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6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작가서문 10/30 01:29 23 line 장편기정무협소설 峨嵋俗家弟子 저 자: 百 象 출판사: 도서출판 산호 문화사 발 행: 92.10.25 타이핑: 양한우(hanwoo71) 작자서문 본저 아미속가제자는 이미 선보인 바 있는 무당소사숙(武當少師叔), 소림 화상(少林和尙), 화산검성(華山劍聖)에 이어 일련의 시리즈물로 제작되고 있는 구파일방 총서의 네 번째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말 그대로 비구니들 이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무림의 명문대파 아미파(峨嵋派)에 운명적으로 어려서부터 입문하여 속가제자로 성장하게 되고 드디어는 불법에 심취하여 궁극적인 인간 구원의 대철대오를 꿈꾸고 있는 소년과 그를 중심으로 필연 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대효웅(大梟雄)의 가공할 음모(陰謀)와 진상, 그리 고 그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치열한 갈등과 번뇌(煩惱) 등이 점차로 고조되 고 증폭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애독을 바랍니 다. --백상 #5347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서장/제1장 10/30 01:29 251 line 서장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열한 명의 사람이 은밀하게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철저하게 위장되고 날조되어 아직 세상 사람들에게 거의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제1장. 白雲生 아미산(峨嵋山). 사천성(四川省)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아미산은 산 세가 지극히 험준하고 수려하여 예로부터 많은 수행자들이나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며, 지금은 강호무림계의 명문일맥(名門一脈)인 아미파(峨 嵋派)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모옥. 그 모옥은 바로 그 아미산의 수려한 산자락 한 곳을 밟고 비교적 조용하고 안온한 분위기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워낙 다른 집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 처음에는 사람들은 다소 기이하게 생각하고 그곳에서 사는 사람을 궁금하게 여겼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백운생(白雲生). 바로 그러한 이름을 가진 나이 어린 소년 하나가 무림명문 아미파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아미파의 속가제자로서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살다보면 더러 기이한 일을 겪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이 백운생이라는 소년의 경우는 다소 특이하다고 말할 수가 있었 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소년이 어머니는 아미파의 비구니라는 사실이었 다. 아미파는 원래부터 남자제자, 즉 비구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전통이 었기 때문에 소년은 아미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특이함은 비단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소년의 아버지 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출가하기 전의 그의 어머니의 신분은 어떠 한 것이었을까? 안개에 가려져 있는 듯이 모호하기만 대강 그러한 의문들 이 소년에 대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신비함과 특이한 느낌을 갖게 하 는 것 같았다. (……?) 소년 백운생은 책을 읽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어 갸우뚱했다. 봄날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문틈으로 스며 들어오는 공기의 냄새가 청량하고 항긋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가 고개를 든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 이 아니라 바로 누군가가 밖에서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정현(靜賢)스님인가?) 백운생은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순간 초록의 빛깔이 만연하고 있는 봄날의 신록이 눈앞을 찌르고 풋풋한 새싹들의 냄새가 정신을 상쾌하게 만 드는 것 같았다. 백운생의 나이는 이제 열두 살이었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인 생의 모습에 대해서 심사숙고해 볼 만한 나이의 그로서는 당연히 이 아름 다운 자연의 환경에 대해서 기꺼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문을 열자 예상했던 한 명의 중년의 비구니가 파릇하게 깎은 머리를 가지고 엄숙하게 마당에 서 있었다. 백운생은 절로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이 비구니 스님이 바로 정현스님 이다. 비교적 엄숙하고 딱딱한 표정을 짓지만 기실 그에게는 매우 다감하 고 친숙한 사람이었다. 백운생은 여태 그에게 의존하여 살아오다시피 했었 다. "무슨 일이십니까?" 정현스님은 다소 상기된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와 함께 가셔야 하겠습니다. 사태께서 분부하셨습니다." 사태. 사태라 면 바로 일심사태(一心師太)를 말하는 것이었다. 일심사태는 백운생의 어 머니이고 따라서 어머니가 눈앞에 정현스님보다 배분이 하나 높기 때문에 자연히 백운생의 배분은 정현스님과 똑같게 되어서 정현스님은 함부로 반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그녀가 반말을하지 않는 이유는 기실은 따로 있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백운생도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정현의 말에 백운생은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여태까지 이렇게 그의 어머니가 아침부터 사람을 보내서 그를 불러갔었던 적은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따라 정현스님의 태도가 다소 기이하다고 생각되었기 때 문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정현스님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직접 가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 정현스님은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운생은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ㄷ어번 갸웃거리다가 그는 곧 신발을 찾아신고 마당에 내려서서 정현스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백운생은 그가 기억할 수가 있는 시절보다 더욱 어렸을 때부터 모옥에서 살아가기 시작했었다. 아마도 어머니의 젖을 떼고 났을 때부터라고 생각되었다. 그러한 어린 아 이가 혼자서 모옥에 덩그라니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에는 그 는 어머니의 배려로 아미산 부근의 한 노파의 보살핌을 받아가며 모옥에서 살아가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백운생이 아홉 살쯤 먹었을 때 별안간 그 노 파가 노환으로 돌아가게 되자 자연히 백운생은 혼자서 모옥에 남게 되었 다. 아니, 그의 어머니는 여러 차례 사람을 통해서 그에게 다른 사람을 붙 여주겠다는 의사를 전해오곤 했었다. 다소 어른스러운 성격 때문인지 백운 생은 줄곧 그것을 사양해 왔었다. 어머니는 불문에 들어가서 거의 자신과 의 인연을 끊으려고 하는 상황인데 자신이 항상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사랑 갈 수는 없다고 하는 생각에서였다. 비록 엉뚱하기는 하지만 그의 요청은 수락되었고 대신 이렇게 정현스님이 나서서 그에게 가끔씩 물품이나 식량 따위를 날라다 주게 되었다. 따라서 거의 자신의 손으로 밥을 지어 먹으며 생활하고는 있지만, 그 밖의 것에는 대부분 이 정현스님의 도움을 받아오 던 터라 백운생은 내심 이를 대단히 미안해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오늘은 대체 무슨 일로 갑자기 어머니께서 그를 부르고 있는 것일 까? 앞에서 걸어가는 정현스님의 발걸음은 비록 천천히 걷는다고는 하나 무공을 배운 사람답게 매우 민첩하여 어린 백운생으로서는 따라가기가 고 역인 셈이었다. 다소 건강한 편에 속하는 몸이었으나 백운생은 얼마 가지 않아서 금방 전신이 물에 빠진 듯이 후줄근하게 땀으로 젖어서 심하게 숨 을 헐떡이게 되었다. 이 아미산은 유난히 산세가 험준하고 제대로 난 길이 없어서 더욱 그러했다. 헌데 한참을 걸어서 아미산의 최고봉인 금정봉(金頂峯)에 가까이 이르렀 을 때 정현스님은 문득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우리 아미파를 잊지는 않겠지?" 백운생은 무 심코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곳은 말하자면 저의 젖줄과도 같은 곳이죠." 그러다가 문 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그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헌데 제가 이곳을 떠나게 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런데 정현스님 은 이미 고개를 돌리고 저만큼 앞서서 나아가고 있었다. (……?) 백운생은 대답도 듣지 못하고 얼른 뒤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정봉. 백운생은 전에도 이곳에 더러 와본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곳 이야말로 그의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어머니인 일심사태는 이곳 아미파에서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 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다른 비구니들은 대개가 산기슭에 있는 아미파의 숙소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만, 유독 그의 어머니만큼은 이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아미파의 최고봉이었다. 따라서 백운생과 같은 나이 어 린 소년이 오르기에는 너무나도 높고도 험하여 그는 이곳의 근처에 이르자 대부분 정현스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일위도강(一葦渡江)이라고 하는 불문의 경공절예는 훌륭한 것이었다. 거의 날아가는 새조차 오를 수가 없다고 하는 이 천험의 금정봉으로 정현스님은 그를 안은 채 거침없이 훌훌 날아올랐고, 그럼에도 거의 숨이 거칠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백운생엑 문득 이러한 신법은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렬하게 생겨날 정도였다. 아무튼 금정봉 정상 위의 작은 공지 위에 오르자 백운생은 순간 뭔가 전 과 같지 않음을 느껴야 했다. 우선, 으레 이곳에 오르면 들리곤 하던 청아 한 목탁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마치 쥐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날아가는 새조차 이 근방에는 머뭇거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곳 부근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삼인(三人)이었다. 삼인. 그들은 암자의 마당에 마치 석상(石 像)처럼 우뚝 서서 사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그를 해코자 하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백운생은 왠지 그들을 보는 순 간 갑자기 숨이 콱 막히고 긴장되며 머리끝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슨 흉악하게 생긴 사람들인가 하 면 그렇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대하는 낯설은 이 세 사람들은 모두 중년의 사람들이었는데 한 사람은 여자였고 둘은 남자였다. 여자는 얼핏 보기에도 지극히 아름다운 미모를 소유한 사람이었는데 일신에 타는 듯한 홍의(紅 衣)를 걸치고 있었고, 그 홍의에는 네 개의 황금빛 동심원과 무시무시한 모양의 늑대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남자 중에서 한 사람은 네 개의 동심원과 금룡(金龍)이 수놓아져 있는 백의(白衣)를 걸치 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역시 네 개의 동심원과 사자(獅子)가 수놓아져 있 는 흑의(黑衣)를 걸치고 있었는데, 백의인은 아주 준수하게 생긴 서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흑의인은 덩치가 매우 크고 우람하게 생겼으며 강인하 기 짝이 없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백운생은 자연 그들의 옷에 한결같이 수놓아져 있는 네 개의 동심원과 늑 대와 용과 사자의 그림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한결같이 흘려내고 있는 막강한 기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그들 에게서 느낄 수가 있는 것은 무시무시한 기운보다는 상당히 비범하고 준수 해 보이는 인상들이었다. 헌데 이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백운생이 나타났어 도 그들은 그를 향해 전혀 신경을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다만 왠지 모르 게 절반쯤 문이 열려져 있는 암자의 입구를 향해 그들의 이목이 쏠려 있는 듯한 느낌을 백운생은 받았다. 백운생은 무슨 이곳의 주인도 아니었고, 또한 그들이 그를 보지도 않기 때문에 일부러 아는 척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조금 전에 그는 어째서 그 들에게서 무서운 기운을 느꼈던 것이었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며 천천 히 암자의 문이 열려져 있는 쪽으로 향했다. 전날이었으면 아마도 백운생 은어머니를 부르며 달려가기라도 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워낙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백운생은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반쯤 열려져 있는 암자의 문을 열었다. 안에서는 문득 가느다란 대화가 이어지다가 멈추어진 것 같았다. 백운생 은 고개를 들어 내부를 살피다가 문득 얼굴에 미소를 띄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심사태. 파르라니 머리를 깎고 아미파에 입문한 지도 그리 오래지 않고 또한 나이가 젊은 편이었지만, 높은 배분으로 이렇게 금정봉에서 수련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은 바로 그녀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예로, 그의 어머니는 배분이 한 단계 아래인 정현스님보다도 훨씬 나이 가 젊은 편이었다. 지금 정현스님은 그가 암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몸을 돌 려 아래로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백운생은 미처 그녀를 배웅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왔느냐?" 어머니 일심사태의 표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다소 싸늘하고 엄 숙해 보였다. 하지만 이미 그러한 표정에 길들여져 있는 백운생은 오히려 그러한 평정을 항상 지닐 수가 있는 어머니의 품성에 대해서 항상 존경스 러워하고 있었다. 백운생은 즉시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예, 어머니." 일심사태의 표정이 다소 찌푸러지는 듯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온화한 음 성으로 그녀는 다시 말했다. "어서 이리로 올라오너라." "……." 어머니의 지시에 대해서 배운생은 여태 거의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그는 지극한 존경과 공손한 마음으로 그녀를 대했고 지금도 그러한 행동에 는 변함이 있을 수가 없었다. 백운생이 공손히 읍한 다음에 신발을 벗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자, 일심 사태는 고요한 태도로 백운생에게 자신의 전면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먼저, 저분께 큰절을 올리도록 해라." (……?) 하긴 실내에는 다른 한 명의 사람이 마주 앉아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백 운생은 어머니에게 불경의 태도가 되지 않을까 하여 감히 한눈을 팔지 않 았었는데 갑자기 그에게 인사를 드리라고 하니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저분과는 벌써부터 아는 사이였나?) 불현듯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백운생은 즉시 두말없이 상대방을 향해 공손 하게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소생 백운생이 삼가 인사 올립니다." 금의인(金衣人). 일신에 아름답고 화려한 금의를 걸치고 있는 상대방은 나이가 대략 오십대의 초로인에서 육십대의 노인 정도로 보였고, 다만 머 리칼이 조금 희끗희끗할 뿐으로 용모는 그렇ㄱ 깨끗하고 준수할 수가 없었 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노인을 고르라면 바로 눈앞의 이 금의노인 을고르면 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비록 용모가 준수하고 화려한 옷 을 입었을망정 기이하게도 노인의 전신에는 화려함보다는 평범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기이한 점이었다. 의당 화려하게 느껴져야 할 사람이 능히 평범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면 단지 그것으로도 상 대는 비범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상대인 금의노인은 만면에아주 흐뭇한 표정을 담고 아래위로 그의 모습 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서 일심사태에게 물었다. "이 아이에게 아직 나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는가?" 상당히 맑고 힘차게 울리는 음성이었다. 허나 무엇보다도 백운생은 이 금의노인이 자신의 어머 니에게 하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막연한 충격을 느끼게 되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일심사태는 조용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예, 아직 그럴 기회가 없었어요." 금의 노인은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흠,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엄연히 우리 백씨 가문의 자손인데 나 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서야 쓰겠는가? 어서 일러주도록 하게." "……." 일심사태는 백운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어 그녀의 입에서 홀러나오는 말의 내용은 엄청난 것이었다. "운생아, 이분은 당금의 동심각(同心閣)의 주인이신 동심지존(同心至尊) 이시고 바로 너의 친할아버지이시다." 백운생은 그만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심각! 이 이름은 결코 평범한 이름이 아니었다. 바로 당금의 강호무림 계의 무림맹(武林盟)의 또다른 이름인 것이었다. 즉, 동심지존은 무림맹주 라는 말인데, 근래의 무램맹주의 임기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은 종신(終 身)이어서, 그 지위는 막강하다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당금의 무림에 진정한 무림왕이 있다면 바로 눈앞의 이 금의 노인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별로 무림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백운생이라고 해도 그 말에 금방 놀라서 안색이 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자신의 어머니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에 비추어서 평범하지 않은 신분이라 는 것을 예상하기는 했어도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백운생도 당금의 무림이 일각(一閣), 칠패(七覇), 구파일방(九派一幇), 오대세가(五大世家)의 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각인 동심각은 대대 로 백씨 일문(白氏一門)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어서 한편으로는 백대세가 (白大世家)라고도 말하기도 하는데, 어머니가 그 가문의 며느리라면 자신 은 그럼 무림의 왕손쯤 되는 사람이라는 말일까? 백운생은 순간적으로 이런 모든 사실이 믿기지 않았으나 금방 자신의 어 머니가 이러한 자리에서 실언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그렇 다면 대체 그의 부친은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어째서 어머니는 불문에 들 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워낙 침착하고 냉정하신 분이어서 백운생은 아직 어머니께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친할아버 지라고 말하는 금의 노인이 있는 상황에서 지금 그런 문제를 꺼내서 물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어쩔 수가 없는 심정으로 이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어머니?" 일심사태는 문득 한 차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 백운생은 새삼스럽게 옆의 금의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안 되어서 다 소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감정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아까는 그저 남이 라는 생각으로 절을 했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친할 아버지라는 생각을 하려니 다소 황당해지는 기분이었다. -계속- #5348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2장 10/30 01:31 302 line 제2장. 아름다운 師姪 하지만 왠지 싫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세상에서 자신이 무림의 위대한 왕손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괴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느닷없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한 생명체가 그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워하는 순간적인 몸짓에 불과한 것 이었다. 백운생은 가능하면 자신의 친할아버지라는 이 금의 ㄴ인을 향해 새삼스럽 게 다시 큰절을 올리고도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그는 마치 꾸중 을 듣는 아이처럼 다소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문득 금의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무림가(武林家)의 장손이 이거 너무 쑥스러워 하는군 그래?" 백운생은 차마 그를 정면으로 다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그런 용기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따라서 즉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한 마디쯤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일심사태가 다소 냉정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라는 것이었다. 특별히 다 른 볼일이 없다면 그만 돌아가도록 해라." 백운생은 다소 멈칫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와 할아버지간에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러나 금방 이 자리를 물러가는 것은 다소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볼일은 없지만 그러나……" 하지만 일심사태는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여러말 할 것 없다. 서책이 필요하다면 내 사람을 시켜서 너를 장경각 (藏經閣)으로 안내해 줄 것이니 그렇게 알고 물러가도록 해라." 백운생은 어머니가 이렇게 내엉하게 말하자 하는 수가 없었다. 모르긴 몰 라도 부친의 일로 인해 할아버지와의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게 패여 있다 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예, 그럼……" 백운생은 즉시 어머니와 금의 노인이게 각각 한번씩 공손히 예를 올린 다 음에 천천히 뒤로 돌아서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예의 그 비범해 보이는 세 사람의 중년인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목석처럼 서 있었다. (저들은 혹시 할아버지의 수하들이 아닐까?) 백운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귓전에 모기소리보다도 가느다란 금의 노인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내 나중에 찾아갈 테니 어서 가 보아라." (……) 일단 금의 노인에게서 친근감을 느끼게 되자 백운생은 아무래도 이들과 다소 친해두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가 비교적 인상 이 부드러운 백의 중년서생을 향해 다가가자, 아니나 다를까, 문득 그 중 년인이 그를 향해 시선을 보내더니 느닷없이 다음과 같은 음성이 울려오는 것이었다. "만나서 반갑네." 백운생은 그 음성이 그가 전혀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도 자신의 귀에 들려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이 일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다. (말로만 듣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의 무공인 모양이로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전혀 입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없던데 혹시 다른 것이 아 닐까?) 하긴 그렇다고 해서 옆의 다른 사람들을 살폈으나 흑의 중년인이나 홍의 여인 등의 표정에는 전혀 그를 아는 척하는 기색조차 찾아볼 수가 없 었다. 결국은 바로 이 준수해 보이는 백의 중년서생이 아주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백운생은 다시 한 가지 문제를 두고 고개륽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 다. (이 사람의 얼굴은 아주 낯익어서 누구를 닮은 것 같았는데, 알고보니 바 로 우리 어머니를 닮은 것이잖아. 그럴 리가…… 어째서 그는 우리 어머니 와 얼굴이 닮은 것이지?) 이때 문득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작은 그림자 하 나가 있었다. 백운생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기다가 어느새 그 그림자가 자신 의 코앞에 도달한 것을 알고는 고개를 들다가 다소 놀랐다. (아니!) 바로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이제 나이가 겨우 열살 정도나 된 것 같은 회색 승복을 입은 앳된 소녀였다. 그런데 이 소녀는 그럼에도 키가 백운생 보다도 조금 큰 것 같았고,머리를 뒤로 길렀을 뿐만 아니라 얼굴이 첫눈 에 보기에도 지극히 아름답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해맑은 얼굴에 마치 흑진주처럼 초롱하게 빛나는 영롱한 눈빛이 흡사 빨아들이는 듯한 마력을 지녔다고나 할까? 아니, 표정이 그렇게 자연스럽고 조용할 수가 없었다. 백운생은 느닷없이 제 또래의 소녀가 눈앞에 나타나자 아연히 놀라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 소녀는 아직 머리를 깎지 않은 행자로서의 아미파의 제자인 것 같았다. "사태께서 분부하셨어요." 소녀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백운생은 정신을차리고 상활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사태를 모시는 행자예요. 그분께서 저더러 공자님의 일을 돌봐드리 라고 말씀하셨지요. 지금 바로 장경각으로 가실 것인가요?" (…….) 백운생은 바로 이러한 소녀가 지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백운생이 평소에 거의 이곳에 올라서 어머니를 보는 일이 없었으 니 그것은 어저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지금 이 소녀가 말 하고 있는 사태는 바로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어머니 일심사태를 말하는 것 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서 안내를 해주겠다고 했었는데 그 사 람이 바로 이런 소녀를 말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정말로 몰랐다. 백운생은 아주 맑고 투명해 보이는 상대의 미모를 차마 마주볼 수가 없어 서 다소 허둥대며 대답했다. "그, 그럽시다." 그 이상한 백의 중년 서생 등의 눈을 피해서 어떻게 금정봉을 내려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리벙벙한 기분이었다. 회의 소녀의 인도를 받 아서 백운생은 흡사 구름 위에 떠 있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험준한 길을 내 려왔다. 평소라면 다소 어지럽고 두려웠어야 할 그 길을 어떻게 태연하게 걸어 내려왔는지 실로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앞에서 가던 소녀가 다시 입을 열어서야 백운생은 정신을 차렸다. "저는 무구(無垢)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어요. 백운생 백공자님이 맞으시 죠?" 무구. 백운생은 금방 찬물에 휩싸이는 듯한 기분으로 그 법명을 생각 하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름이군. 정말로 얼굴에 걸맞는 이름이야.) 불현듯 튀어나온 말이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그렇소만, 언제부터 나의 어미니의 밑에서 있으셨소?" 소녀는 백운생이 마치 어른처럼 묻고 있는 것을 보고 가볍게 웃음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요. 저는 원래 멸문지화를 당한 한 선비가문의 딸이 었는데 죽음 직전에 사부님께서 저를 거두어서 길러 주셨다고 해요." 이 소녀는 그의 어머니를 사부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녀 가 이곳 아미파에 들어온 것은 백운생보다도 조금 늦은 편인 셈이었다. 백운생은 이 무구라는 소녀를 만나고 나자 마치 동병상련의 친구를 만난 것처럼 친근한 생각이 들어서 절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장래에는 반드시 이곳의비구니가 될 작정이오?" 무구는 고개 를 내저었다. "저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사부님께서는 장차 어찌될지 알 수가 없다고 하 시면서 극구 삭발을 하는 것을 말리셨어요."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 문득 물었다. "헌데 우리 어머니의 제자라면 당연히 이름이 정자(靜字) 돌림이어야 하 는데 어째서 그 아래 배분인 무자로 시작되는 것이오?" 무구는 그 말에 가볍게 웃었다. "아니예요. 틀렸어요." 백운생은 눈을 크게 떴다. "틀리다니?" 무구는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예요. 저는 사숙조님의 사존에 불과한데 제자라고 하시니 어찌 틀 리지 않겠어요. 세상에 이런 경우는 없는 거예요." 백운생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그대는 우리 어머니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이오?" 무구는 고개를 내 저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겠어요? 저는 다만 그분의 사손인 걸요." 백운 생은 물었다. "그럼 그대의 사부님은 누구요?" 무구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분은 정자 현자, 그러니까 정현스님이시지요." "정현스님?" 백운생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무구는 가볍게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제야 이해가 가세요?" 백운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헌데 그럼 어째서 우리 어머님의 밑에서 살아왔다는 것이오?" 무구는 잠시 생각하다가 띄엄띄엄 대답했다. "그분은 본파의 아주 특별하신 분으로…… 저의 사부님께서 자청하여 그 분의 수발을 들어 드리고 있지요. 따라서 저도 사부님과 함께 거의 금정봉 에서 살고 있는 형편이랍니다. 지금은 사부님께서 아니 계셔서 제가 대신 백공자님을 안내해 드리려고 나왔죠." 일심사태의 나이가 젊은 탓도 있으 나 백운생은 일파의 배분이 이토록 까다로운 것인지 정말로 몰랐다. 무구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이렇게 다시 말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백공자님은 저의 사숙뻘이시니 제가 당연히 사숙님이 라고 불러야 하겠군요. 그렇지 않아요?" 백운생은 말ㅇ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서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할 필요가 있겠소?" 무구를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본파의 규칙이니 감히 지키지 않을 수가 없는 거 예요." (……) 백운생은 굳이 그러한 말을 듣고 싶지가 않았으나 그렇다고 계속해서 말 릴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화제를 돌리려다가 문득 가볍게 한숨을 내쉬 었다. 이것을 보고 문득 무구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혹시 무슨 다른 근심이라도 있나요?" 백운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것은 없소." 무구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백맹주님의 손자로 판명되셨으니 기쁘지 않나요?" 사실 백운생은 그 일을 고뇌하고 있다가 배록 일부러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런 질문을 받게 되자 다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기뻐야 하겠지만 나는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소." 무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떤 기분이 든다는 거죠?" 백운생은 대답했다. "나는 원래는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내가 누구의 손자라는 얘기 를 듣게 되었소. 그러니 내가 맏음이 놀라고 당황해지지 않겠소? 기쁨이 일기보다는 먼저 마음이 심하게 혼란스럽더니는 말이오." "……" 무구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이 묵묵히 걸어가기만 했다. 백운생은 다시 물었다. "내 마음이 절말로 이상한 것이오?" 무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사숙님이 너무나도 착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원래는 본 파에는 이미 사숙조님께서 동심각의 큰며느님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어 요. 사숙님께서는 너무 순수하셔서 아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계셨던 것 이죠." 백운생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ㄷ. 하긴 그와 그의 어머니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미파에서도 이제까지 그와 같은 대우를 해왔던 것임이 명 백했기 때문이었다. 무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숙님께서 동심각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본파에 완전히 알려져 있 는 사실이예요. 그러니 사숙님께서도 앞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순하게 받아 들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 백운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마음속의 혼란은 아마 그가 현실을 거부하는 데에서 오는 것인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 게 되면 혼란스러운 마음은 절로 사라지게 되지 않겠는가? 자신만이 모르 고 있었던 현실이라니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게 현명할 테니까." 헌데 이때 문득 무구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요." 백운생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오?" 무구는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사숙조님과 사숙님 말이예요. 두 분은 둘다 아주 잘생기신 분들이지만 서로가 닮은 점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모자지간에 닮은 점이 없다는 것 은 이상하지 않겠어요?" (……?) 백운생은 다시 한번 마음에 커다란 혼란을 겪을 뻔했다. 그러나 무구가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는 것을 보고 역시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이상하지만 사실 더욱 이상한 것이 있소." 무구는 웃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뭐죠?" 백운생은 대답했다. "우리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인데 도무지 끝이 나타 나지 않으니 이상한 것이 아니겠소?" 무구는 알 수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천천히 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예요?" 백운 생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소. 나는 원래 빨리 장경각에 들러서 저녁은 나의 집에 가서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늦어지다니 이상하지 않겠소?" (……?) 무구는 일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생각하다가 문득 백운생의 내심을 파악 한 듯 웃으며 입을 가리며 말했다. "호호, 알겠어요. 그럼 이제부터 제가 사숙님을 빠르게 모셔가면 되지 않 겠어요?" 백운생은 눈을 크게 떴다. "그대가 설마 가능하겠소?" 무구는 가볍게 웃었다. "그럴 것 같아요." 순간 부드러운 팔 하나가 허리를 감싸는가 싶더니 백운생은 갑자기 자신 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다음 순간 이미 그의 신형은 무구의 손에 이끌려 거의 쏜살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 다. 무구는 백운생을 안고도 한 걸음에 이삼 장씩 앞으로 쑥쑥 나아가고 있었 는데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백운생은 놀라서 다 시 소리쳤다. "아, 아니, 그대로 벌써 일위도강의 경공술을 펼칠 수가 있다는 말이오?" 무구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위도강은 상승의 경공술이기 때문에 저는 아직 펼칠 수가 없어요. 제 가 지금 펼치고 있는 것은 연화신법(蓮花身法)이라고 하는 거예요." 백운생은 이제 겨우 열 살 정도나 딘 무구의 경공술에 대해서 거듭 감탄 을 느끼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이윽고 아미파의 본채에 이르렀다. 장경각은 바로 아미 파의 서고를 말하는 것으로 말할 것도 없이 아미파의 본채에 있는 것이 당 연한 일이었다. 아미파. 당금에 이르러 아미파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물론 장문방장(掌門 方丈)이겠지만 그 외에도 두 명의 대장로(大長老)들이 있었다. 도겁(渡劫) 과 도난신니(渡難神尼)로 불리우는 그들은 장문방장인 도액신니(渡厄神尼) 와 함께 아미파의 삼대신니(三大神尼)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이었다. 먼 발 치에서 어깨 너머로 두어번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백운생은 아직 그 삼대 신니를 본 적이 없었다. 비록 아미파의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직 접 뵌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대신 백운생이 간혹 만났었던 사람들은 바로 오륙십세의 노비구니들의 배 분인 일자배(一字輩)의 사태들을 더러 만났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아미파 의 제이대 제자들은 대부분이 아미파에서 장로의 직위를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백운생의 어미니 일심사태는 비록 대우를 받고 있기 는 하지만 아미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장로라고 하지 는 않는다. 아미파 본채의 무수한 건물들은 대개가 나무로 축조된 것이었고, 그 가운 데 석조 건물들이 있기도 하고 흙으로 빚어서 만든 건물들도 있었다. 아미 산의 위치 좋은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본채는 넓고 비슷한 경사지 위에 그야말로 끝도 없이 건물들이 지어져 있었다. 원래 이러한 곳에서 하나의 건물을 쉽게 찾아낸다고 하는 것은 낯익은 사 람들이 아니고는 다소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장경각을 찾는 데 있어서 는 그리 낯익은 사람이 아니라도 쉽게 찾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 면 장경각은 이곳에서도 그리 많지 않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석조건물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경각을 굳이 어렵게 화강암으로 지어 놓은 것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었다. 무구의 안내로 장경각의 입구에 이르자 회색 승포를 걸친 비구니들이 길 을 막고 물어왔다. "아미타불, 무슨 일이오?" 무구는 배분이 낮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주 깍듯이 예를 다했다. "저희 사태께서 이분 사숙님을 장경각으로 안내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아미파는 넓어서 비록 오랫동안 살아간다고 해도 서로간에 이름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한 법이었다. 비구니들은 즉시 백운생의 아래위를 바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분 시주가 그대의 사숙이라는 말인가?" 무구는 대답했다. "예, 바로 저희 일심사태님의 아드님인 백사숙님이세요." (……!) 그때였다. 문득 건물의 안에서 하나의 늙수그레한 노파의 음성이 들려왔 다. "어서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라." 장경각을 지키던 비구니들은 그 말을 듣자 즉시 만면에 지극히 공손한 표 정을 떠올리며 두말하지 않았다. 일제히 좌우로 길을 비켜서며 합장하고 불호를 외우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백운생은 무구가 다소 망설이는 것을 보고 먼저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 갔다. 이 석조 건물은 밖에서 보기에는 상당히 웅장하고 미려하게 생긴 훌륭한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역시 오래 묵은 책들을 쌓아두는 곳이라서 일단 안 으로 들어서자 퀴퀴하고 좋지 않은 냄시가 코를 찔렀다. 그것은 비록 다소 거추장스럽기는 해도 이곳 아미파에서는 불문의 본분을 어기지 않고 많은 불경서적들을 보관하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백운생은 워낙에 어렸을 때부터 기이할 정도록 서책을 좋아하여 그런 썩은 서책의 냄새가 아미 천하의 아름다운 향기처럼 즐겁게 느껴졌다. 전에는 정현스님이 더러 몇 권의 서책들을 가져다 주곤 했지만 이렇게 직 접 백운생이 장경각으로 와본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소 어둠침침한 건물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대략 수 십만 권은 될 것 같은 막대한 분량의 서책들이 수많은 서가들의 위에 가지 런히 꽂혀 있었다. 물론 불경서적들은 불과 일부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세 상의 잡서가 아니면 무공기서들인 것이다. "아미타불, 무슨 책을 찾으시오?" 노비구니. 나이는 대략 육십세를 넘은 것 같았다. 마치 왜소하고 쭈글쭈 글한 노파를 연상시켰는데 그 눈빛과 표정은 일견 그렇게 평온하고 온화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이 노비구니에게서는 윗사람다운 위엄들이 느껴지지 않 고 있었는데 그런 평범하면서고 고요한 모습은 백운생에게 절로 감탄을 자 아내게 했다. --계속-- #5349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3장 10/30 01:31 279 line 제3장. 천축(天竺)의 고서(古書) 무구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그 노비구니에게 물었다. "저어, 실례지만 사백조님께서는 혹시 장경각의 수좌(首座)이신 일혜사태 (一惠師太)님이 아니세요?" 무구도 아마 이 노비구니를 처음 대하는 모양이었다. 그 말에 노비구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미타불, 네가 매우 똑똑하구나. 그래, 노니가 바로 일혜이다. 너는 바 로 정현에게 사사를 받고 있는 무구라는 아이겠지?" 무구는 장로급 신분의 상대가 자신을 알아주자 즉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 를 숙였다. "예, 사백조님." 일혜사태는 다시 백운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무슨 책을 보러 왔는가?" 백운생은 공손히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예, 저는 불경들을 조금 보러 왔습니다." "불경을?" 일혜사태는 다소 의외인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책의 공부라고 하 는 것은 이곳 사찰에서도 예외없이 지루한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사찰의 규 정에 정해져 있는 불경독송회 등의 경우가 아니면 스님들은 일부러 불경을 찾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것은 불경을 공부한다는 자체가 고리타분한 느낌 을 주기도 하지만, 아미파의 불교가 대승불교의 선종을 따르고 있는 것이 어서 불경을 공부하지 않아도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생각 때문 이었다. 물론 그 이론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아미파의 제자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대개가 무공비급을 원하고 그 밖의 무거운 내 용이 아닌 잡서를 보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일혜사태는 나이도 어린 백운생이 불경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자 내심 기특하게 생각하 고 있는 것이었다. 백운생은 그것도 모르고 다소 변명조로 대답했다. "예, 다른 불경서적들은 밖에서도 구할 수가 있었지만, 천축의 고서들은 따로 구할 수가 없어서 항상 그리고 있던 중입니다." 이에 일혜사태는 더욱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천축의 고서? 그럼 벌써 천축의 범어(梵語)를 해독할 수가 있다는 말인 가?" 백운생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예, 정현스님께서 졔게 가르쳐 주었지요." "음, 원래 정현은 일진(一塵)의 문하이니 천축어를 배웠겠지." 일진사태. 정현스님의 사부이자 무구의 사조인 일진사태는 바로 반야당(般若堂)의 수 좌장로로서 전문적으로 불경서적들을 연구하는 장소의 수장이었다. 따라서 원래 불문에서도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천축어를 당연히 알고 있는 사람 이었고, 그것을 제자인 정현에게 가르쳐 주었고, 이에 따라 유별나게 서책 을 좋아하는 백운생의 독촉에 못 이겨서 정현은 그만 자신이 어렵게 배운 천축어를 그에게 모조리 가르쳐 주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천축어를 배우고도 아직 이렇다 할 천축의 불경 원본을 하나 보지 못한 백운생은 절로 몸이 달아 있는 참에 마침 그 서책들을 빌려보려 는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하게 생각되는 그의 그러한 생각들 은 충분히 다른사람들의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한 것이었다. 일혜사태는 이해가 가는 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으면서도 종래 믿 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고, 다소 경악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 이 중원의 한자도 어려워서 보통 사람에게는 그것을 깨우친다는 것이 어렵 기도 하거니와 천축의 범어는 최소한 그것 이상으로 어려워서 중원인에게 는 그것을 통달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것이었다. 원래 천하에 천축 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문 것은 당연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당금의 천하 유림에도 천축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대석학들에 한하며 그것이 매우 흔치 않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게도 이 제 겨우 열두 살 짜리 소년이 벌써부터 천축어를 통달했다니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기실 일혜사태는 직접 자신이 듣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서 한번 시 험해 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일 백운생이 지금 거짓말로 허풍을 떤 것이라면 그녀는 다소 실망해 할 생각이었다. 일혜사태는 담담하게 웃으며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럼 저쪽으로 가 보세. 거기에 천축의 불경 원본들이 있다네." 두 사람 은 말없이 일혜사태의 뒤를 따라서 서가의 주위를 이리저리 몇 번이나 복 잡하게 돌고 돌았다. 그러자 과연 그들의 눈앞에 드러나 것은 구석진 자리 에 위치하고 있는 그야말로 최고로 오래된 서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였다. 일혜사태는 걸음을 멈추고 그 서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여기에 천축의 원본들이 있다네. 비록 귀중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지만 그대가 망실하지 않고 다시 가져올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빌려줄 수가 있네." 백운생은 얼굴이 다소 상기되었다. 그야말로 자신이 바라고 있던 서책들을 지금 눈앞에 생생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넙죽하게 먼저 예를 올린 그는 이어 열심히 낡은 서책들의 제목들을 살피 기 시작했다. 생각만 같아서는 이곳의 서책들을 모조리 그의 모옥에 옮겨 놓고 밤낮없이 서책의 내용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곳 의 원본서적들은 워낙에 귀중한 것들이라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 다. 백운생은 자신이 이곳에서 대략 두어 권의 서책을 빌려갈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문득 그의 시야에 아주 두텁기 이를 데 없는 서책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그것 역시 천축의 원본이었는데 다른 서책들과는 달리 그 서책의 두 께는 얼마나 넓은지 가히 한 뼘이나 되는 것 같았다. 내용이야 어쨋든간에 서책에 대해서 욕심이 들끓고 있던 백운생에게는 그 엄청난 분량에 우선 욕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백운생은 더 이상 생각해 보지도 않고 즉시 그 서책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것을 빌려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은연중 백운생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던 일혜사태의 시선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다소 눈살이 찌푸러졌다. 원래 서책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이 남에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두꺼운 책자를 들고 다니는 일은 흔하기 때문이었다. 일혜사태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 서책을 뽑아들고 말했다. "이것은 아주 희귀한 것이고 본파에서도 하나뿐이며 천하에도 다시 있을 지가 의문시되는 귀중한 책자이네. 그래, 이 서책의 제목을 읽을 수가 있 겠는가?" 백운생은 금방 일혜사태의 태도를 보고 쉽게 빌려갈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난감한 기색을 떠올렸으나 이내 안색을 풀고 일혜사태 의 손에 들린 서책의 제목을 살폈다. 과연 일혜사태의 말은 헛된 것이 아 니어서 그 책자는 보면 볼수록 펑범한 것이 아니라 제본부터가 특이했다. 겉표지는 두꺼운 양피지로 만든 것이고, 내부의 종이도 특수한 검은 천에 글씨를 써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일견하기로도 그 연대가 매우 오래된 것 같았다. "용화보경(龍華寶經)이로군요." 백운생의 말에 순간적으로 일혜사태는 눈빛을 번쩍 빛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들고 있는 서책에는 천축어 가운데에서도 고어(古語) 가 적혀 있는 것이었다. 천축어를 배우기는 어렵지만 천축의 고어를 통달 하기는 더욱 어려운 법이었다. 천축의 고어를 통달했다고 하는 것은 물론 천축어를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분명히 백운생의 말대로 그 서책의 표지 에 적혀 있는 글자는 용화보경이라는 것이었다. 일혜사태는 아미파에 있는 불과 몇 명 되지 않는 천축의 고어를 알고 있 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백운생이 쉽게 그것을 알아뭊추자 내심 크게 놀라고 말았다. (천축어를 알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군.) 이때 백운생은 이미 그용화보경을 빌리는 것을 포기했는지 다른 서책들의 표지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을 보고 일혜사태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용화보경을 백운생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을 빌려 가도록 하게." 그 말에 백운생은 다소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것은 천하에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아주 귀중한 것이 아닙 니까?" 일혜사태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것일지라도 이러한 책자가 있는 이유는 누군가에 게 읽혀지기 위해서이네. 자네는 보아하니 천성적으로 학문에 재능을 지닌 사람인 모양이니 이것을 가져다가 보고는 다시 가져오기를 바라네." 백운생은 노비구니의 의도에 감사했다. 내심 마음으로 포기하기는 했어도 한편으로는 용화보경에 대한 미련이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섭섭하던 참이 었다. 더 이상 사양할 겨를도 없이 백운생은 즉시 고개를 숙이며 넙죽 그 서책을 받아들고 말았다.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진 책자인지 막상 들고나자 보기보다도 더욱 무거가 나가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반드시 잘 간수하여 망가지지 않도록 돌려드리도록 하겠습 니다." 일혜사태는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그리고 내 나중에 제자들에게 일러 놓을 테니 그대 들 두 사람은 언제든지 이곳에 와서 서책을 빌려가도 관찮네." 백운생에게는 그야말로 더할 수가 없는 기쁨이었다. "예, 예." 그가 수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자 문득 옆에서 무구가 귓속말로 가까이 다 가와서 말했다. "사태께서 저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이곳에 있는 무공서적들 가운데 몇 권 을 빌려가도 괜찮지 않겠어요?"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무공 서적에는 관심이 별로 없으니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소." 이 에 옆에서 들었는지 일혜사태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불경이라는 것은 얼핏 느끼기에는 고리타분한 것 같지만 거기에는 실로 그만한 그치가 있는 것일세. 무공 서적이라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본 파에는 소림사와는 달리 천고의 절예 비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불경 서적을 보는 것이 훨씬 이로울 것일세." 무구는 내심 그 말에 찬성하 지 않는 눈치였지만 백운생은 달랐다. 그는 매우 공감하고 기뻐하여 즉시 넙죽 인사를 하고 두꺼운 용화보경을 안고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한시라 도 빨리 자신이 겨우 빌린 서책의 내용을 읽고 싶은 욕심이 일고 있는 것 이었다. 무구는 이미 자신의 역할을 다했으니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백우냉 은 내심 그녀가 빨리 돌아가고 자신은 역시 빨리 모옥으로 돌아가서 용화 보경의내용을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 같이 일었지만, 실로 그런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미안스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이런 귀한 서책을 구하게 된 것은 그녀의 도움이 컸던 것인데 이대로 모른 척하 고 보낼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같은 아미산에 살고 있는 처지이고 또한 같은 아미파의 소속이라고 해도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보게 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인생(人 生)이란 그와 같이 비바람이 일면 허무하게 떨어져 내리는 낙화(落花)처럼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는 운명의 희롱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백운생은 요즈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인생의 깊은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 고 있던 중이었다. 따라서 즉시 자신의 헛된 욕심을 버리고 생각을 달리했 다. 그는 웃으며 적극적으로 무구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리 바쁜 것 같지도 않은데 지금 나와 함께 모옥으로 가서 함께 식사라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무구는 다소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것을 보고 백운생은 다시 말했다. "사실 난 지금 이 무거운 책을 들고 모옥까지 가기가 고생이 될까봐 그러 는 것이오." 그 말에 무구는 가볍게 웃었다. "흥, 제게 정말로 일을 맡기시려는 것이로군요." 사실 무구 역시 백운생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일심사태를 모시 고 있는 몸으로서 사사로이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 렇듯 백운생이 자신의 할 일을 만들어 주자 절로 기꺼운 마음이 들었던 것 이다. 백운생은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말로 나의 성의를 무시하고 그냥 돌아갈 생각이오?" 무구는 새침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사숙님의 성의는 무시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사숙님이 필요하다 면 기꺼이 책을 들어드릴 수는 있어요." 백운생은 웃었다.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군." 원래 두 사람의 사이에는 엄격한 배분의 차이가 있어서 무구가 백운생을 깍듯하게 대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백운생 은 정식으로 출가한 제자가 아니라 속가의 제자여서 출가제자들을 존경하 고 공대하도록 되어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존칭 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백운생은 다시 물었다. "정현스님이 지금 우리 어머니와 함께 계시지 않겠소?" 무구는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럴 거예요." 두 사람은 이미 백운생의 모옥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해가 서녘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미 산은 워낙에 크고 험준하여 백운생이 비록 정현스님과 무구의 신법으로 도 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한번 왔다가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 이었다.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서녘의 누렇게 물들기 시작하는 기운을 보고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우리는 좀더 빨리 가야 하지 않겠소?" 무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순간 하나의 부드러운 팔이 허리를 휘감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백운생은 갑자기 전면의 지면이 휙휙 다가오기 시작함을 느꼈다. 그의 몸은 허공에 들려 있었다. 무구가 다시 책과 그의 몸을 안고 신법을 펼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비록 두 번째라고는 하나 이미 백운생은 그녀의 이러한 무공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백운생은 그녀의 몸에서 한 줄기 유향(幽香)을 느끼게 되었다. 아까는 신법의 경이적인 현상에 놀라서 미처 몰랐던 그런 미미한 향기였다. 향기는 아주 기분 좋은 것이었고 왠지 가슴을 울렁거리 게 만들었다. 무구는 여자이고 또한 여자는 남자에 비해 빨리 성숙되기 때 문일 것이다. 황혼이 지는 하늘 아래 모옥은 여전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오늘의 황혼 은 유난히 맑고 아름다운 것 같았다. "여기이오." 백운생의 말이 떨어지지마자 무구는 그의 몸을 마당에 내려놓고 자신도 신형을 멈추었다. 막상 그녀를 자신의 집에 데려오기는 했지만 백운생은 다소 쑥스러운 기 분이 되었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모옥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초라하지 않소?" 확실히 백운생이 살고 있는 모옥은 새로 지은 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멋지 게 지어진 목조건물도 아니었다. 다만 진흙을 발라서 벽을 만들고 푸성귀 를 이어서 지풍을 덮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낡은 모옥이었다. 그러나 무구는 잠시 멍하니 모옥의전경과 그 뒤의 아득하게 늘어지는 황 혼의 노을빛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조금도……. 아주훌륭한 곳이예요." (……?) 백운생은 느닷없는 말을 듣게 되자 다소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긴, 이곳은 전에는 어떤 나무꾼이 살던 곳이라고 하던데 좋은 약초를 캐어서 부자가 되어서 이사갔다고 하더군." "……" 백운생은 멍하니 꿈결을 더듬는 듯한 표정의 그녀를 향해 말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갑시다. 아직 치우지는 않았지만. 식사를 하려면 일단 은 그래야 하지 않겠소?" 헌데 무구는 그제서야 문득 정신을 차린 듯 다소 흠칫하더니 고개를 내저 었다. "아니예요. 저는 이제는 그만 돌아가봐야 해요." (하긴 그렇겠군.) 그렇다 지금 사위는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만일 그녀가 지금 돌아가지 않는다면 필시 사장들로부터 꾸지람을 들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백운생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결코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 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잠깐만 기다리시오. 내가 금방 밥을 지을 테니 그것을 조금 들고 가지 않겠소? 난 솔직히 이대로는 보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이에 무구는 잠시 곤란한 듯 생각하다가 문득 눈빛을 반짝 빛냈다. "그럼 그럴까요?" 백운생은 마음이 다소 불안해 있었는데 의외에도 그녀로부터 쉽게 승낙의 기미를 느끼게 되자 절로 입이 벌어졌다. "글거시오. 만일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나중에 정현스님께 다 해명을 해 드리겠소." "……" 무구는 가볍게 웃을 뿐 침묵했다. 백운생은 즉시 그녀의 옷깃을 잡아서 방으로 끌었다. "자,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대개 속에 어떤 의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여자를 쉽게 방으로 끌지 못할 것이나 백운생에게는 결코 어두운 생각이 없었다. 그의 마음은 순수했다. 물론 나이가 어리기 때문인지 무구는 순순히 그가 이끄는 대로 그의 방 앞으로 왔다. 방문을 열자, 순간, 다소 훈훈한 느낌을 주는 방 안의 냄새와 정돈된 침 구들, 그리고 한족에 잔뜩 쌓여 있는 많은 서책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구는 잠시 서서 그 서책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백운생은 그것을 보고 다소 겸연쩍은 듯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워낙 게을러서 항상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라오.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소." 무구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아주 좋은 것 같아요." 백운생은 웃었다. "밉지 않다니 다행한 일이오." 이어 그는 손으로 방 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어서 잠시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려 주겠소? 내 금방 식사를 마련해 가지 고 돌아올 테니." 헌데 무구는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아니예요. 저는 들어가지 않겠어요. 대신 사숙님께서 안으로 들어가 계 세요." 백욵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무슨 말이오?" 무구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식사는 바로 제가 지어드리겠어요. 저는 사숙님의 진지상을 받아줄 수가 없으니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저는 지금 곧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어요." 백운생은 의아해졌다. "아니, 그건 왜 그렇소?" 무구는 대답했다. "그건 제가 아직 가지 않고 있는 것은 식사를 지어 드리기 위해서이니까 요." --계속-- #5350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4장 10/30 01:32 279 line 제4장. 武林至尊 백운생은 무구의 의견에 ㄸ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상대로 하여금 수긍하게 하고 따르게 하는 청정한 심성이 그녀에겐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백운생은 이제 그녀가 밥상을 차려오면 함께 식사를 들게 될 것이라고 생 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같지 않았다. 무구는 쌀을 씻고 반찬을 장만 하며 저녁식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어스름 땅거미가 몰려올 즈음에 밥상 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서서는 다만 안에 들여다 놓고 자신은 밖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왜 들어오지 않고 그렇게 서 있는 것이오?" 백운생이 묻자 무구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저는 나중에 돌아가서 먹겠어요." 백운생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나를 위해 여태 음식을 만들었다는 말이오?" 무구는 대답했다. "제가 사숙님을 돌보아 드리는 것은 저의 의무예요. 하지만 저는 여기에 서 식사를 할 수는 없어요. 만일 그런다면…… 그런다면 저는 나중에 꾸중 을 듣게 될 거예요." 백운생은 다소 어이가 없는 기분이었다. 자신은 무구 를 위해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기실은 그녀를 부려먹은 꼴이 되고 만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서 한 일을 돌아가서 말하지 않는다면 정현스님은 모르지 않겠소?" "저는 굳이 그런 일을 하지 는 않겠어요." 백운생은 그녀의 뜻이 굳은 것을 보자 더 이상 권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우선 그 문지방에 좀 앉아 있는 것이 어떻겠소?" "……" 그 말에 무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몸을 옆으로 돌려서 문지방에 내려앉았다. 이어 맑은 시선으로 백운생이 식사를 하는 광경을 묵묵히 지 켜보기 시작했다. 백운생은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일면 자신이 식사를 하는 광 경을 지켜보는 그녀의 시선이 너무나도 진지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왠지 이 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녀는 한손으로 입술과 턱을 가리고는 물빛같은 시선으로 다소 넋나간 듯이 그가 식사를 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연히 내색을 해서 그녀의 그런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다소 서둘러서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는 조금 얼굴이 붉어져서 그 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거, 나 혼자서 식사를 해서 미안하오. 정말로 맛있는 식사였소." "……" 무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입을 가리며 눈짓으로 가볍게 웃을 뿐이었 다. 하지만 백운생이 밥상을 들고 일어서자 어느새 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 의 밥상을 빼앗아 드는 것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무예라고 말할 수가 있었 다. 백운생은 아주 ㅃ르고 능숙한 그녀의 솜씨에 밥상을 도로 되찾을 엄두 가 나지 않았다. "이것도 제가 해드릴께요." "……" 서둘러서 부엌으로 향하는 무구의 회색 승포를 입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운생은 문득 다소 넋나간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잠시 곰곰 히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젠 가겠어요." 무구는 설거지마저 깨끗하게 해놓고 말쑥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백운생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묶어둘 수 있는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 았다. 따사서 다소 주저하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저어…… 한 열흘 후쯤에는 서책을 돌려줘야 하는데 혹시 그때 다시 와 주지 않겠소?" 무구는 만면에 방긋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겠어요." "고맙소." "……" 무구는 잠시 그를 보다가 돌아갔다. 이제 사위에는 안연한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백운생은 무구가 돌아가자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어하던 일을 하기 시작 했다. 우선 방 안의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유등에 불을 밝히고 서탁 위에 자신이 조금 전에 빌려온 그 천축의 고서를 올려놓았다. 이 용화보경이라 는 천축의 고서는 매우 무거워서 무공을 연마하지 않은 백운생에게 있어서 다소 힘에 부칠 정도였다. 하지만 일단 서탁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 나자 백운생은 다른 모든 생각들을 잊어버리고 순수하게 서책의 내용에 대해서 몰입하여 들어갔다. 용화보경(龍華寶經). 그것은 한마디로 불교에 전하는 미래세에 부처님이 되어 이 땅에 나타나게 될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행적과 불법을 적은 것이 었다. 백운생은 이미 불경을 수두룩하게 섭렵하기는 했어도 실로 이와 같은 천 축의 원본은 처으믕로 대하는 터라 왠지 다른 서책들과는 다르게 의미심장 한 것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트굿한 재질로 만들어져 있고 그에 의해서 무수한 세월을 이겨온 그 무게가 왠지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 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그의 나이 열두 살, 한창 감정이 여려서 쉽게동하기 쉬운 나이였 다. 얼핏 보기에는 설사 한밤이 모두 새도록 그의 독서는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의외에도 그러한 예상은 쉽게 부서졌다. 백운생은 느닷없 이 독서를 중단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밖에서 그를 불렀기 때 문이었다. "안에 있느냐?" 이 음성은 실로 기이했다. 원래 백운생은 독서에 한번 몰두하게 되면 옆 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책벌레 타입입이었다. 그 런데 다소 지나치리만큼 심하게 서책에 몰두하고 있었건만 백운생은 금방 그 음성을 알아차리고또한 정신이 번쩍 들게 되었다. 그것은 그 음성이 마치 사람의 귓속을 예리하게 진동시키는 듯한 가늘고 강렬한 힘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운생은 금방 그 음성이 별로 낯설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다소 의외의 기분이 드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손님이 그의 집을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백운생은 일어서서 즉시 방문을 열었다. 밖은 이미 칠흑같은 어둠으로 휩 싸여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어둠 속에 한 덩이의 금덩어리가 빛나듯이 문 밖에는 한 사람의 금의 노인이 마치땅 속에서 솟아난 듯이 서 있었다. "나를 벌써 잊지는 않았겠지?" 금의 노인은 만면에 부드러운 웃음을 가득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아까 그를 찾아오겠다고 하던 그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백운생은 갑자기 알게 된 자신의 내력이 다소 혼돈스러워서 그런 얘기를 기억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자신의 친할아버지라고 생각을 하자 갑자 기 눈앞의 이 노인에 대해서 친근감이 드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마당 끝에는 예의 그 홍흑백(紅 黑白)의 삼인(三人)이 전과 같은 태도로 서 있었다. "아니, 나를 계속 이렇게 세워둘 참이냐?" 노인의 말에 백운생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밖으로 나와서 안쪽으로 인 도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방 안을 밝히는 유등과 서탁 위의 책자를 보고는 역시 주변의 가득 쌓아올린 서책 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며 백운생을 향 해 말했다. "우리 백씨일문에서는 대대로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었지. 하지만 이런 학 문 외에도 특히 무학 방면에 있어서 더욱 밝ㄴ의 실력이 발휘되었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백운생은 즉시 노인을 향해 대례를 올렸다. 그리고는 무 릎을 꿇고 앉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모릅니다." 노인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하긴, 여태 자신의 신분도 모르고 자라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이러 묵 묵히 백운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질문했다. "너는 혹시 너의 선친의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선친! 이 소리를 듣자 백운생은 다소 놀랐다. "그럼, 저의 부친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다는말씀입니까?" 노인은 이마에 골을 깊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그렇다. 그 일은 나와 관련이 되었지. 그래서 너의 어미가 이 렇게 이런 곳에 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마도 그 아이는 나를 무척이 나 원망하는 것 같더구나." 노인은 말과 함께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백운생 역시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억눌린 듯한 무거 운 것이었다. 기실 스스로의 신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부친에게 있어 서 어딘가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을 듣게 되자 그간에 다소나마 품었던 어떤 기대감들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서글퍼지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이 노인의 말에 의하면 그 선친과의 사이에 어떤 마찰이 있었고,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도 그의 선친이 희생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 에 자기의 자식을 일부러 망가뜨리는 부모는 없는 법이므로 비록 어쩔 수 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당하는 입장인 그의 어머니는 실로 암담한 기 분이 들었을 것이고, 이런 곳에서 출가한 것이 정당하게 생각되었다. 백운생은 이 노인을 질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기왕에 끝난 일이라면 굳이 다시 자신의 선친의 과거를 들어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 다. 아직 그의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고 이렇게 할아버지도 살아 계신다. 선친의 일은 그들에게 맡겨도 충분할 것이다. 백운생은 암암리에 무거운 한숨을 지차 내쉰 다음에 말했다. "저는 몰랐었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지. 너의 선친은 사실은 당시 내가 모종의 일을 하기 위해 서 심부름을 보냈던 것이었단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갑자기 의문스러운 실종을 하고 말았지." 노인은 안면에 상당히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그것이 벌써 십년, 아니 그보다도 더욱 오래되었군. 우리는 온갖 조사를 해본 끝에 그가 죽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너의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는 것이지만 혹시 너도 나를 미워하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이에 노인의 안면이 환하게 펴졌다. "그럼 혹시 나를 할아버지라고 불러 주겠느냐?" 백운생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할아버님."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할아버님…… 할아버님이라…… 항상 서책만을 가까이 하고 있어서 네가 나에게 그런 존칭을 쓰는 것이로구나. 나는 격의없는 말을 듣고 싶지만 우 선은 억지로 할 수가 없는 것이겠지." "……" 노인은 다시 물었다. "너는 네 선친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릅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럴 테지. 자, 잘 듣거라. 네의 선친의 이름은 바로 백불범(白不凡)이 었다. 의박운천(義博雲天)이라는 별호가 항상 따라다녔지." 의박운천 백불범. 자고로 무인들의 별호라고 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지 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성품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별 호의 내용 그대로 천하의 대의(大義)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면 가히 대장부로서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요, 따라서 백운생은 그 별호를 되뇌이면 서 왠지 가슴이 가득한 느낌을 받았다. 노인은 말을 이었다. "네 어미 문인한상(聞人寒霜)과는 매우 잘 맞는 한쌍이었지. 그리고 내 이름은 백환성(白幻腥)이라고 한다." 백운생이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백환성, 눈앞의 이 노인의 이름을 알게 되자 백운생은 다시금 더욱 친근해 진 느낌이었다. 동심지존 백환성, 특별한 별호가 있었겠지만 이미 무림의 지존의 신분이기 때문에 다른 별호는 버려지고 동심지존이라는 아호만이 따라다닌다고 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자신의 친할아버지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백운생은 다소 혼돈스럽고 들뜨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백환성은 잠시 그를 보고 있다가 웃으며 다시 말했다. "동심각에는 지금 너의 숙부들과 사촌형제들이 함께 살고 있단다. 그들은 나름대로 이미 명성을 누리고 있는 실정이지. 따라서 나는 이번에 너를 데 려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지만, 네 어머니의 반대로 일단은 그냥 돌아가 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내 반드시 나중에 너를 데리러 올 것을 약속하마." "예." 백운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다소 들뜨는 기분이기는 해도 직접 이곳을 떠나 동심각으로 가고 싶 은 마음은 없었다. 이곳은 실로 그의 삶의 터전이었다. 백운생은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문득 백환성은 품속에서 한 권의 두툼한 양피지 책자를 꺼내서 백운생에 게 건네주었다. "백씨일문은 무림의 제일세가이니 너도 글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무공을 익혀야 한다. 이것은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무공비급이니 내가 떠나간 이후에 차례대로 연성하도록 해라." 이 양피지 책자는 용화보경보다는 못해도 상당히 부피가 두터웠고, 또한 오래된 것이 아닌 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마도 백환성은 자신의 손자 에게 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것을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백운생이 받아서 겉표지를 살펴보니 <동심비전(同心秘傳)>이라는 글자가 전자체로 씌어져 있었다. 백운생은 사실 무공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 에 거의 무심코 그 책자를 받았다. "단, 이것을 완전히 기억한 후에는 태워 버리도록 해라. 이 비급을 타인 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이어 백환성은 품속에서 다시 하나의 작은 호로 병을 꺼내서 배운생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바로 동심환(同心丸)이라는 것인데 무공을 배우는 데 있어서 매 우 필요한 것이다. 네가 만약 이 네 알의 동심환을 한 달에 한 알씩 복용 한다면 빠른 진전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 호로병의 부근에서는 은은한 단향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백운생 은 대답을 하며 그것을 열어보지도 않고 품속에 집어넣었다. 사실 그 도임 환은 매우 희귀한 것으로 내공을 연성하는 데 있어서 지극히 귀중한 무가 지보인 것이었다. 백운생이 관심이 있건 없건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백환성은 담담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런 내 손자의 골격을 한번 만져 볼까?" 그러다가 문득 그는 손을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아냐, 아냐. 볼 필요도 없겠지. 우리 백씨 일문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래야 하니까." (……?) 백환성은 이어 밖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백운생이 따라 나가며 물었다. "지금 가시려고요?" 백환성은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그래. 나는 사실 조금 바쁘단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 너와 함 께 있을 수가 없지. 하지만 내 네가 무공을 연성하고 있노라면 반드시 찾 아와서 동심각으로 데려갈 것을 약속하마. 알겠느냐?" "예, 할아버님." 배운생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하자 백환성은 손자의 얼굴이 사랑 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방문을 열었다. 밖에 예의 그 삼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백환성은 다시 신형을 멈추며 입 을 열었다. 하지만 그 음성은 다소 기이한 것이었다. 아주 가늘고 또혓한 음성이었는데 유독 백운생의 귀에서만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백운생은 즉시 그것이 전음입밀의 수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참, 저들 세 사람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구나. 앞으로 너와 자주 대면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음, 저 세 사람은 바로 이 할아버지의 최고 심복들로 동심각의 삼단(三團) 의 단주들이란다. 저 여자는 천랑단(天狼團)의 단주 팔면관음(八面觀音) 해일화(海一花)이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철사단주(鐵師團主) 벽력부 (霹靂斧) 혁련철수(赫連鐵樹), 그리고 흰 옷을 입은 사람은 금룡단주(金龍 團主) 묘수신통(妙手神通) 문인중문(聞人重文)이다. 그런데 그 중 나중에 말한 저 흰 옷을 입은 사람은 바로 너의 어머니의 오라비가 되는 사람이니 너의 외삼촌이기도 하지. 잘 있거라." 백환성의 신형은 마악 따응로 내려 서는 듯한 순간에 마치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 당 끝에 서 있던 그 삼인의 신형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 다. 백운생은 일시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정현스님이나 무구의 무공을 보아왔던 터이지만 이러한 신법은 그 격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흰 옷을 입은 사람은 바로 너의 어머니의 오라비가 되는 사람이니 바로 너의 외삼촌이기도 하지. 텅빈 어둠 속에 할아버지의 음성이 아직도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랬구나!) 백운생은 그제서야 그 백의중년인이 자신을 향해 아는 척을 했던 일이나 그의 용모가 어머니와 매우 닮아 있었던 사실에 수긍을 할 수가 있었다. 뜻밖에도 그 사람은 바로 그의 외삼촌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생각 외로 동심각에서의 일은 다소 엄격하게 규율이 유지 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외삼촌이 어머니를 보고 도 전혀 아는 체도 할 수가 없는 것을 보면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 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이 모두 떠나간 지금 백운생은 왠지 뜨겁게 혈육의 정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본 혈육들. 어쩌면 용화보경이 있다고 해도 백운생은 설레임에 밤을 지새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말했던 가문의 전통은 조금 의심이 가는 사항이었다. 왜냐하 면 백운생은 가히 전형적인 책벌레였다. 친할아버지를 보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운생은 방 안으로 돌아와서 서탁 위에 펼쳐 놓은 책을 대 하게 되자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이 절로 그 앞에 않게 되었고, 이내 그 길 로 밤을 꼬박 독서삼매경 속에서 지새우게 되었다. 이런 사람의 피 속에 어떻게 무인의 혈기가 숨어 있다는 말일까?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한밤을 새고 나서 하얗게 밀려드는 새 벽의 여명을보게 되면 유난히 피로해지기 마련인 것은 책벌레 또한 마찬가 지인 모양이었다. 아니, 그가 무공을 몰라서 체력이 쇠약하기 때문일까? 백운생은 밤을 지새고 새벽이 되자 그대로 지쳐서 쓰러져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저녁 무렵에 자고 일어났을 무렵이었다. 머리맡에 뜻밖에도 매우 낯익은 사람 하나가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계속-- #5351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5장 10/30 01:32 288 line 제5장. 첫사랑 무구, 바로 그녀였다. 백운생은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가 이 사실에 매우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입을 열어 물었다.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오?" 이에 무구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 하고 웃었다. "꿈은 절대로 아니예요." 백운생은 다시 물었다. "그럼 현실이라는 말이오?" 무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현실이예요." "……?" 백운생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무구는 가볍게 웃더니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오늘부터 제가 사숙님의 시중을 들어 드리라고 하셨어요. 혹 시 제가 역시에 오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백운생은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현스님이?" 무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는 어젯밤에 사숙님과의 일을 상세하게 말씀을 드렸어요. 그 런데 오늘 아침에 사부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 요." 아마도 정현스님은 자신의 나이가 많고 해서 백운생을 생각해서 그녀더러 시중을 들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백운생으로서는 물론 대만족이었다. 세상에 이와 같은 아름다운 시종을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정현스님께는 항상 왠지 미안하고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조금 그러한 부담이 덜할 것 같았다. 무구는 다시 말을 이어서 말했다. "만일 사숙님께서 저를 마다하신다면 저는 물론 다시 여기에 오지는 않겠 어요."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만일 그대가 나의 시중을 들어주거나 매일 함께 있어주기만 해도 항상 즐거울 것이오." 이에 무구는 다소 안심이 되는 듯 환하게 웃음을 떠올렸다. 백운생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헌데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아침부터 여기에 와 있었다는 말이오?" 무구 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백운생은 어이가 없어하며 물었다. "그럼 왜 나를 깨우지 않았소?" 반쯤 열린 창문을 보니 이미 은은한 황금빛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구는 대답했다. "사숙님께서 매우 피곤하게 주무시는 것 같아서 감히 깨울 수가 없었어 요." 이어 그녀는 몸을 일으켜서 한쪽에 보자기로 싸놓은 것을 벗겼다. 그 러자 거기에는 아직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상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식사를 하세요." 백운생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날 위해서 여태 식사를 마련하고 있었군 그래. 그대는 이미 식사를 하였 소? 혹시 점심식사를 아직 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 무구는 그저 조용히 웃기만 했다. 백운생은 그것을 보고 그녀가 원래는 일찍이 이곳에 왔다가 아직 점심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백운생은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곁에 누가 와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럼 지금 나와 함께 식사를 하도록 합시다. 설마 이번에도 돌아가서 먹 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무구는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어제는 사부님의 꾸중을 들을까봐 감히 그럴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여기 서 식사를 해도 상관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따로 상 밑에서 식사를 하도 록 하겠어요." "……" 백운생은 막연하지만 매우 감동이 되는 기분이었다. 따라서 뭔가 보답하 고 싶은마음에 생각을 갇듬다가 문득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 로 어젯밤에 그의 할아버지가 남겨주고 갔던 동심환이라는 것이었다. 백운 생은 비록 무공의 문외한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무공을 연성하는 데 있어 서 매우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렇지 않았다면 무림의 지존인 그의 할아버지가 친히 남겨주지 않았을 것이 었다. 하지만 물론 백운생은 별로 그것에 욕심이 일지 않았다. 무림인들이 안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한 보물이라는 것을 그는 실감하지 못하 고 있는 것일까? (모두 네 개라고 했으니 그 중에 하나를 주어도 무방하겠지?) 이어 백운 생은 품속에서 예의 그 호로병을 꺼내서 뚜껑을 열고 기울였다. 그러자 짙 은 단향의 냄새와 함께 그 속에서 호도알만한, 은박지에 싸인 단환이 네 개가 나왔는데 백운생은 그 중에서 하나를 꺼내서 무구에게 건네주었다. "자, 받아. 나의 선물이야." "……" 무구는 갑자기 그와 같은 물건을 받게 되자 다소 어리둥절했다. 이에 백 운생은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은 어젯밤에 그대가 돌아간 이후에 나의 할아버지께서 다녀가셨는데 이건 그분이 주고 가신 동심환이라는 것야. 내게는 모두 네 알이 있으니 그대에게 한 개 정도 준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거야." 무구는 일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보였다. "이게 바로 동심환이라고요?" 아마도 동심각의 물건이라고 그녀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 다. 백운생은 물었다. "왜 그것이 좋지 않은 물건인가?" 무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이건 무림에서 아주 귀중하게 여기는 보물이예요. 한 알을 복 용하면 능히 일갑자의 공력을 높혀 준다고 했어요." 일갑자의 공력이라면 가히 엄청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백운생은 기꺼운 생각에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것을 그대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 아닌가?" 무구는 고개 를 저었다. "하지만 제가 감히 이것을 어떻게……"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만일 그대가 그것을 마다한다면 나는 그것을 받지 않기로 하겠 어. 설사 그대가 그것을 복용한다고 해도 나는 나중에 다시 할아버지께 그 것을 부탁하면 될 일이 아닌가?" "……" 무구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마지못한 듯 그녀는 말했다. "좋아요. 그럼 제가 이것을 갖도록 하겠어요." 백운생은 매우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허나 문득 여태 그가 그녀를 위해 해왔던 일이 결국에는 그녀에게 별로도움이 되지 못했던 점을 상기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그건 그대가 바로 여기에서 그것을 복용해야 한다 는 거야. 나는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사실 무구는 매우 착하기 때문에 만일 그것을 가지고 간다면 필시 정현스 님에게 보일 것이 뻔한 일이고, 그러다가 그 물건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 이 아닌가! 그 말에 무구는 잠시 상기된 표정으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 였다. "예, 알겠어요." 백운생은 절로 기쁜 마음에 다가가서 그녀의 손에 놓인 그 단환의 은박지 를 벗겨서 다시 들려주며 말했다. "그럼 어서 복용하도록 해." 은박지가 벗겨진 단환의 모습은 은은한 황금빛의 진한 단향을 풍기는 것 이었는데, 그 냄새를 맡자 일순 절로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무구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즉시 그 단환을 입 속에 넣고 삼켰다. 그리고 는 방의 한쪽 구석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정좌를 하는 것 이었다. 백운생은 무림인들이 그렇게 운기조식을 한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식사를 하지 않고 약의 효과를 증대시키기 위해 운기조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단환이 들어 있는 호로 병을 잘 간수하여 품속에 넣은 다음에 조용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무구는 이미 몰아지경에 들어간 것 같았다. 백운생이 식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도 그녀는 운기조식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이에 혹시라도 방해가 될 까 저어하면서 백운생은 빈 그릇들을 쟁반에 담아가지고 살며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백운생의 마음은 상당히 즐거웠다. 일부러 백운생은 무구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아주 천천히 설거지를 했고, 이어 설거지가 끝나자 아울러 마당과 부근의 청소마저 아주 깨끗하게 했 다. 이미 저녁노을이 진하게 물들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윽고 한참 동안이나 기척이 없자 검은 땅거미가 몰려들 즈음에 백운생 이 살며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실로 기이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마치 안개처럼 자욱한 백색의 구름같은 기운들이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감싸 고 방 안을 이리저리 휘도는가 싶더니 다시 그녀의 전시을 휩싸고 도는 것 이었다. 백운생은 운기조식을 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다가 문득 색색 기운들의 움직임이 갈수록 빨라지 더니 일시에 그녀의 입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지며 갑자기 그녀가 눈을 떴 다. 무구의 안색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고 화색이 돌고 있었다. 백운생은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일갑자의 공력이 늘었소?" 무구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공력이 갑자기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서서히 공력이 증대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금방 알 수가 있는 것 은 아니예요.: 이어 그녀는 다시 말했다. "원래 그 동심환은 아주 희귀한 것으로 세 알을 복용하게되면 공력이 세 갑자가 늘어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마세요." 백운생은 고개를 거의 건서으로 끄덕였다. "알겠소. 헌데 배고프지 않소?" 무구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이미 배고프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어요. 오 늘은 금식을 하며 약효를 전신에 고루 퍼지게 해야 하겠어요." 백운생은 그 말에 다소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력이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무구는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제 그만 돌아가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어요." 백운생은 말했 다. "너무 피해가 되는 것이 아니오? 다른 일이 있다면 내게는 천천히 와도 상관이 없소." 무구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저에게는 바쁜 일은 없어요." 무구가 돌아간 다음에 백운생은 다시 서책의 앞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내 일 무구가 올 것을 생각하여 오늘밤은 밤을 새우지 않고 비교적 일찍 잠자 리에 들었다. 과연 무구는 다음 날도 그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는데 미리 와서 집의 안 팍을 쓸고 닦는 등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무구의 기색은 더욱 활 력이 넘쳐 보였다. 혹시 그것이 어제 그녀가 복용한 동심환의 효력 때문이 아닐까? 백운생은 그런 일들을 생각하며 마악 방문을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신형을 멈추었다. (그렇군.) 문제는 있었다. 그것은 물론 무구가 시중을 들게 됨으로 인해 생긴 것이 었지만 그녀 때문은 결코 아니고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생활 비용이었 다. 세속의 사람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은자 따위가 필요하기 마련 이었다. 여태 정현스님이 알아서 그런 문제를 해결해 주었었기 때문에 백 운생은 아무런 불편이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부담스럽고 미안한 느낌 이 들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도움을 받고 살 수는 없는 것인지라 근래에 들어서 자신이 스스로 돈을 벌 수가 있는 길을 택하려고 했었다. 글건데 바로 무구가 시중을 들게 됨으로 인해서 그런 문제가 당장 눈앞에 닥친 것이었다. 차마 그녀에게 그런 비용을 부탁하는 것은 할 수가 없었 다. 그래서 결국 백운생이 생각한 것은 바로 지금 그 길을 터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밖으로 나가자 무구가 마당에 자리를 깔아 놓고 음 식상을 차려 놓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운생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이 가정(嘉定)성에 다녀올 것인데 함께 가지 않겠소?" 백운생은 아침 일찍이 일어났다. 하지만 무구는 더욱 빨리 와서 이미 세 숫물을 떠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은 내가 할 테니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자꾸만 하 고 그러지?" 무구가 가볍게 웃는 것을 보며 백운생은 그녀와 함께 아침식 사를 들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에 왠지 은밀하고 즐거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면 백운생은 다소 장난끼가 들어서 장난을 걸곤 했 다. "왜 항상 그렇게 떨어져서 식사를 하곤 하지? 이쪽으로 좀 오라니까?" 말 하면서 빠르게 손을 놀려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고 하면 어느새 무구는 귀 신같이 저만큼 멀어져 있는 것이었다. 동심환을 복용한 이후에 그녀의 신 법은 확실히 더욱 대단해져 있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자 백운생은 무구와 함께 근처에서 가장 커다란 성시인 가정 성으로 향했다. 가정성은 이 근처에서 가장 커다란 성시이지만 또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운생은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해 보 려는 것이었다. 가정성. 가정성은 이곳 사천지방의 서쪽 고원지대에 인접해 있는 거대한 성시이기 때문에 유명했을 뿐만 아라 각종의 토산물이나 산약재 등을 파는 약시로도 또한 매우 유명했다. 만일 이 부근을 지나서 서쪽으로 나아가고 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가정성에 들러서 모든 것들을 준비하 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그런 저런 관계로 가정성은 유명했다. 하지만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가정성을 유명하게 하는 요인들은 더 많이 있는 것 이사실이었다. 하긴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는 않을 것이지만. 백운생이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들도 가정성을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임 에는 틀림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백운생은 어떻게 해서 그들을 알게 되었을까? 다름이 아니라 당 연하게도 백운생은 항상 그 모옥에 갇혀서 사는 사람이 아니어서 가끔씩 서책을 구입하거나 하는 등의 목적으로 가정성에 나가곤 했었다. 물론 나 이가 아직 어린 백운생으로서는 그들과 사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실로 기연(奇緣)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정도로 그들은모두가 특출난 사람 들이었고 개성이 강했다. 아니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백운생과 그들은 서로 만나게 되었을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알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 라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가정성의 약재를 파는 시장과 포목점 등의 온갖 물건들이 널려 있는 번화 가를 그냥 지나쳐서 계속 주택가가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향하자 무구가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물었다. 백운생은 그저 담담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곳이 어디라고 백운생도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들과 처음 만 나는 것은 아니지만 백운생이 이 길로 가는 것은 이제 겨우 두 번째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백운생은 생각한 후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오." "……" 잠시 후에 백운생은 무구와 함께 하나의 거대한 저택의 대문 앞에 이르렀 다. 그리고는 문고리를 잡고 문을 두드렸다. 쾅쾅…… 소리를 듣고 달려나온 사람은 한 명의 하인이었다. 하인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다가 상대가 겨우 열두 살 남짓의 소년과 그 아래의 승포를 걸친 소 녀라는 것을 알자 즉시 문을 비집고 밖으로 나와서는 거드름을 피우며 물 었다. "너희와 같은 꼬마들이 무슨 일이냐?" 백운생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승(阿勝)을 불러 주시오." 이에 문득 하인의 얼굴이 다소 굳어졌다. 그는 잠시 백운생의 얼굴을 살 펴보다가 다시 물었다. "너희들이 우리의 작은 공자님을 알고 있단 말이냐?" 백운생이 대꾸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의 이름을 알고 있겠소?" 하인은 여전히 미덥지 않은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이름이라는 것은 누구나 전해들을 수가 있는 것이니 증거로 삼을 수 가 없는 것이다. 혹시 너희들은 다른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을 알고 있지는 않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것은 없소. 당신은 그렇지 않다면 그를 불러주지 않을 것이오?" 하 인은 난처하다는 듯이 고개를 내둘렀다. "나야 뭐 굳이 그러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만일 너희들의 수작이 거짓이 었다면 나야말로 나중에 치도곤이를 맞을 것이 아니겠느냐? 사실 우리 공 자님은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때 얘기가 길어질 듯하자 문득 옆에서 무구가 말했다. "이분은 댁의작은 공자님이 귀한 시간을 쪼개서라도 만나야 할 훌륭한 분이세요. 만일 당신이 계속 이렇게 나오다가 나중에 더욱 혼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나요?" "……?" 하인은 그 말에 잠시 어이가 없는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두리번거렸 다. 겉으로 보기에 백운생과 무구의 행색은 초라하여 그리 훌륭한 사람 같 지가 않았다. 하지만 용모가 매우 단정해 보이는 무구가 정색을 하고 자신 들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고 말을 했고, 또한 두 사람의 표정이 장난같 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소 찔끔한 기분이 되어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 작은 공자님께는 뭐라고 전해야 하느냐?" 백운생은 이에 웃으 며 대답했다. "백운생이 왔다고 그러면 되오." "……" 하인은 잠시 주저하며 백운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사라졌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기다려라." 기다리면서 무구가 물었다. "아승은 대체 누구죠?"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얼마 전에 나와 친해진 친구의 하나요. 이곳은 가정의 부상(富商) 호대인(胡大人)의 저택인데, 호대인의 맏아들은 호덕만(胡德滿)이고 둘째 아들이 호덕승(胡德勝)이오." 무구는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 아승이라는 사람은 바로 둘째인 호덕승이겠군요?"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승은 바로 호덕승의 아명(兒名)이오." 그때였다. 아직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대문의 안쪽에서 문득 외치는 소 리가 반갑게 울려왔다. "운생(運生), 운생 그대가 왔다고?" --계속-- #5359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6장 10/31 14:16 289 line 제6장. 기재(奇才)들 대문이 활짝 열리고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은 이제 나이가 열서넛 정도 되 어 보이는 한 명의 준수한 어린 소년이었다. 일신에는 호화로운 의복을 걸 쳤으며 다소 둥근 형상의 얼굴에는 사람 좋은 웃음이 천성처럼 깔려 있었 다. 무구는 이 사람이 바로 백운생의친구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운생이 만면에 미소를 띄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승!" 호덕승도 즉시 달려와 백운생의 두 손을 잡았다. "운생, 어서 와!" 마치 사내와 계집이라면 단번에 서로 얼싸안고 감격에 젖을 것 같은 감동 적인 광경이었다. 무구는 이러한 남자들의 모습을 보자 절로 끌려드는 마 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백운생이 웃으며 말했다. "느닷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실은 의논할 것이 있어서 말이야." 호 덕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무슨 일이 있다면 마땅히 나를 찾아왔어야지. 헌데 혹시 우리 집 하인이 네게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는가?"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아주 친절하고 상냥했으니 상관할 것은 없어. 그보다……" 백운생 은 고개를 돌려 무구를 가리켰다. "그는 나의 친구인데, 서로 인사를 나누도록 해. 이쪽은 무구이고 이쪽은 호덕승……" 무구는 즉시 호덕승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허나 호덕승은 다소 의외인지 잠시 무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소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 지어보였다. "정말로 너의 친구란 말이냐?"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ㅎ덕승은 이에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나와도 친구가 될 수가 있겠군." 이어 무구를 향해 넙죽하니 절을 하며 말했다. "운생의 친구를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나는 호덕승, 일명 아 승이라고도 한답니다. 헌데 댁과 같은 친구를 두었다니 운생이 부럽군요. 저도 앞으로 친구가 될 수가 있겠지요?" 이에 무구는 다소 얼굴이 붉어져서 말했다. "나는 이분의 친구가 아니예요. 다만 이분의 시중을 들고 있는 사질에 불 과하지요. 저를 그렇게 다해시면 안되요." 호덕승은 그녀의 복장을 보고 이미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는 웃으며 대꾸 했다. "하지만 저와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분명할 테니 그렇게 대한다고 해 도 상관이 없지 않겠습니까?" "……" 무구는 다소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호덕승이 백운생을 향해 다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자, 우리 우선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헌데 백운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럴 필요도 없겠어. 실은 내가 온 것은 우왕(牛王)의 거처를 알 기 위해서야." 호덕승은 눈을 크게 떴다. "우왕의?" 악우왕(岳牛王). 그도 백운생이 가정에서 사귄 세 사람의 친구 중의 하나 였다. 호덕승과 악웅왕,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좌선비(左善臂) 였다. 백운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덕승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음, 나는 며칠간 그를 만나지 않았는데, 혹시 선비가 그의 거처를 알고 있을지 몰라." 백운생이 호덕승의 집을 찾아온 것은 원래 그를 가장 먼저 알았었기 때문이었다. 백운생이 물었다. "그럼 선비는 어디에 있지?" 선비라고 함은 말할 것도 없이 좌선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원래 호덕승 과 좌선비, 악우왕은 가정성의 삼총사였는데 나중에 백운생이 끼어들게 되 었다. 호덕승이 대답했다. "선비는 아마도 그의 집에 있겠지. 그럼 우리 지금 그리로 갈까?" 백운생 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준다면 고맙겠어." 호덕승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까짓것이 뭐가 대단하다구 그래.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그 러면 내가 금방 들어갔다 나올 테니." 호덕승은 잠깐동안 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리고 세 사람은 다른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운생은 좌선비의 집을 알지 못했다. 호덕승은 두 사람을 이끌고 이번에 는 빈민가가 밀집되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길을 걷다가 문득 호덕승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참, 우왕은 뭣하러 만나려고 그래?" 백운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실은 일자리를구하고 싶어서 말이야." 호덕승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가 일자리를? 그는 좀처럼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백운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나이도 들었으니 스스로 남의 손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어. 악우왕을 만나서 채석장의 일을 좀 부탁할까 하고 말이야." 호덕승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참 동안 백운생을 바라보다 가 말했다. "하긴, 네가 원한다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어서 가도록 하자." 백운생은 다소 궁금해 하는 무구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해주었다. "좌선비와 호덕승, 그리고 악우왕 이 세 사람은 실은 나의 친한 친구들이 야." 무구는 암암리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백운생이 굳이 일 자리를 찾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빈민가의 골목은 확실히 저택가보다는 좁고 지저분했다. 게다가 분위기가 왠지 음침해 보이고 여기저기에서 살벌한 욕설이나 외침 소리가 끊이지 않 고 있었다. 헌데 그들 삼인이 빈민간의 골목에 깊숙히 들어갔을 때 문득 뜻하지 않은 하나의 작은 사건에 부딪치게 되었다. "죽여버려라!" "빨리 일으켜 세워! 안 그러다간 다치겠어!" 맹렬한 고함 소리가 울려 나오는 가운데 작은 골목길의 가운데에서는 지 금 서너 명의 소년들이 작은 한 명의 소년을 둘러싸고 마구 후려치고 있었 다. 맞고 있는 소년은 아니악 대략 열서넛 정도의 호덕승의 또래였고, 다 른 소년들은 그보다는 서너 살이나 위로 보였다. 그러나 맞고 있는 왜소한 체구의 소년은 뜻밖에도 연신 심하게 맞고 있으면서도 몸을 엎드린 채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미 심하게 얻어맞아서 혼절하기라도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보아 하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고는 있으나 다소 두려움에 몸을 멈칫멈칫 거리는 사람들은 바로 다른 소년들이었기 때 문이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알고보니 바로 심하게 얻어맞고 있는 어린 소년의 아래에 지금 다른 소년들의 동료로 보이는 소년 하나가 깔려 있었 는데, 그 소년의 목에는 어린 소년의 비수가 예리하게 겨누어져 있었던 것 이었다. 밑에 깔리 소년은 그 때문에 도저히 힘을 쓰거나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게다가 위에서 때리고 있는 소년들도 그 어린 소년이 혹시 비수로 일을 저리를까봐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은 위에서 때리는 소년들의 심한 매질에도 꿈쩍하지 않 았을 뿐만 아니라 비수로 찌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비수를 거두거나 하 지도 않았다. 다만 비수를 들이대고 심한 고통 속에서도 강렬하게 아래쪽 의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 마침내 아래쪽의 그 소년이 기가 질리고 말았다. 소년은 안색이 핼쓱하게 변하더니 떨리는 어조로 소리쳤 다. "사, 살려줘! 나는 죽기 싫어!" 이에 그만 위에서 때리던 소년들이 놀라서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자연 그 어린 소년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대번에 사태의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침착성과 용기, 그리고 강인한 인내력과 정신력이 없 다면 불가능한 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나이가 어린 일개 소년이 어떻게 나이가 많은 여러 명의 소년들을 당해내 는 담력과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린 소년의 용모는 보이지 않았으 나 그 몸집은 매우 가는 편이었다. 다른 소년들이 뒤로 물러나자 그 소년은 더욱 간절한 음성으로 애걸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나를 좀 살려줘!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하겠어!" 이에 그 어린 소년이 대꾸했다. "그럼 아까 했던 말은 취소해!" 의외로 아주 맑고 가느다란 음성이었다. 그 소년은 즉시 대답했다. "알았어. 내가 너의 아버지를 개백정이라고 놀린 것은 취소하겠어. 그러 니 어서 이것을 좀 치워줘. 난 다시 너에게 덤비지 않겠어." 개백정! 어린 소년의 아버지가 백정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헌데 이때였 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호덕승이 백운생을 향해 말 했다. "선비, 저녀석이 바로 선비야!" 백운생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좌선비. 그 나이 어린 용감한 소년이 바로 좌선비라는 말일까? 옆에서 이 를 듣고 있던 무구는 다소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이미 호덕승이라는 소년이 평범하지 않은 인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터였는데 다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뜻밖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덕승의 말에 그 어린 소년이 소년을 버려두고 몸을 일 으키며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린 소년의 용모는 그 체구처럼 갸름 한 편이었고, 강인하고 거칠은 인상과는 반대로 마치 여자처럼 곱상하고 섬세하게 생긴 잘생긴 소년이었다. 헌데 그때의 일이었다. 어린 소년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래에 깔려 있었던 그 소년이 몸을 일으키면서 눈에 원독의 빛을 발하더니 일순 품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드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말은 그렇게 했 지만 복수할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무심코 이를 보고 호덕승이 얼른 소리쳤다. "선비, 뒤를 조심해!" 허나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휙! 소년은 키가 어린 소년보다 큰 데다가 팔힘이 강하여 벌써 그가 휘두르는 비수가 어린 소년의 등줄기에 도달하고 있었다. 어린 소년도 순간 이를 느 꼈는지 다소 흠칫한 표정을 보였다. 헌데 바로 그때 느닷없이 일행의 시야를 가로막는 안개와도 같은 그림자 가 나타나더니 그 소년의 비수를 잡는 손길이 있었다. "앗!" 사태의 변화는 아주 빠르게 일어났다. 어린 소년을 암습했던 소년은 어느 새 다시 저만큼 뒤로 나가떨어져 있었고, 그와 어린 소년의 사이에는 한 명의 소녀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예의 그 비수가 들려 있었 다. 실로 신기할 만한 변화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라 고 말할 수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소녀는 무구였다. 무구는 이미 공력이 현격하게 증대되 어 순간적으로 신법을 발휘하여 언린 소년을 구하고 암습하는 소년을 물리 친 것이었다. 백운생 등은 다소 놀라와 하다가 즉시 그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다치지는 않았어?" 호덕승이 묻자 어린 소년 좌선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무구에게 던졌다. 호덕승은 그것을 보고 설명했다. "그녀는 바로 운생의 친구야. 바로 우리의 친구라고 할 수가 있지." "……" 좌선비는 고개를 끄덕인 연후에 시선을 다시 백운생에게 던졌다.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좌선비는 다소 웃는 듯한 표정을 보이더니 이번에는 바닥에 나가떨어진 소년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이때는 다른 소년들도 멀찍이 물러서 있었고 그 소년은 다소 넋나간 듯한 표정이 되어 이리벙벙해 하다가 이윽고 두려운 기색이 되었다. "사, 살려줘! 절대로 본의는…… 아니 무조건 살려줘! 다시는 그러지 않 겠어!" 누워서 손과 발로 열심히 빌어대는 소년의 태도는 비굴하기까지 했 다. 하지만 좌선비는 단지 차가운 음성으로 이렇게 대꾸했다. "어서 꺼져!" 그것은 무구의 인상에도 깊이 남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마치 이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소년은 벌떡 일어나더니 다 른 소년들과 함께 한쪽 골목으로 부지런히 달아나 버리기 시작했다. 다소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그것을 보고 호덕승이 웃으며 말했다. "선비, 웬만하면 녀석들을 한둘쯤 박살을 내놓지 왜 그냥 보냈지?" 헌데 그때였다. 이제까지 멀쩡하게 서 있었던 좌선비가 갑자기 몸이 기우뚱하더 니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앗, 선비!" 호덕승이 놀라서 급히 그를 부축했으나 이미 좌선비는 눈을 감고 혼절한 뒤였다. 그러니까 좌선비는 그토록 심한 매질을 당하고도 비수를 놀리지 않고 질 리도록 참아냈지만 결코 철인은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비록 소년들이 있을 때에는 억지로 참고 서 있었으나 그들이 모두 가 버리자 이내 혼절하고 말 았던 것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이는 또한 좌선비의 정신력이 얼마나 놀 라운 것인지를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호덕승이 몸을 부축하며 연신 좌선비를 부르는 것을 보며 문득 무구가 백 운생을 향해 물었다. "그가 바로 좌선비인가요?"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그야." 좌선비의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호덕승이 집 을 나오면서 약간의 은자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근처의 의원에 들러서 진 맥을 하고 약을 지어 올 수가 있었다. 의원의 말에 의하면 너무 심하게 얻 어맞아서 하루 이틀 사이에 쉽에 회복하기 어렵겠다는 말이었다. 일행은 다소 우울한 심정으로 혼절한 좌선비를 업고 그의 집으로 향했ㅅ 다. 좌선비의 집은 과연 백정의 집이었다. 작은 오두막의 부근에는 피비린 내로 진동하고 있었다. 근처에 소나 돼지를 잡는 도살장이 있기 때문이었 다. 물론 좌선비의 부친은 백정 노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비 록 그 일로 살아가는 데에는어려움이 없지만 심한 사람들의 멸시를 받아서 좌선비는 그것을 내심 증오하고 있었다. 좌선비가 그 소년들과 어룰려 싸 웠던 이유도 바로 그들이 좌선비에게 부친을 개백정이라고 놀렸기 때문이 었다. 호덕승은 좌선비와 매우 친하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이 좌선비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의 집은 텅 비어 있다. 원래 좌선비의 어머니는 계시지 않으 며, 그리고 그의 부친은 어디로 일을 하러 가거나 놀러간 모양이었다. 호덕승은 그를 업어다가 방 안에 눕혔다. 다행히 좌선비는 정신력이 굴강하여 금방 정신을 차렸다. "선비!" 호덕승이 소리쳐 말하자 좌선비는 문득 피식 웃더니 몸을 일으키려고 했 다. 허나 여기저기가 매우 심하게 쑤시는지 한참이나 인상을 쓰고서야 비 로소 벽에 기대어 앉을 수가 있었다. 백운생 등은 그런 경우에 누구도 그를 말리거나 도와줘서는 안된다는 것 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안타까운 기분이었지만 참았다. 좌선비는 지나치리만큼 남의 도움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직 아까 받았던 무구의 도움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백운생을 향해 묻는 좌선비의 표정은 역시 냉정하기만 했다. 이에 백운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그보다 네 몸을 지표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은데?" 좌선비는 피 식 웃었다. "내 몸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아. 그런 것은 상관하지 말고 어서 너희 들이 여기에 나타난 용건이나 말해." 백운생은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신 의 일자리를 구하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했다. "실은 한 가지 너희들에게 전해줄 것이 있어서 말이야. 내일 만일 몸이 회복된다면 우왕을 찾아서 아승과 함께 내 집으로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 어." 그 말에 호덕승도 의외인 듯 물었다. "너의 집에? 그건 왜지?" 백운생은 다소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마 내일 와보면 알게 될 거야." (……?)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하고서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호덕승의 표정 이었다. 잠시 후에 백운생은 무구를 동반하고 그곳을 나와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운생은 문득 무구에게 물었다. "동심환을 효과적으로 복용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우선 무공을 배워두는 것이 좋겠지?" 무구는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사숙님께서는 그럼 이제부터 무공을 배우실 생각인가요?" 백운 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아니야." "……?" 백운생은 집에 도착하자 왠지 무구를 일찍 아미파로 돌려 보내고 방 안에 들어앉아서 뭔가 궁리에 골몰했다. 다음 날 백운생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좌선비 등의 친구들이 오기를 기다 렸다. 그러나 역시 먼저 온 사람은 그 세 명의 친구들이 아니라 바로 무구 였다. 하지만 백운생은 그녀가 나타나자 유독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거의 밤을 새워 만든 물건 중에서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줄 아주 좋 은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시오." 말과 함께 백운생은 하나의 두루말이 종이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 무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무심코 그 두루말이를 받아들고 펼처 보다 가 가볍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건 바로 금단공(金丹功)이 아닌가요?" 금단공, 아니 엄격하게 말하자면 백운생이 할압지에게서 받은 동심비전의 내용 가운데의 하나였다. 금단공은 바로 동심비전의 중추를 이루는 절세의 내공심법(內功心法)으로, 다른 무공들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다. 바로 동 심각의 초고 내공심법인 것이었다. --계속-- #5360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7장 10/31 14:17 249 line 제7장. 대형(大兄)이 되다 백운생은 무구가 그 내공심법을 알아보는 것을 보자 내심 이렇게 곰곰히 생각을 굴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께서 비급을 절대로 타인에게 주지 말라는 것은 무공비법을 다 른 사람에게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무공이라는 것은 한 사람 이 독점한다는 것은 보기가 좋은 것이 아닐 테니, 그 중에서 다만 한 개만 을 따로 적어서 가르친다면 그다지 꾸중을 듣게 되지는 않겠지.)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만의 생각임은 물론이었다. 따라서 백운생은 말했다. "그렇소. 내가 그것을 그대에게 줄테니 그것을 한번 배워보지 않겠소?" 무구는 다소 넋을 잃고 황당한 표정이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이것을…… 이것은 동심각의 내공심법인 것 같은 데……" 백운생은 다시 말했다. "동심각의 내공심법이지만 그것이 훌륭하다면 당연히 배울 수가 있는 것 이 아니겠소? 뒷걱정으 나에게 맡겨 두시오." 헌데 무구는 다시 두루말이를 그에게 내밀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숙님의 은혜는 이미 깊이 받았어요. 하지만 이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 네요." 백운생은 다소 어리둥절할 표정이었다. 그는 설마하니 무구가 이렇 게 정색을 하고 거절할 줄은 몰랐다. "왜 그러지?" 무구는 웃으며 대답했다. "동심각의 이 금단공은 천하제일의 내공심법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거 예요. 하지만 저희 아미파의 내공심법도 사실상 그에 못지 않는 것이죠. 저는 이미 아미파에 적을 두고 있는 몸이기 때문에 다른 무공은 배울 수가 없는 형편이예요." 그렇다. 백운생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내심 가슴이 뜨끔해진 기분이었다. 무림 대파의 제자가 자파의 무공이 아닌 다른 파의 무공을 일부러 배운다 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단시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백운생은 너무 한 가지 생각에 매달리다가 미처 그런 점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공연히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다시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의 무공을 함께 익힌다면 그것도 좋지 않겠소?" 무구는 고개를 내저었다. "두 가지 이상의 내공을 한꺼번에 배울 수는 없어요. 게다가 금단공은 도 가적인 무공인 데 비해서 본문의 무공은 불가의 무학이기 때문에 서로 잘 맞지가 않아요.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걸리게 되어 있지요." 배운생은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아미파를 떠나서 이것을 다시 배우게 된다면 좋지 않겠소?" 무 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제가 요즈음 무공이 나날이 늘어가기 때문에 사내에서 주목을 받고 있어요. 제가 앞으로 배우게 될 무공은 본파의 최고 무학들인 연화관음선공(蓮花觀音禪功)과 대자대비천엽수(大慈大悲千葉手), 오뢰정인 (五雷正印), 연대부운(蓮臺浮雲) 등인데, 그것들은 비단 천하에서도 손색 이 없는 절기(絶技)들일 뿐만 아니라 저는 파문당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요." 연화관음선공, 대자대비천엽수, 오뢰정인, 연대부운…… 그와 같은 절기들의 이름은 백운생으로서는 다소 생소한 점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대정선공(大靜禪功)을 비롯하여 복호곤룡장(伏虎困龍掌), 난피풍검법(亂彼 風劍法), 금정면장(金頂綿掌) 따위가 있다는 것을 들어서 대강 알고 있었 다. 하긴 다소 부족하다고 해도 개인의노력과 자질의 여부에 따라서 성취 도가 좌우될 수도 있을 것이기는 했다. 백운생은 더 이상 금단공을 배울 것을 권할 수가 없게 되었다. 기실 그는 원래는 어제 좌선비에게 동심환 한 알을 주려다가 친구가 셋이 기 때문에 유독 그에게만 줄 수가 없는 일이어서 이렇게 오늘 오라고 하고 서 세 사람 모두에게 남은 세 알의 동심환을 모두 나눠줄 심산이었던 것이 다. 백운생이 무공에 대해서 초탈한 성품이 아니었다면 이와 같은 생각은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백운생은 동심환을 복용할 때는 무공을 배 운 뒤가 좋다는 것을 듣고는 내친 김에 동심비전에서 내공심법까지 베껴서 전수해 주려는 것이었다. 덕분에 백우생은 본의 아니게 할아버지가 주었던 동심비전을 처음부터 끝 까지 대강 훑어보게 되었다. 원래 동심비전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바로 동 심각의 백씨일문에서 자랑으로 삼는 팔대신공(八大神功)이었다. 팔대신공, 그 이름은 다름과 같았다. 금단공(金丹功) 금삽수(金揷手) 쌍류금(雙流金) 연기성선(練氣成線) 일선지(一線指) 여영수형퇴(如影隨形腿) 부동신보(不動神步) 빙허임풍(憑虛臨風) 무극검해(無極劍解) 백운생은 그 내용들을 빠르게 훑어본 결과 그 중에서 내공심법인 금단공 을 전수시켜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밤새도록 그 내용을 다른 종이에 옮겨 놓았던 것이었다. 아마도 다만 내공뿐이라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창 기분이 들떠 있는 상황이었는데 무구가 그것을 거절하자 다소 맥이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두루말이를 도로 받아서 품속에 넣은 다음 에 말했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할 수가 없지. 하지만 나는 이제 이런 것 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줄 생각인데 기분 나빠 하지는 않겠지?" 헌데 무구는 생각 외로 놀란 표정이었다. "그건 바로 동심각의 절기인데 남에게 전해준다면 장차 꾸중을 듣게 되지 는 않을까요?" 백운생은 손을 내저었다. "상관없을 거야. 대신 내가 배우지 않는다면 정당한 거래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 이때 저 산 아래에서 세 사람이 다가오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백운생은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이, 어서 오라구!" 바로 그들은 호덕승 등의 세 친구들이었던 것이다. 악우왕. 다른 사람들은 눈에 익었지만 이 친구는 무구의 눈에 익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니, 그는 아주 괴이쩍은 소년이었다. 감히 그를 소년이라고 쉽게 말할 수가 있을까? 한마디로 나이가 이제 겨우 십오세 정도인 그는 흡사 곰과 같은 거대하고 우람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고, 얼굴도 우직한 면 이 엿보였다. 지금의 키가 칠척에 달하고 있으니 나중에는 거의 일장에 이 르도록 크게 되지 않을까? 한마디로 우람한 체구에 다소 거칠고 순직해 보 이는 보기 드문 소년이었다. 또한 그는 성질이 가장 급한 편인 것 같았다. 세 사람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백운생의 앞에 이르러 이렇게 불쑥 물었다. "어ㅣ, 운생. 내게 할 말이 있었다면서?" 백운생은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우선 저쪽으로 가서 얘기를 하도록 하세." 거기에는 이미 자리가 깔려 있었고 작은 음식상도 마련되어 있었다. "좋아." 악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무구도 분명 히 옆에 서 있었는데 여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그늘지 ㄴ곳에 자리를 정하고 나자 백우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왕, 자네에게 내 친구를 소개하지. 바로 아미파의 제자인 무구라네." 악우왕은 그제서야 다소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체를 해보였을 뿐이었다. 그 러고 나자 다시 악우왕이 재촉했다. "운생, 어서 얘기해 보게. 나는 사실 일을 하다가 왔기 때문에 상당히 바 쁜 몸이라구."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이어 그는 좌선비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자네의 몸은 이제 좀 괜찮나?" 좌선비는 여전히 냉정한 표정이었다. "응." 간단히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그를 향해 백운생은 가볍게 웃더니 문득 품속에서 호로병을 꺼내 그 안에 서 한 알의 호도알만한 단환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일순간에 주위에 진하 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단향이 가득차는 것 같았다. 이에 비단 좌선비뿐만 아니라 호덕승과 악우왕도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좌선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뭔가?"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독약(毒藥)이라네." "독약?" 호덕승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허나 백운생은 여전히 좌선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자네가 어떤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를 시험하고 싶어진 것이네. 만 일 자네가 나를 믿고 이 독약을 먹을 수만 있다면 나는 한 가지 부탁을 할 수가 있겠지." 좌선비는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무슨 부탁인가?"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네가 그것을 먹지 않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네." "……" 좌선비는 손에 들린 단환을 바라보며 잠시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백운생이 다시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것일세. 때문에 자네가 나를 믿고 그 독약을 먹지 않는 한은 말할 수가 없는 것일세. 자네는 혹시 나의 부탁을 들어주기가 힘겨워서 회피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에 문득 좌선비는 손끝을 가볍게 떨다가 갑자기 손 안의 단환의 껍질을 벗기더니 입 속에 넣어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어서 그 부탁을 말해보게." 이에 백운생은 일순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아주 고맙네. 이제는 정말로 마음놓고 부탁을 할 수가 있게 되었 군. 그것은 바로 앞으로 한평생 나의 친구로 남아 달라는 것이었네." 이에, "뭐라고?" 한차례의 어리둥절한 외침이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백운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하, 한평생을 친구 노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네들은 모른다는 말인가? 자, 어떤가? 나 역시 그렇게 할 테니까 자네가 나의 그 부탁을 둘어주지 않겠나?" 나중의 말은 물론 좌선비에게 한 것이었다. 좌선비는 다소 못마땅한 듯이 눈살을 찌푸리다가 대꾸했다. "그런 부탁은 할 필요도 없어." 그렇다. 기실 좌선비는 성격이 대쪽같은 사람이어서 백운생이 일부러 변 치 않는 우정을 강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에 백운생이 웃으며 말했다. "하긴 그래. 어차피 우리의 우정은 영원히 지속될 수가 있을 테니 말이 야. 다만 내가 그 부탁 운운했던 이유는 사실 그 독약을 네게 먹이기 위해 서였어." 이때 호덕승이 물었다. "대체 그 독약은 뭐지?" 백운생이 웃으며 대꾸했다. "독약은 바로 독약이지. 하지만 내가 선비에게 준 독약은 사용하기에 따 라서 아주 좋은 독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네." 이어 품속에서 하나의 두루말이를 꺼내서 좌선비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 다. 그것은 아까 무구에게 주었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의 도형과 글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 좌선비는 그 두루말이를 받아들고 더욱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비 록 백정의 자식이지만 좌선비나 악우왕 등도 이미 어느 정도의 글을 읽을 수는 있었다. "금단공이라니 이게 대체 뭐지?" 호덕승이 옆에서 제목을보고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도깨비 장난이냐?" 악우왕도 다소 못마땅한 듯이 소리쳐 물었다. 이에 백우생은 그제서야 웃으며 사실을 차례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하하, 실은 내가 어제 선비가 몸이 허약해진 것을 보고 그를 위해 보약 을 먹인거야. 보약을 먹으라면 듣지 않을 것 같기에 부득이 이런 방법을 썼지." 호덕승이 물었다. "대체 그 보약이 어떤 것이냐니까?" 백운생은 대답했다. "동심환." 호덕승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라구? 아니 갈수록 더욱 심해져 가네. 방금 전에는 금단공이라고 하더 니 이번에는 동심환이라고 하다니. 그럼 네가 동심각의 사람이기라도 하다 는 말이냐?" 동심각은너무나도 유명하여 비록 무공을 연성하지 않은 호덕 승과 같은 소년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많았다. 백운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다고 그래." 호덕승은 더욱 눈이 커졌다. "아니 뭐라구? 누가 그래?" 백운생은 대답했다. "며칠 전에 친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지. 헌데 바로 그분이 바로 동심각 의 동심지존이라는 거야."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일순 다소 멍청 해지는 듯한 표정이었다. 호덕승이 다시 물었다. "소문이 괴상하게 들리더니, 정말로 그게 사실이었다는 말이냐?" 실로 발 없는 소문은 천리를 간다고 했다.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동심환과 저 금단공의 구결은 그분이 내게 주시고 가신 거 야. 너희들은 내 말이 쉽게 믿을 수가 있을 것 같아?" 악우왕이 그 커다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믿을 수가 없어, 믿을 수가 없다구!" 헌데 호덕승이 다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일거야. 장사를 하게 되면 천하의 소식이 밝게 되는 거 알지? 우리 아버님도 네가 동심각의 사람이라는 말을 했고, 게다가 누가 감히 동심지존을 사칭할 수가 있겠어?" 호덕승의 말은 설득력이 있어서 잠시 주위의 공기를 울리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장내에는 잠시 기묘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흘러갔다. 그러다가 악우왕이 다시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좋아. 너는 원래 이상한 녀석이었으니 동심각의 사람이었다고 해도 이상 할 것이 없지. 헌데 대체 그 동심환과 금단공은 어떤 거야?" 호덕승이 대꾸했다. "금단공은 말하자면 동심각의 최고신공으로 일명 천하제일의 내공심법이 라는 거야. 그리고 동심환은 소림사의 대환단(大還丹)보다도 효과가 더욱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는 것으로, 한 알을 복용하면 일거에 일갑자의 공력 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지. 동심솬의 효력을 금단공의 내공으로 일으키고 그 공력을 다시 금단공에 사용한다면 상당한 효과가 있을 거야." 일갑자의 공력. 악우왕이 제아무리 아둔한 사람이라도 그러한 것을 모르지는 않았 다. 아니, 기실 악우왕은 그리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단 일갑 자의 공력의 위력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하제일공(天下第一功)이라 는 금단공의 효능에도 이해가 가고 있었다. 악우왕은 잠시 눈을 디룩디룩 굴리다가 문득 소리쳐 말했다. "아니 그럼 이거야말로 저 선비녀석만 횡재를 하게 된 것이 아니냐?" 호 덕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다만 이런 경우에는 횡재 정도가 아니라 천재일우(千載一 遇)의 기연을 얻었다고 하는 편이 옳은 것야." 횡재든 아니면 천재일우의 기연이든간에 일순 그 두 사람은 일제히 시선 을 모아 백운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에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내 그렇지 않아도 미리 두 개씩을 준비하고 있었지. 걱정마라. 너희들의 것도 이렇게 있으니까." 말과 동시에 백운생은 품속에서 호리병을 꺼내서 다시 그 안에서 두 개의 동심환을 꺼내서 각각 호덕승과 악우왕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두루말 이도 역시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헌데 악우왕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동심환을 받아들고 주저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이것을 먹으면 몸이 그렇게 좋아지는 것일까?" 바로 그때였다. 눈앞에 인영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홀연 무구가 그 동심환을 나꾸어채서 손 에 들고 차갑게 말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먹을 자격이 없어. 굳이 먹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으 니까." 분명 조금 전에 서로 인사를 나눌 때에만 해도 그녀의 표정은 밝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차갑게 변했는지 알 수 가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을 보고 백운생이 놀라 말했다. "무구, 왜 그러시오?" <제1권 끝> --계속-- #5361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8장 11/02 04:04 353 line 제8장. 스스로 살아가는 법 이에 무구는 문득 두 눈에 가벼운 물기를 머금더니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운 것이고 그것에 비해서 동심환은 다 시 얻기가 어려울 만큼 귀중한 것이예요. 사숙님은 아직 한 알도 복용하지 못하셨는데 그것들을 모두 저들에게 주시면 사숙님은 앞으로 어쩌시려는 거죠?" 그렇다. 무구가 표정이 차가워진 것은 바로 동심환 때문이었다. 백운생이 너무나도 그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있어서 그렇지, 이 동심환과 금단공의 가치는 가히 천금을 주고라도 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모두 다 른 사람들에게 주고 있으니 무구의 마음이 다소 초조해지지 않을 수가 없 는 일이었다. 무구의 말에 호덕승과 좌선비 등은 전혀 새로운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저 마다 안색이 변하여 백운생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본디 보물이라는 것은 신외지물(身外之物)이오. 내 이미 우정의 정표로 써 그것을 저들에게 주기로 했으니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시오." 이어 무구의 손에서 동심환을 집어들고 악우왕에게 건네주자 문득 악우왕 은 크게 감격하여 한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백형(白兄), 백형은 실로 커다란 마음을 지녔구려. 내 비록 나이가 백형 보다 많기는 하나 앞으로 백형을 ㄴ의 형으로 모시기로 하겠소. 이것은 내 가 무엇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으로 굴복했기 때문이오." 백운생은 느닷없는 제의에 놀라 만류하려고 했다. 그런데 옆에서 다시 좌선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소. 그는 정말로 우리의 대형(大兄)이 되기에 족하오. 나 역시 그를 형으로 모시겠 소?" 백운생은 갑자기 상대가 너무나도 진지하게 나오는 바람에 금방 거절 할 수가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또한 호덕승이 좌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허, 그럼 이거 나 혼자서 반대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면 우리 이 자리에서 차라리 하나의 의형제로서 맺어지는 것이 어떻겠소?" 호덕승의 제의에 악우왕과 좌선비는 즉시 찬성이었다. 단지 백운생만이 고개를 내저었다. "의형제를 맺는 일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대형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오. 나는 나이가 가장 어리니 막내가 되어야지 않겠소?" 허나 악우왕은 매우 과격했다. 그는 크게 화가 난 듯이 소리쳤다. "백형이 만일 승낙하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 이 동심환을 받지 않고 돌려 드리겠소. 금단공의 구결도 마찬가지요. 어떻게 하시겠소?" 악우왕의 태도가 워낙 서슬 푸르렀기 때문에 백운생은 다소 난처한 지경 에 몰리게 되고 말았다. 특히 호덕승이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백운생은 어 쩔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의형제라는 것은 서로 돈독하게 우의를 나누기 위한 것인데, 누가 형이 된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소? 백형이 만약 계속 사양한다면 그것은 어떤 사심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소? 안 그렇소?" 좌선비도 말했다. "나는 어쨌든 백형을 윗사람으로 모시겠으니 알아서 하시오." "……" 백운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이미 화살은 시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백운생은 잠시 후에 말했 다. "대형이라는 자리가 단지 명분뿐이라면 내가 사양할 수도 없게 되었소이 다. 그럼 내가 대형의 자리를 맡기로 하지요. 여러분이 나를 이렇게 생각 해 주고 격려해 주시니 고맙기 이를 데 없소." 그러자 이에 못을 박으려는 듯이 악우왕이 소리쳤다. "아승, 그럼 우리 그가 대형이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알약을 함께 들도록 합시다." 호덕승도 즉시 찬성했다. "그러지요." 이어 두 사람은 동심환의 껍질을 벗기고 일제히 그것들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제각기 백운생이 나누어준 금단공의 두루말이를 품속에 소중하게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렇게 모든 수습이 끝나고 나자 호덕승이 다시 말했다. "그럼 우리 아예 지금 의형제로 맺어지는 의식을 올리도록 합시다." 그 말에는 즉시 모두가 찬성을 했다. 특히 악우왕이 이렇게 말했다. "참, 우리가 기왕에 의형제로맺어지는 것이니 여기에 다시 한 사람을 더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악오 왕은 바로 무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무구는 사실 미목이 수려하고 기품이 청명하여 그들과 어울리고도 남음이 있는 훌륭한 인재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사실 악우왕은 원래는 여자를 무시하는 습관이 있었으나 조금 전에 무구 에게 호되게 당한 후에는 금방 그녀를 무시하는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오 히려 지금은 그녀에게 어떤 감탄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무구는 다소 놀라 즉시 사양하려고 했으나 백운생이 말했다. "무구, 우리는 사실 친구라고 말핡 수가 있으니 서로 의형제로 맺어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것이 좋지 않겠소?" 무구는 반박할 수가 없어서 그만 얼굴을 다소 붉히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악우왕은 껄껄 대소를 터뜨리면서 즉시 좌우로 몸을 움직여 바위돌을 날라다가 제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워낙에 힘이 좋은 악우왕인지 라 금방 장내의 중앙에는 의식을 위한 제단이 조촐하게 만들어졌다. 백운생과 호덕승은 그 위에 약간의 음식을 펼쳐놓고 그리고 하나의 빈 사 발을 올려놓았다.그것은 이른바 강호인들이 많이 애용하는 피의 맹세를 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이들의 대형이 되는 백운생이 먼저 비수로 손목에 흠집을 내어 피를 사발에 흘렸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나이의 순서에 따라서 악우왕과 호덕 승, 그리고 좌선비와 무구가 각기 피를 흘려 놓았다. 바로 그러한 순서는 그들간의 서열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윽고모두가 각기 한 모금씩의 피를 나누어 마시고 나자 백운생이 작은 제문을 지어서 향을 피우고 낭독했다. "황천후토(皇天厚土)시여, 저희들 다섯 사람은 지금 이 순간 피를 나눈 의형제로 맺어지는 맹세를 하였으니 비록 한날 한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으 나 죽을 때에는 한날 한시에 죽을 수가 있도록 굽어 살펴 주옵소서." 으레 흔하게 전해지는 내용이었다. 백운생과 무구는 불교에 속해 있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반적인 제문을 지어서 낭독한 것이었다. 그것이 끝나자 함께 황천후토의 제신(諸神)들을 향해 절을 올린 후에 사 방에 피 대신 물을 뿌려 먼지를 진정시키고 함께 자리를 정하고 앉아서 서 열과 규칙을 논하였다. 이미 서열은 대강 정해졌으며, 이번의 순서는 그러 니까 의형제로서의 첫 번째의 수인사인 것이었다. 먼저 백운생이 상좌(上座)에 자리하자 네 명의 새로운 아우들이 함께 그 를 향해 대례를 올렸다. "대형(大兄)! 아우들이 삼가 대형께 인사를 올립니다. 아무쪼록 세세년년 토록 복이 무궁하고 우리 아우들을 잘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백운생은 처음에는 단지 형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와 같은 정식적인 인사를 듣게 되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내가 뭐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대들을 이끌어 주겠소? 다만 그대 들의 요청에 의해 대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니, 오히려 그대들이 나를 잘 인도해 준다면 고맙기가 한이 없을 것이오." 호덕승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대형께서는 마음이 착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우리의 관계는 마 치 하나의 손으로 끄는 마차와 같아서 대형이 앞에서 끌어준다면 우리들은 당연히 힘껏 뒤에서 밀어드릴 것입니다." 백운생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좋은 말이오. 헌데 기왕에 대형의 자리는 형식적인 것이니 우리가 각기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대형의 자리를 맡는 것이 어떻겠소?" 그 말에 여태까지 기쁜 표정을 하고있던 좌선비와 악우왕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좌선비가 다소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형께서는 조금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우리의 지금 이 맹세는 결코 장난이 아닙니다. 한번의 대형은 영원한 대형이신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 습니다." "아니, 그것은……" 백운생이 다소 곤혹해 하자 호덕승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형. 우리가 비록 처음에는 형식적인 것이라고 운운했지만 그것은 사실 대형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이런 의형 제의 사이에는 엄격한 규율이 있지 않으면 쉽게 와해되기가 쉬운 것입니 다. 우리는 마땅히 대형을 부모처럼 모시고 어김없이 따르며 형제지간에 우의와 질서를 정립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호덕승은 악우왕이나 좌선비의 경우와는 달리 집안이 유복하여 어려서부 터 많은 서책과 학문에 접하고 지식과 경험이 많은 소년이었다. 그의 말에 백운생은 다소 눈살이 찌푸려졌다. 헌데 그때 갑자기 악우왕이 다시 소리치는 것이었다. "대형, 만일 대형이 그렇게 주관없는 행동을 한다면 나는 결코 이 맹세에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소. 차라리 아까 복용한 그 알약을 다시 토해내고 죽을 결심이니 그런 줄이나 아슈." 말과 함께 악우왕은 품속에서 한 자루 의 날이 시퍼런 비수를 꺼내 들더니 자신의 아랫배를 찌를 준비를 하는 것 이었다. 백운생은 난감해졌다. 기실 장난인 듯하지만 악우왕은 다혈질의 성격이어 서 한번 한다면 자신의 성격에 못 이겨서 해치울 사람이었기 때문에 함부 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지금 백운생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일은 상 당히 신중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우왕이 자결을 하는 모습 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백우생은길게 한숨을 내쉰 뒤에 웃으며 말했다. "좋소. 여러분이 나를 이렇게 믿어 주시니 뭐라고 감격의 말을 다해야 할 지 모르겠소. 어쨌든 우리의 모임은 서로간에 우의를 돈독하게 하기 위함 인 것이니 스스로 질서의식을 가지고 함께 노력해 보도록 합시다. 그리 고……" "……" "지금 방금 생각한 것인데, 각종의 규칙은 나중에 상황을 보아가면서 만 들기로 하고 우선은 대외적인 회합의 이름을 지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 소. 나는 그것을 맑은 바람을 일으키는 모임인 청풍회(淸風會)라고 하고 싶은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소?" 그 말에 악우왕이나 호덕승 등은 일제 히 손뼉을 치며 찬성을 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러니까 대형은 청풍회의 두목이고, 우리는 그 회원들 인 셈이군요?"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이 따라주시니 고맙소." 원래 백운생의 모습은 다소 유약하기조차 한 서생이었다. 하지만 청풍회 의 대형이 되어서인지 지금은 상당히 대범하고 중후한 느낌마저 주는 것 같았다. 백운생은 이어 무구를 향해 말했다. "그대는 앞으로는 사내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에게 큰오라버니라고 불러주는 것이 어떻겠소?" 큰오라버니라는 말은 바로 대가(大家)이다. 백운생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것이기 때문에 무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대가." 이에 다른 사람들은 홍소를 터뜨리며 각자 자리했다. 둘째인 악우왕이 자 리하여 세 사람의 절을 받고, 이어 호덕승은 좌선비와 무구의 절을 받았으 며, 마지막으로 좌선비는 무구의 절을 받아서 완전한 서열이 정해졌다. 이 러한 의형제지간에 서열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절차가 끝나자 백운생은 새로 맞은 아우들을 향해 말했다. "자, 아직 술을 마련하지 못했으니 우리 오늘을 기념하는 의미로 앞에 높 인 한 잔의 맹물을 들이키는 것이 어떻겠소?" 네 명의 소년소녀들은 일제히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좋습니다!" 백운생 역시 맹물을 마시고 나자 이윽고 양우생이 긴장을 풀고 웃으며 그 에게 물었다. "참, 대형이 일자리를 구한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요?" 백운생이 웃 으며 대답했다. "원래 어제 일자리를 구하러 갔었는데 좌아우의 상처를 보고 오늘 동심환 을 나누어줄 생각으로 여러분을 불렀던 것이었네. 이제 그것이 끝났으니 일자리에 대해서 의논을 해야 하겠군." 악우왕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살 을 다소 찌푸렸다. "하지만 하필이면 채석장의 일을 하려는 것이오?" 백운생은 웃으며 되물었다. "왜 안되겠나?" 악우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될거야 없겠지만 대형은 아직 그런 일을 한번도 하지 않은 상태 가 아니오? 나야 뭐 조금 전에도 숙부의 채석장에서 일을 하다가 온 것이 었지만." 그렇다. 악우왕은 말하자면 천애고아였다. 그에게 피붙이는 숙부 가 한 사람 있었는데 지금 채석장의 일을 하고 있는 채석장의 주인 숙부에 게 얹혀서 함께 살고 있는 상태였다. 소문에 의하면 악우왕의 부모는 무림 이었는데 어떤 흉적의 손에 의해 한꺼번에 돌아가고 말았다고 했었다. 하 지만 백운생 등은 아직 악우왕의 원수가 누군인지 듣지 못했다. 백운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허나 그다지 욕심을 내는 것은 아니고, 하루의 오전 동안만 일을 해서 다만 먹고 살 수가 있는 비용을 마련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네. 안되겠 나?" 악우왕은 이에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야 안될거야 뭐가 있겠소? 내 적극적으로 형을 도와 드리리다. 오늘은 뭣하니 내일 나와 함께 숙부에게 바보도록 합시다."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고맙네." 악우왕은 역시 웃었다. "형제간에 고마울 거야 뭐가 있겠소? 그런 그렇고, 참, 형은 이미 동심환 이 남아 있지 않아서 복용할 수가 없다고 하던데 정말이오?"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이네만, 나야 뭐 무예 방면의 일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어서 상관이 없네. 그리고 동심각의 무공은 금단공 이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는 데 나중에 자네들의 진전을 보아서 좀더 가르쳐 줄 생각이네." "……" "원래할아버지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지 말라고 하셨었지만 자네들 은 모두 나와 한몸이나 마찬가지이니 내가 배우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 이네. 다만 내가 부탁하는 것은 동심환과 그 무공에 대한 비밀을 앞으로 가급적이면 지켜 주었으면 하는 것이라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간혹 전혀 뜻하지 않게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다. 백운생은 졸지에 네 명의 아우들을 거느린 청풍회의 수장이 되어서 자 칭 가정의 인재들을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인지 지금 으로서는 그것은 다만 명분에 불과했다. 청풍회의 결성이 끝나고 얼마간의 대화를 나눈 다음에 무구를 제외한 다 른 아우들은 모두 제각기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들 모두를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다시 원래의 백운생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 아닐까? 백운생은 그 날도 무구를일찍 돌아 가서 쉬게 하고 자신은 그간에 다소 소홀하게 대하고 있었던 천축 고서 용 화보경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 용화보경에 적혀 있는 내용은 사실 그다 지 크게 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백운생에게는 왠지 뭔가 특이한 감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어떤 다른 불경 서적보다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선종의 참선하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곤 하는 화 두(話頭)와도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비록 같은 내용이라고 할 지라도 어떤 인연에 의해서 그러한 장면이나 글귀는 그 사람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백운생이 거기에서 무슨 거창한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전날에 보았던 동심비전도 두터운 책자였지만 백운생은 하룻밤 사이에 그 것을 모두 섭렵했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읽고 있는 용화보경에 대한 진전 은 느리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우선 천축의 고어가 어렵고 해독하기 난해 한 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ㅂ다도 그만큼 분량이 많기 때문이 었다. 이 서책의 종이 재질은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아주 얇으면서도 질기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같은 두께라고 하더라도 양피지 책자에 비하 면 실제의 분량은 그 열배에 달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백운생은 아직 그 열에 하나도 다 보지 못한 상태였다. 다음 날 백운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어느새 무구가 세숫물 을 떠놓고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대가, 지금 나오세요?" 호칭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그녀는 다소 쑥스러운 듯한 표정이 었다. 사숙님이라는 호칭보다는 대가라는 호칭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응." 백우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면서 문득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참, 우리는 이제 사숙과 사실 이전에 의형제지간이니 앞으로는 나에게 이런 시중을 들어서는 안되겠어. 다만 하루에 한번 정도 들러서 나와 얘기 를 나눠 준다면 그것으로 고맙겠어. 나는 이제 스스로 살아갈 수가 있는데 그게 좋지 않겠어?" 무구는 잠시 침묵했다. 이미 예상을 한 상태인 듯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 지만 왠지 다소 슬픈 듯한 표정이었다. 혹시 그녀는 백운생에게 시중을 드 는 일에 애착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백운생은 말을 이었다. "나는 앞으로 나의 기본적인 생활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나가기로 했다. 그러니 이렇게 세숫물을 떠다주는 일은 하지 말고, 다만 간간이 장경가에 가서 서책을 빌려다 주거나 아니면 간혹 나의 심부름을 해주지 않겠어?" 무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긂 앞으로 저는 언제 이곳으로 오면 되죠?"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한…… 저녁 때쯤에. 생각해 보니 아래도 책을 읽기 위해서는 오후에 일 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아. 오전에는 책을 읽을 것인데, 내가 저녁에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대를 보는 것이 좋지 않겠어? 물론 매일 보게 된 다면 좋겠지만, 그대가 만일 바쁘다면 하루 이틀쯤 건너뛰어도 상관은 없 지." 무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다소 야속한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은 전혀 바쁘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를 향해 백운생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간간히 나에 대한 소식을 우리 어머니께 알려 주었으면 좋겠어. 지금도 우리 어머니께서는 건강하시겠지." 무구는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태께서는 항상 건강하세요." 이때 문득 다소 먼 거리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왔다. "대형……" 바로 악우왕의 소리였다. 그가 백운생을 찾아온 것이었다. 백운생은 반색을 하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구를 돌려보내고 난 뒤에 백운생은 악우왕의 뒤를 따라서 그의 숙부가 경영하고 있다는 채석장으로 향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슈." 악우왕의 거듭된 말이었다. 백운생은 그저 담담히 웃었다. 다행히 그 채석장은 가정에서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아미산에 인 접해 있어서 백운생은 불과 한 시진이 되지 않아서 그곳에 도착할 수가 있 게 되었다. 땅땅땅…… 하나의 넓고 험한 절벽면 아래에 여기저기에서 대리석의 돌을 가르고 망 치질로 그것을 다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외에는 네모 반듯하게 다듬어진 대리석을 운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분주 하게 느껴졌다. 백운생은 처음에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생의 활력을 느낄 수가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을 대하고 나니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 은 피곤과 고통에 찌들은 험악한 인상들뿐이었다. 하지만 백운생은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하는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 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진실이라고 믿어지는 것이었다. 삶의 진실 자체는 항상 무지개빛일 수는 없다. 다만 그 진실을 극복하고 참다운 이상을 찾을 때 인생은 가장 고상하게 되고 가장 완전한 경지에 이를 수가 있을 것이 다. 백운생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앞장서서 걸어가는 악우왕의 뒤를 따라갔 다. 옆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다가 와서 말을 거는 사람들은 더더욱 하나도 없었다. 문득 악우왕이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걸음을 늦추며 입을 열었다. "실은 숙부에게 형의 얘기를 해봤는데, 여기에서 일하는 인부둘의 하루 품삯은 보통 기술자를 제외하고는 은자 한 냥이오. 나는 특별히 은자 두 냥을 받고 있는데, 형에게도 은자 두 냥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소." 그 말에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나이도 어리고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루에 절반만 일을 하니 그 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는 없지. 그저 엽전 다섯문이면 족할 것 같은데?" 기실 이런 채석장의 일은 상당히 힘겨운 일이어서 다른 일들보다도 품삯 이 비싼 편이었다. 엽전 스무냥이 은자 한 냥이라고 한다면 백운생이 말한 엽전 닷냥은 일반 사람들의 품삯의 반의 반에 해당되는 금액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아니, 그것은……" 악우왕이 반발을 하려는 것을 보고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를 알고 있어. 나는 이 일로 돈을 벌겠다는 것 이 아니라 다만 일한 만큼의 보수를 받고 싶을 뿐이야. 그대가 너무 그 일 에 신경을 쓴다면 나에게는 부담이 될 뿐이지." 할 수 없이 악우왕은 고개 를 내저으며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이득고 두 사람은 한쪽에 지어 놓은 임시 막사의 안으로 들어가서 악우왕 의 숙부를 만나게 되었다. 숙부. 그는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이 가득한, 몸 집이 장대한 거한(巨漢)이었다. 비록 악우왕보다는 못할 것 같아도 천하의 장사 소리를 들었을 것 같았다. "자네가 우리의 일을 해보겠다고?" 숙부는 커다란두 눈을 부릅떠 보이며 그렇게 물었다. 이제 겨우 열두 살 남짓의 가냘프게 생긴 소년이 채석장의 일을 하겠다고 왔으니 그렇게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백운생은 이미 자신이 악우왕의 의형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공손히 대답했다. "예, 악숙부." 악숙부는 백운생이 자신을 그렇게 불러주자 다소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 다. "음." 몸을 일으켜서 좌우로 몇 번 왔다갔다하면서 생각을 거듭하는 듯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럼 대체 품삯은 얼마나 받을 작정이지?" 백운생은 대답했다. "엽전 닷냥입니다." 순간 악숙부는 걸음을 멈추었다. "엽전 닷냥? 정말인가? 백운생은 대답했다. "대신 일은 오후에만 하기로 하고, 나중에 일을 잘하게 되면 품삯을 올려 받기로 하는 조건입니다." 악숙부는 커다란 주먹으로 책상을 쾅 하고 쳤다. "물론이지. 내가 그렇게 염치가 없을 것 같은가? 품삯은 매일 저녁에 주 는 것이고, 일을 하지 않은 날은 품삯이 없다." "숙부!" 옆에서 악우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악숙부를 말렸으나 악숙부는 오불관언 (吾不關焉) 식이었다. "난 자네와 같은 사람이 대체 얼마나 버틸 수가 있을까 하고 궁금해지는 사람이네. 앞으로 지켜보도록 하지."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자 악숙부가 고개를 쳐들고 밖을 향해 사람을 불렀다. "이봐!" 순간 문이 열리며 밖에서 험상궂은 용모의 장한 하나가 불쑥 들어섰다. 악숙부는 그를 향해 말했다. "이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도록 해. 아직 일을 해보지 못했으니 우선 가벼운 일부터 시키라구!" --계속-- #5366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9장 11/04 05:28 245 line 제9장. 불가득(不可得)의 공부(工夫) "우리 숙부는 이미 돈독이 올라서 그러니 형께서 양해를 하시오." 악우왕 이 뒤따라와서 다소 죄스러운 표정으로 백운생에게 말했다.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더욱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자, 나는 이제부터 일을 해야 하니 자네도 그만 가 보게." 악우왕이 하는 일과 백운생이 하는 일은 물론 같을 수가 없었다. 방금 백 운생을 데려온 사람은 바로 이곳의 여러 명의 십장들 중 하나였는데 그에 게서 백운생이 맡은 일은 바로 작은 돌들을 운반하여 치우는 일이었다. 채 석장의 일은 바로 커다란 대리석을 구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캐는 과정에 서 생긴 작은 부스러기들은 치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고, 당연히 그런 일들은 힘이 약한 노인이나 어린 사람들이 했다. 악우왕이 물러가자 백운생은 즉시 그 일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미리 예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채석장의 일은 실로 힘들기 그지 없었다. 거의 이를 악물고 일을 했는데, 백운생은 처음 일을 하고난 다음 날 아침에 심한 코피를 쏟아야 했고, 아울러 전신이 불덩이와 같이 되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백운생은 거의 오기로 다음날도 채석장에 나 가서 일을 했으며, 더욱이 오전에 서책을 읽는 일도 중단하지 않았다. 두 번째 날은 마치 온몸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심한 몸살기운 속에서 해 냈다. 그리고 다음날은 더욱 심한 몸살을 앓았으며, 나아지기는커녕 갈수 록 몸은 더욱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며칠 후에 아침에 눈 을 떠보니 눈앞에 무구가 다소 근심스런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 백운생은 눈을 들어 밖을 내다보다가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았음을 알아차 리고 문득 매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심한 몸살기운 속에서도 아직 아침 공부를 걸르지 않았던 그였다. "이런!" 어째서 이렇게 정신없이 잠이 들었을까? 백운생이 즉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문득 무구가 그의 팔을 잡았다. "일어나지 마세요." (……?) 그러고 보니 무구의 한쪽 팔이 그의 등뒤에 바싹 밀착되어 있었다. 그리 고 거기에서 기이한 부드러운 기운이 밀려들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그간 에 느껴졌던 심한 몸살 기운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즉, 무구는 심하게 앓고 있었던 백운생의 병을 치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치료법은 실로 백운생에게 신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백운생의 정신이 점차 맑아오자 무구는 손을 떼고 근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심한 일을 하고 계세요?" 백운생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대답했다. "심한 일이 아니오. 다만 나의 몸이 다른 사람들보다 허약하다는 것을 실 감하고 있는 중일 뿐이오." 그렇다. 요즈음에 백운생은 배록 무공을 배우지는 않았더라도 신체가 건 강해야 함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사실 백운생은 그간에 너무 책에만 몰 두했던 나머지 몸이 너무나도 허약했었다. 무구는 문득 가벼운 함숨을 내쉬었다. 그 태도는 마치 동심환을 한 알이 라도 복용을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니냐는 무언의 시위인 것 같 았다. 백운생은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래, 그 동안은 보이지 않았었는데 바쁜 일이라도 있었소?" 무구는 그 를 보며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제게 연화관음선공을전수해 주셨어요. 그것을 완전히 익숙하 게 하기 위해서 오지 못했어요." 백운생은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천하의 신공을 전수받았다니 기뻐할 일이오. 이곳의 일은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되오." 무구는 문득 고개를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내가 와보니 심하게 앓고 있었으면서."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뭐 별거 아니었는데도 그러는군." "……" 무구는 매우 못마땅한 기색으로 계속 그를 보지 않았다. 백운생이 무구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고나 할까? 이후로 백운생은 몸살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몸이 점차로 중 노동을 하는 데 길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일종의 자신 감이었다. 일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몸살 기운이 없었기 때문에 백운생은 나날이 자신감이 붙어서 일을 하는 데도 더욱 적극적이었고, 또한 장애가 없었다. 악우왕의 숙부인 악숙부 그렇게 계속 일을 하는 백운생을 보고는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보이고는 했다. 그런데 백운생이 채석장의 일을 시작한 지 대략 보름쯤 지난 무렵, 오전 에 늘 하던 대로 용화보경을 보고 있던 백운생은 한 가지 기이한 것을 발 견하게 되었다. (용화대보리수미선공?) 용화대보리수미선공(龍華大菩際須彌禪功). 그것은 이미 많은 불경서적들 을 보아왔던 백운생에게 있어서도 매우 기이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 다. 바로 무공과 비슷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용화대보리수미선공이라고 명명된 그 내용은 용화보경의 삼분지이가 지난 후부터 시작되고 있었는데, 나머지 삼분지일이 모두 그 내용이었다. 말이 삼분지일이지 실로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내용인 것이었다. 하긴 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 있길래 그렇게 분량이 많은 것일까 하고 의 아해하기도 했었는데 바로 무공에 관한 언급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아 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무공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책의 내용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불도 수행의 하나의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즉, 심신을 보다 훌륭하게 만드는 작업인 것이었다. 백운생은 따라서 혹시 이 내용은 누군가가 뒤에 날조하여 붙여놓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허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뒤의 종이의 재질이나 글씨체 등이 한결같이 똑 같아 앞의 경문을 쓴 사람이 적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의 까마득한 시대의 사람이 말이다. 용화대보리수미선공. 줄여서 용화선공(龍華禪功)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심신(心身)이 허약하고 방황될 때에는 이것을 배우는 것이 좋으리라. 그 러나 다만 이것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목적이 아니며 다만 작은 수단일 뿐이다. 나중에는 이러한 능력마저 버려야 할진저. 불법 수행 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배우지 마라. 자신의 마음에 어느 정도 불 심(佛心)이 깃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되면 이것을 배우지 마라. 도리어 화 근을 부를 것이 두렵도다. 그리고 이전에 다른 공부나 무공을 배웠던 사람 은 역시 이것을 배우지 않는 것이 이롭도다. 이것은 다만 불법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니, 자신의 마음에 구태여 집착이 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것을 배우도록 하라. 이것은 그대에게 미륵불(彌勒佛)의 법력 (法力)을 전해줄 것이다. 이것을 힘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법력인 것 이다. 만일 일신에 어떤 공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몸을 허 약하게 만든 다음에 이 공부를 시작하도록 하라.> 아주 이상하기 짝이 없 는 주문이었다. 백운생은 그 글을 읽고 다소 허황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사실상 백운생 은 어떤 무공이나 그러한 것에 관심이 일지 않았다. 게다가 뒤의 내용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백운생에게는 그것이 이러헌 내용이었다는 사실이 다소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순간 백운생은 이만 서책을 덮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그는 이미 너무나도 앞의 내용에 깊이 매료되어 있는 상황이었 다. 비록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강경하게 버릴 수 도 없는 미련이 남았다. 마침 백운생은 동심환을 복용하지 않아서 일신에 아무런 공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거의 전문의 주문에 걸맞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문제는 불심이었다. 과연 그의 마음에 어느 정도의 부처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백운생은 잠시 동안 고민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자신의 고 민이 전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그는 여기에서 독서를 중단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용화선 공에도 관심이 없지만 그렇다고 용화선공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그리 커다 란 근심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뒤야 어떻든간에 한번 배워본다 는 데에 있어서 다른 무슨 이유나 목적 혹은 근거가 필요할 것인가! 이것 은 바로 산을 오르는 사람의 심정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 사람은 눈앞에 높은 산이 있기 때문에, 혹은 높은 산을 넘기 위해서 등산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비탈진 산을 오르는 노력의 투혼(鬪 魂) 또는 그러한 과정을 즐기고 충실하게 음미할 뿐인 것이다. 마치 그와 같이 인생(人生)에 있어서 어떤 목적도 있는 것은 아니다. 물 론 자기 완성이라는 최후의 목적이야 있겠지만,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목 적을 이루기 위해서 현실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완성을 위 해서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 그러한 고통스런 과정이 그에게는 최대의 충만된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다른 목적도 필요하 지 않다. 즉, 백운생은 다만 열심히 자신의 길을 나아갈 뿐이며, 그 가운 데 용화선공이 성취되든 성취되지 않고 어떤 심한 부작용을 가져오든간에 그러한 면은 거의 상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백운생이 스스로 열심히 자신의 길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 가운데 비록 실패가 있다고 해 도 어찌 그 역시 충만된 기쁨을 주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백운생은 용화선 공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완성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이 것이 다. 실로 이러한 이치는 알쏭달쏭하고 긴가민가하며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것 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백운생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이미 그 에게 체득되어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바로 작은 깨달음 이다. 따라서 이제 눈앞의 용화선공은 백운생에게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 았고, 전에 읽은 경문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아니, 눈앞에 천정에서 떨어져 내리는 먼지처럼 대수롭지 않은 비중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일하지도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시작함 에 있어서 지나치게 집착을 가진다면 번뇌가 일어날 것이고, 따라서 거대 한 벽에 부딪치게 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가 만일 그 일에 아무런 집착도 없이 열중하게 된다면 어떠한 번뇌도 없을 것이고 지극히 투명하고 맑은 심성으로 전체를 꿰뚫어보게 되는 것이며 이내 하나로 꿰뚫 을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번뇌가 사라진 맑고 고요한 마 음에는 마치 고요한 물에 모든 사물이 그대로 비치듯이 모든 이치가 명료 하게비춰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일을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사람은 이미 보통의 인간이 아닐 것이다. 헌데 바로 이 백운생은 실로 그러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사 람이었다. 천성적으로 그는 매사에 담담한 품성을 지고 있었고, 또한 아미 파의 근처에 살면서 이러한 환경은 그를 더욱 물과 같이 담담한 심정을 가 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운생은 결국 비범한 사람일까? 아마도 그것은 이후에 두고보 아야 할 일일 것이다. 누가 결과를 중요시하든 않든간에 콩 심은 데 콩이 나듯이 세상의 이치는 정연하게 짜여져 있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백운생이 평범한 사람인지 비범한 사람이었는지는 나중에 자연히 결과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공연히 말이 길었지만 백운생은 즉시 이어지는 용화선공의 구결과 그 내 용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용화선공, 정확히 말해 용화대보리수미선공이라는 이 공부는 이미 예상했 던 대로 매우 기이하고 신비로운 학문이었다. 여태까지 그가 배웠던 그 어 떤 불경의 내용들과도 궤적을 달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늘 밥만을 먹고 살아오던 사람에게 어느날 아주 맛있는 간식이 주어지는 기분이라고나 할 까? 하지만 전혀 그런 집착이 없어진 백운생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요소는 어떤 장애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별나게 그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 다. 이제까지 늘 해오던 대로 백운생은 다시 계속 무심(無心)하게 그의 일과 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다만 이번의 학문에는 실제로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서 백운생의 일과에 다소간의 변화를 일으켰다. 마치 무공을 연성하기 전에 내공심법을 배우듯이 서책의 내용대로 백운생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폭 포수를 찾아가서 오랫동안 참선을 하기도 했고, 기이한 동작으로 몸을 움 직이거나 기(氣)를 움직여 보기도 했다. 게다가 각각의 형(形)이나 동작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체내의 진기의 운행도(運行圖) 역시 마치 어지러운 실 타래를 푸는 것과 같았고, 역시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매우 상징적인 문구로 되어 있는 구결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상징적(象徵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태를 나타내 기 어려울 때에 사용하게 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즉, 용화선공에서 요구하 는 상태는 도저히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문구 를 사용해서 설명했고, 따라서 제아무리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는 사 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상징적인 문구에 현혹되어 자칫 잘못된 길로 빠져들 기가 쉬운 법이었다. 말하자면 바로 도리의 깨달음은 그 근거가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만일 다소 우둔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심 성이 바른 이치에 도달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떠할까? 마치 눈앞의 사과가 붉고 푸른 것을 알 듯이 여실하게 모든 이치를 꿰뚫고 상징적인 문 구의 바른 의미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장님과도 같은 비유 인 것이었다. 장님은 색깔을 알 수가 없다. 옆에서 누가 어떠한 말로 상징 적으로 설명을 해주더라도 그는 계속해서 어떤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인 것 이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다시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에는 모든 색깍 을 여실하게 볼 수가 있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용화선공의 내용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글이 함께 적혀 있었다. 이 용화선공은 그 분량이 많은 만큼 모두 열세 개의층으로 나뉘어져 있 었다. 말하자면, 복잡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나 기의 운행이 주종을 이루는 것이 제일층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심오한 상징적인 구결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각각의 층에 매겨져 있는 수련 기간이었다. 제일층은 대개의 바보가 아닌 사람은 보통 일년이나 이년 정도면 익숙하게 배울 수 가 있다고 했다. 헌데 제이층의 수련 기간은 제일층의 두 배이고, 또한 제 삼층의 수련 기간은 제이층의 두 배이며, 계속 그렇게 나아가서 심삼층의 수련 기간은 꼭같이 십이층의 수련 기간의 두 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일층을 완전히 배우기 위해선 일이년의 세 월이 필요하고, 제이층은 삼사년이, 그리고 체삼층은 칠팔년의 세월이 필 요하며, 제사층은 십오년이나 십육년의 세월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그 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수련 기간이 늘어가는 것이었다. 계속에서 제오층을 연성하기 위해서는 삼십여년의 세월이 필요하고, 제육층을 연성 하기 위해서는 다시 육십여년의 세월이 필요하니 오직 제육층까지만 연성 하기 위해서도 합계 백이십여년의 세월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었다. 무릇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선인 (仙人)들은 수백년을 살다가 가기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오직 전설의 내용일 뿐으로 현실적으로 믿을 것은 못되는 것이다. 아니, 설령 전설대로 수백년의 세월 동안 살 수가 있다고 해도 과연 이 용화선공을 모두 연성할 수가 있을까?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계속 두 배로 불어가는 수 련 기간에 의하면 제팔층의 수련을 마치는 데에만도 합계 오백여년의 세월 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물론 마지막인 제십삼층을 모두 수련하는 데 있어서는 물경 만년 도 넘는 장구한 세월이 필요하게 것이니, 대체 이것은 누가 만든 것이며, 배울 엄두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렇다면 창안한 사람은 수만년을 살고서 터득하기라도 했다는 말일까? 아니면 그 자신도 아직 터 득하지 못하고 다만 이론적으로 만든 서적에 불과하다는 말일까? 아니, 도 저히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터득이 불가능한 불가득(不可得)의 공부일 것이 었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황당무계한 수련 기간을 제시해 놓은 것일까? 물론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거짓은 아닐 것이었다. 하다 못해 이 공부에 지나치게 욕심과 집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경계를 주기 위한 목적도 있을 수가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누구라도 일단 그런 수련 기간을 보고 나면 최소한 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여기 이 사람 백운생은 원래부터 무엇을 성취한다는 것에 대해서 무 관심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 저 먼지처럼 가볍게 흘려 버렸을 뿐이었다. 원래 이 열세 개의 층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깨달음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사람은 몸으로 익히는 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 지는 것이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마치 농부가 이른 봄에 씨를 뿌리고 차 례로 가꾸어서 나중에 열매를 얻게 되는 것처럼 아주 장구한 시일을 요하 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수련 기간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백운생은 그러한 사 항에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계속-- #5367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10장 11/04 05:29 255 line 제10장. 세월 세월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말린다고 해도 절로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이 다. 그 후로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의 백운생의 일과는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미 용화보경의 내용을 무수하게 읽고 머리속에 온전하게 집어넣었기 때문에 용화보경을 아미파에 돌려준 지도 오래되었다. 백운생은 요즈음 다른 서적들을 한창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완성 하지 못한 용화선공만큼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계속 수련을 거듭하고 있 는 중이었다. 용화선공의 구결은 실로 엄청나게 길었지만 이미 백운생의 뇌리에 깊게 기억되어 있었다. 그는 우선 용화선공의 내용을 따르기 위해 밥을 익혀서 먹지 않고 생쌀이 나 송화가루 혹은 그 밖의 산나물 등을 뜯어 먹으며 생식(生食)을 하기 시 작해 왔다. 그리고 아직 새벽의 여명이 터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근 처의 폭포수가 있는 곳으로 가서 제일층과 이층과 삼층 등에 있는 몸으로 하게 되어 있는 동작과 진기의 운행을 하며 참선에 들고, 돌아와서 가벼운 아침식사를 한 다음에 오전에는 이미 생각해 두었던 각종의 서책을 공부하 거나 한다. 물론 오후에는여전히 채석장에 나가고 있었다. 그 일은 이미 아주 익숙 해져 있었다. 백운생은 점차 힘이 강해져서 무거운 대리석을 운반하는 일 을 담당했고, 이어서 적당한 길이로 다듬는 기술자의 노릇을 해왔다. 이미 그의 기술이 악숙부에게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악우왕이 받는 액 수의 절반인 은자 두 냥을 받게 되었다. 악우왕. 원래 그의 힘은 놀라운 것이어서 몇 년 전에도 벌써부터 은자 두 냥씩을 받을 만큰 엄청난 일을 해냈던 그는, 이제는 마치 괴물처럼 변해서 십여 명의 인원이 겨우 달려들어 운반하는 대리석을 혼자의 힘으로 간단하 게 운반하곤 했기 때문에 지금은 하루에 은자 네 냥이나 받고 있었다. 거기에 비해 단지 오후에만 일하는 백운생이 은자 두 냥을 받고 있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기술적인 일은 아주 교묘 하기 짝이 없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수배의 일을 혼자서 해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많은 은자를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은 정으로 수십 번을 쳐야 반듯해질 대리석이 왠지 그가 몇 번만 가볍게 치면 아주 깨끗하게 잘려나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대리석은 면이 깨끗한 것이 좋은 값을 받게 되기 때문에 백운생이 은자 두 냥을 받는 것은 결코 많이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따로이 돈을 쓸 곳이 많지 않은 백운생은 서책들을 구입하는 일 을 제외하고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아서 이미 집에 수천냥이나 되는 은자를 모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채석장의 일을 끝내고 나면 백운생은 집으로 돌아와서 간단하게 용화선공의 수련을 다시 마친 연후에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과였다. 원래 처음에는 백운생은 체력이 허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용화선 공을 수련한 이후에는 기이하게도 어떤 특별한 힘이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도 아주 심신이 강해져 있었다. 매일 일을 하지만 피곤한 줄을 몰랐고, 게 다가 머리가 갈수록 명경지수처럼 맑아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효과는 거 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종의 알 수 없는 신통한 힘이 스스로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그가 채석장에서 놀라운 기술을 발휘하는 까닭도 실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무공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용화선공의 첫머리에 적혀 있었던 대로 법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백운생은 아직 스스로도 그 법력의 정체를 시원하게 알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실마리는 잡았다. 그것은 이미 그가 용화선공의 모든 내용의 의미 를 거의 통달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물론 그것이 완전해지는 것 과는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어쨌든 백운생은 스스로 용화선공의 거의 황당한 수련 기간에 대해서 생 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 자신의 성취가 그것을 망각시켜 가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삶이 편리해지기 때문에 계속 용화선공의 수련을 멈추지 않 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자기 완성의 한 방편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는 하지만, 기실은 그것에 대해서 거의 집착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가 어떠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인지는 아마 신(神)도 알 수가 없을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쏴아…… 자욱하게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폭포수의 음향은 마치 귓속을 간질거 리는 모기의 울음소리와 비슷했다. 아직은 새벽의 여명이 터오지 않은 새벽 무렵. 백운생은 백여장 정도의 높은 곳에서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의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알몸인 채로 참선에 들어 있었다. 근래에 들어서 용화선공의 하층부에 있는 동작이나 형을 그는 이제는 하 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너무나도 완전히 통달하여 모든 진기의 운행도대로 정확하게 진기를 운행시키고 몸을 조절할 수가 있 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가 주로 하고 있는 동작은 참선이었다. 바로 그것은 용화선공의 구결의 상징적인 의미를 참오해 내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 그가 이곳에 와서 가부좌를 틀었을 때에는 마치 전신이 폭포수의 엄청난 압력에 터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는 정반대였다. 폭포수의 거대한 음향은 그에게 있어서 모기의 울음소리와 같았고, 몸에 부딪치는 폭포수의 압력은 가볍게 떨어지는 빗물의 간지러움 과 같았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백운생은 지극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금 그의 나이는 열아홉, 청풍회를 조직했을 때에서 정확하게 칠년이라는 세월 이 흘러서 계절은 완연한 봄이었고, 그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칠 척 가까이 훤칠한 키의 헌헌장부가 되어 있었다. 다소 구릿빛의 건강미를 풍기는 그의 용모는 지극히 준수한 모습이었고 눈빛은 아주 맑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외면의 변화는 그의 내면의 변화에 비하 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백운생은 아직 친할아버지가 남겨주신 동심비전의 무공을 배우지 않고 있 었다. 그것을 꺼렸다기보다는 왠지 친숙한 느낌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 길로 인도하는 매개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 대신 청풍회의 아우들에게 그 무공을 전수해 주기 위해서 백운생 은 그 내용들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리고 아쉽게도 칠년 전 왔었던 친할아버지는 여태 다시 그의 앞에 나타 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동 심지존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백운생은 그간에 아무런 잡념도 없이 하 나의 공부에 전념할 수가 있었을 것이었다. 백운생이 배운 용화선공은 무공과 아주 흡사한 것이었다. 허나 엄격히 말 해서 무공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무공은 자신의 몸에 진기를 쌓 아올려서는 밖으로 발출시키는 것이지만, 용화선공은 단지 진기의 운행은 정밀하지만 자연의 힘을 빌려서 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백운생의 체내에는 겨우 초보적인 내력만이 잠재되어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용화선공의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아직 백운생은 자신이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렀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십삼층의 구결이었다. 하지만 그렇 다고 그가 이미 그 아래의 수련을 모두 마쳤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었 다. 백운생은 아직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상태라고 해도 그는 마음을 모은 상태에서 얼마 전에 이 백여 장 높이의 거대한 폭포수를 되돌렸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극도의 집중을 한 상태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는지라 일단 유사시에 발휘할 수가 있는 무공 과 같은 능력은 되지 못했다. 유사시에는 그렇게 극도의 집중을 할 수 있 을지 의무시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백운생의 마음은 아주 명경지수와 같이 맑았다. 몸과 마음의 느낌은 아주 상쾌하고 홀가분했고, 세상의 보이지 않는 은밀한 이치가 그대로 한 눈에 비춰드는 것 같았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요 근래 들어서 그러했고, 불과 어제만 해도 그렇게 그의 영대가 맑게 트였었다. 실로 기이한 실이었다. (이상하군.) 백운생은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으나 갈수록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연히 명경지수처럼 맑고 투명하게 열려야 할 그 의 마음이 기이하게 어떤 안개와도 같은 기운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서 다소 초조한 마음까지 일었던 것이다. 실로 이러한 일은 근래 들어서는 없었던 일이었다. 따라서 백운생은 용화 선공의 구결에 대한 생각을 거두고 곰곰히 그 원인을 생각하다가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이건 예감(豫感)이다.) 예감. 바로 그러했다. 뭔가 앞으로 복잡한 것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감각을 백운생은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용화선공의 덕분이 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용화선공이 이미 그와 거의 합일이 되었기 때문에 그 자신의 예리한 감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예감을 믿을 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백운생 스스로에게 물 어보아야 할 것이었다. (……) 백운생은 한참 동안 생각을 거듭한 후에 천천히 가부좌를 풀고 몸을 일으 켰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폭포수의 물줄기가 심한 요동을 일으켰으나 이 내 그의 몸이 옆으로 빠져나가자 정상을 되찾았다. 백운생의 몸은 물에서 나오자 금방 산뜻하게 말라버렸다. 그것 역시 그의 신통한 능력 중의 하나였다. 아직 아침의 여명은 터오지 않고 있었다. 백운생은 허리를 굽혀서 한쪽에 개어 놓은 허름한 옷을 차례로 주워 입고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 했다. 이곳은 그가 살고 있는 모옥보다도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니 당연히 아래로 내려가다보면 그곳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백운생은 이제 자신의 집에 도착하여 식사를 끝내고 좋아하는 서책들을 대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절로 흥이 일어서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부드럽 게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몸이 마치 이끌리듯이 부드럽게 앞으로 이삼장이나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강호에서 전하는 고도 의 무공신법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엄격하게 말해서 무공이 아니라 일종의 법력이었다. 즉, 신통한 능력이다. 자신의 몸에 있 는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자연의 힘을 빌려서 쓰고 있는 것이다. 몸이 마치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앞으로 미끄러지듯이 나아가자 백운생 은 문득 아까의 복잡한 심사는 사라지고 지극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따 라서 이러한 기분을 좀더 지속시키고 싶은 마음에 그는 속도를 좀더 늦추 었다. 그러자 마치 그는 한 송이의 구름이 되어서 발이 땅에 닿지도 않은 채 미끄러지듯이 느릿하게 지면 위로 떠가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새벽의 공기는 매우 상쾌했다. 백운생은 절로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그것도 얼마 후에 어쩔 수 없이 그의모옥에 도착하게 됨으로 써 끝나게 되었고, 백운생은 눈을 뜨고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새벽의 여 명이 시원하게 터오고 있었고 장엄한 대자연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백운생은 곧 깨끗하게 주변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예외없이 백운생은 생식으로 식사를 하고 서탁의 앞에서 책을 읽으며 글공부를 했다. 요즈음 들어서 그는 머리가 매우 맑아져서 어떠한 것이라도 한번 보거나 들으면 잊지 않는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물론 체내의 탁기를 없애기 위해서 생식을 해왔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 런 것도 상관이 없게 되어서 굳이 생식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함에도 계속 생식을 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습관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가 귀찮아 서 그런 것뿐이었다. 그 동안 책벌레인 백운생이 읽은 서책의 분량은 지극히 많고도 많아서 아 미파의 불경서적들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었고, 또한 그가 스스로 가 정성에 가서 구입한 서책들만 해도 방 안으로 가득차서 몇 번이나 처분을 했을 정도였다. 요즘도 그의 주위에는 서책들이 가득하게 쌓여져 있어서 겨우 잠을 잘 수가 있는 공간 등이 확보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제 백운생이 서책을 읽는 것은 글공부라기보다는 일종의 취미였다. 이 미 지나치리만큼 많은 서책을 읽었지만 백운생은 결코 거기에 빠지지 않았 고, 그리고 심신이 아주 건강해져 있었다. 과거의 책벌레와는 다소 달라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백환성이 그에게 주었던 동신비전은 소각시켜 버린 지 오래였다. 백운생은 점심식사를 마치자 이번에는 역시 채석장으로 가기 위해 방문을 나섰다. 과거에는 거의 한 시진이나 되는 시간이 걸렸지만 요즈음에는 불 과 일각여의 시간 동안에 몰래 그곳 부근에 도착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상 당한 시간을 절약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방문을 연 백운생은 다음 순간 의외의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 회 의 소녀. 나이가 이제 십칠세에 이르러 완연한 숙녀로 성숙한 무구가 아름 답고 깨끗한 기풍을 하고 그의 마당 한쪽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실 무구는 지난 칠년 동안 역시 꾸준하게 이틀이나 사흘에 한번씩 백운 생을 찾아와 주었고 그의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아쉽게도 무구는 동심각 의 무공을 전혀 배우지 않아서 아미파의 무공만을 고집했지만 그러나 이미 아주 훌륭한 무림의 일류고수가 되어 있었다. 무림의 일류고수라면 그녀의 내공과 그 운용이 일갑자의 경지를 벗어났다는 말도 되는 것이었다. 게다 가 무구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서 누구라도 반할 만한 정도였다. 아 직 그녀는 머리를 삭발하지 않고 있었고, 백운생에게 보내는 마음의 정성 도 여전했다. 백운생은 그녀와 함께 청풍회에 참석하는 기회가 그간에 그리 많지 않았 다. 고작해야 한달에 한두번 정도였고, 그나마 동심비전의 무공을 가르쳐 주기 위해 백운생이 그들을 소집하는 경우였던 적이 많았다. 이 백운생은 따라서 비록 무공을 연성하지는 않았지만 무학의 작은 박사라고 말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호덕승이나 악우왕 등은 그 일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 곤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면을 떠나서라도 지금 의외의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무구는 비록 기약없이 나타나고는 했지만 항상 그녀가 나타나는 시각이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운생의 하루 일과가 거의 마무리되는 저녁 무렵이었다. 무구는 항상 백운생을 존중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규칙을 지켜서 백운생에게 조금의 방해도 되지 않으려고 했다. 백운생은 이미 그 러한 그녀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이하게도 그녀가 대낮에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물론사 람이라는 것은 항상 같은 수가 없어서 때로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 다는 것을 백운생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새벽에 기이한 예감을 느꼈었기 때문에 백운생은 문득 이상한 기분 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일이지?" 보통 때라면 백운생이 이렇게 물으면 방긋 웃으며 즉시 대답하곤 했을 것 이었다. 허나 지금은 왠지 다소 무거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대답했다. "오늘만은 채석장에 가는 것을 그만두세요, 대가." 백운생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무구는 다시 대답했다. "일이 생겼어요." 마치 당연한 귀결처럼 백운생은 이미 그녀의 입에서 그러한 말이 나올 것 을 예상하고 있었다. 백운생은 눈살을 다소 찌푸렸다. "나쁜 일인가?" 무구는 그런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백운생은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무구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대가에게는 좋은 일이겠죠. 하지만 저에게는 아주 나쁜 일이 될 수도 있 는 것이예요." 백운생은 그녀가 마치 수수께끼와 같은 말을 하자 다소 웃 음이 나왔다. 평소에는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는 그녀였다. 무구는 늘 사 리에 밝았고 말이 논리정연했었다. 백운생은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무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동심각에서 연락이 와서 오라고 한다면 당신은 설마 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인가요? 당신은 갈 것이고 저는 가지 못하게 되니 저는 나쁜 상황이 아 니겠어요?" 무구의 논리는 상당히 웃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운생은 순간 웃을 수가 없었다. "동심각에서? 할아버님이?" 무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늘 아침에 동심각에서 금룡각주가 와서 동심각주의 뜻을 알렸 어요. 당신을 데려오라고요. 지금 한창 사태님과 대면하고 있는 중인데 사 태께서 당신을 부르셨어요." 금룡단주라는 말에 백운생은 문득 전의 그 금 룡단주였던 묘수신룡 문인중문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외삼촌이 된다는 사람, 아직 그가 금룡단주의 직책을 맡고 있는 것일까? 백운생은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오늘 이런 연락을 받으려고 새벽부터 마음이 뒤숭생숭 했었단 말인가?) 확실히 친조부의 연락을 받는 다는 것은 그의 가슴을 다소 울렁거리게 만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의조부는 무엇 때문에 여태 소식 하나 없다가 이제 서야 다시 보자고 하는 것일까? (……?) 백운생은 문득 번뇌에 찬 듯, 혹은 어떤 기대감에 가득찬 듯 기묘한 표정 을 해보였다. --계속- #5368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11장 11/05 04:16 302 line 제11장. 갈등(葛藤) 백운생은 그간에 가끔씩 어머니인 일심사태를 뵈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뵙는다는 생각에서라도 백운생의 마음은 우선 다소 부푸는 느낌 이었다. 과거에는 아미산의 금정봉에 오르기 위해서는 정현스님이나 무구의 도움 을 받아야만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쉽게 그곳에 도달할 수가 있었 다. "사태께서 기다리시니 어서 올라가요." 무구의 재촉하는 말에 백운생은 즉시 그녀와 함께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 했다. 이미 무림의 일류고수의 수준에 도달한 무구의 신법은 그야말로 날듯이 가벼워서 거의 흔적이나 바람을 일으키지 않았다. 원래 여인들은 신체의 구조상으로 신법에 능하기 마련이지만 이토록 여유있게 몸을 움직일 수가 있다는 것은 유사시에는 아주 빠르게 신형을 움직일 수가 있다는 말이 되 는 것이었다. 초상비(草上飛)의 경공술이라고나 할까? 산야에 푸릇푸릇하 게 돋아나는 풀잎들을 가볍게 밟으며 거의 새싹들을 망가뜨리지 않고 유유 하게 신형을 움직이는 그녀의 몸놀림은 제법 신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요즈음 들어서 무구는 자신의 무공보다도 백운생의 특이한 능력에 대해서 더욱 놀라며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구는 내심 백운생이 어 떤 무공을 배우고 있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히 그것에 관해서 물어볼 수가 없어서 여태 함구하고 스스로의 상상력에만 의존하고 있는 실 정이었다. 물론 사람이 무공을 배우게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이상할 것은 아니었 다. 하지만 백운생이 신법을 펼치는 데에 있어서 이상한 점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전혀 힘을 들이지 않는 것처럼 유유자 적함의 표본이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더러는 아주 빠르게 신법을 펼치고 있는데도 거의 옷자락이 날리는 소리나 파공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었다. 물론 백운생의 신법은 아직은 그다지 빠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러나 위에서 열거한 사항 외에도 뭔가 알 수 없는 신기(神氣)가 어려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무구는 자연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나 그러한 점은 그녀가 유달리 시선을 집중했기 때문에 알 수가 있었던 점이고, 다른 사람들, 특히 호덕승이나 악우왕 등은 단순히 백운생이 어떤 무공을 연성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무구는 항상 절제된 생활을 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평소에 어떠한 다급한 일이라도 스스로 참을 수가 있는 사람이었다. 헌데 지금은 왠지 그럴 수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청백(靑白)한 순결의 상징처럼 맑고 수려한 그 녀의 얼굴 표면에는 뭔가 알지 못하는 초조함이 가볍게 서리고 있었다. 무구, 그녀는 분명 아미파의 제자인데도 여태 삭발을 하지 않고 있었다. 비록 정식 제자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미 정식제자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부인 정현스님이 굳이 그렇게 만들었던 이유와 그녀가 백운생과 만나는 것과는 어떤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미파의 오래된 건축물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옆쪽의 계곡길로 돌아서 나아갈 때 무구 는 문득 백운생에게 물었다. "대가께서 동심각의 무공을 연성한 것은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의식했 기 때문이었나요?" 여태 아무런 말도 없다가 그렇게 불쑥무공에 대해서 물 어오자 백운생은 다소 황당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러나 금방 그녀의 의도를 알 수가 있었다. 사실 무구는 많은 나날 동안 백운생과 얼굴을 마 주 대하면서 은연중에 그를 친오빠나 그 이상으로 믿고 따르며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변화에 대해서 그녀는 다소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운생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것은 아니야." 이어 그는 자신이 수련하고 있는 용화선공에 대해서 대략 설명해 주었다. ㅡ것은 용화보경을 배우게 된 동기와 그 대강의 취지였다. 무구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잘됐어요. 대가께서 그렇게 좋은 것을 배우셨다면 저는 다만 기뻐 할 뿐이죠." 허나 다른 날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기뻐하는 표정 이 아니었다. 칠년 전에는 친조부까지 왔었으나 그를 데려가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만 금룡단주만 왔을 뿐이었는데 그것이 어떤 커다란 영향을 백운생에게 가져올 수가 있을 것이란 말인가? 백운생은 이 무구의 표정에서 역시 뭔가 알 수 없는 예감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의 그의 인생은 비교 적 평온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폭풍노도가 휘몰아치게 되는 것은 아닐 까? 금정봉의 모습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그대로였다. 다만 암자의 마당에 는 예전에 보았던 것과 비슷하게 황금빛 동심원이 세 개 새겨져 있고 금룡 이 수놓아져 있는 눈초리가 매서운 무사들이 서너 명이나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백운생과 무구를 한 차례 힐끗 바라보았으나 이내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묵묵히 다른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백운생은 무구의 뒤를 따라서 그들의 옆을 지나쳤다. 암자 안에는 역시 늘상 들리던 목탁 소리가 멈춰져 있었다. 그것은 안에 누군가가 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무구의 뒤를 따라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눈에 들어 오는 것은마루에 한가하게 마주앉은 어머니 일심사태와 예전에 보았던 그 백의중년인이었다. 백의중년인. 금룡단주이며, 묘수신통 문인중문이라고 불리우는 그 사람의 용모는 과거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눈가에 잔주름이 조금 늘 은 것 같고, 머리칼에 흰머리가 한두 개 생겼을 뿐이었다. 그래서인가 백 운생은 그를 본 순간 과거에 느꼈던 그 무거운 중압감은 왠지 느끼지 않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일심사태가 이쪽을 바라보더니 백운생을 향해 말했다. "이리 와서 인사를 올리거라." 무구는 즉시 눈치를 봐서 옆으로 해서 물러갔다. 백운생은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서 그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백의중년인 문 인중문에게 정중하게 포권의 인사를 했다. "다시 뵙게 되는군요." 그 말에 문인중문은 다소 반색의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란 살다 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법이지. 허나 그간에 일이 바빠서 이렇게 늦게야 찾아오게 된 것을 용서하게." 비록 가족의 계보상으로는 문인중문이 한 배분이 위이지만 백운생은 동심 각의 장손이기 때무에 감히 하대를 하지 못했다. 백운생은 문인중문의 답례를 받고 웃으며 대꾸했다. "저는 금룡단주께서 오셨다고 하길래 누구신가 했더니 역시 그대로시군 요." 문인중문은 껄껄 웃으며 자신의 목을 만졌다. "아, 이 목이야 워낙 질기고 튼튼해서 아직 가져갈 사람이 없었다네." 그 것을 보고 일심사태가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린 아이에게 그게 무슨 농담이예요? 어서 본론이나 그에게 말씀하세 요." "음, 그럴까?" 문인중문은 일심사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에 다소 정색을 하고 백 운생에게 말했다. "어느 정도는 미리 예상을 하고 있었겠지만 지금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그 대의 외숙부로서의 신분이 아니라 동심각의 사자로서이네." "……" "각주께서 자네를 데리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네." 백운생이 묵묵하자 문인중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아마도 각주의 이와 같은 갑작스런 처사를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 고 있을 것일세. 허나 솔직히 각주께서도 그 동안 무림의 일에 바쁘셔서 미처 자네를 부를 여가가 없으셨다네. 그랬기 때문에 이제야 부르는 것이 니 언짢게는 생각하지 말기 바라네." 이에 일심사태도 말을 받아서 말했 다. "그렇다, 운생(雲生)아. 너의 조부께서는 지난번에도 오셔서 너를 데려 가겠다고 했지만 내가 말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의 나이도 어느 정도 되 었기 때문에 나의 품을 벗어날 때가 되었고, 이번에 동심각에서 경험과 수 양을 쌓게 된다면 너의 인생 행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기에 나는 승낙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백운생이 여전히 묵묵히 서 있기만 하자 일삼사태가 다시 물었다. "너는 나의 이러한 취지를 알겠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이때 옆에서 문인중문이 다시 말했다. "이번에 자네가 동심각으로 가는 것은 바로 무림의 후계자로 책봉되기 위 해서 가는 것이니 그리 나쁘게 생각할 것이 아니네. 오히려 아주 영광스러 운 길이라고 할 수가 있지. 물론 자네는 이미 동심각의 무공을 배웠겠지 만."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직 그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문인중문과 일심사태는 다소 어이가 없엏며 돌아보다가 문인중문 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설령 그렇다고 해도 각주께서 자네를 무림고수로 탈바꿈을 시키는 것은 아주 간단할 것이니 상관할 것은 없네. 자, 어떻게 하겠는가?" 이어 마루의 한족 구석에서 은근히 이쪽의 말을 엿듣고 있는 무구를 발견 한 후에 문인중문은 말을 이었다. "물론 자네가 원한다면 친구는 얼마든지 함께 데려갈 수가 있네." 백운생 은 잠시 묵묵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잠시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문인중문은 다소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게. 나는 여기에서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테니, 마음이 정리되면 곧장 나에게 연락해 주기 바라네." 백운생은 일심사태에게 인사를 한 후에 암자에서 나왔다. 그때 무구가 뒤 에서 달려나오며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지요?"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 좀 해보고." 무구는 잠시 아미를 찌푸리다가 다시 물었다. "헌데 지금은 어디로 가는 거죠?" 백운생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우들을 만나러." (……!) 무구는 즉시 따라 붙었다. "그럼 저도 함께 가요." 백운성이 먼저 들린 곳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채석장이었다. 원래 지난 몇 년간 백운생은 하루도 빠짐이 없이 이곳에 와서 일을 했기 때문에 오늘 그가 늦어지자 사람들은 일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악우왕 은 무려 팔척에 달하는 근육질의 우람한 체구로 커다란 대리석을 느르다가 백운생을 알아보고는 그것마저 집어던지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대형,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거유?" 무구가 뒤에서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야만 채석장의 일을 쉴 수가 있는 건가요?" 악우 왕은 은근히 무구를 경외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손을 올려 뒤통수를 긁적긁적거렸다. "하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백운생은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앞으로 채석장의 일은 할 수가 없게 되었네." 악우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죠? 혹시 동심각에서연락이라도 온 것이 아닌가유?" 백운생은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을 보였다. "아니, 그것을 자네가 어떻게 알지?" 악우왕은 일면 놀라면서도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제가 아우들과 늘상 하곤 했던 일이었기 때문이죠. 대형은 동심 각의 사람이니 언젠가는그곳에서 부를 줄을 알았다구요."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악우왕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형이 더 이상 이런 일을 할 수가 없겠지요. 뭐 무슨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미련도 남지 않고."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고맙네." 악우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고마울 것이야 뭐가 있겠어요? 우리야 항상 대형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 는 처지이니 자연 대형의 장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보 다도 이런 때를 대비해서 우리끼리 미리 약정을 해놓은 것이 있는데…… 나머지 다른 아우들을 만나보지 않겠소?"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야지." 악우왕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한쪽으로 앞장을 섰다. "그럼 우선 우리 숙부부터 만나러 갑시다." 무구가 백운생과 함께 악우왕의 뒤를 따르다가 문득 궁금한 듯이 물었다. "둘째오빠, 세 분이서 미리 약정을 해놓았다는 것이 대체 뭐죠?" 악우왕 은 비교적 말을 숨기지 않는 성품이었다. "그야 우리가 대형을 따라간다는 것이지 그 밖에 뭐가 있겠어?" 무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따라간다구요? 동심각까지요?" 악우왕은 대꾸했다. "동심각까지 가지 않는다면 따라간다고 말할 수가 있겠어? 사실 이건 핑 계지만 대형과 함께 우리도 출세를 좀 해보고 싶은 거야." 무구는 새침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쳐보였다. "흥, 하지만 나만 따돌리다니 잘들 해보세요." 악우왕은 당황해서 얼굴이 벌개졌다. "아니, 너는 여자이고, 또한 아미파의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이 제외시킨 거라구. 오해하지 말아." 무구는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그래도 오빠라면 불쾌하지 않겠어요?" "……" 악숙부, 그는 막사의 안에서 거칠게 술을 들이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악숙부는 다소 충혈된 눈빛으로 그들 을 바라보며 물었다. "끄윽, 대체 무슨 일이지?" 악우왕의 입에서 욕설이 절로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밤낮없이 마셔대기만 하다니 그래 가지고 일이나 제대로 하겠 다." 아마도 이 악숙부는 술고래인 모양이었다. 백운생은 이 사람이 술에 취해 있을 때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악숙부는 화를 벌컥 내며 소리쳤다. "야 이 녀석아, 누가 너더러 내 대신 일을 하라고 해서 야단이냐? 내가 보기 싫으면 내 곁에서 사라져 버리면 될 게 아니냐?" 악우왕은 눈살을 깊게 찌푸렸다. 그는 무구도 와 있는 마당에 그런 소리 를 듣게 되자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만둘 작정이오." "그만둔다구?" 순간 악숙부는 술이 다 깨는지 몸을 벌떡 일으키며 그들을 보았다. 그리 고는 손가락으로 악우왕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네가 정말로 그만둔단 말이냐?" 악우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 악숙부는 한참 동안 악우왕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 았다. "좋아. 네가 그만둔다면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어 그는 이빨을 뿌드득 갈며 말을 이었다. "빌어먹을 기껏 고생해서 먹여주고 키워줬더니 이제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만두겠다구? 니미랄, 네놈은 이제 필요없어. 저 샌님같은 훌륭한 일꾼이 라면 또 모르지만 네놈같이 우둔한 녀석은 이제 쓸모가 없다니까." 악우왕은 음침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 샌님도 떠나려는 중이오." "뭐라구?" 악숙부는 이번에는 크게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백운생을 바라보았 다. "정말인가?" 백우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악숙부는 일순 얼이 다 빠지는지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다가 얼른 소리 치듯 말했다. "아니, 갑자기 왜 떠난다는 거지? 내가 품삯을 올려주지 않아서 그런가? 지금 네게 은자 네냥을 주고 있지만 나는 열 냥까지도 줄 수가 있다구. 아니, 올려 준다니까?" 그 말에 악우왕이 옆에서 흉흉하게 말했다. "우리 대형은 동심각으로 갈 거요. 동심각주가 불렀기 때문에. 우리도 모 두……" "그래?" 악숙부의 두 눈이 문득 가벼운 광기(狂氣)로 빛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하긴, 그렇다면 가야겠지." 이어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백운생은 악우왕, 무구와 함께 그 모습을 보며 밖으로 나왔다. 이제 인사 는 끝냈으니 그저 떠나면 될 것이다. 무구가 물었다. "지금 좌네째오라버니의 집으로 가는 건가요?"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나의 손, 그 손에는 지금 칼이 하나 들려 있었다. 대개 이러한 일을 하 는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칼이 구비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그 에게는 단지 하나의 칼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자신이 있 다느 말이었다. 한 마리의 소, 소가 순식간에 여러 개의 물건으로 분리되어 한쪽에 차곡 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일에 아주 익숙했다. 왜냐하면 나이에 비해 그는 무공이 상당 히높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손, 그것은 지금 당연히 시뻘건 핏물에 젖어 있었다. 붉은 손은 다소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이름과 걸맞지 않는 것이기 도 했다. 좌선비. 그는 변했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는지 그것은 명확하게 잘라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확실히 그는 변했고, 또한 그것이 좋은지 나쁜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좌선비의 아버지는 몇해 전에 술병이 도져서 돌아갔다. 아니, 기실 그 아 비는 의부였으며, 좌선비의 부모는 의부와 그가 만나기 전인 아주 오래 전 에 돌아갔다고 하고, 그래서 의부와 만나서 자식없는 홀아비인 백정 의부 와 함께 좌선비는 살게 되었던 것이었다. 의부가 죽자 자연히 좌선비는 의부의 직업을 떠맡게 되었다. 백정. 그는 소나 돼지 따위를 잡아서 먹고사는 백정이 되었다. 어렸을 적에 개백정이 라는 놀림을 무수히 듣고도 나중에 이렇게 스스로가 백정이 되어 생활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로 그가 백정인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기 때 문이었다. 그 꿈은 사내라면 한번쯤 갖게 되는 평범한 것이었다. 좌선비가 피묻은 칼과 손바닥을 헝겊에 쓰윽 닦아내고 있을 때 문득 뒷문 이 열리며 여러 명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호덕승을 비롯하여 백운 생과 무구, 악우왕 등의 네 사람이었다. 원래 호덕승은 좌선비의 집으로 놀러 오다가 우연히 백운생 등과 마주치게 되었다. 좌선비는 칼을 구석으로 내던지며 물었다. "무슨 일들이오?" 호덕승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드디어 대형이 동심각으로 가게 되었어. 어때? 근사하지 않아? 우리가 이번에 대형을 모시고 들어가는 거야." "……" 좌선비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백운생을 바라보았다.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조부님이 사람을 보내 왔는데 이번에 갈까말까 망설이는 중이야. 어떻게 생각해? 한번 가도 관찮을까?" --계속-- #5378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12장 11/06 05:35 298 line 제12장. 동심각(同心閣)으로 이에 옆에서 악우왕과 호덕승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물론 가야죠. 이곳에 늘상 있는다고 해서 무슨 득이 있겠소?" 백운생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번에 동심각으로 가는 것은 무슨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 가는 것 이 아니야. 한번쯤 찾아가서 뵈려는 것이지. 그리고 나서 다시 되돌아올 것인데 거기에 그다지 의미를 둘 필요가 있을까?" 호덕승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무래도 대형의 생각일 뿐이지요. 아마 맹주께서는 대형을 결코 그냥 돌아오게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설사 그렇다고 해도 한번쯤 동심각의 구경을 갔다오는 것도 나쁘지 않고 말입니다." 그 말에 좌선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형." 악우왕이 나서서 말했다. "내 생각엔 말이야, 이번에 동심각에서 우리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아예 차제에 우리끼리 문파를 하나 창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그렇게 바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호덕승이 말했다. "하지만 남자로 한번 태어나서 그런 모험적인 일을 한번 해보는 것도 좋 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뭐 실패를 해도 그만이지요. 내 생각에는 우리는 여태 죽은 듯이 살아 왔는데 이번이 어떤 계기가 될 것도 같습니다." 호덕승의 말에 악우왕도 조선비도 다소 동조의 빛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이대로 묶여서 지낸 다는 것이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호를 향해 웅지를 펼치려 는 기개가 살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백운생은 그런 그들의 뜻을 만류할 수가 없었다. "좋아. 그럼 우리 내일 함께 가도록 하지." 악우왕이 무척 기쁜 듯이 괴성을 질러댔다.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었으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챙길 것은 얼마 되지 않 았다. 깨끗하게 세탁한 옷 두어 벌 하고 그 동안 모아 두었던 은표나 은자 등이 고작이었다. 무구가 어젯 저녁에 금정에 가서 그의 결심을 미리 알렸기 때문에 어느새 그의 마당 앞에는 커다란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서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무구와 악우왕, 호덕승 등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소리쳤다. "형님, 어서 나오슈. 우리가 기다리다가 목이 다 빠져 버리겠소." 백운생 은 담담히 웃으며 먼저 마차 위에 올랐다. 그러자 호덕승 등 네 사람은 일 제히 그위 뒤를 따라서 역시 마차 위에 올랐다. 원래 백운생은 가기 전에 어머니께 인사를 올리려고 했으나 일심사태는 그것을 거절하고 무구와 동행할 것을 지시했었다. 지금 무구는 회색의 승 려복이 아닌 평범한 여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세속 처녀 의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어젯밤에 동심각으로 떠나는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서 가장 고생했던 사람 은 바로 호덕승이었다. 그는 밤새도록 말다툼을 했는지 얼굴이 다소 푸석 푸석해져 있었다. 백운생 등의 일행이 마차 위에 모두 오르자, 어느새 마부석에는 한 사람 의 백의중년인이 나타나 앉아 있었다. 그는 바로 금룡단주인 문인중문이었 다. 문인중문은 고개를 돌려 백운생에게 한 차례 웃어 보인 후에 옆의 마부에 게 지시했다. "어서 가세!" 마차의 주위에는 서너 명의 금룡단원들이 손수 말을 타고서 호위하듯 따 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차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덕승 등은 이에 다소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실로 이 길이 그들에게는 강호제일보(江湖第一步)가 되기 때문이 었다. 강호! 천하의 뭇 사내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동경스러운 말인가! 백운생은 그간에 동심각의 금단공(金丹功) 이외에도 호덕승 등의 세 사람 에게 각기 하나씩 동심각의 절기들을 가르쳤었다. 악우왕에게는 쌍류금(雙 流金)이라는 권법(拳法)이요, 호덕승에게는 연기성선 일선지(練氣成線 一 線指)를, 그리고 좌선비에게는 금삽수(金揷手)라는 천하의 장공(掌功)을 전수해 주었다. 원래 동심비전에 수록되어 있는 그 절기들은 하나같이 한 평생을 걸쳐 배운다고 해도 성취하기가 어려운 절세의 절학들이었다. 당연 히 이들 삼은은 여태 금단공과 하나씩의 절기를 연성하는 데 있어서 힘과 재주가 부치고 있었고, 따라서 백운생은 가르치고 싶어도 더 이상 가르치 지 못했었다. 물론 동심각의 절기들은 하나같이 천하제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들이기 때무에 그들 삼인이 그 정도로 배운 것도 경이할 만한 일이 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아미파가 있는 아미산과 동심각이 있는 호북성 대홍산(大洪山)과는 상당 히 먼 거리에 속하는 것이었다. 마차는 연일 꾸준히 달렸다. 도중에 멈춰 서 객점에 들러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문인중문이 도중에 무슨 실수가 생 길까봐 그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모두가 얼마간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마차로 계속 강행군을 하는데도 거의 지치지 않았 고, 중요한 마차나 말들도 문인중문이 미리 준비해 놓았는지 피로할 즈음 이면 바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다. 처음에는 백운생의 일행은 다소 긴장에 젖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 간을 보냈다. 그러나 점차 무료한 시간이 계속되고 오랜 여행에 몸과 마음 이 지치게 되자, 문득 호덕승이 스스로 재담이나 강호에서 들려오는 얘기 들을 늘어놓아 일행을 심심치 않게 해주었다. 이 호덕승은 상당히 견문이 넓은 편이었다.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얘기 들은 대부분 유익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얘기보따리도 바닥이 나고 말자 이내 일행은 저마다 마 차 안에서 각기 수면을 취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십여 일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마차를 달린 끝에 일행은 대홍산의 부근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이 대홍산과 인접해 있는 성시로는 양양성(襄陽城)이 있다. 그 옛날 제갈 무후가 살았다던 곳도이 양양성의 부근이다. 헌데 문인중문은 일행을 태운 마차를 그 양양성의 길에서 세웠다. "미처 다른 사람들의 얘기는 각주께 말씀드리지 못했으니 자네들은 잠시 이곳에 유하면서 기다리도록 하게." 바로 호덕승 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에 다왔다고 내심 좋아하던 그들은 다소 맥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그렇다면 그들로선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호덕승, 무구 등을 하나의 객점에 묵도록 한 다음에 문인중문은 다시 백 운생을 태우고 동심각을 향해 마차를 달렸다. 백운생은 그날 밤에 동심각에 드디어 도착할 수가 있었다. 동심각(同心閣)! 이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거창하다. 그러나 한밤중 에 보고 있기 때문인지 백운생은 이 동심각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화려하지 않다고 느꼈다. 대신 세월의 오랜 연륜을 말해주듯 검은 이끼와 낡은 조각 들이 다소 음산한 느낌으로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 이곳 동심각의 특징을 두 가지 꼽는다면 하나는 대부분의 건물들이 까마득한 암봉의 정상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건물 들을 이고 늘어선 칼날캍은 암봉들이 우연히도 중앙의 암봉을 향해 원을 그리듯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즉, 무공이 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는 쉽게 암봉의 위에 오를 엄두를내지 못하는 것이다. 동심각의 과거의 명성은 화려했다. 물론 지금도 화려했다. 그러나 지금은 왠지 그 화려한 명성이 점차로 퇴색되어 가고 마치 부식되어 가는 돌조각 들처럼 모습도 시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남았다. 하지만 문인중문의 태도는 여전히 당당하고 엄숙해 보였다. 그는 마차에서 내리자곧장 백운생을 데리고 동심각의 내부 깊숙이 들어 가서 하나의 거대한 암봉의 위에 올라갔다. 이 암봉을 올라가는 데 있어서는 다른 길은 없었다. 오직 자신의 무공 실 력을 발휘하여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를 박차고 날아서 올라가야 하는 것 이었다. 문인중문은 그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백운생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어 백운생의 신형이 매우 자연스럽게 위로 날아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소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록 그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지만 그 힘을 빌어서 이렇듯 유유하게 위로 올라갈 수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경신술의 경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무공을 익혔는가?" 문인중문의 질문에 백운생은 다소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암봉은 비단 험하고 높을 뿐만 아니라 도처에 살수들이 매복하여 지키 고 있다는 사실을 백운생은 감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동심각 의 중앙에 있고 이렇게 험준하며 도처에 매복을 깔아 놓은 곳이라면 당연 히 중요한 곳일 것이었다. 혹시 동심각주의 처소가 아닐까? 아니나 다를 까, 암봉의 정상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유등의 등불로 환하게 주위가 밝혀 진 칠층이나 되는 거대한 원형탑이 세워져 있었다. 문인중문은 백운생을 데리고 육층의바로 아래 계단에 날아 올라갔다. 거 기에서 다시 계단을 밟아서 위로 오르자 하나의 황금빛 문이 앞을 가로막 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백운생은 암봉을 올라오면서 수많은 매복자들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유독 이 부근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 에는 전혀 매복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으로도 알 수가 없는 고도 의 능력자들이 매복하고 있을가능성이 컸다. 옆을 바라보니 어느새 문인중문이 황금문을 향해 허리를 굽힌 채 엄숙하 게 입을 열고 있었다. "접니다. 백대공자를 모시고 왔습니다." 백대공자란 바로 백운생을 말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자 잠시 후에 안에서 다소 낯익은 창로한 음성이 웅후하게 들려왔다. "어서 그 아이를 안으로 들여보내게." 백운생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소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 다. 바로 그가 칠년 전에 들었던 백환성의 음성이었다. 무릇 십년이면 강 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지금 들려오는 백환성의 음성은 그때와 거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자연 백운생은 그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깊은 친근감 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문인중문은 허리를 펴면서 백운생을 바라본 뒤에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이오."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어 주저없이 그는 황금문에 손을 가져갔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 문은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자동적으로 스르르 좌우로 벌어지며 열리는 것이었 다. 백운생은 아직 이러한 광경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소 얼떨떨한 기분 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실내. 실내는 생각 외로 아주 검소하고 담박하게 정리되어 있는 작은 집 무실이었다. 바닥에는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고, 정면에는 하나의 태사의 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밖에는 별로 화려한 장식이나 아름다운 조각품 따 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정면의 그 태사의에 한 사람의 금의 노인이 자리하고 앉아서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칠년 전에 그를 찾아왔던 백환성이었다. 음성과도 같이 이 백환성의 모습은 전과 그 리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단지 굳이 달라진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 은 그의 눈매가 더욱 깊어지고 웅후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왔느냐?" 인자한 조부의 말에 백운생은 즉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례를 올렸 다. "소손이 할아버님을 뵈옵니다." 백환성은 환하게 웃었다. "하하, 녀석, 아직까지도 할아버님이라고 깍듯한 존칭을 쓰는구나. 무림 의 사람들은 조손지간에 그런 경어를 쓰지 않지. 어쨌든 이리 가까이 오너 라." 백환성이 손을 벌리는 것을 보고 백운생은 기꺼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스스스…… 뒤에서 예의 그 황금문이 다시 닫히고 있었다. "뭐라고?" 백환성은 다소 놀란 듯이 새하얀 눈썹을 곤두세웠다. 백운성은 하지만 비교적 담담했다. 조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소손의 그 친구들은 그야말로 경의형제들로서 소손의 한몸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무림에 또한 그러한 인재를 기를 수가 있다고 한다면 커다란 이익이 될 것입니다." "음……" 백운생은 조부가 그에게 주었던 동심환과 무공들을 모두 호덕승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말을 했었다. 앞으로 자연히 드러나게 될 일이기에 비교 적 빠른 시간에 고백해 버린 것이었다. 백환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그것을 보고 백운 생은 말을 이었다. "할아버님의 은혜는 제가 항상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그것들을 복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친구를 얻었으니 오히려 복이 아니겠습니까?" 백환성은 설레설레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말했다. "실로 너의 성품이 대쪽같이 곧고 고집이 센 것은 아마도 너희 선친을 닮 은 것 같구나.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찌 다시 거둘 수가 있겠느냐?" 백운생은 조부가 용서를 해줄 눈치를 보이자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했다. "죄송합니다." 백환성은 혀를 찼다. "끌끌, 네가 그것이 죄송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는 하느냐? 원래 이곳의 무공은 결코 밖으로 유출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그 팔대신공은 바로 우리 동심각의 최고 무공들인 것이다. 앞으로 그로 인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되는구나." 백운생은 물었다. "무슨 문제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까?" 백환성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너는 항상 서책만 파고 있어서 아직 강호의 사정에 매우 어둡구나. 혹시 당금무림의 칠패(七覇)를 모르지는 않겠지?" 칠패. 이것은 바로 말 그대로 일곱 개의 강호의 초거대 세력을 말하는 것 으로 당금에 이르러 동심각에는 뒤지고 있지만 무공이 기고하여 오랫동안 의 무림의 명문인 구파일방보다 힘이 훨씬 앞서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 은 현 무림을 일각(一閣), 칠패(七覇), 구파일방(九派一幇), 오대세가(五 大世家)라고 순서대로 말하기도 한다. 그 칠패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자 면 성수거(聖手居), 검방(劍房), 도회(刀會), 장곡(掌谷), 현현보(玄玄 堡), 만화궁(萬花宮), 수라부(修羅府) 등이다. 백운생은 물론 그러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예." 백환성은 다시 물었다. "너는 지금 칠패가 우리 동심각의 아래에 굴복하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동심각이 무림맹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백 환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런 점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바로 우리의 무공이 그들의 무공보 다 최소한 한수 이상이 뛰어나다는 점에 있다. 너는 우리의 무공과 그들의 무공과의 차이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아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지. 내 너에게 말해 주겠다. 사실 이 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나의 무공은 칠패의 주인들보다 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둘이 모였을 때에는 서로 비슷하고, 셋이서 합공을 한다면 나는 감당할 수사 없는 것이다." "……" "따라서 나는 가능한한 그들이 화합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성수거, 검방, 도회는 정대문파라고 할 수가 있는데, 나머지 현현보 나 만화궁, 장곡, 수라부는 사마외도의 단체라고 할 수가 있다. 너는 이 할애비의 고충을 알겠느냐?" 백운생은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 깨어진다면 무림에 혼란이 일어난다 는 말씀이시군요."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마외도이 네 개의 문파는 서로 그야말로 똘똘 뭉쳐져 있다. 따라서 내가 감히 그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무공의 비 밀이 그들에게 새어나간다면 자칫 그 힘의 균형이 깨어질 수도 있지 않겠 느냐?" "……" 백운생은 일이 생각보다도 심각한 것을 알고 다소 안색이 변했다. 그것을 보고 백환성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걱정할 것은 없다. 최소한 이 할애비는 그런 사람들 이 셋이서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하하, 알겠느냐?" 백운생은 그의 웃음에 감염되어 절로 입가에 웃음을 머 금었다. "예." 백환성은 이에 문득 다소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백운생은 고 개를 들었다. "무슨 부탁입니까?" 백환성은 웃으며 되물었다. "이것은 너의 허락이 있어야만 내가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너는 나의 부탁을 들어주겠느냐?" 백운생은 이미 마음에 죄송스러운 구석도 있고 하 여 잠시 후에 대답했다. "도의에 맞는 것이고, 또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하겠습니 다." 백환성은 환하게 웃었다. "물론 도의에 맞을 뿐만 아니라 무림을 위하는 일이고, 또한 너라면 충분 히 할 수가 있는 것이지. 이 할애비가 너에게 불리한 일을 시키겠느냐?" "……?" 이어 백환성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의 부탁이란 바로 네가 성수거의 사위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원래 이 부탁은 너를 부를 때부터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백운생은 잠시 망연한 표정이 되었다. 설마 백환성이 원하는 부탁이 이러 한 것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백환성은 그를 향해 다시 물었다. "혹시 이미 혼인을 한 상태이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백운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백운생은 자신의 이 조부가 자신을 그런 목적으로 쓰기 위해 부른 것을 알자 다소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것을 보고 백환성은 한 차례 숨을 토하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정략결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략결혼이라면 또 어 떻겠느냐? 상대인 배필 또한 아주 뛰어난 미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고 그 것이 무림의 안녕에 크게 기여하는 일인 것을. 운생아, 너는 아마도 나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겠지?" 백운생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그의 뇌리에 순결한 무구의 얼굴이 스쳐지나 감은 웬일일까? 백운생은 대답을 하지 않고 백환성을 향해 되물었다. "그전에 한 가지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저를 부른 것이 오로 지 이 일에 이용하기 위해서였습니까?" 그 말에 백환성은 다소 안색이 변했다. 그리고 다소 노한 듯 고개를 흔들 었다. "아이야, 너는 다소 심한 생각과 말을 하고 있구나. 내 이미 칠년 전에 말했었다시피 원래부터 나는 너를 데려다가 나의 후계자로서의 수업을 시 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우리 가문의 장손(長孫)이기 때문이지." "……"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번의 결혼도 계획된 것이다. 성수거는 너도 알다 시피 칠패의 하나인데 그 명망이 높아서 가깝게 사귀어 둘 만한 곳이다. 마침 그곳에 아름다운 미인이 하나 있어서 너와 혼인을 시키려는 것은 비 록 정략결혼이지만 무림을 위하는 것이고, 너를 나중에 나의 후계자로 삼 겠다는 것이다." --계속-- #5380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13장 11/08 18:18 354 line 제13장. 무학이론(武學理論) 백환성은 열띤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너도 한번 생각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만일 후계자가 될 수가 없 다면 성수거에서 귀한 금지옥엽(金枝玉葉)을 너와 혼인을 시키려고 하겠느 냐?" 백운생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무림을 평온하게 만들 수가 있 는 것이 아닙니까?" 백환성은 다소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다소 냉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이것도 가장 확실한 하나의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 느니라. 네가 굳이 거역하겠다면 모르지만. 사실 나는 너를 나의 후계자로 생각할 때부터 그 배필을 신중하게 골라왔다. 따라서 결국 그 성수거의 여식을 고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차피 너의 배 필은 그런 곳에서 구해지게 되는 것이다. 나의 행동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 하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백환성이 다시 물었다. "너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냐?" 백운생은 문득 망설였다. 그의 뇌리에는 무구의 청초한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 만 그녀는 아미파의 머리를 깎지 않았다 뿐이지 비구니가 아닌가! 백운생 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백환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굳이 나의 말을 거역할 것도 없지 않느냐? 내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의 무공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중대한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느니 라. 하지만 네가 만일 나의 말대로 성수거의 여식과 혼인에 임에 준다면 나는 너의 그 네 명의 친구들을 동심각의 인원으로 받아주거나, 아니면 그 들이 동심각의 무공을 쓰는 것을 정식으로 인정해 주겠다. 만일 그렇지 않 다면 너의 그 네 명의 친구들은 설령 무공을 배웠다고 해도 써서는 안되는 것이니라. 알겠느냐?" 백운생은 내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 조부 는 확실히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다. 대화술이 뛰어나며 상대로 하여금 자 신의 의도에 걸려들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백운생은 구태여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다소 마음의 혼란이 생기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예……" 백환성은 다시 물었다. "그럼 나의 말대로 따르겠느냐?" "……" 백운생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원래 무구를 매우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장차 배필로 여기는 마음인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또하 그녀가 비구니이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백환성은 다시 말했다. "네가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동심환은 사실 매우 귀중한 영약이고 구하 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이지만, 나에게는 아직 몇 개가 더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단지 네 개만을 주었던 것은 네가 모두 복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나누어 복용을 시켰으니 아마도 그들의 공력이 지 금쯤 일갑자를 상회하고 있을 것이다. 허나 그 경지는 나이에 비해서 높은 수준인 것 같지만, 실은 상당히 어중간한 상태인 것이다." "……" "너도 나중에 너의 사촌형제들과 이곳에 있으면서 만나게 될 것이지만, 우리 동심각의 무공은 기초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내공, 즉 최소한 사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만 최소한 모든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너의 사촌형제들의 나이는 너보다도 어리지만 무공은 오히려 더욱 높아서 사갑 자를 훨씬 상회하는 내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너는 팔대신공의 가장 어 려운 무공인 무극검해(無極劍解)를 연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갑자의 내공이 있어야 하는지 아느냐? 바로 육갑자이니라.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도 더욱 높은 공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 "만일 네가 나의 말에 따라 정략결혼에 응해 준다면 그것은 너의 복이 될 것이고, 또한 너에게 몇 알의 동심환을 더 주어서 너의 친구들의 무공이 보다 높아질 수가 있도록 함은 물론이고, 나중에 중용하고 네가 원한다면 네가 후계자가 되는 데 있어서 호위로서 쓸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 자, 이래도 내 말에 따르지 않겠느냐?" "……" <<꼭 한두 줄 빠진 것 같네. 책에는 요것도 없음.>> 백운생은 금 방 그의 내심을 눈치챈 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일 지금 너에게 말못할 사연이 있고, 또한 어떤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라면 나중에 처첩으로 들일 수도 있느니라. 내가 명색이 무 림의 지존인데 그런 것쯤 하지 못하겠느냐? 너의 어머니에게는 이미 운을 띄워 놓은 상태이고 나중에 알려줄 것이다. 자, 네가 나의 말에 따르는 것 은 이렇게 모든 면에 있어서 이로운 것이고, 또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의 말에 따르지 않겠느냐?" 백운생은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도저히 거역할 명분이 없었 다. "알겠습니다." 백환성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말뜻은 내 말을 따르겠다는 것이냐?"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순간 백환성은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좋다. 녀석, 정말로 네 선친을 닮아서 고집이 대단하구나. 그래, 잘 생 각한 것이다. 성수거의 여식은 내 아직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무림제일의 미인이라고 하더라. 게다가 품성도 훌륭하다고 하니 너 에게 손해는 결코 아닐 것이다." "……" 백환성은 이어 품속에서 백운생에게 눈에 익은 호로병을 하나 꺼내서 그 에게 건네주었다. "자, 여기에 있는 것은 모두 열두 알의 동심환이다. 네가 만일 무공을 배 웠다면 한꺼번에 서너 알 정도 복용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아니, 이제 이것은 네 것이니 네가 알아서 친구에게 얼마를 주든 하고 싶은 대로 해 라." "고맙습니다." 백운생은 이미 자신이 약속을 했기 때문에 공손히 그 호로병을 받아들였 다. 이것을 보고 백환성은 문득 백운생에게 물었다. "너는 인간의 공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백운생은 조부가 갑자기 화제를 돌려서 그렇게 물어보자 다소 어리둥절했다. "모르겠습니다." 백환성은 다시 말했다. "인간의 공력의 한계는 바로 육십갑자(六十甲子)이다. 너는 이 일에 대해 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백운생은 다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 무림에서 다만 일갑자의 공 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일류고수라고 해서 알아주는 상태였다. 그렇거늘 육십갑자라니, 백운생은 일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모두 그렇다는 말씀이십니까?" 백환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모두에게 있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의 공력의 한계는 대략 열갑자라고 말할 수가 있다. 하지만 최고의 무예 경지 인 무형검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사람은 초인(超人)의 능력을 갖게 되어 능히 육십갑자의 공력을 소유할 수가 있게 된다. 물론 그렇게 많은 공력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기타 그런 알약이나 영약의 도움만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지." "……" "마땅히 우주 대자연의 이치를 깨우쳐서 거기에서 거대한 힘을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백운생은 그런 얘기를 듣게 되자 자연 절로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생각나는 대로 질문했다. "하지만 그렇게 몇 갑자의 공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을 두고 하는 것입니까?" 백환성은 미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요점을 잘도 물어 주었다. 기실 강호에서는 흔히 몇 갑자의 내공이 니 하고 있는데 그것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자질 이 서로 달라서 일갑자, 즉 육십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공력에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어떤 경지 에 이르게 되면 자연 동등해지므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하필 이면 몇 갑자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일이다. 너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 백운생은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보통 일갑자라고 하는 기간은 모든 것이 하나에서 다시 하나로 돌아오는 주기를 이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백환성은 웃므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마치 그와 같이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고, 공력 또 한 주기를 가지고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일갑자가 되어야 사람 의 공력은 하나의 단단단 공과 같은 완전한 공력을 가지게 된다. 물론 여 기에서 단단한 공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고 비유적인 표현인데, 말 하자면 완전하다는 뜻이다.: "……" "다시 말하면 인간의 공력은 육십년이 흘러야 하나의 완전한 무리가 없는 공력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 새로운 공력이 완성 되어 가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태여 일갑자, 이갑자 하는 것이 다. 그렇다면 매 일갑자의 공력의 차이는 얼마나 될 것 같으냐?" 백운생은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그야 이갑자는 일갑자의 두 배일 것이고, 삼갑자는 일갑자의 세 배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백환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와 같지 않다. 왜냐하 면 처음에 일갑자의 공력을 취하는 사람보다도 이미 일갑자의 공력을 취한 사람이 일갑자의 세월을 보내게 될 때에 더욱 많은 공력을 얻게 되기 때문 이다. 즉, 처음 일갑자의 공력을 취한 사람이 다시 일갑자를 수련하게 되 면 그는 처음 때보다는 자신의 일갑자의 공력이 작용하여 공력의 흡수가 많아지게 되고 그것이 거의 두 배에 달하게 된다. 즉 이미 취하고 있었던 일갑자의 공력에 더하여 이갑자째의 공력은 처음의 공력의 세 배에 달한다 는 것이다." 백운생은 놀라운 얘기에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삼갑자의 공력은 일갑자의 공력의 세 배가 아니라 아홉 배에 달한다는 말입니까?"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이것은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삼 갑자의 공력이 일갑자의 공력에 비해 그저 세 배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별 로 차이가 없는 것이지만, 아홉에서 열 배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 력의 차이가 심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것 같아도 생각해 보면 당연 한 것이다." 백운생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정확하게 일갑자의 공력을 완성하기만 하면 그 힘은 같게 되겠군요?"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사람들의 자질이 틀려서 그 공력이 완성되지 못하는 것뿐이지 만일 똑같이 일갑자의 공력을 완성했다면 그 두 사람의 힘도 같게 되는 것 이다. 그럼 만일 사람이 십갑자의 공력을 갖게 된다면 그 힘은 어떻게 되 겠느냐?" 백운생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계산이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업청나게 강해질 것입니다." 백환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언젠가 그것을 계산해 본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힘은 일갑자 공력의 수만 배에 달하게 될 것이다." "……" 백운생은 너무나도 엄청난 얘기를 듣게 되자 다소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백환성은 말을 이었다. "헌데 육십갑자의 힘을 계산한다는 것은 어렵고 복잡할 뿐이니 그저 가공 스럽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겠지. 거기에는 가히 천지조화(天地造化)의 힘 이 나올 수가 있을 것이다." 매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헌데 백운생은 이 백환성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얘기를 꺼내는지 그의미 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문득 그의 뇌리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조부님께서 그러한 육십갑자의 공력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닐까?) 바라보니 백환성의 안색은 평온하고 전혀 어떤 가공할 힘이 들어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어 백환성은 다시 물었다. "운생아, 너는 내가 왜 굳이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아느냐?" 백운생은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으므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백환성은 웃으며 말했다. "나의 말은 즉, 사람들이 무공을 배울 때에는 내공을 중요시하지만 결국 에는 그것보다는 참다운 무도(武道) 공부에 밀리게 된다는 것이다. 초인의 관문이라는 이 무형검(無形劍)은 바로 무도 공부의 마지막이다. 아니, 비 로소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무학의 길은 끝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즉, 제아무리 내공이 깊어도 십갑자를 넘어설 수가 없고, 비록 무공이 다 소 부족하다고 해도 무형검에 도달하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절로 공력을 얻 게 되는 것이니 구태여 너무 공력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공력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알겠느냐?" 역시 매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백환성은 다시 물었다. "너는 비단 천하에 영약을 가지고 있는 문파가 우리밖에 없지는 않을 것 인데 어째서 다른 문파의 사람들이 우리 일각 칠패를 따라오지 못하는지 아느냐?" 백운생은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혹시 그들이 무형검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백환 성은 고개르 끄덕였다. "그렇다. 과거의 무공은 하나같이 다만 진기의 운용에서 그치는 것이었 다. 그 최고의 경지를 최절정이라고 말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러한 단계를 넘어서서 정기신(精氣神)이 하나로 합일(合一)되고 마음으로 무공을 펼칠 수가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심검(心劍)이라고 말하고들 있다." "……" "과거의 명성을 누리던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등은 모두 이 심검의 경지 에 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초절정(超絶頂)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 리고 심검의 최후의 단계인 무형검에 이르러야 비로소 초인(超人)의 경지 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백환성은 다시 말했다. "나는 지금 이렇게 천하의 영약인 동심환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아직 내공이 형편없는 지경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능히 훌륭하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필시 너를 나의 훌륭한 후계자 로 만들 것이다. 그러니 너도 이제부터라도 좀더 무학의 본질에 대해서 깊 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백운생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백환성은 웃으며 말했다. "내 너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통보해 주마. 그리고 내 사 람들에게 일러 놓을 테니 네가 친구들을 당분간 이곳에서 데리고 있도록 해라. 네가 나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수련에 대해서는 역시 나중에 따로 얘기를 하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백운생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이제 백환성의 얘기는 끝난 것 같았다. 더러 짜증도 났었지만 그의 얘기 는 놀라운 것이었다. 특히 인간이 무려 육십갑자의 공력을 소유할 수가 있 다는 말을 듣고 나서 백운생은 새삼 무학의 가공함에 새롭게 눈을 떴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백환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만 물러가 쉬고 나중에 다시 들르도록 해라." 백운생은 공손하 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스스스…… 황금빛의 문이 좌우로 열리자 거기에는 한 명의 아름다운 중년여인이 서 있다가 웃으며 그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대공자(大公子)! 저를 따라 오세요." 백운생은 일찍이 이 여인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칠년 전에 금정봉의 암 자 마당에서 보았던 천랑단주 팔면관음(八面觀音) 해일화(海一花)인 것이 다. 바로 그녀를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문인중문은 이미 어디로 간 것일까? 백운생은 곰곰히 생각을 굴리며 해일화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백운생이 해일화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수십 수백 개의 봉우리 가운데 다 소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암봉의 꼭대기에 지어져 있는 작은 장원 이었다. 말이 장원이지 이 장원은 전체가 돌로 축조되어 있는 아름다운 작 운 궁정과도 같았다. "이곳에서 쉬고 계세요. 그럼 저는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하겠어요." 해일 화는 그 말을 남기고 되돌아 사라졌다. 백운생은 장원의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이내 안쪽에서 두어 명의 아리 따운 시녀들이 뛰어나와서 그를 향해 깍듯이 예를 올리는 것이었다. "쇤네 등이 대공자님을 뵈어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아무래도 그의 조부인 백환성은 이런 모든 것까지 치밀하게 준비해 놓은 후에 그를 맞은 것 같았다. 동심각의 후계자로서의 길이 이제 시작인가 백운생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실로 이 장원에 있는 시녀들은 아주 잘 훈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은 백운생을 데려다가 직접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도록 했으며, 때로는 스스로 욕탕 속으로 들어와서 등을 밀어주기도 했다. 숫총각인 백 운생으로서는 그야말로 낯뜨겁고 당혹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전신 에 아주 말끔한 백색 비단으로 갈아입고 나서 머리를 빗었을 때 이미 백운 생은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고 있어서 흐트러짐이 없었다. 식사를 들면서 그는 시녀들에게 물었다. "금룡단주에게서 무슨 연락이라도 없었는가?" 금룡단주는 바로 문인중문이다. 시녀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운생은 아무튼 아주 편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그가 잠을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주위가 소란스러워서 눈을 뜨고 보니 어이가 없게도 호덕승이나 악우왕 등이 이미 장원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대들은 언제 들어와 있는 것인 가?" 무구가 다소 붉어진 안색으로 대답했다. "그 금룡단주께서 저희들을 이쪽으로 인도해 주셨어요." 들어보니 내용이 알 만했다. 백환성의 지시가 떨어지자 문인중문이 우선 이들을 백운생의 거처에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이때 오히려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호덕승이 물었다.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백운생이 대답했다. "뭐가 말인가?" 호덕승은 손가락으로 백운생의 얼굴을 가리켰다. "어째서 가난한 선비가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부티나는귀공자로 변해서 이런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백운생은 순간 그들이 어제의 경과를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앞으로 백운생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모두 말해줘야 할 것 이었다. 백운생은 즉시 어젯밤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실은 말이야……" 악우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아니, 그래서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백운생은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구에게 향했다. 허나 정작 무구의 표정은 덤덤한 듯했다. "갑자기 왜들 저를 보시죠?" 악우왕이 말했다. "너는 항상 대형을 좋아하곤 했잖아. 그런데 대형이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는데 설마 상관없다는 말은 아니겠지?" 무구는 가볍게 웃었다. "제가 대가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저와 대가는 오누이로 맺어진 사이예요. 어찌 다른 욕심을 품을 수가 있겠어요?" 악우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이때 좌선비가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후계자의 수업에 대해서는 결정적으로 언급이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백운생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분은 나의 할아버지인데 설마하니 나에게 거짓말을 했겠는가? 그보다 우선 자네들에게 알릴 말이 있네." 호덕승 등은 일제히 백운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운생이 말했다. "조부님께서는 앞으로 자네들을 내가 데리고 있어도 되며, 또한 자네들이 동심각의 무공을 쓰는 것도 허용하고, 자네들이 원한다면 앞으로 동심각의 중요 보직에 쓰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네. 물론 일단은 내가 자네들을 데 리고 있는 것일세." 호덕승 등이 웃었다. "잘된 일이로군요." 백운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된 일이지. 그보다 한 가지 더욱 좋은 소식이 있네." 말과 함께 백운생은 품속에서 백환성에게서 받은 그 호로병을 꺼내들었다. "자네들은 아마도 스스로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실은 그것은 잘못된 생각일세.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이곳 동 심각에서는 그야말로 삼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네. 그 예로 자네들은 아직 동심각의 무공을 하나도 터득하지 못한 상태가 아닌 가!" 호덕승이 말했다. "각주께서 우리의 무공을 높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런 곳에 와서도 누구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무공 이 강해지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 되는 것이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것 을 받아 왔지." 백운생은 말과 함께 호로병 속의 물건을 손바닥에 쏟아 보 았다. 그러자 일순 주위에 짙은 단향의 냄새가 진동하며 호도알만한 알약 이 은박지에 싸여져서 십여 개나 드러났다. 그것을 본 순간 네 명의 백운생의 아우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동심환이다!" 그렇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바로 동심환이었다. 백우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자네들이 이것을 복용하고 더욱 무공이 증대되어 앞으로 나를 잘 보살펴 주기를 바라고 있네. 무공을 연성한 사람에게는 한꺼번에 서너 개 씩 먹어도 상관이 없다고 했으니까 자네들이 세 개씩 복용하도록 하게." 이에 무구가 나서서 간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최소한 네 개는 대가께서 복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요?" 백운생은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 나는 무공에 그다지 흥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마음만 먹는 다면 얼마든지 조부님께 이것을 구할 수가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네. 특히 내가 배운 공부가 내공을 운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실 이런 것은 내 게 필요가 없다네." 다소 기인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백운생이 워낙에 정색을 하고 말했기 때 문에 무구 등은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이에 백운생은 동심환을 각각 세 개씩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모두 지금 복용하도록 하게." 백운생의 지시에 따라서 호덕승, 무구, 악우왕, 좌선비 등 네 사람은 세 알의 동심환을 복용하고 즉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 기 시작했다. --계속-- #5381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14장 11/08 18:19 169 line 제14장. 白氏一門의 사람들 동심환이라고 하는 것은 복용한 즉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대 체적으로 한달 정도는 지나야 비로소 모든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었다. 호덕승 등의 사인은 동심환을 각각 세 개씩이나 복용하고 운기조식까지 마친 다음에 이번에는 각자가 백운생에게 전수받은 무공을 연마하기 시작 했다. 다만 그 중에서 무구만은 동심각의 무공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스 스로 아미파의 절학을 열심히 연마하기 시작했다. 이 장원의 부근에 있는 은밀한 공터들은 그들이 연무하기에 아주 젂ㄱ인 장소였다. 그렇게 동심각에서의 하루가 활기차게 시작되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 백운생은 자신의 침칠에서 가부좌를 틀고 깊은 참 선에 들어 있었다. 이곳 동심각으로 오기 시작한 이후에 백운생은 자신이 그 동안 꾸준하게 해오던 새벽참선이나 생식 등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그럴 기 회는 없게 될 것 같았다. 원래 백운생은 명예욕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무공을 배 우고 싶지도 않았고, 동심각에서 무슨 대공자로 불리우기를 바라는 바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운명(運命)의 흐름이라는 것은 실로 교묘하여 그를 전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백운생은 스스 로 이곳에 들렀다가 다시 아미산으로 돌아가서 수행이나 하면서 평생을 보 내고 싶었다. 하지만 조부에 의해 거의 공공연하게 동심각의 후계자로 내 정된 이후에는 전혀 그런 꿈은 망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앞으로 성수거의 여식과 혼인을 하고 동심각의 후계자가 된다면 백운생에게는 어떠한 행동 의 결정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백운생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 달가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거역할 수가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구태여 거부하고 싶은 생각도 일지 않 고 있었다. 일부러 운명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싸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반드시 자신 을 끌고 가는 운명의 뒷꽁무니를 항상 주시하고 있어야만 한다. 사람이란 실로 각각이다. 백운생이 초야에 묻혀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라면, 반대로 호덕승이나 악우왕 등은 차라리 이곳에서 풍운(風雲)에 휩싸 이고 싶어했다. 지금 아마도 그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만족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게다가 앞으로 백운생이 동심각의 주인이이 되게 된다 면 그들은 더욱 기뻐하며 동심각의 주요 실권을 차지하고 싶어할지도 모른 다. 그들은 백운생의 결의형제들이다. 비록 스스로는 달갑지 않은 것일지라도 백운생은 그들의 사고 방식이나 생각에 대해서 간ㅅㅂ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의 길이란 여러 갈래이지만 종래에는 과연 어느 것이 그 사람에게 있 어서 최선이었는가는 쉽게 알 수가 없는 일인 것이었다. 차라리 백운생은 그들의 열의에 부채질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동심각의 팔대신공의 모든 구결과 동작들을 암기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백운생은 그들이 금단공을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면 나 머지 무공들도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지금쯤 아마도 그들은 역시 아침에 복용한 동심환의 약효를 하루 빨리 흡 수기 위해 운기조식을 하거나 아니면 금단공 등의 연마에 골몰하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그들 가운데에서 유난히 신경을 쓰이게 하는 사람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무구! 여자의 심리라고 하는 것은 역시 사람의 심성임에는 틀림 이 없겠지만, 곁과 속이 일정하지 않아서 쉽게 간파할 수가 없는 것이었 다. 아까만 해도 그녀는 백운생이 혼인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아무런 표정도 일으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전혀 그런 내용을 잊었는지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뭔가 미심쩍은 구 석이 들기는 했지만. 이에 백운생은 내심 차라리 편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마음이 편하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백운생은 절로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지금 온갖 생각으로 참선은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역시 이 모양일 것이다. 아니, 원래는 백운생으로서는 용화선공에 대해서 일종 의 벽에 부딪쳤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 집착하지도 않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에 이르러서 다시 금단공을 시작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백운생은 잠시 후에는 가부좌를 풀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본 뒤에 밖으로 나갔다. 대청을 지나서 서가에 들러 책이나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마악 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갔을 때였다. 돌연 백운생은 한 사람 이 자신의 앞에 내려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금의청년(金衣靑年)! 나이는 대략 십칠팔세 되었을까? 체구가 상당히 우 람하고 그러면서도 용모는 매우 준수하여 어린 나이에도 어떤 중후한 기풍 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백운생에게는 전혀 낯설은 사람이었다. "누구요?" 백운생의 질문에 금의청년은 예리하게 번뜩이는 두 눈으로 백운생의 전신 을 한 차례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백운생이오?" 이것은 느닷없는 뚱딴지 같은 질문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그대는 누구시오?" 금의 청년은 다소 냉랭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백운산(白雲山)이오." 백운산, 백운생은 이 이름을 듣는 순간 뭔가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 다. 백씨성이고 운자 돌림이라면 아마도 그의 사촌형제일 가능성이 큰 것 이다. 비록 사촌형제이지만 워낙에 떨어져서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간에 이 토록 낯설어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금의 청년 백운산은 깨를 끄덕이며 보충했다. "내 아버지의 이름이 백불패(白不敗)요. 백환성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이 되는 셈이지." 백운생의 추측은 틀림이 없었다. 순간 백운생은 환하게 웃 으며 그를 맞았다. "아, 그렇다면 나의 동생뻘리 되는 사람이로군. 이거 반갑소. 내가 느닷 없이 불쑥 나타나서 실례가 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 "……" "우선 이쪽으로 좀 앉지 않겠소?" 백운생이 친절하게 웃으며 의자를 가리켰으나 백운산은 여전히 냉랭한 표 정으로 서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시간이 없소. 지금 나와 함께 가 주어야겠소. 나의 백부와 아버지, 그리고 숙부가 기다리고 계시오." 다소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제안이었다. ㄱ다가 상대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 있었다. 백운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내가 만일 가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소?" 순간 백운산의 두 눈에서 마주보기가 어려운 강렬한 섬광이 그의 두 눈을 향해 작렬했다. "나는 당신의 선택에 맡길 뿐이오." "……" 백운생은 다소 어이가 없는 기분이었다. 상대는 마치 돌이나 쇠로 만들어 진 사람과도 같았다. 그 눈빛을 보아하니 이 백운산이라는 그의 사촌동생은 이미 무예가 굉장한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아직 전혀 그에게 형이라는 말이나 공손한 어투를 쓰지 않았고, 표정이 험악하여 금방이라도 손을 쓸 수가 있는 태도를 보였다. 백운생으로서는 이 무례한 사촌동생과 한 차례 싸워볼 수도 있을 것이었 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해서 패한다면 그게 무슨 망신이 되겠는가? 따라 서 백운생은 다소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그럼 가도록 하지. 간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 " 그 말에 백운산은 두 눈에서 강렬한 기운을 거두더니 즉시 밖을 향해 몸 을 돌렸다. 이 무뚝뚝한 자의 등뒤를 자미 바라보다가 백운생은 천천히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호덕승 등이 곁에 있었다면 다소의 응원이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그들 중에서 하나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 백운산이라는 소년은 확실히 무예가 높은 것이 사실이었다. 장원의 밖 으로 나가자 암봉 위의 낭떠러지의 끝에서 백운산은 그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아니!) 백운생은 백운산의 신형이 마치 구름처럼 허공에 둥둥 뜬 채로 계속 앞으 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다소 놀랐다. 이들의 무예가 대단할 것은 예 상했었지만 이토록이나 뛰어난지는 아직 몰랐었다. 빙허임풍(憑虛臨風)! 동심각의 팔대신공의 하나인 절세의 경공술의 극치 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동심각의 팔대신공은 하나같 이 연성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렇다면 눈앞의 이 백운산은 벌써 그것들을 통달했다는 말인가? 백운산은 비록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어서 백 운생이 따라오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는 그 렇지 않고 백운생의 무공을 보려는 것일 테지만. 백운생은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그에게는 저러한 능력은 없었 다. 하지만 뭔가 생각한 듯 그는 곧장 백운산처럼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스슷. 마치 행운유수처럼 그의 신형이 처음에는 부드럽게 앞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불과 몇 장도 가지 못해서 그의 신형은 아래로 곤두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허공이라서 발을 디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 다. 이 백운생이 묵고 있는 장원이 있는 암봉의 높이는 상당한 것이어서 백운 생의 신형은 아내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괴상하게도 백운생의 신형은 아주 빠르게 떨어져 내리면서도 정신없이 신형이 빙글빙 글 돌아가고 여기저기가 심하게 파동쳤다. 그것은 곧 금방 죽으려는 사람 의 최후의 발악과도 같아서 이제 얼마 되지 않아서 백운생의 육신은 아래 쪽의 예리하게 불거진 기암고석들에 부딪쳐 형편없이 분해될 것 같았다. 이제까지 겨우 여기에 이르렀는데 그만 그렇게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오 호 애재라' 하는 표현이 걸맞는 것이었다. 헌데 마악 백운생의 신형이 뒤집어지면 바닥에 부딪치려는 찰나 갑자기 위에서 그의 몸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있었다. 그 힘은 아주 완강하여 그렇 게 빠른 속도로 아래로 떨어지던 백운생의 육신을 순간적으로 불가사의하 게 허공에 정지시켜 놓았다. 물론 그 손길의 임자는 바로 백운산이었다. (……) 백운생은 내심 의미심장하게 웃다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백운생이 멍청한 사람이 아닌 이상은 처음 보는 ㅁ례한 사람에게 자 신의 목숨을 걸어볼 리는 없는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아래로 떨어지는 데 있어서의 온갖 기운의 흐름을 시험해 본것이고, 당연히 백운생에게는 구명 의 수단이 있었다. 그가 마악 그 수법을 펼치려는 찰나에 그만 백운산에게 붙잡혔던 것이었다. 무학의 용어에 사량발천근이라는 말이 있다. 마치 그 것처럼 백운생은 사실 아주 작은 힘으로써 자신이 떨어지는 기운을 해소시 킬 수가 있었었다. "당신은 보기보다 성질이 급한 편이로군." 백운산은 백운생의 몸을 가볍게 지면에 내려놓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2권 끝> --계속-- #5382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15장 11/08 18:20 441 line 제15장. 고절(高絶) 하지만 이미 거기에는 일종의 친근감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백운생은 느 낄 수가 있었다. 백운생은 툭툭 먼지를 털고 일어서면서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하지만 이런 방법이 가장 빠르지 않겠소?" "……" 백운산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번에는 그는 허공으로 가지 않고 지상에서 신법을 펼쳤기 때문에 백운생이 쉽게 그의 뒤를 따라갈 수가 있었다. 백운생은 그의 뒤를 바싹 따라가며 말했다. "나를 도와줘서 고맙소." 백운산은 고개도 돌리지않고 대꾸했다. "우리 집안에는 그렇게 무모한 사람이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군. 나는 당 신이 앞으로의 일에 있어서도 그렇게 무모하게 되지 않기를 바라겠소." 백운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그대가 조금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 "……" 백운산은 잠시 묵묵했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말했다. "우리는 원래 운룡(雲龍)형이 장차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소. 그런데 그것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되다니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오."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건 실은 나도 마찬가지일세. 자네는 내가 실은 그러한 것들에 별로 관 심이 없는 것이라면 믿겠나?" "……?" 백운산은 힐끗 고개를 돌려 백운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지극히 예 리한 섬광이 그의 시선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야 말로 나이에 걸맞지 않은 소름끼치는 눈빛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백운산의 신형은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백운새은 더 이상 말을 붙여 볼 생각도 못하고 그저 뒤쫓아 가기에만 급 급했다. 이윽고 백운산이 백운생을 데려간 곳은 바로 하나의 작고 화려한 대청이 었다. 알고 보니 동심각의 모든 대소의 건물들은 먼저 보았던 백환성의 집무실 보다 호화로운 곳이 많았는데 그것은 혹시 백환성의 검소함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대청의 문을 열자 느닷없이 마악 안에서 걸어나오는 한 사람과 마주쳤다. 흑의인(黑衣人). 그의 옷차림은 평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운생은 그에게 서 풍겨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 다. 나이는 대략 삼십대의 중반이라고나 할까? 용모는 준수한 편이었지만 강렬한 기운이 면전에서 느껴졌기 때문에 백운생은 다소 기분이 섬뜩해지 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는 다소 멈칫하더니 웃고 있었다. "아니, 운산아, 이 사람은 누구지?" 백운산의 얼굴은 다소 굳어져 있었다. 그는 잠시 묵묵하다가 대답했다. "그는 바로 백운생이오." 순간 흑의인은 눈이 다소 휘둥그래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바로 요즈음 잘나간다는 아미산에서 올라온 백대공자로군 그래!" 이어 백운생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자네의 숙부가 되겠군 그래. 내 이름은 백불인(白不仁)이고, 별호 는 옥면판관(玉面判官)인데, 현 동심각주의 넷째 아들이라네." 백환성의 넷째 아들, 아까 백운산이 말했던 백부와 숙부 가운데에서 숙부 인 것이 틀림이 없었다. 헌데 백운생은 문득 이름이 다소 묘하다고 느꼈다. 백운산의 부친의 이름 은 백불패라고 했고, 또 이 사람의 이름은 불불인이다. 그렇다면 백부라는 그 사람의 이름은 또한 무엇일까? "백운생입니다." 내심 생각을 하면서 백운생은 흑의인 백불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에 멋적게 손뼉을 치던 백불인은 다시 말했다. "실은 나는 말이야, 아직 총각인데, 혹시 그 아미산의 부근에는 괜찮은 여자라도 없었는가? 뭐 비구니라도 상관은 없는데……" "숙부!" 백운산이 옆에서 소리치자 백불인은 다소 찔끔한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녀석은 무슨 말을 못하게 한다니까!" 이어 무슨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면서 밖으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백운산과 백운생 두 사람은 그런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다시 안쪽으 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청! 이곳의 실내 장식은 상당히 우아하고 화려한 면모가 있었다. 중앙 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거대한 팔선탁들이 차례로 늘어서 있었고, 통로의 끝부분인 정면에는 다시 몇 개의 태사의가 장중하게 자리하고 있었 다. 실내에 있는 가구들은 모두가 최고급의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바 닥에는 역시 고급의 융단이 깔려 있었으며, 아름다운 조각들이 가득한 천 정에는 형형색색의 궁등들이 은은한 빛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지금은 대낮이다. 그러나 궁등의 불빛이 부근의 금은보석의 표면에 반사되어 실내 를 아주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기 때문에 대낮에도 불을 켜놓고 있는 것이 리라. 지금 전면의 그 태사의에는 몇 사람이 자리하고 앉아서 이쪽을 건너다보 고 있었다. 모두 네 사람. 그 중 두 사람은 중년인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나이 어린 소년과 소녀였는데, 모두 아주 침착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 고 있었다. 백운생은 그 가운데 중앙의 좌측에 앉아 있는 서생 차림의 중년인에게 시 선을 보냈다. 비록 차림새가 학자풍이기는 해도 은연중 그 사람이 좌중의 분위기를 제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우측을 보니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이 맹렬한 시선으로 이쪽을 쏘아 보고 있었는데 그 용모가 백운산과 닮아 있었다. 백운생은 그 사람이 백운 산의 부친인 백불패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백운산의 뒤를 따라서 백운생은 곧장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장내의 분 위기는 다소 긴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이르자 문득 예의 그 서생 차림의 중년인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 다. "자네가 바로 아미산에서 올라온 백운생인가?" 백운생은 포권을 하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만…… 혹시 두 분께서는……" 이때 갑자기 옆의 태사의에 앉아 있던 어린 소녀 하나가 까르르 하는 교 소를 터뜨렸다. 나이는 대략 십삼사세 가량 되었을까? 용모가 지극히 아름 다울 뿐만 아니라 깜찍한 귀여움마저 깃들어 있어서 장차 천하의 미인이 될 것 같은 아름다운 어린 소녀였다. "그야 뻔하지 않아요? 두 분의 숙부님들을 앞에 두고도 몰라보고 말을 더 듬다니, 그대는 정말로 멍청하군요." 좌중의 시선은 물론이고 백운생의 시선 역시 그쪽으로 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순 백운생의 얼굴에 가벼운 웃음이 떠오르며 그 어린 소녀를 향 해 포권하며 물었다. "나야 당연히 멍청한 사람이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똑똑하고 어여쁜 우 리 꼬마 아가끼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을 알수가 있을까?" 그 말에 그 소녀는 다시 자지러지는 듯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문득 다른쪽에 않아 있던 나이가 열다섯 살 정도의 소년 하나가 다 소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제지했다. "하매(霞妹)! 그렇게 크게 웃으면 못써!"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며 볼멘 소리로 물었다. "흥, 어째서 내가 지금 웃으면 안된다는 거지?" 그 준수하고 우람한 소년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지금은 우리 아버지와 백부께서 저 사람과 첫대면을 하고 있는 중이 아 니야? 그런데 네가 그렇게 웃는다면 두 분의 체면이 뭐가 되었어?" 허나 소녀는지지 않았다. 즉시 눈빛을 반짝이며 반박을 하는 것이었다. "뭐라구? 하지만 지금 저 사람은 우리의 또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먼저 아버지와 숙부님을 소개해 드려야 하는 것임을 모르는 모양이지?" 소년은 다소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럼 너는 소개를 하기 위해서 웃었다는 말이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원래 이 자리는 매우 딱딱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렇다면 서로 에게 좋지 않을테니 내가 일부러 웃고 나서 일을 시작하려는 거야. 나의 그러한 행동에 비해서 악(嶽)오빠는 대체 무엇을 했다고 야단이지?" "……" 소년은 일시 말이 막히는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소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시 백운생에게 고개를 돌려서 말했 다. "험험, 본 낭자는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도록 하겠어요. 우선 본 낭자의 존성대명은 바로……" 그때 아까의 그 소년이 하하 하고 웃는 소리를 냈기 때문에 소녀는 말을 중단하고 그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악오빠, 대체 왜 웃는 거지?" 소년은 웃으며 대답했다. "바보야, 그런 때는 존성대명이 아니라 방명(芳名)이라고 하는 거야." 소 녀는 일순 안색이 붉어졌으나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런 것은 나도 알아. 다만 한번 그렇게 해보았을 뿐이야." 이어 백운생 에게 고개를 돌리고 다시 말했다. "내 방명은 백운하(白雲霞)예요. 그리고 저 악오빠의 이름은 백운악(白雲 嶽)이고, 음…… 우리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별호가 없어요." 지금 이 두 명의 어린이들이 좌우에서 말다툼을 하는 바람에 좌중의 분위 기는 매우 부드러워져 있는 상태였다. 백운생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아름다운 이름이로군. 내 이름은 백운생이라고 한다." 소녀 백운 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오똑한 콧날을 실룩거리며 코우음을 치는 광 경은 귀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흥, 그 이름은 이미 우리도 알고 있어요. 그것보다 우선 내 말이나 잘 듣도록 해요. 저기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이름이 백불의(白不義)이고, 별호는 신기수사(神機秀士)예요. 그리고 저기에 계시는 우리 숙부님은 이 름이 백불패(白不敗)이고, 별호가 대력존자(大力尊者)예요. 그리고 방금 전에 나가신 숙부님은……" 백운생이 웃으며 잘라서 물었다. "바로 옥면판관(玉面判官) 백불인(白不仁)이시겠지?" 백운하는 눈을 동그 랗게 떴다. "어마, 이미 그럼 만났었군요?" "그렇다." 허나 백운생은 내심 다소 기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백불의라…… 정말로 기이한 이름이로군.) 세상에는 갖가지의 말이 있지만 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좋은 말을 이름 으로 쓰기 마련이지, 무슨 불의하다는 말을 쓰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 었다. 백운생은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곧장 두 사람의 숙부를 향해 다시 정중 하게 예를 올렸다. "삼가 두 분 숙부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기이하게도 이 두 사람의 숙부는 자녀들이 나서서 말다툼을 하는데도 전 혀 말리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허나 백운생이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하자 신기수사 백불의가 천천히 다 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네. 숙부들이 여럿이나 되면서도 미처 자네를 돌보지 못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천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저는 이미 돌보심을 받고 편하게 살아가고 있 었습니다." 백불의의 얼굴에 가벼운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로군. 그래, 이곳에 온 자네의 소감은 어떠한가? 한번 살아갈 만하다고 생각되나?" 백운행은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에요. 저는 너무나도 편해서 오히려 병이 날 지경입니다." "음……" 백불의는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조금 잘못된 생각일세. 앞으로 자네는 동심각의 후계자가 될 몸 이니 보다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을 해야지. 만일 자네를 후계자로 세우 고 싶다고 해도 자네의 능력이 거기에 미치지 않는다면 어쩔 수가 없게 되 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후계자가 되지 않으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백운생의 내심에서 는 그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으나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예, 앞으로는 열심히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불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잘 생각했네. 사실 현 동심각주께서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실망을 느 낀 나머지 손자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후계를 정하려고 하신다네. 그분이 그렇게 이미 결심을 하셨으니 우리야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지만, 자네야 말로 더욱 노력하여 그분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게." 실로 진 심어린 충고라고 할 수가 있었다. 말 그대로 설령 후계자로 내정이 되었다 고 하더라도 능력이 없다면 장차 유지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거 귀찮게 되었는데!) 백운생은 내심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불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사실 자네를 부른 것은 이렇게 혈육끼리 만나서 서로 안면을 익혀 두자는 것이었지. 원래는 여기에 있는 운하의 위에 운봉(雲鳳)이와 운룡 (雲龍)이가 있는데, 지금 바빠서 미처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그 아 리들과는 나중에 만나보도록 하게." "예." "원래는 이 자리에 주안상을 준비하여 함께 술이라도 나눠야 하겠지만, 보다시피 그대의 상황은 매우 바쁠 것 같아서 간단하게 몇 마디의 말로써 인사를 대신하는 것일세. 그 일로 인해서 자네가 불쾌해지지는 않겠지?" 백운생은 공손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백불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어 잠시 생각을 더듬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음, 과거의 일을 말하자면 자네의 아버지와 나는 상당히 친밀했다고 할 수가 있네. 자네의 아버지는 매우 고집이 세고 대쪽같은 성품의 무림신사 였지. 아마도 그분을 미워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네." "……" "내 자네의 돌아가신 선친을 생각해서라도 자네에게 정성껏 도울 테니 앞 으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리로 와서 나를 찾도록 하게. 알겠는가?" 백운생은 감격하는 심정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백불의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한 것이지, 고마울 것이야 있겠는가?" 백운생이 말했다. "제가 듣기로, 원래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후계자의 수업을 받게 하 였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백불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운룡이 말인가? 하긴 그랬었지.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았 기 때문에 후계자가 될 뻔했었지. 하지만 이제 자네가 장손임이 드러난 이 상은 후계자의 위치는 불변일 것일세. 다만 자네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지." 백운생은 감격하여 말했다. "운룡아우가 불유쾌할 것임에도 숙부께서 저를 이토록 성원해 주시는 것 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은혜입니다.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백불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권력의 욕망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 난들 나의 맏아 들이 동심각의 주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었겠느냐마는 돌아가신 형 님을 생각하여자네를 적극 밀어주게 되었던 것이네. 자네는 돌아가신 선 친을 고맙게 생각하면 될 것일세." 일반적으로 권력 싸움에는 부모자식도 없다는 말이 있거늘 백불의의 이러한 태도는 백운생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어 백불의는 옆의 백불패에게 말했다. "내 말은 이제 끝났으니 자네가 한마디 하겠는가?" 백불패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다음에 백운생에게 입을 열었다. 그의 음 성은 차분하고 낭랑한 백불이의 음성과는 달리 강렬한 구석이 있었다. "나 역시 둘째형님의 생각과 같네. 자네가 열심히 노력을 다한다면 우리 는 적극 자네가 동심각의 주인이 되는 일에 힘을 다할 생각이네. 그리고 앞으로 다른 형제들과 잘 화합하도록 하고……" 백불패는 거기에서 말끝을 흐렸다. 헌데 그것으로 그의 말은 끝이었다. 백불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 보도록 하게." 백운하, 이 깜찍한 어린 소녀는 이제는 정식으로 백운생을 오빠라고 부르 며 따랐다. 백운생이 대청에서 나올 때 백운산 대신에 그녀가 따라붙었다. "내가 큰오빠의 거처를 알고 있으니 내가 안내해 줄께요." 허나 기실 백 운생은 이미 이쪽으로 오면서 돌아갈 길을 정확하게 기억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들과 친해질 기회인지라 백운생은 웃으면 고맙다고 말을 했다. "그래 주겠어?" "좋아요!" 백운하는 팔짝팔짝 뛰어서 앞으로 나서며 명쾌하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서 번쩍 하고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잠시 후에 다시 땅 속에서 솟아나듯 이 나타났다. 백운생은 그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이가 이제 겨우 십삼 세 정도의 어린 소녀의 무공이 이렇게 추측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니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백운하는 백운생의 옆으로 다가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장원에는 아무런 일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백운생은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어느새 내 거처에 갔다왔다는 말인가?" 백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예요. 내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아요?" "……" "큰오빠와 좀더 천천히 걸어가면서 얘기를 하고 싶어서 내가 미리 그곳을 살펴보고 온 것이지요." 백운생은 내심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로 이들의 무공 경 지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오빠의 입장에서 그런 문제를 시시콜 콜하게 물어볼 수는 없다고 느껴서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나와 얘기를 하고 싶다고? 무슨 다른 할말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백운 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할말은 없어요." 백운생은 의아해졌다. "그럼?" 백운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큰오빠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렇죠. 사실 할말이 있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어요." 백운생은 그녀의 천진한 마음에 기분이 절로 즐거워졌 다. "그럼 왜 내가 마음에 들었는데?" 백운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야 멍청하니까요." "멍청하다고? 내가?" 백운생은 절로 어이가 없어져서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백운하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멍청한 사람이 큰오빠말고 여기에 또 있나요?" (……?) 백운생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멍청하지 않다고 변명할 수도 없 는 노릇인지라 이렇게 물었다. "그럼 너의 그 언니나 오빠들은 멍청하지 않다는 말이냐?" 백운하는 고개 를 흔들었다. "그들은 너무나 잘난 척하고 또는 거칠어요. 나는 사실 큰오빠와 같이 멍 청하고 우스운 사람을 좋아해요." 백운생은 백운하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럼, 그 중에서 잘난 척하는 사람은 누구고 거칠은 사람은 누구냐? 거 칠은 사람은 아마도 운산이나 운악이겠지?" 백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거칠은 사람들은 큰숙부의 아들들인 운산오빠와 운악오빠이고, 잘난 척하는 사람들은 우리 오빠와 언니이죠. 왜요? 한번 그들을 보고 싶 은가요?" 백운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너의 오빠는 사실 나처럼 후계자가 될 뻔했었는데 밀려나게 되어서 나를 싫어하지 않겠느냐?" 백운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원래는 기분이 나쁜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돌린 것 같았어요. 요즘은 무공 연구 에만 몰두하고 밖에는 잘 나오지 않아요." 백운생은 솔직한 그녀의 대답에 왠지 그 순수한 마음을 이용한 것 같은 자신에 대해서 미안한 감을 느꼈 다. 그리하여 말했다. "그렇다면 미안한 일이로구나. 네가 나중에 너의 오빠에게 내가 미안해 하더라고 전해 주겠느냐?" 백운하는 즉석에서 승낙했다. "그러죠 뭐." 백운생과 백운하는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는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으나 이 렇게 이야기가 중단되자 절로 신법의 속도가 빨라졌다. 이 때 백운하가 백운생의 신법을 펼치는 광경을 보고 다소 의외라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어? 큰오빠는 바보인 줄 알았는데 제법 신법이 고절(高絶)한데요." 백 운생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내 신법이 고절하다고?" 백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큰오빠는 보기에 공력이 아직 일갑자도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지금 신법을 펼치는 모습을 보니 한 이갑자의 공력을 가진 사람 처럼 보여요." 백운생은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떠올라 물었다. "그럼 빙허임풍과 같은 허공에 떠다니는 경공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얼마 의 공력이 필요할 것 같으냐?" 그 말에 백운하는 문득 까르르 웃었다. "할 것 같으냐는 또 뭐예요? 호호, 그냥 물어보면 되는 거죠." 백운생은 일순 그녀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너는 알고 있다는 말이냐?" 백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주 당연하다는 식의 말투였다. 백운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건 어째서지?" 백운하는 대답했다. "그야 내가 이미 그 빙허임풍을 배웠으니까요. 지금 보여드려요?" "……" 다음 순간 백운생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느닷없이 앞에서 멀쩡하게 가던 백운하의 신형이 둥실 허공에 떠오른다 싶은 순간 마치 환영(幻影)처럼 빠 르게 혹은 느리게,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다시 느리게 허공을 떠서 날아 가는 등의 귀신같은 재주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것이 빙허임풍이었다. 물론 백운생은 아까 이미 백운산이 빙허임 풍을 펼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변화가 배제된 간단한 동작에 불과한 것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이제 겨우 십삼세의 어린 소녀가 깜찍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절세무공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에 백운하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지면에 가볍게 내려섰 다. 한 차례의 재주를 보였는데도 그녀의 숨결이나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원래의 평온한 모습 그대로였다. 백운하는 이어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는 백운생을 향해 웃으며 설명해 주 었다. "원래 공력이 삼갑자 정도에 이르면 최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죠. 하지만 보통은 그것으로 빙허임풍,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 어풍비 행술(御風飛行術)과 같은 비공(飛功)을 펼칠 수는 없어요. 다만 경공술에 재주가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죠. 그 위에 육갑자의 공력을 갖게 되면 초절 정의 경지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그때에는 굳이 경공술의 재주가 없다고 해도 이러한 비공을 펼칠 수가 있다고 해요." 백운생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럼 너는 언제 이것을 익혔느냐?" 백운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난 공력이 삼갑자가 되었을 때 이미 배워 버렸어요. 아버지가 말씀하셨 죠. 삼갑자의 공력으로 빙허임풍을 연성하지 못하면 그건 멍청한 거라고 요." 백운생은 이 작은 소녀가 이토록 무공에 대한 견식이 높은 것에 감탄을 하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빙허임풍은 동심각의 중요한 팔대신공의 하나인데 그것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 말에 왠지 백운하는 다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중요한 팔대신공이라고요?" 백운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아니라는 말이냐?" 백운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예요. 원래 강호에서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동심각의 내부에 서는 빙허임풍과 같은 무공은 아주 쉬운 무공에 불과해요. 봐요, 저와 같 은 어린 계집애도 이미 배우고 있지 않아요?" (……?) "원래 동심각의 가장 중요한 무공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건 바로 무극검 해(無極劍解)라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무형검(無形劍)으로 가는 무도의 정수(精髓)라는데, 나는 아직 그것을 배우지는 못했어요." 백운생은 다시 물었다. "그럼 너의 공력은 지금 몇갑자나 되느냐?" 백운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호호, 그것은 비밀인데…… 허나 한 가지만은 말해 줄께요. 나의 공력은 삼갑자는 아니예요." 삼갑자가 아니라면 그럼 사갑자에 달한다는 말일까? 백운생은 이 깜찍하고 귀여운 어리 소녀에 대해서 신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극검해! 물론 백운생도 그 구결에 완전하게 암기를 하고 있는 상태였 다. 하지만 워낙에 구결의 내용이 길었고 의미심장하여 쉽게 구결의 내용 을 깨닫기 어려운 것이었다. 원래 백운생도 그것은 가장 나중에 호덕승 등 에게 가르쳐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헌데 지금 백운하의 말을 들어보니 아직은 전혀 가르쳐 줄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히 동심각에 들어와 보니 과연 백씨 일문이 어떻게 해서 천하를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확연하게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백씨 일문의 자손들이 특별히 뛰어나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백운생이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문득 백운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큰오빠도 그렇게 풀이 죽어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큰오 빠도 멍청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까요." 백운생은 그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들었다. "증명되다니?" 백운하가 대답했다. "나는 원래 천하의 신법이나 보법에 관해서는 거의 통달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큰오빠의 공력은 형편없지만 그 신법은 이상해요.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펼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거든요. 대체 어떻게 하 는거죠?" 백운생은 이에 웃었다. 백운하가 기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지금 백운생의 신법은 사실상 스스로의 공력으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흐르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혀 차원이 다른 무공이기 때문에 백운하는 이해하지 못하고, 설령 이해한다고 해도 펼칠 수가 없는 것이었 다. 이것은 고도의 깨달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백운하는 다시 재촉했다. "아이, 큰오빠, 어서 말씀 좀 해보라니까요." 따라서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운하야, 너는 참으로 욕심이 많구나. 나의 이 신법을 가지고 너의 신법 을 따라잡을 수가 있을 것 같으냐?" 백운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잡하기는 해도 빠를 것 같지는 않아요." 백운생은 말했다. "그것 좀 봐라. 너보다 빠르지 않은 신법인데 나도 이런신비한 구석이 있어야만 네가 나중에 계속 나를 좋아하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 "……" 그 말에 백운하는 잠시 묵묵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래요."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나에게 이 신법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백운생은 기실 이 어린 소녀가 나이가 들어서 똑똑해진다 면 얼마든지 자신의 깨우침을 가르쳐 줄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다. 그러나 비록 그가 가르쳐 준다고 해도 쉽게 알아들을 수가 있는 사 람이 있을까? 백운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이어 어느새 두 사람이 백운생의 장원의 아랭 이르렀음을 알고는 백운하 는 방긋 웃으며 백운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갈께요. 그리고 나중에 찾아갈 테니 저 안의 사람들에게 도 내 얘기 좀 미리 해주세요. 알았죠?" 백운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운하는 즉시 허공으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번 쩍하며 증발하듯 빠르게 사라졌다. --계속-- #5383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16장 11/09 18:31 351 line 제16장. 무림맹(武林盟) 백운생이 장원으로 돌아가자 이미 호덕승, 무구 등이 그를 눈이 빠져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웬일이야? 아까는 저마다 일을 보느라 정신이 없더니만." 그 말에 호덕승은 다소 안색을 붉히더니 말했다. "우리가 대형의 복을 모두 빼앗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 짝이 없소." 백운 생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게 생각할 것은 없네." "……?" 백운생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내공이 사갑자가 기본이라더군." "아니, 뭐라구요?" 악우왕이 놀란 표정으로 소리쳥 물었다. 이에 백운생은 다시 웃으며 대꾸했다. "우선 자네들을 보더라도 앞으로 얼마 되지 않으면 모두 사갑자의 공력을 갖게 될 것이 아닌가!" 사갑자의 공력, 이것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이미 일갑자의 공력을 가지고도 천하를 종횡하고 싶은 욕망에 가슴을 떨었던 그들이었는데 사갑 자의 공력을 이루게 된다면 그것은 말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대번에 그들 의 무공 경지가 일류에서 최절정의 경지로 뛰어오름과 동시에 혹시 빙허임 풍의 경공술이나 그 밖의 무공들을 배울 수가 있게 되지 않을까? 악우왕은 잠시 어리벙벙했으나 이내 백운생의 말뜻을 생각하고 스스로 얼굴이 벌개 지며 앞날에 대한 거대한 희망에 부풀었다. 일약 사갑자의 공력을 가지게 된다면 설사 동심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천하에 나가서 일문의 패주(覇 主)로서 군림할 수가 있을 것이다. 미처 감히 생각하지 못했는데 백운생의 말을 듣고 나자 현실에 대한 실감이 들어서 악우왕은 잠시 행복한 기쁨에 마음이 크게 부풀었다. 이에 호덕승이 즉시 그 자리에서 백운행을 향해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말 했다. "대형, 실로 이와 같은 모든 것은 오로지 대형의 은덕이오. 대형이 아니 었다면 우리는 하나같이 가정의 건달이나 되었을 것이 분명할 것이오. 대 형, 우리는 앞으로 결코 대형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평생을 대형을 돌 보아 드리고 생사고락을 함께할 것이오." 호덕승이 새삼 감사를 드리는 것 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자 악우왕과 좌선비, 그리고 무구도 함께 그 자리에 엎드려서 함께 외쳤다. "대형은 바로 우리의 주군(主君)이오!" 이렇게 백운생의 지위는 청풍회에서 일약 격상되었다. 허나 백운생은 여 전히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치켜세우지 마시오. 원래 그대들의 성취는 그대들의 복에 의한 것이지 나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오. 그런만큼 겸손한 그대들에게 나는 더욱 생사고락을 함께할 것임을 맹세하겠소." "대형……" 악우왕이 잠시 감정이 격해져서 그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을 주르르 흘려냈 다. 이윽고 잠시의 격정의 순간이 지나가자 백운생은 아우들을 하나씩 잡아서 일으켰다. 그리고는 문득 물었다. "헌데 그대들은 어떻게 내가 밖으로 나간 줄 알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 소?" 악우왕이 대답했다. "아, 그야 우리가 찾아서 보이지 않으니까 그랬던 것이 아니오!" 백운생 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이미 점심식사도 끝났고 나를 찾을 일이 없었을 텐데, 혹시 그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호덕승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대형의 생각은 예리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도 자칫 말씀드리지 않을 뻔했군요. 사실 조금 전에 철사자(鐵獅子)가 다녀갔었습니다." 백운생은 어리둥절해졌다. "철사자?" 이에 옆에서 악우왕이 소리쳐 말했다. "아, 형님도. 철사자 하면 바로 철사단의 단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백운생은 뒷머리를 툭 쳤다. "아 참 그렇지. 헌데 그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었을까?" 호덕승이 말했 다. "동심각주께서 형님을 보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녁때 다시 오겠다고 했으니 아마 잠시 후에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음……"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대체 철사자는 무엇 때문에 그를 찾은 것일까? 혹시 어제의 일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겼던 것이었을까? 철사자라면 백운생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하긴 그때의 그 벽력부(霹靂 斧) 혁련철수(赫連鐵樹)가 아직도 그 직책을 맡고 있는지가 의문스러운 일 이기는 하지만. 백운생은 공연히 아우들에게 근심을 끼쳐주기는 싫었다. 지금 그들은 공 력을 크게 늘려가는 와중이기 때문에 차분한 상태에서의 수련이 필요한 상 태인 것이었다. 자칫 작은 마음의 번뇌라도 생긴다면 그것이 참혹한 주화 입마(朱火入魔)라는 결과를 낳게 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백운생은 태평스럽게 말했다. "그럼 자네들은 어서 그만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서 무공을 수련하도록 하 게. 내가 머지 않아서 다른 훌륭한 무공들을 새로 가르쳐 줄 것이니 각자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네." "알겠습니다, 형님." 이제 아우들은 백운생에 대한 신뢰감이 크게 깊어진 것 같았다. 백운생은 아우들을 모두 방으로 돌려보낸 다음에 혼자 서재로 향했다. 서재! 천하의 동심각의 명성답게 이곳의 서재 또한 온갖 귀하고 훌륭한 서적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백운생은 안으로 들어서면서 우선 흐뭇한 마음을 느꼈다. 원래 누구나 서재는 보기 좋으라고 마련하여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실제로 그와 같이 서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었다. 백운생은 이미 워낙에 많은 서책을 대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미 서가 위에 자신이 아직 읽지 않은 서책들이 수십 권에 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곳은 비록 아미파의 장경각만큼이나 넓고 규모가 방대하지는 않지만 그 러나 귀한 서책만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무학의 이론서적들도 상당히 끼어 있었다. 백운생은 비록 무학비급들은 관심이 없 었지만 어떤 이론서적들은 흥미를 가지고 덤벼드는 습관이 있었다. 이내 백운생은 한 권의 서책을 뽑아들고 한쪽의 탁자 앞에 가서 열심히 독서삼매경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백운생은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 리다가 가볍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한 사람, 일신에는 흑의를 걸치고 얼 굴이 우락부락하며 체구도 험악한 느낌을 줄 만큼 장대한 중년의 사내, 바 로 아까 생각했던 철사단주 벽력부 혁련철수였다. 백운생은 아직 이 얼굴 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뚝뚝하고 왠지 살벌한 느낌을 주는 얼굴을 마주 대하면서 백운생은 먼 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까 저를 찾으셨었다구요? 칠년 전에 비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습 니다." 혁련철수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고 무뚝뚝했다. "지존께서 부르시오." 동심각주는 동심지존이라고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를 지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운생은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혁련철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 백운생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과 계속 말을 해봐야 얻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리하여 그는 밖으로 먼저 향하며 말했다. "그럼 가볼까요?" 백환성은 예의 그 작은 집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혁련철수의 인도를 받아서 백운생이 안으로 들어서자 백환성은 매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서 오너라." 백운생은 우선 그를 향해 공식적인 인사를 올렸다. "할아버님을 뵈옵니다." "음." 혁련철수가 황금문 밖으로 사라지고 나자 백환성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는 불의와 불패 등을 만났었다면서?" 백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백환성이 물었다. "그래, 만나보니 느낌이 어떻더냐?" 백운생은 대답했다. "생각보다 그들은 매우 능력이 탁월하고 사려가 깊으며 정이 깊다고 느꼈 습니다. 그들은 저를 환영해 주었고, 저는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었습니 다." "허허……" 백환성도 기꺼운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렇게 그들과 친해졌다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구나. 그건 그렇 고,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바로 너의 일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백운생은 의아해졌다. "저의 일이 임박했다니요?" 백환성은 말했다. "너와 성수거의 혼인식 날짜가 임박했다는 뜻이다. 우선 한달 후에 네가 성수거로 가서 그 처자를 만나서 선을 본 다음에 이곳에 와서 혼인식을 올 리기로 했다." 백운생은 물었다. "그럼 혼인할 날은 지금부터 한달쯤 후라는 말씀이십니까?" 백환성은 고 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혹시 기다려지기라도 하느냐?" 백운생은 쓴웃음을 지었다. "할아버님도……" 백환성도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네가 아무리 서두르고 싶다고 해도 그 이상은 안된다. 혼인식을 올리기 전에 우선 네게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 백운생이 묵묵하자 백환성이 물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 것 같으냐?" 백운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백환성은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답부터 하기는……" 이어 백환성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그 사이에 후계자로서의 기초를 닦는 일이다. 만일 네가 이런 상태로 성수거에 가게 된다면 성수거의 그 성수신의(聖手 神醫)가 뭐라고 생각하겠느냐? 혹시 네가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 냐고 의심할 것이 아니겠느냐?" 백운생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인데 의심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백환성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가 않다. 대체로 이러한 이은 잡음이 없을수록 좋은 것이다. 네가 좋은 인상을 주고 서로간에 마찰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게다 가 너는 마침 후계자의 수업을 쌓아야 하는 입장이니 잘된 일이 아니겠느 냐?" "……" 백운생이 묵묵하자 백환성이 다시 말했다. "의문스러운 것을 물어 보아라." 이에 백운생은 내심 그렇지 않아도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항에 대 해서 질문을 했다. "저어, 이런 질문을 드려도 좋을지 모르지만, 아까 숙부님들의 이름을 들 었을 때 다소 이해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의나 불인 등의 말은 어째서 이름으로 지으신 것입니까?" 그 말에 백환성은 일순 어이가 없다는 듯 웃다가 대답했다. "녀석, 별 것을 다 묻는구나. 하지만 대답 못할 것도 없지. 말하자면, 불 악(不惡)이나 불귀(不鬼), 혹은 불마(不魔)라는 정도의 이름을 지었어야 하는데 어째서 도리어 그런 이름을 지었느냐 하는 것이겠지?"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음……" 백환성은 잠시 백운생의 얼굴을 바라본 뒤에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의 사람들이 인의(仁義)와 도덕을 외치고 있지만 정말로 가식없이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 지극히 열악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참다운 길을 찾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항상 사악해 지기 쉬운 환경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내부에 사악함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일단 이론적인 얘기가 나오자 백운생은 흥미있는 듯이 눈빛을 반짝거렸 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백환성은 고개 를 내저었다. "누구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하고, 또한 누구는 악하다고들 하지만 그 얘기들은 다소의 일리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본성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근본이 좋기도 하고, 어 떤 사람은 근본이 나쁘기도 하다. 그런데 본성이 좋든 나쁘든 인간은 누구 나 악에 물들기가 쉽다는 것이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에 물든 상 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 "이것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이름에 인의니 도덕군자니 하는 이름을 써붙 이는 것은 역시 가식이 아니겠느냐? 오히려 스스로의 결점을 인정하고 참 다운 도리에 접근하도록 차라리 불의나 불인이라고 지어준 것이다. 그것이 위선적인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백운생은 다시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보고 백환성이 다시 물었 다. "이제 이해가 되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 고……" 백환성은 백운생의 어깨를 툭툭 쳤다. "녀석, 그런 일에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도 다른 일을 물어보도록 해라."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지금 무림에서는 우리 동심각을 무림맹(武林盟)이니, 혹은 무림의 지존 이니 하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확실한 근거 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백환성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바라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좋은 질문을 했다. 보아하니 너는 아직 우리 동심각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이겠지?"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백환성은 말했다. "좋아. 내 그럼 너에게 직접 설명해 주지. 우리 동심각은 원래는 백씨 일 문의 자랑스러운 무림세가였다. 그런데 과거에 무림에 커다란 혼란이 일어 나서 우리의 선조께서 검을 뽑아들고 천하를 평정했기 때문에 실로 그때부 터 무림에서는 우리 가문의 사람들을 영원히 무림맹주(武林盟主)로 받들기 로 했던 것이다." 백운생은 물었다. "영원한 무림맹주라면 무림의 지존이나 다름이 없겠군요?" 백환성은 웃었 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만 실은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무림에 는 우리를 추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의 뛰어남을 시기하는 무리들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시기하는 무리들은 세력을 이루게 되는 데, 그러한 전통으로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제한을 두었다. 말하자면, 우 리 가문이 무림의 영원한 맹주가 되는 것은 하나의 속박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백운생은 눈을 크게 떴다. "속박이라고요?"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만일 우리가 다른 마음만 먹었다면 쉽게 천하를 제패하고 무림 을 수중에 넣었을 것이다. 바로 그럴 것을 감안하여 그들은 우리 동심각의 내부에 자신들의 사람들을 상주시키고 무림맹주라는 미명을 붙여서 감시하 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사심이 없는데 그들이 우리를 꼼짝못하 게 하는 바람에 천하를 지키는 일도 그칸큼 어려워지게 되었다." 백운생은 눈살을 다소 찌푸렸다.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꼼짝못하 게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저는 할아버님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칠패의 주인들이라도 쉽게 무너뜨릴 수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백환성은 다소 대견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그러하다. 불과 하루만인데 천하를 내다보는 안목이 늘었구나. 내 가 지키기로 한다면 어려운 것이지만 실로 부수기로 한다면 칠패라고 해도 무서울 것이 없지. 그런데 우리 가문은 대대로 정의감을 제일로 내세웠기 때문에 천하를 향한 도발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로 천하의 악명(惡名)을 뒤집어쓰면서 무림을 정복한다고 해도 대체 무엇이 남겠느 냐? 오직 무림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것만 못한 것이다." "……" 백운생은 묵묵했다. 그러나 순간 조부인 백환성에 대해서 깊은 신뢰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백환성은 말을 이었다. "우리 동심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무림맹과 하나가 되어 왔다. 그 기구를 본다면 우선 무림각파의 명숙들로 이루어지는 봉공원(奉公阮)과 칠패의 주 인들로 이루어지는 원로원(元老阮)이 있다." 백운생이 물었다. "그 두 가지의 기구가 지금 우리 동심각의 내부에 있다는 말입니까?" 백 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선 봉공원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혹은 그 밖의 무림 대소 문파에서 그 문파를 대표하는 사람을 하나씩 파견하여 우리의 봉공원에 봉 공(奉公)의 신분으로 머물게 한다. 그것은 상주하는 기구라고 할 수가 있 지. 그러나 원로원은 칠패의 주인들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건 물은 있지만 유사시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상주하는 기구라고 말할 수가 없 다." 백운생이 물었다. "그럼 그들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백환성은 입맛이 쓴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백씨 일족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일이다. 즉, 원로원이 나 봉공원의 과반수의 제안으로 두 개의 기구가 모여서 회를 벌이는 무림 대평의회(武林大評議會)라는 것이 있다. 이 무림대평의회에서 과반수 이상 의 찬성이 이루어진다면 맹주의권한을일부 제약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 한 만장일치의 찬성이 이루어진다면 맹주를 아예 해고시킬 수가 있는 것이 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무림맹주를 해왔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해고를 당 하겠는냐?" 백운생이 물었다. "하지만 항상 바른 일만 한다면 되지 않겠습니까?" 백환성은 대답했다. "물론 우리는 늘상 바른 일만을 하려고 해왔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것이어서 우리는 안팎으로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 만 했지. 만일 우리 가문의 힘이 강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일이건 마음대로 할 수가 있겠느 냐?"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니 이것은 아마도 어 쩔 수가 없는 일일 것입니다." 백환성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 실로 천하에서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 이지.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마침내 하고 났을 때에는 비로소 보람도 생 기는 것이 아니겠느냐?"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역사는 진실을 속이지 않습니다. 나중에 우리의 진실을 알게 되면 사람 들이 아마도 할아버님의 동상을 최소한 서너 개는 세워 줄 것입니다." 그 말에 백환성은 흔쾌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허허, 나는 그런 것은 바라지 않는다. 다만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 롭게 잘 살 수가 있고, 무림의 앞날이 밝아진다면 그것으로 대만족인 것이 다." 백운생은 절로 백환성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천하인들이 할아버님을 지존으로 여기고 따르는 것 이 아닌가 합니다." 백환성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녀석, 쓸데없이 추켜세우기는. 그건 그렇고, 너는 그 밖의 우리동심각 의 기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겠지?" 백운생은 다소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예." 백환성은 웃으며 말했다. "자, 잘 듣거라. 우리 동심각에는 일종의 무림맹의 정예 역할을 하는 삼 단(三團)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심각의 직속기관이지. 즉 네가 알고 있 는 바와 같이 금룡단(金龍團)과 천랑단(天狼團), 그리고 철사단(鐵獅團)이 다. 그리고 그 밖에는 호각위사(護閣衛士)의 기관인 일천위사대(一千衛士 隊)가 있지." 백운생은 물었다. "무림의 맹주는 유사시에 무림첩(武林帖)을 돌려서 무림연합군(武林聯合 軍)을 조직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삼단 중에서 금룡단은 단주인 금룡(金龍)과 그 아래의 금룡일 호(金龍一號)에서 금룡십구호까지의 모두 스무명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그 기능은 무림의 정보를 다루는 일이다. 그리고 천랑단은 역시 단주인 천랑 (天狼)과 그 아래의 천랑일호에서 천랑구십구호까지 백명으로 구성되고 있 는데, 그 기능은 첩보활동과 천하의 사마외도를 척살하는 임무를 맡고 있 다." 백운생은 지금의 천랑단주가 해일화라는 여자라는 것을 상기하고 과 연 그녀가 그러한 험한 일을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백환성은 말을 이었다. "또한 철사단은 단주인 철사자(鐵獅子)와 그 아래으 철사제일대주(鐵獅第 一隊主)에서 철사제이십대주까지 스무명의 철사대주들을 포함하여 오백명 의 동심전사(同心戰士)들로 구성되고 있는데, 그 기능은 유사시를대비한 전투 능력을 갖춘 전사의 집단이다." 백운생은 자연 아까의 그 무뚝뚝하던 혁련철수의 얼굴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리고 일천위사대는 일천명의 위사로 이루어지고, 우두머리인 위사대장 (衛士隊長)과 그 아래의 스무명의 위사조장(衛士組長)들을 포함하여 나머 지를 동심위사(同心衛士)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그들의 임무는 평시의 동심각의 경계를 담당하는 일이다." 백운생은 비록 몇 개 되지 않지만 동심각의 기구가 아주 잘 짜여져 있는 것이라는 데에 놀랐다. 백관성은 다시 물었다. "너는 동심각의 직위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백환성은 다시 설명했다. "동심각주는 정복에 황금빛 태양을 수놓게 된다. 그리고 각 단에 따라서 그림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동심각의 직위는 가슴에 그려져 있는 동심원의 숫자로 표시되게 된다. 삼단의 단주들은 네 개의 동심원이 있고, 금룡단원 과 천랑단원이나 철사대주들은 세 개의 동심원이, 그리고 위사대장도 마찬 가지로 세 개의 동심원이다. 위사조장들이나 철사단의 동심전사들은 두 개 의 동심원이, 그리고 일천위사대의 동심위사들은 하나의 동심원이 그려진 정복을 입게 되어 있다." --계속-- #5384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17장 11/10 18:43 312 line 제17장. 무극동부(無極洞府) 배운생이 물었다. "그러니까 동심위사들이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이로군요." 백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리고 비록 따로 분류되어 있기는 하지만 원래는 이 일천위사 대는 유사시에는 금룡단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으니 평시에도 금룡단주의 통솔을 받는다고 봐야겠지. 일천위사대의 동심위사들의 가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고 동심원만이 있는데, 그것은 실상 반쯤은 금룡이 그려져 있다고 봐야겠지." 이어 백환성은 잠시 생각한 후에 말을 이었다. "그밖의 사항이라면 맹주가 필요할 때에는 동심대전(同心大典)이라는 것 을 열어서 천하의 인재를 모집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재는 그 동심대전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는데 너의 그 네 명의 친구들은 예외가 되 겠지." "……" 백운생이 묵묵하자 백환성은 다시 물었다. "자, 이제 다시 의문나는 점이 없느냐?"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없습니다." 백환성은 눈살을 다소 찌푸렸다. "그래, 너는 이제부터 내가 어떤 방법으로 후계자의 수업을 시킬 것인지 궁금하지도 않다는 말이냐?" 그 말에 백운생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보니 백환성은 바로 그러한 질문을 유도해 내기 위해서 여태 의문나는 점을 물어보라고 말했었던 것이었다.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떤 방법으로 제게 후계자의 수업을 시키실 것입니까?" 이에 백환성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미 너에게 말했다시피, 무공을 배우는 데 있어서는 내공보다는 무학의 깨우침이 더욱 중요한 법이다. 하층의 무공을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물론 공력이 최상의 능력이겠지만, 상승(上乘)의 무공을 배우려는 사람은 늘 이 점을 명심해야만 하는 것이지. 내 그래서 너에게 무학의 깨우침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허나 너는 아직 기초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역시 공력을 어느 정도는 키워야 하겠다. 따라서 나는 너를 우리 백씨 가문의 수련장인 무극동(無極洞)에 보내려고 한다." 백운생은 눈을 크게 떴다. "무극동이라고요?" 백환성은 되물었다. "왜? 이전에 들은 적이 있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금시초문입니다만, 그것도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백환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우리 백씨 일문의 비밀에 관한 것이니 아직 천하에 알려지지 않 았고, 너 또한 알 수가 없었겠지. 앞으로 너도 비록 너의 친구들이라고 할 지라도 공연히 거기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느니라. 이 무극동이야말로 우리 백씨 일문의 뿌리가 내린 곳이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백씨 일문의 뿌리?) "무극동은 말하자면 우리 백씨 일문의 성역(聖域)이나 마찬가지이다. 우 리 백씨 일문은 태어나서 어느 정도 나이가 차게 되면 필수적으로 그곳에 들어가서 얼마간 수련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무학의 기초를 이루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 기 때문이지." "……"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녀왔지만 너는 이제야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기간도 겨우 한 달뿐으로 아주 짧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리 백 씨 일문의 사람들은 백화신골(白華神骨)을 타고났기 때문에 더욱 효과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백화신골이라고?) 백운생은 의문이 들었다. 허나 백환성이 이미 질문을 해왔기 때문에 그것 은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저로서는 뭐, 할아버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좋다."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의 규칙상 그곳에는 마음먹은 대로 자주 드나들 수가 없는 곳 이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들어가게 되면 되도록 많은 것을 얻고 나올 수 가 있도록 해야 한다." 백운생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지금 바로 말씀입니까?"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너의 그 친구들은 내가 알아서 보살펴 줄 것이고, 네가 나올 때쯤이면 그들의 공력도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 이 없으니 빨리 시작할수록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백운생은 백환성이 이미 자신이 동심환을 아우들에게 나누어준 것을 훤하 게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어쨌거나 그것은 할아버지 의 성의를 무시한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백운생은 감히 거역할 생 각을 못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에 백환성은 즉시 만족한 듯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하핫, 아주 잘 생각했다. 내 너에 관한 얘기는 네 친구들에게 잘 말해주 마. 그렇다면 지금 바로 떠나야지?" 말과 함께 백환성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탁탁! 그러자 즉시 예의 그 황금문이 열리며 혁련철수가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었다. 혁련철수는 여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부르셨습니까?"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서 이 아이를 무극동에 데려다 주게." "알겠습니다." 혁련철수는 백운생을 한 차례 바라본 다음에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그럼……" 백운생도 백환성에게 예를 올린 다음에 그 뒤를 따랐다. 무극동! 과연 그것은 동심각의 내부에서도 전혀 상상을 불허하는 장소에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만일 백운생이 그 말을 듣지 못했었다면 동심 각의 내부에 이러한 것이 있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었다. 한담(寒潭). 동심각의 수십 수백 개의 칼날캍은 암봉들의 사이로 많은 계 류들이 흐르고 있는데, 후미진 뒤쪽에는 물빛이 맑고 기온이 차가운 연못 이 아주 깊고 푸르게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 이곳은 동심각에서도 내원에 속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으나 대부분 내부의 사람들의 발길을 모을 수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혁련철수는 백운생을 데리고 이 한담의 근처에 도착하더니 즉시 풍덩 하고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 백운생은 잠시 망설이다가 역시 물 속으로 풍덩 하고 들어갔다. 실로 동심가의 비밀스러운 무극동이 이런 한담의 속에 자리하고 있을 줄 은 뜻밖의 일이었다. 다행히도 백운생은 이미 몇 년 동안 폭포수 아래의 연못에서 물의 성질을 익혀왔었기 때문에 물 속에서 헤엄치는 일이나 오래 견디는 일에도 능숙했 다. 아니 거의 신통한 경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 한담은 위에서 보기에는 그저 짙푸른 것이 도저히 깊이를 알 수가 없 었다. 그러나 일단 안으로 들어와서 잠수하기 시작하자 이내 그 깊이를 짐 ㄴ작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이 한담은 예상했던 대로 지극히 온도 가 낮아서 한 순간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고, 깊이가 워낙 깊어서 도무 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 백운생이 물 속에 들어가자 혁련철수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 있다가 안으 로 들어오는 백운생을 돌아보고는 그가 물 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놀리는 것을 보고 다소 의외인 모양이었다. 이 물 속에서는 설사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라도 공력이 시원치 않으면 추위에 견디기 어려운 법이었 다. 헌데 백운생은 비단 헤엄을 잘 칠 뿐만 아니라 전혀 추위에 얼어붙는 듯한 기색이 아니고 마치 유람이나 나온 사람 같았다. 혁련철수는 다소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먼저 아 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래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밑으로 잠수한다는 것인데, 이런 차가운 물 속에서 잠수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공을 지닌 사 람들은 천근추(千斤鎚)의 신법을 이용하여 비교적 빠르게 내려갈 수가 있 지만, 일반사람들은 불과 얼마 내려가지 못하고 떠오르게 될 것이었다. 혁련철수는 그러한 것을 의식하는 듯 아래로 내려가면서 계속해서 은근히 백운생이 뒤따라 내려오는 광경을 주시했다. 그러나 역시 기이한 일이었 다. 백운생은 상당히 오랫동안 내려왔는데도 전혀 호흡이 가쁜 표정이 없 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쉽게 아래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 이에 점차로 혁련철수의 두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의문의 빛이 짙게 떠 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실 용화선공을 배운 백운생에게는 이러한 현상은 당연한 것이라 고 말할 수가 있었다. 이미 폭포수의 물을 되돌렸던 그인데 물 속으로 잠수하는 것이 어렵겠는 가? 다만 백운생은 이 한담의 깊이가 의외로 깊고 아득한 것에 다소 놀라 움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 위에서 보기에는 이것은 마치 하나의 작은 호수 와도 같았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이것은 마치 거대한 우물과도 같았다. 무려 백여 장이나 아래로 내려갔을까? 이제는 위쪽에서 스며드는 햇빛도 거의 없어서 어두침침한 가운데 드디어 한담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방이 돌로 이루어진 곳이어서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저 단순한 모양일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이 박의 모양은 실로 기묘했다. 한담의 바닥은 마 치 사방으로 구멍이 뚫려 있어서 물이 지하로 흐르고 있는 것처럼 여러 갈 래의 수중동굴(水中洞窟)이 형성되어 있었다. 백운성은 이 물의 흐름이 비 교적 세찬 것을 알고 역시 이 동굴들이 지하수의 통로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무극동은 저 지하수의 수중동굴 가운데의 한 곳으로 통하고 있 는 것이란 말인가? 설사 이곳을 알고 들어온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에 봉착 하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질 것 같았다. 헌데 혁련철수는 이미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그 중의 하 나의 수중동굴로 주저없이 접어 들었다. 이 혁련철수의 무공은 대단하여 전혀 호흡을 하지 않고 비교적 유연하고 빠르게 헤엄쳐 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백운생만큼 자연스러울 수는 없 었다. 백운생은 마치 유람이라도 하듯이 그의 뒤를 바싹 따라갔다. 이미 이 부근은 칠흑같이 어두웠기 때문에 자칫 그를 놓치게 된다면 어떤 낭패 를 당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수중동굴은 일직선이 아니라 아주 복잡하게 생긴 미로(迷路)였 다. 마치 화산이 폭발할 때 생겨난 듯 여기저기에 마구 구멍이 뚫고 동굴 이 생겨난 모양처럼 갈수록 이 수중동굴의 통로는 좌우로 난립해 있었고, 상당히 어지러울 텐데도 혁련철수는 아주 간단하게 미로를 이리저리 잘도 빠져나갔다. 만일 무공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 아니라면 이곳은 올 엄두도 내기 어려운 곳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혁련철수는 한 곳에 이르러 신형을 멈추었다. 결국 끝은 있는 모양이었다. 혁련철수는 무슨 특별하지도 않은 하나의 동굴 벽면의 앞에 신형을 멈추 었는데, 그가 전면을 향해가볍게 일지(一指)를 내뻗자 순간 괴이한 울림 과 함께 전면의 벽면이 옆으로 밀려나는 것이었다. 쿠쿠쿵…… 그리고 다음 순간에 백운생은 자신의 몸이 어떤 기이한 공간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까 벌어졌던 그 수중동굴의 벽면은 이미 닫혀진 후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던 혁련철수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어디로 갔는가? 백운생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알고 보니 아까 벽면이 열리는 순간에 이미 혁련철수는 무공 수법을 발휘 하여 백운생의 몸을 그 열려진 속으로 밀어넣었고, 벽면이 다시 닫혀짐에 따라 백운생의 몸은 바깥과 격리되게 되었던 것이었다. 아마도 지금쯤 혁 련철수는 백환성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 열심히 밖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 었다. 백운생이 조금 전에 어리둥절해졌던 것은 바로 혁련철수의 손속이 너무나 도 빨랐기 때문에 전혀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못했었다는 데에 있었다. 백운생은 여태 비교적 많은 무림인들을 만나 보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헌데 방금 전의 일을 겪게 되자 절로 가슴이 서늘한 것을 금할 수가 없었 다. 만일 혁련철수가 그의적이고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백운생의 목숨은 이미 달아난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과연 철사단의 단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로군!) 백운생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자신은 전혀 새로운 지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돌 렸다. 이곳이 바로 무극동이다. 백운생은 마음을 가볍게 긴장시키고 주위 를 살피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아까 벽면이 열리고 닫힌 순간에 백운생은 혁련철수에 의해 서 벽면을 통과하였고, 그 힘에 의해서 작은 수로(水路)를 십여 장 정도 나아가다가 지금의 이곳으로 솟구쳐 나오게 되었던 것 같았다. 백운생이 지금 걸어나오고 있는 곳은 텅빈 공간의 바닥에 이루어져 있는 작은 웅덩이였다. 그리고 지금 이곳은 칠흑같이 어두운 수로와는 달리 아 주 밝아서 마치 대낮같았다. 그것은 바로 천정에 드문드문 매달려 있는 거 의 주먹만큼이나 커다란 야명주(夜明珠)가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백운생이 서 있는 곳은 마치 바깥의 평범한 하나의 동굴과 흡사했 다. 물론 이곳에는 물이 침범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천정에 박혀 있는 여러 개의 야명주 가운데에서 몇몇은 물으 밀어낸다는 벽수주 (酸水珠)임이 분명했다. 주먹만한 야명주도 흔하지 않은 것이지만 물을 밀 어낸다는 전설(傳說)의 벽수주 또한 지극히 구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 라서 이곳은 역시 평범한 곳이 아니다. 무극동! 과연 이곳은 어떠한 곳일 까? 야명주가 박혀 있는 천정을 따라서 천천히 걸억자 드디어 하나의 석문 과 같은 것이 나타났다. 석문의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전자체로 웅후하게 씌어져 있었다. <무극동부(無極洞府)! 이곳에 이른 자는 먼저 절하여 조상님께 예를 올리 고 들어가도록 하라!>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백씨 가문의 선조께서 적 은 글임을 알 수가 있었다. 석문의 안쪽에는 짙은 안개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멈칫했으나 백운생은 역시 글귀대로 절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 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대례를 올리기 시작했다. 헌데 그때였다. 쾅---! 갑자기 우레 같은 음향이 울리더니 느닷없이 석문의 위에서 거대한 석벽 이 떨어져 내려와 석문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 백운생은 그만 깜짝 놀랐다. 그 내려온 석판의 중앙에 다음과 같은 글귀 가 적혀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 무극동부는 백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면 출입을 금한다. 그리고 설령 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조상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사람은 백씨 가문의 자손으로 인정하지 아니한다. 그대는 이제 백씨 가문의 자손으로 인정을 받았으니 축하한다. 무극동부에 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그 뒤에는 무극동부에 들 수 있는 간단한 기관의 파해법이 적혀 있었다. 백환성은 미리 그에게 이러한 기관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심성을 시험해 보려는 백환성의 의도였을까? 만일 그가 석문 의 위에 적혀 있는 글귀를 무시하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더라면 틀림없이 십중팔구는 횡액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기실 그 다음에 적혀 있는 글귀에 의하면 진정한 무극동부의 입구는 이곳 이 아니었다. 백운생은 몸을 일으켜 우측의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벽면에 돌출되 어 있는 팔괘도형(八卦圖形)의 무늬를 순서대로 쓰다듬자, 순간, 그그 긍……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멀쩡하던 석벽의 한쪽이 뒤로 물러나며 그 자리에 빈 공간이 통로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 안쪽에는 다소 어두우나 신비로 운 기운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백운생은 주저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긍…… 뒤의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백운생은 다소 경이감이 실린 시선 으로 앞쪽을 천천히 살폈다. 이 내부는 비록 뒤의 문이 닫혔어도 천정에 역시 야명주로 불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어둡거나 하지 않았다. 통로를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하나의 작은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石 室), 그러나 쉽게 말해 이곳은 인공적인 석실이라는 느낌보다는 차라리 하 나의 천연적인 동굴과 같은 느낌을 짙게 풍기는곳이었다. 울퉁불퉁하게 석순과 종유석들이 기형(奇形)으로 마구 자라나고 있는 가운데 바닥에는 투명한 빛깔을 보이는 돌이끼들이 무수하게 퍼져 있었고, 다시 중앙에는 하나의 작은 웅덩이와 같은 움푹 패인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기이하게도 우유빛의 액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백운생은 그곳에 시선을 모으다가 일순 가볍게 놀랐다. 웅덩이의 한쪽 벽 에는 마치 호로병처럼 생긴 돌그릇이 마치 장식처럼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 호로병의 입구에 하나의 기이한 과일이 하나 올려져 있고, 과일의 밑에는 한 장의 종이쪽지가 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운생은 즉시 신형을 움직여 그쪽으로 다가가서 과일을 집어들고 종이쪽 지를 꺼내어 그 위에 적혀 있는 글귀를 읽기 시작했다. 역시 그것은 백환 성이 그에게 남기는 글귀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운생아, 지금 이곳에 이르러 다소 놀라고 실망했을 것이다. 나는 네가 틀림없이 우리의 가문을 존중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 다! 바로 이곳이 우리 가문의 근원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무극동부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하여 보잘것없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만일 천하의 무림인들이 이 장소를 알게 된다면 나중에 심한 혈투가 벌어 지게 될 것이고, 이곳은 망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그랬었군.) 백운생은 놀라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환성이 미리 그 기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던 것은 그를 시험했다라기보다는 그를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일 잘못되어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관점에 서 본다면 이러한 종류의 신뢰감은 오히려 당사자에게 힘을 주는 것이었 다. 백운생은 아울러 백환성이 대체 언제 이곳에 와서 이런 글을 남겼을까 하 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음을 읽어 내려갔다. 헌데 뜻밖에도 다음 에는 놀라운 구절들이 적혀 있었다. <지금 네가 들고 있을 그 과일을 결코 버리거나 망가뜨리지 마라. 실은 그것은 고금에 보기 드문 영과(靈果)로서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 백운생은 자신의 오른손에 무심코 들려 있었던 과일에 시선을 보내다가 더욱 놀라고 말았다. 원래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지, 백운생은 본시 워낙에 책을 좋아하던 사람이어서 고서에나 나오는 나오는천하의 영약이나 영물에 관 한 지식이 많았다. (이건 바로 전설에나 나오는 무극금령과(無極金寧果)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전설에 의하면 한 개만 복용해도 가히 신선지경에 이를 수가 있다 고 하는 무극금령과가 틀림없었던 것이다. 그는 놀람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다시 글을 읽기 시작했다. <너는 갑자기 그와 같은 것을 보고 매우 놀랐을 것이다. 내 너의 심성을 비추어 보니 너는 물욕이 없어서 내가 주었던 동심환도 다른 사람에게 모 두 나누어줄 것이 뻔한 일이니 내가 부득이 그것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우리 동심각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는 천문지리상으로 무극지지(無 極之地)에 속하는 곳이다. 그리고 보다시피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그 중 심인 것이다. 이제야 대충 무극동부의 성격을 알 수가 있을 것 같으냐?> (그랬었군!) 백운생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미처 생각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백 운생은 이러한 지리학적인 학문에도 박식하여 글귀를 읽고 나서 진정으로 이곳이 무극지지의 중심임을 알 수가 있었다. 우선 중앙에 있는 움푹 패인 곳의 우유빛의 액체는 바로 선도(仙道)를 닦 는 사람들이 선약(仙藥)이라고 하여 마시거나 다른 것과 함께 환약으로 만 들어서 복용하곤 하는 공청석유(空淸石乳)라는 것으로 아주 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무공책자에 적혀 있는 바에 의하면 이 공청석유를 복용 하면 일갑자의 공력을 높일 수가 있다고 되어 있었다. 물론 이 공청석유의 효능은 그 밖에도 많이 있었다. 백운생은 비록 무공은 배우지 않았지만 무 공에 관련된 서적도 제법 많이 읽어서 이러한 내용에 훤했다. 그리고 웅덩이 밖으 바닥에 숱하게 퍼져 있는 투명한 빛깔의 돌이끼들은 바로 천년옥균(千年玉菌)이라는 것으로 공청석유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공청석유의 기운을 흡수하여 자라나는 것으로 사람이 이것을 장기적으로 복용하게 되면 정신과 피가 맑아짐은 물로이고 백독불침(百毒不侵)의 몸이 되며 공력도 일갑자 정도 진전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무극지지의 기이한 모습 가운데의 그저 평범한 것 들에 불과했다. 백운생의 시선은 웅덩이의 다른 한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작은 웅덩 이 속에서 잎은 하나도 없고 줄기뿐인 황금빛 작은 나무들이 각각 하나씩 자라나고 있었다. --계속-- #5395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18장 11/11 18:33 283 line 제18장. 진면목(眞面目) 이상하게도 열매도 하나도 달리지 않았고 얼핏 보면 무슨 나무같지도 않 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바로 무극지지의 중요한 보물 가운데의 하나인 무극금령수(無極金靈樹)라는 것이었다. 백운생은 역시 이것에 관해서도 서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무극금령수, 그것은 십년만에 한번씩 열매를 맺는 것이며, 공청석유에서 자라나며, 무극지지의 정기(精氣)를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 보아하니 이미 이 무극금령수들은 이미 열매를 거둔 것 같았고, 지금 백운생이 들고 있는 한 알의 무극금령과는 바로 거기에서 따낸 것 같았다. 무극지지의 효능은 이처럼 기이한 것이었다. 사람이 무극금령과를 복용하게 되면 실로 상상불허의 효과를 얻게 된다. 늙은 사람이 복용하면 당장에 회춘을 할 수가 있다고도 하고, 무림인이 복 용하게 되면 수갑자에 달하는 공력을 얻을 수가 있다고도 했다. 백운생은 동심환의 재료가 바로 이러한 것들에서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었다. 하지만 기실 무극지지의 효능은 무극금령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며, 아 직 한 가지 보다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만년옥장(萬年玉漿) 이라는 것이었다. 백운생은 곧장 시선을 위로 올렸다. 천정, 그곳에는 지금 하나의 기이하 게도 옥색으로 투명한 종유석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신기하게 그 끝에 이슬처럼 황금빛 액체가 맺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만년옥장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만년옥빙의 효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 어서, 다만 그것을 한 방울만 복용하게 되면 능히 일갑자의 공력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실로 이 만년옥장은 무극지 지의 신비한 영기(靈氣)가 응축되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것을 얻기는 쉽 지가 않은 것이었다. 백운생의 시선은 다시 곧바로 아래쪽으로 향했다. 결국 다시 그 호로병 모양의 돌그릇으로 시선이 오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호로병 모양의 돌그 릇은 바로 만녕옥장이 흘러내리는 것을 모아두기 위한 것으로 백운생이 고 개를 숙여서 들여다보니 이미 그 안에는 약간의 금빛 액체가 잔잔하게 고 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모든 신비로운 물체와 현상들, 무극지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천하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기운이 깃들어 있는 태고적의 땅을 말하는데, 백운생은 실로 그러한 것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던 일이었 다. 이런 대강의 현실을 파악하고 나자 백운생은 다시 서찰로 시선을 옮겼다. 그 내용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네가 보고 있는 천년옥균과 공청석유, 그리 고 만년옥장 등은 상당히 귀중한 것들이다. 네가 만일 무극금령수를 망가 뜨리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들이 너의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게 다가 이곳의 석벽에는 우리 가문의 팔대신공이 새겨져 있는 만큼 너는 이 곳에서 공력을 키우면서 그것들을 수련하도록 해라.> 백운생은 시선을 다 시 석벽으로 돌렸다. 과연 석순과 종유석들이 어지러이 자라나고 있는 틈 사이로 아주 정교한 글씨가 곳곳에 새겨져 있었는데 틀림없는 동심각의 팔 대신공의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백운생은 이미 그 내용을 암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일 지 않아서 다시 서찰로 시선을 옮겼다. 서찰의 끝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이것들을 이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너는 우선 무극금령과를 복용하 고 나서 고여 있는 만년옥장들을 모두 복용하고 이어 몸을 공청석유의 웅 덩이에 발가벗고 담그도록 해라. 식사는 근처의 천년옥균으로 대용하고. 그렇게 완전히 몸을 공청석유 속에 넣고 있는다면 두 가지 영약의 열기는 대략 한달 정도라면 제거될 것이다. 원래는 한 일 년 정도 오랫동안 그곳 에서 수련을 하는 것이 좋겠지만, 대강 그 정도라면 공력이 적어도 육갑자 에 도달할 것이니 밖으로 나오면 된다. 한달 후에는 내가 직접 너를 데리 러 가마.> 백환성의 글귀는 대부분이 함축적인 내용이어서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백 운생은 다행히도 그 글귀가 의미하는 바를 모두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무인으로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방법인 것이었다. 허나 백환성의 말이 전부 옳은 것일까?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무 극금령과를 입 속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이 무극금령과는 별다른 냄새가 나거나 맛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 속에 넣자 거의 씹기 전에 녹아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씨가 없음은 물론이었다. 이어 백운생은 우수를 호로병을 향해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기이한 일 이 벌어졌다. 호로병 속의 끈끈하게 고여 있는 만년옥장이 일시에 작은 구 멍을 통해서 위로 솟구쳐 오르더니 그대로 백운생의 입 속으로 들어가 버 리는 것이 아닌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백운생의 걸작이었다. 주 변의 힘을 이용하는 기술은 백운생이 거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자 백운생은 배 속에서 갑자기 지극히 뜨거운 열기들이 서서히 요동 치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에 백운생은 서서히 옷을 모두 벗고 서찰에 적혀 있었던 대로 공청석유의 속으로 첨벙 뛰어 들어갔다. 이 웅덩이는 비록 작지만 깊어서 한 사람이 들어앉아 가부좌를 틀면 겨우 목 을내놓을 수 있는 정도였다. 공청석유 속에 몸을 담그자 심하게 뜨거웠던 몸의 밖에서 서늘한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기운이 융합되기가 어려우나 이 공청석유의 기운은 쉽 게 융합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백운생은 심신이 일시에 상쾌해짐 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어 잠시 숨을 몰아쉰 다음에 백운생은 밖으로 나와 있던 얼굴마저 공청 석ㅇ의 속으로 집어넣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법 이다. 하지만 하루 열두 시진 동안 거의 공청석유 속에 살다시피 하고 겨 우 얼마 동안만 밖의 천년옥균으로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백운 생에게 있어서 거의 시간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백운생의 심경은 영약의 효능으로 지극히 맑아져서 그는 공청 석유 속에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호흡을 하며 용화선공의 구결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그것은 심오한 경지의참선이었다. 동심각의 무공을 배 우기를 원하는 백환성이 안다면 놀라겠지만 백운생은 자신이 이미 용화선 공을 통해서 충분히 동심각의 무공을 대신할 수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팔대신공의 연성을 마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이 흘렀다. 한달! 한달이라는 세월은 그리 길지 않지 만 이런 석실에 틀어박혀서 무엇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혹시 길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 한 사람은 전혀 그렇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느닷없이 한 사람이 물 속에서 마치 유령처럼 솟아나왔다. 금의노인, 바 로 그는 백환성이었다. (대체 어떻게 변해 있을까?) 백환성의 입가에는 가벼운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이어 전혀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기척도 없이 그의 신형은 빠르게 백운생 이 들어 있을 석실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그긍…… 석실의 문이 열리고 석실의 내부가 훤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순간 내부를 살펴보던 백환성의 두 눈은 가볍게 놀라고 있었다. 혹시 백운생이 사라진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백운생, 그는 지금 석 실의 한쪽에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참선에 들어 있었다. 비록 낡은 옷이지 만 이미 의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 모든 수련이 이미 끝났다는 것 을 말해주는 듯했다. 지금 백환성의 시선은 백운생에게가 아니라 바로 가운데의 웅덩이로 향하 고 있었다. 웅덩이는 지금 기이하게 변해 있었다. 전에는 우유빛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맑은 물로 화해 있었던 것이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일년 이상 수련한다면 공청석유의 기운이 모 두 체내에 스며들어 빈 웅덩이가 될 것이지만 이제 겨우 한달밖에 되지 않 았으니 그대로일 텐데, 이건 어째서 공청석유가 맹물이 된 것일까?) 이때 인기척을 느낀 듯이 백운생이 조용히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이어 반가운 표정을 얼굴에 담으며 백운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님이 오셨군요!" "응, 그간 잘 있었느냐?" 백환성은 웃으며 대답을 하면서 은근히 백운생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 가 순간 왠지 백환성의 얼굴은 가볍게 변하고 말았다. (아니 이건……?) 백운생이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간 밖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백환성은 금방 보통의 안색으로 회복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론 별일이야 있었겠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백환성은 눈빛을 가볍게 빛내다가 물었다. "헌데 그간의수련은 완성되었느냐?"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행히……" 백환성은 눈살을 다소 찌푸렸다. "헌데 너의 공력은 알고보니 육갑자가 아니라 십갑자가 되었고, 게다가 공청석유가 저렇게 되었으니 어찌된 일이냐?" 그렇다. 백환성이 방금 전에 놀랐었던 이유는 백운생의 공력이 무려 십갑 자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제가 연공을 하던 도중에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라서 그렇게 해 보았더니 저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공청석유의 기운이 모두 흡수되어 저의 공력이 그만큼 증가된 것이었고요. 혹시 제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 닙니까?" 백운생은 자칫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자신이 용화선공을 연마했다는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실상 공력이 무려 십갑자에 도달한 이상 그는 이 제 동심각의 무극검해를 제외한 웬만한 무공은 시전이 가능했기 때문이었 다. 백환성은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다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이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지 어찌 잘못이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그럼 어디 나를 향해 한번 무공을 펼쳐볼수가 있겠느냐?" 그 말에 백운생은 다소 주저했다. "제가 어떻게 감히……" 백환성은 웃었다. "허허, 상관이 없다. 네가 아무리 무공이 높다고 해도 나를 당할 수가 없 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냐?" "……" 이에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죄를 짓겠사오니 용서하십시오." 말과 동시에 백운생은 우수를 백환성을 향해 천천히 내밀었다. 그것은 바 로 금삽수(金揷手)라는 것이었다. 순간 백운생의 신형은 갑자기 어디로 가고 빈 허공에 마치 허깨비와 같은 황금빛 거대한 손이 남아서 백환성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듯한 광경이 펼 쳐졌다. 이것이야말로 금삽수의 진면목(眞面目)이었다. 이 무공의 특성은 실로 괴이하여 아주 빠르게 할 수도 있고 느리게 할 수 도 있으며, 넓게 혹은 작게도 만들 수가 있었다. 게다가 사마외도의 무공 과는 극성이기 때문에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지도 오래되었다. 백운생은 비록 전 공력을 모두 사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칠성 정도 로 느릿하게 백환성의 앞으로 공력을 펼쳤다. 물론 이것은 시전자에 따라 서 얼마든지 회수가 가능한 무공이었다. 헌데, "죄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인자한 백환성의 음성과 함께 갑자기 그의 앞에 도달한 황금빛 거대한 손 이 마치 거짓말처럼 흔적도 엇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앗!" 평소에 침착하기로 천하에 두 번째가라면 서러워할 백운생의 입 속에서 순간적으로 그만 놀란 경악성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그의 금삽수가 백환성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그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느닷없이 자신의 몸이 마치 거대한 힘으로 충만된 망망대 해 속에 들어간 듯한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자신의 몸은 마치 일엽편주와도 같은데 지금 망망대해에 거대한 태풍이 일어서 단숨에 자신을 덮칠 것 같은 느낌이 강렬하게 일어났다. 백운생은 아직 이와 같은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믿을 수가 없게도 그것은 공포(恐怖)였다. 대체 이 공포의 정체는 무엇일까? 백운생은 순간 이것은 혹시 환각이 아 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단코 이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쾅---! 다음 순간 백운생의 신형은 거대한 반탄력을 받아서 뒤로 형편없이 날려 가서 석벽에 심하게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서 석순과 종유석 등이 몇 개가 한꺼번에 부러져 나갔다. 헌데 기이한 일이었다. 사람의 육신과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돌조각이 부딪쳤는데도 돌은 부러져 나가고 백운생의 육신은 멀쩡했던 것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백운생의 육신이 공력이 십갑자에 달하는 동안에 자 연스럽게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몸으로 화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금강불 괴지신! 하지만 지금 바닥에 떨어져서 넋을 잃고 백환성을 올려다보고 있 는 백운생은 그러한 기쁨에 잠긴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믿을 수가 없다!) 극심한 불신(不信)과 공포의 느낌이 그의 표정에은연중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보고 백환성이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느냐?" 이에 백운생은 다소 넋사간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저는…… 정말로 우물안 개구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 실 로 조금 전의 일은 백환성이 백운생의 실력을 시험함과 동시에 보다 거대 한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일전이었던 것이었다. 솔직히 백운생은 조금 전에는 자신의 공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 다. 그러나 막상 칠성의 공력으로 금삽수를 펼쳤을 때 그는 환각이 아닌 실로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힘의 근원을 보았다. 비록 백운생이 십이성의 공력으로 전력을 다했었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결코 조금도 달라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마치 백운생의 공력이 하나의 작 은 일엽편주라면 백환성이 지니고 있는 거대한 근원은 마치 망망대해의 바 다와도 같았다. 이것은 감히 상대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이었다. 아직 공포를 느끼지 않았던 백운생은 거기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무서운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순간적으로 한없은 불신감을 느꼈다. 현실에 대한 불신감이었다. 이러한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것은 곧 전에 백환성이 말했던 육십갑자의 공력으로 연상되었기 때문이 었다. 설마 했었지만 백환성의 공력은 그 육십갑자의 초인적인 경지에 올 라 있는 모양이었다. 백운생이 넋을 잃고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을 보고 백환성은 앞으로 다가와 서 인자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너의 금삽수도 좋았었다. 그렇게 자학할 것은 아니다. 너의 나이 에 비하면 상당한 성취라고 말할 수가 있지." 백운생은 한숨을 내쉬며 백환성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솟아 있었다. 물론 백환성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으므로 백운생이 내상을 입었을 리는 없었다. 백운생이 입은 것은 마음의 상처이고 두려움이며, 무예의 더 높은 경지에 대한 개안(開眼)이었다. 그는 십갑자의 공력을 가진 자신이 상당한 능력자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스스로 자신이 할아버지에 비하면 어린아이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운생은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물었다. "혹시 칠패의 주인들도 그렇게 육십갑자의 공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 까?" 백환성은 입가에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백운생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백환성은 여전히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그는 하나의 일에도 상황을 정확 하게 파악해내며 그것에 의해 현실을 알고 심하게 고통을 느끼는 손자를 보고 심히 마음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원래 무공은 무형검의 단계를 벗어나서 초인의 경지에 돌입하게 되면 스 스로가 걸어온 길에 따라서 대자연의 기운을 얻게 된다. 그것에는 대도(大 道)가 작용하게 되어 있지. 헌데 실로 가장 훌륭한 것은 무극(無極)의 도 인 것이다." "무극검해를 말씀하시는군요?"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말은 무극검해이지만 실은 무극도해(無極道解)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헌데 너는 단순히 무극검해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우리만 못한 줄 아느냐?" 백운생은 물었다. "그럼 다른 것이 있다는 말입니까?" 백환성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사실 우리의 팔대신공은 이미 칠패에게 완전하게 알려져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의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대도라고 하는 것은, 상상이 잘 되지 않겠지만, 기실 작은 차이만 있어도 성취가 불가능한 것이다."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 다가 물었다. "그럼 그들이 자신들의 길을 버리고 우리의 무공을 배우면 되지 않겠습니 까?" 백환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다. 원래 극상승의 무공이라는 것은 미세하여 조금의 차이도 용납하지 않는다. 게다가 너도 알겠지만 상승의 무공이라는 것은 다만 구 결에서는 그것의 내용을 상징할 뿐이고 직접적으로 원류를 말해주지는 않 는다. 그 원류는 조상 대대로 단지 입으로만 비밀스럽게 전해질 뿐이지. 특히 극상승의 무공인 무극검해는 사실상 상징하는 것으로 무형검의 경지 는 알 수가 있겠지만, 그 밖의 초인적인 대도의 이치는 알 수가 없다. 그 것은 오로지 입으로서 전해지게 되는데 다른 문파에서는 감히 이것을 뛰어 넘을 수가 없다."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동심각의 칠대신공을 배우게 된 것 은 용화선공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지 순전히 구결 에 의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일반의 사람은 그 신공 중의 하 나만도 평생동안 다 배울 수가 없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동심각에서도 그러한 이치를 구전(口傳)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모험을 할 수가 없는 것이로군요?"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들은 지금 우리와는 다른 방면의 도를 알고 있을 뿐이지 우리 의 도를 알고 있지는 못하다. 대도라고 하는 것은 미세하여 함부로 흉내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시도할 수도 없다. 자칫 조금이라도 틀리게 되면 심마(心魔)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는 일반인들이 우리의 무공을 배울 수가 없음을 알고 있느냐?" 백운생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그렇습니까? 대체 그건 왜 그렇습니까?" 백환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전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효과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바로 우 리 집안의 신체가 백화신골(白華神骨)이며, 무극도에 가장 알맞는 신체이 기 때문이다. 마치 그처럼 칠패의 사람들도 그들의 도에 가장 걸맞는 신체 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의 것을 배우려고 한다면 일반 인과 같이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것 이다." --계속-- #5396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19장 11/11 18:34 281 line 제19장. 환상(幻像)의 비무(比武) 백화신골, 그 얘기가 다시 나오자 백운생은 궁금한 마음에 즉시 물었다. "헌데 백화신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에 백환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음, 너는 아직 그 얘기도 듣지 못했겠구나. 하지만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바로 네가 우리 가문의 신공들을 쉽게 배울 수가 있는 것은 그것 때 문이었다고 알면 되는 것이다. 그 백화신골이 우리 가문의 특성이다. 칠패 의 사람들이나 일반인들이 우리의 신공을 배우게 되면 효과가 별로 없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백운생은 말했다. "하지만 저의 친구들은 지금 팔대신공의 일부를 배우고 있는데 그것은 어 찌된 일입니까? 그리고 그들도 공력이 높아지게 되면 저처럼 되지 않을까 요?" 백환성은 고개를 저었다. "너의 친구들이 우리의 무공을 배우는 것은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가 없 다. 틀림없이 그들은 평생을 배워도 하나도 대성(大成)하지 못하게 될 것 이다. 물론 조금 도움이 되겠지만 무극검해를 배울 수는 없다. 끼에 비해 서 너는 이처럼 그 신공들을 한꺼번에 쉽게 배우고 금방 초인의 무공에 도 전할 수가 되지 않았느냐?" "……" "실로 팔대신공은 그저 초인무예를 위한 예비무공에 지나지 않는다. 초인 무공을 배울 수가 없다면 팔대신공을 조금이라도 배워본들 무슨 소용이 있 겠느냐?" 이에 백운생은 내심 생각했다. (나는 내가 칠대신공을 터득한 이유가 용화선공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것 이 아니라 단지 백화신골 때문이라니 알 수가 없는 일이구나. 대체 그 백 화신골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허나 백운생은 자신이 용화선공을 배우 고 있다는 말을 하기가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차마 백화신골에 관한 질문 을 다시 하지 못했다. 백환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실로 그와 같이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우리 가문의 무 공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헌ㄷ 칠패의 사람들은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름대로 무형검의 경지를 극복했다. 즉, 그들도 초인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며, 나오 무공이 비슷한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이 사실 이다." "……" "그러나 그들의 도는 바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인 육십갑자 의 공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조금 부족할 것이다. 허나 그것으 로도 나에게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백운생은 물었다. "그럼 오십갑자쯤 될 것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백환성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들은 오십구갑자는 넘어 서 있고 아직 육십갑자를 완전히 채우고 있지 못할 뿐이다." "……" 이에 백운생은 다소 넋을 잃은 듯 멍한 표정이 되었다. 백환성에게는 비 록 상대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그에게 있어서 오십구갑자와 육십갑자에 무 슨 차이가 있겠는가! 백운생은 칠패의 주인들조차도 그러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말을 듣자 절로 전신의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문득 그 는 생각했다. (숙부들인 백불의와 백불패라는 분들은 어떠한 공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 까?) 이때 백환성이 그의 내심을 환하게 들여다본 듯 웃으며 그의 어깨를 쳤다. "허허, 그렇게 급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지금 너의 진전 속도는 눈부신 바가 있으니 나중에 충분히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자, 지 금 밖에서 너를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져 있으니 너무 기다리기 전에 어서 나가도록 하자꾸나!" 백운생은 고개를 숙였다. "예, 할아버님." 백운생은 조부인 백환성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알고보니 백환성 은 동심각의 거대한 연무장에 대대적인 잔치를 마련하고 있는 중이었다. 백운생은 우선 백환성과 갈라져서 자신의 장원으로 돌아가서 목욕을 하고 깨끗하게 면도까지 한 다음에 새옷으로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호덕 승 등 그의 아우들은 이미 연무장으로 갔다고 했다. 이때의 백운생의 용모는 피부가 마치 은은한 금빛을 띠고 있는 것 같아서 곱고 매끈하기 이를 데 없어서 실로 고아하고 준수해 보였다. 게다가 아직 전혀 무공을 연성한 흔적이 나지 않아서 마치 그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서 생과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의 내공이 십갑자에 이르렀다는 것은 백환성과 같은 능력자들만이 분간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시녀들에게 연무장의 위치를 상세하게 설명들은 백운생은 신법을 펼쳤다. 연무장! 도임각의 연무장은 비록 사방이 칼날처럼 까마득하게 치솟은 암 봉들에 둘러싸여 있기는 하지만 뜻밖에도 지극히 넓었다. 가히 무림맹의 연무장다운 면모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넓고 잘 닦여진 연무장의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질서정연 하게 자리하고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고 있었다. 그들 중의 대부분 은 각기 상의에 동심원의 무늬를 수놓은 사람들이었는데 바로 다름 아닌 동심각의 인원들이었다. 그 숫자가 대략 일천에서 이천 가량이나 될까? 하 지만 연무장이 워낙 넓었기 때문에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넓은 연무장의 일부 지역에 불과했다. 그곳의 앞쪽에는 하나의 거대한 석조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로 앞 이 툭 트여 있는 거대한 대청이었다. 그곳이야말로 오늘 잔치의 중심지역 인 모양이었다. 백운생은 모처럼 빙허임풍의 경공술을 자랑하며 허공에 떠올라 아래를 내 려다보다가 이윽고 그쪽으로 천천히 신형을 날아 내렸다. "누구요?" 마침 주변에서 술과 음식을 나르고 있던 장한 하나가 백운생이 갑자기 나 타난 것을 보고 다소 놀라며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헌데 그때, "어서 들어오너라!" 대청의 안에서 낯익은 강렬하고 창로한 음성이 쟁쟁하게 울려왔다. 바로 백환성의 음성이었다. 그 장한도 깜짝 놀라서는 즉시 허리를 굽히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백운생은 대청의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법 화려한 대청의 실내, 먼 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청의 중앙으로 나 있는 길과 그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서너 개의 화려한 태사의였다. 지금 그 태사의에 두 명의 범상치 않 은 기도를 풍기는 노인(老人)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백 환성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동심각주인 백환성과 자리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는 저 자 상해 보이는 용모의 노인은 대체 누구일까? 노인은 일신에 황의(黃衣)를걸 치고 있었고, 일견하기로도 용모가 수더분하여 마치 인상 좋은 이웃집의 할아버지와 같은 느낌을 풍겼다. (칠패의 주인 중 하나가 아닐까?) 백운생은 그런 느낌을 강렬하게 느끼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사 의의 아래족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백불의 등의 숙부들과 그 아들과 딸들, 그리고 그 아래쪽에 무구 등의 네 명의 아우들의 모습도 보였다. 비록 자 리가 워낙 엄숙하여 쉽게 나서지는 못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 같이 크게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밖에 문인중문 등의 삼단주 등의 모습도 보였고, 게다가 그 아래쪽에 길게 자리하고 있는 넓은 팔선탁들의 주위에는 각양각색의 수많은 무림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운생은 한눈 에 보기에도 그들이 동심각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아주 자유분방해 보였고, 또한 차림새나 신분도 가지각색이었다. 스님과 비구니들도 있었고, 도사나 늙은 검사, 혹은 거지들도 있었으며, 때로는 용모가 아주 끔찍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견하기로도 백여 명에 달해 보이는 그들은 틀림없이 언젠가 백환성이 말했던 봉공원의 봉공 들이 분명한 것 같았다. 백운생은 이 모든 것들을 아주 짧은 순간에 훑어보고 판단을 내렸지만, 백환성의 음성을 듣고 그들 모두는 이미 이쪽으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 다. 어떤 사람들은 경이의 표정을 짓기도 했고, 또한 어떤 사람들은 다소 실망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으며, 혹은 저 사람이 누구냐고 옆사람 에게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벼운 수근거림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극히 긴장된 고요가 그 뒤를 이었 다. 백운생은 그 팽팽하게 긴장된 침묵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중앙으 로 나 있는 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너라." 태사의에 가까이 이르자 백환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백운생이 고개를 들 어 바라보니 백환성은 근엄한 얼굴에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어 백환성은 옆의 자리에 앉아 있는 황의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인사를 올리거라. 이분은 바로 당금의 성수거(聖手居)의 주인이신 성수신의(聖手神醫) 심환(心煥), 심노선배이시다." (그랬었군!) 내심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백운생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성수거! 칠패의 하나인 그곳은 이제 그와 인연이 깊은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백운생은 언젠가 백환성이 성수신의에 관해서 거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 백환성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 이외에도 여태까 지의 백환성의 태도로 보아 실로 이 성수신의의 존재가 상당히 중요한 편 이라는 것을 백운생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저 인자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어디에 강인함이 깃들어 있다는 말 일까?) 백운생은 내심 생각하며 즉시 그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예 를 올렸다. "무림의 말학(末學), 불초 백운생이 훌륭하신 무림의 대선배님을 뵈옵니 다." 백운생의 그 거창한 인사말은 다소 황의노인을 즐겁게 했던 모양이었 다. 황의노인 심환은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나이에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군. 과연 동심각의 차기 주인다운 인 재일세." 백운생은 얼굴이 붉어졌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이것을 보고 백환성이 심환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만하면 귀댁의 손녀딸과의 혼사는 무난하겠소?" 심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내 손녀딸은 변변치 않은 사람이니 내가 좋고 말구가 어디에 있겠소?" "하하, 과찬이구려!" 백환성은 크게 흡족한 듯 대소하며 백운생을 향해 말했다. "어서 앞쪽의 선배님들께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이에 백운생은 그 뜻을 알아채고 몸을 돌려 앞쪽에 앉아서 자신에게 시선 을 집중하고 있는 봉공원의 봉공들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그들이 야말로 무림 각파에서 파견된 무림의 명숙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인 사를 한다는 것은 곧 무림 전체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 다. 비록 무림 칠패의 사람들이 빠져 있기는 하지만. "불초소생이 여러분 선배님들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앞으로 소생이 부족한 점이 있다면 필히 꼬집어서 가르쳐 주시고 잘 이끌어 주시기 바랍 니다." "흠, 겸손해서 좋군." 누군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좌중에서 일제히 왁자하니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대공자님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바라오!" "앞으로 우리와도 잘 지내봅시다!" 백운생은 생각 외로 그들이 부담없이 잘 대해주는 것을 보고 이것은 아마 도 백환성이 사전에 공작을 한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마음 이 뿌듯하여 연신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한쪽에서 돌연 한 사람이 몸을 일으키더니 소리치는 것이었다. "잠깐! 아직은 그대가 동심각의 후계자가 된 듯한 행동을 하는 것은 이르 오. 동심각의 후계자라면 최소한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 겠소?" 순간 좌중의 시끄러웠던 소음이 사라지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향했다. 백운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볍게 안색이 변하여 그쪽으 로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그는 두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백의청년(白衣靑年)! 나이는 대략 십칠팔 세 가량 되었을까? 가슴에 동심 각의 문양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동심각의 소속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옆에는 전에 만났엇던 백불의나 백불패, 그리고 백운산 등이자 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게다가 그 용모가 백불의의 서생다운 용모와 매 우 흡사하게 닮은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아마도 아직 보지 못한 백불 의의 맏아들이며, 외아들인 백운룡(白雲龍)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뿐만 아 니라 그 옆에 지금 그의 여동생인 백운봉(白雲鳳)으로 보이는 아주 아름다 운 십육세 가량의 소녀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백운하까지 앉아 있어서 그러한 추측을 확실하게 만들어 주었다. 백운생은 우선 자신이 백불의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았ㄷ는 점을 상기하여 백불의와 백불패에게 각각 공손하게 예를 올린 다음에 백의청년에게 되물 었다. "실례지만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 수가 있겠소?" 이때 백운하가 옆에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큰오빠, 그분은 바로 우리 오빠이고, 이분은 우리 언니예요." 이에 백의 청년은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백운하를 가볍게 질책하는 눈으로 쏘아보더 니 백운생을 향해 말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백운룡이고, 이 아이는 바로 내 여동생인 운봉이오. 허나 나는 아직 당신을 형님이라고 부를 수가 없음을 용서하시오." 그것을 보고, "운룡아!" 백불의가 다소 꾸짖는 듯한 음성으로 제지했으나, 위에서 백환성이 손을 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로 놔두어라.: 따라서 좌중의 사람들은 더욱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백운생과 백운룡과의 사이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백운룡은 타고난 기재여서 앞으로 동심각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라고 알려져 있었던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이 두 사람의 대결 은 피할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백운생은 아름다운 시선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백운봉에게 시선을 보 냈다가 이어 백운룡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어떠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오?" 백운룡은 잠시 긴장된 좌중을 둘러보다가 차가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우리 동심각은 비단 우리 백씨 일문뿐만 아니라 천하의 무림의 운명과도 관계가 깊은 곳이기 때문에 후계자의 자질은 심히 요구되는 법이오. 이것 은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동심각을 아끼기 때문이오. 이른 바 후계자의 자질이라고 하는 것에는 그 능력 자체인 무공 과 성품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을 것이오." 백운생이 물었다. "그럼 여기에서 나의 성품을 보겠다는 것이오?" 백운룡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성품을 보아야 하겠지만, 원래 조부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셨을 때에 는 이미 그 성품을 보셨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은 생략하도록 하겠소. 내가 지금 보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무공 능력이오." 무공 능력, 그것처럼 직접적인 말이 또 있을까?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은 일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에 백운생은 다시 물었다. "그럼 나의 무공이 어느 정도라면 적당할 것으로 생각하오?" 백운룡은 의 외로 상대가 의연한 표정인 것을 보고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것은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평가해 줄 것이오." 백운룡은 자신의 입으로 단적으로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 이 평가해 줄 것이라는 말로 회피했다. 그때 백운봉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옥음(玉音)으로 소리쳤다. "최소한 우리 오빠보다는 나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순간 좌중에서 가 슴을 두근거리며 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말에 일제히 찬성하며 소리쳤다. "그렇소. 어서 한번 빔를 해보시오!" 실로 이러한 광경은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무림의 뜻이라고 할 수가 있었 고, 백운생으로서는 거역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설사 무림맹주인 백환 성조차도 이 일에는 관여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백운생의 표정은 이에 다소 굳어졌다. 게다가 구석진 자리에서 이를 바라 보고 있었던 무구 등의 사인의 마음은 더욱 초조하고 당혹해질 수밖에 없 었다. 이미 지난 한달 동안에 이곳의 대강의 실정과 백운룡 등의 무공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그들은 지금 무공을 별로 배우지 못했을 것이 라고 생각되는 백운생이 그와 겨루게 된다고 하자 어쩔 줄을 모르는 심사 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 태사의에 앉아 있는 백환성에게 향했다. 그런데 백환 성뿐만 아니라 심환도 역시 묵묵히 웃기만 할 뿐 이 일에 전혀 관여하려는 표정이 아닌 것이 아닌가! 무구 등의 시선은 이에 어리둥절해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란 말인가? 백운생은 잠시 생각한 후에 백운룡에게 물었다. "그대는 정말로 나와 겨뤄볼 의향이 있소?" 백운룡은 잠시 생각한 후에 기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그러지 않겠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겁장이라고 놀리지 않겠 소?" 이에 좌중의 분위기는 더욱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이제 바야흐로 동 심각의 두 명의 기재들의 시합이 벌어지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무는 실 로 평생에 걸쳐서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 것으로 좌중의 사람들은 실로 오늘 뜻밖의 눈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운생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서로 다툴 것이 아니라 각기 자신하는 한 가지씩의 무예 를 펼쳐 보이는 것이 어떻겠소?" "……" 백운룡은 그 말에 다소 주저하는 눈치였다. 그는 백운생이 자신에게는 미 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토록 자신있게 나오는 것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에 옆의 백운봉이 그를 밀었다. "뭐해요, 오빠? 어서 나가봐요!" "응." 백운룡은 거의 밀려서 중앙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무림 세가의 기재 답게 그의 태도는 어느새 심히 당당하게 변해 있었다. 백운룡은 가까이에 이르러 백운생에게 물었다. "만일 비무 결과 당신이 나에게 진다면 어떻게 하겠소?"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야 그대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물려줘야 하겠지. 그러나 만일 내가 이 기게 된다면 자네는어떻게 하겠는가?" 백운룡은 눈살을 다소 찌푸리다가 대답했다. "나는 물론 당신을 형님으로 대접하겠소."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이어 다시 물었다. "내가 먼저 할까, 아니면 자네가 먼저 하겠는가?" 백운룡은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나중에 하는 사람이 유리하겠지만, 어쨌든 상대가 할 수 없는 능 력을 보인다면 이기는 것이니 내가 먼저 하도록 하겠소." 그 말은 백운생이 나중에 다시 놀라운 무예를 보이더라도 자신이 다시 그 것을 펼칠 수가 있다면 상쇄된다는 뜻이었다. --계속-- #5397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20장 11/12 19:05 431 line 제20장. 동심패(同心牌) 장내는 심하게 긴장이 되었고 크게 흥분된 가운데 침묵이 흘렀다. 백운룡은 이미 자신이 말한 대로 먼저 걸음을 옮겨서 대청의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그리고는 연무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근처에 이르러 신 형을 우뚝 멈추었다. 그는 전면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십여 장 밖에 하 나의 집채만한 바위가 검은 이끼를 뒤집어쓰고 뾰족하게 하늘로 머리를 내 밀고 있었다. 원래 그것은 연무장의 변두리에 있는 것으로 진작에 치웠어 야 했는데 워낙에 바닥에 박힌 뿌리가 깊어서 아직 치우지 못했던 것이었 다. 백운룡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바위에 시험을 하겠소." 순간 백운룡의 쌍수가 그 바위를 향해 천천히 내밀어지더니 갑자기 마치 환상과도 같은 황금빛 광채가 눈부시게 일어났다. 소리는 없었다. 때문에 더욱 환각같은 그 황금빛 광채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막처럼 그 바위를 향 해 밀려가더니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이에 좌중에서 심한 탄식성과 함께 한숨이 흘러나왔다. "실로 놀라운 절기(絶技)로다! 저것은 장법의 극치와 권법의 극치, 그리 고 지법의 정화(精華)가 한데 어우러져 극도의 조화를 이룬 환상적(幻想 的)인 절기로구나! 저 어린 나이에 저러한 것을 성취하다니 대체 나는 그 동안 무엇을 했었더란 말인가?" 실로 회의에 젖은 탄식성이었다. 사실 좌중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무림명숙들이지만 방금 전의 무예를 보고 댗 어찌된 영문인지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옆의 누군가가 다시 그 탄식한 사람에게 물었다. "도장(道長),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그 말에 탄식한 늙은 도장은 재차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는 말로만 들었는데, 바로 동심각의 팔대신공의 세 가지인 금삽수(金 揷手)와 쌍류금(雙流金), 그리고 연기성선 일선지(練氣成線 一線指)의 정 화가 한순간에 전개된 것 같으네. 그것들은 단 한 가지만도 성취하기 어려 운 것인데, 하물며 그것들을 한꺼번에 극성으로 펼칠 수가 있다니, 자네들 은 상상할 수가 있겠는가?" 도장은 말과 함께 그 바위를 바리켰다. 이에 사람들은 시선을 그쪽으로 집중했다. (……?) 순간 사람들은 다 함께 크게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바위, 검은 이끼가 가득 뒤덮혀 있었던 그 바위의 전면이 느닷없이 허물 어져 내리듯이 스르르 매끈한 벽면으로 변하면서 번쩍이더니, 이어 그 자 리에는 다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선명하게 양각(陽刻)되는 것이 아닌가! <사불승정(邪不勝正) 제마멸사(制魔滅邪)…… 사악한 것은 결코 정도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니 천하의 사마를 멸하리라!> 사람들은 감탄의 탄성을 터뜰릴 여유도 없었다. 입으로 말하기에는 너무 나도 놀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인가 하고 말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십여 장이나 되는 먼 곳에서 우선 벽면을 소리없이 완벽하게 깎아낸 다음에 그 자리에 글자를 양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노릇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음각(陰刻)이란 그저 글자를 새기면 되는 것이지만 양 각은 그 옆의 벽면을 다시 같은 깊이로 파서 글자만을 돌출시켜야 하기 때 문이었다. 이러한 양각이 정교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바로 지법의 경지가 극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며, 앞의 경우는 장법의 경지를 말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좌중의 사람들이 놀라고 있는 순간에 이미 그 글자도 사라지고 바 위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거짓말처럼 먼지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리 는 것이었다. 즉 바위가 있었던 곳에는 이제 단지 뿌옇게 흙먼지만이 한가 롭게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곧 권법의 정화가 펼쳐진 흔적이었다. 말하자면, 이러한 현상은 말로는 쉽지만 세 가지 절기가 극도의 조화를 이루기 전에는 불가능한 현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저마다 넋을 잃고 말았다. 모두 가 가공하 ㄹ무예에 대해서 새롭게 개안(開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동심각의무공은 천하의 무예를 한 차원 높여줄 것이 분명할 것이 었다. 아까는 뭐라고 떠들던 사람들도 이제는 백운룡을 향해 감히 얼굴도 내밀 지 못했다. 저러한 절기가 사람을 향해 펼쳐졌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 었다. 백운룡은 이러한 좌중의 분위기를 느끼며 스스로 흡족한 듯 고개를 돌려 백운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끝났소만 당신이 이제 해보겠소?" 다른 사람들은 백운룡의 절기에 그저 놀라고 경이감을 느꼈었겠지만 무구 나 악우왕 등의 친구들은 어떤 공포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그 것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백운생의 얼굴도 다소 굳어져 있는 것 같았다. 허나 백운생은 백운룡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좋소." 좌중의 시선은 다시 백운생을 향해 경직되었다. 백운룡이 그처럼 놀라운 절기를 펼쳤는데 대체 백운생은 또 어떠한 절기를 펼칠 것인가 하는 호기 심에서였다. 백운생은 다소 굳어진 얼굴로 역시 천천히 계단의 앞에 이르러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한쪽을 바라보며 시선을 멈추었다. 조금 전에 백운룡이 바위를 부수었던 그 뒤의 자리에 아주 작아서 대략 사람의 머리통만한 바위 하나 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바닥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큰 바위에 뒤쪽에 굴러와 있던 바위덩어리였다. 대체 백운생은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순간 백운생은 그쪽을 향해 우수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아니 그는 우수를 들어올리려다가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손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 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안쪽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다소 괴이쩍게 생각을 했다. 사내대장부라면 한번 실패를 하더라도 자신의 무공을 펼칠 수가 있어야만 할 것이었다. 헌데 백운생은 혹시 도중에 자신이 없어져서 포기하려는 것 이 아닐까? 헌데 이때 실로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다소 어리둥 절한 표정이던 백운룡이 백운생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점차 로 안색이 경악과 불신의 표정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일까? 지금은 아까 나서서 아는 척을 하던 그 도장도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 사람을 살피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전혀 기척도 없었는데 태사의에 앉아 있었던 백환성과 심 환의 신형이 백운생과 백운룡의 근처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백환성이 웃는 얼굴로 백운성을 향해 말하는 것이었다. "축하할 일이다. 네가 무극검해(無極劍解)까지 완성을 했구나!" "……" 백운생은 그저 담담히 웃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무극검해, 백운생은 이미 그것을 완성한 것일까? 이에 백환성은 이어 백운룡을 향해 물었다. "운룡이, 너의 생각은 어떻느냐?" 백운룡은 심하게 안색을 일그리고 있다가 조부의 음성을 듣고는 비로소 안색을 펴고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아직 무극검해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운생형을 형 님으로 모시고 따르겠습니다." 사람들의 의문이 계속되는 가운데 백운룡은 이어 백운생을 향해 공손히 포권하며 말했다. "형님, 소제의 행동이 지나쳤음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실로 형님께서 이 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줄은 정말로 몰랐었습니다." 백운생은 담담히 웃었다. "과찬이네." 말과 함께 백운생은 백운룡의 두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자 백운룡 역시 기꺼운 표정을 짓고 함께 웃는 것이었다. 백한성은 이를 대견한 듯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좌중을 향해 말 했다. "자, 노부는 이만 심노인과 함께 사라질 테니 여러분들은 계속 남아서 마 음껏 즐겨주기를 바라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의 신형은 마치 귀신같이 종적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이미 어리둥절하던 상황이었는지라 더욱 안개 속에 휘감기는 기 분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시 백운생이 손짓을 하던 그 작은 바위를 주 시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한 사람이 나는 듯이 그쪽으로 달려가서 그 작은 바위를 한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돌연 그 사람이 다소 놀라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앗! 여기에 글자가 새겨져 있소!" 사람들은 이어 그 자가 이쪽으로 들어보이는 바위의 면을 보고는 다소 흠 칫한 표정을 지었다. 바위의 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심(心)> 사람들은 그 글자가 바로 방금 전에 생겨난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즉, 백운생이 손을 올리다가 만 듯한 행동을 보였을 때 이미 어떤 수를 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그러한 의문을 대변해 주듯 백 운하가 언니인 백운봉에게 깜찍스러운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언니, 대체 저 글자는 양각도 아니고 다만 음각일 뿐인데 뭐가 그리 대 단하다는 거죠?" 이에 좌중의 시선이 크게 집중된 가운데 백운봉이 웃으며 대답했다. "음, 그건 너도 알다시피 이쪽으로 생겨 있는 것이 아니라 바위의 뒷면에 새겨져 있던 것이다. 너는 상상할 수가 있겠니? 바위의 앞면은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순간적으 로 바위의 뒷면에 글자를 새기는 능력을." 사람들은 그제서야 뭔가 좀 알 것 같았다. 사실 모두들 눈여겨 보지 못했 으나 백운봉의 말대로 바위의 뒷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은 분명했 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있다고 자신하겠는가? 일반적으로 아 무리 오묘하고 강한 힘이라고 할지라도 전면으로 나아가는 특성이 있는 것 이지 이쪽으로 되돌린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강하지 못할 것이었다. 아니, 그처럼 완벽하게 글자를 새긴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었 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진기를 자신의 마음먹은 대로 움 직일 수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허나 백운하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 다. "하지만 그런 것은 우리 오빠도 할 수가 있지 않을까?" 백운봉은 잠시 생 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수법이 문제가 되겠지. 우리 오빠는 자신 이 무극검해의 수법을 펼칠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패배를 자인한 것 같아." 백운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대체 무극검해를 완성했다는 것은 뭘까? 그건 바로 무형검(無 形劍)을 말하는 것일까? 그럴까, 언니?" 이에 백운봉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그 이상은 모르겠어. 그 질문은 오빠에게 직접 해보렴." 허나 이때 백운룡은 벌써 혼자서 저쪽으로 멀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을 것이기에 백운하는 즉시 그의 뒤를 따라가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반대로 백운생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이때 백운생은 호덕승 등의 친구들을 향해 다가가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백운하는 즉시 다가가서 물었다. "큰오빠, 대체 방금 전의 일은 어찌된 것이지?" 백운생은 도리어 되물었다. "어찌되다니?" 백운하는 크게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흥, 큰오빠는 무공을 배우더니 이제는 아예 나를 모른 척하려고 하시는 군요?" 백운생은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 대답을 할 것이 아니 겠는가?" 이에 백운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다시 질문하겠어요. 방금 전의 큰오빠의 그 무공은 뭐라는 것이었 죠?"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갑자기 생각난 것이었으니까." 백운하는 눈을 크게 떴다. "할아버지는 무극검해라고 하시던 걸요?"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하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어." 백운하는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럼 대체 어찌된 일이죠?" 이때 호덕승이 백웅생에게 말했다. "대형, 이곳은 복잡하니 그만 장원으로 돌아가서 우리끼리 자축을 하는 것이 어떨까요?" 백운생은 흔쾌하게 승낙했다. "좋다." 이어 백운생은 사인의 친구를 데리고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악우왕은 아무래도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하여 돌아오는 길에 백운생에게 물었다. "그 백운룡 공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소?"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할 수야 있었겠지만 스스로 생각해 보기에 나에게 양보하는 것이 나을 테니까 그랬던 것 같아." 악우왕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어째서요?" 백운생은 웃었다. "그야 난들 알겠는가?" 이윽고 백운생은 장원에 이르러서 호덕승 등을 향해 말했다. "아마도 나는 내일 떠나게 될 것 같소. 그런데 그대들은 이미 내가 가르 쳐 주었던 무공들을 터득했소?" 호덕승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실은 내공은 한 사갑자에 이르렀는데 역시 이상하게도 그 무공들은 쉽게 배워지지 않는 것이었소.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마찬가지인 것 같소.: "……" 백운생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빙그레 웃었다. 하긴 이중에서 무구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무구는 아미파의 절학에 대단한 성취를 이루고 있을 것이었다. 마치 이처럼 적어도 ㅈ신의 위치에 걸맞는 무공을 배우는 것이 더욱 나은 방법이 아닐까? 백운생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들 초조하게 생각할 것은 없소. 원래 이 무공들은 배우기가 어려운 것이니까 천천히 여유를 갖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보다 내가 이번 에 모두에게 신법과 보법을 전수해 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악우왕이 크게 기뻐서 환성을 질렀다. "하하,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이 어디에 있겠소? 나는 가르쳐 주는 무공 은 마다하지 않는 성미라오." 호덕승이 웃으면서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저 턱없이 좋아하기는…… 하지만 기왕이면 신법이나 보법 같은 것을 배웠으면 했었는데 잘됐습니다." 좌선비를 돌아보니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도 좋습니다." 하지만 무구는 단지 만면에 미소만을 띄고 있을 뿐이었다. 무공의 방향이 다른 만큼 그녀는 전혀 백운생의 무공을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는 모양이 었다. 백운생은 따라서 짧은 시간을 활용하여 부동신보(不動神步)와 빙허임풍 (憑虛臨風)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이미 내공이 사갑자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득은 어느 정도는 연성이 가능할 것이었다. 백운생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백환성에게 다시 불려갔다. 이번에 그를 데 리고 간 사람은 바로 문인중문이었다. "축하하네!" 문인중문은 외삼촌이어서 그런지 사심없이 그에게 축하해 주었다. 백운생이 안으로 들어가자 백환성은 역시 혼자 앉아 있다가 그를 맞았다. "어서 오너라." 백운생은 이미 백환성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불렀는지 알고 있었다. 따라 서 먼저 인사를 한 후에 물었다. "오늘 출발해야 합니까?"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혹시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이라도 있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만 이번에 의저 친구들과 함께 갈수 있었으면 해서……" 백 환성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게 해야지. 그래, 어떻게 가겠느냐? 수행인들을 붙여 줄까?"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우리 다섯 사람으로 충분합니다." "그래?"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소근엄 한 표정으로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 누차 말했지만 이번의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라. 어떻게 생각하 면 쉬울 일이겠지만, 이번의 일은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 니라. 내 심노인의 말을 들어본 즉 그의 손녀딸의 성품은 그리 까다롭지 않다고는 하더만은 그래도 여자의 마음이라는 것은 추레한 것은 싫어하니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가 있도록 해라. 알겠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곤란한 일은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이에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백운생 의 두 손을 부드럽게 잡고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이해를 해주니 나로서는 더 이상 걱정이 없겠구나. 모쪼록 이번의 일은 중대사라는 것을 명심하고 마음을 넓게 가지도록 해야 하느니라." 백운생은 고개를 숙였다. "예, 할아버님." 문득 백환성의 손끝으로부터 혈육의 깊은 정이 끈끈하게 전해오는 것 같 았다. 어어 백환성은 품속에서 하나의 전표를 꺼내서 백운생의 손에 쥐어 주었 다. 백운생은 다소 놀랐다.그것은 바로 황금 만냥짜리 전표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건……" 백운생이 사양하려고 하자 백환성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예물은 따로 서수거에 보낼 것이지만, 네가 그 여식을 만나서 추레한 꼴을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이다. 그것으로 어떤 예물을 사서 그 여식에게 선물로 준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백운생에게는 아직 거의 사용하지 않은 은자가 삼천냥 남짓 있었다. 따라 서 끝까지 사양하려다가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공손히 받아 서 품속에 깊이 갈무리했다. 그러자 백환성은 다시 그에게 하나의 황금빛 패(牌)를 건네주며 말했다. "만일 여의치 않은 일이 있을 때에는 이 동심패(同心牌)를 사용하도록 하 고, 또한 이것으로 네 신분이 증명될 것이다." 동심패! 그것은 둥근 원형의 패였는데, 전체가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고 안쪽으로 둥근 태양이 양각되어 있는, 뒷면에 전자체의 글씨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동심지존(同心至尊) 견패여주(見牌如主)! 이것은 동심각주의 신물(信物) 이니 이 패를 보거든 주인을 본 것 같이 하라.> 백운생은 그 날 사인의 친구들을 대동하고 마차를 타고 동심각을 떠났다. 그것은 비교적 은밀한 행동이어서 그들이 동심각을 떠날 때 그들을 배웅하 는 사람은 고작해야 문인중문 정도였다. 문인중문은 상당히 백운생에게 신경을 써주는 눈치였다. 그는 마지막에 백운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천하를 통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천하에는 사악한 무리들 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가능한한 부딪치 지 않도록 하십시오." 백운생이 이미 후계자로서 공표되었기 때문에 문인 중문은 공인의 자격으로서 존대말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백운생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에 마차에 올랐다. "끼랴!" 악우왕이 마부석에서 힘차게 마차를 몰기 시작하고 있었다. 두두둑……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듯 마차는 아주 경쾌하고 빠르게 달려서 금방 운몽현(運夢縣)을 지나서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비록 입신양명을 위해 그랬었기는 하지만 지난 한달 동안 장원 안에 틀어 박혀서 다소 답답한 기분이었던 사인은 동심각을 빠져나오자 마치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인 모양이었다. 악우왕이 큰소리로 소리쳤다. "형님, 이거 우리 동심각으로 들어가지 말고 이대로 다른 지방에 가서 왕 노릇이나 할까요? 예말에도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낫다고 하지 않 았소? 사실 동심각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자꾸만 기가 죽 는단 말이야." 백운생은 이에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 이것을 보고 백운생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호덕승이 문득 백운생에게 물 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장사성(長沙省)일세." 장사성. 호북성의북동쪽에 위치하며 동정호에서 남동쪽으로 수백리를 내 려가면 이 장사성에 도달하게 된다. 비록 동정호아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해 도 동정호로 흘러드는 상강(湘江)의 연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 터 유람객들이 많이 드나들고 교통이 발달된 성시였다. 이 장사성에 그 날 백운생 등이 당도했다. 장사성은 상당히 넓었다. 따라 서 마차를 대강 처분하고 일행은 우선 가까운 주루에 올랐다. "어서 옵쇼!" 상강루(湘江樓)라는 주루였다. 이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번화한 거리에 위 치한 만큼 상당히 화려하고 훌륭하게 실내가 꾸며져 있었다. 이미 일층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일행은 이층에 올라갔다. 이 층의 자리는 매우 전망이 좋았다. 일행이 자리하고 나자 점원이 다가와서 주문을 받고 갔다. 이런 때 주문을 하는 사람은 대개 호덕승이었다. 그러면서 가끔 악우왕과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소고기를 닷근 정도 더 시키라니까!" "이봐요, 둘째형,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러다간 우리의 살림이 동이 나게 될 텐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형님 혼자서 다섯 사람의 몫을 해 치우는 셈이니 이번에는 그 정도로 참아 주십시오." 악우왕은 먹는 일로 호덕승에게 시달림을 받자 얼굴이 벌개졌다. "아니, 아니, 내가 뭐 은자가 없어서 그러는 줄 알아? 빌어먹을!" 이때 호덕승이 악우왕의 시선을 피하며 백운생에게 질문을 했다. "참, 형님. 형님의 말씀대로 장사성에 오기는 했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어 떻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에서 옥수성심(玉手聖心)을 찾으라는 말씀이셨네." "옥수성심?" 호덕승이 혼자 중얼거려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 이름이 참으로 훌륭하군요. 정말로 그 이름처럼얼굴도 아름다울까 요?"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이때 악우왕이 좋지 않은 얼굴을 해가지고 심술을 부렸다. "빌어먹을, 대체 이건 정말 참을 수가 없는 일이라구요." 백운생은 웃으 며 물었다. "뭐가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인가?" 악우왕은 손가락으로 옆에서 묵묵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무구를 가리 키며 대꾸했다. "그녀가 있는데 형님께서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 무렵 무구는 세속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벌써 옷차림뿐만 아니라 행동 까지도 세속의 요조숙녀와도 같았다. "……" 백운생이 묵묵해지는 것을 보고 호덕승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섰다. "둘째형님, 갑자기 왜 그러시오?" 악우왕은 이미 호덕승에게 먹는 일로 심하게 놀림을 받았기 때문에 쉽게 심술을 거두려고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세상에 먹는 것으로 생색을 내는 녀석은 가장 지독한 녀석이 틀림없어. 내가 참나봐라.) 악우왕은 생각나는 대로 대꾸했다. "아, 그렇지 않느냐? 그녀는 원래 우리의 형수님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이 렇게 별볼일이 없게 되었으니, 대체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말이야." 이에 호덕승은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악우왕이 생각도 없이 심한 말을 했기 때문에 도저히 말을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때 무구가 고개를 돌리며 웃으며 대꾸했다. "왜들 그러죠?" 악우왕은 그제서야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것을 알고 우물우물 했다. "아, 아니, 나는…… 그저…… 아무, 아무 것도 아니야." "……" 무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악우왕을 바라보다가 다시 호승덕을 향해 물 었다. "셋째오빠, 대체 무슨 일이죠?" (……?) 호덕승도 다소 머뭇거렸다. "그는…… 네 신세가 불쌍하다는 거야." 이에 무구는 문득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난 또 뭐라고. 호호,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세요. 저는 앞으로 모든 계 획이 다 세워져 있기 때문에 조금도 불쌍하지 않답니다." 내심 가슴이 찌릴고 있었던 악우왕이 돌연 놀라 물었다. "아니, 계획이라니 그게 뭐지?" 무구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아미파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제 무공이 웬 만큼 경지에 도달했으니 본파로 돌아가게 되면 앞으로 본파를 위해 많은 활약을 할 수가 있게 될 거예요. 그야말로 우리들이 가장 이상으로 여기고 있는 사항이죠." "……" 무구는 좌중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큰오빠는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기 때문에 우선 그분을 도와드 린 다음에 나중에 아미파로 가려고 해요." 악우왕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다가 다시 물었다. "너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냐?" 무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니, 왜요?" 악우왕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뭐 세상에 너와 같이 예쁜 아이가 아미파에 가서 중이 되어야 한다 고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아서 말이야." "호호……" 무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둘째오빠가 잘못 안 거예요. 비구니가 되는 것은 뭐 세상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가는 것인가요?" 악우왕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 그게 아닌가?" 무구는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이지요. 비구니가 되는 것은 진정으로 불문에 귀의하여 성불(成佛) 하기를 원하는 것이예요. 어디 가서 그런 말을 한다면 죄를 받게 돼요." 악우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너는 정말로 그런 마음이라는 말이냐?" 무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불문에 마음속으로 귀의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속세의 일을 할 수가 있겠어요? 제가 이번에 나온 것은 다만 한번 쯤 세상 구경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지요." 악우왕은 눈을 꿈뻑거리며 다시 물었다. "구럼 너는 결국 다시 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냐?" 무구는 일순 까르 르 웃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렇게 자꾸 묻는다면 남들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듣게 돼 요." 악우왕은 다소 못마땅한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좋아. 내 그럼 네가 아미파의 장문인이 되는 것을 빌어주지." "……"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무구는 웃고 있었건만 기이한 일이었다. 헌데 악우왕이 다시 말을 꺼냄으로써 그 침묵은 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또 있어. 대체 저 녀석은 어째서 그렇게 말 이 없어졌느냐는 거야. 안 그래?" 호덕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말이 좀 없어졌지." <제3권 끝> --계속-- #5398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21장 11/13 19:53 172 line 제21장. 강호제일보(江湖第一步) 악우왕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좀이 아니야. 좀이 아니라구! 저 녀석은 요 사이에 한 마디도 한지 않고 있다구!" 물론 악우왕이 말고 있는 저 녀석은 옆의 좌선비를 가리키는 것 이었다. 이에 좌선비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악우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그러냐니? 사람이 앞에 시체를 두고 있다면 기분이 좋겠냐?" 좌선비 가 웃었다. "그럼 내가 시체라는 말이야?" 악우왕이 눈을 부라렸다. "그럼 말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시체가 아니라는 말이냐?" "하하…… " 좌선비는 일순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 뭔가 괴로운 일이 있는가 해서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웃자 다소 안심이 되면서도 호덕승 등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헌데 좌선비는 웃음을 멈추더니 즉시 정색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이었다. "원래 나는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싶었는데 여태까지 참고 있었지. 그것은 말이야, 우리가 이렇게 성장하게 된 것이 누구의 은덕이라고 생각해?" 악우왕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손가락으로백운생을 가리켰다. "바로 그가 아닌가!" 이에 백운생은 그저 담담히 웃으며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좌선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그러나 거기에 비해서 우리는 무엇으로 은덕을 갚고 있지?" 일시 좌중이 아주 조용해졌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대답할 말이 궁해졌던 것이 다. 좌선비가 다시 말했다. "우리가 그를 대형으로 모시고 이렇게 따라다니는 것을 은덕을 갚는 길이 라고 생각해? 오히려 이것은 대형에게 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악우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 말은 너무했다. 아무렴 이것이 대형에게 짐이 되기야 하겠 니?" 좌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래.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따라다니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도 되기 땜눈에 결코 은덕을 갚는 길이 아니라는 말이야. 내 말은……" 좌선비는 좌중을 돌아본 다음에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기왕에 그를 대형으로 모시기로 했으니 앞으로 계속 그래야 하겠 지만, 기실은 그를 우리의 주군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거야. 즉, 둘째형과 셋째형은 나에게 있어서 형이지만 대형은 나의 주군이신 거야." 악우왕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좌선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내가 그 동안 꾸준히 지켜보니, 우리는 겉으로는 그런 척 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를 친구로 여기고 있었어." 백운생이 옆에서 듣다 못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선비, 나는 실은 부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원해. 그게 더욱 좋 지 않겠어?" 이에 좌선비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형님. 내가 뭐 나중에 형님이 동심각주가 되는 것을 미리 생 각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고, 우리는 당연히 형님을 주군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소, 셋째형?" 호덕승은 이제까지 아무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의 말이 옳아." 좌선비는 다시 말했다. "그래서 얘긴데, 우리는 이제부터 호칭은 그대로 두더라도 대형게게는 주 군을 대하듯이 행동하고 적극적으로 도와드리는 것이 어때?" 옆에서 무구가 문득 작은 주먹으로 탁자 위를 쳤다. "난 찬성이예요." 이에 악우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탁자 위를 쳤다. 쾅! "나도 찬성이야!" 그리고 호덕승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찬성이야." 헌데 이때 아래층에서 주문한 음식들이 올라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사 람이 일행이 앉아 있는 탁자의 옆으로 다가와서 짜증을 내며 사납게 소리 쳤다. "이봐, 대체 여기가 너희들 안방인 줄 아나? 나이도 어린 것들이 이런 곳 에 처음 와보면 곱게 있다가 갈 일이지 어째서 떠들고 야단이야?" 일행은 이에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대한(大漢). 일견하기로도 얼굴에 칼자욱이 완연하여 흉악하게 보이는 사내 하나가 두 손을 허리에 올려놓고 사납게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긴 일행은 하나같이 나이가 어려서 비록 악우왕의 나이가 가장 많고 또 한 체격이 우람하다고는 하나 아직 험상궂은 인상이 없어서 이렇듯 쉽게 보이기가 쉬웠다. 게다가 옆으로 돌아보니 대한의 일행인 것 같은 매우 흉 악하게 생긴 패거리가 옆 탁자에 모여앉아서 이쪽으로 흉흉한 시선을 보내 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마침 기분이 그리 좋지 않던 악우왕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 백운생 에게 물었다. "형님, 내 한바탕 해도 괜찮겠소?"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처음 오는 입장이고 손님이니 함부로 굴 수야 있는 가? 우선 참게. 내가 알아서 처신할 테니." 그렇게 악우왕을 말린 다음에 백운생은 몸을 일으켜서 그 대한을 향해 말 했다.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너무 흥분하다 보니 조금 시끄럽게 되 었는데, 앞으로는 조용히 있을 것이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옆의 탁자에서 패거리 중의 하나가 사납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야말로 말이라면 최고라는 식이로군. 이봐, 황오(黃伍)! 설마 그 런 한마디에 맥없이 돌아오지는 않겠지?" 그 말에 황오라는 그 대한은 다소 찔끔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백운생을 향해 다시 눈을 부라렸다. "이 자식아, 그렇다면 진작에 조용히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래, 네 놈들의 이름은 뭐야? 그리고 어디에서 왔어?" 백운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는 북쪽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옥수성심이라는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지요." "옥수성심?" 일시 대한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모습이었다. 이때 옆 탁자의 다른 한 사람이 다시 외쳤다. "이봐, 그 여자도 꽤나 쓸 만해 보이는데 다른 여자를 구하고 있는 것을 보니 대단히 분수를 모르는 모양이군. 어서 그 계집의 이름이 무엇인지 한 번 물어봐!" 대한은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가 백운생에게 물었다. "이 자식아, 저 계집의 이름은 뭐냐? 순순히 저 계집을 놓고 간다면 목숨 만은 살려주마. 어떠냐?" 이 대한은 주저하면서도 공갈조로 한술을 더 떴다. 이에 백운생은 더 이상 할말이 없어졌다. 이것을 보고 문득 좌선비가 몸을 일으켜서 그 대한의 앞에 이르렀다. 슷. 대한은 일순 가볍게 놀랐다. 바로 좌선비가 거의 몸을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환영처럼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 다. 좌선비의 얼굴은 이때 지극히 차가워져 있었다. 작고 갸냘픈 체구에서 어 떻게 그런 냉기가 흘러나오는지 알 수가 없어도 좌선비는 백운생의 앞을 막아서며 대한을 향해 말했다. "나는 두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너희들은 어서 꺼져라!" 이에 대한은 다 소 흠칫하더니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그것은 그들의 자문을 구하는 표 정이었다. 그러자 그 탁자의 대한 하나가 사납게 소리쳤다. "야, 황오, 뭣하는 거야? 한방 먹여 놔!" 대한은 주저하며 대꾸했다. "하, 하지만 이들은 실로…… 만만치 않은 자들인 것 같은데요?" 그 대한 이 눈살을 흉악하게 찌푸렸다. "뭐라구? 빌어먹을, 그러니까 한번 해보라는 거 아니야? 너 이자식 나의 말을 거역하다니 죽고 싶어?" 말과 동시에 대한은 품속에서 하나의 날이 예리한 비수를 꺼내 들더니 허 공에 빙그르르 휘둘렀다. 그 살벌한 광경에 황오라는 대한은 즉시 안색이 흙빛이 되어 앞도 보지 않고 그대로 좌선비를 향해 쌍권을 휘두르며 돌진했다. 그러나 왠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한이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은 어느 새 한쪽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좌선비는 아까의 자리에 그 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자연 황오라는 대한의 얼굴은 시뻘겋게 붉어졌 다. 물론 탁자에 앉아 있던 대한들의 불만을 사기에 족한 것이었다. "황오, 너 이리오 와, 이 자식아!" 아니나 다를까,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고 있던 대한 하나가 흉악한 표정 으로 황오를 불렀다. 황오라는 대한은 마지 못해 주춤주춤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문득, "으악 --" 짧은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나동그라졌다. 일행은 처음에는 그저 황오라는 사람이 그 자의 일권을 맞고 그냥 엄살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황오라는 대한은 그 뒤에 일 어나지 않았고, 그의 주위에 점점이 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있었 다. "사, 사람이 죽었다!" "살인이닷!" 이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를 보고 저마다 흑빛이 되어 달아 나 버리고 말았다. 백운생 등의 일행은 실로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를 줄은 몰랐다. 그저 시정 잡배들인 것을 알고 가볍게 손을 봐주려고 했던 것이 살인까지 유발시키고 말았다. 물론 황오라는 대한이 죽은 것은 결코 일행의잘못은 아니었지만. "야, 이 개새끼들아! 어서 저 자식들을 포위해!" 황오를 죽인 그 우두머리는 흉악하게 소리치며 탁자를 있는 대로 두들기 고 있었다. 이에 그의 주위에 앉거나 서 있던 대여섯명의 대한들이 일제히 발빠르게 일행의 주위로 몰려들어 포위를 하는 형국을 취했다. 게다가 어떤 자들은 수중에 비수나 단검 등을 뽑아들고 있었다. 실로 느닷없이 살벌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실로 백운생의 일행에게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말 할 것도 없이 이들은 하나같이 시정잡배들이며, 과거 일갑자의 공력을 가 지고 있었던 때만 해도 능히 혼자서도 가볍게 해치울 수가 있는 상대였다. 그렇건만 감히 사갑자 이상의 공력을 가지고 있는 강호무림의 최절정의 고 수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이렇게 살벌하게 날뛰고 있는 광경이라니, 괴이 쩍은 것보다는 일행은 하나같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일시 멍하니 서로를 돌 아보고 있었다. 물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지극 히 기분이 나쁜 일이었다. 그 우두머리 대한은 이것을 보고 자신의 책략이 통했다고 생각을 했는지 돌연 수중에 들고 있던 비수를 탁자 위에 그대로 꽂으며 악랄하게 소리쳤 다. "야, 이 새끼들아, 죽고 싶어, 살고 싶어?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해!" --계속-- #5399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22장 11/14 22:17 302 line 제22장. 뜻밖의 공교로운 일 일행의 눈에 점차 차가운 기색이 어리는 가운데 백운생이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자신이 처음에 점잖게 대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만일 그가 약간의 힘이라도 보여 주었었다면 저 악랄한 자는 황오라는 자를 죽 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물론 저 자가 황오를 죽인 것은 수하들과 상대를 겁먹게 하자는 수작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라도 본색을 드러내어 약간의 능력만 보여준다면 저런 자들은 쉽게 물러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어째서 저 자가 이토록갑자기 악랄하게 나오는가 하 는 점이었다.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이 아닐까?) 백운생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보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오?" 그의 말은 여전히 정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는 손을 쓰고 있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있음에도 백운생이 이렇게 직접 나서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앗!" 그 대한은 비수를 쥐고 있던 손이 갑자기 심하게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 끼며 비수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거은 마치 비수에 귀신 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비수는 탁자 위에서 절로 빠져나와서 허공에 올 라가더니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움직여서 백운생의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는 아주 적당한 허공에 멈춰서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대해서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대한들은 이에 갑자 기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강호에서 활동을 하는 자들은 시정잡배를 막 론하고 눈치가 빠르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백운생의 이 한수에 금방 상대 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 무림고수가 강호를 횡행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그들로 말 하자면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저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였다. "가자!" 누군가의 한소리 외침과 함께 일행의 주위에 늘어서 있던 대한들이 일제 히 우르르 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우두머리인 그 대한은 미처 달아나기도 전에 눈앞에 서 불이 번쩍 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윽!" 고개를 들고 보니 어느새 자신의 비수가 자신의 이마를 들이받고 허공에 둥둥 떠서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실로 이와 같은 수법은 강호의 절정의 고수들이라고 해도 펼치기가 어려 운 것이었다. 대한은 두 눈이 있는 대로 부릅떠져서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서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그 앞으로 백운생이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 다. "그대를 죽이려는 것은 아니니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소." "……?" 백운생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의 동료가 저렇게 죽어 있는데 시신이라도 가져가야 하지 않겠소?" 백운생이 손가락으로 황오의 시신을 가리키자 그제서야 그 대한은 살 길을 찾은 듯이 눈을 치켜떴다. "그렇다면……"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데리고 가시오. 그리고 한 가지 묻겠는데, 어째서 갑자기 그를 죽 이게 되었는가?" 그 대한은 금방 좋아했다가 질문을 받고 즉시 크게 흠칫 했다. "그, 그것은 바로……" 대한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돌려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무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보고 악우왕이 크게 화가 나서 소리쳤다. "왜 그랬냐고 묻고 있지 않아!" 흡사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조일 것 같은 그 서슬 시퍼런 태도에 대 한은 금방 주눅이 들었다. 그 자는 몸을 떨다가 눈빛을 굴리더니 대답했 다. "소, 소인이 감히 저 소저의 미모에 욕심을 품고 일을 저지르려고 했습니 다." "뭐라구?" 악우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탁자를 쳤다. 쾅! 백운생은 눈살을 다소 찌푸렸다. 뭔가 미심쩍은 것 같기도 했고 또한 어 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 무구의 용모가 그만큼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었다. 백운생은 더 이상 그 일을 논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너는 혹시 옥수성심의 이름을 들어 보았는가?" 대한은 잠시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옥수성심이야 이곳에 있는 사람이면 듣고 있습지요." 호덕승이 갑자기 나서서 물었다.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대한은 고개르 ㄹ치켜들더니 대꾸했다. "무엇을 하다니요? 말할 것도 없이 의원입죠." "의원?" 호덕승이 눈살을 찌푸리자 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는 얼굴도 모르는 의원인데 신비로워서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제 대로 없습니다요. 혹시 그를 찾아가려고 하십니까요?" 호덕승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에 관해서 아는 대로 말해 보아라!" 대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즉시 말하기 시작했다. "옥수성심이라는 것은 그의 손이 매우 아름답고 마음씨가 아주 훌륭하기 때문입니다요. 그는 의원(醫員)이면서도 환자에게 치료비는 전혀 받지 않 는 사람입죠. 하지만 대체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 죠." 호덕승이 차갑게 물었다. "하지만 너는 아까 그를 여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대한은 그의 음성이 갑자기 싸늘하지자 절로 공포감을 느끼는지 가볍게 떨며 대답했다. "그는 손이 매우 곱고 또한 주위에서 향기가 난다고 해서 여자가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는 것입죠. 그는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 때문에……" 호덕승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의 거처는 어디에 있느냐?" 대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요. 그는 실상 너무나도 의술이 신묘(神妙)하고 또한 무료로 치료해 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를 소망하고 있습죠. 하지만 종적이 항상 신비로워서 정작 그를 찾아낸 사람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지요. 다만 그는 북쪽의 빈민가에 많이 나타나는 편이니, 그쪽 으로 가보면 찾기가 쉬울 것입니다요." "……" 호승덕은 그만하면 옥수성심에 대해서 많이 알아냈다고 생각되자 이번에 는 다른 것을 물었다. "너는 앞으로도 그녀에게 욕심을 품을 생각이냐?" 그녀라는 사람은 물론 무구였다. 무구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대한은 즉시 고개를 내저었다. "천,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요." 호덕승이 차갑게 말했다. "그런 천만부당한 일을 아까는 왜 했었나?" "……" 대한이 묵묵히 고개를 떨구는 것을 보고 백운생이 나서서 말했다. "자, 그만하면 됐으니 어서 가도록 하시오." 대한은 이에 크게 기쁜 표정을 지었다. 허나 비수가 여전히 그의 얼굴 앞 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고 사색이 되어 외쳤다. "이, 이것을 좀……" 백운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것은 안 가지고 갈 생각이었나?" "……?" "괜찮으니 가지고 가도록 하게." 이에 어쩔 수 없이 대한은 사색이 다 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비수의 손 자이를 잡고는 더 이상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몸을 되돌려 황오의 시신을 안고 달아나 버리기 시작했다. 이에 일행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탁자 위에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좌선비가 문득 백운생에게 물었다. "이제 북쪽의 빈민가로 가볼생각입니까?"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옥수성심, 그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백운생 일행은 식사를 마친 다음에 결정한 대로 북쪽의 빈민가로 향했다. 그런데 그들이 빈민가의 대로에 들어섰을 때 실로 기이한 장면을 보게 되 었다. 아니, 기실 이런 빈민가에서는 이러한 일이 매일 비일비재로 일어나 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리 왓! 이 죽일 년아!" 퍽퍽…… "아악, 살려주세요!" 심한 남자의 욕지거리와 함께 여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 바로 부부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일행은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생 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아하니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환한 대로상에서 남 자는 여자를 두들겨 패고 여자는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하고 전신에 시퍼렇 게 멍이 들도록 맞고 있었는데, 남자의 태도가 기이하게 살벌할 뿐만 아니 라 여인의 태도 또한 지극히 절박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기이하게 도 부근의 사람들은 그쪽을 별로 주시하지 않고 있어서 근처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일행뿐이라고 말할수가 있었다. "이 개같은 년, 네년이 감히 어디로 달아나려고 해? 이 가랑이를 찢어 죽 일 년!" 퍽퍽퍽…… 사내의 두 눈에는 거의 원독이 실려 있는 것 같았고, 그가 두들겨 패는 광경이 일반 사람이 아니라 무공을 익힌 사람인 것 같아서, 이것이 단순한 부부 싸움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에 여인은 심한 고통으로 인해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괴성을 질러대며 주위의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살려줘요! 나를 누가 좀 구해줘요. 이 자가 나를 잡아가려고 해요! 이 자는 사람을 잡아가는 못된 놈이니까, 어서나를 좀 구해주세요!" 여인의 소리는 처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역시 주위의 사람들은 그저 옆 으로 스쳐지나갈 뿐으로 전혀 이 여인의 불행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눈치 가 아니었다. 따라서 마침내 이를 보던 악우왕이 호덕승을 향해 물었다. "부부 싸움이 아니라 저놈이 그녀를 잡아서 팔아 먹으려는 것이 아니야?" 호덕승은 도중에 공연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까 하고 다소 눈살을 찌 푸렸다. 원래 이런 빈민가에는 살벌한 일이 자주 벌어지게 되며, 으레 그 러한 일들은 못본 척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마련이었다. "글쎄……" "뭐가 글쎄야! 어서 우리가 그녀를 구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구." 악우왕 은 무구를 의식해서인지 여인을 구해주는 이에 매우 열성이었다. 바로 그때 마침 그 사내가 수중에 예리한 날이 번뜩이는 칼을 뽑아 들었 다. "아니 이년이 뭐라구? 네 네년을 죽이고야 말겠다!" 말과 더불어 사내는 수중의 칼로 여인을 향해 크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여인의 안전을 생각하던 악우왕은 이것을 보자 더 이상 견 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설사 그들이 부부라고 할지라도 살벌한 칼부림 은 막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악우왕은 즉시 그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봐, 칼을 거두라구!" 과연 천둥같은 악우왕의 음성은 금방 장내에 효과를 나타냈다. 사내는 첫 번째 여인의 가슴을 찌르는 공격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목을 노리려고 하다 가 문득 고개를 돌리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헌데 그때였다. 사내가 잠시 이쪽으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맞고 있던 그 여인이 별안간 발길을 들어서 사내의 가슴팍을 힘차게 내지르는 것이 아닌 가! "엇! 이 계집이……" 그만 사내는 억소리를 내며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얼른 신형을 일으켜 재주를 넘믄가 싶더니 여인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려고 했으 나, 이때 여인은 어느새 빠르게 신형을 움직여서 악우왕의 우람한 몸집 뒤 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제발, 사, 살려주세요!" 매를 맞아서 얼굴이 온통 푸르뎅뎅하게 물들었으나 악우왕은 애처롭게 호 소하는 여인의 얼굴이 청초하게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몸매도 육감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다소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켜라! 비키지 않는다면 죽일 테다!" 사내가 전면에서 칼을 휘두르며 살벌하게 소리치고있었다. 이에 악우왕은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서 그 여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보시오. 그는 정말로 당신을 팔아 먹으려는 사람이오?" 여인은 크게 다급한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예요. 제발이지 그 자를 빨리 쫓아주세요. 사례는 나중에…… 나 중에 반드시 하겠어요!" 여인의 대답에서 어떤 확신을 얻게 되자 악우왕은 가볍게 웃었다. "사례는 무슨……" 이때 마침 앞쪽에서 그 사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칼을 들고 공격해 오 고 있었기 때문에 악우왕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죽어랏!" 사내의 칼을 다루는 솜씨는 의외로 상당히 민첩하고 정확한 것이었다. 허 나 아무래도 그것이 악우왕에게 통할 리는 없었다. 칼날이 악우왕의 뱃속 을 꿰뚫을려는 찰나, 어느새 칼의 손잡이는 악우왕의 솥뚜껑과도 같은 손 에 잡혀서 요지부동이고, 이어 악우왕의 다른 손에 의해서 사내의 멱살이 잡혀 간단하게 위로 올려지고 있었다. "이…… 이 죽일……" 사내는 여러번 발버둥을 쳤으나 금방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숨이 막히 는지 헉헉거렸다. 악우왕은 이것을 보고 별로 사내에 대한 악감이 없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훈례만을 하고 놓아주려고 했다. 아까 상강루의 주루에서 한 사람이 죽었 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다소 신중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놈들은 한번 혼을 내줘야 하지 않을까?) 악우왕은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차마 손을 쓰지 못하고 사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때는 이미 사내는 악우왕의 무서운 힘에 의해서 거의 녹초가 되어서 더 이상 대 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썩 꺼져라!" 악우왕의 우레 같은 음성에 사내는 낯빛이 새파랗게 변해서 전신을 가늘 게 떨었다. 하지만 의외로 사내는 마음이 굳건하여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대신 악우왕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체 너와 그녀는 무슨 관계이길래…… 혹시 그녀의 새서방이기라도 하 다는 말인가?" "……" 악우왕은 문득 할말이 없어졌다. 헌데 그때 뒤에서 느닷없이 그 여인이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바 로 그렇다. 그러니 너는 어서 꺼지는 것이 어떠냐? 혹시 여기에서 피곤죽 이 되고 싶지는 않겠지?" 그 말은 실로 의외였다. 악우왕은 사내가 의외로 심각한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여인의 음성을 듣고 얼굴이 붉어졌 다. 어쨌든 이 여인은 다급한 가운데 그런 말을 한 것 같으나 그녀는 엄연 히 성숙하고 몸이 잘 발달된 여인이요, 자신은 한창 피가 끓는 청년이 아 닌가! 이에 사내는 얼굴이 시뻘개지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몇 번 이를 갈면서 악우왕과 여인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더니 감히 더 이상 욕설을 퍼붓지는 못하고, 칼을 줏어들고는 달아나듯 뒤돌아 사라지고 말았다. 이 한편의 상황은 마치 촌극과도 같았다. 여인은 사내가 멀리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앞으로 나서서 악우왕과 백운 생 등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다. "여러분이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할 지……" 호덕승이 웃으며 나서서 말했다. "당신을 도와준 것은 바로 우리 둘째형일 뿐이니 우리에게 고마워할 필요 는없소. 우리 둘째형에게 사례를 하면 되지 않겠소?" 호덕승은 다소 짓궂은 마음도 들었으나 상대의 상황을 봐서 감히 농담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때 악우왕은 방금 전에 사내가 소리치고 갔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죽일 년놈들, 어디 두고보자!-- (빌어먹을, 놈이 다시 나를 찾을 것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그와 같은 작자는 설령 백 명이 찾아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 으므로 악우왕은 금방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는 여인에게 물었다. "대체 어디 사는 누구슈?" 헌데 여인은 갑자기 고개를 숙여 슬프게 흐느끼며 눈물젖은 음성으로 말 하는 것이었다. "저어, 긴한 얘기도 있고 하여 잠시 주루에 가서 대접이라도 했으면 하는 데 함께 가시면 안되겠어요?" 원래 여인의 눈물에 약한 사람이 악우왕이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까지 심 하게 매질을 당하던 여인이 눈물젖은 음성으로 음성으로 그렇게 묻자 악우 왕은 마치 어떤 유혹적인 말을 들은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려서 얼굴을 절 로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럽시다." 이에 여인은 즉시 한쪽을 향해 묵묵히 앞장서서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 다. 그것을 보고 잠시 묵묵히 서 있는 일행을 향해 악우왕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뭘해? 설마 우리가 그녀를 여기에서 버려두자는 말은 아니겠지? 안 그래요, 형님?" 백운생은 담담학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억울한 사람은 도와야지." 악우왕은 벌써 저만큼 앞장서 있는 여인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저, 그러니 모두 어서 갑시다." 일행은 악우왕의 뒤를 따라서 천천히 걸어갔다. 무림의 사내들이 강호에 나오게 되면 우선 들리는 곳이 바로 객점이 아니 면 주루일 것인데, 그 중에서도 주루는 마치 습관처럼 찾게 되는 모양이었 다. 주루. 여인이 일행을 데리고 간 곳은 바로 빈민가의 대로를 약간 벗어나 서 골목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취선루(醉仙樓)라는 작고 초라한 술집이 었다. 일행은 우선 여인이 어떻게 이런 술집을 알고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 했다. 헌데 여인은 안으로 들어서서 자리에 앉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이 말해서 일행의 의문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제가 간간이 마음이 괴로울 때면 찾아오곤 했던 곳이기 때문에 이곳은 저에게는 낯익은 곳이지요." 악우왕이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그럼 이 근방에 살고 있다는 말씀이오?" 여인은 문득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우선 음식을 시켜야 하겠지요? 그런 말씀은 차차 드리기로 할 테니 잠시 만 기다리십시오." 이어 주인을 향해 뭐라고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도 술과 약간의안주를 시키는 모양이었다. 이런 빈민가에서 여인의 몸으로 남에게 직접 술과 안주를 산다고 하는 것 은 상당한 성의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주인이 급하게 약간의 만두와 소고기 볶음, 그리고 죽엽청 몇 병 을 들고 오자 여인은 처연하게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들면서 입을 열기 시 작했다. "우선, 제가 변변치 못해서 이렇게 집안일로 여러분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어서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에 눈치빠른 호덕승이 놀라 물었다. "아니, 집안일이라니? 그럼 아까 그 사람이 댁의 남편이었다는 말씀입니 까?" 그 말에 여인이 오히려 다소 어리둥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계속-- #5400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23장 11/16 06:20 293 line 제23장. 무명소졸(無名小卒) "아니, 그럼 아직 모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문득 일행은 크게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이 되었다. 특히 혼자서 정의의 협객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우쭐거리던 악우왕은 더욱 놀라서 물었다. "정말 아 그 자식, 아니 그 양반이 댁의 남편이었다는 말이오?" 여인은 그 말에 처연하게 웃더니 대답했다. "그는 실로 남에게 욕을 먹어도 싼 사람이지요. 원래는 나를 아주 아껴주 고 사랑하던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의처증이 생기고 난 뒤에는 제가 잠시 어디로 다녀와도 그렇게 저를 두들겨 패곤 한답니다. 게다가 이번에 는 특히 더해서 여러분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아마도 그의 손에 맞아 죽었 을런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실로 여인의 말에 일행은 일시에 멍한 표정이 되었다. 하긴 도중에 계속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으나 설마 정말로 그 자가 여 인의 남편이었을 줄이야! 악우왕이 얼굴이 시뻘개지며 소리쳐 물었ㄷ. "아니, 그럼 아까는 왜 그렇게 말했었소? 댁의 남편이 아니라 당신을 팔 아먹으려고 한다고 하지 않았었소?"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실로 궁여지책 속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나 를 구해줄 것 같지가 않아서. 저는 또 여러분이 실은 우리의 사이를 알고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인은 악우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분께서 저의 남편을 어디 그냥 두셨겠습니까?" 악우왕은 크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난 단지 그 자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냥 놔주었을 뿐이오." 이에 여 인은 문득 고개를 숙이며 처연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은 저의 잘못이로군요. 일찍이 말하지 못하고 여러 분에게 폐를 끼친 점에 있어서 어떻게 사죄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 여인은 그만 목이 메이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것을 보고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호덕승이 나서서 말했다. "하여튼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생각해서 무엇하겠소? 그래, 이제 당신의 남편과의 일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여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이야 어떻게 되겠지요. 그는 항상 흥분이 가라앉으면 다시 저를 사 랑해 주곤 했었으니까요. 그보다 오늘 위기에서 저를 구해주신 여러분께 소첩은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과 동시에 아직 아무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손수 일 어나서 술병을 들고 모두의 술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소첩에게는 불행히도 가진 것은 없고 하여 이렇게 대협님들게 술 한 잔 을 대접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대신할까 합니다. 부디 적다고 생각지 말아 주세요." 여인의 성의는 놀랍다고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행은 굳이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술을 한 잔 비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데 미처 그들이 술잔을 마시기도 전에 갑자기 주루의 문이 세차게 벌컥 열리더니 한 사람의 꾀죄죄한 용모의 서생이 안으로 들어서며 요란한 소리 를 질렀다. "이봐, 주인, 여기에 술과 음식을 빨리 가져오도록 하시오. 그것도 아주 최고급으로 말이오. 본 공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을 테 니……" 주루와 같은 곳을 가게 되면 많은 사람들과 대면하게 되기 때문에 이런 서생 하나가 들어왔다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겠으나, 일행은 문득 서생에 게 시선을 집중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서생에게는 다소 특이한 구석들 이 있어서절로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낙방한 서생인지 그의 전 신에는 마치 거지처럼 더러울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마구 찢어진 의복이 걸쳐져 있었고, 게다가 얼굴이나 손 등이 지극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 다. 다만 한 가지 서생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은 그가 다 낡고 지저분한 부채 하나를 아직 여유있게 부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너무나도 궁때가 흘러서 여태 선비노릇을 하다가 그 생활이 말로에 놓인 사람의 본 보기인 것 같았다. 하지만 고집은 아직 꺾이지 않았는지 이런 주루에 들어 와서도여전히 자신의 입에 맞는 음식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악우왕이 첫술잔을 마악 들어서 마시려다가 문득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제 분수를 모르는 녀석이 다 있군." 헌데 이어 마악 술잔을 들이키려던 악우왕은 심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 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과히 유쾌하지 않은 상황인데, 그 서생이 안쪽 으로 들어오면서 더러운 부채를 히저으며 무수한 먼지를 이쪽의 음식과 술 잔 속으로 날려보냈기 때문이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녀석이……" 악우왕은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허나 다음 순간 그는 백운생에게 제 지당하고 말았다. "잠깐만 기다리게." 이어 백운생은 몸을 일으켜서 정중하게 그 서생을 향해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와 함께 합석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에 왠지 그 서생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리며 소리쳤다. "쯧쯧 더럽다! 그렇게 더러운 행실을 하고 있다면 누가 가까이하려고 하 겠소? 나는 혼자서 마시겠소! 나는 혼자서 마시겠소!" 서생은 연거푸 소리쳤다. 악우왕 등은 서생이 자신들이 여인과 함께 앉아서 술을 마시는 것을 비꼬 아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제 앞가림도 모하는 주제에 감히 남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하 고 지랄이야!" 허나 백운생이 나서서 말리고 있는 바람에 감히 서생에게 발작할 수가 없었다. 서생은 그들과 좀더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주인에게 음식을 시키 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여인이 다시 일행에게 술을 권했다. "왜들 마시지를 않죠? 저의 이 성의가 부족한가요?" 악우왕이 부아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당신의 성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어떤 분수를 모르는 녀석이 있어서 술맛이 나지 않으니까 그렇지. 니미랄!" 여인은 악우왕의 욕설에 다소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말했 다. "그럼 제가 다시 한잔씩 따라드릴까요?" 이에 좌선비가 먼저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괜찮소." 그 말과 동시에 무구를 제외한 네 사람은 거의 동시에 술잔을 비웠다. 이때 저쪽에서는 그 서생과 주인간에 사소한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인이 가지고 온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서생이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주인장! 이게 대체 국수라는 것이오? 밀가루를 그냥 물 속에 집어 넣고 끓인다고 해도 이처럼 지저분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 대체 이 돼 지고기는 누가 먹으라고 가져온 것이오? 틀림없이 파리가 수백 마리는 똥 을 싸놓았을 것이오. 대체 이것들을 사람이 먹으라고 가져온 것이란 말이 오?" 주인이 듣고 있다가 와락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런 염병할 자식이…… 그렇게 먹기 싫다면 그냥 나가면 될 일이 아니 냐?" 그러나 서생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뭐라구? 감히…… 감히 손님인 나에게 이렇게 무례하다는 것은 실로……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자고로 손님은 왕이라고 했는데,백성인 주제 에 왕에게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서생은 말과 함께 탁자 위의 음식들을 향해 부채를 휘휘 내저었다. 그러 자 부채에 묻어 있던 무수한 먼지들이 즉시 우수수 그릇 안에 떨어지는 것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생의 지저분한 행색과 태도에 분격하고 있었던 주인은 이것을 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 죽일 놈이!" 버럭 소리침과 동시에 다소 왜소하게 보이는 서생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 대로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죽고 싶으냐?" 헌데 그때였다. 서생이 마악 입을 열어 말하려는 순간에 먼저 다른 소리 가 문의 입구에서 터져나왔다. 쾅! 그리고 먼지가 수북하게 이는 가운데 험상궂게 생긴 대한들이 무수하게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어떤 놈이냐?" 문짝이 졸지에 엉망으로 부서져 나갔음을 보고 주인이 서생을 내려놓고 크게 놀라서 소리치며 달려갔다. 허나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워낙 험상 궂은 인상인 것을 보고는 절로 안색이 변해서 슬금슬금 주위로 피하는 기 색이었다. 헌데 안으로 들어온 대한들 가운데 맨 앞에 서 있던 흉악하게 생긴 대한 이 소리치며 주인을 불렀다. "이봐, 너 이리 좀 와봐!" "……" 주인은 잠시 흠칫하는 기색이다가 천천히 그 대한에게 다가갔다. "저 말씀이신가요?" 대한은 사납게 대꾸했다. "빌어먹을 자식아, 거기에 너밖에 더 있느냐?" 주인은 이에 아주 저자세가 되어 매우 비굴한 표정으로 다가들었다. "아이구, 살려주십시오. 소인이 뭔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고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대한은 그 말에 얼굴을 흉흉하게 일그러뜨렸다. "정말이냐?" 주인은 즉시 고개를 굽신거렸다. "무, 물론입죠." 헌데 그때였다. "악……" 한 차례의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멀쩡히 서 있던 주인의 몸뚱이가 그대 로 바닥에 털썩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순간적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붉은 핏줄기. 이것은 실로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시선을 주인의 시신에 던졌으나 이내 뭔가 기이한 것을 느꼈다. 머리! 주인의 시신에는 머리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던 것이 었다. 그 대신 머리는 지금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헌데 사람들의 시선이 그 머 리에 닿아 있는 순간에 실로 경이적인 일이 벌어졌다. 대한의 우수가 허리 춤에서 가볍게 번쩍이는 순간에 허공에 흡사 환상과도 같은 검광(劍光)이 한 차례 번뜩이더니 무엇인가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것은 머리였다. 퍽…… 대한의 그 검법은 실로 놀랍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보기 드문 잔인(殘忍)한 장면이었다. 대한의 검광이 작렬한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주인의 머리는 그대로 수십 개의 조각이 되어서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악!"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무구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나올 정도였다. 대체 이들은 무슨 원한이 있길래 갑자기 나타나서 이러한 잔인한 행동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헌데 일행은 무심코 대한들의 얼굴을 살피다가 문득 한 사람을 보고는 가 볍게 안색이 변했다. 사내. 조금 전에 대로상에서 헤어졌던 여인의 남편인 그 사내가 바로 대한 들의 뒤에 서서 안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이 자들은 그 사내가 불러온 자들이라는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곧 이어 그 사내가 앞쪽으로 멈칫멈칫 나오더니 그 대한을 향해 앞쪽을 가리 키며 말했다. "어, 어르신! 바로 저 계집과 저들이 소인이 말했던 그 년놈들입니다요. 부디, 모두 한꺼번에 죽여 주십시오!" 일행에게는 실로 어이가 없는 광경이었다. 그들은 그저 무심코 부부 싸움 에 말려들었다가 이런 심한 꼴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옥수성심 심낭자 (玉手聖心 心娘子)의 처소를 아직 한번도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이러한 지 저분한 일에 걸려든 것은 가히 재수가 없다고 할 만했다. 이 얼마나 어처 구니가 없는 상황인가! 백운생 등의 일행은 그 사내가 나서는 바람에 일시 대꾸할 말을 잃고서 멍하니 그저 자리를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저들이 ㄴ서서 공격해 온다면 그저 맞상대해 줄 뿐ㄴ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때 그 여인이 새파래진 안색으로 앞으로 나서며 그 사내를 향해 말했다. "아니, 당신은 또 왜 그러죠? 그리고 저 사람들은 뭐예요?" 사내는 얼굴 에 원독의 빛을 떠올렸다. "이 개같은 년아! 내가 너의 새서방들을 그냥 둘 줄 알았느냐?" 아뿔싸! 그렇다면 저 사내는 아까 여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던 모양이었다. 여인은 극히 당황해서 즉시 변명을 했다. "아니예요. 아까는 내가 그저 도망가려고 거짓말을 했었던 것이예요. 실 은 저들과 나는 아직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웃기지 말앗! 그렇ㄱ 처음 본다는 사람들이 이런 술집에 들어와서 함께 정답게 술을 마신다는 말이냐?" 여인은 빨개진 얼굴로 대꾸했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도와줬기 때문에 답례하기 위해서……" 사내는 흉악 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네년은 저들과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 야 저들을 이렇게나 변호할 필요가 없잖아? 저들이 죽든 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여인은 울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이 죽일 년이!" 사내는 즉시 앞으로 달려들어서 여인의 손을 나꿔챘다. 그리고 바깥으로 끌고 나가며 소리쳤다. "네년은 분명히 아까 네 입으로 저들이 새서방이라고 말을 했었다. 그런 데도 이제 와서 발뺌을 하려는 것이냐? 네년이 저들을 그렇게 두둔하는 것 으로 보아도 그건 틀림이 없어! 어르신들, 어서 저 개자식들을 모두 작살 을 내주십시오." 사내는 그 말을 남기고 주루의 밖으로 멀어져 가 버렸다. 자연 실내에는 어색하게도 백운생의 일행과 열 명 정도의 대한들이 남았 다. 일행은 자신들이 사내의 의처증과 질투에 의해 희생물이 되었다는 사 실에 어처구니가 없었고 눈살이 극도로 찌푸러졌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백운생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천천 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의 그 우두머리 대한을 향해 말했다. "사실 우리는 그 여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오. 그러니 공연 히 오해를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소?" 그 말에 대한이 흉악하게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목숨을 살려달라는 말로 들리는군. 그러나 본좌는 한번 검을 뽑게 되면 다시 쉽게 거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백운생은 상대가 쉽게 뜻을 바꾸지 않을 것을 알고 고개를 돌려 주인의 시신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보아하니 당신은 무명소졸(無名小卒)은 아닌 것 같은데 존성대명을 말해 줄 수가 있겠소?" 대한은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사악하게 웃었다. 헌데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느닷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무림의 십귀(十鬼) 가운데의 하나에 불과한 검귀(劍鬼) 정도가 뭐가 대 단하다고 존성대명이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을까? 너무 과한 말이 아닐까? 암, 과하구 말구." 이에 장내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함께 크게 놀랐다. 다름이 아니라 한쪽에 앉아서 투정을 부리다가 주인에게 형편없이 당할 뻔했던 그 서생이 방금 전에 입을 연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혹시 저 서생이 돌아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 생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저마다 서생의 정체를 궁금하게 생각했다. 무림의 일에 이렇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평범한 서생 일 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 대한은 낯빛이 크게 변하여 서생을 향해 흉악한 안광을 발하며 소리쳤다. "넌 대체 누구냐?" 이에 서생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당신은 그야말로 사마외도의 표본이라고 말할 수가 있지. 게다가 아주 질이 낮은. 그런 사람이 감히 본인의 이름을 들을 수가 있을까? 암, 어림 없는 일이지." 그 말에 대한 즉 검귀의 안색이 흡사 똥 씹은 얼굴처럼 변 하고 그와 동시에 그의 뒤쪽에서 마치 바람처럼 달려나가는 대한이 하나 있었다. 그 대한은 곧장 서생에게 덮쳐들려는 모양이었다. 허나 서생의 앞에 도달하기 전에 그는 한 사람에게 앞이 가로막혔다. 바 로 백운생이었다. 상대인 대한은 자신이 미처 느끼지도 못했는데 백운생이 흡사 바닥에서 솟아나듯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것을 보고 신형을 급히 멈춤과 동시에 크 게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앗, 너는……" 백운생은 여유있게 웃으며 물었다. "왜, 내가 이러는 것이 이상하오?" "……" 상대인 대한은 잠시 머뭇거릴 뿐 쉽게 대꾸하지 못했다. 이것을 보고 문득 뒤쪽에서 그 서생이 다시 말했다. "허어, 난 그리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악우왕 등은 이 소리를 듣고 내심 욕을 해댔다. (빌어먹을! 제 처지도 모르고 기껏 도와주니까 말이 많구나!) 허나 백운 생은 반대로 웃으며 서생에게 말했다. "허나 이것은 그대에게 답례를 하는 것이니 도움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오? 당신이 술과 음식 속에 들어 있던 독을 제거해 주지 않았었 다면 우리는 다소 불편했을 것이 아니겠소?" "아니 뭐라구?" 악우왕 등은 백운생의 말에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여기에 누가 독을 타 놓았었단 말인가?" 그렇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기실 아까 여인이 주문을 했던 음식에 군자산 (君子散)이라는 맹독이 뿌려져 있었는데 느닷없이 서생이 실수를 하는 척 해독을 시켜 놓았던 것이었다. 백운생은 원래 아미파에서 많은 서적들을 탐독하는 가운데에서 용화선공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용독술과 해독술 등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그러한 방면에는 박식했다. 군자산! 이것은 아주 치명적인 것으로, 무색무미무취하여 처음에 복용했 을 때에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그 사람이 공력을 일으키게 되면 갑자기 무서운 맹독성을 발휘하게 되는 일종의 산공독(散功毒)과 같 았다. 하지만 산공독과 다른 점은 이 군자산은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독 이 있는지 발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한번 당하고 나면 공력이 없어지 는 것이 아니라 목숨이 없어지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군자산에 한번 당하 고 나면 그 독성이 지극히 빠르게 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사람을 구하 기는 어렵게 된다. 그런데 대체 그것을 미리 알고 와서 해독해 주었던 서생의 정체는 무엇일 까? 서생은 백운생이 미리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실에 다소 놀라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알겠소, 알겠어. 그까짓것 신세를 갚으면 될 일이 아니오?" 대체 누가 신체를 갚는 입장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악우왕 등 일행은 원래는 서생을 어리석게 생각하고 있었다가 이와 같은 현실을 파악하고는 저마다 크게 어리둥절해지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갑자의 공력을 가지고 크게 마음을 놓고 있었던 그들이었는데, 역시 강호에는 인재가 많다는 것을 알고 다소 경각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 만 지금은 좋지 않은 상황인지라 미처 그에게감사할 시간이 없는 것이 사 실이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의문은 주인이 어째서 그 음식들에 독을 탔었는가 하 는 점이었다. "난 우연히 주인이 독을 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니 부담 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오." 서생은 술에 취한 듯이 혼자 주절거리고 있었다. 실로 이 서생은 신비로 운 이인(異人)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5401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24장 11/16 06:21 259 line 제24장. 이대도(李代桃) 백운생은 그 검귀를 향해 말했다. "자,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들은 이만 물러들 가는 것이 어떻겠 소?" "흐흐흐……" 검귀는 음침하게 웃다가 소리쳤다. "우리가 무슨 독을 썼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천만에 너 희들을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말과 동시에 검귀는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백운생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역시 처음에 보여주었던 그 한수는 막연히 시위적인 것이 아니었다. 검귀 의 무공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대단했다. 놀라운 것은 아까 그 사내가 어떻게 이와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가 하 는 점이었다. 헌데 검귀가 미처 백운생의 앞에 이르기도 전에 그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 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로 좌선비였다. 좌선비의 신형은 빠르게 거의 무 릎을 굽히지도 않고 이동했기 때문에 검귀의 시선을 끌었고, 그를 다소 놀 라게 만들었다. "너는 누구냐?" 이에 옆에서 백운생이 대신 대답했다. "그는 무림에 이제 갓 출도했지만 당신을 상대할 만하오." 그 말에 검귀 는 좌선비의 허리춤에 한 자루의 장검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입가에 얼핏 가벼운 비웃음을 담았다. "그럼 애송이로구만!" 애송이. 그 말은 물론 아직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을 비하시키는 말이었 다. 원래 무림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실력은 삼푼이고, 경험은 칠푼이다.-- 즉, 강호에서는 무공보다도 오히려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애송이라 는 표현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좌선비 등은 어렸을 때부터 음으로 양으로 제법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고작 일갑자 공력의 일류급 무공 시절의 일어었지, 지금과 같은 사갑자에 달하는 최절정 공력을 지닌 경험 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공력은 비록 최절정의 경지이지만 경험 은 아직 일류의 수준에 불과하다고나 할까? 아니, 오히려 더욱 미숙한 상 태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백운새이 지금 믿고 있는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정정당당한 비무의 대결과는 달리 이러한 결투에는 실로 무수한 의외의 요소가 등장하 기 때문에 그것이 또한 승부에 영향을 줄 수가 있었고, 또한 그것이 목숨 과 직결되는 것이므로 쉽게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 좌선비의 표정이다소 경직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가 긴장하고 있음 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백운생이 다시 말했다. "당신도 생각이 있다면 알겠지만, 이 일은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오. 그러니 당신들은 공연히 일을 확대시킬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그만두 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 가 굳이 싸워봐야 무슨 소득이 있겠소?" 그 말에 검귀는 차갑게 대꾸했다. "물론 너의 말대로 우리에게 어떤 소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일을 회피할 경우에는 더욱 많은 손실을 가져오게 되어 있지." 명예! 백운생도 그저들은 얘기지만 이런 흑도(黑道)의 무림인들은 의외 에도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동료간의 의리를 내세우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겉과 속이 같다면 그들을 굳이 흑도라고 분류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지금과 같이 이들은 일단 자신들이 약속을 한 일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에 같은 무리들에게서 들을 조소와 질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흑도무림에서도 어떤 명분을 잃는다는 것은 실로 막대한 피해라고 할 수 가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목숨을 바꿀 만큼 중요한 것일까? 표리가 같은 의리라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겉치레에 불과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목숨마저 건다는 것은 어쩐지 무모한 것이 아닐까? 허나 지금에 이르러 도저히 이들을 설득시킬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백운 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하나의 인과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강호에서 살던 사람이 다시 강호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과 관계 가 종횡으로 얽혀서 그것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도 되는 것이었다. 백운생은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오?" 검귀는 이빨을 드러내며 살벌하게 웃었다. "살(殺!) 죽음뿐이다!" "……" 백운생은 다소 어이가 없어져서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좌선비에게 물었 다. "선비, 괜찮겠어?" 이에 좌선비는 백운생의 말에 대답을 하기 위해 잠시 한눈을 팔았다. 헌 데 바로 그 순간이 검귀가 노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좌선비가 순간적으로 다시 전면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에는 이미 검귀의 허리춤에서 장검이 무서 운 속도로 덮쳐들고 있었다. 슉! 마치 어둠 속을 스치는 한 줄기의 섬광(閃光)이라고나 할까? 그 빠름은 가히 경악스러웠다. 검귀의 진실한 무예는 아까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 같 았다. 일반적으로 강호에서 말하기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펼쳐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칠푼은 내보이되 나머지 삼푼은 숨긴다!-- 그것은 바로 느닷없는 위기를 맞이했을 때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했다. 즉, 항 상 자신의 진실한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남에게 목숨을 잃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인 것이었다. 좌선비는 일시 무의식중에 눈을 크게 떴다. 한 줄기의 섬광처럼 자신의 숨통을 노리고 파고드는 그 정확함과 지독한 쾌검(快劍)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앗!"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악우왕 등조차 이를 보고 크게 놀라 경악성을 터뜨 렸을 정도였다. 허나 세상의 일은 쉽게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비록 경험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이 좌선비는 크게 영명한 인재여서 한 순간에 벌써 자신의 활로를 개 척해 놓고 있었다. 놀랍게도 좌선비가 백운생을 향해 한눈을 팔 때에도 이 러한 순간을 미리 예측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면 믿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거의 한 순간에 목이 꿰뚫릴 것 같던 좌선비 의 신형이 검끝이 거의 닿으려는 순간에 간발의 차이로 환영(幻影)처럼 움 직였다. 그 빠름은 놀랍게도 쾌검보다도 빨랐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빨 라서 눈에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바로 부동신보(不動神步)! 동심각의 팔대신공 중의 하나가 절묘하게 발휘 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부동신보의 특징은 워낙에 빠르게 환상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 들의 눈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극 상승의 보법의 정수인 것이었다. 다만 그것을 배운 지가 불과 며칠 되지 않아서 좌선비는 그 위력의 백분 지일도 미처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좌선비가 부동신보로써 검귀의 쾌검을 피하는 광경은 마치 환상과 도 같았고, 다음 순간 어느새 좌선비의 신형은 오히려 검귀의 면전으로 파 고들고 있었다. 실로 이것이 좌선비가 노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원래 검귀는 일단 쾌검을 펼치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찌르는 검법으로, 그것을 회수하거나 다르 게 변화시키는 데에는 다소의 시간이 걸리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순간적 으로 앞으로 파고든 좌선비의 공격에는 자연 일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말이 일시적이지 실전에 있어서는 그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분 간하는 치명적인 허점이 되는 것이었다. 좌선비의 순발력은 어렸을 때부터 싸움을 하면서 자라온 그답게 눈부시기 이를 데 없었다. 한 순간의 기회를 놓칠세라, 앞으로 파고든 순간 이미 그 의 우수가 빠르게 움직였고 그 다음 순간에 그의 허리에 걸려 있던 차가운 검날이 검귀의 가슴 속을 향해 파고들고있었다. 순간 검귀의 얼굴에 급격한 경악의 빛이 떠오르는가 싶었다. 이미 좌선비 의 공격은 예리하고 빈틈이 없어서 검귀의 무공이 제아무리 높다고 해도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만일 정식적인 비무의 장면이었다면 이 정도에서 심판의 손이 올라가고 좌선비의 승리가 확정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결단코 이것은 어떤 비무가 아니었다. 생사를 결정짓는 살벌한 결투인 것이었다. 자신의 심장을 고스란히 내줄 수가 없다고 느낀 검귀는 일순 최대한의 순 발력을 이용하여 허리를 우측으로 틀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절명의 순간 에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좌선비의 검 끝에 서려 있는 가공할 검기(劍氣)의 영향으로 검귀의 검을 들고 있는 우수가 그대로 어깨 바로 아래에서 매끈하게 떨어져 나갔다. 삭!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경악성과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 었다. 원래 공정한 시합이었다면 비무는 팔이 떨어지기 전에 벌써 멈추어졌었을 것이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팔이, 그것도 오른팔이 잘려나간다고 하는 것 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쭈악! 팔이 잘려나간 곳에서는 금새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 했다. 헌데 그때였다. 당연히 비명을 지르고 흑빛이 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검귀의 얼굴이 바로 그 순간에 아주 득의의 빛으로 바뀌는 것이 아 닌가! 좌선비는 순간 의아해했으나 다음 순간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비 무가 아니라고. 바로 검귀의 오른쪽 어깨가 뒤로 밀려나가는 순간 반대로 그의 왼쪽 어깨 는 앞쪽으로 불쑥 뻗어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좌수의 끝에 들려 있는 한 자루의 차가운 빛을 뿜어내는 비수!그렇다. 실로 놀랍게도 이 검귀는 이 미 이러한 상황까지도 내다보고 공격에 임했었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경험자와 미숙자의 차이인 것이었다. 경험자는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서너 단계나 내다보고 일을 추진한다. 그러나 미숙자는 제아무리 총명하다고 해도 한두 단계밖에는 내다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바로 거기 에서 승부는 결정짓게 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미숙자의 무예가 고강하다 고 해도 그는 반드시 경험자에게 지게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강호에서의 능력은 무예가 삼푼이고 경험이 칠푼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대도강(李代桃 )이라고나 할까? 내 살을 주고 상대의 뼈를 깎는다! 경 험자는 비록 먼저 상대에게 살을 베이는 고통을 당하지만 그 순간에 상대 의 방심을 틈타서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살을 베이는 것은 목숨에는 관계 가 없다. 그러나 한번 허를 찔리게 되면 하수에게도 그거은 목숨과 연관되 게 되어 있는 것이고, 한번 목숨을 잃으면 그것은 영원한 패배라고 할 수 가 있는 것이었다. 한번 죽은 목숨은 되돌릴 수가 없는 일이니까. 좌선비는 순간 전신에서 식은땀이 솟아나고 등골이 오싹하는 공포를 느꼈 다. 상대인 검귀가 득의의 흉소를 흘리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있을 것 같 았다. 지금 좌선비는 긴장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다시 부동신보를 펼쳐서 검귀 의 회심의 일격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놀랍게도 검귀의 비수를 들 고 있는 좌수의 속도는 아까의 쾌검보다도 최소한 두세 배는 빠른 것 같았 다. 실로 이 검귀는 비단 크게 교활할 뿐만 아니라 그 무공 역시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까 아까 먼저 좌선비를 공격했 던 쾌검은 단순한 허초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허초에 일부러 속아 넘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초와 비슷한 허초일 때에는 상대는 그 허초에 넘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미 상대의 우수를 자르고 앞으로 뻗어나간 자신의 장검을 돌이키기는 늦었다. (……!) 더 이상 생각할 시간도 없이 좌선비는 자신의 심장 어림이 마치 불로 지 져지는 듯이 화끈하게 고통으로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윽……" 좌선비의 입 속에서 절로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의 신형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고개가 앞으로 숙여졌다. 그러나 정 작 쓰러지지는 않았다. 검귀와 좌선비, 이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마치 석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오라버니!" "넷째!" 무구와 악우왕 등이 안타깝게 부르짖는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아직 두 사람이 떨어지지 않았고, 좌선비도 아직 쓰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어서 감히 다가가서 손을 쓰지 못했다. 툭! 붉은 핏방울이 바닥에 먼저 떨어졌다. 아무래도 승패는 이미 결정이 난 것 같았다. 헌데 이때의 일이었다. 흉악하게 웃고 있던 검귀의 얼굴이 왠지 점차로 경악과 불신의 표정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실로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검귀는 잠시 후에 서서히 뒤로 신형을 움직여서 물러났다. 좌선비의 신형 은 아가와 그대로였고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좌아우!" 호덕승이 달려가서 좌선비의 몸을 부축했다. 그것을 보자 검귀는 뒤로 물러나더니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돌아가자!" 이것은 실로 장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혀 의외의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검귀는 비록 오른팔이 절단되기는 했지만 오히려 좌수의 공 격이 더욱 예리하여 그가 승리한 것이지, 당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런데 어째서 그는 갑자기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러가려고 하는 것일 까? 허나 일단 그가 그런 명령을 내린 이상은 지체될 이유가 없었다. 먼저 검 귀가 신형을 날려 사라져 버리자, 뒤어어 다른 사람들도 다급히 떠나버리 기 시작했다. 일행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며 차마 그냥 두고볼 수가 없어서 쫓아갈 것인가 하고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백운생이 전혀 쫓아갈 생각이 없는 것 을 보고 참아 두지 않을 수가없었다. 안, 지금으로서는 좌선비의 상처에 대한 치료가 시급했다. 무구가 좌선비의 곁으로 다가와서 걱정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좌오라버니는 괜찮나요?" "……" 호덕승은 묵묵했다. 그것을 보고 무구는 좌선비의 가슴 부위를 살피다가 일순 크게 흠칫하여 안색이 변했다. 비수! 그것은 바로 좌선비의 심장 부위에 아주 정확하게 꽂혀 있었던 것 이었다. 단지 피가 거의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 기이하기는 해도, 좌선비의 상처가 절망적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악!) 일순 무구의 두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솟아나왔다. 그들이 무예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렇게 험한 상황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헌데 이상한 일이 느닷없이 벌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좌선비가 갑자 기 고개를 돌려 백운생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형님이 그러셨소?" 악우왕까지 좌선비의 느닷없는 태도를 보고 크게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원래 지금과 같은 상처를 당했다면 거의 죽어가야 할 것인데도 좌선비의 눈빛이나 태도는 거의 멀쩡한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었다.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하고 있었다. "끼어들어서 미안하네." 순간 좌선비의 두 눈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는 울면 서 말했다. "나는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였소. 형님이 아니었다면…… 형님이 없었 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몸이었소." 말과 동시에 좌선비는 우수로 자신의 가슴에 박혀 있는 비수를 잡아 뽑았 다. 악우왕 등이 놀라서 막으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그 비수는 좌선비의 손에 뽑혀서 들려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자욱하게 뻗어나올 것 같았던 피 는 좌선비의 가슴에서 솟구치지 않았다. 다만 그저 몇 가닥의 핏물이 배어 나오는 정도였다. 이것을 보고 게다가 다시 좌선비의 손에 들려 있는 피묻은 비수의 날을 보고는 악우왕 등은 일순 불신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 비수! 비수의 날은 기이하게도 거의 기역자로 휘어져 있었던 것 이다. 말하자면 비수는 정확히 심장 부위에 꽂혔었지만 심장을 관통하지 못하고 피부 부위에서 기역자로 휘어져서 엉뚱한 곳에 상처를 입히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대체 검귀가 일부러 그러지 않은 이상은 이게 대체 가능 하기나 한 일일까? 일행은 일순 좌선비의 말과 행동, 그리고 백운생의 담담히 웃는 듯한 표 정을 보고는 모든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바로 백운생이 불가사의한 힘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그 비수의 날을 휘어지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이 게 대체 가능이나 한 일일까? 악우왕이 기쁨과 놀람이 뒤섞여서 소리쳐 물 었다. "형님, 이게 대체 정말로 형님의 작품이란 말이오?" --계속-- #5402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25장 11/17 04:17 299 line 제25장. 기인이사(奇人異士) 검귀가 별안간 놀라서 달아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워낙 상황이 좋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내가 손을 썼소." 일행은 백운생의 입에서 그와 같은 확실한 말을 듣게 되자 더욱 놀람과 기쁨을 느꼈다. 기 실 그들은 여태 백운생의 무예가 놀랍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 지만 그게 대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잘 되지 않고 있었다. 실로 이번에 야 비로소 어느 정도 백운생의 능력에 대한 추측이 가능해졌다고 말할 수 가 있었다. 즉, 추측이 불가능할 경지라는 것이다. 무구가 기뻐서 웃으며 말했다. "헌데 대체 어떻게 그런 무공을 펼칠 수가 있는 거죠?"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격체전공(隔體傳功)과도 같은 것인데, 무공이 고강 한 사람은 자신의 몸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일시적으로 금강불괴화시 킬 수가 있다는 것이오." "……" 무구는 말로는 이해가 갈 듯하면서도 쉽게 요득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다 소 갸웃거렸다. 이때 그들의 뒤쪽에서 예의 그 서생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서 앞쪽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고 백운생이 얼른 그에게 몸을 돌려서 입을 열 었다. "잠깐! 형장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우리가 은혜를 입었는데 그냥 헤어져서야 되겠소?" 그 말에 서생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백운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존성대명이라…… 당신은 아무에게나 그런 말을 하는 버릇이 있구려. 게 다가 알고보니 내가 아니었어도 당신들은 독에 당하지 않았었을 것인데, 무슨 은혜 운운하는 것이오? 도리어 귀찮은 존재였었겠지." 백운생은 이 서생의 입심이 워낙 강하여 함께 입씨름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 통성명이나 하고 술이라도 한잔 할 수가 있다면 서 로 좋지 않겠소?" 서생은 고개를 휘휘 내젓더니 불쑥 물었다. "형장은 바쁘지 않으시오?" (……?) 백운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실은 중요한 일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게 쉽게 알 수가 있는 일이 아 니어서……" 서생은 순간 심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사람이 업은 아일ㄹ 십년 동안 찾는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 꼴 이로군." 백운생은 그가 갑자기 화를 내자 다소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서생은 자기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얼굴을 보시오. 상통천문(上通天文), 하달지리(下達地理)! 그야말로 박식한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오. 그 런 나를 두고 어디 가서 의문을 풀겠다는 것이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백운생의 신비로운 능력으로 인해 기쁨과 놀라움을 느끼고 있던 일행은 서생의 이러한 안하무인겪인 말을 듣고는 다소 어이가 없어졌다. 백운생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떤 것을 묻더라도……" 서생은 금방 말을 자르게 대꾸했다.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지." (다소 특이한 재능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허풍이 심해서 정 말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이구나!) 일행은 하나같이 서생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이거 초면에 실례가 되겠지만 그럼 주저없이 질문해 보겠소. 실은 우리 는 이곳에 와서 한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는 옥수성심이라고 하오." "옥수성신?" 일순 되묻는 서생의 두 눈이 기이하게 번쩍이는 것 같았다. 허너그것이 워낙 빠른 순간에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을 눈치채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백운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소만, 혹시 아시는 바라도 있소?" 서생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물론, 그렇지 않다면 내가 감히 무불통지라고 자처하겠는가?" 이에 여태 까지는 설마하며 서생을 어이없게 생각하던 일행은 다소 괴이쩍은 기분이 되었다. 서생이 직접 아는 바가 없다면 저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실로 일행에게는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백운생이 즉시 물었다. "그럼 그 옥수성심은 어디에 있소?" 서생은 잠시 백운생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가 어디에 있다면 당신은 그를 잡을 수가 있겠소?" (……?) 백운생은 되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서생은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이거야 어리석기는! 만일 지금 옥수성심이 한창 신법을 펼쳐서 달리고 있는 것이라면 내가 그곳을 말해줄 때 당신을 그를 잡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오. 이런 간단한 이치조차 물어서야 원……" 서생은 말끝에 혀를 심하게 찼다. 이에 백운생은 절로 얼굴이 붉어지게 되었다. 원래 그는 머리가 대단히 우수하여 여태까지 남에게 우둔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서 생을 만나서 그런 핀잔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대와 함께 말다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다소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어 다 시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그를 만날 수가 있겠소?" 서생은 손뼉을 쳤 다. "맞아! 바로 처음부터 그랬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 서생은 다시 백운생을 향해 기이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기분이 나쁘시오? 이 질문이 끄나고 나면 아예 나를 통째로 잡아잡수 려는 심산이겠지?"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이래뵈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니 염려마시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 서생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문득 백운생을 향해 우수를 내밀었다. 비록 때 에 찌들고 더럽기는 해도 상당히 작고 예쁜 손이었다. "그럼 어서 내놔봐요!" "……?" 백운생이 어리둥절해 하자 서생은 다시 차갑게 말했다. "아까 내가 해독을 해주었던 일은 그렇다고 하고, 지금의 일은 순전히 고 생할 것을 내가 쉽게 알려주는 것인데 어떤 보답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 가?" 백운생은 원래는 이 서생의 내민 손이 아주 작고 예뻐서 기이하게 생 각하고 있다가 서생의 말을 듣고는 그 생각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옆에서 무구가 말했다. "그야 당연히 당신이 먼저 말한 다음에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닌가 요?" 서생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어디 험한 세상에 누구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더군다나 일 대 일의 싸움에서 은근히 암수(暗手)를 써서 자기편을 도와주는 것과 같은 짓 을 하는 사람은 도시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이것은 바로 백운생이 좌선비 를 도와서 검귀를 물리친 일을 은근히 비꼬는 말임에 분명한 일이었다. 비 록 그것이 다소 정당했다고 할지라도 백운생의 얼굴은 자연 붉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고 악우왕이 소리쳤다. "이것 봐, 그렇다면 그 작자는 암수를 쓰지 않았다는 말이냐?" 서생은 차 갑게 코웃음을 쳤다. "강호상에서 암수라는 것은 당연히 발생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이 미숙 하여 남에게 당하고서 뭐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어리석은 것이지 누굴 탓 하겠어? 그런 사람은 애송이라는 말을 들어도 싸지만 그렇다고 옆에서 누 굴 도와준다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겠어?" 이것은 기실 좌선비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좌선비는 자신의 경험이 미숙하여 백 운생의 도움을 받았던 일을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ㄷ. 그런데 서생 의 말을 듣고 나자 얼굴색이 붉어지며 소리쳤다. "난 이제부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겠어! 만일 그런다면…… 그때는 난…… 자살하고 말겠어!" 아까의 검귀의 비수는 예리했지만 지금의 이 서 생의 말은 더욱 뼈아프게 좌선비의 가슴을 찌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서생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아까는 가만히 있다가 내가 뭐라고 하니 대번에 흥분이 되어서 날뛰 는 꼴이라니! 대체 무예의 상승경지가 무심(無心)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 저러다간 다음에는 틀림없이 흥분해서 그 작자에게 당하 고 말 것이니 원조자가 항상 따라다니지 않는다면 오래 살기가 힘들걸!" "……" 이에 좌선비는 대꾸를 하지 못하고 안색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실로 무 예를 익혀서 앞으로 승승장구할 것으로 생각했던 좌선비가 오늘 검귀를 만 나서 심하게 당하고 나서 이번에는 그보다 더욱 무참하게 당하는 형국이었 다. 호덕승이 이것을 보다 못해서 나서서 입을 열었다. "보자하니 너무 하는군. 그래, 그러는 당신은 그렇게 항상 매사가 완벽하 고 용의주도하다는 말이오?" 서생은 역시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꼴뚜기가 뛰면 망둥이도 뛰고 다시 그 옆의 송사리도 뛴다고 하더니 역 시 그쪽이군. 하나하나 나서더니 이제는 한꺼번에 나를 상대하려고 드는걸 그래! 좋아, 좋아. 그래 나는 당신네들보다 항상 완벽하다고 말할 수가 있 지. 당신들은 나의 어디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가 있나?" 이에 호 덕승은 절로 얼굴이 붉어지고 어이가 없어졌다. 설마 서생이 자신을 송사 리에 비유할 줄은 몰랐다. 따라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잠시 생각한 후에 대꾸했다. "당신은 비록 지금 허점이 드러나지 않지만 앞으로 우리와 좀더 지내게 되면 반드시 허점이 드러날 것이오. 그렇게 허점이 드러날까봐 서둘러서 떠나려고 하고 자신을 숨기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다고만 말할 수 가 있을까? 그 사람은 모든 강호인들에게 있어서 격리될 것이 분명하오." 서생은 역시 싸늘하게 코웃음일 칠 뿐이었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들 하더니 역시 자신의 일을 나 에게 말하고 있군 그래! 바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 이 아니오? 당신이야말로 항상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남에게 쉽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성격일 것인데?" "……" 호덕승은 이에 묵묵해졌다. 그는 이 서생의 입심이 워낙 대단해서 말싸움 으로는 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만 입을 다문 것이다. 대신 이때 은근히 노화를 끓이고 있었던 악우왕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서 생에게 달려들었다. "네가 그렇게 허점이 없다고 한다면 이 주먹을 받아보아라! 네가 실력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으 ㄹ피할 수가 있을 것이다!" 워낙에 악우왕이 참고 있다가 폭발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에 백운생도 미처 그를 제지할 여유가 없었다. 확실히 악우왕 역시 무학의 기재였다. 비록 백운생에게 신법과 보법을 전 수받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가 서생을 향해 덮쳐드는 속도는 비호같이 빠르기 그지없었다. 그 팔척을 넘어서는 거대한 덩치가 소리가 울리는 순간 이미 서생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새 악우 왕의 양쪽 주먹에서는 무시무시한 위력의 기운이 파도처럼 휩쓸어가고 있 었다. 바로 쌍류금(雙流金), 그가 백운생에게 일찍부터 배웠던 회심의 최 고 무예였다. 콰릉…… 마치 전면에 화려한 황금빛 광채가 일시에 폭발하듯 일어나는 것 같았다. 해일에 모든 사물들이 맥없이 사그러들듯이 권풍의 전면에 있었던 주루의 벽면이 그대로 먼지처럼 소리도 없이 가루가 되어서 부서져 나가는 것이었 다. 이에 무심코 관망을 하고 있었던 호덕승 등은이거 큰일이 났구나 하고 생각하며 악우왕을 말리기 위해 신형을 움직였다. 악우왕의 공력은 사실 그 체구에서 우러나오는 기본적인 신력이 있기 때 문에 네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강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 엄청 난 공력으로 마음먹고 가장 자신있는 쌍류금을 펼쳤으니 그 얼마나 놀라운 공격이었는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호덕승 등은 이제 저 잘난 척하던 서생이 불쌍하게도 피곤줄이 되거나 형 제도 없이 날아가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그때의 일이었다. 전혀 예상 밖의 의외의일이 벌어졌다. "흥, 나를 찾고 있는가?" 가공할 쌍류금의 공격이 마치 해일처럼 실내를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 악 우왕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에 느닷없이 위쪽에서 예의 그 서생의 음성이 멀쩡하게 울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에 악우왕이나 호덕승 등은 크게 흠칫 했다. 특히 악우왕은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듯한 표정이있다. 서생! 일행이 고개를 들어보니 서생은 어느새 천정 위에 가로놓인 대들보 위에 능청스럽게 걸터앉아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그가 언제 거기에 올라갔는지 호덕승 등은 전혀 보지 못했었다. 필 시 악우왕의 공격이 눈부셨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가만히 생각 해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일반의 무림인들이라면 경악하고도 남음이 있을 악우왕의 무서운 공격을 당하고도 저렇게 태평한 얼굴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은 필시 범상치 않은 무 예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까 검귀와의 일만 해도 좌선비가 처음 부터 독심(毒心)을 먹고 자신의 회심의 절기인 금삽수(金揷手)를 그를 향 해 펼쳤었더라면 전혀 결과가 달랐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것은 경험 부족이었다고 해도 지금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악우왕의 거의 전력을 다한 공격 속에서도 어느 틈에 귀신처럼 몸을 피해 서 저렇게 여유를 부릴 수가 있다는 것은 매우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무구를 비롯하여 좌선비 등이 서서히 그쪽으로 몰려들자 갑자기 서생은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여유있게 그 중앙으로 천천히 신형을 내려 세웠다. "아까처럼 또다시 합공을 하고 싶은 모양이지? 강호초출이라면서 우선 야 비한 짓부터 배우고 싶은 모양이지? 그렇다면 다시 한번 해보라구! 난 언 제든지 이렇게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이미 말했지만 난 항상 완벽을 추구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말과 함께 서생은 다시 그 더러운 부채를 여유 있게 부쳐 보였다. 실로 이러한 괴물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강호에 기인이사(奇人異 士)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대체 이 서생은 어떤 사람일까? 호덕승 등은 일시 그 서생을 포위하기는 했지만, 아니 이것은 그가 스스 로 포위망 속으로 뛰어든 형국인데, 일시 어떻게 해야 할지 다소 난감해졌 다. 이것을 보고 옆에서 이를 관망하고 있던 백운생이 웃으며 서생을 향해 말 했다. "형장, 이제 그만하면 나의 아우들을 많이 놀린 것이니 그쯤으로 해두는 것이 어떻겠소?" 서생은 백운생을 돌아보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 어 보였다. "아니 뭐라구? 이는 분명히 내가 크게 공격을 받아서 이리저리 피하고 있 는 상황인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도리어 이 자들이 나에게 놀림을 당했 다고? 혹시 귀하도 지금 나에게 덤벼보려는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주저말 고 어서 덤비라구!" 백운생은 담담히 웃었다. 그는 이 서생의 성품이 다소 괴이하기는 해도 그리 악하지 않다는 것을 미리부터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서생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악우왕이 공격하는 것을 내 심으로는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악우왕 등은 기실 강호에 처음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강자(强 者)와의 경험을 많이 갖게 될수록 그들에게 크게 이롭게 되는 것이었다. 백운생이 비록 옆에서 그들을 도와줄 수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한때일 뿐 이며, 평생 동안 그럴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백운생만은 같은 조건이면서도 이처럼 쉽게 현실에 적응 할 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백운생의 무예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꿰뚫고 있기 때문이었 다. 제아무리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일단 그 사람의 심리를 파악 할 수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절반쯤은 이기고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 는 것이 된다. 서생은 일순 안색을 차갑게 굳히며 신형을 가볍게 움직였다. 순간 마치 안개처럼 그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백운생의 정면에 다시 나타나 있 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악우왕 등은 크게 놀랐다. 방금 전에 서생이 펼친 신법은 결 코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호덕승 등은 아직 전혀 시전이 불가능한 경지의 것으로, 그것은 이미 서생의 무공이 진실로 그들의 상대가 아님을 드러내 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었다. 서생은 백운생의 앞에 나타나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어서 덤비라는데 뭘 망설이고 그러시오? 내가 뭐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 는 것으로 생각하오? 그렇다면 오산이지. 암!" 이에 옆에서 이를 바라보던 악우왕 등은 은근히 백운생이 나서서 그 서생 에게 손을 써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허나 백운생은 오히려 더욱 태도가 정중해직 있었다. 그는 담담히 웃으며 포권하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재촉하지 마시오. 나는 그대에게 손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 소." 서생은 이에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건 어째서지? 나 정도는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백운생은 웃 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다만 무예라고 하는 것은 가장 최후에 써야 하 는 것이며 그 전에는 대화로써 타협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뿐이 오. 게다가 이 일은 서로 싸울 일도 아니니 굳이 손을 쓸 필요가 어디에 있겠소?" "……" 서생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묵묵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흥, 당신은 제법 훌륭한 말을 할 줄 아는군.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문제 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해야 할 것이오." 백운생이 물었다. "그것은 무엇이오?" 서생은 싸늘하게 웃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지. 따라서 당신이 비록 싸우지 않는다고 해도 평생 동안 나를 피해 다닐 수는 없을걸!" 이에 내심으로 백운생이 싸움을 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은근히 불만스럽 게 생각하고 있던 악우왕 등은 이렇게 생각했다. (제발이지 그럼 함께 싸워라!) 그들의 생각으로는 우상인 백운생의 무공이 결코 서생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운생은 역시 저자세였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내가 만일 그대의 요구를 들어주어 서 그대의 화가 풀어지게 된다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소?" 서생은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가 나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의에 어긋나지 않고, 가능한 일이라면." 서생은 즉시 손가락으로 무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저 계집을 나에게 주도록 하시오. 그렇다면 내 아무 말 도 하지 않고 떠나갈 것이니." 이에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할 수가 없소. 왜냐하면 그것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일 뿐만 아니 라 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오." 서생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어째서 그게 불가능하다는 말이지?" "……" 백운생은 잠시 어이가 없었다. 실로 이 서생이 느닷없이 무구를 달라고 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백운생은 그러나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나에게 매인 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또한 그럴 수 가 있다고 해도 사람을 그런 일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도의에 맞지 않기 때문이오." 서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녀는 당신의 여자가 아니라는 말인가?" 백운생은 실로 입맛이 썼다. "물론이오. 우리는 하나같이 서로 피를 나눈 의형제들인데 어찌 그런 말 을 할 수가 있겠소? 그녀는 나의 소중한 친구인 것이오." 잠시 실내의 분위가 조용해졌다. --계속-- #5403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26장 11/17 04:18 288 line 제26장. 남루(南樓) 서생이 백운생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럼 도의에 어긋나지 않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다는 말이오?"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에 서생은 즉시 소리쳤다. "그럼 어서 내 앞에 무릎을 꿇으시오!" 그 말에 주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일행은 다 함께 안색이 크게 변했 다. 무림에서 남자의 명예는 가장 소중한 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함부로 남에게 무릎을 꿇을 수가 있으며, 게다가 백운생은 앞으로 동심각의 주인 이 될 후계자의 몸이 아닌가! 좌선비가 즉시 소리쳤다. "형님, 그건 안됩니다!" 호덕승도 소리쳤다. "천만부당합니다." 무구 역시 다소 흐느끼며 말했다. "차라리 제가……" 이에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그만두시오. 물론 이 일이 정당한 것인지를 떠나서 내가 기왕에 약속을 한 것이니 거기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소. 게다가 그것으로 서로간 의 사이가 좋아지게 된다면 내가 못할 것이 뭐가 있겠소?" "……" "내 비록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고 하지만 나중에 풀뿌리처럼 시들어갈 인생인 것을, 무엇에 그리 연연하겠소? 나는 사실 나 자신을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소." 말과 함께 백운생은 정말로 서생의 앞 바 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것을 보고 서생은 다소 놀란 듯했으나 곧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 다. "당신은 위선자로군요.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함부로 생각할 수가 있죠?" 백운생은 무릎을 꿇은 채로 담담히 웃으며 대꾸했다. "나의 이 썪어질 몸뚱이는 별로 대단한 것이 못되오. 하물며 이 몸뚱이에 일어나는 일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소." 서생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 백운생은 묵묵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서생은 잠시 후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그것으로 당신들에 대한 화가 풀어졌다고 하죠." 백운생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이제 그 이야기를 해주시겠소?" "……?" 서생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바로 그 옥수성심의 거처를 말하는 것이로군?" 백운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서생은 헌대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할 수가 없소." 백운생은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왜 안된다는 것이오?" 서생은 다시 예의 그 예쁜 우수를 내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공짜로는 말할 수가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당신이 어떤 대가를 주기 전에는 나는 말할 수가 없소." 백운생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실로 이 서생의 성격은 너무나도 괴상하다 고 생각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얼굴을 바꿀 수는 없 는지라 역시 웃으며 물었다. "어떤 것이면 적당하겠소?" 서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음…… 다시 저 여자를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선 그런 대로 당신에게 귀한 것 한 가지만 주면 되오."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품속에서 한 장의 전표를 꺼내서 그 작은 손 위에 올려놓았다. 헌데 그것을 본 호덕승 등은 일순 크게 놀랐다. 바로 다름이 아닌 백환성 에게서 받았었던 예의 그 황금 일만냥짜리 전표였던 것이었다. 그저 단순 히 거처를 아는데 그 많은 돈을 쓰다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값진 것은 이것뿐이니 당신이 갖도록 하시오." "……" 이에 상대인 서생도 다소 의외인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전표를 이리저리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이 만져보다가 일순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제법 쓸 만한 것이군." 그러면서 점잖게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악우왕 등은 내심 백운생에게 뭐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서생 을 향해 옥을 퍼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녀석, 그것으로 거지같은 네 팔자가 시원하게 피었으니, 넙죽 저리라도 해야 하는데 뭐라구? 제법 쓸 만하다구? 이런 염치없는 녀석 같 으니!) 황금 일만냥이라고 하는 것은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는 쉬게 만져볼 수가 없는 막대한 금액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모르긴 몰라도 저 거지같은 서새은 고래등같은 누각을 짓고 호의호식하며 그것으로 평생을 살 수가 있 을 것이었다. 하지만 감히 백운생을 의식하여 나서지는 못했다. 서생은 다시 백운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밤 자정에 남장로(南長路)에 있는 조부자(趙富子)의 집에 가보도록 하시오." 악우왕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거기에 옥수성심이 나타난다는 말이오?" 서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헛소리를 할 것 같은가?" (물론 네가 헛소리를 했다간 앞으로 결코 오래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악 우왕은 내심 욕을 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남잘로는 어디에 있으며, 조부자는 또 누구요?" 서생은 다소 귀찮 은 듯 대꾸했다. "남장로는 남쪽에 있을 것이고, 조부자는 그곳에 가서 물어보면 자연 알 게 될 것인데, 뭘 그리 귀찮게 물어보는가?" (빌어먹을, 겨우 몇 마디를 하고 황금 일만냥이나 버는 주제에 감히 내 질문이 귀찮다고?) 악우왕은 내심 화가 나서 억지로 다시 물었다. "그가 거기에 오늘밤에 나타난다는 것은 당신이 본인도 아닌데 어떻게 그 렇게 확신할 수가 있단 말이오? 만일 그가 오늘밤 거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면……" 헌데 서생은 매우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정히 믿기지 않는다면 가지 않으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미 말 을 했으니, 믿고 말고는 당신들의 자유인 것이오." 말이 끝나자마자 서생은 문득 신형을 돌려서 주루의 밖으로 사라져 버리 고 말았다. 그 행동이 워낙에 느닷없었기 때문에 일행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무구가 얼른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가 돌아와서 말했다. "그는 벌써 사라졌어요." "이거 그녀석의 이름을 알아두는 건데 잘못한 것이 아니야?" 악우왕이 고 개를 갸웃거리자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신형을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했 다. 문득 악우왕이 다시 호덕승을 향해 물었다. "이거 그 황금 일만냥은 너무 아까운 것 아니야?" 호덕승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원래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또한 형님의 입장에서는 그리 돈이 아쉬운 상황이 아니니 상관이 없을 거요. 오히려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만 일의 사태에 대비를 한 것이라면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요." "그럴까?" 악우왕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백운생의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잠시 생각하다가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남장로. 과연 그 서생의 말대로 남장로는 바로 장사성의 남쪽에서 서편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는 번화가였는데, 일행은 거기에 이르러서 실로 간단하게 조부자의 집을 찾게 되었다. 원래 그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곳 저 택가의 조부자 하면 장사성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부자였던 것이었다. "혹시 그 집에 앓아누운 환자라도 있소?" 호덕승의 질문에 지나가던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하긴 그 집에 늙은 노모가 누워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들 하더니만. 그 조ㅜ자 어른이 워낙에 효자라서……" 이에 일행은 그 서생의 말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일단은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일행은 그 전에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하나의 그 근처의 객점에 들었다. 객점의 이름은 남루(南樓)라는 것이었는데, 다행히도 주루가 옆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일해은 먼저 점원에게 시켜서 방을 세 개 만련하도록 한 다음에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주루에 올랐다. 주루. 주루의 실내는 아주 깨끗하고 화려했다. 당연히 이곳의 저택가의 부근에 있는 번화한 주루의 모습들이 그러하듯이 고급스런 손님들만을 받 는 곳이었다. 물론 음식값도 상당할 것 같았다. 이미 두 곳의 주루에서 호된 상황에 접했었던 일행이었지만 아직 혈기가 넘치고 있어서 그런 일들은 쉽게 잊어버리고 금방 실내의 분위기에 취했 다. "이봐, 지금의 음식값은 내가 낼 테니까 상관하지 말라구. 난 지금 매우 배가 고프니까 말이야." 사실 악우왕은 매우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무엇보 다도 술이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은 순탄할 것으로 생각했던 강호 생활이 이제 고생문이 훤하게 열린 것으로 생각되니 잠시 고뇌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심정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호덕승이 웃으며 말했다. "형님,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시키슈. 하지만 역 시 음식값은 내가 내도록 하겠소." 호덕승의 말에 악우왕은 매우 기쁜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는 호덕승 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구, 이 골치덩이리 아우가 이렇게 나를 위해줄 때도 있고 말이야. 정말로 꿈만같은 일인걸!" 이어 점원이 오자 혹시 호덕승이 생각을 바꿀까 하고 얼른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 통닭 열 마리에, 소고기 넙적다리구이 하나, 그리고 돼지고기 볶음 열 접시에, 그 밖의 먹을 만한 요리들을 한 열댓 가지 정도 알아서 가져오 도록 하시오. 아, 그리고 거기에 술 다섯 통을 잊어서는 안되오!" 이에 점원은 잠시 그들을 둘러보다가 멍하니 물었다. "혹시 다른 분들이 오실 것입니까?" 악우왕은 크게 소리쳤다. "아니야. 내가 모두 먹을 거다. 왜 그러시오?" 잉 품속에서 한 덩어리의 황금원보(黃金元寶)를 꺼내서 탁자 위에 내리치 며 말을 이었다. "여기 이렇게 돈이 있으니까 떼먹지는 않을 테니 빨리 가져오도록 해!" 점원은 악우왕이 험상궂게 나오자 다소 놀라서 얼른 물러가 버렸다. 이것을 보고 악우왕은 다시 그 금원보를 품속에 집어넣으며 혼자 중얼거 렸다. "빌어먹을, 황금 일만냥이 아니고 겨우 열 냥을 가지고 말하려니 제대로 씨가 먹히지 않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그는 아까 백운생이 서생에게 주었던 그 황금전표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모양이었다. 하긴 그 돈이라면 그라도 평생 호의호식할 수 가 있을 것이었다. 허나 백운생은 이를 보고도 모른 척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악우왕은 스스로 무안해 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하고는 호덕승을 향 해 입을 열었다. "참, 이곳은 설마하니 아까처럼 먹는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난 솔직히 먹는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면 질색이라서 말이야." 호덕승은 웃으며 대답했다. "세 번이나 계속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라는 법은 없으니 아마도 안심하고 먹을 수가 있을 것이오." 헌데미처 그 말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무심코 주루의 입구를 보던 호 덕승은 문득 가볍게 놀라며 절로 안색이 굳어졌다. "아니, 또 왜 그러지?" 악우왕이 의아해 하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역시 안색이 변했 다. "아니, 저놈은……" 그는 아주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 다른 일행도 그쪽으로 신선을 보내보니 지금 마악 안으로 들어오 고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얼마 전에 이곳 장사성의 상강루에서 처음으로 맞대면을 했었던 그 우두머리 대한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황 오라는 대한을 찔러 죽이고 나서 다시 그 시체를 가지고 달아난 장본인이 다. 이것은 실로 공교로운 인연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저 대한과 헤어질 때에는 그리 마음의 부담이 없었으나 조금 전의 검귀나 서생과의 대면 이후에 그들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겨나서 악우왕은 절로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 이거야 액땜이라도 해야지……" 헌데 바로 그때 그 대한도 우연히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다가 일행과 시선 이 마주치고 말았다. 틀림없이 일행에게 한번 크게 혼이 났었으니 즉시 안색이 변해서 달아날 것이라고 일행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대한의 행동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대한은 두 눈에 즉시 원독 가득한 빛을 발하더니 즉시 고개를 돌려서 뒤를 향해 이렇게 소리쳤던 것이다. "바로 저놈들입니다요, 선배님! 어서 이리로 오십시오!" 알고 보니 대한 은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것도 상당히 마음 든든한 사람이 아니라면 대한이 결코 이렇게 대담하지 못할 것이었다. (빌어먹을!) 설마하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로 나타나게 되자 일행 중에서도 특히 다혈 질인 악우왕은 내심 욕을 하면서 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야 귀신에 씌 이지 않은 이상은 이럴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비록 무공이 고강하여 그 간의 여행의 피로를 잊을 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곳 장사성에 이르러 아 직 단 하룻밤도 편안하게 쉬지 못했었는데, 벌써 두 번이나 주루에서 난리 를 치르고 이는 것이었다. 사실 이제는 누구를 이긴다는 생각보다는 마음이 피로해져서 그만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을 그냥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 아닌가! 대한이 데리고 온 일행은 모두다섯 사람인 것 같았다. 한 명의 요염하게 생긴 색 정적인 젊은 여자를 비롯하여 각기 늙고 젊으며 괴이하고 흉악하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그들의 눈에서 비치는 신광은 예리하고 살벌 하기 그지없었으며, 쉽게 그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을 짐작 할 수가 있었다. (갈수록 태산이군 그래!) 일행은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대한이 데리고 온 그 다섯 명의 괴인들은 모두 일행의 전면 탁자 앞에 이르렀다. 대한은 급히 그 다섯 명의 괴인들의 뒤쪽에 숨었으며, 주 위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손님들은 일제히 이러한 사태를 파악하고 급히 일어나서 분분히 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으으, 빌어먹을!) 일행 가운데에서도 가장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은 뭐니뭐니 해도 악우왕이 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인 다섯 명의 괴인들의 두 눈에서 비치는 신광이 마치 칼로 에이는 듯이 예리한 것을 보고, 자신의 공력에 거의 뒤지지 않 는다는 것을 알고 준동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저들은 순탄하게 차례를 밟 아서 공력을 키워온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험도 매우 풍부할 것이 며, 자연 그만큼무공도 대단할 것이 뻔했다. 아까는 공력이 약한 검귀에 게도 좌선비가 당했었는데 지금 눈앞의 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는 생각 이 들었던 것이었다. 악우왕으로서는 그저 백운생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천하에 고수가 이렇게나 많다는 말인가?) 사실 고수가 많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악우왕이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면 능히 눈앞의 이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 었을 것이었다. 백운생이 먼저 그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백운생의 어조는 여전히 담담하고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자 다섯 명의 괴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백발의 노 인이 매부리코 뒤의 살벌한 안광을 번뜩이며 대꾸했다. "네가 저 아이에게 손을 댄 녀석이냐?" 아이! 뒤에 숨은 그 흉악하게 생긴 대한에게 아이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 은 아마도 이 노인밖에 없을 것이었다. 원래 백운생의 모습은 무공과는 거리가 먼 서생과도 같고, 신광이 전혀 그러나지 않아서 무공 경지를 짐작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백운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는 그에게 손을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시비를 걸 어왔기 때문에 적당히 쫓아보내었던 것뿐입니다." 이에 노인은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려 그 대한에게 물었다. "아이야, 너는 아까 네가 당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대한은 그 말에 다소 쩔쩔 매는 기색이었다. "예, 제가 당한 것은 틀림이 없죠. 하지만 솔직히 제가 먼저 손을 쓴 것 은 틀림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대한은 좌우로 눈을 굴리며 장내의 상황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저들이 황오를 죽인 것은 확실합니다요." 이것은 무슨 말인가? 아마도 저 대한은 자신의 실수를 떠넘기고 장내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가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황오는 마로 자신이 죽이지 않았었는가! "……" 이에 노인은 잠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좋아. 지금의 네 말은 틀림이 없겠지?" 대한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이에 노인은 문득 옆에 서 있는 아주 거대하게 생긴 거한(巨漢)을 향해 가볍게 눈짓을 보냈다. 이 거한의 키는 악우왕의 키보다도 크고, 체구 또한 ㄷ욱 우람항 최소한 그보다는 머리 하나는 큰 것 같았는데 갑자기 노인의 눈짓을 받자 눈부시 게 움직였다. "악!" 대한의 목을 한 손에 움켜잡음과 동시에 그대로 위로 들어올렸던 것이었 다. 일행은 처음에는 그것이 잠시 심문을 하려는 것인 줄로 알았었다. 그런데 마악 대한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 순간, 이어 그의 목뼈가 우두둑 하고 부러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떨어져서 한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 닌가! "아악!" 주루의 구석에서 아직 나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손님들 가운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대한의 목을 간단하게 끊어버리는 거한의 팔힘은 대단한 것 같았다. 그러 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잔인한 태도였다. 거한의 피가 자신의 옷에 떨어 지자 다른 손으로 툭툭 털어내더니 대한의 시체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발로 차 버렸다. 쿵! 엉망으로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시체의 소리는 그야말로 이 순간의 장내의 공기를 살벌하게 냉각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5404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27장 11/17 04:19 372 line 제27장. 힘 겨루기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일행은 그것을 보자 일순간 어떤 상황이 전개될 것인지를 몰라서 다소 마음을 긴장시켰다. 그런데 노인은 대한의 시체를 힐끗 바라보더니 즉시 고개를 돌려 백운생 에게 포권을 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저희들의 아이가 귀하를 괴롭혀 드렸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백 운생은 다소 어리둘절해서 대꾸했다. "천만부당한 말씀입니다." 노인은 길게 자라난 눈썹을 치켜떴다. "부당한 말씀이라고요?"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미 그를 용서했었으니 다시 예를를 갖추실 필요는 없다는 말씀 입니다." 노인은 일시 두 눈에서 차가운 안광을 번쩍 발했다. "그래요?" 백운생은 이들의 태도가 괴이하고 시비적인 것을 보고 가능하면 저자세로 싸움이 되지 않기를 바랬다. "물론입니다. 그러니……" 헌데 노인은 고개를 저어서 백운생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한 가지를 모르시는군." "……?" 노인은 백운생의 두 눈을 차갑게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조직의 규율을 엄수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비록 저 아이가 귀하 들에게 있어서 용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한 대원을 죽게 한 죄는 용 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 백운생은 이 노인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고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을 보고 악우왕이 소리쳤다. "황오라는 자식은 우리가 죽인 것이 아니오." 이에 노인은 악우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압니다. 저 아이가 자기가 지은 죄를 여러분들에게 뒤집어 씌우려 고 했었다는 사실을." 일행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이 노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감히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음산히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저 아이를 죽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요. 죄를 짓고도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뇌우치지 않고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죽음의 죄에 해당하지 요."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악우왕이 내심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백운생이 물었디. "그렇다면 당신들이 그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은 결국에는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에 노인은 순간 눈빛이 번쩍 빛났다. "……" 그는 한동안 의미심장하게 백운생의 얼굴을 노려보더니 차갑게 대꾸했다. "어린 나이에 과연 상황 판단이 빠르군. 그렇다! 우리는 이제 저 아이가 죽도록 만든 너희들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살인을 하기 위한 명분이라는 것은 별 희안한 것도 많았다. 이 노인 은 어째서 이렇게 어이없는 명분을 달고 있는 것일까? 그 명분을 위해서 노인은 정말로 순수하게 대한을 죽였던 것이었을까? 백운생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스스로 죄를 자초한 것이니 우리에게 책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오. 이 문제로 일부러 싸움을 벌일 필요가 있겠소?" "흐흐흐……" 노인은음산하게 웃음 다음에 대꾸했다. "우리와 같이 어떤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 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있는 법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면 누가 우리를 존경하고 따르려고 하겠느냐?" --대체 당신들의 그 조직의 이름은 무엇이오?-- 악우왕 등은 당장에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백운생의 고심을 생각하고 눌 러 참았다. 백운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백운생은 정말로 이런 기막히는 싸움을 싫어했다. 백운생은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가 일어서자 다른 일행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살벌한 기운이 주위에 차가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공기를 꽁꽁 얼 려 놓는 것 같았다. 백운생은 말했다. "그렇다면 기왕에 할거면 이곳이 아니라 좀더 넓은 곳으로 나가는 것이 어떻겠소?" 헌데 노인은 그 말에 즉시 고개를 내저었다. "천만에! 우리는 네놈들을 여기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가게 할 수가 없다!" 이 노인의 의도는 지독하게 확고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그가 말했던 내용들은 단순히이러한 상황을 도출해내 기 위한 일종의 준비된 서식에 불과했었다는 말인가? "흐흐흐……" 노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허나 만일 네놈들이 주위의 물건들이 눈에 거슬린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들을 치워줄 수도 있지." 이어 우수를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어 있던 거한과 다시 그 옆의 머리를 깎은 대머리 땅딸보가 일제히 부근을 향해 신형을 날리는 것 이었다. 그들의 신법은 실로 쾌속했다. 얼마 전에 만났던 검귀 등에 비해 서도 훨씬 뛰어난 것 같았다. 지금 주루의 안에는 점원들을 비롯하여 아직 가지 않고 대담하게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던 수명의 사람들이 구석진 곳에 서 있었다. 거한과 땅딸보 가 날아간 곳은 바로 그곳이었다. "아악!" 아니나 다를까, 거한의 신형이 그곳에 도달하는 순간 그의 커다란 주먹이 휘둘러짐에 따라 사람들이 마치 피떡처럼 변해서 나동그라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그 옆의 땅딸보의 능력은 괴이했다. 그는 단지 사람들 의 옆으로 지나치면서 살랑살랑 손을 휘젓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그가 지나 간 자리에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나동그라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쿵쿵쿵…… 이것을 보고 백운생은 안색이 변해서 소리쳤다. "어서 멈추시오!" 여태 온순한 성격의 백운생이 이처럼 크게 화가 난 표정을 지어 보이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에 마악 점원 하나를 향해 일권을 날리려던 거한과 땅딸보가 거의 동시 에 움직임을 멈추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클클클, 그래 어디 그대가 한번 나서보겠는가?" 흡사 호박처럼 생긴 땅딸보가 음흉하게 웃으며 백운생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이미 주루 안은 수많은 시체와 피로 인해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고 있었 다. 백운생이 미처 그들을 도우러 가지 못했던 것은 바로 악우왕 등을 보 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백운생은 무거워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당신들이 이렇게 원한다면 나는 사양하지 않겠소." 이에 다섯 명의 괴인들은 안색이 일순 가볍게 변했으나 이어 거한이 자신 의 두 주먹을 쾅쾅 후려치며 소리쳤다. "그럼 어디 나와 한바탕 붙어 보자구!" 이것을 보자 백운생이 나서기 전에 먼저 악우왕이 번쩍 신형을 날려 그 자의 앞에 내려섰다. "빌어먹을, 내가 네놈을 상대하겠다!" 거한은 입가에 가벼운 조소를 흘렸다. "애송이같은 놈이 감히 이 어르신네에게 대항해 보겠다는 말이냐?" 악우 왕이 무거운 어조로 대꾸했다. "네놈도 사람인 바에야 내가 못할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 거한은 음산하 게 웃었다. "과연 그럴까?" 이어 거한은 쌍권을 악우왕의 면전을 향해 날렸다. 콰우우…… 흡사 거대한 체구에서 태산같은 기운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이것을 보고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악우왕은 마주 자신의 최대 절기인 쌍 류금을 펼쳤다. 공력이 비슷하고 자신이 동심각의 쌍류금을 펼치기만 한다 면 능히 상대를 제압할 수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콰릉…… 흡사 황금빛 광채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듯 거한을 향해 마주 대항해 가는 것이었다. 곧이어 당연하게도 중간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장내가 아수라장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기인한 일이 일어났다. 두 가지의 권력이 중간에서 부딪쳤는데도 거대한 굉음은커녕 작은 폭발음조차 일지 않았고, 대신 거한의 주위에서 마치 구름같은 기운이 뭉게뭉게 일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부근에서 일 어난 먼지같기도 했다. 하지만 먼지가 아니라는 증거는 곧 나타났다. 구름처럼 일어난 기운이 점차 크게 부풀더니 이윽고 다시 악우왕을 향해 덮쳐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원래 악우왕은 자신이 일권만 격출하면 상대를 제압할 수가 있을 것이라 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그것이 상대에게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을 보게 되 자 크게 마음의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다시 상대의 공격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 재차 자신의 쌍류금을 펼쳤다. 콰릉…… 그러나 기이하게도 이번에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악우왕의 공 격을 받은 거한의 기운은 마치 탄력이 놀라운 고무공처럼 한쪽으로 찌그러 졌다가 점차 서서히 원상태로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실로 이러한 절기(絶技)는 악우왕이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알고보니 악우왕의 공격을 받아들인 거한의 기운은 더욱 강성해져 있었 고, 그만큼 무서운 기세로 다시 악우왕의 면전으로 짓쳐들고 있었다. 악우왕은 이에 크게 당혹했다. 우선 같은 공력으로 자신은 최고의 무공을 펼쳤는데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믿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아무리 그가 공격을 해도 결과는 패배뿐이라는 점이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콰릉…… 한 차례 전력을 다한 쌍류금을 다시 펼치고 나서 상대의 기운이 잠시 주 춤한 틈을 타서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날이 두꺼운 도(刀)를 꺼내들었다. 원래 비록 백운생에게 각기 장법과 권법, 지법 등을 배우기는 했지만, 이 들은, 좌선비는 검법을, 악우왕은 도법을, 그리고 호덕승은 철필(鐵筆) 따 위를 쓰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상황이 몰리자 궁여지책으로 도를 뽑아들 게 된 것이었다. 물론 최대 절기를 펼치고도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자신의 어수룩한 도법으 로 이길 수 있다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다만 악우왕은 이 순간 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결심하며 이빨을 깨물었다. "죽어랏!" 일순지간 악우왕은 그 도를 높이 뽑아들고 거한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덮 쳐갔다. 이 악우왕 역시 무림 최고의 신법과 보법을 배운 사람이었다. 일단 그가 신법을 전력으로 일으키자 그 속도가 눈부시게 빨라서 금방이라도 거한의 강기막을 뚫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왠지 악우왕은 힘을 다해서 그 강기막을 피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창 부풀고 있는 강기막의 중심을 향해 신형을 날리 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쾅--! 흡사 가죽이 터지는 것과도 같은 요란한 굉음과 함께 악우왕의 신형이 그 강기막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미련하게도 천정 높이 날려갔다. 이미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고 입가에 검은 피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심각한 내상을 입 은 것이 틀림없었다. 실로 이것은 악우왕과 같은 사람만이 할 수가 있는 방책이었다. 만일 악 우왕이 천생의 신력(神力)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다면, 다만 이 일장의 격돌로 인해서 그의 내장이 토막나고 말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악우왕은 벌써부터 이것을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장의 격돌로 내상은 입었지만 내장이 부서지지 않았고, 정신을 잃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정신력 은 더욱 또렷하게 변한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파해할 수가 없 는 절망적인 상황을 악우왕은 미련스럽게도 이렇게 부숴버렸다. 다음에는 악우왕은 여전히 수중에 들고 있는 도를 높이 쳐들고 거한을 향 해 빠르게 내리 덮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는 공력이 아니라 병기로써 판 가름을 내자는 뜻이었다. 비록 악우왕이 심한 내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일단 그의 위치가 높게 되었 다는 것은 어떻게 본다면 상황의 우위를 점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거한은 그것을 보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웃으며 품속에서 한 자루의 날이 예리한 단검을 꺼내 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상황은 긴박하여 미처 그가 손을 돌릴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악우왕의 신형은 마악 그의 위에 떨어져 내렸고, 도신이 두터운 악우왕의 도가 일순지간에 거한의 어깨를 비스듬하게 후려쳐 버리고 말았다. 헌데 이때였다. 꽝! 도와 살갗이 맞부딪친 곳에서 느닷없이 굉렬한 금속성이울리는 것이 아 닌가! "욱!" 괴이하게도 악우왕은 거의 무방비 상태의 거한을 공격했는데도 거한의 어 깨에서 반탄되는 무서운 힘을 느꼈고, 도리어 자신의 손아귀와 기혈이 크 게 들끓고 화끈거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따라서 짧은 비명과 함께 한바탕 의 선혈을 입으로 토한 악우왕은 즉시 거한의 어깨를 살펴보다가 일순 크 게 경악하고 말았다. 그의 도가 힘껏 내리쳐진 거한의 어깨! 어이없게도 그곳은 전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고, 여진히 멀쩡한 상태로 핏기 하나 일지 않고 있는 것 이 아닌가! (그, 금강불괴(金剛不壞)!) 그렇다! 실로 이 거한의 몸이 금강불괴가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 었다. 아니 최소한 이 거한은 천하에서 연성하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금종 조(金鍾 )나 철포삼(鐵布衫), 십삼태보횡련(十三太保橫練)과도 같은 횡련 기공(橫練奇功)들을 연성했음이 틀림이 없다. 이러한 횡련기공들은 대부분 이 매를 맞아가면서 약초를 몸에 바르고 먹고 하면서 장기간에 걸쳐서 전 신의 혈도들을 강화시키는 방법인데, 으레 한두 군데 생기곤 하는 연문(練 門)을 제외하고는 마침내 그 몸뚱이가 갑옷을 입은 것처럼 단단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악우왕은 이 거한이 바로 그런 횡련기공까지 연성했을 줄은 몰랐었다. 하 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그러한 후회는 해봐야 늦은 것이 일반적이다. 푹! 어느 틈엔가 거한의 손에 들려 있던 날이 예리한 단검이 악우왕의 오른쪽 가슴을 깊숲히 파고 들고 있었다. 악우왕은 마침 선혈을 크게 토해낸 다음 이라 전혀 저항도 하지 못하고 거한의 그 일격에 당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지금 그가 당한 곳은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이 아니라 오른쪽 가슴 중에서도 장기가 없는 어깨의 바로 밑이었는데, 그것은 거한이 실수 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틈을 보인 것에 불과했다. 거한은 정확히 일검에 악우왕의 심장을 지를 수가 있었는데도 백운생에게 시위를 하는 목적으로 일부러 반대편의 가슴을, 그것도 키가 큰 나머지 어깨 아래를 찔렀던 것이 었다. 찔렀던 단검을 다시 뽑아내자 그 자리에서는 역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거한은 이것을 보고 득의하게 흉소를 흘렸다. "네놈은 역시 나의 적수가 안되……" 헌데 그때 오히려 비를 보게 되자 악우왕의 다혈질의 성질이 불길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한것을 그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거한이 아직 날카로운 단검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으악!" 악우왕은 커다란 괴성을 질러대며 그대로 거한의 허리를 두 손으로 힘차 게 끌어안았던 것이었다. 이것을 보자 일시 하던 말을 중단한 거한은 분명히 자신이 들고 있는 단 검으로 무모하게 달려드는 악우왕의 심장을 찔러서 즉사시킬 수가 있음에 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것을 집어던지며 괴이하게 흉소를 날리는 것이었 다. "감히 힘자랑을 하려고? 흐흐, 그거야말로 나의 주특기다!" 원래 악우왕 이 일부러 그런 것을 노리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장사와 같은 힘을 타고난 사람들은 원래부터 이러한 힘 대결에 대해서 열의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금방 끌날 것 같던 상황이 그야말로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거한은 단검을 집어던지고는 즉시 악우왕의 몸뚱이를 마주 끌어안았다. 원래 비록 거한보다는 다소 작기는 해도 악우왕의 몸뚱이는 천생의 신력 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채석장에서 단련된 엄청난 근육질 의 몸이었기 때문에 악우왕이 한번 그것에 최후의 걸어봄직한 일이었고, 거한도 그훌륭한 체구를 보자 힘겨루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던 것 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기실 천하에 장사가 많다고는 하나 그런 사람들이 한 마을에 여러 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힘이 유난히 굉장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넘쳐오르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 다. 악우왕이 허구 많은 일 가운데에서도 유독 채석장의 일을 했었던 것도 그런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은 그리 유쾌하지 못한 해소법이었고, 늘상 이러한 사람들의 심중에는 자신의 힘을 언젠가는 가장 강한 사람들을 만나서 비교해 보고 싶은 욕망이 늘상 꿈틀거리고 있 게 되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고, 혹은 거한과 악우왕이 각기 천생의 신력을 타고난 사 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기이한 광경은 벌어지 지 않았을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기이한 상황은 시골에서 흔하게 벌어지 는 씨름이나 혹은 무공도 아니었고, 그냥 한순간에 형성된 가장 직접적인 힘겨루기였다. 서로가 서로의 허리를 맞잡고 조이면서 버티는 이 힘겨루기는 원래는 가 장 험악하고 무서운 대결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일 시에 힘을 풀지 않는 한은 두 사람 가운데 허리가 끊어져서 죽는 사람이 생겨나야 비로소 대결이 멈춰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황을 보아하니 이 대결은 그저 멈춰질 것 같지가 않았다. 원래는 매우 초조하게 여기고 있었던 일행은 이것을 보자 악우왕의 신력 을 다소 믿기 때문에 걱정스러우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헌데 백발의 노인 등은 거한이 오히려 유리한 고지를 버리고 힘겨루기를 시작하는데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그저 즐기듯이 웃으며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빛에 씌어 있는 말대로 본다면 그것은 이제 악우 왕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함께 죽을 힘을 다하는 가운데 문득 거한의 두 눈에 사이(邪異)한 광채가 번득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그 사이한 기운이 점차 그의 눈에서 전신으로 옮겨감에 따라서 그의 상체가 점차로 거대하게 부풀기 시작함과 동시에 이어 하체마저도 거대하게 부풀 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으으윽……" 따라서 이를 악다물고 연신 피를 토하고 있는 악우왕의 두 눈에서는 핏발 이 곤두서고 비명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동시에 허리 를 틀어잡고 있는 순간에 거한의 허리가 점차로 크게 부풀어 오르자 마침 내 그 허리를 틀어잡고 있던 악우왕의 두 팔이 끊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 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그의 팔이 끊어져 버린다면 대결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고, 악우왕은 거의 명백하게 죽은 목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우왕 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극한의 인내력으로 참으며 전신의 힘을 있는 대 로 발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 거한의 몸은 어째서 갑자기 그렇게 극강해진 것일까? 이제 거한 의 표정은 극한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악우왕과는 달리 사악하고 득의하게 웃으며 여유마저 있어 보였다. 도무지 지금 거한이 발휘하고 있는 힘은 인 간의 힘이 아닌 것 같았다. 헌데 이때 문득 무구가 소리쳐서 일행을 크게 놀라게 했다. "앗, 저것은 바로 포천대마력(抱天大魔力)이라는 거예요!" 포천대마력! 그렇다. 백운생도 이미 여러 방면의 서책을 읽고 강호의 일에 훤해졌기 때 문에 이 이름뿐만 아니라 내용도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무구의 말대로 거한이 쓰고 있는 수법은 포천대마력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도(邪道)에서 전하는 최고의 악마적(惡魔的)인 수법으로, 말하자면, 전신의 잠력을 한 순간에 극도로 발휘하여 상대의 몸과 숨통을 조이고, 인간 이상의 괴력을 발휘하게 하는 무서운 수법이었다. 원래 이 수법은 사악한 무공으로 인정되어 강호인들의 질시를 사고 있는 것이었는데, 그렇거나 말거나, 일단 이 수법에 걸려들게 되면 어떤 사람이 라고 할지라도 결코 빠져나갈 수가 없다고 전해져 있었다. 이것은 바로 인 간의 힘이 아니라 한 순간 악마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거한의 힘은 막강하여 내상을 입은 악우왕과 단순하게 힘으로 대결 한다고 해도 능히 이길 수가 있었을 것인데, 이제 이러한 방버을 쓰게 되 자 승패는 분명해진 것 같았다. 확실히 노인 등이 여유있는 태도로 바라보 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지금 일행뿐만 아니라 한창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악우왕도 무구의 음성을 듣고 심한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의 능력으로는 도저 히 이 거한을 이길 재주는 없었다. 물론 그 역시 포천대마력의 이름을 들 어온 터였다. 원래는 전에 좌선비가 검귀에게 당하기 전에 백운생에게 도움을 받았던 일에서 자신만은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악우왕의 생각은 이제 완전히 달라졌다. 이런 상태로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제 겨우 강호초출의 상태이고, 앞으로 조심해서 강호의 경험을 더욱 쌓고 무 공을 연마하게 되면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렇거 늘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가 있다는 말일까? 악우왕은 즉각 백운생의 도 움을 기대했다. 아니, 틀림없이 이제부터 백운생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 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 돕고 있는지도 몰라.) 악우왕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고통 속에서도 그의 그런 생각은 극한 의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어서 매우 선명했다. 으레 백운생이 그를 돕는다면 어떤 기운을 보내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악우왕은 극한의 고통을 참고 한 순간 자신의 체내 혹은 피부에서 느껴지 는 외부의 어떤 기운을 감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길이야말로 최후의 살 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아니나 다를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악우왕이 생각한 대로 그의 몸의 어디에선가 어떤 은근하고 거대한 힘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 순간 놀랍게도 벌써 두 팔의 고통이 감소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닌 가! 이에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악우왕은 혼신의 정력을 다해서 그 힘을 자신의 힘으로 옮기는 일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떤 환각이었을까? 아니었다. 확실히 악우왕의 두 팔에서는 힘이 가해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서 부쩍 상대의 몸이 진동하기 시작하고 있었 다. 이제부터 악우왕은 막연하나마 자신이 승리할 수가 있다는 신념이 생겨나 기 시작했다. 이 한 고비만 넘게 되면 길은 외길었다. 이렇게 악우왕의 힘 이 강해진다면 그것은 이제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통이 현격하게 줄어들자 악우왕은 이것이 백운생이 자신에게 보 내주는 진기라고 생각을 하고는 흘러들어오는 진기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 고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하면서 내심 크게 감격하고 있었다. (형님, 고맙소!) 백운생이 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는 거부감 등은 일체 들지 않고 있었 다. 명예 따위가 개입되기에는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긴박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감격한 나머지 악우왕의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 것은 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과도 같은 것이었다. 악우왕이 원하자 즉시 그 힘이 느껴졌다고 하는 것은 이 얼마나 참다운 우정의 표시이며, 하나라 는 기꺼운 마음의 울림인가! 원래 사림이 공력을 최대한으로 운용하는 데 있어서 잡념이 일어나면 심마에 걸리거나 지장을 초래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전혀 달랐다. 악우왕은 지금 흘러들어오는 진기를 크게 고마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간혹 거부감을 일으킬 수 도 있는 것인데도 그의 심리적인 작용에 의해서 더욱 완벽하게 그 진기가 자신의 힘으로 소화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음! 마음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이토록 오묘한 것이다. 악우왕이 이토록 크게 득의하고 있는 가운데 과연 상대인 거한은 반대로 크게 곤혹해 하고 당황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불가항력이던 포천대마력의 힘이 무용지물이 되어가는 가운데 그의 표정이나 몸짓은 볼 만했고, 점차 로 잿빛이 되어가는 그의 안색은 오히려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일행 가운데에는 그것을 애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 다. 간혹 거한은 이제라도 다른 수법으로 악우왕을 공격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서로 극한의 힘으로 대결하고 있는 마당에 그러한 전환이 라고 하는 것은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일단 진기를 다른 방향으로 모으는 순간 이미 악우왕에 의 해서 먼저 허리가 꺾여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차라리 일찌감치 그렇게 하는 편이 실은 더 나 았다. 결과가 험악할 것을 알고 차마결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거한은 점차 로 힘이 빠져서 더 이상은 시도할 여력도 없었다. 그리고 이어 그의 허리 는 마치 거짓말처럼 악우왕의 거력(巨力)에 의해서 꺾이고 말았던 것이었 다. "으악!" 거한은 그 체구만큼이나 거대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이것은 꿈 결인 듯싶었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제4권 끝> --계속-- #5405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28장 11/20 08:54 164 line 제28장. 현기막측(玄機莫測) 실로 이렇게 결과가 끝날 것이라면 차라리 힘이 있었을 때 공격의 전환을 해보지 못했던 것이 한(恨)으로 남았다. 아니 원래는 아까 단검으로 충분 히 승부를 결정지을 수가 있는 순간에 결행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커다란 실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멀어서 이미 거한의 육신은 시신 으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과연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 을까 하는 것은 의문으로 남았다. 쿵…… 뒤이어 승리자인 악우왕의 신형도 뒤로 넘어졌다. 거한의 피를 온통 뒤집 어 쓴 그는 이제 힘이 다하여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기력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 그는 혼절했다.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놓고서. 강호에는 이런 말이 전하기도 한다. --상대를 죽일 수 있을 때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내가 그에게 죽 게 된다.-- 그러니까 거한은 너무나도 백운생 등을 의식한 나머지 이런 강 호의 불문율을 어겼고, 그로 인해서 죽음을 당했던 것이었다. 즉, 세상에 절대의 강자(强者)라는 것은 없다. 그러한 증거인지도 모른다. 이윽고 이제 네 명 남은 괴인들 가운데 얼굴이 가장 괴이하게 생겨서 반 쪽은 험상궂은 남자의 얼굴이고 나머지 반쪽은 요염한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젊은 사내 하나가 소리쳤다. "이, 이것은 누군가가 그를 암중에서 도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을 수가 없는 결과이다. 누가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사내는 다시 백운생을 향해 소리쳤다. "정말로 네놈이 그를 돕지 않았다는 말이냐?" 이에 백운생은 잠시 묵묵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돕지 않았소." 그의 이 말은 실로 같은 일행인 호덕승에게도 다소 의외였다. 그들은 당 연하게도 백운생이 암중에서 악우왕을 도왔기 때문에 악우왕이 승패를 반 전시키고 승리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거의 거짓말 을 할 줄을 모르던 백운생이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니, 혹시 그의 말대로 여기에 어떤 다른 변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내는 백운생 의 말을 듣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크게 광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핫! 삼척동자가 들어도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니, 누가 그런 뻔 한 거짓말을 들어준다는 말이냐?" 이에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들어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하지만 결단코 이것은 사실이오." 사내는 백운생의 태도가 더없이 정색인 것을 보고 다소 곤혹한 표정을 지 었다. 그는 강호의 경험이 많아서 대체로 이러한 사람은 별로 거짓말에 능 훅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터였다. (……?) 잠시 두 눈을 좌우로 굴리다가 사내는 다시 물었다. "그럼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한번 말해볼 수가 있느냐?" 사실 아까 백운 생이 악우왕을 돕고 있다는 증거가 있었다면 그들 사인이 결코 가만히 있 지 않았을 것이었다. 분명히 거한이 힘겹게 악을 쓰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백운생이 암중으로 악우왕을 돕고 있는가 하여 은근히 그들의 행동 을 감시하고 진기로써 사이를 차단시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이치적 으로 공박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심하게 백운생에게 따지지는 못했다.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오." 일행뿐만 아니라 노인의 동료들도 일시에 백운생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시 켰다. 방금 전의 일은 누가 보기에도 실로 수수께끼와도 같은 상황 변화였 기 때문이었다.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능력으로 보자면 당신들의 동료가 강했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 결 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소. 그게 그의 패인(敗因)이오." 사내는 다시 물었다. "그가 대체 무슨 실수를 했다는 말이냐?"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마도 당신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았던 것 말이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 실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다음의 대비가 있었기 때문에 실수라 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오. 실수는 다음에 있었소." 사내는 잠시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대체 그 실수가 뭐라는 말이냐?"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포천대마력이오." "포천대마력?" 사내는 마치 억하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크게 놀라서 되물었다.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같은 백운생의 일행들조차도 이번의 말에는 크게 경악하고 의아해하고 있었다. 포천대마력! 천하에 둘도 없다는 가공할 사도의 대법인 포천대마력을 쓴 것이 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일까? 만일 백운생의 말대로라면 이거야말로 천하에 적수가 드물다는 포천대마 력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처음부터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니겠 는가! 사내는 다시 물었다. "대체 그 포천대마력에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이냐?" 백운생은 웃으며 대 답했다. "포천대마력 자체에는 그다지 큰 잘못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소. 그렇 지 않았다면 그렇게 유명해지지도 않았었을 것이오." 사내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자신이 상대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것 같 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그 수수께끼와도 같은 사건의 의문이 너무나도 심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은 접어두고 다시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뭐냐?"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천적(天敵)을 만났기 때문이오." 사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적이라고?" 백운생은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여 있고, 또한 그들이 의문을 참지 못해서 넋이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찬찬히 설명하기 시 작했다. "그렇소. 이른바 사도의 포천대마력은 천하에 보기 드문 공력이지만, 기 실은 그것을 함부로 쓸 수는 없는 것이오. 바로 천적이 있기 때문인데, 사 도의 공력은 극강하기는 해도 그 내용 자체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 주 전통적인 순수한 공력을 만나게 되면 결국에는 당하게 되는 것이오." 사내가 알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럼 너의 그 저녀석이 그런 공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냐?"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가 가지고 있는 공력은 그야말로 천하에서도 보기 드문 가 장 훌륭한 공력이라고 말할 수가 있지." 그렇다. 금단공(金丹功)! 백운생은 지금 그의 아우들이 공통으로 연성하 고 있는 동심각의 최고 내공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결과가 그렇지 않았지 않느냐?"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소. 원래 이 포천대마력은 극강한 무학이어서 일반의 다른 공 력으로는 당할 수가 없는 것이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공력은 가장 현기막측(玄機莫測)한 것이어서 그 가운데 마음의 요체(要體)를 이끌어내 는 것이 있소. 원래 처음에는 그는 그 공력의 현기를 깨닫지 못해서 좋은 공력을 가지고도 포천대마력에 패할 위기에 몰렸었소. 그런데……" 백운생 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이하게도 그는 죽음의 위기 속에서 절로 그 공력의 현기, 마음의 요체 를 발견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포천대마력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던 것 이오." 그렇다! 지금 백운생이 말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고 객 관적인 사실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원래 악우왕은 금단공의 정수에 깃들어 있는 심공(心功)에 대해서 아직 깨우칠 수가 있는 단계가 아니었는데도, 한 수간에 너무나도 백운생의 도 움을 원하고, 또한 그것이 실제라고 믿는 바람에, 믿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일심(一心)으로 외부의 공력을 흡수해 들였는데, 그것이 바로 백운 생의 도움이 아니라 기실은 거한이 발출하고 있었던 포천대마력의 기운이 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기는 해도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보통의 내 공심법은 마음의 공력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극도의 경지에 이르러 서 마음으로 진기를 운용할 수가 있게 된다면 사도의 그 어떤 기운도 흡수 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상대의 공력이 포천대마력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경지의 공력이라 면 그것은 다시 문제가 달라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만일 악우왕이 극한의 순간에 백운생을 생각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믿는 마음이 없었다면 방금 전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말하자면 악우왕이 승리를 거둔 일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일로 인해서 악우왕이 점차로 공력의 새로운 경지에 접어 들 것인지는 그의 노력이나 깨달음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비록 그가 잠깐 동안 포천대마력의 기운을 흡수하기는 했어도 그것을 즉시 활용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의 내공이 높아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사내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포천대마력의 기운을 흡수했다고? 그걸 누가 믿을 수가 있겠느냐?" 백운 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의 현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소?" 사내는 잠시 생각하다가 백운생의 말을 도저히 승복할 수가 없다는 듯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그 공력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이미 당신들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니오?" (……?) 사내는 잠시 생각하다가 얼굴에 문득 음산한 웃음을 떠올렸다. "너의 말이 비록 그럴 듯하기는 해도 우리는 결코 너의 말을 믿지 못하겠 다. 너희들은 방금 전에 암수를 써서 승리한 것이다." 백운생은 담담히 대꾸했다. "당신들의 동료는 잠시 잘못된 판단으로 포천대마력을 이용하는 바람에 스스로 함정으로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기 때문에 나는 굳이 당신들에게 믿으라고는 말을 하지는 않겠소." "흐흐흐……" 사내는 백운생의 말을 무시하고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너희들이 먼저 합공을 펼치고 암수를 썼으니 이제 우리를 원망하 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래는 이렇게 끝을 볼려고 했었으나……" 사내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볍게 뒤로 우수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느닷 없는 변화가 생겨났다. --계속-- #5406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29장 11/20 08:56 286 line 제29장. 영웅(英雄)의 조건(條件) 쾅…… 우두둑…… 사사삭…… 일진의 요란한 소음과 함께 주루의 문과 천정, 그리고 사방의 벽면이 그 대로 부서져 나가면서 그곳으로부터 일제히 십여 명의 사람들이 비쾌한 신 법을 발휘하여 날아와서는 일행의 주위를 일시에 에워싸는 것이었다. 이를 본 일행은 다함께 안색이 변했다. 바로 지금 나타난 사람들은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에 빈민가의 주루에서 일장의 격투를 벌이고 물러갔었던, 검귀를 포함한 십귀(十鬼)였던 것이었 다. 보아하니 그 검귀는 잘려나간 오른팔 아래를 두툼한 천으로 칭칭 감싸 고 있는 중이었다. 장검이 오른 허리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 그는 좌수검(左手劍)을 쓰려는 모양인데, 아까도 보았었지만 그의 좌수검은 오 히려 우수검보다도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를 상대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고 할 수가 있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일행은 거의 전적으로 백운생을 믿고 의지하다시피 하 고 있는데 이들의 숫자가 이렇게 많아진다는 것은 일행에게 있어서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이 네 명의 괴인들과 십귀와의 관계였다. 원래는 다 를 것으로 생각했었던 이들이 서로 벌써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말인가? 그 렇다면 여기에 처음부터 어떤 음모가 개입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에 혹시 십귀가 혼절하여 누운 악우왕을 건드리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 면서 무구가 입을 열어 노인에게 물었다. "대체 당신들은 누구죠?" 그 말에 노인이 음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 어리석은 년놈들, 그래 아직도 우리가 누군 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냐?" 헌데 이때 백운생이 담담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천만에! 나는 이미 당신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소. 게다가 당신들의 의도까지도." 백운생은 노인 등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바로 무림오흉(武林五兇)이 아니오? 당신은 바로 그들의 우두 머리인 천수인도(千手人屠) 금풍백(金風白)일 것이고?" 그렇다. 기실 배운생은 처음에는 강호사에 대해서 거의 문외한이었다가 이번에 강호에 출도하게 되어서 일부러 서책과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강호 인들에 대해서 알아두었었기 때문에 능히 이들의 신분을 알 수가 있었다. 옥수성심을 찾기 위해서는 자연 사람들을 알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백운생은 이어 찬찬히 나머지 사람들의 신분에 대해서도 말하기 시작했 다. 먼저 말했듯이 백발의 노인이 오흉의 우두머리였고 천수인도 금풍백이라 는 명호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 그대로 암기와 음모술수의 명인이었다. 그 야말로 계략가이며, 음흉하기 짝이 없는 대흉인(大兇人)이었던 것었다. 이어, 오독두타(五毒頭陀) 나귀(羅鬼), 바로 대머리에 땅딸보를 하고 있 는 사람으로 무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독에 관한한 일가견이 있어서 강호 에서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사용하는 자살독강(紫煞毒 ) 이라는 것은 그저 스치기만 해도 뼈와 살이 녹아서 즉사하고 만다는 극렬 한 무공이었다. 쌍두사(雙頭蛇) 반송(潘松)! 바로 조금 전에 백운생과 말다툼을 하던 얼 굴이 두 개로 갈라져 있는 사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남자 의 성과 여자의 성을 한몸에 다 갖추고 있는 음양인(陰陽人)이라고 하는 데, 성격이 괴팍하여 자신이 남자로 지내는 날과 여자로 지내는 날을 정해 두고 살고 있다고 하며, 게다가 음양마(陰陽磨)라고 하는 괴이한 무공에 정통하고 있었다. 그 역시 숱한 부녀자와 가정을 파괴하고 살해한 대표적 인 흉인이었다. 권마(拳魔) 막굉(莫宏)! 바로 조금 전에 어이없게도 악우왕과 대결을 벌 이다가 포천대마력을 쓰는 바람에 악우왕의 금단공에 당하고 말았던 죽은 거한이었다. 그는 성격이 급격하여 쉽게 살인을 하고 방화와 간음을 하는 등의 악행을 저질러 왔었다. 천면호(千面狐) 호미(胡美)! 바로 네 사람 가운데에서 요염하고 색정적으 로 생긴 젊은 여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섯 명의 흉인 가운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여자로서, 비단 변장술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채양 보음(採陽補陰)의 비법 따위의 사술에 능하여 공력이 강하고, 게다가 온갖 사악한 짓을 하여 천하의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고 있는 색녀(色女)요, 악 녀였다. 그녀는 현녀공(玄女功)과 현녀산수(玄女散手)라는 무공에 능했다. 물론 여기까지 백운생이 그대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백운생은 다만 각기 그 사람들의 이름과 신분만을 말했을 뿐이었다. 원래 이들 십귀와 오흉은 무림흑도의 거의 대표적인 악인들이기 때문에 일단 그들의 정체가 밝혀지면 누구나 쉽게 이름들을 알 수가 있었다. 오흉이 각기 특색이 있는 무공을 지닌 최절정의 흑도의 고수들이라면, 십 귀는 비록 절정의 무공을 지니고 있으나, 각기 병기를 지니고 검귀(劍鬼), 도귀(刀鬼), 창귀(槍鬼), 곤귀(棍鬼)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 자들이 었다. 물론 우두머리인 검귀와도 같이 나머지 인원들도 각각의 병기에 타 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사이한 공력을 쌓은 자들이었다. 원래 전의 주루 에서 백운생에게 앞이 가로막힌 사람은 도귀였다. 이어 백운생은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신들의 계획된 연극이 아니오?" 그 말에 천수인도 금풍백, 백발의 매부림코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 다. "뭐가 계획된 연극이란 말이냐?"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우선 당신들이 우리의 앞에 번갈아서 나타났던 시기는 너무나도 공교롭 고 기이하여 결코 예사로 볼 수가 없소. 그리고 당신들은 처음부터 그 모 든 계획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살인멸구(殺人滅口)의 수법으로 자신들의 수하를 제거했으며, 게다가……" 백운생은 천면호 호미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바로 전에 우리의 앞에 나타나서 술을 사주었던 그 여자였던 것 이오. 당신은 일부러 다른 사람과 짜고 변장하여 우리의 눈을 속였으나 나 의 눈은 속이지 못했소. 당신의 동료인 저 오독두타가 독을 풀었던 것이 결정적인 증거요." "호호호, 그렇게 생각하나요?" 천면호, 일명 천의 얼굴을 가진 불여우인 호미는 일순 간드러지게 허리를 움직이며 웃고는 오히려 색정적으로 되묻는 것이었다. 결코 부정은 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묻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진위를 잘 알아차리기가 힘들었 다. 백운생은 금풍백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 황오를 죽였던 자나 저번 술집의 주인이나 그 밖의 사람 들도 보이지 않는데 그 모든 것들이 증거가 되는 것이오. 당신들은 ㅇ마도 우리를 자연스럽게 제거하려고 그런 연극들을 꾸몄을 것이오." "흐흐흐……" 백운생이 낱낱이 증거를 들어서 말했는데도 금풍백은 오히려 음흉하게 웃 으며 대꾸했다. "너는 단지 우리가 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고 그런 결정을 내리는 모양 인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원래 우리 십귀와 오흉은 한통속인 것 이다. 대체 우리가 너희들을 무엇 때문에 희생을 감수해 가면서 일부러 제 거하려고 하겠느냐?" "……" 금풍백의 말은 계속되었다. "너의 말은 크게 허점을 가지고 있고, 어폐가 있다. 너의 그 말로는 누구 도 믿지 않을 것이며, 또한 사실도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다만 각각 너와의 사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너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힘을 합친 것이다. 우리는 십귀가 너에게 당했다는 것을 알고 미리 합공할 수 있도록 계획을 꾸몄던 것이다." 일행은 금풍백의 말에 다소 곤혹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말을 듣자니 그 또한 매우 그럴 듯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드물지만 이러한 공교로운 일은 능히 일어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 중에서 백운생만은 달랐다. 그는 담담히 웃으며 대꾸하는 것이었 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덤벼들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리고 모든 사실은 저기에 있는 천면호를 제압해서 심문해 본다면 명백해지 겠지만 나는 이미 확신하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 다." 이에 문득 천면호가 다시 요요한 음성으로 간드러지게 웃으며 입을 열었 다. "뭐라구? 호호호, 대담도 하셔라. 그게 정말인가요? 지금의 상황을 모르 고 있으신 모양인데, 내가 이렇게 하기만 해도 당신은 꼼짝할 수가 없어 요. 안 그래요?" 말과 함께 호미는 즉시 간드러진 허리를 놀려 번쩍 하더 니 어느새 악우왕이 쓰러져 누워 있는 곁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설사 악우왕이 지금 깨어 있다고 해도 그녀를 당할 수가 없다는 것은 명 백했다. 이에 일행은 다 함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바야흐로 그들이 모두 걱정하 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백운생은 몸이 결코 두 개가 아니다. 그 가 한쪽에 신경을 쓰다보면 다른쪽은 당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 별안간 백운생의 신형은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악우왕 의 곁에 불쑥 나타났다. 이에 거의 그 곁에 이르렀던 호미는 일순 눈앞에 백운생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하여 안색이 변하고 몸이 굳어졌다. 실로 이토록 귀신같은 신법을 그녀는 아직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백운생은 신형을 바로 세우더니 싸늘한 음성으로 장내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잠깐! 내 지금 분명히 말하건대 이제부터 어떤 허점을 노려서 나의 동료 에게 해를 가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목숨을 보장받을 수가 없을 것이 니 명심하도록 하시오!" 이 백운생의 말은 여태까지 그에게 없던 준엄한 기운이 서려 있어서 실로 모든 사람들의 발길을 묶어 놓기에 충분한 것 같 았다. 장내의 공기는 일시에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백운생의 이른바 살인선포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그렇듯이 그의 말을 무시하고 어떤 허점을 노리려 는 약삭빠른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악!" 한 차례의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무구 등의 뒤에 서 있던 십귀 중의 하 나가 갑자기 병기를 들고서 움직이는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말하자면 원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백운생의 일행들도 백운생의 준 엄한 말에 일시 젖어서 넋을 잃고 있었는데,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뒤에 서 암습을 펼치려던 한 사람이 백운생의 무공에 당하고 만 것이었다. 물론 그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라 전신의 대혈이 제압당해 꼼짝할 수가 없는 상 황이 되어 있었다. 비록 아까는 백운생의 위엄에 눌려 있기는 했어도 설마하는 마음들을 갖 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장내의 분위 기가 다시 한번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백운생이 다시 소리쳤다. "내 말은 거짓이 아니오. 이번에는 비록 죽이지 않고 혈도를 제압한 것이 지만, 다음부터는 용서하지 않을 테니 모두 점잖게 물러가도록 하시오!" 기실 백운생이 그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상대의 혈도를 점할 수가 있었다 고 하는 것은 거의 믿을 수가 없는 능력이었다. 게다가 이제 다시 그가 소 리치자 우두머리인 금풍백의 안색이 변화하며 다소 주저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허나 이윽고 그의 안색은 간악하게 변해서 외쳤다. "모두 한꺼번에 덤벼랏!" 그것은 물론 악우왕의 곁에 있는 천면호를 제외하고 하는 말이었다. 백운 생은 약속을 했으니 천면호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녀를 해하지는 않을 것 이다. 그러나 천면호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백운생도 그녀를 경계하여 움직 일 수가 없게 되는데, 그가 그러한 상태에서 먼 거리에서 일행을 보호한다 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금풍백은 생각한 것이었다. 순간 일언지하에 나머지 이흉을 비롯한 구귀의 신형이 비호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좌선비, 호덕승, 무구의 삼인을 향해 무섭게 덮쳐 들었다. 원래 그들 삼인의 무공은 이흉과 싸운다고 해도 이기기 어려운 형편이었 다. 게다가 구귀마저 거기에 합세하게 되자 그들의 필살적인 공격에 세 사 람은 강호에 나와서 처음으로 무서운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의 공격은 평범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네가 죽고 나 도 죽는 필사적인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간에 이들 사이에 이처럼 심각한 원한 관계가 맺어져 있었다는 말일까? 아니면 흑도 무리들의 속성이 이처럼 악 착같고, 한번 틀려진 일은 피를 보고야 마는 것이어서 글허다는 말인가? 호덕승 등의 삼인은 이미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스스로의 공력을 최대한 으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저마다의 최대의 무공으로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번---- 쩍! 그 세 사람이 서 있는 부근에서 마치 원형의 황금빛 뚜껑과도 같은 기운 이 느닷없이 일더니 일 순간 급격하게 확대되며 사방에서 덮쳐들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대로 확산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소리는 거의 일지 않았 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살벌하게 짓쳐들던 십여 명의 사람들은 급격하게 움직 임이 굳어졌고, "으아아악!"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이 비명 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의 고요가 깃드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후다다닥…… 빠른 파공음과 함께 금풍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밖으로 부리 나케 달아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실로 이와 같은 광경은 꿈만 같았다. 막상 정면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었 던 일행들도 처음에는 이를 믿을 수가 없어서 일시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윽고, "우리 잠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깁시다." 백운생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호덕승, 좌선비, 무구는 정신 번쩍 들 어서 크게 놀라고 기뻐하며 허겁지겁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우선 악우왕의 신형을 잘 보호하는 일이 었다. 이미 천면호 등은 달아나 버린 지 오래이고, 악우왕은 그 난리 속에 서도 아직 혼절한 채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호덕승 등은 우선 급히 그 의 어깨에서 샘솟듯 뿜어져 나오는 피를 지혈시키고 대강 피를 닦아주며 붕대로 감아 주었다. 아무튼 그는 이렇게 되기가 정말로 다행이며, 그 통 에 무예의 또다른 경지에 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는 실마리를 자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이때는 이미 주루의 사방은 정신없이 변해 있었고, 살아서 남아 있는 사 람은 거의 없었다. 문득 무구가 소리쳤다. "앗, 저리 좀 봐요!" 일행은 무구의 손짓에 따라서 시선을 돌리다가 일순 다 함께 안색이 가볍 게 변했다. 아까 백운생에 의해서 혈도가 제압되었던 십귀 중의 한 사람, 그의 얼굴 이 어느 틈엔가 시커멓게 변해서 숨을 쉬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알고 보니 어느새 그의 치명적인 사혈(死穴)에는 동전 모양의 암기 하나가 깊숙 히 박혀 있었고, 벌써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일행은 다 함께 섬뜩한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백운 생이 있어서 든든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살벌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행동 은 저로 소름이 끼치는 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금풍백은 그 십귀 중의 하나가 혈도가 제압되어 있어서 급히 달아나지 못함을 알고 그 자의 입을 막기 위해서 손수 암기를 던져서 그 자를 제거했던 것이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항상 무공만을 익혀 왔고, 거의 흑도의 무림에 접근해 보지 못했던 호덕승 등은 이에 절로 가슴이 떨 리고 한숨이 나오는 것을 금할 수가없었다. 무림의 영웅(英雄)은 무공이 높고 공력이 깊다고 해서 절로 생겨나는 것 은 아니다. 실로 치열하고도 살벌한 무림의 현장에서 무수한 고난과 음모, 함정 속을 거치면서 형극의 가시밭길 속에서 비로소 태어나는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일단 영웅이 나타나면 그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지만, 그 러나 그가 그만큼 되기까지의 무수한 고통과 노력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영웅의 길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 형극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려고 꿈꾸고 있는무수한 젊은 소년소녀들이 순수한마음으로 자라나 고 있을 것이다. 일행은 대충 악우왕의 몸을 치료하고 백운생의 인도로 다른 곳으로 자리 를 옮기기 시작했다. 남루에서 객점도 예약해 두었지만 주루의 내부가 그 지경이 되었으니 그 곳에서 묵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일행은 이번에는 비교적 골치 아픈 일을 피하기 위해서 주루는 피하고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 객점에 들었다. 그 객점의 이름은 평통객점(平通客店)이었다. 평통객점! 평통객점에 들자 우선 일행은 악우왕을 침상에 눕히고 약방에 가서 약재를 사다가 약을 다리는 등의 악우왕의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했 다. 이 악우왕은 비록 심한 탈진으로 쉽게 혼절에서 깨어나지는 못했으나 체력은 워낙 튼튼하여 갈수록 빠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일행은 이 평통객점에서 상방으로 세 개를 빌렸다. 좌선비가 내세우는 주 군의 이론이 받아들여져서 우선 여자인 무구가 하나의 상방을 쓰도록 하 고, 역시 백운생이 하나의 상방을 쓰며, 나머지 하나의 방은 호덕승과 좌 선비가 악우왕과 함께 쓰면서 그의 치료를 담당하기로 했다. 물론 오늘밤의 자정에 조부자의 집에 가야 하는 것을 일행 중의 아무도 잊지 않고 있었다. 일행이 이렇게 객점 등에 머물면서 필요한 경비의 대부분은 집안이 유복 하고 돈 걱정이 없는 호덕승이 기꺼이 부담했다. 그가 간혹 악우왕에게 음 식값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단순히 농담이지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호덕승은 설사 지금보다 열 배의 돈을 쓰고 다닌다고 할지 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 호덕승은 여러 가지 잡다한 재주가 많아서 의술에도 약간의 배 운 바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악우왕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활약을 하고 있었다. 물론 백운생은 무구와 함께 그 방에 있으면서 악우왕이 깨어나기를 기다 렸다. 헌데 역시 쉽게 깨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일행은 다소 초조한 기분이 들 었다. 혹시 이 일로 조부자의 집에 가는 일이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까 하 는 걱정 때문이었다. 일행은 이제 사흉(四兇)과 구귀(九鬼)가 노리고 있을까 두려워서 백운생 과 떨어져 있을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최소한 그들이 이곳 장사성에 머물고 있는 동안은 그럴 것이다. 때문에 나중에도 악우왕이 깨어나지 않 으면 일행은 그를 떠메고 조부자의 집에 가야 할 것인데, 그거이 어찌 좋 은 모양이겠는가! 원래 아까 백운생이 사흉과 구귀를 모조리 제거해 버렸으며 속이 시원했 었겠지만, 기실 백운생은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생각해서 차마 죽이지 못 하고 약간의 내상을 입혔을 뿐이었다. 헌데 이때 문득 문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무심결에 일행은 다소 흠칫하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시키신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이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아서 미리 시키고 들어왔던 음식들 이 이미 다 된 모양이었다. 따라서 일행은 즉시 문을 열어주며 저마다 서 로를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헌데 그때였다. 향긋한 음식의 냄새가 스며들기 시작하자 느닷없이 혼절 해 누워 있던 악우왕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아이구, 배고파. 왜 이제야 음식을 가져오는 것이지? 어어, 근데 여기는 또 어디야? 내가 왜 누워 있는 거지? 그리구 그 녀석들은 어디로 갔어? 그 죽일 놈을 내가 죽이기는 했었는데. 그럼…… 내가 여태 기절하고 있었 나?" 일행은 이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속-- #5409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30장 11/21 09:35 298 line 제30장. 옥수성심(玉手聖心)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에 일행은 악우왕에게 아까 그가 백운생의 도움을 받았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물리쳤었다는 얘기를 하는 데에 화 제를 모았다. 그 얘기를 듣던 악우왕은 처음에는 크게 놀라고 신기해 하더 니, 나중에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뭔가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았는지 고 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다. 이에 호덕승이 웃으며 말했다. "형님, 이제는 우리보다 무공이 높아질 것이니 좋겠수?" 헌데 악우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 그게 말이야, 그런데 그때의 상황을 내가 기절하는 바람에 그만 잊어버린 것 같단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이것을 보고 백운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깨달음은 쉽가 얻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니 깊이 생각해 보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그리고 좀더 폭넓게 생각하도록 하고." 그 말에 악우왕은 문득 공손한 태도로 백운생을 향해 고개를 숙여 말하는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아마도 제가 이런 것을 깨달을 것 같으니까, 일부러 마음을 졸이면서도 저를 도와주지 않으신 것이었죠?" 백운생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글쎄……" 악우왕은 다소 쑥스러운 듯이 즉시 화제를 돌렸다. "참, 이제는 설마 놈들이 다시 여기에 나타나지는 않겠지?" 일행은 오랜 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면서 아까 남루에서 있었던 그 뒤의 상황 을 얘기하고, 그리고 나서 나중에는 옷을 새로 갈아입는 등의 조부자의 집 에 갈 준비를 했다. 과아아아앙…… 과아아아앙……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웅장한 소리로 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즉, 자 정이다. 사위는 칠흑같이 어둡고 길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런데 이 어두운 심야에 마치 소리 없는 야조처럼 빠르게 신형을 날리며 골목길을 돌아서 급하게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백운생의 일행인 다섯 사람들이었다. 순라꾼들의 눈을 피해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호덕승은 계 속해서 악우왕을 향해 불평을 털어놓고 있었다. "형님, 내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글쎄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마셔가지고 이렇게 속을 썩이는 거유? 빨리 출발해야 한다니까 조금 만 더 자겠다고 하더니 이렇게 시간이 늦어지게 되지 않았소?" 악우왕은 악우왕대로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너무 그러지 마라. 내가 뭐 그까짓 술에 취해서 그런 줄 아느 냐? 난 이래봬도 여태 술을 마시고 취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란 말이야. 왜 그래? 단지 조금 피곤해서 누웠었을 뿐인데, 겨우 고것도 이해를 못하겠다 는 말이냐?" 호덕승이 답답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무리 내가 이해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만일 우리가 너무 늦게 가서 그 옥수성심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때는 형님이 책임지겠소?" 악우왕은 조금 수그러드는 표정이었으나 금방 다시 발끈했다. "아, 내가 나중에 책임지면 될 게 아니야!" 이때 옆에서 함께 신형을 날리던 좌선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얘기 그만하고 어서 가도록 합시다. 여기서 그런 얘기를 한들 무슨 소용 이 있겠소? 자, 대형은 이미 저 앞에 가고 있으니 어서 따라갑시다!" 그러고 보니 백운생은 마치 산보를 하는 듯한 유유한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기이할 정도로 빨라서 그 뒤에 간신히 무구가 허공을 날며 뒤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연대부운(蓮臺浮雲)! 무구는 이미 아미파의 무공인 연화관음선공을 거의 성취하여 최고의 신법인 연대부운을 펼칠 수가 있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 다. 기실 그녀가 비록 여자여서 여러 번의 싸움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정 밀하게 따지자면 그녀의 무공이 오히려 악우왕 등보다도 나은 것이라고 말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의 무공은 기 초가 매우 튼튼하고 가장 확실한 사부의 아래에서 배운 무공이기 때문이었 다. 지금 여자라서 신법에 능한 이유도 있지만, 신법의 경지가 가장 앞서 가고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는 것이었다. 함께 입씨름을 벌이던 악우왕과 호덕승은 이에 기가 죽어서 좌선비와 함 께 그 뒤를 바싹 쫓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앞서가던 백운생이 어떤 거대한 저택의 담 옆에 신형을 멈춰 세우 자 다른 사람들도 그 옆에 차례로 내려섰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 고래 등같이 거대하게 지어져 있는 저택이 조부자의 집이었던 것이었다. 무구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우리가 도둑이 되는 수밖에." 그렇다. 그들이 옥수성심을 만나러 왔다고 모두에게 알리고 당당하게 들 어갈 수는 없는노릇이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일을 시끄럽게 만들 뿐일 것이고, 옥수성심 심낭자도 이를 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무구를 비롯하여 일행 모두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자 백운생은 그 자리에 서 마치 깃털처럼 흔적없이 신형을 위로 솟구쳐 올렸다. 이 조부자의 담장은 높이가 무려 삼 장이나 되는 높은 것이어서 일반의 사람들은 쉽게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야, 정말로 멋진 신법이로군!" 악우왕이 내심 감탄을 하며 스스로 두 번째로 신형을 허공으로 힘차게 띄 워 올렸다. 비록 아직 빙허임풍의 경공을 제대로 펼칠 수는 없지만 한 순 간에 가볍게 몸을 솟구쳐 올리는 일는 가능했다. 그의 뒤를 이어서 나머지 사람들도 속속들이 위로 몸을 솟구쳐서 가볍게 담장 위에 몸을 세웠다. 바라보니 백운생은 조금 그늘진 곳에서 허공을 밟으며 둥둥 떠 있었다. 그의 그러한 모습은 전혀 형체가 없는 것처럼 가볍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고 악우왕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우리는 언제쯤이나 저렇게 될 수가 있을까? 이 생애에 가능하기나 할까? 대체 저러한 경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로군." 호덕승도 동감인 듯 웃으며 백운생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그렇다. 이 조부자의 저택은 워낙에 넓어서 대체 어느 곳이 조부자의 노 모가 누워 있는 병실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섯 사람이 나서서 찾기로 한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 사이에 시간이 너무 흘 러서 자칫 옥수성심이 돌아가 버리가라도 한다면 이것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이다. 악우왕도 걱정이 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 가서 옥수성심을 찾는다지? 이거 미리 알아둘 것을 잘못했는 데!" 호덕승이 다시 핀잔을 주었다. "형님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아서 좀더 일찍 왔었더라면 상관없었을 것이 아니오?" "그, 그렇군." 악우왕도 이번에는 할말이 없는지 고개를 숙였다. 헌데 백운생은 이것을 보고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금방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무구가 물었다. "그건 어떤 방법이죠?" 백운생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비록 많은 방들이 있지만 역시 주인도 옥수성심이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기에 편하도록 만들어 두지 않았겠소?" 악우왕이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럴 법하네요." 백운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럴 법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야. 자, 그럼 내가 먼저 가서 알아볼 테니 여기에서 잠시 서서 기다리고 있도록……" 백운생의 신형은 말이 끝나는 순간에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을 보고 좌우로 급하게 신형을 돌려서 바라보던 악우왕이 즉시 엄지 손가락을 내밀며 호덕승 등에게 말했다. "정말 볼수록 대단한 무공이야. 도대체 어떻게 그런 무공을 펼칠 수가 있 는지 불가사의할 정도라는 말이야!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점이 또 하나 있 어." 무구가 웃으며 물었다. "그건 뭐죠?" 악우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의 형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공이 우리 보다 못했던 사람이었어. 그런데 아무리 특별한 공부를 했다고 해도 그렇 게나 빠른 성취를 보일 수가 있을까?" 호덕승이 대꾸했다. "그건 백씨 일문의 특수한 자질을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니겠소?" 악우왕 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형님의 무공은 벌써부터 배워온 그 둘째공자 백운룡보다도 높아 진 것을 보면 전저그로 그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어. 당연히 그렇다면 둘째공자보다도 무공이 낮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 그야말로 우리 대형의 무공 성취 속도는 고금제일(古今第一)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거야." 무구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대가께서는 앞으로 불세출의 대영웅이 되실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군요?" 악우왕이 힘차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따라서 우리들도 그 커다란 별의 옆에서 보좌하는 소영웅(少 英雄)들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이야. 물론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 지겠지만 말이야." 좌선비가 나서서 말했다. "나는 우리가 대형과 비교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내가 아무리 낮 게 보려고 해도 역시 대형의 능력은 불가사의하고 무림사(武林史)에 커다 란 변화를 가져올 것이 틀림이 없소. 따라서 나는 오직 형님께서 그런 사 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오." 호덕승이 웃으며 말했다. "좌아우는 늘상 거의 지나칠 정도로 형님을 위하고 있으니 그런 말이 나 올 만도 하지. 우리가 좌아우의 말대로 한다고 해도 손해는 없을거야." 이때 악우왕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또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단 말이야." 무구 가 웃으며 물었다. "그건 또 뭐죠?" 악우왕이 다소 정색을 하고 말했다. "형님은 그 무공 성취 속도도 남다를 뿐만 아니라 가만히 보면 얼굴도 그 의 사촌형제들과 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익 우리 형님에게 뭔 가 다른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야?" 무구가 놀라서 다시 물었다. "다른 일이라뇨?" 악우왕이 말을 다소 더듬었다. "음…… 말하자면……" 호덕승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님께서 부정을 저지르셨다는 말씀입니까?" 악우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게 아니라 형님께서 그분의 친자식이 아니라 양자로 맞아들여진 것 이 아닌가 하는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 형님의 능력이 워낙 발군으로 뛰어나니까 말이 야." 호덕승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형님께서 워낙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은밀히 조사를 해보니 그것은 엉터리같은 생각에 불과했어요. 동심각은 백씨 일문의 본가이기 때문에 형님께서 잉태되시고 태어나셨으며 나중에 어머님의 품에 안기셔서 아마파로 가셨었던 일 등은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직접 그것을 보신 사람들이 많아요. 세상에 아무리 거짓이 난무해도 이것만큼은 진실이죠." "……" "특히 조부님께서는 자신의 장손이기 때문에 유독 관심이 많아서 잉태되 시고 태어나시는 당시의 일이나 어머님께서 아미파로 데리고 갈 때까지의 모든 일에 있어서 거의 항상 주시하고 귀여워하셨기 때문에 형님께서 양자 일 가능성은 전무(全無)해요. 만일 그렇다면 조부님께서 어찌 모르겠으며,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셨겠어요?" 악우왕이 물었다. "하지만 양자라도 일부러 후계자로 삼는 일도 있을 수가 있지 않을까?" 호덕승은 고개를 저었다. "만일 조부께서 형님을 어떤 일에 이용하려고 하셨다면, 결코 이번의 혼 사를 맺는 것이나 무공을 높혀 주신 일, 그리고 후계자로 공표하시는 일 등은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저는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생각을 많이 해 보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가 있어요." 악우왕은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 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얼굴이 조금 다른 것은 어떻게 해명할 수가 있을까?" 호덕승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선친의얼굴을 많이 닮으셨겠죠. 그리고 과거의 예를 들어보면 백씨 일문에서 간혹 위대한 성자(聖者)가 나타나시곤 했었는데, 그분들의 용모나 품성은 아무래도 남달랐었다는 거예요. 그것은 훌륭한 인재라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가장 훌륭한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것이죠." "……" "말하자면 돌연변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큰형님은 백씨 일문의 우수한 피 를 받아서 더욱 훌륭한 인재가 되셨으니 백씨 일문에 있어서도 지극히 경 사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무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악우왕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위대한 백씨 일문의 자손이라는 말인가?" 무구가 웃으며 대답했다. "무림의 불세출의 대영웅이 되실 분이기도 하구요." 헌데 그때였다. "누가 대영웅이라고?" 허공에서 한 줄기 느닷없는 음성과 함께 백운생의 신형이 마치 솟아나듯 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무구 등이 얼굴을 붉히며 반겼다. "오셨군요. 그래, 장소는 찾으셨나요?" 백운생의 표정은 밝았다. "물론이지. 자, 별로 시간이 없으니 나를 따라서 함께가도록 합시다." 말과 함께 백운생은 허공을 지나서 건물의 그림자 사이로 느릿하게 나아가 기 시작했다. 무구를 제외한 일행은 그렇게 허공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백운 생의 뒤를 따라서 건물의 요소요소를 밟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사위는 고적했다. 그리고 일행의 신법은 워낙에 고명하여 전혀 소리를 내 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잠시 후에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운생이 조부자 노모의 병실을 찾았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병실. 그것은 그리 크게 화려한 곳은 아니었지만 저택 후원의 아주 경치 가 좋은 조용한 하나의 별채 안에 꾸며져 있었다. 물론 지금 그 주위는 무 수한 등불이 밝혀져서 마치 대낮처럼 훤한 상태였다. 일행은 굳이 밑으로 오가는 하인들이나 조부자집의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 지 않아서 우선 병실의 지붕 위에 올라가서 몇 개의 기와장을 들어내고 안 을 엿보았다. 순간 악우왕이 다소 놀란 듯이 전음으로 백운생에게 입을 열어왔다. "앗, 옥수성심이 이미 나타난 것 같습니다." 백운생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의 내부는 매우 단초롭게 꾸며져 있었다. 그것으로 지금 병상 위에 누운 환자의 성품을 알 수가 있을 듯했다. 창문은 열려서 달빛이 부드럽게 비춰들고 있었고, 창문과 가까운 구석에 침상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 한 명의 피골이 상접해 있는 노파 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리고 방문은 열려 있었고 대신 문발이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지금 환자가 누워 있는 침상의 앞에 한 명의 황의인(黃 衣人)이 가면(假面)을 쓰고 앉아 있었다. 황의인! 모르긴 해도 바로 이 사람이 소문에 들리는 옥수성심인 것 같았 다. 황의인은 지금 노파의 손을 잡고 진맥을 하고있었다. 게다가 지금 방의 주위에는 어떤 사람도 얼씬거리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 은 바로 황의인 옥수성심의 주문인 것 같았다. 헌데 백운생은 지금 노파의 손을 잡고 진맥을 하고 있는 옥수성심의 작고 아름다운 섬세한 손길이 매우 눈에 익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백운생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과 현실은 맞아떨어지는 것일까? 문득 황의인의 손길이 변해서 노파의 손목을 내려놓더니 마치 환상(幻想) 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그물같은 밝은 지풍을 날려 노파를 치료 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간은 상당히 오래 지나갔다. 비록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황의인의 손 속이 점차로 무겁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공력을 소모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지금 백운생만은 황의인이 펼치고 있는 밝고 부드러운 지풍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백운생은 이미 동심각의 자신의 장원에서 필요한 지식들을 서책 등을 통해서 습득했던 터였다. 일양지(一陽指)! 그것은 성수거의 선천공(先天功)에 이어지는, 환자를 치 료하는 데 지극한 효과를 발휘하는 지법으로, 효과가 큰 만큼 한번 시전하 는 데 있어서 공력의 소모 또한 매우 심한 만큼 쉽게 시전할 수가 없는 불 리함이 있었다. 황의인이 지금 자신의 공력의 소모도 불사하고 노파를 치료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희생정신이 강하다는 말이고, 또한 그것은 그가 틀림이 없는 성수거의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금단공을 배우지 않으면 금삽수 를 전개할 수가 없는 것처럼 성수거의 선천공을 배우지 않고는 일양지는 펼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황의인은 옥수성심 심낭자가 틀림이 없을까? 이윽고 황 의인은 일양지의 치료가 끝이 나자 쌍수를 노파의 가슴 정도의 허공에 고 정시킨 다음에 엄숙한 눈빛으로 다시 기운을 쓰기 시작했다. 노파는 여전 히 혼절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원래 이 노파와 같이 몸이 노쇠하고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는 방금 전에 황의인이 한 대로 일양지의 공력으로 전신 대혈과 십이정경(十二正經), 기 경팔맥(奇經八脈) 등을 두루 관통시킨 다음에 보다 다른 방법으로 활력과 신체의 저항력을 증대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실로 이러한 방법은 실제로 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만큼 효과가 있 어서 다른 천하의 영약을 사용하는 것과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천하의 영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는 노파의 노환도 능히 고칠 수가 있고, 또한 그 수 명을 최소한 십년 정도 늘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요점은 성 수거의 선천공의 기운이 사람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황의인이 펼치고 있는 쌍수의 아래에서 돌연 노을빛과 같 은 서광(瑞光)이 점차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둥글게 공처럼 노파의 육신을 휩싸고 돌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노파의 육신은 마치 노을빛으로 보였고, 게다가 잠시 후에는 노파의 신형이 침상 위에서 둥실 허공에 떠올 라 천천히 좌우, 혹은 상하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치료 방법은 실로 기이하여 좀처럼 보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바로 반선수(反禪手)라는 것으로, 역시 선천공에 이어지는 성수거의 대표적인 무공의 하나이며, 사람을 치료하고 활력을 심어주는 데 있어서 놀라운 효 과가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잠시 후에 노파의 신형은 다시 천천히 침상 위로 내려졌고, 황의 인의 쌍수에서 뻗어ㅏ오던 그 노을빛 광채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자 황의인은 다소 피로한 듯이 상체를 가볍게 휘청거린 다음에 품속 에서 하나의 누런 빛깔의 단환을 꺼내서 노파의 입 속에 집어넣었다. 아마 도 그 단환은 노파의 입 속에서 저절로 녹아버렸는지 노파의 목구멍에서 꿀꺽하고 단환의 액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이제 노파의 전신에는 은은한 활력이 넘치기 시작하고 있었고, 황의인의 치료도 대강 끝이 난 것 같았다. 아마도 이전에 다른 치료도 했었을 것이다. 황의인은 이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이 상체를 가볍게 움직였다. 이것을 보고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악우왕 등은 다소 초조한 마음이 되어 서 내심 생각했다. (그는 지금 떠나려 하고 있는데 혹시 지금 우리가 그의 앞에 나타나야 하 지 않을까?) 헌ㄷ 그때였다. 황의인이 문득 몸을 가볍게 경직시키더니 이 렇게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오셨으며 이제 그만 들어오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벌써 우리를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악우왕 등은 일시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운 점은 바로 그 순간에 백운생 의 신형이 어느새 황의인의 뒤쪽에 내려서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계속-- #5412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31장 11/22 20:15 304 line 제31장. 실종(失踪) 백운생은 입가에 담담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의 황의인의 그 음성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어디서 들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낯설은 느낌은 일지 않는다. 그것은 어쨌거나 그가 이전에 그 음성을 들은 경험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 백운생은 황의인의 근처에 이르자 절로 깊은 유향(幽香)이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옥을 굴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서도 알 수가 있었지만 그 황의인은 틀림이 없는 여자이고 또한 순결한 처녀일 것이다. (심낭자……) 백운생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전에 만난 적이 있지 않소?" "……" 이에 황의인은 천천히 백운생을 향해 뒤쪽으로 신형을 돌렸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은 정면으로 마주쳤고, 각기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에 대해서 어떤 확신을 할 수가 있었다. 황의인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요." 아주 차분하고 조용한 음성이었다. 그 음성은 과거의 어떤 음성과는 대조 적으로 느껴진다. 설마 두 개의 음성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이 황의인은 이미 많은 공력을 소비했기 때문에 매우 피로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백운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우선 자리를 옮기도록 해요." 기실 여기에 있다가 주인에게 들키게 되면 백운생도 곤란해 질 것이다. 황의인이 먼저 창 밖으로 신형을 날리자 백운생도 뒤따라 느릿하게 신형 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그 뒤를 악우왕 등이 소리없이 뒤따랐다. 처음에는 황의인이 앞에서 길을 인도했으나 나중에는 백운생과 나란히 날 리기 시작했고, 다시 그 후에는 오히려 백운생이 길을 인도하게 되었다. 백운생은 평통객점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일행은 이미 평통객점에 세 개 의 상방을 준비해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맞는 데 있어서 별로 부족함 이 없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이윽고 일행이 하나의 상방의 안으로 들어서자 황의인과 백운생은 각기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고급의 탁자 주위에 마주 앉았고, 나머지 사람들도 각기 그 부근에 들어서서 사태를 관망했다. 무엇보다도 악우왕 등은 대체 이 황의인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이 앞서고 있었다. 분명히 아까 말할 때는 서로 한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었 는데, 대체 그들이 서로 어디에서 만났을까 하는 의문도 남았다. 그러나 한 순간 황의인이 자신의 얼굴에 씌어져 있는 가면을 벗어 들었을 때 일행은 저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황의인의 얼굴은 낯 설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극히 고결(高潔)하고 아름다우며 눈부신 미모를 드러내고 있다고는 하나 그 장난끼가 다소 섞인 듯한 아름 다운 봉목과 얼굴의 윤곽에서는 쉽게 누구를 연상시킬 수가 있었다. 그렇다. 서생! 이 황의인은 바로 어제 낮에 빈민가의 주루에서 만나 일행 에게 한 차례 혼란을 주었던 바로 그 거지 서생이었던 것이었다. 과거 그 서생은 워낙 더러웠고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누 구도 그의 용모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그 서생이 이렇게 여장을 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보니 실로 동심각주가 말했던 천하제 일의 미녀(美女)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였다. 이 황의인은 분명히 무구 보다는 아름답고 고결하며 성결한 눈빛마저 가지고 있었다. 일행이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것을 보고, 문득 황의인이 방 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이에 악우왕이 차마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다, 당신이 바로 그 서생이었다는 말이오?" 황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리고 내가 바로 성수거의 하나밖에 없는 금지옥엽(金枝玉葉) 인 심보유(沈寶柔)라는 사람이지요." 심보유! 이름까지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전의 서생의 인상을 눈앞에 떠올리게 되자 일행은 저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문득 악우왕이 백운생에게 물 었다. "그럼 혹시 형님은 미리부터 알고 계셨었던 것이 아닌가요?" 백운생은 담 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어느 정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확신을 내리지는 못했 었소." 악우왕은 물었다. "그럼 우리처럼 조금 전에야 알게 되었다는 말씀이오?"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사실 그 전에 먼저 알고 있었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을 뿐이오." 악 우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그때 그 황금전표를 쉽게 주었었던 것도 기실은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소. 그때는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했으니까." (……?) 악우왕은 도대체 백운생의 말뜻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악우왕은 문득 생각난 듯 심보유를 향해 물었다. "우리 형님은 그 돈으로 당신에게 선물을 사주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 돈이 없으니 선물이 없어서 어쩌나요?" 이에 심보유는 다소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나는 이미 선물을 받았는걸요?" 악우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받았다구요? 아니 그럼 우리 몰래 형님은 당신을 만나서 미리 선물 까지 주고 그랬었단 말이오?" 그 말에 심보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예요. 우리도 지금 처음으로 정식으로 대하고 있는 거예요." 악우왕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 우리 형님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오?" 심보유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서생으로 변장하고 있었을 때에 받았지요." 악우왕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역시 우리 형님은 당신을 미리 알아보고 우리 몰래 선물까지 주었 다는……" 이때 옆에서 호덕승이 가볍게 옷자락을 잡아당겼기 때문에 악우 왕의 말은 중단되었다. "무슨 일이냐?" 호덕승이 안색을 붉히며 말했다. "그게 아니오." 악우왕은호덕승과 심보유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지금 은 자신만이 바조가 되어 있는 듯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아니라니? 그럼 대체 뭐지?" 심보유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마음의 선물이었어요." "마음의 선물?" (그런 것도 있나?) 악우왕이 내심 그렇게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심보유가 웃으며 다시 설명해 주었다. "그때 백대공자께서 저를 찾기 위해서 황금 전표를 아낌없이 쓰지 않았어 요? 그것은 이미 저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니 선물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요. 대신 이 전표는 완전하게 내 돈이니 앞으로 여러분에게 내 가 단단하게 한턱을 내도록 하겠어요." 심보유는 품속에서 예의 그 일만냥 짜리 황금 전표를 꺼내서 흔들어 보였다. 실로 그만한 돈이면 한 턱이 아니라 그것의 수백 수천배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무구가 문득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고마워요, 심소저." 그 태도는 매우 공손해 보였기 때문에 심보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답 례했다. "천만의 말씀이예요. 앞으로 우리는 서로 인연을 맺게 될 것인데, 여러분 들이 저의 부족한 점이 있다면 서슴치 말고 지적해 주기를 바래요." 일행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이 심보유는 결코 그들과 같은 신분의 사 람이 아니었다. 칠패의 하나인 성수거의 금지옥엽인 만큼 가히 하늘과 땅 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일행은 분위기가 왠지 어색하게 느끼고 있었다. 백운생이 담담하게 웃으며 심보융게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알고 있소?" 심보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어요. 당신의 이름은 바로 백운생이 아닌가요?" 백운생은 담담하게 웃었다. "심보유라는 이름은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오." 심보유도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의 이름도 매우 멋져요." 백운생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한 후에 천천히 말을 잇기 시 작했다. "실은…… 나는 솔직히 말해서 천하의 안위를 위해서는 내가 약간의 희생 을 감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러나 나는 지금에 이르러 그것 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소." "……" 백운생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고 보니 나는 희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하에 다시 없을 복을 얻는 것이었다는 사실이오." 심보유는 웃으며대꾸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실은 서생으로 분장하여 당신을 만났을 때 만약 마 음에 들지 않는다면 혼자 멀리 숨어 버리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심보유의 얼굴은 문득 노을처럼 붉어졌다. 옆에 악우왕 등이 서 있기 때 문에 다소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에 눈치를 보고 있던 악우왕 등은 무구와 함께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서 다른 방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실내가 아주 조용해지자 심보유가 문득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제가 정말로 마음에 드시나요?" 백운생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대는?" 심보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이 한쌍의 남녀는 무림인이어서 거의 세속의 예의범절에 구애되지 않았고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심보유가 다시 말했다. "저도 역시 정략결혼의 제물이 되는 것이 싫었지만, 그러나 당신같은 사 람과의 혼인이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좋소." 백운생은 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녀의 작고 아름다운 손을 잡아 주었다. 심보유는 다소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런 어색하고 흥분된 시간이 흘러간 뒤에 심보유가 문득 몸을 일으 켰다. "난 밖에 좀 나갔다가 와야 하겠어요." "……?" 백운생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심보유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가 그를 향 해 고개를 돌리며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에 봐요. 난 당신의 그 여자친구와 함께 잘 것이니까요." 백운생은 편안하게 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나서 얼마 동안의 참선을 하고 나자 실내가 훤하게 밝아왔고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누구요?" 백운생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입고 나자 방문이 열리며 악우왕 등 삼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히 주무셨수, 형님?" 악우왕이 그렇게 말하며 실내를 둘러보다가 일순 의아해하며 물었다. "헌데 그 예비 형수님께선 어디로 가셨소?"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어제 무구와 함께 잤으니 아직도 그녀와 함께 있겠지." 악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까부터 무구가 늦잠을 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랬었 군. 하지만 이거 너무 싱거운 것이 아니오?" 백운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뭐가 싱거운가? 모든 일은 법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지." "그런가?" 악우왕이 고개를 갸우뚱할 때 문득 다시 방문이 열리며 두 명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그 두 명의 사람은 여자였다. 심보유와 무구였던 것이다. 웬일인지 그녀들은 매우 다정한 표정을 하고 함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 는데 심보유가 먼저 백운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잤소만 두 사람은 모두 잘 잤소?" 무구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심보유는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자지 않고 그저 밤새도록 얘기만을 나누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이제는 매우 가까워진 상태죠. 안 그래, 동생?" 무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언니." 아마 그녀들은 벌써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 것 같았다. 백운생이 웃으며 말했다. "잘된 일이오. 헌데 이제 성수거로 가봐야 하지 않겠소?" 성수거. 심보유 의 본가인 성수거는 이곳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남성 설봉산(雪峯 山)의 한 계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렇게 심보유를 만났으니 여자의 집에 갔다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에 심보유는 선선히 　성을 했다. "좋아요. 우리 그럼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 함께 가도록 해요." 서생으로 변장했었을 당시 매우 괴이했던 성격을 경험했기 때문에 일행은 다소 심보유에 대해서 조심하고 있었는데, 기실 심보유의 진짜 성격은 그 리 모나지도 않았고 친절했으며 포용력이 있었고, 또한 사교적이어서 쉽게 일행과 친해졌다. 다만 일행은 그녀를 어떻게 부르는 것이 옳은가 하고 궁리를 거듭했었는 데, 이미 정략적으로 백운생과 맺어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형수님이라는 말로 통일했다. 비록 일행과 백운생과의 사이는 허물이 없을지 몰라도 심보유와는결코 허물이 없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때는 비록 형수님이라고 불러도 주모 (主母)를 대하는 듯이 행동하게 되었다. 그것은 무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계속 언니 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으나 점점 시무룩해지는 것 같았고, 비록 심보 유가 많이 웃으며 분위기를 즐겁게 이끌어도 그리 활발한 표정을 짓지 않 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일행과 심보유와의 첫 만남은 순조롭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서로간의 엄격한 지위가 정해지게 되었지만 분위기는 매우 유쾌하 게 되었다. 그런데 일행이 마악 아침식사를 마치고 짐을 꾸려서 설봉산의 성수거로 향하려고 하는데 백운생은 의외의 잉물과 마추치게 되었다. "아니, 어쩐 일이시오?" 백의중년인, 지금 느닷없이 백운생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동심각에 서 금룡단주의 직위를 맡고 있는 묘수신통 문인중문이었던 것이다. 동심각을 떠나기 전에 그와 작별인사를 했었던 백운생인지라 그가 느닷없 이 이곳에 나타나자 다소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인중문은 잠깐 일행과 심보유 등을 일견하더니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매우 무 거운 안색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각주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 백운생은 의아해져서 심보유를 돌아보다가 다시 문인중문의 얼굴을 바라 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오늘 성수거에 다녀올 것인데 잠시의 시간 을 낼 수도 없는 일이오?" 문인중문은 잠시 주저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실은…… 대공자의 어머님께서 실종되셨습니다." 실종(失踪)! 그 얘기를 듣자 백운생의 얼굴은 금방 창백하게 변했다. 백 운생도 이제는 강호의 험란함에 상당히 익숙해진 터였다. 따라서 자신의 어머니가 비록 아미파에 있다고는 하나 만약 실종되었다면 이것은 보통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바로 백운생의 어머니라면 문인중문의 친누이인 것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리가 있을까? 하지만 느닷없는 일이라 믿을 수가 없어서 백운생은 다시 물었다. "정말입니까?" 문인중문은 상당히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각주께서는 이미 사람을 각처로 보내셔서 대공자의 어머님을 찾고 있습 니다. 그리고 속하에게 급히 대공자를 모셔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문인중문이 백환성의 얘기까지 한다면 이것은 결코 장난이나 거짓말이 아 니다. 백운생은 어이가 없어서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 다. 이때 심보유의 표정도 기이하게 변해 있었으나 그녀는 즉시 웃으며 말했 다.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보시도록 하세요." "……" "우선 어머님의 신변을 보호해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백운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오. 그리고 성수거의 어르신께는 일이 생겨서 부득이 못 뵙고 간 다고, 죄송하다고 말씀을 전해 주시오." 심보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우리 다음에 봐요." 이미 두 사람의 마음이 정해져 있는 이상은 비록 짧은 기간 동안 헤어지 게 되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고 래심줄보다도 질긴 것일 것이므로. 심보유는 마음이 넓어서 짜증을 부리기는커녕 백운생의 어머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맙소." 다른 일이었다면 돌아서서 심보유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 주었을 것이지만 어머니가 실종된 이 마당에 문인중문의 앞에서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 는 일이어서 백운생은 곧장 문인중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어서 가도록 합시다." "예." 문인중문은 허리를 한번 가볍게 굽힌 다음에 즉시 앞장서서 신형을 옮기 기 시작했다. 이른바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여태까지 마치 물이 흐르듯이 순 조롭게 잘 되어가던 행로에 갑자기 제동이 걸린 것과도 같았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백운생은 심보유와 함께 성수거에 들러서 여러 어 른들을 뵌 다음에 심보유를 동반하고 동심각으로 향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다음에는 축복의혼인식을 치뤘을 것이며, 백운생의 후계자의 지위는 결정적으로 굳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실로 야비하여 누구라도 일이 쉽게 잘 되어 가는 것을 용 납하지 않고 항상 복병처럼 나타나서 순탄한 행로에 제동을 걸곤 하는 것 이었다. 심보유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백운생과 함께 따라가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로서는 다음의 상황을 보는 것이 더욱 유리했다. 이미 두 사 람의 사이는 운명적으로 맺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무림명가 (武林名家)의 규수는 그래도 정식으로 혼인의 절차를 밟아야 하지 않겠는 가! 문인중문은 준비성이 대단한 사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미 대로상 에 여러 마리의 말이 끄는 거대한 사두마차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백운생은 생각같아서는 먼저 신법을 펼쳐서 동심각이나 아미파로 향하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라는 것은 바쁘게 서둔다고 해서 잘 되어 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 그보다도 여러 모로 능력이 탁월한 백환성이 그 의 어머니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는 상황에서야. (아버님도 실종되셨던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의 어머님의 실종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혹시……) 심각한 우려 속에서 백운생은 우선 일행과 함께 문인중문이 준비한 마차 위에 올랐다. --계속-- #5413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32장 11/22 20:17 331 line 제32장. 음모(陰謀) 두두두둑…… 상황이 워낙 시급하기 때문인지 마차는 북쪽을 향해 거의 미친 듯이 빠르 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뒤쪽의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며 백운생이 마부석에 앉아 있 는 문인중문을 향해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해서 어머님께서 실종을 당하시게 된 것입니까?" 그의 어머니는 그가 동심각으로 올 때에는 수도에 전념하며 만나주지도 않 았었고, 항상 서리처럼 차갑고 학처럼 고고하신 분이셨다. 적어도 백운생 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그러했다. 문인중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실종된 흔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명백하지요. 그것을 아미파에서 발견하고 우리 동심각에 연락을 취해 왔었습니다." 백운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실종된 흔적이 거의 없다고요?" 문인중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실종된 흔적이 거의 없다는 것은 대공자의 어머님을 납치해 간 자의 무공이 그만큼 놀랍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는 흔적도 없이 불 가능하니까요." 백운생은 다시 물었다. "흔적이 없다면서 어떻게 어머님이 납치를 당했다고 생각하지요?" 문이중문이 대답했다. "우선 아미파의 생각이었고, 게다가 각주께서 친히 그곳으로 가셔서 엄격 한 조사를 하신 후에 틀림없는 납치라고 판명을 내리신 것입니다." 백환성이 그런 판단을 그것은 집중팔구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백운생이 다시 물었다. "당시의 상황은 그럼 어떠했습니까?" 문인중문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날 아침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정현비구니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선 방의 문은 열려져 있고 어머님께서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뒤에 아 미파의 장문인에게 알려서 조사를 해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 다." (정현스님이?) 백운생은 정현스님이 이 일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라고 하자 그녀를 만 나게 되면 뭔가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따라서 잠 시 생각하다가 백운생은 몸을 일으키며 문인중문에게 말했다. "저 혼자서 아미파에 잠시 다녀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동심각에 도착 하기 전에 마차로 다시 돌아올 것이니 이대로 계속 달려 주십시오." "……" 문인중문도 백운생이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단서를 조사하려고 하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그러시다면 가급적 빨리 다녀오도록 하십시오. 물론 다소 늦으셔도 상관 은 없습니다만 각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어 그의 일행인 악우왕과 무구 등에게 시선을 주었다. 특히 무구는 그녀 의 소속 문파인 아미파에 가는 일에 대해서 아마도 함께 따라가고 싶은 마 음일 것이다. 백운생은 그녀를 향해 말했다. "나는 지금 시간이 별로 없으니 여러분은 나의 외삼촌과 함께 이대로 계속 동심각으로 가 주시오." 무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예요." 역시 호덕승이나 악우왕, 좌선비 등도 수긍하는 빛을 띠고 함께 고개를 끄 덕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공이 그리 높지 못하기 때문에 백운생을 따라 가봐야 짐이 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얼마 후에 다시 봅시다!" 백운생은 짧은 몇 마디의 말을 남기고 번쩍 흔적도 없이 마차 안에서 사라 졌다. 지극히 빠르게 달리고 있는 마차 안에서 그처럼 마음대로 사라질 수 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의 신법이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것이 었다. 무구 등은 잠시 백운생이 사라진 허공을 망연하게 더듬었다. 대애애애애앵…… 대애애애애앵…… 저녁 예불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미산의 전역을 은은하게 울리며 퍼져 나가고 있었다. 왠지 오늘따라 이 종소리는 은근한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 는 것 같기도 했다. 백운생, 그는 드디어 이 아미산에 이르러 그 종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자라면서 거의 매일 들었었던 종소리였기 때문에 백운생은 금방 그 소리를 듣자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긴 이 아미산은 그의 고향 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곳이다. 백운생은 묵묵히 잠깐 동안의 서정에 잠기면서 계속해서 신법을 펼쳐서 아 미산의 최고봉인 금정봉(金頂峯)의 정상으로 계속해서 신형을 움직였다. 지금은 다소 느려지기는 했지만 기실 백운생의 신법의 속도는 가공할 정도 의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자신도 그 신법의 속동 놀랄 지경이었다. 백운생이 신법을 펼치게 되면 그의 신형은 아예 허공에 보이지도 않게 된 다. 만일 어머니의 일이 급하지 않았다면 백운생은 핑계김에 다른 곳을 좀 더 넓게 여행하며 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 지금 허공에 떠오른 백운생의 신형은 마치 한 송이의 백색의 구름과도 같았다. 그의 신형은 어느덧 금정봉의 위쪽 하늘에 떠올라서 깃털처럼 가벼운 움직 임으로 서서히 아래도 내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선방이 있는 암자의 안에 들어와 본 지도 매우 오래되었다고 생 각되었다. 백운생은 소리없이 깃털처럼 앞마당에 내려서다가 문득 한 명의 중년의 비 구니가 작은 법당에 향을 피우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정현스님.) 그렇다. 바로 지금 어미니의 법당에서 대신 향을 피우고 예불을 올리고 있 는 사람은 바로 여태까지 어머니의 수발을 들어왔던 정현스님이었다. 백운생은 그 뒷모습을 보자 문득 반가운 감정이 왈칵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이 정현스님은 겉보기에는 매우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인 것 같아도 실은 매우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으며 매우 다정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백운 생이 이 정현스님의 보살핌을 어렸을 때 받았었고, 따라서 그녀는 백운생 의 의어머니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배군생으로서는 그녀가 설사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녀의 말만은 믿을 수가 있었다. 저번에 문인 중문에게서 이번의 사건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에도 정현스님의 얘기를 듣 고서야 비로소 이 일이 사실이구나 하는 현실감을 느낄 수가 있었을 정도 였다. 기실 그의 어머니인 일심사태는 워낙 수도에만 전념하여 차갑고 엄 격하기만 했었지만 이 정현스님은 거의 그에게 모성애와 비슷한 느낌을 준 사람이었다. "정현스님!" 짧게 백운생이 부르자 정현스님은 문득 가볍게 놀라더니 이쪽을 향해 고개 를 돌리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생각해 보면 그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금방 표정을 무겁게 굳히면서 웃으며 그를 반 겼다. "오셨군요. 사실은 오실 줄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현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얼른 앞자리에 포단을 깔아서 백운생이 편 하게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우선 이리 와서 앉으세요." "……" 백운생은 잠시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 앞에 다가가서 앉았 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구는 비록 함께 오지는 못했지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무구는 바로 이 정현스님의 수제자이다. 정현스님이 아끼는 사람이기 때문 에 백운생은 이루러 무구의 소식을 먼저 둘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정현스님은 웃으며 말했다. "사태께서 실종이 되셨는데 그런 아이의 일에 신경을 쓰실 겨를이 있습니 까?" 백운생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의 어머니께서 실종이 되신 것이야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만 사람의 본 성에 차별이 없는 한은 어떻게 누구누구를 나누어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 까?" 정현스님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공자께서는 항상 그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 었지요. 그것이 나중에 좋은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백운생은 얼굴이 다소 붉어졌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정현스님도 담담히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현스님이 다시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미 말씀을 들어셨겠지만, 사태께서 실종을 당하신 것은 절반은 빈니의 책임도 있는 만큼 이제 공자와의 대면이 끝나고 나면 앞으로 참회동(懺悔 洞)에 가서 면벽참선을 하려고 생각중입니다." 백운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현스님이 빙그레 웃었다. "공자께서는 마음도 넓으시군요. 저 때문에 어머님께서 실종을 당하셨는데 도 그런 자비로운 말이 나오십니까?"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송스럽지만 스님께서는 아까 저의 기척을 듣지 못하 셨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만일 저보다도 무공이 높은 사람이 어머님을 납치해 갔다면 스님께서 무슨 수로 그를 당내내었겠습니까? 게다가 스님께 서 항상 어머님의 곁에 매우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 정현스님은 담담히 웃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서 합장을 하며 물었다. "공자께서 그토록 놀라운 무예를 연성하셨으니 축하드립니다." 백운생은 미소했다. 이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저는 대강의 얘기를 들었지만 아직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하므로 스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당시의 상황을 저에게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겠습니 까?" 정현스님은 잠시 백운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날 아침에 저는 늘 하던 대로 아침 불공의 준비를 해 드리기 위해서 아 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던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이 쪽을 올려다 보니 하늘에 웬 낯선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습 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빨리 사라졌기 때문에 긴가민가 하는 마음 으로 올라와서 안으로 들어와 보니 이미 어머님께서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 았습니다." "……" "마침 이상한 느낌도 있고 해서 그 뒤로 얼마간 계속해서 어머님을 찾아보 았으나 정적이 묘연하여 할 수 없이 장문인께 보고를 드리게 되었던 것입 니다."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때의 그 그림자에 대한 어떤 특징 같은 것은 기억나지 않습니까?" 정현스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의 신법이 매우 신비하고 빨랐다는 점과, 그리고 그가 검은 옷을 입 고 있었다는 점이 확실했던 것 같아요." (흑의를?" 백운생이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정현스님이 물었다. "우선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머니가 실종이 된 이후로 정현스님이 왠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서 백운생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어 곧장 일어서서 나오고 말았다. 시간이 그리 촉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운생은 급한 마음으로 동심 각을 향해 신법을 날리기 시작했다. 백환성, 그는 마침 예의 그 자리에 앉아서 백운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뭣이? 흑의였다고?" 백운생의 말을 듣고 백환성은 일시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이에 백운생이 오히려 다소 놀랐다. "예. 헌데 무슨 짚히는 바라도 있습니까?" 백환성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 "원래 그 흑의는 한 가문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란다." 백운생은 다소 의아해했다. "하지만 천하에 흑의를 입는 사람이 그들뿐만이 아닐 것인데, 어떻게 그렇 게 단정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백환성은 백운생을 직시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흑의를 입고 무공이 그렇게 고강한 사람들은 거의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원래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을 의심하고 있었었 다." "……" "그들은 항상 숨을 죽이고 살아오면서 우리 동심각을 전복시킬음모(陰謀) 를 꾸며오곤 했었지. 우리가 천하의 무림맹이지만 결국 정파들의 대부격이 라는 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백운생은 물었다. "그럼 대체 그들은 누구입니까?" 백환성은 잠시 백운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현현보(玄玄堡)이다." "현현보라구요?" 백운생은 일순 눈을 크게 떴다. 현현보! 다름이 아니라 이 현현보는 바로 무림의 초강의 단체라고 할 수 있는 칠패의 하나에 속하는 곳이었기 때문 이었다.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원래 그들은 사공이학(邪功理學)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또한 그런 방면에 매우 발전해 있는 단체이다. 그들은 원래는 거대한 야욕을 품고 있 었는데 우리 때문에 그 뜻이 좌절되곤 하자 은밀히 숨어 살면서 기회를 노 리며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지." 백운생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렇다면?" 백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들은 필시 네가 장차 나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너의 어미를 납치해서는 우리에게 모종의 협박을 가하려고 했을 것이 틀림 없다." 백운생은 묵묵히 생각해 보았으나 왠지 석연치 않아서 다시 물었다. "하지만 현현보주는 무공이 할아버님보다도 높지 못할 텐데 어떻게 감히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일 수가 있겠습니까?" 백환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나는 기실 근래 들어서 세상이 혼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들 몇몇 사마외도의 무리들을 제거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의 그들의 조치는 자구책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들 이 너의 어미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놓는다면 찾을 수가 없을 것이 고,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 "내가 너를 생각하더라도 어떻게 네 어미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 을 수가 있겠느냐?" 백운생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백환성은 거의 확신이 어린 듯한 음 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로서는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그들을 범인 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증거 불충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군다니무림 칠패는 당금의 무림에서 비중이 워낙 막강한 곳이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을 하고 행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백운생은 백환성이 조금 경솔한 판단을 내 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것을 보고 백환성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내 너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당금의 무림에서 나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나를 상대할 수가 있는 곳은 거의 그곳밖에는 없다고 할 수가 있 다. 원래 그 현현보주 현현노조(玄玄老祖)는 심기가 깊고 교활�殆� 무슨 일을 꾸미는 데 있어서 가장 지독한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지." "……" "나는 이미 수십 년이나 무림을 통치해 왔는데 이러한 일에는 특유의 감각 이 있기 마련이다. 운생아, 이것은 틀림없이 그들의 짓이다. 왜냐하면 다 른 곳에서는 감히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에게 가장 주목을 받고 있고, 또한 우리와는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네 어미를 납치한 것일 것이다." 백운생이 문득 물었다. "그럼 그들이 흑의를 입는다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백환성은 그의 마음이 다소 움직여진 것 같자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이유가 있지. 너는 우리 동심각에서 무엇 때문에 황금색을 주색으로 쓰고 있는지 아느냐? 그것은 바로 무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금단공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것과 가장 조화로운 옷을 입게 된 것이지." 백운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백환성은 대답했다. "그렇다 그 무공의 기운이 지닌 색깔에 따라서 성주거는 황의를 입고 있 고, 검방은 청의(靑衣)를, 그리고 도회는 백의(白衣), 장곡은 홍의(紅衣), 그리고 현현보는 흑의를 입고 있으며, 만화궁은 자의(紫衣)를, 수라부는 회의(灰衣)를 즐겨 입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이상한 것 같아도 이미 수십 년 동안 관례로 내려와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지." 백운생은 전에 만났던 심보유가 황의를 입고 있었던 것을 상기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빛을 보였다. 이에 백환성이 다시 말했다. "네가 또 신법에 대해서 말했는데, 천하에서 가장 기이하고 예측을 불허하 는 신법이 바로 현현보의 유령백변(幽靈百變)과 유령풍(幽靈風)인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백운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록 석연치 않은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백환성의 말대로 우선 그 들을 의심해 볼 만한 일이었다. 아니, 그들이 가장 흉수로서 유력시되고 있고, 또한 동심각과는 적대 관곙 있다고 하니 우선은 백환성의 말에 따라 서 행동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백 환성이야말로 무림의 노강호요,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운생이 다시 물었다. "이제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에 백환성은 크게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 그들이 너의 어미를 데려갔다면 무슨 특별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섣불리 행동하지말고 신중을 기해서 놈들의 허를 찔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나의 무공이 그들보다도 높다고 해도 그들을 모 두 제거할 수가 있을지언정 너의 어미의 안전은 보장할 수가 없는 것이 다." "……" "너는 앞으로 이곳에 머물면서 좀더 사태를 관망하면서 내 지시에 따르도 록 해라." 이어 백환성이 문득 물었다. "참, 이번에 내려갔던 일은 잘 되었느냐?" 백운생은 이번의 일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백환성은 그가 무 사히 심보유와 대면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는 빛을 보였으나 이 내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아니, 누가 감히 너희들을 습격했었다는 말이냐?"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며 대답했다. "분명히 어떤 증거가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으나 그들이 일부러 우리에게 접근해 왔던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오흉과 십귀에 관한 얘기였다. 백환은 이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틀림이 없다. 내 사실은 어딘가 불안해 하고 있었는데, 현현보의 놈들이 감히 음모를 써서 나의 후계자를 해치려고 했던 모양이다. 만일 너 의 능력이 그들의 상상 외로 대단하지 않았더라면……" 백환성은 눈빛을 기이하게 번뜩히며 말을 이었다. "장차 너를 잃은 우리가 어떻게 되었겠느냐? 너는 항상 조심하도록 해라.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네가 무림의 기둥이라고 늘 생각하도록 해라." "아니, 우리끼리 가보자구요?" 악우왕이 놀라서 백운생에게 물었다. 백운생은 지금 자신의 장원으로 돌아와서 그의 네 명의 아우들과 함께 자 리하고 있는 중에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이에 백운생이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네. 우리끼리 몰래 가보자는 것이네." 악우왕은 알 수가 없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아까는 각주께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지 않았 습니까?"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악우왕이 다시 물었다. "그럼 방금 전의 말은 또 뭡니까?" 백운생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할아버님의 말을 들을 때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는 했으나, 기실 은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아. 할아버님께서는 다소 심하게 흥분하고 계시는 것 같거든. 그래서 내가 직접 확인해 보려는 것이네. 만 일 이 일로 무림에 대격변이 일어나고, 할아버님께서 자칫 경솔한 행동을 하시게 된다면 큰 문제가 아니겠나?" 이에 악우왕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렇게 몰래 그곳에 가서 만일 그들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어떻 게 하려고 하는 것이오?" 백운생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이미 어머님을 잡고 있는 것이라면 거기에 나 한 사람 보태진다고 해서 그리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네. 설마하니 그들이 나를 해치지는 못 할 것이네." --계속- #5415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33장 11/24 15:29 263 line 제33장. 현현보(玄玄堡) 강서성(江西省) 무이산(武夷山)! 동심각이 있는 대홍산에서 장강(長江)을 지나서 남동쪽으로 내려가다보면 막부산(幕阜山)과 파양호( 陽湖)를 지나서 비스듬히 가로지르고 있는 거대 한 산맥인 무이산에 도달하게 된다. 이 무이산은 그야말로 중원에서 지극히 유명한 산이었다. 게다가 다름아 닌 현현보라는 거대한 세력이 이곳을 거점으로 하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 다. 일반적으로 북방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현실적이고 고전적인 데에 반해 남쪽 지방의 사람들은 주술적인 것을 믿거나 아니면 퇴폐적이고 향락적으 로 흐르기가 쉽다. 바로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생겨난 것이 현현보라는 거대 세력이었다. 현 현보는 사공이학(邪功異學)을 연구하며 수련하는 단체이다. 물론 그 주체 는 현현보주인 현현노조(玄玄老祖)를 비롯한 모용일가(慕容一家)의 사람들 이었으며, 그들의 무예는 가공지경이어서 가히 상상을 불러하는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대대로 모용일가의 사람들은 지략이 뛰어나고 천문지리나 술 책에 밝아서 많은 사람들의 경계심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백운생과 그 일행, 그들 다섯 명은 은밀히 동심각을 빠져나와서 백운생의 의견대로 무이산의 현현보를 조사하기 위해서 남행을 했다. 이미 신법이 저마다 경지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여러날에 걸쳐서 빠르게 무이 산의 근방에 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 백환성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여 일은은 며칠간 노숙을 하며 신 법을 펼치다가 이윽고 무이산의 부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작은 객점을 잡 아서 쉬어 갈 생각을 했다. 바로 그곳은 자개현이라는 곳으로, 무이산의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었으 며, 현현보를 찾아가기 위한 거점으로 삼기에 좋은 곳이라고 할 수가 있었 다. 이 자개현은 무이산의 약재나 그 밖의 토산물들을 파는 시장이 자리하고 있을 뿐 그다지 큰 읍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고 찾아오는 행인들이 많아서인지 숙박업을 하는 객점이나 주루 등이 발달하 여 길가에는 도처에 주루가 깔려 있었다. 일행은 역시 하나의 객점에 들었다. 이름이 안향객점(安香客店)이었는데, 주루가 딸려 있는 곳은 아니고 식사를 시켜서 먹을 수는 있는 곳이었다. 물론 오랜만에 주루에 앉아서 마음놓고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고 싶은 일 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워낙에 지난번 장사성에서 호되게 당했었 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참고 객점에서 지내며 현현보를 조 사하기로 했다. 그들의 신법으로는 이곳에서는 현현보를 왔다갔다하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객점은 그리 훌륭하지 못한 다소 지저분한 보통의 객점이었다. 일행은 역 시 세 개의 방을 얻었는데, 이것은 백운생을 우대하기 위한 좌선비의 제안 이었고, 또한 호덕승 등은 백운생과 한 방에서 비좁게 잠을 자게 되면 잠 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우겨댔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설마 이곳에서도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악우왕의 투 덜거리는 말이었다. 사실 전번의 장사성에서의 일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다 소 무리가 되더라도 한번쯤 길거리에 나가서 거리를 활보해 보고 싶은 마 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아서 자중할 수밖에 없었기 때 문에 악우왕은 자연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운명이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특별하게 붙어다는 것일까? 거의 자정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백운생은 가부좌를 틀고앉아 있다가 이윽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헌데 그때였다. "앗, 웬놈이냐?" "빌어먹을, 함께 덤비자!" 별안간 옆방에서 잠자고 있을 악우왕 등의 괴성이 터짐과 동시에 요란하 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 백운생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즉시 그쪽으로 신형을 움직였 다. 쾅…… 우르르르…… 번쩍! 백운생은 몸을 움직인 순간 거의 동시에 옆방의 창문 밖에 도착했다. 그 는 어두운 공간 위에 둥둥 떠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악우왕 등 삼인은 지금 좁은 방 안에서 역시 비슷 한 숫자의 사람들과 한창 무섭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백운생은 문득 어처구니가 없는 느낌이 들었다. 사흉(四兇)! 지금 악우왕 등 삼인과 함께 한창 치열하게 맞붙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이 아니 라 그들이 장사성에서 보았던 자들이었던 것이었다. 장사성의 그 주루에서 권마 막굉이 악우왕에게 역공을 당해서 죽었기 때문에 천하의 오흉은 이제 사흉이 되었다. 그런데 대체 그들 사흉이 어떻게 일행이 이곳 무이산의 기슭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갑자기 나타나서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일까? 이거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행은 여태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객점에 들르지 않고 인적이 없는 곳에서 노숙을 해왔는데, 설사 나는 새가 있었더라도 이렇게 일행의 거처를 빨리 알아차리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혹시 그럼 이들이 서로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일까? 하긴 사흉이 우연히 만 나지 않았었다면 백운생이 있는 것을 알고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을 것 이었다. 대체 이들은 어떻게 해서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악우왕 등은 지난 며칠간 남행을 하면서 신법과 보법을 더욱 연마했기 때문에 부동신보와 빙 허임풍을 어느 정도 구사할 수가 있었고, 따라서 거기에 각각의 특기인 쌍 류금, 일선지, 금삽수 등을 번갈아 펼치게 되자 다소 밀리기는 하지만 셋 이서 네 명을 상대하는데도 당장의 위험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시골의 작은 객방은 그야말로 심한 폭풍을 만나서 금방이라도 날려가 버릴 것 같은 위기에 몰려 있었다. 만일 악우왕 등이 마지막 순간 에 공력을 거두어 들이고 사흉이 그리 악착같이 공격하지 않는 것이 아니 었다면, 벌써 객방은 형체조차 없어졌을 것이었다. 아니, 그들 모두의 무 공이 워낙 대단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오독두타 나귀의 자살독강(紫煞毒 )과 쌍두사 반송의 음양마(陰陽磨), 그 리고 천수인도 금풍백의 무수한 암기와 천면호 호미의 쌍수에서 펼쳐지는 현녀산수(玄女散手)의 무예가 악우왕 등의 신공절예와 서로 어우러지자 그 야말로 하늘도 놀라고 땅이 뒤흔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백운생은 자신의 동료들이 당분간은 그리 위험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이것이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기 위해서 싸움을 중지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객방 안의 요란한 소음으로 인해 주위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 었다. 하지만 백운생이 여기에서 더욱 큰 소리를 내게 된다면 아마도 이곳 자개현성의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잠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다. 따 라서 백운생은 무예를 펼쳐서 모두의 싸움을 중지시키려고 마음먹었다. 헌데 그때였다. 여태 서로 부딪치지 않고 힘겹게 싸우고 있던 사흉이 느 닷없이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악우왕 등을 향해 강력하게 자 신들의 절기를 내쏟는 것이 아닌가! 콰르르르…… 쾅,쾅콰르르르…… 번 --쩍!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눈앞에서 눈부신 태양의 빛이 작렬하는 것 같았 다. 기실 그들 일곱명의 내공은 사갑자에 달하여 서로 비슷한 경지라고 할 수 가 있었다. 악우왕 등은 여태 절묘한 신법과 보법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막상 네 명의 적과 내공으로 부딪치게 되자 절기의 위력이 다소 우위에 선다고 해도 그 리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 역시 있는 내력을 다해 상대들과 맞부 딪쳤다. 아니나 다를까, 여태 겨우 지탱하고 있던 객방의 벽이 일제히 사방으로 산산조각이 되어 날려가고 근처의 객방들까지 날려가 버렸기 때문에 느닷 없이 이 객점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으악!" "악! 웬, 웬놈들이냐?" 사방의 터져나간 객방에서 비명소리와 신음소리, 그리고 갖은 욕설이 뒤 이어 터져나왔고, 어떤 사람들은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인가 하고 눈이 휘 둥그레졌고, 혹은 청춘의 젊은 남녀들이 함께 옷을 벗고 잠을 자다가 느닷 없는 봉변을 당한 곳도 있었다.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백운생의 눈에는 그러한 것들보다는 한 가지 의구심이 생기기 시 작하고 있었다. 없었다! 사흉,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날뛰며 악우 왕들을 공격하던 그들이 느닷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혹시 창 밖에 서 있었던 백운생의 기척을 알아차렸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방금 전에만 하더라도 그들의 형세 는 유리한 것이었고, 그렇다면 굳이 싸움을 걸어서 유리한 국면에서 달아 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미 무공이 초인지경에 도달한 백운 생의 기척을 눈치챘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무공의 하수는 고수의 기척 을 느끼기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에 주의의 불편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악우왕 등 삼인이 겨우 몸을 수습하고 밖으로 나오다가 백운생과 마주쳤다. "아니, 형님, 언제 여기에 계셨소?" 악우왕의 질문에 백운생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금방 온 것이네. 그보다 그대들의 몸은 괜찮은가?" 악우왕은 그 말 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전과 같을 수야 없는 일이지요." 은근히 자신들의 무공이 강해졌다는 것을 과시하는 모습이었다. 백운생은 이에 담담히웃었다. 확실히 장사성에서의 호된 경험이 있는 후부터 이들 삼인의 무공은 눈에 띄게 늘었을 뿐만 아니라 경험도 많아졌다. 만일 경험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경우에 잠을 자다가 속절없이 당하기만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좌선비가 말했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하겠지요?"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흡사 아수라장처럼 사방에서 난리를 치고 있 는 이곳에서 잠시라도 더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득 고개를 끄덕이던 백운생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러졌다. "참, 헌데 무구는 왜 보이지 않지?" 호덕승 등도 그 말에 급히 경각하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제가 가볼까요?" 분명히 사방이 한꺼번에 터져나가서 아수라장이 되었는데도 백운생의 옆 방에서 혼자서 잠을 자고 있던 무구가 나타나지를 않았다니 이는 이상한 일이었다. (……!) 백운생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하기 사흉이 느닷없이 나타났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함께 가보기로 하세." 말과 함께 백운생은 흡사 부유하듯이 먼저 신형을 움직였다. 악우왕 등은 역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신법을 일으켜 뒤를 따라갔 다. 그들 가운데에서 아직 심하게 중상을 입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무구가 들어 있었던 객방의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일행은 다 함께 흠칫한 기분이 들었다. 객방은 여늬 것들처럼 심하게 부서져 있었 고 도저히 그 안에서 잠을 잘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구도 보 이지 않았다. "제가 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호덕승이 말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살피다가 뭔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것은 바로 무구의 겉옷과 그녀가 항상 들고 다니던 작은 보따리 였다. 일행은 그것을 보고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악우왕이 중얼거렸다. "그럼, 그녀는 잠을 자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인가?" 백운생의 시선 이 그에게 향하자 악우왕은 문득 깨닫고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 그거요? 우리 셋이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놈들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다짜고짜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아니겠소. 그 래서 우리는 함께 싸웠던 것이오." 백운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암습이 아니었다고?" 악우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그걸 암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들은 아주 처음부터 거칠 게 달려들었다니까요. 하긴 처음부터 놈들이 왜 그렇게 요란하게 나오는지 이상하기는 했지만." 좌선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럼 놈들이 우리와 상대를 하는 동안에 그녀를 데려갔단 말인 가?" 말이 데려간 것이지, 아마도 그것은 납치일 것이다. 실로 사흉이 느닷없이 요란하게 악우왕 등과 싸움을 벌인 것은 백운생의 이목을 끌고 그 사이에 무구를 납치해 가기 위한 술책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문제가 있었다. 호덕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막내의 무공도 우리 못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누가 그녀를 납치 해 갈 수가 있었을까?" 그렇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백운생은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들일 것이다!) 그들! 과연 어던 자들일까? 좌선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형,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가볍게 웃었다. "그들을 따라가야지." 좌선비가 물었다. "그들이라뇨?" 백운생은 미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구를 납치해 간 자들 말이다." 대체 백운생의 진실한 능력은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일까? 사실 그것은 백 운생 본인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아직 그것을 시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 었다. 지금의 경우 그것을 시험해 볼 시기가 닥쳤다. 세상에 개라는 짐승은 타고난 후각이 발달하여 어떤 냄새라도 기억하고 그것으로 집을 찾아가거나 무엇을 추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의 후각이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고 해도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을 추적할 수가 있을 까? 백운생은 분명히 개도 아니고 개와 같은 후각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 러나 그는 생각과 즉시 무구를 데려간 자들의 흔적을 느낄 수가 있었고, 또한 그들을 추적할 수가 있었다. --그녀가 이 길로 간 것이 정말이우?-- 악우왕이 뒤따라 몸을 날리면서 계속 그렇게 물었을 정도였다. 어두운 암천(暗天)! 그 어두운 사위를 교교하게 밝히는 희미한 달빛이 서 쪽 하늘에서부터 은은하게 비쳐들고 있었다. 사방은 시야가 미치지 않을 만큼 어두운 편이었다. 그러나 대개 무공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의 시력은 보통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나기 마련이었 다. 백운생 등의 일행은 어두운 사방을 지금 대낮과 같이 훤하게 꿰뚫어볼 수가 있었다. "아니, 저곳이란 말이오?" 악우왕이 의아하다는 듯이 떠들었다. 일행은 이미 무이산의 한 계곡 앞에 이르러 있었다. 맑은 계류(溪流)가 흐르고 있었고, 그 뒤로 조금 올라가자 하나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악우왕은 그곳을 가리켰다. 호덕승이 옆에서 말렸다. "조용히 하슈. 혹시 그들이 눈치챌지도 모르니." 악우왕은 일시 발끈한 표정을 보였으나 이내 순순히 참는 기색이었다. "……" 백운생은 옆에서 담담한 시선으로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앞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어서 가 봅시다." 악우왕은 백운생이 전음을 사용하지 않고 태연히 말하는 것을 보고 것보 라는 식으로 호덕승의 얼굴을 한 차례 노려보았다. 일행은 즉시 사당의 앞에 이르렀다. 사당의 안은 아주 조용했다. 사방이 워낙 어둡고 적막하여 흡사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이구, 이거 정말 뭐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야?" 호덕승이 웃 으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귀신이 나타나면 형님의 그 절세 권법으로 한방 먹여주면 될 일이 아니 오?" 악우왕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 귀신이란 녀석은 틀림없이 형제가 없을 것이니까 그렇지. 아, 형 제가 없는데 내가 아무리 절세의 공격을 펼쳐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런가?" 호덕승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악우왕과 같은 사람이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 을 보고 실로 우습다는 표정이었다. 이때 문득 조용히 말이 없던 백운생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어서 나오시오!" 일시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던 호덕승과 악우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리 둥절한 표정이었다. 백운생은 그러니까 사당의 안쪽을 향해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대 체 사당의 안에 누가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사당 안에서는 여전히 조용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헌데 백운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 밖으로 나오는 것이 좋겠소." 바로 그때였다. 악우왕 등은 일시 눈이 아연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사당의 앞쪽에 마치 연기와도 같은 기운이 일더니 그것이 세 명의 사람이 되어 점 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귀, 귀신이닷!) 악우왕이 일순 정말로 그렇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계속-- #5416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34장 11/24 15:30 366 line 제34장. 전대(前代)의 고수(高手)들 "으흐흐, 소문대로 과연 제법이군. 감히 우리들의 기척을 눈치채다니." 마치 지옥에서 울려오는 듯한 음산하고 바람빠지는 듯한 음성. 그것으로 일행은 그들 삼인이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증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었다. 지금 눈앞에 보고 있기는 해도 전혀 기척을 느 낄 수가 없거늘, 하물며 어디 숨어 있는 상황에서 백운생은 대체 어떻게 그들의 기척을 눈치챘었다는 말인가? 이때 백운생은 이상하게도 다소 의아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으흐흐……" 짙은 음산한 흉소가 흘렀다. 마치 어두운 사당의 주위가 검은 장막 속으 로 뒤집히는 듯한 무시무시한 느낌이 드는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였다. 나타난 세 사람은 하나같이 노인들이었는데 지금 웃고 있는 사람은 아주 작은 키에 머리가 커다란 사람이어서 다소 우스꽝스런 느낌까지 주었다. 헌데 기이한 것은 그 노인의 두 눈이었다. 그 한 쌍의 두 눈은 마치 돼지 에게 진주를 박아 넣은 것처럼 투명한 유리처럼 번들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었다. 그것은 상대에게 가히 공포심을 주기에 족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 중 하나는 아주 뚱뚱하고 피부색이 붉은 노인이었 고, 다른 사람은 왜소하고 볼품이 없어 보이는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었다. "흐흐, 우리가 누구냐구?" 머리가 커다란 노인이 음산하게 소리쳤다. 문득 백운생이 낭랑하게 대꾸했다. "물론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하짐ㄴ 내 물음은 과연 당신들 이 우리의 막내를 데려간 장본인들인가 하는 것이오." (……!) 노인은 잠시 멈칫 하다가 흉물스럽게 읏으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그래서 네가 여기까지 우리를 찾아온 것이 아니냐? 헌데 너의 말은 믿을 수가 없구나. 정말로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말이냐? 그럼 우리는 누구지?"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들은 바로 삼혈(三血)이 아니오?" 그 말에 비단 그 세 명의 노인들뿐만 아니라 악우왕 등도 일시 크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삼혈! 이 사람들은 바로 전대(前代)에 크게 명성을 날리던 무적의 흑도고 수들로 이제는 거의 전설 속의 인물로서만이 전해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물론 흑도를 주름잡고 있는 자들은사흉이지만 이 삼혈은 그들보다도 한 배분 이상이나 높은 그야말로 흑도무림의 최고 수뇌부라고 말할 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헌데 느닷없이 그 삼혈이 일행의 앞에 나타나다니! 게다가 지금 보아하니 그들은 무구를 납치해 갔던 것 같지 않은가! 백운생은 크게 흠칫하여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보이고 있는 커다란 머 리의 노인을 향해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이름은 혈뇌(血腦) 왕규(王圭)로서 계략의 천재이고, 두뇌가 비 상하며 가장 위험스럽다는 사람이겠지. 그리고……" 뚱뚱한 노인과 왜소한 노인을 향해 백운생은 말을 이었다. "뚱뚱한 당신은 혈사(血邪) 선정(單正)이고, 못생긴 당신은 혈귀(血鬼) 마륵길(麻勒吉)이 아니오? 하나는 사공을 연성했고, 또 하나는 독심(毒心) 으로 가득차 있다고 하던데, 누군들 당신들을 몰라볼 리가 있겠소?" 커다란 머리의 노인, 즉 혈뇌 왕규는 잠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다가 어 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헐헐헐, 내가 놀랍다는 것은 네가 감히 우리의 신분을 알고도 그렇게 멀 쩡히 서서 말을 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너는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이 아니냐?" 왕규는 손짓으로 그 커다란 머리 위에 빈 원을 그렸다. 이에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온 것이니 물론 머리가 돈 것은 아니오." 왕규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돈 사람이 돌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 그래, 너는 대체 무슨 목 적이 있어서 우리를 불러낸 것이지?" 백운생은 즉시 대답했다. "그야 물론 나의 막내동생이오." "막내동생?" 왕규는 되물었다.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에 왕규는 흉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 우리가 순순히 내줄 것 같으냐?" 그 말에 일행은 다소 놀랐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 노인이 다소 부정할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수긍을 하고 나서자 재삼 백운생의 능력이 재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백운생은 허나 아주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좋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순간 혈뇌 왕규가 지극히 음산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흐흐, 하룻강아지와 같은 녀석이로군. 우리는 항차 일각 칠패의 사람들 일지라도 그 주인들을 제외하고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감히 네녀석이……" 말소리는 따로 나오고 음산한 소리는 역시 따로 울려퍼졌다. 헌데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휙휙휙……! 일진의 가벼운 인기척과 함께 사당의 뒤쪽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일제 히 바람처럼 나타나서 장내에 일행을 에워싸는 모양으로 내려서는 것이 아 닌가! 악우왕 등은 이에 일순 깜짝 놀랐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나타난 사 람들은 바로 그들이 이미 보았던 사흉과 구귀(九鬼)였기 때문이었다. 그들 열세 명이 나타나자 뭔가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헌데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천면호 호미의 몸뚱이는 유난히 크고 뚱뚱하 게 변해 있었다. 알고보니 그녀의 몸이 변한 것이 아니라 지금 그녀는 한 사람을 안아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속옷을 입은 채로 전신의 대혈 이 제압되어 있는 소녀, 바로 일행이 찾고 있던 무구였다. 일행은 이렇게 쉽게 무구를 볼 수 있게 되자 어리둥절하면서도 매우 어처 구니가 없는 심정이 되었다. 좌선비가 옆에서 문득 중얼거렸다. "난 알겠어. 저들은 바로 우리를 유인해 낸 것이야." 그렇다. 흉물스럽게 웃고 있는 삼혈과 사흉, 그리고 구귀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음산한 살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호덕승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저들은 그녀를 순순히 내줄 것 같지 않군." 좌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들은 애초에 그녀를 인질로 삼을 작정이었어." 사실 사흉과 구 귀가 아까처럼 악우왕 등 삼인을 상대하고 삼혈이 공동으로 백운생을 상대 하며, 게다가 무구를 인질로 삼아서 위협을 한다면 이쪽의 승산은 거의 없 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백운생이 다시 말했다. "재삼 말하지만 그녀를 어서 놔주시오. 그러면 이번의 과오는 묻지 않겠 소." 그 말에 삼혈은 다 함께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인 백운생의 표 정에 변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태연자약하여 도무지 그 심기를 잃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저녀석이 감히 우리를 무시한다는 말인가?) 왕규는 속으로 이 를 갈았으나 대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흐흐, 네가 그렇게 자신이 만만하다면 어서 그녀를 구하면 될 일이 아니 냐? 만일 네가 그녀를 구한다면……" 그때였다. 혈뇌 왕규는 느닷없이 말을 중단했다. 갑자기 가만히 서 있던 백운생이 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 백운생의 신형은 다소 느려 보였다. 원래 이 삼혈의 무공은 사흉 전부에 비해서도 훨씬 막강하여 한 사람으로 도 그들을 능히 당할 수가 있을 정도였다. 비록 겉으로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백운생의 행동의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터라 일단 백 운생이 움직임을 보이자 마치 본능적인 것처럼 세 사람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니, 그와 때를 같이하여 사흉과 구귀의 신형도 무구를 안고 있는 호미 의 주위로 급작스럽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슷…… 백운생의 신법은 자연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빠른 것 같지는 않 았다. 오히려 삼혈의 신법이 놀라울 정도로 빨라서 어느새 백운생의 앞을 거의 일자로 철벽처럼 막아서고 있었다. 주위에 서 있던 악우왕 등도 이를 보고 크게 마음이 긴장되어 전신의 공 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백운생을 효과적으로 막아서자 왕규의 유리알같은 두 눈에서는 일순 득의 의 광망이 솟구쳐 올랐다. "흐흐, 네놈이 감히……" 헌데 그때 였다. 장내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왕규는 다시 하던 말을 중단했다. 아니, 순간 경악스러운 눈빛이 떠올랐다. 백운생! 분명히 앞에 막아서고 있다고 생각한 백운생의 신형이 어느새 마 치 연기처럼 증발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눈의 착각, 그것은 아니었다. 비 단 왕규 등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악우왕 등도 그것 을 분명히 목격했다. 백운생은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에 백운생의 신형은 어느새 무구를 안고 있는 천면호 호미의 곁에 이르러서 안전하게 무구를 품에 안아들고 있었다. 누구도 이를 보고 입을 딱 벌리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와, 완벽한 부동신보(不動神步))이다!) 악우왕 등은 내심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다만 부동신보의 효과만은 아니었다. 부도인보와 빙험임풍 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거기에 일종의 신비로운 능력이 가미되어 순간 적인 이동이 가능한 것이었다. 허나, 대체 이것을 인간의 능력이라고 수긍할 수가 있을까? 호미! 그녀는 느닷없이 백운생이 눈앞에 나타나 무구를 데려가자 다소 넋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비록 백운생이 어떤 수법을 쓴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얼굴 은 금방 공포로 질려 있었고, 말소리까지 떨려나왔다. "그, 그녀는 우리가 방금 데려왔기 때문에 나쁜 짓은 하지 않았어요." 그 렇다. 기실 백운생 등이 워낙 빠르게 뒤쫓아왔기 때문에 그들이 나쁜 짓을 할 여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우연인지는 몰라도 여자인 호미가 안고 있었기 때문에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호미는 이때 감히 백운생에게 손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위에 모여들고 있었던 사흉과 구귀 등도 일순 어리벙벙해져 있어서 다 만 옆에서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무구! 그녀는 잠옷 바람으로 앎은 속옷만을 걸친 상태였다. 아주 갸냘픈 몸이었고, 매우 가벼웠다. 백운생은 그녀의 몸을 안아드는 순간 문득 그녀가 이렇게나 야위었나 하 고 의아해 할 정도였다. 반면 속옷 차림의 무구는 백운생의 품에 안기게 되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백운생은 그녀으 몸이 뜨겁게 달아오름을 느끼고 다소 마음의 격동을 느 꼈으나 아내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고 바닥에 내려 주었다. 헌데 이것을 보고 뒤쪽에서 지극히 대노한 사람들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바로 그들은 삼혈이었다. 삼혈은 백운생이 안하무인격으로 행동을 하 자 즉시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며 뒤쪽에서 백운생을 향해 전력을 다해 공 격해 들어왔다. 과연 삼혈의 무공은 놀라웠다. 혈뇌가 쌍수를 펼치자 천지간에 갑자기 거 대한 혈뢰(血雷)가 일어나는 것 같았으며, 혈사가 쌍수를 펼치자 자욱하게 붉은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고, 이어 혈귀가 손을 쓰자 사위가 일제히 암흑 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우우우우우우우우웅웅웅…… 마치 수천 수만 마리의 벌떼가 일시에 날아들듯이 사방이 온통 그들 삼인 의 공격권 안으로 들어와서 악우왕 등뿐만 아니라 사흉과 구귀 등도 한꺼 번에 그 여파로 날려갈 것 같았다. 헌데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삼혈의 가공할 공세가 씻은 듯이 사라졌는데, 눈을 씻고 보니 어느새 그들 삼인의 신형은 각기 기이한 모양을 하고 서서 멍하니 백운생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백운생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무구의 손을 잡고 악우왕 등이 있는 곳 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우왝!" 일제히 합창이라도 하듯이 삼혈의 입 속에서 지저분한 음향과 함께 붉은 핏물이 솟구쳤으며, 이내 창백해진 안색으로 그들의 신형이 바닥으로 주저 앉기 시작했다. 극심한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비해 유유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백운생의 모습은 너무나도 태연 자약해서 이 대결의 승부는 실로 명약관화하다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호덕승은 이때 급히 달려와서 자신이 들고 있었던 무구의 겉옷 등을 보따 리와 함께 건네주었다. 무구가 급히 그것들을 걸치고 있는 사리에 문득 백운생이 몸을 돌려 삼혈 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묻겠소. 당신들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리에게 접근을 해서 해치려고 한 것이오?" 왕규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이를 갈면서 대꾸했다. "흐흐, 우리가 그것을 말해 줄 것 같으냐?" 백운생은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지금 당신들의 무공을 폐지할 수도 있소. 그것을 하지 않는다는 조 건으로 당신들에게 묻는다면?" 그 말은 그러니까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무공을 폐지하겠다는 말 과도 같았다. 본래 이들 삼혈은 모두 나이가 많아서 무공을 폐지하게 되면 아마도 얼마 살지도 못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즉, 무공을 폐지하겠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말보다도 오히려 가혹한 협박일 수가 있는 것이었다. 물 론 상대인 삼혈은 백운생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는것을 충분히 인정할 것 이었다. 하지만 왕규는 더욱 눈빛이 흉흉해져서 소리 높여 대꾸했다. "흐흐흐, 마음대로 해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너에게 어떤 이치에도 없 는 얘기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개똥같은 말이다." 이에 옆의 혈사 선정도 음산하게 웃으며 거들었다. "우리는 다만 수하들이 네게 당했다고 하기에 나서준 것일 뿐이다. 헌데 네가 이렇게 무공이 고강할 줄이야. 소문보다도 오히려 더하군. 하지만 우 리에게 다른 대답을 얻어낼 생각을 하지 마라." 백운생은 눈살을 찔푸리며 다시 물었다. "허나 그럼 당신들은 우리가 이곳에 온다는 것을 어떻게 미리 알고 기다 렸던 것이오?" 왕규는 음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 그야 다 아는 재주가 있지. 우리 흑도의 무리는 천하에 널리 퍼져 있는데, 너희들이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우리의 이목에서 벗어 날 수가 있을 것 같으냐?" 백운생은 재차 눈살을 찌푸렸다. 이들의 말은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이다. 설령 소식통이 빨라서 연락이 되었다고 해도 구 귀와 같은 자들이 여기에 먼저 와서 기다릴 수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하지만 백운생은 이들에게 더 이상 어떤 대답도 얻어낼 수가 없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대체 이들 흑도의 거물들을 꼼짝못하게 하는 거대한 힘이란 무엇인가? 이때 호덕승이 옆에서 싸늘하게 물었다. "그럼 당신들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쫓아다닐 작정이오?" 왕규는 음산 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겠다고 한다면 너희들은 악랄하게도 우리를 제거하려고 하겠지. 하 지만 너희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기왕에 역부족이라는 것이 드러났으니 우리는 그만 여기에서 손을 떼려고 한다." 호덕승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이었다. "원래 너희들은 한번 당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습성이 있지 않은가?" 왕규는 그 말에 차갑게 웃었다. "너는 우리가 두려운 모양이군. 하지만 염려하지 마라. 우리는 상대를 골 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너의 그 주인은 무공이 우리도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감히 우리로서는 다시 모험을 할 수가 없다. 흐흐, 네가 정히 믿기지 않는다면 지금 손을 써도 된다. 무섭지 않느냐, 아가야?" 아가! 이 치욕적인 말을 듣자 호덕승 의 얼굴은 대번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허나 그는 충동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를 보고 백운생이 웃으며 말했다. "그만 가세." 악우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저 악질들을 다 살려주고 말입니까? 이번 기회에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대형의 명성도 높아지고, 또한 무림에 풍파 도 사라질 것인데……"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마다 각기 운명을 지으며 살아가는 것일세. 우리가 굳이 그것을 꺾 을 필요가 있을까?" 아구왕 등은 일시 백운생의 말뜻을 몰라서 고개를 갸 웃걼ㅅ다. 그러다가 백운생의 신형이 벌써 저만큼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삼혈 등을 뒤돌아보며 연신 군침을 삼키면서. 무구는 이미 완전하게 옷을 차려입었지만 계속해서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신법을 펼쳤고, 옆에서 호덕승이 이를 놀려댔다. "아깐 정말 멋있던데! 난 천하일색(天下一色)을 보는 줄 알았어." 악우왕 도 빠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 "맞아. 난 차라리 우리 막내가 그 성수거의 심낭자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았다니까." "……" 무구는 더욱 대꾸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백운생은 역시 아무런 말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문득 좌선비가 물었다. "대형, 이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악우왕이 말했다. "우리 이제는 놈들의 항복을 받아냈으니 객점 하나를 잡아서 한 차례 술 내기나 해보는 것이 어떨까?" 호덕승이 옆에서 비꼬았다. "아마 술내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형님밖에 없을 것이오." 좌선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왕이 밖으로 나왔으니 우리 이대로 한번 현현보를 염탐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것을 근거로앞으로의 행동도 계획할 겸으로." 헌데 백운생이 마악 입을 열어 대답을 하려고 하는 순간에 느닷없는 일이 생겼다. 절벽 위, 지금 눈앞에 보이는 천험의 절벽 위에 한 사람의 현의중년인이 멍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그쪽으로 시선을 쏟는 순간에 바로 눈앞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었다. "그대가 바로 동심각의 대공자이신가?" 일행은 일순 너무나도 깜짝 놀라서 신형을 급정지시키고 가슴의 두근거림 을 억눌러 참아야 했다. 실로 눈앞에서 이토록 기척도 없이 나타나서 사람 을 놀라게 하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었다. 사람들, 지금 눈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절벽 위의 사람 외에도 하나가 아 니라 두 명이었다. 하나는 젊은 여자였고, 또 하나는 젊은 남자였다. 입을 연 사람은 물론 그 남자였다. 실로 이렇게 느닷없이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다는 것은 공교로운 우연일까? 젋은 남자, 그는 역시 일신에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나이는 대 략 삼십 전후일까? 옆에 있는 스물다섯 정도의 흑의여인과 함께 허공에 둥 둥 떠서 마치 허깨비처럼 흐늘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신법도 있을까? 바람도 없는데 몸이 흔들거리는가 하면 하나 의 몸이 두 개에서 다시 수십 수백 개로 환영처럼 불어나다가 이윽고 다시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곤 하는 것이었다. 일행은 그들의 얼굴을 바라볼수록 정신이 어지러움을 느꼈다. 게다가 이 두 명의 남녀는 매우 잘생기고 아름다운 편이었다. 대체 갑자기 나타난 이들은 누구일까? 성미급한 악우왕이 참지 못하고 소리쳐 물었다. "허깨비 장난을 하는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이에 그 흑의인이 다시 음산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비록 허깨비와도 같지만 남을 해치지는 않지. 하지만 겉모양은 멀쩡하면서 남을 염탐하려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그 말은 일행의 의도를 정곡으로 찌른 것ㅇ어서 악우왕은 얼굴이 붉어져 서 소리쳤다. "빌어먹을, 말을 돌리지 말고 어서 관등성명이나 대란 말이야!" 이에 일 순 흑의인의 눈빛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 광채는 실로 칼날처럼 예리하고 강렬하여 더없는 공포감을 주기에 족했다. "개뿔도 안되는 것들이 주인의 힘을 믿고 겁없이 날뛰고 있군 그래. 그렇 게 훌륭한 주인이라면 나의 정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악우왕은 더 이상 날뛸 수가 없어서 얼굴이 벌개졌고, 백운생이 천 천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신법은 유령풍(幽靈風)이라는 것이오." "유령풍?" 그렇다. 실로 지금 눈앞의 두 명의 남녀는 유령풍이라는 신법에 유령백변 (幽靈百變)이라는 보법을 가미하여 펼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비단 그 신법과 보법에 대한 놀라움뿐만 아니고, 이러한 것들을 펼칠 수가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행의 놀라움을 컸다. 다 름이 아니라 바로 현현보의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이미 현현보를 몰래 염 탐하려고 나온 마당에 이렇게 정면에서 그들과 마주치게 되었으니 어찌 놀 랍고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하긴, 이 근방에서 이토록 신비한 무공을 펼치 고 있는 사람들이란 현현보의 사람들 이외에는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흑의인이 한 차례 음침하게 웃더니 백운생을 향해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귀하를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오. 나는 귀수재(鬼秀才) 모용불명(慕容不 明)이라고 하오." 옆에서 흑의여인 역시 간드러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대가 이렇게 잘생긴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내 이름은 모용소 파(慕容素波)예요. 남들은 저를 흑묘(黑猫), 검은 고양이락 부르고 있죠." (빌어먹을, 과연 검은 고양이라고 부를 만도 하겠군. 정말 저런 여자와 살게 되면 단 하루도 가지 않아서 뼈만 남게 될 거야.) 악우왕이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순간에 백운생이 웃으며 대꾸했 다. "백운생이오. 헌데 무슨 용건이라도 있소?" 모용불명이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 더 들을 필요는 없소. 다만 우리 는 그대가 감히 우리의 지역을 염탐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잡아가려 는 것이오." 백운생은 싸늘하게 웃었다. "우리가 순순히 응하리라 믿고 있소?" 모용불명은 역시 음침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흥, 너의 무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소용이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 현현 보에 와서도 큰소리를 친다면 어림도 없다는 점을 알아두어라." 백운생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삼혈과의 일을 모두 알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대체 당신들은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말해줄 수가 있겠소?" 모용불명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건 우리를 따라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백운생은 담담하게 웃었다. "과연 그것이 마음대로 될까?" 이에 모용불명은 옆의 모용소파에게 말했다. "넌 조금 옆으로 물러가 있거라." 이어 전신에서 무서운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하겠군." 악우왕 등은 옆에서 이를 보고 있다가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비록 지금이 어두운 밤중이기는해도 달빛에 의해서 거의 대낮처럼 사방을 살필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이 심하게 어두워진 것이 었다. 이것은 조금 전에 삼혈 등이 펼쳤던 가공했던 공격과는 또다른 차원 의 것이었다. 마치 먹물같은 어두운 기운이 주위를 감싸고 그 가운데 천지 간의 온갖 괴물들과 사악한 귀신들이 가득차서 사람의 혼백을 일시에 빼앗 아 버릴 듯했다. 이것은 극도의 최면술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악우왕 등은 거의 넋이 빠졌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명아(明兒), 너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한소리의 일갈(一喝)과 함께 갑자기 어두웠던 장내가 다시 훤하게 밝아졌 다. 그 무서웠던 기운도 사라진 지 오래였고, 모용불명이라는 그 흑의인은 모용소파의 부축을 받으며 뒤로 십여 장이나 물러나 입가에 피를 토하고 있었다. "으으, 현현공(玄玄功)이 파해되다니!" 모용불명은 이를 가는 표정이었다. 이에 비해 백운생의 태도는 여전히 담 담하고 전혀 당한 모습이 아니었다. 현현공! 그것은 동심각의 금단공, 성수거의 선천공과 함께 천하의 절대신 공으로 알려져 있는 무서운 신공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현현보의 독문 심법이다. 악우왕 등은 이에 더더욱 백운생의 능력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때 어느 틈엔가 모용불명의 곁에는 한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제5권 끝> --계속-- #5417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35장 11/24 15:31 193 line 제35장. 무학고수(武學高手) 현의중년인! 이 사람은 다소 눈에 익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조금 전까 지만 해도 절벽 위에 서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이는 오십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용모는 단정했고 준수해 보였 어도 눈빛이 혼탁하게 흐려져 있어서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무려 백여 장이나 되는 먼 거리를 순식간에 날아왔다는 것은 악우 왕 등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능력이었다. 이것은 아까 백운생이 순간 적으로 이동했었을 때의 능력과 거의 비슷하게 여겨지는 놀라운 능력이요, 굳이 신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만일 악우왕 등이 저자의 거리에서 이 사람을 보았다면 그리 주목하지 않 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놀라운 그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에 일행의 가슴 은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대체 어떠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과 연 사람의 의문이라는 것은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백운생 역시 그 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누구요?" 현의중년인은 멍하니 백운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대답했다. "나는 그들의 아버지로 모용신수(慕容辛樹)라고 하네. 남들은 나를 귀곡 전(鬼谷顚), 즉,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 자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악우왕은 속으로 외쳤다. (그렇다. 너는 정말로 미친 늙은이로군 그래.)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용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능력 역시 뛰어나네. 그와 같은 어린 나이에 벌써 그와 같은 경 지에 도달하다니. 동심각이 천하를 지배하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네." 백운생은 그를 주시하며 대꾸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모용신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과찬이 아니야. 아니고 말고. 만일 그와 같았다면 천하에 칭찬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네. 그렇고 말고." 모용신수는 말을 하다가 말고 문득 다시 고개를 쳐들어 멍하니 하늘을 바 라보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고 악우왕은 다시 속으로 소리쳤다. (미친 늙은이 같으니라구!) 백운생은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께서 이렇게 나타나신 이유는 저를 제압하기 위한 것입니까?" 모용 신수는 문득 생각에서 깨어난 듯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하여 고개를 흔들었 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사실 내 아버지의 명을 받고 자네를 데려가기 위 해서 온 것일새. 그는 이곳의 왕(王)이나 마찬가지이니 그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가 없지." 백운생은 물었다. "제가 만일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라구?" 모용신ㅅ는 문득 아주 곤란한 질문을 받아서 일시 처리할 수가 없다는 듯 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을 거듭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말이야, 나는 부득이 완력을 쓰지 않을 수가 없군. 하지만 만 일 자네가 나를 이긴다면 모든 죄를 더 이상 따지지 않겠네." 이에 악우왕은 크게 불만스러워서 다시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뻔한 얘기 가지고 어렵게 하고 야단이야!) 하지만 백운생은 시 종 태연하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현현보의 차기 주인과 겨루게 된 것은 영광입니다." 그렇다. 바로 눈앞 의 이 미친 중년인은 현현보의 후계자이고, 당금의 주인인 현현노조의 맏 아들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이었다. "그럼……" 말과 함께 백운생과 모용신수의 신형은 거의 동시에 하늘로 백여 장이나 높이 솟구쳤다. 그 속도가 놀랍기도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움직일 수가 있 다는 자체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까마득한 허공 위에서 십여 장의 간격을 두고 서로 마 주쳤다. 헌데 항상 미친 듯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모용신수는 이때는 실로 눈 빛이 빛나고 있었고, 정신이 아주 또렷해 보였다. "저 자는 알고 보니 싸움에 미친 늙은이였군 그래. 싸울 때만 저렇게 생 생하게 살아나다니!) 아래에서 악우왕 등이 내심 생각을 굴리며 경계를 하 고 있는 동안에 드디어 위쪽에서 격렬한 대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자, 그럼 우선 작은 것으로 시작하도록 할까?" 모용신수는 말과 더불어 가볍게 우수를 흔들었다. "귀음혼(鬼陰魂)일세." 귀음혼, 그것은 바로 현현보의 절세 장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시 허공 위에는 거대한 태풍이 휘몰아치듯이 검은 기운 이 물결을 치며 백운생을 향해 노도처럼 밀려갔다. 콰후후…… 이에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맞섰다. "대단하십니다." 번쩍! 그의 우수에서 거대한 황금빛의 장영이 어두운 그림자를 무찔러 가는 것 을 보고 모용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삽수로군." 그렇다. 이 금삽수는 좌선비도 연성하고 있었는데, 그는 실로 금삽수가 이토록 거대한 장영으로 화하여 가공스럽게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지 몰 랐다. 꽝꽈르르…… 일시에 두 개의 장영이 부딪치면서 그 엄청난 여파로 인해 아래쪽에 서 있는 악우왕 등도 거센 기운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허공 위의 두 사람은 역시 그 간격 그대로 서 있었다. 모용신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우리의 무공은 동심각의 무공을 당할 수가 없단 말이야." 말과 동 시에 눈빛이 번쩍이며 쌍수를 움직여 무수한 현현보의 절학들을 내쏟기 시 작했다. 하늘을 온통 뒤집어 놓을 듯한 거대한 강기막( 氣幕)인 흑풍와선 기(黑風渦仙氣)와 그물같은 현란한 현현지(玄玄指), 그리고 유령백변, 유 령풍에 이어 현현십삼식(玄玄十三式) 등이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 로 현란하게 펼쳐졌다. 물론 백운생은 그것을 동심각의 팔대신공을 사용하여 하나하나 맞부딪쳐 갔다. 따라서 하늘에는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도래한 것처럼 거대한 폭 풍과 회오리가 난무하기 시작하고 정신이 없어졌다. 아래의 악우왕 등도 제대로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게 한참이나 싸웠음에도 두 사람은 전혀 지치는 표정이 없었 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활력이 솟구치는 것 같았고, 두 사람의 간격 도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모용신수가 장력을 거두고 신형을 멈추더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자, 그럼 장난은 그만두고 이제 정식으로 한판 겨루도록 할까?" (아니, 이제까지는 장난이었다구?) 악우왕 등이 어이가 없어 하는 순간 백운생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우수가 거의 동시에 느릿하게 어깨 위로 올라갔다. 여태 까지의 동작에 비해서 그들의 움직임은 오히려 턱없이 간단하고 쉬워 보였 다. 그러나 일견하기로도 그것이 실로 엄청난 무예의 격돌이라는 것을 모 든 사람들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허공에서 일시 두 사람의 사이가 다소 벌어지는가 싶더니 문득 백운생의 입가에서 붉은 선혈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악우왕 등은 시력이 좋아서 이러한 광경들을 다 보았다. "앗!" "대형!" 아직 백운생이 부상을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 일행은 그런 광경을 보자 저마다 크게 놀라서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교적 신법이 취 약한 그들이 거기까지 올라가서 백운생을 부축하기에는 이미 시기적으로 늦어 있었다. 모용신수의 표정도 그리 태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운생의 안색은 갈수록 창백해지더니 급기야는 한 모금의 선혈을 내쏟은 다음에 그대로 혼절하여 허공에서 내리떨어지기 시작했다. "앗, 대형!" 악우왕 등의 일행은 즉시 신형을 위로 뽑아올려 백운생의 몸을 받아들려 고 했다. 과연 가장 먼저 백운생의 몸을 받아든 사람은 신법이 가장 고절 하고 무공이 높은 무구였다. 무구가 혼절한 백운생의 몸을 받아들고 이어 백운생의 상처가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하자 악우왕 등의 일행은 휴우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허나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결코 안심할 단계가 아니었다. 일행이 잠시 백운생의 몸을 돌보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모용불명과 모용소파 두 사람이 예의 그 환상적인 신법을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행은 결 코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헌데 그때였다. 공중에서 한 사람이 내려오며 말했다. "그들을 상하게 하지 마라. 다만 데려가기만 하면 되니까." 바로 모용신 수였다. 백운생을 물리쳐 이긴 가공할 무학고수(武學高手)! 일행은 가급적 이면 그와 대항해서 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었지만, 상황이 좋지 못하고, 또한 백운생의 안전을 위해서 그들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모용불명 등도 역시 다소 머뭇거리다가 다만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현현보는 어디에 있을까? 그곳은 바로 무이산중의한 깊고 은밀한 계곡 속 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시사철 짙은 운무(雲霧)가 계곡의 입구와 위쪽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고, 그 만장계곡의 아래로 몸을 날려서 한참이나 내려가다 보면 이윽고 마치 별유천지(別有天地)와도 같은 계곡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현보의 총단 건 물은 바로 그 계곡의 부근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일행은 곧바로 모용불명 등의 안내를 받아서 그 오래된 석조전각들의 사 이를 돌아서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의 안으로 들어갔다. 모용불명의 안내로 하나의 화려한 문 앞에 이르자 방문은 저절로 열리면 서 내부가 드러났다. 밀실(密室)! 상당히 화려해 보이는 밀실이었는데, 안에는 여러 가지 고급 의 탁자와 의자 등이 좌우로 놓여 있었고, 중앙의 끝부분에 하나의 지극히 호사스러운 태사의가 하나 있었고, 지금 한 사람이 느긋한 자세로 거기에 앉아 있었다. 이 사람의 특징은 괴이했다. 얼굴은 주름살이 맍아서 고희를 벗어난 노인 인 것 같았는데도 머리칼은 검고 싱싱하여 마치 젊은이의 그것에 못지 않 았다. 하지만 다만 기이한 것은 그 심현(深玄)하고 유유(幽幽)해 보이는 무서운 시선이었다. 일행은 그 앞에 서자 감히 그 사람의 시선을 마주 바 라볼 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모용불명이나 모용소파, 모용신수 등은 일행을 방 안에 데려다 놓고 나서 바쁘게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이 무렵 다행히도 백운생이 혼절에서 깨어나서 일행의 근심을 덜어 주었 다. 잠시의 숨막힐 듯한 정적이 지나가자, 문득 그 노인이 백운생을 향해 물 었다. "그대는 나를 알고 있는가?" 백운생은 조금도 주저없이 창백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다인은 현현노조(玄玄老祖)가 아닙니까?" 노인은 이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바로 모용현박(慕容玄博), 이곳 현현보의 주인인 것이다." 순간 악우왕 등을 비롯한 일행은 크게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기왕에 이 렇게 현현보주에게 잡히고 만 이상은 어떤 순간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백운생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이곳에서 정말로 그 의 어머니 일심사태를 납치했던 것이라면, 지금 일행의 목숨은 자못 위태 롭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까 백운생은 이 모용현박의 아들에게 도 당할 수가 없었는데 본인에게야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는가? 모용현박, 그는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에게 할 말이 없는가?" 백운생이 대답했다. "나는 나의 어머니를 찾고 싶소." 모용현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은 진심인가?" 백운생은 차갑게 대답했다. "어머니의 문제를 농담으로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하핫……" 모용현박은 일순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을 이었다. "과연 소문에 자네는 특별한 인재라고 하더니 그 말이 과장은 아니었군. 하지만 자네는 이곳에 자네의 어머니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소. 만일 뒤가 구리지 않는다면 우리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만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오." --계속-- #5430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36장 11/26 05:40 318 line 제36장. 신행백변(神行百變) 모용현박은 그 말에 일순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과연 예리하군. 그러나 사실 내가 직접 자네의 앞에 나서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었네. 게다가 내가 자네의 앞에 나타나서 설명해 준다고 해도 자네는 믿어줄 것 같지고 않고." 문득 조용히 있던 악우왕이 발끈해 서 외쳤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듣는다고 해도 역시 믿지 못할 것이오!" 모용현박은 일순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표정을 고치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약간의 공작을 해둔 바가 있네." 악우왕이 소리쳤다. "무슨 공작이라는 거요?" 악우왕은 모용현박을 볼수록 주눅이 들었지만 실로 그럴수록 크게 반발하 는 타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모용현박은 엉뚱한 악우왕이 나서서 까불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불쾌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대답했다. "자네들은 내 아들에게도 당할 수가 없었네. 그렇다면 나와 싸운다면 어 떻게 되겠는가?" 악우왕은 대답했다. "그야 물론 당신이 이기겠지." 모용현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이기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다. 따라서 너희들의 생사여 탈권은 나에게 주어져 있는 것인 만큼 만일 내가 너희들을 여기에서 풀어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야……" 악우왕은 일시 모용현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머리를 긁으며 어물어물거렸다. 이에 호덕승이 입을 열어 물었다. "우리가 더 이상 당신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까?" 모용현박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들은 주인의 힘을 믿고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어처구니없이 날뛰고 있는 것이로구나!" "……" "그렇다. 실로 내가 그 일심사태를 납치하여 공작을 꾸민 것이라면 내가 너희들을 얌전하게 돌려보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악우왕 등은 이 모용현박이 크게 화를 내게 되면 자칫 무슨 화가 닥칠지 알 수가 없어서 묵묵히 가만히 있었다. 문득 백운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오." 모용현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뜻은 아직도 완전히 나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술수가 뛰어나다고 했소. 따라서 당신에 대해 서는 누구라도 쉽게 단정을 내릴 수가 없을 것이오. 다만 나는 원래 당신 이 흉수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나의 조부 님께 건의해 볼 생각이오." 모용현박은 즉시 얼굴이 밝아져서 말했다. "그렇다. 내 뜻도 실로 그런 것이다. 나는 네가 나의 이 심정을 동심각주 에게 알려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나는 비록 동심각주와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확실한 원수지간도 아닌데 어째서 상대할 수가 없는 벌집을 건드 려서 화를 자초하겠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실 이곳에 와서 그 허실을 탐지해 볼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쉽 게 잡혀서 이 모양이 되었고, 그러나 당신의뜻을 알게 되었으니 애초에 생각하던 성과는 거두었다고 생각하오. 다만 한 가지 풀리지 않는의문이 있소." 모용현박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건 뭐냐?" 백운생이 말했다. "우리는 사실 이곳까지 오면서 삼혈과 오흉, 십귀의 의도적인 습격을 서 너 차례나 받았고, 위기에 몰릴 뻔한 적도 있었소. 그 일은 혹시 당신의 생각이 아니오?" 그 말에 일순 모용현박은 두 눈 가득 기이한 광망을 번뜩 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가 만일 흉수라서 너를 제거할 목적이었다면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꾸밀 리가 있겠느냐? 나라면 아예 그들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겠군요." 그렇다. 현현보의 능력이나 모용현박의 두뇌로 보아서 백운생을 은밀하게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그렇게 일을 허술하게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삼혈 등의 배후에는 어떠한 세력이 숨어 있는 것일까? 잠 시 후에 백운생은 몸을 돌리다가 문득 다시 물었다. "정말로 현현보에는 나의 어머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맹세할 수가 있 소?" 모용현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내가 너의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어야 안심을 하겠느냐? 네가 여기에서 믿지 않는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백운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싸움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이오?" 모용현박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내가 감히 그런 용기가 있겠느냐? 세상에 당금의 동심각을 당해 낼 힘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진실이라는 것은 금방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 다." 말과 함께 모용현박의 두 눈에서 기이한 빛이 번들거리고 있는 것 같 았다. 백운생은 잠시 묵묵하다가 이윽고 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잘 가라. 나중에 좋은 장소에서 다시 보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니……" 뒤에서 모용현박의 마지막 말이 길게 꼬리를 물며 따라왔다. 의문! 왠지 이 의문은 갈수록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았다. 삼혈 등의 일도 그러했고, 어머니의 일도 갈수록 안개를 잡는 것만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호덕승이 백운생에게 물었다. "정말로 이번에 가시면 각주께 그 말씀을 드려볼 생각이십니까?" 백운생 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일은 중대사이기 때문에 지체할 수가 없소." 호덕승은 눈살 을 찌푸렸다. "하지만 각주께서 형님의 말씀을 따라 줄까요?" 백운생이 대답했다. "최소한 경솔하게 하지 않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이 분명하오." "…… " 이때 문득 묵묵하던 무구가 입을 열어 물었다. "저어, 이제 몸은 좀 괜찮나요?"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한번 부상을 입어도 치명적인 상처가 아닌 한은 쉽게 치유될 수가 있는 능력이 있으니 안심해도 좋소." 그렇다. 기실 백운생의 무공은 근본이 대자연의 기운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운기조식보다도 내상의 치유가 빠른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운생의 상세는 벌써 거의 치유되어 얼굴에 은은한 혈색이 살아 나고 있었다. 문득 호덕승이 웃으며 말했다. "형님은 매우 좋으시겠습니다. 이렇게 곁엣 항상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 으니." 백운생과 그 일행은 그 날로 거의 쉬지도 못하고 다시 북쪽으로 길을 떠 나서 동심각이 있는 대흥산의 부근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동심 각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며, 또한 새로운 소식이 있었다. 백운생의 객방으로 찾아온 사람은 역시 묘수신통 문인중문이었다. "뭐라고요? 어머님이 계신 곳을 알아냈다구요?" 백운생이 당혹하여 되물었다. 문인중문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천하의 곳곳에 천랑단의 인원과 금룡단의 인물 들의 근거를 마련해 두고 있었지요. 다만 일종의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에 다소의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입니다." 천랑단은 첩보살수기관이고, 금룡단 은 정보처리기관이다. 문인중문은 금룡단의 단주이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정보에 있어서 가장 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어머님을 납치해 간 곳이 어디라고요?" 문 인중문이 대댭했다. "검방(劍房)이었습니다." 악우왕 등은 다함께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검방이었다고요?" 검방! 그곳은 대대로 무림의 정파를 자칭해오고 있었고 주인들의 행동도 광명정대하여, 무림에서 동심각과 성수거, 그리고 다음으로 쳐주고 있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충격이 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인중문은 말을 이었다. "원래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아미파의 전갈에서 혹시 흑의를 입은 사람이었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그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징." 백운생이 물었다. "그럼 어째서 방향의 전환을 시키게 되었습니까?" 문인중문이 대답했다. "그것은 아미파의 그분 스님께서 그 날 아침에 보았던 색깔이 검은 색이 아니라 청새이었던 것 같다고 알려왔기 때문에……" 백운생은 놀라 다시 물었다. "정현스님 말이오?" 문인중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참회동에 들어가서 참선을 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그 런 생각이 나서 우리에서 전갈을 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침이라서 청색 이 그 날 따라 검은 색으로 보였던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각주께서 직접 가셔서 그 날 보았다는 신법의 모양을 시범을 보이시고는 거의 확신 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백운생이 물었다. "그럼 스님께서 보셨다는 신법은 현현보의 신법이 아니었다는 말입니까?" 문인중문이 대답했다. "현현보의 유령백변이 아니라 검방의 신행백변(神行百變)이었습니다." 옆 에서 호덕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와 같은 가공할 신법이었다면 아침에 청색을 검은 색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 것이겠군요. 색깔이 뚜렷하지 않을 테니까." 백운생은 다시 문인중문에게 물었다. "그럼 직접 확인을 하셨다는 말입니까?" 문인중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극비리에 진행되어 제가 수하들을 풀어서 검방의 지하 밀실에 어머님을 숨겨두고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일입니다. 지금 이 사실을 알 고 있는 사람은 저와 각주님 이외에 얼마 되지 않습니다." 좌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만일 이 사실이 드러나면 더욱 큰 문제가 될 테니까요." 백 운생이 다시 물었다. "대체 검방에서는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했다고 합니까?" 문인중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각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가보셔야 하겠습니다." 백운생은 이에 더 이상 질문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즉시 일 행과 함께 동심각의 안으로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어서 오너라!" 백환성은 예의 그 집무실에서 다소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일어서며 백운생을 맞이했다. 백운생은 우선 인사를 드리고 현현보에서의 일을 설명했다. 이에 백환성 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잘했다. 내가 하마터면 일을 잘못 처리할 뻔했다. 네가그렇게까 지 신경을 써주었다니 나로서는 기쁘기 한이 없구나." 그 말에 백운생이 다시 물었다. "대강의 얘기는 외삼촌께 들었지만, 대체 어째서 그들이 그와 같은 일을 꾸민 것입니까?" 백환성이 대답했다. 그의 표정은 아주 침통했다. "사실 내가 간과하고 있었으나, 요근래 들어서 검방의 지위가 날로 향상 되고 있었다. 과거에는 당연히 우리 동심각이 무림의 주체가 되었으나 이 제는 굳이 그런 주체가 동심각에서만 나와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었던 게지." "……" "게다가 요즈음 내가 조금 과격한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천하의 사마외 도들은 깡그리 제거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현현보와 그 밖의 수라부 (修羅府)나 만화궁(萬花宮) 등을 제거해야겠다고 계획하고 있었지. 이 강 성 위주의 생각이 그들의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백운생이 눈살을 찌푸 리며 물었다. "검방의 목적은 무엇인 것 같습니까?" 백환성이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는 처음에는 너의 어미를 이용하여 나의 기를 꺾어보려는 것 이고, 두 번째는 스스로 무림맹주의 지위를 차지하려는 생각인 모양이다. 근래 들어서 도회(刀會)의 도황제(刀皇帝) 곽철산(郭鐵山)이나 성수거의 성수신의 등이 자주 검방을 찾아가곤 했었다. 나는 그것이 단순히 친선 목 적인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그런 깊은 뜻이……" "……" 그들이 만약 하나로 뭉쳐서 나를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무림을 정복하거나 흑백 양도간의 연합맹을 구성하자고 하겠지. 어쨌든 그들은 누군가가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나는 여태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무한정으로 믿고 지냈으니, 정 말로 어리석었다. 나는 사마외도만이 천하의 악적이고 정파의 사람들은 한 정없이 좋은 줄로만 알았다." 다소 회한이 서린 듯한 백환성의 말이 끝나자 백운생은 고심하는 빛을 보 였다. 생각해 보니 자칫하면 무림의 대파란이 올 조짐이 보이는 것이었다. 백운생이 물었다.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백환성이 이에 도리어 되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백운생은 잠시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능하면 큰 사건 없이 일을 처리했으면 합니다. 혹 시 그들이 무슨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랬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백환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목적이라고? 나의 며느리를 아무 말도 없이 납치해 갔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이냐?" "……" 백운생은 묵묵히 대답하지 못했다. 일단 어머님을 납치해 간 이상은 어떠 한 핑계도 정당화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동심각에 대한 명백한 도전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선전포고가 아니겠는가? 백운생이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백환성이 대답했다. "나는 너의 어미를 되찾아올 생각이다." 백운생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 일은 시각을 다투는 것이라 오히려 상대에게 선수를 당하게 되 면 우리가 심한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림을 위해서라도 좋지 가 않다. 따라서 나는 기습적으로 그곳을 찾아가서 네 어미를 구해올 생각 이다. 물론 그렇다고 검방이나 그 밖의 문파를 제거할 생각은 없다." 이에 백운생은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백환성의 말은 그러니까 검방 이나 성수거는 멸문시키지 않을 것이지만, 그 주인들만은 용서할 수가 없 다는 말로 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백운생은 문득 전에 현현보주인 현현노조 모용현박이 했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내게 감히 그런 용기가 있겠느냐? 세상에 당금의 동심각을 당해낼 힘은 어디에도 없다.-- 현현보주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갑자기 실감이 되 는 기분이었다. 겉으로는 대범해 보이는 백환성, 그러나 기실 그의 두뇌는 모용현박보다 도 월등한 것일지도 모른다. 천하의 모용현박도 두려워하는 상대가 바로 백환성이 아닌가! 백운생이 다시 물었다. "그럼 앞으로 그들과 원수지간이 되실 생각이십니까?" 백환성은 고개를 저었다. "원수지간이 되기로 처음에 시작한 곳은 내가 아니라 바로 검방이다. 무 림이라는 곳은 살벌하여 누구나 쉽게 양보가 가능한 곳이 아니다. 내가 살 지 못하면 남에게 죽임을 당하는 곳이다. 나는 물론 그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원수지간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 일은 그처럼 간단 한 것은 아니다." 말과 함께 백환성은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얘야, 설마 너는 이번에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백운생이 물었다. "그럼 지금 곧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에 중대한 일이라서 이미 함께 갈 인원을 생각해 두었다." 백환성은 말을 이었다. "너는 이번에는 너의 그 친구들은 남겨 놓도록 해라." 말과 함께 문득 우 수를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방 안의 문이 열리며 다른 사람들이 줄줄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름이 아닌 백씨 일문의 사람들인 세 명의 숙 부들과 철사자 혁련철수 등이었다. 백환성은 말을 이었다. "바로 저들이 이번에 우리와 함께 갈 사람들이다. 이번의 일은 중요하기 때문에 결코 한꺼번에 많이갈 수가 없지." "……" 검방(劍房)! 그것은 사천성(四川省) 검문산(劍門山)중에 위치하고 있었 다. 그러니까 아미파가 있는 아미산과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미산에서는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고, 동심각에서는 서쪽으로 한참을 가 야 이 검문산의 검방이 있는 곳에 당도하게 된다. 원래 이 사천성은 지형이 험악하고 기암계곡들이 많아서 특별히 험준하기 로 소문나 있는 검문산의 험준한 지형에 검방은 지어져 있었다. 마치 동심 각의 무수한 암봉들을 연상케 하는 무수한 암봉들과그 허리를 가로지르며 흘러내리는 계곡의 맑고 푸른 물들은 이곳이 혹시 선경(仙境)이 아닌가 하 는 착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선경은 아니고 바로 검방이다. 검방은 그런 천연적인 험준한 요소가 관문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 문에 특별히 다른 문은 보이지 않고, 몇 개의 계곡을 구비구비 돌아서 하 나의 제법 넓은 분지에 이르면 거대한 석조 전각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검방의 대회의청(大會議廳)이었다. 검방의 사람들은 대개가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이런 전각 속에서 살지 않고 암봉의 꼭대기나 수려한 계곡의 부근에 따로 움막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수련에 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오늘은 유난히 이 석조 전각이 있는 곳에 사람이 많았 다. 무슨 행사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슨 음모라도 있는 것일까? 물론 전각의 부근에 사람들을 살피는 곳이 더러 있었으나 아무도 백환성 의 일행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한 사람이 나타나 일행을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수신의와 도황제 곽어르신께서도 이미 오셨구요." 청년(靑年), 나이는 대략 스물서넛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으로 등뒤에는 한 자루의 서슬이 푸른 장검을 메고 있었는데, 그 용모가 대단히 수려하고 단정해 보였다. 실로 비범이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대단한 청년 이라고 여겨졌다. (성수신의와 동황제가 이미 와 있다고?) 백운생은 괴이하게 생각하며 즉시 백환성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그는 누구입니까?" 그 말에 백환성 역시 전음으로 대답했다. "그는 바로 검방주인 신검노야(神劍老爺) 상관승(上官勝)의 장손인 유성 검(流星劍) 상관룡(上官龍)이다.장래에 크게 기대가 되던 젊은이였지." 백환성의 말은 과거형이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이제는 목숨이 황천으로 달아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백운생은 절로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허나 상대인 상관룡은 전혀 그런 어색한 표정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는 백환성과 세 명의 숙부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올리더니 이어 백운생에게 시선이 와서 멎었다. 그리고 다소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번에 동심각의 후계자가 되신 대공자가 아니십니까?" 상관룡은 나이가 비록 자신이 서너살 위이지만 상대가 신분이 고귀하기 때문에 존칭 을 써서 그렇게 물었다.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면, 여기에서 검방의 인재를 보게 되니 새삼 안목을 넒히는 기분입니다." 그것은 백운생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는 솔직히 눈앞의 상 관룡과 같은 훌륭한 인재가 희생되는 것이 매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조부의 행실만 아니었다면…… 대체 검방의 신검노야는 무슨 생각을 먹고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이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상관룡은 이토록 태 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백운생의자신의 신분을 아는 듯이 말하자 상관룡은 다소 흠칫하며 웃으 며 말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앞으로 가급적이면 많은 교분을 가졌으면 합니 다." "……" 이어 백환성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그는 앞서서 일행을 안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계속-- #5431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37장 11/26 05:41 282 line 제37장. 무림대사(武林大事) 전각의 내부, 안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사람들이 들끓는 것이 아니 어서 검박하면서도 조용한 느낌을 주었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서 상관룡이 거대한 문을 밀치자 바로 눈앞에 화려한 대청이 나타났다. 그런데 백운생은 그 안에서 매우 눈에 익은 한 사람을 만나볼 수가 있었 다. 그는 다름아닌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성수거의 주인 성수신의 심환이었 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역시 같은 나이의 체격이 우람하고 강맹한 인상을 지닌 호랑이와도 같은 인상의 노인이 하나 앉아 있었는데, 그 기도가 얼핏 느끼기에도 가공스러운 것이, 아마도 그가 도황제 곽철산(郭鐵山)이 아닌 가 하고 생각되었다. 또한 상관룡이 공손히 걸어가서 보고를 드리는 한 명 의 청수하게 생긴 청의노인이 주인석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는데 그가 바로 검방의 주인인 신검노야(神劍老爺) 상관승(上官勝)인 모양 이었다. 기이하게도 이곳의 분위기는 다소 들떠 있는 것 같으면서도 평온했다. 백환성 일행이 들이닥치자 그들은 저마다 웃으며 일어나 반겨 주었다. "어서 오시오, 각주!" 과연 상관승이라고 생각된청의노인이 먼저 앞으로 다가와서 백환성에게 인사를 했다. 뒤이어 곽철산과 심환 역시 일어나서 백환성에게 인사를 해 왔다. 대체적으로 이들의 분위기는 다소 상대를 공경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러나 기실의 내용은 다르기 때문에 일행은 결코 방심할 수가 없었다. 상관승이 앞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각주, 내 손자놈을 소개하겠소." 말과 함께 손으로 상관룡을 가리켰다. 백환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훌륭한 젊은이로군." 이어 곽철산이 일어나서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소녀 하나를 가 리키며 백환성에게 말했다. "이 아이가 바로 내 손녀딸이라오." 그 소녀는 성장을 해서인지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백환성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도회의 손녀가 철부용(鐵芙蓉)이라고 해서 아름답고 담대하다고 하 더니 저 낭자가 바로 곽심의(郭心意) 곽낭자로군 그래?" 곽철산은 매우 기꺼운 표정이었다. "그렇게 칭찬을 해 주시니 고맙소이다 그려." 그때였다. 문득 장내에 한 소녀가 나타나서 맑고 명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할아버지, 그래 오늘은 오라버니의 날이라고 저는 소개조차 시켜주시지 않을 건가요?" 이에 장내의 시선은 그쪽으로 모이게 되었다. 바라보니 담 청색의 장삼을 걸친 아주 날렵하게 생긴 아름다운 소녀 하나가 맑고 시원 스런 눈빛을 굴리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백운생은 다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개 나이 어린 소녀의 몸으로 이와 같은 엄숙한 자리에 나타나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가 있 다는 것은 당돌함이 아니라 총명하고 강인한 성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일반의 소녀로서 할 수가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비 록 철부용이라고 했던 도회의 소녀의 강인한 모습에는 미치지 않지만 그 아름답고 청아한 얼굴 가운데 그 이상의 당당함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실로 이렇게 나서서 말을 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에 백운생은 내심 생각했다. (이 검방에는 실로 인재가 많구나. 저 상관룡이 대단한 인재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알고보니 저 소녀 역시 그에 못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곤란하게도 그 소녀가 실은 백운생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 닌가! 이때 상관승은 손녀가 갑자기 나서서 다소 곤란한 듯 얼굴이 붉어졌 으나 아내 웃으며 백환성에게 입을 열었다. "하하, 내 막내 손녀를 소개하도록 하겠소. 하긴 하나밖에 없는 손녀이기 는 하지만. 여러분도 알고 계시는지 몰라도 저 아이는 지나치게 영특하여 소호리(笑狐狸)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고, 이름은 상관비취(上官翡翠)라 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은 다함께 껄껄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하핫, 정말로 검방에 장래의 여영웅(女英雄)이 자라고 있었을 줄은 몰랐 는걸!" 다소 긴장된 듯하던 장내의 분위기는 그래서 다소 시끄럽고 부드럽 게 풀려 버렸다. 문득 백운생의 귓가에 다음과 같은 전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이 바로 그 동심각의 차대 후계자인 대공자인가요?" 백운생은 나이 가 겨우 십칠세 정도인 그녀가 자신에게 이토록 관심을 갖는 것을 보고 너 무나도 귀여운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서 모른 척했 다. 이때 백환성이 상관승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잠깐! 상관형, 내 할 말이 있는데, 잠시 들어 주겠소?" 상관승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들어 가까이 다가온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이라는 늘상 은밀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몸을근접시키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상관승은 백환성의 그러한 행동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 었다. 그때였다. 문득 장내를 그야말로 눈부시게 만드는 굉렬한 태양빛과 같은 황금광(黃金光)이 백환성의 몸에서 일어났고, "으악!" 경황없는 비명성이 상관승의 입 속에서 터져나왔다. 백환성의 황금광은 금방 사라졌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일순 차갑게 경악으 로 굳어졌다. 상관승!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탕하게 웃고 말하던 그의 전신이 이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서서히 양단되고 있었다. 쓰러져 가는 상관승의 마지막표 정은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의혹 그것이었다. 하지만, 쿵…… 드디어 육신이 끔찍스런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 버리자, 그제서야 상관룡 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그 옆으로 다가들었다. "아버님!" "할아버지!" 이것은 말하자면 청천 하늘의 날벼락이라고나 할까. 모두의 표정이 그러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상관승의 시신을 부둥켜 안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 제히 백환성을 향해 분노와 경악으로 집중되었다. 이에 백환성은 문득 상관승의 시신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청의중년인을 향해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상관검남(上官劍南), 어서 내 며느리를 내놓도록 하게!" 상관검남, 그는 검방의 후계자, 아니 이제는 주인이 된 듯한 상관승의 맏아들 일검무혈(一 劍無血) 상관검남이었다. 즉 상관룡의 부친이기도 하다. 백환성의 그 말에 일순 분노와 경악으로 물들어 있던 상관검남의 안색이 절망과 의혹으로 돌변했다. "당신은…… 당신은 그럼……" 그는 너무나도 크게 흥분하여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도 말조차 하지 못하 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장내의 사람들의 표정은 의혹으로 크게 물들었다. 이에 백환성은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기라도 하듯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 을 이었다. "실은 며칠 전에 나의 큰며느리가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었소. 나는 그 것을 암암리에 추적해서 조사해 왔었는데……" 상관검남을 향해 백환성은 말을 이었다. "자네, 부인하지는 않겠지? 어서 나의 며느리를 데려오지 않겠나?" 이에 상관검남은 문득 땅이 꺼져라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한 사람의 수하에게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어서 가서 그녀를 데려오도록 하게." 그 말에 처음에는 상관승이 죽었다는 엄청난 사실에 경악과 분노를 품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문득 여기에 간단치 않은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백환성과 상관승의 사이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인간 관계가 있 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실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관승의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이때 백환성은 다소 머뭇거리고 있는 곽철산과 심환을 향해 무거운 표정 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나와 함께 저쪽으로 가서 얘기를 나누지 않겠소?" 그 말에 두 사람은 처음에는 경계하는 빛이었으나 이내 뭔가 까닭이 있음을 알고 천천 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백환서의 뒤를 따랐다. 그때 백운생은 옆에서 이와 같은 광경을 함께 지켜보면서 내심 심한 마음 의 갈등과 번뇌를 느끼고 있었으며, 왠지 불길한 예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백환성이 그 두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한 가지 생각 이 떠올라 자신의 신법을 극도로 전개하여 소리없이 그 사람들의 뒤를 밟 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청을 벗어나서 복도를 지나서 하나의 작은 밀실로 들어갔다. 원래 백운생의 무공은 동심각의 금단공이나 무극검해에서 이룩된 것이지 만 기실은 용화보경의 용화대보리수미선공에서 기초된 것이었다. 따라서 분명히 백운생의 내공은 십갑자에 달하는 것이지만, 그가 만일 정신을 모 으고 용화선공의 내용을 상기하게 된다면 상상불허의 힘을 낼 수가 있었 다. 과거 내공이 거의 없는 상황하에서 신법을 펼치고, 폭포수의 물을 되 돌렸던 일은 그 증거로도 너무나도 충분한 것이었다. 과거 모용신수와의 대결에서 백운생은 아직 자신의 실력을 알지 못했으므 로 용화선공의 내용을 정신을 통일하여 떠올리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또다른 상황이었다. 너무나도 심각한 충격으로 인해 백운생의 정신은 극도로 투명하게 일어서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일단 정신을 모으게 되자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전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백환성 등의 뒤를 밟을 수가 있었다. 물론 그의 숙부들은 지금 몸을 뺄 수가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백환성은 백운생 등의 능력을 어림짐작하여 경계하지 않고 있었다. 만일 백환성이 백운생의 능력이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정말로 경계를 했었다면 대번에 그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백운생은 그들이 밀실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잠시 주저하다가 다 행히 조금 열려진 문틈으로 안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때 백환성은 밀실의 중앙에 이르러 다소 침중한 표정으로 두 사람과 이 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내 실은 여러분께 미리부터 상의를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었소. 그것은 바로 무림의 대사(大事)에 관한 일로서……" 백환성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참, 두 사람은 누가 상관승에게 내 며느리를 납치하라고 시켰는지 아시 오? 그것은……" 백환성은 문득 아주 조심스럽다는 듯이 목소리를 낮추었 다. 따라서 두 사람은 매우 궁금해져서 자연 그쪽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데 그때였다. 갑자기 눈부신 황금빛의 광망이 폭발적으로 백환성의 몸 에서 피어났다. 그것은 실로 백운생이 보기에도 아까 대청에서 보여 주었 던 그 위력보다도 수배는 더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번--쩍! 여기에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일까? "윽!" "헉!" 물론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심환과 곽철산은 미리부터 어떤 준비를 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아까 상관승이 어처구니 가 없이 당할 때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일시 두 사람의 몸에서 누렇고 흰 광채가 구름처럼 일어났지만 이 내 그것은 백환성의 눈부신 광채에 허망하게 스러지고 말았다. 백환성은 과거에 백운생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두 명의 능력과 비슷하고 셋의 합공은 감당할 수가 없 다.-- 그래서 백운생은 백환성의 말대로 정략결혼에 임해 주었던 것이었 다. 그런데 지금의 결과를 보니 결코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백환성의 능력 은 그 두 사람의 능력보다 월등히 고강했다. 설사 세 사람의 칠패의 주인 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백환성을 당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백환 성은 그들 삼인이 함께 모여 있는 이곳에 두려움도 없이 나타났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백운생은 이제서야 모용현박이 왜 그렇게 백환성과 동심각이 강하다고 말 했는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느닷없이 심환과 곽철산은 음모로써 백환성이 죽였다는 점은 백운생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그가 상관승을 죽였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욱 충격적이었다. 미리 이런 예감을 느끼고 온 것이었지만, 그러나 다음 에 찾아오는 충격은 더욱 컸다. 심환의 무공이 더욱 깊었는지 곽철산의 육신은 이미 갈가리 찢겨져서 시 신이 되어 있었지만, 심환은 아직 육신이 찢어지고 있음에도 죽지 않고 있 었다. 그는 바닥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백환성에게 겨우 눈을 떠서 물었 다. "왜 이런 짓을……" 이에 백환성은 자신의 성공을 기뻐하며 득의의 웃음과 함께 말했다. "흐흐흐, 상관승에게 내 며느리를 납치하라고 시켰던 사람이 누구인 줄 아는가? 바로 그것은 나 자신이었네." "……" 순간 백운생은 엿듣고 있다가 가히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크게 놀랐 다. (……!) 이럴 수가! 그의 얼굴은 극도로 창백해지고 더 이상 아무런 생가도 떠오 르지 않았다. 오직 고통과 절망뿐. --그의 조부인 백환성은 결국에는 저러한 사람이었던가? 과거 백운생은 자신이 동심각의 사람이라는 점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가문의 사람인 것 같은 느 낌이었다. 그는 득의의 흉소를 날리면서 심환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백환성의 얼굴을 보고 그 마귀(魔鬼)의 형상에 가슴 깊이 분노를 느꼈다. 그렇다! 이제까지의 의문스러운 모든 일들이 모두가 백환성의 의도적인 계획이었다는 말인가! 이때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득 백환성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백운생은 순간적으로 이곳을 피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발이 떨어지 지 않아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가공스러운 신법도 기이하게 도 이 순간만큼은 무용지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밀실의 문이 확 열려지며 백환성의 얼굴이 정면에 뚜렷하 게 나타났다. 백환성, 그는 아주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네가 뒤쫓아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언젠가 나는 이 일을 얘기해 주려고 했었는데,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 사실 너는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정직하고 순진한 것이 탈이다. 세상에는 변칙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나는 오늘 너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 너도 이제는 알아야 할 때가 되엇다는 말 이다." 그렇다. 기실 생각이 치밀한 백환성이 아무리 백운생의 기척을 몰랐다고 해도 그의 마음마저 읽지 못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백환성은 미리 기척 을 알지는 못했지만 속으로는 백운생이 이미 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 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백운생은 다소 얼빠진 사람처럼 넋을 잃고 서 있다가 문득 물었다. "정말로 모든 일은 할아버지가 꾸민 일입니까?" 과거에는 할아버님이라는 존칭을 썼지만 이제는 그런 존칭이 절로 나오지 않았다. 백환성은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 모든 것을 속시원히 말해주지. 그렇다. 애초에 너를 성수거에 보낸 것이나 결혼을 시키려고 했던 것, 그리고 삼혈 등을 시켜서 순진한 너에게 좀더 강호의 경험을 쌓게 한 것, 게다가 네 어미를 상관승에게 납 치하게 하고 네가 현현보에 가도록 유도했으며, 마지막으로 세 숙적들을 제거한 것들은 내가 일찍이 모두 꾸며서 그렇게 계획한 일이었다. 얘야, 너는 나의 후계자인데 내가 무엇을 숨기겠느냐?" (후계자…… 후계자라고?) 백운생은 잠시 넋나간 듯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뇌까렸다. --후계자. 그런 한마디가 그의 뇌리 속을 송곳처럼 휘젓고 있었다. "이제 이 할애비는무림을 아주 이상적인 세계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지 금의 무림은 썩었고, 좋지가 않다. 물론 다음에 그 세계의 주인은 바로 너 지. 자, 그럼 빨리 뒤를 따라오너라. 나는 바빠서 먼저 가겠다." "……" 백환성은 거의 벙어리가 되다시피 한 백운생의 어깨를 몇 번 토닥거려 준 다음에 급히 신형을 날려 대청이 있는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백운생은 그대로 잠시 넋나간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일에 생각이 미치자 급히 백환성의 뒤를 따라서 신형을 날리기 시작 했다. 대청! 과연 예상했던 대로 그곳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세 명의 숙부와 도회와 검방의 젊은 주인들이 무서운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세 명 의 숙부들 가운데 막내숙부인 옥면판관 백불인은 상관룡과 도회의 철부용 곽심의 등을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상황은 동심각에 지극히 유리한 것이 었다. 미리 백환성은 이와 같은 상황을 예측을 하고 모든 일을 꾸몄던 것 이었으리라. 이곳에서 백환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검방의 주요 고수 들을 제거하기 위해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 그 넓고 화려하던 대청의 천정이나 사방의 벽은 형펀없이 터져서 날 아가고, 백운생도 이미 경험한 바가 있는, 무공이 무형검의 단계에 도달한 세 명의 숙부들을 비롯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무서운 절기를 발휘하고 있어서 감히 나설 수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치 아비규환의 지옥과도 같았다. 확실히 동심각의 세 명의 숙부인 신기수사 백불의, 대력존자 백불패 등의 무공은 백운생이 전에 상대했던 현현보의 모용신수의 무공보다도 훨씬 높 았다. 검방의 일검무혈 상관검남과 도회의 백승도왕(百勝刀王) 곽자의(郭子義) 등의 무공이 결코 약하지 않은 것인데도 그들은 지금 거의 사경에 몰려 있 었다. 백운생은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는 지금처럼 자신의 능력의 부족 을 한탄하기는 처음이었다. 차라리 악우왕 등을 이곳에 데려오지 않은 것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으악!" 먼저 백불의와 상대하던 백승도왕 곽자의가 죽어가는 비명소리가 섬뜩하 게 들려왔다. 그리고 상관검남도 위기에 몰려 있었고, 합공을 펼치고 있는 상관룡 등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지금의 상황은 백운생의 능력으로는 변화시킬 수가 없는 것이었 다. 헌데 그때 문득 백운생의 두 눈에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녀(少 女)! 아까 당돌하게 나서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던 십칠세 가량의 아름다운 미소녀, 소호리(笑狐狸) 상관비취(上官翡翠)라고 했던가? 별호는 귀엽고 영특하다는 뜻인데,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극심한 충격으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상관승의 시 신, 처음의 그 시신을 앞에 두고 그녀는 앞에서 누가 싸움을 하건 말건 그 저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계속-- #5438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38장 11/27 13:01 301 line 제38장. 힘의 정의(正義) 그녀는 대체 상관승의 시신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모 습을 보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대체 주위에 그토록 심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렇게 아직 살아 있 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에 극심한 충격을 느끼고 있는 동병상련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백운생 은 문득 그 소녀를 구해야 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치밀었다. 그것은 스스 로를 향한 절대적인 집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백운생은 순간적으로 지극히 빠른 신법을 펼쳐서 넋을 놓고 망연 히 앉아 있는 상관비취의 허리를 안아들고는 밖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비단 그의 신법이 워낙에 빨랐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는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어서 감히 그에게 한눈을 파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상관비취의 가녀린 몸은 무공 수련으로 단련되어 탄력적이면서도 매우 가 벼웠다. 하지만 지금 백운생으로서는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막상 상관비취의 몸을 안고 밖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대체 어디로 가야 할 지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렇다고 주저하다가 백환성의 눈에 띄게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백운생은 방향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바람을 가르고 허공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략 일각 정도 날아갔을까? 백운생은 자신이 이미 수백 리는 날 아왔고 더 이상 백환성에게 들킬 염려가 없다고 판단이 되자 이내 상관비 취를 안전하게 숨겨둘 만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 그곳은 그야말로 험준하기 이를 데가 없는 암벽들이 늘어서 있었는 데, 그 계곡들의 옆으로 수많은 폭포수들이 줄기차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 다. (……) 백운생은 경황이 없었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으로 상관비취를 안고 폭포 수들이 있는 쪽으로 허공을 가로질러 나아가서 이윽고 하나의 폭포수의 중 간 부분에 이르러 신형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즉시 자신이 일찍이 알고 있 었던 용화선공의 내용을 상기하여 그 거대한 폭포수의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허공에 떠 있는 채로 폭포수의 물을 되돌린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무공으로 하자면 그리 어려울 것 도 없지만, 기실 무공으로는 따로이 할 일이 있었다. 폭포수의 물이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중간에서 뚝 끊어져서 서서히 위로 올라가고 그 가운데에 공간이 드러나자, 백운생은 이어 상관비취를 안고 있지 않은 좌수를 그 절벽면을 향해 서서히 내밀었다. 그러자 소리도 빛도 일지 않는 가운데 가공할 기운이 전면으로 빠르게 밀려갔다. 이것은 바로 무형검(無形劍)이라는 것이었다. 무형검은 최고의 무예이고, 형식이 없는 가장 바른 형식의 무예를 말하는 것으로, 백운생은 이미 터득 하고 있었다. 원래 이 절벽면은 오랫동안 폭포수의 물이 닿아서 쇳덩이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그러나 일단 백운생의 무형검의 공력이 그 면에 닿는 순간 마치 두부가 부서져 내리듯이 한 순간에 푸석푸석한 돌먼지가 날리면서 그곳에 는 하나의 깊고 넓으며 은밀한 동굴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실로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신의 조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었 다. 물론 백운생은 지금 자신의 한계에 달하는 최대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경황이 없지 않고, 정신이 한 가지의 생각에 묶 여 있지 않았다면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보다 현명한 방법과장소를 물색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사고력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하여 그는 지나치게 많은 공력과 심력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렇게 용화선공과 무형검을 동시에 전개한다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만일 이때 품속에 안겨 있는 상관비취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주위에서 누군가가 그를 방해한다면 주화입마(朱火入魔)에 걸려 불구가 되거나 죽음 을 당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 무형검으로 만들어진 석실의 내부는 실로 깨끗하고 잘 만들어져 있었 다. 다음 순간 백운생은 상관비취를 안은 채로 그 안으로 신형을 날려 들어갔 고, 뒤이어 용화선공의 능력을 풀자 그 폭포수는 다시 힘차게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콰콰…… 그 우레 같은 소리를 들으며 백운생은 겨우 다소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그가 방금 전에 만든 이 수렴동굴은 아주 완벽하게 만들어져서 밖에서 누 구라도 그러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것이었다. 폭포수의 물 을 통해 희미한 빛살이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고, 그러나 밖에서는 이 안이 결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백운생은 절로 흐르는 식은 땀을 닦으며 문득 자신의 품속에 안겨 있는 상관비취를 내려다보았다. 상관비취, 그녀는 이 순간 역시 멍한 시선으로 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태까지 그녀가 잠자코 있어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백운생은 절로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그녀를 한쪽의 깨끗한 반석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지금 검방은 완전히 궤멸되고 있는 중이오. 누구라도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앞으로 여기에서 지내면서 밖으 로 나가지 않도록 하오. 나가서 들키게 되면 죽을 것이니, 당신이 죽는다 면 그 복수는 누가 해주겠소?" 백운생은 문득 가슴 깊숙히 치미는 고통을 느끼며 잠시 웃었다. 이어 말을 계속했다. "나는 물론 상관이 없소. 나중에 당신이 나에게 복수를 하든 말든간에 상 관하지 않겠소. 나 역시 백씨 일문의 사람이니까. 하지만 당신이 있는 곳 을 발설하지는 않겠소. 나는 당신이 아무런 피해도 당하지 말고 이 혈겁에 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소. 적어도 당신 하나만은 살아야 하지 않겠소? 그래서 복수를하겠다면 나중에…… 기꺼이 당신의 손에 죽을 생각이 있 소. 나의 이 말을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라오. 내 말은 진심이 오." "……" 백운생은 지금 경황이 없어서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고 횡설수설했다. 그는 잠시 계속해서 말하다가 그녀가 여전 히 자신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기만 하자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손짓으로 뭔가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빨리 냉정하게 행동하기를 바라오. 나 는 여기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앞으로 당신의 일은 당신이 알 아서 처리하시오. 물론 당신은 명가의 후손이니 무공으로 이곳을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 그리고 은자가 없다면 내가 한 천냥쯤 주겠소. 자, 여기에 있소." 백운생은 품속에서 은표를 꺼내다가 무려 이천냥이나 되는 은표를 꺼내서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 "시신을 거두는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가문의 명백이 이어지는 것 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소?" "……" 이 상관비취는 여전히 망연하게 그를 바라볼 뿐 대꾸나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백운생은 문득 덧없다는 생각에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나는 가겠소. 잘 사시오." 백운생은 한숨과 함께 밖으로 번쩍 몸을 나려 사라져 갔다. 헌데 그때 문득 그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는 상관비취의 두 눈에 한 줄 기 기이한 빛이 어리기 시작하는 것을 백운생은 보지 못했다. 다시 백운생이 검방의 대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거의 끝나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상관룡과 철부용 곽심의 등은 시신이 되어 바 닥에 뒹굴고 있었고, 상관검남도 죽어 있었다. 몰론 그 밖의 검방의 수하 들은 백환성을 비롯한 백씨 일문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장내는 한 차례의 격렬한 싸움이 지나고 간 흔적으로 아수라장을 연상케 했다. 결과는 백환성의 대승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일심사태는 안전하게 구조되어 백환성 등과 나란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대체 그녀는 납치된 것인가, 아니면 알고도 이용 을 당했던 것이었을까? "어머니!" 백운생이 부르며 다가가자 일심사태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짓다가 반가운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네가 왔느냐? 어서 이리 오너라!" 일심사태의 얼굴은 주위의 사람들에 비해서 수난을 겪은 사람답지 않게 태연하고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불도의 수행을 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도 무지 그녀는 주변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백운생이 가까이 다가가자 백환성이 옆에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어디에 갔다왔느냐? 마침 잘 왔다. 우리는 지금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어 백환성이 손짓을 하자 일행은 천천히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서 가자!" 일심사태가 그 뒤를 따랐고, 백운생도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갔다. 당금 무림의 정파의 기둥이라고까지 말하던 검방과 도회, 그리고 성수거 가 무너졌다. 원래 이들 칠패의 사람들은 자체 내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 후계자는 하 나만 키워서 집중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주인 하나만 제거되 면 나머지 사람들의 능력은 거의 보잘 것이 없기 때문에 저절로 궤멸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세상이 다 함께 경악할 일이었다. 무려 수백년 동안을 일각과 칠패가 무림을 지배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었는데, 이제는 일각과 사패가 무림을 지배할 것인가? 동심각에서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그들 세 개의 거대 문파가 스스로 멸문 을 자초했다고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문파은 한결같이 평판이 좋은 세력들이었기 때문에 많은 억측과 의혹을 자아냈다. 하지만 무림은 그야말로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당금에 이르러 동심각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은 없었다. 무림인들은 경악했다. 또한 뭔가 알 수 없는 격동의 혼란기가 도래한 것 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느끼기 시작했다. 허나 오직 그뿐이었다. 아무도 동심각의 일에 나서서 대항하지 못했다. 무림대평의회(武林大評議會)가 열 리기에는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설령 무림대평의 회가 개최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시점에서 과연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있을까? 백운생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동심각으로 돌아왔다. 우선 극심한 마음의 충격을 느낀 백운생으로서 당연히 기대고 싶어진 사람은 어머니였다. 아 니, 그는 해명을 듣고 싶었다. 여태 자라면서 거의 의지하겠다는 생각을 가져보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과거에는 백운생은 무림을 지배하고 있는 백씨 일문이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자랑스러운 가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그 가문의 사 람들이 추악하고 더러우며 가공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 린 백운생의 사고방식은 변했다. 전의 그는 스스로 정도를 걸어가는 만인의 표상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 었지만, 지금은 오직 더러운 핏줄을 이은 가문의 자손이라는 모멸감과 회 의, 번뇌, 고통과 자학 등으로 그의 심상은 가득 메워져 있었다. 아니, 그 러면서도 내심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달래기도 했다. "아미산으로 돌아가겠다고?" 백운생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어머니." 일심사태는 눈살을 다소 찌푸렸다. "할아버님께서 허락을 하시더냐?" 백운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 혼자서 내린 결정입니다." "……" 일심사태는 잠시 묵묵히 말이 없었다. 백운생이 다시 말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일심사태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백운생은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결정을 하는 것입니까?" 일심사태는 대답했다. "아미산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미산에는 너를 받아들일 만한 여 유가 없다. 너는 너 하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감히 할아버님을 ㄴ하게 해서 아미파를 멸망시킬 참이 냐?" 백운생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일심사태는 문득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항상 바르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항상 힘의 정의가 앞서고 있는 것이지. 즉, 힘이 있는 것이 정의이고 바른 것이다. 알겠느냐? 변칙이라도 거기에 힘이 가해지면 그것은 바로 정의라는 말이 다." "……" 백운생은 멍하니 말을 못했다. 그는 설마 존경하는 어머니의 입에서 이러 한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세상에 정의는 없고 힘이 바로 정의다!-- 그렇다면 오로지 무공에만 전념할 일이지 불도는 무엇 때문에 닦고 있는 것일까? 다소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어머니를 감히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 었다. 백운생은 다시 물었다. "어머니, 저는 도저히 이런 곳에서 계속 지낼 수가 없습니다. 부디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 일심사태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서 있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좋다. 이것은 너의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라. 나는 간섭하지 않 겠다. 다만 이 일로 인해서 그 여파가 나에게 닥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말이 끝나자 일심사태는 늘 그러했던 것처럼 싸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멀 어져 버렸다. 백운생은 사라져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문득 가슴이 탁 막 히는 듯한 답답한 기분을 느끼고 내심 중얼거렸다. (무구와 우왕 등을 만나봐야 하겠군.) 원래 백운생은 가장 투철한 신념과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따라서 항상 그의 행동은 온건했고 여유가 흘렀다. 하지만 이제 그의 모든 신념이 송두리째 무너지게 되는 계기가 도래했다. 백운생은 자신이 한 마리의 아름다운 황금빛 코끼리라고 생각해 왔었으 나, 기실은 자신은 한낱 추악한 짐승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그러한 사람의 모습은 어떠할까? "아니, 형님, 그게 정말이오?" 백운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네." 악우왕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다시 물었다. "그럼 각주께서는 무림을 정복하려는 것이오?"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방금 전에 말한 그대로이 네." 이것은 확실히 악우왕 등에게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크게 안색이 변해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백운생이 물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호덕승이 물었다. "형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계속 이곳에 남아서 후계자의 수업을 받으실 것입니까?"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곳에 더 있고 싶은 마음이 없네." 호덕승은 악우왕과 좌선비, 그리고 무구를 돌아보았다. 악우왕이 거칠게 소리쳤다. "좋소.난 형님이 계속 여기에 남겠다고 했다면 형님으로 여기지 않을 생 각이었소." 좌선비와 무구는 묵묵히 백운생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악우왕이 다시 소리쳤다. "까짓것 출세라는 것 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니오? 난 전에도 말했다시피 다른 곳에 가서 임금 노릇이나 하면서 한평생 잘 살아보고 싶소." 백운생은 호덕승에게 물었다. "자네는?" 호덕승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나도 물론 형님의 뜻을 따르겠소. 우리가 여기에서 의견이 엇갈린다면 뭐가 되겠소?"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그러니 그대들은 오늘 안으로 빨리 준비를 해서 은밀해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해주게. 그러면 내 나중에 그대들에게 연락을 하겠네. 선비, 무구도 내 뜻을 따르 겠지?" 좌선비와 무구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나 말은 없었다. 그들은 웃고 있는 백운생의 심사를 헤아리는 것이었 다. 악우왕 등이 모두 은밀히 동심각을 빠져나간 후 백운생은 여러 차례나 백 환성으로부터의 호출 명령을 받았다. 허나 그는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절하다가 그 다음날 아침에야 비로소 천천히 백환성의방이 있는 암봉으로 올라갔다. "어서 오너라, 얘야." 백운생은 안으로 들어서다가 문득 가볍게 놀랐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 들도 있었고, 또한 모르는 사람들까지 합해서 대여섯 명이나 방 안에 백환 성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백운생이 안으로 들어서고 백환성이 웃으며 그를 맞이하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우선 백운생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현현노조 모용현박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귀곡전 모용신수였다. 모용현박! 현현보에서 보았던 그가 대체 어째서 여기에 와 있는지 알 수 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 전에 백운생이 현현보에 가게 되었던 일이나 호용현박이 그를 상 대했던 일 등은 알고 보니 하나의 연극이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숙적이라 고 말했던 모용현박과 백환성은 원래는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단 말인가?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도가 가공스럽게 느껴지는 홍의노 인(紅衣老人)과 회의노인(灰衣老人), 거기에 한 명의 백발의 아름다운 용 모의 노파와 이제 나이가 열입곱 정도 되어 보이는 지극히 아름답고 뇌살 적이며 요요(妖妖)로운 기운까지 느껴지는 백의소녀(白衣少女)였다. 만일 지금 백운생의 마음이 매우 심란하지 않았다면 그의 시선은 처음부 터 그 아름답기 짝이 없을 백의 소녀에게 가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 백의 소녀는 백운생의 시선이 닿자 문득 뇌살적인 눈웃음을 지어 보이 는 것이었다. 백환성은 웃으며 백운생에게 말했다. "어서 인사하거라. 마침 이 시각에 네가 찾아오다니 잘된 일이다. 자, 이 분은 바로……" "……" 백운생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무림의 삼패의 주인들이 사라진 ㅈ금 남은 사람들은 사패의 주인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다름 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 남은 사패의 주인들이 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아주 공교로운 일, 하지만 이것을 어찌 다만 공교롭다고만 말할 수가 있겠는가? 오로지 백환성이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이 사람들을 불러모 으지 않았었다면 이들은 결코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있지도 않을 것이었 다. 대체 이들은 이곳에 모여서 무슨 의논을 하고 있는 것일까? 홍의노인은 바로 장곡의 주인인 장노사(掌老師) 적용홍광(赤容紅狂)이었고, 회의노인 은 바로 수라부의 주인인 수라괴노(修羅魁老) 구양응린(歐陽應麟)이었으 며, 백발의 아름다운 노파는 만화궁의 주인 만화성모(漫畵聖母) 운성죽(雲 星竹)이고, 그녀와 함께 있는 백의소녀는 바로 만화궁의 후계자라는 이제 나이가 십칠세인 소주인 백의옥녀(白衣玉女) 운지려(雲芝麗)였다. --계속-- #5439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39장 11/27 13:02 302 line 제39장. 금강마인(金剛魔人)들 백의옥녀 운지려를 제외하고는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무림사에 거의 전 설적으로 알려져 내려오는 무예 초인(武藝超人)들이었다. 비록 지금은 동 심각에 백환성과 함께 모여 있는 것이지만,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능히 하 늘을 가리고 땅을 뒤집을 수가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다른 상황이었다면 백운생은 절로 흥분이 되고 얼굴이 벌개졌을 것 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고 웃는 얼굴이었다. 그들을 향해 그저 가볍게 예를 보낸 다음에 백운생은 백환성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백환성은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허허, 이 할애비가 그저 아무 일도 없이 너를 좀 부르는 것도 잘못이란 말이냐?" 물론 그 말은 그저 농담으로 한 것이었다. 이에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저는 지금 몸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만 가봐야 하겠습니다." 그 말에 백 환성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며 말했다. "아니, 이녀석, 그래 좋다. 이 할애비가 너를 부른 것은 사실 이유가 있 는 것이었지. 마침 이들도 있고 하니, 잘된 일이다." 이어 백환성은 백의옥녀 운지려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원래 너의 정혼자는 이렇게 따로 있었다. 앞으로 이 아름다운 아가씨와 혼인을 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해라!" "……" 백환성은 백운생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웃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넌 왜 말을 하지 않느냐?" 백운생은 웃고 있다가 대답했다. "저는 그녀가 한낱 이름없는 초부와 혼인을 할 것인지 의심스러워서 웃은 것입니다." 백환성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앞으로 초야에 묻혀서 땔나무나 해서 팔며 살아갈 생각입니다. 그 런데 그녀가 제게 시집을 오겠다면 그것이야말로 초부의 아낙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뭐라구?" 백환성은 일시 대노한 듯 눈을 부릅떴다. "누가 너더러 감히 그렇게 하라고 했느냐?"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저 혼자서 결정한 일입니다." 백환성은 그를 노려보았다. "너는 후계자의 지위를 그만두겠다는 말이냐?" 백운생은 대답했다. "그 일은 저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백환성은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그러자 즉시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값 비싼 탁자 하나가 고스란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런 일을 적성을 따져 가면서 하는 것인 줄 아느냐?" 백운생은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어떤 일에는 적성을 따지지 않지만, 또한 어떤 일에는 그것을 따지 고 싶습니다." 백환성은 백운생의 표정이 워낙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을 알자 무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지금 사패의 주인들이 함께 있는 마당에 이렇게 위신에 먹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의 분노 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일에는 꼭 적성을 따져야 하겠다는 말이냐?" 백운생은 대답했 다. "비단 이번의 일뿐만이 아닙니다." 백환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또 뭐냐?"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우롱하고 자신의 욕심으로 세상을 해치는 사람의 일은 어떤 일이라도 뒤를 돌보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뭐, 뭐라고?" 백환성은 순간 대단히 크게 분노한 것 같았다. 기실 그는 여태 누구에게 이렇게 심하게 매도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일개 무림의 지존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어찌 이런 말을 들을 수가 있겠는가? 백환성은 일시 너무나도 크게 분노한 나머지 할 말을 잃고는 이 를 갈며 백운생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문득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듯 한숨 을 내쉬며 말했다. "좋다. 가 있어라. 나중에 다시 보자." 백운생은 태연히 웃으며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차라리 그가 자신의 혈육이나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악을 처단하는 일이 천륜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이 모든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았었더라면 가장 좋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도깨비가 어느날 자신의 머리 위에 보기 싫은 뿔이 솟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심정이 될 것인가? (……) 악우왕 등이 떠나간 이후 장원은 텅 비어 있었다. 몇몇 시녀들이 조심스 럽게 움직이며 일을 하고 있을 뿐 너무나도 적막하고 무료하며 할 일이 없 어서 심심했다. 이 무료함이라는 것은 상상을 부르고 또한 번뇌를 부른다. 백운생은 번뇌 에 시달려 있었다. 그는 고통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절망 감은 고통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누군가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런 방법 으로 그의 심장을 난도질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문득 백운생은 생각을 중단하고 고개를 들어서 전면을 바라보았다. 안개에 깔려 있는 창 밖, 거기에 지금 한 명의 지극히 아름답고 뇌살적으 로 생긴 소녀가 마치 유령처럼 둥둥 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나요?" 그 목소리도 물기에 젖은 듯이 아름답고 유혹적이기 그지없었다. 백운생도 피끓는 젊은이다. 자연 이러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마음이 흔 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들어오시오. 문은 열려 있으니까." 다소 맥빠진 듯한 백운생의 말이 떨어지자 "호호……" 백의옥녀 운지려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하늘하늘 허공을 가로질러 서서히 그의 앞에 구름처럼 내려섰다. "두번째 보는군요, 우리는." 그녀의 눈빛이나 목소리는 지극히 자극적이다. 원래 이 만화궁이라는 곳 이 유혹적인 여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어서 그런가?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대답을 하면서, 백운생은 은근히 그녀의 옷입은 몸을 살폈다. 나삼(羅衫)! 멀리서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도 가까이에서 보기에는 속이 훤하게 비쳐 보이는 백색의 나삼을 그녀는 걸치고 있었다. 이것은 여인들 의 잠옷이다. 혹시 그녀는 이곳에 잠을 자러 온 것일까? 사실 여인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보일 듯 말 듯 유혹적일 때가 가 장 자극적인 법이다. 비록 백운생이 아직 여인의 몸을 가까이 해보지는 않았어도 호덕승 등과 사귀면서 그간에 얻어 들은 얘기는 상당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자극적으로 생긴 여인은 천하에 오직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여인! 백운생은 순간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 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웃었다. 이것 또한 도깨비의뿔이 아니겠는가! 도깨비는 뿔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마치 그처럼 이 백운생이라는 자신도 이런 추잡한 본능의 욕망이 없 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운지려는 슬쩍 나삼치마를 들어서 백옥같이 흰 다리를 보여 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의 이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백운생은 순간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몸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불끈 일 어서는 것 같았다.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름답군." 운지려는 이번에는 가슴을 가리고 있던 옷을 벗어 보였다. "이 몸을…… 갖고 싶지 않나요?" 백운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 물론이오." 뭐가 물론이라는 말인가? 운지려는 순간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더니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의 일을 해야 해요." "……" "어서 당신의 할아버지에게 달려가서 즉시 우리의 혼인에 대해서 말하고 백배사죄를 드리는 거예요." "……" "당신은 아주 이상하군요. 대체 그 정의라는 것이 뭐길래 그토록 미련을 가지고 안달을 못하고 있는 거죠? 그것으로 인해 행복이라도 얻어지나요? 당신은 지금 오히려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운지려는 웃으며 자신의 백옥같이 희고 아름다운 양팔을 앞으로 벌렸다. "어서 오세요. 당신이 지금에라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실로 다행이 로군요. 정의라는 것은 세상에 필요하지 않아요. 나를 봐요. 이렇게 행복 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정의는 시궁창에 내다 버려요!"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궁창에 내다버려라." 운지려는 활짝 웃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음…… 당신은 앞으로 고금제일의 무림지존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나는 당신의 좋은 반려자가 되겠죠?"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운지려는 백운생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다시 자신의 치마를 완전히 들어올리며 물었다. "당신은 여자와 자 본 적이 있나요?" "……" 치마 속에는 하나의 작은 고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백운생은 자연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핥듯이 그 고의 속을 뚫어지도 록 바라보았다. 운지려는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가볍게 움직이는 사이에 고의마 저 완전히 벗어 버렸다. 이제 그녀는 완전한 알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비소(秘所)! 백운생은 그녀의 봉긋하게 솟은, 현란한 아름다움을 자아내 는 두 개의 젓가슴만 봐도 전신이 어찔어찔 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 금 그 두 개의 백옥같은 검은 앙증맞은 숲과 유혹적인 계곡을 보게 되자 그만 정신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백운생의 시선은 그녀의 비소에서 못박히듯이 정지되었다. 운지려는 이것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까르르 웃으며 유혹적으로 나신을 가볍게 흔들었다. 헌데 그 순간에 이미 그녀의 비소는 백운생의 코앞에 다 가와 있었다. "호호, 원래는 혼인을 하고 나서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지금 내 몸을 줄 숙도 있어요." "……" "당신, 제가 아직 순결한 처녀라는 것을 알아요?" 백운생은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이 비소를 향해 움직이려고 했다. 허나 문 득 그는 손을 거두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운지려는 갑자기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 었다. "왜 그러죠?"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매우 아름답군. 그러나 나는 문득 내키지 않는구려." 운지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키지 않는다구요?"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운지려는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내 용모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고 성모께서 말씀하셨어요. 그 리고 나는 만화공(萬花功)을 익혔기 때문에 어떤 남자라도 원할거라고 하 던데?"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남자이니 물론 당신을 품고 싶소." 운지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그렇게 하지 왜 도중에 그만두었죠?"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갑자기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오." "내키지 않았다구요?"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 이어 다시 탐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문득 그녀는 두 다리 사이를 약 간 움츠렸다. 그리고는 얼른 주위에 떨어진 옷들을 집어들고는 몸을 가리 며 소리쳤다. "이이…… 죽일!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백운생은 돌변하는 그녀의 태도를 바라보면서도 역시 담담히 웃고 있었 다. 운지려는 얼른 옷을 다 걸치고 나서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쳤다. "난 그래도 네놈이 좋게 보이고 불쌍해 보여서 구해주려고 찾아온 것인 데, 뭐라구? 감히 나를 놀리다니! 죽을 줄이나 알고 있어, 이 멍청아!" 말과 함께 운지려는 번뜩하는 환영과 함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 다. (……) 백운생은 마치 아쉬운 듯이 그녀가 사라져간 방향을 더듬고 있다가 문득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죽을 거라고?) 죽음! 그렇다. 차라리 그것이 편할지도 모른다. 원래가 무림의 대지존인 백환성에게 그렇게 공개적으로 대들어 놓고 무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 불성설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운지려가 다녀간 후에 한참을 지나서야 백운생은 다시 백환성의 호출을 받았다. 백환성, 그는 백운생을 하나의 지하동굴 속으로 데려갔다. 그러면서 문득 물었다. "금강마인(金剛魔人)을 아느냐?" 백운생은 이제 ㅈ신이 엄한 책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것을 기 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의 질문을 받게 되자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모릅니다."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워낙에 천하에 알려진 바가 없는 전설적인 영물이니." (영 물(靈物)?) 백운생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으나 이제 백환성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 심이 일지 않았으므로 묵묵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백환성은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너는 지금 내가 너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것인지 아느냐?" 백운생은 무심결에 대꾸했다. "그 금강마인을 보여주려는 것입니까?" "그렇다." "……" 백환성은 다시 물었다. "너는 금강마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도 않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군요." "……" 백환성은 잠시 백운생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가 너의 그 태도에 화가 난 것을 틀림이 없는 말이다. 아마도 네가 다 른 사람이었으면 아직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 에 너는 아주 특별한 인재이기 때문에 한번의 기회를 더 주려는 것이다. 아, 지금 대답할 것은 없다. 우선 나의 금강마인들부터 보도록 해라." 금 강마인들이라면 그럼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는 말일까? "……" 이윽고 목적지가 가까워 오는지 백환성은 앞쪽을 힐끗 바라본 다음에 다 시 입을 열었다. "너는 사람이 아니면서도 초인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어떤 것이리라고 생각하느냐?" 백운생이 물었다. "초인의 능력이라면……" 백환성이 대답했다. "말하자면 지금 사패의 주인들보다 조금 모자라는 정도의 능력인 것이다. 아무래도 미물이니만큼 그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지. 너는 이것이 뭔 지 아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백환성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 모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체다." 백운생이 눈을 크게 떴다. "시체라구요?" 그때 두 사람은 동심각의 내부 가운데에서도 지극히 은밀한 장소인 지하 밀실에 들어와 있었다. 첫눈에 보기에도 실로 이곳은 아주 특이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우선 십 여 가지의 색깔을 지닌 안개들이 음습하게 실내를 감싸고 있었으며, 게다 가 무슨 향같기도 하고 썩은 냄새 같기도 한 괴이한 냄새가 전체에 진동하 고 있었다. 그러한 것이 얼마나 가득한지 처음에는 물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 결과, 모두 열 개의 투명한 옥빛의 석관(石棺)이 바닥에 가 로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훌륭한 석관이라면 비단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고상한 느낌을 주게 될 것이다. 허나 지금 이곳의 분위기는전혀 달랐다. 그곳에서는 색 색의 안개가 스며나오고 있었고, 마치 귀신 세계나 아니면 지옥 속을 연상 케 하는 음산한 기운이 공포스럽게 실내의 분위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 주 으시시하고 등골이 오싹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백환성은 역시 득의한 표정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 있는 열 개의 석관 속의 시체들이 모두 금강마인들이다. 그것들 은 영성을 가지고 있어서 나와 정신적으로 통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듣 지를 않지. 네가 전에 보았듯이 내가 항상 바빴던 이유는 바로 이것을 만 들기 위해서였다." 말과 함께 백환성은 입술을 오므려서 뭐라고 미미한 소리를 냈다. 바로 그때였다. 백운생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미미한 파동이 전해지면서 느닷없이 실내의 안개가 더욱 짙어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백환성의 주위에 는 열 명의 사람이 늘어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가 얼굴이나 피부색이 창백하고 뻣뻣하여 쉽게 살아 있지 않은 사람, 강시( 屍)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게 했다. 하지만 백운생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은밀하게 관 속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그것들의 능력이 백운생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 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그것은 이 금강마인들이 하나같 이 얼굴의 형상이 전혀 부패되지 않고 생생하여 원래의 모습을 알 수가 있 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불도속(佛道俗)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거지까지 끼 어 있었던 것이었다. 백운생은 특히 그 가운데에서 한 명의 눈에 익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다소 놀랐다. 도액신니(渡厄神尼)! 바로 현 아미파의 장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있는 장문인보다는 대략 십여 년 정도 젊어 보이기도 했다. 대체 도액신니와 이 시체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며, 또한 어째서 이 시체들은 신분이 각각이며, 그 용모가 각기 범상치 않아 보이는가? 하지만 백운생은 원래 이것들에 관해서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미 파의 장문인을 자세히 살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곧 뇌리에 서 지워 버렸다. --계속-- #5446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40장 11/28 19:53 329 line 제40장. 정인군자(正人君子) 백환성은 다시 입술을 오므려 뭔가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금강마인들은 잠시 동안 허공에 떠서 거의 환상적인 빠른 동작들을 선보이고는 다시 기 척도 없이 석관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실로 이러한 금강마인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가 있다고 한다면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천하에서 가장 강한 백환성이 다시 이런 금강마인들을 만든 이유 는 무엇인가? 마침 백환성은 백운생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이 물건들을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지 아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 었다.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구? 그야 그렇겠지."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너도 조금 전에 보았겠지만, 저 금강마인들의 능력은 당금의 사패의 주 인들의 능력애 버금가는 대단한 것이다. 즉, 저 금강마인이 세 개만 있다 면 한 명의 사패의 주인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놀라운 말이었다. 금강마인 셋이 모이면 사패의 하나를 멸할 수가 있다 니! 그렇다면 열 구의 금강마인이면 세 명의 초인들을 상대할 수가 있는 것인데, 백환성은 그럼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을 만들었던 것일까? 아닐 것이다. 백환성은 말을 이었다. "저 금강마인을 만드는 데 거의 이십 년 가까이나 걸렸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고 훌륭한 물건이라고 할 수가 있지. 저것들은 도검불침이고 초 인들도 제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거의 망가지지 않는다. 내가 살아 있는 한은." "……" 백환성은 백운생을 향해 다시 물었다. "너는 내가 다만 무림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상관방주나 심노인 등을 제거 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백환성은 두 눈에 기이한 빛을 번쩍 떠올렸다. "그렇다면?"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것은 아마도 무림을 할아버지의 생각대로 다루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 다." "하핫……" 백환성은 일시 호쾌하게 웃었다. "실로 그렇다. 너는 확실히 머리가 좋고 자질이 풍부해. 그래서 내가 특 히 너에게 집착을 느끼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고 있었 다는 말인가? 하핫, 그렇다. 나의 목표는 무림 정복(武林征服)에 있는 것 이다." 무림 정복! 백환성의 입에서 이 말을 듣게 되자 다소 생소한 기분이 들었 다. 사실 백환성은 무림의 지존으로서 무림을 제패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이 없지 않은가?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무림 왕국(武林王國)을 세우실 생각이십니까?"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 전에도 슬쩍 말한 바가 있지만, 현재의 무림은 불편하기가 짝이 없고, 무슨 대평의회니 하는 것이 있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다. 원래 나는 무림의 최강자(最强者)이고, 또한 당연히 무림의 지존 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무림의 놈들은 나에게 무슨 맹주니 하는 허울뿐 인 감투를 주어서 나의 행동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놈들의 또다른 교활함이지." "……" 백환성은 눈을 허공에 던지고 냉랭한 어조로 열변을 토했다. "원래 강호라고 하는 곳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이고 적자생존(適者生存)인 것이다. 그러한 생리(生理)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놈들은 나에게 어떤 도움을 기대하고 있다. 아니,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놈들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느냐? 항상 불만스럽게 생각을 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언제나 무너뜨릴 궁리를 하는 것이지. 흐흐……" 음산하게 웃고 있는 백환성을 향해 백운생이 물었다. "그래서 무림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입니까?" 백환성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이대로 평생을 살아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나는 기왕 에 가진 능력으로 천하를 제패하고 무림의 황제(皇帝)가 되어서 진짜 놈들 에게 나의 진면목을 보여 줄 생각이다. 너는 그것이 불가능하리라고 생각 하느냐?" "……" 백운생은 묵묵했다. 백환성은 말을 이었다. "원래 나는 네가 보았던 사패의 주인들과 언약을 하여 무림을 제패하기로 했다. 그 정도라면 충분한 것이었다. 허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보다 일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 이 금강마인들을 만 들었던 것이었다. 이제는 사실 그들이 없다고 해도 나는 충분히 대업(大 業)을 성공시킬 수가 있다." 그렇다. 백환성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천하에 누가 있어서 그의 이러한 야욕을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이란 말인가? 그에게 지금 사패의 주인 들이 동조하고 있는 것은 설상가상의 형상인 셈이었다. 백환성이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일을 위해서 무려 이십여 년이나 묵묵히 참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금강마인도 완성이 되고 더 이상 일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 나는 조 만간 대업을 일으킬 생각이다. 이제 묻게다. 너는 내 생각을 어떻게 보느냐?" 백운생은 직접적인 대답은 회피하고 되물었다. "만일 그런다면 대업은 성취되더라도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할아버지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존경심도 사라지고 미워할 것입니 다." 백환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흥! 천하에 귀찮은 것이 자칭 정파인들 의 존경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 위선적인 작태에 내가 얼마나 시달려 왔는 지 아느냐? 나는 조금도 그들의 존경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만 그들 을 하루 빨리 노예로 부리고 싶은 것이다. 너는 아느냐? 무릇 신(神)이라 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경을 받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 간을 하찮게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장부로 한번 태어나서 피를 두려워 한데서야 말이 되겠느냐? 희생이라는 것은 불가피한 것, 십인을 죽이면 살 인자료, 만인(萬人)을 죽이면 영웅(英雄)이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나는 영웅이 되려는 것이다. 결코 한평생을 쩨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자, 이 제 내 말을 알겠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백환성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나의 말에 따르겠다는 것이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에 백환성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두 눈에서는 기이하고 섬뜩한 광채가 쏟아졌다. 일순 싸늘하게 웃으며 백환성이 말했다. "영웅은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그러나 너를 중시했기 때 문에 이렇게 한번 더 물어보는 것이다. 너는 내가 왜 너를 이곳으로 데리 고 왔는지 아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 백환성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리석은 놈! 이곳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내가 너를 이리로 데려온 것은 최후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네 가 만약 거절할 시에는 이곳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도 너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다. 비록 네가 나의 친손자라고 하더라도.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두려울 뿐으로 죽음은 별로 두렵지 않습 니다. 저는 만인의 피로 이루어진 공양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백환성은 눈에 살벌한 기운을 쏟아냈다. "어리석은 놈! 네가 그렇게 정인군자(正人君子)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다 른 사람들이 퍽이나 너를 존경하고 칭찬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들은 다만 눈앞에서만 칭찬할 뿐이고 뒤에서는 비웃는 것이다. 누가 알아준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바라지 않기 때문에 구태여 남의 시선 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평온하고 행복합니다. 저는 이러 한 행복 속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백환성은 냉랭한 시선으로 백운생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 을 열었다. "너의 궤변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좋다. 내 다시 한번 더 묻겠 다. 너는 나의 후계자가 되겠느냐,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느냐?" 백운생은 대답했다. "저는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순간, "아하하하하핫……" 백환성은 고개를 위로 쳐들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로 인해서 무서운 기운이 사방을 짓눌러서 마치 실내가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실로 백운생은 절대의 공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데 그조차 즉 시 내장이 흔들리고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백환성, 그는 가공할 고수였다. 백환성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어이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내 일찍이 뜻을 둔 일에는 성공하지 않은 일이 없었는데, 뜻밖에도 네가 감히 나를 거역하려고 하는구나! 좋다! 내 비록 너에게 지기는 했어도 억 지로야 네게 시킬 수가 있겠느냐? 내 너를 곱게 죽여주도록 하겠다!" 일시 실내의 벽 전체가 부르르 떠는 것 같았다. 백운생은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 "혹시 저를 죽인 다음에 저의 어머니마저 제거할 생각이십니까?" "어머 니?" 백환성은 문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죽음도 돌보지 않으면서 네 어머니의 일을 걱정한다는 말이냐?" 백운생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렇다. 지금에 이르러서 어머니의 일을 생각한다고 해서 득이 될 것은 없었다. 자신은 백환성의 요청을 거부했는데 그가 그의 부탁을 들어줄 리 가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머니, 불효한 소자를 용서하십시오.) 백운생은 어머니 일심사태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 다. 그때였다. "어서 나오너라!" 백환성이 문득 다른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석실의 한쪽 벽이 스스르 옆으로 밀려나면서 뜻밖에도 거기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놀랍게도 그는 백운생에게 너무 나도 낯익은 얼굴, 언젠가 그와 한바탕의 무예 대결을 했었던 백운룡(白雲 龍)이었던 것이었다. 언제 그가 석벽의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이었을까? 백 운룡은 앞으로 걸어나오자 즉시 백운생을 향해 포권을 하며 웃으며 말했 다. "그간 잘 지내고 있었소?" 백운생은 필시 이 백운룡이 백환성과 미리 짜고 그 안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내심 씁쓰레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것은 바로 둘 중의 하나를 낚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백환서은 그를 이곳으로 불러서 최후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만일 그가 거절할 경우에 백 운룡에게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려고 한 것이었다. 원래 백운생을 제외한 후계자감은 백운룡밖에는 없는 것이었고, 이러한 식의 광경은 백운룡에게 후계자가 되는 확실한 신념을 심어주게 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환성은 백운룡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너의 형은 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백운룡은 이에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대답했다. "저는 물론 형님의 생각에 찬성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형님께서는 아직 세속의 생활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너무 유약한 것이 아닌가 합니 다." 백환성은 눈썹을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너의 생각은?" 백운룡은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강호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이 사라지는 판국이니 어 찌 작은 일에만 매달리겠습니까?" 백환성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문득 입가 에 기이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너는 어떻게 살겠느냐?" 백운룡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저의 식으로 살겠습니다." "너의 식이라고? 그것은 어떤 것이냐?" 백운룡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저는 만인의 행복을 위하여 저의 한 몸을 내던지겠습니다. 저는 기꺼이 만인을 위해서 수백 명을 희생시킬 용의가 있습니다." 그 말에 백환성은 매우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제 너는 나의 진정한 후계자이니라!" 순간 백운룡의 입가에 득의한 미소가 파도처럼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백운룡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백환성에게 정중한 대례를 올렸다. "하핫……" 백환성은 흡족한 듯 껄껄 웃더니 손가락으로 한쪽에서 묵묵히 서 있는 백 운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다. 그의 처리는 너에게 맡기겠 다.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이에 백운룡은 문득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어, 그의 무공은 저보다도 위인데 제가 어떻게 그를 감당할 수가 있겠 습니까?" 백환성은 잠시 흠칫하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상관이 없다. 내가 이미 그의 무공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느니 라." 그렇다. 기실 백운생은 조금 전부터 전신이 기이하게 무력하고 탈진 된 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백환성이 무형중에 그의 내력을 모조리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또한 백환성의 가공할 능력을 말해주는 것이 었다. 그러자 백운룡은 즉시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여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실수가 없도록 하겠습 니다." "하핫, 좋다!" 백환성은 한 차례 너털웃음을 웃더니 즉시 꺼지듯이 신형이 사라졌다. 자 신의 거처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백운생은 이러한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말없이 서 있었다. 이것을 보고 백운룡이 웃으며 천천히 다가와서 물었다. "후후, 당신을 내가 어떻게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아까는 형님이 라고 하더니 이제는 숫제 아랫사람 대하듯이 하고 있었다. 백운생은 이미 마음이 결정된지라 담담했다. "나를 죽이게." 백운룡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죽이지는 않겠소." (……?) 백운생이 고개를 들어서 바라보자 백운룡은 득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 다. "할아버지는 내가 후계자가 된 기념으로 당신이라는 선물을 나에게 준 것 이오. 그러니 어디 금방 없애버릴 수가 있겠소?" "……" "원래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주면 그것을 싫도록 가지고 놀다가 버리는 법 이오. 사실 나도 한 명의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으니까, 당신을 금방 죽이 고 싶은 마음은 없소." 백운생이 물었다. "그럼 나를 살려주겠다는 말인가?" 백운룡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가 당신을 죽이라고 하셨으니 그렇다고 살려줄 수도 없소." 백 운생이 물었다. "그럼 나를 어떻게 할 셈인가?" 백운룡이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당신을 나의 선물로 주었지만, 또한 이 일로 나의 그릇됨을 시험하고 싶었을 것이오. 즉, 나는 당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처리하여 그분 의 눈에 들어야만 하오." "……" "나는 당신을 금방 죽이지는 않지만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 로 만들어야만 하오." 백운생이 물었다. "나를 가두어 두겠다는 말인가?" 백운룡은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 "역시 똑똑하군. 그렇소. 나는 우선 당신을 아주 깊고 은밀한 장소에 가 두어 놓고 점차로 나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오." 문득 백운룡의 두 눈에 원독의 광망이 솟구쳤다. 그는 갑자기 백운생의 멱살을 부여잡더니 거칠게 소리쳤다. "이게 다 무엇 때문인지 아는가? 모두가 당신이 잘났기 때문이야! 나는 원래가 동심각의 후계자가 될 몸이었는데, 당신이 나타나서 나의 앞길을 망쳐 놓았소! 당신과 그날 겨루어서 패했을 때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는지 아는가?" "……" 백운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노려보는 백운룡의 두 눈을 바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백운룡이 말을 이었다. "나느 드디어 나의 원래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소. 그러나 아지근 부족 하지. 만일 지금 너를 죽이게 되면 할아버진ㄴ 항상 내가 너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오. 내가 나중에 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말이오. 따라서 나는 우선 당신을 아무도 찾을 수가 없는 곳에 가두어 놓 고 온갖 고생을 시키다가 내가 나중에 대공을 성취했을 때 추악해진 당신 과 함께 할아버지를 뵈올 생각이오. 그렇다면 그때는 할아버지는 내가 당 신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시겠지. 이것이 바로 나의 처리 계획이 오." 백운생은 내심 담담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이렇게 다시 삶을 이어가게 생겼군.) 백운룡은 잠시 백운생의 눈을 노려보다가 느닷없이 그의 몸을 잡아들고 밖으로 비호처럼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지하뇌옥(地下牢獄)! 동심각에도 이러한 곳이 있었던가? 물론 죄를 범한 자를 잠시 가두어 두는 뇌옥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실로 이처럼 깊고 은 밀한 곳에 위치한 천험의 뇌옥이 있을 줄은 백운생은 미처 상상도 못했을 정도였다. 전에 백운생은 무극동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하 깊숙이 들어가 보았던 적 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최소한 그것보다 두 배는 깊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백운룡의 무공은 확실히 그때의 혁련철수의 무공보다도 고강하여 깊은 지하에 들어가는데도 전혀 거침이 없었다. 마치 지옥으로 통하는 땅바닥의 갈라진 균열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백 운룡은 아득은 무저의 계곡 속으로 한참아나 내려갔다. 그리고 수십 개의 천연의 동굴 속을 거친 끝에 하나의 뜨거운 용암굴(鎔岩窟)에 이르렀다. 세상이 이렇게 용암이 시뻘겋게 흐르고 있는 곳이 있을 줄은 백운생은 미 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곳은 매우 뜨거웠다. 너무나도 뜨거운 기운에 백운생은 내공이 없어서 일시에 머리털이 다 타버릴 정도였 다. 백운룡은 그 용암의 바로 앞에서 백운생을 내려놓았다. 이어 준비한 쇠고 랑과 기다란 쇠막대를 이용하여 백운생의 두 다리를 묶어 놓고 그 끝의 쇠 막대를 석벽에 깊숙히 박아 넣었다. 그리고 백운룡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만일 누구의 도움이라도 받게 된다면 능히 이런 쇠고랑쯤은 벗어 날 수가 있겠지. 그러나 만일 그런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 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나 역시 여태 한번 내뱉은 말을 실천하지 않 은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사람의 내공이라는 것은 한번 사라지면 그것을 되찾는 데 있어 서 전보다도 오히려 노력이 배나 들기 때문에 백운룡은 이 백운생이 설마 하니 내공을 되찾을 수가 있는 방법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 이어 백운룡은 품소게서 다시 한 병의 호로병을 꺼내서 주며 말했다. "이것은 내가 전날 수련할 때 복용하던 벽곡단(酸穀丹)이라는 것이오. 하 루에 한 알씩 복용하면 되는데, 나중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능히 버틸 수 가 있을 것이오. 후후……" 백운룡은 벽곡단을 백운생의 옆에 내려놓고는 음산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한번 더위와 싸워보도록 하시오." 말이 끝나자 백운룡의 신형은 아득하게 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연히 할아버지의 뒤를 쫓다가 이곳을 발견했는데, 오늘 이런 일에 유 용하게 쓰일 줄이야. 핫핫핫……" 그것은 백운룡의 천리전음(千里傳音)이었다. 더위! 세상에 어느 정도라면 더위라는 표현을 쓸 수가 있을까? 이곳은 그 야말로 지독하게 더웠다. 아니, 뜨거웠다. 갈수록 점점 더 뜨거워지는 느 낌에 백운생은 아직 자신의 육신이 익지 않고 있는 것이 자못 신기할 지경 이었다. 세상에 이러한 고통도 매우 드물 것이다. 백운생은 이 고통과 싸우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아니, 그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고통 스러울 수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백운생은 수십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생각했다. 그 길이 차라리 고통을 단축시킬것이다. 그러나 백운생은 문득 마음을 달리했다. 이 고통, 이 고통에 지게 된다면 그의 마지막 남은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인가? 차라리 고통 속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리하여 점차로 심하게 뒤틀 리던 백운생의 얼굴과 온몸의 움직임이 조용하게 멎어지기 시작했다. 마침 내 백운생은 정좌를 하고 않아서 눈을 감았다. 자기 자신을 잊어가기 시작 했다. --계속-- #5452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41장 11/30 06:14 289 line 제41장. 호사다마(好事多魔) 이 뜨거운 동굴 속에서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둡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미 내력을 모두 상실했기 때문에 백운생은 어둠을 꿰 뚫어 보는 능력이 있을 리가 없었고, 이곳이 밝지 않았다면 더욱 곤란했을 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무슨 이유에서라도 어둠보다는 밝은 것이 나은 법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백운생은 심한 허기를 느꼈으나 백운룡이 주 고간 벽곡단을 복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시 움직이게 되면 그의 마음 의 평정이 깨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상상못할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하 기 때문이었다. 실로 이 육신과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은 오묘한 것이다. 원래 백운생은 거의 미칠 것 같은 뜨거운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가까스로 고통 속에 서 몰아지경(沒我之境)에 들어가자 드디어 고통을 이겨낼 수가 있었다. 백 운생은 자신이 이렇게 될 수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어쨌든 그것으로 인해 백운생은 다소 한 고비는 넘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었다. 식사를 하게 되면 마음의 평정이 깨지고, 그렇게 되면 다시 엄청난 고통 을 겪을 것이므로 백운생은 감히 모험을 하지 못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 다시 마음의 평정이 유지될지 알 수가 없었다. 설령 그럴 수가 있닥 해도 백운생은 도저히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은 용 기가 일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아까 겪은 고통의 정도가 너무나도 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대로 굶어죽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따라서 백운생은 죽기 전에 최대한으로 자신이 지금 머물고 있는 무아지 경 속에서 스스로의 이상과 행복에 도취되고 싶어졌다. 이미 거기에는 자 기 자신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의 모든 마음은 구도(求道)에의 길에 던 져졌다. 무릇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운명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위 대하다. 그 근본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며, 우주의 질서도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마음이 혼란해지면 운명에 휘말리게 된다. 운명의 힘이라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그러나 일단 마음이 더없이 맑아지 게 되면 어떤 운명도 맥을 못 추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거기까지 되는 과정이 또한 운명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상 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 는가? 누구는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스스로 타락해 가는 것이고, 또 한 누구는 지옥 속에 들어 있으면서도 마침내 지극한 행복에 젖게 되는 것 이다.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노력하기 나름이니 거대한 마음과 노력으로 바라본다면 이 운명이라는 것도 한낱 부질없는 물거품이 아닐손가! 지금 백운생에게는 아무런 사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이제 죽어갈 것이 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다만 스스로 전 심으로 이 도에 하나가 되어 녹아들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은 평소에 기울었던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원래 지난 몇 달간 백운생은 다소의 무공을 배워온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미 그 전에 백운생은 수년간이나 깊은 철리에 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용화 대보리수미선공(龍華大菩際須彌禪功)이었다. 이 선공은 백운생이 거의 완 성 단계에 이르러 있었는데, 도중에 무공을 배우게 됨으로 인해서 사용하 지 않아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공이 완전히 폐지되게 되자 다시 옛날의 그 용화선공의 내용이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되살아나게 되었 던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유아의 심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는 무아지경에서 아이들이 절로 어미의 푸근한 품속을 찾는 것처럼, 백운생의 마음도 절로 그 용화선공의 행복한 경지로 다시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 백운생의 그 수련법은 상당히 훌륭했고, 고금에 드물 정도로 속도가 빨랐으며, 불세출의 성과를 이루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제아무리 놀라운 결과였어도 지금의 상황과는 매우 다른 점이 있었다. 최소한 그것을 버릴 때에 버린다는 생각 정도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허나 지금 백운생은 그런 생각도 남아 있지 않았고, 본능적으로 어미의 단젖을 빨아먹는 아이처럼 계속해서 무의식적인 행동을 할 뿐이었 다. 그렇게 정신이 아주 극도로 맑아질 때에는 인간의 마음은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게 된다. 이 순간 백운생은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과거의 의문스럽고 희미했던 부분들을 그야말로 여실하게 풀어가기 시작하고 있었 다. 아니, 그것은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맑고 고요한 명경지수(明鏡 止水)에 산림의 모습이 훤하게 내비치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백운생의 마음은 갈수록 맑아졌다. 무엇을 성취했다는 기쁨같은 것도 없 고, 절박한 일념(一念) 속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었다. 백운생은 그것을 깊이 보고 깊이 느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났는지 모른다. 백운생은 아직 죽지 않았다. 하지만 백운생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을 기다리지도 않고 있었다. 오직 그의 생각은 맑고 투명하게 변해 있을 뿐 거기에 어떤 생각의 흐름이 일지 않고 있었다. 거의 절대(絶 對)의 경지라고나 할까? 백운생은 이미 전에는 아직 모르고 있었던 용화선공의 모든 내용을 완전 하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왠지 부족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것 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실로 커다란 성취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루 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이 중요한 순간에 느닷없이 그의 명상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대단한 녀석이로군!" "……" 한번 마음이 흔들리자 백운생은 다시 그 투명하고 맑은 심상을 유지할 수 가 없었다. 백운생은 비록 눈을 뜨지는 않았으나 마음이 이미 흐트러져서 심한 허탈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어 무아지경이라는 것도 깨져 버렸다. 우선 자신의 몸이 이제는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거기에 강한 집착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다시 눈앞에서 벼락치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뭣하느냐? 감히 어른이 왔는데도 아직 눈도 뜨지 않고 있다니! 내가 봐 줄테니 어서 걱정말고 눈을 떠라!" 상대의 어조에는 악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자신이 지금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모를 것이다. 만일 백운생이 아까의 그 맑고 투명한 심상 속에서 얼마의 시간을 더 보냈었다면 금방 떠오른 용 화선공의 의문을 해결할 수가 있었을 것이었다. 어쨌든 기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자꾸만 생각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백운생은 궁금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 그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일은 당 사자인 백운생과 백운룡밖에는 모르는 일이었고, 심지어 백환성도 모를 것 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대체 이 낯설은 목소리는 누구이며, 어 째서백운생이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아냈을까? 그리고 그는 무엇 때문에 이 곳에 나타났는가? 백운생은 이러한 의문들을 한꺼번에 떠올리며 이윽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한 사람이 보였다. 백의인(白衣人)! 원래는 백의였을 옷이 워낙에 오래된 탓에 색깔이 거무 죽죽하게 변해 있었고, 수염도 오랫동안 깎지 않아서 얼굴에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다. 그런데 이 괴인은 지금 바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둥둥 떠서 기 이하게 번쩍이는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무림 고수 일까? 대략 보아하니 나이는 중년을 조금 넘을 것 같았고, 얼굴은 상당히 잘생긴 편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누구십니까?" "너는 누구냐?" 갑자기 두 사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질문이 터져나왔다. 그러다가 괴인이 먼저 실소를 하자 백운생도 뒤따라 웃고 말았다. 그는 이 괴인 때문에 대공이 무산되었지만, 그러나 굳이 이 사람을 탓하고 싶지 는 않았다. 따라서 백운생은 웃으며 먼저 대답했다. "저는 백운생이라고 합니다." 헌데 기이한 것은 그 말을 들은 괴인의 태도였다. 느닷없이 미친 것처럼 철쩍 뛰더니 눈을 부릅뜨고는 큰 소리로 다시 묻는 것이었다. "백운생? 그럼 너는 정말로 백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말이냐? 너의 아버지 와 어머니는 누구였지?" 백운생은 이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크게 흥분하는 것을 보고 다소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기이하게도 이 사람은 이런 곳에서 살면서 거의 밖으로 나가보 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백운생을 보고도 기뻐서 달려와서 말을 걸었던 것이 었을 것이다. 외로운 사람에게 있어서 말벗처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그 런데 대체 이 괴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백운생은 내심 기이하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저의 선친께서는 백불범이라는 분이셨고, 저의 어머님은 지금 아미파에 들어가셔서 비구니가 되셨습니다." "뭐, 뭐라구?" 괴인은 일시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을 들엇는지 전신을 와들와들 떨면서 거의 반쯤은 발작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보아하니 생긴 것으로 본다면 원래는 매우 점잖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마치 어린애처럼 변해 버린 것은 아마도 그간의 외로움이 너무 커 서 성격이 달라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백운생은 이 괴인이 일순 너무나도 마음의 격동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잠시 그의 격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이때 기이하게도 백운생은 전혀 뜨거운 용암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문득 괴인이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헌데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어서 아직도 격동이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너는 선친이라고 했는데, 그럼 그 사람은 죽었다는 말이냐? 그리고 네 어머니가 아미파에 들어가게 된 과정을 좀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마치 그것은 뜨거운 친혈육의 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같은 말투였다. 백운생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곧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저의 선친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실종이 되셨는데, 할아버지께서 결국 그분이 돌아가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선친이라고 부른 것이고, 어머님은 선친께서 실종이 되시자 낙심하셔서 얼마 후에 스스로 아미파에 출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 그래?" 괴인은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온몸이 다시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백운생은 이 사람을 만나게 되어 무료한 것은 없어졌으나 너무나도 감정 의 기복이 심하여 옆에서 바라보기가 부담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해 서 그가 묵묵히 기다려 주자 이윽고 괴인은 점차로 마음의 흥분을 가라앉 히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너의 친애비라면 믿겠느냐? "……?" 이번에는 백운생이 다소 놀랐다. 그는 일시 자신의 귀가 의심스러울 지경 이었다. 놀라는 그를 향해 괴인은 다시 말했다. "내가 바로 네가 말한 의박운천 백불범이다. 뭐라고 해야 나의 말을 믿겠 느냐?" "……" 백운생은 일시 너무나도 크게 놀ㄹ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실종되어 이미 죽은 줄로 알았던 부친, 그가 이렇게 살아 있으며, 바로 이 괴인이 그의 부친이었다는 말인가? 백운생은 문득 귀가 멍멍한 기분이었다. "모르겠습니다." 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모르겠지. 나에게는 이제 원래의 나를 증명할 만한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내용을 듣게 된다면, 내가 너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 괴인은 잠시 고개를 들어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듯하다가 회한에 젖은 음 성으로 이윽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우선은 모든 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한 사람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가 없구나. 모든 일은 그로 인해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과거 한 이십 년 전쯤 되겠군. 나에게 한 명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 이름은 백리창송 (百里蒼松)이었다." "……" "이 백리창송은 원래 무림인이 아니라 안휘성(安徽省)의 대유학자 가문의 사람으로 유학에 아주 정통한 대학자였지.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항상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와 나는 무공을 떠나서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였지. 당시 나는 의박운천이라는 별호를 얻어가지고 한창 무림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백운생은 묵묵히 괴인의 얘기에 빠져 들어갔다. 느닷없이 부친이라고 자 처하고 나서는 괴인의 얘기는 자연 그의 정신을 빼앗기에 족했다. 괴인은 웃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가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내 친구가 우연히 집안의 서고(書庫)에서 한 권의 천 축에서 전해진 무공 고서(武功古書)를 발견하게 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 다. 무공이라고는 거의 관심이 없던 그는 그 책자를 발견하자 곧장 나에게 와서 선물로 그것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마침 무공에 관심이 많았었기 때 문에 이를 매우기뻐하고 우선은 이것을 아버님께 보였던 것이다. 나는 당 시 아버님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고, 의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 니까." "……" 원래 처음에는 말의 내용이나 음성이 기이하고 형편없던 괴인의 말은 얘 기가 길어질수록 점차로 안정되고 청산유수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과거 이 괴인의 학문이 그리 짧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일이었다. "헌데 바로 이 천축의 무공 고서에는 아주 괴상한 내용이 실려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시체를 이용하여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말하자면 강시 술( 屍術)이었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은 조금 특별해서 금강마인(金剛 魔人)이라는 전설의 최강의 강시를 만들어 내는 법이었다." 순간 무심코 듣고 있던 백운생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것읅 보고 괴인이 물었다. "너는 혹시 금강마인의 이름을 들은 것이 아니냐?" 백운생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백운생은 비단 이름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위력을 직접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금강만인의 얘기가 여기에서도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럴 테지. 어쨌든 하던 얘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괴인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시 원래는 그 친구가 나에게 그 책자를 건네주었던 것이 잘못이라고 봐야 하겠지. 아니, 보다 큰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하겠지만. 나는 다만 효도하겠다는 기분으로 그것을 아버님께 드렸던 것이다. 운래 백리창송은 자신이 보기에도 내용이 좋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무공이 이 미 정점에 도달한 우리 가문에서야 무슨 부작용이 있겠느냐 싶어서 나에게 그 고서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사람은 어떤 물건을 보게 되면 절로 욕심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 "나의 아버님은, 물론 너의 할아버지이겠지만, 그분은 그 고서를 단순히 흥미삼아 보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한번 만들어 보고자 했던 것이야. 그리 하여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장문인들을 일시에 납치했다." 백운생은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라고요? 그들이 납치되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그렇다. 동심각에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일시에 납치했다면 그것은 커다란 문제가 될 것이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할 리가 없는데, 백운 생은 아직 아미파에서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운생이 다소 자신의 말을 의심하는 듯하자 괴인은 얼른 변명하듯 말했 다. "하하, 하지만 네가 그건 잘 알지 못해서 하는 소리다. 원래 나의 아버님 은 그들을 납치하기 전에 이미 가짜를 만들어 놓고 바꿔치기를 했었거든." 이 괴인은 아직도 아버님이라는 존칭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존경심을 버리리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사람이 무공 고서를 즉시 부친에게 갖다바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백운생은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럼 지금의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전부 가짜라는 말입니까?" 기 실 백운생은 이 괴인의 어조가 심히 진실되어 보이고, 또한 그의 얘기가 사실과 부합되는 점이 있어서 그의 말을 거의 믿고 있었다. 괴인은 고개를 흔들거리며 대답했다. "음, 이미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가 없지 만, 아마도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나의 아버님이 그들을 가짜로 바꿔 놓은 목적은 나중에 이용하기 위해서였으니, 설령 그 가짜가 죽었더 라도 다시 가짜를 만들었을 것이다."이어 문득 백운생에게 물었다. "지금 아미파에 있는 장문인의 법명이 뭐냐?" 백운생은 대답했다. "도액신니입니다." "도액?" 괴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렇다면 그건 가짜다. 진짜 도액신니는 이미 이십 년 전에 죽었지. 금 강마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아마도 다른 문파들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 다." 백운생은 얼마 전에 그 석실에서 보았던 금강마인이 된 도액신니의 모습 을 뇌리에 떠올리고는 매우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럼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납치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들을 금강마인 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까?" 괴인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랬지만 그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우선 금강마인으로 만들기 위해 서는 그 신체가 자질이 뛰어나고 무공이 높아야 하기 때문에 그들로 택했 지만, 주된 목적은 그들을 금강마인으로 만들어서 구파일방의 세력을 마음 대로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백운생이 물었다. "무림 정복을 위해서 말입니까?" 이에 괴인이 놀라서 물었다. "혹시 벌써 무림 정복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괴인은 다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다행한 일이다. 당시 나의 아버님은 벌써부터 무림 정복을 생각하 고 계셨던 것이었는데, 마침 그 고서가 나타나자 옳다구나 하고 박수를 쳤 던 것이었다. 우선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금강마인으로 만들어서 그들을 제압할 생각을 했지." "……" "사실 현재의 장문인이 가짜라는 것이 알려지면 난리가 나겠지만, 그러나 진짜 장문인이 강시가 되었더라도 한 사람의 지시의 받게 되면 자연 구파 일방은 꼼짝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구파일방의 사람들은 결코 그들에 게 대항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문파의 사람들도 마찬 가지일 것이고. 그래서 쉽게 무림을 제패할 수가 있는 것이지. 음, 아무리 생각해도 절묘　 생각이었단 말이야." 괴인은 워낙 얘기를 하지 않아서 말을 하다가 말고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 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누구와 대화를 별로 가져보지 못했기 때 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백운생은 나름대로 다소의 경악 속에 빠져 있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 이 모두가 백환성의 하수인들이었다면, 이미 무림은 거의 그의 손 안에들 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하긴 백환성의 능력으로 그런 것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게다가 전날 아미파에서 어머니인 일심사태를 장 문인이 그토록 우대해 주었던 일 등은 어떤 심증을 굳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내용들이 사실일까 하고 의심스러웠다. 만일 백운생이 아 직 금강마인들을 보지 못했었다면 이 괴인의 말을 전혀 믿지 못했을 것이 었다. <제6권 끝> --계속-- #5453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42장 11/30 06:15 267 line 제42장. 회천(回天) 괴인은 이윽고 다시 상념에서 벗어나 말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나는 물론 아버님이 그렇게 하는 것에 크게 반대를 했지. 하지만 이미 야망을 계획하고 계신 아버님은 나의 의견을 돌아보시지도 않았다. 아니, 보다 커다란 일을 저지르시고 말았지. 원래 이 금강마인들의 일을 철저하 게 숨기기 위해서는 기밀이 유지돼야 했기 때문에 안휘성으로 가서 나의 친구와 그 일족을 몰살시켰던 것이었다." 순간 백운생은 절로 탄식이 흘러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친구를 위해 한 권의 고서를 선물했던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가혹하게 대대적인 화를 입 은 그 가문의 일이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던 것이었다. 고서를 선물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지만, 실은 사람에 따라서 다른 것이지 그 사람에게 무슨 잘 못이 있었겠는가! 문제는 백환성과 같은 친구의 부친을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백운생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괴인은 한숨을 내쉰 다음에 말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거의 미친 듯이 화가 나서 그렇다면 이 금강마인의 일을 천하에 폭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아버님은 나에게 고집이 세 다고 하시고서 이렇게 이곳에 나를 가두어 놓은 것이었다. 천하에는 물론 내가 실종되었ㄷ고 했다면서?" "……" 백운생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과연 전날 백환성이 자신을 가리켜 선친처 럼 고집이 세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백환성은 이 일을 상기하 고 그랬던 것이었을까? 괴이의 말은 비록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기는 해도 앞뒤의 조리가 분명한 것이었다. 믿기가 어려운 내용이기는 해도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백운생은 가슴이 심하게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물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괴인이 대답했다. "나는 물론 아버님의 지시에는 거역할 수가 없었다. 친구에게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 속에서 살기로 했지. 그것이 벌써 근 이십 년간이나 가까이 되는구나." "……" "나는 당시 갓난아이였던 너와 마누라의 일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아버님 을 믿었기 때문에 그리 심하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차라리 내가 죽었다고 소문났던 일이 잘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당시에는 무공이 폐쇄당했었으나 나중에 무공을 회복하였는데, 아버 님께서 내가 만일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무공을 폐하지 않겠다고 약속 을 하셨었다. 그리고 무림 정복이 이룩된다면 반드시 나를 풀어주겠다고 했지. 하지만……" "……" 괴인은 회한이 이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이곳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고, 또한 느닷없이 억울한 화를 당 한 친구의 일이 마음에 걸려서 어떻게 나중에 편하게 살 수가 있겠느냐?" 백운생은 괴인의 모든 얘기가 끝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괴인이 이곳 동심각의 지하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원래 생각해 보면 백환성이 가끔씩 아들인 괴인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드 나들었을 것이고, 그것을 우연히 백운룡이 발견하고 수상하게 여겨서 그는 뒤를 쫓았는데 도중에서 놓치게 되고, 지금의 이 장소를 발견하게 되었으 며, 이제는 백운생을 이곳에 데려다 놓았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괴인과 백 운생이 다시 만나게 된 것 같았다. 실로 길고도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괴인, 아니 이제는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이 괴인의 경우는 실로 너무나 도 효성이 지극한 나머지 나쁜 결과를 가져온 대표적인 경우라고 말할 수 가 있을 것이다. 괴인, 백불범은 말을 이었다. "나는 과거에는 감히 아버님의 일에 관해서 저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었지 만, 이제는 그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당시 목숨을 던져서라 도 아버님의 무림 정복의 계획을 실천해 가는 것을 막았어야만 했다. 그것 이 진정으로 아버님을 위하는 길이었고, 그랬더라면 지금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백운생은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백환성, 그의 할아버지인 이 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욱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세상에상대가 선의로 비급을 주었던 것이었는데, 구파 일방의 장문인을 한꺼번에 죽여서 강시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 을 숨기기 위해서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짓을 해서 그 읽를 참살시켰다는 것은 어찌 낙망스럽지 않겠는가? 백운생은 절로 자신이 그 가문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모멸스럽기 짝이 없 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백운생은 문득 몸을 일으켜 그 괴인을 향해 대례를 올리기 시작했다. "불초 소자가 삼가 아버님을 뵈옵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백불범은 이때만은 안색을바로하고 바닥에 주저앉 아서 엄숙하게 자식의 절을 받았다. 문득 그러는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 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자식을 찾은 희한의 눈물일까? 문득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사실 너를 낳았다 뿐이지 여태 너에게 해준 것은 없고 오히려 피해 만 주었던 것 같구나. 그러니 지금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해라. 내 뭐든지 들 어주겠다." 백운생은 예를 끝내고 자리에 앉아서 백불범에게 이제까지의 무림의 상황을 얘기했다. 백불범은 얘기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였다. "사실 나는 그간에 얼마든지 밖에 나가고 싶었지만 아버님이 만일 내가 그럴 경우에는 처자를 다신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참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는 너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했었는데 알고보니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휴우, 내가 생각하기에도 네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백운생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백불범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나는 여기에서 살고 싶지만 무림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게다가 너도 그 렇게 되었으니 그깟 마누라야 상관이 없는 것이지. 나도 얼마 후에는 밖에 나가볼 생각이다. 그런데 너는 대체 원하는 것이 뭐냐?"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동안 저를 염려해 오셨는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허나 백불범은 상 당히 섭섭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헌데 너는 무공이 폐쇄된 모양인데 어떻느냐? 내가 너의 무 공을 회복시켜 주마. 이래봬도 내공은 깊어서 너에게 나누어 준다고 해도 나름대로 쓸 만하단다." 백운생은 역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불과 얼마 전에 그런 제의를 들었다면 고통을 감하기 위해서라도 수락했었을지도 모 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백운생은 지금은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저는 이미 무공을 회복했습니다." 그 말에 백불범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뭐라구? 그게 정말이냐?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 은데?" 이에 백운생은 담담히 웃으며 직접 손으로 자신의 발목에 채워져 있는 쇠고랑 두 개를 각각 가볍게 끊어 보였다. 이 두 개의 발목에 각각 하나씩 매어져 있는 두 개의 쇠고랑은 매우 두꺼운 쇳덩이로 되어 이었는 데, 백운생은 이것을 지푸라기보다 더욱 쉽게 부러뜨렸고, 또한 아무런 소 리도 일지 않았다. 백불범은 이것을 보고 크게 감칸한 표정을 지엇삳. "음, 대단하군! 대단한 일이야!" 그렇다. 사실 백운생은 원래 무공을 폐쇄당했을 때에 단전이 엉망으로 파 괴되어서 거의 무공을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데 용화선공을 깨우 치는 과정에서 대자연의 힘이 작용하여 그 내상이 절로 치유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공도 크게 증진되었다. 아니, 기실 그의 무공은 지금 있다고 말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체내에는 공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었다. 다만 전에는 용화선공으로 인해 정신을 모으면 폭포를 되돌릴 수가 있었던 것을 지금은 더욱 확연하게 깨달아서 전의 무형검의 경지, 십갑자 의 공력의 무공 경지보다 더욱 높은 능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얼 마나 높아졌는지 그것은 실제로 사용해보지 않아서 잘 알 수가 없었다. 그 러나 이미 용화선공을 대성한 만큼 어떤 절대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는 것이 백운생 자신의 추측이었다. 방금 전에 쇠고랑을 부러뜨린 능력은 사실 웬만한 무림 고수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같은 능력을 보이더라도 그 수법의 차이에 따라서 능력 을 보는 차가 생기는 것이었다. 백불범은 자신이 높은 무예를 성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백운생의 능 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기실 백운생은 더 이상의 뜨거움 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가 있는 일이었다. 처음 에 백불범은 백운생이 뜨거움을 이기고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다가왔었 다. 백운생은 이 새로 만난 부친에게 자신이 용화선공을 배우게 된 배경과 그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백불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감탄의 연속이었다. 이어 백불범은 물었다. "너는 이제 나가지 않겠느냐?" 백운생은 이때 문득 나가서 연락을 하겠다고 약속했던 악우왕 등의 얼굴 을 떠올렸다. 무공을 회복한 이상은 이곳에서 더 이상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백운생은 물었다. "저더러 할아버지의 일을 저지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백불범은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다. 나는 나의 아버님이 가문에 천추의 더러움으로 기억될 일을 하 도록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다. 보아하니 너는 나보다도 무예가 높아진 것 같으니, 네가 내 대신에 그 일을 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겠다." 백운생은 마침 자신도 그렇고 싶은 마음이었다. 천륜을 어기는 한이 있더 라도 백환성의 무림 정복과 잔인한 행각을 막고 나중에 자신도 스스로 목 숨을 끊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백운룡이 주고갔던 벽곡단이 들어 있는 호로병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 을 바라보며 백운생은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가겠느냐?" 사실 오랜만에 부자가 상봉하여 백운생도 함께 더 있어주고 싶었다. 그러 나 알고보면 백운룡이 그를 이곳에 숨긴 일은 백환성 몰래 스스로가 한 일 이었고, 다만 백환성이 나중에 알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몸소 내려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백운생은 아직은 백환성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백환성은 실로 인간이 능력으로 가능한 최대한의 무공을 터득한 절대의 고수였다. 백운생은 그와 상대하기 위해서는 좀더 수련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의미없 는 희생을 당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강호에 나가서 뵙겠습니다." 백불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나도 이제 곧 강호에 나가게 될 것이니, 거기에서 함께 술이나 하면서 회포를 풀도록 하자꾸나." 백불범은 연신 백운생이 몹시 대견스러운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백운생은 그곳을 떠났다. 그것은 그야말로 극적인 탈출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백운생은 동심각을 떠나서 얼마간 강호를 떠돌았다. 강호의 사정을 들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과연 강호의 사정은 그가 예측하고 있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백환성은 이미 세력을 잃은 심패 외에 나머지 사패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 으며 무림의 절대 패자로 부상했고, 이어 여기에 반기를 드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한 무수한 군소방파의 힘들이 점차로 어이없게 무너져 가 기 시작했다. 이것은 실로 백환성이 미리 치밀한 작전을 짜고 금강마인과 가짜 장문인들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한 탓일 것이었다. 사실 이 백환성의 능력은 워낙에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계획 또한 완벽 이상이었다. 이미 그는 싸움에 이겨 놓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고, 도저히 그에게 감히 대항할 적수는 천하에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무림은 그야말로 어이없고도 급작스럽게 무너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제 머지 않아 무림왕국이 생겨나는 것을 기정사실로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물론 소문에 들리는 반대 세력들도 적지는 않았다. 구파일방 등이 너무나 도 무기력하게 무너진 반면에 그와 버금가는 오대세가(五大世家)가 주축이 되어 은근히 활동을 개시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아울러 이미 멸망한 성수 거를 비롯한 세 곳의 거대 세력들이 모여서 회천(回天)의 꿈을 불태운다는 얘기도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운생이 보기에는 이 모든 소문들은 사실 거의 희망이 없는 것들 이었다. 비록 검방이나 성수거의어떤 후예가 절세의 무공을 다시 터득해 서 함께 합공을 한다고 해도 결코 꺾을 수가 없는 사람이 바로 백환성이었 다. 이미 엄청나게 당하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아직 백환성의 진실한 능 력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희망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오직 백운생만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이 천하의 희망이 될 수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백운생이 이번에 용화선공을 터득하면서 느꼈던 어떤 막연한 깨달 음이 작용한 생각이었는데, 백운생은 비록 아직은 확신할 수가 없지만 보 다 가공할 능력을 얻을 수가 있는 방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테면 그것은 인간의 무예가 아니었다. 따라서 설사 인간 한계의 무 예를 터득한 백환성일지라도 능히 상대할 수가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며 그저 이론에 그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희망을 걸어볼 수도 있다. 백운생은 이제 자신에게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 지하에서 백불범의 방해가 아니었다면 이미 백운생은 그 막연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그런 일은 아쉬워한다 고 해서 다시 돌이킬 수가 있는 일은 아니다. 비록 강호에 나와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만 막상 백운생이 갈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문득 백운생은 수련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어머님을 한번 뵈어야 하지 않 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백운생이 탈출해 나왔기 때문에 그 화 가 어쩌면 어머니에게 미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악우왕 등에게도 연락을 하겠다고 미리 약속하지 않았 던가! 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미산은 그 들이 만났던 근거지이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보면 무슨 단서가 나타날 것이 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생겼다. 아미산! 백운생은 다시 돌아왔다. 무슨 몇 달이나 몇 년이나 지나간 것은 아니지만 백운생은 실로 오랜만에 와 보는 듯한 느낌에 감회를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 다. 우선 백운생은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이 살던 집을 찾았다. 물론 그곳은 아무도 살지 않아서 방 안에 먼지가 수북했고, 씁쓸한 느낌만이 감돌았다. 이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다. 다만 백운생은 차례로 근방을 돌면서 악우왕 등의 행적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었다. 그들의 행적 또한 근방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이곳에 한번이라도 왔었다면 이렇게 완전무결하 게 흔적이 남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인데,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예 이곳에 와 보지도 않고 어디론가 떠나갔었다는 말인 가? 사실 좀더 시간을 두고 면밀하게 조사할 수도 있었으나 백운생은 자칫 백환성이 자신을 찾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감히 모험을 할 수가 없었 다. 백운생은 행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그의 무공이 백환성에게 뒤 진다고 해도 이렇게 피하기만 한다면 결코 백환성이 쉽게 그를 뒤쫓을 수 가 없을 것이다. 이제 백운생은 어머니만을 뵙고 나면 곧장 아무도 모르는 산중에 들어가 서 수련에만 몰두할 생각이었다. 그의 나이는 젊고 가능성은 높았다. 백운 생은 이러한 생각을 하자 스스로 용기와 희망에 부풀어서 강한 신념과 의 지를 느끼게 되었다. 어머님을 뵙고 나면 모든 일은 일사천리일 것이다. 혹시 어머니은 자신을 말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그 경우에는 백운 생은 다소의 불효를 저지르더라도 자신의 행동을 강행할 것이라고 마음먹 고 있었다. 똑똑똑…… 목탁소리. 아미산의 금정봉 위의 암자에서 목탁소리는 다소 정겨운 느낌 을 가지고 마치 백운생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은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사실 백운생은 혹시 어머님께서 무슨 일을 당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마음 을 졸이고 있었는데, 그 목탁소리를 듣게 되자 절로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백운생은 지금 다만 소리만 듣고도 알 수가 있었다. 이 소리는 지금 자신 의 어머니가 내는 소리라는 것을. 그의 어머니의 목탁소리는 특유한 느낌 이 있었다. 지금도 목탁소리는 은은한 곡조를 띠고 있었는데, 왠지 들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백운생은 이것은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 라고 생각했다. 사실 어머님은 그에게 별로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없었으나 간접 적으로 정신적인 안식처와 같은 역할을 했었다. 지금 백운생이 그 목탁소 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지금 불상의 아래에서 염불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백운생은 어 머니가 안전한 것이라면 자신이 떠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뵙고 가벼 운 마음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똑똑똑…… 목탁 소리는 마치 그의 마음을 유혹하듯이 은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백운생의 신형은 빨려 올라가듯이 금정봉의 위로 날아 올랐다. --계속-- #5454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43장 12/02 07:34 273 line 제43장. 심마(心魔) "어머니!" 일심사태, 그녀는 생각대로 암자의 불상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예불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 부근은 아주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무공이 경지에 도달한 백운 생은 부근에 오직 어머니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일심사태는 목탁을 두드리다가 백운생의 소리를 듣고는 문득 손길을 멈추 고 고개를 돌렸다. 가벼운 놀라움과 함께 그녀의 두 눈에는 반가운 기운이 번뜩 스쳐갔다. 목탁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일심사태는 신형을 날려 그의 앞에 내려섰다. "네가…… 왔구나!" 일심사태는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백운생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백운새은 먼저 어머니를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안녕하셨습니까?" 일심사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반갑게 끌어안지는 않으나 그 이상의 정다운 느낌이 그녀의 두 눈에는 흐르고 있었다. "그래, 잘 왔다." 백우냉은 좌우로 고개를 돌리면서 문득 물었다. "정현스님께서는 보이지 않는군요. 그분은 어디로 가셨나요?" 일심사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참회동에서 참회를 하고 있는 중이다. 왜너는 이 에미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실은 그를 보러 온 것이란 말이냐?" 백운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게 아니라……" 일심사태의 두 눈에는 기이한 빛이 스쳤다. "아니라 뭐냐?"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갑자기 부드럽게 잘 대해 주시니 쑥스러운 기분이 들 어서 그럽니다. 어머님은 항상 저를 엄격하게만 대해 주셨었는데." 그 말에 일심사태는 웃었다. "호호, 그랬구나! 하지만 너도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것이 있다. 너는 내 가 너를 미워서 그렇게 엄격하게만 대했다고 생각하느냐?" 백운생은 일순 멍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 기실 일심사태는 백운생에게 있엇 정신적인 지주였고, 감히 범하 지 못할 성역이라고 해도 좋은 사람이었다. 일심사태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토록 엄격하게만 대해 왔던 것이 다. 하지만 너는 이제 성인이 다 되었으니 계속 그렇게 엄격하게만 대할 수가 있겠느냐?" 백운생은 너무나도 쑥스러운 기분이 되어서 뒷머리를 긁 적였다. 비록 그가 천하에 다시 없는 불세출의 기재라고 해도 이 어머니의 앞에서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한 것 같았다. "하긴…… 하하……" 일심사태는 웃으며 안으로 손짓을 했다. "자, 어서 들어오너라. 이렇게 불쑥 왔다가 그냥 가는 것은 아니겠지?" 백운생은 그 말을 듣자 절로 가슴이 뜨끔해졌다. (혹시 어머니께서는 이미 나의 계획을 눈치채고 계신 것이 아닐까?) 백운 생은 사실 일심사태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지 않고 그냥 떠날 생각이었기 때문에 속으로는 죄송스럽기 그지없었다. 따라서 일심사태가 이렇게 일상 적인 어투로 말하는 것에도 가슴이 흠칫해지는 것이었다. 백운생이 마루에 앉자 일심사태는 안으로 들어가서 보기에도 시원해 보이 는 냉차(冷茶)를 한 잔 쟁반에 담아 가지고 내 왔다. 기실 백운생은 여태 어머니에게 차를 대접받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게 되자 절로 송구한 생각이 들어서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헌데 일심사태는 즉시 그의 어깨를 눌러서 다시 앉히며 웃으며 말했다. "너는 이 에미가 이런 것 하나 해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느냐? 어서 앉거라. 네가 일어난다면 이 에미의 정성이 헛된 듯하지 않겠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백운생은 고개를 숙이며 일심사태와 마주 앉았다. 일심사태는 잠시 그윽한 시선으로 백운생의 얼굴을 주시한 다음에 말했 다. "어서 마시거라. 일이 바쁠지도 모르니 너무 이곳에서 지체해서야 되겠느 냐? 빨리 돌아가도록 해야지." 백운생은 어머니의 그 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어머니의 직접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던 그는 어머니가 너무 나도 엄격한 것이 때로는 부담스러운 때도 있었다. 간혹 그런 어머니가 좀 더 부드럽게 대해 주었으면 하고바랬을 때도 있었으나 막상 이렇게 부드 럽게 대해 주자 더없는 기쁨을 얻고 있는 것 같았다. 백운생은 마치 어린 아이처럼 헤벌쭉 웃었다. "예, 어머니." 백운생은 찻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셨다. 맑고 시원스러운 느낌이 폐부에 깊숙히 스며들면서 절절하게 어머니의 사랑이 가슴에 와닿는 것 같았다. "맛이 아주 좋은데요?" 백운생의 말에 일심사태는 웃으며 말했다. "내 이미 너의 소식을 들었다. 너는 후계자의 직위를 그만두었다고?" 백 운생이 물었다. "그럼 혹시 동심각에서 이곳에 사람을 보내서 저를 찾지는 않았습니까?" 일심사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다만 후계자가 바뀌었다는 소리에 나는 은근히 너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네가 이렇게 무사하다니 실로 다행이다." 이에 백운생은 문득 자신이 아버지와 만났다는 얘기를 지금 해드려야 하 는 것인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실 백불범의 얘기를 지금 한다면 어머니는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물어올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일이 다소 복잡해 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만일 어머니가 지금 숨기 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섭섭해 하시겠는가? 허나 역시 대사가 중요하다는 결론으 짓고 백운생은 내심 송구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 다. 동심각의 백환성이 아직 어머니에게 해를 가하지 않은 것은 다소 의외의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백환성은 아직 그가 탈출했는지 도 모를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한 백운룡은 스스로 열심히 찾고 있다고는 해도 미처 이런 생각까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백운생은 많은 우려 속에서 살고 있으나 매사는 오히려 쉽게 풀려나갈 수 도 있는 것이다. 만일 백운룡이 쉽게 보고를 하지 못하고, 그래서 아직 백환성이 백운생이 살아 있다는 점을 모르고 있다면 이는 하늘이 돕고 있다는 조짐이다. 아 니, 설령 백환성이 알았닥 해도 자신의 며느리이고, 또한 백불범도 무림에 나올 것이 확실시 되는 마당에 어머니의 위험은 별로 없다고 생각해도 좋 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죄송스러운 마음은 가슴에 남아 있어서 백운생은 문득 차를 마시 며 일심사태에게 물었다. "참, 이거 저 혼자만 차를 마셔서…… 제가 아직 마시지 못한 귀한 차인 것 같은데, 어머니께서도 함께 드시지 그러셨어요?" 일심사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원래 차를 좋아하여 항상 마시고 있었고, 또한 네가 오기 전에도 많이 마셨기 때문에 과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너나 많이 마 시렴. 그래, 좋다면 내가 좀더 가져다 주마. 어떠냐?" 백운생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백운생은 어머니가 이렇게 부드러워지자 새삼스럽게 정이 깊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파릇하게 머릴 깎은 어머니의 모습은 나이가 많으신데도 불구하고 아직 삼십대의 팽팽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렇게 고귀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 백운생은 차를 마시고 나서 다시 한 잔을 가져다 달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스스로의 감흥을 못 이겨서 일심사태의 두 손을 덥썩 잡아 버리고 말았다. 이 일심사태의 손은 역시 매우 곱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백운생은 이 아 름다운 손이 천하에 역시 하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손은 아주 성스러운 손이었다. 어머니! 백운생의 눈빛이 다소 격해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의 눈빛이 문득 가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 "어머니는 정말로 아름다우세요." 백운생은 문득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소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 이 실언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원래 출가인에게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모욕에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게다가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했으니 이 어찌 무례한 말 이 아니겠는가! 일심사태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는 것 같았다. 백운생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백운생은 원래는 거의 실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어머니의 정을 깊이 받고 보니 정신이 산만해진 모양이었다. 백운생은 그렇게 스스로를 진단하고 절로 다시금 포근한 느낌에 금방이라 도 어머니의 품속에 안겨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허나 어머니는 저렇게 가냘픈 몸을 지녔고, 또한 매우 고귀해 보이니 비록 웃고 계신다고는 하지 만 어찌 감히 무례하게 품속으로 뛰어들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백운생은 어릴 때부터 다소 정에 굶주려 있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 다. 그것은 어머니가 수련에 전념하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부드럽게 어머 니가 대해주자 그는 굶주렸던 애정에 대한 보상심리까지 겹쳐서 가슴이 크 게 격동되고 있는 것이었다. "에미더러 그게 무슨 소리냐?" 일심사태가 크게 꾸짖지 않고 담담하게 웃자 백운생은 더욱 용기가 생겨 서 어머니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택하셨던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아요." 그 말에, "……" 일심사태는 다소 흠칫한 기색을 보이는 듯했다. 과거의 기억이 뇌리에 떠 오르는 것일까? 허나 백운생은 지금 마음이 크게 흥분되어 있어서 그러한 일에 관해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백운생은 자신도 모르 게 일심사태의 품속에 안겼다. "어머니!" 기실 그가 일심사태의 품속에 안긴 것이라고는 하나 워낙에 그의 몸집이 크기 때문에 도리어 어머니의 몸을 그가 안은 꼴이 되었다. 일심사태는 가볍게 흠칫한 표정이 되었으나 웃으며 잠자코 아들의 행동을 내버려두었다. 백운생은 어머니의 몸을 처음으로 가슴에 안자 마치 가슴이 흐물흐물 녹 아 내리는 것 같았다. 지금 어머니의 몸에서는 향수냄새 비슷한 난초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나 오고 있었다. 일반의 퀴퀴한 비구니들과 같지 않았다. 더없이 좋은 그 냄 새를 마음껏 들이키며 백운생은 자신이 마치 황홀한 천상의 극락에 올라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갑자기 가슴에서 뜨거운 열기가 일어나더니 아 랫배가 뻐근하게 일어서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백운생은 마치 찬서리를 뒤집어쓴 듯한 충격을 느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욕정(欲情)! 믿을 수 없게도 지금 백운생이 어머니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은 바로 여인에게서나 느낄 수가 있는 욕정이었던 것이었다. (이럴 수는 없어!) 그렇다. 원래 백운생은 자제심이 강하여 여태 어떤 여자를 봐도 쉽게 마 음이 동하지 않았고 욕정을 느끼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특히 그가 요즈 음 극한의 무예를 성취하고 마음의 수양이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더더욱 여인에게 욕정을 느끼지 않았었다. 아마도 세상에서 그는 가장 자제심이 가안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게도 다른 사람도 아 닌 어머니에게 이런 욕정을 느끼다니…… (이런 더러운 마음이……) 순간 백운생은 아까부터 자신이 모정(母情)이라고 느끼고 흥분하고 있었 던 것들이 알고 보니 모두가 욕정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백운생은 이른바 천하에서 보기 드문 정인군자 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더러운 감정을 느끼게 되다니! 백운생은 너무나도 경악하여 일순간 정욕을 떨쳐버리고 일심사태의 몸을 놓은 채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가 만번 죽더라도 씻을 수가 없는 대죄악이었다. 백운생은 스스로 영혼이 무수한 바늘 끝에 찔리는 듯 한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일심사태는 문득 몸이 홀가분해지자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얘야, 왜 갑자기 몸을 떨고 그러느냐? 갑자기 어디 아프기라도 하느냐?" (어머니, 죄송합니다.) 백운생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몸을 떨면서 자신의 머리를 바위에 당장 부 딪쳐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 헌데 이것을 보고 일심사태가 문득 도리어 그의 몸을 가볍게 껴안아서 자 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하는 것 이었다. "얘야, 어디 아픈 것이 아니냐?" "……" 백운생은 어머니의 손길이 얼굴에 스칠 때마다 전신에서 무서운 욕정이 기세좋게 일어나기 시작함을 느끼고 몹시 곤혹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무 례하게 급히 뿌리칠 수가 없어서 즉시 어머니의 손길을 치우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일심사태의 손길이 얼굴에서 아래로 내려와서 가슴 부위를 어루만지더니 백운생의 아랫도리를 슬슬 부딪쳐 가 는 것이 아닌가! 순간 백운생은 전신이 마치 불구덩이에 갖힌 듯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이것은 실로 백운생이 전에 용암의 동굴에서 견딜 때보다 도 오히려 그 뜨거움이 더했으면 더했지 작지 않았고, 게다가 정신까지 은 근히 마비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이에 비로소 백운생은 이것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 평소의 백운생이라면 결코 이러한 일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어째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백운생은 그 원인을 잘 알 수가 없었 지만, 우선은 무공으로 몸을 일으켜서 이 위기를 타개해야 하겠다고 생각 했다. 헌데 이상한 일이었다. 무공을 일으키려던 백운생은 다시 한번 소스라치 게 놀랐다. 자신이 그토록 자신하던 무공이 발휘되지 않는 것이었다. 체내 의 진기는 고사하고 정신이 혼미해서인지 그 용화선공의 무공 또한 전혀 발휘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 이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백운생 은 경악에 경악을 거듭했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 를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혹시 심마(心魔)의 조짐일까? 하지만 심마가 이렇게 닥쳤다면 이것은 너무나도 공교로운 것이기 때문에 심마라고 생각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직 전혀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운생이 느끼는 절망감은 더욱 컸다. 백운생은 자신이 이렇게 된 원인을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두 눈은 점차로 감겨오고 심한 졸음 속에서 그의 의식은 갈수록 흐려져 갔 다. "얘야, 왜 그러느냐? 정말 어디 아픈 것이 아니냐?" 일심사태는 매우 걱정스러운 듯이 백운생을 안고 한 손으로 계속해서 그 의 단전(丹田) 부위를 천천히 문질렀다. 헌데 이미 백운생의 상징은 어처구니가 없게도 커다랗게 돌출되어 있어서 일심사태의 손길은 절로 그 부근을 건드리게 되었고, 따라서 섬뜩한 느낌 과 함께 극한의 송구함, 그리고 당혹감에서 오는 혼란 속에서 백운생의 의 식은 날로 무뎌지고 어두워져 갔다. 백운생은 이것이 혹시 꿈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는 제발 이것이 꿈이기를 바랬다. 아니, 꿈이라고 해도 미칠 노 릇이지만. 이 가공스럽게 그의 의식을 조여오는 무서운 마력(魔力)에 백운생은 몸서 리를 쳤다. 헌데 갑자기 일심사태의 손길이 그의 상징을 노골적으로 건드리고 만지는 바람에 백운생은 아득한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의식이 사라졌다. 마 치 무저의 지옥으로 들어가듯이. 그때였다. 마치 착각처럼 일심사태의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호호……" (……!) 백운생은 서서히 의식이 깨어났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자 마치 비수로 가슴을 휘젓는 듯한 극도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 했다. 이미 그 가공할 욕정이나 가슴의 열기는 상당히 가라앉아서 다만 은은하 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로 보아서 그는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며칠 혹은 수십 일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모든 것을 떠나서 백운생은 당장에 능력만 있다면 머리를 바닥에 박고 부딪쳐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그때 자신을 어루만지고 있었던 일심사태의 근황이 걱정되 기도 했다. 자신이 혹시 무의식중에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에서였다. 실로 이러한 생각을 해야만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고통 스럽기 한이 없었다. 백운생은 원래 대의(大義)를 위해서 백환성의 대사를 저지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것은 마치 뭐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식인 것이다. 어머니에 대해서 욕정을 느낀 사람이 세 상에 누구에게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가 있겠는가? 백운생의 생각은 고통 스럽게 계속 이어졌다. 아니, 이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문득 차가운 기운이 머리끝까지 느껴짐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 었다. 머리가 다소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누가 그의 머리에 찬물을 들이부은 것 같았다. 비로소 백운생은 희미한 빛을 느꼈고 천천히 눈을 떠서 주위를 살필 수가 있었다. (……) 머리는 여전히 무거웠고 몸은 더욱 무거워서 도저히 움직여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겨우 고개만 간신히 움직일 수가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만 해도 천지조화의 풍운을 일으킬 수가 있었던 그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 은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이런 사람이 눈을 떠서 주위를 살필 수가 있다는 것은 다소 혜택인 것 같았다. --계속-- #5455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44장 12/02 07:35 303 line 제44장. 정체(正體) 이곳은 아주 낯설은 하나의 석실이었다. 사방에는 지금 희미한 유등들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고, 문득 눈앞에 한 사람의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 (어머니!) 백운생은 문득 가슴이 에이고 소스라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일심사태!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지금 백운생의 머리맡에 서서 조용히 백운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녀의 두 눈에는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고, 그 저 쌀쌀하고 냉막한 분위기만을 느낄 수가 있을 뿐이었다. 백운생은 너무 나도 달라진 그녀의 표정을 보자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렀다. 허나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점은 지금 그녀의주위에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숫자는 금방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백운생에게 있어서 너 무나도 눈에 익은 사람들이었다. 백운생의 시선은 그들에게 향하다가 문득 마치 목박힌 듯이 경악으로 정 지되고 말았다. 바로 백운생이 그토록 경계하고 있었던 백환성과 백운룡, 그리고 백불의 등이 서 있었고, 또한 한 사람이 의외에도 그들과 함께 하 고 있었다. 백불범! 놀랍게도 그는 지하에서 만났었던 그 의박운천 백불범이었다. 그 는 지금 얼굴을 말끔하게 손질을 하고 새옷을 입었기 때문에 백운생은 처 음에는 몰라보았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런데 그런 점은 둘째치고라도 우선 이 백불범의 표정 또한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무슨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냉랭하고 무뚝뚝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이었다. 전에 지하에 서 만났을 때에는 그렇게도 친근하게 대해주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백운생은 지금 그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 기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함께 서 있는 것이다. (……) 자연 백운생의 두 눈에는 의문이 그야말로 구름같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 다. 그때 문득 반갑게도 백환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조금 이상하느냐?" 워낙에 주위가 조용하여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기 때문에 백환성의 그 말은 석실 안을 울려서 마치 지옥에서 울려 오는 공포의 음성 과도 같이 느껴졌다.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겨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상하군요, 조금은." 이에 백환성은 갑자기 기이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조금이라니? 너는 사실은 아주 많이 궁금한 것이 아니냐? 너는 지금 대 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냐?" 백운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같다고?" 백환성이 되묻자 백운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사실은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백환성은 눈살 을 찌푸렸다. "그래서?" 백운생은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당신에게 관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에 백환성은 문득 기이하게 웃더니 생각을 굴리면서 다시 물었다. "그래애? 너는 헌데 내가 너를 왜 살려 주었는지 아느냐?" 백운생은 고개 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사실 백운생은 하루 빨리 자신의 목숨을 마감하고 싶었기 때문에 백환성 의 얘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누구의 협박이도 두렵지가 않았다. 오히 려 가장 두려운 것은 소름끼치는 자기 자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백환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너는 정직한 장점만은 언제나 가지고 있군 그래. 우리와는 다른 면이 있었어." (……?) 백운생은 문득 이 백환성이 왠지 알 수 없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백환성이 다시 물었다. "너는 지금 내 얘기를 듣고 싶지도 않은 것이 아니냐?" 백운생은 씁쓸하 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사실 지금 그냥 죽고 싶으니 조용히 처리해 주십시 오." "……" 백환성은 잠시 백운생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치 한 마리 의 쥐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대체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괴이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허나 나는 남이 편하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미이니 굳이 너에게 말을 걸어야만 하겠다. 너는 잠시 죽고 싶은 것을 보류하고 나의 말을 듣는 것이 좋겠다. 너는 여 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백운생은 되물었다. "동심각이 아닙니까?" 백환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여전히 똑똑하군." 허나 방금 전의 질문은 백운생의 생각을 이끌어 내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 다. 백환성은 다시 물었다. "너는 내가 너를 왜 살려냈는지 아느냐?"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백환성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방금 전에 말했지 않느냐? 나는 굳이 남의 약점을 들추어서 다시 고통을 가하고 싶은 취미가 있기 때문이다. 너는 확실히 나에게 있어서 특 별한 사람이었다. 실로 나와 같은 자를 다시 만나보기는 어려운 노릇이지. 따라서 나는 네가 죽기 전에 모든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백운생은 담담히 웃었다. 그의 마음은 극도의 허탈감에 젖어 있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소. 백운생은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아서 백운생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무엇이오?" 백환성은 기이하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느닷없이 일심사태를 가리켰다. "우선 궁금한 점은 그녀가 가르쳐 줄 것이다." 이에 백운생은 그만 다시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실로 마음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그는 더 이상 빛을 보는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지나간 그 상상 못할 기억은 그를 절망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은 그래도 다 른 면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실은 백씨 가문의 탐욕보다도 더한 추 악한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자괴감이었다. 그런데 이때 일심사태가 싸늘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듣고 싶지 않겠지만 들어야 한다." (어머니, 듣고 싶지 않습니다.) 백운생은 눈을 감으며 그렇게 내심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실로 그에게 약 간의 힘만이라도 있었다면 백운생은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음을 택했을 정 도로 지금의 그의 심정은 괴로웠다. 그때 일심사태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승천환(昇天丸)이라는 것을 아느냐?" 승천환! 비록 백운생이 견식이 깊기는 해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일심사태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것은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마약(痲藥)이요, 독약인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지극히 적지만 그만큼 무서운 극독이지." 백운생은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어서 눈을 뜨고 일심사태를 바라보았다. 일심사태, 그녀의 지금의 표정은 지극히 냉막하여 어떠한 한 점의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 일심사태는 말을 이었다. "너는 바로 그 독에 중독이 되었었다." (……!) 백운생은 일순 깜짝 놀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는 원래 만독불침의 몸이고, 또한 금강불 괴의 몸이었습니다. 그런 극독이 스며들 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 기실 백운생이 자신이 만독불침의 몸이기 때문에 중독되었다는 생각을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만독불침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천하의 어 떠한 극독에도 중독이 되지 않는 특이한 체질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심사태는 즉시 말을 이었다. "천하에는 예외가 있는 것이다. 내가 굳이 너에게 승천환을 쓴 이유가 어 디에 있겠느냐? 바로 그것은 이 승천환은 비단 무색무취무미하여 전혀 알 아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으로 금강불괴의 몸이나 만독불침을 깨 는 극독이기 때문이다. 너는 당시 심한 욕망을 느꼈었겠지?" "……?" 백운생은 순간 어두웠던 정신이 훤하게 개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처구 니가 없어졌다. 그리고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만일 그가 처음부터 이해할 수가 있었ㄷ면 이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자학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심사태는 말을 이었다. "원래 이 승천환을 일반의 사람이 복용하게 되면 즉사하고 마는 것이지 만, 만독불침의 사람이 복용하게 되면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최음제(催淫 劑)가 되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은 최음제에 의해서 전신의 진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고, 그 사이로 극독의 성분이 침투하게 되는 것이지. 바로 이 승천환은 그래서 만독불침인의 천적인 것이다. 바로 그 승천환을 내가 찻잔 속에 탔었던 것이다." "뭐라고요?" 백운생은 순간 절로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를 질러 반문했다. 이것은 믿 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하지만 모든 의혹이 일 시에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백운생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소리쳐 물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셨다는 말씀입니까, 어머니?" 그렇다! 기실 백운 생이 뜻밖에도 심한 욕정을 느꼈던 원인은 바로 일심사태가 찻물 속에 극 독을 풀어서 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마시고 나서 중독되었기에 나타난 현상 이었다. 하지만 백운생은 자신이 만독불침의 몸이라는 것과 또한 자신을 그렇게 만들 수가 있는 강력한 최음제가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었고,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의심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돌 리고 심마의 작용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었다. 뜻밖에도 이제 모든 의문이 사라지고 절망적인 마음도 대번에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의혹은 더욱 커졌다. 일심사태으 대답은 여전히 냉막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바로 네가 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백운생은 마치 청천벽력을 맞고 있는 것 같은 경악을 느꼈다. 일심사태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라니! 백운생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머니?" 일심사태는 냉막하게 대답했다. "나는 항상 너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했었다. 그것이 다만 너를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이 아니었다. 그 예로, 전에 너에게 종독시키 기 전에는 일부러 정이 있는 것처럼 연극을 했던 것이 아니냐?" "……" 백운생은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이미 이십 년 가까이 어머니로 모시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단 한마디로 이 말을 믿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때 문득 여태 잠자코 있었던 백불범이 문득 나서서 입을 열었 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운학(雲鶴)아!" 백운생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운학은 또 누구입니까?" 백불범이 대답했다. "그게 바로 너의 진짜 이름이다. 실은 나도 몰랐었지만." 주위는 아주 조 용했다. 백운생은 잠시 생각을 굴려 보았지만 지금 대체 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소리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버지?" 백불범은 씁쓸하게 웃더니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다. 거기에 관한 얘기는 나의 아 내가 말해 줄 것이다." 말과 함께 일심사태에게 시선을 던졌기 때문에 일 심사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아마도 나의 바깥양반에게 그가 실종되었던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 이십 년에 가까운 지난날 동안 나는 너를 속였다. 아니, 모두를 속인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심사태는 문득 백환성의 얼굴을 힐끗 바라본 다음에 말을 이었다. "원래 나의 바깥양반이 실종을 당했을 때에 나는 어버님이 일부러 그를 제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나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따라서 나는 아미파에 출가를 하게 되었는데, 그 목적은 나의 아들을 무사 히 구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 "너는 만약당시의 나였다면 어떻게 행동을 했겠느냐? 나는 일종의 피해 의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혹시 아버님이 내 아들머저 제거할지 몰라서 친아들을 아미파에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헌데 마침 알아본 결과 마 침 그때 내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부모를 잃은 고아가 하나 있었다. 따라서 나는 그 아이와 나의 친아들을 바꿔치기 했던 것이다." 일심사태는 이어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너를 아미산에서 따로 키우는 한편으로 내 친아들을 비밀스런 모처 에 보내서 다른 방법으로 훌륭히 키우게 만들었다. 바로 저 아이가 내 아 들인 운생, 백운생인 것이다!" 실로 꿈결같은 얘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백운생은 절로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순간 아까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백불범의 옆에 서 있는 한 명의 아주 잘생긴 용모의 백의청년(白衣 靑年)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ㄷ. 헌데 기이한 것은 그 청년의 모습이 아주 백불범과 일심사태의 용모를 닮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사실 백운생의 용모는 전혀 백불범과 일심사태의 용모, 혹은 백 씨 일문의 용모와도 다른 느낌이 있었고, 거기에 대해서 악우왕 등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저 백의청년이 백불범의 친자식이라는 말은 비단 일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그럴 듯하게 보 였다. 하지만 백운생은 고개를 저었다. "저를 놀리지 마십시오.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일심사태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나는 지금 너에게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네가 믿고 안 믿고는 상 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에 거짓말을 하겠느냐? 너는 그전에 혹시 우리 가문과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없었다는 말이냐?" 그렇다. 확실히 백운생은 그다지 무공을 좋아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에 있어서도 이 백씨 일문의 사람들과 다른 점이 많았었다. 백운 생은 그것을 살아온 환경의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 금 생각해 보니 뭔가 뿌리깊은 내력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 백운생이 넋을 놓고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백불범이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도 내 아내의 말을 근래에 들었기 때문에 쉽게 납득이 되지 않 았다. 그러나 사실 백씨 일문에는 움직일 수가 없는 한 가지 증거가 있었 기 때문에 금방 가려낼 수가 있었다. 즉, 그것은 백화신골(白華神骨)이 다." 백화신골!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백운생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물론 백운생도 전에 백화신골에 관한 얘기르 들었었고, 그것에 관해 의문 을 품었던 적도 있었었다. 백불범은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 저번에 너와 지하에서 헤어진 이후에 막상 기다렸다가 나가려 고 하자 조바심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네가 나간 뒤에 나는 금방 뒤따라 나간 것이었지. 헌데 나는 우선 아내의 일이 궁금해서 아미파에 가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내에게 진실을 듣게 된 것이 었고, 진짜 내 자식을 백환신골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었다." "……" "너는 갑자기 네가당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궁금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 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즉, 나의 아내는 내가 죽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ㅇ라고 즉시 네가 가짜라는 말을 해주었고, 이내 네가 우 리 가문에 해가 될 것이라고 하고는 일을 꾸몄던 것이었다." 백운생은 잠 시 백불범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가식의 빛이 보이지 않 고 있었다. 대체 이 사실을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 하긴 저번에도 처음 만났을 때 혈 육간의 뜨거운 감정이별로 일지 않았었고, 그것은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렸었다. 특히 백운생이 백씨 일문의 모든 사람들과 만날 때도 그러 했다. 아무리 살아온 환경이 달랐다고는 하나 그는 백환성과 만났을 때에 도 그에게서 어떤 혈육의 끈끈한 정 같은 것을 느껴보지 못했었다. 다만 도의적으로 정이 있다고 생각했었을 따름이었다. 백불범은 이어 자신과 백의청년의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자, 이것이 바로 우리 가문의 상징인 백화문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 천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니, 누구나 모방할 수는 없는 것이지." (……!) 백운생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은 크게 떠졌다. 바로 백불범의 옷을 걷어올린 등뒤 중앙에 마치 연꽃 무늬와도 같은 백색의 반 점이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역시 그 옆의 백의청년의 등뒤 에도 그런 문양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었다. 그 문양은 누가 똑같이 찍어 놓은 것처럼 아주 같았다. (저것이 바로 백화신골이었다는 말인가?) 아직 백운생은 저런 것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등뒤에 저런 것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했었다. 그렇다면 백화 문양이 없는 자신은 결 국 백씨 일문의 자손이 아니라는 말인가? 옆을 둘러보아 백환성 등의 시선 을 보아하니 백불범의 그 말들은 전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원래 백운생이 다소 경험이 없어서 모를 뿐이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인데, 이 백화신골에 관해서 백환성 등이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특히 백씨 일문은 백화신골을 타고났기 때문에 대대로 그 들의 무예를 연성할 수가 있었다는 내용에 대해서 백운생도 익히 들어오던 터였다.이미 그 점에 관해서 의문을 느끼고 있었던 바가 아니었던가! 백운생은 일시 가슴이 매우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터져나갈 것 같은 심정을 억누르기 위해서 한참이나 멍하니 넋을 놓은 사람처럼 있었 다. 이때 백환성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정히 믿기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의 옷을 보려주랴?" 이어 그가 손 을 흔들자 그를 위시하여 모든 사람들의 등에 박혀 있는 백화 문양이 백운 생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똑같아서 더 이상 부 정할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백환성은 이어 말했다. "너에게는 이러한 문양이 전혀 없다. 다만 이것으로도 너는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래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냐?" "……" 하긴 일심사태가 백운생이 자신의 친아들이었다면 그렇게 최음제를 복용 시켜서 불측한 마음을 품게 했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백불범도 금방 태도를 바꾸었으니. 백운생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믿어야 할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가지 모든 여건들이 그가 백씨 일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순간 백운생은 심한 번민과 갈등 속에서 가슴이 그야말로 터져나 가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대체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사실을 애써서 나에게 설명해 주는 것 이오?" 헌데 그 말에 백불범이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네가 바로 한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백운생은 즉각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는 누구요?" 백불범은 대답대신 품속에서 하나의 두루말이 그림을 꺼내서 그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인물화! 그 그림은 매우 정교한 것이었다. 순간 백운생은 그그림을 바라보다가 문득 가볍게 놀랐다. 실로 백운생과 많이 닯은 한 명의 준수한 서생의 청년 모습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운생은 매우 격동해 있다가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기이한 전율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말하자면 친 혈육을 바라보는 끈끈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사실 그 그림 속의 청년의 용 모는 백운생과 그리 많이 닮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인물의 눈빛이나 용모 에서 느껴지는 분위각 백운생과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었 다. --계속-- #5456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45장 12/02 07:36 294 line 제45장. 저주(詛呪) 이 순간 백운생은 설혹 백환성의 얘기를 듣지 않았더라도 능히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바로 저 그림 속의 청년의 혈육이라는 사실을! 기 실 백운생은 친혈육의 끈끈한 정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 백운생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백불범에게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럼 그는 누구입니까?" 그림 속의 인물 그는 대체 누구일까? 백불범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는 너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다." 백운생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면 바로……" 백불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는 바로 과거 나의 친구였던 백리창송(百里蒼松)이다. 그리고 너는 그의 아들인 백리운학(百里雲鶴)인 것이다." 백운생은 조금 전에 그가 자신을 운학이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했다. 그렇 다. 백리창송! 백운생은 실로 엄청난 사실에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백리창송? 백리운학? 내가 백리운학이라고?) 백불범은 말을 이었다. "원래 내 아내는 아버님이 백리창송을 제거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어느날 갑자기 가문이 멸족을 당했는데, 네가 우연히도 살아남아 있는 것 을 보고 전의 친분을 생각해서 몰래 거두어 주었고, 마치 자식처럼 키워 주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내가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주자 네가 바로 우리와는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알고 너를 제거할 생각을 했던 것이었 다. 사실 이 모든 일은 교묘한 운명의 장난이어서 나도 모르고 그녀도 모 르며 아버님도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지." 이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백불범의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운생, 아니 이제는 백리운학이 된 그는 어이가 없어서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고 누워 있다가 다시 일을 열어 물었다. "내가 백리창송, 그분의 아들이기 때문에 굳이 신세를 밝혀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백불범은 문득 기이하게 웃었다. "그것을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사실 나의 죽은 친구에게는 미안한 일 이지만 너는 우리 가문에 아주 좋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에 더 이상 너를 도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즉, 이것이 내가 너에게 베푸는 마지막 친절이 라는 말이다." 백리운학은 물었다. "당신의 의박운천이라는 별호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백불범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너는 역시 고루하고 순진하기만 한 녀석이로구나. 과거 네 아버지도 그 러한 면이 있었지. 사실 그가 나에게 무공고서를 주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집에 가서 그것을 달라고 떼를 썼던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잠깐 빌 려보고 돌려주겠다고 했었지. 하지만 내 아버지가 그의 일족을 제거하자 나는 다소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숨어지냈던 것이었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이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 "만일 모든 일이 이처럼 간단하고 우리 가문의 사람들이 그토록 단순하게 살아 왔다면 어떻게 수백 년 동안이나 무림을 지배할 수가 있었겠느냐? 무 림을 지배하는 것은 그저 무공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동심각의 후 계자였다. 어찌 너의 아버지처럼 순진했었겠느냐?" 백리운학은 물었다. "그렇다면 전에는 어째서 그렇게 말을 했었소?" 백불범은 웃으며 대꾸했다. "세상에는 순진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들은 교활한 사 람은 경계하지만 순진한 사람은 쉽게 믿는 것이다. 따라서 마치 고양이가 발톱을 감추듯이 아난 스스로 순진하고 착한 척해야 하는 것이다." 백리운학은 물었다. "지금 그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역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오?" 백불범은 웃으며 대꾸했다. "편한 대로 생각하거라. 사실 진정한 아버님의 후계자는 너희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우리 부자지간에는 그런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지. 그러니까 너는 내가 무림에 나서는 데 있어서의 희생양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 다.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이유는 다시는 바보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에 백리운학은 문득 내심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실 로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그는 새삼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은 변 화무쌍한 것이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것은 그 변화무쌍한 마음의 변화 속 에서 얼키고 설키며 이어지는 것이니 누가 감히 예측할 수가 있겠는가? 백리운학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소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당신들은 그 얘기를 나에게 하지 말았어야 했소." 순간 백리운학 이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시체라고만 알고 있었던 실내의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딱 벌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느새 백리운학의 안색은 정상으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몸의 움직임도 아주 경쾌하여 전혀 중독된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불범이 놀라서 물었다. "너는 어떻게 그 독을 해독했느냐? 승천환의 독은 해독할 수가 없는 우리 가문 비전의 극독인데?" 이에 백리운학은 웃으며 대꾸했다. "원래 나는 그 독에 전혀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소. 그런데 당 신들이 나의 정체를 밝혀줌에 따라서 나의 마음은 맑아지게 되었고, 이내 다시 무공을 쓸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오. 나의 무공은 본래 마음에서 기 초된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니 이 이 치는 당신에게 말해도 모를 것이오?" 백불범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믿을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지 금 백운생이 일어나서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은 전혀 거짓이 아니지 않는가! 이것을 보고 돌연 장내에서 여태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던 그 백의청년, 즉 진짜 백운생이 나서서 소리쳤다. "저 자를 나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쌍 수를 휘둘러 황금빛 수영(手影)을 실내 가득히 뿌려오는 것이 아닌가! 다 름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백리운학도 익히 알고 있는 금삽수라는 동심각의 팔대절학 중의 하나였다. 저 백의청년은 그 절기를 거의 완벽하게 펼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야말 로 그가 백씨 일문의 자손이라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셈이었다. 기 재라고 할 수가 있는 좌선비 등이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지만 연성하 지 못한 것을 보면 능히 비교할 수가 았는 일이었다. 즉, 동심각의 팔대신 공은 백화신골의 사람들만이 연성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물론 괴이하게도 백리운학만큼은 그 조건에서 벗어나 예외인 셈이었지만. 사실백리운학이 동심각의 무학을 터득할 수가 있었던 것은 그가 용화선공 을 터득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의청년, 진짜 백운생의 절기는 눈부셨고 환상적인 아름다움까지 담겨져 있었다. 누굴도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 나이에 놀라운 성취락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기실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행동이었고, 상대인 백리운학의 진 정한 능력을 모르는 어이없는 행동에 불과했다. 그것을 보자 이미 백리운학의 실력을 알고 있는 백불범이 놀라서 나서서 소리쳤다. "운생아, 그는 너의 적수가아니다! 어서 물러나라!" 그와 함께, 꽈르르 릉…… 실내에 거대한 굉음이 일었다. 어떤 빛이나 소리도 없었으나 무서운 격돌 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굉음이 인 것은 그 여파에 의한 것이었다. 백불범, 그는 한쪽에 물러나서 얼굴이 창백해진 채 힘없이 서 있었고, 백 운생은 그보다 앞에서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 다. 원래 그의 위기를 백불범이 자신의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막아낸 것이었 다. 허나 이 백운생은 원래가 워낙에 곱게 커 왔기 때문에 자신 이에는 다른 누가 무서운 능력을가지고 있는 일을 인정하기를 싫어했다. 지금도 실은 그와 같았다. 분명히 백리운학은 여전히 그 자리에 담담히 웃는 모스으로 서 있건만. 만약 백환성이 없었다면 이를 확인하게 위해 다시 한번 달려들 기라도 했었을 것이었다. "모두 비켜라. 내가 그를 상대하겠다." 백환성의 말이었다. 과연 그 말이 떨어지자 실내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구석진 곳으로 몸을 피했고, 중앙에는 백리운학과 백환성이 서로 마주보며 남게 되었다. 사실 이 지하석실은 그와 같은 두 사람이 겨루기에는 너무나도 비좁은 장 소였다.그러나 오히려 그 두 사람의 능력이 그토록 뛰어나기에 능히 이런 좁은 장소에서도 우열을 가릴 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문득 백환성이 기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잠깜! 우리가 서로 싸우기 전에 한 가지 말해 줄 것이 있구나. 너는 조 금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나는 얼마든지 너를 제거할 여유가 있었 다. 그럼에도 네가 이제까지 당당하게 나와 싸울 수가 있게 된 것은 너무 쉬웠던 느낌이 들지 않느냐?" 백리운학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무슨 말이오?" 백환성은 기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이미 네가 보았다던 그 용화보경을 대충 읽어보았다. 그러면 이해 가 가느냐?" 백리운학은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럼 당신은 일부러 이런 싸움을 유도했다는 말씀이오?" 백환성은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다. 실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너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네 몸 이 점차로 회복되어 가는 속도가 놀랍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것을 제 지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백리운학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하니 당신은 싸움에 미친 사람이라는 말이오?" 백환성은 기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에 미친 것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기는 할 것이다. 네가 이해할 수 가 없겠지만." "……" 백리운학은 잠시 그의 마음을 꿰뚫어볼 듯이 그의 두 눈을 주시했다. 백환성은 말을 이었다. "나는 원래 이십 년 전만 해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야망에 미친 사람이었 다. 나는 당시 정복욕에 미쳐 있어서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지. 그러나 실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상하여 내가 금강마인을 만들면서 이십년 가까이의 세월이 흐르게 되자 절로 인생무상을 느끼게 되고 다소나 마 그 정복욕이 시들해지게 되었던 것ㅇ다. 이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로 나는 너무나도 치밀하게 일을 꾸미기 위해서 너무 신중했던 것이 원인이라고나 할까?" 믿기지 않는 백환성의 말이 계속되었다. "나는 원래가 내 아들에게 후계를 물려주게 되어 있었고, 너희들에게 후 계 운운했던 것은 바로 무림의 인식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는 말은 이미 들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후계자로 책봉했으니 무림인들은 거의 경계심 이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그때를 노렸던 것이고, 나중에 내 아들이 등장 하게 계획이 꾸며져 있었다. 따라서 나는 아들에게 그 일을 맡기려고 했던 만큼 다소 관심이 시들해져 있었다. 너라도 아마 그렇지 않겠느냐?" "……" 백리운학은 묵묵했다. 백환성은 말을 이었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상대가 있어야만 비로소 흥미가 생기는 법이다. 나는 능력은 탁월하면서도 워낙에 조심을 기하는 바람에 무림 정복에 대해서는 시시해지고 말았다. 사실 알고 보면 금강마인은 만 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지. 나는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 지나치게 신중 했던 것이었는데, 나중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만 무 림 정복도 시시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백리운학이 문득 물었다. "그렇다면 삼패를 멸한 것은 심심풀이였다는 말이오?" 백환성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다. 비록 시들해지기는 했지만 무림 정복 역시 내가 일생일대 의 사업으로 생각한 것인 만큼 계획대로 실행한 것이었지. 그러나 내가 어 떤 맥이 빠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내가 무엇을 찾았겠느냐?" 백리운학이 되물었다. "싸울 상대를 찾았다는 말이오?" 백환성은 웃으며고개를 저었다. "싸울 상대를 찾았다기보다는, 너도 알다시피 나는 무학의 한계에 이르러 있었는데 이것보다 훌륭한 경지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것이다. 즉, 모든 것이 시들ㅇ해지자 인간 자체의 초월에 대해서 관심이 쏠렸다고나 할까? 나는 나이가 많아졌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지." 백리운학이 물었다. "그것과 싸울 상대와는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오?" 백환성은 웃으며 대 답했다. "말하자면 나는 나보다도 뛰어난 어떤 것을 알고 싶어한 것이지. 나는 인 간 한계의 무공을 터득한 상태이니 나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 사 람에게는 인간 초월의 능력이 있다는 셈이 아니겠느냐?" "……" "나는 나이가 이미 많아서 그런 것을 배우기도 늦어 버렸다. 다만 그 상 대를 만나서 낭패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죽기 전에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백리운학은 물었다. "그 상대가 바로 나였다는 말이오?" 백환성은 고개를 저었다. "천하는 넓어도 진짜 능력자는 없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사 람을 찾지 못해서 오직 무림 정복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지. 그런데 너에 관해서 내 아들에게 듣고 나서 다시 용화보경을 보았을 때에는 어떤 가능 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라는 녀석은 워낙에 불가사의한 점이 있 었으니까." 백리운학은 물었다. "그러니까 결국 나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는 말이 아니오?" 백환성은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아직은 아니다. 나는 네가 아직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잠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백리운학은 문득 웃더니 말했다. "당신의 말은 어느 정도는 옳다고 말할 수가 있소. 하지만 뒷부분은 좀더 그럴 듯하지 못한 것 같소." 백환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그럴 듯하지 못하다는 말이냐?" 백리운학이 대답했다. "당신은 비록 욕심이 사라졌다고 말했지만 그 욕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 오. 좀더 커다란 욕심이 생겼을 뿐이지. 즉, 당신은 능력자를 보게 되면 죽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제거하려고 할 것 이오. 자신의 기업을 지키기 위해서. 안 그렇소? 지금 점잖게 말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나를 이길 수가 있기 때문이 아니오?" 백환성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다고 해 두지. 어쨌든 내가 너를 그냥 죽이지 않고 지금까지 방관하 고 있었던 것은너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는 충분한 가치를 다하고 나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백리운학은 웃으며 대꾸했다. "결과는 나중에 봐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하하핫……" 백환성은 문득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 기백이 좋군! 확실히 너는 당금의 무림에서 유일하게 나와 겨룰 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그리고 네가 그 용화선공을 대성했다는 것도. 하지만 실은 내가 보기에그 내용은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어 있지." "……" "그 요지는 바로 마음을 쓰는 것인데, 불완전하여 그 마음을 공격당할 경 우에는 어이없이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너의 말처럼 치 밀하여 이러한 모든 사항을 빠짐없이 생각하고 일을 추진했던 것이다. 바 로 그것을 증명하는 의미에서 한 가지 광경을 너에게 보여 주도록 하겠 다." 말과 함께 백환성은 손으로 한쪽의 석벽을 가리켰다. 순간 기이하게도 그 석벽의 한 면이 위로 올라가면서 끼에는 또 다른 하나의 석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으음…… 하악……" "아으…… 아으윽……" 거칠은 숨소리, 괴이한 탄식과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백리운학은 문득 절 로 안색이 붉어졌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지금 그 안에는 다섯 명의 남녀가 실오라기 하나 걸 치지 않고 벌거벗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낯뜨거운 방사(房事)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여자가 둘이었고 남자는 모두 셋이었다. 그렇다면 서로 짝이 맞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그둘 중에 쉬고 있는 사람이나 놀고 있는 사람 은 없었다. 그 다섯 명은 한 덩어리였다. 마치 정욕에 미친 음탕한 한 덩 어리의 인간들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문득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게 된 백리운학은 그만 크게 놀랐다. 다름이 아니라 그 다섯 명은 백리운학이 얼마 전에 그렇게도 찾았던 악우 왕, 호덕승, 좌선비 등의 삼인과 여자는 바로 무구와 심보유가 아닌가! (……!)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그들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백리운학의 얼굴은 서서히 창백하게 변해갔다. 백리운학은 정신이 아찔하면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은 극도의 충격을 느꼈다. 일시 그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심하게 충 혈된 두 눈을 부릅뜨고 뚫어질 듯이 전면을 바라보았다. 사실 전면의 석실이 완전히 개방된 것은 아니었다. 특수한 유리벽으로 되 어서 안에서는 이쪽을 볼 수가 없는데 이쪽에서는 그쪽을 훤히 들여다볼 수가 있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설사 그들이 이쪽을 볼 수가 있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모두 정욕에 미쳐 있었다. 특히 백리운학의 두 눈에 가장 크게 부각되어 들어온 사람은 심보유도 아 니었고, 뭐니뭐니 해도 무구였다. 그 맑고 천진한 눈을 가지고 있었던 소 녀. 만일 동심각에서 후계자 운운하지 않았고, 또한 아미파의 제자가 아니 었다면 백리운학과 함께 혼인을 했을지도 모르는 그녀 무구(無垢)! 그녀는 연신 신음을 토하고 있었고, 그 옆의 심보유 역시 악우왕의 배 위에 올라 앉아서 미친 듯이 움직이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아……) 백리운학은 입 속에서 침이 말랐다. 원래 그는 무구를 내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전에는 미처 몰 랐었다. 백리운학은 항상 그녀가 옆에 있었고, 또한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미처 그녀를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제는 알 것도 같았다. 백리운학의 시선은 크게 충혈되어 초점을 잃고 몽롱한 시선으로 있는 무 구의 두 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백리운학은 전에 일심사태에게 욕정을 느꼈을 때에는 심한 고통을 느꼈었 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의 정도는 전 혀 그보다 못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열 배 혹은 수백 수천 배나 거대 한 고통 속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자학을 하고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 림으로써 대신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저런 지경 에 이르렀을 때 유독 그것에는 대신할 방법이 없었다. 한(恨)이 남고, 운 명을 저주(詛呪)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미친 듯이 하늘과 땅, 지 옥까지 자신의 한을 남김없이 불태운다고 해도 어찌 그 한이 풀릴 수가 있 다는 말인가? 물론 지금의 상황은 백환성이 일부러 백리운학을 위해서 만 들어 놓은 걸작품이었다. 능력이 탁월한 그는 실로 적절한 인물들을 골라 서 저렇게 욕정에 미치도록 최음제를 복용시켜 놓은 것이었다. 저들에게는 지금 이성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뭐가 중요하다는 것 일까? 오직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이 중요한 것으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은 다시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확실히 백환성의 능력은 탁월 했고 그의 수법은 거대한 위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심하게 말하기 에는 이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계속-- #5457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46장 12/02 07:39 237 line 제46장. 소호리(笑狐狸) 백리운학은 금방이라도 안으로 달려들어가서 그들의 미친 광란의 방사를 중지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비단 지금 그럴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 는 알고 있었다. 눈앞에 무서운 적인 백환성이 있는 것이다. 백환성, 그는 기이하게 웃으며 백리운학을 돌아보았다. "어떤가? 한번 봐줄 만한 그림이 아닌가? 나도 한때는 꽤나 여자들을 울 리고 다녔지만 지금은 다소 손색이 있지." 백리운학은 금방이라도 그에게 달려들어 뼈를 조각내고 전신의 살을 물어 뜯고 싶은 강렬한 살인 의욕을 느꼈다. 그러나 의외로 그는 한숨을 내쉬더 니 가벼운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는데 당신도 한번 저들 속에 어울려 보는 것이 어떻 겟소? 저렇게 만들어 놓은다고 해서 기분이 풀리는 것은 아니지 않소?" 이에 백환성은 오히려 껄껄 웃었다. "너는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군 그래. 너의 자제력은 상당히 뛰어나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과연 그 정도가 쓸 만한 것일까?" "……" 백리운학은 말이 없었다. 허나 그 순간에 이미 공격을 전개한 것이었다. 꽈르릉…… 거대한 폭음이 이며 지하석실 전체가 부서져 나갈 듯이 크게 뒤흔들렸다. 유리벽 너머의 다섯 명의 남녀들은 여전히 미친 듯이 그 짓을 계속하고 있 었지만, 이곳 주위의 사람들은 얼른 구석으로 비켜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 기에 급급했다. 첫 번째의 격돌! 그 결과는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알 수가 있었다. 백환성 은 여전히 그 자리에 기이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허나 배리운학은 다소 한 걸음 물러서서 창백해진 안색을 하고 백환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백환성은 그를 향해 비웃듯이 말했다. "아래서야 나를 이길 수가 있겠는가? 여자 친구의 복수도 해야 할 것이 고. 다시 한번 공격해 보게!" "……" 백리운학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두 번째의 공격을 개시한 것이었 다. 꽈꽈꽈꽝…… 무지막지한 엄청난 양의 벽력탄이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처럼 석실의 벽 이 가루가 되어서 마구 날라다니고, 일시 내부가 자욱하게 변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이미 내상을 피하기 위해서 석실을 빠져나가 버린 뒤였 다. 그들은 백환성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기실 이 지하석실은 매우 견고하여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신기할 정도였다. 장방형의 석실이 마치 원형의 석실처럼 사 방이 뭉텅뭉텅 패여나가 버렸고 이어 먼지가 가라앉자 여전히 기이한 웃음 을 머금고 서 있는 백환성이 웃으며 말했다. "제법 하는군. 하지만 아직 멀었네. 그렇게 하다가 그대의 저 여자들이 남김없이 정력을 갈취당해서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백리운학은 이미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에 재차 그는 공격을 퍼붕 ㅆ다. 꽝…… 꽈꽈꽈꽝…… 이번에는 거의 미친 듯한 공격이었다. 그에 따라서 유리벽도 간단히 무너 져서 그쪽에서 미친 듯이 방사를 벌이던 다섯 명의 남녀들은 크게 내상을 입은 채 혼절하여 저마다 나뒹굴고 말았다. 물론 이쪽의 석실의 모양은 그보다도 더했으면 더했지 못할 수가 없었다. 무려 십여 차레의 공격이 끝난 후에 백리운학은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 다. 그의 입 속에서는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두 눈 을 크게 부릅떠서 마치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미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에 반해 백환성은 이제 겨우 안색이 다소 창백해졌을 뿐이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자네의 무공은 사패의 주인들보다도 오히려 한 수가 위이군. 하 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네. 보게, 저기에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자네의 여자는 지금 뭘 바라고 있겠나? 어서 자네가 일을 끝내고 달려들기를 바라 고 있지 않겠나?" 백환성은 이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헌데 문득 그 말을 듣자 힘없이 늘어져 있던 백리운학의 고개가 빠르게 그의 쪽으로 돌아가며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이때 백환성은 무심코 대답하려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백 리운학의 눈빛이 결코 정상이 아니라 괴이한 빛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심마(心魔)에 들었단 말인가?) 백환성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번 상대를 떠보았다. "물론이네. 그런데 자네는 혹시 그런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 말 에, "으하하하핫……" 백리운학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입 속에서 계속 해서 피를 뿜어내며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광경은 그리 보기에 좋지 않았 고, 소름이 끼치는 광경이었다. 이를 보고 백환성은 내심 웃으며 생각했다. (틀림없이 심마에 들었군!) 무공이 극한에 오른 그의 눈이 결코 틀릴 리가 없었다. 백리운학은 이 순 간 극도의 격분과 한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만 심마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 이었다. 아니, 기실은 그가 이렇게 쉽게 심마에 빠져들게 된 원인은 백환 성이 말했던 대로 용화선공이 불완전한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불완전한 이 론상의 무학을 완전하게 익혔기 때문에 일단 마음이 크게 흔들리자 백리운 학은 쉽게 심마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를 보고 백환성은 한 시름을 놓는 모습이었다. 사실 심마라고 하는 것은 일반 무림인들의 주화입마라고 하는 현상보다도 더욱 지독한 것으로, 한번 걸리게 되면 최소한 영영 무공을 익힐 수가 없 는 폐인이 되거나 정신이상자, 혹은 대부분이 목숨을 잃게 되어 있는 것이 었다. 고금에 있어서 심마에 들었다가 무사히 빠져나갔던 사람은 거의 없 는 것만으로도 그 위험성을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리던 백리운학은 즉시 웃통을 찢듯이 벗어버리더니 우악스런 표정으로 무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무구는 뒤로 쓰러져서 반쯤 다리를 벌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미 무 수한 방사를 치른 흔적이 있는 그녀의 그러한 자태는 지극히 유혹적이고 색정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백리운학은 즉시 그녀의 상징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녀의 맑고 투명해 보이는 얼굴을 본 순간 흠칫하더니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천천히 그녀의 나신을 소중하게 안아드는 것이었다. 그러는 그의 눈은 초점이 풀려 있었다. 이것을 ㅂ고 다소 마음을 놓고 있던 백환성은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었 다. 이상하게도 무구를 대한 백리운학의 광기가 점차로 잦아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 이에 백환성은 잘못하다가는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즉시 백리운학 을 향해 자신의 무예를 발출했다. 여태 그는 백리운학의 공격만을 받아 왔 었는데 지금 공격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일시 그의 몸에서 찬란한 황금빛 광채가 일어나더니 백리운학의 등판을 향해 작렬하듯 덮쳐갔다. 빛! 그것은 바로 빛 자체였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방어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과거에 무림칠패의 주인들도 그 공격에 의해 서 맥도 써보지 못하고 죽어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상 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백 리운학은 비단 그 순간에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흉흉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백환성은 거의 기절할 듯이 놀랐다. 백리운학이 무서운 눈빛으로 자 신을 노려보는 순간에 마치 사방이 붉은 핏빛 속에 잠긴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기실 환각도 착각도 아니었다. 원래 백리운학은 거의 미친 듯한 상황에서 무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녀를 품안에 소중하게 안고 있었 는데, 다시 뒤에서 공격을 받게 되자 거대한 분노가 살아나서 발작적으로 반격을 퍼붓게 되었던 것이었다. 꽈꽈꽈꽈꽝…… 일시 지하석실 전체가 통째로 날려갔다. 유리벽의 석실에 혼절하여 누워 있던 악우왕 등의 육신뿐만 아니라 양쪽의 석실 전체가 완전히 허공으로 솟아 올랐는데, 이것은 마치 거대한 화산 폭발이 생긴 것처럼 굉장한 광경 이었다. 그 가운데 무수한 먼지가 사위를 휘감았다. 그 먼지가 모두 사라지고 난 뒤에 문득 허공에 한 사람이 둥둥 떠서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 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는 아 직도 멀쩡한 백환성이었다. 백리운학은 가공할 힘을 무의식중에 발휘하고 나서 거의 광기에 젖어 있 는 상태로 마구 질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중에도 무구의 알 몸을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는데, 아마도 습관처럼 아미산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이 아미산은 두 사람이 만났던 곳이었고, 서로간의 추억 이 깊이 물들어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정작 백리운학은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에서 바르게 아미산으로 가 지 못하고 다소 방향을 다르게 잡고 있었다. 물론 백리운학 본인은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 딜 가려고 하고 있는지의 생각도 없었고,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단지 극 히 혼미한 의식 속에서 한참을 허공으로 빠르게 달리다 보니 어느새 자신 의 몸은 왠지 낯익은 곳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백리운학은 이미 주위의 풍경에 신경을 쓰고 있을 단계가 아니었 다. 다만 이 부근의 풍경이 아름답고 무구의 의식이 조금씩 깨어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백리운학은 어느 뾰족하게 치솟은 암봉 위에 올라가서 이윽 고 무구의 나신을 내려놓았다. "……" 무구는 분명히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실상 그 시선은 마 치 허공처럼 텅 비어 있다는 것을 혼미한 의식 속의 백리운학도 내심 절절 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얄궂은 운명의 희롱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는 이렇게도 운명에 나약하기만 한 것일까? 문득 무구는 입술을 움직여서 뭔가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 속에서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마치 너무나도 심하게 기력을 탕진했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할 힘마저 없는 사람처럼 그녀의 전신은 매우 무기력해 보였다. 물론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실 백리운학이 제정신을 차리고 냉 정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면 능히 자신의 능력으로 그녀를 구할 수가 있었 을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육신의 상처는 고칠 수가 있었을 것이 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고칠 수가 있는 것일까? 백리운학은 이미 무 구의 텅 비어 있는 동공 속에서 어두운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이 백리운학의 눈빛도 절망적으로 물들어가 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구는 결국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다. 과연 그녀는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무구의 육신 은 숨진 것은 아니었으나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뜨고 정신없 이 늘어져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하룻밤이 흘러갔고, 다시 몇 시 진이 흘렀다. 그럼에도 무구뿐만 아니라 백리운학 역시 꼼짝하지 않고 그 녀의 두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미 이 무렵 무구의 동공은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잿빛은 절망의 빛이다. 그녀는 자신의 절망감을 이런 식으로 좀더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 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구의 육신은 점차로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는 정말로 숨져버린 것이었 다. 하지만 백리운학은 자신의 손으로 안고 있는 무구의 체온이 차갑게 되었 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도 못했고, 무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할 만한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다. 비록 일백년의 인생에서의 며칠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의 이 부근에 흐르고 있는 시간은 마치 멈 추어져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의 짧은 한 순간은 마치 일겁(一劫)처럼 길고 도 길었다. 검은 죽음의 어두운 장막이 부근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어서 바람은 물론 시간의 흐름조차 거스를 수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절망이나 어둠이라는 것도 영원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무 구의 시신은 정적으로 감싸인 가운데 움직이지 않았지만, 대신 백리운학의 눈빛은 점차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무구의 아름답던 육신이 점차로 부패되기 시작하고 냄새가 나 기 시작하며 변질되어 간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무리 의 식이 혼미하다고 해도 그는 아직 죽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번의 일ㄹ고 그의 의식이 아주 죽어버리기에는 그의 영혼은 이미 매우 거대해져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에 백리운학의 두 눈에 떠오른 것은 극도의 고통과 다소의 현실감이 었다. 이른바 현실감은 고통을 가중시미고 그 고통은 다시 현실감을 생생 하게 부러일으켜서 정신을 맑고 새롭게 갈아내는 것이었다. 갈수록 백리운 학의 인식은 새로워져 갔고 그의 고통은 늘어갔으며, 따라서 거기에 비례 해서 눈빛도 맑고 정상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한번 심마에 빠지게 되면 다시 되돌리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그러 나 지금의 경우는 매우 특이하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거의 기적적으로 백 리운학은 심마의 늪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었고, 무구의 나신이 심하게 부패되기 시작한 어느날 드디어 백리운학은 무구의 몸을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그 앞에 정좌를 하고 앉아서 깊은 상념에 빠져들기 시작했 다.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시신이 되어 썩어가게 된다면 결코 아름다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런 시신을 항상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예외가 있어서 백리운학은 한낱 무구 의 부패되어가는 추한 모습에 있어서도 심한 애착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 다. 다시 며칠이 흘렀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문득 그의 등뒤에서 한 줄 기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와 이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았던 무거운 어둠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봐요, 아무리 해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군요. 대체 당신은 계속 거 기에서 그렇게 앉아 있기만 할 건가요?" "……" 백리운학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심지어 표정이나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 지 않는 것을 보고 그 불청객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문득 백리운학의 등 을 가볍게 밀었다. 그러자 돌연 백리운학의 신형이 그대로 맥없이 옆으로 쓰러져 버리는 것 이 아닌가! 그렇다! 비록 그렇게 계속 앉아 있기는 했지만 백리운학은 이 미 심한 탈진과 심력의 소모로 인해서 혼절해 있었던 것이었다. 이를 보고 그 불청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작은 두 섬섬옥수를 양 허리 에 올려놓고 매섭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흥,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지가 무슨 철인이라구? 만일 당신이 백운생 이 아니라 백리운학이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었을 줄 알 라구요!" 말이 끝나자 그 불청객은 쉽게 백리운학의 무거운 몸을 둘러메고 어디론가 신법을 펼쳐서 날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불청객, 실은 어디에서 많이 보았던 사람이었다. 바로 상관비취(上官 翡翠)! 전날 검방이 멸족되고 상관방주가 죽음을 당하던 때에 백리운학에 의해서 극적으로 구출되어 목숨을 건졌던 맹랑하고 총명한 소녀. 이제 나 이 십칠세의 소호리(笑狐狸)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영특하고 깜찍스러운 소녀였다. 한 사람과의 인연은 흘러가 버렸다. 그러나 이제 다시 새로운 인연이 시 작되려고 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백리운학이 하필이면 이 부근으로 날아오고 거기에 이토록 상관비취가 그 를 쉽게 발견하게 된 것은 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화가 될 것인가? 무심히 암봉의 아래로 흘러가는 계류는 말이 없고, 산천과 특히 백리운학 의 굳게 닫혀 있는 두 눈도 쉽게 열릴 것 같지가 않았다. --계속-- #5459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47장 12/03 07:48 273 line 제47장. 대의(大義) (……) 백리운학은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느껴지는 것은 지 독하게 어지러운 머리가 점차로 차분하게 정리되어 간다는 느낌과 함께 신 선하게 느껴지는 콧속의 공기였다. 공기! 항상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시면서 살아왔던 그 느낌이 오늘 따라 매우 생경하게 느껴지고, 마치 그로 인해서 앞으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좋은 징조일까, 아니면 나쁜 징조일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는 어떤 공포나 두려움도 그다지 무섭거 나 거부감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러한 것들 은 그의 삶에 있어서 매우 친숙한 것이고, 또한 삶의 일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이러한 느낌에 어떤 이론을 전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직 이것 은 느낌이니까. 백리운학은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한 사람의 낯익은 얼 굴이었다. 아마도 백리운학은 이 얼굴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고, 또한 이렇게 만나게 될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러나 어쨌든 이렇게 만나게 되자 어떤 숙명의 끝이 자신들을 잡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과연 상대방도 지금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백리운학은 문 득 웃으며 물었다. "당신이 웬일이오?" 이에 그녀는 오히려 놀라는 표정이었다. "저를 알고 있었나요? 어째서 저를 보고 놀라지 않죠?" 백리운학은 웃으 며 대답했다. "사람은 때로는 이렇게 만나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녀, 상관비취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래요. 하지만 당신의 태도는 마치 나를 보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한 눈빛과도 같군요." 백리운학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나는 다만 좀더 현실적이 되었을 뿐이오." 상관비취는 고 개를 갸웃거렸다. "현실적이라고요?" 백리운학은 웃으며 다시 물었다. "내가 어째서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오? 그래, 내가 혹시 당신이 있는 곳 으로 쳐들어 왔었단 말이오?" 상관비취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당신은 이곳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나타났었죠. 그런데 제가 당신 을 이곳으로 모신 것이예요. 우리는 사실 이곳에서 은거하며 때를 기다리 고 있었던 거예요." 말을 하면서 상관비취는 전에 백리운학이 자신을 구해 줄 때의 일을 상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백리운학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담담하게 웃었다. 이제 그녀의 얼 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눈빛으 심한 고통을 헤쳐나왔기 때문에 좀 더 깊어지고 넓어진 것 같았다. 이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다. 문득 상관비취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참, 당신은 어째서 그녀의 일을 내게 묻지 않죠?" "……" 이에 백리운학의 눈빛이 잠시 암울하게 물드는 것 같았다. 따라서 상관비 취는 금방 자신이 공연히 그녀의 말을 꺼낸 것에 대해서 후회하기 시작했 다. 이 백리운학은 그 얼마나 고통스러운 마음이겠는가? 헌데 백리운학은 금방 정상을 회복하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하는 것이었 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상관비취는 이에 눈빛을 반짝 빛내며 앞서서 길을 인도했다. "이쪽에 있어요. 따라오세요." 길을 가는 도중에 백리운학은 문득 한 명의 소년이 열심히 목검을 가지고 휘두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나이는 대략 십오륙 세 가량 되었을까? 그런데 비단 용모도 출줄할 뿐만 아니라 근골이 심히 우수하고 하나하나 목검으로 펼치는 검세가 실로 막강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그 와 같은 나이에 벌써 저런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은 가히 경이로운 일인 것 이었다. 백리운학의 시선이 그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상관비취가 다소 웃으며 말 했다. "비아(飛兒)예요. 우리 가문에서는 그와 저 이렇게 둘만 살아남았죠. 지 금 열심히 가문의 북두제검구식(北斗帝劍九式)을 연성하여 복수를 하겠다 고 벼르고 있는 중이죠." 상관비(上官飛), 그는 소리가 들리자 잠시 이쪽 을 건너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는 연습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배리운학은그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좋은 자세로군." 상관비취는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무공의 성취가 대단하다는 뜻인가요?" 백리운학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마음 자세가 훌륭하다는 말이오." "……" 사실 저런 나이에 이런 궁벽한 산 속에서 무예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칭찬해도 아깝지 않은 자세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기실 저 상관비의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결코 백환성을 이길 수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백리운학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명명백 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무덤! 새로 만들어진 이 무덤에는 묘비명도 없었다. 그러나 백리운학은 문득 그 앞에서 다시금 무구의 채취를 느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향을 피우고 술잔을 부어준 다음에 백리운학은 잠시 동안 그 앞에 앉아서 깊은 상념에 젖어 있었다. 이 산 속은 매우 한가로운 느낌을 주었다. 너무나도 깊은 산중이기 때문 에 백환성이라고 해도 쉽사리 이곳을 알아차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디선가 소쩍새가 구슬픈 울음을 울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이에 옆에 서 있던 상관비취는 혹시 백리운학이 다시 무덤 앞에서 며칠 보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되었다. 따라서 생각나는 대로 그녀는 입을 열어 물었다. "이제 당신은 어디로 가실 거죠?" "……" 백리운학은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집에. 나의 진짜 본가(本家)에 한번 가볼 생각이오." (본가?) 상관비취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백리운학의 표정이 그 전보다는 밝아져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안심하는 마 음이 되었다. 백리운학은 무덤에서 돌아와서 내일 떠나기 위해 잠시 방에 들어가서 혼 자 상념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동생이 돌아온 것을 보고 문득 상관비취가 상관비에게 입을 열어 물었다. "비아, 우리도 잠시 이곳을 뜨도록 할까?" "……" 상관비는 잠시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누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뭔 가를 알았다는 듯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곳을 떠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누나는 그가 우리를 기쁘게 일행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상관비취는 문득 눈살을 찌푸리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음, 그건 걱정하지 마. 설마하니 내가 한 남자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니?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다 잘될 거야." "……" 상관비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다가 문득 멍하니 백리운학이 들어가 았는 방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밤이다. 백리운학은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누워서 깊은 상념에 젖어 있었다. 물론 지금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영상이었다. 바로 무 구의 얼굴. 비록 얼마 전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으나, 무수한 추억들과 함께 많은 무구의 얼굴이 그의 뇌리에서 파도처럼 일어났다 스러지곤 하고 있었 다. 왠지 눈물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방 안에 한 사람이 들어섰다. "흥, 남자가 한밤중에 잠은 자지 않고 웬 청승이죠? 그렇게 그녀가 잊혀 지지 않는다면 따라서 죽지 그래요?" "……" 백리운학은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상관비취, 방금 안으로 들어와서 어이없게도 호통을 치고 있는 소녀는 바 로 그녀였다. 백리운학은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렇게 청승맞게 보이오?" 상관비취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이예요. 당신은 한밤중에 잠도 자지 않고 울고 있다니. 나는 확실히 당신을 잘못 보았다고 말할 수가 있겠군요." 백리운학은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나는 이런 사람이오. 그래서 오늘은 이대로 지내고 내일 아침에 일 찍 떠나려고 하니 이해해 주시오." 이에 상관비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안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원래 우리집의 전통은 오는 손님을 내쫓지 않고 잘 접대하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은 내일 결코 혼자서 떠날 생각을 하면 안돼요." 백리운학은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오?" 상관비취는 대답했다. "그야 우리랑 함께 가야 하지 않겠어요?" 백리운학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집에 가는 것인데, 함께 가겠다는 것이오?" 상관비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는 함께 무림의 동도(同道)이니, 당신의 일이 내 일이고, 또한 내 일이 당신의 일과 같으니까요. 우리는 이제 가까운 동지로서 결코 서로간에 떨어져서는 안되는 거예요." 백리운학은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혼인이랃 해야 한다는 것 이오?" 상관비취는 즉시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아니예요. 그런 말은 아니예요. 나는 결코 당신과는 혼인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항상 그녀만을 생각할 것이 아닌가요?" "……" 백리운학은 묵묵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심하게 말을 더듬 는 그녀의 두 눈에는 촉촉한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그 시선은 심한 고통 속을 헤쳐 나온 고독한 눈빛이었다. 백리운학은 충분히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문득 그는 웃으며 물었다. "혹시 그런 얘기를 하러 내게 온 것이오?" 상관비취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나는……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어 요." 백리운학은 물었다. "그것은 뭐요?" 상관비취는 문득 자신의 몸에 걸치고 있는 잠옷을 벗어버렸다. "바로 이거예요." "……" 백리운학은 순간 가볍게 놀랐다. 원래 상관비취는 잠옷 속에 아무것도 입 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완전한 나신이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그녀의 나신은 다소 슬프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어 서 실로 충격을 느끼게 했다. 백리운학은 놀라 물었다. "그럼 나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상관비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바로 내 몸이예요." 백리운학은 잠시 멍하니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는 안되오. 나는 앞으로의 생사가 불확실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오." 이에 상관비취는 두 개의 섬섬옥수를 버들가지 같은 양쪽의 허 리에 올려놓고 싸늘하게 소리쳤다. "누가 당신에게 나를 책임져 달라고 했나요? 나도 당신의 소문은 이미 들 어서 잘 알고 있어요. 동심각주에게 쫓기는 사람은 결코 오래 살 수가 없죠. 하지만 나는그저 당신에게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주려는 거예요." 백리운학은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 하는 것이오?" 상관비취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바로 우리들의 거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당신은 일개 소녀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한밤중에 혼자 울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당신이 아직 여자를 겪지 않은 숫총각이라는 말이죠." "……" 상관비취의 말은 기이하고 엉뚱했다. 지금의 방 안의 분위기도 이상했고. 실로 이러한 상황은 두 사람만이 만들 수가 있는 기묘한 것일 것이었다. "나는 아직 처녀지만 여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요. 여자라고 하는 존 재는 다 비슷하고 거기에서 거기인 셈이죠. 사람이라는 것은 기왕에 죽는 것이니, 그렇게 한 사람에 집착한다면 어떻게 대의(大義)를 구할 수가 있 겠어요?" 백리운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말을 따를 수가 없소." 상관비취는 즉각 반박을 했다. "왜요? 두려워가요? 용기가 없으신가요?" "……" 순간 상관비취는 수치감도 잊은 듯 번쩍 신형을 날려 나신으로 백리운학 의 코앞에 이르러 신형을 우뚝 세웠다. 그리고 다소 떨리는 어조로 말했 다.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아직 전혀 어떤 남자와도 가까이해 본 적이 없으 니 당신이 손해는 아닐 거예요. 저는 당신의 병을 고쳐 주려는 거예요. 기 왕에 저는 당신에에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이런 일쯤은 상관이 없어요." "……" "당신이 죽게 되면, 제가 어떻게 살 것이냐고요? 그것은 상관이 없어요. 저는 앞으로 누구와도 혼인을 하지 않을 생각이예요. 그것은 당신도 마찬 가지예요. 당신이 아무리 애원을 한다고 해도 저는 이미 모든 것을 당신에 게 보였는데 벌써 당신에게 드린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어요?" 순간 백 리운학은 가슴이 심하게 격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관비취, 그녀는 지금 소리없이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비 록 소호리라는 영악스러운 별호를 갖고 있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가장 진실 되게 말하며 설득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과거의 그녀는 영악스러웠으 나 심한 시련을 겪고 나서 비로서 진정한 지혜로운 여인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세상에 진실처럼 강한 것은 없다. 모든 거짓은 그 앞에서 낱낱이 분쇄되 는 것이며, 태양의 빛으로 충만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알고 그것을 감 히 행동에 옮길 수가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는 이러한 여인이야말로 진정 으로 훌륭한 여인이 아니겠는가? 상관비취, 그녀는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재능과 무 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는 그보다도 훌륭함 마음을 가지 고 있었던 것이었다. 백리운학은 문득 새삼스럽게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두 손을 앞을 크게 벌려서 그녀를 맞이했다. "비취……" 이에 상관비취는 마치 이런 때를 오래도록 기다려 오기라도 한 사람처럼 빠르게 소리없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나 신이 이제는 슬프지 않고 한량없이 사랑스럽게 느꼈다. 그렇다 지금은 추운 계절이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무거운 짐이나 격식 등은 벗어버리는 것이 좋다. 서로가 뜨거운 질실로써 하나가 될 때에는 비 로소 어둠이 사라지고 따뜻한 사랑이 우러나며 내일을 향한 희망도 생겨나 는 것이 아니겠는가! 백리운학은 문득 자신이 안고 있는 이 아름다운 여인이 무구가 아닌가 하 는 착각이 일었다. 그러나 다른 것은 확실했다. 이 여인은 진정으로 강했다. 그리고 실로 여인이라고 해도 그렇게 강한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법이다. 진실로 강한 여인이야말로 모든 것을 행복 하고 아름답게 꾸며갈 수가 있는 것이다. 백리운학은 무구의 환영이 눈앞에 어른거렸으나 애써서 그것을 지우려고 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 필요하다면 무구의 인연과 사랑은 먼 추억 속으로 흘러가고 이렇게 상관비취라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의 체취가 깊이 스며들게 될 것이다. 백리운학은 처음으로 그것을 확인해 가 기 시작했다. 안휘성(安徽省)! 백리운학은 드디어 자신의 본가가 있는 안휘성으로 돌아 왔다. 본래는 아주 어렸을 적에 떠났던 고향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상관비취, 상관비와 더불어 셋이서 함께 묻고 물어서 자신의 본가가 있는 곳으로 향했는데, 사실 이십 년 전에 멸망한 대유학자의 가문 백리가 문의 집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일단 안휘성내로 들어서자 나 이가 중년을 넘어서고 조금이라도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선비라면 금 방 백리창송ㅇ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이 안휘성은 아주 경치가 수려하고 예로부터 많은 선비와 학자들이 배출된 곳으로 그저 백리창송의 이름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은 아주 친절하 게 장소를 말해 주었다. 이미 세월이 오래 흘러서 갖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한낱 기우였다. 그리고 이미 폐가가 되어 있는 본가의 부근에서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행 은 한 사람의 곱추 노인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곱추 노인은 과 거에 백리가문의 하인으로 있었는데 지금의 백리운학이 가문의 참화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던 연유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당시 백환성은 너무나도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미처 그러한 세세한 것까지 살피지 않았었으나, 만일 이 곱추 노인마저 당시에 변을 당했었다면 백리 운학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었을까? --계속-- *** 이제 마지막 한 장만 남았군요. *** #5460 양한우 (hanwoo71) [백상] 아미속가제자 제48장 12/03 07:49 254 line 제48장. 능력(能力) 곱추 하인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야말로 소주인께서 당시 참화를 피하신 것은 조상님들의 가호가 계셨 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원래 주인께서는 그 전날 꿈속에 하늘 을 온통 뒤덮은 서운(瑞雲)을 보시고서 문득 생각하신 바가 계서서 소주인 님을 아침에 사당에 올려 조상님께 보이게 하시고는 저더러 그것을 잘 보 고 있으라고 말을 하셨지요. 원래가 우리 사당은 본채와는 조금 떨어져 있 었기 때문에 당시 적도들이 본채에서 난리를 치르는 동안에 미처 뒤쪽에 있는 사당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 곱추도 당시에는 변변 치 않아서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적도들은 미처 소 주인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물러갔었던 것이지요. 소주인님! 소인은 늘상 이곳에 머물면서 언젠가는 소주인님께서 돌아와서 가문의 옛 영광을 다시 일으켜 주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죽 기 전에 뵙게 되어서 정말이지 여한이 없습니다요.-- 상관비취가 문득 물었다. "할아버지, 그럼 그때 이분을 데려간 사람이 생각이 나나요?" 곱추 하인 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 여자가 왔었는데, 그분은 그 전에도 보았었고, 또한 주인님 내외와 친하게 지냈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소주인님을 맡겼던 것이지요. 소인이 모 시고 있는 것보다는 그쪽이 보다 안전할 것 같아서……" 상관비취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때의 이분의 용모와 지금의 용모는 비슷한 구석이 있나요?" 곱추 하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느낌이야 비슷해도 그 동안 워낙에 많이 변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증명할 수가 있는 것이 있지요." "……" "당시 저는 사당에서 소주인님을 안고 돌아와서 주인님 내외가 그렇게 되 신 것을 보고 너무나도 놀라서 그만 소주인님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지 요. 그 때문에 소주인님의 팔뚝에는 기다란 상처가 났었는데……" 이어 백리운학의 오른 팔뚝을 걷어보이며 말했다. "바로 이것입니다요. 제가 당시 너무나도 놀라서 크게 걱정했었기 때문에 이 기다란 상처 자국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것입죠. 소주인님은 틀림없 이 백리가문의 사람이십니다." "……" 백리운학은 그저 담담히 웃었다. "그들이 주위를 포위했습니다." 상관비가 놀란 눈빛으로 달려 드러와서 백리운학에게 말했다. 일행은 지금 거의 폐가가 다 되어 있는 거대한 전각을 청소하고 그 중의 한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이었다. 옆에서 상관비취가 놀라서 말했다. "그들이 뒤쫓아 올 것은 예상을 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들이닥칠 줄은 몰랐어요." 백리운학이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원래 내가 이곳으로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사람 을 박아두고 있었을 것이오. 이상할 것이 없소." 상관비취가 놀란 눈초리로 물었다. "이제 대체 어떻게 하죠?" 백리운학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아무래도 그대들은 몰래 이곳을 빠져나가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좋겠소. 하지만 그대들은 내 말에 따르겠소?" 상관비취가 즉시 고개를 내저었다. "전 죽어도 당신과 함께 죽겠어요. 당신이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고, 또 한 우리가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기도 어려울 거예요." 상관비도 눈빛을 굳히며 말했다. "저도 형님과 함께 죽겠어요. 저는 늘 이런 날을 기다려 왔어요. 저를 보 내지 말아 주십시오!" 백리운학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모두 함께 나가보기로 합시다." "예." 넓은 마당에는 지금 생각대로 백환성이 열 명의 금강마인과 사패의 주인 들과 함께 서서 백리운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뜻밖에도 백리운학에게 서 쓴맛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주 단단하게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었다. 문득 상관비취가 전음으로 백리운학에게 물었다. "참, 저번에는 무공으로 백환성을 물리쳤었다고 했잖아요. 헌데 지금은 그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나요? 백리운학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불가능하오. 당시에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기때문에 어떤 무공을 펼쳤는지 알 수가 없지만, 아마 다시는 그런 무공을 펼칠 수가 없을 것이 오." 상관비취는 다시 물었다. "그럼 결국에는 우리가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인가요?" 백리운학은 웃으 며 대답했다. "사실 저 동심각주의 무공은 이미 극한에 이르러 있기 때문에 내가 전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더라도 이길 수가 있을지 의문인 것이오. 내가 다시 수 십 년 동안 수련하지 않는 한은 그를 이기기는 어려울 것 같소." 상관비취는 백리운학의 비관적인 얘기를 듣자 아미를 살풋 찌푸리더니 입 술을 깨물면서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문득 당신께서 전처럼 심마에 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군 요. 그러면 혹시 누가 알아요? 저 자들을 모두 이기게 될지?" 말과 함께 상관비취는 환한 웃음을 보였다. 이미 그녀도 이 싸움은 승산 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지막 대결이 될 것이다. 다만 그녀는 최후의 순간까지 백리운학에게 용기를 주고 그의 마음을 편안 하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웃음을 보이는 것이었다. 사실 같은 입장에서 여자와 남자가 느끼는 불안감과 공포는 서로 같을 수 가 없었다. 여인이 몇 배는 더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인을 약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환한 웃음을 보이는 상관비취의 태도는 충분히 누구에게라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백리운학은 가볍게 미소하며 천천히 백환성의 앞으로 다가갔다. 백환성은 기이하게 웃으며 이윽고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다시 보게 되는구나." 백리운학은 웃으며 대꾸했다. "결국 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 당신의 손에 다시 걸려든 것이오." 백 환성은 기이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너는 이제 목숨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냐?" 백리운학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허나 백환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실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왔고, 그들을 제압했지만 오직 너만은 쉽게 이해할 수가 없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너의 말을 쉽 게 믿을 수가 없구나." 이에 백리운학은 웃으며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헌데 그 전에 먼저 백환성이 손을 저으며 자신의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어서 대령하라!" 그러자 즉시 동심각의 날쌘 수하들이 움직이더니 뒤쪽에서 한 사람을 묶 어가지고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백리운학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동심각의 수하들에 의해 끌려 나오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들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 주었던 곱추 하인이었기 때 문이었던 것이다. 곱추 하인, 그는 매우 송구한 표정으로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소주인님, 부디 저를 신경쓰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늙어서 아무런 쓸모 가……" 곱추 하인은 나중에는 옆의 사람들이 아혈마저 제압해 버리는 바 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리운학은 이 백환성이 다시 곱추 하인을 이용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백환성은 백리운학을 향해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듣자니 그는 너에게 있어서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라고 하더군. 너는 감 히 자신을 위해서 그를 희생시킬 수는 없겠지? 자, 그를 살리고 싶다면 어 서 네 스스로 자결을 하도록 해라!" 이에 상관비가 크게 격분을 해서 소리 쳤다. "당신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비겁하게 나온다는 말이오? 정정당당하 게 싸울 용기가 없다는 말이오?" 이에 백환성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어리석은 놈,이 모든 능력들이 다 나의 능력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오 직 무력에만 의존하는 것은 필부의 만용인 것이다. 알겠느냐? 자, 나는 이 제 셋을 셀 것이니 그 동안에 스스로 자결하지 않는다면, 저 늙은 병신을 죽여버릴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그러니까 백환성은 백리운학이 자결을 하면 더욱 좋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무공을 펼치 는 데 있어서 지장을 주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백환성이 미처 하나를 세지도 않았는데 상관비가 번쩍 신형을 날려 곱추 하인을향히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상관비취는 크게 놀라 소리쳤다. "앗, 비아!" 허나 정작 상대인 백환성은 이를 보고도 그저 득의하게 웃으며 숫자를 세 기 시작했다. "하나……" 아니나 다를까, 상관비가 거의 곱추 하인의 부근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이 백환성의 뒤에 서 있던 서너 명의 금강마인들이 마치 허깨비처럼 상관비의 면전으로 덮쳐들었던 것이었다. 상관비는 비단 이 금강마인들의 하나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하물며 서너 명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들의 살수가 쇄도해 들자 이는 그 야말로 절대절명의 순간이 되었다. 상관비도 이것을 알고 즉시 저항을 포기하고 그만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 다. 젊은 나이에 이대로 죽는 것은 한스럽지만 결국 대항한다고 해서 살 수가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조금 전의 이 행동은 상관비 스스로 죽음을 의식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고 있던 상관비는 문득 기이하게도 죽을 순간이 지났는데 도 죽지 않았고 공격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알고 눈을 크게 떴다. (……?) 이상한 일이었다. 서너 명의 금강마인들은 바로 그의 코앞에서 움직이던 자세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고, 게다가 백환성을 배롯한 모든 사람 들의 눈빛이 이 순간 크게 경악으로 부릅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상관비는 어리둥절하여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데, "어서 그분을 모시고 이쪽으로 오도록 하게!" 백리운학의 담담한 음성을 듣고서야 상관비는 일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앗! 그럼 형님께서 이미 놀라운 무공을 터득하셨군요." "……" 백리운학은 담담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시에 우수수 가루 로 화해서 쏟아져 내리듯이 흩어져 버리는 금강마인들의 모습이 그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 상관비는 놀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금강마인들은 비단 그 옆의 서너 명 뿐만 아니라 나머지 백환서의 뒤에 있던 것들도 모조리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금강마인이란 말 그대로 금강불괴의 시신인데, 이렇게 쉽게 제 거되어 버리다니 이것은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백환성의 뒤 에 있던 것들까지 한꺼번에 사라졌다는 사실이 매우 의미심장했다. 상관비는 급급히 상황 판단을 하고 멍청하게 서 있는 동심각 수하의 수중 에서 곱추 하인을 빼앗아서는 얼른 백리운학의 뒤로 돌아가 버렸다. 이때 백환성은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백리운학을 향해 물었다. "이것은 무슨 무공이냐?" 백리운학은 이때 아주 신비로운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담담하고 고요하여 깨달음의 서광이 어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런 힘이오." 백환성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설마……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라는 말이냐?" 백리운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백환성은 안색이 수차례나 변했다. 그는 지금의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 야 하는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어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러다가 이윽고 어려운 결심을 한 듯 소리쳤다. "나는 네가 우리 다섯이서 합공을 하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고는 생각하 지 않는다." 이어 말과 동시에 그는 백리운학을 향해 자신의 무공인 황금 빛 광채를 최대한으로 일으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백환 성의 주위에 함께 서 있던 사패의 주인들 역시 각각의 무공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공력을 전개했다. 곧이어 가공할 대격돌이 벌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상황은 기이하게 돌변하고 말았다. "으악!" 백환성은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더니 고개를 돌려 사패의 주인들을 향해 흉악한 눈빛으로 이렇게 소리쳤던 것이었다. "아니, 네놈들이 감히 나를 암습하다니! 이럴 수가!" 그렇다! 알고 보니 사패의 주인들은 백리운학을 향해 합공을 하는 척하면서 일시에 무방비의 상태에 있는 백환성을 공격했던 것이었다. 백환성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 도 무방비의 상태에서 이런 공격은 당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의 이마가 갈라지면서 섬뜩하게 피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사패 가운데에서 장노사 적용홍광이 음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 사실 너도 여태 무수한 음모와 암격으로 지금의 기업을 이루었던 것이 아니냐?" 그 말에 백환성은 일시 대답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럴 수가……" 그는 실로 최후에 사패의 주인들이 자신을 배반할 줄을 미처 상상도 못하 고 있었다. 백환성은 미처 몇 마디의 말도 남기지 못한 채 통한의 눈을 부릅뜨고 죽 어 갔다. 그 섬뜩한 광경을 지켜보면서 남은 동심각의 사람들과 백불범 등은 감히 사패의 주인들을 향해 경거망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보고 장노사 적용홍광이 다시 백리운학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많은 과오를 짓고 살아왔음을 시인하겠소. 그러나 만일 지금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파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동심각의 일도 평정해 드리겠소." 백리운학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동심각의 사람들과 사패의 주인들은 모두 썰물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돌아 갔다. 이제 동심각의 일은 저절로 만인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사패의 주 인들이 개심을 하여 강호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게 될 것이다. 실로 사태의 반전이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상관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형님, 대체 어떻게 그 순간에 그런 능력을 얻게 되셨던 거죠?" 백리운학 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원래 불완전한 심공(心功)을 배웠었는데 거기에 바른 마음이 이룩 되자 절로 거대한 능력이 이룩되었던 것이다." 상관비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것은 가장 위대한 능력입니까?" 백리운학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보다도 훨씬 훌륭한 능력들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지. 오직 바 른 길로 걸어가다 보면 얻어지는 것인데, 세상의 사람들은 바른 길로 걸어 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 옆에서 상관비취도 입을 열어 물었다. "저어, 설마 이제 저를 버리지는 않으시겠죠?" 상관비가 다시 나섰다. "누나는 형님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상관비취는 얼굴이 붉어져서 말했다. "그거야 그냥 해본 말이었지 누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랬었나?" 이에 상관비는 웃으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알고 보니 누나도 형편없이 내숭을 떨고 있었네?" 그 말에 상 관비취는 벌컥 화를 내며 상관비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너,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이리 오지 못해!" 허나 상관비는 실 실 웃으며 달아나고 쉽게 잡혀 주지 않았다. "하핫, 어디 한번 잡아보라구!" 백리운학과 곱추 노인,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뺑뺑 맴돌며 장난을 치 고 있는 남매를 바라보며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담담히 웃었다. --여기에서 본 아미속가제자(蛾眉俗家弟子)를 마칩니다.-- <大尾> *** 이것으로써 백상님의 "아미속가제자"의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꾸준 히 보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김용(?)의 <장백산맥2부>에 이어 두 번째 올린 작품인데, 역시 쉽지는 않 군요. 그런데 참 이상해요. 왜 갈수록 타자수가 떨어지죠? 1권 시작할 때는 빠 른데 2권, 3권…… 갈수록 떨어져요. 다음 작품도 역시 백상님의 작품이 될 것 같군요. 백상님의 글이 개중 훌 륭한 것 같아서요. 그럼, 다음에 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