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매어황 제1권 第一章 마풍지로(魔風之路) 1 휘이이이잉－! 뼈를 에이는 한풍(寒風)이 무섭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잿빛 천공과 가공할 설풍(雪風)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 땅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 하다. 바람(風)과 눈(雪)……. 보이는 것은 오직 순백일색(純白一色)뿐이었다. 사천성(四川省). 촉(蜀)이라 불리는 천형(天刑)의 땅덩어리에도 어김없이 폭설(暴雪)은 휘몰아치고 있었다. 잠총(蠶叢)이라는 전설적인 고대(古代)의 제왕(帝王)이 촉을 개국한 이래 장장한 세월 동안 외부와 단절 이 된 상태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타고 흘러온 대지(大地)! 이 땅의 험함은 가히 필설로는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백보구절(百步九折)이라. 백 보를 걷는 데 무려 아홉 번이나 길을 꺾어 돌아야 하며, 만학천봉(萬壑千峰)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 아 있고, 그 날카로운 형상은 그대로 검(劍)과도 같았다. 사천성으로 통하는 길은 바로 그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그 길을 따라 가노라면 보이는 것은 천야만야의 단애이며, 험하고 가파른 계곡을 날 듯이 떨어져 내리 는 폭포수뿐이었다. 특히 검각(劍閣)의 길은 거친 능선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만 가로막고 있어도 만인(萬 人)을 막을 수 있을 만큼 험난하고 협소한 곳이었다. 휘이이이잉－! 검각도(劍閣道)에도 어김없이 폭설과 공포스러울 정도로 매서운 강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휘이이이잉－! 보이는 것은 절벽을 타고 무섭게 흘러내리는 눈덩어리들이었고 들리는 것은 오직 매서운 바람 소리뿐이 었다. 그런데 그 바람 소리 속에서 다른 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놀랍게도 검각도를 뒤흔들면서 처처에 눈사태를 일으키게 만드는 그 소리는 말발굽 소리였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이윽고 검각도에 한 대의 팔기마차(八騎馬車)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견하기에도 마차의 위용은 범상치가 않았다. 두두두두－ 두두두－! 여덟 필의 눈부시게 흰 설리총(雪梨 )이 끌고 있는 마차는 거친 검각도를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마부석의 흑의장한(黑衣壯漢)은 거침없이 채찍을 내리치고 있었다. 혹한임에도 불구하고 흑의장한의 구레나룻에는 땀방울이 흥건하게 맺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서리처럼 투명하고 시린 눈빛은 무심하고 냉혹하게 보였으나, 왠지 그 무심함 속에는 초조 와 긴장의 빛이 진하게 담겨 있었다. 첫눈에도 그가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반월형(半月形)의 기형도(奇形刀)를 비껴 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형도의 도신(刀身)을 타고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것은 아직도 더운 김을 뿜어내고 있는 핏 물이었다. 똑－ 똑똑－! 핏방울은 끊임없이 도신을 타고 설백의 대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던 한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 마차의 전면으로부터 가공할 폭풍이 일어났다. 폭설이 난분하는 가운데 열 자루의 검(十劍)이 가공할 기세로 마부석의 흑의장한을 향해 쏘아 왔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그 검과 합일(合一)을 이루어 쏘아오고 있는 그들은 백의(白衣)의 복면인(覆 面人)들이었다. 참으로 돌발적인 암습(暗襲)! 거기에다 검각도의 좌우는 천야만야의 단애인데다가 협소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곳은 없었다. "……!" 흑의장한의 무심한 눈빛이 미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일 점의 동요도 없었다. 기형도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퉁기는 싶더니 그의 몸이 허공으로 소리 없이 미끄러져 올라갔다. 그리고 곧장 한 줄기 광채가 찬란하게 일어났다가 스러졌다. 번쩍－! 그것으로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을 맺었다. "크아아악……!" "커억!" "아악!" 섬광이 찰나에 작렬했다가 스러지면서 처절한 단말마가 터져 나왔고, 곧장 허공에 열 송이의 혈화(血花) 가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게 활짝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혈화도 곧 사라졌고, 마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좁은 검각도를 따라 멀어져 갔다. 이제 그 곳에 남은 것은 열 구의 시신(屍身)뿐이었다. 두두두－! 쩍쩍－ 쩌어어억－! 그것은 참으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폭설이 휘몰아치면 치는 대로 싸늘하게 식어 가는 복면인들의 몸이 서서히 미 간에서부터 사타구니에 이르기까지 양단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목불인견(目不忍見)! 그것은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장면이었다. 도대체가 언제 어떻게 이들이 흑의장한의 기형도에 당했단 말인가! 죽은 인물들 역시 자신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전혀 느끼지 못했던 듯 경악과 불신과 회의에 젖은 눈빛 을 허공에 풀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사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전신이 양단된 상태에서 살아 있다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지만, 분명 한 백의복면인이 아직 숨을 쉬 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파리한 입술을 헤집고 무섭게 떨리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으으… 단심무정도(斷心無情刀) 독고우(獨孤雨)… 과연… 당세 제일의 마도(魔刀)……." 그러니까 단 일 도에 열 명의 복면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흑의장한이 단심무정도 독고우라는 말인가? "우욱! 수백의 형제들과… 오십여 차례의 암습으로도… 놈의 털끝 하나 상하게 할 수가 없었으니… 으 으… 무… 무서운… 진정… 무서운… 커헉!" 복면인은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마침내 그도 죽은 것이다. 휘이이잉－! 죽은 자들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싸늘하게 식은 육신은 내리는 폭설에 묻혀 가고 있었다. 비록 이제는 동토 속에 묻혀지게 되었지만, 세인들은 이들의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철혈십자흔(鐵血十字痕). 그들 열 사람은 바로 백만사마인(百萬邪魔人)들의 하늘인 대천마련(大天魔聯)의 십대단주(十大團主)들이 었다. 비록 한 문파의 단주에 불과했으나, 사실 이들의 무공은 능히 한 지역과 한 시대를 패주(覇主)하고도 남 음이 있을 만큼 가공한 것이다. 검의 마술사(魔術師), 살인의 예술사(藝術師). 이렇게 불려지며 공포와 죽음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오던 그들이 사천성 죽음의 오지에서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천하를 발칵 뒤집어 놓고도 남을 만한 대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암습한 단심무정도 독고우는 누구인가? － 단심무정도(斷心無情刀) 독고우(獨孤雨). 그는 대천마련의 천마삼작(天魔三爵) 가운데 일인이자 서열 칠위에 올라 있는 죽음의 전설과 공포의 신 화를 창조해 낸 가공할 대마인. 그런 그를 대천마련의 십대단주가 암습하다니? 대천마련의 인물이 같은 대천마련의 인물을 암습한 이 사실은 결코 심상치 않은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대천마련(大天魔聯)! 이 백만사마인의 하늘(天)이며, 만마(萬魔)의 총본산으로 알려진 이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 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휘이이잉－! 사천성 아미산(峨嵋山)에 이르는 검각도의 폭설은 인간만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거세게 휘몰아쳤고, 철혈십자흔의 시신은 미지의 의혹을 남긴 채 빠르게 폭설 속으로 묻혀지고 있었다. 2 휘이이이잉－! 검각도는 갈수록 협소해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마차는 더 이상 협소한 검각도를 질주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좁디좁은 길을 어찌 마차가 지나갈 수 있단 말인가? 단심무정도 독고우는 천천히 마차를 멈춰 세웠다. "……!" 그의 창백할 정도로 푸르스름한 얼굴에 난색이 떠올라 있었다. 이 때였다. "걸어서 가야 할 곳이라면 걸어서 가야하지 않겠는가?" 마차의 주렴이 걷히더니 한 사람이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왔다.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일신에 타는 듯 붉은 유삼을 걸친 단아한 기품의 중년인이었다. 머리에는 진홍빛 와룡관을 쓰고 등에는 빛바랜 고금(古琴)을 멘 그는 고요한 가운데 만인(萬人)을 억누 르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의 수려한 용모에 은은히 서린 자광(紫光)은 겨울 하늘을 덮은 차가운 노을처럼 기이한 마력마 저 뿌리고 있었다. "길이 이 지경이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중년인은 좁디좁은 검각도를 잠시 바라보다가 가늘게 탄식을 흘렸다. 이어 그는 연민 어린 눈빛으로 단심무정도 독고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상한 곳은 없는가?" "없습니다." 단심무정도 독고우는 공손히 허리를 접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단심무정도 독고우가 어떤 사람인가? 백만사마인들이 우상으로 생각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아닌가. 그는 대천마련에서 서열 칠위를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하에서 그가 이토록 허리를 굽힐 수 있는 상대는 통틀어야 단지 여섯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혈의중년인에게 이토록 공경히 대한다면 이 혈의중년인이 그 여섯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된 단 말인가? 그렇다. 자하고금마유사(紫霞古琴魔儒士) 제갈사림(諸葛史林).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두뇌를 지녔다는 사도제일뇌(邪道第一腦)! 이 혈의의 중년인이 바로 대천마련의 부련주(副聯主)이자 제이인자인 자하고금마유사 제갈사림이었다. 대천마련의 제이인자! 그것은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지고한 권좌가 아니던가? 백만사마인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아귀에 쥔 무상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누리는 자에 따라서 무 서운 야심(野心)을 심어 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하고금마유사의 성품은 사마인에 어울리지 않게 담백하고 자비로운 성품이었다. 야심을 멀리하고 사마의 진정한 도(道)를 추구하는 그는 좀처럼 무림에서 활동하지 않는 인물이거늘, 그 런 그가 이 천험의 오지인 검각도에 나타난 것이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서 드러났듯이 과연 이 길은 하늘이 외면하고 인간이 외면할 만큼 거칠 고 험하다." 자하고금마유사는 잠시 어두운 눈길로 전면을 응시했다. 쿠르르르－!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멀리서 눈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가야 한다. 아미활인선부(峨嵋活人仙府)까지는 아직 백 리 길이 남았으니… 날 이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갈 길을 재촉하여 그 곳에 도착해야 한다." "……!" 단심무정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은 수천 리에 달하고, 그 길이 피와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것이었으나, 이제 남은 백 리 길이야말로 지나온 그 수천 리 길에 비해서 더욱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사실을……. 휘이이잉－!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 무릇 인간만사가 하늘의 뜻에 달린 것… 우리의 운명도 하늘에 맡겨야 하겠지." 자하고금마유사는 잠시 잿빛 하늘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이어 공손한 자세로 마차의 주렴을 거뒀다. "소련주(小聯主)… 속하의 등에 업히셔야 하겠습니다." "……." 자하고금마유사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명의 소동(小童)이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대략 십이삼 세 가량이나 되었을까? 일신에 검은 유삼(儒衫)을 두른 소동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소동의 눈은 겨울 호수에 떠 있는 한 조각 얼음처럼 투명하고 맑았다. 그 서늘하고 투명한 눈빛은 인간의 심혼을 잡아끄는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라도 한 번 대하면 영원히 잊을 수가 없으리라. 하지만 옥에 한 점 티라고나 할까? 소동의 얼굴에는 일체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병색이 완연했다. 수척한 얼굴에 파리한 입술의 그 심약한 모습은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이었다. "……." 소동은 자하고금마유사의 등을 거부하고 바닥에 내려섰다. 그 작은 몸은 혹한(酷寒)을 참아 낼 수 없는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깃든 귀품(貴品)과 위엄(威嚴)은 어린아이의 그것이 절대 아니었다. 대자(大者)의 기도! 그것은 해로(偕老)한 천년노송(千年老松)에서나 풍겨질 수 있는 초연한 기질이기도 했다. "걷고 싶어요." 소동은 두 사람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인 후 검각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잉－! 세찬 한풍(寒風)이 소동의 몸을 휘말아 올리자 소동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단심무정도가 재빨리 소동을 안아 등에 덥석 올렸다. "헛허허… 때가 되면 마음대로 혼자 걸으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무정하고 냉혹하기로 유명한 단심무정도가 소동을 대하는 태도는 따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것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헛허허… 소련주는 지금 병을 치료키 위해 가는 환자(患者)이시기에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이 검각도의 험난함은 무림의 절정고수라도 쉽게 갈 수가 없는 것이거늘… 헛허허… 별 수 없이 소련주 는 이 단심무정도의 신세를 또 지셔야 하는 것이옵니다." "……." 소동은 못마땅하다는 듯 그림 같은 검미를 찌푸렸다. 그러자 자하고금마유사는 소동의 가녀린 손을 잡으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소련주… 소련주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 "지난 십여 년 간 줄곧 병상에만 누워 있어야 했던 소련주이기에 걷고도 싶으시겠지요. 그러나… 허약하 신 소련주께서 걷기에는 이 길은 너무 거칠고 험합니다. 그러니 참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헛허허… 그러나 이것은 약속드릴 수가 있지요. 아미활인선부에서 소련주의 병을 모두 치료한 후 이 길 을 나설 때는 홀로 걷게 해드리겠노라고……." "정말?" 소동의 두 눈에 투명한 이채가 떠올랐다. "물론입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동이 다짐을 받겠다는 듯 말했다. "남아일언(男兒一言)은……?" "헛허허허… 중천금(重千金)입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소동의 천진한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휘이이잉－! 세 사람은 이윽고 마차를 버리고 검각도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 덮인 검각도를 따라 걸음에도 그들의 발자국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답설무흔(踏雪無痕)! 그들은 지금 그 전설적인 경공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휘이이잉－! 검을 수평으로 세워 놓은 듯한 검각도. 보이는 것은 천 길 낭떠러지이며 발 아래로 흘러가는 구름뿐이었다. "흑작(黑爵), 힘들지 않아요?" 흑의소동은 안쓰럽다는 듯 단심무정도의 목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 흑작이라는 호칭은 대천마련의 천마삼작 중 천마흑작(天魔黑爵)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단심무정도가 바로 천마흑작이었다. "헛허허… 힘들기는요… 이대로 천 리를 간다 해도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단심무정도는 감정 없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 올렸다. "하지만 이 단우(亶雨)는 힘든 걸……." "소련주께서요?" 단심무정도는 만면 가득 의혹의 빛을 띠었다. 흑의소동 단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무겁단 말이지요." "마음이……?" "이 단우를 위해 두 분은 이런 고생을 자청하셨으니… 단우의 마음은 무거워요." "……!" 단심무정도와 자하고금마유사는 감동했다. 무림이라는 비정한 대지에 몸을 던진 지 어느덧 이십여 성상(星霜)……. 잔인과 비정의 길을 걸어온 그들이기에 인간의 감정 따위는 말살한 지 오래였다. 자하고금마유사가 사마인들에게는 자비의 상징이라 하지만, 그것은 사마인들의 눈에 그렇게 비친다는 것뿐이지 사실 정파인들의 눈에는 공포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지금 새삼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단우의 한 마디에……. 단우(亶雨). 대천마련의 태상련주(太上聯主)인 천마종야(天魔宗爺) 단사하(亶謝霞)의 단 하나뿐인 혈육이다. 천마종야 단사하가 백만사마인의 살아 있는 신(神)인 만큼, 단우 역시 신일 수밖에 없는 지고한 지체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천적으로 불치(不治)의 절맥(絶脈)을 안고 태어났다. 그래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병상에서 생활해야 했던 비운의 인물. '장래 대천마련의 태상련주가 되어야 할 고귀하신 분… 하지만 그 마음이 너무 여리시다.' 자하고금마유사는 감동하며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백만사마인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잔인하고 비정해야 할 필요가 있거늘…….' 두 사람은 단우를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탄식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들이 어린 단우의 여린 마음에 서서히 동화되고 있음을……. 한 마디로 무심과 무정의 대명사인 두 사람에게도 인간적인 감정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단심무정도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헛허허허… 마음이 무거우시다면 가볍게 하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요." "흑작, 어떤 방법이지요?" "헛허허… 별 것 아닙지요. 이 다음에 소련주께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시면 소인을 오른팔로 삼겠노라 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아마도 그 무거운 마음은 훨훨 날아갈 것입니다." "그… 그럴까?" 단우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단심무정도는 자신의 말이 먹혀 들어가지 않았음을 알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요. 뭐, 소인이 소련주의 덕을 입어 잘 먹고 잘 살아 보겠다는 것은 아닙니 다." 그는 황망히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좋아……." 단우는 그런 단심무정도의 등에 얼굴을 묻으며 힘주어 말했다. "내 이 다음에 아버님의 뒤를 이어 태상련주가 되면 부련주를 나의 오른팔로… 그리고 흑작을 왼팔로 삼을 것을 결심했다." "아이고, 속하까지도… 이 하해와 같은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자하고금마유사는 황송하다는 듯 허리를 수직으로 꺾었다. 단우는 그런 그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왠지 쑥스럽고 수줍다는 듯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두 사람은 다시 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이들의 대화는 장난기가 다분히 들어있었다. 그리고 끈끈한 정감이 진하게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인간지사(人間之事) 다변다사(多變多事)라…….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기에 세 사람은 지금 장난처럼 내뱉은 이 대화들이 그대로 자신들의 운명이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휘이이이잉－! 바람도 비껴 가는 검각도를 따라 걷는 세 사람의 마음은 어쨌든 가볍기가 깃털과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미처 몇 걸음을 걷기도 전이었다. 슈슈슉－! 돌연 그들을 향해 거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날아드는 네 개의 창(槍)이 있었다. 창의 머리에는 끔찍한 아수라상(阿修羅像)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그 곳에서는 가공할 살기(殺氣)가 줄기 줄기 폭출되고 있었다. "아수라마겁창(阿修羅魔劫槍)이로군." 자하고금마유사의 입에서 서릿발같은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천마절대지존(天魔絶對至尊)의 야망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도다." 그는 무심한 눈길로 폭풍을 일으키며 날아드는 아수라마겁창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어느 새 등에 매달려 있던 빛바랜 고금(古琴)이 들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렇게 느껴지는 그 순간, 그의 희고 섬세한 손가락은 고금의 현을 퉁기고 있었다. 디디딩－! 믿을 수가 있겠는가? 심혼을 황홀히 표백시킬 정도로 청아한 금음(琴音)이 마치 비수처럼 네 방향을 향해 쏘아져 갔다면 과 연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더욱 믿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부스스스－! 금음에 접한 네 자루의 아수라마겁창이 한순간 머리부터 가루로 변해 허공에 뿌려지고 있는 것이 아닌 가? 이어 아수라마겁창이 날아온 네 방향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올랐다. "크아아악!" "꺼억!" 연이어 터지는 네 마디의 비명과 함께 양팔이 무참하게 잘린 네 명의 초립인(草笠人)들이 땅에서 솟아 나듯 검각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후후후……!" 자신의 면전에서 피를 흘리며 사지를 뒤트는 초립인들을 바라보며 자하고금마유사는 차갑게 웃었다. "그대들은 절대마벽(絶對魔壁)에 예속된 마겁사신창(魔劫四神槍)이 아닌가?" "……." 마겁사신창이라 불리는 네 사람은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죽이시오." 사실 양팔이 잘려 버린 그들에게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뿐이리라. 그러나 자하고금마유사는 결코 네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백만사마인에게 자비의 상징이라 불려지는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살인을 한 예가 없다. 휘이이－ 휘이이잉－! 세 사람은 마겁사신창을 뒤로 남긴 채 다시 검각도를 따라 걸어갔다. 마겁사신창이 천 길 낭떠러지로 투신자살함을 뒤로 남긴 채……. 이런 식인 것이다. 자하고금마유사는 직접 살인은 금하되 이런 간접 살인을 즐기는 것이니……. 하지만 이런 간접 살인조차도 백만사마인들에게는 자비로 보이는 것이다. 피와 죽음뿐인 사마의 세계에 서 한 가닥 삶의 기회를 준다는 자체가 자비(慈悲)인 것이기에……. "……." 단우는 이 끔찍한 살인의 현장을 목격하고서도 별반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무심히 자하고금마유사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며 자하고금마유사는 놀라고 있었다. '이런 면도 있으셨던가? 여린 듯하시나… 살인을 보고서도 무심한 저 눈빛은 태상련주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하게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단심무정도 역시 똑같이 느끼는 경이로움이었다. 문득 단우의 의혹이 서린 음성이 두 사람의 상념을 일깨웠다. "천마절대지존은 누구이지요?" "……." "절대마벽은 또 무엇이지요?" "……." "저들은 왜 나를 죽이려 했으며… 왜 이 단우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지요?" 마치 봇물 터지듯 단우의 물음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러자 자하고금마유사가 고금을 등에 메며 담담히 물었다. "아시고 싶으십니까?" "……." 단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모르시는 것이 마음 편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알고 싶어요." 단우는 힘주어 말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십매어황 제1권 第二章 대천마련(大天魔聯) 1 "천마절대지존과 절대마벽을 설명 드리기 전에 우선 대천마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야만 소련주를 노리는 인물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를 이해시킬 수가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응……."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에 단우는 기대에 찬 눈빛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휘이이잉－! 휘몰아치는 폭설 속으로 자하고금마유사의 음성은 잔잔히 날리고 있었다. 대천마련(大天魔聯). 구천십지(九天十地)를 통틀어 가장 강한 사마의 힘. 이것은 백만사마인의 하늘(天)이자 만마의 총본산으로 불려진다. 천하인들 중의 어느 누구라도 무림 사상 가장 강한 사마의 세력을 말하라고 한다면 맹세코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대천마련이야말로 무림 일천 년 사상 가장 강한 사마의 세력이다.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당시 사마무림엔 일회이벽삼교(一會二壁三敎)가 이 땅에 악마의 숨결을 불어 넣으며 혼세(混世)를 재촉하고 있었다. 일회이벽삼교. 이들 여섯 개 세력은 천하독패의 야망에 앞서 사마무림을 제패하기 위해 이 땅을 무대로 무서운 피바람 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니……. 그들의 방대한 조직과 그들이 지닌 가공할 힘은 일천 년 역사의 장 어디를 열어 보아도 비교할 만한 세 력을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가경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 여섯 세력이 사파무림의 무림제패라는 야망을 놓고 한바탕 어우러진 죽음의 춤사위는 얼 마나 끔찍한 것이었는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자하사회(紫霞邪會), 만겁금벽(萬劫禁壁), 절대마벽(絶對魔壁), 등천비마교(騰天飛魔敎), 혈의사사교(血衣死死敎), 지옥혈교(地獄血敎). 단언컨대, 이들 일회이벽삼교가 동시대에 출현한 것은 사마무림을 위해선 불행한 일이었다. 당시 이들 육대세력의 출현으로 정파무림은 크게 경각심을 느끼고 흩어졌던 정도의 힘을 하나로 규합하 니……. 벽라무황천(碧羅武皇天). 당금에 와서 대천마련과 함께 정사무림의 하늘로 군림하고 있는 이 절대의 거파는 그렇게 해서 탄생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당시 일회이벽삼교의 육대세력이 무림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사마무림은 사마무림대로 혼돈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정파무림은 그들대로 전전긍긍하니……. 그러나 그런 세월은 결코 길지가 않았다. 빛이 없는 어둠의 세월에 빠져 있던 사마무림에 홀연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유삼(儒衫)을 걸치고 검은 면사(面絲)로 얼굴을 가렸으며 검은 손(手)을 지닌 사람……. 세상은 그를 천마종야(天魔宗爺) 단사하(亶謝霞)라고 불렀다. 천마종야(天魔宗爺) 단사하(亶謝霞).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사마무림을 혼돈의 와중으로 몰아넣었던 육대세력이 이 한 사람의 아래에 귀속이 되었다는 사실은……. 경악(驚愕)! 전율(戰慄)! 바로 이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마종야 단사하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의 능력이 육대세력을 포용할 만큼 뛰어나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대천마련. 이 백만사마인의 하늘은 탄생이 되었던 것이다. 일회이벽삼교의 육대세력은 대천마련의 일개 조직으로 들어섰고, 더불어 흩어졌던 사마의 힘도 일통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이십여 년의 세월은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이 공존하며 비교적 평온하게 흘러왔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진정한 의미의 평온이겠는가? 폭풍전야(暴風前夜)의 정적(靜寂), 바로 이것을 의미함을 정사무림인들 모두가 느끼고 있었거늘…….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은 일단 거기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단우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물었다. "소련주께서는 우리 두 사람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아시겠습니까?" 단우는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부련주는 일회이벽삼교 중 자하사회의 회주(會主)였을 것이고……." 단심무정도가 웃으며 물었다. "헛허허… 그러면 소인은 누구였겠습니까?" 단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흑작은 바로 지옥혈교의 교주였겠지요." "헛허허허… 바로 맞추셨습니다." "헛허허……." 단우의 말에 두 사람은 호탕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일신에서는 과거 대륙을 질타하던 시절의 호호탕탕한 기도가 감회와 함께 뿌려지고 있었다. 비록 이제는 한 사람의 아래에 귀속이 된 신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 한때는 천하를 오시하던 그 들인지라 감회가 새로운 것이다. "와아… 정말이지 대단해요. 부련주와 흑작이 그토록 위명이 쟁쟁한 인물인지는 몰랐어요. 그리고 아버 님도……." 단우는 연신 탄성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단심무정도와 자하고금마유사가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다. 대천마련의 소련주라는 지고한 신분이면서도 무림이라는 세계와 대천마련에 대해서 별반 아는 것이 없 는 단우의 입장에서 보면 자하고금마유사의 말 그 자체가 새롭고 신기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절대마벽의 벽주(壁主)는 천마절대지존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단우의 물음에 정색하며 답했다. 단우는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알 수 없군요. 절대마벽이 우리 대천마련의 일개 조직이라면… 그리고 천마절대지존이 아버님 휘하의 인물이라면… 어째서 이 단우를 죽이려 한 것이지요?" "……!" 자하고금마유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것이 대천마련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병폐?" 단우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육대세력을 일통하여 만들어진 대천마련의 힘은 일천 년 사마무림 사상 최강이라고 할 만합니다." "……!" "그런 만큼 대천마련에 귀속이 된 백만사마인 중에는 그 지닌 바 능력과 야망이 태상련주에 비견될 만 한 인물이 상당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호오……!" "비록 그들의 무서운 야망이 태상련주에게 귀속이 되면서 일시적으로 잠재되기는 했으나… 만약 태상련 주의 힘이 쇠락하거나 허점을 보일 경우에는 그들은 언제나 잠재된 야망을 폭발시킬 것은 자명한 이치 인 것입니다." "음……!"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은 어린 단우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천마종야 단사하! 이 위대한 백만사마인의 하늘이자 자신의 부친이 은근히 걱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절대마벽의 벽주인 천마절대지존이 많은 사람들을 보내 이 단우를 죽이려 하는 것은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함이겠군요." "그… 그렇습니다." "이 단우를 죽임으로서 아버님과 이 단우로 이어지는 이대(二代)에 걸친 사마무림의 패업( 業)을 종식시 키고… 결국은 자신이 패업의 길을 걸으려는 의도가 아닌가요?" "아……!" 자하고금마유사와 단심무정도의 입은 딱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은은히 경악과 찬탄의 빛이 떠올랐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헤아리는 어린 단우의 예지는 두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말했다. "소련주께서는 앞을 보는 혜안을 지니셨으니…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은 든든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 "그렇습니다. 소련주의 말씀대로 천마절대지존은 소련주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 하고 있 는 것입니다." "음……." "총단(總檀)에서 이곳에 이르는 동안의 철혈십자흔과 마겁사신창 등의 암습을 비롯한 오십여 차례의 암 습은 바로 천마절대지존의 밀명에 의해 거행된 것입니다." "아……." 단우의 입에서는 여린 탄식이 흘러 나왔다. "그래서 아버님은 이번 일에 가장 신임을 하고 있던 두 분을 동원한 것이로군요." "그런 셈이지요." 자하고금마유사는 시무룩해지는 단우를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어린 단우의 마음은 전에 없이 무거웠다. 죽음이 비애로운 것이 아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오랜 병상에서의 생활은 사실 어린 단우를 죽음에 귀의(歸依)하는 초연한 마음을 지니게 하였던 것이 니……. 그런 그에게 죽음 따위가 이제 와서 새삼 비애롭고 두려울 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래… 죽는다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야… 몸이 아플 때마다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할 거라고 수백 번 도 더 생각한 단우인 걸.' 단우의 시선은 뿌옇게 흐려진다. '슬픈 것은…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아버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점 때문이야. 야망을 위해 인간의 의리마저 외면하는 사람들…….' 휘이이잉－! '만약 이 단우가 병을 완전히 치료하고 대천마련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버님을 대신하여 그들에 게 엄한 응징을 가할 것이야… 맹세코… 이 검각도를 두고 맹세코…….' 어린 단우의 결심(決心)! 이것은 단지 그만의 결심이었고, 아무도 듣지 못한 그만의 작은 소망이었지만 훗날 어린 단우의 이런 결심은 그대로 이행이 된다. 이런 단우의 결심과는 상관없이 자하고금마유사는 천마절대지존과 절대마벽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 절대마벽(絶對魔壁). 이 조직은 대천마련의 외성(外城) 오십만사마인(五十萬邪魔人)을 관장하는 방대한 조직이다. 이런 방대한 조직을 지닌 천마절대지존은 모든 면에서 천마종야 단사하와 비견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 다. 과거 그가 천마종야 단사하에게 무공이나 지혜가 모자라서 자신의 야망을 꺾고 귀속이 된 것은 결코 아 니었던 것이다. 당시 그는 육대세력이 서로 양패공사함을 원치 않았던 것이고, 천마종야 단사하가 나서자 훗날을 기약 하고 귀속되기를 스스로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천마련의 일개 조직책으로 전락했으나 그의 야망은 잠재되었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 다. 그는 오히려 천마종야 단사하의 힘을 등에 업고는 서서히 외성의 오십만 사마인을 자신의 아래에 끌어 모으니……. 이제 와서 보면 그것은 그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원대한 계획 중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어린 단우를 죽이려는 것도 그 원대한 계획의 일부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천마련이 이런 야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간다는 자체가 난 세(亂世)를 예고하며 풍운(風雲)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어린 단우의 마음은 그래서 더욱 무거운 것인지도 모른다. 2 아미산월반륜추(峨嵋山月半輪秋) 영입평강강수류(影入平江江水流) 야발청계향삼협(夜發淸溪向三峽) 사군불견하유주(思君不見下 州). 아미산의 반쪽된 가을 달님은 그림자만 평강물 따라 흐르네. 밤 청계를 출발코 삼협을 바라 임 그리며 못 본 채 유주로 가네. 한 줄기 청아한 음성이 아미산의 한 유곡(幽谷)을 따라 흐른다. 이백(李白)의 아미산월가(峨嵋山月歌)를 읊조리는 이 음성은 바로 단우의 음성이었다. 천험의 검각도를 빠져 나온 단우와 단심무정도, 그리고 자하고금마유사 등은 아미산의 한 깊은 계곡으 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아미산(峨嵋山). 높이 일천 장이 넘는 명산(名山)으로서 사천성 아미현(峨嵋縣)에 위치하고 있었다. 두 봉우리는 우뚝 마주보고 솟아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초생달 같은 양쪽 눈썹을 닮았다 하여 아미산이 라 했다. 이 아미산에 가장 절경(絶景)을 이루고 있는 유곡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백하선곡(百荷仙谷)! 이 백하선곡에는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한 성수(聖手)를 지닌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었다. － 아미활인선부(峨嵋活人仙府). 이곳은 사천성의 성역(聖域)이다. 대자연에 귀일(歸一)하여 해탈의 도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십삼 인의 성의(聖醫)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십삼 인의 성의들은 아미십삼활인자(峨嵋十三活人子)라 불리며 만인의 추앙과 존모를 받는다. 그들이 지닌 의술(醫術)은 가히 신의 그것이었다. 설령 죽은 사람일지라도 죽은 지 삼 일만 지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회생(回生)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 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의술은 불문불견(不問不見)의 것이었다. "와아… 이곳은 마치 신선(神仙)들이 노닌다는 세외선부(世外仙府) 같은데……?" 단우는 연신 백하선곡의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탄성을 토하고 있었다. 온갖 기화이초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한 줄기의 녹수(綠水)가 계곡의 중앙을 굽이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으니……. 이런 절경(絶景)은 세상에 또 없을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답다. 이런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단우는 아예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저 멀리 계곡 깊숙한 곳에 떨어져 내리는 폭포는 칠채(七彩)의 물보라에 휩싸여 있어서 단우는 일견 환 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단우와는 달리 단심무정도와 자하고금마유사의 표정은 심상치가 않았다. 그들은 단우를 좌우에서 호위하듯 선 채 계곡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의 표 정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그들의 시선은 전면으로 향해 있었으나, 자세히 보노라면 그들의 시선 은 계곡의 전후좌우로 면밀히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 그들의 일보일보(一步一步)가 그야말로 천만 근의 무게를 감당하듯 무겁기만 하다. 단우는 문득 한 가지 기이한 생각이 스쳤다. "이상하다. 아미산 전체가 폭설에 휩싸여 있는데… 어째서 이곳은 이렇듯 화창하게 개여 있는 것이지?" 흑백이 선명한 눈망울에 가득 의혹을 담고 단심무정도와 자하고금마유사를 바라보았다. "어……?" 그의 눈망울에 더욱 큰 의혹이 떠올랐다. 단심무정도와 자하고금마유사의 표정들이 어린 그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지요?" "……!" "무… 무슨 일이 있나요?" 단우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을 전에는 본 적이 없는데……?' 그가 보기에는 이 백하선곡은 단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곳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은 어찌하여 이토록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가? 이때였다. "소련주… 아무래도 소인의 등에 업히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단심무정도는 속삭이듯 말하며 덥석 단우를 안아 등에 업었다. "왜… 왜지요?" 단우는 단심무정도의 목을 바짝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러자 단심무정도가 눈짓으로 자하고금마유사를 가리켰다. "이곳에는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큼 가공할 진세(陣勢)가 수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진세가?" 단우는 놀라며 새삼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비록 시한부 생을 살아가는 비운아였으나 그의 지혜와 오성(悟性)은 사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것이었 다. 불과 두 살의 나이에 사서오경을 줄줄 외고, 세 살의 나이에 제자백가를 거꾸로 외웠던 그가 지금까지 접했던 기문벽서는 거의 십만 권에 달했다. 때문에 그의 머리 속에 담긴 학문은 천하의 모든 대석학(大碩學)들을 능가하는 것이었고, 이 땅에 그가 볼 만한 책이 없을 정도였다. 진도지학(陣圖之學)에 관한 각종 서적도 이미 탐독한 단우였다. 때문에 이 백하선곡에 수많은 진세가 설치되어 있다는 말에 놀라고 있는 것이다. 진법(陣法)의 대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보아도 진세 같은 것은 설치되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단우는 의혹의 눈빛으로 자하고금마유사를 바라보았다. "……!" 자하고금마유사의 안색은 시간이 흐를수록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은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흑발은 흐트러진 채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거기에다 그의 두 발은 지면 속으로 한 치 이상 파고 들어가 있었다. 문득, 자하고금마유사는 품에 단정하게 안고 있던 자하고금(紫霞古琴)을 퉁겨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현은 퉁겨지고는 있었으나 소리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무음(無音)! 분명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고금을 탄주하는 순간부터 실로 가공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보라! 자하고금마유사의 손가락이 현 위에서 움직일 때마다 만발한 꽃들이 한 줌의 재로 화해 날리우고, 아름 드리 고목이 폭풍에 휘말린 듯 뿌리째 뽑혀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늘어서 있는 난석들이 가루로 변했고, 유유히 흐르는 녹수가 때로는 역(逆)으로 흐르니……. 이것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기현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아……." 단우는 이런 놀라운 현상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그는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꽃들이 재로 날리고 고목이 뿌리째 뽑힐 때마다 주위의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수시로 변하는 광경 을……. 고요하기만 하던 백하선곡이 돌연 망망대해로 변하는가 하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뼈를 에이는 한풍만이 전부인 끝없는 설원(雪原)으로 돌변하기도 했으니……. "아… 이것은 분명 무서운 진세의 변화… 아아… 이곳에는 진세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야." 단우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알 수가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가 자하고금을 탄주해서 이곳에 설치되어 있는 가공할 절진(絶陣)들을 파훼하고 있음 을…….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흑작, 저 자하고금에서는 왜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지요?" "……!" "그럼에도 어떻게 고목이 뿌리째 뽑혀지고 꽃이 재로 변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단심무정도는 말을 하다가는 문득 난감한 표정을 떠올린다. '허어, 소련주께서는 무학에는 문외한이시니 무어라 설명을 드리기가 난해하지 않는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강 설명했다. "자하고금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부련주께서 지금 무음무형무적(無音無形無迹)의 강기( 氣)를 현에 주입하여 탄주하기 때문입니다." "무음무형무적?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자취마저 없는 강기?" "그렇습니다. 그것은 고도의 무예로서 단지 뜻만으로도 원하면 무엇이든 살상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아……." "저 무공의 이름은 무음파천세(無音破天勢)라고 하며 부련주의 비전무예입니다." "대… 대단해… 정말 대단해……." 단우는 탄성을 연발하며 새삼 존경 어린 눈빛으로 자하고금마유사를 주시했다. 어린 그는 이때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있었다. 자신의 고질적인 병이 치료만 되고, 훗날 무공을 연성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하고금마유사를 졸라서 꼭 무음파천세를 배워야겠다는 다짐을……. 이때였다. "으음……!" 나직한 신음과 함께 자하고금마유사가 몸을 휘청거렸다. 그런 그의 안색은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한 줄기 가느다란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또한 자하고금을 탄주하던 그의 손가락 끝은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으음." 자하고금마유사가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세우면서 신음과 같은 중얼거림을 흘려냈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이곳 백하선곡에 설치된 진세는 무려 아흔아홉 개이며… 아흔아홉 개의 진세는 전에는 듣도 보지도 못한 가공할 것이 아닌가?" 전방을 망연히 응시하는 그의 표정은 지극히 어두웠다. "내가 지금까지 파훼한 진세는 불과 서른여섯 개… 내 일찍이 이런 진세를 대해본 적이 없다." 그랬던가? 이 백하선곡에 설치된 진세가 모두 아흔아홉 개이며, 그 아흔 아홉 개의 진세 중 서른여섯 개의 진세를 지금 자하고금마유사가 통과한 것이었던가? 그렇다면 자하고금마유사의 전도지학에 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도 이 백하선곡에 설치된 진세 중 불과 서른 여섯 개의 진세를 파훼하고는 기진맥진하고 말았으니 이곳 계곡에 펼쳐져 있는 진세의 무서움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알 수 없는 일이로군. 의술을 인술로 알고 살아가는 아미십삼활인자가 머물고 있는 이 성역에 이런 가 공할 절진이 한 개도 아닌 아흔아홉 개나 설치되어 있다니……." 자하고금마유사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단심무정도와 단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당부하듯 두 사람에게 말한다. "이제부터는 나의 두 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대로 따라야 하네." "……!" "자칫 한 걸음이라도 어긋날 시에는 그대로 진세에 휘말려들게 될 터이니……." "……!" 단심무정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것이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불길한 느낌을……. 이때 단우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 부련주… 우리 그만 돌아가도록 해요." "허어… 무슨 말씀을……?" "이 단우를 살리기 위해 두 분이 고생을 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는 없어요." "어찌 그런 말씀을……." 자하고금마유사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런 고통은 십 년의 세월을 넘게 받아 온 소련주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하… 하지만……." "헛허허… 이 몸을 믿으셔야 합니다. 비록 이곳에 설치된 진세가 가공할 변화를 내재하고 있으며 그 기 묘한 배치가 전설과 신화의 천년지대(千年地帶)와 흡사하다 하나… 이곳이 천년지대가 아닌 이상 삼 일 의 시간만 나에게 주어진다면 능히 이곳의 진세를 파훼할 수가 있다고 장담할 수가 있습니다." "처… 천년지대와 흡사한 배치?"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을 듣던 단심무정도의 얼굴이 돌연 창백하게 질린다. － 천년지대(千年地帶). "어찌 그럴 리가… 어찌 이곳이 천년지대와 흡사하게 진세가 펼쳐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천년지대! 이 얼마나 놀라운 단어인가? 설령 황제의 이름 석자도 모르는 삼척동자라 해도 줄줄 외고 다니는 그 이름, 전설과 신화의 천년지대! ■ 십매어황 제1권 第三章 천년지대(千年地帶)의 전설(傳說) 1 흐르는 세월은 멈춤이 없고……. 역사(歷史)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 무게를 더한다. 그 오랜 인간의 역사 속에는 전설(傳說)도 많고 신화(神話)도 많다. 그리고 그 전설과 신화는 오늘도 끊임없이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수한 전설과 신화 가운데 오직 하나의 전설과 하나의 신화를 꼽으라면 누구라도 천년지대 의 신화와 전설을 말할 것이다. － 천년지대(千年地帶). 세인들은 말한다. 무림의 역사는 일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그러나 사실 무림의 역사는 일천 년이 아니라 이천 년이라면 믿겠는가? 천년지대가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사를 말한다면 과연 믿겠는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어야 한다. 천년지대는 일천 년의 현무림사 이전의 또 하나의 무림사를 말하므로……. － 천년지대!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사. 지금으로부터 일천 년 전. 당시의 무림인들도 무림의 역사를 일천 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일천 년 무림사는 무서운 난세지난세(亂世之亂世)의 소용돌이 속에서 깨끗하게 지 워 버린 것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아아!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폭풍(暴風)이 휘몰아치던 일천 년 전의 그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사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최고의 성세기를 누리던 정사무림(正邪武 林)이 난세 속에서 최후의 일전(一戰)을 치르던 바로 그 어느 날에, 당시 정파무림의 최절정고수 일만 인은 살기 위한 도주를 시작해야 했다. 그들이 상대하기엔 사파무림은 너무 강했던 것이다. 사파무림인들의 손에 일백만 정파무림인들은 죽음을 당해야 했고, 그 죽음의 혈전 속에서 살아남은 정 파무림인들은 오직 그들 일만 인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파무림인들의 희생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그 혈전에서 일백만에 가까운 사파무림인들이 죽어야 했고, 십만여 사파무림인들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일만 정파무림인과 십만 사파무림인들이 지닌 무공은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사상 최강이라고 할 만 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도주와 추격은 실로 처절한 것이었다. 일만 정파무림인들은 살기 위해 도주하면서 무려 아흔아홉 개의 절진(絶陣)을 설치했다. 그 절진 하나 하나에는 오묘불가사의한 변화가 담겨 있었기 때문에 자칫 한 걸음이라도 잘못 들어서면 그대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절진을 십만 사파무림인들은 헤치며 추격을 계속했다. 장장 백 일에 걸친 정파무림인들의 도주와 사파무림인들의 추격전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탄생 시켰다. 죽고 또 죽고……. 그리고 마지막 아흔아홉 개째의 절진이 설치되었을 때 살아남은 정파무림인들은 단지 세 명에 불과했 고, 사파무림인 역시 단 네 사람뿐이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들 일곱 정사무림의 절대자(絶對者)들도 결국은 그곳에서 뼈를 묻어야 했다. 죽은 자는 물론이고 살아남은 자도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려 방원 백 리의 대지 위에 설치된 아흔아홉 개의 절진은 서로 완벽한 조화(造化)를 이루며 거대한 하나의 진세를 이루었던 것이니……. 이것은 설치한 인물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변화였던 것이다. 이 아흔아홉 개의 절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진 진세를 이렇게 부른다. －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萬劫造化九九大圓陣勢). 이것은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불입불귀(不入不歸)의 절진을 말함이다. 결국 일천 년 전 최고의 성세기를 구가했던 정사무림은 이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자연적인 형성과 함 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시의 무림인들은 모두가 죽었고, 산 사람도 이 절진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으니……. 무림사 이천 년 중 일천 년은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무림역사는 새로이 탄생이 된 것이다. 그래서 현세의 무림인들은 일천 년 무림사를 말할 뿐 이천 년 무림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사! 잃어버린 일천 년 무림사! 그것은 그 얼마나 많은 세월에 걸쳐 무림인들을 자극시켜 왔으며 탐욕의 불을 질렀던가? 무림인들은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로 싸인 그 땅을 가리켜 천년지대(千年地帶)라 불렀다. 천년지대 속에는 천 년 역사가 숨쉬고 있다. 그 천년지대 속의 역사를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역사를 잡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새로이 만들어진 일천 년 무림사의 제일인자로 군림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 남겨진 방대한 기진이보와 그곳에 산재한 무수히 많은 무학비급들만 얻을 수 있다면……? 이런 욕망과 탐욕은 수많은 세월에 걸쳐 무수히 많은 무림인들을 자극시켜 왔던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무림인들은 그 탐욕을 채우기 위해 감히 천년지대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설령 들어갔다 해도 살아 나온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 바로 그것이 인간의 접근을 철저히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접근한다는 자체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세의 무림인들은 천년지대를 알고는 있으나 접근은 금한다. 탐욕보다는 목숨이 훨씬 소중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전설과 신화의 천년지대와 흡사한 진세가 이 백하선곡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니 단심무정도의 놀람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단우 역시 놀라고 있었다. 그 역시 천년지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하고금마유사를 빤히 응시하며 의혹성을 발했다. "이해할 수 없어요. 아미활인선부의 아미십삼활인자는 죽어 가는 병자를 살리는 성의라고 들었는데… 어 째서 사람을 죽이는 진세를 설치한 것일까요?" "……!"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무엇인가 희미하게나마 짐작이 가는 점이 있는 듯 했으나 내색치 않았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진세를 모두 통과하고 그들은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 단우는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자하고금마유사의 등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2 삼일(三日)이라는 시간이 물처럼 흘러갔다. 그 동안 자하고금마유사는 식음을 전폐한 채 진세의 파훼에 몰두했다. 아흔아홉 개의 진세는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무섭도록 치밀하고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삼 일의 시간 동안 자하고금마유사는 무려 열 차례나 피를 토했다. 그 혼자 힘으로 아흔아홉 개의 진법을 모두 파훼하기란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자하고금마유사의 심력은 단우와 단심무정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니……. 결국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뒤바꾼 것이다. 비록 열 차례나 피를 토하고, 삼 일의 시간이 그에게는 십 년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지기는 했으나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지막 하나의 진세를 파훼하고 있었다. 밤(夜). 사위는 칠흑의 어둠으로 뒤덮인 밤이었다. 쾅－! 돌연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백하선곡에 설치된 마지막 진세가 파훼되었다. 그리고 세 사람이 그 진세를 빠져 나왔다. 바로 그들은 자하고금마유사 일행인 것이다. "지독하군." 자하고금마유사는 지치고 피로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삼 일의 시간 동안 온 정력을 빼앗겨 가며 빠져 나온 거리가 불과 백여 장인 것이다. 백하선곡의 입구에서 폭포가 자리한 곳까지의 거리는……. "우욱!" 그는 다시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다. "부… 부련주……." 단우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자하고금마유사를 응시했다. 가슴이 아픈 것이다. '이 단우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자하고금마유사를 보고 또 본다. 그러자 자하고금마유사가 단우를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헛허… 대장부는 눈물을 흘려서는 아니 됩니다. 눈물은 여인이나 소인배들이 흘리는 것이지요. 더욱이 나 장래 대천마련의 태상련주가 되실 귀하신 분이 눈물을 보인 데서야 안 되는 것이지요." 단우는 눈물을 쓱 훔치며 배시시 웃었다. "단우는 소인배가 더 좋아요. 아플 때도 눈물을 흘리고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마음놓고 울 수가 있는… 그런 평범한 소인배가 되고 싶어요." "헛허허……." "억지로 눈물을 참아야 하는 대장부는 되지 않을래요." 단우의 천진하며 솔직한 말에 단심무정도와 자하고금마유사는 피로함을 잊고는 환하게 웃는다. 쿠르르르－ 콰콰콰콰콰－! 폭포수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그 곁에는 한 채의 모옥(茅屋)이 고아하고 담백 하게 세워져 있었다. "……!" "……!" 자하고금마유사와 단우 등은 말없이 모옥을 살폈다. 그런데 이때였다. "세 분의 왕림을 진심으로 환영하오이다." 돌연 잔잔하면서도 힘이 담긴 음성이 여운처럼 길게 울리면서 세 사람의 주위로 소리 없이 나타나는 열 사람이 있었다. 십인(十人)! 이십 세 전후로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머리에 황금빛 투구를 쓰고 있었으며, 일신에는 역시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황금색 옷(金衣)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황금빛 금룡언월도(金龍偃月刀)가 쥐어져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고요히 서 있는 그 모습은 천계(天界)에서 하강한 신장(神將)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들이 어둠 속에 있으니 어둠마저 그들의 몸에서 뿜어지는 위엄에 의해 자욱하게 밀려나는 듯했다. "으음……." 자하고금마유사와 단심무정도는 그들 십 인의 출현에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그대들은 벽라무황천(碧羅武皇天)의 벽라십대장군(碧羅十大將軍)이 아닌가?" 자하고금마유사의 물음은 오직 그만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 벽라십대장군(碧羅十大將軍). 이들은 백만 정파인의 하늘인 벽라무황천의 인물들이다. 벽라무황천의 수많은 영재들 중 가장 뛰어난 자질과 무공을 지녔다는 그들은 사마인들에게 있어서 그야 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벽라십대장군은 정파무림인들이 세운 정법(正法)에 따라 행동하며, 그 정법에 위반하는 사마인들은 가혹 하게 척살하거나 잡아들이는 법과 죽음의 집행자들이었다. "……." 십 인의 금갑청년들은 자하고금마유사의 물음에 대답 대신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해 보인다. 그 행동은 비굴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았으나,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항거불능의 위엄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때 자하고금마유사는 벽라십대장군을 보며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이곳은 함정이었군. 그것도 철저하게 안배된……." 그의 시선은 전면으로 향해 있었다. 거기에는 한 채의 모옥(茅屋)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때였다. "핫하하하……." 낭랑한 웃음소리가 흘러 나오더니 한 사람이 모옥 안에서 한 줄기 바람처럼 밖으로 나왔다. 분명히 나오는 듯했으나 보이지는 않고, 보이지는 않으나 존재는 하는 듯한 신비로운 기도의 그는 삼십 대 중반의 인물이었다. 그는 일신에는 단아하게 유백색의 유삼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 그가 서 있으니 어둠 가운데 그는 더욱 고고하며 성결하게만 느껴진다. 용모는 준수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나 투명할 정도로 흰 살결과 아름다운 두 눈은 기이한 위엄을 함축 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이 순간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백옥선(白玉扇)을 연신 접었다가 펼치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촤악－ 츄르륵－! 백옥선을 접었다 폈다 하는 동작에서 나오는 청아한 음향은 밤을 울리며 듣는 이의 심혼을 청량하게 씻 어 내리고 있었다. "……!" "……!" 두 사람, 자하고금마유사와 유삼인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치면서 강한 떨림을 일으켰다. 그것은 처음 대하는 눈빛이나 이미 여러 번 대한 듯 서로에 대한 경외지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던가? 유삼의 청년이 먼저 입술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처음 대하나 이렇듯 구면인 듯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두 사람에게 사연이 많기 때 문일 것이외다. 그렇지 않소?" "……." 자하고금마유사가 잠시 유삼청년을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을 받았다. "그렇지. 사연이라면 사연일 수도 있는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남이 아는 것보다는 많은 것 같군." 벽라십대장군이 주위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으며, 이 새로운 인물이 출현하므로 완전 위기가 조성이 되고 있었지만 그는 시종일관 태연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흔들림이 없는 그것이 바로 그의 장점이었던 것이다. 유삼 청년의 두 눈에 언뜻 찬탄의 빛이 스쳐 갔다. "우리는 지금까지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미 몇 차례의 지혜대결을 벌인 적은 있소." "그랬던 것 같군." "그것은 당신이 대천마련의 제일의 지자(智者)이고… 본인은……." "그대는 벽라무황천의 제일의 지자(智者)인 환우대선생(環宇大先生) 천리옥당(天梨玉當)이기 때문에 어 쩔 수 없이 벌여야 했던 운명적인 대결이었지." 자하고금마유사의 이 말은 실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백만정파인의 하늘인 벽라무황천에 자하고금마유사와 비견될 만한 초지혜자가 있었다. 환우대선생 천리옥당이 바로 그였다. － 환우대선생(環宇大先生) 천리옥당(天梨玉當). 세인들은 그들 두 사람을 놓고 이렇게 비교한다. 환우대선생 천리옥당은 한 때 천하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았던 제갈량(諸葛良)과 사마중달(司馬仲達)과도 같은 초지자들이라고. 바로 이들 두 사람, 제갈량과 흡사한 천리옥당과 사마중달과 비교되는 자하고금마유사는 이 시대의 최 고의 지자들이었으니……. 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귀계책략(鬼計策略)에 따라 정과 사의 운명이 좌우될 정도였다. "우리는 그 동안 정확히 일곱 차례의 대결을 벌였소이다." 환우대선생 천리옥당의 말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가 어려 있었으며, 어둠 가운데에서도 그것은 더욱 선명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 대결에서 본인은 단 한 번의 승리를 거두지 못했소. 그렇지 않소?" 그랬던가? 벽라무황천의 총사(總師)인 그와 자하고금마유사가 세상 사람들 모르게 이미 일곱 차례의 대결을 벌였 으며, 그가 일곱 번 모두 패했단 말인가? "그 결과 본인은 일천삼백 명의 수하를 잃어야 했으며… 본인의 존재는 점차 무림인들의 뇌리에서 사라 지기 시작했소." "……." "당신조차도 평생의 호적수인 본인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소." "음……." 자하고금마유사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얻었던 일곱 차례의 승리는 결코 승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환우대선생의 일곱 번에 걸친 패배는 사실 오늘의 이 순간을 위한 거대한 포석(布石)이었던 것이다. "부련주… 당신은 본인을 잊기 시작했지만 본인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았소." "……." "당신이 본인을 잊고 있을 때 본인은 당신에 대한 완전한 조사를 시작했으며, 끝내 당신을 여기까지 유 인하는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었던 것이오." "음……." 자하고금마유사는 침음성을 자신도 모르게 흘렸다. "훌륭하군. 단 한 차례의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일곱 차례의 패배를 가장한 그대에게 이 몸은 찬사 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군." "핫하하하… 고맙소."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에 환우대선생은 허리마저 정중하게 숙여 보인다. 그것은 얻은 자의 포만감에서 나온 행동이기에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자하고금마유사는 몸을 돌려 그의 그런 행동을 외면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때 단심무정도의 등에 업혀 있는 단우를 안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는 이어 근심의 표정을 짓고 있는 단우의 머리를 자애롭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련주, 속하가 미거하여 이런 사태를 미연에 막지 못했으니… 소련주를 뵈올 면목이 없사옵니다." "……." 단우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박속같이 하얀 치아가 드러나며 그 웃음은 절로 자하고금마유사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단우는 자하고금마유사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부련주… 한 번의 패배는 병가지상사라 했습니다. 이번의 패배를 마음에 두지 마세요." "헛허허… 감사합니다." "단우는 어떤 고통이라도 감당할 수가 있어요. 죽음도……." "허허……." 자하고금마유사와 단심무정도는 대견스럽다는 듯 단우를 주시하며 너털웃음을 토했다. 이런 세 사람의 행동에 환우대선생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고 개는 개를 낳는다더니… 과연 용부용자(龍父龍子)로군. 대천마련의 소련주다운 기도이며 여유로다.' 환우대선생은 내심 감탄한다. 이때 자하고금마유사는 다시 몸을 돌려 환우대선생을 주시했다. 그의 표정은 한결 여유가 있었다. "이제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 환우대선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단우와 단심무정도를 주시하며 침묵을 지켰다. 단우는 그런 그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비록 자신에게 닥친 위기가 범상치 않은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을지언정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단우의 그 행동은 단심무정도와 자하고금마유사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작은 단 우의 배려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환우대선생은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대단하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깊은 심기는 사파제일의 마웅 천마종야 단사하의 아들답다.' 비록 적대관계에 있는 대천마련의 소련주일망정 범상치 않은 단우의 행동에 그는 감탄하고 또 감탄하는 것이다. 문득 그는 단우에게서 시선을 떼며 입술을 열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인물은 당신들 모두이오." "우리들 모두……?" "그렇소." 환우대선생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단심무정도가 냉혹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미십삼활인자는 어디에 있는가?" "그분들은 벽라무황천에 공손히 모셔놓았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벽라무황천까지 갈 수밖에 없겠군." "핫하하… 그렇소이다. 어쩔 수 없이 당신들은 벽라무황천에 가야 하는 것이오." "착각하지 말라. 우리가 벽라무황천에 가야 한다는 것은 소련주를 치료키 위하는 것일 뿐, 그대들의 위 협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다." 단심무정도는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굴복하겠다는 의사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순간, 벽라십대장군의 두 눈에 노기가 스쳐 갔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곧 담담하게 변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수양이 어느 정도인가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자 자하고금마유사가 장내의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물론이오. 한 가지가 아니라 천 가지라도 대답할 용의는 있소이다." 환우대선생의 입가에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곳에 천년지대와 흡사한 진세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대가 펼친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소이다." "그렇다면 그 진세를 펼친 의도는 무엇인가?" "당신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소." "시험?" 자하고금마유사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환우대선생은 백옥선을 접었다 펴며 빙그레 웃는다. "당신에게서 한 가지를 알아 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알아듣겠소?" "그 한 가지라면……?" "대천마련에서도 천년지대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에 있느냐 하는 것이오."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 환우대선생은 그 아름다운 눈에 기이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핫하하… 결론은 분명히 진행 중에 있다는 것으로 내렸소이다." "음……." "단 삼 일만에 아흔 아홉 개의 진세를 파훼하고 이곳까지 이를 수 있음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 니오?" "……." 자하고금마유사는 상대방의 치밀한 안배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대천마련에서 천년지대를 연구 중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군." "물론이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단지 대천마련만이 천년지대를 연구 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대가 속한 벽라무황천에서도 천년지대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소. 그것은 중대한 일이오." "……!" "당금 무림이 비록 평온하다고는 하나 천년지대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진정한 평온이 될 수가 없소. 결 론적으로 정사무림 중 어느 쪽이 먼저 천년지대의 진세를 파훼하는가에 따라 무림의 운명이 좌우되니… 그것을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소?" "그렇군. 그래서 그대는 일곱 번의 패배를 가장하고서 이런 승리를 취한 것이로군." "어찌됐건 우리의 승리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오." "그렇게 생각하는가?" 자하고금마유사는 뒷짐을 지며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환우대선생은 그런 그를 보며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하고금마유사 제갈사림이 어찌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인물이겠는가? 대천마련의 부련주라는 신분으로 그 동안 그의 뛰어난 지략을 이용해서 벽라무황천을 암담하게 만들었 던 장본인이 아니던가? 자신이 일곱 번의 패배를 가장하지 않았던들 영원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만드는, 천하에서 가장 무 서운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이토록 여유를 보여 주고 있기에 그의 마음은 저절로 무거워지는 것이다. 이때 자하고금마유사가 다시 환우대선생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이번 거사(擧事)에서 그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본인이었는가, 아니면 소련주였는가?" 환우대선생은 소리 없이 웃으며 시선을 단우에게 던졌다. "두 사람 모두." "본인을 원한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별것은 아니오. 단지 그대들이 알아 낸 천년지대에 대한 비밀을 듣고 싶었을 뿐이오." "그것이 별 것이 아니라니… 헛허허……." 자하고금마유사는 어이없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는 곧 정색하면서 습관처럼 자하고금의 현을 퉁기며 입을 열었다. "천년지대에 대한 비밀… 그대는 실로 대단한 것을 원하고 있군. 그러나……." "그러나?" "별 수 없이 그대가 소련주를 인질로 잡고 그것을 원한다면 본인은 그것을 말할 수밖에 없겠지." "핫하하… 그렇소. 바로 그것이오. 본인이 당신네 소련주를 원하는 목적이……." 환우대선생은 상대가 자신의 심기를 정확히 읽자 애써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정도인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비겁한 일일지라도 그것이 정파무림의 운 명을 위한 일이라면 행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소?" 찰싹－! 그는 이어 백옥선을 접으며 몰을 돌렸다. 이제 해야 할 말을 다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바로 그때였다. "비겁한 사람!" 돌연 단우가 추상 같은 호통을 쳤다. 환우대선생이 천천히 몸을 돌려 단우를 바라보았다. "아이야… 지금 나를 비겁자라고 했느냐?" 그의 말투는 담담했다. 또한 그의 표정은 뜻밖으로 자상하기 이를 데 없었고, 분노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우는 정색했다. "그래요. 당신은 분명히 비겁자예요." "호오… 너는 어째서 내가 비겁자라는 것이냐?" "흥!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천년지대에 대한 비밀을 얻어 내려 하는 것이 비겁한 짓이 아니란 말인가 요?" "음……." "이 단우가 죽어 간다는 것을 알고… 절대적으로 아미십삼활인자가 필요함을 알고는 아미십삼활인자를 빼돌리고 결국은 이 단우를 이용하여 우리 부련주와 흑작을 꼼짝 못하게 함은 비겁한 행위가 아니란 말 인가요?" 의젓했다. 더할 수 없이 당당했다. 환우대선생과 벽라십대장군의 표정에 다시 찬탄의 빛이 떠올랐다. '대단하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위기 속에서도 전혀 굴함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다니… 장래 저 어린아이가 대천마련의 태상련주가 된다면…아마도 정파무림은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 하리라.'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문득 단우의 그 당당한 모습에 내심 두려움을 느꼈다. 단우가 계속해서 추상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정파인들은… 모두가 당신처럼 비겁한가요?" "……." "당신들은 우리 대천마련의 인물들을 비겁자라고 하며 잔인하다고 하지만… 흥! 비겁하고 잔인한 사람 들은 바로 당신들이에요. 그렇지 않은가요?" "허어……." "아마도 당신들이 이 단우를 노리는 것은 또 다른 흉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에요." "……." "바로 이 단우의 아버님을 노리고 이 단우를 유질(留質:볼모)로 잡으려는 것이 아닌가요?" "……." 단우의 날카롭고 파상적인 질문공세에 환우대선생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분명히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는데 도대체가 저 어린아이는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 이다. "흥! 당신들은 지금 오산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 단우와 아버님은 당신들의 그런 위협에는 절대 굴복 하지 않을 것이니… 흥흥… 당신들은 이 일로 인해 결국은 파멸을 당하고야 말 것이에요." "허어……." 환우대선생은 쩝쩝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어린아이와 입을 대고 싸울 수도 없는 일이고… 허어… 그것 참 맹랑한 꼬마로군.'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다시 몸을 돌린다. 그러자 단우는 더욱 기세가 등등하여 소리쳤다. "두고봐요. 이 단우의 아버님은 당신들을 가만 두지 않을 테니! 흥흥……." 연신 코방귀마저 뀌어대는 단우의 표정은 천진하기 이를 데가 없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절로 자아 내게 하는 것이었다. 이때 단심무정도가 기형도를 비껴들며 벽라십대장군을 천천히 휘둘러보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본인은 벽라무황천에 간다. 아니, 가야 한다." 그는 힐끔 환우대선생 등을 보며 음산한 음성을 흘렸다. 그런 그에게서는 실로 가공할 만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위협으로 가는 것이 아닌 본인 스스로 원해서 가는 것임을 보여 주도록 하겠다." "……!" 벽라십대장군은 담담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어떤 묵계라도 있는 듯 그들은 일체 말이 없었다. "벽라십대장군 정도로 감히 이 단심무정도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인지 봐야만 하겠지." 단심무정도는 말을 하며 천천히 벽라십대장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지나쳐간 바닥에는 한 치 이상의 두께로 그의 발자국이 푹푹 파이고 있었다. 단우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흐른다. '과연… 흑작이 이길 수가 있을까?' 왠지 불안하다. 흑작은 혼자였고 벽라십대장군은 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였다. 단심무정도의 기형도를 지그시 누르는 손이 있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그 손의 주인은 자하고금마유사였다. 자하고금마유사가 나직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단심무정도의 발걸음을 잡았다. "흑작… 우리는 빠져 나가기엔 너무 깊은 함정에 빠져 있다." "……!" "이 함정은 생각해 보건대 상당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런 만큼… 우리가 빠져 나 갈 틈은 단 한 치도 없는 것이다." "……!" "소련주를 업게나. 우리는 어차피 벽라무황천에 한 번 정도 가야만 하는 것이니… 소련주를 치료키 위해 서라도……." "꼭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헛허허… 꼭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는 말이네. 헛허허……." 의미가 담겨 있는 웃음을 머금으며 자하고금마유사는 단우를 번쩍 안아 단심무정도의 등에 업혔다. 그리고는 단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소련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곳에 매복한 인물이 단지 저들 벽라십대장군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단우는 잠시 생각하다가는 고개를 이내 가로 저었다. "아닐 거예요.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사람들이 또 있을 거예요." "쥐새끼처럼… 헛허허……." 자하고금마유사와 단심무정도는 무엇이 그리 통쾌한 것인지 동시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웃는 사람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모옥을 향해 걸어가던 환우대선생도 단우의 말을 듣고는 대소를 토하는 것이었다. "핫하하하… 공문쌍승(空門雙僧)과 우내삼성(宇內三聖)께서 졸지에 쥐새끼로 전락하시다니… 핫하하 하……." ■ 십매어황 제1권 第四章 포로에 대한 권리 1 "쥐새끼라고……?" 투덜거리는 난쟁이 노인이 있었다. 얼굴은 홍안이었으나 백발이 성성하여 그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하는 노인이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불로광승(不老狂僧)이라고 부르는 기인이었다. 지금 그는 단우 일행이 떠나간 자리에 남아서 유난히 큰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작은 손가락으로 큰 콧구멍을 후벼파며 아주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쥐방울만한 놈이 감히 노부들을 쥐새끼라고 해? 못된 놈! 아비를 닮아서 그 놈은 어른도 몰라보는 후 레자식이다."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진정하시게나. 그 두상을 그렇듯 계속 흔들어 대다가는 아마도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썩 은 감처럼 뚝 떨어져 버릴 수가 있으니까. 아미타불……." 은은한 불호성과 함께 한 거대한 노승(老僧)이 나타나 불로광승의 큰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노승의 몸은 실로 거대했다. 파르라니 깎은 까까머리부터 시작해서 발바닥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는 난쟁이 불로광승보다 족히 열 배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가 불로광승의 앞에 우뚝 서자 불로광승의 머리는 아예 이 노승의 사타구니에 처박히듯 묻혀 버리는 것이었다. "으… 이 썩은 냄새……." 유난히 코가 커서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불로광승은 황급히 노승의 사타구니에서 머리를 빼내면 서 코를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불로광승은 코를 막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이… 이런 찢어죽일 놈의 땡초야! 감히 어느 안전에다 그 더럽고 냄새 풍기는 사타구니를 들이대느냐?" 코를 막고 질러대는 고함이었기 때문에 그 소리는 자연 코먹은 소리인지라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웃음 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거구의 노승, 대화승(大華僧)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어리석은 중생이로고… 노납의 사타구니에서 나는 냄새는 중생구도(衆生求道)로 사용되는 불타(佛陀)의 성스러운 향기(聖香)이거늘 어찌 감히 썩은 냄새라고 망발을 하는가……?" "불타의 성스러운 향기?" "험험… 그런 성향을 난쟁이 네놈은 썩은 냄새라 했으니 죽어 지옥에 떨어지리라." 실로 거대한 철선장(鐵禪杖)을 불로광승의 머리에 대고 한 차례 설법(說法)을 퍼붓는 대화승과 그의 철 선장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대는 불로광승은 대체 어떤 기인들인가? － 공문쌍승(空門雙僧). 사실 그들은 대소림사(大少林寺)의 전대(前代) 기승(奇僧)들이면서 당대 최고의 두통거리였다. 불로광승은 대소림사의 속가제자인지라 머리를 길러 다분히 대화승의 부러움을 사고 있고, 대화승은 거 대한 체구를 지니고 있어 난쟁이 불로광승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지라 이들 두 사람은 이렇듯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우느라 하루를 다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한시라도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끈끈한 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해학 속에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는 인물은 평생을 골머리를 썩히면서 살아가야만 했다. 때문에 천하의 어느 누구도 감히 두 사람의 철학을 나누는 모습 앞에서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한편, 공문쌍승의 제멋대로의 행동을 보며 연신 미소짓는 세 사람이 있었다. 거대한 술 호로병을 손에 쥐고 너털웃음을 토하는 산발노인(散髮老人)과 엄청나게 큰 책을 등에 지고 있는 유생복을 걸친 중년인, 그리고 여러 가지의 악기(樂器)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들쳐멘 고아하면서도 성결한 용모의 백의미부(白衣美婦)였다. 세상은 이들 세 사람을 우내삼성(宇內三聖)이라 하던가? － 주성(酒聖) 서문기(西門棋). － 천성(天聖) 현자평(玄字坪). － 음성(音聖) 목우경(穆芋瓊). 그들은 일갑자(一甲子) 전의 인물로서, 각기 한 방면에 입성(入聖)의 경지에 오른 전대의 기인(奇人)들이 었다. 먼저 주성 서문기는 인간만사를 모두 술에 연관시켜 말하는 그야말로 술에 관한 한 성자(聖者)였다. 둘째로 천성 현자평은 천기(天機)의 흐름마저 통찰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학문의 대가(大家)였다. 그의 등에 억겁의 부피로 업힌 거대한 책에는 일천 년 무림사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확인된 바 없다. 마지막으로 음성 목우경은 각종 악기를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다루는 음예(音藝)에 관한 한 천하가 인 정해 주는 제일인자였다. 이들 세 사람과 공문쌍승은 모두가 전대의 인물로서 근래의 무림에서의 활동이 전혀 없었다. 그런 그들이 느닷없이 이곳 백하선곡에 나타난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제 그들은 전설적인 인물로서 무림인들에게 인식되고 있지 않던가? "꺼억… 저놈들은 언제나 철이 들꼬……?" 주성 서문기는 거슴츠레한 눈빛으로 공문쌍승의 행동을 주시하며 꼴같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는 있으나 그의 눈빛은 유리알처럼 투명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놈들… 저 난쟁이는 술을 잘못 배워 저 모양 저 꼴이고… 저 무지막지하게도 큰 땡중은 폭주 를 함으로 저렇게 돌아 버린 것이야… 꺼억……." 그의 시선은 슬며시 천성 현자평에게로 향했다. "채… 책벌레…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 어린놈이 우리를 쥐새끼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천성 현자평은 부드럽게 웃었다. "헛허허… 어린아이의 말에 이토록 예민한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니 아마도 그대들은 그 아이를 단순한 어린아이로 보지 않는 모양이로군." 이건 무슨 말인가? 어린아이를 단순한 어린아이로 보지 않다니……. 이때였다. 언제 어떻게 천성 현자평의 앞에 다가왔는지 공문쌍승이 바짝 천성 현자평의 얼굴 부근에 코 를 들이민 채 떠들어 댄다. "아미타불… 그놈은 어린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능구렁이야… 말투도 그렇지만 제법 세상사에 달관한 듯 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남에게 업혀 다니는 주제에… 흘흘… 점잔을 빼는 꼴이라니… 하지만 그런대로 자질은 쓸 만한 것이었 고 어린아이답지 않은 기도도 지니고 있었어." 공문쌍승은 나름대로 대천마련의 소련주인 단우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침묵을 지키던 음성 목우경이 정색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문제는 그 아이를 유질로 잡아들이는 것에 있어요. 대천마련의 태상련주인 천마종야 단사하는 끔찍이도 아들을 원하는 모양이던데… 그 아이를 납치하였으니 그 동안 평온한 무림이 난세로 치달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음……." 천성 현자평은 그녀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사실 그도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걱정이 되기는 하나… 환우대선생은 그 점까지도 생각했을 것이오. 그가 그것을 생각했다 면 대비책 또한 세웠을 것이니 굳이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음……." "다만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천성 현자평이 고개를 흔들며 말꼬리를 흐렸다. 공문쌍승과 주성 서문기가 궁금증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바삐 물었다. "의문스럽다니……?" "도대체 뭐가 의문스럽다는 것이지?" 휘이잉－! 한 줄기 밤바람이 그들의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천성 현자평이 이윽고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이것은 단지 나의 노파심에서 나온 것일지는 모르나… 한 번쯤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말 하네." "……?" "……?" "나는 자하고금마유사 제갈사림이라는 인물이 결코 환우대선생에 비해 뒤떨어지는 인물이라고는 듣지 않았네." "……." "……." "실제로 내 눈으로 직접 대한 자하고금마유사는 외적인 기질에서 만큼은 환우대선생과 버금 가는 인물 이었네. 그 냉철한 판단력과 앞을 내다보는 혜안… 어떤 상황하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심기……." "음……." "맞아." "그런 그가 이런 사태를 한 번 정도 생각해 보지 않고 당했다는 것이 못내 미덥지가 않다는 말이네. 그 리고 그 어린아이가 차대 태상련주가 되어야 할 신분이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신분을 지니고 있거 늘… 단지 두 사람만이 호위한 채 이 백하선곡에 나타난 것이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야." "그… 그렇군."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야." 네 사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로광승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래… 그 점이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비록 그 어린놈이 죽을병에 걸려 있다고는 하지만 어째서 하필이면 지금에서야 그 병을 치료하려고 하는 것이며… 호위무사도 단지 둘뿐이냐 말이다." 한 손을 이마에 대고 뭔가 심각한 난제에 부딪친 듯한 그의 표정은 보는 사람을 심각하게 하는 것이 아 니라 오히려 웃기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웃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번 일이 그들에게 뭔가 불길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기 때문 이다. "꺼억!" 주성 서문기가 길게 트림을 토하더니 곧 낙천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일이 있으면…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환우대선생의 소관이니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구. 그리고 우리가 이런 생각을 했다면 환우대선생 또한 생각을 했을 것이니… 그들이 어떤 흉심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환우대선생은 대비를 하고 있을 테지." "그래… 바로 그것이야. 현 무림은 우리 시대의 것이 아니야. 우리는 단지 환우대선생의 초대를 받고 이 번 일을 합작한 것뿐이니 더 이상 그런 골치 아픈 생각은 하지 말기로 하자." 불로광승은 얼렁뚱땅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헤헤헤… 노부는 단지 천년지대에 한 번만이라도 들어가 보고 싶은 것뿐이야. 그래서 천 년 전의 무림 인들은 어떻게 생겼으며 그들의 무공은 과연 어떤 것이었나를 보고 싶은 것뿐이지. 자네들도 그렇지 않 은가?" "……." "……."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들은 모두 천년지대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림에 다시 출현했던 것이다. 천년지대!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사는 이렇게 천하인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불로광승은 눈빛을 기이하게 반짝이며 이런 말을 여운처럼 남겼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면… 우리를 쥐새끼라고 한 그 어린놈에 대한 호기심… 헤헤… 이 땅에서 가 장 사악한 피를 이어받고 태어난 그 아이의 피는 과연 어느 정도나 사악할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란 말이네." "……." "……." "헤헤… 노부는 이왕지사 무림에 다시 나왔으니 그 두 가지에 대한 호기심을 확실하게 풀어 볼 심산이 야." 말을 끝낸 불로광승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손뼉을 치고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육십 년 동안이나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던 그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세상사의 흐름이야 어찌 되었든, 오늘도 아미산의 밤은 소리 없이 깊어 가고 있었다. 2 휘이이잉－! 나는 새조차 비껴 갈 정도로 험난하다는 검각도에는 아직도 폭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곳에 한 대의 마차가 나타났다. 화려한 팔기마차였다. 마차의 주위로는 열 명의 금갑청년무인들이 호위하면서 따르고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벽라십대장군이 었다. 그리고 팔기마차 안에는 환우대선생과 자하고금마유사 일행이 타고 있었다. 마차는 아미산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아미산을 빠져 나가기 위해 이 검각도에 이르고 있었다. 갑자기 길은 한 사람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졌다. 이제 마차는 지나갈 수 없고 내려서 가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단심무정도가 단우를 업고 온 그 길이었다. 히히힝－ 히히히힝－! 여덟 마리의 말이 날카로운 울음을 토하면서 좁아진 길 앞에서 멈추었다. 바로 그때였다. "부련주… 나와 약속했지요?" 청아한 어린아이의 음성과 함께 한 흑의소동이 마차에서 내려섰다. 소동은 자하고금마유사의 팔소매를 잡고 있었는데, 그 천진한 모습과 마치 여아(女兒)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는 단우였다. 단우는 자하고금마유사의 팔소매를 흔들어 대며 조르고 있었다. "이 길을 나올 때는 나 혼자 걷게 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헛허허… 그랬지요." "그럼 그 약속을 지키도록 해요." "하지만 소련주의 병은 치료가 된 것이 아니잖습니까?" 자하고금마유사는 난처한 기색을 띠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이 길은 무림의 고수라 해도 함부로 지나갈 수가 없을 정도로 험난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단우는 막무가내였다. "나의 병이 치료가 되었건 안 되었건 약속은 약속이니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에요." 다짐하듯 말하는 단우는 아마 자신의 지금 처지를 망각이라도 한 듯싶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고소를 머금었다. "소련주… 우리는 지금 포로 신세입니다. 설령 나의 마음이 그렇게 해 드리고 싶어도……." 그의 시선은 환우대선생에게로 향한다. "……." 환우대선생은 부드럽게 웃으며 단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우는 환우대선생의 앞으로 다가선 뒤 그를 한 차례 깊숙이 노려본 후 말했다. "우리가 당신의 포로인가요?" 환우대선생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도 할 수가 있겠지." "확실히 말해 봐요. 포로면 포로고 아니면 아니라고……." 단우의 다그침에 환우대선생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허어… 당돌한 꼬마로군. 그래서 포로라면 어찌 하겠다는 말이냐?" "분명히 포로라고 했나요?"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포로에 대한 권리를 말해야 될 때가 되었어요." "포로에 대한 권리?" 환우대선생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단우의 말은 한여름의 소낙비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물론 정과 사의 포로에 대한 권리는 조금은 차이가 있을 거예요." "……." "정(正)은 자비로운지라 포로의 인격을 최대한으로 존중할뿐더러 우리 사파무림처럼 그 어떤 가혹한 고 문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정도의 자유도 인정해 주고……." "잠깐!" 환우대선생은 더 이상 단우의 말을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작은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말은 나를 완전히 구워삶자는 수작이 아닌가? 기가 막히군.' 그뿐인가? 정은 자비로운지라 포로에 대한 인격을 최대한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등의 그 말들은 바로 자신들이 포 로이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적당히 사파무림은 깎아 내리고 정파무림은 치켜세우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단우의 그 말에 환 우대선생은 아예 질려버렸다. "마음대로 하거라. 혼자 걸어가든 기어가든… 둘이서 한 약속이라면 그대로 해야 하겠지." 그리고는 그는 자하고금마유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자 단우는 더 이상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좁은 검각도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들었지요? 이제는 이 단우 혼자 걸어가도 되는 것이지요?" "소, 소련주……." 단심무정도가 황급히 나서서 말리려 했으나 자하고금마유사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떠올리면서 그의 팔 을 붙잡았다. 휘이이잉－! 검각도의 폭풍은 거의 살인적이었다. 그런 살인적인 폭풍을 헤치며 걸어가는 단우는 그야말로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비틀비틀－ 휘청휘청－! 금방이라도 폭풍에 휘말려 천인단애로 떨어져 내릴 듯했다. 단우는 입술을 악물었다. 병약한 어린 그로서는 이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기는 했으나 애써 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것은 이 단우도 누구의 도움 없이 무엇이든 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 었던 것이야. 사실 포로는 기분 나쁜 것이다. 거기에 동정과 연민이라도 받는 약한 포로라면 더욱 기분 나쁜 것이야.' 휘이이잉－! '이 단우가 누구지? 이 땅의 위대한 천마종야 단사하의 아들이 아닌가? 위대한 분의 얼굴에 먹칠을 하 면 안 된다. 포로의 상태에서도 떳떳해야 하는 것이야.'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친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부친은 유일무이한 믿음이었고 신(神)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때문에 그는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 위대한 사람이 자신을 꼭 구출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이 렇듯 대범한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쿨룩쿨룩……." 고질적인 병세가 악화되었음인가? 단우는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 냈다. 파리한 입술을 막은 손가락 사이로 붉은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단우의 행동이 더욱 안쓰럽기만 했다. 휘이이이잉－! 갈 수 없는 길을 단우는 홀로 갔다. 무림의 고수라 해도 함부로 통과할 수 없다는 천험의 검각도를 어린 단우는 무사히 건넌 것이다. 이것은 환우대선생과 벽라십대장군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어린아이가 저런 강인한 의지력을 보이다니… 천마종야 단사하는 대단한 아들을 두었군.' '그러나 그것은 정파무림을 위해선 불행한 일일 뿐이다.' 이들의 이런 생각은 두려움 같은 것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멀리서 이들의 뒤를 따르며 단우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이때 놀라고 있었다. 그들은 우내삼성과 공문쌍승 등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포로이면서도 당당한 태도하며… 저 불굴의 집념은 대단해." "과연 저 어린 꼬마를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어."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단우를 주시하고 또 한다. 그러나 단우는 좁은 검각도를 모두 건너고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단심무정도의 품에 안긴 채. 그리 고……. 3 노을은 꿈결처럼 황홀하게 누리에 펼쳐져 있었다. 그 황홀함이 하나의 결정체가 되어 떨어져 내리는 곳은 파양호( 陽湖)였다. 파양낙조( 陽落照)는 중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파양호에 떨어져 내리는 진홍빛 낙조는 그대로 절경을 이룬다. 그러나 이 파양낙조가 평화의 상징처럼 인식이 되어진 것은 바로 이 파양호변에 정파무림의 하늘이 세 워지면서부터라고 할 수가 있었다. － 벽라무황천(碧羅武皇天). 파양호의 동북쪽 방원 일만 평의 대지 위에는 거대한 건물군이 자리잡고 있었다. 진홍빛 낙조에 반조되어 타는 듯 붉게 빛나고 있는 저 수많은 고루거각(高樓巨閣)들과 십 장의 성벽은 도대체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뻗어 있었다. 그 안에는 거대한 인공호수들이 무려 서너 개나 만들어져 있는 이곳이야말로 정파무림인들의 산실이며 정의 본산이었다. 세인들은 알고 있었다. 이 벽라무황천은 바로 이십 년 전에 이 땅이 사마의 일회이벽삼교(一會二壁三敎)의 난세 속에서 신음하 고 있을 때 세워진 것임을……. 그리하여 당금에 와서는 이 벽라무황천은 백만사마인의 하늘인 대천마련과 더불어 절대쌍주(絶對雙主) 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 벽라천제(碧羅天帝) 백리명(百里溟). 현재의 천주. 그의 휘하에 예속된 정파무림인들의 숫자는 무려 백만을 헤아리며, 그 힘과 조직은 일천 년 정도무림 역사상 최강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벽라천제 백리명의 인간 됨됨이 호방하고 인의대덕한 까닭에 그를 중심으로 뭉쳐진 백만정파 인의 인화(人和)와 단결력은 어떤 힘으로도 붕괴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백만 사마인들의 하늘인 천마종야 단사하가 잔인하며 비정한 수단과 치밀하고 완벽한 성격으로 수하를 다스린다면, 벽라천제 백리명은 오로지 덕(德)으로서 수하들을 다스리는 것이었으니……. 이들 두 사람의 상이점은 곧 정사무림의 상이점으로 통한다고도 볼 수가 있었다. 아무튼, 벽라무황천이 탄생하고 대천마련이 탄생한 이후로 무림은 그런대로 평온했는데, 그 평온함이 대 천마련의 소련주를 볼모로 벽라무황천에서 잡아들임으로서 서서히 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단우라는 어린 볼모가 벽라무황천에 입천(入天)함으로서 무림의 긴장은 팽팽한 활시위처럼 당겨 지고 있었는데……. 단우! 이 어린 볼모의 운명은 어찌될 것이며, 무림의 운명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 십매어황 제1권 第五章 벽라무황천(碧羅武皇天) 1 파양호의 물결은 잔잔하기 이를 데 없었고, 정오의 햇살은 온묘롭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벽라무황천(碧羅武皇天)은 정문 앞에는 거의 일천 여명에 달하는 정파무림인들이 늘어서 있었다. "오고 있다." "그렇군. 저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인물들은 벽라십대장군이 틀림없어." 정파무림인들의 눈 속에는 한결같이 호기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곳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이 모아지는 곳은 정 문으로 통하는 새하얀 대리석 대로(大路)였다. 그리고 지금 그 대로를 따라서 한 대의 화려한 팔기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마차를 중심으로 해서는 십 인의 금갑청년무인들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벽라십대장군이었다. 두두두두－! 마차는 순식간에 벽라무황천의 정문 앞에 당도했다. 그러자 정파무림인들은 다시 수군거리고 있었다. "저곳에 대천마련의 소련주가 타고 있다지?" "틀림없네.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사악한 자의 하나뿐인 혈육이니… 모두가 그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야." "아무튼 환우대선생 천리옥당의 능력은 대단해. 그가 이번에 올린 전과(戰果)는 벽라무황천이 창단된 이 래 최대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 "으음… 사마무림의 전설적인 인물인 단심무정도와 자하고금마유사에다 대천마련의 소련주까지 동시에 잡아들였으니 그 전과는 확실히 대단한 것이 틀림없어." 이때, 팔기마차가 마침내 벽라무황천의 정문 앞에서 멈추어졌다. 이어 한 사람이 천천히 마차의 주렴을 거두며 내려섰다. 유백색 유삼을 일신에 걸친 단아한 용모의 청년! 그는 바로 환우대선생 천리옥당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두 사람이 동시에 대리석 바닥으로 내려섰다. 무심한 인상의 흑의장한과 준수한 용모의 혈의중년인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정파의 무림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떨었다. "저 흑의장한은 단심무정도 독고우가 아닌가?" "그리고 저 혈의중년인은 사도제일뇌라 불리는 자하고금마유사……." 죽음의 대명사 단심무정도 독고우. 그는 지금까지 정사무림인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온 마신(魔神)과도 같은 존재였다. 때문에 그의 출현에 정파무림인들이 전율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자하고금마유사를 보는 순간 정파의 군협들은 내심 놀라움과 의혹을 동시에 느꼈다. 자하고금마유사 제갈사림은 사도제일뇌로서 그 동안 대천마련의 중추적인 존재로 알려져 왔다. 그 동안 그의 두뇌에 의해 정파무림인들이 입었던 피해가 과연 어느 정도이던가? 엄청난 정도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정파는 이미 오래 전에 사파무림을 제압했을 것이다. 때문에 자하고금마유사의 존재는 정파무림인들에게 가히 신화적이었고 전설적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포로의 신분으로 이곳에 나타났으니 정파무림인들은 묘한 감회를 느끼면서도 그의 고아 한 기도와 수려한 용모에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외형적인 모습은 결코 사파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애롭고 온화했다. 정명한 그의 모습을 보면 천하의 어느 누구라도 그를 사파의 인물로 생각할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정파무림인들은 그의 그러한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군웅들의 시선은 곧 두 사람을 벗어나 다른 한 사람에게 옮겨졌다. 그들의 시선을 일거에 끌어 모은 사람은 이제 막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흑의소동이었다. 나이는 대략 십이삼 세 가량이나 되었을까? 소동의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안색은 창백했으며 입술은 파리했다.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는 소동은 실로 완벽에 가까운 용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눈빛은 더 없이 깊고 아름다우며, 그 눈빛을 타고 흐르는 잔잔한 혜지의 빛은 어떤 신비로운 마력(魔力) 마저 풍기는 것이었으니……. 단아한 오관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마치 조각품을 연상케 했다. "오오……!" "아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용모와 어린아이답지 않은 당당하며 귀품 있는 기도가 정협(正俠)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 것이다. 군협들은 단우를 처음 보는 순간 그가 바로 대천마련의 소련주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사실 그들은 단우를 보기 전까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상대가 대천마련의 소련주인 만큼 온통 사악과 잔인과 무정으로 뭉쳐져 있을 것이라고……. 그 눈빛이 잔인해야 하며, 그 몸에서 풍기는 기도 또한 잔인해야 한다고……. 그러다가 막상 직접 보고 나니 군협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전혀 예상 밖으로 대천마련의 소련주는 실로 천진하며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인 것이다. 흑백이 선명한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정파무림인들을 둘러보는 그의 태도는 흡사 한 마리의 어린 사슴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또한, 일천 명의 정협들의 시선을 받게 되면 조금이라도 주눅이 들거나 겁을 집어먹음직도 하건만…….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정파무림인들을 바라보았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 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반갑다는 듯이 고개마저 끄덕여 보이는 것이었다. 마침내 정협들은 단우에 대해 경이와 찬탄의 벽을 뛰어넘어 아예 질려 버리고 말았다. "어허… 저 태도는 우리들을 마치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것이 아닌가?"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과연 대천마련의 천마종야 단사하의 자식답다고 말해야 하는 가?" 군협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바로 그때였다. 단우의 앞으로 다가서는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있었다. 일신에 물빛 청삼(靑衫)을 걸친 십오 세 가량의 소년과, 나이는 어리지만 고아하고 성결한 기품을 햇살 처럼 뿌리고 있는 십삼 세 가량의 채의(彩衣) 소녀였다. 청삼소년(靑衫少年)과 채의소녀(彩衣少女)! 두 사람의 귀족적인 분위기와 영명한 기품은 실로 범상치가 않은 것이었다. 거기에다 그들의 외모는 만인(萬人) 가운데 있어도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아름답고 수려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천여 명의 정파무림인들이 숙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들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환우대선생마저 더할 수 없이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두 분 소천주를 뵈오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소천주라면, 이들 두 남녀가 바로 정도무림의 하늘인 벽라무황천의 천주인 벽라천제 백리명의 두 혈육 이란 말인가? 그렇다. 이들 두 남녀는 백리명의 핏줄인 벽라신월 백리황과 벽라상화 백리예령이었다. － 벽라신월(碧羅新月) 백리황(百里皇). － 벽라상화(碧羅尙花) 백리예령(百里藝玲). 이들의 자질과 지혜는 정도무림의 후기지수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벽라천제 백리명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그들의 품성은 인의대덕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지닌 무예 또 한 상당한 수위에 올라 있다 전해지고 있었다. 벌써부터 벽라천제 백리명은 치밀한 판단력과 뛰어난 통솔력으로 차대 벽라무황천주로서의 발판을 굳혀 가고 있었다. 세인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벽라신월 백리황은 그 자질 면에서 벽라천제 백리명을 능가한다. 그가 차대에 벽라무황천을 다스린 다면 정도무림은 지금보다 더한 성세기를 구가하게 되리라. 그리고 벽라상화 백리예령. 이 어린 소녀의 지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라 전해진다. 온화한 가운데 만인을 다스리는 위엄을 선천적으로 타고나고, 미래를 직시하는 예지를 지닌 그녀는 벌 써부터 중원제일지(中原第一智)와 중원제일미(中原第一美)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환우대선생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런데 좀처럼 모습조차 나타내지 않았던 이들이 단우의 면전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악수를 할까?" 벽라신월 백리황은 담담히 웃으며 단우의 앞에 손을 내민다. 그 한 동작에도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자 정파무림인들의 두 눈에는 더욱더 진한 호기심이 띠어졌다. 어쩌면 그들 세 사람은 장래 정사무림의 두 하늘로서 군림하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들의 이번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이번 만남 속에는 실로 중대한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해서, 정파무림인들이 이들의 행동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악수를 할 수 없어." 단우는 전혀 의외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이 태도는 벽라신월 백리황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벽라신월 백리황은 어린아이답지 않은 깊은 수양을 쌓고 있는 듯 노기가 아닌 빙그레 웃음을 머 금으며 부드럽게 반문하고 있었다. "왜 지금 악수를 할 수 없다는 것이지?" "……!" 단우는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이 단우가 포로이기 때문이야." "포로?" "그래… 이 단우는 포로의 상태에서 악수를 하고 싶지는 않아." 단우는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잊지도 않고 있었으며,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의 악수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정중히 악수를 거절한 것이다. "우리는 동등한 입장에서 악수를 해야 하는 것이야." "……!" "지금은 악수를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내가 악수를 청할 때가 있을 거야." 그리고는 성큼성큼 대로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 모습이 못 견디게 대견하다는 듯 단심무정도와 자하고금마유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 이고 있었다. 반면, 정파무림인들의 표정은 실로 기이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의 표현! 그것은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패배감 같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감탄 같기도 한 참으로 모호한 것이 었다. "대단해……." 벽라신월 백리황은 흐트러져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줄곧 단우에게 향해 있었다. "총사께서는 대단한 인물을 볼모로 잡았군요." 그는 환우대선생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엇이 대단하다는 것인지 어린 벽라신월 백리황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환우대선생은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 역시 단우가 대단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벽라상화 백리예령의 얼굴에 피어나는 기이한 빛을 보았기 때문일까?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시종일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평소에 이렇듯 말이 없는 소녀가 아니었다. 벽라무황천의 빛나는 한 송이 꽃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은 탓에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은 편이었다. 그런 귀염둥이인 그녀가 이토록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작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충격은 바로 단우를 대하면서 일어났다. 단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고, 두 손은 가슴 앞에 꼭 모아 놓고 있었다. '기이한 아이였어. 오빠보다도 잘 생기고… 차가운 분위기와… 아니 차가운 것만 같지는 않은…….'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도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꿈을……. 그 꿈속에는 단우라는 기이한 인상의 소동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 예령이 전에는 보지 못했던 특이한 인상이었어. 이 세상에서 오직 그 아이만이 지닌 듯한… 그것이 이 예령을 침묵케 한 것이야.' 그녀는 가슴이 뛰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열세 살 먹은 소녀의 가슴에 분홍빛 사랑이 피어나고 있음을……. 그리고 벽라신월 백리황의 가슴에는 거대한 호승지심이 일고 있음을……. 이것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늘은 호수처럼 깊고 청명했으며… 가을 바람은 더 없이 신선했다. 2 대전(大殿). 천좌전(天座殿)이라고 불리는 이 대전은 벽라무황천의 심처에 위치해 있었다. 사방 벽은 죽화(竹花)로 고아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으며, 바닥에는 백색의 융단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 다. 지금 이곳의 한 단상에는 두 사람이 대좌한 채 조용히 바둑에 심취해 있었다. 한 사람은 구름을 연상케 하는 육십대의 회의노인(恢衣老人)이었다. 도대체 이 좁은 공간 속에서 어찌 인간이 대자연의 기도를 뿌릴 수가 있는 것인지? 그들이 대전에 존재하니 대전이 그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듯하지 않은가? 그런데 단상 앞에는 또 한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고요한 자세로 서 있었다. 바로 단상의 두 사람을 향한 채 마치 하늘을 대하는 듯 더할 수 없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환우대선생이었다. 벽라무황천의 총사라는 지고한 신분에 있는 그가 이렇듯 두 사람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면의 두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먼저 육십대의 회의노인, － 풍운우사(風雲羽士). 그가 바로 남해(南海)의 신비를 안고 있는 풍운도(風雲島)의 도주(島主)였다. 하지만 지금은 벽라무황천의 부천주(副天主)라는 지고한 신분으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그의 능력이 중원인이 인정할 정도로 뛰어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가 벽라무황천의 부천주로 들어선 지 이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는 이 땅의 또 하나의 하늘로 새롭게 인식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름 같은 초탈한 기도를 뿌리고 있는 백의중년인은 누구인가? 더 없이 온화하며 고아한 풍모의 그는 벽라천제(碧羅天帝) 백리명(百里溟)이었다. － 벽라천제(碧羅天帝) 백리명(百里溟). 벽라무황천의 천주. 약관의 나이로 벽라무황천의 천주로 이 땅에 처음 알려진 그는 모든 면에서 대천마련의 천마종야 단사 하와 버금 가는 인물이었다. 단지 그 온화한 눈빛 하나만으로 이 땅을 다스리는 그로 인해 무림은 이십 년의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 던 것이니……. 이제 무림인들은 정파무림을 말할 때 그를 말하며, 중원을 말할 때 그를 처음으로 말한다. 그리고 하늘 을 말할 때도 그를 말한다. 이제 두 사람이 존재하니 이 대전이 꽉 채워졌던 그 이유를 알겠는가? 또한 환우대선생이 이렇듯 공손히 그들을 마주 대하고 있는 이유를 알겠는가? 딱－! 벽라천제 백리명은 한 알의 백 돌을 바둑판에 내려놓으면서 입술을 열었다. "그가 백하선곡의 아흔 아홉 개의 진세를 단 삼 일만에 파훼했다면… 분명히 대천마련에서도 천년지대 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던 것이로군." 더 없이 부드럽고 온화한 음성이었다. 또한 그 음성은 듣는 이에게 무한의 믿음을 주는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가 그 연구의 핵심 인물이라면 우리는 참으로 대단한 수확을 거둔 셈이오." 그의 투명한 시선이 환우대선생에게 향했다. "수고했소, 총사." "별말씀을… 속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헛허허허… 아니오. 당신의 뛰어난 지략이 없었던들 천년지대는 대천마련의 손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르 는 일이며… 그로서 우리 정파무림은 사마의 아래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오." "천주께서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뿐이옵니다." 환우대선생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러자 벽라천제 백리명은 정색하며 물었다. "자하고금마유사가 천년지대에 관한 많은 연구를 했다면… 당연히 그는 천년지대에 펼쳐진 만겁조화구 구대원진세(萬劫造化九九大圓陣勢)에 대해서 상당한 것을 파악해 냈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환우대선생은 벽라천제 백리명의 말에 동조했다. 그는 이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는 최소한 우리가 천년지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옵니다." "그렇다면……." 벽라천제 백리명의 눈빛에 신비한 기운이 가득 물결친다. "우리는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하여 대천마련에 앞서 천년지대를 손에 넣어 영원한 평화시대를 도 래케 해야 할 터인데… 거기에 대한 준비는……?" "물론 하고 있습니다." "좋소. 그 일에 대해서는 총사께 모두 일임하겠으니 무림의 미래 운명을 생각해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처리토록 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벽라천제 백리명의 항거불능의 위엄이 도사린 말에 환우대선생은 숙연한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아들인다. 딱－! 청아한 음향과 함께 침묵을 지키던 풍운우사의 음성이 울렸다. "총사, 대천마련의 소련주라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마치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말하는 듯한 풍운우사의 물음에 환우대선생은 그 물음의 요 체를 깨닫지 못하고 의혹의 표정을 짓는다. 풍운우사는 빙그레 웃는다. "노부의 말은 그 아이의 자질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오." "아……!" 환우대선생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단우에 대해 쉽게 말할 수가 없는 듯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의 자질은 특이하여 뭐라 한 마디로 단정을 내리기가 어려우나… 분명한 것은 위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오?" 벽라천제 백리명이 불쑥 물었다. 위험 인물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느낀 것이리라. 환우대선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속하의 말은… 그 아이가 불치의 진맥을 치료치 못하고 단명할 경우에는 물론 크게 걱정할 성질은 못 되는 것이나… 만에 하나 그 불치의 질맥을 치료하여 천마종야 단사하의 뒤를 이어 백만사마인을 다스 릴 경우에는……." 환우대선생은 여기에서 말을 끊었다. 뒷말을 잇지 않아도 그 내용은 뻔한 것이었다. 벽라천제 백리명과 풍운우사의 얼굴에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동시에 말했다. "그 아이의 자질이 그 정도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음……." 두 사람은 동시에 침음성을 흘렸다. 잠시 침묵이 무겁게 흘렀다. 환우대선생은 두 사람의 무거운 표정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일이 못 되는 것은… 이 시대의 의술로는 그 아이의 병을 치료할 수가 없는 것이 기 때문이옵니다." "도대체 그 아이의 병명(病名)은 무엇이오?" 벽라천제 백리명이 궁금한 듯 물었다. 환우대선생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 아이는 인간이 지닐 수 없는 것을 한 가지 더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병이라면 병이지요." "인간이 지닐 수 없는 것이라니?" "바로 간뇌라는 것이옵니다." "간뇌……!" 두 사람은 처음으로 들어보는 이 새로운 명칭에 의혹의 표정을 떠올린다. 환우대선생은 자세를 바로 잡으며 간뇌에 대한 보충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간뇌는 인간과 짐승이 동시에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나… 인간의 그것은 태어나는 그 순간에 퇴화 되어 버리고 짐승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간뇌를 지닌 채 생활하는 것이옵니다." "오……." "짐승은 간뇌를 그대로 지녔기에 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을 정확히 감지하는 것이 며… 또한 자신의 죽음마저도 예견하게 되는 것이옵니다." 그랬던가? 그래서 짐승들은 지진이나, 혹은 대자연의 거대한 변화에 대해 미리 느끼고 피신하는 것이었던가? "그런데 인간의 간뇌는 퇴화되어 버리는 것이 통례이나 놀랍게도 그 어린아이는 전혀 퇴화하지 않은 간 뇌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가……?" "어찌 그런 일이……?" 벽라천제 백리명과 풍운우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간이 지닐 수 없는 간뇌를 그대로 지니고 있기에 대신 그 아이의 다른 신체조직이 급격한 퇴화현상 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음……." "하늘의 뜻이지요. 지적인 능력이 지극히 발달한 인간에게 간뇌를 준다는 그 자체가 천기(天機)를 누설 하는 일과 같기에 하늘은 인간이 지닌 간뇌를 태어나는 그 순간에 퇴화토록 한 것이지요. 그리고 간뇌 를 그대로 지닌 인간에게 단명을 내린 것도 하늘의 오묘한 안배일 것입니다." "……." "간뇌를 지니고는 있으되 다른 신체조직이 급격한 퇴화를 보이고 있기에 그 어린아이는 전혀 간뇌가 지 닌 영험을 발휘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엄청난 고통 속에서 생활하다 십오 세가 넘기기 전에 죽음을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 누구인가 그 아이의 퇴화하는 신체조직을 회생시킬 수만 있다면 그 아이는 천기를 꿰뚫어 보는 혜안을 지니게 될 뿐만이 아니라 이해능력과 사고력이 범인의 열 배 이상으로 향상되는지라… 그 가 문(文)을 추구한다면 역사 이래 가장 뛰어난 학문의 대가가 될 것이며……." "음……." "그가 만약 무(武)를 추구한다면 무림 사상 가장 뛰어난 절대자(絶對者)가 될 것임은 자명한 이치인 것 입니다." "……."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아이의 퇴화되어 가는 신체조직을 회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환우대선생은 단언하듯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벽라천제 백리명이 궁금한 듯 물었다. "아미십삼활인자의 능력으로도 그것을 치료할 수가 없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그들에게 다시 백 년의 세월이 주어진다 해도 역시 치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겠군." 벽라천제 백리명은 지금까지의 대화를 마무리하듯 말한 후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문제는 우리가 그들 세 사람을 볼모로 잡는데 대한 대천마련의 반응이오." "……." "그들의 반응에 따라 무림은 난세로 빠져들 수가 있으니 우리는 이 일에 대해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것 이오." "그렇소이다." 풍운우사가 다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현재 대천마련의 힘은 일천 년 무림 사상 최강의 사마세력이라 할 수 있기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오." "……." "비록 이곳에 단심무정도와 자하고금마유사, 그리고 그들의 소련주가 유질로 잡혀 있다고는 그러나 그들 이 그 세 사람을 위해 몸을 사릴 위인들은 아닌 것이오. 아니 그들은 이번 일을 기회로 정파무림을 향 해 정면도전을 선언할 수도 있는 것이니……." "……." "이번 일이 천년지대에 대한 비밀을 풀고 나아가서는 정도무림의 영원한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행해진 것이라고는 하나 자칫 천추의 한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반응을 민감하게 살펴야 하는 것이오." 풍운우사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무림을 위하는 진정과 진실이 담겨 있었다. 환우대선생의 표정은 그 말을 듣자 숙연해진다. 그도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번이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한 치의 오차라도 있다면 정파무림은 실로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 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우대선생은 미리 대답을 준비해 두기라도 한 것처럼 여유 있게 말했다. "천마종야 단사하는 쉽게 움직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첫째의 이유는 지금 대천마련이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미처 이번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것이며……." "……." "둘째의 이유는 그는 자식을 사랑하고는 있으나 이미 아미십삼활인자 역시 자식을 치료할 수는 없으리 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으며… 끝내는 자식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식을 구하려 다 파멸할 수도 있는 도박은 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셋째의 이유는… 천마종야 단사하를 따르는 인물 대부분이 소련주의 죽음을 원하는 실정이기에 이번 일을 외면하는데 있습니다." 놀라운 판단력과 추리력이었다. 실로 무섭도록 정확히 환우대선생은 대천마련의 정세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벽라천제 백리명과 풍운우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환우대선생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단우라는 소련주보다는 자하고금마유사를 상당한 비중으로 놓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음……." "자하고금마유사가 천년지대에 대한 연구를 한 핵심인물이라면 우리가 그를 중요시 한 것 이상으로 그 들도 그를 중요시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이기 때문이옵니다." "일 리가 있는 말이오." 벽라천제 백리명은 중년답지 않은 관옥 같은 용모에 감탄의 빛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환우대선생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한 다음 계속 입을 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하고금마유사를 구하려 들 것입니다. 그것이 속 하가 우려하는 일이옵니다." "음……." "그들은 어떤 피의 대가로도 지불하려 들 터인 즉… 그렇게 된다면 우리측의 피해 또한 상당히 크리라 예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한 번은 감수해야 하는 것……." "……."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요. 이 땅에 천년지대가 존재하는 한 정사무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기에……." 환우대선생의 표정은 왠지 어두웠다. 난세를 예고했기 때문인가? 그는 나직이 자신의 앞으로의 대안(代案)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 십매어황 제1권 第六章 제삼(第三)의 신비세력(神秘勢力) 1 "너도 볼모이고……." "……." "너도 볼모이고……." "……!" "너도 볼모란 말이지?" 단우는 자신의 앞에 거만한 자세로 서 있는 세 사람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차고 있었다. 세 사람은 십오 세 가량된 두 명의 소년(少年)과 십사 세 가량된 한 명의 소녀(少女)였다. 이때, 소년소녀들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 중 마의소년(麻衣少年)이 투박한 눈썹을 역팔자로 꼬며 말했다. "야 임마, 네가 우릴 언제 봤다고 감히 너라고 꼬박꼬박 해 대냐?" 불면 날아갈 듯 비쩍 마른 이 마의소년의 두 눈은 두 개의 점을 찍어 놓은 듯 작았으며, 걸치고 있는 마의는 남의 것을 얻어 입은 듯 헐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단우는 허리춤에 턱하니 두 손을 걸치고는 마의소년을 마주 노려본다. "지금 봤다. 왜 너라고 해서 아니꼽다는 말이냐?" "어어……?" 마의소년은 그 작은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며 어이없다는 듯이 단우를 바라본다. '이놈이 정말 겁주머니를 상실한 놈이로군.' 그는 침을 소리내어 뱉으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꼬마야… 우리가 밥을 먹어도 너보다 훨씬 더 먹었고… 이 제마뇌림(制魔惱林)에 들어온 지도 벌써 삼 년째이니… 이것으로 보나 저것으로 보나 너보다 선배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이 꼬마야. 너는 후배된 입장에서 우리를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지." "선배님……?" 단우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쓸어보며 그 작은 입술을 열었다. "야, 이것들아. 이 제마뇌림에서 몇 년을 더 밥을 먹은 것이 뭐가 그리 자랑거리가 된다고 선배님이라고 불러 달라는 것이냐?" "……." "멍청한 것들아. 그래 삼 년의 세월 동안 주는 밥이나 먹고 있었다니… 그게 말이나 되냐?" 단우는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쯧쯧… 나 같으면 열 번은 더 이곳에서 탈출했을 것이다." "뭐, 탈출?" 마의소년을 비롯해서 무심한 인상의 흑의소년과 곰보의 남의소녀는 단우의 말에 입을 딱 벌렸다. "이… 이 제마뇌림에서 탈출을……?" "미친 놈……." 그들은 한동안 단우를 이리저리 살피던 끝에 결국은 미친놈이란 결론을 내리고 만다. 상대할 만한 가치도 없다는 말이다. － 제마뇌림(制魔惱林). 이곳은 벽라무황천의 금역(禁域)이다. 금역이라고는 하나 울창한 송림(松林) 가운데 자리한 한 채의 모옥(茅屋)이 고작이다. 하지만 일단 이곳에 들어서게 되면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에는 두 소년과 한 소녀가 죄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냉사혼(冷死魂). 소야(小爺). 담야훼(潭野卉). 그들이 어떻게 해서 이 제마뇌림에서 생활하게 되었는지는 별반 알려진 것이 없었다. 알려진 것은, 그들의 배후가 범상치 않다는 것이며 볼모로 잡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 만큼 이 제마뇌림은 사실 벽라무황천의 절정고수들이 주야를 가라지 않고 감시를 하고 있었고, 때 문에 이곳을 탈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벽라무황천의 심처에 위치해 있는지라 설사 이곳을 탈출한다 해도 곧 다른 조직의 인물 들에게 발견이 되어 다시 이 제마뇌림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머리통에 피도 안 마른 듯한 어린 단우가 탈출 운운하고 있으니……. 이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 말을 철저히 무시하는 듯한 태도인데……?" 단우는 콧등을 찡그렸다. "말해 두지만 이 단우의 계획은 이미 세워졌어. 백 일 안에 이곳을 탈출하기로……." "백 일 안에……?" "탈출을?" 소년소녀들은 다시 한 번 입을 떡 벌렸다. 단우는 어깨를 쭉 펴며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나를 구하기 전에 내가 이곳을 탈출할 것이야. 그래서 콧대 높은 정파무림인들에게 뭔가를 꼭 보여 줄 것이야." 그 태도가 워낙 당당했기 때문에 냉사혼이라는 무심한 인상의 흑의소년을 비롯한 마의소년 소야와 곰보 소녀 담야훼는 마음이 왠지 뒤숭숭해졌다. '어리기는 하나 우리와는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 '백 일만의 탈출이라는 말은 사실 황당한 것이지만… 그것을 믿고 싶은 것은 왜일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단우에게 기대에 찬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단우는 그제서야 환하게 웃었다. "바보들… 이제야 이 단우의 말을 믿는군." 병색이 완연한 조각처럼 섬세한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자 냉사혼 등은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그들의 배를 툭툭 치며 단우는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한 배를 탄 신세들이니 서로 돕고 살아야지. 당분간은 말이야." "그… 그래야지." 마의소년 소야는 엉겁결에 대답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이렇듯 순식간에 변한 자신의 태도가 쑥스러웠던 게다. 그러자 단우는 곰보소녀 담야훼를 빤히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곰보가 꽤 매력적인걸?" "뭐야?" 담야훼의 두 눈이 홱 째졌다. 그녀는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이나 누가 자신을 곰보라고만 하면 한 마리의 미친 망아지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지금 이 조그만 소동이 거침없이 그녀를 곰보라고 말하고, 거기에다 비꼬듯이 매력적이라고 했 으니 그녀가 이렇듯 사색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뿔싸… 저 어린 꼬마가 야훼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군.' '큰일이다. 곰보라는 소리를 들으면 야훼는 장장 열흘 동안이나 울고불고 난리법석인데…….' 냉사혼과 소야는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과연 담야훼의 큰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울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그런데 단우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술 더 뜬다. "좋아. 결정했다. 이 단우의 색시 후보감의 명단(名單)에 올려놓기로……." 색시 후보감이라니? 어찌 들으면 이것은 더욱 모욕적인 언사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담야훼의 두 눈에 떠오르던 눈물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더니, 대신 그녀의 목덜미가 붉어지면서 입가 에는 수줍은 미소가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실로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변화였다. 냉사혼과 소야는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어… 어찌 저럴 수가……?' '야훼가 수줍어할 줄을 알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것은 정녕 꿈이 아닐까? 그들은 가만히 자신들의 살을 꼬집어 본다. 하나 분명히 아픈 것으로 보아 꿈은 아닌 것이다. 이때 단우가 실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하얗고 가냘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피… 피곤해… 이 단우는 어디서 쉬어야 하는 것이지." 정말이지 그는 피로한 것이다. 병약한 몸에 이런 급격히 변한 환경에 접하니 당연히 피로하고 지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색은 더 없이 창백하게 변했고 전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담야훼는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어… 어디가 아픈 것이니?" 그녀는 황망히 단우를 부축했다. 단우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응… 조금… 아퍼. 하지만 한숨 자면 나을 거야." "그… 그래?" 담야훼 비로소 안심이 된다는 듯 단우를 부축하고 모옥으로 들어갔다. "……." "……." 냉사혼과 소야는 멍청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야가 문득 기대에 찬 음성을 발했다. "정말 저 꼬마가 백 일만에 이곳을 탈출할 수가 있을까?" 그러자 냉사혼이 한 마디로 잘라 말하며 몸을 돌렸다. "어림도 없다." 아직 소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그에게서는 진한 무심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는데……. 소야는 아직도 단우의 등을 보며 기대에 찬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보낸 삼 년의 세월이 그만큼 지겨웠던 것이다. '거짓말이라도 좋아. 백 일 동안 희망을 안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으니…….' 2 백만정파인의 하늘, 벽라무황천! 이곳의 조직은 일성이전삼루(一城二殿三樓)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 무황성(武皇城). 이곳은 실질적인 벽라무황천의 핵심기관이었다. 정파무림인의 모든 대소사가 최종적으로 이곳에서 결정이 되고 처리되는 것이다. 성주는 벽라무황천의 부천주인 풍운우사. 무황성에는 과거 풍운우사가 소속이 되어 있던 신비의 섬 남해 풍운도(風雲島)의 인물이 상당수가 예속 이 되어 있다 전해지고 있었다. － 천뇌전(天腦殿). 이곳은 이전 중 일전으로서, 정확히 일백팔 인의 초지자(招智者)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가장 우수한 두뇌를 지닌 일백팔 인의 정도인들을 가리켜 일백팔천뇌성자(一百八天腦聖者)라 부르며, 바 로 이들에 의해 벽라무황천 전체의 정략이 세워지고 행해진다. 천뇌전의 전주이자 일백팔천뇌성자의 수뇌는 환우대선생이었다. － 옥황전(玉皇殿). 천뇌전과 함께 이전에 속한다. 천뇌전이 초지자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면, 이곳의 인물들은 가공할 무공을 지닌 초절정고수들로 이루어 져 있었다. 이곳에 예속된 초절정고수는 무려 일만에 달한다. 그들 중 가장 강한 고수 열 명을 일컬어 옥황십무경(玉皇十武卿)이라 부른다. 옥황십무경의 우두머리는 소수천무경(素手天武卿)! 그가 바로 옥황전주였다. － 복마루(伏魔樓). 삼루 가운데 일루였다. 벽라무황천의 형법(刑法)과 치안(治安)을 관리하는 기관으로서, 최고의 인물은 벽라십대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벽라십대장군은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였으나, 당대 최고의 기재들로 손꼽힌다. 이 땅의 호법자(護法者)들인 벽라십대장군의 수뇌는 철기대장군(鐵機大將軍) 옥기린(玉麒麟)이었다. － 대정루(大情樓). 복마루와 함께 역시 삼루 가운데 일루로서, 벽라무황천의 정보수집기관이었다. 천하인들의 신상내력이 이곳에 완전하게 분석 수집되어 있었으며, 장장한 세월 동안 이 땅의 정보통이 라 일컬어지던 개방( )보다도 더욱 완벽한 정보망을 지니고 있다면 과연 믿겠는가? 비밀로 유지되어야 하는 정보에 관련이 있는 조직인지라 이곳은 철저하게 신비에 감추어져 있었다. 루주는 만통선생(萬通先生)! － 기인루(奇人樓). 삼루 가운데 일루이다. 이름 그대로 이곳에는 기인(奇人)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현무림기인을 비롯하여 전대의 기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기인루는 기인들의 총집합체인 것이다. 루주는 백 년 전의 일대기인인 종횡천노(縱橫天老)! 사실 이들 일성이전삼루의 조직 중 어느 한 조직이라도 각기 다른 시대에 내놓으면 그 시대를 패주할 만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그 가공할 조직으로 이루어진 벽라무황천의 힘이야말로 무림사 일찍이 찾아볼 수가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3 사방은 칙칙한 어둠으로 휩싸여 있었다. 벽라무황천 내의 한 부분인 이곳은 아마도 하나의 밀실인 듯 했다. 밀실에는 작은 황촉 하나가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제 몸을 태우고 있었다. 지금 그 불빛 속에 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중년인과 한 명의 삼십대 청년이었다. 그들은 바로 풍운우사와 자하고금마유사, 그리고 환우대선생이었다. 무슨 일인가? 대체 무슨 일로 그들은 달도 없는 야심한 이 시각에 이곳 밀실에 모여 있는 것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자하고금마유사가 가장 상석에 머물고 있었으며, 환우대선생이 그 다음 자리에, 그리 고 풍운우사가 가장 말석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대천마련의 부련주라는 신분으로서 포로의 신분으로 이곳에 잡혀온 것이거늘……. 그리고 분명 풍운우사는 환우대선생의 위에 군림하고 있는 벽라무황천의 부천주의 신분을 지니고 있거 늘……. 지금 그들은 세인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자세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더욱 엄청난 것이었다. 먼저 자하고금마유사의 잔잔한 음성이 울리고 있었다. "그 동안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천년지대의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는 백 년을 주기로 한 차례씩 미 세하게나마 그 움직임이 정지됨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습니다." 환우대선생과 풍운우사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인다. 자하고금마유사의 눈빛은 진한 노을빛을 띠며 두 사람에게 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지되는 순간은 지극히 짧다. 단 하루 열두 시진에 불과한 것이다." "……." "천년지대의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적인 기회를 이용해야만 한다. 그 기회 를 놓친다면 우리는 다시 백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은 감히 세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천년지대의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가 백 년을 주기로 한 차례씩 그 힘이 정지됨을……. 도대체 이들 세 사람의 진정한 신분은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그들은 같은 입장에서 천년지대를 거론하고 있단 말인가? 진정 모를 일이었다. "앞으로 삼백 일 후… 천년지대의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가 약화되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 "지난 일천 년의 세월 동안 우리 선조들은 이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각고를 거듭했다. 그들의 염원 은 우리 대에서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그의 눈빛은 어떤 격동으로 인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환우대선생과 풍운우사를 보며 물었다. "모든 준비는 마감되어 가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환우대선생과 풍운우사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의 그는 과거의 자하고금마유사가 아니었다. 이 순간 그는 더욱 거대하게 보이고 있었다. 대천마련의 부련주라는 지고한 신분에 있으면서도 야망은 없다던 그가 지금은 두 눈에 가득 야망의 불 꽃을 피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황촉 불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엇인가가 생각나는 게 있다는 듯 불쑥 물었다. "단심무정도와 단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환우대선생이 공손히 대답했다. "단심무정도는 금마뇌옥(禁魔牢獄)에 있으며… 단우는 제마뇌림에 머물고 있습니다." "음……." 자하고금마유사는 걸음을 멈추며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을 각별히 신경을 써서 돌봐 주도록 하게나. 그들은 나를 믿고 있으니… 나는 멀리서나마 그 보답을 해야 하는 것이 도리일지니……." "알았습니다." "고맙네." 자하고금마유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물었다. "대종사(大宗師)의 심기는 어떠하신가?" 이번에는 풍운우사가 공손히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그분의 병세는 나날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큰일이군." 자하고금마유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탄식했다. 그는 다시 황촉 불빛을 따라 거닐기 시작했다. 환우대선생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미십삼활인자가 그분을 치료키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조만간 병세에 호전이 있을 것이 옵니다." "그분을 지금 만나볼 수가 있는가?" "그분도 제갈통사(諸葛通士)를 뵙고자 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잘됐군. 그분에게 나를 안내하게." "알겠습니다." 환우대선생은 대답과 함께 밀실을 빠져나갔다. 이어 풍운우사와 자하고금마유사는 그의 뒤를 따라 사라져 갔다. 제갈통사! 자하고금마유사를 제갈통사라 부르다니……! 그 호칭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들 사이에는 세상이 모르는 어떤 신비의 조직이라도 도사리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대종사는 또한 누구인가? 신비! 모든 것이 신비이며 의혹이었다. 밤은 깊어 가고 신비와 의혹은 더욱 깊어 간다. 4 여기 또 하나의 황촉 불이 있었다. 제마뇌림의 모옥 안에서 네 사람이 하나의 목탁(木卓)을 사이에 두고 빙 둘러앉아 있었다. "진짜야? 냉사혼, 네가 자객사림(刺客邪林)의 인물이란 말이지?" 단우는 냉사혼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냉사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냉사혼은 자객사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햐… 놀라운 걸?" 단우는 신기하다는 듯 냉사혼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부련주로부터 자객사림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뭐라더라……?" 단우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이마를 탁 쳤다. "그래… 살인청부조직이라고 했지 아마……?" － 자객사림(刺客邪林). 실로 공포스러운 전문 살인청부조직이었다. 대가만 받으면 이 땅의 천자라도 죽이는 그들을 가리켜 세인들은 자객사(刺客士)라 불렀으며, 그들을 생 각할 때는 몸서리를 치곤 했다. 거의 일천 년의 역사를 지닌 조직으로서, 이 조직 내의 어린아이라도 완벽에 가까운 살인 기술을 지니 고 있다 하였으니……. "이제야 냉사혼이 이곳에 볼모로 잡혀온 이유를 알 것 같아." 단우의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냉사혼은 자객사림의 소림주이겠지?" "……." 냉사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단우는 냉사혼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너도 자객이겠구나?" "물론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걸? 어린 네가 어찌 사람을 죽이는 자객이 될 수가 있는 것이지?" 그러나 다음 순간 단우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느 새 냉사혼이 그의 목에 면도날처럼 얇은 철검(鐵劍)을 들이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단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단우의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오히려 호기심의 빛만이 더욱 진하게 떠올라 있는 것이 아 닌가? 냉사혼은 차갑게 웃었다. "이제는 믿겠느냐?" "응……." 단우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에 닿아있던 철검은 어느 새 사라지고 없었다. 소야가 가는 눈을 굴리며 물었다. "꼬마야, 간 떨어지지 않았느냐?" "천만에… 이 단우의 목에 설사 칼이 뚫고 들어온다 해도 눈 한 번 깜짝이지 않을 걸?" 단우는 어깨를 쭉 펴며 말했다. 소야는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정색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솔직히 너의 간덩어리는 대단히 크다는 것을 인정해 주지. 그러나 이 소야의 신분을 듣는다면… 후후 후… 그 간덩어리는 좁쌀만하게 오므라들 걸?" "과연 그럴까?" "후후후… 틀림없다. 네놈이 나의 신분을 알게 된다면 나를 우러러보게 될 것이다." 소야는 다시 한 번 자신 있게 말한 후 자신의 신분에 대해 말했다. "나는 야성(夜城)의 소성주다." "야성?" 단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야성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 아닌가? 그러자 소야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들…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야?" "응." 단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확신하듯 말했다.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 걸?" 여지없이 자존심이 뭉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소야가 다시 물었다. "자객사림은 알면서 야성은 모른단 말이야?" "글쎄… 그렇게 됐는 걸?" "이… 런……." 소야의 얼굴은 썩은 돼지간 빛이 되고 만다. 그리고는 황망히 침을 튀겨 가며 야성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데……. － 야성(夜城). 한 마디로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신투(神偸)의 집단을 말함이다. 밤의 제황들이 모여 만든 밤의 제국인 것이다. 천하의 내 놓으라 하는 전문가들이 만든 집단이었기에 이들이 가지 못할 곳은 천하에 없다고 전해졌는 데……. "겨우 도독놈들의 집단이야?" 단우는 실망했다는 투로 말했다. 소야의 얼굴은 퍼렇게 질려 버리고 만다. "이… 이런 죽일 놈! 밤의 군자를 보고 도둑놈이라니?" 단우를 한 대 후려갈기려는 듯 손을 치켜들었다. 바로 그때 그 손을 조용히 움켜쥐는 섬세한 손 하나가 있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뭘 그래?" 담야훼가 단우의 앞에 서며 웃고 있었다. 소야는 그 작은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며 말했다. "너… 너까지? 이것들이 이제 보니 아주 죽이 척척 맞네." "……!" "그렇다면 너는 뭐냐. 너는 산적의 딸이 아니냐?" "산적? 분명히 산적이라고 했으렷다!" 담야훼의 눈 꼬리가 치켜세워진다. 그리고 어디를 어떻게 한 것인지……. "아이고……!" 소야는 정강이를 움켜쥐고는 죽는다면서 이리저리 날뛴다. 담야훼는 그제서야 만족한 듯 히죽 웃었다. "감히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의 소채주를 가리켜 산적의 딸이라고 하다니… 아마 삼 일 동안은 끙 끙 앓고 누워 있어야 할 걸?" "아이고… 소야 죽네……." －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 산(山)을 다스리는 산 사람들의 집단이다. 이들의 조직은 상상외로 방대한 것이며 나름대로의 한 세대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산적과의 집단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집단인 것이다. 그들은 실로 가공할 만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으니 누가 감히 그들을 가리켜 산적의 무리라 하겠는 가?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모옥 안이 돌연 쥐죽은듯이 고요하게 변했다. "……?" "……?" 길길이 날뛰던 소야의 입도 굳어져 있었으며, 무심하던 냉사혼의 눈빛도 한곳에 고정이 된 채 떨리고 있었고, 단우와 담야훼의 두 눈도 굳어져 있었다. 모옥의 창문에 유령처럼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 십매어황 제1권 第七章 천년대자문(千年大者門)의 야망자(野望者)들 1 달빛을 등에 받으며 뒷짐을 진 채 고요히 서 있는 그는 중년인이었다. 일신에 허름한 자의(紫衣)를 걸치고 있는 그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해서 도무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무의무감(無意無感)한 상태에서 살인적인 예기(銳氣)를 간간이 뿌리고 있는 그의 미심에는 자색(紫色)의 반점(斑點)이 솟아 있었다. 그 자색반점은 실로 기이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는데……. 이 순간 그의 무심한 시선을 시종일관 단우에게로 향해 있었다. 단우는 그 시선 속으로 자신이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급히 그 전율스러운 감정을 추스르며 물었다. "다… 당신은 누구지요?" "……." 자의중년인은 대답이 없었다. 오직 단우만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무심한 눈에는 단 일점의 감정도 담겨 있지는 않았다. 잠시 단우를 주시하던 자의중년인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소련주께서는 천마절대지존(天魔絶代至尊)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요?" "처… 천마절대지존?" 단우는 경악했다. 이미 자하고금마유사를 통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대천마련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일회이벽삼교(一會二壁三敎)라는 무서운 조직 가운데 절대마벽의 벽주 인 천마절대지존은 대천마련의 외성 오십만 사마인을 휘하에 둔 거마(巨魔)였다. 또한 그는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 단심무정도 등이 대천마련을 떠나 백하선곡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수 하들을 보내 마흔다섯 차례의 암습을 하게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이 야심한 시각에 벽라무황천의 심장부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외부인으로서는 도저히 들어올 수 없는 이 제마뇌림에 나타난 것이니……. 그의 앞에서는 벽라무황천의 수많은 경비무사들이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단우는 문득 불길한 예감을 떠올렸다. '그래… 이 단우를 죽이러 온 것이 틀림없어.' 앞뒤의 상황으로 미루어 단우는 이런 확신을 나름대로 한 것이다. 그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나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당당하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왔나요?" 천마절대지존은 빙그레 웃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속하는 단지 태상련주의 명으로 소련주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오." "아버님의 명으로……?" 단우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은 이 단우를 죽이기 위해 마흔다섯 번의 암습을 한 사람인데… 아버님이 당신에게 나를 구하라는 명을 내렸다니……." "……." "그럴 리가 없어요.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헛허허……." 천마절대지존은 소리내어 웃는다. 나직이 뱉는 그 웃음에도 모옥은 허물어질 듯 진동하고 있었다.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그의 무공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경지에 달한 듯 싶었다. 천마절대지존은 곧 웃음을 그치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오십 차례의 암습은 소련주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었소이다." "그럴 리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속하는 그 암습을 이용하여 불필요한 수하들을 제거했을 뿐이오." "불필요한 수하……?" "다시 말해 진심으로 속하를 따르지 않는 인물들을 단심무정도와 자하고금마유사의 칼을 이용해 죽였다 는 것이지요." "그… 그렇다면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바로 그것입니다." 무감정하게 내뱉는 천마절대지존의 말에 단우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만다. 차도살인지계! 이것은 남의 칼을 이용해 살인을 하는 잔인한 방법이 아닌가? 냉사혼과 소야, 담야훼 등도 천마절대지존의 말을 듣고는 치를 떨었다. '잔인한 사람이다…….' '자객사림의 인물 가운데서도 저런 잔인한 인물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단우의 표정은 믿을 수 없게도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빛은 지극히 고요했으며……. 도저히 어린아이의 눈빛이라고는 볼 수 없으리만큼 유연하여 심해(深海)의 정적이 그곳에 담겨져 있는 듯했다. "……!" 그 눈빛을 대하는 천마절대지존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어떤 경이로움이랄까? 그러나 그 기이한 빛은 나타나는 것보다 빨리 사라지고 이내 무심한 상태로 돌아갔다. 이때 단우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빤히 천마절대지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동안 이 단우가 당신을 오해했던 것 같군요." "……!" "그래요. 당신은 차도살인지계를 써서 기강을 바로 잡으려 했던 것뿐이지… 이 단우를 죽이려 했던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요?" "……!" 천마절대지존은 무심한 시선으로 단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우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틀림없어요. 당신은 수하를 다스리기 위해 적당히 잔인할 뿐이지… 죽을 병에 걸려 죽이지 않아도 죽을 이 단우를 애써 죽이려 했을 리는 없지요." "……." "아버님의 명을 받들고 이런 사지(死地)를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온 당신의 충정(忠情)을 모르고 이 단우 는 당신을 잔인하고 비정하며 이 단우를 죽여 대천마련을 손아귀에 쥐려는 무서운 야망자로만 생각했으 니… 참으로 이 단우는 어리석지요?" 백옥 같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훅훅 불면서 말하고 있는 단우의 표정은 실로 천진 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후후후……." 돌연 천마절대지존은 나직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오싹한 한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도대체 무엇이 대단하다는 것인지……? 그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는 기운은 단지 어둡다는 것뿐이었다. "소련주가 죽어야 할 운명이 아니었다면……." "……."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을 치료할 수가 있는 사람이 이 땅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이 순간 소련주를 죽였을 것이오." "이 단우가 대단하기 때문인가요?" 단우는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천마절대지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단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쨌든 당신이 나를 구하러 이곳까지 와 주었으니 이 단우는 감사를 드리는 입장에서 당신에게 한 가 지 충고를 하고 싶어요. 들어 주시겠어요?" "충고? 좋소. 말해 보시오." 천마절대지존의 눈에는 의혹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대벽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야망이 너무 커요." "……." "그 야망을 버리고 이 단우의 아버님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길 바래요. 만약 당신이 야망을 위해 이 단우 의 아버님에게 불경할 경우에는……." "경우에는?" 천마절대지존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단우는 양 볼에 보조개를 피우며 말했다. "이 단우가 당신을 엄히 문책할 것이에요." "크핫하하하……!" 그의 말에 천마절대지존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전신을 격렬하게 떨었다. 엄청난 공력이 담긴 광소인지라 냉사혼 등은 귀를 틀어막아야 했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단우는 전신기혈이 용솟음쳐 오르는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도 신음 한 마디 내뱉지 않고 천마절대지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천마절대지존은 웃음을 뚝 그치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단우를 바라보았다. "소련주를 구하기 위해 이곳 제마뇌림까지 오는 도중 나는 일급 수하 일백여 명을 잃어야 했소." "……." "한데 이제 와서 고작 들어야 한다는 소리가 그런 충고라니……." 천마절대지존의 손이 검 자루를 잡아갔다. 그런 그의 무심한 눈에는 은은한 살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단우의 표정에는 일점의 변화도 없었다. "흥… 당신은 진정으로 원해서 이 단우를 구하려 온 것은 아니잖아요?" "물론 그렇소. 지금은 태상련주의 명을 거역할 시기가 아닌지라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온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그냥 돌아가도록 해요." 단우는 단호히 말하며 몸을 돌렸다. "소련주께서는 이곳에 남아 있겠다는 말씀이오?" 천마절대지존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단우는 나의 힘으로 이곳을 탈출할 것이에요. 당신의 그런 억지 호의는 거절하겠어요." "후회는?" "절대로 안 해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소련주의 뜻을 그대로 태상련주께 전하도록 하지요."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검 자루를 잡은 천마절대지존의 손이 미미한 움직임을 보이는가 싶더니, 번쩍! 하고 푸르스름한 검광(劍 光)이 모옥의 천장을 향해 무섭게 쏘아져 갔다. "크아아악－!" "커억－!" 서너 마디의 참혹한 비명이 모옥의 지붕 위에서 터져 올랐다. 그들은 벽라무황천의 수신무사들이 틀림없으리라. 그런데……. "크핫하하… 그럼 소련주의 만수무강을 빌겠소이다!" 비명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천마절대지존의 음성은 아련히 모옥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미 모옥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 순간, 모옥에 찬란한 광채가 어리는가 싶더니 전신이 온통 황금색으로 이뤄진 열 사람이 모옥 안으 로 소리 없이 들어섰다. 금빛 찬란한 투구에 금빛 갑의를 걸친 그들은 다름 아닌 벽라십대장군이었다. "……?" "……?" 벽라무황천의 일성이전삼루 중 복마루의 최고인물들인 그들은 모옥 안을 빠르게 휘둘러보고는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이곳으로 침입해올 정도라면 그만큼 무공이 고강했을 것이고,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단우가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단우는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향해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벽라십대장군은 그만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그는 분명 대천마련의 제삼인자인 천마절대지존이었다.' '그가 이곳에 잠입한 목적은 이 단우라는 아이를 구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2 처음에 그는 벽라무황천의 잡부(雜夫)로서 입문했다. 출신은 고아(孤兒)였고 입문할 당시의 나이는 약관에 불과했으며 무공이라곤 전혀 지니고 있지 않은 상 태였다. － 금일홍(金一紅). 이 인물의 특이한 점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용모도 평범했으며, 그의 두뇌 또한 지극히 평범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벽라무황천의 정보(情報) 수집기관인 대정루의 핵심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올라 서 있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가 십 년의 세월과 함께 대정루의 이인자로 올라선 것이었으니……. 사실 그가 지닌 선천적인 한 가지 능력은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을 끄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평범한 한 마디에도 많은 사람은 울고 웃어야 했으며, 그의 평범한 한 동작에도 많은 사람들은 존경의 시선으로 쳐다보아야 했다. 이런 그의 특이한 마력에 많은 사람들이 그와 친구로 지내기를 원했으며 그와 가까이 있기를 원했다. 그는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벽라무황천의 많은 고수들은 그에게 무공을 주기를 원했고, 그를 중 요 직책에 올려놓기를 원했다. 선천적으로 사람을 다스리는 뛰어난 능력을 타고난 그는, 옥황전에 들어 무공을 연마했으며 복마루에도 잠시 머물렀고 천뇌전과 무황전에도 잠시 머물렀다. 아마도 이런 인물은 처음이리라. 한 사람이 벽라무황천의 서너 개 조직을 두루 거친 것은! 그리고 그는 대정루의 이인자의 자리로 올라섰다. 대정루주 만통선생에 이어 그는 실질적인 대정루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벽라무황천의 불가사의한 존재로 불리게 되었으니……. "……." 지금 그는 대정루의 한 서실(書室)에서 하루를 마감하는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의 탁자 위에는 산더미처럼 각종 보고서(報告書)들이 쌓여 있었다. 일신에 허름한 회의를 걸치고 있는, 삼십대 정도로 보이는 그는 그야말로 어느 곳 하나 특출한 곳이 없 는 평범함을 지니고 있었다. 단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그의 손이 유난히 길고 섬세하다는 것과 머리에 쓴 진홍색 문사건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는 세 사람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자하고금마유사와 풍운우사, 그리고 환우대선생이 아닌가? 이때 세 사람은 지극히 공손한 태도를 금일홍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었으니……. 대정루의 부루주인 금일홍은 이들 세 사람과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금일홍의 잔잔한 눈빛이 막 한 권의 보고서에 벗어나 자하고금마유사 등에게 향했다. 그리고는 그들 세 사람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이런 방대한 정보서(情報書)를 다룬다는 것은 사실 벅찬 일이지." 그런데, 그 평범한 얼굴에 띠어진 웃음이 어찌 이리도 매혹적일 수가 있단 말인가? 마치 어둠을 밀어내며 나타나는 한 줄기 광명처럼, 아침 안개 속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양광처럼 도대 체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웃음은 보는 이의 심혼을 황홀하게 파고드는 것이었으니……. 그런 그가 자하고금마유사를 직시하면서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종사를 뵙고 싶다고 했는가?" "그렇소이다. 부종사(副宗師)의 선처가 있기를 바라겠소." 자하고금마유사는 공손히 포권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 평범한 금일홍이 부종사라니?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자하고금마유사를 비롯한 나머지 인물은 분명히 벽라무황천의 인물이건만, 이들의 대화 속에서 나타난 신분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으니……. 벽라무황천의 부천주인 풍운우사는 그의 아래 신분인 환우대선생을 공경히 대하고, 환우대선생은 자하 고금마유사를 더없이 공경히 대하고, 자하고금마유사는 이 금일홍이라는 인물을 부종사라고 부르며 더 없이 공손히 대하고 있었으니……. 벽라무황천. 이 거대한 무림의 하늘 속에는 세인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조직이라도 들어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진정 무서운 일이 아닌가? 벽라무황천이라는 백만정도인의 하늘이 이 신비조직에 철저하게 이용을 당하고 있다면, 신비조직의 힘 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가공할 것임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금일홍이 천천히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지금은 대종사를 만날 수가 없다." "무엇 때문이오?" 자하고금마유사의 표정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금일홍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그분은 아미십삼활인자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네." "아……." 자하고금마유사는 가볍게 탄성을 발했다. 그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치료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음……." 금일홍은 고뇌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지금으로서는 무어라 말하기 어려우나… 아미십삼활인자는 그분을 치료키 위해 무려 삼십 년의 세월을 보냈으니… 가능성은 오십 정도로 봐야겠지." "오십의 가능성……." 자하고금마유사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불쌍하신 대종사… 오음절맥(五陰絶脈)이라는 선천질맥을 타고 나셨기에 그 지혜가 하늘을 덮을 정도이 건만… 오직 죽음만을 기다려야 했던 그분…….' 그랬던가? 이들이 말하는 대종사라는 인물이 오음절맥을 타고난 것이었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의 선천질맥을 치료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 천년대자문(千年大者門)은 자중지란에 빠져들 것이며… 천년지대가 열리기도 전에 파멸을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 천년대자문의 파 멸은 곧 우리 무림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 이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종사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자하고금마유사의 눈빛은 그만이 느낄 수 있는 정도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금일홍은 그 미세한 눈빛의 떨림마저도 감지한 듯 신비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고 있었으니 ……. 그의 그 신비한 미소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매우 궁금했다. 그리고 천년대자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벽라무황천의 속에 자리잡은 천년대자문 안에 꿈틀거리는 인물들은 이 시대 최고인들은 분명 아니었다. 그들은 이 시대의 제이인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이인자들로 이루어진 그들 천년대자문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대종사라는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 십매어황 제1권 第八章 어린 남녀(男女), 그들의 미묘한 대결 1 "지난 삼 년의 세월 동안 이곳에서 알아 낸 것이 아무 것도 없단 말이야?" 단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빛은 냉사혼과 소야, 그리고 담야훼의 얼굴에 고정이 되어 있었다. 이때, 담야훼 등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어린 단우의 앞에서 할 말을 못 찾고 있는 그들의 심사야 오죽하겠는가? 단우의 질책은 계속이 되고 있었다. "쯧쯧… 삼 년의 세월 동안 탈출하려는 시도를 한 번도 안 해본 것도 그렇지만… 이 벽라무황천의 조직 에 대해서도 전혀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했다." "험험… 그, 그것이……." 모처럼 소야가 입을 열었지만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단우는 입을 삐죽였다. "할 말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해 보시지." "험험……." "물론 이 제마뇌림의 주위가 너무 살벌하여 꼼짝을 못했다고 변명을 하려 했겠지?" '귀신 같은 놈이다.' 소야는 입맛을 다셨다. 자신들의 마음마저 꿰뚫어보는 어린 단우의 심기에 그들은 더욱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단우는 정색을 했다. 그런 그의 몸에서는 구름 같은 위엄이 풍겨지고 있었다. "이곳을 빠져 나가려면 이곳의 지형지세의 경비자들의 위치, 숫자 등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 이다. 적을 알아야 승리를 취할 수가 있는 것이기에… 그런데… 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 "분명히 이 단우는 말했다. 백 일만에 이곳에서 탈출을 하겠다고……." "……!" "이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대로 이행될 것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곳의 지형지세 등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알려면 여러분의 도움이 절대 적으로 필요하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세 사람을 주시했다. 그의 눈망울은 유난히 고요하고 깊은 것이었다. 세 사람은 그 눈망울에 접하자 자신들의 마음이 호수처럼 적막해짐을 느꼈다. "벌써 내가 이 제마뇌림에 들어온 지도 열흘… 백 일의 기간 중 열흘의 시간이 참으로 무의미하게 흘러 가 버린 것이다." "……." "오늘부터는 무엇인가를 해야겠어. 우선 제마뇌림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고, 이 제마뇌림의 주위의 경비 자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겠어." 단우의 말이 거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냉사혼이 입을 열었다. "꼬마야, 너는 지금 우리를 너무 멍청이로 알고 있다." "무슨 뜻이지?" 단우의 얼굴에 의혹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소야가 눈을 거슴츠레하게 뜨고는 입을 열었다. "이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삼 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멍청하게 주는 밥만을 먹은 것이 아니란 말씀이야." "그렇다면……?" "사실 우리는 열세 번의 탈출을 그 동안 시도했었지." "열세 번의 탈출을……?" 단우의 눈이 번쩍 빛났다. 담야훼는 탄식했다. "그러나 그 열세 번의 탈출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어. 미처 이곳에서 오백여 장을 빠져 나가기도 전에 잡히고 말았으니까." 담야훼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아직은 인생을 알기엔 어린 나이인 것이다. 부모의 정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할 그들이 삼 년의 세월 동안 이곳 제마뇌림에서 갇혀 지냈다는 것은 사 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결코 밝을 수가 없는 것이고, 보는 것보다는 어둡고 외로움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단우는 그런 그들의 심사를 헤아릴 수가 있었다. 비록 이곳에서의 생활이 열흘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근엄한 아버님의 품이 그립고, 또한 어머님의 자애로움이 그립지 않은가? 문득 단우는 세 사람을 향해 연민의 눈빛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실패는 당연한 것이야." "……." "이곳에서의 탈출은 치밀한 계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야. 아니 치밀한 계산이 뒤따른다고 해도 성공의 확률은 지극히 희박해." "음……." 냉사혼을 비롯한 소야, 담야훼 등은 침음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다. 단우는 이마를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백 장까지도 탈출했다는 것이야." "무… 무슨 말이지?" 소야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단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 오백여 장의 거리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정도 거리만이라도 벽라무황천에 대 해 알아 두었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라고 할 수 있어." "……." "이해할 수가 없는 모양인데… 차차 내 말을 이해할 수가 있을 거야. 우선 지난 삼 년 의 세월 동안 그 대들이 시도한 탈출에서 발견한 그 무엇이든 나에게 말해 주길 바래." "……." "오백 장의 근처에 무엇이 있었으며… 어떤 경위로 이곳을 탈출했고 또한 누구에게 잡힌 것인지를……." 단우의 눈빛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단우의 태도에 냉사혼과 소야, 담야훼 등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청천(靑天). 가을 하늘은 베면 푸른 물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짙푸르렀으며, 네 사람이 머물고 있는 제마뇌림의 푸 른 초지(草地)는 융단이라도 깔아놓은 듯 부드럽다. 그리고 정오의 햇살은 네 사람의 몸 위로 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이때 단우의 말에 말하기 좋아하는 소야가 열심히 그간의 탈출에 대한 일과, 거기에서 발견한 무엇이든 빼놓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 제마뇌림은 벽라십대장군이 수뇌로 있는 복마루의 관할하에 있다. 때문에 이 제마뇌림의 주위로는 복마루의 벽라칠십이천군위사(碧羅七十二天軍衛士)들이 물샐틈없이 감시망을 펼치고 있지." "……!" "우리는 열세 번의 탈출을 시도했다가 다섯 차례는 이들 벽라칠십이천군위사들로 인해 철저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어." "음… 벽라칠십이천군위사가 그토록 대단한 존재란 말이지?"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야의 말을 재촉했다. 소야는 신이 나서 말했다. 말하는 것이 그에게는 즐거움이었기에……. "그러나 벽라칠십이천군위사들보다 더욱 무서운 인물들이 있는데… 그들은 벽라칠대영반(碧羅七大英班) 으로서… 복마루의 초절정 고수들이며 벽라칠십이천군위사를 휘하에 두고 있는 무서운 인물들이야." "벽라칠대영반이라……." "어쨌거나 우리는 벽라칠대영반마저도 다섯 차례나 따돌리고 이 제마뇌림의 구역 내에서 나간 적이 있 었는데……." "있었는데?" "아깝게도 이곳 제마뇌림을 중심으로 해서 동쪽으로는 천뇌전이 위치해 있고 남으로는 옥황전이… 서편 으로는 대정루가… 그리고 동쪽으로는 기인루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탈출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 소야는 못내 애석하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단우는 소야의 말을 뇌리에 담아두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무황성은 어디에 있는 것이지?" "그래, 무황성도 있었지." 소야는 손뼉을 한 차례 치며 말했다. "무황성은 말이지… 벽라무황천 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관으로서……." "알아. 무황성이 핵심적인 기관이라는 것은……." 단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그것은 담야훼가 이미 말했으니… 그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만 말해 줘." 그렇다. 단우는 벽라무황천의 조직에 대해서는 담야훼로부터 간단하게 들었던 것이다. 소야는 단우와 담야훼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랬나? 야훼에게서 들었던 말이지?" "……!" "밤에 들었을까? 아니면 낮에 들었을까?" 소야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의미심장한 중얼거림을 흘렸다. 그러자 담야훼는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너… 죽고 싶어?" "처… 천만에. 이 소야는 살고 싶어… 으악……!" 소야는 정강이를 움켜잡고 비명을 질렀다. 담야훼의 두 발이 소야의 정강이를 걷어찬 것이다. 소야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날카로운 손톱으로 소야의 허리를 잡아뜯었다. "도대체가 도둑놈들은 예의라곤 없단 말이야. 이번 기회에 그 입을 조심하도록 해야겠다." "아… 아이고! 소야 죽네." "흥! 딴 곳은 다 죽어도 그놈의 입만은 살아서 나불거리겠지?" "이… 이젠 그만… 제발… 이 소야가 잘못했어… 으악……."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이지?" "소… 소야기 입을 잘못 놀렸어… 제… 제발… 아이구……."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지?" "으으… 입을 조심하겠어." "정말이지?" "매… 맹세하겠어." "좋아." 담야훼는 소야의 다짐을 받고서야 손톱을 접었다. 소야는 그제서야 살았다는 듯 한숨을 토하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이구… 아파라… 온몸이 피투성이다.' 그는 이곳저곳을 살피며 퍼렇게 멍든 부분을 쓸고 어루만지면서 내심 욕설을 잔뜩 퍼부었다. '어느 놈이 저 계집을 마누라로 삼을지… 고생문이 훤하다… 아이고…….' 한편, 이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며 단우와 냉사혼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제마뇌림에서의 웃을 기회란 그리 흔치 않다. 단지 소야와 담야훼의 이런 행동에서만이 웃음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잠시후 소야는 정색을 하고는 말했다. "무황성은 벽라무황천의 최고 핵심기관인 만큼… 이전과 삼루를 다스리고 있어." "……." "그런 만큼 무황성은 어느 한 장소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하게 벽라무황천을 차지하고 있 지." "음……." 단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냉사혼과 소야, 담야훼 등이 무력하게 이 제마뇌림에서 생활한 것만은 아니었 음을……. 비록 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이 제마뇌림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볼모라는 입장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이 정도로 벽라무황천의 조직에 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은 진정 놀라운 일이었던 것 이다. 아무튼 단우는 그들 세 사람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허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또 다른 것은 없어?" "……!" 세 사람은 미간을 찡그리고 저마다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담야훼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이마를 치며 말했다. "그렇지… 그것이 있었지." "무엇이?" 단우는 두 눈에 반짝 이채를 띠었다. 무엇인가를 노리는 야수(野獸)의 눈빛처럼……. 담야훼는 그런 단우를 정감 있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금마뇌옥(禁魔牢獄)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금마뇌옥?" "그래, 금마뇌옥이야." "확실한 위치는?" 단우는 다그치듯 물었다. 담야훼는 잠시 생각하다가는 말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동남방에 위치해 있어. 거리는 삼백 장 정도쯤이나 될까?" "삼백 장 정도라……." 단우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턱을 한 손으로 괴고는 허공을 주시했다. 그의 눈빛은 푸른 청공을 그대로 담은 듯 깊고 심유했다. 그러다가는 천천히 담야훼를 주시하며 물었다. "금마뇌옥이 뭐하는 곳이지?" 소야가 입이 근지러운지 황급히 대답했다. 마치 누가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금마뇌옥은 정파무림의 공적들과 희대의 마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 "공적들과 마인들만이……?" "아……." "지금 그곳에는 무서운 사파의 거마들이 백여 명 정도가 있다는 정보를 전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백여 명 정도의 사파의 거마들이……?" 단우는 입을 딱 벌렸다. 엄청나다는 뜻일 게다. 야수가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그의 눈빛은 더욱 강하게 빛난다. "금마뇌옥이 그런 곳이라면……." 단우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런 곳이라면… 우리는 탈출하는데 그곳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금마뇌옥을 이용해?" 냉사혼을 비롯한 소야와 담야훼의 눈빛에 의혹이 떠올랐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단우는 금마뇌옥이 있다는 동남쪽을 응시했다. "금마뇌옥의 일백여 마인들을 탈출시키는 것이야. 그래서 그 혼란을 틈타 우리는 아주 쉽게 탈출할 수가 있는 것이고……." "아……." 냉사혼과 소야, 담야훼는 탄성을 발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난감한 기색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탈출시킨다는 것이지?" 그들은 뒤늦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떠올리고는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단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은 반드시 있는 것이야. 비록 그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탈출을 위해 그 일을 필히 해야 하는 것이지." "글쎄… 그게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알지만… 아마도……." 소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단우는 잘라 말했다. "잔소리가 많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금마뇌옥의 마인을 탈출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탈출할 수만 있다면……." 그런데, 단우의 말이 막 끝나는 그 순간이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걸?" 청아한 음성이 울리는가 싶더니 한 명의 채의소녀가 소리 없이 그들 앞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황족의 고귀한 귀품과 학처럼 우아한 용모를 지닌 소녀! 뜻밖으로 그녀는 바로 벽라상화(碧羅尙花) 백리예령(百里藝玲)이었다. 벽라무황천주 벽라천제 백리명의 금지옥엽이자 벽라무황천의 소천주라는 고귀한 신분의 소유자인 그녀 가 지금 단우의 면전에 나타나 신비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는 것이다. "……?" "……?" 냉사혼과 소야, 담야훼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단우는 태연했다. 벽라상화 백리예령의 출현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시선을 허공에 둔 채 딴청마저 피우 는 것이었다. 그런 단우를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벽라상화 백리예령이 소리쳤다. "흥! 과연 이 시대 최고의 마웅이라는 천마종야 단사하의 아들다운 의젓한 태도이자 행동인걸?" 다분히 조소가 담긴 말이었다. "무슨 소리지?" 의외로 단우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소를 날렸다. "흥!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말이지. 여기에 들어온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세 사람을 선동하여 탈출할 계획을 세우다니……." "……." "사마인들은 피와 죽음만을 원하는 소인배들이니… 그것을 이 기회에 반성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 가 아닐까?" "인간의 도리?" "그래. 최소한 그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만 하는 것이거늘… 오히려 이곳을 탈출할 계획이나 세우고 금마 뇌옥의 마인들을 탈출하는데 이용하려는 생각이나 하다니……." "……." "꼬마야, 너는 아느냐? 금마뇌옥의 마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무고하게 죽인 죄인들인지를?" 벽라상화 백리예령이 서릿발 같은 위엄을 뿌리며 말을 계속했다. "네가 그들을 탈출시킨다면 이 땅은 엄청난 피바람의 소용돌이에 잠길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다시 무 고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 단우의 볼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두 주먹은 불끈 움켜쥐어져 있었다. "흥!" 차가운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기세등등하여 말했다. "뭐가 피와 죽음만을 원하는 소인배들이고 무엇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지?" "……!" "도대체 그런 이론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야. 정은 정이라서 선해야 하고 사마인들은 어째서 피와 죽음만 을 원하는 소인배라야 하는 것이지?" "……!"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정과 사는 서로 추구하는 이상이 다른 것뿐이지 일방적으로 한 쪽이 나쁜 것은 아니야." '제법인 걸?'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자신이 공격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견해를 굴하지 않고 확실하게 표현하는 단우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단우의 말은 계속이 되었다. "사마인들 중에도 선한 인물은 있는 것이고… 정파의 인물 중에서도 사악한 인물은 있는 것이야." "……." "적어도 사마인들은 이런 식으로 볼모를 잡아 승리를 쟁취하지는 않아. 이것은 어째서 비겁한 행위가 아 니고 정당한 것이란 말이지?" "잘한다." 소야가 통쾌하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냉사혼과 담야훼도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고 있었다. 금년 십삼 세의 어린 소녀 벽라상화 백리예령의 얼굴은 어쩔 수 없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끝내 이곳을 탈출하겠다는 말이야?" 그녀는 아미를 찌푸리며 물었다. 다분히 위협적인 어조였다. 그러나 단우는 당당하게 말을 받았다. "물론이지. 우리가 볼모로 잡힌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이곳을 탈출하기 위 해 최선을 다할 것이야." "후회할 텐데?" "흥! 후회 같은 것은 안 해." 단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머쓱해졌다. "……!" 그녀는 잠시 단우를 기이한 눈빛으로 바라본 후 말을 쏘듯 내뱉었다. "너는 결코 이곳을 빠져 나갈 수가 없을 거야. 이 예령이 지켜보고 있는 이상은… 흥!" 그녀는 다시 한 차례 단우를 노려본 후 훌쩍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한 마리의 나비처럼……. 2 열흘의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그 동안 단우는 다섯 차례의 탈출을 기도했다. 그러나 그 탈출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도 탈출은 실패했다. 이번의 탈출은 여섯 차례째였다. "자, 이번에는 나의 가랑이 사이를 통과해서 제마뇌림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지?"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단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단우는 만면 가득 실망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냉사혼과 소야, 담야훼가 절망의 빛을 띤 채 서 있었다. '지독한 계집이다… 여섯 차례의 탈출은 이 계집으로 인해 철저하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담야훼 등의 생각이었다. 그렇다. 지난 열흘 동안의 여섯 차례의 탈출은 번번이 벽라상화 백리예령에게 발각이 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이때, 벽라상화 백리예령의 배후에는 하늘빛 청색 경장을 한 칠십이 인의 청년무사들이 공손한 자세로 시립해 있었다. － 벽라칠십이천군위사. 그들이 바로 제마뇌림을 감시하고 있는 복마루의 정예고수들인 것이다. 태양혈(太陽穴)이 불끈 치솟아 있고 신광이 형형한 것으로 보아 그들 일신상의 무공이 범상치 않은 경 지에 올라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은 단우가 탈출한 행로(行路)의 중간 부근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벽라상화 백리예령과 그들이 정확 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단우의 탈출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이제는 벽라상화 백리예령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 야 할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엄청난 수치를 느껴야 할 판이다. 벽라상화 백리예령의 의도도 그런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단우의 표정은 지극히 태연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벽라상화 백리예령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왜일까? 이번의 탈출은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실패한 것일까?" 이런 중얼거림은 그야말로 여유 있게 토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수치심하고는 아예 거리가 먼 듯했다.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기어가는 단우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 천마종야 단사하의 아들이라면 이것을 굴욕으로 알아야 하거늘……."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 이게 무슨 냄새지?" 기어가던 단우가 코를 막으면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는 여지없이 벽라상화 백리예령의 엉덩이를 들이받았고,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그만 앞 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너… 정말?"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고 말았다. 또한 가슴의 기복이 자신도 모르게 급격히 빨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단우를 가리킨 채 씩씩거리고만 있었다. 단우는 여전히 코를 막고 있었다. "기어가는 것은 참을 수가 있었지만… 방귀냄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 "왜 하필이면 그때 방귀를 뀌는 것이지?" 단우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벽라상화 백리예령의 엉덩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내 냉사혼과 소야, 담야훼는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크하하하핫!" "호호호호호……!" 벽라칠십이천군위사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죽여 웃었다.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뀌지 않았는데…….' 이렇게 말하고는 싶었지만, 그녀의 고귀한 지체로 봐서 이 말하기가 너무 수치스러운 것이었기에 그저 속으로 냉가슴만 앓고 있을 뿐이었다. 단우는 그런 그녀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사내를 가랑이 사이로 기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사내는 여인네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갈 수 없는 것이다." "……!" "내 오늘 비록 탈출에 실패했지만 언젠가는 성공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정식으로 오늘의 일을 따 지도록 하겠다." 그의 당당한 태도에 냉사혼과 소야, 담야훼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벽라칠십이천군위사도 감탄의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벽라상화 백리예령마저도 멀어져 가는 단우의 등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증오의 눈빛이 아니라 어떤 정감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으니……. 사마인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천마종야 단사하의 아들과 정파인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벽라천제 백리명의 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이 운명의 대결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그것은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두 사람에게 부여된 운명인지도……. ■ 십매어황 제1권 第九章 천년대자문(千年大者門)의 대종사(大宗師) 1 "음……." 단우는 끙끙 앓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으며, 곧 숨이라도 넘어갈 듯 호흡마저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사위는 칠흑의 어둠에 싸여 있었고, 제마뇌림은 죽은 듯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단우가 누워 있는 침상 주위에는 세 사람이 근심의 표정으로 단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냉사혼과 소야, 담야훼 등이었다. "음… 음……." 단우의 신음은 비수처럼 아프게 세 사람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담야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단우의 식은땀을 훔치고 있었다. "밤만 되면 언제나 이렇게 아프기만 하니……." 그녀는 단우의 손을 소중하게 움켜쥔다. 그렇다. 밤이 되면 단우는 언제나 이렇게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병세가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인데, 담야훼 등은 그 이유를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단우가 간뇌를 타고났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단우의 아픔을 가슴 아파할 뿐 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지? 우리가 도움을 주어야 할 텐데…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으니……." 소야도 탄식하며 단우를 근심 어린 시선으로 주시했다. 정이 든 것이다. 비록 열흘의 시간은 짧은 것이지만 그들은 단우라는 천진한 소동에게 깊은 정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을 느낀 단우는 이렇듯 밤이 되면 다 죽어 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른다. 그래서 더욱 답답하고 근심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를 안다면 마음의 여유라도 있을 텐데……. 단우는 헛소리마저 하고 있었다. 손을 심하게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며 식은땀을 더욱 흘리고 있었다. "헉헉… 이 단우는 이곳을 탈출할 거야. 반드시 탈출할 거야." 그가 끊임없이 토해 내는 그 헛소리는 듣고 있는 냉사혼과 소야, 담야훼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이었 다. '얼마나 이곳을 나가고 싶었으면…….' '그러나 어쩔 수가 없어.' '이곳은 어떤 방법으로든 빠져 나갈 수가 없는 곳이니까.' 그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토했다. "도대체 무슨 병일까?" 냉사혼의 입술이 오랜만에 떨어졌다. 무심하기만 하던 그의 표정은 풀어져 있었으며 가득 염려의 빛을 띠고 있었다. 담야훼는 고개를 흔들었다.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무슨 병인지를……." "……." "꼬마에게 물어도 모른다고 하기만 하니……." 담야훼의 두 눈에 뿌연 물안개가 서린다. 이 순간 그녀의 손은 단우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고 있었다. "바보 같은 꼬마… 지금 이 꼬마는 우리에게 걱정을 주지 않기 위해 말하지 않는 거야." "……." "어리지만 그 깊은 마음은 정말이지 우리가 존경할 만한 것이야." 담야훼는 단우를 보며 기특하다는 생각을 한다. 소야와 냉사혼은 그녀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기실 제마뇌림에서의 생활은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이었던 것이니……. 그러다가 단우가 제마뇌림에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그들은 고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단우, 이 어린 꼬마의 백 일만에 이곳을 탈출하겠다는 허황된 말에 그들은 믿지는 않았지만 일말의 희 망을 지니게 되었으니……. 매사에 자신만만하기만 한 단우의 모습은 그들에게도 자신감을 되찾게 해 주는 계기가 되고 있었던 것 이다. 이제 그들은 단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이 시대 최고의 마웅인 천마종야 단사하의 아들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밤이면 단우는 사경을 헤매니 그들은 그저 우울하기만 한 것이다. "……." "……." 죽음과 같은 침묵과 정적이 그들 사이로 흘러갔다. 그들은 단우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엇인가를 생각한 듯 소야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상한데……?" 담야훼가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이지?" 소야는 단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상하다는 것은… 바로 여섯 차례의 탈출이 이상하다는 것이야." "여섯 차례의 탈출이?" 냉사혼과 담야훼가 동시에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소야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이상해. 전에 꼬마는 금마뇌옥의 마인들을 탈출시켜 혼란을 야기시키고… 그 혼란을 틈타 이곳 을 빠져 나가야 한다고 말했었다." 냉사혼과 담야훼는 생각이 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분명히 꼬마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어." 소야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그런데 이 여섯 차례의 탈출은 금마뇌옥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행해졌단 말씀이야……." "아……." "그것이 이상해. 어째서 그런 것일까? 어째서 금마뇌옥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일까?" "그래… 그러고 보니 조금은 이상한 것 같은데?" 냉사혼과 담야훼도 그제서야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간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다. 그 동안의 탈출 경로는 금마뇌옥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처음 단우가 금마뇌옥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는 금마뇌옥의 마인을 어떤 방법으로든 탈출시 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여섯 번의 탈출은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일어난 것이니 과연 이것은 단우의 실수일까? 아니면 어떤 의도에서 나온 계책인가? 그러나 정작 일을 꾸민 단우는 고통스러운 신음만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야가 문득 다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은 유난히 빛나고 있었는데……. "혹시… 꼬마는 벽라상화 백리예령의 이목을 금마뇌옥에서 멀리 돌리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 "설마……." 냉사혼과 담야훼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린 단우가 자신들조차 상상도 못했던 그런 고도의 계책을 쓰리라고는…….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해 여섯 차례의 패배를… 아니 여섯 차례의 굴욕을 감수했다면… 그것은 진정 무 서운 일이 아닌가?' '과연 소야의 말대로일까? 그래서 웃으면서 벽라상화 백리예령의 가랑이 사이로 길 수가 있었던 것일 까?' 그들은 새삼 단우의 창백한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경이로움이 가득차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이익－! 바람인가? 한 줄기 음산한 기운이 그들의 몸을 휩쓸며 지나갔다. 그 기분 나쁜 바람에 황촉 불이 꺼지면서 미처 어떤 동작을 취해 보기도 전에 냉사혼 등은 눈앞에 캄캄 해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 모옥 안은 죽음 같은 정적에 묻혔고, 단우의 신음만이 간간이 정적을 깨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있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그를 본 사람도 없었고 볼 수도 없었다. 냉사혼 등도 그의 출현을 미처 느끼지 못했고, 그것을 느낄 즈음 정신을 잃고 말았으니……. 그는 누구인가? 일신 가득 창망한 슬픔과 한과 분노를 담고 있는 그는? 벽라무황천의 인물인가? 아니면, 그는 대체 어디에 적을 둔 인물이며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나타난 것인가? "……!" 묵묵히 단우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어떤 감회에 젖어 있었다. 또한 약간은 따스한 온정이 담긴 듯한 눈빛이었다. 문득 그의 입술을 비집고 무심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많이 야위셨군." 느낌이 무심하다는 것이지 사실 그의 목소리에는 연민의 감정이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이제는 하늘의 뜻일 수밖에 없다." 무엇이 하늘의 뜻이란 것인가? 그는 계속하여 알 수 없는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련주, 당신은 죽을 운명이었고… 여기에서도 누구에게나 관심 밖의 인물이었으나… 이제는 아니오." "……!" "당신이 천년대자문(千年大者門)의 운명을 잠시 동안이라도 잡고 있으셔야 하는 것이오. 아아… 천년대 자문에 도사린 거대한 음모의 끈을 잠시만이라도 부여잡고 있으셔야 하는 것이오……." 무슨 소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천년대자문에 대해 언급하는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천년대자문이 아닌가? 그 언제이던가? 환우대선생과 자하고금마유사, 그리고 풍운우사가 대정루의 부루주인 금일홍이라는 인물의 대화에서 잠 깐 언급이 되었던 신비의 문파가 바로 그 천년대자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그 천년대자문이 다시 이 신비인의 입에서 언급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밤은 어둡고……. 신비인의 말 또한 어둡기만 하다. "흐흐흐… 그들이 대종사를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 하다니……." "……." "아아… 대종사는 이미 회생불능의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대라신선이라 해도 그분을 구할 수가 없는 것 이다." 그의 음성은 분노로 인해서인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단우를 천천히 안아들었다. "그러나 대종사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끝으로 신비인의 신형은 연기처럼 모옥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설사 이곳에 그를 보는 인물이 있다 해도 그가 사라졌는지를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았을 것이다. 이 제마뇌림을 감시하고 있는 벽라칠십이천군위사들마저 미처 감지하지 못한 불가해의 움직임을 보여 준 신비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무슨 목적으로 단우를 안고 사라진 것인가? 모를 일이다. 2 시신(屍身). 그 열세 구의 시신은 무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시신들의 미심(眉心)은 약속이라도 한 듯 뻥 구멍이 나 있었으며, 그곳으로부터는 아직도 끈적끈적한 선 혈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시신이 있는 곳은 어둡고 고적한 분위기의 내실(內室)이었다. 내실의 중앙에는 하나의 침상이 놓여 있었으며, 그곳에는 십삼 세 가량의 소동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 다. 소동은 이때 완전 나신(裸身)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산 사람이 몸이 아니라 죽은 자의 육신과 같은 회색빛이었다. 용모는 상당히 수려한 편이었으나, 피골이 상접하여 오래 전부터 병에 시달려 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가 있었는데……. 그는 숨을 쉬고 있었다. 가끔 가슴의 기복이 미미하게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분명 벽라무황천의 심처에 위치해 있었으며, 벽라무황천의 일성이전삼루의 조직 중 정보 수집기관인 대정루(大情樓)의 한 밀실이 분명하건만, 열세 구의 피에 젖은 시신의 중앙에 놓인 침상의 소동은 누구이고 또한 죽어 있는 시신들은 누구란 말인가? 문득 침상 앞으로 한 사람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의 품에는 심이삼 세 가량의 흑의소동이 안겨 있었다. 그 소동은 바로 단우였다. 그리고 황촉 불빛 아래 은은히 드러난 단우를 안고 있는 신비인은 바로 자하고금마유사였다. 대천마련의 부련주이자 신비의 천년대자문의 제갈통사이기도 그가 단우를 안고 이 밀실에 나타난 것이 다. 이 순간 자하고금마유사의 흑발은 산발이 되어 있었고, 그의 표정은 초조와 긴장과 분노로 어우러져 있 는 것이 아닌가? "대종사……." 그는 침상의 소동을 향해 허리를 공손히 접는다. 그런 그의 얼굴은 비통함에 젖어 있었고, 두 눈에는 피보다 진한 비애의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종사라니? 이 침상 위에 소동이 설마 천년대자문의 대종사라도 된단 말인가? 진정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단우가 나직하게 신음을 토하면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으음……." 본능이었을까? 어린 그는 무엇인가 변화가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고 그것이 그의 의식을 일깨우고 있 는 것이다. 단우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그의 눈이 열리면서 투명하면서도 아름다운 눈망울이 황촉 불빛 아래 드러났다. "……!" 언뜻 그 눈망울에 놀람과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침상 위의 소동의 모습이 눈에 우선 들어왔고, 죽어 있는 시신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입에서 반가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부… 부련주……." "소련주……." 자하고금마유사는 단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잠시 그는 단우를 보며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으나 곧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단우는 의아한 듯 물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지요?" 그의 시선이 죽어있는 시신들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이윽고 소동에게서 멈춰졌다. "그리고 이곳은 어디이며 저들은 누구죠? 부련주는 금마뇌옥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수많은 의혹이 단우의 마음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 자하고금마유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어디에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듯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침묵을 깨고 대답했다. "저들 죽어 있는 시신들은 바로 아미십삼활인자들이옵니다." "아미십삼활인자?" 단우는 놀라고 있었다. 아미활인선부의 아미십삼활인자는 단우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얼마 전 검각도의 험한 길을 헤치며 아미산으로 향한 것은 기실 아미십삼활인자를 만나 그의 병을 치료 코자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미십삼활인자는 그곳에 없었고 환우대선생만이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환우대선생은 분명 아미십삼활인자가 벽라무황천에 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어찌 이곳에 이렇듯 비 참하게 죽어 있단 말인가?" 단우는 눈앞의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천천히 단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소련주께서는 많은 의혹이 있으실 것이옵니다." "……." "그러나 지금 그 의혹을 풀어 드릴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왜 이곳에 있고… 아미십삼활인 자가 왜 죽어야 했으며……." "……." "하지만 그 모든 의혹들은 시간이 흐르면 소련주께서도 저절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말을 멈춘 그는 단우의 손을 이끌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침상 위의 소동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소련주께서 해야 할 일은……." "내가 해야 할 일?" 단우는 의혹의 눈빛으로 자하고금마유사와 침상 위의 소동을 응시했다. 왠지 그는 침상 위의 소동을 보며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탄식을 토하며 말했다. "이분은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타고나신 분이옵니다." "가장 고귀한 신분이라면… 황족(皇族)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황족은 아니옵니다. 그러나… 이분은 무림에서 황족과 같은 신분을 지니고 있지요." "무림에서?" 단우는 의혹의 실타래가 더욱 복잡하게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처연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련주께서는 모르는 천년대자문의 대종사가 바로 이분이십니다." "천년대자문?" 단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단우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강호노옹이 있다 한들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을 것이다. 천년대자문! 이 존재는 그만큼 무림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문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문파의 대종사가 어찌 이 땅의 가장 고귀한 존재라는 것인지……? "아무튼 이분은 지금 죽어 가고 있습니다. 본시 오음절맥이라는 불치의 절맥을 타고나 시한부 생을 살아 가시고 있었습니다만……." "……!" "아미십삼활인자의 의술이라면 능히 오음절맥을 치료할 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 "왜냐하면 아미십삼활인자는 오직 이분을 치료키 위해 십여 년의 세월을 아미활인선부에서 의도에만 전 념했기 때문이옵니다." 무엇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아미십삼활인자가 이 소동을 위해 십여 년의 세월을 의도에만 전념했다는 말을 듣자 단우는 이 소동의 신분이 대단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천년대자문의 대종사…….' 운명이었을까? 단우는 이 소동에게서 기이한 친근감을 느꼈다. 자하고금마유사가 분노의 눈빛으로 아미십삼활인자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대종사를 치료해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종사를 죽이려 한 것이옵 니다." "아……." 단우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미십삼활인자가 천년대자문의 인물이라면서 그들은 어째서 대종사의 신분을 지닌 어린 소동을 죽이려 한 것일까? 어린 단우는 궁금했다. "흐흐… 이미 대종사는 이들에 의해 회생이 불가한 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천년대자문의 종 사지맥(宗師之脈)은 완전히 단절이 되고 만 것이지요." '천년대자문의 종사지맥……?' 단우는 새삼 침상 위의 소동을 주시했다. 그는 느낄 수가 있었다. 황족에게는 혈통이라는 것이 있어 이 나라의 천자(天子)가 그것에 우선하여 탄생이 되듯이 천년대자문 에도 대종사가 될 수 있는 혈통이 있다는 사실을……. 그 혈통이 바로 종사지맥을 말함이고, 단우는 천년대자문에 대해 확실히 알 수가 없었지만 자하고금마 유사의 태도와 말로 미루어 그도 천년대자문의 인물이란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자하고금마유사는 존경할 만큼 여러 가지 면에서 탁월하다. 그런 그가 천년대자문에 속해 있다면 천년대자문도 당연히 범상치 않은 문파임이 분명했다. 그런 만큼 천년대자문의 대종사라는 신분은 황족에 비견될 만큼 고귀한 신분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 마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물었다. "왜지요?" "……." "왜 아미십삼활인자가 저 꼬마 대종사를 죽이려 한 것이지요?" "……." 자하고금마유사는 침묵한 채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황촉 불은 그의 한쪽 얼굴에 어두운 음영을 드리운 채 흔들리고 있었다. 침상 위의 소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진한 회색 빛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생명이 시시 각각 죽음을 향해 치달리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자하고금마유사의 얼굴에 초조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무겁게 대답했다. "이 가운데 담긴 사연은 이 밤이 다 지나도록 설명 들어도 짧을 것이옵니다." "아……."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천년대자문의 인물 가운데 야심이 큰 인물이 있고… 그는 대종사가 죽 어야만 그 야심을 달성할 수 있기에 아미십삼활인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대종사를 죽이려 할 것이옵니 다." "아……." 단우는 나직이 탄성을 발했다. 그는 불현듯 생각난 듯 말했다. "그렇다면… 대천마련에서 이 단우를 놓고 암투를 벌이듯 천년대자문에서도 꼬마 대종사를 놓고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가요?" "……." 단우의 말에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찬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단 한마디 말에 사건의 대요를 짐작해 내는 단우의 심기! 자하고금마유사는 이미 단우의 그 뛰어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새삼 감탄하고 있는 것이 다. 단우가 흑백이 뚜렷한 눈망울을 굴리며 물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요?" "……." "내가 저 꼬마 대종사를 위해 무슨 할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해야지요." 단우는 빙그레 웃으며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자하고금마유사는 정색을 하고는 물었다. "소련주께서는 저를 믿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지요?" "알고 보면 이 몸은 대천마련의 배신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몸을 믿어 주시겠습니까?" "……!" 단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자하고금마유사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소련주의 깊은 마음… 진정 감사할 뿐이옵니다." 그의 두 눈에는 뿌옇게 물안개가 차 오르고 있었다. "이 일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옵니다." "헤헤… 상관없지요. 이 단우는 얼마 있으면 죽어야 할 신세이니……." "……." 단우의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말에 자하고금마유사는 코끝이 찡해 오는 아픔을 느꼈다. '불쌍하신 분… 이 일은 이분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이나… 천년대자문의 장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 가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기에 천년대자문의 장래에 영향을 주는 것이란 말인가? 밤은 점차 깊어 가고……. 천년대자문의 운명과 관련이 되는 일은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단우의 운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으니……. 단우의 운명은 이 일을 계기로 엄청난 변화 속으로 휘말리게 된다. ■ 십매어황 제1권 第十章 만령이체천교대법(萬靈移體薦敎大法) 황촉 불빛이 일렁이는 가운데 자하고금마유사의 손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소동의 전신 삼백육십혈(三百六十穴)을 가격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역으로 가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선으로 가격하기도 했다. 그 손놀림들은 그야말로 눈이 부시도록 빨랐다. "……." 그 한 동작 한 동작을 뇌리에 담기라도 하려는 듯 단우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동작을 계속하고 있는 자하고금마유사의 입에서는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지금 대종사께서는 거의 회생불능의 상태이지만… 아직은 실날 같은 숨결이 붙어 있습니다." "……." "만약 이 실날 같은 숨결이 끊어지고 대종사께서 죽는다면… 천년대자문의 상하조직과 점 조직은 그 순 간부터 대종사로부터 끊어지며 엄청난 혼동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음……." "그렇게 되면 대종사를 죽이려는 자를 중심으로 해서 천년대자문은 다시 구성이 될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천년대자문의 천년율법은 철저히 무시될 것이며……." "……." "천 년의 잠을 자던 천년대자문의 모든 인물들은 무림제패라는 명목을 놓고 이 땅에 무서운 피바람을 일으킬 것이니… 그것은 진정 무서운 일이옵니다." "으음……." "아무도 어떤 문파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 "설령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이 힘을 합친다 해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두 세력은 철저히 무너질 것이 니… 거기에다 천년대자문에서는 천 년의 세월 동안 천년지대에 대해 연구를 했고 천년지대의 만겁조화 구구대원진세를 파훼하는 도면을 근래에 들어 거의 완성했으니……." "……." "그들이 천년지대의 모든 것마저 얻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정의 길보다는 사의 길을 추구한다면 무림 의 운명은 살아 있는 지옥으로 변할 것은 뻔한 이치인 것이옵니다." "아……." 단우는 몸서리를 쳤다.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이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천년대자문의 힘이 그 정도로 무서운 것이란 말인가?' 벽라무황천과 대천마련의 힘이 합쳐진 상태에서도 하루만에 붕괴시킬 수가 있다니……. 정녕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너무도 엄청나다!' 단우는 혀를 내둘렀다. 파파파팍－! 자하고금마유사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얼마나 빠른지 육안으로도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가지 기이한 것은, 그는 계속하여 반복해서 소동의 삼백육십혈만을 가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소동의 몸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회색 빛을 띠고 있던 소동의 몸이 점차 붉은 혈색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생기(生氣)였다. '도저히 회생불능의 상태라고 하더니……?' 단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동의 변화는 단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온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침상에서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헉헉……." 신음마저 토해 내고 있었다. 반면 자하고금마유사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있었고 전신을 심하게 떠는 것이 아닌가? 이때 그는 혼신의 힘을 모두 소동에게 쏟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어째서……?' 단우는 의혹에 사로잡혔다. '이왕 죽을 사람이라면 무엇 때문에 부련주는 저렇듯 힘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하고금마유사가 단우의 의혹을 풀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분의 죽음은 이미 말씀드렸듯이 천하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는지라…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 이분은 당분간 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최소한 이분을 배신한 인물을 천년대자문의 모든 인물 앞에 공개할 때까지는……." 자하고금마유사의 음성은 어떤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단우는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 자하고금마유사가 하는 일이 단지 개인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무림 전체의 운명을 놓고 벌이는 일 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이 단우의 마음도 이렇게 무거운 것일까?' 그는 진중한 눈빛으로 자하고금마유사와 꼬마 대종사를 주시했다.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 몸이 바라는 것은 소련주께서 대종사를 대신해 주십사 하는 것이옵니다." "대신하다니요?" 단우는 의혹의 표정을 떠올렸다. '대종사를 대신하라니… 무슨 말이지?' 그는 자하고금마유사와 꼬마 대종사를 주시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종사는 어떤 방법을 취해도 죽을 것입니다." "……." "비록 내가 대종사의 모든 잠재력을 순간적으로 깨우고는 있지만… 죽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 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그를 대신하지요?" "소련주께서 대종사가 되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 단우가 저 어린 대종사가……?" "그렇습니다." "어떻게요?" "대종사와 같은 모습에… 그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옵니다." "같은 모습에… 모든 것을……?" 단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이 아닌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자하고금마유사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는 차근차근하게 말했다. "대종사의 잠재력은 지금 극으로 올라선 상태이옵니다. 여기에 오래 전에 실전된 한 가지 대법(大法)을 사용한다면……." "사용한다면?" "소련주는 대종사의 모습을 한동안 그대로 지닐 뿐만이 아니라 대종사의 뇌리에 있는 모든 기억마저 그 대로 이어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럴 수가……?" 단우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으랴. 이 땅의 어떤 대법으로든 그것은 가능할 수가 없는 것 같았으니……. 그러나 자하고금마유사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진실인 것도 같았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대법이라는 것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무슨 대법이지요?" "만령이체천교대법(萬靈移體薦敎大法)이옵니다." "만령이체천교대법… 만 가지의 영혼이 교차되며……!" "그렇습니다. 만령이체천교대법은 일천 년 전에 실전이 된 대법이며 즉, 대종사와 소련주의 영혼은 서로 교환이 되는 것이옵니다." "이 단우의 영혼이……?" 단우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떠올렸다. 자신의 영혼이 타인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곧 자신을 잃어버림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허허허……!" 자하고금마유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대종사께서는 죽음 직전에 있는지라 소련주의 영혼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에… 단지 이번 만령 이체천교대법은 대종사의 영혼만이 소련주께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몰라도……."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이런 상황하에서도 천진한 웃음을 머금을 수가 있는 단우의 초연한 마음에 자하고금마유사는 내심 부러 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단우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런 대법을 많은 사람이 알고… 죽음 직전에 이런 대법을 남용하여 사용한다면… 그것은 천리 를 어기는 일이 될 뿐만이 아니라 이 땅이 혼란으로 치달리지 않을까요?" "……." 자하고금마유사는 빙그레 웃었다. "염려 마십시오. 천하에서 이 대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이 몸뿐이옵니다." "아……." "이 대법을 이 몸이 알고 있는 것은… 일천 년 전에 천년지대에서 죽어간 이 대법의 창시자가 이 몸의 선조이기 때문이옵니다." "……." "만들어진 이후 이 대법은 아직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으며 지금 최초로 사용되는 것이옵니다." "음……."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안심된다는 표정이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물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이 대법을 시전하는 과정은 너무도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라 죽음이 시시각 각으로 따르는 것이옵니다." "……." "다시 말해 이 대법을 시전 도중에 소련주께서는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옵니다." "그래서요?" 단우는 자하고금마유사의 다음 말을 이미 짐작하고 있기라도 한 듯 웃으며 물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탄식을 토했다.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습니다." "무엇이요?" "소련주께서 이 대법을 거부하신다면… 이 몸은 모든 것을 포기하겠습니다. 소련주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는 말이지요." "……." 단우는 배시시 웃었다. "이미 말했지만… 나의 생명은 길지가 않아요. 그래서 이번 일을 하던 중 죽어도 전혀 억울하지가 않다 는 말이지요." "소… 소련주……." 자하고금마유사는 만면 가득 격동의 빛을 띠었다. 단우는 한 손으로 자하고금마유사의 배를 쿡 찔렀다. "이 단우는 부련주를 믿어요." 믿음! 인간과 인간 사이의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가장 확실한 것이다. 지금 단우는 이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려 하는 것이고, 확률이 미미한 승부에서 자하고금마유사는 내심 자신을 얻고 있었다. '이 대법이 최초로 시전되는 것인 만큼…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있는지는 나도 확실히 모른다. 모든 것 은 천운에 맡긴다.' 파파팟－! 자하고금마유사의 투명한 손은 계속하여 어린 대종사의 삼백육십혈의 상하를 가격하고 있었다. 침상 위의 대종사, 어린 소동은 이제 완전히 투명한 지체가 되고 있었다. 뼈마디가 훤히 들여다보일 지경이었으며, 머리 속의 뇌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대종사의 뇌(腦)는 믿을 수 없게도 거대했다. 그리고 그 뇌가 담긴 머리에서는 희뿌연 백기(白氣)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우우……!" 어린 대종사의 입에서는 기이한 신음이 토해지고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완전히 초긴장하고 있었다. 한 번의 손동작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그대로 이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는 단우를 손짓으로 불렀다. 단우는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자하고금마유사가 단우에게 침상 위로 올라가도록 손짓을 보냈다. "……!" 단우는 망설이지 않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자하고금마유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는가 싶더니 한 방울 두 방울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 작했다. 또한 그의 전신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이 일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단우는 침상에 바로 놓여졌다. '그러나 부련주의 태도로 보아 이번 일이 심각한 것인지라 실패가 두려운 것이다.' 단우는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었기에 지금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두려워 할 단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일에 실패가 있다면 무림이 엄청난 불행 속으로 치달린다 하지 않던가? '꼭 성공하기를 천지신명께 기원해야지…….' 단우는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표정이 하도 진지하여 절로 자하고금마유사를 경건하게 만들었다. 이때, 자하고금마유사가 한 손을 대종사의 머리 위 백회혈(百會穴)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론 단우의 백회혈을 짚었다. '뜨거워…….' 단우는 자신의 백회혈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움을 느끼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을 참으려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파아아아－! 소리! 기이한 소리가 자하고금마유사의 쌍심(雙心)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전신은 장엄한 서기에 휩싸이는 것이 아닌가? 백기(白氣)가 마치 안개처럼 출렁이고, 순식간에 단우와 대종사, 그리고 자하고금마유사의 몸은 그 소용 돌이치는 백기에 휩싸였다. 실로 그 모습은 장엄했다. 휘리리링－! 백기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생명이 담긴 것처럼 서서히 단우를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단우는 그 순간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아아… 너무 고통스럽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자하고금마유사가 간절한 눈빛으로 단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으셔야 합니다. 참지 못하면 이 대법은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옵니다.' "……." 단우는 그런 그를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오오! 그것이 어찌 어린아이가 보일 행동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실로 그것은 너무도 대범하며 굳건한 행동이 아닌가? '장하십니니다. 소련주…….' 자하고금마유사는 눈으로 단우를 칭찬했다. 우우우우－! 밀실은 완전히 백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어린 대종사의 몸에서는 모든 잠력이 일시에 폭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잠력은 백기로 화하여 자하고금마유사의 손을 통해 외부로 폭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다시 자하고금마유사의 손을 통해 단우의 체내로 흡입되고 있는 것이었으니……. 이런 대법은 고금에 다시없는 신비막측한 것이었으며, 이런 일은 다시 볼 수 없는 기경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으으으…….' 단우는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체내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자신의 몸에서 무섭게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전에는 느 끼지 못한 기이한 것이었다. 단우는 느끼고 있었다. 그 힘이 도대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공할 것이었으며, 그것은 단우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과……. 자신이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과……. 자신이 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의 영입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 단우는 지금 어린 대종사의 모든 것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어린 대종사의 지식과……. 어린 대종사의 감정과……. 어린 대종사의 기억 모두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아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단우는 고통 속에서도 거대한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는 자하고금마유사가 만령이체천교대법을 설명할 때는 그것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하는 반신반의를 했던 것인데 이제 그것이 현실로 다가와 가슴에 파 고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 미지(未知)의 지식들은 무엇인가? 생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친근한 사람처럼 기억 속으로 다가서고, 생전 가 보지 않았던 거리 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진정 경이로운 일이었다. '제갈통사… 아아… 자하고금마유사가 제갈통사였단 말인가……?' 지금 단우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몰랐던 자하고금마유사의 존재가……. 천년대자문에서의 자하고금마유사의 신분이 지금 그의 뇌리 속에서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오오! 제갈통사가 천년대자문에서 제삼인자였다니? 그리고…….' 더 이상의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새로운 기억들이 복잡하게 그의 뇌리에서 뒤엉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로 집체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대로 순응할 뿐이었다. 이 거대한 변화를 순순히 감내할 뿐이었다. 이때, 자하고금마유사의 몸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스스스－! 놀랍게도 그의 흑발이 서서히 변하며 백발로 화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윤택한 살결이 꺼칠하게 윤기를 잃어 가더니 마침내는 주름이 지면서 노인의 모습으로 변 하는 것이 아닌가? '저… 저럴 수가…….' 단우는 경악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사실 이 대법을 시전하는 인물도 엄청난 심력을 소비해야 하는 것임을. 때문에 이 대법을 펼치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정력을 낭비하여 결국은 이런 모습으로 노쇠하고 마는 것 이다. 십중팔구는 죽어야 하는 것이나, 자하고금마유사는 엄청난 내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목숨만 은 부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대법을 모두 시전하고 나면 폐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단우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단우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이 대법을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돌이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단우는 그저 탄식만 토할 뿐이었다. 그런데 변화는 단지 자하고금마유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우와 대종사의 몸에서도 일고 있었던 것이다. 대종사의 몸은 서서히 축소되기 시작했으며, 단우의 골격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얼굴도 점차 대종사의 그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단우는 움직이려 했다. 자신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에 손을 들어 그것을 만져 보려 했던 것이다. 그때였다. "소… 소련주… 움직이시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자하고금마유사의 절박한 음성이 단우의 행동을 저지했다. 단우는 황망히 손을 멈추었다. 그러자 자하고금마유사가 더욱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부터가 고비입니다. 소련주께서는 절대 움직이시면 아니 됩니다." "……!"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돌연 밀실에서 소용돌이치던 백기가 가공할 기세로 단우의 체내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아악!"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무서운 고통이었다. 단우는 그것을 끝으로 아득한 혼절의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쉬임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밤이 다 가고 여명(黎明)이 움터오고 있었다. 밀실은 죽음과 같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고요히 합장한 자세로 정좌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피로해 보였다. 눈빛은 풀어져 있었으며 정기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생기를 모조리 상실한 채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노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 다. 아아! 이것을 어찌 자하고금마유사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무공을 전혀 모르는 범노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어린 대종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잠력이 한순간 폭발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단우에게 준 그는 장렬한 산화를 한 것이었다. 시신조차 한 줌의 가루로 변해 이 세상에서 완전히 흔적을 지워 버린 것이다. 반면 단우는 어떠한가? 그는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단우가 아니었다. 단우는 완전히 대종사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병색이 완연하고 청수한 얼굴에 수려한 검미성목(劍眉星目)을 지닌 그 모습은, 어찌 보면 단우가 사라지 고 대종사가 부활한 듯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단우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대종사가 사라진 것이다. 다만, 대종사의 모든 기억을 단우가 얻었고, 단우의 모습이 만령이체천교대법에 의해 대종사의 모습으로 변화되었을 뿐이었다. 이때 자하고금마유사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오 년 동안입니다. 앞으로 오 년 후면 소련주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 나… 그 동안에는 대종사가 되셔야 하는 것이옵니다." "……." 단우의 눈이 슬며시 열렸다. 그의 입가에는 특유의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오 년을 살 수가 있을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도 이 단우는 영원히 나의 잘 생긴 얼굴을 볼 수가 없겠지요." "……." 자하고금마유사는 탄식을 토했다.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우가 오 년을 살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뇌를 타고난 단우는 앞으로 이삼 년을 더 살 수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문득, 자하고금마유사가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제부터입니다. 대종사께서는 머지 않아 천년지대로 떠나야 하며… 그 동안… 잠시나마 동요하고 있을 상하조직과 점조직을 완전하게 정상으로 회복시켜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은 다하겠지만… 과연……." 그렇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다. 모든 것이 미지수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걱정 대신 해사하게 웃었다. "제갈통사가 도와만 준다면… 죽은 대종사만큼은 해낼 수가 있을 거예요." "헛허허… 그 이상일 것입니다. 비록 죽은 대종사의 자질이 고금에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 었지만… 소련주에 비하면 몇 수 아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과찬하시는군요?"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는 정다운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하고금마유사가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퉁겨냈다. ■ 십매어황 제1권 第十一章 야망(野望)은 성숙해 가고 슈슈슉－! 오색의 불꽃이 찬란하게 그의 손끝을 타고 밀실의 천장을 뚫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천년대자문의 인물 사이에 행해지는 신호방법이지요?" "헛허허… 아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나의 기억 속에는 대종사의 기억이 모두 들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대성공이군요." "그런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 지금 자하고금마유사가 전개한 천년대자문은 단우로서는 전에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것에 대해 환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기억 속에 대종사의 기억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인 것이다. "벽라무황천에는 천년대자문의 인물이 일천 명이나 속해 있지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벽라무황천의 각 조직 제이인자들이며 혹은 삼류인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고요?" "헛허허… 맞습니다." "놀라운 일이로군요." 단우는 말하면서도 스스로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벽라무황천하면 이 시대 백만정도인의 하늘이거늘, 이 하늘 속에 천년대자문의 인물이 천여 명이나 포 함되어 있었으니……. 더구나 그들의 능력은 하늘에 닿고 있음에도 전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이인자의 자리 이상 을 차지하지 않고 있었으니……. 말하자면 천년대자문은 제이인자의 집단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힘은 분명 벽라무황천 전체를 놓고 따져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단우가 물었다. "이런! 천년대자문의 인물은 대천마련에도 일천 명 가량이나 포함이 되어 있군요." "헛허허… 그렇습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마냥 즐거운 모양이었다. 자신의 작품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확신감이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이리라. 대천마련에 속해 있는 천년대자문의 인물도 제이인자의 위치에 있거나 삼류고수로서 자신을 전혀 드러 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능력은 제일인자들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본시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자신을 완전하게 감추는 것을 더욱 어려워하는 법이고, 실상 자 신을 감출 줄 아는 인물들이 더욱 무서운 것이다. 때문에 천년대자문의 힘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가공할 것이며, 단우로서는 감히 그 힘을 측정할 수조차 없었고 망연하게 잡히는 가공할 느낌에 다만 입을 벌릴 뿐이었다. "정말 대단해요. 이 단우는 천년대자문의 힘이 벽라무황천과 대천마련을 합한 것보다 우월하다고 했을 때는 믿지 않았었는데……." "헛허허허… 그러셨겠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부련주의 말은 겸손에 지나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확실히 천년대자문의 힘은 일천 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이 된 것이기에… 여타의 문파 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는 그런 것이지요." "맞아요. 일천 년의 세월이 만들어 낸 천년대자문의 힘은 미증유의 것이라고 할 만해요." 자하고금마유사가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니… 무슨 부탁이지요?" "다름이 아니라 대종사께서는 이제 이 몸을 제갈통사라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아……." "소련주께서 대종사가 되신 이상 당연히 이 몸을 그렇게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이 단우가 실수를 했어요." "헛허허허……." "이제부터는 제갈통사라 부르지요. 제갈통사." 단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끝에 제갈통사라는 이름을 집어넣었다. 자하고금마유사가 경건한 표정으로 허리를 접었다. "대종사, 부르셨습니까?" 단우는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당신이 방금 전에 신호한 것은 분명히 천년대자문의 중요인물들을 소집하는 것이었는데……." "그렇습니다." "그들을 소집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그것은……." 자하고금마유사는 밀실의 문을 힐끔 주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대종사의 건재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옵니다. 지금쯤 대종사를 죽이려 했던 배신자는 당연히 대종사가 죽었으리라 믿고 또 다른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은 뻔한 이치……." "음……!" 단우는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족히 헤아리는 지혜를 지닌 그는 대강 짐작이 가는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그의 음모가 더욱 뿌리를 내리기 전에 그 뿌리의 확산을 미연에 막겠다는 것이로군요." "바로 그것이옵니다." 다시 자하고금마유사의 얼굴에는 찬탄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까운 일이다. 이분이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가 아니라면… 그리고 이분이 천년대자문을 지속적으로 다스릴 수만 있다면 우리 천년대자문은 전에 없는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을…….' 그는 내심 탄식했다. 하나 어쩔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주어진 생(生)이기에 그의 이런 생각은 욕심일 뿐이었다. 이때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단우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린 상태로 입을 열었다. "소용이 없을 것 같아요." "……?" 무엇이 소용이 없다는 것인지, 그야말로 뜬구름을 잡는 듯한 단우의 말에 자하고금마유사는 두 눈에 의 혹의 빛을 담았다. 단우가 다시 말했다. "그가 아미십삼활인자를 이용해 대종사를 죽이려 했다면 그것은 실로 오래 전에 꾸며진 음모가 분명할 터인데… 나의 생존을 알린다고 해서 그 음모가 사그러들 리는 없지 않겠어요?" "음……." "때문에 그는 오히려 이번 기회에 당신과 나를 죽이려 할 수도 있어요." "……." "그 음모의 연륜이 오래되었고… 그 자의 야망이 천년대자문의 제일인자에 있는 이상은 상당수의 인물 을 자신의 수족으로 포섭을 하였을 것이고… 그들의 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대단한 것일 거 예요." "음……."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실 그도 지금 단우가 말하는 것과 같은 우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도 이미 단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믿고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이 비록 모반을 꾀하고는 있다 하지만… 천년지대의 비밀을 풀기 전에는 그 마각을 완전히 드러내 지는 못할 것입니다." "……." "모반의 주동자가 노리는 것은 천년대자문의 수좌일 수도 있으나… 사실 그는 그 이상으로 천년지대의 전부를 노리고 있을 것입니다." "음……." "그런 그가 지금 마각을 드러낸다면 거역하는 인물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는 것 이고… 그리하여 천년지대의 모든 것을 얻으려는 야망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을 터인 즉… 그들은 결코 서둘러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단우는 비로소 안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 거대한 음모의 주동자란 위치에 놓고 주동자의 입장에 서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 즉, 결론 은 내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하고금마유사의 말대로 음모의 주동자는 지금은 마각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기에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면 굳이 그 일을 할 바보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놓고 본다면 음모의 주동자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단우는 침상에 조용히 걸터앉았다. 그는 급변해 가는 자신의 운명을 조용히 생각해 보고 있는 것이다. 대천마련의 소련주라는 신분에서 천년대자문의 대종사가 되기까지의 일을……. 그것은 파란만장 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이나, 어린 그가 견디어 내기는 힘들 정도로 순간적인 현상이었기에 내심 피로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단우는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이 생각난 듯 물었다. "제갈통사, 당신은 이번 음모의 주동자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음……." 어려운 질문이라는 듯 자하고금마유사는 이마를 좁혔다. 그러나 그는 단우의 질문에 앞서 이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인 만큼 어렵지 않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가 있었다.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물이며 가장 완벽한 자질을 타고난 인물이고……." "……." "그의 머리 속에 든 학문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일백 인의 대석학들을 합친 그것 이상이고……." "음……." "그는 선천적으로 인간을 포용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타고났으며… 이 땅에서 가장 무서운 무학을 지닌 인물이기도 합니다." "아……." 단우는 탄성을 발했다.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만약 선한 인물이면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성군(聖君)이 될 것이며… 그가 조금이라도 사악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는 이 땅에서 가장 패도적인 마웅(魔雄)이 될 것입니다." "……." "불행히도 그는 패도적인 마웅이 될 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 단우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가 말하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그래… 그런 사람이라면 천년대자문에 오직 한 사람뿐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는 제각기 나름대로 상념에 잠겨들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조용히 뒤엉켰다. "……." "……." 단우는 단우 대로 그 한 사람이 음모의 주동자라는 점에서 왠지 무거운 심사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린 단우 보다도 좀더 이 음모에 대해 폭넓게 생각하며 앞일을 걱정하는 자하고금마유사는 잠시 어두운 눈 빛으로 단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누구인가 짐작이 가십니까?" "……." 단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대화를 진행시킬 수 없었다. 밀실의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 왔기 때문이다. 스스스－! 소리 없이 나타나는 다섯 사람이 있었다. 도대체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불가사의한 신법을 펼치며 나타난 인물들을 보고 단우 는 놀라고 있었다. '벽을 통해서 이 밀실을 들어오다니… 저들이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분명 그들의 불가사의한 움직임은 단우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던 것이다. 단우는 재빨리 자신의 뇌리에 새롭게 자리잡은 새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 대하는 다섯 인물들을 마치 전에 본 듯 뇌리로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 그들 중 한 사람은 전에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 환우대선생! 그렇다. 놀랍게도 그들 중 하나는 자하고금마유사와 함께 정사무림 최고의 지자(智者)라 알려진 환우대 선생이었다. 단우는 억년호수(億年湖水)처럼 고요한 눈망울로 그를 주시하며 생각했다. '저 인물은 천년대자문의 제사인자인 환우법공(環宇法公)…….' 단우의 몸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던 것이다. 자하고금마유사에 이어 환우대선생마저도 천년대자문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천하인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단우는 재빨리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나머지 네 사람을 주시했다. '벽라무황천에서는 풍운우사라 불리며 천년대자문에서는 풍운천공(風雲天公)이라 불리는 제오인자(第五 人者)…….' 방금 나타난 인물 중 한 사람은 벽라무황천의 부천주인 풍운우사였던 것이다. 단우의 시선이 다시 삼십대 초반의 회의청년에게 옮겨졌다. 그를 빠르게 살펴보는 순간, 단우의 전신이 다시 한 차례 미미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적인 순간이었을 뿐이었고, 그의 신태는 곧 물처럼 고요해졌다. '금일홍이라 불리는 벽라무황천의 여섯 개 조직 중 대정루의 부루주…….' 단우의 눈빛과 금일홍의 눈빛이 허공에서 뒤엉킨다. '천년대자문의 부종사이며 제이인자이다. 천년대자문 사상 가장 뛰어난 기재라는 인물… 모든 것이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사실 천년대자문의 인물들은 제이인자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는 것이 본분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천년대자문의 율법에 의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천년대자문의 인물들은 결코 자신의 삼 푼 이상을 드러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지켜지기 어려운 율법인 것이다. 본시 인간이란 자신을 과시하면서 살아가는 욕망의 동물인데, 그것을 감추며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비록 천년대자문의 인물에 속했을망정 자신을 완벽하게 감추며 살아가는 인물은 별로 없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감추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금일홍이라는 인물이 그런 인물인 것이다. 그는 평범하다. 비록 사람을 끄는 천성적인 마력만은 완전하게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는 완벽하게 자신을 은폐한 인물 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천년대자문의 모든 인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능력은 천년대자문 사상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니…….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가는 그들이기에 역시 모든 것을 은폐시키고 있는 금일홍의 확실한 능력을 모른다는 사실이 천년대자문의 인물 사이에서는 가장 무서운 점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 단우는 새삼 그를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평범하다. 저런 평범함이 그를 천년대자문의 제이인자로 부상케 한 이유일 것이야…….' 그는 내심 금일홍에 대해 어떤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그의 시선은 다시 나머지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백의의 노인과 이십대 초반의 남의(襤衣) 소녀였다. 묘하게도 그들 역시 별로 뛰어난 점이 없어 보였다. 금일홍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평범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금일홍의 평범함은 자연적인 것이라면, 이들 두 사람의 평범함은 다분히 가식적으로 꾸며진 것이라고나 할까? 그 외에 다른 점은 없었다. 백의노인의 얼굴은 황토 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이것은 그가 주로 햇볕 속에서 일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윤기 없는 백발은 질끈 검은 천으로 동여매어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한 자루의 호미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용모는 보통의 촌로들처럼 주름진 것이었고 순박하게 보였다. 단우의 눈빛이 잠시 그의 몸에서 머물렀다. '벽라무황천의 화원지기… 꽃을 가꾸며 꽃 속에서 살아가는… 누구 한 사람 눈여겨보지 않는 화노(花老) 라 불리는 인물…….' 그랬던가? 이 백의노인이 바로 벽라무황천의 화원지기였던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어. 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인물이 천년대자문의 여섯 번째 서열을 차 지하고 있는 대자율법사라는 것을…….' － 대자율법사(大者律法師)! 이 인물은 실로 특이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천년대자문의 천년율법을 관장하는 인물로서 어떤 인물도 그를 구속할 수가 없다. 설사 대종사라 해도 그를 쉽게 구속할 수가 없으며, 구속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그가 천년대자문의 율법을 관장하는 이상 그를 존중하고 흠모하는 것만이 천년대자문의 기강과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대종사라 해도 율법에 어긋나는 죄를 범했을 시에는 그에게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소녀! 그녀는 시비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벽라무황천의 시비였다. 용모는 절색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으나 그런 대로 사람 좋은 인상은 지니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범했으나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궁장으로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은은히 진홍빛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벽라무황천의 시비 자홍(紫紅)… 하지만 그녀는 천년대자문의 제칠인자인 청붕소희(靑朋 姬)…….' 단우는 그녀의 눈에서도 은은히 진홍빛이 발산되고 있음을 느꼈다. 아무튼, 다섯 사람은 천년대자문의 중추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때 그들은 경악과 의혹의 표정으로 자하고금마유사와 단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아미십삼활인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문득, 부종사인 금일홍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제갈통사…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요?" 그의 눈빛은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망망대해의 검은 정적이 침잠해 있는 밑바닥과 같은 눈빛이라고 할까? 자하고금마유사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물론 저들의 죽음이 놀라운 것이기는 하지만… 대종사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아랫사람의 도 리가 아닌지……?" 지극히 정중하면서도 교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이런 충고는 때때로 분노를 자아내게 할 때가 있는 것이고 모욕적 인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이 그런 식으로 금일홍에게 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대가……?" 금일홍의 잔잔하던 눈빛에 미미한 흔들림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곧장 고요해졌고, 그는 단우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대종사를 배견하옵니다." 그러자 나머지 인물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단우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속하들이 대종사께 삼가 문안인사 올립니다!" 단우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댄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와 주었어요. 그대들을 만나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는 여섯 사람을 둘러보며 빙그레 웃었다. "대종사라는 신분이 이토록 외로운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나는 이 대종사라는 신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보통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요." "어찌 그런 말씀을……." 금일홍을 비롯한 다섯 사람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단우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부종사… 당신에게 대종사의 신분을 넘겨 주고 싶은데 어떠신지요?" "대… 대종사……." 금일홍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언뜻 당혹한 빛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확실하군.' 무엇이 확실하다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단우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부종사의 지혜와 통솔력이라면 능히 대종사의 신분으로서도 천년대자문을 훌륭히 이끌어 나갈 수가 있 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단우는 나머지 인물들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 "……!" 환우법공인 환우대선생을 비롯한 다섯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씁쓸하게 웃는다. 그러다가 대자율법사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대종사, 대종사의 신분은 종사지맥만이 오를 수가 있습니다. 부종사는 종사지맥의 인물이 아니니 오를 수가 없소이다." "……." 단우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금일홍의 전신에서 실로 거대한 기운이 수 차례나 폭발되고 있음을……. '대자율법사의 말에 부종사가 분노하고 있다.' 그렇다. 지금 부종사 금일홍은 어떤 이유에선지 전신을 미미하게 떨며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온화한 미소가 띠어 있어 그 분노를 완전히 감추고 있었다. "그렇지요… 대종사라는 신분은 속하 같은 천한 신분의 인물이 도저히 넘볼 수가 없는… 아니, 오를 수 가 없는 위치이지요." "……." "그런 것은 율법에도 없는 것이라 속하는 대종사의 따를 수가 없소이다." "하지만……." 단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는 지금 대종사 이상의 야망을 지니고 있고… 대종사 이상의 권위를 누리고 있으니… 당연히 대종 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것은……." 부종사 금일홍의 얼굴에 당혹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단우는 숨돌릴 틈도 없이 말로서 밀어 댔다. "명색이 이름이 대종사일 뿐이지 그 동안 이 몸은 부종사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것은……." "천년대자문의 대소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나와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 하였고… 이제는 이 몸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 부종사 금일홍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이렇듯 당혹해 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리라. 단우의 음성은 잔잔한 것이었으나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에 자하고금마유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환우대선생을 비롯한 풍운우사 등은 의아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대종사의 기도와, 전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대종사의 위엄을 새삼 느꼈기 때문일 까? 단우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천년대자문의 율법에 의하면 천년대자문의 모든 인물들은 대종사를 배견할 때 반드시 무릎을 꿇게 되 어 있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아직도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몸을 무시하는 소치가 아닌가요?" 순간, 부종사 금일홍이 눈을 감았다.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한 그를 바라보는 자하고금마유사의 얼굴에 긴장과 초조의 빛이 떠올랐다. ■ 십매어황 제1권 第十二章 천년지대(千年地帶)를 향하여 1 '부종사… 그는 지금 분노와 갈등에 휩싸여 있다.' 사실 자하고금마유사는 이 순간 금일홍의 심중을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었다. '기실 지금 그의 능력이라면 당장이라도 대종사를 죽일 수가 있다. 그런 그가 이런 수모와 모욕을 감내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자하고금마유사는 부종사 금일홍을 천년대자문에서 알고 있는 음모의 주동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지혜와 그의 뛰어난 능력이 아니고서야 이런 거대한 음모를 꾸밀 인물은 없다고 그는 일찍 이 생각하고 있었다. 부종사 금일홍의 능력은 자하고금마유사로서도 확실히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부종사 금일홍의 능력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에 열을 더해야 할 정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단우를 죽이려 든다면 자신으로서는 그것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은 무공이 거의 전폐된 상태가 아니던가? 설령 환우대선생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이 부종사 금일홍의 음모와 관계가 없고, 그래서 부종사 금일 홍이 단우를 죽이려함을 막으려 한다 해도 역시 막을 수 없음은 불변의 이치인 것이다. 그는 내심 탄식했다. '아아… 대종사께서 그를 분노케 하고 있는 것은 실수다. 지금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은 백해무익할 뿐이 거늘…….' 그렇다. 그는 몇 번이나 눈짓으로 단우의 행동을 저지했다. 하지만 단우의 행동은 막무가내일 뿐이다. 거기에서 자하고금마유사는 또 한 번 단우에게 감탄을 하고 있었다. 어린 단우는 지금 부종사 금일홍이 자신을 죽일 수 없음을 확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전해 받았기 때 문이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대종사께서는 부종사 금일홍이 지금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라 자신하고 있는 것이 다. 대종사께서 부종사 금일홍을 분노케 하는 것이 백해무익하듯… 부종사 금일홍이 대종사를 지금 죽 이는 일이 백해무익하기 때문인 것이다.' 자하고금마유사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부종사 금일홍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런 분노 정도는 참으리라는 사실을……. 그는 작은 것을 위해 큰 것을 버릴 인물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과연 부종사 금일홍은 지극히 담담한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단우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인물들 역시 단우의 면전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종사 금일홍은 공손한 음성으로 말했다. "속하가 그 동안 대종사를 대신하여 모든 대소사를 임의대로 처리하였던 것은 대종사가 어리셨기 때문 이니… 대종사를 무시하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몸을 위해서란 말이신가요?" 단우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부종사 금일홍은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단우는 얼굴을 슬며시 붉혔다. "용서하세요. 이 몸이 부종사의 하해와 같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해를 한 것 같군요." 단우는 정중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자하고금마유사는 내심 실소를 토했다. '기가 막히시군. 시키지도 않은 일이건만 저렇듯 완벽한 연기마저 보이시니…….' 이때 부종사 금일홍이 담담하게 웃었다. "모든 것이 속하의 불찰이옵니다." "……." "대종사께 속하의 뜻을 미리 전했다면 이런 오해는 없었을 것을……." "……!"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몸의 병이 거의 완치가 되었으니… 모든 대소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이 몸이 관장하 게 되겠군요."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부종사 금일홍은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의 대화는 평범한 것 같았지만 사실 치열한 심기전이었던 것이다. 한순간에 단우의 목숨이 떨어질 수도 있고, 더불어 자하고금마유사의 목숨도 사라질 수도 있는……. 이때, 단우가 다시 대담하게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이 몸은 이 자리에서 첫번째 대사(大事)를 처리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대사라면……?" 부종사 금일홍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단우는 잔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별것은 아니에요." "……." "이번에 천년지대에 대한 도면(圖面)을 완성했다고 했는데… 그 도면을 이 몸이 보관하고 있어도 되겠 지요?" "그것은……." "안 된단 말인가요?" "그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렇게 난처한 기색을 짓는 것이지요?" 단우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부종사 금일홍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천년지대의 도면은 사실 너무도 중대한 것이라… 이것이 행여나 무림에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당연히 그것을 노리는 탐욕자들에 의해 무림은 피바다가 되겠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부종사의 말은 그것을 노리는 암중 인물이 많기 때문에 나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요?" "……." "물론 현재의 나의 능력은 당신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것이에요." "……!" "내가 보관하고 있는 것보다 당신이 보관하고 있는 것이 그런 점에서 본다면 훨씬 안전할 수도 있어요." "……." "하지만… 항상 이런 식으로 내가 모자라기 때문에 당신에게 양보해야 한다면 나는 대종사로서의 권위 를 언제 행사하지요?" "그것은……." 대단한 화술이었다. 금일홍은 단우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금일홍은 굴복하고 한 개의 옥갑을 단우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옥갑은 은은히 서기가 뿌려지는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단우는 그것을 잠시 주시하더니 이내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비로소 만족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미안해요. 내가 대종사의 권위를 찾아야 하는 것은 단지 나의 뜻이 아니라 천년대종사로서의 뜻이기 에……." "당연히 하셔야 할 일을 하셨을 뿐이니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종사 금일홍은 허리를 펴며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종사께서 속하에게 다른 할 말씀은 없으신지……." "없어요." 단우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금일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하게 시선을 자하고금마유사에게 던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보이지 않은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 "……!" 두 사람 사이에는 억겁처럼 길게 느껴지는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금일홍에 의해 깨어졌다. "제갈통사, 그대가 아미십삼활인자를 죽인 것인가?" "그렇소이다." 자하고금마유사는 아랫사람으로서의 최대한의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부종사 금일홍의 미간이 좁혀졌다. "죽인 이유는……?" 그의 음성에는 실로 서릿발처럼 차가운 위엄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질문의 대답은 단우가 대신했다. "아… 그 이유는 제가 대신 대답하겠어요." "……?"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이 되었다. 단우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갈통사는 이 몸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죽인 것이에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미십삼활인자들은 나를 치료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려 했어요." "아……." "그래서 제갈통사께서 그들을 죽인 것이고… 죽음에 이른 이 몸을 모든 정력을 쏟아서 이렇게 구한 것 이지요." "음……." "제갈통사는 이번 일로 인해 저렇게 노쇠해 버린 것이며……." 단우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감사한 눈빛으로 한동안 자하고금마유사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저분을 부종사가 책하려 드신다면… 이 몸은 대종사의 신분으로서 그대를 대신 책할 것이에요." "알겠습니다." 부종사 금일홍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아미십삼활인자가 대종사를 죽이려 했다면 당연히 그들은 죽어야 하는 것… 이 일을 더 이상 따지지는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럼 우리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더 이상의 용무가 없으시다면……." "더 이상의 용무라……."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웃음이었다. "용무는 많이 있지요." "……?" "우선 몇 가지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요. 아미십삼활인자가 이 몸을 죽이려 그런데는 반드시 동기가 있을 것이라는 의문과……." "……!" "그 동기를 준 배후자는 당연히 있을 것이라는 의문과……." "……." "당신들은 당연히 제갈통사의 변해 버린 모습을 대하고서 놀라야 했음에도 왜 태연해 했을까 하는 의문 과……." "……." "이 몸의 완치를 보고서도 왜 기뻐하는 인물이 없을까 하는 의문과……." "……." "당신들 중에 과연 아미십삼활인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배후자가 있을까 하는 의문……." 단우는 여기까지 말하고 짐짓 피곤한 기색을 지어 보였다. 그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피로해요. 그래서 그 의문들을 지금은 풀 수 없고…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풀려하 니 여러분의 협조를 부탁하는 바이에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의문들을 모조리 토해 낸 뒤 단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피곤해서 쉬어야 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또한 그것은 축객령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금일홍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후,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자 단우가 자하고금마유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갈통사는 부종사 금일홍이 나를 죽이려 한 최후의 주모자라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자하고금마유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혹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런데 말이에요. 환우대선생의 눈빛은 왜 다섯 차례나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으며… 풍운우사와 부종사 금일홍은 왜 일곱 차례나 기이한 눈빛을 교환했을까요?" "음……." "그리고 또 있어요. 대자율법사는 그 어떤 뚜렷한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그것이 이상해요." "무엇이 이상하단 말씀이신지……." 자하고금마유사는 의혹의 표정을 짓는다. 아니, 그도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을 지금 단우에게서 다시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아미십삼활인자가 죽어 있고… 당신이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음이 놀라운 것임에도 그는 시종 일관 무표정했으니… 그것은 당연히 기이한 것이 아닌가요?" "과연 그렇군요." "청붕소희도 이상해요." "무엇이 말입니까?" "진홍빛을 띤 그녀의 눈빛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단우를 응시하고 있었거든요." "아……!" "그 눈빛은 기이한 마력을 담고 있었으며… 마치 내가 대종사로 변한 것을 느끼고 있는 듯했어요." "그럴 리가……."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단우는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제갈통사의 변한 모습을 보고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어요. 그것은 더 이상한 일이 아닌 가요?" "그렇습니다." 자하고금마유사도 그것을 기이하게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들이 나의 변한 모습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은 것은 이미 이런 나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는 것인 데…….' 이런 생각은 단우도 동시에 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무슨 생각을……?" "이것은 가정이지만… 어쩌면 가정 이상으로 확실할 수도 있어요." "음……." "어쩌면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음모라는 테두리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 "그리고 그들은 이미 내가 단우임도 확실하게 눈치채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그럴 리가……." 자하고금마유사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은 완벽한 비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대종사께 펼친 만령이체천교대법은 오직 나만이 알 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들이 대종사가 소련주임을 알리는 만무한 것이거늘…….' 그렇다. 자하고금마유사의 이론대로라면 부종사인 금일홍을 비롯한 환우대선생 등이 이런 비밀을 알리 는 만무한 것이다. 그럼에도 단우가 그들이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의 직감에서 비롯된 느낌일 뿐일까? 2 따각따각－! 한 대의 팔기마차(八騎馬車)가 교교한 달빛을 받으면서 벽라무황천의 거대한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벽라무황천은 깊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벽라무황천 전체가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벽라무황천의 처처에는 수많은 감시자와 수신자들이 지금도 바람 한 점 스며들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 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한 사람 이 팔기마차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했다. 이 팔기마차의 마부석에는 놀랍게도 벽라무황천의 부천주인 풍운우사가 타고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의심이 많은 인물일지라도 풍운우사의 행동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풍운우사라는 지고한 신분의 인물이 무슨 이유로 마부석에 있는 것이며, 이 야심한 시각에 어디로 출장하는 것인가에만 약간의 의혹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팔기마차는 벽라무황천이 멀리 보이는 지점에서 잠시 멈추었다. 휘이잉－! 기다렸다는 듯이 한 줄기 야풍이 불어와 그의 백염과 백발을 휘날렸다. 그는 마차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한 줄기 바람 같은 음성을 흘려냈다. "일단 속하의 할 일은 여기에서 잠시 매듭을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말은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마차 안의 사람이 대체 누구이기에 풍운우사가 속하라 하칭을 하는 것인가? 이때 풍운우사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마차를 향해 포권의 예를 취했다. "천년지대로 향하는 길은 지옥의 수라강(修羅江)보다도 멀고 험하니… 대종사께서는 부디 옥체를 보중 하시기 바랍니다." "……." "속하는 잠시 벽라무황천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대종사를 따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안개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갔다. 이때였다. 마차의 주렴을 헤치며 두 사람이 내려섰다. 그들은 자하고금마유사와 한 명의 수려한 흑의소동이었다. 소동의 눈빛은 겨울 하늘처럼 시리고 깨끗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만인을 압도하는 위엄이 줄기줄기 흐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천년대자문의 대종사가 된 단우였다. 단우의 미간은 좁혀졌다. "확실히 이상해요." "……!" "부종사 금일홍을 비롯한 나머지 천년대자문의 인물들은 천하인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암중 우리를 보 호하여 천년지대에 이르도록 하겠다지만……." 단우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살래살래 내젓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부종사 금일홍이 순순히 천년지대의 비도를 나에게 준 것도 그렇고… 암중 우리를 보호하겠다는 것은……?" "……!" "내가 대종사의 신분이고… 그렇다면 그는 암중이 아닌 천년대자문의 실체를 드러내고서 천년지대까지 나를 호송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암중 보호를 고집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에요." "……!"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만을 끄덕이고 있었다. 그 역시 단우와 마찬가지로 의혹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단우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암중으로 보호하겠다는 것은 천하인의 이목을 속여 보자는 의도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럴까요?" "허허… 일단은 그렇게 생각해야지요. 약자는 우리이니……." "그렇군요." 단우는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렇다. 두 사람은 약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단우가 대종사의 신분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허울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천년대자문의 힘은 부종사 금일홍이 관장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암중으로 보호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운 이상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거듭 언급하지만 천년대자문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거대한 음모에 대해서 단우는 계속하여 많은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단우는 어떠한 일이나 상황이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그는 유난히 호기심이 많고 강하다. 천성으로 이런 성격을 타고난 그가 이번 일에 휩쓸리게 되었으니 야릇한 희열마저 느끼게 되었으며, 수 많은 의문점에 대해서는 하나씩 풀어 나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요. 이상한 점은 하나둘이 아니었지요." "……!" "그들이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것에서부터… 천년지대의 비도를 우리에게 순순히 내 준 것과 천년지대로 향하겠다는 우리의 제안을 순순히 응한 것에 이르기까지……." 단우는 신비롭게 웃었다. "이 모든 의혹을 단숨에 풀어버린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에요." "……!" "우리가 천년지대에 이르기 전까지 어쩌면 그 의혹들은 모두 풀릴지도 모르지요." "그럴 것입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으나 사실 자하고금마유사의 마음은 어둡기 이를 데 없었다. 어찌 되었건, 부종사 금일홍이 무슨 의도를 품고 있다면 자신과 이 어린 대천마련의 소련주 겸 천년대 자문의 대종사는 결코 그 의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천년지대로 향하는 길은 확실히 멀고도 험하다. 나와 대종사, 천년지대에 이르기도 전에 어쩌면 죽음에 먼저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어두운 것만큼이나 하늘도 어두웠다. 이때, 단우는 벽라무황천을 응시하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냉사혼… 소야… 담야훼… 미안하다." 어린 그는 세 사람을 뇌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비록 이십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형제처럼 정이 든 소년소녀들……. 그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아마 이 밤도 벽라무황천을 탈출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히고 있을 것이다. "백 일만에 제마뇌림을 탈출하겠다고 했지만… 아니, 분명히 나는 여기에 나와 있으니 탈출은 한 셈이 되었지만… 그대들은 아직도 그곳에 있으니…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냉사혼과 소야, 담야훼 등과 함께 탈출하지 못한 것이 단우는 못내 섭섭한 것이다. "금마뇌옥을 파괴하고 마인들을 탈출시킨다면… 너희들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야. 내가 몇 번의 탈출에서 실패한 것은 그것을 위한 계책이었으니… 누구도 금마뇌옥을 이용하여 탈출할 것이란 것을 생 각지 못하고 있을 것이야." 단우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금마뇌옥이 파괴되고 냉사혼 등이 탈출하는 장면이 연상이 되기라도 한다는 듯……. 그러다가 그는 문득 벽라무황천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너희들이 무사히 탈출하고 내가 오래 살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안녕… 나의 친구 들……." 단우는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자하고금마유사의 손을 잡았다. "마차에 오르십시오, 대종사." 자하고금마유사가 단우의 손을 이끌고 마차로 다가갔다. 단우는 고개를 들어 자하고금마유사를 어두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단심무정도… 그도 이번 일에 동참했으면 힘이 되었을 텐데……." "하지만 그는 금마뇌옥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옵니다."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에 단우는 의혹의 시선을 던진다. 자하고금마유사는 담담히 웃었다. "그만큼 우리가 가는 길은 위험하다는 것이지요." "……!" 단우는 그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잠시후 단우는 마차에 올라탔고, 자하고금마유사는 마부석에 올랐다. 두두두－! 마차는 힘차게 어둠의 공간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우의 운명에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사라진 무림 일천년사를 안고 있는 전설의 천년지대! 천하인 모두가 얻고자 하는 그 천년지대와 단우의 운명은 어떻게 연관되어질 것인지……? 이 날은… 천년지대의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가 일백 년을 주기로 한 번씩 약화된다는 그 운명의 시간을 정확히 이백육십 일 앞둔 날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 날을 향하여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한다. 풍운(風雲)을 안고……. ■ 십매어황 제1권 第十三章 풍운지로(風雲之路) 1 － 제갈통사… 천년지대는 어디에 위치해 있지요? － 십만대산(十萬大山) 생사평(生死坪)이옵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마차를 타고 거기까지 계속 간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요? － 수천 리의 거리이니 백 일은 잡아야 하겠으나… 산이 막히고 강이 놓여진 것을 감안한다면 이백 일 이상 잡아야 하겠지요. － 이백 일? 그렇다면 천년지대의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가 약화되는 시간이 이백육십 일 정도가 남았으 니 서둘러서 가야하겠군요. － 그렇습니다. 거기에 방해자라도 있다면 이백 일의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으니… 시간이 촉발한 것 이지요. － 만약에 말이에요.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가 약화되는 시간을 놓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 백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요. －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 무엇이옵니까? － 이 단우의 생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가 천년지대로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지요? 제갈통사 께서는 이 단우가 대종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 ……. － 현재 천년대자문은 엄청난 음모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지라… 그 음모의 주동자를 천년대자문의 모든 인물 앞에 공개할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음모의 주동자가 꿈꾸는 천년대자문의 일인자 자리와 천년지대를 얻으려는 야망을 봉쇄시켜야 한다고……. － 그렇습니다. － 그래서 무림의 그 음모의 주동자가 이끄는 천년대자문의 손에서 피바다로 변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고 말씀하셨지요. － 그렇게 말했지요. － 그런데 내가 대종사가 되었고… 음모의 주동자가 공개적으로 천년대자문의 일인자가 되는 것을 잠시 막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반 변한 것은 없지 않은가요? － ……! － 음모의 주종자가 부종사 금일홍이라는 짐작은 섰지만 그것을 증명할 만한 아무 것도 없을 뿐만이 아 니라… 설사 증명할 만한 무엇이 있다 해도 부종사 금일홍의 야망을 막을 수는 없어요. 그자는 이미 천 년대자문의 모든 것을 거의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 ……! － 우리가 그 자의 음모를 천년대자문의 인물에게 공개한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죽음만을 재촉하는 것일 뿐이에요. － ……! － 이런 마당에서 내가 왜 천년지대로 가야하는 것이지요? 천년지대의 비도를 얻었다고는 하나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확인할 길이 없고… 내가 천년지대의 모든 것을 얻는다고 해서 달리 좋아질 것도 없는 것을… 나의 생은 얼마 남지 않았기에……. － 그 천년지대의 비도는 진짜입니다. － 무엇으로 그것을 증명하지요? － 헛허… 천년지대의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생문은 팔만사천 개이옵니다. 그리고 사문은 십만 개이 지요. 그것을 알기까지에는 거의 일천 년의 세월을 소비했을 뿐만이 아니라 일천 명의 초지자의 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 아……! － 이 몸도 그 일천 명의 초지자 중 한 명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때문에 그것을 만든 이 몸이 그것을 몰라볼 리는 없는 것이고……. － 음……! － 백 자 길이의 천잠사(天蠶絲)로 만든 천년지대의 비도에는 거미줄 같은 선이 무수히 그어져 있을 뿐 만이 아니라 생문(生門)과 사문(死門)이 십팔만사천 개가 점으로 표시되어 있는지라 누가 만약 또 하나 의 비도를 만들려고 생각한다면 백 년의 세월 이상을 소비해야 될 것입니다. － 정말 대단하군요. － 그렇지요. 생문과 사문 중 하나라도 잘못 표시가 된다면 절대로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을 테니… 그것을 정확히 만들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 ……! － 그런 만큼 지금 대종사가 지니고 있는 비도는 가짜일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이 비도가 진짜라면 부종사 금일홍이 순순히 이 비도를 나에게 넘겨준 의도는 무엇일까요? － ……! － 그가 노리는 최후의 야망이 천년지대라면… 그가 이것을 내게 준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요? － 아마도 그는 비도를 대종사에게 주고 천년지대로 향하게 하여 천하인의 이목을 끌게 한 다음… 엄청 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결국에는 그 혼란을 틈타 비도를 다시 얻고 천년지대를 얻으려는 속셈인 것 입니다. － 엄청난 모험일 텐데요? 그러다가 비도를 얻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그의 야망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요? － 하지만 그에게는 비도를 얻을 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 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천년지대로 가는 것이지요? 이대로 그의 음모대로 따르는 것은 그 자의 계 산에 놀아나는 것이 아닌가요? － 하지만 우리는 가야합니다. － ……? － 우리는 천년지대를 얻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 파괴하러? － 그렇습니다. 파괴하여 영원히 천년지대를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 아아……. － 그것이 부종사 금일홍의 음모를 막는 유일한 길입니다. － 그럴 필요가 있나요? 이 비도를 없애 버리면……? － 그것을 없앤다 해도 하나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지요. － 하나의 가능성……? － 그렇습니다. 부종사 금일홍이 이 도면… 즉 천년지대의 비도를 그대로 머리에 담고 있을지도 모르기 에……. － 어찌 그럴 수가… 이 도면을 똑같이 만드는 데도 백 년의 세월이 걸린 만큼 복잡한 것이거늘… 그가 머리에 담을 수가 있단 말인가요? － 헛허허… 그 자의 능력은 그 이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 대… 단… 하… 군… 요. 2 두두두－! 파양호 연변에 위치한 벽라무황천을 떠난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가 탄 마차는 찬란하게 움터 오는 여명 (黎明)을 타고 청류하(靑流河)에 이르고 있었다. 청류하. 이곳은 경관이 수려하고 한적했다. 벽라무황천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 팔십 리 길, 하룻밤을 내내 달려 단우 일행은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황금빛 여명에 반조되어 은빛 편린(片鱗)을 자욱히 띠고 있는 이곳에는 언제부터인가 한 사람이 머물고 있었다. 여명을 마주한 채 청류하변에 조용히 앉아 있는 그는 일신에 눈처럼 흰 유삼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을 뿐 일체의 움직임이 없었다. 어깨까지 덮은 초립(草笠)을 쓰고 있는지라 용모는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무릎까지 흘러내려 구름처럼 싸여 있는 흑염(黑髥)으로 짐작컨대 중년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두두두－! 마차는 이 백의초립인을 향해 빠른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지축이 흔들리는 말발굽 소리로 인해 청류하의 정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있었다. 아침의 고요함이 깨어졌기 때문인가? 백의초립인의 흑염이 미미한 떨림을 일으켰고, 그 순간 백의초립인은 마차가 달리는 관도 위에 정좌한 자세 그대로 놓여지는 것이 아닌가? 그 움직임은 무어라 형언키가 불가하였기에 차라리 착각이었다고 보는 것이 좋으리라. 백의초립인이 본래 관도의 중앙에 정좌해 있었다고 여겨지는 착각! 그러나 자하고금마유사는 정확히 그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아니, 백의초립인의 움직임을 보았다는 것보다 그는 멀리서부터 백의초립인이 관도가 아닌 청류하변에 정좌해 있었던 것을 보았다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그래서 그는 백의초립인이 의도를 지니고 관도의 중앙에 나타난 것을 정확히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적한 청류하변의 한 사람……. 피로한 자하고금마유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존재들이었으나, 그가 멀리서부 터 백의초립인을 주의 깊게 보게 된 것은 백의초립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가 않았기 때문이 었다. 기실 백여 장의 거리를 두고 그런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자체가 자하고금마유사를 경이롭게 하는 것이 었다. 과연 백의초립인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고 정체는 또한 무엇인가? 히히힝－! 마차는 천천히 백의초립인의 앞에서 멈추었다. 바로 그때였다. "왜 멈춘 것이오?" 백의초립인이 불쑥 묻는 것이 아닌가?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길의 한가운데를 막고 선 사람은 누구이며, 어쩔 수 없이 마차를 세운 사람은 누구인데! 자하고금마유사는 어이가 없었다. '미친 사람은 아닐 테고…….' 적어도 미친 사람에게는 저런 신비한 기운은 없다. 그는 유심히 백의초립인을 살피며 물었다. "귀하는 뉘시오?" 그러자 백의초립인은 또다시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본인은 당신이 자하고금마유사임을 알고 있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를 모르고 있는 것이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럴 때 웃어야 하는가 아니면 울어야 하는가? 그러나 자하고금마유사는 백의초립인이 의도를 지니고 접근한 이상 상대를 섣불리 대해서는 안됨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음이 그것을 잘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백발로 변한 뒤의 자신은 분명히 과거의 자하고금마유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정중하게 다시 물었다. "본인에게 무슨 목적이라도 있으신지……?" "목적……?" 백의초립인은 그제서야 생각이 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목적이 있지." 말이 끝나는 순간, 백의초립인은 어느 새 자하고금마유사의 곁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하고금마유사의 손에서 채찍을 빼앗아 들더니 거칠게 내려치는 것이 아닌가? "자, 갈 길이 머니 어서 떠납시다." 두두두－! 마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청류하변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누구일까?' 마차 안의 단우는 궁금했다. '천년지대의 비도를 노리는 자일까?' 불안해지기도 했다. 부종사 금일홍은 암중 천년대자문의 전 고수를 이끌고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을 믿은 단우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는 자신의 목숨을 자신이 책임져야 할 판이다. 무공이 전폐된 자하고금마유사가 위기에서 단우를 도울 수도 없는 것이며, 단우가 자하고금마유사를 도 울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 아닌가? 만약 백의초립인이 천년지대의 비도를 노린다면 그야말로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단우의 귓전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 아니 대천마련의 부련주이며 천년대자문의 제갈통사이신 양반, 당신은 이 마차를 향 해 천하인이 몰려들고 있음을 알고 있소?" 이 음성은 백의초립인의 음성이었다. 순간, 단우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 자가 제갈통사에 대해서 저토록 자세히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천년대자문의 인물은 자체가 신비이며, 그 신분이 철저하게 비밀로 간직되어져 있는 것이다. 상대가 자하고금마유사가 지닌 두 가지의 신분 중 대천마련의 부련주를 알고 있다는 자체도 놀랍지만, 더더욱 놀라운 것은 천년대자문 내의 신분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단우는 자하고금마유사도 상당히 놀라고 있으리라. 이때, 자하고금마유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분명히 본인은 당신의 말을 듣고 놀라고 있소. 그러니 더 이상 말을 돌려 나를 놀라게 하지 말고 당신 의 진정한 목적을 분명하게 말하시오." 그런데 그 음성에는 전혀 놀라운 기색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만큼 자하고금마유사의 수양은 깊다는 뜻이 아닌가? "말장난을 계속하신다면… 더 이상 나는 당신과 나눌 말이 없소." "핫하하하……." 낭랑한 웃음소리가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에 이어 터져 나왔다. 대체로 인간은 희노애락의 감정이 극에 이르렀을 때 곧잘 웃음이란 것으로 표현하는데, 백의초립인의 웃음소리에는 일체의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러나 단우는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웃음소리에서 억겁의 세월을 억눌린 듯한 어두운 무게를……. "말장난이라……." 백의초립인의 다소 자조 어린 음성이 들려 왔다. "천 년의 세월 동안 천하인을 농락한 것이 누구인데… 본인의 말을 말장난이라 하는가?" 백의초립인은 실로 거대한 위엄을 풍기며 말투마저 바꾸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가? 무엇 때문에 일천 년 당시 무림이 천년지대에서 종말을 맞아야 했으며… 무슨 이유로 이천 년의 역사를 지닌 무림이 일천 년의 역사만을 지녀야 했는가?" "……!" "모두가 다 천년대자문의 농락 때문이 아니던가?" '천년대자문의 농락……?' 단우는 새로운 의혹에 사로잡혔다. 백의초립인의 말을 듣자니 사라진 일천 년 무림사가 천년대자문의 농락 때문에 형성이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단우의 기억의 일편에는 본래 천년대자문의 대종사라는 어린 소동의 기억이 담겨 있는데, 그런 그가 천 년대자문의 농락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대종사 역시 몰랐다는 결론이다. 이때, 자하고금마유사는 침묵을 지키고 백의초립인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 그대는 어찌 말이 없는가?" "……!" "일천 년 전에 그대들은 천하무림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거늘… 지금에 와서도 그대들은 여전히 후 세에 남을 죄를 짓고 있으니… 차마 할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인가?" "……!" "천년대자문은 일천 년 전에도 무림을 농락하고 무시했으며 지금에도 여전히 무림을 농락하고 무시하고 있다." "……." "그대를 비롯한 천년대자문의 모든 인물은 이인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철저히 감추며 벽라무황천과 대천 마련에 속해 있지만… 그 비밀이 영원하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 수많은 질책과 조소와 멸시가 담긴 백의초립인의 말을 자하고금마유사는 왜 한 마디의 항변도 없이 듣 고 있어야만 하는가? 이것이 단우의 궁금증이었다. '왜일까?' 단우는 마차의 주렴을 헤치며 백의초립인을 살폈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백의초립인이 쓰고 있는 큰 초립뿐이었다. 이때 자하고금마유사의 노안은 무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식은땀마저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 있는 것이 아닌가? 왠지 자하고금마유사의 얼굴은 십 년은 더 노쇠해 보인다. 그는 피로하고 지친 음성으로 말을 했다. "당신은 누구시오?" 백의초립인의 정체가 가장 궁금한 것이었을까? 그는 얼마 전에 물은 이 말을 다시 내뱉고 있었다. 그러자 백의초립인의 입에서 툴툴 메마른 웃음이 흘러 나왔다. "지난 일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천하인은 천년대자문에 대해서 몰랐고… 천년대자문의 인물은 천 하인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 오지 않았던가?" "……." "그런데 지금… 그대가 왜 나를 몰라야 하며… 내가 어찌 그대를 알고 있는 것인가?" "……." "이것은 이미 천년대자문의 일천 년 비밀이 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백의초립인은 천천히 머리에 쓴 초립을 벗고 있었다. 그 동작은 실로 완만하고 여유가 있는 것이었다. 누리는 자의 자만에서 나오는 여유인가? 아니면, 억눌린 자의 한과 분노에서 나온 무심인가? 초립이 벗겨지고 그의 용모가 여명 아래 찬란한 햇살처럼 드러나고 있었다. 먹물로 찍어 그어 올린 듯 짙은 검미(劍眉)와 수려한 콧날, 주사빛 입술……. 중년인 답지 않게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였다. 눈빛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물처럼 고요하다. 그 눈빛을 대하고 있노라면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이한 마력마저 그 눈빛에는 담겨 있었다. 그 얼굴에는 무심과 여유와 위엄이 숨쉬고 있었다. 한편, 그의 얼굴이 드러나자 자하고금마유사는 숨이 막히는 듯한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 그가 미처 말끝을 맺기도 전에 백의초립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자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자하고금마유사가 들먹이는 것 또한 모멸이라는 듯……. "그렇소. 본인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벽라천제 백리명이라고 부르는 졸부이외다." 분명히 그는 자신을 가리켜 졸부라고 했지만……. 오오, 벽라천제 백리명!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이요, 경이로운 이름이던가? 자하고금마유사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우의 어린 몸 또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벼… 벽라천제 백리명……?' 이 사람! 이 위대한 사람……. 백만정도인의 하늘로 군림하는 이 사람을 어찌 단우가 모를 것인가? 어찌 자하고금마유사가 모를 것인가? "핫하하하… 그렇게 놀랄 것까지는 없지 않소?" "……!" "백만 정도인의 하늘이라 불리는 이 몸이지만… 당신들 천년대자문에서는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로 인식 되어 왔으니… 그렇지 않소?" 벽라천제 백리명, 이 위대한 정파무림의 하늘은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천년대자문의 율법에 의하면 천년대자문의 모든 인물은 자신의 신분을 결코 타인에게 드러내서는 아니 되는 것이고, 때문에 일천 년의 장엄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천년대자문은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비밀로 유지되는 만큼 벽라천제 백리명은 천년대자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천년대자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자하고금마유사에 대해서도 훤히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 자하고금마유사가 놀라고 단우가 놀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벽라천제 백리명의 말은 계속이 되고 있었다. "일천 년이란 세월은 역사를 바꿀 수 있을 만큼 장장한 것이오. 천년대자문이 일천 년의 세월 동안 비밀 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사실 그런 생각은 그대들만의 것이었을 뿐 이미 무림의 역사는 변해 있었던 것이 오." "……!" "다시 말해 천년대자문의 비밀은 오래 전에 드러났던 것이며… 이제는 오히려 천년대자문이 알지 못하 는 비밀이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오." "음……." 자하고금마유사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벽라천제 백리명의 말을 인정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렇다. 벽라천제 백리명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그는 천년대자문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지만, 반면 천년대자문에서 그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있었으니……. "핫하하… 천년대자문에서 모르는 것은 아직 많소. 그것은 차차 드러날 일이지만… 이제부터 당신들은 천하인들을 다시 평가해야 할 것이오. 아니 그렇게 될 것이오." 벽라천제 백리명의 말은 확신이 담긴 것이었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이제 제일인자들과 제이인자들의 대결은 시작이 될 것이며… 그 결말은 천년지대에서 맺어지 게 될 것이오." 바로 이때였다. 자하고금마유사와 단우는 볼 수가 있었다. 바람처럼, 혹은 일편 구름처럼 그들의 타고있는 마차를 유유히 따르고 있는 인물들을……. 그들은 어림잡아 십 수 명에 달했다. 그런데 그들을 보는 순간 자하고금마유사의 안색은 대변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대부분이 벽라무황천의 최고 지위에 있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자하고금마유사의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아… 옥황전의 전주인 소수천무경(素手天武卿)……!" "복마루주인 철기대장군(鐵機大將軍) 옥기린(玉麒麟)……." "대정루주인 만통선생(萬通先生)… 기인루주인 종횡천노(縱橫天老)……." 어디 그뿐이랴. 공문쌍승과 우내삼성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이들 중 단우가 알고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지만 전에 담야훼로부터 들은 적은 있었다. 단우는 짐작하고 있었다. 단지 스쳐 지나가는 생각만으로도 방금 나타난 인물들이 벽라무황천의 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은 벽라무황천을 구성하고 있는 조직의 수뇌들인 것이다. 구름 속의 신룡(神龍)처럼 결코 자신의 존재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던 그들이 돌연 이곳에 동시에 출현 한 것이었으니……. 작게 보면 그들은 일개 문파의 조직체에 불과했으나, 크게 보면 그들은 한 시대를 패주할 만한 능력을 지닌 불세출의 기인들이었으니……. 비록 그들이 벽라무황천이라는 한 문파에 귀속이 되어 있었으나, 한 자리에 회동하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공문쌍승과 우내삼성만 해도 그렇다. 전대의 기인인 그들이 사실 벽라무황천의 기인루(奇人樓)에 소속이 된 것은 전혀 무림에 알려지지가 않 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인루에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것은 무림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니…….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인가 그들의 환우대선생의 부름을 받고 아미산에 나타난 사실을……. 그리고 그 후의 그들의 행적은 철저히 신비에 감추어진 것이었는데 이곳에 나타난 것은 무슨 의미로 해 석해야 한단 말인가? 천년대자문에 속한 인물들은 각 조직의 제이인자로 구성이 되어 있지만, 방금 나타난 인물들은 그야말 로 자타가 인정하는 벽라무황천의 일인자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천년대자문의 인물인 환우대선생과 풍운우사도 벽라무황천의 각 조직 수뇌로 존재하고 있지만 그 것은 벽라무황천 전체를 놓고 볼 때 이인자라고 해야 하는 것이니……. 명백히 말해서 그들은 벽라천제 백리명의 아래에 속한 인물이었다. 아무튼, 이들 제일인자들의 출현은 중대한 의미를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그것이 길(吉)인지 아니면 화(禍)인지를 두 사람도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에게 또 하나의 의 미를 지닌 풍운(風雲)은 불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벽라천제 백리명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단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 단우는 그 눈길에서 기이하게도 자애로움을 느꼈다. 그것은 부친인 천마종야 단사하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상하다. 이 단우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가 아닌가?' 단우는 고개를 슬며시 내저었다. 그는 내심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저 사람이 나를 본 적도 없고… 이 단우가 저 사람을 본 적도 없는데 대종사의 모습으 로 변한 이 단우를 알아볼 리가 만무한 것이지…….' 그때였다. 그의 귓전으로 벽라천제 백리명의 전음(傳音)이 파고들었다. "아이야… 천마종야 단사하라는 분이 너를 걱정하시고 계시다." "아……." "너는 알아야 한다. 네가 자하고금마유사와 함께 아미산으로 향하고… 벽라무황천에 든 모든 것이 네 부 친과 나의 안배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단우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어찌 그런 일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벽라천제 백리명의 얼굴을 주시했다. 두두두－! 마차는 계속하여 달리고 있었고, 벽라천제 백리명의 전음은 계속하여 들리고 있었다. "병환 중인 너에게 그런 일을 향하게 한 것은… 사실 천년대자문의 실체를 드러내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자하고금마유사의 실체가 드러났고… 천년대자문의 실체가 드러났던 것이다." "아……." "자세한 내막은 훗날 네 부친이 직접 설명해 줄 것이다. 지금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뿐이다." "……." "미안하다. 그리고 장하다. 네 부친 또한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단우의 작은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 부친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다니…….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다니……. '감당하기가 힘들어…….' 단우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그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실로 협소한 범위에 국한이 된 것이었다. 그가 아는 무림의 일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아미산의 아미십삼활인자를 찾아감으로서 운명은 거대한 변화를 일으 키기 시작했다. 무림의 일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 모든 일이 거대한 음모와 안배에 의해 움직여지는 무림의 일에 그는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대체가 어디서부터 시작이며 어디가 끝인지……. 이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엉뚱한 곳에서 시작은 되고 있었고,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면 그의 상상 저쪽에서 일은 터지고 있었으니……. 이번 일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천년대자문은 철저한 신비에 가려진 문파이고, 그는 그 속에서 대종사로 변용된 채 천년지대로 향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천년대자문의 부종사 금일홍도 알고 있는 듯 하고, 지금 천년대자문의 부종사 금일홍과 마찬 가지로 벽라천제 백리명조차도 자신이 천년대자문의 대종사가 아닌 단우임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었 으니…….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인지 그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아무튼, 그는 지금 천년지대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십이 세의 어린 나이로, 불과 몇 달이라는 억겁에 비하면 지극히 찰나적인 순간에 운명은 그에게 무수 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운명은 지금 끝이 난 상태가 아닌 것이다. 더욱 거친 격랑을 일으키며, 그 운명은 거침없이 천년지대란 소용돌이를 향해 치달리고 있는 것이다. 단우에게 순순히 천년지대의 비도를 내어준 부종사 금일홍과 그를 따르는 천년대자문의 인물들과 벽라 무황천과 대천마련이 가세를 하고, 더불어 수많은 세월 동안 무림을 떠나 은자로서 생활하던 전대의 인 물들이 대거 천년지대를 노리고 출현하니……. 풍운(風雲)! 무림은 걷잡을 수 없는 풍운 속으로 휘말려 들고 있는 것이다. ■ 십매어황 제1권 第十四章 무림사(武林史) 일천 년의 전설은 열리고 1 십만대산(十萬大山). 대륙의 최남단에 자리한 천험의 고산(高山)이다. 아래로는 열대의 기온에 접한지라 울울창창한 열대림(熱帶林)에 휩싸여 있고, 위로는 만년설(萬年雪)에 덮인지라 어찌 보면 이곳은 사계절이 공존하는 듯도 하다. 그만큼 이 십만대산이 차지하는 범위가 광대하다는 것이며, 십만의 거산들이 중첩되어 있는지라 한 번 잘못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인해 이곳 십만대산은 오래 전부터 인간의 발길이 거부되고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 들이 느닷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단신으로 혹은 떼를 지어 십만대산의 험지로 몰려들기도 했으며, 어마어마한 마차 행렬이 들어서기도 했으니……. 분명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몰려드는 인물이 무림인이라는 점에서, 단지 몰려드는 것이 아니라 탐욕의 불을 켜고 몰려든다 는 점에서 결코 심상치가 않았다. 그렇다. 그들은 한결같이 천년지대를 노리고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아아, 천년지대! 거듭 설명하고 또 설명해도 부족한 전설과 신화의 천년지대는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 역사의 모든 것이기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탐욕 대상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땅이 탄생되고, 무림이라는 환상의 세계가 창출된 이래로 이 정도의 무학보고(武學寶庫)가 과연 존재 했었던가? 천년지대를 무학보고라 한다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인물도 있겠으나, 최소한 이 십만대산을 향해 몰려드 는 인물은 천년지대를 무학보고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천년지대를 무학보고라 한다면 이것은 전에도 후에도 볼 수 없고 엄청난 규모의 무학보고인 셈이다.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의 모든 무학이 들어 있는 천년지대를 어찌 광대하다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 가? 그러나 중요한 점은 천년지대가 무학보고라는 것에 있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천년지대를 누가 얻느냐에 따라 무림에 대세가 좌우된다는 점에 있었으니……. 천년지대가 백 년을 주기로 한 차례씩 그 기세가 약화되는 날을 조화지일(造化之日)이라 한다면, 조화지 일을 며칠 앞둔 지금 천하무림인들이 이 십만대산을 향해 몰려듦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 이다. 천년지대를 누가 얻느냐?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2 따각따각－! 한 대의 마차가 지금 막 십만대산으로 들어서고 있다. 과거는 화려한 마차였겠으나, 지금은 황진으로 뒤덮인 초라한 마차였다. 그러나 이 마차의 마부석에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켜 어찌 초라한 존재라 할 수가 있겠는가? 한 사람은 눈부시게 흰 유삼을 걸친 초립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일신에 피보다 진한 혈의를 걸친 백 발의 수려한 노인이었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이 벽라천제 백리명과 자하고금마유사인 것이다. 한 사람은 백만정도인의 하늘이며, 또 한 사람은 사마제일의 지혜자였으니……. 뉘라서 감히 그들을 초라하게 볼 것인가?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인물들이 벽라무황천의 최고 인물들이었으니……. 누런 황진을 뒤집어 쓴 채 묵묵히 마차를 따르고 있는 인물들은 공문쌍승과 우내삼성을 비롯한 만통선 생, 종횡천노 등등의 엄청난 무위를 지닌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은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그들이 각기 지닌 신분이 그만큼 지고한 것일진대 초라한 마차 하나를 호위하고 있는 듯한 이런 일은 가히 경이로운 것일 수가 있었다. 설령 천년지대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 이 마차에 있다고 해도, 아니 천년지대로 들어가는 유일한 비 도가 이 마차 안에 비장되어 있다는 소문이 대륙에 퍼졌지만 누구 한 사람 이 마차를 노리고 접근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접근한다는 그 자체가 곧 죽음으르 의미하는 것임으로. 물론 그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인물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무모하게 이 마차에 접근한 탐욕자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죽음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접근자는 없었던 것이다. 본래 천년대자문의 부종사 금일홍이 단우에게 천년지대의 비도를 순순히 넘겨준 것은 그것을 기화로 무 림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오려 했고, 결국은 단우에게서 그 비도를 다시 찾아 천년지대의 모든 것을 얻 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벽라천제 백리명의 개입으로 그의 의도는 철저히 방향이 빗나가고 만 것이다. "……." 마차 안의 단우는 전에 비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피골은 상접하여 있었고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습관처럼 피를 토했다. 이것은 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십만대산으로 오는 긴 여정은 사실 그에게 무리였던 것이다. 이백하고도 십 수 일의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그 동안 단우는 한 가지 세상이 모르는 중요한 일을 했다. 그는 천년지대의 비도를 머리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범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난해한 일이었지만 단우는 간뇌를 타고난 기재인지라 그 난해한 도면을 완전히 머리에 담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비도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것은 부종사 금일홍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행동이겠으며, 자하고금마유사를 비롯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단우는 마차의 벽에 기댄 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이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인 것을……." 그렇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천년지대의 비도를 머리에 담고 없애버리는 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천년지대의 비도가 수많은 점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사람이 그것을 머리에 담기 위해서는 백 년의 세월이 필요할 지경이라는 생각해 보면, 오직 천하에서 이 일은 단우만이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 른다. "이제 누구도 천년지대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야. 나를 통하지 않고는……." 단우는 중얼거리면서 내심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부종사 금일홍도 미처 생각을 못했을 것이야…….' 그러나 문제는 이 사실이 천하인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른다는 것은 그들이 언제라도 필요할 때는 그 비도를 노리고 이 마차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르는 것이 니……. 여전히 단우는 결코 지녀서는 아니 되는 화약을 한아름 품에 지니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가 천년지대의 비도를 머리에 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천하인들은 단우를 노리게 될 것이다. 단우는 눈을 슬며시 감았다. "그래도 소용없는 일이야… 나는 누구에게도 비도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을 테니……." 따각따각－! 그 사이에 마차는 하나의 열대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멀리서 보자니 열대림은 안개와 같은 백기(白氣)에 뒤덮여 있었다. 단지 뒤덮여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열대림 자체가 실로 거대한 구름바다의 한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는 듯했다. 이것을 대자연의 기현상이라고 해야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현상인 것인지……? 그러나 이곳 열대림이 생사평(生死坪)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이 초자연적인 기현상 이 아니라 인위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 천년지대가 존재한다는 생사평이 바로 이곳 열대림 안의 생사림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열대림 안에 일천 년의 무림 역사가 숨쉬고 있는 것이다. 이 열대림 안에는 끝간 데 없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나니……. 그리고 거기에는 불세의 기진 아흔아홉 개가 펼쳐져 있다 한다. 이름하여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萬劫造化九九大圓陣勢)! 인간이 펼쳤으나, 결국은 하늘의 조화가 있어 인간의 발길이 금지되고 만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가 거기 있는 것이다. 누구도 일천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누구도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실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정사무림의 대혈전 속에서 정도인들이 사마인들의 맹공격을 감당하기 어려워 이 십만대산으로 피하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은 살기 위해 아흔아홉 개의 절진을 도주하면서 설치했다 하는데, 바로 이것만이 후 세의 무림인들에게 알려졌을 뿐인 것이다. 도대체 누가 절진을 설치했는지조차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다만 무림인들이 짐작하기를,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는 생사평에 정확히 아흔아홉 개의 원(圓)을 형성하 며 펼쳐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잔잔한 호수에 돌 하나를 던졌을 때, 호수의 잔잔함은 일시에 깨져 버리고 수많은 원의 물결 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작은 원이, 그리고 돌이 떨어진 중심에서 시작하여 점차 큰 원으로 변해 간다. 바로 그것을 연상하면 쉽게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를 머리에 그릴 수가 있을 것이다. 중앙으로 들어갈수록 원은 작아지나니, 원이 작을수록 혈전은 더욱 치열한 곳이었으며, 당시의 최강의 고수들이 죽어 있을 것이라는 희미한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심의 원에는 그 시대 절대자들이 죽어 있을 것은 명확한 사실! 이곳에 모여들고 있는 천하인들은 그 절대자들의 무학을 얻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년지대의 비도가 없고서는 거기까지 들어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비도가 있다 하여도 역시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는 인간이 만들었으나 하늘의 조화가 서린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비도이기에 진세 안으로 진입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것이다. 단우는 천천히 마차에서 몸을 내렸다. "……!" 사방에서 보이는 것은 울울창창한 열대림뿐이었다. 그 흔한 햇빛조차도 스며들지 못하는 이곳에서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오직 음습한 감촉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느낄 여유가 여기에는 전혀 없었다. 이미 수많은 무림인들이 어우러져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아아……." "커억……!" 비명이 열대림 안으로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비릿한 선혈이 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문득 잘려진 팔 하나가 단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조심하십시오, 대종사." 자하고금마유사는 황망히 그 팔을 쳐내며 단우를 안아들었다. 그러자 벽라천제 백리명이 정중하게 말했다. "당신보다는 내가 안고 있는 것이 더욱 안전할 것이오." 자하고금마유사는 단우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아이야, 두려워할 것은 없다. 벽라무황천의 수만 고수들이 너를 위해 이 혈전에 가담했으니……." "……."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요하고 깨끗한 눈망울을 굴려 사방을 살피면서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두렵지는 않아요. 다만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일천 년 전의 비극이 또다시 재현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에요." "그럴 수도 있지……." 벽라천제 백리명은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 이곳에 몰려든 무림인들은 대륙의 전 무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열대림에 가려 그 숫자는 확실히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지금 단우가 지니고 있는 비도를 노리고 혈전 을 벌이고 있는 인물들은 어림잡아 수만은 족히 될 듯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천년대자문의 인물은 아직 그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고, 대천마련의 인물 또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직도 뒷전에서 기회만을 노리는 고수들은 더욱 많을 것이니……. 만약 이들이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 속으로 진입하여 갇힌다면 또다시 일천 년 무림 역사는 사라져 버리 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가? 단우가 불안해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었던 것이다. 지금 이곳에 물려든 인물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진다. 한 부류는 천년대자문의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었고, 또 한 부류는 단우를 보호하는 입장인 벽라무황천 과 대천마련의 인물이라 할 수가 있었고, 마지막 한 부류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이 마지막 한 부류의 인물들이 지금 단우의 비도를 노리고 달려들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막기 위해 벽 라무황천의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벽라무황천의 힘은 실로 가공한 것이었다. 불나비처럼 탐욕에 눈이 멀어 죽여도 죽여도 달려드는 탐욕자들이지만 벽라무황천의 인물에 의해 속절 없이 죽어 갈 뿐이었다. 단우는 그 끔찍한 참상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이거늘 탐욕에 젖어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 을 허무하게 버리다니……." 그런데 단우의 이 중얼거림이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밀려들 듯이 땅이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 단우는 이 돌발적인 현상에 크게 의혹을 느꼈다. 지금은 태양이 중천에 뜬 대낮이었다. 그런데 먹구름 하나 없는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다. 놀란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단우의 표정이 더욱 놀람으로 물들었다. "저, 저럴 수가? 태양이… 태양이 사라지다니!" 과연 그러했다. 믿을 수 없게도 태양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태양이 어둠에 묻히면서 밝음은 사라지고 있었으며, 이제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사위는 칠흑 의 어둠에 잠겨 버렸다. 태양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사람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어둠 따위를 불안해 할 그들이 아니었지만, 이 어둠은 그런 부류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 이었다. 그런데, 어둠이 밀려들자 열대림 안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열대림 생사평은 바로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가 펼쳐져 있는 천년지대가 아니던가? 그곳을 둘러싸고 있던 백기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이 땅과 이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이때였다. 자하고금마유사의 얼굴이 긴장과 초조로 얼룩지고 있었다. "이것은… 태양이 달에 가리우는 일식현상……." 이미 천기의 흐름마저 통찰하는 지혜를 지닌 그인지라 이 기현상이 천기의 대변화인 일식현상이라는 것 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식현상은 달이 태양을 가리우는지라 음기(陰氣)가 충천하는 지금,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는 백 년을 주기(週期)로 그 기세가 약화된다는 바로 그 시기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자하고금마유사가 다급히 외쳤다. "대종사… 지금 진세로 진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백 년을 더 기다려야 할 테니… 빨리 들어가야 하겠지요?" 그러자 벽라천제 백리명이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과연 자하고금마유사의 말대로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는 상당히 약화되고 있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진하게 드리워졌던 백기가 엷어진 채 열대림 안의 천년지대의 형상이 희 미하게 보이는 것이다. 천하무림인들은 완전히 이 현상에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무모하게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를 향해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비록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가 약화되었다고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 었다. 지금 여기에 진법의 대가가 있다 하더라도 하루 종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들어갈 가능성을 찾을 수 가 있을진대, 진법에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는 무림인들이 막무가내로 진입하고 있었으니……. 엄청난 혼돈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크아악……!" "으아아악……!" 비명과 처절한 신음은 사방천지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들어가자! 들어가면 무엇이든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일천 년 사라진 고수의 삼류무학일지라도 얻는다면 절정의 고수로 변신될 수가 있는 계기 가 되는 것이다! 운이 좋아 그 시대 절정고수의 비급이라도 주울 수만 있다면 너는, 나는 당장 천하 위에 군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은 비록 설움을 받는 존재일지라도 내일은 지배자의 입장에 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말짱 몽상이었으며 망상에 불과했다. 이런 헛된 야욕은 결국 죽음만을 잉태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자하고금마유사를 비롯하여 단우와 벽라천제 백리명 등은 신중한 기색으로 진세를 따라 들어가고 있었 다. 물론 이 진세의 흐름을 알고 있는 인물은 단우뿐이었다. 단우는 작은 소리로 진세의 흐름을 벽라천제 백리명과 자하고금마유사 등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안으로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미처 몇 걸음을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멈추시오." 돌연 한 줄기 우렁찬 외침이 벼락처럼 그들의 귓전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어 바람처럼 십여 명의 인영(人影)이 그들의 면전으로 내려섰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몸놀림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일신에 흑의장포를 헐렁하게 걸친 중년인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각진 얼굴에는 숨막히는 위엄이 흐르고 있었다. 두 발은 허공에 떠 있었으며, 바람도 없건만 그의 흑의장포는 무섭게 펄럭이고 있었다. 이런 것이야 어쨌든 좋다. 문제는 그의 한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가히 초인간적인 데에 있었다. 이런 기도는 감히 인간으로서는 흉내를 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정도의 흐름보다는 사도의 흐름에 가까운 그 기도는, 일견하기에 벽라천제 백리명과는 상극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 이런 기도를 풍길 수 있는 인물은 천하에 오직 한 명뿐인 것이다. － 천마종야(天魔宗爺) 단사하(亶謝霞)! 백만 사마인의 하늘이자 대천마련의 태상련주가 바로 이 흑의의 중년인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따르는 인물은 대천마련의 핵심인물들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대천마련의 일회이벽삼교(一會二壁三敎)의 조직 중 자하사회의 회주는 자하고금마유사였고, 지옥혈교의 교주는 단심무정도 독고우였다. 거기에다 절대마벽의 벽주인 천마절대지존과 만겁마벽의 벽주인 만겁지존(萬劫至尊), 등천비마교주인 등 천비작(騰天飛爵), 혈의사사교주인 사사혈작(邪死血爵) 등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대천마련의 최고 수뇌들이 이곳에 모조리 운집했다는 것은, 대천마련을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라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마도(魔道)에 몸을 두고 있을지언정 천마종야 단사하와 나머지 인물들은 전혀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었다. 야망을 추구하고 있을지라도 천마종야 단사하는 피를 원치 않는 야망자였고, 나머지 인물들은 피를 원 하는 야망자였으니 그것을 어찌 같다 할 수 있겠는가? 지금 그들의 눈에 일렁이는 빛은 그래서 그 종류를 달리하여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마종야 단사하의 눈빛은 아들을 걱정하고 천하의 안위를 염려하는 근심의 빛이라고 한다면, 천마절대 지존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탐욕이 가득찬 그런 종류의 것이라 할 수가 있었 다. 천년지대에 대한 유혹이 대단한 것인지라, 비록 그들이 천마종야 단사하를 따르고 있으나 그것은 순간 적인 현상에 불과할 뿐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단우에게 검을 겨눌 인물들인 것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출현에 장내는 완전히 긴장의 도가니로 변하고 있었다. 한편, 단우는 천마종야 단사하에게 안겨들고 있었다. "아버님!" "핫하하하… 어서 오너라, 나의 아들아……!" 천마종야 단사하는 덥석 단우를 안아들었다. 그의 얼굴은 격정에 떨리고 있었다. 단우는 두 팔 한아름 벌려 부친의 목을 끌어안았고, 천마종야 단사하는 아들의 뺨에 정신없이 입을 맞 추고 있었다. 이들 이 부자지간의 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백만 사마인의 하늘인 천마종야 단사하이기에 잔인했고 무정했으며 또한 어떤 인물에게는 비정해야 했 던 인간이었으나, 오직 하나뿐인 아들에게만은 자애로웠고 온화하기만 한 전형적인 부친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로 인해서 잠시 별리의 아픔을 맞아야 했지만 결국은 이렇게 만난 것이다. 상황이 더욱 절박한 것이기에 그들의 만남은 더욱 감동적이었고, 진한 정이 충만하여 올랐던 것이다. "보고싶었어요. 아버님……!" "그래, 이 아비도 네가 보고싶었다." "어머님은……?" 단우는 그리운 또 한 사람이 궁금한 듯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천마종야 단사하는 빙그레 웃었다. "울보 어머니 말이야?" "울보 어머니?" "그래, 네 어머니는 울보가 되었단다. 네가 집을 떠난 후 지금까지 줄곧 네 걱정에 울고 있으니… 네가 보고싶어 한사코 따라 나서겠다고 하는 것을 간신히 말리고 왔을 정도다." "어머님……." 단우의 눈망울에 다시 눈물이 차 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감상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문득 벽라천제 백리명이 다가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 된 일이요? 천년대자문의 인물들은……?" 천마종야 단사하는 정색하고 대답했다. "그들은 사라져 버렸소이다." "사라지다니… 무슨 소리요?" 벽라천제 백리명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기실 대천마련의 인물들은 천년대자문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니……. 이것은 애초에 벽라천제 백리명과 천마종야 단사하의 밀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천년대자문의 인물이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는 천마종야 단사하는 심각한 표정을 지 었다. "기이한 일이오. 일식현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들은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했소." "……!" "그런데 일식현상이 일어나는 그 순간… 한 명도 아닌 수백 명의 인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 니……."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라 생각하시오?" 벽라천제 백리명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마종야 단사하는 힐끔 생사평을 주시하며 탄식했다. "오직 한 곳뿐이라고 생각하오." "그렇다면……?" "그렇소. 바로 그들은 생사평 즉 천년지대로 사라진 것이오." "그럴 리가… 그들이 어찌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 안으로 일시에 사라질 수가 있단 말이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진세 안으로 진입한 것 같소." "음……." 벽라천제 백리명은 침음을 토했다. 그의 표정은 왠지 어두웠다. 천마종야 단사하는 말을 이었다. "미거한 본좌의 생각으로 그들이 상상외로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소." "아……." 단우는 나직이 탄성을 발했다. 지금 그는 부친의 말을 듣고서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부종사 금일홍이 순순히 천년지대의 비도를 자신에게 넘겨준 것은 천하무림인들의 이목을 끌어 혼란을 가중시키고자 함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으나, 자신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거대한 음모를 이 천년지대 에서 결말짓기 위해 준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짐작일 뿐 더 이상의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자하고금마유사가 천마종야 단사하의 면전으로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그들이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천하무림인들을 죽음으로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 천마종야 단사하는 묵묵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그를 배반한 배신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어떤 분노의 빛도, 어떤 증오의 빛도 담겨있지가 않았다.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그는 예전의 수하를 대하듯 무심하면서도 약간은 존경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은 담담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이야 어찌됐든 이대로 물러나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오?" "그들은 이 기회를 빌어 천년지대의 모든 것을 얻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천년지대의 모든 것 을 얻는다면 그대로 무림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음……." "그러니 비록 위험은 따르는 일일지라도 천년지대로 들어가 그들의 탐욕을 저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마종야 단사하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려운 결정이 될 것이오. 죽음을 걸고 해야할 결정인 만큼 모두의 의견을 들어야 할 것이오." 그러자 단우가 힘을 주어 말했다. "결정은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 "무슨 생각을 더 이상 한단 말인가요? 상대는 천년지대의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이 날을 기다려 왔는 데… 그리고 그들의 목적이 달성된다면 무림은 그대로 끝장인데… 당연히 그들의 행동을 막아야 하는 것이에요." 당당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리고 있었다. "그들이 천년지대에 설치된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이 단우도 그만큼은 알고 있어요. 이 단우가 있고 천하 최강의 고수들이 구름처럼 있는데…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있는가 요?" 그러자 모든 사람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있었다. '장하다. 나의 아들아…….' 천마종야 단사하는 수척해진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 가슴아파 하며 한편으로 대견해 하고 있었 다. 벽라천제 백리명의 얼굴에도 감탄의 빛이 흐르고, 이제 하나의 결정은 내려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천년지대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없다. 얼마후면 일식은 끝이 날 것이고, 그리되면 들어가려 해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도 할 것 없이 그들은 진세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고 있었다. 과연 어찌될 것인가? 단우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이며, 무림의 운명은 또한 어찌될 것인가? － 천년지대. 그리고 그 거대한 무학보고는 과연 누가 얻게 될 것인가? 천년대자문의 인물들은 천년지대에 어떠한 음모를 꾸며놓고 있는 것인가? 사라진 무림 일천 년의 역사는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데……. ■ 십매어황 제2권 第一章 천 년의 음모(陰謀) 해골(骸骨)이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것은 억겁의 풍상에 시달린 듯한 해골들뿐이었다. 단우 일행은 이제 구십구 개의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 가운데 막 하나의 진세만을 통과했을 뿐이거늘, 눈앞에 펼쳐진 허연 해골을 보며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푸른 인광(燐光)을 뿌리며 널브러져 있는 해골의 더미를 보며 과연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 고 있을까? 해골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천 구의 해골이 보이는 곳곳마다 쌓여 있었던 것이다. 단지 보이는 것은 해골만이 아니었다. 녹슨 검……. 부러진 검……. 녹슨 도……. 바닥에 수직으로 꽂혀 있는 창……. 그리고 산산이 박살난 채 푸른 이끼로 덮여 있는 마차……. 아아, 이것을 보고 어찌 한 가지 상상이라도 못 하리오! 이 수많은 해골들은 어제오늘 이곳에 널브러진 것은 아니었다. 일견하기에도 그 해골들은 수백 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이렇게 누워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사라진 일천 년 무림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천년지대인 것이다. 이곳이 천년지대라면, 과연 이곳에 죽어 있는 저들은 누구이겠는가? 이 대답은 삼척동자를 붙잡고 물어 봐도 뻔한 것이었다. 저들은 일천 년 전 정사무림의 대혈전에서 죽은 희생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가장 바깥쪽의 진세에 죽어 있음은 그들의 무공이 당시 삼류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곳에서 일차 치열한 접전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이 비록 삼류고수였다고는 하나 그것은 천 년 전의 일이고, 일천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그들의 무공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당시 무림은 사상 최대의 성세기에 올라 있었다. 그런 만큼 당시의 삼류고수일지라도 현세의 무림에 내놓는다면 절대자의 위치에 설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세의 무림인들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었다. 한데 그런 엄청난 고수들이 한 명도 아닌 수천 명이나 이곳에 누워 있는 것이다. 일반 무림인이라면 이것을 보고서는 눈이 확 뒤집혀 버릴 것이다. 그리고 정신없이 해골들 사이를 누비며 혹시나 떨어져 있을 무학비급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버릴 것 이다. 하나, 지금 여기에 단우와 함께 있는 인물들은 당세의 절대자급의 인물들인 것이다. 그들은 탐욕을 억제할 정도의 수양을 나름대로 지니고 있었고, 이런 상황하에서 비급을 찾아 나설 어리 석은 인물들도 없었던 것이다. 한데 저 수많은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 부토되어 갈라지고 재가 되어 버리고 있는 해골더미 위에서 정신없이 헤매고 있는 저 인물들은……. 그 수효는 어림잡아도 수천 명에 달했다. 지금 그들은 비급을 찾아 정신없이 헤매고 있는 것일까? 아니었다. 그들의 눈빛은 몽롱했으며……. 전신을 심하게 떨고 있었으며……. 신형을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었고 안색은 백납처럼 창백하여 핏기라고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입가에는 가는 선혈마저 흐르고 있었다. 아아, 그들은 비급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진세의 소용돌이에 빠져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 이다. 그들의 눈빛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공포와 경악과 회의불신에 젖은 그들의 눈빛은 초점을 상실하고 허공을 쫓으면서 바로 한 치 앞의 사람 을 보지 못하고 서로 뒤엉키고 있었다. 혹은, 미쳐 버린 듯 히죽히죽 웃어 대며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대부분이 미쳐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전 일식현상에 의해 진세가 거대한 움직임을 보이자 천년지대 안으로 들어선 무림 인들이었다. 그들도 이렇듯 진세의 변화가 가공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미치지 않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들은 진법에 약간이라도 조예가 있는 인물뿐이었다. "어리석은 사람들……." 벽라천제 백리명은 탄식을 토했다. 그는 이어 시선을 돌려 만통선생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선생께서 나서야 할 것 같소이다. 저들을 이대로 죽어 가게 할 수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한 사람이 허리를 굽혔다. 이 땅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으며, 그가 모르는 만사(萬事)는 없다는 이 땅의 정보자인 만통선생이었다. 홍안(紅顔)에 백발(白髮)인 그는 언뜻 보기에는 특이한 점이 없었으나, 자세히 보노라면 그의 눈빛이 유 난히 고요하며 투명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눈빛에 세상만사가 담겨 있었기에 그 눈빛은 보통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진세를 헤치며 움직이고 있었다. 한편, 정확히 진세의 생로(生路)를 따라 걷고 있는 그를 보며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는 놀라고 있었다. 아니, 놀라는 인물은 그들뿐만이 아니라 대천마련의 인물들 모두가 놀라고 있는 것이다. 만통선생이 진법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하에서도 천하인을 걱정하는 벽라천제 백리명의 대인대덕한 인품을 보고서 알 만한 사 람은 감탄하고 또 감탄하니……. 이때였다. 단우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진세가 변화를 일으켰어요. 어서 만통선생을 돌아오게 해야 되요." 이건 무슨 소리인가? 진세가 변하다니……. 일반적으로 알려지기에는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는 백 년을 주기로 한 번씩 그 기세가 약화될 조화지일 에는 그 움직임과 변화가 멈추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한데, 진세가 움직이고 있다니……. "생문(生門)과 사문(死門)이 바뀌고 있어요." 단우의 외침은 떨리고 있었다. 그는 천년지대의 비도를 확실하게 머리에 담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 진세의 생문과 사문을 정확히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 기억 속의 생문과 사문이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인들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단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허헉－!" 만통선생이 다급한 신음성을 토하더니 전신을 격렬하게 떠는 것이 아닌가? "변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천마종야 단사하의 입에서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그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단우가 다시 말했다. "이것은… 인위적인 현상에서 나온 것이에요." "무슨 말이야?" 천마종야 단사하는 다급히 물었다. 그때였다. "으아아악!" 만통선생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단우는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지그시 깨문다. "누군가가 진세를 조종하고 있어요." "진세를 조종?" "그러지 않고서는 진세가 변화를 일으킬 리가 없어요. 분명히 누군가가 진세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에 요." "그럴 리가……." 중인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일천 년의 세월 동안 아무도 들어설 수가 없었던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가 아니던가? 한데 지금에 와서 그 누가 있어 이 진세를 조종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때였다. 자하고금마유사가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분명히 진세를 조종할 수가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천마종야 단사하와 벽라천제 백리명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백발을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 태상련주께서는 천년대자문의 인물들이 진세 안으로 사라진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바로 그들이 진세를 조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천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만겁 조화구구대원진세를 파훼하기 위한 투자를 했는지라…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어 이미 상당한 경지에까 지 진세를 파악했을 것이며… 그렇다면 충분히 진세를 조종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음……!" 중인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듣고 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 아닌가? 이때 벽라천제 백리명이 한 가지 의혹이 있다는 듯 물었다. "그대는 천년대자문의 제갈통사로서 상당한 지위에 올라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가?" "부끄럽습니다만 사실이옵니다." "그런데 그런 그대가 그 사실을 새삼 알았다는 듯 말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소?" "……." 이 가운데 천년대자문의 인물이 있다면 바로 그뿐이었다. 그런 즉, 중인들의 시선은 자연히 호기심을 안고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잠시 침묵하고 허공을 주시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천년대자문에 대해 얼마나 아시고 계시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입니 다." "음……." "천년대자문의 삼인자 자리에 올랐던 본인조차도 천년대자문의 실체에 대해 확실히 모르고 있는 것이 니……." "음……." 중인들은 계속하여 침음성만을 토하고 있었다. 천마종야 단사하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본다. 분명 눈앞의 단우는 자신의 아들이지만 모습은 아니었다. 이렇게 된 경위를 알고 있을 정도로 그는 천년대자문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생각 자체를 크게 수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자하고금마유사조차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그가 어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때 자하고금마유사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부종사 금일홍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인지라… 지금까지 내가 그곳에 몸을 담고 있었다고는 해도 역시 그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입 니다." "……." "사실 천년대자문은 그에 의해 움직인다고 봐도 절대 과언은 아닌 것이니… 그를 모른다는 것은… 이런 진세의 변화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음……." 중인들은 점차 천년대자문에 대해 엄청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과소 평가했던 몇몇 인물들조차 이제 와서는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특히 그들이 천년대자문의 부종사 금일홍에게 느끼는 감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미 천년지대의 비도는 만들어진 상태입니다. 기실 천년지대가 만들어진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그인지라… 충분히 이 진세를 움직일 능력도 그에게 있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음……." 천마종야 단사하와 벽라천제 백리명은 동시에 침음성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핫하하하……." 어디선가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가 싶더니 진세가 급작스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무형의 거대한 힘에 의해 어둠의 공간이 벌어졌다 좁혀지면서 보이던 눈앞의 정경은 사라져 버리더니 갑자기 천인단애가 나타나고 만경창파의 망망대해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눈앞으로 다가선다. 뿐인가? 악마의 혓바닥 같은 기이한 기류가 그들을 향해 밀려드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분명 환상(幻想)이었다. 환상이라고 생각해도 그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공포와 전율의 환상인 것이다. 단우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있었다. "조… 조심해요! 생로(生路)가 모조리 사로(死路)로 바뀌고 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저 멀리서… 아니 처음에는 아련히 들리는 듯했으나 다시 한 번 듣고 보면 바로 코앞에서 들 려 오는 듯한 낭랑한 음성이 그들을 향해 밀려드는 것이 아닌가? "그대들은 선택할 여지가 없다. 모두 이곳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자하고금마유사가 소리쳤다. "부종사 금일홍의 음성이오. 모두 조심하시오. 움직인다면 그대로 죽음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오." 다급한 음성이었다. 그러자 예의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핫하하하… 제갈통사… 그대는 너무 많은 비밀을 외부에 내놓고 말았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 그대 또한 이곳에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디선가 들려 오는 그 웃음소리 속에는 경멸과 멸시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진세는 더욱 무서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으악－!" "컥－!" 미친 상태에서 정신없이 주위를 헤매던 무림인들이 한꺼번에 피를 토하며 죽어 갔다. 미처 손을 쓰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수천 명의 무림인들은 거의 한순간에 진세의 변화에 휘말려 죽어 간 것이다. "핫하하하… 그대들은 아는가? 일천 년 전 천년지대에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를 설치한 인물이 천년대자 문의 조사(祖師)라는 사실을……." 그 말은 중인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를 펼친 인물이 천년대자문 의 조사였다니……. 단우의 작은 몸은 그 말을 듣고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나의 기억 속에는 없는 말이 아닌가?'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자하고금마유사를 응시했다. '대종사의 기억이 모두 나의 뇌리에 들어 있는데 어찌 그런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의 눈빛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자 자하고금마유사는 탄식하며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대종사께서 그런 사실을 아시기 위해선 율법상 열여덟 살이 되셔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완성되셨을 때 만 천년대자문의 비사(秘事)를 알 권리가 주어지는지라… 본인도 그것을 말씀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 다." "아……." 단우는 그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계속하여 부종사 금일홍의 음성은 여운처럼 길게 들려 오고 있었다. "일천 년이 지난 지금 본인에 의해서 이곳이 천하무림인들의 무덤이 된다면… 그것은 바로 조사의 뜻이 다. 핫하하하……." 고오오오－! 진세는 갈수록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단우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인들의 안색은 점차 질려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아들아……." 천마종야 단사하의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단우가 느닷없이 거대한 흡인력에 휘말려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흡인력은 실로 가공하여 절대의 무학을 지닌 천마종야 단사하로서도 감히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 니……. 아니, 손을 쓸 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도 곧 진세의 변화에 휘말려 정신없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 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인들은 뿔뿔이 헤어져 진세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그들이 이 시대 무림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이 행여나 죽음에 이른다면 무림은 천년대자 문의 손아귀에 그대로 굴러 떨어지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은 열대림에 둘러싸인 천년지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음습하고 비릿한 피 냄새가 담긴 그 바람 위로 피보다 더욱 비릿한 음성이 스쳐 갔다. "세상이 천년대자문을 모르고 있었던 천년대자문의 인물들 또한 본 종사를 모르고 있었으니… 알라, 천 하인이여… 본 종사는 이미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아흔아홉 개의 진세 중 사십사 개의 진세를 조화지 일이 있기 전에 파훼했었다는 사실을……." 이것은 분명히 천년대자문의 부종사 금일홍의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도 놀라운 말이 아닌가? 그가 이미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절반 가량을 통과했었다니……. 이것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이미 통과한 진세 속에서 수많은 무공을 얻었다면, 지금의 그의 성취는 실로 놀라운 것이 아니겠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그런 자신을 철저하게 숨겼다는 점이었다. 아아! 참으로 무서운 인물이었다. 하늘은 이 시대에 이르러 너무도 뛰어난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이 시대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비극(悲劇) 중의 비극이었다. ■ 십매어황 제2권 第二章 전설은 벗겨지고, 신비(神秘)는 쌓여 가고 어둡다. 보이는 모든 것은 칙칙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고, 마른 동체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모습은 천년대자문의 대종사로 변신된 단우의 모습이 아니던가? "이곳은……?" 단우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칠흑의 어둠뿐이었다. 손을 내밀어도 볼 수가 없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단우는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피부에 와 닿는 감촉은 음습함이었다. "……." 그는 손을 뻗어 바닥을 만져 보고 있었다. 물에 젖은 낙엽이 잡히고 있었다. 그리고 또 무엇인가가 잡혀 왔다. 한데 그것은 만지는 순간 한 줌의 가루로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해… 해골……?' 단우는 등에서 식은땀이 확 솟구침을 느꼈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헉!" 하지만 그는 그만 신음을 토하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전신이 저려 오고 쑤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더 이상 느낄 여유가 없었다. 엉겁결에 바닥을 짚은 손에 잡히는 것은 해골이었던 것이다. 등골에 다시 식은땀이 맺히고, 단우는 오싹한 공포를 느끼며 정신없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본능적으로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전신이 빠개지는 듯 아파 왔지만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솟는 공포와 전율로 인해 그는 정신없이 달리 고 또 달리고 있는 것이다. 숨이 턱에 와 닿는다. 더 이상 달릴 기력도 없었다. 아니, 달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해골을 피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아무리 달려도 해골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달려도 그는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것을 느낀 순간 힘이 쭉 빠지며 그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진세에 갇힌 것이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진세 속에 있음을 상기한 것이다. 그리고 이곳이 천년지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얼마 전 천마종야 단사하의 일행과 헤어졌다는 사실도 기억에 떠올렸다.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갑작스런 변화와 함께 그는 무서운 흡인력에 의해 어둠의 한편으로 떨어져 왔 고, 천마종야 단사하와 자하고금마유사 등과 헤어져야 했던 것이다. "그분들은 어찌 되었을까?" 단우는 한숨을 내리 쉬고 올려 쉰다. 결코 천마종야 단사하와 자하고금마유사가 무사하지 않으리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음성은 분명히 부종사 금일홍의 것이었어." 또다시 떠오르는 야심에 찬 미지의 음성은 틀림없이 부종사인 금일홍의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천마종야 단사하와 자하고금마유사 등이 무사하지 못하리라 나름대로 단정짓고 있었다. 단우는 갑자기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곁에는 의지할 사람이 따르고 있었는데 이제 그는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어둠의 공간 속에 덩그라니 놓여졌기에 그는 이제 홀로 지금의 이 역경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단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인데… 새삼 이런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죽음을 초연하게 생각하자 그 동안 자신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두려움이 일시에 사라짐을 느꼈다. 그는 흑의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어깨를 쭉 펴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진세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이곳이 어디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진세(陣勢)를 먼저 살펴야 하는데…….' 그의 눈빛은 투명하게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미 그는 뇌리에 기억되어 있는 천년지대의 비도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파훼도인지라 잠시의 시간이 흐른 다음 그는 이 진세가 만겁조화구 구대원진세의 아흔아홉 개의 진세 중 바깥쪽에서부터 열여덟 번째의 진세라는 사실을 알아 낼 수가 있 었다. "분명해……." 무엇이 분명하다는 것인지……? "사상(四象)과 오행(五行)이 건위(乾位)와 곤위(坤位)를 향해 일정하게 펼쳐진 것으로 보아서 이곳은 분 명 열여덟 번째의 진세야." 단우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두 발은 좌삼삼(左三三) 우사사(右四四)를 일정하게 짚으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데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하여 허연 백골은 그의 발끝에 와 닿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부러진 검이 그의 발끝에 걸렸으며,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물체가 와 닿기도 했다. 단우는 공포를 느끼기에 앞서 그 백골들의 정체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백골들의 주인들도 천 년 전 정사대혈전에서 죽은 인물들일 것이야.' 그렇다. 단우의 생각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이곳이 천년지대이고, 백골들이 이곳에 있는 이상 그들은 천 년 전의 인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바깥쪽의 진세에 있는 인물이 일천 년 전 무림의 삼류인물이었다면, 이 정도에서 죽은 이들 백골 의 주인들은 이류고수정도라고 할까? 그러나 그들을 이 시대에 내놓는다면 어찌 이류고수로 존재할 것인가? 그들은 이 시대의 절대자로 군림할 만큼의 강한 무공을 지녔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니……. 만약 현 무림인 중 누군가가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그가 누구이든 천하무림은 손에 넣은 것만큼 기뻐 날뛸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세의 무림인 중 누구도 여기에 들어온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아! 일천 년의 장장한 세월 동안 버려진 사라진 역사 속의 인물들을 대한 사람은 아마도 단우가 처음 이리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기에는 아직 어린 단우였지만, 이 백골들을 보며 그는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느끼 고 있었다. "쯧쯧… 일천 년 전의 당신들은 살아서 숨을 쉬고… 야망을 지니고도 있었을 것이고, 엄청난 무학을 지 니고도 있었을 테지만……." 단우는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당신들은 천하인들의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무학비급 정도로 취급되고 있으니… 쯧 쯧……." 단지 이 정도의 감정뿐이었다. 그들의 비급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도 없는 단우이고, 그들을 보며 허무한 감정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 었다. 한데 그때였다. 그가 채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갑자기 앞의 정경이 확 변하는 것이 아닌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저것은 무엇인가? "아아……!" 단우는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의 입은 딱 벌어져 있었으며, 두 눈은 화등잔만하게 벌어져 있었다. "이런 곳에… 성(城)이 존재하고 있다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 천년지대 안에 성이 존재하고 있다니? 천 년 전 인간들의 무덤이었던 이곳에, 당시에는 끝간 데 없는 평원이었던 이곳 생사평에, 인간의 발길 이 천 년의 세월 동안이나 철저하게 단절이 되었던 이 천년지대에 무슨 성이란 말인가? 그러나, 보라! 믿을 수 없게도 실로 거대한 성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어둠 속에 어둠보다 짙은 검은 석성(石城)……. 그것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검은 안개의 기류에 휩싸인 악마의 서식처와 같은 거대한 성은 분명 실존하는 것이었다. 스스스－! 검은 안개가 움직이자 거대한 석성 또한 움직이는 듯하다. "아니야… 저것은 실체가 아니야." 단우는 눈을 비비고 또 비빈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믿기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천년지대 안에 이런 거대한 성이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살을 꼬집어 보아도 아프고, 아무리 눈을 비벼도 역시 성은 보이고 있으니……. 저 수많은 성루(城樓)와 성루를 감싸고 끝없이 돌고 도는 십 장의 거대한 성벽(城壁)……. 분명 현실이다. 이것은 진세의 변화에 의한 환상은 아닌 것이다. "아아……." 단우는 저 악마의 성에서 무서운 사기(邪氣)가 꿈틀거리며 흘러 나오고 있음을 느끼고 전율한다. '무… 무섭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강렬한 호기심이 샘물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단우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채 성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스슥－! 무엇인가가 단우의 눈앞에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아니 어둠 그 자체가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는가 싶더 니 한 사람이 그의 면전에 소리 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헉!" 단우는 다급한 신음을 토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곳에 산 사람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그런데 산 사람이 나타난 것이니 그가 놀람은 당연했다. 단우는 나타난 사람을 입술을 깨물며 살폈다. 그는 이제 막 약관을 넘긴 듯한 청년(靑年)이었다. 검은 도포(道袍)를 걸치고 있었으며, 흑발은 발 아래까지 흘러내려 쌓일 정도로 치렁치렁했다. 한데 청년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으되 전혀 인간의 생기가 없었다. 안색은 죽은 자의 그것과 같이 회색빛이었으며, 눈빛은 공허하게 단우를 향해 있었는데, 동공 역시 회색 빛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無)……. 오직 절대무(絶對無)의 기운만을 뿌리고 있을 뿐이었다. 두 팔은 검은 도포 자락에 깊숙이 꽂고 있었으며, 움직이지 않는 듯 했으나 단우를 중심으로 천천히 돌 고 있었다. 단우의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 '왜일까… 왜 나의 가슴이 떨리고 있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이 흑포청년의 모든 것은 그가 전에 대하지 못했던 특이한 기운으로 감싸여 있었던 것이다. "다… 당신은 누구지요?" 단우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단우만을 빨아들일 듯이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핏기 없는 입술은 벌어지고 있었는데……. 인간의 음성이라고 도저히 보기가 어려운 무심한 음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단우… 너는 나를 따라가야 한다." 오오, 그가 어찌 단우를 알고 있단 말인가? 단우의 눈은 또다시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 눈에 한아름 가득 담긴 것은 의혹의 빛……. '나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그러나 상대는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사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스스스－! 거대한 흡인력이 흑포청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더니, 단우의 몸이 정신없이 흑포청년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아… 이 흡인력은……?" 그렇다. 언젠가 대한 적이 있는 흡인력이었다. 도저히 인간이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이 흡인력은 그가 얼마 전 천마종야 단사하와 자하고금마유 사 등과 함께 있을 때 어둠의 일편에서 뿜어져 나왔던 바로 그 흡인력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흑포청년이 그때 당시 이 흡인력을 발출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단우가 막 흑포청년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그 순간이었다. "놓아라!" 냉혹한 일갈이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더니 한 줄기 혈광(血光)이 피어올라 그대로 흑포청년을 향해 폭 사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슈욱－! 순간, 흑포청년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흐흐흐… 그대는 제갈통사라 불리는 인물이로군." 입으로는 말하면서, 도대체가 인간의 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희며 섬세한 그의 손은 빠 른 속도로 혈광을 움켜 잡아갔다. 혈광은 하나의 검이었다. 그런데 그 핏빛의 검은 흑포청년의 손에 잡히자 그대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슉－! 또 하나의 검이 흑포청년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놀랍게도 녹아 내린 핏빛 검 속에는 투명한 또 하나의 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고, 그 투명한 검은 무 서운 속도로 흑포청년의 가슴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헉!" 흑포청년의 무심한 얼굴에 한 줄기 경악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은 그가 보인 최초의 감정표현이었다. 그만큼 그도 이 돌발적인 공격에 놀라고 있는 것이다. 피하고 자시고 할 여유란 눈곱만큼도 없었다. 푹－! 시리도록 투명한 검은 그의 가슴으로 그대로 파고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탕－! 파고들던 검이 반으로 부러지면서 그대로 퉁겨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허억… 금강불괴(金剛不壞)!" 누구의 입에선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 그따위 장난으로 본인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흑포청년은 양 팔을 허공으로 쭉 뻗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어느 새 두 개의 환(環)이 쥐어져 있었고, 그 회색빛을 뿌리고 있는 쌍환은 그대로 어둠의 한 곳으로 뻗어나갔다. 츠츠츠－! 좌우로 갈라져 마치 눈이 달리기라도 한 듯 유유히 부유하고 있는 쌍환은 소름끼치는 사기를 줄기줄기 뿜어 내고 있었는데, 그 회색빛 광채에 한 사람의 얼굴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중년인이었다. 핏빛 유삼을 일신에 걸치고 있었으며 눈빛도 핏빛이었다. 그는 머리에 핏빛 와룡관을 쓰고 있었고, 여인처럼 아름다운 그의 등 뒤에는 하나의 고금(古琴)이 매어 져 있었다. 아아, 놀랍게도 그는 자하고금마유사가 아닌가? 단우는 놀라고 있었다. "제… 제갈통사가……?" 믿을 수 없게도 백발노인으로 변했던 자하고금마유사가 자신의 본래 면목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었으 니……. 그리고 그는 과거 무공이 전폐된 상태였거늘 지금 이 순간 그는 가공할 무공을 연이어 펼치고 있지 않 은가? 단우는 정신이 없었다. 연이어 나타나는 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때, 자하고금마유사의 얼굴에도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구천신마륜(九天神魔輪)… 일천 년 전에 사라진 마물(魔物)을 어찌……." － 구천신마륜(九天神魔輪). 일백 년의 세월 동안 일천 명의 인간의 혼을 불어넣어 만들었다는 죽음의 병기. 이 구천신마륜은 일천 년 전 구천신마(九天神魔)라는 희대의 마인이 천년지대로 들어감으로 해서 사라 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일천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나타난 것이다. 자하고금마유사는 황급히 자하고금(紫霞古琴)을 등에서 풀어 손에 들었다. 딩－! 그는 전신의 공력을 손끝에 집약시켜 그의 독문무공인 일음파천세(一音破天勢)를 전개했다. 단지 음(音)으로서 상대를 격살시킬 수 있는 희대의 음파신공(音波神功)! 하지만 그것은 구천신마륜을 일 장 뒤로 퉁겨 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구천신마륜은 더욱 무서운 기세로 퉁겨져 자하고금마유사의 전신 사혈을 노리고 짓쳐드는 것이었으 니……. 자하고금마유사로서는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지금 나의 잠력(潛力)은 일시에 폭발된 상태이며… 과거의 무공에 비해 십 배 이상 강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저 자를 상대할 수가 없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의 잠력이 모두 폭발하고, 전의 무공에 비해 십 배 강해졌다니……. 그렇다면 현재 그의 무공은 천하무적의 경지로 올라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가 이렇듯 절망을 하고 있으니……. 흑포청년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토록 가공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이때, 흑포청년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핫하하… 현세의 어떤 무공으로도 본인의 무공을 상대할 수는 없다." 이것은 결코 호언장담은 아니었다. 진정 그의 장담대로 이 땅에 존재하는 무공 중에는 그를 상대할 만한 무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만큼 가공할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아아앗－! 구천신마륜은 날카롭게 자하고금마유사의 가슴을 스치며 날아갔다. 푸아아앗－! 한 줄기 피 분수가 자하고금마유사의 가슴에 솟아올랐다. 자하고금마유사의 안색은 창백해지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는 다급히 단우를 향해 소리쳤다. "대종사… 어서 피하십시오." "제… 제갈통사……." 단우는 발을 동동 구르며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대… 대종사… 어서! 어서…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 깊숙이 들어가시길… 그리고 그 진세를 모조리 파 괴하셔야 합니다." "아아……." "대… 대종사… 어서… 헉!" 자하고금마유사의 한 팔이 잘라져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푸아앗－! 그리고 다시 한 팔이 잘라져 피보라와 함께 솟아올랐다. 실로 비참한 정경이었다. 일세의 기인으로서, 사마의 최고 두뇌자로서 명성을 날리던 그가 이토록 허무하게 당하고 있는 것이다. 단우는 눈을 질끈 감고 자하고금마유사의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 바람처럼 한 줄기 인영이 나타나 자하고금마유사를 옆에 끼고, 다시 단우를 옆에 끼고 어둠을 향해 비 쾌하게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순간. "대자율법사(大者律法師)… 그대가 감히 대종사를 배반하다니!" 흑포청년은 사라지는 인영을 보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음성보다도 빨리 그의 신형은 사라지는 인영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빨리 구천신마륜이 사라지는 인영이 등판을 가격하고 있었다. 팡－! "크윽!" 사라지는 인영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지고, 어둠 속에서 비릿한 선혈이 현란하게 피어 올랐다. 그러나 어둠 속의 인영은 오히려 자신의 등을 가격한 구천신마륜의 힘을 이용하여 그대로 빨리듯이 어 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죽일 놈!" 흑포청년은 이빨을 갈았다. "네놈이 지금 변화하는 진세를 이용하여 나의 이목을 피하고 있지만… 대종사를 배신한 이상… 이 땅에 서 살아 숨쉴 수는 없는 것이다." 음성은 여운처럼 길게 허공에 날리며 그의 신형은 검은 석성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석성으로부터는 찬란한 오색불꽃이 허공을 향해 쏘아졌다. 펑－! 번쩍－ 번쩍－ 번쩍－! 천년지대의 한가운데에서,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일부에서 지금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검은 석성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찌 이 천년지대 안에 존재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흑포청년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가 무슨 이유로 단우를 이곳에 끌어들인 것인가? 신비, 신비……. 모든 것은 신비일 뿐이었다. ■ 십매어황 제2권 第三章 제오(第五)의 세력, 흑마련(黑魔聯) 단우는 자신과 자하고금마유사를 안고 있는 인물이 바로 천년대자문의 대자율법사임을 알 수가 있었다. 대자율법사는 천년대자문의 모든 율법을 관장하는 독특한 지위의 인물이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며, 설령 대종사라 해도 함부로 그를 부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구한 것이니……. 하지만 그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의 등판은 완전히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구천신마륜에 의해 가슴까지 관통한 상태에 이르러 있는 것 이다. 문득 그는 휘청 앞으로 기울어졌다. 쿵－! 결국 그는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로 인해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단우는 황급히 자하고금마유사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제갈통사… 정신 차리세요." "으음……." 자하고금마유사는 눈을 떴다. 그러나 그 눈에는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만이 가득 드리워진 것은 그가 죽음에 임박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대… 대종사… 살아계셨군요." 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이제 나는 대종사가 아니에요. 나는 단지 단우일 뿐이에요." "하지만……." "내가 잠시 대종사가 되었던 것은 우리의 약속일 뿐이지… 이제 와서는 대종사로서의 의미가 없어졌어 요." "음……!"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단우를 천년대자문의 대종사로 변신케 한 것은 천년대자문의 위기를 구하고 나아가서는 무림의 위 기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부종사 금일홍의 힘이 너무 거대하여 이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단우가 대종사로 변신한 것을 부종사 금일홍도 알고 있는 듯하고, 그러므로 자신 의 본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은 여전히… 대종사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은 천년대자문의 위기를 구할 사람이 대 종사 한 사람뿐이기에……." 단우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내게는 힘이 없어요. 더군다나… 나는 얼마 살지 못할 것인데……." 단우는 시무룩해진다. 무엇인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으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것이다. 문득 그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제갈통사… 당신은 어떻게 무공을 회복했고 어떻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지요?" "와악!" 자하고금마유사는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다. 이미 양 팔이 잘려져 나간 그는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는 길게 탄식을 토했다. "이 몸이 이렇게 잠시나마 본래의 면목을 찾을 수 있고 무공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몸에 게 만령이체천교대법(萬靈移體薦敎大法)을 전개했기 때문입니다." "마… 만령이체천교대법을……?" 단우는 경악했다. 그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만령이체천교대법이란 과거 자하고금마유사가 대종사와 자신에게 펼친 비학이 아니던가? 이 대법을 펼치게 되면 일시에 잠력이 극으로 폭발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일시적인 현상일 뿐 곧 죽어 가게 되는 것이다. 이 대법을 자하고금마유사가 자신의 몸에 직접 펼쳤다면 이제 머지 않아 그도 죽어 가게 될 것이다. "어… 어리석게도… 어찌… 그 대법을……?" 단우의 음성은 떨려 나오고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대종사를 구하기 위해서이지요. 어차피 폐물로 죽어 가야 할 몸이라면… 잠시나마 대종사를 돕고 싶었 던 것입니다." "아아……." "덕분에 이 몸의 무공은 열 배 이상 강해질 수가 있었던 것이며 본래의 진면목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 "그런데… 그 흑포청년의 무공은 오히려 이 몸을 능가하는 것이었으니… 직접 겨뤄 보지 않았다면 도저 히… 믿을 수 없는 일……." 그의 눈에는 공포와 불신과 회의의 빛이 진하게 감돌고 있었다. 단우 역시 흑포청년을 상기하며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체 어찌된 일이지요?" "……!" "그 검은 석성은 무엇이며 그 무서운 무공을 지닌 흑포인은 누구인 것이지요?" "그것은 이 몸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자하고금마유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는 검은 석성을 보고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짐작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검은 석성이 근래에 세워진 것이며, 바로 부종사 금일홍과 관련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때였다. "으음……!" 신음 소리가 한쪽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자신들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자신을 구해 준 대자율법사가 간신히 몸을 바로 세우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역시 죽음의 그림자가 자욱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잠시 공허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파리한 입술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검은 석성은… 흑마련(黑魔聯)이라 하며… 금일홍에 의해 세워진 것이오." "아아……." 자하고금마유사와 단우는 동시에 탄성을 발했다. 역시 자하고금마유사의 짐작대로 검은 석성은 금일홍과 관련이 있었다. "시… 시간이 없어… 가… 간단하게 이 거대한 음모를 말씀드리겠소." 대자율법사의 얼굴에는 초조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자 않았음을 알고 자신이 알고 있는 흑마련의 비밀을 최대한으로 단우에게 알 려주려 하는 것이다. "헉! 헉헉… 사… 사연이… 많은 것이오… 흑마련이 탄생되고… 내가 이렇게 죽어 가야 할 수밖에 없는 것에는… 헉헉……." 다시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는 대자율법사가 단우의 손을 굳게 움켜쥐었다. 그의 표정은 단우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간절한 것이었다. "대종사… 내가 대종사라 부르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 "대천마련의 소련주가 천년대자문의 대종사가 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이었다고 생각했기에… 대종사라 부르는 것이고… 대종사를 위해 기꺼이 이 한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을 내렸는지도 모르오." "……!" 단우는 말없이 흑백이 선명한 눈동자를 들어 대자율법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대자율법사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십 년 전에 부종사 금일홍은 이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비밀을 알아 내었던 것이며… 지금에 와 서는… 구십구 개의 전세 중 사십사 개의 진세를 완전히 파훼한 실정이오." "아아……." 자하고금마유사와 단우는 입을 딱 벌렸다. "철저한 비밀 아래 그 일은 지켜졌으며… 그때부터 부종사 금일홍은 흑마련을 바로 이 천년지대 내에 건축하기 시작했던 것이오." 너무도 무서운 일이다.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는 모두 아흔아홉 개의 진세로 이루어졌다. 그 진세마다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갇혀 죽어 있었던 것이며, 그 일천 년의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천년 지대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알려지지 않았던가? 한데 부종사 금일홍이 십 년 전에 천년지대 안으로 들어갔다니……. 이것을 뉘라서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는 천년대자문에 드러난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오. 사실 그가 사십사 개의 진세를 단신으로 파훼 한 것만 봐도 그의 뛰어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니……." "……!" "그는 천년지대 안에 흑마련이라는 새로운 집단을 완성했으며… 천년대자문의 모든 힘을 거의 대부분 흑마련의 아래에 귀속시켜 왔던 것이오." "……!" "이제 흑마련이 지닌 힘은 무림 사상 가장 강한 것이며… 과거 천년대자문의 힘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 실정이오." "아아……." 점입가경이었다. 대자율법사의 말은 점차 그 도를 더해 가며 자하고금마유사와 단우를 경악시키고 있었다. "헉헉… 그는 이미 사십사 개의 진세 안에서 수많은 비급을 획득했으며… 사십사 인의 기재들을 거두어 들여 그 비급을 연성케 했소……." "아……." "사십사 인의 기재들… 그들은 이제 무적의 고수로 성장했소.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 해 보시오. 사십사 개의 진세에는 각기 수천 권의 비급들이 산재해 있었던 것이니… 그것을 나누어 익 힌 그들이 어찌 무적의 고수로 변신되지 않을 수가 있겠소?" "……!" "얼마전 제갈통사와 겨루었던 인물은 흑무상(黑武上)이라 하며… 그는 사십사 인의 기재 중 서열의 가 장 낮은 인물에 불과하며… 사십사 개의 진세 중 가장 바깥쪽의 진세에 있는 무공비급을 연성한 인물이 오." "아……."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서운 일이다. 흑무상이란 청년이 사십사 인의 기재들 중에서도 최하위의 인물이었다니……. 그는 전보다 열 배 이상 강해진 자하고금마유사로서도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었던 무서운 고수가 아니 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흑무상이라는 인물이 얻은 비급이 사십사 개의 진세 중 가장 바깥쪽의 진세에 속한 것일지라도, 그 무공비급이 당시 삼류인물의 무공일지라도 그것은 당시에 그렇다는 것뿐이지 그들을 지금의 무림에 내놓는다면 능히 초절정 고수의 대열에 들 수가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들의 무공비급을 한 권이 아닌 수천 권을 얻었고, 그것을 일신에 지녔다면 도저히 자하고금마유사가 상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강한 고수가 무려 사십삼 인이나 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사십사 인의 기재를 통칭하여 흑마사십사령(黑魔四十四靈)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들 개개인의 무공 차이는 엄청난 것이오." "음……." "그런 만큼 그들 중 서열 일위인 인물의 무공은……." 대자율법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는 듯했다. "쿨룩쿨룩……!" 그러다가 그는 잠시 격하게 기침을 토했다. 내장 부스러기가 기침을 토할 때마다 피와 더불어 토해져 나온다. "헉헉… 부종사 금일홍… 그 자는 더욱 무서운 인물이오… 아마도 그 자의 무공 경지는 일천 년 당시의 무림에 내어놓아도… 십대고수 안에 들어갈 것이오……." "아아……."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는 입을 딱 벌렸다. 일천 년 전의 무림, 당시의 십대고수라면 엄청난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그가 무림 사상 가장 강한 십대고수 안에 포함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이니……. 이제 누가 있어 그의 야심을 막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그는… 천년대자문의 인물이 아니오… 그가 천년대자문의 인물이 된 것은… 천년대자문의 힘을 빌어 천년지대의 비밀을 풀기 위함이었지… 철저히 혈족(血族)으로 이어진 천년대자문의 인물은 아닌 것이오……." "아아……." "그의 진실한 신분은 오직 그만이 아는 것… 본인은 그 자의 진실한 신분을 캐내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쏟아 보았으나… 결국 알아 낸 것은 아무 것도 없소……." "……." "한 가지 짐작이 가는 점은… 그가 천년대자문에 대해 원한을 지니고 있는 인물일 수도 있다는 것 뿐……." "원한을……?" 단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천년대자문이 철저한 비밀로 가려져 있었기에 부종사 금일홍이 천년대자문에 원한을 사고 있다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사 천년대자문의 인물에게 죽음을 당한 인물일지라도 천년대자문을 확실히 모르기에 원한을 살 수가 없는 실정이거늘……. 대자율법사의 말은 힘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무서운 점은 천하의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이오." "……." "그는 천마종야 단사하와 벽라천제 백리명이 천년대자문에 대해 비밀리에 조사를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 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으며……." "……." "그들 두 사람이 일천 년 전의 최고 고수인 칠대초인(七大超人) 중 두 명의 후인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 으며……." "아아……." "그는 애초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묵인했던 이유는… 그들을 이용하여 천하무림인들을 이곳에 끌어들이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며… 천하인을 몰살시키려는 무서운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 오." "아아……." "그의 계획은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완벽하게 진행되었고… 결국은 성공이 되었소……." "무서운 사람……." 단우는 치를 떨었다. 그는 대자율법사의 말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부친과 벽라천제 백리명이 오천 년의 최강고수였다는 칠대초인의 후인이라는 점이었다. 문득 대자율법사는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하늘을 헤아릴 수는 없는 것이니… 그는 한 가지 하늘이 내 린 계산을 셈하지 못한 것이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는 동시에 물었다. 하늘이 내린 계산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대자율법사는 단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대답이 단우에게 있다는 듯……. "하늘은 이 땅에 금일홍이라는 뛰어난 사람만을 내린 것은 아니었소. 또 한 사람을 하늘은 계산하여 내 린 것이니……." "……." "물론 이런 생각은 노부의 일방적인 생각일지 모르나… 단우… 어린 대종사 당신이 하늘이 내린 또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이 단우가……?" 단우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자하고금마유사가 대자율법사의 말에 동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러 거의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한다. 육체적인 힘을 말함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을 말함이다. 두 사람은 거의 죽음에 이르러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단우가 하늘이 내린 인물임을 뒤미처 깨달은 것일까? 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의 눈빛은 암담했다. "하늘이 이 단우를 내렸다면… 어찌 나에게 남보다 부족한 생을 주었겠어요." "……." 자하고금마유사와 대자율법사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단우가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는 생각은 단지 그들의 느낌뿐이었기에 단우의 말에 어떤 해답도 대답해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득 단우는 물었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든… 당신은 어째서 금일홍이라는 인물이 한 가지 하늘이 내린 계산을 셈하지 못했다고 한 것이지요?" "……." 대자율법사는 거친 호흡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이제 그는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고, 그의 시선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허공으로 향해 있었다. "분명한 것은… 금일홍도 대종사께서 얼마 살지 못하리라 확신하고 있는 것이오." "……!" "그런 확신은 그에게 자만을 가져오게 했고… 결국은 대종사에게 천년지대의 비도를 준 모험을 행하게 한 것이오." "아……." "그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 대종사께 그 비도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요. 그 비도는 이 땅에서 오 직 한 장뿐인 것이니……." "……." "그가 대종사께 그 비도를 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대종사께 그 비도를 줌으로 천하인을 유혹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비도를 다시 그의 수중에 넣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기 때문인 것인데……." "……." "이런 그의 생각은 대종사를 과소 평가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을 멈춘 그는 단우를 그윽이 바라본다. "노부의 짐작이 맞는다면… 대종사께서는 그 비도를 없애 버렸을 것이며… 그 비도의 내용을 모조리 머 리에 담고 있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자율법사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바로 그 점입니다. 그 점은 금일홍조차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며… 또한 노부가 나서리라는 것도 미 처 생각지 못한 것이니… 그는 대종사를 흑마련에 잡아들임으로써 모든 일이 마무리 지어질 것이라 생 각했으나… 결국은 그것은 그만의 확신이었으며 나태였지요." "아……." "이제 그는 급해졌을 것입니다." 점차 대자율법사의 음성은 흐려지고 있었다. "대종사… 이제 대종사만이 무림을 구할 수 있는 것이오. 금일홍이 파훼한 사십 사개의 진세를 모조리 파괴하셔야 하오이다." 지금 그는 과거 자하고금마유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파괴하라는 말은… 파훼하라는 뜻이 아니오이다." "……!" "본래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는 아흔아홉 개의 진세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움직임으로 강해질 수가 있었 지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단점이 곁들여 있는 것입니다." "……!" "백 년을 주기로 한 번씩 그 기세가 약화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옵니다." "음……." 확실히 그렇다. 일천 년 동안 인간의 발길을 금지시켰던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에도 취약점은 있었던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그 진세의 움직임을 멈추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 "그 진세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다면… 수천 년의 역사가 뒤바뀐다 해도 인간은 결코 천년지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될 것이오이다." "아……." 단우는 탄성을 발하고 있었고, 자하고금마유사는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하고금마유사의 눈빛은 흐렸다. 입가에서는 쉴새없이 선혈이 흐르고 있었으며, 숨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반은 죽어 있었던 것이다. 단우가 대자율법사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자율법사의 말은 떠듬떠듬 이어지고 있었다. "대종사… 어린 대종사이시여… 당신은… 진세의 생문과 사문의 위치를 모조리 뒤바꿔야 하며…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진세는 모조리 파괴가 되는 것이옵니다." "알겠어요."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고개를 끄덕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 기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대자율법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대… 대종사를 믿습니다… 제갈통사 역시 그것을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자하고금마유사는 숨을 거두었다. 대자율법사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단우는 대자율법사의 말을 듣고 문득 불길한 느낌에 황급히 자하고금마유사를 돌아본다. "헉……!" 단우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자하고금마유사에게 달려갔다. 황망히 자하고금마유사를 안아들었으나 이미 자하고금마유사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단우에게 향해 있었으며,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마저 띠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마지막 순간에도 대자율법사의 말처럼 단우를 믿어 의심치 않기에 편안히 죽을 수 있었다는 무 언의 표현이 되는 것인데……. "제… 갈… 통… 사……." 단우의 눈에는 창망한 슬픔이 아프게 맺히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정이 들었던 사람이다. 한데 그가 이제 죽음을 맞은 것이다. 단우는 조용히 눈물을 씹으며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기라도 한 듯……. 그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하고금마유사의 얼굴만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그의 귓전으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곧 엄청난 장소(長嘯)로 변하고 있었다. "우우우－ 우우우－!" 천지가 이 장소에 그대로 허물어져 내리기라도 하듯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죽어 가던 대자율법사가 안간힘을 다해서 다급하게 말했다. "대… 대종사…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지금 이곳은… 금일홍이 파훼한 마흔네 개의 진세 중 서른세 번째의 진세… 어서 이곳을 피하셔야 하는 것이며… 그가 아직 파훼하지 못한 진세로 들어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 단우는 눈물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장소를 터뜨리는 인물들이 바로 흑마련의 인물임을 알 수가 있었다. "어서 대종사… 금일홍도 천년지대의 비도에 대해 어느 정도는 머리에 담고 있을 것인즉… 대종사께서 는 될 수 있으면 빨리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를 파괴해야 하는 것이오… 대종사……." 간절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간절하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단우는 그 간절함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는 대자율법사의 고개가 빠르게 꺾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우우우－ 우우우우－!" 장소는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단우는 공손히 두 사람에게 삼 배를 올렸다. "두 분의 유체를 모시지 못하고 떠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훗날 이 단우가 이곳에 오게 되면… 당신들을 편히 모실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한 방울의 투명한 눈물이 단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싶은 순간, 단우의 신형은 어둠의 일편으로 사 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일단의 무리가 두 사람의 시신이 있는 곳에 나타났다. 조금 전에 사라졌던 흑포청년, 흑무상을 비롯한 흑마사십사령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찾고자 한 단우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한데 그들 중 한 사람은 퍽 눈에 익은 얼굴이 아닌가? 일신에 백의를 고아하게 두른 삼십대 중반의 그의 눈빛은 그야말로 잔잔한 호수와도 같았다. 그렇다. 그는 바로 천년대자문의 환우대선생(環宇大先生)이었다. 천년대자문에서는 환우법공(環宇法公)이라 불렸던, 한때 자하고금마유사와 함께 이 시대 최고의 지혜자 라던 그가 흑마련의 가공할 고수들과 함께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한데 금일홍이 거둔 흑마사십사령(黑魔四十四靈) 중의 하나인 흑무상(黑武上)이라는 인물이 환우대선생 의 앞에서 죄인처럼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를 짐작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환우대선생도 흑마사십사령 중 일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며, 지금 그는 흑무상에게 단우 등을 놓 친 것에 대해 엄한 문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당신은 태상련주(太上聯主)를 나서게 하는 오류를 범하게 하고 만 것이오." "……." 환우대선생의 심각한 말에 흑무상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일은 우리의 선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거늘… 끝내 태상련주께 알려야 한다는 사실은 흑마사십사 령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 그대는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흑무상은 고개를 푹 떨군 채 말이 없었고, 환우대선생은 말없이 단우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음성이 어둠 속으로 여운처럼 퍼져 나갔다. "죽을 운명이기에 죽이지 않았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다… 하나 이런 실수는 다시없을 것이다." ■ 십매어황 제2권 第四章 이 땅에서 가장 거대한 인물(人物) 1 "이곳이 바로 마흔다섯 번째의 진세다." 단우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물자국이 자욱한 얼굴에는 이제 희미한 안도의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마흔다섯 번째의 진세로서, 듣기로는 이곳만큼은 금일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곳이라 했다. 단우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이 정신없이 달려온 곳을 바라본다. 모두를 잃었다. 아버지도……. 자하고금마유사도……. 그리고 대자율법사도 잃었다. 이제 자신만이 이 진세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외로움이 물밀듯이 가슴으로 치밀어 들어왔지만 그것을 오래 느낄 만한 여유는 없었다. '대자율법사의 말대로 이곳을 파괴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이곳을 금일홍이 들어올지 모른다. 그의 능력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기에……. 단우는 그에게 거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휘이이잉－! 한 줄기 음산한 야풍이 단우의 몸을 휘감고 스쳐 지나갔다. 단우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사방을 다시 살폈다. 보이는 것은 어둠이다. 아마도 지금쯤 일식현상은 끝이 났겠지만 때가 밤인지라 사위는 칠흑의 어둠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달빛이 희미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단우는 볼 수가 있었다. 흘러내린 달빛에 드러난 끝간 데 없이 펼쳐진 대평원(大平原)이었다. 은빛 달빛이 춤을 추고 있는 이곳은 어찌 보면 망망대해와도 같았다. 그 가운데 홀로 선 단우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는지 다만 난감할 뿐이었다. '어떻게 이 진세를 파괴해야 하는 것인지……?' 대자율법사의 말대로라면, 이 진세의 생문과 사문을 바꿈으로서 영원히 이 진세는 그 움직임이 멈추는 것이며, 그리되면 천하의 어떤 진법의 대가라 해도 이곳을 파훼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생문과 사문을 바꿔야 하는 것인가? 단우의 머리 속에는 생문과 사문이 기록된 도면이 그대로 기억이 되었지만, 그것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 서는 전혀 문외한이 아니던가? "이런 낭패가……." 단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정말 낭패인 것이다. 마음은 조급하고 자신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은 모르고……. 그냥 단우는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달빛을 처량하게 몸으로 받으며 진세 안으로 무작정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바닥에는 즐비하게 백골이 널브러져 있었다. 천 년 전에 사라진 무림의 정사고수들이리라. 아흔아홉 개의 진세 가운데 이 정도의 위치에서 죽어 있다면 그들의 무위는 상당한 것이다. 이들이 지닌 무학비급을 단 한 권만이라도 얻는다면 그야말로 천하 위에 군림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런 것은 단우에게 있어서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에게는 이런 무학비급 따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이 진세를 파괴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을 지금 모르고 있기에 단우는 세상의 고민은 혼자서 지고 있는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단우의 눈 속에서 돌연 이채가 떠올랐다. "혹시……?"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거리는 대략 삼백여 장에 달했다. 그 거리에서 그는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일정하게 검이 바닥에 꽂혀 있었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단우는 정신없이 자신이 걸어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얼마 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무언가를 좀 더 확실하게 알아 낸 듯 그의 표정은 더욱 밝아져 있었다. "확실해. 이 진세는 검에 의해 펼쳐진 것이야." 단우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그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 진세는 검에 의해 분명히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이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백골이 되어 있었다. 한데 그들 백골 중에는 상당수가 검을 앞에 꽂은 채로 뒹굴고 있었는데……. 그것은 백골의 임자가 생전시 죽어 가면서 바닥에 검을 꽂고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 명도 아닌 수백, 아니 그 이상이 한꺼번에 그렇게 했다는 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단우는 처음 그것을 이상하게 보지는 않았으나, 계속하여 그것을 보는 동안 그런 모습이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놀랍게도 이 진세의 생문과 사문은 거의가 꽂혀 있는 검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단우는 하나의 확신을 나름대로 할 수가 있었다. '그래… 백골의 임자들은 천 년 전에 죽어 가면서 이 진세를 누구의 지시대로 펼쳤던 것이야.' 단우는 경이의 시선으로 그 백골들을 주시했다. 그가 경이롭게 이 일을 보는 것은, 무엇이 저들 백골의 임자로 하여금 죽어 가면서까지 이 진세를 펼치 게 했냐는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이 경이로운 의혹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니 곧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단우는 자하고금마유사로부터 과거 천년지대에 관해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일만 인의 정사고수들과 십만 인의 사마도의 고수들과의 혈전. 그것은 실로 치열한 것으로서, 당시 상황은 정파무림에게 절대 불리했던 것이다. 사마도의 무림인들은 맹추격을 시작했고……. 살기 위해 정파의 십만 고수들은 이곳으로 결국 피해 왔던 것이나……. 아흔아홉 개의 진세를 펼쳐야 했고, 그것으로 최후의 희망을 걸었으나 결국은 모두가 죽음을 맞아야 했 던 것이다. 당시 승부에서 절대 유리한 위치에 점해 있던 사마도의 무림인들의 죽음은 진실로 억울한 것이었다. 그들은 당시 승부를 자신했다. 수적으로 유리한 것은 물론이고, 당시 사마도의 무림은 무림 사상 최고의 성세기에 올라 있었기에 그런 확신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들은 몰랐으리라!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가 인간이 만들었으나 결국은 하늘의 조화에 의해 그 변화가 다시 시작되어 인간 이 만든 진세의 위력에 백 배의 위력이 더해졌음을……. 그리하여 그들은 나름대로 진세의 파훼법을 파악하여 안으로 안으로 추적을 계속 했는데, 결국은 그들 도 하늘의 조화에 의해 죽음을 맞아야 했던 것이다. 정파무림은 힘이 약해 죽음을 맞아야 했던 것이나, 진실로 그들 사마도의 인물은 억울하게 죽어 가야 했던 것이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당시 정도무림인들은 절대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이런 식으로 그들은 죽어 가 면서 그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것이야." 단우는 다소 연민의 눈빛으로 죽어 가는 정파무림인들의 백골들을 주시했다. 이미 죽어진 지 천 년의 성상이 지났다. 그럼에도 지금 단우에게 그들이 연민한 존경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그들이 단 한 모금의 의(義)를 지키기 위해 장렬히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리라. "……!" 단우는 계속하여 걸음을 옮겼다. 진세를 더욱 자세히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내린 결론은 자신의 짐작대로 검에 의해 이 진세가 펼쳐졌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은 간단한 것이야." 단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려운 문제가 풀렸다는 안도감과 혼자의 힘으로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야릇한 희열을 느끼며 미소를 짓는 것이다. "검이 생문과 사문을 이루고 있으니… 검이 이룬 생문과 사문의 위치를 바꾸면 되는 것이야." 말은 간단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검이 한 개가 아니라 수백 개였으며 그것을 어린 단우가 바꾸기란 상당히 힘에 겨운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우가 지나온 험한 여정에 비하면 이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대략 한 시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단우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매듭지었다. 그는 피로하고 지친 기색이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하게 배어 있었으며 신형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서… 성공이다."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안색 역시 지극히 창백하여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윽……." 심력의 소모가 극심했던 탓이리라. 단우는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고 말았다. 황급히 입을 막았으나 막은 손가락 사이로 선혈은 쉴새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피로하면 피로할수록 단우의 생은 그만큼 단축되는 것이다. 고뇌하면 고뇌할수록 단우의 생은 단축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타고난 운명……. 단우는 희미하게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편안하게 인생의 여정을 걸었을 때의 최대의 생을 십팔 년이라고 본다면, 이런 식으로 고뇌의 연 속으로 점철된 여정을 걸었을 때는 최대의 생은 십삼 세를 넘기기가 힘든 것이다. 간뇌를 타고난 하늘이 버린 비운아……. 그의 생은 지금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 단우는 입가의 피를 훔치며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죽어 가기 전에 이 진세를 모두 파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마지 막 보람일 것이야." 이 말을 천하의 어느 누가 어린아이의 말이라 하겠는가? 죽음을 초연한 듯한 이 말에는 살신성인의 숭고한 뜻이 진하게 담겨 있었으니……. 단우는 어둠 속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흔 여섯 번째의 진세를 향해……. 2 이곳은 일흔 번째의 진세였다. 아흔아홉 개의 진세 가운데 단우는 이제 일흔 번째의 진세로 이른 것이다. 그의 흑의는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손은 갈라지고 부르터져 있었다. 안색은 회색빛이었으며 눈빛은 흐렸다. 걸음걸이는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었으며, 일견하기로는 단 한 걸음을 더 걷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단우는 지나온 진세를 모두 파괴했다. 모두 비슷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진세가 검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며, 단우는 그 진세를 바꾸는 것을 어렵지 않게 할 수가 있 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단우이고 보면, 그리고 죽어 가는 단우이고 보면, 그 일은 만산을 넘고 수많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스스－! 안개가 출렁이고 있었다. 단우는 안개를 헤치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눈빛이 흐린 만큼 방향 감각도 흐려졌는지……. 동(東)으로 가는가 하면 서(西)로 가고, 서로 가는가 하면 남으로 가고 있었다. 단우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단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허기였다. 배가 고픈 것이다. 지난 열흘 동안 그가 먹은 음식이라곤 고작 풀뿌리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단우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열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을 자지도 못했으니 이 지경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아니,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이라고 봐야 할 일이었다. "가야 하는데……." 단우는 어기적거리듯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라……. 너는 가야 한다……. 출렁이는 안개 속에서 들려 오는 그 여운과 같은 음성은……. 아버지의 안타까운 독촉과 자하고금마유사의 한 맺힌 음성이었다. 이런 현상은 그의 정신이 정상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오히려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데 단우가 막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였다. "어……?" 단우는 경악의 눈빛을 전면에 던졌다. '산 사람……?' 단우는 자기가 헛것을 본 것이라 생각했다. 산 사람이라니……. 이 진세 속에 산 사람이라니……. 그것이 어디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일천 년의 세월 동안 인간의 발길을 철저하게 거부한 이곳에 산 사람이 존재할 리는 만무한 것이었다. 하지만 단우는 무엇인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음을 또한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보이는 것은 산 사람의 모습이었다. 전면 백여 장 거리에 가부좌의 자세로 있는 인물은 틀림없이 지금까지 단우가 보아온 백골이 아니었다. 그는 눈처럼 흰 유삼을 걸치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문사건마저 두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신비의 인물은 그를 향해 빙그레 웃고 있었다. 단우는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꿈이야… 이것은 꿈이야." 단우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살을 힘있게 꼬집어 본다. 아프다. 그렇다면 분명히 이것은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단우는 이것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산 사람의 모습이 진정 환상이 아니라 실체인 것인지……. 그래서 단우는 비틀거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발끝으로는 백골이 차이고 다른 금속성의 병기가 차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차라리 다가가지 않음만 못했으니……. "아아아… 당신은… 당신은……." 단우는 가까이 다가가 그 인영을 살펴본 다음에 더욱더 경악하는 것이었으니……. 보라. 전면의 유삼을 걸친 인물은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아닌가? 삼십대의 그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저 평범하기만 한 인물, 그러나 그는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인물로 갑자기 부상한 인물인 것이다. "다… 당신은… 그… 금일홍(金一紅)……?" 단우의 중얼거림은 격렬할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렇다. 눈앞의 유삼인물은 바로 천년대자문의 부종사 금일홍이라는 신분의 인물이며, 현재는 흑마련의 태상련 주인 그 금일홍이었던 것이다. 눈처럼 흰 유삼자락을 허허롭게 펄럭이며, 겨울 하늘처럼 시린 눈빛을 단우에게 던지고 있는 인물은 누 가 뭐래도 금일홍이었던 것이다. "아아……." 이 일은 너무도 단우에게 충격을 주었음인지 단우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상대는 자신이 알기로는 이 땅에서 가장 거대한 인물인 것이다. 그의 능력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으며, 그가 흑마련을 세운 무서운 인물이라는 사실 또한 대자율법사 를 통해 들었다. 이쯤 되고 보면 단우에게 있어 금일홍은 그야말로 인간이 아니라 신인 것이다. 금일홍은 담담히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지극히 평범이다. 이런 평범 속에 어찌 비평범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이 평범한 인물이 어찌 천하무림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것인지……. "……." 침묵이었다. 죽음과 같은 고요했다. 간간이 침묵을 깨는 것은 악마의 호곡성과도 같은 바람소리일 뿐, 두 사람은 그런 침묵 속에서 묵묵히 상대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달빛은 유수처럼 흐르고… 침묵 또한 유수처럼 흐른다. 단우의 표정은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늘이 오르지 못할 만큼 높다고는 하나, 대자연이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다고는 하나, 그 앞에 서면 인간은 그것을 느끼기에 앞서, 그것에 위축되기에 앞서 이렇듯 초연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금일홍이라는 인물이 하늘이요 대자연이라면, 단우는 그것을 초연한 자세로 마주 대하고 있는 것 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가 단지 이 진세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혼이 달아나도록 놀란 것은 사실이 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지금은 이렇듯 담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상대가 어차피 좋은 감정을 지니고 나타났을 리는 만무한 이상, 그리고 자신이 그것에 반항할 어떤 힘 도 지니고 있지 않은 이상 체념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담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득 단우는 빤히 그를 올려다보며 당돌하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곳에 있게 된 것이지요?" "……." 금일홍은 담담하게 웃고만 있었다. 모든 것이 평범일색인 그에게 그 웃음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나, 단우는 왠지 그 웃음을 대하는 순간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다. 금일홍에게는 이렇듯 평범 속에 만인을 압도하는 비평범의 위엄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단우의 물음은 계속이 되고 있었다. "대자율법사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사십사 개의 진세만을 파훼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 올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 "당신은 혹시 사십사 개의 진법을 파훼했다는 사실조차 날조한 것이 아닌가요?" "……." "이미 그 이상의 진세를 파훼했으면서도 그것을 감춘 것은… 당신을 타인에게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려 는 수작이 아닌가요?" 단우의 말속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금일홍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를 죽이기 위함이겠지요?" "……!" 금일홍은 천천히 미소를 거두었다. 그리고 최초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이야… 너는 참으로 많은 것을 묻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두려운가요?" "……?" 금일홍은 불쑥 묻는 단우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언뜻 그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음이리라. 단우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이 단우가 당신의 비밀을 많이 알게되는 것이 두렵냐는 말이에요." "풋……." 금일홍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단우를 바라보았다. '당돌하군.' 그는 언제인가 한 번 이 소동을 본 적이 있었다. 벽라무황천 내에서 대종사의 신분으로 막 변신한 그 즈음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때 그가 단우라는 사실 모두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모르는 천하의 대 소사는 없었기에. 한데 그때 처음 단우를 대하는 순간 그는 마치 거대한 암벽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아마도 그가 인간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리라. 세상 사람을 하찮게 보는 그가 어린 단우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로서도 불가사의하게 생각되어졌던 것인데……. 그 어린 소동을 지금 다시 만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한 것이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그는 벌써부터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산에 오르기 전에는 목적의식이 있어 외로움을 느낄 수 없는 것이나, 일단 산을 정복하고 나서 정상에 서면 허탈하고 고독해지는 것이다. 지금 그런 기분을 금일홍은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독한 기분이 이 어린 소동을 대함으로 약간은 위안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가사의하다 고 봐야 할 것인가? 그는 잠시 그 불가사의함을 되뇌며 단우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말문을 연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아이야… 너는 알고 있느냐?" "무엇을 말인가요?" 단우는 흑백이 또렷한 눈망울을 굴리며 금일홍을 빤히 주시했다. 금일홍은 온화하게 말했다. "너는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풋……." 단우는 얼마전 금일홍이 실소를 토한 것처럼 나직이 실소를 터뜨렸다. "당신은 정말 바보로군요." 단우는 천진하게 웃었다. "바보?" 금일홍은 마주 웃으며 단우를 그윽이 바라본다. '본좌를 바보라 한 인물은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지…….' 다른 사람이 그를 바보라 했다면 당연히 그는 심한 모욕을 느꼈으리라. 그런데 이 어린 소동의 말은 오히려 더욱 정감 있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단우의 말문이 다시 열렸다. ■ 십매어황 제2권 第五章 너의 운명(運命)은 하늘에 맡기고 싶다 "당신은 이 단우가 살고자 이 진세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 생각하나요?" 금일홍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죽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왔단 말이냐?" "그렇지요. 살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죽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지요." "……."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 단우는 진세를 파괴하며 더욱 깊숙한 진세로 들어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랬었지." 금일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우는 배시시 웃는다. 그는 마치 이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즐거운 일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만약 이 단우가 마지막 진세 안으로 들어가서 그 진세마저 파괴한다면… 단우는 그 진세에 갇힌 채 죽 어야 할 운명이겠지요?" "……." "아니 그 진세에 갇히지 않는다 해도 결국은 죽어야 할 것이에요. 어차피 이 단우는 오래 살 수 없는 운 명이니까요." "그런가?" 금일홍은 마치 몰랐던 사실처럼 되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천년지대의 비도를 단우에게 넘겨주던 그 순간부터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앞을 보는 혜안을 지니고 있었고, 타인이 지니지 못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일홍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 자신이 죽어야 함을 알고 사는 것은 진정 불행한 일이야… 그렇지 않느냐?" 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하는 것이 정한 이치라면… 당신도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것 이고… 그렇다면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함을 알고 사는 것이지요." "……." "그러나 결코 누구도 그것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물론 이 단우도……." 여전히 단우는 웃고 있었다. 금일홍은 나직이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이 어린 소동에게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야… 너는 거듭 본좌를 감탄케 하는군." "……." 단우는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금일홍은 허공에서 시선을 거두며 단우를 바라보았다. "이리 가까이 올 수 있겠느냐?" "원하신다면……." 단우는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이곳에……." 금일홍은 자신의 무릎을 가리켰다. "그것도 원하신다면……." 단우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마치 다정한 부자지간처럼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금일홍은 단우의 당돌하고 천진한 행동을 보며 동심으로 젖어감을 느꼈다. 그는 단우를 자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야… 너는 본좌가 두렵지 않느냐?" "처음에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들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어째서……?" "그것은 당신도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오……." "약간은 특별난 인간이기는 하지만… 이 단우와 같은 밥을 먹고 사는 인간인데 두려워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요?" "핫하하하……." 금일홍은 낭랑하게 웃었다. 그는 곧 정색을 하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와 같다면… 본좌의 오늘은 존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무슨 뜻이지요?" "그것은……." 금일홍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너와 같은 인물이 세상에는 흔치 않기 때문에 곧 본좌가 존재할 수가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 "난해해요." "물론 그렇겠지. 그러나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두려움을 초월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 "본좌는 오늘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 왔는데… 세상 사람들이 본좌를 대하는 태도가 두려움이 아니라 초월이요 외면이라면… 본좌의 노력은 너무도 무가치한 것이 아니냐?" "……." "다시 말해… 신은 인간이 있기에 존재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 없는 신이 존재할 수가 있다고 보 느냐?" "물론 존재할 수가 없겠지요." "바로 그것이다." 금일홍은 빙그레 웃으며 단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본좌가 아무리 이 시대의 절대자라 해도… 무림의 독패자라 해도… 본좌를 두려워하고 경이롭게 생각 하는 아래의 인간이 있기에 본좌가 존재할 수가 있다는 말이지." "……." "인간이 없는 신이 존재할 수 없듯이 모든 인간이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를 외면한다면… 나 혼자서 절대자라고 주장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또한 재미인들 있겠느냐?" "아……." 비로소 이해가 간다는 듯 단우는 나직이 탄성을 발했다. 금일홍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본좌를 두려워하고 있지. 아이야… 너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불행 이겠지?"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렇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위대한 사람이에요." "무슨 말이지?" 단우의 말에 금일홍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단우는 금일홍을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만약에 말이에요… 당신이 일찍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면 세상 사람들은 당신의 그 뛰어난 능력 에 기가 질려 두려움 같은 건 느끼기도 전에 체념을 해 버렸을 것이고… 무림이야 어찌됐든… 당신이 절대자로 올라서든… 그들은 외면을 해 버렸을 것이에요." "……!" "당신에게 대항할 수 없다면 외면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했을 테니까요." "……." "그래서 당신은 자신을 철저히 숨긴 것이지요. 적당히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적당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 은 채… 모든 사람들이 체념하고 외면하게 되는 만약의 사태를 미리 예방했던 것이 아닌가요?" "대단하구나." 다시 한 번 금일홍은 감탄하고 있었다. 단우의 말은 그의 정곡을 정확히 찔렀던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본좌가 가장 두렵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었는지도 모른다." "……." "그래서 본좌는 나의 능력을 삼 성 이상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며…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모든 것을 파훼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철저히 숨겨 왔던 것이다." "아……." 단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만약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모든 것을 파훼할 능력을 지녔다면……?' 그것은 너무도 무서운 일이 아닌가? 지금 단우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를 파괴하고 있는 것은 금일홍으로 하여금 더 이상의 무학비급을 얻지 못하게 함 이 아니었던가? 그가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모든 것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가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모든 것을 이미 얻어 버렸다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너무 무의 미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단우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다… 당신은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모든 것을 이미 얻었나요?" 금일홍은 신비롭게 웃었다. "그것이 두려우냐?" "물론이에요. 당신이 만약 그 모든 것을 얻었다면… 나의 마지막 할 일은 없어지기 때문이에요." "……!" "죽어 가기 전에 무엇인가를 해야하고 그것을 남겨야 하는데… 그것마저 무의미해져 버린다면 이 단우 는 너무 불행해질 것이에요." 단우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안심해도 좋다." 금일홍은 부드러운 눈길을 단우에게 주며 말했다. "본좌는 아흔아홉 개의 진세 중 일흔일곱의 진세만을 파훼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렇다. 스물두 개의 진세는 아직 파훼하지 못했다." "다행이로군요." 단우는 천진하게 웃는다. 그러나 단우는 곧 다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정도만을 얻은 것으로도 천하무림을 제패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이제 누가 당신을 상 대해야 하는 것이지요?" "……." 금일홍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 단우가 죽을 운명만 아니라면 나머지 것을 얻어 당신을 상대할 수도 있으련만……." 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그는 체념하듯 말했다. "이제 당신은 나를 죽이도록 하세요. 더 이상의 할 말은 없으니……." "……." 금일홍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단우를 주시하며 넌지시 물었다. "살고 싶지는 않느냐?" "죽고 싶지는 않아요." 단우는 간단하게 대답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금일홍은 천천히 단우를 안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둠에 덮인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보아라. 광대무량하지 않느냐?" "……." "본좌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나 저 하늘의 광대함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다." "……." 단우는 기이한 눈빛으로 금일홍과 어두운 하늘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런 하늘이 너 같은 뛰어난 인재를 내렸다면… 그리고 본좌를 내렸다면… 우리에게는 저마다 할 일이 주어진 것이다." "……!" "본좌가 비록 수많은 살인을 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그들이 본좌보다 뛰어나다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 다. 이제 본좌는 적어도 본좌만큼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너를 만났으니… 너의 운명을 본좌의 손으로 다스리는 것보다는 하늘에 맡기고 싶은 것이다." "음……." "네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죽어야 하는 것이고… 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살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너를 나의 손으로 죽이지 않는다 해도 본좌를 자비로운 인물이라 생각하지는 말아라. 본좌의 심 성은 잔인하며 사마의 천년혼(千年魂)이라 할 만큼 비정하기도 하다." "……." "본좌가 너를 내 손으로 직접 죽이지 않음은… 왠지 너를 죽임으로서 본좌는 외로워질 것만 같은 생각 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단우는 궁금한 듯 물었다. 금일홍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른다. 지금 말해도 너는……." "……." "네가 본좌의 위치에 섰을 때만이 지금 내가 한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말하는 금일홍의 전신으로도 고독감이 진하게 배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절대자만이 느낄 수 있는 고독이리라. 그는 단우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본좌가 일흔일곱의 진세만을 파훼한 것은 본좌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 "본좌가 나머지의 진세를 파훼하여 당시의 절대자들의 비학을 얻지 않은 것은… 더 이상 그들의 무공을 얻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 현재의 본좌의 무공은 그들 위에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아……." 단우는 가벼운 탄성을 자신도 모르게 발했다. '대단한 자부심이야.' 그렇다. 그것은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일천 년 전 당시 무림의 절대자라면 무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봐야 할진대……. 지금 금일홍은 스스로가 그들 위에 섰다고 서슴없이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단우는 새삼 금일홍을 주시한다. 크다고 말할 수 없는 어찌 보면 왜소한 몸짓의 그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찌 이리 그가 거대하게 보이 는 것인가? 넘을 수 없는 산 같은 느낌을 단우는 그에게서 받는다. "가라……." 그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지금 단우에게 나직이 말하고 있었다. "본좌가 지금까지 너를 살려 준 것이 어쩌면 본좌의 인생에 있어 최대의 실수인지도 모르지만… 본좌는 다시금 너를 살려 둠으로써 또 한 번의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금일홍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서 가라… 본좌의 마음이 행여나 돌아설 수도 있다." "……." 단우는 잠시 기이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러다가 문득 불쑥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겠지요?" 금일홍은 주춤했다. 언뜻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잠시 허공을 멍하니 주시하다가 이렇게 대답한다. "만날 수도 없으려니와… 만나지도 말아야겠지." "그렇겠지요?" 단우는 시무룩하게 대답한 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어둠 속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작은 등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고 허전해 보인다. 잠시후 단우의 작은 신형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고, 금일홍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천령(天靈)… 그대는 너무 자비롭군." 바람 소리였을까?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는 나직한 음성이 들려 온 것은……. 금일홍은 담담히 웃었다. "지령(地靈)… 그대는 본좌가 자비롭지 않음을 잘 알고 있을 텐데……?" "핫하하… 그래서 이상하다는 말이지."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한 사람이 금일홍의 면전에 나타났다. 한데 이럴 수가 있는가? 그 모습이 금일홍과 완벽하게 같은 것이 아닌가? 분명 그는 또 한 명의 금일홍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래의 금일홍을 천령이라 부르고 있었으며, 본래의 금일홍은 그를 지령이라 부르고 있었 으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천령은 허공을 멍하니 주시하며 말했다. "본좌가 한 일은 태상련주께서도 탓하지는 않으실 것이네." "확신할 수 있는가?" "확신? 물론이네. 본좌가 바로 그분의 분신인데…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리가 있는가?" 분신이라니! 그렇다면 이들 두 사람이 금일홍의 분신이란 말인가? 용모와 그 마음까지도 완벽하게 같은……? "그분이 바로 본좌이고 본좌가 그분인 이상… 본좌의 뜻을 그분은 충분히 헤아릴 수가 있을 것이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핫하하… 이런 자신감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대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천령의 물음에 지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지. 적어도 그분은 우리보다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니… 우리가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범위보다 도 우리의 마음을 그분은 더욱더 헤아리고 계신다고 봐야겠지." "……."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겠는가?" "그 물음은 본좌의 영역 안의 것인가?" "그렇네." "그렇다면 곤란하군.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서로의 영역을 침해할 수 없는 관계를 지녔으니……." 지령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천령은 시선을 허공에서 거두며 말했다. "그러나… 본좌의 물음은 우리의 관계에 어떠한 침해도 주는 것이 아니니 대답해 줄 수가 있을 것이네." "음……." 지령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표정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묻게나. 그러나 가려서 대답해야 하는 나의 입장을 이해해 주게나." "물론……." 천령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물음에 지령은 결코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는 눈을 뜨며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는 천마종야 단사하와 벽라천제 백리명이라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두 사람을 사로잡을 임무를 띠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음……." "어떤가? 자네의 능력이라면 결코 태상련주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데……." "……." 지령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말없이 허공만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천령의 생각대로 그는 대답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려운 질문이로군." 그는 천령을 주시하며 쓸쓸하게 웃었다. "어쩌면 이 대답은 본좌의 가치(價値)를 크게 하락시킬 수도 있는 것……." "……." "그러나 본좌는 대답해야겠네. 자네에게 말함으로써 나의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려는 의도에서라 도……." "음……." "불행히도 본좌는 이번 일로 태상련주를 크게 실망시키고 말았네." "그렇다면……." "철저히 실패한 것이지." "음……." 천령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령의 능력이 자신에 비해 손색이 없음을……. 자신의 일천 년의 최강의 고수라는 칠대초인들에게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만큼 지령 의 능력도 그런 위치에 동등하게 놓고 본다면 역시 대단한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있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한데 지령이 실패했다는 것은 바로 그들의 이 믿음을 크게 뒤흔드는 것이었다. 지령은 암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마종야 단사하… 벽라천제 백리명… 그들은 본좌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인물이었네." "그들이 그토록 뛰어난 인물이었던가?" "그들은 본좌가 상대한 인물 중에서 자네와 태상련주를 제외하고는 가장 무서운 인물이었네." "음……." 천령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지령은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본좌가 그자들을 과소평가했던 것도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나… 그보다 더욱 큰 원인은 그들 을 너무도 몰랐다는 것에 있었어." "무슨 뜻인가?" "그들은 자신들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었지. 즉 우리가 세상에 그 완전한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도 역시 자신들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는 말이네." "아……." "확실히 그들은 이 시대 최고인이라 불리울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네." "그렇다면 자네에게는 무의미한 일이 아니로군." 천령의 말에 지령은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천령은 빙그레 웃었다. "자네는 조금 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는가?" "그렇지." "바로 이것이네. 자네가 할 일이… 그들이 그토록 뛰어난 인물이라면, 그들을 간단히 사로잡는 것보다 오랜 시간을 두고 그들과 대결을 벌인다는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며 하는 일에 재미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음……." "그런 점에서 본좌는 그대에게 부러움을 느끼고 있네." "부러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의 쾌락이라고 할 수 있어." "인생의 쾌락……?" "생각해 보게나. 십 년 전의 우리는 일개 무림의 삼류무사였네. 그런 우리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 두 태상련주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 "십 년 전의 우리는 벽라천제 백리명과 천마종야 단사하를 하늘처럼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 위대한 그들 과 한 판의 자웅을 겨룰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며 희열이 아니겠는가." "그렇군." 지령은 감회에 젖는다. 십 년 전의 그들 두 사람은 무림의 삼류고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벽라천제 백리명과 천마종야 단사하를 우습게 보는 위 치에 서게 되었으니……. 그 자체가 희열이며 쾌감이 아니겠는가? 만약 지령이 그 위대했던 두 사람을 쉽게 사로잡았다면 그만큼 그 쾌감은 쉽게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천령의 말은 계속이 되었다. "누릴 수 있는 쾌감이라면 오랜 세월을 두고 누리는 것도 괜찮겠지. 그리고 그 실패는 자네가 나의 위에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니… 불행이 아니라 행운이라고 봐야겠지. 그렇지 않은가?" "……." 지령은 말없이 웃으며 천령을 주시했다. '무서운 인물… 저자의 무게는 태상련주의 그것만큼이나 무거운 것이다. 어쩌면 나는 저자의 무게를 영 원히 감당할 수가 없을지도…….' 그는 내심 어두운 생각을 하다가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듣고 보니 그대에게는 할 일이 전혀 없어 보내는 세월이 무의미하다는 말 같은데……." "……." "그래서 본좌가 부럽다는 말이 아닌가?" "당분간은 그렇다고 할 수 있네." 천령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당분간은 자네처럼 바쁜 몸이 아니라서 자네가 부럽다는 말이지." "……." "그러나 앞으로 오 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 자네가 오히려 본좌를 부러워하게 될 것이야. 핫하하하 ……." 천령의 낭랑한 웃음소리에 이어 그의 신형은 아스라하게 사라져 갔다. "오 년 후……." 지령은 나직한 음성으로 천령의 말을 되뇌이고 있었다. 휘이이잉－! 한 줄기 밤바람이 그의 몸을 허허롭게 쓸며 지나갔다. 지령은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져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을까? 그의 굳어졌던 입술은 문득 무겁게 열리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야망이 너무 크다는 데에 있지." 그의 입가에는 한 줄기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의 할 일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흑마련 자체에 있다는 것이야. 적어도 자네는 벽라천제 백리명과 천마종야 단사하보다 뛰어난 인물이기에… 나는 자네를 이기기 위해 지금보다 백 배 이상의 노력을 쏟아야 하겠지." 그는 웃고 있었다. 야망이라고 할 수 있는 소리 없는 웃음을…….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자네가 말한 오 년 후는 우리에게 퍽 의미가 있는 것이야… 아마도 지금은 본좌가 그대의 아래에 있으나… 어쩌면 그때는 그 반대의 상황이 될 것이네… 핫하하……." 그는 코끝에 주름을 잡았다. 그것은 기이한 매력을 발산시키고 있었다. 이런 습관은 금일홍의 두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에게 있어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었 다. 지령은 몸을 돌려 천령이 사라진 방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빙글 돌렸다. "일천 년 전에는 칠대초인이 존재했지만… 이 시대는 삼대초인(三大超人)만이 존재할 뿐이다. 일천 년 전에는 칠대초인이 절대자의 자리를 놓고 겨루었지만… 이 시대는 삼대초인이 절대자의 자리를 놓고 겨 루게 될 것이다." － 삼대초인(三大超人). 과연 그가 말하는 삼대초인은 누구인가? "그들 삼대초인에게 있어 오늘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내일이 의미가 있을 뿐인 것이다. 그들 중 오늘의 절대자는 내일의 이인자… 삼인자가 될 수 있기에… 핫하하……." ■ 십매어황 제2권 第六章 칠대초인(七大超人) 보이는 것은 핏빛 일색이었다. 거대한 암석(岩石)이 핏빛이라는 것도 기이한 일이었지만, 그 거대한 암석이 마치 숲처럼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는 것은 더더욱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출렁이는 짙은 안개도 있었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안개의 바다에 떠 있는 암석림…….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다. 아니,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전혀 없어 보였다. 죽음의 땅덩어리……. 회색빛 암울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바닥을 보자니 푸른 이끼요 음습한 습기뿐이질 않은가? 하늘은 푸르고 고요했다. 하지만 이곳은 암울한 회색빛에 젖어 있을 뿐이었다. 한데,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고 있음이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생물체라곤 전혀 없을 것만 같은 이곳에 움직임이 있어 기이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인간의 것 같기에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인간이 이곳에 살아 존재할 수가 있다니……. 보이는 모든 것이 죽어 있는 암석뿐인 이곳에 인간이 움직이고 있다니……. 안개 사이로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인간이었다. 그것도 지극히 왜소한 체구를 지닌 어린 아이였던 것이다. 이제 나이가 십이삼 세 정도나 되었을까? 입고 있는 흑의는 갈기갈기 찢겨져 걸레가 되어 있었다. 또한 머리에 두른 검은 문사건은 어깨에 걸려 있었고, 머리카락은 해초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나 왠지 황량해 보이기만 한 그 얼굴은 자세히 본다면 실로 수려한 것이었으니……. 단우! 그렇다. 이 흑의소동은 바로 단우였던 것이다.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단우의 얼굴은 보기에도 안타까운 것이었다. 두 눈은 움푹 파여 들어가 있었고, 안색은 밀랍을 바른 듯 창백하였으며, 눈빛엔 생기라곤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저히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아니, 지금까지 살아 있음이 기적인지도 모른다. 단우는 암석림의 앞에 선 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엔 피곤함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는데……. 그는 문득 힘없이 침묵을 깨뜨렸다. "이곳이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 중 아흔아홉 번째의 진세인가?"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감개가 무량한 것이다. 그렇다. 이곳은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 가운데 가장 핵심 부분인 것이다. 일천 년 전 당시 단 일곱 명의 정사절대자만이 살아 들어왔다는 죽음의 땅!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모든 움직임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고 이곳에서 종결되는 것이다. 실로 험난했다. 단우가 금일홍과 헤어져 이곳까지 들어오는 과정은……. 이미 삼십 일의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갔고, 정확히 삼십일째 되는 날 정오에 이곳에 도착한 것이 다. "어쨌든 이곳까지는 왔는데……." 이제 무엇을 어찌 해야 하는가? 이곳의 진세를 파괴하면 자신의 할 일은 모두 끝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결코 반 년 이상을 살 수 없음을. '금일홍은 거의 모든 진세의 무학을 얻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나머지 것을 없앤다고 해서 무슨 의미 가 있다는 것인가?' 단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오는 것은 한숨이었고, 느껴지는 것은 암울한 어둠뿐이었다. 금일홍의 장담이 뇌리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는 현재의 능력이 일천 년 전의 칠대초인을 능가한다고 했다. 그의 능력이 그 정도라면… 무림의 그 누구도 그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우의 생각일 뿐이었다. 사실 그가 보았던 금일홍은 천령이라 불리는 금일홍의 분신이지 진짜 금일홍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천령이 칠대초인을 능가하는 능력을 지녔다면, 금일홍은 당연히 그 이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 고 있었으니……. 만약 그 사실을 단우가 알았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아마도 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을 것이며, 그는 더욱 큰 절망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단우, 이제 고작 열두 살의 어린 그는 천령과 헤어진 그 이후 이곳까지 오는 과정에서 모든 진세를 파 괴했다. 그 가운데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단우는 관심이 없었다. 천하인의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비급 따위도 그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진세를 파괴할 뿐이었고, 그것이 그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인 듯했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렀을 뿐이다. 하지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에 와서 자신의 한 일을 돌이켜보면 허탈할 뿐이었다. 애초에 자신과 자하고금마유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것은 천년지대의 모든 것을 파괴함이 아 니었던가? 그리하여 이 천년지대로 인해 벌어지는 혈겁을 미연에 막아 보자는 의도였던 것이며……. 또한 천년지대의 무학을 얻어 천하를 교란하려는 천년대자문의 무서운 음모자의 야망을 막아 보려는 속 셈 또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바로 금일홍이라는 인물에 의해.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일홍이라는 인물이 천년지대의 거의 대부분을 일찍이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 그가 천하인을 이곳 천년지대로 유인한 것은, 천하무림을 한순간에 장악해 보자는 또 다른 흉심이 있었음을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니……. 이런 이유로 인해 단우가 지금에 와서 천년지대의 모든 것 중 일부분을 파괴했다고 해서 과연 무슨 의 미가 있겠는가? 그렇다. 지금 단우의 행동은 별다른 의미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금일홍의 무학이 일천 년 전의 무림 최강의 고수라는 칠대초인을 능가하는 것이라면 그들을 막을 아무런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부분적인 천년지대의 파괴도 결코 금일홍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가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닌 가? 그렇다면 단우는 이제 무슨 일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 이상……. 그리고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에 그는 허탈한 심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단우는 한동안 암석림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 와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회의하고 번민한들 소용없는 일이지." 단우는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원한 일이니… 이 단우는 다만 그들이 원한 대로 할 뿐이야." 휘이이잉－! 한 줄기 음산한 바람이 단우의 머리카락을 쓸며 지나갔다. 문득 단우의 뇌리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극히 평범한 얼굴의 금일홍이었다. 그는 온화하고 자상했다. 그러나 그 온화함과 자상함이 단우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온화함과 자상함은 세상을 아래로 보는 여유에서 나온 것이야.' 그는 입술을 삐죽였다. '만약 내가 그 이상의 절대자였다면… 그가 그런 온화함과 자상함을 보일 수가 있을까?' 단우는 나름대로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이 단우가 본 인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기는 했지만… 보이지 않는 교만과 자만은 이 단 우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어.' 오기(傲氣)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암석림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에 힘이 가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맥이 빠지고 말았다. 오기가 치밀어 오르면 어찌 할 것인가? 그에 대해 도전적인 마음이 있다 한들 어찌 할 것인가?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는 머지 않아 죽어 가야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단우가 이 땅에서 맺은 모든 인과(因果)는 종결(終結) 을 맺게 되는 것이다. 터벅터벅－! 단우의 발걸음은 유난히 무거웠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절대 흐트러진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흐트러지면 당장 그는 진세의 변화에 휘말려 죽고 마는 것이다. 이곳의 진세는 아직까지 거쳐 온 진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위력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단우는 정신을 집중하여 정확히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생문과 사문을 짚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힘든 일이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천년지대 안의 진세는 평원에 펼쳐져 있어 그것을 파괴하기가 용이한 편이었지만, 이 곳은 그냥 걷기에도 어려운 험지가 아닌가? 갖가지 형상의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즐비하고……. 그 사이로 백 보를 걷는데 아홉 번이나 꺾어 돌아야 하는 협소한 길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인 듯싶다. 거기에다 암석의 표면에는 검푸른 이끼마저 끼어 있었기 때문에 아차하면 그대로 미끄러져 박살이 날 판이다. 문제는, 단우가 몸을 가눌 수가 없을 정도로 기력이 탈진해 있다는 점이었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그가 먹은 것은 불과 풀뿌리 등이었으니……. 이 정도면 건강한 사람이라도 병이 나고도 남았으리라. 거기에다 단우는 본래부터 허약한 체질을 지니고 있었으니 죽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인 것이다. 그런 그가 생문과 사문을 정확히 짚으며 진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실로 어렵고 어려운 일인 것이다. "헉헉……." 불과 몇 걸음을 걷기도 전에 숨이 턱 끝에 차 오른다. 안개가 너무 짙어 호흡하기에도 거북한 것이다. 단우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러던 한 순간이었다. "헉!" 단우는 다급한 신음과 함께 주춤 뒤로 물러섰다. 무엇인가 발끝에 와 닿는 감촉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컹했다. 가끔 딱딱한 백골만을 밟아 온 단우이기에 이 감촉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 단우는 시선을 아래로 천천히 내리깔았다. 순간 그는 나직한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아……." 자신이 밟았던 물컹한 느낌의 물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 이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곳에 어찌 살아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단우는 경악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그 사람을 살폈다. 백발(白髮)의 노인이었다. 그런데 노인의 두상(頭上)은 유난히 큰 것이었다. 아마도 보통 사람의 두세 배는 족히 되어 보였는데……. 그 반면 노인의 몸체는 유난히 작은 것이었다. 그 몸체는 보통 그 나이 또래의 노인에 비해 두세 배 가량이나 작은 것이었다. 노인은 회색빛 마의를 헐렁하게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의는 단우가 밟는 순간에 한줌의 재로 변해 사라져 버렸으니……. 노인의 바짝 마르고 왜소한 몸매는 여지없이 단우에게 드러나고 만다. 이때 노인은 단우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사람의 그것이라고 보여지기보다는 마치 원숭이의 그것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표정이 실로 기괴한지라 단우는 그만 픽 웃고 만다. 그러다가 단우는 공손히 노인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단우가 노인장께 인사올립니다." "……." 그러나 노인은 단우가 인사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웃고만 있었다. 단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노인장은 뉘신데 이곳에 계시는 것인지요?" "……." 그러나 역시 노인은 함구무언이다. '벙어리일까?' 단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그의 뇌리를 스쳐 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이곳에 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 자신이 알기로는 일천 년 전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당시의 최강고수인 칠대초인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인간의 발길이 철저히 단절된 곳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런 곳에 어찌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천 년 전의 인물인 칠대초인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는 만무한 노릇이 아닌가? 문득, 조금 전 그가 노인의 몸을 밟자 노인의 마의가 가루로 변해 사라지는 광경을 떠올렸다. "그… 그렇다면… 이 노인은 죽은 사람이란 말인가?" 이제서야 단우는 노인이 결코 산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다. 동시에 등골에서 소름이 확 솟구쳐 오른다. 그러나 웬일인지 노인의 기이한 웃음이 그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 웃음은 다분히 풍자적인 것이었으며 해학적인 것이었다. 보는 이에게 절로 웃음을 짓게 만드는……. 단우는 다시 한 번 피식 웃으면서 새삼스럽게 노인을 유심히 살폈다. 노인이 누워 있는 곳은 여러 개의 바위가 몰려 하나의 동굴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 동굴은 진세로 들어가는 입구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일까? 칠대초인 중 한 사람일까?"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자신의 말에 모순이 있음을 발견했다. "후후… 천 년 전의 사람이 산 사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지." 단우는 실소를 머금었다. 한데 주위를 살피던 단우의 눈에 이상한 글자가 들어왔다. 그 글자들은 동굴의 벽에 깊게 파여져 있었는데……. 푸른 이끼가 무성하게 끼어 있는 것으로 짐작컨대 오래 전에 쓰여진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 단우는 글자가 파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수천 마리의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형상의 지독하게도 못 쓴 글자였다. '형편없는 필체로군.' 단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앞뒤가 영 맞지 않는 글자들을 이리저리 뜯어 맞추며 읽어 나갔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노부의 수려한 필체를 대하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단우는 어이가 없었다. '수려한 필체? 무한한 영광……?' 단우는 혀를 쏙 내밀었다. '칫… 발로 써도 이것보다는 더 잘 쓰겠다.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머리만 큰 줄 알 았더니… 착각은 더 크군.' 글은 계속이 되고 있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노부의 필체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명필이라고 할만 한 것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이… 이 정도면 착각이 아니라 망상이다.' 단우는 아예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전혀 흉내낼 수 없는 필체… 이것만은 사실일거야… 후훗…….' 단우는 자신도 모르게 이 웃지 못할 글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정말이지 노부는 이곳에서 노부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여러 가지 발견했다. 노부의 필체가 명필임은 물론이고 노부가 불세의 미남자라는 사실 또한 깨달은 것이다. 정말이지 노부의 모습은 타인이 전혀 따를 수가 없는 것이었어. 사람들의 노부를 보고 웃었던 그 이유를 노부는 알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노부의 얼굴 이 너무나 잘 생겼기 때문에 나온 웃음이었다 이 말이지.> 착각은 그야말로 계속이 되고 있었다. 단우는 노인의 기괴한 형상을 힐끔 보며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핫하하하… 불세의 미남자라고? 저 얼굴이……?" 점입가경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노인의 착각은 점차 그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노부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무공… 학문… 용모……. 그야말로 천하의 주인이 지녀야 할 모든 조건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어. 그런데 이 위대한 노부가 말년에 와서 한 가지 대실수를 범했으니……. 그것은 십기대학사(十技大學士)의 음모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이곳까지 따라 들어와 결국은 죽어가 야 했던 점이야. 아아… 억울하다, 억울해. 십기대학사… 그놈… 그 죽일 놈…….> 노인의 글은 여기에서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이것은 글을 쓸 당시 노인이 상당히 흥분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는데……. "십기대학사라니… 그가 누구일까? 칠대초인 중 한 사람일까?" 단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글을 계속 읽어 나갔다. <정파의 멍청이들을 수없이 죽여 가며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이제 남은 정파의 멍청이는 불과 셋……. 그놈들만 죽이면 노부의 팔자는 늘어지는 것인데……. 아아! 노부의 야망이 바로 눈앞에 잡힐 듯이 있었는데……. 그만 갇히고 말다니……. 이 십만대산의 생사평 한가운데에 갇히다니……. 억울하다. 그리고 또 억울하다. 십기대학사, 그 놈이 죽일 놈이야. 미친 놈! 그래, 자신조차 빠져 나가지 못할 진법을 펼쳐놓았단 말이냐?> 처음 단우는 이 노인이 칠대초인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천 년 전의 인물이 썩지도 않고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덥지 않았기에 그 생각을 부 정했다. 그런데 그가 남긴 글을 읽다보니 그가 칠대초인 가운데 한 사람임을 알 수가 있었다. 단우는 흥분했다. 자신이 당시 최강의 고수라는 칠대초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이 노인의 글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회로 웠고, 그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울 뿐이었다. <흐흐흐… 미친 놈은 또 한 놈 있었어. 어금태자(御禁太子), 황궁의 후레자식인 그놈은 십기대학사의 어떤 진법이라도 파괴할 수 있다고 자신하 더니 막상 일이 터지자 오리발을 내밀어 버린 것이니……. 흐흐흐… 정파의 멍청이 셋… 사파의 벌레 셋… 그리고 위대한 사람 하나……. 물론 그 위대한 사람은 노부를 말함이다. 우리 일곱은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진세에 갇히고 만 것이야. 더 이상 싸우고 자시고 할 힘도 없어졌다. 정사의 우열을 가리기 위한 우리의 싸움은 결국 무의미해진 것이지. 이런 시점에서 싸운다고 해서 무엇을 하겠으며 승리한다고 해서 또 무엇을 하겠는가? 우리는 결국 이 조그만 울타리 안에서 뼈를 묻어야 하는 것을!> 글은 여기에서 희미해져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이 글을 쓴 노인이 맥이 빠져 글을 쓰는 것도 힘들어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단우는 이 부분에서 또 하나의 초인을 알 수가 있었다. － 어금태자(御禁太子).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칠대초인 중 한 사람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천 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혈전은 사파무림의 일방적 우세였고… 그 우세 속에서 사파무림인들은 진세 를 헤치며 무작정 추격전을 펼친 것이 아니라 어금태자라는 진법의 대가의 주도 아래 추격전을 벌인 것 이었군." 단우는 새로운 사실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은 해학적이고, 약간의 한이 담긴 글은 계속이 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노부를 가리켜 대두혈제(大頭血帝)라고 불렀으며 존경과 흠모를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노부의 손에 죽어 간 작자들의 두 눈을 보고 나름대로 짐작한 것이지만, 노부를 향해 부릅뜬 그 눈에는 한없는 존경과 흠모의 빛이 가득했었어. 고로, 노부는 위대했던 것이야. 또한 노부가 이끄는 흑교(黑敎)도 위대했고, 흑교의 대종사인 노부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 尊)의 위치에 오르고도 남음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었는데……. 아아! 인생무상이라……. 이제 이곳에 갇혀 백 년의 세월을 덧없이 흘러 보내고 나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남겨야 할 것 또 한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애석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노부의 순결한 동정(童貞)이 이곳에서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무려 백 년 하고도 오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이 간직하고 또 간직한 나의 순결이 죽는 그 순간에 파 괴되다니……. 그것이 애석한 것이야…….> "동정……?" 단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동정이라는 의미는 알고 있었지만, 노인의 글이 이상야릇하여 다시 한 번 글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자신이 잘못 읽었는가 하는 우려에서……. 그러나 글을 계속 읽던 도중에 그만 그는 배꼽을 잡고 웃어야 했으니……. <천마서생(天魔書生)……. 놈은 알고 보니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中性)이었다. 흐흐흐… 마교(魔敎)의 주교인 그놈이 중성이라니? 그것을 천하인이 알았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놈은 노부를 보고는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일 줄이야… 노부의 준수함이 죄일 줄이야. 정말 잘생긴 것도 죄가 될 때가 있었다. 놈은 날이면 날마다 노부를 찾아와 동침할 것을 요구했다. 참으로 징그러운 일이었다. 사내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놈이 동침을 요구하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 아닌가? 그놈하고 동침하여 행여나 아이라도 낳는다면……? 정말이지 끔찍하다.> "핫하하……." 단우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절망적인 것이라도 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그것을 모두 잊고 웃어야 했던 것이다. "도대체 천마서생 그가 누구이기에 이런 못생긴 사람에게 동침을 요구했을까? 핫하하……." 보고 또 봐도 대두혈제라는 이 노인은 지독히도 못생겼다. <그러나 천마서생은 노부의 뛰어남을 아는 유일한 놈이었다. 그는 노부의 수려함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노부의 명필을 알아주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놈으로 인해 노부는 새삼 노부의 위대함을 확인했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놈이 기특하기도 했다. 그래서 노부는 죽기 얼마 전에 결국 그 놈에게 순결을 주고 말았다. 아아! 그런데 그것이 이토록 애석하고 후회스러울 줄이야……. 지독했다. 그놈의 몸에서 나는 썩은 냄새는……. 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나의 우람한 물건에서는 악취가 지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이지 낭패다. 몸에서 악취가 난다면 지옥행이라는 말을 누구에게선가 들은 것 같은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영락없는 지옥행이다. 모든 면에서 시대를 앞서 나가던 노부가 이런 천려일실을 범하다니…….> 후회와 번민으로 가득찬 그 글을 읽는 순간. "핫하하……." 단우의 배꼽은 이대로 가다가는 빠져 버릴 듯 싶다. 죽음과 같은 정적에 잠겨 있던 암석림에 때아닌 웃음소리가 진동했다. 인간의 웃음소리는 아마도 천 년 이래 처음 울리는 것이리라. 모처럼 창백하기만 하던 단우의 얼굴에 생기가 감돈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죽을 채비나 하는 도리밖에……. 노부의 엄청난 무학과 재능을 그대로 무덤으로 가져가기는 뭐하고… 뭔가를 남겨야겠다. 다행히 노부에게는 천기를 짚는 재주가 있으니… 가만히 있거라… 그러니까 정확히 백 년 후면 이 지옥 과 같은 땅에 누군가가 들어서리라는 천기의 흐름이 있고… 그 자는 약관의 청년이며… 노부처럼 준수 하고… 하늘이 내린 최상의 자질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는 천애의 고아일 것이며… 아마도 마의 길을 추구하는 인물인 듯싶다. 어떤가? 노부의 미래를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생각지 않는가?> "쯧쯧… 이런 허무맹랑한 예시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단우는 아예 고개마저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 노인은 완전히 과대망상증에 걸려 있었던 듯 싶었다. 적어도 칠대초인 가운데 일 인이라면 천기 정도는 정확히 짚어야 하건만, 이건 도대체가 말이 아니다. 정확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찌감치 딴 길로 흘러 버린 것이었으니……. 백 년 후가 아니라 천 년 후였으며, 약관이 아니라 십이 세의 소동이 아닌가? '그리고 마를 추구하는 인물이라고? 형편없는 미래를 보는 눈이로군.' 단우는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만다. 글은 이런 단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이 되고 있었다. <노부가 예시한 바에 의하면 그는 노부를 향해 사부지례를 올릴 것이며… 노부를 만난 것을 생애 최고 의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노부의 무학은 불세제일이라 할 만한 것이며… 특히 마라단수(魔羅斷手)와 폭풍마접은 적수가 없어 단 한 번도 펼쳐 보지 못한 지상 최대의 절학이다. 각설하고……. 노부의 제자여. 노부의 모든 절학이 담긴 흑교혈경(黑敎血經)은 그대를 위해 이 사부의 위대한 몸 아래 남겨놓았으니 흑교의 부활을 위해 정진할지어다. 정진할지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부의 손에 죽어 간 뭇 생명들의 영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바이다. 이것은 노부가 지옥에 떨어졌을 때 그들에게 수난을 받을 것이 두려워하는 아부… 으이그… 죽어 가는 이 순간 노부가 이토록 초라한 존재가 되어야 하다니…….> 이것으로 길고 긴 글은 끝이 나 있었다. 단우는 마지막 글을 읽고 난 다음 다시 한 번 피식 실소를 짓고 만다. "엉터리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우는 노인의 유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별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노인의 글이 워낙 해학적이어서 마지막까지 그의 걸작들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후후… 당신 같은 사람을 사부로 삼았다가는 신세 망칠 것은 뻔한 것……." 단우는 웃으며 유체에 슬며시 손을 대었다. 순간이었다. 부스스스－! 대두혈제의 유체가 곧장 한 줌의 재로 변해 흩날리는 것이 아닌가? "……?" 동시에 대두혈제라는 노인의 웃음도 사라져 버렸고, 그의 큰 머리도 사라져 버렸다. 단우는 왠지 허전함을 느꼈다. 잠시 멍하니 날리는 대두혈제의 유체를 바라보던 단우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노인이 있던 자리를 살피는 것이다. 과연 그곳에는 하나의 철상자가 놓여져 있었다. 철상자는 땅 속에 파묻힌 채 뚜껑만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응……?" 단우는 문득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펄럭－! 한 장의 서찰이 상자 위에서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그 서찰은 단우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단우는 엉겁결에 그 서찰을 받아들었다. "이건 지독히도 못 쓴……." 그렇다. 서찰에 쓰여진 필체는 눈에 익은 것으로서 바로 조금 전에 보았던 벽면에 쓰여졌던 그 필체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서찰은 대두혈제가 남긴 것이 분명했다. 단우는 호기심이 가득찬 눈빛으로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 십매어황 제2권 第七章 천년지대(千年地帶)의 절대자(絶對者)들 1 <천기를 헤아려 노부가 죽을 날짜를 정확히 짚어 놓았다. 갑자년(甲子年) 사월(四月) 초닷새(五日)……. 그런데 그 날짜가 이미 지났음에도 노부는 아직 살아 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늘이 노부를 시샘하여 오기를 꺼려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하늘도 두려워하는 게다. 그래서 노부는 이 한가한 시간을 빌어 제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를 적으려 한다. 다름 아닌 칠 대초인(七大超人)에 대해서…….> 단우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칠대초인에 대해서……?" 이것은 단우에게 무한의 호기심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 칠대초인(七大超人). 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이던가? 이곳에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단우는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천기를 억세게 못 짚는 대두혈제의 기록은 계속이 되고 있었다. <제자는 어쩌면 노부 외에 육대초인을 모두 사부로 둘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들은 사부로 삼을 만한 위인들이 아니노라. 장담컨대 노부만이 그대의 진정한 사부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 노부가 이 진세의 입구에 유체를 둔 것은 그대를 처음으로 맞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 모두는 노부의 천 기를 헤아리는 능력 덕분인 것이다. 노부의 정성을 그대는 외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노부는 그대에게 공정한 선택을 바라는 마음에서 육대초인의 기록을 남긴다. 그대가 그들의 기록을 보고서 사부를 바꾸겠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노부는 그저 지옥에서 그대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도리밖에는…….> "후훗……."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이 단우에게 겁을 주려 함인가?" 그렇다. 글은 분명히 제자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쓰여졌으되, 보는 이에게 겁을 주려는 속셈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우는 계속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거기에는 육대초인의 기록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 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칠대초인 중 여섯 중에서 대두혈제의 기록은 이미 소 개된 바인지라 여기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 단우의 눈빛은 겨울 하늘에 서린 차가운 별빛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육대초인은 다음과 같다. 천마서생(天魔書生). 여자도 아니고 사내도 아닌 그놈은 평범한 유가(儒家) 출신이다. 놈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의 성격을 두루 지니고 있으며,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떠한 종류의 마공이학(魔 功異學)이라도 그의 머리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없다. 놈은 삼십만 마교(魔敎)의 총수이며, 무공보다도 지혜로서 마인들을 다스렸던 지극히 어리석은 놈이다. 마인들이란 자고로 힘으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 지극히 현명한 것……. 그런 점에서 이 글을 기록하고 있는 이 대두혈제는 참으로 위대하신 것이다. 그가 죽인 인물은 지극히 적다고 알려졌으나 이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죽인 인물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며, 이것이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놈은 대 부분 남의 손을 빌어 살인을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놈의 최고무학은 천군무(天君舞)와 천마강력(天魔 力)이다. 어금태자(御禁太子). 그는 황궁(皇宮) 출신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왕자(王子)의 신분이나 적자가 아닌 서자였기에 천대와 멸시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런 그는 황궁에 대해 엄청난 한을 품었고, 그 한은 천하인에게로 향해졌다. 그는 무서운 인물이다. 황궁의 십만무경(十萬武經)을 독파한 최초의 인물이며, 성격은 무심하고 잔인하다. 그는 무림에 출도하여 어금사교(御禁邪敎)라는 문파를 창단했으며, 그 후 그는 무려 삼천 명 이상의 정 파인들을 위선자라 하여 처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는 천마서생과 반대로 지혜보다는 힘으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지만 그것은 너무 과한 것이었다. 적당한 힘을 뛰어넘으면 천하인으로부터 적대감정만 유발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대두혈제는 가장 적당한 힘으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음을 자부하고 또 자부하는 바이다. 그의 무공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어금사예(御禁邪藝)와 어금혈영수(御禁血影手)이다. 절대군후(絶代君侯) 예소령(芮小玲). 칠대초인 중 유일한 여인이다. 말이 여인이지 그녀는 그 어떤 사내보다도 잔인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살인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 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는 당세 최고였다. 수많은 소녀들이 그녀의 꽃그늘 속에 울어야 했으며, 천하의 영재들이 그녀를 사모하다가 상사지병에 시들어 가야 했다. 아아! 이 십만대산 생사평에 아흔아홉 개의 진세가 펼쳐졌고, 여기에 천하인이 뼈를 묻어야 했던 가장 큰 이유가 그녀에게 있었으니……. 이 사실은 그대가 후에 알게 되리라. 이 여인은 그 아름다움 속에 무서운 가시를 숨기고 있었으니……. 그녀의 무학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녀의 수많은 무학 중 가장 무서운 무학은 그 미모이며, 그 다음으로 무서운 것은 절대사령미염소(絶代 死靈美艶笑)와 절대삼검식(絶代三劍式)이다. 그리고 이 여인에 의해 죽어 간 무림의 인물들은 무려 이천여 명에 이르니 그대가 이곳에 들어올 당시 행여나 그녀가 살아 있다면 무조건 피해야 한다. 벽라성군(碧羅聖君). 온화하고 인의대덕한 인물. 누구도 이 사람은 미워할 수가 없다. 그는 정파인이었지만 사파인으로부터도 존경과 흠모를 받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출신은 평범한 농가(農家)이며, 그래서 노부보다는 그 신분이 천박하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는 정파인으로부터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을 받았으며, 정파인 모두의 뜻으로 벽라문(碧羅門)의 대종사 로 부임했다. 그의 가장 무서운 무공이자 뭇 사파인의 극성무학은 벽라복마십팔해(碧羅伏魔十八解)와 벽라백위파(碧羅 百尉破)다. 무위활인승(無偉活人僧). 이 자는 자타가 인정하는 살아 있는 활불(活佛)이었다. 대소림사(大少林寺)의 주방에서 군불이나 때던 놈이 위대한 자로 등장한 것은 사실 운이 좋았기 때문이 리라. 이 대두혈제처럼 난관을 극복하고 운명을 극복하며 절대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는 대소림사란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에 시대의 활불이 된 것이며……. 그런 점에서 본다면 노부가 그보다 훨씬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땡초는 대소림사 사상 가장 뛰어난 기승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지닌 바 무공이 정심박대하여 사파무학으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부 류의 것이라는 점이었으니……. 무위세수심공(無偉洗髓心功)과 천불선좌세(千佛禪座勢)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최강의 무공을 지녔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노부 대두혈제의 무공은 무위활인승이 혼단백절할 만큼 대단한 것이라는 점을 항시 명심해야 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노부의 무공은 거듭 말하건대 불세제일이다. － 십기대학사(十技大學士). 문제는 이놈이 죽일 놈이라는 것이다. 소위 이런 놈을 가리켜 시대의 간사라 해야 할 것이다. 죽일 놈……. 또 죽일 놈……. 이놈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다. 그러나 그가 벽라성군이 대종사로 있는 벽라문의 총사가 된 것은 그의 뛰어난 두뇌 덕분이었다. 그의 학문은 하늘에 닿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병법(兵法)과 정략(政略)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지경 에 이르러 있다고 했으니……. 어찌보면 그는 우리 사파인이 가장 경계했어야 할 요주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이놈에 대해서 언급하기가 싫어진다.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못 견딜 지경이기 때문이다. 아아! 이 위대한 대두혈제가 이놈의 농간에 놀아나 이런 더러운 땅덩어리에서 뼈를 묻어야 하다니……. 갑자기 머리가 아파진다. 이놈을 생각하니 노부의 명이 재촉되는 듯싶다. 제자야……. 네가 이 더러운 땅을 다 돌아본다면 노부가 왜 이놈을 저주하며 죽었는지 그 연유를 자세히 알게 될 것 이다. 좋다. 네가 모든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것은 허락하겠다. 그러나 십기대학사란 시대의 간사한 인간의 제자는 되지 말아라. 이것이 사부로서의 마지막 바람일 뿐이다. 부탁이다. 그놈의 시신에 검을 겨눌지언정 제자는 되지 말아라.> 이것이 서찰의 모든 내용이었다. "……." 단우는 감개가 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일천 년 전의 칠대초인이라는 인물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된 유일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철저히 안개에 가려졌던 인물들을 우연히 알게 된 단우였으나, 대두혈제가 남겨 놓은 글을 모두 읽고 난 후 한 가지 의혹에 사로잡혔다. "왜일까? 왜 이 사람은 십기대학사를 저주해야만 한 것일까?" 대두혈제의 말에 의하면, 십기대학사는 이곳 천년지대에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를 펼친 인물이 아니었던 가? 대두혈제가 사파인이었고, 결국 이곳에서 진법에 갇힌 채 뼈를 묻어야 했기에 저주한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담겨져 있는 것일까? 모를 일이었다. 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이 진세를 파괴하면 그뿐이고… 당신들은 죽었기에 그뿐인 것이 야." 단우는 철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이 대두혈제라는 자칭 위대한 사람의 모든 비학이 들어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무림에 유출된다면 무림은 그야말로 피바다로 변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단우에게는 쓸모 없는 철상자에 지나지 않았으니……. 한 번 힐끔 철상자를 주시한 단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세의 내부를 향해……. 그러자 철상자만이 부끄럽게 이 자리에 남은 셈이 되고 만 것이었으니……. 이것은 대두혈제라는 위대한 인물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옥에서 그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아마도 머리를 감싸쥐고 드러눕고 말았으리라. 이런 말을 씹어뱉으며……. － 어서 오너라. 어서 지옥으로 떨어져라. 노부의 손톱이 한 자나 자랐으니 네놈을 찢어 죽이는 데에는… 흐흐흐……. 2 단우는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 가운데 가장 핵심 부분이자 칠대초인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진세의 중심부근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생문과 사문을 정확히 가려 걷기를 그 얼마나……. 넘어지고 깨어지면서 그의 무릎과 두 팔은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암석림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험했다. 길은 더욱 좁아졌으며 빙판을 방불케 할 정도로 미끄러웠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그는 발을 헛딛었고, 동시에 암석림 사이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스르르－! 무엇인가를 잡으려 했으며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단우가 떨어져 내린 곳은 하나의 아담한 석실(石室)이었다. 석실이라고는 하나 사방 벽이 울퉁불퉁했고, 군데군데에 깎아 내린 바위조각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석실은 누군가가 상당한 세월을 소비하여 완성한 듯했다. "음……." 단우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아픔을 참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석벽은 은은히 핏빛을 띠고 있었다. 암석림 전체가 핏빛이듯 이곳 역시 핏빛이었던 것이다. 언뜻 보니 이곳은 상고시대의 한 토굴 형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데. "아……!" 무심코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나직이 탄성을 발했다.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그는 여기에 산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이상 상대도 죽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석대(石臺). 석실의 우측에 자리한 그 석대 위에 한 사람이 정좌하고 있었다. 일신은 흑색장포로 휘감겨져 있었고, 두 손에는 두 개의 검은 묵환(墨環)이 휘감겨져 있었다. 묵환에서는 은은히 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마치 두 마리의 묵룡(墨龍)이 흑색장포인의 두 손에 휘감겨 비천하는 듯했다. 거기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것은 흑색장포인의 가슴에는 한 쌍의 묵룡이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다는 점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검은색에 검은 수가 놓여져 있다면 눈에 띄지 않을 듯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은은함으로 묵룡은 보는 이의 시각을 거대하게 자극하고 있었으니……. 단우는 왠지 숙연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자세를 바로잡아야 했다. 미심에 검은 반점이 인상적인 중년인의 용모는 매우 수려했다. '도저히 죽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생동감이 저 중년인에게 넘쳐흐르고 있다.' 단우는 혀를 내둘렀다. 얼마 전 대두혈제 또한 과거의 모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지만 이 중년인은 더했다. 입을 보면 말을 할 듯 했고, 내리 감은 두 눈에서는 투명한 광채가 흐르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은은히 혈색마저 감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구일까?" 단우는 생각했다. 상대는 분명히 칠대초인 중의 하나가 분명했다. 하지만 중이 아닌 것으로 보아 무위활인승은 아닐 것이다. 사내이기에 절대군후 예소령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물론 대두혈제는 아니고, 그렇다면 십기대학사나 어금태자, 그리고 벽라성군이나 천마서생 중 한 사람이 라는 이야기인데……. 일신에서 풍기는 기도가 약간은 사이한 것으로 보아 정파의 기인인 십기대학사와 벽라성군은 아닌 듯싶 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제 상대는 어금태자 아니면 천마서생이라는 것인데……. 한데 단우의 생각이 막 여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무슨 소리인가 들렸다. － 아이야……. '분명… 아이라고 했는데……?' 반사적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단우의 전신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곳에 산 사람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단우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사람의 음성은 느닷없이 들려 왔으니 이건 분명히 경악할 일인 것이다. '잘못 들은 것일 거야.' 단우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한숨을 토했다. 자신의 환청을 들은 것이라 자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허허로운 음성은 다시 들려 오고 있었다. － 아이야……. 너의 방문을 본좌는 진심으로 환영하노라. 음성! 그 음성은 음성이로되 저 멀리 아득한 영혼의 종착지에서 들려오는 듯한 음성이 아닌가? 단우는 다시 한 번 사방을 두리번거렸고 누구냐고 물어도 봤지만 산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행여나 저 흑색장포인이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살피고 또 살펴보았지만 말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단우의 영혼을 아득히 울리는 음성은 또 들려 왔다. － 헛허허… 아이야… 너는 본좌를 멀리 있다고 생각지 말라. 본좌는 바로 너의 앞에 있으며… 천마서생(天魔書生)이라 하노라. 단우는 경악하면서 시선을 황망히 흑색장포인에게 돌렸다. "사… 살아 있으신가요?" 단우는 흑백이 선명한 눈망울을 굴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 눈에는 불신감이 가득했다. 천마서생이라면 일천 년 전의 인물인 것이다. 그가 살아 있을 리는 만무한 것이기에 묻기는 이렇게 물었으나 이미 그는 자신의 물음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 본좌는 분명 살아 있다. 물론 너는 나의 살아 있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헛허허… 본좌의 짐작이 맞는다면 너는 이미 대두혈제를 만나 보았을 것이고… 그는 위대하고 본좌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소개를 들었을 것이다. '아아…….' 단우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분명히 현실이었고, 입술을 움직이지 않음에도 음성은 들려 오고 있었으니……. 그가 살아 있음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떻게 인간이 일천 년을 살 수가 있단 말인가?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 헛허허… 대두혈제, 그는 지독히도 못생긴 위인이지. 단지 얼굴만 못생긴 것이 아니라 필체 또한 형편없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이 당세 제일의 명필이며 미남자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모두 본좌의 아부 덕분 이다. 헛허허… 기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으니… 헛허허……. 천마서생은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한동안 앙천광소를 토하고 있었다. 석실 전체가 쩌렁하게 울리며 허물어져 버릴 듯 뒤흔들리고 있었다. 단우는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계속 듣고 있노라면 전신의 혈맥이 진탕되어 터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그 사람은 본좌가 석실의 벽에 엉터리로 적어 놓은 천기의 흐름을 통찰한 듯한 예시를 몰래 훔쳐보 고 가서 마치 자신이 천기의 흐름을 헤아린 듯 기가 막힌 필체로 유언을 남겨 놓았으니……. 백 년의 세월이 지나면 약관의 청년이 나타난다고……. 헛허허… 그가 자신을 사부로 삼을 것이라고… 헛허허……. 어리석은 사람… 순진한 친구… 헛허허… 그러나 그의 유체는 천 년의 세월 동안 연자를 기다리느라고 목이 빠져 버렸을 것이야. '아…….' 단우는 내심 탄성을 발했다.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여기에서 논할 필요도 없이 천마서생에 의해 대두혈제라는 자칭 위대한 사람이 철저하게 놀아났 다는 이야기이다. 천마서생의 음성은 계속이 되고 있었다. －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이다. 고아로서 흑교라는 일문을 세우기까지 그는 가히 초인적인 능력을 과시했다. 본좌가 장담컨대 무공만으로 따지자면 그는 단연 칠대초인 가운데 으뜸일 것이다. 본좌가 그를 잠시 농락했던 것은 그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노라. 음성은 진지해져 가고 있었다. '대두혈제의 무공이 칠대초인 가운데 으뜸?' 단우는 약간은 의혹의 빛을 표정에 담고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본좌의 예시가 맞는다면… 본인의 후예가 이곳에 처음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바로 단(亶)씨의 성을 쓰는 아이이며… 나이는 열두 살… 헛허허… 어떠냐? 맞지 않느냐? "아……." 단우는 경악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천마서생이 어찌 자신의 성이 단씨임을 알 수가 있단 말인가? 단우는 이 부분에서 한 가지의 사실을 뇌리에 떠올렸다. 천마종야 단사하! 즉, 자신의 부친과 벽라천제 백리명이 칠대초인 가운데 두 명의 후인이라는 대자율법사의 말이 불현듯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님께서 천마서생의 후인이셨단 말인가?' 그러나 또다시 떠오르는 대두혈제의 글이 있었다. '대두혈제의 글에 의하면 천마서생은 여인도 사내도 아닌 중성이라 하지 않았던가? 한데… 그에게 어찌 후인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 헛허허… 아이야, 너는 본좌에게 많은 의구심이 있을 것이다. 본좌가 어떻게 일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살아 있을 수 있으며… 어찌 너에 관해 알고 있는가 하는 의 문……. 헛허… 그러나 알고 보면 본좌는 당연히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현실이다. 너와 본좌와는 운명적으로 맺어진 것……. 그것은 시공(時空)을 초월한 인연이다. "……?" － 아이야… 너는 대두혈제가 남긴 유언에서 칠대초인이 어떻게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대강 알게 되었을 것이다. 좀더 자세한 것은 차후 십기대학사와 어금태자, 절대군후 예소령의 시신을 대함으로써 알게 될 것이다. "……!" － 본좌는 본래 세상이 모르는 한 가지 음양신공(陰陽神功)을 연성하고 있었다. 천지조화의 분기점이 음양이기(陰陽二氣)에서 시작되었듯이 음양신공은 본좌가 창안한 무공 중 가장 멋 진 걸작이었다. 그러나 이 무공을 인간이 익힐 수 없는 것은……. 이 무공을 익히기 위한 음양이기를 동시에 한 몸에 타고난 인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면 음양신공을 연성할 수 있고, 이 무공을 연성하면 영원한 청춘을 지니게 될 뿐만 아니라 죽음마저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니……. 그리고 이것을 무공으로 사용할 경우 천하무적이며, 어떤 무공으로도 상대할 수 없음을 장담하는 바이 다. 모른다. 이 무공의 위력은 본좌도 전혀 모른다. 그것은 본좌가 말년에 이 무공을 연성했음에도 펼쳐 보일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우는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음양신공… 과연 이분의 장담대로 대단한 것이었을까?" 이런 의심이 든 것은, 천마서생 스스로도 칠대초인의 무공이 고강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무공 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런 장담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어쩐지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장담대로라면 과연 그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 본좌는 이 무공을 익히기 위해 여인도 사내도 아닌 중성이 되어야 했다. 물론 본좌는 분명한 사내이다. 그럼에도 중성이 되어야 했던 것은 오직 이 음양신공을 연성키 위함이었다. 이 가운데 얽힌 사연이야 길고 긴 것이고, 또한 굳이 알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여기에서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겠다. 본좌가 진실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본좌가 이 무공을 연성키 위해 무려 일천 명의 동정지기(童精之 氣)와 일천 명의 순음지기(純陰之氣)를 한 몸에 지녀야 했던 것이니……. 헛허허… 이것은 본좌가 세상에 범한 유일한 죄악이었다. 그러나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모두가 너를 위해서 행했던 것이었음을……. "이 단우를 위해서라고요?" 단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듯 물었다. － 헛허허… 그렇다. 너는 간뇌를 타고 태어나지 않았더냐? 그리고 너는 아느냐? 네가 태어난 그 시대야말로 무림 사상 가장 비극적인 난세지난세(亂世之亂世)라는 사실을……. 또한 네가 그 난세를 구할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도 아느냐? 헛허허… 이것은 하늘이 너에게 내린 운명이다. 하늘은 본좌로 하여금 너를 구하라 강요를 하시니 내 어찌 그것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들어라. 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 음양신공이다. 본좌가 일천 년의 세월 동안 살아 있을 수 있음도 음양신공의 덕분이니……. 기실 본좌는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 － 본좌는 음양신공을 연성한 후 과연 본좌가 얼마나 살아 있을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았다. 보통 인간의 수명이 칠십 전후라면, 최강의 무림인들의 수명은 그 두 배까지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칠대초인들은 최소한 이백 세까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가해한 신공인 음양신공을 연성한 본좌는 과연 얼마나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흐흐흐… 너는 믿을 수 없겠지만 본좌는 사백하고도 오십 년을 보통의 인간처럼 살았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본좌는 아무리 안간힘을 다해도 그 이상을 살 수가 없었다. 단우는 입을 딱 벌렸다. "어찌 인간이 사백오십 살까지 살 수가……." 천마서생의 말대로 그는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악은 단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으니……. '어찌 이 단우가 간뇌를 타고난 것을 알고 있으며… 나를 위해 안배를 했다 하니… 어떤 것일까?' 의혹, 또 의혹……. 단우는 완전히 의혹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 음양신공이 천지조화에 따르는 불세의 무학이긴 했지만 영원한 생(永生)을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본좌는 이런 궁여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즉, 음양신공을 이용해 본좌의 인체기능을 잠재운 것이다. 본좌는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잠을 자듯 모든 인체의 기능이 멈춘 것이다. 그런 상태로 본좌는 오늘에 이른 것이니……. 때문에 본좌는 살아 있음보다 죽어 있는 것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이것은 본좌에게는 크게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너에게는 결정적일 수 있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아이야, 너는 아느냐? 너의 신체조직의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너의 간뇌는 너에게 더 이상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본좌와 같은 상태만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너는 간뇌의 고통에서 해방이 될 수가 있다는 것 이다. "아……." 단우는 탄성을 발했다. 상대방의 말은 그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그대로 믿기에는 현실이 너무 불가사의하기에 그는 다만 탄성만을 발할 뿐이었다. － 헛허허… 물론 너는 본좌의 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생각했던, 그리고 세상이 생각했던 불가능은 이 음양신공에 의해 모두 가능함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신체조직이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고 해서 너의 성장은 멈추는 것이 아니며, 약관의 나이까지는 성장을 계속할 것이니……. 그리고 신체조직이 멈추었다고 해서 본좌처럼 죽은 목숨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네가 간뇌를 타고났기 때문에 본좌와는 다른 엄청난 공능을 음양신공에서 얻게 되는 것이다. 처음 본좌가 이 생사평에 이르렀을 때는 일천 여인의 순음지기는 모두 얻었으나 사내의 동정지기는 일 천 명에서 한 명이 부족했다. 다행히 칠대초인 중에서 동정지기를 지닌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대두혈제였다. 그래서 본좌는 그에게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아부란 아부는 모조리 동원해서 그의 동정지기를 얻어 내 야 했던 것이다. 아이야, 너는 그의 마지막 부탁 한 가지를 들어 주는 것이 도리이리라. 그것은 바로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헛허허……. ■ 십매어황 제2권 第八章 구대문파(九大門派) 1 － 아이야……. 이제부터 너는 본좌와 삼 년의 세월 동안 이곳에서 보내야 한다. 본좌의 음양신공을 너에게 모두 전해 주기 위해서는 약 천일(千日)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천 일이라면… 삼 년의 세월이 아닌가?' － 그 천 일을 통해서 너는 새롭게 탄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다. 천마서생의 음성에는 따스한 정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는 분명히 단우의 조상인 것이다. 혈육으로 이어진 끈끈한 감정 때문일까? 천마서생의 눈빛 또한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단우는 그 음성에서 정을 느끼며 굳어진 안색을 풀며 그를 살폈다. 문득 그는 천진한 음성으로 물었다. "할아버지는 신체의 기능이 멈추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말씀은 하실 수 있는 것이죠?" "헛허허… 할아버지라고 했느냐?" 천마서생의 음성에는 진한 격동의 빛이 담겨 있었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히 이 단우가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소손의 조상이시라니……." "헛허허… 좋다. 좋아… 아주 듣기 좋은 소리다." 천마서생은 연신 흐뭇한 웃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자상하게 대답했다. "본좌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조금 성질이 다른 것이다." "……?" "다시 말해서 본좌는 영혼으로 너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혼?" "그렇다. 본좌의 신체조직은 완전히 정지 상태인데 어찌 입인들 굳어 있지 않겠느냐?" "아……." "지금은 그 이상의 것을 설명해 줘도 너는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서생의 말대로 그는 이 석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가사의함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의혹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것을 완전하게 풀고는 넘어갈 수가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풀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체기능의 움직임이 멈춘다면… 죽는 것이 아닌가요?" "헛허허… 완전히 멈추면 물론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정지된다는 것일 뿐 죽는다는 것은 아니 다." "같은 의미 같은데……?" 단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천마서생은 난감하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입을 열었다. "아이야… 너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정지한다는 것은 곧 잠을 자는 것이라고……." "……!" "세월은 그 잠 속에서 잠시 멈추어 있는 것이며… 본좌는 세월과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 고……." "……." "물론 여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 바로 그 것이었다." "아……." 단우는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토했다. 듣고 보니 이해는 가는 일이었지만 걱정이 앞선 것이다. "이 단우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요?" "헛허허… 왜 두려우냐?"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신체조직을 움직일 수가 없다면 비록 살아 있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이니……." "아니다. 너는 본좌와는 달리 몸을 움직일 수가 있을 것이다." "……." "간뇌는 인간이 타고 태어날 수 없는 것이며… 아니 존재하고 있다 하나 본래 기능은 퇴락하여 미미한 활동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 "더욱이 다른 신체조직이 활성화되면 될수록 간뇌는 인간의 생을 단축하게 되는 것이니… 본래 간뇌란 짐승들이 타고나며 그 기능은 인간의 것에 비해 훨씬 잘 발달되어 있는 것이다." "아……." "짐승들은 간뇌가 발달되어 있기에 천기를 예견하며… 대자연의 변화를 인간에 앞서 미리 감지하는 것 이다." "아……." 단우는 이 새로운 사실에 연신 탄성만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희망이란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또한 창백하던 얼굴에서는 미미하나마 붉은 혈색이 감돌고 있었다. "짐승의 간뇌에 비교해 볼 때 인간의 간뇌는 몇 가지 신체조직의 움직임에 연관이 있을 뿐 본래의 기능 은 거의 죽어 있는 셈이다. 하나… 우리 반대로 한 번 생각해 보자." "……." "인간의 신체조직이 활성화되면 될수록 간뇌의 조직이 퇴락한다면… 반대로 인간의 신체조직의 모든 움 직임이 멈추면 간뇌는 어찌될 것인가?" "……."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아이야?" "……." 천마서생의 거듭된 질문에 단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는 이윽고 이렇게 대답했다. "간뇌가 오히려 활성화될 수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헛허허… 바로 그렇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너는 인간이 지닐 수 없는 또 하나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이며 움직일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움직임이 보통 인간에 비해 훨씬 자유로워지리라." "분명히 이 단우가 살아 있을 수가 있을까요?" "물론이다." "……." 단우의 눈빛에 생기가 떠올랐다. 가슴이 벅차 오르고 있는 것이다. 어찌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자신의 평생의 고질병에서 해방되리라는 것을……. 죽음을 목전에 둔 단우가 이제 보통 사람 이상으로 살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꿈만 같은 것이다. "이 단우가 무공을 익힐 수도 있는가요?" 단우는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도 물었다. "허허허… 무공을 익힐 수 있냐고?" 천마서생은 나직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익힐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너는 보통 사람의 수백 이상으로 빠르게 모든 무학을 습득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 "다른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단 한 마디로 너의 정의를 내린다면……." "내린다면?" "헛허허… 너는 전에는 태어난 적이 없고 후에도 태어나지 않을 불세의 기재라는 것." "어찌 그럴 리가……." 단우는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느낀 인간의 감정의 마지막이었다. 2 천마서생과 함께 지낸 천 일 동안 단우는 오직 고통만을 느껴야 했다. 그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천마서생은 그에게 음양신공의 전부를 주었다. 물론 이것은 천마서생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천리까지 역행하면서 얻은 일천 여인들의 순음지기와 일천 명 사내들의 동정지기를 단우에 게 남김없이 주었으며, 그가 평생에 걸쳐 심득했던 모든 무학까지 단우에게 주었다. 단우는 새롭게 변모하고 있었다. 새로운 정도가 아니라 무섭게 변신하고 있었다. 먼저 그는 십이 세의 어린 소동이 이제 십오 세의 소년으로 성장했다. 말이 십오 세이지 누구라도 그의 모습을 대한다면 청년으로 볼 것이다. 그만큼 그의 성장은 빨랐다. 정신적인 성장 또한 그는 보통의 인간들보다 열 배 이상 빨랐다. 그 사이에 봄은 세 번이나 찾아왔다가 지나갔고, 폭양이 쏟아지는 여름과 낙엽 지는 가을도 세 번이나 왔다가 덧없이 떠나갔다. 겨울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땔감이 하나도 없는 황량한 이곳에서의 겨울은 그냥 몸으로 견디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고통은 육체의 고통이었다. 신체의 움직임이 멈추기까지의 고통! 그리고 천마서생으로부터 음양지기를 전해 받는 과정에서 전신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수없이 반복하여 맛보고 있었다. 그 고통이야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 마침내 천 일은 지났다. 그러자 천마서생은 조용히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그리고 석실 안에는 오직 단우만이 남아 있었다. 3 난세 격변의 무림. 그렇다. 무림은 무서운 피 바람에 휘말려 있었다. 지천으로 뒹구는 이름 모를 시신과 산야에 가득 널브러진 백골은 이것이 바로 난세로구나 하는 것을 느 끼게 했다. 난세는 천년지대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이제 시작이 된 난세는 흑마련(黑魔聯)의 등장으로 극을 향해 치 달리고 있었다. － 흑마련(黑魔聯). 이런 무서운 집단이 무림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천하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조직이 신비롭게 무림에 등장했을 때, 천하무림인들은 경악하고 또 경악했다. 이 조직의 힘은 가히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것인지라 벽라무황천과 대천마련이라는 무림의 두 하늘로서 도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아, 벽라무황천과 대천마련! 이들 두 하늘의 전설과 신화는 흑마련에 의해서 무참히 깨어지고, 비로소 세상은 보게 되었다. 흑마련의 검은 실체를……. 그리고 알려지게 되었다. 흑마련의 인물들은 바로 천년지대 안의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사의 무학을 사용하고 있다 했으 니……. 경악(驚愕)! 전율(戰慄)! 그리고 무서운 공포와 충격이 해일처럼 천하무림에 밀려들면서 탄생되고 있었다. 새로운 신화와 전설이……. 흑마련의 검은 전설과 신화가……. 그리고……. － 흑마사십사령(黑魔四十四靈). 이 죽음과 어둠의 신들에 대한 전설과 신화도 창조되고 있었다. 사십 사명의 이들 신비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온통 경악스러운 일뿐이었다. 이들은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의 무학을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며, 이들의 무학은 가히 경 세적인지라 적수가 없을 정도라 하였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이들 흑마사십사령의 인물 중 가장 약한 인물이라도 과거 한 시대의 절대 자로 군림했던 천마종야 단사하와 벽라천제 백리명보다도 강할 것이라 했으니……. 아아! 이제 무림은 흑마련의 세상이 되는 듯했다. 벽라무황천과 대천마련의 힘은 그야말로 미미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제 누구도 벽라무황천과 대천마련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과거의 그 무림 하늘을 생각하기에 앞서 흑마련이라는 현재의 검은 하늘을 생각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더불어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삼척동자라고 해도 검은 유삼을 즐겨 입었으며, 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사 마를 생각하고 동경하게 되었다. 그것은 정녕 비극(悲劇)이었다. 무림의 비극이기에 앞서 이 땅의 비극이었다. 과거에는 누구나 어린아이의 앞에서 정은 정이기에 정의로워야 하고 사마는 사마이기에 악한 것이라 했 으나 이제는 반대의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정이 우선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어린아이는 흑마련을 반박의 주제로 등장시킬 것이니……. 아아! 어린아이들이 흑마련은 사마의 인물임에도 어찌 하늘로 군림하고 있느냐고 질문하면 대답할 말이 없기에 무림은 비극으로 치달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정은 그 명맥마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흑마련의 거대함에 가려져 빛을 잃고 있는 것이 다. 이런 공포와 절망의 와중에서 거대한 또 하나의 힘이 용트림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움직임이 없어 태산(泰山)과도 같고, 온갖 힘의 농축을 의미하기에 북두(北斗)와 같다는 태산북 두! 바로 구대문파(九大門派)의 출현이었다. － 구대문파(九大門派). 존재는 하였으되 무림인들에게 신비로만 느껴지던 신비의 세계! 대소림사(大少林寺)와 무당파(武當派)를 필두로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조직을 지녔다는 개방( )이 무림 에 출현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들은 오직 난세에만 무림에 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세를 무리 없이 평정하고는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도 이들의 힘을 거역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 구대문파의 장장한 역사가 이천 년이기 때문인 것이다. 현 무림의 역사가 사라진 일천 년의 역사와 새로운 일천 년의 역사로 나누어진 것에 비하면, 구대문파 는 그 역사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니……. 일천 년 전의 이 땅은 난세의 격변에 휘말려 있었고,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에 휘말려 정사무림의 전 고 수가 죽음을 맞아야 했음에도 사실은 구대문파는 크게 손실을 입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대소림사의 최고 기승인 무위활인승을 비롯한 몇몇 기인이 희생을 당했지만, 그들이 지닌 힘의 원 천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이었으니……. 그들이 역사는 이천 년으로 이어진 것이며, 그 이어진 힘은 일반 무림인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 는 것이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만큼 구대문파의 힘은 세상사람들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그들이 마침내 무림에 정식으로 출현을 선포했고, 무림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흑마련의 시대에서 구대문파의 시대로 들어가는 어떤 과도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구대문파 역시 흑마련에 의해 희생되어질 것인가? 이것이 당금 무림의 화제거리라면 화제거리였다. 아무튼, 무림의 풍운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흑마련을 중심으로 삼대초인(三大超人)과 구 대문파를 중심으로 이대초인(二大超人)이 탄생되고 있었으니……. 이들 오대초인의 힘은 이 시대의 모든 것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세상이 모르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또 한 명의 초인의 탄생이었다. 그 하나의 초인은 천년지대에서 탄생의 희열을 만끽하고 있었다. 4 "불타미아… 그래 검은 법의(法衣)와 붉은 법의는 없단 말인가?" 투덜거리는 이 소리는 바로 숭산(嵩山) 대소림사(大少林寺)의 한 성전(聖殿)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대소림사(大少林寺)! 이천 년의 장장한 역사를 지닌 무림의 산 증인. 당금에 와서는 무림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현 무림이 난세에 빠지자 마침내 그 오랜 침묵을 깨고 무림출도를 선언한 불가제일문이었다. "불타미아… 어찌하여 이 옥불(玉佛)이 회의가사(恢衣袈裟)만 입어야 한단 말이오?" 음성은 낭랑했다. 그런데 불타미아라는 불호성도 있단 말인가? 사실 그것은 아미타불을 거꾸로 외운 것이었다. 옥불이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해괴한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거기에다 그 기상천외한 불호성이 흘러 나오고 있는 곳은 소림사의 심장부나 다름이 없는 장문방장실 (掌門方丈室)인 것이다. 방장실 안에서는 십칠팔 세 가량의 청년승인(靑年僧人)이 자비로운 불존상(佛尊像) 앞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한 황의노승(黃衣老僧)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게도 청년승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 발가벗은 알몸이었다. 그것도 성스럽고 존귀한 장문방장실 안에서 이런 해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반신을 드러낸 것은 그런 대로 보아 줄만 하다고는 하나, 하반신은 흉한 물건이 꼴사납게 노출되어 있으니 그야말로 눈뜨고는 봐 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 청년승인은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장부로서 결코 손색이 없었다. 살결은 백옥처럼 희고 고왔으며, 알맞게 들어가고 나온 근육은 완벽한 조화미를 이루고 있었다. 두 손은 희고 섬세하여 어떤 여인의 손보다 아름다웠으며 용모 또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거기에다 검미성목(劍眉星目)에 진홍빛 입술과 대리석으로 조각한 듯한 섬세한 콧날은 기이한 매력까지 자아내고 있었으니……. 이리 보나 저리 보나 파르라니 깎은 머리 아래의 얼굴은 수려하기만 하다. 한편, 황의노승은 청년승인을 향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사… 사숙(師叔),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고개마저 설레설레 내젓는 노승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하지만 노승의 신태는 매우 비범한 것이었다. 눈빛은 고요하고 물처럼 투명했으며, 양 귀는 마치 그림 속의 보살(菩薩)처럼 늘어져 있었고, 눈처럼 새 하얀 백미(白眉)는 한 자 이상 아래로 늘어져 있어서 위엄을 더해 주고 있었다.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용모와 더불어 성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이 노승이야말로 현재 소림사의 장문인을 맡고 있는 천화대선사(天華大禪師)였다. － 천화대선사(天華大禪師). 올해 세수 칠십인 그는 대소림사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십대기승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선승이었 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뛰어남이 아니라 그가 대소림사의 장문인이라는 지고한 신분을 지니고 있음에도 이 옥불이라는 청년승인의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점이었다. 사숙이라니? 그가 옥불이라는 청년승인을 사숙이라 부르다니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아미타불… 사숙, 어서 법의(法衣)를 입으십시오. 이런 사숙의 모습을 제자들이 본다면… 어찌 되겠습니 까?" 어디까지나 천화대선사가 옥불에게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러자 옥불이 고개를 흔들었다. "불타미아… 검은 법의나 붉은 법의를 갖다 주시오. 그러면 군말 없이 옷을 입을 것이니……." "그것은……." "물론 대소림사의 유례에 없는 일이라 그럴 수가 없다 하시겠지요. 그러나 그런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은 일찍이 버려야 하는 것이오." 옥불은 이제 코마저 후벼파고 있었다. 그 행동은 이런 신성한 성지에서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불존상의 두 다리를 베개 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옥불을 가리켜 오대초인 중 한 명에 집어넣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것이 불만이란 말이오." "사… 사숙……." "만약에 말이오… 이 몸이 흑색이나 혈의가사를 입었다고 상상해 보시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이 몸을 다시 보게 될 것이며… 초인은 다섯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 옥불이라는 형편없는 청년승인이 정녕 오대초인 중의 하나란 말인가? "아… 아미타불……." "불타미아… 흑색이나 붉은 가사를 입은 이 옥불은 참으로 멋질 것이오. 천하의 모든 여인들이 선망의 시선으로 나를 주시하게 될 것이며……."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옥불은 말하며 연신 헤벌쭉 웃는다. "잘하면 이 옥불도 장가를 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사… 사숙!" 천화대선사는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살인을 즐겨하시고… 육식과 술을 또한 즐겨 드시며… 그리고 여인들을 농락하시기가 일쑤이시니…….' 그는 내심 탄식했다. 어쨌든 그런 것은 어찌할 수 없다고 치자. 그런데 이번에는 대소림사의 계율을 철저히 무시하는 행위마저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본시 대소림사의 인물은 절대로 흑색과 붉은 가사는 걸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천일면벽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파계(破戒) 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선조들께서 남기신 절대의 유시(遺示)다. 그런데 옥불이 지금 그 유시를 깨뜨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작게 보면 옥불 개인의 일이나, 크게 보면 대소림사에 먹칠을 하게 되는 행위로까지 확대할 수 가 있는 것이니……. 지금 천화대선사가 난감하게 이 일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때, 옥불은 두 눈을 거슴츠레하게 뜨고는 설법하듯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살인을 하지 말라… 색계를 범하지 말라… 육계와 주계를 범하지 말라… 도대체가 이것들은 대소림사 를 좀먹는 고리타분한 금계들이란 말이오." "아… 아미타불……." "불타미아… 이런 불필요한 금계들을 없애지 않고서는 소림사가 클 수가 없을 것이며, 그 가치가 영 형 편없이 떨어지고 말 것이오." "……." "고로 이 옥불은 대소림사의 장래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데, 옥불의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역시 태생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로군." 냉엄한 음성이 천화대선사의 뒤쪽에서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여인의 음성이었다. "……!" 옥불의 안색에 미미한 변화가 있었다. 일신에 취담색의 궁장을 걸친, 그야말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가 그의 면전에 소리 없이 나타나 있었 던 것이다. "……!" 소녀를 보는 순간 옥불의 눈빛이 미미한 떨림을 일으켰다. 자신은 알몸이다. 그 알몸 앞에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보통의 여인이 아닌, 일신에서 우러나는 고결하고 성스러운 기품은 보는 이의 눈을 확 돌아가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류의 여인의 앞에 서면 아무리 청결한 사람이라도 스스로가 더럽고 추잡하게 느껴질 판인데, 옥불 은 보기 흉한 몰골을 여인 앞에 그대로 내보이고 있으니 잠시 잠깐이라도 수치를 느껴야함이 당연했다. 그런데 옥불은 어찌된 위인인지 그 흉한 물건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히쭉 웃는 것이 아닌가! "불타미아… 이제 보니… 곤륜(崑崙)의 냄새나는 성녀(聖女)로군. 냄새나는 사람끼리 이렇듯 한 자리에 섰으니… 장문인께서 고통스러우시겠군."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지… 조금 전 그대는 이 옥불의 태생이 어쩌구 저쩌구 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말하는 옥불의 눈빛은 믿을 수 없게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취담색 궁장의 이 소녀는 사실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 곤륜성녀(崑崙聖女). 바로 그렇게 불리는 이 시대 오대초인 중의 하나인 성결한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말했지요. 태생은 어쩔 수가 없다고……." 옥불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반문하듯 대답했다. "음… 그 말은 이 멍청한 옥불이 듣기에도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 "이 옥불의 출신이 지저분한 마(魔)의 가문이기에 이 옥불의 피도 지저분해야 한다 이 말이며… 그래서 이 옥불도 지저분하고 악해야 하며… 고로 이 옥불이 이렇듯 천방지축이란 말인가?" 옥불의 눈빛은 지극히 고요했다. 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얼음처럼 싸늘한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금 그는 뿌리고 있는 것이다. 곤륜성녀는 일순 움찔했으나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더욱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요? 당신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대소림사의 희생이 뒤따른 것이었거늘… 이제 와서 선조들이 만든 금계를 깨려하고 있으니… 그것이 잘한 짓이란 말인가요?" 천만 근의 무게가 실린 호통이었다. 천화대선사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가 구대문파가 아끼는, 그리고 자랑하는 최고의 기재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렇듯 냉담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으니 그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두 분은 제발 진정하십시오. 진정하셔야 합니다. 구대문파가 두 분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어떠하다는 것을 두 분도 잘 아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 옥불은 자신의 회의가사를 천천히 걸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더불어 그 한 몸에서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풍겨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고요히 합장을 하자 그 모습은 영락없이 석가세존의 그 자비로운 모습이었다. "아미타불……." 불호마저 바로 외우지 않는가? 이것은 믿을 수 없는 변신이었다. 그런 그는 곤륜성녀를 향해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인의 태생이 그러니 어쩔 수가 없다면… 그대의 태생은 고결하니… 그대는 이렇듯 고결하고 성결한 것이로군." "……." "후후후… 태생을 따지고 든다면 이 옥불은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 옥불은 두고볼 것이다. 그대의 그 고결함과 성결함이 언제까지 지속이 될 것인가를……." "……." "아미타불… 그날까지 이 옥불은 자제를 할 것이다. 대소림사의 제자로서 긍지를 보일 것이며 부끄럽지 않은 태도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의 고결함과 성결함이 땅에 떨어졌을 때……." 옥불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때는 본좌의 무서운 변신을 그대가 보게 될 것이다. 그때도 태생을 들먹일 수가 있을 것인지 두고보 겠다." 스스스－! 옥불의 모습이 안개처럼 아스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숙! 옥불 사숙님!" "……." 천화대선사가 황급히 그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 곤륜성녀는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진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러지 않고서는… 이런 자극을 주지 않고서는 그분의 타락을 막을 길이 없어서… 선사께서는 용서하 시기 바랍니다." "아미타불… 성녀의 깊은 마음을 어찌 노납이 탓할 수 있으리오만……." 천화대선사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면전의 여인이 옥불에게 정을 주고 있음을! 그래서 지금 이 여인의 마음이 창망한 슬픔에 젖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천화대선사는 나직이 탄식했다. "그러나 사숙께서 큰 상처를 입으신 것 같으니… 아미타불……." "……!" 곤륜성녀는 말없이 상심 젖은 표정으로 옥불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풍운(風雲)이다. 구대문파에서 일고 있는 풍운은 이렇듯 전혀 엉뚱한 곳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풍운은 과연 어떤 변수로 무림에 영향을 줄 것인지……. ■ 십매어황 제2권 第九章 또 하나의 초인(超人) 1 하나의 새로운 무덤이 천년지대의 중심부에 만들어졌다. 무덤은 매우 초라했다. 사실 암석투성이의 천년지대 안에 무덤을 만들기조차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쨌든 만들어진 무덤은 몇 개의 돌 조각으로 덮인 보기 흉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무덤에도 비석은 있었고, 거기에는 이런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었다. <일대영웅천마서생지묘(一代英雄天魔書生之墓)> 그렇다. 이 무덤이야말로 천마서생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며, 그의 길고 긴 인생의 여정이 이곳에서 종결됨을 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황혼(黃昏). 왠지 보는 이의 서글픈 심사를 자아내는 노을이 이 무덤을 진한 슬픔으로 침잠시키고 있었다. 무덤 앞에는 옷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검은 천조각 몇 개를 달랑 걸친 한 소년이 묵묵히 무덤 앞에 서 있 었다. 대략 십칠팔 세 가량의 소년이었다. 흑발은 허리까지 길게 늘어져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자세히 보노라면 상당히 수려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눈빛은 고요했고 입술은 타는 듯 붉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리 흔하지 않은 미장부임이 틀림없었는데……. 그렇다. 이 소년이야말로 비운을 타고난 단우였다. 천일(千日)! 그 삼 년이라는 세월은 그를 이렇게 변모시켜 놓은 것이며, 이제 그는 어린아이에서 어엿한 대장부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지금 그의 일신에서는 자욱한 슬픔의 빛이 일어나고 있었다. "할아버님……." 가늘게 떨리는 음성은 그의 창망한 슬픔을 말하고 있었는데, 그의 고요한 동공에는 아직도 한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비록 움직일 수는 없는 몸이었으나 언제나 단우에게는 자상하기만 했던 천마서생의 모습이었다. 천마서생, 그의 모습은 아직도 단우의 가슴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는 단우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남은 생마저 단우에게 준 것이다. "……." 단우는 오랫동안 굳어진 석상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다른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할 일을 찾아야 함은 그의 뜻이기도 했지만, 천마서생의 뜻이기도 했다. 그는 공손히 천마서생이 잠든 무덤을 향해 구 배를 올렸다. "지금은 불편하시겠지만… 참으셔야 합니다. 이 단우가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다시 이곳엘 왔을 때는 ……."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여운과 같은 음성을 흘렸다. "다시 왔을 때는 와룡복호지세(臥龍伏虎之勢)의 명당 자리로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2 다섯 사람. 정확히 다섯 사람이 한 장소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은 거대한 반석이 천장처럼 솟아 있었고, 그 반석을 수십여 개의 암석이 기둥처럼 받들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곳은 거대한 대전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곳의 중앙에는 하나의 반듯한 암반이 마치 탁자처럼 놓여 있었고, 그 탁자를 중심으로 다섯 사람이 고요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다. 그 중 한 사람은 중년(中年)의 미부(美婦)였고, 두 사람은 준미한 중년인이었으며, 한 사람은 선풍도골 (仙風道骨)의 용모를 지닌 노인이었고, 마지막 한 사람은 홍안(紅顔)의 노승(老僧)이었다. 일견하기에도 이들 모두는 범상치 않은 기도를 뿌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순간 그들 앞으로 한 사람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흑발은 풀어헤치고 일신에는 검은 천조각 몇 개를 걸친 소년이었다. 아니, 청년에 가까운 수려한 용모의 그는 바로 단우였다. 바닥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이것으로 짐작컨대 이곳에 수많은 세월 동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바로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가장 핵심 부분으로서, 천마서생과 대두혈제가 머물고 있던 곳으 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칠대초인 중 나머지 오대초인의 거처였던 것이다. 한데, 지금 단우가 지나온 곳을 자세히 보라!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는 거기에는 당연히 단우의 발자국이 남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단우의 발자국은 그 어느 곳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단우가 지금 무림인이나 펼칠 수 있는 신법이라는 것을 전개하고 있음을 말하며, 그 신법도 보통의 신 법이 아니라 최상승의 신법을 전개하고 있는 것임을 의미했다. 이것은 또한 단우가 상당한 무공을 익혔음을 증명해 주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간뇌를 타고났기에 무공이라면 어떤 종류이든 익힐 수 없었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가 지금 그 무공이라는 것을 익힌 것 같으니……. 그렇다. 천 일의 시간은 그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것을 주었던 것이니 무공을 익히는 따위가 무슨 놀 랄 일이라도 되겠는가? 놀라움은 단지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일 뿐이거늘……. 이 순간 단우는 오대초인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물론 오대초인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유체는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하다. 일천 년이란 장장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렇듯 그들이 유체가 하나 손상 없이 보존되어 있는 것은, 생 전시 그들의 무공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단계에까지 이르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모저모 살피던 단우는 나름대로 그들이 오대초인 중 누구라는 것을 판단할 수가 있었다. 우선 그는 무릎에 단정히 푸른 언월금(偃月琴)을 놓고 있는 중년인을 살펴보았다. 그는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가히 살인적인 것이었다. 무심하며 잔인하게 느껴지는……. '어금태자이리라.' 단우는 한눈에 확신할 수 있었다. 과거 어금사교의 교주인 그는 황궁의 출신으로서 고귀한 신분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파무림의 고수를 삼천 명이나 죽인 희대의 살인마왕(殺人魔王)! 그가 지금 단우의 면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살인마답지 않게 실로 수려한 것이었다. 이 정도의 용모라면 당시의 최고 미남으로 불리웠을 만했다. "……." 단우의 시선이 일신에 백의를 단정히 걸친 노인에게 옮겨졌다. 노인은 입가에 매우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 노인은 벽라성군일 것이다." 당시의 최고 덕자(德者)으며, 벽라문의 문주로서 정파무림의 하늘로 군림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현 벽라무황천의 천주인 벽라천제 백리명의 선조이기도 하다. 단우의 시선이 다시 세 번째 사람에게 옮겨졌다. 오대초인 가운데 유일한 승인(僧人)인 홍안의 노승이었다. "무위활인승……." 탐스럽게 자란 백염(白髥)은 무릎까지 내려와 쌓일 정도로 길었으며, 탁자를 응시하는 눈빛이 물처럼 고 요하기만 하다. 일신에는 잿빛 가사를 걸치고 있었으며, 당시 상당히 연로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홍안을 지니고 있었다. 합장한 손에 걸친 백팔염주(百八念珠)가 은은히 서기(瑞氣)를 발산하고 있었으며, 탁자에 놓인 선장(禪 杖)은 노을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 단우의 시선이 노승을 떠나 네 번째 초인으로 옮겨졌다. 그는 청삼의 중년인이었다. 기이하게도 어금태자와는 완전히 반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허공으로 향해 있었다. 용모는 어금태자와 비견될 만큼 지극히 수려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유약해 보이는 것이 무림인이라고 보여지기보다는 유생처럼 보여지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그 손은 섬섬옥수처럼 아름다웠다. "십기대학사… 그는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선비라 했으니… 당연히 이 사람일 것이다." 단우는 유심히 십기대학사를 주시했다. 그를 가장 주의 깊게 보고있는 것은 그가 과거에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를 펼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고, 대두혈제가 그를 유난히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분은 무슨 이유로 이 사람을 그렇게 증오한 것일까?' 단우는 고개를 흔들면서 마지막 다섯 번째 초인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인(女人)! 유일한 홍일점인 그녀는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팍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절세미부였다. 일신에 당의(唐衣)를 걸친 그녀는 단정한 모습으로 자옥소(紫玉簫)를 들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 이상의 표현을 백 날 생각한들 떠오를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여인은 그저 아름다울 뿐이었다. 그 아름다움에는 살인적인 요기(妖氣)와 더불어 고아함과 성스러운 기품이 공존하고 있었다.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시대를 풍미하며 지나간 수많은 미인들 가운데 이런 분위기의 여인은 찾아볼 수 가 없을 듯싶었다. 단우는 여인을 보자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십오 세가 되었으니 이성에 눈뜰 나이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런 뛰어난 미녀의 등장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랑을 느낀 것이라고 할까? 물론 이런 표현은 너무 급진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여인의 미모는 상식 이상의 충격을 주는 것이 었기에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절대군후 예소령……." 단우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 여인은 일천 년 전의 지상 최대의 미녀라 불리던 절대군후 예소령인 것이다. 한 나라를 망하게도 흉하게도 할 수 있는 경국의 미인! 그녀는 그런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여인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었다.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신일 뿐이다. 단우는 고개를 흔들며 애써 시선을 여인에게서 뗐다. 그리고 종합적인 주위의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오대초인의 주위를 느릿한 걸음으로 맴돌았다. "이들은 왜 이곳에서 함께 죽어 있는 것일까?" 이것은 단우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들을 보건대 갑자기 죽은 모습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죽은 그 자세가 무슨 행동인가를 하다가 갑자기 멈춘 형상이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순간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기이한 일이다… 이들은 서로 혈전 끝에 공사한 것인가?" 그러나 단우는 이내 고개를 젓고 만다.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생각이었다. 주위의 상황과 이들 오대초인의 표정, 행동을 보건대 전혀 그런 흔적이 엿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이 한 차례의 대결을 벌였다면 상처를 입었다든지 아니면 주위의 물건이 흐트러져 있어야 당연하거 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런 것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단우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후세에게 남긴 기록 따위도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철저히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무엇을 발견했는지 단우가 나직하게 탄성을 토하면서 눈빛을 섬전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의 시선은 다섯 사람의 손을 훑어보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다섯 사람의 인지(印指)는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푸른빛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도 힘들 정도로 미세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이들의 손 중 유독 인지만이 푸른빛을 띠고 있단 말인가?" 이상할 뿐만 아니라 기이한 일이었다. 단우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우연은 아니라는 확신만 섰을 뿐 더 이상의 추리는 할 수가 없었다. "혹시… 독(毒)에 중독되어……?" 단우는 머리를 섬전처럼 스쳐 가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거의 확신처럼 굳어졌다.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독에 중독되었던 것이며, 그들은 그 독을 체외로 밀어내기 위해 곧 운공조식에 들어 갔을 것이다. 운공조식(運功調息)이란 자신의 모든 공력을 동원하여 한순간에 힘을 폭발하는 것이다. 무림인이라면 습관적으로 이 운공조식을 하며, 이 운공조식을 행함으로 심신을 깨끗하게도 하고 피로를 풀기도 하는 것이다. 공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이 운공조식의 시간이 짧아지게 되는 것이니……. 독(毒)! 오대초인은 이 독을 운공조식으로 체외로 밀어내려 했던 것을 단우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독에 중독된 후 특별한 해독약이 없을 경우 이 방법이 최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오대초인은 독에 중독되어 죽은 것이다. 자신의 독을 인지까지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리하여 인지를 끊어 버리면 독에서 해방될 수도 있 는 것이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것을 행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던 모양이다. "음……." 단우는 독이 치명적이었던 것임을 짐작하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오대초인들 중 무공을 모른다는 십기대학사를 제외하고는 그 지닌 바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르러 보통 의 독으로는 그들을 절대 죽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전개된 독은 실로 가공할 절독(絶毒)이었음을 말하고 있었는데……. "누가 이들에게 독을 펼쳤단 말인가?" 단우의 눈빛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십기대학사는 무공을 모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의 인지에 푸른빛이 떠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도 상승의 무공은 지닌 듯하지 않은가?" 의혹은 꼬리를 물었다. 좋다. 십기대학사가 무공을 지닌 것은 그가 무공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기에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들이 독에 중독된 것은 무엇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이들 중 한 명이 독을 펼쳤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한 사람은 독에 중독된 현상이 없어야 하지 않겠 는가? 하지만 이들은 모두 중독되었고, 이것은 이들이 타인의 손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타인……?" 장소가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이라면 이런 가정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곳이 어디인가? 만겁조화구구대원진세의 핵심 부분으로서 오직 칠대초인이 머물고 있었던 곳이며, 거의 천 년 전의 세 월 동안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던 그런 곳이 아니었던가? 이런 곳에 칠대초인 이외의 인물이 존재할 리는 만무한 것이다. "음……?" 수많은 난제에 부딪쳐 본 단우였으나 이번 경우처럼 어려운 문제에는 일찍이 접해 본 적이 없었다. 단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상황들을 종합하고 집중 해 보기 위함이었다. 눈을 감았다 뜬 효력이 있었음인가? 단우의 눈빛이 지혜롭게 번뜩였다. "그렇다. 문제는 이들의 마지막 행동에 있었다." 이건 무슨 뚱단지 같은 말인가? 마지막 행동이라니? 단우는 더욱더 면밀히 다섯 사람을 살피고 자신의 생각에 어떤 확증을 잡았다. 오대초인의 손은 각기 탁자에 올려져 있거나 아니면 손가락을 어느 한 곳을 향해 뻗은 형세이거나 혹은 무기를 든 자세이기도 했는데……. 기이하게도 그 손들은 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려는 형상이 아닌가? 그것은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미세한 변화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죽기 전 한 장 소를 향해 동시에 공격을 전개하려 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단우의 시선은 호기심을 띠고 한 곳으로 향했다. 물론 오대초인의 마지막 행동이 가리킨 방향이었다. 천장이었다. 오대초인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부터 정확히 상단 중심이었는데, 천장은 거대한 반석으로 이루어져 있었 다. 단우는 그곳을 살폈다. 순간, 그의 눈빛이 투명하게 빛났다. "역시……." 단우의 신형은 허공으로 쏘아져 올라갔다. 실로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 단우는 순식간에 반석 위로 올라섰다. 그는 반석 아래에서 푸른 반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대초인이 중독되었던 독과 같은 종류의 독이 그곳에도 물들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두께 한 자 이상의 암반이 푸르게 타 들어가 있다는 것은 그 독이 실로 가공할만한 독임을 증명하는 것 이었다. 휘이이잉－!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평평한 암반 위로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단우가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 드러나고 있었다. 인간(人間), 아니 백골(白骨)이 되어 버린 죽은 자의 시신(屍身)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시신은 매우 특이했다. 전체가 백골로 화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반신만이 백골로 화해 있었고, 상반신은 살아 있는 듯 그대로 형체를 보존하고 있었다. 일신에 걸친 빛바랜 옷은 검은 장포였고, 백골로 변한 하반신을 완전히 덮고 있는 긴 흑발은 바람에 휘 날리고 있었는데……. 용모를 보자니 결코 중년은 넘지 않은 인물임을 알 수가 있었다. 휘날리는 흑발 사이로 간간이 드러나는 얼굴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왼쪽 뺨에 긴 검상이 있는 것 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단우가 느끼는 감정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에게서 지독하고 처절한 한(恨)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누구일까?" 이것이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단우는 그 인물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누구이기에 이곳에서 죽어 있는 것일까? 이것은 비사이다.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단우는 흑의인을 살피던 중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흑의인의 앞에는 한 가지 옥함이 놓여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푸른빛을 띠는 분말이 희미하게 쌓여 있었 다. '독이다.' 단우는 어렵지 않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그 옥함이 놓여진 자리 아래에 오대초인은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음……." 단우는 옥함의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옥함의 주위로 쓰여진 깨알같은 글자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 필체가 심하게 흐트러진 것으로 보아 그것은 급박한 상황하에서 쓰여진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단우는 마음을 진정하고 그 글을 읽어 나갔다. <죽어 가는 이 순간에 이 글을 남길 수 있음은 어쩌면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을 영원히 미 궁에 두려하지 않으려는 하늘의 뜻……. 이 글을 쓰는 본인은 유령대제(幽靈大帝)라 한다. 이 명호는 본인 스스로 만든 것이다. 유령대제라는 그 명호는 전혀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다. 왜냐하면 본인은 이 땅에 전혀 나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후후… 이 땅에 칠대초인이 있었기에 본 대제가 들어설 자리는 아예 없었다. 그것은 본인에게 유감이었다. 그래서 본 대제는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황하에서 칠대초인의 움직임을 살펴 왔고, 그 와중에 서 그들의 경이로운 무학에 크게 감탄을 했던 것이니……. 죽기 이전까지 그들은 본 대제의 영웅이었다. 본 대제는 암암리 수많은 어린아이에게 그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나쁜 점도 좋게 해석하여 듣는 어 린아이에게 우상(偶像)으로 삼고자 했으니……. 칠대초인! 그들은 본 대제의 꿈이며 빛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본 대제는 무림에서 차지할 위치가 없었으나 그들이 본 대제의 영웅이었기에 만족할 수가 있었다.> 여기까지 빠르게 읽은 단우는 가만히 유령대제라는 인물을 되뇌었다. "유령대제… 이상한 일이로군. 그가 칠대초인을 이렇듯 영웅으로 생각했다면 무슨 이유로 그들에게 독을 전개한 것일까?" 단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글로 시선을 돌렸다. 글은 점차 심하게 흐트러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본 대제의 영웅일 수가 없었다. 십기대학사. 그는 벽라문의 총사라는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의 그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황궁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금태자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놀라지 마라. 그들 두 사람은 배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십기대학사는 천자(天子)의 적자(嫡子)였고 어금태자는 천자의 서자(庶子)였으니, 비극은 바로 이 두 사 람으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 한 여인의 등장은 이 두 사람의 파멸을 의미했다. 절대군후 예소령! 그녀는 최고의 미녀였다. 동정호를 유람하다가 우연히 만나면서 그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아아……. 장래 천자가 될 고귀한 신분의 십기대학사와 이기적이고 무정한 성품의 절대군후 예소령의 인연은 사실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이들의 비극은 어금태자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서자라는 신분상의 이유로 황궁에서 냉대와 멸시를 받았던 어금태자가 의도적으로 절대군후 예소령에게 접근했던 것이자. 그러자 이미 십기대학사의 유약함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절대군후 예소령은 자연스럽게 어금태자에게 마음을 주고 만 것이다.> "으음……." 단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십기대학사가 황태자의 신분이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절대군후 예소령과 연인 사이였다는 사 실도 놀라운 것이었다. 뿐인가? 이들의 삼각관계는 단우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시키기에 이르니……. 비사(秘事)! 초인들의 세계에 감추어져 있던 그 놀라운 비사는 이렇게 일천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벗겨지고 있는 것 이다. ■ 십매어황 제2권 第十章 비사(秘事), 비사(秘事), 비사(秘事) 1 <절대군후 예소령의 변심은 좌절을 몰랐던 십기대학사에게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무림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십기대학사는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어금태자가 당시 어금사교의 교주로서 천하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했던 것만큼, 그리고 절대군 후 예소령 역시 어금태자에 버금 갈 만한 위치에 올라 있었던 만큼, 비록 황궁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 나 그 힘으로 복수를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기에 그의 복수는 요원할 수밖에 없었 다. 여인에게 실연(失戀)을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 흔하게 발생하는 일로 복수까지 다짐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문제는 그가 황 태자의 신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지고무상한 신분으로서 일개 무림의 여인에게 실연을 당했다는 사실은 가히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황궁을 배반한 어금태자이기에 그에게 있어 복수는 숙명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쳤던 것이다. 그는 황태자라는 신분마저 내팽개친 채 무림으로 뛰어들었었다. 비극은 이렇게 해서 가일층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의 뛰어난 지혜는 그 빛을 보기 시작했고, 곧 무림인들의 주의를 받게 되 었으니……. 그는 그 뛰어난 지혜 덕분으로 벽라문의 총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무서운 것은, 그로 인해 정사무림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들어 갔다는 것이었다. 그는 교묘하게 정사무림의 충돌을 유인했고, 끝내는 정사무림은 사상 최대의 대결전을 치르게 되니……. 수많은 정사무림인들이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죽어가 야 했고, 마침내는 십만대산에 이르러 종말을 맞이 하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비극은 그런 그를 세상이 철저히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 단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서운 일이다. 한 인간의 복수심이 결국 무림의 종말을 도래케 하였으니…….' 유령대제의 글은 천 년 전의 비극을 안고 계속되고 있었다. <대결전은 막바지에 이르고……. 정파무림의 일만고수는 절망적인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본 대제의 바람은 이쯤에서 십기대학사의 복수심이 그쳐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있었으니…….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정파무림인에게 아흔아홉 개의 진세(陣勢)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고, 그것으 로 사파무림인들의 추격을 막자는 제안을 내놓자 위기에 처한 정파무림인들은 앞뒤 가릴 생각도 없이 그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것으로 무림은 끝이었다. 아흔아홉 개의 진세는 정사무림인의 무덤이 되었고, 마지막 진세가 펼쳐졌을 때 남은 사람은 오직 칠대 초인뿐이었다. 이것은 십기대학사의 머리 속에 치밀하게 계산된 그대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실연을 당한 그 한 가지 이유로 인해 십기대학사는 무림의 파멸을 원한 것이었고 또 그대로 된 것이다. 죽이고 싶도록 그가 저주스럽다. 세상이 모르고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그는 가공할 만한 무학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금태자가 황궁의 십만무경을 익혔듯이 그도 일찍이 십만무경을 섭렵했던 것이니……. 실제로 그의 무공은 육대초인에 비해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그는 암암리에 천년대자문이라는 거대한 문파를 세워놓고 있었으니……. 천년대자문을 이 결전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정사무림인들을 모두 파멸시킨 후 천년대자문으로 무림 을 지배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이를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아흔아홉 개의 진세는 십기대학사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자 십기대학사 또한 이 진 세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자 십기대학사는 마침내 자신의 진실한 신분을 드러내 놓기에 이르렀다. 변용한 모습을 진면목으로 환원시켰으며, 자신이 이 모든 파멸을 주도한 인물임도 밝혔다. 이에 그와 한 자리에 있던 어금태자와 절대군후 예소령, 그리고 벽라성군과 무위활인승은 경악하고 말 았다. 특히 절대군후 예소령과 어금태자의 경악은 극에 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본 대제가 그들을 죽여야만 했던 문제는……. 정사무림인 수십만 명이 죽은 지금에 와서 어금태자와 절대군후 예소령, 그리고 십기대학사는 죄를 뉘 우치기 이전에 잘잘못만을 따지고 있었으니 이 어찌 한심한 노릇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본 대제의 우상이며 영웅일 수가 없었다. 거기에 벽라성군과 무위활인승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지적을 못하고 있었으니……. 이럴 수가 있는가? 잘못은 십기대학사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벽라성군과 무위활인승이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가 황태자의 신분에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오직 그만이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에 그를 비호하고 있는 것인가? 그럴 것이다. 현재는 십기대학사가 이 진세의 변화를 깨닫지 못했어도 그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는 능히 이 진세를 빠져 나갈 방법을 찾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벽라성군과 무위활인승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살기 위해 십기대학사를 비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선자(僞善者)들이다. 철저한 위선자들이다. 사랑을 배신한 절대군후 예소령도 더럽고, 그 사랑을 가로챈 어금태자라는 인간도 추잡하며……. 살기 위해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벽라성군과 무위활인승도 가증스럽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더럽고 치사한 인간은 십기대학사이다. 그는 복수를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자책의 빛이 없다. 참을 수가 없다. 죽일 것이다. 그들이 비록 이 시대의 절대자들이라 하나 본 대제는 그들을 죽일 능력이 있다. 그것은 본 대제는 그들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만 그들은 본 대제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 다. 물론 본 대제의 무학은 그들에 비해 보잘것이 없다. 그러나 독술(毒術)만큼은 가히 이 시대 최고라고 자부하는 본 대제이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냄새도 없는……. － 무형지독(無形之毒). 바로 그 무형지독이라면 저들을 순식간에 죽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 대제는 저들을 죽일 수는 있었을지언정 본 대제 또한 저들이 마지막으로 펼친 가공할 무형의 강기에 의해 전신 내장이 모조리 녹아 내리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아아! 그들은 무형지독에 중독되고서도 무공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은 본 대제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내가 아니더라도 죽여야 할 이 시대의 위선자들을 죽였기에 후회는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저들 죽어 간 자들의 무공이 그대로 이곳에 묻히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것이다. 후세의 연자(緣者)가 있어 저들의 무공을 모두 얻고, 저들이 범한 죄를 대신 사할 수만 있다면 본 대제 는 더 이상의 바람이 없겠다. 그리고 본 대제의 유령환허보(幽靈幻虛步)와 독술을 후세에 남겨 준다면…….> 글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 한동안 단우는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이제 그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후련함도 있었지만, 알아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추잡한 무림의 비사였기에 내심 씁쓸할 뿐이었다. "유령대제… 당신의 마지막 처사는 존경할 만한 것이었소." 단우는 숙연해짐을 느꼈다. 칠대초인을 영웅으로 생각했던 사람……. 그들과 동시대의 태어났기에 그림자가 되어야 했던 비운의 인물! 그러나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적어도 이곳에 죽어 있는 오대초인보다는 영웅인 것이다. 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았으나… 이렇듯 허탈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이 물음은 공허하게 허공에 여운처럼 오랫동안 맴돌고 있었다. 단우는 자세를 바로했다. 그리고 유령대제를 향해 공손히 대례(大禮)를 올렸다. 절을 하는 그의 마음은 그도 자세히는 모른다. 그러나 절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위대한 사람이오. 당신의 뜻대로 이 단우는 저들의 무공을 익힐 것이며… 그 무공으로 이 땅의 난세를 평정하여 당신을 위로할 것이오. 그리고 당신의 무공도 연성하여 당신의 위대함을 이 시대에 선 보일 것이오." 죽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이제는 살아야 할 운명의 단우인 것이다. 칠대초인! 그들 모두의 무공을 한 몸에 지닌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 사람으로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극에 이른 무공을 다른 한 사람이 전해 받아 익힌다는 것도 어려 운 일이다. 하물며, 단우는 일곱 사람 아니 거기에 유령마제의 무공을 곁들여 연성해야 하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상상이 가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단우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었다. 그 힘으로 그는 다시 삼 년의 세월을 밀고 갈 것이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 하였던가? 절대 멈춤이 없는 세월이기에 가는 세월 또한 돌아오는 법 없다. 삼 년의 세월……. 참으로 간단없이 흘러갔다. 단우의 나이도 십팔 세가 되었다. 완전히 성숙한 한 개체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시대를 앞서가는 거대한 초인으로 탄생이 된 것이니……. 2 안개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석성은 온통 검은 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이 검은 석성은 퍽이나 눈에 익었다. 그렇다. 이 검은 석성은 천년지대 안에 세워진 흑마련의 총단이었다. 그러나 그 실체가 무림에 알려진 적은 없다. 더불어 이 검은 석성이 흑마련의 총단이라는 사실 또한 철저한 비밀 속에 있었다. 스스스－! 안개는 파도처럼 출렁이고, 주위의 분위기는 음산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죽음과 같은 정적에 휩싸여 있는 이곳에 갑자기 들려오고 있는 저 소리는 대체 무엇인가? 쩡그렁－ 쩡그렁－! 듣기에 따라서 이 소리는 금속성 같기도 했고 혹은 악마의 호곡성 같기도 했는데, 이 소리가 있기에 이 일대는 더욱 음산한 분위기로 침잠해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 정적을 깨는 탄식성도 있었다. 탄식은 회색빛에 젖어 있는 한 사람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있었다. 검은 도포를 걸친 그의 얼굴은 긴 흑발에 가려져 있었는데…….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그대로 죽음의 회색빛이 아닌가! 분명 그는 검은 도포를 걸치고 있었으나 그것이 회색빛으로 보이는 것이며, 검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 었으나 그것이 회색빛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의 두 발을 보라! 거기에는 실로 거대한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그 족쇄는 길고 긴 하나의 쇠사슬에 연결이 되어 있었고 쇠사슬은 검은 석성으로 통해 있었으니……. 이 괴인은 검은 석성의 정문에서 백 장의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어찌 보면 검은 석성에 연결이 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처럼 보인다. "아……." 그의 입에서는 다시 나직한 탄식이 흘러 나왔다. 그의 잿빛 시선이 허공으로 망연히 향해졌다. "한 번의 실수가… 단 한 번의 실수가 나를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하다니… 이제 와서 내가 누구를 원 망할 수가 있겠는가?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의 실수쯤은 하는 것이고, 그 실수는 인생의 경험이 되며 완성을 알리는 토대 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괴인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이 된 듯했으니……. "흐흐흐… 그 날… 그 아이를 놓친 것은 분명히 나의 자만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의 인생을 멋대로 만들 어 버린 교만이었던 것이다. 흐흐흐……." 쩔그렁－ 쩔그렁－! 금속성은 괴인이 움직일 때마다 한을 토하듯 울리고 있었다. "흐흐흐… 내 비록 흑마사십사령 중 막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장래가 보장이 된 것이었다. 인간이 누 릴 수 있는 권세와 명예와… 부귀를 누릴 수가 있었던 자리였다. 그런데 무엇인가?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흑마사십사령 중 막내라니! 그렇다면 언젠가 단우와 자하고금마유사, 그리고 대자율법사를 공격했던 절대의 무공을 지니고 있던 흑 무상이 바로 이 괴인이란 말인가? 그랬던가? 이 괴인이 바로 흑무상이었던가? "그 어린아이를 잡아들이지 못한 단 한 번의 실수가 그 모든 명예와 부귀와 야망을 거두어 가고 만 것 이다. 흐흐흐… 그때의 자만과 교만이 없었던들… 흐흐흐……." 흑무상은 절규를 토하고 있었다. 일신에 지닌 무공이 하늘을 덮고도 남음이 있는 그였으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의 그는 한 마리의 개와 같은 비참한 신세이거늘……. 문득 그의 눈빛이 지극히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 그는 그런 눈빛으로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잡히지 않는 환상을 잡으려는 듯, 그의 표정은 어떤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그 어린아이가 살아 있어만 준다면… 그리고 들어간 그 죽음의 땅에서 나와만 준다면… 이 흑무 상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어린아이란 바로 단우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렇다. 그는 지금 단우가 살아나와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우를 잡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번의 실수는 무마되는 것이기에…….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어찌 그 죽음의 땅에서 살아나올 수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는 죽어 가 는 운명이었던 것을……." 다시 그는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당시 그는 불과 이삼 년을 더 살 수가 없는 운명이었다. 흐흐흐… 그런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는 만무한 것… 이 흑무상의 운명은 이미 끝이 난 것이다. 흐흐흐……." 쩔그렁－ 쩔그렁－! 그의 심사를 알리려는 듯 금속성은 더욱 처량하게 끌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중얼거림이 막 끝나는 그 순간이었다. "당신의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나직한 음성이 그의 고막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는 비록 나직했으나 흑무상에게는 벼락처럼 크게 들리는 것이었다. "……!" 흑무상의 무심한 눈빛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면전에 선 한 사람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지 역시 무심한 시선으로 흑무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도대체가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었다. 옷이라곤 국부를 가린 검은 천조각이 모두였고, 몇 날 며칠을 물 근처에도 가 보지 않았는지 그 알몸에 는 땟국물이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이건 거지 중에도 상거지라 할 만했다. 바닥까지 흘러내린 흑발은 산발이 되어 있었고, 길게 자란 손톱과 발톱을 보자니 방금 무림에서 빠져 나온 귀신 같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흑발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두 눈이었다. 인간의 눈이란 생긴 형태와 눈빛에서 그 미추가 가려지는 법이다. 눈빛이 아무리 빛나고 아름답더라도 생긴 눈이 별볼일 없으면 그저 그런 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눈의 형태가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눈빛이 썩은 동태의 그것과 같다면 그것도 별볼일 없는 것이 다. 하지만 이 알몸 청년의 눈의 형태와 눈빛은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눈빛은 겨울 하늘처럼 차가운 아름다움을 뿌리고 있었고, 눈의 형태 또한 어떤 여인도 따를 수 없을 만 큼 완벽한 아름다움을 뿌리고 있었으니……. '아…….' 그 눈을 보는 순간 흑무상은 그 아름다움에 취해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알몸 청년의 정체였다. 신비하고 경이로운 것이다. 그의 이목을 속이고 이곳에 소리 없이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나타날 수 없는 이곳에 자신이 본 적이 없는 인간이 나타났다는 그 자체가 우선 경이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흑무상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무심한 눈빛을 회복하며 차갑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 알몸의 청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무심히 그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흑무상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려는 순간, 알몸의 청년이 불쑥 말문을 열었다. "흑무상… 당신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오?" 실로 엉뚱한 반문이었다. 흑무상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족쇄는 보잘것 없는 강철조각인 것이거늘… 당신의 무공이라면 쉽게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인데… 당신은 어째서 이곳에서 절규하며 한탄만 하고 있는 것이오?" "……!" "끊어 버리는 것이오.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오. 그 한 조각의 사슬에 매달려 울고불고할 이유는 없는 것이오." 무슨 소리인가? 흑무상의 마음에 선과 악의 신이 있다면, 지금 악의 신이 흑무상에게 달콤한 꼬임을 흘리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는데……. 이때, 흑무상은 상대의 정체야 어찌됐든 상대의 말에 완전히 혼돈이 되고 있었다. "그… 그렇지… 이 족쇄야 끊어 버리면 그만인 것을……." "……!" "그리고 이곳에서 도망치면 그만인 것을… 보는 사람은 없다, 보는 사람은 없어. 흐흐… 내가 원한다면 나는 충분히 이곳에서 탈출할 수가 있는 것이야." 그는 족쇄를 손으로 잡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행동을 못하고 있었다. 그의 전신은 갈등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 아니야. 이것이 보잘것 없는 쇳조각임에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야. 그럼에도 이 쇳조각을 어쩌지 못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야."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무서운 것은… 이 족쇄가 아니라… 나를 잡아 둔 것은 이 족쇄가 아니라… 흐흐흐… 태… 태상련주였 었어. 그가 무서웠던 것이야. 그가 나에게 이것을 강요한 이상 나는 이곳을 떠나서는 안되었던 것이야." 공포(恐怖)! 그의 회색빛 동공에는 지금 공포와 두려움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를 배신하면… 고통은 더욱 가중되는 것이다. 세상의 어디로 도망간다 해도… 결국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야. 이 길만이 그래도 살 수 있는 한 가닥 희망 이 있기에… 흐흐흐……." 그는 머리를 감싸쥐고 절규하다가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광기에 젖은 눈에서는 오싹한 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너… 흐흐흐…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나를 유혹하는 것이냐?" 쩔그렁－ 쩔그렁－! "흐흐흐…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냐… 죽일 놈……." 그는 천천히 알몸 청년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어느 새 두 개의 철륜(鐵輪)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핏빛의 구천신마륜! 언젠가 자하고금마유사와 대자율법사 등이 이 구천신마륜에 당하여 죽어 가야만 했다. "……." 그러나 알몸 청년은 조금도 동요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땟국물이 자자한 얼굴에 한 줄기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당신에게는 절실히 필요로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무엇이오?" "흐흐흐… 사람이다." 흑무상은 주저 없이 말을 씹어 내뱉으며 다가서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람……?" 알몸 청년은 의혹의 표정으로 물었다. "사람이라니… 그가 누구인가?" "흐흐흐… 단우라고 하는 어린놈이지. 아마 그놈은 죽었을 것이다. 지금쯤……." "아… 단우……." 알몸 청년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멍청해진 것은 흑무상이었다. "아… 알고 있단 말이냐? 그 어린놈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거늘……." "그러나 나는 알고 있소." "어떻게?" "핫하하……." 알몸 청년은 대답 대신에 낭랑한 웃음을 흘렸다. 그럴 때마다 흑발은 산발적으로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는데……. 그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에도 아름다움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쓸어 내리는 청년의 손동작 하나에도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는데……. 수려(秀麗)했다! 준미(俊美)했다! 앞으로 흘러내린 흑발이 거두어지며 드러난 청년의 얼굴은 참으로 뚜렷하고 선명한 오관을 지니고 있었 다. 비록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으나, 자세히 보노라면 상당히 섬세하며 뚜렷한 윤곽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만약 그 얼굴에 땟국물만 지운다면 이 땅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이 거기에서 드러날 것만 같았는데…….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은…….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코앞에 있다고 한다면 믿겠소?" ■ 십매어황 제2권 第十一章 단우(亶雨)의 죽음 1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 흑무상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청년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오. 본인이 바로……." "……?" 흑무상은 흠칫하며 한동안 청년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휘둘렀다. "아니야! 단우가 아니야. 네놈의 그 어디에도 그 어린놈의 모습은 담아 있지 않아." "육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오?" "아니지. 내 눈에 썩지 않은 이상 네놈은 단우가 아님이 분명하다." "확신할 수 있소?" "물론이다." "웃기는 일이로군." 청년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는 다시 흘러내린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단우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면… 그 당시의 어린아이의 모습이 단우의 진면목이 아님도 알아야 하거늘… 아니 알고 있을 것일진대……." "……!" "이제 와서 본인의 얼굴이 그 어린아이와 같지 않다 하여 본인이 단우임을 부정하다니……." "그… 그렇다면……." 흑무상의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서야 무엇인가를 느낀 것일까? '그렇지. 그때의 어린아이의 모습은 천년대자문의 대종사의 모습이었지… 단우라는 아이의 진면목은 아 니었던 것이야.' 그는 새삼 단우라는 청년을 면밀히 살폈다. "네가 진짜 단우란 말이지?" 그는 점차 흥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소. 본인은 분명히 단우라고 하오." 그렇다. 알몸 청년은 분명히 단우인 것이다. 육 년의 세월이 지났기에 자하고금마유사가 그에게 전개한 만령이체천교대법은 풀린 것이며 자신의 얼 굴을 되찾은 것이다. 보라! 이 수려한 얼굴은 단우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어린 모습이 그대로 성장하기만 한다면 천하제일의 미남자가 될 것이라고……. 병약한 그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었지만 그 윤곽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오……!" 한동안 단우를 바라보던 흑무상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탄성을 토해 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희열과 기쁨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크핫하하… 이것은 하늘의 뜻인 게다! 이 흑무상을 고통에서 구하고자 하는… 크핫하하……." 광희에 젖은 웃음이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찾은 것이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네놈만 죽인다면 나의 한 가지 실수는 무마되는 것이다. 그리되면… 나는 흑마사십사령의 일원으로 다 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며… 흐흐흐… 오늘의 고통을 배로… 아니 그 이상으로 무림에 돌려줄 수가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광희에 젖기 이전에 한 가지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단우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수가 있었으며, 그가 어떻게 그 죽음의 땅에서 살아날 수가 있었는지 를……. 그랬더라면 그는 이토록 기뻐서 날뛸 수만은 없었을 것이리라. "흐흐흐… 너는 나를 위해 죽어야 한다… 너로 인해 받은 고통이기에… 너는 나를 위해 죽어야 하는 것 이다." 캉－! 그대로 그의 두 발을 채웠던 족쇄는 한 줌의 가루로 변해 떨어져 나갔다. 더 이상 그것을 차고 있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죽이면 되는 것이다. 단우를 죽이면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 할 필요는 없었다. "죽어랏－!" 그는 벼락같이 단우를 향해 구천신마륜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말이 휘두르는 것이지 슬쩍 손을 움직였을 뿐인 데도 구천신마륜은 그의 손을 떠나 이미 단우의 목을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쾌애애액－! 더 이상 빠를 수가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단우가 전의 어린아이가 아님을……. "어린아이의 장난이로군." 단우는 웃었다. 순간, 그는 희미하게 움직였고 이미 구천신마륜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불가사의한 움직임! 그것은 유령마제의 유령환허보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칠대초인의 이목마저 피할 수 있었던 불세의 신법이 아니던가. 때문에 아무리 눈이 좋은 흑무상이었지만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이… 이럴 수가……." 흑무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무공이 어떠한 종류의 것이던가? 천년지대 안의 사라져 버린 일천 년 무림사의 비공이 아니던가? 비록 자신이 얻은 무공이 당시 삼류인물의 무학일지라도 그것은 가공할 것이었다. 한데 단우는 그것을 가볍게 피해 낸 것이다. 더욱이나 자신은 단우의 움직임조차 전혀 볼 수가 없었으니……. 그는 당황했다. 그는 황망히 구천신마륜을 움켜쥐었다. "헉……." 갑자기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손이 허전했다. 다급히 자신을 손을 살펴보는 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어찌된 영문인가? 그의 손에는 구천신마륜이 없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이, 이게… 대체……?' 바로 그때였다. "이것을 찾고 있소?" 단우의 음성이 바로 그의 귓전에서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기겁하여 몸을 황급히 돌리는 순간, 그는 볼 수가 있었다. 단우의 손에 들린 자신의 구천신마륜을……. 그리고……. "받으시오." 단우의 이 음성도 들을 수가 있었다. 파아아아－! 구천신마륜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허억!" 흑무상은 사색이 되어 피하려 했지만 피할 한 치의 틈도 없었다. '아아… 무… 무서운 무공이다.' 이제야 이 사실을 느낀 것이다. 맹세하건대, 구천신마륜은 자신의 병기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백 년의 시간을 더 주고 다시 이 구천신마륜을 펼치라 한들 지금 자신을 향해 밀려드 는 구천신마륜의 위력 그 이상을 도저히 보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콰지직－!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이 그의 회색빛 목에는 구천신마륜이 쑤셔박혔다. "끄으……." 흑무상은 불신과 회의와 절망의 눈빛으로 단우를 주시하며 천천히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끄으… 그대는… 그… 그대는… 칠대초인의… 무… 무학을……." "……."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면 너무 늦은 것이 아니오?" "아아……." 흑무상은 천천히 바닥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의식은 점차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잡으려 했으나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잡기에는 늦어있었던 것이다. 단우는 천천히 검은 석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대는 욕망을 위해 나를 기다려 왔고… 죽이려 했지만… 이 단우는 그대에게 죽은 두 사람을 위해 이 날을 기다려 왔고… 이제 그대를 죽이는 것이다." "허헉……." "이제 그대에게 볼일은 더 이상 없어졌다. 저 검은 석성만이 눈에 거슬릴 뿐이야." 단우는 검은 석성을 향해 걸어간다. 흑무상은 그런 단우의 등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헉헉… 너… 단우… 사… 살아서… 나… 나올 수가 없을… 것… 이… 다… 결코… 살아서… 헉……." 죽어 가는 이 마당에 무슨 미련이 그리 많아……. 무슨 증오가 이리도 커서 이런 더러운 저주를 씹어 뱉어야 하는 것인지……. 결국 그의 고개는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을……. 그러나 그는 웃고 있었다. 죽어 가는 그 순간에도 그가 웃어야 했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2 터벅터벅－! 단우는 길게 발 소리를 내며 검은 석성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흑마련의 총단이던가?"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왠지 음산하여 다시 한 번 되뇌어 본다. 정적이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이 검은 석성의 전부였다. "인간은 고사하고 쥐새끼 한 마리 없지 않은가?" 단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텅빈 듯한 이 느낌은 무엇인가? 왠지 불안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살아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흑무상의 마지막 말이 귀에 거슬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발 소리만이 공허하게 정적을 깨고 있었다. 음산한 바람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단우는 이 순간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간뇌를 타고났기에 짐승과 같은 예리한 감성을 지니고 있는 단우이다. 예전에는 간뇌가 전혀 그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지금은 간뇌의 활성화로 인해 대자연의 변화마저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 단우였다. 즉, 자신의 죽음마저 정확히 감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순간 그는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 그리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음모다." 비로소 단우는 확신을 잡을 수가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쿵－! 엄청난 폭음이 저 멀리 석성의 일편에서 들려 왔다. 시뻘건 불길이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다. 하나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콰콰쾅－! 쿠르르－ 콰콰쾅－! 하늘이 무너지고 당이 균열되는 듯한 굉렬한 폭음이 석성의 사방에서 거의 동시에 터져 오르는 것이었 으니……. 무서운 일이었다. 석성 전체가 폭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인 것이다. "화약냄새……." 단우는 경악했다. 그렇다.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이곳에는 실로 엄청난 양의 화약이 매장되어 있었고, 그것이 지금 일제히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피… 피해야 한다." 단우는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 올렸다. 하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화약의 폭발로 인한 거대한 소용돌이가 천지사방에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석성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 면서 그 파편이 이미 단우의 주위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이곳을 빠져 나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대라신선이라 해도 이 경우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콰콰쾅－ 쿠르르르릉－! 연쇄적으로 터지는 굉렬한 폭음만이 전부였다. 단우의 신형은 이 충천하는 화염(火焰)에 완전히 파묻히고 말았다. 아무리 강한 무공을 소유한 그일지라도 이곳을 빠져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비극이었다. 진정 이것은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한 위대한 초인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 언제부터인지 두 사람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는 검은 석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노일소(一老一少). 출렁이는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는 그들은 일견하기에 주인과 종복처럼 보였다. 일소(一少), 그는 일신에 희디흰 도포(白衣道袍)를 걸친 이십칠팔 세 가량의 청년이었다. 그는 분가루를 바른 듯 유난히 흰 피부를 지니고 있는 수려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그는 한 마리의 나귀를 타고 있었는데, 그 나귀 역시 눈부시게 희다. 기이하게도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질은 얼마 전에 죽은 흑무상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흑무상이 어둡다면 이 청년은 지극히 밝았다. 일신에 걸친 옷의 빛깔도 그렇지만 얼굴의 표정 또한 그러했다. 그의 입가에는 습관처럼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고, 검은 석성이 붕괴되는 광경을 주시하고 있는 눈빛 또한 부드럽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나귀의 옆에서 고삐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老人)이었다. 그런데 그의 머리카락은 핏물에 염색이라도 한 것처럼 붉은색(赤色)을 띠고 있었고 일신에 걸친 의복 또한 핏빛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팔관필을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하며 자세가 전형적인 기마의 형상이 아닌가?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옷! 거기에다 그의 특이한 자세는 그를 아무리 좋게 보아 주고 싶어도 보아 줄 수 없는 전형적인 악인의 모 습이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검은 석성의 폭발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적발노인이 무심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가 죽었을까요?" 백의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나올 수 있는 확률은 백에 일 할뿐이다. 그 정도라면 죽었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흑무상을 일 초만에 죽인 강자입니다." 적발노인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백의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흑무상이 그를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만약 흑무상이 본 백무상(白武上)을 그자처럼 생각하며 공격했다면… 이 백무상은 흑무상을 반초만에 처치했을 것이다."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그런 그를 주시하는 적발노인의 표정은 절대적인 신뢰(信賴)와 믿음, 바로 그것이었다. － 백무상. 이 존재를 무림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흑마사십사령 중 제사십삼령이자 흑무상의 바로 윗서열의 인물이었다.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그의 무공이 흑무상에 비해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으나 실제로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흑마사십사령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한 순위의 차이라 해도 그들의 무공은 하늘과 땅 차이를 보이는……. 이런 백무상의 자부심은 아무도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최소한 그를 알고있는 인물이라면……. 백무상은 나직하게 웃었다. "이제 우리의 임무는 끝이 났다. 흑무상이 죽고… 검은 석성은 붕괴되었고… 가장 중요한 단우라는 인물 이 저 검은 석성의 무덤에 묻혔으니……." 그는 확신하는 것이다. 단우의 죽음을……. "가자." 그는 적발노인을 향해 명을 내렸다. 적발노인은 군소리 없이 고삐를 잡고 나귀의 방향을 돌렸다. 딸랑딸랑－! 나귀의 목에 매달린 방울이 청아한 울음을 토해 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아직도 폭음이 터져 나오고 있 는 검은 석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콰콰쾅－! 쿠르르르－ 콰콰쾅－! 3 때는 춘삼월(春三月) 호시절(好時節)이다. 겨울의 차가움은 아침, 저녁에서나 느낄 수가 있는 봄. 파릇한 새싹이 움터 오며 아지랑이가 살랑이며 피어 오르고 있었다. 보아서 좋고, 느껴서 좋은 계절인 것이다. 황혼이 대지를 평온하게 덮고 있을 무렵. 한 대의 마차가 막 구련산의 한 소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마차는 눈이 부시게 화려했다. 이 마차는 눈부시게 새하얀 여덟 필의 설리총이 끌고 있었으며, 전체가 황금과 은을 비롯하여 온갖 명 주보옥(明珠寶玉)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이 마차는 세상에서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대단히 화려한 것이었다. 마부석에는 화려한 금의(金衣)를 걸치고 있는 두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두두두－ 두두두두－! 마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달릴 때마다 마차의 주렴에 매달린 명주보옥이 찰랑이고 있었으며, 황혼에 반조되어 찬란한 보광을 천 지사방으로 뿌리고 있었다. 화려했다. 아무리 봐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아름다운 마차였다. 이런 정도의 마차를 탈 수 있는 인물이라면 대단한 부호(富豪)이거나 명문세가의 인물임이 분명했다. 과연 누구일까? 누가 마차에 탄 것일까? "앗… 사람이다." "마차를 멈추어라." 갑자기 당황한 외침이 마차의 마부석에서 터져 나왔다. 이곳은 굽이길이었다. 마차의 달리는 기세도 문제였지만, 한 굽이를 막 돌아 나올 때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기에 미 처 멈추고 자시고 할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금의노인이 뒤미처 사람을 발견하고 마차를 멈추었을 때는 이미 마차의 바퀴는 바닥의 사람을 깔아뭉개 고 지나친 뒤였던 것이다. "이… 이런 재수가 없으려니……." 황급히 금의노인은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피투성이의 사람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건 거지가 아닌가?" "그것도 알몸의 거지……." 그들은 입을 딱 벌렸다. 그렇다. 피투성이의 인물은 분명히 거지였다. 알몸이었으며, 그 알몸은 그야말로 땟물 투성이가 아닌가? 거기에다 그 몸에서 썩은 냄새마저 진동하고 있었다. "우욱!" "으으……." 금의노인들은 코를 막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분명히 자살이다.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을 감행한 것이다." "우리의 책임은 아니니 이대로 길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군." 두 사람은 힐끔 마차를 보며 다시 마부석으로 걸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죽었나요?"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마차로부터 흘러 나왔다. 심산을 흐르는 계류의 속삭임처럼 청아한 음성이었다. 두 금의노인은 당혹한 기색으로 황급히 대답했다. "그… 글쎄…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죽어있을 것이라는 거지 앞에서는 당당했던 그들이건만, 이 음성의 주인 앞에서는 그야말로 비굴한 인 간의 표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여인의 음성은 다시 흘러 나왔다. "어서 살펴보세요." "그럴 필요가……." "어서요. 죽었다면 우리는 그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요?" "……." 금의노인들은 할 수 없다는 듯이 피투성이의 인물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은 마지못해 피투성이의 인물을 살폈다. 한데 뛰고 있었다. 죽어도 열 번은 더 죽었어야 마땅할 비렁뱅이가 살아 있는 것이다. 맥박은 가늘게 뛰고 있었으며, 가슴도 미미한 기복을 보이고 있었다.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아직 살아 있다니?" "이… 이건 기적이다. 잡초의 생명력이 그야말로 끈질기다더니… 바로 이 비렁뱅이가 그렇지 않은가?" 두 사람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 속에는 별로 탐탁지 않다는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죽어나 버릴 것이지.' '그럼 한 개의 관이면 되었을 것을…….' 골치 아픈 것이다. 살아 있으니 치료를 하여야 하는 것이고, 자칫하다가 보상까지 해 주어야 할 판이다. 이때, 마차 안에서 다시 그 아름다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어서 태우세요. 살아 있다면… 서둘러야 해요." 여인의 재촉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비렁뱅이를 마차에 태웠다. 그리고는 마부석에 오르면서 투덜거렸다. "억세게도 운이 좋은 놈이로군." "우리 쌍금적자(雙金積子)도 감히 마주할 수 없는 높으신 지체와 동승하였으니……." 두 사람은 부러운 듯 마차를 힐끔 바라보다가 기분이 상한 표정으로 거칠게 채찍을 후려갈겼다. 히히히힝－! 마차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달리기 시작했다. 뿌연 황진이 폭풍처럼 일어나고, 재수가 없어 마차에 깔린 비렁뱅이가 행운을 잡은 이 조그마한 사건은 황진(黃塵)에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4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원(莊院)이었다. 장원을 싸고도는 거대한 높이의 벽은 그 끝을 볼 수가 없었고, 그 안의 수많은 고루거각(高樓巨閣)은 바 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고 많다. 이것을 돈으로 따진다면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가 되리라.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없었다. 오직 하나만 보면 이 장원의 규모가 왜 이리 어머어마한지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현판(懸板). 황금으로 치장된 현판만 보면 된다. <팔황장보원(八荒藏寶院)> 그랬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팔황장보원이었던 것이다. ■ 십매어황 제2권 第十二章 팔황장보원(八荒藏寶院)의 미망인 1 구련산(九蓮山)의 기름진 옥토에 자리잡은 이 팔황장보원은 어째서 유명한가? 그 이유와 질문에는 여러 가지의 이유를 달 필요가 없다. － 대륙제일(大陸第一)의 대부호(大富豪). 그것 한 가지의 이유면 충분하다. 그렇다. 팔황장보원은 자타가 인정하는 대륙제일의 대부호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땅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표국이 이 팔황장보원의 관할하에 있으며, 대륙의 모든 상권이 또한 팔황 장보원에 장악이 되어 있어 대륙의 모든 금전유통이 이곳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면, 이 래도 팔황장보원이 대륙제일의 대부호임을 의심할 여지가 있겠는가? 한 나라를 세우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의 재산을 적재하고 있으며, 때문에 황궁이라 해도 이 팔황장보원 을 감히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무시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황궁에서는 대내고수(大內高手)들을 파견하여 보호해 주고 있었다. 행여 팔황장보원이 하찮은 도적들의 손에 넘어가 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다. 그만큼 팔황장보원이 이 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이것이 세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일설에 의하면 이곳의 주인은 여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이라는 것이었다. 애초에는 그녀의 부군이 이 팔황장보원의 주인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요절한 부군의 뒤를 이어 그녀가 이 팔황장보원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한 일설일 뿐이어서 아직도 세인들은 팔황장보원의 주인에 대 해서 무한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세인들에게 있어 우상 같은 존재였다. 인간성이야 어찌됐든, 쌓은 학문의 깊이야 어찌됐든 돈 많은 사람이 존경을 받고 대우를 받는 것이 인 간사회의 진리! 결국 그런 관점에서 보면 팔황장보원의 주인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존경받고 대우받는 위대해야 하는 사람임은 자명한 이치가 아닌가? 그러나 저러나, 오늘은 팔황장보원에 있어 의미 깊은 날이 되고 있었다. 지난 백 일 동안 팔황장보원의 관할하에 있는 수많은 표국의 재정실태를 돌아보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 였던 팔황장보원의 주인이 오늘을 기해서 돌아온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팔황장보원의 인물들은 바쁜 것이다. 그들의 우상에 대한 환영식에 한 치의 오점도 있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두두두두두－! 한 대의 화려한 마차가 팔황장보원의 정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마차의 마부석에는 얼마 전 비렁뱅이를 치어 죽일 뻔했던 쌍금적자가 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자살하려 했던, 보기 흉한 알몸의 비렁뱅이는 운수대통한 셈이었다. 팔황장보원의 주인과 동승하는 영광을 누리고, 거기다가 일반인이라면 평생을 가도 들어갈 수 없는 팔 황장보원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가고 있었으니 어찌 운수대통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겠는가. 2 "쯧쯧… 갈비뼈가 서너 개가 부러졌으며… 양 팔은 심하게 탈골되어 있고… 두 다리 또한 성치가 않소."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는 인물은 팔황장보원 명의(名醫)인 장대선생(長大先生)이었다. 올해 나이 칠십의 그는, 석년에 황궁의 어의(御醫)로 있었으나 은퇴한 후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온 것이 다. 상당한 액수의 금전이 그가 팔황장보원의 전문주치의로 들어앉는 조건으로 주어졌다는 일설도 있었는 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확인된 바는 없었다. 이 순간 그는 화려한 비단 침상에 눕혀져 있는 알몸의 비렁뱅이 청년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 다. "문제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오른발이 아주 못 쓰게 됐다는 점이오." 그는 안됐다는 듯이 혀를 찬다. 쌍금적자는 장대선생의 곁에 선 채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비렁뱅이에 불구라… 팔자 한 번 더러운 놈이로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뻔했지." 그들은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렁뱅이를 친 것만 해도 재수가 없는 노릇인데 이런 신성한 장소까지 상전 모시듯 그를 모시고 들어왔 으니……. '어젯밤 꿈자리가 어쩐지 뒤숭숭하더니만…….'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원주께서 어찌하여 이런 놈을 여기까지 데려와 치료를 하는 것이지?' 쌍금적자(雙金積子)는 소태 씹은 표정으로 한동안 침상의 비렁뱅이를 주시했다. 그러다가 그들 중 형인 포금적자(袍金積子)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불구가 되든 어쩌든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는 아우인 복금적자(福金積子)를 보며 내뱉듯이 말했다. "이 일은 아우가 맡게나. 이 우형은 골치가 아프니……." "무… 무슨 말씀을……." 복금적자는 펄쩍 뛴다. 그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이 일은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할 일이거늘… 이제 와서 형님만이 속 편하자고 손을 빼겠다니… 이것 이야말로 어불성설이며… 절대적으로 이 아우가 손해를 보는 일이오." "……!" 포금적자는 오만상을 다시 찌푸렸다. "어허… 아우 좋다는 것이 무엇인가? 적당히 몇푼 집어 주며 떠나 보내면 될 일을 가지고……." "천만에! 형님 좋다는 것은 또 무엇이오? 그런 간단한 일이라면 형님이 나서서 하시오. 아무래도 그런 경험은 이 아우보다는……." "관둬라." 포금적자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잘랐다. 바로 그때였다. 이들 두 형제의 작태를 도저히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듯이 장대선생이 앞으로 나섰다. "쯧쯧,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놓고 서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니… 대륙제일의 상술가인 쌍금적자의 머리 속에는 황금 외에는 든 것이 없군." 그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대강 물건을 정리하여 상자에 집어넣고는 몸을 돌렸다. "나는 이번 일을 원주께 그대로 보고할 생각이오. 그리고 가능하면 당신들의 대화도 그대로 전할 것이 오." 장대선생은 위협에 가까운 말을 남기고는 휘적휘적 밖으로 걸어나갔다. 순간 쌍금적자의 안색이 대변했다. 자칫하다간 그들의 밥줄이 이대로 날아갈 판이었다. 그들은 다급히 장대선생을 불러 세웠다. "자… 잠깐! 장대선생, 그냥 가시면 어쩐단 말이오?" "헤헤헤… 우리들은 장대선생을 믿고 농담 몇 마디를 지껄인 것뿐이거늘… 헤헤……." 두 사람은 양 손을 비비적거리면서 연신 비굴한 웃음을 흘렸다. 장대선생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기 때문이었다. "헤헤헤… 우리 사이에 고자질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자자… 그러지 말고 우리 이렇게 합시다." 여전히 포금적자는 장대선생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으며, 복금적자는 은밀히 장대선생의 손에 무엇인가 를 쥐어 주고 있었다. 그것이 뭐라는 것은 뻔한 것……. "헤헤헤… 이 비렁뱅이에 대해서는 그냥 적당히 말해 주길 바라오. 적당히라는 것은… 뭐 이런 게 아니 겠소?" "……." "비렁뱅이는 약간의 타박상을 입은 정도에 불과하며… 그저 편히 여나무 일 쉬면 아무 이상이 없을 것 이다. 바로 이런 것… 헤헤헤……." 포금적자는 장대선생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장대선생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노부에게 거짓을 고하라는 말이오? 그런 것이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뭐요? 당신들은 분명히 노부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것인데……." "헤헤헤… 거 무슨 섭한 말씀을……." 쌍금적자는 식은땀을 흘렸다. '빌어먹을 늙은이… 돈이라면 환장하는 주제에 거드름이라니…….' '돈을 더 달란 말이지? 더럽군.' 쌍금적자는 내심 투덜거리며 눈짓을 교환했다. 그들은 이미 장대선생의 속성을 환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인술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 위인도 알고 보면 돈에 미친 돈 벌레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런 장대선생의 속성을 훤히 알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일이 이 지경이고 보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적당히 돈을 몇 푼 집어 주고 아첨을 몇 번 더 떨면 그뿐인 것이다. "헤헤헤… 뭐 그러시오. 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이러지 말고 적당히 말해 주시오." 과연 돈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포금적자가 은밀히 다시 돈을 그의 손에 쥐어 주니 단번에 장대선생의 표정은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의 거드름은 여전하다. "특별히 이번만은 고려해 보겠지만… 차후 이런 일이 또 있을 시에는 이런 식으로 적당히 얼버무릴 생 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소. 그럼 험험……." 장대선생은 큰기침을 날리며 팔자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쌍금적자는 그가 사라지자 그가 나선 문을 향해 가래침을 뱉었다. "더러운 인간!" "뭐라고? 인술이 뭐 어떻다고… 에라, 인술이 아니라 돈술이다. 돈술……." "좌우지간 오늘 일진은 잡쳤다." 이 모두가 저 비렁뱅이 탓이다. 그들은 잡아먹을 듯이 비렁뱅이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3 아님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돌연 팔황장보원이 발칵 뒤집혔다. 야심한 이 시간에 저 고함 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이고… 팔이야… 갈비야… 다리야…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았단 말이냐?" 느닷없이 팔황장보원 전역을 뒤흔들고 있는 그 괴상한 고함 소리가 마구간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으니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리하여 잠을 설친 수많은 사람들이 고함 소리가 들리는 마구간으로 몰려들었는데……. 마구간에는 말 대신 한 사람이 누워 고래고래 고함을 쳐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꼬락서니를 보자니 거지 중의 상거지인데, 듬성듬성 흰 천으로 감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주인 나오라고 해라. 건장한 이 몸이 이 지경으로 된 것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인데… 마구간에 처박아 놓다니… 주인 어디 있냐?" 비렁뱅이 청년은 발악적으로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우렁찬 것인지 팔황장보원 전체가 들썩들썩할 지경이었다. "……?" "……?" 팔황장보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그들은 이 비렁뱅이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뿐만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에 대해 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자연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구야… 누군데 그래?" "그… 글쎄……?" 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들이야 알 바가 아니라는 듯 비렁뱅이 청년의 고함은 갈수록 그 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비렁뱅이는 사람이 아니냐? 누구는 날 때부터 돈 갖고 태어났느냐? 이 날강도들아… 내 다리를 내놓아 라. 주인은 왜 안 나오느냐?" 몇 사람이 나서서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그는 그야말로 막무가내였다. 이에 몇몇 사람이 다시 나서 그를 마구간에서 끌어내려 했지만 이건 요지부동이었다. 도대체가 어떻게 된 위인인지 장정들이 들려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구… 사람 죽이네. 사람 살려……." 청년은 이젠 사지를 바둥거리며 악을 써 댔다. 이 지경이 되자 결국은 팔황장보원의 원주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라질!" "저놈이 아예 우리를 잡아먹을 속셈이로구나." 쌍금적자와 장대선생은 한쪽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전후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그들에 의해 이 비렁뱅이 청년은 이 마구간으로 밀어 넣어지게 된 것이고, 이것은 원주의 뜻을 크게 위배한 것이니 그들은 뭐 마려운 사람들처럼 쩔쩔 매고 있었던 것이다. 4 은은한 황촉 불 아래 아늑한 침상이 드러났다. 그곳에 한 사람이 반듯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비렁뱅이 청년이었다. 침상 앞에는 한 명의 면사여인이 단정하게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일신에는 눈처럼 흰 상복(喪服)을 걸치고 있었는데……. 일견하기에도 고아하며 단아한 기품이 안개처럼 여인의 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비렁뱅이 청년을 주시하는 여인의 눈빛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마저 흐르고 있었다. 한 송이 매화(梅花)처럼 차갑고 고결한 기품의 여인!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돈벌레들만 득실거리는 이 팔황장보원에서 이런 초속한 기품을 뿌리고 있는 것인가?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다. 팔황장보원에서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은 오직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바로 팔황장보원의 원주(院主)인 것이다. 여인이 팔황장보원의 원주라는 일설은 정확히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이 여인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여인은 묵묵히 비렁뱅이 청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어찌 보면 그 눈빛은 무엇에든 흥미가 있을 수 없다는 권태로움을 담고 있는 듯도 싶었다. 내실은 화려했고 또한 정결했다. 여인의 규방인 듯 한쪽에는 동경이 놓여 있었고 화장대가 놓여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곳은 바로 팔황장보원주의 거처였던 것이다. 원주의 거처이기 이전에 여인의 규방이었기에 이곳은 철저히 사내의 접근이 금지된 곳이기도 했다. 한데 이 비렁뱅이 청년은 버젓이 규방에 몸을 누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단지 누워 있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쉴새없이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이제 내 인생은 끝이 난 것이오. 불구의 몸이 되었으니… 마누라 얻기는 다 틀렸고… 후대를 이 을 길이 막연하니… 어찌 조상인들 제대로 모시겠소." 오만상을 찌푸리며 푸념을 계속 토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몸은 오대독자란 말이오. 그런데 이 꼴이 되고 말았으니……." "……!" "아무튼 책임을 지시오. 당신의 수하들이 나를 이렇게 했다 하나 도의적인 책임은 당신에게 있으니… 책 임을 져야 하오." "……!" 팔황장보원주는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비렁뱅이 청년을 주시할 뿐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하는 짓은 막돼먹었으나… 그 말에는 조리가 있고 결코 천박하지 않다.' 그녀는 내심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비렁뱅이 청년에게 호기심이 싹튼 것이라고나 할까? 남편이 요절한 뒤로부터 세상사에 흥미를 상실해 버린 그녀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 비렁뱅이 청년에게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흥미라는 것이 길을 가다가 대변을 밟고서 더럽다고 느낀 후 도대체 이 대변을 눈 점잖지 못한 장본인이 누구일까 하는 정도였지만, 아무튼 그 정도이나마 흥미를 얻은 사람이 없었기에 비렁뱅이 청 년은 또 하나의 행운을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렁뱅이 청년의 푸념은 계속되었다. "당신이 책임을 지시오. 이왕지사 나는 버린 몸이니… 당신이 나를 가지든… 내가 당신을 가지든 마음대 로 하시오. 마음대로……."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비렁뱅이 청년의 말인 즉은, 이 기회에 아예 이 여인의 바깥주인으로 들어앉고자 한다는 소리와 같은 것이 아닌가! 이쯤 되면 제아무리 마음씨 좋은 사람이라도 코에서 연기를 뿜을 일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비렁뱅이 청년의 말을 한쪽 귀로 듣고 다른 한쪽 귀로 흘려 버리는 듯 그녀는 시종일관 권태로운 눈빛 만을 그에게 던져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원하는 것?" 비렁뱅이 청년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많고도 많소이다." "……?" "우선은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가져다 주되… 이 몸의 손은 고장이 났으니… 당신이 먹여 줄 것이 며……." "……." "그리고 이 몸의 옷을 걸레로 만들어 놨으니… 옷을 한 벌 장만해 줄 것이며……." 점입가경이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비렁뱅이 청년의 말은 단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참… 목욕도 해야겠소. 물론 이 몸이 목욕을 할 수 없는 처지이니… 당신이 대신 씻겨 주어야 할 것 이오." "……!" "명심하시오. 당신의 손으로 직접 해야 함을…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일을 대신케 한다면… 이 몸은 혀를 깨물고 자결하고 말겠소." "……!" "그리고 당신이 이 일을 할 수가 없다면 차라리 당신의 손으로 이 몸을 죽이도록 하시오." 부탁인가? 아니면 협박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가 생각해도 그러한 요구는 과한 것이라는 점이며, 팔황장보원주로서는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팔황장보원주의 눈빛은 일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권태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더 이상의 요구는 없나요?" "더 이상의 요구……?" 비렁뱅이 청년은 의외라는 듯 잠시 팔황장보원주를 직시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헤헤헤… 일차적인 협상은 그 정도에서 마치고… 그리고 나서 우리 천천히 이차적인 협상을 시작하도 록 합시다." 가관도 아니었다. 그의 이런 말투는 마치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것과 똑같았다. 만약 쌍금적자가 이 자리에 있었던들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당장 비렁뱅이 청년을 때려죽이고 말았으 리라. 그러나 팔황장보원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우선 식사부터 하셔야 하겠지요?" 이렇게 묻는 그녀의 말투는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투가 아닌가? 비렁뱅이 청년은 다시 멍청해지고 만다. 그는 여인의 물음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여인은 그런 그를 뒤로 한 채 내실을 빠져 나갔다. "……." 비렁뱅이 청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난제에 부딪친 듯싶었다. "분명히 이 단우가 의도적으로 접근했음을 눈치챘을 것인데… 나의 모든 요구를 거부감 없이 순순히 응 하고 있는 의도는 또 무엇인가?" 단우라니? 이 비렁뱅이 청년이 천년지대 안의 흑마련의 총단에서 죽음을 당했던 단우였단 말인가? 아니, 그가 그 엄청난 화약의 폭발 속에서도 살아났더란 말인가? 흑마사십사령 중 일 인인 백무상이라는 인물이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살아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나름대로 한 가지 일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니……. 만약 이 사실을 백무상이라는 자가 알았다면 게거품을 물고 까무라치고 말일이었다. 그렇다. 단우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팔황장보원주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목적은 오직 단우만이 알 뿐이었다. 그러나 일은 단우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야릇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여인과의 줄다리기이니… 기분은 좋다." 그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직은 성공 여부가 미지수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팔황장보원에서 썩고 있는 돈을… 반 이상은 얻 어 내야 한다." 말은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스르르 잠기고 있었다. 피로한 것이다. 얼마인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마음놓고 잠을 잔 지도 상당히 오래 전인 듯싶다. 단우는 곧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 십매어황 제2권 第十三章 조력자(助力者)를 찾아라 1 욕실(浴室)이었다. 그러나 이 욕실은 보통의 욕실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우선 화려함에서 이 욕실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고, 값으로 따지자면 더욱 엄청난 것이었 다. 만년온옥(萬年溫玉)이라 하면 한 덩어리만 있어도 그야말로 무가지보(無價之寶)로 대대로 전해질 만큼 귀한 것이다. 돈이 억만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희귀한 것이다. 가치는 차가움을 물리칠 수 있는 효능이 있다는 데에 있었다. 한 덩어리의 만년온옥을 품고 있으면 아무리 추운 겨울일지라도 여름처럼 지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무가지보가 욕실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면 이 욕실의 가치와 화려함이 가히 어느 정도인지 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화려한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벗은 알몸은 그야말로 땟물 투성이였고, 머리는 산발하여 욕실의 물은 아예 까맣게 변하고 말았다. 단우였다. 팔황장보원주에게 요구했던 대로 그는 지금 목욕을 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이 순간 팔황장보원의 원주인 면사여인이 그의 몸을 정성스럽게 씻어 주고 있었다. 촤르르르－! 물 소리는 욕실 전체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단우는 온갖 오만상을 찌푸린 채 고통을 하소연하고 있었다. "아아… 살살 문지르시오. 내 살은 철판이 아니란 말이오." 촤르르르－! "아이고… 목 분질러지겠소. 우욱! 팔을 그렇게 비틀면 어찌하겠소?" 듣고 보면 팔황장보원주가 지독하게 그의 몸을 밀어 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팔황장보원주는 조심조심, 그리고 정성스럽게 때를 밀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이야 단우보다는 팔황장보원주가 훨씬 더할 것이다. 살을 밀어 줄 때마다 바윗덩어리(?)처럼 와르르 떨어져 내리는 더러운 때덩어리에다, 거기에서 풍겨지고 있는 악취(惡臭)는 축농증이 걸린 사람이라도 기절하지 않으면 비정상일 정도로 지독스러웠다. 그러나 팔황장보원주는 욕실이 더렵혀지든 말든 그런 것들은 아랑곳없이 때를 밀고 있었다. 그런데 단우가 오히려 뻔뻔스럽게 소리를 질러 대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거기는 박살이 난 곳이니… 초야에 신랑이 신부의 몸을 다루듯 살살… 그… 그렇지… 그렇게 살살 밀어 주시오." 실로 음탕한 표현까지 거침없이 쏟아 내고는 있으나, 사실 그의 눈 속에서는 과거에 대한 감회가 떠오 르고 있었다. '오 년 만이로군. 천년지대로 들어간 그 이후 단 한 번도 목욕을 해 보지 못했으니…….' 시원했다. 단지 때가 씻겨져 내려가서 시원한 것이 아니라 탁한 마음까지도 씻겨져 내려가는 듯한 통쾌함을 맛보 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슬그머니 팔황장보원주를 바라보았다. 비록 면사를 썼으나 그 미모가 절색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거기다가 몸매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있었고, 그 농염함과 그 풍만함 속에서는 성숙한 여인의 관능 미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비록 여인을 많이 상대해 보지 못한 단우지만, 알게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낀 다. '이 여인에게는 백치미가 엿보인다.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하나… 세상을 초탈한 듯한 저 눈빛… 그것은 기이한 마력으로서 나의 가슴에 와 닿으니…….' 단우는 점차 그 여인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사내가 여인에게 갖는 당연한 감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더욱이 단우는 한창 피가 용솟음치는 그야말로 이팔청춘이 아닌가! 그녀의 손길이 알몸을 스칠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알고 보면 이런 내심의 마음을 감추기 위한 수 단일런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때 여인의 손끝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우의 때가 점차 벗겨져 내려가고 그야말로 백옥보다도 흰 피부가 드러날 때마다 그녀의 손끝은 물론 전신에는 가는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에게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처음에 그녀는 단우의 알몸을 마치 돌을 보듯 무심하게 보았으나, 이제는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 깔고 있었다. 그 눈에는 연분홍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남편 없는 청상과부인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철석간담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사내의 알몸을 매만지고 있으니 떨리지 않을 수가 없 는 것이다. 어쩌면 이 순간 그녀의 마음 깊숙이 숨겨 두어야만 했던 연분홍빛 불꽃이 다시 피어 오르고 있는 것인 지도 몰랐다. "……." "……." 두 사람의 호흡은 알게 모르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단우의 수려한 면목이 드러날 때마다 여인의 호흡은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더욱 뜨거워지고 있 었다. 잠시 후, 우여곡절 끝에 목욕은 끝이 났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하여 단우의 몸을 매만지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천하의 비렁뱅이 청년이 이제 이 땅에서 짝을 찾을 수 없었을 만큼 수려한 절세의 미장부로 변신된 것 이다. 다리 한쪽이 불구라지만 그런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는 다만 수려하고, 입가에는 고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만으로 어떤 여인의 애간장이라도 도려내 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아……!" 팔황장보원주는 문득 긴 탄식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이한 눈빛으로 단우를 한동안 주시했다. 단우 역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어라고 할까?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불꽃이 일어나고 있다고 할까? 아무튼 여인은 욕실을 빠져 나가고 잠시 후 한 벌의 희디흰 유삼을 안고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그 옷을 단우의 앞에 내려놨다. "이것을……." 그녀의 입에서 다음 말이 이어지려는 그때, 단우가 벌렁 그 자리에 드러눕고 만다. "나의 두 손은 아직 성치가 않아서… 당신이 입혀 주어야만 할 것 같소." 뻔뻔한 것도 이 정도면 도가 지나친 것이다. 좋다. 알몸을 여인의 앞에서 드러내는 것은 그런 대로 좋다고 치자! 하지만 저 흉한 물건만은 감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상대는 처녀가 아니라 과거에는 한 남편을 섬기던 여인인 바에야……. 그러나 단우는 도대체가 예의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지 그 흉한 물건마저도 여지없이 여인의 앞에 다 드러내놓고 있었다. 이것은 유혹이었다. 분명한 유혹이었던 것이다. 여인은 아마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여인은 군소리 없이 단우의 말대로 옷을 정성스럽게 입혀 주기 시작했다. "……." 침묵 속에서 단우의 옷을 입혀 주고 있는 여인의 눈빛은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도록 비밀스럽게 빛나 고 있었다. 이윽고 단우는 옷을 모두 입었다. 옷을 모두 걸친 단우의 모습은 날아갈 듯 헌앙했다. 비렁뱅이의 더럽고 추잡한 일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 손에 책 한 권만 쥐어 주면 그대로 고아한 기품의 유생이 될 것이며, 책 대신 검이라도 쥐어 줄라치 면 영락없는 무림최고의 기린아가 될 판이다. "……." 잠시 팔황장보원주는 눈이 부신 듯 단우를 주시했다. '내 일찍이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였지만… 이런 미장부는 본 적이 없다.' 그녀의 가슴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때 단우는 동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며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런 대로 쓸 만한 것이로군." 무엇이 쓸 만하다는 것인지……. 그는 빙글 몸을 돌려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일차적인 협상은 모두 끝난 것 같소." "……!" "이제부터는 이차 협상에 들어가야 할 텐데… 이 욕실에서 할 수는 없지 않소?" "따라오세요." 팔황장보원주는 간단히 말하고는 몸을 돌려 욕실을 빠져 나갔다. 단우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의 걸음은 심하게 절룩거리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는 영락없는 병신인 것이다. 2 <지금 이 단우가 하고 있는 일은 철저한 나의 안배이다. 마차에 몸을 깔린 것도, 이 팔황장보원에 들어오게 된 것도 모두 나의 안배에 속한 것이다. 십만대산의 검은 석성의 무서운 폭발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그 이후 이 구련산에 이르는 동안 나 단우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강호정세에 관해 대강을 들을 수 있었고, 지금 내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한 가지 일 을 찾아야 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 비록 상당한 무공을 얻기는 했으나 단신으로 흑마련의 흑마사십사령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강하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강하다. 그런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 혼자의 힘이 아닌 조력자(助力者)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런 생각과 고심 끝에 나 단우는 한 가지의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력자를 구하는 일이었다. 흑마사십사령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무학을 지닌 고수들을 끌어모으는 것이다. 당금의 무림정세로 보아 감히 흑마사십사령을 상대할 만한 무림인이 없는 듯하지만 분명 있다. 그들은 다만 일천 년 이상의 장장한 세월 동안 전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물론 나 단우의 부친인 천마종야 단사하와 벽라천제 백리명을 만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조력자는 구할 필요가 없으나 지금 그들의 행적은 찾을 길이 막막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절대의 고수들을 무림에 끌여 들여야 하는 것이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그들을 끌어 낼 수가 없다. 그들은 천 년 규율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바로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한 방법일 뿐이다. 팔황장보원을 노린 것도 그 이유에서다. 팔황장보원주에게 접근한 것도 그 이유인 것이다. 지금 나 단우는 올 때까지 왔다. 팔황장보원주는 내 앞에 있고, 지금은 모두가 잠든 밤이다. 그야말로 기회라면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팔황장보원주의 엄청난 재력을 나의 손에 집어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스슥－! 일필휘지를 날린 뒤 단우는 천천히 붓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자신의 글이 마음에 든 듯 은은한 황촉 불빛 아래 그의 박속처럼 새하얗고 고른 치열이 드러났다. 그는 한쪽에 있는 팔황장보원주를 향해 웃어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내 일기(日記)요." "……." "그런데 말이오. 일기란 남이 보면 안 되는 것인데… 당신은 어째서 남의 일기를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훔쳐본 것이오?" 사람을 옆에 두고 일기를 쓴 사람은 누구인데, 이제 와서 그는 그 일기라는 것을 들먹이며 따지고 있으 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닌가! 팔황장보원주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의 진정한 의도는 이런 것이었나요?" "진정한 의도라니… 무슨 소리요?" 단우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팔황장보원주의 시선은 아직 먹물도 채 마르지 않은 일기장 같지도 않은 일기장을 바라본다. "더 이상 말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세요." "말장난이라니……?" "당신이 이 몸에게 접근한 목적이 재산에 있었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헛수고를 했다고 할 수 있어요." "헛수고……." 단우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설사 당신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는다 해도 당신에게 돌아가는 것은 한 푼도 없을 것이에요." 팔황장보원주의 말은 단호했다. 추호의 여지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팔황장보원주에서의 나의 실권은 전혀 없다는 말이에요." "그… 그럴 리가……?" 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천만의 말씀……." "아니 당신이 팔황장보원주인데 실권이 없다니… 도대체 그것이 있을 법이라도 한 말이오?" "충분히 있을 수가 있지요." 팔황장보원주의 눈에 이 순간 고뇌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멍하니 천장으로 던져졌다. "이 몸의 부군이 살아 있는 이상… 적어도 나에게는 실권이 없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은 미망인이 아니냔 말이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신의 남편은 요절을 했고… 이 많은 재산을 당신이 독차지하고 있다 들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오리발이오?" 단우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팔황장보원주는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 있었다. "분명히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분은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은 팔 황장보원의 재산을 비밀리에 어딘가로 빼돌리고 있지요." 이것은 어쩌면 그녀와 그녀의 부군과의 비밀인지도 몰랐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니 말해서도 안 되는……. 그런데 그녀는 지금 단우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죽음을 가장하고… 내가 이곳의 원로로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도 그 재산을 용이하게 빼돌리기 위한 것이었어요." "아……." "아무튼 당신이 이 몸에게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음……." 단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여인의 부군… 무슨 목적으로 재산을 빼돌리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단우로서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팔황장보원주의 눈빛은 단우에게로 향했다. "실망하셨나요? 사실 이 몸은 당신이 처음 마차에 접근했을 때부터… 당신이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있음 을 알 수가 있었지요." "음……!" "그럼에도 묵과했던 것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말 대신 한숨을 토하고 있는 것이다. 단우는 그것은 묻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급한 것은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투른 연기까지 해 가면서 여기까지 왔더니… 그야말로 황을 잡은 셈이 아닌가?" "……." "생각해 보시오.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이오? 이 단우의 만질 것 못 만질 것 다 만져 본 당신이니… 선심 쓰는 셈치고 좋은 방법이 있으면 알려 주시오." "……!" "이 단우가 하는 일은 단지 내 개인의 일이 아니라 무림 전체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니… 당신의 말 한 마디에 따라 무림 억조창생의 생사가 결정될 수도 있소." 단우는 정색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연기 따위는 필요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몽땅 수포로 돌아갈 판국이 아닌가? 남이 보면 장난 같은 일이었으나 기실 이 일은 무림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나에게는 이 팔황장보원의 재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나의 목적을 달성 해야 하는 것이오." "……!" "만약 방해자가 있다면 단호히 목을 잘라야 할 판이오." 굳은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 속에는 다분히 위협도 들어 있었는데……. 팔황장보원주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상대는 무림의 운명을 논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 그의 결심을 어찌 그녀가 가볍게 볼 수가 있겠는가? 그녀는 잠시 고뇌 어린 눈빛을 황촉 불에 던진 채 침묵을 지켰다. 문득 그녀는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이지요?" "아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에 열 배를 더해야 할 것이오." "음……." "하나의 성(城)을 세우고자 하오. 그 성은 전에도 후에도 없는 거대한 것이어야 하는데… 상상할 수도 없는 금액이 들어가야 함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소?" "전에도 후에도 없는… 성채(城砦)를?" 팔황장보원주의 눈이 크게 벌어진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인 감정 표현치고 이처럼 모두를 드러내 보인 적은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지금 놀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성을 세우는 목적을 말해 줄 수가 있는가요?" 단우의 눈에 반짝 이채가 스쳐 갔다. "지금 당신의 말은… 내가 원하는 금액을 확보할 여지가 있다는 말씀 같은데……." "함부로 추측은 마시고 대답만 하세요." "……!" 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니… 양해하시오." "……." "문제는 방법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뿐이오." 단우는 말하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팔황장보원주였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있어요. 남편이 빼돌리는 재산을 다시 빼돌리는 방법이지요." "아……." "결코 일은 쉽지 않아요. 이 몸은 지금 심한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이죠. 하나 그 감시자의 눈만 따돌린 다면… 충분히 가능해요." "아……." 단우는 나직이 탄성을 토하며 눈을 떴다. 한 치의 빈틈은 거대한 방벽이라 해도 무너뜨릴 수가 있는 것이며, 일말의 여지는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감시자의 눈을 따돌린다면……." 단우는 길게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맡겠소. 적어도 이 단우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으니……." "쉽지는 않아요." 그러자 팔황장보원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내가 알고 있는 인물 가운데 가장 무서운 인물들이지요. 이 몸이 당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 라… 당신은 결코 그들을 어쩔 수가 없을 것이에요."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분명히 무시하고 있소." "……." "그들을 내게 알려 주시오.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테니……." 자신에 찬 음성이었다. 그런데 단우의 말이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두고볼 수가 없군." 한 줄기 음산한 음성과 함께 소리 없이 내실로 들어서는 한 사람이 있었다. 삼십대 초반의 수려한 용모를 지닌 그는, 일신에 푸른 장포를 걸친 그는 어찌 보면 지극히 문약한 선비 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외형적인 느낌이었을 뿐이고, 인기척이 전혀 없이 내실로 들어온 그의 놀라운 신법 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무서운 무공을 지닌 무림고수인가를 알 수가 있었다. 촤르르륵－! 그는 금주판을 손으로 가볍게 퉁기며 단우와 팔황장보원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단우의 면전에 놓인 탁자에 몸을 올리더니 지극히 여유 있는 동작으로 찻잔의 차를 마셨 다. "감히… 팔황장보원의 재산을 노리는 작자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한데……." 그는 고개를 들어 단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단우는 그의 돌연한 출현에도 불구하고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출현을 예상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질 않는가? 그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은 뉘시오?" "팔황장보원의 삼대감수(三大監修) 가운데 한 사람인 황보금(黃寶金)……." 장포인의 이 말에 단우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이 몸이 알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이곳 신분이 아니라… 무림에서의 신분과 명호를 알고자 하는 것이 오." "……." 황보금의 표정이 미미한 변화를 일으켰다. 무림에서의 명호와 신분! 그는 이 말을 되씹으려는 듯 한 모금의 차를 마셨다. 무어라 말을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대답 대신 차를 마신다는 것은 걸리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미가 아 닐까? 그러나 그는 태연했다. "무림에서의 신분과 명호라니… 무슨 뜻인가?" 그는 빤히 단우를 주시했다. 단우는 빙그레 웃는다. "없다는 말이오?" "대답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대는 지금 그것을 알려하기 이전에 자신의 죽음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 이다." 순간, 그의 몸에서 가공스런 무형의 살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단우의 안색에 미미한 변화가 일었다. '대단한 고수! 적어도 흑무상보다는 강하다…….' 이 내심의 중얼거림을 그냥 흘려 버릴 수가 없는 것은, 한 가닥 전율스러움이 이 중얼거림에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흑무상이 누구이던가? 흑마사십사령의 막내이나, 그의 무공은 자하고금마유사와 대자율법사라는 절대의 고수를 가볍게 요리할 만큼 무서운 단계에 올라 있지 않던가? 그런 그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인물은 이 땅에서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흑마사십사령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한데 면전의 황보금이 흑무상 위의 고수라면? 그의 진실한 정체가 의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우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네가 무엇을 알았든… 죽음으로서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황보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그의 몸에서는 진한 살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천천히 그가 금주판에 손을 올려놓은 것은, 살인(殺人)을 위한 예비동작이라는 것을 단우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 상태로 돌입한다. 바로 그때였다. "황보금, 그대는 본인의 앞에서 감히 살인을 하겠다는 것인가?" 팔황장보원주가 긴장을 깨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황보금이 시선을 그녀에게로 천천히 돌렸다. 하지만 그의 한 손은 여전히 금주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대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보는가?" "그대……?" 팔황장보원주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적어도 이 순간 이전에는 그녀에게 깍듯이 원주라고 부르던 황보금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그는 그녀를 향해 그대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팔황장보원주가 심한 모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지금까지는 남편과 너희들이 나를 감시하든… 이곳의 재산을 빼돌리든… 본인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다." "……!" "그런데 네놈이 감히 본인을 그대라 부르다니… 자격이 없다니… 호호호……." 무엇인가 변하고 있었다. 지금의 팔황장보원주에게서는 전의 유약함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 무엇인가가 분명히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 십매어황 제2권 第十四章 절대금궁(絶代禁宮) 1 '무림인이었던가?' 단우는 이제야 비로소 그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팔황장보원주라는 이 여인도 가공할 무공을 숨기 고 있었음을……. 고오오오－! 그녀에게서도 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황보금의 몸에서 뿜어지는 살기보다도 더욱 진한 살기였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의 지닌 바 무공이 오히려 황보금 이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대가… 무… 무공을……?" 황보금 역시 경악하고 있었다. 단우가 지금 이 순간 팔황장보원주가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듯 그 역시 지금에서야 그것을 안 듯싶 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미처 그 끝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파아아아－! 팔황장보원주의 희디흰 섬섬옥수(纖纖玉手)가 은은히 핏빛을 띤 채 그를 향해 무섭게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럴 수가……." 황보금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언제나 나약하기만 했던 여인……. 남편에게는 절대 순종하고,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든지 그대로 따라 주던 여인이 아니었던가? 어찌 보면 백치와 같았던 순진했던 그녀가 무공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이대로 사실을 불신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몸을 천장으로 뽑아 올렸다. 실로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순간, 실낱 같은 간발의 차이로 그는 팔황장보원주의 공격권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의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파아아－! 팔황장보원주의 손에 끼어 있던 자색의 옥지환(玉指環)에서 믿을 수 없게도 미세한 암기가 그를 향해 쏘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한 개가 아니라 수십, 아니 수백 개에 달했다. 더군다나 그 암기는 육안으로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황보금으로서는 그것들을 피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황보금의 무공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있었다. 스스슷－! 그는 그 결정적인 위기 순간에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천장을 향해 누워 있는 자세의 몸을 빠르 게 뒤집었다. 어느 틈엔지 그의 손에는 면도날처럼 투명하고 얇은 연도(軟刀)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연도는 수십 수백 개의 암기를 쳐냈다. 파파파팍－! 한 동작에 수백 개의 암기를 통시에 쳐낸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다음에 일어나고 있었다. "후후후……." 음산한 괴소가 황보금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그는 슬쩍 연도를 손끝으로 퉁겼다. 팅－! 그 소리는 기이하게도 인간의 심혼을 산산이 헤집는 마력을 담고 있었으며, 이것을 예상치 못했던 팔황 장보원주는 심신이 흐트러졌는지 몸을 휘청거렸다. 순간이었다. 츄리릿－! 연도가 곧장 그녀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아아! 처음 팔황장보원주가 황보금을 공격하고, 다시 공격을 받기까지의 동작은 실로 찰나적인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팔황장보원주의 두 눈에 경악과 절망의 빛이 순간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상상 이상이다.' 상대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나, 상대를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패인이라면 패인이 될 것이 다. 그런데 이 절대절명 위기의 순간이었다. "마혼도(魔魂刀)? 이제 보니 그대는 흑마사십사령 중 한 명이로군." 단우는 황보금의 연도를 보며 야릇하게 웃었다. － 마혼도(魔魂刀). 이것은 천년지대 안에나 있어야 할 물건이었다. 일천 년 전에 이 물건을 지닌 마혼살객(魔魂殺客)은 천년지대에서 그 뼈를 묻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보고 단우가 그를 흑마사십사령 중 일 인이라 확신한 것은, 바로 흑마사십사령이 사라진 일천 년 무림사의 무학을 얻어 완성이 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마혼도는 기형의 병기로서, 기이한 음을 발출하여 상대의 심기를 흐트려 놓은 후 살상을 감행하는 무서 운 병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무공이 그토록 가공한 것이었군." 말과 함께 단우의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도 하나의 검이 들려져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그 검은 미인(美人)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검이 미인의 형상을 하고 있음은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미인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실로 기이하여 인간의 심혼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슈슉－! 빠르다. 그 미인검은 보였다 싶은 순간 이미 황보금의 마혼도를 반으로 자르고 동시에 황보금의 심장으로 파고 들고 있지 않은가? "크아아……." 황보금은 처절한 단말마를 토하며 뒤로 퉁겨져 나갔다. 그의 가슴으로부터는 선홍빛 피보라가 분수처럼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쾅－! 그는 그대로 벽에 쑤셔박히며 무너져 내렸다. 단우는 그 앞에서 본래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미인검은 그 어디에도 없었으며, 그는 팔황장보원주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고 있었다. 한편, 팔황장보원주의 면사는 한 줌의 가루로 변해 있었다. 물론 황보금의 마혼도가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녀의 얼굴은 온갖 성스러움과 요기로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실로 기이한 마력을 풍기는 얼굴이 아닌가? '오오… 저 얼굴은 놀랍게도 절대군후 예소령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단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렇다. 팔황장보원주의 얼굴은 일천 년 전의 칠대초인 중 한 명인 절대군후 예소령과 아주 흡사한 용모와 분위 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니……. 이 얼굴은 한 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이었고, 한 번 보면 그 얼굴 아래 절대 복종하고 싶어지 는 충동이 일어나게 하니……. 그런데 지금 그 얼굴에서는 경악의 빛이 진하게 떠올라 있었다. "미… 미인검… 절대미인검(絶代美人劍)… 우리 절대금궁(絶代禁宮)의 최대신물이자 일천 년 전에 사라 진 그것이 다시 출현하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격동과 희열과 불신의 빛마저 진하게 떠오른다. 무엇인가? 절대금궁은 무엇이며 절대미인검은 또한 무엇인가? 이때, 황보금이 천천히 벽에서 빠져 나왔다. 여전히 그의 가슴에는 피분수가 솟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비틀비틀 단우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형은 단우의 앞에 이르러 그대로 내려앉고 말았다. 쿵－! 황보금은 한동안 다시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으나, 결국 그는 바닥에 엎어진 채 고개만을 들고 있 었다. "허억… 흑마사십령(黑魔四十靈)인 이 철혈후(鐵血侯)가… 그대 같은 애송이에게… 당하다니……." 그는 울컥 한 모금의 피를 토했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흑마련의 인물이었군." 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황보금이 흑마사십사령이라는 점에도 놀라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흑마련이 팔황장보원까지 장악하고 있 음에 더욱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때 흑마사십령 철혈후는 발악하듯 말을 내뱉었다. "허억… 네… 네놈은 대체 누구……." 그는 자신이 이렇게 죽음에까지 몰리는 패배를 당한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기에다 그는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흑마련 외의 인물에게서는 적수가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이 무 참히 깨어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단우는 담담히 웃었다. "단우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뭐라고?" 황보금의 전신이 격렬한 전율을 일으켰다. 그는 경악과 불신의 눈빛으로 단우를 주시했다. "그대가… 다… 단우… 단우… 단우……." 그의 뇌까림은 모호했다. 단우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인지 정확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죽은 것이다. "……!" 단우는 말없이 그의 시선을 주시하고 있었다. 왠지 허탈한 감정이 물밀 듯이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 흑마사십사령. 그들은 강하다. 흑무상에 이어 이 철혈후라는 인물을 상대하고 다시 느끼는 감정은 역시 그들은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시대를 피바람으로 몰아넣고 있는 당연히 죽어야 할 자이다. 그럼에도 그가 허탈한 심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그들의 뛰어남이 아쉽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흑마사십사령은 사라진 일천 년 무림사의 모든 것이라 할만 했으니……. 그것은 그들이 그 사라진 무학들을 대부분 일신에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그들은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우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죽여야만 하는 것 이었으니……. 그들의 죽음은 다시 부활한 사라진 일천 년 전의 무학을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결과이기에 당연히 죽어 야 할 사람을 죽였음에도 단우의 마음이 허전하고 허탈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 것이리라. "공자께서는 어찌 절대미인검을 지니고 계시온지……?" 절대군후 예소령을 유난히 닮은 팔황장보원주의 물음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말투는 실로 공손해져 있었다. 단우는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소?" 팔황장보원주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공자께서 절대미인검을 지니고 계시는 이상 빈첩은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옵니다. 한 가지가 아 니라 백 가지라도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좋소." 단우는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차분한 안색으로 물었다. "당신은 절대군후 예소령과 어떤 관계이시오?" "그분은 빈첩의 조사(祖師)이시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은 절대금궁(絶代禁宮)의 창시자이시며 빈첩은 십 삼대 절대금궁의 궁주이지요." "아……." 단우는 가볍게 탄성을 발했다. 사실 그는 천년지대 안에서 절대군후 예소령의 기학을 모두 얻었다. 물론 이 절대미인검 역시 절대군후 예소령의 유물 가운데 하나이며 그때 얻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절대금궁이란 어떤 기록도 볼 수가 없었으며, 절대미인검의 또 다른 효용에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절대군후 예소령이 미처 자신을 정리하여 후세의 인물에게 남길 틈도 없이 유령대제에게 독살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유령대제가 남긴 절필에는 그들에 대한 설명이 대강은 들어 있었으나, 유독 절대군후 예소령이 속 한 문파에 대해서만은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팔황장보원주의 말은 이런 의혹을 풀어 주고 있었다. "빈첩은 절대화후(絶代花后) 수국령(水菊令)이오며, 신분을 감추고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 것은 조사의 유시가 있었기 때문이옵니다." "유시라니?" "그것은 절대미인검에 의한 명이 없으면 절대 궁인들이 외부의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옵니다." "음……."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 가지의 의혹은 남아있었다. "한데 일천 년의 절대금궁이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이오?" "……?" 절대화후 수국령의 얼굴에 언뜻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단우가 그녀에게 지니고 있는 의혹만큼이나 그녀가 단우에게 지니고 있는 의혹은 많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의혹은 제쳐두고 공손히 대답했다. "절대금궁의 과거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알려질 시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옵니다." "무슨 소리요?" "당시 조사께서는 절대금궁을 창단하시자마자 실종이 되셨기 때문이옵니다." "아……." 단우는 비로소 유령대제의 글에 절대금궁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무튼 이것은 대단한 수확이다. 절대금궁을 손에 넣을 수 있음은 흑마련을 상대할 수 있는 하나의 세 력을 얻은 것이니…….' 그렇다. 이것은 당초 단우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수확인 것이다. 그가 팔황장보원에 접근했던 것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이곳의 재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 과정에서 그는 절대금궁이란 과거 절대군후 예소령의 후인집단을 만난 것이며 또한 흑마련이 이곳에 관련이 있다는 것마저 알았으니 수확으로 따지자면 이것은 대단한 수확이었다. 이때, 팔황장보원주 절대화후 수국령은 단우가 말이 없자 자신의 의혹을 풀기 위해 막 입을 열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보다 단우의 말이 조금 빨랐다. "당신의 물음은 훗날 답하겠소. 내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사정이 있어 그러니 이해하시기 바라오." "……." "그러나저러나 내게는 어느 것보다 급한 일이 한 가지 있소. 물론 그것을 당신에게 약간은 내보였지만… 무림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급히 서둘러서 처리해야하는 것이오." "이곳의 재산을 빼돌리는 일 말이옵니까?" "그렇소. 만약 내가 흑마련의 감시자들을 처치한다면 내가 원하는 그것은 가능성이 있는 것이오?" "가능성이… 있습니다." "좋소. 그렇다면 서둘러 봅시다." "하지만……." 절대화후 수국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밤에 그 일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요?" "아… 그렇군." 단우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손으로 이마를 친다. 그는 손을 비볐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날이 샐 때까지 무엇을 한다?"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지요." "무엇이오? 혹시 흑마사십령 철혈후와 관계되는 나머지 인물들을 처치하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 오?" 절대화후 수국령은 고개를 흔들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지요. 아직 그들은 철혈후의 죽음을 알지 못할 테니… 일은 날이 새면 해도 되는 것이지요." "허어… 그렇다면……?" "……." 절대화후 수국령은 대답 대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거침없이 자신의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녀가 지금 옷을 벗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나 이런 의혹은 지금 문제가 아니었다. 나신(裸身)! 잠깐 사이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삼십대 미망인의 그 알몸은 그야말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있었다. 적당히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 있는 완벽한 몸매였다. 숨이 막힌다. 호흡이 가빠진다. 저 알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단지 요염한 것이었다면 단우는 무심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알몸은 실로 고아하며 성결한 분위기마저 드리우고 있었으니……. 요염함과 성결함이 동시에 담겨져 있는 풍만한 여체는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것이 다. 보는 것만으로 이런 욕정을 느끼는 정도인데……. '아아……!' 그녀가 단우의 품에 거침없이 안겨들 때 단우는 폭발하는 욕념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만 다. 이때, 뜨거운 숨결과 함께 그의 귓전으로 스며드는 속삭임이 있었다. "당신이 내게 접근한 의도를 알면서도… 그것을 묵과하였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아아……." "빈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밤의 욕망이었습니다." "아아……." "빈첩의 남편이… 재산을 빼돌리고 있음을 알았음에도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은 빈첩이었지만… 그가 떠 나 있는 이 자리의 빈첩은 밤의 욕망을 채울 길이 없었기에… 당신을 택한 것이옵니다." 그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빈첩이 미망인임에도… 세상 남자가 빈첩에게 접근치 못한 것은… 금전의 위대함 때문이었습니다." "……?" "그들은 나를 여인으로 보지 않고… 단지 돈으로만 보는 것이었으니… 당신이 비렁뱅이로 나타났을 때… 세상 사람이 주의 깊게 보지 않은 당신을 이용하여 나의 욕망을 풀기 위해 당신의 접근을 모르는 척했던 것이옵니다." 그녀는 정신없이 단우의 입술을 찾고 있었다. 남자와는 다른 이 여인이라 존재는 허영과 사치에 약하기도 하지만 가장 약한 것은 밤의 대사였다.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하여도 밤의 욕망을 채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인에게 있어 가장 불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자상하고 수려한 남편일지라도 여인의 욕망을 만족하여 줄 수 없으면 반쪽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인은 그래서 욕망을 위해 재산을 버린다. 또한 욕망을 위해서 남편과 자식마저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난 과거사를 돌이켜보건대 이런 일은 실로 허다하게 세상사를 어지럽히고 문란하게 장식해 오지 않았 던가? 지금 이 절대화후 수국령이란 여인도 그런 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 제일의 대부호의 아내의 자리에 있으면서, 절대금궁의 궁주라는 지고한 위치에 있으면서 결국은 이런 불륜을 범하는 것도 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인 것이다. 두 사람은 어쨌거나 한 몸으로 어우러지며 욕망을 태우고 있었다. 이러면서도 절대화후 수국령은 번민하고 있었다.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헉……." 어디를 어떻게 만진 것인지 그녀는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자지러지고 있었다. 단우는 그런 그녀의 위에 올라서며 속삭이고 있었다. "이것이 죄라면… 당신뿐만이 아니라 나도 죄인인 셈이니… 우리… 더 이상의 말은 하지 맙시다." 그리고 황촉 불이 조용히 꺼져 간다. 두 사람의 뜨거운 호흡은 그대로 어둠에 잠기고……. 밤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2 잠을 자고 눈을 떠보니……. 세상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혀져 있었다. 그렇다. 한 가지의 소문이 천하무림을 발칵 뒤집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군산(君山)! 천하제일의 대호(大湖)인 동정호(洞庭湖) 군산에 이 땅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하나의 성이 세 워지고 있다 했으니……. 성(城)! 그것은 전체가 귀한 운남(雲南)의 대리석으로 장식이 되고 있으며, 성벽의 둘레만 해도 백 리에 가깝다 했으니……. 이 정도의 규모라면 황궁이라 해도 도저히 이 신비성의 거대함에 따를 수가 있는 것이다. 찬란한 여명과 함께 시작된 이 성의 공사는 이제 중반의 공사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성채의 그 웅장함과 그 거대함에 삼 일 밤낮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세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과연 이 성주의 주인은 누구냐는 것이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이 성을 건축하는가? 이 정도의 성을 세우자면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도 엄청날 것이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한 이치이거늘, 대 체 그 누가 있어 이런 엄청난 비용을 들여 가며 이 성을 세우는가가 가장 화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주인이 누구이며, 무슨 이유로 이 성을 건축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전무한 실정이었기 때문 에 천하무림인들의 관심은 온통 이 성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은 또 하나의 소문이 준비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 하나의 소문! 그것이 무림에 전해질 경우, 무림은 이 성의 실체에 대해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 소문은 과연 무엇인가? 3 단우가 팔황장보원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한 달의 시간은 결코 긴 것이 아니었으나, 팔황장보원은 그 시간에 하나의 사건에 휘말린 채 거대한 충 격의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사건이란 무림에서는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살인(殺人)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무림과 연관이 없는 팔황장보원이기에 연이어 일어난 세 차례의 살인사건은 실로 충격적 인 것이었다. 한데 그 살인사건에 의문의 피살을 당한 인물이 팔황장보원의 삼대감수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삼대감수들은 팔황장보원의 모든 재정상태를 관리하는 중요한 직책의 인물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죽음은 곧 팔황장보원의 큰 손실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죽었다. 그것도 삼 일 만에 연쇄살인을 당한 것이다. 물론 더 이상의 살인사건은 없었지만, 팔황장보원의 인물들은 언제 어떻게 날아들지 모르는 죽음의 손 길을 의식하며 오늘도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삼대감수의 죽음 그 뒷면에는 팔황장보원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는 점을……. 이제 그 운명은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었다. 그들이 비렁뱅이 청년으로 알고 있는 단우에 의해……. 4 "삼대감수 중 황보금만이 흑마사십사령 중 한 명이었소. 그 나머지는 그의 수하였을 뿐이오." 단우는 담담히 말했다. 지금 그가 있는 이곳은 팔황장보원주 즉 절대화후 수국령의 거처였다. 단우는 지난 한 달의 시간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분명 그는 팔황장보원에서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팔황장보원주인 절대화후 수국령과 하나의 침상 을 쓰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애초부터 이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단우가 원했기 때문이다. 단우의 앞에는 다소곳이 절대화후 수국령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빛나는 눈은 시종일관 단우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녀에게 있어 변화한 것은 그다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외적인 변화를 말한다. 하나 내적인 변화는 실로 심각한 것이었으니……. 그녀는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중병에……. 과거에 그녀는 별로 화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그녀는 하루의 절반을 동경 앞에서 보내며 화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즉, 그녀가 자신의 얼굴에 신경을 쓸 만큼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였는데……. 그렇다. 그녀는 열 살 이상의 나이 차이를 가진 연하의 사내 단우를 사랑하게 되고 만 것이다. 남편이 있는 그녀였으나 단우에게서 그녀는 남편 이상의 애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분명 병이었다. 그녀는 한 모금의 차를 마시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철혈후 한 사람이면 충분했겠지요. 그의 무공은 가히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고 그의 지 혜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으니… 그 한 사람과 그를 따르는 두 명의 수하만으로도 이 몸을 감시하고… 팔황장보원을 감시하는 데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었겠지요."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황보금이 흑마사십사령의 일 인이라면… 팔황장보원을 감시하고 재산을 빼돌리는 데 그 이상의 인물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오." 그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매만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 송이의 꽃이었다. 자세히 보니 매화(梅花)인 것 같은데, 향기라고는 전혀 없고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 지금 단우는 꽃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매화는 그가 만들고 있는 조화(造花)였던 것이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는 수십 송이 매화를 만들었다. 그 이유는 절대화후 수국령조차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그가 시간을 보내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것을 만든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단우가 조화를 만들던 손놀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절대화후 수국령을 주시하다가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대 남편의 행적이오." "……?" "그가 흑마련의 인물과 연관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황보금이 흑마사십사령 중 일 인인 것으로 확인되 었는데……." "……!"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그는 황보금의 죽음과 함께 한 번 정도는 이곳에 와야 했던 것이거늘… 전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니……." 단우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내 생각으로는 당신의 남편은 흑마련의 인물인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시오?" "……!" 단우의 물음에 절대화후 수국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남편의 얼굴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지금 단우의 얼굴을 보면서 느꼈던 행복은 단우의 물음으로 산산이 깨어졌다. "……." 그녀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그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그녀는 곧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와 보낸 시간은 십 년…… 결코 짧지는 않은 세월이었으나 아직도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을 정도로 그는 철저히 신비에 싸인 인물이었어요." "음……." "물론 그가 무학을 지니고 있고 또한 무림과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흑마련과 연관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재산을 빼돌리는지조차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내가 무엇을 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 단우는 눈을 감았다. 왠지 절대화후 수국령의 남편이라는 인물에게서 강한 신비를 느꼈다. 단지 신비를 느낀다는 정도일 뿐이었다. 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이상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이 단우는 당신의 도움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소." "……." "당신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군산의 성은 세울 꿈조차 꾸지 못했을 것이오." 단우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절대화후 수국령이 몸둘 바를 몰라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거늘… 무슨 말씀을……." "……." 단우는 이제 막 완성한 매화 한 송이를 절대화후 수국령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군산의 성을 십매어황성(十梅御皇城)이라 할 것이오." "……." "이제 세상은 십매어황(十梅御皇)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될 것이며… 당신에게 주는 이 매화는 십매 어황이 내리는 첫 선물이 되는 것이오." "아……." "앞으로 사람들은 이 꽃을 가리켜 성매(聖梅)라 부르게 될 것이며… 십매 중 이것을 지니고 있는 인물 은 나에게 은혜를 준 인물일 것이며… 이것으로서 나에게 한 가지의 청을 요구할 수도 있는 것이오. 물 론 나는 그 한 가지의 청을 성심성의껏 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며……." 말꼬리를 흐리면서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 절대화후 수국령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한 송이의 매화를 손에 쥔 그녀의 몸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십매어황성… 십매어황……." 단우를 우러러본다. "성매……." 손에 든 매화가 성스러운 매화(聖梅)라 한다. 이것으로 단우에게 한 가지의 요구를 할 수도 있다 한다. 그리고 이 십매는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기억되리라 한다. '이 사람은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큰 일을 하려는 것이 분명해.' 가슴이 떨린다. 어쩌면 자신은 무림 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한 침상에서 지낸 사이이지만 온통 신비투성이인 사람……. 남편을 지닌 이 여인의 가슴은 이 신비인의 앞에서 마냥 이팔청춘이 되고 있었다. ■ 십매어황 제3권 第一章 십매어황성(十梅御皇城) 군산. 동정호를 굽어보며 우뚝 서 있는 이 군산은 천하에 알려진 명산이다. 그러나 이 군산이 근래에 들어와 천하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화제로 오르고 있는 이유는 군산이 산세수려한 명산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군산의 만애평(萬崖坪)에 한 거대한 석성(石城)이 건축되면서부터 이 성에 대한 관심이 천하인을 주목시켰기 때문인 것이다. 아직 성은 미완성의 상태였다. 십만의 인부가 동원되어 불철주야 가리지 않고 성을 짓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성의 규모가 워 낙 엄청난지라 아직 반도 채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었다. "오오……!" "와아……!" 수많은 사람들은 성을 짓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탄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무림인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이 성에 대해 특별한 볼일이 있어 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성에 대해 무한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기에 너도나도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인들 외에도 유생들, 풍류인들이 천하를 유람하던 중 이 군산의 성을 보고는 탄성을 연발하고 있었 다. "정말 대단하다. 이 성이 거대하다는 것은 고사하고… 저 수많은 인부를 좀 봐라. 대체 저 많은 인부를 어디서 고용했단 말인가?" "천만에! 이 중원 땅에는 사람도 많으니 인부는 십만이 아니라 백만이라도 구할 수 있을 것이야… 문제 는 이 거대한 성을 무슨 목적으로 누가 짓느냐 하는 것이지." "아무튼 대단해. 저 성이 만약 완성이 되어진다면 이 땅에서 가장 거대한 성이 될 것이야." 그렇다. 그들은 보고 그저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는 것이고, 그저 사람이 할 수 있는 감탄만을 되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황혼 아래 불타듯 빛나고 있는 저 거대한 대리석 성은 더 없이 웅장했다. 또한 더 없이 거대했으며, 더 없이 신비로울 뿐이었다. 두두두두두－! 갑자기 지축을 진동시키는 말발굽 소리가 동정호변을 뒤흔들었다. 구름 떼처럼 몰려든 채 성을 바라보고 있는 인파 사이를 가르며 한 대의 화려한 마차가 나타났다. 보통의 화려한 마차가 아니었다. 보는 이의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오색 명주보옥으로 장식된 아름답고 화려한 마차였다. 성을 보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마차에게로 동시에 몰리는 것으로 보아 이 마차가 얼마나 화려한 것인 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거대하고 화려한 성과 화려한 마차……. 이것을 번갈아 보며 사람들은 한 가지 상상을 제멋대로 하고 있었다. "혹시 저 화려한 마차가 저 성의 주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저 마차에 달려 있는 보석은 실로 엄청난 것들이다. 묘안석… 자안은옥… 벽룡주……." "아아… 저 보석들 중 하나만 팔아도 능히 하나의 성을 사고도 남음이 있을 만한 값진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입은 딱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그들 중에는 이 마차를 보면서 탐욕의 눈길을 던지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마차는 화려했다. 이때 마차는 천천히 그들 앞에서 멈추었다. 이어 주렴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내려섰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여인이었다. 일신에 걸친 것은 화려한 금의였고, 머리는 각종 보석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아……!" "오오……!" 그녀를 보는 순간 그 많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숨을 죽였다. 사람들은 여인이 화려하다는 느낌 이전에 여인의 기이한 마력에 휘말려 들고 말았다. 요염하면서도 왠지 성스럽기까지 한 기이한 마력……. 사람들은 이런 여인의 기이한 마력을 느끼며 여인을 보고 또 보니……. 화려한 마차 속의 이 여인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내려서자 마부석에 있던 두 노인이 황급히 바닥에 푸른 융단을 깔았다. 행여 여인의 두 발이 더 러워지기라도 할세라……. 그런데 그들 두 노인은 바로 쌍금적자라 불리는 팔황장보원의 인물이 아닌가? 그렇다. 그들은 쌍금적자였으며 여인은 바로 절대화후 수국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절대화후 수국령에 이어 주렴을 헤치며 나타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서생(書生)이었다. 한 손에는 양피지 고서를 들고 있었으며, 별로 화려하지 않은 차림을 하고 있는 그의 나이는 대략 십 칠팔 세 가량으로 보였다. 그는 바람이라도 불어 오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 듯한 유약하고 섬세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한데 서생의 용모는 사람들의 눈을 확 뒤집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투명한 피부와 겨울 하늘에 떠 있는 차가운 별처럼 빛나는 눈……. 입술은 금방이라도 꽃향기가 흘러 나올 것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으니…….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그에게로 집중이 되고 있었다. 더 이상의 특이함은 없었으나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주는 서생의 용모에 사람들은 시선을 뗄 수가 없 었던 것이다. "……!" 서생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산정으로 시선을 올렸다. 그곳은 군산의 만애평(萬涯平)! 바로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그 거대한 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한 달 후면 완성이 되겠군. 과연 십만의 인부를 동원한 보람이 있어." 그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사람들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대부분이 사람들은 그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중인들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세… 세상에… 이 성의 주인이 그렇다면 이 어린 서생이었단 말인가?' '십만의 인부를 동원하다니… 틀림없다. 성의 주인이 아니고서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너무나 경악하여 말이 입 밖으로 확 튀어나올 뻔했으나, 그들은 억지로 그것을 참으며 서생의 다음 말 을 기다렸다. 서생, 단우는 성을 바라보며 계속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성은 십매어황성이며… 십매어황이라는 위대한 인간이 저 성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비록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그 음성에는 힘이 있어 주위 인물들은 모두다 들을 수가 있었으니……. "십매어황성……?" "십매어황……?" 그들은 경이의 빛을 띠고 단우를 주시했다. 금시초문이었다. 사람도 많고 성도 많은 이 대륙이었지만 이런 괴이한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십매어황이란 인물에 대해 그들은 무한한 신비를 느끼고 있었으니……. 대체 십매어황이란 인물은 누구인가? 이때 단우는 절대화후 수국령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속삭였다. "부인… 당신은 이 성을 구성하고 있는 열 개의 조직이 있다면 믿겠소?" 부인이라니? 언제 절대화후 수국령이 그의 부인이 되기로 약속이라도 했단 말인가? 팔황장보원을 손에 넣더니 이제는 그곳의 부인마저 쓱싹했단 말인가? 그 부인이라는 호칭에 절대화후 수국령은 눈부시도록 달콤하게 웃었다. "열 개의 조직이라니… 그 열 개의 조직이 있기에 십매라는 이름을 지은 것인가요?" 그녀는 의혹의 표정으로 반문했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바로 맞추었소. 십매란 열 개의 조직을 뜻하는 것이오." "아……." 절대화후 수국령은 나직이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탄성은 단지 그녀만이 지른 것이 아니었다. 이곳의 수많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탄성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 개의 조직…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혹시 무림과 관련이 있는 집단일까?' 이곳의 인물 가운데 무림과 관련이 없는 선비들은 십매어황성을 황궁과 관련지어 생각했고, 무림인들은 이 성을 무림의 한 집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단우가 절대화후 수국령을 주시하며 넌지시 물었다. "부인… 당신은 그 열 개의 조직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소?" "아… 당신은 그 조직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허, 내가 누구요. 항차 이 십매어황성의 주인이 될 사람이 아니오?" 단우는 노골적으로 자신이 이 십매어황성의 주인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이 성을 짓는 과정에서 단우는 철저한 비밀을 유지했다. 한데 지금에 와서 단우는 자신의 의도를 공적으로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대체 그는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인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단우는 담담히 웃으며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십매라고 불리는 열 개의 조직… 그것은 다음과 같소." 이 말에 중인들의 시선은 온통 단우의 입으로 쏠리고 있었다. 과연 무슨 말이 나올 것인가? 그것이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단우는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열 개의 조직은… 절대금궁(絶代禁宮)… 어금사교(御禁邪敎)… 마교(魔敎)… 그리고 흑교(黑敎)… 벽라 문(碧羅門)……." "……?" "……?" 중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해괴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다섯 개 조직은 일천 년 전 칠대초인 중의 오대초인이 거느리고 있 던 문파였던 까닭에 당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이 문파를 알고 있을 리는 만무한 노릇이 아닌가? 아무튼 그들은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태연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단우의 말을 계속 듣고 그들은 더 이상 태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소림사(大少林寺)와 대천마련(大天魔聯)… 벽라무황천(碧羅武皇天)… 흑마련(黑魔聯)… 천년대 자문(千年大者門)을 말함이오." 오오! 이것은 현 무림을 대표하는 모든 문파를 말함이 아닌가? 대소림사는 구대문파의 기수로서 더 이상 설명이 불필요한 문파이고…….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은 오 년 전만 하더라도 무림의 두 하늘로 군림하던 위대한 문파가 아니던가? 그리고 천년대자문은 오 년 전 천년지대가 열렸을 때 무림을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신비 의 문파이고, 흑마련은 당금 무림의 하늘로 은연중 군림하고 있는 또 하나의 신비의 문파이다. 흑마련의 흑마사십사령의 위대함은 이미 천하에 자자하게 알려진 사실……. 이 또한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한 이름들이다. "그런데… 이들 문파가 십매어황성의 일개 조직이라니… 이것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어찌 그럴 리가 있는가?" "대체 흑마련을 위시한 그들 문파가 동시에 한 문파의 조직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 가 아닌가?" 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십매어황성의 성주라는 저 서생은 아무리 보아도 글벌레라는 것과 용모가 수려하다는 것 외에는 달리 뛰어난 점이 없어 보이는데……. 저런 서생이 어찌 그 문파들을 동시에 하부 조직으로 둘 수가 있겠는가? 중인들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말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우의 말이 좋은 구실이 되고 있었다. 단우의 말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을 믿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 소문은 바람을 타듯 빠르 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대륙의 처처로……. 그리고 십매어황성과 십매어황은 이제 불가사의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소문은 훗날 퍼져 갈 것이겠지만, 지금 단우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경악과 의혹으로 몰아 가 고 있었다. 이때 단우는 다시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쏠리고 있었다. 붙잡고 당장이라도 의혹을 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들이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우의 주위에 있는 화려함에 지레 주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정도의 화려함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라면 그가 십매어황성이라는 저 거대한 성의 주인임도 어느 정 도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주인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다면 그들은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한데, 그들 중에서 제법 용기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미타불……." 낭랑한 불호성을 터뜨리며 단우의 앞을 막아서는 한 사람이 있었다. 파르라니 빛나는 머리에 선명하게 찍힌 것은 계인(戒印)이 두드러진, 그는 절세준미한 용모의 청년승(靑 年僧)이었다. 이제 막 약관을 벗어난 듯한 청년승인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는 실로 범상치 않았다. 특이하게도 그는 일신에 회색(灰色)의 가사(袈裟)를 걸치고 있었으며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가득 담 고 있었다. 두 손은 합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합장한 손에 껴 있는 염주가 기이한 서기를 뿌리고 있었다. 한편, 이 수려한 청년승의 출현에 중인들은 다시 한 번 경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이 청년승인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외쳤다. "오… 옥불(玉佛)! 소림 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기승 옥불이다." "오오… 그는 당금 무림의 오대초인 가운데 한 명이 아니던가?" "그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중인들은 의아한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또 하나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십매어황성주라는 저 서생이 대소림사가 이 성의 한 조직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 의문에 대한 해답 이 이제 막 풀릴 단계에 있는 것이다. ■ 십매어황 제3권 第二章 오대초인(五大超人)과 신비인(神秘人)들의 출현 "그대는 방금 한 말에 책임을 질 수가 있는가?" 옥불은 담담히 말했다. 그의 눈빛은 담담했고 고요했다. 그리고 그 일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는 항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단지 그 기도만으로 주눅이 들어 오금을 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단우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옥불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자가 오대초인 가운데 한 사람인 옥불…….' 그렇다. 천년지대에서 나온 그 이후 수없이 듣고 또 들었던 위대하고 또 위대한 인물, 그 옥불이 지금 그의 눈 앞에 있는 것이다. 그는 옥불을 살피며 그의 비범한 기도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이런 기도는 내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고요하고… 그러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기도…….' 단우는 내심 생각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는 옥불을 주시하며 조용히 물었다. "당신이 대소림사의 옥불이오?" 어이없는 일이었다. 대소림사를 일개 하부조직으로 두었다는 그가 대소림사의 위대한 기승인 옥불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아 닌가. "……?" "……?" 중인들은 이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만다. 옥불은 단우를 보며 고개를 젓는다. "아미타불… 방금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여 그는 묻고 있었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오. 본인은 본인의 말에 충실하게 책임을 질 것이오." "아미타불… 좋다. 그러면 우선 이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무슨 말이오?" "그대는 대소림사가 그 십매어황성의 하부조직에 있다 하였는데… 이는 대소림사를 능멸하는 행위라는 것을 아는가?" 옥불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단우는 담담히 웃었다. "모르겠소. 어째서 대소림사를 능멸하는 것인지… 나는 다만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거늘……." 바로 그때였다. "어리석은 사람이로군. 끝내 진실을 숨기려 하다니……." 청아한 여인의 음성과 함께 바람처럼 옥불의 곁에 소리 없이 내려서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일신에 취록색 궁장을 걸친 면사의 여인이었다. 용모는 면사로 인해 확인할 바가 없었지만, 전신에서 풍기는 우아한 기운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출현에 중인들은 다시 경악하고 있었다. "고… 곤륜성녀(崑崙聖女)가 아닌가?" "그렇다. 옥불과 함께 행동하는 여인은 곤륜성녀뿐이다." 과연 면사의 여인은 곤륜성녀였다. "……!" "……!" 절대화후 수국령과 단우의 눈에서 동시에 이채가 떠올랐다. '오대초인 가운데 한 명,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대초인 가운데 두 명이 나타난 셈이로군.' 단우는 그들 두 사람을 보며 무한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두 사람은 이 시대가 내놓은 최고의 기재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파의 두 하늘인 셈이었다. 과거 천마종야 단사하와 벽라천제 백리명이 무림의 두 하늘로 군림했었지만, 그들의 실종과 함께 출현 한 오대초인은 그야말로 당금 무림의 모든 것이었다. 그들은 좀처럼 무림활동을 하지 않는다. 꼬리 감춘 신룡처럼 모습을 좀처럼 보이지 않던 그들 중 두 명이 이곳에 동시에 출현한 것이었으니 ……. 이것은 중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잠시 두 사람을 똑바로 응시하던 단우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알 수 없군. 그대들은 무엇을 진실이라고 하고… 무엇을 거짓이라 하는 것인지?" 오대초인 중 두 명이 그의 앞에 나타나 서릿발 같은 위엄을 뿌리고 있거늘 그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빙그레 웃는 여유마저 보이고 있었다. "흥……!" 곤륜성녀가 냉소를 쳤다. 면사사이로 그녀의 눈빛은 시리도록 차가운 것이었다. "그대는 분명히 자신을 십매어황성의 주인이라 했는데… 그렇지 않은가?" "그렇소. 설마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말은……." "그것은 조작이다. 무림을 어지럽히려는……." 곤륜성녀가 단우의 말을 끊고 싸늘하게 말했다. "조작이라니?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반문하는 단우의 말투가 얼음처럼 차갑게 변해 있었다. 또한 그의 표정도 얼음처럼 싸늘했다. "근거?" 어이없다는 듯 곤륜성녀가 반문했다. "그것은 그대가 직접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단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만에. 나는 그런 망발은 한 적이 없다." "아미타불……." 옥불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섰다. "그대는 분명히 대소림사를 십매어황성의 하부조직이라 했는데… 그것은 망발이 아니란 말인가?" "핫하하하……." 단우는 낭랑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수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는데……. 그러다가 그는 웃음을 그치고 담담히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본인은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이 사실은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다." "……." "그대가 나의 말을 확인하고 싶으면 한 달 후… 십매어황성에 들라. 그리하면 진실은 드러나게 될 것이 다." "아미타불……." 옥불은 나직이 불성을 외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옥불의 합장한 손이 미미하게 흔들거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흔들렸다는 것 정도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스스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미세한 움직임 속에서 가공할 무형의 경기가 뿜어지고 있는 줄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단우마저 알고 있지 못하는 듯했다. "한 달 후… 헉!" 단우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으나, 어느 한순간 가슴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고 허공으로 퉁겨져 올라갔 다. 그런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옥불의 얼굴에 은은히 의혹의 빛이 서려 있었다. 또한 곤륜성녀의 눈빛에도 의혹의 서려 있었다. '우리가 잘못 생각했는가?' 그들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 두 사람은 십매어황성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이 인물에게는 그만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 하고 있었다. 흑마련! 그 조직과 십매어황성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만큼 이 서생의 무공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경지에 올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암암리 무형의 강기를 뿌려 그의 무공을 시험하려 했는데 전혀 그 방향이 빗나가고 만 것이다. 퉁겨져 올라가는 단우는 전혀 무공을 연성하지 않은 듯하지 않은가? 이때, 절대화후 수국령이 몸을 날려 단우를 안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대로 두시오, 궁주." 단우의 전음이 그녀의 귓전을 은은히 울려 왔다. '저분은 또 무슨 생각을……?' 절대화후 수국령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함께 지낸 시간이 적지 않았고, 그 시간 동안 퍽이나 가까워졌다고 생각해 온 그녀이지만 지금까지 단 우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신비와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 사이에 허공으로 솟구쳤던 단우의 몸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핫하하… 위대한 사람을 이런 식으로 다루어야 쓰겠는가?"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단우를 안아드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일신에 검은 흑포를 걸친 청년이었다. 네모반듯한 용모는 수려한 편이었으나, 실로 냉막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단우는 어느 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때 그는 단우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고 있었다. "친구… 어디 다친 데는 없는가?" 부드럽게 말을 하고는 있었으나 그 음성에는 싸늘함만이 진득하게 배어 있을 뿐이었다. 단우의 눈빛에 번쩍 이채가 스쳐 가고 있었다. "고맙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소이다."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으나, 단우는 오만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한 것으로 보아 내상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 같았다. 흑포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친구… 자네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버릇이 있군." 그는 단우의 안색을 보며 그가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음을 감지한 듯했다. 그는 품에서 하나의 옥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옥병에서 조심스럽게 한 알의 단환(丹丸)을 꺼내어 단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것은 내상을 치료하는 데는 효과가 있는 약이니… 먹어 두어서 해로울 것이 없을 것이네." 그는 단우를 향해 차갑게 웃어 보이며 단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때 단우는 단환이야 삼켜지든 말든 흑포청년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기실 그는 내상을 전혀 입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안색이 창백한 것은 그가 그렇게 내보인 것뿐이었다. 그의 무공은 이미 금강불괴지경에 이른 것인데 어찌 쉽사리 내상을 입을 수가 있겠는가? 한데 지금 그가 흑포청년만을 직시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흑포청년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냉사혼… 자객사림(刺客邪林)의 소림주였던 냉사혼이 아닌가?' 그렇다. 흑포청년은 바로 냉사혼이었던 것이다. 언제였던가? 아마 오 년 전이었으리라. 당시 냉사혼과 소야, 그리고 담야훼라는 세 소년소녀들은 그에게 너무나 인상적인 인물이 아니었던가? 벽라무황천의 제마뇌림에서 볼모로서 지내던 비운의 그들은 단우에게 인간적인 정을 주었던 인물들이었 다. 그런 그들과 생활한 것은 결코 길지는 않았으나 단우는 그들과 형제와 같은 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연한 천년대자문의 음모에 휘말려 천년지대로 가게 되었고, 결국 그 길이 그들 세 사람 과 헤어지는 계기가 되고 만 것이었는데……. 항시 생각이 나는 그들 중 한 명인 냉사혼을 지금 만난 것이다. 그러나 단우는 냉사혼을 알아보았으되 냉사혼은 단우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냉사혼이 변한 것 이상으로 단우의 모습은 훨씬 더 변했기 때문이다. 당시 단우는 피골이 상접하여 병색이 짙은 모습이었고, 오 년이 지난 지금은 전혀 그 당시의 모습을 찾 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냉사혼이 단우를 알아보지 못함은 당연했다. 아무튼 단우는 냉사혼을 보면서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기이한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그것은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냉사혼이 변해 있었던 것이다. 성격이나 모습이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기도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변해 있었던 것이니……. '이것은 냉사혼이 무서운 무공을 지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의 무공이라면 흑마사십사 령의 일인이었던 흑무상과 철혈후에 비해 오히려 높은 수준이다.' 실로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오 년이란 세월에 냉사혼이 흑마사십사령과 비견될 만큼의 무공은 도저히 연성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흑마사십사령! 그들은 천년지대의 무공을 연성한 불세출의 기재들인지라, 옥불이나 곤륜성녀 같이 특이한 자질에 상당 한 배후를 지니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들을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예로 자하고금마유사 같은 인물도 잠력이 한순간에 폭발하여 십 배 이상의 무공 증진을 보았음에도 흑무상이라는 흑마사십사령의 막내에게 허무하게 당하지 않았던가? 물론 자객사림이라는 살수집단도 무시할 수 없는 단체이기는 하지만, 그 단체의 모든 무공을 섭렵한다 해도 이런 정도의 성취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단우가 느끼는 냉사혼의 무공은 흑무상 이상이었던 것이니 단우가 그것을 의혹스럽게 생각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내가 변한 만큼 그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남이 모르는 기연이 따라 주었다면 그의 자 질로 보아 이런 정도의 성취는 이를 수가 있겠지.' 단우는 바닥에 내려선 채 옥불과 곤륜성녀, 그리고 냉사혼 등을 번갈아 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냉사혼은 옥불과 곤륜성녀 등을 보며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두 분이 오대초인 가운데 속한 이상 당연히 소생은 이렇게 대하지 않을 수가 없소." "……." "하나… 일이야 어찌됐든 두 분이 이런 문약한 서생을 공격한 것은 잘못된 일이오. 그렇지 않소?" "아미타불……." 옥불은 나직이 불호를 외쳤다. "시주가 이곳에 갑자기 나타나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 "이렇게 말하기 전에 자신의 신분부터 알리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아… 그것을 잊었소이다. 죄송하오." 냉사혼은 다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소생은 냉사혼이라 하오. 물론 이놈은 두 분께서 일찍이 들어본 바가 없을 것이오." "……?" 옥불과 곤륜성녀는 의혹의 눈빛을 발했다. 그렇다. 그들은 냉사혼이라는 인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상대의 기도로 보아 상당한 고수일진대… 어째서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들 두 사람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다는 느낌일 뿐이지 곤륜성녀만이 옥불을 주시했을 뿐 옥불은 시선을 하늘을 향해 무심히 던져 놓고 있었다. 그러자 곤륜성녀가 침묵을 깨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나타난 의도는……?" 냉사혼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이 몸이 이곳에 온 것은 나의 주인이 이 두 분에게 특별한 볼일이 있기 때문이오." 말을 하면서 그는 눈짓으로 단우와 절대화후 수국령을 가리켰다. 옥불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 두 사람에게는 우리도 볼일이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냉사혼은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이것 참 난처한 일이로군. 두 사람을 나누어 가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주인의 명을 어길 수도 없으니… 아무래도 두 분께서 양보하셔야 하겠소." "아미타불……." 옥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의 입가에는 온화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이것은 살인할 때 그가 짓는 특유의 버릇이었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 옥불이라는 인물이 정파의 최고 인물이었고, 그 자비를 상징으로 하는 대소림사에 몸을 담고 있었지 만 결코 자비롭지만은 않은 인물임을……. 어찌 보면 그는 지극히 잔인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사마인을 대할 때의 일이었다. 그는 사마인을 상대할 때는 그야말로 잔인해지는 것이다. 결코 용서가 없었다. 단지 죽이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베푸는 자비였다. 그 자비를 베풀 때 그는 항시 이렇듯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띠는 것이었으니…….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곤륜성녀는 탄식을 토했다. '이분의 성격은 지극히 잔인하다. 세상이 이분에게 순응하면 이분은 자비로우나… 거부하면 이분은 잔인 해진다. 그러나 세상은 이분에게 순응만 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니… 이분의 잔인은 언제나 그 끝을 맺을 것인지…….' 그녀는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옥불을 상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한 그녀이다. 하늘이 옥불을 내리고 그녀를 내린 것은 그녀로 인해 옥불이 조금이라도 자비로워지기를 바란 것이 하 늘의 뜻이라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잔인함이었다. 옥불은 말하고 있었다. 더욱 온화해진 음성으로……. "마음대로 하게. 두 사람을 데려가든 아니면 놓고 가든……." "……." "그러나 한 가지만은 명심하게. 자네만은 이곳에 남아야 함을!"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결코 두 사람을 냉사혼이 데려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대로 하라면… 그대로 해야겠지." 냉사혼은 음울하게 웃었다. 그의 몸에서는 더불어 잔인한 살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는 단우와 절대화후 수국령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셔야 하겠소이다. 두 분… 이것은 주인의 뜻이니… 천하의 누구라도 이것을 거역할 수는 없소이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두 사람이 마차에 타기를 무언중 강요하고 있었다. 단우는 담담하게 웃었다. "이러다가 우리가 죽는 것은 아니오? 보아하니 저 중 양반은 성격이 잔인한 것 같은데… 당신이 그것을 막을 수가 있겠소?" 다소 염려가 된다는 듯한 단우의 말에 냉사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할 수 있소. 당신의 몸은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이 자부심이 옥불과 곤륜성녀 앞에서 보이는 것이기에 대단한 것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데 바로 그 말이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핫하하… 그의 말은 내가 보증서겠소. 두 분은 안심하셔도 되오." 하늘을 울리는 낭랑한 웃음소리가 돌연 좌중으로 흘러드는 것이 아닌가? 또 한 명의 불청객이 중인들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일신에는 허름한 마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긴 검상이 나 있는 약간은 추악해 보이는 청년이었 다. 그는 동정호에서 낚시라도 한 듯 하나의 낚싯대를 어깨에 매고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한데 그의 발걸음은 실로 가벼운 것이어서 어찌 보면 허공을 밟고 있는 듯 하지 않은가! 한편, 그의 출현에 냉사혼은 다소 긴장한 듯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무엇인가 불안한 생각이 든 것 같은데…….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냉사혼이 이토록 긴장하고 있는 것인가?' 적어도 단우가 알기로는 냉사혼은 그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가공할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옥불과 곤륜성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것은 믿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 런 그가 마의청년의 출현에는 아연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애초에 저 군산 만애평에 거대한 성을 관람하기 위해 모여든 중인들은 연속 출연하는 신비인들 을 보고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 "……!" 군웅들은 긴장된 모습으로 옥불과 곤륜성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느낄 수가 있었다. 이들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암투가 있으며, 이어 무서운 혈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음은 옥불과 곤륜성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파의 하늘이고 오대초인에 속해 있는 개세의 고수들이었기에 이곳에 출현한 어떤 인물도 그들 두 사람을 상대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어떤 혈전에서도 무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위험한 장소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저 거대하고 신비한 성의 주인이라는 단우에 대해서 무한한 신비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혹시 이곳에 남아 있는다면 그 신비를 한 가닥이라도 풀 수가 있을 것 같은 마음이기도 했다. 이때였다. "핫하하하… 우리의 주인도 두 분을 원하고 있으니… 두 분은 이 철사자(鐵獅子)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 오. 핫하하……." 마의청년은 자신을 철사자라 드러낸 그 직후 신형을 허공으로 쭉 뽑아 올렸다. 한데 그렇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었다. 슈욱－! 그의 낚싯대가 허공을 반으로 쪼개더니 그대로 단우와 절대화후 수국령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돌발적인 상황! 단우와 절대화후 수국령은 순식간에 낚싯줄에 휘감겨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때, 절대화후 수국령은 반항을 할 수도 있었으나 단우의 전음이 그것을 만류함으로 그녀는 힘을 빼고 있었다. 철사자는 두 사람을 이끌고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갔다. "핫하하하… 여러분, 훗날 다시 봅시다." 말은 느렸으나 그의 행동은 말보다 열 배 이상은 빨랐다. 말이 떨어지는 그 순간에 그의 신형은 단우와 절대화후 수국령을 동반하고 까맣게 멀어지고 있었다. 그 빠름이라는 것은 그의 무공이 얼마나 가공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그대로 두고만 보고 있을 냉사혼이 아니었다. 그리고 옥불과 곤륜성녀가 아니었다. "철사자… 두 사람을 내려놓아라." 냉사혼의 신형이 철사자에게로 쏘아져 가고 있었다. 이미 그의 손에는 얼음처럼 투명한 검이 쥐어져 있었고, 거기에서는 가공할 검기(劍氣)가 폭사되고 있었 다. 어디 그뿐이랴. "아미타불… 어리석은 중생이로고……." 옥불은 합장하며 불호성을 외쳤다. 그러나 그는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단지 그의 백팔염주만이 철사자를 향해 날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쾌애애액－! 백팔염주는 냉사혼보다 더욱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고, 일순 허공에서 작은 폭발과 함께 분리되더니 그 대로 철사자를 덮쳐 버렸다. 순간 중인들의 얼굴에 경이의 빛이 흐르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아! 저것은 백팔복마주(百八伏魔珠)가 아닌가?" "오오… 저 백팔복마주가 일시에 폭발하면 일백팔 명의 인명을 동시에 살상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 철사자를 향해 날아들고 있는 것은 백팔복마주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지 무기로서만이 아니라 소림사의 장문인이라 해도 굴복시킬 수 있는 무상의 신물이기도 했 다. 지금까지 그 백팔복마주로 인해 죽어 간 사마인은 그 얼마던가? 차라리 지옥의 염라대왕은 만날지언정 옥불은 만나지는 말아야 된다는 말은 바로 이 백팔복마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한데, 그 백팔복마주가 지금 철사자를 향해 날아들고 있는 것이었으니 결과야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 니겠는가? ■ 십매어황 제3권 第三章 십매어황(十梅御皇) 그러나 철사자라는 인물의 실력은 중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가공할 공세 앞에서도 그는 조금도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과연! 과연이다!" 낭랑한 탄성과 함께 그가 허공에서 몸을 가볍게 비트는 순간이었다. 스스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신형이 수십 개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환영술이었다. 어느 것이 실(實)이고 어느 것이 허(虛)인지 도대체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옥불의 입가에 순간적으로 싸늘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합장한 손을 가볍게 허공을 향해 뻗었다. "아미타불… 일천 년 전 실전된 무영환마술(無影幻魔術)을 펼치는 것을 보니… 흑마련의 흑마사십사령 중 일 인이로군." 단지 무공을 봄으로서 상대의 신분을 짐작해 내는 옥불의 안목은 중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 었다. '모르는 것이 없군.' '과연 대소림사의 최고 기승답다.' '정파무림에 저런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들은 대견한 시선으로 옥불을 주시했다. 한편, 옥불의 쌍수가 허공으로 뻗어지자 놀라운 변화가 백팔복마주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스스스－! 놀랍게도 백팔복마주도 역시 수십 개의 환영을 연출해 내는 것이 아닌가? 한 개가 수십 개로 갈라진다는 말이다. "헉!" 철사자는 이런 변화에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까지도 수십 개의 환영에서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었으니……. 그는 느끼고 있었다. 백팔복마주를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음을.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단우와 절대화후 수국령을 등한시하고 자신만 살고자 한다면 백팔복마주를 벗어날 한 가닥 희 망이라도 있는 것이다. 그의 무공이 엄청난지라 최소한 생명은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죽음 앞에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나약해 지는지라, 그는 결국 살기 위해 단우와 절대화후 수국령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휙－! 그는 낚싯대를 빠르게 거두었다. 순간 단우와 절대화후 수국령은 낚싯대에서 벗어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단우는 이 와중에서도 전혀 당황하는 빛 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군. 철사자라는 인물은 흑마련의 인물이었군. 그렇다면 이번 일에도 흑마련은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내가 바랬던 바이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바로 그때. 파아아아－! 철사자의 낚싯대는 백팔복마주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것은 보통의 낚싯대가 아니었다. 만년흑옥(萬年黑玉)으로 만들어진 희세의 병기인 것이다. 한데 그 낚싯대가 순간적으로 거대하게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이어 그것은 백팔복마주를 향해 무섭게 날아갔다. 콰아아아악－! 엄청난 강기( 氣)의 소용돌이가 거기에서 뿜어져 나왔다. 단우는 그 광경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으음… 정말 대단한 무공이다. 그리고…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은 일천 년의 백대고수 안에 있던 천간조 수(千竿造手)의 독문병기인 천간(千竿)… 틀림없이 저자는 흑마련의 인물이다.' 그러다가 그는 냉사혼을 보며 더욱 놀라게 되었다. 냉사혼의 손에 쥐어져 있는 투명한 보검 때문이었다. '아아… 일천 년 전 역시 백대고수 안에 들었던 자객사혼(刺客死魂)의 빙류검(氷流劍)이 아닌가? 그렇다 면 냉사혼 역시 흑마련의 인물이란 말인가?' 냉사혼이 빙류검을 들고있는 이상 흑마련의 인물임이 분명했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구심이 있었다. 그가 흑마련의 인물이라면 철사자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인물임이 자명한 이치이거늘 그가 지금 철사 자를 공격하고 있으니 말이다. "……?" 단우가 미혹에 빠져들었다. 어쨌거나 일천 년 전의 사라진 무림 속의 병기와 무학이 계속 이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심상치가 않은 일이었다. 한편. 카카캉－! 철사자는 천간으로 백팔복마주를 강하게 쳐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냉사혼의 빙류검이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든 것은! 백팔복마주를 상대하자니 자연 냉사혼은 신경 쓸 여지가 없었던 터, 그의 빙류검을 피하고 말고 할 시 간적인 여유는 전혀 없었다. 파앗－! 냉사혼의 빙류검은 그대로 철사자의 가슴을 노리고 짓쳐들었다. 그의 가슴에서 피 분수가 치솟아 올랐다. "헉! 내… 냉사혼! 네… 네놈이… 태상련주를 배반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철사자는 가슴을 움켜쥐고 처연하게 외쳤다. 그의 가슴에는 빙류검이 관통해 있었다. 철사자는 바닥에 선 채 빙류검을 움켜쥐고는 그것을 거칠게 빼냈다. 푸아앗－! 더욱 선홍빛 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흐흐흐… 태… 태상련주를 배신한 놈들은 모두가… 죽을 것이다. 필연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태상련주라 함은 바로 흑마련의 련주를 지칭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흑마련에 배반자라도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나……. 냉사혼은 싸늘하게 웃었다. "누가 누구를 배반했다는 말이냐… 태상련주라니… 누구를 두고 하는 소리냐? 내가 모시고 있는 분도 태상련주이거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가 모시고 있는 인물도 태상련주라면 흑마련의 련주가 하나가 아닌 두 명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무튼 단우는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 가지 놀라운 짐작을 하고 있었으니……. '저들이 두 명의 태상련주를 섬기다니…? 기이한 일이다. 흑마련의 태상련주가 결코 두 명은 아닐 터… 그렇다면 무슨 말인가? 흑마련이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져들었단 말인가?' 흑마련의 자중지란! 이것을 옥불과 곤륜성녀도 동시에 생각하고 있었다. 옥불은 고요한 시선으로 철사자와 냉사혼을 주시하고 있었다. 중인들의 시선도 바로 그들 두 사람에게로 향해 있었다. 철사자가 비릿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우리들 흑마사십사령이 어떻게 탄생이 되었느냐? 모두가 태상련주 덕분이 아니더냐?" "그렇지……." 냉사혼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데 배반이라니… 흑마삼십이령(黑魔三十二靈) 냉사혼, 네가 배반이라니… 항차 태상련주의 분노를 어 찌 감당하려 하느냐?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철사자는 말을 하고는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다. 그러나 그의 말과는 달리 냉사혼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두려움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냉사혼이 모시고 있는 분도 태상련주라는 것이다." "닥쳐랏! 그는 천령(天靈)일 뿐이지 태상련주가 될 수 없다. 태상련주는 한 사람이지 두 사람이 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헉헉……." 흥분이 너무 지나친 탓인지, 아니면 내상이 점점 깊어지고 있음인지 철사자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한데……. － 천령(天靈)! 이 이름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언제이던가? 한 사람의 금일홍이 아닌 두 사람의 금일홍이 천년지대 안에 나타나 야망에 찬 대화까지도 기억이 생생 한데……. 당시 그들은 각기 천령과 지령으로 불렸다. 그런데 당시의 그 천령이 지금 두 사람의 대화에 언급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명의 태상련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이 충분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때, 냉사혼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다. 너는 죽어 가고 나는 살아 있기에… 더 이상 그런 복잡한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흐흐흐… 냉사혼… 너는 흑마사십사령 중 흑마삼십이령이고… 이 철사자는 흑마삼십일령(黑魔三十一 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물론 잊지 않고 있다." "헉헉… 그렇다면 너와 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란 것도 잘 알고 있겠군." "물론이다." "허헉… 그런데 내가 너에게 당하여 죽어 가고 있다니…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평상시의 우리들 의 대결이라면… 너는 이 몸의 삼초지적도 될 수가 없는 것이거늘……." "그러나 그것은 이론상 그렇다는 것뿐… 너와 내가 익힌 무공이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일지라도 나의 자질이 너보다 뛰어난 것이라면… 오히려 내가 너를 이길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그 이론을 깨지는 못했다. 너도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철사자의 말에는 어떤 확신감이 스며 있었다. 순간 그것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파아아－! 그의 몸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찰나지간 그의 신형은 돌풍처럼 그 자리에서 도는가 싶더니 벼락처럼 한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내미는 것이 아니라 냉사혼의 가슴을 노리고 짓쳐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손은 보통의 손이 아니었다. 완전히 검은빛에 젖은 손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옥불의 입에서 신음과 같은 외침이 터지고 있었다. "흑마수(黑魔手)가 아닌가?" 그렇다. 철사자가 지금 전개하는 것은 일천 년 전 천년지대에서 실전된 전설의 흑마수였던 것이다. 흑마수! 이것은 죽음 직전에야만 펼칠 수 있는 무공으로서, 이 무공을 펼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오직 피와 죽음 만을 원하는 악마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일천 년 전에도 철저히 금기로 여겼던 저주의 무공이었다. 죽음 직전에 펼쳐야 한다는 제약도 있었지만, 이 무공을 단 한 번이라도 펼친다면 완전히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상실해 버리고 오직 피와 죽음만을 쫓는 마물이 되어 버리기에 그 누구도 연성을 하지 않으려 했던 마공이었다. 하지만 이 무공을 펼치게 되면 죽음에서 살아날 수가 있었다. 어떤 내상을 입었다 해도, 설사 그 내상이 치명적인 것이어서 죽어야 함이 필연적인 것이라 해도 살 수 가 있는 것이다. 철저히 마물로서만! 그 위력은 그만큼 저주스럽다. 그런데 일천 년 전에도 연성을 금했던 그 무공을 연성한 인물이 지금 나타난 것이다. 냉사혼은 경악했다. "설마… 흑마수를 연성했을 줄이야……." 검은 손을 보며 냉사혼은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벼락처럼 빙류검을 뻗어 흑마수를 자르려 했지만, 흑마수는 그대로 빙류검을 반동강이로 자르고 말았다. 그리고 계속하여 냉사혼을 향해 날아들었다. 절대절명의 위기 순간. "흑마수를 연성했다면 당연히 죽어야 한다." 어디선가 냉혹한 일갈이 터졌다. 중인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어리둥절하고 만다. "저… 저자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것 같지 않았던가?" "십매어황이라는 저 청년이……." 그렇다. 단우의 신형이 지금 철사자를 향해 폭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움직임은 불가사의했다. 그러나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그의 손이었다. 그 손은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녹색의 광망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손이 어찌 아수라존(阿修羅尊)의 형상을 할 수가 있으며, 어찌 저렇듯 불가사의한 변화를 보일 수 가 있단 말인가? 나타났다 싶은 순간, 그의 손은 이미 철사자의 흑마수를 절단하고 그대로 철사자의 가슴으로 파고 들어 가니……. 꽈지직－! "크아아아악－!" 철사자는 참혹한 비명과 함께 십여 장 밖으로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그리고는 한 차례 꿈틀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죽은 것이다. 미처 흑마수를 완전히 펼쳐 보이지도 못한 채 종말을 맞고 만 것이었으니……. 단우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소?" 단우는 부드럽게 냉사혼을 향해 물었다. 냉사혼은 기이한 눈빛으로 단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그대는 숨은 고수였군." 그는 새삼 단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단우는 담담히 웃었다. "숨은 고수라니… 과분한 칭찬이오. 이 몸이 지니고 있는 무공은 어디에다 선보이기도 부끄러운 미약한 것에 지나지 않소." "후후후… 그 정도가 미약한 것이라면 이 몸은 더 이상 무공을 쓸 자격도 없는 것이오." 냉사혼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기이했다. 처음 대하는 단우가 기이하게도 친근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객이라는 특수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번도 정을 주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런데 단우를 보며 처음부터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을 무엇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그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단우임을……. 자신이 과거 한때 정을 주었던 그 어린 소년임을……. 그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어쨌든 고맙소. 생명을 구해 주셔서……." "천만의 말씀이오. 사해의 인물은 모두가 동도라 했는데… 내 어찌 죽어 가는 당신을 보고 모른 척할 수 가 있겠소." 두 사람은 마주보며 빙그레 웃고있었다. 가식 없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한편, 옥불은 다시 침음성을 토하고 있었다. "저자가 쓴 무공은 전설의 마라단수(魔羅斷手)이다." 놀랍게도 그는 전설의 그 무공까지도 알고 있었다. 이때 곤륜성녀가 말을 이었다. "마라단수라면… 일천 년 전 사라진 칠대초인 가운데 대두혈제의 무공이 아닌가요?" "그렇소. 당시 대두혈제는 이 무공을 창안해 놓고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조사의 기록이 있고 보면… 심히 저자의 신분이 신비롭소." "아……." 곤륜성녀는 새삼스레 단우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는 기이한 물결이 일고 있었으니……. 이 시대의 최고의 성녀인 그녀의 마음에도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인가? 이것을 옥불이 놓칠 리는 없었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 성녀……. 이 옥불은 두고볼 것이다. 그대가 태생을 따지고 든다면 할 말이 없는 본인이지만……. 후후후… 옥불은 두고볼 것이다. 그대의 고결함과 성결함이 언제까지 지속이 될 수 있을지… 그날까지 이 옥불은 자제를 할 것이다. 대소림사의 제자로서 긍지를 보일 것이며… 부끄럽지 않은 태도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성결함과 고결함이 땅에 떨어졌을 때 그대는 본좌의 무서운 변신을 보게 되리라……. 그리고 그때도 그대가 태생을 들먹일 수 있을는지 두고볼 것이다. 이것은 저주였다. 그런데 그 말을 끝으로 옥불은 놀랍게 변화했다. 술과 여인을 밥먹듯이 즐기던 그가 그때부터 그것을 철저히 금했으며, 살인도 즐겨하던 그가 살인마저 될 수 있는 한 자제를 했다. 이것은 오직 한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니……. 그는 곤륜성녀의 타락을 보려하는 것이다. － 성녀로서의 타락! 세상은 그녀를 존경하고 사모한다. 그녀를 여인으로 보는 것보다 성녀라는 특수한 신분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천하의 사내들은 그녀를 사모할 수는 있어도 독점하려 생각하지는 않는다. 독점하려 들면 그 순간부터 천하 사내들로부터 그 사람은 철저히 외면을 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성녀이어야만 할 여인이 한 사람을 사랑하고 택한다면 그것 역시 천하 사내들로부터 외면 당할 구실이 되는 것이니……. 그녀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성녀이어야 하고, 그녀에게 있어 사랑은 곧 타락이 되는 것이다. 이를 옥불은 지켜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악취미가 아니라, 비록 대소림사의 최고의 성승이라 하나 마인의 피를 타고난 태생을 지니 고 있기에 그와는 완전히 반대의 고결한 태생의 성녀에게 갖는 오기일 수도 있었다. 지금 그는 성녀가 단우에게 야릇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한데 웬일인가? 당연히 쾌락을 느껴야 하는 그임에도 불구하고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인가 마음 한 귀퉁이에서 빠져 나가는 듯한 이 공허함은? '아미타불… 불문에 몸을 담고 있는 내가… 이 옥불이 한 여인을 사랑하고 있기라도 했단 말인가?' 자신의 마음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곤륜성녀가 타락하기를 바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으니……. 이때, 단우는 중인들을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한 달 후 당신들은 보게 될 것이오. 십매어황성의 완성을… 그리고 십매어황을… 또한 그 위대함도 ……." 그는 이런 말을 하고는 주저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중인들은 멍하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차는 떠나가고 있었다. 두두두－! 그러나 중인들은 그 자리에 떠날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냉사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분명히 두 사람을 자신의 주인에게 데려가야 할 임무가 있음에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우의 무공을 보지 않았는가? 그의 무공은 자신이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는데……. 그 무공은 자신의 주인과 비견될 만큼 강한 것이었는데……. 마음은 있을지나 그의 떠남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옥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미타불……." 그는 묵묵히 단우의 사라짐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무한의 신비뿐이었다. － 단우. 일명 십매어황이라고도 하는 인물, 과연 그는 무슨 목적으로 십매어황성을 세우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는 무슨 목적으로 십매라는 단어가 무림 십 개 문파라고 말한 것일까? 그 조직은 현재 무림에서 활동하는 문파도 있었고, 이미 일천 년 전에 사라진 문파도 있었는데……. 그러나 저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 열 개의 문파가 도저히 한 문파 아래 귀속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십매어황이라는 저 인물은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말하고 사라진 것이다. "……!" 중인들은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입을 통해 무림에 전해질 것이다. 단우가 말한 그대로……. 그리고 그의 가공할 무공에 대해서도 무림인들은 화제로 삼기를 서슴지 않을 것이다. － 십매어황성(十梅御皇城). － 십매어황(十梅御皇). 이 존재는 이렇게 해서 무림에 정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풍운(風雲)! 이것은 또 다른 무림의 풍운을 예고하고 있었다. ■ 십매어황 제3권 第四章 팔황장보원주(八荒藏寶院主) 달빛과 별빛에 젖은 동정호는 유난히 아름다웠다. 쏴아아아－! 파도 소리와 함께 은빛 편린으로 부서지는 포말……. 거기에는 환상 같은 신비경이 떠올라 있다가 스러지고 있었다. 밤하늘은 동정호에도 비쳐 있어 어찌 보면 하늘은 하나가 아니라 둘로 보인다. 동정호변을 따라 천천히 거니는 한 쌍의 연인이 있었다. 여인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며, 사내는 영락없는 백면서생이었는데 그 용모가 어둠을 밀어 낼 만큼 눈이 부시게 수려하다. 그야말로 인중지룡(人中之龍)이며 임풍옥수(臨楓玉樹)였다. 이들은 바로 군산을 떠나 이곳에 온 단우와 절대화후 수국령이었다. 달빛은 교교하고 두 사람의 발걸음은 지극히 여유 있는 것인지라 보는 사람에게도 편안함을 주고 있었 다. 그들만이 아니라 동정호변을 따라 많은 유랑객들이 짝을 지어 거닐고 있었다. 실로 봐서 나쁠 것 없는 기분 좋은 정경이었다. "이제는 말씀하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절대화후 수국령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이오?" 단우는 짐짓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절대화후 수국령은 탄식을 흘렸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되묻는 것을 보니… 말씀하실 의향이 없으신 듯하군요." "하하하… 글쎄 무엇을 말이오?" 단우는 재미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그러자 절대화후 수국령은 짐짓 토라진 음성을 흘렸다. "이제 당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당신의 신분이 무엇이며… 십매어황성이라는 것을 만 드시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 "아직도 빈첩을 믿지 못하고 있으신가요?" 금시 눈물이라도 쏟아 낼 듯, 절대화후 수국령의 두 눈이 슬픔으로 차 올랐다. 단우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요? 당신을 믿지 못해서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히 숨기는 것이지요?" "……." "빈첩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가요? 하나 당신은 빈첩에게 무엇을 주었나요?" "……." "당신이 섭섭하기만 해요. 당신이 아무리 빈첩에게 잘해 준다고 해도… 당신을 모르는 나이기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한 방울의 눈물이 그녀의 면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여인의 눈물은 사내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무기이다. 그것이 미인의 눈물일 때는 더욱 그렇다. 단우는 난처한 빛을 띠었다. "당신은 섭섭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되오." "하… 하오나……." "알아서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소. 나에 대해 안다는 것은 좋은 것은 못 되오." 단우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의 비밀이 어찌 보면 엄청난 것인지라… 나에 대해 알고 있음은 나를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있어 당 신이 표적이 될 수 있고… 결국 그들은 당신을 통해 나를 알아 내려 할 것이오." "……!" "나는 당신이 그런 위험에 빠져드는 것을 원치 않소. 십매어황성과 십매어황이라는 말에 수많은 무림인 들이 나를 노리는 것은……." "음……." 절대화후 수국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단우의 말은 사실 맞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나를 노리는 것은 십매어황성에 대해서 알고자 했기 때문이오. 그리고 나의 행동이 자신들의 운 명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서로 싸우고 죽이며 나를 탈취하여 십매어황에 대해 알려 했던 것이니……." "……!" "만약 당신이 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그들은 당신을 노릴 것이 분명한 것이 아니오?" "……." 절대화후 수국령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다. "어쩌면 당신은 나로 인해 죽을 수도 있소. 한데… 내가 왜 그런 위험한 장난을 하려 들겠소. 내게 있어 당신이란 존재는… 십매어황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을……." "아……." 단우의 말에 절대화후 수국령은 감동하고 말았다. 백 마디 천 마디보다도 단우의 그 한 마디 말에 그녀는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 내게 있어 당신은 십매어황성 못지 않게 중요하오! 이것은 그녀에게 확신을 주고 믿음을 주고 있었다. 단우의 신분이야 어찌됐든, 그가 하고 있는 진정한 목적이야 어찌됐든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이제 그녀는 단우를 믿고 따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흑……!' 감동의 물결이 해일처럼 그녀의 눈망울에서 일고, 급기야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단우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차차 알게 될 것이오. 나의 모든 것에 대해… 물론 나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크게 실망하겠지만 ……." "아…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비렁뱅이라 해도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에 요." 와락－! 그녀는 단우의 품에 자신을 던졌다. 밤은 아름답고 두 사람의 사랑 또한 아름다웠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그들은 귓전을 파고드는 냉혹한 음성을 들어야 했다. "보기 좋은 광경이로군." 이 소리는 어둠에 잠긴 동정호변의 한 갈대밭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단우는 태연히 절대화후 수국령을 밀어 내고 갈대밭으로 시선을 던졌다. "……?" 그는 한 사람을 그곳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백의인(白衣人)이었다. 달을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 있는 그 백의인은 백립(白笠)을 턱 아래까지 눌러쓰고 있었는데…….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그의 몸은 은빛 달빛이 후광처럼 드리워져 있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 함을 뿌리고 있었다. 한 인간에게서 달을 연상한다는 것은 모순이겠지만, 분명 그는 달과 같은 신비와 기도를 뿌리고 있었다. 태양이 뜨면 사라질 것 같은 기도……. 그러나 태양이 뜨면 사라지는 것이 달이 아니라 달은 다만 보이지 않은 것이고, 보이지 않기에 더욱 신 비로운 그것을 그는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으니……. 전율……. 그것이 단우의 몸에 스쳐 가고 있었다. 천년지대에서 나온 이래 사람을 보고 이런 전율을 느껴 보기는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리라. 물론 옥불과 곤륜성녀에게서도 거대한 기운을 느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누구이기에… 이런 기도를 뿌리고 있단 말인가? 이런 기도를 뿌릴 수 있는 인물이 오대초인 말고도 또 있었단 말인가?' 단우는 떨리는 눈빛으로 그 백의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상대는 거대하게 느껴졌고 신비롭게 느껴질 뿐이다. 백의인이 다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보기에는 좋지만… 그러나 알고 보면 좋은 것이 아니야." 무엇이 좋고, 무엇이 좋지 않다는 것인지 백의인의 말은 애매모호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해답의 열쇠는 바로 절대화후 수국령이 쥐고 있는 듯했다. 보라! 지금 그녀의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지 않은가? "헛허허… 한 사람은 남편을 버리고 외간 사내와 놀아나는 불륜녀이고… 한 사람은 그 얼굴을 미끼로 엄청난 재산을 빼돌린 난봉꾼이니… 이를 어찌 좋게만 볼 수가 있는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우와 절대화후 수국령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확실 하게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 백의인은 지금 두 사람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국령… 그대는 설마 나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아니야, 모른다고 할 수도 있겠는 걸." "……!" "남편을 버린 여인이 남편을 그대로 인정할 리는 만무한 노릇이니……." 다분히 그 음성에는 조소가 실려 있었다. 바로 단우와 절대화후 수국령을 향해 던지는 조소……. 그러자 단우는 내심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알고 있소, 저 사람을……?" 그는 절대화후 수국령에게 물었다. 절대화후 수국령은 잠시 동안 말을 못하고 있었다. 입이 굳어져 버리기라도 한 듯……. 그러나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약간 진정이 된 듯 힘없이 말했다. "그가 바로 팔황장보원주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남편……?" 단우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슥－! 백의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단우의 면전에 나타나 있었다. 보고 있음에도 그것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움직임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것인지를 능히 짐 작할 수가 있으리라. '대… 대단하다.' 단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적어도 현 무림에는 저런 신법의 종류가 없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의 결론이 나온다. 그가 전개한 신법은 일천 년 전 사라진 무학이라는 것이었다. 즉, 천년지대 안의 무공을 연성한 사람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인가? 단우는 그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절대화후 수국령의 남편이라는 점에서 더욱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으니……. "……!" "……!" 두 사람은 한동안 그대로 묵묵히 서 있었다. 서로에게 거대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랄까? 아무튼 그들은 서로에게 이제까지 남에게서 느껴 보지 못했던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화후 수국령은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남편은 기실 공포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가운데 느끼는 것은 알 수 없는 공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이 쉽사리 단우에게 돌려졌을지도 모른다. 단우에게서는 신비로움만 느껴졌지 공포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부부 사이에 공포가 있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 그런 공포가 있다면 어찌 진정한 부부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절대화후 수국령의 신분이 절대금궁이란 궁주의 위치에 있었거늘, 그런 공포를 느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를 단편으로 짐작케 하는 것이다. 그녀는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어 말을 못하고 있었다. 단지 단우의 곁에 바짝 선 채 몸만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단우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죽은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다니… 이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일찍이 없었던 괴사로군." 다분히 조소가 담긴 말이었다. 그렇다. 과거 팔황장보원주는 죽었고, 세상은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니……. 그는 분명히 죽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백의인은 습관처럼 백립을 매만지며 말했다. "뻔뻔한 친구로군. 남의 아내를 가로채고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양심이 있는 자라면 미안한 기 색이라도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뻔뻔한 것은 그대가 아닌가? 그대가 죽었다면 그대의 부인은 당연히 미망인이어야 하고… 그렇다면 그 대의 부인은 다른 남편을 섬길 의무가 있는 것이거늘… 설마 그대는 그대의 부인이 청상의 과부(寡婦) 로 늙다가 백토로 변하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닌가?" "……!" "어쨌든 그대가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뻔뻔한 것이지." "대단한 입심이로군." 백의인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백립을 어루만졌다. "이 백립은 우리 부부 사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니……." 그의 시선은 절대화후 수국령에게로 향했다. "내가 죽음을 가장하고 떠나던 하루 전 날 밤… 부인은 이것을 정성들여 만들었소. 그리고 떠나도 이것 을 보며 부인을 생각하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소." "……." 절대화후 수국령의 눈빛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분명히 저 백립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다. 그리고 백의인의 말대로 그녀는 그것을 사랑의 정표로 주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와서 그녀가 할 말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한데… 부인은 내가 이 백립을 보면서 부인을 생각하고 있는 그 시간에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겨 나를 잊고 있었던 것이오." "아아… 그만……." 절대화후 수국령은 귀를 막았다. "그리고… 나의 전 재산을 다른 곳으로 빼돌렸소.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었소?" "……." "그런가, 친구?" 그는 단우를 보며 물었다. 단우는 묵묵히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말은 너무 일방적인 것 같군." "일방적?" "그대는 백립을 보면서 아내를 생각한다고는 하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소. 만약……." "만약……." "만약 그대가 진정으로 아내를 생각했고 사랑했다면… 재산을 어디로 빼돌려야 하는가는 말해 줄 수 있 었던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대의 신분 정도는 확실히 말해 줄 수도 있었지 않은가? 사실 그대는 그 런 것을 모두 숨기고 일방적으로 아내가 자신을 따라 주기만을 바란 것이지." "……." "그뿐인가? 그대는 부부의 공동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팔황장보원의 모든 것을 한 마디의 설명도 없이 빼돌렸고…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얼굴 한 번 내밀지 않았으니……." "……." "그것은 그대가 일찍이 아내를 잊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야망에 눈이 멀어 아내를 이용하려 했을 뿐이 지. 한데 이제 와서 그것을 비난한다면… 나와 그대의 아내는 할 말이 많소." "음……!" 백의인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백립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매우 흥분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찰나지간에 사라졌고 곧 백립은 물처럼 고요해졌다. 그것을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 단우는 여전히 태연하고 당당하게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문제는 그대가 일찍이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오. 그럼에도 이제 나타나 그 사실을 들먹이는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 "혹시 당신도 나를 노리고 접근한 것은 아니오?" 단우의 이 말은 그의 정곡을 찔렀음인가? "크핫하하하하……." 그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 앙천광소에는 엄청난 공력이 깃들어 있는지라, 절대화후 수국령 같은 절대의 고수조차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형을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으음…….' 단우 역시 가슴의 기혈이 진탕됨을 느끼고 경악하고 있었다. '가공할 공력이다. 이런 정도의 공력이라면… 오대초인을 제외하고는 전개할 수가 없는 것이거늘… 그렇 다면 이 자가 설마 오대초인 가운데 한 명이란 말인가?' 오대초인 중의 두 명은 옥불과 곤륜성녀이다. 하지만 나머지 세 명은 흑마련의 인물인 것이다. 흑마련주와 그 외의 그 두 명이 흑마사십사령 중 이 인이라는 것만 알려졌지 자세한 것에 대해서는 전 혀 알려지지 않았다. '만약 이 자가 오대초인에 속해 있는 자가 분명하다면… 이 자는 흑마련의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데…….' 단우의 생각은 꼬리를 물고 있었다. 이때 백의인이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는 천천히 백립을 벗었다. 그러자 드러난 그의 얼굴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번 보았을 때의 느낌일 뿐이었다. 두 번, 세 번 이상 보게 된다면 보는 이는 그가 결코 평범한 얼굴이 아님을 느끼게 하는 기이한 얼 굴……. 그렇다. 그 얼굴에는 기이한 마력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심혼을 사로잡는……. 그런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단우는 상상 이상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금일홍… 그대가……?" 단우는 경악성을 토하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백의인의 얼굴! 그 얼굴은 불에 타 없어진다 해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백의인은 금일홍이었던 것이다. 과거 천년대자문의 부종사의 신분으로서 단우의 면전에 한 번 선보인 적이 있었고, 그리고 천년지대 안 에서 단우를 순순히 살려 보냈던 그 장본인인 그가 지금 단우의 면전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럴 수가… 설마 이 자가 수국령의 남편일 줄이야…….' 이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단우는 한 가지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금일홍에게는 그 용모와 습관, 그리고 무공마저도 완벽하게 같은 두 명의 분신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과거에 천년지대에 만난 인물은 진짜 금일홍이 아니라 두 분신 중 한 명인 천령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니……. 만약 단우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 면전의 백의인이 진짜 금일홍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 정도는 했을 것이거늘……. 안타깝게도 그는 백의인을 금일홍으로 완전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팔황장보원주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로군… 믿을 수 없어." "……." 금일홍은 담담히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빛 또한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단우는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러나 그 기이한 빛을 빠르게 감추며 말했다. "놀라운 일이로군. 그대가 본좌를 알아보다니… 대체 그대는 누구인가?" "응……?" 이 물음에 정작 단우가 놀라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모르다니… 내가 아무리 변했어도… 이 사람만큼은 나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 가? 한데 모르고 있다니… 모르고 있다니……?' 그는 의아했다. "그대는 본인을 모르는가?" 이에 금일홍은 아차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황망히 말을 돌렸다. "아… 내 실수를 했군. 내가 어찌 그대를 모를 리 있는가?" "알고 있다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할 수가 있겠군." 단우는 다그치듯 물었다. 그도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기이했다. 왠지 그는 상대가 금일홍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것을 확인하고 싶어 그는 바삐 물었던 것이다. 한데 이때였다. 딸랑딸랑－! 청아한 방울 소리가 그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한 마리의 나귀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귀 위에는 한 백의청년이 타고 있었다.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얼굴은 창백할 정도로 희었는데……. 그는 바로 백무상이었다. 흑무상의 바로 윗서열에 있었으며, 모든 점에서 흑무상과는 상이한 기도를 지니고 있는 그가 나타난 것 이다. 그리고 그는 천년지대 안의 검은 석성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때 그것을 지켜보며 단우의 죽음을 자신 있게 말하던 그 인물이기도 했으니……. 이때 그는 나귀에서 금일홍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태상련주… 그가 검은 석성에서 죽었다고 보고한 속하를 벌하여 주십시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금일홍은 미간을 가볍게 좁히며 차갑게 말했다. "그렇군. 그대가 당시 단우가 죽었다고 보고를 했기에… 본좌는 단우를 보았음에도 잠시 알아보지 못했 던 것이로군." 말은 이렇게 했으나, 그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이것은 단지 느낌뿐이었지만 단우는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금일홍은 애초에 이 단우를 몰라본 것이 확실하며… 이 자가 느닷없이 나타나 나를 언급하여 간접적으로 나의 신분을 드러낸 것도 이상하다.' 그러나 단우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의아함을 내색한다 해도 하등의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기에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물었다. "지금 당신이 이 단우에게 접근한 의도는 무엇이오? 더 이상 이곳에서 당신들과 어우러져 있을 시간은 없소." "……!" 금일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단우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를 알고 싶다. 대답해 주겠는가?" "……!" 단우는 대답 대신에 주의를 빠르게 살폈다. 어느 새 그의 주위에는 상당한 숫자의 인물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림잡아도 그들의 수효는 수십……. 그들 중에는 백무상 이상으로 가공할 기도를 뿌리고 있는 인물도 상당수 포함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물론 흑마사십사령 중 일부일 것이다. '완전히 포위당한 형세로군.' 단우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오래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인가?" ■ 십매어황 제3권 第五章 자중지란(自中之亂) 금일홍은 느릿하게 말했다. "그대는 십매어황성을 무슨 목적으로 세운 것인가?" "결국 그것이었군."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곧장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은 그것을 말할 수 없다." "……!" "그러나 한 달 후 십매어황성이 정식으로 무림선언을 할 때… 그때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음……." 금일홍은 백립을 만지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흑마련이 십매어황성의 하부조직이라 소문을 낸 것은 무슨 의도인지는 말해 줄 수가 있는 가?" "알 수 없는 일이로군. 그대가 금일홍이라면… 그리고 내가 단우인 것을 알고 있다면… 그대의 그 물음 은 전혀 필요치가 않은 것일진대……." "……!" "그런데 지금 그대는 그 필요치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 금일홍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빨리 사라지고 그의 눈빛은 다시금 물처럼 고요해졌다. 단우가 말을 이었다. "그대가 금일홍이든 아니든 이 단우는 한 가지는 대답해 주어야 할 것 같으니 방금 그대의 물음에 답하 겠다." 금일홍이든 아니든……. 그 말은 묘한 여운을 던져 주고 있었다. 그러나 금일홍의 눈빛은 더 이상의 변화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칠대초인의 무학은 이 단우가 모두 얻었다. 그런 만큼 이 단우는 칠대초인이 당시 지니고 있는 문파의 후인들을 거느릴 당연한 의무가 있는 것이지." "……!" "어떤가? 내가 생각하기로는 금일홍 당신은 어금태자가 거느리고 있던 어금사교(御禁邪敎)의 후인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 금일홍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단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을 이었다. "대답을 하지 않음은 시인함이라 생각하겠다." "……!" "그렇다면 나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해지는 것이지. 내가 십매어황성의 하부조직으로 흑마련을 둔 것은… 바로 흑마련이 어금사교의 분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음……." "이상이다. 이제 나의 말은 모두 끝났다." 단우는 이 말을 끝으로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앞에는 금일홍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그대로 걸어갈 경우 금일홍과 부딪칠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럼에도 그가 그를 향해 계속 걸어가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그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걸음걸음에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입가에는 여유 있는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그때였다. 금일홍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좌와 동업할 생각이 있는가?" "무엇을 말인가?" 단우는 의아한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이것은 의외의 물음이었기에 단우로서도 언뜻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금일홍은 담담히 웃었다. "본좌의 말은… 그대와 내가 힘을 합칠 경우 흑마련을 더욱 수월하게 상대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 "아……." 단우는 비로소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금일홍의 말을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금일홍이 흑마련의 인물일진대……. 더구나 그는 흑마련의 태상련주라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신분의 인물이거늘……. 지금 단우에게 힘을 합쳐 바로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흑마련을 상대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단우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당신의 말은 당신이 금일홍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런가?" "헛허허… 본좌가 그 대답을 꼭 해야 하는가?" "아니지. 그 대답은 굳이 할 필요가 없지. 이미 나도 짐작이 익히 가는 바이니……." "그렇다면 승낙하겠는가?" "음……." 단우는 고뇌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따라 어쩌면 그의 생사가 좌우될는지도 모른다. 주위에는 수많은 적들이 있다. 그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하나 그들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달빛은 교교하고……. 호심에는 몇 척의 유람선이 한가로이 미끄러지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극히 평화롭고 아늑한 정경이었다. 그러나 그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무림의 운명이 결정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단우의 말 한 마디에 의해 무림의 운명은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니……. 이 밤은… 정말이지 이 밤은 느껴지는 것처럼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문득,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단우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 단우가 당신의 제안을 거절할 여지는 어느 정도인가?" 금일홍은 빙그레 웃는다. "전혀 없다면 믿겠는가?" "전혀?" "그렇다. 그대가 단우라면… 그대의 부친은 천마종야 단사하일 것이고… 그대의 부친이 내 수중에 있는 이상 그대는 본좌의 제안을 결코 거절할 수 없을 것이네." "음……." "그러나 이런 위협으로 그대와 동업하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아. 대세를 보는 그대의 안목… 본좌는 그것 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대가 본좌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 믿고 있지." "음……!" 단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아버님이 저자의 수중에 있단 말인가?' 불현듯 그는 부친이 과거에 천년지대 안에서 실종되었던 것을 상기해 냈다. 다음 순간 그는 금일홍의 말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단우로서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상대가 설마 천마종야 단사하를 들먹이고 나올 줄은……. 어찌해야 하는가? 상대의 의도는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저자의 태도나 말로 미루어 진짜 금일홍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자의 의도는 오직 하나이다. 바로 나의 힘을 빌려 진짜 금일홍을 상대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차도살인지계! 이것은 남의 칼을 빌어 살인을 하는 고도의 계책이었다. 물론 단우는 이 의도를 알고 있는 이상 단호히 그의 제안을 거절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거절할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천마종야 단사하의 안부였다. 만약 천마종야 단사하가 금일홍의 말대로 그의 수중에 있다면, 지금 단우의 말 한 마디에 그의 생사가 좌우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단우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그 식은땀은 그의 이마를 타고… 마침내는 볼을 타고 흘렀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 천하의 금일홍도 거짓말을 할 때가 다 있는가?" 차가운 음성이 장내로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이 어둠을 헤치면서 느릿느릿 다가왔다. 사십대 중반의 그는 일신에 허름한 흑포를 걸치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사내의 구레나룻은 유난히 눈에 띄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얼굴에는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추호도 담겨 있지 않았고, 오직 무심일색이었다. 그리고 그 한 몸에서 풍기는 기운 또한 무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자 단우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진하게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다… 단심무정도… 그대가……." 그의 음성마저도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흑포장한은 바로 단심무정도였던 것이다. 대천마련의 천마삼작 중 천마흑작(天魔黑爵)으로서 한때 단우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그가 아닌가? 무심무정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정파인에게는 한때 공포의 대명사로 불렸던 그였으나, 단우에게만은 각 별한 정을 주었던 단심무정도가 바로 이 흑포장한이었던 것이다. '오… 오 년 만인가?' 단우는 새삼 감회에 젖고 있었다. 과거 단심무정도는 벽라무황천의 금마뇌옥에 갇혀 있다는 소문을 들은 그 이후 지금까지 그 생사를 몰 랐던 그가 이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것이다. 금일홍의 얼굴에 당혹한 빛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때였다. "죽으려고 환장했군." 백무상이 벼락처럼 단심무정도에게 덮쳐 들어갔다. 어느 틈엔지 그의 손에는 피먹은 듯 붉은 부채가 들려져 있었다. 콰아아아－! 그 혈옥선(血玉扇)은 가공할 한기(寒氣)를 뿌리며 단심무정도를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이었다. "어림없다." 단심무정도는 싸늘하게 냉소하며 어느 새 한 자루의 기형도를 품에 안고 있었고, 슈슈슈슛－! 그것은 곧장 백무상을 향해 날아갔다. 기형도와 혈옥선은 허공에서 마주쳤다, 까까까깡－! "헉……!" 단심무정도는 낭패한 표정으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낭자했다. 단 일 초의 대결에서 단심무정도는 비참한 패배를 당한 것이다. 백무상의 무공은 과거 한때 천하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단심무정도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지난 오 년의 세월 동안 피나는 무공수련을 했어도… 이런 흑마련의 하위 인물 하나 상대하지 못하다니……." 단심무정도는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에도 백무상의 혈옥선은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단심무정도가 피할 능력은 없어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사람을 죽여 입을 막겠다는 것인가? 어리석다." 단우가 싸늘하게 외친 후 백무상을 향해 가볍게 팔소매를 내저었다. 한데 그 가벼운 동작 이후 단우의 팔소매에서는 그야말로 가공할 무형의 강기가 폭출되는 것이었으 니……. 펑－! "으악!" 백무상은 비명과 함께 가랑잎처럼 허공으로 맥없이 날아올랐다. 푸아앗－! 비릿한 피내음과 함께 그의 칠공으로부터는 분수처럼 선혈이 솟구치고 있었다. 단 일 초에 그는 미처 손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죽음을 당한 것이다. 백무상이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몇 차례의 꿈틀거림 그것뿐이었다. 금일홍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천마강력(天魔 力)! 일천 년 전 마교의 교주였던 천마서생의 무공을……." 그의 얼굴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천마강력은 천마서생의 독문무공 중 가장 무서운 무공으로서, 그 어떤 형태의 호신강기라도 가루로 만 들어 버릴 수 있는 무적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작 무서운 것은 전혀 소리 없이 형체도 없이 상대를 격살해 버리는 데에 있었다. 이때, 단우는 단심무정도의 손을 잡았다. "흑작……!" 단심무정도를 부르는 그의 음성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격동과 희열이 뒤범벅이 된 얼굴에는 따스한 정감이 담뿍 담겨 있었다. 단심무정도의 창백한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소… 소련주… 이렇게 살아 계셨군요." 그의 음성에는 진한 격정이 스며 있었다. "도… 돌아가신 줄만 알았는데… 살아 계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살아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단심무정도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우는 이런 상황 속에서는 오랜 해후를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흑작… 금일홍이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아버님은 무사하시단 말인가?" 단심무정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태상련주께서는 흑마련의 마수에서 무사히 벗어나시어 지금 현재 안전한 곳에 은신중입니 다." "아……." 단우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금일홍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는 이것을 어찌 해명하겠는가?" "……!" "분명히 그대는 오대초인 가운데 한 사람이 분명할진대… 그런 그대가 신의를 외면한 동업을 제안하다 니… 놀라운 일이로군." 단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단우의 말이 조소이든 아니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금일홍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변한 것은 없다.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이 동업인 이상… 그 외의 어떠한 일이라도 이 제안과는 무관할 수밖에 없다." "편리한 대로이군." "어떤가? 제안을 승낙하겠는가?" "거절한다면?" "크핫하하…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위협하는 것인가?" 단우는 담담히 말했다. 그는 고요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대는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이런 정도의 인물들로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 "물론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그 대가는 당연히 생각했어야 했다." "대가라면……." 금일홍은 짐짓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단우는 차갑게 웃었다. "설마 모른다는 말은 아니겠지. 나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그대는 상당히 많은 수하들을 죽여야 할 것 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대도 죽을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이 된다." "호오… 정말 대단한 자부심이로군." "자부심이 아니다. 비록 흑마사십사령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내게는 그들을 죽일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다." "음……." "그대는 나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그런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대가 상대할 인물들에게 어부지리를 주는 결과밖에는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니, 당연히 그대는 알고 있을 것이다." "……." "앞뒤의 사정이 이런 즉… 나는 한 가지를 확인할 수가 있다." "……." "즉, 그대는 이곳을 순순하게 떠날 것이다.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면 훗날을 기약해야 하는 것이 상책이 라는 것을 그대는 잘 알고 있을 테니……."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지극히 여유 있는 태도였다. 금일홍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섭군… 무서워……." 신음처럼 중얼거리는 그 말은 단우의 말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분명하다. 지금 내가 저자를 죽일 수 있다 하여도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 는… 그 희생이 본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을 위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두 사람!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금일홍은 그들만이 자신의 유일한 적수라고 생각해 온 듯싶었다. 그런데 오늘 또 한 명의 무서운 적수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 금일홍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으로 던져져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의 얼굴에는 온갖 복잡미묘한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단우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단우, 오늘은 그대에게 패했음을 깨끗이 시인하겠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단우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절대화후 수국령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대는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패배는 그대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에게 당한 것임을… 만약 내게 그들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그대는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말을 끝내고는 기이한 눈빛으로 절대화후 수국령을 응시했다. "훌륭한 남편을 얻었군, 국령……." "……!" "이것은 진심이다. 그대는 본인 이상으로 새 남편을 정성껏 섬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 가지 충고할 것 은… 다시는 남편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순간 절대화후 수국령의 눈빛은 크게 흔들렸다.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자." 금일홍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희뿌옇게 흐려지는 그 순간, 그는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이어 그들의 수하도 소리 없이 사라졌다. 나타날 때보다 빠르게……. 이제 이곳에는 단우와 단심무정도, 그리고 절대화후 수국령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잠시 금일홍이 사라진 방향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우의 입에서 문득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토해지고 있었다. "무… 무서운 인물이로군. 진정으로… 그는 이 시대의 최고인이라 할 만했다." 단우는 피로한 기색이었다. 금일홍과의 심기전은 어떤 혈전보다도 그를 지치고 피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단 한 번의 무공대결도 없었지만, 금일홍의 한 몸에서 풍기는 기도 하나만으로도 단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를 느꼈던 것이다. 더불어 그는 새삼 흑마련의 거대함을 피부 깊숙이 절감해야만 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내가 십매어황성을 세운 목적은 모두가 흑마련을 상대하기 위함이다. 지금의 흑마련은 실로 무서운 자 중지란에 빠져 있는 듯하지만… 만약 그들이 그런 불상사가 없었다면 나는 도저히 흑마련을 상대할 수 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흑마련이 자중지란에 빠져 있는 것이 퍽이나 다행한 일인 것이다. 단우는 다시 중얼거렸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방금의 금일홍은 진짜 금일홍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태상련 주가 두 명이라는 철사자의 말과 가짜 금일홍과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 것인가?" 표정은 더할 수 없이 심각했지만, 그의 눈빛은 유난히 심유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오늘밤 실로 중대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아무튼 흑마련이 자중지란에 빠져 있는 것은 하늘이 내게 준 기회이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나는 영원 히 흑마련을 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스스스－! 멀리 보이는 갈대밭이 바람결에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단우가 갑자기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나직하게 소리쳤다. "귀하들은 언제까지나 그곳에 있을 생각이오?"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이곳에 그들 외에 또 다른 인물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하하하… 대단한 청력이로군." 듣기 좋은 낭랑한 웃음소리에 이어 그들을 향해 소리 없이 날아드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의 청년과 한 소녀였다. 두 사람은 마치 마치 구름이 흐르는 것처럼 허공을 유유히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서는 그야말로 신인(神人) 같은 탈속한 풍도가 느껴지고 있었다. 청년, 물빛 청삼(靑衫)을 일신에 걸치고 있는 그는 경국경성의 절세미녀처럼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였 다. 어떤 여인이라도 한 번 보는 순간 오금이 저리면서 그대로 사련(邪戀)에 빠져들게 만들 정도로. 그를 보는 순간 단우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아… 저자는 벽라신월(碧羅新月) 백리황(百里皇)이 아닌가?" 벽라신월 백리황. 벽라무황천의 소천주인 그는 과거 단우가 본 적이 있던 그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그러나 오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는 눈부신 변신을 하고 있었다. 용모는 전보다 더욱 수려해져 있었고 일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신비롭기 이를 데 없었으니……. 벽라의 떠오르는 달은 이렇게 완벽한 성장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녀! 그녀의 미모는 조물주의 완벽한 걸작품이었다. 십전십미(十全十美)의 미인이라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녀는 일신에 담색의 능라의를 고아하게 걸치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봉황건(鳳凰巾)을 두르고 있었다. 한데 그녀는 자연 그대로 아름다웠다. 옷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봉황건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녀의 미모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완벽함을 보이고 있었다. 단우의 입에서 다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벽라상화(碧羅尙花) 백리예령(百里豫鈴)이 아닌가!" 벽라상화 백리예령. 역시 벽라무황천의 소천주이며 벽라무황천의 요정이었던 소녀였다. 철없는 그 나이에 단우에게 연보랏빛 연정을 느꼈던 순진무구했던 소녀가 이렇듯 성장하여 단우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한편, 그들이 출현하자 단심무정도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단심무정도가 두 분께 인사 올립니다." 벽라신월 백리황과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단심무정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단우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단심무정도가 어찌 저들에게 이토록 공손하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바로 이때였다. 단우의 귓전을 슬며시 파고드는 단심무정도의 전음이 있었다. "소련주… 저 두 분은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에서 지난 오 년의 세월 동안 함께 키운 인물들입니다." '아…….' "태상련주와 벽라무황천주인 벽라천제 백리명은 저들 두 사람을 위해 자신들의 무학을 아낌없이 모두 주었으며… 이제 저들은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의 모든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아버님과 벽라천제 백리명이 동시에 키운 인물……?' 단우는 놀라고 있었다. 그는 꿈에도 이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이 저들 두 사람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실로 단우에게 경이로움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느낄 수가 있었다. '처절하셨겠군. 저들 두 사람을 키워 흑마련을 상대하려 한 두 분의 마음은…….' 그는 새삼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 십매어황 제3권 第六章 그리운 사람들의 이야기 1 바로 그때였다. "단우……." 벽라상화 백리예령이 떨리는 음성으로 단우를 불렀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만감(萬感)이 교차되고 있었다. 눈물이라도 왈칵 쏟아져 나올 기세인데……. "단우가 틀림없지요?" 그녀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모두 들었던 것이다. 단우와 금일홍의 대화를……. 사실 그들 두 사람은 단심무정도와 함께 이곳에 왔던 것이다. 단우는 왠지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천진하며 짓궂기만 했던 철없는 소녀. 과거 제마뇌림에서 그녀와의 신경전은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우도 어렸고 그녀 또한 어려서 둘은 기이한 호승지심으로 서로를 의식하고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단우 를 괴롭혔던 것이니……. 그것을 어찌 이제 와서 돌이켜 나쁜 감정으로 발전시킬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두 사람은 더없이 반가웠다. 과거에는 철없기만 하던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성숙할 대로 성숙한 것이다. 이 만남은 그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소. 그대가 벽라상화 백리예령이 분명하다면… 나 역시 단우가 분명할 것이오." "아……."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격하게 몸을 떨었다. 두 눈에서는 투명한 물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사… 살아 있으시다니… 살아 있으시다니……." 그녀는 빨아들일 듯이 단우를 주시하더니 그대로 그를 향해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 단우는 당황했다. 그는 그녀가 이런 당돌한 행동을 보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반가운 감정이야 들었지만,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서로를 껴안을 정도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가 있겠는가? 한데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사람이 있든 없든 단우의 품에 안긴 채 오열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흐흐흑… 흑흑흑……." '이, 이런……!' 단우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자 벽라신월 백리황이 앞으로 나서며 은근히 말했다. "그 아이는 지난 오 년 동안 줄곧 자네를 생각해 왔네. 또한, 그 아이가 나에게 단 하루도 자네에 대해 말하지 않음을 기억할 수 없네." "아……." 단우는 탄성을 발했다. 그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벽라상화 백리예령이 자신을 그렇듯 지극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그 아이의 그런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 정도는 그 아이를 품어 주는 것이 자네가 취해야 할 도리 일 것이네. 핫하하하……." 벽라신월 백리황은 낭랑하게 웃었다. 단심무정도 역시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색한 표정의 단우에게 절대화후 수국령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빈첩을 의식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당신이 그 어떤 여자를 원한다 해도 빈첩은 질투 따위를 하지 않 을 테니까요." 그녀는 단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에게 사랑을 강요한다고 해서 동정으로 그녀를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단우는 그들의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런 사랑의 감정이 급작스럽게 솟아난 것이 아니라, 기실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운명적으로 형성이 되었던 것이었다. 이를 두고 천생연분이라고 하던가? '그래… 이것은 운명이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단우는 깊숙이 그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포옹하는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이 밤은 그들만큼이나 아름다운 밤이었다. 벽라신월 백리황은 웃고만 있었다. 그는 흐뭇한 것이다. 자신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천마종야 단사하의 힘이 지대했던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그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벽라상화 백리예령 역시 마찬가지 경우였다. 그들은 언제나 천마종야 단사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한때는 무림의 최고 마인으로 인식되었던 천마종야 단사하이나, 무림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무림의 운 명을 건지기 위해 기꺼이 정파무림과 힘을 합하지 않았던가? 진정한 의미에서 그는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런 천마종야 단사하는 언제나 아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천마종야 단사하에게 있어 단우라는 존재는 그의 인생의 전부라고 할 만했다. 한데 단우는 천년지대에서 실종이 되었고, 천마종야 단사하는 자신의 아들이 십중팔구는 죽었을 것이라 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누가 생각해도 단우는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간뇌를 타고난 죽어야 할 운명의 단우였기 때문에 죽었을 것이라는 확신은 지배적이었던 것인데……. 아아! 살아 있었던 것이다. 단지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거대하게 성장해 있었다. 십매어황성의 주인으로서……. 그보다 그의 무공이 흑마사십사령 중 백무상이라는 무서운 고수를 단숨에 죽일 정도로 고강한 것이었으 니……. 뿐인가? 그의 심계는 그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지자라 불리는 금일홍을 능가하는 것이었으니……. 단심무정도와 벽라신월 백리황, 그리고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격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천마종야 단사하를 생각해서라도 단우가 살아 있음을 그야말로 다행한 일이 아닌가? 천마종야 단사하, 그가 만약 단우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안다면…… 그리고 단우의 모친이 단우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그들은 아마도 단우의 살아 있음을 도저히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단우가 살아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면 그들은 삼 일 밤낮을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벽라신월 백리황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웃지 않으려 했으나, 자꾸만 터져 나오는 이 웃음은 전혀 기분 나쁜 것이 아니었으니……. 웃자! 그리고 또 웃는 것이다. 웃어서 나쁠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 않던가? 이때 단우가 벽라상화 백리예령을 조용히 밀어 내며 말했다. "백리형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웃고만 있을 것이오?" "핫하하하… 자네 같은 위대한 사람을 매제로 두게 되었으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핫하하 하……." 벽라신월 백리황의 짓궂은 말에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홍시처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이 그야말로 수줍은 한 떨기 수선화 같은지라 여러 사람은 빙그레 웃고 만다. 단우는 이 어색함을 가리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하하하… 이렇게 좋은 날… 술이라도 한 잔해야 하지 않겠소? 우리 어서 이 자리를 떠납시다." 단우의 이 말에 단심무정도가 대환영하며 나섰다. "헛허허… 술이라면 이 몸이 빠질 수가 없지요.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창 루(武昌樓)가 있으니… 그곳으로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하하하……." 벽라신월 백리황은 단지 웃을 뿐이었다. 그는 이대로 가다가는 입이라도 찢어질 듯싶었는데……. 2 무창루(武昌樓). 이곳은 동정호변에 위치한 아담한 주루였다. 밤이 깊었지만 이곳은 아직 주객들로 흥청거리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흥청거리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단우와 벽라신월 백리황 일행이었다. 그러나 그 흥청거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들은 심각하게 당금 무림의 정세에 관해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으니……. 여기에서 단우는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의 현 실태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기실 현 무림에서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의 존재는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 년 전 천년지대에서 상당히 많은 수하를 잃어야 했던 천마종야 단사하와 벽라천제 백리명은 그제서 야 흑마련의 무서움을 피부로 느끼고 후일을 기약한 채 잠적해야 했다. 결국 그런 이유로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은 무림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하나 그들은 실로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흑마련을 상대하기 위해선 절대적인 무공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그래서 그들은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의 비학을 하나로 합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은 정사무림의 일치였으며, 결코 화합한 적이 없는 정사무림의 무학이 하나로 합쳐지는 계기가 되 었던 것이다. 그 무학을 두 사람이 동시에 연성하였다. 당시 무림 최고의 기재기녀이던 벽라신월 백리황과 벽라상화 백리예령이……. 사실 이들 두 사람의 재질은 백 년에 하나 볼까 말까 한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오 년이라는 시간에 그 모든 무학을 일신에 지닐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두 사람은 벽라천제 백리명과 천마종야 단사하의 전 공력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또한 정사 무림 최고의 고수이던 십 인의 공력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물론 두 사람에게 공력을 준 인물들은 무공이 전폐되었지만, 그와 반대로 두 사람의 무공은 엄청나게 고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마종야 단사하와 벽라천제 백리명은 한 가지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벽라신월 백리황과 벽라상화 백리예령이 지닌 무공의 수위는 능히 무적이며, 이 시대의 오대초인이라는 인물과 비교해도 뒤떨어질 것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무림활동을 개시한 것이며,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 역시 은근히 무림활동 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그들은 한 가지 엄청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단우가 이름 지은 십매어황성에 관한 것이었다. 신비의 성, 십매어황성! 벽라신월 백리황과 벽라상화 백리예령이 이 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성이 흑마련과 관 련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추측은 가능성이 있었다. 천년지대 안에 있던 검은 석성이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여 한줌의 가루로 화했으니 그들은 어딘가에 본 거지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군산의 석성이 바로 흑마련의 본거지일 수도 있다는 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성에 대해 조사를 했고, 결국은 여기에서 단우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전부였다. 술……. 한 모금의 쓰디쓴 술을 마시며 단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는 뿌연 물안개가 서리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무공이 전폐되시다니… 아아… 그분의 처절한 심사를 자식으로서 전혀 모르고 지냈으니… 이것은 불효가 아닌가?"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벽라상화 백리예령이 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죄책감에 사로잡히실 필요가 전혀 없어요. 당신은 최선을 다한 것이에요." "……!" "당신이 살아 있다는 자체 한 가지만으로도 당신은 더 이상의 효도를 할 수 없는 것이니 당신의 아버님 은 당신을 자랑스럽게 여기실 거예요." "……!" "더군다나… 당신은 일신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무공을 지녔고 그 무공을 무림을 위해 쓰려 하신다니… 그것을 어찌 효도라 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고요한 눈망울에는 따스한 정감이 물살처럼 번져 나고 있었다. 단심무정도가 한 마디를 거들었다. "소련주…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속하의 마음이 이럴진대… 태상련주께서는 더욱 소련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것이옵니다." 그의 음성에는 충정이 흐르고 있었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작… 그분들은 지금 어디에 은신하고 계신가?" 단심무정도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천목산(天目山) 천엽곡(天葉谷)이옵니다." "천엽곡?" 단우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단우의 눈빛에 싸늘한 한기가 떠올랐다. "우리의 대화를 엿듣는 쥐새끼가 있었군." 그의 손은 말보다 더욱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나무젓가락을 잡는가 싶었는데, 그것은 곧장 천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파파파팟－! 놀랍게도 일개 나무젓가락 한 쌍이 대리석 천장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그 가공할 공력에 벽라신월 백리황 등은 경이의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헉!" 천장에서 다급한 신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단우를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은 그대로 천장을 헤치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콰콰쾅－! 무창루의 천장이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 버렸다. "헉!" "으으… 저, 저게… 뭐냐?" 주루 안에서 술을 마시면서 환담을 나누던 주객들은 그만 대경실색하면서 다급히 몸을 움츠렸다. 휘이이잉－! 한 줄기 밤바람이 주루 지붕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 단우는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상당한 거리 밖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왜소한 체형이었다. 단우는 그가 복면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는데, 몸놀림이 약간 어색한 것으로 보아 상처를 입은 것 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단우는 내심 다소 놀라고 있었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저런 정도의 신법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은… 저자의 정체가 범상치 않음을 말하 는 것……." 그의 말에 벽라상화 백리예령이 다급히 말했다. "큰일이에요. 저자가 우리의 말을 엿들었다면… 천목산 천엽곡이란 은신처에 대해서도 들었을 터이니… 그를 사로잡지 못한다면 그분들이 위험해요." 그렇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순간 단우의 신형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이곳에서 여러분은 기다려 주시오. 내 저 작자를 추격할 것이니……." 그의 말이 여운처럼 아련히 들려 오는 순간, 놀랍게도 그의 신형은 이미 까마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오오!" "대단하다!" 단우의 불가사의한 신법을 본 단심무정도 등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쩌억 벌렸다.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분의 무공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는 것이에요. 저분이야말로 오대초인을 능히 상대하고도 남음이 있을 유일한 사람……." 벽라신월 백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 지금까지 알량한 무공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너의 낭군을 보니 그것이 자만이었음 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인다. 다만 절대화후 수국령만은 다소 근심 어린 눈빛으로 단우가 사라진 어둠 속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몸에서 허전함과 고독함이 진득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는데…….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슬그머니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언니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언니……." "물론……." 절대화후 수국령은 온화한 눈빛을 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벽라상화 백리예령은 배시시 웃었다. "언니… 언니는 이 동생이 원망스럽지요?" "어째서?" "피이… 시치미 떼시긴가요?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서러움이 두 눈에 역력하게 떠올라 있는데도?" "아니야……." 절대화후 수국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분은 누구도 독점할 수가 없어. 독점한다는 것은… 어리석음만 자초할 뿐이지. 진정한 독점은 그분을 편하게 놓아드리는 것이야." "아……." 백리예령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희미하게나마 잡히는 무엇인가는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절대화후 수국령이 친근스럽게 생각되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화후 수국령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는 하염없이 단우가 사라진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3 슈우우－!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빠르게 날고 있었다. 흐르는 유성인가? 그것은 그야말로 한 줄기 빛처럼 빨랐는데…….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헉헉……." 입으로부터는 거친 숨소리마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펼치는 신법은 일천 년 전에 사라진 어기비행술(御氣飛行術)! 단 한 모금의 진기로도 천 리를 단숨에 날 수 있다는 가공할 신법이었다.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이런 가공한 신법을 전개하여 어둠 속을 빛보다 빨리 질주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말이 달리는 것이지 그는 허공을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희미하게나마 드러난 그는 일신에 검은 경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가슴을 보라! 거기에서는 선열한 피 보라가 뿌려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 개의 젓가락이 그곳에 꽂혀 있었다. 그렇다. 이 인물은 얼마 전 무창루의 지붕에서부터 단우의 추적을 받던 그인 것이다. 한편, 단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흑의복면인의 신법이 너무 빨랐기 때문인가? 그의 신형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힐끗 뒤를 돌아보던 흑의복면인의 눈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무… 무서운 놈……." 흑의복면인은 속도를 다소 늦추며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금 그가 달리고 있는 곳은 한 이름 모를 야산(野山)이었다. 백양목(白楊木)이 울창하게 자라있 는 야산의 중턱에서 그는 마침내 신형은 멈추었다. "무… 무려… 백 리를 달리고서야 놈의 추격권 속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니… 이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이름을 갈아야 하겠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복면은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는 아름드리 백양목의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복면을 벗었다. 복면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것은 비쩍 마른 얼굴이었다. 눈은 세모꼴이었고 이마는 좁았으며 입술은 얄팍했다. 일견하기에도 속좁은 인간이라는 인상이 들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바로 소야가 아닌가? － 소야(小爺). 오 년 전 제마뇌림에서 단우와 함께 생활한 바 있는 바로 그 소야인 것이다. 그는 야성(夜城)이라는 도둑집단의 소성주로서 당시 벽라무황천에 볼모로 들어와 있었다. 그런 그가 오 년이 지난 지금 이런 모습으로 단우의 추격을 받고 있었던 것이니……. 냉사혼이 그런 놀라운 변화를 보여 준 것처럼 그에게도 어떤 특별한 변화가 있었던가? 이때 그는 망연히 허공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변했어. 오 년의 세월 동안 이 소야가 변한 것은… 그의 변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그란 바로 단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 창백한 얼굴 위로 한 가닥 추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병약한 소동이… 어제오늘 죽을 것만 같았던 그 약골이 그런 가공할 고수로 변모하다니……." 그는 탄식했다. 바로 그때였다. "소야… 그가 그토록 변했단 말이야?" 청아한 옥음이 소야가 기대어 있는 백양목 위의 가지에서 들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소야는 경악의 표정을 지었으나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라는 것을 느꼈는지 곧 씁쓸하게 웃는다. "곰보 야훼로군." 그는 눈을 감았다.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휙－! 그의 앞으로 바람처럼 내려서는 한 명의 단삼(單衫) 소녀(少女)가 있었다. 언뜻 보자니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 얼굴은 애석하게도 곰보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여 세 정도……. 비록 곰보였을지언정 그 얼굴에는 기이한 매력이 흐르고 있었다. 한 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 야훼. 그렇다. 이 단삼의 곰보소녀는 바로 담야훼였다. 냉사혼, 소야와 함께 오 년 전 제마뇌림에서 볼모로 잡혀 생활하던 비운의 소녀가 이토록 어른스럽게 성장한 것이다. 그녀는 하나의 자색 우산을 들고 있었다. 소야는 그녀를 본 체도 안하고 있었다. 그러자 담야훼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가 어떻게 변한 것이지?" "……!" "소야… 제발 입을 열어. 너는 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잖아.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그는 분 명히 단우였어?" "변했어……." 소야는 눈을 감은 채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담야훼의 눈빛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 글쎄 어떻게 변했냐구? 예전의 모습은 남아 있어? 병은 다 나은 것 같아?" "젠장할……." 소야는 투덜거리고 만다. 이건 해도 너무 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가슴은 그 자에 의해 완전히 피박살이 나 있는 판국에 저 계집은 그자 생각에 나란 놈은 조금도 생각 않고 있는 것이다. 소야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씹어 뱉었다. ■ 십매어황 제3권 第七章 일천 년 전 무학(武學)은 가공하고 "자, 보아라. 그는 이렇게 변해 있었다." "……?" 담야훼는 의아한 시선을 그의 가슴으로 던졌다. 소야는 습관처럼 침을 씹어 뱉었다. "젠장할… 그놈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저 놈이 단우와 비슷하다는 냉사혼의 말을 듣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곳으로 간 것뿐이었는데……." "……!" "놈이 보고 싶어서 간 것뿐이었는데……." 소야의 눈에 투명한 물기가 어렸다. 담야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찌된 일인지 짐작이 가는군." "뭐가……?" "소야, 너는 언제나 그 도둑 근성을 버릴 생각이지? 분명히 너는 그곳의 천장에다 귀를 대고 몰래 남의 말을 엿들었을 것이며… 결국은 그런 꼴이 된 것이 아니야?" "그… 그것이……." 소야는 입을 열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담야훼는 맞아도 싸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계속 물었다. "아무튼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는 노릇이니… 투덜거리지 말고 그가 어떻게 변했는지나 말해 줘." "젠장할……." 소야는 그래도 투덜거리고 있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그의 예전의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놈은 말이지. 정말이지… 절세의 미장부가 되어 있었어. 야훼… 네가 보면 확 눈이 뒤집힐 지경으 로……." "아……." "그 어린 병자는 이제 건강을 완전히 되찾은 듯했으며… 무공 또한 가공할 만한 경지에 올라 있었단 말 이야." "아……." 담야훼의 표정은 꿈을 꾸듯 몽롱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절세의 미장부의 아내가 되는 환상에 사로잡히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연정은 아직 그대로 그녀의 가슴에 고이 간직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잘 나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소야는 담야훼를 힐끔 보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후… 그런데 말이지. 그놈의 곁에는 그야말로 절색의 미인들이 수두룩하게 따르고 있었던 것이야. 그녀들은 곰보도 아니었으며 그야말로 현숙하고 아름답고 고결하고… 누가 봐도 홀딱 반할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단 말이야." "뭐야?" 뒤집히고 있었다. 담야훼의 두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 속을 난도질이라도 해 주려는 듯이 소야의 느글거리는 말은 계속되었다. "그 녀석은 아마도 삼처(三妻)와 사첩(四妾)을 거느리고 있는 듯했는데… 당시 놈은 여인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셔 대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어." "……." "그런 놈이… 곰보 야훼를 과연 아내로 맞으려 할까? 아니 쳐다나 볼까?" 말이 이 정도면 이것은 완전히 담야훼의 기를 팍 죽이는 것이었다. 담야훼의 표정은 수시로 변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판을 낼 기세였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풀이 죽고 만다. "그래… 나는 곰보야. 그가 절세의 미장부가 되었다면 당연히 나 같은 계집은 쳐다도 안 보겠지." "아마도 그럴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시… 그에게서 다짐이라도 받아 두는 것인데… 꼭… 나를 아내로 삼겠느냐고… 아니 삼아 달라고……." "미친 년……." 소야가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다는 듯이 가래침을 씹어 뱉으면서 소리쳤다. 순간이었다. "나한데 한 소리냐?" 담야훼의 안색이 험하게 굳어졌다. 소야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렇다. 너에게 한 소리다." 그의 담야훼를 바라보는 눈빛이 광기 비슷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담야훼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뭐… 뭐라고… 이… 이놈이……." "흥… 주제를 파악해라. 네년은 어디에 몸을 담고 있는 몸이냐? 그놈과는 적대관계에 놓여 있는 신세가 아니냔 말이야. 한데 놈의 아내가 어쩌구?" "……." "잊어버려. 어쩌면 우리는 놈을 죽여야 할지도 몰라. 태상련주의 명 하나면… 우리는 당연히 그와의 정 분을 무시하고 그놈을 죽여야 하는 것이야." "……." 갑자기 표독스럽기 이를 데 없던 담야훼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무룩해졌다. 소야는 풀어진 시선으로 어두운 하늘을 주시했다. "후후후… 흑마삼십이령 냉사혼… 흑마삼십삼령 소야… 흑마삼십사령 담야훼…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되 지.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의 오늘은 있을 수가 없어." "아……." "태상련주… 그분은 위대하신 분이다. 지금 그분이 생사의 기로에 처한 이 마당에 고리타분한 옛 정분이 나 들먹이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다." "……!" 기세등등하던 담야훼는 왠지 할 말을 못하고 있었다. 소야의 말은 사실 지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흑……!' 담야훼는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창망한 슬픔이 그녀의 전신을 휩쓸며 지나고 있었다. 소야는 그런 그녀를 보며 한편으로 안되었는지 탄식을 흘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슥－! 소리 없이 그들의 앞에 나타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산발한 거구에 거대한 핏빛 도끼 한 쌍을 어깨에 매고 있는 그는 무심냉막한 인상의 삼십대 장한이었 다. 이때, 그는 소야의 맞은편 백양목 아래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는데……. "배신자는 죽는다." 그는 단지 이 말만을 하고는 눈을 내리감았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자 소야와 담야훼의 안색이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아아… 흑마이십팔령(黑魔二十八靈) 사금부(史金斧)……."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 것인가?" 두 사람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사금부를 상대하느니 이곳을 빠져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배신자가 설 곳은 그 아무 데도 없다." 다시 무심한 음성과 함께 한 사람이 마치 안개가 나타나듯 또 다른 방향에서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 가? 그는 철도(鐵刀)를 비스듬히 품에 안고 있는 그는 일신에 녹의를 걸치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눈이 하나뿐인 독안(獨眼)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소야와 담야훼의 표정이 아예 사색으로 변하고 말았다. "흐… 흑마이십사령(黑魔二十四靈) 막사인(莫死印)……." "아아… 절망이다." 두 사람의 절망으로 물들었다. 자신은 그들이 완전히 포위됐음을 느낀 것이다. 그렇다. 나타난 인물들은 단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스스스－! 마치 유령이 부유하듯 어둠 속을 날아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방금 나타난 인물과는 달리 한결같이 혈포(血袍)를 걸치고 있었으며, 얼굴은 한결같이 철면(鐵 面)이 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어림잡아도 그들의 수효는 수십여 명에 달했는데, 소야와 담야훼 등을 중심으로 다가서는 그들은 기실 소야와 담야훼 등이 탈출한 틈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야의 입에서 경악성이 다시 터져 나왔다. "헉! 저들은 흑마실혼인(黑魔失魂人) 중 일부가 아닌가? 정녕 저들이 완성되었단 말인가?" 소야의 사지는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흑마삼십사령의 지위라면 천하에 적수를 찾아볼 수가 없을 만큼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지금 사색이 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인물 가운데 두 명이 흑마이십팔령과 흑마이십사령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흑마사십사령은 한 순위의 차이만 하더라도 엄청난 것이었는데……. 그들과 소야, 담야훼 등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인 것이다. 무공으로나 지혜로나 두 사람은 도저히 사금부와 막사인을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지닌 바 무공이 결코 흑마사십사령에 비해 뒤질 바가 없다는 흑마실혼인 중 일부마저 나타 난 것이다. 이제는 희망이라고는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이때 막사인은 독안을 번뜩이며 음산한 음성을 흘려 냈다. "보았듯이 흑마실혼인은 근래 들어 완성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태상련주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이다." "……." "……." "이제 그 동안 버려 두었던 배신자들을 처단할 때가 된 것이다. 태상련주를 배신한 그 대가가 얼마나 무 서운 것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으음……." "아아……." 담야훼와 소야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흐흐흐… 천령과 함께 배신한 흑마사십사령 중 네년놈들을 포함한 열다섯… 그리고 지령과 함께 배신 한 흑마사십사령 중 열넷은 가장 비참하게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이 말인 즉은, 흑마사십사령 중 스물아홉 명이 배신을 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두 패로 갈라져……. 이것은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비사였다. 이때 소야가 발악하듯 말했다. "무슨 소리냐? 누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말이냐? 우리가 섬기고 있는 분도 분명히 태상련주이거늘… 어 찌 우리가 배신자라는 말인가?" "크핫하하… 어리석은 놈……." 막사인은 오싹한 한기를 뿜어 냈다. "네놈은 천령이라는 인물이 태상련주의 제일분신임을 모른다는 말은 아니겠지?" "……!" "그리고 지령은 태상련주의 제이분신이거늘… 그놈들이 어찌 태상련주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담야훼는 식은땀은 흘리며 바삐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과 무공과 습관 그 모든 것이 태상련주와 같은 것이거늘… 우리가 어찌 그들을 가릴 능력이 있단 말인가요?" "흐흐흐… 변명은 소용없다. 이제 와서 그런 변명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벼… 변명이 아니에요. 우리는 단지 천령이라는 인물이 태상련주라는 생각으로 따랐을 뿐이니……." "닥쳐랏! 우리는 누차 그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왔고 또한 경고도 했다. 한데 그대들은 전적으로 우리 들의 말을 무시해 왔다. 한데 이제 와서……." 막사인은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순간이었다. "흐흐흐……." "크크크……." 그것이 무슨 신호였던 듯 흑마실혼인들이 음침한 괴소와 함께 소야와 담야훼를 향해 덮쳐드는 것이 아 닌가. 소야와 담야훼는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최선을 다해서 죽을 때 죽더라도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 '그래서 흑마실혼인의 완성을 천령… 그분에게 알려야 한다.' 그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악물었다. 다음 순간 그들의 신형은 그대로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슈슈슈슛－ 휘리리리릭－! 부상을 당한 소야이지만 그의 신법만은 가히 천하일절인지라 그 빠름이 빛과 같았다. 그리고 담야훼의 신법 또한 일천 년 전에 사라진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이었던 것이니……. 파아아아앗－! 그들의 신형은 그대로 흑마실혼인들을 뛰어넘는 듯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흑마실혼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듯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틈엔지 담야훼와 소야의 앞을 완벽하게 차단하여 막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는 실낱 같은 쇠사슬이 마치 거미줄처럼 뒤엉켜 있었는데……. 그들이 가볍게 손짓하자 그 검은 철삭은 그대로 허공을 완전히 덮으며 소야와 담야훼를 휘감는 것이 아 닌가? 콰아앗－! "피… 피해라!" "저것은 죽음의 추혼사망삭(追魂死亡索)이다." 두 사람은 사색이 되었다. － 추혼사망삭(追魂死亡索). 이것은 인간의 생혈을 따라 흐르는, 그리하여 결국은 인간의 피를 보고야 마는 죽음의 쇠사슬이었던 것 이다. 이것은 천잠사(天蠶絲)와 강철보다도 강한 만년한철(萬年寒鐵)을 혼합한 뒤, 수많은 인간의 생혈과 백골 을 일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제련할 때 비로소 완성이 된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만드는 비법은 일천 년 전에 사라졌다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추혼사망삭이 일천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무림에 출현한 것이다. "허억……." "욱……." 소야와 담야훼는 그만 추혼사망삭에 칭칭 감기고 말았다. 그들의 무공이 비록 강하다 하나 한 개도 아닌 수십여 개의 추혼사망삭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르르륵－! 그들의 칠공으로부터는 검은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은 촌각을 버티지 못하고 죽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반항도 할 수가 없었다. 추혼사망삭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을 향해 수축되어 왔기 때문이다. '트… 틀렸다… 우리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아…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으나… 단우를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 한 방울의 눈물이 담야훼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런데 바로 이 위기의 순간이었다. "인간을 실혼인으로 만든 것도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거늘… 그 실혼인으로 살인을 행하려 함은 더욱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차가운 외침이 울리듯이 사방에서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가 그 음성은 어느 방향에서 들려 오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음성에는 가공할 공력이 깃들어 있어 듣는 이의 피를 들끓게 하고 있었다. "……." "……." 그 음성이 들려 오자 흑마실혼인들은 주춤했다. 바로 그때였다. 번쩍－ 번쩍－! 한 줄기가 아닌 백여 줄기의 눈부시게 흰빛이 가공할 속도로 흑마실혼인들을 향해 폭사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크아악!" "컥!" 흑마실혼인들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떼를 지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오오, 그들의 미심을 보라! 그곳은 손가락 굵기 정도의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기이하게도 그곳으로부터는 단 한 방울의 선혈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헉!" "이, 이게… 대체……." 순식간에 흑마실혼인들은 앞을 다투어 쓰러지는 것을 본 막사인과 사금부의 안색이 대변했다. "이… 이럴 수가… 도대체 누구인데 이런 가공할 무공을……." "어찌 한 인간이 동시에 백여 줄기의 지력을 퉁겨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 소야와 담야훼가 있는 곳으로 유유히 다가서는 하나의 그림자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듯했으나 실상 그 움직임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그는 한 명의 백의인이었다. 용모가 탈속수려한 십칠팔 세 가량의 청년. 어딘지 모르게 유약한 모습이기는 했으나 아무튼 그 용모만큼은 가히 뇌쇄적이었다. 눈빛은 겨울 하늘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것이었으며, 단아하게 두른 문사건이 한 마리의 고고한 학을 연 상케 하는 그는 바로 단우가 아닌가? 사실 단우는 이미 오래 전에 이곳에 나타나 소야와 담야훼의 대화를 다 들었던 것이며, 또한 그는 막사 인과 사금부의 출현, 그리고 흑마실혼인의 출현을 처음부터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가 펼친 무공은 일천 년 전 최고의 고수인 칠대초인 중 벽라성군의 벽라백위파(碧羅百尉破)였다. 한순간에 동시에 백여 줄기의 지력을 퉁겨 낼 수 있는 그 가공할 벽라백위파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는 흑마실혼인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흑마실혼인은 인간의 잠재력을 완전히 극으로 폭발하여 이성을 상실시키고 결국은 실혼인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니……. 여러 단계를 거쳐 이 흑마실혼인으로 완성이 되면 도검이 불침하는 몸이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강시( 屍)와 같은 부류가 되는 것이다. 즉, 살아는 있으나 완전히 죽은 것과 진배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흑마실혼인은 무림인으로서 이지는 상실당했으나 무공은 극으로 폭발한 잠력에 의해 평소 보다 엄청나게 강해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런 흑마실혼인은 그 어떤 도검으로도 죽일 수가 없다. 또한 오체 중의 어느 한부분이 떨어져 나간다 해도 오체가 갈가리 찢기기 전에는 광기에 젖어 날뛰게 되는 것이니 뉘라서 감히 이 흑마실혼인을 상대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 흑마실혼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심혈(眉心穴)이었다. 미심혈을 무엇으로든 관통하면 흑마실혼인은 결국 죽는 것이다. 지금 단우는 그 약점을 정확히 알고 공격을 했기 때문에 흑마실혼인이 맥없이 떨어진 것은 지극히 당연 했다. 만약 단우가 흑마실혼인의 약점을 알지 못했다면, 그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그 중 열 명의 흑 마실혼인을 상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흑마실혼인은 탄생의 어려움과는 달리 너무도 맥없이 죽어 갔다. "……!" "……!" 막사인과 사금부는 망연자실하고 만다. 애초에 그들이 상부로부터 이 흑마실혼인을 인수받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 이 흑마실혼인은 무적이다. 비록 인성을 지니지 않았으나 그 무공만큼은 흑마사십사령에 전혀 뒤질 바가 없으니……. 그대들이 오십육 인의 흑마실혼인을 지닌 이상 중원의 절반 이상을 장악해야 함은 당연하다. 이 말은 자신과 확신에 가득 찬 말이었다. 그런데 너무도 허무했다. 막사인과 사금부는 지금까지 이 흑마실혼인을 이용하여 수많은 무림의 고수들을 죽였기에 능히 그 가공 함을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고 보니 흑마실혼인의 능력에 회의가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그들은 단우를 공포의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단우는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이제 그대들 차례인가?" 그는 빙긋이 웃는다. 그 자세가 너무 여유만만하다. 하지만 그의 자세는 어찌된 영문인지 전체가 빈틈 투성이였다. 막사인과 사금부의 눈빛은 맹렬히 빛나고 있었다. '죽일 수가 있을 것 같다.' '저 순간적인 허점을 노린다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 더군다나 상대에게는 무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 사위는 칠흑의 어둠으로 잠겨 있었기에 기습은 더욱 용이한 것이다. 두 사람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사부만파세(死斧萬破勢)－!" "도광만천(刀光滿天)－!" 눈빛을 교환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신형은 그대로 단우에게로 쏘아져 갔다. 쾌애애액－ 콰아아아－! 무섭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에다가 그들의 쌍부와 철도는 가공할 살기를 뿌리며 단우에게 밀려들고 있었다. 폭풍(爆風)! 가공할 폭풍이 일며 주위의 백양목이 그대로 잘려져 나가고 있었다. 실로 가공무쌍한 위력이었다. 허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공스러운 것은 그 빠름이었다. 그들의 신형이 떴다 싶은 순간 이미 단우의 목과 가슴을 노리고 쌍부와 철도는 파고들고 있었다. 아무런 방어자세도 취하지 않고 있던 단우가 그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아니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쌍부는 목을 노리고 거의 살에 닿아 있었고, 철도는 이미 가슴의 옷자락을 자르고 있었다. '됐다!' 막사인과 사금부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놈은 죽는다.' '태상련주가 설사 이 자리에 있다 해도 이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상련주하면 그대로 그들의 신이다. 그가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천하의 그 누구도 이 공격을 피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 그들은 보지 못했다. 단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고 있음을……. 그 순간 단우는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그런 느낌이 든다고 생각되어지는 그 순간, 그는 아예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은 일천 년 전 칠대초인의 이목마저도 완전히 속여 넘길 수 있었던 불세의 신법인 유령대제의 유령 환허보(幽靈幻虛步)였다. "헉!" "이럴 수가!" 막사인과 사금부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그들이 생각했던 불가능이 이제 가능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와락－! 한 쌍의 핏빛 손이 그들의 목을 잡았다. 그것은 바로 어금태자의 최고 무학인 어금혈영수(御禁血影手)였다. 이 손에 닿으면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그대로 한 줌의 물로 녹아 내리며, 아무리 강한 고수라 해도 감 히 마주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천 년 전 어금태자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 어금혈영수 덕분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이 일천 년이 지난 지금 단우의 손에서 재현이 되고 있는 것이다. 파스스스－! 최초로 막사인과 사금부의 두 다리가 마치 얼음처럼 녹아 내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녹아 내린다는 전설은 비로소 실현이 되고 있는 셈이었다. 마침내 막사인과 사금부의 육신은 순식간에 격렬하게 떨다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녹아 내리고 말았 다. 최후의 순간까지 남았던 것은, 바로 불신과 경악에 젖어 흔들리던 그들은 두 눈이었으나 그것도 곧 한 줌의 물로 화하고 말았다. "……!" 단우는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어금혈영수의 위력이 이 정도였다니…….' 그러나 그의 놀람은 단지 이 어금혈영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천 년 전 당시 최고인이었던 칠대초인과 유령대제의 무공을 사용할 때마다 그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무공이 인간 한계를 뛰어넘는 위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공했다. 그 누구라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도 그것은 입증되었다. 막사인과 사금부라면 흑마사십사령 중 이십 위대의 고수로서 평소 그 무공이 적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강했던 것이다. 한데 그들이 미처 손을 써 보기도 전에 죽고 말았으니……. 단우는 새삼 자신의 핏빛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었다. '함부로 써서는 안 될 무공이로군.' 그는 이 엄청난 무공의 위력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에게만 이 무공을 전개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흑마실혼인에게 공격할 때도 죽이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흑마실혼인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단우였기에, 그들이 실혼인이 되기 이전에는 정 파무림의 고수일 수도 있는 것이고 보면 그들을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벽라백위파의 위력은 대단하여 그대로 그들의 미심을 관통하고 만 것이었으니……. 단우는 탄식했다. 한편……. "으음……." "아아……." 담야훼와 소야는 아직도 추혼사망삭에 갇힌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볼 수가 있었다. 흑마실혼인의 죽음을……. 그리고 막사인과 사금부의 죽음을……. '무… 무서운 무공이다.' 그들은 그만 입만을 딱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 밀려드는 것은 격동과 희열이었다. 그들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본 것이다. 냉사혼에게서 그가 단우일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소야는 무창루에서 그것을 확인했고 담야훼는 소야에 게서 그것을 들었는 바……. 너무도 변한 단우이지만 그들은 한눈에 상대가 단우임을 알아본 것이다. 담야훼의 눈에 격동의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아아… 저리도 아름다울 수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워.' 여인처럼 아름다운 단우가 다가와 그들의 몸을 조이고 있는 추혼사망삭을 풀고 있었다. "……." "……." 세 사람의 눈빛은 허공에서 뜨겁게 엉켰다. 그들은 한때는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과거의 친구다. 말할 수 없는 감회가 물살처럼 그들의 몸을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가슴은……?" 단우는 소야의 가슴의 상처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소야는 히죽 웃었다. "이 정도는… 안 죽어… 너를 보니 기뻐."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담야훼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처녀티가 완연하군." 담야훼가 배시시 웃었다. 웃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아마 아이도 낳을 수 있을 걸." "뭐야?" "크하하하핫……!" 마침내 세 사람은 폭소를 터뜨렸다. 전후사정이야 어찌됐든, 그들의 현재의 신분이야 어찌됐든 그것은 상관없다. 다만 보는 것만으로 좋은 그들은 하염없이 동심으로 젖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풍운은 이 와중에서도 점차 무르익어 가고 있었으니……. 단우가 해야 할 일은 억세게도 많은 셈이었다. ■ 십매어황 제3권 第八章 천령(天靈)과 지령(地靈), 그리고 금일홍(金一紅) 1 단우는 소야의 가슴을 치료하고 있었다. 담야훼는 한쪽에 쭈그리고 앉은 채 다만 단우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포만해 있었는데……. 이곳은 하나의 사찰(寺刹)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이 황폐한 사찰의 대웅전을 찾아든 것은 소야의 상처를 치료키 위함이었고, 지나온 그들의 사정에 대해 많은 말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단우는 말했다. "그렇다면 제마뇌림에서의 생활은 계획적인 것이었단 말인가?" 소야는 말했다.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흑마사십사령이 되기 위한 안배였고… 그것은 누구의 눈이라도 피하려 했기에 볼모가 기꺼이 되었던 것이다." "음……!" "이 모두가 한 사람의 각별한 배려 덕분이었다." "한 사람……?" "음…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어. 그의 능력과 자질은 눈이 부실 정도였으며… 그의 성품은 온화하기 그지 없었다." "아……!" 단우는 탄성을 발했다. 그는 다소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흑마사십사령 중 그런 인물이 있었던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야는 말을 잇고 있었다. "사실 흑마사십사령의 탄생 과정은 그런 은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어. 냉사혼과 담야훼… 그리고 나 소야는 제마뇌림에서 그분의 배려로 천년지대의 무공을 익혔던 것이며 결국 흑마사십사령 중 세 명으로 탄생이 되었던 것이지." "대… 대단하군." 단우는 탄성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 그런 은밀한 탄생이었기에 흑마사십사령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 속에 있었던 것이로군.' 소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마도 다른 흑마련의 인물 모두가 우리와 같은 은밀함 속에서 탄생이 되었을 것이야. 그런데……." "그런데……?" "적어도 우리는 우리에게 무공을 전하고 우리를 이렇게 탄생시켜 준 인물을 흑마련의 태상련주로 생각 해 왔었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어." "잠깐!" 단우가 말을 끊었다. 그는 무엇인가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물었다. "태상련주의 이름은……?" 담야훼가 모처럼 대답했다. "그분은 금일홍이라고 했어." "금일홍?" 단우는 경악했다. 소야가 말했다. "그리고 그분은 흑마사십사령 중에서 천령(天靈)이라고도 불렸어. 또한 그분은 흑마사십사령 중 서열 제 일위의 위대한 분이셔." "아……!" 무엇인가 잡힐 듯하다. 단우는 다시 물었다. "분명히 금일홍이라고 했는가?" "음……!" 소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상하군. 금일홍이 어찌 흑마사십사령 중 일 인이며 천령이라 불리는 것이지?" "그것은……." 소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야. 사실 금일홍에게는 두 명의 분신(分身)이 있었어. 모습과 그 무엇도 완전 히 같은… 이것은 금일홍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지." "두 명의 분신……?" 단우는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보니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던 흐릿한 느낌이 완전히 잡히는 듯했다. "계속 말해라, 소야." 소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태상련주 금일홍이 그들 분신을 만든 것은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배려이기도 했던 것이다. 항차 무림을 용이하게 지배하려는…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그들 분신에게 주었고 그들 두 분신은 그야말로 뛰어난 자질 덕분으로 그 모든 면에서 진짜 금일홍과 비견될 정도로 성장했다." "음……." "두 분신 중의 한 사람은 천령이라는 분이셨고… 그분은 온화정대했으며 인간적으로 완성이 된 분이셨 다. 그리고 한 사람은 지령이라고 불렸다. 바로 흑마사십사령 중 제이인자인 그는 천령과는 다른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 성격은 잔인하고 무심했으며 독랄하기까지 했다." "……!" "그리고 그는 지혜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으니… 아무튼 그들 두 분신은 금일홍의 기대만 큼 거대한 성장을 이룩했던 것이야." "음……." 단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참으로 놀랍고도 무서운 비사였다. 그 흑마련의 비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과 상황에서 지금 적나라하게 풀려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두 분신은 진짜 금일홍과 함께 이 시대의 다섯 초인 중의 두 사람이 된 것이지." "아… 오대초인 중 두 사람……?" 단우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오대초인 가운데 삼 인이 흑마련의 인물이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천령과 지령으로 불리는 금일홍의 두 분신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던 것인데 지금 그 사실 을 알게 된 것이다. '천령과 지령…….' 이들 두 사람에게 단우는 기이하게도 호승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철저히 신비에 싸인 인물이기에 더욱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때 소야의 말은 계속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두 분신이 금일홍과 너무도 같은 모습에 같은 무학을 사용하고 또한 그 위대함 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는 데에서 있었다." "음……." "그리고 그들은 각기 분담하여 흑마사십사령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또한 문제였다. 한 인간에게 야망이 없다면 그것은 속물에 불과할 뿐인데… 그들 두 분신에게 야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두 분신이 흑마사십사령 중 일부를 키우게 된 것은 어떤 야망의 분출구로 이용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음……." "냉사혼과 나와 담야훼가 천령을 태상련주로 생각하고 그의 인간미에 완전히 매료가 되었던 것처럼 다 른 인물들 역시 그랬을 것이니… 그것은 배반의 요인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어." "배반이라고?" "그렇다. 평소 흑마련의 행위와 금일홍의 너무나 큰 야망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천령, 그분이 우선 배 반의 기를 들었고… 그를 추종하는 흑마사십사령 중 상당수가 그를 따라 배반의 길을 걸었던 것이야." "……!" "물론 이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기 때문에 천령을 태상련주로 알고 배반 아닌 배반을 한 것이지만… 이 사실을 천령으로부터 직접 듣고서도 우리는 배반을 한 것은 그의 취지가 매우 바람직했었기 때문이었 어." "아……!" "그분은 무림을 위해서 마지막 인생을 장식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어. 단지 피와 죽음으로 야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무림을 지배하자는 의견에 우리는 동의를 했고 거의 헌신적으로 그분을 따랐던 것이다." "대단한 사람이로군. 천령이라는 그 사람은……."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인간을 바르게 부릴 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성숙된 인간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말이 쉽지 사실은 매 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령이라는 인물은 진정 뛰어난 인물인 듯싶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지령 또한 배반의 길을 걸었어. 물론 천령, 그분과 뜻을 함께 한 것이 아 니라 그는 독자적으로 자신을 추앙하는 인물과 함께 야망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 "그런 그에게도 충분한 능력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진짜 금일홍 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는가 하는 것이었어." 소야는 한쪽 기둥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단우는 말했다. "물론 무섭게 분노했겠지." "바로 그것이야. 분노 뒤에는 당연히 배신자를 척살한다는 무서운 결심으로 굳어졌고… 그리하여 흑마련 은 무서운 겁란으로 치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니……." 단우는 소야의 말을 듣고 몇 가지 짐작이 가는 사실이 있었다. 첫째, 흑마련이 그토록 가공할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림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들이 자중지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얼마 전 동정호변에서 만났던 금일홍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확실히 과거에 그가 보았던 금일홍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의 확신은, 그는 지령이라는 금일홍의 두 분신 중 한 명이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거 단우는 천년지대에서 보았던 금일홍의 무릎에 앉아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 었다. 당시 단우는 그를 금일홍이라 생각했으나,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는 진짜 금일홍이 아니었음 이 확실하다. 확실히 그는 금일홍에 비해 지극히 온화했고 자비로웠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천령이라는 금일홍의 또 하나의 분신임이 분명했다. 아무튼 이런 단우의 생각과 동시에 소야의 말은 계속이 되고 있었다. "그런 금일홍의 결심은… 과거에는 주춤했었다. 그것은 그가 한 가지의 과업(課業)을 완성하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완성하기 위한 총력전이 필요했던 까닭으로 배반자를 척살하려는 그의 결심을 뒤 로 미루게 된 것이다. "한 가지 과업이라니?" 단우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소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바로 흑마실혼인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 "당시 그는 정확히 일천 명의 무림인들을 잡아들여 동시에 흑마실혼인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 니……." "아……." "그런데 그것이 근래에 들어 완성이 되어 가고 있음에 분명하다. 사실 그것을 막기 위해 천령께서는 모 든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그것이 수포가 돌아간 것은 그 장소가 너무나 은밀한 데다가 그곳에는 금일 홍을 비롯한 무서운 고수들이 매복하여 들어갈 틈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음……." "무서운 일이다. 흑마실혼인… 지금 완성된 흑마실혼인들은 일천흑마실혼인 중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 다. 사실 무공이 강했던 인물들을 흑마실혼인들로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 는데……." "……!" "그리고 그 이상의 무공을 지닌 무림인들을 흑마실혼인으로 만들 경우에는 그 이상의 세월과 노력이 필 요한 것이었는데… 최초로 지금 완성된 흑마실혼인보다 바로 차차 완성이 되어질 실혼인의 위력은 엄청 난 것이야." "음……." 단우의 얼굴 표정은 무거워졌다. 소야의 말은 여기에서 일단 맺어졌지만, 단우는 실로 이 모든 비사를 듣고 난 지금 마음이 무거웠다. '흑마실혼인… 일천 인의 실혼인… 엄청나다…….' 더군다나 무림 최고수들을 잡아들여 흑마실혼인으로 만들 경우, 최약점으로 지니고 있는 흑마실혼인의 미심혈조차도 완벽하게 보완이 되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됐을 경우, 그 아무도 그들 흑마실혼인들을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단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 장소를 알고 있는가?" 담야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엇을 하려고?" "시간이 없다. 더 이상의 흑마실혼인은 탄생되어서는 안 된다." "하… 하지만……." "아는가?" 재차 반문하는 단우의 표정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담야훼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장소를 알고 있는 인물은 오직 한 분뿐이에요." "그가 누구지?" "천령……." "아……." 단우는 나직이 탄성을 발했다. "그를 만날 수 있는가?" "물론……." 소야가 몸을 일으키며 주저없이 말했다. "안내하게." 단우는 재촉하듯 말했다. 급한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흑마실혼인이 완성되고 있을 것이니……. 일천 인의 흑마실혼인이 완성될 경우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흑마실혼인이 완성되기 전에 그 장소를 파괴하는 것이 우선 시급한 일이었다. '만약 실패하면 무림은 끝이다.' 단우의 표정은 결연했다. 아무튼 십매어황성은 한 달 후에야 완성이 된다. 그 한 달 동안 단우에게 이번 싸움에서 절대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긴 셈이다. 2 "너는……?" 냉사혼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그런 그의 동공에는 격동의 빛이 진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그 동공 속에는 단우가 떠올라 있었다. "너… 분명 단우가 맞지?" "그리고 십매어황성의 십매어황이기도 하지."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그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냉사혼의 차가운 눈 속에 축축한 물기가 맺혔다. 눈물이었다. "그… 그래 맞았어. 어쩐지 친근감이 있다 했더니… 단우… 바로 단우였어." 냉사혼이 눈물을 흘리면서 와락 단우를 끌어안았다. "이… 이놈… 살아 있었어. 살아 있었어. 허어… 그 어린 꼬마가 이렇게 성장하다니……." 그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편, 이 광경을 주시하는 소야와 담야훼의 눈에 놀라움의 빛이 진하게 떠올라 있었다. '냉사혼… 저놈은 무심한인 줄 알았더니… 눈물을 흘리다니…….' '이거 하늘이 놀라고 땅이 기절할 일인 걸.' 그들은 냉사혼의 이런 변화에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냉사혼은 감정 표현이 아예 없는 인물이었다. 자객이라는 특수신분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천성이 얼음처럼 차가운 인물이었던 것이 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단우 앞에서는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우정(友情). 그렇다. 이것은 우정의 덕분이다. 그는 단우에게 형제보다도 더한 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쏴아아아－! 파도 소리가 들린다. 이곳은 동정호의 중앙이었다. 보이는 그 무엇이든 푸르게만 느껴지는 이곳은 동정호의 푸른 창파 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단우를 비롯한 그들이 있는 곳은 거대한 한 척의 배의 선상이었다. 배는 실로 거대했다. 하나의 섬을 방불케 할 정도로……. 쏴아아아－! 파도 소리는 단우와 냉사혼의 마음을 대변해 주려는 듯 힘차게 왔다가 밀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선상의 한쪽을 보라. 그곳에는 네 개의 검은 관이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각기 한 개의 신위(神位)가 세워져 있었고, 푸른 향연이 자욱히 피어 오르고 있었는데……. "저… 저것은……." "아아……." 그것을 바라보던 담야훼와 소야의 전신이 격하게 떨리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황망히 관 앞으로 달려갔다. "이럴 수는 없어……." "누가… 대체 누가 이분들을……." "이분들이 죽다니… 이분들이 죽다니……." 담야훼와 소야는 망연자실해지고 만다. 그들의 몸과 마음이 흡사 화석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냉사혼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죽었어. 죽은 것이야……."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단우는 의아했다. '이들이 대체 누구이기에… 이들이 이토록 격분하고 있단 말인가?' 단우는 관을 자세히 살폈다. 관을 열려 있었다. 그곳에는 네 구의 시신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한결같이 수려한 삼십대 후반의 인물이 었다. 그런 그들은 한결같이 칠공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다. '완전히… 완전히 가루로 변해 있다. 누가… 도대체 누가 이런 가공할 무공을 전개할 수가 있단 말인 가?' 단우는 경악했다. '단 일 장에 당한 것 같다. 단 일 장에 완전히 오장을 박살낼 수가 있다니… 이들은 흑마사십사령 중 네 사람 같은데…….' 단우는 그들을 자세히 살폈다. 상처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의 뇌리를 섬전처럼 스쳐 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혹시… 무형살인수(無形殺人手)에 당한 것……?' 이렇게 생각하고는 단우는 몸을 떨었다. 언제이던가. 이들과 흡사하게 죽어 있는 시신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한 구가 아니었다. 수백 구의 시신이 이런 식으로 상처 하나 없이 죽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살이라곤 하나도 붙어 있지 않은 백골들이었지만 단우는 어린 그 당시에도 그들의 한 가지 무공으로 당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거기에 어떤 한 사람이 죽어 가면서 남긴 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년지대! 그곳의 아흔아홉 개의 진세 중 예순 개째의 진세 안에 남겨진 글은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아아… 무형마군자(無形魔君子)의 무형살인수의 위력이 이토록 가공한 것이었다니……. 무섭다… 무서워……. 수백 명의 정파인들이 손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죽었다. 보이지 않는 죽음의 손……. 그것을 피할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단우는 당시 이것을 그냥 흘리듯 기억해 두었는데, 그것이 불현듯 지금 생각이 났던 것이다. 단우가 알기로는 이 무형살인수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한 번 사용하는데 엄청난 진력이 낭비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리 강한 고수라 해도 이 무공을 연이어 일백 번 이상 펼친다면 진력이 고갈되어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무형마군자는 수백 번에 걸쳐 이 무공을 전개했던 것이니……. 결국은 그도 죽었으나 그의 무공이 얼마나 가공할 것이었던지… 그리고 그 무공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 운 것이었는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인데……. 만약 당시 무형마군자가 연이어 그 무형살인수만 펼치지 않았다면 그는 칠대초인과 한 자리에 있을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형살인수가 지금에 와서 다시 나타나다니… 놀라운 일이다.' 단우는 놀라고 있었다. 이때, 담야훼가 절규하듯 물었다. "대체 누구의 짓이지? 이들은 흑마사십사령 중 이십오령과 이십육령… 그리고 삼십오령과 삼십육령이거 늘… 누가 이들을 동시에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엄청난 일이었다. 죽어 있는 사람들의 무공은 과거 자하고금마유사를 무참하게 죽인 흑무상과 백무상이라는 인물과는 비 견도 할 수 없으리만큼 가공할 것이었는데……. 그런 그들이 이토록 무참하게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죽인 인물의 무공은 과연 어느 정도란 말인가? 냉사혼이 분노를 삭히며 말했다. "그는 사령(死靈)이다." "사령? 흑마사십사령 중 제삼인자인 사령이란 말인가?" 담야훼와 소야는 사색이 되고 만다. 단우가 물었다. "혹시 그가 사용한 무공은 무형살인수가 아닌가?" 이 물음에 냉사혼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단우… 이 무공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음……." 단우는 고개를 끄덕인다. 냉사혼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토록 이 무공이 강한 것이었던가? 이들이 죽을 만큼……?" "음……!" 단우는 자신이 보았던 천년지대 안의 글귀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자 세 사람은 뻣뻣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 그런 무공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 놈이 제삼인자의 자리에 올라설 수가 있었던 것이로군. 정말 무서운 놈……." "사… 사령… 그놈을 죽일 방법이 없단 말인가?" 세 사람은 몸을 떨며 처연한 안색을 지었다. 냉사혼은 이빨을 악물며 말을 씹어 뱉었다. "흐흐흐… 죽일 놈은 사령이라는 놈이지만… 그러나 정작 더 죽일 놈은 그 금일홍이라는 태상련주다. 그 놈은 이제 완전히 광분하고 있다." "……!" "우리 모두를 죽이려 하는 것이지. 흐흐흐… 그놈… 그놈은 세상을 모두 죽이려 하고 있어. 그 첫번째 목표가 배신자라 부르는 우리들일 뿐이야." 냉사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은은하면서도 미증유의 힘이 실린 음성이 선실 쪽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가? 단우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다시 그 음성이 들려 왔다. "당신이 십매어황이시오?" "그렇소." "당신은 천령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오?" "그렇소." 단우는 의혹 어린 눈빛으로 선실을 바라보았다. 이때 냉사혼의 전음이 단우의 귓전으로 나직하게 흘러 들어왔다. "단우… 지금 목소리의 주인은 흑마사십사령 중 문령(文靈)으로 불리는 제사인자이시네." '아…….' 단우는 내심 탄성을 발했다. '흑마사십사령 가운데 흑마사령(黑魔四靈) 문령이라…….' 단우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선실 쪽으로 돌렸다. 음성은 다시 흘러 나오고 있었다. "들어오시오. 당신을 뵙고 싶으니……." "……."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실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십매어황 제3권 第九章 천령(天靈)의 정체 1 선실(船室) 안은 아담하고 정박한 분위기였다. 그곳에는 하나의 목탁만이 놓여져 있었는데, 한 사람이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일신에 허름한 백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첫인상은 전형적인 유생의 그것이었다. 전혀 무림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그는 청수한 면모의 사십대 중반의 인물이었다. 이 순간 그는 한 권의 책을 펼쳐놓고 시선을 그곳에 던지고 있었다. 마치 독서삼매경에라도 빠진 듯한 모습이었는데, 단우는 그를 보며 그가 문령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 었다. "……!" 그는 말없이 문령을 살폈다. 어디 하나 특출나게 뛰어난 점이 없어 보이는 그는 자세히 보면 기이한 마력이 풍겨지고 있음을 알 수 가 있었다. 입가에 고아한 미소가 사람을 끌고 있었으며, 책장을 넘기는 손이 여인의 그것처럼 아름다워 기이한 매 력(魅力)을 담고 있었다. 특출나게 뛰어난 것은 없는 반면, 그의 어느 곳 하나 매력적이 지 않은 곳도 없었다. '과연 흑마사십사령 중 사령답다.' 그는 신이었다. 적어도 흑무상과 백무상이라는 인물에 비한다면. 그리고 냉사혼, 담야훼, 소야 등에 비해도 그는 신일 수밖에 없는 가공할 인물인 것이다. 위로는 오직 흑마련의 태상련주라는 금일홍과 천령, 지령, 그리고 사령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는 이 시대의 제오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흑마련의 흑마사십사령이 이 시대의 최고 기인이었기에 그들 가운데 사인자인 이 인물은 충분히 한 시 대의 패자로서 군림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를 마주 대면한 단우는 문령이라는 인물에게서 거대한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령이 여전히 시선을 책장에 둔 채 물었다. "천령을 만나려는 목적은 무엇이오?" 단우는 담담히 말했다. "한 장소를 알기 위함이오." "장소라니?" "바로 흑마실혼인이 만들어지고 있는 그 장소를 말하는 것이오." "아……." 문령은 나직이 탄성을 발하며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단우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 순간적으로 단우를 담은 그의 동공에 찬란한 빛이 흘러갔다. '대… 대단한 인재로군. 그 자질이 완벽하다.' 그는 감탄하고 있었다. '십매어황이라 불리는 이 시대 최고의 신비인…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는 한동안 단우를 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다. 문령은 본래 황궁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궁의 인물임에도 무림인이 된 것은 그가 황궁의 권력쟁탈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단지 학문만으로 황궁에서 한림대학사(翰林大學士)라는 위치에 오를 수가 있었으니……. 그의 학문의 깊이는 하늘을 포용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황궁에서 본 사람이나 무림에서 대한 사람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맹세코 이 면전의 단우만큼 절세적인 용모와 자질을 완벽하게 지닌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이때, 단우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시간이 없소이다. 그분을 만나게 해 주시오." "물론 그래야 하겠지만……." 문령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분을 만날 수가 없소."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그분이 이곳에 안 계시기라도……?" "아니오. 그분은 이 배에 분명히 있소." "그런데 왜……?" 단우는 의혹의 표정으로 문령을 주시했다. "그 분은 약 한 달 전에 이십 일 폐관에 들어가시었소. 한 가지 무공을 완성하기 위함이오." "이십 일 폐관이라면… 이미 지났지 않소이까?" "그렇소. 지났소." "그런데……?" "예정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분은 여전히 폐관을 마치지 않고 있는 것이오." "아……." "때문에 그분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소. 다시 말해… 그분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 오." "음……." 단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나야 하오." "음……." 문령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분의 명이 떨어지지 않는 한 누구도 그곳에 접근할 수 없소." "만약 그분이 불행한 사태에 있어도 말이오?" "무슨 뜻이오?" 문령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단우는 간단하게 말했다. "내 말은 그분이 폐관 중 위험이 처할 수도 있다는 말이오." "그럴 리가……." "아니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오. 당신도 무림인이기 때문에 무공을 수련 중 수많은 위험이 도사 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 않소?" "음……."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가 있는 것이니… 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오. 생각해 보 시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가 열흘 이상을 그곳에 더 머물 수가 있단 말이오?" "음……." 문령의 표정을 어두워졌다. 단우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도 단우처럼 그런 이런 짐작을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천령의 명이 너무 지엄했기 때문에 지금 까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우는 그런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말했다. "모든 것을 이 몸이 책임지겠소. 그를 만나게 해 주시오." "……." "만약 그를 만나지 못하고 흑마실혼인이 계속 완성되는 것을 두고볼 수밖에 없다면… 당신들은 물론 무 림은 끝장이오." "알겠소." 문령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도 사태의 심각함을 익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몸을 따라오시오." 그는 선실의 문을 열고 다른 선실로 들어갔다. 단우는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2 또 하나의 선실, 이 선실의 문에는 단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금(禁)> 이것은 오직 하나를 의미한다. 이곳에는 누구의 접근도 금한다는 뜻일 게다. "들어가시오." 문령은 말하고는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단우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단우는 잠시 선실의 문을 살폈다. '과연 나의 짐작대로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그는 한 가닥 의혹을 담은 채 선실의 문을 열었다. 순간이었다. 스스스－! 왠지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쁜 사이한 바람이 흘러 나왔다. "무슨 일인가가 있긴 있는 것 같다." 단우는 문을 완전히 열었다. 그런데 그 문은 또 하나의 문을 내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 문을 여니 약간의 공간을 두고 또 하나의 문이 있었던 것이다. "……?" 단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또 하나의 문을 열었다. "어……?" 그는 다시 놀라고 말았다. 또 하나의 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틀린 것이 있다면 철로 되어 있다는 점뿐이었다. "기이하군……." 단우는 다시 그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 문을 여는 방법을 문령에게 들었기에 쉽게 열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문이었다. 또 하나의 문이 약간의 공간을 두고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문은 수십 개의 장인(掌印)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문은 거대했다. 또한 그것은 만년흑옥(萬年黑玉)으로 만들어져 있었는지라 도검은 물론이고 불로서도 녹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인간의 손자국이 나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닌 수십여 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단우는 경악했다. "이 정도의 만년흑옥문을 관통할 정도의 능력이라면 엄청나다. 일신에 지닌 공력이 최소한 오갑자(五甲 子) 이상이라는 이야기인데……." 단우는 혀를 내둘렀다. 지금까지 이 정도의 공력을 지녔다는 인물을 그는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천 년 전의 절대고수인 칠대초인조차도 이런 정도의 공력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칠대초인 이상의 능력의 증거를……. "도대체 누가… 이런 가공할 능력을……?" 그렇다. 이것은 분명히 가공할 능력인 것이다. 일천 년 전 칠대초인을 능가한다는 것은 가히 하늘도 놀라고 땅이 전율할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장인은 자세히 살피건대 안쪽에서 낸 것이 분명했다. 다시 말해, 누군가 이 만년흑옥문 안쪽에서 이런 엄청난 능력을 보였다는 말이다. "누구일까?" 단우는 의혹에 잠긴다. 하지만 그는 곧 실소를 토하고 말았다. 자신의 이런 의혹은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이곳이 천령이라는 인물의 폐관장소인 이상 그가 당연히 이 장인의 주인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튼 단우는 천령이라는 인물에게 더욱 호기심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그그긍－! 만년흑옥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기에 쉽게 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으으으……." 안에 들어가는 순간 기이한 신음을 단우는 들을 수가 있었다. "……?" 어둡다. 사방은 치가 떨릴 만큼 어두웠으며 극렬한 사기(邪氣)가 흐르고 있었다. '천령이라는 인물이 사공(邪功)을 익히고 있었던가?' 단우는 의혹의 눈빛을 발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 그는 탄성을 발했다. 무엇인가를 발견했던 것이다. 한 사람이 선실의 한쪽 벽면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이때 단우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의 눈빛을 접하는 순간 단우는 전율하고 말았다. "아아… 사람의 눈빛이 아니다." 눈빛! 한 쌍의 그 눈빛은 수정처럼 투명했다. 그런데 단지 투명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은은히 녹광이 흐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녹광의 저편에는 핏빛이 악마의 혓바닥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눈빛……. 인간의 눈빛이 과연 이렇게 끔찍스럽고 사이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 눈빛의 주인은 더욱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산발한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으며, 걸치고 있는 옷은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피부는 역시 눈빛과 같이 투명한 가운데 핏빛과 녹광을 강하게 뿌리고 있었다. 단우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나직이 물었다. "혹시 천령이시온지……?" 그런데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크아아아－!" 괴인은 날카로운 괴성을 지르며 단우를 향해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두 손은 단우를 잡아 찢어 버릴 듯한 기세로 날아오고 있었으며, 손이 날아오기 전에 무서운 장력이 뿜 어져 나오고 있었다. "우웃!" 단우는 이런 사태를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라 피하고 자시고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유령환허보를 전개했는데……. 이럴 수가 있는가? 괴인은 흐르듯이 움직이는 단우를 그대로 따라오며 장력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쾅－! 그대로 장력은 단우의 몸에 격타되었다. "컥!" 단우는 가슴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무… 무서운 무공…….' 단우는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다. 그가 정식으로 무공을 익힌 이후 이렇게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칠대초인의 무공을 지닌 단우이기에 가히 적수를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이었는데, 그는 오늘 어쩌면 임자를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크크… 크크크……!" 괴인은 집요하게 단우를 향해 무서운 장력을 뻗어 내고 있었다. 아예 단우를 박살이라도 낼 모양이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가공할 강기의 소용돌이가 일어 가고, 그것에 닿은 만년흑옥벽은 그대로 조금씩 녹아 들고 있었으니……. 그 가공함과 그 경이로움에 단우는 거듭 경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당할 수만은 없었다. 비록 가슴의 기혈이 뒤엉켜 있어서 미처 공력을 완전히 끌어올릴 수는 없었으나……. 그는 조용히 합장하며 가부좌를 틀었다. 고고고－! 결가부좌를 틀고 운공하기 무섭게 그의 몸에서는 한 줄기 찬란한 서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천불선좌세(千佛禪座勢)! 지금 그가 전개하고 있는 무공은 칠대초인들 가운데 무위활인승(無偉活人僧)이 말년에 창안해 낸 천불 선좌세였다. 스스스－! 그의 모습은 불존의 모습인 양 성스럽게 변화했고, 그것은 곧 천 개의 환영으로 갈라진다. 그야말로 천불(千佛)……. "……." 이 급작스러운 변화에 괴인은 주춤했다. 그러나 괴인은 곧 더욱 사이하게 웃으며 양 손으로 원을 그렸다. 아주 단순한 동작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콰콰콰콰콰－! 이 석실 전체가 완전히 폭풍에 휘말린 듯 가공할 경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것이 아닌가! 천불이 아니라 만불이라 한들 어찌 이에 당할 수가 있겠는가? 장소가 괴인의 가공할 장력을 피하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단우의 환영은 휘날리는 낙엽 꼴이 되고 있었다. 이리 부대끼고 저리 부대끼고……. 이러다가는 일천 개의 환영이 그대로 가루로 변할 듯싶었는데! "가… 가공하다." 단우는 천불선좌세로도 도저히 괴인을 상대할 수가 없음을 느꼈다. 순간 그는 한 손을 미심에 대고 다른 한 손을 단전에 올려놓았다. "무위세수심공(無偉洗髓心功)……." 그의 입에서 불호성처럼 은은히 흘러 나온 그 무위세수심공 역시 무위활인승이 말년에 창안한 무공이었 다. 창안만 했었기 때문에 무위활인승조차도 그 위력을 확실히 몰랐던 것이었다. 고오오오오－! 찬란한 서기가 단우의 몸에서 피어 올랐다. 그 서기는 단지 서기가 아니라 엄청난 경기였다. 순간. 콰콰쾅－! 괴인의 장력과 단우의 경기는 허공에서 격렬하게 마주쳤다. "헉!" "큭!" 두 마디의 답답한 신음이 흘렀고, 선실 전체가 허물어져 내릴 듯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단우는 다시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 괴인의 몸이 흔들림을 느끼고 재차 몸을 날렸다. "십자폭(十字爆)!" 그는 곧장 한소리 우렁찬 외침을 토하며 양 손을 수평으로 괴인을 향해 뻗었다. － 십자폭(十字爆). 그 무공은 바로 칠대초인 가운데 십기대학사의 무공이었다. 물론 십기대학사는 이 무공을 단 한 번도 펼쳐 보인 적이 없었다. 대자연의 움직임을 보고 창안한 무공이지만, 그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선비로 가장했기에 이 무공을 창 안했음에도 펼쳐 보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단우의 몸은 빠르게 괴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곧장 양 손으로 괴인의 몸을 가격했다. 십자폭은 어떤 물체에 닿으면 그때서야 실로 무서운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만약 이 십자폭에 적중된다면 완전히 육신이 가루로 변해 사라져 가는 것이다. 쾅－! 굉렬한 폭음과 함께 괴인의 몸이 기우뚱 물러서고 있었다. 푸아앗－! 한 모금의 선혈이 괴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괴인은 놀랍게도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또한 그는 더 이상 상처도 입지 않았다. 만약 이 광경을 십기대학사가 보았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으리라. 단우 역시 놀라고 있었다. "와… 완벽한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 단우는 힘이 쭉 빠짐을 느꼈다. 그렇다. 괴인의 몸은 어떠한 신병이기(神兵異器)로도 해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금강불괴지신은 미완성의 상태를 말함이다. 즉, 흔히 무림에 등장한 금강불괴지신은 말이 그렇다는 것뿐 사실은 완전한 상태가 아닌지라 명검이나 명도 같은 신병이기에는 감히 대적을 못했던 것이 지금까지의 상례였다. 그런데 이 괴인은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금강불괴지신이었던 것이다. 그 가공할 십자폭에 적중당하고서도 무사함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변화가 있었다. 괴인의 눈빛이 한순간 물처럼 고요해지는 것이 아닌가? "너… 너는 누구……?" 그의 음성 또한 사이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단우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나… 나가라… 나가지 않으면 주… 죽는다… 어서… 어서……." 괴인이 다급히 소리쳤다. 놀랍게도 그 음성은 사내가 아닌 여인의 음성이었다. '천령은 남자라고 들었는데……?' 단우는 경악과 의혹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단우는 급히 물었다. "당신이 천령이시오?" 그러자 괴인의 몸이 격렬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그… 그렇다. 내… 가 천령……." 괴인은 분명 천령이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영락없는 여인의 음성이었다. "이… 이럴 수가……." 단우는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천령이 여인이었단 말인가? 금일홍의 분신 중 한 명이 여인이었단 말인가?' 과거 그는 천년지대 안에서 이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완벽한 금일홍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 얼굴 그 체형마저도 완벽히 같은 것이었는데……. 그가 여자라니……. 단지 음성뿐만이 아니었다. 괴인의 이모저모를 빠르게 살피고 보니 과연 풍만한 몸매하며 사내에게는 없는 것이 달린 것을 보니 여 인이 틀림없었다. 이때였다. "어… 어서 나가라. 그리고… 수… 수하에게… 더 이상… 나에게 기대를 말라고… 저… 전해… 크아아 아……." 천령은 말을 미처 끝내지도 못하고 다시 괴성을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자신의 옷과 육신을 마구 쥐어뜯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녀의 두 눈에서는 뜻밖으로 무서운 욕정(欲情)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 십매어황 제3권 第十章 풍운만변(風雲萬變) 1 천령은 완전히 이성을 상실하고 있는 듯했다. 순식간에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찢어 발겼고, 끝내 그녀는 나체로 변해 버렸다. 풍만한 젖가슴은 금시라도 떨어져 내릴 듯 출렁이고 있었으며그녀의 가장 신비한 곳까지도 모두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사내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단우에게 처음이리라. "크아아아－!" 욕정은 갈수록 극으로 치달리는 듯했다. 잠깐 동안이었으나, 천령이라는 여인은 눈빛으로나마 단우에게 나가라는 표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단우는 나갈 수가 없었다. 그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인은 무공을 연성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인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또한 엄청난 욕정까지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만약 이대로 둔다면… 이 여인은 전신의 기혈이 터져 죽고 말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천령이라는 여인은 전신혈맥이 툭툭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눈빛은 시뻘겋게 충혈이 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는 금방이라도 피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구해야 한다. 이 여인이 흑마실혼인을 만들고 있는 장소를 알고있는 유일한 인물인 이상 어쨌거나 나는 이 여인이 죽어 가는 것을 두고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단우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여인은 사내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여인은 욕정을 풀 수가 있는 것이며, 주화입마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사내의 구실을 해야 하는 것이다. 천령이 여인이 되었고, 여인이 마성에 젖게 된 사연이야 어찌됐든 그는 여인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가 여인에게 알아 낼 한 가지 사실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듣기로는 천령의 성품은 온화한 것이며 비록 흑마사십사령 중의 첫번째 인물이나 대의를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전에 그녀는 단우를 한 번 살려 놓아 준 적이 있었기에 그 작은 보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살려야 하는 것이다. "크아아아－!" 천령은 완전히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욕정에 사로잡힌 몸은 불타듯 뜨거운 열기를 뿜어 내고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지 그녀는 천천히 단우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젖무덤은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비록 광기에 젖은 여인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충분히 자극적이며 도발적인 것이다. '무슨 사연이었을까? 이 여인은 무슨 이유로 여인이면서 사내가 되어야 했던 것인가?' 단우는 이 와중에도 그녀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었다. 천령이 여인이었다는 충격은 상당히 컸었던 모양이었다. 이때였다. "크으으－!" 천령이 단우를 와락 끌어안더니 정신없이 그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단우는 알몸이 되었다. 긴장한 근육질의 육체가 드러나고 두 사람은 이내 바닥으로 넘어졌다. "크으으……!" 천령은 완전히 욕정의 화신이었다. 단우의 나신을 빨고 쓰다듬으면서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능이었으리라! 그녀는 단우를 자신의 몸 위에 싣고 있었으니……. 단우는 그녀의 적극적인 자세에 아예 질려 버리고 있었다. 과거 그는 절대화후 수국령과 한 달 이상 육체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여체를 다룰 줄도 안다. 그러나 지금의 이 경우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적당히 만져 주고 하는 행위란 아예 필요치가 않았다. 가장 급한 것은 욕정을 푸는 것이다. 더군다나 두 사람에게 애정이 있을 턱이 없었고, 그래서 사랑의 행위에 필요한 애무란 애초부터 필요치 가 않았던 것이다. 오직 필요한 것은 화합이었다. 천령도 그것을 원하고 있는 듯 전신을 마구 비틀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괴성 뒤에는 뜨거운 숨결도 토해진다. "으으……." 천령은 이제 정신없이 단우의 어깨를 물어뜯고 있었다. 급한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완전히 욕정의 폭발로 죽을 판이다. 단우는 천천히 그녀의 몸 위에 자신을 실었다. 그리고 곧장 마지막 행위에 돌입했다. "크아악－" 천령은 전신을 떨며 비명을 내질렀다. 분명히 괴성이 아니라 비명이었다. 고통에 찬 비명……. '처녀였던가?' 단우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얼굴로 보아……. 그리고 그 몸매로 보아 이 여인의 나이는 적어도 삼십 이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뜻밖에도 순결한 처녀였던 것이다. 그녀가 내지른 비명은 처음 터지는 파괴의 아픔에서 유발된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단우는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처녀이든 아니든 그것은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이것은 분명히 남녀의 화합이었으나 따지고 보면 성행위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지금 단우는 한 여인 을 살리기 위해 이 행위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치료를 위한 의술행위……. 이것이 이 두 사람의 행위에 가장 적당한 표현이 되리라. "헉헉……." "크으으……." 어쨌거나 이것이 의술행위이든 아니든 두 사람의 숨결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단우의 등은 손톱 자국이 나고 있었고, 천령은 아픔 뒤에 솟아나는 쾌감으로 인해 전신을 격렬히 떨고 있었다. 2 흑마련은 이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동안 어둠 속의 존재였던 흑마련! 한때는 무섭게 무림을 장악하기조차 했던 흑마련이 언제인가 느닷없이 그 움직임을 멈춘 그 이후 기실 흑마련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흑마련이 지금 무서운 기세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흑마사십사령이 흑마련에 존재하고, 흑마사십사령의 무서움을 익히 알고있는 무림인들은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물론 무림인들은 흑마련의 자중지란으로 흑마사십사령이 삼분되었던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공포스러운 것이다. 흑마련은 이제 구대문파에까지 손을 뻗고 있었다. 옥불과 곤륜성녀라는 이 시대 최고의 초인이 버티고 있는 구대문파와 흑마련의 대결! 이것은 무림사 사상 가장 치열한 난세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단지 여기에 있지 않았다.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이 다시 무림활동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이제는 유명무실하기만 했던 두 무림의 하늘! 그러나 그들 두 세력은 벽라신월 백리황이라는 인물과 벽라상화 백리예령이라는 불세출의 기재들을 배 출해 냄으로 인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들 두 기재들의 무공은 가히 오대초인과 비견될 정도로 가공할 것이라 했다. 그렇다. 무림은 난세다. 난세의 난세인 것이다. 여기에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또 하나의 소문은 흑마실혼인에 관한 것이었다. 이지를 상실한 죽음의 그림자……. 그들에게 아무리 강한 무공도 필요가 없다. 도검불침에 가공할 무공을 소유한 그들의 광기를 막을 아무 것도 없는 듯했다. 아아! 흑마사십사령의 공포에 이어 흑마실혼인들의 공포! 이것은 완전히 무림을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들고 있었으니……. 그리고 또 하나의 소문은 바로 십매어황성에 관한 것이었다. 무림인들의 화제는 이제 완전히 십매어황성으로 몰리고 있었다. 대소림사를 위시하여 흑마련, 대천마련, 벽라무황천 등을 하부조직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십매어황의 말 에 무림은 거대한 충격의 회오리에 감싸이고 만다. 물론 그 말을 믿고 있는 무림인들은 별반 없었지만……. 그러나 십매어황성이라는 신비의 성이 세워지기 시작한 지금 문제는 신비한 인물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 다는 점에 있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세력……. 전에는 보지 못한 인물들……. 그들은 십매어황성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야말로 일천 년 전 사라진 칠대초인들의 후예라고……. 그리고 이렇게도 말했다. 십매어황성으로 향하는 그들로 미루어 십매어황성의 십매어황이 말한 하부조직은 단지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십매어황성에는 열 개의 하부조직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풍운격변의 시대! 어쨌거나 무림은 최대의 혼세기(混世期)를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3 격렬했던 정사는 이제 끝이 나 있었다. 단우는 대강 찢겨진 옷을 걸치고 있었다. "……!" 그는 말없이 천령을 주시했다. 천령은 정사 후 변화해 있었다. 그녀의 눈에 감돌던 욕정의 빛도 사라지고 없었으며, 더 이상의 광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눈빛은 고요했다. 일신에서 풍기는 기도 또한 물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 그녀는 망연히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눈물인가? 투명한 이슬마저 어려 있었는데……. 아무튼 그녀의 알몸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지금 그 알몸은 완전히 조각품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적당히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적당히 나올 곳은 나온 조화미……. 피부는 너무도 희어서 서럽고, 우아한 목의 호선은 사슴을 닮아 슬프기만 하다. 아직도 젖가슴에 매달린 두 알의 포도송이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하체의 한 부분을 적시고 있는 것은 앵화……. 그것은 그녀가 처녀였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가릴 생각도 않고 있었다. 마치 혼이라도 빠져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문득, 단우는 말없이 그녀에게 대강의 옷 조각을 주워 덮어주었다. 순간, 천령의 눈빛이 한 차례 떨리더니 천천히 단우에게로 향했다. 이미 그녀는 대강 전후사정을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단우는 공손히 대답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천령은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이던가… 당신은 한 소동을 무릎에 올려놓고……." "아……." 천령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황망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다면 단우……?" 그녀는 새삼스레 단우를 살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그때의 그 어린아이는 죽어야 할 운명이었거늘……." "그러나 이렇게 살아 있으니… 하늘의 뜻인가 봅니다." "아아……." 단우의 말에 그녀는 나직한 탄성을 토했다. "그래, 맞아… 그때의 얼굴이 남아 있어… 그 어린 병약한 소동의 모습이……." 그녀는 떨리는 눈빛으로 단우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병약한 소동이… 나와 몸을 섞다니… 허어……."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나이 차이를 따져도 엄청나고, 도저히 두 사람은 화합할 수 없는 상대가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어찌됐건 정사를 한 것이고 이렇게 마주선 것이었으니……. "그때의 꼬마가 말이다… 이건… 이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은 그것뿐이 아니라… 당신이 아직 처녀였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후후후……." 농담 어린 단우의 말에 천령은 실소를 흘렸다. 그녀는 기이한 눈빛으로 한동안 단우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그녀는 한 가지가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인가?" "그것은……." 단우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러자 천령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대가… 그 신비한 성의 주인이라고?" "그렇습니다." "아……." 천령은 탄성을 연발했다. 그리고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흑마실혼인을 연성했다면… 그것은 큰일이다. 막아야 하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 고……." "그렇습니다.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장소는 그야말로 일천여 개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으며… 수많은 무림고수들 이 철저히 감시하고 있는지라… 이 천령은 수 차례 그곳을 들어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음!" 단우는 침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단념할 수가 없었다. '단념한다는 것은 무림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는 간청하듯 말했다. "말해 주십시오. 그 장소를……." "음……!" 천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마저 엿보인다. 그러다가 그녀는 결연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다. 하나 나와 함께 그곳에 가야 한다. 승낙하겠는가?" "좋습니다." 단우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천령은 역시 웃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악－!" 그녀가 돌연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단우는 이렇게만 묻다가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천령이 왜 그러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천령이 얼굴을 홍시처럼 붉히고 있었다. "뭘 보는가?" 그녀는 곱게 눈을 흘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가 누구인가? 천령이라는 이 시대 오대초인 가운데 한 명이 아니던가? 그리고 금일홍의 두 분신 중 한 명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만한 위치에 있는 그녀가, 나이 사십에 가까운 그녀가 이제 애송이티를 갓 벗은 단우 앞에서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만사(世上萬事)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4 동정호의 남단에서부터 시작하여 산세가 장장 칠백 리에 걸쳐 뻗어 있는 거대한 대산이 있었다. 말이 산이지 하나의 산맥(山脈)을 이루고 있는 그 산의 이름은 설봉산(雪峯山)이었다. 이 설봉산의 한쪽 기슭을 타고 오르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청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중년인이었다. 그런데 청년의 용모는 그야말로 수려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탈속한 기도는 가히 눈이 부실 지경이었고, 백옥보다 더 흰 살결은 차라리 투명하기까지 했다. 문사건을 단아하게 두른 이 인간같게 생기지 않은 미남자는 단우였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모든 것이 지극히 평범한 청삼중년인은 이 시대 최고의 거목 중 한 사람인 금일 홍의 분신이자 오대초인 중의 하나인 천령이었다. 두 사람은 유유히 산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천히 걷는 그들이었으나 기실은 일 보에 십여 장씩 전진하고 있었으니 그것을 어느 누가 느리 다 할 것인가? 단우가 불쑥 물었다. "이제는 물어야겠습니다." 천령은 정감 있는 눈망울로 단우를 담으며 물었다. "무엇을?" 그녀는 알고 있었으나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이다.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어째서 사내가 되어야 했으며… 어찌 그 선실에서 욕정에 불탔었는지……." 지금에서야 단우는 그 의혹을 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선실에서 그렇고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 곧장 이곳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그 동안 단우는 그 질문이 매우 어색한 것이었기 때문에 묻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제법 친숙해졌고, 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묻고 있었다. 천령은 담담히 웃었다. "결국 묻고 마는군. 묻지 않기를 바랬는데……." 그녀는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하지만… 지아비될 사람이 물었으니… 대답을 해야겠지." "지아비……?" 단우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러자 천령이 짐짓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은 내 말이 달갑지 않다는 투인데… 처녀를 망치고 오리발 내밀겠다는 수작인가?" "그… 그것이 아니라……." 단우는 쩔쩔맸다. '젠장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 아닌가?' 그는 내심으론 투덜거렸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왜 표정이 그렇게 일그러지는 것이지?' 천령은 다그쳤다. 순간이었다. "지아비에게 하는 말투가 어찌 그런가?" 단우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어……?" 천령은 느닷없이 고함에 찔끔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단우의 말을 음미하고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단우를 바라보며 팔짱을 끼었다. "이 몸은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그대로 따르겠어요. 말투가 그렇다면 당연히 고쳐야지요." 사근사근한 말투……. 누가 보면 이건 완전히 동성연애자들의 꼬락서니였는데……. 아무튼 천령은 자신에 대해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었다. ■ 십매어황 제3권 第十一章 귀무곡(鬼霧谷)의 격전(激戰) － 소첩은 섬서성(陝西省) 봉양(奉養) 태생이옵니다. 부친은 그 고장의 유지였을 뿐……. 그리고 모친은 그저 평범한 아낙이었을 뿐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분들이었지요. 소첩 역시 그저 평범하기만 했습니다. 단지 책을 좋아하고, 책에 심취하면 몇 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고 빠져들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한 가지 남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 있었지요. 바로 기억력이었습니다. 무엇이든 한 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는 특별하고 첨예한 기억력을 타고난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책이라도 한 번 보면 그대로 머리 속에 남아 있어서 소첩의 나이 십팔 세 정도에는 그 고 장에서 제일 가는 학사가 되어 있었지요. 그때 소문은 이렇게 나 있었습니다. 봉양에는 신녀(神女)가 하나 있으니……. 그녀의 이름은 문곡(文曲)이라 했고……. 그녀의 미모는 가히 눈이 부실 정도다. 문곡은 천기를 헤아리는 재주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그대로 기억하는 특이한 자 질을 타고났으니……. 지금에 와서 그녀의 학문은 가히 따를 자가 없을 정도다. 그녀는 사물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자신에게 받아들이는 것이니……. 그녀는 대자연과 대화하고, 대자연에서 수많은 학문을 얻는다 하더라. 신녀 문곡……. 지금도 학문을 닦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찾아 몰려들고 있으며……. 그녀와 한 마디라도 말을 나누면 백 권의 책을 보는 것 이상의 지식을 얻는다 하더라. 부끄럽지만 바로 이것이 소첩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 소문은 전 중원에 자자하게 퍼진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그때가 소첩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나 봅니다. 어느 날이었지요. 소첩을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첩이 보기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첩은 그와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지 않아 그만 그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야 했습니다. 그의 바다와 같은 학문은 도대체가 그 끝이 없는 듯했고……. 그의 지혜는 가히 소첩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는 것이었으니……. 그의 용모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으나 그의 학문은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학문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소첩은, 중원에서는 적어도 대화의 상대가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던 소첩은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을 만났던 것이지요. 그가 바로 금일홍이었습니다. 그는 소첩에게 무림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소첩은 무림에 대해서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었는지라, 그의 말에 완전히 빠져 밤이 새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신선들이 노니는 환상의 세계……. 그들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고 손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신비의 세계! 소첩은 그곳의 설명을 듣고는 완전히 매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함께 갈 것을 원했지요. 소첩은 기꺼이 응했던 것입니다. 그의 인간적인 아름다움과 무림을 바른 취지로 다스려야 하겠다는, 그래서 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 다는 그의 제의를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나에게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 후 나는 그와 함께 천년지대 안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 흑마련의 총단이라는 검은 석성으로……. 그리고 그가 주는 무서운 무공을 연성키 시작했지요. 사실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수반되어야 했지만 소첩이 그것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 지 일념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내 한 몸을 희생하여 무림이라는 지옥이 평화의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서 만족할 수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무공이 모두 완성이 되고, 내가 그의 분신이 되었고, 내가 흑마사십사령의 제일인자의 자리 에 올랐을 때…….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금일홍이라는 인물이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의 야망은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천하무림을 관장하고 무림인들을 완전히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는 그의 무서운 계획은 치가 떨릴 정도였 습니다. 후회와 번민의 나날들……. 소첩은 이상과는 다른 이 현실에 고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소첩은 한 가지를 결심하게 되었지요. 바로 배신이었습니다. 배신은 용이하게 될 수가 있었습니다. 소첩을 추종하는 인물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소첩의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금일홍의 능력은 가공한지라, 그의 야망은 도대체가 그 끝이 없는지라 소첩은 두려움에 떨지 않 을 수가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우리 두 분신은 그와 비견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 해도 그를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이란 바로 소첩과 지령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더군다나 그는 흑마실혼인이라는 무서운 인물들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 년 전에 그가 천하무림인들을 천년지대로 유인한 것은 바로 이 흑마실혼인들을 만들기 위함이었지 요. 결국 무림인들을 사로잡아 흑마실혼인을 만들려는 무서운 계획은 그대로 이행이 되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무림인들이 그의 손에 들어왔으며, 그는 그때부터 흑마실혼인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더불어 소첩의 배신은 한동안 그의 시선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흑마실혼인들을 완성시키는 데 주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흑마실혼인이 완성되는 그 날……. 우리는 무서운 그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흑마실혼인을 만드는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온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 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소첩은 한 가지 길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것은 한 가지 무공을 연마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수십 번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기만 했던 그 무공은 금일홍조차도 전율을 금치 못했던 무공 이었습니다. 물론 천년지대 안의 무공이었는데……. 당시 이 무공을 연성했던 천패자(千敗者)가 단 일성(一成)의 수위로서 무려 오십사 번째의 진세에 들어 갈 수가 있었던 것은 이 무공의 가공함을 잘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공의 이름은……. － 태을불마대능력(太乙佛魔大能力).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불(佛)과 마(魔)의 완전한 일치에서만이 연성 가능하며, 이 무공을 연성하기 위해서는 일천 가지 이상의 마공절예와 일천 가지 이상의 정종절예를 일신에 지니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불(佛)과 마(魔)의 이기를 체내에 축적하고, 악마의 싸움과 불존의 자비로움을 하나로 화합 하여 연성할 때 이 무공은 연성이 비로소 가능한 것인데……. 그 과정이 너무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이 무공은 금일홍조차도 감히 익히려 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옵니다. 그럼에도 소첩이 이 무공을 연성하려 했던 것은 이 무공만이 금일홍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무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일천 년 전 당시 천패자가 이 무공을 완벽하게 연성하였던들 그는 칠대초인 위에 있었을 것입니 다. 이것은 당신도 인정하셔야 합니다. 아무튼 소첩은 당신의 도움으로 이 연성이 불가능한 무공을 연성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마도 이것은 하 늘의 뜻이 아닌가 하옵니다. 당시 소첩은 불과 마의 기운을 합일시키지 못해 주화입마에 빠졌던 것이고, 그로 인해 음양이기가 조화 를 잃었는지라 엄청난 욕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소첩은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당신도 소첩과 화합함으로서 불마이기를 얻었고, 이 무공을 연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여기까지 들은 단우는 탄성을 발하고 만다. "대… 대단하다." 그는 새삼스런 시선으로 천령을 응시하고 있었다. 천령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무엇이 대단하다는 것이지요?" "당신의 모든 것이……." 단우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천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요. 대단한 사람은 금일홍이고 당신이지 소첩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금일홍과 이 단우는 사내이고 당신은 여인이오." "……." "당신이 여인이기에 더욱 대단한 것이오." "과분한 칭찬… 이제 나에 대해서 의문점은 없는가요?" "그렇소." 단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령은 비로소 만족한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었다. "쉿, 이제부터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장소에 접근하였으니……." 천령은 손을 세워 입을 막으며 조용히하라는 시늉을 했다. "……!" 단우는 긴장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지금 그들이 이른 곳은 한 협곡(峽谷)이었다. 양쪽을 보자니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천야만야의 낭떠러지가 마치 벽처럼 막아서 있었고, 협곡의 앞은 안개에 휩싸여 있어 신비로운 일면을 풍기고 있었다. "이곳은……." 단우는 전음으로 물었다. 천령 역시 전음으로 대답했다. "이곳이 바로 귀무곡(鬼霧谷)이에요." "귀무곡?" "바로 흑마실혼인을 만들고 있는 장소이지요." "음……." 단우는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천령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곳은 처처에 죽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으며 무서운 고수들의 눈이 있는지라 아차하면 그대로 황천 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아무려면 이곳이 십매어황성만은 하겠소?" "무슨 소리에요?" 천령은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십매어황성에는 일천팔백 개의 기관장치를 설치하고 있소. 과거 십기대학사는 그 방면에는 일가견이 있 었는데… 이 단우가 그의 모든 기학을 다 얻었는지라… 당시 그가 미처 이 땅에 선보이지 못했던 모든 것을 그곳에 화려하게 펼쳐 놓았소." "아……." "만약 십매어황성이 완성된다면… 그곳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지옥이 될 것이며… 이 단우의 허락 없이 는 누구도 그곳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가 없을 것이오." "아……." 천령은 연신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그렇다면 십매어황성이야말로 이곳 귀무곡보다 더욱 무서운 곳이 틀림없을 것이에요." "이 모두가 당신의 덕분이오." "무슨 말씀을……?" "핫하하… 오 년 전 당시 당신이 천년지대에서 나를 죽였다면 그것으로서 나의 인생은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니 어찌 십매어황성인들 존재할 수가 있겠소." "……!" 천령은 단우의 말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몸에게는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결론인가요?" "바로 그렇소." "홋호호……." 천령은 청아한 옥소를 터뜨렸다. 물론 지금까지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대화는 모두가 전음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전음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아악－!" "크아아－!" 돌연 어디선가 처절한 단말마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그 비명은 귀무곡의 깊숙한 곳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명은 한두 번 들리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들려 오는 것이었다. "……?" "……?" 천령과 단우의 얼굴에 경악과 의혹의 빛이 동시에 떠올랐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리에 앞서 침입자가 있는 모양이오." "그런 것 같군요. 누군지 모르지만 귀무곡에서 살인을 저지를 정도의 인물이라면 대단한 자가 틀림없어 요." "음… 어서 가 봅시다." 휘이익－! 두 사람의 신형이 귀무곡의 깊숙한 곳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 가기 시작했다. 죽어 있었다. 정확히 열세 명이……. 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검은 복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가슴에는 놀랍게도 황금빛 불인(佛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 천령이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금불인(金佛印)……." 단우가 물었다. "금불인이라면 대소림사의 무공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소림 칠십이종절예 중 십대절학에 속하는 무공으로 아직까지 누구도 이 무공을 연성한 자 가 없었다고 들었는데……." 천령의 얼굴에는 경이로움이 떠오르고 있었다. 단우는 일순 한 사람이 뇌리를 스쳐 감을 느꼈다. "혹시… 옥불이……." "옥불이라면……?" "그렇소. 그는 오대초인 가운데 일 인이며 대소림사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승이라고 불리는 인물이오. 그라면 이 금불인을 연성할 수도 있소." "음……." 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띠어져 있는 의혹의 빛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찌 이곳에 올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도 이곳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음…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구대문파의 힘은 더욱 거대한 것 같소이다." "……." 그들은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또다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시다." 단우와 천령은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들의 신형은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남은 것은 정적과 싸늘한 시신뿐이었다. 시신(屍身). 이번에는 정확히 이십여 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단우와 천령이 비명이 들리는 이곳까지 이른 것은 지극히 찰나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이 일련의 살인사건은 깨끗이 끝나 있었던 것이다. "……." "……." 단우와 천령은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죽어 있는 자는 단지 복면인뿐이 아니고 승속도(僧俗道)인들이 함께 죽어 있었던 것이다. 승인이 셋, 그리고 도인이 둘, 속인이 셋이었다. 승인 중에는 여승도 끼어 있었다. 단우는 그들을 보며 침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이들은 구대문파의 인물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구대문파의 인물들이 상당수 이곳에 왔단 말인가?" 천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이들 복면인은 흑마련의 인물인 것 같은데… 흑마사십사령을 제외하고서도 이토록 많은 인물들 이 소속되어 있었소?" "물론이지요." "아……." "흑마련에는 정확히 십만의 인원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십만?" "왜 그리 놀라십니까? 대천마련과 벽라무황천은 백만의 문도들을 거느리고 있었거늘……." "하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오?" "무엇이 다른 것이지요?" "보아하니… 이들은 최절정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 듯 그런데… 이 정도의 고수는 대천마련과 벽라무황 천에는 불과 일천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오." "바로 그것입니다." 천령은 무거운 신색으로 말했다. "흑마련의 무서움은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전혀 이런 대인원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흑마련이야말로 무림사상 가장 방대한 문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음……." "십만의 고수들의 무공은 가히 일파종사급이지요. 그런 그들이 일찍이 흑마사십사령과 함께 움직인다면 무림은 완전히 이들의 지배에 들어갔음은 명약관화한 일이었지요." "음……." 단우는 침음성만을 흘리고 있었다. '대… 대단하다. 이 정도의 고수를 거느린 금일홍의 능력이야말로 더욱 대단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일 천 년 전의 칠대초인을 모든 면에서 능가하는 인물일지도…….' 단우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천령이 단우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크아아악!" "컥－!" "으아아악!" 과히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다시 들려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접전을 벌이고 있는 듯 비명은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 던 것이다. 스스스－! 두 사람은 안개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갔다. 수백 명이 어우러져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중 승속도인 약 삼백여 명이었고, 혈의복면인은 육백 명 정도였다. 이것은 숫자적으로 승속도인의 절대적인 열세에 놓였음을 여실히 말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구대문 파에서 나온 고수들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들 중 백팔 명의 승인이 위치한 방향이었다. 각기 백팔 방위에 서 있데 그들은 모두 백여 살이 넘어 보이는 노승들이었고, 일신에서는 가히 형용할 수 없는 위엄이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 한 명이 일세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기승임은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이 순간 혈의복면인이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정작 대결에서는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팔승인(百八僧人)! 그들은 하나의 진세를 이루면서 혈의복면인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단우의 입에서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저들은 대소림사의 백팔나한(百八羅漢)이고… 저들이 전개하고 있는 진세는 소림백팔나한대진(少林百八 羅漢大陣)이 아닌가?" 그의 음성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천령의 눈에도 경악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맞아요. 저들은 일천 년 이래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백팔나한들이고… 백팔나한대진이에 요." "음… 아무래도 구대문파는 이번 일에 총력을 기울이는 듯하군." 두 사람은 관심 있는 눈빛으로 그 진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진세를 움직이는 한 사람은 실로 수려한 용모의 청년 승인이었다. 바로 옥불이었다. 이 순간 그는 허공에 떠 있었다. 가부좌를 튼 자세의 그는 그대로 불존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구대문파의 장문인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은 한 면사소녀가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그녀의 한 몸에서 솟아나는 성결함과 고아한 기품은 그녀가 바로 이 시대 성녀인 곤륜성녀임을 말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커억－!" 이제 싸움은 절정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진세는 완전히 구대문파의 인물들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혈의복면인들의 무공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백팔나한대진에 갇힌 채 우왕좌왕하며 허둥대고 있을 뿐 미 처 그 힘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채 죽어 가고 있었다. 반면,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기세등등했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혈의복면인들을 척살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역시 구대문파의 고수답다." 단우는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령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코 이 정도가 아니거늘……." "무슨 말이오?" 단우는 의아한 듯 물었다. 천령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내 말은 이곳의 인물들이 흑마련의 삼류고수인 것 같다는 것이에요."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니오?" "아니에요. 무엇인가 이상해요. 지금까지 전례로 보아도 흑마련의 인물은 특이한 복선의 구성을 이루고 있는지라 삼류인물 네 명에는 반드시 두 명의 이류 고수를 두어 다스리게 하고, 그 두 명의 이류고수에 게는 다시 한 명의 일류고수를 두어 다스리게 했거늘……." "아……." "그런데 그 전례가 여기에는 전혀 없어요. 이곳의 모든 흑마련의 고수들은 철저하게 삼류고수일 뿐이에 요." "그렇다면 이곳은 함정?" 단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천령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함정이에요. 어서 저들을 이곳에서 피하게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전멸을 당하고 말 거예요."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불행히도 늦은 감이 있었다. 콰콰쾅－ 콰콰콰콰쾅－! 그녀의 다급한 말이 끝나는 순간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며 터져 오 르는 것이 아닌가? ■ 십매어황 제3권 第十二章 금일홍의 야망(野望) 1 "크아아악－!" "헉－!" 폭음과 함께 울리는 것은 참혹한 비명성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구대문파의 인물과 흑마련의 인물이 어우러져 치열한 혈전을 벌이던 그 장소가 엄청난 불길이 휩싸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귀무곡 전체가 허물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콰르르르－ 콰콰쾅－! 폭음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비명도 계속하여 처절하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단우와 천령은 경악실색했다. 결국 그들의 짐작은 그대로 들어맞고 만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이곳에 화약을 매복했다니……." "무… 무서운 음모……." 두 사람은 신형을 허공으로 날렸다. 화염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돌더미가 그들에게로 밀려들고 있었다. 콰아악－! 두 사람의 호신강기가 그것들을 쳐내며 앞으로 나갔다. "이…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하겠소." 단우는 천령의 손을 잡았다. 천령은 당혹한 표정이었으나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하나 이것이 금일홍의 음모라면… 그는 우리들과 오대초인 가운데 두 명을 몰살시 키려는 계획이 분명해요." 콰콰쾅－!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살 곳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 이곳은 지옥(地獄)이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지옥 그대로인 것이다. 천령의 음성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대문파의 인물 중 최소한 두 사람은 구해야 해요. 바로 곤륜성녀와 옥불이라는 사람 을……." "그렇소. 그들을 구해야 하는 것이오."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폭음이 거세게 들리는 장소로 몸을 날렸다. 물론 그곳은 구대문파의 장문인과 혈의복면인들이 치열한 혈전을 벌이던 그곳이었다. 콰르르르－ 콰콰쾅－! 귀무곡 전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양쪽의 벼랑, 끝조차 안 보이던 병풍과 같았던 암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거기에 깔리고 화염에 휩싸여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크아악－!" "헉－!" "으악!" 가장 먼저 죽어 가고 있는 인물들은 바로 혈의복면인들이었다. 단우는 그것을 보며 치를 떨고 있었다. "금일홍… 무섭도록 잔인한 인물이로군. 비록 삼류고수일망정 저들은 자신의 수하가 분명하거늘… 목적 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위해 평생을 몸바친 저들을 이토록 처참하게 죽이다니……." 천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요. 그는 그렇듯 이기적이고 냉혹한 인물이지요.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아내와 자식은 물론 부 모형제까지도 희생시키는 그런 인물입니다." 두 사람은 구대문파의 인물이 있던 곳으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림의 백팔나한대진이 지금과 같은 절대절명의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실로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고오오오－ 쿠쿠쿠쿠쿠－! 그들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구대문파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며 돌풍처럼 빠르게 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그들을 중심으로 해서는 엄청난 무형의 강기( 氣)가 발산이 되고 있었으며, 거기에 닿은 그 무엇 이든 그대로 가루로 변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아무 것도 접근을 못하고 있었다. 하늘 끝까지 치솟은 화염도 그들을 비껴 지나고 있었으며, 떨어지는 암석들도 그들을 향해 날아들다가 그대로 가루로 변해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폭음보다도 더욱 크게 들리는 그들의 불호성은 거룩하고 성스러웠다. 살신성인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분명히 그들은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과도한 진기를 소모하는 백팔나한대진을 펼치고 있었기에 그들의 안색은 더할 수 없이 창백했고 입가에 서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기력이 급격하게 탈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펼치는 나한대진은 갈수록 위력이 약화되었고, 이제 구대문파의 인물들도 죽어 가고 있 었다. "크아악－!" "컥－!" 목불인견의 참상! 거대한 돌 더미에 깔려 허위적거리며 죽어 가는 사람도 있었고, 화약의 폭발과 함께 한 줌의 가루로 변 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도 있었으며, 화염에 휩싸여 무서운 괴성을 토하며 길길이 날뛰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에는 무공의 고저가 따로 없었다. 무공이 높은 절정의 고수이든, 삼류고수이든 죽어 가야 하는 데는 예외가 없는 것이다. 옥불과 곤륜성녀의 안색은 처절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럴 수가… 저들이 이 귀무곡 전체를 완전히 폭발할 정도라면… 이제 흑마실혼인이 완성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들은 이곳을 모두 빠져 나갔다는 결론이 아닌가?" 옥불은 죽어 가는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처절하게 웃고 있었다. "핫하하… 어리석다, 옥불! 어리석었도다, 옥불!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작은 인간인 네가… 이제 구대 문파를 죽이고 있으니… 크핫하하하……." 그의 진실은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회색승포는 검게 그을려 있었으며, 얼굴은 이글거리는 화염에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자 곤륜성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재빨리 그를 위로했다. "자학하지 마세요. 이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니… 금일홍… 그를 죽여야 해요.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요?" 콰콰쾅－! 또 한 번의 폭발음이 터졌다. 그 폭음성을 들으면서 옥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미타불… 틀렸소. 이제 모든 것은 끝난 것이오. 보시오. 우리가 빠져 나갈 곳은 없소. 적어도 이 귀무 곡에는 십만 근의 화약이 매복이 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것이 동시에 폭발하였고… 귀무곡 전체가 무 너지고 있는데… 어찌 빠져 나갈 수가 있겠소?"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하늘을 우러르며 처연한 탄식을 토하고 있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것이오. 무림인들의 운명은… 피에 살고 죽음에 사는 무림인들의 종말은 언제나 이런 식이오. 오늘 내가 존재했다고는 하나 내일은 이런 운명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며… 오늘 내가 천하패자였다고는 하나 내일은 새로운 패자가 탄생되어야 하는 것이 무림이라는 이 비정한 땅덩어리가 만들어 낸 진리이니… 후후후… 우리는 이 운명을 거역할 수가 없는 것이오." 콰콰쾅－! 화르르르릉－! 곤륜성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는 비애의 눈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보세요. 저들 백팔나한들은 무엇 때문에 죽어 가야 합니까? 저들은 누구를 위해 죽 어 가고 있는 것입니까?" "아미타불……." "저들은 이곳에서 적어도 당신과 나만은 살려 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당신이 모든 것을 체념한다면… 저들의 죽음은 헛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미타불……." "옥불,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합니다. 어서……." 곤륜성녀는 옥불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이때였다. "크아아아－!"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한 명의 노승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때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전신은 피투성이었으며, 두 눈은 경악과 공포와 불신에 젖어 있었는데……. 손에 든 백팔염주는 그가 소림장문인 천화대선사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옥불과 곤륜성녀에게 달려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어… 어서 피하시오. 이제 우리에겐 당신들만이 희망이오.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은 모두 죽었소. 모두 죽 었어. 으흐흐흐……." 이미 세속의 번뇌 따위는 잊어 버렸음직한 나이에, 하늘에 닿은 불심을 지닌 그가 울고 있는 것이다. 이 날로써……. 이것으로써……. 구대문파는 이천 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비록 인간이었지만 이 처절함에 그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옥불은 천화대선사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천화대선사의 몸에 붙었던 불길은 비 맞은 것처럼 꺼지고 있었다. "장문인… 어찌 나 혼자 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소림의 모든 제자는 어찌하고……." 천화대선사는 죽어 가고 있었다. 눈빛은 이미 죽음의 회색빛에 젖어 있었고 칠공에서는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옥불을 향해 웃어 보이고 있었다. "아미타불… 이 몸의 죽음은 억울한 것이 아니나… 소사숙이 죽는다면 이 몸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 할 것입니다. 어서…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구대문파의 위대함을… 허억……." 그는 마지막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고행과 수행으로만 일관되었던 그가 마침내 열반(涅槃)의 길에 든 것이었다. 옥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눈빛은 말할 수 없이 비애로운 것이었지만, 이제 그 눈빛에는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불꽃처럼 일어 나고 있었다. "아미타불……." 그는 조용히 천화대선사를 그 자리에 놓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전신에서는 무상의 위엄이 흐르고 있었다. "……." 그는 소림백팔나한들의 죽음을 보고 있었다. 또한 구대문파의 모든 인물들의 죽음도 보았다. 그는 조용히 합장했다. "아미타불… 이 옥불이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살아야지요. 이 한 몸 태생이 마인의 피를 이어받고 태 어난 것이나……." 콰콰쾅－! "이제는 그 더러운 피를 씻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옥불은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라, 그의 한 몸에서는 초탈한 인간의 면모가 보이고 있었다. 아마 불심 백 년의 불자가 그인가 싶다. 곤륜성녀는 전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것은 격동의 물결이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당연히 살으셔야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많습니다." "아미타불… 그렇소. 아직 많소. 그 첫번째로 나는 금일홍을 죽일 것이오. 기필코… 금일홍을 죽일 것이 오." 다음 순간. 휘이이익－!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굉렬한 폭음이 연속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콰콰쾅－ 콰아아아앙－! 폭우처럼 크고 작은 돌덩어리들이 두 사람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아무리 인간의 힘이 초극한 경지에 올라서도, 이런 대자연적인 힘에는 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억!" "우욱!" 두 사람은 호신강기로 그것들을 쳐내고 있었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입에서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들의 안색은 더 없이 창백했고, 허공을 비천하는 신형은 점차 그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콰콰쾅－! 우르르르－ 콰콰쾅－! 단 한 명도, 그 누구도 아직까지는 귀무곡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는 아스라한 산봉이었다. 안개가 출렁이고 있었고 저 멀리 귀무곡의 비극이 훤하게 보이고 있는 이곳에서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 이 귀무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마치 수천 수만 명의 인간이 이곳에 존재하는 듯한 착각 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 사람, 그는 중년인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었으나 그 한 몸에서는 실로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기도가 뿜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최고인이며 흑마련의 태상련주이기도 하고 이 난세의 주역이기도 한 금일홍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한 청년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그의 나이는 고작해야 이십오륙 세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절대자(絶對者)의 그 것이었다. 그를 보면 죽음을 느끼게 되고……. 그를 보면 피를 연상케 되며……. 그를 보면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되니……. 용모는 수려하나 그 한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결코 얼굴만큼이나 수려한 것은 아니었다. － 사령(死靈). 그가 바로 흑마사십사령 중 제삼인자인 사령이었다. 그러나 그가 제삼인자로 머물게 된 것은 금일홍에게 가장 늦게 선택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니……. 그리고 그의 나이가 가장 어리기 때문인 것이니……. 만약 그가 천령과 지령과 같은 입장에서 시작했다면 그는 능히 흑마사십사령 중 제일인자가 되고도 남 음이 있는 인물이었다. "……!" "……!" 두 사람은 묵묵히 귀무곡의 참상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두 사람이 만든 걸작이었지만 그 광경을 주시하는 그들의 눈빛에는 결코 희열 따위는 찾 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동정과 연민의 눈빛으로 귀무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사령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모두가 죽는군요." 금일홍은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죽는 것은 아니다." 사령은 빙그레 웃었다. "저곳에서 살아날 수 있는 인물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 금일홍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만약에 말이다. 그대가 저런 상황에 처했다면 살아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그렇습니다." 사령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부심을 지녀도 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금일홍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네 사람은 저곳에서 살아날 수가 있을 것이네." "아… 그렇군요." 사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금일홍은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단우… 천령… 옥불… 곤륜성녀… 그들은 일천 년의 최강고수이던 칠대초인을 능가하는 이 시대의 위 대한 인물이다." "……." "그런 그들이 귀무곡에서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음……." 사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금일홍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그들은 귀무곡을 빠져 나오면서 더욱 처참한 비극을 보게 될 것이다. 무림은 이제 흑마련의 천하가 되었으니… 이제 저들이 설 땅은 없어진 것이고… 이제 저들은 살아 있으나 죽은 몸이 될 것이 다."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 희미한 웃음은 전율처럼 그의 전신으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소리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산봉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대단하다. 실로 대단하다. 그는 과연 이 시대의 절대자다운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정색을 하고는 물었다. "사령… 지령을 공격한 일은 어찌 되었는가?" "반은 성공했고 나머지 절반은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령은 죽이지 못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그를 따르는 인물 대부분을 척살했으나……." "했으나……?" "지령을 비롯하여… 흑마팔령(黑魔八靈), 흑마십령(黑魔十靈)은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음……." 금일홍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다시 허공으로 던져내고 있었다. "지령, 그도 죽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그가 살아 있음도 결국 죽어 있음과 마찬가지다. 머지 않아 그들 은 나의 손에서 처절하게 죽어 가야 할 것이다." "……!" "십매어황성을 공격한 일은 어찌 되었는가?"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음……." "죄송합니다. 우리들이 십만 인부를 모조리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당시 공사는 팔 할 이상 진척 이 된 상태였습니다." "팔 할 이상이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부 사정은?" "실로 완벽한 듯했습니다. 약 일백 명의 흑마실혼인들이 그곳으로 들어갔으나… 그곳을 다시 빠져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대단하구나. 십매어황성은……." 금일홍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흑마실혼인이 한 명도 살아 나올 수 없는 것이라면 그곳에는 엄청난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음이 분명하 다." "……!" "지금 우리들도 귀무곡을 버렸기 때문에 마땅한 거처가 없지 않느냐?"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좋아. 우리는 십매어황성을 거처로 한다." "하지만……." "무엇을 망설인단 말인가? 십매어황성이 그토록 완벽하다면 우리의 거처로는 그 이상이 없지 않는가?" "……!" 사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침내 그도 금일홍의 말에 승복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순간 그들은 더 이상 귀무곡에 미련이 없다는 듯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2 한편, 단우와 천령은 마침내 귀무곡의 입구까지 나왔다. 그런데 그들의 품에는 한 사람씩이 들려져 있었다. 단우의 품에는 옥불이, 천령의 품에는 곤륜성녀가 들려져 있었다. 콰콰쾅－! 우르르르릉－! "으악－!" "커억－!" 폭음과 비명은 아직도 들려 오고 있었다. 단우와 천령은 두 사람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옥불과 곤륜성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안색은 지극히 창백했고, 핏기라고는 단 일 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입가에서는 가느 다란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일신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이다. 그나마도 단우와 천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 "……." 두 사람은 감사의 눈길로 단우와 천령을 주시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난맥이 있었으니……. 그것은 천령이 금일홍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금일홍의 분신이 두 명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는 듯 곧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 아미타불……." 불호성을 외는 옥불의 표정은 지극히 고요했다. 그것이 더욱 처절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곤륜성녀의 두 볼로는 투명한 물기가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비참한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 한 줌의 재로 변해 가고 있었으니……. 이 비참함……. 이 원통함……. 이 한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가 있겠는가? 이때 옥불은 단우와 천령을 향해 조용히 합장하며 허리를 굽혔다. "아미타불… 두 분의 구명지은을 어찌 갚아야 할지……." "별 말씀을……." 단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옥불은 탄식했다. "그러나 이 몸은 두 분에게 몹쓸 부탁을 해야 하니… 들어 주시겠습니까?" "무엇이오?" 단우는 의혹의 눈빛을 발했다. 옥불은 곤륜성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분간 성녀를 보살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에요?" 곤륜성녀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황망히 물었다. 그러나 그 순간 옥불의 몸은 이미 아득히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미타불… 성녀… 복수를 할 것이오. 내 한때 그대를 원망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철부지의 어리광 같은 것… 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금일홍에 대한 한(恨)뿐이오. 그를 죽이지 않는 한 다시는 성녀 앞에 나타 나지 않을 것이오. 아미타불……." 그것이 끝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옥불은 순식간에 종적을 감췄다. 곤륜성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옥불의 비장함과, 옥불과 곤륜성녀의 애절한 사랑을 지켜보던 단우와 천령은 서로 마주보며 나직하게 탄식을 터뜨렸다. 그러나 비명은 아직도 사방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직 비극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 십매어황 제3권 第十三章 죽음과 삶의 기로(岐路) 1 끝내 십매어황성은 완성되지 못했다. 누구도 이 십매어황성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거의 윤곽은 갖추고 있었지만 정문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성벽도 채 완성이 되지 않은 채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다. 그리고 수십 개의 성루는 반쯤 만들어진 채 버려져 있었다. 다행히 십매어황성의 외곽은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봐 줄 만했다. 단지 그 정도의 방대함과 웅장함만으로도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말이 성이지 어찌 저것을 성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 마치 그것은 군산 전체가 하나의 성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십매어황성(十梅御皇城). 비로소 미완성의 십매어황성에 대한 전설은 이렇게 탄생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은밀히 십매어황성으로 입성하였던 것인데……. 그들은 무림인들이 전에는 보지 못한 인물이었고, 그 세력은 무림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신비의 세력 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들이 십매어황성으로 은밀히 입성한 것은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십매어황성은 정식으로 무림활동을 선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은 수많은 사람들이 십매어황성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십매어황성은 그 날 완전히 개방된 상태에서 무림인들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십매어황성에 대한 호기심을 풀기 위해 수많은 무림인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몰려들고 있 었는데……. 아무도 몰랐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것이 풍운의 종착지인 줄은……. 더불어 이것이 난세의 마지막일 줄은 전혀 짐작치 못했던 것이다. 2 내전(內殿). 화려하지도 정결하지도 않은 이 내전은 그러나 실로 공허하리만큼 넓었다. 소리라도 지르면 여운이 끝 도 없이 길게 울려질 것처럼. 그곳에 두 개의 태사의(太獅椅)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위에는 단우와 천령이 몸을 묻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십매어황성의 어황전(御皇殿)이었다. 스스스－! 어디선가 매화향(梅花香)이 진하게 풍겨지고 있었다. 이 순간 천령은 금일홍의 모습이 아닌 본래의 진면목을 되찾고 있었다. 지극히 고아하고 지극히 아름다 운 절대미인의 모습이었다. 스윽－! 단우는 손에 들고 있던 한 송이의 매화를 코끝으로 가져가더니 마치 향기를 음미하는 것처럼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향기가 풍겨질 리가 없었다. 그 매화는 조화(造花)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 매화를 들고 있는 이유는 그가 바로 십매어황인 까닭이었다. 단우는 문득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운명의 날인가?" 그 나직한 중얼거림 속에는 비장(悲壯)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천령은 정감이 담뿍 담긴 눈길로 단우의 얼굴을 더듬으며 말했다. "당신은 오늘을 마지막의 날이라 생각하시나요?" "마지막 날?"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주시했다. "오늘은 십매어황성의 개관일이오. 그런데 어찌 내가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생각할 수가 있겠소."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 비극이 아니겠소?" 단우의 말에 천령은 곱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당신은 오늘을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기 위해 애쓰는 듯하니… 그 비장함은 이 해가 되지만 이 몸을 생각해야 할 것이에요." "무슨 소리요?" "자칫하면 이 몸이 청상과부가 될 운명이라는 것이지요." "아……." 비로소 알았다는 듯 단우는 자신의 이마를 쳤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금시 다시 어두워졌다. "솔직히 말해서… 금일홍, 그는 참으로 거대하오. 이 단우가 오늘 그를 상대할 수가 있을는지 그것 이……." "자신을 가지세요. 당신은 충분히 금일홍을 상대할 수가 있으니……." "하하하… 당신은 지아비를 위로하기 위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오?" "천만의 말씀이지요. 현명한 아내는 결코 지아비를 자만케 하여 죽음으로 몰고 가지는 않습니다." "허어……." 천령의 말에 단우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고 만다. 그는 잠시 물끄러미 천령을 주시했다. '이렇게도 변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는 천령이라는 여인에 대해 아니, 여자라는 인간에 대해 새삼 신비함을 느꼈다. 여인이란 변화가 막측한 동물들은 어떤 상황에서 상상할 수 없는 적응력을 보이는 것이다. 만약 이 천령이라는 여인이 금일홍의 아내가 되었다면 그녀는 사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잔인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단우의 아내가 됨으로서 현숙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단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십매라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소?" "그것은 열 개의 조직을 말함이 아닙니까?" "후후… 소문은 과연 빠르군."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천령은 다분히 의혹의 표정으로 말했다.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말씀 같은데……." "그렇소." "그게 무엇이지요?" "핫하하… 죽음과 삶을 뜻하기도 하오." "생(生)과 사(死)?" 천령의 의혹은 점차 깊어져 가고 있었다. 단우는 말을 이었다. "나는 열 개의 매화로서 오늘 죽음과 삶을 결정할 생각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그것은 이 열 개의 매화가 하나씩 나의 가슴에 꽂혀질 것이라는 말이오." "그럴 수가……." 천령은 경악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으랴? 매화를 자신의 가슴에 꽂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매화를 가슴에 하나도 아닌 열 개를 꽂으면 죽는 것이다. "한 송이의 매화는 한 시진을 주기로 나의 가슴에 꽂혀질 것이오." "아……." "언제인가… 나는 한 사람의 위대한 사람이 자신의 잠력을 극으로 폭발시켜… 또 한 사람을 구하는 것 을 본 적이 있소." "아아… 자하고금마유사… 그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그분이오." "그런데……." "그래서 이 단우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이오. 그런 만큼 나는 그를 위하는 마음에… 그의 죽음을 위로하는 마음에서 그와 같은 운명을 걸으려 하는 것이오." 단우의 그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천령을 전신을 격렬하게 떨었다. "이제 보니 당신은 자신의 잠력(潛力)을 극한(極限)으로 끌어올려서……?" "그렇소. 그 방법만이 금일홍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오." 천령은 사색이 된 얼굴로 다급히 소리쳤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지금 능력으로도 그를 충분히 죽일 수가 있거늘… 어찌하여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단우는 짐짓 낭랑하게 웃었다. "핫하하… 나는 천천히 잠력을 극으로 끌어올릴 것이오. 매화가 하나씩 나의 가슴에 꽂혀질 때마다 나의 잠력은 극으로 끌어올려 질 것이며… 결국은 금일홍과 최후의 결판을 갖게 될 것이오." "아아… 당신… 당신은……." 천령의 얼굴에서,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단우가 누구인가? 그녀의 전부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가 지금 죽음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으로서 무림을 구하려 하는 것이다. 단우는 빙긋 웃었다. "천령,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죽는 것은 아니오. 열 번째의 매화가 나의 가슴에 꽂히고… 그리고 한 시진 내에 음양대법(陰陽大法)으로 나를 치료해 준다면… 나는 죽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오." "아아……." 천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금일홍이 누구인가? 그는 이 시대의 최고수(最高手)였다. 때문에 그녀는 단우와 금일홍의 무학과 그 경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금일홍의 무학은 가히 절대무적인 것이었고, 아무리 강한 고수라 해도 한 시진 안에 그를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신이라 할지라도 한 시진 안에 금일홍을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히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설사 단우가 금일홍을 죽인다 하더라도 그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단우는 확신하듯 말했다. "만약 내가 그런 상태에서 금일홍을 죽이고 이 땅에 평화를 안착시킬 수만 있다면… 후세의 인물들은 비로소 이 몸을 십매어황이라 불러 줄 것이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더없이 숭고했다. 또한 더 없이 관대했으며 또한 비장한 것이었다. '흐흑……!' 천령은 울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또한 그녀의 눈 속과 얼굴에는 단우를 말리겠다는 강한 결심의 기색이 강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단우의 결심이 굳어졌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때였다. 푸욱－! 단우는 한 송이의 매화를 가슴에 꽂았다. 소리 없이, 이 향기 없는 삭막한 매화는 단우의 가슴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는 가슴에 한 송이의 매화를 장식으로 매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금일홍이라는 절대자와 단우라는 또 하나의 절대자간의 싸움은……. 3 아담한 내실이었다. 사방에는 매화로 장식이 되었고, 보이는 모든 것은 매화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침상도 매화의 모양이었으며 벽에는 매화의 문양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이곳이 매화 천국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벅저벅－! 한 사람이 내전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그는 바로 단우였다. "……!" 그는 말없이 침상으로 다가갔다. 침상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여인의 얼굴은 초췌하여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녀는 곤륜성녀였다. 단우는 그녀를 보며 탄성을 흘렸다. "몸은 좀 어떠시오?" 나직하며 온화한 음성이었다. 곤륜성녀는 귀무곡에서 치명상을 입었기에 지금까지 병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보다도 더욱 아픈 것은 바로 마음의 상처였다. 그녀는 귀무곡에서 허무하게 죽어 간 구대문파의 인물들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매일을 보내고 있는 것이 다. 그리고 그녀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옥불이었다.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 오리무중이었다.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비록 승인이었으나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그녀는 금일홍을 죽이겠다고 떠난 그를 생각하며 결국은 이렇게 몸져눕고 만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옥불, 그가 비록 이 시대 오대초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는 하나 금일홍의 적수가 결코 못 된다는 사실 을……. 그렇다면 옥불은 죽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서 혈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그분은……?" 그녀는 물었다. 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그의 행적을 찾지 못했소. 하지만 곧 찾을 수 있을 것이오." "아아……." 그녀는 다시 무너질 듯 침상에 주저앉고 말았다. 단우는 탄식을 발했다. "아아… 당신은 일어나야 하오. 이런 상태로는 옥불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 아니오?" "아니오. 그분은 죽었을 것이에요." "핫하하… 그는 죽지 않았소. 그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오. 그는 지금도 금일홍을 죽일 기회 만을 노리고 있을 것이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이곳에 와 있을지도 모르오." "그… 그럴 리가……." "금일홍은 이곳 십매어황성에 와있을 것이오. 그러니 옥불도 당연히 이곳에 와 있는 것이오." "어떻게 그것을 장담하시지요?" "장담할 수가 있소. 금일홍은 오늘 여기에 와야 하기에… 만약 그는 오늘을 넘기면 영원히 무림을 제패 할 수가 없소. 그것은 나의 생각이나 그의 생각 또한 같기에… 결국 그는 여기에 올 것이며… 그리하여 나를 비롯한 모두를 죽이려 할 것이오." "아……." 곤륜성녀는 탄성을 발했다. 아직은 단우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옥불이 살아 있다는 한 마디만으로 그녀의 창백한 안색에 은은히 혈색이 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인 것이다. 그녀는 감사의 눈빛으로 단우를 주시했다. 그는 한 번쯤은 사랑하고픈 사람이었다. 만약 그녀에게 옥불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그녀는 분명 단우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녀가 보는 단우는 지극히 자상했다. 또한 대범했으며 그의 냉철한 판단력은 가히 전율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가, 이 대범한 인간이 지금 가슴에 매화를 장식품으로 달고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보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다… 당신은……?"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단우의 가슴을 바라본다. 그러자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내가 누구요? 바로 십매어황성의 주인인 십매어황이 아니오? 열 개의 매화는 달 수 없을망정… 하나 정도는 달고 있어야 나의 체신이 서는 것이 아니오." "아……."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말을 듣는 순간 곤륜성녀는 창망한 슬픔이 솟구쳐 오름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슬픔과 비애를 느낀 것이다. 아무래도 그것은 여인들만의 본능적인 예감에 의한 것 같았다. 그녀는 단우가 지금 어떤 중대한 결심을 내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4 일천팔백 개의 기관장치와 함정이 도사린 십매어황성은 그대로 살아 있는 지옥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입성(入城)하는 사람은 많은데 나가게 될 사람은 몇이나 될는지……. 금일홍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 일천팔백 개의 기관장치가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칠대초인의 후예들이 하나로 화합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다. 칠대초인의 힘이 가공했던 것만큼, 그들 후인들도 가공할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 힘이 일천 년의 세월 동안 농축되어졌다면 그것의 폭발은 흑마련으로서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 이다. 대두혈제가 이끌던 흑교! 천마서생이 이끌던 마교! 절대화후 수국령의 절대금궁! 어금태자의 어금사교! 벽라성군의 벽라문! 무위활인승의 대소림사! 이들의 힘은 실로 엄청나고 가공스럽다. 물론 금일홍은 어금태자의 후인인지라 어금사교를 다스리고 있다지만, 그 나머지 힘이 십매어황성에서 하나의 힘으로 합쳐지게 된다면……. 천하에서 그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이나 단우라는 인물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단우는 칠대초인의 무학을 모두 얻었다. 더불어 그들이 남긴 신물도 모두 얻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단우는 그 신물로 그들을 다스릴 수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금일홍으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흑마련의 전 세력을 이곳 십매어황성에 투입하고 있었다. 무섭다. 사실 흑마련의 힘은 참으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금일홍에게는 사령을 비롯한 흑마사십사령 중 열 명이 따르고 있었고, 그는 거의 일천 명에 달하는 흑 마실혼인과 더불어 십만에 가까운 마인들을 이곳 십매어황성에 투입하고 있으니 어찌 공포스러운 일이 아니랴. 어찌 되었든, 금일홍의 그런 결단에 의해 십매어황성의 운명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며, 무림의 운 명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5 "크아아악－!" "우아악－!" "헉－!" 마침내 십매어황성 처처에서는 처절한 비명이 터져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시작된 것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이 운명은 바다로 흘러 나가듯 비명은 점차 확산되어 가고……. 그 비명 소리는 장장 열흘에 걸쳐 지속이 되고 있었다. 무엇인가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일천팔백 개의 기관장치는 마침내 무서운 작동을 시작하였고, 그 수많은 죽음의 함정들은 악마의 입처 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날은 단우의 가슴에 다섯 개의 매화가 꽂힌 날이다. 운명은 시시각각으로 단우의 가슴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 십매어황 제3권 第十四章 사령(死靈)의 죽음 1 살아야 할 사람은 인도되고……. 죽어야 할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십매어황성을 만든 이 단우의 제일철칙이다. 2 하나의 거대한 대전(大殿), 아마도 이 땅을 통틀어 이만한 규모의 대전은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 대전의 크기는 거대했다. 그리고 웅장했으며 장엄하기까지 했다. 대전 상단의 태사의에 한 사람이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었다. 몸은 그다지 큰 것이 아니었으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없이 거대함을 느끼게 하고 또한 경외심을 품게 만드는 신비스런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단우였다. 지금 그의 가슴에는 일곱 개의 매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단지 외관상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었으나, 단우는 이 순간 거대한 잠력의 폭발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 다. 지금의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보라. 그의 눈빛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고 투명했다. 보는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세상을 볼 수가 있으며, 그는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십매어황성의 모든 것 을 일목요연하게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은 무(無)요, 공(空)이다. 무아무심(無我無心)……. 그는 분명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으나 아무것도 보지 않고 느끼지 않은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몸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무심(無心)과 무혼(無魂)과 무허(無虛)의 상태라고나 할까? 반면, 시종일관 그를 바라보고 있는 천령의 눈빛은 한없이 슬퍼 보인다.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저것은 자신을 희생하시는 살신성인의 숭고한 길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은 촉촉이 물기에 젖고 있었다. 일곱 개의 매화는 그의 죽음이 그만큼 가까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는……. "크아아악－!" "우아악－!" "헉－!" 비명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 오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나직하며 힘있는 음성이 대전의 문 쪽에서 들려 왔다. "성주… 그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 단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음성이 들려 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냉사혼이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지극히 엄숙한 것이었으며 또한 우수(憂愁)에 젖어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단우가 자신을 희생하여 무림을 구하려 한다는 사실을……. "수고했네." 단우는 냉사혼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그의 뒤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냉사혼의 뒤편에는 두 사람이 고요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첫번째 인물은 검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흑포인(黑袍人)이었다. 칠십 세 가량의 노인인 그의 눈은 매우 특이했다. 입고 있는 옷처럼 그의 눈은 흰자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오직 검은 동공으로만 이뤄져 있었다. 또한 그는 역시 검은 천으로 둘둘 말아 놓은 검을 비껴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전신에서 흐르고 있는 기도(氣度)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전율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그런 암울한 인간! 단우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단하다…….' 그의 시선은 흑포노인의 옆사람에게 옮겨졌다. 그는 일신에 혈포(血袍)를 걸치고 있었다. 미심(眉心)에는 핏빛의 점이 자리잡고 있었고 머리카락도 핏빛이었으며 동공(瞳孔)까지도 오직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 또한 전율스러운 비릿한 피내음이었다. 단우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단하다…….' 내심 탄성을 흘리면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흑교와 마교의 대종사(大宗師)시오?" "……." "……." 두 사람의 눈 속에서 순간적으로 의미를 짐작하기 힘든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그들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들은 지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한 인간들을 직접 보고 있는 것이다. 단우만이 아니었다. 한 쪽에서 고아한 기품을 뿌리며 서 있는 천령 또한 거인(巨人)이었다. 두 사람으로서도 도저히 상대조 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우리가 이토록 초라하게 느껴지다니…….' 거의 일천 년의 세월 동안 잠적해서 살아 온 흑교와 마교의 후인들! 그들은 비록 세상을 떠나 살고 있으나 자부심은 있었다. 칠대초인의 후인이었기에 그들은 적어도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는 자부심을 지녔었다. 그런데 오늘 그들은 면전의 두 사람을 보면서 자신들의 지금까지 자부심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절 실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특히, 단우를 보는 순간 그들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무게에 감당할 수 없는 전율을 맛보면서 숨 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저… 저런 인물이 이 땅에 있었다니…….' '불과 약관의 나이임에도 저런 기도를 뿌릴 수가 있다니…….' 두 사람의 눈빛은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역력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공손히 대답하고 있었다. "그렇소이다. 본인은 흑교의 십이대 대종사인 흑사무제(黑邪武帝)라 합니다." 흑포인의 말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혈포인이 대답했다. "본인은 마교의 십사대 대종사인 천마풍(天魔風)이라 하오이다." "좋소." 무엇이 좋다는 것인지 단우는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본시 천마서생에게는 두 부류의 후인이 있었다. 하나는 직계후인이었고, 또 하나는 방계후인이었다. 직계후인이란 혈육으로 이어진 것을 말함이고, 방계후인이란 조직으로 이어진 후인을 말함이다. 단우 자신은 바로 그 직계후인이었다. 그리고 마교라는 거대한 조직의 후인이 바로 이 천마풍이었던 것이니……. 그는 새삼 감회 어린 눈빛으로 천마풍을 주시했다. 사실 이들 두 사람은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성장의 발판을 다듬어 준 대두혈제와 천마서생의 후인인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자연 부드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 흑사무제와 천마풍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대하는 상대방이 자신들에게 왜 이리 부드러운 눈길을 주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또 하나의 매화를 가슴에 꽂았다. 여덟 개째의 매화였다. 매화를 꽂고 나자 단우의 눈빛은 더욱 맑고 투명하며 고요해졌다. 더불어서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와 위엄도 더욱 강렬해졌다. 그의 이런 괴이한 행동에 흑사무제와 천마풍은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단우가 자신의 가슴에 왜 저 매화를 꽂고 있는지……. 한동안 닫혀 있었던 단우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당신들은 이 십매어황성이라는 곳에 의혹이 있어 왕림한 것이 아니오?" "그렇소."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십매어황성이라는 곳이 어떻게 흑교와 마교를 하부조직이라 하는 것인지……." 그는 다시 두 사람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품안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하나는 마(魔)라고 쓰여진 핏빛의 깃발(血旗)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은 옥패(黑玉牌)였다. 검은 옥패의 한 면에는 검은 아수라(阿修羅)가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두 가지 물건을 보는 순간, 흑사무제와 천마풍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아… 천마혈기(天魔血旗)……." "오오… 흑교종사령(黑敎宗師鈴)……." 두 사람은 떨리는 음성으로 외치며 그 자리에서 오체복지했다. 머리는 물론이고 몸 전체가 바닥에 찰싹 닿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 두 개의 물건은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문파의 최고 신물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 두 가지 신물들은 일천 년 전에 칠대초인 중 대두혈제와 천마서생이 천년지대에서 실종되면서 함께 사라졌던 것이었다.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두 문파는 일천 년의 장구한 세월동안이나 빛을 보지 못한 채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한이야 오죽 하겠는가? 그런데 두 사람은 마침내 천 년 전에 사라진 자파의 무상신물을 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것을 대조사를 대하듯 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그들의 전신은 격동과 희열로 무섭게 떨고 있었다. 두 개의 신물이 나타난 이상 두 사람은 물론이고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세력은 무림에서 정식으로 활동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당신들이 마땅히 지녀야 하는 것……." 휙－! 놀랍게도 단우가 두 개의 신물을 주저없이 그들에게 던져 주었다. 흑사무제와 천마풍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 두 개의 신물을 하나씩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왜……?" 두 사람은 수많은 의혹이 담긴 눈빛으로 단우를 바라보았다. 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것은 나를 대신하여 천령이 말해 줄 것이오." "……?" "……?" 흑사무제와 천마풍은 단우가 가리키는 천령을 주시했다. 단우는 다시 하나의 매화를 가슴에 꽂았다. 아홉 번째 매화였다. 마침내 운명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단우는 매화를 꽂은 뒤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의 마지막 바람은 두 분이 무림평화에 일조(一助)를 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 겠소?" "……." "……." 대답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왜? 그것은 그들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단우의 성결한 표정과 전신에 흐르고 있는 숭고한 기품을 보면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단우의 시선이 천령에게 옮겨졌다. 하지만 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천령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우는 그런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러자 천령도 단우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그 웃음은 처절할 정도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그런 웃음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리라. 단우가 몸을 돌렸다. "냉사혼… 금일홍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냉사혼은 탄식했다. "꼭 가야만 합니까?" 그의 표정은 우울하고 암울했으며 지독히 어두운 것이었다. 단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냉사혼은 다시 한 번 탄식을 토해 내면서 할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는 일천팔백 개의 기관진식 중 이미 일천칠백 개를 통과했습니다." "대단하다. 금일홍……." "그는 지금……." "됐다. 내가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갈 때면 그는 아마 십매어황장(十梅御皇場)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계산을 하는 듯 단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나머지 인물들은?" 냉사혼이 무겁게 말했다. "무엇을 더 바라는 것이오? 당신은 죽음으로서 금일홍을 제거하면 그뿐… 나머지 일은 우리에게 맡겨도 되는 것이 아니오?" "음……." "가시오. 빨리 가란 말이오!" 냉사혼은 소리치면서 등을 돌렸다. 단우는 피식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뒤 상체를 흔들었다. 순간이었다. 스스스－! 그의 모습이 돌연 한 줄기 안개처럼 흩어지면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오오!" "아아……!" 그 불가사의한 움직임에 흑사무제와 천마풍은 그만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단우와 자신들과의 격(格)과 벽(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흐흑!" 단우가 사라지기 무섭게 천령이 고개를 떨구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냉사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우… 우우우…….' 그의 입술 사이로 상처 입은 짐승과도 같은 괴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무정무심한 그가 지금 울고 있는 것이다. 3 길게 뻗어 있는 이 통로(通路)는 매우 어두웠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어 빛살이 조금도 스며들지 못하기 때문에 어두운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 어둠은 보통의 어둠이 아니었다. 완벽한 어둠! 자신의 손을 눈앞에 뻗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둔 것이다. "……." 단우는 천천히 통로를 걸어갔다. 열 개의 매화로 잠력을 폭발시키고 있는 지금의 그로서는 가능한 빨리 목표지점에 당도해야 했으나 그 는 오히려 천천히 가고 있는 것이다. 예기(銳氣)! 그것은 통로 건너편에서 몰려오고 있는 극렬한 예기 때문이었다. 그 예기는 실로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단우는 지금까지 이토록 날카롭고 강렬한 예기를 접해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가 열 개의 매화를 꽂아 잠력을 극대화시켰다고는 하지만, 지금 몰려오고 있는 예기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단우는 어둠 저 편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청년이었다. 이제 막 약관을 벗어난 듯한 이십대 중반의 청년에 불과했으나, 청년의 몸에서는 가히 절대자(絶對者)다 운 기도가 풍겨지고 있었다. 풍겨지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고, 극렬한 피 내음이 풍겨졌으며,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마기(魔氣) 와 사기(邪氣)가 풍겨지고 있었다. 그것은 정녕 공포와 전율스러운 기운이었다. － 사령(死靈). 그렇다. 그는 바로 흑마사십사령 중의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령이었다. 이미 한 번 언급이 되었지만, 사실 그가 흑마사십사령 중의 제삼인자로 머물게 된 것은 금일홍에게 가 장 늦게 선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나이가 그들 중에서 가장 어렸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천령이나 지령과 같은 입장과 시기에서 시작했더라면 그는 능히 흑마사십사령 중 제일인자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인물이었다. "……." 단우는 걸음을 멈췄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사령과 대략 삼 장 정도의 거리였다. "……!" 단우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사령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심각하게 굳어졌다. 단우는 강자였다. 비록 지금까지 한 번도 정면으로 격돌해 본 적이 없었지만, 사령은 몇 차례 그를 관찰했었기 때문에 단 우가 얼마나 강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르다! 단우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과는 분명 달랐다. 더욱 강해졌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이었다. 그 강함의 농도(濃度)는 사령이 예상하고 있었던 것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고수들의 이러한 느낌은 파충류의 촉각기관과도 같은 것이어서 절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사령은 전신의 모든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에게 이런 반응을 보이게 만들었던 사람은 오직 하나, 자신을 거느리고 있는 금일홍뿐이었 다. "……." 마치 진짜 석상이 되어 버린 것처럼 단우는 아무런 말도, 더 이상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장승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사령은 그것을 견뎌 낼 수 없었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열렸다. "믿을 수 없군. 귀무곡에서 보았을 때는 결코 이 정도가 아니었거늘…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이토록 강한 모습으로 변모해서 나타나다니……?" "……." "그러나… 네게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이토록 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운명이 바뀌지는 않는다." 스윽－! 말을 끝내면서 그는 등 뒤에 매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검을 뽑아 들기 무섭게 검극(劍極)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거리면서 열 송이의 검화(劍花)를 만 들고 있었다. 스르르－! 열 송이의 새하얀 검화가 허공을 부유(浮游)하는 광경은 마치 눈송이가 흩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 검법은 일견 단순했다. 비록 열 송이의 검화를 만들어 냈으나, 이것은 일류의 고수라면 누구나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 다. 그러나 사령은 고수였다. 고수도 보통의 고수가 아니라 초극(超克)의 절대고수였다. 이런 고수들이 단지 열 송이의 검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정도의 고수들은 마음만 먹으면 일거에 수백 송이 이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사령의 무서운 점이었다. 사령은 지금 그 열 송이의 검화 속에 자신의 전부를 실어 보낸 것이다. 단우 같은 고수들에게는 수백 송이가 아니라 수천 송이의 검화를 만들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내공을 열 송이의 검화 속에 응축시킨 것이다. 때문에 이 열 송이의 검화는 수천 송이의 검화보다 몇백 배나 가공할 예리함과 파괴력을 감추고 있는 셈이었다. "……." 그것을 모를 리 없으련만, 단우는 검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고 검화가 자신의 몸에 닿을 때까지 일체의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검화가 그의 몸에 격중되어 피분수를 뿜어 내기 직전, 마침내 그의 몸이 유령처럼 열 송이의 검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엇?" 사령은 깜짝 놀랐다. 그는 단우가 설마하니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의 검세가 순간적으로 주춤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단우의 손이 사령의 검을 그대로 움켜잡았다. 그 손길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여 얼핏보기에는 두 사람이 각본을 짜고 하는 것 같았다. 스윽－! 단우가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자 사령은 손아귀가 파열되는 고통을 느끼고 엉겁결에 장검을 놓아 버 렸다. "으음!"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흑마련의 제삼인자의 자리에 있는 개세고수 사령이 제대로 손도 써 보지 못한 채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검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검을 빼앗긴다는 것은 패한 것보다도 훨씬 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으…….' 사령은 얼굴이 시뻘개졌다. 보통의 고수들이라면 이런 경우 말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허리춤에서 괴이한 병기를 뽑아 들었다. 길이가 팔 척 가량 되고 신축이 자유로워 보이는 채찍이었다. 이 채찍의 끝에는 괴이하게도 쇠갈고리처럼 날카롭게 구부러진 날이 달려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병기였다. 사령은 채찍을 뽑아들기 무섭게 단우를 향해 벼락같이 덤벼들었다. 휘익－! 괴이한 그 병기가 휘둘러지자 주위가 한순간에 온통 편영(鞭影)으로 뒤덮였다. 스슷－! 단우는 슬쩍 몸을 날려 채찍을 피했다. 병기의 특징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초식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에 섣불리 덤볐다가는 오히려 어이없게 당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단우의 몸이 빛살처럼 이동하는 순간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휘리리릭－! 허공으로 스쳐 갔던 그 괴이한 병기가 기이하게 꺾이면서 단우의 허리춤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그 빠르기도 빠르기였지만 각도의 절묘함 또한 실로 경악스러은 것이어서 단우는 도저히 피할 곳을 찾 을 수 없었다. '우웃!' 단우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이런 공격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스슷－! 반사적으로 그의 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편과 편이 휘둘러지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틈새를 향해 몸을 날린 것이다. 휘익－! 괴병기는 다시 허공만 가르고 말았다. 하지만 사령의 공세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츄리리릭－! 어느 틈엔지 그 채찍 같은 괴병기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기기묘묘하게 뒤틀리면서 끝 부분에 매 달린 갈고리로 단우의 이마를 찍어 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병기의 괴이절륜한 공세는 실로 가공스러웠다. 단우는 계속 피하기만 하다가는 자신이 치명적인 위험에 빠져들 것임을 깨달았다. 이런 긴 병기를 휘두르는 상대에게는 접근해서 싸우는 것이 유리했다. 일촌장(一寸長)이면 일촌강(一寸强)이오, 일촌단(一寸短)이면 일촌험(一寸險)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무기가 길수록 유리하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사령의 괴병기를 휘두르는 솜씨는 가히 신의 솜씨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보통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를 꺾을 수 없었다. 스스슥－! 단우의 신형이 연기처럼 흐르듯 움직이면서 엄밀한 편영을 뚫고 사령에게 돌진해 갔다. 그것은 가히 환상이라 할 만큼 신묘한 몸놀림이었다. 단우의 눈앞으로 사령의 모습이 바짝 파고들었다. 이제는 싸움을 끝낼 때였다. 단우는 즉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고는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냈다. 슈슉－! 바로 그때였다. 사령이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놀랍게도 이런 절대절명의 순간에서 그의 얼굴에는 사악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 단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 번쩍－! 사령의 왼쪽 소맷자락 속에서 무언가 희끗한 것이 쏘아져 나오면서 단우의 미간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실로 너무도 창졸간의 일인지라 단우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지금 사령을 향해 섬전처럼 빠르게 일직선상으로 몸을 쏘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쏘아져 오는 암기는 너무도 빠르고 시기가 적절했기 때문에 설사 사령이 암기를 던진다 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고 하더라도 피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쾌애애액－! 그런데 단우의 미간이 그 광채에 꿰뚫리기 직전이었다. 휙－! 갑자기 단우의 몸이 거의 불가해할 정도로 빠르고 절묘하게 뒤로 꺾였다. 달려오던 탄력으로 몸을 멈추기도 불가능할 텐데 그의 허리가 뒤로 쭉 꺾여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생고무도 아닌 인간의 몸이 어찌 이렇게 자유자재로 꺾일 수 있단 말인가! 사령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 단우의 검이 사정없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으악!" 처절한 비명이 통로 안을 뒤흔들었다. 검이 파고든 사령의 목에서는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끄르르… 끄르륵……." 사령은 괴상한 음향을 토해 내면서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잠시 단우를 노려보았다가 그대로 통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쿵－! 그의 괴상한 병기도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단우는 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은 뒤 오른손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손 손바닥에는 어린아이의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끝부분이 화살촉처럼 만들어진 세 개의 암기 (暗器)가 쥐어져 있었다. 방금 전에 단우는 찰나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면서 이 암기들을 움켜쥐었던 것이다. 그 암기는 우모귀왕침(牛毛鬼王鍼)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 번 격중되면 아예 해약(解藥)이 없기 때문에 정파무림은 물론이고 사파무림에서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것이었다. 결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흑마련의 서열 삼위에 올라있는 사령의 이런 비열한 수법에 단우는 분노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천하의 고수인 사령이 이렇게 암기를 사용할 줄이야… 흑마련은 악독하고 잔인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집단이로군.' 만약 단우가 십매잠력비공을 펼쳐 본래보다 몇 배 강해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우모귀왕침을 피해 내지 못한 채 저승의 고혼(孤魂)이 되었을 것이다. "……." 잠시 사령의 시신을 바라보던 단우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걸어가지 못하고 다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한 사람이 그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얼굴이 온통 검고 곱슬곱슬한 수염으로 뒤덮인 장한(壯漢)이었다. 그는 사령과 마찬가지로 흑의를 입고 있었으며 체구가 엄청나게 컸다. 키도 사령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아 보였고, 몸집은 두 배도 넘을 것 같았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커다란 철추(鐵錘)가 쥐어져 있었다. 하나의 무게가 족히 백여 근(斤)은 나갈 정도로 커다랗고 단단해 보이는 철추였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사용하기는커녕 제대로 들고 있지도 못할 것 같았는데 이 덥석부리 장한은 마치 공깃돌처럼 가볍게 들고 있었다. "……." 장한은 살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단우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양 손에 든 철추를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휘이잉－! 가공할 파공음이 들리며 그의 양 손에 들린 철추들이 풍차처럼 회전했다. '대단하다!' 단우의 표정이 가볍게 굳어졌다. 철추가 회전하면서 만들어 내는 바람 소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고 날카 로웠던 까닭이다. 단우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휘이잉－! 한 차례 허공을 가르며 돌아갔던 두 개의 철추가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음향을 일으키면서 다시 가공스럽게 휘몰아쳐 왔다. 철추의 위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단지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조각조각으로 박살이 나 버릴 것만 같 았다. 스스슷－! 단우가 이번에는 몸을 갈대처럼 사방으로 휘청이면서 빛살처럼 빠르게 좌우측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덥석부리 장한은 그 거대한 몸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다시 덮쳐 왔다. 그의 몸놀림은 얼마나 빠른지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철추를 풍차처럼 휘두르고 있는 두 손의 움직임은 신랄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한 순간도 멈춰지는 법 이 없었다. 마치 단우가 미리 그곳으로 피할 것은 예상하기라도 했던 듯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덤벼드는 것이다. '믿을 수 없군.' 정신없이 철추를 피하고 있는 단우의 눈 속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흑마사십사령 중의 하나가 분명한 것 같은데 사령보다도 더 강한 것 같으니……?' 사령은 흑마사십사령 중에서 천지쌍령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고수였다. 그런데 이 철추를 사용하고 있는 덥석부리 장한은 사령보다도 더 강하게 느껴진 것이다. '대체 흑마련에는 이런 고수가 얼마나 많은 것일까?' 쾌애애애액－! 단우는 풍차처럼 회전하며 덮쳐 오는 두 개의 철추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번개같이 손을 휘둘렀다. 쐐액－! 환영인가? 마치 한 가닥 뇌전처럼 그의 검이 뽑혀져 나오더니 믿을 수 없게도 철추와 철추가 휘둘러지는 그 미세 한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철추들을 뚫고 덥석부리 장한의 얼굴로 폭사되었다. 장한은 휘두르던 기세 그대로 두 개의 철추를 단우를 향해 던졌다. 쐐액－! 쾌검을 날리던 단우의 몸이 그대로 허공에 반쯤 떠오르면서 철추들을 피해 버렸다. 그러나 그의 쾌검은 조금도 속도가 늦춰지지 않고 계속 폭사되어 나갔다. 그때였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장한이 단우의 검을 그대로 두 손으로 움켜잡은 것이다. 콰악－! 그의 솥뚜껑처럼 크고 거친 투박한 두 손이 꼬치처럼 꿰뚫리며 핏줄기를 뿜었다. 대신, 그로 인해 단우의 몸은 허공에서 그대로 고정되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장한이 단우를 향해 커다란 입을 쩌억 벌렸다. 쐐액－! 놀랍게도 그의 입 속에서 핏물처럼 붉고 가느다란 물체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왔다. '뱀(蛇)!' 단우는 대경했다. 장한의 입에서 쏘아져 나온 것은 분명 실처럼 가느다란 붉은 뱀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이 망가지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검을 움켜쥔 것도 놀라웠지만, 입 속에 뱀을 감추고 있 을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크크크……!" 장한이 징그럽게 웃었다. 그의 눈에 자신이 쏘아 낸 뱀이 단우의 얼굴을 관통하는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 웃음소리는 순간에 불과했다. "크아아악!" 갑자기 그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아닌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스르르－! 핏줄기가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인두(人頭) 하나가 통로의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장한의 수급(首級)이었다. "……." 통로 안에 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단우는 장승처럼 우뚝 서서 자신의 수급 옆에 쓰러져 있는 장한의 목 없는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이마에는 장한이 화살처럼 쏘아 낸 붉은 뱀이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뱀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단우의 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력(引 力)에 의해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단우는 장한을 내려다보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은 고금제일독(古今第一毒)인 유령대제의 독술(毒術)을 물려받은 나에게 이까짓 혈왕사(血王蛇)를 사용한 것은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는 이어 자신의 이마에 매달려 있는 혈사를 떼어 냈다. 놀랍게도 혈사는 햇볕에 오랫동안 말린 것처럼 쭈글쭈글하게 변해 있었다. 사실 이 혈사는 혈왕사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코끼리나 물소 같은 동물도 물리는 즉시 죽음으로 몰아넣 는 극렬한 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단우의 이마를 물었던 이 혈왕사가 쭈글쭈글하게 변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단우가 익힌 유령대제의 독공(毒功)에 의해 혈왕사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독기를 모조리 갈취당한 것이 었다. 그 덕분으로 단우의 독공은 한 단계 상승하는 효과를 얻었으니……. 이것은 덥석부리 장한이나 그를 보냈던 금일홍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 십매어황 제3권 第十五章 십매어황(十梅御皇)은 위대했다 1 저벅저벅－! 단우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가 걸어가고 있는 암흑의 통로는 십매어황장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 통로만이 십매어황장으로 들어가고 나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통로는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올 수는 없는 불귀로(不歸路)였다. "……." 단우의 걸음이 다시 멈춰졌다. 스윽－! 다시 흑의인 하나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단우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사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흑의인은 얼굴이 원숭이를 빼닮아 있었다. 공처럼 둥근 얼굴이 온통 검은 털로 뒤덮여 있었고, 양 손은 기형적으로 길고 유연했으며, 십지(十指) 또한 한결같이 유난히 길고 가늘었다. 그를 보는 순간 단우는 그의 이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령(猿靈)!' 용모가 원숭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원령은 흑마사십사령 중 서열 일곱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고수였다. 그의 특기는 권각족(拳脚足)이라고 했다. 원령을 보자 단우는 비로소 방금 전에 격돌했던 덥석부리 장한의 이름이 떠올랐다. '광령(狂靈)!' 철추를 사용하던 그 덥석부리 장한은 흑마사십사령 중의 아홉 번째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광령이었다. 단우가 알고 있는 광령의 특기는 결코 철추가 아니었다. 천령은 분명 광령의 본래 특기가 창술(槍術)이라고 말해 주었었다. 그런데 광령은 창이 아닌 철추로서 단우를 상대했었다. 이로 보아 암흑사십사령에게는 제일수좌령이었던 천령조차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감춰진 절기가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의 원령 또한 권각족이 아닌 다른 절기를 사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단우는 금일홍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금일홍은 지금 십매어황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암흑사십사령을 모조리 동원시켜서 단우를 지치게 만들 생각이 분명했다. 달리 생각하면 이것은 금일홍이 단우를 껄끄러운 상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금일홍… 당신이 겨우 이 정도에 불과했단 말인가?' 단우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말 실망이군.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는 자가 이런 잔꾀를 부리다니…….' 바로 이때였다. 휙－! 원령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단우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그는 앞의 광령과는 달리 자신의 특기인 주먹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우웅－! 원령의 주먹은 일견 느릿느릿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무엇보다 빠르고 위력이 강했다. 분명 천천히 뻗어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도 피하기가 매우 어려운 주먹질이었다. 파아악－! 권풍이 휘몰아치자 단우의 장삼자락이 찢어질 것처럼 펄럭거렸다. 상대가 병기를 사용하지 않는데 병기를 사용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단우는 즉시 원령이 펼쳐 낸 권풍(拳風)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웃!' 단우는 움찔했다. 그가 파고들기 무섭게 원령이 일으키는 권풍이 무섭게 회전하면서 그의 몸을 사정없이 죄었기 때문이 다. 단우는 즉시 일지(一指)를 퉁겼다. 슈슈슉－! 단우의 손가락에서 황금색 광채가 빨랫줄처럼 뻗어 나갔다. 놀랍게도 그것은 대소림사가 자랑하는 고금제일의 지공(指功)인 탄지신통(彈指神通)이었다. 쫘아악－!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들리며 원령의 이마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멍이 뚫린 이마에서는 핏물이 뿜어지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공스럽게도 원령이 이마에 구멍이 뚫린 채 그대로 단우를 향해 덮쳐 오는 것이 아닌가! "응?" 단우가 흠칫 놀라는 순간이었다. 원령이 그 유난히 길다란 양팔을 활짝 벌리더니 단우의 몸을 바짝 껴안았다. 우두둑－! 그의 두 팔이 마치 뱀처럼 단우의 몸을 칭칭 감자 단우의 몸에서 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섬뜩한 음향 이 터져 나왔다. 칭칭 감는 것은 두 팔만이 아니었다. 그의 두 다리도 단우의 몸을 칭칭 휘감으면서 무섭게 죄고 있었다. "우욱!" 단우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터졌다. 원령의 두 팔과 두 다리의 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공스러웠다. 단우는 지금까지 이토록 강한 팔힘과 다리 힘을 지닌 자는 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다 상대는 이마에 구멍이 뚫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으으……." 사지(四肢)를 이용한 포박(捕縛)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꿈틀거리고 있는 단우의 전신 피부가 금방이라 도 펑! 하고 터질 것처럼 부풀어올랐다. 원령은 마치 한 마리 거대한 문어처럼 전신을 사용해 단우의 몸을 괴이하게 죄는 것이다. 이것은 천 년 전에 절전된 것으로 알려진 마승포천력(魔繩捕縛力)이라는 괴공(怪功)이었다. 마승포천력에 일단 포박을 당하게 되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다. 본래 이 마승포천력은 서장(西藏) 유가신공(瑜伽神功)의 일종으로서, 체내의 모든 잠력을 격발시켜 초인 적인 신력(神力)을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에 황소는 물론이고 쇳덩어리라도 진흙처럼 짓이겨지고 만다. 투툭－! 단우의 몸에서 계속해서 기이한 음향이 터지면서 그의 전신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힘과 힘의 대결! 원령의 얼굴이 피로 물든 듯 새빨개지며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그의 팔 안에서 뼈가 가루로 변해 숨통이 끊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단우의 표정은 무심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그는 원령에게 포박당한 상태로 가만히 서 있었다. 우두둑－! 마침내 원령의 몸에서도 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두 팔과 다리를 죄는 힘 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단우가 두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콰지직－! 원령의 팔이 오히려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는 얼굴을 고통스럽게 잔뜩 일그러뜨렸다. 쇳덩어리조차 진흙처럼 짓이긴다는 악마의 힘, 마승포천력조차 단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뿌드득－! 원령의 두 팔이 점점 벌려졌다. 단우가 팔을 위로 쳐들어 올릴수록 원령의 표정은 더욱 고통스럽게 일그러졌고, 그의 두 팔도 좌우로 벌려지는 것이다. 일다경도 안 되어 원령의 두 팔과 다리는 거의 모두 풀려지고 말았다. 이제는 단우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완전히 풀려 버릴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원령의 얼굴이 단우를 향해 움직였다. 괴이하게도 그의 얼굴에서 사이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눈알이 핏물을 머금은 것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 단우는 흠칫했다. 원령의 이런 변화가 왠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원령의 눈동자는 아예 불덩어리처럼 시뻘겋게 변했고, 그 불덩어리 같은 동공의 중앙에 까만 반점 하나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단우의 뇌리에 떠오르는 공포의 역천마공(逆天魔功)이 있었다. '이제 보니 이것은……?' 단우는 다급히 원령의 몸에서 벗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원령의 육신이 마치 폭죽처럼 무섭게 폭발해 버렸다. 콰아앙－! 한순간에 통로 안이 온통 핏물과 조각난 살점들로 뒤덮이고 말았다. "우욱!" 단우는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옷은 깨끗했다. 그 엄청난 양의 핏물이 그를 덮쳤음에도 그의 몸은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원령이 몸이 폭발하는 순간 저절로 호신강기(護身 氣)가 발동해서 핏물과 살점 조각들을 퉁겨 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원령의 육신이 폭발하면서 화살처럼 퉁겨진 핏물과 살점 조각들에 격중되어 그의 내부 기혈을 뒤흔든 탓이었다. － 천참만륙파혈공(千斬萬戮破血功). 원령이 자신의 육신을 폭발시킨 그 무공은 인간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잠력을 거꾸로 역행(逆 行)시켜 한순간에 자신의 몸을 폭발시키는 역천의 마공이었다. 천참만륙파혈공에 의해 폭발하면서 사방으로 퉁겨져 나가는 핏물이나 살점 조각들은 천하에서 가장 악 독한 흉기가 된다. 그 핏물에는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독 중의 하나인 인독(人毒)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몸을 슬쩍 스치 기만 해도 전신이 썩어 문드러지거나 얼음처럼 녹아 내리는 것이다. "……." 단우는 장승처럼 멍청히 서 있었다. 통로 안은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사방 곳곳에 널려 있거나 달라붙어 있는 핏물과 살점 조각들을 바라보는 단우의 안색은 섬뜩할 정도로 무심하고 차가웠다. "금일홍……." 그의 달라붙어 있던 입술이 힘겹게 열리면서 하나의 이름이 눈빛보다도 더 차갑게 흘러 나왔다. "이젠 정말로… 너를 용서할 수 없다." 그렇다. 단우는 진실로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금일홍의 수단과 방법에! 저벅저벅－! 통로 안에 다시 단우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밀폐된 공간이었던 까닭에 그의 발걸음 소리는 둔중한 진공음을 일으키면서 오랫동안 통로 안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묘하게도 듣는 사람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 단우의 걸음이 다시 멈춰졌다. 그의 걸음이 멈춰진 곳은 거대한 석문(石門) 앞이었다. 마침내 그는 십매어황장 앞에 당도한 것이다. 십매어황장은 바로 이 석문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석문 앞에는 한 사람이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옆구리에 사척(四尺)의 장도(長刀)를 차고 있는 그는 매우 뚱뚱했다. 천하에서 이렇게 뚱뚱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키도 결코 작지 않았음에도 보통 사람보다 다섯 배 이상 뚱뚱한 체구로 인해 그의 모습은 마치 굴러다 니는 공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번엔 거령(巨靈)인가?' － 거령(巨靈). 그는 몸집이 워낙 커서 그런 이름을 얻은 도법(刀法)의 달인이었다. 암흑사십사령의 서열 아홉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그는 잔인하고 흉폭하기 이를 데 없어서 거령도귀(巨 靈屠鬼)라고도 불린다. 그는 절대 상대를 살려 주는 법이 없다고 한다. 언제나 그는 상대를 무자비하게 난도질을 해 버리는 악마 같은 살인마왕이었다. 거령처럼 뚱뚱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몸이 느린 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사람들에게나 통하는 말이었다. 창－! 일언반구도 없이 칼을 뽑아 들고 몸을 날리는 뚱보 거령의 몸은 그야말로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빨랐 다. 쾌애애애액－! 천지가 온통 칼바람에 휩싸인 것 같았다. 거령의 칼은 일반적인 칼보다 반 자 가량 길고 면이 넓었으며 두께 또한 보통의 칼보다 배 이상 두꺼웠 다. 그 정도 칼이라면 그 무게가 족히 백 근 이상 나갈 터인데도 어찌나 빠르고 영활하게 움직이는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단우는 피하지도 않고 몸을 날려 정면으로 부딪쳐갔다. 그의 검과 거령의 장도가 정면으로 격돌했다. 까까까까깡－!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칠흑 같던 통로 안에 불똥이 퉁겨졌다. "우욱!" 짓눌린 듯한 신음 소리와 함께 거령의 거구가 주르르 뒤로 밀려갔다. 단우는 시간을 오래 끌지 않겠다는 듯 쉬지 않고 거령을 몰아 붙였다. 거령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다급히 장도를 들어 단우의 검을 막았다. 째앵－! 다시 불똥이 사방으로 퉁겨지면서 거령의 몸이 갈대처럼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가 벼락처럼 펼쳐진 단우의 검을 연거푸 막아 낸 것으로 보아 그의 도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 인가를 알 수 있었다. 단우는 눈빛을 차갑게 빛내면서 비틀거리고 있는 거령을 향해 바람처럼 덮쳐 갔다. 통로 안이 온통 그의 검이 일으킨 검광(劍光)과 검영(劍影)으로 가득 찼다. 번쩍－ 번쩍－! 쐐애애애애액－! 거령은 이를 악물고 다시 장도를 들어 검을 맞받아 쳤다. 쩌어엉－! 마치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덩어리가 갈라지는 듯한 음향이 터지면서 거령의 장도가 중간에서 그대로 잘 라졌다. 단우의 검은 여세를 몰아 더욱 가공할 속도로 거령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푹－! 검이 정확하게 거령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면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거령이 자신의 가슴에 꽂혀 있는 단우의 검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 단우는 움찔했다. 검을 뽑기 위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지만 검이 마치 접착제로 붙여 놓은 것처럼 뽑혀지지 않았기 때 문이다. "흐흐흐……." 거령이 입가로 피를 흘리면서 징그럽게 웃었다. "나 혼자 저승으로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우, 네놈의 목숨도 오늘로서 끝장이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파앗－! 거령의 등판 옷자락이 산산조각으로 찢겨지면서 한 왜소한 인영(人影)이 번개같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 닌가? 그것은 참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거령이 그토록 뚱뚱했던 것은 본래 그가 뚱뚱해서가 아니라 등판에 한 사람을 업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콰아아악－! 등판에서 솟구쳐 나온 인영은 뜻밖으로 다섯 살 가량의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얼굴에 주름이 축축 늘어지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쇠어 있는 사람을 어찌 어린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 가? 단우의 표정이 급변을 일으켰다. '왜령(矮靈)이다!' － 왜령(矮靈). 그는 선천적으로 그렇게 작은 사람이 아니었다. 우연한 기회에 괴이한 독초(毒草)를 먹어 다섯 살 가량의 어린아이처럼 변한 것이었다. 콰아아악－! 허공으로 솟구쳤던 왜령은 가공할 기세로 단우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독수리가 병아 리를 나꿔채기 위해 쏘아져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양 손에서는 각기 검고 붉은 비수(匕首)가 쥐어져 있었다. "지옥쌍비(地獄雙匕)!" 단우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지옥쌍비는 천하에서 가장 예리한 공포의 마병이었다. 두 자루의 비수는 비단 예리할 뿐만 아니라 독까지 발라져 있어서 누구든지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불에 탄 것처럼 재로 변하거나 얼음조각으로 변해 산산조각 부서지게 만드는 악마의 병기인 것이다. 콰아아아악－! 지옥쌍비는 단우의 천령개와 심장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내려왔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방법의 암습과 빛살처럼 빠르고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공격이었다. 비록 단우가 전보다 열 배 이상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번 암습 만큼은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았 다. 그만큼 왜령의 암습은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두 자루 비수가 단우의 천령개와 심장을 독사의 이빨처럼 파고드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스르르－! 마치 둘둘 말아놓았던 비단이 풀려지는 것처럼 단우의 몸이 바닥으로 길게 눕혀지면서 가슴에 검을 꽂 고 있던 거령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푹－ 푹－! 지옥쌍비가 거령의 천령개와 심장으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헉!" 왜령은 눈을 부릅떴다. 단우가 설마하니 이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신의 살수를 피해 낼 줄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이, 이런……?" 그런데 왜령이 순간적으로 멍청한 표정을 떠올리면서 몸을 움찔하는 바로 그때였다. 단우의 몸이 용수철처럼 퉁겨지면서 왜령을 향해 쌍수를 일직선으로 뻗었다. 퍽－! 비명도 없었다. 가슴이 처참하게 짓이겨지면서 왜령의 몸이 뒤로 통겨져 나갔다. "……." 실로 눈 깜박할 사이에 두 명의 절세고수를 저승으로 떠나보낸 단우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차갑고 무심할 뿐이었다. 단우는 아직도 장승처럼 뻣뻣하게 서 있는 거령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가슴에 박혀 있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검에 묻은 피를 거령의 옷에 문질러 닦아 낸 다음 힘주어 석문을 밀쳤다. 그그긍－! 둔중한 굉음을 일으키면서 거대한 석문이 뒤로 천천히 밀려났다. 그와 함께 거대한 지하광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 십매어황성의 가장 밑에 자리잡고 있는 십매어황장은 실로 방대한 면적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이곳에 들어오게 되면 사방이 철저하게 밀폐(密閉)되고 만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미 한 사람이 들어와 자리잡고 있었다. 금일홍이었다. 이 순간 그는 광장의 중앙에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로 앉아서 사방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단우,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이 광장은 확실히 걸작품 중의 걸작품이로구나. 나 금일홍으로 하여금 이 곳까지 들어오는데 정확히 하루의 시간을 허비하도록 만들다니……." 그는 웃고 있었다. 하루…….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기다려 왔는데 이 정도의 시간이 어찌 아깝겠는가? 그런데 금일홍의 중얼거림이 광장 안에 여운을 남기면서 울려 퍼지는 바로 그때였다. 낯선 음성이 금일홍의 음성을 흔적 없이 지워 버렸다. "금일홍! 들어올 때는 쉬웠는지 모르지만 이제 당신은 영원히 이곳을 나갈 수가 없소." 스스슷－! 단우가 한 줄기 바람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로 다가오고 있는 그의 가슴에는 열 개의 매화가 꽂혀 있었다. 그렇다. 그는 마침내 열 개의 매화를 모두 가슴에 꽂은 것이다. 쿠쿠쿠쿠쿠－! 열 번째의 마지막 매화가 꽂히는 순간부터 단우의 내부에서는 거대무비한 잠력(潛力)이 무섭게 폭발하 고 있었다. 그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잠력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이런 정도라면 지금의 단우는 과거보다 최소한 열 배 이상 강해져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동안 그가 금일홍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는 끝장이 나는 것이고, 그 전에 금일홍을 척살하고 치료를 한다면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 단우를 바라보던 금일홍의 표정이 가볍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곧 담담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차분한 어조로 조용히 물었다. "오령의 관문을 이토록 쉽게 통과하다니… 그들은 어찌 되었는가?" "마침내 우리는 만났구려." 단우의 대꾸는 실로 엉뚱했다. "이제 우리 두 사람만이 이곳에 있게 되었소." "그렇군. 우리 두 사람뿐이로군." 금일홍은 마치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면서 단우를 바라보았다. "편하군.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많으나 우리만이 제대로 된 사람이라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운명이고 또한 이것은 오래 전에 이렇게 됐어야 하는 것……." "……!" "자,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금일홍은 수정처럼 투명하고 유현한 눈빛으로 단우를 직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보아하니 그대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그렇지 않은가?"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않소. 한 시진이면 충분하오." "한 시진?" 금일홍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또다시 타인에게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한 시진 후에 내가 살아 있으면 무림은 나의 것이고… 내가 죽으면 그대의 것인가?" "아마도……." 단우는 빙그레 웃었다. "크핫하하핫－!" 금일홍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더불어 그의 신형은 소리 없이 단우에게 밀려들고 있었다. 어떤 움직임이 전혀 없었음에도 그는 이미 단우에게 지척까지 다가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우는 그 의 움직임을 전혀 간파하지 못했다. 단우는 경악했다. "정말 무서운 무공이로군. 잠력이 극으로 폭발한 지금에도 저자의 움직임을 볼 수가 없다니… 만약 예전 의 나였더라면 저 자의 일 초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재빨리 유령대제의 유령환허보를 전개했다. 스슷－! 그의 신형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변한 것이다. 같은 유령환허보를 펼쳤음에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무쌍한 위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 다. "핫하하… 대단하다! 그 정도면 본좌와 맞상대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파아앗－! 금일홍의 손이 빠르게 단우를 향해 밀려들었다. 이번 역시 일체 소리가 없었다. 그의 손은 뼈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때문에 그것은 분명 존재하고 있음에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음……." 단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금일홍이 펼친 그 무공은 단우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천년지대의 오십육 번째의 진세에 있던 보잘 것 없는 무공이 그의 손에서 펼쳐지자 상상조차 할 수 없 었던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단우는 즉시 손을 뻗었다. "어금혈영수!" 동시에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마주쳤다. 콰콰콰쾅－! 천지개벽이 일어난 듯한 폭음과 함께 광장 전체가 무섭게 뒤흔들렸다. "헉!" "음……." 두 사람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크흐흐흐… 무섭다. 정말 무서운 무공이구나. 내 평생 나를 감탄시킨 무공은 없었거늘… 정말 대단한 무공이로구나." 금일홍이 탄성을 토해 냈다. 하지만 그의 탄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충격을 받았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의 대결은 종식될 것이다." 또한 그의 움직임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쿠쿠쿠쿠쿠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참으로 거대한 기운이 단우를 향해 노도처럼 몰려갔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형용조차 어려운 거대한 기운이었고, 또한 그것은 언젠가 단우가 맛보았던 것이었다. "……!" 단우의 가슴은 터질 듯이 고통스러웠다. 방금 전의 격돌에서 그는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상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욱! 태, 태을불마대능력－!" 지금 금일홍이 펼친 무공은 천령이 죽음마저 불사한 채 연성하려 했던 태을불마대능력이었기 때문이었 다. 천령은 분명 말했었다. 금일홍은 이 무공을 연성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금일홍은 이 무공을 완벽하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십이 성까지 완벽하게 대성(大成)을 이룬 상태에서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단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경악했다. '천령은 이 태을불마대능력이 십이 성까지 대성을 이루면 천하의 그 무엇도 당적해 낼 수 없는 혼세무 적의 절대신공이라고 했다.' 그는 이미 천령에게 이 무공의 구결을 들었기 때문에 이 무공의 가공함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순 아득한 절망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전신의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그리고 그는 칠대초인의 무공을 동시에 펼쳐 내기 시작했다.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잠력은 극으로 폭발되었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콰콰쾅－! 마침내 두 사람의 신형은 허공에서 십자로 교차되면서 천번지복의 대폭멸성이 터져 올랐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금일홍의 육신이 광장의 천장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런 그의 가슴은 완전히 박살나 있었고, 칠공에서는 쉴새없이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으으… 믿을 수가 없다. 내… 내가… 패할 수도 있다니… 내가… 죽을 수도 있다니… 이것은… 무엇인 가 잘못된 것… 허억… 믿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고개를 꺾었다. 죽은 것이다. 그의 인생 오십…….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허망한 것이 인생사(人生事)라더니, 그는 지금까지 무엇을 얻기 위해 살아왔던가? 결국 그의 손에 잡힌 것은 한 줌의 핏물뿐인 것을……. 그리고 그가 남긴 말은 믿지 못하겠다는 말뿐이었던 것을……. 바닥에 누워 있는 단우 역시 피투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서는 미약하나마 분명 기복이 일어나고 있었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 단우는 메마른 웃음을 토해 냈다. "후후… 단지 일 할에 불과했던 승률이었는데… 성공할 수도 있었던가?" 그렇다. 그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승리한 것이다. 싸움은 이각여 만에 끝났다. 그들의 승부가 이토록 빨리 끝난 것은 금일홍이 너무 과신(過信)했던 탓이었다. 만약 시간을 두고 대결했더라면 이 승부는 십중 십, 그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아무튼 싸움은 끝이 났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단우는 살고 싶었다. 애초에 이곳에 들어설 때에는 살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살고 싶은 것이다. 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천령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한 시진 이전에 천령이 이곳에 반드시 나타날 것이므로. '그 동안 잠이나 자야겠다.' 피로한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쳐 온 길이 피를 말리는 것이었고 가시밭길이었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제대로 휴식을 취 해 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다 그는 금일홍과의 대결을 위해서 억지로 잠력을 끌어올렸기 때문에 이 순간 그의 몸은 만신창 이나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지금의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휴식이 끝나게 되면 그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었다. 그는 앞으로 무한히 강해질 것이고……. 강해진 만큼 그는 여유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실로 십매어황으로서 다시 탄생하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