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龍尊 제1권 千古奇才 지은이: 사마달 ‥ 차 례 ‥ 序 章 제 1 장 奇 緣 제 2 장 다섯개의 奇寶 제 3 장 萬毒眞解 제 4 장 紫 霞 莊 제 5 장 天下第一의 武學 제 6 장 婚 談 제 7 장 깊어가는 사랑 제 8 장 괴상한 初夜 제 9 장 英雄의 決心 제 10 장 처음 펼친 武功 제 11 장 赤陽官主 제 12 장 裸體의 美女 제 13 장 사랑과 질투 제 14 장 靑 松 莊 제 15 장 香 序 章 일천년전(一千年前) 무(武)의 원조(元祖)이신 보리달마(菩提達磨)께서 열반(涅槃)에 드신 이후 중원무림(中原武林)은 극도(極度)의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이를 노리고 천축(天竺)의 마교(魔敎) 납찰파(拉刹巴)의 고수(高手) 십대마불(十大魔佛)이 등장하여 세상을 휩쓰니 무림은 드디어 종말(終末)이 오는 듯했다. 이때 한 기인(奇人)이 암운(暗雲)을 헤치고 혜성(慧星)처럼 등장하니…… 그의 한수에 십대마불은 추풍(秋風)에 낙엽(落葉)처럼 쓰러졌다. 전 무림의 고수들은 경악하고 천지(天地)의 이목은 그 기인에게 집중되었다. 허나 그 기인은 꼬리를 보이지 않는 신룡(神龍)처럼 무림에서 사라지니, 그 이후 그 누구도 그 기인을 본 사람은 없었다. 허나, 그 기인이 남긴 다음과 같은 한 마디는 무림인들의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으니…… -백환(白環)과 흑환(黑環)이 존재하는 한 무림의 평화는 결코 깨어지지 않으리라. 백환(白環)! 흑환(黑環)! 이는 무엇인가? 아무도 이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헌데, 그로부터 천 년 후 다시 무림에 거대한 혈화가 폭풍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무림인들은 일천 년 전 그 기인의 말을 다시 기억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이 언제부터인지 무림에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백환(白環)의 서기(瑞氣)가 하늘로 뻗치매, 천하(天下)의 독존(獨尊)이 그 아래 굴복하고, 흑환(黑環)의 마성(魔性)이 섬광(閃光)처럼 번뜩이니, 아비(阿鼻)의 백마(百魔)도 핏물로 화하더라. 천년(千年) 무림의 평화는 산산조각처럼 흩어지니, 천지(天地)는 혼돈하고 군마(群魔)는 난무하도다. 무림의 정의(正義)는 어디 갔는가? 아아, 흑백(黑白)의 성환(聖環)이여! 그대를 부르는 소리 들리지 않는가……? 제 1 장 奇 緣 1 천태산(天台山). 이 산은 절강성(浙江城) 동북 쪽으로 수백 리에 걸쳐 뻗어나간 험준한 산이다. 도가(道家)의 성지로도 이름 높은 이 천태산은 남동(南東) 지방에서 괄창산(括蒼山)과 더불어 준령고악(峻嶺高嶽)의 위용을 자랑하는 산이다. 때는 풍상(風霜)이 조석(朝夕)으로 만변(萬變)하는 가을, 산 전체는 만산홍엽(萬山紅葉)으로 불타오르는 듯했다. 이렇게 단풍진 산형(山型)은 하나의 거대한 홍석(紅石)과도 같았다. 이 단풍든 수해(樹海)를 따라 남단으로 가면 절승절경(絶勝絶景)을 이룬 계곡이 있으니, 이름하여 풍엽곡(楓葉谷). 기암(奇岩)과 깎아지른 단애(斷涯)로 둘러싸여 계곡은 더욱 깊었다. 그 풍엽곡의 수림들을 헤치고 안쪽으로 깊숙이 따라 들어가면 당당한 위용으로 버티고 서 있는 한 채의 장원이 있었다. 천태산 인근의 나무꾼들이나 산골 사람들은 이 장원을 자하장(紫霞莊)이라 불렀다. 이 자하장의 장주(莊主)는 팔순을 넘은 황보명(皇甫明)이라는 노인이었다. 황보명은 왕년에 조정의 중신으로 한때 벼슬이 병부시랑(兵部侍郞)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허나, 관계(官界)의 혼탁한 시류(時流)에 염증을 느끼곤 낙향(落鄕)하여 이곳에 자하장을 짓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이 장원에 은거한 지도 벌써 어언 이십 년. 황보명 노장주는 성품이 인자하고 온후하여 인근의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2 때는 하오(下午)의 잔광(殘光)이 쏟아지고 있는 미시(未時)경, 자하장 안채의 어느 방 장지문에 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고요한 방 안, 그 방은 삼면이 온통 고금동서(古今東西)의 수많은 책자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방 가운데에는 조그만 책상이 놓여져 있었다. 지금 그 책상 앞에는 한 소년이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을 만큼 깨끗한 백의(白衣) 차림의 소년이었다. 십 육칠 세 가량 되었을까? 소년의 얼굴은 관옥같이 빛나고 있었다. 검날같이 뚜렷한 검은 눈썹이 귀까지 뻗어 있었고, 그의 우뚝 솟은 코는 투명하듯 붉은 입술과 어울려 대단히 비범한 인상을 풍겼다. 실로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만들 정도로 수려한 용모의 소년이었다. 지금 이 순간 소년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띄운 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깊이 침잠된 그의 눈빛으로 보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책을 다 읽은 듯 책을 덮더니만 잠시 동안 두 눈을 감고는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읽은 책의 내용을 되돌아 생각해보는 듯했다. 잠시 후 소년은 눈을 떴다. 뭔가를 깨달았음일까? 소년의 입가엔 만족한 듯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문득 소년은 밖을 향하여 낭랑하게 외쳤다. "아삼(阿三)! 밖에 있느냐?" 허나,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자 소년은 눈썹 끝을 가볍게 찌푸리며 다시 낭랑한 목소리를 터뜨렸다. "아삼! 밖에 있느냐?" 소년은 다시 목소리를 높여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 녀석이 또 어딘가에서 낮잠을 자고 있나 보구나……) 소년은 몸을 일으켜 천천히 장지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온 소년의 눈에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는 너무나도 맑고 깨끗한 하늘이었다. "아! 정말 청명(淸明)한 날씨구나……!" 소년은 가볍게 중얼거리며 신을 신었다. (아삼, 이 녀석이 대체 어딜 갔을까?……) 그는 정원 주위를 훑어보았다. 한데, 오늘따라 웬일인지 하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하늘을 바라보던 소년은 문득 대문 밖으로 나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황보성운(皇甫星雲). 그것이 바로 이 소년의 이름이었다. 지금 나이 십육세(十六歲). 그는 이 자하장(紫霞莊)의 노장주인 황보명(皇甫明)의 손자였다. 하씨(河氏) 집안은 대대로 손(孫)이 귀했다. 하여 대대로 독자(獨子)로서 겨우 가문(家門)의 명맥만을 유지해 왔다. 바로 그런 집안의 십이대(十二代) 독자가 황보성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황보성운을 마치 금(金)이나 옥(玉)을 대하는 듯 소중히 키워왔다. 그리하여 황보성운은 어려서부터 이때까지 장원 내에서만 생활해 왔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책들 속에 묻혀 지내는 일 뿐이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그는 오늘 따라 밖에 나가 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황보성운은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자하장의 대문쪽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의 가슴 속은 가벼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대문 앞에는 늙은 청지기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고 있었다. (후훗, 나가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가?) 황보성운은 늙은 청지기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소리를 죽이며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늙은 청지기는 여전히 졸음을 못이겨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을 뿐이다. 대문을 나서 연신 뒤쪽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던 황보성운은 산모퉁이를 돌자 급속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 속에는 속박을 풀어던진 희열감이 격랑치고 있었다. 그는 펄쩍펄쩍 뛰며 달려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황보성운은 달리는 속도를 서서히 늦추고 풍엽곡의 절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풍엽곡은 다홍빛으로 불타고 있는 단풍잎의 바다로 일대장관(一大壯觀)을 이루고 있었다. "아! 정말 아름다운 계곡이다!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는 것을 진작 왜 몰랐을까……?" 소년 황보성운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주위의 풍경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이때 둘러보던 황보성운의 눈에 바로 앞 숲 속에서 놀고 있는 토끼 한 마리가 보였다. 빨간 눈에 하얀 털로 뒤덮여 있는 그 토끼는 예의 그 눈을 굴리며 주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보성운의 입가엔 장난기 서린 미소가 번져 올랐다. 문득 가슴 속에서 동심(童心)이 발동한 것이다. (흠, 저 놈을 한번 잡아볼까……)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토끼 곁으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순간, 토끼의 두 귀가 쫑긋이 세워졌다. 소년의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후다닥! 토끼는 재빨리 몸을 덩쿨 사이로 감춰버렸다. 소년은 계속 다가왔다. (후훗, 네놈이 숨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다……) 이윽고 소년은 두리번거리다 덩쿨 속에 숨어 있는 토끼를 발견했다. 토끼는 빨간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황보성운을 훑어보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그 모습이 무척 재미있었다. "인석, 거기 꼼짝 말고 있어라. 후훗…… 꿀밤이나 한 번 줄까보다." 황보성운은 가벼운 미소를 날리며 살금살금 덤불 곁으로 접근했다. 토끼는 소년이 지척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놀리기나 하듯 후다닥 도망쳤다. "저놈의 토끼가……" 황보성운은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흥, 그래 좋다. 누가 이기는지 어디 한 번 해보자!" 황보성운은 빠른 걸음으로 토끼를 쫓아갔다. 허나, 그의 발걸음이 토끼를 쫓을순 없었다. 토끼는 황보성운을 놀리는 듯 도망치다 멈추고 또 다시 도망치다 멈추곤 하는 것이었다. 약이 바짝 오른 황보성운은 젖먹던 힘을 다해 토끼를 추격했다. 토끼와의 실랭이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사이에 황보성운은 어느덧 풍엽곡을 벗어나고 말았다. 허나, 그는 토끼에 정신이 팔려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점차 시간은 흘러 태양은 서산의 마루턱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 주변이 점차로 어두워오고 있었다. 문득 서늘한 한기를 느낀 황보성운은 토끼를 쫓던 일을 멈추고 급속히 주변의 풍경을 살폈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이미 풍엽곡이 아니지 않는가? 단지 수많은 기암과 황토(黃土)로만 이루어진 생경한 계곡이었던 것이다. 황보성운은 당혹감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런…… 너무 많이 왔구나……" 황보성운은 주위를 살피며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껏 토끼를 뒤쫓아 온 방향을 도저히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드디어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덮쳐오고 있었다. 황보성운의 가슴 속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밀어 닥쳐왔다. 작은 호승심에 이끌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 자책과 후회의 감정들이 일어났다. 그는 오로지 자하장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일념(一念)으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지금 황보성운이 달려나가는 방향은 자하장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그는 점차 계곡 깊숙한 곳으로 빠져 들어갔다. 밤길에 경험이 없고, 외부세계에 대한 경험도 전무(全無)한 그로서는 암석이 무수히 돌출한 계곡을 뛰어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몇번이고 넘어져 무릎이 으깨어지고 손에 상처가 났다. 허나 그는 아픈 것도 모르고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주위의 경물(景物)은 완전히 암흑 속에 먹혀 들어가 있었다. 이때 어디선가 적막을 깨고 늑대의 음산한 울음소리가 뇌리를 후벼파듯 들려왔다. 우---- 후---- 우----! 우---- 우---- 후----! 황보성운은 등줄기로 한 줄기 싸늘한 땀이 흘러내리며 모골이 송연해짐을 금할 수 없었다. "아아! 큰일났구나……" 그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반대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괴기스럽고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늑대의 울음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혼신의 힘을 쥐어 짜내어 치달려갔다. 그의 전신은 이제 돌출한 암석과 나뭇가지 등으로 얽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늑대가 바로 뒤에서 덮쳐드는 듯한 공포에 혼절할 지경이었다. 그의 전신으로는 비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또한 피가 흐르는 두 다리는 점차 천 근처럼 무겁게 느껴져 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달려 완전히 탈진된 그는 거의 기다시피 걷고 있었다. 그는 점차로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는 무엇인가에 발목이 걸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넘어졌고, 그 충격으로 곧 정신을 잃었다. 3 뾰로로…… 뾰로롱…… 찌르르…… 찌르르르르…… 산새들이 조잘거리며 이곳 저곳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경쾌한 아침, 동산 위로 불끈 솟아오른 태양은 밤새 낙엽 위에 쌓였던 이슬을 걷어갔다. 황보성운은 눈부신 햇살 속에서 혼절로부터 깨어나기 시작했다. 눈을 뜬 그는 서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문득 밤에 늑대에게 쫓기던 생각이 떠올랐다.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부지했구나." 그는 뇌까리면서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어젯밤 일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으---- 윽!" 황보성운은 전신으로 파고드는 격렬한 통증에 절로 신음을 터뜨렸다. 그의 무릎은 처참하게 으깨어져 있었다. 또한 그의 백의(白衣)는 흙과 흘러 내린 피로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전신은 이곳 저곳이 긁혀 성한 곳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황보성운은 자신의 처참한 몰골을 들여다보며 장탄식을 터뜨렸다. "휴우! 할아버지께서 이 꼴을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한숨을 거둔 그는 자신의 주변을 힘없이 돌아보았다. 순간 그는 나직한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 놀랍게도 바로 그의 앞쪽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수백 장의 까마득한 절벽이 쏟아질 듯 가파롭게 가로 막고 있었다. 실로 위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천인단애(千 斷崖)였다. 황보성운은 멍하니 절벽을 바라보다 절벽 옆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무릎에 격심한 상처를 입었는지 심하게 절룩거렸다. 몇걸음 걷지 않아 그는 뼛속까지 치미는 고통에 걸음을 옮길수가 없었다. 황보성운은 내심 솟구쳐 오르는 처량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몸으로 어떻게 집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그의 입술 사이로 공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황보성운의 머리 속에는 집에서의 즐거웠던 일들이 하나 둘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자상한 웃음을 입가로 가득히 흘리시던 할아버지며, 엄격하고도 기품이 넘치는 아버님의 모습, 항상 자애롭던 어머님의 손길…… 그리고 일 년 전, 자신의 생일 때 달빛 교교히 내려오는 정원에서 자신의 시녀인 소향과 밤새 이야기하던 일 등…… 평생 고생 한 번 하지 않고 자라온 그였기에 지금의 처지를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타고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자신을 책망했다. (아니다. 이렇게 나약해서는 안돼. 나는 돌아갈 수 있다. 이 정도의 일에 체념해서야 어찌 사내장부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자하장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기껏해야 수십 리에 불과해. 설사 다리가 부러졌다 한들 기어서라도 갈 수가 있어.)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걸음을 옮겼다. 늦가을의 양광(陽光)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황보성운은 격심한 고통과 허기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허나, 보이는 것은 말라 죽은 듯 앙상한 나무들과 암석, 그리고 누런 황토 뿐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계곡은 끝나지가 않았다. 황보성운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일말의 의혹을 거둘 수가 없었다. 비록 장원을 나서본 적이 거의 없지만 사람들에게 들어 장원 주위의 지리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허나 누구에게도 지금 그가 걷고 있는 지형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서 서쪽으로 기울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황보성운은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이미 무릎은 마비가 된 듯 고통마저 없었다. 지금 그의 입술은 말라 갈라져 있었고, 입 속은 모래를 씹은 듯 껄끄러웠다. 거기에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그의 기운은 거의 탈진된 상태였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그는 귀를 곧추세웠다. "으응, 내가…… 환청(幻聽)을……?" 그러나 그가 발걸음을 옮겨가자 물소리는 점차로 확연해지고 있었다. 졸졸졸졸…… 아! 그것은 분명 물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는 고통과 피로에 지쳐있는 몸을 이끌고 황급히 물 소리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약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을 걸었을까? 그의 눈 앞에 조그만 샘이 나타났다. 그 샘은 또 다른 수백 장의 절벽 아래에서 솟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샘물 안에는 수정처럼 맑은 물이 가득히 고여 있었다. 황보성운은 허겁지겁 머리를 숙여 물을 들이켰다. "아……!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구나……" 타오르던 갈증이 풀리자 황보성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엎어져 다신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한데 바로 이때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그의 앞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은은한 홍광을 뿜어대고 있었다. "저게 뭘까?" 황보성운은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은근한 호기심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그 괴물체(怪物體)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점차로 앞으로 다가가자 괴물체의 형상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붉은 빛을 띤 철궤였다. 그 철궤는 높은 곳에서 떨어진 듯 땅 속으로 절반이나 깊숙이 박혀 있었다. 또한 오랜 풍상(風霜)을 겪은 듯 철궤의 표면은 이끼와 먼지로 온통 뒤덮여 있었으며 군데군데 깨어져 있었다. 특이한건 철궤 전체에서 발산되는 은은한 빛이었다. 철궤 앞에 다가와 선 황보성운은 천천히 몸을 숙여 철궤를 뽑아냈다. 철궤는 중량이 제법 묵직했다. 황보성운은 천천히 상자를 뒤덮고 있는 이끼와 먼지를 쓸어냈다. 그러자 그 철궤 표면에는 청룡(靑龍)이 금빛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광경이 정묘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는 치솟아 오르는 호기심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상자를 바라보던 황보성운은 손을 얹어 철궤를 열었다. 빠---- 악! 철궤는 기이한 음향을 내며 힘겹게 열렸다. 다음 순간 그 철궤 안은 은은한 광망(光網)이 꿈 속처럼 신비롭게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곳에는 홍색과 백색, 그리고 흑색의 광망이 가히 신비 막측하게 뿜어오르고 있었다. 실로 하나의 신비경이었다. "아……!" 황보성운은 넋을 잃은 듯 절로 놀람의 탄성을 터뜨렸다. 그의 벌어진 입은 굳어버린 듯 좀체로 다물어질 줄 몰랐다. 바로 그의 앞에 있는 철궤 속에는 모두 다섯 개의 빛나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한 권의 누런 양피지 책, 붉은 광망에 휩싸여 차라리 투명한 듯한 구슬 한 개, 매미 날개처럼 얇고 한없이 투명하여 있는지 없는지 모를 장갑, 어린 아이 모양의 우윳빛을 내뿜고 있는 기이한 식물의 뿌리, 그리고 빛을 안으로 갈무리한 듯한 흑백(黑白)의 두 개의 환(環) 등이었다. 황보성운은 넋을 잃은 듯 그 물건들을 응시했다. (도대체…… 이 신비한 물건들은 무엇일까?) 이때 청량하고 향긋한 냄새가 황보성운의 코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는 바로 그것이 우윳빛의 식물이 내뿜는 향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보성운은 그 물건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어린 아이 모양의 뿌리가 우윳빛을 낸다? 혹시…… 이것이 삼왕(蔘王)이라는 영물이 아닐까?" 황보성운은 자신의 일 년 전에 읽은 한 의서(醫書)의 내용을 더듬어 보았다. 과연 그때 자신이 책에서 본 삼왕의 모습과 동일했다. 황보성운은 커다란 흥분을 느꼈다. (이 정도 크기에다 이 정도 향기를 내뿜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수천 년은 된 삼왕임이 분명하다.) 그렇다. 황보성운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것은 바로 만년(萬年) 묵은 삼왕이었다. 허나 이 삼왕은 보통 삼왕과는 또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만년극음삼왕(萬年極陰蔘王)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만년극음삼왕. 이것은 만년한옥석이라는 신비한 영석(靈石)에서만 자라는 것이다. 즉, 만년극음삼왕은 천하의 가장 음랭한 음기(陰氣)가 모여서 굳은 만년한옥석에서 만년 동안 한옥석의 음기를 빨아 들이며 자란 것이었다. 이것을 일반인이 복용하면 그 본신(本身) 수명을 이백 년이나 늘일 수 있게 된다. 또한 만약 무림인이 이것을 복용할 시(時)에는 백년(百年)의 본신 내공을 증강시킬 수 있는 천하의 기물(奇物)이었다. (이런 곳에서 이 귀한 삼왕을 얻게 되다니……) 황보성운은 끓어 오르는 흥분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삼왕의 그윽한 향기는 계속하여 황보성운의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삼왕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보드랍고 차가웠다. 마치 삼왕 속에는 어떤 액체가 들어있는 듯 반투명한 말랑말랑한 느낌을 손 끝에 전해오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삼왕를 위로 치켜든 다음 그 밑을 베어 물었다. 순간 입 속에 이루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 차는 것 이 아닌가? 그 향기는 그가 이제껏 먹어온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었다. 동시에 향긋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가자 전신에 날아갈 듯한 상쾌감이 밀려 들어왔다. 어느덧 삼왕은 액체가 다 빠져나가고 반투명한 우윳빛의 껍질만이 남아 있었다. 황보성운은 아쉬운 듯 빈껍질만 남은 삼왕를 바라 보았다. 그리곤 껍질마저 씹어 먹었다. 삼왕을 다 먹은 황보성운은 다시 시선을 철궤로 돌렸다. 철궤 속에는 예의 그 물건들이 빛나고 있었다. 허기와 갈증이 좀 가신 황보성운은 신비스런 홍색의 광망에 싸여있는 구슬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예쁘게 생긴 구슬인데……) 그는 가만히 구슬을 집어들었다. 순간, "아니!" 그는 깜짝 놀라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구슬은 황보성운의 예상과는 달리 전혀 딱딱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딱딱하기는 커녕 말랑말랑한 감촉이 느껴졌으며 은은한 온기(溫氣)마저 도는 것이 아닌가? 그의 구슬을 들고있는 손조차 은은하고 황홀한 광망으로 휩싸고 있는 홍색의 구슬! 황보성운은 손을 돌려보다가 구슬을 지그시 눌러보았다. 그러자 다음 순간 그의 손가락을 누른 자리에서 구슬은 약간 일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으음, 정말 이상할 정도로 말랑말랑하구나......) 황보성운은 구슬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눌러보다가 입 속으로 넣어보았다. 순간 놀랍게도 그 구슬은 순식간에 향긋한 액체로 용해되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황보성운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헌데 한층 더 예기치 못한 일들이 뒤이어 일어나고 있었으니…… 황보성운의 뱃속으로 예의 그 붉은 구슬이 녹아드는 순간, 그는 점차로 아랫배에서 뜨거운 기운이 모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또한 아랫배에 모인 기운은 전신으로 타오를 듯 치솟구쳐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몸이 왜 이렇게 뜨거워져가는 것일까?) 황보성운은 은근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그 열기는 전신을 휘돌아 지금 그의 전신을 점차 홍색(紅色)으로 물들여 가고 있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단지 몸이 뜨거워져감을 느낄 뿐, 자신의 변화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점차 시간이 흐를 수록 그 기운은 강맹하게 전신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또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황보성운은 마치 전신이 뜨거운 불길 속으로 던져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전신의 곳곳으로 참을 수 없는 열기가 밀어 닥쳐 뼈와 살을 일시에 태워버리는 듯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으으---- 윽……! 윽!" 황보성운은 처절한 비명을 터뜨리며 이곳 저곳으로 뒹굴었다. 지금 그의 몸은 진정 무서울 정도로 붉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혈인(血人). 그는 바로 붉은 피를 발라놓은 듯한 인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찰나, "아아아아악!" 황보성운은 마지막 절규성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는 곧 혼절해 버렸다. 헌데 이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그의 붉게 변화된 몸에서 기이할 정도의 붉은 광채가 뿜어 올라 그 홍광(紅光) 속으로 그의 신형을 감추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어찌 사람이 붉게 변할 수 있으며 또한 광망을 폭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것도 필시 하나의 기연이란 말인가? 그렇다. 사실 정신을 잃은 황보성운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붉은 구슬은 예사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만년화룡(萬年火龍)의 내단(內丹)이었던 것이다. 만년화룡의 내단이란 화룡(火龍)이 극열천(極熱泉)에서 만년 동안 지낸 후 승천할 때 남기는 작은 구슬 모양의 것이었던 것이다. 이 내단을 무림인이 만약 복용한다면 전신이 창칼이 불침하는 금강불괴의 몸을 갖게 된다.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 이것은 무림인들이 꿈 속에서나 그려온 일이 아닌가? 또한 무림 수천 년 사에 과연 금강불괴지신이 된 무림인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내단을 복용할 시에는 순수한 원양진기(元陽眞氣)가 극성으로 올라 순식간에 백 년의 내공이 증진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보성운은……? 그렇다. 황보성운 그는 실로 엄청난 광세기연(廣世奇緣)을 만난 것이었다. 무림인들이라면 목숨을 내걸 희대의 기보를 하룻밤 만에 두 개 씩이나 얻은 것이었으니…… 지금 그의 체내(體內)에는 이백 년의 공력이 잠재하여 있는 것이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여전히 혼절로부터 깨어날 줄 모르고 있었다. 늦가을의 싸늘한 밤공기가 축축한 이슬로 변하여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었다. 제 2 장 다섯개의 奇寶 1 동쪽에서 새벽의 여명(黎明)이 어렴풋이 밝아오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오랜 혼절 속에서 깨어났다. 그는 주저앉은 채 동녘의 햇살을 보며 쓰게 웃었다. 벌써 이틀 째 혼절 속에서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심중으로 자신의 처지를 푸념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침 햇살을 맞고 혼절에서 깨어난 건 어제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몸 상태는 그때와 전혀 달랐다. 기이하게도 어제와는 달리 전신이 날아갈 듯 가벼운 것이 아닌가? (이상하다? 몸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황보성운은 괴이한 느낌에 전신을 훑어 보았다. 그리곤 문득 눈이 휘둥그래 커졌다. 놀랍게도 그렇게 극심했던 무릎의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이……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이때 문득 황보성운의 머리 속에 어제 먹었던 삼왕(蔘王)이 떠올랐다. (그래…… 맞아! 바로 삼왕이 그런 역할을 한거야……) 그의 생각은 곧 붉은 구슬로 옮겨갔다. "그것을 먹고 정말 죽는 줄 알았지……" 그는 어제의 극심했던 고통을 떠올리는지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뇌까렸다. 그는 그런 생각을 뿌리치기나 하듯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예의 그 붉은 상자는 황보성운이 서 있는 곳에서 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황보성운은 상자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자에는 세 가지 물건이 남아 있었다. 그는 누런 빛깔로 퇴색한 양피지 책자를 꺼내들었다. <현현비록(玄玄秘錄).> 그 책자의 겉표지 좌측 상단에 용이 등천(登天)하는 듯한 필체로 쓰여있는 서명(書名)이었다. "현현비록……? 대체 이건 무슨 책일까?" 그의 가슴 속은 점차 호기심으로 인해 격탕되어 갔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첫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천관(天關)의 진(陣)은 오직 인연자(因緣者)만이 뚫을 수 있다. 그대가 천관의 내부로 들어왔으니 나와의 인연이 이어진 것…… 노부 현현자(玄玄子)는 인연(因緣)있는 자(者)에게 나의 모든 유품을 남긴다. 노부의 유물을 발견하는 자는 강호(江湖)를 정의(正義)로 협행(俠行)하도록 하라.> "그럼 이 철궤를 남긴 사람이 현현자라는 분이란 말인가?" 황보성운은 더욱 부풀어오르는 호기심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불길처럼 정광을 내쏟으며 다음 장을 넘겼다. <현무신공(玄武神功).> 현무신공이라 씌여진 그 밑에는 총명한 황보성운으로서도 좀체로 용이하게 이해될 수 없는 주해들이 빽빽하게 쓰여 있었다. 한참 동안 그 주해를 들여다보던 황보성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현무구장(玄武九掌).> "현무…… 구장…… 현무구장……!" 황보성운은 현무구장의 이름을 되뇌이며 계속 다음 장을 넘겼다. 현무구장은 기이한 도형(圖形)으로 거의 아홉 장에 걸쳐 그려져 있었다. (으음, 이것이 바로 내가 종종 들은 바 있는 무공(武功)이라는 것인가 보군……) 황보성운은 가슴이 두근거리며 큰 흥분을 느꼈다. 책을 통해 읽은 기인이사 영웅호걸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는 책을 계속 읽으려다 그만 두었다. 책의 두께도 만만치 않거니와 종이가 워낙 얇아서 최소한 수백 장은 될 듯했다. 그는 책을 덮은 뒤 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철궤 안에서 매미의 날개처럼 얇고 눈부시게 투명한 장갑을 꺼냈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살펴보다가 그것을 손에 끼어보았다. 눈 대중으로 봤을 땐 조금 작은 듯 싶더니만 그 장갑은 놀라운 신축력으로 손에 끼우자 완전히 들어맞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한 그것은 너무도 투명한 나머지 끼었는지 안 끼었는지도 구별해 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장갑을 유심히 바라보던 황보성운은 내심 기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거참 괴이한 장갑이로구나…… 무슨 장갑이 이렇게 얇고 투명하단 말인가?" 장갑을 요모조모 살펴보던 황보성운은 뇌까리며 철궤 속에 흑환(黑環)과 백환(白環)을 꺼내려고 철궤를 한 손으로 짚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팍! 경쾌한 음향과 함께 손으로 짚었던 철궤의 한 부분이 부서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앗, 이럴…… 수가……?"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철궤가 이토록 쉽게 부서질 수 있단 말인가?) 너무 녹이 슬어서 부식되었나 생각했지만 결코 그런건 아니었다. 의혹을 느끼던 황보성운의 머리 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이 장갑 때문에?) 그는 장갑을 끼고있는 자신의 손을 들어 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하고 말았다. "훗…… 기막혀서…… 내가 이런 말도 안되는 황당무계한 생각을 다하다니……"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신의 지나친 상상력을 비웃었다. 그리곤 장갑을 벗으려다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보곤 동작을 멈칫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장갑을 낀 채로 나무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곤 나무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나무야…… 나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정말로 멍청한 것 같아." 말과 함께 그는 우수(右手)를 들어 나무를 내리쳤다. 순간, 우지직! 팍!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무껍질이 산산조각으로 튀어 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아름드리 고목은 굉음과 함께 파공성을 일으키며 서서히 무너졌다. 쿠르르---- 쿵! 고목이 쓰러지자 황보성운이 서 있던 땅이 진동했다. 그는 그 광경에 경악한 나머지 입을 딱 벌렸다. "세…… 세상에…… 이런 일이……" 설마했던 의문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말도 안돼…… 이건 우연이야…… 지독한 우연…… 저건 쓰러지기 직전의 썩은 나무야……" 그는 다시 옆에 있는 바위로 다가가 몇 차례 호흡을 가다듬고는 기합성과 함께 오른쪽 주먹을 내질렀다. (이게 가짜라면 내 손이 부숴질거야.) 한데 다음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오른쪽 주먹이 바위 속으로 깊숙이 박혀버렸다. 황보성운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젠 모든게 명확해졌다. 장갑의 가공할 위력은 현실인 것이다. 황보성운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난 지금 엄청난 물건을 얻은거야……" 그는 한자 깊이로 바윗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주먹을 빼내었다. 그제서야 엄청난 기쁨의 감정이 전신으로 휘몰아쳐 왔다. 그는 떨리는 흥분을 가까스로 억제한 채 다시 철궤 곁으로 다가갔다. 상자 속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흑백(黑白)의 쌍환(雙環)이 은은한 빛을 그 속으로 갈무리한 채 천 년의 신비를 감춘 듯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황보성운은 마지막 물건인 쌍환을 꺼내들었다. 그는 의혹의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것은 또 무엇에 쓰는 것일까?" 그의 한 손에 들려 있는 백환은 마치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투명하여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다른 손에 들려 있는 흑환은 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불러온 듯 칠흑빛에 은은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백환을 공중으로 던져보았다. 순간, 주위 십여 장 내에 있는 모든 물체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황보성운은 깜짝 놀라 떨어져 내리는 백환을 받았다. 그러자 모든 경물들이 제 모습을 갖추었다. 그는 이번에는 흑환을 호기심 가득찬 표정으로 던져 올렸다. 다음 순간 그의 주위 십여 장에 온통 흑색의 그림자로 가득차 버려 사위를 분별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정말 해괴한 물건들이구나……" 그는 흑환을 받아 손에 쥐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림자들이 사라져 버렸다. 황보성운은 쌍환을 들여다보다가 손목에 끼워보았다. 순간, 언뜻 보기에 커 보이던 쌍환이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목으로 들어가 맞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기이한 물건을 얻은 희열에 들떴다. "자세한 용도는 잘 모르겠지만 이 또한 보통 물건이 아닌건 분명해……" 황보성운은 만족한 듯 양 손목에 찬 흑백쌍환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아직 황보성운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 두 가지의 희고 검은 환이 그 얼마나 엄청난 물건이라는 것을...... 단지 황보성운은 신기한 물건을 얻은 기쁨에만 잠겨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희희낙락(喜喜樂樂)하고 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기이한 신력(神力)을 가진 장갑이 끼워져 있었고, 손목에는 흑백(黑白)의 쌍환(雙環)이 빛나고 있었다. 또한 그의 품 속에는 광세비급인 현현비록이 들어있지 않는가? 황보성운은 자신이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기인이사라도 된듯한 기분이었다. 이때 바로 그의 앞 숲에서 한 마리의 토끼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자 기보에 정신이 팔려있던 황보성운은 문득 이곳에 오게된 기억과 함께 집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참, 집에서 기다릴텐데 빨리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대략 방향을 가늠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2 어느 정도 걸었을까? 황보성운은 어느새 천인단애로 포위된 협곡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그토록 노력해도 빠져 나올 수 없던 계곡을 빠져 나온 것이었지만, 황보성운은 별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가 어찌 알랴? 그가 협곡으로 들어오고 나간 것이 모두가 하늘의 인연 때문임을…… 어쨌든 황보성운은 그런걸 의식 못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앞에 수백 년을 커온 듯한 전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숲이 가로막았다. 황보성운은 무심히 그 숲 사이로 난 소로(小路)길로 접어들었다. 그 숲은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노송과 거목의 전나무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는 것이었다. 햇빛 한점 비치지 않는 한랭한 음지(陰地). 그 바닥엔 잡초와 축축한 이끼로 무성했다. 그러나 황보성운은 별 느낌없이 우거진 숲 속을 헤쳐나갔다. 가면 갈 수록 길이 험했으며 이름모를 거목과 덩쿨들이 그의 진로를 방해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금새 지칠 정도로 험한 길이었건만 괴이하게도 황보성운의 얼굴에는 전혀 지친 기색을 엿볼 수가 없었다. 황보성운으로서는 실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의 한시진 가까이 걸었는데 숨 하나 가쁘지 않으니…… 기이한 일이로구나……) 황보성운은 날 듯한 상쾌함을 전신에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다시 한시진 동안 숲속을 헤치며 나아갔을 때, 그의 눈에 하나의 사찰이 보였다. "아……!" 황보성운은 절로 탄성을 터뜨렸다. 이틀만에 처음 보는 사람이 사는 곳인 것이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급히 사찰로 다가가고 있었다. "저곳에 가서 물어보면 자하장으로 가는 길을 알아낼 수 있을거야." 허나, 사찰 앞까지 뛰어간 황보성운의 표정엔 옅은 실망의 빛이 나타났다. 눈 앞에 있는 사찰이 너무나 폐허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이 사찰(寺刹)이지, 많은 곳이 무너져 내려 앉았으며 그 근처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괴사찰(怪寺刹)로부터는 싸늘한 살기가 모골이 송연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두려움 때문에 잠시 망설였으나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사찰 대문으로 다가섰다. 그는 대문 안을 넘겨보며 낭랑하게 외쳤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그러나 안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황보성운은 머뭇거리며 대문을 밀었다. 순간, 끼이---- 이---- 익! 소름이 끼칠 듯 기분나쁜 음향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는 주위를 살피다가 대웅전 안으로 들어갔다. 대웅전 안은 온통 거미줄과 먼지로 뒤얽혀 음침했으며, 불전의 위엄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괴이하게도 그곳에는 삭막한 냉기가 구석구석마다 배어 그 살풍경(殺風景)을 도와주고 있었다. "엉망이로군……" 그는 이런 말을 내뱉으며 불존 옆의 구석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찰나, "악!" 그는 혼이 달아나는 듯한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가 바라본 곳, 그곳에는 한 구의 싸늘한 백골(白骨)이 흩어져 있었다. 냉막한 냉기와 깨어 부서질 듯한 싸늘한 침묵이 서린 대웅전의 어둠침침한 마루, 당장 귀곡성(鬼哭聲)을 내지르며 괴물이 튀어나올 듯한 분위기인 바로 그곳에 허옇게 인광을 발산하며 누워있는 백골(白骨). 실로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보성운은 머리칼이 삐쭉삐쭉 거꾸로 곤두서며 등 뒤로 섬전(閃電)같은 전율이 휩쓸고 지나감을 느꼈다. 잠시 후 황보성운은 격앙된 호흡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휴우----" 한숨을 길게 내뿜은 그는 고루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백골은 죽은 그 자세로 아직까지 외부의 손길을 받지 않은 듯해 보였다. 그의 오른쪽 뼈가 향해있는 곳과는 한자 정도 떨어져 흑색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백골의 앙상한 양 팔은 그 상자를 향해 뻗어 있었다. 마치 영혼의 힘을 빌어서라도 검은 상자를 잡으려는 듯이…… 황보성운은 아직까지도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의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황보성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상자 앞으로 가 그것을 끄집어 올렸다. 그리곤 한 걸음 물러서서 의혹에 찬 눈으로 상자를 들여다 보았다. 상자에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황보성운은 상자를 열기 위해 상자를 잡았다. 그러나 좀체로 그 상자는 열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힘을 주었다. 그러자, 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부서져 버렸다. 투명한 장갑의 위력이었던 것이다. 순간, "아!" 황보성운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탄성음이 흘러나왔다. 철갑 속에는 한 권의 책자와 취옥빛을 내뿜고 있는 옥병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보성운은 책자를 꺼내 들었다. 그 책자 표지 좌측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만독진해(萬毒眞解).> 황보성운은 다시 철갑 속에서 옥병을 꺼냈다. 그 옥병 속에는 은은한 자광(紫光)을 띄는 몇 개의 알약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옥병 겉에는 날 듯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만독신단(萬毒神丹).> 옥병을 바라보는 황보성운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대체 어디에 쓰는 것일까……?) 약의 이름에 독(毒)이란 글자가 들어간 걸로 미루어 필히 좋은 물건은 아닌 듯싶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옅은 경기(氣)를 일으키며 한 줄기 붉고 푸른 섬광이 황보성운의 등 뒤로 날아 오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깜짝 놀라 뒤로 피하려 했으나 이미 그 빛은 그의 목덜미를 휘어감아 버렸다. "으---- 윽!" 그의 목을 감은 것은 물컹하는 물체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 마리 독사였다. 그 독사는 기이하게도 반쪽은 푸르고 반쪽은 붉은 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대경실색한 황보성운은 독사를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으나 좀체로 떨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독사는 혀를 날름거리며 보라색 독기를 내어뿜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때, 미처 당황함이 가시지 않은 그의 귀에 음산한 괴소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지만, 또한 너무나 확연하게 황보성운의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크흐흐흐흐…… 드디어 오십 년 간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크흐흐……" 황보성운은 소름끼치는 괴소에 몸을 움츠리며 외쳤다. "누…… 누구요?" 그는 외치며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허나 예의 그 목소리만 들려올 뿐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크흐흐흐…… 꼬마야, 서툰 짓을 하면 그 독사가 너의 목을 물어 뜯을 것이다." 황보성운은 경악스런 표정으로 다급히 소리쳤다. "나…… 나는 잘못한 것이 없소." 즉시로 음랭한 괴소가 날아들었다. "흐흐흐…… 이 세상에서 정말로 잘못해서 죽는 자가 몇이나 될 것 같으냐?" "나…… 나는……" "좋다, 꼬마야. 너무 겁먹을 필요없어. 내 말만 잘 들으면 넌 절대 위험하지 않아. 넌 그저 노부가 명령하는 방향대로만 오면 되는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황보성운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크흐흐…… 좋다, 꼬마야.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에서 오른쪽 벽으로 와라." 황보성운은 두려운 눈길로 목에 감긴 독사를 내려 보았다. 전신에 섬뜩하고 미끈미끈한 느낌과 함께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오른쪽 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순간, 다시 그 음산하기 짝이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됐다, 꼬마야 그곳에서 보면 한 개의 금불상(金佛像)이 있을 것이다. 보이느냐?" 황보성운이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과연 그 앞에는 사람정도 크기의 금불상이 서있었다. 그는 재빨리 대답했다. "네, 보…… 보입니다." "좋다! 너는 그 불상의 목을 오른쪽으로 한바퀴 돌려라!" 황보성운은 멈칫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 어찌 그런 일을……?" "이놈! 불상 대신 네놈 목이 돌아가고 싶으냐?" 괴인의 노갈이 터졌다. 황보성운은 당황하여 다급히 내뱉었다. "예, 하…… 하겠습니다." 그는 금불상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금불상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입을 꽉 다물고 불상의 머리를 힘껏 돌렸다. 순간, 쿠르르릉----! 둔중한 굉음과 함께 불상 옆에 조그만 석문(石門)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깜짝놀라 석상처럼 서버렸다. 이때 또 다시 음산하고 싸늘한 노인의 괴소가 들려왔다. "크흐흐흐…… 꼬마야, 어서 안으로 들어오너라." 그러나 황보성운은 문 앞에서 머뭇머뭇 거렸다. 그의 앞에는 어둠침침한 동굴이 시꺼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크흐흐…… 이놈! 목에 감겨있는 것이 무엇이지? 너는 독사가 두렵지 않느냐?" 황보성운의 목을 독사가 서서히 조여왔다. 황보성운은 할 수 없이 떨리는 몸을 자제하여 석문(石門)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온통 습기와 퀘퀘한 냄새로 가득했고 어둠침침했다. "크흐흐…… 됐다. 그곳에서 바로 앞 계단을 밟고 계속 내려와라." 황보성운은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이때, 쿠르릉----! 뒤로부터 육중하게 석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황보성운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허나 이미 석문은 굳게 닫혀진 뒤였다. "크흐흐…… 크크…… 꼬마야, 이제 네놈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빨리 이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황보성운은 주춤주춤 캄캄한 암흑 속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이때 한 가지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그의 주위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깜짝 놀라 주위를 황급히 훑어보았다. 허나 주위를 밝혀주는 물건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그는 기이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때 또 다시 괴노인의 음침하고 껄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내려오너라! 대체 무엇을 꾸물거리느냐?" 황보성운은 싸늘한 냉기가 냉막하게 휩싸고 있는 석실을 황급히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끝없이 뻗어내려간 나선형 계단 앞에 와있었다. 황보성운은 두려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전신을 으스스 떨며 나선형 계단을 따라 계속 내려갔다. 한참 동안 내려간 그는 계단의 끝에 당도했다. "크흐흐…… 됐다, 됐어. 이제 너는 네 앞에 있는 벽을 잘 살펴봐라. 그곳을 보면 약간 불룩 튀어나온 곳이 있을 것이다. 그곳을 힘껏 눌러라!" 황보성운은 석벽으로 다가가 튀어나온 곳을 찾았다. 그것은 석벽의 우측 중앙에 있었다. 그는 머뭇거리다 그곳을 힘껏 눌렀다. 순간, 쿠르릉----! 거대한 석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열리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흠칫 놀랐다. 그러자 다시 음침한 괴소가 더욱 크게 울려왔다. "크흐흐…… 꼬마야, 두려워 말고 어서 들어오너라." 황보성운은 이를 악물고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석문 안쪽으로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순간, "아앗----!" 황보성운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올랐다. 지금 석문의 안에는 싸늘한 자색(紫色)의 흉광을 폭사시키고 있는 한 명의 백발괴인이 소름끼치는 냉소를 흘리며 석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백발괴인(白髮怪人)! 그의 몰골은 얼마나 흉악한지 말로 다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땅바닥까지 휘덮으며 쓸고내려간 강철같은 머리칼, 무릎까지 송곳처럼 내리뻗은 백염(白髥), 게다가 걸치고 있는 누더기 속의 몸체는 마치 불에 그을린 듯 전신이 바싹 말라 있는 것이 아닌가? 백발괴인의 모습은 차라리 하나의 해골이었다. 제 3 장 萬毒眞解 1 황보성운은 두려운 눈빛으로 백발괴인을 응시했다. 백발괴인을 바라보는 황보성운의 두 다리는 후둘후둘 떨리고 있었다. 또한 그의 등 뒤로는 싸늘하게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때 산송장처럼 냉막하게 앉아있던 백발괴인이 돌연 두 손을 슬쩍 치켜들었다. 순간, 쉬이---- 익! 하는 소리와 함께 놀랍게도 황보성운의 손에 들려져 있던 책자와 옥병이 괴인의 손으로 휩쓸려 날아갔다. "앗! 귀…… 귀신이다……!" 순식간에 눈씻고 보아도 믿지못할 광경이 목전에서 전개되자, 대경실색한 황보성운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또한 그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해졌고, 그의 표정은 공포로 크게 일그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백발괴인은 그런 것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빼앗은 옥병과 책자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는 흡족한 듯 만면에 음침한 괴소를 흘리며 뇌까렸다. "크흐흐흐흐…… 오십 년, 으! 그래…… 오십 년이다! 그 많은 세월 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크하하핫……" 백발괴인은 무척이나 장쾌한 듯 음침한 괴소를 연발해 터뜨렸다. "노양(奴陽)! 노양, 네놈이…… 나를 해치고 이 물건들을 갖고 도주하려 했지만 어림없는 수작, 흥! 그럼 어림없고 말고, 어찌 네가 감히 내 단장독(斷腸毒)을 견뎌낼 수 있었겠느냐…… 크하하하하…… 크하핫!" 괴인의 행동은 처절하게 미쳐버린 광인(狂人), 바로 그것이었다. 웃다가 화냈다가 다시금 터뜨리는 폭소(爆笑)……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황보성운은 격렬하게 밀려드는 공포감에 휩싸여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괴인은 광적인 행동을 멈추곤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꼬마야! 이리 가까이 오너라!" 이렇게 말하는 괴인의 눈 속에서는 서서히 형형한 흉광(凶光)이 폭사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황보성운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순간 괴인이 섬뜩하게 웃으며 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괴인으로부터 기이한 잠력(潛力)이 황보성운 쪽으로 뻗어 나오더니 황보성운은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괴인 앞으로 주르르 끌려갔다. "아앗!" 황보성운은 대경실색해서 억지로 버텼다. 허나 그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황보성운은 괴인의 앞으로 끌려갔고, 괴인은 사악한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뻗어 황보성운의 목에 감겨있는 독사를 회수했다. 황보성운은 가히 숨도 제대로 못쉴 지경이었다. 백발괴인은 붉고 푸른색의 광망(光網)을 내뿜고 있는 독사를 지그시 내려보며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크흐흐…… 수고했다, 청홍(靑紅)아!" 괴인은 연신 독사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독사도 몸을 뒤틀며 갈라진 혀 끝을 날름거렸다. 이것을 바라보던 황보성운의 전신엔 오한과 함께 소름이 쭉 뻗쳤다. (저자가…… 진정…… 인간일까……?) 이때 독사를 어루만지던 백발괴인은 황보성운을 넌지시 바라보며 음침하게 입을 열었다. "크흐흐…… 꼬마야, 네놈의 이름은 어떻게 되느냐?" 황보성운은 움찔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황보…… 성운이라고……" 그가 말 끝을 흐리자 백발괴인은 즐거운 듯 괴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황보성운이라, 대단히 좋은 이름이다. 흐흐흐흐……" 백발괴인은 연신 수염을 떨며 클클거렸다. 그리고 다시 그의 입에서 소름끼치는 괴소가 흘러나왔다. "꼬마야, 노부가 너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황보성운은 두려운 눈빛으로 백발괴인을 응시했다. "노부는 오십 년 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벌레나 구데기…… 또는 들쥐같은 것밖에는 먹지 못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황보성운은 안색이 변했다. 그의 안색은 다시 밀납처럼 창백하게 질려버렸으며, 그의 가슴 속에는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오고 있었다. 이때 재차 싸늘한 괴소가 다시 그의 귀를 후벼 파고들었다. "크흐흐…… 꼬마야, 그래도 노부의 말뜻을 모르겠느냐?" 황보성운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괴인의 두 눈에서 불벼락같은 기운이 뻗었다. "빌어먹을 놈! 생긴건 총명해 보이는 놈이 왜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이만큼 말을 했으면 대충 알아들어야 할거 아냐?" "난…… 무슨 말인지…… 도저히……" 백발괴인은 눈으로 음산하고 흉맹한 광망을 폭사시키면서 입가에 아수라같은 냉소를 날렸다. "좋아…… 크크크크…… 그렇다면 확연하게 말해주지. 나는 지금 너의 그 신선한 피와 살점을 씹고 싶단 말이다. 알겠느냐? 크흐흐흐……" 혼비백산(魂飛魄散)! 그렇다. 지금 황보성운은 바로 그 혼비백산의 상태였다. 그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으며 질린 나머지 입은 벌려져 굳어버렸다. 2 잠시 후, 황보성운은 가까스로 한 가닥 정신을 수습하여 재빨리 물러나려 했다. 허나 그는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괴인 앞으로 점점 끌려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괴인이 끌어당기는 기이한 잠력 때문이었다. 기이한 잠력으로 황보성운을 옭아맨 백발괴인은 득의의 괴소를 날리며 황보성운을 계속 끌어당겼다. 황보성운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백발괴인의 잠력에 이끌려 서서히 끌려갈 뿐, 도저히 그의 수중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드디어 괴인의 해골같이 징그러운 손이 서서히 올라왔다. 그리고는 황보성운의 손을 덥석 움켜 쥐어버렸다. 황보성운을 움켜잡은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아귀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는가! "크흐흐…… 진정 이렇게 훌륭한 식사는 오십 년 만에 처음이로다!" 황보성운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버렸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붙잡힌 손을 빼내려 했으나 괴인의 손은 천근의 바위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황보성운의 얼굴에는 죽음, 그것도 갈가리 찢겨지는 죽음에의 그림자가 덮여가기 시작했다. (아…… 내가 겨우 늙은 괴물의 식사꺼리밖에 되지 않다니……) 공포에 질려 그의 정신은 점차 혼미해져 가고 있었다. 절대절명(絶大絶命)의 순간이었다. 헌데 바로 이순간, 문득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뇌리 속으로 섬전 처럼 뚫고 지나갔다. "아!" 그의 입에서 탄성음이 새어나왔다. 일루의 희망에 그는 눈동자를 빛내며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지그시 눈을 내리깔고 먹을 것인 듯 황보성운을 내려보던 백발괴인은 귀찮다는 듯이 말하였다. "무엇이냐? 이놈아!" 황보성운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대답했다. "죽는 것은 좋습니다. 이 마당에 어찌 하겠어요? 대신 한 가지만 내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기이하게도 황보성운의 표정엔 두려운 기색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백발괴인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라고? 소원이라고?" "그렇습니다. 마지막 소원인데도 안되겠습니까?" 괴인은 잠시 황보성운을 바라 보았다. 문득 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좋다, 이 녀석아! 죽어가는 놈 소원이니 들어주마. 대신 목숨을 살려달라는 것 따위는 안된다." 황보성운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저의 소원은 다름이 아니라…… 죽기 전에 노인어른의 가슴이나 한 번 마음껏 쳐보고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백발괴인은 황보성운의 꿍꿍이속을 알 수 없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꼬마야, 그게 무슨 소리냐?" 황보성운은 그늘진 표정으로 땅이 꺼져라 장탄식성을 토해냈다. "그냥 맥없이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식사꺼리가 되는 마당에 누군들 분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죽는 것보단 한 대라도 때리고 죽으면 조금이라도 분이 풀릴 듯싶어서 그럽니다." 순간 의아한 듯 황보성운을 쳐다보던 괴인은 그의 말이 어이가 없었던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노부는 이미 무공을 익힌 지 백 이십 년, 노부의 몸은 쇠보다도 단단하다. 한데 크하하핫…… 어이가 없구나. 어이가 없어……" 황보성운은 야차의 형상으로 폭갈을 터뜨리는 백발괴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되겠습니까?" 백발괴인은 껄껄 웃더니 두 팔을 벌려 가슴을 활짝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그래, 꼬마야! 쳐봐라, 쳐봐. 어디 네 마음대로 실컷 쳐보거라. 분이 풀리도록…… 그리고 얼른 내 뱃속으로 들어가거라. 카하하핫……" 그 말이 끝나자 마자 황보성운은 성큼 백발괴인 앞으로 다가섰다. 백발괴인은 실소를 머금고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허공을 응시했다. 실상 그는 지금 황보성운의 행동이 가소롭다 못해 기막힐 정도였다. 도검불침의 신체나 다름없는 그의 몸을 겨우 십 오륙 세의 꼬마가 때리겠다니…… 그렇기에 그는 운공도 하지않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괴인을 한 차례 쏘아본 뒤 장갑 낀 그의 양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얏----!" 하는 기압성과 함께 황보성운의 주먹은 노인의 벌려진 가슴을 강타했다. 순간, "크---- 악!" 처절무비한 비명소리가 석실 안을 진동시키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황보성운의 두 주먹은 백발괴인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 꽂혀버린 것이었다. 백발괴인의 얼굴은 놀라움과 고통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 이럴…… 수…… 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처참한 일이 터지자 황보성운은 괴인의 가슴에서 손을 빼곤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황보성운의 하반신은 후들후들 경련했다. 괴인은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양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분수처럼 흘러나왔다. 황보성운은 괴인의 가슴 속 깊이 틀어 박혔던 자신의 두 손을 내려보았다. 기이하게도 그의 손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은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두려움에 질린 채 창백한 표정으로 괴인을 바라보았다. 가슴을 움켜쥔 백발괴인도 황보성운의 두 손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괴인의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 잠룡피(潛龍皮)…… 네가…… 잠룡피…… 를……" "나는 당신을 이런 꼴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소. 허나 당신이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황보성운은 말 끝을 흐렸다. 이때 괴인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흐흐흐…… 모든 것이 끝이다. 끝장이야…… 하지만 꼬마야, 네놈도 이곳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크흐흐흑……" 그 말과 동시에 백발괴인의 눈동자에서 흉광이 점차 사라져갔다. 동시에 서서히 그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앞으로 고꾸라져 갔다. 쿵----! 황보성운은 두려운 눈빛으로 백발괴인의 시체를 응시했다. 듬성듬성 찢겨져나간 흑의(黑衣) 사이로 곪아 썩어버린 살점과 고름이 뒤엉켜 있었다. 너무나도 흉칙한 그 모습에 황보성운은 고개를 돌렸다. 이때 황보성운을 향하여 무엇인가가 빗살처럼 쏘아오는 것이 아닌가? "헛!" 그는 경악성을 터뜨리며 급히 몸을 옆으로 피했다. 허나 그것은 황보성운의 목을 순식간에 휘감고 말았다. 바로 그것은 예의 그 청홍(靑紅)이라 불리우는 독사였다. 대경실색한 황보성운은 황급히 양손으로 청홍의 몸뚱이를 움켜쥐 었다. 그러자 청홍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냈다. 입을 벌린 독사는 순식간에 황보성운의 손을 물었다. 허나 독사의 날카로운 이빨은 황보성운의 장갑을 뚫지 못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황보성운은 양손에 잡힌 독사의 몸뚱이를 혼신의 힘으로 움켜쥐었다. 순간, 독사는 고통스러운 듯 요란하게 전신을 몸부림쳤다. 이때 청홍의 입이 고통에 못이겨 벌려지더니 그 속에서 붉은 광채를 내뿜는 한 개의 작은 구슬이 황보성운을 향해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예기치 않은 사태에 놀란 나머지 한 마디 경악성을 터뜨렸다. "엇!" 바로 그 순간 그 붉은 구슬은 정확하게도 황보성운의 입 속으로 튀어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구슬은 입 속으로 들어가자 마자 한 줄기 액체로 화하여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의 단전 부근으로부터 한 줄기 강맹한 열기가 치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또한 전신에 퍼져 이상하게 솟구쳐오르는 흥분에 황보성운은 신음성을 뱉아냈다. "으…… 음……" 이때 청홍이 머리를 들고 그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순간, 황보성운은 자신도 모르게 청홍의 머리를 힘껏 깨어물었다. 그러자 비릿한 내음과 함께 청홍(靑紅)의 선혈이 황보성운의 입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황보성운은 강렬하게 일어나던 흥분이 좀 가셔지는 듯함을 느꼈다. 황보성운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청홍의 선혈을 계속 힘껏 빨아 들이키고 있었다. 청홍은 괴로운 듯 황보성운의 손을 칭칭 감으며 몸부림쳤다. 잠시 후, 청홍은 모든 기력이 쇠진되었는지 축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말았다. 한편 청홍의 선혈을 다 빨아들이킨 황보성운은 청홍의 시신을 석실 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청옥석(靑玉石)의 석실 바닥에 내던져진 청홍은 죽어버렸는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3 거친 숨결을 토해내며 독사의 시체를 바라보던 황보성운은 그제서야 자신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자 하반신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허나 괴인의 시체에 눈길이 멎자 다시 소름이 끼치며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백발괴인이 쓰러져 있는 옆쪽에 놓인 만독진해(萬毒眞解)와 옥병이 황보성운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는 허리를 숙여 옥병과 책자를 집어들었다. 황보성운은 그것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이것들을 어떻게 할까?" 잠시 후, 그는 무엇을 결심한 듯 두 가지 물건을 품 속으로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고 굳게 닫혀진 석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헌데 이때 해소된 줄 알았던 괴이하고 강맹한 열기가 다시금 그의 전신을 불태워버릴 듯이 단전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는 대경실색하여 자신의 전신을 살폈다. "으읏! 또 몸이 왜 이럴까?" 점차로 그의 얼굴색이 다시 검붉게 달아오르며 두 눈 속에 시뻘건 혈광이 나타나고 있었다. 황보성운의 단전 속에서 피어오르던 강맹한 열기는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갔다. 그러자 이것은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의 눈에서 괴이하고도 살벌한 광기(狂氣)가 들끓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전신은 온통 붉은 핏빛으로 시뻘겋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괴로운 듯 연신 괴성을 터뜨렸다. "으…… 우…… 우…… 욱……!" 이때 실로 놀라운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돌연, 그의 몸이 서서히 홍무(紅霧)를 뿜어내면서 부풀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인간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찌---- 직! 찌---- 익---- 찍----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오르는 몸 때문에 그의 백의(白衣)가 팽팽해지더니 급기야는 찢어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때 다시 황보성운의 입에서 끔찍스러울 정도로 무서운 괴성이 터져나왔다. "우---- 우---- 우---- 아아아아----!" 그 가공스러운 목소리 때문에 석실 안은 금세 무너져내릴 듯 쩌렁쩌렁 울렸다. 괴성을 멈춘 황보성운은 시뻘겋게 변한 몸을 움직여 성문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헌데 이런 기이한 일이 있을 수가? 황보성운이 밟고 지나간 석실의 청옥석 바닥에는 놀랍게도 발자국이 세 치의 깊이로 선명하게 파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실로 눈으로 보기 전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청옥석 바닥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쫙쫙!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석문 앞에 도착한 황보성운은 석문을 밀었다. 그러나 그 육중한 성문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우---- 우---- 우---- 우----!" 다시금 황보성운의 입에서는 광기로 터져오르는 요란한 괴성이 터져나왔다. 다음 순간, 황보성운은 괴성을 내지르며 두 손을 번쩍 치켜들어 강맹무비한 위력으로 성문을 내리쳤다. 순간, 콰---- 쾅! 온통 석실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몇 자 두께의 석문이 터지는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잠룡피가 끼워진 황보성운의 양손은 석문 속을 한 자 정도나 깊 숙이 파고들어가 있었다. "우---- 왓!" 요란한 괴성을 터뜨리며 황보성운은 다시 석실 문을 내리쳤다. 순간, 콰르르---- 릉!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석실 안을 진탕시켰다. 동시에, 일순간에 천근이 넘는 거대한 석문이 산산조각으로 부숴지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실로 가공스러운 광경이었다. 석문을 때려부순 황보성운의 신형은 벌써 부서진 석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이때 광란하는 그의 눈 속에 나선형의 계단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황보성운은 두 눈으로 미친 듯한 광기를 폭사하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계단에 무지막지한 발자국이 선명하게 파이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의 발바닥에 밟힌 계단은 무서운 기세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거리는 계단! 황보성운은 내부의 광기가 폭발해오르는 듯 계단 위를 미친 듯이 튀어 올라갔다. 그러자 그가 밟은 계단들이 계속 돌가루를 흩날리며 광폭하게 무너져 내려갔다. 쿠르릉----! 쿵! 콰앙---- 크르릉----! 그는 계단을 십여 개씩 뛰어오르며 빛살같이 내달렸다. 그 아래로 계속 계단이 가공할 굉음을 일으키며 무너져 갔다. 그는 어느새 모두 무너뜨리고 거대한 석벽 앞에 와있었다. 다음 순간, "우---- 우---- 우---- 우---- 앗!" 천지를 울릴 듯한 뇌성벽력을 내지르며 황보성운은 석벽을 향하여 빛살처럼 몸을 내던졌다. 찰나, 펑! 콰르르---- 릉! 쾅! 황보성운의 몸에 부딪친 석벽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자욱하게 사방으로 돌가루를 날렸다. 허나 실로 기괴하게도 석벽에 부딪친 황보성운의 몸엔 상처하나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밖으로 치달려 나갔다. 그의 뒤로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린 금불상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는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하나의 맹폭한 광인(狂人)이었다. 밖은 어스름한 저녁 무렵, 또한 하늘에선 장대같은 빗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 황보성운은 거목으로 울창한 숲을 맹폭하게 휘저어 가고 있었다. 그는 놀라운 속력으로 몇 자나 되는 거목들과 부딪쳐 가고 있었다. 우지직! 우지끈----! 우지끈---- 쿵쾅! 쿠르르---- 릉! 거대한 거목들이 수천의 조각으로 부숴지며 쓰러져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또한, 동시에 숲 속에선 대호(大虎)가 울부짖는 듯한 장소성이 울려오고 있었다. "우---- 우---- 우---- 우----!" 점차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와 광폭한 포효, 빗소리 등으로 숲속은 일대 아수라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 황보성운의 정신은 석실 안에서 받아먹은 청홍(靑紅)의 내단과 선혈로 살기충천(殺氣沖天)의 광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보라! 미쳐버린 황보성운의 광란이 휩쓸어 광폭하게 무너뜨리고 간 숲을…… 그야말로 일대 전화(戰火)가 머물고 간 쑥대밭이 아닌가? 실로 형용할 수도 없는 광란의 현장! 그 위로 지금 늦가을의 싸늘한 빗줄기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쏴---- 아---- 그 빗줄기 속에서 빗살처럼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달리고 있는 하나의 인영(人影), 그것은 바로 황보성운(皇甫星雲)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내달리고 또 달렸을까? 쏟아져 내리던 빗줄기도 점차 그 위세가 줄어들고 있었다. 또한 황보성운의 달리는 속도도 점차 느려져가고 있었다. 지금 황보성운의 눈 속에는 현묘한 오색의 아지랑이가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잡으려는 듯 빈손을 허공으로 휘젓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허공에 한 손을 힘없이 휘젓더니, 풀썩! 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빗방울은 서서히 그쳐갔다. 그리고 늦가을의 싸늘한 바람소리와 냇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제 4 장 紫 霞 莊 1 "아아…… 깨어나셨군요……" 곁에서 꿈결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옥음(玉音)이 들려오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지금 꿈결같이 혼몽(昏 )한 상태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으---- 음!" 나지막한 신음성을 흘리며 그는 눈을 가볍게 떴다. 깨어나는 순간, 황보성운은 자신이 지금 푹신푹신한 침상 위에 누워있음을 알았다. (아…… 이곳은 어디일까……?) 그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훑어보는 순간, 그는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 안의 전경은 놀랍게도 자신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 아닌가! (아니, 이곳은 나의 방……?) 순간적으로 혼동이 일어났다. 지리(地理)를 잃고 헤매다가 괴사찰로 들어갔고, 그 후 자신을 먹으려던 괴인을 만났다. 계략을 써서 그 괴인을 해치웠지만 괴사찰을 나오려는 그 순간, 몸 속에서 치솟는 기이한 열기 때문에 그는 정신을 잃었다. 헌데, 어째서 자신이 자하장의 자신 방에 있는 것인가? 이때 그의 머리맡에서 꿈 속에서 들었을 듯한 예의 그 옥음(玉音)이 다시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으응?" 황보성운은 저으기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한 명의 미소녀가 서 있었다. 대략 십 칠팔 세 정도 되었을까? 백옥같은 피부에 후리면 휘어질 듯한 호리호리한 몸매의 소녀였다. 바르르 떨리는 눈썹 속으로 수정같이 맑게 반짝이고 있는 눈, 오똑하게 솟은 콧날 밑으로 앵두같이 꼬옥 붉게 다물린 입술, 그 아래로 봉긋이 솟아오른 가슴 언저리, 그리고 늘씬하게 뻗어내려간 그의 전신 등, 가히 절세가인(絶世佳人)을 방불케하는 미태(美態)였다. 소녀는 기쁜 표정을 눈꼬리에 지으며 환한 웃음으로 황보성운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보는 사람을 보는 것 같네요?" 망연히 소녀를 바라보던 황보성운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소향(少香)!" "아아…… 정말 다행이예요. 이렇게 무사히 깨어나시다니……" 소향을 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황보성운은 지금의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現實)임을 알았다. 그러자 마음 한구석으로 안도감이 퍼졌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분들을 상심시켰는지 아세요?" 약간 책망하는 듯한 그녀의 음성을 귓전으로 흘리며 그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소향이 옆에서 부축해 주었다. 탄력있는 그녀의 가슴이 어깨에 눌려오면서 풋풋한 처녀의 내음이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너무나 익숙한 냄새였다. 상체를 일으킨 후, 황보성운은 소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향! 내가 어떻게 집에 와있는 거지?" 그 말에 소향은 눈을 가볍게 치떴다. "전혀 기억이 안난단 말인가요?" 살구처럼 동그랗게 떠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황보성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 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소향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그녀는 황보성운을 보며 청아한 옥음으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실종되신 직후 자하장은 발칵 뒤집어졌어요. 노장주님께선 사람들을 모두 풀어 근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도련님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고……" 소향이 말하다가 힐끗 황보성운을 보곤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모든 사람들이 비통에 빠져있을 때 도련님이 돌아 오셨죠. 바로 나흘 전이었어요. 그날은 폭우(暴雨)가 매우 심하게 쏟아지는 날이었는데…… 황영감님이 대문 밖에서 엉망으로 된 채 도련님이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죠." 황보성운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껌벅거렸다. "그럼 내가 나흘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단 말이야?" "거의 미동도 없었죠." "내가 실종된 지는?" "오늘로 구 일째예요." 황보성운은 망연했다. 자신의 기억으로 길을 잃고 헤맨 기간은 분명 이틀이다. 자신이 집으로 돌아온 게 나흘 전이라면 자신은 집으로 돌아오기 전 사흘 동안 정신을 잃고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는 결론이다. "그동안 집안 어른들의 걱정이 태산 같으셨어요." 황보성운은 침묵했다. 소향은 그를 바라보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백옥같은 섬섬옥수(纖纖玉手)로 입을 가리며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어쨌든 뜻밖이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후후…… 샌님같은 도련님이 밖으로 나갈 생각도 다했으니 말이예요." "샌님? 지금 날 놀리는거야?" 소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구 일 동안 한잠도 못자게 했으니 도련님은 놀림을 받아도 마땅해요." 황보성운이 멈칫해서 소향을 바라보자 그녀는 언뜻 얼굴을 도화빛으로 붉히곤 몸을 돌렸다. "노대인(老大人)께서 도련님이 기척하신 것을 아시면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이만 가서 어른들께 알려야겠어요." 상기된 얼굴로 생긋 웃어보인 소향은 문을 밀고 밖으로 사라졌다. 황보성운은 소향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구 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고……?) 황보성운은 문득 가슴 한곳이 뭉클해져 오는 걸 느꼈다. 소향(少香). 본명(本名) 진미향(陳美香)이다. 그녀는 본래 항주 진회하(秦淮河)에서 소문난 명기(名妓)였던 설랑(雪娘)의 외동딸이었다. 오 년 전, 소향의 어머니인 설랑이 많은 빚을 남긴 채 병으로 죽자 그녀는 모친의 빚으로 인해 동기(童妓)로 팔리는 몸이 되었다. 그때 그곳을 지나던 황보노대인(皇甫老大人)이 어린 소향을 보게된 것이었다. 노대인은 총명하고 영특해 보이는 소향을 보는 순간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하여 그는 많은 돈을 지불하고 소향을 데려온 것이었다. 황보 노대인은 그녀를 이곳 자하장으로 데려온 뒤 황보성운의 몸종으로 두었다. 자하장에 온 지 얼마 동안은 말이 없고 우울해 보였으나, 그녀는 시간이 갈 수록 상냥해지고 생활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천성이 진실하고 아름다운 소향이 마음에 흡족했는지 노대인은 그녀를 후에 손자 황보성운의 첩으로 삼을 생각까지 하곤했다. 그런 할아버지의 생각을 황보성운 자신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황보성운도 나이는 어렸지만 소향을 볼 때마다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소향은 황보성운보다 두 살 위였기 때문에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를 동생처럼 아껴 보살펴 주고 있었다. 황보성운 역시도 소향이 한 핏줄처럼 여겨질 정도로 깊은 정을 느껴왔다. 황보성운은 소향과의 몇 가지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이때 밖으로부터 여러 개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 앞에서 멎었다. 동시에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험험! 성운아, 할애비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허나, 황보성운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문은 급히 열리고 있었다. 2 열린 문으로 한 명의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갈대꽃처럼 풍염한 백발의 수염을 늘어뜨린 채 매우 인자한 풍모를 지닌 모습이었다. 만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는 노인, 그가 바로 황보성운의 할아버지, 즉 자하장(紫霞莊)의 노장주인 황보명(皇甫明)이었다. 백발노인 뒤를 따라 청수하게 생긴 중년선비가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또한 그 곁에는 고귀하게 생긴 중년미부인도 같이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황보성운의 부친인 황보검영(皇甫儉英)과 모친인 주라연(朱羅娟)이었다. 황보명은 손자 황보성운을 자애어린 시선으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성운아! 이제야 깨어났구나! 몸은 좀 어떤 것 같으냐?" 황보성운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할아버지. 너무 심려 마세요." 황보성운의 말에 황보명은 만면을 활짝 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인석아, 이 할애비의 마음을 당황하게 만들다니, 인석! 정말…… 허허……" 이때 황보검영은 옆에 서 있다가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운아! 어떻게 해서 밖으로 나가게 됐느냐?" 부친의 근엄한 물음에 황보성운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밖의 경치를 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만……" 황보성운은 말 끝을 흐렸다. 황보검영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렇지, 가족들을 이렇게 걱정시켜서야 되겠느냐? 네가 없는 동안 할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노심초사……" 이때 황보명이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아들 황보검영의 말을 막았다. "허허…… 아범아, 그만해 둬라. 성운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인데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느냐?" "하지만, 아버님……" "허---- 허, 그만 두라니까, 저도 이번에 고생 좀 했을 것이다." 황보성운은 자신이 어른께 심려를 끼쳐드렸다는 생각이 들자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아버님, 모든 것이 제 잘못이예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황보명은 황보성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헛! 그래, 그래야 내 손자답지." 이때 방문이 스르르 열리며 그 사이로 소향이 들어왔다. 그녀의 섬섬옥수 위에는 은쟁반이 들려 있었다. 그 은쟁반 위의 은은한 빛을 내는 그릇에는 무엇이 담겨있는 듯 무럭무럭 흰 김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소향아, 그게 무엇이냐?" 황보명의 물음에 소향은 수줍은 듯 수려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엷은 미소를 띄웠다. "연자탕(燕子湯)이예요. 도련님께서 무척 시장할 것 같아 제가 좀 준비했어요……" 황보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면에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허허…… 그래도 우리 집안에서 운아를 제일 위해주는 사람은 소향이군." 그 말에 소향의 두 뺨은 홍시처럼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떨군 채 옷자락을 매만지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소향을 바라보던 황보명 부자(父子)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실상 소향을 생각하는 그들의 심정은 남달랐다. 워낙 손(孫)이 없는 가문이다. 십이대 째 독자로만 내려온 가문이기에 집 안에선 언제나 항시 손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황보명은 이번 만큼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황보명은 손자에게 일처(一妻)만을 얻어 줄 생각은 처음부터 눈꼽 만큼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향은 아주 마음에 드는 첩실감이었던 것이다. 이때 소향의 모습을 보며 황보명은 다시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헛! 그래, 아마 배가 무척 고플 것이다. 그리고 몸도 좀 피로할 게구. 요양 잘하거라." 이렇게 말한 황보명은 황보검영에게 의미있는 눈길을 돌렸다. "애비야, 에미야, 나가자. 둘이서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헛헛헛!" 그 말과 함께 황보명은 방문을 밀고 나갔다. "성운아! 몸 조리 잘 하거라." 이렇게 말하며 황보검영 부부도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왠지 방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예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문득 소향이 황보성운을 바라보다가 그만 풋!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거지?" 소향이 배시시 웃었다.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게 그냥 웃음이 나와서요." "그냥 웃음이 나와? 왜?" 소향이 연자탕 그릇을 들곤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예쁘게 웃었다. "쓸데없는 질문말고 식기 전에 연자탕이나 드세요. 응? 제가 입에 넣어드릴 테니까요." "아…… 아니야, 나 혼자 먹을 수 있어." 황보성운이 당황해서 그릇을 잡으려하자 소향이 눈썹을 치켜뜨며 언성을 높였다. "아까 노대인께서 하신 말씀 못들었어요? 몸조리 잘하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꾸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지 말고 어서 입이나 벌려요. 계속 그러면 나도 쑥스러워지니까……" 그녀는 강한 어조로 말을 마치곤 바짝 황보성운 곁으로 다가 앉았다. 그리고는 연자탕을 떠서 황보성운의 입 속으로 넣어주기 시작했다. 어쩔수 없이 황보성운은 입을 벌려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섬섬옥수가 그릇과 황보성운의 입 사이를 계속해서 왕복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봉긋한 젖가슴이 황보성운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곤 했다. 황보성운은 전신에 짜릿한 느낌이 휩쓸고 지나감을 느꼈다. 이런 것은 예전에는 없던 일들이었다. 웬일인지 소향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에 몽롱한 환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소향은 인자한 어머니인 양 다정한 누이인 양 황보성운에게 연자탕을 정성스레 먹여주었다. 이윽고 소향은 빈그릇을 은쟁반 위에 내려놓으며 약간 상기된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씻어냈다. "후훗! 정말 남에게 음식 먹여주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 는데요." 이렇게 말하던 소향은 문득 황보성운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했다. 그녀는 멈칫하곤 황보성운의 눈을 바라 보았다. 순간 소향의 눈과 황보성운의 불타는 눈길이 뜨겁게 마주쳤다. 그러자 소향은 기이하게도 황보성운이 준수한 청년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전엔 없던 일이었다. (어째서 오늘 따라 저렇게 어른스러워 보일까?) 소향은 점차 가슴이 격동되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꼈다. 이내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아래로 내리 숙였다. 황보성운은 소향의 그런 모습을 내려보며 가슴 한 구석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다정한 누님같고 또 어쩌면 달콤한 연인(戀人)같은 여인, 소향. 그는 소향의 자태를 가슴 속에 깊이 아로새겼다. 문득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향…… 앞으로 내가 성인(成人)이 되면 말이야……"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잠겨있던 소향은 화들짝 놀라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예……?" 황보성운은 뜨거운 열기가 서린 눈으로 소향을 바라 보았다. 그리곤 백옥같이 하얗고 가는 그녀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강하게 쥐었다. "앞으로 크면 나는 반드시 소향을 내 여자로 만들거야. 부인(婦人)으로 말이야" 순간, 소향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런 그녀의 목덜미는 삽시간에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작은 가슴은 새가슴처럼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얼마 동안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하던 소향은 고개를 들고 습기를 머금은 눈동자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점차 그녀의 두 눈에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녀는 그 상태에서 억지로 인상을 썼다. "쳇…… 공연히 사람 마음 이상하게 만들지 말아요." 황보성운은 소향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중지(中指)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소향의 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며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난 진심이야." 소향은 황보성운의 말에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울려옴을 느꼈다. 그녀의 어깨는 크나큰 감격의 물결로 흔들렸다. 허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난 넘어가지 않아요."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소향, 정말이야. 난 진심이라고!" "나빠요. 도련님은…… 사람을 이렇게 울리고……" 황보성운은 소향의 흐느끼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향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서서히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선선한 가을 바람이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며칠 전에 내린 비가 아직 다 마르지 않았는지 바람 속에 눅눅한 낙엽의 향기가 실려왔다. 황보성운은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저 맑기만 한 하늘이었다. 이때 어느 결에 곁에 왔는지 황보성운의 곁에 소향이 이슬을 머금은 연꽃잎처럼 살포시 서 있었다. 그녀 또한 황보성운처럼 하늘을 보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그녀가 옆에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향…… 내가 조금 전에 한 말은 너를 동정하기 때문이 아니야. 나는 진정으로 네가 좋아……" 다정사(多情事), 진정 하나의 꿈(夢)일 것인가? 3 밤(夜). 삼라만상(森羅萬象)이 깊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잠이 든 밤. 늦가을의 싸늘한 바람이 어둠의 이곳 저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밤이 깊었건만 황보성운은 웬일인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겪었던 일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소향과의 일 때문일까? 어쨌든 밤이 깊어갈 수록 황보성운의 상념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문득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탁자로 다가가 밝혀 놓았던 등촉(燈燭)의 불을 죽였다. 방 안이 순식간에 짙은 어둠 속으로 잠겨버렸다. 헌데, 그 순간 황보성운의 안색이 돌처럼 굳어졌다. "이럴 수가……!" 분명 불을 껐건만 놀랍게도 주위의 모든 사물이 대낮처럼 확연하게 들어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황보성운은 급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허나 방 안을 밝히고 있는 것은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이때 무엇인가 그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 그렇지, 그때 그 괴사찰(怪寺刹) 안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었지…… 한데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는 계속해서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방 안은 천정 구석구석까지 전부 보일 정도로 환하게 눈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별들만이 무수히 깔려 빛나고 있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황보성운의 눈에는 문 밖의 모든 경물(景物)이 선명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눈을 비비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확실히 수십 장이나 떨어져 있는 가산에 깔린 돌조각까지, 또한 나뭇잎새 하나하나마저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때 문득 자신이 며칠 전에 기이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먹게 되었던 것이 생각났다. 황보성운의 머리 속에는 그 물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만년극음삼왕(萬年極陰蔘王)! 만년화룡내단(萬年火龍內丹)! 청홍(靑紅)의 내단(內丹)과 피(血)! (혹시…… 그 물건들 때문에 이런 일이……) 황보성운은 그것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았다. 우연히 먹게 된 그 물건들이 이 기현상(奇現象)을 유발했다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외 달리 생각할 방도도 없었다. 황보성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밤을 낮처럼 볼 수 있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현재로선 판별이 가지 않았다. 황보성운은 한숨을 쉬곤 곤혹스러운 마음으로 침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잠을 청하려고 베개를 집어들었다. 순간, "아!" 그는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가 베개를 들어낸 그곳에 자신이 며칠 전에 얻었던 물건들이 빠짐없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물건들을 바라보며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누가 이 물건들을 이곳에 가져다 두었을까?) 문득 황보성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렇지. 분명 소향이 가져다 둔 것임에 분명하다." 소향을 생각하자 그는 다시 가슴이 뜨거워졌다. 실상 그녀는 황보성운의 몸종이란 신분이었지만, 떠날려고 마음을 먹으면 언제라도 자하장을 나갈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의 뛰어난 미모 때문이었다. 소향은 진정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절세미인이었다. 그녀의 미태는 이곳 자하장 뿐만 아니라 근처의 지방까지도 소문 이 파다했다. 하여, 근방의 내노라하는 부잣집 자제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으나, 결국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자, 황보명은 소향을 불러다가 은연중에 그녀의 마음을 떠보았다. 그러나 소향은 첫마디에 거절했다. "저에게는 도련님이 있어요. 도련님 곁을 결코 떠날 수 없어요." 이때 황보성운은 우연히 정원을 산책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황보성운은 이유 모를 감격에 얼마나 가슴이 격동됨을 느꼈던가? 지금 황보성운의 귓속에는 할아버지와 말하고 있던 소향의 말소리가 또랑또랑 울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불과 삼 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 항상 황보성운은 소향을 자신의 처(妻)로 가슴 속에 새겨 두어오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왠지 소향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아…… 소향……) 잠시 후 황보성운은 베개 밑에서 현현비록을 꺼내 들었다. 제 5 장 天下第一의 武學 1 등촉을 다시 돋우고 탁자 앞에 앉은 황보성운은 현현비록을 펼쳐들었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누워 하늘거리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눈을 고요히 내리깔고 정좌(定坐)한 뒤에 명상에 잠겨들어 갔다. 명경지수(明鏡止水)! 방문 너머 정원으로부터 풀벌레 소리가 늦가을의 적막을 깨며 울어대고 있었다. (옛날 할아버지께서는 무릎에 나를 앉히시고 신비한 기인(奇人)들의 행적에 대하여 말씀하시곤 했었지. 그때 나도 그들처럼 살기를 얼마나 열망했던가……!) 황보성운의 머리 속에는 지난날에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잠시 후, 황보성운은 현현비록의 첫장을 넘겼다. 현현비록은 전 오장(五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 일장(第一章)! 그곳에는 용이 날아오르는 듯한 웅후한 필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현무신공(玄武神功). 이 신공은 우주만물(宇宙萬物)의 생성필멸(生成必滅)의 원리인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조화와 합일(合一)에 그 근본(根本)을 두고 있다. 하여 무릇 이 신공의 모든 변화는 다음과 같은 열 개의 변화결(變化訣)을 이룬다.> 계속 읽어 가고있는 황보성운의 가슴은 점차 격동되어 가고 있었다. 다음 장을 넘기니 그곳엔 신비막측하고 오묘무쌍한 현무신공의 열 가지 구결들이 적혀 있었다. 합자결(合字訣)! 분자결(分字訣)! 화자결(化字訣)! 공자결(空字訣)! 흡자결(吸字訣)! 진자결(震字訣)! 탄자결(彈字訣)! 압자결(壓字訣)! 파자결(破字訣)! 살자결(殺字訣)! 위의 구결들은 실로 가공할 만한 내공의 구결들로 모두 두 개의 연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즉, 합분화공흡(合分化空吸)의 방어를 위주로 한 구결과 진탄압파살(震彈壓破殺)의 파괴적인 공격의 구결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방어를 위주로한 전오결(前五訣)은 다음과 같다. 전신의 진기를 묶어버리는 합(合), 상대의 장력을 모조리 나누어 잘라버리는 분(分), 또한 상대의 공력을 가닥가닥 풀어헤쳐 아예 그 공력을 산산이 흩어버리는 화(化), 그리고 상대방의 공력을 무위로 없애버리는 공(空)과 상대방의 공력을 흡수해 버리는 흡(吸)의 구결이었다. 또한, 상대방을 강맹무비한 공격으로 휘몰아치는 가공할 후오결(後五訣)은 다음과 같다. 상대방을 우뢰소리와 함께 떨쳐버리는 진(震), 상대방의 공력과 정면으로 부딪쳐 전신을 퉁겨버려 피화살을 뿜고 떨어지게 하는 탄(彈), 그리고 상대방을 수백만 근의 위력으로 눌러 고기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압(壓), 또한 천하의 모든 물건을 산산조각으로 박살내 버리는 파(破)와 신공, 시전 즉시 상대방을 흔적도 없이 죽여버리는 살(殺)의 구결이었다. 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추측도 할 수 없는 끔찍하고 가공스러운 무공들이었다. 황보성운은 절로 스며드는 공포에 전신을 으스스 떨며 나직한 신음성을 내뿜었다. "으…… 음! 실로 잔혹하기 짝이 없는 무공이구나……" 그렇다. 이 열 개의 구결들은 진정 끔찍스러울 정도로 잔혹한 것이었다. 사실 이 신공의 입문 단계만 거치려해도 최소한 일갑자 이상의 내공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이 무공을 오성 이상 연성하면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초범입성(超凡入聖)! 이 무슨 가공할 말인가? 말 그대로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성인의 경지에 도달함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신공을 오성 이상 연성하면 천하무적의 고수가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 지금 황보성운은 실로 광세적인 무공을 접하고 있는 것이었다. 허나, 이 신공은 더욱 강력한 무공을 시전하기 위한 바탕에 불과했으니…… 황보성운은 연신 감탄의 신음성을 터뜨리며 다음 장을 넘겼다. <현무구장(玄武九掌).> 이것은 현무신공(玄武神功)의 십자결(十字訣)을 바탕으로 한 구초(九招)의 장법(章法)이었다. 이 현무구장은 상상을 불허하는 무시무시한 장법이었다. 특히 최후의 마지막 삼초(三招)는 강호의 어떤 고수도 막을 수 없는 가공할 위력을 펼쳐내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손 끝을 가볍게 떨며 현현비록의 다음 장을 계속 넘 겨갔다. <잔영보(殘影步).> 이것은 일종의 보법(步法)이었다. 이것은 잔영보라는 말 그대로 너무나 쾌속한 운신(運身)에 의해 그림자조차 나뉘어 사라져 버리는 신기막측한 보법이었다. 이 보법이 절정에 이르면 삼백 육십의 방위로 짙은 그림자가 늘어선다. 그리고 점차 그림자가 삼백 육십의 방위로 십 장 가량 나가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 시전자는 삼백 육십 방위 중 아무 곳으로나 빠져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이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황보성운은 경악스런 표정으로 연신 혀를 내둘렀다. <표풍신법(漂風身法).> 이 신법은 하나의 호흡법(呼吸法)의 일종이었다. 즉, 물고기가 물 속에서 떠오르 듯 전신이 새털처럼 가벼워져 기류(氣流)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을 나르는 신법(身法)인 것이다. 이 신법을 십이성 연성하면 수천 장의 벼랑도 옷깃 하나 상하지 않고 가랑잎처럼 떨어져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가히 신선(神仙)의 신법이었다. 다음 장에는 경공술이 적혀 있었다. <무영비행술(無影飛行術).> 무영비행술(無影飛行術)! 그렇다. 이것은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빗살처럼 쾌속절륜하게 날아가는 경공술이었다. 이것을 십이성 연성하여 최절정으로 시전하면 단숨에 천리를 날아가는 가히 경악할만한 위력을 나타낸다. 허나, 이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최소한 현무신공이 칠성에 이르러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이 신법은 연성하기가 극도로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읽은 황보성운은 심호흡을 한 뒤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현현비록의 제이장(第二章)! 그곳에는 천하 각대문파와 기인명사들의 독문절기(獨門絶機)가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실상 앞의 일장(一章)의 무공은 그만두고 이것만 익히더라도 전무림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만한 일이었다. 천하의 그 누구가 각대문파의 모든 비전절기를 터득할 수 있겠는가? 황보성운은 절기들을 세세히 읽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현현비록의 제 삼장(第三章)! 그곳에는 불문불견(不聞不見)의 신묘한 의술(醫術)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일반적인 상용(常用)의 의술 외에도 이치를 뛰어넘는 괴이한 의술들이 상당히 들어 있었다. 이를 테면 인간의 내공을 단시간(短時間)에 몇 배로 증진시킨다든지 또는, 죽은 시체의 경혈을 이동시켜야 강시( 屍)로 만든다든지 하는 기괴한 의술이었던 것이다. 제사장(第四章)! 이곳엔 강호(江湖) 유협(遊俠)에 항상 필요되는 여러 가지 잡술(雜術)들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었다. 수시로 천(千)의 얼굴로 역용할 수 있는 신비막측한 환용술(幻容術)! 고저청탁(高低淸濁)에 관계없이 천의 목소리로 바꿀 수 있는 변성술(變聲術)! 상대방의 물건을 귀신이 곡할 정도로 쾌속하게 훔치는 투취술(偸取術)...... 등, 여러 가지 괴이한 수법이 수도 없이 많았다. 현현비록 제오장(第五章)! 그곳에는 천하의 기기묘묘한 진법(陣法)이나 기관지학(機關之學)같은 기문이학(奇門異學) 등이 상세한 도해(圖解)와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황보성운은 현현비록(玄玄秘錄)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리고 허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으---- 음! 실로 이것들은 그 위력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묘무쌍한 수법들이구나!" 잠시 후 그는 현현비록을 탁자 한 구석에 밀어놓은 다음에 만독 진해(萬毒眞解)를 집어들었다. 2 만독진해의 겉표지를 바라보던 황보성운의 뇌리 속에 서서히 백발괴인이 떠올랐다. (도대체 이 안에는 어떤 내용이 실려있기에 그 괴사찰의 괴인이 그토록 좋아했을까?) 황보성운은 의아한 심경으로 만독진해의 첫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독(毒)으로써 천하(天下)를 독패(獨覇)한다. 만독성군(萬毒聖君).> 이 무슨 기괴한 말인가? 글귀를 읽어본 황보성운은 내심 놀라며 중얼거렸다. "무척이나 오만한 글귀로군……" 황보성운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다음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천하삼대독공(天下三大毒功)----! 극혈천독공(極血千毒功)! 독령탈심공(毒靈奪心功)! 패천신독공(覇天神毒功)!> 이 세 가지 독공(毒功)은 실로 그 위력이 저주받을 정도로 참혹하고 잔인무도한 것이었다. 이 독공에 스치기만 해도 순식간에 맞은 자리가 썩어 독수(毒水)로 화해버리는 것이었다. 특히, 이 세 가지의 독공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즉, 극혈천독공(極血千毒功)은 시전시에는 시전자의 전신에 핏빛 광망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이 핏빛의 그물망은 광풍폭우(狂風暴雨)처럼 상대방의 전신을 휩싸버려 일시에 핏물로 화해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독령탈심공(毒靈奪心功)을 시전하면 천지개벽을 방불케 하는 강맹무비한 장풍의 소용돌이가 황홀한 취록색 경기를 띠고 벼락치듯 떨어진다. 이 장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대방은 고기비늘같은 취록색 분무로 변하여 한 구의 백골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패천신독공(覇天神毒功)을 시전하면 우선 시전자의 전신은 유리처럼 투명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아무런 냄새도, 색깔도 발출해내지 않는다. 단지 상대방의 전신은 머리 끝으로부터 서서히 가루로 변하며 흘러내리고 마는 실로 경천동지할 독공인 것이다. 황보성운은 무시무시한 독공의 내력에 치를 떨었다. 그는 천천히 다음 장을 넘겼다. <이 천하삼대독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독신단(萬毒神丹)을 복용해야 한다. 만약 만독신단을 복용하지 않고 이 삼대독공을 연마하면 그 자는 평생토록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다. 접촉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 때문이다. 만독성군(萬毒聖君).> 여기까지 읽은 황보성운은 전신에 섬전(閃電)같은 소름이 혼이 달아날 듯 휩쓸고 지나감을 느꼈다. (아…… 만약 이 책을 그 괴인이 가지고 갔더라면…… 실로 상상만 해도 끔찍한……) 황보성운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그곳에는 수천 수만의 독의 종류와 용독법(用毒法), 활독법(活毒法), 그리고 해독법(解毒法)이 상세하게 적혀져 있었다. 황보성운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수록된 모든 글귀를 읽어나갔다. 그는 만독진해의 책장을 넘겨가면서 몇 번이고 치를 떨어야만 했다. 이윽고 황보성운은 만독진해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지금 그의 머리 속은 수천 가닥의 생각들이 회오리쳐가고 있었다. 난생 처음 읽은 사악하고 악랄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가공할 위력들을 생각하며 황보성운은 고개를 무겁게 흔들었다. 그리고 격탕된 마음을 진정하려는 듯 창가로 갔다. 이윽고 그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창 밖은 온통 만물(萬物)들이 무거운 잠의 뿌리를 털고 일어서는 미명(未明)…… 그는 가슴 가득히 밀려오는 새벽 공기 속에 있었다. 제 6 장 婚 談 1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쓸며 눈썹처럼 떨어져 내리는 잔설(殘雪)들. 옛 이야기들처럼 흰눈들은 내려 쌓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결빙(結氷)시켜 묶어버리는 겨울. 한시절은 가고, 또 한시절은 오며 그렇게 흘러가 다시 오지 않는다. 세월(歲月)은 유수(流水)와 같은 법(法)! 무릇 모든 만물(萬物)들은 만변(萬變)하는 그 세월의 수레바퀴 아래서 움트고 일어나 춤추며 쓰러져, 돌아가는 필연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화살같이 삼년(三年)은 흘러가고, 자하장에 겨울의 입김이 다가 와 있었다. 백설이 분분(紛紛)히 떨어지고 있는 안채의 어느 방 안, 은은한 열기를 내뿜고 있는 화로 옆에서 백의를 걸친 준수한 청년이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이 놓여진 책상은 향나무를 깎아 만든 듯 은은한 향내음을 풍겼다. 단정한 백의의 청년, 그는 누구인가? 그는 다름 아닌 황보성운이었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는 실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약간 치기 어린 듯한 모습은 사라지고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그야말로 만산(萬山) 중에 우뚝 솟은 영봉(靈峰)과도 같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미려하기 짝이 없는 눈매는 독서삼매경에 빠진 듯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이때였다. 그의 방문이 소리없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열려진 틈으로 절색의 미녀가 나타났다. 절색의 미녀, 그녀의 양볼은 도화꽃의 그것인 듯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아름다운 두 눈은 흑백(黑白)의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그 눈위로 초생달처럼 그린 듯 뻗어난 아미(蛾眉). 실로 절색의 신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황보성운의 책읽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눈을 가볍게 흘기며 눈부신 미소를 눈가 위로 떠올렸다. 그녀는 예의 그 장난기 서린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방문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는 까치발로 황보성운의 뒤로 살금살금 접근했다. 그러나 황보성운은 그러한 기색을 모르는 듯 여전히 독서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황보성운의 등 뒤에 서있던 소녀는 예의 그 웃음을 흘리며 백옥같은 손으로 그의 등을 가볍게 쳐내려갔다. 바로 그 순간, 황보성운은 몸을 홱 돌리며 쾌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소향, 언제 왔지?" "어멋!" 미녀 소향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라 얼마나 놀랐는지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곧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샐쭉한 교갈을 터뜨렸다. "도련님도……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황보성운은 눈을 크게 뜨며 언성을 높였다. "화아……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누가 누굴 놀라게 하려고 했는데 되려 큰 소리지?" 소향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허나,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흥! 미리 알고 아녀자를 놀라게 하는게 장부가 할 도린가요?" "쩝…… 별곳에서 다 장부의 도리를 찾네." 짐짓 인상을 쓰며 중얼거리는 황보운성의 모습을 보고 소향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교소를 터트렸다. "호호호호호……"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그 모습에선 실로 아찔할 정도로 뇌쇄적인 마력이 풍겼다. 황보성운은 소향의 요염한 미태를 홀린 듯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곤 물었다. "소향, 여긴 어인 일이지?" 그 말에 예의 그 샐쭉한 표정을 짓더니 뾰루퉁한 말로 답했다. "왜요? 여기는 제가 오면 안되는 곳인가요?" "하하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소향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이곳에 올 리가 있나?" 그러자 소향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곤 멋쩍은 듯 배시시 웃었다. "지금 밖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어요." "눈이 내리고 있다고?" 몸을 일으킨 황보성운은 밝은 표정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과연 창 밖에는 주먹만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벌써 천지는 온통 은백색으로 덮여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황보성운은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허! 정말 굉장한 눈이로다. 눈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황보성운의 곁에서 창 밖의 광경을 바라보던 소향이 콧등을 찡그리며 애교스럽게 웃었다. "책 속에만 빠져 사시는 책벌레님이 어찌 비오고 눈 내리는 자연의 조화를 알겠습니까요?" 익살스런 그녀의 어조에 황보성운은 파안대소했다. "핫핫핫…… 이거 자연도 모르는 책벌레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설경을 감상해야겠는걸……" 황보성운은 소향의 앞에 서서 한 손을 문으로 향한 채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가시죠, 소향낭자." 소향은 그만 참지 못하고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교소를 터트렸다. "호호호호……" 2 잠시 후, 그들은 천천히 문 밖으로 나섰다. 쌓여있던 눈들은 발목으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지난해 악주(岳州)에서는 새벽 매화가 눈같이 희게 피었더니, 금년에는 북(北)쪽 유주(幽州)땅이라 눈이 매화(梅花)피듯 희게 뿌려지도다…… 장안(長安)에서는 궁성에 화롯불 새벽 내내 타리니……" 황보성운은 흥이 난 듯 몇 개의 시(詩)구절을 흥얼거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소향은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도련님은 정말 천성적인 책벌레예요." 황보성운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허나, 최소한 고리타분하고 냄새나는 책벌레는 아니야." 그들은 담소를 나누며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함박눈은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내려오고 있었다. 천지(天地)는 온통 은빛에 덮여 일대 장관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소향은 머리 위로 쌓이는 눈에도 아랑곳 없이 그저 감탄사만 연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황보성운은 그런 소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젖었다. (으음, 그때 이후로 벌써 삼 년의 세월이 흘렀구나! 당시만 해도 소향의 키는 나보다 컸었는데, 지금은 내 어깨 정도 밖에 닿지 않으니…… 진정 세월의 흐름이란……) 그렇다. 삼 년이 흐른 지금 황보성운의 모습은 실로 걸출한 약관 청년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나이 현 십구세(十九歲), 거의 육척에 이른 키와 그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의연한 기풍은 뭇 사람들로부터 감탄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인지룡(人中之龍)! 그것은 다름 아닌 황보성운의 풍모였다. 관옥같은 얼굴에 용의 꼬리처럼 힘차게 뻗어내린 눈썹, 온갖 지혜와 예기로 빛나는 눈, 위풍당당하게 솟아오른 코,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입술 등…… 가히 황보성운의 용모는 인중지룡(人中之龍)의 풍모였다. 게다가 걸친 은빛의 여우털 조끼는 백설(白雪)을 배경으로 비할 데 없는 고고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은은한 미소를 날리며 소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향은 여전히 흰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입술은 반쯤 벌어진 채 가지런한 치아를 하얗게 빛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설원(雪原)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매화(梅花)같다고나 할까? 실로 불면 꺼질 듯한 천하의 미태(美態)였다. 황보성운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아…… 소향, 날이 갈 수록 아름다워지는 것 같구나……) 황보성운의 느낌대로 지금 소향은 완전히 무르익은 과일과도 같았다. 지금 소향의 나이는 이제 이십 일 세. 한줌밖에 될 것 같지 않은 가냘픈 허리가 나긋거리고, 그 아래로 시절의 요구에 따라 놀랍도록 풍만하게 부풀어오른 둔부. 또한 가슴 언저리에 봉긋이 솟아오른 그 젖가슴은 어떠한가? 화용월태(花容月態)라 했던가? 소향의 모습은 바로 그 화용월태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황보성운의 뜨거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향은 하늘을 쳐다보며 살포시 중얼거렸다. "도련님…… 정말 아름답죠? 눈이란 거 말이예요……" "……" 황보성운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녀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는 멈칫했다. 황보성운의 불타는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소향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수줍어 고개 숙이는 소향의 모습을 보자 황보성운은 약간 정신이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향에게 빨려들 듯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황보성운은 한 손을 어깨 위에 얹었다. 황보성운은 소향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향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소향……" 부드러운 황보성운의 음성이 그녀의 귓전에 닿자, 소향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도화빛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상기된 그녀의 얼굴은 실로 사나이의 철담을 녹일 만한 요염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소향의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 보며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소향, 그대는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야……" 그의 말에 소향은 눈까풀을 몇 차례 깜박이며 한없이 빛나는 눈으로 황보성운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아! 그것은 진정 깨물어 주고 싶도록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황보성운은 가슴 속이 점차 격탕되어 감을 느꼈다. 황보성운의 뜨거운 눈길을 더 이상 받기 어려운 듯 소향은 얼굴을 도화빛으로 물들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황보성운은 어깨에 올렸던 손을 들어 갸름한 소향의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소향의 살포시 뜬 눈과 황보성운의 불길같은 눈길이 마주쳤다. "소향……" 꿈결같은 황보성운의 은은한 목소리가 들리자 소향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스르르 내리 감았다. 그리고 소향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가만히 그의 손을 옮겨 그녀의 백옥같은 뺨을 쓰다듬었다. 순간 소향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된 채 불처럼 뜨거워졌다. 황보성운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에서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아아……"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서는 걸 느끼며 소향은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의 입술이 약간 벌어지며 백옥같은 하얀 이가 나타났다. 황보성운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눌러갔다. 순간 소향의 입술로부터 촉촉하고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왔다. 소향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황보성운의 목을 안았다. 그녀의 입 속으로 황보성운의 혀가 미끌어져 들어왔다. 소향도 혀를 움직여 화답했다. 누구도 가르쳐 준적이 없건만 두 젊은 남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난생 처음 겪어보는 흥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아…… 도련님……) 소향은 타오르는 격정을 이길 수 없는 듯 그녀의 백옥같은 팔로 황보성운의 목을 강하게 죄었다. 그녀의 하체가 완전히 밀착되면서 황보성운은 치미는 욕망으로 전신의 피가 끓어올랐다. 점차 두 남녀의 숨결은 격동으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황보성운은 소향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한 손을 위로 쓸어올렸다. 그녀의 얄팍한 어깨에 그의 손이 닿았다. 그녀의 연약한 어깨를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어느새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팽팽한 젖가슴이 손 끝에 느껴졌다. 난생 처음 남자의 손길을 접한 여인의 가슴은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소향의 입에서 견딜 수 없는 듯 가녀린 비음이 연신 흘러나왔다. 한편 황보성운의 다른 손은 버들가지같은 허리선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손은 드디어 소향의 봉긋한 둔부에 멈추었다. 그리고 그 둔부를 한 차례 쓸었다. 소향은 이제 아예 뼈조차 없는 사람처럼 그의 전신을 온통 황보성운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황보성운의 목에 둘러져 있는 채 떨어질 줄 몰랐다. 잠시 후 황보성운은 소향을 포옹한 채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방 안에 들어온 그는 소향을 침상 위에 곱게 눕혔다. 그리고 황보성운은 잠시 소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온통 목덜미까지 도화빛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긴 속눈썹은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동안 바라보던 황보성운은 타오르는 욕정을 더 이상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소향은 가볍게 몸을 떨며 뒤척였다. 허나 황보성운의 손길은 벌써 소향의 상의를 반쯤 벗겨나가고 있었다. 상의를 벗기자 그곳에는 분홍빛의 젖가리개가 나왔다. 그는 미칠 듯이 터져오르는 격동 속에서 상의를 벗기고 젖가리개를 풀어버렸다. 다음 순간, 보라! 그곳에는 실로 필설로 다 이를 수 없는 일대 장관이 펼쳐져 있었으니…… 백옥으로 다듬은 듯 뽀얀 살결에 봉긋이 솟아오른 두 개의 젖무덤, 더군다나 그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울 듯 보이는 젖무덤의 정상에는 떨어질 듯 부끄럽게 떨고 있는 분홍빛 열매가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실로 신선과(神仙果)라도 이처럼 훌륭할 수가 있단 말인가? 황보성운의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 두 개의 육봉(肉峰) 위에 맺혀있는 분홍빛의 조그마한 유실을 어루만졌다. 소향은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야릇한 교성을 내질렀다. "으…… 음…… 아……!" 그녀의 입에서 연신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황보성운의 손가락은 그녀의 유실을 쓰다듬고 비틀고 어루만지며 마음대로 농락하고 있었다. 소향의 몸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황보성운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가슴에 자신의 입술을 댔다. 그리고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찾듯 강렬하게 그녀의 가슴을 탐했다. "아아아…… 아아……" 여인의 교성이 뜨겁게 방 안을 진동했다. 황보성운은 뜨겁게 소향의 가슴을 탐하며 한 손을 그녀의 하체로 옮겨갔다. 소향의 하체를 더듬던 손이 미끌어지듯 치마 사이로 들어갔다. 비단결처럼 매끄럽고 탄력있는 허벅지를 지나 그의 손이 금단의 땅으로 진입했다. 부드러운 융모의 감촉이 손바닥 가득히 느껴왔다. 융모의 사이에 있는 여인의 계곡엔 지금 비가 내려 물이 범람하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뜨거운 음성과 함께 여인의 샘을 찾았다. 소향은 자신의 비밀스런 곳으로 들어오는 남성의 손을 느끼며 자지러질 듯 신음을 토했다. 이미 그녀의 옷은 거의 벗겨진 채 나신이 거의 드러나 있었다. 소향은 몸을 비틀며 더욱 황보성운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뜨거운 불길이 솟구쳤다. 그냥 꺼버리기엔 너무나 뜨거운 불길이었다. "아아아…… 도련님…… 날 좀 어떻게 해줘요……" 쾌락에 몸부림치는 여인의 교성은 사내의 본능을 더욱 타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소향의 손은 어느새 대담하게도 황보성운의 남성을 찾고 있었다. 여인의 몸은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 소향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떨었다. 그녀는 턱을 가파르게 치켜든 채 무섭게 전률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극렬한 쾌감에 그녀는 연신 몸을 떨었다. 황보성운은 극심한 갈증으로 샘을 찾듯 그렇게 소향의 몸 속을 찾아들었다. 소향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자지러지듯 비명을 질렀다. 허나 고통은 금방이었고, 곧 아득한 쾌감이 그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휘감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남녀는 진정한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창 밖에는 여전히 함박눈이 펑펑 내리 쏟아지고 있었다. 3 황보성운은 침상에 누운 채 천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곁에는 비스듬히 누운 소향이 황보성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누워 있었다. 소향의 백옥같은 젖가슴이 그녀의 팔에 가리워져 반쯤 드러나 있었다. 소향은 황보성운의 가슴을 그녀의 섬섬옥수로 쓸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도련님…… 소향은 기뻐요……" 소향의 말에 그는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향, 그게 무슨 뜻이지?" 소향은 뺨에 홍조를 띄우며 가느다랗게 말했다. "옛날부터 저는 도련님의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도련님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없었는데…… 헌데 오늘 그것을 확인했으니……" 그녀는 부끄러운 듯 말 끝을 흐렸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벽옥같은 조그만 어깨를 쓸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소향, 나는 옛날 내가 어릴 적부터 너를 누님처럼 여기며 좋아했지. 그리고 그 마음은 앞으로도 같을 것이다." "도련님……" 소향은 황보성운의 가슴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옛날 많은 사람들이 네게 청혼을 해올 때마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것이 모두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황보성운은 말 끝을 흐렸다. 소향의 깊이를 알 수 없을 듯한 두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두 줄기의 옥루(玉淚)가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 그 모습이라니…… 그것은 마치 비에 젖은 한 떨기 배꽃같다고나 할까? 황보성운은 측은한 심경에 그의 중지를 들어 그녀의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소향, 앞으론 모든게 잘될거야……" 소향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눈물 젖은 얼굴로 웃는 그 모습은 실로 묘한 매력으로 황보운성의 가슴에 와닿았다. 그는 다시 아랫배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느꼈다. 그는 손을 뻗어 소향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소향은 멈칫했지만 거부하진 않았다.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소향은 다시 몸이 뜨거워지는걸 느꼈다. 황보성운은 손을 뻗어 소향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쓸어올리며 그녀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다시 널 갖고 싶어……" 소향은 다시 온통 얼굴을 도화빛으로 물들였다. 황보성운의 입에서 극히 부드럽게 음성이 흘러나왔다. "소향, 사랑한다." 황보성운은 짧게 말을 내뱉으며 소향의 버들가지같은 허리를 힘주어 끌어당겼다. 방 안에는 다시 폭풍이 치는 듯한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 뜨거운 열기와 격동 속에서 두 남녀의 몸을 덮었던 이불이 침상 아래로 흘러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격랑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4 황보노대인의 방 안, 황보노대인은 백색 모피로 둘러진 의자에 깊숙이 앉아 황보검영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뒤로는 선비의 방답게 온갖 고서(古書)들이 고기비늘처럼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한동안 집안 일에 대해 말을 하던 황보노대인은 돌연 말을 끊고 한 동안 침묵했다. 잠시 후, 황보검영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검영아, 성운이의 나이가 지금 몇이냐?" 노인의 표정은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황보검영은 어리둥절했다. 돌연히 황보성운의 나이를 묻는 부친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손자의 나이를 모를 리가 없을진대…… "아버님, 그것은 어찌하여……" "어서, 묻는 말에나 대답해 보려므나." "성운이의 나이는 열 아홉 입니다." 황보노대인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으---- 음! 열아홉이라……" 약간 말 끝을 흐린 황보노대인은 황보검영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성운이는 우리 집안의 십이대(十二代) 독자(獨子)가 아니냐. 또한 우리 집안은 대대로 손(孫)이 부족하여 이때까지 겨우 명맥만 유지해온 형편이고……" 이 말에 황보검영은 부친의 뜻을 대략 짐작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시면 아버님의 뜻은……?" "그래, 이 애비의 뜻은 돌아오는 봄에 성운이를 결혼시키자는 것이다." 순간, 황보성운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님, 어찌…… 이제 성운이는 겨우 열 아홉입니다." "아니다. 봄이면 스물이 된다." "하지만 아버님, 성운이는 혼인을 하기에는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립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해도 늦지가 않을 듯합니다." 그 말에 황보노대인은 코웃음을 날렸다. "무슨 소리! 과거 너의 조부님은 스물이 되기 전에 혼인을 했고 나 또한 스물 둘에 가정을 이루었다. 스물이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게다가 성운이는 나이에 비해 기골이 장대하며 생각이 깊다. 스물이 아니라 그보다 어리더라도 관계가 없어!" 부친의 강경한 어조에 황보검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소자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말해봐라." "운아가 다른 또래에 비해 건장하고 생각이 깊은건 소자도 동감입니다. 하오나 그렇다 한들 아직 경험이 일천한 아이에 불과합니다." "……!" "저희 집안이 이곳 천태산 풍엽곡으로 낙향을 한 지도 벌써 이십 삼 년…… 운아는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고, 또한 이곳에서만 자랐습니다. 그 아이는 평생 단 한 번도 이 장원 밖을 벗어나 세상 구경을 해본적이 없습니다. 소자는 항시 그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헌데 지금 다시 그 아이로 하여금 가정을 이루게 한다면 그 아이에게 너무 심한 일이 아닐까 우려되옵니다." 황보노대인의 안색이 점차 흐려지더니 한동안 침묵했다. 잠시 후 황보노대인은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검영아, 성운이를 생각하는 너의 마음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허나 우리 집안은 다른 여타의 집안과는 다르지 않느냐? 더구나 나의 건강도 별로 좋지 못하여 앞으로 얼마나 살런지도 문제인데……" 황보검영은 문득 부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친의 얼굴은 아직 붉으레한 홍안(紅顔)이었지만 그 위로는 굵은 주름살이 가득 그어져 있었다. (아…… 아…… 아버님께서도 이제 무척 늙으셨구나…… 이토록 세월을 의식하시다니……) 황보노대인은 말을 꺼내놓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검영아! 이 애비의 꿈은 별로 없다. 단지 하나 있다면 성운이의 성혼(成婚)을 보는 것과, 죽기 전에 증손자를 안아보는 것이다." 이러한 부친의 말을 듣자 황보검영은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아버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저도……" 황보검영은 말 끝을 흐리더니 약간 침중한 표정으로 황보노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헌데 아버님, 성운이의 상대는……?" 아들이 주장을 굽히자 황보노대인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허허…… 그것은 이미 내가 생각해둔 바가 있다. 너는 혹시 조정의 설대인(薛大人)을 기억하느냐?" 그러자 황보검영은 나직한 탄성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아! 이부상서를 지내신 설영덕(薛英德) 노대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황보노대인은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와는 죽마고우(竹馬故友)지. 삼 년 전 내가 설대인의 집에 찾아갔을 때 나는 그의 손녀 딸을 한 번 본적이 있었다." "……" 황보노대인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손녀딸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아이를 손주 며느리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황보노대인은 이름을 생각하는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는 가볍게 무릎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설연미(薛娟美)라고 했지…… 지금 나이는 아마…… 열 여덟 쯤 되었을 것이다." 부친의 그 말에 황보검영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버님, 그것은 우리의 소망이지 설노대인께서 허락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황보검영의 물음에 황보노대인은 껄껄 홍소를 터뜨렸다. "허허…… 그래, 나도 그것이 약간 걱정이다만 별 상관은 없다고 본다. 너도 알다시피 그 설대인은 나와 수십 년 지기(知己)가 아니냐? 그 역시 우리 성운이를 보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차분히 그 말을 듣고 있던 황보검영은 부친을 넌지시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의 뜻이 진정 그러하시다면 소자가 성운에게 그 뜻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황보노대인은 손을 내저으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아니다. 이것은 좀 이른 감이 있다. 양 가문의 일이 잘 성사된 다음에 알려도 별로 늦지는 않다. 나는 우선 설대인을 만나러 북경(北京)을 한 번 가봐야겠다." "저도 같이 가도록 할까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보노대인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입을 떼었다. "아니다. 아무래도 나 혼자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황보검영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그럼 저는 밖에 나가 여장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황보노대인은 부드러운 눈길로 황보검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음!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라." 5 북경(北京)의 관도(官道) 위로 몇대의 마차(馬車)들과 사람들이 흑한에 옷깃을 여미며 뛰어오고 뛰어갔다. 거리마다 겨울의 삭풍이 불어 먼지들이 뿌옇게 일고 있었다. 북경 중심가의 어느 골목, 웅장한 홍석(紅石)의 석담을 돌아가면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대(大) 저택이 나온다. 그 저택의 지붕에는 온통 기괴한 무늬가 그려진 청기와가 번쩍거 린다. 또한 수십 채의 소택(小宅)들과 대문들이 당당한 집의 규모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이 저택의 규모로 보아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집임에 분명하였다. 수십 개의 대문을 지나 깊숙한 안채의 어느 방 안, 어느 절색의 여인이 근심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지금 앉아있는 그 소녀의 뒤로는 고관대작의 그 위용을 말해줄 듯한 화려한 고급 가구(家具)들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었다. 또한 방 한쪽 벽을 다 차지한 서가(書家)에는 고금동서(古今東西)의 온갖 기서(奇書)들이 늘비하게 꽂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서가 옆에 한쪽 구석으로 분홍 비단휘장이 길게 늘여졌으며 그 뒤로는 수실로 화려하게 수놓인 침상이 있다. 일견(一見)하기에도 여인이 거처하는 규방임을 알 수 있다. 한데 근심스런 표정의 궁장소녀는 지금 무슨 일인지 탁자에 턱을 괜 채 가끔 한숨을 뿜어내고 있었다. 연꽃 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자개책상에 턱을 고이고 있는 소녀. 그녀의 신태는 가히 선녀(仙女)를 방불케 하는 절색(絶色)이었다.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살결에 시원스럽게 쭉쭉 뻗어내려간 팔 다리, 게다가 얼굴은 어떠한가? 실로 필설(筆舌)로 다 못한다는 말이 필요하리라! 초승달처럼 붓으로 그린 듯 뻗어내려간 아미, 꿈틀하면 그대로 미칠 듯하고, 그 밑에 자리한 눈(目)은 한 번 깜박이면 이 세상 모든걸 빨아들일 듯한 신비를 지닌 듯했고…… 게다가 오똑하게 솟아 오른 콧날과 촉촉히 젖어 있는 입술은 보 는 이의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만들 정도였다. 또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내려간 백설같이 하얀 턱의 선은 실로 명장의 솜씨로 빚어낸 조각과도 같았다. 아! 실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며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절색 중에 절색이었다. 대략 방년 십팔 세 정도 되었을까? 풍겨나오는 그 아름다움이란 꿈 속에서 한 번만 보아도 미쳐버릴 듯한 미색이었다. 헌데 이것은 무슨 일인가? 그토록 아름다운 그 여인은 고웁디 고운 아미(峨眉)를 찡그리고 한숨을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녀의 그 신비한 눈에는 가득 근심의 빛이 출렁이고 있었다. 헌데 놀랍게도 그 모습마저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이때 방문이 스르르 열리며 한 명의 소녀가 들어섰다. 들어선 소녀는 청의(靑衣)를 걸치고 있는 무척이나 귀여운 소녀였다. 십육 세 정도 되었을까? 아직도 치기가 어린 눈이며 얼굴가에 나 있는 솜털 등 분명 방만(放漫)한 어린 소녀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 소녀는 교소를 띄운 얼굴로 방 안에 들어오다가 궁장소녀의 침울한 모습에 입가에 가득히 떠올렸던 웃음을 지워버렸다. 청의소녀는 조심스럽게 궁장소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사뿐이 궁장소녀 앞에 다가앉았다. 소녀는 약간 머뭇거리며 궁장소녀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 일이 잘 되겠지요. 뭐……" 궁장소녀는 청의소녀를 바라보더니 또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의소녀는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듯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니, 어머니께서도 극력 반대하고 있단 말이예요. 그러니 너무 상심 말아요." 그러나 궁장소녀는 여전히 근심 서린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청의소녀를 응시하며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할아버지와 아버님께서 일을 추진하고 계신데 어찌 어머님의 힘만으로 반대할 수가 있겠니……?" 그 말에 청의소녀의 모습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두 소녀가 앉아있는 방 안의 분위기는 점차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청의소녀는 분한 생각이 드는지 흥분된 어조로 침묵을 깼다. "언니,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어찌 자신의 일생을 집안 어른들의 일방적인 의견에 따라야 하나요?" 이 말을 듣고있던 궁장소녀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의소녀는 못마땅하다는 듯 계속 언성을 높이며 말을 이어갔다. "더군다나 상대방 신랑의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거늘…… 정말 기가 막혀서……" 궁장소녀는 청의소녀의 격분한 말에도 여전히 무거운 한숨만 땅이 꺼져내릴 듯 내쉴 뿐이었다. 이때 청의소녀의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섬전(閃電)처럼 떠올랐 는지 갑자기 희색을 띄웠다. "참, 언니 오늘이 며칠이지?" 궁장소녀는 청의소녀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청아야, 그것은 갑자기 왜 묻니?" "언니, 오늘이 분명 정월 초닷새가 맞지요?" "그래, 왜 그러니?" 그러자 청의소녀는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 참! 언니도, 정신이 없나봐요. 오늘이 바로 일 년마다 한 번씩 사부님이 오시는 날이잖아요." 궁장 소녀는 그 말에 일시에 무겁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렇구나. 오늘이 바로 사부님께서 오시는 날이구나." 이때 문 밖에서 귀에 익은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은 이 사부 이야기를 하고 있었구나." 순간 두 자매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동시에 궁장소녀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밖에는 온후한 인상의 노여승(老女僧)이 칠흑빛 염주를 연신 손가락 사이로 굴리며 서 있었다. 노여승은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밖에 나온 궁장소녀를 바라보았다. 궁장소녀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사부님, 그동안 옥체강령(玉體姜領)하셨는지요?" 노여승은 여전히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날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답했다. "나야, 언제나 건강하지 않느냐……" 이때 궁장소녀 옆에 있던 청의소녀도 환한 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올렸다. "사부님, 우민한 제자 연청(娟靑)이 사부님을 뵙습니다." 그녀 역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노여승은 빙그레 웃으며 연청을 바라보았다. "우리 청아는 갈 수록 예뻐지는구나. 이 사부도 청아가 너무 예뻐지니 알아보기가 힘들 것 같구나." 노여승의 말에 연청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이…… 사부님도……" 궁장소녀는 열려진 방문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노여승에게 가볍게 굽히며 입을 열었다. "사부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밖의 바람이 차갑습니다." 노여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두 소녀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넌지시 두 소녀를 바라보던 노여승이 입을 떼었다. "그 동안 스승이 가르쳐준 항마십오검(降魔十五劍)은 모두 터득했느냐?" 여승의 말이 떨어지자 궁장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모두 터득했습니다. 사부님." 여승은 다시 시선을 돌려 연청을 바라보았다. "그래 연청아, 너는 어찌되었느냐?" 그러자 연청은 배시시 웃으며 조그만 입을 열었다. "저도 언니 만큼은 안되지만, 그래도 웬만큼은……" 노여승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7 장 깊어가는 사랑 1 노여승(老女僧)은 설연미(薛娟美) 설연청(薛娟靑) 두 자매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재질은 너무 뛰어나 이 노니(老尼)의 짧은 예측을 불허하는구나. 일 년에 한 번밖에 못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노여승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으…… 음! 이번에는 항마검법(降魔劍法)의 마지막 삼초(三招)와 사문(師門)의 장법인 백운장법(白雲掌法)을 가르쳐 주겠다." 이때 노여승의 우측에서 다소곳이 앉아 말을 듣고있던 설연청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사부님, 사부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일순, 노여승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청아야?" 그러자 설연청은 이내 얼굴에 침울한 기색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 언니에게 곤란한 문제가 생겼어요. 그 문제를 상의드리려고요." "연미 때문에?" 약간 의외라는 듯 설연청을 바라보던 노여승은 설연미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일이기에 그토록 심각한 표정을 짓느냐? 어디 자세히 말해보거라!" 그러자 설연청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설연미를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심각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사실은…… 지금 할아버지와 아버님께서 연미 언니를 시집보내려 하고 있어요." 순간, 잠시 노여승의 표정에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이윽고 놀란 표정을 이내 거두더니 노여승은 천천히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허---- 어, 진정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다더니…… 몇 년 전만 해도 귀엽고 조그마하던 연미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군. 그래……" 잠시 노여승은 말을 멈춘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던 노여승은 순간, 기이한 생각이 드는지 연청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노니로서야 좀 아쉬운 일이지만 집안으로서 보면 큰 경사인데 어찌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느냐?" 노여승의 말을 듣고 있던 설연청은 돌연 얼굴에 분기(憤氣)를 띄우며 대답했다. "할아버지와 아버님께서는 가문의 명예만을 위해 언니를 생판 모르는 집으로 시집 보내려 하고 있단 말예요." 설연청의 말에 노여승의 백미(白眉)가 꿈틀거렸다. 설연청은 더욱 목청을 돋구어가며 말을 이어갔다. "더군다나 상대 남자는 얼굴도 보지못한 상태예요. 생각해 보세요. 일생을 생판 모르는 상대와 함께 보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연청의 말을 듣고있는 여승의 안색이 점차로 침중하게 변해갔다. 말을 끝낸 설연청은 더욱 근심이 어린 표정으로 노여승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부님!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까요?" 노여승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방 안은 일시에 무거운 분위기에 덮혀 버렸다. 잠시 후 무거운 침묵을 깨며 노여승의 말이 흘러나왔다. "너희 집 안이 무림(武林)의 가문이라면 이 사부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겠다만…… 너희 가문은 그렇지 않으니…… 게다가 나는 너희 집안어른들 몰래 너희에게 무공을 전수해 왔으니…… 나설만한 명분도 없구나……" 순간, 사부의 말을 들은 설연미의 안색은 절망감으로 순식간에 어두워져 버렸다. 이런 설연미의 표정을 잠시동안 들여다보던 노여승은 그녀에게 나직이 물었다. "연미야, 솔직하게 대답해 보아라. 너는 지금 이 혼인이 정말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이냐?" 그러자 설연미는 잠시 노여승의 눈을 바라보고는 곧 고개를 떨구 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여승은 가볍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너의 조부이신 설대인은 결코 경솔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이 상대를 너의 정혼자로 결정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을터…… 허나 정작 본인인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제는 작지 않은데……" 이때 곁에서 설연미를 바라보던 설연청이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노여승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부님, 이번 기회에 저희들도 강호(江湖)에 나가면 어떨까요?" 설연청의 느닷없는 물음에 노여승은 흠칫 놀라며 입을 열었다. "청아야, 대체 그것이 무슨 말이냐?" 설연청은 당연하다는 듯 당당하게 노여승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 언니도 이 일에 조금도 마음이 없고하니 이번 기회에 강호로 나가 구경이나 하겠다는거죠." 노여승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된다. 그것은 집안 어른들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행동이다." 노여승의 말에 설연청은 잠시 말이 없이 눈쌀을 찌푸렸다. 잠시 후,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근심스레 굴리며 물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을까?" "……" 노여승은 설연청의 말에 아무 대답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느닷없이 설연청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맴도는 것이 아닌가? "스승님!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런지요?" 노여승은 허공을 바라보던 눈을 떼어 기이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설연청을 의문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설연청은 잠시 언니 설연미를 둘러보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언니가 그 집안으로 시집가는 척 하는 거죠. 그 집안에 도착하는 즉시 실종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그 집안의 책임이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순간 침중했던 설연미의 안색에 약간의 희색이 떠올랐다. 설연미의 표정을 지그시 바라보던 노여승은 가볍게 미소를 날리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무공이나 연마하기로 하자." 그 말에 설연청은 씽긋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사부님, 우리가 강호에 나가서 사부님의 무공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의 명성을 떨칠 수 있나요?" 이처럼 당돌하고도 치기어린 질문에 노여승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난색을 띄웠다. 사실 제각기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는 무림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상당한 결례(決禮)가 되는 것이었다. 허나 노여승은 설연청의 철없는 질문에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너희들은 어느 정도 실력이 될 것이라 생각하느냐?" 여승의 물음에 설연청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저는 분명히 당할 자가 없으리라 믿어요." 노여승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그것은 상당히 건방지고도 위험한 생각이다. 결코 이 세상에는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단다." 설연청은 예의 커다란 눈을 굴리며 물었다. "그럼 사부님의 무공이 천하무적이 아니라는 말이예요?" 설연미는 설연청의 철없는 질문에 깜짝 놀라 옆구리를 쿡 찔렀다. "청아야! 스승님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설연미는 그제서야 자신의 실례를 깨달은 듯 겸연쩍게 낮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노여승은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다, 괜찮아. 내가 지금부터 몇가지 이야기를 할터이니 잘 들어보아라." 노여승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은 대충 이러했다. 지금 수천 년의 무림 역사에 기인이사(奇人異士), 절대마흉(絶代魔凶)들이 장강(長江)의 탁류(濁流)처럼 수도 없이 흘러왔다 흘러갔다. 하지만 일신(一身)에 지닌 절학(絶學)으로 당대(當代) 중원무림(中原武林)을 풍미하는 절정고수를 꼽는다면 다음의 열 명이다. 바로 이름은 일성(一聖), 이마(二魔), 삼기(三奇), 사괴(四怪)로 불리는 바, 그들 열 명이 그 본신(本身)에 지닌 절기(絶技)의 경중(輕重)은 거의 논(論)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일성(一聖)은 무성(武聖) 천룡노인(天龍老人). 이마(二魔)는 잔양신마(殘陽神魔)와 패도혈마(覇刀血魔). 삼기(三奇)는 백학거사(白鶴居士), 신검자(神劍子), 청암신니(靑庵神尼). 사괴(四怪)는 천면괴객(千面怪客), 음양서생(陰陽書生), 죽엽마령(竹葉魔靈), 신풍개(神風 ). 설연청, 설연미 두 자매는 넋을 잃은 채 사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바로 자신들의 사부가 삼기(三奇) 중의 하나인 청암신니(靑庵神尼)라는 사실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듣고있던 설연청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사부님, 그럼 그분들의 무공은 모두 막상막하이겠네요?" 설연청의 물음에 청암신니(靑庵神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그렇다고 보면 된다. 허나,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일성(一聖)이 약간 위고 사괴(四怪)가 약간 떨어진다고 볼 수 있지." 청암신니의 말을 흥미있게 듣고있던 설연청이 말을 던졌다. "그렇다면 이마(二魔)하고 삼기(三奇)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요?" 청암신니는 그녀의 물음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무공이나 연마하도록 하자." 그들은 그 말과 함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은 방문을 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북경의 하늘은 금방 폭설이라도 퍼부을 듯 잿빛 구름이 깔려오고 있었다. 2 봄이었다. 동장군이 내려오는 이른 봄의 햇살 뒤로 물러가고 있었다. 이곳 저곳의 헐벗었던 나뭇가지 위로 푸른 싹들이 고개를 내밀고 일어나고 있었다. 솟구쳐 피어오르는 봄, 자하장의 정원에 있는 나뭇가지들이 푸르렀다. 자하장 안채의 어느 방 안, 그곳에 한 명의 준수한 백의서생(白衣書生)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다름아닌 황보성운이었다. 골똘히 책을 읽던 황보성운은 가끔씩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보곤 했다. 만변하는 시절이었다. 이윽고, "아아……" 그의 나직한 탄성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때 방문이 소리없이 스르르 열렸다. 그리고 그 열려진 방문 사이로 청의(靑衣)차림의 중년문사(中年文士)가 서있었다. 그는 바로 황보성운의 부친인 황보검영이었다. 그의 얼굴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황보검영이 들어오자 황보성운은 몸을 급히 일으키며 부친을 맞았다. "아버님, 어인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황보검영은 표정을 바꾸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책을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아!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종종 쉬어가며 하려므나. 그러다가 건강이라도 해치면 어쩔려고……?" 황보성운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부친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아버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소자는 건강에 자신이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황보검영은 묵묵히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보성운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웬일인지 모르게 삼 년 전부터 황보성운의 건강이 무척이나 좋아졌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골도 장대해져 지금은 오히려 부친의 체격을 능가할 정도였다. 황보성운은 약간 심각한 기색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성운아, 여기에 좀 앉거라. 이 애비가 너에게 상의할 것이 있다." 부친의 심각한 표정을 이제껏 몇 차례 보지 못했던 황보성운은 부친의 의외적인 태도에 자세를 바로하며 공손하게 물었다. "아버님, 어떤 일을 저와 상의하려 하시는지요?" 황보검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성운아, 너는 지금 할아버님의 연세가 어찌되는지 아느냐?" 황보성운은 갑작스런 부친의 물음에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그는 별다른 내색을 보이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일흔 둘이 아니십니까?" 황보검영은 몇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맞다. 옛부터 인생칠십(人生七十) 고래희(古來稀)라 했는데…… 바로 너의 할아버님이 일흔 둘이 되셨구나." 황보성운은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는 부친의 의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어 내심 몹시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황보검영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아버님, 소자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 하십니까?" "……" 황보검영은 대답을 하지않고 잠시 동안 황보검영을 직시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성운아, 할아버지께서는 지금 단 한 가지의 소원밖에는 없으시단다." 이윽고 황보검영은 황보성운을 바라보던 눈길을 돌려 허공을 바라보며 한 차례 침중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황보성운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바로 당신 살아 생전에 한 번 증손자를 안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넷? 증…… 증손자라구요?" 황보성운은 소스라치게 놀라 황보검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버님, 그건…… 그건……" 황보검영은 놀라는 황보성운을 부드러운 눈길로 지켜보며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성운아, 이 애비는 지금 너의 의견을 듣고 싶구나." 황보성운은 부친의 의도를 완전히 짐작할 수 없었다. (혹, 아버님께서는 나를 결혼시키려……?) 이때 잠시 생각에 젖어있던 황보성운은 재차 묻는 부친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성운아, 어서 너의 의견을 말해 보아라!" 황보성운은 황보검영의 말에 약간 말을 더듬었다. "허지만, 아버님…… 저는 아직 나이도 어리거니와 아직 가정을 꾸밀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데……" 황보검영의 안색이 다시 무겁고 침중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침중한 음성이 울려나왔다. "성운아, 지금 할아버지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느냐? 그러니 돌아가시기 전에 효도를 다하는 것이 자식된 자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황보성운은 더 이상 무어라고 할말이 없었다. 자신의 의도는 의도이고 할아버지의 염원은 염원인 것이다. 점차로 할아버지의 인자한 모습이 머리 속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품 속에서 흰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일들…… 연신 소탈한 웃음을 터뜨리시던 할아버지…… 황보성운은 도저히 할아버지의 소원을 뿌리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내심 한숨을 쉬곤 부친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자는…… 아버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황보성운의 말이 떨어지자 일시에 황보검영의 얼굴은 희색으로 덮여버렸다. "성운아, 정말 고맙구나. 네가 이 애비의 뜻을 이해해 주니……" 희색을 띄우고 있는 황보검영을 침중하게 바라보고 있던 황보성운은 조용히 입을 떼었다. "아버님, 혼인 날짜는 언제 쯤에……?" 황보검영은 온화한 미소를 띄우고 대답했다. "하하하…… 이 일은 벌써 할아버지께서 정해놓으셨다. 보름 후면 신부가 이 자하장에 도착한다." "넷? 보름 후에요? 그렇게 빨리요?" 황보성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그렇게 일이 진척되어 있었다니……) 황보검영은 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예로부터 만사는 일찍 해결하면 할 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성운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신부감은 할아버지께서 고르고 고른 그런 집안의 규수니까……" "……" 황보성운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모습을 넌지시 바라보던 황보검영은 몇번 헛기침을 하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 모든 것은 잘 이루어질 것이니 걱정 말거라. 그럼 이만 나가봐야겠구나." 황보성운은 밖으로 나가는 부친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며 이제껏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다. (혼인? 혼인이라니…… 난 준비된게 아무것도 없거늘……) 실로 그것은 황보성운으로서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길게 나직한 한숨을 토하며 중얼거렸다. "휴우…… 맙소사, 혼인이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어찌 인간의 대사(大事)를 이토록 쉽게 결정한단 말인가. 상대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거늘……" 그는 장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더불어 소향의 가냘픈 자태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럼…… 소향은 어떻게 하지…… 소향은……?) 이때 방문이 소리없이 스르르 열렸다. 그리고 그 열려진 방문 사이로 들어온 사람은 소향이었다.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허나 왠지 모르게 두 눈에 우수(憂愁)가 가득 차 있었다. "아! 소향……" 황보성운은 표연히 몸을 일으켜 그녀를 맞았다. 순간, 소향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헌데 그녀의 웃음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것이었다. 소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 축하드리겠어요." "축하하겠다니? 그것은 또 무슨 말이냐?" 황보성운은 흠칫 놀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소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예의 그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 결혼하시는 것…… 말이예요." 그녀의 음성은 가늘게 떨려나오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소스라치게 놀라 물었다. "아니…… 네가 어찌 그것을……?" 순간 꿈 속의 사람을 보듯 황보성운을 바라보고 있는 소향의 두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고여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보성운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가 싫은 듯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조금 전, 대인님의 말씀을…… 우연히 듣게……" 소향은 격동치는 마음을 이길 수 없는 듯 말 끝을 흐렸다. 점차로 소향이 서있는 발 끝으로 한두 방울의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순간 황보성운의 가슴 속에는 소향으로 향한 측은감이 미어질 듯이 밀려왔다. 그는 천천히 소향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 위로 얹었다. "소향, 울지마라." "흑! 도련님……" 소향은 나직이 오열을 터뜨리며 황보성운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황보성운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의 오른 손을 들어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향, 절대 걱정하지 마라. 내 설사 결혼하더라도 너와의 약속을 저버리겠느냐." "흑흑…… 도련님!" 소향은 가슴 속으로 터질 듯이 밀려오는 감격에 휩싸여 가늘게 울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얼굴을 들어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아! 그것은 비에 젖어 떨고있는 한 떨기의 꽃,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그녀의 붉게 상기된 뺨 위로 두 줄기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양손을 들어서 눈물에 젖은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소향은 부르르 눈썹을 떨며 두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일순 황보성운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와 촉촉히 젖어있는 그녀의 입술을 힘껏 내리눌렀다. "으…… 음……"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소향의 코 속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이윽고 소향의 양손이 황보성운의 목덜미를 힘껏 끌어안아왔다. 그리고는 나직한 비음을 흘려내는 것이었다. "도련님……" 제 8 장 괴상한 初夜 1 서로에게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끌어안은 두 남녀(男女), 황보성운과 소향. 점차로 그들은 타오르는 격정 속으로 거칠게 숨을 내뿜으며 들어가고 있었다. 황보성운의 오른손은 벌써 소향의 옷깃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그러자 뭉클하고 그 신비스런 열매가 황보성운의 손 끝으로 닿아오는 것이 아닌가? 신비의 열매, 더군다나 그 열매 끝에는 부끄러운 듯 오디의 작은 열매가 떨고 있었다. 몇 번 그 열매를 매만지던 그의 손길이 점차 과육을 탐닉하듯 소향의 전신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어, "으…… 음……" 가냘픈 교성이 연신 소향의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황보성운은 참을 수 없는 듯 그녀의 교구를 들고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소향은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 황보성운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조심스럽게 소향을 침상 위에 내렸다. 소향은 얼굴을 도화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미 황보성운과의 수차례 관계를 맺어 남녀간의 정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있는 그녀였다. 황보성운은 뜨거운 숨결을 토하며 그녀의 옷을 하나 둘 벗겨나갔다. 이윽고 드러난 뇌살적인 전나(全裸)의 여체(女體)! 부풀었다 내렸다하는 백옥빛의 두 동산, 그리고 그 동산을 따라 휘어져 내려간 기름진 평야, 또한 그 가운데 수줍은 듯 패여져있는 작은 배꼽…… 이어 그 아래 신비의 절곡을 따라 내려간 울창한 삼림(森林). 실로 이루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뇌살적인 나신(裸身)이었다. 소향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황보성운이 자신의 나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며 몸이 달아올랐다. 이때 황보성운이 손을 뻗어 그녀의 울창한 비처를 쓸 듯이 쓰다듬었다. 짜릿한 전률이 쾌감처럼 소향의 몸을 스쳤다. "으으음……" 황보성운은 급히 옷을 벗고는 그녀의 몸 위로 자신을 밀착시켰다. 하체에 와닿는 남성을 느끼며 소향은 자신도 모르게 황보성운의 목을 안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남성을 느끼며 소향의 교성은 높아졌다. 황보성운의 몸은 파도처럼 소향의 몸 위에서 움직였다. 그 파도의 움직임을 따라 소향의 몸도 출렁였다. 어느새 두 남녀의 신음 소리가 마치 음율처럼 방 안의 공기 속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흘러가는 듯 슬픈, 그러나 무엇인가 무척이나 안타까운 듯 타오르고 꺼져가는 아쉬운 곡조들…… 망망대해(茫茫大海)의 풍파 속으로 두 사람의 배가 표표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때 방문 밖에서 가벼운 탄식이 울려왔다. "후…… 우! 이 일을……"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보성운과 소향은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의 열풍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2 보름 후, 완연한 봄기운을 따라 돋아오르는 수목들이 벌판을 푸릇푸릇하게 수놓고 있었다. 그 위로 몇 무리의 나비떼가 분분했다. 황보성운의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조급했다. 그가 듣기로는 신부의 일행이 이미 자하장에서 삼십 리 떨어진 백마사(白馬寺)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열린 창문을 통해 먼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으…… 음, 시간은 급속히 흘러가고 마음은 다급해지고…… 정말 미치겠구나." 한 동안 망설이던 황보성운은 그 무엇을 결심했는지 벌떡 일어섰다. "좋다! 한 번 백마사에 가보자.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계집인지 보기라도 하자." 황보성운은 방문을 밀어젖히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3 백마사(白馬寺). 이곳저곳에 칠해진 단청이 헐고 기왓장들이 풍상에 깎인, 당나라 때 지어진 절로서의 유서가 흘러나오는 곳. 그 때문인지 이곳을 찾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어딘지 모르게 흥청거리고 있었다. 백마사의 앞뜰에는 수십 개의 가마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마들 중에는 오색의 수실들로 뒤덮힌 매우 아름답고 호화로운 몇 개의 가마가 끼어있어 무슨 경사가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백마사의 어느 승방, 그곳에는 우아한 의복을 걸친 설연청과 신부 차림의 설연미가 있었다. 설연미(薛娟美). 지금 그녀의 모습은 붉은 빛의 신부 복장으로 인하여 더욱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가히 지상(地上)으로 하강(下降)한 선녀(仙女)와 같다고나 할까? 실로 절세의 신부(新婦)였다. 허나 그녀는 얼굴 가득히 걱정스러운 빛을 띄우고 있었다. 이어 그녀는 나직이 뇌까렸다. "아, 내일이면 자하장에 도착하는데 이를 어쩐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설연청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지껄였다. "할 수 없어요, 언니. 원래의 계획대로 실행한 다음 무림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그 말에 설연미는 더욱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껏 나를 길러준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불효가 아니겠니……" 설연청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아이참, 언니도! 언니는 그래 얼굴도 모르고 마음에도 없는 사내의 품속에서 일생을 보내겠단 말이예요? 정 그게 좋다면 마음대로 해요. 나도 더 이상은 관여하지 않을테니까." 이때 희끗한 그림자가 대웅전 뒷숲으로부터 두 자매가 있는 승방으로 빗살처럼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 그림자는 쾌속절륜하고도 신비막측하게 날아와 일점의 먼지도 없이 그 승방의 지붕 위로 내려섰다. 지붕 위에 내려선 하얀 그림자(白影)는 좌우를 예리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백영은 승방 뒤 창문 곁으로 유령처럼 내려서는 것이었다. 이윽고 내려선 그는 승방 창문에 바짝 귀를 붙혔다. 승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엿듣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가끔 고개를 움직여 승방 안을 살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채 설연미와 설연청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언니, 제 말대로 첫날밤에 그 신랑 놈의 혈도를 찔러버리고 우리는 흔적없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리고 강호로 나가는 거예요." "허…… 허지만……" 설연미는 몹시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 끝을 흐렸다. 이 광경을 훔쳐보던 백의인의 입가엔 야릇한 냉소가 흩어졌다. 잠시 후,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백의인영은 슬쩍 몸을 날려 한 줄기 그림자로 화하여 밖으로 빠져나왔다. 백마사의 어느 누구도 그 인영의 행적을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 백마사를 빠져나온 백의인영은 어느새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약관으로 보이는 청년인데 관옥같은 얼굴에 뻗어내린 콧날과 검날같은 눈썹, 빛나는 눈이 돋보였다. 바로 황보성운이었다. 지금 황보성운은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백마사 승방에서 들었던 두 자매의 말을 곰곰히 되씹고 있었다. "흐흠…… 나의 혈도를 찌르고 강호로 도망가겠다고 했던가!" 그렇게 말을 내뱉은 황보성운의 입가엔 벌레를 씹은 듯 씁쓸한 냉소가 스쳤다. (물론, 나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들의 소치가 좀 괘씸하지 않은가?) 황보성운은 은근히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보성운은 언뜻 승방에서 보았던 신부의 모습을 좀체로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신부의 모습이 천하에 보기드문 절세의 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설같이 빛나는 피부에 봉목(鳳目), 마늘쪽처럼 오똑 솟아오른 코 등…… 실로 이루 비할 데 없는 절세의 미녀였던 것이다. 다음 순간 황보성운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에 기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좋다. 갈 때 가더라도 어디 혼좀 내주어야지……) 황보성운은 곧 신형을 날렸다. 허공에 그의 신형이 떠오르자 일시에 형체가 사라지며 흐릿한 그림자가 날기 시작했다. 그 백영은 섬전(閃電)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사실 그 경공술이 어찌나 쾌속한지 하나의 그림자만 언뜻 보일 뿐이었다. 그 백영은 자하장 쪽으로 비조처럼 쏘아갔다. 4 자하장은 대단히 흥청거리고 있었다. 대문이 활짝 열려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으며, 넓은 마당 곳곳에는 술자리들이 벌어져 있었다. 그 술자리마다 즐거운 환담과 소성(笑聲)들이 왁자지껄하게 울려 나왔다. 대청 안, 그곳에는 신랑 신부의 부모들이 마주 앉아서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즐거운 담소를 나누는 듯했다. 그 중에서도 황보노대인과 설노대인이 제일 즐거워하고 있었다. 한편, 한쪽 방에서는 황보성운이 예복 치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소향이 황보성운의 치장을 도와주고 있었다. 잠시 후 치장이 끝났다. 한데, 아! 거기에 서 있는 황보성운의 모습은 실로 인중지룡(人中之龍)의 절세 미장부였다. 마치 천신(天神)이 서 있는 듯 그의 모습은 수려했으며, 거기에는 장부의 위풍당당한 기개가 넘쳐흐르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소향의 입에서 절로 경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도련님, 정말 멋져요. 마치 꿈 속의 공자님같아요." 황보성운은 그 말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순간, 소향은 황보성운의 미소에 홀린 듯이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어 버렸다. 눈의 초점이 흐려진 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향의 그런 모습을 바라본 황보성운이 약간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소향! 정신차려, 무엇 하는거야?" 황보성운의 청랑한 목소리에 비로소 정신이 드는지 소향은 깜짝 놀라는 기색을 지었다. 그녀는 얼굴에 짙은 홍조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아, 조금 전의 도련님의 미소를 봤더라면 이 세상의 어떤 여인 이라도 홀리고 말거예요." 소향의 말에 황보성운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에 자신이 지어보인 미소는 현현비록(玄玄秘錄)의 제 사장에 나오는 섭심미혼술(攝心迷魂術)이었던 것이다. 황보성운은 문득 기이한 미소를 흘렸다. (으음…… 이 정도라면 그 계집들도……) 5 어느덧 신부를 태운 가마의 일행은 천천히 자하장의 대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자 마당에 모여있던 많은 사람들이 양편으로 갈라서며 가마를 호기심어린 눈동자로 지켜보았다. 그 가마는 온통 오색의 아름다운 꽃들과 수실로 뒤덮여져 있었다. 이때 대청 위에서 즐거운 담소를 나누던 신랑 신부의 부모들이 희색을 띄우며 달려나와 가마를 맞았다. 그 꽃가마는 뜰 한가운데에서 멈추었다. 그 뜰에는 양가 부모들과 친척들이 단정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드디어 가마의 문이 열리고 화려한 치장을 한 신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순간, "아아……!" 식장에 몰려있던 많은 중인들의 입에서 한결같이 경탄성이 터져올랐다. 그들은 신부의 모습을 바라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았다. "정말 천하에 없는 미인인데……" "도련님과는 천생배필이야!" "허허…… 입춘대길(立春大吉)이로군." 과연 그러했다. 신부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나이라면 꿈에라도 한 번 보고싶을 만큼 절세의 미인(美人)이었다. 백옥같은 피부에 화장이 곁들인 그녀의 미(美)는 극에 극치를 달려가고 있었다. 머리는 위로 구름처럼 올라갔으며, 아름다운 두 눈은 신비로운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백옥같은 살결을 감싸고 화려한 신부의 예복이 사람의 눈을 현란스럽게 빛내고 있었다. 신부는 설연청의 부축을 받으며 대청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때 예복을 차려입은 황보성운의 빛나는 풍모가 대청 안쪽으로 나타났다. 드디어 예식이 시작된 것이다. 한데, 기이하게도 황보성운의 얼굴에 면사가 씌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신랑의 기괴한 모습에 그곳에 모인 중인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황보노대인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허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문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 깊은 밤이었다. 신랑 신부는 많은 사람들의 기이한 웃음과 관심 속에서 곱게 단장된 신방으로 들어갔다.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된 신방 안에는 향촉이 은은한 홍광을 터뜨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황촉의 촛대 옆에 은으로 장식된 소반(小盤)이 놓여져 있었으며, 그 위에는 자기 술병과 황금 술잔이 빛나고 있었다. 또한, 신방 한편으로는 자개가 박힌 호화롭기 그지없는 가구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분홍색 휘장이 드리워진 침상이 있었다. 또한 그 침상에는 원앙이 수놓아진 비단이불이 곱게 접혀져 신랑 신부의 합환(合歡)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와 설연미와 마주앉은 황보성운은 촛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그윽히 바라보았다. 홀홀히 타오르는 촛불의 그림자에 싸여 부끄러운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듯 붉게 물들어져 있는 신부의 얼굴…… 초생달을 뽑아다 심은 듯 그려진 눈썹과 가을 호수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두 눈, 고고하게 오똑 솟아있는 콧날과 앵두같은 입술 등은 가히 절색 중의 절색이었다. 더군다나 곱게 치장을 한 그녀의 얼굴은 차라리 뇌살적으로 요염하다고나 할까? 황보성운은 설연미의 신태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다!) 황보성운의 철담은 가볍게 격탕되기 시작했다. 이때 불현듯 소향의 청초한 얼굴이 황보성운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래, 소향의 모습도 결코 이에 떨어지지는 않아.) 이렇듯 만감이 오고가는 황보성운의 가슴을 아는지 모르는지 설 연미는 다소곳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고개를 떨군 채 있었다. 허나, 지금 그녀의 얼굴 어딘가에는 무척이나 초조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청아한테서 언제쯤 소식이 올까?) 지금 그녀는 우습게도 도망갈 준비를 하고있는 것이었다. 이때 황보성운이 몸을 일으키며 서서히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시…… 신부! 이제 그만 자리에 들어야겠소." 설연미의 마음은 황보성운의 이러한 말에 더욱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밖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설연미는 몸이 달아 안절부절 못하며 동생인 설연청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이자의 혈도를 찌르면 자칫 남들에게 발각될 우려가 있다. 어서 청아한테 소식이 와야 할텐데……) 황보성운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서 그녀의 속마음을 훤히 짐작할 수 있었다. (후훗, 동생을 기다려 보았자 오지 못할 걸. 지금쯤 소향에게 붙잡혀 있을테니……) 황보성운은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며 설연미의 머리에 올려진 화관(花冠)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화관을 풀어내린 황보성운은 서서히 예복을 벗기려는 듯 손을 그녀의 몸에 대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은 온통 울상이 되어버렸다. (청아, 그 계집애는 도대체 무엇하고 있길래 이토록 오지 않는담……) 이때까지도 황보성운의 얼굴은 여전히 망사로 덮여있었다. 황보성운은 능숙한 솜씨로 설연미의 예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순간 설연미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어느덧 황보성운의 손길에 의하여 설연미의 상의가 벗겨졌다. 그러자 눈부시도록 하얀 어깨가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사람을 현란 속으로 밀어넣는 분홍빛 젖가리개가 드러난 것이었다. 동시에 처녀의 향긋한 육향(肉香)이 황보성운의 코를 찔렀다. 황보성운은 정신이 약간 어지러워지며 자신도 모르게 단전 아래쪽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설연미는 수치감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황보성운의 손은 다시 설연미의 하의를 벗기고 있었다. 잠시 후 설연미는 황보성운의 손길에 의하여 겉옷이 모조리 벗겨져 버렸다. 그녀는 단지 중요한 부분만을 간신히 가린 속옷만을 걸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녀는 아예 두 눈을 꼭 감아버리고 있었다. 그녀의 심정은 절망을 지나 오히려 포기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요염한 그녀의 몸매를 취한 눈길로 지그시 내려보았다. 가냘프게 떨고있는 어깨, 백옥같은 두 팔, 물이 흘러가듯 매끄러운 배, 그리고 쭉 시원하게 뻗어내려간 백옥같은 다리…… 그야말로 남성을 뇌살시켜버릴 듯한 절색의 몸매였다. 잠시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던 황보성운은 떨리는 손을 들어 분홍빛 젖가리개를 풀기 시작했다. 순간 진정 만든 조물주마저도 통탄할 아름답기 짝이없는 그녀의 젖가슴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평생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가슴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것은 완미(完美)에 가까울 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어쩌면 아름답다는 표현도 너무나 짧은 표현이리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단 말인가! 봉긋하게 솟아오른 그 한정없이 부드러울 듯한 백옥빛의 젖가슴, 뿐만 아니라 젖가슴의 정상에는 부끄러운 자주빛 오디열매 하나가 떨고있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의 입에서 절로 감탄성이 터져 올랐다. "후우,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구나……" 그의 탄성을 들으며 설연미의 전신이 바르르 짧게 경련했다. 그녀는 혀를 물고 죽고싶을 만큼 수치감을 느꼈다. 황보성운의 눈에 그녀의 꼭 감은 눈꼬리로 눈물이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 (내가 좀 너무하는 것이 아닐까……?) 허나, 곧 그의 머리 속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다. 이 소녀는 나의 신부다. 즉, 나의 여인이 아닌가……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황보성운은 들먹거리는 그녀의 어깨 위로 가볍게 손을 얹은 뒤 나직이 입을 떼었다. "오늘은 기쁜 날이 아니오? 자, 울음을 그치고 어서 잠자리에 듭 시다." 황보성운의 그 말에 더욱 설움이 복받치는 듯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난데없이 지붕 위에서 부스락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황보성운의 눈가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으음, 동생이 왔구나……) 황보성운은 설연미의 벗겨진 상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경우엔 어쩌면 좋은가……?) 그는 신부의 눈물 짓는 모습을 보며 내심 탄식을 했다. (좋다. 여인이 원치 않는데 내가 만류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순간, 피---- 융! 예리한 파공성이 울리며 창문쪽에서 예리하기 짝이없는 한 줄기 지풍이 신속하게 뻗어왔다. "으---- 윽!" 수혈이 적중된 황보성운은 짧은 비명을 터뜨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다음 순간 창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그 틈으로 섬연한 체구의 한 인영이 날아 들어왔다. 바로 설연미의 동생 설연청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언니의 벗겨져버린 상체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저…… 정말로…… 미안해요……" 설연미는 묵묵부답 몸을 일으키더니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녀의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기 시작했다. 설연청은 설연미의 눈치를 살피며 죽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어…… 언니…… 정말……" 설연미는 멍하니 설연청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이미 나의 모든 것을 보았어……" "어, 언니…… 허지만……" 그 말에 설연미는 장탄식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이미 엎어진 물! 나가자, 청아야." 문득 밖으로 나가려던 그녀의 눈에 황보성운이 쓰러져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설연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무엇을 결심한 듯, 황보성운 곁으로 다가갔다. "휴우……!" 무거운 한숨을 내쉰 그녀는 황보성운의 몸을 살며시 들어 침상 위에 조심스레 놓았다. 잠시 황보성운을 바라보던 설연미는 다시 한 번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날려 창 밖으로 날아갔다. 이어 설연청도 설연미의 뒤를 따라 급속히 신형을 날렸다. 이윽고 그들이 방에서 사라지자, 황보성운은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기이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흠, 연미…… 무척이나 마음이 고운 여자로군." 황보성운은 씩 웃으며 천천히 문 밖으로 다가갔다. "좋다. 그대 연미가 어찌 생각하든 나는 반드시 너를 아내로 삼을 것이다. 그대는 이미 나와 결혼한 몸이 아닌가?" 제 9 장 英雄의 決心 1 황보성운은 문 밖으로 나왔다. 순간, 그는 어깨를 꿈틀하더니 한 줄기 백영으로 화(化)해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유령처럼 빠른 속도로 떠올라 허공 속으로 섬전(閃電)처럼 쏘아갔다. 그러나 자하장은 어떤 사실도 모르는 채 흥청거리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한 줄기 번뜩하는 백영으로 신쾌하게 날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가벼운 깃털처럼 어떤 전각 위로 우뚝 내려섰다. 그리고 그는 가볍게 몸을 떨쳐 전각 아래로 내려섰다. 이윽고 그는 전각 아래의 어느 방문 앞으로 가더니 문을 소리없이 밀고는 곧 신속히 방 안으로 빠져 들어갔다. 방 안에는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황보성운은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폈다. 비록 캄캄한 밤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구석에 있는 분홍빛 휘장이 확연하게 들어왔다. 그 휘장 뒤로 분홍빛의 침상이 은은히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침상 위에는 지극히 아름다운 한 명의 미녀가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그녀의 백옥같은 다리는 황보성운의 시선을 강렬히 자극 시켰다. 황보성운은 천천히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는 듯 깊이 잠들어 있었다. 황보성운은 살며시 침상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소향……" 순간, 소향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 앞에 거목처럼 서 있는 인영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누, 누구세요?" 황보성운은 손가락을 들어 소향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속삭였다. "소향, 나야! 나 황보성운이다." 그러자 소향은 안도의 숨을 내뿜으며 황보성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휴우…… 놀랬어요. 헌데, 도련님 이곳엔 어떻게……?" 황보성운은 소향의 얼굴을 내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향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어!" "저하고요?" 소향은 의외라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신형을 곧추세웠다. 순간 나삼 속으로 훤히 그녀의 상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풍만한 젖가슴이 나삼 속에서 매력적으로 흔들렸다. 황보성운은 자신의 눈이 약간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비록 자신이 모두 속속들이 알고있는 소향의 몸이지만 그녀의 몸은 언제나 신선미를 풍겨주는 것이었다. 소향은 팔을 뻗어 등촉을 밝혔다. 환하게 밝아진 방 안에서 그녀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간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도련님, 이 심야(深夜)에 어찌……" 황보성운은 그녀의 얼굴을 직시하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신방에서 묘한 일이 벌어졌다." "네? 신방에서…… 어, 어떤 일이……?" 소향은 깜짝 놀라 휘둥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황보성운은 신방에 들고난 뒤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을 대략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며 점차 소향의 안색은 경악으로 일그러져갔다. "저, 정말 큰일이군요. 이를 어찌 한다지요?" 황보성운은 소향의 말에 개의치 않는 듯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입에서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후후…… 소향, 너는 중원을 좀 유람하고 싶지 않느냐?" 황보성운의 뜻밖의 말에 소향은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황보성운은 여전히 입가에 기이한 웃음을 머금은 채 소향의 갸름한 턱을 받쳐올렸다. "소향, 나에게 한 가지 기이한 변장술이 있다. 후후후……" "……?" 영문을 알 수 없는 소향으로서야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황보성운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 변장술로 너를 설연미로 만드는 거야." "네? 저를 설아가씨로요?" 소향은 솟구쳐 오르는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황보성운을 직시했다. 황보성운은 싱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연후에 한 가지 구실을 대어 중원(中原)으로 나가보는 거야." 소향은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제가 아가씨의 모습을……" 황보성운은 소향을 부드러운 눈길로 내려보며 입을 떼었다. "후후후, 너의 몸매와 음성은 설연미와 비슷해서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소향은 황보성운의 자신감에 찬 말에도 믿기지 않는 듯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곁에 더욱 가까이 다가 앉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소향, 괜찮지? 나를 도와줄 수 있겠지?" 황보성운의 무척 부드러운 음성에 소향은 온 얼굴을 도화빛으로 물들이며 고개를 가늘게 끄덕였다. "저는 도련님의 사람인데 어찌 뜻을 거역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 수가……?" 그 말에 황보성운은 대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하하하! 소향, 너는 나만 굳게 믿어라." 소향의 어둡던 얼굴은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도련님을 적극 도와드리기만 하면 되겠어요?" 황보성운은 빙그레 웃음을 띈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때 소향은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황보성운을 넌지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도련님!" 황보성운은 씽긋 웃어보이며 소향의 갸름한 턱을 중지로 받쳐올렸다. "왜?" 소향은 잠시 황보성운의 눈길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떨구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 설아가씨는……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예요?" 황보성운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쩌면 좋을까?" 소향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냥 도망갔다 하더라도, 그래도 도련님의 부인이 아니예요?" 황보성운은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소향의 양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입을 열었다. "역시 소향은 비단결처럼 마음이 곱군." 황보성운은 그 말과 함께 소향의 버들가지 같은 허리를 힘차게 끌어 안았다. "어멋!" 소향은 황보성운의 급작스런 행동에 얼굴을 도화빛으로 붉혔다. "소향, 신랑이 첫날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 황보성운의 말에 소향은 목덜미까지 도화빛으로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윽고 황보성운은 소향의 몸을 들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소향의 뇌살적인 육체를 서서히 쓸어갔다. 소향의 뜨거운 몸은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황보성운은 소향의 풍만한 젖가슴을 쓸며 나직이 속삭였다. "소향, 너는 설연미의 얼굴을 보았느냐?" 소향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볍게 끄덕였다. "네, 보았어요. 무척 아름답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무척 가늘게 들려왔다. 황보성운은 소향의 나직한 목소리에 씩 웃으며 능숙하게 그녀의 전신을 애무해 갔다. "후후, 설연미는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어." 교성을 질러대던 소향은 가볍게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아이, 도련님도…… 안되겠어요. 손 안에 꽃을 들고 있으면서도 다른 꽃을 생각하시다니……" "그랬던가? 하하핫……!" 황보성운은 폭소를 터뜨린 후 그녀의 몸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덮쳐내렸다. 어느덧 소향이 걸치고 있던 나삼은 벗겨져 침상 아래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연신 교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다시금 황보성운의 전신과 소향의 전신이 깊게깊게 밀착되어 가고 있었다. 2 무르익은 봄이었다. 산천(山川)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봄기운을 따라 연록색과 울긋불긋하게 만개(滿開)한 꽃들로 물들어 있었다. 절강성(浙江省) 동북쪽에서 강소성(江蘇城) 남단으로 뻗어내려간 한 관도(官道), 널찍한 길을 따라 백의(白衣)를 걸친 남녀가 양춘(陽春)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 중 남자의 모습은 실로 필설(筆舌)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영준하고 수려했다. 검날같이 힘차게 귀 끝으로 뻗어내려간 눈썹, 그 밑으로 빛나는 성목(星目), 그리고 전신을 타고 흐르는 당당한 기풍 등 실로 누가 보아도 인중지룡(人中之龍)이라 찬탄할 만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연신 교태로운 몸짓으로 걷고있는 절색(絶色)의 미녀(美女), 초승달같은 아미(蛾眉)에 별빛같은 눈동자였으며 늘씬하게 뻗어나간 전신에는 사나이의 철담을 녹일 뇌살적인 미태(美態)가 흘렀다. 실로 천생지연(天生之緣)으로 어울리는 한 쌍의 인중용봉(人中龍鳳)이라고나 할까? 그들의 모습은 양춘(陽春)의 따뜻한 햇살로 내려온 금동옥녀(金童玉女)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다. 그들은 바로 자하장을 떠나온 황보성운(皇甫星雲)과 소향(小香)이었다. 지금 그들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 연신 만면에 희색을 지으며 연신 가가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하…… 소향, 정말 멋진 연극이었다. 할아버지 아버님은 물론 설가(薛家)의 어른들까지 속다니…… 하하." 황보성운은 소향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말했다. 그러자 소향은 짐짓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읍을 해보이면서 물 흘러가듯 입을 열었다. "공자님의 변장술은 실로 훌륭한 바가 있었나이다." 이에 황보성운도 고개를 훌쩍 뒤로 젖히더니 헛기침을 한 번 내뱉은 후 뒷짐을 지고 입을 열었다. "허험! 아, 그랬었는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향은 터져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듯 교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황보성운도 따라서 대소(大笑)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호호호호호!" 잠시 후, 웃음을 거둔 소향은 무엇이 문득 생각난 듯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참, 도련님. 이제 어디로 가실 작정이세요?" 황보성운은 소향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왕 강호로 나온 차, 전 중원(中原)을 유람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그 동안 자하장 좁은 구석에만 박혀 있었더니 좀이 쑤실대로 쑤셔서……" 그러자 소향은 장난스럽게 콧등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래도 순서란 게 있지 않겠어요?" 이에 황보성운은 한 발을 힘껏 내딛으며 한 손을 앞으로 내뻗더니 결연히 말했다. "일단 금릉으로 가지!" 그러자 소향은 가볍게 우려하는 기색을 떠올리며 말했다. "금릉이면 이곳에서 오백여리(五百餘里), 최소한 열흘은 가야할텐데…… 그냥 항주(杭州)부터 구경하는 게 어때요?" "하하하…… 항주보다는 금릉 쪽이 맘에 드는데." 그러자 소향은 짐짓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 아니 공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할 수 없죠. 하늘같은 분의 말씀을 소녀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어요?" 이 말에 황보성운은 기이한 미소를 날리며 중얼거렸다. "후후후…… 금릉까지 열흘이라고 했지?"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몰라요." "내 보기엔 오늘 안으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소향이 기막힌 듯 황보운성을 바라보더니 이내 눈을 살구처럼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몰랐군요. 공자님께서 언제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술법을 배우셨죠? 손오공처럼 근두운이라도 불러서 타고 날아갈 건가요?" "근두운을 부를 순 없지만 그만큼 빨리 갈 순 있지." 소향이 깔깔 웃었다. "호호호호, 농담 그만 하시고 어서 가요." "농담?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농담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아?" 황보성운은 소향의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소향의 가느다란 허리를 옆구리에 단단히 끌어안았다. "자,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무슨 장난을 하시려고……" 소향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허나 소향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아서 황보성운은 가볍게 땅을 박차는 듯하더니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소향은 대경실색(大驚失色)했다. 지금 자신을 껴안은 황보성운은 한 마리 비조(飛鳥)처럼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실로 그 누가 보아도 경악할 경공이었다. 소향은 자신이 구름을 타고 날으는 착각 속에 빠졌다. 그녀는 황보성운의 넓다란 가슴팍에 전신을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공포와 경악으로 인해 그녀는 거의 정신이 없었다. 이때 황보성운은 이미 허공으로 백여 장이나 올라와 있었다. 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우선…… 현현비록(玄玄秘錄) 속에 실려있던 무영비행술(無影飛行術)을 시전해 보자.) 그는 구결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미 끌어올린 진기로 구결을 따라 운공했다. 순간, 그의 신형(身形)은 한 줄기 빗살처럼 날아갔다. 소향은 느닷없는 변화에 기이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다음 순간, "악!" 그녀는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외마디 경악성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지금 자신의 까마득한 밑으로 수려한 산(山)과 강(江)들이 한폭의 움직이는 그림처럼 스쳐가는 것이 아닌가? (이…… 인간이…… 하늘을 날다니……) 이것은 실로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상상조차도 하지못할 가공할 일이었다. 아니 비조(飛鳥)라도 이처럼 빠를 것인가? 허나, 황보성운은 여전히 지상과 백여 장을 격(隔)한 채 쾌속무비할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한데 지금 황보성운 역시 내심 무영비행술의 신비막측한 속도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에야 비로소 무영비행술을 처음 시전(施展)해보는 것이었다. (오성(五成)밖에 펼쳐내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만약, 극성으로 끌어올린다면 어떻게 될까?) 황보성운은 가슴 속에 젊은 장부로서의 자부와 은근한 호기심이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조용하지만 웅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소향, 조심해라." "……?" 소향은 혼백이 거의 나간 상태에서 황보성운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때, "핫핫핫…… 보아라!" 황보성운은 한 차례 장소성을 터뜨렸다. 다음 순간, 갑자기 그의 신형이 가공할 정도로 급속하게 쏘아져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한 줄기 섬전(閃電)이었다. 소향은 너무나 놀라고 호흡마저 가빠진 나머지 아예 황보성운의 허리를 필생의 힘을 다하여 끌어안았다. 이 찰나지간에 돌연 실로 괴이막측한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황보성운과 소향의 신형이 돌연 뿌옇게 변화되는 듯하더니 아예 형체조차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무영비행술의 최상승의 경지였다. 실상 과거 현현비록(玄玄秘錄)의 창시자(創始者)인 현현자(玄玄子)조차도 이 무영비행술의 최상승 경지를 터득하지 못했었다. 아마 그가 지금의 황보성운을 보았더라면 그는 분명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 황보운성이 전개하는 것은 실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비행술이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황보성운은 진력이 점차 고갈되어감을 느꼈다. 그는 서서히 속도를 늦춰갔다. 그러자 그와 소향의 모습이 점차 드러났다. 3 잠시 후, 서서히 날던 그들의 수백여 장 앞에는 수천 장의 거대한 산이 우람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얼마나 왔을까? 그리고 이곳은?) 황보성운은 천천히 산의 상공을 선회하며 산세를 살폈다. 이때, 그의 눈에 울울창창(鬱鬱蒼蒼)한 숲들 안쪽으로 십여 장의 다듬은 듯이 평평한 암반이 들어왔다. (옳지! 저곳에 내려야겠군.) 황보성운은 가볍게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암반 가운데로 사뿐히 날아내렸다. 그러나 소향은 아직도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소향의 모습을 내려보았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내리감은 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황보성운은 결코 떨어지지 않을 듯이 문어처럼 매달려있는 소향을 바라보며 내심 고소(苦笑)를 금치 못했다. "소향, 그렇게 나의 허리를 죄다간 나의 뼈가 모조리 부러져 버리겠다." 황보성운의 말에 소향은 깜짝 놀라며 눈을 반짝 떴다. 그러자 황보성운과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자신과 황보성운은 암반 가운데 내려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여전히 황보성운의 몸에 매달린 채 두려움에 질린 음성으로 물었다. "부…… 분명…… 여긴 허공이 아니죠?" "이미 바닥으로 내려왔어. 그건 그렇고, 숨 좀 쉬게 나좀 풀어주지?" 소향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얼굴을 가볍게 붉혔다. 그리고 아쉬운 듯이 황보성운의 품을 빠져나왔다. 도화빛으로 가볍게 물든 소향을 바라보며 황보성운은 약간 장난기 서린 어투로 입을 열었다. "후후후…… 나의 품이 그렇게 좋다면 계속 안겨 있어도 무방해." 소향은 부끄러움에 목덜미까지 온통 도화빛으로 빨갛게 물들어버렸다. 그리고 득달처럼 달려들어 백옥같은 두 손으로 앙증맞게 황보성운의 가슴을 쳤다. "바람둥이……!" 소향의 말에 황보성운은 호쾌한 듯 한 손으로 소향을 가리키며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바람둥이라니…… 나는 소향이라는 여자 외에는 바람을 피워 본 적이 없는데…… 이거야 원, 참……" 이때였다. 암반 뒤의 울창한 잡목림 속에서 흉흉(凶凶)하기 짝이 없는 음침한 괴소가 울려오는 것이 아닌가? "카하하…… 크크크……" 동시에 뼈를 깎을 듯한 살기가 갈기갈기 뻗쳐나왔다. "크흐흐흐…… 꽤나 예쁘게 생겨먹은 계집이로군." "소꼽장난 하는 모습이 정말 가관이야. 크크크……" 순간, 황보성운은 그 힘차게 뻗은 검미(劍眉)를 꿈틀거렸다. 그리고 예의 그 음침한 괴소가 울려오는 숲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나직하게 소리쳤다. "누구요?" "클클클…… 크카카……" 그러자 전신 모골을 뽑아 챌 듯한 음침한 괴소를 흘리며 잡목숲을 헤치고 두 명의 인영(人影)이 황보성운과 삼 장여를 격하고 날아내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칠흑빛 흑의장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대략 사십대(四十代)의 중년인으로 보였다. 또한 갈기갈기 찢겨져 나오는 음침한 눈빛으로 보아 심성이 교활하고 악독하기 그지없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황보성운은 잠시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괴소를 날리고 있는 그들의 흉악한 몰골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포권지례(抱拳之禮)를 갖추었다. "실례하겠소. 조금 전 우리의 귀를 시끄럽게 오염시킨 분이 노형들이시오?" 그러자 한 흑의(黑衣)장한이 뼈를 깎을 듯 냉랭히 코웃음을 치면서 차갑게 대답하였다. "그렇다, 애송아! 네 계집년을 입에 올려 불쾌하냐?" 황보성운의 눈썹이 용꼬리처럼 꿈틀거렸다. 황보성운이 선을 긋듯 냉막하게 말했다. "친구, 당신은 항상 입에 오물을 바르고 다니오?" "크흐흐…… 애송이 놈, 네놈의 간덩이는 태산이라도 삶아먹었느냐? 함부로 노호령(怒虎領)에 들어와 미친 개수작을 떨다니…… 네놈을 갈기갈기 찢여 죽여주마. 크흐흐……" 한 흑의장한이 말을 계속하는 동안에도 옆에 있는 또 다른 흑의장한은 등신처럼 히죽 웃으며 음탕한 눈을 번득거렸다. 그는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소향의 전신을 한 차례 쓸더니 침을 한 자나 흘리며 구접스럽게 입을 열었다. "키히히…… 저 계집의 미모는 대단하니 한 번쯤 주물럭 떡을 만든 후에 죽일 수도 있지…… 히히히" 황보성운과 소향은 이들의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자태에 그만 분기가 치솟아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황보성운은 서릿발이 뻗치듯 냉랭하게 냉소를 날렸다. "흐흣, 내 처음 강호에 나와 너희들과 같은 추잡한 무리들을 만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애송아?" "클클클…… 저 계집년이 지금 몸이 달아 이 어른을 뜨겁게 기다리고 있어. 애송이 놈, 어서 목을 길게 빼고 뒈질 준비나 해라." 황보성운은 이 말에 드디어 꾹꾹 눌러 참고있던 분노를 터뜨렸다.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는 벌레같은 작자들이로고! 내 너희들에게 함부로 사람을 농락하는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마." 그러자 한 장한이 찢어질 듯이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대뜸 일장(一掌)을 후려쳐왔다. "애송이! 구천은 바로 문 밖이닷!" 순간, 그 장한의 흉갈과 함께 노도와 같은 경풍이 몰아쳐 왔다. 허나, 황보성운은 시종 태연자약했다. 그는 기실 이미 현무신공을 전신으로 운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경풍이 한 자 앞으로 다가왔을 때까지도 그는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순간, "앗!" 소향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또한 예의 그 장력을 시출한 장한도 흡족한 괴소를 흉흉히 날렸다. "흐흐흐…… 이놈이 죽을려고 작정을 했구나!" 허나, 그 장력이 황보성운의 몸에 막 격중되려는 순간, 황보성운의 손은 보이지 않는 신쾌무비한 속도로 뻗어나갔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짤막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튀어나왔다. "화(化)!" 다음 순간, 노도처럼 밀려오던 장풍이 어디로 갔는지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중인들이 경악성을 터뜨리기도 전, 그 찰나지간에 금석을 양단시키듯 결연한 어조가 황보성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진(震)!" 순간, 그의 장심으로부터 광풍폭우처럼 뇌성벽력이 떨어지며 천지개벽을 방불케하는 위세가 떨쳐지는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쿠르릉----! "크아---- 악!" 날개가 꺾인 흉조처럼 모골이 쭈삣거리게 할 괴성을 지르며 장한은 십여 장 밖으로 튕겨나갔다. 장한은 온통 전신이 시커멓게 불타 즉사해 버렸다. 나머지 흑의장한은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동료가 황천길로 가버리자 안색이 시체처럼 푸르딩딩하게 변해버렸다. "사…… 사술이닷!" 황보성운 역시 현무신공의 가히 가공스러운 위력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럴 수가? 겨우 삼성 밖에 쓰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이때 공포에 질려있던 흑의장한이 득달같이 내달으며 창자를 쥐어짜는 듯한 처절한 귀성을 터뜨렸다. "이 갈가리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비겁하게 사술(邪術) 따위를 쓰다니……" 흑의장한은 처절한 귀성(鬼聲)을 내지르더니 원독에 찬 눈으로 살기등등히 황보성운을 노려보았다. "부뚜막에서 밥 빌어먹는 거러지가 어찌 정종내공심법(正宗內功心法)을 알랴. 부지깽이로 네놈의 골통을 두드려 식견부족을 통탄이나 하도록 해라." 이에 예의 그 흑의장한은 이를 부러지도록 부드득 갈면서 벼락치듯이 혼신의 힘을 다해 일 장을 내뻗어왔다. "듣기 싫다, 애송아. 뒈져라!" 황보성운은 장한을 유리가 깨어질 듯 싸늘하게 노려보며 입가로 냉소를 날렸다. "가려는 자(者)에게는 항상 지옥문은 열려있다." 짤막하게 말을 자른 후 황보성운은 왼손을 교묘하게 뒤집더니 한 구절을 천천히 내뱉았다. "현(玄)---- 천(天)---- 낙(落)---- 혼(魂)----!" 드디어 그 가공무쌍할 현무구장(玄武九掌)의 제 일식(第一式) 현천낙혼이 전개되고 만 것이었다. 순간, 쿠르릉---- 천지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으---- 아---- 악!" 흑의장한이 실 끊어진 연처럼 이십여 장을 퉁겨져갔다. 다음 순간, 쿵! 장한의 시신이 땅 속으로 반쯤이나 깊숙이 박혀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미 그 장한의 전신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터져나오고 피가 흘러내려 하나의 핏덩이로 변해져 있을 뿐이었다. 죽음의 귀성을 부르짖던 순간이 사그라져버린 지금 납덩이같은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황보성운은 피비린내가 역하게 치밀어오자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 보았다. (큰소리 치는 것으로 보아 제법 한수 뻗을 자인 줄 알았더니…… 겨우 나의 이성 공력조차 받아내지 못하다니…… 허나, 가히 기분이 좋지 않구나. 강호초출(江湖初出)에 살인이라니……) 허나 황보성운이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실상 현무신공은 천하의 신공 중에 최고로 꼽을 수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황보성운의 지금 본신 내공수위는 천년극음삼왕과 만년화룡내단, 그리고 청홍의 내단과 피 등의 복용으로 인해 이미 이백 년 이상이었다. 그러하니 천하의 그 누가 과연 황보성운의 일 장을 받아낼 수 있단 말인가? 조금 전 황보성운에게 격살된 자들도 강호에서는 한 가닥 흉명(凶名)을 떨치던 자들이었다. 허나, 황보성운에 비하면 달빛에 반딧불이니 조족지혈(鳥足之血)도 안되는 자들이었다. 제 10 장 처음 펼친 武功 1 이때 황보성운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으---- 음! 좀 전에 저자가 이곳을 노호령이라 했었지. 그렇다면 필시 저들 외에도 또 다른 일당들이 있을 것이다!) 내심 생각을 굴린 황보성운은 공포에 떨며 시신을 쳐다보고 있는 소향을 바라보았다. "소향!" 소향은 황보성운의 웅혼한 외침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황보성운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소향은 몸을 으스스 떨며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공자님, 그냥 가는 것이 어때요? 왠지 무서운 느낌이 들어서……" 소향은 말 끝을 흐렸다. 황보성운의 빙그레 웃고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왜? 또 누가 소향을 잡으려들까봐?" 그 말에 소향의 굳었던 표정이 이내 풀리더니 삐죽 웃으며 교성을 터뜨렸다. "왜요? 나를 빼앗길까봐 겁났었어요? 정말 이젠 기고만장했군요?" 그녀의 가볍게 삐죽거리는 말투에 황보성운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다시 내 품이 그리운 게로군. 자, 이리 뛰어들라구! 괜찮아." 황보성운은 엄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러자 황보성운의 말에 소향은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샐쭉하고 토라진 표정으로 돌아섰다. 황보성운은 천천히 소향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옥수(玉手)를 쥐고 쾌청하게 웃어젖혔다. 그리곤 가볍게 정색을 하며 한 손을 앞으로 들이밀며 정중하게 말을 했다. "이젠 가시지요, 아가씨." "몰라요!"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은 다시 엉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노호령 기슭을 타고 날아갔다. …… 약 반식경이나 흘렀을까? 황보성운의 눈에 깎아지른 절곡이 나타났다. 황보성운은 소향을 끌어안은 채 절곡의 곡구(谷口)로 신형을 날렸다. 순간, 그곳에는 수백 장의 암벽 밑으로 한 채의 거대한 도관(道官)이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데, 왠지 모르게 그 도관으로부터 암암리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살기(殺氣)가 뻗쳐 나오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곡구의 한 암석 뒤로 홀연히 숨어내렸다. 소향은 황보성운의 품에서 빠져 나오더니 도관으로부터 쏟아져 오는 살기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아요." 소향의 잔뜩 찌푸린 눈살을 보며 황보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 곳이 아까 그놈들의 근거지(根據地)인지도 모르겠군." 다음 순간, 황보성운은 소향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그림자도 없이 쾌속전륜하게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심장이 얼어붙게할 정도로 냉혹한 살기가 뼈를 얼릴 듯 뻗쳐나오는 도관 안쪽으로 날아 들어갔다. 일순, 황보성운은 도관 한구석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를 발견하고 나무 위로 은밀히 날아내렸다. 그리고 그는 주위를 급속히 휘둘러 보았다. 이때 도관 쪽으로부터 두 명의 장한이 나타났다. 그들은 터벅거리는 걸음걸이로 서로 무어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흐흐흐…… 당주님께서 이번에 이 독공(毒功)을 연성하시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 되시는 것이지." "아무렴, 여부가 있나. 그렇게 되면 우리 적양관(赤陽關)이 천하를 제패할 수 있게 되지." 장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실제로 일어난 일인 듯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장한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며 내뱉았다. "여하튼, 우리는 물샐 틈 없이 철저히 경비하는 것이 우리 일이야." 한 흑의장한의 말에 다른 장한은 쓸데없다는 듯이 입가에 냉소를 날렸다. "흥, 젠장! 십 년 동안 쥐새끼 한 마리 올라오지 않았는데, 오늘 따라 어떤 자식이 올 리가 있나?" "그래도 철저히 해두는 것이 제일이야." 장한의 말에 다른 장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무심히 끄덕거렸다. 이때 문득, 한 장한이 무엇이 생각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한데, 밖으로 나간 조(曹) 일곱째와 강(康) 열째는 왜 감감 무소식이지?" 다른 장한도 의아한 기색을 띄웠다. "글쎄……? 그 녀석들 또 산을 내려가서 전처럼 그 지랄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군." 그러자 옆의 장한이 힐쭉거리며 입가를 삐죽거렸다. "흐흐흐…… 조 일곱째는 너무 밝혀서 탈이야." 나뭇가지 위에 숨어 두 장한들의 말을 엿듣고 있던 황보성운은 입가에 간간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바로 눈 앞에 있는 나뭇잎 두 개를 따내렸다. 그리고 내공을 운기하여 나뭇잎을 장한들에게 날렸다. 적엽비화(摘葉飛花)! 두 개의 나뭇잎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날아가더니 두 장한의 몸에 적중되었다. 순간, 두 장한은 마혈(麻穴)이 찍힌 채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한 놈은 흉칙하게 웃고 있는 주름살이 그대로 잡혀 있었고, 또 한 놈은 눈을 치뜨고 입술을 한자나 빼낸 채 굳어버린 가관의 모습이었다. 황보성운은 나뭇잎을 뿌림과 동시에 그들 앞으로 유령처럼 현신(現身)했다. 두 장한은 난데없이 전신이 굳어버리고, 자신들의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자 소스라치게 놀라 경악성을 터뜨렸다. "어---- 엇!" 그러자 황보성운은 신쾌무비하기 짝이 없는 속도로 두 장한의 아혈을 짚어버렸다. 그리고 얼음가루가 풀풀 날릴 듯한 냉막한 시선으로 두 장한을 내려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허튼 수작을 하면 이 자리에서 황천으로 보내주겠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추호도 거짓없이 대답하면 네놈들의 목숨만은 붙여주마." 두 장한은 대경실색하며 화등잔처럼 눈을 휘둥그래 뜨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황보성운은 칼 끝이 뻗칠 듯 냉막한 시선으로 두 장한을 쏘아보다가 손가락을 가볍게 퉁겨 아혈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서릿발이 내리 뻗칠 듯한 말투로 물었다. "이 적양관의 관주(關主)가 무공을 연마하는 곳이 어디냐?" 그러자 두 장한은 오뉴월에 서리를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모…… 모릅…… 니다." "모른다고? 이놈들이 아직 본인의 뜨거운 맛을 보지 못했구나." 황보성운은 짐짓 살기를 가닥가닥 뿜어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소매를 가볍게 흔들었다. 순간, 그들과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있는 둥근 바위가 스르르 모랫가루로 변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서릿발같은 냉소를 날리며 나직이 내뱉았다. "허튼 수작을 계속한다면 네놈들의 머리는 바로 저것과 같이 될 것이다." 장한들은 등골로 스며드는 공포와 전율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셋을 셀 동안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너희들이 더 잘 알 것이다." 황보성운은 냉막하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나." 황보성운의 입에서 목소리가 떨어지자 장한들의 등 뒤로 식은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둘!" 황보성운은 냉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장한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사색(死色)이 되어버렸다. 드디어 황보성운의 입술에서 운명의 소리가 떨어져 나왔다. "세……" 순간, 한 장한이 사색이 된 얼굴로 부르짖었다. "자…… 잠깐, 말하겠소." 그러자 옆 장한이 격분한 어조로 내뱉았다. "호(胡) 셋째 너 미쳤느냐? 관주님을 배반……" 순간 황보성운의 발이 언뜻하는 듯하더니 장한의 입에서 비명이 울려나왔다. "으---- 윽!" 동시에 그는 삼사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의 입 속에서 선혈과 이빨이 터져나왔다. "네놈은 아가리를 닥치고 있어라!" 황보성운의 입에서 노갈이 터져나왔다. 그는 계속 입을 열었다. "다시 입을 열면 아가리를 야차처럼 찢어주마." 장한은 입을 두 손으로 막더니 한없이 두려운 눈길로 황보성운의 눈만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황보성운은 고개를 돌려 다른 장한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너는 꽤 사태를 판단할 줄 아는 자로구나. 자 어서 말해라. 관주는 어디에 있지?" 그러자 장한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 관주님은…… 지금 청운각(靑雲閣)에 계십니다." "청운각? 청운각은 어디 있느냐?" 황보성운은 급촉히 물었다. 장한은 떨리는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오십여 장 정도 가면……" "후후후…… 좋다. 너의 목숨은 살려주마." 이때 옆에 있던 장한이 노갈을 터뜨렸다. "호 셋째, 네놈은 관주님께 처참한 독형을 당할 것……" 순간, 황보성운의 발이 장한의 가슴을 격타했다. "악!" 장한은 다시 오륙 장 정도 나가 떨어지며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잡았다. "네놈의 입술이 네놈을 죽일 것이다. 그래도 계속 나불거리겠느냐?" 장한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실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광경이었다. 황보성운은 장한을 한참 노려보더니 히쭉 웃었다. "후후후…… 네놈 친구 덕분에 네놈의 목숨이 무사한 줄 알아라!" 황보성운은 다른 장한을 돌아보며 나직이 말을 뱉았다. "자, 그럼 친구들 몇 시진 푹 자도록 하시지." 말을 마친 황보성운은 가볍게 두 장한의 수혈을 쳤다. 그러자, "음……!" 장한들은 순식간에 깊은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황보성운은 다시 신쾌하게 그들을 구석으로 치운 뒤 나무 위로 신형(身形)을 날렸다. 그리고 나무 위에 있는 소향에게 말했다. "소향, 너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러자 소향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황보성운의 옷소매를 꽉 부여잡으며 하소연하는 눈길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안돼요. 공자님, 저는 죽어도 공자님 곁을 떠날 수 없어요." 그러자 황보성운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소향, 나는 너의 곁을 떠나겠다는 것이 아냐. 같이 가면 내가 불편하고, 또한 네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소향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떼었다. "공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소향도 어쩔 수는 없지만……" 소향은 말 끝을 흐렸다. 황보성운은 빙그레 웃으며 소향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나직이 말했다. "소향, 걱정하지 마라. 곧 돌아올테니까." 소향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그럼 갔다 올테니까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라." 황보성운은 말을 마치고 소향의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떼며 신형을 날렸다. 휘---- 익! 그러자 소향은 다급히 소리쳤다. "공자님, 조심하세요." 황보성운의 모습은 소향의 시야에서 이내 사라져 버렸다. 허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은은히 들려왔다. "하하! 소향, 걱정마라……" 2 어떤 고루 전각, 이곳저곳의 담장 벽이 장구한 세월을 말해주듯 무너져 있고, 그 사이 사이로 울울창창한 잡초들이 쭈뼛쭈뼛하게 올라 서있다. 또한 전각의 기와들은 듬성듬성 깨져 떨어져 내려 있고 금방 꺼져버릴 듯 전혀 손을 보이지 않은 그 지붕 위로 억센 풀꽃들이 뻗 어올라 음산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또한 전각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백골(白骨)들은 한때 참혹무비했을 살상의 혈거를 대변해 준다. 게다가 그 괴 전각 안으로부터는 암암리에 등골이 오싹오싹해지는 음충맞기 짝이 없는 살기(殺氣)가 서리서리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이 음충맞은 고루 전각의 지붕 위로 쾌속무비한 한 줄기 인영이 섬전(閃電)처럼 쏘아왔다. 그 인영은 지붕 위로 한점 먼지처럼 사뿐히 내려섰다. 그는 준수미려하기 그지없는 청년이었다. 대체 이런 괴기스런 현장으로 내려선 자는 누구란 말인가? 바로 황보성운이었다. (음, 이 곳이 바로 청운각인 모양이로군.) 황보성운은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가 가볍게 전각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 그는 한 줄기 빗살처럼 청운각 안쪽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러자 음침하고 금방이라도 귀곡성이 구석에서 터져나올 듯한 낭하가 나타났다. "정말 기분 나쁘군!" 황보성운은 나직하게 내뱉은 뒤 낭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삐---- 극! 실로 말못할 정도로 뼈를 깎는 듯한 기분 나쁜 음향이 들렸다. 황보성운은 마음을 가볍게 진정시킨 뒤 발걸음을 옮겼다. 삐---- 극---- 삐---- 삐---- 이---- 익! 삐---- 삐---- 극! 기분 나쁜 음향은 낭하를 길게 울리며 소름 끼칠 정도로 계속 들려왔다. 그렇게 음침한 회랑을 얼마나 걸었을까? 그의 앞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그 문 앞에는 괴이한 그림들이 그려져 금방 튀어나올 듯했다. 또한, 그곳으로부터 사람의 숨을 턱턱 막히게하는 살기가 갈가리 뻗치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으---- 음! 뻗어나오는 이 살기(殺氣)! 왠지 심상치가 않은 느낌이야.) 황보성운은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열려다가 갑자기 손을 멈췄다. 다음 순간, 그는 손톱으로 문을 살짝 긁은 뒤 코에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으---- 음! 지독한 독(毒)이로군." 황보성운은 나직이 뇌까렸다. 기실 이미 황보성운은 만독진해를 독파했지 않았는가! 비록 그곳의 독공을 연마하진 못했지만 독에 대한 그의 식견은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황보성운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음, 보아하니 이 문에 발라진 것은 천하(天下) 십대기독(十大奇毒) 중의 하나인 갈산홍(蝎散紅)같구나!) 이렇게 생각한 황보성운은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괴이한 일이다. 이런 조용한 도관에 천하 십대극독 중의 하나인 갈산홍을 쓰는 자가 있다니…… 허나, 이 정도로 나 황보성운을 저지할 수는 없지.) 황보성운이 가볍게 소매를 움직이는 듯하자 문이 빠끔히 열렸다. 동시에 그는 한 가닥 연기처럼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실로 혀를 한 자나 내어뽑고 볼 경악할 신법(身法)이었다. 한데, 그가 그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한 줄기 강맹무비한 경풍이 노도처럼 그의 전신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허나, 황보성운은 예측이나 했다는 듯 어깨를 움찔하더니 털 끝을 움직이듯 간단하게 그들의 공격을 피해 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자신을 중앙으로 해서 세 명의 노인이 품(品)자 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음침하게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노인이 두 눈에 살기를 띄우며 물었다. "네놈은 어떻게 이곳에 들어 왔느냐?" 황보성운은 묵묵부답인 채 태연한 표정으로 노인들을 훑어 보았다. 그들의 이마에는 태양혈이 불끈 솟아오르고 두 눈에는 신광이 쏟아지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모두 절정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때 황보성운의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방약무인한 태도에 황의노인은 격분한 듯 노갈을 터뜨렸다. "이놈,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대체 네놈은 어떻게 왔느냔 말이다." 그제서야 황보성운은 그 황의노인을 흘낏 바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어떻게 왔느냐고? 그거야 당연하지 않겠소. 이 두 다리로 걸어왔소." "뭣이?" 황의노인은 노기충천(怒氣沖天)하여 수염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놈의 애송이가 감히 노부를 희롱하다니 지옥에 가고싶어 환장을 하는구나." 황의노인은 분기로 온통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대뜸 강맹한 일장(一掌)의 살초(殺招)를 격출했다. 순간, 쒸---- 익! 싸늘한 파공성이 울렸다. 허나 황보성운은 여전히 여유작작한 미소를 띄우며 가볍게 소매를 흔들었다. 다음 순간 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가? 노도처럼 격출돼 오던 장풍이 한 줄기 하늘하늘한 미풍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미풍은 가볍게 황보성운의 장삼을 흔들 뿐이었다. 황의노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내 혼신의 살초를 무산시키다니! 이제보니…… 보통 무서운 놈이 아니구나.) 이때 황보성운이 놀라는 세 명의 노인을 바라보며 쾌소(快笑)를 터뜨렸다. "하하하...... 나는 그대들과 별로 다투고 싶지 않소. 단지, 당신네들의 주인 적양관주(赤陽關主)에게 볼 일이 있을 뿐이오." 황보성운의 말을 들은 세 명의 노인은 대경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 뒤에 있는 석문(石門)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네…… 네놈이 과연…… 들어갈 수 있을 줄 아느냐?" 황보성운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제보니 저 석문 안에 그 노마가 있는 모양이로군.) 황보성운은 흔쾌하게 웃으며 세 노인을 쳐다보았다. "하하하핫…… 당신들은 바로 앞서 이미 그 강함과 약함을 보지 않았소." 이때 세 노인 중 흑의노인이 무엇이 생각난 듯 음침한 괴소를 날렸다. "흐흐흐…… 애송아, 네놈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여대든 저문을 통해 들어선 이상 너의 목숨은 끝난 것이다. 크흐흐……" 이어 나머지 두 노인도 만면에 희색을 띄웠다. 허나 황보성운은 대뜸 소리쳤다. "하하핫…… 그대들은 그 시시한 갈산홍(蝎散紅)을 믿고 큰소리인가?" 순간, 세 노인의 얼굴은 경악으로 아귀처럼 일그러져 버렸다. "네…… 네놈이 어찌…… 그 독(毒)을……" "하하하…… 그 독은 내가 두 살 때부터 갖고 놀던 독인데, 그런 독 따위로 나를 겁주려하다니…… 하하하……" 도대체 세 노인은 황보성운의 신분이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 이놈의 정체는? 대체……) 이때 황보성운의 웅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 이제 나는 안으로 들어가겠소." 그리고 그는 천천히 석문(石門) 앞으로 다가갔다. 순간, 세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멈춰라!" 그리고 그들은 눈짓을 교환한 뒤 일제히 격살할 듯 쌍장을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혼신의 진력으로 장풍을 격출시켰다. 강맹무비한 세 줄기의 장력이 황보성운의 전신으로 뻗어왔다. 순간, 황보성운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화(化)----!" 다음 순간, 황보성운의 전신으로 덮쳐오던 장력이 돌연 방향을 바꾸더니 세 노인의 전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 무슨 기이한 수법이란 말인가? 그렇다. 바로 이것은 현무신공의 화자결(化字訣)로서 극치에 이른 이화접목(以花接木)의 수법이었다. "앗----!" 세 노인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수법에 흔히 달아날 듯 대경했다. 허나, 그들이 미처 장력을 거두기도 전에 그 장력은 그들의 전신을 격타해 버렸다. "어이쿠!" "큭!" "칵!" 이어 그들의 몸은 삼사 장 밖으로 퉁겨나가 버렸다. 분명히 자신들은 황보성운을 공격했는데 어찌하여 스스로를 치는 결과를 빚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실상 그들은 지고무상(至高無上)한 현무신공의 위력을 알 리 없었다. 하여 그들은 서로의 가슴과 얼굴 등을 서로 치고 받은 것이었다. 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황보성운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꺼냈다. "몸이 편치 않으실텐데 수고스럽게 일어나실 필요없이 푹 쉬시도록 하시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세 명의 노인들은 수혈이 찍혀 소리없이 고꾸라졌다. 실상 이들 세 노인도 강호에서 기치를 높이 드는 일류고수였다. 허나 황보성운에 비하면 너무나 큰 차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손 한 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그들의 모습을 힐끗 보더니 이내 석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석문을 밀었다. 한데, 석문은 태산이라도 되는 듯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으---- 응?" 황보성운은 예상 외의 일에 눈썹을 짙게 찌푸렸다. 그는 내공을 운기하여 칠성의 공력으로 밀어보았다. 그래도 석문은 끄떡도 하지않는 것이었다. "으---- 음! 이 석문은 최소한 만근 이상의 돌로 이루어져 있구나." 황보성운은 문으로부터 몇 걸음 후퇴했다. 그리고 그는 현무신공을 운기했다. 이윽고 황보성운의 입에서 웅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파(破)----!" 순간 천지를 깨뜨릴 듯한 광풍노도의 격풍이 황보성운의 몸으로 부터 석문으로 강맹무비하게 격출되었다. 다음 순간, 꽈르르르릉----! 지축이 흔들릴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몇만 근의 석문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버렸다. 잠시 후 돌 가루가 가라앉은 그곳에는 커다란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지체없이 그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하나의 석실이었다. 석굴 안에 들어서 황보성운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찰나, 그는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아…… 아니…… 저…… 저것은……?" 제 11 장 赤陽官主 1 석실(石室) 안, 그 곳은 칠흑처럼 어둠이 내려 있었다. 또한 그 어둠 속에는 자욱한 백무가 휩싸여 있었다. 지척조차 분간할 수 없는 백무(白霧), 그 백무 속에 휩싸여 석실 벽은 물방울이 흥건히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물방울들이 하나 둘 떨어질 때마다, 살을 저밀 듯한 살기가 맹위를 떨치며 살갗으로 파고 들었다. 또한 그 백무 속에서는 괴이한 악취가 코를 잡아 비틀 듯이 풍겨왔다. 실로 그 악취는 사람의 오장육부(五臟六腑)를 뒤집을 듯 지독하게 역했다. 일순 황보성운은 별안간 몸을 우뚝 세우며 즉각 경악하는 빛을 나타냈다. 그의 얼굴 빛은 침중하게 굳어졌고 입은 한일자로 굳게 다물려져 버렸다. 지금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피비린내 나는 살기의 육감이 그의 전신을 잡아 흔들 듯 밀려온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온통 얼굴을 찌푸리며 나직이 내뱉았다. "으음! 지독한 이 살기와 악취…… 가히 뼈를 얼릴 듯하구나." 그는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겨갔다. 헌데, 이때였다. 느닷없이 안쪽으로부터 사람의 전신 모골을 뽑아버릴 듯한 말할 수 없이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후르…… 르……! 훅…… 훅---- 뿌글…… 뿌…… 글…… 뿌글…… 뿍! 그 소리는 흡사 귀신이 우는 소리 같았고, 인피고(人皮鼓)를 두드리는 소리처럼 사람의 뇌수를 파낼 듯하게 들려왔다. 도대체 으스스하고 종잡을 수 없는 소리…… 허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점점 가까이서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황보성운은 야릇하게 긴장이 되어 마른 침을 삼켰다. (실로 사람의 전신 모골을 후벼파 애간장을 태울 듯한 소리로군.) 황보성운이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옮길 때마다 그 소리는 푸---- 푸---- 땅 속에서 울려오는 듯 귓속을 후벼팠다. 이러한 소리와 지독한 백무는 뭉실뭉실하게 어울려 일종의 환몽(幻夢) 상태에 빠져버린 듯 사람의 혼을 뽑아낼 듯했다. "……!" 황보성운은 뒷골로 스며드는 냉막한 살기에 전신 모골이 거꾸로 쭈삣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전신에 칼 끝과도 같은 긴장을 세우면서 안력을 돋우고 안쪽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갔다. (괴기스럽기 짝이 없는 곳이로군. 대체 그 작자는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황보성운은 짙은 의혹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때였다. 그의 앞에 괴이한 홍광(紅光)이 흐늘흐늘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엇! 저것이 무엇일까?" 황보성운은 뒷골을 도려내는 듯한 싸늘한 느낌을 받으며 황급히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주위에 뭉실뭉실하게 흐르는 백무 속에 흐늘흐늘 시야가 흔들려서인지, 석실의 괴기스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도대체 그 홍광은 흡사 귀신이 장난을 하고 있는 듯했다. 사람이 귀신에게 홀리면 헛것을 본다든가? 그러나 헛것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홍광이었다. 황보성운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홍광을 주시했다. 그러자 그 홍광의 형체가 뚜렷이 보였다. 한 무리의 은은하고 괴기스럽기 짝이 없는 홍광은 끊임없이 오르려는 듯 위로 흐늘흐늘 거렸으나, 그 부근에서 너울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도시 종잡을 수 없는 괴이한 소리가 푸---- 푸---- 하고 들려오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열심히 추정을 해보고 생각을 해보았으나, 도시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하는 요물일까, 황천에 온 것만 같구나." 후…… 후…… 르…… 륵…… 훅! 뿌글…… 뿌…… 글…… 뿍! 도시 어지럽게 울려오는 소리는 음산하게 홍광과 어울려 구천의 아귀지옥 속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입을 굳게 다물고 손을 꽉 쥔 뒤, 마음을 다잡고 감연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그러자 괴기스럽기 짝이 없이 너울거리며 현혹시키던 홍광의 정체가 점차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뱀의 혓바닥처럼 온통 사기(邪氣)를 으스스하게 내뿜으며 날름거리고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불꽃은 거대한 청동화로에서 원독에 가득찬 듯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헌데, 그 청동화로는 화로라기 보다는 얼핏 보기에도 하나의 두개골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천 만의 고루( ��)를 집어 삼켰을 듯한 아수라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바로 그 아수라의 아가리를 통하여 불길이 구천(九泉)의 그것처럼 치솟고 있는 것이었다. "으---- 욱!" 황보성운은 잔혹하기 짝이 없는 살풍경에 나직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을 다가가 살펴 보았다. 그러자 지옥의 불길처럼 날름거리며 솟구치는 화로 위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헌데 그 가마솥은 어찌나 크고 두꺼운지 입을 딱 벌릴 정도였다. 가마솥의 크기는 가히, 송아지를 통째로 삶을 만했고, 그 두께만도 두 치가 넘어 보였다. 게다가 그 가마솥은 거무튀튀하게 그을러져 흉칙했으며, 그 옆면에 지옥도가 부조로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지금 그 거대한 가마솥 속에는 유령처럼 흐늘흐늘 김이 올라 자욱한 백무로 석실을 기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실로 지옥을 방불케 하는 으시시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어디서 아수라나 야차같은 흉악한 괴물이 클클거리며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황보성운은 전신 모골이 만년빙 속에 들어간 듯 송연해짐을 금할 수 없었다. (음, 저곳으로부터 그 백무가 뿜어져 올랐었나 보군!) 황보성운은 어깨를 몇 차례나 추스르고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순간, "엇!" 황보성운은 외마디 경악성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우뚝 말뚝처럼 서 버리고 말았다. 화로 뒤에는 온통 악귀들이 새겨져 있는 석탁이 있었다. 헌데, 이것은 또 무슨 해괴한 일인가? 놀랍게도 그 석탁 위에는 절세 미모의 여인이 누워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나(全裸)가 아닌가? 미(美)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여인(女人)이었다. 십구 세 정도 되었을까? 백옥같은 살결이 뇌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허나, 오히려 그녀의 절세의 미태는 석실의 살풍경(殺風景)과 어울려 뼛골을 얼려 버릴 듯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백옥같이 빛나는 희디 흰 살결이 흡사 유령처럼 번득이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나체 여인 옆에는 한 명의 흉악하게 일그러진 백발괴인이 정좌를 한 채 운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전신을 타고 암암리에 갈기갈기 냉혹무비한 살기가 내뻗치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실로 숨막힐 듯한 살기로구나.) 황보성운은 전신으로 휩쓸고 지나가는 공포를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괴인의 몰골을 예의 주시했다. 백발괴인. 진정 그의 모습이란 이 세상 속에서 짝을 찾을 수 없을 지경으로 기괴하고 흉칙했다. 살기가 갈기갈기 뻗쳐나올 듯 퍼렇게 움푹 꺼져 들어간 두 눈 언저리, 괴기스럽게 휘돌아 엉켜 허리로 늘어져내린 백발, 그리고 피 한 방울 없을 듯 밀랍처럼 얼음가루를 풀풀 날릴 듯한 얼굴. 또한 그 얼굴 위로 흉흉(凶凶)하게 짓뭉개져 씰룩거리는 흉터 등…… 실로 피도 없고, 표정도 없고 마음도 없는 듯 마치, 지옥에서 온 색혼사자(索魂使者)와 같은 모습이었다. 실로, 그의 몰골은 살을 저미는 듯한 주위의 풍경과 어울려 무시무시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완전히 석실 안은 무한한 공포의 도가니로 빠져드는 사악한 그림자들의 놀음판이었다. 헌데, 이때 더욱 기괴하게도 그 괴인의 이마 위에는 동전만한 붉 은 반점이 떠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뼛골을 얼려 부술 듯한 사기(邪氣)가 울컥울컥 뻗어나오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살기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순간 그의 등줄기로 쭈뼛쭈뼛 소름이 돋치며 한 줄기 싸늘한 식은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허나, 운공 도중인 그 괴인은 밀랍처럼 싸늘한 얼굴로 죽은 시체처럼 운공의 막바지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음 순간 석실 속을 가득 메우고 흐늘거리던 백무가 서서히 그의 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헌데, 더욱 괴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점차로 그의 코 속으로 백무가 빨려 들어가자 그의 이마에 붉은 반점이 더욱 새빨갛게 변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반점으로부터 토해버릴 듯한 구역질을 일으키는 사기가 갈기갈기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대체, 저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황보성운은 가슴 깊이 냉기 한 모금을 들이쉬며 손에 땀을 쥐었다. 그리고 냉막한 눈초리로 그 괴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괴인의 표정은 백합처럼 희고 엄숙하며 싸늘하여 마치 분묘 속에서 일어난 시체, 바로 그것이었다. 이때 문득 황보성운의 눈에 자신의 백의가 점차 검게 변해가는 모습이 보였다. "엇! 이런!" 황보성운은 대경실색하여 경악성을 내질렀다. (지…… 지독한 독무(毒霧)다. 도대체 저 화로에서 끓는 것이 무 엇이길래 나의 자연적인 호신강기마저 침범한단 말인가?) 황보성운은 다급히 현무신공을 전신에 운기했다. 그리고 화로 곁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그곳으로부터 땅을 두드리는 듯 괴상한 울부짖음같은 소리가 등골이 섬뜩하게 하는 핏빛 불꽃과 함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가마솥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곳은 시커먼 빛깔의 끈적끈적해 보이는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 오르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가마솥 안을 들여다 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안색이 밀랍처럼 하얗게 굳어버렸다. "그…… 그렇구나! 이제보니 이것은 구천현독액(九天玄毒液)이구나!" 황보성운은 대경한 나머지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며 전신을 으스스 떨었다. 정지된 침묵의 사태에 휩쓸려 앉아 운공하고 있는 괴노인, 그리고 괴기스런 화로와 날름거리는 불꽃, 심장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딱딱하고 음산한 분위기, 그리고 구천현독액. 이제서야 황보성운은 그런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음! 이자는 이제보니 극혈천독공을 연마하고 있었구나." 극혈천독공(極血千毒功)----!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만독진해에 수록되어 있는 독랄한 천하삼대독공(天下三大毒功) 중의 하나가 아닌가! 황보성운의 안색은 수시로 급변하고 있었다. (이자가 어찌 만독진해에 적힌 극혈천독공을 알고 있단 말인가? 정말 모를 일이다.) 황보성운은 격통되고 있는 가슴을 억눌렀다. 그리고 흘깃 눈을 돌려 석탁 위의 나녀(裸女)를 바라 보았다. 그녀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이 여인은 극혈천독공의 최후 연마에 필요한 극음진기(極陰眞氣)를 얻기 위해 잡아온 여인일 것이다.) 황보성운은 괴인의 잔악하고 냉혹하기 짝이 없는 행위에 극도의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극혈천독공을 이런 사도적(邪道的)인 방법으로 연마하려 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놈이다." 황보성운은 나직이 억누른 분갈을 터뜨렸다. 헌데 이때, 석실 속의 백무가 엷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괴인의 콧구멍 속으로 마지막 한 모금의 백무가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흠칫 놀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안되겠다. 이놈이 깨어날 시기가 다 되었구나.) 황보성운은 급속히 현무신공을 끌어올렸다. (이자가 무림에 나간다면 엄청난 혈겁이 일어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 이 기회에 이놈을 처치하지 않는다면 필경 큰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헌데 이때, 돌연 백발괴인이 눈을 번쩍 뜨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의 눈에서 뼈를 얼어붙게할 정도로 음산하고 냉혹한 흉광(凶光)이 폭포수처럼 쏘아져나왔다. "엇!" 황보성운은 경악성을 터뜨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저 뼈를 깎아낼 듯한 무시무시한 살기!) 황보성운은 머리칼 하나하나가 거꾸로 삐쭉삐쭉 치뻗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백발괴인은 벌떡 일어서더니 백염을 떨며 미친 듯한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드디어 극혈천독공이 십성(十成)에 이르렀다. 크하하하……" 그의 광소는 석실 벽을 쳐무너뜨릴 듯 울려나왔다. 이때 황보성운은 무겁게 짓눌러오는 살기에, 눈동자로 예리한 광망을 짓쏘아내며 길게 차가운 공기를 들이켰다. 2 지금 이 순간 황보성운은 피할 수 없는 참살적인 사태의 조짐이 무르익으면서 그 시각이 임박해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두 팔을 서서히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상반신을 살짝 굽히며 강렬하게 빛나는 눈초리로 광소를 터뜨리고 있는 괴인을 직시했다. 여전히 석실 안에는 뼈에 스밀 듯 음습한 동굴의 살기가 으스스하게 뻗치며 괴기스러운 소리가 쉴새없이 귀곡성처럼 후훅거리며 들려왔다. 점차 석실 안은 숨막히는 긴장이 팽팽하게 고조되면서 피비린내가 감돌 듯 살벌한 침묵이 내깔렸다. 이때 돌연, 만근같은 침묵을 산산이 깨어 부시면서 한 마디 웅후하고 날카롭기 짝이 없는 외침성이 터져나왔다. "적양관주! 망몽(亡夢)에서 깨어나라! 좋아하기는 아직 이르다. 너는 이곳에서 나에 의해 뼈를 묻을 것이다." 동시에 황보성운은 웅후무비한 일 장을 일갈과 함께 내뻗었다. "진(震)----!" 찰나, 우르르릉----! 뇌성벽력과 함께 광풍노도와 같은 수천의 암경(暗勁)이 폭사되어 흉험한 기세로 적양관주에게 벼락치듯 떨어져갔다. "아…… 앗!" 백발괴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흉악한 얼굴을 시체처럼 푸르딩딩하게 변색시키며 거의 본능적으로 일 장을 펼쳐 마주쳐왔다. 퍼---- 엉! 쌍방의 장력이 장심에서 격출되어 나가자 석실을 요란하게 격타하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다음 순간 황보성운은 몰아쳐 들어오는 괴이한 장력에 가슴에 거대한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둔중하게 일보(一步)를 후퇴했다. 한편 백발괴인은 실 끊어진 연처럼 뒤로 십여 보를 물러나서야 겨우 멈추어 섰다. 그는 겨우 들끓어 오르는 기혈을 억제하며 경악한 표정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백발괴인은 눈썹을 곤두세우고 움푹 패인 안구에 푸른 광망을 번뜩이며 악마의 괴후처럼 사악한 기운이 잔뜩 어린 음성으로 소리쳤다. "네…… 네놈은 누구냐?" 황보성운도 입에 비단폭이 찢겨져 날아갈 듯 냉막한 냉소를 날리며 칼 끝같이 예리하게 말을 잘랐다. "그것은 알 필요 없다. 받아랏!" 이어 황보성운의 입에서 뼈조각처럼 부서진 말이 짤막하게 튀어나왔다. "현---- 천---- 낙---- 혼----!" 백발괴인은 시퍼렇게 깊숙이 들어간 눈에 갈기갈기 살기를 내뿜으며 괴후(傀喉)를 터뜨렸다. "감히 이 노부에게 덤비다니, 이 찢어죽일 애송이 놈!" 다음 순간, 그는 괴기스러운 울부짖음같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양 어깨를 극렬하게 들썩거렸다. 순간, 꽈르르…… 꽝! 허공으로 수천만의 돌풍이 휘몰아치며 지축이 흔들릴 듯한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그들은 엄청난 서로의 장력에 의해 각각 이보 씩이나 격퇴되어 버렸다. 헌데, 그들이 격퇴된 석실의 청옥석 바닥에는 또렷이 세 치의 깊이로 발자국이 파이는 것이 아닌가! 실로 경천동지할 대격돌이었다. 백발괴인의 떡을 쳐놓은 듯한 얼굴이 일그러지며 거무틱틱한 이빨이 아귀같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지금 일어난 일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겨우 약관 정도의 어린놈이 노부가 백 년 이상 수련에 걸쳐 터득한 추혼마황공(追魂魔荒功)을 막아내다니……) 황보성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가에 칼 끝같이 싸늘한 냉소를 흘렸다. "백 년을 수련하고도 그 정도라면 정말 어지간히 둔한 늙은이로군." 백발괴인은 가슴 속에 미칠 듯한 노기가 폭발해오는 것을 느꼈다. "크흐흐…… 흐흐…… 애송이 놈이 감히 노부를 능멸해?" 백발괴인의 움푹 패여들어간 두 눈에서 시뻘건 적광(赤光)이 흉흉히 내뻗치기 시작했다. 찰나지간에 그 눈빛은 전신으로 뒤덮어 가더니 백발괴인의 전신을 핏빛 광망으로 휩싸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지 그의 눈만 남은 채 나머지 전신이 회오리치는 불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어찌 인간이 핏빛 광망의 소용돌이가 된단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점차 그 핏빛 소용돌이 속에서 흉흉한 두 눈이 커져가고 있었다. (크크크! 이 애송이 놈의 일신무공이 보통이 아니구나. 허나 오늘 네놈은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때 그 핏빛 소용돌이 속에서 백발괴인의 장삼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힘에 의해 찢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찌---- 이---- 익! 찌---- 익---- 찍----! 아! 그것은 실로 놀랍고 기괴한 일이었다. 이어 핏빛 소용돌이 속에서 음침하고 싸늘한 광소와 무지막지한 일 장이 격출되어 나왔다. "크하하하…… 네놈이 최초로 극혈천독공의 제물이 되는구나. 뒈져랏!" 다음 순간, 핏빛 소용돌이는 수천 수만의 손자국으로 변하더니 그물망처럼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일순 그 핏빛의 그물망은 광풍폭우처럼 벼락치듯 떨어져 내렸다. 한편 황보성운은 현무신공을 십성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자 신비롭고 한정없이 찬란한 오색 광망이 황보성운의 전신을 따라 현란무비하게 휩싸고 도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그 오색광망이 황보성운의 전신으로 스며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유백색의 신비롭기 그지없는 서기가 십여 장에 걸쳐 웅장하게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실로 신비막측한 일대 장관(壯觀)이었다. 바로 그곳에 황보성운이 천신(天神)이 하강한 듯 유유히 서 있는 것이었다. 이때 백발괴인의 핏빛 장영이 광풍처럼 휘몰아쳐 황보성운 주위의 서기 속으로 노도처럼 밀어 닥쳐들었다. 찰나 황보성운의 입에서도 금석을 짜르듯 짤막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현원공공(玄元空空)----!" 드디어 일세(一世)의 광세기학(廣世奇學)인 현무구장(玄武九掌)의 제 칠초 현현공공이 엄청난 십성의 내력으로 격출된 것이었다. 찰나지간 황보성운의 장심으로부터 오색의 신비하고 현란무비하 기 짝이 없는 장풍이 수천만 근의 위력으로 천지를 붕괴시킬 듯 폭발되어 나갔다. 콰---- 쾅---- 꽝---- 쾅----!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굉음이 천지를 붕괴시켜버릴 듯 석실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석실의 구석구석이 부서져 돌풍을 일으키며 수천수만의 현란하고 아름답기 짝이없는 불꽃들이 꽃송이인 양 뒤덮어 버렸다. 실로 더 이상 이를 데 없는 현란무비한 핏빛과 오색의 장관이었다. 누군들 이런 장관 속에서 넋을 잃지 않으랴! 아!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말 못할 광경이었다. 헌데 다음 찰나, "크---- 아---- 악----!" 처절무비한 비명이 석실을 잔혹하게 후벼파면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석실의 허공을 물들이는 시뻘건 피보라가 일어났다. 그리고 경천동지할 굉음과 돌가루들이 걷혀갔다. 그리고 천근같은 침묵이 일어났다. 그곳에 드러난 광경은 실로 보는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백의(白衣)의 앞자락을 시뻘건 선혈로 적시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헌데, 백발괴인 그는 어떠한가? 그는 자신이 서 있던 곳에서 십여 장 뒤의 석벽에 부딪쳐 퉁겨나와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왼팔이 어깻죽지 부근으로부터 갈기갈기 찢겨 떨어져나간 것이 아닌가! 더욱이 그의 전신은 온통 칼에 헤집은 듯 터져나왔고, 그곳으로부터 검붉은 선혈이 솟구쳐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백발괴인은 원독에 가득찬 흉흉한 눈으로 이빨을 부러뜨릴 듯 부드득 갈면서 신음성을 내뱉았다. "으…… 윽…… 네…… 네놈이……" 황보성운은 서리서리 냉막한 표정으로 외쳤다. "적양관주! 마지막 일 장으로 네놈을 황천으로 보내주마!" 순간, 백발괴인은 흉맹한 표정으로 짐짓 장력을 시출하는 듯하더니 석벽의 구멍으로 급속히 몸을 날렸다. 황보성운은 예기치 못한 일에 가볍게 경악성을 내질렀다. "엇! 저놈이……" 그리고 그는 백발괴인이 빠져나간 구멍으로 신속히 몸을 날렸다. 그는 섬전같은 속도로 석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살펴보았다. 허나, 그 괴인의 종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때 허공으로부터 원독에 가득찬 음성이 들려왔다. "으으…… 으…… 애송이놈, 청산 녹수가 변함이 없는 한 이 원수는 반드시 갚을 것이다. 반드시……" 백발괴인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쪽을 향하여 황보성운은 웅후한 일갈을 내질렀다. "흥, 적양관주. 네놈은 영원히 내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황보성운은 천천히 석실로 돌아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비록 네가 극혈천독공을 극성까지 연성하더라도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천하제일의 독경인 만독진해(萬毒眞解)를 갖고있기 때문이다." 제 12 장 裸體의 美女 1 황보성운은 다시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적양관주와의 결투로 인하여 부서진 석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실로 석실 안은 붕괴 직전에 놓인 듯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의 아수라장이었다. 석실 중앙의 청옥석 바닥에 커다란 웅덩이가 파였는가 하면, 석벽에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수도 없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들을 따라 커다란 금이 쩍쩍 가 있어 곧 석실은 붕괴될 듯해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저곳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돌가루와 암석들이 뒤흩어져 있었다. 도대체가 온전히 제자리에 놓여있는 물건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없었다. 석실 중앙의 화로와 가마솥은 깨어져 바닥에 아무렇게 뒹굴어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끓어대던 구천현독액은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또한 석탁은 깨어져 날아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석탁 위에 누워있던 여인은 석실 구석으로 튕겨나가 기묘한 자세로 처박혀 있었다. 또한 파여진 웅덩이와 바닥으로 분분(分分)히 떨어져 있는 피(血)! 실로 이러한 모습은 황보성운과 적양관주와의 대격전이 얼마나 처절했는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황폐하기 그지없는 처참경!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진화가 휩쓸고 간들 이처럼 황폐할까? 더군다나 석실은 음습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와 지독한 냄새들로 얽혀 사람들의 안색을 절로 흉악하게 일그러지게 할 지경이었다. 황보성운은 연신 눈썹을 찌푸리며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는 전나(全裸)의 여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전신에 온통 돌가루를 뒤집어 쓰고 있었으며 숱하게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또한 그녀의 긴 머리칼은 온통 뒤헝클어져 불룩하게 솟아오른 앞가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헌데, 그녀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혀 기척이 없었다. 황보성운은 천천히 그녀 앞에 굽혀 앉았다. 양쪽으로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여인의 비처가 보일 듯 말 듯 그의 시선을 자극했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은밀한 곳에서 시선을 돌린 후, 그녀의 코 끝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그러자 미약하게 숨결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으---- 음! 아직 죽지는 않았구나.) 황보성운은 무엇을 찾는 듯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있어야할 그녀의 옷이 없지 않은가? "이를 어찌한다?" 황보성운은 난처한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마음을 결정한 듯 주위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여인의 전신을 번쩍 안아다가 바닥에 편안히 뉘였다. 다음 순간 그녀의 뇌쇄적인 전나(全裸)의 육체가 황보성운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황보성운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훅하고 들이 쉬었다. 그리고 약간 머리 속이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아까 언뜻 봤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아무런 표정없이 누워있는 전나의 여인(女人)의 얼굴은 진정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선녀(仙女)인들 이처럼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실로 그녀는 이 세상 어느 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미(美)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아니 얼굴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전신은 그야말로 백옥같은 피부에 완벽에 가까운 곡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깨의 가냘픈 선(線)을 따라 내려가 봉긋하게 솟아오른 젖가슴 언저리, 그리고 신비한 듯 그 위에 떨고있는 자주빛 열매, 가슴의 굴곡을 따라 좁아져 내려간 세류요의 가냘픈 허리는 한 송이 꽃가지와 같았고, 또한 그 아래로 부풀어오른 둔부의 선은 그야말로 곡선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차마 볼 수 없는 비역(秘域), 그 속으로 내밀한 여인의 밀궁이 보일 듯 말 듯 은밀했다. 황보성운은 그 자리에서 호흡이 멎어버릴 듯했다. 실로 그녀의 모습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황보성운은 잠시 잃어버렸던 정신을 수습하고 황급히 그녀의 육체에서 눈을 떼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절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정말 숨막히는 육체로다." 잠시 후 마음을 물같이 고요하게 가라앉힌 황보성운은 겉옷을 벗어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가볍게 지풍을 날렸다. 잠시 후, "으…… 음!" 여인은 가볍게 몸을 뒤틀더니 눈을 떴다. 순간 초생달같은 눈썹을 배경으로 나타난 두 눈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할 만큼 매혹적이고 아름다왔다. 그곳에는 실로 깊이를 알 수 없을 듯 너무나 신비한 빛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흑백이 뚜렷한 두 눈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신비한 광채를 지니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자신의 전신이 그 눈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신비한 눈이구나! 소향이나 설연미에게선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이야……) 헌데, 갑자기 뜻밖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깨어난 여인의 신비한 눈빛이 갑자기 몽롱하게 변하더니 전나의 몸을 비비 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으---- 으---- 음----!" 야릇한 교성이 그녀의 반쯤 벌어진 매혹적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 니?" 황보성운은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에 흠칫 놀랐다. 그러자 다음 순간, 여인은 상체를 부시시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스르르----! 그녀의 몸을 덮었던 옷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한없이 매혹적인 상체가 드러났다. 길게 백옥같이 흘러내린 가냘픈 어깨, 부끄러운 듯 봉긋하게 솟아오른 젖무덤…… 황보성운은 그만 정신이 아찔했다. 이때였다. "아……! 제, 제발…… 저를……" 여인은 야릇한 교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백옥같이 가늘고 섬세한 두 팔이 들리는 듯하더니 황보성운의 목을 휘감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 황보성운은 대경실색 했다. 그리고 다급히 소리쳤다. "나…… 낭자, 정신 차리시오!" 순간 그녀의 행동을 저지하려던 손이 그녀의 앞가슴에 뭉클하고 닿았다. 황보성운은 깜짝 놀라 불에 데인 듯 손을 떼었다. 여인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듯 황보성운의 가슴에 자신의 전신을 부벼대며 몸부림치는 것이었다. 계속 그녀의 입술과 코로 교성과 비음들이 거칠게 뿜어나왔다. "제, 제발…… 저, 저를 어떻게…… 헉…… 좀…… 헉헉!" 그녀는 거의 미칠 정도인지 황보성운의 전신을 끌어안고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손은 이미 자신의 은밀한 곳을 헤집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 손은 황보성운의 남성을 찾아 더듬기 시작했다. 황보성운은 거의 정신이 달아날 듯 놀라 어쩔 줄 몰랐다. 허나 황보성운(皇甫星雲)은 피가 끓는 대장부이면서도 냉철히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희대의 기남(奇男)이었다. 비록 그가 전에 소향을 정복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가 소향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미 소향과는 어떤 묵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허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전혀 낯 모르는 여인이 자신에게 육탄 공세를 퍼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냉철하게 마음을 진정하고 생각을 굴렸다. (안되겠다. 우선 이 위기를 넘기고 보자.) 황보성운은 생각을 굳히고 전신을 미칠 듯 비벼대고 있는 여인의 마혈을 제압했다. 그러자 다음 순간, "으…… 음!" 그녀는 나직한 신음성을 흘리며 스르르 쓰러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녀는 쓰러지면서 엉덩이가 위로 향한 묘한 자 세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여 뒤쪽으로 그녀의 내밀한 곳이 송두리째 보였다. 황보성운은 얼굴이 붉어지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심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정말…… 오늘은 여러 가지로 진땀을 빼는군……) 황보성운은 그녀를 똑바로 누인 뒤 다시 옷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여인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적양관주가 이 여인의 몸에 무슨 수작을 한 것이 분명하다.) 황보성운은 내심 짙은 의혹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여인의 코 근처로 자신의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순간, 황보성운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그래, 역시 내 추측이 맞았어. 이제보니 적양관주는 이 여인의 몸에 최음제 중 가장 독한 음혼산(淫魂散)을 먹였구나." 황보성운은 솟구쳐 오르는 분기에 손을 부르르 움켜쥐었다. "이는 여인의 음기(陰氣)를 최고로 한 다음, 그녀의 음기를 흡수해 극혈천독공을 연성하려 한 것임에 분명하다." 황보성운은 적양관주를 살려보낸 것이 못내 통탄스러웠다. 그는 나직이 분갈을 터뜨렸다. "내 이 다음에 그놈을 만나면 절대로 살려주지 않으리라." 이를 부드득 갈며 황보성운은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죽은 듯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허나, 그녀의 이마에는 벌써 가는 힘줄들이 튀어오르고 얼굴은 피가 몰려 뻘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칠공에서 피를 토하고 죽을 것임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황보성운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하반신에 대략 옷을 걸쳐 주었다. 그리고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황보성운은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으로 천천히 양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유근혈에 장심을 붙였다. 순간 여인의 두 가슴에 뭉클하고 손바닥이 닿았다. 허나, 황보성운은 정신을 가다듬고 서서히 현무신공을 운기했다. 그러자 황보성운의 장심으로부터 여인의 체내(體內)로 뜨거운 한 줄기 진기가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2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인의 얼굴에서 서서히 도화색이 걷혀갔다. 잠시 후, 완전히 평상적인 얼굴로 회복된 여인은 살포시 눈을 떴다. 다음 순간 자신의 몸에 이상한 감촉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멋----!" 그녀는 짧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지금 자신의 소중한 젖가슴을 어떤 낯모르는 사내가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부끄러움과 수치감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일시에 커다란 분노심으로 격변해버렸다. 그녀는 격노하여 이를 악다물고 한 손을 들어 그 사내를 공격하려 했다. 허나, 체내에는 털 끝만큼의 진력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실로 그녀는 애통하고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 돌연 황보성운이 눈을 떴다. 순간, 여인은 안색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앙칼진 노성을 내질렀다. "그 손 놓지 못하겠어요!" 허나 황보성운은 여전히 젖가슴을 움켜쥔 채로 여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원독에 가득찬 눈으로 황보성운을 앙칼지게 쏘아보았다. "이…… 더러운 색마……!" "오해마시오, 소저." 황보성운의 음성과 태도는 너무나 당당했다. 여인이 흠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황보성운은 눈을 신비스럽게 빛내며 조용하고도 위엄있는 목소리를 터뜨렸다. "나를 믿지 못하겠소?" 여인은 더 더욱 놀라 황보성운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황보성운의 두 눈은 일말의 사심조차 없어 보였다. 오히려 하늘을 보듯 청청무구하고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는 결코 사심을 갖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은 너무 분명해 보였다. 더구나 그의 전신으로는 장부의 위풍당당한 기개가 넘쳐흐르는 것이었다. 실로 그것은 아무리 오만하기 그지 없는 절색의 여인이라 할지라도 일시에 서리서리 간직한 방심(芳心)을 뒤흔들어 버릴 기상이었다. 여인은 왠지 모르게 눈 앞의 준수미려한 청년에게 기울어지는 자신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코 엉뚱한 사심을 가질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강력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얼굴을 도화색으로 붉게 물들이며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이윽고 그녀의 모기만한 목소리가 가늘게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미, 믿어요…… 허, 허지만…… 지금 상황이……" 황보성운은 붉게 물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손을 대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소." 황보성운은 말을 끊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인은 여전히 부끄러운 듯 온통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지금도 낭자의 몸 속에는 음혼산의 기운이 남아 있소이다." 여인은 황보성운의 손을 통하여 자신의 몸 속으로 여전히 한 줄기 뜨거운 진기가 흘러들고 있음을 느꼈다. 여인은 얼굴을 붉힌 채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화성운이 여인의 가슴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자 여인은 급히 옷자락을 여미며 가슴을 가렸다. 여인은 다홍빛으로 물든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엇이 생각난 듯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참, 그 자는 어디 있죠?" "그 자라니……?" 황보성운은 의아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여인이 물 흘러가듯 청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늙고 음흉한 그 마두 말이예요." 그러자 황보성운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 그 적양관주 말이오. 그자는 내가 쫓아버렸소." "쫓아버렸다구요?" 그녀는 깜짝 놀라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 노마두는 자신이 평생 처음 보는 무서운 고수였던 것이다. 자신도 분명 삼 초도 넘기지 못하고 패해 붙잡히는 신세가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헌데 놀랍게도 청년은 그 자를 쫓아버렸다니…… (정말…… 이 청년은 신비롭기 짝이 없구나.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그녀는 앞에 서 있는 청년이 신비스럽고 의문스러웠다. 헌데 이때 문득 그녀는 자신이 답례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허리를 정중하게 굽히며 낭랑하게 말을 꺼냈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에 감복하옵니다. 소녀의 이름은 모용청(慕容靑)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황급히 황보성운도 포권을 하며 답례를 했다. "소생은 황보성운이라 하오." 황보성운의 말에 여인은 이름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되뇌었다. "황보…… 성운……!" 이때 황보성운이 벌떡 일어섰다. "자, 낭자 그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갑시다." 그러자 모용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따라 일어섰다. 허나, 그녀는 일어서자마자 곧 도화빛으로 물들더니 멈칫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제보니 여인은 전신에 넓은 장삼 하나만 걸쳤을 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녀는 아랫도리가 허전한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황보성운은 여인의 기이한 태도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바로 그 여인의 난경(難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보성운은 내심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는 겨우 입술을 물어 웃음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낭자, 좀 불편하시겠지만 잠시만 참아주시오. 밖에 나가 옷을 구해봅시다." 모용청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최대한 장삼을 좁혀 몸을 가린 채 황보성운의 뒤를 따라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이윽고 그들은 청운각(靑雲閣) 밖으로 나왔다. 청운각의 풍경은 아까와 별 다름없이 음산하고 괴기찬 모습이었다. 황보성운은 고개를 돌려 뒷발치에 서있는 모용청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실례하겠소." 황보성운은 짤막하게 말을 내뱉으며 모용청의 허리를 낚아챘다. 순간, "어멋!" 모용청은 외마디 경악성을 지르며 황보성운의 전신으로 휩쓸려왔다. 허나, 왠지 모용청은 반항을 하지 않았다. 찰나지간에, 휘---- 익! 파공성과 함께 놀랍게도 모용청을 끌어안은 황보성운의 인영(人影)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섬전처럼 쾌속절륜하게 수십여 장을 한꺼번에 쏘아갔다. 순간, 모용청은 내심 극도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정말, 이분의 무공은 실로 상상도 못할 지경이구나.) 겨우 이 정도의 경공에 이렇게 놀라다니, 만약 그녀가 황보성운의 무영비행술(無影飛行術)을 보았다면 어떠한 표정을 지을 것인가? 허나 겨우 이 정도가 아니었다. 사실 지금 펼치고 있는 황보성운의 경공술만 하더라도 강호에서 가히 필적할 자가 거의 없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모용청을 안은 채 신쾌무비하게 날고 있었다. 모용청은 이마를 황보성운의 가슴에 대며 꿈 속같이 달콤함을 느꼈다. 잠시 후, 모용청을 끌어안은 황보성운은 어느새 어느 나무 위로 내려서고 있었다. 그 나무는 소향이 황보성운을 기다리고 있는 나무였다. 지금 소향의 표정은 만면에 초조한 기색을 한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때, 황보성운이 날아들자 그녀의 표정은 일시에 희색으로 범벅이 되어 활짝 피었다. 그녀는 만면에 희색을 띄운 채 황보성운의 가슴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 공자님!" 소향은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헌데, 황보성운의 품에는 웬 여인이 안겨있는 것이 아닌가? 소향은 그 모습을 보고 그만 안색이 변해버렸다. 제 13 장 사랑과 질투 1 소향은 즉시 황보성운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실로, 그녀의 얼굴은 놀람, 실망, 원망 등의 감정들이 뒤얽혀 뭐라고 잘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황보성운을 빤히 바라보면서 냉막하게 물었다. "이 여인은…… 누구죠?" 황보성운은 소향의 기묘한 표정에서 직감적으로 그녀의 질투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소향, 인사해라. 이 분은 모용낭자다." 그러자 모용청도 황보성운의 품에서 빨리 몸을 빼어냈다. 그리고 급히 소향에게 허리를 굽히며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어요. 소매는 모용청이라고 해요." 다음 순간 소향은 무척이나 기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모용청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모용청이 속옷을 하나도 입지 않은 채 단지 넓은 겉옷 하나만 걸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죠?" 그녀는 만면에 짙은 의혹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보성운은 모용청을 흘깃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황보성운의 입에서 풍운각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대충 흘러나왔다. 황보성운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모용청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도화빛으로 붉혔다. 이윽고 황보성운의 말이 끝나자 소향은 고개를 돌려 야릇한 시선으로 모용청을 바라보았다. 모용청은 고개를 숙여 아래로 눈을 내리깔고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했다. 소향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여인의 마음은 같은 여인이 더 잘아는 법(法)! 그녀는 모용청의 내심을 훤히 알 수 있었다. (아! 이제보니 이 소녀는 공자님께 마음을 빼앗긴 듯하구나.) 그녀는 가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야 공자님의 모습을 보고 세상에 반하지 않을 여인이 있을 리 없지. 더군다나, 그런 상황이라면 더욱……) 이런 생각이 들자 소향은 왠지 모르게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가슴 한 구석이 텅하니 비어버리는 듯 못내 한 번 자리잡은 씁쓸한 느낌은 좀체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이런 느낌을 지워야한다고 생각하면서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이때 황보성운의 말이 울렸다. "소향, 너의 옷 한 벌을 이 모용낭자에게 줄 수 있겠느냐?" 그러자 소향은 거의 표정이 없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짐보따리를 끌렀다. 짐 속에는 자하장을 떠나면서 몇 벌 준비해 온 옷가지들과 사물들이 들어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짐 속에서 초록색의 옷 한 벌을 꺼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모용청에게 건네주었다. "모용 소저,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우선 이것이라도 입어보세요." 그러자, 모용청은 감격에 찬 빛으로 옷을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언니!" 이러한 모용청의 말에 소향은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녀는 정말 대단히 영리하구나. 나에게 언니라고 불러서 나의 마음을 풀고 공자님께 한 발 더 접근하는구나!) 소향은 마음을 야무지게 먹으려 해도 왠지 모르게 봄바람에 얼음장이 풀리듯 마음이 스르르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점차로 소향은 그녀가 매우 귀엽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황보성운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 뭐하는 거예요. 어서 고개를 돌려요. 모용 동생이 옷을 갈아입어야 하잖아요." "아참! 미안하오……" 황보성운은 말을 더듬거리며 몸을 돌렸다. 이윽고 등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황보성운은 그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묵묵히 어둠 속에 잠겨있는 적양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 적양관주란 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황보성운은 내심 깊은 의혹 속으로 잠겨들어 갔다. (어떻게 해서 그자는 만독진해에 적힌 그 극혈천독공(極血千毒功)을 안단 말인가?) 실상 극혈천독공을 연성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 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는 사악한 방법으로 적양관주가 사용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황보성운이 만독진해와 함께 얻은 만독신단(萬毒神丹)을 복용하는 방법이었다. 비록 황보성운은 아직 만독진해의 삼대독공(三大毒功)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은 훤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때 문득 황보성운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그때 그 사찰(寺刹) 안의 괴노인과 이 적양관주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황보성운은 계속 사념(思念)의 미로(迷路)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이때, "공자님 이제 돌아서세요." 뒤에서 소향의 말이 울려왔다. 황보성운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렸다. 순간, 그곳에는 실로 아름답기 짝이없는 한 명의 녹의소녀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린 듯이 뻗은 눈썹, 신비로운 광채(光彩)가 뿜어나오는 두 눈, 백옥같이 오똑한 콧날과 매혹적인 빛깔의 입술, 그리고 가녀린 하얀 턱 등…… 실로, 무어라고 표현하기 힘든 절색의 미녀였다. 황보성운은 잠시 넋을 잃은 듯이 소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황보성운의 이러한 태도를 보며 소향은 짐짓 화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뾰족하게 소리쳤다. "무얼 그렇게 넋놓고 보는 거예요? 모용 동생을 처음 봐요?" "아!" 황보성운의 입에서 나지막한 경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보니 모용낭자였구나……) 녹의 차림의 소녀는 석실에서의 그 소녀와는 전혀 달라보였던 것이다. 그녀의 전신으로는 유난히 은은한 기품이 돋보이게 흐르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내심 절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옷을 걸치니 이토록 모습이 달라지다니……) 모용청은 황보성운이 자신을 넋을 잃고 바라보자 어떤 부끄러움과 함께 가슴이 벅차오르는 희열감을 느꼈다. 이때 소향의 물 흘러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자님, 어때요? 우리 모용동생 정말 아름답죠? 나는 우리 모용동생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러자 모용청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언니의 모습이 저보다 훨씬 예뻐요." 소향은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겸양의 말을 했다. "어머! 모용동생, 무슨 말을…… 내가 뭘 예쁘다고…… 동생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훨씬 못할텐데……" 순간, 황보성운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하…… 이제 그만하고 이곳을 떠납시다." 이렇게 말하고 황보성운은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는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멈칫 서 버렸다. 그리고 그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했다. 다음 순간, "잠시 기다려 주시오." 황보성운이 몸을 날리려 했다. 순간 소향은 깜짝 놀라 황보성운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어디 가시려고요?" 그러자 황보성운의 입에서 나직한 말이 흘러나왔다. "저 적양관을 그대로 놔두고 떠날 수는 없지." 이렇게 말을 내뱉은 후 황보성운은 어깨를 꿈틀하더니 신형(身形)을 날렸다. 그리고 섬전같은 속도로 쾌속무비하게 허공 속으로 쏘아갔다. 잠시 후, 실로 엄청난 광경이 목전에서 전개되었다. 거대한 고루 전각이 일시에 경천동지할 굉음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거대한 기둥들이 송두리째 뽑혀 허공 속으로 날아가고, 수천의 나무조각과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분분(分分)히 흩어져 버렸다. 동시에, 수십여 장의 불꽃이 허공으로 치솟구쳐 올랐다. 화광충천(火光沖天)의 대 장관! 실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살기를 내어뿜던 전각이 일시에 궤멸되어 버리는 장관이었다. 순식간에 그 화마(火魔)는 하늘을 집어 삼킬 듯 뻗어올라 주변을 온통 시뻘건 아수라의 불길로 삼켜버렸다. 2 소향과 모용청은 지척의 목전에서 전개되고 있는 경천동지할 사태에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대경실색해 버렸다. 그들은 그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적양관이 일시에 붕괴되는 장관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무엇을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소." 어느새 황보성운이 나무 위로 날아들어 그들의 뒤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이제 그만 갑시다." 그리고, 황보성운은 천천히 소향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황보성운은 허리에 소향을 끼며 모용청을 바라보았다. "모용낭자, 경공을 할 수 있소?" 그러자 모용청은 머뭇머뭇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금은……" 황보성운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이윽고 그는 결심한 듯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럼, 소생이 좀 실례하겠소." 동시에 그는 모용청의 버들가지같이 가느다란 허리를 휘어감았다. 모용청은 얼굴을 부끄러운 듯 살짝 붉혔다. 허나 반항하지 않고 황보성운의 가슴으로 살며시 안겨왔다. 순간, 황보성운은 한 마리의 비조처럼 허공으로 치솟구쳐 올라갔다. 그리고 실로 무섭기 짝이없는 경공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수십여 장을 순식간에 빗살처럼 쏘아갔다. 옆의 숲과 경물(景物)들이 주마등처럼 무서운 속도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모용청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 실로 엄청난 속도…… 이 분의 무공은 정말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하구나.) 이때 그녀의 귓가로 황보성운의 낭랑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모용낭자! 낭자의 집은 어디요?" 모용청은 짤막하게 아름다운 옥음(玉音)을 터뜨렸다. "금릉!" "금릉?" 황보성운은 짤막하게 말을 되뇌이더니 흔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잘 되었군. 우리도 금릉으로 가려던 참이었소." 말을 하는 도중에도 황보성운의 일행은 수없이 많은 계곡들과 숲 위를 신쾌무비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이때 모용청은 문득 기이한 생각이 치밀었다. 지금 날아가고 있는 방향은 원래 목적지와는 반대 방향이 아닌가? "저…… 황보공자님, 이 곳은 금릉으로 가는 길이 아니예요. 북쪽으로 가면 안돼요. 남쪽으로 가야하는데......" 이에 황보성운은 가볍게 놀라 품 속의 모용청을 내려보았다. "아니, 금릉이면 북쪽이 아니오?" "아니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태산이니까 금릉까지 남쪽으로 천(千)여 리는 가야해요." 황보성운은 의아한 기색을 지었다. 허나 다음 순간, 황보성운은 퍼뜩 깨닫는 바가 있었다. (오, 그렇구나! 이제보니 나는 금릉으로 간다고 허공을 날았으나 헛된 일만 한 것이군. 금릉을 훨씬 지나 태산까지 왔으니……) 황보성운은 내심 치밀어 솟구치는 고소(苦笑)를 금할 수가 없었다. (무영비행술(無影飛行術)이 이토록 빠를 줄 몰랐던 것이 큰 실수였군.) 이윽고, 황보성운은 모용청에게 경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용낭자, 지금 시각(時刻)이 얼마나 되었겠소?" "미시(未時)가 조금 넘었을 거예요." 모용청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황보성운은 경쾌한 콧소리를 내며 흔쾌하게 뇌까렸다. "흐---- 흠, 그럼 해가 지기 전까지 금릉에 도착할 수 있겠군." 모용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잘못 들었는가 싶어 황보성운의 얼굴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한다구요?" 그러자 황보성운은 당연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모용청은 재차 확인을 받자 도대체 어이가 없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인간이 두 시진 정도에 천 리를 날아갈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팔에 두 사람을 껴안고서 말이다. 모용청은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도시 그녀의 상식으로는 실없는 소리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다시 그녀의 귀에 모용청의 마음을 안다는 듯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믿지 못하겠소? 자, 그럼 보시오." 다음 순간, 황보성운은 한차례 숨을 길게 들이키는 듯하더니, 허공으로 위풍당당히 솟구쳤다. 그리고 백여 장이나 일시에 뻗어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어멋!" 모용청은 실로 경악에 경악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자신들은 백여 장의 허공 속에 떠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자신들의 아래의 땅은 까마득히 멀어져 아득한 것이었다. 그녀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이 무슨 엄청난 일이란 말인가? 아니, 어찌 이것이 인간의 경공이란 말인가? 그렇다. 이것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신비막측한 경공술이었다. 드디어 그 공전절후의 경공술인 무영비행술이 전개되고야 만 것이었다. 모용청은 경악을 하다못해 아예 싸늘한 두려움마저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황보성운의 허리를 혼신의 힘으로 끌어 안았다. 그러자 황보성운의 웅후하고도 호쾌한 웃음소리가 또 다시 허공 속에 울려왔다. "하하하…… 두려워 할 필요없소. 떨어지게 하지는 않을테니까 하하하……" "……" 모용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도무지 목전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미궁(迷宮)에 빠진 듯 얼떨떨하기만 할 뿐이었다. 또한 황보성운이 온통 신비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진정, 이분이 인간이란 말인가?) 절세의 미장부에 호탕한 인품, 그 위로 흐르는 당당한 기재, 또한 신비막측하여 도저히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듯한 무공(武功)…… 모용청은 자신의 마음이 한없이 황보성운에게로 휩쓸려 들어감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에는 나른한 행복감이 스쳐갔다. 헌데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에 어떤 결연한 빛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번 일은 나에게 엄청난 행운일런지 모른다. 절대로 이 기회를 그냥 놓쳐서는 안된다. 절대로……) 모용청은 살포시 황보성운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들은 계속 쾌속무비하게 백여 장의 허공을 빗살처럼 쏘아가고 있었다. 서로의 가슴 속에 각기 다른 어떤 생각들을 키우고 부풀리면서…… 지금 그들 아래 백여 장 밑으로는 수없이 많은 산들과 강의 풍경들이 그림처럼 쾌속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끊임없는 수려한 산(山)들과 강(江)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녘 하늘을 물들이며 서서히 일륜(日輪)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수천 수만 장의 적황색(赤黃色) 물결을 일으키며 떨어져 내리는 일륜! 황혼(黃昏)이 서녘 하늘을 서서히 덮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찬란무비한 그 황혼 속에 한 줄기 괴이한 빛이 섬전처럼 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제 14 장 靑 松 莊 1 금릉(金陵). 강소성(江蘇城) 동남쪽에 자리한 고도(古都)로 절승(絶勝)의 명소(名所)가 많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남동쪽으로 더 뻗어내려가면 태호(太湖)의 푸른 물, 그리고 북서쪽으로는 수면장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홍택호(洪澤湖)의 절경이 펼쳐져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장강(長江)의 도도한 지류(支流)가 근동으로 흘러들어 농토는 기름지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온유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타관으로부터 수없이 중인들의 발길이 철따라 몰려들어 시가(市街)는 고루전각들이 줄줄이 늘어서 번화가를 이루고 있었다. 때는 서녘이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는 황혼 무렵, 금릉의 한 번화가에 준수미려한 세 남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황보성운의 일행이었다. 그들은 연신 감탄을 발하며 번화가를 천천히 둘러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정말 금릉은 대단하군요." 소향은 마치 진귀한 물건을 보듯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난생 처음 보는 도회에 대한 감격으로 들떠 있었다. "아! 정말 금릉이 크고 번화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이때 옆에 있던 모용청은 소향의 모습을 보며 생긋 웃더니 옥음을 터뜨렸다. "언니, 금릉이 마음에 드시면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도 좋아요. 제가 금릉의 명소를 모두 안내해 드릴테니까요." 그러자 소향은 활짝 웃으며 들뜬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머? 동생 그게 정말이야?" 모용청은 황보성운을 힐끔 곁눈질하더니 마치 황보성운이 들으라는 듯 낭랑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왜 허튼 소리를 하겠어요? 이곳 금릉은 무척 구경할 곳이 많으니 아마 언니도 충분히 만족하실 거예요." 소향은 만면에 희색을 띄우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생각은 어때요? 모용 동생이 직접 안내를 해주겠다고 나서는데……" 황보성운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그렇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모용낭자에게 너무 지나친 폐를 끼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황보성운의 말에 모용청은 정색을 하며 재빨리 입을 놀렸다. "어머! 폐를 끼치다니요. 오히려 제가 공자님같은 귀인을 모시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에 황보성운은 예의 그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 무슨 지나친 겸손의 말씀을……" 이윽고 황보성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혼연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소생 며칠 신세를 지도록 하겠소." 그러자 모용청은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만면에 희색을 띄웠다. "신세는 무슨 신세예요. 오히려 신세는 제가 더욱 진 것같은데……" 황보성운은 소향을 돌아보며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향, 당신이 제일 기뻐하겠군?" 그러자 소향은 짐짓 샐쭉하게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흥! 그러는 공자님은 좋지 않은가요? 자하장 밖으론 나가본적이 없었으면서……" "헛, 이거 갈 수록 혀 끝이 매워지는걸 보니 슬슬 불안해지는데……" 엄살부리는 듯한 그의 모습에 두 여인은 그만 교소를 터트렸다. "호호호호호!" "호호호호!" 세 명의 남녀는 즐거운 담소를 나누며 번화가를 걸어갔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그들의 모습을 부러운 듯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젊은 여인들은 온통 황보성운의 모습에 여지없이 방심(芳心)이 흔들려 넋을 잃었다. 또한 청년들은 선녀(仙女)보다도 아름다운 두 여인을 양 옆에 거느린 황보성운이 부러운 느낌이 드는지 몇 번이고 응시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황혼이 사라지고 사방 지척으로 땅거미가 어스름하게 깔려올 무렵, 그들은 뒤로 울울창창한 송림을 끼고 있는 어느 장원 앞에 서 있었다. 그 장원은 가히 한 작은 궁성을 연상시킬 정도로 웅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장원의 문 위로는 고색창연한 단청들이 빛나고 있었으며, 그 위로는 고래등 같은 청기와들이 저녁 불빛을 받아 비늘처럼 번쩍거렸다. 또한, 문 기둥은 천 년의 고목을 베어다 만든 듯 아름드리 고목으로 되어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 위의 편액에는 용이 휘돌아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가 풍취를 더해주듯 웅후한 장원의 이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청송장(靑松莊).> "저곳이 바로 저의 집이예요." 모용청의 입에서 물 흘러가듯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러자 소향은 가볍게 놀란 표정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 정말 대단히 큰 장원인데……" 이때 장원 문 옆에 서 있던 두 장한이 모용청을 발견하고는 깜 짝 놀라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니! 아가씨 아니십니까?" 그들은 몇 걸음을 급속히 달려나왔다. 그러자 모용청은 당당한 기품으로 약간 오만하게 두 장한을 쳐다보았다. "아버님은 안에 계시냐?" 두 장한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네, 무림의 몇분 친구 분들이 찾아오셔서 내당 의사청에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이어 한 장한이 입을 열었다. "안에 기척을 알려드릴까요?" 그러자 모용청은 가볍게 옥수(玉手)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니다, 필요없다. 내가 직접 들어가겠다." 이때, 한 장한이 일행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이분들은?" 그러자 모용청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네가 알 바 아니다. 이분들은 나의 지극한 귀빈들이시다." 모용청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를 돌아보며 씽긋 웃었다. "공자님, 소향언니, 저를 따라오세요." 세 사람은 청송장(靑松莊)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장원 내의 풍경이 드러났다. 장원 내부는 가운데의 장원을 중심으로 수십 채의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원에는 수만 가지의 꽃들이 봄기운을 따라 온갖 다홍빛으로 색 색이 물들어 있었다. 실로, 단아하고 우아한 정원이었다. 이때 뒤따라오던 소향의 웃음소리가 은쟁반에 옥이 굴러가듯이 흘러나왔다. "호호호, 모용동생 아까 보니까 동생의 위풍이 대단하던데……" 그러자 모용청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어머, 언니도 참……" 이때 황보성운의 온후한 목소리가 둘의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모용낭자, 아버님은 어떤 분이시오?" 그러자 모용청은 황보성운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긋 웃더니 자랑스러운 듯이 말을 꺼냈다. "아버님의 성함은 모용후(慕容侯)로서 원래 무당파 전대장문인(前代掌門人)의 속가제자예요." 모용청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그리고 현 무당 장문인이신 현우도장(玄羽道長)의 사형 뻘 되시지요." 황보성운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 어! 모용낭자의 부친께서는 무림에서 상당히 높은 배분이시군요." 모용청은 황보성운이 칭찬하자 무척이나 기쁜 표정이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약간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는 진천신검(震天神劍)이란 별호처럼 강소성에서는 정도(正道) 무림의 맹주(盟主) 격이지요." 그녀는 한 차례 숨을 가볍게 내쉰 뒤 말을 이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중원에서 아버님을 함부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이때 어디선가 인자하고 웅후한 홍소가 울려왔다. "허허허…… 청아가 이 애비의 얼굴에 아주 금칠을 하려는구나." 황보성운 일행은 깜짝 놀라 주위를 급속히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들 앞 화원 곁으로 한 명의 노인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 노인은 황의(黃衣) 차림에 온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또한 호호백발에 수염이 가슴 앞자락까지 흘러내렸고, 얼굴에는 홍광(紅光)이 가득해 의연한 풍모였다. 모용청은 노인을 보자마자 만면에 온통 기쁜 기색을 띄웠다. 다음 순간, "아버님!" 그녀는 한 마리 작은 새처럼 날아갈 듯 뛰어가 노인의 품 속에 안겼다. 황보성운은 가볍게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음, 저 노인이 바로 진천신검 모용후란 분인 게로군!) 황보성운은 모용후의 온후한 얼굴을 살펴보았다. 지금 그는 입가에 가득 주름살을 지으며 연신 인자한 홍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허허허…… 조금 있으면 시집갈 녀석이 어리광은……" 모용청의 작은 어깨를 쓰다듬는 그의 노안(老顔)에는 한없이 자애로운 부성애(父性愛)가 넘쳐 흘렀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살짝 흘기며 짐짓 토라진 듯 어리광을 부렸다. 실로 더없이 정다운 두 부녀(父女)의 모습이었다. 이윽고, "청아야, 저분들은 누구냐?" 황의노인은 황보성운과 소향을 넌지시 건네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모용청은 옆에 황보성운과 소향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볍게 붉혔다. 그리고 노인의 품에서 몸을 빼었다. 그녀는 곧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황보공자님! 이분이 바로 저의 아버님이세요." 이에 황보성운은 공손히 포권하며 허리를 굽혔다. 이어 그의 입에서 낭랑하고 침착한 어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노선배님의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소생은 말학후진(末學後進)으로 황보성운이라고 합니다." 모용후는 인사하고 있는 황보성운의 모습을 보며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어……! 천하에 이토록 뛰어난 청년이 있었다니…… 가히 인중지룡(人中之龍)이로구나!) 점차 황보성운의 풍모를 보면 볼 수록 모용후는 내심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음! 진정 훌륭한 청년이다. 내 칠십 평생에 이토록 준수미려한 청년은 처음 보는구나!) 모용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딸과 황보성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때 문득, 그는 모용청의 눈에 기이한 빛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옆에선 채 황보성운을 그 기이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모용후는 무엇인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날렸다. (허---- 어, 이제보니 이녀석도 다 컸구나!) 이어 그는 무엇을 생각한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하기야, 이 정도의 젊은이라면 천하에 반하지 않는 여자가 없겠지!) 이때 모용청의 애교 섞인 핀잔이 물흐르듯 또그르르 흘러나왔다. "아이참! 아버님, 황보공자님의 인사는 받지 않고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모용후는 내심 고소를 흘리며 모용청을 흘깃 본 뒤 나직이 뇌까렸다. "아! 이거 참, 노부가 망녕이 들었나 보군." 이어 그는 얼굴에 소탈한 웃음을 함박같이 떠올렸다. 그리고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하소협, 노부의 실태를 용서하시구려. 노부는 모용후라는 보잘 것 없는 늙은이요." 그의 인사에 황보성운이 공손히 예를 차리자 모용청은 소향 옆으로 다가가 한쪽 팔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이 분은 소향언니예요." 소향은 입가에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모용후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이어 그녀의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옥음(玉音)이 청량하게 울렸다. "노선배님, 소녀(少女)는 진미향(陳美香)이라 하옵니다." 이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금 그녀는 입가에 매화꽃 한 송이를 문 듯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실로 그것은 막 피어오르는 한 떨기의 꽃을 방불케 하는 미태(美態)였다. 모용후는 그녀의 아름답기 짝이 없는 자태에 내심 깊이 감탄했다. (나는 이제껏 천하에서 청아를 능가하는 미인이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여인 역시 청아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구나!) 모용후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소향을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반갑소이다. 청아가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 것을 보니 대단히 친한 것 같구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모용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말을 계속 이었다. "청아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니 앞으로 잘 부탁하오."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그의 태도는 정중했고 표정도 진심이 어린 듯해 보였다. 허나, 사실 그는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기실 모용후는 강호에서 수십 년 간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고수다. 늙은 생강이 맵다던가? 그는 소향을 보자마자 그녀가 이미 황보성운과 모종의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모용청을 위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한편, 모용청 역시 흘깃 바라보는 부친의 눈빛에서 이미 그 내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도와주시는 부친이 한없이 고마웠다. (아버님께서 벌써 내 마음을 알아채셨구나!) 이때 모용후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다시 울렸다. "허허허…… 이거 귀한 손님을 밖에만 세워두다니…… 실수도 이만저만한 실수가 아니군." 그는 계속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한 손을 들어올려 권하며 입을 열었다. "자! 황보소협, 진낭자,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리고 그는 안쪽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황보성운 등은 모용후를 따라 담소하며 의사청 안으로 들어갔다. 2 청송장(靑松莊) 안채 의사청의 대청. 그곳의 한쪽에는 지금 한창 술좌석이 벌어져 있었다. 커다란 탁자 위에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수많은 산해진미(山海珍味)들. 그 술좌석에선 세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중년 부인이 둘러 앉아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데, 그들의 모습은 천차만별로 각기 달라 기묘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연신 칠흑빛 염주를 놀리고 있는 회의(灰衣) 장삼 차림에 팔십 노구의 인자한 풍모를 지니고 있는 노승(老僧). 그리고 그 옆에 칠십 고희(古希)에 이른 듯 감히 범접하기 어려울 듯한 위엄에 싸여있는 도인(道人), 그도 역시 왼손에 석 자 가량의 불진(拂塵)을 들고 있었다. 또한 그의 얼굴은 네모지게 각이 져 있어서 일견(一見)하기에도 대단히 강직한 성품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자리엔 백설같이 하얀 백의(白衣)차림의 극히 아름다운 중년부인이 앉아 있었다. 머리를 높이 올리고 봉황패(鳳凰佩)를 꽂은 그녀의 특이한 자태는 고고한 한 마리의 학(鶴)과 같다고나 할까? 그 곳으로부터 물처럼 담담하고 고귀한 유유함이 은은히 멋처럼 우러나왔다. 그리고 바로 이 여인의 건너편에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늙은 거지가 연신 함지박만한 입을 벌리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칠십여 세 정도 되었을까? 허옇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게 퇴색되어 봉두난발로 헝클어졌고, 옷은 너덜너덜하게 찢겨져 백여 군데나 기우고 누빈 자국이 있었다. 또한 그의 주먹만한 코는 연신 살아 벌름거렸으며 실끝같은 두 눈에는 짓궂은 장난기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자루같이 디룩디룩하게 살찐 몸에서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실 끝같은 눈을 빛내며 함지박같은 입을 가득 벌리고 있었다. 이때 모용후와 황보성운의 일행이 안으로 들어섰다. 제 15 장 香 1 늙은 거지는 모용후를 따라 들어서는 모용청을 발견하고는 디룩디룩한 얼굴을 씰룩이며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노부는 모용 늙은이가 왜 그렇게 급히 나가나 해서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그의 보배같은 딸이 왔었군." 늙은 거지는 코를 벌름거리며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비비 꼬았다. 들어서던 모용청도 거지노인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다는 듯 입 끝을 삐쭉이며 능청스러운 어조로 맞장구를 쳤다. "흥, 어쩐지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시궁창 냄새가 풍겨 웬일인가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거지 아저씨가 왔기 때문이었군요." 거지노인은 실 끝같은 눈을 부라렸다. "아니, 뭐라고? 시궁창 냄새라고?" 그는 말을 하면서 더욱 격심하게 코를 씰룩거렸다. "이런 고약한 말이 있나? 내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비록 장미 향기는 못될지언정 최소한 국화 향기 쯤은 된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으로 좌중의 인물들을 돌아 보았다. "안 그렇소? 여러분! 그런데 시궁창 냄새라니 이런 억울할 데가 있소?" 그러자 좌중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폭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 국화(菊花) 향기라고?" "핫하하하……" "허허허헛……" 이윽고, 폭소가 가라앉자 늙은 도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 마디를 내뱉았다. "금(金) 시주께서는 자신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소." "그게 무슨 뜻이오?" 늙은 거지는 가는 눈을 휩뜨며 반문했다. 도인은 빙그레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시주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국화향(菊花香)이라면 아마도 변소에서 풍기는 냄새는 매화향이 틀림없을 것이오." 순간 다시 좌중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하……" "허허허헛……" 그러자 거지 노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어 버렸다. 그는 분기를 억누르는 듯 코를 오르락 내리락 크게 씰룩거렸다. 이윽고 그의 자루만큼 부풀어 오른 입에서 분기에 가득찬 말이 튀어나왔다. "말코 도사, 정말 그렇게 말하기요?" 그리고 늙은 거지는 괴춤을 들썩이더니 거무튀튀한 타구봉을 부여잡았다. "내 당장 본방(本 )의 타구봉법(打拘棒法)으로 말코, 당신의 코를 소코로 만들어 주겠소." 그는 번쩍 타구봉을 치켜들었다. 이에 늙은 도인은 황급히 안색을 대변시키며 코를 가렸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금노시주, 빈도는 결코 노시주의 냄새나는 방망이 아래 매맞는 개가 되고 싶지 않소." 도인은 겁이 난다는 듯 손을 급히 내저었다. "빈도가 실태를 사과할테니, 제발 그 지저분한 방망이는 치워주시오." 그는 냄새가 역하다는 듯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또다시 대청이 떠나갈 듯한 흔쾌한 폭소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하하하…… 여러분, 이제 농담은 그만 하시고 이 노부의 말을 들어주시오." 모용후가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어 그는 가볍게 한 번 헛기침을 했다. "흠, 내 여러분께 한 명의 출중한 젊은 고수를 소개해 드리리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뒷전에 서 있는 황보성운을 가리켰다. "이 청년은 무림의 신진고수(新進高手), 황보성운 소협(小俠)이 외다." 그러자 황보성운은 정중히 포권을 하며 천천히 읍례(泣禮)를 취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초 소생은 황보성운이라 합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순간, 황보성운을 향해 시선을 돌린 좌중의 인물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동시에 그들의 입에서 나직한 감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저토록 빼어난 기상을 가진 청년은 평생 처음 보는구나!" "……!" 이때 황보성운의 곁에 서 있던 모용청은 그들의 감탄어린 일성(一聲)에 자신이 칭찬 받은 듯 만면에 기쁜 기색을 띄웠다. 헌데, 그러한 그녀의 표정을 음흉한 늙은 거지가 놓칠 리 없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띄웠다. (옳거니! 아까 당한 것을 복수할 절호의 기회로다.) 다음 순간, 그는 괴이한 웃음을 흘리며 함지박 만한 입을 열었다. "클클클…… 이제보니 저 계집애도 다 컷군." 난데없는 거지노인의 말에 모용청은 흠칫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좌중의 시선도 거지노인의 얼굴로 옮겨갔다. "……?" 그러자 거지노인은 연신 입 끝을 비틀며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때가 되면 벌이 꽃을 찾는다더니, 저 계집애도 그것을 알아서 벌써 헌칠한 신랑감을 데려왔군…… 클클클……" 그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연신 괴이한 웃음을 날렸다. 그는 모용후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모용 늙은이는 좋겠군. 졸지에 잘생긴 사윗감 하나 얻게되니…… 정말 이럴 때는 딸 하나 없는 것이 한이로구나, 한이야." 모용청은 그만 거지노인의 말에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설마 늙은 거지가 사람 많은 이런 곳에서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타들어오는 부끄러움과 분기에 눈썹이 하늘로 치켜뻗었다. 그리고 앵두같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에 짙은 노기를 담은 채 노개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녀의 얼음가루가 풀풀 날릴 듯한 싸늘한 눈초리에 노개(老 )는 그만 등골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쿠, 이제보니 저 계집애가 진짜로 화가 났구나. 이거 곤란한데......) 노개(老 )는 실끝같은 눈을 희번덕하게 휘돌리더니 간사한 웃음을 터뜨렸다. "헤헤헤…… 어여쁜 질녀, 백부가 농담을 조금 한 것을 가지고 무얼 그러나…… 이 모두가 질녀가 귀여워서 그런 것이니……" 순간, 모용청은 노개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며 억누르고 있던 분갈을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시끄러워욧!" 그녀는 곧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냉소를 날렸다. "흥, 거지 아저씨! 앞으로는 영원히 제가 만든 연실홍미주(蓮實紅美酒)는 냄새도 못맡을 줄 알아요." 모용청의 말에 노개의 안색은 온통 찌푸러진 울상이 되어 버렸다. 그는 즉시 애원하는 빛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쿠! 계집애야, 그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냐? 누구 숨 넘어가는 꼴 볼려고 그러냐?" 그리고 짐짓 하염없이 슬픈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내 생의 기쁨이라면 오직 내 몸에서 향기 맡는 것과 연실홍미주를 마시는 것인데……" 노개는 더욱 슬픈 태도를 가장하여 모용청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두 가지 기쁨 중 하나를 뺏긴다면 도대체 무슨 기쁨으로 세상을 살아 가겠느냐?" 모용청은 그의 그런 심각한 말과 표정에 그만 웃음이 복받쳐 터져나오려는 것을 겨우 입술을 깨물어 참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휙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흡을 가다듬은 모용청은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흥! 아저씨는 한 번 톡톡히 혼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제정신을 못차릴 것이예요." "어이구 계집애야, 나는 이미 정신을 차렸으니 그만 용서하려무나." 노개는 온갖 수단을 다하며 사뭇 애원조였다. 이때, 모용후의 호탕한 소성(笑聲)이 울렸다. "하하하…… 금형, 농담은 그만하고 술이나 드십시다." 2 그 말에 노개는 희번덕 희색을 띄우며 눈을 빛냈다. 모용후는 황보성운과 소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황보소협, 낭자,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황보성운과 소향이 노개 옆의 빈자리로 가서 자리잡고 앉았다. 그러자, 모용후는 모용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청아야,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가서 연실홍미주를 열 근만 가져오너라." 순간, 노개의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그리고 그 안으로부터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연실홍미주를…… 무려 열 근씩이나……!" 그는 흘러 내리는 침조차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감격하여 입을 열었다. "아이쿠, 오늘 주신(酒神)이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구나." 노개는 눈 앞에 연실홍미주가 있기라도 한 듯 몽롱한 표정으로 연신 침을 흘렸다. 그런 노개의 모습을 바라보며 모용청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흥, 거지 아저씨는 좋아할 필요가 조금도 없어요. 그 술은 황보소협 때문에 가져오는 것이니 거지 아저씨는 입도 대지 마세요." 그리고 그녀는 몸을 홱 돌리더니 대청 밖으로 빠져 나갔다. 노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신 웃음을 흘렸다. "클클클…… 계집애야 소용없다. 여기서 술먹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그 술은 모두 내 것이다. 클클클……" 그리고 그는 찢어진 듯한 눈길을 돌려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헤헤헤…… 자네의 모습을 보아하니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듯하군." 그는 음흉하게 눈빛을 빛냈다. "하기야 술이라는 것은 사람을 취하게만 만들지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니 조금도 이득될 것이 없지. 안 그런가?" 그는 그렇지 않느냐는 듯 황보성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황보성운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하하…… 소생은 어려서부터 술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특히 명주(名酒)라면 다섯 근 정도는 충분히 먹을 수 있습니다." 순간 노개는 대경실색해 버렸다. 그의 작은 눈은 휩뜨여졌고, 함지박만한 입은 딱 벌어져 닫칠 줄 몰랐다. 그는 다그치듯 물어왔다. "다섯 근 씩이나 먹을 수 있다고?" 황보성운은 여전히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물론입니다." 노개는 황보성운의 얼굴을 바라보며 연신 코를 씰룩거렸다. 지금 그의 얼굴은 거의 쭈그러지다시피 울상이 되어있었다. "어이구…… 그것은 너무 많다. 좀 적게 마실 수 없나?" 그는 사뭇 애원이 섞인 눈빛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황보성운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안됩니다. 저도 명주라면 누구 못지 않게 좋아하니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노개는 이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주먹만한 코를 씰룩거렸다. "하는 수 없지. 자네는 귀한 손님이니 내가 양보하는 수 밖에……" 그는 좀 실망한 듯 투덜거렸다. "제기랄, 노부도 다섯 근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겠군."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못내 아쉽고 애통한 듯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염주를 굴리고 있는 노승(老僧)을 힐끗 바라보았다. "광인(廣人)! 당신은 불제자(佛弟子)의 몸이니 설마 술은 안 먹겠지?" 그러자 노승, 즉 광인대사는 눈을 가늘게 아래로 내리깔고 빙그레 웃었다. "원래 빈승은 술을 좋아하지 않으나 연실홍미주는 워낙 맛이 좋아 조금은 먹고 싶소이다." 그러자 노개는 눈을 희번뜩거리며 다그쳐 물었다. "조금이라니…… 얼마나?" "허허허…… 그저 두 근 정도로만 만족하겠소." 순간, 노개의 안색이 대변해 버렸다. "뭐, 두 근 씩이나!" 이때 옆에 있던 늙은 도인이 광인대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무량수불! 대사, 빈도도 웬일인지 한 잔 하고 싶소이다." "말코…… 당신까지……" 이제 아예 노개의 디룩한 얼굴은 처참할 지경으로 일그러져 버렸다. 그의 안면 근육은 제 마음대로 씰룩거렸다. 이때 다시 모용후의 호쾌한 소성이 울렸다. "핫핫핫…… 금형, 노부는 이 청송장의 주인이니 절대 빠질 수 없소이다." 노개는 처참하게 일그러져버린 얼굴로 마지막 구원을 바라는 듯 처량한 눈빛으로 중년 미부인을 응시했다. 그러자 중년 미부인은 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별로 술을 좋아하지 않아요." 순간, 노개의 얼굴에 일말의 희색이 감돌았다.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감격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아! 역시 부인은 내 마음을 알아 주는구려." 허나 다음 순간, "호호호…… 하지만 저 역시 오늘같은 날은 한 잔 하고 싶군요." "맙소사!" 노개의 얼굴은 온통 흉신악살처럼 처참하기 짝이 없을 지경으로 일그러져 버렸다. 이윽고 그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목메인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라리 나의 목을 베어가라! 그 술을 앞에 두고 못먹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그는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목을 어루만졌다. 좌중은 노개의 그런 신태를 바라보며 폭소에 폭소를 터뜨려 대청 안은 완전히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소향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하하핫…… 금형, 그만 하시오. 더 이상 웃겼다간 뱃가죽이 터지겠소." 잠시 후, 모용후는 웃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소협, 내 소협에게 이분들을 소개하리다." 그리고, 모용후는 늙은 거지를 가리켰다. "이 늙은 걸인은 개방( )의 현장문인으로 자칭 향개(香 )라 한다네." 황보성운은 수려한 두 눈을 깜박였다. (향개?) 그는 내심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저렇게 냄새가 나는데 향개라? 취개(臭 )라면 몰라도…… 정말 포복절도할 이름이군…… 후훗……) 황보성운은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보성운은 거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향개는 앙심이 치미는 듯 무뚝뚝하게 자루같이 부풀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본 걸인의 본명(本名)은 금천(金天)일세." 모용후는 쾌소를 터뜨리며 그 옆의 노승을 가리켰다. "하하하…… 소협, 그리고 이 대사는 소림사 장경각주(藏經閣主) 광인대사이시네." 황보성운은 다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이에 노승은 칠흑빛 염주가 들린 손을 합장하며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기쁜 인연을 맺는구려. 허허……!"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모용후는 계속해서 좌중의 인물들을 소개해 나갔다. "저 도장은 무당파(武當派)의 상청관(上靑館) 관주이자 노부의 동문사제(同門師弟)인 백우도장(白羽道長)일세." 그러자 백우도장은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량수불…… 처음 뵙겠소이다, 소시주!" "……" 황보성운은 정중히 포권지례(抱拳之禮)를 갖추었다. 이어 모용후는 마지막으로 중년의 미부인을 소개했다. "이 부인은 무산(武山) 신녀궁(神女宮)의 궁주이신 봉황신차(鳳凰神叉) 민예항(閔藝姮)이시네." 이예 민예항은 입가에 은은히 고고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황보성운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이때 모용청이 흑갈색의 술독을 들고 들어왔다. 2권으로 이어집니다. 제목: 龍尊 제2권 武威震天 지은이: 사마달 ‥ 차 례 ‥ 제 16 장 千年雪蓮實 제 17 장 젊은 英雄 제 18 장 殘陽神魔 제 19 장 神 風 제 20 장 潛龍山洞 제 21 장 玉面神手 제 22 장 春 風 제 23 장 笑殺天功 제 24 장 당돌한 少女 제 25 장 �� 谷 제 26 장 아뿔사! 제 27 장 나타난 黑白雙環 제 28 장 기이한 因緣 제 16 장 千年雪蓮實 1 모용청은 술독을 팔선탁자의 주안상 한가운데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좌중의 시선 속에서 밀봉한 뚜껑을 서서히 벗겨냈다. 순간, 대청 안에는 실로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말할 수 없이 향긋한 향내가 진동했다. 향개 금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먹만한 코를 벌름거리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크…… 으…… 진정 기가 막힌 향기로다." 그러자 모용청은 눈을 가볍게 흘겼다. "흥, 거지 아저씨에게 돌아갈 술은 조금도 없으니 괜히 입맛부터 다시지 말아요." 향개는 온통 울상이 되어 털이 망가진 붓을 연상시키는 빠진 눈 썹을 일그러뜨렸다. "계집애야, 보아허니 이 술독에 든 술은 최소한 열근은 넘는 것 같은데 나에게 돌아올 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러나 모용청은 어림도 없다는 듯 코 끝으로 야멸찬 냉소를 날렸다. "흥, 술이 아무리 많아도 거지 아저씨에겐 조금도 줄 수 없어요." 향개는 안타까운 듯 마치 솔과 같은 꺼칠한 턱수염을 쓸며 실낱같이 찢어진 눈에 가득히 애원의 표정을 담았다. "한 모금만 마셔도 안되겠느냐?" "아저씨에게 줄 술이 있으면 차라리 땅에 버리겠어요." 모용청은 모질게 내뱉았다. 그러자 향개는 자루같이 부풀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예의 그 코를 씰룩거리며 원망조로 입을 열었다. "계집애야! 대체 노부가 너에게 무슨 철천지 원한을 졌다고 그러느냐?" 그리고 그는 온통 얼굴에 울상을 짓고 술독을 바라보다가 이내 마음을 돌이킨 듯 간사하게 웃었다. "헤헤헤헤…… 계집애야, 그러지 말고 노부도 좀 마시자." 향개는 연신 술독을 흘끔거리며 꿀꺽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술만 먹게 해준다면 내 네 소원을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모용청은 거절하려다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입가에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거지아저씨,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한 걸음 양보하죠." 순간, 향개는 커다란 입을 딱 벌리고 누런 황금니를 빛내며 만면에 희색을 띄웠다. "헤헤헤…… 과연 나의 질녀답구나." 그는 재빨리 손을 뻗어 술독을 들려고 했다. "무슨 짓이예요?" 모용청은 향개의 손을 재빨리 가로막으며 향개의 실눈을 노려보았다. 순간, 향개는 어리둥절하여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마셔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조건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향개는 이내 안색을 가다듬으며 다급히 소리쳤다. "그래, 그래, 무슨 조건인지 빨리 말해라. 뱃 속에서 주충(酒蟲)이 발악을 하고 있구나." 모용청은 앙큼스럽게 생긋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 아저씨께서 몇 년 전에 설산(雪山)에서 천년설연실(千年雪蓮實) 몇 개를 우연히 얻었다고 들었는데요." 순간, 향개는 전신을 움찔하고 곧추세우더니 두 눈을 희번뜩거렸다. "계집애야, 너는 대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그러자 모용청은 은방울이 굴러가는 듯한 교소(嬌笑)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것은 알 필요 없어요. 단지 저는 바로 그 천년설연실을 원할 뿐이예요." "뭐라고?" 향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안색을 대변시키며 경악성을 내질렀다. "너, 너……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냐? 천년설연실을 달라고?" 향개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모용청은 생긋 입가로 유유한 미소를 날렸다. "그래요. 바로 그 천년설연실을 다섯 개만 주시면 이 술을 마시도록 허락하죠." 향개는 모용청의 말에 울화가 치미는 듯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질렀다. "말도 안된다, 계집애야! 천년설연실은 천고(千古)의 신품으로 평생 한 개도 얻기 힘든 것인데 이까짓 술 때문에 다섯 개나 내놓으라니……" 그는 얼굴을 씰룩이며 단호하게 내뱉았다. "차라리 내 간을 빼가져 갔으면 가져갔지 그것은 못준다." "흥, 그러면 저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어요." 모용청은 새침하게 내뱉은 뒤 주위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자, 여러분! 어서 술을 드세요." "무량수불…… 진정 저절로 군침이 돌만큼 좋은 향기구려. 빈도가 우선 여러분께 한 잔을 권하겠소." 백우도장은 홀연히 입가로 웃음을 흘리며 슬쩍 불진을 흔들었다. 순간, 팔선탁자의 중앙에 놓여있던 술독이 돌연 허공으로 세 자나 두둥실 떠오르더니 광인대사의 앞으로 스르르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술독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더니 광인대사의 술잔에 가득 술을 따르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정말 훌륭한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신공이외다. 빈승은 진정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오." 광인대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빈승이 스스로 못난 솜씨를 한 번 부려 보겠소이다." 그는 승포를 가볍게 흔들었다. 순간, 실로 놀라운 광경이 목전에서 전개되었다. 술독에서 술줄기가 솟구치더니 좌중들의 앞에 놓여 있는 술잔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모든 술잔에 술이 가득 들어차는 것이었다. 단, 향개의 술잔만 여전히 아무 것도 차지 않은 빈 잔이었다. 이에 향개는 실같은 눈을 부라리며 노갈을 터뜨렸다. "대머리! 왜 나에게는 술을 안주는거요? 내가 지난해 당신 소림사에 불전을 안줬다고 정말 이렇게 앙심을 품기요?" "아미타불…… 빈승이 알기로는 금시주께서는 술을 안먹겠다고 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만?" 광인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향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향개는 노기가 치솟아오른 듯 얼굴을 붉히며 두눈을 부릅떴다. "노부가 언제 안먹겠다고 했단 말이오?" 이때 옆에 있던 모용청이 말 속으로 끼어들었다. "그럼, 거지 아저씨께서는 그 천년설연실을 내놓기로 했나요?" "처, 천년설연실……!" 향개는 말을 더듬으며 다급히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모용청을 쏘아보며 고함을 빽 질렀다. "어, 어림 없는 소리 하지 말아라. 내가 그 다섯 개의 천년설연실을 얻으려고 설산(雪山)에서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긴 줄 아느냐?" 말을 하며 향개는 곤혹의 눈빛으로 술독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찌 그것을 내놓을 수가 있단 말이냐……" "흥, 그럼 저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요." 추호도 참작할 여지가 없다는 듯 모용청은 냉랭하게 안색을 바꾸며 뾰루퉁하게 내뱉았다. 이때 이들의 묘한 흥정을 바라보며 모용후가 흔쾌한 듯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청아야, 금형은 술을 마시기 싫다는데 왜 자꾸만 그에게 권하려 하느냐? 안그렇소, 금형?" 모용후는 향개의 시뻘개져 씰룩거리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향개가 분격의 눈빛으로 입을 열기도 전 좌중으로 고개를 돌리며 잔을 치켜들었다. "술이란 본래 그 맛을 아는 사람만이 먹을 수 있는 법! 자, 여러분! 모두 한 잔 들도록 합시다." 그러자 좌중은 모두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술을 쭉 들이켰다. "아미타불…… 정말 훌륭한 미주(美酒)로다. 빈승이 이토록 훌륭한 술을 마실 줄이야. 셋이서 마시다 둘을 시기하여 죽일 술이로다. 광인대사는 술잔을 내려 놓으며 연신 감탄성을 터뜨렸다. 이에 백우도장도 입맛을 음미하듯 혀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무량무불…… 빈도도 동감이오." 모든 좌중의 인물들은 주거니 받거니 계속 담소를 하며 술을 비워갔다. 향개 금천은 싸늘한 안색으로 냉담하게 앉아 있었다. 허나 시간이 흐를 수록 술이 줄어들자 그의 눈꼬리가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안면까지 온통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황보성운은 그런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터져오르는 웃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후후훗…… 향개가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모용청은 향개의 씰룩이는 얼굴을 힐끔 훔쳐보더니 놀리려는 듯 앙증맞은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벌써 술이 반도 안 남았네." 이에 모용후가 은근슬쩍 맞장구를 쳤다. "허허허…… 오늘 이 술 먹으면 몇 년 이내에 다시는 이 맛 보기가 힘들텐데, 실컷 먹어야지." 이런 두 부녀의 말에 금천은 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안색을 대변시키며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시뻘개진 얼굴로 삿대질을 하며 분갈을 터뜨렸다. "좋구나, 좋아. 이 장원의 애비나 딸년이나 모두 도둑 심보가 태산을 뽑아다 안마당에 심어놓은 듯하구나." 그리고 그는 품 속을 아무렇게나 휘집더니 칠흑빛의 정교한 옥합을 꺼내 모용청에게로 뿌리쳐 내던졌다. "가져라 가져! 빌어먹을…… 천년설연실이 아니라 만년설연실이라도 노부는 더 이상 못참겠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탁자 위의 술독을 번쩍 치켜들더니 목울대를 오르락거리며 벌컥 벌컥 들이켰다. 모든 사람들은 돌변한 향개 금천의 태도에 아연실색하여 멍청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술독의 술은 금천의 불쑥 튀어나온 뱃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얼마 후, 금천은 흡족한 듯 술독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크---- 으! 진정 좋다." 그리고 두터운 입술과 솔같은 수염 위로 낭자하게 흘러내리는 술을 쓰윽 닦으며 모용청을 노려보았다. "계집애야! 내 이번에는 너에게 당했지만 다음번엔 톡톡히 빚을 갚아주마." 그는 다시 끌어안고 있던 술독을 치켜들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벌컥벌컥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이켰다. 금천의 술마시는 광경을 바라보며 모용청은 은쟁반 위를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호호…… 거지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말을 교태롭게 뱉은 그녀는 수중의 옥합을 열어젖혔다. 순간, 그곳에는 보기에도 선명한 붉은 빛을 띤 다섯 개의 설연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으로부터 머리를 상쾌하게 하는 향긋한 향기가 뿜어져 올랐다. 이때 금천은 술독을 내려놓고 마지막 한 방울을 들이킨 뒤 아깝다는 듯 쩝쩝거리며 입을 열었다. "계집애야, 노부의 보물을 모두 빼앗으니 이제 속이 시원하냐?" 이에 모용청은 가벼운 냉소를 터뜨렸다. "흥! 거지아저씨, 제가 알기로는 아저씨는 설산에서 최소한 열 개의 설연실을 구했어요." 그렇지 않느냐는 듯 모용청은 금천의 가는 눈을 직시하며 톡 쏘았다. "헌데, 이것 가지고 뭐 그렇게 안절부절이세요?" 향개는 움찔하더니 말꼬리를 돌려 얼버무렸다. "도대체 그 많은 설연실을 어디에 쓰려고……?" 그러자 모용청은 쌩긋 웃으며 황보성운을 의미 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옥합을 닫더니 황보성운에게 내밀었다. "황보 공자님! 소녀의 성의니 이것을 받아주세요." 황보성운은 예기치 않게 불쑥 옥합이 디밀어오자 깜짝 놀라 손을 다급히 휘저었다.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어찌 소생이 이 귀한 것을……" "아니예요, 공자님. 이것은 저의 정성이니 받아주세요." 이때 이들의 모습을 보며 향개 금천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후핫핫핫! 결국 그랬었구나. 좋아! 좋아! 과연 나의 질녀답다. 하하핫핫하……" 한참 동안이나 대소를 터뜨리던 금천은 음충스런 눈길로 모용청을 힐끗 둘러본 뒤 황보성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황보소협, 받아두게. 그 천년설연실은 천하에 대단한 기물(奇物)이네.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일세." "허지만……" 황보성운은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말 끝을 흐렸다. 그러자 모용청이 두 눈에 돌연 처량한 빛을 띄웠다. "제가 워낙 못나서 못 받는 것인가요?" 황보성운은 그만 모용청의 황당한 말에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그, 그게…… 무슨……" 이에 옆에 있던 소향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 받아주세요. 모용동생의 정성인데 어찌 박절하게 거절할 수 있어요?" "……" 황보성운은 아무 말 없이 어쩔 줄 모르다 이내 결심한 듯 포권을 했다. "고맙게 받겠소." 황보성운은 모용청에게 옥합을 건네받았다. 그러자 모용청은 만면에 매우 기쁜 기색을 떠올리며 갑자기 몸을 발딱 일으켰다. 그리고 날아갈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다시 가서 연실홍미주를 더 가져오겠어요." 향개는 턱 밑까지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며 다급하게 말을 받았다. "오냐! 오냐! 그것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다." 그는 입가에 한 차례 침을 두르며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허나, 계집애야! 가져오려면 독으로 두 개쯤 더 가져와라. 그래야 이 득실거리는 주충들을 진정시키지, 암." 그는 실로 그렇다는 듯 불쑥 튀어나온 아랫배를 탕탕 두들겼다. 모용청은 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이번만은 특별히 봐드리죠." 그녀는 말을 마치고 이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곧 밀봉한 술독 두 개를 들고 들어섰다. 좌중의 인물들은 밀봉한 술독을 뜯어 주거니 받거니 술잔들을 비워갔다. 그리고 허리끈을 풀고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흉금을 탁 터놓고 대화를 시작했다. 2 술자리는 일배 부일배, 터져오르는 호쾌한 소성(笑聲) 속에서 무르익어 갔다. 어느덧 쏘아 논 화살처럼 시간은 흘러 대청마루로 잔광(殘光)이 희미하게 쓰러져 가는 저녁 무렵이 됐건만 주석(酒席)의 취흥은 좀체로 가실 줄을 몰랐다. 헌데, 이때 도도히 취흥이 무르익은 대청으로 한 명의 청의 장한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다급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온통 당황하여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색된 얼굴로 모용후를 바라보았다. "장주님! 다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용후는 주석의 홀홀한 취흥을 깨며 돌연히 장한이 뛰어 들어오자 들었던 술잔을 내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길래 그토록 허둥대느냐?" 그러자 장한은 품 속에서 하나의 깃발을 꺼내들어 모용후에게 넘겼다. "이것이 대문에 날아와 박혔습니다." 모용후는 깃발을 받아 펼쳤다. 순간,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잔양목혈령(殘陽木血令)!" 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과 같은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좌중의 인물들은 모용후의 말에 일시에 술잔들을 내려놓으며 대경했다. "잔양목혈령이라고?" 향개 금천도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묘하게 올라간 목소리로 빽 소리쳤다. "그럼, 잔양오살(殘陽五殺)이 다시 나타났단 말인가?" 일순, 장내에는 천근같은 침묵이 불길한 전조를 보는 듯 싸늘하게 감돌았다. 이윽고, 광인대사의 나직한 불호소리가 침묵을 깨뜨리며 나직이 울려퍼졌다. "아미타불…… 잔양오살은 삼십 년 전 무림삼기(武林三奇) 중 한 분인 청암신니에 격패당해 은거했는데 어떻게 다시 등장했을까?" 순간, 모용후의 눈 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리고 무엇이 생각난 듯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듯하오." "그게 무슨 말이오?" 향개 금천이 당치않다는 듯 즉각 물어왔다. 모용후는 회상하는 듯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하며 나직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일 년 전쯤이었소. 사천성에서 길을 가다 숲 속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리길래 숲으로 뛰어 들어 갔소."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에 격분의 빛을 띄웠다. "헌데, 그곳에서 참혹한 만행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었겠소? 한 명의 청년이 한 소녀를 강간하고, 그것도 모자라 잔혹하게 죽이고 있었던 것이오." 모용후는 그 때를 상상하는 듯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싸늘한 안광을 내뿜었다. "노부는 격노하여 그 자와 격전 끝에 제압하여 죽이려 했소." 금천은 답답하다는 듯 주먹코를 벌렁이며 한소리를 빽 질렀다. "그게 잔양오살과 대체 무슨 관계요?" 모용후는 미동 없이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헌데, 그 놈은 내가 죽이려 하자 다급히 자신이 잔양문(殘陽門)의 제자라고 위협하는 것이었소." 모용후는 고개를 돌려 좌중의 따가운 시선을 외면하며 침중하게 말을 뱉았다. "허나…… 그 당시 노부는 워낙 격분한 나머지 그 자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말았소." 모용후의 말을 다 들어 전모를 알게 된 금천은 신경질적으로 코를 잡아 비틀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흠, 결국 잔양오살이 그렇게 해서 그 냄새나는 수족을 뻗었군." 그리고 그는 방망이만한 입술을 좌우로 비쭉거리더니 코를 벌름거리며 웃었다. "하하하…… 모용 늙은이, 두려워 할 필요는 없잖소. 잔양오살인지 개뼈다귀인지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나 우리 역시 만만치 않으니……" 한데 이때, 어디선가 사람의 등골을 은밀히 다가와 베어내는 듯한 싸늘하고 흉흉한 괴소가 들려왔다. "크흐흐흐흐…… 건방진 놈이로군. 감히 우리 잔양오살을 능멸하다니……" 좌중은 모두 난데없는 괴소에 대경했다. 기실 이들은 모두 강호에 발 하나 손 하나는 족히 디밀 절정고수들인 것이다. 헌데, 추호의 기척도 없이 이들의 지척에 접근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대의 무공은 가히 범상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이다. 찰나지간 대청으로 다섯의 인영(人影)이 현신(現身)했다. 그들은 모두 황의(黃衣) 장포 차림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팔구십여 세로 보였는데, 한결같이 깡마르고 눈이 퍼렇게 움푹 패어 들어가 사뭇 뼈를 얼릴 듯한 음산한 기운이 서리서리 뻗쳐나왔다. "잔양오살이다!" 좌중에서 한 마디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모용후는 반사적으로 퉁기듯 벌떡 일어나며 억지로 꾸민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하하하…… 다섯 분께서 어찌 이곳까지 어려운 행차를 하시었소?" "흐흐흐…… 모용후, 우리가 온 목적을 모른다고 발뺌하지는 않겠지?" 잔양오살은 살기가 싸늘하게 뻗치는 눈길로 모용후를 쏘아보며 음침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닥쳐라! 네놈은 작년 이맘 때 사천의 초양(湖陽)에서 한 명의 청년을 참살하지 않았느냐?" "……" 잔양오살은 말없이 서 있는 모용후를 계속 핍박해 나갔다. "너는 그가 누군지 아느냐?" "그, 그건……" "그는 바로 우리들의 제자다. 너는 그 당시 그것을 알면서도 그 자를 죽였다." 잔양오살은 입가에 서리가 내릴 듯한 싸늘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모골이 송연해질 듯한 냉막한 일갈을 터뜨렸다. "크흐흐흐흐…… 그러므로, 네놈은 우리 노야들의 손속 아래 뼈와 살이 찢겨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모용후의 안색은 그들의 말에 따라 수시로 급변했다. 허나 잠시 후, 그는 안색을 냉막하게 고치며 엄숙하게 입을 떼었다. "좋소, 그 자를 죽인 것은 시인하리다. 허나 그 자의 죽음은 마땅하오." 모용후는 이렇게 냉막히 말을 자른 후 잔양오살을 둘러보았다. "여러분도 무림의 고인(古人)이니 무림에서 가장 첫 번째의 금기가 무엇인지 알 것이오." "모용후,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 잔양오살은 가당치 않다는 듯 냉막하게 힐문했다. 모용후도 맞받아 싸늘하게 내뱉았다. "그자는 바로 무림의 최대 금기인 색(色)을 범했소. 게다가 살(殺)까지!" 순간, 잔양오살은 움찔하더니 얼굴에 약간 당황한 기색을 떠올리며 서로 마주보았다. 허나 그것도 일순, 가장 가운데 서 있던 노인이 한 걸음 나서며 돌연 두 눈으로 교활한 흉광을 내쏘았다. "흐흐흐…… 우리는 그런 것은 알 필요 없다. 단지 네놈이 그를 죽인 것만이 중요할 뿐!" 이때, 금천이 팔선탁자 주안상을 쾅, 치며 불끈 일어섰다. "흥, 사도의 무리라 할 수 없군. 잔양오살 네놈들은 말 속에 구린내를 넣고 다니느냐? 구역질이 나는구나." 금천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안면과 코를 씰룩이는 시늉을 했다. 이에 잔양오살은 안색을 대변시키며 격노한 귀갈(鬼喝)을 터뜨렸다. "무엇이? 금천! 죽고 싶으냐?" "이런, 찢어죽일!" 허나, 금천은 뉘집 개가 짖느냐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흐흐흐…… 아마 쉽지 않을 걸." 그러자 맨 왼쪽 노인이 소매를 걷어 붙이며 얼음가루가 날릴 듯한 싸늘한 표정으로 음충스럽게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금천! 네놈에게 나 마영살(魔影殺)의 무서운 손속을 보여주마." 그는 말을 마치자 마자 마루를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활과 같은 곡선을 그려 금천의 전면으로 짓쳐내리며 일장을 격출했다. "죽어라! 금천!" "흥, 누구 맘대로!" 금천은 누덕누덕 기운 양 소맷자락을 맹렬하게 휘두르며 강맹하게 맞받아쳐 나갔다. 순간, 꽈르릉----! 대청을 뒤흔드는 굉음을 일으키며 강맹한 두 장력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동시에, "욱----!" 금천은 후방으로 네 걸음이나 격퇴되어 다급한 신음성을 터뜨렸다. 허나, 마영살은 뒤로 반보 정도만 물러난 채 흐트러진 신형을 추스리고 재차 공세를 취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로써 쌍방의 실력이 확연히 판가름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중인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 과연 잔양오살은 무서운 놈들이구나. 막내인 마영살이 금천보다 한수 위라니.) 마영살은 드디어 공격을 취할 준비를 다 갖추고 입가에 득의의 괴소를 날렸다. "흐흐흐…… 향개 금천, 술버러지야! 이번 일장으로 네놈을 지옥으로 보내주마." 이때 위급을 느낀 모용후가 향개 앞을 다급하게 가로막으며 싸늘한 일갈을 터뜨렸다. "잠깐! 마영살! 네놈은 내가 상대해주마."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경쾌한 금속성이 일었다. 챙----! 어느새 그의 손에는 싸늘한 검광을 내뿜는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다음 찰나, 그는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무수한 검광을 난무시키며 마영살의 전면으로 덮쳐갔다. 허나, 어디선가 기이한 잠력이 그의 신형을 끌어당기는 것과 함께 음충맞은 괴후가 들려왔다. "흐흐흐…… 모용후! 그들의 싸움에 끼지 마라. 너는 나 자오살(子午殺)이 맡아주마." 그자는 바로 잔양오살 중 셋째인 자오살이었다. 모용후는 울화가 복받쳐 올라와 자오살에게로 신형을 돌렸다. "좋다, 자오살! 노부의 진천신검의 진수를 보여주마." 그는 포효처럼 일시에 분갈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자오살의 면전으로 성난 파도처럼 짓쳐내려갔다. 그들은 곧 본신 절기를 십분 펼쳐내어 격렬한 격투를 벌렸다. 주위로 은망(銀網)과 벽공장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들은 마치 용호가 상박하는 듯 막상막하의 호각지세를 이루었다. 그 격투의 와중 속에서 잔양오살 중 나머지 세 명이 서로 마주보더니 모종의 타결을 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주석을 향하여 소리쳤다. "광인! 백우! 우리도 한 번 어울려보는 것이 어떠냐?" "아미타불…… 빈승도 동감이오." 광인대사가 선뜻 앞으로 나섰다. 백우도장도 불진을 단단히 치켜들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잔양오살 중 둘째 홍면살(紅面殺)이 광인대사 앞으로 덮쳐내렸고, 넷째 추명살(追命殺)도 백우도장에게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그러자 뒤에 남은 첫째 혈혼살(血魂殺)이 음탕한 시선으로 민예항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연신 입가에 음흉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봉황신차 민예항, 삼십 년 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정숙해진 것 같구나." 이에, 민예항은 서리가 내린 듯 싸늘한 안색으로 혈혼살을 꿰뚫듯이 짓쏘아보며 서슬이 시퍼렇게 외쳤다. "닥쳐라, 혈혼살! 삼십 년 전 청암신니께 혼이 나고도 아직 정신을 못차리다니…… 너같은 놈은 죽어도 마땅하다." 이에 혈혼살은 미친 듯이 노화가 치미는 듯 시뻘개진 얼굴로 분격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닥쳐라, 민가 계집년! 과거 너 때문에 청암 늙은 중년과 싸워 격퇴당해 무림을 물러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들에게는 얽힌 과거사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원래 그 이야기는 삼십 년 전 민예항의 꽃다운 처녀 시절로 돌아간다. 그녀의 미모는 지극히 뛰어난 바 있어 뭇 청년들의 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허나, 그녀는 고고하고 우아한 품위를 지켜 뭇 청년들의 가슴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헌데, 우연히 그녀를 보게된 혈혼살이 음흉한 음심을 품고 그의 네 아우와 함께 그녀를 막아섰던 것이다. 위기일발! 실로 처녀 민예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이때 이곳을 지나가던 일대고인(一大古人)이 있었으니, 그 고인이 바로 무림 십대고인 중의 한 명인 청암신니(靑庵神尼)였던 것이다. 원래 청암신니는 잔양문과의 싸움을 꺼려왔던 바였다. 그것은 잔양문 일대문주(一大門主)가 자신과 동배인 이마(二魔) 중의 한 명인 잔양신마(殘陽神魔)였기 때문이었다. 허나, 잔양오살이 너무나 안하무인(眼下無人)격으로 날뛰자 격노하여 그들을 격패시키고 민예항의 순결을 건졌던 것이다. 잔양오살은 그때 십 년 동안이나 거동조차 할 수 없을만큼 격심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혈혼살은 민예항의 말에 얼굴을 시뻘겋게 달구며 격분한 것이었다. 그는 원독과 통한에 가득찬 음성으로 음음하고 흉흉하게 입을 열었다. "민예항! 오늘 네년을 잡아 실컷 즐긴 다음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주겠다." 그는 음침하게 입가로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민예항에게로 다가왔다. 순간, 민예항은 그의 위세에 눌려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실상 민예항도 뒤에 서라면 서러워할 강호의 절정고수였다. 허나, 잔양오살의 첫째인 혈혼살에 비교하면 한 수 밑인 것이다. 민예항은 은근히 치미는 두려움에 접근해오는 혈혼살을 불안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이때 어디선가 웅후하고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 혈혼살, 멈추시오." "응?" 혈혼살은 난데없이 훼방꾼이 그와 그녀 사이로 들어서자 안색을 짙게 찌푸렸다. 헌데, 보니 약관의 청년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네놈은 누구냐?" 혈혼살은 눈을 휩뜨며 분격에 찬 괴성을 빽 내질렀다. 그러자 그 약관의 청년은 입가에 신묘한 웃음을 빙글 돌리며 쾌 소(快笑)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소생은 단지 이곳에 머무는 손님이외다." 약관의 청년이 자신의 위세에 추호도 굴하는 기색이 없자 혈혼살은 내심 솟구치는 울화를 금할 수 없었다. "흐흐흐…… 에미의 젖에나 달려있을 새파란 놈이 감히 노부의 일에 참견을 하다니…… 사지를 온전히 간수하려면 즉각 물러나라!" 허나, 혈혼살의 살기가 뻗치는 노갈에도 청년은 추호의 두려운 기색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니, 오히려 뉘집 개가 짖느냐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씽긋 웃는 것이었다. "후훗! 소생은 원래가 불량한 일을 보면 온 몸이 근질거리는 성미라…… 용서하시오." 제 17 장 젊은 英雄 1 순간, 혈혼살의 안색이 삶은 돼지간처럼 푸르딩딩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건방진 애송이 놈! 관을 보기 전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놈이구나."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냉랭한 표정에 한 줄기 비웃음의 기색을 그으며 한 손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자, 애송아! 받아라!" 그는 일갈을 터뜨리며 손을 쭉 들이밀었다. 순간, 혈혼살의 장심으로부터 막강한 암경(暗勁)이 흉험한 기세로 내뻗쳐 나왔다. 약관의 청년 즉, 황보성운은 담담하게 입가로 기묘한 웃음을 물은 채 슬쩍 소맷자락을 흔들었다. 순간, 펑! 혈혼살의 장심으로부터 폭사되어 오던 암경과 황보성운의 소맷바람이 허공에서 부딪쳐 폭음을 울렸다. 동시에, "으---- 윽!" 혈혼살은 고통에 찬 신음성을 내지르며 그 충돌의 위력으로 무려 다섯 걸음이나 주르륵 밀려나서야 흔들거리는 신형을 겨우 곧추세웠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온통 경악과 공포, 당혹의 감정들이 얽혀 떠올랐다. 그는 도대체 지금 일어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희대의 흉명을 떨치던 자신이 일개 약관 서생의 가벼운 소맷바람에 격퇴당하다니…… 혈혼살은 가까스로 경악의 감정을 누르며 휘둥그래진 눈으로 입을 떼었다. "네, 네놈은…… 대, 대체 누구냐? 무공을 보니 결코 무명소졸(無名小卒)이 아니구나?" "후후후…… 소생은 단지 황보성운이라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외다." 황보성운은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시종 여유작작한 태도였다. 이에 혈혼살은 이를 부드득 부서져라 갈며 양 손을 가슴 앞으로 끌어올렸다. "좋다. 조금 전에는 네놈을 너무 얕본 탓에 당한 것이다. 허나 이번에는 좀 다를 것이다." 순간, 혈혼살의 양 손이 돌연 붉은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이에 민예항은 다급히 소리쳤다. "황보소협! 조심하세요. 지금 저자가 시출하려는 것은 잔양신공(殘陽神功)이예요." 이때 이미 혈혼살의 양 손은 빨갛게 달아올라 완전히 혈수(血手)로 변해 있었다. "흐흐흐…… 애송아! 이젠 뒈져랏!" 그는 귀갈(鬼喝) 같은 괴후를 내지르며 혈수를 힘차게 황보성운을 향해 내뿌리쳤다. 순간, 슈슈슈슉----! 공기를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을 일으키며 태산을 밀어버릴 듯한 장력이 소나기처럼 저돌적으로 황보성운을 향해 덮쳐들었다. 순간, 황보성운은 현무신공(玄武神功)을 끌어올려 전신을 철벽보다 더 단단한 호신강기로 둘러쌌다. 찰나지간 흉험한 기세로 혈혼살의 장력이 황보성운의 전신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 장력이 막 격중되는 순간, 황보성운은 가공할 현무신공 십자결 중 탄자결(彈字訣)을 운공했다. 다음 순간, "으---- 악!" 외마디 처절한 비명이 공기를 갈가리 찢으며 들려왔다. 동시에, 허공으로 한 줄기 피화살을 내뿜으며 혈혼살의 전신이 퉁겨나갔다. 쿵! 그의 신형이 땅에 둔중한 소리를 울리며 떨어졌다. 주위의 인물들은 모두 손을 내린 채 목전에서 전개된 상황에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지척 안전에서 발발한 일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찌 혈혼살 정도의 절세마두가 일개 약관 청년에게 이토록 처참하게 당한단 말인가? 이때, "우---- 욱!" 혈혼살은 창자가 뒤틀리는 듯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으며 울컥 피 한 모금을 토해냈다. 허나, 황보성운은 여전히 주위에 일어난 사태에 별 감흥이 없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온통 커다란 의혹으로 얽혀 있었다. (아까 중인들의 표정으로 보아 이들 잔양오살의 무공이 상당한 듯했다. 한데, 겨우 나의 육성 내공조차 받아내지 못하고 저꼴이라니……) 만일 누군가 황보성운의 이 말을 들었더라면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과연 천하에 이토록 무공이 강한 자가 그 어디 있단 말인가?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급촉하게 울렸다. "황보소협, 조심하시오!" 그 말에 황보성운은 슬쩍 양 옆을 훑어보았다. 순간, 그는 추명살과 홍면살이 자신의 요혈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짓쳐 내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혈혼살이 당하자 눈이 뒤집혀 혼신의 전력으로 합공(合 功)을 전개한 것이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추호도 당황의 기색이 없이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잔양오살이 이름난 고수인 줄 알았더니 일개 보잘 것 없는 무리배들이었군." 그리고 황보성운은 소맷자락을 양 측면으로 내뻗으며 짤막하게 부르짖었다. "화(化)!" 순간, 추명살과 홍면살은 자신들의 장력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 아니!" "엇! 이럴 수가!" 그들의 다급한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그들의 가슴으로 무서운 경기가 회오리처럼 몰아쳐 오는 것이었다. 추명살과 홍면살은 혼비백산하여 전신을 급급히 움직였다. 허나 두 차례의 둔탁한 음향과 함께 두 마두는 나직한 비명을 터뜨리며 경기에 휩싸여 허공으로 휘말려 날아갔다. 이때 허공을 나는 그들의 귓가로 차가운 비웃음이 흘러들어 왔다. 이어, "파(破)----!" 한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파파파파팍! 무시무시한 금속음같은 것이 고막을 터뜨릴 듯 울려퍼졌다. 동시에, "으---- 악!" "크---- 악!" 단말마의 두 마디 참혹한 비명이 대기(大氣)를 찢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마두는 십 장 밖으로 화살처럼 퉁겨나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잠시 꿈틀거리더니 이내 축 늘어져 버렸다. 그들의 모습은 실로 말씀이 아니었다. 전신은 이곳저곳이 터지고 갈라져 온통 뭉클뭉클 피가 낭자하게 흘러나왔으며 입으로는 샘물처럼 섬뜩한 선혈이 콸콸 솟구쳤다. 중인들은 아예 넋을 잃고 멍하니 목전에서 전개된 처참경을 바라보았다. 그저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용청마저도 황보성운의 무공이 이토록 경천동지할 정도일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알지 못할 흐뭇함과 아울러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째서 나는 정말 이렇게 바보스러울까? 이미 입신(入神)에 든 황보공자에게 아버님의 무공을 자랑했으니…… 황보공자가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을까?) 그녀는 멍하니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지금 황보성운은 뒷짐을 진 채 약간 거만스러운 표정으로 잔양오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생 기질인 듯하면서도 영웅적인 기상이 함께 보이는 그 모습에 모용청은 내심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천하에 저분같이 특출한 개성을 지닌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힐끗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소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심 기우(杞憂)를 금할 수가 없었다. (소향 언니는 저분을 무척 사랑하고…… 저분 역시 소향 언니를 좋아하는 눈치인데……) 그녀는 지그시 앵두같은 입술을 물었다. (좋아, 아무리 험난한 과정이 있더라도 반드시 저분을 차지하고야 말리라.) 이때 잔양오살 중 첫째인 혈혼살의 날카로운 음성이 그녀의 귀를 울렸다. "애송이 놈, 오늘은 우리가 완전히 패했다." 그는 원독에 가득찬 눈으로 황보성운을 노려보았다. "애당초 이 청송장에 너같은 놈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온 것이 크나 큰 실책이었다." 그는 잠시 숨을 들이키더니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허나, 이것으로 우리의 원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청산이 푸르고 녹수가 흐르는 한, 복수는 반드시 천만 배로 갚고야 말겠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옆에 서 있는 자오살과 마영살에게 홱 고개를 돌렸다. "가자!" 그는 짤막한 일갈을 내지르며 먼저 신형을 날렸다. 자오살과 마영살은 원한이 싸늘하게 뻗치는 눈으로 황보성운을 쏘아보더니 즉시 쓰러져 있는 추명살과 홍면살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혈혼살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리며 원독에 가득찬 분갈을 터뜨렸다. 황보성운은 담담하게 웃으며 그들의 등 뒤에다 소리쳤다. "후후후…… 무림의 어느 곳에서라도 그대들의 도전을 기꺼이 받 아주리라." 잔양오살은 중인들의 시선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지 결투의 흔적만이 수선스럽게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었다. 이때 소향이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근심스러운 기색을 나타내며 황보성운 옆으로 급히 다가왔다. "공자님! 몸은 괜찮으세요?" "후후후…… 소향, 내가 어디 상처입을 사람 같은가?" 황보성운은 눈을 가늘게 치뜨며 입가에 미소를 날렸다. 소향은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 공자님의 무공이 초절(超絶)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까 같아서는 정말 가슴이 떨려 혼났어요." 그러자 황보성운은 손가락 끝으로 소향의 오똑한 콧날을 누르며 약간 장난기서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소향, 앞으로 힘들겠는데……" "……?" 소향은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이에 황보성운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어디 나를 따라다닐 수가 있겠는가?" "어머!" 소향은 얼굴을 붉히며 샐쭉 토라진 표정을 띄웠다. "아이참,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이때 황보성운과 소향과의 오가는 수작을 보며 금천이 참을 수 없는 듯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낭자, 우리들은 상관말게. 나도 한창 젊을 때는 다 그렇고 그랬으니까! 핫핫핫핫핫……" 중인들도 향개의 짓궂은 수작을 보며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허나 황보성운을 바라보는 모용청의 입가에는 약간 쓴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2 대청 안은 다시 소나기가 훑고 지나간 수수밭처럼 시원스럽고 경쾌한 말들이 오갔다. 좌중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술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의당 그들의 관심과 탄복어린 시선은 황보성운에게 집중되었다. "황보소협, 이 거지는 정말 눈깔이 툭 튀어나오도록 놀랐네." 향개 금천이 신이 나는 듯 실눈을 손가락으로 크게 벌려 보이면서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예의 그 함지박같은 입을 벌렸다. "무림의 마두로서 이름을 날린 잔양오살이 자네의 일거수 일투족에 형편없이 나가 떨어지다니" 그는 통쾌한 듯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아마 이 소문이 무림에 퍼져나가면 아무도 믿으려 들지 않을걸세." 이에 모든 좌중의 인물들도 빙긋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이때 광인대사가 어떤 의문이 있는 듯한 시선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황보시주, 시주의 무공은 혹시 백 년 전 천하제일 의 기인이었던 현천신군(玄天神君)의 현무신공이 아닌지?" 그 말에 좌중의 인물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경악성을 터뜨렸다. "현천신군?" "현무신공!" 모용후도 평소의 침착성을 잃고 다급히 물었다. "소, 소협 그게 사실이오?" 그러자 황보성운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그는 내심 광인대사의 해박한 견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기실 그도 현천신군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황보성운이 익힌 현현비록의 주인인 현현자는 지금으로부터 이백 오십 년 전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무림의 신비문파의 천현문(天玄門)의 제일대 조종(祖宗)으로, 만일 지금 살아있다면 근 사백 세에 이를 여러 대(代) 전의 기인인 것이다. 헌데, 현천신군은 천현문의 삼대장문(三代掌門)으로 백 년 전에 천하를 종횡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백 년 전 중원무림이 도탄에 빠졌을 때 천신(天神)처럼 나타나 삽시간에 마(魔)의 무리를 소탕하고 홀연히 은거했던 것이다. 허나, 그는 그 이후로 다시는 그 종적을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세인들의 뇌리에 아직도 전설적인 기인으로만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천신군과 황보성운과의 배분이 기묘해진다. 황보성운은 현현자가 직접 저술한 현현비록을 익혔으니 현현자의 제자나 다름없었다. 헌데, 현천신군은 천현문의 삼대장문이 아닌가? 결국 황보성운이 현천신군의 사숙뻘이 된다는 기묘한 이야기다. 황보성운은 이 모든 것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허나, 현천신군이 천현문의 삼대장문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내심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입을 떼었다. "현천신군은 저와 약간의 관계가 있습니다. 허나, 그의 무공을 배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모용후는 비로소 사태의 전모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쩐지! 소협의 무공이 경세적이라 했더니 현천신군 노선배와 어떤 관계가 있었구려." 허나 황보성운은 입가에 담담한 웃음을 지은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에 중인들은 황보성운이 현천신군과의 관계를 더 이상 밝히지 않으려는 것으로 구구억측을 했다. 이때 금천이 비양거리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천하에 어리석은 모용 늙은이로군." 금천은 한심하다는 듯 두터운 입술을 끌끌 찼다. "그래, 현천신군같은 분이 아니고서야 어찌 황보소협같은 인재를 키워낼 수가 있겠는가? 쯧쯧, 그래도 한 장원의 장주라고 버티고 있으니……" "하기야……" 모용후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말 끝을 흐렸다. 좌중의 모든 인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성운은 좌중의 그러한 사태를 둘러보며 내심 솟구치는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다시 대청 안은 호탕한 소성과 걸직한 대화들이 오가며 점점 취흥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점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3 칠흑의 밤, 자시(子時)도 훌쩍 넘었을까? 선들거리는 봄 바람이 소슬거리며 불어갔다. 황보성운은 침상에 누워 흩어지는 밤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지금 그의 품 속에서는 소향이 행복에 가득찬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가끔가다 단꿈을 꾸는 듯 황보성운의 가슴을 더듬다가 이내 새근거리며 깊은 잠으로 떨어져 갔다. 황보성운은 그녀를 내려보던 시선을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따라 웬일인지 더욱 정신이 맑아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소향을 가볍게 침상에 바로 눕히고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웬일일까? 오늘밤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으니……) 이때였다. 우…… 우…… 웅! 돌연, 그의 품 속에서 괴이한 음향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응?" 황보성운은 흠칫 놀랐다. 그는 급히 품을 뒤져 보자기를 끄집어냈다. 그러자, 우…… 우…… 웅! 보자기 안에서는 기이하게도 더욱 크게 괴이한 음향이 나는 것이었다. (분명! 이 보자기 안에서 나는 소리다. 헌데, 도대체 무엇이……?) 그는 보자기를 풀어젖혔다. 순간, "아니!" 황보성운은 나직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지금 그 보따리 안에서는 실로 괴이무쌍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흑백(黑白)의 쌍환! 그 쌍환(雙環)이 은은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흑백 쌍환이 울다니……) 헌데 이때, 더욱 괴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서서히 그 은은한 음향이 사라지는 듯하더니 돌연 흑환과 백환이 은은한 흑광(黑光)과 백광(白光)을 내뿜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크게 놀라 목전에서 전개되는 변화를 주시했다. 그러자, 쌍환으로부터 발출된 은은한 서기는 점차 강렬해지더니 급기야 방 안을 완전히 밝힐 듯 뻗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단 발출된 흑백의 서기는 온통 뒤섞이며 오색의 찬란하 고 현란한 이채를 뿌렸다. 이런 광경은 흡사 요지경 속에 들어간 듯 아름답고 현묘하기 그지 없었다. 헌데, 이처럼 휘돌던 오색의 이채가 느닷없이 하나의 운무(雲霧)처럼 허공으로 집결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뒤이어 실로 예측불허의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돌연 집결된 이채가 하나의 글씨를 허공에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흑백쌍환의 영기(靈氣)는 절강 천 년의 일대기재(一大奇才) 앞에 나타나노라. 하여 그대는 이 쌍환의 두 번째 주인이 되노니 이는 하늘의 영지로다.> 여기까지 나타났던 글은 흩어져 오색의 광채로 다시 되돌아갔다. 황보성운은 거듭되는 경악의 일에 격동된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오색의 광채로 빛나는 괴이무쌍한 광경을 주시했다. 그러자 다시 오색의 광채가 운무처럼 집결되며 허공에 찬란한 구결을 이루어갔다. <흑환의 천하지마성(天下之魔性)은 일섬(一閃)에 천하지악(天下之惡)을 격멸하고, 백환지신성(白環之神性)은 천상선기(天上善氣)로 일광(一光)에 만생만물(萬生萬物)을 정의로 회심(回心)케 하는도다. 쌍환 합일(合一)에 천리(天理)가 마음대로 달통(達通)하니, 그대 만약 쌍환을 합(合)하면 그대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리로다.> 다시 또 운무가 사라지더니 오색광채를 뿌리며 글귀가 연달아 쓰여졌다. <백환의 서기를 이용하여 성천구도(聖天九刀)를 만드노니, 천하일세(天下一世) 태평성대(太平聖代)로다.> 구결은 계속 연속적으로 지워지고 나타났다. 황보성운은 정신일도(精神一到)하여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계속 나타나는 구결들을 응시했다. 허나, 구결들은 계속 허공에서 나타나고 없어져갈 수록 현묘(玄妙)하여져 점점 어려워져 갔다. 실로 그곳에 나타나는 구결들이야 말로 경천동지하고 개세무비할 구결들이었음이랴! 아무리 석학총명한 황보성운도 난득(難得)하여 암기에 급급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성천구도(聖天九刀)의 현묘하기 그지없는 구결들이 끝이 났다. 헌데, 바로 이 순간 뻗쳐있던 오색 광휘가 느닷없이 휘돌더니 핏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섬뜩한 한 귀절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악(惡)의 기운이 하늘까지 덮으니 이제 이를 제거하려 하도다. 이에 혈천일도(血天一刀)를 만드노라.> 황보성운은 또박또박 혈천일도의 구결을 읽어갔다. 헌데 그 구결들을 읽는 동안 등골로 한 줄기 써늘한 한기가 스미 는 느낌에 전신을 오싹 떨었다. 뜻을 알지 못할 글자에서 모골이 송연한 섬뜩한 살기가 물씬 풍겨왔기 때문이었다. 그 살기는 마치 사람의 칠공을 틀어막고 비틀어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지, 진정……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살기다! 단지 글자만 보는데도 이 정도라니 만약, 이것이 초식으로 전개된다면 어찌 될 것인가?) 황보성운의 전신 모골로 예리한 전율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는 다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 허공을 물들이던 핏빛글씨가 휘리릭 휘돌더니 흑광과 백광으로 돌변하여 쌍환으로 쓸려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은은했던 광채마저 사라지고 쌍환은 다시 평범한 듯하게 변모해 버렸다. 황보성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바로 직전에 겪은 일들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벌써 창문으로 햇살이 어렴풋이 밝아오는 아침이었다. 그는 초극도의 긴장상태에서 경천동지할 일을 겪으며 하룻밤을 훌떡 넘겨버렸던 것이다. 이때, "아---- 함!" 뒷전에서 교태로운 여인의 하품소리가 들려왔다. 황보성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상에서 소향이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고 있었다. "어머! 공자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소향은 은방울이 구르는 듯한 옥음을 터뜨렸다. 황보성운은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띄웠다. "소향, 잘잤나?" 소향은 흩어진 머릿결을 쓸어올리며 약간 얼굴을 붉혔다. "푹 잤어요. 어젯밤은 정말 굉장히 짧았던 것 같아요." 소향은 생긋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가로저었다. 황보성운은 장난스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달게 주무셨사옵니까, 공주마마? 하하하핫……" 소향은 황보성운의 말에 눈을 살짝 흘기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분홍빛 엷은 잠옷 사이로 백옥같은 팔과 탐스러운 젖가슴이 은은히 비쳤다. 게다가 샐쭉 토라진 듯한 그녀의 얼굴은 진정 다시없을 듯한 뇌살적인 미태였다. 순간, 황보성운은 넋을 잃은 듯 소향의 자태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자 소향은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무얼 그리 보세요?" 허나, 황보성운은 아예 소향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아름답군!" 그제서야 자신의 신태를 둘러보며 소향은 흠칫 놀랐다. "어머!" 그녀는 양 손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삐쭉 곱게 입술을 내밀었다. "나빠요!" "나쁘다고? 하하하하……" 황보성운은 짐짓 음흉스런 눈길로 다시 소향의 전신을 훑었다. "그런 차림으로 사람을 유혹한 게 누군데?" "어머머!" 소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공자님은…… 읍!" 순간, 황보성운이 그녀를 휙 끌어안고 소향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버렸다. "으---- 음!" 소향은 야릇한 비음을 내뿜으며 가볍게 앙탈했다. 허나 곧 그녀는 하얀 팔을 뻗어 황보성운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더 정열적으로 부딪쳐갔다. "으…… 음…… 음…… 음……!" 어느새 소향의 잠옷은 가슴까지 드러나도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황보성운의 손은 능숙하게 소향의 비밀스러운 부분들을 애무하고 있었다. 이윽고 황보성운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듯 소향의 전신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침상으로 다가가 뉘었다. 서서히 뜨거운 열풍이 방 안에 몰아치고 있었다. 제 18 장 殘陽神魔 1 금릉성 외곽(外廓)의 널찍한 관도. 길가로 울울창창한 숲들이 초록으로 물결쳐 흔들린다. 이제 하늘과 땅은 봄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이 만춘(滿春)의 관도 위로 가벼운 먼지를 이끌며 한 필의 말이 나타났다. 다그닥! 다그닥----! 말은 유유히 달려왔다. 바로 지금 그 한 필의 말 위에는 가히 인중용봉(人中龍鳳)이 무색한 절세의 청춘 남녀(男女)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황보성운과 소향이었다. 황보성운은 소향을 자신의 앞에 앉혀 한쪽 팔로 끌어안은 채 유유히 말을 몰고 있었다. "공자님! 청매(靑妹)가 무척 섭섭해 할 거예요." 소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보성운은 말(馬)의 아랫배를 가볍게 차며 경쾌하게 말을 내뱉았다. "할 수 없지. 몇 달이고 마냥 그곳에서 머물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도 좀더 경쾌하게 앞발을 쭉쭉 뻗어나갔다. "하지만 아무 말도 않고 몰래 떠난 것은 좀……" 소향은 스쳐가는 풍경으로 고개를 무심히 돌리며 말 끝을 흐렸다. 이때 황보성운은 예의 그 장난스런 기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윽고 그는 가볍게 쾌소(快笑)를 터뜨렸다. "하하하! 소향, 너는 모용낭자에게 질투심을 느끼지 않나?" "어머! 그게 무슨……?" 소향은 무엇이 잡힌 사람처럼 가볍게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황보성운은 싱긋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모용낭자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글쎄, 늘 야릇하더라고……" 순간, 소향은 새침하게 안색을 돌변시켰다. 그리고 가볍게 냉소를 날렸다. "흥, 그녀가 당신을 사랑이라도 한단 말인가요?" 그러자 황보성운은 어깨를 으쓱 치켜올리며 짐짓 거만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렴, 천하에 그 어떤 여인이 나같은 미남을 보고 반하지 않겠는가? 흠……!" "어머머!" 소향은 기가 막히다는 듯 입술을 삐쭉거렸다. "기가 막혀! 세상에 자신을 자화자찬을 해도 유분수지……" "자화자찬이라니? 이것은 분명 하늘과 땅이 다 아는 사실이야. 핫핫핫핫……!" 황보성운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돌연 말의 아랫배를 철썩 후려찼다. 순간, 히히힝----! 깜짝 놀란 말이 앞발을 치켜 들더니 쏜살같이 내달렸다. "어멋……?" 말이 급작스레 뛰어 내달리는 바람에 소향은 가볍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허나 이내 입술을 내어밀어 삐쭉거리며 냉소를 터뜨렸다. "흥! 공자님이 아무리 그래도 전 못믿겠어요." 이에 황보성운은 버들가지처럼 가는 소향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말이 질주하는 속도 때문에 머리채가 날려 드러난 그녀의 백옥같은 귀로 입술을 가져갔다. 뒤이어 그는 지극히 부드러운 말로 속삭였다. "소향! 그럼, 내가 그 증거를 보여줄까?" 소향은 어림도 없다는 듯 뾰족하게 내뱉았다. "흥! 들어보나마나예요." "후후후…… 좋아, 내가 말해주지." 황보성운은 소향의 호기심을 촉발시키려는 듯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뒤 뜸을 들였다. "……?" 이윽고 황보성운은 다시 그녀의 귀에다 바짝 그의 입술을 대고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향같은 미인이 왜 나를 좋아할까?" 순간, "어머머!" 소향은 목덜미까지 빨갛게 붉어져 버렸다. 황보성운은 여유만만하게 짓궂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그것을 보면 내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겠지? 그러자 소향은 몸을 홱 돌리더니 가냘픈 옥수(玉手)로 황보성운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바람둥이!" "하하하하……" 황보성운은 그녀의 물어주고 싶도록 깜찍한 모습에 쾌소를 터뜨렸다. 이에 소향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2 이때 어디선가 음산하고 냉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호호호…… 꽤나 다정한 한 쌍이군." 황보성운은 흠칫 놀라며 급히 말고삐를 잡아챘다. 히히히히항----! 말은 앞발을 재껴 먼지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멈추어섰다. 황보성운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웅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구냐?" 순간, 관도 옆의 울창한 삼림(森林)으로부터 십여 인의 인영(人影)이 번뜩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황보성운의 말 주위 방원 십 장 내외로 떨어져 내렸다. 황보성운은 내려선 그들을 칼날처럼 싸늘한 눈빛으로 휘익 휘둘러보았다. 그러자 그들 중 외팔의 한 도인이 불쑥 앞으로 나서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그의 모습을 보고 칠흑같은 눈썹을 꿈틀 치켜올렸다. "흥! 누군가 했더니 가짜 도사 적양관주였군." 그렇다. 지금 황보성운의 앞에 나타난 자는 얼마 전 황보성운에 의해 한 팔을 잃고 도주했던 적양관주였다. 적양관주는 황보성운을 노려보았다. "애송이 놈! 이번에는 그때 빚을 톡톡히 갚아주마." 적양관주는 시퍼렇게 움푹 패인 눈에 싸늘한 흉망을 짓쏘아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의 기색을 띄웠다. "혹 떼려다 혹 붙인다고…… 오히려 남은 한 팔까지 잘릴까 걱정이군." 황보성운의 빈정거리는 말에 적양관주는 격분하여 안면을 흉칙하게 일그러뜨렸다. "으----! 이 놈의 꼬마 자식이……"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소매를 떨치고 출수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관주! 잠깐 기다리시오!" 냉막한 일갈을 내지르며 한 명의 노인이 불쑥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자색 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일견하기에도 무척 늙고 흉맹한 것이 결코 범상치 않은 풍모였다. 그는 해골같이 비쩍 마른 손을 슬쩍 들어 황보성운을 가리키며 흉험(凶險)한 일갈을 터뜨렸다. "네놈이 바로 황보성운이라는 애송이냐?" 순간, 그의 목소리가 관도 주위를 쩌러렁 울렸다. "당신은 누구요?" 황보성운은 짐짓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노괴(老傀)는 헐렁한 장삼자락을 펄럭여 팔장을 끼며 입가로 음침한 괴소를 날렸다. "흐흐흐…… 네놈이 청송장에서 노부의 제자들을 격살시켰으니, 네놈도 오늘 살아남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마라!" 그러자 황보성운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호, 이제보니 당신이 바로 무림에 명성을 떨친 무림이마(武林二魔) 중 한 명인 잔양신마이구려?" "그렇다, 애송아! 노부가 잔양문의 문주인 잔양신마 구양패( 陽覇)다." 그는 안면근육을 잠깐 씰룩였다. "흐흐흐…… 듣자하니 네놈은 현천신군의 제자라던데 팔십 년 전 그 자리에서 노부가 진빚도 오늘 동시에 갚아주마!" "후후후…… 과연 그것이 뜻대로 될까?" 황보성운은 빙글빙글 능청스럽게 웃어댔다. 이에 잔양신마는 심장을 얼어붙게 할 듯한 싸늘한 눈빛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뼈에 스밀 듯 음랭한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네놈이 비록 천하무적의 현무신공을 익혔다 하나 오늘 우리 수중에서 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황보성운은 같잖다는 듯이 냉소를 날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에서 내려섰다. "소향! 너는 잠시 저쪽에서 기다려라!" 그러자 소향은 밀랍처럼 창백하게 돌변된 안색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고…… 공자님!" 이에 황보성운은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띄웠다. "하하하…… 소향, 걱정하지 마라. 천하에 나를 당할 자는 없다." 황보성운은 말을 마치고 침착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몸을 돌려 천천히 잔양신마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내심 생각을 굴렸다. (으---- 음! 잔양신마라면 적어도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도(邪道) 제일의 고수다. 그러므로 내가 여지껏 상대해왔던 마두들과는 천양지차일 것이다. 조심해야 한다.) 황보성운은 잔양신마와 약간의 거리를 격(隔)하고 우뚝 섰다. "잔양신마! 당신이 비록 절세의 고수라 하나 이번에 나를 만난 것은 큰 불행이 될 것이오." 황보성운은 암중에 경각심을 높이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뱉았다. 잔양신마는 노화가 치밀다 못해 기가 막히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허허, 애송이 놈! 실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겁없이 날뛰는구나." 그는 오른손을 슬쩍 치켜 세우며 전혀 감정이 없는 듯한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 네놈에게 하늘 높고 땅 넓음을 보여주겠다." 한데 이때 돌연, "문주님! 잠시 신수(神手)를 거두십시오."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 있던 한 명의 노인이 불쑥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황보성운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힐끗 본 뒤 잔양신마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문주님! 저따위 애송이 놈을 죽이는데 문주님께서 손수 하수(下手)하신다는 것은 닭을 잡는 데 소잡는 칼을 쓰심과 같사옵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뒷전에 서 있는 노인들을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저 애송이는 저희들에게 맡겨주십시오." 그러자 잔양신마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음! 좋다. 허나, 잔양오살이 저놈에게 당한 것으로 보아 제법 수단이 매운 듯하니 조심하도록 해라!" "흐흐흐…… 염려 놓으십시오. 놈이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그는 음침하게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계속 입을 열었다. "우리 잔양칠절(殘陽七絶)의 손속 아래 피 뿌리고 나가 떨어질 한 마리 불쌍한 하룻강아지일 뿐입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여섯의 노인들이 불쑥 튀어나와 다른 한 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황보성운을 노려보았다. 잔양칠절 중 가운데 있는 노인이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잔양오살로부터 네놈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다." "흐흐흐…… 허나, 네놈도 오늘로써 생을 마쳐야 할 것이다." 허나 황보성운은 뉘집의 개들이 짖어대느냐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보며 뇌까렸다. "하늘은 참으로 높고 맑은데 갈 곳 없는 잡인(雜人)들이 땅을 더럽히는군 그래. 쯧쯧……" 황보성운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그만 잔양칠절은 수염을 부르르 떨며 격분하고 말았다. "뭣이!" "이 건방진 애송이 놈이……" 이때, "뒈져랏!" 맨 좌측에 서 있던 한 노괴가 분기탱천하여 일갈을 내지르며 일장을 격발시켰다. 순간, 수천의 암경(暗勁)이 황보성운의 전신 요혈로 짓쳐들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허나 그는 이미 내공을 전신에 퍼뜨리고 그자의 공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흠! 이자는 잔양오살보다는 한 수 위인 듯하군.) 황보성운의 거만한 태도에 일 장을 시출한 노괴는 그를 단숨에 격사시키려는 듯 더욱 공력을 돋우었다. (흐흐…… 이 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한데, 빗발치듯 쏟아져 오던 노괴의 암경이 황보성운의 가슴에 격중되려는 순간 돌연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시에 황보성운의 신형이 뿌옇게 안개처럼 흐릿해지더니 급기야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엇!" 노괴는 대경실색하여 급급히 고개를 주위로 돌렸다. 허나, 그보다 먼저 더욱 쾌첩하게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의 맥문을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순간, "윽----!" 그는 뼈를 쪼개는 듯한 고통에 절로 신음성을 터뜨렸다. 그러자 다음 순간, 실로 거부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이 자신을 허공으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쿵! 노괴는 고통에 가득찬 신음을 내뱉으며 간신히 신형을 일으켰다. 모든 노괴들은 창졸간에 목전에서 연출된 일에 대경하여 모두 안색을 격변시켰다. (저, 저럴 수가…… 잔양칠절 중에 한 명이 단 일초에 당하다니……) 잔양신마마저도 싸늘하게 서리가 내릴 듯이 안색을 바꾸었다. (으---- 음! 잔양오살이 저놈을 얕보아서 당한 줄 알았더니…… 한데, 이제보니 그것이 아니었구나. 과연, 적양관주가 말한대로 대단한 놈이다.) 이때 황보성운의 호쾌한 웃음이 창룡음(蒼龍音)처럼 울려퍼졌다. "하하하하! 잔양칠절, 너희들 개개인이 덤비면 나의 손 아래 아무도 일초를 못넘긴다. 일찌감치 속 차리고 일곱 명이 연수 합공(合功)해라." 잔양칠절은 얼굴을 붉히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허나, 실력이 미치지 못하니 어찌 하리…… 가운데 있던 한 노괴가 어찌할 수 없자 발악적으로 괴후를 내질렀다. "형제들! 칠절귀무진(七絶鬼霧陣)을 전개하라!" 이에 잔양칠절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음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황보성운의 주위를 둘러쌌다. 황보성운은 그들이 밟고 서 있는 방위를 잠시 살폈다. 그리고 이내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띄웠다. (흥, 이제보니 저놈들의 칠절귀무진이라는 것은 칠절마진(七絶魔陣)과 귀무살진(鬼霧殺陣)을 합해 놓은 것이로군.) 기실 황보성운의 진법(陣法)에 대한 견식은 이미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미 현현비록을 통해 현존하는 기진(奇陣) 뿐만 아니라 비전기진까지 달통해 있었던 것이다. 하여 비록 칠절마진과 귀무살진이 대단한 것이기는 하나 그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장난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슬쩍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지풍(指風)을 날렸다. 순간, 관도 위에 늘어서 있던 한 나무의 나뭇가지가 부러지더니 그의 손으로 스르르 날아들었다. (허공섭물!) 주위 인물들은 경악의 표정을 띄웠다. 허나 황보성운은 덤덤한 표정으로 나뭇가지에 붙은 나뭇잎을 떼 어냈다. 한데, 기이하게도 일곱 개의 나뭇잎은 떼지 않고 그냥 붙여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호기롭게 잔양칠절을 둘러보며 짤막하게 내뱉았다. "자, 잔양칠절! 어디 덤벼보시지!" 그리고 그는 나뭇가지를 앞으로 쭉 내뻗었다. 그러자 그 나뭇가지는 잔양칠절 중 좌측방(左側方) 세 번째 인물을 가리켰다. 순간, 잔양칠절의 안색이 급변해 버렸다. (저…… 저놈이 칠절귀무진의 최대 약점을 가리키다니…… 그렇다면 저놈은 이미 이 진법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허나 그들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저렇게 어린 놈이 그것까지 알 리가 없다. 단지 우연일 뿐이다.) 그들은 즉시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이윽고, "진을 움직여랏!" 하는 누군가의 일갈이 터져올랐다. 순간, 칠 인의 인영이 흡사 뼈가 없는 물체처럼 무질서하게 흐늘거렸다. 허나, 일견 술취한 듯 흐늘거리는 그들의 움직임은 엄밀히 계산된 방위에서 다른 방위로 옮겨가는 것이지 절대 무질서한 행동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흡사 바람에 흔들리는 듯 물결이 출렁이는 듯 전후좌우로 흐늘거렸다. 그러자 그 혼돈 속에서 서서히 귀무(鬼霧)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들의 주위를 검은 안개가 둘러싸더니 급기야 그들의 신형마저 흑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단지 그 흑무는 점점 거리를 좁혀오면서 황보성운을 중심으로 급격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흑무는 괴이한 음향을 발산시키며 수천만 근의 압력을 동반하고 황보성운의 전신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황보성운은 자신의 전신요혈로 소용돌이쳐 쳐들어 오는 일곱 줄기의 무서운 경기를 느꼈다.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수중의 나뭇가지를 드세게 흔들었다. 그러자, 슈슈슈슈슉----! 나뭇가지가 대기(大氣)를 가르는 예리한 파공성을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찰나, 흑! 괴이한 음향이 터져오르며 귀무(鬼霧)가 양쪽으로 쫙 갈라져버렸다. 그러자 곧이어 황보성운의 웅후한 소성(笑聲)이 울렸다. "핫핫핫…… 적엽비화(摘葉飛花)의 신기를 보여주마!" 순간, 휙----! 휙----! 휙! 나뭇가지에 달려있던 일곱 개의 나뭇잎이 흑무를 향해 격사되어 갔다. 그리고 다음 찰나, 그것들은 섬전(閃電)처럼 안개 속에 파고 들어갔다. 순간, "윽----!" "헉----!" 잇달아 각기 다른 일곱 마디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칠흑같았던 흑무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잔양칠절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데 ,그들은 놀라게도 한결같이 어깨 부근의 중부혈(中府穴)에 나뭇잎이 꽂혀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결과였다. 개개인의 무공이 일류고수인 잔양칠절이 단 일초에 저 지경이 되다니…… 묵묵히 관전하고 있던 잔양신마의 안색이 돌연 침중하게 변해버렸다. (무서운…… 놈이다! 잔양칠절의 합공은 천하에서 당할 자가 거의 없거늘, 저놈은…… 단 일초(一招) 만에……) 이를 악문 잔양신마가 냉막하게 소리쳤다. "칠절! 물러나라!" 이에 잔양칠절은 창백한 안색으로 어쩔 줄 모르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3 잔양신마는 황보성운을 싸늘한 눈길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꼬마 놈! 확실히 네놈의 무공은 나의 예상보다 훨씬 강하구나, 허나…… 흐흐흐……" 그는 살기가 섬뜩섬뜩하게 돋는 듯한 괴소를 흘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왔다. 황보성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거만스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잔양신마! 옛부터 시기를 아는 자가 영웅이라 했다. 스스로 약함을 안다면 물러감이 어떠냐?" 순간, 잔양신마의 눈에 번쩍 뒷골을 도려낼 듯한 냉혹한 살기가 빛났다. "흐흐흐…… 건방진 놈! 누울 곳을 보고 다리를 뻗어라. 네놈이 조금 전 칠절을 이긴 것은 그들의 진법을 안 탓일 뿐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 마자 등 뒤에서 괴이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하얀 빛이 싸늘하게 번뜩이는 하나의 채찍이었다. 그것은 뱀의 척추와 두개골로 된 듯 작은 도맥들로 이어져 보기에는 섬뜩한 살기와 냉기가 뼈를 얼릴 듯 사뭇 심상치 않았다. "호호호…… 이 백골사두편(白骨蛇頭鞭)으로 네놈을 환천으로 보내주마!" 순간, 그의 두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형형히 내리뻗쳐 나왔다. "받아랏!" 그는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괴후(傀候)를 내지르며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찰나, 그의 신형이 희끗하게 빛나는가 하더니 돌연 창졸간에 백골사두편을 휘둘러 그물같은 광면(光面)을 형성시켰다. 싸늘한 백색의 편영(鞭影)이 온통 천지가 개벽하는 듯 어지러이 허공을 쓸어냈다. 동시에, 스스스스----! 귀가 찢어질 듯한 예리한 소성을 쉴새없이 일으켰다. 그것은 마치 수백 명이 동시에 초식을 시출해 내는 것처럼 광풍폭우의 기세로 추호의 빈틈도 없이 황보성운의 전신에 떨어져 내렸다. 황보성운도 안색을 약간 변화시켰다. (무서운 공격이다! 이때까지 만난 자(者)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세로구나!) 황보성운은 잔영보(殘影步)를 전개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그림자로 화하더니 그 그림자가 수십 개로 분리(分離)되어 사방 팔방으로 늘어섰다. 찰나, "천현문의 잔영보로구나!" 허공에서 음산한 음성이 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혈음지(血陰指)닷! 받아랏!"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가닥의 붉은 기운이 지상의 그림자로 격사되어 슈슈슈슉! 하며 예리한 파공성을 울렸다. 황보성운은 내심 당황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이거 예상보다 훨씬 강하구나!) 그는 한 마디 창룡음을 터뜨리며 번개같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꽃밭을 움직이는 유연한 벌나비처럼 유연하게 답공술(踏空術)을 전개했다. 순간, "현천낙지(玄天落地)!" 황보성운의 입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드디어 개세무비한 현무구장의 제 일초가 격출된 것이었다. 찰나, 수십 줄기의 청광(靑光)이 허공을 찬란하게 물들이더니 급기야 잔양신마가 시출시킨 혈음지를 휘감아 버렸다. 동시에, 파파파팍----! 팍! 팍! 팍! 기이한 폭음을 일으키며 수십 가닥의 청광이 낙엽지듯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한데, 흙먼지가 자욱이 흩날리고 난 뒤 땅바닥엔 놀랍게도 근 삼십여 개에 달하는 청색의 장인(掌印)이 선연히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잔양신마는 선명히 널려있는 청색 장인을 바라보며 안색을 대변시켰다. "으---- 음! 훌륭한 초식이다!" 뒤이어 그는 지체없이 채찍을 돌풍처럼 휘돌리며 접근했다. 그리고, "자! 백광마영(白光魔影)을 받아랏! 우후합!" 그는 천둥같은 기합소리를 터뜨리며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황보성운의 전신으로 덮쳐들었다. 그러나 황보성운은 다시 잔영보를 전개하여 십 장 밖으로 벗어났다. 두 사람은 폭죽을 터트리듯 허공을 기묘한 파공음과 이채로 물들이며 창룡이 광동하여 격랑을 일으키듯, 대붕이 광풍폭우로 덮쳐내리듯 방원 수십 장을 휘돌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이백여 초를 주고 받았지만 싸움은 막상막하의 호각지세를 이루어 좀체로 종단(終端)을 볼 수 없을성 싶었다. 그들은 지금 서로의 재간에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이…… 꼬마 놈의 무공이 이토록 강할 줄이야. 과거 현천신군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구나!) (음! 과연 천하 제일의 거마(巨魔)답구나. 이런 고수가 과연 천하에 몇 명이나 될까?) 그들은 다시 허공으로 백룡처럼 튀어올랐다. 그리고는 곧 땅으로 질풍처럼 덮쳐내리더니 민첩하게 비조처럼 비스듬히 날았다. 동시에 몸을 회오리처럼 회전하며 오색의 광망과 질풍을 허공에 찬란무비하게 낭자히 흩뿌렸다. 실로 보는 이의 눈을 아리게 할만큼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다시 백여 초가 창졸간에 흘러갔다. 이때 갑자기 잔양신마가 땅 위에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섰다. 그리고 거친 숨결을 가다듬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꼬마 놈! 가히 가공할 실력을 갖고 있구나! 흐흐…… 허나 이번 노부의 초식은 막지못할 것이다." 그는 가래침을 칵 뱉아냈다. "자, 노부의 최고 무공 삼절마편(三絶魔鞭)을 받아봐랏!" 순간, 휘리링----! 잔양신마는 백골사두편을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으로 난무시키며 은연중에 엄청난 내력을 격발시켰다. 황보성운은 노마(老魔) 초식의 위력이 심상치 않게 급변하자 전신을 누르는 엄청난 위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내심 경각심을 촉발시켜 내공을 구성에서 십일성으로 급촉히 끌어올렸다. 찰나, "절혼편(絶魂鞭)----!" 잔양신마가 벽력같이 노후를 내질렀다. 이에, "현광무흔(玄光無痕)!" 황보성운은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개세무비한 현무구장의 제 육초를 격렬하게 격출시켰다. 그러자 찰나지간 허공에 검은 광채가 번뜩이는 듯하더니, 꽈르릉! 지축을 뒤흔드는 경천동지할 굉음을 일으키며 수백만 근의 암경이 허공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순간, "으---- 음!" 가공할 암경의 일부가 가슴에 격중된 듯 답답한 신음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잔양신마가 비틀 신형을 흔들었다. 이에 황보성운은 순간적으로 품 속에 양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손에는 어느새 잠룡피(潛龍皮)가 끼워져 있었다. 허나, 그것은 너무나 특별하여 자세히 봐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잠룡피를 끼자마자 황보성운은 허공에 양손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훌쩍 뛰어올랐다. "현무살령(玄武殺令)----!" 아아! 드디어 그 누구도 받아내지 못할 가공할 현무구장의 마지막 삼초 중 제 일초, 천하제일의 장법(掌法)이 전개된 것이었다. 잔양신마는 백골편을 무의식적으로 급급히 휘둘렀다. 순간, 황보성운은 풍차처럼 휘도는 백골편을 오른손으로 후려잡았다. 이에 잔양신마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입가에 음흉한 괴소를 날렸다. "크흐흐흐…… 이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동시에 그는 백골사두편에 자신의 혼신내공을 주입했다. 한데, 실로 엄청난 광경이 목전에서 전개되었으니…… "으하하하……" 돌연, 황보성운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백골편에 힘을 주는 것이었다. 순간, 파---- 파---- 팍! 만년한철보다도 더욱 단단한 백골사두편이 박살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찰나, "헉----!" 잔양신마가 황급한 신음성을 내지르며 뒤로 급급히 후퇴했다. 다음 순간, 황보성운은 지체없이 일갈과 함께 일 장을 격발시켰다. "잔양신마 가거랏, 천현살미(天玄殺眉)다----!" 순간, "크---- 윽!" 잔양신마는 입으로 한 줄기 피화살을 내뿜으며 무려 이십여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한데, 그는 떨어지자 마자 재차 허공으로 솟구쳐 도주하는 것이 아닌가? 제 19 장 神 風 1 뒤이어 허공을 타고 원독에 찬 처절한 음성이 들려왔다. "황보성운! 애송아, 차후에 이 복수는…… 꼭 하고야…… 말 것이다……" 순식간에 그의 인영(人影)은 산등성이를 너머 사라져버렸다. 황보성운은 잔양신마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담담한 냉소를 날렸다. 그리곤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훑어보았다. 순간, 그는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응당 있어야할 소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단지 그녀가 비켜 서있던 나무의 가지에 하나의 쪽지가 팔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황보성운은 다급히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쪽지를 내려들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채 마르지 않은 글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너의 계집을 찾고 싶으면 한 달 이내에 고루곡( �뽎�)으로 오너라. 적양관주(赤陽關主).> 황보성운은 노기충천하여 쪽지를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중얼거렸다. "소, 속았구나!" 그는 통분스러운 듯 두 손을 부르르 모아 쥐었다. 뒤이어 그는 주위를 힐끗 돌아본 뒤 땅을 거세게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허공으로 빗살처럼 쏘아갔다. 2 호북성(湖北城)의 동방(東方)에 위치한 거대한 성(城) 무창(武昌). 이곳은 흘러드는 장강(長江)의 도도한 지류(支流)와 무수한 호수(湖水)들로 인해 기름진 땅이었다. 하여 일찍이 이곳은 호북 제일의 대도시(大都市)로 번창하여 무수한 사람들의 생업(生業)의 발길들을 이끌어 오고 있었다. 시가지는 고루전각과 수십 채의 별원들을 감춘 대저택들이 늘어서 있어 가히 호북 대도(大都)의 풍모를 느끼게 해준다. 무창 시내의 북쪽으로 뻗은 한 중심가의 대로(大路) 위로 지극히 영준한 백의서생이 나타났다. 지금 그는 무슨 근심이 있는 듯 매우 우울한 신색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헌데 그때마다 기묘하게도 그의 영준한 모습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황보성운이었다. 지금 그는 소향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근 두 달 동안 고루곡을 찾아 헤맸지만 지명조차 아는 사람이 없으니……) "휴---- 우!" 그는 나직한 장탄식을 터뜨렸다. (사랑하는 여인 한 사람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협행(俠行)을 한다고……) 이때 황보성운이 걷고 있는 대로상 한편에 금빛 현판을 빛내는 객잔 하나가 나타났다. <열래객잔(悅來客棧).> 황보성운은 약간의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현판을 힐끗 보고 이내 객잔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십 오륙 세 정도의 점소이가 튀어나와 허리를 훌쩍 굽혔다. 다음 순간 허리를 세운 점소이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햐!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공자가 있었다니……) 점소이는 넋을 잃고 입을 딱 벌렸다.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취홍루에서 본 그 어떤 미녀보다도 더 잘 생긴 것 같구나!) 그의 그런 모습에 황보성운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자리를 안내하지 않고 무엇을 그렇게 보느냐?" 그제서야 점소이는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황보성운은 손을 가볍게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자리가 있긴 있느냐?" 점소이는 무안을 감추려는 듯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네네! 있구 말굽쇼. 저를 따라 오십쇼!" 그리고 주르르 이층으로 뛰어올라 갔다. 점소이는 계단을 오르면서 내심 무안한 생각에 투덜거렸다. (젠장, 그게 어디 내 탓이람…… 자기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그런 것이지……) 황보성운은 천천히 이층 계단을 밟았다. 이윽고 이층에 올라서자 점소이는 황보성운을 창가에 있는 좌석으로 안내했다. "헤헤헤…… 저의 열래객잔은 이 무창에서도 음식맛 좋기로 단연 제일이죠." 점소이는 황보성운이 앉자마자 입에 침을 튀기며 지껄이기 시작했다. 황보성운은 점소이의 말이 길어질 듯해 보이자 손을 들어 제지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여아홍(女兒紅) 한 병! 제일 잘하는 안주 두세 가지!" 황보성운은 간단하게 말을 하고 가볍게 탁자를 탁탁 두드렸다. 그러자 점소이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예! 조금만 기다리십쇼." 그리고는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갔다. 황보성운은 주위를 훑어 보았다. 이층은 몇몇의 인물들만 있을 뿐, 일층에 비해 비교적 한산했다. 이때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던 황보성운의 시선이 문득 멈추었다. 그것은 자신의 맞은 편 탁자였다. 거기에는 한 명의 청의소년이 앉아 있었다. 십 팔구 세 가량 되었을까? 그 소년은 지극히 준수미려했다. 아니 오히려 남자 치고는 너무 피부가 백옥같이 희고 몸이 호리했다. 일견(一見)하기에도 매우 문약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황보성운은 청의소년의 준수한 모습에 감탄어린 시선을 보냈다. (으---- 음! 정말 대단히 아름다운 미소년이구나.) 이때 청의소년은 술잔을 조금씩 기울이다가 문득 기이한 느낌에 술잔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만 황보성운의 시선과 마주쳐버렸다. 순간, 그의 눈에 움찔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얼굴이 사르르 붉어지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황보성운은 내심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허----! 저 친구 생긴 것만 여자같은 줄 알았더니 행동도 영낙없는 여자같군.) 황보성운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소년에게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왼쪽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거기에는 실로 배꼽을 쥐고 십 리를 데굴데굴 굴러갈 가관이 전개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한 명의 늙은 걸인이 탁자에 코를 박은 채 술에 골아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헌데, 그 모습이라니…… 탁자 위에는 빈 술병과 먹다남은 안주와 국물 찌꺼기들이 널려 있었는데, 늙은 걸인은 바로 그 안주 접시에 얼굴을 처박고 드르렁 드르렁 하며 우렁차게 코를 골아내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끈끈한 안주 찌꺼기가 뿌글뿌글 풍선처럼 코 끝으로 부풀어 올랐다 꺼지고 다시 부풀어 올랐다. 게다가 그의 얼굴과 머리카락에는 온통 안주국물이 묻어 흡사 하나의 요리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가끔씩 탁자 위를 휘젓는 그의 손짓은 꼭 무슨 물에 빠져 물귀신에게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일으키기에 꼭 알맞았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의 전신에는 알 수 없는 어떤 예기가 서려있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예리하게 눈살을 빛내며 가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비록 저렇게 코를 골고 있지만 어쩌면 저 거지노인은 예사의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때 점소이가 술과 음식을 들고 올라왔다. 점소이는 탁자 위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씨익 웃었다. "손님, 맛있게 드십쇼." "수고했네." 황보성운은 은자 한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점소이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어…… 어이구 이렇게 많은 돈을……?" 점소이는 허리를 꺾어질 정도록 굽히고 나서 재빨리 은자를 집어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허리를 굽신거렸다. 이때 황보성운의 귀에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젊은 녀석이 너무 낭비가 심하군. 남은 돈이 없어 냄새나는 술과 안주 사먹기에도 허리가 휠 정도인데." 이어 꿀꺽하는 침삼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계속 말이 이어졌다. "쯧쯧쯧…… 저렇게 함부로 돈을 뿌리다니…… 에잉! 그래서야 어디 나의 무공을 이어받을 수가 있나?" 황보성운은 흠칫 놀라 주위를 급속히 훑어보았다. 허나, 주위는 여전히 그대로일 뿐 말을 했음직한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없었다. 순간, 황보성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음! 이제보니 전음지술(傳音之術)이로군.) 그는 재차 객잔 내(內)를 예리하게 살폈다. 허나 객잔 내에는 예의 청의 소년과 노개(老 ), 그리고 옆자리에서 대소를 터뜨리며 한참 무슨 이야기에 깊이 빠진 풍채 좋은 두 명의 상인과 몇몇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이때 문득 황보성운의 시선이 노개의 잔 등에 머물렀다. (혹시 저 노개가?) 황보성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지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노선배님! 조금 전 후배가 고인을 몰라 뵙고 실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한 잔 대접하지요." 하나 노개는 여전히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 뿐이었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손을 뒤척이며 잠꼬대를 했다. "음냐, 음냐, 뭐라고……? 네 여편네가 너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알았다, 알았어. 내 다시 너에게 더 예쁜 여편네를 얻어주마." 이에, "하하하…… 헛헛헛……" 객잔에 있던 사람들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청의소년도 술을 들이키다가 그만 풋! 하고 웃는 바람에 술이 목에 걸렸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큭큭거렸다. 황보성운도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후배가 실례한 듯합니다. 잠 속에까지 여편네를 끌고 들어가서 죄송합니다." 주위는 다시 폭소로 어울어졌다. 황보성운은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아홍을 술잔에 가득히 따랐다. 이때 예의 그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허----! 그 녀석 입심과 해먹는 수작이 꽤 되먹은 것 같군. 좋다, 좋아. 그런 의미에서 내 너를 의발전인으로 거둘 수도 있겠구나."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황보성운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떠올 랐다. (틀림없군! 아무리 정체를 숨기려 해도 나의 천리청음술(千里聽音術)을 벗어날 수는 없지!) 천리청음술! 이것은 현현비록에 수록되어 있던 실로 기이막측한 수법이었다. 이는 말 그대로 천 리 밖의 소리를 듣는 수법이란 이야기다. 기실 내공이 정심(精深)해질 수록 인체의 오관(五官) 중에 청각이 더욱 발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극히 현묘한 이치(理致) 아래 천리전음술(千里傳音術)이 전개(展開)되는 것이다. 허나, 이것은 장강대하같은 공력을 그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지극히 연성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최소한 입문단계만을 거치려 해도 이갑자 이상 공력의 소유자라야 한다. 그리고 최절정을 연성하기 위해서는 삼갑자라는 엄청난 내공의 깊이를 갖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하므로 이 천리청음술과 천리전음술은 일반 여타의 전음술과는 판이하게 다른 엄청난 위력을 나타낸다. 즉 이것들을 최절정까지 연성했을 시(時)에는 십리(十里) 밖에서 낙엽 한 장 지는 소리조차 확연히 들을 수 있는 천이통(千耳通)이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천리청음술은 더욱 더 신기막측한 것이었다. 3 황보성운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띄운 채 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문득 황보성운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는 술잔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청의소년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가 급히 고개를 돌려 딴전을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저 소년이…… 왜 나를 그토록 쳐다봤을까?) 황보성운은 이내 고개를 흔들며 고소를 했다. (남이 나를 보던 말던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는 재차 술을 한껏 들이켰다. 이때 객잔으로 두 명의 인물이 올라왔다. 그들은 한 명의 노파와 취의소녀였다. 노파는 장님인지 취의소녀의 한 손을 잡고 긴 지팡이로 연신 지척을 두드리며 걸어오는 것이었다. 취의소녀는 한 손에 노파를 다른 한 손으로는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객잔 내의 중인들은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놀라버렸다. 천하절색(天下絶色)이라고나 할까? 꽃바구니를 들고 오고 있는 그녀의 미모는 실로 월아선녀가 객잔으로 현신했다 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허나, 흑백(黑白)이 너무도 뚜렷한 두 눈엔 어떤 우수가 깊이 들어차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 두 여인은 탁자를 옮겨다니며 꽃을 팔았다. 그리고 여러 탁자를 돌아 황보성운 앞에 와 섰다. 이때 황보성운을 바라보던 취의소녀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손님! 꽃을 좀 사주시겠어요?" 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듯한 고운 옥음(玉音)이 굴러나왔다. 황보성운은 취의소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은자를 한줌 꺼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정확히 열 냥이었다. 취의소녀의 얼굴에 약간 놀라는 빛이 스쳐갔다. 이내 그녀는 담담히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손님,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한 냥이면 족합니다." 그녀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더니 탁자 위에서 한 냥만 집고 몸을 돌렸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괴이한 소녀다. 비록 꽃을 팔고 있지만 저들의 모습은 실로 범상치가 않구나!) 이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흐흐……" 뇌수를 빨아들일 듯 들려오는 괴소성은 실로 기분 나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객잔 안은 일시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황보성운의 옆자리에 앉아았던 상인들의 안색도 침중하게 변했다. 또한 청의소년도 전신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일순 황보성운도 기묘한 눈빛을 빛냈다. (오…… 적어도 이갑자 이상의 내력이 실린 소성이다!) 이윽고 그 소름끼치는 웃음이 뚝 끊어졌다. 순간, 시퍼런 일섬(一閃)의 청광(靑光)이 창문으로 날아들었다. 찰나, 탁----! 그 괴이한 청광은 이층 한쪽 벽에 날아와 박혔다. 그것은 한 개의 조그만 대나무잎(竹葉)이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죽엽치고는 좀 색이 짙어 벽록색에 가까웠다. 그 대나무 잎을 본 순간, 객잔의 이곳 저곳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주…… 죽령패(竹令牌)다!" "죽엽마령(竹葉魔靈)이 나타났다!" 삽시간에 객잔 내부는 혼란 속에 빠져내렸다. 그리고 염라사자를 만난 듯 후다닥 밖으로 대부분이 도망쳐 내려갔다. 허나, "크---- 악!" "으---- 악!" 미처 그들은 나가기도 전에 모두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놀랍게도 그들의 목에 한결같이 대잎이 박혀 있는 것이었다. "흐흐흐…… 죽령패가 나타났는데 감히 도망가려 하다니……" 냉오한 일갈과 함께 한 명의 괴노인이 유령같이 나타났다. 그는 안색이 푸르딩딩하고 전신이 장작개비처럼 깡마른 자였다. 그는 움푹 패여 들어간 두 눈에서 시퍼런 광망을 발산하며 객잔 내부를 휘익 쓸어 보았다. 이에 좌중은 완전히 압사할 듯한 공포 분위기에 휩싸여버렸다. 황보성운은 그자를 힐끗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음, 저자가 바로 무림사괴(武林四怪) 중의 한 명인 죽엽마령이구나.) 기실 황보성운 역시 죽엽마령에 대해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어왔 던 터였다. 이때 죽엽마령은 음산한 괴소를 입에 떠올린 채 천천히 어느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가 지나가는 곳에 있던 사람들은 전신을 부르르 떨다가 그가 지나가는 순간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죽엽마령은 어느 곳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그것은 바로 청의소년 앞이었다. 허나 청의소년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여전히 식사만 할 뿐이었다. 죽엽마령의 입에서 베일 듯한 싸늘한 말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계집년! 네년이 변장한다고 내가 못알아 볼 것 같으냐?" 그는 우수(右手)를 앞으로 쑥 들이밀었다. 그러자 뼈다귀같은 손가락이 흉흉히 드러났다. "어서, 그 혈응(血鷹)을 내놓아랏!" 이에 청의소년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 무슨 말을 하는거요? 혈응이라니……?" "흐흐흐…… 네가 그런다고 내가 모를 것 같으냐?" 그는 집게 손가락으로 청의소년을 가리키며 냉막하게 소리쳤다. "강남일미(江南一美) 팽소연(彭少燕)! 네가 그 청해일검(靑海一劍)에게서 받은 그 혈응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는 더욱 중압감을 주려는 듯 말을 단호히 끊었다. 그리고 서리가 내릴 듯한 냉오한 괴소를 날렸다. "흐흐흐흐……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제 20 장 潛龍山洞 1 청의소년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색되더니, 급기야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죽엽마령은 계속 입가에 냉오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팽가 계집년! 네년이 나 죽엽마령의 손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거만스럽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하에서 나의 손아귀를 벗아날 자는 아무도 없다." 청의소년은 창백한 안색으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돌연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좋다! 죽엽마령!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허나 절대로 너에게 혈응을 넘겨줄 수는 없다." 죽엽마령은 가소롭다는 듯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이 계집애야, 네가 감히 나의 손속을 벗어날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그는 싸늘하게 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장소녀 팽소연 앞의 탁자를 걷어 차버렸다. 순간, 펑----! 박살난 탁자의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위급한 사태에 팽소연은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안색은 싸늘한 시체의 그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시 예의 그 소름끼치는 괴소가 울렸다. "크흐흐흐…… 물러나 봤자 독 안에 든 쥐다." 죽엽마령은 독수리 발같이 깡마른 손을 슬쩍 치켜 올렸다. 그리고 허리를 약간 숙이며 손가락을 갈쿠리처럼 구부렸다. 순간, 한줄기 조영이 팽소연의 앞가슴을 향하여 먹이를 채듯 무서운 속도로 뻗었다. 팽소연은 자신의 가슴을 향해 뻗어오는 손가락을 보자 그만 얼굴을 확 붉혔다. "수치도 모르는 놈!" 동시에 그녀는 옆으로 급급히 피해갔다. 허나, 조영(爪影)은 흡사 자석처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흐흐흐…… 피할려고? 어디로?" 찰나, 찌---- 익! 죽엽마령의 흉조(凶爪)에 팽소연의 앞가슴 옷이 찢겨졌다. "어멋!" 순간, 젖가리개로 가린 그녀의 하얀 젖가슴이 약간 드러났다. "흐흐흐…… 정말 매력적인 모습이구나!" 죽엽마령의 음흉한 웃음이 흘렀다. 팽소연은 수치감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러나 이내 격분하여 가냘픈 어깨를 흔들며 맹렬하게 장풍을 격발시켰다. 허나, "어딜!" 죽엽마령은 슬쩍 피해버렸다. 순간, 펑----! 빗나간 장풍이 애꿎은 벽을 후려쳤다. "크흐흐……" 다시 죽엽마령의 괴이한 조영이 희끗 움직였다. 순간, 찌---- 익! 또 다시 옷이 찢기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이번엔 그만 그녀의 백옥같은 젖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렸다. 팽소연은 황급히 양 손으로 찢어진 옷자락을 추스리며 앞가슴을 가렸다. 그녀의 얼굴이며 목덜미가 수치감에 빨갛게 물들었다. 헌데 그 순간, 툭----! 그녀의 품 속에서 무엇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선혈이 뚝뚝 떨어질 듯 섬뜩할 정도로 시뻘건 빛의 옥 (玉)으로 만든 독수리였다. "오! 혈응(血鷹)……" 죽엽마령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손을 뻗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쉬---- 익! 쉭! 두 줄기 예리한 지풍이 그의 영태혈(靈台穴) 장문혈(章門穴)로 짓쏘아들었다. "응?" 죽엽마령은 황급히 신형을 비꼈다. 그러자, 팍! 파팍----! 지풍이 객잔 바닥을 뚫었다. 죽엽마령은 격노해 몸을 홱 뒤로 돌렸다. 그리고 두 눈에서 흉흉히 살광을 내뻗쳤다. "어떤…… 찢어죽일 놈이냐!" 그는 갈아마실 듯한 눈으로 예리하게 중인들을 훑었다. 그러자 두 명의 풍채 좋은 상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순 죽엽마령의 흉악한 시선이 두 상인에게 떨어졌다. "네놈들이냐!" "그렇소." 두 상인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죽엽마령의 눈 끝이 가볍게 경련했다.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들이구나!" 서서히 그의 움푹 패인 두 눈에서 싸늘한 자광이 흉흉히 내뻗치기 시작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죽기 전에 이름이나 밝혀라." 극도로 억누른 분갈이 흘러나왔다. 이에 두 상인은 가볍게 포권지례를 갖추었다. "우리는 무당파의 쌍의(雙義)요." 그러자 죽엽마령은 움찔하더니, 이내 싸늘한 괴소를 날렸다. "흐흐흐…… 이제보니 네놈들은 무당의 백학 늙은 놈이 아낀다는 무당쌍의(武當雙義) 황가 형제놈들이구나." "그렇소. 소생이 바로 황곤의(黃坤義)요." 왼쪽의 상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자 그 옆의 상인도 담담히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소생은 황곤표(黃坤表)요." 죽엽마령은 돌연 눈빛을 번쩍 빛내더니 싸늘히 입을 열었다. "흐흐흐…… 백학, 그놈은 이십 년 전 노부와 약간의 빚이 있다. 오늘 그놈을 대신해서 내가 따끔한 맛을 보여주마." 황보성운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가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음! 이제보니 저 두 상인이 바로 우내삼기 중 한 명인 백학거사의 직전제자로군.) 이때 죽엽마령은 주위를 휙 돌아보며 일갈을 내질렀다. "모두 꺼져라! 노부가 오늘 파격적으로 대해(大海)같은 관용을 베푼다!" 그러자 중인들은 주춤주춤 문가로 뒷걸음질 치더니 문가에 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후다닥 도망쳤다. 허나 몇 명은 그대로 자리에 박힌 듯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황보성운, 괴노개, 그리고 취의소녀와 노파 등이었다. 이에 죽엽마령은 움푹 패인 두 눈을 흉험하게 부라렸다. "네놈들은 죽고 싶어서 떠나지 않는 것이냐?" 그러자 취의소녀가 기이하게 두 눈을 빛내며 불쑥 나서는 것이었다. "죽엽마령! 옛부터 인연있는 자만이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했어요." 죽엽마령은 조그만 소녀가 나서자 아예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허……! 너같은 계집까지 이 일에 한몫 끼겠다는 것이냐!" 취의소녀는 생긋 웃음을 떠올렸다. "호호호…… 이것 갖고도 자격이 부족한가요?" 그녀는 품 속에서 짧은 단검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순간, 중인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천신검(天神劍)!" 죽엽마령은 취의소녀를 싸늘하게 노려보더니 냉막하게 입을 떼었다. "네년은 신검자(神劍子)와 무슨 관계냐?" 취의소녀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허나 그 미소 끝에는 왠지 모를 싸늘함이 흘렀다. "그분은 나의 조부(祖父)예요." 짤막한 말이 떨어지자, 죽엽마령의 안색이 굳어졌다. 잠시 좌중엔 숨막힐 듯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죽엽마령이 안면을 가볍게 경련하더니 싸늘하게 소리쳤다. "좋다, 좋아! 크흐흐흐…… 이 조그만 객잔 안에 용호(龍虎)가 웅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하나, 나 죽엽마령의 이름으로 경고하건데! 그 어떤 놈이라도 혈응을 건드린다면 하루 아침의 이슬로 변하게 해 주마!" 이때 어디선가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클클클…… 늙어 죽지 못한 놈이 돼지처럼 욕심은 많아서 보는 것마다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군." 죽엽마령은 이에 황급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싸늘하게 노갈했다. "어떤 놈이냐?" 그러자 다시 그 걸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헛헛헛…… 눈이 삐었느냐? 네 앞에 있는 사람도 몰라보고?" 이에 죽엽마령은 안면을 격심하게 일그러뜨리며 재차 주위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이때 그의 눈에 담담히 술잔을 기울이는 서생이 들어왔다. 그는 황보성운이었다. 죽엽마령은 눈 끝을 분노에 바르르 떨며 황보성운 앞으로 다가갔다. "꼬마야! 조금 전 네놈이 씨부렁거렸느냐!" 황보성운은 담담히 술잔을 탁자 위로 내려 놓았다. 그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힐끗 죽엽마령을 바라보았다. 이때 다시 그 목소리가 죽엽마령의 귀를 두드렸다. "으헤헤헤…… 제법 늙었다고 벌써 귀가 먹었군. 찾으라는 사람은 찾지 않고 닭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할 서생에게로 가다니. 쯧 쯧……" 죽엽마령은 그제서야 시선을 늙은 거지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갔다. 이윽고 거지 앞에 우뚝 선 그의 입에서 음산한 말이 흘러나왔다. "회음통(廻音通)! 이제보니 네놈은 신풍개(神風 )였구나." 죽엽마령의 말에 중인들은 모두 놀라는 기색을 지었다. 신풍개라면 죽엽마령과 같은 무림사괴의 일 인이 아닌가? 이때 늙은 거지는 안주 접시에서 얼굴을 들며 키들키들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온통 안주로 범벅된 채 웃는 그의 모습은 실로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안주 찌꺼기를 핥아먹으며 히죽 웃었다. "죽엽마령! 같은 사괴(四怪)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처음으로 만나는군." 죽엽마령은 약간 경직된 안색으로 신풍개를 노려보았다. "신풍개! 네놈도 저 혈응을 탐내고 왔느냐?" 신풍개는 여전히 익살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신풍개는 두 눈을 껌벅거리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이어 그는 입을 익살스럽게 쑤욱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너같은 나쁜 악당 놈이 얻는다면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라면 나도 참견하고 싶지 않다." 희롱하는 듯한 신풍개의 어조에 죽엽마령의 안색이 돌처럼 굳어 졌다. 허나, 심기가 깊은 그는 흥분하지 않고 내심 염두를 빠르게 굴렸다. (음! 저 신풍개 놈은 나의 무공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더군다나 이곳에 있는 놈들 역시 보통이 아니니……) 그는 눈썹을 짙게 찌푸렸다. (헌데…… 그는 왜 아직도 소식이 없을까?) 2 이때였다. 돌연, 웅후한 소성이 객잔 안으로 쩌르릉 날아들었다. "핫핫핫핫…… 신풍개! 그 혈응은 반드시 우리가 가져가야 한다. 만약 네가 막는다면 오늘 이후로 무림사괴는 무림삼괴만 남게 될것이다." 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한 줄기 선풍이 일더니 홀연히 객잔 안으로 다섯 명이 등장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죽엽마령의 얼굴에 희색이 스쳤다. 그들은 모두 사기(邪氣)가 물씬 풍기는 자들로 풍기는 인상이 가히 사람의 뼛골을 얼릴 듯한 자(者)들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대략 삼십 정도 되었을까? 그는 서생차림에 금빛 섭선을 든 호리호리한 미남이었다. 허나, 전신으로부터 사기(邪氣)와 음흉한 기운이 암암리에 싸늘하게 풍겨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신풍개를 바라보며 괴이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흐흐흐흐…… 오랜만이군, 늙은 거지." 신풍개의 두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음양서생……!" "후후…… 신풍개! 몇 년 보지 못한 사이에 무척 많이 늙은 것같군." 그는 싸늘한 미소를 날렸다. 신풍개는 침음했다. (으음! 음양서생, 저놈까지 이곳에 나타나다니……) 음양서생(陰陽書生). 그 역시 무림사괴의 일 인이었다. 비록 겉으론 삼십대의 젊은 나이로 보이지만, 실제 그는 이미 백 세를 넘어선 노마(老魔)인 것이다. 일찍이 그는 사도의 극악한 마공 음양섭혼대법(陰陽攝魂大法)을 익혔다. 그리하여 수많은 처녀의 순음진기를 섭취하여 늙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무공 역시 사괴 중에 제일 강했다. 죽엽마령은 음양서생이 나타나자 크게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유형!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하하하하…… 혁형께서 오래 기다렸다면 정말 미안하오. 나중에 벌주 석 잔 마시리다." 음양서생은 여전히 신풍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음산하게 말을 받았다. 음양서생의 뒤쪽에 서있던 네 명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허 리를 굽혔다. "혁당주님께 인사 드립니다." 죽엽마령은 음침한 안색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음……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순간,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대경해버렸다. 당주라니……? 그러면 죽엽마령이 어느 방파의 일개 당주란 말인가? 그래도 당금 무림을 흔드는 십대 절정고수 대열에 있는 그가 겨우 당주의 신분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인들은 경악의 시선으로 죽엽마령을 응시했다. 이때 음양서생의 차디찬 말소리가 객잔을 울렸다. "신풍개! 우리는 교주님의 명령을 받고 저 혈응을 취하러 왔다. 그러니 순순히 물러가라!" 신풍개의 안면이 한쪽으로 홱 뒤틀렸다. 그는 안면을 가볍게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흐흐흐…… 천하의 무림사괴 중 두 명이 다른 사람의 주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음양서생은 냉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때를 아는 자가 준걸(俊傑)이라 했다." 죽엽마령도 한 마디 거들었다. "신풍개! 너도 본교에 들어온다면 우리와 똑같은 대우를 해줄 수 있다." 그 말에 신풍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용의 꼬리가 되느니 차라리 뱀의 머리가 되겠다." 그리고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나는 남의 냄새나는 발바닥을 핥으면서 살만큼 비위가 좋지못해." 이처럼 빈정거리는 신풍개의 말에 음양서생과 죽엽마령의 안색이 붉게 물들었다. 순간, 죽엽마령이 노갈했다. "노개! 네가 감히 우리를 비웃어?" "비웃음을 당할 행동을 봤으면 당연히 비웃어 주는 게 도리 아니냐?" 죽엽마령은 안면을 격심하게 일그러뜨리며 격노한 일갈을 빽 내질렀다. "관중사패(關中四覇)! 이곳에 있는 놈들을 한놈도 남김 없이 처단해라!" 그러자 음양서생은 팽소연과 취의소녀를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미묘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관중사패! 너희들은 나의 마음을 알겠지?" 관중사패는 서로 마주보며 히쭉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입 끝이 찢어지도록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염려 마십시오. 저 두 계집은 조금도 다치지 않고 남겨놓겠습니다." 이때 황곤의가 곤혹스런 표정을 한 채 관중사패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들이 몇 달 전 동정방(洞庭 )을 일거에 무너뜨린 관중사패냐?" 그러자 관중사패는 음침한 괴소를 날리며 즉각 대답했다. "흐흐흐…… 그렇다!" "동정호에서 힘을 쓴 보람이 있군. 알아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있으니…… 크크크……" 중인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으음…… 저들이 관중사패?" "동정방을 멸망시킨……?"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가 망연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기실 동정방은 동정호(洞庭湖) 일대의 동정 칠십이채(七十二寨)를 휘어잡고 있던 최대의 문파였던 것이다. 헌데, 어느날 실로 참혹한 사태가 발발하고 말았으니…… 습격해온 관중사패란 자들에 의해 일거에 참몰의 비극을 겪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관중사패는 그 혈세적(血洗的) 악명을 강호무림에 떨쳤다. 헌데, 눈 앞에 그 동정방을 멸망시킨 관중사패가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건 그들이 어느 조직의 일개 수하라는 점이다. 일순 침묵에 빠져버린 장내(場內)에 한 마디 냉혈적인 일갈이 터져나왔다. "무엇하느냐, 관중사패! 놈들을 모조리 쳐라!" 죽엽마령이었다. 그러자 관중사패는 어깨를 으쓱이며 호기롭게 튀어 나섰다. "흐흐흣…… 오랜만에 몸을 풀어 보는군." "동정방에서도 그랬지만 인간을 닭모가지를 비틀 듯 죽여버리는 것은 참으로 짜릿한 맛이란 말씀이야. 키히히힛……" 그들은 한 마디씩 지껄이며 한 사람씩 붙잡고 격투에 들어갔다. 바야흐로 객잔 안에 피비린내가 물씬 풍길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이곳 저곳에 장력과 병장기가 부딪는 소리가 요란했다. 지금 관중사패 중 두 명은 쌍의형제와 용호상박의 기세로 격돌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팽소연을 핍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팽소연은 아까 죽엽마령과의 싸움으로 인해 옷이 찢어져 양 손을 사용하기가 매우 불편했다. 한 손으로 찢어진 옷자락을 여민 채, 한 손으로만 상대하자니 매우 힘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상 양 손을 다 사용한다 해도 그녀는 관중사패의 한 명을 꺾을수가 없었다. 만약 음양서생이 관중사패에게 그녀를 해치지 말라고 당부만 하지 않았다면 벌써 그녀는 시체로 누웠을 것이다. 어쨌든 팽소연은 몇차례 손속을 주고 받는 동안 계속 뒤로 몰렸다. 놈이 사악하게 웃으며 공격했다. "크크크…… 계집년, 쓸데없는 반항은 체력만 소모할 뿐이다. 곱게 양 손을 내리고 굴복해라!" "닥쳐라!" 팽소연이 상대의 공격을 피해 몸을 날리는 순간, 상대의 손 끝이 왼쪽 옆구리를 노리고 다시 밀려왔다. 팽소연은 어쩔 수 없이 찢어진 옷자락을 여미고 있던 왼손을 사용해 상대의 공격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찢어진 옷자락이 흘러내리며 탐스런 유방이 부끄럼을 모르며 백일하에 드러났다. 팽소연은 손으로 가슴을 가리려고 했지만 상대의 공격 때문에 그 럴 수가 없었다. 상대가 능글맞게 웃으며 외쳤다. "크흐흐…… 정말 끝내주는 젖통이군. 색깔을 보니 아직 남자에게 빨려 본 경험이 없는 것 같구나." "이…… 죽일 놈!" 팽소연은 황급히 가슴을 가리곤 이를 갈며 공격했다. 허나, 그녀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흐흐흐…… 계집년! 앙탈은 그만하고 일찌감치 굴복해라. 그러면 당주님의 품 속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그는 다시 팽소연을 뒤로 가볍게 물리치며 여유작작히 능글거렸다. 팽소연은 격노해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며 노갈을 빽 내질렀다. "닥쳐라! 천한 놈들!" "히히히히…… 그 계집년 정말로 고양이처럼 앙팡지군." 한편, 황보성운은 짐짓 두려운 표정으로 탁자 위에서 사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보성운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취의소녀가 그에게 다가왔다. "공자님! 이곳은 위험하니 나가는 것이 좋아요." 그녀는 황보성운 신변의 안전이 염려되는 듯 고운 이마에 근심스런 기색을 보였다. 이때, "크히히힛…… 계집애야! 남 생각은 그만 두고 네년 걱정이나 해라."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지르며 관중사패 중 남은 한놈이 그녀의 전 신 위로 손속을 펼쳐왔다. 취의소녀는 싸늘한 냉소를 날렸다. 그리고는 상대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버렸다. "엇! 제법이구나!" 헛손질한 그는 가볍게 감탄했다. 이때 죽엽마령의 말이 울렸다. "관중사패! 조심해라! 그 계집은 신검자 늙은 놈의 손녀다. 제법 한 수가 있다." "알았습니다." 관중사패는 즉각 대답하며 신중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신속하게 손을 펼치며 한 마디를 내질렀다. "신검자의 무공이 어떤지 한 번 견식해 보자." 이때 옆에서 차가운 냉소가 울렸다. "건방진 놈! 감히 아가씨의 존체를 건드리려 하다니." 그리고 다음 순간, 언제 격발되었는지 모를 장력이 관중사패의 장력에 부딪쳐갔다. 펑! 허공에서 장이 부딪는 소리가 울렸다. 찰나, "윽----!" 당당히 취의소녀에게 달려들던 관중사패의 한 놈이 답답한 신음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뒤로 다섯 걸음이나 주르륵 밀려나갔다. 가까스로 신형을 세운 그는 돌변한 사태에 눈을 희번득거리며 경악했다. 그의 전면으로 서서히 눈먼 노파가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너…… 너는 누구냐?" 한 차례 혼줄이 난 그는 다급히 외쳤다. "염라대왕이 가르쳐 줄 것이다." 그 괴노파는 손에 든 용두장(龍頭杖)을 다짜고짜로 휘둘렀다. 그러자 윤전(輪箭)처럼 장영(杖影)이 현란스레 일어났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엄청난 내력이 격출되어 나왔다. 그는 혼비백산하여 급급히 피하며 놀란 한소리를 내질렀다. "풍운장법(風雲杖法)!"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색되었다. "너…… 너는 용두파파(龍頭婆婆)와 무슨 관계냐?" "어린 놈이 어디서 나의 이름은 주워 들었나 보구나." 괴노파 즉 용두파파는 다시 허공으로 장영을 뿌려대며 공격해 들어왔다. 관중사패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으…… 이 눈먼 노파가 설마 삼십 년 전 위명을 떨친 용두파파일 줄이야……!) 용두파파.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육십여 년 전에 등장했던 인물이었다. 그때 그녀는 한 자루의 용두장을 휘두르며 강호를 종횡했다. 타오르는 불! 쪼개지는 대쪽! 이것은 바로 불의(不義) 앞에 선 그녀의 성격이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용두장 아래 참살되었던 수없이 많은 사악한 자 들, 그 수(數)는 바닷가 모래와 함께 기억해야 하리라. 삼십 년 전, 그녀는 홀연히 실종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런곳에서 다시 나타나다니…… 이때, "관중사패! 물러나라. 용두파파는 내가 상대해 주겠다." 죽엽마령이 자리를 떨치고 관중사패와 용두파파 사이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음험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난교하(蘭嬌河)! 네가 아직까지 살아 남아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자 용두파파는 눈썹을 부르르 떨더니 허연 눈을 떴다. "음가효! 이놈 삼십 년 전 네놈에 의해 잃은 두 눈에 대한 빚을 오늘 갚고야 말겠다." "크크크…… 네 실력으로 날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용두파파는 분노에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용두장을 풍차처럼 휘돌리며 무시무시한 위세로 쳐내려갔다. "이 용두장으로 네놈의 머리통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 "크흐흐흐…… 난교하! 이번에는 두 눈이 아니라 아예 숨통을 끊어주마." 죽엽마령도 두 손을 단단히 끌어올려 뿌리쳤다. 그러자, 휘리리리리리링----! 스샤샤샤샤샤샥----! 괴이한 소리가 대기(大氣)를 갈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크치치치치칫! 허공에 무수한 섬광(閃光)이 흩뿌려지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각각 이보(二步)씩 뒤로 물러섰다. "음!" "으---- 음!" 두 사람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그들은 다시 극랄한 격투를 벌였다. 용호상박의 호각지세였다. 허나, 이백여 초가 흘러가자 서서히 진력이 고갈되어가는 듯 용두파파의 출수가 눈에 뜨이게 늦어져갔다. 그러면서 점차로 용두파파가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 관중사패는 다시 취의소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신풍개와 음양서생은 한곳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엇비슷한 절정 고수들이므로 쉽사리 결말이 나지않을 성싶었다. 황보성운은 유유히 격전의 와중 속에서 결전장 위로 두 눈을 굴리고 있었다. 대체적인 싸움의 정세는 점차 정파 세력이 불리한 쪽으로 가고 있었다. (으음! 아무래도 내가 개입해야 될 것 같구나!) 이때 그의 귀에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황보성운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팽소연이 서 있었다. 헌데 그녀의 옥같은 가슴이 완전히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가슴 위에는 흉칙한 혈장인(血掌印)이 끔찍하게 찍혀 그 위로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러한 자태로 곧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이때 관중이패의 냉혹한 일갈이 살벌하게 울려 나왔다. "흐흐흐…… 계집년, 이제 그만 굴복하거라!" 그의 손이 돌연 괴이하게 변형되는 듯하더니 그곳으로부터 막강한 암경(暗勁)이 발출되었다. 팽소연은 도저히 피할 방도가 없었다. 전신의 힘이 거의 탈진되었고, 가슴의 상처로 인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절망했다. (아아…… 이렇게 허무하게 삶을 마감하다니……) 헌데 이때, 누구도 예상못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막강한 암경을 발출시킨 관중이패가 돌연, "아---- 악!" 외마디 참혹한 비명을 내지르며 허공을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쿵! 그의 신형이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꿈틀하더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즉사(卽死)한 것이다. 돌변한 사태에 중인들은 모두 대경해버렸다. 그들은 싸우던 일도 멈추고 현장을 직시했다. 음양서생의 침음한 말이 흘러 나왔다. "어떤 놈이 감히 암습을……?" 죽엽마령도 주위를 둘러보며 냉갈을 터뜨렸다. "비겁한 놈! 숨어있지 말고 썩 나서거라!" 이때 황보성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 21 장 玉面神手 1 좌중의 인물들은 황보성운의 돌연한 등장에 심한 의구심을 금할 수가 없었다. 신풍개는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대체, 저 문약한 녀석이 하필 이때 왜 일어선단 말인가?) 모든 시선이 황보성운에게 향한 채 순간적으로 객잔 안은 천근 같은 침묵이 흘렀다. 황보성운이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곤 그는 죽엽마령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난 비겁하지도 않고 숨어있지도 않았소." 황보성운이 담담한 신색으로 죽엽마령을 바라보았다. 좌중의 인물들은 대경하고 말았다. (아니, 저 서생이 관중사패 중의 한 명을 죽였단 말인가?) 허나 이내 그들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도저히……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취의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황보성운을 야릇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때 죽엽마령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황보성운의 전신을 쓸어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네놈이 관중이패를 죽였단 말이냐?" "난 진실한 사람이오. 내가 뭣 때문에 비싼 밥 먹고 거짓말을 하겠소?" 황보성운이 히쭉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죽엽마령의 두 눈이 새파랗게 번득였다. "분명…… 사실이렸다!" 그러자 황보성운은 죽엽마령을 힐끗 보더니 이내 무심히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쯧쯧…… 정말 괴상한 사람이군. 남의 말을 그렇게 못믿다니…… 평소에 얼마나 불신(不信)의 감정이 많았으면……" 순간, 죽엽마령의 두 눈에서 살광이 갈가리 뻗쳐나왔다. "흐흐흐…… 노부가 오늘 고인(高人)을 몰라봤군." "하하하…… 안목이 없어서 그런 것을…… 어쩌겠소? 스스로의 능력 부족인데……" 황보성운의 조소에 죽엽마령의 안면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는 도저히 상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림사괴의 한 명인 자신의 앞에서 상대는 너무나 태연한 것이다. 미친 놈이거나 뭔가 믿는 구석이 없고서야 저럴 순 없는 것이다. 그는 가래침을 뱉듯 한 마디를 뱉아냈다. "애송이 놈! 네놈의 정체는 무엇이냐!" 황보성운은 다시 고개를 돌려 죽엽마령을 정시했다. 그리고 기이한 미소를 날렸다. "황보성운!" 그의 입에서 짤막한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황보성운……!" "오오! 저자가 황보성운이라고……?" 좌중 속에서 연신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주위 모든 인물들의 안색은 이미 급변해 있었다. 죽엽마령 또한 대경실색해서 하얗게 질려버린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네…… 네가 바로, 잔양오살과 잔양칠절을 일초에 격패시키고 적양관주와 잔양신마를 꺾은……" 그는 꿀꺽 침을 삼켰다. "옥면신수(玉面神手) 황보성운이란 말이냐?" 황보성운은 어리둥절했다. (옥면신수……?) 허나, 이내 문득 한 생각이 빗살처럼 뇌리를 쓸고 지나갔다. (아! 이제보니 나의 별호(別號)가 그렇게 붙은 모양이군.) 황보성운은 짐짓 신비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바로 옥면신수 황보성운이오." 주위는 다시 술렁거렸다. 죽엽마령과 음양서생은 황보성운을 공포의 기색으로 응시했다. 반면에 정파의 인물들은 경이의 눈빛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존경과 감탄의 기색이 흘렀다. 특히 취의소녀는 어떤 알 수 없는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보통 분은 아니라고 직감적으로 느끼긴 했지만…… 그토록 대단한 분일 줄이야!) 그녀는 왠지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이었다. 이때 황보성운은 음양서생과 죽엽마령 등은 안중에도 없는 듯 태연한 신색으로 한쪽 구석에 주저앉아 있는 팽소연 앞으로 다가갔다. 팽소연은 왼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어 앞가슴을 가린 채 창백한 안색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황보성운의 부드러운 음성이 흘렀다. "낭자, 상처가 심하오?" 이에 팽소연의 창백한 얼굴에 일말의 홍조가 떠올랐다. "괜찮습니다, 소협! 아직은 견딜만해요." 팽소연은 가볍게 미소를 떠올렸다. 허나, 그녀는 그 대답과 함께 이내 몸을 파르르 경련했다. 황보성운은 그녀에 대한 애처로운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말없이 옆의 봇짐에서 옷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리고 소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낭자, 이것이라도 괜찮다면 우선 걸치는 것이 어떻겠소?" 이에 팽소연의 안색이 사르르 붉어졌다. 그리고 약간 당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니…… 저, 전……" "낭자, 사사로운 예의에 얽매일 필요는 없소." 팽소연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허나, 이내 고개를 들며 가느다란 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공손히 옷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옷을 걸쳤다. 옷은 헐렁하도록 매우 큰 것이었다. 한편 죽엽마령과 음양서생은 자신들을 옆에 두고도 안하무인격으로 황보성운이 여유만만히 행동하자 수치심이 치밀었다. (이런! 찢어죽일 놈이……) (완전히 우릴 무시하고 있어.) 허나 그들은 생각과는 달리 발작을 하지 못했다. 상대는 희대의 기재(奇才)다. 잔양칠절, 적양관주, 잔양신마 등 흉랄한 노마(老魔)들을 단독으로 일거에 물리친 황보성운인 것이다. 기실 자신들도 일대 마두지만 아무래도 우내이마(宇內二魔) 중의 일인인 잔양신마에 비하면 한수 밑인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때 황보성운은 천천히 죽엽마령과 음양서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싸늘하게 황보성운의 눈빛이 그들 위로 떨어졌다. "원래 나는 이 일에 참견하지 않으려 했소. 허나 당신들의 행동이 극도로 파렴치하고 비겁하므로 나서게 된 것이오." 황보성운은 한 손을 서서히 들어올려 죽엽마령을 가리켰다. "죽엽마령! 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살상했으니 오늘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 죽엽마령은 움찔했다. "……" 황보성운은 힐끗 죽엽마령을 바라본 뒤, 음양서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양서생! 당신은 큰 죄는 없으나 행동이 눈에 거슬리므로 약간의 징계만 내리겠소." 이때 등 뒤에서 살기띤 어조가 폭발했다. "건방진 놈! 우리 형제를 죽여놓고 무슨 개소리냐?" 그들은 바로 관중사패 중 남은 삼 인이었다. "쳐라!" 한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세 줄기 인영이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치솟더니 황보성운의 전신으로 벼락치듯 덮쳐내렸다. 황보성운은 가볍게 냉소를 날렸다. "허----! 쓸데없이 또 죽음을 재촉하는군." 황보성운은 서서히 가슴 앞으로 양손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추산진해(推山振海)의 식으로 닥쳐드는 세 줄기 장력을 향해 가볍게 직격(直擊)했다. "살(殺)----!" 현무신공 십자결 중 가장 잔인한 살자결(殺字訣)이 시전된 것이다. 순간, 펑! 퍼펑! 퍼---- 엉! 장력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으헉!" "흑!" 각기 다른 관중삼패의 세 마디의 다급한 신음성이 터져 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은 주르륵 뒤로 무려 일 장이나 격퇴되어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순간, "으핫핫핫핫핫…… 귀현조원(歸玄朝元)!" 황보성운은 두 손을 부챗살처럼 펼쳐 맹폭한 일장을 격발시켰다. 그것은 바로 현무구장의 제사초였다. 순간, 허공으로 커다랗게 찬란한 은색 지영(指影)이 부챗살처럼 둘러퍼졌다. 그리고 일시에 그 부챗살같은 지영(指影)은 냉전처럼 격사되어 갔다. 다음 순간, "으---- 아---- 악!" "으---- 악!"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참혹하게 울렸다. 이어 허공으로 찬란한 피보라가 휩쓸었다. 동시에 관중삼패는 허공으로 튕겨나갔다. 쿵! 쿠쿵! 벌집처럼 처참하게 구멍이 뚫린 세 개의 시신(屍身)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전신으로부터 손가락 굵기의 핏줄기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모조리 일격에 즉살된 것이었다. 2 중인들은 부르르 몸을 떨면서 경악의 표정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과…… 과연 옥면신수다.) (관중삼패를 어린애 다루듯 해치워 버리다니……) 한편, 이처럼 쉽게 관중삼패가 격살되자 죽엽마령과 음양서생의 얼굴에는 짙은 공포의 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했다. (으으으! 설마 설마 했었는데 과연 잔양신마가 당할만 하구나.) 이때, 피비린내가 울컥거리는 현장을 뚫고 황보성운의 낭랑한 음성이 울렸다. "죽엽마령! 음양서생!" 중인들의 시선이 황보성운에게 향했다. "너희들이 나에게 불복한다면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중인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황보성운의 입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나에게 연수 합공하도록 해라. 나는 그것을 백초 내에 격파시키겠다." 죽엽마령과 음양서생의 안면이 가볍게 경련했다. "만약 너희들이 나의 백초를 받아내면 이 시합에서 패배한 것으로 인정하겠다." 이 말에 중인들은 대경했다. 아무리 황보성운의 무공이 강하다 해도 상대는 무림사괴 중의 두 명이다. 어찌 그들에게 연수합공을 하라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백초 내에 격패시키지 못하면 진 것으로 인정하겠다니…… 중인들은 황보성운이 지나치게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음양서생과 죽엽마령의 얼굴에는 희색이 스쳐갔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크흐흐…… 이 꼬마 놈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다. 사실 우리 둘 중 하나라면 자신이 없다. 허나 합공(合功)으로 백 초 받아내는 것쯤이야 누워서 떡먹기가 아닌가?) 음양서생이 음흉맞은 괴소를 흘리며 입을 떼었다. "흐흐흐…… 과연 옥면신수다운 위세로군. 좋다! 네 말대로 우리 둘이 너의 공격을 받아보겠다."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수중의 섭선을 쫙 펼쳤다. 지금 그의 내심은 자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일단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음양서생은 그대로 몸을 날리며 섭선으로 황보성운의 허리를 쓸어갔다. "애송이 놈! 이것이 바로 음양십팔선(陰陽十八扇)이닷!" 스스스스스슷! 대기(大氣)를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이 울렸다. 한편 죽엽마령은 이와 거의 동시에 양손을 뻗었다. 휘---- 익! 그의 두 손은 흡사 갈쿠리처럼 휘어져 무섭게 쳐들었다. 그 동작은 실로 쾌속무비했다. 순간, 황보성운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조영(爪影)이 흡사 먹이를 채는 독수리처럼 떨어져 내렸다. 음양신마와 죽엽마령이 함께 펼치는 연수 합공은 실로 그 위력과 위세가 상상불허의 엄청난 것이었다. 실상 무림십대고수의 실력은 모두가 백지장 차이다. 무림십대고수 중 가장 강한 천룡노인일지라도 음양신마와 죽엽마 령의 합공을 받아낼 순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싸움을 바라보는 중인들의 표정엔 지극히 초조한 빛이 서려있었다. 특히 취의소녀는 안절부절한 표정으로 싸움을 바라보며 여차하면 싸움에 끼어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 음양신마와 죽엽마령이 사악한 웃음과 함께 좌우에서 공격했다. "애송이 놈! 네놈의 오만이 네놈을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그들의 합공은 실로 살벌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신풍개는 나직이 침음성을 터뜨렸다. "으음…… 나같은 경우라면 저 공격은 도저히 받아내지 못할 것 같구나!" 취의소녀와 팽소연은 더욱 초조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은 안타까운 듯 입술을 질끈 물고 있었다. 허나 정작 당사자인 황보성운은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그는 어느새 양 손에 잠룡피를 끼고 있었다. 이때 선영(扇影)과 검영이 황보성운의 지척으로 덮쳐들었다. 순간, 창졸간에 황보성운이 사라졌다. 그리고 수십 개의 그림자가 사방팔방으로 늘어서는 것이 아닌가? "엇?" "아니!" 죽엽마령과 음양서생은 한 모금 찬공기를 들이켰다. 황보성운이 비로소 독문보법(獨門步法) 잔영보를 펼친 것이었다. 찰나지간, 황보성운의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들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음양서생과 죽엽마령은 급급히 뒤로 신형을 돌렸다. 헌데, 놀랍게도 그곳에 황보성운이 미소를 짓고 서 있는 것이었다. 죽엽마령과 음양서생은 황보성운의 신기막측한 신법에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과, 과연…… 무서운 놈이다.) 그들은 마음 속의 방심을 지우곤 다시 공격했다. 허나 또 한차례 할일 없이 허공만 쳐댔을 뿐이었다. 그들은 계속 사납게 공격했다. 허나 황보성운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여유만만하게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오십 초가 흘러갔다. 음양서생과 죽엽마령은 내심 매우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공격해도 황보성운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좀체로 표정이 없는 음양서생의 이마에도 가늘게 힘줄이 섰다. 그들은 지금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시합이 문제가 아니다. 둘이서 일방적으로 상대를 오십 초나 공격해서도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를 못하다니……) 그들의 얼굴이 점차 처참하게 일그러져 갔다. (아! 이건 정말 수치다.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내밀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일순 그들의 얼굴에 돌연 비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뜻이 통한 것이다. 그들은 암암리에 전신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돌연 음양서생의 모습이 괴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 양면으로 붉고 푸른 기운이 감돌더니 잠시후 완벽하게 얼굴이 적면(赤面)과 청면(靑面)으로 나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얼굴 뿐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은 중추를 중심으로 완벽한 대칭으로 좌우(左右)가 적청(赤靑)으로 상반되는 빛을 내는 괴이한 모습을 이루었다. 실로 그의 그런 모습은 흡사 무슨 흉험한 괴물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신풍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조심하게, 황보소협! 그것이 바로 그자의 최절정 무공인 음양신공(陰陽神功)일세." 음양서생의 몸은 점점 그 적청의 빛깔이 짙어져 갔다. 그리고는 급기야 그의 섭선마저 한쪽은 푸르고 한쪽은 싯뻘겋게 물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섭선의 빛깔이 점차 강해지면서 섭선의 양면으로 은은한 홍광과 청광이 갈라서 기묘한 장면을 이루었다. 이때 온통 괴인(怪人)으로 변해버린 음양서생의 흉험한 괴소가 울렸다. "흐흐흐…… 애송이 놈! 나의 이 음양신공과 음양선법은 평생 두 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음양서생은 기이한 동작으로 섭선을 쭉 내밀었다. "이번에 이것으로 너의 숨통을 끊어주마." 그의 섭선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러자 섭선으로부터 무수한 청광과 적광이 사방으로 내뻗쳤다. "받아라!" 섭선으로부터 엄청난 경기가 태산을 밀어버릴 듯 내뻗쳤다. "황보소협! 절대 그 섭선에 부딪치지 말게! 부딪치면 크게 위험하네." 다시 신풍개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에 음양서생은 버럭 노성을 내질렀다. "늙은 거지, 정말 죽고 싶어 입을 씨부리느냐? 허나 네놈이 주의를 줘도 저놈은 절대 피하지 못한다." 음양서생은 섭선을 들어 태극(太極)모양을 그렸다. 이에 황보성운은 싸늘한 냉소를 날리며 뛰어올랐다. "후후후…… 음양서생! 예로부터 방심은 금물이라 했다." 순간, "현천낙지----!" 황보성운은 전신으로 덮쳐드는 선영(扇影)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그러자 무수한 청색 장인이 폭포수처럼 허공을 현란하게 물들이며 선영으로 떨어져 내렸다. 헌데 그의 장인이 음양서생의 기이한 섭선에 부딪치는 순간, 청광은 양쪽으로 휙 갈라져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허엇! 제법이구나!" 황보성운이 허공에서 감탄성을 터뜨렸다. 한편 한쪽에서 음양서생과 황보성운의 싸움을 바라보는 죽엽마령의 눈빛이 괴이하게 이글거렸다. (흐흐흐흐……) 내심 음악하게 웃는 그의 양손에는 은은한 녹색 광채를 뿜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애송이 놈…… 저승으로 보내주마……) 이렇게 중얼거린 어느 순간, 그가 손을 휙 은밀하게 움직이자 십여 줄기의 녹광(綠光)이 황보성운을 향해 번갯불처럼 쏘아갔다. 쉬---- 익! 쉭! "사망죽엽표다! 꼬마야, 이젠 네 목숨도 끝이다!" 죽엽마령의 흉랄한 외침이었다. 허나 그 순간 황보성운은 환상같은 모습으로 허공을 비스듬히 날았다. 그리곤 그 자세 그대로 죽엽표를 잡아챘다. 중인들은 대경실색했다. "건드리지 말게. 그 죽엽표에는 극독이 묻어있어." 신풍개의 급급한 목소리였다. 허나 이미 황보성운은 손 안에 죽엽표를 받아든 뒤였다. "맙소사!" 신풍개를 비롯한 중인들은 절망의 탄성을 발했고, 반면 죽엽마령은 얼굴을 온통 희색으로 물들였다. "으하하하…… 꼬마야, 이젠 승부가 끝났다. 죽엽표에는 천하의 극독인 혈사독(血蛇毒)이 묻어있단 말이다. 하하하…… 역시 네놈은 무공만 강했지 경험이 없어!" 황보성운이 실소했다. "당신 너무 좋아하는군. 헌데 어쩌지? 실망을 시켜서…… 안타깝게도 난 만독불침(萬毒不侵)이야." 말하면서 황보성운은 죽엽표를 든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순간, 푸시시식! 소리와 함께 단단하기 그지없는 죽엽표가 가루가 되어 버렸다. "아…… 아니!" 죽엽마령은 너무나 놀라 눈을 부릅뜬 채 할말을 잊었다. "쯧쯧…… 조심해야겠어. 그러다가 눈알 튀어나올라." 이때 옆에 있던 음양서생이 섭선을 이용해 필살의 수법을 전개해왔다. "만독이 불침일지언정 도검이 불침은 아닐 것이다!" 황보성운이 냉소하며 소매를 떨쳤다. "음양서생, 너의 그 수법도 이젠 바닥을 드러냈어!" 음양서생은 자신의 앞으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경기를 느끼며 혼배백산했다. 그는 전력을 다해 음양신공을 전개했지만, 밀려오는 경기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사정없이 튕겨났다. "핫핫핫! 보아하니 이제 승부를 결정할 때가 된 것 같군." 황보성운이 조소를 날리며 몸을 움직였다. "두 노마! 이제 나의 공격을 받아 봐라!" 황보성운은 내공을 가일층 끌어올린 채 현무구장을 연속으로 전개했다. 그 엄청난 장력의 여파에 음양서생과 죽엽마령은 순식간에 휩쓸렸고 그들은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이미 황보성운의 경이적인 무공에 의기를 상실했기에 죽엽마령과 음양서생은 패색이 완연해졌다. 어느덧 그들의 결전은 구십 초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구십오 초가 되었을 때, 웅후한 황보성운의 말이 터져올랐다. "이제 오초가 남았고…… 지금부터가 진짜다." 순간, 그의 입에서 개세무비의 초식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현천낙지! 한월음혼! 항천복룡----!" 창졸간에 현무구장의 초식들이 잇달아 전개된 것이었다. 죽엽마령과 음양서생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최대의 위기를 느꼈다. 그들은 도저히 황보성운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찰나, "현(玄)---- 원(元)---- 공(空)---- 공(空)----!" 황보성운의 몸에서 현무구장의 제칠초가 개세무비의 위력을 발하며 터져나왔다. "윽----!" "허억!" 죽엽마령과 음양서생은 각기 어깨와 옆구리에 막대한 타격을 입고 비틀비틀 물러났다. 허나 공격이 그것으로 끝난건 아니었다. "마지막이다, 현천살미!" 황보성운의 심판관같은 일갈이 터져올랐다. 찰나,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수천 가닥의 기류가 음양서생과 죽엽마령을 향해 휘몰아쳤다. 음양서생과 죽엽마령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 공격에 대항하려 했지만, 그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장강의 흐름을 막으려는 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으악----!" "으---- 윽!" 여지없이 현천살미의 기류에 격중된 그들은 참혹한 비명을 토하며 허공으로 튕겨났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들은 처절한 신음을 토하며 비실비실 몸을 일으켰다. 헌데 그들의 모습은 실로 처참했다. 죽엽마령은 전신이 피투성이였고 양쪽 귀도 절단되어 있었다. 음양서생 역시 그 못지않게 처참했다. 어깨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처가 심했고, 게다가 그의 준수한 얼굴엔 수십 개의 혈선이 그어진 채 무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그들의 상처 부위로 샘물이 솟듯 피가 솟구쳤다. "으…… 으으……!" 그들은 공포와 원독에 가득찬 신음을 이를 부득부득 갈며 내뱉았다. "크으으…… 이놈이……" "네…… 네놈 따위에게 우리가……" 황보성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것이 구십구초 째다! 아직 너희들에겐 일초의 기회가 있어. 마지막 나의 공격을 막아낸다면 너희들은 승리하는 것이다. 허나 그것을 받아내지 못하면 너희들은 내가 아까 말한 대가를 치뤄야 할 것이다." 음양서생과 죽엽마령은 가슴이 서늘했다. 그들은 황보성운의 말이 농담이 아니란걸 느꼈다. 허나 그들은 황보성운이 전개할 일초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이미 그들의 내공은 거의 탈진 상태였던 것이다. 그들은 정신이 혼미해지고 아득해졌다. 이렇게 무참하게 자신들이 당할 줄은 생각도 못한 것이다. 헌데 바로 이때, 그들의 귀로 가느다란 전음이 전해졌다. 그 순간 음양서생과 죽엽마령의 얼굴에 은은한 희색이 감돌았다. 그들은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애송이 놈…… 분명 네놈은 대단하다. 허나 그렇다고 우리를 어떻게 할순 없어!" "크크크…… 절대로 네놈은 우릴 꺾지 못해!" 그들의 그런 모습에 황보성운은 멈칫했다. 지금 그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헌데 대체 무엇을 믿고 그들이 저런 허풍을 친단 말인가? 황보성운은 내심 경계심을 세웠다. 그들은 백 세가 넘은 노마들이다. 무슨 흉계가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때, "애송이 놈! 끝장을 내주마!" 두 노마가 동시에 외치며 각기 양쪽에서 공격을 해왔다. 황보성운은 본신의 내공을 십성까지 끌어올린 후 그들의 공격에 맞섰다. 헌데 바로 그 순간, 누구도 생각못한 일이 발생했다. 양쪽에서 공격하던 두 노마가 돌연 방향을 바꿔 허공으로 도주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황보성운은 물론이고 주위의 중인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두 노마가 이런 치사한 방법으로 도주하리라곤 생각을 못한 것이다. "하하하…… 이게 바로 비장의 수법인가? 허나 그렇다고 내손을 벗어나진 못해!" 황보성운은 현무신공을 극성으로 이끌어 올렸다. 동시에 그는 무공에 이른 현무신공으로 두 노마를 향해 경천동지의 일장을 날려 보냈다. 우르르릉----! 그러자, 객잔 안에 있던 모든 물건들은 황보성운의 장력에 태풍을 만난 듯 초토화 되어버렸다. 도주하던 두 노마는 그 엄청난 위력에 혼배백산했다. 헌데 바로 그때, 황보성운의 장력에 맞서 어디선가 뼈를 얼려 부실 듯한 음랭한 장력이 맞부딪쳐 오는 것이 아닌가! 찰나, 꽈르르르릉! 엄청난 격발음이 허공에 울렸다. 순간, 황보성운은 팔이 시큰함을 느끼며 뒤로 몇걸음을 물러났다. 그 틈을 타서 죽엽마령과 음양서생은 객점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황보성운은 눈을 부릅뜬 채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암습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어디선가 서리가 뼈 위에 내릴 듯한 음산한 어조가 들려왔다. "흐흐흐흐흐…… 황보성운, 네놈이 천존교(天尊敎)에 대항한 이상 반드시 그 답례가 있을 것이다……" 그 모골이 송연한 목소리는 점차 희미해져 갔고, 마지막 음성 때는 거의 들릴락 말락할 정도였다. 상상도 못할 속도로 사라진 것이다. 황보성운은 내심 침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도대체 어떤 자(者)이길래 그토록 무서운 내공을 가졌단 말인가?) 가슴을 눌러오는 무거운 생각에 황보성운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소한 백 오십 년 이상 되는 공력의 소유자다. 잔양신마보다도 한수 위의 실력자였어…… 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제 22 장 春 風 1 황보성운은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때 그의 곁으로 중인들이 다가왔다. "오늘 소협이 없었다면 정말 큰 봉변을 당할 뻔했소이다." 신풍개가 정중히 포권하며 치사를 했다. 이에 황보성운은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무슨 말씀을…… 어찌 천하의 신풍개가 그 정도에 당할 리가 있습니까?" 이에 신풍개는 그 익살이 살아나 고소를 하며 입을 열었다. "노부도 한 가닥 하지만 음양서생, 죽엽마령 개개인과 막상막하일 정도에 불과하오." 모든 사람들은 존경과 감사가 어린 시선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이때 황보성운은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즉시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즉각 신풍개에게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참! 노선배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신풍개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황보성운을 직시했다. 황보성운은 한 번 가볍게 숨을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아까 소생이 음양서생과 죽엽마령을 처단하려는 찰나, 한 줄기 장력이 방해를 했습니다." 그의 표정은 신중하게 변했다. "헌데, 그 장력이 매우 독특했었습니다." 황보성운의 눈에 일말의 곤혹한 빛이 스쳤다. "음산하고 싸늘하면서도 어떤 지극히 강맹한 기운이 있었습니다만……" 신풍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때 옆에 서있던 황곤의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극심한 의구심으로 빛내며 입을 열었다. "소협! 혹시 그 장력이 아홉 가닥으로 쳐들어 오는 것 같지 않았소?" 황보성운은 혼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황대협, 무엇을 좀 아시겠습니까?" 순간 황곤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무엇이 떠올랐는지 그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편 뭔가를 떠올린 신풍개의 안색도 하얗게 질려버렸다. "노선배님……" 황보성운이 그의 주위를 환기시키려 했지만, 신풍개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간 듯했다. 잠시 후, 그는 가늘게 안면을 떨며 중얼거렸다. "그…… 그렇다면 설마 그것이 바로 구유마공(九幽魔功)이란 말인가?" "구유마공?" 황보성운은 처음 듣는 말에 미간을 꿈틀했다. "구유마공이 무엇인가요?" 옆에서 듣던 취의소녀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물었다. 신풍개는 두려운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탄식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구유마공은 이백 년 전 천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구유천존(九幽天尊)의 독문무공이오." "구유천존?" 황보성운은 강렬한 호기심이 들었다. 중인들도 바야흐로 신풍개의 입에서 떨어질 수대 전의 이야기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호기심을 갖고 그의 눈을 응시했다. 신풍개는 고개를 내려 중인들을 둘러보며 서서히 입을 떼었다. "구유천존은 당시 사도(邪道) 최강의 고수였소.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손에서 삼 초도 못넘길 정도로 그의 무공은 초절했던 것이오." 중인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야흐로 전 무림은 그의 손 아래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락해갔소. 모든 인물들은 그저 멸망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신풍개의 눈이 반짝였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는 그 찰나에 돌연 강호에서 실종되어버렸던 것이오." "……!" "……!" 중인들은 신풍개의 이야기에 따라 안색이 계속 변했다. 황보성운은 눈에 기묘한 빛을 반짝이며 신풍개를 응시했다. 신풍개는 말을 이었다. "허나, 무림인들은 그때까지도 평화의 맛을 느낄 수가 없었소. 그것은 언젠가 또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길한 징조를 사람들은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소." 신풍개는 나직이 한숨을 내뱉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그의 존재마저 거의 잊혀지고…… 이백 년이 흘러 지금에 이른 것이오." 그는 침중한 안색으로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헌데, 이백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그의 무공이 다시 나타날 줄이야……" 이때 황곤의가 눈썹을 찌푸리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으---- 음! 그렇다면 아까 그자는 틀림없이 구유천존의 제자일 것입니다." 모든 중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중인들의 얼굴 위로 어두운 기색이 조금씩 덮여갔다. 그때 문득, 신풍개가 얼굴을 펴며 흔쾌히 입을 열었다. "허나,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중인들은 의아한 눈으로 신풍개를 바라 보았다. 신풍개는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백 년 전의 구유천존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 만무하고 또한 그의 제자 정도는 황보소협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니까 말이오…… 허허허……" 신풍개는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미소를 띄운 채 말하자, 중인들도 모두 동감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황보성운이 보여준 놀라운 신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없이 서있던 황곤의가 호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어두운 기색이 하기야 잔양신마도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게 만든 천하의 옥면신수를 과연 누가 당할 수 있단 말이오?" 황보성운은 거듭되는 중인들의 치사와 선망의 눈길에 어색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과찬의 말씀입니다." 중인들은 그의 겸손한 태도에 빙그레 웃음을 띄웠다. 그의 그런 모습이 오히려 중인들로 하여금 깊은 호감을 갖게 만든 것이다. 이때 무엇이 생각난 듯 신풍개가 취의소녀를 응시했다. "낭자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러자 취의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며 입을 열었다. "저의 이름은 호혜령(胡慧玲)이라 합니다." 신풍개는 그녀를 지긋이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낭자가 신검자의 손녀라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취의소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신풍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나는 신검자에게 낭자같은 손녀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네." 그러자 취의소녀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원래 저는 여지껏 어머님과 함께 살아 왔어요. 그리고 할아버님께는 가끔 찾아가는 정도였을 뿐이죠." 황곤의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낭자의 모친은 어떤 분이시오?" 취의소녀는 힐끗 옆에 서있는 황보성운을 바라보고는 쌩긋 웃었다. "저는 어머니로부터 황보소협에 대한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어요. 아마 황보소협도 저의 어머니를 아실거예요." 황보성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평생을 자하장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외부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헌데, 호혜령의 모친이 자신을 잘 안다니 이상한 생각이 든 것이다. "실례지만 자당께선……?" 호혜령은 달콤한 눈빛으로 황보성운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저의 어머님은 바로 무산 신녀궁의 궁주이신 봉황신차이십니다." "아어두운 기색이!" 황보성운은 절로 짤막한 탄성을 발했다. 그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풍개도 깜짝 놀란 듯 눈을 화등잔처럼 휘둥그래 떴다. "봉황신차가 낭자의 모친이라고?" 취의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중인들도 놀란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듣고 있던 황곤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신검자 노선배가 어찌……?" 취의소녀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네, 사실 정확히 말하면 그분은 저의 외할아버님이시지요." 중인들은 또 다시 경이의 표정을 떠올렸다. 신풍개는 탄식조의 감탄성을 터뜨렸다. "허----! 이건 정말 뜻밖이군. 신검자와 봉황신차가 부녀지간이라니……" 이때였다. "으---- 음!" 바로 옆에서 연약한 신음소리가 울리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일제히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자에 앉아있던 팽소연이 곧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팽낭자, 몸이 안좋소?" 팽소연은 황보성운의 팔에 겨우 몸을 의지한 채 핏기가 하나도 없는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고운 이마로는 송글송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황보성운은 문득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 이제보니 좀 전에 팽낭자가 관중사패 중 일 인에게 가슴이 격상당한 것을 깜박 잊고 있었구나.) 이때 황곤의가 이마를 탁 치며 입을 열었다. "참, 아까 팽낭자는 관중사패의 넷째 놈에게 가슴에 혈인장(血印掌)을 맞은 듯했소." "무엇이? 그 악독한 혈인장을?" 신풍개의 안색이 굳어졌다. "으---- 음!" 팽소연은 다시 연약한 신음성을 발했다. 신풍개는 황급히 단안을 내렸다. "안되겠군. 호낭자, 어서 저 아이를 안으로 데리고 가서 상처를 살펴보도록 하게." "네." 호혜령은 급히 팽소연을 받아들어 객잔의 구석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호혜령은 어두운 안색으로 방을 나왔다. "어떤가?" 신풍개가 급히 물었다. 호혜령은 심히 어두운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혈인장의 극독이 폐까지 침투해 들어가서 소생이 불가능할 것 같아요." 중인들은 모두 대경했다. 그들은 멍한 시선으로 호혜령을 응시했다. 이때 황보성운이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호낭자! 아직 팽낭자의 숨이 끊어지진 않았소?" 그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네, 헌데 왜……?" 황보성운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럼 내가 팽낭자의 상처 좀 봐도 되겠소?" 중인들은 모두 의아한 기색을 띄웠다. 이때 신풍개의 눈이 기이하게 반짝였다. "이제보니, 황보소협은 의술까지 달통한 모양이구려. 이 늙은이는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 황보성운은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별 말씀을…… 어설픈 실력이 있을 뿐입니다." 그 말에 중인들이 모두 희색을 띄웠다. 왠지 황보성운의 말에 믿음이 간 것이다. 신풍개가 다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고 있나? 어서 들어가 보게." 황보성운이 고개를 끄덕이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신풍개가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얼굴을 엄숙하게 굳히며 말했다. "황보소협! 명심하게. 상처를 치료할 때 절대 남녀간의 예의예 구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황보성운은 그의 말 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2 황보성운은 홀로 객잔의 방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객잔의 방 안엔 단촐한 가구 몇개와 침상이 놓여있을 뿐이었는데, 침상의 앞엔 붉은 휘장이 둘러져 있었다. 황보성운은 침상으로 다가가 휘장을 젖혔다. 침상 위엔 팽소연이 창백한 안색으로 혼절해 있었다. 황보성운은 천천히 팽소연 옆으로 다가섰다. 이미 그녀는 남장차림의 머리가 풀어져 길게 흘러내려 있었다. 그것은 실로 말로 다 못할 기가 막힌 미모였다. 삼단같이 탐스럽게 흘러내린 머릿결에 감은 눈자위로 길게 내려뜨린 속눈썹, 마치 옥을 깎아 만든 듯한 수려한 이목구비(耳目口鼻), 전신을 흘러내려간 신비로운 곡선 등…… 가히 완전무결한 신의 예술품인 듯 그녀의 모습은 실로 지고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천하절색이라 했던가? 허나, 그것은 그 아름다움에 비해 너무도 부족한 표현이었다. 황보성운은 절로 나직한 신음성을 흘렸다. "으---- 음! 남장을 했을 때는 몰랐는데 이제보니 정말 대단한 미녀로구나." 그 아름다운 미녀가 창백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연민의 정이 뭉클거리며 솟아났다. 황보성운은 일단 그녀의 상처를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는 곧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처는 치료해야 하는데 정말 난처하군.) 상처가 있는 부위는 바로 가슴이다. 그렇다면 가슴의 옷을 벗겨야 하는 것이다. 망설이던 그의 뇌리로 아까 신풍개의 말이 떠올랐다. 황보성은 쓰게 웃었다. (마치 지금의 내 심정을 짐작이라도 한 것 같군.) 이때였다. 팽소연의 안색이 창졸간에 검은 빛을 띄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얼굴 뿐이 아니었다. 전신의 피부가 점차로 검은색으로 짙어졌다. 게다가 숨결은 미약해져가기 시작했다. 황보성운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예의를 고집할 수는 없다.) 황보성운은 손을 뻗어 팽소연의 앞 가슴을 풀어헤쳤다. 이미 찢어진 곳이라 쉽게 열렸다. 순간 달덩이처럼 둥실 올라온 백옥빛 젖가슴이 드러났다. 그것은 흡사 하나의 작은 산처럼 신비로운 곡선을 이루며 올라가 있었다. 누워있음에도 그 젖가슴의 팽팽한 능선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콩알만한 분홍빛의 유실이 황보성운의 시선을 강렬하게 유혹했다. 한동안 황보성운은 그녀의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얼굴을 붉히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스스로 군자라고 자부하던 내가 치료를 앞두고 정신을 팔다니……) 정신을 가다듬은 후, 황보성운은 엄숙한 표정으로 팽소연의 가슴 사이를 응시했다. 젖가슴 사이에 붉은 혈인(血印)이 선명하게 찍혀있는 것이 보였다. (으---- 음! 지독한 장법이다.) 황보성운은 서슴없이 손을 들어 장인이 찍힌 가슴 주위를 눌러보았다. 다른 부분과 달리 그곳은 흡사 돌이라도 된 듯 딱딱하게 응어리져 있었다. 황보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장인(掌印) 속에 흑매산효독(黑梅酸酵毒)의 독기가 들 어있었군." 그는 한눈에 팽소연의 생명을 위협하는 원인을 알아낸 것이다. 실상 만독진해를 독파한 황보성운에게 있어 이 정도의 독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독에 관한한 전문가인 것이다. 황보성운은 지체없이 한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 사이에 얹었다. "일단 가슴에 맺힌 흑매산효독의 기운을 풀어줘야겠어." 그는 손바닥으로 팽소연의 젖가슴 사이를 천천히 회전하듯 문지르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장인이 찍힌 부분의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황보성운은 현무신공의 흡자결을 이용해 그 부분의 독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팽소연의 젖가슴에 찍힌 붉은 장인이 점차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이윽고, "휴---- 우!" 긴 한숨을 내쉬며 황보성운은 손을 떼었다. 그는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냈다. (다행히 독기가 모두 치료 되었군.) 황보성운의 시선이 언뜻 팽소연의 가슴에 닿았다. 그 뚜렷했던 장인이 모두 사라지고 뽀얀 백옥빛의 살결이 드러나 있었다. 검게 변했던 살결도 이젠 원상태를 회복하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만족한 미소를 짓고는 팽소연의 찢어진 옷자락을 여며 그녀의 가슴을 덮어주려고 했다. 헌데 그 순간, 그는 돌연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좀전에는 상처 치료에 몰입한 나머지 잘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의 가슴에 눈길이 닿자 문득 아랫배에서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갈증과도 같은 것이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린후 팽소연의 옷깃을 여며주었다. 헌데 그 순간, 그의 손이 우연히 팽소연의 탄력있는 젖가슴에 뭉클하고 닿고 말았다. 마치 생고무같이 경이로운 탄력이 손 끝에 느껴졌다. 그는 손 끝을 부르르 떨었다. 일순 그의 단전 밑에서 어떤 뜨거운 기운이 후욱 치밀었다. "으음……!" 황보성운은 한 마디 기묘한 신음을 내질렀다. 그의 얼굴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왜, 왜 이럴까?) 그는 참을 수 없는 기운에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무……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 왜 이토록 전신이 뜨거울까?) 이미 황보성운의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것이 대체 무슨 해괴한 변화인가? 아무리 팽소연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욕정을 느낄 황보성운은 아닌 것이다. 허나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과거 삼 년 전, 황보성운은 괴사찰(怪寺刹)에서 청홍이란 독사의 피를 마신 적이 있다. 황보성운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실상 그 청홍이란 독사는 보통 뱀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뱀의 피는 더 더욱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 청홍은 원래 음양신사(陰陽神蛇)라는 천고의 영물로 천지간의 음양지기를 흡수하여 자라는 놈이다. 음양신사는 백 년에 세치가 자라는데 그 청홍은 길이가 다섯자가 훨씬 넘어 수천 년을 묵은 것이었다. 실상 천 년 이상 묵은 청홍의 피는 극도로 강렬한 최음(催淫) 작용을 일으킨다. 그 피 한 방울은 일반적인 강렬한 춘약보다도 수백 배는 더욱 독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피를 한 방울만 복용하면 몇주야 동안 정사(情事)를 해도 지치지 않는 엄청난 정력을 갖게 된다. 헌데 황보성운은 그런 엄청난 음양신사의 피를 모조리 빨아 먹은 것이다. 그 결과 황보성운은 평생 동안 무한대에 가까운 정력을 갖게 되었고, 또한 끝없는 음양화합을 통해 자신의 정력을 외부로 발출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부에 쌓인 열기로 인해 마성(魔性)이 발산되는 것이다. 헌데, 어째서 삼 년 전 당시 황보성운의 몸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거기엔 물론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황보성운은 천년극음삼왕을 복용했다. 그 천년극음삼왕의 차가운 냉기가 음양신사 피의 음기(淫氣)를 제압한 것이다. 게다가 그 후 천고의 무학인 현무신공을 연성해 그 힘을 바탕으로 청홍의 피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허나 천년극음삼왕의 효력 기간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오늘 그는 노마들과의 결투와 팽소연의 상처 치료 등으로 내공이 상당히 탈진된 상태였다. 더군다나 오늘이 바로 청홍의 피의 마력을 막은 천년극음삼왕의 효력이 끝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허해졌고, 그 틈을 타고 그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음양신사의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운은 그 어떤 성인(聖人)이라도 막을 수가 없는 힘이었다. 황보성운은 점차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이지를 상실해갔다. 그의 피부는 놀랍도록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삼 년 간 억눌려왔던 모든 음기가 일시에 폭발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마치 붉은 괴물과도 같았다. 그는 손을 들어 팽소연의 하얀 젖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놀랍도록 탄력있는 그녀의 가슴이 황보성운의 손 안에서 무참히 유린되었다. 그는 팽소연의 가슴을 움켜쥔 채 그 위의 분홍빛 유실로 입술을 가져간 뒤 강하게 흡입했다. 그리곤 이빨로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자, "아아아!" 팽소연은 극심한 젖가슴의 고통으로 인해 혼절로부터 깨어나 눈 을 떴다.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피부가 시뻘건 어떤 괴인이 자신의 젖가슴을 거칠게 움켜쥔 채 유두(乳頭)를 마음대로 빨아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 누구냐?" 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을 질렀다. 허나,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신지를 잃은 황보성운이 그녀의 전신 위로 덮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아…… 안돼……" 그녀는 몸서리치며 반항했지만 상대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도저히 그 무지막지한 손길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상대의 손이 거칠게 그녀의 옷을 찢었다. 팽소연은 이를 악물고 몸부림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은 전나(全裸)가 되었다. 상대의 손이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 들었다. 팽소연은 있는 힘을 다해 두 허벅지를 붙였다. 양 허벅지 사이의 도톰한 구릉과 그 위의 울창한 갈색 수풀이 수치로 떨고 있었다. 허벅지가 움직일 때마다 숲 사이로 계곡이 보일 듯 말 듯했다. 황보성운은 자신의 몸이 급격히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의 일부가 통증이 느껴지도록 팽창했다. "음……!" 황보성운은 신음을 삼키며 팽소연의 허벅지 안쪽을 계속 공략했다. 팽소연은 낯선 사내의 손길이 자신의 은밀한 곳으로 진입해 들어 오는 걸 느끼며 몸서리쳤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소중한 그곳이 무참히 유린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혀를 물고 죽고 싶었다. 허나, 그럴 용기는 없었다. 꽉 감은 두 눈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어느 순간, 팽소연은 전율하며 하얗게 눈을 치떴다. 상대의 손가락이 자신의 내밀한 곳을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고통이 느껴졌다. 한데 어느 순간, 자신도 이해못할 야릇한 쾌감이 그녀의 세포 구석구석에서 조금씩 일어났다. 그 이해 못할 육체의 배반에 팽소연은 자신을 저주했다. 허나, 그 속에서 그녀의 닫혀진 허벅지는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상대의 남성은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뚫고 그녀의 비궁을 파괴하며 전진해 들어왔다. "아아아악!" 난생 처음 느끼는 처절한 고통에 팽소연은 비명을 토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절대로…… 절대로…… 이 한을 잊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녀는 절규했다. 고통은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더럽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팽소연은 몸부림치면서 상대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허나, 상대는 팽소연의 저항에도 아랑곳않고 그녀의 내부를 드나 들기 시작했다. 몇 송이 혈화(血花)가 팽소연의 허벅지로 흘러내렸다. 그런 와중에서 팽소연은 또 다시 자신의 육체의 일부로 부터 난생 처음 느끼는 쾌락이 용솟음쳐 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그녀의 의지가 거부를 해도 그녀의 몸은 그 쾌락을 쫓고 있었다. "아아…… 흐흑……" 얼마가 지나면서 팽소연의 신음소리가 고통에서 희열로 변해갔다. 강맹한 황보성운의 공격에 그녀의 이성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녀는 둔부를 흔들며 황보성운의 행위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간혹 정신이 들 때마다 강간을 당하면서도 희열을 느끼는 자신이 역겹기까지 했다. (안돼, 이래선 안돼…… 이건 나에 대한 배신이야……) 이를 악물었지만 그것은 단지 그녀의 마음에 불과할 뿐이다. 황보성운의 거대한 일부가 그녀의 몸을 꿰뚫을 듯이 압박해 옴에 따라 그녀의 내부에서는 무럭무럭 환희의 불꽃이 일어났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본능적으로 저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이지를 배반하고 급격히 달아올랐다. 그것은 항거(抗拒)할 수 없는 본능(本能)의 유혹(誘惑)이었다. 마침내, "아흐흑…… 아아……" 팽소연의 앙다문 입술 사이로 흐느끼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황보성운은 더욱 몸을 거칠게 움직였다. "아아흑…… 아아아……" 팽소연의 입에서 봇물 터지듯 숨가뿐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몸은 환락의 나래를 폈다. 팽소연은 손을 뻗어 황보성운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은밀한 사랑의 궁전은 이미 범람해 넘치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잔혹한 표정으로 더욱 극렬하게 허리를 비틀었다. 황보성운은 지치지 않는 들소처럼 쉬지않고 팽소연의 육신을 학대했다. "으음……" 황보성운은 목이 탔다. 그는 본능적으로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팽소연의 입술을 한껏 빨았다. 팽소연도 혀를 움직여 화답했다. 그 속에서 팽소연은 쾌락의 끝을 맛보고 있었다. 3 얼마나 지났을까? 화염처럼 몰아치던 열풍이 그치고 방 안에는 끈적한 침묵이 감돌았다. 황보성운은 차츰 제 정신이 돌아왔다. 문득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으---- 음! 좀 머리가 무겁군.) 이때 문득 황보성운은 기이한 감촉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품 속을 내려보았다.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품 속에는 털 끝하나 걸치지 않은 전나(全裸)의 여인이 안겨있는 것이 아닌가? (내…… 내가 무슨 짓을……) 황보성운은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대체 알 도리가 없었다. 한데 바로 이때, 불현듯 조금 전의 일이 뿌연 안개에 서린 듯 기억나기 시작했다. 점차 그 기억이 선명해질 수록 그의 안색도 창백하게 질려갔다. (내…… 내가 진정 그런 파렴치한 일을……) 이런 생각이 들자 황보성운은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증오스러웠다. 이때 그의 품 속에서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황보성운은 흠칫 놀라 품 안을 내려다보았다. 팽소연이 지금 황보성운의 품 속에 얼굴을 묻은 채 가늘게 오열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상 팽소연은 황보성운에게 강제적으로 몸을 빼앗긴 후, 거의 인생이 끝나는 듯한 절망을 느꼈다. 십팔 년 간 고이 간직한 순결을 무참하게 유린한 상대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상대는 자신을 능욕한 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팽소연은 살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다. 헌데 그자를 보는 순간, 그녀는 경악했다. 붉은 얼굴의 괴인, 그는 바로 황보성운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망연자실했다. 동시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을 범한 상대가 다름 아닌 황보성운이란 사실에 묘한 안도감 과 함께 기쁨을 느낀 것이다. 절망의 심정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황보성운이 자신을 사랑한 나머지 그런 행위를 벌인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헌데, 조금 전 황보성운이 깨어나 보인 행동은 무엇을 후회하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그러자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정조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더한 무엇이 그녀를 서럽게 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황보성운은 팽소연이 지금 수치심 때문에 흐느끼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는 장탄식을 터트린 후 입을 열었다. "낭자, 입이 백 개 있어도 할 말이 없소." 그러자 그녀는 더욱 서럽게 흐느꼈다. 황보성운이 야속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다니…… 허나 황보성운은 더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낭자! 무엇으로 이 죄를 보상하면 되겠소? 내 목숨이라도 내놓겠소." 순간, 짝! 황보성운의 뺨에 불이 튀었다. 팽소연은 황보성운의 뺨을 올려 부친 뒤, 멍하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몸을 돌려 더욱 더 서럽게 흐느꼈다. "흐흐…… 흑흑…… 흐흑……"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렸다. 황보성운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팽소연의 백옥같은 어깨를 쓸어안았다. "나…… 낭자!" 순간 팽소연은 슬프게 오열하며 황보성운의 가슴으로 쓰러져 안겼다. "흐흐흑……! 공자님!" 그녀의 부드러운 육체가 황보성운의 가슴에 밀착 되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그런 것을 느낄 여유가 전혀 없었다. 팽소연은 황보성운의 가슴을 밀고나와 눈물이 흐른 충혈된 눈으로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는…… 앞으로 어떡하면 좋죠?" 황보성운은 즉각 대답했다. "낭자가 나를 용서한다면 앞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겠소." "어떻게 책임진단 말이지요?" 팽소연은 눈물이 고인 애틋한 눈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보성운은 무엇을 결심한 듯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낭자만 싫지 않다면 낭자를 나의 부인으로 삼고 싶소." 순간 팽소연의 얼굴에 한 줄기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허나, 그녀는 곧 안색을 시무룩하게 고쳤다. "당신은…… 책임감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여인과 결합하겠단 말인가요?" 문득 황보성운은 그녀의 모습에서 실로 애처로운 그 무엇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보호해주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함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사랑스런 느낌이 꿈틀거렸다. 황보성운은 팽소연을 부드러운 눈길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내가 낭자를 지금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오." 황보성운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허나, 어쩐지 낭자에게 앞으로 사랑을 느낄 것 같소." "아……!" 그녀는 감격의 눈물이 흘렸다. "공자님!" 팽소연은 황보성운의 가슴으로 깊이 밀착해 들어왔다. 매끄럽고 탄력있는 그녀의 육봉(肉峰)이 황보성운의 가슴을 압박해왔다. 그러자 황보성운의 가슴 속에 어떤 뜨거운 것이 다시 치밀었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가슴을 가볍게 만졌다. 순간, 팽소연은 움찔했다. 허나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낭자, 아니 소연! 그대에게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소." 팽소연은 충만된 눈으로 황보성운을 올려보았다. "어떤 것이예요?" 황보성운은 진지한 안색을 지었다. "실상…… 나에게는 이미 한 여인이 있소." 그러자 팽소연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어떤 여인이죠?" 황보성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소향에 대하여 차례차례 이야기해 나갔다. 그녀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느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약간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는 무척 예쁜가요?" 황보성운은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그녀는 무척 아름답고 착하오." 이에 그녀는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입을 열었다. "저와 비교하면……?" 황보성운은 내심 웃음이 터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가까스로 웃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짐짓 진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명은 우아한 국화라면, 한 명은 청초한 난초와 같아 그 아름다움을 비교할 수 없소." 팽소연은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황보성운을 주시했다. "그밖에 다른 여자는 없나요?" 황보성운은 그녀의 말에 움찔했다. 문득 설연미의 생각이 났던 것이다. (참,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황보성운의 태도에 팽소연은 샐쭉하게 다그쳤다. "또 있나 보군요?" 황보성운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르던 손에 더욱 더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있다고 할 수도 있소." "무슨 말이예요?" 황보성운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설연미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러자, 팽소연은 킥 하고 교소를 터뜨렸다. "그 여인은 정말 바보로군요. 당신같은 남자가 싫다고 도망가다니……" 황보성운은 눈을 껌벅여 짐짓 이마에 주름살을 지었다. "아마도 나와 그녀는 연분이 없는 모양이오." 팽소연은 내심 황보성운의 태도에 웃음이 치밀었지만 안색을 애써 싸늘하게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예요?" 황보성운은 그녀의 젖가슴을 짓궂게 꽉 움켜쥐며 씨익 웃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팽소연은 얼굴을 붉히며 눈을 곱게 흘겼다. "바람둥이!" "하하하…… 그 바람둥이 같은 성격 때문에 소연같은 예쁜 낭자를 만난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유쾌하게 웃어댔다. 그러다가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정색을 했다. "참, 한데 나는 아직 당신의 신세에 대해 모르는데……" 황보성운은 말 끝을 흐렸다. 팽소연이 갑자기 침울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무겁게 탄식을 했다. 그리고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저의 부친은 원래 호북성에서 위명을 떨치시던 고수 가람신검(迦藍神劍) 팽천기(彭天基) 대협이세요." 그녀는 자신의 부친을 생각하는 듯 두 눈에 한없이 슬픈 기색이 떠올랐다. "헌데, 어느 날 그분은 우연히 어느 동굴 속에서 보물을 얻게 되었지요." 황보성운은 침착하게 두눈을 빛내며 그녀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지하게 말을 시작했다. 가람신검(迦藍神劍) 팽천기(彭天基). 그는 호북성(湖北城) 일대를 호령하는 현무림의 쟁쟁한 고수였다. 그는 대부분의 생활을 병든 사람들을 고치는 의원으로 보내고 있었다. 하여 그의 명망은 호북성 일대에서는 거의 신(神)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 날도 그는 예전처럼 약초를 캐기 위해 호북성의 막부산(幕阜山)에 올랐다. 한데 그가 산봉(山峰)을 거슬러 내리던 사흘 째 되던 밤, 느닷없는 광풍폭우가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비를 피하기 위하여 어느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비가 좀체로 그치지 않기에 그는 안으로 더욱 들어갔고, 그곳에서 한 천고기보(千古奇寶)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팽소연이 지니고 있던 옥으로 만든 핏빛의 독수리, 혈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바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 혈응의 비밀을 푼다면 그대는 일약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리라.> 팽천기는 흥분했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혈응을 품에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팽천기는 그 이후로 문을 닫아 걸고 연구를 시작했다. 허나 혈응의 비밀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헌데 난데없이 암암리에 마수가 뻗쳐오고 있었으니…… 어느새 그 소문은 무림으로 퍼져나가 음흉한 무리들이 눈독을 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어느날 밤 그는 흑의 복면인들로부터 기습을 받게 되고야 말았다. 끔찍한 유혈(流血)의 참사! 결국 그의 장원은 하룻밤 만에 쑥대밭이 되고, 전 장원의 식솔들은 참몰의 변을 겪고야 말았다. 이곳 저곳으로 수십 구의 시체들이 쓰러지고 분분히 살점과 피들이 낭자하게 흩뿌려져 갔다. 장원의 전각과 별원들은 삽시간에 불길 속으로 싸여 들어갔고, 팽천기 자신마저 극심한 부상을 입고야 말았다. 이에 팽천기는 자신의 수제자인 청해일룡에게 자신의 딸과 혈응을 부탁하고, 수십 명의 흑의 복면인과 혈전을 벌인 뒤 장렬하게 사라져 갔다. 청해일룡과 팽소연은 피보라가 낭자히 흩뿌리는 혈로(血路)를 뚫어 기적적으로 탈출했다. 화광충천(火光沖天)의 장원! 수없는 전각들과 아름드리 기둥들이 무너져 내리고, 그 위로 지옥의 화마처럼 널름거리며 타오르는 불길들…… 그리고 사지가 찢겨 선혈을 흩뿌리며 죽어가던 식솔들…… 그리고 팽천기의 죽음…… 팽소연과 청해일룡은 십여 리 밖에서 타오르는 장원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허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들에게 또 하나의 난관이 준비되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호북성(湖北城)과 호남성(湖南省)의 경계지점에서 천하의 대마두인 죽엽마령에게 걸리고 만 것이었다. 그곳에서 청해일룡은 한많은 뼈를 묻었으며 팽소연은 혈응을 넘겨받고 겨우 계교를 써서 탈출했던 것이다. 허나, 결국 다시 이곳에서 발각되는 몸이 되고만 것이었다. 4 여기까지 말한 팽소연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황보성운은 그녀가 한없이 애처롭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홀홀단신의 천애고아가 아닌가? 황보성운은 길게 탄식했다. 죽엽마령을 살려보낸 게 못내 후회가 되었다. 그러다가 황보성운은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팽소연을 응시하며 물었다. "헌데, 소연! 당신의 집에 쳐들어 온 흑의 복면인들이 누군지 아시오?" "그들에 대해선 전혀 몰라요." 황보성운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혹시 죽엽마령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인물들이 아니겠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허나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황보성운은 나직한 침음성을 터뜨렸다. "음……! 어쩌면 죽엽마령이 말한 천존교의 인물들인지도 모르겠군." 팽소연의 두 눈에 처절한 원독의 빛이 서렸다. "반드시, 반드시 이 원한은 갚고 말 거예요."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허나, 이내 침울한 안색으로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허나…… 나의 이 미약한 무공으로는……"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황보성운은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가볍게 쓸어 안으며 입을 열었다. "아내의 원한은 남편의 원한이기도 하오." 황보성운은 그녀의 가냘픈 등을 탁탁 두드렸다. "소연! 걱정마오. 내 반드시 당신의 원한을 풀어줄테니까." 팽소연의 안색이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황보성운이 남편 아내 운운(云云)하자 새삼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허나 그녀는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이 은혜를……" 황보성운은 호쾌하게 웃어 제꼈다. "하하하…… 아내가 남편에게 은혜란 말을 하는 법이 어디있소." "아…… 운랑(雲郞)!" 팽소연은 격정에 못이겨 자신의 앵두같은 입술로 황보성운의 입술을 부볐다. 황보성운은 다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부러져라 끌어 안았다. "아…… 으---- 음!" 황보성운의 입술이 팽소연의 입술로 격렬하게 부딪쳐 갔다. 팽소연도 연신 비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혀를 황보성운의 입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러자 달콤한 타액이 혀 위로 도르르 굴렀다. 황보성운은 다시 손을 기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의 선(線)을 따라 흘러내려 그의 손은 허리를 재차 힘껏 끌어 안았다. 그리고 지체없이 그 손은 부르르 떠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거쳐 풍만한 둔부로 흘러 내려갔다가 그녀의 은밀한 곳에서 멈췄다. 그리곤 그곳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아…… 아…… 음……" 그녀는 흥분에 못이겨 연신 신음을 터뜨리며 전신을 비틀었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듯 조그만 손으로 황보성운의 남성을 찾았다. 황보성운은 자신의 남성에 그녀의 손이 닿는 순간, 모든 혈맥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즉시 그녀의 몸 위에 자신의 체중을 실고는 그녀의 깊숙이 자신을 진입시켰다. 다시 방 안으로 뜨거운 열풍이 몰아쳤다. 제 23 장 笑殺天功 1 황보성운과 팽소연은 옷을 단정히 입고 탁자에 마주 앉아있었다. 팽소연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녀의 두 뺨 위로는 도화빛이 불그스레 물들어 있었다. 또한 그녀의 두 눈엔 춘정이 가득 넘실거렸다. 실로 요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여자의 모습이 이토록 달라질 수가 있다는 것에 대해 황보운성은 내심 경탄을 금치못했다. 이때 팽소연이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참, 운랑! 제가 지니고 있던 혈응은 어디에 있어요?" "신풍개 노선배께서 주웠다가 나에게 전해 주었소." 황보성운은 품 속에서 혈응을 꺼냈다. 혈응은 거의 투명하게 붉은 선혈빛이 선명했다. "자, 소연! 이제 당신이 보관하시오." 황보성운은 혈응을 팽소연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팽소연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운랑! 이것을 제가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요?" 황보성운은 당치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팽소연은 얼굴을 붉히며 곱게 고개를 숙였다. "저의 정표로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황보성운은 난처했다. 혈응을 생명으로 지킨 팽천기나 그 일족들을 생각한다면 의당 그녀가 가져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또한 그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녀의 성의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허…… 이것 참." 황보성운은 주춤거렸다. 그의 마음을 팽소연은 짐작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운랑! 당신은 그 혈응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알고 있어요?" "모르오." 황보성운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은 제가 이것을 가지고 있는 동안 이것의 비밀을 발견했어요." 그녀는 혈응으로 눈을 돌렸다. "혈응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황보성운은 혈응을 주시했다. 그것은 핏빛의 옥(玉) 독수리로 실로 그곳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서기는 가히 상서롭지 않았다. 붉다 못해 차라리 투명해 보이는 선혈(鮮血)빛…… 게다가 이름있는 세공이 가다듬은 듯 부리며 두 눈이나 깃털 등도 정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혈응의 눈을 자세히 보세요." 팽소연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황보성운은 혈응의 눈을 응시했다. 그 혈응의 눈은 백옥석으로 되어 은은한 홍광(紅光) 중에 유독 흰 광채를 빛내고 있었다. "오른쪽 눈을 눌러보세요." 팽소연의 말이 이어졌다. 황보성운은 가볍게 엄지 손가락으로 혈응의 오른쪽 눈을 눌렀다. 순간, 탁!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툭! 혈응의 배 밑에서 무엇인가가 탁자 위로 떨어졌다. "응?" 황보성운은 예기치 못한 일에 가볍게 놀랐다. 탁자 위에 둘둘 말린 조그만 양피지가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호기심이 치밀었다. 그는 양피지를 들어 펼쳤다. 그러자 양피지 안에는 깨알같은 문자(文字)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급히 안력을 돋우었다. 그는 이미 신안(神眼)이었으므로 한 번 안력을 돋우자 안에 적혀있는 글자가 확연히 들어왔다. <노부는 제(齊)나라 사람으로 완수(浣水)의 끝에 위치한 표(杓)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노부는 수많은 삼교구류의 학문을 연구했지만 어떤 것에도 깊이 빠져들지 못했다. 노부에게 한 가지 일평생을 관류(灌流)하는 목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음(音)에 대한 탐구 뿐이었다. 노부는 어려서부터 수많은 음률(音律)을 연구했고 그 심오한 경지를 점차 해득해 갔다……> 황보성운은 왠지 점차 흥분되어 가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급속도로 양피지를 읽어갔다. 그것은 어떤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천음상인(天音上人) 소홀자(笑忽子). 이것이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그는 음률(音律)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일생을 음률의 기묘(奇妙)에 대한 연구로 보냈다. 그는 때때로 고심참담한 연구를 거쳐 기음(奇音)을 발견할 때마다 미친 듯이 웃어댔으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된 것이었다. 그의 나이 삼십(三十) 때 그의 음률에 대한 연구는 이미 절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사십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음(音) 하나로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초절한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 그의 신변에 뼈를 부수고 살을 쥐어뜯는 뼈저린 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바로 가문(家門)에 잔혹무비한 참극이 도래하고 만 것이었다. 가을 해가 서천(西天)으로 낭자히 떨어지던 석양 무렵, 적살문(赤殺門)이라는 마도의 문파가 일거에 급습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목전에서 악랄무비의 가문 참화 현장이 전개되었다. 그의 노부모는 사지가 절단된 채 땅바닥에 뒹굴었으며, 그의 사랑하는 아내는 그들의 윤간을 거쳐 참혹한 죽음을 당했고, 또한 아들은 가랑이로부터 찢겨져 한줌 고깃덩이로 화(化)해 사라졌다. 단지 소홀자 혼자만이 피눈물을 뿌리고 광소를 터트리면서 아비규환의 현장을 탈출한 것이었다. 처절한 원한! 원한! 어찌 백골이 진토(塵土)된들 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매일 매일 미쳐버릴 고통을 이기려 가슴에 한 번씩 난도질을 했다. 원한의 피, 그 피를 마시며 와신상담을 한 지 몇 년! 하나, 그의 무공은 너무 보잘 것이 없었다. 그 무공으로 복수를 한다는건 꿈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남보다 뛰어난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률(音律)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음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헌데,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음인가? 어느날 그는 우연히 오백 년 전 천소노인이라는 기인이 남긴 비 급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천소노인(天笑老人), 그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소홀자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평생을 음(音)의 연구에 바쳤던 사람이었다. 하여 그가 이백 살이라는 엄청난 나이에 만들어낸 그의 비급이 있었으니, 그 비급의 이름은 바로 천소경(天笑經)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음(音) 연구의 최고 정수(精髓)로, 단지 웃음소리 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가공할 비학(秘學)이었다. 그날부터 소홀자는 그 천소경을 바탕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그리고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이십 년 후 그는 드디어 천하무쌍의 무서운 음공(音功)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아아…… 그것은 너무나 통천가공할 음공(音功)이었다. 일소지하(一笑之下) 제마즉사(諸魔卽死)! 웃음소리 아래 모든 마두가 즉사하리라. 드디어 그는 처절한 유원이 담긴 광소를 터뜨리며 적살문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음공을 이용해서 적살문의 무리를 일거에 참살시켜 버렸다. 허나, 그도 역시 내공이 심후하지 못한 탓에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입고야 말았으니…… 주화입마(走火入魔)! 극도의 내공 소비와 미쳐버린 복수심 때문에 그는 일신지화를 겪게 된 것이었다. 그는 점차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느꼈다. 그는 그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인 혈응(血鷹)의 뱃속에 그가 알고있는 모든 음공을 적은 비급을 넣어놓았던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황보성운은 한숨을 길게 내뿜으며 나직이 뇌까렸다. "으음! 실로 처참한 인생(人生)이로군." 황보성운은 지금 그 노인에 대한 존경심과 동정심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다시 양피지로 시선을 돌렸다. <노부가 창조해낸 소살천공(笑殺天功)을 여기 적어 놓는다. 인연있는 자(者)여, 그대의 무운을 빈다. 천음상인(天音上人) 소홀자(笑忽子) 유필(遺筆).> 황보성운은 두 눈을 반짝였다. "으---- 음! 이제보니 이곳에 적힌 것은 그 놀라운 음공(音功)의 구결인 듯하구나!" 황보성운은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며 계속 읽어갔다. <소살천공(笑殺天功)! 이 소살천공은 최소한 내공 수위가 백년 이상이라야만 입문단계에 들어설 수 있다. 만약 백 년 수위에 도달치 못한 자가 이 신공을 익히려 한다면 단전이 파열되어 일신지화(一身之禍)를 면치 못하리라. 황보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히 통천가공할 음공이라더니…… 그만한 내력을 필요로 하는구나!) 황보성운은 계속 읽어갔다. 거기에는 소살천공의 구결들이 쓰여있었다. <소살삼음(笑殺三音)----! 제일초(第一招) 미소환(微笑幻)! 가볍게 웃음으로 상대를 환몽(幻夢) 속에 빠뜨린다. 제이초(第二招) 귀소열(鬼笑裂)! 귀신을 부르는 웃음소리 아래 상대의 심장이 찢어진다. 제삼초(第三招) 마소혼(魔笑魂)! 악마의 미소 속에 상대의 숨이 소리없이 끊어진다. 소살쌍천곡(笑殺雙天曲)----! 제일초(第一招) 노천예혈소(怒天刈血笑)! 격노한 웃음소리 아래 모든 사물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도다. 제이초(第二招) 광마진천소(狂魔震天笑)! 미친 광소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도다. 여기까지 읽은 황보성운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만약 여기에 씌여있는 위력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황보성운은 길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것이 사도(邪道) 인물에게 들어갔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이때 황보성운의 수시로 급변하는 안색을 보며 팽소연은 생긋 웃었다. "어때요? 운랑! 좀 알 것 같아요?" 황보성운은 침중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음! 약간……" 황보성운은 말 끝을 흐렸다. 팽소연은 그런 황보성운의 태도에 놀랐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래 떴다. "어머! 저는 그것을 몇 번 봤지만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생긋 웃었다. "역시 천하제일의 기인인 옥면신수는 무엇이 달라도 다르군요." "하하하…… 너무 과찬하지 마시오. 몸둘 바를 모르겠소." 황보성운은 유쾌하게 웃으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2 이때 밖에서 몇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허허허…… 웃음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모든 게 잘된 모양이군." 신풍개의 걸쭉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발걸음은 더욱 가까이 오더니 멈추었다. "황보소협, 들어가도 되겠나?" 황보성운은 밖에 대고 경쾌하게 소리쳤다. "아!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신풍개와 무당쌍의, 호혜령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들어오자 마자 신풍개는 팽소연의 안색을 살폈다. 이윽고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 어! 낭자의 얼굴이 도화빛을 띄고 신색이 훨씬 좋아진 것을 보니 상처가 다 치료된 모양이구려!" 이 말에 팽소연은 찔끔했다. 무엇이 찔리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모든 게 노선배님께서 걱정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러자 신풍개는 얼굴에 익살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허허…… 내가 무슨 도움을…… 황보소협의 치료 방법이 워낙 고매하고 독특하고 뛰어나서 그렇겠지." 신풍개는 말을 하며 황보성운을 힐끗 보았다. 이 말에 팽소연은 더욱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때 황보성운이 말을 꺼냈다. "노선배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만……" 그러자 이내 신풍개가 말 끝을 가로채 버렸다. "그게 무슨 새삼스런 말인가? 아니 자네와 내 사이에 어찌 부탁이고 뭐고 가타부타 할 것이 있나?" 신풍개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가에 함박만한 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어서 말해보게. 대체 무엇인가?" "제 예상입니다만 천존교가 계속 혈응을 노릴 것 같습니다." 황보성운은 검미(劍眉)를 살짝 찌푸렸다. "따라서 아무래도 노선배님과 여러분들은 계속 천존교의 추적 대상이 될겁니다." 신풍개가 냉소했다. "흥! 그렇다고 해서 이 노개가 놈들을 두려워 할 것 같나? 얼마든지 오라고 해! 미친개 잡듯이 놈들을 때려잡으면 되니까!" 무당쌍의도 동조했다. "노선배의 말이 맞소. 어찌 무림인의 한 사람으로 그런 걸 두려워 하겠소?" 황보성운은 손을 들어 그들의 말을 제지하곤 미소를 띈 채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 문제는 그리 쉽게 생각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음양서생과 죽엽마령같은 노마들이 당주급으로 있는걸로 보아 천존교의 힘은 가히 추측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 "더욱이 그들은 구유천존과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 모든 인물들은 말없이 황보성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옳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제 생각으로는……" 황보성운은 예까지 말하고 그냥 입만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전음입밀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중인들의 얼굴 표정이 수시로 급변했다. 이윽고 황보성운의 전음이 다 끝나자 신풍개가 불만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너무 큰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닐까?" 황보성운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염려 마십시오. 천존교가 아니라 그 어떠한 것일지라도 소생은 두렵지 않습니다." 신풍개는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익살스럽게 삐죽거렸다. "꼬리를 마는 것 같아 좀 찝찔하지만…… 그렇게 하지." 신풍개는 쓰게 웃으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보성운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신풍개는 두 눈을 반짝이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팽소저를 좀 보살펴 주십시오." 순간, 팽소연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녀는 원망과 실망이 겹친 듯한 눈길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허나, 황보성운은 그녀의 시선을 못본 듯이 말을 계속했다. "팽소저의 가문은 멸족의 화를 입은 관계로 그녀는 홀홀단신이 되어 친지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신풍개가 괴상한 인상을 쓰며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짓궂게 물었다. "흐흐흐…… 팽낭자를 내게 넘기겠단 말인가?" 황보성운이 멋쩍게 웃었다. "노선배님의 개방이라면 충분히 팽소저를 보호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신풍개가 팽소연을 바라보며 히쭉 웃었다 "거지 소굴에 팽소저같은 미녀가 온다면 나야 백번 환영이지. 다른 거지들도 입이 찢어질거고…… 헌데, 팽소저가 그걸 마음에 들어할까?" 황보성운이 팽소연을 바라보았다. 팽소연은 원망의 눈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다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곤 기어들 듯한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공자께서 원하시면……?" 신풍개가 심통이 난 듯 입을 삐죽였다. "아니 황보소협만 허락하면 다야? 개방은 그냥 핫바진감? 다른 사람이 아무리 허락해도 내가 고개를 흔들면 안되는거야!" 황보성운이 쓰게 웃곤 정중히 포권했다. "삼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신풍개는 화가 나는 듯 짐짓 크게 소리쳤다. "젠장할! 그렇게 부탁한다고 내가 들어줄 것 같나?" 그는 인상을 팍 쓰며 황보성운을 힐끗 바라보다가 돌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을 들어주지." 신풍개의 익살에 그만 좌중은 폭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허허허헛헛……" 황보성운도 참을 수 없어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원 노선배님도……" 팽소연도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황보성운을 보며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이때 호혜령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참! 황보소협은 앞으로 어디에 갈 작정이세요?" 황보성운은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정확히 갈 곳을 정한 바가 없소이다. 허나 북경에 한 번 들릴까 하오." "그 다음엔……?" 호혜령이 되물었다. 허나 이내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되물었다는 생각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황보성운은 담담히 대답했다. "아직 마땅한 곳은 없소이다." 호혜령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그럼, 우리 신녀궁에 한 번 들려주시겠어요? 저의 어머님께서도 무척 만나 뵙고 싶어하는데……" 황보성운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되면 들리겠소." 호혜령은 그 말에 활짝 웃었다. 황보성운은 말을 마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중인들을 향해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그럼 소생은 이만 떠나겠습니다." 황보성운은 허리를 펴며 팽소연을 바라보았다. 팽소연은 온통 애련한 눈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낭자! 불편하겠지만 노선배님과 같이 얼마간 머물러 주시오." 그는 결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 반드시 찾아가리다." 그러자 신풍개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황보소협! 팽낭자를 찾으려면 악양으로 오게. 그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황보성운은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신형을 솟구쳤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 마디를 등 뒤에 남기고 순식간에 황보성운의 신형이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신풍개는 황보성운이 사라진 곳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탄식조의 감탄이 흘렀다. "허…… 진정 기가 막힌 신법이로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하에 둘도 없는 기재야, 기재!" 그러자 옆에 있던 황곤의가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저런 기재는 처음 봅니다. 아마 저의 사부님께서도 저 정도의 경공을 시출하시진 못할 것입니다." 허나, 이들의 이런 찬탄과는 달리 팽소연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온통 슬픈 빛이 감돌았고, 그 위로는 서서히 투명한 액체가 솟아 올랐다. 이때 그녀의 귀로 황보성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리전음이었다. "소연, 반 년 안에 반드시 내 그대를 찾겠소…… 사랑하오!" 팽소연은 황보성운의 마지막 말을 듣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슬픔이 솟구쳤다. 그녀의 눈에는 드디어 소리없이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신풍개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내심 한탄을 금치 못했다. (음, 저 어린 것이 사랑의 늪 속에 빠져버렸군. 하기야 황보소협 정도의 남자에게 빠지지 않을 여인이 있을라고?) 신풍개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렀다. "다정(多情)이면 유한(有恨)이라!" 제 24 장 당돌한 少女 1 하남성(河南省)이 복우산(伏牛山). 험준하기 짝이 없이 휘돌아가는 산세를 따라, 수십 수백의 절봉들이 줄줄이 늘어서있다. 그리고 그 절봉들 밑으로 수십 장에 달하는 단애(斷涯)와 계곡들이 흡사 물결치듯 이어지고 끊어져 가고있다. 또한, 곳곳이 삐쭉삐쭉 솟구쳐 올라 찌를 듯이 버티고 있는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은 창날처럼 예리했다. 이 복우산의 서북방(西北方), 수백 장의 깎아지른 단애를 병풍처럼 두른 험난한 계곡이 있었다. 하루에 한 시진 정도나 햇빛이 들까? 어지럽게 흩어진 난석들과 그곳으로 불쑥불쑥 잡초들이 무성하게 지극히 음산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휘---- 리---- 릭! 휘---- 이---- 이---- 익! 일광(日光)이 폭사되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간단없이 한풍이 불어와 단애의 유리벽 같은 석벽(石壁)으로 부딪쳤다. 하여 이곳은 대낮에도 사람의 종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나타나지 않는 곳이었다. 헌데, 이 음산경이 극치를 이룬 계곡의 입구 쪽에서 돌연 한 인영이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키를 훌쩍 넘는 잡초를 해치며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자 점차로 그의 모습이 확연해져 갔다. 그는 한 명의 젊은 서생이었다. 그 서생은 몇 차례 풀숲을 헤치더니 문득 신형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즉시 주위를 살폈다. "으---- 음! 이곳이 고루곡임이 틀림이 없겠군." 그는 침중하게 뇌까렸다. 그렇다. 바로 이곳이 옛날부터 강호에서 신비한 지역으로 알려진 복우산의 제일 험역 고루곡이었다. 그리고 침중하게 뇌까린 서생은 바로 황보성운이었던 것이다. 적양관주가 소향을 몰래 붙잡아간 뒤 황보운성은 그들이 말한 고루곡을 찾아 천하를 무수히 헤매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산과 들을 누볐고, 또한 그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고루곡의 위치를 캐물었다. 무려 삼 개월의 추적…… 그리고 기어코 황보성운은 이곳 복우산에서 고루곡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근방에 사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그는 고루곡에 대해 들었다. 그들은 모두가 고루곡에 대해 무한의 공포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고루곡에 대해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만약 황보성운이 간곡히 부탁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고루곡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황보성운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지금 마을 사람이 말했던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죽음의 계곡이라고? 흥! 웃기는 소리! 그 철칙은 나에 의해서 깨어질 것이다!) 허나, 그의 이런 자신감과는 달리 또 다른 마음의 한구석에서는 불안한 생각이 들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났는데…… 소향이 과연 이 마굴(魔窟)에서 무사할까?) 황보성운의 뇌리로 수많은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허나 곧 그는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불길한 생각은 하지 말자!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힘껏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때였다. 돌연, 난데없이 뒷전에서 꾀꼬리같은 음성이 울렸다. "이봐요! 잠깐만 기다려요!" 황보성운은 흠칫 몸을 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사오 장 정도 뒤의 노송(老松) 아래 한 인영이 어른거리는 것이 황보성운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인영은 순식간에 황보성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코 끝을 스치는 싸한 향내가 황보성운을 자극했다. 황보성운은 의외의 표정으로 인영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뜻밖에도 백설같이 눈부신 백의를 걸친 미소녀였다. 헌데, 그 소녀(少女)의 모습은 실로 아름답고 우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막 피어오르는 백합과도 같다고나 할까? 그녀의 백의가 유유한 바람에 가볍게 나풀거려 지극히 기묘한 미를 이루었던 것이다. 더구나 수려한 이목구비는 청초한 자태를 곁들여 산뜻한 미태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황보성운은 고개를 돌려 소녀를 의아한 눈으로 응시했다. 험한 산중에서 이런 미녀가 나타날 줄은 생각을 못한 것이다. 허나, 놀란 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소녀는 황보성운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별같이 반짝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얼굴에 무척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 스쳐갔다. 그리고 갑자기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설마 상대가 이토록 수려한 미공자일 줄은 미처 몰랐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가슴 속은 황보성운의 탈속한 듯한 비범한 모습에 잔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급기야 가슴이 자신도 놀랄 듯이 두근거렸다. (세상에 이렇게 잘 생긴 미남자가 있었다니……) 이때 미소녀를 바라보던 황보성운은 상대의 얼굴이 상당히 눈에 익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그는 내심 깜짝 놀랐다. (이…… 이제보니…… 저 소녀는!) 하마터면 그는 이처럼 외칠 뻔했다. 그 소녀는 황보성운이 너무나도 잘아는 소녀가 아닌가? 그녀는 바로 설씨 자매 중 동생인 설연청이었던 것이다. 황보성운은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다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문득 옛날 일들이 머리 속으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는 자신을 속이고 설연미와 함께 도망가던 설연청의 그 다급스럽던 표정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입가에 미미하게 고소를 흘렸다. (인생하처(人生何處) 불상봉(不相逢)이라더니…… 정말 이런 곳에서 저 소녀를 만날 줄이야……!) 지금 설연청은 삼 년 전에 비해 훨씬 성숙한 모습이었다. 소녀 티를 완전히 벗고 이젠 완연한 처녀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의 눈이 일순 빛났다. (저 소녀가 여기 있는 것으로 보아 설연미도 이 근처에 있지 않을까?) 황보성운의 머리 속에 설연미의 아름다운 자태가 그려졌다. 허나, 이내 황보성운은 내심 코웃음 치며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었다. (흐흥! 나를 속이고 도망쳤거늘……) 그는 설연미를 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조금 전에 소저가 날 불렀소?" 설연청은 황보성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자신의 실태가 느껴진 듯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문득 입을 열었다. "저……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지극히 더듬거리며 불안정한 어조의 말이 그녀의 앵두같은 입술 사이로 흘렀다. 허나, 황보성운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만한 태도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설연청의 안색이 가볍게 변화했다. 자존심이 팍 상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이 무림에 나온 이래 이토록 무시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허나, 일면으로는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저……" 설연청은 다시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다. 허나, 황보성운은 계속 시선을 창천(蒼天)으로 던진 채 시종 오만무례한 태도였다. 그러자 그만 설연청은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아랫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흥! 네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천하에 너 말고는 남자가 없는 줄 아느냐?) 분통이 치민 설연청은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땅을 박차고 떠나려다 흠칫했다. 그녀의 뇌리 속에 의아한 느낌이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매우 험한 곳이라 일반 사람은 거의 오지 않는다. 이 서 생이 홀로 이 고루곡 근처에 있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필시 무슨 이유가……) 여기까지 생각한 설연청은 다시 몸을 홱 돌려 세웠다. 그리고 황보성운의 방자한 등을 향해 앙칼지게 내뱉았다. "여보세요!" 황보성운은 귀찮은 듯 그녀를 바라보곤 짜증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설연청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어 그녀는 냉랭히 코웃음쳤다. "흥!" 그리고 그녀는 양 손을 허리에 올리고 싸늘하게 내뱉았다. "당신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요!" 황보성운은 내심 실소를 터뜨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당돌한 저 성격은 변함이 없구나!) 어떻게 생각하면 설연미가 초야에 몰래 도주한 것도 저 소녀 때문이 아닌가? 하여튼 황보성운은 그녀의 말에 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물어보시오." "당신! 이 고루곡에 온 지 얼마나 되었나요?" 설연청은 한 손을 들어 황보성운을 가리켰다. 황보성운은 가볍게 검미를 찌푸렸다.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 의도는 뭐요?" "반문하지 말고 당신은 사실대로 대답만 해요!" 설연청이 다그쳤다. 황보성운은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날렸다. "거절한다면?" 황보성운의 반문에 설연청은 눈썹을 싸늘하게 치켜올렸다. 이어 강압적인 말이 떨어졌다. "당신은 꼭 대답을 해야해요." 황보성운은 아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던졌다. "나는 낭자에게 그렇게 할 의무가 없소이다." 설연청의 눈빛이 서리가 내릴 듯 싸늘해졌다. 곧 그녀에게서 냉랭한 코웃음이 터졌다. "흥! 나는 그것을 강제로라도 알아야겠어요." 황보성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극히 온화한 눈길로 설연청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강제로라도…… 말이오?" 일순 설연청은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어찌 사내의 미소가 저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단 말인가? 같은 남자가 봐도 빠져들 만큼 황보성운의 미소는 매혹적이었다. 설연청은 망연히 그 미소를 바라보다 부지중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녀의 가슴이 다시 격동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래요. 난 꼭 알아야…… 겠어요……" 그녀의 태도가 수그러졌다. 왠지 그녀의 말엔 자신감이 없었다. 황보성운의 입가로 조소가 흘렀다. "후후후…… 만약 싫다면 어쩌겠소?" 그 비웃음의 소리를 들으며 설연청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바보같은 행동을 자책하곤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아마 그것은 쉽지 않을걸요." "쉽지 않다고? 하하하하……" 황보성운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설연청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리고 한 소리를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무엇이 그렇게 우습죠!" "생각해 보시오. 여긴 지나는 사람도 없는 은밀한 곳이오. 이런 곳에서 여자인 소저가 남자인 나에게 협박을 하다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하하하…… 정말 당돌하단 말이야…… 하하하하……" "우…… 웃지 말아요! 당장 웃음을 그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어요!" 황보성운은 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설연청을 깊이 주시했다. "어떻게 말이오?" 설연청은 얼굴이 붉어졌다. 싱글싱글 웃는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약이 바짝 올랐지만, 그 눈빛에 닿는 순간 마음이 다시 약해지는 것이었다. 설연청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 내가 당신에게 그 말을 못 알아낼 것 같아요?" 황보성운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시간 낭비요. 내가 보기에 소저는 뭔가를 잘못 먹은 것 같소. 하하하…… 더 이상 소저와 입씨름하고 싶지 않으니 이만 실례하리다." 황보성운은 가볍게 포권을 하고 몸을 돌렸다. 찰나, 설연청이 몸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그녀의 입술은 분노 때문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거만한 자(者) 같으니라고……" 2 그녀는 날카롭게 외치며 손바닥을 쾌속하게 휘둘렀다. 순간, 한 줄기 무서운 기운이 사정없이 몰아쳤다. 황보성운은 상대의 초식이 이처럼 쾌속무비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는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일장을 격발시켰다. 다음 순간, 펑! 충돌음이 울렸다. 그러자 설연청의 전신은 그 충돌의 여세로 인하여 한 차례 휘청거렸다. 황보성운은 만면에 경이스런 기색을 떠올렸다. "호, 이제보니 상당한 실력을 지녔구려!" 실상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설연청 자매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사람이 청암신니라는 것을 모른다. 그렇기에 설연청의 무공 실력이 상당히 뜻밖이었던 것이다. 허나 설연청의 입장에서 그건 달랐다. 상대의 말이 비웃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설연청은 참을 수 없이 열화에 치밀었다. 실상 조금 전 그녀는 내공을 오성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추호도 황보성운을 해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공격은 단지 상대를 위협하려는 동작일 뿐이었던 것이다. 헌데,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황보성운은 거만스럽다 못해 아예 빈정거리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설연청은 극도로 노화가 치밀고 말았다. "건방진 자식! 어디 나의 일장을 다시 받아봐라!" 그녀는 치를 떨며 내공을 십성으로 끌어올렸다. 순간, 그녀의 손바닥에 한 가닥 흰구름이 일어나는 듯 희미한 백무(白霧)가 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기묘한 장력은 지극히 온유한 듯 미풍처럼 밀려갔다. 황보성운은 내심 감탄했다. (강호로 나가겠다고 할 만한 이유가 있었군. 정말 대단한데……) 허나 겉으로 황보성운은 여유있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가볍게 일장을 들어 강기를 발산했다. 찰나, 퍼---- 엉! 천만 뜻밖에도 지극히 온유하리라 여겨졌던 설연청의 장력이 태산을 밀 듯한 엄청난 위력으로 덮쳐들었다. 다음 순간, 황보성운은 턱턱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황보성운은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경악 어린 시선으로 설연청을 응시했다. (설연청의 내공이 이토록 심후하다니…… 정말 뜻밖이구나!) 한편 설연청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사부님의 독문장법인 백운장법에 전력의 내공을 전개했는데 저자가 이렇게 간단히 받아내다니……) 그녀는 아예 멍해져 우뚝 서 버렸다. (사부님 말씀으로는 이 장법을 받아낼 자가 무림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라고 했는데!) 이때 황보성운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하하하…… 낭자! 정말 뜻밖이오. 이토록 무공이 강하다니…… 이제보니 우내삼기 중의 한 분이신 청암신니의 고명 제자였구려." 황보성운의 이 말에 설연청은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다시 격렬하게 일장을 떨쳤다. 허나, 황보성운은 뒷짐을 진 채 잔영보를 전개해 가볍게 피해 버렸다. 결국 그녀는 헛손질만 했을 뿐 황보성운의 옷자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몇번을 공격해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상대는 의당 해와야 할 출수를 하지않고 빙글빙글 웃으며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입가에 맺힌 그 여유있는 미소가 그토록 얄미울 수가 없었다. 설연청은 수치감에 귀 끝까지 붉히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찰나, 쨍! 경쾌한 소성이 일며 상서로운 검광이 현란히 내뻗쳤다. 설연청은 검신을 미간으로 가로 뉘며 싸늘히 외쳤다. "항마십팔검(降魔十八劍)을 받아라!" 황보성운이 실소했다. "후후후…… 청암신니 본인이 시전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텐데…… 소저 능력으로 내 머리카락이나 하나 건들일 수가 있겠소?" 설연청은 분기충천했다. "닥쳐라!" 그녀는 싸늘한 일갈을 내지르며 잠룡출동(潛龍出洞)의 초식으로 신형을 뽑아올렸다. 그리고 허공으로 검영(劍影)을 현란무비하게 물들였다. 그러자 수백 수천의 검영이 일시에 우박 떨어지듯 황보성운에게 덮쳐들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여전히 잔영보를 전개해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연속되어 항마십팔검의 무서운 살초(殺招)가 전개되었다. 허나 번번히 설연청의 검은 애꿎은 허공만 가를 뿐, 아무런 이득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설연청은 항마십팔검의 최후 초식인 항마혜검(降魔慧劍)을 전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가볍게 웃으며 야속하게 마지막 초식 마저 슬쩍 피해버렸다. 실상 이 항마혜검은 가공할 살초였다. 단지 설연청이 연성한 것이 불과 삼성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 진수를 발휘할 수 없었다. 허나 실상 이 항마혜검을 십이성 연성한다 하더라도 황보성운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예컨데 청암신니 본인이 시출한다 하더라도 역시 같은 결과란 이야기다. 그런데 그의 제자 정도야…… 만약 황보성운이 반격한다면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설연청은 믿었던 항마혜검마저도 상대가 피해 버리자 그만 전신의 맥이 탁 풀려버렸다. 이때 낭랑한 황보성운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하하하…… 낭자, 모두 공격했으면 나의 공격을 받아보시오." 황보성운은 가볍게 소매를 떨쳤다. "귀현조원(歸玄朝元)----!" 가공할 현무구장의 제 삼초가 전개된 것이다. 찰나지간 방원 십여 장 내의 허공에 수천 수만의 장영이 천라지망으로 뒤덮였다. "어머!" 설연청은 소스라치게 놀라 경악성을 터뜨렸다. 순간, 허공에 암운(暗雲)처럼 덮여있던 장영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설연청은 문득 손이 허전한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황보성운의 소맷자락이 설연청의 검을 휘감아 가버린 것이었다. 다음 순간, 쨍! 검이 허공을 날아가 암석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설연청은 멍하니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돌연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눈물이 글썽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며 황보성운은 문득 애처로운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설연청은 입술을 질끈 물고 황보성운을 노려보더니 이내 몸을 홱 돌렸다. "낭자! 낭자의 검은……?" 그러자 설연청은 얼굴을 감싸쥐고 아래 쪽으로 내달렸다. 황보성운은 내심 고소를 흘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전광석화처럼 설연청의 앞에 멈춰섰다. 황보성운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낭자, 소생이 너무 무례했소. 그만 화를 푸시고 용서하시오." 허나 설연청은 다시 옆으로 몇걸음을 달려갔다. 황보성운은 다시 그녀 앞을 가로 막았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시오. 흔쾌히 대답하리다." "……" 이윽고 그녀는 어쩔 수 없는 듯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눈물 어린 눈길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이어 그녀는 잠시 주저주저하다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 고루곡에 온 지 얼마나……?" "반나절 쯤 되었소." 황보성운이 즉각 대답했다. 그녀는 울어 약간 코소리가 섞인 소리로 물었다. "그럼 혹시 어떤 흉악하게 생긴 괴한과 도인이 몇몇 수하들과 함께……" 그녀는 꿀꺽 침을 삼켰다. "한 명의 소녀를 잡아가는 것을 보지 못했나요?" 황보성운은 흠칫 놀라 정색을 했다. "모르겠소. 그런 것은 보지 못했소만……" 설연청의 얼굴에 온통 안타까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애타게 뇌까렸다. "아…… 그렇다면 이미 반나절 전에 잡혀갔다는 이야긴데……"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초조감이 떠올랐다. 황보성운은 심각하게 물었다. "그 소녀와 낭자는 무슨 관계요?" "그는 저의 언니예요." 황보성운은 대경했다. (그렇다면 설연미가 적양관주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때 발을 동동 구르던 설연청이 아랫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뇌까렸다. "좋다. 이렇게 된 이상 나라도 한 번 들어 가보는 수밖에……" 그리고 발을 차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때, 황보성운이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 설낭자!" 순간, 설연청은 날리려던 신형을 똑바로 세우며 황보성운을 급히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역력히 드러났다. "다…… 당신이 어찌 나의 이름을……?" (아차!) 황보성운은 내심 뒷골을 한 차례 후려쳤다. 그리고 당황한 기색을 얼른 정색으로 바꾸었다. "으음! 천하에 내가 모르는 일이라고는 없소." 설연청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은 점(占)도 칠줄 아세요?" 황보성운은 내심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허나 겉으로는 짐짓 거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점이란 건 내게 있어 실로 우스운거요. 난 천기(天機)의 흐름도 맞출 수 있소." "그럼 저의 언니 이름을 맞춰 보세요." 설연청은 불끈해 진정 못믿겠다는 기색을 떠올렸다. 황보성운은 담담한 신색으로 공연스레 손가락을 엄지로 짚으며 계산하는 듯 이마를 가볍게 찌푸렸다. 그리고 예의 경쾌한 미소를 날렸다. "음…… 성(姓)은 설(薛)이요, 이름은 연미라! 아마 맞을 것이외다." 황보성운은 설연청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설연청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당신은 무척 신비한 사람이군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죠?" 황보성운은 내심 치솟는 웃음을 삼키려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냥 신비서생이라고만 불러주시오." "신비서생……" 황보성운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자, 낭자! 우선 이 검(劍)이나 받으시오." 설연청은 얼굴을 붉히며 검을 받았다. 그녀는 지금 야릇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급속도로 이 신비서생에게 기우는 느낌인 것이었다. 너무나 매력적인 남자가 아닌가? 허나 만약 그가 자신의 언니와 결혼식을 올렸던 황보성운이라는 것을 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여하튼 황보성운과 설연청은 고루곡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제 25 장 �� 谷 1 황보성운과 설연청의 신형이 번갯불처럼 쏘아갔다. 이미 그들은 고루곡의 깊은 곳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질주하고 있는 주변으로는 아름드리 고목들이 울창하게 하늘을 가리며 뻗어 있었다. 또한 나무들 사이에는 이끼에 덮인 암석(巖石)들이 무수했다. 휘---- 이---- 잉! 휘----- 잉! 땅바닥에서 거센 바람이 불 때마다 싯누런 황토가 휘날렸다. 그 황토바람의 위세는 주위의 경물마저 흐릿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이윽고 곡구(谷口)들 몰아치던 바람의 위세가 한풀 꺾이며 자욱했던 황토바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러자 점차 주위의 경관이 일목요연하게 비쳐왔다. 이때 설연청과 황보성운은 막 그 울창한 괴목 숲을 벗어나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 찰나 황토바람이 가라앉은 것이다. "헛!" "어머!" 그들은 한 마디 경악성을 터뜨리며 급히 신형을 세웠다. 그리고 등골을 후벼파는 공포감에 표정을 급변시켰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 눈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바로 그들의 앞에는 소름이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해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이곳저곳으로 작은 둔덕들을 이루며 허연 빛을 음산하게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었다. 흡사 지옥을 방불케 하는 해골들…… 그 수는 수천 명의 그것인 듯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그 주변으로는 사방으로 무수하게 자란 풀포기 한 뿌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쉬---- 이---- 리---- 리---- 릭! 쉬---- 이---- 리---- 릭----! 쉬익----! 음산한 바람만이 해골들에 부딪쳐 기이한 음향을 일으켰다. 실로 간담이 싸늘할 음산경이었다. 설연청이 전신을 으스스 떨며 입을 열었다. "치가 떨릴 정도로 끔찍해요." "으---- 음!" 황보성운은 침음성을 말했다. (저 해골들이 모두 사람의 것이란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 고루곡의 곡주는 실로 악랄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황보성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이 고루곡의 곡주가 누군지 아시오?" 설연청은 고루의 둔덕을 바라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래 이 고루곡은 이백 년 전에 세워진 곳이에요!" "이백 년 전……?" 설연청이 두려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엔 우내삼천존(宇內三天尊)의 한 명인 고루천존이 이곳의 곡주(谷主)였어요." "고루천존……?" 설연청의 말이 계속되었다. "당시 그는 고루문의 문주로 천하를 휩쓸었지요. 허나 어느날 갑자기 실종되었어요. 따라서 이곳도 폐허로 변하게 되었지요." 황보성운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우내삼천존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설연청은 고개를 돌려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혹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 당신 그것도 몰라요?" 황보성운은 입가에 겸연쩍은 미소를 날렸다. "워낙 우매하고…… 견문이 좁다보니……" 설연청이 생긋 웃음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겸손한 말이 나오는군요."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짐짓 오만하게 입을 열었다. "우내삼천존은 이백 년 전 사도(邪道) 제일의 고수들로 바로 구유천존, 고루천존, 그리고 독혈천존 세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예요." 그녀는 계속 진지하게 말을 이끌어갔다. 서서히 우내삼천존의 내력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내삼천존(宇內三天尊)! 그들은 무림사에 다시 없을 개세마두들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한결같이 괴이무쌍하고 통천가공할 위력을 가진 것이었다. 그들은 그 엄청난 무공으로 전 무림을 삽시간에 피바다로 물들였다. 시산혈해(屍山血海)---- 그들이 가는 곳마다 어김없이 살겁이 일어났고, 그곳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아아! 그들의 손 아래 참살된 무림인들이 과연 몇이던가? 아마 그들의 숫자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삽시간에 전 무림으로 피바다의 혈풍이 몰아 닥쳤으니…… 그들은 바로, 구유천존(九幽天尊). 고루천존( �뽸모�). 독혈천존(毒血天尊). 구유천존. 그는 구유마방(九幽魔 )의 방주였다. 구유마방은 무림사상 최강의 방파였다. 그는 그 마방을 이끌어 전 무림을 피바다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한데 돌연, 천하독패 일보직전에 그만 실종되고 말았던 것이다. 고루천존. 그는 바로 이 고루곡( �뽎�)의 곡주였다. 그가 고루곡의 곡주로서 활동한 기간은 대략 이 년 정도였다. 허나, 불과 그 이 년 동안 그가 저지른 혈겁은 구유천존을 능가할 정도였다. 한데, 그 또한 역시 그 후 돌연 종적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독혈천존. 그는 당시 독(毒)의 제 일인자였다. 기실 그는 어려서 무림 최고 독경인 만독진해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독으로 천하를 독패한다는 말을 외치며 중원무림을 휘저었다. 허나 그 역시 신비하게 실종되어 버린 것이었다. 2 황보성운은 설연청의 이야기를 듣다가 크게 놀랐다. (아니! 만독진해라고?) 그것은 바로 자신이 괴사찰에서 얻은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지극히 의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당시 그 괴노인의 행동으로 보아 그는 결단코 독혈천존이 아니다!) 그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단지 그는 누군가가 남긴 만독진해를 가지고 누구와 쟁탈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이때 설연청의 목소리가 황보성운의 귓전을 때렸다. "언제까지 이곳에 서 있기만 할 거예요?" "음? 아! 그렇지. 어서 안으로 더 들어갑시다." 황보성운은 정색을 하고 먼저 신형을 뽑아 날렸다. 그리고 솟구치는 의혹을 떨쳤다. 일단 지금 그에게 중요한건 소향과 설연미를 구하는 것이었다. 찰나지간에 그의 신형이 고루의 둔덕을 뛰어 넘었다. 뒤이어 설연청의 신형이 날아 내려앉았다. 그들의 앞에는 삐쭉삐쭉 잡초들이 무성한 꽤 넓은 평지가 펼쳐졌다. 그 평지는 거의 인적이 닿지 않아 실로 황폐하기 짝이 없었다. 한데 바로 그 평지 끝에 한 채의 장원이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장원은 일견하기에도 수백 년의 풍상을 겪은 듯 곧 허물어질 것처럼 보였다. (음! 저것이 고루곡에 있는 무리들이 사는 거처가 분명하겠군.) 황보성운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설연청도 굳어진 안색으로 장원을 주시했다. 이윽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장원 안으로 빗살처럼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그들의 신형이 장원의 안 뜰로 번개처럼 떨어졌다. 한데 이때, 갑자기 황보성운이 즉각 설연청의 손목을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그는 강하게 설연청을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어멋!" 설연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나 어느새 황보성운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나무 위로 섬전처럼 쏘아 올라갔다. 이때 장원 모퉁이로부터 몇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연청은 즉시 황보성운의 돌연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일시에 붉어졌다. 그리고 가슴이 점차 두근거렸다. "손목이나 놔요." 그녀는 가늘게 입을 열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누군가가 왔소." 설연청의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그녀는 톡 쏘아 붙였다. "손목이나 놓고 얘기해요." "아! 미안하오……" 황보성운은 급히 손을 놓았다. 이때 모퉁이로 네 명의 중년대한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흉악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흐흐흐…… 장삼(張三), 자네 그 두 계집들 얼굴을 좀 봤나?" 한 대한이 음흉하게 입을 열었다. "보지는 못했어. 한데 그토록 미인이라면서?" "물론!" 다른 대한이 즉시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대한이 침을 꿀꺽 삼켰다. "흐흐흐…… 진정 내 평생 그토록 예쁜 계집들은 처음 봤어. 보 기만 해도 그냥 정신이 몽롱해지니…… 만약 그것들을 꿀꺽 한다면…… 그 맛이야…… 어이구…… 생각만 해도 아랫도리가 뻐근해진다……" 다른 대한이 곁다리를 꼈다. "정말 관주님은 복도 많지. 그런 계집을 두 명이나 껴안을 수 있다니……" "정말…… 아깝더군. 오늘로써 그런 미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허지만 그로 인해 관주님은 그 천하 무적의 독공(毒功)을 최고 절정까지 연마할 수 있지 않은가?" 통탄스럽다는 듯 내뱉았던 한 대한은 입맛을 쩍 다셨다. "허나 왠지 아쉬운 느낌을 금할 수가 없구만." "흐흐흐…… 꿈꾸지 말고 속차려. 그저 호박같은 자네 마누라 엉덩이나 실컷 두들겨 주게." 옆에 있던 한 대한이 비웃듯이 말하자, "키키히히학!" "흐흐흐……" 모두가 음충맞게 웃어댔다. 이때, 그들의 머리 위로 몇 줄기 경기가 은밀하게 쏘아왔다. "엇?" "아…… 아니!" 혈도가 찔린 채 그들의 전신이 석상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들은 돌변한 사태에 대경실색했다. 다음 순간, 두 개의 인영이 히끗하는 듯하더니 그들의 면전으로 젊은 두 남녀(男女)가 떨어져 내렸다. "누…… 누구냐?" 대한들은 황급히 부르짖었다. 그러자 황보성운이 불쑥 한 걸음 나섰다. "묻는 말에 즉각 대답해라! 추호라도 거짓이 있을 시는 황천으로 목을 날려 버리겠다." 황보성운은 서슬이 시퍼렇게 대한들을 쓰윽 훑었다. "네…… 네놈은 누군데 감히……" 순간, "으---- 악!" 말을 채 맺지도 못한 대한의 몸이 나가 떨어졌다. 일순, 그는 허공으로 피화살을 내뿜으며 즉사해 버렸다. 황보성운의 잔혹한 출수였다. 실상 황보성운은 살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허나 그들의 대화를 통해 설연미와 소향의 위급함을 느끼곤 살수를 쓴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장한들의 입을 열기가 어렵다고 느낀 것이다. 하여튼 한 명의 장한이 죽자, 나머지 세 명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들의 등허리로 주르륵 싸늘하게 식은 땀이 흘렀다. "자, 내 말에 즉각 대답해라!" 황보성운은 한자 한자 날카롭게 끊으며 냉혹하게 외쳤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버린 안색으로 급급히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지…… 물어…… 보십쇼. 아는…… 대로 대답하겠습니다." 이구동성(異口同聲)이었다. 황보성운은 머릿발이 뻗치듯 혹독히 물었다. "적양관주는 어디 있느냐?" 순간, 그들의 안색이 변했다. "말하라!" 추상같은 황보성운의 말이 떨어졌다. "그…… 그는……" 한 대한이 아래턱을 덜덜 떨며 입을 놀렸다. 순간, 다른 대한이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장삼! 미쳤느냐? 말하면----" 찰나, "으---- 악!" 다시 그의 전신이 통나무처럼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전신을 한 차례 파르르 떨다가 이내 축 늘어져 버렸다. 즉사한 것이었다. 나머지 두 대한의 안색이 돌변했다. 창졸간에 두 명의 동료가 황천으로 날아간 것이다. "어디냐?" 냉혹히 파고드는 황보성운의 일갈이었다. "자…… 장원 뒤쪽 한 동굴에 있습니다." "위치를 좀더 자세히 말해라!" 한 대한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화…… 환희각에……" 황보성운은 대한을 쏘아보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좋다. 수고했다. 허나 거짓임이 판명되면 그냥두지 않겠다." "무…… 물론입니다. 추호도 거짓이 아닙니다." 두 대한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황보성운은 냉랭한 기운을 반감시켰다. "잠깐 쉬고 있어라." 그의 손이 언뜻 움직였다. 그러자 두 대한은 소리없이 쓰러졌다. 황보성운은 옆에 서 있는 설연청에게 시선을 던졌다. "갑시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쾌속하게 솟구쳤다. 설연청의 신형이 뒤따라 솟구쳐 올랐다. 3 고루곡의 끝에 한 채의 전각(殿閣)이 세워져 있었다. 하늘을 뚫을 듯 십수층으로 치솟은 그 위세는 자못 위풍당당했다. 헌데, 기이한 건 전각의 외부로 왠지 알 수 없는 섬뜩한 요기(妖氣)가 뻗어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전각 위로 두 줄기 인영이 소리없이 내려섰다. "이곳이 바로 그자가 말한 환희각이군." 황보성운이었다. 문득,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름만 들어도 별로 좋지못한 냄새가 풍기는군." "언니가 무사한지 걱정이예요." 설연청은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들어가 봅시다." 황보성운은 지체없이 한 마디를 던지며 신형을 날렸다. 그들은 번개처럼 전각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러자 그들 앞에 긴 복도가 나타났다. 황보성운은 급속히 고개를 휘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서서히 앞으로 몇 발자국을 옮겼다. 순간, 그의 신형이 문득 멈칫했다. 가벼운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누군가 오고 있소." 황보성운은 급히 설연청의 허리를 끼었다. 즉각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복도의 천정에 마치 박쥐처럼 달라붙었다. 설연청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간이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천정에 그대로 달라붙다니…… (이…… 이것은 혹시 전설 속에서나 들어오던 편인접( 引接)이라는 수법이 아닐까?) 이때 문득 그녀는 자신이 현재 황보성운의 품 속에 밀착되듯 안겨있다는 것을 느꼈다. 일시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벌렸다. "저……" 순간, 황보성운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조용히 하시오." 설연청은 흠칫 놀라 황보성운이 바라보는 곳을 따라 주시했다. 그곳은 복도가 꺾여지는 곳이었다. 지금 그 복도 끝을 두 명의 남녀(男女)가 막 돌아서고 있었다. 남자는 대략 사십 정도 되었을까? 흑의를 걸친 매우 음침한 몰골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옆에 여인의 허리를 낀 기묘한 자세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여인은 그에게 허리를 내맡긴 채 요염하게 둔부를 흔들어댔다. 대략 이십대 후반쯤 되었는데 꽤나 뛰어난 미모를 갖춘 여인이었다. 도화빛 같은 얼굴 위로 도발적인 색기가 자르르 흘러 보는 이의 마음을 유혹시킬 듯한 분위기였다. "흐흐흐…… 당신의 몸은 정말 언제나 색다른 맛을 풍겨서 나를 미치게 한단 말씀이야." 사내는 그녀의 옷깃 사이로 손을 넣어 젖가슴을 주무르며 연신 음탕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어때? 여기서 한 번……?" "아이…… 누가 오면 어쩔려고?" "흐흐흐…… 오긴 누가 와? 여긴 우리 담당 구역이야. 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말을 하면서 그의 한 손은 어느새 그녀의 치마 아래를 더듬고 있었다. 여인의 밀궁은 이미 촉촉히 젖어 있었다. 사내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여인은 몸을 비비틀며 교성을 터트렸다. "으…… 음…… 아!" 동시에 그녀의 전신이 사내의 전신으로 끈적거리게 꽉 엉켜들었다. 사내가 그녀를 벽쪽으로 밀어붙히곤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하체를 바짝 접근시켰다. "으---- 음! 아, 그러지 말아요. 누가 보면 어쩔려고?" "흐흐흐…… 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사내는 그녀의 젖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아…… 아! 아파요……" 그녀는 교태롭게 눈을 흘겼다. "당신…… 참…… 나빠요." 황보성운은 천정에서 두 남녀의 작태를 바라보며 내심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할 곳이 없어서 이런 데서……) 그는 힐끗 옆의 설연청에게 시선을 던졌다. 설연청은 지금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된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일순 그녀의 두 눈이 황보성운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는 어떤 부끄러움에 고개를 내리숙였다. 황보성운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번졌다. (흠! 그러고 보니 이 소녀 역시 언니인 연미 못지않은데……) 그는 갑자기 짓궂은 생각이 치밀었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후…… 설낭자, 보기가 좀 힘드오?" 황보성운의 전음입밀 수법이었다. (어머!) 설연청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녀는 언뜻 고개를 들어 황보성운을 직시했다. 순간, 황보성운의 두 눈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설연청은 내심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곤 곧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서서히 황보성운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다가 들었다. 그녀는 완강하게 피하고 싶었다. 허나, 이상하게도 전신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동안 계속 황보성운의 입술은 다가들어 그녀의 입술 한치 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설연청은 자신도 모르게 기묘히 가슴이 울렁여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한데 기대했던 그것(?)이 자신의 입술에 닿지 않는 것이었다. (응?) 그녀는 슬쩍 눈을 떠보았다. 그리곤 문득 안색이 굳어졌다. 황보성운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설연청은 수치감과 모욕감에 얼굴을 울그락 푸르락 변화시켰다. 이때 흑의중년인은 여인을 끌어 안다시피 하여 복도 옆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황보성운은 설연청을 안은 채 한점 먼지처럼 소리없이 바닥에 내려섰다. 설연청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급히 황보성운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옆으로 훌쩍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화난 표정이 역력했다. 허나 황보성운이 보기에는 그 모습이 더욱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씩 미소를 날렸다. "저 방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설연청은 울컥 화가 치밀어 아무 말도 없이 홱하고 외면해 버렸다. "후후후…… 왜 좀 꺼림칙 하오?" 황보성운은 능청스레 물었다. 설연청은 불끈해 고개를 홱 돌리며 냉랭히 코웃음쳤다. "흥! 들어가라면 못들어갈 줄 알고요?" 그리고 그녀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데, 침상 위에는 실로 낯이 뜨거운 꼴불견이 벌어져 있었다. 중년인과 여인이 서로 엉켜서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옷은 대부분 벗겨진 상태로 그 사이에 중요한 부분들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설연청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급히 고개를 돌렸다. 황보성운은 씩 미소를 날렸다. (아무래도 처녀라 보기가 힘들겠지……)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허나 두 남녀는 아직도 들어온 황보성운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중년인은 여인의 몸 위에서 움직이기에 바빴다. 황보성운은 그의 지척 뒤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중년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것 보시오, 형장! 좀 물어볼 것이 있는데." 순간, 중년인은 크게 경악했다. 그는 급히 용수철처럼 옆으로 퉁겨 나갔다. "누…… 누구냐?" 그는 창졸간에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을 질렀다. 한데, 앞에는 새파란 약관 서생이 빙글빙글 웃고 있지 않은가? 그는 분기탱천했다. 그는 옷깃을 급히 잡아서 중요한 곳을 대충 가리곤 노갈을 버럭 내질렀다. "네놈은 누구냐?" 황보성운은 시종 유유히 미소를 날렸다. "하하하…… 지나던 사람인데 이상한 소리가 들리길래 들어와본 것일 뿐이오." "뭐라고? 이놈이 지금 누구를 희롱하는거냐?" 중년인은 노화가 치밀다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두 눈에 살광을 폭사시키며 전신 내력으로 일장을 미친 듯이 내뻗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신형을 슬쩍 흔들더니 가볍게 피해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오른쪽 발로 그의 명치를 걷어차 버렸다. 신쾌한 각법(脚法)이었다. 펑! "어---- 흑!" 중년인의 전신이 침상 위로 짐짝처럼 내던져졌다. 그리고 부르르 몸을 떨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즉사한 것이다. 여인은 침상 구석에서 두려운 듯 덜덜 떨었다. 황보성운은 무표정히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여인을 주시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이곳에 누구 좀 찾으러 왔소만……" 여인은 두려운 듯 한껏 더 웅크렸다. "누…… 누구를……?" "적양관주라고 알고 있소?" 여인은 흠칫 놀랐다. "부…… 문주님을?" "부문주?" 황보성운의 얼굴에 지극히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기실 그것은 무척 의외의 사실이었던 것이다. "적양관주가 이곳의 부문주란 말이냐?" 황보성운은 싸늘한 눈길로 여인을 직시했다. 제 26 장 아뿔사! 1 "그…… 그래요." 여인은 흡사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때 다시 냉랭한 황보성운의 말이 떨어졌다. "문주는 누구냐?" "그…… 그것은……" 여인이 말 끝을 흐리자, 황보성운은 혹독히 다그쳤다. "빨리 말해라! 우리는 시간이 없다." 그러자 여인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문주가 누군지 몰라요. 얼굴을 본적이 한 번도 없어요." "거짓말 하지 마라!" 황보성운의 추상같은 노갈에 여인은 울상을 지었다. "정말…… 이예요." 황보성운은 냉랭히 코웃음쳤다. "흥! 어찌 같은 문파의 문주인데 한 번도 본적이 없을 수 있단 말이냐?" 여인은 다급한 안색에 떨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 문주님은 언제나 복면 차림이예요. 더군다나 목소리조차 괴이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녀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심지어는 늙었는지 젊었는지조차 추측할 수가 없어요." 여인은 지극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황보성운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직시했다. (흠! 이 여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괴이한 자로군.) 그는 섬뜩한 눈으로 여인을 노려보았다. "너의 말에 추호도 거짓이 없으렷다." 황보성운의 말에 서릿발이 돋혔다. 여인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황보성운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가에 능청스런 미소를 날렸다. "너…… 침상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자 여인은 즉각 가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두려운 표정으로 방바닥에 내려섰다. "손을 내려라!" 황보성운의 냉랭한 일갈이 터졌다. 여인은 흠칫 떨었다. 허나 곧 입가에 음탕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보니…… 이놈도……) 그녀는 양 손을 천천히 내렸다. 순간, 그녀의 상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화끈한 두 개의 풍만한 육봉(肉峰)이 가볍게 출렁였다. 실로 색정을 절로 일으킬 만한 가슴이었다. 그 육봉 끝에는 자주빛으로 변한 젖꼭지가 달콤하게 비쳤다. 그녀는 두 눈에 춘색을 가득 담고 몸을 비비 꼬았다. 그때마다 풍만한 젖가슴이 미묘한 율동으로 출렁였다. "아래 옷도 벗어봐라!" 여전히 싸늘한 황보성운의 말투였다. 여인은 교태롭게 눈을 흘기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너무 딱딱하게 말하지 말아요." 여인은 치마끈을 풀렀다. 순간, 스르르 치마폭이 흘러내렸다. 이때, "다, 당신…… 지금 무엇을 하는 거예요?" 설연청의 경악성이 울렸다. 지금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시종 담담한 안색이었다. "신경쓰지 말고 구경이나 하시오. 보시오, 저 몸매를…… 얼마나 보기가 좋소?" 설연청의 안면이 씰룩였다. 그녀는 지금 온갖 모독과 수치, 그리고 황보성운에 대한 경멸감으로 가슴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를 갈며 황보성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천하의 파렴치한 색마 같으니." 옆에서 바라보던 여인이 고혹적인 교소를 날렸다. "호호호…… 공자님! 염려마세요. 저까짓 계집은 마음에 둘 필요 없어요." 여인은 교태로운 눈길로 계속 황보성운의 눈을 바라 보았다. "저런 계집은 얼굴만 반지르 했지 실속이 없어요. 나이가 어려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 진정한 쾌락의 진미를 느낄 수가 없죠. 호호호……" 순간, "닥쳐라!" 설연청의 손이 허공을 날았다. 짝! 설연청의 손이 여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얏!" 여인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동시에 그녀는 침상 위로 나가 떨어졌다. 그 바람에 양다리가 위로 번쩍 들려지면서 그만 그녀의 밀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설연청은 득달처럼 여인에게 다가들었다. "음탕한 계집! 그냥 두지않겠어!" 순간, "설낭자! 그만 하시오." 뒤에서 황보성운의 말이 들렸다. 설연청은 고개를 홱 뒤로 돌렸다. 그리고 냉랭히 코웃음쳤다. "흥! 왜요. 저 계집이 그렇게도 사랑스러운가요?" 그녀의 얼굴에는 극렬한 분기와 조소의 기색이 역력했다. 황보성운은 검미를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설연청의 더욱 싸늘해진 냉소가 터졌다. "흥! 이젠 당신이란 사람을 완전히 알 것 같아요." 지체없이 그녀는 계속 냉혹하게 소리쳤다. "당신은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색마(色魔)예요." 황보성운의 입가에 문득 고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침상 위의 여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침상 구석에 고꾸라져 있는 중년인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자의 이름은 무엇이냐?" 여인은 억지로 웃음을 띤 채 중년인의 시체를 힐끗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장곤(張坤)이라는 자예요."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황보성운은 재차 물었다. 여인은 아픈 것도 잊었는지 춘색이 가득 담긴 미소를 보내왔다. "매화(梅花)라고 해요." "매화? 흥! 꽃이 울겠다. 너같은 게 매화라니----" 설연청이 즉각 냉랭히 조소를 날렸다. 황보성운은 설연청의 개입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그는 단지 매화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설연청은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정말 무슨 저런 인간이……) 한동안 매화의 몸을 살펴보던 황보성운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음, 이 여인의 몸매는 설낭자보다 좀 풍만한 것 같군.) 그는 매화를 보며 웃었다. "매화! 모든 것을 자세히 보여줘서 고맙소." 매화는 요염하게 웃었다. "뭘요, 저는 당신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사양하지 않을 거예요." "정말이오?" 황보성운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매화는 손을 가볍게 떨치며 고혹적으로 눈을 흘겼다. "아이! 몇 번을 대답해야 믿겠어요?" "좋소!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하리다." "무엇인데요?" 매화는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눈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황보성운은 지극히 간단히 내뱉았다. "사흘간만 푹 쉬시오." "네?" 매화는 일순 지극히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순간, 쉭! 황보성운은 한 줄기 지풍을 날렸다. "윽!" 매화는 즉각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황보성운은 매화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슬쩍 들어 침상 밑에 숨겨 넣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그는 지체없이 중년인의 시체를 들어 매화의 나신 위에 덮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침상보를 내리니 감쪽같이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황보성운은 허리를 펴며 손을 탁탁 털었다. "후후후…… 시체하고 사흘만 있으면 아마 몇 년간은 남자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설연청은 돌연한 황보성운의 태도에 크게 놀랐다. 그녀는 의아한 눈초리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당신…… 지금 무엇을 하는거죠?" 황보성운의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설낭자!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왔소?" "그야…… 물론 저의 언니를 구하려고……" 황보성운이 말 끝을 가로챘다. "맞았소." 그는 천천히 안색을 신중하게 굳혀갔다. "허나, 원래 나의 생각보다도 이 고루곡은 더욱 괴이하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은 곳이오." "……?" 황보성운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들어가기보다는 변장을 하고 가자는 것이오." "아……!" 설연청은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문득 뇌리 속에 한 생각이 섬전처럼 스쳤던 것이다. "아까 그 두 명의 남녀로 변장하자는 말이죠?" "그렇소." 황보성운은 담담히 웃었다. 한데 설연청은 곧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허나 전 변장술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해요." "그것은 나에게 맡기시오." 설연청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기쁨의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변장술을 아나요?" "색마의 솜씨치곤 그런대로 봐줄만 할거요." 황보성운의 말에 설연청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곤 고개를 떨구었다. "저…… 할 말이 있어요." "이 색마에게 말이오? 그게 뭐요?" 설연청은 더욱 얼굴이 빨개지더니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까…… 당신에게…… 화낸 것…… 사과…… 하고 싶어요. 솔직히…… 그건 본심이 아니었어요. 단지 그 순간 너무 화가 나서……" "하하하……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걱정 마시오." 설연청의 얼굴이 환하게 변화했다. "정말이예요?" "물론, 색마보고 색마라고 하는데 어찌 화를 낼 수가 있겠소?" "다…… 당신…… 정말……" "하하하하! 농담이오, 농담! 소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와 잠시 농담을 해본거요!" 설연청은 수줍음에 온통 귓뿌리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살며시 황보성운을 훔쳐보았다.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지금 이 순간 설연청은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사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가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한 차례 씩 웃었다. 그리고 침상 위에 있는 중년인의 옷가지를 들어 올렸다. "낭자! 조금만 고개를 돌려주시오." "왜요?" "싫으면 관두고." 말과 함께 황보성운은 겉옷을 벗었다. 설연청은 황보성운의 의도를 즉각 알아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황보성운은 급히 겉옷을 벗고 흑의를 걸쳤다. 그리고 조속히 현현비록에 적힌 환용술(幻容術)을 펼쳤다. 순간, 그의 안면근육이 씰룩이더니 흡사 무슨 밀가루 반죽처럼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완전히 즉사한 중년인과 똑같이 변해 버렸다. "됐소!" 황보성운은 설연청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설연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앗!" 그녀는 경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세상에……) 너무도 똑같지 않은가? 얼굴에 낀 음침함이라든지 웃을 때 근육이 움직이는 모양 등 실 로 그것은 차라리 중년인 바로 그였다. 황보성운이 입을 열었다. "어떻소? 좀 비슷한 것 같소?" 한데, 그 목소리까지도 완전히 똑같은 것이었다. 설연청은 혀를 내둘렀다. "그의 부모가 봐도 모를거예요." 황보성운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침상에 있는 매화의 옷을 들어 설연청에게 던져주었다. "낭자! 얼굴은 내가 고쳐줄테니 옷이나 갈아 입으시오." 황보성운은 잠시 멈칫거리다 곧 침상으로 가서 이불섭을 뜯고 속에 들어있는 솜을 꺼냈다. 그리고는 솜뭉치를 설연청에게 던져주며 입을 열었다. "설낭자! 아무래도 매화라는 여인이 낭자보다는 몸이 좀 풍만한 듯하니 이 솜으로 대강 알아서 하시오." 설연청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떼었다. "제가 알아서 할테니 몸이나 돌리세요." 황보성운은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2 잠시 설연청은 황보성운의 등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옷을 벗어 내려갔다. 스르륵---- 스르륵---- 황보성운은 등 뒤에서 옷 벗는 소리가 들리자 왠지 모르게 가슴 에 뜨거운 기운이 치밀었다. 매화의 알몸을 보고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그가 지금은 옷 벗는 소리에 이렇게 가슴이 뜨거워지다니……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무심히 전면 벽에 있는 물건들을 살폈다. 한데 그 순간, 황보성운의 눈이 크게 흡떠졌다. 그의 전면 약간 좌측 벽에 하나의 동경(銅鏡)이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헌데 놀랍게도 그 거울 속에는 지금 한 명의 소녀가 조심스럽게 옷을 벗고 있었다. (아뿔사!) 황보성운의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그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허나 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선은 그쪽을 쫓고 있었다. 지금 거울 속에서는 절세의 미녀가 막 상의를 완전히 벗어 던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그녀는 황보성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허나 자신의 모습이 동경 속에 여지없이 비치리라고는 어디 상상인들 했을 것인가? 그녀는 상의를 완전히 벗어젖혔다. 순간, 분홍빛 젖가리개가 나타났다. 뒤이어 그녀는 치마끈을 풀렀다. 그러자 스르륵 치마가 발목으로 떨어지고 속바지가 나타났다. 그녀는 매화의 옷을 입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솜뭉치를 바라보며 머뭇머뭇 하더니 곧 솜뭉치를 들었다. 그리고 급히 자신의 젖가리개를 풀었다. 순간, 황보성운의 숨이 일시에 꽉 막혀버렸다. 아! 거기에는 실로 아름다운 백옥빛의 젖가슴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 매화처럼 풍만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소담스럽고 귀여웠다. 게다가 그 가슴 위로 막 피어오르는 꽃 봉우리처럼 떨고 있는 젖꼭지…… 그것은 아름답다 못해 충격적인 것이었다. 설연청은 자신의 몸이 모두 비춰지는 것도 모르고 연신 황보성운의 동태를 살폈다. 동시에 그녀는 급급히 솜뭉치를 잘라 가슴에 얹었다. 그리고 젖가리개로 다시 묶어버렸다. 또한 허리에도 약간의 솜을 집어넣은 다음 황급히 옷을 입었다. 솜뭉치는 허리와 가슴에 불쑥 솟아있어 좀 어색했다. 그녀는 가슴을 몇 번 쓰다듬고 눌렀다. 그리고 허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자 감쪽같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녀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 됐어요." 황보성운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겸연쩍은 미소가 흘렀다. 설연청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옷은 다 입었는데 변장은 어떻게 하죠?" "우선 자리에 앉으시오." 황보성운은 바닥을 가리켰다. 순순히 설연청은 바닥에 앉았다. "두 눈을 감으시오." 설연청은 가볍게 홍조를 띄우며 눈을 스르르 내리 감았다. 황보성운은 손을 그녀의 얼굴에 대었다. 순간, 설연청은 한 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서서히 황보성운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 위를 움직였다. 설연청은 가슴이 격동됨을 느꼈다. 동시에 찌릿찌릿 전류같이 전신을 휩쓰는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그녀는 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점차 몽롱한 환상 속에 빠져들어갔다. 이윽고, "다 됐소." 황보성운의 손이 떼어졌다. 설연청은 살포시 눈을 떴다. 이어 가볍게 도화색이 물든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저의 얼굴이 완전히 바뀌었나요?" "그렇소." 설연청은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경쾌하게 입을 놀렸다. "저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어요. 어떻게 변했는지!" 그녀는 속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에 벽에 걸린 동경이 들어왔다. 그녀는 조속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황보성운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때, "아!" 설연청은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며 탄성을 울렸다. 매화의 모습과 추호도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리려 했다. 헌데 거울 속에 황보성운의 얼굴이 비쳐있지 않은가? 찰나, 설연청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확 치밀었다. (이…… 이제보니…… 이 거울 속에……) 돌연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몸을 홱 돌렸다. "다…… 당신…… 이미……?" "설낭자! 고의는 아니었소." 황보성운은 가볍게 고소를 지었다. 순간, 설연청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급변되었다. "다, 당신…… 당신!" "낭자! 이해해 주시오." 황보성운은 크게 당황하여 부지중에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설연청은 느닷없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 당신…… 너무해요. 모든 것을…… 다 봤으면서도…… 그렇게 모른 척 하다니……" "나, 낭자……!" 황보성운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설연청은 계속 흐느꼈다. "흐흐흑…… 흑!"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들썩였다. 황보성운은 길게 탄식을 했다. "휴우, 설낭자! 이해해 주시오. 정말 이건 고의가 아니었소." 설연청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황보성운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입술을 지그시 물며 입을 열었다. "당신!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그게…… 무슨?" "흥!" 설연청은 얼룩진 얼굴에 한 가닥 싸늘한 기색을 떠올렸다. "남에게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몸을 당신이 봤는데 당신은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예요?" "허, 허지만……" 황보성운은 난처했다. 그의 얼굴에 짙은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자, 설연청의 안색이 창백하게 급변했다. "비록, 몸을 준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나의 몸을 본 이상 나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수 없는 몸이예요." 설연청의 어조는 사뭇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황보성운은 더욱 더 당황했다. (이것 정말 큰일이로군. 걸려도 단단히 걸렸으니……) 황보성운은 짙은 난색을 표명하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책임을 져야 마땅해요." 설연청의 말은 단호했다. 황보성운은 흠칫했다. 허나 이내 입가에 고소(苦笑)를 떠올렸다. "설낭자! 당신의 생각은 너무 극단적인 것이오." 황보성운의 어조는 한없이 유연하고 부드러워졌다. "당신은 혹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소?" 설연청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아내가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소?" 황보성운의 말에 설연청의 안색이 일시에 밀랍처럼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게다가 입술은 흡사 엄동설한을 만난 듯 부들부들 떨었다. "호, 혼…… 인을 했나요?" 간신히 그녀는 입을 열었다. 황보성운은 무겁게 대답했다. "그렇소." "그, 그럴 수가……?" 설연청의 안색이 온통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황보성운은 다시 입을 떼었다. "낭자, 그러니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하고 넘어갑시다. 마음을 돌리시오." 지극히 설득적인 어조였다. 설연청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변하였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는 무엇을 결심한 듯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좋아요." 황보성운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잘 생각했소. 낭자같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반드시 훌륭한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이오." 설연청은 빤히 황보성운의 얼굴을 응시했다. "당신은 제 말 뜻을 오해했어요." "아니! 그게 무슨……" 황보성운은 일순 다시 당황했다. 설연청은 계속 황보성운을 뚫어질 듯 직시했다. "당신이 결혼한 사람이라도 좋아요." 황보성운은 무엇이 호되게 뒷골을 후려치는 기분을 느꼈다. 설연청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해갔다. "저의 의식 관념으로는 이미 저는 정조를 잃은 여인이예요. 당신 아닌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다는 것은 절대 저 자신이 용납할 수 없어요." 급기야 그녀는 고개를 떨구어 방바닥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돌연 고개를 휙 쳐들더니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당신이 설사 삼처사첩(三妻四妾)을 거느린 사람이라도 저는 괜찮아요. 당신만 받아준다면!" 황보성운은 아찔한 충격을 느꼈다. 그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나, 낭자! 지금 낭자는 한때의 충동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황보성운은 급히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분명! 훗날 분명히 후회할 것이오. 그렇소,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오." "후회하지 않아요." 다시 설연청의 두 눈에 가득 눈물이 고여 올랐다. 그녀는 아주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부인이 아니라도 좋아요. 설사 첩이라도……" "낭자! 그게 무슨 말이오!" 황보성운은 버럭 화를 냈다. 허나, 이내 사정조로 어투를 고쳐 입을 열었다. "낭자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스스로를 격하시키려 하오?" 황보성운의 가슴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이때 설연청의 창백한 안색에 일말의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리 숙였다. "그…… 것은 이미…… 저의 마음 속에…… 당신이란…… 사람이 꽉 차있기 때문…… 사랑하기 때문이예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긴 무언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은 이처럼 한 사람의 전 생애를 흔들어 무언(無言)의 말을 시키고 다시 그 어느 곳으로 승화해가는 그 어떤 것인지…… 하여튼 지금 그녀의 모습은 실로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이때, "휴---- 우!" 황보성운의 입에서 갑자기 긴 탄식이 터졌다. 지금 그의 심정은 매우 착잡한 것이었다. (연미는 나의 아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소녀는 나의 처제다. 어찌 처제를 첩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황보성운은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천정에 떨어졌다. "설낭자! 낭자가 어떻게 생각해도 좋소. 허나 나와 낭자는 절대 결합할 수 없소." "그…… 게 무슨?" 설연청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황보성운은 침통하게 뇌까렸다. "그 이유는 낭자가 훗날 알게 될 것이오." 일순 설연청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더니 흡사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녀의 동공(瞳孔)은 일시에 열려 희뿌옇게 되어버렸다. 망연자실(茫然自失)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거의 실성한 듯 보였다. 헌데 다음 순간, 돌연 그녀는 손을 번쩍 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손으로 천령개(天靈蓋)를 후려쳐갔다. "이게 무슨 짓!" 황보성운은 섬전처럼 그녀의 손을 낚아채 버렸다. 그러자 설연청은 핏기가 하나없는 얼굴에 싸늘한 안색을 띄웠다. "당신이 거절한다면 저는 오직 이 길밖에 택할 길이 없어요." 황보성운은 어이가 없었다. 허나 어찌할 것인가……? 그는 길게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소, 설낭자…… 허락하오." 황보성운의 허탈한 음성이었다. 순간, 설연청의 안색이 일시에 환하게 밝아졌다. "아아……! 공자……" 그녀는 긴장이 풀렸는지 휘청 몸을 쓰러뜨렸다. 황보성운은 그녀를 황급히 부축했다. 그러자 설연청은 황보성운의 품에 깊이 안겨들었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머리결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떠올라 있었다. (여복(女福)인지 여난(女難)이지…… 정말……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제 27 장 나타난 黑白雙環 1 어느 석실(石室), 사방으로 음침한 분위기가 섬뜩하게 감돌고 있었다. 석실의 사방 구석에 매달린 네 개의 등잔(燈盞)에서 비추어진 흐릿한 불빛이 어두운 암흑을 조금이나마 밀어내고 있었다.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컴컴한 석면(石面)에 불빛이 닿아 흡사 무슨 흉칙한 물건처럼 번들거렸다. 석실 중앙에는 두 개의 돌 침상이 놓여있었다. 헌데 이 무슨 또 해괴한 일인가? 그 돌침상 위에는 두 명의 여인이 죽은 듯이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여인들은 실로 인세(人世)에 보기 드문 기막힌 절세(絶世)의 미녀(美女)들이었다. 그들은 일제의 미동도 없이 시종 그 형태처럼 굳은 듯 보였다. 그 두 개의 석탁 주변으론 열 두 개의 향로가 놓여 있었는데, 그 향로의 표면엔 십이지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바로 그 향로로부터 기이한 열 두 가닥의 향연(香煙)이 뿜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 푸르스름한 향연은 흡사 무슨 대롱처럼 피어올라가 석실의 천정에 부딪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석실의 천정에 부딪친 향연은 기이하게 엉켜 하나의 청무(靑霧)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석탁을 좌우로 하고 외팔의 백발괴인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아! 그는 바로 적양관주였다. 황보성운이 쇠신이 닳도록 찾아 다닌 적양관주(赤陽關主), 그가 지금 그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헌데, 괴이무쌍하게도 그가 호흡할 때마다, 천정에 엉켜있던 청무(靑霧)가 무슨 흡인력에 따라 그의 코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점차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자 계속 천정에 엉킨 청무가 엷어졌다. 그리고 그럴 수록 기괴하게도 적양관주의 얼굴빛은 점차 푸르게 변색되어 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천정 위에 모여있던 청무가 거의 사라지고 적양관주의 얼굴은 보기에도 섬뜩할 만큼 짙푸른 색깔을 띈 괴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전신에 은은한 청광이 서리는 것이 아닌가? 어느순간 돌연 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찰나, 그의 두 눈으로부터 실로 무시무시한 청광이 한 자나 내뻗쳤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크흐흐흐…… 성공이다, 성공이야! 크흐흐……" 실로 전신을 갈가리 찢을 듯한 괴소가 석실을 뒤흔들었다. 지금 그의 두 눈에는 음흉한 흡족감이 넘실거렸다. "크흐흐…… 청살음혼무(靑殺陰魂霧)의 기운이 체내에서 광란을 하는구나. 크크……" 그의 괴소는 한 동안 석실 안을 뒤흔들었다. 그는 음흉한 눈길을 식탁 위로 던졌다. "이제 저 계집들의 음기(陰氣)만 취한다면 청살독황음혼공(靑殺毒荒陰魂功)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마공(魔功)! 천하무적의 마공이 내 손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크하하하하하……" 천하무적의 마공(魔功), 청살독황음혼공(靑殺毒荒陰魂功)! 그것이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길래 적양관주가 그토록 미친 듯한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좋아한단 말인가? 원래 적양관주는 극혈천독공을 연마하려다 황보성운의 제지로 실패했었다. 그 후, 그는 단전이 파괴되었다. 더군다나 외팔이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다시 독혈천독공을 재연마할 수가 없었다. 헌데 얼마 전, 우연히 한 권의 비급을 취득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칠백 년 전 사도(邪道) 제일의 마두인 청살독제(靑殺毒帝), 그가 남긴 청살경(靑殺經)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후 그는 이것을 익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알고 있는 독혈천독공의 장점과 청살마공의 장점을 합하여 희대의 마공을 창출해냈으니, 그 마공이 바로 청살독황음혼공(靑殺毒荒陰魂功)인 것이다. 적양관주는 천천히 석탁 옆으로 다가갔다. 이어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두 여인의 수혈을 풀은 것이었다. 설연미와 소향은 차츰 제정신이 돌아왔다. 허나, 몸은 움직일 수 없어 눈만 뜨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들은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 적양관주가 음침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흐흐흐…… 진정 천하에 둘도 없는 미인들이다." 설연미와 소향은 전신을 으스스 떨었다. "허나, 너희들의 그 아름다움도 오늘로써 사라지게 될 것이다." 두 여인은 오싹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에 의해 음기(陰氣)를 빼앗기고 나면…… 크흐흐흐" 적양관주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음흉스런 괴소를 흘렸다. "너희들의 그 아름다운 모습도 한 구의 백골로 변할 것이다. 크하하하……" 소향과 설연미는 적양관주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전신으로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허나 일 촌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니…… 두 여인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적양관주를 노려보았다. 적양관주가 음흉맞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 마두야! 지금 무슨 짓을……!" 설연미가 부르짖자 적양관주는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내가 비록 색을 밝히는 자는 아니나 네년들의 모습을 보니 진정 마음이 동하는구나!" 적양관주는 설연미의 옷고름을 풀었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소, 손을 멈추지 못하겠느냐!" "크하하하…… 계집애야, 반항해도 소용없다. 조금 있으면 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적양관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에 의해 쾌락의 극치를 맛보게 될 것이다." 적양관주의 손이 설연미의 상의를 벗겨냈다. 그러자 분홍빛 속옷이 나타났다. 적양관주는 속옷을 움켜쥐곤 거칠게 당겨버렸다. 순간, "흐읍……!" 적양관주는 눈을 부릅뜬 채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곳에는 실로 아름답기 짝이없는 여인의 육봉(肉峰)이 나타나 있었다. 너무나 희어 파아란 실핏줄이 그대로 투영될 듯 비치는 그 가슴은 너무나 팽팽하게 솟아 마치 적양관주의 눈을 찌를 듯했다. 게다가 그 끝엔 보기에도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분홍빛의 유실이 맺혀 있었다. 설연미는 아예 두 눈을 감아버렸다. 감은 눈 사이로 구슬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기막힌 촉감이로군." 적양관주는 시커먼 손으로 젖가슴을 쓰다듬다가 손가락 끝으로 유실을 슬쩍 퉁겨보곤 연신 음흉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우는 것을 보니 더욱 더 매력적이구나." 그는 설연미의 치마를 아래로 당겼다. 그러자 고의가 나타났다. 적양관주는 침을 꿀꺽 삼키곤 고의 위로 손을 올려보았다. 설연미는 정신이 아득했다. 그런 그녀의 귀로 적양관주의 괴소가 들려왔다. "평생 이렇게 흥분된 적은 처음이야……" 설연미는 상대의 손에 의해 고의마저 벗겨지고 있음을 느꼈다. 잠시 후, 설연미는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나(全裸)로 변했다. 설연미는 이렇게 더럽혀질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혀를 물었다. 그 순간 적양관주가 그녀의 혈도를 찍었다. 적양관주는 연신 득의의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자결하려고? 안돼지 안돼. 네가 죽으면 모든 공이 수포로 변하거늘…… 어림도 없지." 그는 꿀꺽 침을 삼켰다. "하여튼 진정 기가 막힌 몸매다." 적양관주는 설연미의 몸을 훑어보다가 괴소를 터트리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은밀한 삼림(森林)을 쓰다듬었다. 파르르…… 설연미의 몸이 잔물결치듯 경련했다. "흐흐흐…… 계집, 조금만 기다려라. 곧 끝내주는 쾌락을 맛보게 해줄테니까!" 그는 옆 침상에 누워있는 소향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소향의 옷을 벗겨나갔다. "손을 멈춰라!" 소향은 발악적으로 외쳤다. 허나, 적양관주는 시종 여유작작한 태도로 입가에 음흉한 괴소를 흘렸다. "계집애야! 반항해도 소용없다. 보아하니 너는 처녀도 아닌 것이 무어 그리 부끄러워 하느냐?" 소향은 이를 갈았다. "반드시 공자님께서 나타나서 네놈을 찢어죽일 것이다." "흐흐흐…… 옥면신수 말이냐?" 적양관주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의 기색이 흘렀다. "흥! 그놈이 이 고루곡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찾는다 해도 그땐 이미 노부의 무공은 완성되어 있을 때다." 그의 얼굴에 잔혹한 살기가 떠올랐다. "그놈은 분명 내 손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 적양관주는 소향의 옷마저 완전히 벗겨 버렸다. 결국, 두 천하절색 미녀의 여체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석실 안은 기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석실에 가득한 살기와 두 절색미녀에서 우러나는 천상선경(天上仙景)이 어우러져 기묘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두 미녀의 몸매를 넋나간 듯 바라보던 적양관주가 돌연 품 속에 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음! 흐흐흐…… 이게 무엇인 줄 아느냐?" "……!" "……!" 설연미와 소향은 말없이 적양관주를 노려보았다. 그녀들의 눈 속엔 증오와 공포의 기색이 역력했다. 적양관주의 손바닥에는 기묘하게 새빨간 단약(丹藥) 두 알이 흉칙하게 빛났다. "이것은 음양최혼단(陰陽催魂丹)으로 너희들의 음기를 최고로 만들 것이다. 흐흐흐……" 적양관주는 음흉한 눈길로 두 여인들을 번갈아 응시했다. "이것을 먹으면 아무리 정조가 굳은 여인도 천하의 음탕한 요부로 변하게 되고 만다. 물론 해약은 없지! 크크크!" 적양관주는 수중의 단약을 두 여인의 입에 넣었다. 두 여인은 반항하려 했지만 혈도가 찍힌 그녀들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단약은 입 속으로 들어가더니 스르륵 삽시간에 녹아버렸다. 그리고 한순간에 목구멍을 타고 흘러 넘어가 버렸다. 잠시 후, 두 여인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전신에 뜨거운 기운이 치민 것이다. 그 기운은 순식간에 격렬한 느낌을 몰고왔다. 급기야 그녀들의 전신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야릇한 충동에 못이겨 두 여인은 연신 신음을 발했다. "으으음…… 으음……" "아아음……" 그들의 육체가 온통 춘기에 휩싸여 버렸다. "흐흐흐…… 참기가 괴롭겠지. 허나, 조금만 기다려라. 내 너희들을 즐겁게 해줄테니!" 적양관주는 급속도로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때, "부문주님!" 밖에서 다급한 외침성이 울려왔다. 2 적양관주는 손을 멈추고 노화가 치민 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장곤입니다." "절대 이곳에 오지 말라고 한 말을 잊었느냐?" "화급을 요하는 일입니다." 밖에서 매우 다급한 듯한 말이 들려왔다. 적양관주의 두 눈썹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들어오너라." 그러자 석실 안으로 두 명의 사람이 불쑥 튀어들었다. 그들은 장곤과 매화였다. 순간, 돌침상 위의 나녀들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안색이 대변했다. "장곤! 무슨 일이냐!" 적양관주의 음침한 표정에 일말의 노화를 떠올랐다. 장곤은 황급하게 대답했다. "큰일입니다." "뭐가 큰일났단 말이냐?" "옥면신수가 도착했습니다." "뭐라고?" 적양관주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놈이 이곳에 왔단 말이냐?" "네!" "빌어먹을……! 하루만 늦게 와도 되는데 하필이면……" 적양관주는 다된 일이 어그러지자 안면을 심하게 씰룩였다. "대체 그놈은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장곤은 갑자기 앞으로 훌쩍 다가섰다. 그리곤 적양관주의 얼굴에 무지막지한 일장을 발산하며 외쳤다. "바로 여기다!" 적양관주는 황망한 중에 자신도 모르게 일장을 맞받았다. 순간, 펑! 적양관주는 뒤로 여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네…… 네놈이……" 적양관주의 안색이 대변했다. 순간, 목전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돌연 장곤의 안면 근육이 삽시간에 꿈틀거리며 변하더니 다른 얼굴로 바뀌는 게 아닌가? 그것은 바로 황보성운이었다. "적양관주! 설마 나의 얼굴을 잊지는 않았겠지?" 황보성운의 추상같은 일갈이 떨어졌다. 적양관주는 대경실색했다. "오…… 옥면신수!" "고…… 공자님!" 곁에 있던 소향이 탄성을 내질렀다. 황보성운은 소향에게 시선을 던졌다. "걱정마라! 소향! 내가 곧 구해줄테니까!" 소향은 기쁨과 치욕을 동시에 느꼈다. 황보성운이 온 것은 기뻤지만, 그에게 이런 치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때 황보성운이 고개를 돌려 적양관주를 서릿발처럼 쏘아보았다. 적양관주는 두려움에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적양관주! 오늘 네놈이 도망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드시 네놈을 지옥으로 보내줄 것이다!" 황보성운의 냉랭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적양관주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애송이 놈! 웃기지 마라! 저번에는 내가 패했지만 오늘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적양관주의 안색이 음산하게 돌변했다. "비록 청살독황음혼공을 십성밖에 터득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히 네놈쯤은 물리칠 수 있다." 황보성운은 냉랭히 코웃음치며 힐끗 설연청을 바라보았다. "설낭자! 어서 저 두 명에게 옷을 입히도록 하시오." "네!" 설연청은 급히 설연미에게 달려갔다. 이때 적양관주의 음산한 괴소가 뼈에 서릴 듯 울렸다. "으흐흐흐…… 애송이놈! 청살독황음혼공의 맛을 보아라!" 순간 목전에서 가공할 광경이 일어났다. 돌연, 적양관주의 전신에서 시퍼런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시퍼런 불길은 몸 주위 일 장까지 내뻗쳤다. 그러자 전신이 수십 개의 영상으로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의 안색이 냉막하게 변했다. (으---- 음! 무서운 사공(邪功)이다. 전에 비해 비교도 안될 정도로 무공이 증가했구나!) "받아랏!" 적양관주의 음산무비한 일갈이 괴성처럼 터져올랐다. 동시에 양 손바닥으로부터 섬뜩한 시퍼런 불줄기가 격출되었다. 그 불꽃은 흡사 귀신의 머리카락처럼 뻗쳐 황보성운에게 일시에 덮쳐들었다. 황보성운은 부지중에 일장을 날려 맞받아쳤다. "탄(彈)----!" 현무신공의 십자결 중 탄자결이 시출된 것이었다. 순간, 꽈르릉! 굉음이 석실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황보성운은 거센 충격을 느끼며 뒤로 무려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고야 말았다. 한편 적양관주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뒤 만면에 희색을 떠올리고 있었다. 황보성운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는 서서히 손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또 다시 그의 전신으로 살기등등한 청색 불길이 뒤덮였다. 순간, "애송아! 뒈져랏!" 적양관주가 버럭 대갈을 터트리며 엄청난 강기를 발산시켰다. 석실 안은 온통 흉흉(凶凶)한 청광(靑光)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엄청난 위력의 암경(暗勁)이 황보성운의 전신으로 덮쳐들었다. 황보성운도 지체없이 현무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전신으로 오색광망이 한 차례 휘돌더니 은은한 은색의 서광으로 물들었다. 순간, "현광무흔(玄光無痕)----" 현무구장의 개세절초인 제 육초가 전개된 것이었다. 다음 순간, 꽈르르르르릉! 엄청난 경천동지의 굉음이 석실을 무너뜨릴 듯 후려쳤다. 그러자 청광과 무수한 장영이 현란히 부딪치는 가운데 석실에 커다란 웅덩이가 파이며 자욱이 난석과 돌가루가 날렸다. 이윽고 분분히 날리던 난석과 돌가루가 가라앉고 두 명의 인영이 드러났다. 그들의 상태는 완전히 막상막하의 호각지세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경악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황보성운은 침중한 표정으로 적양관주를 바라보았다. (놀랍다. 이 노마의 무학이 이토록 증진되다니…… 전에 비교한다면 상대도 안될 정도구나. 오히려 잔양신마보다 한수가 더 높아진 것 같구나!) 한편 적양관주는 두 눈을 휩뜨고 황보성운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 었다. (이…… 이럴 수가? 천하 최고의 사공인 청살독황음혼공을 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놈을 죽이지 못하다니……) 그의 안색은 수시로 급변했다. (대체 저놈의 무공은 과연 얼마나 깊고 오묘하단 말인가? 도저히 추측을 불허하는구나!) 그들은 다시 개세무비의 절도들로 경천동지의 결투를 벌였다. 황보성운은 현무구장의 모든 정수를 다 펼쳤다. 적양관주 역시 청살독황음혼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황보성운에 대항했다. 통천가공할 대결투였다. 무쇠보다도 단단한 청옥석들이 갈라지고 이곳 저곳에 무수히 많은 웅덩이가 패였다. 또한, 분분히 날리는 난석과 돌가루는 온통 석실 안을 자욱이 메우고 있었다. 허나, 막상막하의 결전일 뿐 아무도 쉽사리 패색이 드러날 성싶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싸운다면 결국 양패구상(兩敗俱傷)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이때 돌연, 황보성운이 왼손 소맷자락을 떨치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좋다, 적양관주! 놀랄 만큼 실력이 향상되었구나. 허나, 이번에는 네놈도 끝장이다." 적양관주의 얼굴에 칼 끝같은 긴장이 감돌았다. 왠지 황보성운의 말이 단순한 위협같지가 않다고 느낀 것이다. 황보성운은 왼손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천하의 신성 백환(白環)의 천상선기(天上善氣)가 하늘 위로 뻗 치도다!" 황보성운의 왼쪽 손목에서 찬란한 백광(白光)이 현란하게 내뻗었다. 그 빛은 삽시간에 음침한 석실을 대낮같이 밝혔다. 적양관주가 놀라는 순간, 어느새 황보성운의 손에는 투명한 백색의 도(刀)가 들려있었다. 적양관주는 왠지 그 신비스런 빛을 대하자 천근 같은 공포감을 느꼈다. 적양관주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황보성운의 두 눈에 기묘한 신광이 번뜩였다. "후후후…… 적양관주! 두려우냐?" 그 말에 적양관주는 울화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적양관주는 어깨를 크게 들썩여 양손을 움직였다. 그의 장심으로부터 무시무시한 새파란 불줄기가 격사되었다. 허나 황보성운이 슬쩍 왼손에 있는 도(刀)를 흔들어 백광을 뻗자 격사되어 오던 청광(靑光)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 아니!" 적양관주는 대경실색했다. 황보성운은 도(刀)를 비껴 들었다. "성천구도(聖天九刀)의 진수를 보여 주겠다." 황보성운은 지체없이 도(刀)를 휘둘렀다. 찰나, 허공에 수천만의 도광(刀光)이 현란무비하게 난무했다. 또한, 그곳으로부터 뿜어나온 백색 도영(刀影)은 흡사 우박치듯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의 어마어마한 도기(刀氣)가 자신으로 덮쳐내리자 적양관주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음을 느꼈다. 한데, 쳐내려오던 도기는 기이하게도 몸 바로 일 촌 앞에서 슬쩍 비켜나가는 것이 아닌가? 계속 그 도기는 피할 수 없는데도 슬쩍슬쩍 비켜 나가기만 하는 것이었다. (아…… 이상하다. 이놈의 도법(刀法)이 너무나 신묘하구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데 어찌 죽이지 않고 슬쩍슬쩍 비켜나가기만 하는 것일까?) 적양관주는 지극히 의혹스런 눈길로 도법을 응시했다. 어느덧 십 초가 흘러갔다. 허나, 적양관주는 일초도 반격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점차 참을 수 없는 수치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수치감은 순식간에 분노로 돌변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청살독황음혼공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번엔 독혈참시(毒血斬屍)다!" 다음 순간, 삽시간에 그의 전신이 먹빛으로 화(化)했다. 그러더니 돌연 전신이 퉁퉁 부어오르고 모발이 쇠철사처럼 무섭게 곤두섰다. 게다가, 지지지지지지지----! 전신의 피부에 가늘게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대경했다. (저 수법은 독혈천독공 최후 마공인 독혈참시공이 아닌가? 그렇다면 놈이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하겠단 뜻인가?) 그렇다. 지금 적양관주가 전개하고 있는 건 독혈천독공의 최후 초식인 독혈참시였다. 독혈참시란 상상도 못할 만큼 끔찍한 화골분체(化骨分體)의 수법이었다. 육체를 풍선처럼 터트려 상대도 죽이 고, 자신도 죽는 무서운 수법이 바로 독혈참시였다. 한 구석에서 숨을 죽이며 지켜 보던 세 여인도 대경실색했다. 그녀들은 생전 듣도 보지도 못한 괴현상에 무서운 공포를 느꼈다. 특히 설연청과 소향은 황보성운을 응시하며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허나, 이때 황보성운의 안색은 서릿발처럼 냉막하게 굳어있었다. (틀렸다! 백환의 서기를 받고도 심성이 여전히 악한 것을 보니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마두다.) 황보성운은 내심 마음을 굳히며 서서히 오른손을 떨쳤다. "천하의 마성 흑환의 일섬(一閃)이 그어지도다." 순간, 황보성운의 오른손에서 무시무한 흑광(黑光)이 섬뜩하게 내뻗쳤다. 또한, 그 흑광 속에는 수백 줄기의 혈광(血光)이 번뜩이는 것이었다. 찰나, 어느새 그의 손에는 혈광(血光)과 흑광(黑光)에 덮인 하나의 도(刀)가 들려 있었다. 황보성운은 그 혈흑(血黑)빛의 도를 비껴들며 분연히 외쳤다. "혈천도(血天刀)의 일도(一刀) 아래 천하 제마(諸魔) 즉사하도다." 찰나, 쐐---- 애---- 액! 가공할 파공음이 대기를 갈랐다. 동시에, "끄---- 아---- 악!" 폐부를 도려내는 참혹한 비명이 울렸다. 찰나지간 석실을 물들였던 흑광과 혈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보성운은 어느새 흑백 쌍환을 손목으로 거두었던 것이다. 단지 적양관주만이 가슴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린 채 곧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크…… 으…… 으…… 으……" 그 구멍으로부터는 핏줄기가 흡사 분수처럼 솟아나왔다. 적양관주는 손을 들어 핏줄기를 막았다. "분…… 하다. 네…… 네놈에게…… 내가 패하다니……" 황보성운이 싸늘하게 웃었다. "독혈참시가 무섭긴 하지만 난 이미 만독진해를 통해 그 수법을 알고 있었어." 적양관주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허나…… 결코…… 나 혼자 가지는 않는다." 적양관주는 손을 뻗어 어떤 곳을 힘껏 눌렀다. 동시에, 그의 몸이 그대로 풍선처럼 터져버렸다. 황보성운은 급히 적양관주의 육편을 피했다. 쿠르릉! 이때, 창졸간에 석실 바닥이 통째로 떨어져 내렸다. "아…… 아니!" 황보성운은 급급히 허공으로 솟구쳐 멈추었다. 허나, 그의 안색은 곧 급변했다. "으---- 아---- 악!" 설씨 자매와 소향이 아래로 떨어져가고 있지 않은가? 황보성운은 급급히 신형을 밑으로 날렸다. 황보성운의 신형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이윽고 석실 바닥은 다시 원래 위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던 듯 석실 안에는 덩그라니 두 개의 석탁만이 놓여 있었다. 제 28 장 기이한 因緣 1 한편, 황보성운은 내공을 끌어올려 체중을 최대한 무겁게 한 후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에 가속을 붙였다. 사방은 칠흑같은 암흑이었지만 황보성운의 안력은 그 모든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눈에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세 여인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의 신형이 세 여인 곁에 접근했다. 동시에, 그는 급히 현무신공의 흡자결(吸字訣)을 운행했다. 그러자, 세 여인의 떨어지는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 순간, 황보성운은 순식간에 세 여인을 잡아챘다. 그리고 창졸간에 우렁찬 호흡성을 내질렀다. "후---- 웁!" 그는 찰나지간에 현현비록의 표풍신법(漂風神法)을 전개한 것이었다. 세 사람을 부둥켜 안은 황보성운의 전신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그는 서서히 허공에서 낙엽처럼 밑으로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황보성운은 가볍게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곧 세 여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녀들은 모두 이미 혼절해 있는 상태였다. "후---- 우!" 황보성운은 긴 한숨을 내뱉았다. (정말 큰일날 뻔했군. 적양관주 그놈이 설마 이렇게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구나!) 마음이 어느정도 가라앉은 황보성운은 천천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곳은 하나의 석실(石室)이었다. 허나 상당히 넓었다. 황보성운은 세 여인을 내려놓고 천천히 상세를 살폈다. "으---- 음! 이제보니 단순히 기력이 막힌 것에 불과하군." 황보성운은 신속히 세 여인의 혈도를 가볍게 쳤다. 그러자, "음----!" 짤막한 신음을 토하며 설연청이 깨어났다. 그리고 즉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순간, 그녀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설낭자! 괜찮겠소?" 황보성운은 불쑥 한 걸음 다가갔다. "누…… 누구예요?" 설연청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황보성운은 의외의 사태에 걸음을 멈추었다. 일순, 한 생각이 황보성운의 머릿속에 번갯불처럼 튀어올랐다. (아! 이제보니 설연청은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이 석실이 어둡다는 이야긴데……) 실상 이 석실에는 칠흑의 어둠이 깔려있었다. 단지 황보성운은 심후한 내공 덕분에 석실 내(內)의 칠흑같은 어둠을 대낮처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황보성운은 입가에 고소를 떠올렸다. "설낭자! 나의 음성을 기억 못하겠소?" 설연청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공자님이셨군요." 그러더니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한데, 저의 언니는?" "옆에 있소이다." "언니는 괜찮은가요?" "현재로선 별 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소." "아…… 다행이예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돌연 물었다. "그런데 왜 깨어나지 않죠?" 이때, "으---- 음!" "음!" 설연미와 소향이 깨어났다. 황보성운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깨어났소." 한데 다음 순간, 황보성운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깨어나는 설연미와 소향의 표정이 극히 이상한 것이 아닌가? 그녀들은 마치 무엇을 갈구하는 듯 뜨거운 숨을 연신 몰아 쉬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옆에 있는 설연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설낭자! 화섭자 있소?" "네." "불좀 붙여보시오." 설연청은 품 속을 뒤져 화섭자를 꺼낸 뒤 그곳에 불을 붙였다. 일순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자 설연미와 소향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들은 바닥에 누운 채로 기묘하게 전신을 비틀고 있었다. 두 여인의 피부는 지금 마치 밝은 도화빛처럼 달아 올라 있었다. 계속 그녀들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언니……" 설연청은 안타까운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대체 이게 어찌 된거죠?" 황보성운은 급히 그녀들의 전신을 샅샅이 살폈다. 순간,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큰일이오! 이들은 모두 지극히 음독한 최음약에 당했소." 설연청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 그럼 어떻게 하면 좋죠?" 그녀의 얼굴은 곧 울음이라도 터질 듯한 모습이었다. 황보성운이 그녀를 위로했다. "내가 한 번 치료해 보겠소." 황보성운은 두 여인의 혈도를 찍어 움직임을 멎게한 후 그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현무신공을 끌어올렸다. 그런 연후에 흡자결을 이용해 그들의 체내에 있는 최음약의 기운을 흡수하려 했다. 예전에 팽소연의 몸 속에서 독기를 빨아낸 적이 있기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허나, 곧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느꼈다. 두 여인의 몸 속에 깃든 음약의 기운은 너무나 강했고 이미 세포 구석 구석까지 흡수된 상태였다. 실상 적양관주가 두 여인에게 먹인 음양최혼단(陰陽催魂丹)은 너무나 음기가 강해 해약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리해서라도 그것을 빨아들이려 한다면 할 수도 있었다. 허나 그렇게 되면 최음약의 기운 뿐만 아니라 진기까지도 흡수되어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이 그늘진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자 설연청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 어떻게 된거죠?" "최악이오. 음성(淫性)이 너무 강하오. 이런 최음약에 당하면 오직 남자와 결합하는 방도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소." 순간, 설연청의 안색은 더할 나위없이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찌---- 익! 찍! 두 여인은 자신의 옷을 찢어버리고 있었다. 설연청이 경악했다. "분명 혈도를 찍었거늘……" 황보성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폭발적인 체내의 열기 때문에 혈도가 자동으로 풀린거요." 두 여인은 자신들의 옷을 계속 찢었다. 그러자 찢어진 옷깃 사이로 백옥같은 살결이 드러났다. 설연청은 그녀들의 모습과 황보성운의 모습을 계속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계속 무엇을 말하려다 망설이는 것 같았다. 이때, "으---- 음!" 설연미의 입에서 돌연 신음과 함께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아! 언니!" 설연청은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이내 무엇을 결심한 듯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공자님! 언니를 구해 주세요." 처절한 애원이 담긴 말이었다. "그게 무슨……?" "남자와 결합하면 살아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어…… 어찌 그런?" 황보성운은 황망히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설연청은 지지 않고 앞으로 휙 다가서며 외쳤다. "그럼, 언니가 저대로 죽도록 그냥 두실 건가요?" 황보성운은 말없이 설연미와 소향을 응시했다. 그는 내심 길게 탄식을 했다. (후……! 연미는 나의 혼인 상대자나 마찬가지고 소향 역시 절대 죽여서는 안된다.) 황보성운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문득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좋다. 어차피 이 방법 외에는 없다.) 황보성운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설연청을 향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설낭자." 설연청은 그 말에 황보성운의 품 속으로 뛰어들며 감격했다. "아, 고마워요…… 정말……" 황보성운은 입가에 고소를 지었다. "어쩌면 이 일은 당연히 해야할 일인지도 모르오. 단지 시기가 좀 빨랐을 뿐……" "그게 무슨 말이죠?" "……" 황보성운은 묵묵히 설연청을 떼어놓으며 설연미와 소향을 내려보았다. 설연청도 더 이상 묻지않고 황보성운이 보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헌데, 저 낭자는……?" 설연청의 말에 황보성운은 쓰게 웃었다. "내 말 한 적이 있었을 것이오. 나에게는 부인이 있다고!" 설연청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럼…… 저분이?" "그녀가 바로 나의 부인이오." "아!" 설연청은 나지막이 탄성을 발했다. 황보성운은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나는 원래 소향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오." 설연청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띄웠다. "저 여인 이름이 소향인가요? 정말 예쁜 이름이군요." 설연청은 이처럼 말하다 문득 눈썹을 가늘게 찌푸리며 고개를 갸 웃거렸다. "헌데…… 어디선가 한 번 꼭 뵌 것 같아요." 황보성운은 내심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이 소녀는 소향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기실 자하장(紫霞莊)에 있을 당시 설연청은 소향에게 말 상대로 붙잡혀 빠져나오지 못해 설연미가 곤욕을 치르지 않았던가? 허나, 그 당시와는 소향이 많이 변한 것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지고 옷차림도 바뀐 것이다. 황보성운은 즉시 설연미와 소향을 양쪽 팔에 안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자 석실 한 구석으로 난 통로가 보였다. 황보성운은 두 여인을 껴안고 그 통로로 들어갔다. "설낭자! 나는 이곳에서 치료할테니 밖에서 좀 기다려주시오." 설연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급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약간 슬퍼보이는 뒷 모습을 응시하며 내심 깊은 탄식을 흘렸다. (아! 결국 설씨 자매와 나와의 인연은 끊을 수 없는 무엇이 있는 모양이군.) 황보성운은 두 여인을 내려보았다. 그녀들은 전신이 핏빛으로 물든채 몸을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모든 혈관들이 팽창되어 툭툭 불거져 있었고, 눈마저 무섭게 충혈되어 있었다. (안되겠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간 목숨이 위험하다.) 황보성운은 서서히 두 여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여인은 완전히 벌거벗은 몸이 되었다. 그들의 피부는 몸 전체가 온통 붉은 빛이었다. 두 여인은 뭔가를 갈구하는 뜨거운 눈빛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아아아……" "으으음…… 음음……" 그녀들의 손은 자신들의 비밀스런 곳에서 뜨겁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뭔가를 향한 애타는 갈구였다. 황보성운은 한숨을 쉬곤 옷을 벗었다. 그리고 일단 설연미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실었다. 그는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신방에서 일을 치르지 못하고 이런 곳에서 관계를 해야하다니, 그것도 상대를 인식도 하지 못하고…… 허나 그의 상념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설연미의 몸 위로 몸을 싣는 순간, 설연미의 손이 그의 남성을 잡았고 그것을 자신의 몸 속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건만 음양의 본능이 상대를 찾아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다. 두 남녀는 순식간에 일체(一體)가 되었다. 설연미의 몸이 폭풍처럼 흔들렸다. 고통으로 일순간 아미가 찡그려졌지만, 그녀의 몸 속에 깃든 열기가 그 고통을 잊고 쾌락의 끝을 찾도록 만들었다. 황보성운도 점차 쾌락의 늪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2 "으음……" 심해(深海)와 같은 침묵 속에서 설연미는 눈을 떴다. 주위는 짙은 어둠이었다. 설연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마치 길고 긴 악몽을 꾸고 난 후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임을 느낀 것이다. 설연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간, 하체에 커다란 고통이 엄습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여 하체를 내려다 보았다. 헌데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신의 하체(下體)에 뜨거운 정사(情事)의 흔적과 함께 점점이 선혈이 묻어있는 아닌가? 순간,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정신이 아득해져 버렸다. (그…… 그렇다면 내가 이미 그 노괴물에게 당했단 말인가?) 설연미의 전신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한데 그녀가 망연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바로 자신의 옆에 한 청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 청년의 모습은 실로 이 세상에서 다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준수 미려한 것이었다. 수려한 이목구비. 그리고 그 위로 당당히 흐르는 기품 등, 가히 선풍도골, 인중지룡을 무색하게할 당당한 천품이 여지없이 엿보였던 것이다. 그는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이미 무아지경의 상태였다. 설연미는 그 청년의 모습을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저…… 저 사람은……) 그녀는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자신이 적양관주에게 겁탈 당하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한 명의 준수한 청년이 뛰어들었고, 그는 적양관주와 엄청난 대격전을 치르었다. 한데, 그 뒤의 생각은 마치 뭉클한 안개 속에 가린 듯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설연미의 안색이 점차 변해갔다. (그렇다. 분명 이 청년이 나를 구했을 것이다.) 그녀의 안색이 흐려졌다. (허나 적양관주가 먹인 그 음양최혼단의 약효 때문에……) 이렇게 생각이 들자 돌연, 설연미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틀림없다. 이미 나는 저 청년과 몸을 섞은 것임에 분명하다.) 그녀는 온통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에 다시 심하게 휘청거렸다. (이, 이럴 수가…… 내가……) 설연미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남에게 몸을 바쳤다는 것은 곧 그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 허나 나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이 아닌가?)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비록 모르는 상태에서 몸을 섞었다고는 하나 이미 불결한 여인…… 아! 하늘마저도 똑바로 볼 용기가 없구나!)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옷을 주워 입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온통 비통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또한 그와 함께 결코 무너지지 않을 듯한 결의가 가득차 있었다. (가는거다. 아주 먼 곳으로…… 그리고 이 세상에 영원히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설연미는 청년, 즉 황보성운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서 점차 소리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천천히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설연청이 초조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러다 설연미를 발견하고는 금세 반색을 하며 뛰어들었다. "언니!" 설연청은 설연미의 손을 잡았다. "무사히 치료가 되었군요?" 설연미는 흠칫 놀라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청아야! 어떻게 네가 여길……!" "언니! 내가 언니 걱정을 얼마나 했는 줄 알아요?" 설연청은 설연미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설연미의 머리 속에 그때 문득 무슨 생각이 스쳤다. "그러면 네가 아까 그 여인으로 분장한 것이냐?" "그래요." 설연청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연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청아야!" "언니! 아무튼 무사하니 다행이예요." 설연청은 활짝 웃음을 띄웠다. 그러다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정색을 했다. "헌데 참 그분은 왜 안나오죠?" "그분이라니?" 설연청은 교태롭게 눈을 흘겼다. "아이참, 시치미 떼기는…… 왜 언니를 치료해준 분 말이예요." 설연미의 미간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아직 동굴 안에 있다." "그런데 왜 언니 혼자 나왔어요?" "……" 설연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져 설연청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자 설연청이 재빨리 안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언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들어가서 보고 올테니까?" "그러려므나." 설연청은 안으로 급히 뛰어들어 갔다. 설연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아도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보군. 그것을 생각해봐도 역시 내가 사라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다." 이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무거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제…… 가야겠군." 그녀는 허탈히 몇 걸음 움직였다. 허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걸음을 문득 멈추었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조그마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지체없이 손가락을 깨물어 흘러나오는 새빨간 선혈로 혈서(血書)를 쓰기 시작했다. 흰 손수건 위로 혈서가 한줄 한줄 쓰여져 갔다. 〈비록 하룻밤의 인연이지만 평생을 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허나, 소녀는 당신을 모실 수 없는 몸…… 말 없이 떠나는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설연미는 혈서를 남겨놓고 홀연히 사라져갔다. 3 한편, 설연청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막 운기조식을 끝낸 황보성운이 일어서고 있었다. 소향은 언제 깨어났는지 이미 옷을 모두 입은 채였다. "아! 일어나셨군요?" 설연청은 기쁨에 한 걸음 다가서며 입을 놀렸다. 황보성운은 쓰윽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니는 어디 있소?" "밖에요." 설연청은 밖을 가리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소향을 바라보며 입을 놀렸다. "소향 언니시죠? 과연 듣던대로 미인이세요. 처음 뵙겠어요." 소향은 설연청의 태도에 당황했다. 소향은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비록 설연청이 자신을 모른다 하나 이미 그녀는 지체높은 설씨 집안의 둘째 딸임을 알고있지 않은가? "아…… 아가씨 이러시면 안돼요." 소향은 황망히 설연청을 부축했다. "고마워요, 언니!" 설연청은 감격이 서린 빛으로 소향을 응시했다. 소향은 황급히 부인했다. "고맙기는요. 아가씨같이 지체 높은 분이 어찌 저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설연청은 짐짓 화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언니! 아가씨라는 말은 대단히 거북해요. 계속 그렇게 부르면 저는 이곳에 남아있지 않겠어요." 소향의 얼굴에 짙은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녀는 낭랑하게 입을 열었다. "설동생! 그렇다면 내가 사과하지!" "언니!" 설연청은 감격하여 소향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황보성운은 너털웃음을 호방차게 터뜨렸다. "하하하…… 이제 그만들 하시오." 황보성운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설연청에게 물었다. "헌데, 설연미 낭자는 어디 있소." 설연청은 생긋 미소를 날렸다. "밖에 있어요." 소향이 옆에서 급하게 거들었다. "공자님! 어서 나가보세요." "음……" 황보성운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연청과 소향도 황보성운을 뒤따랐다. 헌데, 밖에 나온 그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설연미가 없지 않은가? 황보성운은 급속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이 들어왔다. 급히 그것을 집어들고 읽어가던 황보성운은 대경했다. (이, 이런 일이……) 설연청은 손수건을 빼앗듯이 황보성운에게 넘겨받은 뒤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흐흑…… 언니!" 황보성운은 황급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들의 전면으로는 몇 개의 동굴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뻗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갔는지 전혀 구별할 수가 없었다. 황보성운은 급촉히 안력을 돋구었다. 그러자 한 동굴로 들어간 희미한 자취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황보성운은 지체없이 외쳤다. "이쪽 동굴이오." 동시에, 그의 신형이 한 동굴로 달려갔다. 그러면서 황보성운은 내심 크게 부르짖고 있었다. (연미! 당신은 결코 불결한 여인이 아니오. 그대는 알고 있소? 그대의 약혼자와 내가 동일인이라는 것을……) 동굴 안으로 달려가던 황보성운이 우뚝 신형을 멈추더니 뒤따라오는 설연청에게 외쳤다. "설낭자! 화섭자를!" 다음 순간 설연청은 급급히 품을 뒤져 화섭자를 밝혔다. 일시에 동굴 내부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들이 한참 앞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앗!" 돌연, 황보성운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곳에는 하나의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 광장은 거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듯 천정에는 종유석들이 삐쭉 삐쭉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 종유석들은 화섭자의 불빛에 반사되어 오색찬란한 현기(玄氣)를 여지없이 드러냈던 것이다. 또한 동굴 중앙에는 커다란 원형의 석탁이 흡사 반투명 물체처럼 기묘하게 번뜩이는 것이었다. 헌데 바로 그 원형의 석탁 한가운데에 한 명의 노파가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노파는 백발이 성성하게 어깨를 덮어 내려와 있었으며, 전신에 걸친 금의(金衣) 위로는 심상치 않은 예기가 뻗쳐 나오는 것이었다. 또한 흰 눈썹이 허옇게 뻗어내려간 얼굴에는 감히 범접키 어려운 홍광이 그득했다. 게다가 그 주름살 하나 찾을 수 없는 얼굴에 서린 기운은 가히 그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감돌았다. 황보성운은 직감적으로 그 노파가 보통이 아님을 즉각 알아차렸다. 황보성운은 정중히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노선배!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소." 금의노파는 시종 담담한 기색으로 황보성운을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무엇인가?" "한 소녀가 이곳으로 오는 것을 보시지 못했소?" 금의 노파의 두 눈이 기이한 안광을 내뻗었다. "그 소녀와 너희들은 무슨 관계냐?" 설연청이 한 걸음 불쑥 앞으로 나섰다. "저의 언니예요." 금의노파는 번갯불같은 시선을 설연청에게 던졌다. 그리고 이내 황보성운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윽고 천천히 금의노파의 고개가 끄덕였다. "으---- 음! 노신은 그 아이를 조금 전에 보았다." "어디로 갔습니까?" 황보성운은 급히 물었다. 금의노파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데리고 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그럼 언니가 있는 곳을 알려 주세요." 설연청은 다급히 다그쳤다. 금의노파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이야, 서두르지 마라! 노신이 한 마디 하겠다." 금의노파는 시선을 천정으로 던졌다. "원래 노신이 이 천부동(天府洞)에 들어온 것은 옛 노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금의노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허나 며칠 동안 찾아 봤어도 그 노우(老友)는 만날 수 없었다." 금의노파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그들을 한 차례 주욱 훑어 보았다. "포기하고 가려는데 너희들이 말한 그 아이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금의노파의 눈빛이 신비롭게 빛났다. "노신은 그 아이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다." 금의노파의 시선이 황보성운에게 떨어졌다. "노신이 보건데 너는 일신상의 무예가 극히 고절하여 천하에 적을 찾기 힘들 정도이고 기상 또한 대단히 드높다." 금의노파의 눈이 섬전(閃電)같이 예리한 안광을 뿜었다. 황보성운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놀라운 내공이다. 가히 깊이를 모를 정도로구나.) "허나, 미간에 짙은 도화살이 뻗쳐 평생 동안 여자의 출입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황보성운은 내심 움찔했다. "연미는 너와 인연이 있다. 허나 그 인연은 조금 더 세월이 지나야 한다." "노선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황보성운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금의노파는 담담한 눈길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너와 다시 만날 그때까지 그 아이는 노신이 데리고 있겠다." "뭣이……?" "노신은 그 아이에게 모든 절학을 물려줘 나의 전인으로 삼는 한편 천하 제일의 고수로 만들 것이다!" 금의노파는 기이하게 웃으며 황보성운을 내려보았다. "이 아이가 다시 세상에 나타날 때는 너도 아마 상대가 안될 것이다." 금의노파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설연청이 다급히 다가서며 외쳤다. "잠깐, 노선배님! 언니는 이미 스승이 있어요. 아마 노선배의 제자가 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금의노파는 여전히 등을 진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천암을 말하는 것이냐?" "네!" "천암에게 알려도 좋다. 허나 그 아이도 이것을 알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 그때, 설연청이 무엇이 생각났는지 얼굴을 대변했다. "노…… 노선배님은 혹시…… 금천신모(金天神母)가 아니십니까?" 순간, 노파는 갑자기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즉각 설연청의 귓속으로 한 줄기 전음이 날아들었다. "아이야, 너는 무척 영리하구나! 내 너에게 한 가지 당부하마. 부디 너의 남편될 사람을 잘 모셔라." 일순, 설연청의 안색은 빨갛게 변해버렸다. 전음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뭇 여인들과 다투지 마라. 그러면 훗날 크나큰 복락이 들어올 것이다." 순간, 금의노파의 인영이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황보성운은 급급히 쫓으려 했다. "그만 두세요!" 설연청은 다급히 제지시켰다. "왜……?" "공자님께서는 저분이 누군지 아세요?" 황보성운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오만……" "아…… 저분이 여지껏 살아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설연청은 혀를 내둘렀다. 황보성운은 의혹이 더욱 강하게 치밀었다. "저 노파가 누구요?" 설연청은 눈을 곱게 흘겼다. "불손한 말 쓰지 마세요. 저분은 배분으로 따진다면 저의 스승님의 사조뻘이 되세요." "뭐요? 청암신니의 사조뻘이라고!" 황보성운은 대경했다. 그러자, 설연청은 황보성운을 그윽히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금천신모(金天神母)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나요?" "없소." "저분은 이백 년 전 천하를 휩쓸던 분이었어요. 지금 천하에선 그를 당할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을걸요. 아마……" 설연청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황보성운은 내심 묘한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금천신모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금천신모라고 했던가? 좋소. 오늘은 연미 때문에 그대로 보내 주겠소. 허나 다음에 만날 때는 실력의 고하를 겨루어 보리다.) 그의 눈빛이 강한 승부욕으로 이글거렸다. 3권으로 이어집니다. 제목: 龍尊 제3권 魔勢到來 지은이: 사마달 ‥ 차 례 ‥ 제 29 장 天外天遊神 제 30 장 宇內三天尊 제 31 장 再 出 現 제 32 장 天下第一高手 제 33 장 사랑과 미움 제 34 장 밤과 죽음 제 35 장 天魔二老 제 36 장 轉禍爲福 제 37 장 十大魔佛 제 38 장 混世天下 제 39 장 모여드는 군웅들 제 40 장 北海氷魄殺 제 41 장 最後의 決戰 제 29 장 天外天遊神 1 황보성운은 금천신모를 생각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금천신모는 그가 무림에 출도한 이후 가장 강하고 가장 신비한 인물이다. 첫눈에 봐도 그 무공의 깊이를 추측할 수가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주눅이 들 황보성운은 아니었다. 잠시 후, 황보성운은 두 여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이곳을 나갑시다." 황보성운은 먼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때, 어디선가 희미한 음성이 황보성운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젊은이! 잠시만 기다려 주게……" 황보성운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누구요?" 황보성운은 급히 주위를 살폈다. 허나 주위에는 인기척을 낼만한 그 아무것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네. 지금 나는 석벽 속에 있는데 나를 좀 만나줄 수 있겠나?" 황보성운은 짙은 의혹을 느꼈다.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강렬한 호기심이 치밀었다. "대체 누구십니까?" "날 만나면 자연히 알게 될걸세." 소향과 설연청은 황보성운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괴인물의 전음을 듣지 못한 그녀들이었기에 주위를 보며 말을 하는 황보성운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 것이다. "공자님…… 왜 그러시는 거죠?" 소향이 물었지만 황보성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보며 상대의 음성이 나온 방향을 감지하려 했으나 그것을 알아낼 순 없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만날 수 있습니까?" "왼쪽 석벽을 보게." 황보성운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곳엔 모두 푸른 이끼가 덮여있을 것이네. 허나, 사방 석 자 되는 한 부분만은 이끼가 조금도 끼지 않았을 것이네." 과연 그 말대로 왼쪽의 석벽에는 온통 푸른빛의 이끼가 무성하게 덮여있었다. 한데, 왼쪽 벽 한 구석에 사방 석 자 되는 부분만은 방금 깎아낸 듯 번듯하게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그 석벽은 기이한 벽록색의 광채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며 황보성운은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이때 다시 어디선가 긴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벽록강석(壁綠 石)에 어찌 이끼 따위가 낄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단한 물체거늘……" "벽록강석……?"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이! 노부가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무엇입니까?" "내 보기에 자네의 무공은 천하에서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강하네." 그 목소리는 힘이 드는 듯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혹시 자네가 익힌 것은 현천신군의 현무신공인가?" 황보성운은 흠칫했다. 어떻게 보지도 않고 그것을 알아낸단 말인가? "그…… 것을 어떻게?" "허허허…… 과연 내 추측이 맞았군." 유쾌한 홍소였다. "허나, 자네의 무공이 현천신군보다 높고 현무신공의 정화 또한 그보다 더욱 깊이 연성한 걸로 보아 그의 직계 제자는 아닌 것 같군." "……!" 황보성운은 내심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실상 그가 무림에 나온 직후 그의 무공 내력을 알아낸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그들 또한 모두가 그의 무공을 현천신군과 연결시켰다. 헌데, 지금의 상대는 보지도 않고 자신의 무공 근원을 알아내는 게 아닌가? 기실 자신의 내력을 이토록 정확히 끄집어 낼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보성운은 괴인물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이때 안쪽으로부터 나직한 탄식 소리가 울렸다. "아……! 실로 백 수십 년 만에 처음 이토록 긴 대화를 해보는군." 황보성운은 다시 경악했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이곳에서 백 수십 년 이상을 지내왔단 말인가? 실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노부의 부탁은 다름이 아니라 자네의 일장으로 그 벽록강석을 부수어 달라는 것일세." 황보성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선배의 무공으로는 저 벽록강석을 부술 수 없단 말입니까?" 그러자 어두운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가 그 벽을 부수고 안에 들어와 보면 노부의 처지를 볼 수 있을 것이네." 황보성운은 눈을 빛냈다. 그리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황보성운은 옆을 바라보며 나직이 소리쳤다. "잠깐 옆으로 비껴 서시오." 그러자 소향과 설연청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들은 왜 황보성운이 이러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황보성운은 현무신공을 운기하여 본신의 내공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십자결 중 가장 강맹한 파자결을 운용해 진기를 발산시켰다. "파(破)----!" 강맹무비한 일장이 폭풍같은 기세로 석벽을 후려쳤다. 꽈르르르르르릉! 천번지복할 듯한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설연청과 소향은 그 음파의 충격으로 인해 창백하게 질린 채 뒤로 정신없이 밀려났다. 엄청난 굉음(轟音)으로 인해 고막이 멍멍했다. 이때 황보성운은 무거운 표정으로 석벽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석벽은 조금도 손상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황보성운이 석벽의 거센 반탄력에 의해 손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을 뿐이었다. 이때, "현무신공 파자결이 비록 강하긴 하나 그것으로는 벽록강석을 부수지 못하네." 예의 그 목소리였다. "전신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현무구장 중 마지막 초식인 현천살미(玄天殺眉)로 벽록강석을 후려치게." 황보성운은 여전히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석벽을 노려 보았다. 그의 가슴 속에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괴인의 말대로 따르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품 속에서 잠룡피를 꺼내 손에 끼었다. 그리고 천천히 석벽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 연후에 다시 오른손을 치켜들며 현무신공의 파자결을 운용해 석벽을 강타했다. "파(破)----!" 그의 오른손이 엄청난 위력으로 석벽을 후려쳤다. 찰나, 꽈르르르르르릉! 다시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쩌---- 억---- 쩍! 쩌---- 어---- 억! 순식간에 그 단단하기 짝이 없는 벽록강석이 수십 개로 균열했다. 황보성운은 다시 한 걸음 물러나 전신 내공을 끌어올려 엄청난 일장을 격발시켰다. 순간, 퍼---- 엉! 석벽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사방으로 자욱이 난석과 돌가루가 날렸다. 괴인의 놀람에 가득한 음성이 들렸다. "오…… 오! 이제보니 자네의 실력을 노부가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군." 잠시 후 서서히 먼지가 가라앉자 모든 광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황보성운의 바로 앞에는 하나의 시커먼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오게." 동굴 안쪽에서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보성운은 지체없이 동혈(洞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뒤에서 설연청과 소향이 머뭇머뭇 거렸다. "공자님……!" 소향이었다. 황보성운은 즉각 뒤를 돌아보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소향! 걱정하지 마라." 그는 설연청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청! 이곳에서 소향과 같이 기다려 주시오. 곧 다시 나올테니……" 설연청은 가볍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이분이 나를 연청이라 불러 주다니……) 그만큼 자기를 가깝게 여긴다는 증거가 아닌가? 설연청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소향 언니하고 이곳에서 기다릴테니 조심하세요." "알았소." 2 황보성운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은 완전히 칠흑의 어둠으로 덮여있었다. 허나, 황보성운의 눈에는 모든 것이 대낮처럼 환하게 보였다. 황보성운은 계속 주위를 살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약 일각 정도의 시각이나 걸어 들어갔을까? 황보성운은 갈 수록 내심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들어온 거리만도 근 오백 장이 넘는다. 이런 곳에서 그토록 밖의 상황을 잘 알아낼 수 있었다니……) 다시 그는 일각 정도의 시간을 걸어 들어갔다. 황보성운은 갈 수록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의 눈에 석동(石洞)의 끝이 보였다. 황보성운은 낭랑하게 외쳤다. "노선배님! 이제 이곳에서 어디로 가면 됩니까?" "주위를 살펴보게. 아마 조그만 구멍이 있을 것이네." 황보성운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과연 땅바닥에는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음직한 구멍이 있었다. "그곳으로 뛰어내리게." 황보성운은 지체없이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몸이 아스라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대략 백여 장 정도 내려갔을까? 황보성운의 눈에 바닥이 보였다. 황보성운은 표풍신법을 사용해 몸의 무게를 최대한 가볍게 한 후 사뿐히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즉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왼쪽을 보게. 그럼 내가 보일걸세." 목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울렸다. 황보성운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앗!" 황보성운은 한 마디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곳에는 실로 괴이하게 짝이 없는 백발괴인이 앉아 있었다. 백발괴인(白髮怪人). 그의 머리칼은 얼마 동안이나 길었는지 무려 십여 장에 달해 전신을 덮고 땅에 늘어져 있었고, 수염 또한 앞자락을 덮어 내려 바닥에 닿아 있었다. 전신이 온통 모발로 뒤덮여 흡사 하나의 괴물같이 보였다. 게다가 얼굴도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아 도저히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허나, 황보성운이 놀란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노인의 처참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렇다. 지금 노인의 몸엔 쇠사슬이 감겨 있었는데 그 중 몇개는 노인의 비파골(琵琶骨)을 뚫고 지나가 석벽에 박혀 있었다. "……" 황보성운은 노인의 모습을 보며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노인은 탄식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자네는 왜 노부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겠나?" "제가 우민한 까닭으로 노선배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 같습니다." 황보성운은 정중히 사과를 했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소탈하게 웃었다. "허허…… 노부가 이렇게 된 것도 알고보면 노부의 잘못인데 어찌 자네를 탓하겠나."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형형한 눈빛이 흔들렸다. "아아……! 지나간 이백 오십 년이 마치 긴 꿈속같구나. 옛 벗이 찾아왔으나 만나볼 용기조차 없는 몸이 살아보아야 무엇하리……" 황보성운은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노선배님! 혹시 아까 금천신모께서 찾아오신 분이 바로 노선배님 아니십니까?" "그렇네. 그녀가 찾는 사람이 바로 나일세." 노인은 지극히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황보성운은 만면에 의혹을 나타내며 되물었다. "한데, 어찌하여……?" 노인은 뒤로 고개를 젖히며 비통스런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그녀의 영상 속에 남은 나의 모습은 이렇지가 않다네. 이미 이백 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어……"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세월이 흘러도 항상 옛모습은 그대로 남는 것, 어찌 내가 그것을 깰 수 있었겠는가?" 황보성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비통한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황보성운은 기이한 생각이 들어 노인을 응시했다. "노선배님! 왜 쇠사슬을 끊고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이 쇠사슬 말인가?" 노인은 쇠사슬을 흔들었다. 그리고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내가 어찌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겠나? 허나 천인수(千刃手), 파천기(破天氣) 등 내가 알고있는 수없이 많은 절학들을 전개했어도 이 사슬만은 조금도 흠집을 내지 못했네. 그래서 백 년 전부턴 완전히 포기했어." 그 말에 황보성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약간 머뭇거리며 노인에게 말했다. "제가 한번 시도해 봐도 되겠습니까?" "쓸데없는 일일세." 노인은 씁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쇠사슬 앞으로 불쑥 다가섰다. 그리고 잠룡피가 끼어진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한 번 해보겠습니다." 노인은 고소를 흘렸다. "해보게나. 허나 실망만 있을 것이네." 황보성운은 현무신공을 끌어올려 그 힘을 잠룡피를 낀 우수로 집중시킨 후 파자결을 전개했다. 순간, 벽록강석을 파괴시킨 놀라운 힘이 발산되었다. 쿠르르르릉! 허나, 노인의 예측대로 쇠사슬은 조금도 손상이 되지않은 채 끄덕이 없었다. 황보성운은 아연실색했다. 이때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허허허…… 이제보니 자네는 천고의 기물(奇物)인 잠룡피를 끼고 있었군." 노인은 망연히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하기야 잠룡피도 대단한 물건이지. 허나, 이 대라천마삭(大羅天魔索)을 끊기에는 조금 부족하네." 황보성운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그는 쇠사슬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찰나, 그의 손목으로부터 수백 줄기 혈광과 흑광이 뻗어나왔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엔 흑광과 혈광이 덮인 혈천도(血天刀)가 들려 있었다. 그러자, "오…… 오! 흑백 쌍환…… 흑백 쌍환!" 노인은 경악에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황보성운은 대라천마삭을 향해 수중의 혈천도를 신쾌무비할 속도로 내리쳤다. 순간, 쨍!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그리고 보라! 놀랍게도 천고의 기물이라는 그 대라천마삭이 일도에 양단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노인은 경악에 잠긴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이제보니…… 자네는…… 바로…… 현현자의 제자였군." 황보성운은 흠칫 놀랐다. "그것을…… 어떻게……?" 노인은 황보성운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긴 탄식을 터뜨렸다. "진정 뜻밖이야. 노부는 자네가 천현문의 이대장문인인 냉천신군(冷天神君)의 제자인 줄 알았는데 그의 스승인 현현자의 제자라니……" "저는 단지 그분이 남긴 비급을 읽었을 뿐입니다." 황보성운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노인은 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 늠름하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으---- 음, 내가 소년 시절 때 현현자 사숙을 한 번 뵌적이 있네. 그 당시 그분은 천현문의 일대장문으로 천하를 굽어봤네." 점차 노인의 목소리가 격동되어 갔다. "그 후, 현현자께서는 우연히 흑백쌍환을 얻게 되셨지. 이에 수많은 무림고수들이 그것을 노리고 불나방처럼 그분에게 덤벼들었네." 황보성운의 얼굴도 계속 그 말에 따라 격동되어 갔다. 기실 사부의 이야기를 듣는데 어찌 한 마디인들 흘려들을 수 있을 것인가? "현현자 사숙께선 인간의 더러운 탐욕에 염증을 느끼셨지. 그분은 탄식하며 그 모든 물건들을 어느 곳에 감추고 스스로 은거에 들어가셨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셨지." 노인은 과거를 음미하는 듯 한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자 문득 옆에 있는 황보성운이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그리고 호방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이제부터 자네를 사제라 불러야겠군." 황보성운은 노인의 돌연한 말에 그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사제, 자네 문파나 우리 천외천문(天外天門) 사이에는 대단한 친분이 있네. 뿌리를 깊이 파고들면 근원이 하나라고도 할 수가 있지. 내가 현현자 그분을 사숙이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고……" 지극히 인자한 어투였다. "그러니 자네가 거절한다면 나를 무시하는 것밖에 안되는 것이네." "노선배…… 허지만 이 세상엔 법도란 것이 있거늘…… 어찌……" 황보성운은 말 끝을 흐렸다. 그러자 노인은 벌컥 화를 냈다. "소사제! 만약 더 이상 나를 노선배라 부른다면 그것은 천현문과 천외천문의 친분을 망각하는 소치라고 볼 수밖에 없네!" 황보성운은 난처했다. 허나, 할 수 없이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습니다, 노형님! 소제 황보성운이 인사드립니다." 황보성운은 정중히 포권지례를 갖추었다. 그러자 노인은 대단히 흐뭇한 표정으로 파안대소를 했다. "허허허헛…… 소사제, 정말 기쁘네. 내 평생 이토록 기쁜 날은 없었네." 노인은 인자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우형(愚兄)이 누군 줄 아는가?" "모르고 있습니다." 황보성운은 멋적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노인은 온화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천외천유신(天外天遊神) 단목천(丹木天)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황보성운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습니다. 견문이 워낙 짧아 여지껏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허허허! 그렇게 생각말게. 현 무림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테니까…… 그 모든 걸 기억하기엔 워낙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어. 지인(知人)들은 모두 사라지고 홀로 나만 남았으니……" 노인의 얼굴에 고독이 서렸다. 3 천외천유신(天外天遊神)! 그는 누구인가? 만약 나이가 백 세가 훨씬 넘는 전대의 기인들이 그 이름을 들었다면 모두가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천외천유신은 지금부터 이백 년 전 전무림을 종횡하던 천하무적의 고수였던 것이다. 천외천유신 단목천. 이백 년도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젊은 날, 그는 이미 천외천문(天外天門)의 제 육대 문주에 올라 있었다. 또한 그의 위명은 전 무림으로 쟁쟁하게 날리고 있었다. 허나, 실상 그 당시 천외천문은 수많은 절기(絶技)가 유실되어 옛날에 비해 형편없는 몰락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하여 단목천은 문주에 오른 직후부터 천외천문의 중흥에 힘쓰는 한편 유실된 무공비급들을 되찾기에 전 노력을 견주했다. 그리하여 그는 십여 년 동안의 수많은 험난곡절을 거쳐 천외천문에서 유실된 수많은 비급들을 되찾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도 천외천유경(天外天遊經)을 되찾은 건 실로 천우신조나 다름이 없었다. 천외천유경(天外天遊經)! 천외천문 사상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연성하지 못한 천고의 비 급이 바로 그것이었다. 헌데, 단목천은 그것을 수련하여 완성하고 만 것이다. 그 후, 사 년이 지났을 때 무림엔 거센 폭풍(暴風)이 몰아쳤다. 천외천유경을 완벽하게 연성한 단목천의 엄청난 무공 아래 삼초를 넘긴 자(者)가 그 누구이던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그의 앞에서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단목천의 나이도 육십이 넘었다. 허나 그는 신비한 주안술로 삼십대의 젊은 모습을 항상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당당하고 준수하기 짝이 없는 용모와 함께 그의 협명(俠名)은 이제 전 무림에 하나의 신(神)과 같은 존재로 부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살아있는 전설(傳說)이자 신화(神話)였다.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단목천은 수많은 곡절과 음모에 뒤얽힌 강호를 등지고 은거에 들어갔다. 일단 은거에 들어간 그는 세상의 번잡스러움을 떠나 세 명의 어린 제자를 거두었고, 그들에게 일신의 무공을 전수하는 것을 낙(樂)으로 삼고 살았다. 그 어린 제자들은 매우 영특하여 그의 무공을 급속도로 익혀갔다. 유수같은 세월이 다시 화살처럼 흘러갔다. 한데 언젠가 단목천은 너무나도 우연히 무림 사상 최고의 독경(毒經)을 얻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만독진해(萬毒眞解)였다. 그것은 무림 개사 이래 독의 제 일인자였던 만독신군(萬毒神君)이 지은 불후(不朽)의 독경(毒經)이었다. 허나, 단목천은 독(毒)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연마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비밀리 비장(秘臟)시켰다. 한데 그것이 바로 엄청난 참화의 발단이 될 줄이야! 애지중지 혈육처럼 키운 세 제자가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들은 천외천유경과 만독진해를 노리고 단목천을 암습했다. 여기까지 말한 단목천은 수백 년의 유원이 서린 긴 탄식을 내뿜었다. "후우……! 그때 노부는 운공조식을 하던 때였네. 더군다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방심했었던 탓에 당하고 말았지……" "……" 황보성운은 망연히 그의 말을 들을 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분노와 증오가 얼마나 컸을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단목천은 격정을 금할 수 없는 듯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 그는 길게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황보성운의 얼굴을 응시했다. "소사제,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무엇입니까?" 단목천은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천외천문의 문규를 보면 사문(師門)을 배반한 자는 오직 죽음 뿐이라네." "……!" "자네는 나의 사제나 마찬가지네. 그러니 윗 어른의 신분으로 나의 세 제자를 처단해 주게." "허지만 노형님께서 직접……" 단목천은 손을 내저었다. "소사제!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말게." 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이백 년이나 이 자세로 있는 동안 노부의 하반신은 완전히 석화(石化)되어 버렸네. 내 몸에 붙어있을 뿐…… 이미 이것은 죽은 지 오래네." "……!" 황보성운은 내심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그는 곧 이를 악물며 분연히 외쳤다. "알았습니다, 노형님! 반드시 그 세 명의 반도를 소제의 손으로 처단시키고야 말겠습니다." "아아…… 고맙네, 소사제." 황보성운은 문득 한 생각이 들어 급히 물었다. "헌데 그 세 반도의 이름은?" 단목천은 형형히 안광을 발했다. "첫째가 위지청목(尉遲靑木), 둘째가 사도패(邪道覇), 셋째가 마응상(馬應相)일세." 순간, 황보성운의 안색이 대변했다. "위지청목…… 사도패…… 마응상!" 아아! 이럴 수가? 위지청목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우내삼천존 중 첫째인 구유천존이 아닌가! 게다가 사도패는 고루천존, 마응상은 독혈천존이다. 백 오십 년 전, 천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던 천하의 개세마두, 우내삼천존! 헌데, 그들이 바로 단목천의 세 흉악한 제자였다니…… 황보성운은 아예 경악을 하다 못해 입을 딱 벌리고 할 말을 잊었다. 제 30 장 宇內三天尊 1 단목천은 지극히 의혹스런 눈길로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소사제, 왜 그토록 놀라는가?" 황보성운은 격동된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 세 반도들이 강호에 뿌린 악행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잠시 후, 황보성운의 말이 다 끝나자 단목청은 어두운 안색으로 탄식을 했다. "아…… 모든 것이 노부의 잘못이다. 사람의 성품은 보지 않고 재질만을 본 이 어리석음이 강호에 그토록 혼란을 야기시켰다니……" 단목천은 괴로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이윽고 그의 두 눈에 결연한 형광이 내뻗었다. "소사제! 자네의 말을 들으니 더욱 더 결심이 굳어지네." 단목천은 천천히 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꺼냈다. 그것은 매우 얇고 오래된 듯 누렇게 퇴색된 책이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내려오는 최고의 비급, 천외천유경일세." 단목천은 책자를 황보성운에게 디밀었다. "아!" 황보성운은 탄성을 발했다. 허나 곧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헌데, 왜 이것을 저에게……" "자네가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해도 그 세 명의 제자를 상대하기에는 좀 부족하네." "……" 황보성운은 묵묵히 단목천을 바라보았다. 단목천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론 자네에게는 흑백쌍환(黑白雙環)이 있으나 그것에도 단점은 있네……" "……?" 황보성운이 멈칫하자 단목천은 계속 온후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 "백환의 무공은 강하나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흑환의 무공은 치명적 살수이나 두 번 연속 사용 못하는 약점이 있네." 단목천은 약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더군다나 자네는 혼자이고 그들은 셋이니……" 그러자 황보성운은 입가에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호기롭게 외쳤다. "노형님! 걱정마십시오. 저는 충분히 그들을 해치울 수 있습니다." 단목천은 조용히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그의 두 눈에서 지극히 부드러운 눈빛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자네는 노부의 예상보다 무공이 훨씬 더 강한지도 모르겠군." 단목천은 온화한 기색에 일말의 엄숙성을 띄웠다. "허나, 무공이란 강하면 강할 수록 좋은 법, 절대의 나의 청을 거절하지 말게." 황보성운은 단목천의 엄숙한 태도를 대하자 거역할 수 없음을 느꼈다. "노형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황보성운은 곧 정색을 했다. "아! 소사제……" 단목천은 기쁨의 표정을 지으며 수중의 비급을 황보성운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한 번 읽어보게." 황보성운은 천외천유경의 책장을 조심스레 펼쳤다. 그러자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필체가 나타났다. 〈하늘(天) 밖에 하늘(天)이 있다. 허나, 하늘 밖의 하늘엔 아무것도 없다. 무공이 신(神)의 경지를 벗어나 하늘의 경지에 이르니 이를 일컬어 천외천(天外天)의 무학이라 한다. 천공노인(天空老人) 서(書).〉 황보성운은 내심 크게 감탄했다. (이분의 호기는 실로 대단하구나!) 황보성운은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며 다음 장을 넘겼다. 〈천외천유공(天外天遊功).〉 황보성운은 그 아래로 무수히 적힌 구결들을 계속 읽어갔다. 구결들은 매우 현묘(玄妙)한 이치를 담고 있어 쉽사리 해득되어지지 않을 듯했다. 허나, 황보성운은 일순간에 읽으면서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체없이 읽어가는 그의 얼굴에는 커다란 경악의 빛이 계속 스쳐갔다. (아! 이럴 수가? 이때까지 현무신공을 당할 무공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허나 이 천외천유공은 오히려 한단계 위로구나.) 그는 경이에 찬 표정으로 계속 다음 장을 넘겼다. 〈천라구장(天羅九掌).〉 이것은 괴이무쌍한 구초의 장법(掌法)이었다. 가히 그 위력은 필적할 상대가 없을 지경으로 가공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구초의 장법을 면밀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현무구장이 양강(陽强)을 바탕으로 하는 반면 이 천라구장은 지극한 음유를 그 근본으로 하고 있구나.) 계속해서 천외천유경의 다음 장이 넘어갔다. <파천기(破天氣).〉 황보성운은 이 글귀를 읽는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 구결을 대하는 순간, 그곳으로부터 알 수 없는 무서운 살기가 섬뜩하게 뻗쳐나왔기 때문이었다. (웃! 놀랍다. 파천기의 위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읽은 것만으로도 이 정도라니 만약 그것이 실제로 시출된다면……!) 황보성운은 계속 구결들을 읽어갔다. 그 구결들로 보아 이 파천기는 일종의 지극히 강맹한 공격을 위주로한 강기( 氣)였다. 그 구결은 현무신공의 십자결 중 파자결(破字訣)과 비슷하나 위력은 그것의 열 배도 넘는 가공할 것이다. 황보성운은 혀를 내두르며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천인수(千刃手).〉 이것은 음(陰)이 극치에 이른 무공이었다. 허나 음(陰) 속에는 가히 추측하기도 힘든 무서운 양강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전개시에 아무런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 일종의 무형신공(無形神功)이었다. 허나 적의 몸에 격중되면 그 순간 어떠한 호신강기라도 박살내 버리는 가공할 수법이었던 것이다. 하여 일단 이 수법에 격중한 사람은 전신에 천개의 칼자국이 나면서 처참하게 죽어버리는 것이다. 실로 이 무공은 너무나 끔찍하고 괴이하여 흡사 마공과도 같았다. 천외천문의 제일대 문주인 천공노인도 그렇기 때문에 한 번도 이 무공을 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단목천도 이것만은 제자들에게 전수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황보성운은 천외천유경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가슴 속은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점차 잔잔해져갔다. (진정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것이 실감나게 하는 비급이로다.) 이때, "다 읽었는가?" 곁에서 황보성운을 지켜보던 단목천이 온유하게 입을 열었다. "예, 다 읽었습니다." 황보성운은 조용히 단목천을 응시했다. "감상이 어떤가?" "좁았던 제 안목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실로 천하제일의 무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목천이 껄껄 웃었다. "세상에 천하무적이란 없네. 모든건 다 상대적이지." "하오면…… 이 세상에 천외천유경의 무공을 능가하는 무공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허허허…… 끝없이 넓고 넓은 대륙 위에 어떤 신비가 존재하는지 어찌 나같은 필부(匹夫)가 알겠나? 솔직히 말해서 자네가 지니고 있는 흑백쌍환의 무공 또한 노부는 그 깊이를 짐작할 수가 없거 늘……" "……" "몸을 돌리게!" "네?" 황보성운은 돌연한 단목천의 말에 당혹했다. "어서 나에게 등을 보이고 돌려앉게!" 재차 단목천의 말이 엄숙하게 떨어졌다. 황보성운은 극히 의아했으나 머뭇머뭇 돌아앉았다. 순간, 그의 등 뒤에 단목천의 손바닥이 달라붙었다. 동시에 황보성운의 명문혈로 대하(大河)같은 진기가 급속도로 밀려드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 황보성운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러자 단목천의 냉엄한 말이 떨어졌다. "정신을 가다듬게! 정신이 흩어지면 둘다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입고 마네!" 황보성운은 할 수 없이 정신을 집중시키고 운공에 들어갔다. 그러자 극렬하게 뜨거운 진기가 체내로 밀물 듯이 밀려들었다. 유입된 진기는 순식간에 인체의 삼백 육십 오 군데의 혈도를 휘돌아 단전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일단 단전(丹田)에 모인 열류는 전신 사지백해(四肢百骸)를 따라 급격히 휘돌았다. 거침없이 흘러가는 열류. 일순간에 그 열류는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돌아 두 줄기로 나뉘더니 급기야 임독 양맥을 거슬러 거침없이 흘러갔다. 동시에 발바닥 밑의 용천혈(勇泉穴)에서 한 줄기 지극히 울창한 기운이 뻗치더니 곧장 백회혈(百會穴)로 치뻗는 것이 아닌가? 이미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타통되고 생사현관(生死玄關)이 유통된 지 오래인 황보성운의 전신 혈도는 막힘없는 탄탄대로였다.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따라 돌던 열류는 이미 칠주천(七週天)이나 순환하고 있었다. 순간, 그의 전신으로는 엄청난 장력이 장강도하(長江道河)처럼 터질 듯 넘쳐흘렀다. 한편 운공하고 있는 두 사람의 주변으로는 서서히 백무(白霧)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점점 짙어지더니 급기야 그 두 사람은 완전히 백무 속에 휩싸여 버렸다. 무아지경(無我之景)! 그렇다. 바로 그것은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천지인(天地人) 완전 합일(合一)의 상태였다. 어느 순간, 황보성운은 몸 속으로 양강(陽剛)의 기운과 극음(極陰)의 기운이 일신에 격탕하는 것을 느끼며 혼절해버렸다. 2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 음!" 황보성운이 번쩍 눈을 떴다. 순간, 그의 두눈으로 폭포수같은 엄청난 신광(神光)이 폭사되었다. "소사제! 깨어났는가?" 단목천의 목소리가 울렸다. 황보성운은 급격히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서 단목천이 벽에 등을 기댄 채 밀납같이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일순간에 십수 년은 더 늙은 듯 수척하고 초췌했다. "노형님!" 황보성운은 격정적인 어조로 부르짖었다. 그러자 단목천은 창백한 얼굴에 일말의 미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소사제! 너무 부담 갖지 말게!" "노형님! 제가 어찌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황보성운은 안타까워 격정적으로 부르짖었다. 단목천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허허…… 소사제! 자네 몸에 진기를 전부 주입한 것은 아니니 안심하게." 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돌았다. "최소한 사성(四成) 정도는 아직 나의 체내에 남아 있네. 이 정도만 있어도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은 없으니 걱정말게." 단목천의 얼굴에는 시종 인후한 너그러움이 넘쳐흘렀다. "소사제! 사문의 세 반도를 처단하고 만독진해를 회수해 준다면 그로써 내 조그만 도움은 모두 갚는 것일세." 황보성운은 정색을 했다. "노형님! 만독진해는 회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단목천은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황보성운은 지체없이 품을 뒤졌다. 그리고 만독진해를 꺼내 보여주었다. 순간, 단목천은 대경하고 말았다. "오오……! 이, 이것은……" 순식간에 그의 안색은 온통 감회로 물결쳤다. 황보성운은 단목천에게 상세히 만독진해를 얻게된 모든 경과를 말해주었다. 단목천의 안색은 황보성운의 이야기에 따라 수시로 급변했다. 이윽고 황보성운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돌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예로부터 기보는 인연있는 자에게만 간다더니 결국에 자네에게 돌아갔군." 단목천은 유쾌한 듯 황보성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됐네. 소형제! 허나 이 만독진해에 실린 것은 모두 사악한 무공이니 익히지는 말게." 단목천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 무공이 비록 뛰어나기는 하나 그 흉악하기가 이를 데 없고 그 익히는 과정이 너무 잔혹해 오히려 본신 무공이 감소될 우려조차 있네. 단지 과거 만독신군이 만든 만독신단(萬毒神丹)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나 만독신단은 만독신군이 사라진 이후 같이 없어져 버린 것이니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낫지." 황보성운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날렸다. "저에겐 이미 만독신단이 있습니다." "뭣이? 그게 무슨 말인가?" 단목천은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황보성운은 품 속에서 옥병을 꺼내 만독신단을 보여주었다. 단목천은 만독신단을 보며 아예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허----! 천하의 기연은 모두 자네가 혼자 도맡아 만난 셈이로군." 단목천은 망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의 뜻이야! 하늘의 뜻!" 그리고 그는 이내 황보성운을 믿음직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네가 있는 한 무림은 영원한 평안을 누릴 것일세." 더할 나위 없는 축수였다. 단목천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소매 속에서 한 개의 옥갑을 꺼내더니 그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한 장의 지극히 정교한 인피면구(人皮面具)가 들어있었다. 단목천은 천천히 인피면구를 드러냈다. "이것은 과거 노부가 사용했던 인피면구일세." 그는 한없이 감회가 어린 시선으로 인피면구를 들여다 보았다. "노부는 평생 본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네. 물론 나의 제자들에게도 말일세." "……?" 황보성운은 의아한 눈빛으로 단목천을 응시했다. 단목천의 두 눈에 회한의 기색이 떠올랐다. "자네는 그 이유가 궁금한가?" "아닙니다…… 소제는…… 그냥……" 황보성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단목천이 손으로 허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기 때문이었다. 순간, "아----!" 황보성운은 탄식을 터뜨렸다. 드러난 단목천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수한 상처자국이 나 있었던 것이다. 단목천은 길게 탄식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이 상처 자국들은 노부가 과거 천외천유경을 얻을 당시 천외천동(天外天洞)에서 얻은 상처들일세." 단목천은 인피면구를 어루만졌다. "그후 노부는 이 상처를 감추기 위해 이 면구를 만들었고, 이 동굴에 들어오기 전까지에는 한 번도 벗은 적이 없네. 과거 사람들은 내 얼굴이 변하지 않는 걸 보고 놀라운 주안술을 익혔느니, 혹은 반로환동의 경지에 도달했느니…… 말들이 많았지. 허나 그것은 모두가 이 인피면구 때문일세.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이것이 면구임을 알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 단목천은 면구에서 시선을 거두며 황보성운을 깊이 응시했다. "소형제! 자네는 노부가 이 면구를 주는 이유를 아는가?" 황보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형님의 뜻은 제가 이 면구를 쓰고 강호에 나타나 사문의 세 반도를 처단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단목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맞추었네." 그의 얼굴에 한 가닥 비장스런 기운이 스쳐갔다. "비록 내가 직접 그놈들을 징벌하지는 못하나 그 대신 이 면구를 통해서라도 이백 년의 유원을 풀어보고 싶어서일세." "알겠습니다. 노형님의 그 뜻을 그대로 이행하겠습니다." 황보성운은 엄숙히 말한 뒤 공손히 인피면구를 넘겨받았다. 그러자 단목천은 씁쓸히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그의 얼굴 위로는 무수한 감회가 오가고 있었다. "자, 그럼 가보게." 단목천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황보성운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노형님께선?" 단목천이 씁쓸히 웃었다. "허허…… 다 늙은 이 몸이 나가서 무엇하겠나?" "노형님! 그러지 마시고 저와 함께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보성운은 사뭇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단목천은 흔연히 손을 내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내가 있으면 오히려 자네의 행동이 제약되네." 단목천은 돌아앉으며 사뭇 완강한 태도로 말을 내뱉았다. "그 세 반도의 목을 갖고 이곳으로 오기만을 기다리겠네." 황보성운은 어쩔줄 몰라 자꾸 안타까운 시선을 단목천에게 던졌다. "어서 가게! 자네의 여인들이 기다리겠군." 황보성운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허나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재차 사뭇 냉랭한 단목천의 말이 떨어졌다. "어서 가지 않고 무얼하는가?" 황보성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외면한 단목천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노형님! 그럼 소제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반드시 세 반도의 목을 갖고 찾아올테니 그때까지 부디 옥체 보중하십시오." 황보성운은 말을 마치자 마자 몸을 돌렸다. 그리고 훌쩍 신형을 날렸다. 더 이상 그곳에서 있기가 괴로웠던 것이다. 순식간에 황보성운이 동혈(洞穴) 속에서 사라져갔다. 서서히 단목천의 두 노안 위로 뿌연 눈물이 맺혀졌다. "소형제! 잘 가게나. 노부는 자네가 반드시 내 소원(所願)을 이루어 주리라 믿네." 끝을 모르는 침묵과 그 위에 서리는 뼈저린 고독 속에서 단지 단목천의 고독한 중얼거림만이 공허하게 석실을 울리고 있었다. 제 31 장 再 出 現 1 사천(四川)의 험준한 지대 위에 수천 리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천고의 영산(靈山) 무산(巫山). 구비구비 정봉(頂峰)들과 계곡(溪谷)들이 장한가(長恨歌)의 한 가락처럼 유유히 흘러가고, 그 사이사이로 무수한 계류(溪流)들이 호호탕탕 흘러내린다. 끝없이 펼쳐진 수해(樹海) 위로 수천 수만의 절봉들이 서로의 위용을 뽐내며 서있는 것이 마치 천공(天公)이 수억 년간 공들여 만들어 놓은 듯하다. 때는 산이 계집의 치마폭처럼 불타오르는 가을. 바로 이러한 절승(絶勝)의 풍취를 더해주는 듯 화려한 단풍잎이 물결치는 계곡으로 돌연 한 명의 청년이 나타났다. 이십대 초반의 나이인데 백삼을 휘어두른 전신 위로는 가히 절세 대장부의 기품이 흘렀다. 수려한 이목구비와 근골들로 미루어 보아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 분명했다. 바로 황보성운이었다. 헌데, 설연청과 소향은 어디가고 그 혼자만이 여기에 홀연히 나타났단 말인가? 원래 황보성운은 지하 동부(洞府)에서 나온 뒤 즉시 고루곡을 샅샅이 뒤졌었다. 허나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고루곡을 떠났다. 헌데, 같이 행동한 지 몇날이 지났을 때 돌연 소향의 몸에서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태기(胎氣)였다. 황보성운은 당황했다. 일면으로는 아버지가 된다는 기쁨이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같이 행동하기 거북한 난처함이 뒤따랐던 것이다. 결국 황보성운은 설연청에게 부탁하여 소향을 자하장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했다. 소향은 이별을 슬퍼했다. 허나 몸 속의 아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보성운은 그동안의 모든 상황을 서찰로 써서 함께 보냈다. 그렇기에 지금 황보성운은 홀로의 몸이 되어 유랑을 하게 된 것이다. 소향과 헤어진 후 황보성운은 한동안 고독감에 빠졌다. 그런 감정은 소향이 있었을 때에는 거의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의 마음 속에 소향의 비중이 이토록 컸단 말인가?) 기실 한 사람이 메꾸었다 비워버린 자리는 늘상 더욱 고적해지는 것이다. 황보성운은 더욱 더 높아만 가는 창천(蒼天)을 응시하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이때였다. "으---- 악!" 돌연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황보성운은 흠칫 놀랐다. 그는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허공으로 솟구친 그의 신형은 찰나지간에 산등성이를 쏘아 넘어갔다. 순식간에 그는 비명소리가 울린 곳에 도착했다. 그 곳은 숲가운데 있는 빈터였다. 헌데 그곳에는 한 명의 중년여인이 거의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전신은 끔찍할 정도로 피투성이였다. 그런 그녀의 주위로는 네 명의 장한이 칼을 든 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음침하게 생긴 얼굴에 온통 살기를 가득 띄우고 있었다. "흐흐흐…… 네년이 감히 우리의 손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한 장한이 입가에 냉혹한 괴소를 흘렸다. 그러자 중년여인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야 말 것이다." "흐흐…… 이년이 발악을 하는군." 다른 한 장한이 손을 들어 일장을 내갈겼다. 펑! 일장이 중년여인의 가슴을 격타했다. "으---- 윽!" 중년여인은 무려 삼 장이나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피를 칠공으로 분수처럼 내뿜었다. "으…… 으……" 그녀의 입가로 참혹한 신음이 흘렀다. 그때 다른 장한이 불쑥 나섰다. "자! 이년아, 이젠 지옥으로 갈 차비나 하여라." 그는 지체없이 쌍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일거에 중년여인을 격살시키려는 찰나, "멈춰라!" 웅후한 일갈이 들려오고 곧 한 인영이 장내로 날아들었다. 네 명의 장한은 흠칫 놀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막이 웅웅거리는 음성으로 상대의 무공이 보통이 아님을 직감했기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을 느꼈다. 헌데 막상 그들의 앞에 나타난 상대가 이십대의 젊은 청년임을 보자 그들은 입가에 냉소가 어렸다. 얕보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애송이, 네놈은 누구냐?" 황보성운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날렸다. "백주 대낮에 사람을 함부로 해치려 하다니, 그럴 수가 있는거요?" 장한들은 상대의 훈계조에 어리둥절했다가 곧 눈썹을 곤두세우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놈은 누구길래 감히 어르신네들의 일에 끼어드느냐?" "지나가는 사람이오만 당신들의 행동이 무척 거슬려서 참견을 한거요." 황보성운은 싸늘히 네 명의 장한을 쓸어보았다. "애송이 놈이 죽을려고 환장을 했나보군." "크크크…… 감히 천존교의 일을 방해하다니." 장한들은 가소롭다는 듯 황보성운을 쓸어보았다. 순간, 황보성운의 안색이 굳어졌다. "천존교!" 과거 구유마공으로 황보성운에게서 음양서생과 죽엽마령을 탈출시킨 신비괴인이 전음입밀로 천존교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자의 무공은 당시 황보성운이 만난 고수 중 최강이었고, 게다가 음양서생과 죽엽마령같은 고수들도 천존교의 일개 당주였었다. 허나 그 이후 천존교에 대해선 황보성운도 듣지를 못했는데 이곳 무산에서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이다. 장한들은 황보성운이 굳어진 표정으로 서있자 자신들의 말에 겁을 먹었다고 착각했다. "흐흐흐…… 애송이 놈! 이제야 겁이 나는 모양이지만 이미 늦었어! 함부로 참견한 것이 실수야!" 한 장한이 칼을 휘두르며 황보성운에게 덮쳐들었다. 순간, 황보성운은 냉랭히 코웃음치며 슬쩍 소매를 흔들었다. 소매의 끝이 장한의 칼날을 스치는 순간, 쨍그랑! 칼 끝이 부러지며 명쾌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그 장한은 한 모금 찬바람을 들이켰다. "허억!" 부러진 칼을 타고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경기가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장한은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며 황급히 전력으로 내공을 끌어올려 그 힘에 대항하려고 했지만 그건 무리였다. "으---- 악!" 그의 칼이 수십 조각으로 부서지고, 그 칼을 잡고있던 장한의 팔도 갈가리 찢어졌다. 동시에 그는 엄청나게 거대한 철퇴에 적중된 듯 처절한 비명을 토하며 십 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전신이 끔찍할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그자는 몇 차례 몸을 푸들 떨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즉사한 것이다. "저, 저럴 수가……?" 나머지 세 장한은 대경실색했다. 황보성운의 일갈이 냉혹히 떨어졌다. "천존교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느냐?" 세 장한들이 이를 갈았다. "네놈이 감히 천존교도를 해치다니!" "이 새끼! 절대 용서못해!" "죽어라!" 그들은 이를 부드득 갈며 삼면으로 황보성운에게 덮쳐들었다. 황보성운의 입가로 비웃음이 스쳤다. "모습를 보아하니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흉도들 같군!" 황보성운의 소매가 한 차례 흔들렸다. 현무신공의 살자결을 전개한 것이다. 그 순간 쓰러져 있던 중년여인이 망연자실했다. 허공에 떠서 공격하던 세 명의 장한들이 허공에 뜬 채 그대로 가루처럼 분해되어 버린 것이다. 비명도 없었다. 그들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덧없이 그냥 사라진 것이다. "벌레같은 놈들은 벌레처럼 죽어야 마땅하다!" 황보성운은 손을 탁탁 털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쓰러져 있는 중년여인을 바라보았다. 중년여인은 고통도 잊고 망연히 황보성운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도저히 눈 앞에 있는 청년이 인간같지가 않았다. 황보성운은 중년여인에게 다가와 물었다. "상처는 좀 어떠시오?" "겨…… 견딜만 합니다…… 은공……" 중년여인은 억지로 일어나려 하다가 돌연 피를 울컥 토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오!" 황보성운이 격공타혈로 중년여인의 혈도 몇 곳을 찍었다. 순간, 중년여인은 전신을 엄습하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운공조식을 하면 움직일만 할거요." 중년여인은 감격했다. "이…… 이 은혜를 어떻게?" 황보성운은 담담히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소." 말과 함께 그는 몸을 돌렸다. 이때 중년여인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은공! 염치 불구하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 "지금 무산 신녀궁이 위험합니다. 천존교의 무리들이 쳐들어와서…… 저는 신녀궁의 위기를 외부로 알리려다가 천존교의 무리들에게 추적을 당해서……" 중년여인의 말을 듣던 황보성운의 안색이 굳어졌다. (신녀궁이 위험하다고?) 그는 급히 물었다. "신녀궁의 위치는 어디요?" "동쪽으로 사십여 리를 가면……" 중년여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이미 황보성운은 그 자리에 없었다. 어느새 그는 수십 장의 허공으로 솟구친 뒤 동쪽 하늘 저 멀리 새카만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중년여인은 혼백이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꼬집어 보았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2 황보성운은 무영비행술을 이용해 섬전같은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까마득한 아래로 수많은 절봉과 계곡이 스쳐지나 갔다. 잠시 후 그의 눈에 수십 개의 고루거각이 세워진 궁(宮)이 보였다. (저곳이 신녀궁(神女宮)같구나.) 그의 예측대로 그곳은 바로 신녀궁이었다. 헌데, 지금 신녀궁의 곳곳은 화광(火光)이 충천하고 시커먼 연기가 뭉클뭉클 솟구치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격전이 한창인 듯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완전히 아수라 지옥을 방불케하는 처참지경이었다. 황보성운은 한눈에 신녀궁이 매우 위험하단 것을 직감했다. "안되겠다. 더 이상 시간이 흘렀다간 완전히 궤멸되겠구나." 황보성운은 재차 급급히 신형을 날려 신녀궁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이미 장내에는 수백 명의 인영이 뒤섞여 대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허나, 한 번 유심히 보면 한 쪽은 모두 여인들이고, 한쪽은 흑의인들로 갈라서 있는 것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여인들은 완전 열세에 몰려 있었다. 흑의인들은 흉칙한 괴소를 연신 입가에 흘리며 신랄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주위에 흩어진 수많은 여인들의 시신을 보면서 황보성운은 노기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허공으로 수십 장을 붕 떠올랐다. 그런 다음 몸을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소매를 떨쳐 수백 줄기의 기류를 사방으로 뻗었다.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은 황보성운의 그림자가 흑의인들의 사이를 누비며 그들의 혈도를 찔렀다. "으윽" "허억" 삽시간에 흑의인들이 썩은 집단처럼 풀썩풀썩 쓰러져갔다. 허나 흑의인들은 황보성운의 신형을 발견하지 못했다. 무공이 뛰어난 몇 명은 한 줄기 섬광이 허공에서 현란하게 번뜩이는걸 보았지만, 이미 뭐라고 말도 하기 전에 혈도가 찍혀 쓰러졌다. 창졸간에 근 이백여 명에 달하는 흑의인들이 모두 쓰러졌다. 실로 통천경악할 일이었다. 신녀궁 여인들은 모두 어리벙벙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쓰러진 흑의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 "나도 몰라…… 어떻게 이런 일이……?" 그녀들이 망연자실하고 있는 사이에 이미 황보성운은 그곳에 없었다. 그는 삽시간에 이백여 인의 흑의인들을 쓰러뜨리고 궁의 안쪽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눈에 뜨이는 족족 흑의인들을 모조리 제압시켜 버렸다. 어느덧 그는 신녀궁의 중심으로 파고 들었다. 그곳은 하나의 커다란 전각이었다. 그곳에서는 지금 수십 명의 절세 고수들이 싸우고 있었다. 우선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은 민예항이었다. 그녀는 지금 죽엽마령과 싸우고 있었는데 그 정세가 용호상박의 호각지세를 이룬 상태였다. 또한 한쪽 옆에서는 용두파파 난교하와 음양서생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용두파파는 조금씩 계속 밀리더니 점차 패색이 짙어갔다.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호혜령이 음침한 세 명의 흑의노인들과 무시무시한 공방을 벌였다. 허나 그 음침한 흑의노인들은 매우 공력이 고강하여 호혜령은 간신히 일초 일초를 견디어내는 형편이었다. 또한 바로 그 옆에는 잔양신마와 백발노인이 광풍노도와 같은 기 세로 무서운 손속을 겨루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초절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 단시간에 그 승패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또한 전각 바로 밑에서는 신녀궁의 제자들이 십여 명의 흉흉한 흑의인들에 둘러싸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시 후면 곧 신녀궁의 인물들이 패배할 것은 자명한 사실로 보였다. 헌데, 한쪽에서 소용돌이 치는 격전장을 음침하게 바라보는 한쌍의 눈이 있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음울한 회색 빛의 눈빛을 가진 그자는 바로 한 명의 청년이었다. 그의 얼굴은 실로 준수미려했으나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섬뜩하고도 교활해 보이는 사기였다. 그의 바로 양 옆으로는 음산한 두 명의 노인이 시립해 있었다. 한데, 그들에게서 풍기는 인상 또한 가히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왼쪽의 한 명은 핏빛 장삼을 걸친 장대한 체격의 노인이었다. 그는 일견하기에도 매우 흉맹하고 포악한 성질로 보였는데 그의 등 뒤로는 엄청나게 큰 적살도(赤殺刀)가 메어져 있어 더욱 난폭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오른쪽의 노인은 이와 반대로 흡사 쇠꼬챙이처럼 바싹 마른 흉상(凶相)이었다. 그는 깡마른 전신으로 헐렁한 백의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그의 움푹 패여 들어간 두 눈에서 뿜어나오는 빛은 만년빙굴에서 즉각 나온 듯이 사람의 뼛골을 얼리는 차가움이 서려있었다. 황보성운은 장내를 한 차례 쓸어본 뒤 안색을 냉막하게 굳혔다. (으음! 이 상태로는 얼마 버티지 못하겠군.) 그는 즉각 몸을 움직이려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입가로 야릇한 미소를 스쳤다. (그렇지……!) 황보성운은 품 속을 뒤적였다. 그리고 인피면구 한 장을 끄집어낸 뒤 그것을 얼굴에 뒤집어 썼다. 그러자 냉막한 표정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바로 단목천이 넘겨준 인피면구를 쓴 것이다. (흐흠! 이 정도면 죽음의 신(神)이 출동할 준비는 된건가?) 3 한편, 이때 호혜령은 실로 급급한 위기일발에 처해 있었다. 세 명의 흑의노인에게 연속 밀리다가 급기야 구석에 몰려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그 절호의 기회를 노칠세라 두 명의 흑의노인이 급격히 수중의 장검을 후려쳐 왔다. 쨍---- 쨍----! 호혜령은 간신히 이검(二劍)을 막아냈다. 허나 바로 그 찰나, 나머지 한 흑의노인의 칼이 가슴 앞으로 육박해왔다. 호혜령은 찔러오는 칼을 보자 그만 아찔한 절망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앗!" "아니!" 근처에 있던 신녀궁의 사람들은 대경실색했다. 허나 그들이 움직여 돕기엔 너무나 시간이 촉박했다. 헌데 이때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발발하고 말았다. 호혜령의 가슴을 찔러들던 한 흑의인이 돌연 한 마디 참혹한 비명을 울리며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이다. "으아아악!" "아…… 아니!"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나머지 두 흑의노인은 호혜령이 암수를 쓴 줄 알고 노기충천했다. 그들은 이를 부득 갈며 노갈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저 냄새나는 계집년이 비장의 암수를 갖고 있었어!" "죽어라! 이 계집년!" 그들은 수중의 장검을 신랄하게 움직여서 호혜령을 공격했다. 쨍---- 쨍! 호혜령은 필사적으로 이검(二劍)을 막았다. 헌데 다음 순간, 또 다시 비명소리가 터졌다. "으---- 악!" "크---- 악!" 그리곤 호혜령을 공격하던 두 흑의노인이 가랑잎처럼 날아가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싸움을 멈춰라!" 장내로부터 벽력같은 호통이 터져나왔다. 백발노인과 겨루던 잔양신마의 외침이었다. 잔양신마는 안면을 격심하게 일그러뜨리며 냉혹히 소리쳤다. "주위에 숨어서 장난치는 자는 누구냐? 어서 썩 정체를 드러내라!" 순간, 어디선가 싸늘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후후후…… 제법이군. 나의 존재를 알아채다니……" 중인들은 급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허나 어느 곳에도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종적 조차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것은 잔양신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곤혹의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헌데 바로 이때, 나직한 웃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돌연 허공으로부터 한 명의 인영(人影)이 천신(天神)처럼 하강해 내려왔다. 그는 매우 냉막한 얼굴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마치 계단을 밟듯 허공을 밟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가 그 놀라운 경공과 신위에 경악하며 망연히 중년인을 응시했다. 한쪽에 서있던 청년과 두 노인도 안색이 굳어진 채 중년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바닥에 완전히 내려선 중년인은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뒷짐을 진 채 나직하게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은 많은데 쓸만한 자는 한 명도 없군." 그 모습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의 오만한 자태였다. "네놈은 누구냐?" 잔양신마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순간, 짝! 하는 소리가 울렸다. "우욱!" 잔양신마는 한 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따귀를 얻어맞은 것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왼쪽 뺨은 퉁퉁 부어올랐다. 게다가 입술을 타고 한 줄기 선혈이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곧 카악 피를 받아냈다. 그러자 한 모금 선혈과 함께 부러진 두 세 개의 이빨이 섞여나왔다. 주위의 인물들은 영문을 몰랐다. 그들은 중년인이 움직였는지 움직이지 않았는지조차 보지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중년인이 여전히 뒷짐을 진 채 그냥 우뚝 서 있었던 것으로만 보였다. 잔양신마는 수치감이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무림의 우내이마(宇內二魔) 중의 한 명이자 사도 최고의 인물인 자신이 이토록 형편없이 당하다니…… "네놈이…… 나를……" 잔양신마는 치를 떨었다. 순간, 다시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잔양신마가 비틀했다. 오른쪽 뺨에 따귀를 맞은 것이다. 순식간에 오른쪽 뺨이 퉁퉁 부어 올랐다. (으…… 으…… 무, 무서운 놈이다.) 잔양신마는 공포어린 시선으로 중년인을 응시했다. 그러자 중년인은 잔양신마를 바라보며 냉혹하게 입을 열었다. "노부가 이백 년 만에 무림에 나와 아는 자가 없겠지만 그래도 어린 놈의 말이 너무나 불손하구나!" (이…… 이백 년……!) 잔양신마는 물론이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못했다. 중년인은 냉막하게 말을 이었다. "무공을 보아하니 천잔마옹의 후예같은데…… 맞느냐?" 잔양신마는 중년인의 말에 움찔했다. 천잔마옹은 바로 그의 사조였던 것이다. "사조(師祖)님을…… 아시오?" "천잔마옹의 제자인줄 알았더니 겨우 그의 사손이야! 흥! 정말 어이가 없군. 과거 천잔마옹(天殘魔翁)도 노부 앞에서는 숨을 제대로 못쉬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구부렸거늘 그의 사손 놈이 감히 노부에게 무례를 해?" 잔양신마는 경악하여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사조인 천잔마응은 잔양신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만약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대략 이백 육십을 웃돌 까마득한 전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그럼 저자가 정말 이백 세가 넘었단 말인가?) 잔양신마는 불신의 표정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이때, "창(蒼)호법! 잠시 물러가시오." 옆에서 바라보던 음산한 청년이 걸어나왔다. 그는 사악한 눈으로 중년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귀하의 말을 들어보니 과거 꽤나 명성을 떨쳤던 분 같은데…… 실례지만 높으신 존함이 어찌 되시오?" 중년인, 즉 황보성운은 차갑게 그를 바라보며 같잖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따위 하잘 것 없는 애송이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값싼 이름이 아니다." 그 말에 청년의 안색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의 눈 깊숙한 곳으로 새파란 인광이 번득였다. "흐흐흐…… 당신이 누구든…… 또 과거 얼마나 명성을 날렸는지 모르나 내 앞에서는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이다." 황보성운은 문득 그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한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렇다. 이제보니 이놈은 과거 나에게 구유마공을 써서 죽염마령과 음양서생을 도망가게 한 그놈이로구나!) 황보성운은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살심(殺心)이 솟구쳤다. "흐흐흐…… 애송이가 실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구나." 그의 입술이 기묘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뒤이어, "흐흐흐흐흐흐흐……" 그의 입술 사이에서 기묘한 웃음 소리가 나직이 흘러 나왔다. 찰나 주위의 인물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지금 황보성운은 소살천공(笑殺天功)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 천소노인의 이백 년 정수에 천음상인 소홀자의 이십 년 각고 노력이 어울어져 탄생한 위대한 음공 소살천공, 그 무림사상 개세무비의 최고 음공(音功)이 전개되고야 만 것이었다. 그는 지금 소살천공의 제 일초인 미소환(黴笑幻)을 시전하고 있었다. "흐흐흐흐흐흐흐……" 소살천공 중에서 가장 위력이 약하고 또한 가장 유한 것이 미소환이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천존교의 무리들에겐 치명적이나 다름 없었다. "크으으으……" "커어억!" 공력이 약한 자들은 음파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칠공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헌데, 기이하게도 신녀궁 사람들은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는 듯 시종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때, "크하하하하하하……" 황보성운의 소성(笑聲)이 돌연 귀신이 울부짖는 듯 으스스하게 돌변하기 시작했다. 소살삼음(笑殺三音)의 제이초 귀소열(鬼笑裂)이 시전된 것이다. 그러자 잔양신마, 죽엽마령, 음양서생은 물론 음산한 청년과 그 옆의 두 노인들도 황급히 정좌를 했다. 그리고 내공을 끌어올려 그 소성과 대항하기 시작했다. 황보성운의 웃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신녀궁의 주위로 엄청난 모래먼지가 일어났다. 천존교의 무리들은 점차 안색이 밀랍처럼 굳어져갔다. 이미 내공이 약한 일반 부하들은 모두 피를 토한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신녀궁주인 민예항을 비롯한 신녀궁의 사람들은 이 엄청난 광경에 망연자실했다. 주위가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있거늘 자신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음공을 시전하고 있는 중년인의 능력이 그만큼 지고(至高)하다는 뜻인 것이다. (대체 저 신비인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능력이니……) 이때 운공을 하여 음공에 대항하고 있던 죽엽마령의 몸이 폭풍처럼 경련하기 시작했다. 혈맥이 지렁이처럼 툭툭 불거지고 코와 입으로 선혈이 스며 나왔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음공에 대항했지만 그것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어느 순간, "크아아아악!" 죽엽마령은 폐부가 찢기는 듯한 신음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그의 입으로부터 한 줄기 피화살이 터져나왔다. 그리고는 두 눈이 뒤집어지며 뒤로 풀썩 넘어가 버렸다. 헌데, 그가 쓰러지자 마자 돌연 음양서생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두 눈은 분노로 불타며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네놈만 음공을 할줄 아는게 아냐!" 그는 미친 듯이 장소성을 터뜨렸다. "우아아아아아아!" 그것은 바로 음양서생의 독문음공인 범천음(梵天音)이었다. 허나, 어찌 그런 음공을 소살천공과 비유할 수 있겠는가? 만용의 대가는 곧 지불되었다. 음양서생의 장소성이 곧 잦아들더니 돌연 두 눈이 피분수와 함께 밖으로 퉁겨나왔다. "크아아아악!" 뒤이어 귀와 입에서 피분수가 뿜어지더니 그 자리에서 고목처럼 고꾸라졌다. 아! 실로 끔찍한 소살천공의 위력이었다. 그 중 비교적 약한 소살삼음의 일초와 이초에 천하에 이름을 떨치던 대마두들이 맥없이 쓰러지다니…… 한편 나머지 네 명도 온전치 못했다. 그들의 안색은 삽시간에 밀랍처럼 창백하게 변했으며 입 끝으로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황보성운은 느닷없이 웃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비로소 나머지 네 명은 창백한 안색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순 장내에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황보성운이 음산한 청년을 예리하게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네놈은 천존교에서 어떤 위치냐?" 청년의 무심한 두 눈이 공포로 물든 채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서야 상대의 무공이 자신과는 천양지차라는 걸 느낀 것이다. "초…… 총사(總師)요." "위지청목이 천존교의 교주냐?" "그…… 그것을 어떻게……?" 청년의 표정이 굳어졌다. 황보성운은 다시 냉혹히 물었다. "위지청목과 너는 무슨 관계냐?" 청년은 마른 침을 삼켰다. 침 속에 비릿한 피냄새가 풍겨왔다. "그분은…… 증조부님이시오." 황보성운은 냉랭히 코웃음쳤다. "좋다. 가서 위지청목에게 알려라! 사문을 배반한 대가를 받으러 천부동(天附洞)에서 노부가 나왔다고!" 음산한 청년은 공포에 떨면서도 마지막 오기를 다하여 물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천외천유신!" 황보성운은 지극히 말했다. 허나, 천외천유신이란 다섯 글자가 주위에 준 충격은 너무나 컸다. "처…… 천외천유신!" 청년을 비롯해 잔양신마 등 세 노인은 그만 너무나 커다란 충격에 입만 벌릴 뿐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삽시간에 죽음의 공포가 덮여버렸다. (으…… 으…… 어…… 어쩐지…… 어마어마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했더니……) 놀란 건 신녀궁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까마득한 옛날에 존재했던 전설의 고수가 눈 앞에 나타나다니…… 이때 청년은 백지장같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 갑시다!" 청년과 세 노인은 전력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신형이 순식간에 신녀궁으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황보성운은 묵묵히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때 민예항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노선배님! 위기에서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황보성운은 여전히 담담한 태도로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럴 필요없다. 노부는 단지 위지청목 때문에 이 사건에 끼어든 것이니까…… 그럼 노부는 이만 가보겠다." 황보성운은 신형을 날렸다. "노선배님! 자…… 잠깐." 민예항은 황급히 외쳤다. 허나, 이미 황보성운은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민예항은 경악스런 표정으로 사라져가는 황보성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영…… 비행술…… 정말…… 인간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무공이다……!" 이때 민예항 옆으로 호혜령이 다가섰다. "진정 믿기 힘들어요. 이백 세가 넘는 사람이 아직까지 저런 모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니……" "허나, 진짜 천외천유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천존교의 마두들을 어린애 다루듯이 할 수 있겠느냐?" 이미 황보성운의 모습은 그들의 시야에서 아득히 사라지고 없었다. 제 32 장 天下第一高手 1 호북성(湖北省)의 악양(岳陽). 호북 제일의 대도(大都). 또한 거대한 장강(長江)의 물결이 넘실거려 흘러드는 곳. 그 물보라가 흐트러지는 강변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주루 객잔들이 과연 몇이던가? 수십 층으로 올라간 기루(妓樓)마다 노래가락 절로 흐르고, 절승의 경관을 따라드는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긴 탄식이 면면히 흘렀으리라. 이곳은 고루전각들이 늘어선 시내의 번화가, 어느 객잔 밖이었다. 객잔의 처마 아래 지금 한 명의 중년인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앉아 있었다. 대략 삼십 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그의 얼굴은 지극히 냉막했다. 게다가 미간으로는 싸늘하고 오만한 기운이 뻗쳐있어 그다지 좋은 인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맨바닥에 눈을 내리감은 채 그냥 앉아 있었다. 헌데 괴이하게도 그의 바로 좌측에는 하나의 깃발이 꽂혀있는 것이 아닌가? 헌데 더욱 괴이한 일이 있었으니, 그 감청색 깃폭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금색 수실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세상만사를 모두 꿰뚫으니 천하(天下)가 내 손 안에 있도다. 대륙(大陸)을 모두 훑어봐도 나의 일검(一劍) 일장(一掌)을 받아내는 자(者)는 한 명도 없구나!〉 아니 이 무슨 망발인가? 천하에서 당할 자(者)가 없다니…… 이것을 보면 누구든지 미쳤다고 하리라. 그의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깃발과 청의중년인을 번갈아 흘끔거리며 보았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허나 중년인을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세상은 넓고 미친 놈은 수없이 많은 법이니까.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일들에 신경쓰기엔 세상은 너무나 복잡한 것 이다. …… 계속 시간이 흘러갔다. 허나 청의중년인은 결가부좌를 튼 상태로 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이때 등 뒤에 귀두도를 멘 한 명의 우람한 대한이 객잔 안으로 들어서려다 무심코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곧 그는 그 옆에 꽂혀 있는 깃발을 발견했다. 다음 순간, 그는 검은 깃발에 쓰여있는 엄청난 말에 그만 멍하니 서 버렸다. 그러나 이내 그는 냉소를 쳤다. 그리고 성큼 청의중년인 앞으로 다가갔다. "친구! 정말로 친구의 무예가 천하무적이오?" 지극히 빈정거리는 어투였다. 청의중년인은 눈 한 번 뜨지 않고 묵묵히 대답했다. "그렇소." "헤헤헤헤…… 정말 나 악양대호(岳陽大虎) 장팔이 세상에 태아나서 이렇게 웃기는 자는 처음 보는군." 대한은 손가락으로 청의중년인을 가리키며 참을 수 없다는 듯 계속 웃어댔다. "……" 허나 청의중년인은 시종 표정 하나없이 바로 그 상태였다. 그러자 대한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정중히 물었다. "그렇다면 내 한 마디 묻겠소." "물어보시오." 시종 딱딱하고 냉랭한 어투였다. 대한은 입가에 조소를 떠올렸다. "당금 무림의 구파일방의 장문인도 이길 수 있소?" "일초(一招)." 청의중년인은 지극히 담담히 대답했다. "일초라니?" 대한은 어리둥절하며 되물었다. "그들은 나의 일초밖에 받아낼 능력이 없소." 대한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기실 허풍도 이쯤 되면 그냥 넘기기가 어렵다.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면 일대 지존의 신분인데 겨우 일초밖에 상대가 안된다니…… 실로 가공할 말이었던 것이다. 대한은 문득 무엇을 생각했는지 인상을 쓰며 다시 물어보았다. "당금 무림의 십대고수(十大高手) 정도면?" 청의중년인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이초(二招)." 대한은 아예 놀라다 못해 버럭 의심이 들었다. (이 친구 혹시 먹을 것을 잘못 먹어서 돌지 않았나?) 이때 벌써 주위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헌데, 그들 중에는 특이한 인물들이 몇몇 있었으니…… 바로 음산한 청년과 세 명의 노인이었다. 그들은 흥미있게 이야기를 듣다가 십대고수들이 이초 상대밖에 안된다고 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바로 무산에서 황보성운에게 패해 달아난 자들이었던 것이다. 잔양신마는 울화가 치밀어 버럭 한 소리를 질렀다. "저놈이 너무 안하무인격으로 큰 소리를 치는군. 뒈지고 싶어 환장을 했나?" 자신 또한 십대고수의 한 명이 아니던가?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나서려 했다. "잠깐, 창(蒼)호법!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음산한 청년이 가볍게 제지했다. 이때 예의 그 대한이 능글스런 조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그렇다면 귀하의 무공은 천하무적이겠군." "최소한 그 정도는 되지." 청의중년인의 냉막한 답변이었다. "최소한?" 대한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당신! 옥면신수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 순간, 전혀 미동이 없던 청의중년인이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였다. 허나, 그는 이내 감추듯이 급히 눈을 감고 얼굴에서 표정을 조속히 지워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냉막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들었소!" 그러자 대한은 능글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소?" "사초(四招)." 다시 청의중년인의 냉랭한 말이 떨어졌다. "사초라니?" 대한은 황당하게 되물었다. 청의중년인은 강조하듯 힘주어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사초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것이오." 순간, "푸핫핫핫……" "허헛헛헛……" 중인들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옥면신수 황보성운, 그는 누구인가? 그는 우내이마 중의 하나인 잔양신마조차 당해내지 못한 천하무적의 고수가 아닌가? 헌데, 그런 그를 사초 만에 꺾을 수 있다니…… 대한은 재수없다는 듯 가래침을 바닥에 뱉으며 빈정거렸다. "이제보니 머리가 돈 놈이었군. 공연히 미친 놈과 대화를 했군." 허나 청의중년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때 음산한 청년이 슬쩍 옆의 노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 적살도(赤殺刀)를 멘 혈의노인은 입가에 음침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친구, 조금 전에 친구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라 자부할 수 있나?" 청의중년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언제나 두 번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오." 혈의노인은 은근히 배알이 뒤틀렸다. 그는 가볍게 수작을 걸었다. "그렇다면 나는 몇초 만에 제압할 수 있겠나?" 청의중년인은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냉막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무공은 그래도 강호에서 한 가닥 하겠군. 내가 당신을 약간 높게 잡으면 삼초면 끝낼 수 있소." "삼초(三招)?" 혈의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노부가 백 수십 년을 살아오는 동안 이토록 광망스러운 놈은 처음이다." 혈의노인은 냉혹한 안색으로 버럭 소리쳤다. "나 패도혈마(覇刀血魔)가 명예를 걸고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마." "패도혈마!" "우내이마 중의 하나다!" 주위 인물들은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꼭지가 빠져라 줄행랑을 놓았다. 예의 악양대호 장팔이란 대한도 전신을 부들부들 떨더니 뒷걸음질 쳐 급급히 도주했다. 찰나지간에 수없이 몰려있던 중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단지 장내에는 음산한 청년 일행과 청의중년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패도혈마가 두 눈을 시뻘겋게 붉히며 노갈을 터뜨렸다. "애송아! 어서 준비해서 노부를 공격해라. 내 손속에서 삼초만 견딘다면 살려주마." 청의중년인은 지극히 담담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언제나 먼저 공격해 본적이 없소. 마음대로 손속을 펼쳐 보시오." 패도혈마는 그만 분기탱천하고 말았다. 스르릉----! 그는 등 뒤의 엄청나게 큰 적살도를 뽑아 들었다. 순간, 사방으로 시뻘건 혈광이 현란하게 내뻗었다. "자, 간닷!" 패도혈마는 수중의 적살도를 무시무시하게 내리찍었다. 순식간에 방원 십장이 온통 혈광(血光)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수천의 검화가 청의중년인의 전신으로 떨어져 갔다. 허나 청의중년인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바라보던 사람들이 냉소했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가 있었다. 몸이 두쪽이 난 채 나뒹구는 청의중년인의 모습을…… 헌데 아쉽게도 상황은 그들의 예측대로 흐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던 청의중년인이 돌연 손가락을 슬쩍 움직이더니 무지막지하게 내리쳐오는 적살도를 손가락 끝으로 잡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그것은 실로 통천경악할 일이었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흑!" 패도혈마는 급급히 한 모금의 찬공기를 들이켰다. 천하의 마도(魔刀), 적살도가 일개 중년인 손가락 끝에 잡히다니…… 그는 칼을 힘껏 잡아당겼다. 헌데 흡사 적살도는 무엇에 단단히 걸린 듯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패도혈마는 당황하며 급급히 전 내공으로 끌어당겼다. 허나 여전히 적살도는 요동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흡사 갑자기 쇠기둥을 뽑을려는 것과 같았다. (무…… 무서운 놈이다.) 패도혈마는 경악해 두 눈을 화등잔처럼 부릅떴다. 이때 청의중년인의 실소가 들렸다. "허----! 예상보다 형편없는 자로군. 아무래도 삼초를 일초로 바꿔야겠군." 이어 그는 적살도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밀었다. 순간, "으---- 윽!" 패도혈마는 엄청난 진력에 밀려 무려 일곱 걸음이나 격퇴당했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처…… 천하에…… 이렇게…… 무공이 강한 자가 있었다니……) 그는 아예 넋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주위에 있는 청년과 두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청의중년인이 그들을 힐끗 보며 중얼거렸다. "나이만 처먹었지 정말 쓸데없는 폐물들이군." 그 말에 잔양신마와 깡마른 노인이 노기충천했다. 잔양신마가 앞으로 나서며 이를 갈았다. "애송이 놈! 네놈이 그렇게 강하다면 우리 셋의 합공(合功)도 받아 보겠느냐?" 청의중년인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늙은 뼉다귀가 합쳐진다고 나아질게 있을까? 들리느니 뼈다귀 부딪히는 소리 뿐일텐데……" 잔양신마가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애송이 놈! 일장에 네놈을 없애주마." 동시에 세 마두는 삼면으로부터 신쾌무비하게 덮쳐들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사방에 돌가루와 흙먼지가 자욱이 날렸으며, 흡사 태풍이 몰아치듯 무시무시한 암경이 벼락치듯 떨어져 내렸다. 허나 청의중년인은 여전히 원래 그 자세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의 전신으로 태산을 무너뜨릴 듯한 장력이 짓쳐들었다. 찰나, 청의중년인의 전신에서 엄청난 압력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퍼---- 퍼---- 펑! 폭발음이 울렸다. 동시에, "크---- 흑!" "헉!" "큭!" 세 명의 노마두는 각기 다른 신음성을 내지르고 뒤로 퉁겨나갔다. 다음 순간, 가까스로 치밀어 오르는 기혈을 억누른 그들의 얼굴은 온통 경악으로 일그러져 버렸다. (이…… 이놈은 인간이 아니다. 어찌 인간이 이토록 강한 무공을……) 이때, "세 분! 잠깐만 물러나시오!" 손을 저어 제지시키며 음산한 청년이 청의중년인 앞으로 다가섰다. 이어 그는 정중히 포권지례를 갖추었다. "형장! 소생은 위지룡이라 합니다." "……" 청의중년인은 여전히 냉막한 안색이었다. 청년, 위지룡은 어색하게 웃으며 계속 입을 놀렸다. "저의 사람들이 형장을 모욕한 것은 제가 대신 책임을 지겠습니다. 형장께서 넓은 마음으로 양해하십시오." 청의중년인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스쳐갔다. "그래도 당신은 좀 사람같은 말을 할줄 아는군. 저 뼈다귀들에 비하면 훨씬 낫군." 세 마두는 노기충천했다. 허나 상대의 엄청난 무공 때문에 차마 발작을 하지 못했다. 위지룡은 계속 굽신거렸다. "형장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가운성(可雲成)일세." 청의중년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위지룡은 반색을 지었다. "아…… 이제보니 가형님이셨군요." 중년인, 즉 가운성은 내심 냉랭히 코웃음쳤다. (흥! 형장에서 형님이라…… 무척이나 계산이 빠른 놈이군.) 위지룡은 계속 수작을 걸었다. "가형님! 제가 오늘 형님같은 기인을 만난 것은 정말 크나큰 복연인 것 같습니다." 위지룡은 입가에 침을 발랐다. "하여 형님께 제가 술 한 잔 사고 싶은데 사양하지 마십시오." 가운성은 입술을 야릇하게 뒤틀었다. "으음! 자네는 갈수록 맘에 드는 말만 하는군." 이어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술 한 잔 사겠다면 못마실 것도 없지." 가운성은 가볍게 대답하며 훌쩍 일어섰다. 위지룡의 입가로 희색이 스쳤다. 그는 가운성을 무슨 제황처럼 떠받들어 모시며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굽신굽신하는 태도는 정말 옆에서 혼자 보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객잔 주인이 나와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위지룡은 황금 덩어리를 꺼내들며 거드름을 피웠다. "가장 좋은 방이 있느냐?" 객잔 주인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는 얼른 허리를 굽히며 굽신거렸다. "예! 예! 있구 말굽쇼. 최고 특실로 모시겠습니다." 위지룡은 거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악양에서 제일 가는 명기들을 불러오너라." 객잔 주인은 허리를 땅에 닿도록 굽혔다. "네, 네…… 알았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객잔의 화려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순식간에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잠시 후,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쁜 명기들이 줄줄이 객잔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술자리는 곧 질펀한 분위기에 휩싸여 들어갔다. 계속 터져나오는 명기들의 교성, 그리고 달착지근하게 녹아들어가는 술들…… 주연(酒宴)은 무르익어 갔다. 2 시간이 흐르면서 술자리는 완연히 무르익어 있었다. 이때 위지룡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늘 가형님같은 분을 만나 이렇게 인연을 쌓게 되니 소제는 실로 무상의 영광입니다." "허허허…… 흐르는 유랑인같은 신세거늘…… 자넨 너무 겸손하군." "아…… 아닙니다. 소제가 그동안 무수한 영웅호걸을 만나봤지만 형님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허허허…… 과찬이겠지만 하여튼 듣기 싫진 않군." 문득 위지룡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물어보게." "가형님께서는 대체 어디서 그렇게 엄청난 무공을 배우셨습니까?" "궁금한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형님의 무공신위가 워낙 신비로와서……" 위지룡은 어색하게 웃었다. 가운성은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 내가 살던 곳은 감숙성(甘簫省)과 청해성(靑海省)의 경계 지역인 현소(峴昭)란 곳이네." 가운성은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그리고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곳에 무황곡(武皇谷)이란 곳이 있지." 가운성은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 "……" 모든 사람들은 호기심에 귀를 바짝 세웠다. 가운성의 말은 계속 되었다. "무황곡은 원래 천여 년 전 무황(武皇)이란 분이 세운 곳으로 그곳에는 천하의 모든 무공 비급이 비장되어 있네." (무황……?) 청년과 노마들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 그들의 의문을 알았는지 가운성은 빙그레 웃었다. "아마 무황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을걸세." "소제가…… 워낙 우민한지라……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건 자네의 잘못이 아니야. 실상 무림에서 그분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을거야. 워낙 오래 전의 일이고 게다가 무황께선 무공이 하늘의 경지에 달했지만 평생에 걸쳐 몇번 무림에 나타나지 않으셨으니 일반 사람들이 모르는건 당연하지……" 위지룡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형님께서는 그 무황곡의……" 가운성은 시선을 위지룡의 얼굴로 돌렸다. "음! 맞았네. 나는 바로 그 무황곡의 전인일세." "아!" 중인들은 모두 탄성을 발했다. 가운성은 다시 묵묵히 술잔을 잡았다. 그러자 옆의 기녀가 교태롭게 술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원래 나는 무황곡을 나올 생각은 하지 않았었네." 그는 술잔을 쭉 들이켰다. "허나 요즘 한 가지 소문이 떠돌더군." "어떤 소문 말입니까?" 위지룡은 의아한 기색으로 급히 물었다. 가운성은 천천히 위지룡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외천유신 단목천이 다시 무림에 등장했다는 소문 말일세." 위지룡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불안한 눈길로 가운성을 응시했다. "천외천유신과 형님과 무슨 친분이라도……?" "친분?" 가운성은 냉랭히 코웃음쳤다. "내가 어찌 그런 놈과 친분 따위가 있을 리가 있겠나?" 위지룡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하오면…… 무슨 원한이라도……?" 가운성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원래 무황곡에는 수많은 무공 비급이 있네. 허나 그 중에서도 최고의 비급은 무황삼경이라 불리우는 세 권일세." "아! 무황곡의 최고비급이라면 당연히 엄청나겠군요." "물론이지!" 가운성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헌데 이백 년 전 단목천이 무황곡에 침입해서 무황삼경 중 하나인 천외천유경을 가지고 도망했네." 중인들은 모두 가운성의 이야기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이었다. 가운성은 그들의 표정을 훑어보며 내심 냉소를 금치못했다. (흥, 완전히 화술(話術)에 휘말려 들어갔군.) 허나 그의 얼굴은 시종 담담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의 사부께서는 진노하시어 즉시 무림으로 나오셨네." 가운성은 위지룡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여 천외천유신을 찾으셨지만 웬일인지 그는 곧바로 실종되고 말았네." 위지룡은 그만 그 말에 움찔하고 말았다. 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조부 위지청목이 천외천유신을 암습하여 천부동에 감금시켰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가운성은 위지룡이 움찔하는 모습을 힐끗 보며 내심 비웃었다. 허나 겉으론 침중하게 말했다. "사부께서는 실망하여 무황곡으로 돌아오셨네." 가운성은 다시 술을 한 잔 비웠다. "그후 이백 년이 지난 후 사부께서 나를 제자로 거두셨네." 허나 곧 안색을 냉막히 굳혔다. "헌데 얼마 전에 다시 천외천유신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사부께선 급히 나를 무림으로 보낸 것이네." 중인들의 얼굴에 온통 경악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위지룡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입을 딱 벌렸다. "그…… 그럼…… 형님의 사부께서 아직 살아계시단 말입니까?" 가운성은 지극히 담담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분은 지금 오백 세가 넘었지만 천수를 누리고 계시지." (으…… 아…… 오…… 오백 세!) 위지룡은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마치 전설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풋, 내가 너무 거짓말을 심하게 했나!) 가운성은 그들의 넋나간 표정을 보며 내심 터져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기실 가운성(可雲成)의 운성(雲成)이란 이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그것을 꺼꾸로 하면 성운(成雲)이 아닌가? 게다가 성은 가(可)씨다. 가(可)라는 자와 가(假)라는 자는 발음이 같다. 결국 가짜 성운이라는 뜻이니, 이 얼마나 요절복통할 일인가? 가운성 즉 황보성운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내가 무림에 나온 것일세." 황보성운은 허공에 시선을 던지며 침중히 말을 이었다. "나는 단연코 단목청을 잡아 천외천유경을 회수해야만 하네." 그러자 위지룡이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 "단목 늙은이의 무공은 엄청나 천하에 그를 당할 자가 없습니다." 황보성운은 싸늘히 냉소를 날렸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내 손에 걸리면 백초도 넘기지 못해!" "배…… 백초라고 하셨습니까?" 황보성운은 곧 바로 눈에 조소의 빛을 가득히 떠올렸다. "그가 익힌 천외천유경은 무황삼경 중 가장 낮은 것에 불과해." 위지룡은 만면에 경악의 빛을 떠올렸다. 황보성운의 말은 계속되었다. "허나 내가 익힌 무외무허경(武外武虛經)과 마외마혈경(魔外魔血經)은 그보다 훨씬 고강하지." 그의 얼굴이 다시 냉막하게 변해갔다. "내 그를 붙잡아 기어코 천외천유경을 회수하고 놈의 목을 따버릴 것이다!" 황보성운은 말을 마치자 마자 손을 슬쩍 치켜들었다. 순간, 그의 손바닥이 완전히 투명하게 변해버렸다. 그것은 흡사 투명한 벽록강석과도 같았는데 환상적인 빛이 그곳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위지룡과 노마들, 그리고 기녀들이 너무나 놀라 망연자실했다. 어찌 인간의 손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지금 황보성운은 단목천에게 배운 공전절후의 수법인 천인수(千刃手)의 수법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패도적이고 극랄하여 그의 세 제자에게조차 가르치지 않았다는 수법 천인수! 차라리 하나의 마공(魔功)을 연상시키는 경천동지의 수법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황보성운이 그들의 망연한 표정을 힐끗 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그리곤 그는 슬쩍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츠츠츠츠츠츠츠츳----! 그의 손으로부터 수천 수만의 지극히 예리한 경기가 광풍노도의 기세로 엄청나게 뻗어나갔다. 순간, 경기에 부딪힌 방문이 그 자리에서 먼지처럼 소멸되었다. 엄청난 경기는 문 밖으로 뻗어 십 장 밖 수백 년 고목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순간, 은은한 뇌음이 울려퍼졌다. 동시에 고목이 수천 수만 조각으로 부서져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많은 고목조각들은 땅에 떨어지기 전에 한줌 가루로 변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대경하고 말았다. 그들의 눈 앞엔 이미 거대한 고목이 없었다. 애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고목의 잔재조차 증발해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저…… 저게…… 진정…… 인간의 무학이냐?) 황보성운은 음침한 미소를 날렸다. "흐흐흐…… 전 내공을 다 사용하면 이 객잔이 통채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일성의 내공만 사용했네." "일…… 일성!" 중인들은 까무라치듯 부르짖었다. (맙소사! 일성이라니…… 저 정도만 해도 천하에서 받아낼 자가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겨우 일성이라니……!) 그들은 아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심정이었다. 기실 황보성운은 팔성의 내공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무공은 실로 경천동지할 만한 것임에 분명하였다. 이윽고 황보성운은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것 말고도 더욱 더 무서운 수많은 절학들이 있지만 자네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니 생략하겠네." 지극히 거만한 황보성운의 말투였다. 허나 이미 위지룡은 황보성운에게 휘말려 들어가 정신이 없었다. (이 사람만 우리편으로 끌어들인다면 천외천유신이 아니라 그 할애비가 온다해도 무서울 게 없겠다.) 위지룡의 얼굴에 결연한 안색이 떠올랐다. (좋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사람을 총단으로 데려가자. 그렇지 못할 바엔 차라리 암계로라도 죽여버리는 것이 낫다.) 위지룡은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가 형님께 한 가지 건의를 할까하는데요?" "무엇인가?" 황보성운은 가볍게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그러자 위지룡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가형님께서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무림에 처음 나온 이상, 소식에는 어두우실 것입니다." 황보성운은 짐짓 진지하게 대답했다. "음! 하긴 그렇지." 그러자 재빨리 위지룡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황보성운은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위지룡은 교활스럽게 두 눈을 반짝였다. "형님이 그 단목천 늙은이를 찾을 동안 우리 총단에 머무르시면 저희들이 모든 사람을 동원시켜 단목천을 찾아내겠습니다." 황보성운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옳커니! 요놈이 드디어 나의 덫에 걸렸구나!) 허나 겉으로는 오히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하면 자네에게 너무 폐가 되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군." 위지룡은 황급히 부인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히려 제가 모시기에 부족함이 있을까 걱정입니다." 황보성운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척하더니 결연히 입을 열었다. "음, 그렇다면 얼마간만 폐를 끼치겠네." 순간ㅡ 위지룡은 만면에 희색을 띄웠다. 그는 흔쾌히 술병을 집어들었다. "가형님! 소제의 잔을 받으십시오. 가형님같은 분과 한식구가 되었으니 실로 무상의 영광입니다." 위지룡은 황보성운의 술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황보성운도 위지룡의 잔에 술을 부었다. "자네도 한 잔 받게." 위지룡은 술잔을 받으며 마냥 감격스러운 태도였다. "정말 오늘은 머리끝까지 취하도록 마셔야만 하겠습니다." 그러자 황보성운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마음껏 들어보세." 다시 좌중은 왁자지껄한 술자리가 벌어졌다. 취흥이 도도히 무르익어갔다. 허나 그 누가 알았으랴! 이런 속에서 황보성운의 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을 줄을. 황보성운은 술잔을 단숨에 비우며 야릇한 미소를 날렸다. (천존교로 들어가는 일차 관문 통과!) 제 33 장 사랑과 미움 1 저녁 무렵, 서편으로 석양이 찬란하게 불타고 있었다. 완연한 가을……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이면 기나긴 정취 속에서 사라져가는 아름다움들을 완상(玩賞)하리라. 가을의 쓸쓸한 추국(秋菊)들이 피고 있었다. 웅장한 전각들 뒷뜰에 있는 아담한 화원(花園). 가을 꽃들이 서늘한 바람에 나부껴 가늘게 흔들렸다. 고적한 가을꽃들의 정취(情趣). 그 꽃들은 그 고독한 꿈 가운데 이루지 못한 그 고고함들을 한껏 누리지도 못하고 스러져간다. 한데, 그 아담한 화원 주위에 한 명의 청의서생(靑衣書生)이 유 유히 거닐고 있었다. 그는 가끔 무엇을 생각하는 듯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인 채 거닐었다. 그리고 때때로 높다란 창천에 시선을 그득히 던지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꿈 속의 꿈이로다. 영락의 깊은 곳이 그 어딘가? 흘러가고 흘러갈 진저……" 이때 화원 속에서 돌연 하나의 꽃이 피어났다. 아니 그것은 꽃이 아니라 한 명의 소녀(少女)였다. 한 명의 꽃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꽃밭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한 떨기 국화(菊花)같은 소녀(少女). 대략 십 육칠 가량이나 되었을까? 스스로 내부(內部)의 아름다움을 못이겨 피어오르는 꽃처럼 실로 그 소녀의 모습은 아름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백옥빛으로 흘러내린 선명한 이목구비(耳目口鼻), 그리고 특히 두 눈은 보석같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소녀는 청의서생을 발견하자 발그스레하게 두 뺨을 물들였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옷자락을 매만졌다. 청의서생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위지낭자! 웬일로 이 홍운각(紅雲閣)까지 오시었소?" 지극히 부드러운 말씨였다. 소녀는 약간 당황한 듯 더욱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니예요. 단지…… 산책을 하다 저도 모르게 이곳까지……" 청의서생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이어 그에게서 호방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하…… 위지낭자의 취흥도 대단하군요. 불초 정말 감탄했소 이다." "어머!" 소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쩔줄 몰라했다. 위지혜미. 이것이 이 소녀의 이름이다. 그녀는 천존교 교주인 위지청목의 증손녀이자, 위지룡의 유일한 누이동생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조부와 부모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라왔다. 하여 그녀는 천존교 밖을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순진무구한 소녀였다. 헌데 요즘 들어 그녀의 그 조그만 가슴 속에 작은 풍파가 일기 시작했으니…… 한 달 전, 그녀의 오빠인 위지룡이 한 명의 청의서생을 데리고 온 것이 그 발단이었다. 그 청의서생은 매우 냉막한 모습에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이어서 처음에는 별 느낌을 받지 못했다. 허나 시간이 흐를 수록 그녀의 마음은 야릇하게 변해만 갔다. 비록 그가 잘생긴 미장부는 아니었지만, 그 풍기는 인상이 태산같고 학문도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한 것에 점차 그녀의 마음이 기울어져 간 것이었다. 게다가 냉막한 가운데서도 알 수 없는 부드러움과 인자함이 흘러 천존교 내의 살벌하고 음산한 사람들만 보아온 그녀로서는 금방 호감이 갔던 것이다. 사랑은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다가 언제 끝나버리는지 더욱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청의서생을 은근히 남모르게 사랑하고 만 것이었다. 허나 근거 없는 사랑이란 초로(草路)와 같은 법(法). 한 번 격랑이 밀려왔다 가면 물거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다. "영조부께서는 비천각(飛天閣)에 계시오?" 청의서생은 부드러운 눈길로 물었다. 소녀, 즉 위지혜미는 옥구슬이 은쟁반 위를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오늘 아침에 친구분들이 찾아오셔서 대화를 하고 계셔요." "친구분들?" 청의서생은 가볍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위지혜미는 생긋 매혹적인 웃음을 날렸다. "가(可)대협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그 친구 분들은 가끔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예요." 가(可)대협이라니? 그렇다. 청의서생은 바로 변장한 황보성운이었던 것이다. 황보성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혹시 그 친구들이란 단(丹)노형님의 둘째 셋째 제자인 사도패와 마응상이 아닐까?) 이때 위지혜미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제가 한 가지 물어봐도……?" "……?" 황보성운은 의아한 눈빛으로 위지혜미를 응시했다. 위지혜미는 까만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가대협께서는 어찌하여 그 나이가 되시도록 아직 결혼을 안하셨어요?" 황보성운은 멋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워낙 인물이 못났으니 할 수 없지요." "어머! 무슨 농담을 그렇게 멋없게 하세요?" 위지혜미는 당치 않다는 듯 가볍게 눈을 흘겼다. "천하에 가대협만한 영웅은 없다고 나는 생각해요." 황보성운은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게 봐 주신다면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소." "아니예요!" 위지혜미는 가볍게 정색을 했다. "천하에 여인의 눈이 잘못 됐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아마 가대협을 보고 사랑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녀는 약간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그런데……" 순간, 그녀는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말한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은 온통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내리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확확 달아 올랐고, 가슴마저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깨물어 주고 싶도록 귀여운 모습이었다. "……" 황보성운은 어떤 사랑스러운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위지혜미 앞 으로 다가갔다. 순간,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수줍음에 아예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그녀는 귓뿌리까지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턱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위지낭자!" 위지혜미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급히 옆으로 돌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옥같은 얼굴이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황보성운은 다시 그녀의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차마 황보성운을 응시하지 못하고 두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그녀의 속눈썹이 길게 드러났다. 황보성운은 어떤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위지혜미의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위지혜미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순간, 그녀의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의 가슴은 지금 흡사 폭풍이 몰아치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바야흐로 한 떨기 청초한 꽃이 떨어질 찰나였다. 한데, 황보성운은 그만 그녀의 입술 위로 가져가던 자신의 입술을 멈추었다. (이 소녀가 아무리 사랑스럽다해도 나에게 있어서는 원수의 손녀나 마찬가지이다.) 황보성운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어찌 한순간의 기분으로 한 소녀의 마음에 씻지 못할 상처를 줄 수 있겠는가?) 이때 위지혜미는 황보성운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살포시 눈을 떴다. 헌데 황보성운은 이미 한 걸음 떨어져서 묵묵히 허공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녀는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설움이 왈칵 치밀었다.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아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가대협…… 제가 가대협과 어울릴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못생겼나요?" 황보성운은 당황했다. 그녀가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위지혜미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흐흑……" 그녀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두 뺨을 감싸쥐고 몸을 돌려 달려갔다. 황보성운은 그녀를 잡으려다 흠칫했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렀다. (그만두자.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좋다.) 한편 위지혜미는 황보성운이 자신을 잡아주기를 은근히 바랬다. (그러면 그의 품에 안겨 끝없는 행복의 나락으로 떨어지리라.) 헌데 황보성운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위지혜미는 견딜 수 없이 슬펐다. 달리는 그녀의 복사꽃 고운 뺨 위로 쉴새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달리면서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바보, 천치…… 목석같은 사람……) 달리는 그녀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거렸다. (흐흐흑…… 나의 맘을 그렇게 몰라주다니……) 황보성운은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옛부터 정이 많으면 한도 많다고 하지 않았는가…… 위지소저, 용서하시구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여도 남는 것은 상처 뿐이라오.) 황보성운은 어두운 안색으로 천천히 화원을 벗어났다. 이때 전각 모퉁이로부터 위지룡이 나타났다. 그는 황보성운을 발견하자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가형님! 여기 계셨군요. 정말 한참 찾았습니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허둥거리냐?" 황보성운은 침울한 안색으로 위지룡을 바라보았다. 위지룡은 빙글빙글 웃으며 유쾌하게 입을 열었다. "하하하…… 조부님께서 빨리 가형님을 모셔오라고 야단입니다." "위지노협께서 어쩐 일로 나를……?" 황보성운은 의아한 빛을 띄웠다. 위지룡은 씽긋 웃으며 황보성운을 잡아 끌었다. "우선 저를 따라와 보십시오." 황보성운은 천천히 위지룡을 따라갔다. 이윽고 그들은 한 채의 웅장한 전각 앞에 섰다. 그 전각의 위용은 얼마나 거대한지 기둥 굵기만도 무려 어른의 두 아름도 넘어보였다. 게다가 곳곳으로 가로지른 전각의 횡목(橫木)들에는 찬란한 금빛으로 번쩍거렸으며, 그 높이는 이미 수십 장에 달해 고래등같은 기와들이 마치 작은 목각처럼 까마득해 보였다. 이곳이 말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는 곳이라는 비천각(飛天閣)이었다. 비천각(飛天閣). 이곳은 천존교 교주인 구유천존 위지청목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그들 천존교 무리의 모든 음모와 계략들이 무수히 이곳에 이루어지며 또한 내왕하는 모든 귀빈들을 영접하고 보내는 곳이기도 했다. 2 황보성운과 위지룡은 비천각 안의 내빈청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반드르르하게 빛나는 대청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대청 안에는 거대한 팔선탁자가 있었으며, 그 탁자 주변으로는 화려한 태사의가 놓여져 있었다. 지금 그 태사의에는 다섯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황보성운은 위지룡과 함께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가운데 앉아있던 혈색이 좋은 백의노인이 벌떡 일어서며 반색을 했다. "하하하…… 가노제, 어서 오게나." 황보성운은 가볍게 예를 취했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위지노협께선 어인 일로 소생을 부르셨는지요?" "하하하…… 우선 자리에 앉게나." 백의노인은 황보성운을 자신의 옆자리로 이끌었다. 황보성운은 조용히 착석했다. 허나 위지룡은 감히 앉지 못하고 백의노인, 즉 위지청목의 뒤에 가 섰다. 한편, 태사의에 앉아있던 네 명의 노인들은 황보성운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시종 냉막한 태도였다. 이때 위지청목이 주위를 둘러보며 흔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여러분! 노부가 한 젊은 기협을 소개하겠소." 그는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가노제로 말할 것 같으면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 고수라 할 수 있는 일대기협으로 가운성이라 하오." 황보성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묵묵히 포권을 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생 가운성, 앞으로 여러분의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위지청목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띄웠다. "가노제! 앉게나. 내가 이 분들을 소개하지."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바로 왼쪽에 있는 노인을 소개했다. "이 사람은 나의 둘째 사제로 강호에서 일명 고루천존 사도패라 부르는 사람일세." 황보성운은 위지청목이 가리킨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쇠꼬챙이처럼 깡마른 모습에 해골처럼 음침한 자(者)였다. 게다가 시퍼렇게 움푹 패여들어간 두 눈으로부터는 싸늘한 녹광이 뿜어나와 매우 흉악한 인물이라는 것을 담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보성운은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영명(英名)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고루천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청목은 웃으며 그 다음 사람을 소개했다. "이 사람은 나의 셋째 사제 독혈천존 마응상일세." 그는 대략 오십 정도 되어보이는 대머리 중년인이었다. 헌데 특이한 것은 그의 두 눈이 마치 실밥이 터진 듯 가늘게 찢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부탁드립니다." 황보성운은 포권지례를 갖추었다. 독혈천존은 큰 입에 씨익 미소를 떠올리며 손을 내저었다. "천만에, 노부가 오히려 부탁해야 하겠군." 위지청목의 손이 계속 다음 사람을 가리켰다. 그는 매우 냉막하고 음랭한 인사의 홍포라마(紅希喇痲)였다. "이분은 서장 황교(黃敎)의 대사마(大師馬)이신 야율극(野律克) 법사이시네." 황보성운은 유심히 그를 살피며 포권을 했다. "처음 뵙습니다." "아미타불…… 소시주! 소시주의 위명은 위지대협에게 많이 들었소이다." 홍포라마는 합장을 했다. 위지청목은 마지막 사람을 소개했다. "이분은 남해 현궁도(玄弓島)의 제일고수로 독심마검(毒心魔劍) 유조림(柳朝林) 대협이시오." 그는 근 백여 세가 넘어보이는 얼굴이 매우 창백한 노인이었다. 그의 두 눈은 흡사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며 얼굴에는 일말의 표정조차 없는 매우 싸늘한 인상이었다. 그는 가볍게 포권하며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반갑소." "동감입니다." 황보성운도 냉막하게 예를 갖췄다. 이윽고 모든 좌중의 인물에 대한 소개가 끝났다. 그러자 위지청목은 좌중을 둘러보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네 분을 모셔오고, 이렇게 가노제를 불러온 것은 한 가지 중대한 상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 좌중에는 천 근 같은 침묵이 휩싸였다. 위지청목은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 천외천유신에 대한 소문이 강호를 진동하고 있소." 그는 다시 좌중의 인물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정파 무림에서는 그를 중심으로 우리와 대결하려는 묘한 움직임이 발동된 것이요." 그의 안색은 침중했다. 그러자 독혈천존은 가소롭다는 듯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흥! 그까짓 놈들이 아무리 모여봤자 불 속으로 뛰어드는 하루살이들이지…… 모조리 죽여버리면 되오." 그러자 위지청목은 고개를 침중히 가로저었다. "사제! 그렇게 쉽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네. 구파일방 놈들이야 별것 아니지만……" 그의 미간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그놈들은 지금 은거한 지 오래되는 그들 문파의 선배 스승까지 모두 동원하고 있으니……" 위지청목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예를 들면 천룡노인, 신검자, 백학거사, 청암신니…… 등 무수한 고수들이 바로 그들일세." "흐흐흐…… 사형! 그동안 너무 소심해진 것 같소이다." 독혈천존이 실끝같은 눈으로 교활한 눈빛을 빛냈다. 이어 그는 커다란 입을 삐쭉였다. "솔직이 십대고인이란 작자들 중 천룡 늙은이만 빼놓으면 나머지야 한낱 허수아비들이 아니오?" 그는 냉랭히 코웃음치며 말을 이었다. "흥! 나머지 놈들은 아마 나의 손에서 삼십 초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오." 위지청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는 여전히 침중한 안색이었다. "사제의 말도 일리는 있네만, 또 한 놈 무서운 놈이 있네." "누구요?" 고루천존이 의아한 기색으로 돌렸다. 위지청목은 고개를 돌려 고루천존을 바라보았다. "사제! 아마 자네도 옥면신수란 놈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일세." "옥면신수!" 좌중 인물들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옥면신수는 보통 놈이 아니오." 고루천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독혈천존도 안색을 신중히 바꾸며 입을 열었다. "사형의 말이 맞소이다. 옥면신수의 무공이 매우 과대평가 되어 소문이 나도는게 사실이지만 여러 정황을 종합해 분석해보면 놈의 능력은 우리와 비교해도 별로 손색이 없을 지경이오." 중인들의 얼굴에 놀라움의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위지청목은 얼굴을 침중히 하며 근심스레 입을 열었다. "허나 그 무엇보다도 단목 늙은 놈이 다시 또 나타난 것이 큰 걱정일세." 중인들의 안색은 그 말에 더욱 침중히 굳어버렸다. 이때 황보성운이 입을 열었다. "위지노협! 너무 그자를 높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놈의 무공이 그토록 강하다면 나에게 맡겨주십시오." 황보성운은 어조를 좀더 격앙시켰다. "내, 언제든지 그놈이 나타나면 결단코 요절을 내고 말겠으니 말이오." 그러자 위지청목은 무릎을 탁 치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내 깜빡 가노제를 잊고 있었군. 하기야 가노제 정도면 단목천도 꼬리를 움츠리고 도망갈걸세." 위지청목의 말에 주위 인물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황보성운을 너무 치켜세우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늙은 여우같은 위지청목은 즉각 그들의 눈치를 알아차렸다. 그는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날리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가노제! 우리가 이렇게 모이고 했으니 가노제의 무공 한수만 보여 우리의 안목을 좀 넓혀주게." 시종 위지청목의 황보성운에 대한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황보성운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어찌 제가 여러분 앞에 무공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입니다." "핫핫핫…… 너무 겸손해 하지 말게나." 위지청목은 당치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고루천존도 냉막하게 황보성운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가소협! 어디 한 번 우리의 좁은 안계를 넓혀 주시면 좋겠소." 너같은 놈이 무어 그리 대단한 재주가 있겠느냐는 식의 말투였다. 황보성운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졸렬하나마 한수 펼쳐보겠소이다. 그 대신 웃지는 마십시오." 황보성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때, 그의 눈에 하늘 높이 까마득히 떠 선회하는 매 한 마리가 들어왔다.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중인들의 시선이 그의 손 끝을 따라 매에게로 집중되었다. "제가 저 매를 한 번 잡아보겠습니다." 순간 중인들은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 하늘 높이 떠있는 매를 어찌 잡는단 말인가? 그것도 근 백 장 이상이나 떠있는 매를…… 그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렸다. 그들은 혹시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나 하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위지청목조차도 내심 우려를 금하지 못했다. (이자가 너무 큰소리를 치는군. 창피나 당하지 않을지……) 허나 황보성운의 얼굴은 시종 담담한 기색이었다. 이윽고 그는 서서히 오른손을 치켜들더니 돌연 허공으로 휙 뿌렸다. 순간, 한 줄기 섬전(閃電)! 검은 빛과 붉은 빛이 뒤섞인 섬뜩한 광채가 허공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올랐다. 가공할 살초(殺招), 혈천일도(血天一刀)가 전개된 것이었다. 광채는 가공할 속도로 솟구쳤다. 창졸간에 무시무시한 섬전은 매를 꿰뚫었다. 캬아악! 동시에 매는 허공에서 두 동강으로 싹둑 잘리며 허공으로 피보라를 흘렸다. 이윽고 두 동강으로 나뉜 매의 시체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편 검고 붉은 광채는 어느새 황보성운의 소매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좌중의 인물은 모두 까무라칠 정도로 대경하고 말았다. (처…… 천하에 저런 무공이……) 위지청목은 안색도 급변하여 있었다. (내…… 이기어검술을 소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저것은 어검술보다도 훨씬 가공할 무공인 것 같구나!) 그는 얼굴에 온통 감탄의 기색을 떠올리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가노제! 조금전 자네가 쓴 무공이 무엇인가?" 황보성운이 멋쩍게 웃었다. "비천유성검(飛天流星劍)이란 겁니다. 공연히 여러분들의 눈만 버리지 않았는지 부끄럽습니다." "……" "……" 모든 사람들이 침묵했다. 그들은 비천유성검이란 말도 처음이었지만, 뭐라고 할말도 없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옥면신수나 천외천유신을 상대할만 하겠습니까?" 위지청목이 껄껄 웃었다. "천외천유신이 몇명이 와도 참살을 면치 못할걸세. 허허허! 정말 놀랍기 짝이 없는 천하제일의 무공일세!"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제 완전히 황보성운을 신뢰한 것이었다. 잠시 후, 대청 안에는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중인들은 흥겹게 서로의 술잔들에 술을 따르며 담소했다. 황보성운도 거나하게 들이켰다. 3 꾸르르르---- 륵! 꾸욱----! 꾸욱---- 꾸욱---- 꾸르르륵! 꾸욱----! 야조(夜鳥)가 심란하게 울어댔다. 밤이었다. 깊은 가을의 밤, 귀두도(鬼頭刀)같은 초생달이 서편에 서늘히 빛났다. 그 빛을 받아 거대하게 치솟은 고루전각의 그림자가 땅바닥으로 길게 음영(陰影)을 드리웠다. 어둠 속에 잠긴 천존교의 경내, 하나 둘 모든 불이 꺼지고 밤은 더욱 깊었다. 헌데 전각의 어느 방에서 은은한 황촉의 빛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곳은 독심마검 유조림이 거처하는 방(房)이었다. 그는 대체 이 깊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방문에는 그의 그림자가 흡사 거인처럼 크게 비쳐있었다. 그의 그림자는 흔들거리는 불빛 때문인지 계속 너울거렸다. 헌데 그때마다 백지로 된 문살에는 검(劍)의 모습도 함께 흔들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지금 검을 가지고 무엇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지금 그는 침상 위에 앉아 시커먼 빛의 검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일을 하는 것이 흡족한 듯 매우 열중해 있었다. 기실 매일 검을 닦는 것은 그의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항상 검(劍)을 자신의 몸과 같이 생각해왔다. 하여 그는 자면서까지 검을 품에 지니고 있을 정도로 그의 검에 대한 애착은 실로 남다른 것이었다. 검(劍)이 없으면 생명(生命)도 없다. 이것이 그의 검에 대한 애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그의 평생 신조였다. 어느새 밤은 더욱 깊어 삼경(三更). 둥! 둥! 둥! 둥! 둥! 심야(深夜)를 알리는 북소리가 둔중하게 울려왔다. 그러자 다 닦은 검신(劍身)을 흡사 홀린 듯 바라보던 유조림은 검을 서서히 검집에 집어 넣었다. 이윽고 그는 검을 들고 침상에 올랐다. 그리고 가슴 위에 검을 올린 뒤 두 손으로 검을 포개고 눈을 감았다. 이때, 탁! 한 줄기 경풍이 창문을 때렸다. 그러자 그 바람에 창문이 덜컹 열어 젖혀졌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한 줄기 써늘한 가을 바람이 들어왔다. "응?" 유조림은 눈을 번쩍 뜨며 눈썹을 찌푸렸다. 일순 그의 뇌리 속에 기이한 느낌이 치밀었다. (분명히 아까 창문을 걸었다. 헌데……) 순간, (살기다!) 유조림의 안색이 돌처럼 굳어졌다. 몸 전체로 섬뜩한 살기를 느낀 것이다. 그는 손바닥을 휘둘렀다. 팍! 촛불이 꺼져버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암흑이 왔다. 지금 그의 전신엔 섬전처럼 무서운 직감이 스쳤다. 그것은 이미 백 년 이상 검도(劍道)를 수련하며 체득한 놀라운 육감이었다. 그 육감에 의하면 지금 주위에선 누군가 그를 노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의 신형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찰나 그의 신형이 창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는 땅에 착지하는 즉시 사방을 휘둘러 살폈다. 허나,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다!) 그는 칼날같은 눈초리로 주위를 급속히 쓸었다. 이때, "흐흐흐흐흣……" 돌연 등 뒤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흡!" 유조림은 급격히 뒤돌아 섰다. 순간, 한 명의 중년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지극히 냉막한 표정의 인물이었다. "너는 누구냐?" 유조림은 냉랭히 소리쳤다. 중년인은 서릿발치듯 입을 열었다. "천외천유신!" "뭐…… 뭣이!" 유조림은 대경했다. 그의 입술이 잿빛으로 변한 채 파르르 떨었다. "무…… 무…… 엇 때문에……" "세 반도를 돕는 자는 절대 살려둘 수 없다." 살얼음처럼 차가운 말이 떨어졌다. 중년인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일장을 후려쳐왔다. 찰나, 유조림은 섬전처럼 검을 뽑아 무섭게 휘둘렀다. 일순 격발된 중년인의 장력이 산산이 흩어졌다. "과연 해남 제일의 고수답다." 중년인은 절로 감탄을 터뜨렸다. 그는 다시 쌍수(雙手)를 가슴 앞에 끌어 붙였다. "허나 이것으로 너는 끝이다." 순간, 그의 쌍수에게 경기(勁氣)가 회오리쳤다. 그러자 유조림은 전신에 막대한 압력이 죄어드는 것을 느꼈다. "후후후…… 파천기(破天氣)다!" 중년인은 냉혹히 웃음을 날리며 쌍수(雙手)를 홱 뿌려댔다. 제 34 장 밤과 죽음 1 유조림은 아찔했다. 평생 이토록 파괴적인 힘은 처음이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검을 움켜쥐곤 자신의 몸으로 쇄도해오는 강기( 氣)를 향해 검기를 발산했다. 허나 그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무모한 몸짓에 불과했다. "으---- 아---- 악!" 참혹한 비명이 적막한 밤공기를 찢었다. 동시에 유조림의 전신이 허공으로 퉁겨나갔다. 이윽고, 쿵! 그의 전신이 땅바닥에 곤두박혔다. 헌데 떨어진 유조림의 전신은 완전히 파열되어 피투성이가 아닌가? 유조림은 복부가 파열되어 내장이 흘러내리는 것도 무릅쓰고 검에 의지한 채 가까스로 일어섰다. 그러자 검이 활( )처럼 휘어지더니 급기야 쨍! 하고 부러져 버렸다. 따라서 그도 따라 통나무처럼 모로 쓰러졌다. "으…… 거…… 검이 부러졌다는 것은 생…… 명도 이미 끝났…… 다는 것……" 일순 그의 고개가 툭 땅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중년인 즉, 천외천유신은 지극히 냉담한 표정으로 유조림의 시신을 응시했다. "유조림! 너는 훌륭한 검수였다. 허나, 너의 일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이때 지척에서 달려오는 급촉한 발소리가 들렸다. 천외천유신은 신형을 옆으로 비껴 날렸다. 삽시간에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순간, 한 명의 홍포라마가 장내로 뛰어들었다. 그는 황교의 대사마인 야율곡 법사였다. 장내에 들어선 그의 안색이 일순 대변하고 말았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던 것이다. 그는 황급히 유조림에게로 달려들어 어깨를 부여잡았다. "유시주! 유시주……!" 허나 이미 유조림의 몸은 싸늘한 시신(屍身)이었다. "누가…… 유조림을 이토록 잔인하게 죽였단 말인가?" 야율곡은 두 눈을 형형히 빛냈다. 그러자, "바로 나다!" 한 명의 인영이 장내로 날아들었다. "누구냐?" 야율곡은 훌쩍 한 걸음 물러서며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거기에는 서릿발처럼 냉막한 중년인이 서 있었다. 중년인은 사뭇 서릿발처럼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날리고 있었다. "천외천유신!" "네…… 네가…… 바로……" "……" 천외천유신의 입가에는 얼음가루가 풀풀 날릴 듯한 냉소가 스쳐지나갔다. "네…… 네가 유…… 유조림을 죽였느냐?" 야율곡은 몹시 떠듬거렸다. 천외천유신은 꿰뚫을 듯한 시선으로 야율곡을 쏘아보았다. "야율곡! 무척이나 말이 불손하군." 야율곡은 흠칫 놀랐는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허나, 그는 곧 괴악스런 웃음을 날렸다. "흐흐흐…… 천외천유신! 네놈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나를 어쩌지는 못한다. 더욱이 여긴 천존교다!" "그것은 두고 보아야 하는 것!" 천외천유신은 매서운 표정으로 즉각 공세를 취했다. 야율곡이 두 눈으로 이글거리는 광망을 토해내더니 손을 치켜들었다. 순간, 그의 양 손이 흡사 솥뚜껑처럼 부풀며 시뻘건 광채를 내뿜었다. "대수인(大手印)이다, 받아라!" 순간, 펑! 천외천유신과 야율곡의 장력이 서로 맞부딪쳤다. "윽!" 야율곡은 뒤로 다섯 걸음이나 주르륵 밀려나 버렸다. (아…… 안되겠다. 놈의 무공은 상상보다 훨씬 무섭구나.) 이때 주위로 몰려드는 발걸음 소리가 급촉히 들려왔다. 천외천유신은 안색을 가볍게 굳혔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좋지 않겠군.) 그는 다시 무시무시한 일장을 격출했다. "파천기----!" 순간, 천외천유신의 장심으로부터 엄청난 경력이 소용돌이쳐 야율곡의 전신을 격타해 갔다. 순간, 그 위력을 감지한 야율곡의 안색이 급변했다. 정면 충돌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야율곡은 안색을 잿빛으로 돌변시키더니 돌연 거북이처럼 전신을 웅크리며 뒤돌아 섰다. 순간, 막강한 파천기의 강기가 그의 등을 격타했다. 찰나, 펑! 그의 몸뚱아리는 파천기의 힘에 격타당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몸은 벽에 작렬하듯 부딪쳤다. 꽈아아아앙! 누가 보더라도 야율곡의 몸은 묵사발이 됐을 상황이었다. 헌데 다음 장면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벽 속에 박혀있던 야율곡이 돌연 그 안에서 나오더니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천외천유신의 안색이 굳어졌다. 야율곡이 그를 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크흐흐흐…… 천외천유신! 밀종의 철갑마공(鐵甲魔功)의 위력이 어떠냐?" 천외천유신의 안색이 몇차례에 걸쳐 거듭 변화했다. 그는 재차 극렬하게 파천기를 시출했다. "크크크! 아무리 강한 무공도 철갑마공을 뚫진 못해!" 야율곡이 몸을 웅크렸고, 그 위로 다시 파천기의 기운이 적중했다. 야율곡의 몸이 흡사 고무공처럼 튀어나갔다. 허나,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다시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이 따위 놈이 있다니……) 천외천유신은 은근히 노기가 치밀었다. 일순 그는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 올렸다. 찰나, 그의 손바닥이 옥석처럼 투명해져 버렸다. 야율곡은 흠칫 몸을 떨었다. 무서운 살기를 느낀 것이다. 찰나지간, 허공에 솟구친 천외천유신의 신형이 흡사 매처럼 땅으로 내리 꽂혔다. "천인수(千刃手)!" 순간, 야율곡은 다시 철갑마공의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 위로 천인수의 힘이 작렬했다. "크---- 아---- 악----!" 허공에 현란한 피보라가 뿜어 올랐다. 이윽고 수천만 갈래로 피부가 난자당해버린 야율곡의 전신이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파르르 떨더니 이내 축 늘어져 버렸다. 땅에 내려선 천외천유신의 안색에 침중한 빛이 스쳤다. (으---- 음! 천인수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처치하기 곤란한 상대였다.) 그는 지면을 박찼다. 창졸간에 그의 신형이 홀연히 사라져 갔다. 이때 장내로 세 명의 인영(人影)이 쏘아들었다. 그들은 우내삼천존이었다. 그들은 내려서자마자 낭자한 아수라장을 둘러보고 대경실색했다. "아…… 이럴 수가?" "누…… 누가 이런 짓을……?" 이윽고 독혈천존이 유조림의 시신을 흔들어보며 안색을 격심하게 일그러뜨렸다. "처참하게 당했군." 독혈천존은 송충이같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천하에서 유조림과 야율곡 법사를 동시에 죽일 수 있는 인물이 과연 있단 말인가?" 이때 돌연 야율곡의 몸이 꿈틀 움직였다. "아!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고루천존이 급히 허리를 숙여 야율곡의 상반신을 부축해 올렸다. 위지청목은 급급히 물었다. "야율곡 법사! 도대체 누구에게 당했소?" 야율곡은 한 차례 몸을 부들 떨었다. 그리고 혀를 깨무는 듯한 소리로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처…… 천외…… 천…… 유……" 순간 그의 고개가 뒤로 축 늘어져 버렸다.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천외천유신!" 우내삼천존의 안색이 잿빛으로 질려버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무서운 공포가 천 근처럼 내려앉았다. 위지청목이 급히 소리쳤다. "어서 가대협을 데려오너라! 어서! 어서!" 이때 어디선가 멀리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단목천! 서라! 비겁하게 도망가지 말고 멈춰라!" 이어 음산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으하하하…… 애송이 놈! 네놈의 사부라면 모르지만 네놈은 아직 나의 상대가 아니다." 다음 순간, 꽈르르릉! 은은한 폭음이 들려왔다. 삼천존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기묘해져 있었다. 이윽고, "가봅시다." 독혈천존이 신형을 뽑아 날렸다. 위지청목과 고루천존은 급히 신형을 따라 날렸다. 소리는 날아가는 그들의 귓속으로 계속 들려왔다. "으---- 윽!" "크하하…… 단목천! 나의 칼 맛이 어떠냐?" 득의의 호통소리였다. 이어 단목천의 신음소리가 따라 들렸다. "으…… 으…… 네놈의 무공이 이토록 강할 줄이야! 두고보자. 훗날 이 빚은 반드시 갚아주겠다." "도망가려고? 흥, 어림없는 수작!" 득달같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헌데 어느 순간, "아…… 아니!" 당황한 듯한 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비겁하구나. 서라! 천하의 단목천이 암습을 하고 도주를 하다니……" 삼천존은 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천존교 경내로부터 대략 오리(五里) 정도 벗어난 숲속이었다. 헌데, 바로 그곳에서 황보성운이 통분한 표정으로 신형을 날려 쫓으려는 동작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노제! 멈추게!" 위지청목이 숲의 넓다란 평지로 내려서며 크게 외쳤다. 황보성운은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리며 안타깝다는 듯이 발을 굴렀다. "왜 조금 더 빨리 못왔습니까?" 그는 얼굴에 사뭇 원망의 기색을 담았다. "일각만 빨리 왔어도, 단목천 그자를 놓치지 않는건데……" "미안하네. 헌데 어떻게 된 일인가?" 위지청목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황보성운은 고소를 지으며 소맷자락을 보여주었다. 그 소맷자락의 끝 부분이 움푹 잘려나가 있었다. "저도 약간 당했습니다만, 그 놈은 몇 군데 상처를 입었습니다." 황보성운은 강조하듯 말을 반복했다. "아마 상당한 부상일 것입니다." 위지청목은 침중한 안색을 활짝 폈다. "그게 정말인가?" 황보성운은 매우 미안한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렇소이다. 허나 놈을 놓쳤으니……" 위지청목은 흔쾌히 손을 내저었다. "그것은 상관없네." 독혈천존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놈이 부상을 입었다면 반드시 이 기회에 처치해야 합니다." 위지청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따라온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천존령을 주위 천 리에 전달하여 단목천의 행적을 찾아라. 그리고 발견 즉시 연락해라!" "존명!" 부하들이 급히 사라졌다. 황보성운은 화가 난다는 듯 애매한 숲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꽈르르릉----! 엄청난 강기에 의해 숲의 일부가 날아가 버렸다. 주위 노마들은 그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며 등골이 서늘했다. "험험! 자, 가소제! 안으로 들어가세. 오늘 수고가 무척 많았네." 위지청목이 황보성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치하를 했다. 황보성운은 짐짓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씀을…… 오히려 장담만 해놓고 놓쳐서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위지청목은 고개를 흔들며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 무슨 말인가? 천하에서 천외천유신에게 부상을 입힌 사람은 자네가 처음일걸세." 독혈천존도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무림에서 이를 알면 가소협은 졸지에 천하제일 고수로 추대받을 것일세." "원 별 말씀을……" 황보성운은 머쓱한 웃음을 날렸다. 그러자 위지청목이 흔쾌하게 입을 열었다. "자, 자…… 어서 들어가세." 2 밤(夜). 천지(天地)는 온통 어둠의 장막에 덮히고 천존교(天尊敎)의 거대한 고루전각들도 암흑의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벌레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 헌데 이 암흑을 뚫고서 한 인영이 유령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초승달이 구름을 젖히고 나타났다. 아! 희미한 달빛 아래 나타난 그 인영의 얼굴, 그는 놀랍게도 천존교의 교주이자 천하제일의 마두인 구유천존 위지청목이 아닌가? 이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천존교에서 무엇 때문에 그가 이토록 비밀스럽게 움직인단 말인가? 아무튼 위지청목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는 듯이 주위를 살피며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곧 그는 천존교의 뒷편에 위치하고 있는 어느 거대한 가산(假山)에 이르렀다. 위지청목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가산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어디선가 착 가라앉은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청목이냐?" 순간, 위지청목이 흠칫했다. 그리고는 곧 제자리에 몸을 세운 채 공손히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이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천하제일의 고수라고 자칭하는 구유천존이 다른 사람 앞에서 스스로 무릎을 꿇다니…… 음산한 목소리는 계속 울려 퍼져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길래 이런 야밤에 우리를 찾아왔느냐?" 위지청목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 역시 두 분 사부님의 연공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이 너무 커서 감히 찾게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냐?" 위지청목은 약간 두려움이 섞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천외천유신 단목천이 다시 강호에 나타났습니다." "뭣이!" 가산 안에서 경악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청목! 네가 잘못본 것이 아니냐? 단목 늙은 놈은 내가 너에게 준 대라천마삭에 의해 묶여 있었다." "허, 허지만……" "네가 단목천을 직접 보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바보같은 놈! 대라천마삭은 천하에서 가장 질긴 물건이다. 만년한철이나 금강혈옥(金剛血玉)등의 천고의 기물로 만든 보검으로도 그 대라천마삭에 만큼은 조금의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음산한 목소리와는 다른 또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까마귀가 우는 듯한 카랑카랑한 음성이었다. "크르르르…… 둘째! 대라천마삭을 자를 수 있는 물건이 있기는 있다." "흥, 흑백쌍환을 말하는 것이오? 허나, 그것은 옛날 현현자가 사라지면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전설상의 물건에 불과하오." 위지청목은 조용히 듣고있다 입을 열었다. "단목천 그자는 무림에 등장하자마자 무산에서 본교의 절정 고수 여섯 명을 순식간에 물리치고 그 중 두 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그것을 봐서……" "그만둬라, 청목! 직접 노부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그자가 단목천이라고는 믿지 못한다." "으---- 음, 둘째의 말이 맞다. 아마 그놈은 단목천의 제자일 가능성이 많다." 위지청목은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릴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위지청목은 조심스럽게 가운성이란 인물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 작했다. 말이 모두 끝나는 순간, 카랑카랑한 음성이 찢어질 듯 터져나갔다. "바보같은 놈! 청목, 너는 속았다. 그 가운성이란 놈은 단목천으로 변장한 놈과 동일 인물이다." "넷? 그…… 그게 무슨……?" "그놈이 너의 손자에게 보여준 그 무공이야말로 이백 년 전 우리 두 명을 강호에서 물러나게 한 희대의 신공 천인수(千刃手)다." "넷?" 음산한 음성이 떨리듯 새어 나왔다. "이것은…… 두려운 생각이지만 만약 그놈이 너에게 보여준 비천유성검이란 무공이 혈천일도(血天一刀)라면……" 카랑카랑한 음성이 말을 받았다.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놈은 흑백쌍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단목천을 구해주고 그놈으로부터 천인수를 이어받은 것이다." "청목! 어서 가라. 놈이 눈치채기 전에 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해 버려라." 위지청목의 두 눈은 흡사 찢어질 듯이 크게 흡떠져 있었다. "그…… 그놈이…… 나를……" 그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두 분 사부님이 아니었더라면 제자는 실로 커다란 실수를 범할 뻔했습니다." "청목! 잘못이란 두 번 이상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한 번까지는 허용이 되나 두 번은 절대 안된다."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위지청목은 공손히 예를 올리고는 다시 신형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주위는 적막을 되찾았다. 헌데 가산의 뒤에 위치한 어느 높은 탑, 그 탑 위에 한 명의 청의 인영이 옷자락을 나부끼며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누구인가? 달빛에 희미한 음영을 그린 채 표표히 서있는 그자는 바로 황보성운이었다. 황보성운은 위지청목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예의 그 냉막한 웃음을 머금었다. "과연…… 나의 추측대로 위지청목의 뒤에는 또 다른 배후인물이 있었군." 그의 신형이 암흑의 천공 속으로 솟구쳤다. (이렇게 되면 누가 선기를 잡느냐에 따라 승리가 좌우된다. 허나 위지청목, 너는 절대 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3 다음 날 오전(午前), 비천각의 대청에서 황보성운과 위지혜미가 즐겁게 담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위지룡과 고루천존이 장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때 대청 안으로 위지청목이 들어갔다. 대청 안에 있는 황보성운을 본 순간, 그의 눈길은 일말의 무서운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허나, 곧 그것은 사라졌다. 위지청목은 인자한 노인같이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황보성운에게 다가왔다. "하하하…… 가노제, 노제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 있나 보군." 황보성운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하하…… 위지노협께서 오신 줄도 모르고 제가 너무 무례한 것 같습니다." 위지혜미도 활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 어서 오세요." 위지청목은 인자한 조부의 모습으로 위지혜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혜미야, 잠깐 동안 가노제와 이야기해도 너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그의 의미있는 물음에 위지혜미는 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졌다. 그녀는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몰라요, 할아버지. 저를 놀리시다니……" "핫핫핫…… 아무래도 혜미가 가노제에게 단단히 반한 모양이오. 사형, 잘못하다가는 혜미한테 원망들을까봐 두렵소이다." 고루천존의 말이었다. "어머 둘째 할아버지까지……" 위지혜미는 눈을 곱게 흘기며 고루천존을 때릴 듯한 흉내를 내었다. "어! 어! 너의 그 무지막지한 손으로 치면 나의 몸에 붙은 뼈다 귀들이 모두 부숴진다." 고루천존은 울상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혜미야, 내 반드시 너에게 참한 신랑을 얻어줄테니 이번만은 봐다오." 좌중은 그의 말에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황보성운도 의미있는 눈으로 위지혜미를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위지혜미는 그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벌떡 일어났다. "몰라요. 몰라! 나중에 모두 한 대씩 때려줄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밖으로 튀어 나갔다. "하하하하……" "허허허허……" 좌중에서 다시 웃음이 터져나왔다. 헌데 어느 순간 갑자기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것은 위지청목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 "……" 황보성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위지노협, 무슨 걱정이라도 계십니까?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위지청목은 지그시 황보성운을 바라보더니 이내 긴 탄식을 터뜨렸다. "정말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군." 황보성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떤 일로 그러십니까? 위지노협! 제가 외인이라고 여기시지 않으신다면 탁 털어놓고 이야기 해보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으니까요." 위지청목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좋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노제, 노부를 따라오게." 위지청목은 고루천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둘째 사제! 미안하지만 가노제와 둘이서 이야기 좀 하겠네." "어떤 일인지 모르지만 소제까지 들을 수 없다니 무척 섭섭하군요." "하하하…… 우형이 나중에 술 한 잔 내겠네." "알았습니다, 사형. 허지만 조금 전에 하신 말씀 절대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하하…… 알았네, 알았어. 자네의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먹여줄테니까." 위지청목은 말을 마치자마자 황보성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노제, 우린 가보세." 황보성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위지청목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밖으로 나갔다. 헌데 그가 밖으로 나간 순간, 고루천존의 웃던 얼굴이 돌연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리더니 나직한 귀소(鬼笑)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흐흐흐흐흐……" 4 한편, 황보성운과 위지청목은 비천각의 또 다른 별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곳은 들어가는 길이 상당히 복잡한 곳으로 황보성운 역시 한 번도 들어와 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들은 어느 별실에 이르렀다. "먼저 들어가게." 위지청목이 은근히 말했다. 황보성운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이로 보나 배분으로 보나 위지노협이 저보다 훨씬 위인데 어찌 제가 먼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위지청목의 눈에 야릇한 빛이 스쳐갔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실망의 빛과도 같았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매우 단출했다.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몇 개의 족자가 전부였다. 그들은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황보성운이 의아한 빛을 띤 채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체 위지노협께서 저에게 부탁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위지청목의 미간에 어둠이 스쳤다. 그는 긴 탄식을 터뜨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노부가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겠네." 그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더니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벽에 달린 하나의 족자를 떼어내는 것이었다. 족자를 떼어내는 순간, 위지청목의 두 눈에 음흉한 살기가 스치며 지나갔다. 그는 족자를 든 채 황보성운 앞으로 다가갔다. 허나 그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황보성운이 물었다. "위지노협, 자리에 앉지 않으시니 제가 불편합니다." 위지청목이 돌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후하하하…… 가운성! 조금 있으면 그 불편함도 사라질 것이다." 황보성운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위지노협! 왜 그러십니까?" 위지청목이 냉소했다. "가운성! 진정 노부는 너의 침착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구나." 그는 음흉한 미소를 날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허나, 노부는 이미 네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위지청목을 응시했다. "위지노협!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이오?" "가운성! 네놈이 나의 손자에게 보여준 무공은 대체 무엇이냐?" "그, 그것은……" "크흐흐흐…… 얼마 동안은 노부조차 네놈에게 깜박 속았다. 허나 노부는 곧 그 무공이 바로 단목천 늙은놈의 천인수(千刃手)임을 알아챘다." 황보성운은 가볍게 미소했다. "하하하…… 위지노협, 정말 대단하십니다. 천인수의 무공을 알아내다니……" 위지청목은 황보성운의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모습에 가슴이 섬 뜩했다.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놈이다.) 허나 위지청목은 여전히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네놈은 바로 천외천유신으로 변장한 놈과 동일 인물이겠군." "하하하…… 위지노협! 소생은 노협께서 무공만 강한 줄 알았더니 머리 또한 대단히 잘 돌아가시는군요.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오." 위지청목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흐흐흐…… 가운성! 침착한 척 하지마라. 네놈이 아무리 그래도 이곳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황보성운의 입가에 조소가 스쳐갔다. "위지청목! 너는 어찌 나의 정체를 알아냈으면서도 자꾸만 가운성이란 이름을 대고 있느냐?" 위지청목의 안면이 약간 일그러졌다. "위지청목! 네놈은 내가 누군지 아느냐?" 위지청목은 황보성운의 연속되는 반말에 그만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황보성운은 여전히 냉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운성은 나의 가명이다. 나의 본 이름은 옥면신수 황보성운이다." "뭐…… 뭐라고……" 위지청목은 대경실색했다. "네…… 네놈이 황보성운이라고……" "그렇다. 내가 바로 황보성운이다." "네…… 네놈이……" "노형님이신 천외천유신 단사형께서는 나에게 너와 너의 두 사제의 목을 자르라는 명을 내리셨다." "미친 놈!" "미쳤는지 미치지 않았는지는 조금 후의 결과가 증명해 줄 것이다." 위지청목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황보성운! 네놈은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 "내 집도 아닌데 내가 어찌 알겠느냐?" "흐흐흐…… 이곳은 바로 비천각에서도 가장 무서운 곳으로 알려진 사망뢰(死亡牢)다. 이곳의 주위는 모두 석 자 이상 두께의 금강연철(金剛軟鐵)로 되어있다." 황보성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망뢰건 무엇이건 너 역시 이곳에 있는데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느냐? 설마 나와 같이 죽을 리는 없고……" "황보성운! 네놈은 과연 대단한 정력(定力)을 지니고 있구나." "모두가 너같은 나쁜 놈들을 상대하다 보니 생겨난 것이다." 황보성운의 말투에 위지청목은 노기가 충천했다. 그의 눈가가 미미하게 경련했다. 허나 그는 노마답게 분노를 눌러 참았다. 그는 이를 꼭 다물더니 수중의 족자를 뒤집었다. 순간, 황보성운이 흠칫했다. 족자에 그려진 건 지옥도(地獄圖), 바로 그것이었다. 죄를 지은 인간들이 처참하게 당하는 아수라같은 광경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황보성운! 너는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황보성운은 묵묵히 족자를 응시했다. 그는 그 족자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전신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으음…… 진정 괴이한 그림이다.) 위지청목은 황보성운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의 얼굴에 일말의 어두움이 스쳐가는 것을 보고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이 그림은 바로 수백 년 전 천하제일의 화가이자 독술(毒術)의 명수인 천화독군(天畵毒君) 시천교(屍天嬌)가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다." (천화독군 시천교?) "크흐흐흐…… 이 지옥수라도(地獄修羅圖)에는 시천교가 설치해논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삼십 육 가지의 독암기가 설치되어있다." 황보성운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크흐흐…… 너와 나와의 거리는 불과 석 자, 천하에 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닌 자라도 이 거리에서 시천교의 삼십 육가지 암기를 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 "시천교의 암기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서운 극독이 발라져있다. 단 하나라도 스치면 그걸로 끝이다." 이때 돌연 황보성운이 낭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위지청목! 네가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큰 소리만 치지 말고 어디 그 지옥수라도의 암기를 시출해 보도록 하여라." 위지청목은 흠칫했다가 곧 살기를 내뿜었다. "네놈이 진정 무서운 맛을 못봤군." 황보성운이 냉소했다. "시천교의 독암기 따위로 날 겁줄려고 생각했다면 그건 처음부터 실수한거야." 황보성운은 괴이한 미소를 띄운 채 손을 품 속으로 집어 넣어 한 권의 책자를 꺼내었다. "위지청목! 이것이 무엇인지 보아라!" 위지청목은 그 책을 본 순간 안색이 급변했다. 책의 표면에 씌여진 만독진해란 글자가 그의 두 눈을 찔렀다. "마, 만독진해(萬毒眞解)----!" "그렇다. 바로 만독진해다. 시천교의 독술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무림사상 최고의 독왕인 만독성군에 비하면 하룻강아지에 불과하다." "네…… 네가 이미 만독진해를 터득했단 말이냐?" "물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토록 태연한 것이 아니냐?" "으…… 으……" "후후후…… 위지청목! 더 놀라운 것을 가르쳐 줄까? 너는 이미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나에 의해 천하제일의 극독인 무영지독(無影之毒)에 당했다." 순간, 위지청목의 안색이 흑빛이 되었다. "그…… 그게 정말이냐?" "후후후…… 위지청목! 너는 나를 너무나 얕봤다. 너는 한 가지를 생각했어야만 했다. 과거 적양관주의 독혈천독공이 어떤 이유로 나에게 파괴 당했었는가를……" 위지청목은 정신이 아찔함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노부는…… 믿을 수가 없다." "믿지 못하겠다면 시험해 보아라. 아마 너의 중부혈과 명문혈이 따끔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위지청목은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올려 운공을 했다. 허나 중부혈과 명문혈에는 조금도 중독당한 느낌이 없었다. 그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말하려는 찰나, "으하하하…… 위지청목! 어리석은 늙은이! 너는 나에게 속았다." 위지청목은 자신의 오른손 완맥이 황보성운에 의해 꽉 잡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주 순식간에 당한 것이었다. 위지청목의 안색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비…… 겁한 놈!" "후후후…… 위지청목! 누가 비겁한지는 네가 더 잘 알텐데…… 날 이런 곳으로 유인한 뒤 시천교의 암기로 암습해 죽이려고 계획한 건 바로 네놈이 아니더냐?" "……" "네놈이 나의 말에 속아 적을 앞에 두고 운공을 한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 그럼 네놈은 만독진해를 배우지 않았단 말이냐?" "후후…… 그렇다." 위지청목은 황보성운이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가증스러웠다. "교활한 여우같은 놈!" 황보성운은 빙글빙글 웃으며 위지청목을 바라보았다. "내가 교활한 여우라면 너는 피에 굶주린 늑대다." "이, 이놈의 새끼가……" "후후후…… 위지청목! 되도록이면 말을 곱게 써라. 다 늙은 놈이 그렇게 입이 험해서야 어디 쓰겠느냐?" 그는 비꼬듯이 말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번개보다도 빠른 속도로 위지청목의 몇 군데 혈도를 짚었다. "자 위지청목, 너는 이미 나의 제혈수법(制穴手法)에 의해 전신 경맥이 막혔다. 순순히 나의 말을 따르는 것이 건강에 좋을 것이다." "어, 어쩌겠다는 것이냐?" 황보성운은 엄숙하게 허리를 굽혔다. "위지노협, 이야기가 모두 끝났으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위지청목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좋다! 황보성운, 오늘은 내가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하겠다." 위지청목은 말을 마치자마자 앞장서서 사망뢰를 벗어났다. 얼마 후, 그들은 사망뢰를 완전히 벗어나 처음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에 도착했다. 위지청목은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 다 나왔으니…… 어서 혈도를 풀어라." "혈도라니? 갑자기 그게 웬 소리요?" 황보성운이 의아스럽다는 듯이 위지청목을 바라보았다. 위지청목은 부아통이 치밀었다. 허나 그것을 간신히 참고는 입을 열었다. "밖으로 나오면 네놈이 혈도를 풀어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난 또 뭐라고…… 하하하…… 위지노협! 소생이 아까 혈도를 친 것은 뭐 별다른 제혈수법도 아닌 그냥 흉내만 낸 것에 불과하오. 그러니 너무 심려할 것 없소이다. 정 찝찔하시면 팔다리를 몇번 흔들어주쇼. 그럼 괜찮아질테니까……" "뭐…… 뭐라고?" 위지청목은 급히 운공을 해보았다. 과연 전신의 혈도는 막힘이 없이 유통되는 것이 아닌가? 제 35 장 天魔二老 1 위지청목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멍하니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이백 년 가까이 살아온 내가 한낱 애송이 놈에게 이토록 철저히 당하다니……) 그는 끓어 오르는 수치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수치감은 곧 끝없는 분노로 바뀌었다. (저 애송이 놈을 오늘 죽이지 못한다면 나는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그의 두 눈에서는 벌써 사악한 흉광이 뻗치기 시작했다. 황보성운은 이에 그의 내심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전신의 공력을 사지백해에 터지게 하면서 위지청목의 공격에 대비했다. "애송이 놈! 오늘 네놈을 찢어죽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겠다." "쯧쯧…… 공연히 오늘 또 성 바꾸는 늙은이 하나 생기겠군." "이…… 이 자식이!"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히 생각해봐라. 네 실력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그렇게 자신이 있었다면 왜 구태여 사망뢰로 날 유인했냐?"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어디선가 음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우리까지 가세한다면 전세가 달라질 것이다. 어차피 넌 여길 벗어나지 못해!" 황보성운은 흠칫 놀라면서 뒤를 바라보았다. 그의 뒷쪽으로 두 명의 인물이 몸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우내삼천존 중의 나머지 두 명인 고루천존 사도패와 독혈천존 마응상이었다. 황보성운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화했다. 허나 그는 여전히 침착을 잃지 않은 채 담담하게 입을 떼었다. "후후후…… 우내삼천존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셈이군." 우내삼천존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황보성운을 품자형으로 에워쌌다. 구유천존 위지청목이 이를 갈며 부르짖었다. "황보성운! 오늘이 바로 명년 네놈의 제삿날이다." 황보성운은 여전히 태연자약이었다. 그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띤 채 우내삼천존을 응시했다. "후후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텐데……" 독혈천존이 미친 듯한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황보성운! 네놈의 정신이 약간 어떻게 된게 아니냐? 천하에서 우리 우내삼천존의 합공을 받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후후후…… 허나 처음으로 오늘 너희들은 나에게 패할 것이다." "미친 놈!" 고루천존이 음랭하게 부르짖었다. "노부의 고루마공으로 네놈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말을 마치자 마자 고루천존의 신형이 유령같이 움직였다. 쉬---- 익! 어느새 고루천존의 쌍장은 무서운 음한지기를 동반한 채 황보성운의 전신을 물샐틈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핫핫핫핫…… 과연 우내삼천존의 무공답게 훌륭한 수법이다." 허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신형은 어느새 번개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잔영보(殘影步)를 시전한 것이다. 스스스스스스스스……! 괴이한 음향과 함께 그의 신형이 수십 개의 그림자로 분리되었다. 고루천존은 나직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웃! 잔영보로구나."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문 채 쌍장을 더욱 괴이하게 휘둘렀다. "애송이 놈! 어디 나의 고루팔비장을 받아봐라!" 순간, 실로 눈으로 보기 전에는 도저히 믿기 힘든 괴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고루천존의 장작개비같은 팔이 순식간에 여덟 개로 나뉘어지더니 가공할 음향과 함께 황보성운의 전신요혈로 짓쳐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굉장한 수법이다.) 황보성운은 내심 감탄을 하면서 즉시 그 자리에서 전신을 돌풍처럼 회전시켰다. "현원공공(玄元空空)!" 드디어 지고무상의 절학 현무구장이 시전된 것이다. 화화화화화화! 무서운 파공성과 함께 두 고수의 장력이 정통으로 충돌했다. 순간, 꽈르르! 귓청을 찢어놓을 듯한 음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황보성운은 양 팔이 약간 뻐근함을 느꼈다. 그는 약간의 충격을 느끼며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났다. 허나, 고루천존의 상태는 대단히 비참했다. 그는 자그만치 일곱 걸음이나 후퇴한 채 입가로 시뻘건 선혈을 토해내고 있었다. 구유천존과 독혈천존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의 안색은 몹시 침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과연…… 놈의 무공은 무서울 정도로 높구나. 아무래도 우리만이 합공하지 않는한 놈을 꺾기는 불가능 하겠구나.) 구유천존은 즉시 고루천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둘째! 견딜만 한가?" 고루천존은 무서운 살기가 어린 눈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직 천초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이다." 그는 마치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서서히 황보성운에게 접 근했다. "흐흐흐…… 애송이 놈! 과연 네놈은 노부가 만난 상대 중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허나, 노부 역시 이대로 순순히 꺾이지는 않을 것이다." 구유천존과 독혈천존도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린 채 황보성운의 곁으로 접근했다. "죽어라!" 고루천존이 냉갈을 터뜨리며 제일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그 뒤를 이어 구유천존과 독혈천존도 가세를 했다. 황보성운은 여전히 평정을 잃지않고 있었다. 허나, 마치 격랑처럼 밀려오는 우내삼천존의 공격에 그는 전신이 터질 듯한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즉시 잔영보를 전개하여 그들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하는 한편 현무구장과 천라구장을 혼합하여 그들의 공격을 맞받았다. 꽈르르르릉! 딱딱딱딱---- 딱! 딱! 엄청난 파공성과 폭음이 잇달아 울렸다. 이것은 실로 경천동지할 만한 대혈투였다. 일세(一世)를 주름잡은 천하의 대 흉마 우내삼천존, 그리고 무림사상 최대의 젊은 영웅 옥면신수 황보성운! 그들의 결투는 실로 무림사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보기 힘든 혈투였다. 용호상박(龍虎相搏), 난형난제(難兄難弟)! 양편은 서로 조금도 꿇리지 않은 채 거의 수백 초를 싸우고 있었다. 우내삼천존은 싸우면 싸울 수록 어떤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으…… 으…… 세상에 채 약관도 되지 않은 놈이 천하에 적수를 찾기 힘든 우리 세 명의 합공을 받고도 끄덕이 없다니……) 황보성운역시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으…… 음 만약 내가 단노형님께 무공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이들의 합공을 절대 받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수백 초가 경과했다. 이미 그들의 싸움으로 인해 주위는 온통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때 구유천존은 아무리 공격해도 황보성운이 조금도 패할 기색이 없자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즉시 두 사제를 보며 소리쳤다. "사제들! 즉시 삼존마공진(三尊魔空陣)으로 변화시켜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루천존과 독혈천존은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며 스스로의 방위를 이동시켰다. 그것은 실로 괴이한 진법이었다. 구유천존은 양 손을 단전에 댄 채 조금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고, 고루천존은 양 손을 상하(上下)로 뻗어 건자결(乾字訣)과 곤자결(坤字訣)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한, 독혈천존은 양 팔을 양 옆으로 쭉 뻗은 채 대붕전시(大鵬展翅)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결코 대붕전시는 아니었다. 황보성운은 그들의 자세를 보고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실로 무어라고 표현하기 힘든 살기를 느낀 것이었다. (으음…… 보아하니 보통 수법이 아닌 것 같다.) 구유천존이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황보성운! 이 삼존천공진은 우리 삼형제가 평생토록 단 한 번도 시전하지 않은 것이다. 이 진법으로 네놈을 지옥으로 보내주겠다." 말을 마치자 마자, "쳐라!" 그의 입에서 무서운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진법이 발동했다. 구유천존은 단전에 모은 양 손을 기이하게 뻗었다. 순간, 그의 장심으로부터 무서운 소용돌이를 동반한 장풍이 황보성운을 향해 날아왔다. 황보성운은 함부로 상대하지 못하고 신형을 허공으로 띄웠다. 순간, 독혈천존이 양 팔을 뻗은 그 자세에서 그대로 허공으로 치솟으며 황보성운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웃!" 황보성운은 무서운 위기를 느꼈다. 그것은 그가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도 못했던 무서운 위기였다. 허나 직감적으로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허수(虛手)다!) 그는 내심 크게 부르짖었다. 그가 독혈천존에 신경을 쓰는 사이에 고루천존의 양 손으로부터 그의 최고 무공인 고루천공지가 발출된 것이었다. 동시에 구유천존은 회선마공을 순식간에 구유천마공으로 변화시켜 그의 명문혈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에 떠있는 독혈천존도 다시 자세를 거꾸로 하여 황보성운의 백회혈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속았구나! 이 삼존마공진은 완전히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했구나.) 그는 내심 부르짖으면서 신형을 무서운 속도로 이동시켰다. (맛을 단단히 보여주마!) 그의 양 손은 어느새 투명한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천인수(千刃手)가 전개된 것이다. 파파파파파파파팍! 귀청을 찢는 듯한 파공성에 이어, "으---- 윽!" "으---- 음!" 하는 세 마디의 비명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장내는 다시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겨들었다. 허나 보라! 우내삼천존의 모습은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전신에 걸친 옷은 갈기갈기 찢어진 채 흩날리고 있었고, 그 떨어진 옷자락 사이로는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나, 황보성운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는 우내삼천존을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우내삼천존! 이제 단형님의 뜻을 실천할 때가 왔다. 이제 너희들은 사문을 배반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는 서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우내삼천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들의 눈으로부터는 지독한 공포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황보성운의 입가에 죽음의 선고가 떨어졌다. "파천기(破天氣)----!" 순간,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가공할 만한 중력이 황보성운의 장심에서 터져나갔다. 꽝! 꽈르르…… 르르릉……! 우내삼천존의 안색은 아예 흑빛이 되었다. 그들은 아예 황보성운의 공격을 받아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끝났구나.)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헌데 어느 순간, 한 줄기의 흑영이 번개같이 황보성운의 앞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황보성운이 뻗어낸 장력을 그대로 받아내는 것이었다. 꽝----!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황보성운은 양 팔이 시큰함을 느끼면서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도, 도대체…… 어떤 자가 나의 공격을……?) 그는 경악에 잠긴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2 황보성운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자는 백발이 성성한 괴인이었다. 허연 백발은 길게 드리워져 무릎 근처까지 뻗어 있었고, 수염 역시 석 자 가량이 되었다.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 실처럼 가느다란 두 눈에서는 음산한 빛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종잇장같이 얇은 입술은 약간 벌어진 채 흉흉한 괴소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이 노인이 나타난 순간, 우내삼천존의 얼굴에 희색이 어렸다. "사…… 사부님!" 황보성운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사부라고……?) 황보성운은 내심 느끼는 바가 있었다. (으---- 음, 이제보니 저 노인은 그때 가산 안에 있던 두 노인 중 한 명인 것 같구나.) 이때 괴노인은 황보성운을 향해 무서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네놈이 황보성운이란 애송이 놈이냐?" "그렇소." "네가 바로 천외천유신 단목천의 제자냐?" "제자는 아니오." "제자가 아니라고?" "그분은 나에게 있어서 사형 뻘 되오." "사형?" 괴노인은 두 눈에 의아함이 스쳐갔다. "좋다. 어쨌든 네가 천외천유신과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는 눈빛을 빛내며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너는 노부가 누군지 아느냐?" "소생은 워낙 견문이 짧아 모르겠소이다." "너는 천마이로(天魔二老)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천마이로?" 황보성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들어 본 적이 없소이다." 황보성운은 천마이로를 모르기 때문에 이토록 태연했다. 허나 만약 그가 천마이로가 누군지 알았다면 결코 이렇게 태연한 태도는 취하지 못했으리라. 천마이로(天魔二老)! 이들은 누구인가? 지금부터 이백 년 전 당시 천하는 여섯 명의 기인에 의해 분할되고 있었다. 일군(一君). 일신(一神). 일음(一音). 일살(一殺). 이마(二魔). 일군은 당시 천현문의 이대장문인인 냉천신군(冷天神君)을 말했으며, 일신은 천외천유신(天外天遊神) 단목천(丹木天), 일음은 천음상인(天音上人) 소홀자(少忽子), 일살은 북해빙백살 (北海氷魄殺) 용호상(龍虎相), 이마는 천마이로(天魔二老)…… 즉, 혈사천로(血邪天老) 마극생(馬克生)과 지옥귀로(地獄鬼老) 여파(余巴)를 일컬었다 이들 육 명은 실력이 서로 엇비슷하여 누가 가장 뛰어났다고도 말하기 힘들었다. 헌데 지금 황보성운의 앞에 서있는 사람이 바로 천마이로 중 한 명인 지옥귀로 여파인 것이다. 허나 이를 알 수 없는 황보성운은 여전히 태연했다. 하기야 그의 정체를 안다해도 두려워 할 황보성운은 아니었다. 아무튼 지옥귀로는 지금 냉랭한 시선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는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크흐흐흐……" 황보성운은 점차 긴장이 고조됨을 느꼈다. 그는 전신에 내공을 극도로 끌어올린 채 상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 침묵이 흘렀다. 허나, 그 침묵 속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가공할 살기가 내재되어 있었다. 일각, 이각…… 시간은 점차로 지나간다. 허나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바라보는 우내삼천존 역시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황보성운과 지옥귀로가 기(氣)의 대결을 벌이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이런 싸움은 일반적인 초식의 싸움에 비해 진기의 소모가 훨씬 많을 뿐더러 또한 매우 위험한 것이다. 자칫 실수하여 기의 싸움에서 밀린 자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게 마련이다. 지옥귀로는 기의 싸움을 벌여 황보성운과 대치를 시작했을때부터 필승의 자신이 있었다. 이백 수십 년 간 닦아온 자신의 기를 한낱 애송이 따위가 막을 수 있다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헌데, 시간이 흐를 수록 그는 자신의 생각이 오판임을 느낀 것이다. 상대 황보성운이 발산하는 기(氣)의 힘은 결코 자신의 밑이 아니었다. 지옥귀로의 태연했던 얼굴이 시간이 흐를 수록 긴장으로 굳어졌다. 어느 순간, "차---- 앗!" "핫!" 두 인영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그리고는, 꽝…… 꽈르릉! 경천동지할 폭음이 일어났다. "윽!" "헉!" 두 마디의 짤막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절정 고수의 싸움은 길게 끌 수도 있지만, 막상 끝내려면 단숨으로 끝난다. 지옥귀로와 황보성운은 거의 똑같이 육칠보를 후퇴한 채 전신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안색은 백지장같이 창백했으며, 입가로는 붉은 선혈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웩!" 지옥귀로가 먼저 피를 토해냈다. 황보성운도 선혈이 솟구치는 것은 느꼈다. 허나 그는 이를 악문 채 그것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옆에서 보던 우내삼천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은 설마 황보성운이 지옥귀로까지 패배시킬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그들은 황보성운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는 내심 염두를 굴렸다. (만약 저놈을 오늘 죽이지 못하면 차후 이 땅에서 우리는 활동할 공간이 조금도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놈을 없애야 한다.) 우내삼천존이 서서히 황보성운에게로 다가갔다. "흐흐흐흐흐……" 구유천존이 먼저 괴소를 터뜨렸다. "황보성운! 오늘로써 네 목숨은 끝이다." 황보성운은 코웃음을 날렸다. "위지청목, 큰 소리만 치지 말고 어서 덤벼봐라." 위지청목이 움찔했다. 허나, 그는 곧 이를 악물고는 두 사제에게 눈짓을 한 뒤 다가왔다. 다가오는 우내삼천존을 보며 황보성운은 내심 매우 초조했다. 실상 이미 그의 내상은 극도로 심해 무척이나 위험한 상태였다. 이때 어디선가 음산한 어조가 들려왔다. "청목! 멈추어라." 위지청목은 움찔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지금 지옥귀로 옆에 한 명의 음산한 혈의노인이 서 있었다. 우내삼천존이 그를 보곤 허리를 숙였다. "대사부님!" 그는 바로 천마이로 중 첫째인 혈사천로(血邪天老) 마극생(馬克生)이었던 것이다. 혈사천로는 우내삼천존의 행동을 저지한 후, 황보성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으음…… 옥면신수 황보성운, 노부는 실로 너의 무공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너의 무공은 노부의 예상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났구나." "과찬이오." 황보성운은 담담히 대꾸했다. 혈사천로의 두 눈에 언뜻 살기가 스치며 지나갔다. "허나 오늘 너는 죽는다. 그것은 절대로 거역 못할 운명이 될것이다." 혈사천로의 음성은 섬뜩했지만, 황보성운은 조금도 눌리지 않고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그건 당신이 결정한 운명일 뿐이지, 내가 선택한 운명은 아니오." 혈사천로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나왔다. "으하하하하…… 황보성운! 실로 네놈은 방약무인하기 짝이없구나." "……!" "네가 과연 노부의 십초를 받아낼 수 있는지 두고보겠다." 말을 마치자 마자 혈사천로의 오른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순간 그의 왼손이 시뻘건 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그 광경에 가슴이 섬뜩했다. "크흐흐…… 애송이놈! 어디 노부의 혈사음혼공(血邪陰魂功)을 받아봐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손에서 시뻘건 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화르르르르르----! 황보성운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져 버렸다. 그는 전신에 현무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뒤 진력을 향해 내뻗었다. 헌데 그가 현무신공을 내뻗는 순간, 그는 단전에 극렬한 고통과 함께 내공이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윽!" 전신의 혈맥이 무섭게 팽창되면서 기혈이 솟구쳤다. 그는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그가 이러는 사이에 혈사천로의 장력은 그의 가슴을 강타하고 있었다. "으---- 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황보성운의 몸이 실 끊어진 연처럼 십 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의 입가에는 시뻘건 선혈이 샘솟듯이 터져나오고, 안색은 시체의 그것처럼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으…… 으…… 으……" 황보성운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허나 그의 정신은 이미 자기 것이 아니었다. 천지(天地)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착각과 함께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고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끄…… 끝장이구나) 황보성운은 다시 한 번 핏덩이를 토해내며 전신을 비틀거렸다. 혈사천로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가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이제보니 네놈은 벌써 아우에 비해 심한 내상을 입고 있었구나." 그는 두 눈에 가득 살기를 담은 채 서서히 황보성운의 곁으로 다가갔다. (흐흐흐…… 옥면신수 황보성운! 비록 네놈은 우리의 적이긴 했지만 무림에서 대단한 놈이었다. 이것을 참작해서 단숨에 목숨을 끊어주마.) 그의 말이 황보성운의 귀로 아련하게 들려왔다. 황보성운은 이를 악물었다. (살아야 한다. 절대로…… 절대로 여기서 죽어서는 안된다.) 그는 전신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억누르며 내공을 모았다. 그러자 미미하나마 약간의 내공이 모였다. 이때, "황보성운! 이제 영원히 가거라." 혈사천로가 음흉된 음소를 터뜨리며 일장을 뻗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황보성운의 신형이 비틀거리면서도 번개같이 움직였다. 허공으로 십여 장 정도로 솟구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은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바로 지고무상의 경공술인 무형비행술을 전개한 것이다. "아…… 아니!" "저…… 저런!" 갖가지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혈사천로는 노기를 참지 못하고 허공을 향해 일장을 뻗었다. 허나, 그것은 쓸데없는 것에 불과했다. 이미 황보성운의 몸은 점이 되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제 36 장 轉禍爲福 1 황보성운은 무영비행술을 이용해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발 아래로 스쳐가는 경물이 아스라하게 느껴졌다. 혈사천로에게 당한 가슴의 상처로 인한 고통이 점차 극심해지면서 정신 또한 흐릿해졌다. 더욱이 내공을 억지로 끌어올려 무영비행술을 전개한 상황이었기에 그의 정신은 더욱 아득했다. 허나, 비행을 멈출 순 없었다. 지금 그것을 멈추면 다시 내공을 끌어올릴 자신이 없었다. 지금쯤 위지청목은 천존교의 전 힘을 동원해 자신을 추적하고 있을 것이다. 자칫하면 그들의 추적에 걸려들게 된다. 최소한 그들의 추적이 닿지않는 거리까지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끊어질 듯한 내공을 계속 끌어올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황보성운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계속 무영비행술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정신이 아찔해지며 갑자기 진기가 완전히 막혀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어 그의 신형이 급속히 밑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진기가 유통되지 않은 형편이므로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크…… 큰일이다. 여기서 떨어지면 그대로 즉사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신형은 수백 장 밑으로 순식간에 내리 꽂혀가고 있었다. 찰나지간 그의 몸은 곧 바닥에 떨어져 박살나기 일보 직전까지 내려왔다. 황보성운은 일생일대의 위기라고 느꼈다. 그는 전신에 필사의 힘을 격발시켰다. 그리고 전력으로 지면을 향해 엄청난 일장을 후려쳤다. 순간, 꽈---- 르---- 르---- 르---- 릉! 엄청난 폭발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그 순간 황보성운은 양 팔이 부러지는 고통과 함께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퉁겨 오르는 것을 느끼며 혼절해 버렸다. 2 점차 날이 밝고 있었다. 동방(東方)으로 불끈 솟아오른 일륜(日輪)이 사방으로 그 찬란한 빛을 흩뿌렸다. 그 빛이 뿌려지는 어느 한 곳에 커다란 웅덩이가 패여져 있었다. 헌데 바로 그 웅덩이 안에는 한 사람이 쓰러져 죽은 듯 깨어날 줄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는 전신에 격심한 부상을 입은 듯 완전히 피투성이였다. 대체 그는 누구길래 이런 웅덩이 안에 쓰러져 있단 말인가? 그는 바로 황보성운이었다. 어젯밤 부상을 입은 몸으로 무리하게 무영비행술을 전개하다가 진기가 막혀 수백 장 아래로 곤두박질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웅덩이는 황보성운이 마지막 잠력을 끌어올려 떨어지며 후려친 장력에 의해 파였던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허나 여전히 황보성운은 깨어날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리더니 홀연 세 명의 소녀(少女)가 나타났다. 그들은 한 명의 백의미녀와 두 명의 청의소녀였다. 그들은 모두가 절세의 미녀들이었다. 특히 백의소녀의 아름다움이란 실로 그 짝을 찾아볼 수 없는 천하절색이었다. 정말 기가 막힌 미모라고나 할까? 초생달처럼 그린 듯 뻗어나간 두 눈썹, 그 밑에 샛별처럼 빛나는 초롱초롱한 두 눈, 앵두처럼 붉은 입술, 갸름한 턱 등…… 진실로 절세미녀 중의 절세미녀요, 천하절색 중의 천하절색이었다. 게다가 전신으로 흐르는 기품이 고아하고 청수한 것이 실로 예사로운 미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무척이나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가씨! 확실히 중원은 아름다워요. 우리가 사는 북해와는 전혀 딴판이예요." 왼쪽에서 걸어오는 청의소녀가 아름다운 입을 벌리며 찬탄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왼쪽의 청의소녀가 백의소녀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호호호…… 아무튼 저는 무척 즐거워요. 아가씨 덕분에 중원 구경을 해보고……" 백의소녀는 살며시 미소를 띄웠다. 헌데 그 미소란 실로 사람의 혼백을 앗아갈 정도로 아름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오른쪽 소녀는 백의소녀를 바라보다가 그 미소에 그만 실성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백의소녀는 그녀의 그런 태도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추국! 내 얼굴에 뭐가 묻었니? 그렇게 뚫어지게 응시하게?" 그제서야 추국이라 불린 소녀는 정신을 차린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아가씨는 너무나 아름다워요." 추국은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천하에서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은 한 명도 없을거예요." "어머! 그 무슨 말을……" 백의소녀는 눈을 살짝 흘겼다. 그러자 왼쪽 소녀도 맞장구를 쳤다. "호호호…… 추국의 말이 맞아요. 정말 어떤 분이 아가씨의 낭군이 될지 모르지만 아마……" 그녀는 입가에 생긋 미소를 날렸다. "천하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일거예요." "어머! 동매! 너까지도 나를 놀리다니……" 백의소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그녀를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동매는 까르르 웃으며 도망을 쳤다. 그녀는 몇 걸음 앞에 서서 다시 입을 열었다. "호호호……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요." 백의소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눈을 흘겼다. "그렇게 계속 까불면 때려줄테다." 동매는 그 말에 혀를 낼름 내밀며 교태롭게 말을 했다. "저는 아가씨를 칭찬한 죄밖에 없는데 왜 맞아요?"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추국이 짐짓 걱정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무공으로 봐도 주인님을 빼놓으면 당할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 얼굴도 아름답지……" 그녀의 얼굴은 사뭇 심각했다. 이어 그녀는 그 심각한 얼굴을 더욱 심각하게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너무 뛰어나도 걱정이야…… 천하에서 과연 아가씨 배필 될 분이 있을까?" 이어 그녀는 백의소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그래요, 아가씨?" "뭐야!" 백의소녀는 발칵 화를 냈다. "너희들 정말…… 계속 그러면 내 그냥두지 않겠다." 그러자 두 소녀는 서로 마주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이때 추국의 웃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굳어버렸다. 그녀의 두 눈에 두려운 빛이 가득 떠올랐다. "아…… 아가씨…… 저…… 저기……" 그녀는 떨리는 손 끝으로 웅덩이를 가리켰다. "추국! 왜 그러느냐?" 백의소녀는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추국은 공포에 질려 백의소녀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시체예요. 시체……! 저기……" "시체라고?" 백의소녀는 급히 추국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아! 과연 그곳에는 한 구의 처참한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전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시체. 동매는 더 이상 못보겠다는 듯 시선을 휙 돌렸다. "아! 정말 너무 끔찍해요." 백의소녀는 가볍게 이마를 찌푸리며 시체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추국이 뒤따라오며 두려운 듯 입을 열었다. "그냥 가요, 아가씨. 기분 나빠요." "추국, 그게 무슨 말이냐?" 백의소녀는 가볍게 꾸짖었다. 그리고 한 걸음 시체 옆으로 다가갔다. "가엾게도 이런 곳에서 죽다니…… 그냥 두면 들짐승의 밥이 될터…… 묻어나 주어야겠어." "아가씨! 깨끗한 손을 더럽히지 마세요. 제가 하겠어요." 동매가 선뜻 나섰다. 그녀는 시체 앞으로 대담하게 다가가 시체를 발로 뒤집었다. 얼굴 역시 피투성이가 되어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동매는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무척 젊은 사람같은데…… 이렇게 비참하게 죽다니……" 이때, "으…… 음……" 미약한 신음이 울리더니 시체가 돌연 꿈틀했다. "어머나!" 동매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시, 시체가 움직여요." 백의소녀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동매야! 너무 소란 떨지 마라! 그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다." 백의소녀는 천천히 다가섰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맥을 짚어보았다. 순간 백의소녀의 두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미, 믿을 수 없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은 이미 오장육부가 박살났고, 전신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다." 백의소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보통 사람같으면 죽었어도 몇 번 죽었을 텐데……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니……" 동매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어서 묻으세요. 어차피 곧 죽을 시체인데요." 백의소녀는 경악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 사람의 내공은 실로 추측하기도 힘들 정도다. 지금 이 사람의 내부에서는 빠른 속도로 상처가 치유되어 가고 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동매는 미혹한 표정이었다. 백의소녀는 숙연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다. 이 사람은 정말 기이한 사람이다. 살려봐야겠다." 이어 그녀는 급히 동매를 응시했다. "동매야! 어서 이 사람을 업어라!" "저, 저는……" 동매는 짙게 눈살을 찌푸렸다. 백의소녀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소매를 걷었다. "네가 싫다면 내가 업겠다." "그 무슨……!" 동매는 깜짝 놀라 백의소녀를 제지했다. "아가씨같이 존귀한 분이 어찌 한낱 무림인을 업을 수가 있어요?" 그녀는 불쑥 앞으로 나섰다. "제가 업겠어요." 그녀는 울며 겨자먹기로 황보성운을 들쳐업었다. 허나, 곧 그녀의 입에서는 투덜거리는 말이 새어 나왔다. "칫! 무덤 자리까지 파놓고 죽지 않은 건 또 뭐람!" 3 그들이 어느 정도 걸어갔을까? 그들의 앞에 조그만 암자가 나타났다. 그 암자는 오랜 세월이 경과된 듯 단청이 벗겨지고 이곳 저곳의 담장이 허물어져 매우 허름했다. "안에 계시온지요?" 암자 앞에 다달은 백의소녀가 낭랑히 외쳤다. 허나 암자로부터는 아무런 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여전히 암자로부터는 아무런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일행은 암자 안을 살폈다. 동매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곳은 먼지가 잔뜩 끼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 것 같아요." 일행은 할 수 없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백의소녀는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방 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동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을 방 안에 내려놓고 그 주위를 대강 정리해라!" 동매는 황보성운을 내려놓은 뒤 방 안을 쓸고 닦았다. 이윽고 백의소녀는 황보성운 곁에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물 좀 떠오너라." 추국은 나는 듯이 달려가 물을 떠왔다. 그러자 백의소녀는 품 속에서 수건을 꺼내 물에 적셨다. 그리고 황보성운의 얼굴에 묻은 피부터 닦아냈다. 헌데 황보성운의 얼굴에 묻은 피를 모두 닦아낸 순간, "아!" 백의소녀는 경악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핏속에 드러난 얼굴! 그 모습은 실로 천하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한 절세의 미남이 아닌가? 안색이 약간 창백하긴 했지만 굳고 힘차게 뻗은 눈썹, 우뚝한 코, 한일자로 굳게 다물려져 강한 의지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입술, 그리고 그의 얼굴 위로 흐르는 당당한 대장부의 기상…… 그것은 실로 뭇 여인의 방심(芳心)을 여지없이 흔들 절세 대장부의 모습이었다. 백의소녀는 매혹되어버린 듯 멍하니 황보성운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옆에 있던 두 시녀도 넋을 잃었다. 이윽고, "정말…… 그 시체가…… 이렇게 잘 생긴 미남이었다니……" 동매가 찬탄을 터뜨렸다. 백의소녀는 그제서야 선뜻 정신이 들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야릇한 감정이 물결치고 있었던 것이다. (내 평생 이렇게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남성은 없었다. 그동안 내가 보아온 그 어떤 미남자들도 이 사람에 비하면 태양과 별빛의 차이야.) 백의미녀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더욱 중요한 건 이 사람의 무공 능력…… 이 사람의 내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어. 어떻게 생각하면 할아버님보다도 높은 것 같았어.) 왠지 입 안의 침이 말라왔다. 백의소녀의 안색이 무엇을 결심한 듯 굳어졌다. (그래, 어쩌면 이것은 하늘이 내게 점지해준 인연일지도 몰라. 북해를 떠나 이 머나먼 중원에서 이렇게 사람을 만난다는 자체가 보통 인연이 아니고선 이뤄질 수가 없는거야.) 그녀는 천천히 품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이내 하나의 옥병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매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가씨! 그것은…… 만년영지액(萬年靈芝液)이 아니예요? 그 귀한 것을……" 백의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도, 그것을 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대로 써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녀는 천천히 옥수를 들어 황보성운의 입술을 벌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녀는 옥병을 기울여 황보성운의 입에 만년영지액 다섯 방울을 떨어뜨렸다. 추국과 동매의 얼굴에는 온통 경악의 기색이 떠올랐다. (세상에…… 한 방울만 먹어도 십 년 내공이 증진되는 저 천하기약을 다섯 방울씩이나……) 백의소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병 속의 마지막 다섯 방울을 몽땅 쏟아 넣었다. 추국과 동매는 아예 어이가 없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녀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들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아가씨가 반할 만도 하지……) 한편 백의소녀는 약을 모두 먹인 후 정성껏 치료하고 있었다. 치료에 열중해 있는 그녀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차라리 숙연했다. 그녀는 추국이나 동매에게 치료를 맡긴다는 것은 생각조차 않는 듯했다. 어느 덧, 암자에 온 지 꼬박 하루가 지나갔다. 백의소녀는 주야로 황보성운을 지키며 치료하고 있었다. 추국과 동매는 몸이 축난다고 쉬어가며 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시 또 이틀이 훌쩍 지나갔다. 4 소박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침상이었다. 그 침상 위에 지금 남의(藍衣) 청년이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다시 찾을 수 없는 천하의 미남이었다. 허나 그는 약간 창백한 안색으로 잠자듯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의 옆에는 백의소녀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남의청년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황홀한 빛이 넘쳐흘렀다. 그녀는 어떤 미래를 꿈꾸는 듯했다. 문득 백의소녀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렀다. "아! 한 번도 이야기를 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이 분은 나 용취란(龍翠蘭)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리는구나……" 헌데 순간,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 듯 가볍게 안색을 굳혔다. (헌데 이 분이 깨어나서 나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는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떠올렸다. (나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고 전신에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허나 곧 그녀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아버님은 나를 보고 천하제일의 미녀라고 하셨어. 그런데 저분이 싫다고 할 리가 없지.) 백의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청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뺨에 은은히 홍조가 어렸다. 백의소녀는 지금 가슴이 달아오르고 야릇한 느낌에 온통 들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청년의 입술로 가져갔다. 헌데 그녀의 입술이 청년의 입술에 살짝 닿는 순간, 돌연 남의청년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어머나!" 백의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물들어버렸다. 눈을 뜬 남의청년, 즉 황보성운은 의아한 빛으로 백의소녀를 바라보았다. "낭자는 누구요? 그리고 여기는……?" 용취란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저는……" 그녀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도 할말이 많았는데 막상 깨어나니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황보성운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전신으로 은은한 통증이 느껴져왔다. (으음! 천마이로…… 정말 대단한 자들이었어. 자칫했으면 천존교에서 뼈를 묻을 뻔했다.) 그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황보성운의 머리 속은 무척 복잡한 상태였다. 그는 너무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옆에 용취란이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이윽고 그는 문지방을 밟았다. 이때, "이것봐요!" 뒷전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황보성운은 움찔 놀라 위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얼굴 위로 냉랭한 눈길이 퍼부어져 왔다. 그것은 용취란의 눈빛이었다. 지금 그녀는 격분하여 얼굴을 싸늘히 굳힌 채 황보성운을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황보성운이 아무 말도 없이 나가는 것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여 그녀는 충격을 받고 격분한 것이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아직도 용취란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의아하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러자 용취란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녀는 급기야 눈썹 끝을 미미하게 떨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에게 아무 할 말도 없나요?" 처음보는 낭자가 돌연 그런 말을하니 황보성운은 더욱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황보성운은 지극히 미혹한 표정을 지었다. 용취란은 그만 화가 오르다 못해 설움이 왈칵 치밀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애써 냉랭한 표정을 지으려 했다. 허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하며 떨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다, 당신은 그 상처를 누가…… 치료했는지 아나요?" 황보성운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전신에 운공을 해보았다. 그러자, 상처는 커녕 전보다 오히려 내공이 훨씬 증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숨은 내력(內歷)을 알 수 있었다. 황보성운은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엇을 말하려 했다. 헌데 돌연, 고개를 휙 돌리며 안색을 싸늘히 굳히더니 두 눈에 살기를 띄우는 것이 아닌가? 용취란은 목전에서 황보성운이 돌변한 태도를 보이자 그만 움찔 해버렸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왜 그러시죠?" 허나 황보성운은 여전히 냉막한 표정으로 대답없이 밖을 싸늘히 응시하는 것이었다. 제 37 장 十大魔佛 1 용취란은 황보성운의 태도에 극도로 화가 치밀었다. "다, 당신……" 순간, 용취란은 말을 멈추고 말았다. 밖에서 낯선 인기척이 들렸던 것이다. 찰나, 그녀의 두 눈은 크게 떠지고 말았다. 문 밖에 홀연 두 명의 노화상이 서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전신에 홍포를 두른 괴이한 자(者)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거의 무표정할 정도로 냉막했으며, 두 눈은 그 내심조차도 짐작키 어려울 정도로 투명했다. 또한 전신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흉랄한 살기가 흘러 모름지기 사람을 그 살기만으로도 질식시킬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섬칫할 정도의 싸늘한 시선을 황보성운에게 던졌다. 황보성운도 역시 살얼음처럼 싸늘한 안색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이윽고 왼쪽의 화상이 곁의 화상에게 무어라고 괴이하게 지껄였다. 허나 그 말은 중원말이 아니어서 황보성운이나 용취란은 미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른쪽 화상은 왼쪽화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왼쪽 화상은 황보성운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약간 어색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바로 옥면신수냐?" 황보성운은 흠칫 놀랐다. 허나 이내 안색을 싸늘히 하며 되물었다. "그것을 묻는 뜻은?" 노화상은 아무 말없이 품을 뒤졌다. 그는 지체없이 품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종이와 황보성운을 번갈아 대조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다. 너는 옥면신수 황보성운이다." "당신들은 누구요?" 황보성운은 가볍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오른쪽 화상이 기묘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마교(魔敎) 랍찰파(拉刹巴)에서 왔다." "랍찰파!" 황보성운은 처음 듣는 이름인지라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 서장의 노화상은 냉막한 안색으로 단호하게 입을 떼었다. "네가 옥면신수인 이상 우리 손에 죽어야만 한다." 황보성운은 어이가 없었다. "노화상! 그게 무슨 뜻이오?" 그러자 오른쪽 화상이 두 눈에 은은한 살기(殺氣)를 내뿜었다. "노승은 랍찰파의 십대마불(十大魔佛) 중 일곱째다." 그는 지극히 오만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랍찰파의 십대마불이 중원에 온 뜻은 중원의 명성을 떨치는 고수들을 죽이고 우리의 손 아래 중원을 점령하기 위해서다." 전혀 억양이라고는 추호도 느껴지지 않는 살얼음같이 차가운 말투였다. 황보성운은 한껏 조소를 날렸다. "후후후…… 당신들이 누군지는 모르나 꽤나 큰 망상을 하는구려. 중원의 구름같은 고수들을 어찌 다 죽인다는 말이오?" 노화상은 여전히 그 억양없는 말투로 계속 입을 놀렸다. "모두 죽일 필요는 없다. 단지 너같은 자만 몇 명 죽이면 된다." 그러자 그 옆의 노화상이 한 마디 끼어들었다. "중원에서 십대고인으로 불리는 고수 중 이미 세 명이 나의 손에 삼초를 넘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 황보성운의 안색은 그 말에 대변하고 말았다. 그는 형형히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누가 죽었단 말이오?" 그러자 왼쪽의 노화상이 입을 열었다. "천면괴객, 백학거사, 패도혈마, 삼인(三人)이다!" 황보성운은 섬칫 전신에 전율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사태의 심상치 않은 추이를 느꼈던 것이다. "우리 십대마불이 중원에 온 이상 중원은 이미 끝난 것이다. 천 하의 그 누구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 오른쪽 화상의 냉막한 말이었다. 왼쪽 화상은 서서히 손을 치켜 들었다. "옥면신수, 너부터 이 세상에서 사라져 줘야겠다." 그는 소리없이 두 손을 천천히 앞으로 밀었다. 일순, 황보성운은 위험을 직감했다. 그는 급히 현무신공을 구성(九成)까지 끌어 올렸다. "현무신공? 그런 시시한 무공으로는 랍찰파의 무형참미소(無形斬彌銷)를 당해내지 못한다." 순간, 꽈르릉! 엄청난 폭발음이 울렸다. 동시에 황보성운은 거대한 충격을 느끼며 뒤로 무려 다섯 걸음이나 주르륵 밀려났다. 황보성운은 극도로 경악했다. (미, 믿을 수가 없다. 이자들의 무공은 지옥괴로나 혈사천로의 무공보다도 훨씬 고강하구나!) "아미타불…… 우리 랍찰파가 천 년 전 중원에서 쫓겨날 때, 우리는 천 년 안으로는 절대 중원을 침입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왼쪽의 노화상은 기나긴 유원이 서린 듯 냉막한 표정에 일말의 한을 담았다. 이어 그는 시선을 돌리며 살기등등히 부르짖었다. "허나, 이미 그 기한은 지났다. 이제 중원은 완전히 궤멸될 것이다." 그는 다시 일장을 서서히 뻗어왔다. (아직 내력이 팔성 정도밖에 회복되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하다.) 황보성운은 급촉히 잔영보를 전개했다. "그 어떤 보법(步法)도 무형참미소보다는 느리다." 노화상은 계속 일장을 밀어왔다. 순간, 찌---- 익! 황보성운의 옷자락이 찢겨져 나갔다. 동시에, 펑! 황보성운은 막강한 암경(暗勁)에 어깨를 격타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어깨가 부서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과 함께 그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는 간신히 신형을 가누며 내려섰다. (처, 천하에 이토록 무공이 무서운 자들이 있었다니……!) 황보성운은 경악스런 감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노화상은 천천히 다가왔다. "천 년 전 쌍환노인(雙環老人)의 후계자가 있다면 몰라도 현 무림에서 우리의 십초(十招)를 견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다시 단조로운 자세로 일장을 서서히 내뻗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아직 내상이 완전히 쾌유되지 않은 탓에 전혀 진기를 모을 수가 없었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이때 용취란이 갑자기 노화상의 옆구리를 향해서 일 장을 내뿌렸다. 그것은 지극히 음랄한 장풍이었다. 노화상은 슬쩍 한 걸음 옆으로 피하면서 약간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오! 이제보니 너는 북해빙백살(北海氷魄殺)의 빙혈공(氷血功)을 익혔구나." 노화상은 다시 손을 끌어올렸다. "북해빙백살도 우리가 제거해야만 될 인물, 너부터 없애주겠다." 그는 서서히 쌍장을 들이 밀었다. 용취란은 급급히 옆으로 피해갔다. 허나, 찌---- 익! 일순간에 옷자락이 찢어지고 백옥같은 살결이 드러났다. 그녀는 도저히 노화상의 상대가 아니었다. "너의 무공은 십대고인보다 훨씬 위로구나. 허나 역시 나의 손 아래 십 초를 못 넘긴다." 노화상은 서서히 손을 뻗더니 공격을 시작했다. 용취란이 전력을 다해 막았지만 상대의 무공은 너무나 강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계속 밀렸다. 오륙 초 쯤 경과했을까? 이때, "무형참미소를 받아라!" 노화상은 다시 무형의 소리없는 장풍을 서서히 밀어왔다. 용취란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최후의 상태가 도래했음을 느꼈다. 그녀는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렸다. 헌데 이때 돌연, 황보성운이 번개같이 용취란을 낚아채 허공으로 치솟는 것이 아닌가? "크흐흐…… 도망가려고? 어림없다!" 노화상은 다시 허공의 황보성운을 향해 소리없는 장풍을 밀어붙였다. 황보성운은 허공에서 몸을 빙그르르 회전시키며 우수(右手)를 내뻗었다. 일순, 그의 손이 극도로 투명하게 급변했다. 그 가공할 장법 천인수가 전개된 것이었다. "엇!" 노화상은 다급한 경악성을 질렀다. 순간, 꽈르릉----! 엄청난 폭발음이 울리며 암자의 한구석이 날아가 버렸다. 동시에 노화상은 뒤로 척척 네 걸음을 격퇴당했다. 한편, 황보성운은 장력이 부딪치는 반탄력으로 허공으로 퉁겨 쏜살같이 날았다. 즉시 그는 허공에서 무형비행술을 전개했다. 순간, 그의 신형이 수백 장을 솟구치더니 창졸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엇! 무영비행술!" 그들은 감히 쫓지 못하고 망연히 황보성운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응시했다. 허나 곧 그들의 얼굴에 음산한 괴소가 흘렀다. "도망가도 소용없다!" "십대마불에게 걸려든 이상 탈출이란 불가능하다." 두 노화상은 서로 마주 보았다. 순간, 그들의 인영이 스르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2 한편, 황보성운은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품 속에서 용취란은 망연자실했다. 인간이 이토록 새처럼 하늘을 날다니…… 근 백여 리 정도 날았을까? 황보성운은 다시 진력이 고갈됨을 느꼈다. 기실 그는 격심한 부상에 이어 한 차례의 격전 등으로 인하여 많은 내력이 소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지면으로 내려왔다. 그곳은 어느 산봉우리였다. 이때 돌연, 괴이무쌍한 일이 일어났다. 그의 앞에 스르르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홀연 두 노화상이 신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음침한 괴소를 띄우며 다가왔다. "네가 그 무엇으로 도망간다고 해도 우리의 천리비환(千里飛幻)의 수법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황보성운은 전신을 무섭게 휩쓰는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지, 진정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놈들이다.) 노화상은 손을 다시 끌어 올렸다. "자, 이제 죽을 준비나 해라!" 이때 용취란이 서릿발처럼 싸늘한 안색으로 두 화상을 노려보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당신들이 스스로 천하제일이라고 자처한다면 상처입은 사람을 핍박하진 않을 거예요." "상처를 입었다고?" 두 화상은 돌연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그리고 황보성운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이윽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과연 내공이 좀 손상 되었군." "좋다. 우리도 그런 편의를 얻어 공격하고 싶지는 않다." 두 화상은 손을 내렸다. 그리고 냉랭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시진만 기다리겠다." 순간, 그들은 말을 마치자마자 스르르 한 줄기 연기로 변하더니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후……!" 황보성운은 탄식을 터뜨렸다. (이자들의 수중에서 벗어나기란 도저히 불가능(不可能)하구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용취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용취란도 애틋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심 마음을 굳게 다졌다. (좋다. 나는 여기서 죽더라도 상관없다. 허나 이 아름다운 소녀가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이 소녀가 죽는다면 그건 모두가 나 때문이다.) 황보성운은 결연한 빛을 떠올리며 입을 떼었다. "낭자! 손바닥 좀 내밀어 주시오." 용취란은 흠칫했다. 허나 황보성운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왼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손이었다. 섬섬옥수라 했던가? 가녀리게 뻗어나간 손가락이며 그 손가락 위로 귀엽게 반짝이는 손톱, 그리고 백옥같은 손바닥은 천하미인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손이었다. 황보성운은 천천히 손목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용취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천천히 글씨를 썼다. (낭자, 절대로 입을 열지 마시오. 전음도 하지 마시오. 어쩌면 그들은 우리의 모든 걸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오.) 용취란은 흠칫했다. 허나 곧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황보성운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목을 통해 일종의 짜릿한 감정을 느꼈다. 황보성운은 다시 그녀의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낭자! 그들의 무공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오. 아마 오늘 탈출은 불가능할 것 같소.) 순간, 용취란의 눈빛이 흐려졌다. 황보성운의 손가락은 계속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였다. (내가 죽는 것은 관계없소. 허나 낭자만은 반드시 살아야 하오.) 용취란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녀는 선뜻 자신의 오른손으로 황보성운의 왼손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급히 글씨를 썼다. (싫어요.) 황보성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황보성운은 다시 용취란의 손목을 바꿔 잡았다. (낭자는 단지 나의 목숨을 구하려다 이 일에 휘말린 것이므로 나는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소.) 그러자 용취란의 눈빛이 변화했다. 그것은 어떤 실망의 빛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황보성운의 손목을 다시 끌어잡아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나갔다. (당신은 겨우 그 책임감 때문에 그런 것인가요?) 다시 손이 바꿔 잡혀갔다. (낭자는 나의 목숨을 구했소. 그러므로 이것은 지극히 응당한 보답이오.) 용취란은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며 다시 황보성운의 손목을 잡았다. (나는 아직 당신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어요.) (낭자의 그 마음 하나만 해도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소.) 황보성운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떠올랐다. (반드시 낭자는 이곳에서 살아나야 하오.) 용취란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황보성운의 손을 급히 낚아챘다. (당신은 당신에 대한 나의 진심을 알고 있나요?) 황보성운은 천천히 용취란의 손목을 다시 끌었다. (낭자, 그런 이야기는 그만.) 용취란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황보성운의 손을 홱 잡아당겼다. (우선 나의 질문부터 대답해요!) 황보성운은 내심 길게 탄식했다. 그는 천천히 용취란의 손을 끌어 글씨를 또박또박 써나갔다. (내가 만약, 낭자의 그 마음을 모른다면 구태여 이렇게 낭자를 구하려 들지 않을 것이오.) 용취란은 한없이 가슴이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게 이미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녀는 목전에 커다란 위험을 두고 타오르듯 사랑이 불붙고 있는 것이었다. 용취란은 사랑이 가득찬 눈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그녀는 황보성운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흡사 전에 썼던 말을 지우기라도 하듯 한 차례 쓸어내린 뒤 글씨를 또박또박 적어나갔다. (당신의 마음은 저도 알아요. 허나 저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아요. 오히려 다른 대가를 원해요.) 황보성운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낭자가 어떤 대가를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용취란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당신이 나를 하찮은 여인이라 생각해도 좋아요. 그러니 당신은 나에게 반드시 그 대가를 주어야 해요.) 황보성운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대가가 무엇이오?) 용취란은 황보성운의 손목을 끌어당겨 한자 한자 힘주어 썼다. (당신의 마음을 주세요!) 순간, 황보성운은 망연자실했다. 그의 가슴 속에 실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이 격랑처럼 밀려 닥쳤던 것이다. 이 천하에 둘도 없을 아름다운 여인이 이처럼 급급한 위경에 처해 애틋한 사랑을 고백하다니…… 황보성운은 격심한 갈등 속에 빠져 버렸다. 자신이 만약 이 소녀의 마음을 거절한다면 그녀는 필시 깊은 상처를 입고야 말 것 같았던 것이다. 허나 또한 진심을 속여가며 응락한다는 것은 그녀에 대한 기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한편 용취란은 황보성운을 간절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서서히 그녀의 두 눈에 그윽히 투명한 눈물이 뿌옇게 차올랐다. 그리고 갸름한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진땀을 흘리며 갈등 속에서 번민했다. 잠시 동안 그들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용취란은 다시 황보성운의 손목을 부여잡아 한자 한자를 정성껏 적어갔다. 그 때마다 방울방울 눈물이 황보성운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절대 강요하는 것이 아니예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요. 제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솔직한 마음이예요.) 용취란은 황보성운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글씨를 써나갔다. (실상 저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사랑했어요. 이것은 절대 순간적인 애정이 아니예요. 어쩌면 단신과 저는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예요.) 황보성운은 침중한 시선으로 용취란을 응시했다. (낭자, 낭자는 지금 무엇을 잘못 생각하는거요. 천하엔 나보다 훌륭한 남자들이 무수하오. 낭자는 왜 하필이면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나같은 남자를 사랑하려 하오?) 황보성운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용취란을 응시했다. 황보성운은 지금 그녀의 생각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급기야 용취란은 소리없는 오열을 터뜨렸다.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황보성운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저는 절대 당신을 잊을 수 없어요. 이것은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예요. 저는 우리의 처지를 잘 알고 있어요. 허나.)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당신과 내가 마음만 합친다면 이 난국을 빠져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예요?) 황보성운은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어 그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그는 용취란의 얼굴을 연민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서히 그녀의 손목을 이끌었다. (낭자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순간, 용취란의 얼굴에 온통 흥분과 희열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황보성운의 손을 잡았다.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은 후회하지 않는 것이예요. 내 자신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어요.) "아----!" 황보성운은 긴 탄식을 터뜨렸다. (좋소!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이리라.) 용취란은 멍하니 황보성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넋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순간, 그녀는 한 줄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황보성운의 품에 자신의 몸을 묻었다. 황보성운은 품 속의 용취란을 지그시 내려보았다. 잠시 후, 용취란은 가볍게 몸을 빼내며 지극히 자연스럽게 황보성운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자, 이제 어서 운공조식을 시작하세요.) 황보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취란은 계속 손가락을 놀렸다. (당신의 몸 속에는 제가 준 만년영지액이 아직 완전히 체내로 흡수되지 않았어요. 하니 ,운공하면 내상 정도는 말끔히 치료될 거예요.) 황보성운은 멍하니 용취란을 응시했다. 지금 그의 가슴 속에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잔파랑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그녀의 두 뺨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이어 격정적인 입맞춤이 이루어졌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허리를 부러지도록 끌어안았다. 그러자, 용취란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이윽고 그녀도 다태울 수 없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 백옥같이 가녀린 팔을 황보성운의 목에 부드럽게 휘감았다. 그리고 지극히 부드럽고 달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직 나의 이름을 모르시죠?"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만 알 뿐이오." 황보성운은 더욱 힘차게 용취란을 끌어안았다. 용취란은 얼굴을 다홍빛으로 물들였다. "저의 이름은 용취란이라고 해요. 앞으로는 그냥 취란이라고 불러주세요." "예쁜 이름이오. 나는 황보성운이라 하오." 황보성운은 더욱 격정적으로 입맞춤을 했다. 두 사람의 달콤한 타액이 서로 합쳐져 부드럽게 흘렀다. 용취란은 흥분에 들떠 눈을 스르르 내리 감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황홀한 행복의 빛이 떠올랐다. 이윽고 황보성운은 입술을 가볍게 떼었다. "취란! 나는 운공을 해야겠소!" "제가 지켜드리겠어요." 용취란은 호법을 섰다. 황보성운은 뜨거운 시선을 한 번 용취란에게 던진 뒤 곧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즉각 운공요상에 들어갔다. 그러자 즉시 단전에서 뭉클뭉클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일단 솟구친 진기는 전신의 사지백해 기경팔맥을 따라 급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전신의 본원진기(本元眞氣)와 만년영지액의 효력이 합쳐진 열류는 엄청난 위력으로 전신을 격탕하였다. 이윽고 그의 전신으로부터 허연 백무가 뿜어져 나오더니 급기야 주위 방원 이십여 장의 숲을 지척도 분간키 어려운 백무로 휩싸버렸다. 서서히 뿜어져 나오던 백무는 다시 그의 코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백무의 마지막 한 모금이 그의 콧속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 그러자 그의 두 눈으로부터 엄청난 신광이 폭포수처럼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황보성운은 자신의 몸이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갈 듯함을 느꼈다. (으음! 이미 나의 내공이 무려 오백 년의 수위에 이른 듯하구나!) "어때요?" 호법을 섰던 용취란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그녀의 그러한 눈빛은 실로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이 없는 지극한 아름다움이었다. 흑백(黑白)이 선명한 눈동자…… "매우 좋소." 황보성운은 용취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장난스레 그녀의 뽀얀 귓볼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이 정도면 놈들과 겨루고도 당신을 다시 안을 수 있을 것 같소." "어머!" 용취란은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황보성운은 급히 그녀의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렇게 얼굴만 붉히다간 뺨이 녹아나서 어디 견디겠소?" "몰라요!" 용취란은 샐쭉하게 눈을 흘겼다. 황보성운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당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놈들을 물리치리라." 용취란은 입가에 지극히 아름다운 미소를 띄웠다. 이때, 스스스스…… 다시 두 노화상이 홀연히 몸을 나타냈다. "옥면신수! 약속한 한 시진이 지났다." 제 38 장 混世天下 1 황보성운은 담담한 안색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때가 됐구려." "내상은 모두 치료되었나?" 노화상은 싸늘한 눈초리로 황보성운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황보성운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소."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다른 노화상이 음침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싸우다가 죽어도 할 말은 없겠군." "모든 건 결과가 말해줄거요." 황보성운은 시종 담담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 어디 한 번 함께 뚜껑을 열어봅시다." "후후후…… 너는 아직도 망상을 못 벗어났구나." 노화상은 가소롭다는 눈초리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황보성운은 계속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망상은 당신들의 친구가 될 수도 있소." 노화상은 싸늘히 안색을 변색시켰다. "좋다.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이름이나 알고 죽어라." 말을 하던 화상은 옆에 서 있는 화상을 가리켰다. "저분은 다섯째 천심불(天心佛)이시다. 또한 노납은 자면불(紫面佛)로 일곱째가 되신다." 자면불은 천천히 황보성운 앞으로 다가섰다. "너희 둘이 함께 덤벼도 좋다." "혼자 만으로도 충분하오!" 황보성운은 묵묵히 대답했다. 자면불은 지체없이 쌍수를 가슴으로 끌어올렸다. "그럼…… 자, 받아라!" 그는 손을 무겁게 내리 뻗었다. 순간, 일진의 소리도 없는 경풍이 닥쳐들었다. 황보성운은 이것이 가공할 무학, 무형참미소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황보성운은 지체없이 쌍수를 내리 뻗었다. "파천기!" 순간, 꽈르릉----!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커다란 웅덩이가 파였다. 동시에 황보성운은 뒤로 네 걸음을 밀려났다. 또한 자면불은 세 걸음이나 물러나서 신형을 추스렸다. 일순, 그의 얼굴은 온통 경악으로 휩싸였다. "놀랍구나! 노납이 중원에 들어온 이래 이토록 나의 무공에 접근한 자(者)는 처음이다." 그는 휘둥그래 눈을 뜨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그 무공은 무엇이냐?" "파천기라 하오." 황보성운은 냉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면불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무공이다. 허나, 무형참미소를 따라오기에는 아직 멀었다." 이어 그는 두 눈에 무시무시한 흉망을 발산하며 소리없이 몰아쳐 왔다. 황보성운도 형형히 두 눈에 광망을 내뿜으며 가공할 위력으로 맞부딪쳐 갔다. 두 사람의 신형은 외관상(外觀像) 극히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았다. 허나, 그 공격의 무서움이라는 것은 생사존망(生死存亡)이 촌각에 명멸(明滅)하는 가공할 것이었다. 두 사람의 공방은 흡사 풀어내려하면 할 수록 다시 감기고 얽혀지는 헝클어진 실뭉치처럼 집요하게 휘감기고 뒤얽혀, 막상막하의 호각지세를 이루었다. 자면불은 손목을 교환하면 할 수록 더욱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어! 이 소배는 실로 괴이한 자로군. 아까와는 전혀 딴판이니……) 지금 황보성운은 현무구장과 천외천유신에게 배운 천라구장을 혼합해 시전하고 있었다. 기실 현무구장은 극양(極陽)의 장법이다. 반면 천라구장은 극음(極陰)의 장법인 것이다. 이러한 극양과 극음이 함께 조화되자 그 장세의 위력이 훨씬 배가 되었던 것이다. 어느덧, 십 초…… 십 오…… 이십…… 이십 오…… 삼십 초가 순식간에 흘러갔다. 이때 자면불이 훌쩍 한걸음 비껴서더니 돌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노납은 중원에 시시한 인물만 있는 줄 알았더니 너같은 자도 있었구나." 자면불은 흉흉한 눈길로 황보성운은 직시했다. "좋다. 그렇다면 너에게 노납의 정수 섬전비혈수(閃電飛血手)를 보여주겠다." 순간, 그의 손이 번뜩했다. 다음 순간, 쉬---- 쉬---- 쉿----! 한 줄기 예리한 푸른 섬광이 대기(大氣)를 잘랐다. 전광석화(電光石花)! 그것은 실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쾌속무비한 수법이었다. 찰나, "흑!" 황보성운은 어깨를 감싸쥐었다.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던 것이다. 찰나지간, 자면불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신쾌무비한 출수를 거듭했다. 황보성운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잔영보를 펼쳤다. "하하하…… 아까 그 보법이구나. 비록 절묘하긴 하나 섬전비혈전보다는 훨씬 느리다." 순간, 쉬---- 쉬---- 쉭! 예리하기 짝이없는 경기가 황보성운의 전신으로 소나기처럼 훑어왔다. 찰나, 파---- 파---- 팍! 황보성운은 연속 괴이한 출수에 격중당했다. 황보성운은 뒤로 주르륵 밀려나 입가에 선혈을 흘렸다. 순간, 그는 돌연 품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잠룡피를 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차---- 앗!" 한 마디 호기로운 기압성을 내지르며 신형을 솟구쳤다. 일순 그의 잠룡피를 낀 오른 손이 투명하게 변해버렸다. 찰나, "엇!" 자면불은 다급한 경악성을 질렀다. 지금 황보성운이 시전하는 무공은 아까 자신이 혼이 난 장법이 아닌가? 그는 극도로 긴장하여 섬전비혈수를 전광(電光)같이 전개했다. 순간, "천인수!" 황보성운의 신형이 지면으로 흡사 독수리처럼 내리꽂혀 왔다. 순간, 그의 장심으로부터 엄청난 섬광이 흡사 우박처럼 떨어져내렸다. 찰나, 츠츠츠츠츳----! 엄청난 파공음이 울렸다. 다음 순간, "흑!" "억!" 그들은 한 마디 다급한 신음성을 지르며 옆으로 쫙 갈라섰다. 그리고 흡사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극심하게 비틀거렸다. 황보성운은 왼쪽 가슴이 피투성이였다. 자면불은 가까스로 신형을 곧추세우며 이를 으드득 갈아붙였다. "과연 대단하다, 옥면신수! 너는 중원제일 고수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다시 일 장을 격출했다. 허나, 황보성운은 제자리에 일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얼음장처럼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장력이 그를 덮쳐 산산조각으로 짓뭉개버릴 찰나였다. 돌연, 황보성운이 빗살같은 속도로 한 손을 내뻗는 것이 아닌가? (이놈이 손이 잘리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자면불은 창졸간에 손에 내공을 휩쓸어 넣었다. 허나, "으---- 흑!" 황보성운의 손에 부딪친 노화상은 손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후려친 황보성운의 손에는 잠룡피가 끼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바닥은 처참하게 찢어져 피가 분수처럼 뿌려졌다. 자면불은 안색을 극심하게 일그러뜨렸다. 헌데 바로 그 찰나, 어느새 황보성운의 왼손이 번뜩하는 것이 아닌가! "현천살미!" 드디어 현무구장의 최후 살초가 전개된 것이었다. 다음 순간, "으---- 윽!" 자면불은 뒤로 십여 보나 주르륵 밀려나 버렸다. 그리고는, 으---- 엑! 피 한 모금을 토해냈다. "일곱째! 물러나라." 뒤에서 관전하던 천심불이 돌연 장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황보성운을 냉랭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서릿발치듯 입을 열었다. "옥면신수! 노부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네가 십대마불 중 일곱째를 꺾다니, 허나 결코 일곱째가 실력으로 진 것은 아니다." 황보성운도 냉랭히 소리쳤다. "싸움에서 변명은 필요없는 법!" 노화상은 지긋이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다. 너는 처음으로 우리 손아래 살아남은 놈이다. 위기에 편승해서 계속 공격하고 싶지는 않다." 뒤이어 그는 두 눈에 형형한 살광을 내뿜었다. "허나, 다음번에는 아마 이런 요행은 없을 것이다." 천심불은 자면불을 부축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의 신형이 뿌옇게 흐려져 한 줄기 연기로 화(化)하더니, 급기야 그것마저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천심불이 자면불을 이끌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용취란은 만면에 희색을 떠올리며 황보성운에게 다가왔다. "아아…… 당신! 결국…… 그들을 물리치셨군요." "……" 헌데 괴이하게도 황보성운의 안색은 매우 침울했다. 그는 단지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헌데 바로 이때, 그의 입술 끝으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용취란은 황급히 황보성운의 손을 잡으며 얼굴을 올려보았다. "다, 당신…… 왜…… 왜 그러시죠?" "이번 싸움은…… 실상 내가…… 패한 것이오." 그의 안색은 더할 나위없이 침울했다. 그는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놈의…… 무공은…… 확실히…… 엄청난 것이었소." 그는 힐끗 자신의 전신을 둘러보았다. 그의 전신에는 이곳저곳이 갈라지고 피가 튀어 말씀이 아니었다. "슬쩍 스친 것에 불과한데도 나…… 나의 오장육부가 진탕 되다니……" 황보성운은 견딜 수 없는 듯 피 한 모금을 울컥 토해냈다. 용취란은 새파랗게 질린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성운! 성운!" "우, 운공을…… 해야겠소." 황보성운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어요." 용취란은 같이 쪼그리고 앉았다. "필요없…… 소." 황보성운은 손을 저었다. "아니예요. 당신이 싫다고 해도 저는 강제로 해야겠어요." 황보성운은 고개를 돌려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용취란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한가닥 미소가 스쳤다. 이어 그는 눈을 내리 감고 운공에 들어갔다. 용취란은 재빨리 황보성운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명문혈에 장심(掌心)을 대고 진기를 주입시켰다. 서서히 황보성운의 밀랍같았던 얼굴에 한가닥 홍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용취란은 등 뒤에서 손을 떼었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게다가 그녀의 고운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이었다. 매우 지친 모습이었다. 허나 그녀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황보성운의 곁에서 호법을 섰다. 이미 황보성운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마음의 커다란 기둥이었다. 아니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욱 귀중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점차 몇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 동안 급격히 가까와져 있었던 것이다. 용취란은 황보성운의 얼굴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용취란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의 눈에 세 명의 음침한 노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흠칫 놀랐다. (크, 큰일이다. 저들이 만약 적이라면 대단히 위험하다.) 나타난 자들은 바로 혈사천로와 잔양신마, 그리고 한 명의 꼽추였다. 허나 용취란은 그들이 어떠한 인물들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보통고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특히 그녀는 혈사천로를 보는 순간 가늘게 경련하고 말았다. (저자의 무공은 결코 할아버지 못지 않다.) 이때 그들은 천천히 황보성운이 운공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황보성운이 운공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만면에 희색을 떠올렸다. "후핫핫핫…… 옥면신수! 결국 네놈도 여기서 잡히고 마는구나." 혈사천로는 음침한 괴소를 날리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멈춰요!" 용취란은 상황이 심상치 않자 급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혈사천로가 우뚝 신형을 세웠다. 그리고 눈살을 짙게 찌푸리며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집! 네가 나를 불렀느냐?" "그래요. 저분 곁으로 가지 마세요." 용취란은 살얼음처럼 싸늘히 대답했다. 그녀는 냉랭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혈사천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 계집애야! 너는 노부가 누군지 아느냐?" "그런 것은 상관 없어요." 사뭇 냉랭한 용취란의 태도였다. 혈사천로는 빙글빙글 웃으며 수작을 걸었다. "내가 저놈에게 가겠다면……?" "내가 반드시 막을 거예요." 용취란은 바짝 긴장하여 전신에 십분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혈사천로는 그녀 정도야 아랑곳 없다는 듯 유유히 뒷짐을 지고 있었다. "후후후…… 어디 막아 보아라!" 순간, 용취란은 지체없이 음랭하기 짝이 없는 일장을 격발시켰다. "앗! 비…… 빙혈공!" 혈사천로는 소스라치게 놀라 급급히 비켜섰다. 이어 그는 두 눈에 살광(殺光)을 줄줄이 내뿜으며 서릿발처럼 물었다. "너는 북해 빙백산 용호상(龍虎相)과는 무슨 관계냐?" "조부(祖父)예요." 용취란은 의아한 기색을 띄웠다. 혈사천로는 극도로 음침한 안색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으---- 음! 용가놈이 아직 죽지 않았느냐?" 용취란은 그제서야 그가 자신의 조부와 과거에 어떤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즉시 냉랭하게 코웃음 쳤다. "흥! 아직 당신같은 고물(古物) 하나 정도는 두둘겨 잡을 만큼은 정정하시오." "이, 이 발칙한 계집이!" 혈사천로는 노기충전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잔양신마와 꼽추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얘들아! 너희들은 저놈을 죽여라!" "넷!" 그들은 황보성운에게 급속히 접근했다. "멈춰라!" 용취란은 잔양신마와 꼽추를 향해서 일장을 내뻗었다. 허나 옆에 있던 혈사천로가 그녀의 장력을 상쇄시켜 무위로 돌려버렸다. 그러자 그 틈을 이용해 잔양신마와 꼽추는 두 눈에 온통 음침한 살광을 폭사시키며 황보성운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황보성운의 전후(前後)로 갈라섰다. "신타형! 동시에 칩시다." 잔양신마가 꼽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꼽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죽어라!" 그들은 살벌하게 일갈하며 공격했다. 용취란은 절망했다. 그녀는 아예 두 눈을 꼭 내리감았다. (아, 모든 것이 끝났구나!) 순간, "크---- 아---- 악!" "크---- 흑!" 두 줄기 참혹한 비명이 대기를 찢었다. 용취란은 정신이 아찔해지며 옆으로 쓰러졌다. 헌데 이때 누군가가 쓰러지는 자신의 허리를 부여잡는 것이 아닌가? "놔…… 놔랏!" 그녀는 창졸간에 손바닥을 휘둘러쳤다. 순간, 그녀의 손이 완강한 손에 붙잡혔다. "취란! 나요, 나 황보성운이오."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용취란은 홱 몸을 뒤로 돌렸다. 순간, "아……!"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바로, 그곳에는 황보성운이 당당히 버티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용취란은 왈칵 눈물을 흘리며 황보성운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황보성운이 운공조식하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잔양신마와 꼽추가 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처참하게 즉사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황보성운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당신 나빠요, 나빠. 나를 이렇게 놀라게 하다니……" "고의는 아니었소." 황보성운은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용취란은 문득 손을 멈추며 눈물이 글썽했다. "알아요. 제가 왜 모르겠어요." 그녀는 다시 황보성운의 품 속에 포근하게 머리를 기대었다. "정말 다행이예요." 다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한편 혈사천로는 자신의 수하가 창졸간에 죽어버리자 격분했다. 더욱이 황보성운과 용취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사랑에 열중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황보성운! 지금 무슨 지랄을 하고 있는거냐?" 혈사천로는 집어 삼킬 듯이 두 사람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제서야 용취란은 깜짝 놀랐다는 듯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어머, 깜짝이야!" 이어, 그녀는 고개를 돌려 혈사천로를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성운, 왜 저사람은 저렇게 신경질을 내지요?" 황보성운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당신이 이해해 줘야 하오." 용취란은 눈을 반짝 빛냈다. 황보성운은 자못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원래, 사랑을 못해본 사람은 남의 사랑에 질투가 나는 법이라오." 혈사천로는 그만 노기충천하고 말았다. "이놈! 무슨 헛소리를……!" 그러더니 돌연 무시무시한 속도로 암습을 했다. "죽어라!" "엇!" 황보성운은 대경하여 급히 피했다. 허나 혈사천로의 장력은 황보성운의 어깨를 여지없이 후려치고 말았다. 순간, 찌---- 익!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황보성운은 어깨에 은은한 통증을 느꼈다. 가벼운 외상을 입은 것이었다. 용취란은 다급히 물었다. "성운! 심하게 다쳤어요." "아니오." 황보성운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용취란은 고개를 돌려 혈사천로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혈사천로! 비겁하게 암술을 하다니……" "흐흐흐…… 계집년! 암습도 일종의 무공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혈사천로는 득의의 괴소를 날렸다. 용취란은 울화가 치밀었다. 헌데 돌연, 그녀의 시선이 왼쪽으로 돌아가더니 안색이 대변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 혈사천로와 황보성운은 자신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빙혈수라지(氷血修羅指)다!" 용취란이 신쾌무비한 속도로 지풍을 날렸다. 그러자, "헉!" 예리한 지풍이 혈사천로의 어깨를 관통해버렸다. 혈사천로는 너무 창졸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의 관통된 어깨로부터는 손가락 굵기의 피기둥이 솟구쳤다. 그리고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고통이 급속도로 전신에 번져갔다. 혈사천로는 급급히 혈도를 막고 경혈을 폐맥시켰다. 이어 그는 흉광(兇光)이 내뻗치는 눈으로 용취란을 바라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 비겁한 년! 남을 속여서 암습을 하다니……" 용취란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손 끝으로 혈사천로를 가리켰다. "성운! 저자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죠?" 황보성운은 짐짓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천하에서 오직 자기만이 암습할 권리가 있다고 울부짖는군." "까르르르……" 용취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교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황보성운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용취란은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어투로 말을 이었다. "호호호…… 정말 무척이나 낯짝이 두꺼운 자군요." "취란, 이해해줘야 하오. 낯짝이 두꺼우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소?" 황보성운은 심드렁히 내뱉았다. 아예 혈사천로는 그만 노기충천한 나머지 발광 직전이었다. 그는 시뻘겋게 두 눈을 붉히며 벽력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죽어라, 이노옴!" 그의 전력을 기울인 일장이 광풍노도의 기세로 황보성운에게 덮쳐들었다. 허나, 황보성운은 냉랭히 코웃음쳤다. "흥! 혈사천로! 너는 이미 나의 상대가 아니다." 찰나, 꽈르르릉! 엄청난 폭발음이 허공을 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으---- 헉!" 혈사천로는 무려 일곱 걸음이나 뒤로 주르륵 밀려나갔다. (이, 이놈의 무공이 사흘 전과 비교도 안되게 발전했구나……) 그는 경악스런 표정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황보성운은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날렸다. "후후후…… 예로부터 선비는 사흘만 만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없다고 했다." 황보성운의 얼굴에 한껏 조소의 기색이 떠올랐다. "혈사천로, 이미 나는 사흘 전의 황보성운이 아니다." 혈사천로의 안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트, 틀렸다. 놈을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황보성운은 혈사천로의 그러한 심경을 꼬집기라도 하듯 의미심장 하게 미소를 날렸다. "혈사천로! 도망가려는가? 좋다, 가거라. 허나 한 가지 명심해라. 지금 무림에는 무서운 자들이 등장했다는 것을……" "……?" 혈사천로는 만면에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황보성운은 냉막히 입을 열었다. "서장 랍찰파의 십대마불이 등장했다." 순간, "뭐…… 뭐라고? 십대마불……" 혈사천로의 얼굴에는 온통 경악과 공포의 기색이 뒤덮혀 버렸다. 그는 한차례 부르르 전율하더니 신형을 솟구쳤다. "시, 십대…… 마불이……" 그는 긴 장소를 날리며 쏜살같이 사라져 갔다. 용취란은 의아한 눈초리로 그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자가 저토록 놀랄까요? 마치 무슨 큰 죄를 지은 것처럼……" 황보성운도 의혹이 섞인 소리로 입을 열었다. "글쎄…… 난들 알 수가 있나?" 이어 황보성운은 용취란의 손을 잡았다. "자, 우리도 갑시다." "어디로 갈 건데요?" 용취란은 고개를 돌려 황보성운에게 시선을 던졌다. "개방 총단에 가봅시다." 황보성운은 미리 생각해둔 듯 담담히 대답했다. 용취란은 의아한 눈빛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거기는 왜……?" 황보성운은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개방은 천하에서 가장 소식에 정통한 문파이니, 아마 십대마불의 행방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오." "가요." 그들의 신형이 솟구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까마득한 점으로 사라져 버렸다. 제 39 장 모여드는 군웅들 1 호북성에 위치한 무창(武昌). 서녘 해가 대지에 붉은 노을을 드리울 무렵 무창으로 통하는 관도에 두 명의 남녀가 나타났다. 천하에서 보기 힘든 준수한 청년과 아름다운 미소녀. 마치 인간 중의 용봉(龍鳳)을 연상시키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황보성운과 용취란이었다. 그들은 지금 개방 총단으로 가는 중이었다. 황보성운이 무창으로 가는 이유는 바로 개방총단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개방 총단엔 팽소연이 있다. 과거 황보성운이 신풍개에게 부탁을 해서 그곳에 있는 것이다. 팽소연. 어떻게 생각하면 천하에서 이 소녀처럼 불쌍한 소녀도 없을 것이다. 천하절색의 미모를 지니기는 했지만, 그녀의 생애는 실로 불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황보성운은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늘 비에 젖은 한 송이의 해당화가 연상되곤 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자신과 몸을 섞은 사이가 아닌가? 무창성이 가까워올 수록 황보성운은 그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솟아나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용취란은 황보성운과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하다 의아한 듯이 말문을 열었다. "성운! 대체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죠?" 그제서야 황보성운은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다시 저 무창성을 보노라니 과거의 한 가지가 기억이 나서 그렇소." "어떤 기억인데요?" 용취란이 호기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그, 그것은……" 황보성운은 난처한 듯이 약간 더듬거렸다. 용취란 앞에서 자신과 팽소연과의 사이를 말해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황보성운의 그러한 태도를 보자 용취란은 더욱 의심이 생겼다. 원래 그녀가 황보성운에게 물어본 것은 황보성운의 일이라면 뭐든지 알고싶은 그녀의 애정심(愛情心) 때문이었다. 헌데, 황보성운의 표정이 야릇해지자 용취란은 금방 의심이 든 것이다. "도대체…… 말못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저에게까지 숨길 일이 있나요?" "그렇지는 않지만……" "그럼 어서 말해보세요." 황보성운은 그녀의 독촉에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무창성이 있는 개방 총타에는 내가 아는 친구 한 명이 있소. 조금 전에 그 친구를 생각한 것이오." 용취란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남자 친구인가요? 여자 친구인가요?" 그 말에 황보성운은 입을 다물며 머뭇거렸다. 용취란은 그의 모습에서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고운 눈썹이 상큼 위로 치켜올라갔다. "여자 친구가 틀림없군요? 그렇죠?" 황보성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용취란의 두 눈에 질투의 불꽃이 일어났다. "그녀는 물론 젊고 예쁜 여인이겠죠." "그…… 그렇소. 허지만 그대 보다는 조금 못하지." 황보성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흥!" 용취란은 냉소를 쳤다. 허나 한편으로는 황보성운의 말에 달콤한 기분도 들었다. 여자란 사랑하는 님의 칭찬에는 이토록 약한 것인가? 황보성운이 우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취란, 만약 그대가 소연의 사정을 알면 동정을 금치 못할것이오." "그녀 이름이 소연인가요? 흥! 무척이나 예쁜 이름이군요." 황보성운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침울한 어조로 팽소연에 대한 이야기를 조용히 말해주었다. 그의 말이 계속됨에 따라 용취란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졌다. 특히 팽소연의 집안이 멸화당하고 그녀가 쫓기는 장면에 가서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다. "저, 정말…… 불쌍한 소녀로군요."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낀 뒤, 문득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성운! 당신은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할거죠?" 황보성운은 짐짓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할 수 없지 않소? 나에게는 이제 당신이 있는데 그녀까지 책임질 수 없지 않소?" 그 말에 용취란은 극히 감미로운 느낌을 받았다. 허나 곧 정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되요. 만약 당신께서 그녀를 버린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잃을 거예요."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당신은 반드시 그녀를 책임져야 해요." 황보성운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허나 겉으로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 그럴 수가?" "성운! 그만 두세요. 이번 일만은 저에게 맡기세요." 황보성운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는 모르겠소.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이런 대화를 하는 사이에 그들은 벌써 무창성의 성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2 무창성은 호북성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의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내는 수많은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황보성운과 용취란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황보성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왜 그러시죠?" "저 쪽을 보시오." 용취란은 황보성운이 가리키는 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방(傍)이 하나 붙어 있었다. 헌데, 그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수근거리고 있었다. 용취란은 호기심이 생기는지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한 번 가봐요. 어떤 것인지?" 황보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벌써 그 방을 읽고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 심각한 것을 보고 어떤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황보성운은 그 방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방에 쓰여진 글을 읽었다. 다 읽은 순간, 황보성운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굳어져 버렸다. "저, 저럴 수가……?"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글씨는 식지를 깨물어 쓴 듯 시뻘건 혈서(血書)였다. 〈십대마불(十大魔佛)이 중원(中原)에 무단 침입하여 무차별로 무참한 살육을 벌이고 있다! 의분(義憤)한 중원 정사(正邪)의 영웅(英雄)들이여! 만웅장으로 모여 십대마불을 처단하자.〉 황보성운은 침음했다. (으음……! 십대마불이 드디어, 그 마각(馬脚)을 본격적으로 드러냈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림인물들을 모으려고 혈방(血榜)을 붙인 것이로군.) 한편 용취란도 침음한 표정이었다. 황보성운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 검미를 찌푸렸다. 이윽고 그는 무엇이 생각난 듯 용취란의 귓가로 자신의 입을 가져갔다. 그리고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용취란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3 만웅장(萬雄莊). 호북성(湖北省) 일대에서 제일고수라 일컬어지는 쌍검무적(雙劍無敵) 장태하(張太河)가 세운 웅장한 장원이다. 만웅장은 수백 장에 달하는 넓은 지역에 웅대한 규모로 건축되어 있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만웅장은 천하 각처의 무림호걸들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로 혈방(血榜)을 보고 밀려든 수많은 정사양도(正邪兩道)의 고수(高手)들이었다. 이들이 몰려들자 만웅장의 일꾼들은 눈코 뜰새 없이 바빠졌다. 이들은 무림의 암담한 위기를 건질지도 모르는 고수들의 시중에 성의를 다하는 것이었다. 날이 갈 수록 만웅장은 혈기 넘치는 호한들로 열기가 높아지고 북적댔다. 정오(正午) 무렵, 이곳 만웅장 앞에 한 쌍의 남녀(男女)가 나타났다. 여인은 이십 미만의 절세적인 미녀(美女)였다. 또한 남자도 삼십대 초반의 극히 준수하고 의기가 헌앙한 인물이었다. 그는 등 뒤에 고색(古色)이 창연한 보검을 메고 있어 더욱 풍도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야말로 두 사람은 인간 중의 용봉(龍鳳)이었다. 헌데,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바로 용취란과 황보성운이었다. 황보성운은 본래 모습을 감추고 변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다정한 자세로 문(門) 앞으로 갔다. 문 앞에는 오십대의 청수하고 위맹하게 생긴 노인이 탁자에 혈맹단(血盟單)의 인명부를 놓고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만웅장의 총관인 다비신장(多臂神掌) 진표악(陣豹岳)이었다. 황보성운이 다가가자 진표악은 신중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귀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오?" 그 말에 황보성운은 아무말 없이 탁자에 놓인 붓을 들어 혈맹부에 일필휘지로 갈겨썼다. 〈북해(北海) 빙백궁(氷白宮) 냉백공자(冷白公子) 설안(薛安)과 처(妻) 북해일미(北海一美) 용취란.〉 순간, 글을 본 후 진표악의 표정은 경악으로 급변했다. 그는 이어 벌떡 일어서더니 공손히 포권했다. "아! 이제보니 두 분은 북해에서 오셨군요! 반갑소이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이어 그는 문 안을 향해 급히 외쳤다. "귀빈이 오셨다! 어서 특별히 안으로 모셔라!" 그러자, "네! 총관님!" 하며 한 명의 청의를 입은 장한이 즉시 달려나왔다. 황보성운과 용취란은 하인의 안내를 받아 만웅장 안으로 들어갔다. 만웅장 안에는 넓은 뜰이 있었다. 그 뜰은 넓이가 족히 방원 백여 장은 넘어 보였다. 헌데 지금 넓은 뜰에는 곳곳에 수백 개의 천막이 쳐지고 태(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천막속에는 의자가 있고, 수많은 군웅들이 시끌벅적하게 오가며 떠들고 있었다. (음……! 대단한 규모로구나……!) 황보성운은 내심 감탄하며 천막들을 지나쳤다. 청의장한은 그들을 안내하여 몇 채의 대전(大殿)을 지나 한 채의 아담하게 지어진 별원으로 데려갔다. 이어 별원 중의 한 칸 방으로 안내했다. "두 분께서는 불편하시더라도 이 방을 쓰시기 바랍니다." "음!" 황보성운은 방문을 열고 안을 살펴 보았다. 방 안은 지극히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장식도 매우 고상했다. (음, 숱한 군웅들이 몰려와 객방이 모자랄텐데 이렇게 방을 선뜻 내주니 과연 북해 빙백궁의 위력은 대단하구나.) 내심 이렇게 생각하며 황보성운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청의장한은 그들이 들어가자 공손히 읍하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그럼 편히 쉬시지요." "알겠소." 황보성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의장한은 총총히 사라졌다. 황보성운과 용취란은 방 안으로 들어가 각기 의자에 앉았다. 용취란은 신기한 듯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휘장을 사이에 두고 침실까지 마련이 되어 있었다. 용취란은 휘장이 쳐진 쪽을 힐끗 바라보며 홀로 공연히 얼굴을 붉혔다. 이때, 밖에서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보성운은 다소 냉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들어 오시오!" 그러자 문이 스르르 열리며 두 명의 녹의를 입은 시비가 들어왔다. 그녀들은 십 육칠 세쯤 되어 보이는 예쁘게 생긴 시비였다. 오른쪽의 시비가 꾀꼬리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께서는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청해 주세요. 천비 들은 항상 부르시는 즉시 달려오겠습니다."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두 시비의 모습을 보면서 용취란은 왠지 짜증이 났다. 그녀는 뾰족한 음성으로 앞질러 말했다. "알았다! 어쨌든 지금은 필요 없으니 너희들은 그만 나가 있거라!" 시비들은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조용히 물러났다. 황보성운은 그 광경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왜 웃는 거죠?" 용취란은 시비조로 반문했다. 황보성운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아마도 이곳은 특실인가 보지? 그러니 시비들도 저렇게 예쁘지 않소?" 그 말에 용취란의 눈썹이 상큼 치켜 올라갔다. "당신은 그저 예쁜 여자만 보면……!" "하하하…… 하지만 그녀들 보다 훨씬 아름다운 당신이 있는데 내가 다른 데 눈을 돌릴 겨를이나 있겠소?" 황보성운은 호탕하게 웃으며 슬쩍 손을 뻗어 용취란의 나긋한 허리를 안았다. "어멋!" 용취란은 강인한 팔에 이끌려 황보성운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허나 짐짓 뾰로통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당신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못믿겠어요." 황보성운은 더욱 능청스럽게 말했다. "좋아! 그럼 믿게 해주지!" 이어 그는 팔에 힘을 주어 용취란의 나긋한 허리를 부러지도록 세게 끌어안았다. "으음……" 용취란의 입에서는 절로 달콤한 비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만 온 몸에 맥이 탁 풀리며 뼈가 녹아나는 쾌감을 느낀 것이다. 황보성운의 뜨거운 입술이 다가왔다. "아……!" 용취란은 입김이 얼굴에 끼얹어지자 그만 눈을 꽉 감고 온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의 가슴과 육체의 모든 것은 황보성운에게 완전히 열려 있었다. 언제나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뜨겁게 열려있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의 뜨거운 입술은 이윽고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아……!) 용취란은 혼(魂)이 빠져 달아날 듯 정신이 취해 버렸다. 황보성운의 뜨거운 혀가 그녀의 입술 사이와 단단한 치아를 열고 헤엄치듯 미끄러져 들어와 그녀를 열락에 들뜨게 만든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황보성운의 손이 그녀의 옷 위를 더듬었다. 봉긋한 젖가슴을 더듬을 때는 용취란의 몸이 완전히 불길에 싸이고 말았다. "아아……" 황보성운은 뜨겁게 용취란의 입술을 탐하며 한 손을 그녀의 가슴 옷깃 속으로 약간 밀어 넣었다. 매끈하고 탄력있는 가슴의 살결이 손 끝에 닿았다. 그 감촉은 사내의 본능을 더욱 타오르게 하기에 충분했고, 여체의 전신을 물고기처럼 파닥이게 했다. 성숙한 여체는 금세 달아 올랐다. 용취란은 황보성운의 품 속으로 파고들 듯 바짝 밀착해 왔다. 그것은 보다 적극적인 행동으로의 유혹이었다. "취란……" 용취란의 가슴을 더듬던 손이 옷깃 사이로 깊숙이 미끌어져 들어갔다. 비단결처럼 매끄럽고 탄력있는 젖가슴이 손 안에 가득찼다. 손가락 끝에 조그만 열매의 감촉이 느껴졌다. 황보성운은 뜨거운 음성과 함께 용취란의 젖가슴을 터트릴 듯 움켜쥐었다. 용취란은 몸을 비틀며 더욱 황보성운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뜨거운 불길이 솟구쳤다. 그냥 꺼버리기엔 너무나 성숙한 불길이었다. 어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몸은 침대 위로 허물어졌다. 이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동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었다. 투툭! 거친 황보성운의 손길에 의해 용취란의 가슴 옷자락의 단추가 뜯어지면서 옷깃이 벌어졌다. 그리고 붉은 빛의 젖가리개가 나타났다. 지금 황보성운의 손길은 젖가리개 아래에서 꿈틀거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에 의해 젖가리개의 끈이 끊어지면서 평생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운 유방이었다. 분홍빛의 유실이 그 정상에서 안타깝게 몸을 떨고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황보성운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유실을 찾았다. 유실을 머금은 채 혀 끝이 그곳을 맴돌았다. 용취란의 몸이 활처럼 젖혀지며 파들파들 떨었다. 황보성운은 용취란의 모든 걸 흡입이라도 할 듯 거칠게 유실을 빨아들였다. "아아…… 성운……" 고통과 함께 쾌감이 전류처럼 흘렀다. 용취란의 양 손이 황보성운의 목을 안았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손을 아래로 움직였다. 수초 사이를 누비는 물고기처럼 그의 손은 영활하게 그녀의 치마 아래를 헤집고 있었다. "아아…… 제발…… 으음……" 황보성운의 손은 이미 고의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보슬보슬한 음모의 감촉을 느끼자 마자 그 손은 여인의 비밀스런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여인의 궁(宮)은 흠뻑 젖어있었다. 이미 그녀의 옷은 거의 벗겨진 채 달빛 아래 나신이 거의 드러나 있었다. "아아아…… 성운……"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 용취란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떨었다. 그녀는 턱을 가파르게 치켜든 채 무섭게 전율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극렬한 쾌감에 그녀는 연신 몸을 떨었다. 어느 순간 황보성운은 그녀의 몸에서 난초향을 맡았다. 왜 갑자기 그녀에게서 난초향이 나는지 황보성운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그는 욕정이 더욱 타올랐다. 원래 용취란에겐 독특한 습관이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난초의 이슬을 받아 그것으로 목욕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그녀의 몸엔 난초의 향이 배어있었고, 지금 이 순간 흥분이 되면서 피부 속에 잠재된 난초향이 일시에 풍겨나오는 것이었다. 지금 용취란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녀는 곧 자신의 몸에서 마지막 남은 한 개의 천조각이 떨어져 나감을 느꼈다. 이제 실오라기 한 올도 없는 나체가 된 것이다.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는 황보성운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눈 앞에 가득 들어오는 용취란의 나신(裸身)…… 황보성운의 눈이 현란할 정도로 용취란의 나신은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옥을 깎아 만든 듯한 살결,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과 그 위에 수줍게 떨고 있는 분홍빛 유실…… 황보성운의 눈길이 아래로 내려갔다. 앙징맞은 배꼽의 우물을 따라 끊어질 듯 가는 세류요를 지나니 그 아래로 갑자기 넓어지는 풍요로운 대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대지는 두 갈래의 미끈한 옥주로 뻗어나가고, 그 삼각지대에 부드럽고 소담스럽게 울창한 여인의 방초(芳草)여…… 미끈하게 뻗어내린 허벅지 사이의 비림은 실로 숨을 멈추게 할 유혹을 흩뿌리고 있었다. "음……" 황보성운은 침을 삼켰다. 일순 그의 아랫배에서 불끈 화염이 치솟았다. 그의 손이 여인의 은밀한 비림을 움켜쥘 듯 쓰다듬었다. "아아……" 용취란의 몸이 바르르 경련했다. 용취란은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뻗어 황보성운을 안았다. 황보성운은 하복부가 돌덩어리처럼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가락이 여인의 방초 사이를 부드럽게 헤엄쳤다. 어느새 여인의 땅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용취란은 뜨겁게 타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그 무엇인가를 갈망했다. 그녀는 황보성운을 휘감으며 하체를 밀착시켰다. 황보성운은 용취란의 젖무덤을 와락 이즈러뜨리며 뜨겁게 여체를 내리 눌렀다. 어느새 황보성운도 나체가 되어 있었다. 언뜻 눈을 떴던 용취란의 시선에 그 남성의 상징이 들어왔다. 용취란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샘터를 벌리며 그를 이끌었다. 황보성운은 용취란의 허벅지를 두 팔로 안았다. 그리고 하체에 힘을 주어 서서히 용취란의 몸 안으로 자신의 일부를 가져갔다. "아흐흑……!" 용취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체의 일부로 격렬히 조여오는 긴축감과 묘한 희열감에 황보성운도 흥분했다. 그는 용취란을 찍어 누르며 실체를 그녀 몸 깊이 가져갔다. "아아악!" 고통을 못이겨 용취란의 몸이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허벅지가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난생 처음 느껴지는 극렬한 고통이었다. 그녀는 이 고통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을 감내하며 남자의 모든 걸 받아들였다. 두 개의 몸이 하나로 되는 순간, 두 사람은 뜨거운 숨결만 토해냈다. 황보성운의 몸이 물결처럼 요동쳤다. 그 파도에 휘말린 용취란은 하얗게 눈을 떴다. 어느새 고통이 조금씩 사라지고 내밀한 쾌감이 그녀의 몸 속에서 요동쳤다. 그녀의 사지는 뱀같이 황보성운을 휘어감았다. 하체와 하체가 진퇴를 거듭했다. 용취란의 몸에서 더욱 짙은 난초의 향기가 났다. 그녀는 꽃뱀처럼 사내를 옭아 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입에서 쾌락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뜨겁게 분출하는 환희의 폭발 속에서 황보성운은 용취란 몸 속 깊이 자신의 모든것을 한껏 부어주었다. 4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용취란은 이미 옷을 입고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황보성운도 이미 의관을 바로 한 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록 뜨거운 열풍은 지나갔지만 흐트러진 침대의 모습이 조금 전의 열기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용취란은 수즙음 때문에 차마 황보성운을 보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발 끝만 보고 있었다. 자신과 황보성운이 하나가 됐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또한 평생을 고이 간직한 처녀성을 상실했다는 슬픔도 있었다. 이때 황보성운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취란…… 평생을 당신과 함께 하겠소. 약속하리다." 용취란이 고개를 들어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정말인가요?" "물론이오." "영원히……?" 여자는 끝없이 확인하고 싶어한다. 아마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확인을 하고 싶어하는 게 여자일 것이다. 황보성운은 그녀의 어깨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영원히요!" 용취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허나,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황보성운이 웃었다. "이제 정말로 명실상부한 부부가 되었군." 용취란의 얼굴이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눈을 흘겼다. "색마(色魔)!" "색마?" 황보성운은 이윽고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기야 당신에게만은 색마가 되어도 좋소!" 이어 그는 용취란을 끌어당겨 그녀의 붉은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 용취란은 감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행복에 도취된 표정을 지었다. 이때, 똑똑똑……! 밖에서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두 사람은 급히 떨어져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이때 문 밖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설대협! 들어가도 되겠소?" 황보성운은 냉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들어 오시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세 명의 노인(老人)이 안으로 들어왔다. 맨 앞에는 막 칠순(七旬) 가량의 청의노인으로 두 눈에 정기가 뚜렷했으며 체격이 강했다. 그가 바로 이곳 만웅장의 장주인 쌍검무적 장태하였다. 또한 백 세가 넘어 보이는 사각형의 얼굴에 주사빛 붉은 피부를 가진 노인이 뒤따랐다. 그 옆에는 역시 백 세가 넘는 지저분한 거지노인이 서 있었다. 이 거지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신풍개(神風 )였다. 쌍검무적 장태하는 황보성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대협,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미안하오." 황보성운은 가볍게 응수했다. "무슨 말씀을…… 오히려 소생이 송구스럽소이다." 장태하는 자신들의 소개를 했다. "노부는 이곳의 보잘 것 없는 장주인 장태하요." "아……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하하…… 별 말씀을, 그리고 이분은 바로 천룡노인(天龍老人)이십니다." 장태하는 사각형의 얼굴을 가진 노인을 가리키며 존경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황보성운은 내심 감탄을 발했다. (아! 이 사람이 무림 십대기인의 첫째이구나!) 이때 늙은거지, 즉 신풍개가 먼저 너스레를 떨며 자기 소개를 했다. "하하…… 이 늙은이는 신풍개라고 하오." 황보성운은 내심 웃음을 참으며 마주 공수했다. "아! 노선배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보잘 것 없는 거지일 뿐이오." 이때 천룡노인은 문득 정색을 짓더니 용취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부는 북해 빙백궁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소이다. 또한 크게 기뻤소이다." "……!" "그것은 과거 백여 년 전 노부는 용(龍)어른을 만나뵌 적이 있기 때문이오. 헌데 두 분은 그 분과 어떤 관계신지?" 그 말에 용취란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분은 바로 저의 할아버님이예요." 천룡노인은 얼굴에 경악의 빛을 띄웠다. "아! 그랬었군! 헌데, 이분은……?" 그는 눈으로 황보성운을 가리키고 있었다. 용취란은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이분은 할아버님의 제자이며 또한 저의 남편이예요." "아……!" 세 노인은 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천룡노인은 다시 물었다. "헌데, 요즘 용어른은 어떻게 지내시오?" 용취란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할아버님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셔요." "아……!" 천룡노인은 감탄성을 터뜨렸다. "벌써 그분이 나이가 이백 오십이 넘을 텐데 아직 천수를 누리시다니 정말 부럽기 짝이 없소이다." 한편 장태하와 신풍개의 얼굴에도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인간이 이백 오십 살이 넘도록 산다는 것은 정녕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때 천룡노인이 다시 물었다. "헌데, 두 분께서는 어떻게 이곳에 오시게 되었소이까?" 황보성운이 대답했다. "우리는 혈방(血榜)을 보고 십대마불의 횡포에 분노를 느껴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 말에 천룡노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정말 고맙소이다. 북해 빙백궁에서 두 분이 오신 것은 실로 이번 전 중원무림의 단결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오." "별 말씀을……" 이윽고 세 노인과 황보성운, 용취란 등은 탁자에 둘러 앉아 담소에 들어갔다. 두 명의 녹의시비는 언제 준비했는지 향차(香茶)를 가지고와 중인들에게 따랐다. 천룡노인 등은 대화를 하면 할 수록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설안(薛安)이라는 눈 앞의 인물이 도대체 무불통지(無不通知)로 천하만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학(武學)은 물론 문학(文學)과 각종 예기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대화가 무르익을 수록 세 노인은 황보성운에 대해 더욱 감탄을 더해갔다. 이윽고 어느덧 대화는 십대마불(十大魔佛)에게로 옮겨졌다. 황보성운은 한동안 십대마불에 대해 귀를 기울이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십대마불의 무공이 그토록 높단 말입니까?" 그러자 천룡노인은 탄식을 하며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가 한 가지 예를 들겠소." 이어 그는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우내이마(宇內二魔) 하면 노부와 비해도 별로 손색이 없는 최절정 고수요. 헌데, 이마 중에서 패도혈마(覇刀血魔)가 그자들의 손에 단 이초(二招) 만에 죽음을 당했소이다." "아……! 그럴 수가……" 황보성운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자들을 상대할 사람은 강호에 한 명도 없다는 말입니까?" 천룡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울하게 말했다. "휴…… 그런 실정이오. 단지 그래도 간신히 버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있긴 있소." 황보성운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 말에 천룡노인은 향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먼저 꼽을 수 있는 인물은……" 장태하와 신풍개 등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천룡노인의 입으로 쏠렸다. "천존교(天尊敎)의 태상방주인 천마이로(天魔二老)가 있소이다. 그리고 나부산의 금천신모(金天神母), 천외천유신(天外天遊神), 또 북해 빙백궁의 용(龍)어른…… 그리고……" 황보성운은 그가 말을 흐리고 잇지 않자 다그쳐 물었다. "또 누가 있습니까?" 천룡노인은 탄식하며 말했다. "천하제일의 기재(寄才)로 영웅인 옥면신수(玉面神手)황보성운 소협이 왔소이다!" 천룡노인은 이 말을 할 때 만면에 지극히 숙연한 표정을 지었으며 경외심까지 풍겼다. (……!) 황보성운은 그때 내심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용취란은 기이한 눈으로 살짝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짐짓 모르는 척 천룡노인을 향해 물었다. "그 분이 그토록 유명한가요?" 천룡노인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소. 실상 그야말로 이 혼탁한 무림을 구할 수 있는 신성(新星)이오. 그의 무공은 신비에 가까울 정도이며 인품 또한 이미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해 있소이다." 장태하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황보성운에 대해 찬사를 늘어 놓았다. 그는 비록 황보성운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황보성운은 그야말로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하……! 이거 정말 낯이 뜨거울 정도로군.) 용취란은 두 뺨이 발그레 상기되어 존경과 애정의 눈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설마 자신의 정인(情人)인 황보성운이 이토록 무림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절세의 인물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실내에서는 다시 얼마간 대화가 이어졌다. 그 대화는 당금의 무림상황과 십대마불의 퇴치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약 일각 후 천룡노인과 장태하, 신풍개는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설대협! 편히 쉬시오." 그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다시 황보성운과 용취란만이 남게 되었다. "……" 용취란은 야릇한 눈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 속에는 감탄과 존경, 사랑의 빛이 가득 충만해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돌연 고개를 짐짓 숙여 보이며 말했다. "성운…… 정말 제가 몰라뵈서 죄송해요." 황보성운은 그만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 무안하게 그런 말을 왜 하는 거요?" 그러나 용취란은 감미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전 정말 당신이 그토록 훌륭한 분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 황보성운의 얼굴에 문득 짓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하기야, 당신 눈에는 내가 색마로밖에 보이지 않을테지." "어머……!" 용취란은 얼굴이 빨개져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녀는 급히 변명의 말을 했다. 황보성운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농담이오, 농담!" "정말, 당신은……" "핫핫핫핫……!" "호호호호……!"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본 채 밝게 웃어 제꼈다. 황보성운은 웃음을 딱 그치더니 문득 정색을 지으며 말했다. "취란, 앞으로 있을 대 결전을 위해서 나는 지금부터 한 가지 무공을 조용히 이곳에서 연마해야겠소." 용취란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은 무엇인가요?" 황보성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없소. 단지 이곳을 조용하게 지켜주기만 하면 되오." "알겠어요, 성운." 황보성운은 혼자 휘장이 쳐진 침실로 들어갔다. 용취란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탁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한편, 황보성운은 침상 위에 올라 앉아 품속에서 옥병을 꺼냈다. 그 속에는 천년설연실(千年雪蓮實)이 다섯 개 들어 있었다. "……!" 황보성운은 천년설연실을 내려다 보며 문득 모용청의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모용청이 준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잠시 모용청에 대해 생각하다가 수중의 천년설연실을 내려다 보았다. 천년설연실은 한번에 능히 이십년(二十年)의 공력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음……! 흑백쌍환의 진실한 위력을 발휘하려면 모두 십갑자(十甲子)의 내공이 필요하다. 현재 나의 내공은 오백 년(五百年)...... 이 다섯 개의 천년설연실은 나를 영원한 불사신(不死神)으로 만들 것이다!) 황보성운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침상에 앉은 채 천년설연실을 모두 삼켰다. 이어 그는 운공(運功)에 들어갔다. 그의 모습은 미동도 없어 마치 석상과 같았다. 이미 내공의 경지는 오귀조원, 삼화취정과 반박귀진의 경지를 넘어 섰기 때문에 운공 중에도 그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날부터 황보성운은 매일같이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껏 이성(二成)까지 밖에 이르지 못했던 성천구도(聖天九刀)와 혈천일도(血天一刀)를 극성까지 연마했다. 이미 내공이 십갑자에 이른 그로서는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5 화원(花園). 만웅장의 후원에 위치한 아름답게 꾸며진 화원에는 늦가을의 소슬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밤이었다. 십오야(十五夜)의 보름달이 화원을 환히 비추었다. 황보성운은 홀로 화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왠지 그는 이날 따라 기분이 울적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흠칫 하고는 재빨리 하나의 화목 뒤로 몸을 숨겼다. 한 명의 청의소녀가 전면에서 힘없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매우 수척한 표정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는 멍하니 서서 달을 바라보더니 탄식을 발했다. "아! 세월은 흘러 벌써 몇번이나 저 달이 떴건만 나의 그 분은 왜 안오신단 말인가……?" 그녀의 음성은 애련과 상심에 젖어 처량하게 들리기만 했다. 이때 화목 뒤에 숨어 이 광경을 보고 있었던 황보성운은 그만 콧등이 시큰해 짐을 느꼈다. 그는 지금이라도 그녀의 앞에 나서고 싶을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다! 지금 나가면 안된다! 조금만…… 조금만 참자!) 그 청의소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팽소연이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인영이 번쩍하더니 신풍개가 등장했다. 그는 기이한 표정으로 팽소연을 바라보더니 측은한 듯 말했다. "연이야, 그만 들어가자. 밤바람이 차다." "할아버지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겠어요." 신풍개는 그녀를 나무랬다. "이녀석아! 그러다간 너의 그 정인이 오기도 전에 네가 먼저 쓰러지겠다. 자, 어서 들어가자." 팽소연은 금세 두 눈에 눈물이 핑 돌면서 울먹였다. "할아버지…… 전…… 전……" 신풍개는 탄식했다. "아이야, 걱정하지 말아라. 황보운성은 틀림없이 약속을 지킨다. 그는 분명히 올 것이다." "그…… 럴까요?" 신풍개는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서히 한 채의 건물을 돌아 사라져 갔다. 황보성운은 그들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탄식하며 몸을 날렸다. 6 만웅장(萬雄莊)에는 수많은 군웅들이 운집했다. 그들 중에는 오래 전 은거한 수많은 기인(奇人)들도 다수 끼어 있었다. 금천신모(金天神母)를 비롯하여 곤룬파의 당금 장문인의 사조(師祖)격인 곤륜쌍로(崑崙雙老), 또한 소림사에서 백 오십 년 간을 면벽하던 불마신승(佛魔神僧) 등, 그밖에도 수 많은 기인들이 속속 당도했다. 그야말로 이들로 인해 만웅장은 이름 그대로의 장원이 되었다. 만웅장은 결전태세가 완비되어 갔다. 군웅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충전했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십대마불의 소식은 한 달 전부터 뚝 그치고 말았다. 그들은 어디로 잠적했는지 조용하기만 한 것이었다. 모든 군웅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들은 모두 이 조용함이 앞으로 닥쳐올 엄청난 혈풍(血風)의 징조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폭풍전야(暴風前夜)! 바로 그것이었다. 제 40 장 北海氷魄殺 1 만웅장 정문 앞의 넓은 공터에 십여 명이 자신들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채 서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 눈에 형형한 신광을 뿜어대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깊은 침묵에 잠겨 있는 만웅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열 명 중, 맨 앞의 세 명은 나머지 인물들보다 더욱 비범해 보였다. 세 명의 인물…… 그 중 중앙에 있는 자는 곤룡포를 전신에 휘감은 다섯 가닥의 서로 꼬인 수염을 가진 위엄이 서린 노인이었다. 양 옆의 두 노인은 백외와 혈의를 걸친 인물들로서 일견키에도 정(正)의 인물들은 아닌 듯 전신에서 물씬 사기(邪氣)가 뻗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백의노인은 완전히 사(邪)로 뭉쳐진 듯 태양조차 외면할 정도였다. 혈의노인은 실낱같이 가는 눈에다 얇은 입술을 한 냉막한 인물이었다. "……!" 만웅장의 거대한 대문을 지키는 장한들은 유령인 양 나타난 십여 명의 인물들을 대하자 문득 오금이 저려옴을 느꼈다. "어, 어떻게 본 장에……?" 장한들은 얼굴 빛이 변한 채 더듬거리듯 입을 열었다. 곤룡포를 걸친 노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장주(莊主)는 안에 있느냐?" 순간, "으……!" 장한들은 일순 고막을 움켜쥐며 가는 비명성을 터뜨렸다. 곤룡포 노인의 입술이 열리자 그들은 흡사 거대한 벼락이 그들의 고막을 후려친 듯한 고통을 느낀 것이다. 그들은 안색을 흑빛으로 물들인 채 재차 더듬거렸다. "어, 어인 일로 장주님을……?" 곤룡포 노인의 얼굴에 일순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장주에게 일러라! 북해(北海) 빙백궁(氷魄宮)에서 용호상(龍虎相)이 왔다고!" 순간, "……!" 장한들은 그대로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그들은 망연자실하여 경악성조차 잊었다. 북해빙백살(北海氷魄殺) 용호상. 이 얼마나 엄청난 명호인가? 장한들은 엉금엉금 기다시피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장원 안으로부터 여러 명의 인물들이 구르듯 쫓아 나왔다. "용 노선배님!" 한 명의 인물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바로 천룡노인이었다. "자넨 누군가?" "상문옥입니다. 과거 백 사십 년 전 상가채에서 뵈온 적이 있습니다." 용호상의 얼굴이 잠시 찌푸러졌다가 뭔가 기억난 듯 입가에 한 가닥 웃음이 피어 올랐다. "그래, 기억이 난다. 허허……! 자네가 바로 상가채의 그 소년이란 말인가?" 소년이라니……? 천룡노인은 이미 백 오십 세의 인물이 아닌가? 허나 눈 앞의 북해빙백살 용호상에 비하면 어린애에 불과한 게 사실이다. "자네에 대해선 몇 번 들었어. 십대고수 중 천룡노인이 바로 자네였다지?" "부끄럽습니다." 천룡노인은 재차 허리를 숙였다. 용호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이미 백 수십 년이 흘렀구나. 진정 세월여류(歲月如流)…… 어린 소년이었던 자네 역시 이제 늙어 무림의 일절(一絶) 이 되었으니……" 천룡노인의 얼굴에도 무한한 감회의 빛이 스쳤다. "진정입니다! 그때 상가채에서 뵈온 이래 영영 뵈옵지 못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뵙게 되다니…… 진정 뜻밖입니다!" 그들은 마주 보며 감회의 시선을 교환했다. 북해빙백살의 시선이 천룡노인의 뒷쪽으로 옮겨갔다. 순간, 그의 시선이 한 차례 격동의 빛을 보였다. "매누이……! 이것이 얼마만이오?" 금천신모였다. 금천신모는 진작부터 격동의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허나 그녀는 이내 담담한 신색으로 회복시키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담았다. "용사형! 실로 이백 년 만이군요!" "이백 년……" "그래요! 용사형의 풍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늠름하군요!" 그들의 시선이 한동안 잔잔한 이백 년 간의 격동을 주고 받았다. 잠시 후, 북해빙백살의 시선이 금천신모의 옆으로 옮겨졌다. 설연미였다. "저 아이는 매누이의 제자인가?" 금천신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아! 어서 인사드려라! 저 분은 너의 사백이시다!" 설연미는 이미 내심 눈 앞의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북해빙백살 용호상을 향해 날렵하게 허리를 숙였다. "설연미가 사백님께 배견인사 드립니다!" 북해빙백살은 설연미의 지극히 절세적인 용모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으음……! 이 아이의 미모는 란아에 비해 조금의 손색도 찾을 길이 없다! 진정 경국지색의 미모로다!) 이때, "용노선배님! 헌데 이 두 분께선……?" 천룡노인은 혈의노인과 백의노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용호상은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그들을 소개했다. "이 분은 천존교(天尊敎)의 태상방주(太上幇主)인 혈사천로(血邪天老) 마극생(馬克生)이고…… 이분은 지옥귀로(地獄鬼老) 여파(呂巴)란 분일세." 순간, 천룡노인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아연실색치 않을 수 없었다. 불세출(不世出)의 대마왕(大魔王)들인 천마이로(天魔二老), 그들이 만웅장에 나타나다니…… 이것이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순식간에 만웅장은 터질 듯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북해빙백살 용호상은 한 차례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모두들 긴장할 필요없네! 이분들은 비록 우리와 다른 사파(邪派)의 인물들이지만…… 십대마불(十大魔佛)에 대항키 위해 오신 것일세!" "……!" 천룡노인 등은 또다시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경악은 서서히 기쁨으로 치달렸다. 경악 만큼 그 희열 또한 주체할 수 없는 것이다. 북해빙백살과 천마이로! 이들이 만웅장의 정파 인물들에게 스스로 조력(助力)을 자청하다니, 그야말로 천군만마(千軍萬馬)의 힘을 얻은 것이 아닌가! "자! 노선배님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천룡노인은 앞장 서 그들을 안으로 인도했다. 안으로 들면서 그는 북해빙백살에게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참, 용선배님! 이곳엔 영손녀도 와 있습니다!" 북해빙백살의 눈이 휘둥그래 떠졌다. "란아가 이곳에……?" "그렇습니다!" 북해빙백살의 노안에 기쁨의 물결이 일었다. "허어…… 란아가 이곳에 있었다니……" "영손녀 뿐만 아니라…… 영손서(令孫壻)께서도 이곳에……" 북해빙백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손주 사위라고……?" "그렇습니다!" "……?" 북해빙백살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천룡노인은 그러한 북해빙백살의 표정에 오히려 곤혹에 빠졌다. "아니? 설대협이 노선배님의 손주 사위가 아니십니까?" 북해빙백살은 갈 수록 오리무중 속을 헤매는 표정이었다. "설대협……?" 다음 순간, 그는 무엇이 짚히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여보게! 내 당장 그 아이들을 만나보아야겠네!" 천룡노인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용호상을 후원 쪽으로 안내했다. 2 잠시 후, 북해빙백살은 황보성운의 거처에 도달했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방문을 노려보며 외쳤다. "란아! 안에 있느냐?" 한편 방 안에서 황보성운과 대화를 하고있던 용취란은 용호상의 음성이 대경실색했다. "하, 할아버지의 모, 목소리……!" 그녀의 전신은 이미 굳어 있었다. "란매!" 황보성운은 용취란의 모습에 무슨 영문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거세게 문이 열리며 북해빙백살의 모습이 방 안에 나타났다. 그의 신광 번뜩이는 시선이 대경하고 있는 용취란을 쏘아 보았다. 용취란은 자신의 전신이 바짝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하…… 할아버지……" 북해빙백살은 냉소했다. "정말 실망이구나. 네가 이토록 방종한 짓을 하다니……" "소…… 소녀는……" 북해빙백살의 시선이 침착하게 신형을 일으키는 황보성운에게 향했다. "네놈이 바로 란아의 남편이라고 엉뚱한 수작을 꾸민 놈이냐?" 분기탱천의 외침이었다. 황보성운의 시선이 용취란을 향했다. 이때 용취란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색(死色)이 되어 있었다. 황보성운은 생각지도 않은 묘한 상황에 쓴웃음을 지었다. "노선배님, 저는……" "흥! 네놈이 어떤 교묘한 방법으로 란아를 유혹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부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암! 용납할 수 없고 말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개에게 주겠느냐?" (호랑이 새끼를 개에게 줄 수 없다……?) 황보성운의 두 눈썹이 성큼 치켜졌다. "노선배! 그 말씀을 당장 취소 하십시오! 그건 저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저의 가문에 대한 치욕입니다!" 그의 입에서 준엄한 외침이 터졌다. 북해빙백살은 뜻밖이라는 듯 황보성운에게 재차 시선을 보냈다가 돌연 광소를 터트렸다. "취소하라고……? 이녀석! 그렇다면 네놈이 용의 새끼란 말이냐?" 황보성운은 눈썹을 꿈틀했지만 용취란을 생각해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진 않았다. 어찌 됐던 용취란을 부인으로 맞은 이상 용호상은 자신의 웃어른인 것이다. 용호상이 음산하게 웃었다. "좋다! 노부는 네놈과 일장을 겨루겠다! 만약 네놈이 노부의 일장을 막아낸다면 네놈을 용의 새끼로 인정하고 란아를 너에게 주겠다! 허나, 막지 못한다면 네놈을 개의 새끼로 인정하고 일장에 때려 죽일 것이다!" 갈 수록 태산이란 이런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황보성운은 북해빙백살의 거듭되는 호통에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난 노선배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흥! 큰소리 치더니 이제와서 강아지 새끼처럼 꼬리를 말 셈이냐?" 황보운성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소생은 어떠한 일에든 겁을 먹는 그런 못난 위인이 아니외다! 다만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고자 할 뿐입니다!" 무지개인 양 그의 전신에 의연한 기개가 피어 올랐다. 웅혼한 그 기운에 북해빙백살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용취란에게 향했다. 용취란은 극히 초조한 빛으로 조부와 황보성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북해빙백살은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손녀인 용취란의 안목을 믿는다. 그렇다면 용취란이 아무하고나 혼인을 맺지는 않았을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저놈은 의외로 물건일 수도 있겠군.) 북해빙백살이 음산하게 웃었다. "좋아. 네놈 말대로 불필요한 직접 대결은 피해주지." 이미 그의 음색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다음 순간, 북해빙백살은 열려진 문을 향해 슬쩍 손을 치켜 들었다. 순간,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 몇 잎이 쾌속하게 그의 수중으로 날아들었다. 허공섭물의 절기였다. 이어 북해빙백살은 가볍게 손을 떨쳤다. 다음 순간, 나뭇잎들은 가루로 변한 채 방문 밖을 향해 섬전인 양 쏘아갔다. 황보성운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낙엽이 날아가는 곳은 십 장 밖에 있는 한 그루 고목이었다. 파파파팟----! 가루가 된 나뭇잎 등은 고목의 전면에 깊숙이 박혔다. 〈북해천세(北海千歲).〉 또렷이 새겨진 네 개의 글자가 부각되었다. 북해빙백살이 황보성운을 바라보았다. "이제 네놈 차례다! 맞아죽기 싫으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황보성운은 입가에 빙긋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채 손을 들었다. 다음 순간 그의 수중에 몇 개의 나뭇잎이 들어오는 찰나, 이미 그것은 가루가 되어 쾌속하게 고목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북해빙백살 보다 훨씬 비쾌한 수법이었다. 파---- 파---- 팟! 격타음이 일며 북해빙백살이 남긴 글 옆에 또 다른 글이 새겨졌다. 〈천현광휘(天玄光輝).〉 "이, 이럴 수가……?" 북해빙백살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짙게 떠올랐다. 그의 시선은 얼어 붙듯이 고목에 꽂혀 있었다. 황보성운이 남긴 글은 자신이 남긴 것보다 더욱 뚜렷하게 새겨지고 더 깊이 패여있는 것이 아닌가? "……!" 북해빙백살은 멍하니 황보성운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이, 이것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그때, "용늙은이! 시시한 것은 그만 두게나! 자네의 실력으론 소사제(少師弟)를 어찌할 수 없을 걸세!" 어디선가 한 소리 냉막한 음성이 일었다. "……?" 황보성운 등은 일제히 음성이 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의 인영이 유령인 양 방문 밖으로 내려 앉았다. 냉막한 가운데 전신에 위엄이 깃들어있는 노인이었다. 북해빙백살은 나타난 노인을 보곤 흠칫했다. "위 늙은이! 언제 이곳에 왔는가?" "조금 전부터 자네의 호랑이 행세를 보고 있었지!" 순간, 북해빙백살은 할말을 잊었다. 그는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헌데, 소사제라니? 저 아이가 자네의 사제란 말인가?" "그렇다네!" 이어 황보성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허허허…… 사제! 노부는 냉천신군 위영걸일세! 얼마 전 단목천을 만나 자네에 대해 자세히 들었네." "아……!" 황보성운은 일순 반색의 경탄성을 터뜨렸다. 이어 그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소제가 사형께 인사드립니다." 냉천신군 위영걸의 냉막한 얼굴에 일순 대견의 기색이 스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이어 냉천신군 위영걸은 용취란을 바라본 후, 북해빙백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곧 안색을 바꾸며 호탕하게 말했다. "자네의 손녀딸은 대단한 미인(美人)일세! 우리 소자제와는 잘 어울리는 한쌍이네! 그러니 그대가 주게." 그 말에 북해빙백살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곧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실상 자네가 나타나지 않아도 노부가 패한 이상 굴복을 할 수밖에 없었네. 아니 오히려 지금 심정으로는 손서가 나의 손녀를 마음에 안들어 할까봐 걱정이네." 황보성운이 기회라고 생각하곤 급히 북해빙백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보성운이 삼가 할아버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그 말에 북해빙백살이 깜짝 놀랐다. "황보성운? 그럼 자네가 옥면신수 황보성운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할아버님……" 북해빙백살이 힐끗 용취란을 보곤 혀를 찼다. "허어…… 이런 일이……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옥면신수가 만나기도 전에 손녀 사위가 되어 있었다니……" 용취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이때 옆에서 위영걸이 웃었다. "용늙은이, 자넨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 채 들어온거야. 말년에 복 터진거지.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자네의 손녀 사위나 일으켜 주게." 그제서야 북해빙백살은 껄껄 웃으며 황보성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때 위영걸이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황보성운을 보며 급히 물었다. "소사제, 한 가지 의문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단목천에게 내가 듣던 바와 모습이 다른 것 같은데 혹시 변장을 하고있는 게 아닌가?" 황보성운이 멋쩍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흐음…… 그럼 실제 모습을 볼 수가 있겠나?" 할 수 없이 황보성운은 빙그레 웃으며 내공을 끌어올려 얼굴 모습을 원래대로 회복했다. "아……!" "오……!" 위영걸과 북해빙백살은 똑같이 입을 딱 벌리고 탄성을 질렀다. 그들로서는 천하에 이같은 미남자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해빙백살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서! 그럼 나의 손녀 아이를 잘 부탁하네. 만일 그 아이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 때려줘도 무방하네. 허나 그 대신 귀여워 해줘야 하네." "어머! 할아버지는……" 용취란은 얼굴은 빨갛게 붉히며 펄쩍 뛰었다. "핫핫핫……" "헛헛헛……!" 북해빙백살과 위영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방을 나갔다. 방 안에는 다시 두 남녀만이 남게 되었다. 문득 황보성운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취란, 당신의 할아버지는 당신을 잘 아는군." "……?" "하하하…… 얼마나 말을 안들었으면, 내가 때려도 좋다고 하시니 말이야!" "어머!" 용취란은 샐쭉해져서 쏘았다. "그래서 당신은 정말 야만인처럼 되겠다는 거예요?" 황보성운은 짐짓 움찔해 보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같은 미녀를 누가 때릴 수 있겠소? 괜히 하는 소리지!" 용취란은 달콤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코웃음을 쳤다. "흥! 사탕발림하지 말아요!" 그 순간, 황보성운은 손을 뻗어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취란! 이것은 나의 진심이오." 이어 그의 뜨거운 입김이 용취란의 귓가에 부어졌다. "아…… 성운!" 용취란은 몸을 부르르 떨며 그의 품에 바싹 안겼다. 3 월광(月光). 환한 달이 만웅장을 밝게 비치고 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만웅장은 지극히 조용하기만 했다. 어찌된 셈인지 벌레소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천지는 오직 주검과 같은 정적에 싸인 듯 침묵에 잠겨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잠이 든 듯 만웅장 내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였다. 만웅장의 뒤편으로부터 열 줄기의 그림자가 마치 유령처럼 출현했다. 그들 신법의 빠르기는 정녕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빛살처럼 만웅장으로 날아가더니 한 가장 높은 전각 위에 내려섰다.그들은 한 명을 중심으로 아홉 명이 둘러싸고 있었다. 달빛 아래 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은 놀랍게도 모두 승의를 입은 노화상들이었다. 이때 가운데 있는 노승이 갑자기 만웅장을 향해 찌렁찌렁한 음성으로 외쳤다. "노납은 랍찰파의 십대마불 중 첫째인 영가불(靈迦佛) 오비라(烏毘羅)다! 만웅장에 모인 중원인들은 모두 나와 노납에게 경배하라!" 그 음성은 만웅장을 온통 뒤흔들 듯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자, 쾅----! 휙! 휙휙----! 여기저기서 문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인영이 각 건물에서 뛰쳐 나왔다. 그 인영은 바로 혈방을 보고 모여든 정사의 군웅들이었다. 군웅들은 일제히 전각을 둘러쌌다. 스스로 영가불이라 밝힌 노승은 광소를 터뜨리며 외쳤다. "으하하하하……! 중원의 인물들이여! 천년 납찰파의 비한(悲恨)을 풀겠노라!" 순간, 그의 몸에서 엄청난 금빛 광채가 사방으로 발산되었다. 꽈르르르릉----! 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전각은 통째로 무너져 버렸다. 이어, "크하하하하……!" "크크크크……!" "클클클클……!" 갖가지 소름끼치는 괴소와 함께 열 개의 인영이 빛살같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아, 드디어 천 년에 걸친 중원(中原)과 서장의 마교(魔敎) 랍찰파의 대혈전(大血戰)의 서막은 열린 것이었다. 무시무시한 피의 서막이……! 제 41 장 最後의 決戰 1 피보라의 서막(序幕). 싸움은 드디어 시작되었다. 중원 무림의 정사(正邪) 양대고수(兩大高手)들과 서장(西臟) 랍찰파(拉刹巴)의 십대마불 간의 대혈전(大血戰)! 아아, 이것은 무림 수천 년사 이래 아직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혈투(大血鬪)였다. 물(水)과 불(火)처럼 절대 상극(相極)을 이룬 전중원(全中原)의 힘 대(對) 서장(西臟)의 마교 랍찰파의 십대마불. 인원수는 중원 측이 훨씬 많았다. 허나, 십대마불의 무서운 공격은 중원의 인물 중 그 어느 누구도 막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엄청난 도륙과 극랄한 참살의 현장이었다. 십대마불(十大魔佛)의 손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수명의 무림고수들이 무참하게 거꾸러졌던 것이다. 그래도 근근히 버티는 고수들은 북해빙백살 용호상, 금천신모, 냉천신군, 그리고 곤륜쌍로 불마신승 등, 단지 그 몇몇 정도일 뿐 대부분의 무림고수들은 제대로 손 한 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지리멸렬(支離滅裂)했다. 헌데 기이한 일이 있었으니, 혈사천로와 지옥귀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그들과 함께 온 우내삼천존만이 악전고투를 면치 못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2 밖에서 대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그 시각 황보성운은 그의 방에 좌정(坐定)해 운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막 운공의 최고 중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지막 최절정의 관문(關門)! 그는 그 관문을 뚫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그의 주위에는 온통 현란한 금빛의 광채(光彩)가 물들어 있었다. 그 금빛 광채는 흡사 하나의 거대한 원을 연상시키듯 그의 전신 둘레로 점차 찬란무비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는 용취란이 온통 초조와 긴장에 싸인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요란하게 병장기가 부딪는 소리와 함께 참혹한 비명이 잇달아 들리는데, 황보성운은 여전히 그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깨어날 줄 모르니…… 그녀는 입술을 바짝바짝 태웠다. 이때 돌연, 황보성운의 전신이 한자나 허공으로 저절로 떠올랐다. 동시에, 전신으로부터 아예 그 빛을 본다면 그만 눈이 멀어버릴 듯한 휘황찬란한 금강(金 )이 커다란 원광(圓光)을 그렸다. 동시에, 우---- 우---- 우---- 우---- 웅! 웅장한 소리가 흡사 천상음(天上音)처럼 방으로부터 온 천지를 은은히 진동시켰다. 계속 그 금강(金 )과 천음(天音)은 더욱 휘황찬란하고 웅후무비하게 울었다. 그러기를 얼마 계속했을까? 어느 순간, 돌연 금강 속에서 웅후한 앙천대소가 터져나왔다. "으하하하…… 성공했다. 드디어 흑백쌍환의 완전한 비밀, 그 비밀을 풀어내고야 말았다. 으하하하하……" 순간, 금강이 돌연 휘리리릭 회오리치더니 일순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그토록 웅대하던 천음(天音)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순간, 하나의 천신(天神)같은 사람이 방 안에 현신(現身)했다. 그는 바로 황보성운이었다. 용취란이 만면에 감격의 기색을 떠올리며 황보성운 곁으로 다가왔다. "성운! 서…… 성공했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감격에 떨려나왔다. 황보성운은 입가에 지극히 신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모두가 당신 덕분이오." "제가 무슨……" 용취란은 당치 않다는 듯 급히 부인했다. "아니오! 모두 당신 덕분이오." 황보성운은 천천히 용취란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용취란은 자신의 머리를 황보성운의 가슴에 묻은 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황보성운이 귀에 문득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확연히 들려왔다. 황보성운의 안색이 굳어졌다. "취란!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났소?" 그제서야 용취란은 생각난 듯 벌떡 황보성운의 품을 뛰어나왔다. "아! 큰일났어요. 십대마불이 침입해 왔어요." 황보성운은 안색을 대변시켰다. "뭣이! 그들이……" 그는 문을 박찼다. "나가봅시다." 그는 급격히 신형을 뽑아 날렸다. 찰나지간, 그의 눈에 한 명의 노화상이 허공을 번개같이 종횡무진하면서 고수들을 죽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잔인무도한 수법에 치를 떤 주위의 십여 명 인물들이 동시에 공격해 들어갔다. 순간, "으하하하…… 무형참미소다!" 그 노화상은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지극히 막강한 암경(暗勁)을 사방팔방으로 폭사시켰다. "으---- 악!" "크---- 악!" "악!" 무수한 단말마의 비명이 갈가리 대지를 찢었다. 동시에 허공에 섬뜩한 피보라가 흡사 하늘을 뒤집듯이 낭자하게 흩뿌려졌다. 아, 그것은 너무나 참혹한 광경이었다. 주위에서 득달처럼 달려들던 사람들 중 하나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사지가 산산이 부서지고 배가 터지고 파열되어 그 시신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노화상은 입으로 흉랄한 괴소를 날리며 주위를 흡족한 듯 쓸어보았다. 이때 황보성운의 신형이 그의 앞에 내려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잠룡피가 끼워져 있었다. 노화상은 황보성운의 전신을 쓸어내려보며 거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도 덤비려는가?" 황보성운은 짐짓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너무 악독…… 하구려!" "후후후…… 중원의 무림인은 모두 죽여야만 한다." 노화상은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황보성운은 기묘한 미소를 날렸다. "그것은…… 망상이오!" "망상?" 노화상은 황보성운을 힐끗 본 뒤 돌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망상이라도 좋다. 우리는 단지 노력만 할 뿐 그 결과는 생각지 않는다." 그의 안색이 이내 싸늘히 굳었다. 그는 황보성운을 서릿발치듯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소배! 이제 너도 갈 때가 됐다." 그는 무겁게 천천히 손을 앞으로 들이 밀었다. "죽어라!" 황보성운은 즉각 상대가 무형참미소를 전개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극성으로 공력을 뽑아 올렸다. 그리고 전력으로 파천기를 시전했다. 찰나, 꽈---- 꽈---- 르---- 릉! 엄청난 폭발음이 울렸다. 동시에, "으---- 윽!" 노화상은 무려 뒤로 주르르륵 아홉 걸음이나 밀려갔다. 또한 그의 입에서는 한 줄기 피화살이 허공으로 뿜어졌다. 노화상은 겨우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입을 열었다. "네, 네가……?" "노화상, 이것은 당신의 실수요. 나를 얕보고 팔성 공력밖에 안쓴 것이 잘못이었소." 황보성운은 냉랭한 안색으로 가볍게 조소를 날렸다. "이…… 이놈……" 노화상은 이를 악물고 쌍수를 끌어올려 공격해 왔다. "이미 당신은 끝났소." 황보성운은 서서히 쌍수를 끌어 올려 가볍게 후려쳤다. "현원공공!" 순간, "크---- 아---- 아---- 악!" 노화상은 수십 장 밖으로 날아가 사지가 분별할 수 없을 지경으로 박살나버렸다. 이때, "성운! 조심하세요." 용취란의 다급성이 급촉하게 울렸다. 황보성운은 번개같이 신형을 휘돌렸다. 순간, 황보성운의 전신으로 무시무시한 섬광이 번뜩이는 일장이 격습해왔다. (섬전비혈수!) 황보성운은 번개처럼 다시 파천기를 펼쳤다. 순간, 꽈---- 꽈---- 르---- 릉! 그들은 엄청난 격발력으로 뒤로 일보(一步)씩 물러섰다. 황보성운을 공격했던 노화상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격노했다. "네가 열째인 마천불(魔天佛)을 죽이다니……" "그대는?" 황보성운은 싸늘한 조소를 날렸다. 노화상은 격노에 수염을 떨면서 입을 열었다. "노납은 셋째인 벽력불(霹靂佛)이다. 너를 죽여 열째 사제의 원수를 갚고 말겠다." 그는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쌍수를 내리쳤다. 그러자 푸른 섬광이 가공할 예리한 경풍과 함께 무섭게 덮쳐들었다. "웃, 대단하군!" 황보성운은 즉각 잔영보(殘影步)를 전개했다. 그의 잔영보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삼백 육십 방위로 삼백 육십의 매우 길다란 그림자가 줄줄이 늘어섰다. 물론 그의 신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푸른 광채의 예리한 경공은 그림자로 내리꽂혔다. 파파파파파팍! 허나, 그것은 모두 허사였다. 이미 그림자가 삼백육십의 방위로 들어서는 찰나 그는 십장 밖에서 미소를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천현문 조사(祖師)인 현현자조차도 이르지 못한 초절무비한 경지였다. 화상은 갑자기 몸을 멈춰 세웠다. "아미타불…… 시시한 보법 따위로 노납을 속이려 하다니……" 그는 이어 손을 커다란 원형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랍찰파의 지고무상한 절기에 선풍강(旋風 )의 위력을 보여주겠다." 돌연 그의 승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의 주위로 오색이 기기묘묘한 경기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그 경기는 점점 더욱 거세어지더니 급기야 하나의 엄정난 회오리 선풍을 일으켰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광경이었다. 순식간에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허공으로 회오리쳐 올라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웃! 엄청난 압력이다.) 황보성운의 신형이 허공으로 휩쓸려 올라갔다. 그는 전 극성의 내공을 끌어올려 파천기를 시전했다. 허나, 파천기의 힘이 그 오색경기의 선풍과 부딪치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대로 퉁겨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흑!" 황보성운은 급급히 찬바람 한 모금을 들이켰다. (무, 무서운 수법이다.) 그는 가공할 살초(殺招)인 천인수(天刃手)을 시전했다. 꽈---- 꽈---- 르---- 릉! 순간, 엄청난 폭발음이 지축을 경동시켰다. 동시에 허공에 수천 수만의 번갯불이 현란무비하게 피어올랐다. 그러자 노화상의 안색이 대변했다. 게다가 그의 전신이 부르르 진동했다. 찌---- 아---- 익! 찌---- 익! 찌---- 이----- 이---- 익----! 찌----익! 노화상의 승포에 수백 가닥의 균열이 일어났다. 허나 그 노화상은 여전히 끄덕없이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성운은 아연실색했다. 그는 곧 안색을 서릿발처럼 굳혔다. "노화상!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그는 천인수를 연속 전개했다. 노화상의 두 눈이 일순 핏빛으로 변했다. "소배! 선풍멸절강(旋風滅絶 )이다. 받아랏!" 그 괴노화상은 엄청나게 휘돌던 선풍을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쭈욱 들이밀었다. 순간, 가공할 흡인력과 함께 엄청난 기운이 무시무시하게 회오리쳐 왔다. 그 경풍은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 항거할 수 없는 흡인력으로 황보성운의 전신을 잡아끌어 당겼다. 황보성운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음을 절절히 느꼈다. 순간, 그는 하늘로 왼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천상선기! 백환의 빛이 현신하도다." 순간, 그의 손에서 차마 범접할 수 없는 웅장한 백광이 현란무비하게 뻗쳐올랐다. 그는 지체없이 그 백광을 엄청나게 덮쳐드는 경력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흩뿌렸다. 그러자, 슈---- 슈---- 슉! 현란한 백광이 일순간에 섬전으로 화(化)하더니 돌아치는 경풍을 향해 쏘아갔다. 찰나, 퍼---- 퍼---- 펑! 그 하나의 섬전은 수천만 개의 섬전들로 중간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마주쳐 들던 경력들이 바람처럼 소멸되었다. 그것은 바로 백환의 서기로 이룬 성천구도(聖天九刀)의 정수였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광경에 노화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그것은 성천구도!" 바로 그 순간 황보성운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혈천일도(血天一刀)의 일섬(一閃) 아래 제마(諸魔)가 즉사하도다." 순간, 그의 오른손에서 흑광(黑光)과 혈광(血光)이 내뻗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황보성운의 오른손에 섬뜩한 흑광(黑光)과 혈광(血光)에 휩싸인 도(刀)가 나타났다. "혈(血)---- 천(天)---- 일(一)---- 도(刀)----!" 황보성운은 한자 한자 못을 박듯 외쳤다. 쐐---- 애----애---- 액! 혈흑광(血黑光)이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일으켰다. "끄---- 아---- 악!" 찬란한 비명이 허공을 갈기갈기 찢었다. 아---- 아, 혈천일도(血天一刀)! 바로 그 필사(必死)의 가공할 살초(殺招)가 전개되고 만 것이었다. 다음 순간, 그 노화상의 참상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의 가슴이 머리를 집어넣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만 것이 아닌가? 그곳으로부터는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노화상은 간신히 쓰러지지 않은 채 두 눈을 까뒤집고 애통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처, 천 년 전의…… 흑백쌍환이 또, 또다시…… 우리의 일을 방해 하다니……" 그는 머리를 들어 원망스럽다는 듯 올려보았다. 허나 그것도 일순, 그의 신형이 흡사 거목이 쓰러지듯 앞으로 꼬꾸라졌다. 죽은 것이다. 황보성운은 묵묵히 벽력불의 시신을 응시했다. 왠지 모르게 그의 가슴은 천근처럼 무겁기 짝이 없었다. 이때, "으---- 아---- 억!" "아---- 악!" 하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황보성운은 급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아! 장내는 실로 무어라고 표현하기 힘든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중원무림 전체에서 모여든 수백 명의 고수 중 절반 이상이 피를 뿌린 채 쓰러져 있었다. (아! 너무나 처참하다.) 황보성운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서운 분노심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이때 시체들을 살피고 있던 황보성운의 눈이 갑자기 한 곳에 정지되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른 곳, 그곳에는 우내삼천존이 전신에 피칠을 한 채 나뒹굴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내심 길게 탄식을 했다. (사도(邪道)의 최강고수라 자칭하던 저들도 결국은 이런 곳에서 죽음을 맞는구나.)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비명 소리는 계속 터져나오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주위를 대강 훑어보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그는 상황이 대단히 급한 것을 깨달았다. 순간, 그는 소살천공(笑殺天功)을 운공했다. 그리고는 소살삼음 중 두 번째 음인 귀소열(鬼笑裂)을 시전했다. "우우…… 우…… 우우……" 마치 귀신이 호곡하는 듯한 처절한 음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갔다. 장내에서 싸우던 중인들은 그 음파에 전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십대마불(十大魔佛) 역시 안색이 변한 채 음이 터져나온 곳을 응시했다. 이때 중인들과 십대마불의 시선은 모두 황보성운에게로 가있었다. 어느 순간 긴 장소음이 멎었다. 주위는 돌연한 침묵에 묻혀 일전의 음향도 들이지 않았다. 이때 황보성운이 웅혼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십대마불이여! 아직 때가 늦지는 않았으니 그만 살생을 멈추고 랍찰파로 돌아가라!" 십대마불 중 첫째인 영가불(靈迦佛) 오비라(烏毘羅)가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소배여! 너는 누구인가?" "그대들은 나의 명호를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완전히 변한 황보성운의 모습, 그것은 천하에서 둘도 없을 듯한 미남자의 모습이요, 영웅의 얼굴이었다. "나는 옥면신수(玉面神手) 황보성운이다." 영가불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때 중원들 사이에서도 일말의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허나, 곧 그 소요는 커다란 환성으로 변했다. "옥면신수가 돌아왔다." "중원 제일인 옥면신수 황보대협이다." "와아아---- 아" 환성은 갈 수록 커졌다. 천지가 떠나갈 듯 환성은 만웅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의 영웅 옥면신수 만세----!" "십대마불을 죽여라!" "죽여라! 죽여!" 중인들의 흥분은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헌데, 황보성운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장내는 순식간에 쥐죽은 듯이 고요하게 변했다. 북태빙백살 등 몇몇 고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림 역사상 황보성운 만큼 무림인들의 존경을 받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의 단순한 몸짓 하나하나가 중인들의 모든 심중까지 지배하는 판이니……) 이때 장내에서 황보성운을 눈물 어린 눈으로 보는 몇몇 여인들이 있었다. 설연미, 그녀는 지금 애정과 갈등이 어린 눈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 진정코 사랑하지만 결코 맺어질 수 없는 남자. 설연미는 황보성운의 모습을 보면서 지극한 애정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팽소연, 그녀는 지금 희열과 감동의 파랑이 이는 눈빛으로 황보성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낭군, 자신의 목숨보다도 훨씬 더 사랑한 낭군이었다. 용취란, 그녀는 사랑과 애정, 그리고 신뢰가 충만한 마음으로 황보성운의 행동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토록 위대한 나의 낭군이라니……) 만약 장내에 아무도 없었다면 그녀는 당장 황보성운에게 뛰어가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쨌든 지금 황보성운은 정기어린 시선으로 십대마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가불 오비라는 허연 눈썹을 꿈틀거리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으음! 옥면신수 너는 비록 적이긴 하지만 대단한 인물이다. 확실히…… 천하에서 우리의 적수가 될만한 사람은 오직 너 뿐이다." "과찬이오." "소배! 허나 자만하지 마라. 그렇다고 해서 너의 무공이 우리를 능가하는 것은 아니다. 천하의 어떠한 무학도 우리 랍찰파의 무학을 능가할 수 없다." "그것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오. 이미 당신이 자부하는 십대마불의 두 명이 나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했소." 영가불의 눈 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노납은 네가 진보한 무학으로 그들을 죽였다고는 믿지 못한다." "영가불! 당신네 랍찰파가 천 년 전 중원에서 물러난 것은 무엇 때문이오?" 영가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소배!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냐?" "이것을 보시오." 황보성운이 양쪽 손을 위로 뻗었다. 순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그의 양 손으로부터 희고 검은 두 가지 광채가 허공으로 치솟더니 어느새 황보성운의 손에 두 자루의 도(刀)가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영가불의 안색이 급변했다. "흑…… 백…… 쌍…… 환!" "그렇소. 바로 흑백쌍환이오. 천 년 전 당신들의 조상을 중원에서 쫓아보낸 그 흑백쌍환이오." 영가불은 멍한 표정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아아! 이것이 진정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흑백의 쌍환이여! 너는 어찌 그다지도 랍찰파의 야망을 저지하는가?) 영가불은 문득 아주 오랜 옛날 자신의 어른들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흑백쌍환이 중원에 있는 한 랍찰파는 여전히 중원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영가불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아무리 흑백쌍환이 천고의 기물이라고는 하나, 그 역시 인간이 만든 것임은 분명한 것! 어찌 이대로 물러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뒤에 서 있는 일곱 명의 노화상들을 응시했다. "칠불(七佛)! 운명에 저항하라! 흑백쌍환이 아무리 신물이래도 인간의 의지에는 당하지 못한다. 랍찰파의 무서운 무공을 보여줘라." 칠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는 모두 비장한 결심이 서리고 있었다. 칠불과 영가불, 즉 팔대마불은 황보성운을 중심으로 서서히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때 중인들 사이에서 소요가 다시 일었다. "어찌 황보대협 혼자 놈들을 상대한단 말인가?" "우리도 합공하자." "흑백쌍환이 있는 한 겁날 것이 없다." "와---- 아! 죽여라!" 황보성운은 중인들의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러분! 잠깐만 진정하십시오." 중인들은 금방 입을 다물고는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황보성운은 주위를 훑어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일은 중원의 대사(大事)이기도 하지만 또 천 년 간 흑백쌍환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중원과 서장의 결산이기도 합니다." 황보성운의 어조는 웅혼하기 짝이 없었다. "제가 부탁하건데 그 누구도 이 속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만약 이를 거역한다면 저를 무시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중인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황보성운의 결심을 꺾을 수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황보성운은 즉시 시선을 영가불에게로 돌렸다. "대사! 시작해봅시다." 영가불은 지그시 황보성운을 응시했다. 그런 그의 두 눈에서 어떤 감동의 빛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소시주! 그대와의 싸움 결과가 어떻든 노납은 그대에게 가장 큰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창노하게 부르짖었다. "시작해라!" 드디어 싸움은 시작했다. 무림 역사상 두 번 다시 보기힘든 아니 아예 볼 수도 없는 희대의 대결투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신형이 움직였다. 그것은 실로 육안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분간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팔대마불과 황보성운, 그들은 바로 번갯불보다도 빨리,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몸을 움직였다. 한 치의 오차가 목숨을 빼앗는다. 그런 생각 아래에서 그들은 움직였다. 어떤 마찰음도, 어떤 파공성도, 숨소리도, 그 어떤 음향도 없이 그들은 무형 속에서 싸웠다. 백 초…… 이백 초…… 오백 초…… 천 초…… 일세의 영웅 황보성운, 그는 지금 최고 경지에 이른 지고무상의 도법 성천구도(聖天九刀)로 팔대마불의 모든 공격을 차단시키고 있는 것이다. 팔대마불의 공격이 아무리 거세기로 성천구도의 도광은 도저히 뚫을 수가 없었다. 영가불은 차츰 초조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사제들을 바라보며 크게 부르짖었다. "대불개안(大佛開眼)!" 나머지 칠불도 처절하게 말을 이었다. "천불혈세(天佛血洗)!" 순간, 황보성운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팔불의 몸이 그대로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허공 그대로에서 황보성운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것이 아닌가? 황보성운은 이 수법이 랍찰파 최후의 수법임을 직감했다. 그는 내심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제…… 끝날 때가 왔다.) 이때 영가불의 마지막 음성이 절규처럼 들려왔다. "쳐라!" 순간, 허공에서 돌던 여덟 명의 마승들이 곧 바로 황보성운의 전신을 노리며 쳐들어왔다. 천지는 순식간에 암흑 속에 감기고 오직 처절무비한 악마의 울부짖음만이 들려왔다. 그 순간 황보성운이 양 손에 들고있는 두 개의 칼을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혈천유성탈백심(血天流星奪魄心)----!" 아아, 혈천유성탈백심(血天流星奪魄心)! -암흑(暗黑) 속을 한 줄기 붉은 유성(流星)이 빛살처럼 흘러가며 모든 마(魔)의 혼백(魂魄)을 빼앗는도다. 이것은 바로 지난 한 달 동안 황보성운이 모든 힘을 기울여 알아낸 흑백쌍환의 최후 비밀이었다. 흑백쌍환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칼을 동시에 날려 쌍도(雙刀)의 위력을 최극성으로 발휘하는 전무후무한 무공. 천 년 전, 랍찰파의 마승들이 중원에서 물러난 것도 바로 이것 때 문이었다. 하늘을 나는 두 개의 칼은 이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하듯 천지 사방을 온통 암흑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그리고 곧 세상이 밝아졌고, 무서운 적막이 주위를 휘감았다. "……" "……" 팔대마불 중 일곱 명은 이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시신이 훼손된 채 죽어있었다. 유일하게 살아서 서있는 자는 영가불 뿐이었다. 허나, 그의 가슴엔 혈천도가 꽂힌 채 피가 샘솟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가불은 가슴에 꽂힌 칼을 응시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소시주, 이것은…… 이미…… 노납이 두려워한…… 최후의…… 결과요. 허나, 불행히도 노납의…… 추측이 맞아 버렸소." 그의 음성은 끊어질 듯 희미했다. "앞으로…… 영원히…… 랍찰파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오. 영원히……" 황보성운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처, 천마이로는 랍찰파의 반도들이오…… 노납은…… 그들이…… 이곳에 오고도…… 다시 우리가 두려워…… 도주한 걸 알고있소…… 허나…… 그들은 한 가지를 모르고 있소. 나…… 영가불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그들 역시 지옥의…… 겁화(劫火) 속에 한 줌의…… 재가 됨을……" 피 한 모금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제 끝이오…… 영원히……" 영가불의 몸이 고목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긴 탄식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이 끝났다.) 황보성운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황보성운은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했다. 팽소연, 용취란…… 아름다운 여인들이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사랑이 가득 잠긴 시선으로 황보성운에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헌데, 설연미는 없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3 설연미는 슬픔을 씹으며 천천히, 그리고 무작정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래…… 모든 걸 잊는거야…… 모든 걸 잊고 이 세상을 떠나는 거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설연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로 앞 커다란 고목 아래에 한 명의 면사를 쓴 청년이 비스듬히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설연미는 그에게로 간 시선을 거두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녀가 그의 옆을 지나려는 찰나, "소저…… 잠깐만 실례하겠소!" 설연미는 움찔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면사청년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무슨 일로 저를 불렀죠?" "낭자는 내가 누군지 아시오?" 설연미는 차갑게 냉소했다. "내가 어찌 그것을 알 수 있죠?" "후후후…… 낭자와 나는 무척 밀접한 관계가 있소. 나는 바로 자하장에서 왔소." "다, 당신이…… 당신이……" 면사청년은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설연미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연미! 왜 나를 피하시오? 나는 엄연히 당신의 남편인데……" 설연미는 전신을 경련했다. 면사청년의 손이 설연미의 어깨에 닿은 것이다. 설연미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형식적이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지아비가 아닌가? 면사청년의 손이 설연미의 턱을 받쳐들었다. "연미! 당신은 아직도 아름다움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려." 면사청년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설연미의 안색이 계속 변했다. 입술은 벌써 닿을 듯 말 듯 다가와 있었다. 이때, "안돼요!" 설연미가 갑자기 면사청년을 힘껏 밀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용서하세요. 저는 도저히 저의 마음을 속일 수가 없어요. 저에게는 이미 당신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공간이 없어요. 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녀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다. 이때 그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 "연미! 나를 보시오." "……?" 설연미는 고개를 들었다. 청년은 이미 면사를 벗고 있었다. 고인 눈물 때문에 상대의 모습이 흐릿했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상대의 모습은 점차 뚜렷해졌다. "아……!" 누구인가? 그렇다. 그리운 얼굴, 사랑하는 얼굴, 황보성운 바로 그였다. 설연미는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황보성운이 부드럽게 웃었다. "연미…… 비록 초야를 지내진 못했지만 우린 분명 양가의 축복 아래 혼인을 했소." "이럴 수가……" "이제 당신이 피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소." 설연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황보성운은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다가왔다. 설연미가 그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공자님!" 두 남녀의 몸이 하나로 합쳐졌다. 영원히 그리고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늦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사랑하는 연인들의 머리 위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찬란히…… 그들의 펼쳐진 행복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