. 백화맹은 언제나 무림동료들은 환영하지만 그것 은 오직 한 종류의 사람들에 한해서인 것이오." "……." "정(正)과 사(邪)의 구별은 하지 않으나, 우리 백화맹에는 모든 무림의 영웅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것이오. 그리고 영웅이란 무공 이 높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나이들을 일컫는 것이오." 여기까지 들은 벽혈쌍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심목풍이 먼저 말했다. "두 분의 무예가 매우 심후하다는 것은 심모도 잘 알고 있소. 그 러나 두 분의 무예가 설혹 하늘을 가르고 바다를 뒤엎을 정도라 하여도, 백화맹은 결코 두 분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오." 여태껏 벽혈쌍사는 이러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백화맹에 입맹하려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러한 말을 들 은 지금은 그러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어이가 없었으며 심한 수치심과 모욕을 느꼈다. 이러한 모 욕은 난생 처음이었다. "본인들은 원래 백화맹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소. 세상이 하도 심 맹주를 칭송하기에 심맹주 영식의 유해를 갖은 고생 끝에 이 곳으 로 가지고 왔소. 그런데 이런 푸대접을 받을 줄이야." 사람들의 시선은 비로소 면포가 씌워져 있는 한 구의 시체로 향했 다. 사람들은 모두 심목풍의 아들 심천량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나도록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것도 알 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체를 벽혈쌍사가 찾아왔다니……. 이것은 심목풍에게 있어 확실히 어떠한 예물보다도 귀중한 예물임 에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심목풍이 태도를 바꾸리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벽혈쌍사 에게 감사의 표시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심목풍은 더욱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아(家兒)의 시신을 운구해 오신 것에 대해서는 깊은 감사를 드 리오. 그러나 그것은 사적(私的)인 일이오. 공적(公的)으로는 더 욱더 두 분의 입맹을 허락할 수 없소. 왜냐하면 이로 인하여 두 분이 백화맹에 입맹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이 더욱더 명백해졌기 때문이오." 사람들은 생각했다. '백화맹에 입맹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면 무엇 때문에 벽혈쌍사가 이런 일을 했을까? 심맹주의 안목은 과연 예리하기 이를 데 없구 나.' 사람들은 또한 심목풍에게 탄복을 금치 못했다. '공과 사를 엄정하게 구분하여 인재가 아니면 입맹시키려 하지 않 는 심맹주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 아니 할 수 없구나.'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직 벽혈쌍사만은 심목 풍의 간계에 치를 떨고 있었다. 그들은 관 속에 금은보화를 집어 넣은 것이 심목풍의 밀명을 받은 누군가의 소행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심목풍이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벽혈쌍사는 무엇 때문에 심목풍이 고의로 자신들을 모욕하는지 그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오?" 벽혈쌍사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파랗게 질리다시피 한 얼굴로 소리 쳤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초대한 것이오? 그리고 초대를 해 놓고 우리 를 모욕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벽혈쌍사의 모습은 원래 뱀을 연상시킬 정도로 차갑고 냉혹했다. 지금 그들이 분노에 몸을 떨자, 그 모습은 잔뜩 독이 올라 있는 한 마리의 독사를 연상시킬 정도로 소름끼쳤다. 벽혈쌍사의 무서움을 익히 알고 있는 중인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결투가 벌어질 것만 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직 심목풍만이 아직도 태연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위엄이 있었으며 이러한 위엄은 그 무엇으로도 손상 을 입힐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심목풍은 나직이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원래 두 분의 명성을 흠모하여 백화맹에 일조하여 주기를 청하려고 하였었소. 그런데 두 분의 행동은……." 그는 나직이 탄식을 토해 내더니, 차마 직접 비난은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두 분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오. 일신에 재주를 지 니고 있는 자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나, 마음이 광명정대하여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자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줄어들기만 하니 말 이오." 심목풍은 벽혈쌍사를 직접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그 어떠한 욕보다도 더욱 모욕적인 것이었다. "심맹주, 당신… 당신이……." 벽혈쌍사는 분노를 참느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심목풍은 그러한 그들의 표정을 못 본 척 유유히 탄식을 토했다. "무림의 앞날이 걱정이오……." 말을 하고 난 그는 천천히 벽혈쌍사를 향해 몸을 돌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의 선물은 고마우나 본인은 단지 마음으로만 받을 뿐, 예물 을 접수할 수가 없구려. 수고스럽겠지만 두 분께선 나가실 때에 가지고 온 예물을 가지고 가시기 바라오." 심목풍의 말을 듣고 난 벽혈쌍사는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울분을 폭발시키듯 한 차례 웃고 난 그들은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 리로 말했다. "벽혈쌍사는 확실히 여태껏 살아오면서 영웅이라는 말은 듣지 못 하였소. 그러나 여태껏 비겁하다는 소리 또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소." "오늘 벽혈쌍사가 이런 대접을 받았으니,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 겠소? 심맹주께서는 영웅이니, 우리 형제는 이번 기회에 영웅의 피가 우리 같은 소인(小人)과 어떻게 다른지 견식을 해 봐야겠 소." 차례로 말을 하고 난 벽혈쌍사는 살기 띤 눈빛으로 심목풍을 노려 보았다. 벽혈쌍사는 그들의 말대로 비록 영웅은 아닐지 모르지만 최소한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인배는 아니었다. 이런 모욕을 받고도 죽음이 두려워 그냥 돌아간다면 오늘날 벽혈 쌍사라는 이름이 이렇듯 천하인의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았으리라. 벽혈쌍사는 이미 마음을 정하였다. 심목풍과 일전을 벌이지 않는다면 무림에서 그들의 이름은 땅에 떨어져 짓밟힐 뿐만 아니라, 세인의 조롱거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이었다. 그들이 살기를 뿜자, 장내는 온통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에 뒤덮여 버렸다. 두 사람이 만약 두 마리의 뱀이라면 장내는 두 마리의 뱀이 내뿜 은 시퍼런 독기(毒氣)로 가득 차 버린 것이다. 이 독기에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했다. 숨을 쉬면 독기가 스며들 어 마치 당장 죽어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데, 오직 심목풍만이 유 유히 탄식을 토한다. "주인된 입장으로 어찌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손님과 접장(接場)을 할 수 있겠소? 두 분은 심모를 난처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돌아가 주시오." 이 말에는 정인군자다운 풍모가 깃들여 있었다. 누구라도 감동을 받을 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말은 오직 벽혈쌍사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돌아갈 수가 없었다. 심목풍은 이러한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정인군자가 되지만 벽혈 쌍사는 이미 소인잡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더욱 악(惡)한 인간으로 치부될 뿐이었다. 그러나 심목풍이 정말로 벽혈쌍사를 놓아 보낼 심산일까? 벽혈쌍사 같은 고수(高手)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 된다. 일단 적(敵)이 되어 버리면 기회가 있을 때 죽여 버리는 것이 상 책이다. 심목풍 같은 위인이 이러한 이치를 소홀히 했다면 지금 백화맹의 맹주 같은 높은 위치에 오르지 못했으리라. "우리보고 돌아가라고?" 벽혈쌍사가 반 실성한 듯한 표정으로 냉소하며 말했다. "이런 모욕을 받고 그냥 돌아갈 무인(武人)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네가 그런 말을 하느냐?" "너에게 우리를 돌려보낼 마음이 있었다면 어째서 고의로 우리를 모욕했단 말이냐!" 말과 동시에 벽혈쌍사는 이미 검을 뽑아 들었다. 두 사람의 손에 들린 검은 보검(寶劒)이 아닌 평범한 청강장검(靑 剛長劒)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들의 손에 들린 청강장검은 그 어떠한 보검보 다도 날카로운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푸르스름한 광채. 그것은 단순한 광채가 아니었다. 무엇이든 닿으면 닿는 대로 베어 버리고 마는 강기인 것이다. 검의 길이는 비록 석 자에 불과했으나 이 강기의 길이는 일 장 이 상까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기에 비록 사람이 많고 그들이 모두 일파의 종주들이긴 하지만, 본신의 진력을 검 끝을 통해 일 장 이상이나 내뻗을 수 있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검도 무섭지만 강기는 더더욱 날카로운 것이다. 벽혈쌍사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심목풍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심목풍의 명성을 듣기는 했으나 그가 무공을 펼치는 것 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자연 심목풍을 걱정한다. 그런데도 심목풍은 아무 준비도 없이 다만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는 백혈쌍사만을 주시하고 있다. "두 분, 걸음을 멈추시오." 벽혈쌍사를 돌려보내겠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자신이 한 말을 지키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때였다. "맹주!" 돌연 밖으로부터 한 사람이 뛰어들어와 심목풍의 앞에 부복했다. 얼굴이 하얀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며, 손에는 놀랍게도 두 개의 수급을 들고 있었다. 지금도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수급, 그것은 백화맹의 산문을 지키던 두 무사의 수급이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벽혈쌍사와 마찬가지로 산문을 통해 들 어왔으므로 수급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들이 갑자기 죽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의혹을 느끼고 있는데, 심목풍이 더욱 놀라며 묻는 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눈물을 흘리면서 중년인이 대답했다. "본맹의 규칙에 따라 내방자를 검문하던 중 무예가 부족하여 오히 려 모욕을 당하였으니, 이는 백화맹의 권위를 실추시킨 것이라 하 여 스스로 자결을 하였습니다." "모욕을 당하다니?" "내방자가 검문에 응하지 않고 목에 검을 겨누며 위협을 했다고 합니다." 심목풍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규칙에 따라 내방자를 맞이하는 것은 모든 문파의 당연한 권리이 거늘, 감히 어느 누가 검을 들어 본맹을 모독했단 말이냐?" 얼굴이 하얀 중년인은 아무 말도 없이 벽혈쌍사를 쳐다보았다. 심목풍은 그제야 다시 벽혈쌍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탄식하듯 말했다. "일개 하급무사를 상대로 하여 검을 뽑다니… 두 분은 아마도 자 신의 무공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것 같구려." 말을 하는 도중에 심목풍의 눈빛은 차츰 차갑게 얼어붙어 나중에 는 무서운 살기를 띤 눈빛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그의 음성만은 눈빛과 달리 여전히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 다. "오늘 심모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맹의 영예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두 젊은 무인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 되며, 두 분 또한 백화 맹에 사람이 없다 할 테니… 오늘 심모는 어쩔 수 없이 검(劒)을 뽑아야만 하겠구려." "심목풍, 너는 애초부터 우리를 제거하려 했는데 구태여 이런 연 극을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 "두 분이 심모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두 분의 자유요. 그러나 본인은 주인된 입장이니, 두 분께 삼 초(招)를 양보하여 드리겠 소. 어서 발초하시오!" 심목풍의 이 말은 예의바르고 정중한 것이었으나, 벽혈쌍사에게만 은 더할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삼 초(招)를 양보하는 예는 무림에서 종종 있으며, 또한 반드시 고수(高手)가 하수(下手)에게만 양보하는 것도 아니다. 사제가 비무를 할 때는 스승이 제자에게, 사형제간일 때는 사형이 사제에게 무공(武功)의 고하(高下)와 상관없이 삼 초를 양보하며, 검을 겨루는 두 사람이 친구지간일 때에는 때로 연장자가 삼 초를 양보하기도 하는 것이 무림의 미덕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삼 초를 양보했다고 해서 그것이 승부에 연관되는 경우는 거 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삼 초를 양보하는 것이 의례적인 것이니만큼, 삼 초를 양보받은 사람 또한 그 삼 초를 형 식적으로만 펼칠 뿐 상대를 직접 공격하는 데에는 사용치 않기 때 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우는 비무와 같은 대련의 성격이 짙은 승부에 서만 국한된 것일 뿐, 지금과 같이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이 나 는 생사(生死)의 혈투에서는 삼 초를 양보하는 예가 거의 없으며 양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심목풍의 이 말은 중인들에게 심목풍이 벽혈쌍사를 해칠 의사가 없는 것으로 느껴지게 된 반면에 벽혈쌍사에게는 심목풍이 자신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심목풍은 물론 이 말의 이러한 양면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예측한 것은 이내 현실로 나타났다. 심목풍을 주시하는 중인들의 눈빛이 깊어진 반면에, 벽혈쌍사는 즉각 살기 띤 음성으로 이렇게 응수해 왔다. "삼 초를 양보하겠다고? 좋다! 네가 삼 초를 양보하겠다면 그 삼 초 내에 목이 땅에 떨어지게 하겠다." 말과 동시에 벽혈쌍사는 즉각 몸을 움직였다. 슈우욱－! 두 개의 녹영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본 순간, 중인들은 무수한 녹색의 광채가 하늘로부터 흩뿌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촤아아－! 흡사 그물과도 같이 심목풍의 전신을 덮어 가는 녹색의 강기( 氣)! 이 일 초를 보는 순간, 중인들은 벽혈쌍사의 명성이 결코 허명(虛 名)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중인들은 모두 자신이 심목풍의 입장이 되어 본다. 그리고 걱정한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연 심목풍 때문이며, 반격을 하지 않고는 이 일 초를 피할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삼 초를 양보하겠다고 한 이상, 심목풍은 절대로 반격을 하지 않 을 것이다. 그러나 반격을 하지 않고는 이 일 초를 피할 길이 없 다. 중인들은 그물 같은 강기에 의하여 수천 조각으로 갈라지는 심목 풍을 연상하며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들의 손은 어느 새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물과도 같은 녹색의 강기는 하늘로부터 펼쳐 내려와 어느 새 심 목풍의 몸을 덮어 가고 있다. 중인들이 막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였다. 돌연, 심목풍의 몸이 뒤 로 눕혀지더니 미끄러지듯 사정권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한 마리의 물고기가 그물에서 빠져 나오는 것처럼 아슬아 슬하면서도 유연하기 이를 데 없는 동작이었다. 사실 이러한 신법은 매우 평범한 것으로써 여기에 있는 중인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신법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평범한 신법으로 벽혈쌍사의 일 초를 무위로 돌아 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만약 심목풍이 중인들이 모르는 아주 오묘한 무공으로 이 일 초를 피해 냈다면 중인들은 비록 감탄을 했을지언정 경탄을 하지는 않 았으리라. 그러나 그가 이렇듯 평범한 무공으로 벽혈쌍사의 무서운 일 초를 무위로 돌아가게 하자, 중인들은 비단 감탄했을 뿐만 아니라 경탄 을 금치 못했다. 마치 신비로운 마술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때였다. 나직이 탄성을 질러 대던 중인들의 얼굴이 돌연 흙빛 으로 변했다. 심목풍의 신형이 강기의 그물에서 벗어나 하늘로 솟 구치는 것과 동시에 펼쳐진 벽혈쌍사의 일 초를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심목풍의 몸은 허공에 떠 있기에 완전히 벽혈쌍사의 사정권 안에 노출되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 피하든 벽혈쌍사의 사정권에 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심목풍을 향해 한 마리의 새를 쏘아 맞추듯 벽혈쌍사는 예 리한 지풍을 발출해 냈다. 슈우욱－! 이 일 초를 피해 낼 방법은 없다. 어디로 피하든 간에 제이(第 二), 제삼의 지풍이 재차 발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일세의 영웅이 마두의 손에 의하여 최후를 맞이하는구나!' 중인들이 애통함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에 두 줄기의 지풍은 어김 없이 심목풍의 신체에 격중되었다. 파팍－! "아앗!" 중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명을 내질렀다. 다음 순간,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풍에 격중되어 피를 뿌리며 쓰러져야만 될 심목풍의 몸이 돌연, 천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마치 바람개비가 원을 그리듯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밀려 올라간 심목풍은 천장에 부딪치는 순간, 가볍게 몸을 뒤집어 대들보 위에 사뿐히 올라섰다. "와아!" 중인들은 저마다 경악에 가까운 탄성을 내질렀다. 흥분을 억제하 지 못하고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첫번째에 심목풍이 초식의 오묘한 운용을 보여 주었다면, 이 두 번째의 초식에서 그는 경신술의 진수와 더불어 내공의 심후함을 보여 준 것이다. 심목풍은 아주 약한 미풍에도 몸이 날아갈 정도로 최대한 몸을 가 볍게 하는 것과 동시에, 벽혈쌍사의 지풍에 격중될 부위에 전신의 공력을 집중시켰었다. 몸을 아무리 가볍게 하더라도 공력이 부족하면 벽혈쌍사의 지풍에 의하여 몸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공력을 집중하여 대승을 한다 하더라도 몸을 가볍게 하여 충격을 완화시켜 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대라신선이라 할지라 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일 초는 경신술과 내공의 절묘한 조화이자 무공의 극치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은 말로만 설명할 수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실제로 펼쳐 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중인들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벽혈쌍사마저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 심목풍이 있었지만 그들은 심목풍조차도 눈 에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 초(招)를 펼쳤을 뿐이니, 그들은 아직 일 초를 더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벽혈쌍사 두 사람은 모두 다 남은 일 초를 전개하려 하지 않았다. 중인들의 시선은 넋을 잃고 서 있는 벽혈쌍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벽혈쌍사가 어떠한 초식을 전개하더라도 심목풍이 능 히 파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중인들도, 벽혈쌍사도, 그리고 심목풍도 모두 입 을 열지 않고 있었다. 중인들은 벽혈쌍사가 초식을 전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심목풍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벽혈쌍사 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의무이기도 했다. 마침내 벽혈쌍사가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이 움직인 것은 손이나 발이 아니었다. 이번에 그들이 움직인 것은 입술이었으며, 입술에서 흘러 나온 음 성은 의외로 너무나 담담한 것이었다. "벽혈쌍사가 삼십 년을 무예에 바쳤으면서도 둘이서 한 사람을 당 해 내지 못하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말과 동시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언뜻 중인들은 그들의 눈에 떠오르는 어떤 처절한 각오 같은 것을 보았다. "벽혈쌍사는 비록 영웅은 아니나,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 이다." "삼 초 내에 목이 땅에 떨어진다고 했으니……." 돌연, 두 줄기의 섬광이 번쩍이더니 두 개의 수급이 땅에 떨어졌 다. 땅에 떨어진 수급은 벽혈쌍사의 발 밑을 굴러 중인들의 눈앞에서 멈추었다. 그제야 뒤늦게 선혈이 확 뿜어져 나왔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땅에 떨어진 벽혈쌍사의 수급을 향했다. 두 개의 얼굴에 박힌 두 쌍의 눈은 아직도 살아 있는 듯 보였다. 눈뿐만이 아니었다. 두 개의 입술도 말을 할 듯 가늘게 경련을 일 으키고 있었다. 그 입은 비록 말을 하지 못했지만 중인들은 모두 다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입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벽혈쌍사는 오직 삼 초만을 펼쳤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을 지켰다!" 중인들은 어떤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벽혈쌍사에 대하여 그들은 어떤 연민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이 때였다. 나직한 탄식이 중인들의 귀로 흘러 들어왔다. "백혈쌍사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중인들의 시선은 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했다. 심목풍이 어느 새 벽혈쌍사의 시신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안타까운 눈빛으로 벽혈쌍사를 주시하 고 있었다. * * * 백화맹의 뒤쪽에 심목풍의 처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해가 진 후에 얼굴이 하얀 중년인이 심목풍을 찾아와 고했다. "맹주, 여표이옵니다!" "안으로 들라!" 심목풍은 대청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한 잔의 차는 아 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찻잔의 물은 어느 새 싸늘하게 식어 있 었다. 다도를 즐기고 있었다면 어째서 싸늘하게 식도록 차를 마시지 않 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원래부터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단 말인가?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면, 그는 어째서 이 늦은 시간까 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단 말인가? 심목풍이 물었다. "어떻게 되었는가?" 대청 바닥에 부복한 여표가 대답했다. "그 동안 맹에 가입하지 않고 있는 십칠 개 문파가 오늘 정식으로 본맹에 가입했습니다." "당연한 결과다." "맹주……." "무슨 일인가?"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여표가 조심스레 묻자, 심목풍은 담담하게 말했다. "말하라." "벽혈쌍사는 오늘 가맹한 십칠 개 문파보다도 더욱 무공이 뛰어납 니다. 그들이 본맹에 가입할 의사가 있는데, 구태여 제거한 이유 가 무엇인지요?" 심목풍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궁금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벽혈쌍사의 무예가 십칠 개 문파를 모두 합한 것만큼이나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벽혈쌍사는 힘만 있지, 다른 것은 없다." "……." "반면에 십칠 개 문파는 그 전력에서는 벽혈쌍사에 다소 뒤질지 모르나, 휘하에 두면 여러 가지 쓸모가 많다. 아직도 본맹에 복명 하지 않은 다른 문파들을 끌어들이게 함은 물론이요, 그들은 자신 들의 영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리에게 소상히 전해 주는 충실한 정보원이 되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머지않아 큰 싸움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때엔 한두 명의 고수보 다는 정확하고 빠른 한두 가지의 정보가 승부에 더욱 커다란 영향 을 미치는 것이다. 벽혈쌍사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부득이하게 죽 인 것이다. 다른 문파의 종주들을 내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이제 알겠습니다." 여표는 심목풍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여표의 몸이 밖으로 나가기 전에 심목풍의 물음이 다시 흘 러 나왔다. "두 무사를 죽인 것은 네가 직접 한 일인가?" 여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일을 본 사람은 없는가?" "맹주의 지시대로 특별히 두 무사를 은밀한 곳으로 부른 후 그들 을 죽였으니, 아무도 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수고했다." 심목풍 자신도 이미 여표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는 자신 이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 본 것뿐이다. 이것은 그의 성격이었으며, 여표 또한 그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한 것이다. 오늘의 일은 심목풍과 여표의 합작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도 오직 두 사람밖에는 없었다. "그만 가서 쉬어라." 심목풍은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내일 날이 밝으면 두 무사의 유족들에게 장례금을 후히 보내 주도록 하라." ━━━━━━━━━━━━━━━━━━━━━━━━━━━━━━━━━━━ 제 29 장 명기대전(名妓對戰) ━━━━━━━━━━━━━━━━━━━━━━━━━━━━━━━━━━━ 시월. 푸르던 들녘은 차츰 노랗게 물들어 가는데, 하늘은 점점 더 푸르 게만 보이고 있었다. 손을 담그면 푸른 물이 들 것만 같은 하늘. 사마소군은 황금빛 들녘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누워 짙푸른 하늘 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엔 한 점 흰구름이 떠 가고 있었다. '저 구름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구름과 더불어 사마소군의 마음도 정처 없이 하늘을 떠 가고 있었 다. 그는 외로움을 느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고독감이었다. 하늘을 떠 가는 구름도 어느 새 어머니의 얼굴이 되어 그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그는 나직이 소리내어 어머니를 불러 보았다.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에서 물기가 스며 나왔다. 이 때였다. 사마소군은 누워 있는 머리 위쪽에서 가볍게 풀잎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눈가의 눈물을 지웠다. 그가 일어나 앉는 것과 동시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회주, 철무쌍이옵니다." 나타난 사람은 십이문의 천오문주 철무쌍이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다른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짙푸른 녹의에 원숭이처럼 생긴 중년인이었다. 얼굴만 원숭이같이 생긴 것이 아니었다. 등은 앞으로 조금 굽어져 있는데다가 얼굴은 물론 소매 밖으로 삐죽 내밀어져 있는 두 손에 도 시커먼 털이 숭숭 나 있어, 마치 진짜 원숭이가 사람의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원숭이같이 생기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눈뿐이었다. 중년인의 두 눈은 결코 원숭이의 눈이 아니었다. 그의 두 눈은 마 치 심해인 양 깊어 보였고, 거기에는 무궁한 지혜가 깃들여 있는 듯 느껴졌다. 중년인은 사마소군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러나 지극히 정 성스레 절을 올렸다. "천신문주(天申門主) 조전해가 삼가 회주를 뵈옵니다." "일어나시오." 사마소군은 조전해를 부축해 일으키며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보았 다. 아무리 보아도 영락없는 원숭이였다. '천신문주라… 그래서 원숭이를 닮은 건가?' 사마소군의 얼굴은 어느 새 외로운 그늘을 떨쳐 내고 특유의 친근 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천오문주 철무쌍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정보 수집은 원래 천오문 담당입니다. 허락도 없이 천신문주를 대동하고 온 점,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데리고 오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소. 그러니 용서할 것도 없지." 사마소군은 웃으며 천신문주 조전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보낸 서찰을 통해 서 잘 알았을 테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당신이 대신 말해 보 시오. 백화맹을 이 땅에서 지워 버리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상 책이겠소?" "백화맹을 없애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서론을 들 어 보니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한 마디 해야겠소. 말이 길어지면 듣는 사람도 지루할 뿐만 아니라 당신도 입이 아플 테니, 될수록 이면 간간이 요점만 말하는 것이 어떻겠소? 나처럼 말이오." 간단히 말하라고 하면서 그는 조전해보다도 더욱 많은 말을 한꺼 번에 쏟아 냈다. 조전해가 놀라서 얼굴을 들어 보니, 사마소군이 내려다보고 있다 가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레 씨익 웃는다. 결국 조전해도 웃고 말았다. 웃으면서 그는 다시 말했다. 아까보다는 한결 가벼운 마음이었다. "백화맹에 가맹되어 있는 문파는 정사(正邪), 모두 합해서 약 이 백삼십 개 문파입니다." "생각보다 많군." "그 중에는 구파일방이 있고, 오대세가가 있으며, 일곡이장삼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일이오." "사람의 머릿수로 따지면 삼십만도 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모두 다 죽이기는 벅차다 이거군?" "그렇습니다." "하긴 다 죽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많은 사람을 다 죽일 수는 없 지. 우리도 똑같은 사람인데, 기본적인 양심이 있으니까." "그것도… 그렇군요." "또한 그 많은 사람을 다 죽일 필요도 없는 일이야. 반드시 죽어 야 하는 사람들과, 죽일 수밖에 없는 사람만 죽여도 충분하니까.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조전해는 다시 웃었다. 간단히 말을 하라고 해 놓고 오히려 그가 더 많은 말을 지껄이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사마소군이 다시 그를 나무란다. "말을 하라고 했는데, 어째서 가만히 듣고만 있소? 어서 말을 하 시오."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은 나무람이다. 조전해는 사마소군과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점점 더 편안해지 는 것을 느꼈다. "조금 힘든 일이긴 하지만 백화맹의 총단을 첫 목표로 삼는 것이 상책일 것 같습니다." "장수가 쓰러지면 졸병들은 자연 흩어지게 마련이지."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말을 하면서 조전해는 품속에서 한 장의 지도를 꺼내 들었다. 그 자신이 직접 그린 지도인 듯한데, 거기에는 백화맹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산과 강, 심지어는 아주 작은 문파들까지 상세히 표 시되어 있었다. 사마소군은 팔짱을 낀 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계속하시오." 조전해가 말했다. "백화맹에 이르는 길은 모두 네 개가 있습니다만, 그 중 어느 한 곳도 타문파를 거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 다." "우리가 지나는 곳의 문파에서 자연 백화맹에 보고를 할 거란 말 이오?" "그렇습니다." "가장 빠른 속도로 그들의 영지를 통과하면 어떻게 되겠소?" 조전해는 생각해 볼 가치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우리보다 먼저 그들의 전서구가 백화맹에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배후를 공격하게 되겠지요." "내 짐작도 그렇소." 사마소군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되겠군." "그럼 한 가지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이젠 한 가지 문제만 남았 군요." "어떤 문제요?" "네 군데의 길 중 어느 곳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길을 택할 수도 있고, 두 군데나 세 군데, 혹은 네 군데의 길을 모두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서 우 리의 행동 또한 모두 달라질 것입니다." "이건 매우 귀중하고도 중요한 선택이 되겠군." 사마소군은 씨익 웃어 보였다. 얼굴 가득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그는 말했다. "이런 중요한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낼 수는 없지. 우리 모두의 목 숨이 걸린 대사(大事)니까." 그렇다. 이건 그들 모두의 목숨뿐만 아니라 무림 전체의 운명과도 직결된, 아주 중요한 선택이었다. 짙푸른 하늘은 점차 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밀려 오기 전에 두 사람이 언덕을 떠나갔다. 떠나간 사람은 사마소군이 아니었다. 사마소군은 조전해와 철무쌍을 떠나 보낸 후 한참 동안 말없이 하 늘을 올려다보다가 해가 완전히 진 후에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 다. "강남(江南)에는 미인(美人)이 많다던데, 슬슬 강남으로 나가 볼 까?" 엉덩이의 흙을 툭툭 털며 그는 느릿느릿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가는 그의 등 뒤에서 어둠이 깊어 가고 있었다. 남창(南昌). 명주(名酒)와 미인(美人)이 많다는 강남에서도 남창은 손꼽히는 향도(香都)였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그윽한 술 향기에 취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향 기(香氣)에 취해 해가 지도록 가던 길을 다 못 간다는 말이 있는 데, 이는 바로 남창의 거리를 두고 한 말이었다. 남창에는 수십 종류의 술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술은 뭐니뭐니해도 백화주(白花酒)였다. 백 가지 꽃의 꽃잎을 따서 담근 술인데 기후가 따뜻한 강남이 아 니면 절대로 만들 수 없는 술일 뿐만 아니라, 그 향기가 진하고 맛이 독특해서 한 번 맛을 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이 술을 끊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강남에는 미인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가는 미인은 천향(天香)이라고 했다. 남창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백화주를 잊지 못해 오는 사람도 많지 만 천향을 만나기 위해 오는 사람이 더욱 많다. 백화주를 찾아오는 사람은 대부분 이미 백화주를 맛본 사람이지 만, 천향을 찾아오는 사람은 그녀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 다. 백화주를 찾아오는 사람은 대부분 백화주의 맛을 볼 수 있지만, 천향을 찾아오는 사람은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천향을 만나는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를 찾아 오는 사람이 워낙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를 만나는 순서를 기다리려면 최소한 한 달 동안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 보따리를 싸 들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모여 든다. 그리고 그들은 남창에 도착하는 즉시, 뇌물까지 써 가면서 천향루 에 여정을 푼다. 천향루에 들지 못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근처에라도 방을 잡는다. 백화주는 남창의 다른 주루에서도 맛볼 수 있지만 천향은 오직 천 향루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소군이 천향루에 도착한 것은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 술을 마시기에도 아직 이르고, 기방을 찾아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주루는 빈 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로 꽉 들어 차 있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장사를 하려거든 술 장사나 계집 장사를 하라더니, 그 말이 과연 명언이었군." 일단 들어가긴 했지만 어디에도 앉을 자리가 없자, 사마소군은 우 두커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 있는 그를 향해 젖가슴이 유난히 큰 기녀(妓女) 하나가 엉덩이 를 흔들며 다가왔다. "술을 마실 건가요? 아니면……." "천향(天香)을 만나러 왔소." 사마소군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기녀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다른 기녀라면 몰라도 천향이를 만나려면 아마 두어 달은 족히 기다려야 할 걸요?" 말을 하고 난 기녀는 사마소군의 품에 안기듯이 바싹 붙어 서며 갑자기 아양을 떨었다. "전 어때요? 아직 개업시간이 안 됐지만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 라도 제 방으로 모실게요." 그녀는 사마소군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사실 사마소군만큼 매력 있는 남자는 흔치 않았다. 사마소군을 빤히 올려다보는 기녀의 두 눈은 갈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웃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난 아직 동정이오. 그리고 동정의 딱지를 천향에게서 떼고 싶소. 소저(小姐：아가씨)는 그 후에 품도록 하지." 가슴이 큰 기녀는 몸을 빙글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저는 뭐 언제나 다리 벌리고 누워 있는 줄 알아요? 싫으면 관두시라구요. 누가 뭐 겁날 줄 아나?" 몸을 움직이자 기녀의 젖가슴이 크게 출렁였다. 조금 천박해 보이긴 해도 유혹적인 몸짓이었다. 특히 탄력 있는 젖가슴은 누구라도 탐낼 만했다. 사마소군은 닳고 닳은 한량처럼 기녀를 달래듯 살며시 끌어안으며 슬쩍 그녀의 젖가슴을 만졌다. "화내지 마오. 사내대장부가 일단 칼을 뽑았으면 두부라도 잘라야 하지 않겠소?" 물컹, 손에 와 닿는 젖가슴의 감촉이 일품이었다. 다시 한 번 만 져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왕 한량이 된 김에 사마소군은 주위의 눈도 아랑곳없이 본격적 으로 그녀의 가슴을 주물렀다. "그러니 천향을 좀 빨리 만날 수 있도록 손을 좀 써 주시오." 사마소군의 손길에 기녀는 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마소군의 손길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천향을 빨리 만나게 해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쉬운 표정으로 사마소군을 밀어 내며 말했다. "천향을 품으려면 천 냥하고 명부를 접수시켜 놓고 가서 기다려 요. 순서가 되면 알려 드릴게요." "정말로… 기다려야 하오?" "당신이 황제이거나, 적어도 그 친척이 아니라면 어림도 없어요." "난 물론 황제가 아니지. 그 친척도 물론 아니고……." 사마소군은 장난스럽게 두 팔을 벌려 보이며 웃었다. 웃으면서 그 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러나 여자 하나를 만나는데 두어 달씩 기다릴 여유가 없는 사 람이기도 하지." 기녀가 사마소군의 말을 들었을 때, 사마소군은 어느 새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뜻밖의 일인지라 기녀는 한동안 멍청히 서있다 가 사마소군의 뒤를 향해 소리쳤다. "천향이는 그 곳이 금으로 되어 있기라도 한 줄 알아요? 나도 꽤 쓸 만한 여자라구요!" 그녀는 사마소군을 붙잡고 싶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마소군은 그의 말대로 꼭 천향이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 도 그가 한 말이지만 순서를 기다릴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시간이 남아 돌아가도 기다릴 만한 위인도 아니지만. 천향루는 하나의 누각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거대한 장원 안에는 또 다른 높고 긴 담장이 지역을 여러 군데로 나누고 있었고, 크고 작은 월동문 을 통해 왕래가 가능한 장원 안에는 아름다운 연못들과 각종의 정 원과 화원, 고루거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안내자가 없으면 안에서도 길을 잃기 십상일 정도였다. 명기 천향은 이러한 장원 안에서도 가장 깊고 깊은 곳에 위치한 하나의 아름다운 누각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누각 앞에는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연못 위의 운교를 지나 울창 한 정원수 속에 파묻혀 있다시피 하는 누각은 대개의 기루가 다 그렇듯이 제법 힘깨나 쓰는 일류무사들이 언제나 은밀히 호위하고 있는 것이다. * * * 기루에는 몸을 파는 홍루(鴻樓)와 노래와 웃음만을 파는 청루(靑 樓)가 있다는 것은 한량이 아니더라도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천향루는 원래 홍루로 개업을 했다. 그리고 개업할 때의 원래 이 름은 천향루가 아니었다. 이 곳의 이름을 천향루로 바꾼 것은 천향이란 명기를 고용한 후부 터였다. 천향루로 이름을 바꾼 후 이 곳에서는 예전과 다름없이 윤락이 성 행했지만 단 한 곳, 천향이의 거처인 천향원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천향루는 홍루였으나 천향원만큼은 홍루 속의 청루였다. 그 누구도 천향의 육체를 함부로 소유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그 녀가 스스로 몸을 허락하기 전에는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 정도로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의 몸을 소유할 수 없는데도 남자들은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찾아왔다. 그녀의 몸을 소유하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 하나만을 끌어안고서 ……. 천향원은 원래 하나의 누각으로 되어 있었다. 천향원이 원으로 불리는 까닭은 단지 꽃들이 많이 피어 있으며, 매우 아름다워 전체가 하나의 정원과 같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꽃들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둥근 원형의 창이 있 었다. 창은 누각의 높은 이층에 위치해 있었지만, 아래가 아름다운 꽃나 무로 완전히 가려져 있어 마치 꽃 위에 둥실 떠 있는 것같이 보였 다. 창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열린 창으로 하오의 따사로운 햇살과 그윽한 향기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깨끗하게 정돈된 방(房)에서는 아름다운 한 소녀가 화장을 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여자들은 대개 하루에 두 번,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와 잠자리에 들 때 화장을 한다. 이렇게 어정쩡한 시간에 화장을 하는 여자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 다. 그런데 그녀는 매우 정성들여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본래 매우 아름다워 화장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 다. 분을 바르면 오히려 본래의 아름다운 피부가 빛을 잃을 것 같 았다. 그녀는 단지 아주 엷게 분을 바르고 눈썹을 약간 고쳤을 뿐이다. 천진무구하고 순진한 얼굴에 그제야 약간 요염한 기(氣)가 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소녀는 자신의 화장 솜씨가 마음에 드는 듯 살 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 때였다. 거울을 들여다보던 소녀의 얼굴에서 갑자기 미소가 굳 어졌다. 거울 속에 갑자기 두 개의 얼굴이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의 얼굴은 그녀의 것이지만, 다른 하나의 얼굴은……. 꽃나무 가지에 태연히 앉아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장난스러운 얼굴은 분명 그녀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 었다. 그녀는 굳어졌던 얼굴을 풀며 천천히 입술에 연지를 바르기 시작 했다. "당신은 누구죠?" 연지를 바르며 그녀가 묻자, 거울 속의 얼굴이 씨익 미소를 지으 며 반문했다. "소저가 천향이오?" 거울 속의 얼굴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같은 질 문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래요. 제가 천향이에요.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소저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뭐 때문에 내가 여기에 왔겠 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죠?" "무사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몇 번 들킬 뻔하긴 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소." 천향루의 무사들은 보통 무사들이 아니었다. 천향원의 무사는 더 더욱 그렇다. 천향은 눈앞에 있는 이 장난스런 남자가 절대 보통 인물이 아니라 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화장을 끝내고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음성 또한 더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자리가 불편하지 않나요?"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남자는 물론, 사마소군이었다. 사마소군은 웃으면서 물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소?" 사마소군이 웃자, 천향은 더욱 달콤하게 웃었다. "저한테 잡아먹힐까 두렵지 않다면요." 사마소군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소저 같은 미녀(美女)에게 잡아먹힌다면 아마 나는 죽어서도 황 홀해할 거요." 말을 하는 사이에 사마소군의 몸은 이미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방 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사마소군은 이제까지 수많은 방에 들어가 보았다. 그가 들어가 본 방 중에는 이보다 더욱 크고 화려한 방도 있었고, 또한 매우 특색 있게 꾸며 놓은 방들도 많았다. 그러나 여태껏 그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드는 방의 분위기는 맛본 적이 없었다. 방은 매우 간단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 개의 옷장과 하나의 경대, 그리고 하나의 그림이 한쪽 벽에 걸 려 있을 뿐이었다. 이렇듯 단순하게 꾸며져 있는 방의 분위기가 이렇듯 사람의 마음 을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이상하지만, 사마소 군은 그것이 이상하다는 느낌마저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단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만을 느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넘어 들어온 창문을 등에 기대고 천향을 지그시 바라 보고 섰다. 천향은 아까보다 더욱 달콤하게 웃었다. "당신은 이미 들어왔으면서 어째서 자리에 앉지 않는 건가요?" "나는 친구들과 한 가지 내기를 했었소." "무슨 내기지요?" "내 친구들 말이 당신은 기녀지만 인중용봉(人中龍鳳)이며, 또한 아직도 청백지신을 지니고 있다는 거요." "그래서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소. 나 또한 시정잡배이지만 인중용(人 中龍)이며 아직도 순결한 몸이라고." 사마소군이 동정이라고 말하지 않고 순결이라고 하자, 천향은 재 미있다는 듯 웃었다. 사마소군이 계속 말했다. "그러니 내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겠소. 인중용과 인중봉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만,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아마 영원 히 결합할 수 없을 거라고 말이오." "그래서 당신은 뭐라고 그랬나요?" 사마소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기를 하자고 했소. 내가 나의 순결을 천향에게 바치면 그들이 평생 동안 나를 형이라고 부르고, 바치지 못한다면 내가 그들을 평생 동안 형이라고 부르며 공경하기로 한 것이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여성화시키면서 말했다. 그래서인지 두 사 람이 주고받는 말은 조금도 음탕해 보이지 않았다. 아주 평범한 일상생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 껴지고 있었다. 사마소군의 말은 물론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이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천향도 알고 있었으며, 사마소군 또한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했으며, 천향은 여전히 그 의 거짓말에 속아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신 친구들은 당신이 나에게 순결을 바쳤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 하지요?" 천향의 말에 사마소군은 웃으며 대답했다. "해가 지면 일곱 명의 친구들이 올 것이오." "그들이 당신과 내가 같이 자는 것을 훔쳐본단 말인가요?" "뭐 그런 셈이오." "정말 재미있군요." 천향은 소리내어 웃었다. "전 비록 기녀 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지만 많은 남자들을 만나 보 았어요. 그러나 여태껏 내게 요구하는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구요." "당신과 자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었단 말이오?" "저를 만난 남자들은 모두 저를 가지고 싶어했어요. 그러나 그들 은 돈으로 저를 사려고만 했을 뿐, 별로 특별한 구석이 없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럴 때의 제 기분이 어떠했겠어요? 전 물건이 아 니거든요. 최소한 제 순결만큼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주고 싶었 단 말이에요." "장사를 할 땐 하더라도 그 다음에 하겠단 말이오?" 듣기에 따라서는 지나칠 정도로 모욕적인 말인데도 천향은 아무렇 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사마소군은 순진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그래, 지금은 순결을 주어도 괜찮은 남자를 발견하였소?" "그래요." "그 남자가 누구요?" 천향의 반짝이는 시선은 곧바로 사마소군의 얼굴에 못박혔다. 그녀가 꿈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에요." 거짓인 줄 알면서도 사마소군은 마음이 달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빛은 흡사 구름처럼 그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 오고 있었 다. 이런 미녀(美女)의 따뜻한 눈빛과 달콤한 속삭임을 들으면 누구라 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사마소군은 그녀를 품고 싶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었다. 이 때 그의 눈앞에서 천향이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황혼을 받으며 드러난 그녀의 섬세한 어깨도 금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타오르는 석양을 한몸에 받으며 드러나기 시작하는 그녀의 예쁜 두 개의 젖가슴도 석양빛으로 발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도 그렇게 발갛게 타오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마소군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 듯 멍하니 그녀의 나신(裸身)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황혼을 받은 천향은 온몸이 금빛으로 빛나며 그의 눈앞에서 나신 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불현듯 사마소군은 그녀의 나신 속으로 뛰어들어 그녀와 함께 뜨 겁게 타오르고 싶었다. 이 때였다. 한 발 앞으로 다가오며 천향이 유혹하듯 속삭여 왔다. 뜨거운 목소리였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나요? 전, 저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어 요." ━━━━━━━━━━━━━━━━━━━━━━━━━━━━━━━━━━━ 제 30 장 기방풍운(妓房風雲) ━━━━━━━━━━━━━━━━━━━━━━━━━━━━━━━━━━━ 밤. 어둠이 쌓인 거리엔 하나 둘, 불이 밝혀지고 있었다. 유곽이나 기루(妓樓)의 문 앞이나 처마 밑에 매달린 지등(紙燈)은 어둠 속에서 제각기 색색(色色)으로 타오르고 있건만 어둠은 오히 려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깊어 가는 밤의 어둠을 뚫고 여섯 줄기의 인영(人影)이 소리 없이 천향루의 높은 담장을 넘고 있었다. 휙－ 휘이익－! 자금성(紫禁城)의 성벽(城壁)을 방불케 하듯 까마득히 높은 담을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새(鳥)처럼 날아 넘는 것으로 미루어 여섯 명의 야행인들은 무림에서도 흔치 않은 일류고수들이 분명했다. 천향루의 담을 가볍게 뛰어넘은 야행인들은 마치 어떤 묵계라도 되어 있었던 듯,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천향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천향원의 주위에는 많은 고수들이 매복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이들의 야행(夜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 육 인(人)의 신법은 그 정도로 날렵했으며 은밀했다. 보통 무림고수들의 신법과는 판이했다. 언뜻 보기에도 특별하게 보이는 몸놀림으로 미루어 이들은 매우 특수한 수련을 받은 특별한 계통의 무림인들임에 분명했다. 이윽고 야행인들은 숲이 우거진 정원의 어느 한 나뭇가지 위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마소군이 앉아 있었던 나뭇가지에 그들은 마치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채 잘 정제된 담담한 시선으로 맞은편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움직임을 멈춘 지금에서야 그들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죽음처럼 검은 흑의경장에, 검은 장갑에, 검은색의 가죽신을 신은 육 인은 머리에 커다란 죽립을 쓰고 있어 얼굴은 물론 신체의 어 느 한 부위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일견 벽혈쌍사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으나, 이들의 가슴에는 붉 은색으로 수놓아진 양(羊)의 모습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또한 거꾸로 매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씌워져 있는 죽립 은 여전히 그들의 얼굴을 깊이 감추고 있었다. 다만 어둠에 묻힌 죽립 속에서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만이 어두운 공간을 뚫고 일직선으로 천향원의 창문으로 날아가 꽂히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한 명의 야행인이 아주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회주께선 아직도 저 안에 계시는가?" 다른 야행인이 억양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틀림없다." 맨 처음 말을 꺼냈던 야행인이 다시 말했다. "정말… 천향을 취하고 있단 말인가?" 이 때였다. 맞은편의 창문을 넘어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교성이 흘 러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 교성을 듣는 것과 동시에, 그들은 창문 안의 상황을 볼 수 있었 다. 창문은 아직까지도 열려진 상태 그대로였으며, 침상 위에 누워 있 는 두 남녀(男女)가 격렬하게 움직이자 그들의 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 침상 아래로 흘러내렸던 것이다. 남녀의 몸은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으며, 서로 뒤 엉켜 있었다. 원래는 남자가 위에 있었던 듯한데, 흥분이 고조되자 위치가 바뀐 것이다. 말을 타듯 남자의 몸을 타고 앉은 천향은 고개를 위로 쳐든 채 연 신 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땀에 젖은 그녀의 나신은 불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상하(上下)로 흔들리는 두 개의 탐스러운 젖가슴도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흥분으로 곤두선 두 개의 선홍빛 유실이 떨어질 듯 흔들리고 있었 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교성은 그녀가 쾌락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 고 있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천향은 백화맹에서도 극히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 회주께서 정말로 그녀를 취하실 줄이야." 나직이 중얼거린 야행인 중 하나가 망설이듯 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회주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하는가?" "회주의 지시는 천명(天命)!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래도 회주께선 지금……." "회주께서 어떠한 일을 하고 계시든 그분의 명령은 반드시 지켜져 야 하는 것! 자, 내가 먼저 들어간다!" 번쩍－! 음성과 동시에 하나의 인영이 거꾸로 매달린 자세 그대로 창문을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아니, 하나가 아니었다. 다른 다섯 인영도 즉시 뒤를 따랐고, 여섯 줄기의 인영은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소리 없이 방 안에 내려섰다. 침상 위에서는 격렬한 정사(情事)가 계속되고 있었다. 침상 주위에 내려서면서 여섯 인영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회주!" 이 때였다. 남자를 올라타고 앉아 연신 몸을 흔들어 대던 여인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다, 당신들은 누군가요?" 여섯 명의 야행인들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천향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으나 결코 천향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공도 모르는 평범한 기녀임에 틀림없었다. 그녀가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누구를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 없 으니, 어서 나가 주세요!" 야행인 중 한 사람이 누워 있는 남자의 턱을 잡아 얼굴을 앞으로 향하게 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정사를 벌이고 있던 남자는 사마소군이 아니 었다. "회주께선 어디에 계시단 말인가? 혹, 무슨……." 이 때였다. 야행인들의 음성을 끊으며 지극히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염려가 되신다면 소녀가 여러분들을 당신들의 회주 곁으 로 보내 드리죠." 여섯 명의 야행인들은 일제히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 다. 문 가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창백한 한 명의 중년인과 미모의 소녀, 심 목풍의 심복인 여표와 명기 천향. 여섯 명의 야행인들은 비록 이들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으나, 이들의 정체에 대해선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었다. 이들 두 사람이 어떻게 함께 있을까? 그렇다면 사마소군은……? 여섯 명의 야행인들은 사마소군의 안위가 염려되어 견딜 수가 없 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꾹 다문 채 하늘하늘 구름을 밟듯 걸어 들어오는 천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천향은 이들 여섯 명의 야행인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자신과 꼭 닮은 기녀를 향해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수고했어, 언니. 고마워." "천향, 이게… 도대체 어떻게……?"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알았… 어." 기녀는 천향의 손에 등이 떠밀려 옷도 채 입지 못하고 문가로 떠 밀려 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역시 알몸인 남자가 붙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두려움과 의혹의 표정으로 안에 있 는 사람들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그들이 막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천장으로부터 돌연 한 줄기의 눈부신 섬광(閃光)이 번쩍였다. 단지 섬광이 한 번 번득였다가 사라진 것뿐인데도 알몸의 두 남녀 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그들 자신도 어째서 걸음을 멈추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 을 짓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걸음을 멈추었을까?' 두 사람의 등 뒤쪽에는 한 명의 흑의인이 천향을 향해 부복해 있 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타났기 때문에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 런 자세로 부복해 있었던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흑의인이 말했다. "흑사풍(黑死風), 단주(壇主)의 명(命)대로 두 사람을 처리했습니 다!" 흑사풍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등 뒤쪽에 서 있는 두 남녀의 목이 기우뚱하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목에서는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두 줄기의 피분수가 세차게 공중으로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두 사람의 몸뚱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것은 핏줄 기가 현저하게 약해진 후였다. 부복해 있는 흑사풍의 흑의는 두 구의 시체에서 뿜어져 나온 핏줄 기에 젖어 흑사풍이 아닌 혈사풍(血死風)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 다. 그러나 흑사풍은 천향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듯 부복한 자 세 그대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천향은 배시시 웃으며 여섯 명의 흑의인들을 향해 물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멋있고 깨끗한 솜씨죠?" "……." "누가 더 빠른지 한 번 더 시험해 보시지 않겠어요?" 여섯 명의 야행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천향이 다시 말했다. "어째서 대답을 하지 않죠? 당신들은 검(劒)을 멋으로 차고 다니 나요? 그렇지 않다면 한 번 승부를 해 보는 게 어떻겠어요?" 여섯 명의 야행인들은 이번에 더한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허리 아래로 자연스럽게 늘어뜨려져 있는 여섯 쌍 의 손은 이미 땀으로 젖어 있었고, 가느다랗게 경련마저 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어째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이 검만 뽑으면 단번에 죽일 수 있는 거리에 천향은 서 있었 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 누구 하나 검을 뽑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천향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아참, 제가 이 방을 산공지독(散功之毒)이 든 몽연향(夢煙香)을 피워 놓았다는 것을 깜박 잊고 말해 주지 않았었군요." "……." "미안해요. 제가 부주의한 관계로 인하여 오늘 일곱 분에게 폐를 끼치게 되는군요." 몽연향은 말이 연(煙)이고 향(香)이지, 사실은 연기처럼 눈에 보 이는 것도 아니며 향기(香氣)처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 었다. 산공지독을 이 몽연향과 함께 사용하면 지극히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을 맛보게 되지만, 해약을 복용하지 않은 사람은 전신의 공력 이 사라지고 온몸이 무기력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천향의 말을 들은 여섯 명의 야행인들은 전신을 떨었다. 지금 이 곳엔 여섯 사람밖에 없다. 그러나 천향은 분명 일곱 사람 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나머지 한 사람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섯 명의 야행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검자루를 힘껏 움켜 잡았다. 천향이 웃으며 말했다. "뽑으세요. 왜 뽑지 않으시죠?" 말을 하는 사이에 천향은 맨 앞에 있는 야행인의 앞에 다가갔다. 말을 하며,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야행인의 머리에 씌워져 있는 죽립(竹笠)의 끝을 잡았다. 그들이 죽립을 쓴 것은 당연히 남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얼굴이 노출되는 위기에 처했다. 얼굴이 노출되지 않게 하려면 지금이라도 검을 뽑아 그녀를 베어 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검을 뽑지 못했다. 검자루를 잡은 손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사이에 천향은 마침내 그의 머리에서 죽립을 완전히 벗겨 냈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어?" 심지어는 천향마저도 뜻밖이라는 듯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 다. 그러나 놀라운 표정은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그녀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야행인의 얼굴을 주시하 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일이군요, 여자였다니?" 그렇다. 죽립을 벗기자 드러난 야행인의 얼굴은 뜻밖에도 여자였 으며, 그것도 젊고 아름다운 미모의 소녀였다. 생명이 없는 듯 차갑고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은 비록 천향의 얼굴 처럼 요염하지는 않았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하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었다. 천향이 이리저리 자신을 뜯어보고 있는데도 야행인은 여전히 무표 정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천향이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지요?" "……."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침입해 온 것이지요?" "……." "당신은 입이 없나요?" 야행인은 얼굴이 드러난 후에도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어떻게 보면 천향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 천향 같은 사람은 자신과 말을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있던 천향의 얼굴에 언뜻 차가운 분노 가 스쳤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리 아름다운 그녀라 할지라도 표독스런 짐승과 같은 추악한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표독스러움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빨리 사라졌으 며, 그녀는 이내 본래의 아름다운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며 여유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나의 방에 무단으로 침입한 사람을 용서해 준 적이 없어 요." "……." "이번에도 예외일 수는 없어요. 말을 해 보세요. 당신들은 어떤 벌을 받고 싶나요?" 얼굴이 드러난 야행인을 향해 계속 물었으나 그녀는 끝내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마치 석고상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천향은 계속해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당신은 참 아름답군요. 전 아름다운 것을 좋아해요. 아름다운 꽃 을 보면 꺾고 싶어하는 사람들처럼……." "……." "이렇게 하도록 하지요. 전 당신의 아름다움을 꺾는 것으로 당신 들이 내 방을 침입한 벌을 대신하겠어요." 천향은 야행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했으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잔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여자란 누구나가 다 아름다워지기를 소망한다. 못생긴 여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잘생긴 여인들마저도 더욱 아름 다워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만약 인분(人糞)이 미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면 세상에는 아마 측간이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것은 모든 여인들의 공통적인 소망이며, 이 아름다움이 무참히 꺾였을 때 여인들은 심지어 세상을 살아갈 의 욕마저도 잃을 것이다. 천향의 손에는 어느 새 한 자루의 날카로운 비수가 쥐어져 있었 다. 야행인은 자신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날카로운 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향의 얼굴은 흥분으로 인하여 더욱 아름답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천향은 확실히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야행인이 비참한 표정을 짓기를 바 라고 있었다. 그녀가 절망하면 할수록 자신의 즐거움이 더 커질 것 같았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야행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으나 그 아름다움은 흡사 대리석을 깎아 조각해 놓은 것과 같았다. 그 차갑고 무표정함은 대리석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날카로운 비 수가 얼굴에 닿았는데도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천향은 어떻게든 그녀의 표정을 변하게 하고 싶어 더욱 천천히 그 녀의 얼굴을 그었다. 스으윽－! 표정은 대리석과 다름이 없었으나 그녀의 얼굴은 분명 살로 되어 있었으며,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연하고 부드러운 살로 되 어 있었다. 날카로운 비수가 얼굴에 닿자, 하얀 살은 즉시 양 옆으로 갈라지 며 선홍(鮮紅)의 핏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즉시 피로 물들어 버렸다. 그러나 천향은 끝내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비수가 얼굴의 살을 깊숙이 파고들었는데도 그녀는 눈 한 번 깜박 이지 않았다. 오히려 천향이 비참한 심정이 되었다. 마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남에게 빼앗긴 심정이었다. 그녀는 비수를 내려놓으며 차갑게 명령했다. "흑사풍!" 여태껏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흑사풍이 즉시 대답했다. "예!" 천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 사람들을 조금 전의 그 놈과 함께 가두어라! 남자에게 짓밟힐 때도 표정이 변하지 않는지 지켜 보아야겠다." * * * 한 채의 기루(妓樓)가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서 있었다. 천향루처럼 크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이 기루에는 미인(美人)이 많 고, 기녀들의 솜씨 또한 뛰어나 언제나 장사가 잘 되는 곳이었다. 밤, 세상은 어두워질수록 고요해지지만 이 기루는 어두워질수록 더욱 소란해지고 있었다. 이 소란은 세상의 소란과 그 성질이 다른 것이다. 여인의 흐드러진 웃음소리, 남자의 호기로운 목소리에 이어 앙탈 을 부리는 듯한 애교스런 목소리가 들려 오고, 나중에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여인의 가쁜 숨소리가 뒤를 따른다. 그러나 이 때였다. 뜨겁고 은밀한 신음 소리 중에 갑자기 방문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쾅－ 와지끈－! 이어서 지극히 차가운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흘러 나왔다. "여인을 짓밟는 사내들은 다 죽어야 한다!" 목소리, 이 목소리는 비록 나직했으나 무한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는 어둠마저도 이 목소리로 인하여 꽁꽁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루의 불빛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지만 이 소리를 끝으로 다른 모 든 소리는 뚝 끊어졌다. 마치 모든 소리가 이 목소리로 인하여 얼 어붙은 것처럼……. 기루, 양 옆으로 붉고 푸르며 노란 휘장이 늘어뜨려져 있는 방들 이 죽 늘어서 있는 회랑(回廊)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산산조각이 난 방문 위에 나체의 사내 하나가 패대기쳐져 있었다. 알몸의 사내는 돼지처럼 디룩디룩 살찐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자 신을 패대기친 이 낯선 사람을 의문과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 그의 앞에는 온몸을 희디흰 백의로 감싼 한 명의 미녀가 서 있었다. 기압의 차이로 생겨나는 순, 역류의 기류를 우리는 바람이라고 말 한다. 바람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내는 한 사람의 몸에서 풍 겨 나오는 기운이 바람처럼 피부에 닿아 오리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러한 바람이 전신을 휘감고 있는 것을 온몸으 로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몸서리쳐질 정도의 냉막함이었다. 사내는 흡사 만년빙굴에 떨어진 듯 온몸을 덜덜 떨며 자신이 대체 이 귀신 같은 여자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 내려고 좋지도 않은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그러나 없었다. 그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자신의 생애에 이렇게 무서운 여자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만난 적이 없으니, 잘못한 것 또한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여자는 어째서 비싼 돈 주고 들어와 한창 재미를 보려 고 하고 있는 자신의 잠자리에 뛰쳐 들어와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패대기친단 말인가? 그러나 사내는 두려움에 질려 감히 묻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 때 냉막한 미소녀의 음성이 싸늘한 한기(寒氣)를 휘몰 고 그의 귀로 흘러 들어왔다. "몇 푼 돈을 미끼로 여인의 몸을 짓밟으려 했으니, 너는 죽어 마 땅하다!" 이 음성에는 추호의 인정도 깃들여 있지 않았다. 사내는 단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사내는 다급히 소리쳤다. 조금이라도 변명이 늦으면 당장 머리가 땅에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여자를 짓밟은 것이 없습니다!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나 는 그녀의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미소녀의 시선은 벌거벗은 사내의 뒤쪽 침상 위에서 덜덜 떨고 앉 아 있는 기녀를 주시했다. 기녀의 얼굴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돈이 없어 어찌할 줄을 모르는 가련한 여자를 푼돈으로 유혹하여 순결을 짓밟아 놓고 죄가 없다는 말이냐?" "순결이라니요?" 사내는 억울하다는 듯 뒤쪽에 있는 기녀를 손가락질하며 항변했 다. "저 여자는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 전에 이미 적어도 백 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을 텐데, 도대체 누가 그녀의 순결을 짓 밟았단 말입니까?" "그녀의 첫 남자도 너와 같은 파렴치한 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미소녀의 기세는 서릿발 같아, 무엇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듯했다. 사내는 처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에는 나와 같은 남자가 적어도 백 명이 더 있습니다. 소저는 그들 모두를 죽이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미소녀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백 명이 있다면 백 명을, 이백 명이 있다면 이백 명을 죽일 것이 다." 이 소란으로 주위에는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양 옆으로 죽 늘어서 있는 방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사내들은 이 소리가 떨어지자, 즉시 방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고 다시는 고개를 내밀지 못했다. 그들은 지금 이 기루에 들어온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을까를 궁 리하고 있을 때에 다시 냉막한 음성이 들려 왔다. "지금 이 순간부터 여자가 아닌 사람은 여기에서 단 한 걸음도 밖 으로 나갈 수가 없다!" 이 음성은 사람의 음성 같지가 않았다. 한번 뱉어진 말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졌다. 여기에는 적어도 오십여 개의 방들이 있었고, 그 기방(妓房)마다 에는 적어도 한 명의 남자씩 도합 오십여 명의 남자들이 들어 있 었다. 그리고 그 남자들은 한결같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 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뱉어진 이상, 자신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 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절박하게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사 람은 미소녀에 의해 패대기쳐진 사내였다. 죽음의 공포가 극에 달하자, 사내는 오히려 두려움을 잊어버렸다. 사내가 소리쳤다. "그렇다면 우리를 죽이는 이유가 단순히 여자를 짓밟았기 때문이 란 말입니까?" 미소녀는 냉혹한 음성으로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 "내가 꼭 죽어야만 한다면 죽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사내가 처절한 음성으로 소리치자 미소녀는 두 눈을 빛내며 물었 다. "무엇이냐?" "나를 죽이기 전에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한 기녀에게 한 번 물어 보기라도 해 주십시오. 그녀가 만약 어쩔 수 없이 나와 잔 것이라 고 말한다면 나는 미련 없이 죽겠습니다!" 미소녀는 나직이 코웃음쳤다. "그건 물어 볼 가치도 없다." "하찮은 목숨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래도 생명이 걸린 일입니 다. 그런데 소저는 한 번 물어 보는 것조차 귀찮다고 말하시다니, 이건 너무나 불공평하며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미소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돌연 사내의 등 뒤에서 아 직까지 알몸을 그대로 내놓고 있는 기녀를 향해 물었다. "대답해 보라. 너에게 만약 조금의 논밭이라도 있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면, 그래도 너는 이 사내에게 몸을 팔았겠느냐?" 기녀는 비록 겁에 질려 있었으나 닳고 닳은 여자였다. 이미 이 냉 막한 미소녀가 여자에게는 아무 원한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측은 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대답했다. "나에게 만약 논밭이 있었다면… 그래도 나는 여전히 기녀가 되었 을 겁니다." "네… 네가……?" 미소녀는 마치 커다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말 을 잇지 못했다. 기녀가 계속 입을 열었다. "저를 초라하고 불쌍한 여인으로 보고 계신다면 그것은 소저의 착 각이십니다. 논밭이오? 그 까짓 것은 재수만 좋으면 하룻밤에도 벌 수 있는 걸요." "……!" "무엇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해서 논밭을 일구며 살아요? 그저 남자 들의 비위를 조금만 맞춰 주면 호의호식할 수 있는데. 제발 부탁 인데, 저의 좋은 일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네… 네가……." 미소녀는 돌연 말을 한 기녀의 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녀가 이렇게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기녀는 미소녀에 의해 목이 졸려 숨도 쉬지 못하고 바둥거렸다. 창백하게 질린 기녀의 목을 흔들며 미소녀가 싸늘하게 소리쳤다. "그렇다면 네가 죽어야 한다! 여자에게 적이 있다면 바로 너다! 너 같은 여자가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우리 여자를 언제나 노리개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다!" 이 때였다. 미소녀의 동작이 돌연 멈추어졌다. 얼음장 같은 분노가 이글거리던 그녀의 두 눈에서 돌연 투명한 광 채가 번뜩였다. 동시에, 그녀의 귀로 나직한 전음(傳音)이 흘러 들어왔다. "백약빙, 백소저이십니까?" 백약빙은 이미 고도의 잠행술(潛行術)을 지닌 인영 하나가 천장 위에 소리 없이 내려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회주의 명령이십니다. 전갈을 받는 즉시, 장한별부의 전 병력을 이끌고 백화맹으로 오시랍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치이이익－! 그녀의 맞은편 벽면(壁面)에 돌연 빠알간 불꽃이 생겨났다. 이상한 불꽃이었다. 벽면은 목재로 되어 있는데도 불꽃은 다른 곳 으로 번져 가지 않고 오직 한 곳에서만 타오르다가 이내 서서히 꺼져 가고 있었다. 불꽃이 꺼져 가는 벽면에는 검게 탄 흔적이 또렷이 나타났다. 그것은 단순한 발화(發火)의 흔적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식별할 수 있는 하나의 문양이 남아 있었다. '말! 그렇다면……?' 검게 탄 흔적은 분명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말(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천오문, 드디어 일을 벌였구나!' 십이문의 존재는 극비였다. 천오문이 연락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 실은 더더욱 아는 사람이 없다. 장한별부와 십이문 자체의 요인을 제외하고는……. 파아앗－! 돌연 백약빙의 신형이 빙글 도는 듯하더니, 그 자리에서 훅 꺼져 버렸다. "……?" 사람들은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백약빙의 모습을 찾다가 어느 한 사람의 비명을 듣고서야 허둥대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었다! 춘월(春月)이의 목뼈가 부러졌다!" 기루는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어서 관가에 연락해라! 시체는 건드리지 말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일이며, 커다란 사건 임에 틀림없었다. * * * 죽음은 분명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이며, 사람은 죽음을 직시 할 수 없다는 말도 있다. 그것은 사람은 타인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어떠한 종류의 사람들은 죽음을 비단 직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즐기기도 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은 아마 악마의 영혼 을 소유한 사람들일 것이다. 밀실, 사방이 밀폐되어 있는 방에 사마소군은 갇혀 있었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전신의 공력이 모두 사라졌는데도 그는 태연하게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었다. 그의 시선은 여유만만하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천장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 뚫어져 있었고, 천향의 아름다운 얼굴 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마소군이 웃으면서 말했다. "생각 있으면 내려오지 그래?" 천향도 웃었다. "난 이미 너의 맛을 충분히 보았으니, 지금은 생각이 없는걸." "내 몸을 바라보는 너의 눈빛은 그렇지가 않은걸?" "그건 너의 착각이야." "그렇다면 어째서 너는 줄곧 나의 그 부분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지?" 천향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더욱더 사마소군의 사타구니만 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아까 너무 힘을 많이 써서 당분간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닐 까?" 사마소군은 팔베개를 하고 길게 누운 채 대답했다. "그게 염려스러우면 당장이라도 확인시켜 줄 수 있으니, 내려오지 그래. 정말이야. 열 명이라도 문제 없다구!" "그래?" 천향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교활하게 번득였다. 그녀의 눈을 본 사 마소군은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꼈다. 이 때 천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걱정을 안 해도 되겠군." "걱정을 안 하다니……?" "열 명까지 상대할 필요는 없어. 넌 다만 여섯 명만 상대하면 돼. 남자가 일단 말을 뱉었으니, 그 말에 대한 책임은 지겠지?" "너… 너……?" 사마소군은 돌연 입을 다물었다. 한쪽 벽면에 갑자기 조그만 문(門)이 생겨나며 그 곳으로 여섯 명 의 나녀(裸女)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사마소군은 이 나체의 소녀들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누군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아연한 표정으로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위에서 까르륵 웃는 천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장담하겠는데 그녀들은 모두 순결한 처녀야. 남자에게 이 이상의 행운이 있을까? 한 번에 여섯 명의 처녀를 품게 되다니 말 이야. 나는 절대로 질투하지 않을 테니, 마음껏 즐겨 봐! 나한테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야." 웃음소리는 점차 작아지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천장에 있던 작은 구멍도 또다시 무엇인가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동시에 어디에선가 우윳빛의 기체가 소리 없이 스며 들어오기 시 작했다. "이 연기는……." 기체의 냄새를 맞은 사마소군은 안색이 변한 채 소리쳤다. "양춘로(陽春露)……!" 사마소군의 눈 바로 앞에는 얼굴에 길게 칼자국이 난 소녀가 나체 로 서 있었다. 무예로 단련된 알맞게 솟은 탄력 있는 젖가슴 위로 한 방울 두 방 울씩 아직도 핏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고통 스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는데도 그녀는 수치스러워하 지도 않았다. 그녀는 흡사 대리석 같았다. 흡사 조각을 해 놓은 듯 미끈한 지체 에는 한 올의 온기(溫氣)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양춘로의 연기가 스며 들어온 지금, 그녀의 얼굴은 조금씩 표정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붉게 상기되어 가는 얼굴, 거칠어지기 시작하는 숨소리……. 사마소군은 이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 었다. "천향!" 사마소군은 허공에다 대고 소리쳤다. "이 계집애야, 어서 문을 열어! 문을 열지 못해!" 천향의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왔다. "내가 베푸는 마지막 호의이니, 마음껏 즐기지 그래? 이 일이 끝 나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얼굴에 칼자국이 난 소녀가 돌연 두 눈을 꼭 감았다. 두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마소군 은 그녀의 눈 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욕정을 읽을 수 있었다. "회주……." 뜨거운 음성으로 그녀가 말했다. "저를… 죽여 주세요! 제 자신이 수치스러운 실수를 범하기 전에 어서 저를 죽여 달란 말입니다!" ━━━━━━━━━━━━━━━━━━━━━━━━━━━━━━━━━━━ 제 31 장 천향원의 밤 ━━━━━━━━━━━━━━━━━━━━━━━━━━━━━━━━━━━ "속하, 여표이옵니다." 맑고 투명한 물이 흐르는 강가에 한 대의 마차(馬車)가 세워져 있 었다. 평범한 이두마차이지만 마부석은 텅 비어 있어, 왠지 이상한 느낌 을 주는 마차 앞에 여표는 공손히 서 있었다. 깊은 밤, 게다가 하늘엔 구름마저 잔뜩 끼어 있어 이들의 모습을 식별해 내기란 불가능했다. 안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어떻게 되었는가?" 여표가 즉시 대답했다. 공손한 음성이었다. "놈들의 정보망은 과연 정확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 향원이 우리의 눈과 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오 늘 밤 침입해 왔습니다." "그 사실 외에 백화맹에 관한 일급문서들이 천향원에 보관되어 있 다는 사실도 알고 침입한 것이겠지?" "그러하옵니다." 어느 누가 백화맹이 일급문서들을 한낱 기방(妓房)인 천향원에 보 관하리라고 생각하랴? 심목풍의 머리는 과연 비상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사마소군의 눈 을 속이지는 못했다. 무슨 말인가? 마차 안에 있는 인물은 그럼 심목풍이 아니란 말인가? 여표는 분명 심목풍의 심복이거늘, 어째서 지금은 다른 사람을 위 하여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마차 안의 인물은 그럼 누구란 말인가? 여표가 말하고 있었다. "천향도 과연 요녀(妖女)답게 아주 손쉽게 그들을 가두었습니다." "후후……." 마차 안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너는 그 방법이 간단하다고 생각하느냐?" "속하는……." "어려운 일을 간단하게 처리하는 것은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더욱 어려운 것이란 이치를 모르느냐?" 여표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과연 그러하옵니다. 천향이 아니라면 이러한 일을 이렇듯 간단히 처리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아니라니요……?" "사마소군이 일부러 당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가 요녀가 아니라 아 무리 하늘에 오르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가둘 수는 없었 을 거라는 사실이다." 여표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천주(天主)……!" 천주? 그렇다면 마차 안의 인물은 채색독사의 사내, 바로 그란 말인가? 그렇다. 마차 안의 인물은 바로 채색독사의 사내였다. 그리고 더욱 무서운 것은 백화맹주 심목풍 또한 여표가 채색독사 의 사내를 위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차 안에서, 채색독사의 사내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놀랄 것은 없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오나 양춘로에는 속하가 이미 해독제를……." "천향원은 오늘 밤 이 땅에서 사라져야만 한다. 그들은 이제 해야 할 일을 다했으므로 이 땅에서 사라질 때가 된 것이다." "……." "장한별부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는 사마소군이 죽어서는 안 된다. 그가 살아 있어야만 백화맹을 이 땅에서 영원히 멸망시 킬 수 있기 때문이다."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원래 장한별부와 십이지문을 비롯한 석가(釋 家)의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는 어째서 지금 또다시 백화맹을 향해 화살을 돌린단 말 인가? 그러나 여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채색독사 사내의 손과 발이었지, 머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시키는 대로만 충실하게 이행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임무대로 채색독사의 사내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명령을 전달받았다. 깊은 밤, 명령을 안고 돌아가는 여표의 발걸음은 하늘과 마찬가지 로 은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큰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험을 해야 할 때가 있게 마련이 다. 사마소군도 그러했다. "음모자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죽일 수 있었다.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도 더……." 이것은 사마소군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모험을 건 것은 이러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죽이지 않는 까닭은 그에게 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이 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떠한 일을 당해도 반드시 빠져 나갈 방 법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설마하니 자신이 이러한 처지에 놓이게 될 줄은 꿈에 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는 원래 꼭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한 까닭은 백화맹을 경각시키지 않 고 원하는 것을 이루려 했기 때문이다. 정공법으로 천향원을 공격해 들어가서는 백화맹의 이목을 속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가 원하던 문서마저도 상대가 불태워 없애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러한 처지에 놓이게 되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면, 그는 이러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해도 소용이 없지 않은가? 그의 눈앞에는 여섯 명이나 되는 나녀(裸女)가 욕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천인문(天寅門) 소속의 정예 살수(殺手)들이었으 나, 지금은 차츰 살수의 냉막함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욕정을 억제하느라 꼭 다문 입술에서는 가느다란 피가 흘러 나오 고 있었다. 육체의 고통은 확실히 욕정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사마소군은 이러한 사실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양춘로의 욕정은 인간의 인내로는 감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것을 무시하고 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면 혈관이 파 열되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욕정은 여섯 명의 살수들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사마소군 또한 불길 같은 욕정에 몸을 태우고 있었다. 언뜻 그는 죽음을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소저……." 그는 눈앞에 있는 나체의 살수를 향해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얼 굴에 칼자국이 난 살수였다. "회주……." 그가 다가서자, 그녀 또한 한 발 앞으로 다가오다가 주춤 멈추어 서서 사마소군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은 뜨거운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두 눈을 감아 버렸다. '그래…….' 사마소군은 그녀를 향해 다가가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먼저 나서서 하는 것이 좋다. 그녀 가 먼저 나에게 덤벼든다면 나중에 어떻게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살며시 끌어당겨 안았다. 여체는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었던 듯 그의 가슴으로 허물어져 왔 다. 냉막한 외모와는 달리 뜨겁고 부드러운 여체였다. 여체를 안으며 사마소군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천향이 이것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천향은 원래 처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즐기는 것이 있다 면, 그것은 바로 성(性)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행하는 것을 즐기기도 했지만, 남의 것을 보 는 것을 더욱더 좋아했다. 그러한 그녀가 일 대 육(一對六)의 난교(亂交)를 지켜보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 그래야지." 사마소군이 여체를 안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도 그녀의 두 눈은 반짝이기 시작했고, 호흡 도 이미 거칠어져 있었다. 그녀 자신이 행위를 할 때보다도 그녀는 더욱 흥분되어 있었다. 사마소군은 여체 위에 엎드려 어린애처럼 그녀의 가슴을 매만지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 천향은 한쪽에 서서 두 눈을 감고 있는 다른 다섯 명의 나녀(裸 女)들을 보며 두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너희들은 구경만 하고 있을 거야?" 천향과 아래의 밀실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천향의 목소리가 들렸을 리가 없는데도 다섯 명의 나녀들은 마치 그녀의 명령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사마소군을 향해 덮쳐 들었다. "회주!" "아아……." 벌거벗은 일곱 개의 나신은 금세 한덩어리가 되어 밀실의 바닥을 굴렀다. 한 여체가 다시 사마소군의 목을 껴안는다. 한 여체가 그와 입맞 춤을 하려고 하면 금세 다른 한 여체가 뒤에서 그를 안아 버린다. 그러면서 일곱 개의 벌거벗은 나신은 기묘한 형태로 한덩어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좋아. 그래, 그래야지." 천향은 자신이 남자가 되어 있는 듯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남자가 되어 여섯 명의 미녀(美女)들과 난교(亂交)를 벌이 고 있는 듯한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정사(情事)는 사마소군이 벌이고 있었지만 그 쾌락은 사마소군이 아닌 천향이 대신 느낀다고나 할까? 사마소군은 또다시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살수의 몸 위에 엎어지 고 있었다. 그는 극도로 흥분되어 있는 듯했다. "아아……." 천향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떨며 신음했다. 이 때였다. "아아, 회주……." 뜨거운 신음과 함께 갑자기 밀실이 온통 깜깜해지는 것이 아닌가? 원래 밀실의 벽 두 군데에는 황촉불이 밝혀져 있어 밀실을 환히 비추고 있었는데, 사마소군을 향해 덮쳐 들던 나녀들이 황촉불을 쓰러뜨려 불이 꺼져 버린 것이다. 깜깜한 어둠 저 아래쪽에선 뜨거운 행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뜨겁다 못해 격정에 가까운 신음 소리 가 끊이지 않고 들려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이제 천향의 소리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향은 사마소군과 함께 정사를 벌이고 있었으나, 이 순간 그녀는 갑자기 그 곳에서 쫓겨나고 만 것이다. 그녀는 뜨거워진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다시 밀실 속으로 뛰 어들어 정사를 계속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밀실에서 벌어지는 행 위를 보아야만 했다. "소군, 너무 서두르지 마. 내가 갈 때까지." 천향은 벌떡 일어나 아래층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한 손에 등을 밝혀 든 천향은 밀실의 문을 살며시 밀었다. 그녀만이 열 수 있는 문이었다. 밀실 안은 아직도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어둠은 이 제 곧 등불의 힘에 의하여 옷을 벗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중단되었던 난교의 쾌락을 다시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찬 가슴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서던 천향 의 얼굴은, 그러나 밀실 안으로 한 걸음을 채 들어서지 못하고 흠 칫 굳어져 버렸다. '너무 조용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친 숨소리와 육체와 육체가 부딪치는 기음 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밀실의 공기가 이상하게도 무겁게 가라앉 아 있는 것이 아닌가? '뭔가… 이상하다!'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낀 천향은 얼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하나의 손이 빠르게 뻗어 왔다. 슈우욱－! '암습!' 천향은 비록 일개 기녀의 몸이지만 백화맹의 단주였다. 때문에, 일신의 무공 또한 결코 범상한 수준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마치 이 러한 기습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미끄러지듯 옆으로 흘렀다. 신법만 펼쳐진 것이 아니었다. 옆으로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그 녀의 우수(右手)는 어느 새 암습이 가해진 어둠을 향해 소리 없이 일 장(掌)을 발출해 내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수법은 암습자에 대한 암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 닐 정도로 신속하면서도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반격이었다. 이러한 반격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천향은 자신의 일 초가 반드시 득수(得手)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일 장(掌)은 허공을 치고 말 았다. 파아앗－! 뜻밖의 상황에 흠칫 놀라는 그녀의 등 뒤 명문혈에 소리 없이 하 나의 손가락이 얹혀졌다. "……!" 그것이 비록 날카로운 검(劒)이 아니라 하나의 손가락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천향은 감히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손가락 끝에 웅후한 진기가 모아져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문혈은 사혈(死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르되 약 간의 내공(內功)이라도 연성한 사람에 의해 혈도가 짚힌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향도 죽음을 두려워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의아해하면서도 그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이 밀실에 있는 사람은 모두 다 내공을 상실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 밀실에 들어온 것도 이 안에 있는 칠 인(人)이 비록 무 림인(武林人)이기는 하되, 무공(武功)을 펼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녀가 들고 있던 등불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하여 빛을 발 하고 있었다. 원래는 그녀가 그 빛으로 다른 사람을 관찰하려 했으나, 이제는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다. "불을 끄면 난 네가 반드시 몰래 들어와 훔쳐보리라고 생각했었 지." 등불을 들고 있는 사람은 사마소군이었다. 한쪽 벽에 비스듬히 팔짱을 끼고 기대어 서서 자신을 조롱이라도 하듯 바라보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천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네가… 어떻게… 공력을……?" "세상에는 비밀스러운 일이 너무 많아." 사마소군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 비밀을 모두 다 알고자 하면 평생 죽을 때까지 나한테 배워도 모자라지." 사마소군은 천향의 앞에 태연히 서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 을 이었다. "너같이 예쁜 제자를 하나 두고 천천히 인생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사제지간에 불륜을 저지르는 것은 교 육상 좋지 않기 때문에 사양하겠어." "……." 천향의 주위에 서 있는 사람은 비단 사마소군뿐만이 아니었다. 여 섯 명의 여살수(女殺手) 또한 본래의 냉막한 모습을 되찾은 채 싸 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다. 여살수 중 한 명은 그녀의 몸 바로 등 뒤에 서서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사혈을 겨누고 있었다. "날… 어떻게 할 셈이지?" 천향이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사마소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난 워낙 여자의 일에 끼여들기를 싫어해서 말이지. 여자의 일은 여자끼리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어떨까? 부부유별(夫婦有別) 이라는 말도 있고, 남녀유별(男女有別)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아주 다정하게 말을 하면서 사마소군은 천향이 들어온 밀실의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밀실 문 밖에서 그의 마지막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나는 옷을 구해 올 테니까, 그 동안 잘 해결해 봐." 천향은 사마소군이 밖으로 사라져 버리자 더욱 두려운 표정을 지 었다.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앞으로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살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천향은 그녀의 얼굴에 있는 상처가 자신이 직접 한 짓이기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며 물었다. "나를… 어떻게 할 셈이냐?" 그녀의 물음에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살수가 억양이 없는 음성으 로 대답했다. "우린 살수다." 그녀는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지만, 실상 이 대답은 천향의 물 음에 대한 가장 명확한 답변이었다. 살수에게 용서니 뭐니 하는 말은 없다. 살수들에게는 단지 죽여야 하는 사람과 죽일 필요가 없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살수가 이미 개입을 했다는 것은 반드시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안 돼! 난 죽기 싫어!' 천향은 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빙 둘러싸고 서 있는 여섯 명의 살수, 그녀들은 비록 나체 였으나 마치 얼음의 옷을 한 벌씩 입고 있는 듯 투명하면서도 싸 늘하기 이를 데 없는 한기(寒氣)를 뿜어 내며 천향의 온몸을 떨게 하고 있었다.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전무(全無)했다. 천향은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나 혼자 죽지는 않겠다. 천향원에는 많 은 고수들이 있으니까, 소리를 지르면 금세 그들이 달려올 것이 다.' 천향은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러나 입은 벌렸으나 그녀의 목소리 는 입 밖으로 미처 새어 나오기도 전에 끊어져 버렸다. 명문혈에 닿아 있는 손가락 끝에서 일순 강한 전류(電流) 같은 기 류(氣流)가 그녀의 목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소리를… 소리를 질러야 되는데…….' 두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달싹이던 천향의 몸은 서 있는 자세 그 대로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풀썩……. 쓰러진 그녀의 몸 위에서 살수들의 냉막한 음성이 흐르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제거해야 한 다." "가능한 빠르고 은밀하게, 놈들로 하여금 백화맹에 이 사실을 전 할 수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여섯 살수들은 모두 나체였다. 탐스러운 젖가슴도, 기름진 복부도, 쪽박을 엎어 놓은 것만 같은 예쁜 엉덩이도… 그녀들은 모두 남김없이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며 자신들의 복장에 대해서 는 단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물론 조금 전에 일어난 수치스런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살수가 냉막한 표정으로 문가를 힐끔 쳐다본 후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회주께서 늦으시는데……." 이 때였다. 천장에 나 있는 구멍이 열리며 여섯 벌의 옷과 여섯 자루의 검이 떨어져 내렸다. 휘이익－! 떨어져 내리는 옷과 더불어 사마소군의 은밀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정해진 대로 신속하게 움직이시오!" * * * 밤, 별 하나 없는 캄캄한 하늘 아래를 하나의 인영(人影)이 나는 듯이 질주해 가고 있었다. 휘이이익－! 야음(夜陰)에 묻힌 인영은 언뜻 보기에 한 마리의 거대한 새(鳥) 를 연상케 했다. 한 마리의 새가 땅에 닿을 듯 말 듯하면서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그 인영의 경신술은 놀랍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침내 그 인영이 잠시 걸음을 멈춘 곳은 넓은 초원이 내려다보이 는 나직한 구릉 위에서였다. 넓은 초원 저쪽에는 한 채의 거대한 보(堡)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늘까지 닿아 있는 듯 높은 목책(木柵)으로 넓은 땅을 가두고서 있는 보(堡)는 흡사 하나의 거대한 산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위 압적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보(堡)가 아니라 하나의 철옹성을 방불케 하는 일종의 요 새(要塞)와 다를 바 없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게 하는 위용이었다. 그러나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감싸고 있는 야행인(夜行人)은 지극히 싸늘하면서도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철기보(鐵機堡)… 백화맹(白花盟)으로 가는 길목에 네가 서 있는 것은 너의 불행이다. 이로 인하여 너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져 야 하니까." 어둠, 깜깜한 하늘 아래를 지나는 또 다른 인영(人影)들이 있었 다. 한 명이 아니었다. 일견(一見)해도 수백이 넘는 많은 숫자의 무리 였다.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수백이 넘는 사람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 는데, 기이한 것은 이상하게도 말발굽 소리 하나 나지 않고 있다 는 점이다. 아무리 말을 타고 달리지 않고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인마(人馬)가 이동하는데 어떻게 말발굽 소리 하나 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은 잘 훈련된 군사들 같았다. 수백이나 되는 인마가 이동을 하는데도 이들은 은연중에 일종의 진(陳)을 이루고 있었으며, 암 암리에 풍겨 나오는 기도(氣度)가 범상치 않았다. 말도 조용했으며, 사람은 더더욱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이들은 어둠을 타고 이동하여 마침내 넓은 초원 의 입구에까지 이르렀다. 눈앞에 철기보의 거대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비로소 맨 앞에 있던 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 "정지!" 나직한 음성은 질식할 듯한 어둠의 무게에 눌려 금세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나, 수백의 인마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멈추어 섰다. 손을 들어 인마의 이동을 멈추게 했던 사람이 계속해서 명령을 내 렸다. "말의 입을 막은 재갈과 말굽을 싼 천을 풀어 출진 준비를 하라!" 이동할 때 그토록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말의 입과 말 굽을 천으로 싸맸기 때문이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백의 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이 제부터는 말이 자유롭게 달릴 수 있도록 재갈과 말굽을 싸맨 천을 풀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푸르르 하는 말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와 함께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어둠이 갑자기 당겨진 활시 위처럼 팽팽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둠, 그 속에서 마침내 또다시 하나의 손이 높이 들려졌다. "진격!" 들려진 손이 앞으로 힘차게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수백의 인마가 일제히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와아아……!" "와아……!" 두두두－! 어둠을 진동시키는 말발굽 소리, 그리고 함성……. 목책 위에서 파수를 보던 조춘구는 얼굴을 굳히며 떨리는 음성으 로 소리쳤다. "적의 기습이다! 어서 보주께 알려라!" 동료 무사를 향해 소리친 그는 황급히 목책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 갔다. 산문을 더욱 단단히 잠그기 위해서였다. 밤이라 산문은 이미 잠겨져 있었지만 평소대로 하나의 빗장만을 걸어 두었기 때문에 적의 공세를 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전시(戰時)에 사용하는 철근이 박힌 빗장을 걸어야만 하 는 것이다. 무사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곳곳에 횃불이 밝혀지고 있었 으며, 고함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역시도 그 속에 있었으며, 고함을 지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었다. "이봐, 어서 나를 좀 거들어! 빗장을 채우게!" 그는 마침 산문 가에 서 있는 한 사람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소리치고 난 그는 커다란 빗장을 들기 위해 허리를 숙이다 가 흠칫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너, 넌… 누구냐?"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복장이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검은 경장에 검은 복면을 하고 있는 날렵한 몸매의 야행인. "적(敵)!" 두 눈을 부릅뜨며 조춘구는 이 사실을 소리쳐 알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이미 하나의 검이 소리 없이 가슴을 찌르고 있 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푸욱－! "헉!" 검에 찔린 후에야 그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한 자루의 얇고 긴 검 을 경악과 불신의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이… 토록 빠른 검이……?" 벌어진 조춘구의 입에서 붉은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검은 그의 가슴을 찌를 때와 마찬가지로 기척도 없이 거두어졌다. 힘없이 쓰러지는 조춘구의 몸 바로 옆에서 검은 옷의 야행인은 빗 장을 열고 있었다. 산문은 육중하고 거대했으나 무공으로 단련된 야행인의 손 앞에서 는 아주 간단하게 열렸다. 문을 열고 야행인은 넓은 초원을 달려오는 무수한 인마를 바라보 고 섰다. 두두두두－! 달려오는 인마와 철기보의 무사들 간에는 아직 거리가 있었으나 싸움은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휙－ 휘익－! 허공을 가르는 무수한 화살, 그리고 천지를 진동시키는 함성과 처 절한 단말마의 비명 소리……. "와아아!" "산문이 열렸다! 문을 막아라!" "으악!" "아아악!" 온갖 고함과 비명 소리를 헤치고 온통 혼란에 빠진 철기보를 말없 이 둘러보다가 보(堡)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마치 그는 이 싸움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넓은 초원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는 그의 앞으로 한 필의 말이 다 가왔다. 말 위에는 단단한 체구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한 손에 피가 흠뻑 묻은 검을 들고 있는 중년인은 검은 옷의 야행 인을 향해 가볍게 물었다. "귀하는 천미문(天未門)의 살수(殺手)?" 야행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문했다. "당신은 천진문(天辰門)의 문주(門主)?" 묻고는 있었으나 이들은 이미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상면(相面)한 적은 없어도 그들의 가슴에 각각 용(龍)과 양(羊)의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양과 용은 각각 천미문과 천진문의 신표가 아니던가? "그렇소" 밝고 건강한 웃음을 머금은 천진문주 진천하는 야행인을 향해 검 끝을 아래로 한 채 포권을 해 보였다. "고맙소. 철기보의 산문을 열어 주어서." 진천하의 호의 어린 미소와는 달리, 흑의 야행인은 지극히 사무적 인 어조로 짧게 대꾸했다. "그것은 나의 임무였소." 말을 한 야행인은 진천하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빙글 몸을 돌려 떠나갔다. 야행인의 태도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진천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씨익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천미문의 살수, 과연 소문대로 찬바람이 이는군." 멋쩍게 웃던 그는 왼손으로 고삐를 빙글 돌려 철기보 안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죽여라!" 달려 들어가며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철기보 안에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남겨 두지 말고 모두 죽여 라!" * * * 밤, 칠흑 같은 밤하늘을 한 마리의 새가 날고 있었다. 다른 모든 새들이 잠든 이 한밤에 이 새는 어째서 암천야공(暗天 夜空)을 날고 있는 것일까? 한 마리의 새는 마치 정해져 있는 길을 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어두운 공간을 일직선으로 질러 가고 있었 다. 산과 들을 지나고 내(川)와 강(江)을 지난 야조(夜鳥)는 크고 작 은 집들과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즐비한 어느 상공(上空)에서 갑자기 속도를 늦추더니 한 바퀴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목적지를 찾았음인가? 다시 한 번 원을 그리며 창공을 돌던 야조는 돌연 방향을 바꾸어 지상(地上)으로 빠르게 날아들었다. 휘이익－! 야조가 날아 들어가는 곳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크고 화려하게 지어져 있는 누각(樓閣)의 이층 창문. 창문은 닫혀져 있었으나 한쪽 끝에는 언제든지 새가 날아 들어올 수 있도록 조그만 쪽문이 나 있었다. 먼 길을 날아온 야조는 익숙한 몸짓으로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 갔다. "벌써 일곱 마리짼가?" 밝은 불빛 속에서 하나의 손이 뻗어 와 지금 막 들어온 새를 낚아 채며 말을 이었다.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놀라운 조직력인데?" 말을 한 사람은 사마소군이었다. 사마소군의 뒤쪽에는 여섯 명의 여살수들이 석상(石像)처럼 무표 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여살수들은 천향원에 들어올 때의 복장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 었다. 검은 옷에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죽립. 죽립 속의 시선은 아마도 사마소군의 손에 들린 한 마리의 전서구 를 향하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사마소군은 이미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려 온 전서(傳書)를 펼치고 있었다. 왼손으로 쓴 글씨, 냄새를 없애기 위해 얇은 장갑을 꼈다. 어찌 주도면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급보(急報)! 철기보 멸문(滅門), 적(賊)의 신원 불명(不明), 전력(戰力)은 최 상(最上), 적 인원은 약 사백(四百). 맹(盟)에 보고 바람.> 극히 짧은 문구. 그러나 사마소군은 이 짧은 문구가 무엇을 뜻하 는지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전서구가 전하고자 했던 상대는 원래 백화맹의 수하였으나, 전서 구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전서구는 다만 귀소본능에 의하여 자신이 자란 곳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비록 상대는 다르지만 전서구는 사마소군에게 한 가지의 소식을 전해 준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일이 사마소군이 계획하고 지시했던 대로 잘 되어 간 다는 소식이다. "백화맹으로 이르는 네 군데의 길목에 위치한 가장 곤란한 일곱 개의 큰 문파가 제거되었다. 나머지 다른 문파는 구태여 제거하고 지나가지 않아도 커다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전서를 한 손에 꽉 움켜쥔 사마소군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심목풍!" 사마소군은 두 눈을 빛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잠시만 더 기다려라. 네 목을 가지러 내가 간다!" ━━━━━━━━━━━━━━━━━━━━━━━━━━━━━━━━━━━ 제 32 장 칠인회동(七人會同) ━━━━━━━━━━━━━━━━━━━━━━━━━━━━━━━━━━━ 와룡장(臥龍莊). 무창(武昌)에 자리잡은 한 채의 장원 위로 아침의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숙취로 밤새 고생하다가 뜬눈으로 새운 말단무사 이광(李光)은 늘 어지게 하품을 해댄 후 온몸을 으스스 떨었다. "언제까지 문지기 노릇만 하고 살아야 하는지? 쳇, 이렇게 골이 빠개지도록 아파도 꼼짝없이 나와서 서 있어야만 하는 신세가 서 럽다 서러워!" 이 때였다. 투덜거리던 이광은 갑자기 주위가 어두컴컴해지는 것 을 느꼈다. "비가 오려나? 왜 갑자기……?" 나직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던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사람? 사람은 사람인데, 산(山)만큼이나 크다. 보통 사람보다 족히 머리 두세 개는 큰 키와, 허벅다리만큼이나 굵은 두 개의 팔뚝. 가뜩이나 보통 사람보다 왜소한 체구의 이광은 이 거한의 그림자 에 완전히 뒤덮여 버리고 말았다. "우와!" 이광은 거한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순박하게 생긴 거한이었으며, 어리숙한 농부를 연상케 하는 모습 이었다. "옷 한 벌 지어 입으려면 돈깨나 들어가겠는데?" 나직이 중얼거리는 이광 앞에서 거한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와룡장의 커다란 산문을 둘러보고 있었다. "막내가 만나자고 한 곳이 바로 여기렸다? 어떻게 할까? 이 곡철 화 어른이 아우들이 오기 전에 이 곳을 싹 쓸어 버려?" 제딴에는 혼잣말로 중얼거린 모양인데, 워낙 목소리가 커서 이광 은 귀가 아플 정도였다. 그러나 귀가 아픈 것은 둘째 문제였다. '뭐? 이 곳을 쓸어 버려?' 그렇다면 상대는 적이 아닌가? 이광은 다시 한 번 곡철화라는 이 거한의 몸을 위 아래로 훑어보 았다. 아무리 보아도 평범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별 볼일 없는 사내가 분명했다. '자고로 키 큰 사람은 싱겁다 했으니…….' 이광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거한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으로 그 의 몸을 쿡 찔렀다. "이봐!" 쿡 찌르긴 찔렀는데……. '어째서 손가락 끝의 감촉이 이렇지?' 점잖게 충고를 해서 이 한심한 거한을 돌려보내리라고 마음먹었던 이광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손가락 끝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돌렸 다. 손가락 끝은 분명 상대의 몸을 찔렀다. 그러나 거한의 키가 워낙 커서 배를 찌른다는 손이 그만 사타구니를 찔러 버렸던 것이다. '이거 좀 난처하군.' 멋쩍은 표정으로 얼른 손가락을 거두어들이는 이광의 머리 위로 곡철화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와 휘이 아래를 둘러본다. 그는 마치 이제야 이광의 존재를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 었다. 곡철화가 물었다. "이봐! 왜 하필이면 내 다리 사이에서 놀고 있는 거야?" 놀다니? 이광은 기가 막혀서 말도 잘 안 나왔다. 또한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멍청한 농부 자식이 감히 대와룡장의 무사 나으리한테 이런 모욕 적인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놈, 감히 어느 안전에서……." "놀려면 다른 곳에 가서 놀아.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곡철화는 말을 하고 있는 이광의 등을 툭 쳤다. 그는 조심해서 가볍게 툭 민 것이었지만, 솥뚜껑만한 손에 떠밀린 이광은 일곱 여덟 발자국이나 밀려간 후에야 간신히 넘어지지 않 고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광은 팔소매를 둥둥 걷어붙이고 가장 멋있는 자세로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내 오늘 이 무례한 농부를 벌하지 않는다면 대와룡장은 두고두고 타인의 조롱거리가 되리라!" 며칠 전에 은자 두 냥이란 거금(巨金)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구입 한 석 자 두 치의 청강장검은 아침의 햇살을 받아 눈부신 광채를 흩뿌렸다. 검을 뽑아 든 이광은 문득 더할 수 없이 상쾌한 기분이 되었으며 호기가 용솟음쳤다. 검을 뽑아 드는 자신의 자세가 더할 수 없이 멋있게 느껴졌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청강장검 또한 쇠를 무 베듯 하는 한 자루의 보 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류무사가 별거냐? 검 잘 쓰면 일류지!' 그는 자신이 일류무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어깨에 잔뜩 힘을 주 고 소리쳤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농부 자식아! 검을 뽑아라! 나 이광은 검을 들지 않는 자는 베지 않는다." "검?" 곡철화는 커다란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웃었다. "난 검이 없는데?" '참, 농부는 검이 없지. 그럼…….' 얼른 머리를 굴린 이광은 재차 소리쳤다. "그렇다면 호미라도 뽑아……." 말을 하던 이광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급하게 말을 하려다 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좀 이상한 말이 입 밖 으로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왕 검을 뽑았는데, 그대로 집어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좌우간 아무 거나 뽑아! 맨손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기는 싫으니 까." "그럼 휘두르지 않으면 될 것 아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귀찮 게 굴고 있어, 정말." 말을 끝내고 난 곡철화는 다시 와룡장의 산문 쪽으로 빙글 몸을 돌렸다. 이 때였다. "엉?" 곡철화는 지금 막 산문 안으로 들어가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저… 놈은 화옥!' 그가 이광과 장난을 치고 있는 사이에 화옥이 텅 빈 산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도둑놈이 아니랄까 봐 순서를 도둑질해? 와룡장을 저 놈에 게 빼앗길 수는 없지!' 산문을 향해 뛰어가려던 곡철화는 와룡장의 높은 석벽을 발견하고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구태여 문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 어차피 좋은 대접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니까.' 이광은 화옥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곡철화만 보일 뿐이었다. "뽑지 않는다 하더라도 난 무사로서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러 나 목숨만은 다치지 않도록 해 주겠다!" 의연히 외치고 난 이광은 가장 빠른 동작으로 곡철화를 향해 달려 들어갔다. 경쾌한 신법에 허공을 가르는 눈부신 검광(劍光)! '아아, 지금의 내 모습을 장주님이 보았어야 하는 건데……!' 난생 처음 사람을 상대로 휘둘러 보는 검! 벅찬 감동이 이광의 가슴 속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슨 비극이련가? 이광의 몸이 막 곡철화의 곁에 이르는 순간에 곡철화는 와룡장의 석벽을 넘어서 들어가기로 막 결정을 내리고야 말았으니……. 휘이익－ 휘익－! 허공을 가르는 두 개의 바람 소리. 하나는 곡철화의 몸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 광의 몸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였다. 그리고 곡철화의 몸이 높은 석벽을 가볍게 뛰어 넘어가는 순간에 이광은 온몸으로 단단한 석벽을 사정없이 때리고야 말았으니……. 쾅－! "으아악!" 털썩－! 맨 처음의 소리는 이광의 몸이 석벽에 부딪치는 소리고, 두 번째 의 소리는 석벽에 몸을 부딪친 이광이 질러 댄 비명 소리였으며, 맨 나중의 소리는 그가 땅에 쓰러지는 소리였다. 처음과 두 번째의 소리는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고, 세 번째의 소 리는 약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일어났다. 쓰러진 이광은 한동안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이마에 난 주먹만한 혹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장주님이 안 계신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장주님이 이것을 보았더 라면 나는 이 곳에서 쫓겨나 처자식 먹여 살릴 일이 막막했을 게 아닌가? 난 운이 좋았다!" * * * 이광은 정말로 운이 좋은 사내였다. 그가 와룡장 밖에 있지 않고 와룡장 안에 있었더라면 아마 목숨을 부지하기가 요원했을 것이 다. "악!" "으악!" 와룡장 안으로 들어선 곡철화의 귀로 맨 먼저 들려 온 소리는 처 절한 비명 소리였다. 비명 소리는 비단 한 곳에서만 들려 오는 것이 아니었다. "저, 저건 냉자기! 저 자식은 또 언제 들어왔지? 안 되겠다. 가만 있다간 몸도 풀기 전에 상대를 다 빼앗기겠다." 발을 구르고 난 곡철화는 다급한 표정으로 와룡장의 후원을 향해 달려갔다. "후원에는 아직 내 손에 죽어 줄 무사들이 남아 있겠지." 와룡장의 곳곳에는 시체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모두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였다. 시체와 피를 밟지 않으면 걸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연무장과 두 개의 화원을 지나면서 곡철화가 본 살아 있는 무사의 수는 겨우 손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온통 죽어 있는 시체들뿐이었 다. 그러나 다행히도 후원에는 시체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옳지! 여기까지는 아직 동생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군." 후원에는 인공으로 된 자그마한 연못이 하나 있었고, 연못을 끼고 길게 나 있는 길 끝에 무사들의 숙사(宿舍)가 있었다. 숙사는 조용했다.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연무장 쪽에서 들려 오는 비명도 여기까지는 미치지 않고 있었다. 활짝 열려져 있는 창문, 아침의 신선한 바람에 휘날리는 휘장… …. "잠꾸러기들이 이제야 일어난 모양이군." 나직하게 중얼거린 곡철화는 나무로 지어져 있는 숙사의 문을 박 차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모두 덤벼라! 원하는 방법으로 죽여 주겠……!" 소리치던 곡철화의 얼굴이 돌연 확 일그러졌다. 숙사에는 과연 사오십 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서지듯 열리는 문 소리와 곡철화의 고함 소리에 도 꼼짝 않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 없는 처지였다. 검푸르게 변색되어 있는 얼굴, 어떤 무사는 손발이 머리통만큼이 나 퉁퉁 부어 올라 있기도 했다. 곡철화는 이것이 공야치의 수법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 었다. "공야치, 이 놈이 내 몫을……." 이 때였다. 곡철화의 머리 위쪽에서 귀에 익은 공야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첫째 형, 내가 뭐 어쨌다고 내 욕을 하는 거요?" 공야치는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거꾸로 매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너희들, 정말 이럴 수가 있어?" "뭐가요?" "와룡장을 쓸어 버릴려면 나와 상의를 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내 가 몸을 풀 상대라도 남겨 놓았어야 하는 것 아니야?" "형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상의를 한단 말이오?" 공야치는 빙긋 웃으며 대들보에서 거꾸로 뚝 떨어져 내렸다. 거꾸로 떨어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 다리는 어느 새 가볍 게 땅을 밟고 있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하게 느껴지게 하는 신법이었다. 바닥에 내려선 공야치는 유유히 말을 이었다. "이 곳으로 오라는 막내의 말도 며칠 전에야 간신히 주워들었는데 ……." 곡철화의 얼굴은 턱 밑으로 지나가는 공야치의 머리를 따라 문 쪽 으로 백팔십도 회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놈들은 어떻게 만났어?" 공야치는 숙사 밖으로 나가며 볼멘 소리로 대꾸했다. "오다가다 우연히 만난 걸 가지고 왜 시비요? 첫째 형이면 첫째 형답게 좀 점잖을 수 없나?" "어쭈? 이 자식 봐라?" 곡철화가 눈을 부라리며 나오든 말든, 공야치는 맑은 하늘을 올려 다보며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하늘이 참 맑기도 하다. 밖에서는 일이 다 끝난 모양인데?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여기저기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져 있는 장원 안을 오남일녀(五男 一女)는 태연히 걸어가고 있었다. 표정은 비록 태연했으나 어딘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듯한 눈 치가 역력했다. "마지막 한 놈이 안 보이는데……." "배알도 없이 석 달 전 백화맹에 꼬리치고 들어간 와룡선생께선 아마 어젯밤 잔뜩 술에 취해 계집을 끼고 침소에 들었다지?" 디룩디룩 살찐 사내가 두 개의 금덩어리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어느 누가 그 놈을 죽이는 게 좋을까?" 금사충의 말에 곡철화가 얼른 대답했다. "그거야 나 곡철화지. 너희는 장유유서(長幼有序)도 몰라?" "장유유서야 알죠. 그러나……." 공야치가 곡철화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살인을 하는데는 손이 빠른 사람이 최고라는 이치를 형님께선 왜 모르나 몰라." 휘이익－! 말을 하는 도중에 공야치의 몸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 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어?" 동작이 둔한 곡철화가 두 눈을 부릅뜨는 순간에 경신술에 남다른 재주가 있는 화옥의 몸이 또다시 퉁겨지듯 앞으로 향했다. 휘이이익－! "안 돼!" 곡철화는 발작적으로 외치고 난 후 뒤늦게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 작했다. "와룡장주는 내가 죽여야 해!" 그가 달려나가자 땅이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싸늘한 표정으로 냉자기가 나직이 말했다. "기껏해야 한 놈 남았을 뿐인데, 어린애처럼 왜 싸우나 몰라." 금사충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살인보다 더 좋은 게 금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지." 가만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백약빙도 한 마디 거들었다. "저 미련스런 싸움에 굳이 끼여들 필요는 없지만 따라가 보는 게 좋겠어요." 금사충이 얼른 동조하고 나섰다. "그럴까? 누가 와룡선생의 목을 베는지 구경하는 것도 심심하지는 않을 테니 말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 사람도 일제히 몸을 날렸다. 앞서 간 세 사람이나, 조금 늦게 출발한 세 사람이나 경신술의 경 지는 도토리 키 재기였다. 와룡장의 뒤쪽에 있는 커다란 가산(假山) 안에 홀로 지어져 있는 호화로운 저택에 맨 먼저 도착한 사람은 분명 화옥이었으나, 다른 다섯 사람도 바싹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휘이익－! 일찍이 술을 좋아하고 재물을 더욱 좋아하며 계집엔 아예 눈이 멀 다시피해서 삼애선생(三愛先生)으로도 불린다는 와룡선생의 집 높 은 대문을 화옥은 아주 가볍게 뛰어넘어 들어갔다. 화옥은 가볍게 뛰어넘어 들어갔으나, 신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가속도를 이용하여 공야치를 추월한 곡철화의 거구는 그대로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콰앙－! 곡철화의 몸은 커다란 목문(木門)을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공야치가 낄낄 웃으며 그 뒤를 바싹 쫓았다. "큰형 뒤를 따라가면 여러 모로 편리하다니까."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문을 들어섰고, 다른 세 사람은 한 발 뒤 처져서 안으로 들어갔다. 방, 호화로운 침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며 화옥이 소리쳤다. "와룡선생! 날이 밝았으니 그만 좀 일어나는 것이 어떨까?" 집 전체를 쿵쿵 울리며 뒤따라 들어온 곡철화는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솥뚜껑만한 손을 들어올리고 있 었다. "일어날 필요 없다. 계속해서 영원히 잠들면 돼!" 휘이익－! 허공을 가르는 곡철화의 손. 화옥이 소리쳤다. "큰형, 그건 반칙이오!" "생사(生死)의 전장(戰場)에서는 반칙도 수(手)라는 이치를 모르 지는 않겠……!" 득의한 표정으로 말을 하던 곡철화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입만 다문 것이 아니었다. 화옥과 공야치의 시선은 물론, 뒤이어 들어온 금사충과 냉자기와 백약빙의 시선도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로 날아가 박혔 다. 육 인은 거의 동시에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막내가 언제 들어왔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인물은 그들이 찾는 와룡선생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사마소군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사마소군은 졸린 눈으로 육 인을 쓸어 보며 말했다. "웬 소란이오? 남의 집에 들어왔으면 예의를 차려서 좀 조용히 할 수 없소?" * * * "천오, 천신, 천술, 천해… 이 네 문파를 제외한 여덟 문파는 지 금 백화맹으로 향하는 네 군데의 길목에 진(陳)을 치고 있소." "……." "백화맹 정보 수집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천향원을 제거하였기 때 문에 백화맹에선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나, 백화맹의 능력으 로 봐서는 조만간 그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임에 틀림없소." 와룡장의 대청, 당금무림의 신비인들로 지칭되는 칠인회(七人會) 의 일곱 사람들은 장한별부를 나온 이래 두 번째의 회합을 하고 있었다. 사마소군의 말에 사마소군을 제외하고는 말이 가장 많은 공야치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퉁명스레 말했다. "막내는 다 좋은데, 꼭 한 가지 나쁜 버릇이 있단 말야. 어째서 요점부터 말하지 않고 말을 빙 돌려서 하나 몰라. 쓸데없이 말만 길어지게 말야." 말을 하는데는 금사충도 절대 빠지지 않는 인물이 아닌가? 언제나 양 손에 들고 다니는 두 개의 작은 금덩이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씨익 웃었다. "넷째는 말을 잘못 했어." "어?" "막내의 어디가 다 좋으냐? 너는 의당히 막내는 다른 것도 다 나 쁜데, 말을 빙 돌려서 하는 습관이 그 중에서도 가장 나쁘다고 말 했어야 옳은 거다." 말을 해 놓고 그는 낄낄 웃었다. 곡철화가 앞에 놓여 있는 탁자를 한 손으로 쾅 내려치며 소리쳤 다. "이 놈들, 막내가 애써 말을 하는데 도와 주고 경청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장난을 해? 그러고도 너희들이 형이냐?" 공야치와 금사충이 어디 이 정도로 외눈 하나라도 꿈쩍할 위인들 인가? 공야치가 곡철화를 손가락질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어? 대형이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했지?" 금사충이 다시 말을 받았다. "그 동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푸대접만 받다가 오랜만에 동생 들을 보니, 지나치게 감격한 모양인데?" "이 자식들이!" 곡철화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사마소군이 말했다. "대형, 좀 앉아 있으면 어디 덧나오? 막내가 말 좀 하겠다는데, 꼭 그렇게 훼방을 놓아야 되겠소?" "막내, 너……." 편을 들어 주고 있는데 사마소군이 이런 말을 하자, 곡철화는 기 가 막히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사마소군이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다른 형들을 보시오. 다들 얌전하게 앉아 있는데 유독 대형만이 서서 떠들고 있지 않소? 쯧쯧, 맏형이면 좀 맏형답게 놀아야지." 곡철화는 금사충과 공야치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새색시처럼 얌전하게 앉아 아예 곡철화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너, 너희들……." 공야치와 금사충을 손가락질하던 곡철화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다 가 어금니를 꾹 깨물며 그냥 자리에 앉고 말았다. 말싸움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곡철화가 참아 버리자, 장난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사마소군을 향했다. 사마소군은 잠시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천신문의 보고에 의하면 백화맹에는 아주 무서운 인물이 제법 도 사리고 있다는 거요." "그래? 모두 몇 놈이냐?" "열두 놈이오." 지니고 있는 버릇을 고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공야치가 금세 입 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가 그 놈들을 맡으라는 건가?" 사마소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덟 문파는 각기 네 곳에 나누어져 포진하고 있소. 그들은 각기 자파의 문주로부터 지시를 받고 있는데, 자칫 죽음을 당하게 되면 나머지 병력들은 졸지에 오합지졸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지 않소. 그러나 형들이 그들과 함께 진격해 들어가면서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가 나타나면 좀 처리해 주어야겠소." 이번에는 금사충이 입을 열고 나섰다. "십이 문주들의 목숨은 아깝고, 우리들은 죽어도 좋다는 건가?" 금사충은 사마소군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마소군은 팔꿈치로 금사충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백화맹의 졸개 따위가 어찌 형들을 죽일 수 있겠소? 형들이 정녕 그 따위 졸개들을 무서워한다면 또한 어찌 나 소군의 형이 될 수 있겠소." "이거 헛갈리는데?" 금사충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를 칭찬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언뜻 이해가 안 가." 공야치가 가만히 앉아 있을 리가 없었다. "셋째 형은 아마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거요. 워낙 머리가 나쁜 편이니까." "이 자식이……." 금사충이 엉덩이를 들썩하는데, 냉자기가 싸늘한 음성으로 물음을 던졌다. "백화맹의 열두 놈이 누구지?" 냉자기가 말하자, 공야치와 금사충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냉자기의 성질은 워낙 쌀쌀해서 자칫 잘못하다간 정말로 언성을 높히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사마소군이 대답했다. "백화맹의 삼당오원(三堂五院)의 각 우두머리들과 심목풍의 좌우 호법, 그리고 심목풍 자신과 그의 심복인 여표요." "우리가 그 놈들을 책임지지." "심목풍은 내 몫으로 남겨 주었으면 좋겠소."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주인이 아닐까?" "원래는 그렇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있으니 편의 좀 봐주쇼. 형들 좋다는 게 다 뭐요? 이런 편의조차 봐주지 않으면 또 누가 막내를 하겠소." 공야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정? 어떤 사정이지?" 공야치의 옆에 앉은 금사충이 공야치의 뒤통수를 툭 치며 말했다. "척 보면 삼천 리라는데, 이 놈은 근시라서 삼 장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군. 사정이 있다면 보나마나 원한관계지. 그걸 꼭 물어 봐 야 알어?" 공야치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금사충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어이구 잘났소! 내가 형이라면 이걸 그냥……!"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데 곡철화가 사마소군을 향해 무게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사정이 있다면 당연히 너의 몫으로 남겨 놓아야지. 막내는 염려하지 마라. 이 대형이 책임지고 네가 올 동안 심목풍의 목을 남겨 놓으마." 신통하다 싶으리만치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화옥이 돌연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겨우 싸움을 시작한 셈인데, 마치 다 이겨 놓은 듯이 말을 하는군. 심목풍은 뭐 목을 길게 내밀고 남이 잘라 가기를 기다리 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지?" "제까짓 놈이 기다리지 않으면?" 곡철화가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워낙 크기 때문에 그가 일단 말을 하자, 다른 사람 들은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공야치와 금사충도 그 바람에 말싸움을 뚝 그치고 곡철화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곡철화가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일곱 형제가 목을 접수하러 가는데, 제놈이 무사할 것 같 아? 이 싸움은 보나마나야. 천하에서 그 누가 감히 우리와 대적 (對敵)하겠어? 싸워 볼 놈 있으면 나오라고 해! 당장에 본때를 보 여 줄 테니." 말을 하는 기세가 워낙 살기등등해서 화옥은 쑥 들어갈 수밖에 없 었다. "누가 뭐랬소?" 화옥은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변명했다. "내 말은 그러니까… 우리가 가기 전에 달아나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게 그러니까……." 곡철화는 다시 소리쳤다. "그 놈은 욕심이 많아서 달아나지도 못해! 그 많은 재산과 명예를 버리고 달아난다면 아마 아까워서 스스로 심장이 터져 죽을 놈이 야, 그 놈은!" 이 때였다. 사내들의 거친 목소리 사이로 아름다운 고음(高音)이 끼어 들어왔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큰오빠!" 아름다우나 차가운 목소리, 백약빙이었다. 백약빙은 곡철화가 드물게 두려워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고 나서자, 곡철화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침착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백약빙이 말했다. "맹수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하잖아요? 우 리는 의당히 막내의 의견을 존중하여 일사불란한 행동을 취할 필 요가 있어요." "……." "만에 하나 덤벙대다가, 혹은 상대를 얕잡아 본 관계로 패하게 되 는 날에는 막내의 중요한 일을 망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의 소망과 목숨도 끝장이 나는 거예요." 그녀의 말은 여기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속마음을 대변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커다란 한(恨)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 닌가? 말을 그렇게 했다고 해서 이들이 정말로 백화맹을 우습게 알고 있 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인 것이다. 사실 백화맹을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이 하늘 아래에 아무 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음모자인 채색독사의 사내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적 용되는 공통적인 견해이다. 백화맹이 가벼운 상대였다면 채색독사의 사내는 이미 사마소군을 죽였을 것이다. "여섯째의 말이 옳다!" 곡철화가 믿음직스런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어.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의 당히 회주인 막내의 지시에 의해 조직적으로 움직일 것이니까." "대형이 오랜만에 맏형다운 말을 했소." 공야치도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의당히 막내의 말을 따를 거야." 그는 사마소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서 지시를 내리지. 우리는 모두 경청할 테니까." 사마소군은 빙긋 웃었다. "말은 벌써 다 끝났소." 말을 하며, 그는 품 속에서 여섯 개의 양피지를 꺼내 육 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기에는 형들이 진격해 나가야 할 방향과 백화맹의 주요인물에 대한 인상착의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소. 형들은 그저 그대로만 따라 주면 나를 도와 주는 것이오." "막내는 과연 주도면밀하군." 화옥이 양피지를 받아 들며 말했다. "심목풍이 막내를 원수로 만든 것은 그의 불행이야. 누구든 막내 를 원수로 삼으면 절대 오래 살지 못하지." 공야치가 웃으면서 사마소군을 향해 물었다. "그 말에는 동감이야. 막내, 심목풍의 목은 언제 땅에 떨어질 거 지?" "글쎄요?" 사마소군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올 겨울을 넘기진 못할 걸요?" ━━━━━━━━━━━━━━━━━━━━━━━━━━━━━━━━━━━ 제 33 장 살인행진(殺人行進) ━━━━━━━━━━━━━━━━━━━━━━━━━━━━━━━━━━━ <십이문(十二門)의 위치와 전력 파악. 천주(天主)의 하명(下命)을 기다립니다. 신이문주(神耳門主) 배상(拜上)> 한 장의 서찰을 말없이 읽고 난 사내는 천천히 뒷짐을 지며 하늘 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곧 추위가 시작되겠군." 사내의 허리에는 한 마리의 채색독사가 꿈틀거리며 매달려 있었 다. 아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원래는 한 자루의 비수였다. 그러나 비수의 손잡이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한 마리의 붉은 뱀의 모습이 보는 이의 시선을 강력하게 끌어당기고 있어 보는 이로 하 여금 비수는 보이지 않고 마치 한 마리의 뱀이 사내의 몸에 달라 붙어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石家)의 진전을 이어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혹독한 추위 가 되겠군." 나직이 중얼거리고 난 채색독사의 사내는 허공을 향해 담담한 음 성으로 말했다. "비검!" 사내의 몸 바로 옆에는 한 그루의 높고 큰 나무가 서 있었다. 빛 바랜 나뭇잎 몇 개만을 간신히 매달고 있는 나무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채색독사 사내의 말이 떨어지자, 아무도 없는 나무 위에서 돌연 한 사람의 그림자가 땅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예!" 너무나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인지 비검은 흡사 한 개의 나뭇잎 속 에서 저절로 솟아 나온 것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비검은 채색독사의 사내의 등 뒤에 부복했 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 와 몇 개 남지 않은 나뭇잎 중 하나를 속절없이 떨어 지게 하고 있었다. 떨어진 나뭇잎은 바람에 휘말려 하늘 높은 곳까지 날아올랐다가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채색독사의 사내는 무심한 시선으로 나뭇잎을 쫓으며 천천히 말문 을 열었다. "오는 십칠 일(十七日), 십이문 중 네 곳을 친다." "네 곳이라 하오면……?" "천오, 천신, 천술, 천해, 네 문파다." "……." "나머지 여덟은 백화맹과 함께 사라지게 한다. 낙양성부(洛陽城 府)에서." 나뭇잎은 바람에 쫓겨 멀리 지평선 끝으로 사라졌다. 무표정한 시선으로 나뭇잎을 쫓던 채색독사의 사내는 그제야 느릿 한 동작으로 비검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며 사내는 계속 말을 이었다. "가라! 가서 마종십문(魔宗十門)으로 하여금 개봉(開封)에 집결토 록 하라." "명대로 하겠습니다." "명심하라. 오는 십삼 일까지 집결하여야만 한다. 십삼 일 이후로 는… 마교천하(魔敎天下)가 도래하는 것이다!" 비검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지금 즉시 떠나도록." "천주(天主)의 무운(武運)을 비옵니다!" 부복을 한 채 비검의 몸은 허공으로 반 장 가량 떠올랐다가 빙글 방향을 틀더니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휘이익－! 채색독사의 사내는 텅 빈 허공으로 다시 시선을 던지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참으로 길고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온 것이다. 석가와의 구원(舊怨)을 청산하고, 마교천하를 이룩하는 영광스런 날이……." * * * 십일월 십일 일, 변산(邊山). 백화맹으로 향하는 네 길목 중 한 곳인 변산에는 눈이 내리고 있 었다. 첫눈이었다. 송이송이 떨어져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곡철화는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첫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는데……." 나직이 중얼거리던 곡철화는 자신의 허리밖에 안 찰 정도로 왜소 한 체구의 천묘문주를 향해 갑작스럽게 말했다. "문주, 우리 눈싸움을 해 볼까?" 뜻밖의 제의에 천묘문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푸우 소리내 어 웃었다. "수하들이 많으니, 다음으로 미루지요." 두 사람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옆에는 역시 마상 (馬上)에 앉아 있는 천진문주 진천하가 있었다. 진천하는 호인답게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곡대협께서는 아직도 동심(童心)을 지니고 있으니, 정말 부럽소 이다." 동심이라는 말에 곡철화는 얼굴을 붉히며, 행여 다른 수하들이 들 었을까 봐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등성이 밑으로는 가슴에 각각 토끼와 용의 문장을 한 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천오백의 정예군사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고, 그 기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곡철화는 군사들을 힐끔 훔쳐본 후 안심했다는 듯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군. 눈싸움 한 번 하자고 했다가 괜히 망신살이 뻗 칠 뻔했네." 곡철화의 목소리가 좀 큰가? 사실 군사들은 모두 다 곡철화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큰 목소리가 아니던가? 군사들은 대부분 곡철화의 체면을 생각해서 웃음을 참고 있었는 데, 곡철화가 나중에 한숨까지 토해 내며 말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얼굴이 벌개진 곡철화가 고함을 내질렀다. "내가 눈싸움이라고 한 것은 그러니까… 음, 눈이 오는 날이니까 눈을 맞으며… 음, 백화맹의 졸개들과 싸움을 하자는 말이었다." 곡철화의 거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젊은 군사 하나가 웃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대협!" "그래?" 젊은 군사의 말에 곡철화는 입을 찢어지도록 벌리며 반색을 했다. 커다란 덩치의 곡철화가 천진스런 표정을 하자, 군사들은 또다시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戰場)으로 출진할 군사들이지만 훈훈하고 밝 은 기운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이번 싸움은 우리의 승리다!" 진천하가 미소를 머금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런 기세라면 어느 누구도 우리를 당할 수 없어." 가슴에 토끼의 문장을 한 천묘문주가 진천하를 향해 밝은 표정으 로 말했다. "이제 출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구름 속에서 아마도 해는 중천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을 시 각이었다. 지금 출발을 하면 황혼 무렵에 아마 첫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난 진천하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 고 난 후, 천진문의 군사들을 향해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출발!" 그가 말하자 천진문의 일천 군사들의 맨 앞에 있는 다섯 무장(武 將)들이 진천하의 명령을 받아 다시 명령을 내렸다. "출발!" 천진문의 일천 군사들은 천천히, 그러나 질서 있게 움직이기 시작 했다. 천묘문주는 진천하가 명령을 내리고 난 후, 자파(自派)의 무장들 을 향해 가히 크지 않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군사들을 출진시켜라!" 천묘문의 군사들 앞에도 다섯 명의 무장들이 있었다. 천묘문주와는 달리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들은 천진문의 다섯 무장 들과 비슷한 동작을 취하며 명령을 내렸다. "출발!" 천진문 일천(一千), 천묘문 오백(五百), 도합 천오백의 군사들이 드디어 백화맹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의 출진을 축복이라도 하듯 하늘은 더욱 굵고 흰 눈송이를 떡 가루처럼 뿌려대고 있었다. 황혼 무렵. "웬 군사들이지?" "글쎄?" 철현진(鐵賢鎭)에 자리잡고 있는 운영장(雲影莊)의 졸개들은 맞은 편 산쪽에서 새까맣게 말을 타고 달려오는 한떼의 군사들을 발견 하고 두 눈을 휘둥그래 치켜떴다. 철현진은 백화맹과 근접해 있는 지역이라, 여태껏 어떠한 종류의 싸움도 일어난 적이 없는 곳이었다. 두두두두－! 군사들의 모습을 두 눈이 감지해 낸 한참 후에야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우렁찬 말발굽 소리. 졸개들은 흡사 말들이 자신의 가슴을 짓밟고 오는 듯한 불길한 예 감을 느꼈다. 달려오는 군사들의 무리 속에서 휘날리는 두 개의 깃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개의 깃발엔 아무 글자도 쓰여져 있지 않고 다만 한 마리의 뱀 (蛇)과 닭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맨 처음에 이들을 발견한 졸개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장주께 보고를 드려야 될 것 같다." "그, 그러지……." 옆에 서 있던 다른 졸개가 역시 겁먹은 표정으로 쏜살같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군사들이 천사문과 천유문 소속의 천이백 군사들이란 사실을 알아서가 아니다. 앞에서 달려오는 군사들의 위용이 운영장 정도는 한순간에 쓸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기세등등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하지?" 군사들이 오십여 장 밖에까지 다가왔는데도 안에서 아무 연락이 없자, 남아 있는 졸개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멈추라고 소리를 쳐야 할까?" 그러나 달려오는 기세로 보아 소용이 없을 것 같지 않은가. "도대체 어쩌자는 거지?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졸개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군사들의 무리 속으로부터 돌연 한 자루의 수전(手箭)이 날아와 그의 답답한 가슴을 깊숙이 찔렀기 때문이 다. 슈우욱－! "헉!" 졸개의 몸은 벼락을 맞은 멧돼지처럼 풀쩍 뛰어올랐다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한 자루 수전에 실려 있는 힘은 능히 바위라도 부술 수 있을 정도 로 위력이 있었다. 두두두－! 쓰러진 졸개의 몸 위로 천이백 필의 말발굽이 바람처럼 치달려 갔 다. 쾅－! 운영장의 산문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 오고, 그 소리 속에서 낄 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개시는 내가 먼저 했다!" 공야치의 목소리였다. 금사충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어 들려 오고 있었다. "졸개 하나 죽여 놓고 큰소리는." 밤. "아악!" "아아악!" 창－ 차창－!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처절한 비명이 어둠을 찢고 있었다. 선운로(仙雲路). 호구수(戶口數) 삼백, 상주인구 천여 명의 가히 작지 않은 촌락 (村落)은 지금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선운로에 때아닌 혈풍(血風)이 불어닥친 이유는 단 하나, 백화맹 의 남쪽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뿐이었다. 두두두두－! 무리를 지어 달리는 말 위에는 하나같이 팔이 하나 없거나, 다리 가 없거나, 아니면 꼽추 같은… 신체에 결함이 있는 불구자들이 앉아 있었다. 손이 하나뿐인데도 그들은 그 손으로 고삐가 아닌 검(劒)이나 창 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몸은 말과 하나가 된 듯 자유자 재로 거리를 치닫고 있는 것이다. 맨 앞에서 말을 달리는, 가슴에 쥐의 문장을 한 천자문의 문주가 하나밖에 없는 손에 들린 검을 번쩍 들어올리며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눈에 띄는 자는 한 놈도 남김없이 모두 죽여 없애라!" 천자문의 군사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무사들은 일견 천자문에 비 해 수적으로 우세해 보였다. 그들은 그 동안 이 지역의 패주로 군림해 온 천검장(天劒莊)과 구 룡방(九龍幇)의 무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열세에 처해 가 고 있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두두두두－! 처음에는 제법 완강히 저항을 하는 것도 같았는데, 어느 새 무사 들은 말을 탄 천자문의 군사에 쫓겨 이리저리 골목으로 무리를 지 어 달아나고 있었다. 달아나는 그들의 뒤에는 어김없이 말을 탄 천자문의 군사들이 무 서운 속도로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말라!" 촌락 전체가 전장화(戰場化)되자, 누군가가 커다란 목소리로 경고 하고 있었다. "우리는 도적이 아니니, 무림인이 아니거나 백화맹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두 대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밖으로는 고개조차 내밀 지 않았다. 오직 쫓고 쫓기는 무사들과 군사들만이 거리 곳곳을 누비고 있는 것이다. 십여 명의 무사들이 어두운 골목길을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 다. "헉헉……." 몹시 지친 모습들이었다. 누군가가 헐떡이며 말하고 있었다. "어서 이 사실을 백화맹에 알려야 해. 그들은 백화맹을 목표로 하 고 있는 거야." 운이 좋았는지, 그들의 뒤에는 말을 탄 천자문의 군사 하나도 뒤 따르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달리면 이 지옥 같은 선운로를 빠져 나갈 수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우거진 숲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곳까 지만 달아나면 지세(地勢)를 이용해서라도 충분히 한 목숨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였다. "……!" "저기……!" 무사들은 길 끝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주춤 달리는 속도 를 늦추었다. 한 사람, 가히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 은 체구의 사내가 검(劒)도 아닌 조그만 비수(匕首) 한 자루를 옆 구리에 차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저 단순히 서 있을 뿐이지만, 그를 발견한 무사들은 문득 온몸을 감싸오는 으스스한 한기(寒氣)를 느꼈다. "보, 보통 놈이 아닌 것 같다." 무사들은 아예 걸음을 완전히 멈추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이 내 사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머리에 떠올린다. 또한 사내가 지니고 있는 무기는 기껏해야 비수 한 자루에 불과하 지 않은가? "해치울 수 있어!" 한 사람이 호기를 부리자, 다른 무사들도 호기가 되살아난다. "그래, 저 놈만 해치워 버린다면 우린 이 곳을 빠져 나가는 거 야!" 눈짓을 주고받은 무사들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가자!" 휘이익－! 그래도 천검장에서는 알아주는 무사들이었다. 일단 행동을 전개하 자, 그 몸놀림은 익숙하고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때였다. 타다다다닥－! 맞은편의 사내도 돌연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 가? 사내는 경신술을 펼치지 않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과 마찬가지 로 달리기를 하듯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속도는 경신술을 펼치는 무사들에 비해 조금도 느린 것 같지가 않았다. "짧은 비수로 검과 맞겨루겠다는 건가?" "맞겨룸에서는 무기가 긴 쪽이 백 번 유리하다는 평범한 도리조차 모르는 무식한 놈이로군." 십 대 일(十對一). 서로를 향해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열 명의 무사들과 한 명 의 사내는 캄캄한 골목길의 한가운데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쳤 다. "타앗!" "죽어라!" 무사들은 일제히 검을 쳐들었다. 그들은 모두 한 개의 귤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열 조각 이상으 로 벨 수 있는 쾌검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위로 쳐든 검을 미처 휘두르기도 전에 돌연 눈앞에 서 무수히 번득이는 섬광(閃光)의 편린(片鱗)들을 보았다. 번쩍－! "……!" 단지 눈이 부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도 그들은 모두 위로 쳐든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어째서……?' 그들은 짧은 순간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검을 휘두르지 않은 것일까?' 휘두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휘두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 했다. 마치 무엇에 흘린 느낌이었다. '비수를 든 사내는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의혹이 생겨났을 때 그들은 문득 가슴 한쪽을 불로 지지는 듯한 뜨거운 통증을 느꼈다. "헉……!"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니,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뒤에서 냉막한 듯하면서도 무심한 음성이 들려 오기 시작한 것은 그 아픔을 느낌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 마지막으로 충고를 하나 하지. 손에 들린 무기를 너무 믿지 마라." 비수를 든 사내는 어느 새 무사들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손에 들린 비수 끝에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는 붉디붉은 선혈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의 이 마지막 충고를 명심하면 지옥에서는 좀더 오래 살 수 있 을 것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은 사내의 손에 들린 비수뿐만이 아니 었다. 십여 명이나 되는 무사들의 왼쪽 가슴 한가운데서도 한결같 이 뜨거운 선혈이 울컥울컥 솟아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무사들은 자신의 가슴에서 피가 솟아 나오고 있다는 사실 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체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깨달을 수 있을까? 눈을 부릅뜬 채 무사들의 몸은 몇 번 휘청이더니, 이내 땅바닥으 로 자신의 몸을 처박고 있었다. 냉막한 표정의 사내는 그제야 천천히 몸을 돌려 시체의 옷에 비수 의 피를 쓱쓱 문질러 닦으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 냉자기를 만난 것은 그래도 너희들의 복이다." 비수를 허리춤에 비껴 차며, 냉자기는 나직이 소리내어 중얼거렸 다. "아무 고통도 없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가는 것은 생자(生者) 의 마지막 소원이 아닌가? 이 소원을 내가 풀어 주었으니, 너희들 은 의당히 내게 감사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 * * 십이 일(十二日). 휙－ 휘이이익－! 눈 덮인 산을 십여 줄기의 인영이 빠른 속도로 달려 올라가고 있 었다. 아니, 그것은 달리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날아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하리라. 십여 줄기의 인영은 너무나 빨리 움직이고 있어 그 형체조차도 분 명치가 않았다. 마치 희뿌연 안개가 사람의 형체를 이루고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휙－ 휘이익－! 두 줄기의 인영이 산등성이에 서 있는 헐벗은 나뭇가지를 살짝 밟 는가 싶더니, 나뭇가지의 탄력을 이용하여 더욱 빠른 속도로 산의 정상을 향해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파아앗－!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나뭇가지를 밟았는데도 나뭇가지에 쌓인 눈은 조금도 떨어져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밟은 눈 위에는 심지어 사람의 발자국조차도 남지 않았다. 산정(山頂). 산의 정상에는 한 채의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주위에는 노송(老松)이 우거져 있었는데, 수북이 눈이 쌓인 노송 으로 인하여 더욱 운치가 있어 보이는 정자였다. 사방이 탁 트여져 있는 팔각의 정자 안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 다. 다름 아닌 사마소군이었다. 사마소군은 차가운 정자에 좌정한 채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앞에 놓고 있었다. 문방사우는 방금 사 온 것인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이었 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백화맹과의 중요한 일전(一戰)이 벌어지고 있는 이 시간에 묵화라 도 그리며 망중한(忙中閑)의 여유라도 부려 보겠다는 것인가? 사마소군은 느릿한 동작으로 새 벼루의 뚜껑을 열고 한 줌의 희고 깨끗한 눈을 녹여 먹을 갈고 있었다. 슥－ 스윽－! 원래 글공부하고는 별로 사이가 안 좋은 사마소군이 아닌가? 제딴에는 의젓하게 앉아 먹을 갈고 있지만 그 모습은 일견해도 우 스울 정도로 서툴러 보였다. 어디서 구해 입었는지 그는 제법 깨끗하고 멋들어진 유삼을 입고 있었는데, 먹을 갈고 있는 그는 긴 소맷자락의 끝이 벼루에 닿아 검은 먹물이 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디 소맷자락뿐인가? 먹을 가는 그의 손가락과 손등에도 먹물은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그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니 한쪽 볼과 입 근처에도 검은 먹물이 여기저기 번져 있었다. 계속해서 조금만 더 먹을 갈다간 그는 아예 온몸에 온통 먹칠을 하고야 말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해서 먹을 갈고 있 었다. 그러나 이 때였다. 먹을 가는 그의 오른손이 주춤 멈추어졌다. 벼루를 향하고 있던 시선이 은밀하게 정자 밖의 송림(松林)을 향 한다. '추적자가 있었나?' 송림에 쌓인 눈이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송림 속으 로부터 전해져 오는 살기(殺氣)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긴 백화맹과 인접해 있는 이 곳에서 그들의 눈을 완전히 따돌 리는 건 좀 무리였지.' 사마소군은 먹을 갈던 손으로 습관적으로 콧등을 쓱 문질렀다. 그 의 콧잔등에 다시 검은 먹물이 묻었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 온통 먹물이 묻었다는 것은 까마득히 모른 채 생각에 잠겼다. '셋, 넷… 모두 네 명이군. 어떻게 할까? 쫓아가서 죽여 버려?' 이 때였다. 망설이던 그의 얼굴에 돌연 한 가닥 희미한 미소가 떠 올랐다. '그냥 놔 둬도 되겠군. 그들이 왔으니, 알아서 처리하겠지.'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휘이익－ 휙－! 산 아래쪽으로부터 십여 줄기의 인영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것 이 보였다. 십여 줄기의 인영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날아와 눈에 보이는가 싶 자 어느 새 정자의 지붕 위쪽 하늘에 이르렀고, 정자의 지붕 위 허공에 이른 십여 줄기의 인영은 거의 동시에 빙글 몸을 뒤집더니 정자 앞 눈 덮인 뜰에 사뿐히 내려서고 있었다. "낭천(浪天)의 제자들이 삼가 공자(公子)를 뵈오!" 내려선 사람들은 일제히 사마소군을 향해 부복하며 소리높여 외쳤 다. 제각기 다른 복장을 한 사람들의 맨 앞에는 산발을 한 묵양자가 부복해 있었다. "오랜만이오." 사마소군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초대하지 않은 사람도 네 명이나 따라왔는데, 우선 그들부 터 좀 처리해 주지 않겠소?" 말을 하며 사마소군은 송림 속에 숨어 있던 네 명의 그림자가 빠 른 속도로 달아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산발괴인 묵양자는 부복한 자세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대답을 한 그는 부복한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려 하 지 않고 있었다. 비단 묵양자뿐만이 아니었다. 묵양자의 뒤쪽에 일렬로 부복해 있 는 열다섯 명의 사람들 또한 말없이 부복해 있을 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자는 게지?' 사마소군은 두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네 명의 졸개가 살아서 달아나 이 사실을 백화맹에 알릴까 두려운 생각은 조금도 들지가 않았다. 그는 묵양자를 믿었다. 그가 이미 대답을 한 이상 어떤 방법으로 든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다만 그 방법이 궁금했을 뿐이다. 그의 추측은 적중되었다. 돌연 산 아래쪽으로부터 단말마의 비명 이 들려 왔다. "으악!" "아아아악!" 비명은 거의 동시에 들려 왔고 또한 짧은 순간에 들려 왔다가 이 내 끊어졌지만, 사마소군은 그 비명이 모두 네 사람의 입에서 발 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낭천에는 모두 구백의 무사들이 있습니다." 묵양자가 설명하듯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그 많은 제자들이 모두 올 수 없기에 다른 제자들은 산 아래쪽에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백화맹의 네 명은 낭천의 다른 제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말 이다. "어쨌든 수고했고……." 사마소군은 앉은 채로 말했다. "좀 편히 앉는 것이 어떻소?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엉덩이가 젖 을 것 같으면 서 있어도 좋고.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부르긴 했지 만, 따지고 보면 길게 설명할 것도 없는 부탁이오." "부탁이란 말은 당치 않습니다." 묵양자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낭천은 혈풍향 석공자님에 의하여 생겨난 것, 석공자님은 지금 계시지 않지만 낭천은 영원히 그분의 후인(後人)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낭천은 공자의 명 령을 기다립니다!" "고맙소." 사마소군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며 말했다. "나는 한 개의 동전을 가지고 있는데, 이 동전으로 천마사로(天魔 四老)를 찾고자 하오." 사마소군은 품속에서 천마철전(天魔鐵錢)을 꺼내며 계속 말을 이 었다. "천마철전이라고 불리는 이 동전을 천마사로에게 보이면 된다고 하였으나, 이 동전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기에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 탁본(拓本)을 떠서 나누어 주려고 하오." 말을 하며 사마소군은 붓으로 먹물을 찍어 동전에 묻힌 다음, 마 치 도장을 찍듯이 동전을 화선지에 찍었다. 사마소군의 앞에 수북이 쌓여 있는 화선지에는 동전의 앞면과 뒷 면이 나란히 찍혀지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찍혀진 화선지 뭉치를 묵양자에 게 건네 주며 말했다. "이것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 천마사로를 찾게 하시오. 천마사로를 찾아 천마철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찾고 있다고 전해 주시오." "천마사로는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답지 않은 질문을 하는구려." "죄송합니다. 단지 분명히 하는 의미에서 물어 본 것뿐입니다." "나는 그들이 단지 이 땅 어디엔가에 있다는 사실밖에 모르오. 그 러나 반드시 그들을 찾아야만 하오. 왜냐하면 백화맹주의 음모로 부터 무림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 을 들었기 때문이오." "알았습니다." 묵양자는 화선지를 받아 든 채 사마소군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 이며 말했다. "전 중원과 새외(塞外)와 남해(南海)와 이 땅 끝까지 뒤져서라도 반드시 천마사로를 찾아 공자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고맙소." 사마소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말했다. "그럼 가 보시오." "공자의 무운(武運)을 비옵니다!" 묵양자는 사마소군을 향해 다시 한 번 깊숙이 머리를 숙이고 난 후, 올 때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향해 번쩍 신형을 솟구쳤다. 휘이익－ 번쩍－! 묵양자가 신형을 솟구치자 다른 사람들도 동시에 신형을 솟구쳤으 며, 허공에 둥실 떠오른 그들의 신형은 공중에서 가볍게 방향을 바꾸어 산 아래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새(鳥)나 다름없군." 사마소군은 멀어져 가는 낭천의 제자들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 렸다. "저들이 있으면 백화맹과 싸울 때 얼마나 큰 힘이 될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번 싸움은 너무나 중요한 결전이라 만약 의 사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 제 34 장 마교출현(魔敎出現) ━━━━━━━━━━━━━━━━━━━━━━━━━━━━━━━━━━━ 십이 일(十二日) 황혼 무렵. 백화맹의 총단 안에는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 었다. 백화맹주 심목풍과 구파일방(九派日幇)과 일곡이장삼성(一谷二莊 三城)의 종주(宗主) 등, 백화맹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수뇌들이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백화맹주 심목풍조차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밖으로부터 번갈아 가며 백화맹의 수하들이 들어와 사무적이 면서도 공손한 어조로 보고를 마치곤 총총히 다시 밖으로 사라지 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천묘문과 천진문의 천오백 군사들이 동쪽 백오십 리(里) 지점을 통과, 매시각 일 리(里) 정도의 속도로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천사문과 천유문의 천이백 군사들이 서쪽 천불동 계곡을 한 시간 전에 통과했다고 합니다." "천자문과 천미문의 이천 군사들이 어젯밤 천검장과 구룡방을 멸 문시키고, 빠른 속도로 본맹(盟)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뢰옵니다! 천축문과 천인문의 군사 천팔백이 본맹의 북쪽 요충 지인 청원평(靑元坪)을 두 시진 전에 통과했다고 합니다!" 백화맹의 수하들이 차례로 들어와서 보고하는 내용은 모두 다 십 이문의 동태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는 정확하고 자세하 기 이를 데 없었다. 이들이 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어떻게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있 는 것일까? 또한 이들이 어떻게 한자리에 모여 앉아 있단 말인가? 이들의 표정이나 태도로 미루어 이들은 지금 사마소군이 이끄는 십이지문이 공격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없지 않은가? 수하들의 보고가 한 차례 끝나자, 심목풍이 얼굴에 엷은 미소까지 머금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적(敵)들은 지금까지만 해도 무려 오만이 넘는 인명(人命)을 무 참히 살상하고 진격해 오고 있는 중이외다. 그들은 사람이라 부를 수 없으리만큼 잔인하고 흉폭하기 이를 데 없소." "……."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어떠한 요구의 관철이 아니라, 전 무림(武 林)을 수중(手中)에 넣고 짓밟자는 의도인 것이오." "……." "적들의 수는 약 칠천, 그러나 모두 특수한 훈련을 거친 정예들이 라 숫자에 비해 월등한 공격력을 발휘하고 있소. 우리의 수가 그 들의 약 세 배에 달한다고 하나, 결코 방심하거나 태만해서는 안 될 것이오." 다른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모두 놀라운 사실들뿐이었 다. 십이지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도 불과 며칠 전이었다. 십이지문이 파죽지세로 백화맹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모든 무림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백화맹은 영원하다고 믿고 있 었다. 세상에서 백화맹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백화맹은 그들 자신이었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백화맹은 영원히 존재하여야만 한다. 백화맹에 대적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백화맹은 무림의 법이며 질서였다. 따라서 이에 반(反)하는 것은 모두 악(惡)이며, 존재할 가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이 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어 보니 십이지문이라는 것이 있 고, 그들이 무서운 파괴력을 앞세워 그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저 놀라운 것은 심목풍의 혜안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백화맹을 과신하고 태만에 빠져 있을 때, 정작 맹 주 자신은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 분석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 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람이 맹주로 있다는 것은 무림의 복이자 그들 자신의 복 이었다. 그들 모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소림장문(少林掌門) 원각선사는 합장(合掌)을 하며 나직이 불호를 외우고 난 후, 존경과 흠모의 시선으로 심목풍을 향했다. "맹주께선 무엇이든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빈승 등은 무림을 위 하여, 그리고 맹(盟)을 위하여 이 한 목숨을 아낌없이 바칠 각오 가 되어 있소이이다." 정파무림의 수뇌라 할 수 있는 원각선사가 합장을 하며 말하자, 지난 이백여 년 동안 사파(邪派)를 영도해 온 일곡이장삼성(一谷 二莊三城)의 여섯 종주들 중 만독성(萬毒城)의 성주 여불위가 두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소림과는 문로(門路)를 달리하는 우리들이기는 하나, 이번만큼은 원각선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오. 맹주께서는 명령을 내려 주시오. 맹주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내 목이라도 아낌없이 잘라 바치리다!" "고맙소. 고맙소, 여러분." 심목풍은 자리에서 일어나 중인들을 향해 포권을 해 보이고 난 후, 감격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마음 을 진정시킨 듯 잔잔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 우린 백화맹이 창립된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소. 그러 나 적들의 기세가 아무리 흉흉하다고 해도 아직까지 승산의 팔 할 이상은 우리에게 있소." "……." "첫째, 그들은 가히 짧다고는 할 수 없는 거리를 쉼없이 진격해 왔기 때문에 적지 않은 체력의 손실과 인명 피해를 입었을 것이 오. 또한 둘째로는 지난 며칠 간 내린 눈으로 인하여 적들은 음식 물 등 중요 보급물자에 대한 수송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오." 심목풍은 마치 십이지문에 대한 생황을 보고 오기라도 한 사람처 럼 자신있는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점은 백화맹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구파일방과 일곡이장삼성의 정예들이 모두 이 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며, 이러한 사실을 적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외 다." "……." "단지 적들이 우리의 실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심하고 이쪽 의 지세를 잘 이용해서 매복해 있기만 한다면, 길을 달려온 적들 을 우리는 가만히 기다려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외다." "무량수불……." 나직한 도호를 앞세우고 무당의 무우진인이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곳에 매복해 있어야 한단 말이외까?" "백화맹은 평지에 위치해 있으나, 백화맹의 주위에는 숲이 우거진 산들이 많이 있소." "그럼……?" "백화맹에 극히 일부의 무사들만을 남겨 놓고 인근의 산에 매복해 있다가 적들이 백화맹을 공격할 때에 그들의 배후를 포위하여 기 습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중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심목풍의 계책이 적중한다면 백화맹은 아주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중인들은 마치 벌써 승리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맹주!" 귀혼곡주(鬼魂谷主)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소리쳐 물었다. "적들이 이 곳에 당도하는 시기는 어느 날로 추정되고 있습니까?" "그건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외다. 그러나……." 심목풍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속도대로라면 십칠 일(十七日) 정오(正午)를 전후해 서 총공세를 취해 오리라고 예견되고 있소이다." "십칠 일?" 귀혼곡주는 두 주먹을 움켜쥐며 만면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 한꺼번에 싹 쓸어 버리게……." 어느 누구라도 세월을 빨리 지나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세월은 흐르는 것이 며, 그 날이 오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십칠 일은 앞으로 불과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십삼 일(十三日) 개봉. 고도(古都) 개봉은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 었다. 네 개의 대문(大門)과 네 개의 소문(小門)으로 구분되어져 있는 성문(城門)은 모두 활짝 열려져 있었고, 열린 성문으로는 이른 아 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개봉은 일찍이 상업이 발달한 곳일 뿐만 아니라, 천하제일대방(天 下第一大 )인 개방( )의 총단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성문을 통해 왕래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연 허리춤이나 등에 검 (劍)이나 도(刀)를 비껴 찬 무인(武人)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 었고, 상인이나 농민들 같은 범인(凡人)들도 다른 지역의 사람들 과는 달리 이러한 무인들의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고 있었 다. 성문에는 관하에서 파견되어 나온 군병(軍兵)들이 형식적인 검문 을 하고 있었으나,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어디에서 오느 냐? 무슨 일로 어디로 가느냐? 하고 묻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성들과 마찬가지로 개봉도 성문을 통해 드나드는 사람은 거 의 한정되어 있다시피 하기 때문에 상인이든 무인이든 파견되어 나온 지 오래 된 군병들에게는 거의가 서로 여러 번 얼굴을 부딪 쳐 본 면식인들이었다. 때문에, 성문을 지키는 군병에게 있어 하루의 일과란 지극히 따분 하고 판에 박은 듯이 반복되는 지루함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다. "아함……!" 곡우는 아침부터 늘어지게 하품을 해대며 들고 있는 창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의지한 채 한없이 길게 뻗어 있는 관도를 습관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하루가 또다시 시작되는군. 화끈하고 자 극적이면서도 무슨 충격적인 사건 같은 것 안 일어나나? 하다 못 해 화적 떼 같은 거라도 쳐들어오면 얼마나 좋아. 그러면 내가 커 다란 공을 세워 무장으로 발탁될 수도 있을 텐데……." 이 때였다. 졸린 눈으로 관도의 끝을 바라보고 있던 곡우는 갑자 기 잠이 싹 달아나는 것 같았다. "왔다!" 관도의 저 끝에서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 곡우는 기대와 흥분의 시선을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흙먼지를 향해 던졌다. "저렇게 빨리 말을 달려오는 놈들이라면 화적 떼가 분명해. 드디 어 공을 세울 때가 왔다. 흐흐흐, 화홍아! 그 동안 네가 나를 업 신여기고 허리 한 번 안지 못하게 했겠다? 이제 두고 보아라! 내 가 화적을 소탕하여 무장이 되고 나면 네가 감히 어떻게 나오나 두고 보겠다." 두두두두－! 흙먼지가 가까이 다가오고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디 말발굽 소리뿐이랴? 곡우는 이제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화적 떼의 얼굴 생김새며 팔다 리와 차고 있는 무기까지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곡우는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화적 떼가 눈앞으로 달려오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불만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겨우 열 명이잖아?" 그의 불만의 원인은 화적의 수가 너무 적다는 데에 있었다. "겨우 열 명을 잡아서야 어디 무장이 될 수 있겠나? 올려면 한 백 명쯤 와야 내가 공을 세울 것 아냐?" 지극히 불만스런 표정의 곡우 앞으로 드디어 화적 떼가 다가와 말 을 멈추었다. 화적들은 모두 검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무복의 상의 왼쪽 가슴에는 붉은 글자로 기분 나쁘게 <마 (魔)>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생긴 것도 영락없는 화적이군. 못생긴 것도 정도 문제지, 저렇게 생겨서야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저런 괴물을 낳아 놓 고도 그래도 미역국은 끓여 먹었겠지?' 성문 앞에서 말을 멈춘 화적들은 곡우를 발견하고 천천히 말을 몰 아 다가오고 있었다. 곡우는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화적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에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네놈들이 누군지는 알고 있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 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우리들이 누군지 알고 있다고?" "그렇다! 너희들은 화적이지?" "화적?" 곡우는 화적들이 서로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괜히 모골이 송연 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이 웃기 전에는 단지 흉악하게 생겼다고 느꼈을 뿐인데, 그들 이 웃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스산한 마기(魔氣)가 훅 하고 끼 쳐 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거, 평범한 화적들이 아닌 모양인데?' 곡우는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화적들은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서로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는 성루에 있는 군병들을 처리할 테니, 너희들은 성문을 통제 하라." 성루의 군병들을 처리하다니? 처리란 말이 설마 죽이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이보시오?" 두려움과 의혹의 표정으로 말을 붙이려던 곡우는 그만 입을 딱 벌 리고 말았다. 눈앞의 말에 앉았던 화적 한 명이 마치 날개라도 달 린 듯 앉은 자세 그대로 까마득히 높은 성루를 향해 날아 올라가 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휘이익－! "세, 세상에……?" 입을 딱 벌린 그 앞에서 다른 화적들은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성문을 닫았으며, 성문 앞에 미리 써 가 지고 온 방문을 붙이고 있었다. 방문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앞으로 나흘 간 성(城) 안의 모든 사람은 성 밖으로 나갈 수 없 다. 이를 어기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무엇 때문에 나갈 수 없는지 이유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심지어 는 서명(書名)도 없었다. "이것들 보시오! 이게 도대체 무슨 짓……!" "으아악!" "아악!" 말을 하던 곡우는 성루 위에서 들려 오는 처절한 비명을 듣고 그 만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투둑－! 두 개의 둥글고 피 묻은 물체가 그의 발 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와 절친한 동료인 장삼과 허문교의 수급, 그들의 얼굴 속에서 핏발 선 두 눈이 곡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곡우는 그 자리에 선 채 온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을 지키는 군병 중에서는 살아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자기 하나만 살아남아 있다고 생각되자 곡우는 너무나 두려 워서 아무것도 물어 볼 수가 없었고, 또한 아무것도 보기가 두려 웠다. 그는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내가 어째서 화적 떼가 오기를 바랐던가? 이는 모두 내가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천벌을 받아 일어난 것이다. 나의 잘못이다. 모두 내 잘못이다…….' 두 눈을 감은 그의 귀로 또다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두두두두－!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 한두 필이 아니었다. 일이백? 아니면 몇천? 곡우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살그머니 실눈을 떴다. 멀리서 관도를 가득 메우고 달려오는 인마들이 보였다.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가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었으며, 흙먼지 속을 달려오는 인마의 수는 적어도 수천에 이르는 것 같았다. 그제야 곡우는 아연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이들은 화적 떼가 아니다! 이들은 역도들이다! 황궁을 치고 제위 를 찬탈하려는 무리들이다! 아아, 황제여! 소인을 용서하소서! 소 인은 충성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막을 방도가 없는 것입 니다!' 성문에는 평소 그가 존경하던 고수 중의 고수, 개방의 제자들도 몇 명 있었는데 그들조차도 역도들을 발견하자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황급히 성 안으로 달아나 버리고 있었다. 역도의 무리들은 성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성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밖으로 나가야 하나? 내가 밖으로 나가려 한다면 이들이 나를 가만히 놔 줄까?' 고민을 하는 곡우의 시야에 한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얼굴, 이 얼굴을 보자 곡우는 돌연 머리가 멍청해지고 말았다. 심 지어는 두려움마저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주위에는 흙먼지가 뿌옇게 날리고 있건만 그녀의 얼굴에는 먼지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타지 않고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구름 속에서 달이 나타나듯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말을 하면 향내가 풀풀 날 것 같은 붉디붉은 입술. 가녀린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우아한 호선은 곡선미의 극치을 이루고 있었으며, 가볍게 앞뒤로 몸을 흔들며 걸어오는 자태는 흡 사 구름을 밟고 내려오는 월궁의 향아를 연상케 했다. 눈, 그녀의 신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뭐니뭐니해도 흑백이 분명하고 영롱하게 반짝이는 한 쌍의 큰 눈이었다.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이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곡우의 온몸에 찌르르 전율이 스쳐 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아예 넋을 잃어버렸던 곡우는 그러 나 이내 고개를 세차게 한 번 흔들며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개봉이 역도의 소굴로 변하는 것을 모르고 들어오려고 하다니! 역도의 무리들은 음탕하고 난잡하기 이를 데 없다고 들었는데… 잡히면 비참한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나는 목숨을 걸고 이 사실 을 알려 선녀와도 같은 저 소저를 구해야만 한다!' 비장한 각오를 하고 곡우는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아름다운 소저 를 향해 개봉성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소리쳐 외치려 하였 다. 이 때였다. 아름다운 소저가 그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이 는 것이 아닌가? 곡우는 너무 황홀해서 입도 열지 못했다. '난,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 생전에 저런 선녀의 미 소를 받을 줄이야!' 달콤하게 웃으며 선녀의 꽃잎 같은 입술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흘 려 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어째서 아직까지 죽이지 않았지? 성문을 지키는 군졸 은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죽이라는 나의 명령을 잊었단 말인가?" 황홀경에 빠져 있던 곡우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성루 위에서 공손한 음성이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고 있었다. "마종십문이 어찌 화검의 명령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우리 는 이 자를 잘 이용하면 성 안의 사람들에게 좋은 경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남겨 두었던 것뿐입니다." "경고라……?" 화검은 흑백이 분명한 큰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달콤한 미소를 머 금었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야." 그녀가 말했다. "이 자의 팔과 다리를 자른 후 성문 위에 매달아 성 안의 사람들 로 하여금 마종십문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여 우리의 명령에 거 역치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어." 말을 하는 그녀는 마침 곡우의 앞을 지나고 있었다.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한 것은 그녀가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얼굴에서 어떻게 이토록 잔인하고 끔찍한 말이 서슴없이 나올 수 있을까 의아해서였다. '그래, 악마는 언제나 선녀의 모습을 하고 세상에 내려온다고 했 어. 이 평범한 진리조차 악마의 미소에 흘려 까마득히 잊고 있었 다니… 곡우 너는 죽어도 싸다.' 선녀의 모습을 한 악마는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안으며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 왔다. 입을 맞추고 나서 그녀는 그의 귓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성문 위에서 좀 수고해 줘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달콤하게 속삭이고 난 그녀는 까르륵 웃으며 성 안으로 걸음을 옮 겨 놓고 있었다. 그녀가 해 준 입맞춤은 죽음의 입맞춤이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곡우는 입맞춤의 황홀함에 몸을 떨었다. 정말로… 그녀의 입에서는 향기로운 꽃내가 났다. 죽음처럼 진한 향내가……. 십삼 일 황혼 무렵. 개봉성주는 성부(城府)의 정청 안에서 피둥피둥 살찐 살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성부에는 모두 천여 명의 군사들이 주둔해 있었으나 그가 그토록 믿고 있었던 군사들은 갑자기 쳐들어온 불과 오십여 명의 흑의인 들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는 다섯 명이나 되는 자신의 직속 수하들을 아주 간단하게 처리해 버린 무서운 여자가 턱 버티고 서 있는 것 이다. 이들은 성부에서 살인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혈도만을 짚어 쓰러 뜨렸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개봉성주로 하여금 두려움 중에서도 한 가닥 희망 을 가슴에 품게 하고 있었다. "우린 역도들이 아니야." 다섯 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가볍게 해치워 버린 무서운 여자가 달 콤하게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건방진 계집, 혀끝이 짧은가?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 것이 아버지뻘이 되는 나에게 대뜸 반말이야.' 그러나 이 무서우면서도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 여자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생겼다. 두려워서 물음을 던져 놓고도 성주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에 자꾸만 그녀의 몸을 훔쳐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정말 늘씬하게 빠졌군. 통째로 삼켜도 비린내 하나 나 지 않겠어.' 무섭고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통째로 삼켜도 비린내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여자는 그가 앉은 자리에 한쪽 발을 턱 걸쳐 놓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린 무림인들인데, 긴요한 일로 나흘 동안만 성 전체를 통제해 야만 하겠어." "무림… 무림과 관(官)은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관례인 데." "우리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 그러나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 데, 어찌하겠어?" 성주는 힐끔힐끔 그녀의 허벅지를 훔쳐보느라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비린내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 데, 그녀가 다리를 들어올리자 그녀의 허벅지 깊숙한 곳까지 은밀 히 들여다보였다. 원래 호색인 성주는 그녀의 다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허벅지는 강력한 흡인력으로 그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 다. "꿀꺽……." 다리를 훔쳐보며 침을 삼키는 성주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여자는 유혹적으로 웃었다. "그저 당신이 조금만 협조해 준다면 무림과 관부(官府)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시켜 나갈 수 있을 거야." "내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요?" "성문에 우리가 써 붙힌 방(榜)이 있는데 그 방문에 당신의 직인 (職印)만 찍어 주면 되는 거야." 말을 하며 그녀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치마를 살짝 끌어당기고 있 었다. 치마 안으로부터 더운 살 내음이 훅 하고 얼굴에 끼쳐 왔다. 성주는 그 안에 단 한 번만 얼굴을 묻어 봤으면 죽어도 소원이 없 을 것 같았다.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가 고도의 섭혼술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 찍어 드리지요." "성 안에서는 지금 몇 군데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을 거야. 대수롭 지 않은 싸움이니까 성부에서는 상관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래 주겠어?" 그녀는 계속 하대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 는 달콤한 미소 때문에 오히려 애교를 부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이 들 정도였다. 성주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요." "그래야 나의 좋은 사람이지." 여자는 성주를 마치 아이 다루듯 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의 부탁을 들어 주었으니, 나도 당신에게 기회를 주지. 한 가 지 부탁만 말해 봐요. 내 들어 줄 테니." 그녀가 말을 하자 말자 성주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허벅다리를 어루만졌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석을 대하듯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그는 말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나와 함께 잠자리를……." 성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는 달콤하게 웃었다. "당신의 부탁을 들어 드리고 싶은데, 잠을 잘 시간이 없어. 그러 나 이 곳에서라도 좋으면 내 부탁을 들어 드리지." "좋… 좋소!" "그렇다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지금도 아까운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는데, 어서 나를 마음대로 해 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주는 헉 하고 거친 숨을 토해 내며 그녀의 치마 속에 얼굴을 처박았다. 다리를 벌리고 선 채, 그녀는 성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너무 부드럽게 하지 마. 난 어린애가 아니라구. 그리고 이런 일 은 거칠게, 미친 듯이 해야 제맛이 나는 법이야." 창 밖에선 황혼이 부끄럽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창 밖의 거리엔 그녀의 치마 속과도 같은 어둠이 한 점, 두 점 내 리고 있었다. 여자는 물론 화검이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싸움이라고 말했지만, 성 안에서는 지금 엄 청난 살육이 자행되고 있었다. 백화맹으로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개방의 수많은 제자들과 성 안에 머물러 있었던 무림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마종십문의 고수들은 객잔과 주루, 심지어는 민가들까지 샅샅이 뒤져 무림인들을 찾아 내 죽였고 거리는 온통 시체와 피로 흥건히 젖어 갔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날이 밝자, 개봉성 문 앞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마종십문의 고수들이 모여들었다. 개봉성의 여덟 개 문을 통하여 모여든 고수들은 각기 다른 열 개 의 깃발을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입고 있는 의복의 색은 모두 같았으나 그들의 가슴에 수놓아져 있 는 <마>자는 그들의 앞에서 휘날리고 있는 깃발의 색에 따라 모두 열 가지의 색으로 구분되어져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개봉성 문 앞에는 높은 대(臺)가 하나 만들어져 있 었고, 그 위에는 얇고 붉디붉은 입술을 가진 비정해 보이는 모습 의 사내가 서 있었다. 비검이었다. "지금부터 마종십문은 각 교(敎)와 교주(敎主)의 지시에 의하여 목표물을 향해 출발한다." 비검은 문주(門主)라 칭하지 않고 교주(敎主)라 칭했다. 이는 마종십문이 각기 다른 열 개의 문파가 합해진 것이 아니라, 마교(魔敎)라는 거대한 집단 아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천오, 천신, 천술, 천해 문파를 기습할 공격조가 특히 명심할 것 은 십칠 일 새벽 첫 닭이 울 때를 전후해서 공격하여야 하며 목표 지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린아이, 임신부, 노파, 그 누구를 막 론하고 단 한 사람도 살려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검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음성은 모든 사람 들의 귀에 똑같은 크기로 전해지고 있었다. 비검은 지극히 냉정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지금 곧 출발하라." 비검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교의 고수들은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 다. 그러나 움직이는 것은 극히 일부의 고수들뿐이었다. 열 개의 깃발은 아직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깃발을 중 심으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 또한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 떠나간 고수들은 천오, 천신, 천술, 천해, 이 네 문파를 기 습할 공격조뿐이었다. 그들이 공격할 대상은 무예가 뛰어나지 않은 상인, 정보, 연락 등 을 담당하고 있는 요원들이기 때문에 많은 고수들을 파견할 필요 가 없었던 것이다. 일부 고수들이 떠나간 후에도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대로 서 있 었다. 비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남아 있는 고수들도 어느 누구 하 나 입을 열지 않았다.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 있으면서 사람의 말소리 하나 들리 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광경일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이들에게는 이 침묵이 오히려 지극히 어울려 보이고 있었다. 마치 시체들이 늘어서 있듯 이들에겐 침묵만이 오히려 유일한 대 화인 것같이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서 있는 이들의 모습은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고 마 치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때였다. 맞은편 길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날씬한 허리를 하늘하 늘 흔들며 다가왔다. 화검이었다. 그녀는 마치 무덤가에 홀로 피어난 한 송이 장미 같았다. 무거운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 름다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비검에게 물었다. "우리는 언제 떠날 거지?" 비검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천주(天主)께서 명령을 내리실 때에." 천주, 마교의 교주(敎主)이자 석천능의 후예. 사마소군을 둘러싼 음모의 입안자(入案者)이자 칠인회의 일인(一 人), 그는 누구란 말인가? 그는 어디에 있으며, 또한 어떻게 명령을 내린단 말인가? ━━━━━━━━━━━━━━━━━━━━━━━━━━━━━━━━━━━ 제 35 장 마지막 포석(布石) ━━━━━━━━━━━━━━━━━━━━━━━━━━━━━━━━━━━ 해는 뜨고 또 진다. 꽃은 피었다가 지고, 겨울이 가면 또 봄이 온다. 어떻게 보면 끝없이 반복되는 똑같은 나날들. 그러나 어찌 오늘이 어제와 같으며, 내일 또한 오늘과 같다고 여 길 수 있으랴! 이 수많은 똑같은 나날 속에서 많은 사람이 태어났으며, 또한 죽 어 가고 있는 것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 나날들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점차 영화를 누 리게 되고, 또 어떠한 사람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운명은 바로 이 평범하고 단조로운 하루에 의 해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인간은 끝없이 노력해 온 것이며, 때로는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 투쟁하는 것 이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십사일, 거리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제 내린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또다시 함박눈이 내리니, 거리엔 아이들만이 기뻐서 날뛰고 있었다.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과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 조금 큰 아이들은 토끼를 잡겠다고 눈 덮인 산을 뛰어다니고, 형 과 함께 눈썰매를 지치는 아이들도 보인다. 사마소군은 농부의 옷차림을 한 채 아이들이 노는 것을 웃으면서 지켜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과자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처음엔 과자봉지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도 그의 곁에 오 지 않았으나 그가 계속 바보스러우리만치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자, 그 중 한 아이가 마침내 그에게 다가왔다. "과자 하나만 주세요." 사마소군은 웃으면서 봉지 안의 과자를 꺼내 주었다. 과자를 얻은 아이는 쪼르르 달려가 친구들에게 자랑을 한다. 그러 자 사마소군의 곁에는 다시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한두 명이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어 그에게 과자를 달라고 떼를 쓴다. 사마소군은 드디어 웃으며 말한다. "눈사람을 굴리며 누가 먼서 성(城)에까지 가나 시합할까? 진 사 람에게는 이 과자를 주고, 이긴 아이들한테는 더 좋은 과자를 사 주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그의 옷자락에 매달리며 큰 소 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아저씨는 우리 편을 하세요!" 아이들은 이렇게 마음씨 좋은 아저씨를 본 적이 없었다. 서로가 자기들 편으로 삼으려고 싸운다. 사마소군은 그 중 한 아이들 편이 되어 눈사람을 굴리기 시작했 다. 낙양성. "와아아아!" "아저씨, 비켜요!" 삼사십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크고 작은 눈사람을 굴리며 넓은 관 도를 온통 차지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관졸은 아이들의 외침을 듣고 얼른 길을 비켜 주며 끌끌 혀를 찼다. "쯧쯧, 다 큰 어른이 아이들과 어울려 저게 무슨 꼴이람?" 성문을 통해 드나드는 사람을 철저히 검문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그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눈사람을 굴리며 달려오던 아이들 속에는 그의 자식도 섞여 있었 기 때문이다. 성 안에 들어온 사마소군은 아이들에게 과자를 듬뿍 사서 똑같이 나누어 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심목풍은 위선자지. 위선자에겐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따르지 만 나름대로의 약점이 있게 마련이지. 그것은 바로 위선, 그 자체 야." 성 안의 경비는 그의 예상대로 허술했다.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기 위해서는 검문을 철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마소군은 백화맹의 코앞에 있는 객잔에 방(房)을 얻었음에도 불 구하고 호패조차 꺼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밤(夜). 모두가 잠이 든 깊은 밤에 사마소군은 백화맹을 나와 은밀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높은 무예를 수련한 고수들이 분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데, 어둠 속으로는 발자국 소리 하나 스며 나오지 않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고수들……." 객잔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며, 사마소군은 나직하게 중얼거렸 다. "내 예상이 맞았다. 백화맹의 중추세력은 모두 이 곳에 모여 있었 어. 이번에도 음모자는 나의 행동을 자세히 알고 있었던 거야." 십오 일 아침. 천진문주 진천하는 곡철화의 손에 들려 있는 비둘기를 보고 웃으 며 물었다. "대협, 웬 비둘기입니까?" 곡철화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눈이 쌓여 먹을 것이 없어 그러는지 이 놈이 내 품으로 뛰어들지 뭐요." "워낙 크고 두꺼워서 아마 소나무인 줄 알고 둥지를 지으려 한 것 이 아니구요?" "허헛… 그럴지도 모르겠군." 웃으면서 곡철화는 손에 들린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날아오른 비둘기는 곡철화의 머리 위에서 한 바퀴 원을 그리고 난 후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어릴 때 나는 눈을 무척이나 좋아했었소." 눈이 덮인 산길을 걸으며 사마소군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자란 곳은 남해(南海)라 일 년 내내 거의 눈을 볼 수 없고, 어쩌다 운 좋은 날 가끔 내리는 눈송이 하나 둘을 볼 수밖에 없어 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말꼬리를 길게 끌면서 사마소군은 자신과 나란히 걷고 있는 무정 쾌도 능한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며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능한비, 싸움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능한비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선(善)과 악(惡)의 필연적인 충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승부의 열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오." "많은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대답을 하기가 어려운 질 문입니다." "그렇소. 이 문제는 실로 대답을 하기가 어려운 질문이오. 그러나 나는 한 가지에 대해서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소." "……." "싸움은, 어떠한 싸움이라도… 승부는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난다는 사실이오." "……." "필요한 군사들을 모으고, 훈련을 시키고, 군비를 조달하고… 그 다음에 적과 자신을 저울질해 보면 싸우기 전에도 승부를 능히 예 측할 수 있는 것이오." "병법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소. 아마 싸움을 하는 인간들이 마지막까지 싸움을 하는 것 은 바로 이 전력외적(戰力外的)인 조건 때문일 것이오." 문득 능한비는 사마소군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외롭고 쓸쓸하다 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나 웃고 떠들고 장난기를 좋아하던 회주가 아니던가? 언제나 동심(童心) 속에서 뛰노는 아이같이 천진스런 이분을 이렇 게 외롭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능한비는 불현듯 사마소군을 꼭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애정 어린 연민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도 믿음 없이는 사용할 수가 없소." "회주!" "난… 우리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그 자가 나 의 형제들인 칠인회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소." "그, 그럴 리가……?" 능한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칠인회가 사마소군의 형제들이라 면 그에게 있어서는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장한별부에서 그는 그들의 성장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항상 관 여해 왔었다. 칠인회 전체에 대한 그의 애정은 보통 이상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속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고개를 젓는 그를 향해 사마소군은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언급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싸움에서 어쩌면 우리는 패할지도 모르오." "회주!" "이 상태로는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이번 싸움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선상에 놓 여져 있기 때문이오."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패하지 않습니다!" 사마소군은 소리치는 능한비를 향해 물처럼 고요한 시선을 던졌 다. 능한비는 여지껏 이토록 고요한 시선을 본 적이 없었다. 너무나 맑고 투명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시선이었다. "능한비, 이번 싸움에서 빠져 주시오." "……!" 능한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사마소군을 향해 부르짖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싸움이 위험하면 할수록 속하는 반드시 참 가할 것입니다!" "한비……." 사마소군은 걸음을 멈추며 능한비의 손을 잡았다. "다른 사람은 혹 믿을 수 없을지 몰라도, 나는 당신만은 믿고 있 소. 그래서 당신에게 보다 중요한 일을 맡기려는 것이오." "……!" "이번 싸움에서 만약 우리가 패하고 내가 죽게 된다면 무림은 아 마 지금보다 더욱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백화맹과 싸움을 하지만 이번 싸움의 승리는 아마 마교 (魔敎)가 차지하게 될 것이오." "마교……?" 능한비는 얼굴을 굳혔다. 그는 오랜 세월 석우생과 함께 생활해 왔었다. 자연 마교의 무서 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사마소군이 말했다. "자세히 말해 줄 여유는 없소. 한비, 당신은 뛰어난 무공의 소유 자이며 잠재능력 또한 무한하오. 이번 싸움에서 정파도 사파도 다 멸망하게 되면… 이는 나의 죄요." "……." "만약 이 땅에 마교천하(魔敎天下)가 도래하게 되면 당신이 나의 죄를 짊어지고 이 땅의 정의를 위해 싸워 주시오." "회주!" 사마소군은 품속에서 양피지로 된 책자를 꺼내 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석형님이 남기신 비급이오. 이 무공을 익히면 능히 이 임 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오." "안 됩니다!" 능한비는 사마소군의 발 앞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남으시려면 의당히 회주께서 남으셔야 합니다. 이 땅에서 회주를 제외하고 또 누가 마교를 막을 수 있으리요? 회주, 속하의 말을 들으소서!" 사마소군은 고개를 저었다. "심목풍은 나의 원수, 내 어찌 그를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 주겠 소. 또한 내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석천능의 후예가 절대로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오." "당신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이 무림을 음모로부터 구해 내시려는 겁니까?" "나는 그런 어려운 말은 모르오. 나는 다만 이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하려는 것뿐이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신의 쥐꼬리만한 선을 내세워 저만이 잘랐다고 소리쳐 대는데, 당신께서는 온몸을 내던져 무림을 구하 려 하시면서도 단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만 말하시니 세상에 이런 분이 어디에 또 있을까?" 능한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능한비는 당신을 주인으로 섬긴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사마소군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 이들이 아무도 모르게 장한별부의 고수들을 인솔하여 떠나 가시오. 그들에게 비급의 무공을 전수하여 일당백(一黨百)의 전사 (戰士)로 키우시오. 무림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길뿐이 오." "속하, 회주의 거룩하신 뜻을 따르겠습니다." 능한비는 사마소군을 향해 정성을 다해 절을 올렸다. "속하, 하직인사 드리옵니다. 부디 자중하소서!" "당신도 부디 몸조심하시오." 절을 올리고 난 능한비는 눈물이 가득한 시선으로 잠시 동안 말없 이 사마소군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이것이 이별이자 사별(死別)이 될지도 모른다. 능한비는 자신이 사마소군을 대신해서 죽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떠나갔다. 그가 떠나 간 것은 훗날 그 자신이 사마소군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목숨은 이미 사마소군의 것이므로. 십오 일 황혼 무렵. 눈이 그친 새파란 겨울의 하늘 위로 몇 마리의 산비둘기가 날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리가 개봉성의 성루 위에 사뿐히 내려앉고 있 었다. 성루 위의 비둘기는 다른 산비둘기와 똑같이 생겼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비둘기가 걸어간 뒤에 눈 위에 생겨난 발자국 에 이런 글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진(進)> 진(進), 이는 바로 나아가라는 뜻이니……. "드디어 천주께서 명령을 내리셨다." 비검은 차가운 얼굴에 비정한 미소를 띄우며 발바닥에 인장 같은 것을 붙이고 있을 비둘기를 향해 오른손 식지를 쭉 뻗었다. 슈우욱－! 한 줄기 지풍이 소리 없이 뻗어 나가 비둘기의 몸에 격중되었다. 폭죽처럼 온몸이 터지며 붉은 피와 내장 조각들을 파편처럼 퉁겨 내는 비둘기 아래에서 비검은 천주를 대신하여 명령을 내렸다. "마종십문의 제자들은 낙양을 향해 진격하라!" 드디어… 십칠 일! 낙양성 밖에는 십이지문(十二六門)의 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주축을 이루는 것은 팔개지문(八個六門). 다른 네 문파의 군사들은 그 동안 군량미를 운송해 준 자들과 연 락과 정보계통에 종사해 온 군사들이었다. 며칠 만에 다시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화기애애했다. 군사들의 사기 또한, 하늘을 찌를 듯했다. 천사문을 따라 진격해 온 공야치가 화옥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전쟁터가 훔칠 게 제일 많다던데, 그 동안 뭘 좀 훔쳤소?" 화옥이 대꾸했다. "막내의 말에 의하면 백화맹에는 무서운 고수들이 있다던데… 그 동안 너 같은 놈을 없애 버리지 않고 뭐 했나 모르겠다." "아마도 형이 무서워서 백화맹 안에 꼭꼭 숨어 있는 모양이오. 덕 분에 막내는 쓸데없이 우리만 고생시켰지만." "쓸데가 없기는?" 공야치가 나서지 않고 가만 있을 리가 없다. 금사충은 그 동안 공야치와 함께 전장을 누비고 다녀서 좀 정이 들었는지 공야치의 편을 들고 나섰다. "막내 덕분에 둘째 형과 떨어져 있었는데, 그 무슨 섭섭한 말을 하나? 우리가 둘째 형과 함께 있었다면 뭐 하나 남아 난 것이 있 었을 줄 알아?" 공야치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 둘째 형과 함께 있었다면 아마 닳아 빠진 신발 하나 남 아나지 않았을 거야. 우리가 그나마 신발이라도 신고 있는 것은, 그러니까 순전히 막내의 공이지. 이 때였다. 그들의 귀로 벼락 같은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이 놈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있어! 귀신들은 이런 놈들을 다 안 잡아 가고 뭐 하고 있나?" 공야치와 금사충 등은 돌아보지 않고도 그것이 곡철화의 음성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사충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지옥이 시끄러워질까 봐 두려운 모양이지 뭐." 공야치도 얼른 말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대형은 왜 안 잡아 가지?" 금사충이 다시 대답했다. "너무나 무거워서 끌고 가기 힘들까 봐." "이 자식들이!" 곡철화가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으려 하자, 금사충과 공야치는 얼 른 눈치를 채고 싹 피해 버렸다. 곡철화는 두 사람을 향해 눈을 부라리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 다. "그건 그렇고, 막내가 왜 이렇게 늦지? 혹, 무슨 일이 생긴 것 아 냐?" 곡철화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태 평스런 얼굴들이다. "네놈들은 막내가 늦는데도 걱정이 되지 않는단 말이……?" 화가 나서 말하는 곡철화의 배 밑에서 신경질적인 음성이 들려 온 것은 바로 이 때였다. "이거 시끄러워서 어디 서 있을 수가 있나. 대형, 좀 멀찌감치 떨 어져 있으면 어디 덧나오? 꼭 내 옆에 와서 떠들어야 속이 시원하 겠소?" "어? 너 언제 왔냐?" 사마소군이 대답했다. "방금 왔소." "그런데 왜 나는 보지 못했지?" "그렇게 떠들고 있으니 어디 내가 보이겠소? 원 대형씩이나 되어 서 떠드는 동생들을 조용히 타이르지는 못할망정 같이 떠들다니? 하늘이 부끄럽지도 않소?" "난, 나는… 조용히 시키고 있었는데……." "거기다가 거짓말까지?" 사마소군은 퉁명스레 말하고 난 후 도열해 있는 군사들을 향해 물 었다. "누가 제일 크게 떠들었소?" 그가 묻자, 군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곡대협입니다!" 낙양성은 아직도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둠 저 끝에서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멀리서 첫 닭이 우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 왔다. 사마소군은 도열해 있는 군사들을 말없이 둘러보다가 천천히 한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들려진 손을 내리면서 그는 힘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 다. "공격!" 두두두두－!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천의 군사들이 낙양성을 향해 말을 달려 들어갔다. 사마소군은 맨 앞에서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십이지문의 군사들이여! 나를 용서해 주오!' 오직 그만은 낙양성이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다. 지금 그들은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화맹의 함정에 빠 져드는 것이다. 사마소군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 게 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백화맹을 공격하는 것은 오히려 뒤에서 마교의 공격을 받 게 되어 견딜 수 없다! 백화맹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교 와 백화맹 모두를 밖에 두게 되어서 차라리 낫다!' 두두두두－! 낙양성 안으로 말을 달려 들어가며, 사마소군은 큰 소리로 외쳤 다. "우리는 도적 떼가 아니니,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 달아나려 하지 마라! 그저 집 안에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 다!" 성 밖, 구파일방의 정예들과 일곡이장삼성의 고수들은 낙양성 안 으로 물밀듯이 밀려 들어가는 십이지문의 군사들을 산 위에서 내 려다보고 있었다. 낙양성의 동쪽, 원각선사는 심목풍을 향해 존경이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맹주, 어서 명령을 내리소서!" 심목풍은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본 후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고개를 끄덕이고 난 그는 여표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신호를 보내라." "알았습니다." 심목풍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난 여표는 아직 어두움이 가 시지 않은 하늘로 하나의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슈우우욱－!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가는 불화살. 이것은 낙양성의 다른 방향에 위치한 고수들에 대한 신호일 뿐만 아니라, 여표가 자신의 천주에게 보내는 신호이기도 했다. 성의 서쪽. "곤륜(崑崙)의 제자들이여! 이 땅의 선(善)과 정의(正義)에 무모 한 반기(返旗)를 든 반도(返徒)들을 처단하라!" 둥－ 두둥－! 어디선가 전고(戰鼓)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소리에 발을 맞추어서 이제껏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곤륜의 천여 제자들이 일제히 말에 올랐다. 곤륜의 제자들이 마상에 오르자, 이번에는 화산파의 장문인이 격 앙된 어조로 소리쳤다. "화산의 제자들이여! 이 땅의 선을 수호하라!" 두두둥－! 또다시 울리는 북소리.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곤륜과 화산의 장문인들은 서로를 쳐다 보고 난 후 일제히 명령을 내렸다. "진격!" 두두두두－! 이천여 필의 말이 일제히 산 아래를 향해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 다. 말 위에는 각기 도검창편(刀劍槍鞭)으로 무장을 한 양파(兩派)의 고수들이 사기충천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렇다. 이번 싸움은 그들의 승리였다. 최소한 그들은 모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악!" "으아아악!" 백화맹 안으로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간 십이지문의 군사들은 즉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백화맹 안에는 극히 일부의 무사들, 그것도 잡일에 종사하는 최하 류의 무사들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내!" 곡철화가 말을 달리며 소리쳤다. "아무래도 놈들의 함정에 빠진 것 같다!" 사마소군은 담담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모두들 당황하지 말고 전열을 가다듬으시오! 적들의 말발굽 소리 가 들리오! 이제 곧 적들의 총공세가 있을 것이오!" 과연 사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후훗……." 공야치가 웃으면서 수중에 들고 있는 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난 또 멀리 달아난 줄 알고 매우 서운해하고 있었지 뭐야. 이토 록 성대한 환영식이 준비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지." 금사충이 말을 받았다. "성대한 환영식에는 그만한 답례가 있어야 되겠지?" 화옥이 대답했다. "그런 기본적인 예의 같은 것도 꼭 물어 보아야 안단 말인가? 나 를 따라오라! 내가 아주 정중한 예의를 가르쳐 줄 테니. 하하… …!" 고삐를 왼손으로 휘어잡은 그는 발뒤꿈치로 말의 배를 쿡 찍었다. 다음 순간, 그는 말과 함께 달려오는 적진을 향해 화살처럼 뛰쳐 나갔다. 무모하리만치 담대한 행동. 공야치가 웃으면서 서슴없이 그 뒤를 따랐다. "도둑의 예절이라… 머리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 배워 보 고 싶은데, 셋째 형은 어떠우?" 금사충은 이미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말을 달리며 그는 밝게 웃음을 머금은 채 대꾸했다. "우린 늘 다투기만 했는데 이번만큼은 마음이 맞는군. 어디 둘째 형의 예의를 배워 볼까?" 화옥은 이미 곤륜의 복장을 한 무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 다. 화옥의 목소리가 아침의 신선한 대기(大氣) 속으로 파고들었다. "잘 있었소, 친구들? 이 날이 오기를 오랜 세월 기다리고 기다려 왔소. 자, 내 인사를 받으시오!" 파아앗－! 화옥의 검술은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는데, 어느 새 곤륜제자 세 명의 목이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공야치가 화옥의 뒤를 바싹 따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둘째 형의 인사는 너무 길어. 내 인사를 들어 보지 그래. 어이, 친구들! 안녕하신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공야치의 옆을 스쳐 지나간 곤륜제자 두 명 이 피를 내뿜으며 말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화옥과 공야치, 금사충 등의 무예는 곤륜제자들에 비해 월등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수없이 많은 적들에 의해 겹겹이 포위되어 버 렸다. 천진문주 진천하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천진의 군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두두두두－! 진천하를 필두로 하여 앞으로 달려나가는 천여 필의 말. 천진문과 곤륜의 제자들 사이에는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혼전이 벌 어지고 있었다. 천진문의 고수들이 막강한 무예를 소유하고 있다면 곤륜과 화산의 제자들은 수적인 면에서 월등했다. 일 대 일(一對一)이라면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그들은 천진문의 군사 한 명에게 세 명, 네 명씩 달라붙고 있었다. 곤륜과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무림명가(武林名家)의 출신들이다. 내공의 기초가 탄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협공(協功)에도 능했 다. 쉽사리 어느 쪽의 우세를 예측할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다시 양 옆과 뒤쪽에서도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구파일방의 제자들과 일곡이장삼성의 고수들이 거의 동시에 들이 닥친 것이다. 두두두두두－! "와아!" "이 땅의 정의를 위해 반도들을 처단하라!" 사방을 가득 메우고 덮쳐 오는 적들! 애초부터 달아날 곳이 없는 싸움이었고, 달아날 생각도 할 수 없 는 싸움이었다. 그저 대가리가 터지도록 싸울 뿐. "정의? 훗……!" 백약빙이 얼굴 가득 차가운 미소를 떠올렸다. 이어, 그녀는 희고 고운 손에 한 자루의 비수를 뽑아 들더니 덮쳐 오는 적들을 향해 신형을 솟구쳤다. "오호호… 남자들은 모두 죽어야 해! 거룩한 척 입으로만 정의를 부르짖는 놈들은 더욱더!" 그녀의 손속은 원래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가 뛰어든 곳에서는 금세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 으며, 한 번 터져 나오기 시작한 비명 소리는 좀처럼 끊어지지 않 고 계속 이어졌다. 왜소한 체구의 불구자인 천자문주가 그녀가 뛰어든 곳을 힐끔 쳐 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랜 싸움이 될 것이다. 그녀로 하여금 진력을 아끼게 해야 해." 나직이 중얼거린 그는 백약빙이 있는 쪽으로 말을 달리며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했다. "천자문의 고수들이여! 위선과 교만으로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 자들에게 우리의 설움을 알게 해 줘라!" 두두두두－! 어디 천자문뿐이랴? 천축문의 군사들도, 천인문의 군사들도, 천미문과 천유문의 군사 들도 일제히 말을 타고 달려나갔다. 혼전! 걷잡을 수 없는 혼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아직 어느 쪽의 싸움에도 가세하지 않고 있었 다. 그는 말없는 시선으로 죽고 죽이는 살육의 전장을 훑어보고 있었 다. '심목풍, 백화맹주 심목풍은 어디에 있는가?' 문득 그의 시야로 한 사람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구파일방의 고수들 저 너머에 홀로 달려오는 인자한 표정의 중년 인. 희고 수려한 용모에 남을 압도하는 기상. 사마소군은 단번에 그가 자신이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온 천하를 상대로 위선의 모습을 지켜 나가자면 저러한 용모가 아 니라면 절대로 불가능할 테니까. "심목풍!" 그는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심목풍을 향해 소리쳤다. 언뜻 심목풍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사마장천의 아들 사마소군이 선친의 빚을 갚으러 왔다! 나의 검 을 받으라!" 크게 소리치며, 사마소군은 말 위에서 허공으로 신형을 뽑아 올렸 다. 파아앗－! 허공으로 솟아오른 그는 검을 앞세우고 곧바로 심목풍을 향해 짓 쳐 들어갔다. ━━━━━━━━━━━━━━━━━━━━━━━━━━━━━━━━━━━ 제 36 장 나타나는 기인(奇人)들 ━━━━━━━━━━━━━━━━━━━━━━━━━━━━━━━━━━━ 하루는 어느 새 또 어둠을 맞이하고 있었다. 밤(夜), 멀리 낙양성에서 아직도 끊임없이 비명 소리와 병장기 부 딪치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하늘엔 별 하나 뜨지 않았다. 마치 인간들의 잔혹한 살육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으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 속에서, 어둠은 피를 머금어 갈수록 더욱 짙어져 가 고 있는데, 돌연 흰 눈을 밟고 소리 없는 그림자들이 나타나기 시 작했다. 온몸에 죽음 같은 묵의(墨衣)를 걸치고, 왼쪽 가슴에는 십색(十 色)으로 <마(魔)>자를 새기고 있는 마교의 고수들이었다. 무리의 선두에는 비검과 화검이 서 있었고, 두 사람의 뒤로는 열 개의 깃발을 앞세운 마종십문의 고수들이 차례로 따르고 있었다. 비검은 멀리 낙양성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서 말없이 한 손을 들 었다. 짙은 어둠 속인데도 불구하고 마종십문의 고수들은 비검의 말없는 명령을 즉시 받아들이고 말을 멈추었다. 이들에게는 마치 말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화검은 달랐다. 그녀는 이러한 침묵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침묵보다는 말하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여자는 남자들에 비해 거의 선천적으로 말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 르지만 어쨌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첫번째 신호가 있은 지 벌써 한나절이 지났어. 이제 두 번째 신 호가 솟아오를 때도 되었는데……." "……." 그녀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교의 고수들은 마치 시체처럼 검은 옷을 입고 늘어선 채 오직 천주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성 안에서의 싸움은 거의 막(幕)을 내려가고 있었다.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그런 싸움이었다. 굳이 승자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죽음뿐일 것이다. 사방에는 오직 죽음만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시체, 시체들……. 시체들은 그 자신이 흘려 낸 피에 흥건히 젖어 있거나 심지어는 피 웅덩이에 둥둥 떠다니고 있기도 했으며, 살아 있는 사람 또한 그 자신과 타인의 피로 온통 몸을 적시고 있었다. "아아악!" 두 개의 화살을 옆구리와 가슴에 박은 채 백화맹의 당주 한 명을 힘겹게 해치우고 난 공야치는 시체더미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 덜거렸다. "막내가 무서운 놈이 있다더니, 그 말이 과연 맞군." 투덜거리면서 그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태까지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누가 살아남았고 누가 죽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이 때였다. 시체더미와 어둠을 헤치고 주위를 훑어 가던 그의 시 선이 아직도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흠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저들은……?" 두 사람, 땅과 하늘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접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 아무리 짙은 어둠 속이라 하지만 그는 이 두 사람이 누군지 단번 에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이 펼쳐 내는 무예는 그 자신도 여태껏 구경 한 번 못 해 본 상상을 초월하는 무예였기 때문이다. "과연 백화맹주다. 막내와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이고 있다니… …." 그는 심한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이, 오랜 싸 움으로 인하여 탈진하여 쓰러진 사람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백 화맹주와 사마소군의 대결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았다. "막내야, 이겨야 해!" 공야치는 자신이 싸우고 있기라도 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 쳤다. "이 따위 위선자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구!" 쿠쿠쿵－! 두 사람의 몸에서 펼쳐지는 무예는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 는 것이었다. 일 초 일 초가 펼쳐질 때마다 사람들은 넋을 잃었고, 비명과 신음 을 토해 냈으며, 또한 탄식을 금치 못했다. 심목풍의 몸이 빙글빙글 돌며 어두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입정한 고승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합장을 한 심목풍의 손바닥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눈부신 광 채가 사마소군을 향해 일직선으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오오, 저것은 소림의 달마비전(達魔秘傳)! 장문인만이 익힐 수 있는 항마금불(降魔金佛)이 아닌가? 저 초식이 어찌 맹주의 손에 의하여 펼쳐진단 말인가?" 원각선사는 의혹과 감탄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 자신도 항마금불의 일 초를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펼쳐 내는 위력은 지금 심목풍이 펼쳐 내는 일 초에 비하면 아주 미미 한 위력이었다. 항마금불의 일 초가 펼쳐지자, 사마소군도 태만할 수 없다는 듯 몸을 좌우로 바르게 이동시키며 두 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그의 두 손은 어느 새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저것은 소수귀랑의 소수무영장!" 쿠쿵－! 항마금불과 소수무영장이 부딪치자, 세찬 회오리가 일어났다. 중인들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쓰러진 시체들이 허공을 날았으며, 탈진하여 저항력을 상실한 사 람들의 몸도 세찬 바람에 날려 십 장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한 번 접장(接掌)을 한 두 사람은 이번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무수한 초식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탈정삼검!" "백보신권!" "혈견휴천혈선지!" "양의신검(兩意神劒)!" 사마소군의 몸에서 펼쳐지는 것은 대부분 장한별부의 무공이었고, 심목풍이 펼쳐 내는 무예는 구파일방의 비전절기들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무예가 아니야." "아미타불……."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있는데, 점입가경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사마소군이 돌연 백화맹의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서며 심목풍을 향해 외쳤다. "심목풍, 장난은 이제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싸우는 것이 어떨까?" 여태까지의 싸움이 장난이었다면 진짜 무예는 어떠한 것이란 말인 가? 심목풍은 맞은편 지붕 위에서 이미 싸움에 끝나 있는 장내를 천천 히 훑어보고 나서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좋다! 이제 내 정체가 밝혀질 때도 된 것 같으니……." 말꼬리를 길게 끌던 심목풍의 신형이 돌연, 또다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중인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심목풍을 주시했다. 본래의 정체라니? 맹주에게 또 무슨 정체가 있단 말인가? 의아한 시선을 하늘로 던지던 중인들은 갑자기 입을 딱 벌리고 말 았다. "아아, 저 무예는……." 보라! 심목풍의 일신에서 쏟아져 나오는 저 가공스러운 마기(魔 氣)를. "지옥수라마폭공(地獄修羅魔暴功)!" 촤아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천하를 뒤덮었다. 이것은 어둠이 아니었다. 차라리 암흑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또한 아무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의 암흑. 마치 이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경악하며 부르짖었다. "이건… 마교(魔敎)의 필살지예(必殺之藝)!" 필살지예! 반드시 살인을 하기 전에는 멈춰지지 않는 악마의 무예. 쿠쿠쿠－! 어둠! 암흑! 사람들은 온몸을 떨었다. 그랬던가? 오오, 백화맹주 심목풍이 정말로 마교의 후인이었단 말인가? 가공할 암흑의 마기는 사마소군을 덮치고 있었다. 아니, 사마소군 과 더불어 중인들 전체를 덮치고 있었다. 중인들은 자신의 온몸을 덮쳐 오고 있는 죽음을 보았다.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항거할 수 없는 미증유의 거력이었다. 그러나 이 때였다. 슈파앗－! 중인들은 보았다. 어둠을 가르고 환상처럼 솟아오른 유성 같은 광 채를! 밤길을 걷다 언뜻 쳐든 시선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별빛을 본 적이 있는지? 그렇다. 심목풍이 펼쳐 낸 무예가 광대무변한 암흑천지라면, 사마 소군이 펼쳐 낸 이 일 초의 무예는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는 한 줄 기 유성(流星)과도 같은 것이었다. 심목풍은 불현듯 가슴 언저리가 불로 달구듯 뜨거워지는 것을 느 꼈다. 태양을 안아 버렸다고 생각했다. 이, 이럴… 수가? 마교의 무공이 패배하다니?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땅에 똑바로 내려서야 한다고 생각했는 데, 신법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콰당－! 땅바닥에 처박히다시피 내려선 심목풍의 귀로 요란한 함성이 들려 오고 있었다. "와아아……!" "와아!"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사마소군이 보였다. 사마소군의 목소리가 먼 꿈결처럼 들려 왔다. "당신은 패했소." 심목풍은 웃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겨우 얼굴을 찡그렸을 뿐이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심목풍이 말했다. "나는 패했지만… 그렇다고 네가… 이긴 것도 아니다." 그는 말을 했지만, 이 음성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을 하며 쓰러지는 그의 몸을 더욱 커다란 함성이 파묻어 버렸기 때문이다. "와아아……!" "와아아!" 공야치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막내,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나의 의동생이란 사실이, 그 리고 네가 우리들의 회주란 사실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 중에는 아직껏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싸울 기력도 없었으며, 명분도 상실 해 버렸다. 그들은 이제껏 무엇을 했던가?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교 의 졸개 노릇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사마소군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이겼지만 심한 중상을 입은 듯 입으로 연신 피를 흘려 내고 있었다. "다쳤는가?" 공야치는 사마소군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으며 웃었다. "그러나 우린 이겼어. 오늘의 상처는 영광의 상처이며, 세월이 모 든 것을 치료해 줄 거야." 공야치는 웃었지만 사마소군은 웃지 않았다. 그는 싸움이 아직 끝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물었다. "다른 형들은……?" "글쎄?" 공야치가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자빠져 있겠지. 그러나 모두 무사할 거야. 백화맹의 졸개 따위가 어찌 감히 우리를 해칠 수 있겠어?" 이 때였다. 어둠 저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며 말했다. "넷째의 말은 틀림없어. 백화맹의 졸개 따위로는 그들을 해칠 수 없지." 걸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공야치는 반색을 했다. "대형, 무사하구려!" 곡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무사하지. 그러나 다른 형제들은 별로 무사하지가 못해." 공야치는 어리둥절했다. 곡철화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 다. 그가 곡철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 었다. "대형은 분명 조금 전에……." 곡철화가 웃으면서 공야치의 말을 끊었다. "나는 분명 백화맹의 졸개 따위로는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했지. 그러나 그들을 해친 것은 백화맹의 졸개가 아니야." "그럼……?" 곡철화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태연하게 말했다. "나… 바로 내가 그들을 죽였다." "대형, 대형이 왜 그들을……?"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부릅뜬 공야치의 옆에 서서 사마소군은 나 직이 탄식했다. "대형, 당신이 바로 석천능의 후예였소?" 슈우욱－! 하나의 불화살이 긴 꼬리를 그으며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은가?" 불화살을 보며 곡철화가 말했다. "이 땅에 마교천하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축하의 불꽃이네." "우리 칠 인 중에 한 명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당신일 줄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겠지?" "그렇소. 그러나 내게는 한 가지 믿음이 아직 남아 있소." 곡철화는 웃었다. "십이지문은 이미 거의 전멸했고, 칠인회도 이제 두 명만이 살아 남았을 뿐이다. 소군, 이 땅에서 너의 목숨을 구해 줄 사람은 이 제 아무도 없다." 사마소군도 웃었다. "어쩌면 나는 죽을지도 모르오." "어쩌면이 아니라 반드시다." "그러나 나는 죽어도, 이 땅에는 아직 선(善)이 남아 있소. 선한 사람이 남아 있는 한, 마교는 이 땅에서 영원히 배척받을 거요." "이제 곧 죽어야 할 사람하고 그런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다. 소 군, 오랜 세월 나는 이 날을 기다려 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소." 정말로 사마소군은 이 날을 기다려 왔다. 마침내 음모자는 밝혀졌다. 그러나 사마소군에게는 지금 닭 한 마 리 잡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능한비, 이제 나는 당신을 믿을 수밖에 없소! 내가 죽은 후에라 도 부디 이 땅의 선을 지켜 주시오!' 자신이 할 역할은 음모를 파헤치는 것에서 끝이 났다고 사마소군 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아주 담담한 심정으로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두두두－! 멀리서 어둠을 헤치고 마교의 고수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 다. 곡철화가 웃으면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소군, 너에 대한 마지막 호의로서 내가 직접 너를 죽여 주겠다." 곡철화의 오른손이 천천히 들려졌다. 사마소군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승산 없는 저항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은 저항이 아니라 반 항이 될 것이며, 죽음을 더욱 추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할일이 끝났으니, 깨끗하게 죽겠다. 사내답게!' "잘 가라, 나의 최후의 적이여!" 번쩍－! 곡철화의 손에서 눈부신 광채가 발해지더니 곧바로 사마소군의 가 슴을 향해 짓쳐 들어왔다. 죽음을 안고 곡철화의 일 초가 사마소군의 가슴에 격중되려는 순 간에 돌연, 외마디 절규가 눈부신 광채로 뛰어들었다. "안 돼!" 퍼억－! 눈앞에서 사마소군은 공야치의 몸이 벼락을 맞은 고목처럼 갈기갈 기 찢어지는 것을 보았다. 흡사 폭죽이 터지듯, 공야치의 육신이 허공에서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공야치의 수급을 보았다. 하늘 높은 곳으로 퉁겨져 올 라가는 공야치의 얼굴 속에서 그의 두 눈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 다. "소군, 너는 살아야 해! 네가 죽어 버리면 누가 우리의 복수를 해 주겠어?" 사마소군은 그 순간 모든 것을 잊고 공야치의 수급을 향해 달려갔 다. 있는 힘껏 달려가며 그는 소리쳐 불렀다. "넷째형!" 그렇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공야치는 그의 형이었다. 그 리고 그를 대신해서 죽었다. 그러나 똑같은 처지의 곡철화는 어찌하여 그의 가슴에 검을 겨누 는가? 사마소군은 공야치의 수급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미타불……."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악(惡)은 때로 선을 행하기도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선은 선(善)을 혼란케 하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화 (禍)를 불러일으킨다. 원각선사는 뼈저린 후회를 하고 있었지만 이제 모든 것을 돌이키 기에는 너무 때가 늦어 버렸다. 사방에서 마교의 고수들이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이 땅의 무 림이 멸망하는 순간이었다. "업보, 업보로다……." 연신 불호만을 터뜨리고 있는 원각선사의 앞에서 곡철화는 사마소 군을 향해 또다시 죽음의 초식을 펼쳐 내고 있었다. 슈우욱－! 일 초, 사마소군으로서는 이 일 초를 피할 능력이 없었다. 아니,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죽지 않았다. 갑자기 땅 속으로부터 하나의 거 센 강기( 氣)가 뻗어 나와 사마소군의 몸을 밀쳐 냈기 때문이다. 파파팍－! 사마소군이 있던 땅 속에서 갑자기 두 사람이 솟아 나왔다. "토행지술(土行之術)!" 곡철화는 안색을 굳혔다. 이런 류(流)의 무공은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전 문적인 살수(殺手)들만이 펼치는 인술(忍術)인 것이다. "아직도… 석가(石家)의 후손이 남겨 놓은 집단이 남아 있었던 가?" 땅 속에서 솟아 나온 산발괴인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던졌던 곡철 화는 이내 본래의 담담한 신색을 되찾으며 차갑게 소리쳤다. "불행 중 다행이군. 석가와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풀 한 포기도 남겨 놓지 않으려 하였는데… 제발로 나타나 주다니!" 땅 속에서 나타난 사람들은 묵양자를 비롯한 낭천의 고수들이었 다. "공자!" 묵양자가 사마소군을 등에 업으며 소리쳤다. "어서 이 곳을 빠져 나가야만 합니다!" "묵양자, 나는……." "용서하십시오. 공자를 위하여 혈도를 제압하겠습니다!" 묵양자는 사마소군의 혈도를 제압했다. 사마소군의 몸이 굳어져 있어야 등에 업고 활동하기가 좀더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파아앗－! 묵양자가 백화맹을 빠져 나가려 하자, 곡철화가 앞을 가로막고 나 섰다. "이왕 왔으면서 어째서 그냥 달아나려 하느냐?" 곡철화가 묵양자를 향해 다가가려고 하자, 또다시 땅 속에서 낭천 의 고수들이 툭툭 튀어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공자를 베려거든, 우리를 먼저 죽여야만 한다!" 번쩍－ 번쩍－! 땅 속에서 느닷없이 솟아 나온 수십 자루의 검은 곧바로 곡철화의 몸을 찔러 갔다. 낭천에 소속되어 있는 낭인무사들의 무공수준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공으로는 곡철화의 마공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땅 속에서 나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 곡철화가 다섯 손가락을 쫙 펼치자, 각기 다른 오색(五色)의 광체 가 소리 없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이건… 오행마공(五行魔功)!" 흠칫 놀라는 묵양자의 눈앞에서 낭천의 다섯 무사들은 손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피를 뿌리고 있었다. "낭천의 제자들은 목숨으로 공자를 보호하라!" 묵양자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마종십문의 고수들이 즐비한 적진 속으로 몸을 던졌다. 빠져 나가야만 한다! 어떻게 하든 공자를 구해 내야만 훗날을 도 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묵양자의 머릿속에는 이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뒤에서 곡철화가 따라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멈춰라!" 다섯 자루의 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내던져 다섯 자루의 검을 막았다. 푸확－! 뜨거운 피가 확 피어 올라 묵양자와 사마소군의 얼굴을 적셨다. 아아, 형제들이여! 사마소군은 비록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으나, 이 모든 것을 눈으 로 볼 수는 있었다. '오늘의 이 은혜를 내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사마소군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 었다. "이미 나의 손에 떨어진 이상, 그 누구도 달아날 생각을 말아야 한다!" 휘이익－! 곡철화는 묵양자의 머리를 가볍게 뛰어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 다. 묵양자를 가로막고 선 그의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 고, 그의 손에는 한 자루 비수가 들려져 있었다. 흡사 한 마리의 채색독사를 연상케 하는 예리한 비수는 푸르스름 한 광채를 독기(毒氣)처럼 뿜어 내고 있었다. 묵양자의 안색이 변했다. 낭천의 고수들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 들로서는 곡철화를 저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낭천의 무사들이 곡철화를 향해 몸을 던져 가고 있었다. "공자를 죽이려거든, 먼저 우리를 죽여야만 한다!" "형제들……." 묵양자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신형을 솟구치려 하였다 이 때였다. 휘리리릭－! 어두운 밤하늘로부터 갑자기 아홉 개의 등불이 현란하게 곡선을 그으며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홉 개의 등불은 곡철화의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마치 아홉 개의 귀화(鬼火)인 양 허공에 멈추어 섰다. 곡철화의 안색이 비로소 가볍게 변했다. "이것은 구루마등……."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어둠 속을 향해 말했다. "한세마희께서 오셨으면 내 영접하리다. 어서 나오시지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둠 속에서 커다란 공 같은 것 이 소리 없이 굴러와 곡철화의 앞에 멈추었다. 구르는 것이 멈춘 후에야 곡철화는 그것이 짧은 단삼을 입은 뚱뚱 한 체구의 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곡철화는 차가운 표정 위에 은은한 살기를 머금고 다시 입을 열었 다. "한세마희에 이번에는 독심괴의라? 소군은 의외로 좋은 조력자를 많이 거느리고 있군. 어디 또 없소? 소군을 돕고 싶은 자가 있으 면 이번 기회에 모두 나오시지!" 곡철화는 몹시 분노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화가 날수 록 오히려 더욱더 냉정해지고 있었다. 곡철화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하나의 가냘픈 인영이 허 공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나오라니, 나갈 수밖에……." 옥같이 고운 음성, 그러나 나타난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지극히 추악하게 생긴 흑의여인 옆에 온몸에 누더기를 걸친 파계 승이 소리 없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소수귀랑에 광치화상이라……." 곡철화는 손에 든 비수를 만지작거리며 차갑게 웃었다. "나는 이번에야 사람다운 사람들을 만난 것 같군." 묵양자도, 그리고 사마소군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의아해하는 두 사람의 귀로 한세마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가야, 묵양자가 너를 천마사로에게 데려다 줄 것이다." 아아, 천마사로! 사마소군은 그제야 이들이 천마사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천마철전을 가지고 있는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온 것이구 나. 그런데 어찌하여 천마사로는 직접 오지 않았단 말인가?' 의아해하기는 묵양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록 천마사로를 찾았지만 그로부터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었 던 것이다. "ㅋㅋ……!" 독심괴의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려 내며 사마소군을 향해 말했다. "어서 떠나라! 우리들도 마교의 무공을 당해낼 수는 없다. 단지 그를 조금 지체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선배님들……." 묵양자가 감격해하며 말하려 하자, 이번에는 소수귀랑이 차갑게 소리쳤다. "어서 꺼져! 귀찮게 하지 말고!" 묵양자는 네 명의 기인(奇人)들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신형을 솟구 쳤다. 사마소군을 업은 그의 주위에는 낭천의 무사들이 그림자처럼 따르 고 있었다. ━━━━━━━━━━━━━━━━━━━━━━━━━━━━━━━━━━━ 제 37 장 종장(終章) ━━━━━━━━━━━━━━━━━━━━━━━━━━━━━━━━━━━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무림혈사록이 낙양살겁(洛陽殺劫)이라 명명(名名)한 십칠일의 무 림대전(武林大戰)도 이제는 일 년 전의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백화맹! 불과 일 년 전에는 그토록 명예롭게 거론되던 이 이름도 이제는 한낱 수치스런 이름이 되어 버린 것은 세월의 무상함 때문일까? 어쨌거나… 과거는 변함이 없고, 변하는 것은 언제나 세상뿐. 그렇다. 세상은 이미 변했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이제는 소림을 일컬어 무림의 북두(北斗)라 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백화맹이란 이름조차 기억하기를 꺼려했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만 마교(魔敎)라는 두려운 이름뿐 이다. 마교, 이 이름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모든 것이 변 했다. 선(善)과 정(正), 바르고 착한 기운들은 모두 땅 속으로 매장되었 다. 폭력이 용기가 되고 간사한 것이 지혜가 되며 살생(殺生), 투도 (偸盜), 사음(邪淫)이 도덕이 되어 버린 시대! 무림 전체가 하나의 지옥이 되어 버린 듯, 그 어느 곳에서도 선 (善)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변해 버린 무림의 강남(江南)과 북(北)에 하나의 거대한 대전(大殿)이 세워졌다. 이름하여 만마대전(萬魔大殿)! 만마대전은 무림을 통치하기 위한 기구였다. 이 안에서는 무림에 대한 모든 것이 판단되어지고 결정되어진다. 만마대전 안에서 결정된 사항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오랜 세월, 무림의 기인으로 불려지던 무림명숙의 생사(生死)도, 한 문파의 존폐도, 모두 만마대전 안에서 결정되어졌다. 어느 누구든, 어떠한 문파든, 만마대전에서 죽으라고 명령하면 죽 어야만 했다. 만마대전에서 결정되어지는 것은 곧 무림의 법이었다. 그리고 만 마대전에서의 결정권은 만마대제 곡철화가 지니고 있었다. 만마대제(萬魔大帝)! 그렇다. 그는 모든 인간 위에 홀로 군림하는 마(魔)의 제황(帝皇)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그만한 권한이 생겼다는 것이지, 그가 결코 신(神)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지배하는 무림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그에게도, 하늘에 오 를 만한 부와 권세와 무공을 지니고 있는 그에게도, 믿을 수 없게 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능한비, 이 놈!" 만마대전의 호화로운 처소에서도 그는 언제나 분노에 차 있었다. 정말이지 그는 능한비 정도의 위인이 이토록 자신을 귀찮게 할 줄 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는 능한비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었 고, 그가 무림의혈단(武林義血團)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였다는 정 보를 입수하였을 때는 비웃기까지 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없애 버릴 수 있는 하찮은 존재로밖에 생 각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하찮은 존재가 사사건건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로 하여금 잠자리에조차 편히 들지 못하게 하 고 있는 것이다. 변방의 지부(支府)를 습격하는가 하면, 공금 수송마차를 공격하여 지부의 일 년치 예산을 통째로 강탈해 가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그가 잠자고 있는 만마대전을 향해 수백 발 의 화살을 한꺼번에 쏘아 대고 달아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능한비를 잡을 수 없었다. 무림의혈단의 위치조차 알아 낼 수 없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되어 있었고, 어떠한 경우에도 정면 으로 맞서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보여야 잡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능한비, 네놈만큼은 내 친히 가죽을 벗겨 죽이고야 말리라!" 무림의 황제라 일컬어지는 만마대제 곡철화의 단 하나 소망은 바 로 이것이었다. 능한비를 자신의 손으로 잡아 죽이는 것! 십일월 십칠일 낙양.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백화맹이 멸문을 한 지금, 낙양은 그저 평범한 하나의 고을에 지 나지 않았다. 아니, 백화맹의 지부가 있던 곳에 만마대전의 지부(支府)가 세워 진 이후로는 낙양을 찾아오던 시인묵객들의 발길조차 뚝 끊어져 거리는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텅 빈 거리로 죽립(竹笠)을 깊이 눌러 쓴 한 사람의 폐포인이 들 어서고 있었다. 얇고 해진 옷 사이로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고 있는데, 홀 로 낙양성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폐포인의 모습에선 추위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이라 성 안도 성 밖과 마찬가지로 한산하기 이를 데 없 는데, 폐포인은 천천히 걸어 들어와 만마대전의 낙양성 지부로 향 하고 있었다. 여아(女兒). 이 여아는 정신 없이 두들겨맞고 있었다. "이년, 이년!" 낙양반점이라고 쓰여져 있는 초라한 반점이었다. 반점의 주인 겸 주방장 정도로 보이는 흉악한 표정의 뚱뚱한 중년 여인, 그리고 그 손길 아래 땅을 뒹굴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칠팔 세 가량의 여자아이. 폐포인은 지나던 걸음을 멈추고 죽립을 치켜들었다. 죽립 안에서 드러난 얼굴은 맑고도 투명했다. 그것은 마치 득도(得道)한 고승(高僧)에게서나 볼 수 있는 무아 (無我)의 표정이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아직 어린아이인데, 행동이 좀 지나치시구려." 원래 흉폭한 성격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거꾸로 곤두세우며 무슨 말인가를 내뱉으려다가 폐 포인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찔끔하는 표정으로 어조를 급선회 시켰다. "과객(過客)은 집안 일에 참견하지 마시구려. 이 종년은 물을 길 어 오라는데, 앉아 장난을 치고 있던 년이오. 망할 년!" 여인은 떨고 있는 여아를 다시 후려칠 자세를 취했다. 이 때였다. 그녀의 앞으로 돌연 어린아이 주먹만한 금덩이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 순간, 여인은 흠칫하는 표정으로 폐포인을 쳐다보았다. "과객께선……?" "그 아이를 내가 데려가도 되겠소?" 이 정도의 금덩이라면 여인은 자신의 남편까지도 팔아치울 여인이 었다. 그녀는 행여 빼앗길세라 얼른 금덩이를 집어 들더니 입이 귀밑까 지 찢어져라 대답했다. "아이쿠! 되, 되고 말고요!" 폐포인은 물어 볼 것도 없다는 듯 떨고 있는 여자의 몸을 번쩍 안 아 들었다. "네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 "작년 겨울에 돌아가셨어요." "안됐구나." "아버지께선 백화맹의 무사이셨어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사람들 은 모두 저를 싫어해요." 폐포인의 몸이 흠칫 그 자리에 멈춰졌다. 언뜻 그의 눈에 암울한 음영(陰影)이 드리워졌다. '이것도… 업보(業報)련가?' "뭐라고?" 만마대전의 낙양성 지부의 수문위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앞에 있는 이 한심한 작자를 쳐다보았다. 누더기나 다를 바 없는 허름한 폐포를 걸치고, 역시 거지나 다름 없는 꾀죄죄한 어린 계집아이를 안고 있는 죽립인. 그의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 최상급의 죽엽청(竹葉靑)이 한 병 들 려 있는데……. "나보고 이 안으로 잠깐만 들어가게 해 달라는 말을 진정 말이라 고 씹어 뱉는 거냐?"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올 지경이었다. 어린아이부터 노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두려워하는 만마대전 의 지부였다. 차라리 감옥에는 갈지언정 가지 않으려 하는 곳이 바로 이 곳이 아닌가? 그런데 이 한심 무지막지한 작자는 지금 지부 안으로 좀 들어가자 는 것이다. "이 자식, 이거 미친 놈 아냐?" 수문위사가 삿대질을 하며 묻자, 폐포인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 다가 지부 안으로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수문위사였다. "이 놈, 안 서! 이게 누구 죽는 꼴을 보려고!" 폐포인을 가로막던 그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온몸이 돌처럼 굳어져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꼭 필요한 살인이 아니라면… 더 이상 살인은 하고 싶지 않은 사 람이오."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폐포인은 느릿한 걸음으로 지부 안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반시진 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던 지부의 무사들은 연무장 한가운데서 타오르고 있는 몇 자루의 향(香)을 볼 수 있었 다. 은은한 향기를 피어 내고 있는 향 앞에는 한 병의 죽엽청이 놓여 있었고, 땅에는 이런 글이 쓰여져 있었다. "은인들이여, 나를 용서해 주오!" 이 때 폐포인은 여아를 안고 성문을 나서고 있었다. 여아가 그를 향해 묻고 있었다. "아저씨, 왜 거기다가 향을 피운 거야?" "많은 사람이 죽었거든." "우리 아버지도 그 곳에서 죽었다는데……." "큰 싸움이 벌어졌었으니까." "어른들은 왜 싸우는 거야?" "어리석기 때문이지." "어리석어?" "그렇단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도 있고 아주 악한 사람도 있지만, 사실 착하거나 악한 사람은 별로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착하지 도 않고 악하지도 않단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평범한 사람들은 악한 사람을 만나면 악해지고, 선한 사람을 만 나면 또한 선해지지. 세상이 잘못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 야." "그럼 누구의 잘못인데?" "아주 악한 사람, 한두 명. 그들이 세상 전체를 악하게 만드는 거 지." "아주 나쁜 사람이네?" "그래, 그들이야말로 정말로 죽어야 할 사람들이지. 다른 사람들 은 그들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거야." "아저씨가 그 사람들 좀 때려 줘" "그래, 아저씨는 바로 그 사람을 혼내 주러 왔단다!" 두 사람의 음성은 두 사람의 모습과 더불어 점차 멀어져 갔다. 하늘은 계속해서 흰 눈을 펑펑 쏟아 내고 있었다. <무림의혈단의 주력(主力) 발견, 현재 대별산(大別山)에서 낙양방 면으로 이동 중.> "하하핫……!" 곡철화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소리쳤다. "능한비, 드디어 네놈도 내가 쳐 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구나!" 그는 벌떡 일어나 검을 허리에 둘렀다. "출정 준비를 하라! 지금 낙양으로 가겠다!" 반시진 후, 사람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만마대전의 산문이 활짝 열리고, 그 안으로부터 수천의 군사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하늘을 온통 뒤덮는 흙먼지. 사람들은 끌끌 혀를 찼다. "이번에는 또 어느 의인(義人)을 죽이려고……." 두두두두－! 그들은 쫓기고 있었다. 수는 약 백여 명. 더러는 말을 타고 더러는 경신술을 펼치고 있었지만, 사람도 말도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하늘이여!" 쫓기는 무리의 맨 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능한비였다. 그렇다. 이들은 무림의혈단이었다. 사마소군의 명령을 받은 능한비가 장한별부의 고수들과 구파일방 의 고수들 중 뜻있는 사람들을 규합해서 결성한 지하조직인 것이 다. "만마대전의 최고고수들인 비검과 화검, 심지어는 곡철화까지 직 접 나설 줄이야!" 쫓기는 그의 표정은 암울했다. 비급의 무공을 모두 익혔건만 그 무예로는 이들 세 고수를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이들 세 고수가 있는 곳의 기습은 기피해 왔 었다.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모두 살해된다면 다시 는 이 땅에서 만마대전에 항거하는 무리들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는 불행히도 이들 세 사람 모두와 정면으로 마주 치고 만 것이다. 뒤에서 곡철화의 음성이 들려 오고 있었다. "능한비! 그래도 우리는 장한별부에서 함께 지낸 옛친구인데, 함 께 술 한 잔을 나누지는 못할망정 보자마자 달아나서야 어디 예의 라 할 수 있겠소?" 곡철화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사실, 그는 이미 능한비를 눈앞에 둔 이상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수가 있었다. 그가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은 능한비를 좀더 괴롭게 만들기 위해 서였다. 능한비도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놈은 지금 우리를 사냥하고 있다! 우리를 지치게 하고 끝없는 절 망으로 몰아넣은 후에 서서히 죽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달아났다. "만약 꼭 죽어야만 한다면 회주께서 돌아가신 그 자리에서 죽고 싶다! 백화맹이 있던 그 영광된 자리에서!" 그러나 곡철화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능한비가 달아나는 방향을 보고 그는 곧 능한비의 생각을 알아 냈다. "나는 네놈에게 죽음에 있어 그 어떠한 만족감이라도 안겨 주지 않겠다!" 차가운 웃음을 머금은 채 그는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냥을 시작하라!" 만마대전에서 그가 이끌고 온 고수의 수는 무려 삼천여 명. 소수 의 무림의혈단이 그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슈슈슉－! 짐승을 쫓듯, 만마대전의 수하들은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무림의혈단의 고수들은 그들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으악!" "아아악!" 무림의혈단의 고수들은 하나 둘씩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능한비는 이를 악물었다. "놈들은 우리를 단번에 몰살시킬 수 있는데도 일부러 멀찌감치 쫓 아오며 활을 쏘아 대고 있다!" 자신이 사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할 수 없이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슈욱－ 팍－! "으악!" 바로 옆에서 달리던 동료 한 명이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화살에 등이 꿰뚫린 채 쓰러지고 있었다. '낙양까지 달아날 수는 없다! 놈들은 분명 그 전에 우리를 죽일 것이다!' 능한비는 돌연, 달아나는 것을 멈추었다. '어차피 그 곳까지 갈 수 없는 것이라면 이 곳에서 죽겠다! 놈들 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그가 멈추자, 무림의혈단의 다른 고수들도 달아나는 것을 멈추었 다. 심지어는 곡철화까지 말을 멈추었다. 곡철화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떨올랐다. "이제야 달리는 것에 싫증이라도 났나?" 능한비는 곡철화를 쏘아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달리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지." "무슨 일이지?" 곡철화의 얼굴에 비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능한비는 짧게 대꾸했다. "사람 같지 않은 놈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 "나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군." "난 바로 너를 죽이겠다는 거다!" "그래? 그거 유감이군. 나는 너를 말하고 있었는데." "길고 짧은 것은 대어 보아야 알겠지." "그건 너같이 미련한 놈들일 경우에나 해당되는 말이고, 나같이 현명한 사람은 대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능한비, 너는 바로 이 곳에서 죽는다! 나의 손에 의하여." 능한비는 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의 검을 빼어 들며 대부분 중상을 입고 있는 무림의혈단 의 고수들을 향해 외쳤다. "의인들이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자!" 말을 하면서 그의 몸은 이미 검과 함께 앞으로 쏘아져 나가고 있 었다. 이 때였다. 한 소리 나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저씨, 여기서도 어른들이 싸우고 있어. 이 사람들 모두 어리석 은 사람들이야?" 언제 나타났을까? 길 한쪽 옆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 어왔다. 낡은 폐포를 걸치고 어린 여자아이를 가슴에 안고 서 있는 죽립 인. 죽립인을 보는 순간, 능한비는 그 모습이 왠지 눈에 몹시 익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보았을까?' 죽립인이 담담한 음성으로 여자아이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래, 이들도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란다. 아저씨가 말했던 아 주 나쁜 사람도 한 사람 섞여 있고……." "누구야, 나쁜 사람이?" 죽립인은 손가락으로 곡철화를 가리켰다. "바로 저 사람. 저 사람만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머지않아 세상은 다시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래 도 악한 것보다는 선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비검의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하는 놈이 여기 하나 더 있군." 나직이 중얼거리고 난 그는 수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비검의 명령을 받은 수하 열 명이 즉시 검을 들고 몸을 날려 왔 다. 죽립인은 그러나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자아이를 향해 말하 고 있었다. "잠깐 동안 눈을 감고 있어라." "왜?" "이 아저씨에게 할 일이 생겼는데,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 기 때문이란다." "아저씨 말이라면 뭐든지 들을 거야." 죽립인의 가슴에 안겨 있는 여자아이는 두 눈을 꼭 감고도 모자라 앙증맞은 두 손으로 두 눈을 감쌌다. "이제 됐어?" 죽립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느릿하게 몸을 돌리고 있었다. "착하구나." 그러나 몸을 돌리는 순간에 이미 열 자루의 검은 무서운 속도로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파파파팍－! 능한비는 탄식을 토해 냈다. "애꿎은 사람이 헛되이 목숨을 잃는구나!" 중얼거리던 그는 돌연 눈을 부릅떴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검을 맞은 죽립인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데, 오히려 검을 휘 두른 열 명의 고수가 맥없이 땅바닥에 쓰러지고 있는 것이 아닌 가? 그는 죽립인이 무슨 방법으로 이들을 쓰러뜨렸는지 보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열 명의 고수는 땅에 쓰러졌고, 죽립인은 여전 히 느릿한 동작으로 만마대전의 고수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 이다. "알고 보니, 믿는 구석이 있었군!" 비검은 나직이 말하고 난 후, 이번에는 직접 검을 뽑아 들었다. "모두 덤벼라!" 명령이 떨어지자, 만마대전의 고수들은 일제히 죽립인을 향해 덮 쳐 들었다. 두두두두－! 무려 삼천. 달리는 말발굽에 밟히기만 해도 시체조차 건지기 어렵다. 그러나 폐포의 죽립인은 여전히 어린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달려 오는 적들을 향해 태연히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죽립인이 말하고 있었다. "아이야, 나를 위해서 열을 헤아려 주겠니?" "응!" 일순, 화살 같은 장력들이 죽립인의 전신을 노리고 쏘아왔다. 슈슈슉－! 그러나 죽립인은 그 모습을 일견했을 뿐,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무수한 장력들과 죽립인의 몸은 정면으로 마주쳤다. 꽈꽝－! 폭음이 일고, 뿌연 흙먼지가 하늘까지 피워 올랐다. 거센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능한비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보라!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보이는 것은 여전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죽립인의 모습이 아닌가? 장력을 쏟아 낸 고수들의 몸이 오히려 산지사방으로 퉁겨져 나가 고 있었다. "으악!" "아아악!" 처참한 비명 소리 속에서 여자아이가 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하나……." 수십 명의 고수들이 이번에는 검을 앞세우고 맹렬히 덮쳐 들었다. 언뜻 죽립인의 한 손이 들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간단한 동작 하나에 만마대전의 고수들은 일제히 피를 뿌리며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쿠쿠쿵－! "으악!" "아아악!" 비명 소리 속에서도 수를 헤아리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기이하리 만치 선명하게 들려 오고 있었다. "둘……." "으악!" "셋……." 꽈꽝－! "아아아악－!" 능한비는 눈을 부릅떴다. "고, 고수……!" 그는 이런 무예를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의 능력으로 이런 무예를 펼쳐 낼 수 있다고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 이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으며,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아이가 수를 하나 헤아릴 때마다 만마대전의 고수들은 열 명, 백 명씩 무더기로 죽어 갔다. 그리고……. "열! 아저씨, 다 헤아렸어. 이제 눈을 떠도 돼?" 열을 다 헤아린 아이가 천진스럽게 묻고 있을 때, 앞에는 그 많던 만마대전의 고수들이 한 명도 서 있는 자가 없었다. 남아 있는 사람은 오직 곡철화 한 명뿐. 곡철화의 표정은 담담했다. 너무나 담담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 는지 아무도 추측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수하들이 모두 다 죽을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 아 있었던 것이다. 곡철화는 자신의 수하들이 다 죽은 후에야 느릿하게 말 위에서 내 려오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죽립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서며 그는 말을 이었다. "살아 있으리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정작 이렇게 만나고 보 니 그래도 여전히 뜻밖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건 아마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서였겠지." 곡철화는 웃었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만약 나의 적이 있다면… 그건 오직 너뿐 이란 사실을 어느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 지." 능한비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저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는 사이란 말인가? 곡철화가 말했다. "더 이상 말은 필요가 없겠지?" "물론……." 곡철화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죽기에는 아주 좋은 날이군." 말을 하며, 그는 허리의 검을 풀어 땅에 내려놓았다. "진정한 고수를 상대하기에는 검 같은 것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 검을 땅에 내려놓은 그는 품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 들었 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두 사람, 서로를 마주하고 선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는가 싶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신형을 솟구쳤다. "타앗!" "하아!" 하늘이 부서지는가? 아니면 땅이 뒤집히는가?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 땅에 반드시 제거해야만 하는 악마(惡魔)가 탄생하였을 때, 하늘은 자신의 정기로서 한 명의 신인(神人)을 태어나게 한다고 한다." 단지 싸움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온몸을 휘감아 도는 벅찬 감동 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저 두 사람이 악마와 그 신인이 아닐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나직이 중얼거리는 그의 발 밑으로 뭔가 둥근 물체가 툭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둥근 물체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일제히 환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와아!" 둥근 물체는 바로 곡철화의 목이었던 것이다. 이 땅의 악마를 제거하기 위하여 하늘이 내린 신인은 땅으로 천천 히 내려서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어린아이가 안겨 있었다. 능한비는 죽립인을 향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협! 대협께서 무림을 구하셨습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대협께선 뉘신지요? 존함이라도 밝혀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에 감사라도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무림의혈단의 고수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죽립인을 향해 존경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죽립인은 천천히 죽립을 벗으면서 능한비를 향해 말했다. "한비, 당신은 진정 나의 부탁을 들어 주었구려." 죽립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능한비는 마치 벼락을 맞기라도 한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오, 하늘이여! 바로… 바로 당신이셨습니까? 한참이나 넋을 잃고 있던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며 죽립인의 가슴에 안겨 들었다. "회주!" 사마소군은 능한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는 그의 눈에도 맑은 이슬이 맺혀 있었 다. 아이가 의아한 듯 묻고 있었다. "아저씨, 왜 울어?"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하랴? 세상은 선한 사람들의 것도 아니고, 또한 악한 사람들의 것도 아 니다. 세상은 그저 사람들의 것인 것이다. 사람들이 그저 자신들이 살기 편하게 노력해서 만들어 가는 곳이 바로 세상이란 무대가 아닐까? 이 세상에 만약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신만 의 이익을 위하여 세상의 이런 이치를 파괴하는 자일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세상에 만약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세 상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를 벌하는 자일 것이다. 만마대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곡철화가 사 라진 이상, 세상은 다시 본래의 질서를 회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비록 시간은 걸릴지라도 세상은 천국 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 신검성 제 3 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