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락검극천미명 月落劍極天未明 第 1 部 - 巨商列傳篇 第 1 卷 序幕 ( I ) 殺人血帖 ( I ), 破天의 劫 대명(大明) 말엽(末葉) 신종(神宗) 만력(萬歷) 이십이년(二十二 年), 대파천(大破天)의 겁(劫)이 태동(胎動)하다. x x x 한 사나이가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죽음의 상태에서 기적적으 로 재생(再生)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십여 년후인 만력(萬歷) 사십일년(四十一年). 그 사나이는 자신을 그토록 처절한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 은 하늘을 상대로 엄청난 공포의 보복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했으 니....... - 살인혈첩(殺人血帖) ! 바로 그 죽음의 최명부를 전 중원에 뿌려내며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공포의 살인혈첩(殺人血帖)! 그로부터 중원무림에는 단 하루도 피가 마를 날이 없었으니 오 호통재(嗚呼痛哉)라! 죽음의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재생한 그 사나 이가 뿌려낸 살인혈첩의 상대를 찾아 사나이의 수하(手下)들은 마 치 혈사신(血死神)인 양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척살(刺殺)을 벌이 기 시작했다. 공포의 대살행(大殺行)은 끝없이 이어지고....... 하나, 그 중에서도 가장 공포스러웠던 일은 그 사나이가 만력 사십이년(萬歷四十二年) 늦 겨울에 뿌린 단 세장의 극비살인혈첩 (極秘殺人血帖)이었다. 또 세 장 ! 그 세 장의 살인혈첩에 적힌 이름은 삼인(三人), 사나이의 충성 스런 수하들은 그때부터 그 삼인을 죽이기 위한 처절무비하고 가 증스런 계획을 세운다. 훗날, 세인(世人)들은 그 당시 세 장의 혈첩으로 발생한 그 끔 찍한 사건을 일컬어 이렇개 불렀다. ----- 파천(破天)의 겁(劫). x x x <극비살인지령 제일호 (極秘殺人指令制一號).> 집행자(執行者) : 혈관음(血觀音), 집행대상자(執行對象者) : 무영(無影) 고검령(古劍靈), 집행등급(執行等級) :제일등급(制一等級) 척살(刺殺), 기타일체(其他一切)는 첩지(帖紙)와 함께 보내는 자료(資料)에 의하여 참조하라. <극비살인지령제이호 (極秘殺人指令制二號).> 집행자(執行者) : 독로장미(禿路薔薇), 집행대상자(執行對象者) : 신산(神算) 제갈사(諸葛師), 집행등급(執行等級) :제일등급(制一等級) 척살(刺殺), 기타일체(其他一切)는 첩지(帖紙)와 함께 보내는 자료(資料)에 의하여 참조하라. <극비살인지령제삼호 (極秘殺人指令制三號).> 집행자(執行者) : 천면인요(千面人妖), 집행대상자(執行對象者) : 태진왕(太眞王) 주익적, 집행등급(執行等級) :제사등급(制四等級) 회유(懷柔), 불가(不可) 하면 척살(刺殺), 기타일체(其他一切)는 첩지(帖紙)와 함께 보내는 자료(資料)에 의하여 참조하라. 이 세장의 살인혈첩(殺人血帖) !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엄청난 음모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 때는 아직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이는 만력(萬歷) 사십이 년(四十二年) 가을(秋), 파천(破天)의 겁(劫)이 시작되고 있었다. 序幕 ( II ) 殺人血帖 ( II ), 鐵幕의 殺人 그는 일신에 낡디낡은 흑포(黑袍)를 걸치고 머리에는 깊숙이 죽 립(竹笠)을 쓴 채 한 자루의 칼(刀)에 몸을 의지하고 무림에 출현 했다. 때는 만력(萬歷) 이십이년(二十二年), 처음에는 아무도 그의 출 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저 삼십 세가 갓 넘은 젊은 낭인무사 정도로만 모두들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나 곧 전 무림은 경악했다. 그가 묘강(猫疆)의 마군(魔君)인 구독잔마(九毒殘魔)를 운남성(雲南省)에서 단 삼초(三招) 만에 목 을 날려 버렸을 때, 절강(浙江)의 명숙 천수신마(千手神魔) 구여해 (丘如海)를 단 일초(一招)에 양팔을 잃게 하였을 때, 전 무림은 경 악하다 못해 불신하기까지 했다. 하나 곧 그것이 그저 시작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하의 어떤 고수도 그의 칼 아래 단 삼초(三招)를 넘기지 못했 던 것이다. 중원인들은 곧 그를 백 년 전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 였던 도성(刀聖) 유백(柳白)과 견주기를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도담후( 潭侯), 별호는 만승금도(萬勝金刀), 하나 이해할 수 없게도 그는 무림에 등장한 지 꼭 육 개월 만에 다시 중원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숱한 의문과 의혹을 남긴 채로,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어언 만력(萬歷) 사십이년(四十二年)....... x x x <살인지령 (殺人指令).> 집행자(執行者) : 무정도(無情刀), 집행대상자(執行對象者) : 만승금도(萬勝金刀) 도담후( 潭侯), 대상거처(對象居處) : 사천(四川) 무산(巫山) 철마보(鐵魔堡), 무공등위(武功等位) : 초일급(超一級) 천절금도(天絶金刀)를 이 용한 수라구류도(修羅九流刀)는 당대무적, 현문강기(玄門 氣)를 깊이 체득하여 전신이 도검불침(刀劍不侵)임. 생혈(生穴)과 사혈 (死穴)의 구분이 없음. 주의사항(注意事項) : 철마보(鐵魔堡) 입구에서 그의 거처에 이 르는 곳까지 수십개의 사진(死陣)과 수백 개의 기관(機關)이 설치 되어 있음. 게다가 도담후가 직접 키운 백명(百名)의 절정고수들 이 철통같이 그를 지키고 있음. 동시에 철마보 내에는 특수하게 훈련된 천천여 마리의 야효(夜梟 : 올빼미)와 산응(神鷹 : 독수리) 이 항상 철마보 위를 날아다니며 철저히 지키고 있음. 정면돌파는 불가능(不可能)함. 기타(其他) 필요한 일체(一切)는 첩지(帖紙)와 함께 보낸 자료를 참조할 것. 붉은첩지 위에 쓰여진 검은 글씨, 그 글씨는 흡사 사망인(死亡 印)인 양 촛불 아래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얇은 소 책자가 놓여 있다. 촛불 위에서 그 두 가지 물건을 바라보는 한쌍 의 눈은 무감각하게 빛나고 있었다. x x x 백발(白髮), 아니 은발(銀髮)이라 함이 더욱 어울리리라. 윤기흐 르는 백발을 단정히 백건(白巾)으로 묶은 오순(五旬) 가량의 노인, 두 눈은 냉정하다 못해 차디찬 얼음조각을 보는 듯하다. 각(角)진 얼굴, 왠지 음산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사이한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왼손에는 석 자 길이의 금도(金刀)를 쥐고 있었는데 오십여 세의 나이치고는 그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생애(生涯)의 파란 탓에 이마의 주름살이 많아서일까? 이 노인이 만승금도(萬勝金刀) 도담후라면 믿겠는가? 또한 동시 에 철마보(鐵魔堡)의 신비에 쌓인 보주이기도 하다. 주름진 얼굴 과 백발이 성성함과는 달리 섬뜩하리만큼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그. 그는 항시 천절금도를 손에서 떼어놓지 않는다.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 늘상 가슴에 품고 잔다. 그의 전신은 언제나 무섭도록 긴장되어 있다. 단련된 무혼(武魂)이 습관적으로 배인 탓이다. 지금 그의 시선은 촛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두 동공에 촛 불의 불꽃이 타오르는 것이 비쳤다. 그는 상념(想念)에 빠져 있었 다. '그때... 그를 확실히 죽였어야 했다.' 파르르... 백미가 떤다. '단 한순간의 실수가 지금에 와서 내 마음을 긴장시킬뿐더러 숨통마저 조이고 있다.' 무엇을 염려하는 것일까? 문득, 스...... 소리도 없이 그는 금도를 뽑았다. 순간 방 안이 온 통 눈부시면서도 음산한 금빛 광채로 휩싸였다. 환상인가? 촛불의 불꽃이 순간적으로 세 개로 갈라졌다가 합쳐졌다. 아! 언제 금도를 휘둘렀단 말인가? '하나 후회는 없다. 어차피 이십 년 전 그때... 나의 혼은 하얗게 재가 되도록 태울 수 있었으니까.......' 철ㅋ! 나올 때와는 달리 도집에 꽂을 때는 소리가 났다. '하늘과 땅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럼없이 살아온 오십인생(五十 人生)....... 이제 더 무엇이 두려우랴?' 슥...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어 걸음을 옮겨 휘장이 쳐져 있는 옆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옆방은 침실이었다. 침상은 검박한 나무침상이었다. 침상 옆에 는 한 명의 여인이 공손히 서 있었다. "의부(義父)님" 양녀였던가? 자세히 보면 여인이라기에는 아직도 소녀티가 풍 겼다. 십 칠 팔세쯤 되었을까? 백합처럼 깨끗하고 난초처럼 청초 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소녀가 허리를 나직이 구부렸다. 도담후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우며 자애롭게 말했다. "아직 침소에 들지 않았느냐?" 소녀는 눈을 들며 생긋이 미소지었다. 두 눈이 너무나 깨끗하 고 순순해 보였다. "의부님께서 아직 침소에 들지 않았거늘 어찌 소녀가 먼저 잘 수 있겠어요?" "허헛." 도담후는 가볍게 웃었다. 도담후는 이십여 년 전부터 그 누구 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이 직접 키운 백 명의 고수들조차 완전히 신임하지 않았다. 하나 오직 단 한 명만은 믿었다. 바로 눈 앞의 소녀였다. 손미(孫媚), 자신이 한때 지극히 사랑했던 한 여인의 혈육이었 다. 그 여인과 맺어지지 못한 그로서는 손미는 쓰라리면서 달콤한 추억이 깃든 존재였다. 그여인이 죽은 이후 그가 대신 맡아서 키 웠다. 현재 나이 십팔세, 비록 딸처럼 키웠으나 손미는 자라면서 너 무나 과거에 사랑했던 그 여인과 닮아 그는 차라리 일종의 애정 마저 그녀에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어찌 손미를 믿지 않 겠는가? "이제 그만 가서 쉬거라." 그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손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의부님." 손미는 공손히 대답한 후 다가왔다. "옷을......." 그녀는 도담후의 곁으로 가 그의 장포를 벗기려 했다. "허헛... 참, 괜찮대두......." 하나 그는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손미는 그의 곁에서 고개를 숙인다. 고개숙인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워 자칫 도담후는 과거의 연인을 보는 듯한 달콤함을 느꼈다. 손미는 뒤로 돌아가 그의 장포를 벗겼다. 그때 그녀의 손이 가 볍게 떨리는 것을 도담후는 느끼지 못했다. 이윽고 겉 장포가 벗 겨지자 그의 등 한복판에서 이상한 물건이 나타났다. 그것은 거울 이었다. 손버닥만한 크기의 둥근 금빛겨울(鏡)이 끈에 묶여 등 한 복판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손미의 눈이 가늘게 경 련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녀의 떨리는 손이 거울을 향해 뻗는 것 이 아닌가? 바로 그때 도담후는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손미, 이제는 가서..." 문득 그의말이 끊어졌다. 갑자기 등 뒤가 허전해진 것을 깨달 은 것이었다. 쨍그랑......! 동시에 그의 등 뒤에 매달려 있던 금빛거울이 바닥에 떨어져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도담후는 흠칫하면서 몸을 돌렸다. "손미!" 손미는 안색이 하얗게 탈색한 채 서서 겁먹은 눈으로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금빛 거울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도담후가 몸을 돌린 그 순간, 도담후의 등 뒤에서 돌연 묵광(墨光)이 번뜩 일었 다. 도담후의 동공이 크게 벌어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경악과 고 통, 그리고 회의에 찬 표정으로 그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 다. "우......욱!" 정작 비명은 뒤늦게 터져나왔다. 그의 눈은 자신의 앞가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한 자루의 검은 빛이 도는 칼(刀). 칼 끝이 어느 새 등을 꽤뚫 고 가슴까지 삐죽이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다. "누...누구......냐?" 순간, 촤 --- 악! 검은 칼이 뽑혀졌다. 분수같은 핏줄기가 그 바 람에 등과 가슴으로 동시에 분출되었다. 동시에 도담후의 눈앞에 한 명의 준수한 흑의(黑衣)를 입은 미청년(美靑年)이 나타났다. 흡 사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그는 나타났다. 극히 섬세하게 생긴 미청년이었다. 아니, 여인처럼 곱게 생겼다. 아찔 할 정도의 극미(極美)한 매력이 넘쳤다. "......!" 도담후, 그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불신의 눈빛으로 자신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피라는 것을....... 도담후는 눈앞의 흑의청년의 존재를 무시하고 힘겹게 시선은 손미에게 돌렸다. "손...... 손미...... 네가...... 나를......?" 그의 시선은 절망을 담고 손미의 두 눈에 꽂혔다. 손미는 구석 에 등을 붙인 채 격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손미의 커다란 두 눈에는 온통 후회와 고통, 두려움이 뒤엉켜 있었다. 눈물까지 고 인 채 그녀는 계속 와들와들 떨었다. "의...부님." 지금 이 순간에서야 그녀의 마음 속에 극도의 후회가 밀려오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너무고 늦은 후회였다. 이때 미청년의 입에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를 탓할 필요는 없소. 그녀의 마음이 배신한게 아니라 그 녀의 몸이 배신한 것이니까." 도담후의 안면은 더욱 창백해졌다. 하얗다 못해 푸르게까지 변 색되었다. "너는... 누구냐?" 미청년은 입가에 너무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같은 남자가 보더라도 반 할 정도의 아찔한 미소였다. "나는 당신의 삶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려는 분이 보내서 왔 소." 순간 도담후의 눈이 공허하게 빛났다. "그가... 그가... 너를 보냈구나.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도담후의 머릿속에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한 인물이 떠오르 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토록 허무하게 당할 줄은..." 미청년은 다시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도담후, 당신은 실수를 한 거요. 첫째는 여인이란 존재를 너무 믿은 것이었고, 둘째는 그 여인에게 자신의 급소를 가르쳐 준 것 이 결정적인 실수였소." "......." "여인이란 말이오, 사랑에 눈이 멀면 어떤 행동이라도 해 낸다 는 것을 당신은 몰랐던 것이오." 문득, " 으하하하하핫." 도담후는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 닌가? 하나 그 광소는 어딘가 모르게 짙은 허무의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는 곧 웃음을 그쳤다. 이어 그는 구석에서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손미를 응시하 며 뭐라 입을 열라 했다. 하나 손미의 두 눈에 가득찬 눈물과 그 속에 서린 후회의 빛을 발견한 도담후는 자신의 모든 분노를 덮 기로 했다. 그는 허망한 음성으로 탄식하듯 말했다. "손미... 너를 탓하지는 않겠다. 하나......." 그의 시선이 흑의 청년에게 돌아갔다. 순간 이미 그의 오른손 은 천절금도를 뽑고 있었다. 번 --- 쩍 금빛이 휘황하게 물들면서 상상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그의 칼 끝이 흑의청년의 목을 노렸다. 그야말로 가공할 쾌도(快刀)였 다.하나 미청년은 여전히 아름답게 웃으며 태연히 말했다. "당신의 현문강기는 이미 깨어졌소, 도담후." 스윽! 그의 수중의 묵도(墨刀)가 비스듬이 움직였다. 그것은 겉으로보 기에는 매우 움직임이 완만하고 느려 보였으나 일단 펼쳐지자 섬 광처럼 작렬했다. "헉!" 두 자루의 도(刀)가 교차하자마자 도담후의 경악성이 울렸다. 그는 뒤로 칠팔 보(步)나 뒤로 밀려나갔다. 이어 힘없이 벽에 기 대 서더니 회의의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도성(刀聖) 유... 유백(柳白)의... 무극팔로도세(無極八路刀勢)." 퍽! 그 순간 그의 복부가 갈라졌다. 동시에 핏줄기와 함께 내장 이 흘러내렸다. 오장육부가 모조리 갈라터진 복부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도담후는 그것을 막을 생각도 없는 듯했다. 그는 고통스 런 시선으로 미청년을 응시했다. "유... 유백의 후예냐?" 미청년은 담담히 웃었다. 도담후의 허연 눈썹이 가늘게 경련했 다. 그는 벽에 기댄 채 한 손으로 천절금도를 짚고 중얼거렸다. "차라리... 마음은 평안하구나." 그는 어지러운 듯 눈을 감았다 떴다. "지난 이십년(二十年) 세월은... 차라리 순간순간이 고통의 연 속... 이었다. 이십 년동안... 나는 긴장 속에서... 몸과 마음이 너무 도... 늙어버렸지." 그랬......던가? 그래서 그의 모습이 나이보다 그토록 훨씬 늙어 있었던가? 미청년은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문득 도담후가 안간힘을 쓰 듯 최후의 음성을 짜내었다. "하나... 하나... 너는 알아야 한다. 나는 죽는다 해도...... 아직 무 영(無影)과 신산(神算)이 살아... 있다는 것을." 그는 서서히 무릅을 꺽기 시작했다. "조화성주(造化城主)... 그... 그의 뜻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 쿵! 결국 그는 쓰러졌다. 거목(巨木)은 쓰러졌다. 한 자루 천절금도 로 천하를 경악케 한 뒤 사라져 조용히 철마보에서 이십 년을 잠 적했었던 도(刀)의 명인(名人), 천절금도는 꺽이지 않았으되 그의 주인(主人)은 쓰러진 것이다. 천절금도는 도담후의 시신 앞에 박힌 채 음울한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고목(古木)은 죽되 잔뿌리 하나는 남겨 언제고 새로이 태 어나기를 암시(暗示)라도 하는 것일까? "의... 의부님!" 순간 봇물 터지듯이 손미의 오열이 터졌다. 그녀는 양손으로 한껏 입을 틀어 막았으나 터져나오는 오열을 채 다 막을 순 없었 다. 이때 미청년은 묵도를 도집에 천천히 꽂으며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이 눈물어린 손미의 두 눈에 뿌옇게 투영되었다. "잠깐." 황급한 그녀의 제지에 미청년은 힐끗 돌아서며 그녀를 응시했 다. "왜 그러느냐, 손미?" 손미는 눈물로 얼룩진 두 눈으로 두려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저를... 설마." 미청년은 문득 감미롭게 웃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손미, 너는 도담후의 죽음을 보고도 나를 따를 수 있단 말이 냐?" 순간 손미의 안색이 거듭 변화를 일으켰다. 그야말로 자신의 아픈 곳을 무자비하게 쑤시는 말이 아닌가? 하나 곧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미는... 당신의 여인이에요." 순간, 미청년의 아름다운 듀 눈이 갑자기 빛을 상실한 듯 무감 동하게 변해버렸다. 음울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막을 씌우듯 덮어 내렸다. 섬뜩한 변화였다. 그런 그의 모습은 전과는 달리 무섭도록 무정해 보였다. "당신!" 손미는 그의 그런 변화에 갑자기 어떤 무서운 예감을 느낀 듯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하나 미청년은 앞으로 다 가서며 무감동한 음성으로 말했다. "맞아. 너의 일을 해결할 것을 잊고 있었어. 잊을 뻔한 일을 네 가 일깨워 주었다." 순간, 번 ------- 쩍 묵섬(墨閃)이 일었다. 그 뿐이었다. 청년은 이 미 무정하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 손미의 아름다운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허나 곧 그 두 눈은 공 포와 절망을 담은 채 빛을 상실했다. 비틀....... 손미의 가슴에 뜨거운 선혈이 뭉클 솟았다. 그리고 곧 그녀의 몸은 썩은 짚단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때 문 밖으로 사라져가 는 무감동한 음성이 바람결을 타고 들려왔다. "누가... 여인을 보고 아름답다고 했는가?" 방 안, 온통 피바다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직 한자루 금도 (金刀)만이 암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한데 이때, 하이얀 손 ... 피에 젖은 여인의 손하나가 꿈틀거리 듯 움직이더니 금도(金刀)의 날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칼날에 베 여 여인의 손에 핏물이 흐른다. 허나 그 여인은 그 칼을 놓지 않 았다. 여인은...... 손미였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 힘을 다하는 듯 금도를 움켜쥐었다. 허나, 그녀는 금도의 날을 움켜쥔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하얀 손 끝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핏물은 차 라리 처절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렇게 온갖 비밀을 간직한 채 잔혹무비한 살인의 막은 내려졌다. 만승금도 도담후의 죽음속에 담긴 비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유유히 사라져버린 미청년의 정체는? 또한 무영(無影)과 신산(神算)은 또 누구란 말인가? 이 일막의 살인극 이 몰고 올 훗날의 바람(風)은 또 어떤 것인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바람(風)... 때는 만력(萬歷) 사십이년 (四十二年) 겨울(冬) 어느 날이었다. 序幕 ( III ) 殺人血帖 ( III ), 悲劇의 私生兒 <너는 결코 태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인간인간이 다. 너는 신(神)의 저주(咀呪)로 태어난 비극(悲劇)의 사생아(私生 兒)다. 네 몸속에는 내 피가 흐르고 있으나 너는 나의 아들(子)이 아니고 너 또한 너의 부친이 될 수가 없다. 하나 용서해다오. 아들아. 내가 너를 이렇게밖에 부를 수 없는 것은 운명(運命)이 어쩔 수 없이 맺어준 너와 나의 인연(因緣) 때 문이다...... (中略) ...... 아들아, 나는 너를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으로 키웠다. 이 것은 네가 스스로 너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게끔 해야할 이 아비의 최선이었다. 아들아 어찌해서 내가 네게 얼굴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는 지 결코 의문을 품지 마라. 아 아비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감 수하면서도 네게 최소한의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으려 노력해왔 다. 아들아, 너와 나의 저주받은 이 운명을 네 스스로 해결하기 전 까지는 결코 이 모든 의문을 알려고도 풀려고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다오. 이것은 하늘(天)조차 어찌할 수 없는 천륜(天倫)과 인륜(人倫)이 잘못 매듭지어진 저주의 수렁이나니....... ......(中略)....... 아들아, 너는 이제 공동산( 山)으로 가거라. 그것에 너를 위 해 한 장의 첩지(帖紙)를 남겼다. 그것에 적힌대로 행하라. 그리고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라. 네가 그것을 이루었을 때 너의몸에 씌 어진 저주의 굴레는 벗겨지고 너와 나는 영원히 만날 수 있으리 라. 아들아, 부디 네 앞에 행운(幸運)과 신(神)의 가호가 깃들기를 빈다.> 손(手), 흰 천으로 칭칭 감겨진 두 손은 한 통의 서찰(書札)을 움켜쥔 채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아버님......." 피(血)로 쓴 서찰이었고 그 서찰을 바라보는 두 눈은 차갑고 무 심(無心)했었으나 점차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부의 격동과 고뇌, 그리고 무한대의 고통을 포함한 눈(眼)....... 그래서 차라리 무심(無心)해버린 그 한쌍의 눈은 언제까지고 피 로 쓴 서찰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대체 누군......가? x x x 공동산( 山)! 도가성지(道家聖地) 공동산에는 수많은 동혈(洞穴)이 있다. 살 (肉)을 깍고 뼈(骨)를 태우는 구도고행(求道苦行)을 하는 장소로써 동혈의 수도 많거니와 때로는 어떤 동혈은 너무나 깊어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곳도 있었다. 석실(石室), 어두침침한 석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폐쇄된 동혈 내에 있는 곳이다. 석실 중앙에는 사각형의 석대(石臺)가 있었다. 그 위, 붉은 빛이 놓여있다. 한 장의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의 시뻘건 첩지(帖紙)였다. 그리고 첩지 앞에는 어둠의 화신인 양 어 둠과일체(一體)가 된 한 명의 검은 인영이 정좌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은 오직 얼음처럼 빛나는 차가운 두 눈과 흰 천 으로 칭칭감은 두 손(手) 뿐이었다. 슥... 소리없이 첩지가 펼쳐졌다. 그리고 첩지 속에서 간결하게 쓰여진 검은 글귀가 보인다. <조화성(造化城)을 붕괴시키고 조화성주(造化城主)를 척살(刺 殺)하라.> 아주 간단한 글귀였다. "흐흐흐흐......." 어둠 속의 인물이 음산무비한 괴소를 흘려내며 혈첩을 움켜쥐 었다. 어딘가 모르게 공허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그의 얄팍 한 입술이 열리며 그 속에서 자조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비극(悲劇)의 사생아(私生兒)." 오오, 너무나 한스런 음성이 아닌가? "결코 태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인간이란 말이지?" 그의 차가운 음성은 어둠을 공명시키며 이어졌다. "조화성(造化城)....... 조화성주라 했든가?" 문득 낮고 살벌한 음성이 들렸다. "크ㅋ... 어쩔 수 없지. 내 운명을 알아내고 아버님을 만나기 위 해서는 너를 나의 제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공명은 점점 더 살벌해졌다. "크크크ㅋㅋ! 조화성! 깡그리 멸(滅)하리라!" 소름이 끼치도록 비정한 음성이 석벽에 부딪치며 회오리쳤다. 푸스스... 그 순간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혈첩은 파란 연기를 내 며 가루로 화했다. 은밀한 곳, 공동산( 山)의 수 많은 동혈중 한 곳에서 벌어진 이 조그만 사건, 훗날 이 일이 얼마나 거대한 폭류의 흐름을 조성 하게 될 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먼 훗날,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일컬어 이렇게 불렀으니....... 역천(逆天)의 겁(劫)! 때는 아직도 만력(萬歷) 사십이년(四十二年) 겨울(冬)의 막바지 였다. 第 1 章 蔣 天 신선루(神仙樓). 남창성(南昌城)은 몰라도 신선루를 모른다면 강남인(江南人)이 아니라고 할 줄 모른다. 천하오대호(天下五大湖)중 하나로 그 풍 광이 수려하기로 동정호(洞庭湖)와 함께 선두를 다툰다는 파양호 ( 陽湖), 파양호의쪽빛 푸른 호반에 세워져 있는 구름을 뚫을 듯 솟아있는 대루가 바로 신선루(神仙樓)다. 신선이 구름에서 내려와 잠시 호반의 풍치를 즐기며 술을 마실 것 같이 아름다운 주루였 다. 그 규모 또한 엄청나게 크다. 파양호의 수면에 수천 개의 기둥 을 박아 그 위에다 누각을 지어 마치 멀리서 보면 호수 위에 하 나의 탑(탑)이 떠 있는 듯 신비해 보이는 것이었다. 또한 주루의 벼과 지붕은 어린 아이 몸통 굵기의 청죽(靑竹)으로 만들어 몹시 탈속한 느낌이 들게한다. 어디 그 뿐이랴? 폭은 그다지 넓지 않으나 호변을 따라 무려 백여장이나 길게 뻗어있어 실로 장관이었다. 창강에 앉으면 바로 파양호를 볼 수 있었다. 따라서 특히나 신 선루에서 바라보는 파양호의 석양(夕陽)은 가히 절경을 이룬다. 이는 남창성은 물론 강서성(江西省)의 명물로 손꼽혀 이름난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였다. 뿐만 아니라 일반 강호협객들도 항상 이 곳에서 초만원을 이루 어 더욱 유명해지고 있었다. 또한 신선루에서 일하는 점원들이 모 두 여인(女人), 그것도 꽃같이 아름다운 미녀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상냥할 뿐더러 그녀들이 요리하고 내어놓는 회맛이나 술, 그리고 기타 안주등의 맛은 황제가 부러워할 정도 로 일품이었다. 그러니 어찌 신선루가 항상 손님들로 초만원을 이루지 않겠는 가? x x x 신선루의 한 자리,바로 호반을 내려볼 수 있는 창가에 마련돤 특석이었다. 그곳에 두 명의 노인이 앉아 술을 들며 담소하고 있 다. 나이는 모두 오십대 가량에 얼굴에는 화색(和色)이 감돌았다. 그들이 시킨 요리는 가히 최고급 요리로써 웬만한 부호 아니면 들 염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비싼 요리였다. 금포(金袍)를 입은 뚱뚱한 노인, 이 근방에서 그들 모르는 자는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백만(金百萬) 이것이 그의 이름인자 아니지는 오직 그 본인만이 알고 있다. 다만 사람들은 모두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 이유는 그가 강서 제 일의 거부(巨富)였기 때문이다. 그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 역시 없다. 그의 상권(商權)은 그가 사는 남창성은 물론 강 남 전역에 뻗치고 있어 상계의 거목으로 통했다. 그가 사는 만금 산장(萬金山莊)은 그 크기와 화려함에 있어 만력제가 사는 자금성 과 비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한 예로 얼마나 넓은지 처음 가 는 사람이 길을 잘못 들면 하루 동안을 헤매도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한편, 만금 장주 금백만의 맞은편에 앉은 노인을 일신에 화복 (華服)을 입은 청수하게 생긴 노인이었다. 턱에는 멋진 수염이 가 슴까지 늘어져 있었는데 윤기가 감도는 흑염이었다. 눈은 어린 아 이의 눈처럼 맑았다. 화복 노인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의 음식맛은 상당히 좋군. 힛힛... 자네가 왜 딴곳을 마다 하고 굳이 이곳으로 오자고 했는지 이제야 알만하네" 그 말에 금백만 노인은 미소지었다. "강북(江北)의 음식맛이 어찌 강남을 따르겠는가? 특히 이 신선 루는 강남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네" 화복노인은 술 한 잔을 들이키며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음식맛도 음식 맛이지만 이곳의 풍취는 정말 놀랍군?" 그는 정말 감탄한 듯이 호수의 푸른 수면으로 맑은 눈길을 돌 렸다. "호수 위에다 이런 것을 만들 이 신설루의 주인의 안목에는 정 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군 그래!" 이어 그는 분주히 좌석 사이를 오가고 있는 날씬한 몸매의 미 녀 점원들을 의미깊은 눈으로 쫓으며 다시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게다가 강남의 미인은 모두 이곳에 있는 것 같단 말이 야." 그 말에 금백만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이 사람아! 그럼 말 하지 말게. 강북(江北)의 절세 미 녀를 일곱 명이나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또 미인 타령인가?" 화복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느긋이 헛기침 했다. "험! 세상에 미인이 많다고 싫어하는 남자를 보았나? 그런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위선자이네. 헛헛헛, 미인은 그저 다다익선(多多 益善)인 법이네" "핫핫핫핫! 이 사람, 여전한 호색가구먼......." "헛헛헛, 아직 늙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두 오십대의 노인은 무척 우의가 깊은 사이인 듯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정경이 었다. 이때, 한쪽으로부터 한 명의 미녀(美女)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 다. 취의미녀(翠衣美女), 언뜻 보아도 눈이 멀 정도의 아찔한 미색 의 여인이었다. 화복노인은 그녀를 본 순간 마시던 술잔을 멈춘 채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찔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취의미녀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경세절륜한 것이었다. 일신에 는 고귀함과 요염함이 절묘한 배합을 이루고 있으며 고운 피부는 희다못해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며 맑은 두 눈은 파양호 전체를 축소해 놓은 듯 보는 이의 넋을 빼고 혼백을 사로잡으며 눈이 멀 게 할 정도의 미녀였기 때문이었다. 취록색 궁장의에는 눈부신 금 은 보석의 장식이 달려 걸을 때마다 맑고 청아한 소리가 더욱 사 람의 넋을 잃게 만들었다. 틀어올린 머리에는 화전, 취요, 금작(金 雀), 옥소두 등의 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신구들이 마침 서역 으로 기우는 햇살을 받아 온통 영롱휘황한 광휘를 두르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나타나자 떠들석 하던 신선부가 갑자기 조용해 졌다. 손님들은 저마다 술잔을 멈춘 채, 또는 대화하던 만 채 넋을 잃고 그녀를 응시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취의 미녀는 손님들 사이를 걸 으며 가볍게 아는 사람들에게 인사말과 눈웃음을 건내고 있었다. 인사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희색이 만면해졌다. 이윽고, 취의미녀는 두 노인이 있는 곳까지 다가오더니 금백만 을 향해 나긋이 고개를 숙이더니 미소지으며 입술을 열었다. "금대인(金大人)께서 오셨군요." 저자세도, 그렇다고 오만하지도 않은 인사였다. 금백만은 너털 웃음을 치며 찬사를 늘어 놓았다. "헛헛! 취랑(翠娘)의 아름다움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 같구료. 어떻소? 술 한잔 받지 않겠소?" 그 말에 취랑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만 들어도 취하는 듯하옵니다. 제가 어르신의 잔을 들었 다고 여기시고 계속 두 분이 즐기시기 바라옵니다." 이어 그녀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 나긋이 묵례를 한 후 다시 걸 어갔다. 딸랑... 딸랑... 가벼운 옥장신구가 부딪치는 교음은 흡사 선녀의 비파음을 듣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저만치 떨어지자 그제서야 화복 노인은 한숨을 들릭락 말락하게 내쉬며 말했다. "허어, 굉장한 미인이군!" 금백만은 빙긋 웃었다. "그렇네. 강남에서 취랑보다 더 아름다운 미녀는 없을 것이야." 화복 노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북에도 없네. 그것은 내가 보증하지. 내 생전 저런 미인은 처음일세." 금백만은 헛움음 쳤다. "헛헛, 이 친구 단단히 반한 모양이군." 화복노인은 문득 진지하게 물었다. "대체 저 놀라운 미인은 누군가?" 금백만은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신선루를 경영하는 여인(女人)이네." 그말에 화복 노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곳의 주인이란 말인가?" 허나 금백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주인은 따로 있네. 다만 경영을 맡고 있을 뿐이지." 화복 노인의 눈에 이체가 일어났다. "결혼은 했나?" 금백만은 실소를 지었다. "이 친구야! 공연히 엉뚱한 마음 품지 말게나. 자, 술이나 들게. 자네가 전재산을 몽땅 준다해도 따르기는커녕 눈하나 깜박 않을 영인이니까 말이야!" 화복노인의 얼굴에 언뜻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후후후,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군." "그렇네. 솔직이 말해 세상에 황금으로 하지 못할 일이 무어가 있겠나?" 금백만은 술잔을 쭉 들이켜며 탄식하듯 말했다. "황금으로 귀신까지도 부릴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랑까지 살수는 있겠나?" 흠짓하는 표정의 화복노인은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반문했다. "그렇다면?" "임자가 있지. 그녀가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네." "그게 누구가?" 금백만은 신선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 신선루의 주인일세/" "신설루 주인?" "그렇네. 그는 이제 이십 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의 약관 청년 일세. 그리고 풍류(風流)를 아는 아주 멋진 청년이지." "겨우 약관의?" "훗훗, 끝까지 들어 보게나. 그의 부친은 과거 상당한 거부였지. 허나 부친이 죽은 후 바로 그 청년이 이 신선루를 지어 경영하고 있네." "!" "뿐만 아니라 이 신선루 외에도 남창성 내에 상당히 큰 몇 개 의 주루(酒樓)와 고서점(古書店), 전장(錢莊), 비단 포목점, 그리고 골동품점까지 경영하고 있는 상술(商術)의 젊은 귀재(鬼才)일세." "허." 화복 노인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헛헛헛, 그는 이 금백만까지 압박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 이야. 그의 사업수완은 상술의 귀재란 칭호를 들을만큼 놀랍단 말 일세." 화복노인은 더욱 궁금증이 치미는 듯 물었다. "그 젊은 친구의 이름이 무엇인가?" "장천린(蔣天 )이라고 하지." "장(藏)...천(天)...린( )...!" x x x 벽옥(碧玉)빛 술이 담긴 옥배는 눈처럼 희고 투명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대의 진품(眞品)임이 분명하다. 허나, 정작 그 옥배를 잡은 손(手)은 그보다 더욱 희고 깨끗했다. 너무도 희고 투명하여 언뜻 여인의 손을 연상케 했으나, 그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 다운 손의 주인은 분명 남자였다. 미인의 섬섬옥수가 무색해질 조 각 같은 손의 소유자, 그는 일신에 티끌 한점 묻지 않은 옥색(玉 色)의 유삼(儒衫)을 입은 청년이었다. 이마에는 단정한 유건(儒巾) 을 두렀으며 허리에는 금(金)으로 장식한 요대(腰帶)를 맸다. 황금 요대만 하더라도 가히 수만금의 가치가 있을 만큼 진귀한 것이었 다. 허나, 정작 유삼 청년의 용모를 본다면 그러한 것은 그저 부 속품에 불과했다. 반듯한 이마는 단아하고 넓은 기품을 느끼게 했 고, 눈썹(眉), 검미(劍眉)라는 표현이 그지없이 어울릴 정도로 짙 고 날카롭게 귀 밑까지 뻗쳐 있었다. 두 눈(眼)은 흡사 두 개의 보 석을 박은 듯 신비무쌍했으며, 코는 우뚝 솟아 힘찬 기질과 그 유 려한 선은 풍유미마저 느끼게 했다. 입술은 붉고 육감적이어서 여인의 그것과 같았으나 그래도 어 딘가 모르게 굽히지 않는 의지(意志)를 담은 듯 난카로운 선을 긋 고 있었다. 미청년(美靑年), 그러나 체구가 당당했다. 훤칠한 칠척 (七尺)을 바라보는 키에 딱 벌어진 어깨가 그가 사나이 중의 사나 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청년, 그가 바로 신선루(神仙樓)를 지은 장본인이자 주인이었다. 장천린(蔣天 )......!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남창(南昌)의 사람이 아니거나 바보천치일 것이다. 그는 지금 신선루에 달린 한 채의 누각에서 파양호에 지는 석양(夕陽)을 바라보며 홀로 술을 들고 있었다. 그 의 아름다운 눈에 석양이 물들어 더욱 신비한 느낌을 준다. 석양 빗을 받고 창가에 선 채 파양호를 내려보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 가 하나의 예술품인 듯....... 손에 가볍게 쥔 옥배에는 벽옥색 술이 반ㅉ 남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혹 당대의 명싯구(名詩句)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노을은 점점 짙어져 파양호로 온통 물들이고 청년 장천린의 모 습은 더욱 신비한 광휘에 감싸였다. 헌데 문득, 문(門)이 살며시 열렸다. 이어 취의궁장을 입은 미녀가 사뿐히 들어섰다. 바로 신 선루를 경영하는 미녀 취랑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취옥교(翠玉嬌), 그녀가 신선루에 들어온 것은 이년 전이었다. 그녀가 어디서 왔는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오직 장천린만이 그녀의 본명 이 취옥교이며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 뿐이었다. 신비의 미녀 취옥교, 그녀는 아름다운 눈에 어떤 동경을 담은 채 여전히 호반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장천린의 모습을 바라 본다. 이때, 문득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陽湖邊一色低 黃茅 裏 鳴 丈夫飄落今如此 一曲長歌楚水酉 ...... 파양호변( 陽湖邊)에 날이 저물어 풀섶엔 자고새 설리도 운다. 장부(丈夫)의 뜬 마음 둘 곳도 없나니, 한곡조 길게 빼어 노래 부를까 하노라. 시음이 끝나자 취옥교는 도취된 듯 눈빛이 몽롱해 졌다. 그야 말로 그윽한 정취와 사나이의 기개가 어울린 노래가 아닌가? 그녀는 살며시 다가가더니 장천린의 어께에 섬섬옥수를 가볍게 얹었다. 그러자 비로소 인기척을 느낀 듯 장천린은 고개를 돌렸 다. 그의 영준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언제왔소, 취누이?" "후훗. 정말 뜻밖이군요. 제가 오는 것도 모르고 낭만에 젖어 있다니요?"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석양을 보다가 흥취가 나도 모르게 솟아 올랐소." 취옥교는 싱긋 웃으며 그의 몸에 바짝 기대며 한 손을 뻗어 장 천린이 들고 있던 옥배를 빼앗았다. "정말 당신답지 않은 낭만적인 말이군요." 그 말에 장천린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후후. 취누이는 그럼 내가 낭만도 모르는 삭막한 사람으로 알 고 있었소? 그것 참 실망인 걸." "호호호!" 눈부신 웃음이었다. 취옥교는 아찔할 정도의 교소를 흘리더니 빼앗은 술잔을 고혹 적인 입술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었다. 그로자 장천린은 염려스ㄹ다는 듯 주의를 준다. "많이 마시지 마시오, 취누이. 그것은 사천(四川)특산의 천일취 (千日醉)요. 한 번 취하면 최소한 사흘은 잔다는 독주요." 그 말에 취옥교는 요염한 눈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제가 취할까좌 걱정이세요?"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하기사 미녀의 취한 모습도 아름답기는 하겠군." "호호호호!" 취옥교는 또다시 교소를 터뜨리며 천일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그녀의 뺨은 금시 발그레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술탓인가? 아니면 석양 탓일까? 그녀의 그런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가히 선정적이기까지 했다. "천린, 당신 앞에서만은 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장천린은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후회할 것이오. 남자는 여자의 허를 보면 때때로 음흉한 늑대 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요." 취옥교는 까르르 은방울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늑대가 되면 어떻게 행동하죠?" 장천린은 씩 웃으며 말했다. "잠자는 미녀를 그냉 둘리 가 있겠소? 냉큼......." 취옥교는 목이 타는지 다시 한모금을 삼켰다. "냉큼 어떻게 한다는 거죠?" "잡아먹어 버리지." 그 말에 그녀의 고혹적인 눈에 서 아름다운 광채가 솟아나왓다. "후훗... 늑대에게 잡아먹혀도 취하고 싶은데 어쩌죠?" 유혹인가? 그녀의 갸름한 턱이 약간 올라간채 열기를 발산하며 장천린을 올려다 본다. "하하하핫!" 문득 장천린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취옥교는 남은 술을 모두 마셨다. 이어 벽옥잔을 한쪽 탁자에 내려 놓고는 빙글 돌아 섰다. 순간, 징천린은 흠칫했다. 뜻밖에도 그녀가 갑자기 두 소늘 뻗어올려 그의 목을 휘어감은 것이었다. 목에 매달리다시피 끌어 안자 그녀의 얼굴은 장천린의 얼굴에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그녀 의 몸에서는 강렬한 꽃향기가 풍겼다. 그녀는 입술을 장천린의 귓 가에 대다시피하여 속삭였디. "당신은 아직 제말에 대답하지 않았어요." 장천린은 코 끝을 간지럽히는 그녀의 체향에 신비로운 표정을 지었다. "흠, 냄새가 무척 좋군." "호호, 다행이어요." 취옥교는 더욱 그의 몸에 자신의 교구를 밀착시켰다. 장천린은 무득 그녀의 붉게 타오르는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허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어조였다. "옥교, 신선루에는 더 이상 나가지 마시오." "왜죠?" 장처린은 그녀의 뺨의 감촉이 손 끝에 묻어날 듯 하다는 생각 을 하며 담담히 말했다. "나는 당신이 다름 사람 ㅇ에서 웃는 모습이 별로 좋지 않거 든." 순간 취옥교의 눈이 빛났다, "왜 그곳이 싫을까요? 약간 애교띤 음성이었다. 장천린은 취옥교의 수려한 이마에 가 볍게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아마 당신을 사랑하기 ㄸ문인 것 같소." "!" 그말에 취옥교는 잠시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장천린을 응시했다. 서서히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허나 그와는 반대로 그녀의 호수같이 깊은 눈에서는 뽀오얀 안개가 서리는 것 이 아닌가? 그녀는 문득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옥교가...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는 걸요." 장천린은 그녀의 오똑한 코에 입맞춤 했다. "그것 말고 또 있소." 그말에 취옥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또 뭐죠?" "그건 말이오." 장천린은 그녀의 한줌밖에 되지 않는 세류요를 한 손으로 감으 려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는 것이오." 순간 그녀의 교구가 파르를 떨리는 것을 그는 역력히 느낄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기쁨이며 섬광처럼 그녀의 영혼이 희열에 잠기는 순간이었다. "청혼(請婚)... 하시는 건가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장천린은 담담히, 그러나 확신있게 대답했 다. "그렇소." 최옥교는 망연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문득 안개가 짙어지더니 눈물이 고였다. 허나 얼굴은 웃고 있었 다. "기쁘... 군요!" 그녀의 눈망울이 온통 비에 젖는다. "옥교는 정말... 이 순간이 영원히 멈춰 버리기를 바랄만큼 기뻐 요." 장천린은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사랑하오." 그리고 그가 막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려는 순간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왜...우는 것이오?" 그가 흠짓하며 묻자 그녀는 급히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활짝 웃었다. "너무너무 기쁘기 때문일 거예요." "허... 기뻐서 운다?" 취옥교는 문득 그의 손을 이끌었다. "만져 보세요, 옥교의 작은 가슴은 지금 터질 듯이 뛰고 있어 요." 허나, 장천린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옥교, 솔직이 말하시오." "?" "지금 당신의 눈에는 순수한 기쁨이 아닌 슬픔이 깃들어 있소." "!" 장천린은 한숨을 쉬었다. "나의 청혼이 무례했다면 미안하오." 순간 취옥교의 교구가 바르르 떨었다. 마치 풀잎처럼.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녀는 강하게 도리질을 하더니 애타게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옥교는 당신을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사랑 한단 말이예요." 장천린은 다만 묵묵히 그녀를 볼 뿐이었다. "결코 거짓이 아니예요. 정말이예요. 천린..., 흑."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취옥교, 순간 장천린의 철석심은 녹아 버렸다. 그는 한숨을 쉬며 부드럽게 말했다. "울지 마시오. 옥교!"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서서 히 아래로 내려가더니 마침내 오똑한 코를 스쳐 취옥교의 꽃잎 같은 입술을 덮었다. 순간 취옥교는 눈을 꼭 감은채 바르르 떨었다. 입맞춤..., 황홀하고 짜릿한 청춘(靑春)의 문이 열리는 순간 자신 도 모르게 취옥교는 두 손으로 사나이의 목을 꼭 끌어 안으며 이 술을 벌리고 있었다. 그런체로. 두 남녀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 동안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 천린(天 ), 당신은 저의 마음을 모른답니다..., 제가 당신을 얼 마나 사랑하는지를..., 당신의 청혼에 저의 영혼이 온통 녹을 듯하 여지는 것을..., 하나..., 하나...말이죠. 저는 결코... 당신과 어울릴 수 없는 몸이랍니다. 당신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몸... 평범 하게 당신의 아내가 되어서는 안되는 걸요... 천린(天 ), 허나 당 신을 사항하는 마음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거예요... 천린....... 정천린은 길고 긴 입맞춤을 떼며 문득 미소지었다. "옥교, 당신의 입술에서는 장미향이 나는군." 그 말에 취옥교의 얼굴은 홍조가 어렸다. 허나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당신만을 위한 향기가 될 거예요." 장천린은 문득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장천린은 그녀의 허리에 서 가슴으로 손을 옮겼다. 뭉클한 가슴을 그의 손은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음." 취옥교는 그의 손길이 닿자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신음을 흘렸 다. "당신을 내게 보내 준 것은 하늘의 축복이오." 장천린의 말에 취옥교는 그의 목을 끌어 안으며 입술을 마구 비벼댔다. "옥교도 당신을 만나게 해준 신에게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옥교!"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부딪쳤다. 이번에는 더욱 뜨겁고 강하게....... 입술과 입술이 벌어지고 뜨거운 입김이 오고 갔다. 순간 여인 의 몸에서는 더욱 달콤한 장미향이 풍겼고 장천린의 집요한 공세 (?)가 그녀의 입술 깊숙이 유영했다. ....... 뜨거운 입술이 살포시 감은 눈두덩을 지나고... 부풀어 터질 듯 한 뺨에서 노닐다가 학처럼 우아하게 빠진 목을 ㅎ고... 그리 고....... "아!" 여인의 입술이 꽃잎처럼 열리며 짤막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어 느 덧 여인의 몸은 활처럼 젖혀졌다. 사나이의 뜨거운 욕망의 손 (手)은 그녀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젖가슴, 조금도 쳐지지 않은 젖가슴은 팽팽했으며 윤기가 흘렀 다. 그 정상에 자리한 연분홍빛 돌기는 아직껏 한 번도 타인의 손 길을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 연분홍 돌기를 조각같이 섬세한 사 내의 손가락이 애무한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한지 이윽고 그의 타 는 듯한 입술이 그곳을 마침내 점령해 버린다. "아!" 여인은 달뜬 신음을 발하며 해파리처럼 교구를 늘어뜨렸다. 상 의가 벗겨지고 어느 덧 그녀의 몸에서 선녀의 날개 같은 옷자락 이 소리없이 흘러 내렸다. 노을,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여체의 관능적인 요소에 스며들어 황홀한 그늘을 이루고 그곳으로 사나이의 욕망은 서서히 접근하 기 시작했다. "사랑하오." 장천린은 취옥교의 나신이 된 몸을 안고 침상에 눕혔다. 취옥 교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도 갈망의 빛이 떠올라 있었 다. "저도...요." 이윽고 장천린은 자신의 옷을 벗었다. 노을이 사면으로 비쳐드 는 누각에 그의 우뚝 선 육체는 마치 하나의 탑같이 훌륭했다. 이 윽고 장천린은 알몸이 되자 침상에 올랐다. 취옥교는 눈을 감고 그의 탄탄한 가슴 속으로 파고 들었다. 여(女)와 남(男)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무언의 합의로 그들은 뜨겁게 서로를 요구하고 응했다. 취옥교는 성숙한 여인이었다. 결코 아무 곳에서 무작정 몸을 사리거나 북그러워 하지 않았다. 그녀는 태워야 할 때를 알고 있 었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도. "옥교." "아아... 천린." 두 남녀의 몸이 펄펄 끓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렬하게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석양(夕陽)은 절정의 황홀한 잔관을 두 남녀의 육체 위로 쏟아부었고 마침내 한치의 틈도 없이 결합 된 두 육체는 희열과 고통, 그리고 환희로 범벅이 된 채 떨었다. - 사랑해요. 천린...,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허나... 이 작 은 가슴을 항상 스치는 불안(不安)은 무엇인가요? 마치 깨지기 쉬 운 유리그릇인 양 불안한 것은... 당신이 없는 밤이면 항시 배개깃 이 젖는 애달픔속에 그 불안한 예감을 지우려 몸부림 치죠. 사랑 해요, 천린, 이것만은 진심이예요. 설사 우리가 어떤 불가항력 속 에 갈라진다 해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거예요. 사랑합니다. 천린. 노을을 졌다. 파양호반에 어둠이 깃들었다. 누각의 창문은 아직 열려져 있었으나 불은 좀체로 켜지지 않았 다. 그런 채로 밤이 이슥하고 다시 새벽이 올 때까지도 불은 켜지 지 않았다. 굳이 불을 켤 필요가 있었을까? 第 2 章 寒梅雪鳳, 깨어지는 사랑 새벽녘의 공기가 열린 누각의 창으로부터 흘러들어 온다. 차고 맑은 공기였다. 침상 위, 장천린과 취옥교가 나란히 누워있다. "옥교, 당신을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오?" 취옥교는 장천린의 가슴에 안겨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이불 밖으로 살짝 드러난 매끄러운 그녀의 어깨 곡선은 아름 답기 그지 없었다. 또한 장천린의 단단한 가슴에 눌려 약간 옆으 로 삐져나온 뽀얀 젖가슴의 일부가 몹시도 육감적인 느낌을 준다. 취옥교는 자언린의 말에 그저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 나 곧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장천린의 눈짓에 교태의 미소를 흘 렸다. "후훗...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난 날을 잊을 리가 있나요?"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삼년 전 만가산(萬家山)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던 나는 눈속에 서 당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랬지." 그는 그 때를 회상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처음에는 동사(凍死)한 시체인 줄 알았소." 취옥교는 생긋 웃었다. "당연하지요. 그 당시 저는 극심한 상처를 입어 거의 숨이 끊어 질 지경이었으니까요." "하하 나도 당신 가슴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무림인들끼 리 싸우다 죽은 것으로 알고 마음이 언짢아져 그냥 가려고 했지." 이어 그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다 당신의 아름다움에 놀라 당신의 상세를 살피게 된 것 이지." 취옥교는 코웃음 쳤다. "흥! 그럼 제가 못생긴 추녀였다면 꼼짝없이 죽었겠군요?" 장천린은 문득 손을 뻗어 그녀의 젖가슴을 가볍게 움켜쥐듯 만 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어쨌든 당신은 살아나지 않았소?" 취옥교는 가볍게 눈을 찡그렸다. "아파요......." "응? 어디가?" 짐짓 모른 척하며 장천린은 더욱 움켜쥔 젖가슴에서 젖꼭지를 가볍게 비틀었다. "음... 못써요." 취옥교는 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렸다. "하하하하." 장천린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젖가슴을 내려 보았다. 지난 밤의 격렬한 사랑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티없이 곱던 잦가슴 언저리에 군데군데 붉은 흔적이 나 있었다. 그는 혀를 찼다. "쯧쯧 사랑하는 님의 가슴이 멍들었군." "정말 악당이군요!" 취옥교는 얼굴이 빨개져 이불을 그만 얼굴까지 끌어올려 덮어 버렸다. 장천린은 짓궂체 말했다. "어디 그게 내 잘못이오? 나 역시 등이 찢어진 틋 아프단 말이 오." 정말 그는 아픈 듯 인상을 썼다. "어머!" 취옥교는 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그의 가슴을 힘껏 꼬집었다. "아야!" "정말 계속 그럴 거예요?" "하하하하!" 장천린은 그녀의 둥그랗고 탐스러운 둔부를 쓰다듬으며 너털웃 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그는 웃음을 그치며 짐짓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옥교." "?" "삼년 전 내가 당신의 상처를 치료할 때 당신 가슴에 꽂힌 비 수를 뽑으니까 당신이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취옥교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뭐라고... 그랬죠?" 장천린은 짖궂게 웃었다. "아파요. 그랬지 지금처럼 말이오." 순간 취옥교의 얼굴은 그만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용서할 수 없... 음?" 하나 그녀는 채 항의(?)를 하기도 전에 그만 도중에서 말을 끊 고 말았다. 장천린이 그녀의 입술을 덮어버린 것이었다.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녀가 오히려 더 적극적이 되었다. 거부하는 척하다가 오히려 그녀쪽에서 입술을 벌리며 장천린의 입술 깊숙이로 헤엄치듯 들어갔다. 장천린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더니 자세를 바꾸었다. 그 러자 자세가 기묘하게 되었다. 취옥교가 그의 위에 오르는 자세가 된 것이었다. 취옥교는 그의 건장한 몸 위에 엎드린 채 싫지는 않 은 듯 곱게 눈을 흘겼다. "음탕한 사람." 하나 곧 그녀쪽에서 장천린의 입술을 덮으며 손을 움직이기 시 작했다. 그녀의 손길은 섬세하고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이미 체득 한 장천린의 구석구석을 지나가는 그녀의 솜씨는 아주 훌륭하고 농염한 것이었다. 두사람의 젊은 육체는 또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새벽의 찬 공기도 아랑곳 없이 누각의 공기는 뜨겁게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더욱더 농밀하고 능숙한 두사람의 애정 행 위는 서로를 활활 불사르고 있었다. 어느덧 파양호반에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비출 때까지....... x x x 다시 또 황혼(黃昏)이 졌다. 어둠이 파양호변을 감쌌다. 누각의 문이 열기고 일남일녀가 걸어나왔다. 신선루의 젊은 주인 장천린 과 그의 아내가 된 취옥교였다. 하루 종일 누각에 틀어박혀 있던 탓인지 두사람의 모습은 약간 달라 보였다. 달콤한 피곤이라 할 까? 특히나 취옥교의 얼굴은 더욱 그런 흔적이 역력했다. 하나 더 욱 성숙하고 완미(完美)해진 모습은 가히 절륜했다. 장천린은 누 각 아래에 매어있는 백마(白馬)의 고삐를 풀었다. "옥교, 그럼 남창성에 가서 장부를 정리한 후 곧 돌아오겠소." 취옥교는 약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이제 곧 날이 저물 텐데 내일 아침 가시는 것이 어떨까요?" 장천린은 듬직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시오. 한시진이면 넉넉히 도착할 거리가 아니오?" 그는 눈을 찡긋하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 어제 저녁에 출발해야 하는 것인데 당신 때문에 늦은 것 이오." 그 말에 취옥교의 얼굴에는 홍조가 번졌다. "흥... 제 핑계인가요?" "하하하, 하긴 내가 좋아서 늦었으니 고생해도 할 말이 없소." 이어 그는 마상(馬上)에 올랐다. "자 모레 다시 들르겠소." 그는 마상에서 허리를 굽혀 취옥교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 었다. "모레 올 때는 당신을 위해 멋진 선물을 가져 오겠소. 하하하." 그는 호탕한 웃음과 동시에 박차를 가했다. 히히히힝....... 백마는 앞발을 번쩍 들었다가 곧 질풍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조심... 하세요. 천린." "걱정 마시오, 옥교." 말이 끝났을 때는 이미 말과 사람은 저만큼 파양호변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어둠이 곧 시야를 가리웠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취옥교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곧 몸을 돌려 신선루로 돌어갔다. 신선루에 는 늦은 시각이라 손님이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탁자와 의 사 등속도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문득 그것을 보면서 취옥교는 공허해지는 기분을 느겼다. 장천 린, 그가 곁에 없기만 하면 그년는 늘상 공허한 기분이 되곤 했 다. 결국 그녀는 신선루를 잠시 둘려본 후 발길을 돌려 자신의 방 으로 돌아갔다. 바로 장천리과 하루 밤과 낮을 함께 보냈던 누상 의 방이었다. 텅빈 방, 취옥교는 스스로 차(茶)를 끓여 잔에 부은 후 탁자 앞 에 앉았다. 상념에 젖었는가? 찻잔의 차는 어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는 데도 그녀는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도저히 홀로 차마실 기분이 나지 않은 것일까? 문득 몸을 일으킨 그녀는 침상에 걸터 앉는다. 그러다 문득 침 상에 엎드리더니 그녀는 이불자락을 끌어 코에 댔다. 장천린과 뜨 거웠던 순간이 남긴 채취를 마시려는 듯....... 한참 동안이나 코에 이불을 대고 있던 그녀는 이윽고 한숨을 불어냈다. 한데 바로 그때 였다. 홀연히 여인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보군요, 언니." 순간, 취옥교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 몸을 일으키며 돌 아섰다. 언제 나타났는가? 창가에 한 명이 서 있었다. 미소녀(美少女), 일신에 자의(紫衣)를 입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 의 미소녀였다. 백설 같은 피부가 특히 자삼과 대조적으로 선명한 인상을 주었다. 하나 싸늘한 표정과 조각 같은 얼굴은 마치 트명 하고 냉랭한 얼음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녀와 취옥교는 모두 절세 미녀였으나 두 사람은 큰 대조를 이루었다. 취옥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 사매." 자의 미소녀는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의 얇은 입술에 가느다람 미소가 어렸다. "삼 년 만이군요, 언니." 감정이 배어있지 않은 너무나 냉연한 음성에 취옥교는 망연자 실해졌다. "그...렇구나, 벌써... 삼년이나 되었구나." "왜 그 동안 저에게 한 번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죠?" 취옥교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자의 소녀는 추궁하듯 말했다. "설마 언니는 죽음을 가장하여 스스로의 존재를 영원히 은폐시 키려 한 것은 아니겠지요?" "나... 나는." 또다시 취옥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때 언니를 상처 입혔던 냉혈팔숙(冷血八宿)은 그 동안 내가 모두 처치했어요." 자의 소녀의 또박또박한 음성에는 한기가 배어 있어 섬뜩한 느 낌이 들게 했다. 그녀는 취옥교를 정면으로 응사하며 말을 이었 다. "언니와 내가 사부님께 약속한 그 기간은 이제 채 보름도 남지 않았어요." 자의 소녀는 거듭 창백한 표정을 짓는 취옥교가 딱하다는 듯 비로소 표정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언니는 지금 환상을 꾸고 있어요, 언니가 마음만 먹으면 천하 (天下)의 그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서 가장 뛰어난 남자와 맺어질 수도 있어요." "나는." "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생명의 은인이라는 하나의 이 유 때문에 그에게 얽매이고 있는 거예요." 그 순간, "아니야!" 갑자기 취옥교는 강하게 부인했다. 이어 그녀는 절실한 어조로 말했다. "사매... 나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어." 그 말에 자의 소녀의 안색이 싸늘히 굳어졌다. "미... 미쳤군요." 이어 그녀는 경멸하듯 잘라 말했다. "그 자의 외모의 그럴 듯함에만 홀려 겨우... 한낱 장삿꾼에게 사랑을 느끼다니... 실망이군요!" "그는 결코." "듣기 싫어요. 언니, 정신 좀 차리세요 사부님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아아." 취옥교는 절망의 탄식을 발했다. "사부님은 용서를 모르는 분이예요. 그분은 공(公)과 사(私)를 철저히 구분하는 분이예요. 언니가 돌아기자 않는다면 언니는 물 론 그 장천린인가 뭔가하는 사내도 죽음을 면치 못할 거예요." 자의 소녀는 약간 늦춘 음성으로 말했다. "언니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에게서 스스로 벗어나 는 게 도리가 아닐까요?" 취옥교의 전신에 경련이 일어났다. 자의 소녀는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잡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물론... 처음에는 고통스럽겠지만 차차 상처는 아물게 될 거예 요." 취옥교의 얼굴에 점차 허탈한 기운이 어렸다. 어려움을 절감했 기 때문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죽어가는 것을 생각 하자 그녀의 가슴은 그지없이 낙망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졌다. "잘 생각해 봐요. 언니. 그는 그대로가 좋아요. 만일 언니와의 한때 사랑의 불장난으로 그의 목숨이 달아난다면 얼마나 어리석 은 것인가요?" "한때... 불장난이라고?" 취옥교의 얼굴에 넋이 빠닌 듯했다. "언니와 그 자의 세계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어요. 그건 하늘 (天)과 땅(地)만큼의 차이에요." "그래... 그건." "그것 보세요. 언니는 현명해요. 상처를 딛고 다시 출발할 수 있어요. 용기를 내요." 서서히 취옥교의 얼굴이 쓸쓸해 졌다. 자의 소녀는 문득 음성 을 낮추어 말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철솔선생(鐵率先生) 왕문헌(王文軒)의 위 치도 이미 파악했어요." 그 말에 취옥교는 흠칫했다. "호호... 놀랍게도 그 자는 이곳 남창성에 숨어 있었어요." "이곳... 에?" "바로 금백만(金百萬)이란 강남 제일의 거부로 화해서 말이에 요." 순간 취옥교는 내심 자신도 모르게 부르짓고 말았다. '금백만!' 그녀의 놀라움은 정녕 이루 말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 금대인(金大人)이... 철솔선생 왕문헌이었단 말인가?' 충격이었다. 그 유쾌하고 부드러우며 항상 인심을 잘 쓰는 강 남 제일의 거상 금백만 노인, 그가 바로 자신의 사부가 죽이라고 명령한 무림(武林)의 신비기인(神秘奇人) 철솔선생 왕문헌이었다 니! 취옥교가 받은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자의 소녀는 냉랭하 게 말했다. "냉혈팔숙은 모두 제거 했으니 이제 그 자만 죽이면 우리는 사 부에게 돌아갈 수 있어요." 촛불, 창문으로 흘러들어온 바람결에 촛불이 춤춘다. 그리고 흔 들거리는 촛불을 받아 흑백의 선명한 윤곽을 이룬 취옥교의 안색 은 창백해져 있다. 무서울 정도로. 그리고 그녀의 그토록 보석처럼 아릅답던 사랑의 눈동자도 총 기와 생기를 잃은 채 공허하고 쓸쓸하게 변했다. "저도 언니에게 무조건 강요하지는 않겠어요. 단." 자의 소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언니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사부님께 알 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취옥교는 멍하니 침상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를 자의 소녀는 계속 주시했다. 그녀의 내심을 탐지하려는 듯이. 하나 한참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하자 자의 소 년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해서 그 이지적이고 차갑던 언니가 이렇게 변한 거죠? 한매설봉(寒梅雪鳳) 취옥교란 존재는 대체 어디로 간거예 요?" 그녀의 음성은 격앙되어 있었다. 하나 취옥교는 여전히 말이 없다. 자의 소녀는 취후의 통첩인 양 야무지게 말했다. "내일 저녁... 이 신선루의 주인 장천린은 금백만... 아니 왕문헌 (王文軒)의 저택으로 초청되어 갈 거예요." 흠칫 놀라며 취옥교가 비로소 자의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왕문헌은 비록 무공이 극고무상하지만 장천린과 언니를 의심 하지 않고 있으니 그의 경계심도 반드시 허(虛)를 드러내게 될 거 예요." 미소녀는 일단 말을 털어놓자 또다시 냉랭해졌다. "언니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왕문헌을 제거할 수 있을 거예 요." 그녀는 곧 품속에서 하나의 목갑(木匣)을 꺼내어 취옥교에게 건 네 주었다. "내일 아침까지 남창성 입구에서 기다리겠어요." 자의 소녀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창 밖으로 걸어가며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잘 생각해 봐요. 언니." 스... 슷! 순간 그녀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꺼져버렸다. 그야 말로 비쾌무비한 신법이었다. 탄지지간(彈指之間)에 사라졌다고나 할까? 하나 그녀가 사라진 것은 아랑곳 없이 취옥교는 여전히 망연자 실한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하나 그녀의 빛을 잃은 눈동자 깊숙 한 곳에서는 쓰라린 고통의 얼룩이 번지고 있었으니....... ---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저 막연히... 한 가닥 기 대만 했을 뿐이죠... 우리의 사랑은... 너무도 어려운 운명(運命)이 얽힌 실타래였던 거예요... 아니면 잘 못 맺어진 매듭이었던가... 아아... 이제는 정녕 어찌할 도리가 없군요 신(神)이시여.. 취옥교의 눈에 눈물이 흘러 넘칠 듯 고였다. 그녀는 이불자락 을 움켜쥐며 내심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천린... 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을' 그녀의 시선이 무릎에 놓인 목갑에 가 멎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 '천린... 용서해 줘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목갑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둥글게 말려 있는 백색(白色)의 종잇장같이 ㅇ은 연검(軟劍)이 들어 있었 다. 창! 문득 그녀가 손에 쥐자 검신(劍身)이 떨쳐졌다. 그 순간 눈 부신 백광(白光)이 누각의 방을 온통 차가운 한기로 뒤덮었다. 손잡이는 상아(象牙)로 되어 있고 연검의 ㅇ은 검신에는 봉황의 문양이 새겨져 있어 일세의 보물 명검임을 알 수 있었다. 응....... 봉황검이 은은한 검명을 냈다. 마치... 오랜만에 세상 공 기를 접해 빨리 피를 적시고 싶다는 듯이. 뚝! 봉황검의 검신에 물방울이 피대시니 떨어졌다. 취옥교의 눈 물이었다. '안년... 천린... 이제 우리는 영원히 이별입니다.' 그녀의 내부에서 고통스럽게 울린 중얼거림. 그것은 운명(運命) 의 결단이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始作)이었을까? 밤은 깊어 간다. 制 3 章 萬家山의 毒霧, 네 怪人들 산로(山路)를 말을 타고 달리는 일은 위험하다. 특히나 심야에 는 더욱 그렇다. 두두두. 만가산(萬家山)을 달리고 있는 일기인마(一騎人馬), 마상에는 장 천린이 고삐를 들어쥐고 있었다. 그는 지금 남창성(南昌城)으로가 는 중이었다. 파양호변의 신선루에서 남창성까지는 약 칠십여리 정도, 그러나 지금 그는 지름길로 가기위해 만가산을 넘는 험준한 산로를 택했다. 이 길로 가면 채 삼십여 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길을 많이 달려봤기에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익숙해져 있었다. x x x 이름모를 야조(夜鳥)의 울음소리가 칠흑의 신로를 음산하게 울 린다. 또한 짐승들의 포효소리가 심야의 공기를 공포스럽게 한다. 허나 장천린은 눈섭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백마에 올라탄 채 여유 만만이었다. 본래 그의 성품은 담 대했다. 도대체 그는 겁이라고는 모르는 사내였다. 게다가 그는 웬만한 장한 십여명 정도는 가볍게 때려눕힐 수 있는 호신무술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그의 기분은 오히려 유쾌했 다. 취옥교 생각을 하고 있기에. '올해가 가기 전에 반드시 옥교를 나의 아내로 만들 것이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평생 모아두신 그 보화를 풀어 나의 사업 을 본격적으로 확장해야 겠다.' 장천린, 그는 타고난 상술(商術)의 귀재(鬼才)다. 약관 나이에 그가 경영하는 모든 사업이 성공적으로 번창하고 있음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젊다. 그러기에 그의 가슴에는 원대한 야망이 숨쉬고 있 었다. '후후후... 강남은 물론 강북(江北)에도 상권(商權)을 뻗어 향후 십년 내로 중원 제일의 거부가 되리라.' 그의 생각은 가일층 전개되고 있었다. 험한 만가산을 달리면서 도 생각은 계속되고 있었다. '후훗... 뿐만 아니라 범선(帆船)을 타고 바다를 건너 저 머나먼 파자사국(波刺斯國:페르시아)이나 색목국(色目國)까지도 가보리라' 장천린의 두 눈에는 야심의 불꽃이 일어났다. '후후... 옥교와 나란히 그 모든 곳을 누비리라.' 취옥교를 생각하자 또다시 그의 가슴은 감미로운 달콤한 기분 이 되었다. 문득 그는 고개를 들어 야천을 응시했다. 하늘에는 초 생달이 걸려 있었다. 그는 미소 지었다. '옥교는 지금쯤 잠들었겠지.' 그는 초생달을 향해 중얼거렸다. '잘자시오. 나의 연인.' 따각... 따각.... 절묘한 산길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오직 말발굽 소리 뿐이었다. 장천린. "......." 그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는 말 달리는 속도를 벌써부 터 늦추고 있었다. 만가산 깊숙이 들어선 이후 그는 몇 가지 이상 한 점을 느겼기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이상한 것은 우선 아까부 터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직 사위는 괴괴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장천린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나 그는 천천히 말을 몰고 갔다. 그러다 문득, '옷!' 히히힝! 그렇다. 한구의 시체가 길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장천린은 시 체를 자세히 보다가 가슴이 섬뜩해져 그만 안색이 변했다. 끔찍했 다. 시체는 얼굴 반쪽이 동째로 날아간 처참한 형상 이었다. 흡사 거대한 도끼로 찍거나 괴수(怪獸)가 손으로 내려친 듯 참 혹하게 죽어 있었다. '으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가 축축히 젖는 것을 느꼈다. 실로 이런 무자비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이때 그는 전면을 응시하다가 다시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달빛 아래 흡사 안개(霧)와 같은 것이 뭉클뭉클 밀려오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짙은 회색(灰色)의 안개였다. 섬뜩하도록 기분이 나쁠 뿐 아니라 죽음의 느낌이 풍기는 안개 가 그를 향해 뭉클거리며 빌려오는 것이다. 그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말머리를 두드리며 앞으로 빨리 지나치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 쌔---액! 돌연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며 한 가닥 섬광처럼 검은 선이 뻗 더니 그의 허리를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헉!" 그것은 채찍이었다. 동시에 그가 미처 반항하고 어쩌고 할 틈 도 없이 강력한 힘으로 그를 끌어 올렸다. 그는 어이없이 허공으 로 붕 뜬채 어딘가로 끌려갔다. 마치 한 마리 물고기가 낚싯줄에 채이는 듯한 광경이었다. 쿵! 마침내 그는 숲속에 내동댕이 치듯 떨어졌다. "윽!" 온몸이 부서질 듯 격렬한 통증에 비명이 절로 나왔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의 손이 뻗더니 그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동시에, "움직이지 마라." 나직하지만 섬뜩하도록 스산한 음성이 바로 귓전을 울렸다. 하 나 그 말을 하지 않아도 장천린은 어차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를 잡은 손의 힘이 무쇠처럼 강하여 조금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 었다. 장천린은 눈동자를 돌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 한명의 괴인(怪 人)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하나 백발과 수염이 온통 얼굴 을 뒤덮고 있어 용모를 알 길이 없었다. 의복도 갈기갈기 찢어지 고 구멍이 뚫린 넘아였다. 한데,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부르스름한 광채를 발산 하고 있었다. 괴인은 그가 자신을 쳐다보자 비로소 손을 풀었다. 장천린은 급히 자세를 바꾸며 물었다. "노인장은 누군데 나를?" 하나 괴노인은 싸늘하게 말했다. "입 닥치고 저것이나 보아라." 장천린은 그말에 돌아보다가 그만 등골이 오싹해졌다. 바로 그 가 타고 온 백마가 쓰러져 있었다. 회색빛 안개가 백마를 휘감고 있었는데 안개에 닿은 부분이 그대로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 가? 백마는 처참한 비명를 질렀으나 순식간에 뼈만 남는 것이었다. '저... 저럴 수가.' 이때, 산길에 누워있던 시체 역시 녹아서 백골이 되어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공포스런 광경이었다. 이때 장천린은 옆에 서 괴노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미안하네, 황형(黃兄)... 자네의 시신조차도... 제대로 보존시켜 주지 못했으니." 그의 음성은 심한 자책과 비통으로 떨리고 있었다. 정천린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눈앞의 상황이 마치 악몽과 같아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은 것이다. 이때, 스스스. 회색빛 안개는 서서히 그 두사람이 있는 곳으로 밀려오기 시작 했다. 장천린은 섬뜩하여 말했다. "노인장, 어서 피해야." "떠들지 마라." 노인장은 그의 말을 묵살한 뒤 이를 부드득 갈았다. "당선종(唐先宗)... 그 놈이 아예 우리의 씨를 말리려고 작정을 했구나!" 이어 그는 품속에서 조그만 구슬(珠)을 꺼냈다. 우유빛 광택이 도는 구슬이었다. 그 순간 회색의 죽음의 안개가 마침내 그들이 있는 곳까지 도 달했다. 한데 정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회색 안개는 우유빛 구슬 주위에 접근을 못하고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오직 구슬 주위 사오 장 범위는 안개가 접근을 못하는 것이었 다. 장천린의 의혹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이때 문득 괴노인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장천린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장천린이라고 합니다." "나는 노명(盧明)이다." '노명?' 장천린으로서는 난생처음으로 듣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괴노인 노명은 그를 그 푸른 광채가 도는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어떻게 이 곳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너는 지독히도 재수가 없구나." "......?" "이산을 둘러싸고 있는 놈들은 너를 결코 살려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점점 괴이한 말이었다. 하나 장천린은 천성적으로 담대한 인물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진정되어 그는 담담히 말했다. "보아하니 노인장은 무림인 인 것 같소이다." "그렇다. 장가(蔣家)아이야." 장천린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 만가산에서 무림인들끼리 어떤 분쟁이 있 는 것 같군요." "맞다." "하나 나는 무림인 아니오. 그들이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를 죽 일 리가 없지 않소?" 그말에 괴노인은 듣기 거북한 괴소를 흘렸다. "흘흘흘... 꿈꾸지 마라, 애송아." "......." "놈들에게 어디 한 푼이라도 자비심이 있는 줄 아는냐? 그들은 단지 네가 이 산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죽일 이유가 된다고 믿고 있다."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데 그때, 휙! 휙! 돌연 파공성이 일더니 그들이 있는 곳으로 세가닥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모두 노인들이었다. 그 중 한 명은 늙은 가사장삼의 승(僧)이었고, 또 한명은 외팔 이 노인이었으며 마지막 노인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청 삼노인이었다. 그들은 떨어질 때 비틀거렸는데 모두 극심히 피곤 한 모습이었다. 노명은 급히 물었다. "어찌 되었소?" 노승ㅇ이 어두운 안색으로 합장불호했다. "아미타불..., 전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소이다. 빈승의 추측으로 보아 당선종의 무리들에 의해 모두 죽은 듯 하오." 그 옆의 외팔이 노인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육십칠명중 살아남은 사람은 우리 뿐인 것 같소." 노숭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황곤(黃坤) 대형은 어디있소?" 노명은 고소지었다. "죽었소. 철마왕(鐵魔王) 사진청(査進靑)에 의해서...... 당했소." "......!" "......." 모두들 침울한 안색을 지었다. 잠시 후 삼인 중 이제껏 말이 없던 창백한 안색의 청삼노인이 장천린을 가리키며 묻는다. "이 젊은이는 누구요?" 노명은 장천린을 주시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쩌면 이 청년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 될지도 모르겠소." 그말에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는 장천린조차도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노명은 진지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당선종은 우리 네명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소. 그리고 이 상태 에서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 북경(北京)까지 갈 확률은 거의 없소 이다. 또 설사 이곳을 벗어난다해도 놈들의 집요한 추격에 어찌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가 있겠소?" 청삼노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청년이 무슨 수로 이 곳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이오?" 노명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네명의 능력이 이 아이에게 집중된다면 최소한 오할의 확률은 있소. 게다가 놈들은 이 아이의 얼굴을 모르니 말이오." 그 말에 삼인은 흠칫했다. 이어 새삼스럽게 장천린을 훑어보았 다. 허나 정작 장천린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아 그저 하늘만 보고 있었다. 노명은 삼인에게 뭐라고 한동안 전음(傳音)을 했다. 한참 후, 외 팔이 노인이 냉소했다. "그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오. 게다가 이 젊은 친구를 어떻게 믿을 수있단 말이오?" 노명은 그를 설득하듯 말했다. "확률이 전혀 없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낫지않소? 물론... 어렵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 "......." 모두들 침중해졌다. 노명은 그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의 뜻은 어떻소?" 노승이 탄식하며 불호를 외운다. "아미타불, 어타피 우리 삼인은 체내에 당선종의 천리독무(千里 毒霧)의 독기가 퍼져서 세 시진을 버티지 못할 것 같소." 노승은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빈승은 노시주의 뜻을 따르겠소이다." 노명은 고개를 끄덕인 후 청삼노인을 바라보았다. "전형(典兄)의 뜻은?" 청삼노인도 창백한 얼굴에 고소를 지었다. "지금 심정으로야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소?" 노명은 이번에는 외팔이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외팔이 노 인은 씁쓸하게 탄식한다. "대체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소." 이어 체념한 듯 말했다. "노형 뜻대로 하시오. 따르겠소." 노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장천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모두 들었는가?" "들었소이다." "우리는 힘을 합해 최선을 다해 자네가 이 곳을 벗어나도록 해 주겠네." "......." "그대신 한통의 서찰을 북경(北京)까지 전달해 주어야 하네." 장천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뜻밖에도 거절 이었다. "나는 무림인이 아니오. 그럼므로 쓸데없이 무림의 은원관계에 휘말리고 싶지 않소이다." "......." 그 말에 사인은 모두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천만뜻 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장천린은 의연하게 말했다. "나는 나 혼자의 힘으로 이곳을 벗어나겠소이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나를 그들이 죽이리라고는 믿지않 소." 순간 노명의 눈에서 시퍼런 광채가 솟아나왔다. "흐흐흐! 생긴 모습은 계집처럼 생겨 유약하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법 뼈대가 굵은걸."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그저 일개 상인이오.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 관계치 않 소이다." 이어 그는 몸을 일으켰다. "흐흐... 놈! 네가 혼자서 저 닿기만 해도 녹아버리는 독무(毒霧) 를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여기느냐?" 노명의 말에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 순간 그는 검은 선이 자신 의 목을 향해 뻗어오는 것을 보았다. 노명의 채찍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윽!" 목이 화끈하며 숨통이 조여 들었다. 동시에 노명의 음침한 음 성이 귓전을 파고 들었다. "네놈이 제의를 거절한다면 아예 여기서 네놈의 목을 분질러 버리겠다." 살기가 물씬 풍기는 위협이었다. 장천린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렀다. 하나 목이 조여드는 고통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는 안 간힘을 다해 내뱉았다. "내...... 보기에는...... 당신들이 더 악인(惡人) 같구료......." 그 말에 노명의 두 눈에는 더욱 짙은 살광이 흘러 내렸다. 하나 장천린은 지지않고 두 눈을 부릅뜬채 마주 보았다. "흐흐! 네 놈이 견딜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츠츠.... 목에 감긴 채찍이 흡사 뱀처럼 움직이며 깊숙이 파고 들었다. "......." 장천린의 이마에는 굵은 심줄이 돋아 올랐다. 목 깊숙이 파고 든 채찍으로 인해 숨을 쉴 수 없음은 물론 정신마저 혼미해지고 있었다. 하나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여전히 지지않고 노명을 바라 보았다. 어느 덧 채찍이 목으 ㄹ파고들어 핏방울이 솟아 오르며 옷깃을 적셨다. "흐으... 지... 지독한 놈!" 노명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시퍼래졌다. 머리카락이 젖혀진 덕 분에 그의 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고... 고문 따위로는... 나... 장천린을 굴복시킬 수는... 없소......." 장천린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하나 여전히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절대 절명....... 이제 한 식경 안에 그는 숨이 끊어질 것이다. 노명을 제외한 삼 인은 그의 지독한 의지력에 모두 안색이 변해 있었다. 만가산에서 만난 독무(毒霧), 그리고 네 명의 괴노인들....... 장천린의 운명은....... 制 4 章 般若大能力과 鶴眠龜息大法 인간의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다. '.......' 마침내 장천린의 부릅뜬 눈동자의 초점이 풀렸다. 그는 의식이 혼미해짐을 느끼며 서서히 사지를 늘어뜨렸다. 바로 그때 노명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어 그는 탄식하며 채찍을 풀었다. "내가 졌다." 그는 채찍을 떨구며 한탄했다. "무엇 하나... 되는 게 없구나." 이에 외팔이 노인이 말했다. "천리독무가 엷어지고 있소. 당선종이 다시 독기를 거두어 들 이고 있는 것 같소." 그 말에 노명은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장천린은 혼미 직전에 다시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고 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젊은 친구, 노부가 졌다." 솔직한 노명의 시인에 장천린은 그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노명은 탄식했다. "독무가 사라지면 떠나거라. 우리는 우리대로 행동하마......." 이어 그는 그 동안 미운 정(?)이라도 든 듯 섭섭한 표정을 지으 며 말했다.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기를 바라마......." "......." 장천린이 무언가 대꾸하려는데 그 는 고개를 돌리며 삼인을 향 해 말했다. "독무가 사라지기 전에 빨리 움직입시다. 독무가 완전 히 사라지면 당선종은 이 산 전체에 천라지망(天羅之網)을 칠 것 이오." 삼인은 모두 고개를 그덕였다. 그들은 곧 주위를 둘러보더니 신형을 움직였다. "잠깐!" 그때 장천린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 "내 힘이... 그렇게 필요하오?" 그말에 노명의 머리칼 사이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렇다." 그대에 찬 그의 음성이었다. 장천린은 그를 바라보며 다짐했다. "정말 북경에 서찰을 전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노명은 고개를 끄떡였다. 장천린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서찰을 주시오." 그러자 노명의 눈빛에 격동이 일어났다. "고... 고맙다. 젊은 친구!" 그러자 옆에 있던 외팔이 노인이 조급하게 말했다. "노형,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빨리 행동해야 하오, 반 시진 내에 독무가 모두 걷 힐 것이오." 노명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노승에게 말했다. "선사(禪師)께서 먼저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노승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장천린을 향해 돌아섰다. "소시주, 앉으시오." 장천린은 흡칫했으나 자신이 수락한 이상 말에 따르는 것이 옳 다고 생각했다. 그는 순수히 바닥에 앉았다. 그러자 등 뒤에서 노승의 잔잔한 음성이 들려왔다. "눈을 감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시오......." 장천린은 의아심을 느꼈다. '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무림인이 아닌 그로서는 그들이 하려하는 일에 대해 전혀 진작 이 가지 않았다. 헌데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노 명의 음성이 들렸다. "시키는 데로 하게. 자네가 이곳을 벗어나려면 단시간 내에 어 떤 특수한 능력을 지녀야만 하기 때문이네."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설명을 계속했다. "그 중 하나로서 귀원선사(歸元禪師)께서는 지금 자네의 몸에 이갑자(二甲子)의 내공이 담긴 소림(少林)의 반야대능력(般若大能 力)을 주입시키려는 것이네." 장천린은 내심 경악했다. '이 평범해 보이는 노승이 소림의 신승(神僧) 귀원선사라니......!' 그느느 무림인이 아니다. 하나 그는 자신의 장원(莊院)에 호원 무사들을 고용하고 있었고, 그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강호이야기 를 들은 적이 있었다. 특히 소림사(少林寺)는 중원무림의 태두(泰 斗)임은 물론 불문성지(佛門聖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귀원선사(歸元禪師), 그에 대해서도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소림 천년 사상 달마대사와 육대조(六代祖) 혜능선사 이후로 가 장 뛰어난 고승이라는 것이었다. 한데 삼십 년 전 귀원대사가 의 문의 실종이 된 것도 알고 있었다. '반야대능력이라면 소림이 보유하고 있다는 칠십이종무에 중 서열 일위의 불가사의한 무공이 아닌가? 그 힘은 가히 바다를 가 르고 산을 무너뜨린다던데.......' 장천린은 그 누구보다도 천재적인 두뇌와 오성을 지니고 있었 다. 하나 지금의 상황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귀원산사 같은 분이면 천하에서 건드 릴 자가 없을 것이다. 한데 당선종이란 자가 누구기에 이토록 전 전긍긍한단 말인가?' 그는 주위에 선 채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노명을 포함한 삼 인 을 바라보았다. '저들도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다. 한데 네 사람의 능력으로도 이 산(山)을 벗어나기가 그렇게 힘들단 말인가?' 그가 의문의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문득 등 뒤에서 ㄱ전으로 천 둥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잡념을 버리시오. 시주!" '......!' 장천린은 황급히 상념을 떨쳐버리고 눈을 감은 뒤 정신을 집중 시켰다. 그순간. '우욱!' 그런 느낌은 난생 처음이다. 갑자기 등 한복판 명문혈(命門穴) 어림으로부터 불같이 뜨거운 기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닌 가?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서운 고통이었다. 흡사 불의 칼 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불칼은 뇌전처럼 명문혈을 뚫고 들어와 그의 혈맥을 따라 무섭 게 치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내공(內功)을 익히지 못한 일반인에 불과했다. 따라서 경 맥(經脈)과 혈도(穴道)에 대한 상식이 없는 것은 당영했다. 등 뒤 로부터 흡사 노도와 같이 뜨거운 기운이 흘러들어와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십이중루와 삼십육대혈로(三十六大血路)를 돌았다. 불로 혈맥을 지지는 듯한 고통....... 사지 백해를 도는 동안 장천린은 몇 번이나 혼절할 뻔했다. 하 나 그가 누구인가? 그는 철혈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실상 귀원선사는 불문의 개정대법(開頂大法)을 시전하고 있었 다. 이윽고 무서운 진력은 그의 경락을 십이주천(十二週天:열 두 바퀴 운행함)했다. 그리고 곧장 임독이맥(任督二脈)을 따라 치솟 더니 천원(天元)을 폭파하는 것이 아닌가? 실로 상상도 하지 못했 던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그의 임독이맥을 가로막은 생사현관(生 死玄管)은 여지없이 관통되었으며 곧장 그 기세를 타고 뜨거운 기운은 그의 천령개(天靈蓋:정수리)까지 솟구쳐 올랐다. 한 순간, 꽝! 천지가 붕괴되는 듯한 굉음을 장천린은 느꼈다. 그 순간 천령 개가 터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하나....... 정말 도저히 상상치 못한 일이 뒤이었다. 죽거나 혼절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갑자기 머리가 확 트이며 전신이 공중에 뜬 듯 가벼워지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기분도 날아갈 듯 상쾌 해지고 고통도 언제 그랬냐싶게 말끔이 사라졌다. '도대체.......' 그는 망연해 졌다. 이때 등 뒤에서 약간 쇄진한 듯한 귀원선사 의 음성이 들려왔다. "끝났소. 아미타불...... 이젠 소시주의 몸 속에 주입된 반야대능 력은 소시주의 몸에서 이십사 시진 동안 유용할 것이오. 그리고 이십사 시진이 지나면 완전히 소멸되어 무(無)로 돌아갈 것이오." 귀원선사의 음성에는 한가닥 유원이 담긴 듯했다. "하나 만일 소시주가 먼 훗날이라도 인연이 있어 불문의 무상 금강결(無想金剛訣)을 얻게 된다면 반야대능력은 다시 살아날 것 이고 소림사상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극무(極武)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오. 모쪼록... 아미타불... 행운을......." 귀원선사의 음성이 흐려지더니 종내에는 잦아들었다. 장천린은 완전히 새로 태어난 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머리 속이 마치 명경지수인 양 맑아지고 전신에는 엄청난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것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 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직도 여력의 힘으로 흐르는 무궁한 기운 을 따라 전력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 다. 그는 그런 상태로 몰아의 경지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그는 눈을 떴다. "......?" 바라 앞에 노명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칼 뒤로 젖힌 그의 강퍅 해 보이는 얼굴은 기이하게도 슬픔에 젖어 있었다. 장천린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어 물었다. "노선사께서는......?" 노명은 탄식하며 말했다. "열반에 드셨네." "......!" 장천린은 흡칫하며 몸을 돌렸다. 바로 자신 뒤. 그곳에 단전히 정좌한 자세로 귀원선사는 합장(合掌)한 채 죽어 있었다. 하나 마치 살아 있는 활불(活佛)인 양 장엄하고 숭엄한 모습이었다. "노... 노선사......."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격동했다. 콧날이 시큰해져 그는 가까이 다가가려 했댜. "건드리지 말게......." 노명은 입술을 깨물며 떨리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노선사는 내공의 상실로 인해 체내에 천리독무가 스며들어 버 렸네." "......!" "곧 시신조차 녹아 버릴 것이네." 그 말에 장천린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츠... 츠츳......! 과연 노선사의 몸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이 썩어내리 는 것이 아닌가? 곧 눈 깜짝할 사이에 귀원선사의 모습은 백골로 화하고 말았다. 장천린은 넋을 잃었다. 또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자신 의 생명조차 버려가면서까지 이렇게 해야만 했단 말인가? 그는 어떤 슬픔을 느꼈다. 이때 곁에서 외팔이 노인의 조급한 음성이 들렸다. "시간이 없소. 노형......." 그는 안색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노부... 단전에 있는 독기를 더 이상 제어하기가 어려울 것 같 소." 노명은 탄식했다. "알겠소. 강형(康兄)께서 먼저 하시오." 그 말에 외팔이 노인은 장천린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젊은 친구, 노부의 이름은 강중문(康中文)이다. 별호는 일수삼 도(一手三刀)다." 그는 장천린이 뭐라 하기도 전에 계속하여 말했다. "노부가 자네에게 가르칠 것은 학면귀식대법(鶴眠龜息大法)이 라고 하는 것이다. 학면귀식대법은 귀식대법의 일종이지만 그 차 원이 일반의 것과는 천지차이가 있다." 장천린의 그의 얼굴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검어지는 것을 보 았으므로 말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여 들어야 했다. "일반 귀식대법은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몸의 모든 기관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하나 학면 귀식대법은 인간이 움 직이고 사고(思考)하는 상태에서도 몸의 모든 기관을 정지시킬 수 있으며 또 언제든지 마음대로 해제할 수 있는 신묘한 것이다." 빠르게 설명하는 일수삼도(一手三刀) 강중문의 얼굴에서 은은 한 자부심이 엿보이고 있었다. "이것을 응용하여 몸을 숨긴다면 천하의 어떤 고수라도 자네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게 되네. 숨소리는 물론, 미세하게 발열하는 체온이나 체취까지도 완전히 정지해 버리기 때문이지."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공에 대해 어느 정도 기본은 알고 있는 그였으나 강중문이 하는 말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있으면서도 숨을 쉬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 그는 묻지 않았다. 바로 일수삼도 강중문의 말이 이어졌 기 때문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므로 학면귀식대법의 초보단계만 설명하겠네" 장천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듣게. 한 번밖에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알겠소이다. 한 번이면 족하오." 장천린의 자신있는 말에 강중문은 눈을 번쩍였으나 아무말 하 지 않았다. "학면귀식대법은 학(鶴)이 선 채로 잠을 자거나 거북이(龜)가 휴식(休息)을 취하는 데서 착상한 것이다. 그러므로 체내의 기관 전체에 걸친 신경의 맥을 늦추면서......." 그는 나직하게 구결(口訣)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잔천린은 그의 구결을 머리에 새겨 넣었다. 들을수록 신기묘모 한 구결이었다. 체내 기관을 조절하는 신경을 느슨하게 하는 방법에서 호흡법 을 서서히 완전히 정지될 때까지 감해나가는 방법 등등....... 그로서는 과거에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 구결에 포함되어 있었다. 구결이 끝나자 강중문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다시 불러 줄테니 기억해라." 하나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필요 없소이다." "음?" 강중문은 눈쌀을 찌푸렸다. "모두 암기했으니 걱정마시오." 강중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그 긴 구결을 단 한 번 듣고 외울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노부하고 농담하자는 말이냐?" 노기에 차 말하자 장천린은 어이 없다는 말했다. "농담이 아닌 사실이오." "노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면 외워 보겠소이다." "......!" 장천린을 눈을 감고 줄줄이 외우기 시작했다. 강문중과 청삼노 인, 노명 등은 모두 그의 암송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그들의 얼구에 경악이 떠올랐다. 장천린이 암송하는 구결은 단 한자도 틀 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윽고 암송을 마치자 강중문은 문득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핫...! 으하하......." 광소를 터뜨리다가 그는 울꺽! 선혈을 토해냈다. 그 순간 그의 안색은 삽시에 창백하게 변했다. 하나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물들 어 있었다. "흐흐...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젊은 친구는... 멋지군!" 그는 아타까운 듯이 중얼거렸다. "시간이 ...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더니 한 권의 ㅇ은 책자를 꺼냈다. "이것을... 받아주게나. 훗날... 쓸모가 있다고 여긴다면... 한 번 익혀보게." 장천린은 얼떨결에 책자를 받았다. "그곳에는 학면귀식대법의 요체와 몇초의 도법(刀法)이 적혀 있 네." 일수삼도 강중문은 말을 마치더니 곧 옆으로 물러나 좌정했다. 노명은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강형. 견딜만 하오?" 강중문은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나 강중문이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최소한 몇 놈이 라도 지옥해(地獄行)에 동반자를 데리고 갈 생각이오." 말하는 순간에도 그의 안색은 더욱 더 창백해 졌다. 노명은 탄 식하며 시선을 다시 청삼노인에게로 돌렸다. 청삼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천린에게로 걸어왔다. 制 5 章 鐵 魔 王 "노부는 개벽신수(開闢神手) 전붕(典朋)이라 하네." 청삼노인의 음성은 차분했다. 장천린은 숙연하게 들었다. 이제 그들에 대해 더 이상 반감은 들지 않고 있었다. 개벽신수 전붕은 얼굴이 창백했으나 청수한 용모였으며 유난히 팔히 길고 손은 여 인의 손인 양 희였다. "노구가 자네에게 전해줄 것은 한 가지 무공이네. 바로 단금옥 수(斷金玉手)라는 것이네" '단금옥수......?' 장천린은 내심 외우며 저차 궁금증이 당겼다. 전붕은 계속 말 했다. "이 무공을 완전히 배우려면 최소한 수년을 소요해야 하네. 하 네 자네는 우선적으로 개요만 이해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네." 이어 그는 차분히 말했다. "자, 구결을 한 번만 불러 주겠네." 전붕은 곧 난해하기 그지 없는 단금옥수의 구결을 부르기 시작 했다. 장천린은 정신을 집중하여 구결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그로써ㅗ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구결이었다. 이윽고 긴 구결이 끝나고 전붕은 약간 미심적은 듯 물었다. "모두 암송할수 있겠나?" 장천린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이다." "허허... 믿겠네." 전붕은 너털웃음을친 후 손을 들어오렸다. "자, 그럼 이제 단금옥수의 도식(圖式)을 가르쳐 주겠네. 구결을 안다 해도 도식을 모르면 펼칠 수가 없네." 그의 손은 나이답지 않게 희고 깨끗했다. 그는 손을 수평으로 뻗었다가 서서히 원을 그렸다. 그런가 하면 수직으로 뻗고 좌우로 비스듬히 긋기도 했다. 그 움직임은 지극히 단순했을뿐더러 별다 른 변식(變式)도 없어 보였다. 그저 평범한 수공(手功) 같을 뿐이 었다. 장천린은 의아함을 느꼈다. '단금옥수라는 무공이 이렇게 평범할 리가 없다. 분명 어떤 깊 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전붕의 계속하여 느리게 보여지는 수 식(手式)을 관찰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수식을 전붕은 두 번 연속 하여 보여주었다. '대체 알 수 없군.' 장천린은 역시 눈이 빠져라 관찰했지만 아무런 특별한 점도 발 견하지 못했다. "이 단금옥수는 초식이 모두 다섯 가지로써 변화보다는 힘(力) 과 기(氣)에 중점을 둔 것이네. 자, 다시 한 번 보여 주겠네." 전붕은 다시 똑같은 작세를 보여 주기 위해 손을 들었다. 하나 이때 노명의 급촉한 음성이 들렸다. "천형, 시간이 없소. 당선종이 천리독무를 모두 거두었소." 전붕은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죽음의 회색 안개는 완전히 걷혀 보이지 않았다. "무서...운 놈! 십리(十里)까지 확산된 독무를 반 시진도 안되어 모두 다시 체내로 흡수해 버리다니......." 이때, 노명이 장천린을 향해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이것을 받아라." 그것은 한 권의 두터운 책자였다. "노부의 별호는 백변천군(百變千君) 노명이다. 무림에서 노부를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다시 말해서 노부의 무공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다는 얘기다." 노명은 계속하여 얘기했다. "이 책자 안의 내용은 상상도 못할 만큼 지극히 무서운 것들이 다. 적들의 손에 들어갈까 두려워 없애 버리려 한 것이지만 이젠 자네에게 주겠네." 노명은 진지하게 음성을 낮추었다. "이 속에는 노부가 채 익히지도 못한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네가 제대로 익힌다면 아마......." 이 때 전붕이 급촉하게 말했다. "노형! 시간이 없소. 서장(西藏)의 맹견들인 금모신견(金毛神犬) 들이 우리의 냄새를 맡고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소이다." 멀리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와 날카로운 개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명은 안색이 변하더니 품속에서 한통의 밀봉(密封)된 서찰을 꺼냈다. "이것을 북경 태진궁(太眞宮)의 태진왕(太眞王) 전하(殿下)께 전 해 드리게." 순간 장천린은 충격을 받았다. '태진왕......!' 태진왕이 누군인가? 당금 대명(大明)의 황제인 신종(神宗) 만력 제(萬歷帝)의 이복동생이 아닌가? 만력제가 노년에 이르러 정사 (政事)를 게을리하고 황음(荒淫)에 빠져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일. 태진왕은 대명의 병권(兵權)을 은연 중 장악하고 사실상의 권력 을 행사하고 있었다. 즉 막후에 도사린 그의 영향력은 보이지 않 는 가운데 대명의 시운을 조종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천린의 상계의 신성으로써 특히 자금성의 존재에 대해 남다 른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펑! 돌연 노명이 장력을 날려 땅바닥에 하나의 큰 웅덩이를 만들었 다. "젊은 친구, 빨리 이 웅덩이로 들어가 학면귀식대법을 전개하 게!." 개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땅의 흙을 묻어 버리면 놈들은 결코 자네를 찾지 못할 것이 네." 이에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신중하게 당부했다. "이곳에서 최소한 사흘 동안 움직이지 말아야 하네." 장천린은 멈칫했다. "빨리 들어가게! 시간이 없네." 하나 장천린은 머뭇거리다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ㅁ겠습니다. 대체 노인장들을 쫓는 무리 들은 누구이오?" 그 말에 노명의 안면이 씰룩 거렸다. "조화성, 그렇게만 알게." 순간 그는 다짜고짜 그에게 가벼운 일장을 쳤다. "윽!" 장천린은 구덩이로 굴러 떨어졌다. "잘있게. 젊은 친구." 장천린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디...... 노인장들도 무사하길 빌겠소이다." 노명의 두 눈이 그 말을 듣자 괴이롭게 일렁였다. 웬지 쓸쓸해 보이는 눈이었다. 하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살아난다면 다시 만나게 될 걸세."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손을 저었다. 순간 어떤 보이지 않는 힘 에 밀려 파진 흙더미가 와르르 구덩이를 매워 버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구덩이 속에 생매장되어 버리자 장천린은 호흡이 턱 막혔다. 하나 영민한 그는 순간적으로 학면귀식대법의 구결을 떠얼렸고 그에 따라 체내의 기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 음에는 잘 되지 않았다. 천천히 흐흡을 멈추며 신견을 극히 편안 한 상태로 느슨히 풀자 마침내 그는 호흡이 극히 느려지다가 멎 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피부의 체온도 급격히 떨어졌다. 결 국 움직이는 것의 그의 뇌밖에 없게 되었다. 장천린은 자신의 이런 상태에 대해서 실제 해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찌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신체의 기관을 정 지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문득 그는 손 끝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마음 먹음대로 움직 여지는 것이 아닌가? 아아......! 신체의 모든 기관은 완전히 정지했건만 손이 움직여지고 지각 능력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중거로 그는 훨씬 가깝게 들려오는 날카로운 맹견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동시 에 가까운 곳에서 일수삼도 강중문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형, 전형! 어서 가시오 노부는 이곳에서 놈들을 막겠소." 그리고 잠시 침묵, 다시 노명의 침통한 음성이 들렸다. "그럼, 저승에서 만나세. 감형......." 동시에 무엇인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듯한 파공성이 들렸다. 장 천린은 웬지 가슴이 찡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조금 더 움직 였다. 그러자 흙사이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지금은 밤이었다. 하 나 반야대능력 탓인지 그의 눈에는 밖의 경물이 마치 대낮처럼 환히 보였다. 그것은 실로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일수삼도 강중문, 그는 힘없이 바위 옆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 다. 그때. 컹- 컹-! 가까운 곳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몹시 지척에서 들렸다. 그러자 강문중은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뇌까렸다. "오너라 얼마든지 오너라." 휙- 휙-! 돌연 흡사 허공으로 뛰어내리듯 십여 마리의 맹견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금빛 털을 가지고 있었고 두 눈은 핏빛이었다. 또한 송아지만하게 큰 사자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맹견이었다. 맹견들은 갈기를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그리고 한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비호처럼 몸을 날려 강중문의 목줄기를 물어뜯으려 덤볐다. "크크... 한낱 짐승 따위가......!" 쉭! 강중문의 한 손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그러자 한 마리 맹견의 목줄기를 움켜쥐었고 그 순간 바위를 향해 내던졌다. 무서운 힘이 었다. 퍽! 케-액!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가 튀었다. 맹견은 피와 살과 뼈가 터져 즉사한 것이었다. 하나 맹견들은 도대체게 겁이라고는 없는 듯 계 속 강문중에게 덤벼들었다. 금모신견(金毛神犬)이라는 이름을 가 지고 있는 그들은 서장 특산으로서 호랑이도 상대한다는 사나운 맹견이었다. 금모신견은 이빨을 드러매며 계속 달려들었다. 강중문의 손이 좌우로 움직였다. 퍽! 퍽!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고 처절한 비명이 들 렸다. 하나 맹견들도 어느 정도 위기를 느꼈는지 더욱 날쌔고 교 묘하게 공격했다. 한순간, 번-쩍! 쐐-액! 돌연 도광(刀光)이 빛무리를 폭사했다. 카아악! 크-악! 금모신견은 삽시에 두 동강이 났다. 오느 새 강중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도(刀)가 들려져 있었다. 끝이 기묘하게 갈라진 기형도(奇形刀)였다. 결국 열마리 금모신견 은 모두 참혹하게 죽었다. 강중문은 무리하게 힘을 쓴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 한데 바로 그때, "제법이구나, 강중문!" 무듯 쇳소리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돌과 나무가 쓰러 지며 한명의 거인이 나타났다. 구척거구! 놀랍도록 튼 흡사 탑을 연상케 하는 거인이었다. 더욱이 전신에는 검은 철갑(鐵甲)을 두루고 있었다. 양손에도 철갑을 씌웠으며 두 눈을 제외하고는 운통 무쇠였다. 또한 등 뒤 에는 엄청난 크기의 방천화극(方天畵戟)을 메고 있어 흡사 지옥의 전륜대왕을 연상케 했다. 그가 나타나자 강중문은 부르르 떨며 외 쳤다. 그가 나타나자 강중문은 부르르 떨며 외쳤다. "철마왕(鐵魔王) 사진청(査進靑)!" 그때, 땅 속에 파묻혀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장천린도 흡칫하 고 있었다. '저 자가 철마왕 사진청......." 이때 철마왕은 철갑면구사이로 무시무시한 광채를 폭사하며 물 었다. "노명과 전붕은 어디 있느냐?" 그 말에 강중문은 괴소를 흘렸다. "흐흐... 사진청, 그것은 네놈이 알 바 아니다." 순간, 번-쩍! 그는 다짜고짜로 공격했다. 너무나 비쾌무비한 공 격이었다. 도(刀)가 그대로 사진청의 가슴에 여지없이 적중되었다. 하나, 캉! 불꽃이 일며 도는 도로 퉁겨나갔다. "헉!" 강중문은 뒤로 세걸음이나 밀려나갔다. "으하하하핫! 그따위 장난감으로 나를 어쩌겠다는 거냐?" 철마왕 사진청이 움직였다. 거구답지 않게 무서운 속도였다. "읏!" 사진청의 철갑수(鐵甲手)가 공격해오자 강중문은 급급히 도를 뻗어 막았다. 하나 사진청은 괴소를 터뜨리며 그대로 손으로 도를 내려치는 것이 아닌가? 카 --- 캉! "헉!" 도가 철갑수와 부딪친 순간 그대로 박살이 나버렸다. "지옥으로 가버려라! 강중문!" 위----잉! 거대한 철갑수가 그대로 강중문의 옆구리를 훑어 버렸다. 피와 살점이 뜯겨나갔다. 어디 그 뿐이랴? 철갑수 끝에 내장까지 그대 로 끌려나와 버린 것이 아닌가? '아! 강노인.......' 땅 속에 숨어있던 장천린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너무나 끔 찍한 광경이었다. "크하하하핫!" 철마왕 사진청은 득의의 광소를 터뜨렸다. "크으으." 강중문은 비틀비틀거렸다. 옆구리가 길게 뜯겨나가고 내장이 빠져나가고 내장이 빠져나온 이상 살 희망이 없었다. "강중문! 노명과 전붕은 어디 있느냐?" 하나 강중문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꿈꾸지마라... 조화성의개......." 순간 철마왕의 두 눈에서 새파란 불똥이 솟구쳤다. "크흐흐." 위잉! 웅후한 파공성과 함께 거대한 철갑수가 그대로 강중문의 머리를 쳤다. 실로 도저히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강 중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크하하하하하핫!" 철마왕 사진청은 피묻은 자신의 철수를 바라보며 광소를 터뜨 렸다. 어느새 그의 주위로는 십여명의 흑의복면인들이 몰려와 있 었다. 사진청은 벼락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노명과 전붕을 찾아라! 놈들은 결코 이 만가산을 벗어나지 못 했을 것이다." "존명(尊命)." 흑의복면인들은 일제히 대답하더니 쾌속한 신법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으하하하하핫!" 사진청은 다시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웃음을 그치며 한쪽으 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귀원선사의 유체가 있는 곳이었다. "크크! 이 늙은 중도 결국 당노형의 천리독무에 죽었군!" 이어 그는 발로 귀원선사의 백골만 남은 유체를 걷어차 버렸다. 실로 잔인한 행위였다. 이어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 다. 한데 하필이면 장천린이 묻혀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 가? 장천린은 공포를 금치 못했다. '큰일이다. 저놈이 이곳을 밟아본다면 즉시 이상함을 눈치챌 것 이다.' 그는 초조했다. 그러나 철마왕 사진청은 여전히 그가 있는 곳 으로 육중한 걸음을 옮겨왔다. 한데 그때 멀리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려왔다. 사진청이 우뚝서며 중얼거렸다. "놈들을 발견했군." 다음순간 그 거대한 체구가 흡사 거붕처럼 날아 허공을 가로질 러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또한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장천린이 숨어있는 웅덩이에서 불 과 한 발자국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곳이었다. 장천린은 땅 속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림인들은 모두 이렇게 잔인하단 말인가?' 땅 속에서 장천린의 마음은 분노의 비감으로 차 있었다. 땅 틈 으로 걸레처럼 ㅉ긴 강중문의 시신이 보였다. 하나 그것도 잠시 후 녹아버렸다. 장천린의 가슴은 분노가 일었다. 그것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하나 동시에 그의 심중에는 많은 의문 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니....... 첫째, 조화성(造化城)이란 단체(團體)는 어떤 곳인가? 둘째, 조화성에서는 무슨 이유로 노명 등을 죽이려하는 것인가? 셋째, 노명등이 태진왕(太眞王)에게 보내는 서찰의 내용은 무엇 인가? 숱한 의문이 장천린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 간은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시각이 어떻게 되었을까? 자시(子時)는 넘은 것 같고.' 그는 점차 갑갑증을 느꼈다. '대체 얼마나 이곳에 숨어 있어야 한단 말인가? 사흘씩이나 숨 어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인데.' 문득 그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더군다나 내일 아침 진시에 파자사국의 상인(商人) 아라사(阿 羅斯)와 만나기로 했는데.' 그렇다. 그는 내일 아침 진시에 파자사국의 유명한 거상인 아 라사는 인물과 만나기로 약정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서 파자사국 의 진귀한 물건을 구입키로 한 것이다. 또한 그와의 거래는 향후 그의 상업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약속은 필히 지켜야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시 전까지 당도해야 했다. 이제 진시까지는 사개 시진도 남지않았다. 하나 남창성이 비록 지척에 있어도 함부 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끔찍하고 잔인한 조화성의 인물들위 행위 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制 6 章 惡夢의 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사위는 숨막히는 정적이 무겁게 깔려 아 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침내 구덩이 속에 숨어있던 장천 린은 결정을 내렸다. '어쩔수 없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아라사와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그는 일단 결정을 내리자 즉시 행동에 옮겼다. 학면귀식대법을 해제하는 것은 전개하는 구결을 거꾸로 시전하는 것이었다. 처음 전개할 때부터 그는 익숙하게 해제할 수 있었다. 이윽고 체내의 기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호흡이 느리게 시작됐다. 잠시 후 그는 흙을 떨치고 구덩이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었다. "......!" 그는 감개가 무량했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마치 일 생(一生)을 지낸 것처럼 길게 느껴졌던 것이다. 더구나 강중문과 귀원선사의 시신을 보니 더욱 기분이 처량해짐을 금치 못했다. 허 나 그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직시할 줄 안다. '두분의 유골을 묻어 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자칫 흔적을 남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용서하시오. 두 분.......' 그는 두 구의 유골을 향해 묵묵히 장읍했다. 이어 발걸음을 돌 렸다. 천색을 살펴 남창성 쪽으로 방향을 잡고 그는 앞으로 달려 갔다. 허나 그 순간 '억!'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한 번 뛴다는 것이 그대로 허공을 사오여 장이나 도약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허공에서 중심을 잃고 하마터면 그대로 곤두박질칠 뻔했다. 그는 간신히 팔다리를 저어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허나 그의 놀라 움은 컸다. '굉... 굉장하다.' 그렇다. 현재 그의 전신에는 백 이십 년에 달하는 불문최고의 무상선공(無上禪功)인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이 잠재되어 있다. 그것은 가히 무림에서 손가락을 꼽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장천린 의 얼굴에는 희색이 번졌다. '이 정도면 말보다 빨리 달릴 수도 있겠다.' 그는 다시 이번에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뛰어 올랐다. 휘 --익! 그의 신형은 곧바로 비조(飛鳥)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갔다. 쾌 속무비한 속도였다. 비록 별다른 경신법을 쓰지는 않았으나 주위 의 경물이 무섭게 지나칠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그는 남창성을 향해 달려갔다. 헌데, 약 일각을 달렸을까? 돌연 허공에서 야조처 럼 한 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그가 보기에는 놀라운 신법이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해졌다. 급히 신형을 어렵게 멈추었다. 상대는 흑의복면인이었다. 바로 철마왕 사진청의 곁에 있던 흑의복면인 들과 같은 복장이었다. 이때 흑의복면인은 음산한 눈빛을 번쩍이며 물었다. "네 놈은 누구냐?" 장천린은 침묵했다. 그러자 흑의복면인은 그에게 다가왔다. "이 만가산에는 어떻게 들어왔는냐?" 장천린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필요가 없었을 뿐 더러 실상 그는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는 단전의 내공을 어렵게 끌어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야대 능력이 체내에 흘러들어 올 때의 경도를 기억하며 끌어올리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허나 뜻밖에도 무궁무진한 힘이 솟구치자 그는 자신이 생겼다. 흑의인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 듯 천천히 다가왔 다. 한 순간. "타(打)...!" 장천린은 전력으로 양손을 뻗었다. 흑의인은 냉소했다. 그의 자 세가 너무나 어성했을 뿐더러 그는 사전에 이미 준비를 하고 있 었던 것이다. 그는 좌우수를 교차시키며 엉성하기 없는 장천린의 공격을 막았다. 순간, 펑! 폭음이 울렸다. 순간 장천린은 양팔이 떨어져나가는 드한 고통을 느꼈다. 허나 이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음......!" 흑의인이 나직이 신음을 발하며 뒤로 칠팔 보나 비틀거리며 물 러나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간신히 신형을 멈춘 그는 경악의 두 눈을 부릅떴다. "네... 네놈이......!" 그 순간을 장천린이 놓칠 리 없었다. 그는 그대로 신형을 날리 며 우수로 흑의인의 머리를 공격했다. 바로 한 순간의 동작이었으나 얼마 전 배운 단금옥수(斷金玉手) 의 일식을 전개한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단순한 동작이었다. 흑 의인은 급급히 우수를 들어올려 막았다. 허나, 퍽! "크-악!" 흑의인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팔이 부딪친 순간 그의 오른 손이 그대로 부러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몸을 굴렸다. 허나 그는 절정의 무공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그는 허리에서 즉시 검을 뽑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장천린의 동작이 더 빨랐다. 그는 평소 익힌 호신술을 그대로 사용했다. 막 검을 뽑으려는 흑의인의 턱을 발로 세차게 걷어차 버렸다. 퍽! "크-윽!" 피가 튀었다. 흑의인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일격의 위 력은 그가 상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는 몇 바퀴나 굴러가서야 멈 추었는데 사지를 파르르 떨다가 축 늘어지고 말았다. 즉사를 한 것이었다. "휴!" 그가 뻗자 장천린은 전신이 땀으로 목욕을 한 듯 젖은 거을 알 았다. 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흑의인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한 숨을 쉬었다. '대... 대단하다. 일개 수하의 무공이 이토록 무림의 절정고수라 니.' 문득 그의 뇌리에 강중문을 단 일격에 날려버린 철마왕 사진청 의 가공할 무공이 떠올랐다. 그러자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으음. 그자는 인간도 아니다.' 그는 더 이상 그 곳에 머물러 있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어서 가자!' 그는 신형을 날렸다. 허나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급히 뒤 돌아 왔다. 이어 죽은 흑의인의 몸에서 옷을 벗겨내는 것이 아닌 가? 그는 급히 그 옷을 자신의 옷 위에 걸쳐 입었다. 그리고 복면 을 썼다. 피가 묻어 다소 꺼림직 했으나 그는 상황이 상황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체를 숲 속에 눈에 띄지 않도록 숨긴 다음 중얼거렸다. '이만하면 놈들과 똑같겠지.' 이어 그는 신형을 날렸다. 남창성 쪽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비록 힘은 무궁무진하게 솟구쳐 오르고 있었 으나 그의 이마에는 진득한 땀이 배었다. 다급한 마음 때문이었 다. 공포의 만가산(萬家山)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허너, 문득 그의 귓전으로 한 가닥 무서운 광소소리가 들려왔 다. 그 광소를 듣는 순간 그는 소림이 오싹 끼쳤다. "으하하하핫...! 노명, 네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내 손을 벗 어나지 못한다." 약 사오십 장 밖에서 들려온 음성이었다. '철마왕 사진청의 웃음이다.' 그는 전율을 금치 못하며 자신도 모르게 신형을 멈추고 말았다. 이때, 날카로운 옷자락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곁으로 세 명 의 흑의 복면인들이 내려섰다. 장천린은 흠칫 되로 일보 물러섰다. 허나 그들 중 한명이 그의 어께를 치며 말했다. "십오호(十五號), 어서 가자. 마왕께서 노명을 발견하신 모양이 다." 그 말에 장천린은 멈칫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 세 명 을 뿌리치고 달아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그는 입 술을 지그시 깨물고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숲 한가운데, 백변천군(百變千君) 노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서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바로 철마왕 사진청이 팔짱을 낀채 철탑처럼 우뚝 서 있다. 장천린은 흑의복면인들 사이로 슬며시 끼어들었다. 그들로부터 달아나기는 커녕 그들의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된 것 이었다. 이때, 노명은 두눈에서 푸르스름한 광채를 빛내며 이를 갈 듯 이 말하고 있었다. "사진청! 사년전 노부의 십이경락이 다치지만 않았어도 네놈이 그도록 노부 앞에서 광오하진 못할 것이다." 그 말에 철마왕 사진청의 두눈에서 으스스한 살광이 흘렀다. "어리석은 놈! 네놈이 익힌 자부문(紫府門)의 무공 따위는 어린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 흐흐, 지금이라도 내가 손을 쓰면 네놈 은 삼초(三招)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는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 "하나 나는 네놈을 그렇게 쉽게 죽이지 않겠다." 그는 분노의 음성으로 덧붙였다. "네놈이 제오신마전(第五神魔殿)의 죄수 육십육인(六十六人)을 충동질하여 탈출했기 때문에 나 사진청이 성주(城主)께 당한 곤욕 을 생각하면 네놈을 갈아마셔도 속이 시원치 않단 말이다.!" 노명은 음소를 흘렸다. "흐흐흐, 조화성은 죄악의 온상이다. 언젠가 조화성은 하늘의 저주를 받아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는 푸른 광채를 빛내며 저주를 퍼부었다. "흐흐흐, 그때가 되면 조화성의 너와 같은 개들은 천하에 발 붙 이 ㄹ곳이 없게 될 것이다." 사진청의 눈에서 살광이 폭사했다. "후후후, 어리석은 놈!"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전붕도 네놈처럼 떠들어 대다 내 손에 두 갈래로 찢어졌다." "......!" 노명의 안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크크크, 네놈도 곧 그렇게 만둘어 주마." 사진청은 곧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즉시 흑의 복면인 한명이 검을 들고 노명에게 다가갔다. "늙은이, 각오해라!" 그는 다짜고짜 짓쳐 들어갔다. 허나 노명은 탄식했다. "불쌍한 꼭두각시들." "흥! 아가리나 닥치게 해주마!" 쐐-액! 검광(劍光)이 여섯 갈래로 신랄무비하게 전개되었다. 인 정사정없는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허나 노명은 고수 중 고수였다. 그의 신형이 옆으로 소리없이 미끄러지더니 순간 검은 선이 뻗었 다. 채찍은 검권을 뚫고 호선을 그렸다. "헉!" 채찍이 검에 감긴 순간 검은 그대로 허공 멀리 날라갔다. 그와 동시에 채찍 끝에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이 흑의인의 목을 휘감 아 버렸다. "크윽!" 흑의인은 채찍이 목을 조여들자 눈을 부릅떴다. 순간 주르륵 칠공(七孔)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노명은 채찍을 거두었다. 퍽! 흑의인은 비명 한마디 지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즉 사하여 고꾸라졌다. 이때 사진청은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크크크, 제법이군."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명령했다. "삽사호(十四號)! 십오호(十五號)! 놈을 처치해라!" '......!' 순간 장천린은 가슴이 철렁했다. 십오호는 바로 자신이 아닌가? 이때 그가 망설이는 사이에 십사호는 벌써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장천린은 내심 탄식하며 천천히 나섰다. 이때 노명은 가슴을 펴고 두 눈에 인광을 흘리며 외쳤다. "덤벼라! 괴뢰들!" 순간, "뒈져랏!" 휘-잉! 십사호가 먼저 공격개시했다. 그는 푸른빛의 곤오검을 쥐고 야차귀로(夜叉歸路)의 일식으로 신랄하게 공격했다. 허나 노 명은 괴소를 터뜨렸다. "흘흘흘, 불쌍한 개!" 순간 그의 수중의 채찍이 마치 독사처럼 허공을 누볐다. "크아악-!" 한 순간의 일이었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십사호는 도를 떨어 뜨리고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심장에 구멍이 뻥 뚫린 채 피화살 을 뿌리고 그는 날아갔다.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근처에 조차 접근하지도 못하고 일초에 당한 것이었다. 장천린 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십사호를 날려버린 채찍이 이번에는 자신을 향해 무섭게 날아온 것이었다. 그는 다급해졌다. 어떻게 피해야 할지 도무지 난감하기만 했다. 허나 그대로 서 있다간 십사호처럼 심장에 구멍이 뚫릴 판이었다. 그는 엉겁결에 수중의 검으로 채찍을 막으며 동시에 몸을 굴렸다. 촤-악! 순간 채찍이 가슴을 스쳤다. 옷자락이 길게 찍어졌다. 다행이도 큰 중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그는 짐짓 신음을 발하며 몇 차례나 몸을 굴렸다. "바보 같은 놈들!" 철마왕 사진청의 논에서 분광이 솟구쳤다. 그는 칼칼한 음성으 로 외쳤다. "모두 공격해라!" 그 말에 즉각 흑의인들이 나섰다. 어디에선가 착 가라않은 음 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사(査)노제, 죽음은 결코 유희가 아니네. 장난은 그만 두게나!" "......!" 그 말에 사진청의 두 눈에는 흠칫 광채가 흘렀다. 어디 그 뿐인 가? 노명조차도 안면이 돌덩이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대체 그 음 성의 주인이 누구이기에? 制 7 章 疑惑의 血夜 흑의노인(黑衣老人), 그는 몹시 깡말랐다. 피부는 밀랍처럼 창백했으며 두 눈은 움푹 패인 채 자광(紫光) 을 발산하고 있었다. 뺨은 움푹 깎여나가 광대뼈가 치솟았다. 머 리카락과 콧수염, 턱의 긴 수염 조차 은빛을 발하고 있다. 양손은 서로 다른쪽 소매 속에 넣어 팔짱끼듯 하고 있었는데 음산한 모습이면서도 사실 자세히 보면 청수해 보이기도 했다. 다만 풍기는 기운이 극도의 무심(無心)함과 냉막함을 뿌렸다. 한데 그 옆 한 명의 자의 소녀가 깜찍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한 데 바로 신선루의 누각에 취옥교의 앞에 나타났던 바로 그녀가 아닌가? 취옥교의 사매....... 그녀의 출현은 실로 괴이롭다. 하나 물론 장천린이 그녀와 취옥교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 리는 없었 다. 노명은 안면을 가볍게 경련하며 말했다. "독제(毒帝) 당선종(唐先宗)!" 그 말에 장천린은 섬뜩함을 금치 못했다. '저 자가 바로 당선종!'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전신이 얼음 구덩이로 빠진 듯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독제 당선종의 얄팍한 입술 사이로 무심한 음 성이 흘러나왔다. "노명, 이번에 실로 너무나 큰일을 벌였더군." "......!" "너의 한 순간의 잘못된 생각이 육십 육인의 생명을 앗아갈 것 이다." 그 말에 노명의 안면이 씰룩거렸다. 동시에 두 눈에 괴광을 흘 려내며 말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터져야 할 종기 같은 것이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당선종은 여전히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명,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굴복한다면 우리가 너에게 제 시한 모든 것을 계속 들어 줄 수있다." 노명은 문득 허탈한 웃음를 터뜨렸다. "히히힛! 당선종, 내가 제오신마전을 벗어날 때부터 이미 그곳 으로는 영원히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모르는가?" 당선종은 여전히 무심하게 말했다. "생명은 결코 둘이 아니다." "헛헛헛! 하나 뿐인 생명이니 멋지게 사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 아닌가?" 당선종은 침묵했다. 한찬 노명의 안면을 살피던 그는 물었다. "결정했는가?" "물론." 노명의 대답은 확고부동했다. "안타깝군." 당선종은 오른손을 소매에서 서서히 빼내었다. 그러자 감추어 져 있던 그의 손이 드러났다. 깡마른 손(手),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고, 새하얀 소수(素手)였다. 중지(中指)에 자주빛 보석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당선종을 손을 치켜들었다. "......!" 노명은 긴장했다. 어느새 그의 머리카락 사리에 두 눈은 긴장 과 당혹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당선종의 무서움을 잘 안다. 그리고 아차하면 그대로 목숨이 날아가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 "......!" 노명과 당선종의 눈이 마주쳤다. 당혹과 긴장으로 흔들리는 눈 과 무심화게 가라앉은 눈빛, 승부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번쩍! 돌연 당선종의 중지에 끼워져 있던 자주빛 반지에서 자 광이 섬전처럼 뻗었다. 휙-! 그와 거의 같은 시각, 노명은 신형을 날렸다. 그의 안색은 급변해 있었다. 하나 당선종의 차디찬 음성이 그의 영혼을 뒤흔들 었다. "노명, 너는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그 음성과 동시에.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야음을 몸서리쳐지도록 처참하게 찢었다. 허공 으로 떠올랐던 노명의 몸이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바닥에 여 지없이 흙먼지와 함께 나뒹굴었다. 허나 본능적인 동작으로 그는 오뚜기처럼 일어났다. 비틀비틀 신형을 비척거리는 노명, 놀랍게도 그의 이마 한복판에 동전만한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치지직......! 자색 연기와 함께 구멍 언저리가 타들어가고 있었 다. "네... 네가... 자뢰(紫雷)... 독강(毒 )을... 익혔다니......." 노명의 얼굴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당선종은 담담히 말하고 있었다. "잘 가거라. 노명, 네가 택한 길이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치지지직! 노명의 이마에서 계속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서서 히 아래로 무너져 내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기... 기억해야... 한다. 당선종... 조화성의 최대적수인... 무영(無 影)과... 신산(神算)이 살아 있는한... 조화성도... 언젠가는... 무너 질... 수 있음을......." 푸시시식! 그의 전신에서 자욱한 자연(紫燃)이 피어 올랐다. "조화성주... 그가... 결코 신(神)이... 아닌 이상에야... 그도... 죽 을 수가... 있는 것......." 피시시시시! 노명의 전신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실로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 장천린, 그는 넋을 잃었다. 그는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가공할 공포의 전율이 전신을 얼어붙게 했기 때문이었다. 흑의 복 면인들만 해도 그렇다. 반야대능력을 가지고도 그는 간신히 그들 중 한 명을 죽일 수 있었다. 한데 노명은 단 일초로 가볍게 흑의 복면을들을 죽였다. 그런 노명을 단 일초로 재로 만들어 버리는 당선조으이 가공할 무공은.......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장천린은 하룻밤 사이에 연거푸 일어난 일에 대해 아찔함을 금치 못했다. 이때, 당선종의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영과 신산이 살아 있으나... 이미 만승금도(萬勝金刀) 도담후 가 죽은 이상 그들 역시 옛날 같을 수는 없다." 당선종은 무심한 눈빛을 흘리며 하늘을 바라다 보았다. "무영과 신산도 이제 종말(終末)이 다가왔음을 알아야 한다." 이때 곁에 서 있던 자의소녀가 문득 철마와 사진청을 향해 입 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사숙부(査叔父)!" 허나 사진청은 자의소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팔짱을 낀 채 당선 종만 응시했다. 그의 눈에서는 불쾌함을 감출 수 없는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노명의 일은 당노형이 끼어들지 않았어도 내가 처리할 수 있 는 일이었소!" 당선종은 여전히 무심했다. "끝난 일이네." 사진청은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흐, 물론 끝은 났소. 허나......." 다시 그는 의미있는 괴소를 흘렸다. 이때 자의소녀는 눈알을 사르르 굴리더니 당선종에게 말했다. "당숙부, 소녀도 이젠 가봐야겠어요." "음......." 당선종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의 소녀는 차갑고 영활한 눈으 로 대담하게 그를 마주보며 말했다. "왕문헌(王文軒)을 제거한 뒤 옥교(玉嬌) 언니와 함께 다시 숙 부님을 찾아 뵙겠어요." 그 말에 당선종은 문득 처음으로 관심을 나타내며 물었다. "설봉(雪鳳),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 순간 자의소년의 얼굴에 싸늘한 표정이 떠올랐으나 곧 재빨리 지우며 태연히 말했다. "호호, 왕문헌을 제거하기 위해 남창성 근처에서 몇 년 간 신분 을 숨기고 숨어 있어요." "음......." 당선종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왕문헌이 비록 대단한 자이긴 하지만 설봉의 실력이라면 능히 제거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자의 소녀의 얼굴에 묘한 웃음기가 어렸다. "당숙부께선 언제나 옥교 언니를 좋게 보시는군요?" 당선종의 무심한 얼굴에도 그 순간에는 미미한 웃음기가 지나 갔다. "설봉은 영리한 아이다." "그래요. 옥교언니는 영리하고 유능하지요. 그러나......." "......?" 당선종의 얼굴에 의아로움이 이렸으나 자의소녀는 곧 고개를 저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허나 이번에 보시면 언니도 많이 달라졌 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에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는 바람처럼 신형을 빙글 돌리더니 휙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사진청은 중얼거렸다. "교활한 계집!" 사진청으로서는 자의소녀가 탐탁치 않은 모양이었다. 이때 당선종은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했다. "사노제, 그럼 반년(半年) 후 성에서 다시 만나세." 사진청은 그가 돌아서려하자 급히 불렀다. "당노형!" "무슨 일인가?" 당선종이 돌아서자 사진청은 음산하게 말했다. "숙야염과 너무 가까이 하지 마시오." "......." 당선종은 그 말에 묵묵히 사진청을 응시했다. 그가 대체 무엇 을 생각하고 있는지 표정만으로는 도저히 추측할 길이 없었다. 잠시후. "가겠네" 그는 무심히 말한 후 어깨를 흔들었다. 스스스, 그러자 그의 신 형은 연기처럼 흐려지더니 유령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사진청은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음소를 흘렸다. "흐흐흐, 숙야염이 그렇게도 술수에 능(能)했던가?" 문득 그는 입을 크게 벌리며 일진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핫!" 그의 광소는 어둠을 온통 뒤흔들게 하는 맹수의 포효처럼 사납 고 거칠었다. 이어. "가자!" 그는 수하들에게 한 마디 하고는 신형을 날렸다. 거구에 도무 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쾌속하게 밤하늘을 타고 날아갔다. 흡사 거붕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먼저 떠나자 나머지 흑 의인들도 즉시 뒤따라 신형을 날렸다. 한편, 장천린은 그들의 맨 뒤에 쳐져 따랐다. 그러다가 차츰 속 력을 늦추어 마침내 그는 숲 숙에서 슬쩍 빠지는데 성공했다. 그 리고 그는 반대편으로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역시 남창성 쪽이 었다. 장천린은 전신에 땀을 흘리면서도 상념을 끊을 수가 없었다. '아아! 이것으로 네 분 노인들 중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내가 서찰을 북경으로 전해야 되겠구나.' 그의 뇌리에는 잠깐 동안이었지만 정(情)이 든 사 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로서는 일찍이 만난 적이 없었던 무림의 기인(奇人) 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얼굴들, 철마왕, 당선종, 그들은 꿈 속에서도 상상해 본 적이 없던 무서운 고수들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난 가공할 마학(魔學)의 소유자들. '그런데, 왜 같은 편인 그들 사이에도 어떤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는 것일까?' 그는 철마왕이 독제 당선종 사이에서 오간 대화에서 그런 느낌 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 다. 문득 그는 자의 소녀에게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철렁한 느낌 이 들었다. '왕문헌(王文軒)을 제거한 뒤 옥교(玉嬌) 언니와 함께 다시 숙부 님을 찾아뵙겠어요.' 그 말을 듣던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었다. '옥교(玉嬌)! 설마 그녀를 말함은 아니겠지." 그는 한동안 마음 속이 무거운 의혹으로 어두워졌었다. 허나 곧 그는 실소를 터뜨렸다. '나도 참 어이가 없는 생각을 하는군. 후후, 쓸데없는 기우다.' 그는 남창성으로 가는 길이 가까워졌음을 느끼며 자신의 생각 에 부언했다. '세상에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많거늘 하필 옥교를 그 무서운 조화성의 인물과 연관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후후, 아무래도 내가 정신이 흩어진 탓이다.' 어느새 산로(山路)는 순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저멀리 남창성(南昌城)의 전경이 새벽안개 속에 은은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는 긴장이 풀리며 안 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 마치 악몽과 같은 밤이었다.' 장천린은 새벽 여명을 받으며 더욱 남창성을 향해 속도를 가했 다. 획! 획! 새벽의 찬 공기가 뺨에 스치자 지난 밤의 공포스러웠던 일들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었다. 第 8 章 波刺斯國의 高人 귀가(歸家), 장천린은 동이 틀 무렵 무사이 자신의 집이 청하원 (靑河院)으로 돌아왔다. 그는 엉망이 된 모습이었으나 다행히도 새벽이라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다만 청하원의 관리인인 진노 인(陳老人)이 문을 열어 주며 이상히 여겼으나 그는 적당히 둘러 대었다. 오는 도중 낙상을 하였다고....... 처소로 돌아온 그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아 침식사를 끝내었을 때 진시(辰時)가 되었다. 진시가 되자 과영ㄴ 약속대로 파자사국(波刺斯國)의 상인 아라사(阿羅斯)가 찾아왔다. X X X 아라사(阿羅斯), 그는 금발에 벽안의 인물이다. 상당히 큰 체구 였으며 중원인과도 틀린 복장에 허리에는 짧은 만월도를 차고있 었다. 오순(五旬)가량의 나이, 얼굴은 각(角)이 졌는대 과거에는 대단 한 미남이었음직 하다. 그는 파자사국(페르시아) 출신으로 귀족 (貴族)이었으나 타고난 상술(商術)로 중원을 자주 오가며 색목국 (色目國 : 서양국가)등에서 나는 진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중원에 판다. 그리고 그 돈으로 중원의 비단당 특산품을 사가지고 다시 파자사국으로 가 상업을 하는 인물이었다. 장천린과는 십년 전 부텨 인연을 맺었다. 아라사가 중원으로 오던 중 태풍을 만나 범선(帆船)아 난파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간신히 목숨을 건지 아라사가 심한 고생을 치를 때 우연히 장천 린이 그를 보게 되어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아라사는 특별히 장천린과 거래를 하게 된 것이었다. 이번에 그가 다시 중원에 오게 된 것은 장천린이 그에게 한가지 물건을 부탁한 때문이었다. 아라사의 성격은 매우 쾌활했다. 또한 중원어에도 정통했고 장 천린을 은인이라 생각하여 매우 친교를 다짐하고 있었다. 화려하나 속(俗)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화청(花廳), 두 사람 이 차(茶)를 나누며 환담하고 이었다. "하하하! 일 년 못본 사이에 장대인(蔣大人)의 신수가 매우 훤 해지고 사업도 번창했으니 정말 기쁜 일입니다." 아라사는 유창한 한어로 얘기했다. 장천린은 담담히 미소지었다. "모든 것이 아라사공(阿羅斯公)의 덕분입니다." "하하! 거 무슨 말씀이시오? 모두 장대인의 뛰어난 상술때문이 지요." 아라사는 껄껄 웃고 나서 말했다. "한데 이제는 장대인도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어야 하지 않 겠소이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될 듯합니 다." "하하하! 그렇게만 된다면 이 아라사가 장대인을 위해 큰 선물 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아라사공의 영애께서는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습니 까?" 아라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십육세요. 몇 년 더 있어야 합니다." 아라사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눈을 찡긋했다. "솔직이 말해서 나에게는 그 아이 이외는 혈육이라곤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내 곁에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 아비된 자의 심정 입니다." "......." 장천린은 그에 대해 알만큼 알고 있었다. 아라사는 부인이 타 계(他界)한지 오래였으나 오직 딸인 유리공녀(琉璃公女)만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헌신했다. 그의 딸에 대한 집착은 가히 무서울 정도라는 것이다. 아라사는 문득 입을 열었다. "참, 장대인께서 부탁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이어 그는 자신있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건을 보시지요. 내가 직접 불름국(로마의 옛 이름) 에 가서 가져온 것인데 극히 귀중한 것입니다. 아마 장대인께서도 흡족해 하실 것입니다." 아라사는 곧 금빛의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다탁에 놓은 후 극히 신중한 동작으로 뚜껑을 열었다. 순간. "아!"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금갑 속, 거기에는 하나의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하나 보통의 평범한 목걸이가 아니었다. 순금(純金)의 줄로 되었으며, 줄의 고 리 하나 하나하나마다에다 극히 세밀한 조각이 되어 있었다. 그리 고 목걸이에 달린 보석(寶石)은 마치 엷은 하늘 빛이었는데 호두 알만한 크기였다. 그로 인해 찬란한 빛이 발산되어 눈이 부실 지 경이었다. 정말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목걸이였다. "정말... 굉장하군요!" 그 말에 아라사는 득의한 듯 설명했다. "이 푸른 보석은 금강석의 일종입니다. 그 가치가 백만금(百萬 金)을 헤아립니다." 그는 침을 발라가며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서른 여섯 개의 보석도 각기 천 금(千金)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보석들을 이용해 마즌 세공(細工)의 예술 적 가치이지요." 아라사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에 열기를 더했다. "이 푸른 금강석은 불름국의 한 장군(將軍)이 어떤 야만국에 원 정을 갔다가 전리품(戰利品)으로 얻은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불 름국의 유명한 장인(匠人)을 시켜 세공(細工)케 해 삼 년 만에 이 목걸이를 완성시킨 것입니다." 장천린은 그 말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라사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그 장군은 이것을 생명처럼 아꼈습니다. 가보(家寶)로 정할 저 도 였으니까요. 하나 그 장군이 죽은 이후 그의 손자 때에 이르러 가문이 기울자 결국 이것을 팔게 된 것입니다." 장천린은 호기심이 일어 물었다. "대체 얼마에 구입하셨습니까?" 아라사는 미소지었다. "세개의 강(江)과 스물 세 개의 산(山)이 포함된 영지에 건장한 노예 백명, 거기에다 은전(銀錢)을 십만 개 주고 샀지요." 장천린은 그 말에 얼른 계산을 할 수가 없었다. 중원과 계산법 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제가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라사는 약간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대인에게 만큼은 그다지 이익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잠시 헤아리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중원의 은자로 치면 육백만 냥이면 되겠습니다." '육백만 냥!' 장천린은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목걸이 하나에 은자 육백만 냥이라니?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가 아닌가? 그의 놀람이 깃든 표정을 보고 아라사가 고소를 지었다. "솔직이 말해 너무 엄청난 가격이라 파자사국에서도 웬만한 거 부들조차 살 엄두를 내지 못하는 물건입니다." 장천린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 그가 소유하고 있는 신선루등 일곱 개의 업체를 모두 처 분한다해도 은자 육백만냥에는 어림도 못미친다. 다만 방법이 있 기는 있다. '아버님께서 평생 모아놓으신 지하석부(地下石府)의 금은보화를 모두 합치면... 은자 육백만냥은 조금 넘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허나 그것을 써서 저 목걸이를 구입한다면 나의 계획에 너무 도 큰 차질이 올 것이다.' 그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강남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나의 계획도 최소한 십년은 늦어질 것이다.' 이때, 아라사가 그의 눈치를 보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험! 장대인에게 너무 무리가 된다면 다른 것을 보여드릴 수가 있습니다." "......." 하나 장천린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황금에 칠백 개의 보석이 박힌 황금공작도 있고, 열두개의 금 강석이 박힌 팔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백년 전 불름국의 황제가 쓰던 황금배(黃金盃)도 대단한 보물입니다." "......." 아라사는 약간 초조한 듯 말을 계속했다. "이 세가지 물건들은 각기 은자 백만냥 정도는 나가는 값진 보 물들입니다." 아라사는 신중하게 말했다. "이 세가지 물건과 저 보석 목걸이를 구입하는데 나의 전 재산 이 투입되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는 장천린을 바라보며 탐색하듯 말했다. "장대인께서 어떤 이유로 값진 물건을 구하시는지는 몰라도 이 네 가지 물건은 모든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장천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일년전에 아라사에게 부탁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물건을 구해달라고, 하나 그것이 정작 은자 육백만 냥을 홋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때. 아라사는 장천린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했다. 하나 장천린 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스럽게 말했던 것이다. "좋습니다. 이것을 사겠습니다." 아라사는 활짝 미소지었다. 그는 덥석 장천린의 손을 잡으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대단히 기쁘군요. 솔직이 말해서 중원에서 이 물건을 팔 수 있 을까 매우 걱정했습니다." 그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것이 팔리지 않았으면 중원에서 물건을 구입하는데 어려움 을 겪었을 것입니다. 정말 기쁨니다." 장천린은 빙그레 웃었다. "대금은 전액 오늘 내에 지불하겠습니다." 아라사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늘...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라사의 입이 찢어졌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없이 기쁜 일입니다." 이어 그는 궁금한 듯이 말했다. "한데 대체 이 보물을 어디에 쓰시려고 합니까?" 장천린은 담담이 말했다. "선물로 사들이는 겁니다." 아라사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치떠졌다. "선... 선물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대... 대체... 누구에게 이런 막대한 가치의 보물을......?" 장천린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입니다. 바로 그녀에 게 청혼(請婚)하기 위한 선물이지요." "......!" 아라사는 완전히 넋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멍청이 장천린을 응 시했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일개 여인에게 청혼하려는 예물로 자그만치 은자 육백만냥이라 는 거금(巨金)을 쓰다니! 설사 왕후장상도 그처럼 엄청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아라사는 역시 거상(巨商)이었다. 그는 마침내 대소를 터 뜨렸다. "하하하하! 정말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분일 것입니다." 장천린은 빙그레 미소짓기만 했다. 아라사는 그를 바라보며 말 했다. "은자 육백만 냥의 거금보다도 장대인 같은 천하에서 가장 통 이 큰 께서 청혼을 하시다는 사실자체가 이미 그 여인의 축복일 것입니다." 장천린은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아라사의 눈에는 탄복의 기색이 어려 한참이나 가실 줄을 모르고 있었다. X X X 은자(銀子) 육백만 냥이라는 거금(巨金)을 하루 동안에 마련한 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장천린은 약소대로 그날 오후까지 아라사에게 대금을 계산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부친인 장진군(蔣眞君)이 평생에 걸쳐 모아놓은 보 화중 금은(金銀)을 모두 털고도 모자라서 열 두 상자의 보석까지 도 꺼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세 상자의 보석 뿐이었다. 장 천린이 아라사에게 지불한 육백만 냥은 마차 여섯 대 분에 꽉 찰 정도였다. 그 날 신시 무렵, 아라사는 금릉(金陵)으로 떠나야 한다며 일곱 대의 마차를 몰고 청하원(靑河院)을 떠났다. 아라사를 따라온 파 자사국의 무사(武士)들이 수십명이 있었기에 호송에는 별다른 조 치가 필요없었다. 한데, 아라사는 떠나기 전 장천린에게 일 년 후에의 재회를 약 속하며 한 개의 커다란 상자를 선물했다. 그가 떠난 후 장천린은 그 상자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상자 안에는 수백개의 보석이 박힌 황금공작(黃金孔雀)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라사가 중원으로 가지고 온 네가지 보물 중의 하나라는 것을 그는 한 눈에 알아 보았다. 상자 안에는 한통 의 서찰도 들어있었다. < 장대인(蔣大人)의 앞날에 행운이 무궁하기를 기원합니다. 일 년 후 결혼하신 행복한 모습을 뵙기 바라며 약소하나마 선물을 드리고 떠납니다. ----- 영원한 친구 아라사(阿羅斯). > 비록 간단한 글귀였으나 장천린은 거기에서 아라사의 상(商)거 래를 초월한 우정(友情)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종족까지도 초 월한 뜨거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이었다. 장천린은 서찰을 들고 미소지었다. "아라사 공(公). 고맙소이다." 그의 손은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공작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것만 해도 능히 은자 일백만 냥은 나가는 엄청난 보물이었다. 第 9 章 무서운 疑惑 고풍(古風)스런 방안, 벽면의 장식은 거개가 고서화(古書畵)나 골동품이었다. 방안의 탁자 앞에서 장천린은 아라사라부터 거금 육백만 냥을 주고 사들인 푸른 금강석목걸이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정말 몇번을 보아도 아름다운 보석이다.' 그는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이 황금을 깎은 세공(細工)은 가히 예술의 극치를 이룬 아름다움의 결정이다.' 목걸이 줄 하나하나에 새겨진 조각솜씨는 그를 매료시키고 있 었다. 그는 본시 골동품 및 보석감정에 밝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 다. 그런 그가 감탄할 정도라면 그 목걸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만 한 일이었다. 그는 목걸이를 어루만지며 미소지었다. '이 목걸이의 이름이 중원어(中原語)로 태양(太陽)의 눈(眼)이라 했지. 과연 그 이름대로 한참 보고 있으면 이름대로 태양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군.' 문득 한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오르자 그의 가슴에는 뿌듯 한 느낌이 차올랐다. '이것을 옥교에게 주면 얼마나 기뻐할까?' 그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내일쯤 신선루에 가서 그녀의 목에 이 태양의 눈을 걸어주며 다시 청혼하리라.' 그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말하리라. 옥교 그대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 들어 주겠노라고.' 장천린은 취한 듯 태양의 눈을 움켜쥐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 태양(太陽)의 눈(眼)앞에서 나는 그대에게 청혼하리니... 눈부 신 하늘(天)의 축복이 우리에게 있으리라. 내 사랑 옥교(玉嬌), 내 그대의 향기로운 입술에 입 맞추며 사랑을 맹세하리라. 복사꽃같 은 그대 두 뺨에 행복이 깃들게하고 별빛같은 그대 눈망울 속에 환희의 빛을 심어주리라. 옥교(玉嬌), 이 세상 여인들이 모두 그대 를 가장 부신 눈으로 바라보게 하리라....... 석양(夕陽), 타오르는 붉은 석양의 노을을 응시하고 있는 장천 린, 그의 옆모습은 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마치 미(美)의 신(神)이 조각한 듯, 그의 손에 들려있는 태양의 눈에선 반사된 아름다운 광체가 그의 얼굴에 더욱 황홀한 서리를 뿜어주고 있었다. 장천린 은 하동안 넋잃은 듯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상념에 젖어 있는 것일까? 이윽고 그는 태양의 눈을 다기 금갑 속에 넣었다. 그리고 금갑 을 소중히 품속에 갈무리 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우선 북경(北京)에 가야겠다. 북경의 태진궁 태진와(太眞王)진하께 전해달라는 그 서찰이 비록 무슨 내용인지 는 몰라도 네 분 노인의 뜻을 어기고 싶지는 않다.' 그의 뇌리에 처참하게 죽어간 네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생각이 치닫고 있었다. '조화성(造化城)이라고 했지.' 그는 곧 고개를 흔든다. '어떻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무림(武林)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의 체 험이었으나 그로 인해 더욱 그는 무림늬 냉혈세계(冷血世界)에 대해 반감과 두려움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나 어찌 그가 알겠는가? 이미 운명(運命)이 그의 발길을 무림계로 서서히 몰고 가고 있 다는 것을....... 장천린은 문득 내공(內功)을 끌어올려 보았다. 그러자 단전에 깊이 잠재하고 있던 진기가 마치 대해(大海)처럼 뻗쳐 올랐다. 그 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백 이십년의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 하나 이것도 이십 사 시진만 지나면 무(無)로 사라지는 것.......' 왠지 그는 한 가닥 아쉬움을 느꼈다. '쓸데없는 일에 연연하지 말자. 나는 무림인이 아니라 다만 상 인(商人)일 뿐이다.' 그는 주전자에 식혀 둔 차를 따라 한모금 입을 적셨다. 차의 향 기로운 냄새가 입 안을 청량하게 감돌자 그는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그렇군, 오늘 유시(酉時)에 금대인(金大人)이 저녁식사 초대를 했지.' 그는 그 생각이 떠 오르자 머리 회전이 빨라졌다. '시간이 다 되어가니 준비해야겠군. 금백만(金百萬) 그 양반은 아직 강남에서는 제일 가는 거상(巨商)이니 어느 한도까지는 친분 을 유자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가 생각을 마치고 막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문득 문 밖에서 진노인(陳老人)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인님." "무슨 일이오?" "신선루의 취소저꼐서 오셨습니다." 장천린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취누이가 왔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어서 들라 하시오." 장천린은 서둘러 의관을 정제한 후 화청(花廳)으로 나갔다. 화 청은 그가 즐겨 손님을 맞는 장소였다. 취옥교는 왠지 조금 초ㅊ한 모습이었다. 장천린은 화청으로 들 어서자 마자 의아한 듯 물었다. "어인 일이오. 옥교? 이곳까지 오다니." 취옥교는 장천린을 응시하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곳에 오면 안되는가요?" 장천린은 멈칫했다. 하나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 무슨 말이오? 나야 아주 기분이 좋은 일이지. 아 름다운 옥교가 내곁에 있는데 싫을 리가 있겠소?" 취옥교는 그윽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나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빛이 감도는 눈빛이었다. "어젯밤에...... 한숨도 못잤어요." 장천린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었소?" 취옥교는 장천린의 눈을 마주 응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늦게 밤길을 떠난 당신 걱정때문이죠." 그말에 장천린은 흠칫했다. '하기사... 자칫했으면 영영 못볼 뻔 했지.'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그였다. 하 나 그 일을 발설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그였다. 그는 취옥 교의 뺨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옥교가 그토록 내 걱정을 했다니 정말 기분이 좋군." 취옥교는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어 나직이 한숨을 쉬며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 "천린....... 사랑해요." 장천린은 그녀를 안으면서도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오늘따라 옥교가 이상한걸.' "옥교." 하나 그가 물으려 했을 때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막 으며 말했다. "천린, 아무 말씀마세요. 오늘...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찾아왔어요." 장천린은 멈칫했으나 곧 미소지었다. "좋소. 옥교 그대의 이야기라면 아무리 재미없어도 시흘 밤낮 까지는 들어줄 용의가 있소." 이어 그는 그녀의 오똑한 코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눈 을 찡긋했다. "하나 지금은 안되오." "왜요?" "왜냐면 금백만대인의 만금산장(萬金山莊)에 다녀와야 하기 때 문이오. 저녁식사를 유시까지 약속했기 때문이오." "......!" 취옥교의 안색이 변했다. "그곳에 다녀와서 이야기를 듣겠소. 그리고......." 장천린의 얼굴에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녀와서 내일 옥교에게 줄 선물도 있소." 하나 취옥교는 문득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약속... 취소할 수는 없나요?"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안되오. 며칠 전부터 한 약속이니 어길 수가 없소." 그 말에 취옥교의 눈가에 가는 경련이 일어났다. "내일 가면...... 되잖아요?" 장천린은 정색을 지었다. "옥교, 금대인과의 일은 우리 두 사람의 사랑과는 별개의 일이 오." "하지만......." "옥교!" 장천린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의 뜻을 꺽을 수가 없 을 것 같았다. 취옥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 제가 따라가면 안 될까요?" 이 말을 하는 순간 취옥교는 지정으로 그가 거절해 주기를 바 라고 있었다. 하나 장천린은 오히려 밝은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 가? "좋소! 금대인도 당신이 가면 크게 기뻐할 것이오." 취옥교는 그만 절망의 늪에 빠졌다. 이제는 한가닥의 희망조차 도 사라진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장천린은 그녀의 심정도 아랑곳 없이 마침 화청밖에 대기하고 있는 진노인을 향해 경쾌하게 말했다. "진노인, 어서 마차를 준비해 주시오." "예, 주인님." 진노인은 대답을 하고 급히 사라졌다. "자 나갑시다. 옥교." 하나 취옥교는 문득 고개를 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천린......." "......?" "당신은... 나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계시죠......?" 그 말에 장천린의 가슴 속에는 재차 깊은 의혹이 치밀어 올랐 다. '진정... 오늘 옥교가 이상하구나.' 하나 그는 빙긋 미소지으며 오히려 이상한 듯 반문했다.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요? 그저 매우 아름다운 나의 연인이라 는 것만 알면 되지 않소?" "저는 무림인이에요." 취옥교의 말에 장천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것은 당신이 만가산에서 상처를 입고 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니오?" 취옥교의 음성이 조금 떨려 나왔다. "저는... 고아에요." "역시 아는 것이오. 당신이 이야기해주지 않았소?" "저... 저는......." 마침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큰 눈에는 맑은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문득 눈물어린 눈망울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큰 눈에는 맑은 눈 물이 고였다. 그녀는 문득 눈물어린 눈망울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린, 어떠한 일이 생겨도... 저를 사랑하시겠어요?" 장천린은 더욱 더 의혹을 느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하나 그는 미소지었다. "당신이 설사 지옥(地獄)에 간다해도 사랑할 것이오." 그 순간 취옥교는 그의 품에 몸을 던지다시피 안겼다. "안아주세요......." 장천린은 그녀의 양뺨을 손으로 잡고 그녀의 얼굴을 쳐들었다. 이어 엄숙한 음성으로 물었다. "옥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소?" 하나 그녀는 도리질을 하며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안아 주세요." 장천린은 그녀를 안았다. 취옥교는 그의 목을 꼭 끌어 안았다. 그녀의 두 뺨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녀는 그의 얼굴 에 자신의 뺨을 꼭 갔다 붙이며 말했다. 마치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이, "천린, 옥교는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것예요.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 장천린은 깊은 의혹에 빠졌다. 그때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 왕문헌(王文軒)을 제거한 뒤 옥교(玉嬌)언니와 함께 다시 찾 아 뵙겠어요. --- 설봉(雪鳳) 그 아이는 어디 있느냐? --- 호호. 왕문헌을 제거하기 위해 남창성(南昌城) 부근에서 삼 년간 숨어있어요. 만가산(萬家山)에서 들었던 자의소녀와 독제(毒帝) 당선종의 대 화, 그 당시 그는 그 대화를 흘려 들었다. 세상에 동명이인은 많은 법이라고....... 하나 지금 이 순간 그의 등골에서 한기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설마.......' 그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취옥교를 내려 보았다. 그녀의 뺨 에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설마.......' 그는 자신을 타이르듯 부정했다. "입 맞춰 주세요. 천린......." 취옥교가 그를 향해 예쁜 턱을 들어올리며 갈망했다. 장천린은 내심 고개를 흔들며 강하게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천린. 그것은 기우다. 너의 지나친 상상일 뿐....... 말도 안된다. 옥교를 조화성의 사람으로 생각하다니.' 그는 머릿속에서 불안한 생각을떨쳐 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 여 자신을 향해 함초롬히 젖은 채 살짝 벌어져 있는 꽃잎 입술을 향해 입을 맞추어 갔다. "음......."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취옥교는 놀랄만큼 적극적으로 그의 목 에 매달리며 정열적인 입맞춤을 해왔다. 장천린은 계속하며 그녀 의 뺨이 젖는 것을 느끼면서 깊은 입맞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린... 용서해 주세요.' 한껏 입맞춤에 몸을 사르면서 취옥교는 내심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第 十 章 엄청난 殺人, 破局 만금산장(萬金山莊). 남창성(南昌城)의 동북(東北)방향에 위치해 있다. 너무나도 거대 한 정원이었다. 수개의 산(山)을 장원의 영지로 통합시킬만큼 방 ㅐ하며 하나의 성(城)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가히 강남제일의 거부(巨富)의 집다운 규모였다. 이 곳 만금산 장애소 일하는 식솔만 해도 수백 명, 아니 천여 명을 헤아린다니 능히 그 규모를 지작할 만한 일이었다. 남창성내에서는 장천린도 상당한 부자였다. 하나 만금산장의 금백만(金百萬)과는 아직 비교가 되지 못했다. 강남 칠개성(七個 省)에 걸쳐 금백만의 사업체는 수백 개에 달하고 있었다. 그가 벌 어들이는 돈은 매년 은자 수백만 냥에 달했다. 뿐인가? 세인들이 추측하는 금백만의 재산은 가히 물경 억만 냥에 달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설(說) 도 있었다. X X X 만금산장(萬金山莊)의 육중한 금칠을 한 대문 앞, 장천린과 취 옥교가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핫핫핫. 이거 신선루의 선녀(仙女)께서도 오시다니 이 금백만 의 두 눈이 오늘 복(福)이 터진 것 같소이다." 뚱뚱한 체격의 금포노인 --- 금백만은 마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 을 바라보며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취옥교는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이 절을 했다. "금대인께서 청하시지도 않았는데 와서 오히려 송구스럽나이 다." 금백만은 껄껄 웃었다. "그런 말 마시오. 취랑같은 미인이 온다면 언제든지 만금산장 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놓을 용의가 있습니다." 이어 그는 장천린을 바라보며 의미있게 말했다. "허나 그렇게 했다가는 장공자의 주먹에 이 늙은이의 갈빗대가 아래 위로 섞여 버리겠지. 핫핫핫!" 금백만은 대소를 터뜨렸다. "별 말씀을."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금백만, 그는 언제나 유쾌한 모습이었다. 그는 곧 소매를 휘둘 렀다. "자 어서 들어갑시다. 이 늙은이가 주착없이 떠들어서 귀한 손 님에게 밤이슬만 맞히는구료." 아닌게 아니라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육중한 대문 에 등롱이 수십개나 걸려 있어 대낮같이 밝았다. 이윽고 그들은 환담을 나누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大廳). 화려하고 넓은 대청에는 이미 수십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탁자에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먼저 온 손님이 두 명 있었다. 한명은 화복노인이었는 데 바로 신선루에서 금백만과 술을 들던 노인이었다. 다른 한명, 그는 남삼청년이었다. 극히 준수한 용모의 이십 사 오세 가량 된 인물이었다. 관옥같은 얼굴에 두 눈에는 혜지가 넘 치고 패기만만한 인물이었다. 옷차람도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대청주위에는 이십여명의 청의무사(靑衣武士)들이 허리 에 검을 차고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잘 훈련된 호장무 사들인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 앉으시오. 두 분." 금백만은 장천린과 취옥교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어 그는 화복 노인을 바라보며 소개를 했다. "상관형(上官兄), 내 자네에게 멋진 분을 소개하겠네." 이어 그는 장천린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젊은이가 바로 내가 그렇게도 칭찬했던 신선루(神仙樓)의 주인일세. 그리고 이 아름다운 소저는 취랑이라고 강남제일미인 일세." 장천린은 즉시 몸을 일으켜 포권했다. "장천린이라고 합니다." 화복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상관홍(上官紅)이라고 하오. 내 장공자의 소문은 귀가 따갑게 들었소이다." 취랑도 사뿐히 절을 했다. 동시에 그녀는 맑은 음색으로 말했 다. "신선루에서 한 번 뵌 분 같군요," "그렇소." 상관홍은 멋적게 웃었다. "허허. 그만 주착없이 단번에 취소저에게 반했다가 저 금가 늙 은이한테 혼났지요." 취랑은 그만 얼굴에 홍조를 띄었다. 금백만은 껄껄 웃었다. "이 늙은이는 주착없는 노부와 가장 친한 막역지우이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장공자도 아마 들은 적이 있을 것이네. 하북성(河北省)의 용문 전장(龍門錢莊)에 대해서 말일세. 이 늙은이가 바로 용문전장의 주인이라네. 강북에서는 늙은 색귀(色鬼)와 돈귀신으로 통하지." 상관홍이 얼굴이 시뻘개져 외쳤다. "예끼! 이 사람아! 손님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군." 금백만은 히죽 웃었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는가, 선녀처럼 아름다운 강북의 칠선 녀(七仙女)를 모조리 데리고 살면서, 게다가 돈에 굶주려 돈 모으 는 것만을 취미삼아온 게 자네 아닌가?" "이 친구 큰일 날 친구로군. 사람을 매도해도 분수가 있지!" 두 사람은 언쟁을 했으나 오히려 화기가 감돌고 있었다. 하나 이때 장천린이 심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용문전장!' 용문전장(龍門錢莊). 중원제일의 전장으로써 무려 이백년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전장의 규모는 그 전장이 보유하고 있는 자금의 능력과 비례하는 법이다. 그래야만 그 전장에서 발행하는 전표의 신용(信用)이 유 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용문전장의 전표는 단연 대륙제일의 신용을 누 리고 있었다. 용문전장이 보유하고 있는 자금의 규모는 상상을 불 허했다. 지니고 있는 전금으로만 따지면 금백만보다는 오히려 훨 씬 위였다. 전 중원 십삼개성(十三個省)에 백여 곳의 용문전장의 분점을 가 지고 있으며 상관홍은 바로 용문전장의 제 칠대 주인이었다. 심지어는 황실(皇室)에서조차 그의 용문전장을 이용할 정도니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정말 놀랍다.' 장천린의 경악은 컸다. 지금 이 자리에 중원의 상권을 거머쥐 고 있는 양대거물이 함께 있는 것이었다. 실로 경이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금백만은 남삼청년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쪽은 제갈유풍(諸葛柔風)이라고 하네. 내가 존경하는 분의 아들이 되지. 서로 사귀어 보게. 아마 의기가 통할 것이네." 남삼청년이 일어나 공수했다. "제갈유풍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장형의 많은 지도편달을 바랍 니다." 장천린은 그의 심상치않은 기도를 느꼈다. '보통인물이 아니구나.' "별 말씀을, 오히려 제가 부족하니 많은 가름침을 바랍니다." 금백만은 미소지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 노부가 장공자를 초대한 이유를 알겠나?" 장천린은 멋적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소생이 우둔하여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헛헛! 사실은 오늘이 노부의 생일(生日)이라네." "아!" 장천린은 뜻밖의 말에 탄성을 발했다. "하나 번거롭게 널리 알리고 싶지 않아서 노부가 평소 잘 아는 몇 명만 초대한 것이네." "......." "장공자도 알다시피 노부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지 않는가? 실상 이렇게마나 생일잔치라고 한것도 오년만이네." 금백만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장공자와 취소저, 부담없이 모쪼록 이 늙은이를 위해 즐겨주 면 정말 기쁠 것이네." 이때 상관홍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이 늙은이야! 그만 떠들게. 자네가 입벌려 수다 떨고 있는동안 음식이 식는다는 것을 모르나?" 금백만은 껄껄 웃었다. "헛헛! 좋아, 좋아. 자 우리 건배 한 번 하세." 그 말에 모두 술잔을 치켜들었다. 마침내 장내에 주흥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술잔이 권커 니 잣커니 몇 순배가 돌아가자 모두들 얼큰해졌다. 장천린도 어느 정도 술기운이 돌았으며 심지어는 취옥교도 몇 잔 술에 양뺨이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금백만이 입을 열었다. "장공자, 취소저. 노부가 한가지 무례한 부탁을 해도 되겠소?" "......?" 장천린과 취옥교는 의아한 눈을 돌렸다. "장공자의 탄금(彈琴) 실력과 취소저의 가무(歌舞) 솜씨가 강서 성 일대에서 쌍절이라는 소문을 들었소. 오늘 밤 이 늙은이의 안 목을 좀 넓혀주지 않겠소?" 장천린은 멈칫했다. 이어 그는 멋적게 머리를 긁적였다. "글... 글쎄요." 금백만은 사정조로 말했다. "장공자, 이 늙은이를 위해 한 번 탄금솜씨를 보여주게나." 이어 취옥교를 향해서도 애원하듯 말했다. "취소저, 이 노부의 부탁 좀 들어주시구료." "......!" 취옥교는 당황한 표정으로 장천린을 응시했다. 장천린은 마침 내 미소지으며 응낙했다. "좋습니다. 오늘은 금대인의 생신이시니 제가 부족한 솜씨나마 보여 드리겠습니다." "헛헛헛! 정말 고맙네." 이어 그는 손뼉을 세 번 쳤다. "어서 가져 오너라!" 중인들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어리둥정했다. 그러자 곧 안쪽 으로부터 두 명의 시녀가 하나의 금(琴)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닌 가? 장천린은 얼떨떨하다가 그만 고소를 금치 못했다. "벌써 준비해 놓고 계셨군요." "으하하핫! 당대의 명가 두분이 오는데 어찌 이만한 준비를 안 하겠는가? 장천린은 미소지으며 금을 받아 슬쩍 퉁겨보았다. 띵! 맑은 금음이 장내의 공기를 일순 청아하게 울렸다. 그는 감탄했다. "좋은 악기로군요." "허허. 백년 전 천하음률의 대가(大家)였던 해랑선생(海浪先生) 이 쓰시던 것이네." 장천린은 시선을 취옥교에게 옮겼다. 그러자 취옥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교구를 일으켰다. 술기운 탓인지 그녀의 얼굴은 더욱 더 화기가 보기좋게 피어나 있었다. 극미(極美)의 요염함이 그녀를 흡사 요정처럼 보이게 했 다. 하나 몸을 일으킨 그녀는 주변에 도열해 있는 청삼무사를 바 라보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금백만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거 노부가 실수를 했구려. 살벌한 분위기에서 취소저 의 가무를 즐긴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 이어 그는 제갈유풍에게 말했다. "제갈현질, 저 아이들을 잠시 나가 있도록 하게." 제갈유풍은 눈살을 살짝 지푸렸다. "숙부님." "현질, 내 말대로 하게." 금백만의 말이 완고해지자 제갈유풍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 을 저었다. 그러자 이십여 명의 무사들은 곧 허리를 숙인 후 사라 졌다. 이윽고 장내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장천린은 자리를 잡았 다. 그는 눈으로 물었다. "......." 취옥교는 그의 눈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던 그녀는 수줍은 듯 말했다. "비파행(琵琶行)을......."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좋소. 나도 오래간만에 취누이의 노래 솜씨를 듣겠구료." 이어 띠디딩......, 그는 칠현금을 골랐다. 그리고 단정히 금을 무 릎에 비스듬히 누인 후 눈을 감았다. 탄금하기 전에 늘상 그는 정신을 가다듬는 버릇이 있었다. 그 래야만이 그 자신이 음율에 젖어들 수 있고 훌륭한 탄금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띠딩...... 띵...... 띵....... 청아하면서도 은은하며 심금을 파고드는 감미로운 금음이 울리 기 시작했다. 장천린의 희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금현 위에서 춤추 듯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취옥교가 서서히 날씬한 교구를 율동하 며 음율에 맞추어 매혹적인 음성으로 노래부르기 시작했다. "심양강( 陽江) 저문 날에 손을 보낼제( 陽江頭夜送客), 갈꽃 단풍잎에 갈바람 불어(風葉秋花秘瑟瑟) 주인은 말 내리고 손은 배 에 올라(主人下馬客主船), 잔 들자니 피리도 거문고도 없어라(擧 酒欲飮無管絃)." 청아한 음성이 금음에 맞추어 노래부르기 시작하자 중인들은 홀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부르는 것은 시성(詩聖) 백낙천 (白樂天)의 비파행(琵琶行)이었다. 곱고 은은한 음성은 흡사 천계의 선녀가 노래하듯 심금에 젖어 들고 있었다. "문득 비파소리 물을 타고 들려와(忽聞水上瑟瑟聲) 주인도 손도 갈길을 잊었구나(主人忘歸客不發). 비파소리 따라서 타는 이 물어 보니(辱聲闇問彈者) 소리는 그쳤어도 미처 대답이 없어(瑟瑟聲停 欲語?)." 탄금(彈琴)소리는 열려진 창을 타고 월야(月夜)로 흘러나가고, 금음에 맞춰 부르는 취옥교의 노래소리도 마침내 가경에 이르렀 다. 중인들은 모두 넋을 잃었다. 더욱이 음율과 노래에 맞추어 율 동하는 취옥교의 하늘거리는 자태야말로 속되지 않으면서도 사람 의 혼백을 사로잡는 것이었기에....... "뱃전을 감도는 달빛 차게 빛나고(繞船明月江水寒) 이슥한 밤 꿈꾸던 내 청춘이여(夜深忽夢人生事) 흐느껴 우는 꿈에 눈시울이 뜨겁구나(夢啼牧淚紅蘭于) 내 듣노니 비파소리 탄식일레라(我聞瑟 瑟己歎息)." 금음의 탄주는 절정에 이르러 흐느끼듯 흐르고 노래소리는 비 창해졌다. 중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는 제갈유풍조차 넋을 잃은 듯 취옥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춤추는 취옥교의 모습은 황홀했다. 마치 한 마리 푸른나비가 꽃밭을 누비듯, 모두의 넋을 빼고 있었다. 장천린도 흥이 고조해 더욱 스스로 몰아경에 빠져들며 탄주했다. "온종일 이곳에서 무슨 소리 들리리(其問旦暮聞何物) 두견이 피 를 토하고 원숭이 슬피울어(杜鵑啼血猿襲鳴)." 취옥교의 춤추는 발걸음은 어느덧 알게모르게 금백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금백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호수같은 두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격랑의 물결이 치듯....... 하나 그녀는 교구를 빙글 돌리며 노래를 계속했다. "꽃피는 봄 달 밝은 가을 밤에(春江花鳥秋月夜) 흥겨우면 홀로 잔을 기울여 봐도(往王取酒還獨傾)" 취옥교는 마침내 금백만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 춤을 춘다. 금백만은 한 손으로 턱을 괸채 넋을 잃고 그녀의 품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취옥교는 그를 향해 뇌쇄적인 미소를 지었다. '으음.......' 그 미소에 금백만은 혼백이 녹아나는 듯함을 느꼈다. 그는 아 찔한 유혹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바로 그 때였다. '금대인, 용서하세요.' 마지막 그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원하노니 그대여, 한 곡조 더 타다오(莫辭更坐彈一曲)." 슉! 섬광(閃光)도 그처럼 빠를 수는 없다. 노래가 한 소절 끝남과 동시에 춤추며 휘젓던 취옥교의 소매 속에서 푸른 섬광이 뻗었다. 너무나 빨라 도저히 육안으로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컥!" 금백만의 목에 푸른 섬광이 작렬했다. 그는 흡사 목에 가시가 걸린듯한 거북한 소리를 내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는 믿 을 수 없다는 듯한 경악과 불신의 빛이 더올라 있었다. 하나 그는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역시 그 동작은 이미 그의 목 에 섬광이 꽂힌 직후였다. "우욱......!" 그는 목을 움켜 쥐었다. 순식간에 핏물이 손가락사이로 뭉클뭉 클 비집고 흘러나왔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상상치도 못 한 변화였다. 곁에 있던 상관홍과 제갈유풍의 안색이 급변했다. 상관홍은 대 경하며 그를 부축했다. "금형! 금형!" 하나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금백만의 안색은 하얗게 탈색해 있었고 상체는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목욕을 하다시피 하고 있 었다. 이때, 제갈유ㅍ은 어느결에 벌떡 일어났으며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그는 검을 뽑았다. 그는 검을 뽑아 취옥교를 향해 겨누며 너 무나 기가 막혀서인지 부드부들 떨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숙부님을 공격했느냐?" 하나 역시 그는 이 엄청난 상황속에서도 신속하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한소리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고 순식간에 대청을 벗어 났던 청의무사들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취옥교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장 천린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 장천린의 두 눈은 경악과 불신으로 휩싸여 있었다. 그는 취옥 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었으며 혼란스럼이 극에 이르렀다. 모든 경물이 흔들흔들했다. 그의 안색은 백납처럼 창백해져 갔다. 취옥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이슬이 반짝 였다. "안녕... 천린......." 그 말이 장천린의 귓가에 가물거리는 순간, 그녀는 신형을 솟 구쳤다. 그러자 제갈유풍이 노갈을 터뜨렸다. "도망치지 못한다!" 그는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막아라! 주살해도 좋다!" 순간, 창! 째애앵-----! 슈파파아앗! 청의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날리며 취옥교를 공격했다. 하나 번 쩍! 취옥교가 손을 뻗자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백광(白光)이 환상 처럼 원을 그림과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졌다. 봉황검 (鳳凰劍)이 발출된 것이었다. "크---윽!" "악!" "으아악!" 십여명의 청의무사들이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실로 엄청난 검법이었다. 제갈유풍은 그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럴 수가!' 그는 취옥교의 무공이 그토록 강하리라고는 상상치도못했다. 이때 펑---! 취옥교는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눈깜짝할 사이에사라지고 말았 다. "추격해라!" 제갈유풍은 노성을 질렀다. 청의무사들은 급급히 신형을 날렸 다. 하나, "크아악!" "으---아악!" "큭!" 그들이 채 문을 나서기도 전에 또 하나의 이변이 발생했다. 그 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모조리 고꾸라진 것이다. 그들의 이마! 그곳에서 자줏빛 비수가 깊숙이 꽂혀 파르르 떠는 것이 아닌 가? 실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음......!" 제갈유풍이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도 어깨에 비수를 맞 은 것이었다. 그 순간 귀를 찌르는 무섭고도 싸늘한 교소가 대청을 울렸다. "호호호호홋!" 스스슥......! 동시에 제갈유풍의 눈앞에 자의인영이 나타났다. 아름다우나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같은 냉기를 뿌리는 미소녀(美少女)였다. 그 녀를 본 순간 제갈유풍의 안색은 곧 무섭게 일그러졌다. "빙심자봉(氷心紫鳳) 매소련(梅素蓮)!"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경악에 휩싸여 있었 다. 그 순간 매소련의 우수가 거짓말처럼 번득였다. "악!" 참담한 비명이 뒤따르고 제갈유풍의 입에서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여지없이 뒤로 나뒹굴었다. "호호호호홋!" 매소련은 날카로운 웃음을 흘렸다. 이어 한쪽에서 두 눈에 초 점을 상실하고 있는 장천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천린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모든 것을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설마설마 했던 일이 모두 명확한 현 실이었다는 것을....... 매소련의 입가에 날카로운 웃음이 어렸다. 그것은 조소였다. 그 녀는 그를 향해 새하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슉! 슉! 소매속에서 두자루의 비수가 날아갔다. 무서운 속도였다. 장천 린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도 없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비 수가 그의 복부와 심장을 그대로 적중하여 깊숙이 꽂혔다. 그는 그래도 비명 한마디 없이 고꾸라지고 있었다. '옥교...... 네가......!' 그의 의식이 멀어져갔다. 매소련은 시선을 그에게서 거두더니 이번에는 상관홍에게 향했 다. "호호! 상관홍, 너도 가거라!" 슛! 비수가 또 다시 섬전처럼 날아갔다. 상관홍은 공포의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무공을 할 줄 몰랐다. 하나 바로 그때 그의 품속에 있던 금백만이 돌연 몸을 벌떡 일 으키더니 비수를 맨손으로 내리쳤다. 캉! 비수는 흡사 철퇴를 맞은 듯 퉁겨나갔다. 하나 그의 손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맞은 편을 향해 무서운 맞은 편을 향 해 무서운 장력(掌力)을 뻗었다. "......!" 매소련은 경악했다. 그녀가 신형을 급히 허공으로 띄우자, 꽝! 하며 그녀가 서있던 벽면이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철수진기(鐵手眞氣)!" 경악에 차 부르짖는 매소련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 졌다. '이럴 수가... 목의 천돌혈이 관통당했음에도... 죽지않고 무공을 전개하다니!' 이때 금백만은 우뚝 선채 두 눈에서 시퍼런 광채를 뿜어냈다. "물러가라, 매소련! 내 비록 치명적 부상을 당했으나 남은 한 줄기의 진기라면 너와 동귀어진 할 수는 있다!" "......!" 매소련의 안색이 거듭 변화를 일으켰다. 그녀는 한동안 영활한 눈으로 금백만을 살피더니 이윽고 싸늘한 교소를 터뜨렸다. "과연 철솔선생(鐵率先生) 왕문헌답구나. 치명상을 입고도 그만 큼 움직일 인내가 있다니....... 호호홋! 하나 너의 최대급소인 천돌 혈이 뚫린 이상 너의 목숨도 한 시진을 넘기진 못할 거다!" 그녀는 훌쩍 그대로 뒤로 누운 자세로 날아갔다. "호호호호호홋!" 그녀의 웃음소리가 차디찬 전율감을 남기며 마침내 멀리로 사 라져 갔다. 이윽고, 그녀가 사라지자 장내는 피비린내와 함께 처 참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금백만은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금...... 금형......!" 비로소 정신을 차린 상관홍이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나를... 건드리지 말게....... 나를 건드리는 순간...... 나는 죽는 다네......." 상관홍은 그 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금백만은 초점 잃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 상관형....... 부탁이 있네......." "금형!" 상관홍의 노안에 눈물이 어렸다. 그는 평생의 죽마고우(竹馬故 友)인 금백만의 죽음이 다가왔음에 비통을 금할 길이 없었다. "천하(天下)를 위해... 상관형... 내 뒤를... 이어... 주겠나......?" 금백만의 말은 혼신의 기력을 다한 것이었다. 상관홍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힘차게 말했다. "맹세하겠네! 제발." 하나 그 순간 금백만의 주름진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고...맙...네....... 친구......." 스르르....... 그는 그 순간 흡사 고목(古木)이 넘어지듯 거꾸러졌 다. "금형!" 상관홍은 급히 피를 토하듯 부르짖으며 그를 끌어 안았다. 하 나 어찌하리오? 금백만, 일대 거부(巨富) 금백만은 이미 눈을 부 릅뜬 채 죽어 있었던 것을....... "금형!" 상관홍은 노우(老友)의 시신을 끌어안고 절규했다. 그의 노안에 는 철철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밤(夜), 생일야(生日夜)는 이렇게 무서운 파국(破局)을 몰고 왔 다. 이 밤... 이 밤이 던진 운명(運命)의 무서운 사슬은 또 어떻게 인간을 휘감을 것인가? 第 11 章 造化城의 內歷 --- 복부에 꽂힌 단검은 다행히 급소를 피해 내장(內腸)이 크게 손상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장(心臟)에 던진 단검은 마침 품 속에 들어있던 금갑(金匣)에만 꽂혔을 뿐 금갑 속의 보석에 부 딪쳐 상처는 전혀 입지 않았습니다. 실로 천우신조(天佑神助)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 살릴 수는 있겠나? --- 물론입니다. 몇 시진후면 깨어날 것입니다. 상처회복 속도도 오히려 제가 놀랄 정도로 빠릅니다. --- 반드시 살려야 한다.그리고 그를 통해서 조화성(造化城)의 음모(陰謀)를 알아내야 한다. X X X '으아아악!' 복부를 흡사 불칼로 후벼내는 듯한 격통에 장천린은 긴 혼몽속 에서 깨어났다. 그는 정신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꼈 다. "옥... 옥교(玉嬌)!" 그는 손을 허위적 거렸다. 한데 그때 바로 옆에서 차분히 가라 앉은 음성이 들렸다. "이제 깨어났군." 장천린은 비로소 정신이 드는 것을 느끼고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침상에 반드시 눕혀져 있었다. 그리고 침상 곁에 한 명의 백의중년인(白衣中年人)이 서 있었다. 준수한 용모에 코와 턱에는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전신 에서 ㅍ기는 기운은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담담한 가운데 그 누 구도 범접치 못 할 고고한 기품이 흘렀다. 두 눈은 다소 깊고 은은한 현기가 어려 마치 억만 년 동안을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호수(湖水)를 연상케 했다. 장천린은 간신히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귀... 귀하는? 그리고... 이 곳은 어디입니까......?" 그의 음성은 극히 쇄잔한 탓인지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그러자 청수한 용모의 중년인이 담담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여기는 만금산장(萬金山莊)이다. 자네는 어젯밤 빙심자봉 매소 련이 던진 단검에 의해 부상을 입고 혼절했다가 이제 깨어난 것 이다." 그 말에 장천린은 문득 어젯밤의 악몽(惡夢)과 같은 일이 떠 올 랐다. 동시에 취옥교가 금백만을 죽이던 광경도 선명히 떠올랐다. 그는 가래끓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오... 옥교는......? 우욱!" 순간 복부에 다시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오는 바람에 그는 비명을 질렀다. 중년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한매설봉(寒梅雪鳳) 취옥교(翠玉嬌)를 부르는 것인가?" 장천린은 고통을 간신히 눌러참고 말했다. "옥교는...... 어디 있습니까?" 중년인은 담담히 말했다. "자네는 취옥교가 어떤 여인인 줄 알고 있는가?" 장천린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누구이든 상관없소. 나는 지금 그녀를 만나보고 싶을 뿐이오." 그는 왠지 중년인에게 적대감을 느껴 말투조차 변했다. 중년인 은 고소지으며 말했다. "취옥교는 조화성의 일맥(一脈)이라 할 수 있는 북해사태청(北 海獅太廳)의 주인인 북해창룡수(北海蒼龍 ) 숙야염(叔夜焰)의 오 제자(五弟子)중 한명이다." 그 말에 장천린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허나 곧 그는 이를 악물며 고함쳤다. "나는 지금... 그녀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소!"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중년인은 뒷짐지었다. 그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침착온건하여 설사 태산이 무너진다해도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자네는 그녀에게 이용당했다." ".....!" 장천린의 안면에 경련이 일어났다. 중년인은 깊은 눈으로 그를 내려보며 말했다. "자네는 조화성이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중년인은 진의를 캐듯 한동안 그를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조화성은 악(惡)의 온상이다. 그것이 만들어진 것은... 지금부터 삼십 년 전 단 세 사람에 의해서였다." 장천린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조화성 따위가 무엇인지는 듣고 싶지 않소." 그는 고통으로 안면을 찡그리며 강하게 말했다. "나는 신선루로 가보겠소. 옥교는 그 곳에 있을 것이오. 그곳에 가서 그녀를 만나야 하오!" 중년인은 슬쩍 소매를 저었다. 순간 장천린은 어떻게 된 셈인지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흡사 무형의 질긴 실이 그의 전신을 꽁꽁 묶어버린 것 같았다. 중 년인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조화성을 만든 삼인(三人)은 바로 염무(焰武), 고검령(古劍靈), 제갈사(諸葛師)란 세 사람이었다." 장천린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르짖었다. "나를... 풀어주시오! 나는 가야 하오." 허나 중년인은 그를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할 뿐이었다. 장천린 은 할 수 없이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중년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들 삼인중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는 바로 염무(焰武)였다. 그는 고검령과 제갈사의 힘을 빌어 단 몇 년 사이에 전무후무(前 無後無)한 단체인 조화성(造化城)을 만들어 냈다." 중년인의 안색은 극히 담담했다. 장천린은 핏발 선 눈으로 그 를 노려봤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본래 조화성을 만든 목적은 중원의 평화(平和)를 위해서였다. 허나... 곧 엄청난 착오가 생겼다. 바로 염무의 가슴에는 애당초 중원평화 따위의 목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장천린은 차츰 그의 이야기에 관심이 몰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염무는 고검령과 제갈사 모르게 가공할 마(魔)의 단체와 손을 잡고 전 중원에 암암리에 마(魔)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장천린은 문득 의문이 일었다. 백의중년인이 무슨 이유로 자신 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었다. 허나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중 년인은 그의 심중은 아랑곳없이 계속 이야기를 계속했다. "더욱 엄청난 사실은 염무가 고검령과 제갈사를 만나기 전에 이미 한 단체(團體)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 "그것은 놀랍게도 그가 천하 모든 마(魔)의 근원인 마교(魔敎) 의 교주라는 사실이었다." '......!' 장천린은 흠칫했다. 마교(魔敎). 설사 무림인이 아니라도 마교라는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마교는 약 이천년 전에 생성되었으며 천하(天下) 모든 마공(魔功) 과 마예(魔藝)의 근원이 되는 곳이다. 천 년전 마교가 자체의 내 분으로 인해 붕괴될 때까지 수많은 성쇄를 거듭하면서 천하는 그 얼마나 많은 피(血)로 산하(山河)를 적시었던가? 마교(魔敎). 그 이름은 아직도 공포의 대명사였다. 마교가 성 (盛)하면 천하가 암흑(暗黑)에 빠져들고 마교가 쇠하면 천하는 평 화시대를 누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년인의 말이 계속 되었다. "고검령과 제갈사는 자신들이 염무에게 이용당했음을 곧 깨닫 게 되었다. 염무는 그들 두명을 이용하여 이미 천하에 자신의 세 력을 구축함과 동시에 천하정도의 무공을 모조리 끌어모아 정도 무림을 연구, 그 약점을 파악해 냈던 것이었다. 그가 끌어모은 무 공은 정도무공의 구할이 넘었다." "......!" "아예 정도(正道)에서 그 자신에게 상대할 자가 없도록 하기 위 한 치밀하고 무서운 계책이었다." 중년인의 말은 여전히 담담했다. 하나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 은 그야말로 중대무림비사였다. "그는 자신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마침내 눈에 가시인 고검령과 제갈사를 제거할 음모를 세우기 시작했다." '.......' "허나 고검령과 제갈사는 그 전에 이미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 기 시작했으며 또 염무가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것을 눈치채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화성의 분열을 은밀히 획책하기 시작했다. 그리 고 역으로 염무를 제거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문득 이제까지 듣고만 있던 장천린이 마침내 질문을 던졌다. "고검령과 제갈사란 두 명이 무슨 능력으로 염무를 위해 천하 정도 무공의 구할을 모을 수가 있었단 말이오?" 중년인은 고소지었다. "그것은 오직 그 두명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충 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장천린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라! 말이 천하정도무공 구할이지 그것은 실로 상상 도 못할 엄청난 일이 아닌가? 가히 몇만, 몇십만 종류에 달할 것 이 아닌가? 어찌 그 방대한 분량의 무공을 단 이인(二人)의 힘으 로 모을 수가 있단 말인가? 중년인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어쨋든 고검령과 제갈사는 염무를 제거할 계획을 완벽하게 세 웠다. 그들은 동시에 그 계획을 달성키 위해 당시 조화성의 대총 관(大總官)이던 만승금도 도담후란 인물을 포섭하는데도 성공했 다." "......!"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어느 날...... 마침내 염무를 암습했다." 장천린은 긴장을 느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중년인은 침묵했다. 잠시후 그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말했 다. "실패했다. 염무는 거의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완벽 하게 죽일 수는 없었다." "......!" "고검령과 제갈사는 할 수 없이 조화성을 벗어나야 했다. 조화 성은 이미 염무의 개인의 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 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들 두명과 염무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중년인은 이야기를 끝내고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여는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내리깔렸다. "이십년이 흐른 지금 천하(天下)에서 염무의 조화성에 상대할 자는 아무도 없다. 어떤 단체, 어떤 고수라도 결코 상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다만......." "......." "염무가 보격적으로 몸을 드러내 활동하지 않는 이유는 어직 고검령과 제갈사 때문이다." 장천린은 물었다. "고검령, 제갈사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오?" 장천린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조화성의 인물인 철마 왕 사진청, 독제 당선종 같은 무서운 인물들을 직접 경험했다. 그 런 가공할 고수를 가진 조화성이 어찌 개인 두명을 두려워 한단 말인가? 중년인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검령은 마치 안개와 같은 인물이다. 그에 대한 것은 일체 모 든 것이 신비에 싸여 있다. 그의 무공은 염무보다 약할지 몰라도 염무가 그와 세 번을 싸울때까지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오히려 염무가 그에게 당한다." "......?" 장천린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참지 못 하고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된단 말이오?" 중년인은 담담히 말했다. "고검령은 천하의 어떤 무공이라도 한 번 보면 그 자리에서 자 신의 것으로 흡수해 버리는 무서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 가 염무와 세 번만 싸운다면 그는 염무의 무공을 파악할뿐더러 오히려 약점까지 파악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찌 천하에 그런 천재(天才)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아무리 인간의 능력이 하늘에 닿는다 해도 어찌 단 한 번 보고 모든 무학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단 말인가? 중년인은 그의 의혹은 아랑곳없이 계속 이야기했다. "자네가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허나 과거 염무가 소장하 고 있던 수만 권의 무경(武經)을 단 백일(百日)동안 모두 읽고 그 무공을 특성대로 분류하고 약점을 기록해 놓은 인물이 바로 고검 령이다. 그의 머리에는 최소한 천하무공의 칠할이 담겨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 장천린은 경악을 더해 그저 입을 크게 벌릴 뿐이었다. 중년인 은 약간 표정을 기이하게 변화시키며 말을 이었다. "제갈사는...... 그의 무공은 고검령에 비하면 약하지만 그는 뛰 어난 지략가(智略家)다. 이십년 전 염무릉 죽일 계획을 짠 것도 바로 그다." 장천린은 크게 충격을 받고 있었다. 고검령이 천하무공의 칠할 을 알고 있다는 것만 해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거늘....... 그렇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또 그정도의 무공으로도 이길 수 없다는 염무의 능력은 또 어느 정도란 말인가? 조화성주 염무, 그는 신(神)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때 중년인이 말했다. "고검령의 별호는 무영(無影), 제갈사의 별호는 신산(神算)이다. 조화성에서는 그들을 가장 큰 적으로 생각한다." 아아...... 드디어...... 무영(無影)과 신산(神算). 그 이름이 나오고야 말았다. "......!" 장천린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영..., 신산이 그들이라고......?" 그는 흡사 넋을 잃은 듯 여러 차례 그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 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을 한 가닥 뇌전이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었다. 무영(無影)과 신산(神算)...... 과연......? 第 12 章 無影과 神算 중년인은 장천린의 표정을 계속 주시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 다. "염무는 그들을 극히 꺼려하기 때문에 일년 전부터 무서운 계 획을 세웠다." "......!" "그는 자신이 지난 이십년 간 비밀리에 키운 제자들과 자신의 추종세력을 이용하여 무영과 신산의 세력을 분쇄하기 시작한 것 이다." 중년인의 표정은 다소 굳어져 있었다. "반 년 전...... 마침내 무영과 신산의 오른팔격인 만승금도 도담 후가 조화성의 무정도(無情刀) 모용초에게 암습당하여 죽었다." "......!" "그리고 어젯밤에는 무영과 신산에세 자금을 대어주던 철솔선 생(鐵率先生) 왕문헌이 죽었다. 바로 한매설봉 취옥교에게 그는 당했다." 장천린은 의혹의표정을 지었다. "철솔선생 왕문헌?" "철솔선생은 바로 금백만의 또 다른 변신이다." 장천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염무는 전 중원에 공포의 살인혈첩(殺人血 帖)을 뿌려대며 무영과 신산의 추종자들을 하나 둘씩 제거해 가 고 있다." 중년인의 얼굴에는 비감의 표정이 짙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 살인혈첩에 의해 진정으로 정도(正道)를 위하 는 명숙들도 하나하나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중년인은 문득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왜 자네에게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는지 아는가?"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 중년인의 두 눈에서 기이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는 약간 칼칼 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한매설봉 취옥교와 빙심자봉 매소련은 그녀들의 사부인 북해창룡수(北海蒼龍 ) 숙야염의 명을 받고 철 솔선생과 냉혈팔숙(冷血八宿)을 제거하려고 나섰다." 그는 장천린의 심정은 아랑곳 없이 계속 이야기했다. "냉혈팔숙은 바로 신산 제갈사의 수하들이다. 하나 당시 냉혈 팔숙은 역으로 만가산에서 취옥교의 종적을 눈치채고 오히려 그 녀를 공격, 제거했다." "......!" "하나 취옥교는 완전히 죽지 않았었다. 마침 공교롭게도 그곳 을 지나던 자네에게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장천린은 섬뜩했다. 너무나도 자세히 그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의 집에서 치료받는 동안 취옥교는 자네가 금백만과 친분 이 있음을 눈치채고 한 가지 계획을 세우기 되었다." "......!" "그것은 바로 자네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자네를 통해 금백만 과 친분을 트고 그것을 기회로 그에게 접근하여 그를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장천린은 전신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 그것은... 절대 아니오....... 절대... 그녀는...... 나를 진정으 로 사랑하고 있소." 중년인은 힐끗 그를 응시했으나 담담한 음성으로 계속했다. "취옥교의 얼굴은 원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숙 야염의 다섯 제자중 첫째로써 단 한 번도 중원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지." "......!" "더우기 그녀의 얼굴을 유일하게 알던 냉혈팔숙이 자봉 매소련 에게 죽었으니 그녀는 활동하기가 더욱 편해졌다." 장천린은 전신을 떨었다. "그녀의 이름은 신선루에서 그냥 취랑이라고만 불려졌다. 그녀 는 분명 자네에게 그녀 이름이 취옥교란 것을 타인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장천린은 전신이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분명 취옥교는 그 렇게 부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는 부르짖었다. "없소! 그런 적이 없단 말이오!" 그러나 중년인은 담담하기만 했다. "자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취옥교가 조화성의 끄나불임에 분명 하다." "......!" "더우기 그녀가 자네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왜 매소련이 자네 를 죽이려는 것을 방관했겠는가?" 장천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몸부 림치듯이 항변했다. "나를 죽이려 한 것은 매소련이지 결코 옥교가 아니오!" 중년인은 고소를 지었다. "자네는 어리석을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다. 하나 그것 은 매우 우매한 일이다." 이어 그는 품에서 하나의 금갑을 꺼냈다. "이것을 보아라." 그것은 바로 장천린이 파자사국의 상인 아라사에게서 사들인 태양의 눈이 들어 있는 금갑이었다. 중년인은 금갑의 뚜껑을 열었 다. 순간 찬란한 황금빛 광채와 푸른 광채가 방 안을 채웠다. 중 년인은 태양의 눈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대단히 훌륭한 보석이다." 이어 그는 기오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 보석이 자네를 살린 것을 아는가?" "......!" "매소련이 던진 두 개의 비수중 하나는 자네의 심장을 노렸다.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비수는 자네 가슴에 있던 이 금갑만 곤총했 을 뿐 금갑속에 있던 이 보석에 부딪쳐 자네의 심장을 찌르지 못 했다." "......!" 중년인은 금갑속에 목걸이를 넣은 후 금갑을 장천린에게 돌려 주엇다. "결국 자네는 죽을 뻔한 생명을 우연히 건진 것이다." 장천린은 문득 눈썹을 경련시키며 물었다. "대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두가지다." 중년인은 본론으로 돌아온 듯 진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보았다. "첫째는 자네가 죽은 금백만의 뒤를 이어 강남의 상권(商權)을 맡아주는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자네 때문에 금백만이 죽은 것은 결코 자네고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장천린은 입가를 씰룩이며 말했다. "결국 금대인의 뒤를 이어서 무영과 신산에게 자금을 대어주는 역할을 하란 말이구료?"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또한 천하(天下)를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는 다시 그를 주시하며 물었다. "상관홍을 아는가? "알고 있소." "그는 용문전장의 주인으로써 중원제일의 거부다. 우리는 원래 금백만을 통해 그를 설득하여 그의 막대한 재력으로 우리를 돕도 록 할 셈이었다." "......!" "하나 그는 거절해 왔다.그러다가 어제 죽마고우인 금백만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분노했다. 그로인해 그는 우리 일에 적극 협 조하기로 약속했다." 중년인은 담담히 그러나 확신이 담긴 어조로 조용히 말했다. "이제 자네만 도와준다면 우리로써는 아까운 인재를 잃었어도 오히려 전화위복을 삼을 수가 있는 것이다." 장천린의 안색은 차츰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그는 눈 앞 의 중년인에 대해 심한 의혹과 두려움을 느꼈다. '이 자의 계획은 무서울 정도이다. 대체 이 자의 정체는 누구이 기에?' 그러다 갑자기 그는 무엇을 발견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치 석고상처럼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대체 무엇을 생각해 낸 것일까? 갑자기 그는 차가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조금전 나는 한가지 우스운 생각이 떠올랐소." 중년인은 느닷없는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천린은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둔 채 억양없이 중얼거렸다. "금대인을 죽인 진정한 원흉이 바로 당신 같다는 느낌이 들었 소." "......!" 중년인 놀랍게도 그는 그런 말을 듣고도 조금도 안색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담담히 물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 장천린은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 않은채 말했다. "당신은 너무나도 이 일의 전후사정을 잘 알고 있소." "그래서?" "어쩌면 당신은 옥교가 금대인을 죽이려는 것을 미리 알고 있 었을지도 모르오." "계속해 보게." 중년인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으나 그의 눈빛은 기이하 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금대인이 죽도록 내버려 둔 것은 오직 두 가 지 이유때문일 것이오." "어떤 이유말인가." "첫째는 금대인에게는 그의 재산을 물려받을 후손이 없소. 또 한 강남에 뻗친 상권과 사업체에는 분명 무영과 신산의 수하들이 손을 대고 있을 것이오." "......!" "그렇기 때문에 금대인이 죽는다 해도 즉시 마땅한 후계자만 만들어 놓으면 사업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을 것이오. 오히려 금대 인이 없으니 더 마음대로 자금을 끌어들일 수가 있을 것이오." "음......!" 중년인의 표정에 약간 변화가 일어났다. "둘째!" 장천린은 여전히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으나 그 특유의 날카롭 고 치밀한 두뇌회전이 시작된 듯 그의 눈빛은 활기를 띄우기 시 작했다. "금대인의 죽음으로 인해 돕기를 거부하던 상관홍을 자연스럽 게 끌어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오," "......!" "상관홍은 중원에서 가장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소. 어쩌면 당 신들에게는 금대인보다 상관홍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오. 그의 엄 청난 재력으로 조화성과 싸울 수 있기 때문이오," 중년인에게는 표정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할 추리다." 그의 말투는 너무도 태연하고 또 부드럽기만 했다. 장천린은 계속했다. "조화성주 염무는 금대인 아니 철솔선생 왕문헌을 죽였기 때문 에 장차 오히려 더 큰 압박을 받을 것이오. 그것을 유도한 것은 바로 당신이고 말이요." 중년인은 비로소 흠칫했다. "내가 말인가?" "그렇소. 신산(神算) 제갈사 나으리!" 장천린은 말과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려 불타는 듯한 눈으로 그 를 노려보았다. 第 13 章 무서운 借刀殺人之計 신산(神算) 제갈사(諸葛師)! 장천린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 처음으로 중년인의 안색 이 급변했다. 그는 몇차례나 안색이 변했다. 하나 그것고 순간적 이었을뿐 그는 곧 평소의 담담한 안색을 회복하며 물었다. "내가 어째서 제갈사라고 생각했는가?" 장천린은 그를 계속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무영과 신산중 일인이 아니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신이 아까 무영과 신산의 이야기를 했을 때 반드 시 그분들이라고 존칭을 ㅆ을 것이오. 하나 당신은 그저 평칭으로 얘기했소." "음. 그것만으로?" "둘째 당신은 무서울 정도로 감정의 절제가 뛰어나고 또 얼음 처럼 차고 현명하오." 중년인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나를 제갈사라고만 생각하고 고검령이라고 생각지 않았는가?" "당신은 무영과 신산을 이야기할 때 무영에 대한 칭찬은 무척 많이 하면서도 신산에 대해서는 별로 칭찬을 하지 않았소." "......." "타인 앞에서 자기가 자신의 칭찬을 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있 어서 조금은 쑥스러웠을 것이오." 중년인은 지그시 장천린을 응시했다. 이어 그는 중얼거렸다. "자네의 관찰력은 진정 놀랄만 하군." 그는 담담히 시인했다. "그렇다. 내가 바로 신산(神算) 제갈사다." "......!" 장천린은 충격을 받았다. 비록 그의 추리가 논리가 정연하고 그 자신도 그것을 정확하다고 생각ㅎ으면서도 정작 확신은 없었 다. 한데 정작 그것이 사실로 나타나자 그의 놀라움은 말할 수 없 이 컸다. 신산 제갈사! 그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다. 하나 장천린은 자신의 놀라움 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구한 두 번째 목적은 무엇이오?" 신산 제갈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의자에 걸터 앉았다. 이제 까지 그는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담담히 장천린을 응시하며 물었다. "자네는 한매설봉 취옥교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가?" 장천린은 숨이 막힐만큼 전율을 느꼈다. 그는 한참후에야 간신 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만날 수가 있소?" 제갈사는 지그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방법은 많이 있다." 장천린은 급히 물었다. "무슨 이유로 나에게 옥교를 만나게 해주려는 것이오?" "나는 한가지에 기대를 하고 있다." "......." "어쩌면 그녀가 진정으로 자네를 사랑했으지도 모른다는 것이 네." 그 말에 장천린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곧 입술을 지그시 물며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후후. 이제 당신의 의도를 알았소." "........" "당신은 나를 이용해서 옥교가 조화성을 배신하도록 계획하고 있소." 장천린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 올랐다. "옥교가 당신 말대로 북해사태청의 대제자라면 조화성 내에서 도 결코 무시 못할 상당한 위치를 차지 할 것이오. 당신은 그것을 이용해 조화성의 비밀을 캐내려 하는 것이오." 제갈사는 미소지었다. "자네는 정말 두 마디가 필요없을 정도로 너무 현명하군." 이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다. 설봉이 진정 자네를 사랑한다면 그녀를 회유 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는 두 눈에서 현기를 흘리며 말을 계속했다. "설봉만 우리 편으로 돌리면 우리에게는 큰 이득이 될 것이다." 장천린의 얼굴에는 불쾌함과 더불어 단호한 표정이 떠올랐다. "남녀간의 진실한 애정을 결코 음모의 도구로 사용할 수는 없 소." 제갈사는 설득하듯 말했다. "그것을 도두화 한 것은 설봉이 먼저다. 그리고 우리는 악을 붕 괴시키고 중원평화를 위해서 그렇게 하려는 것 뿐이다." 장천린은 문득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어그는 제갈사를 바라 보며 말했다. "신산나으리, 나는 애초부터 무림인이 아니오. 다만 일개 상인 (商人)일 뿐이오.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업이지 무림사 가 아니오. 그 점을 이해했으면 좋겠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무림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이 없소. 무림의 일은 당신들 일이지 결코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오." 그는 제갈사를 주시하며 한자한자 힘주어 말했다. "극히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당신의 두가지 도전을 모두 들어 줄수가 없소. 내가 버는 돈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싫고 또 애정 을 기만하는 행위도 싫소!" 그는 시선을 허공으로 옮기며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힘으로 사업을 벌일 것이오. 누구의 도움도 필 요없소. 그리고 옥교에 관한 문제도 내가 알아서 해결 할 것이 오." "......!" 제갈사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입 을 열었다. "그렇게되면 자네는 영원히 설봉을 만나지 못할 것이네. 아니 만나기도 전에 조화성 고수들에 의해 생명을 잃을 것이네." 그의 어조는 무심하기까지 했다. 하나 장천린은 차분하게 말했 다. "그것은 나의 문제요." "진정 거절하겠는가?" "백번 물어봐도 마찬가지요." 제갈사는 지긋이 장천린을 응시했다. 이어 몇 차례나 안색이 변화를 일으키다가 마침내 탄식하며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자네는 가장 현명하면서도 또한 어리석은 친구다." X X X 한 칸의 밀실(密室), 신산 제갈사와 한 명의 청년이 마주하고 있다. 청년은 기골이 무척 장대했다. 턱에는 구레나룻이 나 있어 흡사 용맹스럽고 강직하다는 인상을 풍겼다. 등 뒤에는 짧은 단창 (短槍) 세자루를 교차하여 매고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단천굉(段天宏), 그의 별호는 신창(神槍), 그는 제갈사를 무척 존경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갈사가 입을 열었다. "무정도(無情刀) 모용초를 추격한 일은 어찌 되었는가?" 부드럽고 인자한 음성이었다. 단천굉은 눈을 번쩍이며 대답했 다. "놈은 마치 여우같아 종적을 잡기가 극히 어려웠습니다. 섬서 (陝西)에서 놈의 수하 열명을 죽이고 놈과 수십초를 겨루었지만 놈은 싸울 마음이 없는지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음." 신창 단천굉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투지의 빛이 어렸다. "모용초의 무공은 영주께서 짐작하신대로 도성(刀聖) 유백(柳 白)의 독문무공인 무극팔로도세(無極八路刀勢)였습니다." 제갈사는 탄식했다. "만승금도 도담후는 도(刀)에 관한한 무적이라 여겼는데 모용초 의 암습에 당하다니 실로 애석하구나." 단천굉은 이를 갈았다. "도어른께서 당하신 이유는 결코 무공이 뒤져서가 아닙니다. 어른께서 아끼시던 손미라는 계집이 배신하여 도어른의 유일한 급소인 명문혈(命門穴)에 있ㄷ 철금경(鐵金鏡)을 떼어버렸기 때문 에 당하신 것입니다." "음." 제갈사는 신음을 흘렸다. 이어 담담히 물었다. "도담후의 제자인 원계묵(元桂默)은 뭐라 하던가?" 단천굉의 얼굴에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그는 정말 훌륭한 사내입니다. 그는 도어른의 직속 수하들인 일백 인과 함께 이미 백살대(百殺隊)라는 것을 조직하여 조화성과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은연중 원계묵이라는 인물에 대한 존경심이 어려 있었다. 하나 제갈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원계묵이 비록 도담후의 진전을 모두 이었다지만 잘해야 모용 초와 동수(同手)를 이룰 정도다. 그와 일백인의 힘으로는 조화성 에 역부족이다." 단천굉도 고소를 지었다. "원계묵에게 영주님의 의도를 알렸지만 그는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습니다." "......." "그는 육신이 가루가 될지라도 자신들의 힘만으로 조화성과 싸 우겠다고 했습니다." 제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계묵은 훌륭한 투사(鬪士)다. 천굉, 너는 그와 계속 접촉하여 그를 설득해야 한다." 단천굉은 공손히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제갈사는 문득 그를 주시했다. "천굉, 네가 한 가지 해야할이 있다." 제갈사의 말은 담담했다. "장천린은 알고 있겠지?" 단천굉은 흠치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를 그의 장원인 청하원까지 데려다 주고 오너라." 단천굉은 의아했다. "장천린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들었습니다. 그가 영주님의 제 의를 받아들였습니까?" 제갈사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거절했다." 단천굉의 눈썹이 솟구쳐 올랐다. "하오시면?" 제갈사는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강제로 안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를 억지로 끌어 들일 수는 없다. 그는 포기하겠다." "......!" "대신 강남의 상권은 옥류향(玉柳香)에게 맡기면 된다. 설봉의 문제도 일단 없었던 것으로 한다." 단천굉은 머뭇거렸다. 그는 곧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 "허나 그는 우리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용문전장 의 일이 만에 하나라도 조화성의 귀에 들어간다면 상관대인(上官 大人)의 생명도 보장하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제갈사는 그 말에 얼핏 불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장천린은 입이 무겁다. 나는 그를 믿는다. 그는 결코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단천굉은 두 눈에서 단호한 빛을 뿜었다. "차라리 제거해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는 힘주어 의견을 피력했다. "후환이라는 것은 남겨두면 언제 어느 때든 불씨가 될지도 모 릅니다." 제갈사는 묵묵히 듣고 있다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굉, 우리는 지금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를 들고 일을 하 고 있다. 장천린의 입을 막기위해 그를 죽인다면 우리도 역시 조 화성의 무리들과 다를 바가 없다." "......." "내가 만일 직접 그를 죽이라고 지시한다면 나를 믿고 따라오 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냐?" 단천굉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어렸다. "네가 한 그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다." 제갈사는 화제를 돌렸다. "너는 장천린을 청하원에 데려다 준 뒤 항주(抗州)에 있는 옥류 향에게 연락을 취하여 이 곳으로 오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단천굉은 고개를 숙였다. 단천굉은 침묵했다. 제갈사는 그가 가 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밀실을 서성였다. 그의 심중 은 무척 복잡해졌다. 본래 그의 성격은 과격한 반면 단순했다. 그는 정의롭고 용맹하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설사 온몸이 부서진다해도 밀고 나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제갈사를 가장 존경한다. 오늘 아침 그가 만금산장에 왔을 때 그는 비로소 금백만의 죽음을 알았다. 그리고 신산 제갈사의 셋째 아들인 제갈 유풍은 사경을 헤메이고 있었다. 한데 신산 제갈사는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은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금백만, 아니 철솔선생 왕 문헌의 죽음을 극히 애통해 했다. 그리고 그 슬픔속에서도 그것을 견디며 그는 매사를 조금도 흐트러지지않게 신중하고 치밀하게 처리해 나갔다. 그 뿐 아니라 제갈사는 오늘 이 시간까지도 목숨이 경각에 달 린 아들 제갈유풍에 대해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것은 일반인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대인(大人)의 풍도였다. 단천굉은 그런 모든 것을 보고 내심 커다란 갈 등에 휩싸여 있 었다. '영주님께서는 너무고 크신 분이다. 무림을 위해 너무나도 지대 한 공을 세우시고 자신을 헌신하고도 조금도 업적을 내세우지 않 으시는 분이 이 시대의 거성이시다.' 그는 생각을 계속했다. '더우기 공적인 일에는 항상 자신의 사적인 모든 것은 묵살하 시는 그런 분이다.' 서서히 단천굉의 얼굴에는 어떤 결심이 차 올랐다. '하나 단지 마음이 독하시지 못한 것이 흠이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장천린을 영주님은 그를 보내주라고 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 는 화약을 어찌 그냥 방관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놈을 죽여봐야 나도 단순히 영주님께 꾸짖음만 받을 뿐 놈을 제거해 버리겠다.' 그의 눈에서 살광이 이글거렸다. 신창 단천굉! 마침내 그는 나름대로 무림대의를 위해, 그리고 존경하는 신산 제갈사를 위해 장천린을 제거하기로 일방적으로 결심을 했다. 과연 그것이 그의 순수한 결심에서였을까? 第 14 章 運命의 二十四時辰 한 대의 사두마차(四頭馬車)가 마금산장을 빠져나와 어둠을 뚫 고 달렸다. 두두두두...... 워낙 심야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두마 차가 빠져나간 것을 알지 못했다. X X X 두두두...... 사두마차는 어둠을 달렸다. 마차 안, 이인(二人)이 마주보고 앉 아 있다. 장천린과 신창(神槍) 단천굉이었다. 장천린의 안색은 여전히 밀랍같이 창백했다. 복부에는 붕대를 칭칭감고 있었다. 아직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신산(神 算) 제갈사는 약속대로 그를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장 천린에게는 다소 뜻밖이었다. 중대한 비밀을 모두 있는 그 자신은 이렇게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줄을 몰랐던 것이었다. 지금 그의 뇌리에는 오직 취옥교에 대한 생각에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심정은 극도로 허탈했을뿐더러 허무하기까지 했다. '옥교,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 느냐?' 그의 가슴은 찢어질 듯 괴로왔다. '제갈사의 말대로 나란 존재는 과연 너에게 있어 하나의 이용 도구였단 말이냐?' 그는 강하게 부정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옥교는 나를 사랑했다. 진정한 사랑이었 다. 그것은!' 장천린은 두 눈을 감았다.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 가고 있었다. --- 오늘 밤은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 오늘은 약속이 있소. --- 그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나요? '그녀는 어떻게든 내가 만금산장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단 하루만이라도 나와 같이 있고 싶어 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도 금대인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다만 그것은 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한 것 뿐이었다. 장천린은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쓸쓸함에 젖어 있었다. 들리 는 것은 이 야밤을 뚫고 달리는 마차 바퀴소리 뿐이었다. 두두두...... 덜컹! 덜컹! 이따금씩 돌에라도 바퀴가 걸린 듯 심하게 마차가 요동을 치곤 했다. 장천린은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뇌리에 취옥교가 만금 산장에서 금백만을 죽인직후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그래, 그녀의 두 눈은 극도의 절망과 슬픔에 젖어 있었다.' --- 안녕....... 천린.......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던 마지막 한 마디, 장천 린은 가슴이 터질 듯한 심정이 되었다. '옥교는 조화성과 나 사이에서 크나큰 갈 등을 겪고 있었다. 만 약 그녀가 금대인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그녀가 조화성의 명령자들에게 죽었을 것이다. 어쩌면 심지어 나까지도.......' 장천린의 얼굴에 자조의 웃음기가 어렸다. '후훗, 자위일지 몰라도 어쩌면 옥교는 나를 위해서 내 곁을 떠 났을런지도 모른다.' 장천린은 눈을 떴다. 그의 눈은 극도의 허무에 젖어 있었다. '옥교, 네가 겪은 아픔과 고뇌는 내가 이해하지만 네가 저지른 일은 남들에게 결코 용서받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의 생각은 계속 깊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제 너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물어볼 것이다. 내가 너 를 사랑한 만큼 너의 사랑이 진실했는지를.' 장천린의 눈에는 맞은편에 앉아 아까부터 그를 뚫어져라 응시 하고 있는 신창 단천굉의 모습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면 나만은 너를 용서할 것이다. 세상 모두가 너를 욕할지라도 나만은 용서한다. 그리고 너를 보호해 주겠다. 조화성이나 무영과 신산으로부터....... 아니 이 세상 그 어떤 것으 로부터도 너를 지킬 것일 것이다.' 장천린은 문득 손을 들어올려 가슴에 있는 금갑을 어루만져 본 다. '나의 생명을 구한 이 태양의 눈... 여기에 대고 맹세한다. 옥교, 나와 너의 사랑은 절대로 이렇게 끝날수는 없다.' 그의 눈에 빛이 어렸다. '절대로!' 이때 그를 줄곧 응시하고 있던 단천굉이 문득 헛기침을 했다. "험! 장공자, 기분이 무척 우울한 것 같소." 장천린은 힐끗 그를 바라 보았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단천굉이라고 하오." "......!" 역시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천굉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 다. 하나 곧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는 장공자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아직도 취옥교를 사랑하시오?" 장천린은 묵묵히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단천굉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는 당신을 죽이려 하지 않았소?"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나를 죽이려 한 것은 매소련이오." "어쨌든 그녀는 당신을 이용한 것이 아니오?" "......!" 단천굉의 두 눈에 약간의 경멸이 스쳤다. 그는 내심 이렇게 생 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배신한 여인을 잊지 못해 연연하다니 무척이나 심약한 자로군. 영주님 말씀에 비해서는 결코 큰 그릇이 아니다.' 그는 짐짓 타이르듯 말했다. "장공자, 모르지기 남아라면 천하를 직시하는 눈이 있어야 한 다고 생각하오. 거거에 비하면 남녀간의 애정따위는 극히 미미한 것에 불과하오. 옛부터 모든 영웅들은 대의(大義) 앞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미녀와의 사랑이라도 초연했었소." 장천린은 힐끗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사랑해 본 적이 있소?" 단천굉은 미소지었다. "나는 삼년전 결혼했소. 아들도 한명 있소." 장천린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대의 앞에서 부인을 버릴 수 있소?" 단천굉은 엄숙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오." 장천린은 그의 강직한 눈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자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 자는 제갈사가 필요하다고 하 면 부인은 물론 아들까지도 버릴 것이다.' 그렇다. 실제로 단천굉은 그런 인간이다. 실로 한 인간의 마음 속에 이토록 확고한 신념이 깃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 다. 단천굉, 본래 강직하고 용맹한 성격의 그였으나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그 자신보다는 한 사람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장천린은 그를 알고 있다. 그는 단천굉을 대의에 죽게 할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 는 신산 제갈사란 인물의 능력에 문득 한기마저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과연 그것이 정도일까?' 그는 그 자신조차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 여러 가지를 생각하자 그는 머리가 실타래조차 복잡해졌다. 이때 단천굉이 다시 말했다. "장공자,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고 만금산장으로 돌아가는 것 이 어떻소? 내가 장공자라면 백번 천번 영주님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오." 장천린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에 대해 얼마 만큼이나 알고 있소?" 단천굉은 의아했다. "그야 청하원의 주인이고... 뛰어난 상술가이고......." 장천린은 잘라 말했다. "됐소. 그러면 더 이상 아무 말 마시오." 단천굉은 그만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 안 침묵이 흘렀다. 오직 마차가 달리는 소음만이 계속적으로 들릴 뿐 이었다. 좁은 마차 안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각각 딴 생각을 하느라고 오랫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장천린이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말했다. "만금산장을 떠나온 지 꽤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청하원에 도착 하지 못했소?" 그 말에 단천굉의 두 누에서 기이한 빛이 뻗어나왔다. 그는 단 호하게 말했다. "이 마차를 모는 마부는 남창의 지리를 잘 알고 있소. 결코 실 수하지 않을 것이오." 이 때 갑자기 마차가 더욱 심하게 덜컹거리며 요동을 했다. 순 간 장천린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청하원으로 가는 길 중 이렇게 덜컹거리는 길은 업소!" 그는 손을 뻗어 마차 문을 가린 휘장을 젖히려 했다. 하나 그 순간이었다. 하나의 단창이 돌연 소리없이 뻗더니 그의 목에 섬뜩하게 닿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단천굉의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움직이지 마시오. 장공자." 장천린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한동안 눈가에 경련을 일으켰다. 하나 곧 그는 기소를 흘렸다. "후후후훗." 나직한 웃음이었으나 왠지 비웃음이 서려 있었고 허무한 느낌 이 들었다. "제갈사가 나를 제거하라고 했소?" 단천굉은 멈칫했다. "후후, 하기야 만에 하나 용문전장의 일이 조화성의 귀에 들어 간다면 당신들에겐 큰 타격이 될것이오." 단천굉은 헛 기침을 했다. "험! 영주께서는 장공자를 청하원에 무사히 보내주라고 했소." 그는 강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소. 장공자 아니, 장형은 그 이유 를 알겠소?" 장천린은 냉소했다. "흥! 당신의 충심때문이겠지." 단천굉은 어색하게 말했다. "미안하오. 장형, 장형에게 죄가 있다면 너무 많이 우리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이오." 장천린은 그때 문득 무엇을 생각했는지 큰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핫!" 단천굉은 어리둥절했다. 장천린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후후. 신산 제갈사는 과연 머리가 좋군." "......?" "후후. 금대인에 이어 이번에는 내가 그의 차도살인술(借刀殺人 術)에 걸렸으니 말야." 단천굉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후후후. 과연 신산다운 계략이야. 자신은 조금도 손을 대지않 고 필요한 상대의 생명을 깨끗이 빼앗아 버리니 말이야. 우후후." 단천굉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영주님을 모욕하지 마시오! 이번 일은 내가 스스로 결정한 것 이오." 장천린은 히죽 웃었다. "단천굉, 당신같은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하시는지 아시오?" "......?" "석두(石頭), 돌대가리라고 하는 거요." 단천굉의 안색이 돌을 씹은 듯 무참해졌다. 한동안 그의 안색 이 붉그락 푸르락 하더니 말했다. "나를 모욕하는 것인가?" "하하하!"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공허한 웃음만이 한동안 마차안을 메울 뿐이었다. 단천굉은 싸늘하게 말했다. "이 곳은 만가산(萬家山)이오. 그리고 조금만 더 가면 만가산의 가장 험난한 곳인 단정애(斷情崖)가 나올 것이오." 장천린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당신은 마차를 나와 함께 그 곳 단정애에 떨어뜨리겠 군. 그리고 돌아가서 보고하겠지. 나를 청하원에 데려다 줬는데 내가 마차를 타고 신선루로 가기 위해 만가산을 넘다가 사고라도 낸 모양이라고 말이오." 단천굉은 할 말이 없었다. '귀... 귀신같은 놈.' 한치도 틀림이 없었다. 그 자신 또한 그렇게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산 제갈사는 탄식하겠지. 쯧쯧... 무모한 젊은이의 혈 기가 생명을 앗아갔군. 이렇게 말이오." 단천굉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무... 무서운 놈이다.' 그는 나직이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장형은 매우 머리가 좋구료. 하나 한 가지만은 틀렸소. 나는 영주님께 이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 할 것이오. 망설였는데 지금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내렸소." 장천린은 히죽 웃었다. "그래 보았자 당신에게 돌아올 것은 약간의 문책 정도겠지." 단천굉은 고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장천린은 허무한 눈빛 으로 웃음을 흘렸다. "후후. 내가 보기에는 조화성이나 당신들이나 조금도 다를 곳 이 없는 것 같소." 단천굉은 뭐라 얘기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동사에 그는 단창을 거두었다. "지금 일에 대해선 할 말이 없소. 하나 나 때문에 우리 전체를 욕하지는 마시오." 장천린은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단천굉 은 침묵했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어떤 갈등 같은 것이 어리고 있었다. 이때 마차가 멈추었다. "단어른, 도착했습니다." 밖에서 약간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리시오. 장형!" 단천굉의 말에 장천린은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마차에서 내렸 다. 휘이잉!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하늘에는 으스름 초승달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장천린은 앞을 응시했다. 그곳은 실로 섬뜩한 지세(地勢)였다. 마치 거대한 도끼로 내려친듯 길이 뚝 끊겨 있다. 그 아래로는 엄 청난 깊이의 엄청난 깊이의 절곡이었다. 바로 이곳이 만가산에서 가장 험하다는 단정애(斷情崖)였다. 단 정애 아래는 가히 천장(千丈)의 깊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서운 격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 격류는 장강(長江)으로 흘러드는 지류 였다. 격류의 흐름은 엄청나게 거칠어 일단 빠지면 도저히 헤어나 기가 불가능할뿐더러 곳곳에 칼날처럼 돌출한 암석이 있어 그곳 에 부딪치면 시체의 형상조차 보존하기 힘들었다. "후후후. 한 인간이 묻히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관이로 군." 장천린의 말에 단천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왠지 가 슴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조금씩 후 회하고 있었다. '차라리 영주님 말대로 그냥 청하원에 데려다 줄 것을.......' 하나 곧 그는 강하게 마음을 먹었다. '아니다. 단천굉, 너는 결코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려서는 안된 다.' 이때 장천린은 단정애에 선 채 내심 탄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는가?' 쓰디쓴 웃음이 나온다. 문득 복부의 고통이 되살아났다. 갑자기 창자가 끊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그는 그 고통에 움직이기조차 힘 이 들었다. 하나 그 순간 그 고통은 이제껏 잊고 있었던 어떤 일에 그의 생각이 미치게 했다. 그는 번뜩 뇌리를 스친 생각에 문득 입을 열었다. "단형, 지금 시각이 얼마나 됐소?" 단천굉은 담담히 말했다. "축시 가까이 됐을 것이오." '축시!' 장천린은 입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축시라면 반야대능력의 내공이 소멸되는 이십 사 시진이 아직 지나지 않았다.' 그는 즉시 내공을 모아보았다. '윽......!' 순간 단전에 엄청난 고통이 왔다. 진기는 어떤 장애에 걸린 듯 잘 모아지지 않았다. 하나 조금씩 진기는 그의 강한 의지력에 따 라 모이고 있었다. 장천린은 한 가닥 희망을 느꼈다. '어쩌면 살아날 수 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품 속의 금갑을 만져보았다. '심장에 비수를 맞고도 천운으로 살아난 나다. 신은 아직 나의 편일 것이다.' 이때 단천굉은 결심한 듯 말했다. "장형, 그만 마차에 오르시오." 장천린은 기소를 흘렸다. "후후. 이제부터 조작된 살인극을 시작하려는 것이오?" 단천굉은 고소지었다. "미안하오. 장형." 장천린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의미모를 말을 중얼 거렸다. "어쩌면 언젠가 당신이 나를 청하원에 데려다 주지 않고 이곳 으로 데려온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소." 단천굉은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장천린은 지그시 그를 응시하다가 문득 웃었다. "후후, 단천굉. 당신은 역시 석두요." 순간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단정애의 끝으로 걸어같다. "장형! 당신......." "후후. 조작된 살인극에 끌려가기 보다는 스스로 하는 것이 낫 지않소?" 순간 장천린은 말을 마치자마자 단정애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앗!" 단천굉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었다. 단천굉은 뒤늦게 신형을 날렸으나 한 발 늦고 말았다. 휘이이잉! 강한 바람이 소용돌이치는 단정애 아래로 장천린의 모습은 유 성이 점멸하듯 아스라히 떨어져 버렸다. 그의 모습은 눈 깜박할 사이에 떨어졌고 노도질팡의 사나운 격 류사이로 삼켜지고 말았다. "이럴수가......." 단천굉은 넋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문득 가슴이 알지 못할 전율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장천린이라고 했던가?' 그의 눈빛이 어떤 두려움과 후회 같은 것이 어렸다. '어쩌면 평생 오늘 일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가자!" 그는 낮게 말하고 마차속으로 올랐다. 잠시후 마차는 덜컹거리 며 오던 길을 향해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단정애(斷情崖) 아래의 격류는 여전히 굉음을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 15 장 海堂이라 불리는 少女 장천린은 생사(生死)의 도박(賭博)을 걸었다. 그는 단정애(斷情 崖)에서 떨어진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전신의 피가 모조리 어 디론가 빠져나가는 듯한 고통에 의식이 가물거렸다. 더욱이 세찬 충격과 함께 격류에 떨어지는 순간 그는 엄청난 물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나 그는 초인적인 의직력 으로 한 가닥 남은 정신과 한줌 모이는 진기로 생명의 도박에 불 을 당겼다. 바로 학면귀식대법(鶴眠龜息大法)을 전개한 것이다. 전신의 기 관을 일시에 정지시키는 신비의 귀식대법. 그는 내장의 기능이 멎 고 이어 호흡이 정지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전신에 엄 청난 충격을 느끼고 그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의 몸은 세차게 흘러가다가 격류속에 돌출한 한 날카로운 바위에 부딪친 것이었 다. 그의 전신에서 피가 솟구쳤다. 허나 그의 몸은 곧 시체처럼 떠 물결에 실려 다시 떠내려 가기 시작했다. 어디론가 끝없이...... 끝없이........ X X X 조일해(曹逸海)는 동릉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그는 또한 지 독한 수전노로써 의심이 많고 짜기로 소문났다. 또한 그가 돈만큼 이나 좋아하는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여색(女色)을 지독 히도 밝힌다는 것이다. 그는 여색을 밥먹기보다 좋아했다. 그런 그의 나이는 팔십이 가깝다. 그 나이에 여색을 밝히는 것도 놀랍지만 아직도 그는 절 대 밤에 혼자 자지 않았으며 그가 거느리는 집안의 하녀들치고 건드리지 않는 하녀가 없을 정도였다. 팔십이란 나이는 인생(人生)의 황혼이다. 그의 피부는 쭈글쭈글 했을뿐더러 검버섯까지 피어있다. 더구나 깡마른 그의 해골같은 모습을 좋아할 여자가 누가 있으랴? 허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다. 왜냐면 그 아닌 그가 지닌 돈 의 위력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항상 여자가 맴돌았다. 동릉현 사람치고 그가 일찍 주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심지어 그의 재산을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 그의 자식들까지 포 함해서 단 한명도 없었다. 조일해는 그런 추악한 늙은이였다. 화원(花園), 인공호(人工湖)가 있고 가산(假山)이 있으며 호수에 세워진 그림같은 정자(亭子)가 있는 아름다운 화원이다. 이곳은 조일해의 장원 내에 있었다. 무척 클뿐더러 잘 가꾸어진 곳이었 다. 화원의 꽃(花)들은 한창 다투어 만개하고 있었다. 꽃밭에서 꽃을 가꾸는 시녀 두명이 있었다. 그녀들은 제법 예 쁘장하였으며 꽃바구니에는 꽃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녀들은 가 지 친 꽃을 담으며 이따금씩 힐끔힐끔 한곳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쪽은 별채쪽이었다. 별채로부터 한낮임에도 블구하고 숨이 넘어가는 듯한 뇌쇄적인 여인의 교성과 신음이 간헐적으로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아아...... 학!" 시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종알거렸다. "지독새. 벌써 반시진째야!" 청의시녀가 혀를 차며 황의시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가엾어.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저게 어디 인간이 할 짓이람?" 청의소녀는 코웃음쳤다. "흥! 그 늙은 영감 좀 누가 안데려가나? 나는 그 영감만 생각하 면 소름이 끼쳐." 황의시비차림의 소녀는 말없이 꽃을 다듬기만 했다. "요즘 와서 더 지독해졌어. 마치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 같아." 그 말에 황의소녀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어머! 너 요즘 영감 방에 끌려 들어간 적 있지?" 그 말에 청의소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응! 삼일전에 한 번......." 황의소녀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어떻든?" 청의소녀는 경멸의 어투로 내뱉었다. "흥, 나이가 들어선지 정력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지 뭐야. 마음 뿐이지 몸은 해파리지 뭐!" "그래서 너도 또 채찍으로 때리든?" 청의소녀는 욕설을 퍼 부었다. "아무렴 제 버릇 개 주겠니? 늙고 힘이 없어 아프지는 않지만 그게 어디 사람이 할것이야? 당장 밀어버리고 뛰쳐나왔지 뭐." 황의소녀도 맞장구 쳤다. "맞아. 그 영감은 형편없어. 그 헐떡이다가 축 늘어지는 꼴이란. 에이그 염라대왕도 눈이 뼛지. 그 영감부터 잡아가지 않고는......." 처의소녀는 문득 화제를 돌렸다. "그 영감도 지독하지만 해당(海堂), 그 계집애도 정말 독해. 영 감의 변태같이 추악한 짓을 다 받아 준다니까?" 청의소녀는 은밀한 말이라고 하듯이 음성을 낮추어 속삭였다. "그때 살며시 훔쳐보니까 영감이 채찍으로 때리는데도 발가벗 고 말이지......." 청의소녀는 차마 더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휴! 정말 입으로는 얘기 못하겠어." 그녀의 얼굴이 어떤 흥분탓인지 빨갛게 뜨거워졌다. 황의소녀 는 부질없이 애ㄲ은 꽃을 뚝뚝 분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모든게 돈이 원수지. 돈때문이야." 청의소녀도 그말 에 맥이 빠진 듯했다. 실상 그녀들은 모두 돈 에 팔려 이곳으로 온 처지였던 것이다. 잠시 후 청의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문을 들어보니까 해당 그 계집애는 열 세 살때부터 몸을 팔 았데!" "세상에." "흥! 그 영감태기하고는 서로 잘 만난 것이지 뭘. 덕분에 우리 가 편하지 않니?" 황의소녀는 별채 쪽을 돌아보며 근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영감이 힘이 없다지만 그렇게 맞고도 몸이 견딜까? "견디니까 그런 짓을 하겠지." 이때 문득 황의소녀가 눈을 반짝였다. "나온다." 청의소녀는 흠칫하여 별채쪽으로 눈을 돌렸다. 별채로 통하는 월동문(月洞門), 그 월동문으로 막 한명이 나오고 있었다. 소녀(少女)였다. 이제 십 오륙세쯤 돠었을까? 그녀는 비교적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허나 상상보다도 깜짝 놀랄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피부가 해맑고 투명했으며 귀여운 미모의 소녀가 아닌가? 허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며 군데군데 곤욕을 치른 듯 멍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콧노래를 부르며 손에 조그만 비단주머니를 들고 던졌다 잡았다 하며 나오고 있었 다. 어찌보면 천진한 것도 같았고, 어찌보면 함부로 굴린 듯해 보 이기도 했다. 소녀는 마침내 두 시녀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시녀들은 마치 이상한 동물을 보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소녀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며 눈썹을 치뜨고 날카롭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 처음 봐?" 두 시녀는 움찔했다. 허나 기가 질린 듯 그녀들은 슬금슬금 옆 으로 물러났다. "흥!" 소녀는 코웃음치더니 문득 주머니를 흔들며 종알거렸다. "그 놈의 영감은 지독한 구두쇠야. 실컷 두들겨 놓고는 겨우 은 자 닷냥이라니." 그녀는 주머니의 끈을 잡고 빙빙 돌리며 걸어갔다. 그러다 문 득, "어머 해당화(海棠花)야!"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청의시녀의 꽃바구니에서 붉 은 해당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녀는 허락도 없이 불쑥 손을 뻗 어 해당화 한 송이를 끄집어 내더니 자신의 머리에 꽂았다. 이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때? 예쁘니?" "그... 그래......." 청의시녀가 기가 질려 그저 멍청히 대답했다. "호호호호!" 소녀는 까르르 교소를 터뜨리더니 몸을 훌쩍 뛰며 빙글빙글 춤 추듯 두 팔을 흔들며 앞으로 달려갔다. 꽃밭사이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요정이라도 된 듯 아 름다왔다. 그녀가 사라지자, 황의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애야!" 청의소녀도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말했다. "조금 모자라는 애같아.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행동할 수가 없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꽃밭사이로 사라진 소녀, 그녀의 이름은 해당(海堂)이었다. X X X 쏴아! 강(江)물은 맑았다. 해당은 강가에 앉아 치마를 걷고 하얀 종아 리를 물에 담그고 있었다. 하얗고 조금만 발은 앙증스러울만큼 귀 여웠다. 허나 자세히 보면 옥같이 고운 종아리에는 마치 뱀이 지나간 득 붉은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첨벙! 해당은 발 끝으로 물방울을 퉁겨본다. 물방울은 종아리를 타고 또르륵 굴러내린다. 발가락을 오물오물해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파문이 가라앉은 수면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기도 하는 해당, 그 녀의 얼굴에는 심심함이 어려 있었다. 무료함을 참을 수 없었던지 그녀는 돌멩이를 집어 던져보기도 하나 곧 싫증이 난 듯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마침내 턱을 괴고 가만히 있었다. 해당화는 시들어 있었다. 그녀는 해당화를 머리에서 빼들고 이 리저리 졸려보다가 강으로 던졌다. "쳇!" 해당화는 강물에 빙글빙글 돌다가 떠내려 갔다. 그녀는 뒤로 벌렁 드러 눕는다. 하늘(天), 푸르렀다. 푸른 창천에는 깃털구름이 깔려 있었다. 문 득 구름을 보는 해당의 흑진주같이 검은 눈이 몽롱해졌다. 해다(海堂)은 고아(孤兒)였다. 그녀를 키워준 사람은 늙은 노파 였다. 노파는 매일같이 그녀에게 일만 시켰다. 그러다 그녀가 십 세가 되었을 때 노파는 그녀를 기루에 팔아넘겨 버렸다. 기루에서 그녀는 온갖 잡일을 하면서 숱한 고생을 하였다. 그 고생이 너무나 힘겨워 마침내 그녀는 열 세 살이 되던 해 몰래 기루를 도망치고 만다. 그해부터 천애(天涯)를 유랑하는 동안 그녀는 여자의 몸으로 별 별 일을 다해가며 연명했다. 그녀가 겪은 일은 너무도 파란만장하 여 그녀 자신 조차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 녀가 정착한 것은 일 년 전이었다. 바로 이 곳 동관현에 발을 멈추게 된 것이었다. 마침 조일해란 늙은 색귀가 그녀에게 반해 버렸으므로 그녀는 이곳을 당분간 떠 날 필요가 없게 된 것이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바로 꽃이었고 그 중에서도 해당화 를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해당(海堂)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해당(海堂), 그녀는 그런 소녀였다. 하늘은 푸르르다. 허나 하늘을 바라보는 해당의 눈은 그보다 더 푸르고 맑았다. 그녀는 비록 잡초처럼 살았고 시궁창보다 더 지저분한 환경과 운명을 헤쳐왔지만 그녀에게는 아직도 순수한 면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풀밭에 누워 하늘을 보는 때가 가장 좋았다. 이럴때면 마음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 기 때문이었다. 상상속에서는 그녀가 공주가 될 수도 있고 귀부인 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구름을 보며 그런 갖가지 상상속에 가 슴이 터질 듯이 부푸른 것이었다. 문득 그녀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집어넣는다. 돈주머니가 잡혀 나왔다. 끈을 푸르자 그 속에서 하얀 은전 다섯 개가 나왔다. 해당은 동전을 소중스럽게 만진다. 그리고 입김을 불어 옷깃에 깨끗이 닦아도 본다. 그녀는 꿈에 젖은 듯한 눈으로 은전을 내려 보며 증얼거렸다. "이제 서른개만 더 모이면 백개가 채워지고 그렇게되면 나는 이 곳을 떠나 어딘가로 멀리 가서 조그만 꽃가게라고 차릴 수 있 을 거야." 그녀의 얼굴에는 달콤한 빛이 어렸다. "옷도 예쁜 것을 사 입을 수도 있고......." 하나 문득 그녀는 다시 우울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전까 지만 해도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이 몹시 즐거웠다. 하나 나이를 먹 은 탓인지 최근들어 그런 생각을 해도 즐겁지 않을뿐더러 까닭없 이 쓸쓸해지곤 하는 것이 아닌가? 해당은 은전을 꼭 움켜쥐었다. 이어, "쳇! 쳇! 쳇!" 그녀는 혀를 차더니 은전을 다시 갈무리했다. 이어 몸을 일으 키더니 신발을 두 손에 벗어 들었다. 백사장은 뽀얗게 빛나고 있 었다. 뽀드득...... 뽀득....... 그녀는 발 끝에 밟히는 모래의감촉을 즐기며서 걸어갔다. 이따 금씩 한 발 껑충 뛰어도 보고 또 뒤로도 걸어보았다. "아야!" 그녀는 그만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뾰족한 돌을 밟은 것 이었다. 발바닥이 조금 찢겨 새빨간 피가 배어나왔다. "이 빌어먹을 돌멩이가!" 그녀는 돌멩이를 잡더니 화가나 힘껏 던졌다. 퐁---당! 돌멩이는 강물에 떨어졌다. 해당은 인상을 쓰며 주저앉았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그녀의 안색이 변 함과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치뜨는 것이 아닌가? '저... 저것은?' 강가의 저쪽 편, 무엇인가가 떠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해당은 급히 달려갔다. 그러던 중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만 안색이 창백해졌다. '시... 시체야.' 그렇다. 그것은 물에 빠져 죽은 시체였다. 해당은 가슴이 두근 두근 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그녀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녀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강변은 눈부신 햇살만이 쏟아지고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해당은 재빨리 강가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강물은 그다지 깊지 않았고 물살도 완만했다. 잠시후 시체가 그녀 있는 곳으로 떠내려 왔다. 해당은 가까이 가려다 그만 물이 깊어지자 투덜댔다. "쳇!' 그녀는 치마를 위로 걷어올렸다. 눈부신 허벅지가 나이답지 않 게 성숙한 느낌을 주었다. 하나 허벅지의 곳곳에는 상처가 나 있 었다. 나뭇가지를 뻗자 시체가 닿았다. 해당은 다시 혀로 입술을 빨 았다. 자꾸만 목이 탔다. 그녀는 나뭇가지 끝을 시체의 옷자락에 걸어 서서히 당겼다. '됐어!'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그년는 조금씩 시체를 당기며 물가로 끌어냈다. 결국 그녀는 시체를 강가로 끌어내는데 성공을 했다. 시체는 엉망이었다. 머리카라은 산발이 되어 얼굴을 온통 뒤덮 고 있었으며 옷도 여기저기 찢겨져 걸레쪽 같았다. 그리고 시체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는데 상처는 물에 불어 입을 벌리고 있어 보기 만해도 끔찍했다. 시체의 복부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붕대는 피 에 젖어 더욱 끔찍한 느낌을 주었다. 해당은 치마를 내린 후 나뭇가지로 시체를 툭툭 건드려 본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였 "쳇! 죽어도 더럽게 죽었군." 그녀는 제빨리 시체의 몸에 걸쳐있는 의복을 살펴보았다. "옷을 보니까 죽기 전에 제법 괜찮게 살던 놈 같은데?" 그녀는 살구씨같은 눈알을 사르르 굴렸다. 해당,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린 후 겁도 없이 시체의 가슴 옷자 락을 열었다. 허나 피와 살이 엉켜붙어 있어 잘 벗겨지지가 않았 다. "에잇!" 그녀는 힘을 주어 찢어냈다. 그러자 무엇인가가 툭 떨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금갑이었다. 그녀는 눈에 빛을 내며 금갑을 주 어 살펴보았다. 한순간 그녀의 얼굴에 희열이 솟구쳤다. '그... 금이야... 순금.......' 그녀는 금갑이 모두 금으로 된 것을 알고 뛸만큼 기뻐했다. '굉... 굉장해. 제법 묵직한 걸로 보아 은자 백냥은 문제없겠어.' 그녀의 작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녀는 급히 주위를 살펴보 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만 오후가 기울어 태양이 서켠으로 기울 고 있을 뿐이었다. 해당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뭐가 들어있을까?' 금갑을 살펴보니 가느다란 홈이 있었다. 그녀는 잠시 살피다가 뚜껑을 여는 데 성공했다. 순간, "아!" 그녀는 그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은 크게 벌어졌고 눈은 화등잔만해져서 금갑 속에 빛나는 물건을 향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목걸이였다. 그것도 황금줄에 호두알만한 푸른 보석(寶 石)이 달린 휘황찬란한 보석목걸이였다. 바로 태양의 눈 바로 그것이었다. 아아! 그렇다면 시체는? 바로 장천린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단정애에서 스스로 몸을 날려 뛰어내린 장천린이었다. 그는 격류에 휩쓸려 이곳까지 흘러 내려온 것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해당의 눈에 띄게 된 것이었다. 해당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평생 그런 물건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신이 들고 있는 목걸이의 가치가 얼마나 나갈는지 짐작조차 가시지 않 았다. '대... 대체 얼마나 값이 나가는 것일까? 천냥정도 나갈까?' 그녀는 급히 금갑의 뚜껑을 닫았다. 흥분이 가시지 않고 있었 다. '완전히 오늘 봉을 잡은 거야.' 그녀는 금갑을 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시체의 복부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허리띠가 있었는데 수초에 잔 뜩 엉켜있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수초를 떼어내 보았 다. '와!' 순간 그녀의 입이 다시 크게 벌어졌다. '허리띠도 금이야!'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도대체 뭐하는 작작이기에... 허리띠까지 금으로 했단 말야?' 그녀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나뭇가지로 시체의 얼굴을 뒤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젖혀 보았다.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에는 큰 상처가 나 있었다. 이마에서 뺨 으로 길게 찢어진 상처 때문에 얼굴의 윤곽이 잘 분별되지 않았 다. 허나 자세히 뜯어보자 그 얼굴이 상당히 젊고 준수함을 알 수 가 있었다. 해당은 발로 시체를 발로 툭 걷어쳤다. "쳇! 살아있을 때 계집 꽤나 홀렸을 얼굴이군." 그녀는 땅에다 퉤 침을 뱉았다. "딴 놈같으면 그냥 물에다 던지겠다만 나에게 준 것이 많으니 대충이라고 묻어주지." 해당은 허리띠고 품에 쑤셔넣은 후 시체를 질질 끌고 갔다. 몹 시 무거워 그녀는 끙끙거려야만 했으나 그녀는 잠시 후 숲이 우 거진 곳까지 시체를 운반할 수 있었다. 이어 그녀는 그곳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강가의 습기찬 땅이 라 단단하지는 않았으나 그녀로서는 벅찬 일이었다. 허나 대충 구 덩이가 파지자, "됐어, 이제 묻으면......." 땀을 뻘뻘 흘리며 시체를 돌아버며 중얼거리던 그녀의 안색이 그만 하얘지고 말았다. "헉!" 그녀는 흡사 귀신이라고 본 듯 뒤로 주춤 물러났다. 시체가 갑 자기 꿈틀거린 것이었다. '분... 분명 아깐 숨이 끊어졌었는데.......' 그렇다. 그녀는 분명히 시체의 심장이 멎고 호흡이 끊어져 있 는 것을 확인했었다. 헌데 분명 그녀의 눈앞에서 시체가 움직인 것이 아닌가? '내가... 잘못 보았나?' 허나 그렇게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확실히 시체의 손이 움직였다. 그러더니 입에서 신음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으으... 음......." 해당은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허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 음이었다. 시체가 감았던 두 눈을 뜨는 것이 아닌가? '아... 으.......' 해당은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아무리 세상을 험하고 막되 세 살아온 그녀라 해도 정작 귀신만은 겁을 내는 그녀였다. 그녀 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시체, 즉 장천린은 눈을 떴다. 하나 그의 두 눈에는 빛이라곤 없었다. 그저 흐리멍텅하기만 했다. 문득 그는 힘겹게 목을 들어 올렸다. "물... 물을......." 그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그의 고개가 풀썩 꺽였다. 해당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녀는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약간 마음이 진정 되는 것이었다. '이제 죽었나?' 그녀는 대담했다. 그래도 달아나지 않은 그녀는 나뭇가지ㅗ 다 시 장천린의 몸을 쿡쿡 찔러 보았다. 하나 장천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해당은 조금 더 담대해졌다. 그녀는 다가가서 이번에는 심장에 귀를 대 보았다. 순간 그녀의 귀에 아주 선명한 고동소리가 들려 왔다. '살아 있다니?' 그녀는 이상한 심정이 들었다. '어떻게... 한다?' 그녀는 그만 난감해진 느낌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 자 리를 오락가락하면서 갈 등에 휩싸였다.. "쳇! 재수가 없으려니까 죽은 시체가 살아나고......." 그녀는 발끝으로 돌멩이를 걷어찼다. 그러다 결심한 듯 그녀는 장천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힘겹게 장천린의 팔을 잡고 어깨에 매었다. "끙!" 몹시 무거워 체구가 작은 그녀는 비틀거렸다. 그녀는 그를 업 고 앞으로 조금 걸음을 옮기며 코웃음쳤다. "흥! 살려는 준다만....... 그 대신 네가 지닌 물건은 모두 내거 야." 그녀는 짐짓 야무지게 말했다. "달래기만 해 봐라. 다시 물에다 쳐박아 버릴 테니까!" 해당, 그녀는 비틀거리며 장천린의 무거운 몸을 업고 걸어갔다. 석양(夕陽), 오늘 밤의 노을은 유난히도 밝았다. 붉은 노을빛이 해당의 그림자를 길게 땅에 비추고 있었다. 이상한 날이었다. 행운의 날이기도 했고 또 재수없는 날이기도 했다. 해당이라는 소녀, 그녀의 이상한 하루였다. 제 16 장 愛情은 江물처럼 만(萬)분지 일(一)도 안되는 그죽음의 도박(賭博)에서 난 살아났 다. 신산(神算) 제갈사. 당신의 그 음흉한 차도살인계 속에서 나는 죽음의 패(死牌)를 잡지 안ㄹ고 삶의 패(生牌)를 잡았소. 운명의 이십 사 시진 중 마지막 남은 한 시진(時辰)이 나를 살린 것이오. 후후, 하나 인간의 심리(心理)란 왜 이다지도 묘한 것일까? 나는 당신이 나를 죽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당신에 대한 증오심은 별로 없소. 어차피 무림이란 세계는 그런 것임을 이번 기회에 철저하게 체득했으니 말이오. 당신이 우려한 것처럼 나는 용문전장(龍門錢莊)의 일을 조화성에 알리지는 않을 것이오. 당신 이나 조화성이나 내게는 모두 관계가 없소.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작 한가지 뿐, 바로 옥교(玉嬌)를 찾는 것이오. 옥교를... 옥교를....... X X X 장천린은 허름한 나무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무섭도록 창백했다. 초ㅊ하고 해쓱했을뿐더 러 피부마저 꺼칠해 보였다. 움푹들어간 눈과 광대뼈도 약간 튀어 나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른쪽 이마에서 뺨까지 뱀이 지나가듯 붉은 흉터자국이 생겨나 있었다. 과거에는 그토록 맑고 총기에 차 있던 눈빛마저 지금은 음울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의 모습에서 는 과거의 절세미공자의 면모를 조금도 찾을 길이 없었다. 해당, 그 소녀에게 구함을 받은 지도 어느 덧 보름이 지나고 있 었다. 장천린의 상처는 실로 끔찍했다. 그를 치료하러 온 의원이 보 고서 기겁을 할 정도였다. 그 의원은 그가 이런 상태에서도 살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 했다. 전신에는 백여군데도 넘 게 살이 찢어지고 십여 군데의 뼈가 부러져 있었다. 더욱이 매소 련의 비수에 관통당했던 복부의 상처는 물 속에서 터져 내장으로 물이 스며들어 부패하기 직전이었다. 아무튼 그는 살아났다. 십일 동안 신음과 무서운 열속에서 혼 수상태를 헤매었다. 의원은 약을 지어 주면서도 가망이 없다고 했 다. 하나 그는 살아났다. 열하루째 되는 날 그는 눈을 뜬 것이었다. 이렇게 그는 소생했다. 의원은 기적이라고 했다. 장천린 그는 살 아야 했던 것이다. 외상(外傷)은 어느정도 아물고 있었다. 일반인보다 상처치유 속 도가 빠른 것은 원체 건강했던 체력 탓도 있었지만 그가 어느 정 도 내가토납진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야대능력의 운기 행로(運氣行路)를 은연중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장천린은 창 밖을 응시하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보름만 더 지나면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 것이다.' 그의 생각은 계속 되었다. '상처만 왠마큼 아물면 청하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노인을 시 켜 청하원의 모든 사업을 일단 정리하자.' 그는 누워있는 동안 이미 몇가지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은밀하게 해야 한다. 내가 살아있는 것을 제갈사가 알게 되면 분명 이번에는 더욱 무서운 살수를 쓸 것이다.' 그의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실로 그는 기사회생했으나 그렇다 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과거는 이제 그에게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전혀 타의(他意)에 의해 서. 장천린, 어째서 그는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하늘이 원망스 러운 심정이었다. X X X "랄랄랄." 해당, 요즘 그녀는 기분이 몹시 좋다. 그녀답지않게 기분이 들 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동관현의 약포에서 약을 지어가는 중이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약을 묶은 끈을 빙글 빙글 돌리며 자신이 혼자 살고 있는 초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힐끗힐끗 그녀를 응시했다. 그들은 저희들 끼리 수근거리기도 하고 낄낄 웃기도 했다. 동관현 사람치고 그녀 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늙은 색귀 조일해에게 몸을 파 는 일을 다 알기 때문이었다. 실상 동관현 사람들은 창녀나 기녀 따위를 백정 다음으로 경멸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해당의 존재는 그들에게 인간 이하로 비추 어지고 있었다. "헤헤헤!" "킬킬." 해당의 뒤로는 동네 꼬마들이 줄줄 뒤쫓고 있었다. 그들은 히 득거리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헤헤, 해당은 조영감 앞에서 발가벗고 개처럼 긴단다!" "히히, 발가벗고 멍멍 한댄다." "아니야! 해당은 말(馬)처럼 채찍을 맞으면서도 좋아서 웃는단 다." "하하하하." "이랴! 이랴! 어디 한 번 짖어봐라!" 꼬마들의 놀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 마침내 해당은 걸음을 멈 추고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이 독살스럽게 치떠졌다. "이 후레자식들이!" 그녀는 되는 대로 커다라 돌을 들어 냅다 던졌다. "와 --- 아!" 아이들은 그 바람에 모두 도망ㅊ다. 해당은 표독스럽게 아이들 을 노려보며 내뱉았다. "개 같은 자식들......." 이어 그녀는 다시 걸었다. 왠지 조금 기운이 없어진 듯했다. 그 녀는 동관현을 벗어나 강가를 따라 걸었다. 끝없이 넓은 장강(長 江)이 펼쳐져 있었다. 동관현은 대장강의 강변어귀에 위치한 현이 었다. 해다은 잠ㅁ시 강가의죽에서 장강을 응시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었다. 맑기만한 그녀의 눈이 왠지 젖었다. 그는 문득 소매로 눈을 문질렀다. "쳇!" 이어 눈물을 찍어낸 그녀는 장강을 향해 고함을 쳤다. "야 --- 아!" 그녀의 애처로운 느낌의 고함이 장강 수면위로 여운을 흘리며 흩어지다. 고함속에 설움과 고독, 울분을 실었던 탓일까? 해당은 다소 기분이 회복되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문득 그녀는 회상 속 으로 들어갔다. 보름 전 다 죽어가던 시체같은 장천린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 을 때, 그녀는 처음 그가 죽든 말든 방구석에 팽개쳐 두었다. 살 면 사는 것이고 죽으면 내다 묻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다. 하나 밤새 장펀린은 신음을 흘렸다. 그 시음을 들으면서 해 당은 문득 자신의 과거의 한 자락이 떠 올랐다. 자신을 키워준 노 파에게 이끄려 기루로 팔아넘겨진 날, 그날 밤 그녀는 심한 열병 에 시달렸었다. 허나 밤새 헛간에 내팽겨쳐진 채 그녀를 돌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튿날 그녀는 전신이 퉁퉁 부은채 엉금엉금 기어나와 우물가 에 쓰러졌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그녀는 왠지 그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해당은 장천린을 안아서 자신이 자는 침상에 눕혔 다. 그리고 한밤중에 동과년으로 달려가 오기 싫다는 의원에게 소 중하게 모아두었던 은자 열냥이란 거금을 주어서 억지로 끌고 오 다시피 데려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녀는 침식을 잊다시피하며 장펀린을 간호했 다. 왜 자신이 그토록 열을 올려서 낯모르는 사내를 위해 애를 쓰 는지 자신조차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열 하루재 되는 날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오히려 그녀가 탈진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허나 기뻤다. 뭐라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그녀는 기뻤다. 너무 기뻐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사흘이 지난 지 금....... 해당은 문을 여고 들어갔다. 장천린은 침상 위에 앉아 있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어리고 있었 다. "조금 늦었구나." 그 말에 해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강가를 따라서 왔거든." 장천린은 무득 그녀가 오늘따라 왜소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 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해당은 활짝 웃었다. "아니야, 약 가져 올게." 그녀는 곧 옆으로 통해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지난 며칠 동 안 두 사람은 친해졌다. 장천린은 해당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고 생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반면 그녀가 무엇을 하는 소녀인지는 몰랐다. 단지 아는 것은 그녀가 고아이며 나이는 십오세라는 것 밖에는 몰랐다. 그러나 그는 해당이란 소녀가 무척 기구하다는 것 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천진한 눈망울 속에는 말 못할 사 연이 깊이 숨어 있는 것 같았기 대문이었다. "다 됐어!" 잠시 후 해당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약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장천린은 그 약을 받아 마셨다. 썼다. 오늘따라 지독하게도 약이 썼다. 그는 약간 이맛살을 찌 푸리자 의자에 앉은채 턱을 괴고 유심히 그를 지켜보고 있던 해 당은 물었다. "쓰지?" 장천린은 쓴 웃음을 지었다. "써도 할 수 없지." 해당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문득 물었다. "아저씨도 해당처럼 고아라고 했지?" "음." "언제 고아가 됐어?" 장천린은 약그릇을 내려 놓으며 담담히 말했다. "어머님은 내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지. 그리고 아버님은 돌 아가신지 삼 년이 넘는다." 해당은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나는 부모님 얼굴도 몰라. 나를 키워준 노파 얘기로는 내가 하 살 때 어머니가 돈을 주고 나를 맡겼다는 거야." "......." "쳇! 그런데 그 노파는 내가 열 살 때 기루에 팔아넘겼어." 장펀린은 묵묵히 그녀를 응시했다. "삼년 뒤 나는 몰래 기루를 탈출했어. 헤헷, 아마 그 기루 주 인은 꽤나 팔팔 뛰었을 거야." 장처린은 빙긋이 웃었다. "이곳에는 그때 온 모양이구나?" "아니야. 한 일년 넘도록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어. 그리고 여기 온지는 일년 조금 안돼." 장천린은 그녀의 눈빛을 읽었다. "힘들었겠구나." 해당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턱을 괸 채 빤히 장천린 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무엇을 생각한는지 장천린은 알 수가 없었다. 해당은 어리애인가 하면 여인이었고 여인인가 하면 또 어린애 같은 신비한 면이 있는 소녀였기 때문이었다. 두사람은 서로를 이해했다. 각기 틀린 환경과 운명, 그리고 나 이조차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로의 과거에 대해서 그들은 더 묻지 않았으며 알려구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응 서로에 대해 신뢰했으며 함께 지내는 동안 이상한 정(情) 이 싹트고 있었다. X X X 장천린은 목발을 짚고 강가를 거닐고 있었다. 차츰 그는 보행 (步行)연습을 했다. 상처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 의 옆에는 해당이 즐거운 표정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강가에 핀 꽃을 꺽으며 때로는 예쁜 꽃을 따 자신의 머리에 꽂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천진난만하고 아름다왔다. 도무지 그늘이라 곤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장천린은 ㅡ러나 그녀의 내부에 엄청난 슬픔이 응어리져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곳에 온 지 이십여일이 되는 동안 어느정도 해당이 하는 일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더욱 안스러워지고 있었다. 문득 상념에 젖은 그를 일깨우는 소리가 있었다. "아저씨! 여기서 해당이 아저씨를 건졌어." 해당은 강변의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장천린은 묵묵히 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시체인 줄 알고 묻으려 했지 뭐야. 헤헤." 장천린은 그녀의 천진한 말에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무섭지 않더냐?" 해당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무섭기는? 시체를 처음보나 뭘?" "......?" "후훗, 사실은 아저씨를 건진 이유가 따로 있었어." "......?" "혹시 아저씨의 몸에 쓸만한 물건이 없나해서 건졌거든." 장천린은 흠칫했다. "저번 장마때 시체 한구를 건져서 제법 슈입이 괜찮았거든?" 장천린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자신이 강탈(?)의 대상이었다 니....... 해당이 쪼르르 달려오더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한데 아저씨는 어쩌다가 그런 꼴이 되었지?" 장천린은 잠시 침묵했다. 세상풍파란 풍파를 모두 겪은 그녀는 매사에 눈치가 빨랐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가 그 일에 대해 말하 고 싶지 않다는 것을 느꼈던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저씨는 상처가 나으면 집으로 돌아가겠지?" 장천린은 쓴 웃음을 지었다. "해당,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단다." 해당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장천린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후후,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저번처럼 또 떠내려 올거야. 이번 에는 진짜 시체가 되어서 말이야." 해당은 침묵했다. 그러다 그녀는 눈을 반짝 빛내며 진지하게 물었다. "아저씨." "음?" "음, 돈만 내면 해당하구 살아도 돼." 그녀 딴에는 제법 진지하고 심각한 제의였다. 허나, "하하하하하." 장천린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나 어이없고 우스운 생 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왕왕 해당은 그렇게 엉뚱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응?" 장천린은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어머니가 보고싶지 않니?" 해당의 눈ㅂ이 흔들렸다. 하나 곧 그녀는 입술을 살짝 물며 고 개를 저었다. "나에게는 부모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고 싶지 않아." 장천린이 말이 없자 그녀는 문득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우리 그런 시시한 이야기는 그만해." "......." "참, 아저씨." "......?" "옥교란 누구야?" 장천린은 뜻밖의 질문에 흠칫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알지?" 해당은 미소 지었다. "아저씨가 의식불명일 때 계속 그 이름만 불렀거든." 장천린은 고소했다. 하나 해당은 문득 심각하게 물었다. "부인...... 이야?"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애인?" 장천린은 해당을 응시하다가 싱긋 웃었다. "맞아." 순간 해당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녀를 사랑해?" "음." 해당은 다시 무엇인가를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왠지 그녀의 눈빛은 우울해졌다. 그녀는 머리에 꽂은 꽃을 따더니 갑자기 바닥 에 던졌다. 그러다 또 한송이는 꽃잎을 하나씩 따더니 강물에 던 졌다. 꽃잎은 강물을 따라 빙글빙글 돌며 천천히 떠내려갔다. 장천린은 그 광경을 보며 물었다. "왜 꽃을 던지지?" 해당의 말은 갑자기 가라앉았다. "시들 때 던지면 기분이 않좋아요." 그녀가 처음으로 사용한 존댓말이었다. 왠지 장천린의 가슴에 그녀의 말이 애잔하게 와 닿았다. 꽃잎은 하나 둘씩 강물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강물을 따라 빙 글빙글 돌며 어디론가 하염없이 흘러만 가는 것이었다. 제 17장 紋身 일개월의 시간이 물 흐르듯 지났다. 장천린은 마침내 완전히 회복되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그의 얼굴에 새겨진 흉터 였다. 이마에서 뺨으로 은은히 붉은 선처럼 자리한 흉터, 하나 장 천린은 그깟 얼굴의 흉터쯤이야 관계치 않았다. 몸에도 흉터는 징그러운 뱀이 지나간 것처럼 숱하게 남아있었 다. 그러나 몸의 흠은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그렇게 가릴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는 본래 대범한 성품의 소유자인지라 관계치 않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마음에 남은 상처였다. 마음깊이 새겨진 상 흔(傷痕)이야말로 지울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X X X 장강(長江)의 흐름은 도도하다. 숱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원 의 역사가 어떻게 변하던 대장강의 흐름은 한 번도 멈춘적이 없 다. 말없이 흐르는 강(江), 그것은 대륙(大陸)의 산 증인이었다. 장천린, 그는 장강의 강가에 서 있었다. 일신에는 흑의(黑衣)를 걸쳤다. 검은 옷은 그가 이제껏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옷이었 다. 검은 옷과 그의 창백한 피부와는 왠지 섬뜩하도록 강렬한 인 상을 주었다. 머리는 풀어서 뒤로 길게 늘어뜨린 장발이었다. 그의 용모는 아직 준수했다. 비록 얼굴에 남은 흉터가 은은히 보였으나 그것은 오히려 색다른 매력을 풍겨주었다. 예전의 조각같이 섬세하던 아 름다움이 그 상흔으로 인해 기이하도록 강인하며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깍지않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는 나이가 조금 들어 보였다. 그리고 예전의 그의 모습 같지 않게 보 였다. 하나 틀림없는 사실은 기이하도록 그에게서는 강렬한 매력 이 흐른다는 사실이었다. '내일 오후쯤 동관현에 들렀다가 남창성으로 가봐야겠다.' 그는 장강을 등졌다. 그는 천천히 초막으로 돌아가며 한가닥 염려를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해당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다. 그동안 꽤 정이 들었 는데.' 그렇다. 정작 떠나야 할 때가 되자 그는 해당을 내버려두고 갈 일이 걱정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인간의 정을 느껴보지 못하던 불행한 소녀 해당, 그녀는 장 천린과 함께 있던 동안 많이 달라졌다. 무척 성숙해졌는가 하면 성격도 많이 달라진 듯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장천린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장천린 자 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쨋든 나는 떠나야 한다.' 장천린은 서서히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해당은 머리를 감았다. 본래 그녀는 목욕을 자주하지 않았으나 최근 들어 부쩍 자주 목욕을 했다. 뿐더러 옷차림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녀는 지금도 목욕을 하고 깨끗이 머리를 감은 다음 수건 으로 젖은 머리를 닦는 중이었다. 그때 문을 열고 장천린이 들어 왔다. 해당은 활짝 웃었다. "어디갔다 왔어요?"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바람 좀 쐬고 왔다." 그는 침상가에 앉으며 물었다. "목욕을 했나 보구나?" 해당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응,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기분이 무척 상쾌해요." 그녀의 얼굴과 피부는 생기에 넘쳐 빛나고 있었다. 예전의 그 런 그늘지고 어두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수건 으로 질끈 동여 묶었다. 그리고 사뿐히 걸어와 장천린의 옆에 앉 았다. '......!' 장천린은 그녀가 옆에 오자 그녀의 몸에서 싱그러운 냄새를 느 꼈다. 그는 내심 감탄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녀의 아름다 움과 성숙미를 다시 발견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해당은 본시 아름다왔다. 하나 항상 허름한 옷과 지친듯한 표 정으로 인해 본연의 미가 빛을 잃었었다. 그런데 목욕을 하고 깨 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의 모습은 장천린이 놀랄 정도로 아름 다운 미태가 넘치고 있었다. 장천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예쁘구나." 그 말에 해당답지 않게 그녀는 홍조를 지으며 배시시 웃었다. "에이...... 거짓말." 장천린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다. 해당은 누가 보더라도 매우 아름다운 소녀다." 해당은 왠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정작 자신이 아름 답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늘상 그녀는 자신이 평범하다 고 생각해왔다. 뿐만 아니라 한심할 정도로 추하다고 느꼈었다. 한데 장천린의 칭찬을 듣고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나 차츰 날 아갈 듯 가슴이 부풀어 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왜 그럴까? 장천린의 말 한마디, 눈짓하나에도 그녀는 신경이 크게 쓰였 다. 요즘에는 조일해의 집에도 가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녀의 피부는 더욱 고아져 광택까지 날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희게 느 껴지는 피부를 그녀는 은근히 자신조차 신기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장천린이었다. 그가 칭찬하자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해당은 살며시 손을 뻗어 장천린의 손을 잡았다. "아저씨......." "음?" "아저씨의 손은 정말 너무 아름다워요. 훗 제 손보다 더 희고 섬세한 것 같아요." 장천린은 나직이 웃었다. "후후, 남자 손이 아름다워야 무엇 하느냐?" 해당은 배시시 웃었다. "저......." "음?" "옥교란 분은 매우 아름다운가요?" 장천린은 멈칫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다." "정말 그녀를 사랑해요?" "물론." "한데 왜 헤어졌어요?" "......." 장천린이 말을 하지않자 해당은 문득 얄궂은 표정을 짓더니 물 었다. "옥교란 분하고 자보셨어요?" 장천린은 그녀가 설마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라 그저 망연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뭐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때 해당은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아저씨, 정말 재미있는 것을 보여드릴까요?" 그녀의 두 눈에 이상한 빛을 띄며 그렇게 말했다. 장천린은 멋 적게 물었다. "어떤 걸 말이냐?" "호호호." 해당은 교소를 흘리며 별안간 가슴의 옷자락을 활짝 벌렸다. 장천린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해당, 너......." 그러다 그는 말을 멈추었다. 해당은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 다. 옷이 벌려지자 그녀의 소담스런 젖가슴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체격과 나이에 비해 성숙한 젖가슴이었다. 사나이의 시선을 흘리고도 남음이 있는 탄력이 느껴지는 소담 스런 젖가슴, 장천린의 눈이 경련했다. 하나 그의 눈은 젖가슴 가운데를 보고 있었다. 젖가슴의 풍만 한 계곡에 핏빛의 선명한 문신(紋身)이 있었다. 붉은 주사(朱砂)로 찍어 새긴 듯 하나의 관음보살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치 앞으로 튀어나올 듯이, 그것은 손바닥 절반 정도의 크기 였다. 헤당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것은 해당이 태어났을 때부터 새긴 문신이에요." "......." "후훗, 제 부모가 누군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독실한 불교신자 인 모양이에요." 해당은 옷깃을 여몄다. "한ㄸ는 칼로 이 문신을 벗겨버릴까도 생각했어요. 하나 잘못 하다간 큰일날 것 같아 그만 두었죠." 그녀의 음성은 우울해졌다. 장천린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가만히 손을 뻗어 해당의 어깨 위에 얹었다. 해당은 그의 눈을 응시했다. 문득, 그녀의 눈꼬리에 이슬이 맺 혀 떨어지려 하자 그것을 감추기라도 하듯 그의 품에 얼굴을 묻 어버렸다. "해당." 장천린은 그녀의 작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오늘따라 그녀가 몹시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가볍게 어깨 를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한 번도 울은 적이 없다는 그녀였다. '해당." 장천린은 그녀를 안고 고개를 들었다. 창밖에 해가 지고 있었 다. 노을이 창 안으로 들어온 듯 방안은 불그무레하게 물들고 있 었다. 문득, 장천린은 방금 전 해당의 젖가슴사이에서 본 문신이 떠 올랐다. 선명한 핏빛의 관음상, 왠지 자꾸만 그 관음상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새 그의 뇌리에 마치 주인(朱印) 처럼 깊이 새겨져 있었다. 어둠이 서서히 밀려들고 있었다. 第 18章 서글픈 別離 해당(海堂), 그녀는 침상에 웅크린 채 소록소록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잠든 모습은 저욱 작고 측은해 보인다. 장천린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는 것 이다. 그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고 있는 황촛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촛불이 그의 눈동자에 심지처럼 박혀 일렁이고 있었다. 문득 그는 시선을 침상 위에 자고있는 해당에게로 옮겼다. '해당.......' 마치 잡초처럼 살아온 소녀, 글(文)도 전혀 모를뿐더러 교양이 나 품위따위와는 아예 담을 쌓은 듯이 거칠게 살아온 인생, 하나 그렁 그녀에게도 야생화(野生花)와 같은 미가 있었다. 해당에게는 인생의 파란만장한 여정이 얼룩져 있었으나 그녀의 순수함만은 아직도 빛을 잃지 않은 그런 신비면이 있기도 했다. 장천린은 가는다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며칠전 동관현에 들렀 다가 비로소 그녀가 어떠 소녀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그 동 안 어떤 생활을 했었는지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결코 더럽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더윽 더 연민지정을 느꼈다. 그는 해당에게서 누이동생과 같은 애 정을 느끼고 있었다. 장천린은 마침내 소리없이 몸을 일으켰다. '해당, 반드시 돌아오마. 너로 인해 살아난 나의 인생....... 어찌 너 하나 행복하게 못해주겠느냐?' 장천린은 잠든 해당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고 천진해 보였다. 뺨은 사과 같고 긴 속눈썹은 아직도 아름다운 소 녀의 동경을 품고 있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그때였다. 입술을 떼는 순간 그는 보지 못했다. 해당의 눈꼬리 에 맺힌 이슬을....... X X X 아침(朝), 해당은 굉장히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평소보다 유 난히 많이 웃고 떠들며 바삐 움직였다. 그녀는 요란하게 아침식사 를 준비했다. 또한 전에 볼 수 없는 색다른 반찬따위로 식탁을 깜 짝 놀랄만큼 풍성하게 했다. 한데 식사가 끝나자 갑자기 그녀는 말이 없어졌다. 장천린은 그녀가 끓여준 차를 마시며 웃었다. "하하. 아침식사 내내 떠들다가 갑자기 말이 없으니까 이상하 구나." 해당은 그 말에 턱을 괸채 미소를 지었다. "때로는 이렇게 조용한 것도 좋지 않아요?" "하하! 왠지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구나." 이어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해당이 갑자기 어른스러워진 것 같은데?" 해당은 미소지었다. "해당은 다 컸어요. 그래서 아저씨 마음을 다 이해해요."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떠나려는 거지요?" 그녀의 음성은 조용했다. 두 눈은 맑게 빛났다. "해당......." 장천린이 뭐라 입을 열지 못하자 그녀는 문득 입을 가리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이어 그녀는 장난스런 표 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얼 그리 어렵게 생각해요? 해당은 한 두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니예요." 그녀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대신 가끔이라도 해당에게 들려주면 되잖아요." "해당." 장천린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해당의 말은 그에게 어떤 종 류의 슬픔까지 느끼게 했다. 하나 해당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 했다. "헤! 아저씨답지 않게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장천린은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치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그런 표정하지 말아요." 해당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벽장으로 가서 무엇인가를 꺼 내왔다. 그것은 본래 그가 소유하고 있던 두가지 물건이었다. 태 양의 눈이 들어있는 금갑(金匣)과 금요대였다. "이것은 아저씨 물건이니 돌려 드리겠어요." 장천린은 멈칫했으나 물건을 받았다. 그러다 문득 금요대를 그 녀에게 다시 내밀며 말했다. "이것은 해당 네가 가져라. 그동안 네가 수고한 바에 비하면 아 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줄것이라고는 이것뿐이니 성의로 여겨다 오." 순간 해당의 표정이 반짝였다. '수고? 성의?' 왠지 그녀의 눈에는 자욱한 안개처럼 슬픔이 깔렸다. 하나 곧 그녀는 깔깔거리며 말했다. "호호홋. 역시 조영감보다는 훨씬 손이 크군요." 그녀는 금요대를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게 받겠어요." 장천린은 그 순간 그녀의 눈이 반짝거린 것을 보지못했다. 그 러나 그녀의 심정이 결코 순탄치 않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X X X 그는 떠났다. 반드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그는 떠났다. 해 당은 강가에 멍하니 앉아 석양에 물든 장강의 물결을 응시하고 있었다. 석양의 붉은 노을이 그녀의 모습을 유난히 외롭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강가에 앉아 멍하니 물결을 본다. 석양에 반짝이 며 어디론가로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 그때 그분을 구했을때도 저런 석양이었어.' 조금씩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나 곧 해당은 이를 악물 었다. '안돼 해당. 울면 안돼.......' 그녀는 이를 힘꼇물고 자신을 타일렀다.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잖아?' 하나 결국 복받쳐오르는 슬픔을 어찌 할 것인가? 결국 그녀는 봇물터지듯 끝없는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인간적인 정(情)을 느낀 사람, 정따위는 필요없다고 생각한 나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 남자였어. 그러나 처음 느낀 정이었기에 아픔이 너무 커! 그가 떠난 순간 참을 수 없는 슬픔이 솟구쳤어. 그래 그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 하나 왜 그가 떠날 때 그에게 매달리지 못 했을까? 같이 가자고 아니 그것이 안된다면 다만 며칠이라도 있 다가 가 달라고 거절하지는 않을 것 같았는데 말야. 왜? 왜 그렇지 못했지? 왜? 내가 몸을 파는 더러운 화냥년이라서? 그래... 서야? "우웁........" 더욱 거세게 터지는 오열이었다. 해당은 태어난 이래 그토록 심한 오열을 터뜨린 적이 없었다. 그녀는 두 손에 금요대를 꽉 움 켜쥔채 마침내는 엉엉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석양의 노을은 점점 흐드러지게 타들어가고, 장강(長江)은 말없 이 흘러만 가는데....... 第 19 章 勝負는 始作되었다 태화루(太華樓), 동관현(銅官縣)에서 가장 큰 주루, 그곳은 동관 현을 지나는 장강(長江)을 굽어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곳 태화현은 항상 손님이 붐비고 있는 곳으로 장사가 성업이었다. 따 라서 손님도 장사꾼에서 선비, 그리고 때로는 강호인(江湖人)들까 지 다양했다. 이층 창가, 막 올라온 사람은 청년이었다. 일신에 흑의를 입은 그는 체격이 건장했고 준수했다. 하나 자세히 보면 그의 얼굴에 가느다란 흉터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장천린, 바로 그였다. 그가 오르자 점원은 재빨리 창가에 면한 자리를 마련했다. "헤헤, 어서 오십쇼. 공자님, 요리는......." 장천린은 담담히 주문했다. "장춘선(長春仙) 한근, 홍수육(紅水肉) 한접시, 오리볶음 한접시, 연와탕과 소채 신선한 걸로 세가지, 그리고 상어알은 있는가?" 점원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런 요리는 최고급중에서도 최상급이었다. 아직 그는 한 번도 그런 요리를 한꺼번에 주문하는 손님을 보지 못했었다. 하나 곧, '이거 보기보다는 고급 손님인 걸. 헤헤 잘만하면.......' "예, 예, 있구말굽쇼. 잠깐만 기다리시면 됩니다요!" 그는 넙죽넙죽 절하고는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갔다. 주방에 서도 난리가 났다. 지지고 볶고, 데치고....... 요리가 나왔다. 술은 최고급 장춘선이었는데 그런 술은 왠만한 주루에서는 없는 것이었으나 다행이도 태화루에는 몇병 남아있었 다. "헤헤, 천천히 드십시오." 점원은 손을 비비며 서 있었다. 그는 좀체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그는 본래 부호였으므로 그런 요 리가 익숙했고 또 점원의 눈치도 알고 있었다. "여기 있네, 수고비." 그는 은자 한덩이를 주었다. "아이코! 감사합니다." 점원은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그런 큰 액수의 수고비는 점원생활 십오년만에 처음이었던 것이다. 장천린은 먼저 술 한모 금을 마셨다. 그의 이마에 주름살이 잡혔다. "장춘선은 서늘한 곳에 보관하여 공기가 통하지 않게 밀봉해야 하건만 이건 조금 바람이 들어갔군?" "아... 예... 그건......." 점원은 진땀을 뺐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괜찮네. 그리고......." 그는 점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점원에게서 물어 볼 게 있 었다. "자네에게 물어 볼 게 있네." "네, 무슨 말씀인지 물어만 봅쇼." 장천린은 얼굴을 활짝 폈다. "요즘 남창소식은 어떤가?" 그 말에 점원은 어리둥절했다. "남창소식이라뇨?" 장천린은 홍수육 한 점을 집어 먹으며 물었다. "나는 복건성(福建省)에서 온 상인인데 요즘 남창성의 소문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걸세." 점원은 아첨의 웃음을 흘렸다. "헤헤, 그렇습죠. 요즘 남창에도 한 달동안 무척 많은 일이 벌 어졌습죠." "대체 무슨 일들인가?" 장천린은 담담히 물었다. "우선 가장 큰 사건은 강남제일거부이신 금백만대인께서 돌연 급사를 하신 일을 들수 있습죠." 장천린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나는 그 소문을 듣기만 했는데 진정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구 말굽쇼. 헤헤, 저의 숙부께서 남창에 계시기 때문에 남창소식은 훤하죠." 장천린은 장춘선을 다시 한 모금 마신 후 탄식했다. "허, 금대인이 죽었다면 진정 문제는 크겠군. 더욱이 금대인은 자식이 없는 걸로 아는데?" 점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자식은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양자가 있었다더군요." "양자?" "그렇습니다. 항주에서 큰 주루를 경영하던 옥류향(玉柳香)이란 분인데 그가 금대인께서 후계자로 키운 양자라고 하더군요." 장천린은 문득 느껴지는 게 있었다. '제갈사의 계략이다!' 하나 그는 겉으로는 조금도 놀라움을 내색치 않고 물어보았다. "그럼 옥류향이 만금산장의 모든 사업을 이어 받았겠군?" "그렇습죠." 장천린은 내심 염두를 굴렸다. "제갈사는 과연 치밀한 사람이군. 내가 거역할 것을 알고 미리 대비하여 또 다른 한 명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니.' 그는 새삼 제갈사의 무서운 안배에 또 한 번 가슴이 섬뜩한 기 운을 느꼈다. 그는 문득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한데 이상하군. 금대인은 삼년전 뵈었을 때는 상당히 정정하 셨는데 어찌 그리 쉽게 죽는단 말인가?" 점원은 짐짓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펴며 말했다. "금대인을 치료하던 의원의 이야기로는 금대인께선 원래 오랫 동안 지병을 앓아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지병이 발작하여 급사 하셨다는 겁니다." '지병?' 장천린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지하에서 금대인이 알면 통곡하겠군.' 그는 다시 소채 한 점을 씹은 후 물었다. "그런데 또 다른 일은 무엇인가?" 점원은 자신의 얘기에 열을 올렸다. "또 한가지 큰 사건은 청하원(靑河院)의 장주이자 신선루의 젊 은 주인이었던 장천린 공자가 모든 사업을 정리해서 신선루의 취 랑과 함께 실종된 사실입니다." 장천린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헷헷, 신선루의 취랑은 소문에 천하제일미녀라는군요. 아마 장 공자는 그녀를 위해 사업까지도 포기한 모양입니다." 장천린은 내심 이를 갈아붙였다. '제갈사....... 정말 기막히군. 힘하나 안들이고 나의 전재산을 삼 키다니. 후후, 정말 신산답다.' 그는 더 이상 점원에게 물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수고했네." "헤헤, 뭘입죠." 점원은 몇번이나 허리를 숙이고 돌아갔다. 장천린은 창문을 통 해 멀리 내려다 보이는 장강의 도도한 흐름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결국 제갈사도 이번 한판으로 대강남북의 모든 상권(商權)을 한 손에 움켜쥔 셈이 되었군.' 그는 제갈사의 무서운 음모에 전율을 느꼈다. '수억만냥이 넘는 그 가공할 재력이라면 천하의 조화성이라도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될 것이다.' 장천린은 서서히 가슴속에서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하나 제갈사, 당신의 완벽한 계획에도 한 가지 차질은 있었다 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오. 바로 나 장천린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을 말이오.' 장천린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식탁에는 아직도 많은 요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가 태화루를 나갈 때 점원은 달려나와 그르 배웅해 주었다. 돈, 돈이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뿐더러 육체까지 부 리는 것이었다. X X X 남창성, 어둠이 깃든 시간이었으나 남창성은 멀리서 보아도 번 화했다. 청하원은 남창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비록 그 규모는 만금산장에 비할 수 없었으나 역시 부호의 저택답게 으리 으리했다. 특히 담장을 따라 울창하게 자라있는 청류(靑柳 : 버드 나무)는 일품이었다. 그로 인해 청하원을 어떤 이는 청류장(靑柳 莊)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자시(子時)쯤 되었을까? 청하원의 담장을 따라 한 인영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바로 장천린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나 지금은 빼앗긴 집이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다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가볍게 담장 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청하원의 구조에 대해 눈을 감고 도 그릴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집이 아닌가? 청하원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하인(下人)들의 모습도 볼 수 없 었고 진노인(陳老人)도 볼 수 없었다. 장천린은 몸을 움직여 한 방으로 소리없이 들어갔다. 그 곳은 서재였다. 자신이 오랫동안 써 온 서재였기에 불을 켜 지 않고도 내부구조를 알 수 있었다. 그는 한 쪽 벽면을 메우다시 피한 서가 중 한쪽을 밀었다. 빙글! 서가는 기이하게 설계되어 있어 소리없이 회전했다. 그리고 벽 속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석실(石室), 그 곳은 청하원의 비밀 석실이었다. 서재 바로 지하 (地下)에 있었고 그 곳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장소였다. 애당 초 그의 부친이었던 장진군이 만든 것으로 그의 평생 모아놓은 재산을 비장시켜 놓은 곳이었다. 지하밀고, 그 안은 거의 텅 비어있었다. 그 이유는 얼마전 그가 아라사로부터 태양의 눈을 사기위해 모두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세 상자의 보석이 남아 있었다. 장천린은 세 개의 작은 상자 를 열었다. 순간 보광이 밀고를 환하게 밝혔다. 보석류가 꽉 차 있었다. '이정도면 한 상자에 삼만 냥은 넘을 것이다. 세 상자면 십만 냥....... 좋다. 이 정도 액수면 충분하다.' 장천린은 구석에서 조금 큰 상자를 하나 찾아 냈다. 그것은 아 라사가 선물한 황금공작(黃金孔雀)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이것도 필요할 지 모른다.' 그는 또 이번에는 벽면의 장에서 작은 비단보에 싸인 물건을 꺼냈다. 비단을 들자 두 권의 책자가 나왔다. 그것은 만가산에서 얻은 일수삼도(一手三刀) 강중문과 백변천군(百變千君) 노명이 준 것이었다. '이제 이 책자에 나의 모든 것을 건다.' 장천린의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는 보석상자와 황금공작, 그리고 책자 등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그것을 옆구리에 끼고 오던 길로 나갔다. 청하원은 여전히 조용하여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았다. 하나 장천린은 조심에 조심하여 장원을 빠져 나갔다. 어둠에 잠겨있는 청하원을 응시하는 장천린의 눈은 어떤 희열 에 젖어있었다. '나와 아버님의 땀이 배어 있는 곳... 지금은 빼앗겼지만 언젠가 는 돌아온다.' 장천린의 미간이 굵게 좁혀졌다. '기필코 도로 찾을 것이다.' 그의 눈에서 형용할 수 없는 집념의 빛이 흘러 나왔다. '조화성, 무영과 신산....... 이 모두가 지금부터는 나의 적(敵)이 다.' 아! 결국 그는 모종의 결심을 하고야 만다. '승부(勝負)는 시작(始作)되었다.' 장천린은 다시 한 번 청하원의 전경을 가슴에 담아두려는 듯 응시하고는 서슴없이 등을 돌렸다. 어디로 떠나는 것인가? 그의 발걸음은 확신과 집념에 찬 의지 로 일보(一步) 일보, 어둠을 밟으며 사라지고 있었다. 第 20 章 三刀와 紫府의 絶藝들 태산 관일봉(觀日峰), 중원(中原)의 성산(聖山)인 태산의 장엄함 은 직접 보지않고 느끼기는 힘들다. 숱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 원의 주인(主人)이 바뀔 때마다 그들은 태산을 쳐다보며 제왕(帝 王)의 긍지를 다지곤 했다. 특히 관일봉에서 바라보는 동해(東海)의 일출(日出)은 장엄하다 못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지금도 많은 시인묵객들은 관일봉에 오르고 있으며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며 웅장한 자연(自然)의 신 비에 취해 시심을 돋우곤 한다. 관일봉 기슭, 얼마전 그곳에 엉성한 대집 한채가 생겨났다. 누 군가가 손으로 엮어 지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집이었다. 한 청년 이 그곳에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장천린이었다. 방 안, 장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구석에 침상을 대신하 는 짚더미가 수북이 깔려있고 아무렇게 짠 탁자가 볼품없이 놓여 있다. 장천린, 그는 탁자위에 한 권의 얇은 책자를 펼쳐놓고 있었다. 그것은 일수삼도(一手三刀) 강중문이 남긴 책자였다. <삼도경(三刀經).> 겉표지에는 그런 제목이 쓰여 있었다. 아주 평범한 제목이었 다. 제목만으로는 그 속의 내용이 그다지 신기하거나 비범한 무예 서(武藝書)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장천린은 회상에 잠기고 있었다. 외팔이 노인 강중문이 삼도경 이란 책자를 전해 줄때의 절박했던 상황은 아직도 생생히 뇌리에 남아 있었다. 철마왕 사진청에게 처참하게 죽어가던 모습도 선명 히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장천린은 미간을 찡그리며 눈에 불꽃같은 기운을 흘렸다. '현재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힘(力)이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나의 머리를 믿는다. 나에게 어느 정도의 무공(武功)까지 보태진다면 나는 어떤 난관이라도 뚫을 자신이 있다.' 장천린의 생각은 계속 되었다. '조화성주 염무나 무영 고검령같이 높은 무공은 필요없다. 그저 일류정도면 족(足)하다. 세상일이란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장천린은 분명 남과는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 리고 자신의 주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의지력을 지니고 있었다. '옥교, 반드시 나는 너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만들 것이다.' 그의 두 눈에는 집념이 이글거렸다. 그가 남창성을 떠난 지 어 언 한달여가 되었다. 그는 의도가 있어 남창성에서 수천리 이상 떨어진 이 곳에 온 것이다. 장천린의 성품은 차츰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본래의 부드럽고 유화적이던 성격은 강하게 자리잡고 시작하고 섬세하던 성품 또한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무서울 정도의 집 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의 파란이 이토록 그를 변화시킨 것 이었다. 장천린은 눈에서 집념의 빛을 내며 천천히 삼도경(三刀經)을 넘 기고 있었다. 삼도경의 처음 몇 장에는 도(刀)에 관한 자세한 개 관이 서술되어 있었다. 장천린은 약간의 기이함을 느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뜻으로 강서성의 유명한 무림인들로부터 무공 을 사사받았다. 비록 오묘한 내가무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반 적보다는 숙련된 무공이 있었다. 그러므로 대충 무공에 대한 지식 은 있었다. 그런데 삼도경에 나오는 도(刀)의 개관은 그가 익히 들은것들이 아닌가? '이상하다. 이 책자는 마치 강중문 노인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무공을 전달하려는 듯 처음부터 너무 상세하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정도라면 무공에 문외한일지라도 이해가 될 정도이다.' 그렇다. 본래 무공비급은 대부분 그 오묘한 비전이 실전(失傳) 됨을 막기위해서 그 요결(要訣)을 기록해 놓는 것이다. 허나 대부 분 불필요한 기초설명은 생략하고 난해하고 간결한 구결(口訣)이 나 도해(圖解)등으로 적혀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삼도경은 그와는 반대였다. 처음부터 누가 보아도 이해 할수 있을 정도로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정말 다행한 일이로구나.' 장천린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곧 잡념을 떨쳐버리고 삼 도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학문에도 이미 깊은 경지에 이른 그 였기에 이해하기에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헌데, 문득 어느 부분에 이르러 그의 눈빛은 이채를 띄기 시작 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저, 천하(天下)에는 수만 종의 무공이 있고 도법(刀法)의 천 차만별로써 가히 그 숫자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허나 무림사 역대 로 세인들이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도법(刀法)은 두 가지이니 그 것은 칠백년전 수라신마(修羅神魔)가 창안한 수라구류도(修羅九流 刀)와 백년전 도성(刀聖) 유백(柳白)이 성취해 낸 무극팔로도세(無 極八路刀勢)이다.> 수라구류도(修羅九流刀). 이는 철마보(鐵馬堡)의 보주였던 만승금도(萬勝金刀) 도담후가 익힌 도법이 아닌가? 그리고 무극팔로도세는 무정도(無情刀) 모용 초가 도담후를 죽일 때 사용한 무공이었다. 하나 장천린으로서는 물론 그것을 알 리 없었다. 다만 그는 삼 도경에 적힌 최강도법의 설명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설명 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수천종의 도법중 그 어떤 것도 이 두 가지 도법에는 미치지 못하니 이는 곧 두 가지 도법이 너무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 나 이에 조금 미치지 못할지언정 거의 접근한 도법이 세가지 있 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기술된 세 가지 도법에 대한 설명부분에 장천린은 마음이 절로 끌려들고 있었다. <해남(海南)의 월영도법(月影刀法)과 막북(漠北)의 흑사도법(黑 刀法), 그리고 풍뢰도법(風雷刀法)이다. 월영도법은 그 빠름(快) 이 천하의 으뜸이고 흑사도법은 잔인하며 독랄함에 있어 으뜸이 다. 풍뢰도법은 극히 파괴적이며 패도적(覇刀的) 위력을 지닌 것 으로...... 中略 ...... 이 세 가지 도법이 위의 두 도법과 약간의 차이 가 있다하나 이는 익힌 자의 자질과 내공(內功), 그리고 성취도에 따라 오히려 능가할 수도 있으니 이것이 곧 무공의 오묘함이다.> 장천린은 계속 읽어갔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는 내용에 빠져 들어갔다. 무공에 대해서는 본래 강한 흥미는 없었지만 그는 새로 운 느낌이 들고 있었을뿐더러 삼도경의 내용은 그로 하여금 심취 케 하는 점이 있었다. <노부가 이곳에 적어 놓은 일초(一招)의 도법은 뇌전단홍(雷電 斷虹)이라는 것이다. 이는 풍뢰도법의 제 일식(一式)이다. 노부는 우연히 수십 년 전 풍뢰도경(風雷刀經)을 얻었으나 그것은 일부분 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안타깝게도 제 일식밖에는 얻을 수가 없 었다. 게다가 노부는 한 팔이 없어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었으 므로 이 도법을 익혔어도 단 한 번도 전개한 적이 없었다. 하나 초식의 뛰어남이 너무도 출중하여 노부는 이에 초식의 구결을 남 기니 연자(緣者)는 이를 익히기 바란다.> 설명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나머지 삼도경의 부분에는 도형 (圖形)과 구결(口訣)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단 일초도법 뇌전단홍 (雷電斷虹)이라는 것이었다. 도식은 단 한 장이었다. 허나 그것을 설명한 구결은 열장이 넘었다. 장천린은 갈수록 심취해 들어갔다. 그는 도형을 보았으나 너무 어려워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허나 구결부분은 워낙 자세히 기 술되어 있어 그는 그것을 읽었다. 읽는 동안 그는 거듭 섬뜩한 전 율을 느껴야만 했다. '이 뇌전단홍은 상상도 못할만큼 파괴적이다. 방어는 전혀 하지 않고 오직 공격위주의 필살(必殺)의 초식이구나.' 그는 가슴이 뜨끔함을 느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거꾸로 당할 우려가 있을 정도다. 강노 인이 익혔으면서도 전개하지 못한 이유를 알겠구나.' 장천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나 잠시 후 그는 다시 책장을 넘겼다. 삼도경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가 읽은 곳은 그 중 일부였다. <삼도귀변팔법(三刀鬼變八法).> 중반부에는 그런 글이 쓰여 있었다. 그것은 팔초(八招)의 도법 (刀法)을 말하는 것이었다. 실상 삼도경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수삼도 강중문의 비전도법 이었던 것이다. 일수삼도(一手三刀)란 그의 별호가 말하듯 그의 도법은 불가사의한 힘이 있었다. 한 개의 도(刀)가 마치 세 개로 늘어난 듯 전개된다. 더욱이 그것은 결코 환영이 아닌 실체라는데 그 무서움이 있었다. 따라서 일도(一刀)에 세명의 고수들을 정수 리로부터 양단할 수 있는 무서운 도법이었다. 삼도귀변팔법의 도 해와 구결을 읽으며 장천린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정말 놀랍다. 이 도법은 뇌전단홍과는 또 다른 류에서 아주 무 서운 도법이다.' 문득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한가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생각 났다. '한데 이런 무서운 도법으로도 사진청에게 일초도 넘기지 못했 단 말인가?' 그는 의문에 사로 잡혔다. '천리독무(千里毒霧)에 당했기 때문일까?' 허나 알수 없었다. 그러나 장천린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 다. 실상 강중문의 무공은 극고했다. 그는 결코 철마왕 사진청에 게 일초에 당할 인물은 아니었다. 또한 천리독무의 탓도 아니었 다. 그 속에는 실로 엄청난 흑막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만일 그 흑막을 알게되면 그는 놀라고 분개하리라. 삼도경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가 이미 배운 바 있는 학면귀식대 법의 요결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그가 아는 내용이었다. 다만 다른 것 이 있다면 그 속에는 운용방법이 여러 가지 첨가되 어 있었고 또한 다른 무공과 연결시키는 여러 가지 묘용 등에 관 해 쓰여 있었다. 장천린은 그것을 모두 읽고 머리에 새겨넣었다. 그는 삼도경을 덮었다. 그는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읽은 삼 도경내의 무공이 강하다는 느낌이 들면 들수록 그에 비례해서 조 화성이란 단체에 대한 압박은 더욱 커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런 무학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조화성의 능력은 어 느 정도란 말인가?' 그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어차피 무공으로 승부를 낼 생각은 없었지 않았는가? 공연히 우려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장천린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한 후 다음 이번에는 백변천군 노 명이 준 책자를 펼쳐보았다. <자부경(紫府經).> 그것은 상당히 두터운 책이었다. 표지의 글씨는 금빛의 전서체 (篆書體)로 되어있어 묵중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책은 극히 낡고 양피지로 되어서 묶여져 있었다. '무척 오래 된 듯 하군.' 장천린은 자부경을 읽기 시작했다. 앞면에는 서문(序文)이 실려 있었다. <자부문(紫府門)의 무공은 변화(變化)와 귀기무쌍(鬼氣無雙)함 으로 당대제일이다. 성품(性品)이 유(柔)한 자는 문하(門下)에 두 지 마라. 자부(紫府)의 맥(脈)을 흐리게 할 위협이 있기 때문이다. 심기(心機)가 뛰어나고 성격이 독해야만 자부의 무공은 극(極)에 이를 수 있다. 자부의 맥은 일맥이니 두 제자를 둘 수 없다. 두 제 자를 둠은 후세에 자부의 멸문(滅門)을 초래한다. 그 이유는 서로 를 용납 못하는 무공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자부의 맥에 여인 을 두지 마라. 여인의 음기(陰氣)는 자부 무공의 후퇴를 가져온 다....... 後略.>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계속 자부문의 율법(律法)에 대해 적 혀 있었다. 모두가 까다롭고 금기사항이 많았다. 허나, '까다로운 문파로군. 하나 나는 자부의 제자가 아니다.' 장천린은 대충 서문을 읽어 넘겼다. 서문은 상당히 길었으나 한참 넘기니 마침내 무공요결이 나타 났다. 자부경에 적혀 있는 무공은 하나같이 장천린으로서는 상상 도 못했던 기괴하고 엄청난 것들이었다. --- 선공(先攻)은 승리(勝利)의 첩경이다. <구전신공(九轉神功).> --- 이는 자부(紫府)의 중심을 이루는 내공(內功)이니 자부의 맥 을 이으려면 필히 익혀야 한다. 구구팔십일주천(九九八十一週天) 을 단 한숨에 돌릴 수 있다면 구전신공이 곧 극(極)에 이르렀음이 라, 그 힘(力)은 능히 바다(海)를 가르고 산(山)을 누르리라. 장천린은 구전신공의 요결을 읽은 다음 느낌이 이상해졌다. '이 구전신공은 의외로 사악한 냄새가 풍기는구나. 정도(正道) 라기 보다는 일종의 편격함과 사이함이 어려있다.' 허나 그는 계속하여 자부무공을 살펴보았다. --- 손속에 정(情)을 두지마라. 상대에게 허가 생기면 망설이지 마라. 승부는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백골마조(白骨魔爪).> --- 백골마조의 전신은 천응조법(天鷹爪法)이나 그 위력은 비교 가 되지 않는다. 백골마조의 조력(爪力)은 세 치 두께의 강철판이 라도 뚫는다. 장천린은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대체 손가락의 힘이 그 정도라는 것을 믿을수가 없었다. '정말 지독하구나. 만일 이것이 펼쳐진다면 잔혹하기 짝이 없는 무공이다. 노명노인의 성품과는 어울리지가 않는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더우기 손속에 정(情)을 두지 말라는 말이 포함되어있으니 이 것을 정도의 무학이랄 수 있을까?' 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부경상에는 그밖에도 많은 무공이 기재되어 있었다. <귀영마변보(鬼影魔變步).> <혈음강기(血陰 氣).> <적살장(赤殺掌).> <투살진기(透殺眞氣).> ....... 모두 이십사종류의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 무공마다 에는 반드시 한 가지씩의 경구(驚句)가 적혀있고 그 경구의 내용 은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었다. 장천린은 모두 읽었다. 그는 섬뜩함을 지우지 못했다. '이것은 결코 정도의 무공이 아니다. 사도(邪道)의 무공이다. 그 것도 지독히 사이한 무공이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알기로 자부문은 그래도 중원의 정통일맥이거늘 어찌 이 토록 사악한 무공만 적혀있단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장천린은 모르고 있었다. 자부경에 얽힌 처절 한 비사를 그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자부문이 변해야 했던 그 이유, 그것은 자부문만이 간직한 치 욕과 수치, 또한 한 인물의 숭고한 희생이 치른 비사였으니....... X X X 천년 전, 당시 중원은 마교(魔敎)의 일곱 번째 창궐로 인해 극 도의 혼란기에 빠져 있었다. 당시 중원은 또한 오호십육국(五好十 六國)의 시대로 중원의 이곳저곳을 분할하여 저마다 패업을 이루 려는 전란(戰亂)으로 거의 황폐화 되어 있었다. 백성들은 전란에 휘말려 생업을 잃고 이리저리 유랑했으며 하 루 아침에 주군이 바뀌고 나라가 기울어 그 참상은 이루 말할 길 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마교는 전 무림계를 장악하기 위해 피바람을 일 으켰다. 하루도 피바람이 잘 날없는 난새....... 당시 자부문(紫府門)의 제 이대문주였던 여소청(如 靑)은 혈겁 을 보다 못해 마교를 무너뜨릴 비장한 결심을 굳힌다. 그의 계책 은 살신성인의 비장한 것이었으니, 그는 변신하여 무서운 마존(魔 尊)으로 화했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한다는 각오로 그는 일년간 무자비 한 살육을 저질렀다. 그로 인해 그는 공포의 혈마왕(血魔王)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어 그는 그 신분으로 마침내 마교에 투신 한다.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그는 마교 십대천마(十大天魔)의 한 명으로 위치를 굳힐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잔인무도한 활동으로 마교교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 였다. 그러나 그의 치밀한 마교분쇄의 계책은 그 와중에서도 착착 진행되었다. 즉 그는 신비가공할 마교의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천부적인 자질로 마침내 마교교주의 무공인 천마구예(天魔 九藝)를 제외하고는 마교의 모든 무공을 모두 익히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그는 특별한 자질로 마교무공의 극성(克性)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즉 독으로 독을 제거하는 이른바 이독제독(以毒除毒)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는 마교의 무공보다 더 잔인한 무공을 창 안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가공할 마예 스물 네가지를 창안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그것을 은밀히 자신의 아들인 여대경(如大京) 에게 전한다. 만일 자신이 실패할 경우 아들에게 자신의 임무를 잇기 위한 처사였다. 그로부터 삼 년후, 마교는 엄청난 회오리 속에 흔들리기 시작 했다. 그것은 바로 여소청의 무서운 계략에 의해 마교 내부에 분 열이 일어난 것이었다. 마침내 십대천마의 서열 일위(一位)였던 검마(劍魔) 냉살(冷煞) 을 부추겨 그는 마교를 뒤집었다. 십대천마는 마교교주에게 등을 돌리고 교주에게 정면으로 대항한 것이다. 결국 그로 인해 그토록 엄청났던 마교는 붕괴되고 말았다. 십대천마와 마교교주가 동귀어진한 것이었다. 더더욱이 냉살과 마교교주의 싸움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그들은 경천동지의 혈 전을 벌였다. 결국 육백초만에 냉살이 죽었다. 하나 마교교주 역 시 극심한 상처로 죽고야 만다. 나머지 구대천마를 혼자 사애한다 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상처입은 마교교주를 제거한 것은 여소청이었다. 그 후 천년간 마교는 무림에 나타나지 못했다. 마교는 그로인 해 너무도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살신성인의 큰 뜻 으로 마교에 위장투신했던 여소청도 결국은 죽고 말았다. 그는 치 유할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결국 마교는 사라졌다. 중원(中原)에는 다시 평화가 도래했다. 여소청의 아들 여대경은 부친이 남긴 비급을 보고 진저리를 쳤다. 그는 마도(魔道)를 증오했다. 그러기에 그는 자부경의 악랄한 무 공을 익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후손에게 그 무공을 전하지도 않 았다. 다만 없애기가 아까와 그는 땅 속에 깊이 묻어버리고 만다. 그 이후 천년이 지나도록 자부경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천년후, 백변천군 노명이 우연히 땅 속에서 그 무서운 이십 사 종마예를 얻게 될 ㄸ까지 말이다. 노명은 자부경을 얻은 후 그 무서움에 놀랐으나 곧 조화성주에 게 대항하기 위해 그것을 익히려 했었다. 허나 불행히도 그는 자 부경을 익히기도 전에 조화성주의 마수(魔手)에 걸렸다. 그리고, 이제 그 저주의 마경 아닌 마경은 장천린의 손에 들어 오게 되었다. X X X 장천린은 자부경을 덮었다. 문득 그는 노명이 그 책자를 자신 에게 전해 주며 자신에게 한 얘기를 떠 올렸다. --- 이 책자에 적힌 무공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것들이다. 적들의 손에 들어 갈까봐 없애려고 했었다. 허나 이제 자네에게 주겠다. 이속에는 노부조차 익히지 못한 무서운 무공 이....... 그렇다. 천 년전 자부문주 여소청이 남긴 이 무공, 천하에서 그 무공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도 무서운 이마제마(以魔制魔)를 위한 저주의 무공이 드디어 장천린의 손에 떨어졌다. 운명인가? 아니면......? '무공이 아무리 사악하다해도 그것을 익히고 사용하는 사람에 게 달린 것이다. 나는 단지 나의 목적을 이룰만큼 능력만 있으면 된다.' 장천린의 눈이 빛났다. '좋다. 이 무공을 가장 빠른 시기에 연말하리라.' 장천린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이 흘렀다. 어 느덧 초겨울의 문턱으로 대륙의 계절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날인가? 일은 시작되었다. 第 21 章 深夜의 殺人劇 어둠, 칠흙같은 어둠이 사위를 장막처럼 뒤덮고 있는 밤(夜), 어 스름한 초승달만이 스산한 빛을 뿌리는 이곳은....... 산동성(山東省) 진무현(陳武縣), 황하강(黃河江) 하류 어귀에 위 치한 조그만 마을이었다. 객점(客店), 그다지 규모가 크달 수 없는 객점은 적막에 싸여있 다. 후원에 있는 한 객방에는 불이 꺼진 지 이미 오래다. 한데, 스스슷......! 문득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객방의 열려진 창문 사이로 소리 없이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두 그림자는 불꺼진 방안에서 벽의 양쪽으로 바짝 붙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어찌나 은밀했던지 일점 의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마치 벽의 일부가 된 듯. 이윽고 그들은 서서히 벽을 따라 침상 쪽으로 움직였다. 일체 의 소리는 물론 공기의 파동도 없는 극히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한데 어는 순간, 한 흑의인의 손이 움직였다. 슈슈슉! 놀랍게도 수십개의 비표(飛 )가 전광석화처럼 날아 침상 위에 꽂혔다. 그와 거의 같은 순간에 두 흑의인이 동시에 침상을 덮쳤 다. 번쩍! 파앗! 검광(劍光)이 섬전처럼 갈랐다. 침상은 완전히 통채로 네 동강 이가 났다. 그 순간 두 흑의인이 신속하게 침사의 좌우에 내려섰 다. 하나 문득 그들의 눈빛이 경직되고 말았다. 침상 위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흑!" 신음이 들렸다. 한명의 목이 어느 틈에 잘려 떼구르르 바닥에 굴렀다. 자른 한명은 경악했으나 역시 소리없이 몸을 바닥에 굴려 우측으로 굴러갔다. 순간 차가운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틀렸다. 좌측이다." "윽!" 여지없이 흑의인의 목이 떨어졌다. 언제 어떻게 자신의 목이 잘렸는지도 모르게 그는 죽었다. 그때 비로소 방 안 한구석에서 한 쌍의 눈이 음산하게 떠올랐 다. 하나 그것도 한 순간뿐, 슉! 그는 천정을 뚫고 솟구쳤다. "크흑!" 천정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지붕위, 두 명의 흑의인영이 피를 뿜으며 지붕 아래로 떨어지 고 있었다. "후후훗!" 한 인영이 괴소를 터뜨리며 다시 도약했다. 그는 바로 객방에 있던 인영이었다. 그는 단숨에 객점의 담을 넘어갔다. "으아악!" 그가 담장을 스쳐간 순간 담장에서도 비명이 들렸다. 그가 담 장을 넘어 수십 장이나 벗어나서야 담장 위에서 한구 의 시체가 굴러 떨어졌다. 그도 역기 흑의인이었는데 얼굴에 복면을 하고 있 었다. 그러나 신비의 인영은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그는 한 마장쯤 달리다가 한 그루의 고목(古木)을 지나면서 다시 우수(右手)를 뻗 었다. "케에엑!"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그순간 고목이 두 동강나며 굉음을 내 며 쓰러졌다. 역시 고목 뒤에서 한 흑의인이 허리가 동강난 채 쓰 러졌다. 하나 그때는 이미 신비인영은 다시 멀리 사라지고 있었 다. 그의 동작과 신법은 놀랄정도로 빨랐으며 살수도 냉혹잔인했 다. 스스스! 갈대밭, 황하연에 무성하게 밀집되어 있는 갈대밭에 이르자 인 영은 비로소 멈추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아래 회의인영(灰衣人影)의 모습이 드러났다. 의외로 그는 이십여 세 가량 된 청년이었다. 전체적으로 마른 얼 굴이었다. 피부는 창백하여 약간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두 눈은 삼각형의 독사눈이었고 광대뼈에 끝이 약간 구부러진 매부리코여 서 언뜻보면 잔인음독한 얼굴이었다. 하나 반면 이마가 넓고 반듯했으며 짙고 굻은 눈썹이 의외로 강직한 느낌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체격은 컸다. 그는 어깨위로 한 자루의 장도(長刀)를 매고 있었 다. 마치 장도와 그의 몸이 하나인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음산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놈들이냐?"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떨어지는 순간, 갈대밭 사이에서 극히 미세한 음향이 들려왔다. 회의청년의 두 눈이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스스스스! 어느 순간 그의 주위로 세 인영이 떠 올랐다. 그들은 품자형으 로 그를 포위했다. 모두 중년인들이었는데 기이하게도 얼굴이 똑 같았다. 세 쌍둥이였다. 그들은 한 손에 여섯 자 길이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비스 듬히 들고 있었는데 안색이 완전히 무심했다. 두눈은 극도의 비정 함을 담고 있었다. 회의청년은 그들을 둘러보며 기소를 흘렸다. "청룡언월도를 쓰는 세 쌍둥이라...흐흐흐. 너희들이 바로 지옥 (地獄)의 도수부(屠手夫)라는 조화성 제삼신마전의 악씨(岳氏) 삼 형제인가?" 그말에 삼인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 바로 맞추었다." "살인혈첩(殺人血帖)이 떨어진 이상에는 천신(天神)이라해도 조 화성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 원계묵(元桂默)!" "백살대(百殺隊)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너의 치명적인 실수였 다." 낮고도 스산한 음성이었다. 악씨 삼형제는 꼭 필요한 말 이외 에는 하지 않았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천천히 거리를 좁혀 들었다. 청룡언월도의 끝에 으스름 달빛이 스산무비한 광채를 반 사했다. 회의청년 원계묵, 그는 어깨의 장도를 서서히 내리며 입가에 비정한 웃음을 품었다. "복수의 칼을 한 번 갈기 시작한 이상 내 심장의 피가 식기 전 까지는 그 어떤 상대라도 사양치 않을 것이다." 휘이이! 갈대밭에 바람이 불었다. 무섭도록 팽창된 공기가 살기로 인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일대삼의 대결은 좀체로 불을 당기지는 않 았으나 대치상태가 결코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들의 눈에서 점점 더 가공할 필살의 살기가 흘러 나왔기 때문이 었다. X X X 소년은 조각을 하고 있었다. 으스름한 유등(油燈) 아래서 깊이 심취된 표정으로 조각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인보다도 섬세한 손 에 든 조각칼은 손잡이가 상아로 된 예쁜 소도(小刀)였다. 소년의 얼굴은 십 오륙세 정도 되어보였다. 짙은 우수에 잠긴 두 눈은 너무도 아름다워 흡사 가을호수를 연상케 했다. 너무도 아름답고 섬세한 얼굴이었다. 약간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소년의 극미(極美)한 얼굴을 몇 올 가리고 있어 어찌보면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각...... 사각....... 소년이 조각하는 목상(木像)은 여인상이었다.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젊은 미녀상이었다. 조각도가 움직이는데 따라 마침내 미 녀상은 완성되었다. 소년은 완성된 조각을 한동안 응시했다. 그의 두 눈이 문득 짙 은 그늘에 싸였다. 하나 곧 소년은 괴소를 터뜨렸다. "크ㅋ!" 갑자기 소년은 소도로 미인상의 심장을 푹! 찌르는 것이 아닌 가? "크ㅋ!" 소년은 다시 괴소를 흘렸다. 그의 아름다운 눈에는 짙은 음영 이 어리고 있었다. 유등의 푸르스름한 불빛아래 조각칼에 심장을 관통당한 여인의 조각상은 섬뜩기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소년의 눈망울에 비친 칼에 찔린 미녀상, 소년의 여인처럼 섬 연한 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때였다. 문득 창문 밖으로부터 한 마리의 새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앵무새였다. 털빛이 온통 눈처럼 흰 백색의 앵무새였는데 보통 앵무새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웠다. 앵무새는 붉은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더니 날개를 파닥거리며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왔다! 왔다! 소진(少眞), 그 자가 왔다." 아! 놀랍게도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소년의 두 눈에 반짝 이채가 번뜩였다. "어디로 가더냐?" 그의 말에 앵무새는 다시 파다닥거리며 빠르게 종알댔다. "선창가다. 선창가로 간다." 소년은 몸을 일으켰다. "백아(白兒), 네가 추격해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아라 불리운 앵무새는 쏜살같이 날아갔다. 하나 한 마디를 남기는 것이 아닌가? "소진아, 소진아. 너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너는 이 아비의 마지막 희망이다!" 앵무새의 음성은 사람의 음성을 흉내낸 듯 굵직했다. 소년은 고소지었다. "버릇없는 놈." 그는 잠시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하나 곧 하늘을 응시하 며 중얼거렸다. "원계묵이라고 했던가?" 문득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요 염하기조차한 미소였다. 소진(少眞)이라고 했던가? 이 소년....... X X X 지옥(地獄)의 도수부(屠手夫)라는 악씨 삼형제의 셋째인 악표, 그는 핏발선 눈으로 눈앞의 회의청년 원계묵을 노려보고 있었다. 옷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핏물이 배어있었다. 주위의 갈대밭에는 흑의복면인들의 시체가 십여 구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악씨 삼형 제 중 두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교활한 놈! 우리 삼형제를 계략으로 흩어지게 하다니!" 그렇다. 원계묵은 가장 효과적인 전법을 사용했다. 그는 이 곳 갈대숲에 수많은 매복이 있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선공(先攻)을 했다. 그 상대는 악씨 삼형제가 아니라 갈대 속에 포진한 흑의복 면인들이었고 그는 좌충우돌 수십번이나 방향을 바꾸었다. 그 바 람에 악씨 삼형제는 그의 종적을 놓쳤을뿐더러 서로 흩어지기까 지 했던 것이었다. 원계묵은 입가에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쉽게 이길 수 있는 것을 구태여 어렵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 다. 어차피 분산지계도 병법의 일종이니까." 악표는 두 눈에서 살광을 뿜어냈다. "나를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여긴단 말이냐?" 원계묵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무시하는 빛이 역 력했다. 악표는 수치를 느꼈다. "죽일 놈!" 슈악! 평소 냉정을 잃은 적이 없었던 그가 냉정을 잃은 것은 치명적 인 실수였다. 그의 청룡언월도가 섬광처럼 허공을 갈랐다. 가공할 도기(刀氣)가 허공을 갈랐다. 하나 원계묵의 입가에는 비정하리만큼 냉혹한 미소가 흘렀다. "도법(刀法)으로 치면 너는 아직 한참 멀었다." 착 가라앉은 음성과 함께 어ㄲ위에 걸쳐져있던 장도(長刀)가 번 뜩였다. 파앗! 섬광이 작렬했다.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으나 장도가 육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으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악표는 경직되어 있었다. 주르륵....... 그의 입가에 선혈이 흘러내렸다. "수... 수라구류도(修羅九流刀)....... 과... 과연......." 그는 털썩 무릅을 꿇었다. 청룡언월도는 땅에 박혀 있었다. 어 느새 그의 심장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원계묵은 여전히 장도를 처음 그 자세 그대로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며 물었다. "나를 추격하는 최후의 인물은 누구냐? 악표." "흐... 으....... 원계묵. 어차피... 너는... 우리의 손을 벗어나지 는...... 못한다." 악표는 반쯤 뒤집어진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너의 수라... 구류도가... 아무리 무섭다해도... 그 어른의 수중을 벗어날 수는 없다......." 원계묵은 무심하게 물었다. "그가 누구냐?" 악표의 입가에 비틀어진 웃음이 어렸다. "귀(鬼)... 송(松)... 자(子)......." 그 말이 끝이였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앞으로 푹 고꾸라진 것이었다. 원계묵의 얼굴은 처음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귀송자(鬼松子) 혁련노후(赫連瑙候)." 그의 눈빛에 음울한 빛이 흘렀다. "그가 아직까지 생존해 있었던가?" 그는 힐끗 악표의 시체를 응시했다. 그는 입술을 지긋이 물더 니 문득 괴소를 흘렸다. "흐흐. 원계묵, 약해졌구나. 조화성 전체를 상대하겠다는 네가 겨우 한 인물의 이름에 긴장하다니." 그는 자조의 웃음을 흘리더니 악표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를 묻혀 그의 옷자락에 한 줄기 글씨를 적었다. <선창가로 오너라.> 슉! 글을 적자마자 그는 신형을 날렸다. 쾌속무비한 신법이었다. 그가 사라진 직후, 문득 갈대밭 사이로 한 소년이 걸어나왔다. 소년의 어깽에는 하얀 털빛의 앵무새가 앉아 있었다. 소년은 악표 의 시체를 내려보더니 혀를 찼다. "쯧. 굉장한 솜씨군. 석년의 도담후에 비교해도 거의 뒤지지 않 갰어." 소년은 악표의 옷자락에 쓰여진 글씨를 읽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고소가 어렸다. "놀랍도록 대담한 성격이야."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음. 그나저나 귀송자 혁련노후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좀 뜻밖 인걸." 소년의 두 눈이 말끝을 흐리면서 문득 이채를 띠었다. 바로 그 순간, 휙! 소년의 눈앞에 한 인영이 질풍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악씨 삼형제 중 둘째인 악호(岳虎)였다. 그는 악표의 시체를 본 순간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세... 셋째야!" 시체를 부둥켜 안은 그의 눈에 불똥이 퉁겼다. "으으....... 네가 당하다니!" 그러다 옷자락에 쓰여진 글씨를 읽는 순간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아 붙였다. "으으으! 원계묵 이 놈!"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신형을 날리려했다. 하나 그때, "잠깐." "......!" 그제서야 악호는 그 자리에 소년이 있음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음산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너는 또 뭐냐?" 소년은 미소지었다. "당신은 구태여 선창가로 갈 필요가 없소." 악호는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소년은 히죽 웃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동생 곁에 머무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아서 하는 이야기요." 악호의 안색이 변했다. "이 애송이 놈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도 화가 나서 할 말을 잃고 만 것 이었다. 하나 소년은 신비롭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수중에는 어 느새 소도(小刀)가 쥐어져 있었다. 번뜩! 소도가 빛을 뿌렸다.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느새 소도가 악호의 이마에 꽂혀버린 것이었다. "큭!" 악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불신(不信), 의혹.. 그는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것은... 말이... 안돼. 말이......." 쿵! 그는 고목처럼 쓰러졌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맹세코 소년이 어떤 수법으로 소도를 날렸는지 보지 못했다. 소도가 자신 의 이마에 박힌 후에야 당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허무하게 죽었다. 도대체 그의 말처럼 말도 안되는 죽음 을 당한 것이었다. 소년은 다가가더니 소도를 뽑아냈다. 소도에는 피한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소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악씨 삼형제의 합벽도법은 일절인데 이렇게 흩어져서 허망하 게 죽은 것을 알면 조화성 제삼신마전주(第三神魔殿主) 태사독의 두 눈에 불똥이 튀겠군." 소년은 어깨를 흔들었다. "가자. 백아." 푸르르륵! 앵무새 백아는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앵무새는 굵은 음성으로 종알거렸다. "소진(少眞)아, 너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너는 이 아비의 마 지막 희망이다." 소년 소진은 고소를 금치 못하더니 주먹을 허공으로 흔들어 보 였다. "언젠가 네놈의 그 버릇없는 주둥이를 문질러 버릴테다!" 이어 스스스! 그는 갈대밭 사이로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이 소년, 소진(少眞). 그는 누구인가? 第 22 章 神秘한 商人 龍白君 원계묵은 오랫동안 기다렸다. 선창가에는 새벽안개가 짙게 깔 려 있으나 그의 눈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는 우뚝 선 채 여전히 어깨 위에 장도(長刀)를 걸치고 있었다. 새벽여명을 응 시하고 있는 그의 두 눈에는 곤혹이 어리고 있었다. '기이하군. 어째서 그 두 놈들이 이리로 오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악표의 시체를 발견 못했을리 없거늘.......' 는 약간 지루해진 듯 서성거렸다. 그때였다. 슉! 안개를 뚫고 무엇인가가 그를 향해 쏘아왔다. '음!' 원계묵은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잡아챘다. 그의 두 손가락 사 이에는 비수가 잡혀 있었다. 그 비수에는 종이가 묶여 있는 것으 로 미루어 애당초 그를 해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원계묵은 최소한 그 비수가 사오십장 밖에서 던져졌다고 판단 했다. 지금 추적해봐야 비수의 주인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종 이를 풀어 보았다. 그 안에는 뜻밖의 글이 쓰여져 있었다. '악룡(岳龍)과 악호(岳虎)는 내가 제거했으니 기다려 봐야 헛수 고요. 그리고 이 곳을 되도록 빨리 벗어 나시오. 당신이 벌인 살 인극 때문에 산동행성(山東行省) 제형안찰사(提刑按察使司)의 무 사들이 이 일대에 범인을 잡기위해 쫙 깔렸소. 조심하길 바라오.' 아무런 서명(書名)도, 기호도 없는 글이었다. 상당히 달필이었 고 서체도 수려했다. 원계묵은 큰 의혹에 잠겼다. '악룡, 악호를 제거했다고?' 그는 섬뜩함을 느꼈다. '조화성말고 나를 지켜보는 제삼자(第三者)가 또 있었단 말인 가?' 그러다 그는 한동안 서찰을 응시했다. 그의 뇌리에 하나의 의 문이 생기고 있었다. '이 조그만 진무현(陳武縣)에 제형안찰사사의 무사들이 나타나 다니?'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 이것은 대명제국(大明帝國)이 중 원십삼개성(中原十三個省)에 설치한 지방관청으로 주로 형법(刑 法)을 담당한다. 각 행성(行省)마다 한 개씩 있으며 일명 얼사( 司)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곳의 장관은 안찰사(按察使)로서 정삼품(正三品)에 해당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다. 비록 십상행성 중 일행성(一行省)이라 해도 그 지역은 엄청나게 광활하기 때문이다. 또한 안찰사사에 속 한 무사들은 무공 또한 고강하다. 형(刑)을 담당하려면 무공이 필 수적 요건이기 때문이었다. 원계묵은 물론 제형안찰사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일개 지현의 살인사건에 어찌 제형안찰사사의 무사들이 동원 된단 말인가?' 하나 그는 서찰의 내용이 허위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결국 판단을 내렸다. '이 서찰을 전한 상대가 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의 말대로 관부(官府)와 부딪쳐서 좋을 것은 없다.' 그와 동시에 원계묵은 궁금증을 느꼈다. 대체 그에게 소식을 전해준 상대는 누구란 말인가? '분명 조화성의 인물은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가 악씨형제를 제 거한단 말인가? 원계묵은 고개를 들어 선창쪽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눈에 정박해 있는 한 척의 커다란 범선이 들어왔다. 상당히 큰 범선이었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원계묵의 가느다란 눈이 빛났 다. 그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선창가, 범선으로부터 인부 몇 명이 짐을 운반하고 있었다. 원 계묵은 묵묵히 인부들을 바라보다 문득 그 중 한명을 향해 물었 다. "저 배는 언제 떠나는 것이오?' 인부는 그 말에 움찔했다. 워낙 원계묵의 생김새와 인상이 특 이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다란 장도를 어깨에 둘러멘 모습은 위 압적이기까지 했다. "곧... 떠날 겁니다." 원계묵은 담담히 물었다. "행선지는 어디요?" "북경... 입죠." '북경이라.' 원계묵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다지 먼 곳은 아니니 관계없겠군.'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범선과 선창으로 연결된 목교 위로 그는 서슴없이 걸어 올라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인부들은 뭐라 수근거리고 있었다. 뱃머리, 원계묵은 뱃머리에 우뚝 선 채 떠오르는 태양을 응시 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황하의 동쪽 수평선으로부터 끓 어오르며 붉게 떠 오른다. 그 모습은 장관이었다. '위대하다. 저 이글거리는 불덩이는 진정 얼마나 힘차고 아름다 운가!' 문득 태양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아련한 추억이 어리고 있었 다. 그의 사부 도담후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오는 듯 했다. --- 이십년전 , 이 사부는 무영(無影), 신산(神算)과 함께 조화성 주 염무를 제거하려 했다. 계획은 완벽했다. 하나 실패하고 말았 다. 실패할 이유가 없는데 실패했다. 수년이 흐른 이후 나는 그 실패의 이유를 알았다. 무영과 신산, 그리고 이 사부의 삼인(三人) 간에 보이지않는 서로에 대한 조그만 불신감이 그 실패를 가져온 것이었다. 무영과 신산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염무를 제거하 는 과정에서조차 서로를 보이지 않게 견제했던 것이다. 부끄럽게 도 이 사부 또한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 염무는 복수의 칼 을 갈 것이고 무영과 신산은 물론 나 역시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이다. '사부.......' 원계묵의 음산한 눈에 사나이의 슬픔이 어렸다. '당신은 저에게 아무런 말씀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저는 당신의 죽음을 절대로 묵과 할 수 없습니다.' 원계묵의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렸다. '저에게 있어 당신은 부친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몰 라도 사부 당신을 죽게 만든 모용초와 그 죽음의 명령을 내린 염 무는 반드시 내 손으로 제거하겠습니다.' 원계묵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무영과 신산에게는 절대로 포섭되지 않으리라. 그들이 아무리 설득을 해도 이 일은 반드시 나 원계묵 단독으로 해낼 것이다.' 태양, 태양은 이제 떠올라 강렬한 눈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비 록 여름을 지나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태양의 빛은 불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사나이 원계묵의 가슴에도 그 불꽃이 타고 있었다. 문득 인기척이 다가왔다. 원계묵의 근처로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원계묵은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다 흠칫했다. 그는 내심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멋진 사내로군.' 그 인물은 그의 곁을 지나 뱃머리 쪽으로 갔다. 원계묵은 끌려 들 듯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흑의인(黑衣人), 그는 후리후리한 키였다. 건장한 체구였으나 그렇다고 둔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않는 유연한 체격이었다. 긴 흑발은 풀어서 허리 아래에까지 늘어져 있었다. 자르르 윤기가 도는 흑발은 강렬한 느낌을 줌과 동시에 극미한 분위기까지 이상한 마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마에는 역시 검 은 흑건(黑巾)이 질끈 묶여져 있었다. 얼굴은 극히 준수했다. 이목 구비 하나하나가 극도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살빛은 은은히 탄 장미였다. 단지 유일한 흠이라면 이마에서 뺨 아래까지 길게 그려진 가느 다란 흉터였다. 조금은 섬뜩했다. 하나 원계묵에게는 오히려 그 흉이 더욱 강렬한 매력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두 눈은 마치 차가 운 별빛같이 빛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극히 냉철하고 오연해 보 였다. 원계묵은 평생 이토록 강렬한 느낌을 주는 인물을 처음 보 았다. '보통 비범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생각은 계속되었다. '무림인 같지는 않은데 대체 뭐하는 인물일까?' 그는 강한 호기심에 이끌리고 있었다. 이때 흑의인은 힐끗 그 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전 이 배위로 관부(官府)의 인물이 올라왔소." 원계묵은 흠칫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올라왔는지는 모르겠소만 당신은 옷을 갈아입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당신의 소매 끝에 퉁긴 핏방울 은 그들의 의혹을 불러 일으킬 충분한 이유가 되니 말이오." 원계묵은 멈칫했다. 그는 자신의 소매를 바라보았다. 과연 장포 소매에 몇 방울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포권했다. "충고 감사하오이다." 흑의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젯밤 진무현에서 이십여 명이 살해되었다는데 당신과 관계 과 있소?" 원계묵은 씁쓸히 웃었다. "부인하지 않겠소이다." 흑의인은 그가 그토록 순순히 인정하리라고는 예상 못한 듯 기 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면 내 방으로 가서 차 한잔 하시겠소?" 원계묵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실례가 안된다면 감사히 받아 들이겠소이다." 흑의인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는 몹시 인상적 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선실로 내려갔다. 몹시 깨끗하고 큰 선실이었다. 별 장식은 없었으나 그 선실의 주인의 성품을 연상케하는 단아한 꾸밈새였다. 흑삼인은 선실 안 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후 문득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초광(楚光)!" "넷!" 밖에서 힘찬 대답이 들리더니 곧 한 청년이 선실 안으로 들어 왔다. 그를 본 순간 원계묵은 흠칫했다. 굉장한 거구였기 때문이 었다. 피부는 흑갈색이었고 머리카락은 곱슬곱슬했다. 그는 중원 인같지가 않은 느낌이었는데 십척(十尺)에 가까운 키에 팔뚝이 왠 만한 사람 허리 정도로 굵었다. 그는 몹시 우직한 느낌을 주고 있 었다. 흑삼인은 담담히 말했다. "가서 옷 한 벌과 명패 하나를 가져오너라." "알겠습니다." 초광은 공손히 물러갔다. 흑삼인은 그에 대해 설명했다. "초광은 내 하인이오. 원래 밀석아국(密昔兒國 : 이집트)의 노예 였는데 우연히 내가 거두게 되었소이다." 원계묵은 밀석아국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솔 직한 느낌을 말했다. "정말 대단한 체격이외다." "신력(神力)의 소유자요. 충심이 대단하고 체구에 비해 의외러 계산이 빨라 내게 큰 도움을 주고 있소." 원계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흑삼인이 문득 생각난 듯 말 했다. "참 내 소개가 늦었구료." 이어 그는 담담하고 낭랑하게 말했다. "나는 상인(商人)이외다. 이 배의 주인이기도 하지요. 미천한 이 름은 용백군(龍白君)이라고 하외다." 원계묵은 그 이름을 가슴에 새겼다. "소생은 원계묵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떠돌이 낭인입니다." 기이한 상인(商人) 용백군은 담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 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초광이 들어왔다. 그는 옷 한벌을 들 고 있었다. 용백군은 옷을 건넸다. "어서 갈아 입으시지요." "고맙습니다." 원계묵은 사양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다. 용백군은 그가 벗어 놓은 회의를 가리키며 말했다. "초광, 이 옷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초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옷을 들고 사라졌다. "......!" 원계묵, 그의 성격은 본래 남의 도움을 받지 않는 주의였다. 하 나 기이하게도 용백군의 도움은 별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지고 있 었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였다. 두 사람, 신비한 상인 용백군과 원계묵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차를 나누며 그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다. 한데 대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원계묵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용백 군의 학식은 실로 대단했던 것이다. 원계묵도 자칭 문무(文武)를 겸비했다고 평소 자부해왔다. 하나 용백군의 학식에 비할 바가 아 니었다. 용백군의 화제는 끝이 없었으며 또한 그 깊이 역시 추측 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용백군은 나이답지 않 은 어떤 노련함마저 풍기고 있었다. 일종의 완숙미랄까? 실상 그는 원계묵과 거의 대등한 이십 세 정도의 나이에 불과 한 것으로 보면 그런 느낌은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아무튼 이야기 하면서 원계묵은 용백군에게 완전히 심취되고 말았다. 얼마 후 초광이 선실로 아침식사를 날라왔다. 그들은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함께 식사를 들었다. 그러는 사이 범선은 이미 진무현 을 떠나고 있었다. 황하와 연결된 대운하(大運河)를 타고 북경을 향해 출발한 것이었다. 항해는 순조로왔다. 원계묵은 용백군의 선실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담소를 나누었다. 한데 오시(午時)무렵 한 중년인이 선실 로 들어와 보고를 했다. "주인님, 아침에 이 배위에 올라오신 관부(官府)의 나리께서 주 인님을 좀 뵙자고 하십니다." '......!' 원계묵은 뜨끔했다.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나 자신 때문에 용백군에게 어떤 해라도 미칠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용백군은 태연히 말했다. "이리로 모셔라." 중년인이 나가려 하자 그는 덧붙였다. "참 그리고 이것을 초광에게 전해라." 그는 즉시 무엇인가를 종이에 쓴 후 그것을 중년인에게 건네 주었다. 중년인이 나가자 원계묵은 몸을 일으켰다. "용대인(龍大人)......." 하나 용백군은 미소지었다. "원형은 보고만 있으시오." "......?" 잠시 후 선실 안으로 삼 인이 들어왔다. 가운데 인물은 사십대 중반 가량의 전형적인 관인(官人)이었다. 관복을 입었으며 턱 밑 에는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허리에는 패검을 찼는데 몸에 서 관인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얼굴은 비교적 청수했으며 특히 약간 깊고 가느스름한 눈은 그가 극히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느끼게 했다. 그의 좌우에도 역시 관복차림의 두 청년이 따랐다. 중년관인이 선실 안으로들어오면서 포권했다. "실례하오이다. 함부로 뵙기를 청해서......." 말을 하며 그의 눈은 재빨리 용백군과 원계묵을 훑어보고 있었 다. 이어 그는 용백군이 배의 주인임을 간파한 듯 포권했다. "관부의 일 때문에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했으니 협조를 바랍니 다." 용백군은 당당히 인사를 받았다. "앉으시지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나랏일이라면 어찌 도움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년관리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과연 산동(山東)의 거상 용백군 대인답습니다." 용백군은 미소지었다. "저에 대해 벌써 조사를 하신 모양이군요?" 중년관리도 미소지었다. "산동의 관리로서 어찌 산동의 유명한 거상을 모를 수 있겠습 니까?" 이어 그는 엄숙하게 물었다. "본인은 산동성 제형안찰사사 소속으로 형부도독(刑府都督) 단 위제(檀偉帝)라고 합니다." 그 말에 용백군은 흠칫했다. 뿐만 아니라 원계묵도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단위제, 이 인물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과언이 아니다. 그는 관부(官府)내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를 그저 정육품의 관 리로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의 범인체포나 또는 미궁(迷宮) 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는 솜씨는 가히 신화적(神話的)이다. 사건 을 대하면 그는 흡사 동물적 육감을 지닌 듯, 영활하고 기민하여 무섭도록 파고드는 집착력을 보인다. 그가 일다 손댄 사건치고 해 결이 안된 것이 없었다. 그런 그의 공적으로 보면 그의 관직 직품 은 이미 오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나 그것은 그의 성격 때문에 더 이상 출세를 못하고 있음을 세인들은 알고 있었다. 절대로 타 협을 모르는 성격때문이었다. 상부의 지시나 압력 따위로 그는 일 에 임하면 철저히 무시한다. 강직하고 또한 청렴결백하여 그는 부 정을 모를뿐더러 용서치도 않았다. 하나 그는 부하들에게 있어 그 는 신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극진히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그가 무림고수가 개입된 사건을 해결한 것도 여럿이었다. 그로 미 루어 단위제의 무공(武功) 또한 상당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용백군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설마 그 유명하신 단도독님이실 줄은 몰랐습니 다." 단위제는 멋적게 웃음을 흘렸다. "별 말씀을 부끄럽소이다." 이어 힐끗 시선은 한쪽에서 묵묵히 서 있는 원계묵에게로 돌리 며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실상 본인이 용대인을 뵙자고 한 이유는 한가지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용백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진무현에서 희대의 살인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십여 명이 죽었지요." 용백군은 정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그 많은 사람이 죽었단 말입 니까?" 단위제는 미소 지었다. "무림인들의 분쟁이라고 생각됩니다. 한데 문제는 그 죽은자들 의 정체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위제는 가느스름한 눈에 기광을 흘리며 말했다. "시신들을 살펴 본 결과 그들은 놀랍게도 조화성의 인물들이라 는 것을 밝혀 냈습니다." "조화성!" 용백군의 안색이 변했다. 단위제는 계속 설명했다. "당금 무림제일의 세력이지요. 하나 더욱 놀라운 것은 조화성 의 고수들을 그토록 베어버린 범인의 무공입니다." "......?" "이십 구의 시체 중 단 두 구만 제외하고는 모두 한 사람에게 당했습니다. 그것도 모두 일초(一招)에......." 단위제는 서성거렸다. 그는 탁자위에 놓인 용(龍)모양의 도각 장식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계속했다. "범인은 어제 저녁 진무현의 열래객잔에 머물렀습니다. 열래객 잔에서도 시체가 다섯 구나 발견되었지요. 객잔 주인의 말로는 범 인의 모습이......." 그는 말을 잠시 중단하고는 힐끗 원계묵을 주시했다. 원계묵의 안색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단위제는 미소지었다. 그는 장식 을 만지작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아주 좋은 물건이군요. 송나라때의 조각같습니다." 용백군은 담담히 말했다. "훌륭한 안목입니다." "하하하!" 단위제도 문득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시체들의 몸에 난 상처로 보아 범인은 상당히 긴 장도를 사용 했지요." 원계묵은 흠칫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안목이 대단한 자다.' 이 때 단위제의 시선은 탁자 옆에 세워져 있는 원계묵의 장도 로 향했다. 원계묵은 가슴이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위제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십 구의 시체중 두 구에서 발견 된 상처는 일종의 비도술(飛刀術)에 당한 것입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역시 일초에 즉사했습니다." 용백군은 담담히 말했다. "단도독께서 말씀하고 싶으신결론은 무엇입니까?" 단위제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원계묵을 가리켰다. "실례지만 저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용백군은 싱긋 웃었다. "원계묵이라 합니다." 그 말에 원계묵은 흠칫했다. 그가 설마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 힐줄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단위제는 탄성을 발했 다. "오! 그렇다면 요즘 중원에서 백살대(百殺隊)의 대장으로 알려 진 마도(魔刀) 원대협(元大俠)이 바로?" 용백군은 쾌히 대답했다. "이분이외다." 단위제의 눈에서 기이한 광망이 뻗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원대협이 용대인과 같이 계신 이유를 말씀해 줄 수 있는지요?" 용백군은 태연히 말했다. "본인의 사업은 아시다시피 해상(海上)과 수로(水路)를 많이 이 용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해적에게 수시로 위험을 당할 우려 가 있지요. 그래서 올초에 원대협과 계약을 했습니다. 원대협의 무공과 백살대의 힘을 이용하여 본인의 물건을 보호하기로 말입 니다." 단위제는 씩 웃었다. "그렇게 된 것이군요." 이어 그는 신비한 표정으로물었다. "그렇다면 원대협은 언제부터 이 배에 타고 계셨습니까?" "약 한달 가량 되었습니다." 그 말에 단위제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쳤다. "그렇습니까?" 이어 그는 옆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서 그들을 데려오너라." "네, 도독님." 젊은 관복청년이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원계묵은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무림인이라 여차하 면 언제든지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그로인해 관부와 등을 지겠지만 그정도를 두려워할 그가 아니다. 하나 용백군은 다르다. 그는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을 수도 있 었다. 그 점을 그는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용백군은 태연하기 만 했다. '대체 용대인이란 사람은?' 이때 젊은 청년관인이 세 명을 데리고 선실 안으로 돌아왔다. 원계묵은 따라 들어온 상인을 본 순간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바로 자신이 배에 오르기 전 말을 걸었던 그 인부들이 아 닌가? 인부들은 겁을 먹은 표정들이었다. 필시 형부도독의 위엄에 눌린 듯 했다. 원계묵은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구나!' 그는 여차하면 즉시 이 자리를 벗어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때 단위제는 세 사람의 인부를 바라보며 위엄있는 음성으로 물 었다. "너희들은 저 사람을 알고 있느냐?" 인부들은 원계묵을 힐끗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아... 알고 있습니다." 원계묵은 다급함을 느꼈다. '결국 들통나는군.' 단위제는 미소지었다. "언제 보았느냐?" 인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원공자님은 한 달 전부터 줄곧 이 배위에 계셨습니다." 순간 단위제의 안색이 굳어지고 있었다. 용백군은 여전히 담담 했다. "무슨 소리냐? 너희들은 오늘 새벽에 한 명의 회의인이 이 배 에 올랐다고 하지 않았느냐?" 단위제의 음성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렇...습니다." 인부들은 기가 질린 듯 시인했다. "그렇다면 왜 부인을 하느냐?" 그러자 인부 중 한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새벽에 한 명이 이 배에 오르기는 했습니다. 허나 그 자 는 처음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원공자님은 이 배를 지켜주 시기 위해 한 달 전부터 쭉 계시였습죠." 그 말에 단위제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고 말았 다. 인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자가 원공자님과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단위제는 일시에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 는 원계묵이 입고 있는 옷이 회의가 아니라 청의(靑衣)임을 비로 소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이번에는 더욱 크게 한 대 얻어맞은 느 낌이 들었다. '당했군. 깨끗이!' 이때 용백군은 인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아침에 단도독꼐서 말씀하신 그런 사람이 배위로 오 른 것을 본적이 있느냐?" "네, 주인님!" "그 자는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 인부중 한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새벽에 오른 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냥 도로 내려간 듯 합니다." 용백군은 고개를 돌려 단위제를 보고 싱긋 웃었다. 이어 그는 원계묵을 바라보며 낭랑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원형(元兄). 품 속의 명패를 보여주시구료." 그 말에 원계묵은 흠칫했다. '무슨 명패를?' 허나 그는 품속으로손을 넣어가다가 더욱 놀랐다. 그는 내심 감탄을 느낌과 동시에 어떤 한기마저 느꼈다. 설마 용백군이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준비를 했을 줄이야 상상치도 못한 그였다. "여기있소." 그는 수중의 명패를 단위제에게 내밀었다. 단위제의 눈이 날카 롭게 빛나며 명패를 노려보았다. <구룡(九龍).> 명패에는 그런 문장과 함께 아홉 마리의 용(龍)이 정교하게 새 겨져 있었다. 단위제는 한 눈에 그것이 산동 거상 용백군의 식솔임을 표시하 는 명패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지그시 용백군을 응시 했다. 용백군은 담담한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더 이상 아무것 도 캐낼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마침내 단위제는 미소를 지을 수밖 에 없었다. "이 구룡상선(九龍商船)에서 이기려고 한 내가 잘못이었소. 헛 헛, 용대인. 깨끗이 졌소이다." 용백군은 이상하다는 듯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단도독께서는 아직도 원형을 범인으로 생각하시는 모 양이군요?" 단위제는 고소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하군. 원계묵의 얼굴을 아는 증인으로 객점주인이 있 지만 저자의 머리로 보아 나보다 먼저 그곳까지 손을 써 놓을 것 이 틀림없다.' 그는 슬쩍 원계묵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정말 기막힌 도피처를 찾은 셈이로군.' 그는 잠시 생각을 굴렸다. 이어 용백군을 향해 정중히 말했다. "용대인, 이 배가 북경까지 간다면 같이 타고 가도 상관없겠습 니까?" 용백군은 빙긋이 웃었다. "물론 상관없습니다. 이배는 상선이지만 자리가 많기 때문에 돈만 내신다면 승객도 태우니까요." 단위제는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용대인. 굉장히 바쁘신 용대인께 실례가 많았습니 다." 이어 그는 다시 한 번 포권지례를 취한 다음 돌아섰다. 그는 두 명의 청년관인과 함께 선실을 나갔다. 용백군은 그가 사라지자 인 부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들은 이제 나가보게." "네, 주인님!" 인부들은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 다음 물러갔다. 그들이 사 라지자 곧 초광이 안으로 들어왔다. 용백군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 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초광!" 초광은 우직한 얼굴에 다만 충직스런 미소를 지을뿐이었다. 원 계묵은 그런 주종간을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말 좋은 관계로군.' 범선은 계속 북상(北上)하고 있었다. 워계묵은 평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제 23장 두 사나이의 約束 북경(北京), 대명제국(大明帝國)의 흥망을 쥐고 있는 황도(皇都), 황제가 기거하는 자금성(紫金城)이 있는 북경은 과연 천하제일지 다운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사통팔달한 대로(大路)에는 반듯한 청석판(靑石板)이 깔려있었고 그 옆에는 마차가 나란히 여덟대가 지나 갈 수 있을만큼 넓었다. 북경성의 저택들은 모두 번쩍이는 단청과 유리기와로 장시되어 그 화려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 다. 황도 북경성(北京城), 바야흐로 풍운(風雲)은 이곳에서도 일기 시작했으니....... X X X 천륭객점(天隆客店), 이곳은 북경성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는 객 점이다. 그 규모는 가히 일개 부중을 방불케 하였으니 주루(酒樓) 와 객점을 겸하고 있었다. 객방만 해도 가히 수백이 넘었고 따로 독립된 별원을 무수히 포함하고 있었다. 천륭객점은 왠만한 사람 은 묵을 엄두도 못낼 정도로 비싼 곳이었다. 객점의 전면에는 주루가 있었다. 주루는 삼층이었는데 웅장한 규모여서 북경성내의 명물이기도 했다. 주루의 삼층, 손님들이 저마다 담소하며 술을 들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조용하고 사치스럽게 꾸며진 좌석, 그 곳은 특별히 칸막 이가 되어있어 최상급의 자리라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두 청년이 술을 들고 있었다. 바로 용백군과 원계묵이었다. 그 들이 진무현을 떠나온 지 십일이 되었다. 그들이 북경성에 도착한 지 도 오일이 되었다. 그동안 용백군은 사업을 벌였다. 그의 사업 이란 다름아닌 각종 물품을 황실(皇室)에 납품하는 것이었다. 그 의 물품중에는 갖가지 것들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종이, 도자기, 금은세공, 각종 비단과 포목을 비롯하여 북경에서 소모되 는 갖가지 일상용품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납품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었다. 그동 안 원계묵은 왠지 용백군에게 점차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지난 오일동안 용백군을 따라 다니며 그의 사업을 도와주었다. 그 러는 동안 용배군에게 감탄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용백군의 화술(話術)을 비롯하여 거래당시의 그의 상술(商術)등 은 원계묵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매끄럽고 능숙한 것이었 다. 또한 거래에 오가는 금전의 액수는 너무나 엄청나 원계묵은 그저 입을 벌릴뿐이었다. 비록 사업에는 문회한인 원계묵이었지 만 그는 용백군의 사업수완에 그저 감탄을 연발할 뿐이었다. 구룡 상선에 가득 실려있던 그 엄청난 양의 물건이 불과 오일사이에 바닥이 난 것 또한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동안 원계묵은 용백군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용백군은 산동성 제남(齊南)의 거부(巨富)인 양익상(楊益尙)의 조카로 그의 뒤를 이어 일년 반전부터 그의 사업을 물려받은 것 으로 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용백군이 사업을 이어받은지 불과 일년 반사이에 그는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그리고 놀라운 재능으 로 그 규모와 실적이 과거의 양익상에 비해서 수배나 신장시키는 업적을 보였다. 그의 현재 나이는 이십 이세, 나이는 원계묵에 비해 두 살이 위 였다. 하나 생각하는 면이나 경험은 원계묵과 비할 바가 아니었 다. 원계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존경심과 더불어 강한 마력에 이끌 리고 있었다. 그는 북경성에 온지 며칠 안되어 자신도 모르게 용 백군에게 형니이란 칭호를 쓰고 있었다. 평소 유아독존적인 원계 묵에게 있어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원계묵은 술 한잔을 쭉 들이켰다. 이어 용백군에게 잔을 돌렸 다. 두손으로 공손히 술을 따른 그는 물었다. "형님은 이제 제남으로 가셔야겠군요?" 용백군이 미소를 지었다. "북경에 머물러 한 가지 마쳐야 할 일이 있네. 그것을 마친 후 제남으로 돌아 갔다가 다시 일을 시작해야지." 이어 그는 원계묵에게 물었다. "원제(元弟)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원계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의 일은 워낙 막연하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손을 대 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원계묵은 이미 자신의 사부 만승금도 도담후와 조화성에 얽힌 은원관계를 그에게 얘기한 후였다. 그는 자신이 왜 만난지 열흘밖 에 되지않은 용백군에게 그토록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용배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히 말했다. "음, 이 우형의 생각으로는 자네와 백살대(百殺隊)의 실력으로 조화성에 대결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 같네." 원계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나 곧 미소지으며 말했다. "형님의 말씀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용백군은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가 말한 무영과 신산이란 자들과 합작하는 것이 어떤가?" 원계묵은 강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싫습니다. 그들과는 결코 힘을 합티고 싶지않습니다." 용백군도 술 한잔을 들이키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원제. 기다린다는 것은 지루한 것이지만 대로 인간은 기다려 야 할 때도 있는 법일세. 무모한 용기는 단지 만용에 불과할 따름 이네." 원계묵은 한동안 용백군을 응시했다. 용백군의 눈은 별처럼 차 갑지만 왠지 원계묵은 그 눈에서 강한 신뢰를 느끼고 있었다. 그 는 한참 후 힘주어 입을 열었다. "형님, 이 어리석은 아우에게 한 번 길을 안내해 주시지 않겠습 니까?" 용백군의 눈이 빛났다. "그게 무슨 말인가?" 원계묵의 두 눈이 번뜩였다. "형님 곁에 소제를 두시고 제가 움직여야 할 때를 알려 주시십 이오." 용백군은 잠시 흠칫하더니 곧 나직이 웃었다, "원제, 자네는 나를 너무 크게보는군. 나는 일개 장사꾼일세. 자 네가 속한 무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네." 그러자 원계묵은 두 눈으로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소제를 속이지는 못합니다. 형님은 상인이지만 결코 단순한 상인은 아닙니다. 형니은 제가 보기에 대단한 무공(武功)을 지니 고 계십니다." 용백군은 그저 담담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원계묵의 음성 에는 점점 더 열기가 더해갔다.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로 사람들은 신산 제갈사를 꼽지만 저의 육감으로 형님은 결코 제갈사의 아래가 아닙니다." 용백군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원제, 나는......." "형님! 부탁드립니다." 원계묵은 용백군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 었다. 그는 진정이 담긴 은성으로 말했다. "요즘들어 소제는 스스로 극도의 무력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형님을 만나게 해준 것이 어쩌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 니다." 용백군은 잠시 그를 응시하다 담담히 물었다. "원제, 내가 자네에게 무엇을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원계묵은 간절하게 말했다. "제가 움직일 방향을 설정해 주십시오." 용백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것을 가르쳐 주기란 무리일세." "기다리겠습니다. 언제까지라도......."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백년이라고 기다릴 용기가 있습니다." 용백군은 똑바로 원계묵을 주시했다. 원계묵의 두 눈이 간절한 빛을 발하자 그는 미소지었다. "자네는 언젠가 나를 택한 것을 후회할 걸세/" 그것은 곧 허락이나 다름없는 말이 아닌가? "형님!" 원계묵의 눈에 기쁨이 충만하게 떠올랐다. 그는 손에 힘을 주 었다. "저의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 니다!" 용백군은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디 한 번 해보세, 아우." 이 약속, 놀라운 지모(智謀)를 지닌 신비의 상인(商人) 용백군과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인 마도(魔刀) 원계묵간의 이 약속... 이것 이 장차 몰고올 풍운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으니....... 하나 아직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XXX 태진궁(太眞宮). 자금성(紫金城) 동(東)쪽에 위치한 겉으로 보아서는 그다지 크 달수 없는 궁(宮), 하나 이 궁이야말로 대명(大明)의 국운(國運)을 좌지우지하는 한 거인의 처소였다. 태진왕(太眞王) 주익적(朱翊 ), 그는 현 황제 신종(神宗) 만력 제(萬歷帝)의 이복동생이다. 전 황제 목종(穆宗)이 아끼던 서귀비) 徐貴妃)의 둘째 아들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란 평판 을 들었다. 목종은 제위에 오른지 육년만에 죽었으므로 당금 황제인 세종 이 황제가 된 것은 그의 나이 십세 때였다. 그토록 어린 나이였으 므로 그가 정사(政事)를 제대로 다룰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천행이랄까? 다행이도 그 무렵 철(鐵)의 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명신(名臣) 장거정(張居正)이 있으므로 해서 오히려 정사는 평화롭고 순조롭 게 이어 나갈수 있었다. 하나 만력 십년, 신종은 유능한 철의재상 장거정을 환관의 농 락으로 제거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주색(酒色)에 빠져 폭정을 일삼게 되니 조정의 정국(政局)은 말이 아니었다. 자금성은 온통 환관(宦官)의 천하가 되고 말았다. 이때 젊은 나이의 태진왕은 극히 현명하여, 정국을 염려하여 몇 번이나 신종에게 상소문으 올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환관의 손에서 처리되거나 이미 눈이 어두워질대로 어두워진 신종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결국 태진왕은 뜻있는 신하들을 규합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수 십년에 걸쳐 혼란한 황실을 위해 보이지 않는 숨은 노력을 하기 에 이르르니, 그는 변방을 강화하여 찰합이성 일대의 이민족 달탄 부족과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 전념했다. 뿐만아니라 현재 북방의 가장 근심거리인 흑룡강(黑龍江)과 송 화강(松和江) 일대의 여진부족의 족장인 누르하치의 침입을 방어 하는데 숨은 배전의 힘을 다했다. 그것은 황실의 충직한 인물에게는 커다란 존경의 대상이었다. 또한 그는 황실의 직속 특무기관인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 의 대권을 위임받아 황실의 비리제거에도 앞장섰다. 하나 그는 신종의 방탕함으로 그것도 점차 어려움을 겪고 있었 다. 한데 뉘 알았으랴? 이 태진궁(太眞宮)에 마침내 서서히 바람 (風)이 불기 시작했으니....... 제 24장 太眞王 화원(花園), 갖가지 꽃이 만발해 있다. 금란화, 백일홍, 작약, 국 화, 목단, 매화, 장미, 해당화... 세상의 꽃이란 꽃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는 듯 하다. 그리고 여인(女人), 그녀는 꽃을 따고 있었다. 일신에는 소박한 백의(白衣)를 입은 여인이었다. 얼굴에는 화장기도 전혀 없었으나 청초하고 고귀해보이는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백가지 꽃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나이는 이십 세가량 정도 되었을까? 꽃바구니에 꽃을 담는 그 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와 같았다. 이곳은 태진궁의 별당화원, 미녀의 이름은 백연연(白娟娟), 만 력(萬歷) 삼십 년 무렵, 환관의 음모에 의해 어명으로 사약을 받 고 죽은 충신 백시열(白時悅)의 딸이었다. 평소 백시열과 친분이 두터웠던 태진왕이 그녀를 극비리에 빼돌렸다. 그리하여 삼족이 며운데도 그녀만이 유일하게 살아남게 된다. 지난 십수년간 태진 왕이 그녀를 거두어 키웠다. 그녀가 하는 일은 태진왕을 곁에서 모시는 일이었다. 그녀는 태진왕이 딸처럼 여겼으므로 결혼을 하 지 않은 태진왕의 궁에서 그녀는 안주인이나 다름없었다. 백연연, 꽃을 따던 그녀의 우아한 섬섬옥수가 문득 멈추었다. 해당화, 아직 피지 않은 해당화 봉오리에 눈길이 멎었다. 그녀으 ㅣ아름다운 고결한 얼굴에 언뜻 미소가 어렸다. 시각은 아직 이른 아침이라 해당화 가지에는 이슬방울이 영롱하게 매달려 있었다. 백연연은 문득 아름다운 음성으로 시를(詩)를 읊는다. "방울진 해당화 봉오리 잎사귀 사이에 가지런히 달려있네." 翠葉輕寵豆顆적 "그 끝은 연지 바른 듯 붉고 납으로 봉한 듯 야무지게 닫혀있 는데......." 연脂濃抹蠟痕新 "그대 주의하여 나뭇가지에 맺혀있는 이슬을 떨구지 마세요. 만약 이슬이 떨어진다면 붉은 색 튀어나와 봄날은 가버리고 말 거예요." 殷피留著花소露 滴下生紅可惜春 미녀의 고운 옥음(玉音)에 실려나온 시음은 너무도 그윽하고 아 름다워 취할 정도였다. "허허, 연연(娟娟). 네 아름다움이 꽃 속에 있으니 꽃들마저 빛 을 잃은 듯 하구나." 문득 낭랑하면서도 은은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인물이 나타났 다. 태진왕(太眞王)이었다. 그는 오순 가량의 나이에 청수한 용모였 다. 하나 낯빛이 파리했으며 몹시 병약하단 느낌을 주었다. 하나 두 눈만은 혜지를 담고 있었다. "허허, 연연. 네 시(詩) 소리를 듣고 나왔다. 쿨룩... 쿨룩......." 태진왕은 문득 기침을 했다. 백연연은 급히 다가와 태진왕을 부축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온통 근심이 어려 있었다. "전하(殿下), 날씨가 차온데 옥체를 상할실까 두렵사옵니다." 하나 기침이 멎은 태진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 내 몸은 아직 건강하다. 남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하나 백연연의 두 눈에는 그늘이 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요즘 전하의 건강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허허... 그렇냐?" 태진왕은 문득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설혹 내 한 몸이 부서진다 한들 이 나라만 평안해진다면 무슨 걱정이겠느냐?" 백연연은 근심스럽게 듣고있었다. "황제께서는 아직고 간신들 속에서 헤매고 계시고, 북방의 누 르하치는 여진을 통일하고 금(金)을 세워 계속 북방을 위협하니 장차 이 나라가 어찌될까 근심스럽도다." 태진왕의 얼굴에는 우국충정의 빛이 어렸다. "게다가 중원에는 조화성인지 뭔지하는 단체가 혼란을 일으키 고 있으니... 쿨룩... 쿨룩......" 그는 말을 다하지 못하고 다시 심한 기침을 해댄다. "전하!" 백연연은 급히 부축했다. 그녀는 창백한 태진왕의 옆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큰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고 있었다. 태진왕의 몸이 수척해질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비록 어려서부터 딸처럼 자신을 키워준 태진왕이지만 그녀는 태진왕에게 깊은 존경심과 함께 애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간곡하게 말했다. "전하께오서는 이 나라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부디 옥체를 보 중하소서." 태진왕은 기침을 간신히 그치고는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 그러다 문득 그는 꽃송이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국화는 매우 아름답구나." 그러고 보니 백연연의 꽃바구니에는 국화종류만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하의 방에 장식할 것이옵니다." 태진왕은 너털웃음쳤다. "허허허, 연연. 너는 장차 결혼하면 가장 훌륭한 내조자가 될 것이다." 그 말에 백연연의 얼굴에는 짙은 노을과 같은 홍조가 피어났다. 태진왕은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백연연은 양빰은 물론 귀 밑까지 붉어졌다. "호!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나." 백연연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녀는 내심 이렇게 외치고 있 었다. '전하! 제가 사랑하는 분은 바로 전하이옵니다. 왜... 모르시나 요?' 그녀는 야속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 태진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너는 결코 관리와 결혼하지 말거라. 평범한 것 이상 좋은 것이 없는 것이다." 백연연은 내심 중얼거렸다. '소녀에게는 전하의 곁에 있는 것만이 가장 큰 행복이나이다.' 하나 어찌 감히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낼 수 있으랴? 엄청난 신 분 차이... 그것으로 인해 백연연의 가슴은 항상 꽁꽁 감싸여진 채 지낼 뿐이었다. 태진왕은 몸을 돌렸다. "들어가자구나." "네, 전하......." 한데 그때였다. 화원으로 한 인물이 들어섰다. 그는 비단금포를 입은 중년인이었는데 소매에 금빛 수실이 매 어져 있었다. 용맹하고 충직한 인상의 중년인은 다가와 무릅을 꿇 었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무슨 일이냐?" 태진왕이 묻자 중년인은 즉시 공손히 말했다. "전하를 알현하고자 하는 자가 있습니다." "나를?" 태진왕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습니다." 본래 태진왕은 조용한 성품이므로 번잡한 것을 싫어할뿐더러 사람을 만나는 것을 특별한 경우외에는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라고 하던가?" 중년인은 공손히 두 손으로 한 장의 배첩을 받들어 올렸다. 태 진왕이 배첩을 펼쳐보자 그 속에 간단한 글이 들어 있었다. <산동(山東) 용백군(龍白君) 배례(拜禮).> "용백군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군." 태진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중년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 다. "산동성에서 용백군은 유명한 거상입니다." "상인인가?" 태진왕은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그렇습니다, 전하." 태진왕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몸이 않좋으니 나중에 들르라 일러라." "하오나 용백군은 일년전 전하께서 구진(九鎭)을 시찰나가셨을 때도 태진궁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중년인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게다가 그는 양응시(楊應翅)대감의 외손자이기도 합니다." 순간 태진왕은 깜짝 놀란 듯 반문했다. "양응시대감의 외손자라고?" "그렇습니다." 태진왕의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게 피어올랐다. "오! 오! 양대감의 후손이라면 어찌 만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 가?" 그는 쾌히 응낙했다. "어서 들라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중년인은 부복한 후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백연연은 궁금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양응시 대감이 누구신가요?" 태진왕의 얼굴은 아직도 가벼운 흥분상태였다. "충신중의 충신이지. 하나 그 성격의 강직함으로 인해 이십년 전 모함을 받아 삭탈관직하여 산동으로 낙향(落鄕)했지. 그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 분의 후손을 보게되다니......." 그는 회상에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 젊은 시절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이셨다. 정말 대단한 어 른이셨지." 태진왕의 얼굴에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실로 오랜만 에 화기가 감돌고 있었다. 방 안, 당금 친왕(親王)의 처소치고는 놀랄만큼 검소한 분위기 였다. 평소 사치와 허례를 싫어하는 태진왕의 성품을 한 눈에 읽 을 수 있는 그런 방이었다. 검박한 타자를 앞에 두고 태진왕이 포 단 위에 앉아 있다. 그 앞, 용백군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미천한 백성 용백군이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태진왕은 처음 용백군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한 눈에 용백군의 모든 것을 느끼는 듯했다. '석년에 양대감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구나. 아니 오히려 그 기 상은 더욱 훌륭하구나.' 그는 흔쾌한 어조로 말했다. "일어나게. 자네를 만나보니 양대감을 직접 보는 듯해 몹시 기 쁘네." "황송합니다." 용백군은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도 역기 내심 감탄을 금치 못 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검소하고 다감한 분이시구나.' 태진왕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양대인께서는 평안하신가?" 용백군은 약간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외조부님께선 십 년전 노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순간 태진왕은 충격을 받은 듯 몸을 가볍게 떨었다. "돌아... 가셨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아...! 진정한 우국충신이 또 한 분 돌아가셨구나......." 태진왕의 충격은 몹시 큰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허허, 한심하도다. 양대감의 부음조차 왜 몰랐던고?" 그는 오랫동안 서운함과 슬픈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그 는 용백군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양대감께서는 익상이란 아들과 혜(慧)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들 은 어떻게 되었는가?" 용백군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외숙의 함자가 바로 익상입니다." "음. 그럼 자당의 양혜(楊慧)인가?" "그렇습니다." 태진왕은 한동안 용백군을 응시하더니 문득 기이한 눈빛으로 물었다. "자당은 안녕하신가?" 용백군의 안색이 침울해졌다. "돌아가셨습니다." "음." 태진왕도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입 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자당은 이십 몇 년전인가 남창(南昌)의 한 장씨 (莊氏)성을 가진 상인(商人)과 결혼한 것으로 아네만......." "그렇습니다." "한데 어째 자네의 성이 용씨(龍氏)인가?" 용백군은 내심 감탄했다. '정말 겉보기보다 무섭게 치밀하고 기억력도 놀라운 분이시다.' 그는 곧 솔직이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용씨는 거짓 성(姓)입니다. 실제 저의 이 름은 장천린이라고 합니다." 아아......! 그렇다. 용백군. 그는 바로 장천린의 또 다른 변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남창을 떠난 후 세월이 흐른 지금 용백군이란 가명을 쓰고 있었 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신산 제갈사의 눈길을 벗어나기 위한 조 치였다. 태진왕의 눈빛이 빛났다. "어째서 가명을 쓰는가?" 용백군, 아니 장천린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신이 그 동안 겪은 일에 대해 그는 태진왕에게 자세히 이야 기했다. 부친 장진군이 죽은 이후 사업을 이어받은 일, 신선루(神 仙樓)를 세운 일, 그리고 취옥교를 만난 사건, 그 이후 만가산에서 노명등 사 인을 만난 일과 그 후에 벌어진 일련의 파란만장했던 사건들... 금백만의 죽음과 신산 제갈사의 차도살인계에 걸린 일 하며...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하고 태산(泰山)에서 무공연마를 하게 되었던 그간의 일들을 그는 될 수록 자세히 이야기했다. "......!" 태진왕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로 한 사람에게 벌 어진 일치고는 너무나 엄청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장천린은 계속 이야기했다. "태산에서 몇 개월간 무공을 익힌 저는 제남의 외숙을 찾아갔 습니다." 그렇다. 제남의 거부 양익상은 실제 그의 외숙이었다. 양익상의 누이 양혜(楊慧)가 바로 그의 모친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것은 삭탈관직 당한 양씨(楊氏)가문이 그 들의 가계를 노출시키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상인인 장진군 과 양혜가 결혼한 것도 관직에 회의를 느낀 양응시의 뜻이었다. "외숙부의 집에 묵으면서 외숙의 사업을 도우는 중 저는 일년 전 북경으로 전하를 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 "음. 그랬다고 들었네." "그것은 노명어른이 남긴 서찰때문이었습니다. 하나 전하를 만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동안 계속 사업에 전념 하다가 이제야 전하를 찾게 되었습니다." 태진왕은 망연한 눈빛을 보였다. 그는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 렸다. "노명이 죽었단 말이지?" 그의 표정은 허탈하고 허무해 보였다. 장천린은 의아심을 느꼈 다. '노명과 전하는 애당초 아는 사이였단 말인가?' 이때 태진왕은 그의 궁금증을 느낀 듯 이야기했다. "노명은 금의위(錦衣衛)의 비밀 고수일세. 나의 명령을 받고 조 화성에 잠입했었네." "아!" 장천린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태진왕은 손을 내밀었다. "서찰을 보여다오." "여기 있습니다." 장천린이 서찰을 바치자 태진옹은 잠시 기이한 표정을 짓더니 즉시 서찰을 뜯어 읽었다.한데 점점 그의 안색이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급기야 태진왕은 안색이 창백해져 힘없이 포단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의 넓고 창백한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두 눈 또한 망연해졌다. 장천린은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대체 어떤 글이 쓰여있기에?' 하나 그는 감히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신분의 차이가 엄 청나지 않은가? "허허헛." 문득 태진왕이 허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 태진왕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어찌 들리느니 좋은 소리는 없고 망국(亡國)의 소리만 전해오 는가?" 그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 모습을 몹시 안타까워보였다. "전하......." 태진왕의 깊은 두 눈에 이슬이 고였다. "읽어 보겠는가?" 그는 서찰을 장천린에게 건네주었다. "황송합니다." 장천린은 서찰을 두 손으로 받은 후 읽어보았다. 그 내용은 실 로 놀라운 것이었다. <미신(微臣) 노명(盧明)이 전하(殿下)께 글을 올립니다. 전하의 뜻을 받들어 조화성에 잠입한 지도 벌써 수년, 미신은 그동안 조화성의 금제(禁制)에 걸려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 기에 전하께 연락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 中略 ... 미신은 조화성 의 제오신마전(第五神魔殿)에 갇히었던 육십육인(六十六人)의 금 제자들을 설득하여 탈출을 시도하려 합니다. 만에 하나 미신이 죽 더라도 한 명이라도 벗어나면 전하께 이 서찰을 전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내일이면 탈출을 시도할 것입니다. 이에 마지막으로 미신 이 조화성에서 조사한 사실을 여기에 적습니다. 그 중 엄청난 비 밀 두 가지는 명조(明朝)마저 위태롭게 하는 너무도 놀라운 것입 니다. ... 中略 ....> 장천린의 놀라움은 극에 달했다. 다음 부분을 읽고 난 그는 가 슴이 철렁 내려앉음과 동시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 조화성주 염무는 여진(女眞)의 누루하치와 암중동맹을 맺었 습니다. 중원을 안과 밖에서 정복하려는 엄청난 반역이라고 사료 됩니다. 더더욱 무서운 일은 조화성주 염무가 전하의 옥체를 노리 고 살인혈첩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집행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필시 무서운 인물로 추측됩니다. 전하께서는 어지러운 이 나라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셔야 합니다. 만일 미신이 살아난다면 반드시 뵐 수 있으리라 여기며.......> 서찰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고 끝에는 노명의 서명(書名)이 기재 되어 있었다. 실로 상상도 하지 못한 엄청난 소식이었다. 장천린은 눈썹이 파르르 떠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조화성... 감히 이 나라를 정복할 음모까지 꾸미다니.......' 그의 충격은 컸다. 그리고 왜 태진왕이 그토록 허탈해졌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장천린의 가슴에는 이제껏 한 번도 느끼지 못 했던 불덩이가 이글거렸다. 그것은... 한족이라는 이유때문이었다. '조화성!' 제 25장 錦衣衛의 領首 태진궁(太眞宮)의 객원(客院), 방안에 두 청년이 마주앉아 술을 들고 있다. 용백군, 즉 장천린과 원계묵이었다. 원계묵은 술잔을 내리며 약간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형님, 대체 언제까지 태진궁에 머무를 작정이십니까?" 그렇다. 원계묵이 그 말을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 다. 그들이 태진궁에 들어온 지도 어언 열흘이 지났기 때문이었 다. 장천린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담담히 말했다. "원제, 지금은 우리가 이곳을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원계묵이 의아해하자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태진왕은 속이 깊은 인물이야. 그는 분명 제남의 양가장으로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계묵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라는 존재를 십분 믿기 위해서 일 것이다." 하나 원계묵은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지금은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장천린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지. 만에 하나라고 태진왕께 드린 서찰이 가짜라면 그것을 믿고 움직이다가는 황실에 커다란 타격이 오지 않겠는가?" "......." "아무리 대명황실의 군사력이 막강하다해도 조화성과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없는 일이네." 그 말에 원계묵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렇다. 조화성의 고수는 수만을 헤아린다. 대명의 군사력이 수백만이란 한들 상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엄 청난 비극과 혼란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른다.' 장천린은 문득 미소지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우, 이 방 근처에 몇 명의 고수가 매복해 있는가?" 그 말에 원계묵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즉시 공력을 일으켜 청각을 집중했다. "열 세명입니다. 숨소리가 고르고 기척을 거의 느낄 수 없는 것 으로 보아 모두 일급 고수들입니다." 이어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뇌까렸다. "태진왕... 조금 너무하는군요." 그러다 문득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빛났다. "문으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장천린은 태연히 앉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잠시 후, 아닌 게 아니라 과연 문 두드리는 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들어 오시오." 원계묵이 딱딱한 음성으로 말하자 문이 살며시 열리며 백의미 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바로 백연연이었다.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 를 숙이며 말했다. "두 분 저를 따라 오시지요." 공손하면서도 기품있는 태도였다. 장천린은 몸을 일으키며 물 었다. "전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까?" 하나 백연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장천린의 눈이 반 짝였다. 그는 즉시 원계묵에게 전음을 전했다. '아우, 조금 고달픈 일이 생길 것 같다. 주의하게.' '?' 원계묵은 의아했다. 하나 그는 절대적으로 장천린은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아무 말 않고 장천린의 뒤를 그림자처럼 붙어 따랐다. 세 사람은 말없이 긴 회랑을 돌고 돌아 어느 상당히 넓은 대청으 로 들어서게 되었다. 백연연은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이어 그녀는 나가버렸다. 두 사람만 남게되자 원계묵은 의혹을 느끼고 전음으로 말했다. '형님, 확실히 느낌이 이상한데요?' 장천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응시했을 뿐이었다. 이어 그는 벽을 만져보았다. 벽의 촉감이 섬 뜩하도록 차갑자 그는 약간 놀랐다. '벽 속에 강철이 들어 있다.' 그는 내심 긴장이 되었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 다. 잠시 후 대청으로 다섯 명의 복면인이 들어왔다. 그들은 검 (劍)을 들고 있었으며 얼굴은 하나같이 백색복면으로 가리고 있었 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서히 두 사람을 포위했다. 장천린은 전음을 전했다. '원제, 상대는 대내(待內)의 일급 고수들이다. 일대 오인데 감당 해 낼 수 있겠는가?' 원계묵은 다섯 복면인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했다. 그 순간 그는 어깨 위의 장도를 약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동작은 오랫 동안 숙련된 준비동작이었다. 그는 빠른 시간동안에 이미 그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으음, 풍기는 기도로 보아 악씨 삼형제이상이다. 황궁에서 이 정도 무공을 쓰는 자들이라면?' 그는 내심 단정을 지었다. '소속이 금의위 아니면 동창중 하나다.' 금의위나 동창에 소속된 황궁대내고수들이 일반 무림고수와 또 다른 특출한 무공을 지니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원계묵은 서서히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동시에 전음으로 물었다. '형님. 대체 태진왕의 속셈은 무엇일까요?' 장천린도 그것이 궁금했다. 하나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 느 오인의 복면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하나 복면인들은 애당초 듣지 않은 듯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 다. 원계묵이 냉소하며 음산하게 웃었다. "후후, 태진궁에 감히 복면무리들이 횡행하다니 고약한 일이 군!" 어느 순간, 그는 결코 인정과 싸움을 혼동하지 않는 사람답게 이미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갈!" ㅆ! 검광(劍光)이 번득였다.섬광이 오인 중 한명을 두 쪽 낼 듯이 번쩍였다.순간 복면인도 기민한 반응을 보이며 검을 휘둘렀다. 캉! 불꽃이 튀었다. 순간 복면인은 휘청거렸으나 원계묵의 놀라움도 이만저만이 아 니었다. 손목은 물론 팔 전체가 떨어져 나갈 듯이 찌르르 울렸던 것이다. '이 자! 대단한 강자다.' 그는 일초로 상대의 능력을 시험한 것이었다. 이때 그의 귓전 으로 장천린의 전음이 들려왔다. '원제, 될 수 있으면 실력의 삼푼은 숨겨두게.' 원계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좌우에서 두 명이 전광석 화처럼 공격해 왔다. "후훗!" 원계묵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빛은 음산하고 비정한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한 순간 장도를 비스듬히 벼락처럼 가르 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야수처럼 변한 듯했다. 차차창! 파파파팍....... 카캉! 쩌 --- 엉! 실로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졌다. 불꽃이 우박처럼 퍼지며 가 공할 검광도광(劍光刀光)이 대청을 살벌하게 메웠다. 일대오(一對五)의 싸움은 숨막히는 접전이었다. 원계묵의 무공 은 가히 예술적이었다. 그의 도(刀)는 그의 손에서 자유자재로 춤 추고 있었다. 허공에 손을 그을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도기(刀氣) 가 뿌려지면서 단순한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무궁무진했 다. 가벼운 도(刀)같았으나 어느 때는 태산같은 묵중함으로 오인의 검을 짓눌렀고 어떤 때는 단지 기(氣)만으로 그들의 신형을 휘청 거리게 했다. 하나 그는 절대 우세도 열세도 보이지않는 국면을 유지하고 있 었다. 관전하던 장천린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굉장한 도법이다. 저정도 기법이라면 능히 천하제일도(天下第 一刀)가 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그는 마치 딴 사람같이 변한 원계묵을 바라보면 감탄했다. '평소에는 모르겠는데 일단 싸움에 임하니 원제는 마치 야수같 구나. 마치 싸움을 위해 태어난 무인같군.' 이때였다. 원계묵의 음산한 웃음이 들렸다. "흐흐흐, 얼굴을 가린 겁장이들! 이제 그만 탈을 벗어라!" 순간, 우우우우 ------ 웅! 그의 도에서 마치 아수라의 울음소리 같은 파공음이 울렸다. '웃!' 장천린은 흠칫 놀랐다. 그는 보았다. 원계묵의 도(刀)가 괴이하 게 펼쳐지는 순간 도영(刀影)에서 마치 환상처럼 아수라(阿修羅) 의 형상이 일어나는 것을....... '저것이 바로 수라구류도(修羅九流刀)!' "헉!" "크윽!" "흐 ... 흑!" 비명이 연달아 터졌다.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모두 뒤로 주르 륵 밀려나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모두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또 한 그들의 손아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복면 사이의 그들의 눈에는 모두 경악에 젖어 있었다. 이때였다. 문득 웃음소리가 대청을 울렸다. "하하하, 과연 마도(魔刀) 원계묵답군. 정말 대단하네." 박수소리와 동시에 대청안으로 삼인(三人)이 들어섰다. 그중 두 명은 태진왕과 백연연이었다. 나머지 한 명을 금포노인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그는 평범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수염은 특 징없이 길렀으며 키도 중키였다. 얼굴도 지극히 평범하여 잘 인상 에 남지 않는 그런 인물이었다. 나이는 오순이 약간 넘어보였다. 태진왕은 여전리 박수를 치며 걸어들어왔다. "전하!" 장천린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태진왕은 빙그시 웃었다. "미안하네. 백군(白君), 자네에 대한 여러 가지 조사 때문에 며 칠간 자네에게 소홀했네. 내 사과하지." 이어 그는 다섯 명의 복면인들을 바라보며 손을 저었다.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예!" 오인은 즉시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태진왕은 원계묵을 응시하며 말했다. "내 마도(魔刀)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네. 오늘보 니 과연 명불허전이군. 금의위의 다섯 고수가 손도 못쓰고 당하다 니 말일세. 하하하하."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태진왕의 기분은 몹시 유쾌한 듯했다. 원계묵은 내키지 않았으나 예를 표했다. "황송합니다." 태진왕은 대청 안쪽으로 걸어가며 자애스럽게 말했다. "자, 자리에 앉게. 백군!" 그는 장천린은 용백군으로 칭해 주고 있었다. 장천린이 자리에 들자 그는 비로소 금포중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분을 소개하겠네." 이어 담담히 설명했다. "이 분은 엽천우(葉天羽) 대인일세. 현재 금의위의 영수(領首)일 세." '금의위의 영수!' 장천린과 심지어는 원계묵까지도 충격을 느꼈다. 금의위(錦衣衛). 그것은 황제의 직속기관으로 대내(待內)의 모든 고수들을 장악 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의 집합체다. 그 권력은 가히 육부(六部)의 상서를 능가하며 승상(承相)과도 맞먹을 정도다. 황제의 친명을 받아 역모(逆謀)를 꾀하거나 간언(間言)을 일삼 는 간악한 자들을 체포구금하여 처단하고 정보를 캐내는 비밀기 관이므로 사실상 상대직분에 관계없이 언제든 무서운 실력을 행 사한다. 설사 승상이나 황족이라 해도 법에 저촉되면 언제든 처단 한다. 그러므로 관리들에게 있어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으음. 금의위의 실권을 태진왕이 잡고 있다더니 그 소문은 사 실이었구나.' 그는 곧 포권했다. "소생 용백군이라 합니다." 엽천우는 담담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용공자의 외조부인시 양응시대감은 노부도 옛날부터 존경해 왔소이다. 그 어른의 혈육을 만나니 실로 감회가 깊소이다." 이때 태진왕이 지시했다. "연연, 차를 준비해라." "네!" 백연연은 공손히 대답하고 몸을 우직였다. 태진왕은 장천린에 게 말했다. "백군, 자네가 나에게 한 말 중 조금도 거짓이 없음을 오늘 아 침에야 확인했네. 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자네에 대해 조사했는 지 자네는 궁금 할 것이네." 태진왕은 기침을 쿨룩쿨룩했다. 이어 엽천우를 흘낏 응시하며 말했다. "엽대인께서 나 대신 설명해주시겠소?" 엽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받들겠습니다." 이어 그는 장천린을 바라보며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용공자는 현재 대명이 처해있는 상황을 잘 아실 것이오. 안으 로는 환관과 간신들로 인해 황제폐하의 이목(耳目)이 가려졌고 밖 으로는 여진의 누르하치가 위협하고 있소이다. 뿐만아니라 남으 로도 왜구는 계속 골치를 썩히고 있소." 장천린은 말없이 들었다. "게다가 조화성등 무림세력이 극히 혼란한 정세를 틈타 누르하 치와 암중 동맹까지 맺었소." 엽천우는 충심이 우러난 음성으로 탄식했다. "만약 이대로 방치하면 대명의 앞날은 결코 장담할 수 없소." 이때 백연연이 향차를 끓여 들어왔다. 그녀가 차를 돌리는 동 안 얘기는 잠시 끊어졌으나 그는 곧 말을 이었다. "태진왕 전하께서는 이러한 난관을 뚫기 위해 한가지 계회을 세우셨소." 장천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나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즉 황실을 보호하고 대명을 지키기위한 특수정예부대인 이십 만 황실친위대(二十萬皇室親衛隊)를 조직하려고 계획을 세우신 것이오." 장천린은 그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실 로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 그는 회의를 금치못했다. 그거은 불가능하다. 현재 대명에 는 백만대군이 잇소 거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군비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엄청나다. 게다가 현재 황실의 재정(財政)은 엉망이 아닌가?' 그의 생각은 계속되었다. '이 상태에서도 또다시 이십만 황실친위대를 조직한다면 그 막 대한 자금을 동원키위해 백성의 부담은 커질 것이고 그렇게되면 중원은 더욱 피페해질대로 피폐해질 것이다.' 이때 엽천우 금의위 영수가 탄식했다. "실상 대명에는 백만대군이 있고 십삼행성(十三行省)에는 각 도 지휘사 아래 수십만 정병이 있으나 모두 숫자만 만을뿐 막상 실 전(實戰)에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소. 그런 의미에서 이십만 황실친 위대의 조직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오." 장천린은 급기야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 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자금입니다. 그리고 자금이 있다해도 이십만의 엄청난 인원을 어디서 보충한단 말입니까?" 엽천우는 담담히 말했다. "인원문제는 이미 확보해 놓고 있소이다. 일년 이내면 이십만 대군을 조직할 수 있소. 하나 용공자가 말했듯이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이오." 엽천우의 말에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렇군. 결국 나로 하여금 그 자금에 관해 상의하려는 의도였 군.' 엽천우는 눈에 기광을 흘리며 말했다. "중원에서 그 정도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세명 있소. 강남의 만금산장의 주인이자 강남제일의 상인인 금백만과 강북 용문전장의 주인인 상관홍이 바로 그들이오." 장천린도 그 말에는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하나 그들에게 그 막대한 군비를 조달시키기에는 너무도 어려 운 점이 많소. 더욱이 금백만은 이년전에 죽었소이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또 한명은 누구입니까?" 엽천우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한 번 알아 맞춰 보시겠소?" 장천린은 생각에 잠겼다. 중원의 거부라면 그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강남의 심재궁(深才宮)이나 육만춘(陸滿春)도 거부이긴 하나 금백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는 강남에서 강북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아는 한 모든 거부와 거상을 떠올려 보았다. 하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었 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안색이 변했다. '설마!' 이때 엽천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사십 오년 전 강남 귀주성의 금값이 한 차례 폭 락한 적이 있었소. 그뿐만 아니라 귀주성에 나돌아 다니던 돈의 반 이상이 모조리 어느 한 곳으로 쓸려 들어간 일이 있었소." "......!" "한 사람이 상상도 하지 못할 막대한 황금을 귀주성에 뿌리고 모두 돈으로 바꿔갔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소이다." 장천린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그는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황금(黃金)의 손(手)이라고 불리우는 탁일비(卓逸丕)를 말하는 것입니까?" 엽천우의 얼굴에 탄복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소이다." 장천린의 안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황금의 손 탁일비, 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이제 풍운(風雲)은 점점 더 회오리쳐 중원의 상계(商界) 깊숙한 곳까지 뒤흔들기 시작했으니... 과연? 제 26장 酒樓의 殺風 천륭객점(天隆客店), 주루의 삼층은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다. 일이층은 저녁시간이라 한창 북적대고 있었으나 삼층은 음식과 술값이 비싼 특별석이므로 손님이 한가했다. 장천린과 원계묵은 창가에 앉아 술을 대작하고 있었다. 원계묵 은 연거푸 석잔을 마신 다음 불만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시큰둥하 게 물었다. "형님, 대체 태진왕이 형님께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이십만 황실친위대에 필요한 군비를 조달해 달라는 것이네." "왜 하필 형님에게 그걸 부탁한단 말입니까?" 원계묵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자칫하면 자신의 일이 뒤로 미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장천린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의 외조부님이 대명의 충신이었던 양응 시대감이기 때문이네. 즉 나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지." 원계묵은 계속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어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그를 정시했다. "형님은대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득 태진왕의 말이 떠 올랐다. '탁일비는 엄청나게 많은 황금을 소유하고 있다. 그 분량이 어 느정도인지 추측할 수도 없을 정도라네. 허나 그는 지금 나이가 칠십이 넘어 수명이 다해가고 있지. 게다가 그에게는 일점혈육도 없네. 얼마 전 그는 황실의 금의위로 서찰을 보내왔었네. 그가 누 군가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있다는 내용이었네. 허허허, 그것 을 해결해주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황금의 삼분지 일을 주겠다 고 제의해 왔네. 백군(白君),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은 바로 그 삼 분지 일의 자금을 이용하여 사업을 벌여 군비를 조달해 달라는 것이네. 매년 필요한 자금만 보태면 되네. 그외에 남는 것은 모두 자네가 가지게. 황금 또한 마찬가지네.' 장천린은 그 말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삼분지 일 의 황금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 분명 엄청날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그 부탁을 받아들이기에는 한가지 난점 이 있었다. 그것은 취옥교 때문이었다. 지난 일년 반동안 그는 취 옥교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결과 그는 그녀가 북해(北海) 사태청 에 있음을 알아냈다. 허나 황금의 손이라는 탁일비가 있는 곳은 해남(海南)이었다. 실로 남과 북으로 이만리(二萬里)의 거리가 떨 어져 있는 곳이었다. 장천린으로서는 그 결정이 어려웠다. 대의를 택할것인가, 여인을 택할 것인가? 원계묵은 왠지 짜증이 나고 있었다. 그는 연거푸 술만 퍼마셔 대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불만이 꽉 차오르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장천린에게로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속이 부글 부글 끓고 있었다. 이때, 주루의 삼층으로 오 인이 올라왔다. 그들은 눈길을 끄는 차림새였다. 머리에 하나같이 죽립(竹笠)을 눌러쓰고 얼굴에는 면 사를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장천린과 원계묵에 게서 얼마 떨어지지않은 자리에 앉더니 식사를 주문했다. 그들은 죽립을 탁자에 벗어놓은 후 거리낌없이 웃고 떠들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 장천린의 전음이 원계묵의 귓전에 들렸다.. '아우, 죽립을 쓰면 머리에 죽립이 눌린 자리가 어느 정도 생기 는가?" 원계묵은 흠칫했다.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 오인의 머리 부분 을 응시했다. 과연 그들의 죽립 중앙 뚫린 부분이 닿았던 머리카 락은 깊이 눌린 자국이 있었다. 그는 의혹이 치밀었다. '가벼운 죽립에 저 정도의 자국이 날 리가 없다.' 원계묵은 문득 점원을 불렀다. "이봐!" "부르셨습니까, 나으리?" 점원이 달려왔다. "자네 조그만 거울 가진 것 있나?" "거울요?" 점원은 원계묵의 엉뚱한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원계 묵은 미소지었다. "조금 있다가 여자를 만나러 가는데 얼굴 좀 보려고 말이야." 그 말에 점원은 히죽 웃었다. "알겠습니다. 곧 갖다드립죠." 하나 그는 몸을 돌리며 내심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미친 놈, 그 독사같은 상판에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봐야 그 얼 굴이 그 얼굴이지.' 그는 비웃으며 거울을 갖다주었다. "고맙네." 원계묵은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음산하고 비정하게 생긴 마른 얼굴을 그것도 나자가 거울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실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원계묵의 의도는 딴데 있었다. 그는 거울을 들여다 보는 척하며 창가로 들어오는 석양의 빛을 오 인이 앉아 있는 탁자로 반사시켰다. 반짝! 다섯 개의 죽립으로 거울빛이 스칠 때마다 빛이 반짝거 렸다. '으음.' 원계묵은 내심 신음을 흘리며 거울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대체 무엇을 발견했기에? 이때 다시 삼층으로 또 한명이 올라왔다. 뜻밖에도 십 오륙세 가량의 귀여운 소녀였다. 양볼에 보조개가 매력적으로 패이는 아 름다운 소녀였는대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그녀가 꽃파는 소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장천린이 있는 곳으로 사뿐사뿐 걸 어왔다. "공자님, 꽃 한송이만 팔아주세요." 그녀는 몹시 가련해 보였다. 백합 한 송이를 들고 애원하는 그 녀의 큰 눈망울은 가련한 빛이 흘렀다. 입고 있는 옷도 허름한 마 의(麻衣)여서 더욱 연민지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원계묵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필요없다. 다른 곳으로 가봐라." 하나 장천린이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우, 오늘 가인(佳人)을 만나러 가는데 꽃이 한 송이 있는 것 이 좋지 않겠나?" 이어 그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이 꽃 얼마냐?" 그러자 소녀는 생긋 웃으며 백합을 내밀었다. "동전 한 냥이에요." 장처린은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동전을 주는 척하며 슬 쩍 소녀의 갸냘픈 손목을 잡는 것이 아닌가? "어머!" 소녀는 화들짝 놀랐다. "후후, 이 꽃보다는 네가 더 마음에 드는구나." 장천린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파렴치한이었다. 소녀는 그만 울 상이 되고 말았다. "나... 나리. 이 손... 좀......." 원계묵은 의아했다. 그가 보기에 장천린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장천린은 문득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원래 이 북경 천륭객점에는 추련(秋蓮)이 늘 꽃을 팔 러오는데 그녀가 안오고 네가 온 것을 보니 추련의 몸이 어디 아 픈가 보구나?" "그... 그렇습니다." 소녀의 얼굴이 왠일인지 창백해져 중얼거렸다.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가 보아라." 그는 손을 놓아주었다. 소녀는 살았다는 듯이 황급히 물러났다. 하나 소녀는 장사의 미련을 떨구지 못 하는 듯 주춤주춤 이번에 는 오 인의 죽립인들에게 다가갔다. "나으리들, 꽃 한송이만 팔아주세요." 그러자 죽립인중 한 명이 말했다. "얼마냐?" "동전 한 냥... 이에요." "허어. 굉장히 싸구나." 죽립인은 쾌히 말했다. "좋아, 좋아. 내가 사 주지." 헌데 그는 말하자마자 덥석 소녀를 안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것이 아닌가? "어머!" 소녀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나으리!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나 죽립인은 어디까지나 능글능글했다. "흐흐... 동전 한 냥만 주면 될 것 아니냐? 아니지, 아니야. 너무 싸니까 오늘 밤에 잘만 모시면 은자 열냥까지도 쳐주마." "하하핫!" "훗훗훗!" "킬킬킬!" 죽립인들은 모두 대소를 터뜨렸다. 소녀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죽립인은 응큼하게 지껄여댔다. "힘겹겠지만 우리 다섯 사람을 모두 모시면 오십 냥이다. 으하 하하하핫!" 이어 그는 마구 떡 주무르듯 소녀의 가슴을 주무르지 않는가? 어느새 그의 투박한 손은 마의를 뚫고 소녀의 가슴 속으로 들어 갔다. "아앗!" 소녀는 갸냘픈 비명을 질러대며 몸부림을 쳤으나 막무가내였 다. 죽립인은 소녀의 채 익지도 않은 유방을 마구 주무르며 음소 를 흘리고 있었다. 나며지 네 죽립인들도 그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점원이 달려왔다. "나으리들, 제발 좀..." 허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꺼져." 펑! 죽립인이 발로 걷어차자 점원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 졌다. 그 순간 죽립인은 소녀의 옷을 찢었다. 찌 --- 익! "악!" 소녀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소녀의 가슴 옷이 길게 찢 어지고 조그마하나 소담스런 소녀의 유방이 드러났다. "흐흐흐흐!" "킬킬킬. 아직 다 익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달겠는걸?" 죽립의 사나이들의 눈빛이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그들은 소녀 가 비명을 질러대건 말건 손장난을 계속했다. 소녀는 여러개의 손 에 유린되고 있었다. 주점에서 벌어진 이 횡포에 많지 않았던 손님들은 그만 슬금슬 금 눈치를 보며 자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죽립인들의 험한 말투 에서 그들이 무림인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악 놓아주세요! 제발... 으흐흑......." "흐흐, 왜 이리 앙탈이냐? 즐겁게 해 주겠다는데?" "흐흐, 그것 참 퍼득이니까 더욱 감칠 맛이 나는데?" 죽립인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어느새 소녀는 반라가 되고 있었다. 꽃바구니는 저맡큼 떨어져 나뒹굴고 바야흐로 눈뜨고 볼 수 없는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원계묵이 천천히 탁자 옆에 세워 두었던 장도를 잡고 있 었다. 장천린은 술잔을 들며 담담히 물었다. "참견할 것인가, 아우?" 원계묵의 눈이 야수처럼 번들거렸다. "저들의 정체를 파악했습니다. 놈들은 지금 나를 끌어들이려고 일부러 저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장천린의 질문에 원계묵은 차갑게 말했다. "조화성 제삼신마전(第三神魔殿)의 웅이오괴(熊耳五怪)라는 작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호탕하고 영웅인 척하나 죽음의 이빨을 숨 기고 있다는 살인전문가들입니다." 원계묵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장천린은 술잔을 들이켰다. "참견하겠다면 해보게. 하나 구태여 이쪽에서 살기를 먼저 들 어낼 필요는 없네. 그리고 이곳 객점에서 꽃을 파는 추련이란 소 녀는 없어." 원계묵의 얼굴에 흠칫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저 소녀의 손바닥에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네." 원계묵은 섬뜩함을 느꼈다. '대체 형님은.......' 그는 새삼 장천린에 대해서 기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원계묵은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다섯 사나이들 앞에 우뚝 선채 차갑게 말했다. "여보시오. 이건 좀 너무하지 않소?" 순간 소녀의 둔부를 쓰다듬고 있던 사나이가 음침하게 말했다. "뭐야, 네 놈은?" 이어 그는 면사사이로 징그러운 웃음을 흘렸다. "흐흐, 이 계집이 탐나는 모양이군?" 그는 두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그의 한 손은 호통치면서도 소녀의 젖가슴을 터질 듯이 움켜쥐 고 있었다. 원계묵은 차갑게 말했다. "미친 척하지 마라. 웅이(熊耳)의 다섯 귀신들!" "음?" 오인의 죽립인들의 몸이 굳어졌다. 하나 그것은 극히 일순간일 뿐이었다. "아악!" 소녀는 죽립사나이가 내던진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원계묵 앞 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 순간을 이용하여 사나이들은 탁자 위의 죽립을 잡더니 전광석화처럼 원계묵을 공격했다. 파츠츳! 죽립이 스치자 탁자는 마치 예리한 칼을 맞은 듯 두 동 강이가 났다. 원계묵은 뒤로 물러섰다. 소녀가 걸리자 그는 소녀 를 잡은채 옆으로 미끄러지며 장도를 후려쳤다. 쨍! 죽립과 장도가 부딪친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동시에 죽립이 찢어졌다. 그리고 그속에 시퍼런 광채의 철륜(鐵輪)이 나 타나는 것이 아닌가? "뒈져랏!" "차 --- 앗!" 위잉! 쌔애애앵! 다섯 개의 철륜이 상중하와 좌우로 원계묵을 공격했다. 원계묵 의 두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뿜어 나왔다. "흐흐흐흣!" 그는 이빨을 들어내며 괴소를 흘리더니 장도를 선풍처럼 흔들 었다. 위 --- 잉!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그것은 상대의 공격은 아예 완 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웅이오괴는 흠칫했다. 그들은 설마 원계묵이 이토록 무ㅁ게 공 격할 줄은 몰랐다. 카카캉! 쩌정! 쩌정! 불꽃이 퉁겼다. "아악!" "켁!" "크악!" 처절한 비명이 터지며 삼인이 허공에서 두 동강이 나며 떨어졌 다. 그들의 철륜도 동강난 채였다. 하나 원계묵도 무사하진 못했 다. 그의 옷자락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풀거렸다. 철륜에 당한 것 이었다. 하나 놀랍게도 피는 한방울도 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살결은 철륜에 스친 자리가 붉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네 놈이 벌써 현문강기(玄門 氣)를 익혔단 말 이냐?" 나머지 두 명은 이를 갈더니 다시 공격했다. 츠츠츠츳! 위이이잉! 두 개의 철륜이 가공할 기류를 뿌리며 원계묵의 옆구리와 목을 양단할 듯 공격해 왔다. 원계묵의 눈은 비정했다. 그는 냉소를 터뜨렸다. "가거라! 수라구류도 중 일초(一招)인 수라초현(修羅初現)이다!" 순간, 우우우웅! 무서운 도기(刀氣)가 시커먼 아수라의 환영을 일으키며 뒤덮였다. 실로 믿을 수 없는 패도적인 도세(刀勢)였다. 한순간 두명의 모습은 도세에 파묻혔다. "으아악!" "크아아!" 처절한 비명이 아수라의 도형 속에서 들렸다. 그들은 즉사한 것이었다. 실로 가공할 도법이었다. 원계묵은 장도를 내렸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보던 점원은 안색이 퍼렇게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한편, 꽃팔이 소녀의 안색도 창백해져 있었다. 원계묵은 그녀를 응시했다. "가... 감사합니다. 나으리......" 소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원계묵의 눈이 괴이하게 변했다. "음!" 허나 그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넓은 등이 소녀에게 그대 로 노출되었다. 손만 뻗으면 명문혈에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소 녀의 눈동자에 새파란 독기가 빛났다. "죽엇!" 슉! 믿을 수 없는 빠르기였다. 어느 틈에 소녀의 손에는 독비 (毒匕)가 쥐어져 있었고 몸과 비수가 하나가 된 채 원계묵의 등을 찔렀다. "악!" 소녀는 비명을 질렀다. 비수가 명문혈에 적중된 순간 박히기는 커녕 상상도 못할 반탄력으로 비수가 퉁겨나간 것이 아닌가? 소 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눈을 크게 뜨며 순간적으로 입을 벌렸 다. 입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쿵! 그녀는 눈동자가 경직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비로소 그녀의 목이 몸체에서 분리되며 떼구르르 굴렀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원계묵은 거의 육안으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장도를 휘둘러 소녀의 목을 베어버린것이었다. 그 광경에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잔인하군. 놔줘도 될 것을 일부러 틈을 보여 상대에게 공격하 게끔 유도한 뒤 죽여버리다니!' 이때 원계묵이 다가왔다. 그는 장천린의 표정에서 그의 심중을 눈치챈 듯 했다. "잔인하다고 여기십니까?" "부인하지 않겠네." 장천린의 대답에 원계묵은 입술을 씰룩였다. "흐흐, 나는 사부와는 좀 다릅니다. 그 분은 천하 그 누구에게 도 헛점을 보이지 않았지만 결국은 허(虛)를 보여 돌아가셨습니 다." 원계묵의 음성은 스산하기만 했다. "나는 나를 노린 놈들을 절대로 살려두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 다."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한데 그때였다. 문득 기이한 웃음이 들려왔다. "후훗, 이번에야 말로 현장에서 걸렸군." 장천린과 원계묵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삼층 계단 어귀에 한명의 관복을 입은 초로의 청수한 인물이 서 있었다. 짧은 수염 과 혜지가 어린 눈빛에 그는 기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로 범선에서 만남 제형안찰사사의 형부도독 단위제였다. 장 천린은 몸을 일으읔켰다. "이 곳에서 또 만났군요. 우리는 인연이 깊은 것 같습니다." 단위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헉, 그런 것 같습니다." 이어 그는 주루에 쓰러져 있는 여섯 구의 참혹한 시신을 쓸어 보며 원계묵을 향해 말했다. "원대협의 도법은 실로 대단합니다. 본인의 눈이 놀라다 못해 찢어질 뻔 했소이다." 원계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위제는 시체를 다시 바라 보며 혀를 찼다. "허허, 참. 참혹하군." 장천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도독께서 직접 보셨다시피 이번 상황은 내 아우의 죄가 아님 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단위제는 그를 향해 돌아서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정당방위란 말씀이시구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신 그대로입니다." "헛헛,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이제까지 공력을 끌어올리며 여차하면 손을 쓰려했던 원계묵의 눈이 차츰 부드럽게 풀렸다. 이때 계단으로 몇 명의 무사들이 뛰어왔다. 그들은 주루의 살 인극에 대한 손님들의 신고를 받고 몰려온 북경성의 관인들이었 다. 점원이 그들이 올라오자 반색을 했다. "바로 저자가 살인을 했습니다!" 그러자 관인들은 눈을 번뜩이며 점원이 가리킨 원계묵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 중 한 중년관인이 원계묵을 노려보며 말했다. "실례지만 관청까지 좀 가주시겠소?" 원계묵의 눈이 꿈틀거렸다. "관청?" 그는 냉소했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 다시 예의 야수같은 빛이 발해졌다. 원계묵은 애당초 관청따위는 경시하는 습관이 있었다. 비록 관과 충돌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관이나 왕법을 두 려워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때였다. "하하핫 잠깐만!" 단위제가 나섰다. 관인들은 그제서야 그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단위제는 품 속에서 하나의 영패를 꺼내더니 그들에게 보여주었 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관인들은 기겁을 하고 놀라더니 모두 무릅을 꿇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영반(大領盤)께 인사드립니다!" 순간 장천린은 흠칫했다. '대영반?"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그가 알기로 단위제는 산동성 제 형안찰사사 소속의 형부도독이었다. 그 신분은 비록 산동성 내에 서는 막강한 권력이었으나 황도 북경성의 관인들까지 부복케 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는 심중에 커다란 의혹을 느꼈다. '단위제, 저 사람에게 또 다른 신분이 있단 말인가?' 이때 단위제는 영패를 거두며 관인들에게 지시했다. "이번 사건은 내가 처리하겠다. 너희들은 어서 이곳의 시체나 옮겨라." "넷!" 관인들은 즉시 바닥에 쓰러진 여섯 구의 시체를 처리하기 시작 했다. 그들의 단위제를 대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신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 단위제는 몸을 돌리며 장천린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용대인,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술 한잔 하시겠소이까?"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관청만 아니라면 아무 곳이나 상관없습니다." "하하하하! 원 농담도!" 단위제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는 원계묵을 바라보 며 말했다. "자 원대협께서도 같이 가십시다." 원계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 장천린이 몸을 일으켜 그의 청에 따르자 그도 역시 말없이 뒤를 따랐다. 단위제는 뭐가 그리 기분이 유쾌한지 계속 껄껄 웃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 삼인은 아래로 내려갔다. 第 27 章 두 怪物 그는 어릴 적부터 밝은 것을 싫어했다. 그는 유난히도 어두움 을 좋아했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아니 조용하 다 못해 숨막히는 적막을 좋아했다. 그는 평생 행복이란 말을 가장 증오했다. 따라서 행복해 보이 는 인간들을 보면 모조건 살심(殺心)을 느꼈다. 허나 그러면서도 그는 살인(殺人) 그 자체는 별로 즐기지는 않았다. 그가 살고 있 는 곳은 어두운 침묵의 숲이었다. 늙은 고송(古松)들만이 빽빽이 우거져 있는 곳, 하루종일 가야 했빛 한 올 스며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육십년 이상 을 살아왔다. 현재 그의 나이 구십 팔세,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귀 송자(鬼松子)라고 불렀다. 귀송자(鬼松子) 혁련노후(赫連瑙侯),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그가 평생동안 틀어박혀 살아온 이 침묵의 숲에서 보내려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음울한 성격을 지닌 괴인, 그는 아무래도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렇게 침 묵의 숲에서 살아가게 될 것 같았다. × × × 조그만 호수(湖水), 배 한 척이 떠 있다. 그리고 그 배 위에는 일남일녀(一男一女)가 나란히 다정한 모습 으로 타고 있었다. 남자는 미서생(美書生)이었다. 너무나도 섬세하 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사내였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그보다 아름다운 남자는 없을 것이다. 유려하고 섬세한 용모의 얼굴은 마치 조각의 신(神)이 새긴 듯 미려했다. 그 앞, 젊디 젊은 미녀(美女)였다. 이제 이십 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여인은 아름답고 청수했다. 또한 그녀에게서는 완숙 한 느낌이 들었다. 미서생은 옥선(玉扇)을 가볍게 부치고 있었다. 서늘한 가을 바 람이 불고 있었다.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미남미녀가 앉아 그 풍 취를 즐기는 광경은 누가 보더라도 경탄과 부러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미녀는 살짝살짝 미서생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났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그녀는 내심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 그리고 가장 멋진분.......'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보랏빛 꿈에 젖었다. 그녀는 지난 보름 간이 마치 꿈결같기만 했다. 그것은 그녀의 일평생을 통해 가장 행복하고 달콤한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경랑(京娘), 그녀는 명문(名門)의 규수였다. 그녀는 한 달 전 결혼을 한 몸이다. 그리고 그녀는 행복했다. 헌데 보름전, 그녀의 앞에 돌연 한 사람이 나타나면서 그녀의 일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 사람은 바로 지금 눈앞에 있 는 미서생이었다. 그녀는 미서생이 나타난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애욕에 빠지 고 말았다. 미서생은 마치 사랑의 마법(魔法)이라도 가진 듯 그녀 와 미서생은 순식간에 깊은 관계에 빠지고 말았다. 도저히 거부할 수도, 거부하기도 싫은 사랑의 마약에 취해버린 것이었다. 경랑은 남편 몰래 미서생과 관계를 맺고 말았다. 그녀 의 가문이나 교양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그녀는 조금 도 후회하지 않았다. 미서생은 그녀가 꿈에 그리던 그런 사람이었 고 그녀를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미서생은 항상 부드럽고 온화했다. 또한 박학다식했으며 그녀 에게 보내는 말이나 눈짓, 손짓 하나가 그지없이 달콤하여 경랑은 그만 넋을 빼앗길 지경이었다. 이제는 도저히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그런 사이가 되어 버렸다. 경랑은 결코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을 만나게 해준 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소? 경랑?" 부드럽다. 이 세상 어떤 여인일지라도 그 달콤한 음성에는 녹 아버리리라. 경랑은 홍조를 띄우며 말했다.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미서생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듣기 싫진 않군. 정말이요?" "진심이예요. 정말이예요." 경랑은 꿈꾸듯 말했다. "저는 언제나 당신 생각을 하는 걸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심지어는 잘 때에도요......." 미서생은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는 그녀의 귓볼에 입술 을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만약에 말이오." "......?" "내가 당신에게서 떠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순간 경랑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아...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세요." 미서생은 그녀의 뺨에 입술을 대면서 속삭였다.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지 않소?" 경랑은 입술을 삐죽이며 마치 자신에게 하듯 말했다. "저는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아마... 죽어버릴 거예요." 미서생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남편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오?" "......!" 경랑의 안색이 변했다. 허나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 했다. "물론... 이예요." 미서생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다정하게 물었다. "남편에게 떠난다는 편지를 쓰고 나왔소?" "네......." 경랑은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부정한 여인 이다. 허나 아직껏 너무도 사랑에 빠진 나머지 그런 것을 한 번도 생 각해 본 적이 없었다. 헌데 지금 새삼 상기되자 그녀의 가슴에 찌 르는 듯한 양심의 가책이 전해져 왔다. 미서생은 중얼거렸다. "남편이 보면 기절하겠군." 그렇다. 이제 결혼한 지 한 달, 경랑의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선비이며 성격이 너그러웠다. 그리고 경랑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 었다. 그런 그에게도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고 외간 사내와 떠나며 편지를 남겼다는 사실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충격이 되리라. "어쩔 수 없는 일이예요. 경랑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후후." 미서생은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문득 경랑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떠나야지요. 패물을 많이 가지고 나왔으니 이 정도면 아 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경랑의 눈에는 기대에 찬 빛이 일렁거렸다. 참다운 행복, 그녀는 그 행복을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려 하는 것이다. 이 전에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녀는 현재의 사랑에 완전히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어디로 가고 싶소?" 미서생의 질문에 경랑은 그의 가슴에 기대며 꿈꾸듯 말했다. "당신 뜻대로 하세요. 어디로든지." 미서생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 전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소." "......?" 경랑은 의아하며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미서생은 담담히 말했다. "당신과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오." "......!" 경랑의 안색이 일순 핏기를 잃고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 당신... 무슨 농담을......?" 그러자 미서생의 두 눈이 갑자기 무감동해졌다. 예전에는 따스 한 관심과 유정(有情)으로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눈이었으나 한 순간 그 눈은 마치 돌처럼 무심해지고 말았다. "나는 평생 농담을 한 적이 없다." "당... 당신......." 경랑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경랑, 너라는 여자는 매우 이상해. 대체 너는 나의 대해 얼마 나 알고 있지?" "......!" 미서생은 경멸의 눈빛으로 경랑을 바라보며 비정한 말을 계속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나가는 낭인에게 몸을 주고, 거기다 남편 까지 버리고 따라오겠다니 말이야." 경랑의 얼굴은 창백해지다 못해 ㅎ빛이 되었다. "누가 여인을 보고 아름답다고 했던가? 후후후, 모두 어리석은 말이야." 미서생의 무감동한 웃음이 조용한 호변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 의 두눈은 마치 회색빛 하늘 처럼 공허해졌고 그토록 열정적이던 아름다운 얼굴은 음울하게 변했다. 이윽고 미서생은 몸을 일으겼 다. "안돼요!" 경랑은 갑자기 넋잃은 듯 외쳤다. "헤어질 수 없어요! 저는 가문과 남편마저 버리고 당신을 따라 왔어요!" 그녀는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듯이 미서생을 잡고 매달렸다. "지금 당신은 저와 농담을 하고 있는 거죠, 그렇죠? 그렇죠?" "......." "제발...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얘기해 주세요. 네?" 그녀의 얼굴은 비맞은 배꽃처럼 처연해졌다. 허나 미서생이 그 녀에게 준 것은 냉혹한 말 뿐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 적이 없어. 단지 네가 스스로 사랑했을 뿐이 야/" "......!" 경랑은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완전히 넋이 빠진 듯했다. "분명히... 저... 저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전신을 떨고 있었다. "후후, 올해 만도 네가 열 아홉 명째로 내가 사랑한 여인이야." "......!" 순간 경랑의 얼굴은 완전히 백지장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손 이 힘없이 풀어졌다. "안녕, 경랑!" 미서생은 무감정하게 그렇게 말했다. 경랑은 망연히 그를 응시 했다. 완전히 혼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고 그녀의 눈에서는 하염없 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득했다. "저는... 어디로 가지요?" 미서생의 말은 잔인했다. "내 길이 아닌 걸 어찌 알겠나? 하지만 아까 너는 대답했었지. 나와 헤어지면 어떻게 하겠다고 말이야." 슉! 순간 미서생은 배에서 신형을 날렸다. 그의 날렵한 신형은 수면을 스쳐 연못가로 날아갔다. 놀라운 신법이었다. 허나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때, 등 뒤에서 풍 덩!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미서생은 비로소 연못가에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연못의 수면 위에 포말이 솟고 있었다. 선연한 피가 수면에 번지고 있었다. 미서생은 조금도 표정의 변화없이 중 얼거렸다. "그래, 맞았어. 그게 너의 길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최소한 이 모용초는 모는 여인이 그래 주기를 바라고 있지." 아! 들었는가? 모용초(慕容焦), 모용초라고 그랬는가? 그렇다면 그가 바로 만승금도 도담후를 죽인 무정도(無情刀) 모 용초 --- 그였단 말인가? 모용초는 연못가를 지나 그늘진 곳으로 걸어갔다. 숲은 울창한 송림(松林)이었다. 햇빛조차 스며들지 않을 정도의 밀림이었다. 이 때, 숲 안으로부터 문득 음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놈이야." 동시에 고송 사이로 한 명의 노인이 걸어나왔다. 그는 왜소한 늙은 노인이었다. 일신에는 헐렁한 갈의를 걸치고 있었고 피부는 메마르다 못해 풋석푸석해보였다.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이었고 머 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은 퀭하니 들어간 것이 우울해 보였다. 그가 나타나자 모용초는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노선배!" 갈의 괴노인은 징그럽다는 듯이 칼칼한 음성으로 내뱉았다. "얼음보다 차갑고 뱀보다 비정한놈!" 그는 경멸하듯 뇌까렸다. "나는 인간을 죽였지만 인간의 감정까지 죽이진 않았어. 타인 의 행복을 증오하지만 그것을 최소한 깨지는 않았어." 갈의 노인의 퀭한 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혐오의 빛이 흘러 나왔다. "허나 네놈은 인간을 죽이면서 감정도 함께 죽이고 뿐만 아니 라 행복한 모든 것을 부수려 하고 있어!" "모두 보셨습니까?" 모용초는 히죽 웃었다. "그렇다. 못된 놈!" "후후, 살아갈 가치가 없는 계집이었습니다." "내가 너였다면 그냥 검으로 내리쳤을 것이다. 허나 네놈은 그 녀 스스로 죽게 했어. 완전히 갈 곳을 없게 만든 다음 말이야." "후후, 죽을 때가 되었는지 말씀이 많아지시는군요." 모용초의 말은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네놈이 보기 싫어서라도 일찍 죽을 것이다." "후후, 아무튼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모용초는 이어 궁금한 듯이 물었다. "북경에서 어른의 표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째서 죽어 들어가실 관(棺)이나 만들지 않고 다시 나오셨습니까?" 갈의 노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염무는 조금이라도 쓸 수 있는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 아." "......!" 모용초는 침묵했다. 잠시 후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를 맡으셨습니까?" "원계묵!" 갈의 노인의 말에 그는 흠칫했다. "강적을 맡으셨군요." "좀 아는가?" "약간 알지요. 놈은 아주 무서운 놈입니다. 저와 부딪쳐 보지 않아서 모르겠읍니다만... 아마 거의 비슷한 경지일 것입니다." "흐흐, 이미 악씨(岳氏) 삼형제와 웅이오괴(熊耳五怪)가 당했어. 아주 대단다더군. 수라구류도란 정말 명불허전이야." 갈의노인은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 늙은이도 위험할지 모르겠어." 갈의노인의 눈이 음울하게 젖었다. "후후, 귀송자 혁련노후께서도 자신없다는 말씀을 하시니 이상 하군요." "녀석, 내 몸도 이젠 옛날같지 않아. 세월 속에서 모든 것이 너 무 늙어 버렸어." 모용초는 눈앞의 늙은이, 즉 귀송자를 바라보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수십년 전, 한때 어둠 속의 제왕(帝王)이라 불리우던 공포의 상징이던 인물, 그런 인물이 저토록 나약한 말을 하다니. 그는 문득 가슴이 허전해 짐을 느꼈다. 이때 귀송자가 괴소를 터뜨렸다. "훗훗... 놈, 내 나이도 이 년만 지나면 백 세야. 이제는 내가 태 어난 어둠의 숲에서 영원히 침묵에 빠지고 싶은 게야." "......." 문득 귀송자는 생각난 듯 물었다. "네놈은 이 북경에 웬일이냐?" 모용초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냥 지나던 중입니다." 귀송자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용초, 너는 언제나 그 빌어먹을 짓을 그만 둘 작정이냐? 벌 써 백 명 이상의 행복한 미녀들이 네놈 손에 저주를 받아 죽었 어." 모용초의 두 눈이 다시 회색의 무감동한 빛으로 돌아왔다. 그 는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도 역시 잿빛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하듯이 중얼거렸다. "나의 생명이 끊어지든... 그녀... 취영이 죽든... 둘 중 하나가 이 루어질 때까지는... 계속할 것입니다." 귀송자는 징그럽다는 듯 내뱉았다. "네놈은 그 언젠가 그 일 때문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것이 다." "후후후, 어쩌면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보다 강한 놈이 나타나 내 심장에 칼을 푹 꽃아 줄 날을 말입니다. 어차피 살 의 미가 없는 생이니까 말입니다." 그의 두 눈은 완전히 잿빛이었다. 귀송자는 탄식할 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모용초를 아 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모용초를 손자처럼 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모용초에게는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용초의 가슴 속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허나 이해는 할지언정 그의 행위에 찬동을 할 수는 없었다. 웬지 모용초의 인생이 자신의 전철을 밟아가는 것 같은 끔찍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귀송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언젠가 먼 훗날이 되어 내 나이 때가 되면 네놈은 반드시 후 회할 게야." "하하하하!" 모용초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짐짓 활기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어른의 무덤에 술 한 잔을 뿌려 드리지요." 그는 문득 앞장섰다. "자 가시죠. 십 년 만에 뵈었는데 술 한 잔 해야지요. 시시껄렁 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말입니다." 귀송자는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좋아!" 두 괴인, 그렇다. 그들은 비록 나이는 다르고 생김새도 천지차이였지만 괴인임엔 틀림없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불 행한 과거를 가진 괴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는 그들은 거나하게 술 한잔을 걸치기 위해 어디론가 로 나란히 떠났다. 이곳은 북경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第 38 章 訣別 "백군(白君), 자네가 허락하니 내 마음 실로 기쁘구나." 태진궁(太眞宮) 깊은 밀전(密殿), 태진왕은 기쁜 듯 장천린의 손 을 잡았다. 장천린은 담담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치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나란히 밀전을 나와 태진궁의 후원을 거닐었 다. 일국의 친왕과 한낱 젊은 상인(商人)으로서는 파격적인 관계 랄 수 있었다. 하나 장천린과 함께 후원을 걷는 태진왕의 얼굴에 는 흡족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백군, 자네의 나이가 몇 살인가?" "이십 이 세 입니다." "헛헛, 좋은 나이다." "......." "옥교라는 여인을 아직도 사랑하는가?" "......!" 태진왕의 질문에 장천린은 잠시 침묵했다. 하나 곧 그는 담담 히 말했다. "사랑합니다." 태진왕은 너그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자애스럽게 말했 다. "자네의 일이 잘 이루어 졌으면 좋겠구나." "......." 태진왕은 시선을 돌려 화원에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며 부드럽 게 말했다. "부탁한대로 자네의 과거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태진왕은 한 송이의 국화를 꺾더니 코 끝에 대고 냄새를 맡았 다. "해남도(海南島)로는 언제 떠날 작정인가?" 장천린은 즉시 대답했다. "내일 떠나겠습니다." 이어 그는 태진왕에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조화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 태진왕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황실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처단할 힘이 없네." 태진왕은 국화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장천린은 염려스러운 듯이 말했다. "노명어른 말대로라면 전하를 노리는 자객이 있을 것입니다." 태진왕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네." "하오나......." "허허......." 태진왕은 낮게 웃고 나서 그를 바라보며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어제부터 금의위의 본부가 태진궁으로 이동하였네. 금의위의 영수인 엽대인이 항시 내곁에 있을 걸세." "......." 장천린은 그 말을 듣고도 웬지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담후 같은 고수도 그 철저한 방어 속에서 결국 쓰러뜨린 조 화성의 자객들이 아닌가? 그는 금의위의 막강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일말의 불안감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엽대인의 능력을 믿네." 태진왕은 자신있게 말했다. "그는 비록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나 누구보다도 무서운 인물이 네." 태진왕은 걸음을 멈추고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자네만 일고 있게." "......?" "엽대인의 사문은 바로 남해신궁(南海神宮)이네." '남해신궁!' 장천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남해신궁(南海神宮)! 남해의 바다(海) 어디엔가 전설처럼 내려 오는 섬(島)에 있다는 신비문파(神秘門派)다. 그들이 쓰는 무공은 중원무학과 크게 다른 종류였으며 극히 신비무쌍하다는 풍문이 수년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엽천우란 이름은 가명일세. 그의 본 신분은 남해신궁의 제 십 삼대 궁주(宮主)인 축조망(竺祖望)이네." "......!" 장천린의 놀라움은 가일층 더했다. "그의 무공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네. 조화성주의 무공 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그의 무공도 결코 아래는 아닐 것이네." 장천린은 비로소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렇군. 태진왕이 이십만 황실친위대를 조직하려는 것도 결국 은 축조망의 도움이 있었기에 실현에 옮기려는 것이로구나.' 그는 문득 한가닥 의혹을 느꼈다.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 신비의 남해신궁은 수백 년 간 중원과 내왕이 없었는데 어떻게 태진왕과 연결을 이룰 수 있었단 말인가?' 태진왕은 그의 의중을 눈치챈 듯 빙그래 미소지으며 말했다. "원래 나는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네. 그래서 젊어서 한 분의 기인(奇人)을 사부로 모시게 되었네." "......!" "그분이 바로 전대(前代)의 남해신궁의 궁주라네." 장천린은 흡칫했다. "축조망은 결국 사문으로 보면 나에게 사형(師兄)뻘이 되는 셈 이네." 장천린은 이제야 태진왕이 그토록 축조망을 믿고 그에게 금의 위의 대권을 넘기고 또 그토록 신임을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태진왕은 문득 돌아서며 그를 주시했다. "백군,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이 모든 비밀을 자네에게 말해 주는 이유를 아는가?" 장천린은 의아했다. "모르겠습니다. 전하." "자네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자네에게서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 할 강한 신뢰를 느꼈네." "......!" 장천린은 웬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진 왕이 그의 손을 잡았다. 친왕의 손은 뜨겁고 부드러웠다. "자네가 이번 해남에 가도록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갈등을 겪었 는지 이해할 수 있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별 말씀을 어차피 누군가가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허허허." 태진왕은 의미모를 웃음을 흘렸다. 후원에 낙엽이 지고 있었다. 조금은 철 이른 낙엽이었다. 태진왕은 문득 중얼거렸다. "이제 곧 가을이 오겠군." "......." "백군 아니 천린(天 )." "......?" 장천린은 문득 그의 음성이 이상함을 느꼈다. "만약에 말일세. 내가 무슨 사고로 죽게 된다면 보광사(菩光寺) 의 해우(海宇) 스님을 만나보게." "전하......!" 장천린은 흠칫했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치밀었던 것이다. 하 나 태진왕은 등을 돌리고 뒷짐을 진 체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올 겨울... 유난히 춥겠어......." "전하......." × × × 구룡상선은 북경에서 조금 떨어진 대운하(大運河)의 하안(河岸) 에 정박하고 있었다. 배의 갑판 위, 두 청년이 서 있었다. 운하를 스치는 바람은 제법 찼다. 그 바람을 맞으며 원계묵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정말... 해남으로 가실 작정입니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 일은 굳이 형님이 아니더라도 할 사람은 많습니다. 더욱이 형님이나 나는 관부(官府)의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이미... 결정했네." "......!" 원계묵은 시선을 홱 돌려 대운하의 푸른 물결을 응시했다. 잠 시 후 그는 물었다. "이번 일이 얼마나 세월을 소모시킬지 아십니까?" "......." "형님, 현 대명의 황실이 이 모양이 된 것도 모두 그 잘난 황족 들 때문입니다. 나는... 천하게 자라와서 그런지 몰라도 그 비단 옷을 입은 작자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심지어 태진왕까 지도 말입니다." "......." 장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면 원계묵은 계속 이야기 했 다. "그들이 저지른 일은 그들이 알아서 처리해야 합니다. 형님은 그들의 도움없이도 얼마든지 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우가 돕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태진왕에게 거절의 뜻 을 전하십시오." 그의 어조는 강력했다. 장천린은 듣고 있다가 문득 담백하나 강한 의지가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아우, 나는 지금 태진왕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돕는 것이다." 순간 원계묵의 눈썹이 꿈틀 솟구쳤다. 이어 그는 음산한 웃음 을 흘렸다. "흐흐, 형님이 무슨 신이오? 사업을 하고 대명황실을 돕고 또 조화성을 상대하려는 나를 도울 수가 있단 말이오?" 그의 말에는 조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장천린은 그의 말에 대 꾸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시선을 들어 하늘을 응시했을 뿐이었 다. 문득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원제의 말이 맞다. 나는 인간이다. 그것도 가장 평범한 부류의 인간에 불과해. 내 마음을 진심으로 말하면 해남보다는 북해(北 海)쪽에 기울어져 있다. 옥교(玉嬌), 그녀를 만나고 싶은 거다. 하 나... 하나.......' 원계묵은 장천린을 노려보며 말하고 있었다. "형님이 황실일만 관여 안하면 나는 형님의 사업을 도우며 내 힘을 키울 수 있소. 조화성의 염무를 언제고 제거할 힘을 말이오. 하나 형님이 황실을 도우려 해남으로 간다면 나의 일은 언제 이 루어 질지 아득하기만 할 뿐이오." 장천린은 문득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우." "말하시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자네를 구속할 능력이 없다. 자네가 떠나고 싶다면 떠나 게." 장천린의 말에 원계묵은 흡칫하며 안색이 굳어졌다. 잠시후....... 그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는 시선을 운하로 향했다. "진심...이오?" "......." 장천린이 말이 없자 원계묵은 문득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그는 아빨을 지그시 물었다. "어차피 혼자였소. 외로운 한 마리 늑대처럼 말이오." 그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은 성난 야수의 그것이 되고 말았다. "몸 건강하시오. 형님."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장천린은 저만큼 걸어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무운(武運)을 빌겠다." 원계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해안으로 연결된 목교를 건너 땅으로 내려선 후 뒤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져 버렸다. "아우......." 장천린은 망연히 중얼거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정이 들은 원계묵이었다. 그는 늑대처럼 고독하고 살모 사처럼 차가운 원계묵의 그 눈빛에서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정을 느꼈다. 그 동안 두사람은 마치 피를 나눈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 이 지냈다. 그런데... 헤어졌다. 너무도 간단히 두사람은 헤어졌다. 서로의 생각하는 바가 틀렸기에 융합하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다. 막상 원 계묵이 떠나자 장천린은 갑자기 가슴이 뻥 뚫린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바람에 등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멋대로 춤을 추었다. 장 천린은 한 동안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서 있기만 했 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등 뒤에서 너털웃 음이 들려왔다. "헛헛헛, 용대인, 여기서 웬 바람을 맞고 계시오?" 장천린은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는 흡칫했다. 두명이 서 있었 다. 한 명은 형부도독 단위제였고 다른 한 명은 바로 태진궁에서 본 적이 있던 백연연이었다. "단도독, 백소저......." 그는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단위제는 수염을 손가락으로 꼬 며 예의 그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헛헛, 뜻밖인 모양이군요. 용대인." 장천린은 비로소 물었다. "어떤 일로 두 분께서 이곳에 오셨소이까?" 단위제는 껄껄 웃었다. "그날 용대인과 먹은 술이 모자란 듯하여 더 마실까 해서 이지 요." 장천린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실상 그는 지금 술을 마실 기분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 곧 단위제는 정색을 하며 말했 다. "사실을 태진왕 전하의 명을 받고 이곳에 온 것이오." 장천린은 문득 태진왕이 그와 헤어지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내일 안으로 내가 자네에게 유능한 두명을 보내주겠네. 분명 자네의 일에 도움이 될걸세' 장천린은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두사람을.......' 단위제는 문득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전하의 서찰이 있소이다." 장천린은 서찰을 받아 그 자리에서 읽어 보았다. 틀림없는 태 진왕의 친필(親筆)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백군(白君), 단위제(檀韋帝)와 백연연(白娟娟)을 자네에게 보내 네. 그 두명은 자네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네. 단위제 는 신분이 산동성(山東省) 형부도독이나 실제는 동창(東廠:황실 비밀첩보조직)의 대영반(大領盤)이라나 이중 신분을 가지고 있네. 그는 심기가 깊고 사물(事物)을 관찰하는 시야가 예리할뿐더러 또 한 무공이 대단히 높네. 백연연은 여인의 몸이나 남들에게 없는 특이한 능력(能力)이 있네. 그들 두 명은 나의 수족과 같은 인물 이니 믿고 함께 일해 주기 바라네. 태진왕(太眞王)' "......." 장천린은 서찰에서 눈을 떼었다. 이어 그는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과 함께 일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헛헛헛." 단위제는 너털웃음을 쳤다. "동감이오이다. 나는 평생 머리 하나 굴리는 것만으로 먹고 산 몸인데 이번 기회에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든 용대인을 만나게 되 었으니 용대인 곁에서 분석을 좀해야겠습니다."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백연연이 청초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소녀에게도 여자라고 봐주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세요. 신명 을 다해 돕겠습니다." 장천린은 문득 그녀를 응시하며 기이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 여인, 태진왕을 사랑하는 것 같았고 태진왕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는데 어찌 태진왕이 이 여인을 떠내 보냈을까?' 그는 잠시 깜박잊고 있었다. 태진왕이 서찰 중에 적은 부분 을....... '남들에게는 없는 특이한 능력(能力)이 있네!' 단위제는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난 듯이 물었다. "참, 그 무시무시한 원대협은 어디에 있오이까?" 장천린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하나 곧 그는 담담히 말했다. "떠났소." "......?" 단위제의 표정이 흠칫했다. 동시에 그의 예지의 찬 눈빛이 번 쩍 빛났으나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좀 더 세게 불고 있었다. 대운하의 물은 파도를 치고 있 었다. 第 29 章 鬼林의 術法者들 북경(北京)에서 남(南)으로 오십여 리 떨어진 산촌(山村), 기울 어져 가는 주막이 하나 있어 나그네의 심사를 달랜다. 화려한 북 경성과 이곳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가까운 곳의 북 경성에 비해 그지없이 쓸쓸한 곳이었다. 주막의 한 구석에서 원계묵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탁자 위에는 벌써 빈 술병이 수십 개나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폭음 했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그의 얼굴은 취기로 인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아예 귀찮다는 듯이 술병째로 마시 고 있었다. 벌컥벌컥! 목구멍에 쑤셔박다시피 마셔대던 원계묵은 문득 짜 증스럽게 술병을 탕! 하고 내리며 외쳤다. "주인장! 여기 한 병 더!" 그러자 한쪽에서 눈치보고 있던 초로의 주막주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으리, 이제 취하신 듯한데 웬만하면......."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원계목의 눈이 무시무시한 빛 을 발하며 그를 노려보기 때문이었다. 주막주인은 소름이 쫙 끼쳤 다. 그는 더 이상 아무소리도 하지 못하고 급히 술을 갖다 주었 다. 원계묵은 다시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어 손등으로 입 가를 쓱 문지른 후 내뱉았다. "빌어먹을......." 웬지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문득, 꽝! 그는 주먹으로 탁자 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탁자 위에 늘어서 있던 술병들이 튀어올라 와장창 깨졌다. "나는 분명히 먼저 떠난다고 예개하지 않았소! 당신이 먼저 말 을 꺼낸 거야!"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흐흐, 수많은 돈이 굴러 들어오니까 내 말은 눈에 차지도 않는 거야." 그는 손으로 와락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의 두 눈 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형님, 내 평생 가장 좋아했던 삼인(三人)이 있었소. 나를 키워 주고 가르쳐 주신 사부(師父) 그리고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 그리고 형님 당신이오. 하나 사부는 죽고 여인은 나를 배반했소.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당신 뿐이오.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친형님 같았소. 짧은 기간이었읍니다만 무척 정이 들었소. 늑대처럼 잡초처럼 자라온 나지만 의리는 있소. 당신에게 약속했듯이 나는 언제까지나 기다릴 셈이었소. 한데.......' '바보 같은 원계묵, 겨우 한 마디 서운한 말에 그냥 그의 곁을 떠나다니.' 원계묵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하나 이제는 끝난일 오늘 해가 지면 구룡상선은 떠난다.' 원계묵의 마음 속에는 갈등이 일어났다. 아직도 해가 지려면 두 시진 이상이 남았다. 그는 다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쾅! 그는 다시 술병을 탁자가 부서져라 내려 놓았다. 또 술이 떨어진 것이다. 그는 힐끗 주방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문득 경멸의 웃음이 들려왔다. "이 친구 아까부터 보아하니 이 집 전세를 냈나? 혼자 기분 다 내는군!" "흐흐흐, 계집한테 바람이라도 맞았나?" 원계묵의 이글거리는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두명의 장한이 그 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제법 힘꽤나 쓸 듯한 험상궂은 장한이었 다. 그들 중 한 명이 다가오더니 손으로 원계묵의 턱을 치켜들었 다. "임마! 너만 감정있고 우리는 감정도 없냐?" 원계묵의 두 눈에서 시퍼런 광채가 솟아났다. "쥐새끼 같은 놈들!" "음?" 장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장한은 솥뚜껑만한 주먹을 치켜들었다. 막 주먹을 날리려는 순 간. "헉!" "헉!" 그들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머리 위가 선뜻 하는 듯하더니 상투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상대가 언제 장도를 뽑아 상투를 날 렸는지 그들은 아예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원계묵은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내뱉았다. "사라지지 않으면 이번에는 목을 날려 버리겠다." 순간 두 장한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 들은 후다닥 걸음아 나 살려라는 듯이 꽁무니를 빼버렸다. 그들이 사라지자 원계묵은 다시 술을 시켰다. 하나, 아무리 불러도 주방 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주인장!" 목청을 높였으나 마찬가지였다. 원계묵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나 이때, 탁! 문득 그의 눈앞에 술병이 세 개나 뻗어오더니 탁자에 놓이는 것이 아닌가? "이 집 술은 이게 끝이오." "음?" 그는 고개를 들었다. 탁자 앞에 한 명의 소년이 서 있었다. 십 오륙 세쯤 되었을까? 몹시 아름답게 생긴 미소년이었다. 붉은 입술과 초롱한 눈망울이 미녀를 방불케 하는 미소년이 눈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소년은 한 손에 장남감같은 예쁜 소도(小刀)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너는... 뭐냐?" 소년은 혀를 찼다. "쯧! 상대하기가 상당히 거북한 양반이군." 이어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 술 세병의 주인이오. 이 주점에 마지막 남은 술을 내 가 산 것이오. 당신이 술을 원해도 이제는 없소. 당신이 이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나와 함께 마시는 수밖에 없소." 소년은 굉장히 빠르게 말했다. 한 마디밖에 하지 않은 것 같았 는데 할 말은 모두 다 한것이었다. 원계묵은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어 소년을 응시해 보았다. 소년은 극히 드물게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이마에 약간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다소 퇴폐적인 느낌을 갖게 했으나 두 눈동자는 우수에 젖어 기묘한 매력을 느끼게 했 다. 원계묵은 갑자이 이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앉아라." 소년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고맙소." 그 미소는 매력적이었다. 이어 소년은 자리에 앉으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나는 부금진(符錦眞)이라 합니다. 그냥 약칭으로 소진(消盡)이 라 불러도 돼요." "나는 원계묵이다." 부금진이란 소년은 실소했다. "당신은 무척 오만하군요. 처음 보는 나에게 반말이라니?" 원계묵은 무섭게 말했다. "네가 존댓말을 듣고 싶으면 엄마 젖좀 더 먹고 오면 된다." "......!" 부금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약이 오른 듯 원계목을 노려 보았다. 하나 반면 원계목은 조금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는 술 하나를 잡아서 부금진에게 전해 주었다. 이어 자신도 한 병을 잡고는 말했다. "자! 소진, 건배하자." 그는 즉시 술병째 술을 들이켰다. 부금진은 그 모습에 그만 혀 를 내둘렀다. "당신은 내가 두 번째로 본 술고래요." "음?" 원계목은 궁금한 듯 물었다. "첫번째는 누구냐?" 부금진은 키득키득 웃어댔다. '괴상한 웃음이군.' 원계묵은 그렇게 생각할 때 부금진은 술병을 거꾸로 들더니 단 숨에 모조리 마셔버렸다. 이어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첫번째 주당은 우리 아버지요." "......!" 원계묵은 약간 멍해졌다. 하나 곧 대소를 터뜨렸다. "좋군, 너의 부친이 술고래라면 너도 웬만큼은 하겠군." 그는 남은 술병 하나를 손에 들고는 흔쾌하게 말했다. "자, 이것만 마시고 나가자. 꼬마친구, 내가 한잔 사마." 그는 술병을 들어 다시 입에 댔다. 하나 그때 부금진은 두 눈에 이채를 띄었다. "당신이 그 술마저 모두 마신다면 칼 잡은 손에 기(氣)가 빠질 것이오." "음!" 흠칫한 원계묵은 부금진을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냐?" 부금진은 턱을 괸 채 씩 웃었다. "귀송자(鬼松子) 혁련노후가 지금 당신을 노리고 있소." 원계묵의 안색이 굳어졌다. "너는 누구냐?" "나는 소진이오." 부금진은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원계묵의 눈썹이 끔틀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귀에 미세한 소리가 들 렸기 때문이었다. 부금진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벌써 시작이군." 바로 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펑! 돌연 창문이 부서지며 세 줄기 빛살 같은 인영이 전광석화 처럼 원계묵을 공격했다. 극히 순간적인 찰나였다. 원계묵은 탁자 옆에 세워둔 장도를 뽑았다. 다음 순간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세 줄기 인영은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 로 섬전 같은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원계묵은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이 피묻은 장도를 내려보고 있었다. 부금진은 탄성을 발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하나 이때 원계묵은 시선을 들어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분명히 발자국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하나 기 이한 것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오후 의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왔으 나 여전히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 럴 수가......." 원계묵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이때 부금진이 안색을 변화시 키며 중얼거렸다. "귀림(鬼林)의 술법자들이오." 그 순간 발자국소리가 멈추었다. 동시에 주점 어딘가에서 음산 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법이군, 꼬마." 원계묵은 예리한 살기를 느꼈다. 갑자기 등줄기에 면도날이 파 고드는 듯한 살기에 그는 옆으로 피했다. 순간, 파악! 그가 앉아있던 탁자가 두 동강 났다. 긴발의 차이 였다. '이놈들... 형체가 없는 놈들인가?' 원계묵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편 부금진도 조금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 다시 음산한 기운이 밀려왔다. "웃!" 원계묵은 즉기 피했으나 어깨가 화끈했다. 옷자락이 찢겨지고 어깨에 혈흔(血痕)이 그어졌다. 어디선가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놈의 눈과 입! 용천(龍泉)과 명문(名文)만 노려라!" 원계묵은 섬뜩함을 느꼈다. 바로 자신의 급소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다시 좌우측에서 얼음장 같은 기운이 밀려왔다. 그 는 다시 피했다. 꽝! 주점 한쪽 벽이 박살났다. 그러자 그 뚫린 구멍으로 한 가 닥 석양빛이 들어왔다. 어느 새 해가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음!' 한 줄기 석양빛이 어둠침침한 주점 안으로 들어오니 주점 안에 자욱이 일어난 먼지가 보였다. 원계묵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때 다시 얼음장 같은 기운이 쇄도해 왔다. 원계묵은 다시 슬쩍 미끄 러지며 피했다. 펑! 이번에는 벽이 아예 무너져 내렸다. 석양빛이 주점 안의 자 욱한 흙먼지를 미세하게 멈추었다. 원계묵은 입술을 씰룩했다. '살을주고 뼈를 깎는다.' 그는 칼 끝을 아래로 내렸다. 그 광경에 부금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저... 저런 무모한.......' 이때, 쇄... 애......! 원계묵은 다시 정체불명인들이 공격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방에 서 동시에 들렸으므로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나 그 순간 주 점 안의 먼지가 파동쳤다. '네 명!' 슉! 칼 끝이 치솟았다. "으악!" "캑!" "끄......." 비명이 터졌다. 원계묵은 칼 끝에 무엇의 메마른 감각을 느꼈 다. 아니나 다를까? 피보라가 자욱이 뿌려지며 네명의 모습이 나타났다. 모두 흑의 (黑衣)를 입고 있었다. 세명은 이미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살아남은 흑의노인은 복부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의 독사눈에는 불신이 잔뜩 엉켜있었다. "네... 네놈이... 어떻게......?" 원계묵의 가슴 옷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상처가 약간 나 고 피도 내배이고 있었다. 그는 흑의노인을 노려보며 입을 움직였 다. "아무리 빠르고 아무리 은신술이 뛰어나도 먼지 사이로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다." "......!" 흑의노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어 그는 괴소를 쿡쿡 흘렸다. "대... 대단하다... 나 혁련궁(赫連宮)이... 이렇게 쉽게 당할... 줄 이야......." 쿵! 그는 앞으로 쓰러졌다. 이때 부금진이 원계묵 앞으로 다가 오며 손뼉을 쳤다. "정말 대답합니다. 귀림(鬼林)의 둘째 주인이자 혁련노후의 동 생인 혁련궁을 단숨에 처단하다니 말이오." 원계묵은 부금진을 응시했다. 그는 술병을 집어 들어 마시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이 자들의 정체를 금방 알아냈느냐?" 부금진은 씩 웃었다. "강호 견문이 넓은 탓이지요." 하나 문득 그는 안색이 싹 변하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야단났소! 밖을 보시오." "......?" 원계묵은 시선을 돌리다 역시 안색이 굳어졌다. 주점 밖, 수십명의 흑의인들이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 닌가? "흐흣!, 아주 작정을 했나 보군." 원계묵은 냉소하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부금진도 그의 뒤를 따 라 나갔다. 흑의인들은 사십여 명 가량 되었다. 그들 중 맨 앞에 는 왜소한 체격의 갈의노인이 서 있었다. 원계묵은 나오자 그도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귀송자(鬼松子) 혁력노후! 바로 그였다. 원계묵은 그를 대한 순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내가 만난 자 중 가장 강한 자다.' 그는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혁련노후는 천천히 걸 어왔다. 이어 주점 안에 쓰러져 있는 혁련궁의 시체를 바라보았 다. 그의 두 눈은 음울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석년의 도담후를 대하는 기분이군." "......." "자네가 바로 원계묵인가?" "그렇소." 원계묵은 묵묵히 대답했다. "나는 혁련노후다." 원계묵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하나 그는 의외로 칼을 땅에 세 워 꽂더니 포권을 했다. "혁련노선배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이다. 뵙게 되어 영광이오." 혁련노후의 입가엔 여전히 음울한 미소가 여렸다. "노부가 무슨 이유로 자네를 찾았는지 이유를 알것이네." 원계묵은 술병을 들어 꿀꺽꿀꺽 마신 뒤 던져버렸다. "염무가 보냈으리라 짐작하고 있소이다." 혁력노후는 그의 행동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모용초 말마따나 대단한 놈이군. 마치 야수같군.' 그는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노부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 노부는 나이가 너무 많 아 자네를 제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영원히 쉬고 싶구나." 원계묵의 살모사 같은 두 눈에서 과연 야수의 빛이 번쩍였다. "흐흐흐, 내가 칼을 쥐고 있는 이상 이 하늘 아래에서 나를 꺽 을 자가 있다고 ㅁ지 않소. 혁련노선배." 이어 그는 약간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쉬고 싶다면 아예 내가 영원히 쉬게 만들어 주겠소." 스르릉. 그는 장도를 서서히 잡아 뺐다. 바람이 분다. 황혼이 짙어지는 한 산촌의 다 부서져 나간 주막 앞, 바람은 일대의 노마왕(老魔王)과 새로이 떠오른 젊은 도(刀)의 제일인자 사이로 불기 시작했다. 第 30 章 檀韋帝의 過去 구룡상선(九龍商船), 선실(船室) 안, "......." 장천린은 탁자에 앉아 창문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석양의 노 을 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조각 같은 느낌을 주었다. 비록 예전같 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없었지만 오히려 더욱 강렬한 느낌 을 주었다. 그의 앞, 단위제가 주사위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또르륵......! 그는 탁자위에 주사위를 굴렸다. 그리고 다시 주워모아 탑(塔) 처럼 쌓았다. "용대인께서는 사업을 시작한지 몇 년이 되었습니까?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육 년." 단위제는 주사위 탑을 무너뜨렸다. 모두 육(六)자가 나왔다. 신 기한 일이었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관부에 투신한 지가 올해로 삼십 년 째이오." 그는 놓여진 주사위를 다시 쌓았다. "나는 용대인을 볼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 "후후, 용대인은 사람을 무척 강하게 이끄는 마력 같은 것을 지 니고 있습니다. 나 같은 능구렁이까지 말이오." "......." "용대인은 모르겠지만 내가 용대인을 처음 본 것은 일년 전 산 동 안찰사의 저택에서였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말 일년 전 사업 관계로 산 동 안찰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받은 느낌은 실로 강렬했소이다. 그때부터 용대인 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었소. 한데 정말 이상한 일이오. 용대인의 외숙인 양익상 어른에게는 용씨성을 가진 처남이 없다 는 점이 말이오." 장천린이 담담히 말했다. "무척이나 나의 과거를 자세히 조사한 모양이구료." 단위제는 씩 웃었다. 그는 다시 주사위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이번에도 모두 삼(三)자가 나왔다. 그는 장천린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용대인의 얼굴의 상처는 언제 다친 것이오?" 장천린은 흠칫했으나 곧 담담히 대답했다. "몇 년 전 마차 사고로 다친 것이오." "아! 실로 안타까운 일이오. 아름다운 얼굴에 흠이 가다니......." 단위제는 무득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장천린이라고 아시오?" 장천린은 뜨끔했다.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이오?" "별 것 안니오. 장천린이라는 사람은 강서성의 아주 유능한 상 인(商人)으로서 혹시 아나 하고 물은 것이오." "......." 장천린이 대답하지 않자 그는 말을 이었다. "이 년쯤 강서성에 남창부에서 몇 가지 사건이 있었지요." "......." "만금산장의 장주 금백만이 돌연히 급사하고 청하원의 장천린 역시 실종된 사건이지요." 단위제는 계속 이야기 했다. "당시 강서상 안찰사에서 그 사건을 조사하던 중 난해한 점이 너무 많아서인지 나에게 그 사건에 대한 의뢰를 청해 왔었지요." 장천린은 문득 흥미를 느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단위제는 잠시 침묵하다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 두가지 사건은 실로 미묘한 것이었소. 만금산장의 인물들 은 결코 금백만의 시신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소. 시신을 욕되게 한다고 말이오. 나는 그러던 중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지 요. 금백만이 죽는 날이 바로 그의 생일(生日)이었다는 점과 그의 생일에 초대된 사람들의 명단을 입수하게 된 것이오." 장천린은 단위제의 말에 점차 마음이 이끌리고 있었다. "초대된 사람은 모두 네 명인데 그 중에는 장천린과 그의 정인 인 취랑이란 미녀, 그리고 용문전장의 상관홍과 제갈유풍이란 젊 은이였다는 것이오. 한데 그날밤 이후 묘하게도 장천린과 취랑이 같이 실종된 것이오. 더욱이 기묘한 것은 그날 밤 이후 금백만의 측근 호위 무사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사라진 것이오." 장천린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자 무척이나 깊이 조사를 했구나.' 다누이제를 다시 허물어 뜨렸다. 이번에는 더욱 기이한 숫자가 나왔다. 일(一), 이(二), 삼(三), 사(四), 오(五), 육(六), 여섯 개의 주사위 가 모두 틀린 숫자가 나왔던 것이다. 장천린은 탄성을 발했다. "대단한 솜씨요." 단위제는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솔직이 나는 금백만과 장천린 등이 타살되었다고 믿고 있소이 다. 하나 만금산장에서 그 사건을 미궁으로 빠지게 만든 인물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증거를 없애버려 조금도 단서를 잡지 못했소. 실로 귀신이 곡할 정도로, 금백만은 자연 급사로 처리시키고 장천 린은 실종된 것으로 만든 것이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갈사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지.' 그는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결국 일 년 만에 나는 그 사건에서 손을 떼고 말았지요." 탁! 단위제는 손바닥으로 주사위를 덮쳤다. 그는 장천린을 보고 한 번 웃더니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 장천린은 눈을 크게 떴다. 없어졌다. 주사위가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었다. 손바닥에도 물론 주사위는 없었다. "허허허." 단위제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탁자 아래에 있던 왼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속에 여섯 개의 주사위가 고스란히 쥐어져 있지 않은 가? "굉장한 실력이오." 장천린이 재차 감탄하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는 정 색을 했다. "한달 전에 나는 태진왕 전하께 북경으로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았소이다. 그래서 수하들과 함께 북경으로 올라오던 중 진무현 에서 다시 용대인을 만나게 되고 원대협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만 나게 된것이오. 태진완 전하께서는 나에게 동창의 대영반 자리를 맡기셨지요. 나는 벼슬을 탐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황실의 더러움 을 씻어내려는 전하의 뜻에 감복하여 결국 승낙했지요." 단위제는 손가락 사이로 주사위를 굴렸다. 주사위는 손가락 사 이 사이로 마치 요술을 부리듯 없어졌다 나타났다하고 있었다. 그 는 장천린을 응시했다. 정천린의 눈빛은 여전히 별빛처럼 차가울 뿐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단위제의 입꼬리에 쓴웃음이 어 렸다. "나의 부친은 하급관리였소. 극히 옹색하고 성격이 편협했지만 조금도 더러움을 타지 않은 분이었소." 장천린은 묵묵히 그의 과거를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이 년 전 나의 부친은 엄청난 누명을 쓰고 상급관부에 의해 오체분시(五體分屍)라는 처참한 형벌을 받고 대 로(大路)에서 사지가 찢겨진 채 돌아오셨소." 단위제는 비참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그이 표정은 다만 쓰 디써 보일 뿐 그다지 격동하지 않고 있었다. 장천린은 의외라고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얘기를 나에게......?' "어머니와 누이는 노예가 되었소. 어머니는 그후 목을 매어 자 살을 하셨소. 능욕당했기 때문이오. 누이는 어디에 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소." "......!" 너무도 비참한 얘기에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 다. 단위제는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내 아버님이 돌아가시더 날 그 날 나는 무엇을 했는지 아시오. 흐흐, 도박장에서 사흘 내내 도박을 하고 있었소." 단위제의 얼굴에 일그러진 표정이 떠올랐다. "내 탁자에 산처럼 쌓인 은자를 보며 최고로 득의양양 해져 있 었소. 내가 은자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대로에 하나 의 목이 효수(梟首)되어 있었소. 재수 없다고 침을 뱉고 보니까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고 곧 그 머리가 나의 아버님임을 알았소." "......!" 장천린은 절로 눈썹을 떨었다. 실상 그 말은 그가 듣던 중 가장 비극적인 얘기였다. 장천린은 단위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왜 자신 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위제는 문득 씩 웃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도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훗! 사흘 후 관청에서는 아버님이 무죄였음을 알아 냈소. 하나 그때 이미 아버님의 시신은 썩었고 까마귀 밥이 되어 있었소. 어 머니는 자결을 했고 누이는 실종이 되었소, 그때 나는 관리가 되 기로 결심을 했소. 그리고 관리가 되었소. 사건을 만날 때마다 끝 가지 파고 들어 기필코 해결을 했소. 범인의 배경이 아무리 든든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그의 죄명을 밝혀 처형을 시켰소." 단위제는 더 이상 주사위를 만지작거리지 않았다. "상급관부의 명으로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명령을 하달받은 적 도 많았소. 하나 그렇게 되면 아예 범인의 목을 내 칼로 날려버린 후에 보고서만 작성하여 상급관부에 올렸소." 장천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게 되었다. '단위제, 당신은 능히 그럴만한 사람이오.' "후후, 상급관부에서 나를 보면 나는 눈 안의 가시 같은 존재였 을 것이오. 그들은 틈난 나면 나를 얽아매어 삭탈관직시키려고 하 였소. 하나 나는 조금도 그들에게 틈을 보이지 않았소. 조금도 말 이오......." 단위제는 문득 말 끝을 흐리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너절한 과거 이야기로 주접을 떤 것 같아 미안하오, 용대인."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별말씀......." 단위제는 주사위를 움켜쥐었다. "내 평성 처음으로 남에게 과거 이야기를 한것이오. 내가 왜 용 대인에게 나의 과거를 이야기 했는지 아시오?" 단위제의 눈이 정면으로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 장천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용대인은 내 평생 처음으로 나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기 때 문이오. 솔직히 말하겠소. 나는 용대인과 격없이 지내고 싶소." 그 말에 장천린은 문득 기소를 흘렸다. "후후후, 내 과거가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이구료, 대영반." 단위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단도독이라 불러주시오, 갑자기 출세(出世)하니 몸이 근 질근질하고 어색합니다." 단위제의 두 눈은 부드러워졌다. 장천린은 문득 창가를 응시했 다. 운하의 수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석양이 마지막 빛을 뿌리 며 떨어지고 있었다. 장천린의 모습은 우울해 보였다. 단위제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원대협 때문에 마음이 아프신 모양이구료?" 장천린은 씁쓸하게 말했다. "친아우 같았지요.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모양입니다." 단위제는 짧은 수염을 꼬며 말했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그는 반드시 언젠가 돌아올 것이오." 그의 손안에 있던 주사위가 하나 하나씩 소매 속으로 빨려 들 어가고 있었다. "글쎄요......." 장천린은 넘어가는 해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第 31 章 血戰, 그리고 暴風의 百殺隊 "......!" 부금진(符錦眞), 그는 지금 두 눈에 경이의 빛을 띄운 채 눈앞 의 싸움을 보고 있었다. 귀송자(鬼松子) 혁련노후와 원계묵의 싸 움은 벌써 백초(百招)가 넘고 있었다. 원계묵의 수중의 칼은 가공 할 도광(刀光)을 뿌리고 있었다. 슈파파파팟! 수라구류도(修羅九流刀)의 정수가 그의 손에서 유감없이 폭출 되고 있었다. 반면 혁련노후는 장각찬(長脚讚)이란 끝이 두 갈래 로 갈라진 창(槍) 비슷한 기형병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무시무시 한 싸움이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격렬히 접전을 벌여 그 와중으 로는 누구도 끼어들래야 끼어둘 수가 없었다. 부금진은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전세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 다. '내공이나 노련함은 귀송자가 월등하다. 하나 밀어붙이는 힘이 나 도법(刀法)의 패도적 기세는 원계묵이 위다.' 부금진의 얼굴에 찬탄이 어렸다. '칠 년 전 아버님과 숙야염이 싸울 때 만큼이나 대단하구 나.......' 부금진은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새 굳게 움켜잡은 손이 축축히 젖어들었다. 그는 잔뜩 긴장하여 싸움을 지켜보고 있 었다. 한편 원계묵은 싸울수록 경이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과연 대단하다. 혁련노후, 이정도면 천하(天下)에 당적할 고수 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전세를 가늠했다. '이렇게 싸우다간 오늘 밤이 새도록 승부가 나지 않겠다. 더욱 이 혁련노후를 이긴다 해도 사십여 명이나 되는 저놈들을 무슨 수로 제거한단 말인가?' 고수의 싸움에는 정신력이 가장 중요하다. 원계묵이 신경을 다 른 곳에 나누자 금시 자세에 빈틈이 생겼다. 슥! 장각찬의 예리한 끝이 그의 어깨를 ㅎ고 지나갔다. "윽!" 웃이 찢어지며 핏방울이 튀었다. 하나 약간의 외상 정도였다. 한편 혁련노후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단한 놈, 보통 놈 같았으면 팔이 날아갔을 텐데도 겨우 약간 상처를 낼 뿐이라니.......' 그의 움푹 꺼진 눈에 기괴한 빛이 흘렀다. '현문강기(玄門 氣)가 저놈 몸을 에워싸고 있는 이상 급소를 적중시키지 않고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군.' 이때였다. "혁련노선배, 각오하시오!" 원계묵의 굵직한 음성과 함께, 윙......, 갑자기 칼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무시무시한 환청이 일 어났다. 휘류류류류, 우우우우... 웅......! 아수라의 호곡성이 전후좌우에 서 들리며 가공할 도기(刀氣)가 쇄도했다. 수라구류도의 제 칠초 (七招)인 혈해수라(血海修羅)였다. 파츠츠... 츳츳츳! 도기가 그물처럼 에워쌌다. 수라구류도의 제 칠초, 팔초, 구초 등 삼 초식은 내공(內功)을 극심하게 소모시킨다. 그러므로 웬만하면 사용치 않는 것이다. 허나 원계묵은 승부를 걸었다. '......!' 혁련노후의 안색이 급변했다. 순간 그는 장각찬을 무섭게 돌렸 다. 장각찬이 수없는 환영을 이루며 사방으로 뻗었다. 하나 그 순 간 원계묵의 가공할 괘도에서 나오는 백삼십육변(百三十六變)의 변화가 장각찬의 모든 공세를 차단시켰다. "흣!" 혁련노후는 헛바람을 토했다. 가슴이 화끈했다. 어느 새 삼도 (三刀)가 스친 것이었다. 원계묵은 틈을 주지 않았다. "천일수라(天逸修羅)!" 수라구류도의 제 팔초(八招)! '흐윽.......' 혁련노후는 찬바람을 들이켰다. 도저히 공격방향을 짐작할 수 가 없었다. 원계묵의 도(刀)가 사면팔방에서 마치 파도처럼 밀려 왔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다.' 순간 그는 장각찬을 곤추세우고 좌수(佐手)를 비스듬히 뻗어나 갔다. 그때 관전하던 부금진이 외쳤다. "조심하시오! 흑마장(黑馬場)이오." 순간, 카캉! 무겁고도 파괴적인 음향이 들렸다. 부금진이 경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던 것이다. "음......." "흑......." 두 마디 신음성이 들렸다. 원계묵이 칼로 땅을 짚고 신형을 간 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한데 그의 가슴에는 시커먼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반면 혁련노후의 장각찬은 부러져 있었다. 그는 입 가에 선혈을 흘리고 있었고 심장 부근에는 구멍이 뚫려 있을 뿐 만 아니라 두 눈에서는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두눈에서는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놀랍게 도 그의 두 동공이 터져버린 것이었다. "후... 훌륭하다.... 아주 훌륭......." 원계묵은 울컥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다. "흐흐... 노선배의 흑마장은 정확히 나의 가슴에 적중되었소. 하 나... 안타깝게도 노선배의 장력은 나의 현운강기를 깨지 못한 것 같구료." 혁련노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퀭한 두 눈에 피를 흘리며 그 는 중얼거렸다. "어쨌든... 자네가 이겼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모든 것이 끝났으니... 어두 운... 침묵의 숲... 나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겠군......." 이때, 원계묵의 주위로 사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아무도 혁련노후를 부축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두 눈에 무서운 살기를 흘리며 원계묵을 포위해 오고 있었다. 이때 혁련노 후는 피를 울컥 토했다. 핏속에는 부스러진 내장토막들이 잔뜩 섞 여 있었다. 그는 더듬더듬 말했다. "원께묵... 저들은... 나의 수하들이... 아니라... 조화성 제... 삼신 마전(第三神魔殿)의... 천강삼십육검수(天 三十六檢水)들... 조심... 하는게 좋을 것......." 이때, 스스스스... 문득 혁련노후의 곁으로 기이한 파공성이 들 리더니 흑의인 한 명이 내려섰다. 유령같은 신법이었다. 원계묵은 흠칫했다. '귀림의 술법자.' 이때 흑의인이 비통하게 외쳤다. "주군!" 혁련노후의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더듬거리며 물었다. "귀... 귀림의... 제자냐......?" "그렇습니다. 주군." "나... 나의 시신을... 귀림으로... 데려다 다오." 혁련노후의 몸이 서서히 경직되어 갔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나를 묻어다오." 고개가 떨어졌다.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부러진 장찬각으로 몸 을 의지한 채 그는 서서 죽은 것이었다. "주군!" 귀림의 술법자는 비통하게 외쳤다. 이어 그는 혁련노후의 시신 을 눕히더니 무릎을 끓고 기이힌 울부짖음을 냈다. "우우... 우......." 기것은 실로 처량하기 그지없는 장소였다. 술법자는 눈물을 흘 리며 동(東)쪽을 향해 세 번 절하더니 혁련노후의 시신을 안고 일 어섰다. 스... 팟! 순간 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 로 표홀무비한 시법이었다. 원계묵은 침묵하고 있었다. 부금진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 다. "어떻소?" "견딜만 하다." 부금진은 고소지었다. "이제 문제는 저 천강삼십육검수들이오." 그는 걱정된다는 듯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저들은 조화성 제삼신마전의 전주인 태사독이 친히 키운 절세 의 고수들이오." 원계묵은 고소지으며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너까지도 위험하겠군." 부금진은 싱긋 웃었다. "관계없소." 그는 정말 이상한 소년이었다. 비록 상황은 극히 위험한 국면 이었으나 오히려 원계를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 이떼, 천강검수 중 한명이 입을 열었다. "원계묵, 네가 혁련노후까지 꺾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나 너 는 이미 극도의 상처를 입은 몸, 후후후, 이제 너의 생도 여기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원계묵은 입가를 씰룩이며 웃었다. "흐흐, 어찌되든 네놈들만은 모두 데려가 주마." "후후훗, 그대는 입만은 살았군." 그 자는 검을 쓱 뽑았다. 그러자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하듯 삼 십 육 인은 모두 검을 발검했다. 찌르는 듯한 살기가 장내에 가득 찼다. 실로 기세가 등등했으며 살기는 태산조차도 갈가리 찢어버 릴 듯했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쳐라!" 삼십육인(三十六人)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실로 무시무 시하고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위이이잉! 차차차차창! 서른 여섯 자루의 검(劍)이 일제히 하늘을 뒤덮으며 원계묵과 부금진을 도륙낼 듯 쏟아져 내렸다. 하나 원계묵은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신형을 지탱하고 있던 칼을 그대로 올려쳤다. 캉! "크악!" 불꽃이 튀며 한 명이 검과 팔이 그대로 잘려 날아갔다. 하나 그 순간 원계묵도 등줄기가 화끈해졌다. 누군가 그의 등을 친 것이었 다. 하나 그는 이를 악물고 그대로 돌아섰다. 눈앞에 퉁겨나온 자신의 검을 잡고 비틀거리는 상대방이 보였 다. 그는 그대로 칼을 빙글 돌렸다. "케-액!" 상대는 두 동강이가 나 피분수와 함께 쓰러졌다. 원계묵은 일 단 싸움에 임하면 야수가 된다. 그는 그 자를 벤 즉시 몸을 땅바 닥에 굴리며 다시 칼을 휘둘렀다. "으-아-악!" "허억!" 두 명이 아래로 위로 두 쪽나 쓰러졌다. 실로 살벌무비한 혈전 이었다. 원계묵도 이미 수 차례의 검을 맞고 만신창이가 되고 있 었다. "......!" 부금진, 이 아름다운 소년도 혈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하 나 그는 손에 소도를 만지작거리며 지극히 태연했다. 한 명이 덤 벼들었다. "쳇! 어쩔 수 없군." 번뜩! "......?" 상대방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넘어갔다. 그의 이 마 한복판에는 소도가 꽂혀 있었다. 하나 그가 완전히 쓰러지기도 전에 부금진은 신형을 움직여 소도를 뽑은 후 다시 뒤로 던졌다. "악!" 뒤로 달려들던 한 명도 이마에 소도가 꽂힌 채 벌렁 쓰러졌다. "저 놈의 비도술(飛刀術)을 조심해라!" 그제서야 천강삼십육검수들은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십여 명이 원진을 그리며 부금진을 포위했다. 부금진의 얼굴이 떱은 감 씹은 꼴이 됐다. '빌어먹을, 이렇게 되면 비도술은 써먹지도 못하겠군.' 문득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검 하나를 발 끝으로 차올렸다. 그는 검 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힐끗 원계묵쪽을 돌아보다가 눈이 움찔 해졌다. 원계묵은 처참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검수들과 뒤엉켜 있었다. 부금진은 내심 혀를 찼다. '쳇! 이럴 줄 알았다면 무공수련을 좀 더 하는 건데.' 이때였다. 그의 귓전에 원계묵의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진! 내 걱정 말고 어서 너만이라도 빠져 나가라!" 그 말에 부금진은 냉소했다. "내가 도망가려 했을 것 같으면 벌써 갔을 것이오!" 이어 그는 검으로 눈앞에 달려드는 흑의인의 어깨를 베며 말했 다. "아직 당신은 죽을 때가 아니오. 당신과 나는 술을 먹자고 약속 하지 않았소?" 원계묵은 그 말에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그래, 맞다. 그 약속을 깜빡 잊을 뻔했군. 그래!" 번쩍! 그의 칼이 원을 그리자 다시 한 명의 목이 튀어 올랐다. 그는 그 자의 피를 뒤집어 쓰고 다시 몸을 굴렸다. 천강삼십육검 수는 모두 십 이명이 죽었다. 하나 그래도 너무 많았다. 더욱이 원계묵의 상처는 극심했다. 또한 부금진은 검이 손에 맞지 않았다. 또한 부금진은 검이 손에 맞지 않았다. 그는 소도를 한 개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써먹기는 곤란했다. 검법(劍法)은 아직 그에게 익숙하지가 못했다. "뒈져라!" 츳! "흣!" 흑의인의 검이 부금진의 어깨를 스쳤다. 피가 솟구쳤다. "빌어먹을!" 부금진은 비틀거리며 신형을 날려 다른 공격을 간신히 피했다. 이때 그의 눈에 원꼐묵이 다시 검을 맞고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원계묵의 등 뒤에서 한 명의 흑의인이 목을 찌르는 것도 보였다. '......!' 부금진은 다급했다.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슉! 그의 손에서 하나 뿐인 소도가 날아갔다. "아악!" 흑의인의 이마에 소도가 박혔다. 그는 사지를 허위적거리며 쓰 러졌다. 원계묵은 힘겹게 신형을 유지하며 말했다. "고맙다. 꼬마친구......!" "꼬마 꼬마 하지 마시오! 살모사 나리!" "흐흐......." 원계묵은 웃었다. 하나 그는 이니 기진맥진 하고 있었다. 두 눈 은 가물가물하여 초점이 맞지 않아 사물이 잘 보이지 않았고 팔 과 다리는 천근추를 단 듯 무겁기만 했다. '결국... 이렇게 끝인가......?' 그는 하늘을 응시했다. 이미 사위에는 어둠이 어리고 있었다. 이때 문득, 그의 눈에 번쩍 이채가 일어났다. 저 멀리 언덕을 본 때문이었다. 뽀오얀 황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두운 언덕의 능선을 따라 자욱한 황진을 구름같이 일으키며 백여 필의 말이 나타나고 있었다. 마상(馬上) 뒤에는 백의인(白衣人)들이 타고 있었다. 원계묵의 두 눈이 경련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그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이... 이 놈들......!' 순간 그는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소진, 힘을 내라. 우린 이제 살아 날 수 있다." 벌써 두 개 이상의 검을 스쳐 맞은 부금진은 시큰둥하게 말을 받았다. "무슨 소리요?" 그도 역시 죽음 직전이었던 것이다. "으하하하...! 나의 동료들이 왔다. 그들이 왔단 말이다?" 원계묵이 기쁨에 찬 광소를 터뜨렸을 때, 두두두두두-! 백여 필의 인마(人馬)가 마침내 가까이 돌진해 왔 다. 마상의 백의인들은 머리에 백건(白巾)을 두르고 허리에는 모 두 칼(刀)을 차고 있었다. 그들 개개인은 모두 한결같이 두 눈에 형형한 살광을 번쩍이고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부금진은 내심 부르짖었다. '백살대(百殺隊)!' 그렇다. 더 이상 설명은 필요없었다.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여라!" "대주(隊主)를 구해라!"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말과 사람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천 강삼십육검수들은 당황했다. 하나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획! 획! 획! 백의인들이 흡사 탄환 처럼 마상에서 신형을 날려 도(刀)와 몸이 하나가 된 채 날아왔 다. 만승검도 도담후가 친히 키운 백인(百人)의 정예고수 백살대 (百殺隊)! 천강검수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숫자상으로도 훨씬 열세가 아닌가? "크아-악!" "아아악!" "케에...엑!" 피, 피, 피....... 백살대의 무공은 개개인이 모두 한 지방을 주름 잡을 정도의 막강한 고수들이었다. 천강검수들은 허위적거리며 흡사 허수아비처럼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변변히 저항도 못하고 몰살하고 말았다. 이윽고....... "대주(隊主)!" 백의인 중 한 명이 원계묵에게 달려가 무릎 ㄱ었다. 원계묵은 웃었다. "흐흐, 운표(雲票)... 네가 와 주었구나......." 운표라 불리운 이십대 가량의 백의 청년은 온통 안면을 일그러 뜨렸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원계묵은 입가가 씰룩였다. "하지만 알아야 된다. 이것은 나의 최선이었다." 그 순간 그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이만큼 버틴 것만 해도 기 적 같은 일이었다. 운표는 그를 급히 부축했다. "우... 운표... 부탁이... 있다......." "말씀하시오! 대주......!" "나를 데리고... 가장 빠른 속도로... 대운하(大運河)로 가서... 구 룡상선의 주인... 용백군을 만나... 그리고... 그리고......." 거기까지 말하고 원계묵은 혼절했다. 운표는 한숨을 쉬었다. 이 어 주위를 보았다. 천강검수들은 깨끗이 전멸되고 백살대의 백의 인들은 질서있게 도열해 있었다. 운표는 힘차게 말했다. "모두 말을 타라! 운하 어귀로 간다!" 이어 그는 한쪽에 역시 창백한 얼굴로 낭패하여 서 있는 부금 진을 보고 지시했다. "이 분 소협에게 말 한 필을 드려라!" 부금진에게 한 필의 말이 건네졌다. 운표는 포권했다. "소협도 같이 가십시다." 부금진은 힐끗 원계목을 보고는 잠시 생각했다. 하나 곧 그는 히죽 웃으며 승낙했다. "좋소." 운표는 말에 뛰어올랐다. "가자!" 그 말에 백살대는 일제히 지축을 뒤흔드는 굉을을 내며 출발했 다. 폭풍(暴風), 흡사 폭풍과 같은 기세였다. 나타날 때도 폭풍이었 고 사라질 때도 폭풍이었다. 그것이 바로 백살대었다. 第 32 章 醉軒 符白景 바다(海), 만경창파(萬頃蒼波)는 끝없이 출렁이고 아무리 시선을 길게 뻗어도 수평선만 보일 뿐이다. 이곳은 동해(東海)였다. × × × 동해(東海)의 창파에 늠연히 돛을 펄치고 미끄러지듯 흐르는 커 다란 범선, 구룡상선(九龍商船)의 표기가 해풍에 휘날리고 있다. 구룡상선이 북경을 떠나 운하에서 백하(白河)를 빠져 동해로 들어 온 지는 오 일이 지나고 있었다. 항해도 순조로왔고 해풍도 순풍 이었다. 선실 안, 여섯 명의 인물이 모여 담소를 하고 있었다. 침상 위 에는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은 원계묵이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장천린과 단위제, 백연연이 있었고 미소년 부금진과 백살대의 지휘자 운표의 모습도 있었다. 그들은 즐거운 담소를 나 누고 있었다. "헛헛! 아무튼 그날은 정말 깜짝 놀랐소. 원대협의 그때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오싹 끼치오. 마치 혈귀(血鬼) 같았으니 까 말이오." 단위제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단위제는 어깨를 으쓱하 며 고개를 저었다. "그 평소 강해 보이기만 하던 원대협의 그런 모습은 정말 믿을 수가 없었지요." 그 말에 원계묵은 수척한 얼굴에 고소를 지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다가 당한 셈이오. 그날 싸움 이후로 느낀 점이 많습니다." 이때 부금진이 소도를 만지작거리다가 참견을 했다. "하지만 그날 싸움은 원대협이 아닌 그 누구라도 당했을 것이 오." 그는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오히려 그런 상태에서 귀림(鬼林)의 일급고수들을 모두 처치하 고 혁련노후마저 제거한 원형님의 무공이야말로 가히 경이적인 것이오."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누가 생각하더라도 명 백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장천린은 문득 부금진에게 말했다. "소진, 이번에 자네가 원제를 도와준 것을 원제 대신 심심한 고 마움을 표하는 바일세." 부금진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방해만 된 셈이었지요. 뭘......." 그가 마치 계집아이처럼 얼굴을 붉히자 단위제 문득 나섰다. "꼬마친구, 원대협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네의 그날 펼친 무 공은 대단했다던데 실례지만 사문(師門)이 어디인가?" 그 말에 모두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십 오륙 세에 불과한 소년이 그토록 무서운 혈전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벌써부터 많은 궁금증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나 이때 부금진은 안색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는 한 동안 소 도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지 않았고 두 눈에는 짙은 그늘이 어 렸다. 하나 잠시 후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저의 아버님의 함자는 백경(白景)입니다. 호(號)는 취헌(醉軒) 이라 하지오." 그 말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두 사람은 안색이 크 게 변했다. 그것은 원계묵과 단위제였다. 특히 단위제의 안색에는 경이가 어렸다. "자... 자네 춘부장 어른이 진정 취헌 부백경대인이시란 말인 가?" "그렇습니다." 이때 원계묵의 두 눈에는 놀라움이 어렸다. 그는 너무도 뜻밖 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술과 구름과 검(劍)만을 사랑하시며 평생을 살아오신 천애유자 (天涯遊子) 어른이 소진 자네의 부친이라니......." 장천린은 궁금한 듯 말했다. "흠, 저는 견식이 ㅉ은 탓인지 소진의 춘부장 어른에 대한 소문 을 들은 적이 없군요." 그것은 바로 설명을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단위제는 헛기침을 하며 힐끗 부금진을 바라본후 말했다. "취헌 어른은 수십년 전 섬서삼변총독(陝西三邊總督)이셨지요." 이어 그의 설명이 계속 되었다. --- 취헌 부백경(符白景), 이 인물은 사십여 년전 북방의 이민족 들의 침입을 막기위해 설치한 구진(九鎭)중 사진(四鎭)을 통괄하 던 섬서삼변총독이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 불과 이십 세 후반이 었으나 무공이 뛰어나고 심기(心機)가 깊었으며 병법(兵法)에도 통달했다. 그러므로 그가 있는 동안 북방의 경비는 튼튼하여 아무 런 말썽도 없었다. 북방의 오랑캐들에게 있어 그의 존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나 너무 젊은 나이에 빨리 출세한 탓이었는지 그는 또한 시기의 대상이기도 했다. 만력사년, 마침내 그는 북경 자금성에서 획책된 음모에 말려 삭탈관직되고 만다. 그때 그에게 일어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가 관복을 벗는 날 있었던 일이다. 그는 총독부의 대청에서 사흘 밤낮 동안을 술을 마셔댔다. 자그마치 그가 마셔댄 술을 백 독이 넘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 았다. 사흘째 되는 날 그는 자신을 문책하는 자금성의 간신 환관 도림사(都林史)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그리고 자금성이 있 는 방향으로 세 번 절을 하고 세 번 곡(哭)을 하고 다시 세 번 웃 었다고 한다. 그후 그는 백의로 갈아입고는 총독부를 영원히 떠났다. 취헌 부백경, 그는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단위제는 조용히 이야기 했다. "그 이후 그 어른은 중원을 유랑하시었소." 그의 말은 짙은 감회가 어려 있었다. "그분은 관직에 계실 때도 유명한 분이셨지만 중원무림에서도 유명하지요. 사십 년 가까이 무림을 유랑하시면서 무수한 고수가 그분의 검 아래 굴복하였기 때문이오." 단위제의 얼굴에는 진정으로 감복하는 빛이 넘쳐 흘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싸움의 일화는 칠 년 전 북해제일고 수(北海第一高手)이자 신비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북해사태청(北 海獅太廳)의 청주(廳主) 북해창룡수 숙야염과의 일전(一戰)이오. 장장 삼 일 밤낮을 겨루었던 것이오. 지금도 무림에서는 그 싸움 을 일컬어 백야(白夜)의 천전(天戰)이라 하며 인구(人口)에 회자되 고 있소이다." 장천린은 순간 약간 안색이 변했다. '북해창룡수 숙야염!' 그의 안색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그는 취옥교 의 사부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문득 원계묵이 중얼거렸다. "시(詩)와 구름을 사랑하시고 술을 생명처럼 즐기시며 한 자루 고검(孤劍)에 혼(魂)을 실은 채 강호를 유랑하시는 분으로 무림에 몸 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분이지요." 장천린은 새삼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는 부금진을 바라보았 다. 부금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웬지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천린은 입을 열었다. "소진, 자네의 춘부장 어른이 그렇게 훌륭한 분이신줄은 생각 못했군." 부금진은 피식 실소했다.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시지요. 하나......." 그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단위제가 물었다. "춘부장께선 지금 어디에 계신가?" 부금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을 못 뵌 지 수년이 지났습니다. 아버님은 늘 제 곁에 안 계셨지요. 제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말입니다. 항상 바쁘신 어 른이니까요." "......." "......." 웬지 그의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어색해 졌다. 이때 잠자코 있던 백연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말씀은 그만 하시고 차나 한 잔씩 드시지요?" 하며 그녀는 차 주전자를 들어 향긋한 냄새가 나는 차를 한 잔 씩 중인들에게 따라 주었다. "으허허! 그래도 백소저가 제일이오. 내가 목 마른 것을 어떻게 알았소? 아무튼 백소저는 눈치 하나는 귀신이오. 결혼하면 반드시 사랑받을 것이오." 백연연의 얼굴에 홍조가 노을처럼 번졌다. 그녀는 눈을 곱게 흘리면서 말했다. "단도독님께서는 편리할 때만 제 칭찬을 하시는 군요." "응?" 단위제는 펄쩍 뛰었다. "그 무슨 섭섭한 소리요? 그래도 우리들 중에서 백소저를 아름 답고 총명하다고 제일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 댄 사람이 바로 나 단위제요!" "어머!" 그녀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고 중인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하나 이때 장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부금진은 슬며시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갔다. 운표를 혀를 찼다. "쯧! 저 친구는 의외로 심약한 것 같군요." 그 말에 단위제가 코웃음쳤다.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무식하도록 우둔해." "무... 무식요?" 운표의 얼굴이 빨개졌다. 단위제는 콧방귀 뀌며 말했다. "생각해 보게. 백하(白河)에서 말이야. 그 와중에 운항하는 구룡 상선에 칼을 들이대며 배를 세우라고 설쳐대는 법이 어디 있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어. 그때 나는 완전히 수적 (水賊)인 줄 알았네. 백살대의 고수들을 지휘하는 진두지휘하며 고함을 빽빽 처대는 자네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콧방귀가 나온단 말씀이야?" 운표의 준수한 얼굴은 완전히 벌겋게 달아 올랐다. 하나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변명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단지 대주(隊主)로부터 구룡상선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그대로 이행한 것 뿐입니다. 그 당시 대주께서는 정신을 잃었기에 저로서는 무조건 싸울 수 밖에 없었 습니다." 운표의 우스꽝스러운 말과 표정에 중인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 렸다. 선실 안의 화기애애한 정담은 오랫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점차... 밖은 어둠이 짙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토록 프르르던 동해 물도 먹을 탄 듯 검게 변해만 갔다. 구룡상선은 심야해를 조 용히 항진해 나갔다. 第 33 章 피로 맺은 結義兄弟 불꽃, 탁자 위에 놓인 황촉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 선실 안에는 공기가 가라앉아 있다. 자연 황촉불도 조금의 흔 드림 없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다. 한데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한 마리의 불나방이 황촉불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불꽃의 현란함에 이끌려서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춤(舞)에 젖어서 인가? 점점 불나방은 불꽃 가까이 접근해 갔다. 그리고 막 불꽃 속으로 몸을 사르러 들어가기 직전, 환상인가? 번-쩍! 일섬(一閃)이 명멸했다. 그 순간 불나방의 날개가 두 갈 래로 갈라져 팔랑거렸다. 불나방의 몸체가 정확히 두 쪽이 난 것 이다. 하나 몸체가 완전히 분리되기도 전에 슷! 슷! 슷! 예리한 파공 성이 번갈아 들렸다. 그러자 불나방은 수십 동강이가 나 종이조각 처럼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황촉 불꽃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원계묵은 천천히 칼을 칼집으로 넣고 있었다. '됐어, 몸은 이제 웬만큼 치유되었다.' 그의 한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에 한 가닥 미소가 어렸다. 한데 이때였다. "훌륭한 솜씨다. 아우." 등 위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원계묵은 천천히 몸을 돌렸 다. 문가에 장천린이 서 있었다. "형님." 장천린은 아낌없이 칭찬했다. "눈부신 솜씨였다. 칼을 씀에 있어서 자네야말로 당세무적일 것이네." 원계묵은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습니다. 소제의 실 력이야 티끌 정도에 불과합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도법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은 아니네. 만약 칼로 자네 를 이길 자가 있다면 나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네." 원계묵은 미소 지으며 칼을 탁자 위에 놓았다. "과거 사부께서는 폭설속에서 도법을 수련하신 적이 있지요." 그의 얼굴에는 은은한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 분은 주위 다섯 자 이내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한 개 도 남김없이 모두 동강내 버렸습니다. 그것도 장장 세 시진 동안 계속, 더욱이 밤중에 말입니다." 장천린은 흠칫했다. "대단하셨군." 원계묵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백 년전 어떤 기인은 도(刀) 끝에서 흐르는 기운만으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고수 십육인(十六人)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 "그 기인의 이름은 도성(刀聖) 유백(柳白), 제가 인정하는 무림 사상 제일의 도신(刀神)이지요." 장천린은 눈이 기이하게 변했다. 이어 그는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설 속에 묻혀버린 기인이 아닌가?" 원계목은 눈을 반쯤 내리 감았다. "사부님을 죽인 자의 이름은 무정도(無情刀) 모용초, 놈이 쓰는 도법은 바로 도성 유백의 무극팔로도세(無極八路刀勢)입니다." 장천린은 가슴 속에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겼다. "모용초, 놈은 이 대륙 내에서 숨쉬고 있는 나의 원수이자 칼에 관한 한 평생의 숙적이지요." 그러다 문득 원계묵은 미소를 지었다. "형님도 도법을 익히셨다고 했지요. 일수삼도(一手三刀) 강중문 의 삼도귀변팔법(三刀鬼變八法)과 풍뢰도법(風雷刀法) 말입니다." 장천린은 이미 자신에 대한 얘기를 원계묵에게 모두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고소 지으며 말했다. "수박 겉ㅎ기 식이네." 원계묵은 다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했다. "강중문은 섬서 일대에서 알아주는 일류 도객(刀客)이지요. 그 의 도법은 일종의 환도(幻刀)입니다." 그는 씩 웃으며 장천린을 바라 보았다. "언젠가 한 번쯤 형님과 비무해 보고 싶군요." 장천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소리 말게. 공연히 저 불나방 꼴이 되고 싶지 않아." 그는 술쩍 황총 주위에 흩어져 있는 불나방의 잔해를 응시했다. "더우기 나는 무사(武士)가 아니라 상인(商人)일세. 상인은 칼보 다도 계산이 빨라야 하네." "후훗." 원계묵은 나직이 웃었다. 하나 문득 그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 다. "무사는 싸울수는 있어도 결코 대륙(大陸)을 지배하고 천하(天 下)를 치세(治世)할지 못합니다. 천하를 움직이고 대륙을 뒤흔들 수 있는 사람은 무사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형님 같은 분이야말로 진정한 대륙의 지배자가 될 수 있지요." 장천린은 문득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원래 나는 그만큼 큰 인물이 못되네. 더욱이 나는 대륙을 지배하는 것 따위에는 취미가 없네. 그저 대륙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싶을 뿐이네." 원계묵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대륙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力)은 돈입니다." "......." 장천린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형님." 원계묵의 시선이 문득 열기를 품었다. "......?" "소제는 부상을 입고 난 이후 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 다." 장천린은 흠칫하여 물었다. "무슨 말인가?" 그러자 갑자기 원계묵은 뜻밖의 행동을 했다. 그는 문득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끓는 것이 아닌가? "아우! 이게 무슨 뜻인가?" 장천린이 당황해 하자. "거두어 주십시오!" 원계묵의 묵직한 말에 장천린은 더욱 흠칫했다.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소제도 나름대로 계산을 했습니 다. 소제가 움직이기에는 이 대륙은 너무나 넓고 광활합니다." 원계묵의 어조는 확고한 신념과 결의가 어려 있었다. "무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인에게 생명을 맡깁니다. 천애고아 인 이 원계묵을 가장 먼저 알아주신 분이 바로 형님입니다. 형님 과 소제가 만난 것이 운명이라면 이제는 이 아우, 형님을 도와 한 번 이 넓은 중원대륙과 운명의 승부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장천린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어 그는 담담히 말했다. "원래 자네는 자네에게도 해야할 일이 있는 법이네. 그리 고......." 하나 그의 말은 원계묵의 말에 의해 끊겼다. "소제의 일은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장천린은 당황했다. 그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원계목이 행동하 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자신을 거두어 달나는 것. 그것은 곧 무사로서 주군(主君)을 모 신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야말로 자신을 송두리째 타인에게 맡긴 다는 결정은 함부로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장천린은 한동안 원계묵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고개 숙인 원계묵의 완강한 등에서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운명의 힘을 느꼈다. 그것은 결코 일시적인 충동이 빚은 말이 아 니었다. 원계묵은 달라져 있었다. 분명히 며칠 전 북경에서의 그가 아 니었다. 단 며칠 사이에 너무도 원계묵은 달라져 있었고 또 성숙 해져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달관한 듯이. 문득 장천린은 결심을 굳혔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이 원계묵의 장도를 뽑았다. 이어 새끼 손가락 끝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원계묵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핏물이 새끼 손가락으로부터 떨어지가 그 피가 바닥에 둥근 원 을 그렸다. 그이 음성은 깊숙한 진실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원(圓)은 끊이지 않는 선(線)이다." 그는 원계묵을 주시했다. "아우, 자네와 나와의 운명도 이제부터는 이 원 속에 영원히 공 존할 것이다." "......!" 원계묵의 눈썹과 얼굴 모든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장천린은 그에게 장도를 넘겨 주었다. 원계묵은 두 손으로 칼을 받은 다음 서슴없이 식지를 베었다. 그리고 그도 역시 피로 원을 그렸다. 그 의 원은 장천린이 그린 원 속에 나란히 그려졌다. "하늘에 두고 맹세하건데, 일생(一生)을 형님과 같이하여 저의 모든 것을 형님께 바치겠습니다! 태어난 시각은 달라도 죽는 순 간 만큼은 같이 하도록 하늘에 약속합니다!" 순간, "아우!" "형님!" 손(手), 두 사나이의 손이 마주 합쳐졌다. 눈(眼), 뜨거운 사나이의 두 쌍의 눈이 허공에서 얽혀졌다. 피(血)로 맺은 경의형제(結義兄弟), 그들은 단단히 결속되었다. 이것은 장차 무림천하에 몰려올 거대(巨大)한 힘의 근원 --- 그 시 작(始作)이었으니, 과연? 第 34 章 奇少年 符錦眞 항해 칠 일째 되는 날, 구룡상선(九龍商船)은 황하(黃河) 하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석양(夕陽), 타는 듯한 진홍의 저녁 해(日)가 황하 하구를 붉게 물들이는 광경은 정녕 장관이었다. 구룡상선은 유유히 하구로 들 어서고 있었다. "타-!" 백의 무사 세 명이 목도(木刀)를 쥐고 비무하고 있었다. 상대는 한 사람이었다. 운표(雲票), 그는 왼손은 뒷짐진 채 여유있게 삼 인의 무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이곳은 구룡상선의 선상(船上), 삼인은 백살대 (百殺隊)의 무사들이었다. 부릅뜬 두 눈들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목도는 진도(眞刀) 이상의 예리한 기운을 발출하고 있었다. 운표의 표정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엄숙하기만 했다. 주위에는 백살대의 무사들이 양쪽으로 갈라 앉아 무릎을 꿇은 채 관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이인(二人)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 다. 단위제와 원계묵이었다. 단위제는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흠, 저 운표는 평소 덜렁거리기에 얕보았더니 무공이 보통이 아니구료." 원계묵은 미소지었다. "백살대 중 단연 으뜸입니다. 저와 비교해도 그다지 차이가 없 을 정도이지요." "아!" 단위제는 짧은 탄성을 발했다. 그러다 문득 기이하다는 듯 물 었다. "헌데 운표의 목도는 상당히 짧은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 는 것인오?" 원계묵은 담담히 말했다. "제가 쓰는 칼은 네자 세 치로 상당히 긴 반면 운표는 두 자 여 덟 치로 상당히 짧은 편이지요. 그 이유는 칼의 변화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어 짤막하게 말했다. "실제로 운표의 칼은 일종의 기형도(奇形刀)입니다." 이때였다. "탓!" 날카로운 기합소리가 들렸다. 단위제가 급히 시선을 돌려보니 운표를 상대하던 한 명의 무사의 목도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운표의 목도가 무사의 머리를 내리쳤다. "윽!" 무사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갈!" 운표의 얼굴은 살얼음장이 되었고 그의 입에서는 준엄한 질책 이 떨어졌다. "무사에게 있어 무기는 생명이다.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라도 절대 놓쳐선 안되는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쓰러진 무사에게 말했다. "가서 천황련(天 鍊) 일만회(一萬回)를 연습해라!" "알았습니다." 무서운 얼굴에는 추호의 불만도 없어 보였다. 맹종하는 충직한 빛과 자신에 대한 실책의 부끄러움만이 보였다. 운표는 목도를 내렸다. 무사는 떨어진 목도를 주운 후 뒤로 물 러났다. 그러자 두 명의 무사는 공손히 목도를 가슴에 안고는 허 리를 절반 이상 굽혔다.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음!" 운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조충(兆忠)!" "네!" 한쪽 대열의 첫 번째에 앉아 있던 청년무사가 힘찬 대답과 함 께 일어섰다. "조충. 네가 훈련시켜라." "알겠습니다." 조충은 운표가 뒤로 물러나자 즉시 가운데로 걸어가며 목청을 돋구었다. "모두 일어서라!" "목도를 잡고 양측으로 나누어 대련을 실시한다!" "시작하라!" 모든 것이 일사불란이었다. 따다닥! 딱! 딱! 선상에서는 때아닌 격전이 벌어졌다. 비록 진 도가 아닌 목도였지만 그 대련은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격렬 하여 온통 파공성과 경풍소리로 귓전을 찔렀다. 단위제는 내심 혀 를 내둘렸다. '굉장하군! 저 정도라면 웬만한 문파와는 비교할 수가 없겠는 걸? 더욱더 무서운 점은 저들의 도법이 완전히 실전도법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백살대는 한결같이 어릴적부터 오직 도담후의 직접적 인 가르침을 받으며 도(刀)를 익혀왔다. 도담후는 그들에게 허식 과 형식을 완전히 빼버리고 오직 실전도법만을 가르쳤다. 그로 인 해 백살대 전원은 실로 무서운 하나하나의 도귀(刀鬼)라 해도 과 언이 아니었다. 운표가 다가오자 단위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 다. 원계묵이 담담히 말했다. "수고 했다." 운표는 히죽 웃으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대주께서 직접 지도하시는 것만 못하지요." 그의 얼굴은 예전의 덜렁거리고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단위 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조금 전 그 모습은 일순간의 모습일 뿐이었군." 운표는 의아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헛헛, 아닐세. 자네가 알면 무척 자존심 상할테니 이야기 않겠 네." "......?" 운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잠시 후 극히 기분 나쁜 표정 을 지었다. 대충 짐작이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때였다. "수고들 하시는 군요." 문득 청아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와 세 사람은 고개를 돌려보았 다. 그곳에는 백연연이 아름다운 자세로 과일 한 접시를 들고 서 있었다. "이것 좀 드시지요." 그녀가 내온 과일은 푸짐했고 깎은 솜씨도 정성이 깃든 것이었 다. 운표가 활짝 웃으며 두 손으로 받았다. "감사합니다. 소저!" 백연연은 생긋 청초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선실쪽으로 사라졌 다. 그녀의 뒤를 운표는 동경이 담긴 시선으로 한 동안 멍하니 바 라보았다. 이어 그는 중얼거렸다. "단도독님, 아무리 생각해도 백소저는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단위제는 느긋하게 말했다. "눈은 제대로 달린 모양이군." "......!" 운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기분이 몹시 상했으나 그는 꾹 참 고는 말했다. "저는 백소저 같은 성격의 미녀를 좋아합니다." 단위제는 그 말에 문득 대소를 터뜨렸다. "으허허허헛!" 운표는 급히 물었다. "왜 웃습니까?" 단위제는 웃음을 멈추며 가리켰다. "저게 무엇인가?" 그의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운표는 생각 해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하늘이지요." "저것은?" "바다." 단위제는 미소지었다. "그 정도면 됐네." 운표는 흠칫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헛헛헛, 나는 걱정이 되었네. 자네가 어디가 아픈가 하고 말일 세." 옆에서 원계묵도 웃었다. 그제서야 운표는 자신이 희롱당했다 는 것을 알고 얼굴이 시뻘개지고 말았다. 허나 그는 아무말도 못 하고 있었다. 단위제에게 정면으로 화를 낸다는 것은 더욱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에. × × × 석양(夕陽)은 점차 진홍빛에서 암갈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 다. 구룡상선의 후미, 선미(船尾)에 해당하는 그늘진 곳, 한 소년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파도가 갈라지는 선미에 두발을 배 밖으로 내민 채 위태스럽게 앉아 있는 소년은 바로 부금진이었다. 그는 조각을 하고 있었다. 부금진이 소도로 사각사각 깎는 것 은 아름다운 미녀상이었다. 그는 미녀상을 조각하는데 몰두해 버 린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각... 사각...! 소도가 나무결을 하나씩 벗겨낼 때마다 미녀상 의 형태가 점차 뚜렷한 윤곽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간이 흐르자 미녀상은 완성되었다. 그러자 부금진은 멍하니 완성된 조각을 바라다 본다. '어머님!' 그의 아름다운 두 눈에 문득 뿌연 습기가 어렸다. '당신은 차라리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 제 곁을 떠났어 야 했습니다.' 부금진의 얼굴에 그늘이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그랬더라면 저에게 아무런 아픔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나 어머님, 당신은 저에게 너무도 큰 상처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부금진의 눈에 문득 무엇인가 반짝 빛났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또 증오해요, 허나 안타깝습니다. 당신이 그리워지면 질수록 어머니 당신에 대한 증오 또한 커지는 것을.' 문득 부금진은 품 속에서 하나의 피리를 꺼냈다. 피리는 옥(玉) 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비취 빛을 띄우는 훌륭한 진품인 듯했다. 그는 피리를 입술에 갔다땠다. 삘리리 --- 삘릴리리 --- 릴. 곧 구슬프면서도 아름다운 피리음이 파도소리를 타고 애잔하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심금을 찌르는 듯한 묘한 마력이 깃든 피리 의 음율이었다.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선율....... "......." 문득 피리를 입에서 땐 부금진은 다시 조각을 응시했다. 그의 두 눈에 고뇌가 어렸다. 갈등, 눈에서는 마음과 사랑이 얽히고 있 었다. 다음 순간 그는 입술을 깨물더니 조각을 바다로 던져 버렸다. 멍하니 바다의 파도에 떠밀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조각을 바라보는 그의 눈꼬리에 이슬이 어린다. 삘릴리리......, 부금진은 다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이번의 피 리소리는 더욱더 구슬펐다. 애잔한 선율이 가슴을 후비는 듯 했고 피리의 곡조가 높이 올라가고 낮게 깔릴 때마다 울적한 심사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극을 주고 있다. 부금진, 미소년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그의 섬세한 얼굴의 윤곽이 어두워지는 석양빛 아래 기이하고 슬프게 투영되 었다. "......." 부금진을 피리를 입에서 떼었다. 그의 뺨으로 눈물이 젖어 내 렸으며 그의 눈은 멍하니 이제는 짙은 보랏빛을 띈 석양을 응시 하고 있었다. 그런 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좋은 곡(曲)이군." "......!" 부금진은 흠짓했다. 허나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음 성은 바로 원계묵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왔습니까?"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앉은 채 물었다. 원계목은 그의 가냘펴 보이는 등을 내려보며 말했다. "아까... 허나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솜씨가 대 단하더군, 하지만 곡조가 너무 슬프다." "쿡쿡쿡" 부금진은 괴소를 흘렸다. 그는 곧 비웃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살모사 나리께서도 음에 대해 좀 아시나 보군요?" 원계목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으나 그 말에 대답치 않고 담담히 말했다. "아까 네가 던진 것, 아주 훌륭한 조각 같던데 왜 버렸느냐?" 부금진의 몸이 흠칫 떨렸다. 허나 곧 그는 차갑게 말했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시오!" 원계목은 담담했다. "나는 너의 일에 참견할 이유가 있다." "당신이 무슨......." "소진! 너는 내 생명을 한 번 살려 준 셈이다. 그리고 너와 나 는 함께 죽을 고비도 넘겼다." 부금진은 다시 키득키득 괴소를 흘렸다. 이어 빈정대듯 말했다. "원형님도 의외로 감상적이시군요." 원계목은 그에게 다가갔다. 이어 바닥에 앉으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소진, 너는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사연을 지닌 듯 하구나, 네 고민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알고 싶구나." 부금진의 안색이 몇번이나 흐렸다 개었다 하더니 종내에는 다 시 냉소를 던졌다. "흥! 무슨 자격으로?" 원계목은 침착했다. "자격은 없다. 허나 나는 너를 좋아한다." "......!" 부금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소진, 네가 갈곳이 없다면 나와 함께 해남으로 가자." 부금진이 아무말도 없자 그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소진, 남자는 말이다.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이 있더라도 능히 이겨낼 줄 알아야 한다. 소진 너도 강한 놈이니까. 내 말뜻을 이 해하리라 믿는다." 원계묵은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겼다. 이어 그는 뚜벅뚜벅 선 실쪽으로 사라져 갔다. 부금진은 문득 몸을 돌리더니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원계묵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치잇... 제까짓게... 뭔데......." 그는 이어 힘없이 하늘을 응시했다. 보랏빛은 이제 붉은 회색 으로 물들었다. '아버님, 대체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금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하 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남에게 묻기에 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부금진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헌데 이때, 푸드드득-! 문득 어디선가로부터 날개소리가 들리더 니 한 마리의 앵무새가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털이 백설같이 흰 앵무새였다. 앵무새는 날개를 푸덕거리며 이 렇게 중얼거렸다. 굵은 목소리로, "소진아, 소진아, 너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너는 이 아비의 마지막 희망이다." 부금진의 우울하던 얼굴에 문득 피식 실소가 번졌다. 그는 앵 무새를 바라보며 뇌까렸다. "언제고 백아(白兒), 네놈을 닭고기 대신 튀겨 술안주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러자 앵무새는 놀란 듯 눈을 깜박깜박했다. 허나 곧 갑자기 푸드득 날아가며 허공에서 종알거렸다. "바보 같은 소진아, 앵무새 고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이 없 다. 이것은 사실이다!" "푸후훗!" 부금진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그는 조 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시선을 돌리며 내심 중 얼거렸다. '그래, 해남으로 가보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소도의 칼등으로 자신의 손 등을 문질렀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원형님에 대해 아버님이 부탁하신 것 이 루어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부금진은 이미 어두워진 선상을 가로질러 선실쪽으로 걸어갔 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하구(河口)의 바닷물이 강물과 만나면서 내는 파도소리 뿐이었다. 쏴아......! 第 35 章 가깝고도 먼 親舊 산신묘(山神廟), 주위에는 사람의 키를 넘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이미 향화(香火)가 끊어진 지 수십 년이나 지난 듯한 이곳. 사당 안으로 노을이 마치 핏빛처럼 섬뜩한 느낌을 주며 비 쳐들고 있다. 아......! 관(棺), 사당안에는 하나의 관이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닌 가? 핏빛 노을이 관 위에 내려앉아 있는 광경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관의 옆, 한명이 웅크리듯 앉아 있었다. 백의인(白衣人), 너무나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송옥도 울고 갈 만큼 아름답게 생긴 미청년이었다. 그의 옆 바닥에는 한자루의 묵도(墨刀)가 누워있다. 누군가,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정한 풍류아. 무정도(無情刀) 모용초, 바로 그 였다. 지금 그의 영준하게 생긴 얼굴은 다소 수척해져 있었다. 관은 뚜껑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관 속에는 바로 귀송자 혁련노후의 시체가 누워있었다. 그는 죽었으나 평온한 표정이었다. "......." 모용초는 망연히 넋을 이ㄹ은 듯한 표정으로 관 속의 혁련노후 의 시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한 시진째 그는 그 자세 그대 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노야(老爺), 당신은 진정 세상을 떠난 것이오? 진정 죽은 것 이오? 후후, 당신은 언제나 사람을 기만하는 것을 좋아했지요. 지 금 당신의 모습도 나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오? 나는... 믿을 수가 없소. 당신의 죽음을...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단 말이오. 모용초는 문득 바닥에서 잡초를 한 웅큼 뽑았다. 사당은 너무 나 낡아 지붕이 훤하게 뚫려 있음은 물론 바닥에는 잡초가 마구 자라 있었다. 모용초는 잡초를 입에 한 웅큼 뜯어넣고 씹었다. 비 릿한 냄새와 함께 씁쓸한 느낌이 끝없는 슬픔과 함께 그의 새포 구석구석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잡초를 자꾸만 뽑아 입 안에 구 겨 넣었다. 쓰디쓰고 독한 풀즙의 맞은, 그의 혈관 끝까지 번져나가 그의 가슴을 후벼파는듯했다. --- 당신이 나에게 보여주던 그 강철같은 위대한 힘은 어디로 갔소? 흐흐, 이렇게 당신 누워있고 나는 앉아서 당신의 시체를 보 아야 한단 말이오? 그까짓 원계묵 정도에 당할 정도로 당신은 늙 어버렸단 말이오? 모ㅊ초는 계속 잡초를 씹었다. 이제는 쓰다 못해 혀가 아렸고 맛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관 속에 누워 있 는 혁련노후의 시선을 노려 보았다. '죽었으면서도 당신의 그 평온한 표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 오?' ㅌ! 그는 씹던 잡초를 내뱉았다. 문득 그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원계묵!' 무섭도록 강렬한 살기가 전신혈맥으로 팽창되듯 퍼나갔다. 한 데 그때였다. 스슷, 문득 사당 안의 공기가 파동치더니 관 앞에 한 명의 흑의 인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귀림의 인물이었다. 사실상 그는 귀림 의 마지막 생존자라 할 수 있었다. 과거에 번창하던 귀림의 술법 자들은 그 언젠가의 혈투에 휩쓸려 거의 소멸된데다가 이번에는 원계목의 마도(魔刀)에 의해 모두 죽고 그만 혼자 남은 것이었다. 흑의인은 허무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용어른, 해가 지고 있습니다. 이제 주군의 시신을 옮겨야겠 습니다." "귀림으로... 말인가?" 모용초의 말에 흑의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초는 문 득 그를 그 특유의 비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왜 귀림으로 가기 전에 나에게 들렸느냐?" 흑의인은 침묵했다. 하나 잠시 후 그는 움푹 꺼진 눈가에 그늘 을 드리우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용어른께만은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 습니다." 이번에는 모용초가 침묵했다. 흑의인은 관 뚜껑을 닫으려 했다. 하나 이때 모용초가 제지했다. "잠깐." "......?" 찌-익! 모용초는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내더니 그 조각을 혁련노 후의 가슴에 놓았다. 그의 두 눈에는 깊은 슬픔이 어렸다. "이제... 되었다." 흑의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관 뚜껑을 닫았다. 그가 관을 정리 하자 모용초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상곡(商谷), 너는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냐?" 상곡이라 불리운 흑의 중년인은 당당히 말했다. "귀림으로 돌아가 다시는 나오지 않을 작정입니다. 어른께서 돌아가신 이상 성주도 더 이상 귀림을 찾지 않을 테니까요." 모용초는 그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무엇을 바라느냐?" 상곡은 잠시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 그는 안면을 씰룩였다. 그 의 두눈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 모용초는 스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원계묵은... 내가 죽여 주겠다." 상곡은 흐드러진 웃음을 흘렸다. 이어 그는 약간 비틀어진 어 조로 말했다. "나는 관계치 않겠습니다. 허나 한 가지만은 태사독 어른께 전 해주십시오." 태사독, 그는 조화성 제삼신마전의 전주다. 원계묵을 죽이기 위 해 끈질기게 시도되는 살수(殺手)들이 모두 제삼신마전에서 보내 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 모용초가 그를 바라보자 상곡은 눈썹을 경련하며 말했다. "청강삼십육검수가 조금만 도와 주었다면 어른은 돌아가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는 관을 들었다. "언제고 시간이 있으시다면 귀림으로 방문해 주십시오. 어둡고 빛이 없는 숲이지만 더러움은 없는 곳입니다." 스스스! 상곡의 모습이 사라졌다. 귀림의 마지막 생존자, 마침 내 그는 영원히 무림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린 것이었다. 모용초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석양의 타는 듯한 노을이 그 의 얼굴에 비쳤다. 설뜩하도록 아름다운 얼굴에 귀기가 어리고 있 었다. 이제 갈 사람은 갔다. 그리고 그만이 남았다. 텅 빈 사당에 홀로 남은 채 그는 넋을 잃고 있었다. 한데 이때 그의 귓전을 울리는 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마음의 괴로운가, 친구? 하나 그 모습은 자네 답지가 못하구 나." 모용초는 고개를 돌렸다. 사당의 문(門), 한 사나이가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긴 그림자가 사당 안으로 어둡게 깔렸다. 그는 몹시 특이한 사람 이었다. 입가에는 긴 풀잎을 물고 있었으며 머리칼은 흐트려진 채 다듬어 놓지도 않았으며....... 옷은 마의(麻衣), 반쯤 걷은 팔과 다리는 구리빛이었다. 또한 얼 굴에는 무수한 상처가 나 있어 마치 야차를 보는 듯 무시무시했 다. 더욱이 한쪽 눈은 실명(失明)한 듯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 다. 나이는 사십 가량 되어 보였다. 그를 본 순간 모용초의 안색 이 변화를 일으켰다. "막청!" 그러자 마의인, 즉 막청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모용초도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다. 친구." 순간 두 사람은 굳세게 서로를 포옹했다. 사나이들의 포옹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모용초는 감회가 어린 듯 약간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너무 소식이 없어 죽은 줄 알았다." 막청의 두 눈에도 감상 어린 빛이 흘렸다. "그렇군, 거의 이십 년이 다 되었어." 그는 괴상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너무나 험악한 상처투성이 로 인해 미소같지가 않고 흉측하게만 보였다. 그는 모용초의 아름 다운 얼굴을 보며 기괴하게 웃었다. "흘흘, 자네의 모습은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여전히 아름답고 빛이 나는구나." 모용초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 무어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실상 겉보기에만 이십 대로 보일 뿐 그는 막청과 동년배였던 것 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막청은 흐흐 웃었다. "조화성의 표기를 보았지." "그럼, 그간 어디에 있었나?" 막청은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산(天山)." "천산?" 막청은 허리춤에서 호로병 하나를 꺼내더니 술을 몇 모금인가 단숨에 마셔댔다. "자네도 한 모금 마시게." 모용초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로병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독 한 배갈이 목을 넘어가며 쓰디 쓴 맛을 풍겼다. 막청은 중얼거렸 다. "혁련노인이 돌아가셨더군. 원계묵이란 자, 소문은 몇 번 들었 다. 그렇게도 강한가?" 순간 모용초의 두 눈에서 섬뜩한 광채가 솟아났다. "자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막청은 잠시 그를 응시했다. 이어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네, 결국 혼자 어떻게 해 내갰다 이거군." 막청은 잠시 침묵하다가 문득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취영의 일은 얘기 들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위로해 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모용초의 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막청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와 그녀는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순간, "그만!" 모용초는 안색이 일그러지더니 별안간 막청의 멱살을 움켜 쥐 었다. 그의 눈에서 무섭도록 섬뜩한 분노와 광기(狂氣)가 치솟고 있었다. "막청! 그만해라. 그녀의 이름을 더 이상 내 앞에서 올리지 마 라!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살심을 느낀다!" 막청은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안색이 짧은 순간에 몇 차례나 거듭 변했다. 잠시 후 그는 멱살 쥔 모용초의 손을 뿌리친 후 딱딱하게 말했 다. "모용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만큼은 그녀에 대해 말할 자 격이 있지 않은가?" "......!" 모용초의 눈썹이 다시 경련했다. 그는 잠시 후 안색을 누그러 뜨리며 어둡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친구......`." 막청은 옷 매무새를 고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두 절친한 벗, 그들 사이에는 감당할 수 없는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한참 후 모용초는 막청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벌컥벌컥 들이 켰다. 이어 그는 손등으로 입술을 쓱 문지른 후 미소를 흘렸다. "흐흐, 이십년 전 그녀는 돌연히 변했다. 그 정숙하고 아름답고 언제나 빛나 보이던 그녀가 단 몇 달 사이에 엄청나게 변해 버린 것이다." 막청은 그저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흐흐, 내가 성주의 명을 마치고 하북에서 돌아와 그녀의 방으 로 보고 싶은 마음에서 급히 달려갔을 때, 그녀가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아나? 흐흐, 다섯 명의 남자들과 침상에서 발가벗고 그짓을 하고 있 었다. "......." 막청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흐흐, 나는 상상도 못할 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 그 광경 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라고 수없이 외쳐 댔었다. 허나 그것은 엄 연한 현실이었다." 모용초는 다시 술병을 입으로 쑤셔박으며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녀의 눈이 말이다. 흐흐, 문 앞에서 망연히 서 있는 나를 발 견하고는 흐흐, 웃었네. 그것도 요염하고 요부같은 방탕함으로 말 이야." "음......." 막청의 이마에 심줄이 불거졌다. 그로 미루어 그도 무한한 고 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군... 당신도 이리 오세요... 이들 갖고는 모자라는 것 같아요... 라고." 다시 술은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용초의 두 눈에 이슬이 어렸다. 막청의 얼굴도 어떤 비극의 충격을 못이겨 굳어져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는 대체 눈앞의 친구를 뭐라 위로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허나 곧 그는 그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그 자신 역시 엄청난 슬픔과 분노, 그리고 비애를 감당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석양은 점점 기울어 가고 대지에는 어두움이 깔려들었다. 암천(暗天), 별빛만이 가물거리고 있다. 황량한 들판에는 이름 모르르 풀벌레 울음소리가 야음을 울린다. "......." "......." 모용초와 막청 두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다. 모 용초가 한참을 침묵한 이후에 입을 열었다. "도대체 그녀가 왜 그렇게 변해 버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 역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묻지 않았지." 막청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남모를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 "흐흐... 으......." 모용초는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막청은 섬뜩했다. 그가 알기로 모용초가 과거에 이런 웃음을 짓는 것을 그는 한 번도 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문득 모용초가 말했다.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 막청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초는 음성을 다시 예전과 같이 낭랑하게 회복시켰다. "막청, 자네의 아버님은 평안하신가?" 막청은 너털 웃음을 흘렸다. "후후, 돌아가셨다. 햇수로 어느 덧 십 년이 흘렀지." 모용초는 흠칫했다. 허나 막청은 미소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평생을 복잡하게 살아오신 분이었지만, 마지막 생 만큼은 깨 끗하게 정리를 하시고 떠나신 셈이지." 막청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흩날렸다. "모두, 지난 일이야." 모용초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헌데 어째서 나오게 되었나?" "일 년 전, 내가 살던 천산(天山)으로 성주의 서찰이 날아들었 다. 내가 필요하다고 하더군." "그래서 나왔나?" 막청은 허허로운 웃음을 웃었다. "후후, 십삼사(十三邪)의 운명은 모두 마찬가지일세. 친구, 마교 (魔敎)의 일맥으로 태어난 나 막청도 그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 야. 성주께서 나를 보고 신산(神算) 제갈사를 제거해 달라고 하셨 네." "신산 제갈사를......?" 모용초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의 눈에는 곤혹의 빛이 어렸다. "신산 제갈사는 지금 독로장미(禿路薔薇) 서문표(西門彪)가 맡 고 있는......." 막청은 눈을 번뜩였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글세, 누가 맡고 있는 관계치 않겠네." 그는 자조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성주의 명령은 어차피 절대적인 것, 신산 제갈사를 제거해야 지." 모용초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신산 제갈사는 보통 무서운 자가 아닐세. 이십 년 동안 성주는 온갖 수단을 다 써서 그자를 죽이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해 왔네." "글세......." 막청은 문득 얼굴을 기이하게 씰룩였다. "인간이 신이 아닌 다음에야 허점이 있기 마련이고, 완벽이란 것이 존재치 않은 이상에는 반드시 그 틈이 있기 마련이지." 그는 시선을 하늘로 돌리며 말했다. "나 막청이 사십 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절대로 깰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 뿐이네. 바로 나의 아버님이지." 모용초는 얼굴이 흔들렸다. "허나 이제 그 분은 돌아가셨네." 막청의 얼굴이 조금은 우울해졌다. 모용초는 하늘을 응시했다. 그와 막청. 그들은 이십 년 전까지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옛 적부터도 모용초는 준수했으며 학문이 깊고 무공이 고강했다. 막 청은 모든 면에서 모용초에게 비교가 되지 않았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두 명은 누구보다도 친했다. 막청은 어릴 때부터 모용초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며 살아왔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여인까지도 양보했다. 막청의 한 쪽 눈이 멀은 것도 바로 무공비무 때 막청이 한 수 양보하다 다친 것이었다. 모용초는 막청을 좋아했다. 허나 그는 늘 그의 인생에 있어 빛을 진 듯한 느낌 때문에 막청에 대해 보 이지 않는 벽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서로 가깝게 걸으면서도 그들은 모르는 타인이 걷는 듯 한 느낌을 은연중 갖고 있었다. 가까우면서도 먼 우정(友情). 그들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바람은 차갑다. 어느 덧 가을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곧 겨울이 올 것 같군." 막청의 중얼거림은 웬지 스산하게 들렸고 그 음성에 모용초는 가슴이 쓸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第 36 章 廻旋飛流외 神刀術 제남부(齊南府), 산동성(山東省) 제일의 대도(大都), 화북대평원 (華北大平原)의 기름진 평야지대는 중원대륙의 노른자위라 해도 과언이 이니다. 누대에 걸쳐 얼마나 많은 영웅 호걸들이 이 화북 대평원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렸던가? 중원(中原)을 차지하기 위해 화북은 필수불가결한 요충지였고 온 화북을 차지해야만 중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화북 의 중요성은 컸다. 제남부는 화북에 있다. 또한 황하(黃河)가 평원을 옥토로 만들 며 도도히 흐르는 곳, 그곳에 제남은 위치해 있었다. 제님부에는 양가장(楊家莊)이 있었다. 이십 년 전, 북경(北京) 자금성에서 호부판서(戶部判書)를 지냈 던 양응시 대감이 관직을 그만 뒤 고향인 제남으로 내려와 세운 장원이었다. 양응시는 연로하여 세상을 떴다. 그리고 그의 아들 양익상의 대(代)에 이르러서는 상업(商業)으 로 크게 번창했다. 그리하여 양가장은 제남은 물론 산동일대의 거 부(巨富)로서 주위의 큰 존경과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양익상은 고집이 세고 완고한 성품이다. 허나 그가 존경을 받 는 것은 그의 인자함과 박애(博愛) 때문이다. 그는 비록 상인이었 으나 황하의 인근 수역(水域)에 수재가 날 때마다 곡식을 풀어 수 재민을 구호하곤 했던 것이다. 양가장은 황하를 굽어보는 구릉에 세워져 있었다. 그 규모가 웅장하지는 않았으나 건축미와 누각의 아름다움은 일대의 으뜸이 었다. × × × 양가장 내의 연희청, 떠들석한 분위기 속에 연회청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구룡상선(九龍商船)의 인부들 수십 명과 백살대(百殺隊) 등 많 은 사람들이 연회청을 메웠다. 수십 명의 양가장 시녀들이 바쁘게 술과 음식을 나르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양가장은 완전히 잔치 분위기 였다. 연희청의 상석, 그곳에는 장주 양익상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육십여 세 정도에 알굴은 청수했다. 양간 각이 진 얼굴은 강직하 고 완고한 그의 성품을 엿보게 했다. 금의 화복을 입은 그는 언제 나 날카로운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옆, 용백군으로 행동하는 장천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 래로 단위제, 원계묵, 운표, 백연연, 부금진 등이 자리에 있었다. 양익상은 북경까지 다녔왔으며 장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온 장 천린에게 치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단위제와 원계묵 등과 인사를 나누었다. 장천린은 그들의 신분을 감추고 단지 사업을 위해서 고용했다 고만 이야기했다. 양익상은 그저 기쁠뿐이었다. 그는 조카인 장천 린이 대견하기만 했다. "허헛! 백군, 이번에 정말 수고가 많았다. 물건이 예상보다 많 아서 은근히 걱정했다. 그런데 그 많은 것을 다 처리하고 돌아왔 으니 진정 기쁘구나." 정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외숙께서 십수 년에 걸쳐 닦아놓은 길이었는데 제게 무슨 특 별한 어려움이 있었겠습니다?" "허허허, 그건 지나친 겸손이다. 실상 네가 아니었다면 그 일을 해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익상은 기분이 좋았다. 그는 조카인 장천린이 자신의 사업을 대행할 때 설마 이정도로까지 잘 해낼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이 년 전 장천린이 맡고 부터는 그의 재산이나 사업규모는 수 배나 신장되었던 것이었다. 한동안 담소가 오가며 술잔이 부지런 히 옮겨졌다. 그러다 양익상은 문득 물었다. "백군, 진총관(陣總管)을 당산(唐山)으로 보내라고?" 장천린은 대답했다. "예. 당산 근체에서 철광(鐵鑛)이 상당히 매장된 곳이 있는데 쓸로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북경에 도착하기 전에 보냈습니다." 그 말에 양익상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총관은 몸이 약해서 원......." "그래서 초광을 딸려 보냈습니다." "음, 그랬나?" 양익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천린이 하는 일에 이제껏 한 번도 허술했던 적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고 마음을 놓았다. 장천린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세옥(世玉)과 문완(文婉)은 어디에 있습니까?" "핫핫, 사냥을 간 모양이네. 백군 너의 소식을 들었다면 만사를 젖혀 놓고 달려올 뗀데 꽤나 멀리나간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군요." 장천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때 양가장의 하인 한 명이 다가와 양익상에게 무엇인가 귓속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양익상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두 눈에는 노기가 일어났다. "그 놈이... 감히......!" 그는 분노에 찬 음성을 말했다. "너는 나가서 그 놈을 썩 내쫓아라!" 하인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주인님... 하지만......." 양익상은 노성을 터뜨렸다. "당장 내쫓아 버리지 못하겠느냐?" "예......." 하인은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장천린은 묵묵히 지켜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외숙?" "우무것도 아니다. 신경쓰지 말고 술이나 한 잔 받아라." 장천린은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그는 술을 마신 후 양익상 에게 따라주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군요." 양익상은 술 한 잔을 들이키더니 노기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백군, 너도 알 것이다. 호개악(胡介岳)의 청무관(靑武館)을 말 이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이어 그는 담담히 말했다. "청무관은 제남부 일대에서 가장 큰 무술도장이 아닙니끼?" "그렇다." 양익상은 아직도 분기가 살라지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호개악 관주에게는 은이랑(殷伊郞)이란 조카가 있다. 그 놈은 호개악의 위세를 믿고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한데 보름 전쯤 갑자기 그 놈이 양가장으로 하인을 보내더니 청혼(請婚)을 해왔다." "청혼?" 양익상은 기가 막히다는 듯 수염을 짜증스럽게 꼬았다. "문완(文婉)을 달라는 것이다." 장천린은 흠칫했다. 양문완(楊文婉)은 양익상의 외동딸로서 금년나이 십 칠 세였다. 제남제일미(齊南第一美)로 손꼽힐 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널리 알 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를 얻기 위해 많은 명문대가의 귀공자 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혼담이라는 것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양익상은 노기를 띠었다. "그것은 네가 몰라 하는 소리다. 은이랑이란 그 놈은 호색한에 다 이만저만 방탕한 놈이 아니다. 그 놈은 개망나니일뿐더러 결혼 은 안했어도 벌써 첩이 여섯 명이나 된단 말이다." 장천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천하에 고약한 놈이군.' 이때, 두명이 연희청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자 장천린 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들어온 사람은 소년과 소녀였다. 십 이삼 세 가량의 귀엽게 생긴 소년과 실 찰팔 세 정도의 절 세 미소녀였다. 그들이야 말로 양익사의 자식인 아들 양세옥(楊世 玉)과 딸인 양문완(楊文婉)이었다. "백군 형님!" 양세옥이 장천린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그는 그 대로 총알같이 달려오더니 장천린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어이쿠, 이 개구장이 녀석아! 형님 가슴에 구멍이 나겠다.!" 장천린의 말에 양세옥은 상기된 얼굴을 들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형님이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누나하고 급히 오는 길이예요." 양세옥의 두 뺨은 달아 있었다. 귀엽고 당찬 듯한 느낌이 드는 소년이었다. 장천린은 싱긋 웃더니 세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어디 갔다오는 중이냐? "사냥이요." "후후, 많이 잡았느냐?" 양세옥은 어깨를 으쓱했다. "노루 두 마리를 잡았어요." 이때 양문완이 그에게 다가와 공손히 절을 했다. "오라버니, 북경까지 다녀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겠어요." 장천린은 미소했다. "힘든 것은 없었다." 그는 유연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집안에만 박혀 얌전하기만 하던 네가 사냥을 갔 다더니 정말 뜻밖이구나." 문완은 얼굴을 노을처럼 붉혔다. "아니예요. 세욱이 끌고가는 바람에 억지로 따라갔던 거예요." "피이, 거짓말! 사냥 가서는 나보다 더 설쳐놓고 집에 와선 치 사하게 새침떨다니?" 세옥이 혀를 쏙! 내밀며 빈정거렸다. 문완은 그만 홍당무가 되 었다. "너......`." "하하하!" 장천린은 호탕하게 웃음을 웃었다. "세옥, 까불지 말고 이 형님의 친구분들게 인사들여라." 그 말에 양세옥은 눈을 반짝 거렸다. 그는 급히 주위를 빠르게 ㅎ어보았다. 이어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이제와는 딴판으로 단위제, 원계묵 등에게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양세옥이라고 합니다." "......!" 그 광경에 단위제를 비롯하여 모두들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명가(名家)의 후손이라 다르구나. 금방 개구장이였다가도 이렇게 딴판으로 변하다니.' 이때 양문완도 옷깃을 가볍게 잡고는 인사를 했다. 그녀의 나 이는 아직 어렸으나 그 아름다움은 눈부신 것이다. 부호의 딸이었 으나 그다지 사치스럽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녀의 언행은 오히려 검박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운표는 술잔을 들다 말고 팔꿈치로 슬쩍 원계묵의 옆구리를 건 드렸다. "대주, 양소저는 정말 대단한 미인인데요?" 원계묵은 담담히 말했다. "양소저가 미인인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냐?" 운표는 혀를 찼다. "멋없소. 대주." 그는 다시 시선을 양문완에게로 돌렸다. 그는 처음 보는 순간 부터 그녀의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그의 가슴에는 알게 모르게 양문완의 영상이 낙인 찍히듯 들어서고 있었다. 운표는 계속 그녀 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양문완은 장천린의 곁에 붙은 채 술 을 따르며 웃고 있었다. 운표는 내심 생각했다. '정말 아름답군, 백소저도 아름답지만 그녀는 웬지 가까이 하기 가 어려운 느낌인데 양소저는 정말.......' 이때, 한쪽에서는 백연연과 단위제, 부금진 삼인이 담소하고 있 었다. 단위제의 재담(才談)이 워낙 웃겨서 백연연과 부금진은 그 얘기에 빠져 연신 웃고 있었다. 연회는 계속 흥겹게 진행되었다. 특히 연회에서 가장 잘 노는 사람은 단연 단위제외 운표였다. 그들은 평소 다소 앙숙(?)이었으 나 이런 자리에서는 분위기를 잘 맞추고 있었다. 단위제의 능청스러운 우스개 소리에 죄중은 연신 폭소가 터지 곤 했다. 운표도 얼큰히 취한 얼굴로 단위제의 이야기에 기막히게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양익상도 실로 오랜만에 웃음에 이끌려 즐거운 기분이었다. 연 희청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여 어느 것 해가 기울어 가는 데도 아무도 자리를 뜨려하지 않았다. "하하하......." "헛헛헛......!" 웃음과 갈채가 끊이지 않고 술과 안주는 계속 시녀들에 의해 날라져 왔다. 구룡상선의인부들도 오랜만에 포식을 했으며 백살대의 젊은 도 객들도 간만에 실컷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단위제가 문득 몸을 일으켰다. 그는 원계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대협, 내가 여러분을 대산하여 원대협에게 한 가지 청할 일 이 있소이다." "......?" 원계묵은 물론 중인들도 궁금한 시선을 그에게 집중시켰다. 단위제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원대협이 천하제일도라는 것은 세인이 다 아는 사실이오. 이 번 기회에 칼 솜씨를 보여주셔서 이곳 좌중의 인물을 좀 높여 주 시지 않겠소?" 원계묵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하나 이때 좌중의 인물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다. 백살대의 도객(刀客)들도 미 소 지으며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와-!" "원대협의 신기(神技)를 보고 싶습니다!" "대주! 한 번 시원스럽게 보여 주십시오." 원계묵은 고소지었다. 그는 상황이 어쩔 수 없다고 느꼈는지 쓴웃음 지으며 단위제를 바라 보았다. "단도독, 아주 저를 곤경에 빠드리는 군요." 단위제는 느긋하게 웃었다. "헛헛헛, 이해히 주시오. 나는 그저 중인의 마음을 대신했을 뿐 이외다." 단위제의 기묘한 발뺌에 원계묵은 흔쾌히 말했다. "좋습니다. 그대신 나도 부탁이 있습니다. 먼저 단도독께서 솜 시를 좀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더욱 분위기가 익을 것 같습니 다." "......!" 단위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나 이때 좌중에는 다시 떠나갈 듯한 박수 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단위제는 어색하게 웃었다. "허헛, 내가 원대협께 한방 먹었구료." 이어 그는 흔쾌히 말했다. "좋습니다. 본인이 미숙하지만 한 수 보이겠습니다. 허헛, 여러 분께선 웃지나 마시기를." 그 말에 모두들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장천린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그는 단위제가 무공을 펼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태진왕의 서찰을 통해 그가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양익상과 양씨 남매는 호기심에 찬 눈빛을 빛냈다. 그들은 무림인이 아니므로 무공 같은 것을 본적이 없었다. 기 껏해야 단순한 소신권각술 따위를 호장무사들이 연마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장천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단도독의 신기를 구경하게 되어 몹시 행운입니다." "허허, 이거 창피나 당하지 않을는지 모르겠소이다." 한데 이때, 부금진이 장천린의 밑으로 다가오더니 전음으로 말 했다. "용대인, 조금 전에 잠깐 나갔다 오던 중 하인들의 말을 들으니 양가장 안채에서 몇 명 무사들이 난동을 부린다고 하더군요."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들이 누구기에?" "아마 청무관의 문하제자들 같습니다." 장천린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소란이 심하던가?" "양가장 하인들 몇 명이 심하게 다쳤다더군요. 그들의 기세로 보아 곧 이곳으로 쳐들어 올 것 같다는 군요. 제가 가서 손 좀 보 고 올까요? 아까 양어른이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청무관의 은 이랑이란 놈은 아주 못된놈 같은데 말입니다."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진, 그럼 네가 가서 수고 좀 해다오. 하나 너무 심하게 하진 마라." 부금진은 싱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이어 그는 중인들의 시선이 단위제에게 쏠린 틈을 타 몰래 장 내를 빠져 나갔다. 이때, "와!" 함성이 들렸다. 단위제가 중인들 앞으로 나간 것이다. 단위제는 시녀에게 술잔 다섯 개를 주문했다. "허헛, 그 술잔에 모두 술을 채워 주시오. 가득 말이오." 시녀들은 의아했으나 곧 말없이 술잔 다섯 개에 술을 채웠다. "허허헛, 자, 여러분 웃지는 마시오." 단위제는 너털웃음을 웃더니 술잔을 차례차례 빠르게 연회장 밖으로 던졌다. 윙! 다섯 개의 술잔은 파공성을 내며 연회장 밖으로 사라졌다. "......?" 모두들 의아했다. 장천린도 의아했다. 하나 이때 오직 원계묵만 은 두 눈에 곤혹스런 빛을 띄우고 있었다. 단위제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하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 보아도 밖에서 술잔이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 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거야?" "글쎄?" 중인들은 웅성웅성 거렸다. 이때 단위제는 문득 시녀가 들고 있던 쟁반 하나를 달라고 말한 뒤 그것을 양세옥에게 주었다. "이것 좀 들고 있어주지 않겠나? 하니만 절대 움직이면 안되네. 양공자." "네." 양세옥은 귀여운 눈을 깜빡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 라 잔뜩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때였다. 펑! 돌연 연회청 옆 창문에 구멍이 뚫렸다. 그와 동시에 쉭! 쉭! 쉭!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리며 어떤 물체가 양세옥을 향해 쏘아들 어왔다. 모두 깜짝 놀랐다. "엇!" 양세옥도 놀라 피하려 했다. "움직이지 말게!" 단위제의 말에 그는 움찔 놀라 그대로 섰다. 그때였다. 어느 새 쟁반 위에는 다섯 개의 술잔이 나란히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창문을 뚫고 쏘아온 것은 바로 술잔이었던 것이었다. "와-아!" "신기(神技)요!" 함성이 일어났다. 양익상도 연신 탄성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하나 이때 양세옥은 멍하니 술잔을 내려보고 있었다. 술잔에는 술 이 찰랑찰랑 차 있었다. 한 방울도 축이 나 있지 않았다. 그것은 도저히 양세옥으로서 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어떻게 술이 가든 찬 술잔을 던졌는 데 다시 돌아오고 또 한 방울의 술도 흘리지 않을 수가 있단 말 인가? 양세옥은 마치 도깨비에게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요술 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이때, 장천린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굉장한 회선비류(回旋飛流)다. 만약 저 술잔이 암기였다면?' 그는 새삼 단위제가 재평가 되는 느낌이었다. "단도독, 내 상상보다 훨씬 고수다.' 이때 원계묵은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단위제 는 멋적은 미소를 지었다. 이어 술잔을 차례로 돌렸다. 양익상, 장 천린, 원계묵, 운표 그리고 나머지 한잔은 자신이 들었다. "허허헛, 미숙한 솜씨로 추태를 보였소이다. 아량으로 받아주시 고 술을 드시기 바랍니다." 양익상은 연신 탄성을 발했다. "오! 오! 정말 신기(神技)요!" 중인들에게서 다시 떠나갈 듯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단위 제는 고루 포권을 한 다음 원계묵에게 말했다. "자, 이제 원대협의 차례요." 원계묵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중인들이 지 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모두들 숨을 죽였 다. 이미 마도(魔刀) 원계묵의 이름은 중원에 알려지고 있었다. 과 연 그가 어떤 절기를 펼칠지 중인들의 호기심은 극에 달했다. 원 계묵은 담담히 말했다. "종이 좀 구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시녀들이 급히 어디에선가 한 뭉치의 종이를 가져왔다. 원계묵은 종이를 세어보았다. 모두 열 두장 이었다. 그는 아직도 쟁반을 들고 서 있는 양세옥에게 종이를 건너 주었다. "양공자, 종이를 허공에 던져주지 않겠나?" 양세옥은 흠칫했다. "한 장씩 말입니까?" "아니 모두 한꺼번에 던져 주게." 양세옥은 눈을 빛냈다. "좋아요." 그는 즉시 쟁반을 내려놓고 종이를 들었다. 이어, 휙! 열두 장 의 종이가 던져지자 허공에서 종이가 저마다 어지럽게 펼쳐졌다. 그순간, 번-쩍! 중인들은 원계묵이 언제 장도를 뽑았는지 몰랐 다. 발도(發刀)의 동작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원계묵의 주위에서 무엇인가 번쩍번쩍 수없이 도광(刀光)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것은 환상이었다. 마치 수없는 흰 나비가 허공에서 무수한 숫자로 늘어나 훨훨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열 두 장의 종이는 조 각조각 잘라졌다. 거의 가루가 되도록. 하얀나비가 눈송이로 변하여 떨어져 내렸다. 중인들의 입이 벌 어졌다. 허나 그것은 약과였다. 바로 다음 순간, "타!" 원계묵은 허공을 향해 일장(一掌)을 날렸다. 순간 눈가루 같은 종이조각이 일시에 태풍에 휘말리듯 한쪽 벽으로 날아갔다. 파파파파팍! 벽에서 격타음이 일었다. 잠시 후 중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다. 보라! 단단한 목질로 된 벽면에 종이조각이 모두 깊숙이 박혀버 린 것이 아닌가? 더욱이, <양문천세(楊門千世)> 그런 글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글씨의 형상을 이룬 종이조각들, 그것은 모두 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일정하게 잘려져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종이조각은 모두 매화꽃 모양이었다. 실로 신도술(神刀術)이 아닐 수 없었다. "......." 장내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계묵은 장도를 안고 중인들에게 포권했다. "미숙한 솜씨로 여러분의 시선을 어지럽혀 드렸습니다. 용서하 십시오." 그제서야, "와아아-!" 우뢰와 같은 함성과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들은 자신의 눈 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더욱이 양가장 사람들은 제 정신이 아니었 다. 흡사 꿈을 꾸는 듯했다. 그들은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계속 박 수를 쳤다. 백살대의 도객들은 입가에 자부심 어린 미소를 띈 채 박수를 치고 있었다. 박수소리와 함성은 근 일각이나 계속되었고 장내는 흥분과 열기로 가득차게 되었다. 장천린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 침착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원계묵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과연, 원제다.' 장내의 연회는 절정에 올랐다. 술잔 부딪치는 소리, 웃음소리, 담소가 어우러져 온통 흥청거리는 분위기였다. 양가장은 오랜만 에 흥청거렸다. 第 37 章 初 雪 이른 아침(朝), 양가장 후원(後園)은 쌀쌀했다. 어느덧 계절은 초겨울(初冬)로 접어들고 있었다. 원계묵은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있었다. 꽃들도 시들은 화원은 웬지 을씨년스러웠다. '내일 오후에 해남(海南)으로 떠난다고 했다.' 원계묵의 표정은 언뜻 보아 아무런 감정도 엿볼 수가 없었다. '장장 일만리(一萬里)의 해로(海路), 한달은 잡아야 할 만큼 먼 거리다.' 그는 뒷짐을 지고 하늘을 응시했다. '헌데 문제는 형님 말마따나 과연 황금의 손 탁일비가 그 많은 황금을 순순히 내 줄것이냐 하는 것이다.' 원계묵은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설사 내준다 해도 탁일비가 지니고 있는 황금의 양이 얼만큼 인지 전혀 모르는 이상,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문득 그는 고개를 흔들며 고소지었다. '그만두자. 내가 머리 쓰는 것은 어울리지가 않아. 형님이 알아 서 처리하시겠지.' 그는 천천히 걸었다. 화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문득 월동문 속 에서 누군가가 툭 튀어나왔다. "......!" 원계묵은 흠칫했다. 상대가 바로 부금진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부금진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산뜻한 남삼에 하얀 털 조끼를 입었으며 머리는 묶어 뒤로 내렸다. 옥과 같은 피부에 섬세한 얼굴은 마치 미소녀를 무색케 할 정 도로 아름다왔다. "엇! 형님, 이른 아침부터 원일입니까?" 부금진이 놀라자 원계묵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는 자네는 원일인가?" "후훗!" 부금진은 나직이 웃었다. 웬지 그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그는 하늘을 응시하더니 말했다. "어쩌면 오늘쯤 첫 눈(雪)이 올 것 같군요?" "음!" 지금은 십 일 월, 첫눈이 내릴만도 했다. 부금진은 콧 등에 주 름을 잡으며 웃었다. 묘한 매력이 풍기는 웃음이었다. "형님, 저는 먼저 안채로 들어가겠습니다." "응, 그래라." 부금진은 그를 지나쳐 몇 걸음 가더니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밝게 웃었다. "참, 해남까지 같이 가고 싶으니 형님깨서 용대인께 말씀 좀 잘 해 주십시오." 원계묵은 싱긋 웃었다. "좋아, 잘 생각했다." 부금진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원계묵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웬지 부금진에게 그는 두터운 정을 느끼 고 있었다. 함께 사로(死路)를 빠져나왔기 때문일까? 잠시 후 원 계묵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흠, 정말 눈이 오는군." 그렇다 조금씩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눈이 내리자 그의 기분은 약간 들떴다. 그는 화원을 빙 돌아갔다. 헌데 그때, '......!'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한명의 아름다운 미소녀(美少女)가 한 그루 나무 아래 기대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상 념에 빠진 듯 갸름하고 둥근 턱을 가볍게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 일순 원계묵은 충격을 받고 내심 부르짖었다. '소... 손미!'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허나 미소녀는 그가 생각한 여 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바로 양 익상의 딸 양문완이 아닌가? '손미... 일 수가 없지.......' 힘이 빠졌다. 이때 양문완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손간 그녀의 얼굴에 보조개가 생기며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원무사님......!" "......." 원계묵은 망연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가슴은 다시금 찢어질 듯한 괴로움으로 비틀어지고 있었다. '내가 왜? 어째서 지금 이 순간에 손미를 생각했단 말인가? 나 의 사랑을 배신하고 사부님마저 죽게한 그녀를... 왜... 왜......?' 양문완은 얼굴이 귀 밑까지 붉어진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 는 옷고름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타는 듯한 시선으로 자기를 직시하는 원계묵의 눈을 감당할 수 가 없었다. 웬지 모르게 그녀는 원계묵을 처음 본 순간부터 강렬 한 느낌을 받았다. 남성, 강인한 남성상으로 그녀의 여린 가슴에 자신도 모르게 가득 들어차 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원계묵이 계속 자신을 주시하 자 어쩔 줄 모르고 계속 얼굴만 붉어지고 있었다. 눈(雪), 눈이 내린다. 눈은 점차 굵어져 함박눈으로 화했으며 그 함박눈 속에서 두 남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마주 서 있었 다. 여인의 사랑은..., 첫눈(初雪) 속에 그렇게 서서히 눈을 뜨고 있 었다. 第 38 章 運命의 만남 비단 금포(錦袍), 허리에는 옥류대(玉柳帶), 발에는 검은 가죽신 을 신고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벗어 등 뒤로 길게 허리까지 늘어 뜨린 모습, 조각같이 섬세한 얼굴은 약간 차가운 듯했으나 남성미 가 유난히 강렬한 느낌을 준다. 두 눈빛은 차가운 별처럼 고요하다. 그에게서는 조금의 흐트러 점도 보이지 않았다. '......!' 운표는 장천린, 즉 용백군의 뒤를 따르면서 몇 번이고 그의 기 도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구룡상선에서는 자주 보았으나 오늘처럼 이렇게 같이 움직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대화 속에서나 혹은 용백군의 눈짓, 몸짓 하나에도 어떤 강한 압도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그와 동 시에 자신도 모르게 용백군에게 무섭게 빨려가는 마음을 느꼈다. '과연, 그 오만한 대주가 형님으로 모실만 하다. 장차 반드시 거물이 될 것이 틀림없어.' 장천린과 운표, 그들은 양가장을 아침 일찍 나섰다. 그들이 들 린 곳은 제남부의 내놓으라하는 대부호(大富豪) 들의 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장천린은 운표를 대동하고 그간 밀린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여러곳을 방문했다. 장천린이 방문하는 곳은 운표가 보기에는 제남에서는 유명한 곳인 듯했다. 대부분 양익상의 사업체이거나 제남의 큰 부호들의 저택이었다. 비록 장사에는 문외한이었으나 운표는 장천린의 대화로 미루어 여러 가지 사업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운표는 그 밖에도 확실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제남부 내의 어떤 부호 들도 장천린, 즉 용백군과 비교하면 피라미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전혀 모르는 사업이라는 방면에 대한 호기심도 점차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정오(正午) 무렵, 제남부의 대로를 걸으며 장천린이 물었다. "운표, 피곤하지 않은가?" 운표는 히죽 미소 지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야 워낙 단련된 몸이니 피곤을 느낄 이 유가 없지요."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흠, 하지만 칼을 쓰는 무사가 장사꾼 뒤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조금은 권태스러운 일이지." 운표는 기분좋은 웃음을 터드렸다. "하하, 하지만 용대인은 다른 장사꾼과 달라서 같이 다니다보 면 보고 느끼는 점이 많습니다." "다행이군." 장천린은 계속 걸어갔다. 운표는 궁금증이 일었다. "이젠 또 어디로 가시는지요?" "마지막 방문일세. 황학산(黃鶴山)이라고 이 산동성 내에서 첫 손 꼽는 거부의 집이지." '황학산?' 물론 운표가 알 리가 없었다. 하나 어딘지 모르게 그는 그 이름 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혹시 병장기를 만들어 파는 황학산, 그가 아닙니까?" "맞네." "......!" 운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황학산, 그가 누구기에 그는 이토록 놀라는가? 황학산, 그는 제남부 근처에 열 두 개의 거대한 규모의 철공소 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십대 이상 내려온 가업이었다. 말이 철공소라 하지만 그 규모는 거대하기 그지 없었다. 한곳에서 일하 는 장인(匠人)의 숫자만도 수백 명, 혹은 천명(千名) 이상인 곳도 있었다. 작게는 농기구로부터 크게는 무기나 갑옷, 또는 심지어 화포까지도 생산한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철기구에는 항상 황공 (黃工)이란 글씨가 표식되어 있다. 그 표식이 있는 물건은 중원에 서도 가장 알아준다. 특히, 무림에서 황가철장(黃家鐵莊)에서 만든 도검(刀劍) 등의 병기를 최상급으로 쳤다. 황가철장은 황실(皇室)의 군대나 각 지 방 행성(行省)의 군부(軍部)에 병장기와 갑옷을 납품하고 있었다. 사실상 강북 육개성에서 소비되는 철제품의 삼할 이상이 황가 철장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장천린은 운표의 표성을 보고 물었다. "황학산을 아는가?" 운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압니다. 소문을 들었지요. 제가 쓰는 칼도 황가철장의 무 기를 조금 개조한 것이지요." 운표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소문에 의하면 황학산의 성격은 몹시 괴팍하나 그의 재산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던데 사실입니까?" 장천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산동성 내에서 가장 재산이 맣은 열 명의 부호를 다 합쳐도 황학산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네." 운표는 믿어지지 않는 듯 물었다.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그 정도 입니까?" "글세, 정확히는 추정할 수는 없어도 대충 그의 재산은 은자로 쳐서 오 천만냥에서 일억만 냥은 될 것이네." "......!" 운표는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 일억 만냥!' 은자 열 냥이면 웬만한 백성이 한 달 생계를 유지하는데 충분 한 액수다. 그렇다면 일억 만 냥이란 액수는 어느 정도겠는가? 도 저히 상상조차 할수 없는 액수였다. '과거, 철마보(鐵魔堡)를 처분했을 때도 은자 십만 냥 정도밖에 안 되었거늘, 철마보 재산의 천배.' 그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는 계산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정천린이 그의 골머리를 아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운표, 돈계산을 하는 것은 무사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네." 운표는 머쓱해졌다. 장천린은 다시 걸어갔다. 대로의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한데,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안색이 변했다. 저만큼 앞에서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에는 죽립(竹笠) 을 쓴 채 낡은 흑의를 입은 청년이었다. 장천린은 걸음을 늦추었 다. 그의 시선은 죽립청년에게 향해졌다. 죽립청년은 이십여 세 가량 되어 보였다. 평생 한 번도 햇빛을 보지 않은 듯 그의 안색 은 희다못해 푸르게 보일 정도였다. 체구는 약간 말라 보였다. 얼굴은 준수했으나 어ㅉ지 그의 전신에서는 물씬 메마른 기운 과 고독한 기운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는 등 뒤에 집단으로 감싼 긴 물건을 메고 있었다. 이상한 것 은 그의 양손이 흰 천으로 칭칭 손목까지 감겨져 있다는 점이었 다. "......!"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장천린은 그의 모습에서 무섭도 록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원계묵에게서 받은 느낌 이상으로 강한 충격 같은 것이 전율처럼 스쳐간다. 동시에 물씬 그에게서는 어둠 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때, 죽립 청년도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눈빛이었다. 하나 곧 그는 스쳐갔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용이다. 내 안목이 틀리지 않는다면 천하를 뒤흔들 관상이다.' 장천린은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황학산의 일만 아니라면 뒤따라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끌리는 구나.' 그는 걸음을 멈추며 청년이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운표가 의아한 듯 물었다. "용대인님, 무슨일이라도?" 장천린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 조금 전 그 흑의인을 보았나?" 운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보았지요." "어떻던가?"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글쎄요. 자세히 보지 않아서... 저는 머리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음......." 장천린은 신음을 흘렸다. "한데 왜 그러십니까? 그자가 무슨......." "아닐세, 그만 가세." "그러지요." 운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하나 장천린은 달랐다. 죽립을 쓴 흑의청년, 등 뒤에 맨 기다란 물건, 양손에 칭칭 감 긴 흰 천, 그 모두가 그의 뇌리에 깊이 뿌리 박혔다. 장차... 그 한 번의 스친 만남이 엄청난 폭풍의 전조라는 것을 미약하나마 예감한 것일까? 第 39 章 天才的商術 뚱뚱한 노인(老人), 흔히 부유한 사람이 나이가 들면 느느니 살 덩이요, 흐르는 것이 얼굴의 번들거리는 개기름이다. 이 노인도 예외는 아니다. 지독히도 살이 쪘다. 어찌나 살이 쪘 는지 양뺨이 축 흘러내리고 턱은 아예 살에 묻혀 어깨와 붙어 있 다. 체구도 보통사람의 두배나 넘어 그가 앉는 의자는 특별히 주 문한 것이라고 한다. 두눈은 가늘고 길었다. 눈꺼풀은 뜨기조차 무거운 듯 항상 뜬 듯 감은 듯 했다. 이 노인, 전신을 비단옷으로 칭칭 감은 이 노인이 바로 산동성 (山東省)에서 제일 간다는 거부(巨富)이자 철(鐵)의 가문인 황가철 장(黃家鐵莊)의 장주인 황학산(黃鶴山)이었다. 그는 십일대(十一 代) 가주였다. 지금, 그의 뒤에는 네명의 중년무사가 시립해 있었다. 얼굴은 음랭하고 무표정했다. 품에는 한결같이 칼을 품고 있었다. 아마도 황학산의 호위무사인 듯했다. 황학산 앞에는 한 명의 오순 가량의 노인이 서 있었다. "......!" 그는 우람한 체구였는데 지금 식은 땀을 연신 흘리고 있었다. 이때, 황학산이 두터운 입술을 열었다. "호개악(胡介岳), 자네가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아왔는지 몰라도 나는 관심이 없네. 그리고 시간이 없으니 대충 이야기하고 나가 주게." 호개악이라면? 바로 청무관의 관주가 아닌가? 호개악은 고개를 숙이며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노야(黃老爺), 제발 부탁입니다. 이번만 도움을 주신다면 평 생 잊지 않겠소이다." 황학산은 무표정했다. "나보고 무슨 도움을 달라는 건가?" 호개악은 땀을 훔치며 간곡히 부탁했다. "은자 이십만 냥만 빌려 주십시오. 반드시 반년 이내로 갚을 테 니." 허나 황학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하며 반문했다. "이십만 냥?" 이어 그는 괴상하게 웃었다. "흘흘흘, 자네는 이십만 냥이 뉘집 개 이름인 줄 아나?" "노야!" "나가보게." 황학산은 통하지 않았다. 황학산 앞에서 평소 그렇게 당차고 오만하던 호개악은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다. 그는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청무관을 잡히겠으니." 그 말에 황학산은 껄껄웃었다. "청무관을 다 털어봐야 은자 오만 냥 짜리도 안돼. 게다가 내가 알기로 자네는 한 달 전 용문전장(龍門錢莊) 제남지부(齊南支部) 에서 청무관을 저당잡혀 은자 삼만냥을 받은 것으로 아네." "......!" 호개악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호개악, 자네는 스스로의 역량도 재보지 않고 너무 무리하게 사업을 했네." "노야!" 황학산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이제 끝이야." 호개악은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자네는 그저 주어진 무공으로 청무관이나 운영하는 게 제일 좋았어. 주제넘게 감히 사업을 벌이다니......." 호개악의 얼굴이 희다 못해 푸르게 변했다. 황학산은 아랑곳 없이 계속 말했다. "소문을 듣자니 어제 저녁 한 명의 복면인이 청무관에 잠입하 여 청무관의 사범 십 명의 팔을 꺽고 자네 조카 은이량을 반쯤 죽여놨다고 하더군. 쯧쯧! 청무관의 얼굴은 그 일로 완전히 먹칠 이 된 셈이야. 자네는 이제 소생할 아무런 힘도 없네." "노야......." 호개악의 두 눈에 절망이 어렸다. 허나 황학산은 냉정하게 말 했다. "호관주를 배웅해 드려라." 그러자 그의 등 뒤에 있던 네 명의 무사 중 한 명이 호개악에 게 다가갔다. "나가시지요. 호관주!" 호개악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는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너는 비켜라!" 그는 무사를 팔꿈치로 밀었다. "흥!" 허나 무사는 냉소치며 손가락을 기묘하게 움직여 호개악의 곡 지혈(曲池穴)을 마치 강철고리처럼 움켜쥐었다. '윽!' 호개악은 팔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때 무사가 그의 귓전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호개악, 함부로 말썽 피우면 팔뚝을 아주 분질러 놓겠다." 이어 그는 호개악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호개악은 뒤를 돌아보며 애원을 그치지 않았다. "노야... 제발......." "쓰레기 같은 놈!" 황학산의 얼굴에는 능멸이 어리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호개악 정도는 발톱의 때만큼도 비중이 없는 것 같았다. 호개악이 비록 제남에서는 제일가는 무인이었으나 그에게는 한낱 빛투성이의 펑 범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호개악이 개처럼 끌려나간 뒤 얼마 후 밖으로부터 하인이 들어 와 보고했다. "노야,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냐?" "양가장의 용백군 대인입니다." "응?" 황학산의 가는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용백군이?" 황학산도 용백군과는 안면이 있었다. 솔직이 말해 황학산이 산 동성 일대에서 가정 경계하는 인물이 바로 용백군이었다. 그에게 는 남달리 사람보는 눈이 있다. 그는 벌써부터 용백군이 극히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 었던 것이다. "......." 황학산은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입 가에 기묘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를 객원(客院)에 정중히 모셔라." "알겠습니다. 노야!" 하인은 즉시 머리를 조아린 후 사라졌다. 황가철장으로 들어오면서 운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 다. 수만 평이 넘는 저택도 놀라웠지만 곳곳마다 은밀히 배치되어 있는 무사들이 그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상인의 집이 아니라 마치 군부(軍部)같군요."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돈이란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황학 산의 돈버는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를 도와주는 무인들 이 없다면 그는 극히 위험할 것이다. 녹림의 비적들에게 있어 먹 음직스런 고기로 보이기는 황학산도 싫은 게지." 운표는 나직이 웃었다. "호위무사들이 꽤 많은가 보지요?"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학산이 개인으로 키우는 사병(私兵)만 해도 일천 명이 넘지. 이 황가철장 내에만 오백명 이상의 무사들이 그를 지키고 있네." 운표는 혀를 내둘렀다. 하나 그는 주위를 ㅎ어보며 문득 입가 에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하지만 숫자만 많다고 능사는 아니겠지요." 장천린은 다만 담담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이때, 안내하는 하인이 그들을 개원으로 안내했다. 객원의 규모 만 해도 일반 장원만 했다. 하인은 그들을 화려한 객실에 안내했 다. "이곳에서 기다리시지요." 그는 차를 내놓았다. "곧 황노야님으로부터 연락이 계실 것입니다." 그는 밖으로 사라졌다. 객원의 대청에서 장천린과 운표를 기다 렸다. 운표는 시간이 약간 흐르자 지루한 듯 물었다. "황학산은 굉장히 바쁜 모양이시지요?"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천만에, 그는 극히 한가하다. 바쁜 시간에 찾아오는 것은 실례 지. 그래서 일부러 일이 없는 시각에 방문한 것이네." 운표는 그 말에 눈썹을 꿈틀했다. "그렇다면 바로 만나주지 않고 객원으로 데려온 이유기 무엇입 니까?" 그는 불쾌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황학산이 나를 시험하는 셈이지." 운표는 눈쌀을 찌푸렸다. 장천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운표, 상계(商界)는 무림과 달라. 이곳은 무림처럼 성질대로 해 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황학산은 산동제일거부로서 상당히 오만하다. 그는 산동성에서 오직 양가장에만 약간의 적수의식을 지니고 있지. 특히 나에 대한 경계의식은 꽤나 날카로운 편이다. 그밖에 다른 인물들은 그의 안중에도 없네." 운표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수 만은."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지." 이어 그는 옆의 벽에 매달린 방울로 연결된 끈을 몇번 당겼다. 대청 안에서 방울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아리따운 시녀가 사뿐히 걸어나왔다. "시키실 일이 있습니까, 손님?" 시녀는 상당히 예뻣고 총기가 있어 보였다. "흠! 황가철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이군." 장천린의 말에. "어머!" 시녀는 얼굴을 붉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다... 당해(唐慧)라고... 합니다." 장천린은 두 눈을 약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 눈길을 받자 그만 온몸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인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장천린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문방사우를 준비해다오." 당혜는 멈칫했다. 문방사우는 바로 탁자 위에 있지 않은가? 허 나 그녀는 아무말도 없이 준비를 했다. "먹물을 갈아라." 어찐된 셈인지 그녀는 장천린의 말에 조금도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소곳이 않아 정성스럽게 먹을 갈았다. 그 광경 에 옆에서 보는 운표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남의 집 사람을 자기 하인처럼 부리는 용대인의 수완은 놀랍기만 하구나!' 이윽고 먹물이 다 갈아졌다. 장천린은 붓을 들더니 종이 위에 글씨를 썼다. 그의 글씨는 놀라운 달필(達筆)이어서 옆에서 보던 운표는 물론 당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종이 위에 쓴 글귀는 다 음과 같았다. '박산(博山)의 함배옥(咸杯玉)은 양문(楊門)에 가깝고 철계(鐵溪) 의 물은 바닥이 드러난다.' "......?" 운표와 당혜는 그 글귀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장천린은 종이를 접어 당혜에게 주었다. "이것을 황노야에게 전해주고 오너라." "네." 당혜는 홀린 듯이 대답했다. "참, 그리고 황노야에게 이것을 전하면서 한 마디 해다오. 시간 이 없어서 나는 잠시 후에 돌아가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당혜는 총총히 사라졌다. 운표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당혜가 사라진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장천린은 미소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운표, 돌아가자." "예, 용대인." 그들은 객원을 나왔다. 그들은 서서히 걸어 황가철장의 문까지 빠져나왔으나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천린은 내심 약 간 조급해졌다. '내 추축이 틀렸단 말인가?' 한데 아니나 다를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용대인님!" 당혜가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다가와 한동안 숨이 찬 듯 호흡을 가다듬더니 말 했다. "노야께서 만나신다고 하셨습니다." 장천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됐어!' 장천린은 마지 못한 듯이 몸을 돌렸다. 황학산, "......!" 그는 가느다란 눈에 기묘한 빛을 흘렸다. "용대인, 노부가 급한 일 때문에 소홀히 한 것을 이해하시오."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물론 이해하지요. 하나 저로서도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나중에 찾아뵈려고 하던 중이었지요. 헌데 노야께서 이렇게 시간을 내주 시니 진정 감사합니다." 황학산은 궁금한 듯 물었다. "헌데 무슨 일로 노부를 만나러 온 것이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천린은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황가철장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수상(水上), 해상(海上)의 운반 을 우리 양가장에서 맡고 싶습니다." "......!" 황학산의 안색이 굳어졌다. 황가철장, 이곳은 강북에서 소모되는 모든 철제품의 삼할 이상 을 생산한다. 엄청난 양의 철광석이 그를 위해 필요했다. 그렇기 에 황하의 수로(水路)를 이용하여 그 모든 철광석을 광산에서 철 공소로 잇는 제남으로 운송해 와야 했다. 그 뿐이 아니다. 철의 제련에 필요한 나무와 석탄을 운송해야 한다. 그리고 완성된 철제품을 수로를 통해 중간상인에게까지 수 송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송 일은 보통 큰 규모가 아니었다. 적어도 대형 운 송선박 백여 척이 쉴 틈도 없이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황가 철장에서 필요로 하는 운송은 그러므로 막대한 이문이 남는 사업 이다. 그것을 황가철장에서 남에게 넘길 리가 없었다. 그들은 운송도 자신들이 직영으로 직접하고 있었다. 황학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용대인, 지금 나와 농담하자는 것인가?" "진담입니다." "선박은 우리 황가철장이 직영하고 있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해상 선박에 관한 것을 황가철장보다 양가장이 더욱 정통하기 때문입니다." 황학산은 냉소했다. "나가주게. 더 이상 이야기를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네." 명백한 축객령 이었다. 허나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노야께서 지니고 계신 철계의 광산 열 아홉 군데는 삼 년안으 로 바닥을 드러낼 것입니다." "......!" 황학산의 안색이 굳어졌다. 허나 장천린은 그를 주시하며 빠 르고 직선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철꼐 외에도 노야의 소유인 청도(靑島), 완주, 경량(京亮), 탄곡 (彈谷)의 철광 중 십 년을 버틸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야께서는 올해부터 다른 광산을 알아보셔야 할 것입 니다. 허나 제가 만약에 박산(博山), 주령(朱領), 당산(唐山), 촉읍 (蜀邑), 환재의 다섯 군데 광산을 노야보다 먼저 매입한다면 노야 는 치명타를 입게 될 것입니다." "......!" 황학산은 입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물론 노야는 양가장의 십 배에 달하는 재력을 지녔으니 그 힘 으로 미리 손을 쓸수도 있지요, 하나 박산(博山)의 주인 함배옥(咸 杯玉)은 양가장과 인척관계이고 촉읍과 환재는 이미 제가 매입했 습니다." "......!" 황학산은 이마에 땀방울이 어렸다. "노야께서는 잘해야 주령과 당산 중에 한 군데 정도만 구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당산에도 이미 한 달 전에 제가 사람을 보냈지요." 그렇다. 한 달 전쯤 장천린은 확실히 당산으로 진총관과 초광 을 보낸 적이 있었다. 황학산은 이제 더 이상 침착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용대인,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노야께서는 이 다섯 군데의 광산을 얻지 못하시면 어쩔 수 없 이 다른 광산을 택해야 합니다. 허나 다섯 군데를 제외하고는 가 장 가까운 곳이 수백 리, 아니 천여 리에 달합니다. 게다가 지리 적으로 극히 불리하지요." 장천린의 말은 쉬지않고 계속되었다. "뿐만아니라 운송에도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무리해서 그 광 산을 택한다면 황가철장 철제품의 단가가 운송비나 제반 경비의 상승으로 폭등하여 다른 곳의 제품과 결코 경쟁 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결국 노야의 철공소 열 두군 데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되 고 노야의 수천 명 점원과 수백 개의 상점도 모두 문을 닫고 집 으로 가야할 것입니다. 물론 오년 정도 뒤의 일입니다만 말입니 다." 황학산의 양뺨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무... 무서운 놈.......' 그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두 눈에서 흉광을 쏟으며 말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양가장 정도는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 다."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호랑이 한 마리를 잡으려고 태산을 불태우시겠습니까?" "......!" 황학산의 이마는 물론 온몸에도 땀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강북, 그것도 산동 내에서 설마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도전해 올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았으나 결국 해결점을 찾지 못했 다. '어쩔 수 없다. 놈은 너무도 나의 급소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 다.' 황학산은 울화가 치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광산을 구입하는 것을!' 하나 이미 철저히 늦어 버렸다. 마침내 그는 두 손을 들어 버렸 다. "졸하. 그대가 말한 광산을 노부에게 양보해 준다면 황가철장 의 모든 운반권을 양가장으로 넘겨 주겠다." 그로서는 파격적인 양보였다.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포권을 한 뒤 그는 다시 말했다. "이렇게 되면 노야께서 지니고 계신 백 척의 선박은 필요가 없 겠군요?" "......!" 황학산은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 그렇게 되면 선박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더욱이 모 두가 대형선인데다가 묵혀두면 관리비만 엄청나게 들 것이 아닌 가? 더욱이나 황가철장은 대대로 철의 사업만 벌여왔음 뿐 선박 업과는 무관했다. "어쩌겠다는 건가?" "제가 구입하겠습니다." "......!" 황학산은 거듭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 계속 하여 그는 장천린, 즉 용백군의 수에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그러 나 그는 역시 장사꾼이다. '어차피 두어봐야 짐만 될 뿐이다. 게다가 그 막대한 관리비는.' 결국 그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에 살 생각인가?" "한 척당 은자 만냥으로 쳐서 백만 냥 내겠습니다." 황학산의 안색이 굳어졌다. "농담하는 건가? 한 척당 최소한 이만 냥은 되는 것이네."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허나 그 배들은 너무 헐었습니다. 게다가 철광석 운반선이므 로 일반 다른 용도로는 쓸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만 냥씩 쳐도 많 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황학산은 기가 막혔다. 허나 그는 용백군의 말에 아무것도 반 박할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내가 졌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장천린은 다시 포권하고는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내일 안으로 사람을 보내 일체의 문서(文書)를 작성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황학산은 더 이상 대꾸하기도 싫었다. 그와 얘기를 하면 할수 록 더 큰 손해를 입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바쁘신 시간을 뺏어 죄송했습니다." 장천린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황학산은 눈을 번쩍 떴다. 그 의 눈에선 이상한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 니 장천린의 손을 잡았다. 그런 일은 매우 파격적이랄 수 있었다. 황학산은 극히 오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장천린의 손을 잡고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용대인, 이번에는 내가 졌네. 허나 나 황학산은 빛이 있으면 밤잠을 못 이루는 성격이 있음을 기억해 주게."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어 그는 다시 한 번 정중히 포권한 뒤 물러났다. 그는 연신 탄성에 탄성을 연발하는 운표를 대동한 채 무사히 목적을 달성하 고 황가철장을 나올 수가 있었다.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第 40 章 亂破船 구룡상선(九龍商船)은 다시 출발했다. 장천린은 양가장에서 오 일 간 더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했다. 그간 그가 한 일 은 놀라운 것들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만한 것은 바로 황가철장의 운송권을 따낸 것이었다. 백 척의 운송선을 반 값에 사들였는가 하면 막대한 이 윤을 남기는 운송업도 획득한 것은 양가장으로써 배 이상 재산이 신장되는 커다란 계기다 되었다. 정작 정천린이 황학산을 협박한 미끼는 고작 은자 이만 냥에 불과한 종이조각이었다. 그는 촉읍(蜀邑)과 환재의 광산을 인수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각각 일만 냥의 계약금을 걸고 계약서를 가지 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이만 냥을 투자하여 적어도 선박 백척에서 오십만냥 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운송업으로 인해 벌어들일 이익 금은 그보다 훨씬 막대한 것이다. 양익상의 입이 벌어질대로 크게 벌어졌다. "허허서, 백군, 자네가 앞으로 삼 년만 더 사업을 한다면 아무 래도 산동 제일의 대사업가가 될 것이 틀림없네." 양익상의 말에 장천린은 담담히 웃었을 뿐이었다. 육 일째 되는 날, 그는 구룡상선에 올랐다. 단위제, 백연연, 원 계묵, 운표, 부금진도 따랐으며 백살대도 승선했다. 이윽고, 구룡 상선은 황하의 흐름을 타고 동해(東海)로 빠져나갔다. 하루 만에 동해로 나온 것은 물의 흐름을 탔기 때문이었다. 구룡상선은 발해만을 지나 산동반도를 지나갔다. 그리고 남하 하여 청도를 지나 염성으로, 항해는 지극히 순조로왔다. 장강의 입구인 숭명도(崇明島)에 도착했을 때는 제남을 떠난 지 십 이 일 째였다. × × × 바다의 바람은 조금은 거센 편이었다. 촤- 아-! 철썩! 파도가 구룡상선을 흔들리게 했다. 하나 특별히 건조한 선박이 므로 그 정도 파도에는 항해에 지장이 없었다. 선실안, 장천린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배에 오른 이후 대부 분의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장천린은 책을 읽는데 몰두해 있었다. 문득 선실 안으로 한 여인이 들어왔다. 백연연이었다. 그녀는 소반에 향차를 받쳐들고 사뿐히 걸어들어왔다. 하나 장천린은 독 서삼매경에 빠진 듯 그녀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 백연연은 멈칫했다. 그녀는 웬지 그를 방해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는 쟁반을 한쪽에 놓고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않았다. 그럼에도 장천린은 그녀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듯 계속 책을 읽고 있었다. '이 사람.......' 언제부터 었을까? 백연연은 용백군이란 인물에 대해 나날이 새 로운 느낌을 받곤 했다. 처음에는 그저 유능한 장삿꾼 정도로 여 겨졌다. 하나 시간이 흐를스록 그녀의 생각은 크게 수정되어야 했 다. 부드러운 듯 강하고 섬세한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면을 함께 지닌 사람, 또한 그의 전신에서는 뭇사람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선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독서에 몰두해 있는 용백군의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신성스럽 게까지 보였다. 백연연은 한동안 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 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장천린은 백을 덮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다가 흠칫했다. 비로서 백연연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니, 백소저. 여긴 어떻게?" 그는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훗!" 백연연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차를 끓여 왔어요. 하나 대인께서 너무 책에 몰두해 있어 방해 할 수가 없었어요." 장천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 참...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오." 그는 자리를 가리켰다. "자, 앉으시지요." "네." 백연연은 차주전자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실소가 흘렀다. "차가 다 식었군요."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백소저의 아름다움이 배인 차이니 식을 들 어떻겠습니까?" "어머!" 백연연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그녀는 평소 농담을 잘 하지 않는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웬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허나 결코 그의 농담이 싫지는 않았다. 그녀는 차를 따랐다. 차는 역시 식어 있었다. 장천린은 식은 차를 음미하듯 마시며 물었다. "이번 여행이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아니예요. 오히려 줄거운 걸요. 저는 이렇게 먼 여행은 처음이 라 보고 느낀 점이 많아요." "다행입니다." 백연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남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앞으로 보름은 더 가야 할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두 ㅉ은 남녀 가 한 방에서 그것도 서로 가까이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야릇한 일이다. 허나 웬지 장천린과 백연연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문득 백 연연이 먼저 그것을 느끼고 어색한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장천린 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녀는 곧 어색함을 지울 수 있었다. 백 연연이 문득 아름다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용대인께서는 왜 결혼을 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요." 장천린은 멈칫했다. 하나 곧 멋적게 웃으며 말했다. "상대가 없으니까요." 백연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무척 까다로운신 것 같군요." 장천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여자에게 매력이 없게 보이는 탓이겠지요." "흣!" 백연연은 입을 가리며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것은 지나친 겸손이예요. 용대인은 여인에게 분명 인기가 있어요. 같은 여자 입장에서 보더라도 어떤 여인이든 용대인께 반 할 거예요. 단지." "단지?" "용대인 스스로 웬지 모르게 마음의 문을 닫고 계신 것 같아요. 이것은 제 예감이지만 용대인에게는 분명 사랑하는 분이 계실 거 예요." 장천린은 문득 시선을 돌려 창 밖을 응시했다. 그의 뇌리에 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옥교.......'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백연연은 장천린의 두 눈에 스치는 괴 로움을 보았다. '사연이 있는 분이야.' 장천린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지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하나 지금은 곁에 없습니다." 백연연은 호기심이 서린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어디... 계신가요?" "아주 먼 곳에......." 백연연은 흠칫했다. "그렇다면 혹시?" "아! 오해는 마십시오. 죽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만나기 어렵도 록 먼 곳에 있을 뿐이지요." 백연연이 다시 물었다. "그 분을 아직도 사랑하시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찾으셔야 겠군요?"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백소저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까?" 백연연은 자시 생각하다가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찾아야지요. 진정 사랑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해요. 이루어지 지 않는 사랑만큼 아픈 것이 없으니까요." 장천린은 의외로운 느낌을 받았다. '내성적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강한 면도 있었군' 그는 이번에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백소저는 사랑하는 분이 계십니까?" 백연연의 얼구에 홍조가 어렸다.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하나 그녀는 대답을 회피하지 않았다. "네 있지요. 그분은 저의 모든 것이예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며 가장 사랑하는 분이예요." 장천린은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태진왕일 것이다' "하지만, 그 분은 저의 마음을 모르지요." 백연연은 문득 수줍게 웃었다. "말하자만 저의 사랑은 조금 일방적이죠." 이때였다. 문득 문이 열리며 운표가 들어왔다. 그 바람에 두사람의 대화 가 끊겼다. 운표는 급히 말했다. "용대인님 난파선입니다!" '난파선!' 장천린은 흠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즉시 운표와 함께 선 상으로 올라갔다. 선상에는 이미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선상에 오른 장천린은 중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눈길을 던졌다. 약 한 마장쯤 거 리에 한 척의 배가 있었다. 하나 배는 이미 기울어 있었고 반쯤 가라앉은 상태였다. 장천 린은 인부들에게 명했다. "접근해라." "예, 대인!" 즉시 배의 방향이 돌려졌다. 배는 서서히 난파선을 향해 다가 갔다. 원계묵이 옆에서 물었다. "풍랑을 만난 걸까요?" "......."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풍랑은 아니다. 이 근처 해역에서는 근간 태풍이 분 적이 없었 다. 그렇다면.' 이때, 거의 닿을 듯이 두 배가 접근 했다. "목교를 놓아라!" 장천린의 말에 원계묵이 만류했다. "위험합니다. 형님. 배가 곧 가라앉을 것입니다." 하나 장천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상관없다. 어서 목교를 걸쳐라." 그러자 인부들이 즉시 목교를 가설했다. 장천린은 서슴없이 난 파선을 향해 건너갔다. 그 뒤를 원계묵과 운표, 그리고 단위제가 따랐다. "......!" 사인은 배 위에 오른 순간 흠칫했다. 배는 심하게 부서져 있었 다. 여기저기 박살이 나 있었고 시커멓게 탄 곳이 곳곳에 눈에 띄 었다. 단위제가 불에 탄 나무조각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더니 곧 침중하게 말했다. "화포(火砲)에 당한 것입니다." "화포......." 장천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배가 부서진 모양으로 보아 그다지 큰 화포는 아닙니다. 하나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알수가 없군요." 이때 운표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시체입니다." 모두 그쪽으로 가 보았다. 선실 안, 놀라운 광경이 벌어져 있었 다. 그것은 실로 눈 뜨고 못 볼 끔찍한 광경이었다. 선실 안은 오 십여 구가 넘는 시체가 꽉 차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두 칼로 난도질한 시체들이었다. 끔찍하다 못해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참 혹한 광경이었다. 시체들은 이미 부패되기 시작했고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장천린은 분노를 느꼈다. 단위제는 혀를 찼다. 원계묵 역시 눈 썹을 경련하고 있었다. 하나 단위제는 역시 직업(?)답게 곧 허리 를 숙여 시체들을 살폈다. 그는 잠시 후 시체 틈에서 한 자루의 병기를 주워들었다. 그것 은 파풍도(破風刀)였다. 단위제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파풍도의 손잡이에 멈 추어져 있었다. 손잡이에는 검은 솔개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단위제는 무거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검은... 바람(黑風)......." 장천린이 물었다. "알아낸신 것이 있소이까?" 단위제는 파풍도를 던지며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배는 해적선에게 당한 것입니다." "해적선......?" "동해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해적선 검은 바람입니다." "......?" 그 말에 모두들 의아했다. 강호 경험이 많은 원계묵조차도 잘 모르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단위제는 자신이 아는 것을 설 명했다. "검은 바람은 동해와 남해바다에 걸쳐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선 입니다. 두목이 누군지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자는 극히 머리가 영활하여 그 동안 관군의 추적을 수십 차례나 받았음에도 교묘히 빠져나갔습니다. 그는 파풍도를 가리켰다. "저 무기는 바로 그들의 것이지요. 검은 바람의 해적의 숫자는 칠십여 명밖에 안되나 하나같이 무공이 강하고 악랄합니다. 동 해를 오가는 상선들에게 그들은 공포적 존재입니다." 그는 덧붙였다. "이 배는 상선인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신음했다. "정말 잔인하군, 한 명도 살려두지 않다니. 게다가 이토록 참혹 하게 죽이다니." 단위제의 음성은 더욱 침중해졌다. "과거 검은 바람에는 화포가 없었습니다. 한데 이제 화포까지 달다니 앞으로 그들의 행패는 더욱 심해질 것 같습니다." 이때였다. 배가 크게 기우뚱거렸다. 운표가 밖에서 다급히 외쳤 다. "용대인님, 배가 곧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돌아갑시다." 삼 인은 서둘러 갑판 위로 올라갔다. 한데 그들이 막 구룡상선 으로 넘어가려할 때였다. 문득 난파선의 돛대 위로부터 신음이 들 려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의 시선이 돛대 위로 향했다. 순간 모두 안색이 변했다. "사람이다!" 그렇다. 돛대에 한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팔과 다리에 강철못 이 박힌 채 돛대에 매달려 있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끔찍한 모 습이었다. 운표가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운표는 가까이서 보자 더욱 놀라움을 느꼈다. 팔과 다리에 박 힌 못의 굵기가 손가락만했던 것이었다. '지독한 수법이군!' 운표는 치를 떨면서 못을 뺐다. 이어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용 모를 알 길이 없는 사나이를 옆구리에 끼고 다시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그가 내려서자 장천린이 물었다. "어떤가?" "간신히 숨만 붙어 있습니다." 이때, 구룡상선 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가라 앉습니다." 일행은 즉시 신형을 날렸다. 장천린도 목교를 건너 구룡상선으 로 건너갔다. 그들이 구룡상선으로 건너간 직후, 구구구! 파도가 소용돌이치면서 난파선은 굉음과 함께 가라앉았다. 한동안 바다 는 거세게 회오리쳤고 거품이 부글부글 일었다. '검은 바람.' 장천린은 난파선을 삼킨 바다를 바라보며 내심 무거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웬지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第 41 章 靑風流의 倭人들 칠 일 후, 구룡상선은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해 금문도(金門島) 를 지났다. 그리고 보름째 되는 날. 마침내 예정대로 해남도(海南 島)에 도착되었다. 그들이 닻을 내린 곳은 해남도의 해구(海口)라 는 곳이었다. 장장 한 달 간에 걸친 기나긴 항로였다. 해남도, 이곳은 중원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섬이다. 기후나 풍토 가 중원대륙과는 크게 달랐다. 사시사철 열대성 기후로써 갖가지 희귀한 식물과 과일이 자란다. 뇌주반도(雷州反島)와 마주 보고 있으며 이곳에서 나는 자단목(紫檀木)은 유명했다. 중원대륙 밖의 가장 큰 두 개의 섬 가운데 하나로써 이곳에는 리족( 族), 묘족(苗族), 회족(回族) 등이 원주민이었다. 특히 소금 의 생산지로 유명하고 각종 희귀한 과일 등이 황실에 진상되기도 했다. 해남도에 또 하나 유명한 것은 송대에 이름난 시인(詩人) 소동파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섬 중앙에는 오지산(五指山)이 있어 이곳에서 나는 각종 광물로 자원이 풍부했다. × × × 해구(海口), 해남도에서 가장 큰 포구, 새벽안개가 자욱이 깔려 남국의 신비로움이 한결 진하게 느껴진다. 구룡상선은 이곳에 닻 을 내렸다. 새벽안개와 더운 기후는 웬지 생소한 느낌을 준다. 중 원대륙은 겨울이었으나 이곳은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장천린은 해구의 포구에 내렸다. 그의 뒤로 백살대가 원계묵의 지휘 아래 내리고 있었다. 단위제도 따라 내렸다. 그들이 해구에 내리자, 어디선가 안개를 헤치고 수십 기의 기 마대가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당당한 체격의 무사들이었다. 맨 앞, 삼십 정도의 화복청년(華服靑年)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허리에 쌍철편(雙鐵鞭)을 둘렀으며 머리에는 기이하게도 붉은 꽃 을 꽂고 있었다. 준수한 용모였다. 특이한 것은 눈썹이 은빛이었 으며 피부가 투명할 정도로 희고 콧날이 얇았다. 어딘가 모르게 중원인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용모였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어떤 분이 용백군 대인이십니까?" 장천린이 입을 열었다. "본인이 용백군이오." "......!" 화복청년의 두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는 상대가 이토록 젊 다는데 놀라는 듯했다. 하나 곧 그는 말에서 내려 정중히 포권했 다. "북경(北京)으로부터 전서구로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개를 했다. "소생은 동방사성(東方射星)이라 합니다. 탁어른의 명을 받고 용대인을 마중 나왔습니다." 장천린은 마주 예를 표하며 물었다. "탁일비 대인은 어디 계십니까?" 화복청년은 낭랑히 말했다. "탁어른의 자택은 여기서 이백여 리쯤 더 가야 합니다. 마차를 준비했으니 오르시지요." "고맙소이다." 장천린은 마차에 올랐다. 원계묵은 호위하듯 마차 위로 따라 올랐다. 화복청년 동방사성의 눈빛이 원계묵을 바라볼 때 야릇하 게 번뜻였다. "출발하라!" 마차가 움직였다. 마차가 윰직이자 비가 내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안개....... 후덥지근한 기후는 중원에서 온 일행들에게 색다른 이국의 정서를 느끼게 했다. 마차 안에서풍 물을 보는 정천린의 기분도 다소 그런 느낌이었다. 해구의 연도에 자라았는 나무는 처음 본 것들이었다. 잎새가 길고 넓었으며 쭉 곧은 나무 위에 처음 보는 기이한 과실들이 열 려 있었다. 이때 운표는 투덜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다 도착한 줄 알고 좋아했는데 이백 리라면 오늘 저녁 에나 도착 하겠군." 단위제는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을 줄곧 동방사성과 그의 무 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위제 특유의 날카로운 추리력이 발동 되고 있었다. '보통 무술을 수련한 자들이 아니다.' 그의 눈은 동방사성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저 동방사성이란 젊은 친구는 대단히 강한 인물일 것이 다.' 그는 짙은 안개와 부슬비로 인해 시야가 넓지 못한 전망을 바 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웬지 이번 해남도의 일은 그리 쉬울 것 같지가 않구나.' 이때 운표가 말했다. "어서 가시죠, 단도독님." "음." 이윽고 그들도 떠났다. 백살대는 조용히 움직였다. 안개와 비..., 웬지 음산한 새벽이었다. 구룡상선, 해구의 선창에 결박해 있는 구룡상선은 안개에 휩싸 인 채 조용하기만 했다. 한데... 안개 속을 움직이는 인영들이 있 었다. 수십 명의 인영들이 소리없이 안개를 틈타 구룡상선으로 오 르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백의(白衣)를 입고 있었다. 스스스, 일체의 소리도 없이 그들은 구룡상선 위로 올랐다. 모 두 신속하고 괴기한 신법이었다. 한편, 선실 안에서 부금진은 조각을 하고 있었다. 사각! 사각! 소도는 얼굴부분을 깎고 있었다. 조용한 선실 안에 서는 나무깎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지금 구룡상선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곤 그와 백연연, 그리고 이십여 명의 인부들 뿐 이었다. 부금진은 계속 조각에 열중했다. 한데 문득, 그는 조각을 멈추었다. '살기.......' 그때였다. 쾅! 선실 창문이 부서지며 한 인영이 다짜고짜로 그에게 공격 해 왔다. "......!" 부금진은 급히 몸을 바닥으로 뒹굴었다. 그리고 다섯 바퀴나 구른 다음에 일어섰다. 눈앞에 한 명의 백의인이 서 있었다. 머리 앞부분은 밀었는데 머리칼이 없었고 상투가 높이 솟아 있었다. 복 장도 중원에서 볼수 없는 특이한 것이었다. '중원인이 아니다!' 백의괴인은 손에 긴 장도(長刀)를 들었는데 폭이 좁고 날카로왔 다. 부금진은 소도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기며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무슨 이유로 나를 암습했느냐?" "......." 하나 백의괴인은 아무러 대꾸도,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사사 삭, 다만 소리없이 발을 움직였는데 굉장히 빨랐다. 이때, "아아악!" 차창창,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 음이 들려왔다. '......!' 부금진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었다. 이때, 백의인은 그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쐐액!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단순한 도법이었다. 하나 단순함 속에 비쾌무비함과 악랄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읏!" 부금진은 다시 몸을 굴림과 동시에 부르짖었다. "청풍류(靑風流)!" 그는 벌떡 뛰어 일어났다. "그대는 왜국의 무사인가?" "......!" 백의인의 두 눈에 경이가 어렸다. 자신의 공격을 피하고 더구 나 도법까지 파악한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 같았다. 이때 다 시 밖으로부터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차!" 백의인이 다시 부금진을 공격했다. 하나 부금진은 냉소하며 신 형을 위로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소도가 번뜩였다. "윽!" 백의인은 비틀했다. 그의 이마 한복판에 소도가 꽂혀 있었다. 그의 두 눈은 경악과 불신으로 휩싸여 있었다. 그는 설마 자신이 이토록 간단히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쿵! 그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부금진은 즉시 소도를 회수했다. '홰국의 무사가 어찌 이곳에?' 부금진은 혼동을 느꼈다. '청풍류는 왜국 사대유파(四大流波) 중 하나로 석정일랑이라는 도(刀)의 달인이 창안해낸 것인데 어째서 우리를 공격?' 이때 문득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아차! 백소저가 위험하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쏜살같이 뛰쳐 나가고 있었다. 第 42 章 船上血戰, 검은 바람 백연연, 그녀는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장천린이 그녀에게 장 부정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천성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그녀 는 금방 그 방법을 터득했다. 더욱이 장천린의 상세한 가르침으로 그녀는 장부계산하는 것에 새로운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 그녀는 마침내 한 권의 장부정리를 끝내고 장부를 덮었다. 문득, 그녀는 한가지 생각이 났다. '참, 그 분에게 아침식사를 준비해 드려야지.'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상처도 거의 치유가 되었어. 회복이 그렇게 빠른 걸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니야.' 바로 난파선에서 돛대에 못에 박혀 있던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 다. 그의 이름은 반송(盤松), 나이는 삼십 사 세였다. 그는 자신이 해적을 만나 당했다고만 했을 뿐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상 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으므로 장천린도 그다지 깊게 물어 보 지 않았다. 그는 웬지 비밀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의 사나이였다. 똑똑! 백연연은 반송이 있는 선실 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러 자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 오시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반송이 침상 위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구레나룻이 나 있었다. 병중이라 안색은 창백했으나 모습에 서 상당한 기백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눈썹은 짙고 코가 우뚝 하여 사나이다운 매력이 넘치고 있었다. 그가 돛대에 피투성이로 매달려 있던 것에 비하면 천지차이의 모습이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반대협?" 백연연은 식사를 차린 소반을 내리며 물었다. 반송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무척 좋아졌습니다. 모두가 소저의 덕분이오." 백연연은 싱긋 웃었다. "자, 식사 좀 하세요." "감사히오이다." 반송은 수저로 손을 뻗었다.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된 이후 그 는 식욕이 늘고 있었다. 더욱이 절세미인 백연연이 직접 장만해 주는 음식은 그의 입에 딱 맞고 있었다. 반송은 수저로 음식을 떴 다. 한데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게 무슨 소리죠?" 백연연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반송의 안색도 굳어졌다. 바로 그때, 와장창! 돌연 천장이 부서지며 한 줄기 섬광이 백연 연에게 전광석화처럼 뻗었다. "조심하시오, 백소저!" 반송은 경악성을 발했다. 하나 이미 늦었다. 백연연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등 뒤에서 피보라가 일어났다. "백... 백소저!" 하나 백연연은 이미 나뒹굴은 후였다. 어느 새 방 안에는 백의 인 한 명이 장도(長刀)를 들고 서 있었다. 왜국인이었다. 반송의 안색이 굳어졌다. 쐐-액! 백의인은 이번에는 반송을 공 격했다. 반송은 이를 갈았다. 그는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칼을 막 았다. 상식적으로는 어림도 없는 저항이었다. 하나, 챙! 부딪친 순간 백의인의 두 눈에 경이가 어렸다. 그의 장도가 막혀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 반송은 몸을 빙글 돌리더니 탁자 위의 촛대를 잡고 공격했다. 파-앗! 그의 공격은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 백의인도 고수였다. 싹! 강도가 빙글 도는가 싶더니 촛대를 막았다. 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퉁겼다. 하나, "캑!" 어이없이 백의인이 고꾸라졌다. 촛대에만 신경쓴 것이 탈이었 다. 어느 새 반송의 좌수(佐手)가 그의 복부를 쑤시고 들어갔던 것이다. 손을 빼자 그의 내장이 뜯겨져 나왔다. "끄으." 쿵! 백의인은 회으에 찬 눈을 부릅뜬 채 쓰러졌다. 반송은 급급 히 몸을 날려 쓰러진 백연연을 살펴 보았다. 백연연은 혼절해 있 었다. 숨이 겨우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다. "......!" 반송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스스슷! 천장에서 다시 한 명이 떨어져 내렸다. 펑-! 동시에 문이 부서지며 또 한명의 백의인이 나타났다. 그들 은 바닥에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보더니 안색이 홱 변했다. 다음 순간 그들은 공격했다. 아무런 말도 없었으나 그들은 합공을 폈 다. 쐐액! 파츠츳! 반송은 사태가 험악함을 깨달았다. 그는 발 끝으로 왜구 시체 옆에 있던 장도를 쏘아 차 올려 손에 잡았다. 그 순간 그대로 허 리를 틀어 장도를 내리쳤다. 도무지 육안으로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쾌도(快刀)였다. "우와악!" "카악!" 두 마디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두 왜인들은 칼이 동강나면서 그대로 몸까지 두 동강이가 된 것이었다. 실로 끔찍한 도법이었 다. 이때, 획! 선실 안으로 또 하나의 인영이 뛰어 들어왔다. 반송이 다시 장도를 뻗으려다가 급히 멈추었다. "백누님!" 나타난 인영은 바로 부금진이었던 것이다. 그는 급히 쓰러진 백연연을 안고 살폈다. "이럴 수가!" 백연연의 상세는 위중했다. "누가 백누님을 이렇게 했소?" 반송은 한숨을 쉬며 턱으로 세 구의 시체를 가리켰다. 이어 그 는 약간 쉰 음성으로 말했다. "내 밖에 나가 보겠네. 이곳은 부소협이 맡아주게." 부금진은 그가 밖으로 신형을 날리는 것을 망연한 눈빛으로 바 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세구의 왜인들 시체를 응시했다. '가공하다. 단 일도(一刀)에 무기와 인간의 몸이 저토록 양단되 다니.' 그는 새삼 반송이란 인물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하나 백연연이 더욱 중요하다. 그는 급히 그녀의 상세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둥 뒤에 깊이 한 푼 가까운 도상(刀傷)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의 깊은 상쳐였다. '지독하게 당했구나!' 그는 누썹을 찡그렸다. '만약 백누님이 죽는다면 나는 용대인을 볼 낯이 없다.' 그는 품 속에서 금창약을 꺼내 응급조치를 취했다. 그러는 동 안 밖에서 계속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부금진은 백연연의 등에 금창약을 바르고 상처를 묶었다. '우선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그는 백연연을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다시 신형을 날렸다. 선상, 고요했다. 하나 선상에 오른 부금진은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선상 위에는 수십 구의 시체들이 즐비 하게 누워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왜인이었다. 한데 그들의 시체 는 모두 동강나 있었다. 지금 다섯 명의 왜인들이 한 사람을 포위하고 있었다. 가운데 는 반송이 칼을 높이 올리고 우뚝 서 있었다. 쐐- 애- 액! 다섯 명의 왜인들이 공격했다. '역시 청풍류의 도법!' 부금진은 전율했다. 하나 어느 순간 부금진은 두 눈을 크게 떴 다. 반송은 수중의 칼을 직선으로 휘두르며 오 인의 사이로 파고 들고 있었다. '저 도법은!' 이때였다.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투... 툭툭......! 다섯 개의 머리가 마치 수박통처럼 선상 위에 굴 러 떨어졌다. 오 인이 동시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처... 천월도법(天月刀法)! 무림 사상 쾌(快)의 극치라는 해남(海 南)의 천월도법이다!' 그렇다. 도(刀)의 종류는 수천 수만 종에 이른다. 하나 그 중에 서도 수백 년, 또는 천여 년간 내려오며 극점을 이룬 도법은 몇 되지 않는다. '무극팔로도세(無極八路刀勢)' '수라구류도(修羅九流刀)' '흑사도법(黑 刀法)' '천월도법(天月刀法)' '풍뢰도법(風雷刀法)' ...... 그 몇 가지 도법은 대대(代代)로 내려오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 했고 각기 독특한 영역을 구축했다. 작금에 이르러 그 도법들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절정에 올라 있었다. 단지 익히는 사 람의 자질이나 숙련도 등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날 뿐이었다. 한데, 정체 불명의 반송이란 사나이가 그 중 사상 최고의 쾌도 (快刀)로 불리우는 천월도법을 사용한 것이다. 반송은 피묻은 장도를 바다로 던져버렸다. 이어 아직도 이어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부금진에게 다가왔다. "백소저의 상처는 어찌 되었는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소, 단지...." "단지?" 부금진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등뼈를 다쳐서... 뭐라고 장담할 수가 없소." 순간 반송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 물었다. 부금진은 탄식을 하며 왜인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대체 저들이 무슨 이유로 구룡상선을 습격했을까요?" 그러다 문득,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저것은!" 받, 저 편 바다에 배 한 척이 보였던 것이다. 그 배는 거대한 범선이었다. 한데 돛대의 돛폭에 검은 솔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검은... 바람!" 반송도 그것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검은 바람 의 출현(出現)! 과연... 또다시 일기 시작한 폭풍은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해 남도(海南島)에 몰리는 폭풍의 의미는......? 第 43 章 무서운 陰謀 밀림(密林), 해남도(海南島)는 열대지역이다. 온갖 희귀 동식물 들이 번식을 하며 기후 또한 중원과는 딴판이었다. 장천린 일행은 밀림을 뚫고 오지산(五指山) 기슭으로 들어섰다. 원숭이를 비롯, 각종 밀림의 동물들은 꽥꽥거리며 일행 주위를 맴돌았다. 잎새가 많은 기이한 식물과 각종 덩쿨이 우거진 밀림지 역은 습기가 심했다. 더욱이 자주 내리는 비(雨)로 인해 습지와 늡지가 곳곳에 있었다. 만일 길을 모르고 들어 선다면 늪지에 빠 지거나 각종 독충(毒蟲)에 물려 살아날 수가 없었다. '정말... 기이한 곳이군.' 정천린은 바깥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윽고, 일행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밀림 한가 운데 거대한 장원이 있었다. 지붕이 사원(寺院)처럼 둥글고 뾰족 한 특이한 건축양식이었다. 비록 금백만이나 황학산이 그것처럼 크지는 않았으나 특이한 풍경에 둘러싸여 괴이한 분위기를 이루 고 있었다. × × × 화복청년 동방사성은 용백군, 즉 장천린을 데리고 탁일비의 거 처로 안내했다. 원계묵은 그림자처럼 장천린의 뒤를 수행했다. 탁일비, 일명(一名) 황금의 손이라 불리우는 그는 장원 깊숙한 곳의 석전(石殿)에 있었다. 침상 위, 병색이 완연한 칠순 노인이 누워 있었다. 그가 바로 탁일비였다. 얼굴은 누렇게 떴으며 마치 고목(枯木)처럼 말라 있 었다. 동방사성이 보고했다. "용대인을 모시고 왔습니다." 탁일비는 기침을 심하게 했다. 동방사성이 급히 부축했다. "모... 몸을 일으켜 다오." 상체를 동방사성이 일으켜 주었다. "어... 어느 분이... 용대인이시오?" 쇄잔한 음성에는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정천린이 포권했다. "제가 용백군입니다." "나... 탁일비요." 탁일비는 다시 기침을 했다. "노야." 동방사성이 등 뒤에서 어깨를 주무렀다. 탁일비는 술을 잠시 고른 다음 입을 열었다. "북경의 태진왕 전하께서... 생각보다 빨리... 결정해 주셔서... 기 쁘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한데... 내일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습니 까?" 하나 탁일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오. 이것은... 촌각을... 다투는... 문제요... 쿨럭! 쿨 럭......." 그는 기침이 다시 쏟아지자 한참 애를 쓰더니 뒤를 향해 말했 다. "사성... 네가... 대신 말씀드려라." "예, 노야." 동방사성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쯤 전이었소이다. 이 해남도에 일단의 무 리들이 무단상륙해 왔습니다." 그의 침착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 × × 수십 척에 달하는 선단(船團)이 해남도의 포구 해구(海口)에 상 륙했다. 그들은 그때부터 무차별 노략질을 벌였다. 그들의 정체는 왜구였다. 그들은 단숨에 해구의 관청을 박살냈으며 관인들을 몰살시켰 다. 그들의 규모나 무공은 일반 왜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직적이었다. 그들은 잘 훈련된 왜국의 정병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해남에 쳐들어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십수 년 전, 왜국에서는 전란의 영웅 풍신수길이 죽고 덕천가 강이 권력을 장악했다. 조선에서의 긴 전쟁(戰爭)의 패배가 풍신 수길의 결정적 죽음과 실작의 원인이 되었다. 그 이후, 덕천가강은 기회를 틈타 세력을 장악한다. 그는 당시 풍신수길의 가장 큰 신임과 총애를 받던 석전삼성(石田三成)을 제 거하려 했다. 석전삼성이 풍신수길의 어린 아들을 옹립하여 대 (代)를 잇게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석전삼성이 이끄는 무사들과 덕천가강의 추종자들은 왜 국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대격돌을 벌인다. 일명 관원(權原)의 전 투라 불리우는 훗날의 전투가 그것이었다. 결국 관원의 전투에서 석전삼성은 대패한다. 그는 포로로 잡혔 으며 그의 나머지 수하들은 분루를 머금고 패퇴했다. 석전삼성을 처형한 직후 덕천가강은 후한이 될만한 석전삼성의 무사들을 닥 치는 데로 척결한다. 그 당시, 석전의 수하로서는 두 명의 무사가 있었다. 청풍류(靑 風流)의 창시자이자 도(刀)의 달인인 석정일랑과 신음류(新陰流) 의 제일고수였던 청산의명이 그들이었다. 그 두 명은 자신을 따르는 무사들과 함께 왜국을 떠났다. 왜국 내에서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해상으로 떠났다. 그들은 아직도 덕천가강에게 복수심을 품고 언제든 복수를 하 기 위해 힘을 기르고 있었다. 그들은 동해 어디엔가 근거지를 정 하고 계속 정병을 양성했다. 해상에서의 노략질을 통해 군비를 조 달하면서도 그들은 항상 본국(本國)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칼을 갈고 있었다. × × × 동방사성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들이 이 해남으로 잠입해 들어온 목적은 바로 노야의 엄청 난 황금 때문입니다. 엄청난 노야의 황금으로 힘을 키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입니다." 장천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탁일비의 생명을 위협하 는 무리들이 왜국인들일 줄이야. 동방사성의 말이 계속되었다. "조만간 그들이 다시 잠입해 올 것입니다. 이곳의 관부는 썩을 대로 썩고 무기력해 있어 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노야께서는 태진왕 전하께 서신을 올린 것입니다." 장천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의외로 일이 크구나.' 장천린은 이번 일이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포권했다. "잘 들었습니다. 본인은 신중히 생각한 다음 대책을 강구해 보 겠습니다. 그럼 오늘 이만." 탁일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셔... 드려라. 사성......." "예! 노야." 장천린은 탁일비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을 보았다. 그는 웬지 그를 혼자 놔두고 나오는 것이 꺼림칙했으 나 할 수 없었다. 해남도에 도착한 첫날이므로 아무런 행동도 취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저녁 무렵, 단위제와 운표는 배당된 처소에서 바둑을 두고 있 었다. 단위제가 일방적으로 우세한 국면이었다. 하나 운표도 고집 스러웠다. 그는 이미 대세가 확연히 기울었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끙끙거리며 수를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나 이미 흑(黑)의 대마(大馬)가 궁지에 몰려 회생할 가망이 없었다. 단위제는 싱긋 웃었다. "운표, 고민하면 머리카락 빠진다. 이제 그만 돌을 던져라." "흥!" 하나 운표는 계속 고집을 세웠다. 그는 계속 바둑판이 뚫어져 라 응사히며 끙끙대고 있었다. "쯧쯧! 그저 고집은 황소같아 가지고서." 그는 따분했다. 운표는 벌써 이 각 동안이나 장고(長考)했다. 마 침내 단위제는 더 이상 답답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실컷 고민해 보게. 허헛, 잠시후 머리털이 다 빠질 지도 모르니 주의하게." 그는 빈정거리듯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바람이라도 쐬 려고 문 밖으로 나왔다. 장원의 후원이었다. 이곳은 야자수가 우 거져 있었고 열대의 나무들이 흡사 밀림처럼 우거져 있어 중원 일반 저택의 후원과는 크게 분위기가 틀렸다. 비는 계속 부슬부슬 내리고 어둑해지기 직전이어서 약간 음산 한 느낌이 들었다. '흠, 정말 특이하군. 중원은 한참 겨울인데 이곳은 이토록 후덥 다니.' 그는 색다른 감동에 젖어 걸음을 옮겼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한참을 걸었다. 후원은 곧바로 숲과 연결되어 있었고 특별히 담 같은 것도 없 었다. 한데 문특, "......!" 그는 숲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그 인영 의 움직임은 매우 신쾌했다. '......?' 그는 호기심이 치밀었다. 그는 즉시 몰래 인영의 뒤를 쫓아갔 다. 인영의 신법이 비록 영활하기는 했지만 단위제의 신법은 그보 다 더 빠르고 은밀했다. 그러므로 그는 들키지 않고 따를 수가 있 었다. 얼마쯤 갔을까? 그 인영이 멈추었다. 인영은 대충 삼십 정 도의 나이였다. '저 자는?' 단위제에게는 남이 따를 수 없는 몇 가지 장기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한 번 본 사람은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었다. 설사 슬쩍 지나쳤다 해도 그는 절대 잊지 않았다. 그 특이한 기억력은 그가 관부에서 형부도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 였다. '저 자는 동방사성과 함께 해구로 왔던 무사들 중 한 명인데.' 그는 의문이 치밀었다. '한데 왜 저렇게 은밀하게 행동한단 말인가?' 이때, 스스슥! 숲이 흔들거리더니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놀랍 게도 왜인이었다. 허리에는 장도를 찬 그의 특이한 복장에서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왜국인은 유창한 한어로 물었다. "어찌 되었나?" 무사는 대답했다. "지금 그 자는 탁노야와 만나고 있소이다." "그 자의 모습은 자세히 그렸소?" "염려마시오. 석 장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그렸으니까 틀림이 없을 것이오." 무사는 득의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용모를 분장시키고 목소리까지 연습하고 있소. 오늘 밤 안으 로 용백군과 똑같은 인물이 탄생할 것이오." '......!' 듣고 있던 단위제는 가슴이 철렁한 느낌이 들었다. 왜국인이 만족스런 웃음을 흐렸다. "흐흐흐, 잘되었소. 사흘 후 우리는 이곳을 공격하겠소. 하나 싸 움이 시작되면 지는 척하고 도망가겠소." 그는 은밀히 속삭였다. "그런 연후 탁일비가 황금이 묻혀진 비도(秘圖)를 가짜 용백군 에게 넘겨주면 계획대로 일을 시작할 것이오." "후후, 물론이오. 한 점의 차질도 없을 것이오." 왜국인은 문득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용백군을 확실히 처리 하시오. 특히 놈의 곁에 있는 놈은 보통 놈이 아니오." 무사는 장담을 했다. "염려 마시오. 동방영주의 계획에는 빈 틈이 없소." 이때, 한 그루 야자수 뒤에 숨어있던 단위제는 가슴이 싸늘해 지는 것을 느꼈다. '하... 함정?' 그는 충격을 받았다. 이때 왜국인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려왔 다. "흐흐, 지금쯤 구룡상선에 있는 자들은 완전히 황천에 갔을 것 이오." '......!' 단위제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 바람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부 스럭 소리를 냈다. "누구냐!" 슉! 무사가 날카롭게 외치며 암기를 날렸다. '음! 실수다!' 단위제는 즉기 품 속에서 조그만 쇠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는 쇠구슬을 자신이 있는 반대편을 향해 던졌다. 회선비류(回 旋飛流)의 암기술이었다. 스스스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반대방향으로 일어났다. 순간 무사는 그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번-쩍! 그는 검을 쾌속 무비하게 휘들렀다. 캬악! 비명이 들리 고 피가 튀었다. 야조 한 마리가 떨어졌다. "쯧! 야조였군!" 무사는 검을 거두었다. 그는 왜인에게 말했다. "자, 그럼 사흘 후에 봅시다." 이어 그는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왜인도 잠시 서성이다가는 어디론가로 모습을 감추었다. 단위제는 마음이 급 해졌다. '큰일이다.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휙! 그는 신형을 날렸다. 하나 겨우 반 마장 쯤 달려 갔을까? "후후후후! 역시 쥐새끼가 숨어 있었군!" "......!" 단위제는 급히 신형을 멈추었다. 어느 새 앞을 바로 그 왜국 무사가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 단위 제는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탁노야 손님으로 산책하는 중이오. 당 신은 누구요?" 왜국인의 두 눈이 음산한 독기를 흘렸다. "변명해야 소용없다. 어차피 조금이라도 거리끼는 것은 제거한 다." 창! 그는 장도를 뽑았다. 칼 끝에서 음산한 푸른 빛이 뿜어졌다. 단위제는 섬뜩함을 느꼈다. '무서운 도기다.' 단우제는 몰랐다. 눈앞의 이 왜인이야말로 보통인물이 아니었 다. 세천상유, 그런 이름을 가진 그는 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끼 는 무서운 고수였다. 신음류(新陰流)의 서열 이위의 인물로서 도 (刀)의 귀(鬼)였다. 비는 어느 덧 그치고, 나뭇가지 사이로 으스름한 초승달빛이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폭이 좁고 긴 장도(長刀)에 반사되는 달빛 은 마치 찌르듯이 단위제의 목줄기를 압박하고 있었다. 점차, 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第 44 章 椰子香의 少女 東方玉 화려한 방 안, 장천린과 원계묵이 앉아 있었다. 그곳은 특별히 장천린의 처소로 배정된 곳이었다. 장식과 시설이 황궁 못지 않게 고급이었다. 장천린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이번 일이 이토록 큰 것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동방사성의 말대로라면 석정일랑과 청산의명이 이끄는 왜국무 사들의 숫자는 근 오백명에 달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왜 국 무사가(武士家) 출신으로 무공이 뛰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특 히 석정일랑과 청산의명은 왜국에서도 첫손가락을 꼽는 도(刀)의 달인들이 아닌가? 장천린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의 현재 세력이라면 능히 탁일비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각은 계속되었다. '하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탁일비가 숨겨놓은 황금 때문 일 것이다.' 이때, 원계묵은 그의 상념을 깨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지금 다 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타고난 무골(武骨)이었다. 그러므로 무골 특유의 강한 투지가 샘솟고 있었다. 청풍류(靑風 流)의 대가 석정일랑과 신음류(新陰流)의 도의 달인 청산의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과 한 번 도의 대결을 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왜국의 도법과 자신의 수라구 류도를 비교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둥, 어디에선가 해시(亥時)를 알리는 둔중한 북소리가 올려왔다. 원계묵은 몸을 일으켰다. "형님, 그만 주무시지요." 그는 장도를 잡았다. "저는 운표에게 가 보겠습니다. 백살대를 점검해야 하니까요." "그러게, 아우." 장천린은 그가 나간 후에도 계속 상념에 잠겼다. 그는 한 가지 한 가지 사실을 차분하게 정리하며 분석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안색이 변했다. '어쩌면!' 그의눈썹이 가늘게 흔들렸다. '나는 탁일비를 도우러 이곳에 왔지만 석정일랑과 청산의명은 반대로 나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아직까지 본격적 행동을 하지 않은 이 유가 없지 않은가?' 장천린은 가슴이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한데 이때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누군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 한 명의 소녀였다. 십 칠팔 세쯤 되어 보였는데 약간 앳되긴 했 으나 절세미녀였다. 커다란 눈망울이 신비롭게 반짝이는 아름다 운 미녀였다. 그녀는 화의(華衣)를 입고 있었는데 손에는 비파와 하나의 옥갑을 들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냐?" 장천린은 의아하여 물었다. 그러자 미소녀는 무릎을 꿇고 공손 히 말했다. 몹시 세련되고 아름다운 자태였다. "오늘 밤 대인(大人)을 시중들러 왔사옵니다."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동방사성이 보냈는가?" "네." 소녀의 다소곳한 대답에 장천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동방사성의 의도는 고맙지만 나는 여인에게 별 취미가 없다. 돌아가라." "......!" 미소녀의 두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그녀는 약간 의외라는 표 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고혹적인 붉은 입술에 살포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소녀를 이곳으로 보낸 분은 동방사성님이지만 온 사람은 소녀 입니다." "......?" "대인께서 소녀를 거절하심은 소녀에게 큰 치욕입니다." 장천린은 문득 기이함을 느꼈다. 그는 그녀가 결코 천한 신분은 아니라고 느꼈다. 품위도 있었 으며 그녀의 언행은 세련되고 예의가 있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동방옥(東方玉)이라 합니다." '동방?' 그는 즉시 물었다. "동방사성과 무슨 관계라도?" "오라버님입니다." "......!" 장천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어찌 누이동생을 타인에게 시중들게 하느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동방옥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대인께서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의 지방에서는 가문의 여식이 영웅(英雄)을 모시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는 풍속이 있지요. 소녀는 오늘 저녁 먼 발치서 대인의 모습을 뵙고 연모하 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 오라버니의 청을 수락했습니다." 실로 대담한 고백이었다. 중원여인으로서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장천린은 기이할 뿐이었다. 중원의 풍습과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해남의 풍습이 모두 그런가?" 동방옥은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일부 족에서만 내려오는 풍습입니다." 장천린은 호기심이 동했다. "그렇다면 한 번 시중을 들면 다른 사람과의 결합에 있어 흠이 되지 않는가?" 동방옥의 아름다운 눈에 기이한 빛이 흘러나왔다. "한 번 모신 분이 있으면 여인을 절대 다른 사람과 맺어질 수 없습니다."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는 그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한 번 모신 남자의 영원한 소유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가? 동방옥은 아름답게 웃었다. "소녀가 태어난 곳은 해남에서도 가장 남쪽이예요. 그곳의 여 인들은 모두 소녀와 같은 생각이예요. 물론 모실만한 분을 발견하 지 못하면 부족의 청년 중 한 명과 결혼을 하지요. 하나 일단 타 족의 영웅과 결합하게 되면 다시는 결혼할 수가 없어요. 만약 그 분이 버린다면 영원히 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여자의 정 절을 의미하는 것이나까요."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 남자측에서 거절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자 동방옥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그녀는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경우 여인은 크나큰 수치와 모멸감을 얻기 때문에 오직 자결(自決) 밖에는 갈 길이 없어요. 하나 이제까지 남자가 거절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어요." "......." 장천린은 난처함을 금치 못했다. 눈앞의 소녀 동방옥의 의도는 분명했다. 자신을 오늘 밤 꼭 모셔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고 그녀는 그 이후의 책임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자신이 거절하면 스스로 자결한다고 하지 않던가? 장천린도 남자였다. 그는 결코 성인군자는 아니다. 그에게도 욕 망이 있고 아름다운 여인을 안고 싶은 충동도 있다. 그가 접한 여 인이 취옥교 외에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나 취옥교와 사랑을 나누 이후 그는 되도록 다른 여인과는 멀리해 왔다. 취옥교와 헤어진 이 년여동안에도 그는 한 번도 여 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때, 동방옥은 그에게 다가오며 진지하게 말했다. "용대인님, 소녀는 결코 대인의 가정에 폐를 끼치지는 않을 거 예요. 오늘 밤 이후 다시는 뵐수 없다 해도 결코 원망치 않겠어 요." 장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해하지 마라.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까." 동방옥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정말 믿기지 않는군요. 용대인 같은 분이 아직도 홀몸이라니." 장천린은 고소지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구나. 단 한 번 본 남자의품에 안 기려는 그대들의 풍습을." 동방옥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대인깨서 보시기에는 이상할지 몰라도 저희에게는 조금도 이 상하지 않습니다. 전통이니까요." 황촉불이 탄다. 그 황촉불 아래 다소곳이 이야기하는 동방옥의 자태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비로 취옥교처럼 화려한 아름다 움은 아니었으나. 그녀 나름대로의 상큼하면서 발랄한 야성미가 흘러넘치고 있었 다. 마치 남국의 이름모를 야화(野花)라고나 할까? 일렁이는 황촉불 아래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동방 옥은 커다란 유혹덩어리였다. '.......' 장천린은 이제껏 오랫 동안 잊고 있었던 욕망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수년 간 체내 깊숙한 곳에서 잠자던 욕망이었다. 그의 눈 에서 욕망의 불꽃이 서서히 일어났다. 이때, 동방옥도 본능적으로 그의 그런 느낌을 알아차렸다. 그녀 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웬지 수줍음이 일어났다. 하나 남국의 여인은 중원 여인과는 다르다. 그녀들은 본능에 솔직담대한 면이 있었다. 동방옥은 대담하게 다가왔다. 장천린의 코 앞까지, 장천린은 그 녀의 몸에서 은은한 야자향을 맡았다. 몹시 시그러우면서도 강렬 한 냄새였다. 그녀는 그윽한 눈망울로 그를 올려보며 약간 정열적으로 도톰 한 입술을 열었다. "소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 장천린은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의 뺨이 새빨개지더니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결국은 그녀도 여자였다. 장천린은 탄식 했다. "그대를 취한다 해도 그대의 앞날에 대해 지금은 어떤 언질도 줄 수가 없다." 그 말에 동방옥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이 서늘하게 빛나 고 있었다. "소녀가 결정한 일이니 후회는 하지 않아요." 장천린의 두 눈에 부드러운 빛이 흘렀다. 동방옥은 문득 그 눈 이 극히 매혹적이며 매력적이라고 느껴졌다. 별처럼 차가우면서 도 이지적이고, 그러면서도 지극히 달콤한 눈빛이 지금 자신을 바 라보고 있는 것이다. 장천린의 달콤한 음성이 물었다. "옥(玉), 비파를 잘 타는가?" 그녀는 그 호칭에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조금요." "후훗, 그럼 한 곡조 타다오." 장천린은 음률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이런 남만의 오지에서 비파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이윽고, "그럼... 부족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기를......." 띵... 띠딩... 띵....... 비파가 탄주되기 시작했다. 비파에 맞추어 동방옥은 노래를 불 렀다. 극히 달콤한 음성이었다. "봄은 대체어디서 오고... 봄은 대체 어디에 와 있나요?" '問春何處來' '春來在何許' "달은 지고 새벽인데 꽃은 아무말 않고... 꾀꼬리 꽃 새에서 울 고만 있어요." '月落花不信' '幽禽自相語' ....... 사나이의 심금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달콤한 음조의 노래였다. 장천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파음도 그렇지만 그녀가 읊은 노 래도 보통이 아니었다. '일이 년 배운 솜씨가 아니다. 보기 드문 훌륭한 솜씨다.' 그는 진심으로 친창했다. "정말 훌륭한 솜씨로군." "부끄러울 따름이예요." 동방옥의 얼굴이 다시 복사꽃처럼 발그레졌다. 이때, 자시(子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동방옥 은 비파를 치우며 말했다. "밤이... 깊었사옵니다." 이어 그녀는 그에게 다가왔다. 야자향이 더욱 진하게 풍겼다. 장천린은 감회가 일어났다. '옥교... 그녀의 몸에서는 언제나 장미향이 났었지.' 그는 손을 들어 동방옥의 어깨에 얹었다. 동방옥은 몸을 가볍 게 떨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뺨을 감싸쥐었다. 동방옥은 감히 그 를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내렸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 동방옥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문득 장천린의 성격이 이상하 다고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다른 여인의 얘기를 하다 니, 하나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장천린에게 더욱 친근감이 드는 것이다. '그만큼, 진실한 분이야. 소옥(小玉), 너는 사람을 잘 보았어.' 그녀는 두 눈에 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분, 아름다우신가요?" "그렇다. 몹시... 아름답지." 장천린의 눈빛이 뭉클해졌다. 그녀는 미소지었다. "하나 용대인님, 지금 이곳에는 그 분이 아닌 소옥만이 있을 뿐 이예요." 장천린은 가슴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여인이다. 조금도 불쾌해 하지 않다니.'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동방옥을 바라보았다. 이때 동방옥은 탁자로 갔다. 그녀는 자신이 들고 온 옥갑의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두 개의 옥배(玉杯)가 들어 있었다. 각기 자웅(雌雄)이 새 겨진 정교한 옥배였으며 아름다운 자기술병도 있었다. 벽옥빛의 향기로운 술이었다. 그녀는 달콤한 음성으로 말했다. "합환주 입니다."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이것도 의식의 하나인가?" 동방옥은 미소지었다. "그렇사옵니다." 이어 그녀는 수줍게 설명했다. "이것은 두 남녀의 육체의 결합을 의미하나이다. 웅배는 남자 가 마시고 자배는 여인이 마시며 웅배는 지배를, 자배는 복종을 의미합니다." 장처린은 빙긋 웃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각각 웅배와 자배를 나누어 들었다. 은은한 황촉불 아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합환주를 나누어 마셨다. 장천린은 모두 마신 다음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방옥이 가볍게 기대오자 그는 그녀를 가볍 게 안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소녀는 대인의 영원한 종이옵니다." 장천린은 문득 그녀가 요염하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에서 은은한 정념의 불꽃이 타올랐다. 동방옥은 얼굴 떨구며 떨 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녀의 옷을......." 장천린은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옷을 벗 겼다. 곧 상의가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며 희디흰 여체의 곡 선이 들어났다. 유지같은 매끄러운 살결이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장천린은 갑자기 뱃속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동시에 머리가 아찔했다. 그는 크게 놀랐다. "도... 독(毒)을......!" "아니......?" 동방옥은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깜짝 놀랐다. "대인 어른......?" "소옥... 내가... 독을......." 장천린은 그녀를 손가락질 했다. 그의 동공이 거꾸로 뒤집혀지 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의식을 잃고 고꾸라지고 말았다. "대인!" 동방옥은 크게 외치며 그를 끌어안았다. 第 45 章 처음 펼친 武功 동방옥은 대경하여 장천린을 부축했다. "대인 어른!" 그녀는 당혹과 의아를 금치 못했다. 너무도 뜻밖의 사태가 벌 어진 것이었다. 이때였다. "하하하, 소옥, 수고했다." "......!" 방 안으로 동방사성과 다섯 명의 무사들이 들어왔다. "오라버니!" 막 반색을 하던 동방옥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다섯 명의 무 사 중 한 명에게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는 용백군과 똑같 았다. 옷차림에서 용모까지 완벽한 또 하나의 용백군이 아닌가? 동방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라버니, 대체 지금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죠?" 그녀의 음성은 싸늘해졌다. 하나 동방사성은 담담히 미소지었 다. "소옥, 너는 상관할 것 없다. 물러나 있거라." 허나 동방옥의 두 눈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자웅옥배에 무슨 장난을 쳤죠?" "후후, 걱정마라. 단순한 미혼약일 뿐이니까. 미리 웅배의 안쪽 에 살짝 발라 두었었지." 동방옥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동방사성은 여전힌 담담히 말했다. "나는 탁노야가 지니고 있는 황금이 필요해." "......!" 동방옥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따지듯 물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용대인께 저를 보낸 것도 오라버니의 음모 속에 포함된 것인가요?" "이해해다오." 동방옥은 가슴이 식는 것을 느꼈다. "왜... 왜... 미리 저에게 알려주지 않았지요?" 동방사성은 빙긋 웃었다. "너는 그때문에 훌륭히 연극을 해내었다." "호호호호홋!" 문득 동방옥은 미친 듯이 교소를 터뜨렸다. 이어 웃음을 뚝 그 치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처럼 오라버니가 비열해 보이기는 처음이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장천린을 부축한 채 탁자쪽으로 걸아갔다. 그녀는 힐끗 가짜 용백군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 자를 용대인으로 변장시켜 탁노야를 속일 셈인가요?" "......." 동방사성은 대꾸하지 않았다. 허나 곧 두 눈에서 광채를 띄우 며 말했다. "내가 탁노야 밑에서 삼 년동안 충실히 일해온 것도 오늘이 오 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흥! 이제야 알겠어요. 석정일랑과 청산의명을 해남으로 끌어들 인 것도 바로 오라버니였군요." "......!" 동방사성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허나 곧 그는 담담히 말했다. "용백군을 넘겨다오." 동방옥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어 시선을 동방사성에 게 고정시키고는 이상한 어조로 말했다. "오라버니는 한 가지를 예상 못했어요. 오라버니는 어떤 목적 을 가지고 저를 이용했을지는 몰라도 제 마음은 진심이었어요." "......?" "즉, 이 분은 지금 이 순간부터 저의 주인(主人)이예요. 이 분을 해치는 사람은 누구도 용서치 않겠어요. 설사, 오라버니라 해도 말이예요." 말을 마치는 찰나, 그녀는 탁자 위에서 철비파(鐵琵琶)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슈슈슉! 철비파를 한 바퀴 휘두르자 미세한 파 공성이 일어났다. 동방사성은 경악성을 발했다. "추혼침이다. 조심......." 허나 이미 늦었다. "큭!" "헉!" "크윽!" 세 명의 무사가 쓰러졌다. 그 순간 동방옥은 장천린을 안은 채 창문을 부수고 사라졌다. "쫓아라!" 한 명의 무사가 신형을 날렸다. 동방사성은 가짜 용백군에게 지시했다. "너는 당장 원계묵과 백살대가 머무르는 객당으로 가서 그들이 절대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조치해라." "네!" "그리고 객당 주위에 수하들을 풀어서 그 누구도 객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차단해라." "알겠습니다." 휙! 가짜 용백군은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동방사성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소옥, 네가 그토록 어리석은 일을 벌이다니." 그의 얼굴에 그늘이 어렸다. 허나 곧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중 얼거렸다. "그러나 결코 이번 일을 수포로 돌릴 수가 없다. 나 동방사성은 이번 일에 전 인생을 걸었으니까." 그는 초조하게 뒷짐을 지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약 일각쯤 지 났을까? 문득 아까 추적했던 무사가 돌아왔다. "어떻게 되었느냐?" 무사는 무릎을 꿇었다. "놓쳤습니다. 소저께서는 장원을 넘어 밀림속으로 들어가셨습 니다." "빌어먹을!" 동방사성은 은빛 눈썹을 칼같이 세우며 지시했다. "당장 수하들을 풀어서 밀림을 수색하라!" 그는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밀림 속에 잠입해 있는 청산의명에게 전서구를 띄워서 용백군을 잡는데 협조를 구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절대로 소옥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대신 용백군은 죽여도 좋다." "알겠습니다." 무사는 급히 뛰쳐나갔다. 동방사성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자웅옥배를 움켜잡았다. 순간, 팍! 자웅옥배가 그의 손아귀에서 가루가 되었다. "절대, 실패할 수 없다!" × × × 밀림(密林), 자욱한 새벽안개가 깔려 있었다. 온갖 열대성 식물 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 밀림은 한없이 깊었다. "......." 밀림의 약간 움푹 들어간 곳, 각종 나뭇잎들이 쌓여 있는 지점 에 일남일녀가 앉아 있었다. 장천린과 동방옥이었다. 동방옥은 옷 차림이 엉망이었다. 옷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선 혈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녀는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반면 장천린의 두 눈은 차분했 다. 다만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동방옥은 그에게 죄스 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는 듯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장천린이 정신이 든 것은 약 한 시진 전이었다. 처음에 그는 몹 시 혼란스러웠다. 허나 지금은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탁일비는 자신의 소유인 막대한 황금을 어디엔가 묻어놓았다. 그 위치는 아무도 모 른다. 동방사성은 황금을 노리고 탁일비에게 접근하여 충성을 다 했다. 허나 탁일비는 여전히 그에게 황금의 위치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방사성은 무력으로 탁일비를 위협할 수는 없 었다. 탁일비는 늙고 병들었으므로 자칫하면 생명을 포기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무산될 것이다. 그래서 동방사성은 계획을 세웠다. 그는 석정일랑과 청산의명을 끌어들였다. 그돌로 하여금 탁일비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한 것이다. 과연 계획대로 탁일비는 북경에 서찰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동방사성은 구원자가 오자 자신의 수하로 하여금 가짜 용백군을 만들어 원계묵과 백살대를 조정하려고 했다. 그들로 하여금 왜인 들과 싸우게하여 왜인들이 도주토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탁 일비는 가짜 용백군에게 약속대로 삼분지 일의 황금을 줄 것이다. 그 틈을 이용하여 동방사성은 황금의 삼분지 일은 물론이려니와 황금 전체를 손에 넣으려고 획책하는 것이었다. 동방옥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녀는 대인께 뭐라 사죄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오라버 니로 인해 대인께서 큰 욕을 보셨으니." 장천린은 지그시 그녀를 응시했다. 동방옥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녀는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그대 오라버니는 나를 죽이러 한 대신 그대는 나의 생명을 구 했다. 더욱이 애초에 그대 마음 속에 음모가 있던 것이 아니고 진 심이었거늘 어찌 내가 그대를 탓하겠는가?" "흑!" 동방옥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 장천린은 그녀의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물었다. "옆구리의 상처는 좀 어떠냐?" "찰과상 정도일 뿐 걱정할 건 아니예요." 장천린은 새삼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작고 가냘퍼 보이는 그녀에게서 그런 용기가 나온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녀는 밤새도록 자신을 안고 숲 속을 도주했다. 더구나 동방사성의 혈육 의 정도 무시한 채 그녀는 추격자들을 죽이고 그를 보호했던 것 이었다. "고맙다. 소옥!"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하자 동방옥은 감격에 몸을 떨었다. '아!' 그녀는 벅찬 기쁨을 느꼈다. "소녀가 당연히 해야할 도리인 걸요. 어차피 대인은 저의 영원 한 주인이예요." 장천린은 쓸쓸하게 웃었다. 이어 그는 울창한 밀림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 밀림의 지리를 아느냐?" 허나 그녀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몰라요. 이 밀림은 오지산 내에서도 가장 험역이예요. 사람들 이 거의 들어온 적이 없어요. 소녀도 역시 처음이예요."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구나." "네." "음." 장천린은 근심이 되었다. 그는 원계묵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을 굴렸다. '허나 원제의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당분간은, 어차피 동 방사성이 탁일비의 황금을 노리고 가짜 용백군인 나를 만들어 놓 은 이상, 왜인들을 물리칠 때까지는 안전할 것이다.' 그는 계속 상념에 잠겼다. '단지, 원제가 그 가짜를 눈치챈다면 오히려 더 위험할 것이다.' 이때, 동방옥은 장천린의 품 속에서 아늑한 느낌을 받고 있었 다. 그녀가 예상한 상인의 그슴이 아니었다. 장천린의 가슴은 마 치 강철같이 탄탄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조금도 당황 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정말, 진정한 영웅이시다. 이분은.' 그녀는 그의 품에 뺨을 대고 아늑한 기분에 젖었다. 헌데, '......!' 그녀는 흠칫했다. 그녀의 귓전에 미세한 음향이 들려왔던 것이 었다. 아니나 다를까? 돌연 한 야자수 그늘로부터 검은 인영이 나타나더니 전광석화 처럼 장천린은 덮쳤다. 순간, 띵! 동방옥은 비파줄을 퉁겼다. 소리없이 비파에서 추혼 침이 날아갔다. "컥!" 인영은 목줄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스스슷! 허나 사방에서 여 섯 명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모두 왜국의 복장을 한 무 사들이었다. 동방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용대인님, 옆으로 물러나세요." 그는 장천린이 무공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즉시 앞으로 나섰다. 육 인의 왜인들도 그녀와 같은 생각인 듯 동방옥만 포위했다. 그 들 중 한 명의 매부리코의 왜국인이 약간 서툰 한어로 물었다. "소저가, 동방영주의 누이동생이오?" "맞아요." "소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소. 비키시오." 허나 동방옥은 냉소했다. "어림없는 소리!" 무사는 눈쌀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군, 상처를 입히더라도 사로잡는 수밖에." 쉬-악! 놀라운 도법(刀法)이었다. 폭이 좁고 긴 장도가 곧장 날 아왔다. 동시에 나머지 오 인도 칼을 휘둘렀다. 치열한 싸움이었 다. 따... 땅......! 철비파에서 연신 비파음이 울렸다. 동방옥은 무공이 보통이 아 니었다. 그녀의 철비파는 다양하게 상대방의 공격을 차단시켰다. 특히 철비파에 비장된 추혼침은 그들에게 큰 위협을 주어 그들은 일시에 그녀를 제압하지 못했다. 허나, 상대의 숫자가 워낙 많았다. 게다가 육 인의 도법은 극히 정교하고 악랄했다. 장천린은 싸움을 관찰하고 있었다. '음! 하나같이 일류급 고수들이다. 이 상태로 가면 소옥은 십초 이상 버티기 힘들겠다.' 이때 문득, 그의 앞에 죽은 왜인 무사가 쓰던 장도가 보였다. 그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장천린은 도를 잡은 순간 망설여졌다. '나의 무공도 약한 편은 아니다. 허나 실전경험이 전혀 없는 것 이 가장 치명적이다.' 그는 육 인의 무사들을 노려보았다. '저들은 내가 무공을 모르는 줄 알고 있다. 그것을 최대한 이용 해야 한다.' 이때, "학!" 캉! 동방옥은 다급한 신음을 발했다. 그녀의 철비파의 현이 세 줄이나 끊어졌으며 그녀는 낭패하여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다. 소 맷자락이 길게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추 혼침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사용하면 그들 중 두 명은 죽일 수 있다. 허나 그렇게 되면 허 를 보여 그녀 역시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계속 뒤로 물러나면서 절망을 느꼈다. '아아! 내가 죽는 것은 상관없어, 하지만 용대인님은.' 이때 그녀의 ㄱ전에 용대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옥, 내가 돕겠다." 순간 용백군, 즉 장천린은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의 자세는 엉성하기 그지 없었고 중심도 엉망이었다. 육 인의 무사들은 코웃 음쳤다. 그들은 아예 장천린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허나 동 방옥은 가슴이 철렁하여 외쳤다. "용대인, 무모한."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육 인에게 다가간 장천린이 무서운 도약을 했기 때문이었다. 약 삼 장 가량 뜬 채 허공에서 그의 칼이 호선을 그렸다. "으아악!" 비명이 터졌다. 한 명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 나머지 오 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허나 여유를 줄 장천린이 아 니었다. "뇌전(雷電) --- 단홍(斷虹)!" 풍뢰도법(風雷刀法)의 제 일초(一招)가 뇌전을 뿌렸다. 우르르, 은은한 우뢰소리와 함께 또다시 한 명이 쓰러졌다. 칼 과 몸이 동시에 두 동강이 난 것이었다. 칼이 지나간 자리는 숯처 럼 그슬려 있었다. 실로 가공할 도법이었다. "조... 조심해라! 무서운 놈이다!" 하나 그들이 경각했을 때는 이미 장천린이 삼도귀변팔법(三刀 鬼變八法) 중 제 육초인 혈망개(血網開)를 전개한 후였다. 파아아! 도(刀)가 세 개로 보였다. 세 개의 도가 스친 순간 삼인 의 왜인 중 한 명은 머리서부터 두쪽이 났으며 한 명은 팔이 날 아갔다. 또 한명은 옆구리가 베어져 내장이 쏟아졌다. 실로 가공할 도법이었다. 만약 정천린이 실전경험이 많았다면 삼 인 모두 양단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처음 펼친 도법이 었기에 그 정도에 그친 것이었다. "으으." "끄으." 두 명은 혼비백산하며 뒷걸을질 쳤다. 한쪽팔이 없는 자와 옆 구리가 갈라진 자의 눈은 흡사 귀신을 만난 듯 공포에 질려 있었 다. 그들은 설마 일개 상인에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숨은 실력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허나, 퍽! 옆구리가 터진 자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세 치 두께의 강철판도 뚫을 수 있다는 백골마조(白骨魔爪)로 장 천린이 그의 가슴을 박살 낸 것이었다. 그 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 하고 고꾸라졌다. "허헉!" 나머지 한 명은 대경실색하여 전력으로 신형을 날렸다. 하나 그 순간, 장천린의 입에서 차가운 호통이 쏟아져 나왔다. "어딜!" 그는 귀영마변보(鬼影魔變步)로 허공을 날아 그의 옆에 떨어졌 다. 동시에 그의 손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그대로 왜인의 가슴을 가격했다. "적살장(赤殺掌)이다!" 펑! "크아아악!" 왜인은 붕 떠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의 가슴에는 시뻘건 장인(掌印)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살이 타는 듯한 고약 한 냄새가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그는 즉사했다. 결국 육 인의 왜국 무사가 장천린의 손에 모두 죽은 것이었다. 그것은 불과 숨 몇 번 쉴 정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실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연쇄적으로 처치한 것이었다. "......." 동방옥은 망연한 표정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허 나 그녀의 놀라움은 곧 기쁨으로 바뀌었다. "용대인!" 그녀는 눈물이 뺨에 범벅이 되는 것도 모르고 달려와 장천린의 넓은 가슴에 안겼다. "소옥!" 장천린은 담담히 웃기만 했다. "정말, 정말 놀랐어요. 소옥은 용대인님의 무공이 그 정도일 줄 은." 장천린은 고소지었다. "그건 저들이 나를 너무 무시했기에 당한 것이다. 처음부터 저 들이 주의했다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동방옥은 고개를 흔들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승자는 대인이예요. 그리고 소옥은 기뼈요."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기쁜 것은 나중에 느껴도 된다.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빨 리 이 밀림을 벗어나는 것이다." "네!" 동방옥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어 두 사람은 대충 방향 을 정하고는 밀림을 지나기 시작했다. 그곳에 버려진 여섯 구의 시체에서는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곳을 떠난 지 채 반각도 되기 전에 각종 기이 한 독충과 벌레들이 시체를 파먹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오지산(五指山)은 열대성 오지였던 것이다. 第 46 章 무서운 怪筮들 밀림(密林), 가도가도 끝이 없는 숲, 하늘 조차 보이지 않았다. 각종 기괴(奇怪)한 원시림(原始林)이 덩굴에 얽힌 채 끝없이 펼 쳐져 있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밀림을 매웠다. "헉헉." "하아." 장천린과 동방옥은 땀을 폭포수 같이 흘리며 밀림을 헤쳐나가 고 있었다. 방향감각을 잃은 지 이미 오래였다. 장천린은 왜인무 사들에게 빼앗은 장도로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들을 쳐내며 전 진하고 있었다. 하나 너무도 울창한 원시림이었기에 전진하는 속도는 느렸다. 소옥도 지칠대로 지쳤다. 더욱이 그녀는 여자의 몸이므로 기진 맥진한 상태였다. 하나 그녀는 쉬자는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 다. 장천린도 전신이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팍! 팍! 장도로 계속 덩굴과 나무를 쳐나가던 장천린은 문득 걸 음을 멈추었다. "......?" 동방옥 즉, 소옥이 물었다. "왜그러세요. 용대인님?"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가는 방향이 탁일비의 장원과는 방향이 틀린 것 같다. 갈수록 숲이 우거지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 앞으로 전진하면 할수록 길이 열리기는 켜녕 더욱 더 울창한 수목이 앞을 막고 있었다. "어쩌면 좋죠?" 소옥도 그만 울상이 되었다. 장천린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오히려 더욱 더 길을 헤매일 것이다.' 하나 그는 자신의 불안을 내색하지 않았다. 원래 그는 그런 사 람이다. 자신의 고민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러써 상대가 불안 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소옥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걱정마라, 소옥. 잘 될 것이다." 소옥은 그 말에 웬지 안심을 느꼈다. 그녀는 장천린의 말에 강 한 신뢰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곧 어두운 표정을 거두며 미소 지었다. "틀림없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음, 가자." 그들은 다시 숲을 뚫고 전진했다. 밀림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 로 깊고 괴이했다. 때로는 덩쿨이 스르르 움직여 그들의 목을 휘 감기도 했다. 그것은 움직이는 식물이었다. 장천린은 난생 처음 보는 괴식물에 모골이 송연했으나 역시 내색치 않고 칼로 자르며 전진했다. ....... 얼마나 깊이 전진했을까? 문득, 장천린은 괴이한 냄새를 맡았다. 언뜻 향긋한 듯하면서도 코를 찌르는 그 향기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불길한 생각이 든 것이었다. "대인?" 소옥은 의아하여 그에게 다가왔다. 그때, "악!" 그녀는 발목이 푹 빠지며 몸을 휘청였다. "소옥!" 장천린은 놀라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어느 새 소옥의 발은 무 릎까지 빠져 있었다. "용대인님!" 그녀의 입술은 공포에 질려 완전 사색(死色)이 되고 말았다. 장 천린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 다가오지 마세요! 자, 장독( 毒)이 퍼져 있어요!" "......!" 장천린은 흠칫했다. 아닌게 아니라 과연 소옥의 머리 위로 희 미한 안개 같은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연한 갈색을 띄고 있는 안 개와 같은 기류(氣流).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극히 연한 기류였다. 밀림의 오지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장독( 毒)에 대해 올바른 상식 을 갖고 있지 않다. 열대지방에서 수만 년을 두고 쌓인 낙옆이 썩어 발효하여 발생 되는 독기(毒氣)로써 장천린도 직접 보지는 않았으나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소옥은 장독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장천린을 다가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아아." 스스, 소옥은 점점 더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지나 다름이 없었으나 그녀는 겉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다, 다가오지 마세요!" 장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소옥, 조금만 참아라." 하나 소옥은 애처롭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저를 그냥 놔두세요. 어서 그냥 가세요." 어느 덧 그녀는 허리까지 빠져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 의 안색은 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다급했다. 그는 급 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을 반짝 빛냈다. 주위에 아름드리 나무가 덩쿨에 감겨 있는 것이 눈에 뜨였다. 장천린은 장도로 나무를 베어 넘겼다. 공력이 부족하여 그는 여러번 쳐야만 했다. 쿵! 나무는 늪지를 가로질러 쓰러졌다. '호흡을 멈추어야 한다. 학면귀식대법을.' 그는 즉시 학면귀식대법의 요결을 운용했다. 그러자 그의 호흡 이 느려지더니 마침내는 완전히 멈추어졌다. 그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조심스럽게 나무 위로 걸어가 마침 내 그는 소옥의 손을 잡았다. 늪지는 무서운 힘으로 소옥을 빨아 들였으나 그는 간신히 그녀를 늪에서 빼낼 수가 있었다. 잠시 후 그녀를 안고 늪지를 벗어나자 아름드리 나무도 곧 흔 적도 없이 가라앉았다. 실로 무서운 늪이었다. "용대인..." 구출된 소옥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혼절하고 말았다. 그녀의 피부는 점점 더 짙은 갈색을 띄어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붉은 반점이 곳곳에 돋아나고 있었다. 장천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 다. '큰일이다. 장독의 기운이 이미 전신에 퍼졌다.' 그는 소옥을 안았다. 하나 그는 독(毒)에 대해 문외한이었으므 로 다급하기만 했을 뿐 정작 어떻게 손을 써야할지 속수무책이었 다. 한데 이때, 설상가상이랄까? 스스스스! 문득 주위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 장천린은 안색이 급변했다. 소옥이 빠졌던 늪지로부터 무엇인 가가 스물스물 기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한치 가량 크기의 거머 리처럼 생긴 작은 벌레들이었다. 그 수효는 엄청나게 많았다. 핏빛을 띈 거머리들은 바닥을 온 통 뒤덮은 채 무서운 속도로 그를 향해 쇄도해 오고 있었다. 스스스, 스스스,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의 소음이 울렸다. '저... 저것들은 뭐란 말인가?' 장천린은 전율하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나 이미 사방 이 모두 핏빛 거머리떼로 깔려 있어 그 어디로도 달아날 곳이 없 었다. 한데 이때. 카-악! 돌연 듣기 거북한 음향과 함께 한 마리 괴조가 그를 공 격했다. 놀랍게도 사람만한 괴조였다. 장천린은 몸을 피하면서 장 도를 휘둘렀다. "뇌진단홍!" 케-액! 괴조는 그대로 두 쪽이 나 떨어졌다. 마침 괴조의 시체는 거머 리떼 사이로 떨어졌다. 순간, '저... 저럴 수가.' 장천린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괴조의 시체로 거머리들이 무서 운 속도로 달려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흡혈충인가?' 장천린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이 밀림에 서 일어나는 현상을 온통 괴이하고 끔찍한 일 투성이였다. 장천린은 주춤했다. 어느 새 거머리떼들이 발 아래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읏!' 획! 그는 신형을 힘껏 도약시켰다. 간신히 사 장쯤 떨어진 곳의 나무 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 그는 나무위에 올라 식은땀을 흠쳤 다. 약간 마음이 가라앉자 그는 품 속의 동방옥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반점이 가득 번져 있었다. '야단이로군!' 그는 조급해졌다. 어떻게든 손을 써야만 했다. 한데 이때, 엎친 데 덥친 격으로 또 다른 위기가 닥쳐왔다. 카윽! 캬아! 캬르르! 푸드드득! 푸드드드! 돌연 사방으로부터 수많은 박쥐떼들이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나무와 나무 사이로 새카맣게 날아드는 박쥐떼들은 거머리들을 닥치는대로 쪼아먹었다. 그것은 실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결국 거머리들은 천적을 만난 셈이었다. 하나, 박쥐들은 장천린 에게도 공격했다. 장천린은 장도를 휘두르며 막았다. 그것은 끝이 없는 싸움이었다. 수많은 박쥐떼들이 쳐도 쳐도 한이 없었다. '안되겠다.' 마침내 장천린은 장도를 나뭇가지에 꽂고는 쌍장을 펼쳤다. '혈음강기(血陰 氣).' 순간, 자부문(紫府門) 이십 사 개 마공 중 하나인 혈음강기가 전개되었다. 장천린의 주위에 은은한 핏빛 기운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박쥐들은 그의 근처에서 터져버렸다. 혈음강기에 닿자 마자 그대로 몸이 터져버리는 것이었다. 실로 무서운 위력이었다. 그러나 장천린의 내공은 보잘 것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공력 소모가 극심한 혈음강기를 오래 지탱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위기에 몰렸다. 파앗! "윽!" 한 마리 박쥐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그의 어께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며 피가 솟구쳤다. '이대로 있다간 큰일 나겠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 무다.' 그는 몸을 일으텼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의 귓전에 외침소 리가 들려왔다. "용대인님! 이곳으로 몸을 날리십시오."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소진이!' 장천린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이때, 펑! 무엇인가 주위 에서 폭발하며 하얀 연기가 퍼졌다. 그러자 그 연기 근처에 있던 박쥐들이 맥을 못추고 우수수 떨어졌다. 잠시 후 연기 속에서 한 명이 신형을 날리더니 그의 곁에 내려 섰다. 과연 부금진이었다. "소진!" 장천린은 반색을 했다. 하나 부금진의 모습도 엉망이었다. 옷이 여기저기 찢겨졌는가 하면 피가 배어 있었다. 머리카락도 산발이 되어 몹시 낭패한 모습이었다. "네가 어찌 이곳엘 찾아 왔느냐?" 장천린의 물음에 부금진은 다급히 말했다. "나중에 설명할테니 빨리 저를 따라오세요." 말과 동시에 그는 신형을 날렸다. 장천린도 칼을 뽑아 들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부금진은 이미 길을 터 놓은 듯 앞장서서 달렸 다. 그리고 얼마후 그는 한 공지에 당도했다. 비교적 숲이 덜 우거진 곳으로 아늑한 분지형태였다. 그곳에 당도하자 부금진은 한숨을 돌리며 몸을 멈추었다. 장천린은 숨을 가다듬자 물었다. "소진, 대체 어찌된 일이냐? 어찌 네가 이곳에?" 부금진의 안면에 그늘이 어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구룡상선으로 왜인들이 침입해 왔었습니다. 상선 내의 인부들 육십 명이 모두 죽었습니다." "......!" 장천린의 안색이 무섭게 창백해졌다. 부금진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어요.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장천린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가 얼마만큼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구룡 상선은?" "불에 타버렸습니다." 장천린은 하늘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구룡상선이 불타다니, 그것은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건조한 배 였다. 아니 그보다도 육십 명의 인부들의 죽음이 그에게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그를 믿고 따르는 양가장의 식솔들인 것이었다. 이때, 부금진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모든 일이 자 신의 불찰이라 자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어리고 감성이 여 린 탓인지 그의 눈꼬리에 이슬이 어렸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떤 문책이라도 받겠습니다." 장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초인적인 인내로 감정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는 그 순간에도 냉정을 유지하려 애를 섰다. '소진은 강하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해도 그는 충분히 일급고수 정도다. 그런 그가 당했을 정도라면 분명 큰 사건이 있었을 것이 다.' 그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의 음성은 부드럽고 차분했다. 그는 소진의 어깨를 잡았다. "소진, 나는 네가 최선을 다했으리라고 믿는다. 결과야 어찌 되 었든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부금진의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순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용대인 어른." 장천린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문득 품에 안긴 동방 옥에게 생각이 미치자 그는 물었다. "소진, 독(毒)에 대해 아느냐?" 부금진은 비로소 동방옥을 응시했다. "이 분 소저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장독에 당했는데, 나는 의술이 깊지 않을 뿐더러 독에는 문외한이라 치료할 수가 없구나." 순간 부금진의 안색이 변했다. "아까 그곳의 장독에 당했습니까?" "그렇게 됐다." "큰일입니다. 그 장독은 열 시진 이내로 뼈를 삭이고 녹인다는 무서운 부골장독입니다." "부골장독?" 장천린은 단지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부골장독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에게 보여주십시오." 장천린은 축 늘어져 잇는 동방옥을 부금진에게 넘겨주었다. 부금진은 그녀의 맥문을 잡고 맥박을 관찰한 다음 다시 뭄의 여기저기를 눌러보았다. 그의 두 눈에 다소의 안도가 스쳤다. 이 어 그는 고개를 들었다. "다행입니다. 독기가 아직 심장까지 침투하지 않았습니다. 이분 소저의 내공의 힘이 독기를 막고 있습니다." "치료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음, 정말 다행이다." 이윽고, 부금진은 동방옥을 바닥에 반듯이 눕혔다. 이어 그는 품 속에서 목갑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각각 길이 와 굵기가 틀린 갖가지 금침(金針)이 들어 있었다. "......!" 부금진의 표정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엄숙해졌다. 그는 손으로 동방옥의 명치 아래 복부를 강하게 몇 번 눌러보았다. 그러자 동 방옥이 꿈틀했다. 부금진은 곧 가장 긴 금침을 꺼내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명치 부근에 깊이 꽃았다. 그러자 동방옥은 처음보다 더 심하게 꿈틀하며 몸을 경련햇다. 第 47 章 不歸林 "......!" 부금진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이 맺혔다. 그는 극히 신중한 동작으로 동방옥의 가슴 근처에 일곱 개의 금침을 차례로 놓았다. 다 마쳤을 때 부금진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됐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독기가 심장을 침투하지 못할 것입 니다." 장천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부금진은 품 속에서 하얀 자 기 옥병을 꺼내더니 손바닥에 쏟았다. 그것은 역시 백색분말이었 다. 그는 분말을 동방옥의 얼굴, 손 등의 노출된 부위에 뿌렸다. 다 시 그는 다른 자기병에서 이번에는 조그만 황색단약을 꺼내더니 동방옥의 턱을 움켜 쥐었다. 그러자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알약을 집어 넣었다. 그 일 면의 동작은 유연하게 이루어 졌다. 부금진은 다시 땀방울을 손등 으로 문질렀다. 한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장천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장난스럽고 치기가 남아있는 부금진에게 의술이 있다는 것 이 경이로왔다. 뿐만 아니라 부금진의 솜씨가 보통 익숙한 것이 아니라 더욱 감탄스러웠다. 약 일각 쯤의 시간이 흐르자 동방옥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새 어나왔다. "독기가 새어나오는 것입니다." 침을 뽑으며 부금진은 담담히 말했다. "이제는 옷을 갈아 입혀야 됩니다. 이 분이 입고 있는 옷은 독 에 젖었으니 빨리 다른 것으로 갈아 입혀야 되니까요." 장천린은 난처했다. 옷이 바로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하나 이 때 부금진이 미소 지었다. "저에게 옷이 한벌 있어요. 하나 남자 옷이라." 장천린은 얼굴을 활짝 폈다. "상관없다. 이리 다오." 부금진은 등에서 보자기 비슷한 것을 꺼냈다. 그것은 유랑을 좋아하는 부금진이 항상 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보자기 속에는 여 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 속에서 한 벌의 장삼을 꺼냈다. 그리고 깨끗한 천을 꺼냈다. "이 천으로 저 소녀의 몸에 묻은 독약을 모두 닦아낸 후 갈아 입혀야 합니다." "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즉시 소옥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깨가 드러나고 젖가리개가 나타 났다. 장천린은 왠지 어색해져 몸을 돌렸다. 장천린은 소옥의 옷을 벗기며 조용히 말했다. "소진, 구룡상선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 다오." 부금진은 움찔했다. 하나 두 눈에 그늘이 드리운 채 그는 이야 기 했다. 왜국무사 수십 명이 갑작스레 쳐들어온 일, 인부들이 속수무책 으로 죽은 일 등등. 장천린은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면서 계속 소옥의 옷을 벗겨 나 갔다. 곧 그녀의 가슴을 가린 젖가리개가 풀러지고 동그랗고 소담 한 유방이 나타났다.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유방이었다. 한데 그 유방 위에 붉은 액체가 점점이 묻어 있었다. 피부에 돋 았던 반점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런 기습을 벌였습니다. 저도 기습 을 받아 하마터면 당할 뻔했으나." 부금진은 계속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백연연이 중상을 입고 반송이 천월도법(天月刀法)으로 왜국무사들을 모조 리 죽였다는 이야기를 할 때, 장천린의 안색은 거듭 변하고 있었 다. 하나 그의 손은 동방옥의 하의를 벗겨 내리고 있었다. "백소저가 중상을 입었다고? 어느 정도지?" "......." 부금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상처가 심한가 보구나." 부금진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등뼈가 칼에 심하게 상했습니다." 장천린은 안명이 굳어졌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처연하고 고귀 한 백연연의 얼굴과 태진왕의 모습이었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 리고 있었다. 이제 동방옥의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주요부분을 가린 고의 하 나 분이었다. 부금진이 다시 이야기 했다. "왜국무사들을 모두 죽인 후에 해적선 검은 바람이 나타났습니 다." "......!" 장천린의 두 손이 다시 떨렸다. '검은 바람!' "저와 반대협은 백소저를 모시고 중요한 문서와 몇 가지 물품 만을 챙긴 채 구룡상선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적선에서 는 곧 화포(火砲)가 터졌고 상선은 불타며 순식간에 가라 앉았습 니다." 장천린, 그의 두 눈은 동방옥, 즉 소옥의 창백한 얼굴에 멎어 있었다. 하나 그의 손이 서서히 움직였다. 천천히 그는 소옥의 하 나 남은 고의를 벗겨 내렸다. 소옥의 이제껏 한 번도 타인에게 보인 적이 없었던 여인의 비 지(秘地)가 여지없이 나타났다. 고운 숲에 감싸인 신비가 나타난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전라가 되었다. 이어 그녀의 피부에 돋았던 반점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장 천린은 부금진이 준 천으로 그녀의 나신을 닦기 시작했다. 유방은 물론 곳곳에 붉은 액체가 뭍어 있었다. "저와 반대협은 백소저를 모시고 용대인님을 찾으러 탁일비의 산장으로 떠났습니다." 부금진의 말이 계속되었다. "하나 도중 밀림에서 나타난 왜국무사들을 만나 또다시 격전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장천린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반대협과 백소저는 어떻게 되었는가?" 말을 하면서도 그의 손은 소옥의 유방을 세심히 닦고 있었다. "반대협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왜국무사 중 청산의명 이란 자와 밀림에서 싸웠습니다." '청산의명!' 장천린의 손이 소옥의 유방에서 원을 그리다가 멈추었다. 부금진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반대협의 도법(刀法)도 대단했지만 청산의명이란 그 자는 진정 무서웠습니다. 그 싸움은 진정 용호상박이었지요. 더욱이 반대협 은 두 손에 못 박혔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몸에 상처를 내게 되었습니다." 장천린의 손은 아직도 소옥의 유방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저는 급히 계략을 써서 두 분을 데리고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안전한 곳에 모시고 탁일비의 장원을 찾으러 가는 중에 용대인을 만난 것입니다." 부금진의 말이 끝났다. 장천린은 다시 소옥의 나신을 닦기 시작했다. 그녀의 백옥 같 은 살결이 눈부시게 제색을 되찾고 있었다. 허나 장천린의 두 눈 은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은 허리로 내려왔고 다 시 허벅지를 세심하게 닦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 그는 그녀의 하체에 무엇에 긁힌 듯한 한치 길이의 상처가 십 여 군데 있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그 상처에서는 선혈이 조금씩 배어나오고 있었다. "소진! 이 여인의 하체에 상처가 많은데 좀 봐주지 않겠느냐?" 부금진은 멈칫했다. 그는 곧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옷으로 몸을 좀 가려주지 않겠습니까?"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옷으로 그녀의 몸을 덮었다. 젖 가슴과 주요부분을 살짝 덮었다. "이제 되었다." 부금진은 얼굴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아무리 여인의 중요한 부분을 가렸다고는 하지만 소옥은 완전나체가 아 닌가? 일시적으로 눈부신 살결을 대하자 그는 눈 둘 곳을 몰라했 다. 하나 그의 눈이 그녀의 허벅지와 종아리 근처를 본 순간 안색 이 굳어졌다. 그는 급히 물었다. "용대인님, 부골장독 말고 이 분 소저는 혹시 어디에 빠진 적이 있습니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있네. 그곳은 늪지 같은 곳이었네." 부금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곳은 늪이 아닙니다. 혈소(血沼)라 불리우는 곳입니다." "혈소?" "일종의 웅덩이지요. 용대인께서 아까 계셨던 그곳은 해남 오 지산의 밀림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곳입니다. 주위 오십 리 일대가 모두 죽음이 깔린 곳입니다. 부골장독이 도처에 떠다니고 수백 수천 개의 혈소가 있는 곳입 니다. 혈소는 수백 년 동안 쌓인 나뭇잎이 썩은 것에 빗물이 고여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 혈소 안에는 피를 빨아먹고 사는 무서운 혈거머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혈소 주위에는 그 거머리들을 먹고 사는 흡혈박쥐들도 떼를 지어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 놈들은 어떤 동물이든 접근하면 무조건 공격하여 피를 빨어먹습니다." "으음." 장천린은 절로 신음을 발했다. 이때, 부금진은 자신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소도(小刀)로 동방 옥의 종아리 근처에 상처난 곳을 건드렸다. 그러자 상처부분이 꿈 틀하며 피가 조금 배어 나왔다. 부금진은 입술을 씰룩였다. "이 상처 속에 그 거머리들이 들어가 피를 빨아먹고 있습니다." 장천린은 그만 모골이 송연했다. "이것을 그대로 두면 이 분 소저는 오늘 안으로 피가 말라 죽 을 것입니다." 그는 소도 끝으로 상처 사이를 벌리더니 입술을 깨물고 상처를 예리하게 후벼팠다. 츳! 핏방울이 퉁겼다. 그리고 소도를 들어 올리자 놀랍게도 거 머리 한 마리가 소도에 찍혀 끌려나왔다. 거머리는 몹시 뚱뚱했는데 피가 무섭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천린은 구역질을 느꼈다. 하나 부금진은 신중하게 계속 소도 를 움직이며 이야기했다. "아까 용대인님께서 계셨던 그곳은 오지산 일대에서도 가장 무 서운 불귀림(不歸林)의 근처였습니다. 만약 조금만 더 깊이 들어 갔다면 저는 용대인님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용대인께서 극히 위험했을 것입니다." 말을 하는 동안 부금진은 계속 따라 소도를 후벼내어 흡혈거머 리를 뽑아냈다. 모두 일곱 개의 거머리들이 끌려나왔다. 그 바람 에 소옥의 하체는 완전히 피투성이가 되었다. 부금진은 문득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저어, 이 이상은 곤란합니다. 대인께서 해 주셔야겠습니다." "음." 장천린은 신음을 발했다. "소도를 이리다오." 부금진이 곤란해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처는 이제 소옥 의 허벅지 깊숙한 곳인 아랫배 부근에 네 군데나 더 남아 있었다. 부금진으로서는 감히 그곳까지 손을 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장천린은 그녀의 하반신을 가린 옷을 걷었다. 네 군데의 상처 가 보였다. 이 때 부금진이 등을 돌린 채 물었다. "대체 그 분 소저는 누구입니까?" "내 생명의 은인일세." 부금진은 흠칫했다. 장천린은 소옥의 허벅지를 약간 벌렸다. 그러자 여인의 비문(秘 門)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담백하게 만 했다. 그는 남은 허벅지 안쪽의 상처를 소도로 후볐다. 상처 속에서 꿈틀대는 거머리를 느낄수 있었다. 그는 거머리를 찍어 뽑아냈다. 그 바람에 허벅지는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장천린은 이번에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탁이비를 만났던 일, 동방사성의 음모, 동방옥이 그것도 모르고 자신에게 접근하여 독이 든 합환주를 마신일, 그리고 동방옥이 자 신을 보호하여 밀림 깊숙이 도주해 온 이야기 등을. 부금진은 몇 차례나 안색이 변했다가 종내에는 한숨을 내쉬었 다. 장천린은 침착하게 이번에는 아랫배쪽의 상처를 파고 있었다. 그곳은 여인의 비지와 불과 손가락 두 개 겹친 정도의 거리밖에 없었다. 천만다행이랄까? 그녀의 비궁에는 거머리들이 침투한 흔 적이 없었다. 한동안 그는 거머리 떼어내는데 열중했다. 이윽고., "천을 하나 더 다오." "네!" 장천린은 새 천으로 소옥의 몸을 깨끗이 닦아 주었다 .그리고 지혈(止血)을 시킨 후 그는 그녀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부금진이 준 옷은 대충 소옥의 몸에 맞았다. 장천린의 음성이 들렸다. "몸을 돌려도 좋다. 소진!" 부금진은 돌아앉았다. 장천린은 소옥을 안고 있었다. "백소저가 있는 곳은 어딘가?" "이 근처 잘아는 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그 말에 장천린은 지그시 그를 응시했다. "소진!" "......?" 장천린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이 해남에 와 본적이 있느냐?" 부금진은 흠칫했다. 그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허나 곧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옛날, 아버님이 데리고 오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방랑객 이지요. 안 가보신 곳이 없을 정도로, 그때 아버님과 함께 이곳 불귀림을 지난 적이 있었습니다." 장천린은 침음했다. "그럼, 탁일비의 장원도 알겠구나?" "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백소저에게 안내해다오." "알겠습니다. 용대인!" 이윽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第 48 章 憤怒의 密林 바다(海), 망망대해에 낙조(落照)가 어린다. 수평선과 맞닿는 하 늘은 온통 붉은 구름이 낮게 까려 온 바다와 누리를 핏빛으로 물 들이고 있다. 핏빛의 바다, 한척의 거대한 범선이 바다를 군림하듯 떠 있다. 배의 모양은 몹시 특이했다. 선수에는 강철로 만든 뾰족한 원 추형의 쇠가 길게 뻗어 있었으며 배의 둘레 또한 강철판으로뒤덮 여 있었다. 철갑선의 형태를 한 범선에는 수십개의 돛이 활짝 펼 쳐져 있었다. 한데, 검은 솔개의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검은 바람, 해상을 공포로 떨게 만드는 죽음의 해적선 검은 바 람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해적선 검은 바람의 선실,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삼십 대 중반 가량의 남자, 그의 머리칼은 금발(金髮)이었고 눈 (眼)은 녹색의 벽안이었다. 역시 양귀 밑에서 턱까지 금빛의 구레 나룻이 덮여 있어 몹시 이국적인 냄새를 풍긴다. 그는 태사의에 앉아 있었는데 넓은 어깨에는 역시 금발의 독수 리가 앉아 있었다. 타는 듯이 붉은 눈을 가진 사나운 독수리와 이국 청년. 그는 얼굴이 준수했다. 하나 약간 깊이 들어간 날카로운 눈과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에서 냉혹하고 패도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더구나 팔뚝에는 폭이 넓은 강철팔찌를 차고 있어 더욱 위압적 인 분위기였다. 여인은 이십대 중반의 요염절륜한 미녀(美女)였다. 교태가 전신 에 흘러 넘쳤으며 옷차림도 묘하게 색감(色感)이 풍겼다. 타는 듯한 홍의(紅衣)의 가슴 앞자락이 깊게 패이고 반쯤 열려 있어 풍만한 젖가슴의 구릉이 보이고 있었다. 약간 치켜 올라간 눈에는 짙은 색기가 어려 있었다. 머리칼은 윤기가 흘렀으며 너무나 길어 허리출을 한 바퀴 감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흡사 색(色)의 요정 같은 인상이었다. 태사의에 않아 있는 금발인은 체격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컸다. 그는 왼손에 무엇인지 모를 살덩이를 들고 있었는데 독수리가 그 것을 쪼아먹고 있었다. 홍의미녀가 입을 열었다. "구룡상선에서 죽은 왜국무사들의 상처는 분명 반송의 천월도 법(天月刀法)이예요." 하나 금발인은 담담히 말했다. "헛소리 마라. 반송은 죽었다. 그것은 수하들이 잘못 본 것이 다." 홍의미녀는 강하게 말했다. "내 눈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흐흐흐, 요미(妖美), 너는 아직도 반송이 두려운 모양이구나. 보아하니 평생 반송의 악령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군." 그 말에 여인 요미는 냉소를 쳤다. "흥! 반송이 살아 있다면 분명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금발인은 낄낄 대소를 터뜨렸다. 이어 웃음을 뚝 그치며 카랑 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요미, 나 금월(金月)이 두려워 하는 것이 이 천하에 아무것도 없어. 반송이 천월도법을 익혔다면 나도 천월도법을 익혔다. 놈이 가지고 있는 것은 나 역시 모두 갖고 있다." 요미는 눈을 야릇하게 빛냈다. "반송은 진천뢰(震天雷)를 만들 수 있어요." 금발인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냉혹무비한 시선으로 요미를 노 려 보았다. 요미는 섬뜩함을 느꼈다. 하나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마주 그를 응시했다. 순간 금발인 금월은 그녀의 팔을 획 낚아채 더니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 "아." 금월은 우악스런 손으로 요미의 턱을 움켜쥐며 말했다. "요미, 똑똑히 들어 둬라. 반송은 죽었어. 놈의 팔과 다리에 쇠 못을 박았으니, 놈은 배와 함께 가라않아 죽은 거다." 그의 두 눈에서는 새파란 불똥이 퉁겨져 나왔다. 실로 살벌한 눈빛이었다. 문득 금월은 거칠게 요미를 끌어 안더니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 을 퍼부었다. 요미는 거부했다. 하나 집요하고 거친 금월의 공세 앞에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 역시 본능의 피를 억제할 수가 없는 듯 금월의 두터운 목을 끌어안고 격렬한 입맞춤에 동 조해 나갔다. 그들의 입맞춤은 격렬하고 뜨겁게 계속되었다. 몸을 야릇하게 틀며 금월의 품에 밀착되었고 그 바람에 앞섶이 벌어지며 풍만한 유방이 금월의 가슴을 눌렀다. 금월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더듬어 내려가 둔부를 움켜쥐었다. "응." 요미의 입세어 뜨거운 콧소리가 났다. 금월의 또 다른 손은 그 녀의 커다란 유방을 세차게 움켜쥐었다. "요미, 너는 아름다운 악녀(惡女)야." 금월의 눈은 정염의 불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요미 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흔들며 교태로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진정한 악마(惡魔)겠군요." "흐흐흐." 금월은 괴기한 웃음만을 치며 물었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이예요?" "후후, 황금을 찾아야지." "어떻게요?" "모두 죽이는 거야." "모두." "탁일비의 수하인 동방사성과 그의 졸개들, 그리고 청산의명, 석정일랑의 왜국 놈들을 깡그리 죽이는 거야." 금월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광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탁일비란 늙은 놈의 목을 움켜쥐면 황금은 쏟아지게 되어 있어." 요미는 가볍게 아미를 찌푸렸다. "너무, 무모해요." "흐흐흐, 무모하다고? 천만에. 일이란 너무 어럽게 생각하면 생 각할수록 어려운 법이야. 그저 간단하게 힘(力)으로 누르는 게 제 일이야! 내게도 일당천(一當千)의 용맹한 수하 칠십 명이 있고 이 십사문(二十四門)의 화포(火砲)와 두문(二門)의 거대한 자모연환포 (子母連環砲)가 있어!" 금월의 전신에서 자신만만한 기운이 넘쳤다. "그 누구라도 깡그리 날려버릴 수 있어! 크하하하핫!" 그는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황금은 나의 것이다!" 요미는 야릇한 눈으로 그를 응시학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생 각하고 있는지는 오직 그녀 자신 만이 알 일이었다. "그 황금으로 나는 나의 제국(帝國)을 건설한다. 그리고 그 제 국의 제왕(帝王)이 되는 거야! 으하하하하!" 앙천대소를 터뜨리는 금월의 눈에는 광기(狂氣)가 어리고 있었 다. "......." 요미, 그녀의 눈은 이상한 광체를 띈 채 그 순간 허공을 바라고 보 있었다. 요악(妖惡)한 마음을 가진 여인,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 × × "으으." 세천상유, 신음류의 제 이위의 고수, 그는 왜국 내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도(刀)의 명인 이었다. 하나 지금 그는 한 손으로 왼쪽 눈을 움켜쥐고 있었다. 오른손 에는 피묻은 장도(長刀)를 질질 끌고 있었다. 석양이 스며드는 밀림 속, 눈을 가린 손가락 틈새로 조금씩 핏 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으으, 놈, 도망가지 못한다. 나 세천강유가 네 놈을 보내줄 것 같으냐?" 저벅... 저벅, 슥... 슥, 그의 방걸음은 규칙적이었고 장도가 땅을 끄는 소리도 규칙적 으로 들렸다. 언뜻 느릿느릿가게 걷는 것 같았으나 그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너무, 방심했어.' 그렇다. 어젯밤이었다. 그는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초로의 노인에게 당했던 것이 다. 단위제 였다. 그 평범해 보이는 노인과의 싸움에서 그는 오히려 단위제가 던 진 쇠구슬에 한쪽 눈이 맞아 실명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일 생일대의 최초의 실수였다. 지금 그는 가슴 속의 분노를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특유의 집착력과 집중력, 그리고 광기에 가까운 신념으로 밀림 속 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이 밀림을 헤멘지 이미 수 시진이 흘렀다. 하나 단위제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해도 그는 결코 단념하지 못했다. 그는 무 서운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세천상유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갑자기 주위에서 이상한 비 린내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이 냄새는?' 그는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재빨리 주위를 ㅎ어 보았다. 순간 그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주위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백 마리의 늑대떼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천상유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이, 이놈들이 내 피냄새를 맡았구나!' 이때였다. 카르르릉! 크아아! 휙! 휘익-휙! 늑대떼들이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무섭게 몸을 날려 공격 하기 시작했다. 세천상유는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는 땅 에 끌던 장도를 들더니 벼락같이 몸을 빙글 돌리며 도광을 뿌렸 다. 순간 자욱한 혈무와 함께 한꺼번에 여섯 마리의 늑대가 동강났 다. "오냐! 그렇지 않아도 울분을 삼킬 것이 없었다. 깡그리 죽여주 마!" 세천상유는 손을 눈에서 떼었다. 눈알이 터진 채 반쯤 덜렁거 리고 있었다. 그는 눈알을 스스로 뽑아내 버렸다. 하나 그는 눈알을 버리려다 말고 자신의 입 속에 넣는 것이 아 닌가? 아! 그는 자신의 눈알을 씹어 삼키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한쪽 눈에서 광기에 가까운 살기가 돌았다. "이 ---야 --- 아!" 그는 기합을 발하며 도(刀)와 몸(身)이 혼연일체가 되어 수백 마리의 굶주린 늑대떼들에게 뛰어 들었다. 번-쩍! 그저 보이는 것은 섬광을 방불케 할 정도의 도광 뿐이었 다. 콰아앙! 캐- 액! 들리는 것이라고는 늑대들의 처절한 포효와 비 명 뿐이었다. 자욱한 피보라가 낙조를 받아 더욱 선연한 피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번개와 야수의 혈투였다. 밀림의 혈투, 세천상유는 늑대떼들 속에 싸여 무서운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차츰, 낙조가 기울고 있었다. × × × 이끼가 잔뜩 뒤덮인 바위, 한 명의 초로의 노인이 기대앉아 있 었다. 바로 형부도독 단위제였다. 그는 어깨에 상처를 입고 있었 고 안색은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쯧! 인간 단위제가 왜국놈의 칼에 한 번 스쳤다고 이 모양이라 니." 그는 어젯밤 신음류의 고수 세천상유와 싸우다 도주했다. 그는 탁일비의 장원으로 돌아가려 했다. 원계묵에게 자신이 본 음모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하나 원계 묵이 머무르는 객당으로 접근하기도 전에 공격을 받았다. 그는 워낙 중과부적의 싸움에서 어쩔 수 없이 장원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는 세천상유의 수하들인 왜국무사들이 밀림에 깔린 것을 보았다. 할 수 없이 그는 왜인들을 죽이면서 계 속 벗어났다. 그러다 다시 세천상유와 만나게 되었다. 세천상유는 그가 평생 에 처음 만난 무서운 고수였다. 그는 그에게 일도를 어깨에 맞았 고 대신 그는 철환을 던져 그의 한쪽 눈을 실명시켰다. 그러나 단위제의 상처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왜인들에 게 포위공격 당해 옆구리에도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하나 그는 킬킬거리고 있었다. "쿠쿡, 그 왜놈 눈깔이 무척이나 아팠을 것이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윽!' 하나 그는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다짐했다. '분명, 용대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다.' 그는 억지로 신형으르 바로 잡았다. '세천상유는 대단한 고수다. 중원에서도 그 정도라면 도(刀) 방 면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 것이다.' 단위제는 조금씩 걸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 다. '하나 다시 부딪히면 한쪽 눈마저 뽑아주마.' 그는 밀림지역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대충 방향을 잡고 걸어갔다. 한데 바로 이때. "단도독! 단도독!" 문득 그를 부르는 소리가 허공에서 들려 그는 깜짝 놀랐다. 급 히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본 그의 눈에서 기쁨이 어렸다. 털빛이 하얀 앵무새가 그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지 않은가? "백아(白兒)!" 그것은 바로 부금진을 항상 따라 다니던 앵무새 백아였던 것이 다. 앵무새 백아는 그의 어깨에 내려 앉았다. 단위제는 마치 친지 를 만난 것 이상으로 일개 앵무새에게 반가움을 느꼈다. 백아는 몹시 기쁜 듯 그의 어깨에 부리를 비벼댔다. 이어 놀라운 말을 하 는 것이 아닌가? "소진이 실종됐다. 구룡상선이 타서 가라 않았다. 많이 죽었다. 단도독! 단도독!" "......!" 단위제는 흡사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그럴 수가!' "백아,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밀림 속에 있었다. 많은 사람이 숲 속에 있다. 모두 무섭다!" 단위제의 눈에 문득 이채가 어렸다. 그는 백아가 몹시 영리하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아, 심부름을 해다오?" "......?" 백아는 빨간 눈을 굴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단위제는 급히 자신의 옷을 찢어냈다. 이어 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것을 백아의 발목에 묶어준 다음 당부했다. "이것을 원대협에게 전해다오. 이쪽으로 가면 장원이 나온다. 그곳에 원대협이 있다." 백아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이어 푸드득! 날개를 치며 날아 갔다. "원대협! 원대협!" 백아의 괴상한 목소리가 숲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제발, 저 서찰이 도착해야 할 텐데.' 단위제는 다시 힘을 냈다. '나도 어서 움직이자.' 한데 바로 그 순간. 그는 절로 가슴에 찬바람이 들이켜지는 것을 느꼈다. 한 사람 이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왜국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육십 가량의 노인이었다. 푸른 빛의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금색수실이 매달린 장도(長刀) 를 차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마른 듯 했으나 청수했고 두눈은 물 처럼 고요했다.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대가 상유의 눈을 다치게한 분이시오?" 정중한 어조였으며 유창한 한어는 아니었으나 음성이 지극히 담백했다. '보통이 아니다. 세천상유보다 훨씬 고수다.' 단위제는 서서히 진기를 일으키며 물었다. "귀하는 뉘시오?" 노인은 담담히 말했다. "청산의명이라고 하오." "......!" 단위제의 놀라움은 켰다. 청산의명이라면 신음류(新陰流)의 제일 고수가 아닌가? 단위제 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第 49 章 生의 意味, 假面 오지산(五指山) 기슭에는 온갖 종류의 열대식물과 덩쿨류의 괴 이한 식물이 우거져 있다. 또한 수많은 늪지와 소(沼)가 있으며 동굴 또한 많다. 허나 대두분의 동굴이 동물들의 서식지로써 그 입구(入口)는 대부분 덩굴에 뒤덮여 좀체로 주의하지 않으면 발견 하기가 쉽지 않았다. 동굴 안, 사인(四人)이 있었다. 장천린은 부금진의 안내를 받아 이곳에 오게 되었다. 동굴 안 에는 반송과 백연연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백연연은 동굴 벽에 기대 있었는데 안색이 백지장 같이 창백해 있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으며 두 눈은 공허해 보였다. 그녀의 표정은 절망적이었으며 삶의 의지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 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반송이 기대앉아 있었다. 그는 섬뜩한 상 처를 입고 있었다. 왼팔이 어깨부근에서부터 잘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른손과 이빨을 이용하여 천으로 상처를 묶는 중이었다. 그의 두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용대인." 장천린이 부금진과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몸을 일으 켰다. 장천린은 한눈에 그 동안 그가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었는 지를 간파하고 탄식했다. "반대협, 상처는 좀 어떠시오?" 반송은 고개를 저었다. "견딜만 합니다. 하지만 백소저께서." 그는 더 말을 잊지 못했다. 장천린은 시선을 백연연에게로 돌 렸다. 그녀는 아직도 초점이 없는 시선으로 망연히 허공을 응시하 고 있었다. 반송을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창 아름답게 꽃필 수 있는 백소저, 평생 하반신 불구라니.' 장천린은 백연연이 태진왕을 사모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허 나 여인에게 있어 하반신 불구라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살아 있지만 백소저에게는 죽음보다도 못한 것이다.' 장천린은 뭐라 위로의 말을 하려 했으나 곧 그것이 아무런 소 용도 없다는 것을 느끼고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때, 반송은 이빨로 왼팔 어깨에 묶은 천의 매듭을 강하게 조 이며 내심 심한 죄책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백소저가 저렇게 된 것은 나의 책임이다. 내가 조금만 더 주의 를 기울였다면 저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괴로왔다. 이때 부금진이 이상한 듯 물었다. "반대협, 그쪽 팔은 왜?" "거추장스러워서 잘라버렸네." 부금진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하지만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는데 구태여 그렇게까지." 반송은 암울한 표정을 지으며 뇌까렸다. "어차피 치료해도 신경이 끊어져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네. 더욱이 나에게 왼팔은 그다지 소용이 없네." 그는 말을 하면서 오른손 손바닥을 응시했다. 상처가 다시 터 져 붕대 사이로 피가 물들여지고 있었다. 그는 두 눈에서 섬뜩한 광채를 발하며 중얼거렸다. "이 상처만 아물면 청산의명 그 놈의 목을 날려버릴 것이네." 그는 소리없이 이를 갈았다. 사실상 그는 신음류의 일인자인 청산의명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렸으나 상처 때문에 전력을 다 히지 못한 것이 억울하기만 했다. 이때 장천린이 입을 열었다. "소진, 한시라도 빨리 이 숲을 벗어나야 한다." "네, 용대인님!" 부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천린은 백연연에게 시선을 던졌 다. "백소저!" "......" 허나 백연연은 듣지 못한 듯 여전히 망연한 표정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백소저, 힘을 내시오." 허나 문득 그녀는 공허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 는 이슬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힘없이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용대인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저를 베어 주세요." 장천린은 흠칫했다. "백소저!" 허나 백연연은 고개를 좌우로 몇 번이나 도리질 했다. "제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저는 아마 미쳐버릴 거예요." "......!" 장천린은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는 그저 망연 히 그녀를 볼 뿐이었다. "저를 베어 주세요." 백연연은 간절하게 되풀이 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는 눈물 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천린은 이윽고 탄식하며 타이르듯 말했다. "백소저,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오. 스스로 그것을 포기한 다는 것은 죄악이오." "죄악이라고요?" 백연연은 힘없이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는 전혀 생기라고는 찾 아볼 길이 없었다. 장천린은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이것은 살아있는 웃음이 아니다.' 이때 반송이 몸을 일으키더니 다가갔다. "백소저!" 그의 눈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백연연은 여전히 생기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반송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만약 백소저가 생을 포기한다면 나 반송 역시 살 가치가 없습 니다. 만약 백소저가 죽는다면 모든 것은 내 짓입니다. 어찌 나 반송이 하늘을 보고 계속 살아갈 수 있겠소이까?" 반송의 얼굴에는 비장한 결의가 가득찼다. 그는 옆구리의 칼을 뽑더니 바닥에 꽂았다. "백소저에게 뭐라고 할 자격은 나에게 없소이다. 하나 내 생명 을 내가 선택할 자격은 있소이다." "......!" 비로소 백연연의 망연하던 얼굴이 변화를 보였다. 그녀는 아미 를 파르르 떨었다. 이때 부금진도 탄식하며 말했다. "백누님의 그런 모습은 반대협보다는 오히려 내가 더 큰 책임 이 있습니다. 용대인께서 부탁하신 것을 이행치 못했으니까요." 부금진은 백연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백누님이 생명을 포기하신다면 저 역시 백누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 백연연의 안색이 거듭 변화를 일으켰다. 그녀는 번갈아 두 사 람을 응시했다. 문득 그녀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홋!" 그녀는 교소를 터뜨리면서 눈물을 뿌렸다. 그러다 웃음을 뚝 그치며 다소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지금 저를 위협하는 건가요? 당신들이 뭔데 내게 그 런 소리를 하나요? 네? 네? 말씀해 보세요? 흐으윽." 마침내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글픈 오열을 터뜨렸 다. 그녀의 오열은 애간장을 끊는 것이었고 동굴 안의 삼 인의 마 음은 비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잠시 후, 장천린이 입을 열었다. "백소저!" 그는 부드럽게, 그러나 설득력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내가 태진왕 전하라면 백소저가 생명을 끊는 것을 말릴 것이오." 백연연은 얼굴을 들었다. "백소저의 살아가는 의미가 태진왕 전하였다면 최소한 태진왕 전하를 뵙고나서 생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소?" 백연연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장천린은 설득력 있게 말을 이었다. "정말 진정으로 전하를 사랑한다면 살아야 하오. 백소저!" 그는 다가가 백연연의 가냘픈 어깨를 잡았다. "......." 백연연은 망연히 그렇게 있었다. 그녀의 뇌리에는 태진왕의 모 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카다란 그녀의 누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장천린은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됐다.' 그는 백연연을 번쩍 안아들었다. "요... 용대인님... 이 무슨?" 백연연은 놀랍고 부끄러워 당황성을 발했다. 허나 장천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소저는 내가 보호하겠소." 이어 그는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속삭이듯 말 했다. "내 반드시 소저의 사랑을 이루어 드리겠소. 나의 모든 것을 경 주해서라도 말이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대답할 틈도 주지않고 부금진에 게 말했다. "소진, 동방소저의 몸을 살펴라. 그녀가 깨어나는 대로 이곳을 떠난다." 부금진은 미소지었다. "알겠습니다. 용대인!" 비로소 동굴의 침울하던 분위기는 약간 활기를 되찾았다. 백연 연은 장천린의 넓은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창백하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에는 보일 듯 말 듯 엷은 홍조가 어려 있었다. × × × 탁일비의 장원(莊院), 밀림에 둘러싸여 있는 장원은 조용하기만 했다. 객방 안, 삼인(三人)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원계묵과 운 표, 그리고 가짜 용백군이었다. 원계묵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형님, 단도독께서 실종되신 지 벌써 이틀째입니다. 찾아봐야 합니다.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용백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원제, 그것은 안된다. 이 장원을 나가면 안된다." 원계묵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왜 안된다는 겁니까?" 원계묵의 짙은 눈썹이 꿈틀 솟았다. 그는 내심 의혹이 치밀었 다. 무엇인가 용백군이 이상하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허나 그는 그 이상한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지금 이 객원 주위에는 무사들이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그것 은 분명 동방사성이 우리를 감사하기 위해 배치한 것입니다." 가짜 용백군은 고개를 저으며 일축했다. "지나친 의심이네, 동방사성은 그럴 인물이 아니네." 마침내 원계묵은 짜증을 냈다. "대체 형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용백군은 담담히 말했다. "동방사성의 말에 의하면 이 장원 근처에는 청산의명과 그 수 하들이 숨어 있다고 했네. 그들이 조만간 쳐들어 올지 모르기 때 문에 무사들을 배치한 것 뿐이네. 만약 백살대를 푼다면 그 이후 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지 않겠는가?" 원계묵은 침음했다. 용백군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허나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웬지 의혹이 구름처럼 일고 있었다. 눈앞 의 용백군이 예전같지 않은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용백 군이 지니고 있는 어떤 특유의 분위기가 없었다. 원계묵의 눈은 점차 의혹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가짜 용백군이 몸을 일으켰다. "원제, 그토록 의혹이 난다면 내가 직접 동방사성을 만나보겠 네." 원계묵도 따라 일어섰다. "소제도 따라가겠습니다." 용백군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나혼자 가겠네." 이어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 했다. 헌데 그때였다. "원대협! 원대협!" 돌연 창문에서 괴상한 음성이 들려와 세 사람은 흠칫했다. "백아!" 원계묵은 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창문으로 흰 빛이 날아들었다. 과연 앵무새 백아였다. 백아는 원계묵의 어깨에 앉더니 빠른 어조로 종알거렸다. "단도독이 말했다. 원대협을 찾으라고! 단도독이 말했다!" "......!" 원계묵의 안색이 변했다. 가짜 용백군도 마찬가지였다. "단도독은 어디 있느냐?" 원계묵이 급히 묻자 백아는 날개를 파다닥 거렸다. "상처를 입었다. 숲 속에 있다!" 그 때 문득 원계묵은 백아의 다리에 묶인 천을 보고는 얼른 풀 어 보았다. 그것은 단위제가 피로 쓴 글이었다. 그것을 읽는 동안 원계묵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이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짜 용백군을 노려보았다. 가 짜 용백군은 안색이 가볍게 변하더니 긴장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원제!" "......!" 원계묵은 침묵했다. 다만 지그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 가짜 용백군은 섬뜩했다. 그의 눈빛이 야수와 같았기 때문이었 다. 그 눈빛을 접하자 그는 그만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문득 원계묵이 앵무새를 가리키며 물었다. "형님, 이 백아를 아십니까?" 가짜 용백군은 섬뜩했다. 그가 어찌 부금진이 구룡상선에서 데 리고 있던 백아를 알겠는가? 허나 그는 배에 힘을 주었다. "물론 알지." 원계묵의 눈가에 조소가 스쳤다. "누가 기르는 것입니까?" "나를 시험하는가?" 가짜는 짐짓 언성을 높였다. "말씀해 보십시오." 원계묵의 음성은 착 가라앉았고 조용하기만 했다. "원제, 나를 놀리는 것이냐?" 가짜 용백군은 더욱 기분나쁜 듯이 언성을 올렸다. 원계묵은 내심 중얼거렸다. '당황하고 있군, 그래.' 그는 살기가 치솟는 것을 눌렀다. 이때 운표도 얼굴이 굳어졌 다. 그는 원계묵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느끼고는 몸을 서서히 움직 여 방문 입구를 차단시켰다. 원계묵은 짐짓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형님께서 어찌 단도독이 아끼는 새 백아를 모른단 말입니까?" 가짜 용백군은 논빛이 반짝 빛났다. "내가 어찌 그걸 모르겠나? 단지 자네가 나를 시험하는 것 같 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을 뿐이네." 원계묵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때, 앵무새 백아가 돌연 소리질렀다. "단도독이 아니다! 단도독이 아니다!" 가짜 용백군은 흠칫했다. 그는 자신이 위기에 몰렸음을 직감하 고 뒤로 일보 물러났다. 허나 그 순간, 삭! 언제 어떻게 뽑았는지 그는 결코 보지 못했다. 어느 새 원계묵의 칼이 그의 목에 대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헉!" 그는 전신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원계묵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여전히 변함없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형님은 어디 계시냐?" "무... 무슨 말이냐? 원......." 순간, 번뜩! 칼빛이 그의 안면에 스쳤다. 순간 그의 얼굴이 두 쪽으로 정확히 쪼개져 나뒹굴었다. "으!" 가짜 용백군은 비틀했다. 그는 자신이 죽었는 줄 알았으나 곧 바닥에 떨어진 것이 면구(面具)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전신 을 부르르 떨었다. 면구 속에 나타난 얼굴은 삼십 대의 음침하게 생긴 장한이었다. "정말 기막히게 잘 만든 면구로군." 원계묵은 방바닥에 나뒹구는 면구를 발 끝으로 툭 차며 중얼거 렸다. 이어 그는 역시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형님은 어디 계시느냐?" 장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 모른다." 순간 운표가 달려들었다. "개새끼!" 슉! 그의 주먹이 일직선으로 장한의 명치에 꽂혔다. "큭!" 장한은 멱따는 듯한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순간 운표는 발로 장한의 얼굴을 짓밟았다. "크으으." 장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신음을 발했다. "잡종 자식! 대갈통을 두부처럼 부셔놓기 전에 빨리 불어라!" "모... 모른다." "이 후레자식이!" 운표의 발이 무지막지하게 장한의 입을 눌렀다. 으드득! 이빨이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장한은 비명을 질렀 으나 발에 입이 박혀 있어 소리가 되지는 못했다. 이때 원계묵의 눈에서는 야수같은 광채가 흘러나왔다. "너 같은 아이를 다루는 데는 이골이 나있는 나다." 그의 음성은 여전히 차분하여 더욱 공포스런 느낌을 들게 했다. 장한은 그의 눈빛을 보았다. 그는 생전 그토록 무서운 눈빛은 처 음 보았다. 전신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스르... 릉! 원계목은 꽂았던 장도를 서서히 뽑았다. "네놈을 고기 썰 듯 얇게 조금씩 떼어내주마." 여던히 부드럽고 차분한 음성, 장한은 마침내 공포에 질려 떨 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말... 말하겠소." "음! 그래야지." 쿡! "악!" 원계묵이 칼을 바닥에 꽂자 장한은 다시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의 손 등에 칼이 꽂혔기 때문이었다. 장한은 더 이상 발뺌이나 애원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불 수밖에 없었다. 동방 옥을 이용하여 미혼약으로 용백군은 암살한 것에서부터, 동방사 성이 꾸민 음모에 대해 그는 더듬더듬 이야기 했다. 동방옥이 용백군을 데리고 달아난 것까지 모두 이야기 했다. "......!" 원계묵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문득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 다. "운표!" "에. 대주!" 운표는 허리를 숙였다. "백살대에게 전투준비를 시켜라." "알겠습니다!" 운표는 즉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편, 가짜 용백군 행세를 했던 장한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 었다. "나, 나는." 그는 애절하게 원계묵을 쳐다보았다. "흐으, 내 앞에서 살기를 바랬나?" "제발, 아악!" 칼이 호선을 한 번 그렸고 일은 끝났다. 장한의 목이 굴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아직도 공포의 빛이 역력한 채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원계묵은 칼을 거두었다. "동방사성, 형님께 만에 하나라도 조금의 탈이 생긴다면 네놈 을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 그의 눈에서 짐승 같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여주마." 그의 중얼거림을 만일 들은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소름이 끼쳤 을 것이다. 원계묵은 그런 사람이었다. 第 50 章 花史, 찢어진 밤 멀리 바다(海)의 끝없는 수평선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남해(南 海)의 어느 이름 모를 해안, 청년은 언덕에 드러누워 길게 하품을 했다. 일신에는 낡은 넝마 같은 옷을 입었다. 그나마 흙이 여기저 기 묻어 있었다. 청년의 얼굴은 준수했다.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으나 그의 두 눈빛은 나이답지 않게 치기(痴氣)가 짖궂게 어려있다. "아함! 따분하군." 남쪽이라 그런지 기후는 온화했다. 청년은 기지개를 켜고 다시 팔배게를 하고 편안히 누웠다. 멀리 바닷가에는 배가 이십여 척 정박해 있었다. 그 광경은 포구의 광경 같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배의 모양이 달랐다. 청년은 졸린 듯 두 눈을 반쯤 감았다. 한데 그때, 하나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 청년은 가볍게 눈살을 찡그렸다. 눈을 뜨고 보니 바로 앞에 한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십 칠팔 세쯤의 나이였는데 난초(蘭草)처럼 청초한 소녀였다. 전체적으로 극히 청아하고 얌전해 보이는 용모였다. 한데 그녀 의 복장은 중원의 복장이 아니었다. 왜국(倭國)의 복장을 하고 있 었다. 소녀는 손에 조그마한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속에는 산나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도련님, 이곳에 계셨군요?" 왜국소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꽃잎 같은 입술과 하얀 얼굴 이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하나 청년은 계속 눈살을 찌푸렸다. "화사(花史), 건방지다. 햇빛을 막지마라." 그 말에 소녀 화사는 볼에 보조개를 만들며 옆으로 비켜났다. 화사의 나라에서 남자는 절대적이다. 따라서 그림자조차도 남자 를 덮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화사는 생긋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미안하다는 뜻이리라. "무슨 일이냐?" "저어, 아버님이 도련님을 찾으셔요." 화사의 말에 청년은 권태롭게 말했다. "아, 아! 피곤하군. 녹장영감은 너무 따분해서 재미가 없어." 화사는 그 말에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배가 떠나는데 가 보셔야지요." 하나 청년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문득 짓궂은 웃음 을 흘렸다. "후후, 그보다 재미 있는 일이 생각났다." "......?" 화사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는 순간, 청년은 슬쩍 화 사의 발을 걸었다. 그 바람에 휘청 중심을 잃은 화사는 그만 청년 의 품 속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어머!" 그녀는 그대로 안겼다. 순간 청년의 자세가 빙글 뒤바뀌더니 그녀를 찍어 누르듯 올라탔다. 화사의 해맑은 얼굴에 온통 햇살이 쏟아져 그녀는 눈을 뜰 수 가 없었다. 그 순간 그늘이 덮이더니 그녀는 하나의 입술이 자신 의 입술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아... 안돼요!" 화사는 저항하듯 손을 내저었다. 하나 청년이 놓아줄 리가 없 었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강하게 눌렀으며 어느 틈엔가 한 손이 화사의 치마를 뚫고 들어갔다. 화사가 입은 옷은 안쪽이 바로 맨살이었다. 속옷을 입지 않는 왜국의 풍습 때문이었다. 치마가 벌어지자 햇살을 받은 눈부신 살 결이 허벅지까지 그대로 드러났다. "아아." 화사의 입이 벌어졌다. 청년의 손은 그녀의 깊은 곳으로 거침 없이 파고들어갔다. 한낮, 눈부신 남해의 햇살이 쏟아지는 언덕배기에 남녀가 서서 히 뒤엉키고 있었다. 옆에는 바구니가 엎어져 산나물이 쏟아져 있 었다. 청년은 소녀의 매끄럽고 보드라운 몸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화사는 전신을 가늘게 떨면서도 어느 새 가냘픈 손으로청 년의 등과 목을 쓸어안고 있었다. 청년, 석정일랑(石井一郞)은 손에 개구리 한 마리를 올려놓고는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앞, 한 명의 근엄하고 강직하게 생긴 노인이 엎드려 있다. 그 노인 역시 왜국무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 는데 흡사 늙어 힘이 없어 보였다. 노인은 충언하듯 말했다. "도련님, 이번 일은 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반드시 도련님께서 같이 가셔야 합니다." 하나, 석정일랑은 손바닥 안의 개구리를 톡톡 건드리며 장난에 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의 귀에는 노인의 말이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도련님께서는 덕천가강에 의해 빼앗긴 성(城)과 영지(領地)를 되찾고 돌아가신 영주님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노인은 계속하여 간곡하게 말했다. "덕천가강을 쓰러뜨리고 옛 명예와 영화를 되찾는 길은 오직 도련님의 두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석정일랑은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볐다. 노인의 햐얗게 센 눈 썹이 꿈틀했다. "도련님! 지금 듣고 계신 것입니까?" "응?" 석정일랑은 깜짝 놀란 듯 그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했지?" 노인, 즉 녹장아문은 어이가 ㅇ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허탈 해진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도련님은 왜 요즘 칼을 잡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석정일랑은 문득 기소를 흘렸다. "헛헛, 나 아니라도 칼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나?" "도련님!" "헤헤, 왜 소리를 치오?" "도련님께서 지금 방심하시면 자칫 청산의명(靑山義明)님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될것입니다." "하하하핫!" 문득 석정일랑은 크게 웃었다. 그의 대소에 노인의 얼굴이 흘 들렸다. 석정일랑은 웃음을 뚝 그친 후 내뱉았다. "바보 같은 소리다." "넷?" "지금 우리 내부는 청산(靑山) 일파와 나 석정(石井)의 유파로 나뉘어져 서로 경계를 하고 있다." 석정일랑의 음성은 딴사람이 된 듯 낭랑하고 진지해 졌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결이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만일 내가 계속 칼을 놓으면 청산일파는 우리를 경계하지 않 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 단결되지 않겠느냐?" 노인 녹장아문은 흠칫했다. 설마 그가 이토록 깊은 뜻을 가지 고 있을 줄은 몰랐었다. "그럼 이번에 해남으로 가시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신(家臣)들은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석정일랑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지도자가 두 명이면 좋지 않다. 청산노인만 해도 충분하다. 그 는 뛰어난 사람이거든." 녹장아문의 얼굴에 불안이 어렸다. "잘못하면 영원히 청산의명님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습 니다." 그 말에 석정일랑은 개구리의 둥을 손가락으로 툭툭쳤다. "녹장아문." "예?" "자네가 일생을 통해 성공한 것은 딸밖에 없어." 석정일랑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손바닥 안의 개구리를 소중한 듯이 싸잡고 걸어갔다. "청산은 이미 육십이 넘었어. 이빨빠진 호랑이는 보기만 무서 울 뿐 힘이 없어." "......!" 석정일랑은 사라져 갔다. 해변을 따라 걷는 그의 모습은 몹시 고독해 보였으나 반면 보 이지 않는 달관한 자의 완숙미가 느껴지고 있었다. × × × 밤(夜), 해안(海岸)의 밤은 파도소리로 인해 고즈넉하면서도 약 간은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해안에는 이십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그 배는 왜국에서 빠져나온 배였다. 해변의 한 곳에서 시 끌벅적한 소음과 함께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내일이면 그들은 해남으로 출정하기 때문이었다. 청산의명이 해남으로 먼저 데리고 간 무사의 숫자는 백명이었다. 그리고 이곳 에 대기중인 무사들의 수는 사백여 명이었다. 이제 그들은 내일 아침 해가 뜸과 동시에 배를 타고 해남으로 떠난다. 정산의명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밤이 깊도록 잔치는 잔치는 계속되었다. 횃불이 휘황하게 밝혀 진 가운데 무사들은 웃고 떠들며 술과 고기를 마음껏 포식하고 있었다. 화사(花史)는 해변을 걷고 있었다. 그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곰곰히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 록 얼굴이 귀뿌리 까지 붉어졌다. '도련님.' 그녀는 오래 전부터 석정일랑을 애모하고 있었다. 석정일랑은 본국에 있을 당시부터 그녀에게는 너무나 높고 존귀한 신분이었 다. 그녀는 늘상 석정일랑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보며 마음을 태 우곤 했었다. 한데, 이루어진 것이다. 그가 그녀를 안은 것이다. 화사는 가슴이 아직도 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석정일랑을 생각하면서 걸었다. 다만 그녀는 아직 도 석정일랑의 마음을 알수가 없었다. 그는 항상 장난기를 부렸으 며 진지한 구석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석정일랑이 좋았다. 그것은 어쩌면 일방적인 사랑인지도 몰랐으나 오늘 오후의 사 건 이래 그녀는 마음이 설레어 이렇게 밤잠을 못 이루고 해변을 거닐고 있는 것이었다. 문득, 화사는 걸음을 멈추었다. 줄지어 정박해 있는 배 위에서 검은 인영이 미끄러지듯 빠져나 오는 것이 희미한 달빛 아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오인(五人)이었다. 화사는 그들은 자세히 보기 위 해 시선을 집중했다.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들 오인은 모두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모두 왜인들이 아니었을 뿐더러 용모 가 모두 틀렸다. 금발인이 있는가 하면 피부가 숯처럼 검은 자도 있었다. 모두 각각 인종이 틀린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가죽 상의 를 입고 있었는데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누굴까?' 화사의 가슴에 검은 의혹이 치솟았다. 그때 오인의 괴인들 사 이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다. "설치는 끝났나?" "완벽하오." "흐흐, 이제 내일 새벽이면 이 배들은 해남으로 가겠지?" "크크, 모조리 지옥행(地獄行)일 것이외다. 해남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냥 쾅! 흐흐흐." "클클, 굉천화뢰(轟天火雷)의 위력은 볼만할 것이다." 괴인들은 주거니 받거니 괴소를 흘렸다. "건방진 왜구새끼들, 한 놈도 빠짐없이 물고기밥이 될 것이다. 그 광경을 못 보는게 한이다." 이때, 숨어서 그 대화를 엿듣고 있던 화사는 공포에 질리고 말 았다. '무서운 음모, 저들이 누구기에?' 그녀는 너무나 겁에 질려 전신이 자신도 모르게 사시나무 떨 듯 떨리는 것도 몰랐다. 이때, 다섯 명의 괴인이 움직였다. 하나 그 순간 그들 중에서 애꾸눈의 괴인이 흠칫했다. 그의 독안이 달빛을 받아 무섭게 번들 거렸다. 그는 본 것이다. 배 모통이에 숨어 있는 화사의 긴 그림자가 눈 에 들어온 것이었다. 화사는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사실 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눈짓을 주고 받았다. 이어, 슉! 애꾸눈은 신형을 날렸다. '아!' 화사는 자신이 들켰음을 알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나 곧 전 력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나 어찌하랴? 채 사오 장도 가기 전에 우악스런 손길에 채여 그녀는 백사장 에 내동댕이쳐 지고 말았다. "악!" "흐흐, 계집이었군." 달빛이 가리워졌다. 백사장에 쓰러진 화사의 몸위에 다섯 개의 그림자가 겹친 것이었다. 화사는 너무나 공포스러운 나머지 비명 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흐흐, 상당히 반반한 왜국 계집이군." '도련님!' 화사는 그 순간 오직 한 사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석정일 랑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그녀의 뇌리에 떠올랐다. "죽여 버려!" 쇠소리와 함께 칼이 달빛을 반사했다. 한 명이 칼을 치켜들었 다. 그 순간 달빛을 받은 도신(刀身)에 검은 솔개의 문양이 그려 져 있는 것이 보였다. 빙글! 칼이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절대절명. '도련님......' 화사는 눈을 감았다. "잠깐!" 누군가 저지하는 음성이 들렸다. "흐흐, 그냥 죽이기엔 너무 아깝지 않느냐?" 음탕한 웃음이 들렸다. 화사는 눈을 떴다. 애꾸눈의 괴인은 흉 측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는 갈색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고 하 나 뿐인 눈은 푸른 빛이었다. 화사의 눈이 공포로 인해 크게 벌어졌다. "안돼!" 하나 어찌하랴? 애꾸괴인이 그를 덮쳐눌렀다. 화사는 있는 힘 껏 저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찌- 익! 북-! 몇차례 옷자락 찢기는 소리와 함께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고 그녀는 모래사장에 알몸이 되고 말았다. "안... 안돼.. 안... 흑!" 늦었다. 그녀는 무지막지한 기운이 하반신을 벌리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고 그 순간 머리가 텅 비는 것을 느꼈다. "흐흐흐." ㄱ전에서 더운 입김과 음탕한 괴소가 끼쳐졌다. 애꾸괴인의 율 동은 무지막지했으며 그 때마다 화사는 아랫도리가 찢어지는 듯 한 고통에 몇 번이나 혼절을 해야 했다. 하나, 간간이 의식이 들어 눈은 떠보면 이번에는 얼굴이 달라 져 있었다. "흐...으...윽......" 그녀는 끝없는 집채만한 바위에 눌리고 있었다. 오인의 인종이 다른 괴인들은 번갈아가며 그녀를 유린했다. 화사의 몸은 만신창 이가 되었고 그녀의 눈가에는 핏물이 흘러나왔다. 어찌나 손가락 으로 모래틈을 긁어 댔는지 그녀의 손톱은 모두 빠져버리고 없었 다. 마침내, 그녀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흐흐흐." 아득한 의식 저편으로 짐승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안하지만 살려둘 수가 없다. 우리의 비밀을 알았으니 말이 야." 애꾸괴인이 칼을 거꾸로 치켜들었다. 화사는 사지를 벌린 채 눈을 떴다. 찢어진 눈가에서 흐른 피로 인해 시야가 흐릿했다. 혼 백이 나간 듯 그녀는 백치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꾸는 그녀를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염라대왕이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거라. 검은 바람의 오교(五 蛟)가 보내 주었다고 말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푹! 칼이 화사의 복부를 쑤셨다. 화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이미 그 전 그녀의 혼백은 구 천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무엇인가 핏물과 함께 그녀의 입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잘려진 혀(舌)조각이었다. "지독한 계집, 스스로 혀를 물었군." 애꾸는 피묻은 칼을 화사의 젖가슴에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화사의 몸은 바다에 던져졌다. 그 밤, 그 잔악무도한 일이 벌어진 것을 아무도 몰랐으니, 그 장소로부터 불과 한 마장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는 화사가 윤간(輪姦)당하는 동안 줄곧 웃고 떠들며 춤을 추느라 정신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막 사랑하는 정인의 품에 안겨 달콤한 꿈에 있던 한 소녀, 그녀의 행복은 그렇게 무참히 짓ㅂ히고 말았다. × × × 새벽 여명이 바다를 뿌옇게 밝힐 무렵 이십 척의 선단은 해남 을 향해 떠났다. 왜국무사 사백 인을 실은 배는 무서운 대참화의 화약고가 불이 붙은 줄도 모른 채 유유히 출발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정오 무렵, 석정가의 가신 녹장아문 노인은 딸 화사가 보이지 않자 다소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한데 얼마 후였다. "어른... 화사 아가씨가!" 하인이 안색이 창백해진 채 뛰어와 보고를 했다. 녹장아문은 가슴이 섬뜩했다. "화사가 어찌 되었다고?" "시... 시체가." 하인은 차마 뒷말을 하지 못했다. "가자!" 녹장아문은 하인을 잡아끌고 바닷가로 나갔다. 그리고, 바닷물 이 밀려드는 해변의 모래틈에서, 녹장아문은 미처 보지 말아야 할 광격을 보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화사!" 녹장아문의 주름진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사의 시체가 모 래틈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전라였으며 특히 하체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또한 물에 불은 데다 물고기에게 살이 뜯겨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모습이었다. "화, 화사!" 녹장아문 노인은 마침내 털썩 주저 앉았다. 노인의 머리는 텅 비어가는 듯했다. 바로 그때, "화사." 그의 뒤에서 중얼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정일랑! 그가 나타난 것이다. 석정일랑도 하인들의 보고를 듣 고 나온 것이었다. 그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제껏 장난기가 어려 있던 그의 두 눈에서는 실로 무시무시한 엄청난 살기와 전 율스러운 광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문득, 그의 눈은 화사의 손으로 가 멎었다. 화사는 주먹 속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풀게 했 다. 그 속에서 나온 것은 하나의 금빛 단추였다. '교(蛟)' 그런 글자가 단추에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검은 솔개의 문양 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 바람!' 석정일랑은 두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어났다. 다음 순간 그 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색이 홱 변했다. "녹장!" "예." 녹장아문은 망연히 대답했다. "빨른 배를 준비하게! 가장 빠른 속도로 새벽에 떠난 배들을 따 라가야 한다!" 녹장아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딸의 참혹한 죽음에 반 쯤은 정신이 나간 듯 했다. 석정일랑은 발로 땅을 쾅 울렸다. "바보 같은! 지금 슬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아침에 떠난 무사들이 모두 죽을 지도 모른다!" 그는 몸을 홱 돌렸다. 이어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처소를 향해 뛰다시피 걸어갔다. 걷는 동안에 그의 얼굴은 서서히 평온을 되찾 고 있었다. 다만 눈빛만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손 안의 금단추를 움켜쥐며 내심 수없이 뇌까리고 있었다. '검은 바람의... 오교(五蛟)... 오교.......' 하늘은 푸르르다. 그 속에서 해사하게 웃는 화사(花史)의 맑은 얼굴이 그를 내려보고 있는 듯 했다. 하늘을 보는 석정일랑의 눈 에 죽은 화사의 모습이 아프도록 비쳐지고 있었다. '화사.'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이 유난히 그의 가슴을 에이게 하고 있었 다. 第 51 章 삶의 執念, 計略求生 밀림(密林)을 뚫고 전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장천 린은 벽연연을 품에 안고 있었다. 부금진과 반송이 앞에서 길을 뚫고 있었다. 그들의 칼이 번뜩일 때마다 덩굴과 열대성 나무들이 쓰러졌다. 맨 뒤로는 동방옥이 따르고 있었다. 동방옥은 부금진의 옷을 입고 있어 남장이었다. 머리는 틀어올 려 묶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상큼하면서도 기묘한 매력을 발산 하고 있었다. 동방옥은 장천린의 뒤를 따르면서 계속 백연연을 의식하고 있 었다. 그녀는 물론 백연연이 누군지 모른다. 하나 그녀의 감정은 기이한 질투심에 차 있었다. 비록 그녀 자신의 입으로 설사 장천 린이 그녀를 버려도 후회하지 않는다고는 했으나 어찌 그것이 마 음과 같이 쉬우랴? 여심(女心)이란 묘한 것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이미 장천린에 게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 아닌 다른 여인이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자 그녀는 마음이 미묘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장천린이 자신의 장독을 제거시키기 위해 옷을 모두 벗겼다는 사실을. 그래서 일까? 그녀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더 장천린에게 애정이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것 을 느꼈다. 동방옥,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 장천린은 한참을 밀림을 뚫어도 길이 나타나지 않자 침중하게 물었다. "소진, 탁일비의 장원까지 얼마나 남았느냐?" 부금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삼십여 리 정도입니다. 하나 불귀림(不歸林)을 우회해야 하니 까 시간은 두배 걸릴 것입니다." "음." 일행은 묵묵히 밀림을 뚫고 전진했다. 하나 그나마 다행 중 다 행이었다. 만일 부금진이 과거 오지산에 와 본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밀림을 통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얼마쯤 갔을까? 일행의 전신은 나무에 걸리고 긁혔으며 살인적 인 기후로 인해 전신은 땀으로 목욕을 한 듯 젖어 있었다. 한데 문득, 앞장 서 길을 열던 반송이 멈칫하더니 중얼거렸다. "피비린내가 나다니!" 그 말에 일행은 모두 긴장했다. 과연 아닌게 아니라 코에 역한 피비린내가 풍겨오고 있었다. 대략 십수 장을 더 전진하자 숲이 조금 한산해졌다. 한데, "......!" 일행은 안색이 변했다. 시체들! 놀랍게도 수십, 수백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늑대의 시체떼 였다. 늑대 시체는 엄 청나게 많았다. 그리고 그 죽은 형상 또한 끔찍했다. 모두의 안색이 굳어졌다. 반송이 늑대들의 상처부위를 조사하 다 놀랍다는 듯 말했다. "대단한 도(刀)의 달인에게 당했습니다. 그것도 일인(一人)에 의 해 죽었습니다." 그 말에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많은 숫자를, 대체 누가?" 장천린이 침중하게 말했다. "이 숲 속에 있는 자들은 오직 왜국무사들밖에 없다." 부금진은 눈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실력가라면 청산의명이나 석정일랑 중 일 인이겠군요."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 것이 또 다른 신음류(新陰流)의 고수 세천상유(細天常有)라는 인 물의 솜씨라는 것을. "어쨌든 계속 가보자." 장천린의 말에 일행은 다시 늑대들의 시체를 넘어 앞으로 전진 했다. 늑대시체는 갈수록 그 수효가 조금씩 줄었으나 여전히 놀랄 만한 숫자였다. 이윽고, 더 이상 늑대들의 시체는 보이지 않게 되 었다. 그때 문득 그들의 귓전에 신음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신음 소리를 따라 가보았다. 한 그루 나무 아래, 한 명의 왜국무사가 피투성이가 되어 기대 앉아 있었다. 그는 끔찍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전신 곳곳이 찢기 고 뜯겨 있어 설점은 물론 뼈까지 드러나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의 전신에는 열대지역에 서식한다는 무서운 불개미떼들이 새카맣게 달라붙어 살점을 파먹고 있었다. 실로 참 혹무비했다. 왜인의 한쪽 눈도 퀭하니 뚫려 있었다. 바로, 세천상유(細天常有)였다. 세천상유는 그런 상태에서도 수 중에 피묻은 장도를 움켜쥔 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무수한 늑 대떼들과 사투(死鬪)를 벌였다. 마침내 늑대들을 퇴치하긴 했으나 그는 중상을 입은데다 완전히 탈진해버린 것이었다. 그는 지금 손 가락 하나 들 힘도 없었다. 그러기에 번연히 불개미들이 자신의 살을 파먹고 있는 것을 알 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대앉아 있는 것이다. "흐흐, 이자식 왜놈이었군." 반송이 세천상유 앞으로 다가갔다. 반송은 구룡상선에서의 왜 인들의 공격으로 인해 왜인무사에 대한 증오심이 무서울 정도가 되어 있었다. 그는 하나 뿐인 오른팔로 칼을 뽑았다. 칼집은 그의 허리춤에 묶여져 있었다. "......" 세천상유는 감았던 외눈을 힘겹게 떴다. 그의 입가가 실룩했다. 하나 곧 그의 외눈에는 체념의 빛이 떠올랐고 그는 다시 눈을 감 아버렸다. 그는 조금도 저항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반송은 칼 끝을 세천상유의 목에 댔다. "말해라. 이 밀림 속에 네놈의 동료는 모두 몇 놈이냐? 말해 라!" 순간 세천상유의 목에서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칼이 한 푼쯤 파고 들어간 것이다. 그때 세천상유는 외눈을 힘겹게 뜨더니 뭐라고 중얼거렸다. 하나 반송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왜국어였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씨부리는 거냐?" 순간 세천상유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꺼져라." "......!" 반송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는 칼 끝을 더 밀었다. "음." 이번에는 세천상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반송은 이를 갈며 물었다. "청산의명이란 놈은 어디 있느냐? 좋아. 말하기 싫다면 죽여주 지." 반송은 손목에 힘을 주었다. 살짝 비틀기만 해도 세천상유의 목이 떨어질 것이다. 바로 그때. "잠깐." 장천린이 저지시켰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죽일 필요는 없소. 저 자는 그대로 두어도 죽을 테니 말이오. 반대협." 하나 반송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저 정도 상처를 입은 자를 죽이는 것은 반대협의 칼을 더럽힐 뿐이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소?" 반송은 그 말에 내심 심한 반발이 일어났다. 그는 항상 제멋대 로 행동해 왔다. 누군가의 지시나 권유를 들은 적도 없었을뿐더러 들을 반송 또한 아니었다. 하나, 장천린의 담백한 눈길과 접한 순간 그는 반박하던 마음 이 절로 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그런 심경변화에 기 이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 곧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장천린은 천천히 세천상유의 앞으로 다가갔다. "저쪽에서 수백 마리의 늑대떼를 죽인 자가 그대인가?" 세천상유는 초점이 불분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무겁게 말했다. "그렇다." 장천린은 내심 놀랐다. '그렇다면 청산의명도, 석정일랑도 아닌 이 자는 또 다른 무서 운 고수였군?' 그렇다. 이제껏 그는 청산과 석정 두 왜인고수들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대 이름은?" 세천상유는 잠시 침묵하며 외눈으로 장천린을 응시했다. 그 역 시 장천린이 보통인물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상대가 반송과 같은 거친 고수급에게 항거할 수 없는 분위기를 보이는 것으로 그는 충분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천상유(細天常有)다." '세천상유.' 장천린은 심중 몇 번 그 이름을 되뇌였다. 이어 그는 고개를 끄 덕이며 담담히 말했다. "좋다. 세천상유, 나는 그대들과 원한이 극히 깊다. 하나 그대는 상처입은 몸, 그대를 죽이지는 않겠다. 하나 그대를 치료해 줄 수 는 없다. 그점 이해하리라 믿는다. 그대가 운(運)이 있다면 살아날 것이다." 장천린의 말은 기이하게 세천상유의 마음에 까닭을 알 수 없는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이제껏 오직 죽느냐 죽이느냐 의 절대법(絶對法)으로만 살아왔다. 본국(本國)에서도 그러했고 본 국을 떠난 이후는 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도(刀)의 진 리이기도 했다. 하나 지금, 그 절대법을 회의케 하는 인물을 만난 것이다. 장천린은 돌아서 가고 있었다. 그를 수행하는 인물들도 말없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잠깐!" 자신도 모르게 세천상유는 다급히 불렀다. "불렀는가?" 장천린은 돌아섰다. "귀공은 이름이 뭔가?" 장천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용백군(龍白君)이다." 순간 세천상유의 가슴이 뛰었다. '용백군! 저자가 바로?' 그의 가슴은 무엇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때 장천린은 그를 지그시 응시하고는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 세천상유는 장천린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뜨고 있었다. 그의 전신이 무감각하게 된 지 이미 오래였다. 불개미가 새카맣게 달려들어 전신을 뜯고 있어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눈꺼풀이 축 처지면서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자면 안된다! 여기서 자면 끝장이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나 세천상유가 이렇게 불개미의 밥이 될 수는 없다.' 그는 칼로 몸을 지탱했다. '반드시 살아난다. 반드시.' 그는 초인적인 의지력으로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외눈에서는 광가(狂氣)에 가까운 생(生)에의 집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절대 죽을 수는 없다. 생명이 아까와서가 아니다. 단지 이렇게 죽는 것이 너무 허무하기 때문이다.' 비틀비틀, 흡사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세천상유는 도에 몸을 의지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끈적끈적한 피 가 줄을 긋고 있었다. × × × 형부도독 단위제. "......."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그의 앞에는 청산의명이 극히 담담 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물처럼 고요했다. 수 중의 칼은 약간 아래로 내린 자세로 그는 정지된 듯싶었다. 단위제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청산의명과의 싸 움에서 그는 이미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훗훗훗, 과연 왜국제일고수답군, 신음류(新陰流)의 제일대가(第 一大家)로서 명불허전 이야." 청산의명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살인을 즐기지는 않소. 하나 필요하다면 반드시 행(行)하 오. 그대는 세천(細天)을 다치게 했고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절대 살려둘 수 없소." 단위제는 염두를 굴렸다. '내가 여기서 살아나가려면 놈의 심기(心機)를 어지럽혀야 한 다.' 그는 낄낄 웃었다. "으헛헛! 칼을 한 번 쓰는데 변명하는 소리가 너무 많다. 그대 는 솔직이 나보다 강하다. 하나 그대가 나를 죽인다는 것은 조금 곤란한 문제야." "......?" 청산의명의 눈빛에 의아심이 떠올랐다. 그는 분명히 상대를 죽 일 자신이 있었다. 하나 상대는 지극히 태연할 뿐더러 오히려 여 유만만한 것이 아닌가? "낄낄, 지금보다 수십 배 더 위험한 상황을 벗어난 인물이 나 단위제다." 단위제는 기침을 쿨럭쿨럭 했다. 그떼마다 피가 울컥거리며 쏟 아져 나왔다. 청산의명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토록 절망상태에 세도 상대는 여유를 보이고 있다. 하나 청산의명은 역시 고수였 다. 그는 천천히 칼 끝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대를 베겠소."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렇다. 청산의명은 본국에서도 첫손을 꼽는 무사였고 신념에 따라 행도하는 무인의 표본이었다. 그러기에 이미 대세(大勢)가 기운 줄 알면서도 멸망한 전 군주(君主)의 복수를 하기 위해 본국 을 빠져나오지 않았는가? 이때, 단위제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 그는 허리춤에서 무엇인가 를 끌러냈다. 청산의명이 다가오는 것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태 도였다. 그것은 황금빛의 포승줄이었다. 즉 관부에서 범인을 잡아 묶는 포승인 것이었다. 포승줄의 길이는 다섯 자 가량이었다. 단위제는 황금포승줄을 끄르며 태연히 말했다. "청산의명, 그대는 지금부터 평생 처음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 청산의명의 고요한 얼굴에 더욱 짙은 의혹이 어렸다. 이때 단위제는 입가에 괴이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품속에서 몇 가지 물건들을 꺼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잡동사니였다. 엽전 몇 개, 은덩어리 대여섯 개, 작은 붓(筆) 한 자루와 종이 두루마리, 그 리고 자기로 된 호리병 하나. 그밖에도 여러 수십가지의 잡동사니 가 품속에서 꺼내졌다. "......?" 청산의명은 더욱 짙은 의혹을 느꼈다. 하나 단위제는 그것들을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주위에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청산의명은 곤혹을 느꼈다. 도대체 단위제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단위제는 내심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흐흐, 네가 나보다 무공은 강할지 몰라도 심기 쓰는 데 적수가 될려면 한참 멀었다. 청산의명.' 단위제는 곧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산의명, 그대는 곧 나의 마지막 비장의 수법을 보게 될 것이 다." 청산의명은 선뜻 공격을 하지 못했다. 상대는 너무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단위제는 껄껄 웃으며 수중의 황금포승을 들어올렸다. "이 황금포승은 나 단위제의 신표다. 이것으로 나는 지난 수십 년 간 수백명의 죄인들을 포박했지. 이것의 길이는 다섯 자, 그대 와 나와의 거리도 다섯 자." 문단 단위제의 입가에 기묘무비한(?) 웃음이 어렸다. 청산의명은 내심 중얼거렸다. '저 자는 분명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려는 것이다.' 그는 도에 힘을 주었다. "이 황금포승은 죄인을 묶는 데도 쓰지만, 또 하나 쓰이는 데가 있다." 단위제는 다시 기침했다. 피가 계속 기침할 때마다 섞여 나왔 다. 그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고 신형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 틀거렸다. 그는 입가를 쓱 문질렀다. 손에는 핏덩이가 묻어나왔다. 하나 갑자기 그는 청산의명을 노려보며 고함을 지르는 것이 아닌 가? "청산의명! 그 자리에서 제발 움직이지 마라." 말을 외침과 동시에 그는 황금포승을 청산의명을 향해 휘둘렀 다. 그 순간 청산의명은 가슴이 섬뜩해져 자신도 모르게 칼을 잡은 채 뒤로 사오 자 신속하게 물러났다. 바로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단위제는 포승줄을 갑자기 방향을 꺾어 뒤로 날렸 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황금포승이 고무줄처럼 쭉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곧 이십여 자 이상 늘어난 황금포승은 한 그루 나무에 감겼다. 순간. "자!" 단위제의 몸이 빨려들 듯 위로 날아갔다. 황금포승이 줄어들며 그 탄력으로 허공을 날아 엄청난 속도로 뒤로 솟구친 것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는 수십 장 밖으로 비상해 갔다. '아차! 속았다!' 청산의명의 안색이 그만 무참하게 꾸겨졌다. 그는 그제서야 깨 달았다. 상대방은 도망을 가기 위해 그토록 괴상한 행동을 하며 온갖 헛소리를 늘어놓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혼란시킨 후 잽싸게 의표를 찔러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청산의명이 발을 굴릴 때, "으헛헛! 청산의명! 나의 마지막 수법이 바로 이거야. 중원에서 는 이것을 가리켜 삼십육계주위상책(三十六計走爲上策)이라고 한 다네. 으헛헛헛!" 단위제는 대소를 터뜨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황금포승을 거두 고 다시 날아가면서, 마침내 그는 보이지 않게 되고 숲 속에서 그 의 음성만이 들려왔다. "황금포승의 또 다른 쓰임새는 바로 도망치는 데 있었던 거야, 으헛헛." 이윽고 그의 음성도 숲 속에 삼켜지고 말았다. 청산의명은 그만 망연해지고 말았다. 하나 그때 그의 감정을 긁기라도 하듯 멀리서 회천지음술(廻天之音術)로 단위제의 비양 거림이 들려왔다. "으하하하, 무공은 그대가 강할지 몰라도 계략은 아직 한참 멀 었다. 청산의명. 으하하하하." 청산의명은 어이가 없었다. 단 한 칼이면 그는 상대를 죽일 수 있었다. 한데 이토록 어이없이 도망가게 하다니. 그는 씁쓸해져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대단한 인물이다. 계략을 쓰긴 했어도 웬만큼 대담하지 않고는 저 정도로 연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청산의명은 고소지으며 칼을 거두었다. 이때, 숲으로 사인(四人)의 무사가 날아들었다. 그들은 동시에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청산의명께 아뢰옵니다." "무슨 일이냐?" 네 명의 무사도 왜인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당황기가 어려있 었다. "탁일비의 장원에서 원계묵이란 자가 백살대(百殺隊)를 끌고 대 혈전(大血戰)을 일으켰습니다.!" "......!" 청산의명의 좀체로 변할 것 같지 않던 얼굴이 변했다. 또 한 명 의 무사가 보고했다. "동방사성도 그 틈에 탁일비를 데리고 도주했습니다." "뭣!" "도중 그의 수하들은 원계묵에 의해 모두 죽었습니다." 청산의명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계략이 실패?' 무사들은 동시에 말했다. "지시해 주십시오!" "먼저 숲 속에 흩어진 제자들을 모두 모아라." "옛!" "그리고 숲 속에 있는 용백군이란 자의 일행을 제거해라. 단 용 백군은 살려 사로잡아라." "알겠습니다." 스슷! 사인의 무사는 곧 숲 속으로 놀라운 속도로 흩어져 나갔 다. 청산의명은 우뚝 선 채 눈썹을 움직였다. '동방사성이 탁일비를 데리고 도주를 했다고?' 청산의명은 도를 움켜쥐었다. '동방사성, 네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를 바란다.' 청산의명의 물처럼 고요하던 눈에 파문이 번진다. 그 파문, 곧 그것은 엄청난 피(血)를 부르게 될 줄이야. 第 52 章 惡魔의 遊戱 밀림(密林)은 끝도 한도 없다. 반송(盤松)은 앞에서 밀림을 헤쳐 나가며 길을 열고 있었다. 그는 장도(長刀)로 덩굴과 나뭇가지를 베며 나아갔다. 그의 옆에서 부금진이 도와주는 형극이었다. 그 뒤로는 장천린이 백연연을 안고 따랐으며 맨 마지막에는 동방옥 이 걸었다. 백연연은 깊은 상처와 피곤으로 인해 장천린의 품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동방옥은 장천린의 뒤를 바짝 따랐다. 그녀는 조금 우울한 표정이었다. 한편 장천린은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하는 듯 입을 열지 않았 다. 반송, 그는 이따금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칼을 잡은 외팔의 손 아귀가 쓰라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쇠못에 박혔던 상처 때문이 었고 그 상처는 쇠독이 침투하여 파상풍을 입은 적이 있었다. 당시 양팔을 다 잃을 뻔 했으나 간신히 살려낸 것이다. 두 다리 역시 오랜 무리한 보행으로 인해 상처가 덧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반송은 참을성이 강하다. 하나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문득 그의 뇌리로 한 여인의 영상이 떠올랐다. '요미(妖美).'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내 언젠가 네년의 사지를 찢어 죽이리라!' 그의 두 눈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금월(金月), 네놈도 예외는 아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원한도 가중되고 있었다. 그는 이를 갈며 칼 로 앞을 가로막는 장애를 쳐냈다. 이때 옆에서 부금진이 말했다. "에자 사오 리만 가면 불귀림입니다. 지금부터는 길을 우회해 야 합니다." 장천린이 뒤에서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한 시진 안으로 탁일비의 장원에 도착할 수 있겠느냐?" "가능합니다. 용대인." 이때, 앞으로 전진하던 반송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그 의 귓전으로 미세한 음향이 들렸던 것이다. '이 소리는!' 그의 신경이 한올 한올 날카롭게 곤두섰다. 바로 그때였다. 바로 위 허공에서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반송은 뒤 로 일보 물러나면서 동시에 칼을 휘둘렀다. 전광같은 동작이었다. "윽!" 상대방의 신음이 들렸다. 하나 그때 반송은 자신의 칼이 무엇 인가에 막힌 것을 느끼고 몸을 빙글 돌렸다. 그 순간 인영이 그의 앞에 떨어졌다. 그는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단도독님!" 그렇다. 놀랍게도 기습자인 줄 알았던 상대는 바로 단위제였던 것이다. 단위제는 황금포승줄로 반송의 칼을 어렵게 막아내고 떨 어진 것이었다. 그의 전신은 피투성이였고 안색도 거의 흰빛이었 다. 하나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반대협, 나를 죽여버릴 셈이었나?" 그 말에 반송은 황황히 칼을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단도독님." 단위제는 고소를 지었다. 바로 그때 그는 뒤에 장천린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지었다. "용대인! 무사하셨군요." 그는 마치 죽은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장천린은 오히려 단위제의 처지가 궁금했다. "단도독께서 어찌된 것이오? 그리고 그 몸은 왜?" 단위제는 대답을 하려 했으나 기침이 걷잡을 수 없이 나와 한 동안 괴롭게 기침을 했다. 그때마다 피가 솟구쳐 나왔다. 그는 간 신히 기침을 멈추며 말했다. "너무 많이 묻지 마십시오. 그 대답을 다 할 힘이 없소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단도독님!" 부금진이 놀라 급히 그를 부축했다. 부금진의 팔에 부축되자 단도독은 여전히 히죽 웃었다. "후후, 고맙다. 소진. 솔직이 지탱할 힘이 이제는 없어." 장천린은 그가 중상을 입었음을 알았다. "소진, 어서 응급치료만이라도 해라." "예." 부금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즉기 단위제를 눕힌 다음 그의 상처를 살폈다. 그는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상처가 놀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전신에 수 많은 도상(刀 傷)을 입었을 뿐더러 특히 옆구리와 복부는 거의 내장이 상할 정 도로 살이 벌어져 있었다. 장천린도 놀랐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소이까?" 단위제는 누운채 힘없이 웃었다. 이어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중인들은 모두 몇번이나 안색이 변 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청산의명을 속이고 도망친 사기(?) 이야 기를 들었을 때는 그만 모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나 장천린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단도독이다. 그 정도의 배짱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 니다.' 장천린은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슨 자신이 겪은 이야기 를 들려주었다. 그의 이야기 역시 파란만장하고 숨가쁜 것이었음 은 물론이었다. 모두 듣고난 단위제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제 대충 짐작하겠군요." 이어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번 해남의 일은 정말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소이다. 그려." 그러다 갑자기 그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크게 웃음을 터뜨 리는 것이 아닌가? "핫핫핫, 운표, 그 멍청한 친구는 아직도 바둑판 앞에서 고민하 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 말에 모두 대소를 터뜨렸다. 생각할수록 우스운 것이었다. 하나 실상 그들이 웃는 이유는 연속적인 긴장과 역경에서 다소나 마 여유를 갖기 위해서 인지도 몰랐다. 웃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부금진이었다. 그는 오히려 눈 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웃지 마시오. 치료 중이니까." 그 말에 단위제는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이렇게 치료하는데 따끔따끔하지?" 부금진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상처를 꿰매는 중이니까요. 그냥두면 큰일나요. 그러니 제발 그만 떠들고 웃지 말아요. 상처가 다시 터질지 모르니 말입니다." 그 말에 단위제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좋아, 웃지 않겠네.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뚱이 인데 넝마처럼 꿰메지 말고 좀 예쁘게 꿰매다오." 그 말에 모두들 옆에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데 천재적(天才的)인 단위제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 허했다. 문득 장천린이 중얼거렸다. "원제가 백아로부터 소식을 전해 받았는지 모르겠소이다." 단위제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놈의 새는 인간보다 영악하고 교활하니 분명 전달했을 것이 오." 장천린은 정말 궁금했다. 원계묵과 백살대는 이제 그의 형제요. 수족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편, 동방옥은 옆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괴로움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자신의 오빠 때문이 아닌가? 그녀는 그런 죄책감 때문에 장천린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점차 오빠인 동방사성에 대해 미움과 환멸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더욱이 그로 인해 자꾸만 장천린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잠시 후, 단위제의 상처치료가 끝났다. 중인들은 다시 전진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한데 이때, "소진! 소진!" 모두 깜짝 놀랐다. 허공에서 날개소리와 함께 앵무새 백아의 음성이 들린 때문이었따. 과연 백아가 나타나 그들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잠시 후 백아는 부금진의 어깨 위에 앉더니 누가 묻지도 않았 는데 마구 지껄여 대는 것이었다. "동방사성이 탁일비를 데리고 도망갔다. 원대협이 모두 죽였다. 죽였다." "......!" 모두 흠칫했다. 하나 곧 그들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부금 진도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용대인님, 원형님이 먼저 선수를 친 모양입니다." 이때 앵무새 백아가 빨간 눈알을 굴리더니 다시 지껄였다. "원대협이 백살대 끌고 밀림으로 온다! 밀림으로 온다!" 중인들은 그 말에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단위제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한 놈이다. 백아. 헛헛, 나는 네가 잘 해낼 줄 믿고 있었 다." 이어 그는 앵무새에게 물었다. "참, 그런데 원대협이 내 안부 묻지 않더냐?" 앵무새는 눈알을 사르르 굴리더니 즉시 대답했다. "원대협이 말했다. 그놈의 단위제는 영악하고 교활하다고 잘해 낼 거라고 했다!" "......!" 단위제는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하나 곧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고 말았다. 그만 앵무새의 놀림감이 된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핫핫핫!" "하하하!" "푸후훗." 중인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조금 전에 깨어난 백연연까지 도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중인들은 모두 활짝 얼굴을 펴고 있었다. × × × 남해(南海)의 해안, 그곳은 청산의명과 석정일랑 두 무가가 수 하들과 함께 임시 근거지로 삼은 곳이었다. 오백 명의 무사들과 그에 딸린 식솔들이 해안에 작은 촌락(村落)을 이룬 곳이었다. 현재 촌락은 반쯤 비어 있었다. 그것은 무사들이 모두 해남으 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자들이라고는 부녀자와 힘없는 노인과 어린 아이들 뿐이었다. 한데, 한데 말이다. 엄청난 비극의 혈풍우(血風雨)가 이 작은 한 적한 촌락을 지옥도(地獄圖)로 만들고 말았으니. 불타는 가옥들. 시뻘건 불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촌락 주위에는 시체가 가득 널려 있었다. 피(血)의 강(江)이 흘렀 다. 아아.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불기둥과 시체들 사이에는 수십 명의 인물들이 광란의 살육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 로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마치 썩 은 짚단 자르듯 그들은 노인이든 부녀자든 가리지 않고 베었다. 심지어는 어린애까지도. "크핫핫핫! 죽여라! 깡그리 씨를 말려라!" "아아악!" "아아악!" 녹장아문, 늙은 그는 분노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지 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등을 한 명의 장한이 발로 짓누르고 있었기에 무릎을 끓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앞, 태사의가 놓여 있었고 금발의인물이 앉아 있었다. 금 발인의 어깨에는 금빛 독수리가 앉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바로 금발인은 검은 바람 해적단의 우두머리인 금월이란 인물이었다. 그렇다! 석정일랑이 급히 배를 타고 떠난 직후 검은 바람이 이곳을 친 것이다. 왜국무사들이 모두 해남으로 떠난 이상 촌락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무지막지한 살륙극이었다.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검은 바람의 잔악무도한 인물들에게 개나 돼지처럼 칼을 맞고 죽 었다. 검은 바람의 무리들은 온갖 인종(人種)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 들은 모두 고향에서 버림받거나 죄를 지어 돌아갈 수 없는 자들 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은 잔혹하다 못해 악마적이었다. 태사의에 앉은 채 금월은 벽안을 빛내며 음험하게 물었다. "석정일랑은 어디 있느냐?" 녹장아문의 입과 코로 피가 흘렀다. "모른다." 그는 치를 떨고 있었다. 꺾이되 굽어지지 않는 것이 녹장아문 의 신명이었고 생명이었다. "흐흐, 늙은 놈의 뼈가 얼마나 단단한지 보고 싶군." 금월은 눈짓을 했다. 그러자 녹장아문의 뒤에 있던 피부빛이 검은 장한이 발로 찍어 눌렀다. "크윽!" 녹장아문의 상체가 바닥에 짓이켜졌고 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금월은 다시 음험하게 물었다. "석정일랑은 어디 있느냐?" "모, 모른다." 녹장아문은 여전히 굽힐 줄 몰랐다. "이 늙은 놈이." 금월의 금빛 눈썹이 거꾸로 치솟으려는 순간, 한 명의 장한이 달려 들어와 보고했다. "두목, 이곳에 있는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처치했습니다. 그 리고 쓸만한 계집들은 모두 골라 잡아놨습니다." 그 말에 금월은 눈을 번뜩였다. "석정일랑은?" 장한은 고개를 들었다. "몇 놈을 잡아 심문해 보니 놈은 오늘 정오에 배를 타고 이곳 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래?" 금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컬컬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좋다. 한 시진 내로 이곳을 철수한다." 장한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계집들은, 헤헤. 어떻게 합니까?" 금월은 음소를 지었다. "후후,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해도 된다." 장한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단 일이 끝난 뒤 살려두지 마라." "알겠습니다." 장한은 음탕한 괴소를 흘리며 밖으로 나갔다. 녹장아문은 그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안된다! 이놈들아! 짐승만도 못한, 악!" 등 뒤에서 장한이 발로 걷어찼다. 녹장아문은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이때 장한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참, 두목. 청산의명의 세 딸을 잡았습니다. 모두 대단한 미인들 입니다." "청산의명의 딸?" 순간 금월의 두 눈에서 묘한 빛이 반짝 빛났다. "데려와라." "넷." 장한은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후 그는 세 명의 미인들 을 데리고 들어왔다. 모두가 보기 드문 미인이었고 전신에도 기품이 어려 있었다. 하나 그녀들은 결국 약한 여자였기에 얼굴과 눈은 공포에 젖어 있었다. "음, 괜찮은 계집들이군." 금월은 세 미녀들을 차례로 ㅎ어 보았다. 그의 시선이 스치자 세 여인은 마치 징그러운 뱀이 몸을 휘감 는 듯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이때 금월 눈이 그중 가장 어려보이는 소녀에게 가 멎었다. 그 의 눈에서 짐승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십육 세 정도 되어 보였다. 특히 흰 피부와 큰 눈을 가졌으며 그 큰 눈은 공포에 젖어 어 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흐흐, 꽤나 이쁘군." 금월은 손가락으로 소녀를 가리켰다. "저 계집만 남기고 두 계집년은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해라." "옛! 두목." 두 명의 장한은 희희낙락하여 즉시 두 명의 여인을 끌고 밖으 로 사라졌다. 혼자 남게된 소녀는 혼비백산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까무 라칠 듯 떨고 있었따. 이때 혼절했던 녹장아문이 깨어나 애원을 했다. "제발, 그 분들만은 건드리지 마시오. 제발." 금월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이놈이 아직도 힘이 남아있나 보군." 문득 그는 밖을 향해 외쳤다. "누구 없느냐?" "넷!" 또 한명의 장한이 달려 들어 왔다. 그곳은 촌락에서 유일하게 불에 타지 않은 집이었고 또한 석정일랑이 기거하던 곳이었다. "흐흐, 저 계집의 옷을 벗겨라." "넷." 장한은 곧 벌어질 일에 대해 잔뜩 흥미가 이는 듯 두 눈알이 벌써부터 빨개졌다. 그는 거침없이 소녀에게 다가갔다. "아, 제발." 소녀는 뒷걸음질 쳤으나 곧 벽에 닿자 그는 절망에 싸여 두 눈 을 감아 버렸다. 그 순간 장한은 소녀의 옷을 잡아 그대로 찢었 다. 부-욱! 순식간에 소녀는 알몸이 되고 말았다. 채 완전히 성숙하 지도 않은 소녀의 나신은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이미 여 인의 면모는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소녀는 공포와 수치감에 얼굴이 파래졌다. 이때 이 광경에 녹 장아문은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의 늙은 얼굴에는 심 줄이 툭툭 불거지고 있었다. 하나 어느 한 순간. "크하하하." 그는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리더니 갑자기 금월에게 덮쳤다. "이놈! 짐승만도 못한 놈!" 순간 금월의 소매에서 무엇인가가 번뜩했고 "악!" 녹장아문의 입에서 단말마가 터졌다. 그는 선 채 전율했다. 그 는 무엇이 어떻게 됐는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또한 무엇인가 번뜩했고 곧 정수리가 뜨끈한 것을 희미하게 기억했다. 순간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이마 한복판에 혈선(血線) 이 그어졌고 서서히 그는 쓰러졌다. 그의 몸은 정확히 양단되었 다. "아악!" 소녀는 그 광경에 비명을 질렀다. 너무나 참혹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비명에 금월은 시선을 소녀에게로 돌렸다. 나체가 된 소녀 를 보자 금월의 눈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기둥에 묶어라." 장한은 즉시 끈으로 소녀의 팔과 다리를 벌리게 한 후 묶었다. 금월은 소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은 이미 사람의 그것 이 아니었다. 그 눈빛을 접하자 소녀는 절망을 느꼈다. "네가 청산의명의 딸이냐?" "......."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 공포에 질려 입이 얼어 붙었다. "흐흐, 청산의명. 많은 소문은 들었다. 꼭 한 번 부딪쳐 보고 싶 은 놈이었지." 금월은 서서히 소녀의 나신으로 다가갔다. 이어 그는 묶인 채 꼼짝 못하는 소녀를 안았다. 그의 입술이 소녀의 뺨에서 입술을 더듬고 다시 봉곳한 가슴을 유린해 나갔다. "아아." 소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금월의 입술 은 소녀의 온몸을 구석구석 ㅎ어나갔다. 그의 얼굴이 소녀의 아래로 점점 내려갔다. 마침내 소녀의 감 은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믿을 수가 없 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악몽이라면 어서 깨길 바랄 뿐이었다. 한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상대의 접촉이 떨어진 것을 느꼈 다. 그녀는 눈을 파르르 떨다가 무심코 떴다. 그 순간 그녀는 못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아아." 금월은 이미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 아서는 안될 것을 본 것이다. 그녀는 하얗게 질려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그녀의 몸이 경련했다. 그녀는 자신의 어느 한 부분에 이상한 감촉을 느낀 것이었다. "아 --- 악 --- 악!" 그녀는 엄청난 고통에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급기야는 혼절을 하고 말았다. 금월(金月), 그는 천천히 옷을 입은 후 힐끗 묶여진 채 축 늘어 져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훌륭해. 처녀치고는. 흐흐흐." 소녀는 눈을 멀건히 뜨고 있었다. 하나 이미 그 눈에는 생기도 초점도 없었다. 금월은 손으로 소녀의 젖가슴을 한 번 쓰다듬은 다음 중얼거렸다. "수고했다. 이제 곧 편안해 질거야." "......!" 소녀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이어 부르르 나신을 떨더니 고 개가 푹 떨구어졌다. 금월이 손을 떼자 그녀의 고운 젖가슴에는 선명한 홍색장인(紅 色掌印)이 찍혀져 있는 것이 보였다. "먼저 간다고 섭섭해 하지 마라. 네 아비도 곧 따라 갈테니까 말이다." 금월은 돌아섰다. "이제 그만 해남으로 가야겠군. 그곳에 황금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막대한 황금이 말이다. 으하하하, 으하하핫!" 미친 듯한 광소가 돌아선 그의 입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의 두눈에서는 무시무시한 광기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녀의 시신을 뒤로 한 채로 악마(惡魔의 유희(遊戱)는 그렇게 새로운 막(幕)을 올리고 있었다. 第 53 章 白娟娟의 能力 "추격자들이 있다! 추격자들이 있다!" 앵무새 백아가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경고했다. 밀림을 계속 전진해 나가던 장천린 일행은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부금진이 백아를 향해 물었다. "백아, 추격자라니 무슨 소리냐?" 백아는 날개를 파다닥거리며 빠르게 이야기 했다. "칼을 든 많은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다!" 장천린이 침음하며 말했다. "청산의명의 수하들이다." 장천린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분명 청산의명은 수하들을 통해 동방사성의 계략이 탄로났음 을 들었을 것이오. 그렇기에 그는 이 밀림 속에 왜국 무사들을 풀 어 우리를 죽이려 할것이오!" 그 말에 모두 수긍의 표정을 지었다. 반송이 문득 의아롭다는 듯이 물었다. "헌데 어떻게 이 넓은 밀림에서 그들이 우리를 추적할 수 있다 는 말입니까?" 부금진에 의해 부축받고 있던 단위제가 고소지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을 적들에게 명백하게 제시해 주고 있지 않소?" 반송은 어리둥절 했다. "우리가 말입니까?" 여전히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쯧, 우리가 덩굴과 나무를 자르고 지나왔으니 그 길을 따라오 면 훨씬 빨리 ㅉ아올 수 있는 것이오." "아!" 반송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자신의 둔한 머리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었다. 이때 정천린이 앵무새를 바라보며 물었다. "백아, 그들이 어디쯤 오고 있느냐?" 백아는 되풀이해 말했다. "가깝다. 아주 가깝다!" 그러나 그 말로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 었다. 아무리 영활하다해도 앵무새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기는 무 리였다. 단위제는 문득 입을 열었다. "소진, 팔을 놔다오." "......?" 부금진은 의아했으나 곧 팔을 놓아 주었다. 그러자 단위제는 귀를 땅에다 대더니 한참동안 그 자세를 유지 했다. 이어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오리(五里)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상당한 숫자가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소이다." 장천린은 염두를 굴렸다. '왜인들의 숫자는 최소한 우리보다 몇 십배는 될 것이다. 더욱 이 우리들은 대부분 상처를 입고 있다. 거기에다 극도로 피곤한 상태이니 그들과 싸우면 크게 위험하다.' 문득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두 눈에 이채를 띄며 부금진을 응시했다. "소진, 전에 불귀림을 지난 적이 있다고 했지?" "그런 적이 있었지요. 헌데?" "불귀림을 정 중앙으로 관통할 자신이 있느냐?" 부금진은 흠칫했다. 그는 본래 영활한 소년이다. 그는 재빨리 장천린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 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불귀림을 직접 통과해 본적은 없어도 통과할 수는 있어요. 하 나 그것은 곳곳에 있는 혈소(血沼)만 피할 수 있다는 뜻이지, 결 코 부골장독이나 흡혈박쥐까지 피할 수는 없어요." 부금진의 얼굴에는 약간 회의적인 빛이 떠올랐다. "더군다나 공연히 잘못해서 흡혈박쥐와 싸우다가 흡혈거머리까 지 나오게 되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요." 장천린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 점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 방법이 아니라면 결코 왜인들의 추적은 피할 수가 없다. 만일 부딪치게 된다면 결과는 너무나도 뻔했다. 이때 문득 장천린의 품에 안겨있던 백연연이 입을 열었다. "소진, 박쥐와 장독만 없다면 불귀림을 통고할 수 있나요?" 부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가능하죠." 백연연이 눈에 이채를 빛냈다. "만약 소나기가 내린다면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만은 장독은 땅 속으로 가라앉고 박쥐도 나오지 않겠지요?" "그럴태지요." 백연연은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금 당장 불귀림으로 들어가요." 그 말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백누님?" 부금진의 말에 백연연은 신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일각 안으로 소나기가 내릴 거예요." "......?" 모두 의아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보았다. 하늘은 약간 흐리긴 해도 그렇다고 비가 올 것 같은 날씨 는 아니었다. 중인들이 반신반의해 하자 백연연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은 극히 더운 지방이예요. 하루에도 몇 번씩 소나기가 내 려요. 게다가 이곳은 오지산 기슭으로 산악기후가 작용해요." 그녀의 말에 모두 수긍을 했다. 하나 그녀가 일각 후에 소나기 가 올 것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 소나기가 내릴 시각까지 예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만일 그녀의 말만 믿고 불귀림에 들어갔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지 않는가? 도저히 그녀의 예 격만으로는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때, 장천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도 역시 백연연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백연연에게 갔다. 이때 그녀는 눈을 돌려 그를 마주 응시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어떤 호소력 있는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진실 의 빛이었다. 문득 장천린은 한 가지 생각이 뇌리에 떠올랐다. 태진왕의 서 찰에 적혀 있던 글귀였다. '백연연에게는 한가지 남들에게 없는 특이한 능력(能力)이 있 네.' '혹시?' 장천린은 마음이 움직였다. "소진." 그의 부름에 부금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불귀림 근처까지 빠르게 나아간다면 그래도 일각은 걸릴 것이 다. 그곳에 도착한 뒤에 소나기가 온다면 불귀림을 통과해도 될 것이다."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써는 그 방 법밖에 달리 아무런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일행은 불귀림을 향해 출발했다. 앞으로 얼마쯤 전진했 을 때 백연연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용대인도 제 말을 안 믿으시는 군요."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믿소." 백연연의 두 눈에 반짝 이채가 어렸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술을 음직였으나 곧 그만 두었다. 일행은 전보다 더욱 속력을 내어 덩굴과 나무를 자르며 불귀림 을 향해 접근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다 왔어요. 이곳부터 불귀림입니다." 부금진이 일행을 저지시키며 말했다. 과연 도착한 시간은 일각 정도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이함이 어려 있었다. 왜냐면 이곳까지 오는 도중 하늘이 어두컴컴해졌으 며, 먹장구름이 짙게 덮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후두두둑! 흡사 쌀알을 흩뿌리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밀림에 퍼지기 시작했다. "소나기다!" 부금진이 들뜬 음성으로 외쳤다. 중인들의 얼굴에는 모두 경탄 과 기쁨의 빛이 어렸다. 쏴- 아! 불귀림은 곧 자욱한 우연(雨煙)에 뒤덮여 시야가 뿌옇 게 흐려지고 있었다. 중인들의 시선은 경이의 빛을 담은 채 일제 히 백연연을 바라보았다. 단위제도 기침을 하며 웃었다. "흐흐, 정말 대단하구료. 백소저." 백연연은 얼굴을 붉혔다. 장천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소진. 이젠 안내해라." "네. 용대인." 부금진이 앞장을 서고 일행은 마침내 죽음의 숲, 돌아오지 않 는 숲인 불귀림으로 들어섰다. 불귀림은 언뜻 보아서는 일반 밀림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 곳곳에 도사린 수많은 혈소의 함정과 독충 등이 서식하며 한 번 잘못 빠지면 설사 원주민이라 해도 살기가 힘든 곳이었다. 부금진은 나름대로의 특유한 방법이 있는 듯 여러차례 우회해 가며 전진해 나갔다. 중인들은 그가 혈소를 피해가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말없이 뒤를 따랐다. 장천린이 일행에게 주위를 시켰다. "소나기는 우리의 흔적을 모두 제거시켜 줄것이오. 대신 나뭇 가지나 덩굴에 손을 대지 마시오. 그것을 보고 적들이 따라온다면 고생도 헛일 일테니 말이오."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장천린은 문득 백연연에게 속 삭이듯 물었다. "백소저. 이 소나기는 얼마나 쏟아질 것 같소?" 백연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손가락을 내밀어 떨어 지는 빗방울을 받더니 손가락 끝으로 만져 보았다. "매우 상쾌한 비군요." 웬지 그녀의 말은 우울하게 들렸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비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비어 젖은 이화 (梨花)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백소저." 장천린의 말에 그녀는 문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훗, 제가 이 상황에서 너무 감상적인 말을 했나보죠? 이 비는 반 시진 가량 내릴 거예요." '반 시진.' 장천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 백연연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받으며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망울이 빗물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탓인지 흐려져 있었다. '비(雨), 전하께서는 유난히도 비를 좋아하셨어.' 장천린은 부금진에게 물었다. "소진, 불귀림을 통과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 같은가?" 부금진은 눈을 굴리더니 대답했다. "지금 이 정도 속도라면 반 시진 조금 더 걸릴 것입니다." 장천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속도를 조금 더 낸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불귀림을 통과한 직 후 비가 그칠 것이다.' 그의 눈빛이 일순 이상한 광채를 흘렸다. '그렇다면 우리를 추격해 멋모르게 불귀림에 들어오게 된 왜국 무사들은.' 장천린의 눈에서 광채가 번쩍였다. '불귀림에 갇힌다!' 장천린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섬뜩한 마음을 느꼈다. 불귀림 에 간힌다면 그 결과는 어찌 되겠는가? 생각만 해도 무서운 함정 이었다.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쓸데 없는 동정은 금물이다.' 그는 부금진에게 말했다. "소진, 속도를 조금만 더 내자." "예, 용대인님." 과연 비(雨) 탓인지 부골장독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금진은 혈소를 피하며 일행을 대동하고 불귀림 깊숙이 가로 질러 갔다. 그리고....... 第 54 章 돌아오지 않는 숲, 죽음의 바다 쏴아아아! 폭우, 한치 앞도 가릴 수 없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열대성 폭우는 굉장했다.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폭우가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것이 바로 이곳 지방의 기후였다. 밀림은 삽시에 온통 물천지가 되었다. 곳곳에 주름진 곳을 따 라 급류와 격류가 콸콸거리며 흘러내렸고 시야는 마치 장막이 쳐 진 듯 뿌옇기만 했다. "......." 폭우 속을 전진하는 인간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 맨 앞에는 청산의명(靑山義明)이 전진하고 그의 뒤를 따라 팔십 여 명의 왜국무사들이 반원형으로 포진한 채 따르고 있었다. 청산의명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의 나무의 덩굴을 관찰했 다. 그들은 장천린 일행이 밝고 지나간 길을 더듬어 추적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청산의명의 전신은 흠뻑 젖었으며 그의 얼굴에는 세찬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비가 너무 심하게 오는군.'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기 않았다. '관계는 없다. 이곳의 폭우는 잠깐 사이에 그친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전방의 나뭇가지를 쓸었다. '나무의 갈라진 단면을 보아 반 시진이면 놈들을 따라 잡을 수 가 있다.' 그는 계속 전진했다. 하나 얼마쯤 갔을 때 그는 흠칫했다. 덩굴 과 나무가 잘라진 흔적이 끊어진 것이었다. '음, 결국 우리의 추적을 눈치채고 그냥 통과했군.' 이때, 청산의명의 옆으로 한 명의 청년무사가 다가와 말했다. "사부님, 비가 너무 심하게 쏟아져서 놈들의 흔적을 찾기가 어 려울 듯합니다." 청년도 역시 장천린 일행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주한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그는 자욱한 비의 장막이 쳐진 전방을 응시하며 말했다. "더우기 이 빗속에서 계속 전진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나 청산의명은 담담히 말했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렵다면 그들은 더욱 고초를 겪을 것이 다." 청산의명은 짤막하게 말했다. "전진한다!" 청년은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허리를 굽 히며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이어 청년이 뒤를 향해 손짓하자 대열은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단련된 무사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무가(武家)에 입문하여 이제까지 수없는 전투를 치 뤘으며 근육과 뼈는 강철같이 단단한 자들이었다. 비록 폭우가 쏟 아지는 밀림속이었으나 그들의 대오는 추호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전진하는 속도는 조금도 늦추기 않았다. 얼마쯤 갔을까? 결국 그들은 장천린 일행이 들어선 불귀림(不 歸林)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엄청난 죽음의 함정이 그들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채 그들은 드디어 불귀림에 발 을 디뎠다. 쏴아아. 폭우는 쉬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밀림은 물이 점점 불어나 무사들의 허리까지 차는 곳도 있었다. 야자수나 열대 식물의 잎새는 축축 늘어져 전진에 더욱 방해가 되었다. 하나 행(幸)인지 불행(不幸)인지 그들이 불귀림에 들어선지 일 각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혈소(血沼)에 빠진 자가 없었다. "......." 청산의명은 고개를 돌려 묵묵히 폭우를 맞으며 강행군하는 수 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마음이 기이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번 해남에 와서 느낀 점이 많다.' 그의 얼굴에 빗물이 때렸다. '특히 이젠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듣다. 과거의 청산의명은 명 쾌하고 항상 판단력이 빨리 작용하던 지장(智將)이 아니던가? 헌 데 이젠 그런 결단력도 떨어지고 일이 지나치게 신중해지고 있 다.' 청산의명의 생각은 계속 되었다. '본국에 있었을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무사혼(武士魂)을 지키기 위해 대세를 만회하기 어려움을 알면서 본국을 뛰쳐나와 유랑생활 수년, 그동안 나도 지쳤단 말인가? 본국의 덕천가강은 이제는 반석같이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그를 친다는 것은 계란으 로 바위를 치는 격, 하나 만약 이곳의 일이 잘 되면 막대한 황금 을 이용 어떻게 해볼 수도 있었다.' 청산의명의 미간에 어두운 그늘이 어렸다. '하나 또 일은 틀어지고, 용백군이란 일개 상인(商人) 하나 처 치하지 못해 내가 이 고생이라니.' 문득 그의 뇌리에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난스러우면서도 매사에 달관한 듯한 청년, 석정일랑이 떠오 르자 청산의명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부드러워졌다. '이번 일이 끝나면, 석정에게 모든 대권을 양도하리라.' 그는 순간적으로 결심을 했다. '그야말로 그는 진짜 걸물이다. 그는 내가 지니지 못한 지혜와 패기(覇氣), 담력을 아울러 겸비하고 있다. 돌아가면 그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청산의명은 석정일랑과 그동안 미묘한 갈등관계에 있었다. 그 것은 류가 다른 무가로써 유랑무사들의 주도권을 서로가 양보치 않으려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는 해남도에서의 거듭되는 좌절과 환우를 통해 이제는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허어, 석정일랑은 분명 잘 해낼 것이다.' 빗물이 얼굴을 더욱 세차게 때렸다. 그는 손등으로 얼굴의 빗 물을 씻었다. 그는 폭우가 쏟아지는 먹구름 덮인 하늘을 응시했 다. '지금쯤 그들 사백 명은 해구(海口)에 도착했겠군.' 그는 자신의 세력과 합병하게 될 무사들이 해남도에 당도할 때 가 되었음을 떠올렸다. 하나 반면 씁쓸한 면도 있었다. '석정일랑은 오지 않았겠지.' 석정일랑이 일부러 뒤켠으로 빠지며 일의 행사력을 그에게 미 루는 것은 얼마 전부터의 일이었다. 청산의명은 젊은 나이의 석정 일랑이 자신보다는 포용력이 뛰어났다는 생각이 비로서 들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한데 문득 처절한 비명소리가 그의 상념을 산산이 무너뜨리고 있었다. "아아악!" 그는 몸을 홱 돌렸다. 보니 한 명의 무사가 늪에 빠져 허위적 거리고 있었다. 그곳은 다른 곳과 아무런 차이도 없는 곳이었다. 한데 빠진 무사는 가슴 까지 들어간 채 허위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구해라!" 청산의명이 명령했다. 그러자 근처의 무사들이 칼집을 뻗었다. "이 끝을 잡아라." 빠진 무사는 손을 허위적거리다 간신히 칼집을 잡았다.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림과 동시에 서서히 잡아 당기는 힘에 따라 몸은 늪에서 빠져 나왔다. 하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악!" 돌연 무사는 비명을 지르며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린 것이 아닌 가? 그 바람에 그는 칼집마저 놓쳐 버렸다. 주위의 무사들은 크게 놀랐다. "왜 그러느냐, 석전(石田)?" "크으으, 무엇이 내 몸 속으로, 으아악!" 무사는 구슬픈 단말마를 말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이 하얗게 까뒤집어 지더니 그는 곧 부글부글 끓은 늪 속으로 빠져들고 말 았다. 그의 모습은 눈 깜박할 사이에 무사들의 눈앞에서 사라졌 다. 그가 빠진 자리는 곧 그전처럼 평범한 곳으로 회복되고 방금전 의 일이 언제 있었다는 듯 말짱하기만 했다. "이럴 수가!" 무사들은 모두 몸을 떨었다. 그들이 어찌 알 리가 있겠는가? 불귀림에 내린 폭우로 인해 흡 혈박쥐와 부골장독은 잠잔다 해도 혈소(血沼) 속에 꾸틀대는 흡혈 거머리들은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청산의명은 침통해졌다. 그는 웬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나 언제까지나 넋을 잃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진!" 그의 명령에 따라 대열은 다시 폭우를 맞으며 불귀림을 통과하 기 시작했다. 하나 얼마 못가 또다시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이번에는 네 명의 무사가 연속적으로 혈소에 빠졌다. 그들도 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흡혈거머리에 당해 눈 앞에서 죽어갔 다. "......!" "......!" 대열은 술렁거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공포심이 차올라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청산의명은 막연한 공포에 정신이 불안 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나 대열은 조금씩 계속 전진했다. 그 사이 다시 십여 명이 혈소에 빠져 죽었다. '이럴수가!' 청산의명의 눈에는 공포가 떠올랐따. 무공도 그 무엇도 속수무 책이었다. 그는 애당초 밀림 속으로 무작정 들어온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한데 그러는 사이 폭우가 그쳤다. 열대성 폭우답게 일단 기치자 하늘이 새파랗게 개었으며 뜨거 운 햇살이 밀림을 비추었다. 청산의명은 약간 안도감을 느꼈다. 어쨌든 폭우가 그치자 시야 가 트였기 때무이었다. 그는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다시 전진한다, 최대한 앞을 주의하면서 조금씩 나간다!" 대열은 그 말에 따라 속도를 늦추면서 잔뜩 긴장하여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나 어찌 알았으랴? 이제까지보다 더욱 더 무서운 죽음의 사 신(死神)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불귀림에 햇살이 가득 비치자 곧 습기가 마르면서 사방으로부 터 은은한 갈색 안개 같은 기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바로 부골장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골장독은 점점 스물거리며 숲 여기저기에서 진한 갈색을 띠며 피어 올랐다. 비온 뒤의 증발현상으로 인해 장독의 독기는 평소보다 몇 배나 더 강했다. 문득. "크아아악!" "으아아악!"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무사들은 목을 움 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부골장독에 중독되어 픽픽 쓸러졌 다. 한데 엎친데 덥친 격으로 이번에는 나뭇가지 사이로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흡혈박쥐들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크아악!" 흡혈박쥐들은 장독에 당해 비틀거리는 무사들의 목줄기에 달라 붙어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실로 처절하고 끔찍한 광경이었다. 청산의명은 그만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너무나 도 뒤늦게야 그는 깨달은 것이었다. '이, 이놈들! 이제보니 이 죽음의 숲으로 우리를 유인했구나!' 그는 문득 어지러움증과 함께 구토를 느꼈다. 부골장독이 그에 게로 스며든 것이었다. '끝장이다.' 청산의명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수십 마리의 흡혈박쥐를 바 라보면서 점차 의식이 비어가기 시작했다. 무서운 함정, 비명소리조차 어느덧 스러져 가고 있었다. 불귀림(不歸林), 돌아오지 않는 숲. × × × 쾅! 쿠콰콰쾅! 콰아앙! 바다(海), 가이없이 푸르고 끝없이 출렁이는 남해의 바다 한가 운데서 미증유의 폭발이 발생했다. 한 번 폭발음이 터질 때마다 불기등과 물기둥이 십수 장을 솟구쳤다. 아아, 바다 한가운데서 일어난 연쇄적인 폭발의 의미는 무엇인 가? 바다에는 부서진 배의 파편과 불에 타다 남은 잔해들이 어지럽 게 둥둥 떠 있었다. 배, 한 척의 그리 크지 않은 배가 그 가운데 떠 있다. 뱃머리에 는 한 명의 청년이 넋을 잃고 바다에 가득 널려 있는 잔해를 바 라보며 전신을 무섭게 떨고 있었따. 석정일랑, 바로 그였다. '신(神)이여.' 화사의 죽음에서 그는 어렴풋이 새벽에 출발한 선단(船團)의 원 형을 직감했다. 그는 즉시 배를 타고 쫓아왔다. 하나 막 그가 선단의 빽빽한 돛폭을 멀리서 보게 될 정도까지 추격했을 때. 그 때 모든 것은 그의 눈 앞에서 사려져 버렸다. 엄 청난 폭발음과 화염, 불기둥과 물기둥이 치솟으며 그의 눈앞에서 이십여 척의 선박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면서 마지막 한 척의 배까지 날 아가는 광경을 보았다. '으으, 모두 모두 죽었단 말인가?' 석정일랑의 눈은 바다 위에 부유하는 선박의 잔해들 위에 허망 하게 떨어졌다. "검은 바람." 그의 임술에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검은 바람!"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선 엄청난 분노와 원한, 증오가 서린 구슬 프고도 처절한 장소성이 터져 나왔다. "우우우우! 바다 저 멀리....... 들리는가? 왜국의 한 청년 석정일랑의 분에 찬 장소가? 들리는가? 들리는가? 第 55 章 黃金과 함께 살다간 老人 야수(野獸)같은 눈빛을 번뜩이며 그는 칼을 지었다. 번뜩! 세 개의 목이 날아갔다. 채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세 개의 생명이 절단난 것이다. "으으으." 한 명이 남았다. 그는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는 무엇인지 모를 신음을 흘리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허나 곧 그의 눈에는 절망 의 빛이 들어찼다. 그의 바로 앞에는 방금 동료 셋의 목을 한꺼번에 날린 원계묵 이 피묻은 장도(長刀)를 비스듬히 내린 체 서 있었다. 주위에는 백살대(百殺隊)가 빈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원계묵 은 야수 같은 눈빛을 번뜩이며 물었다. "동방사성은 어디 있느냐?" "......." 생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이지를 상실한 듯 안면근육이 멋대로 비틀어지고 있었다. "동방사성은 어디 있느냐?" 원계묵은 똑같은 어조로 다시 물었다. 비로소 장한의 얼굴이 움직였다. "말하면 살려 주시겠습니까?" "동방사성은 어디 있느냐?" 세 번째 질문은 억양도 똑같았고 여전히 원계묵의 눈빛은 야수 의 눈빛이었다. 냉혹했다. 장한은 전신이 오그라붙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탁노야(卓老爺)와 함께 해구(海口)쪽으로 가셨습니다." "해구." 원계묵은 중얼거리다가 곧 곁에 있는 운표에게 말했다. "운표, 저자를 보내줘라." "넷!" 운표의 시원스런 대답에 장한의 얼굴에는 살았다는 희열과 안 도감이 어렸다. 그는 원계묵에게 절을 했다. "감사, 으악!" 허나 어찌하랴? 고개를 숙이기 직전 그의 심장에 운표의 기형 도(奇形刀)가 푹 박힌 것을. "끄, 왜?" 장한은 자신의 가슴에서 피분수가 솟구치는 것을 보며 회의에 찬 눈을 부릅떴다. 운표는 그의 앞에서 히죽 웃었다. "놈, 지옥(地獄)으로 보내 주라는 뜻도 모르느냐?" "그럴 수는......." 운표는 기형도를 칼집에 넣고 있었다. "애당초부터 네놈들은 우리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쿵! 장한은 가슴을 부여 잡은 채 앞으로 쓰러졌다. 원계묵은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운표!" "넷!" "오십 명을 데리고 밀림으로 들어가라. 보이는 것은 무조건 척 살(刺殺)한다." 스산한 음성이었다. 운표의 평소 장난스럽던 눈꼬리가 파르르 긴장했다. "대주께서는?" 원계묵은 무심하게 말했다. "동방사성을 추적하겠다." 이어 나직이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흡사 비조(飛鳥)처럼 쏘아나가고 있었 다. 운표는 히죽 웃었다. 이어 백살대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었느냐? 대주께서는 우리에게 밀림의 사냥을 허용하셨다." 백살대의 청년들의 얼굴이 문득 똑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야수 (野獸) 의표정으로. "가자!" × × × "허억!" 밀림은 폭우가 내린 후 질척거렸다. 밀림의 길은 손바닥 들여 다 보듯 훤히 아는 동방사성이었다. 그는 밀림 사이의 소로를 따 라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의 가는 방향은 해구(海口)였따. 지금 그의 옆구리에는 탁일비가 안겨 있었다. 탁일비는 병중이 었고 워낙 노쇠한데다 무리한 탓인지 안색이 거의 잿빛에 가까웠 다. 동방사성은 전신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깨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원계묵의 도(刀)에 당한 것이었 다. 달릴 때마다 피가 솟았으며 어깨가 쓰라렸다. 동방사성은 이 를 갈고 있었다. '원계묵! 이 고통은 훗날 배로 갚아 주마.' 그의 얼굴에는 자조어린 조소가 스쳤다. '흐흐, 천하를 우습게 알던 나 동방사성이 이렇게 도망을 치다 니?' 그는 이를 악물었다. '허나, 이것은 훗날의 도약을 위한 후퇴일 뿐. 황금만 내 손에 들어오면 나는 천하를 움켜쥐게 된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달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그는 곧 밀림 속이 너무나 질퍽하여 속도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밀림 속의 은밀한 곳, 동방사성은 그곳에 탁일비를 내려놓았다. 그는 탁일비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 탁일비는 눈을 떴다. 그의 앞에 피에 젖은 동방사성이 있었다. 늙고 병든 탁일비였으나 그는 곧 자신의 상황을 판단했다. 그의 주름진 입가에 힘없이 쓰디쓴 웃음이 어렸다. 동방사성은 어색하게 말했다. "탁노야, 미안하외다." 탁일비는 심하게 기침을 했다. 이어 그는 간신히 기침을 그치 며 물었다. "사성, 그렇게도 황금이 탐나더냐?" 동방사성은 안색을 굳혔다. "나는 십여 년 전부터 이 일에 내 인생(人生)을 걸었소." "쿨럭, 쿨럭!" 탁일비는 다시 기침을 했다. 동방사성은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탁노야, 황금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시오." 그 말에 탁일비는 흐드러진 웃음을 잠시 흘렸다. 허나 그 웃음 이 지나가자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온통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옛날 나도 너 같은 때가 있었다. 육십 년 전, 나는 황금에 미 쳐서 전 중원의 산(山)이란 산은 다 뒤졌다. 황금광맥(黃金鑛脈)을 찾아서 내인생을 몽땅 바쳤다." 탁일비의 주름진 얼굴에는 추억 속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듯했다. "그리고 오십년 전 해남의 오지산(五指山) 기슭에서 거대한, 상 상도 못한 엄청난 금맥(金脈)을 발견했던 것이다." 동방사성의 얼굴이 탐욕으로 빛났다. 탁일비는 그의 얼굴을 보며 다시 주름진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것을 파헤쳐 미증유의 황금을 모았다." 탁일비의 얼굴은 문득 지나간 세월이 아쉬운 듯 허망한 표정이 떠올랐다. "허나 내가 황금에 미쳐 인생을 탕진하여 수십 년을 보냈을 때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사람하 는 사람도 없었다. 거대한 황금산(黃金山)이 내 앞에 쌓였을 때 나는 이미 너무나 늙고 병들어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극도의 허무 (虛無)와 절망을 느꼈다." 동방사성의 얼굴이 흔들렸다. 하나 지금 그에게는 황금의 소중 함 외에는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아까운 청춘을 이제는 쓰지도 못하고 황금에 집착해 흘려 버 렸다." 탁일비의 말이 끝나자 동방사성은 급급히 말했다. "나에게는 그 황금이 필요하오!" 탁일비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성, 네가 내 밑에 일하러 왔을 때부터 나는 너의 야심을 알 았다. 그러면서도 너를 그냥 둔 것은 힘없고 늙은 나에게 진실로 네가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탁일비는 또 다시 쿨룩쿨룩 심한 기침을 했다. 탁일비의 말에 동방사성은 무서운 집착을 보이며 끈질기게 말했다. "노야, 당신의 생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소. 그 막대한 황금 을 그냥 지하(地下)에 묻은 채 사라지게한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 운 일이 아니오? 그것을 나에게, 노야!" 탁일비는 힘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 다시 격렬한 기침을 했다. 그는 간신히 기침을 억제한 뒤 더욱 쇠잔해진 음성 으로 말했다. "내가 북경 태진왕 전하께 서찰을 올린 진정한 목적은 내 죽기 전에 나의모든 황금을 나라에 바치기 위해서였다." 동방사성은 흠칫했다. "평생 보람없이 살아온 이 늙은이가 마지막 죽기전에 할 수 있 는 마지막 일이었다. 허나 황금 주위에 너무 많은 벌레가 끼었 어." 문득, 탁일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갑자기 얼굴이 해쓱해지더니 일을 벌렸다. "악!" 그의 입에서 한 사발도 훨씬 넘는 많은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왔 다. 순간 동방사성의 가슴이 철렁했다. '피를 토하다니!' 그는 언제나 탁일비를 치료하던 한 의원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만약 노야께서 피를 토하시게 되면 그때는 끝이오.' 갑자기 동방사성은 안색이 수없이 변하더니 탁일비의 앞에 털 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에는 다급함과 당황함이 어려 있었 다. "노야, 어쨌든 나는 당신을 위해 수년 간을 노력했습니다. 당신 은 어차피 혈육도 친지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종처럼 봉 사하지 않았습니까? 그 황금을 나에게 주십시오." 동방사성의 비굴할 정도의 자세에 탁일비의 안면은 보기 괴로 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허나 곧 그의 눈에는 연민의 빛이 어렸다. 마침내 그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떠올랐다. "사성!" "말씀하십시오!" 동방사성의 얼굴이 변했다. 몇 번씩이나. "용등대, 귀두암(鬼頭岩)을 부셔 보아라. 그곳에 황금이 있을 것 이다." 탁일비는 마침내 입을 열고야 말았다. 순간 동방사성의 얼굴에 기쁨이 격렬히 떠올랐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동안 벙벙한 표정을 짓던 그는 곧 넓죽 절을 했 다. "감사, 감사합니다. 노야! 오오!" 그는 들뜬 음성으로 말하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어 그는 한시가 바쁜 듯 달려가려고 몸을 돌렸다. 허나 그는 멈칫 걸음을 멈추더니 탁일비를 응시했다. "......!" 탁일비는 늙고 병들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습기찬 언덕에 누 운채 동방사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방사성이 쳐다보자 그는 힘없이 웃었다. "사성, 마음이 약해지느냐? 후후, 가거라. 그 황금으로 너의 인 생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죄송합니다. 노야!" 동방사성은 그 말을 끝으로 마침내 신형을 날렸다. "허허." 그의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탁일비의 노안에 눈물이 어 렸다. "쿨룩! 쿨룩! 쿨룩!" 그는 다시 기침을 하며 이번에는 더욱 많은 양의 피를 토해냈 다. 헌데 동방사성이 사라진 직후 스스스! 숲을 헤치며 한 인영이 나타났다. "탁노야!" 그는 바로 원계묵이었다. 그는 급히 탁일비를 부축했다. "원 무사." 탁일비는 힘겹게 눈을 떴다. "탁노야, 동방사성은 어디에 가고 노야만 이곳에 있는 것입니 끼?" 탁일비는 더듬더듬 말했다. "그는 꿈을 찾아 떠났소." 그의 전신에 경련이 일어났다. "용대인은?" 탁일비의 말에 원계묵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살아계실 것입니다. 반드시!" "용대인에게 전해 주시오. 내 황금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겠소. 모두." 탁일비의 숨결이 가빠졌다. "나의 황금은 모두 다섯 군데에 묻어, 그중 하나는 사성에게 가 르쳐 주었소." "노야." "나머지 네 곳은 첫번 째가 백사안(白沙岸), 백사안의 모래 속 에, 그리고 두 번째는 태(太), 태." "노야!" 원계묵은 크게 부르짖었다. 탁일비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 기 때문이었다. "노야!" 그는 급히 그를 흔들었다. 허나 죽은 자가 어찌 말을 하겠는가? 어찌 죽은 자가 다시 눈을 뜨겠는가? 그는 죽었다. 황금의 위치 다섯 군데 중 한 군데는 동방사성에게, 한 군데는 원계묵에게 말해주고 나머지 세 군데가 묻힌 곳은 말하지도 못한 채 그는 눈을 감았다. 황금(黃金)의 손(手) 탁일비, 황금만을 위해 전 인생(人生)을 바 친 노인,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아온 노인. 그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세 군데에 묻힌 황금의 비 밀을 안고 영원히 사라졌다. 第 56 章 黃金筮의 終末 불귀림(不歸林), 돌아오지 않는 숲에는 새로운 역사가 생기게 된다. 장천린의 일행은 계속 전진했다. 그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장천린은 백연연을 안고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부금진은 불귀림의 혈소(血沼)를 통과하느라고 지나치게 신경 을 소모한 탓인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나 본래의 예쁘장한 그의 용모는 그로 인해 더욱 미소년으로 보였다. 지금, 그의 입가에는 점차 득의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때였다. 문득 허공에서 앵무새 백아(白兒)의 들뜬 음성이 빠 르고 시끄럽게 들렸다. "밀림이 끝났다! 밀림이 끝났다!" 중인들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반송이 제일 먼저 앞으로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아아! 그렇다. 과연 십여 장쯤 달려가자 그 토록 울창하던 밀림이 끝이 났다. 태양(太陽), 누부신 태양이 비추는 곳은 나지막한 구릉지대의 초지(草地)가 아닌가? 반송은 너무나 기뻐 하나밖에 없는 외팔을 번쩍 치켜들며 대소 를 터뜨렸다. "핫핫핫! 빛이다! 빛이야!" 빛, 밀림속에는 닿지조차 않았던 눈부신 햇살이 그의 만신창이 가 된 몸을 환하게 투영하고 있었다. "핫핫핫. 드디어 우리는 그 생각하기조차 지긋지긋한 숲을 벗 어난 것이다!" 숲으로부터 일행이 뛰다시피 빠져나왔다. 그들의 얼굴도 모두 기쁨에 넘쳐 있었다. 부금진은 단위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도독님, 우리가 이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단위제는 대소를 터뜨렸다. "낄낄! 소진,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게 뭔지 아느냐? 술이 야, 술! 으핫핫, 오늘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셔야겠다." 부금진의 눈도 반짝 빛났다. "제가 대작을 하지요." "좋아, 소진! 너는 확실히 내 말을 아는 귀여운 꼬마야." 단위제는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부금진도 이번에는 꼬마라는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한편, 장천린은 감개무량하기만 했다. '진정 다행이다. 그런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도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이때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백연연도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행이예요. 정말." 장천린은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시선에 백연연은 수줍게 웃었다. 그녀의 창백한 두 뺨에 햇살이 밝게 스며들고 있었다. "백소저!" 장천린은 빙긋이 웃었다. "만약, 내가 태진왕 전하라 할지라도 소저 같은 여인은 반드시 사랑하게 될 것이오." "......!" 백연연의 얼굴에 복사꽃 빛 같은 홍조가 어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심경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 다. 그것은....... 왜일까? 이런 일을 겪고나니 그녀의 무너지고 절망했던 가슴 속에 삶의 의지가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숱한 환난과 역경을 직접 보고 겪은 그녀는 새삼 인간의 삶이란 고귀하여 포기할 수도, 포 기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 한쪽에 망연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동방옥을 보았다. 동방옥은 그렇게 기쁜 심정만은 아니었다. 비록 마의 불귀림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앞으로의 걱정이 태산 같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옥(玉)동생!" "......!" 동방옥은 백연연의 담담한 호칭에 흠칫했다. 백연연이 맑고 그 윽한 눈에 따스한 빛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연연이 말했다. "동생, 오늘 안으로 용대인은 동생의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 동방옥의 우울한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백연연은 미소지었다. "용대인은 옷이 많이 찢어지고 더럽혀졌어요. 동생이 꿰매고 손질해 주어야겠어요." 그 말에 동방옥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녀는 곧 기대와 불안에 찬 눈길을 장천린에게 옮겼다. 장천린은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곧 싱긋 웃었다. "해 주겠느냐, 소옥?" '아!' 동박옥의 두 눈에 뽀얀 이슬이 어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 다. 허나 그녀의 고개는 연방 몇번이고 끄덕여지고 있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낙담으로 짓눌렸단 가슴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 × × 용등대(龍登台), 용(龍)이 하늘로 오르려다 굳은 듯 해구(海口) 에서 남서쪽으로 사십 여리 떨어진 곳이다. 바다(海)와 연한 해안에 온통 흑암(黑岩)으로만 이루어진 거대 한 바위가 있다. 바위라기 보다는 하나의 절벽과 같은 곳이었다. 높이가 삼십여 장 남짓되는 용등대가 성난 포효를 지르며 막 등천하는 용의 형상으로 솟아 있다. 문득, 한 인영이 나타났다. 바로 동방사성이었다. 마침내 그는 황금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까마득히 솟은 용등대 아래까지 그는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황금에 대한 탐욕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다 왔다! 귀두암(鬼頭岩)을 찾으면 된다.' 그는 용등대 위로 숫구쳤다. 그는 용등대를 오르며 면밀히 살 폈다. 그의 마음은 황금에 대한 조급함과 설레임으로 꽉 차 있었 다. '저것이다.' 마침내 정상 부근에 이르러 그의 눈자위가 경련했다. 그렇다. 정상 바로 아래 약간 평범한 지대가 있었고 그 사오 장 위에 흡사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의 머리 형상의 바위가 있었다. 동방사성은 희열에 몸을 떨며 신형을 날렸다. 허나 그는 난색 을 띄웠다. '이것을 어떻게 부순단 말인가?' 귀두암은 보통 큰 것이 아니였다. 동방사성은 잠시 망설이다 곧 쌍장에 내공을 주입하여 귀두암의 한 부분을 쳤다. 펑! 허나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저 약간 흔들리기만 했다. '바위가 너무 크다.' 문득 그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다음 순간 그의 허리에 검은 쌍철편(雙鐵鞭)을 꺼내더니 내공을 주입했다. 웅! 철편이 뻣뻣이 일어서자 그는 그대로 바위를 내려쳤다. 퍽! 비로소 바위 한쪽이 떨어져 나가자 그는 미친 듯이 쌍철편 을 휘둘렀다. 팍! 팍! 펑! 드디어 바위 아랫부분이 부서져 나가더니 점차 귀 두암이 떨어질 듯 흔들거렸다. "후후, 이제 조금만 더 치면." 펑! 순간, 우르르! 마침내 귀두암이 균형을 잃고 그대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우르르 쿵쾅! 용등대 아래로 귀두암은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귀두암이 떨어지자 그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안으로 동 굴이 뻗어 있었다. "이것이다!" 동방사성은 기쁨에 어쩔 줄 몰라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그는 동굴 속으로 뜰어갔다. 그곳은 인공(人工)으로 뚫린 곳이었고 아래로 계단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단 아래....... "오! 오! 이것이다!" 동방사성의 넋을 잃은 듯한 탄성이 들렸다. 보라! 굵기가 어른 팔뚝만한 금괴가 동굴 바닥에서 흡사 하나 의 작은 동산만큼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이 아닌가? 찬란한 금빛 광채가 온통 동굴을 메우고 있었다. 동방사성은 떨리는 손으로 금괴 한 개를 집어들었다. 그의 눈 은 경악과 흥분으로 한껏 벌어져 있었다. "이것이 금(金)이란 말인가?" 그는 의심스러운 듯 금괴를 이빨로 깨물어 보았다. 선명한 아 빨 자국이 생겼다. 다음 순간 그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금이다! 금!"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으핫핫, 이제 나는 거부가 되었다. 으하하, 이것으로 나의 꿈은 이룩되었다." 동방사성은 금괴를 두팔 가득 끌어안고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핫핫, 이제부터 나 동방사성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헌데, 마치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빈정거리는 음헌한 소 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수고했다. 동방사성!" "......!" 동방사성은 부르르 떨더니 뒤로 돌아섰다. 동굴 입구로부터 일 곱 명의 인영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맨 앞, 일남일녀가 만면에 요악(妖惡)한 웃음을 띄고 있었다. 금월(金月)과 요미(妖美), 바로 그들이 아닌가? 그들 뒤로는 흉 악하게 생긴 인종(人種)이 각각 틀린 오 인이 따랐다. "너희들은?" 언뜻 동방사성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금월의 두 눈에 으스스한 한기가 어렸다. "검은 바람, 들어 보았느냐? 흐흐, 나는 검은 바람의 두령 금월 (金月)이다." '헉!' 동방사성은 멈칫했다. 금월은 광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핫핫핫! 동방사성, 너는 진정 수고했다. 나로 하여금 이 많은 금을 그냥 얻게 해주다니 말이다." 동방사성의 얼굴에 분노와 살기가 일어났다. "검은 바람, 명성은 들었다. 하나 이 황금은 내 허락없이 아무 도 건드리지 못한다." 그는 황금더미 앞을 가로막았다. 그 말에 금월은 두 눈에 광기를 띄우며 말했다. "흐흐, 나 금월이 한번 마음먹은 것은 모두가 내 것이다. 못 믿 겠다면 곧 알게해 주마." 츳! 예리한 음향과 함께 그의 소매 속에서 종잇장같이 얇고 폭 이 좁은 면도가 나타났다. 순간 면도로부터 무서운 살기가 치뻗었다. "......!" 동방사성은 압박감을 느꼈다. 하나 그 역시 자신의 무공을 믿 었다. 그는 쌍철편을 굳게 움켜쥐었다. "덤벼 보아라. 동방사성! 흐흐흣! 단숨에 도륙을 내주마!" "미친 놈!" 쐐-액! 동방사성은 선공(先攻)을 했다. 쌍철편이 허공을 메우자 금월의 면도가 쾌속무비하게 움직였다. 쐐- 액- 날카로운 호곡성과 같은 금속성이 울리며 섬뜩한 도기 가 뻗었다. 언뜻 초승달과 같은 뿌연 도형(刀形)이 그려졌다. "헉! 천월도법(天月刀法)!" 동방사성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훗훗훗, 눈은 있구나." 금월은 도를 아래로 기울며 음산하게 웃었다. 동방사성의 마음은 다급하고 초조해졌다. 동시에 불길한 예감 이 들었다. '하나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황금을 지켜 야 한다.' "타!" 쐐애액! 쌍철편이 무서운 괭음을 내며 금월을 향해 날아갔다. 금월은 흠칫하며 옆으로 미끄러졌다. 캉! 쌍철편은 금괴더미에 떨어졌다. 금괴가 박살나며 금조각이 사방으로 눈부신 광채를 뿌리며 날아갔다. 한편, 요미(妖美)는 요염한 눈을 반짝이며 내심 중얼거렸다. '대단하구나. 저 자의 무공은 소문 이상이구나. 저 채찍에 맞으 면 끝장이겠구나.' 그녀는 힐끗 오인(五人)의 괴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오 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타!" 금월은 괴이한 웃음을 흘리며 돌연 금괴 하나를 발로 겉어찼다. 윙! 금괴는 채찍에 맞아 두 동강이 났다. 그 순간. "흘흘흘!" 금월의 입에서 마치 가래가 끓는 듯한 괴소가 터져나오며 그의 도(刀)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쓰쓰쓰! 츄리릿! '헉!' 너무나 빠른 도(刀)의 움직임은 흡사 달빛이 파도에 무수히 난 반사되는 것처럼 현란하고 스산했다. 동방사성은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나 도기에 닿은 가슴 옷 자락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가슴이 화끈했다. 어느새 가슴에 십여 군대의 도상(刀傷)을 입은 것이었다. 그때였다. "흣!" 돌연 동방사성의 뒤쪽에 있던 요미가 입술을 오무리더니 무엇 인가를 불었다. 푸른 빛이 번뜩였다. "윽!" 동방사성은 어깨가 뜨끔했다. 그의 어깨에 푸른색 침(針)이 박 혔다. "네, 네 년이." 그가 시선을 돌린 순간, "킬킬!" "뒈져라!" 위-잉! 다섯 명의 괴인이 그를 공격했다. 그들의 공격은 무지막지했다. 무기는 구환도(九環刀), 쌍절곤(雙 折棍), 귀두봉(鬼頭棒), 거치도(巨齒刀), 선인장(仙人掌)등 하나 같 이 잔인한 외문병기였다. "비, 비겁한." 동방사성은 오 인의 공격을 받자 금시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쌍철편을 아무리 휘둘렀으나 역부족이었다. "으윽!" 그는 거치도에 어깨의 살점이 날아가자 비명을 질렀다. 하나 그들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ㅋㅋ, 쓰러져라! 윙! 선인장이 그의 허리를 스쳤다. "큭!" 허리에서 피와 살점이 뜯겨져 나왔다. 동방서성은 너무도 고통 스러워 급급히 뒤로 후퇴했다. 허나, 그의 바로 뒤에 금월이 음산 한 눈빛을 번뜩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깜박 잊고 있었다. 번쩍! 금월의 도(刀)가 사정없이 그의 등줄기를 갈랐다. "으윽!" 동방사성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등줄기가 무참하게 베어졌다. 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의 상처였다. 그는 쌍철편을 떨구며 비틀 거렸다. "이 해적놈들이." 하나 금월은 음험하게 중얼거렸다. "동방사성, 이제 너는 끝이다." 그는 도를 빙글 돌렸다. "으악!" 동방사성의 양다리가 절단났다. 그는 금괴위로 쓰러졌다. 그의 다리에서 치솟는 핏물이 금괴 위로 뿌려졌다. "끄으." 동방서성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의 몸 아래에는 금괴가 있었다. '이 황금을 바로 눈앞에 두고서.' 그의 손이 뻗었다. '꿈, 나의 꿈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거늘.' 그는 힘겹게 금괴를 움켜쥐었다. 허나 이미 그는 금괴의 촉감 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금괴는 마치 그를 비웃 듯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동방사성의 뇌리에 문득 늙은 탁일비 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아까운 청춘(靑春)을 이제는 쓰지도 못하는 황금에 집착해 흘 려버린 것이야.' 동방사성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과연, 과연 그런 것인가?' 그의눈에 문득 동방옥의 환상이 떠올랐다. 일찍부터 고아가 되 어 유일하게 유지홰왔던 남매, 갑자기 그는손에 들고있는 금괴가 아무런 소용도 없는 돌덩이인 것을 느끼면서 미친 듯이 동방옥이 보고 싶어졌다. "소, 소옥." 끝이었다. 마침내 동방사성은 금괴에 머리를 떨구며 죽고 말았 다. 결국 그는 인생을 오로지 황금에 걸었다가 그 황금더미 위에 서 생의 고별을 기하고 만 것이었다. 그 얼마나 모순된 죽음인가? 금월은 그의 시체를 향해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해남의 손 꼽는 고수인 동방사성도 별 것 아니군." 그는 시선을 돌려 황금더미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앙 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이제 나는 천하(天下)를 얻었다!" 그때 요미가 역시 황홀한 표정으로 금괴를 들고 다가왔다. "핫핫핫, 기뻐해라, 요미. 이제 나는 제왕(帝王)이 되고 너는 나 의 제국(帝國)의 여주인이 되는 것이다. 으하하하." 요미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에 두 손을 걸고 매달렸 다. "이제 돌아가야지요?" "핫핫, 물론 황금을 얻은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지." 금월은 다시 한 번 요미를 끌어 안은 채 기쁨에 찬 광소를 터 뜨렸다. "으하하하하!" 第 57 章 明과 暗 밀림에 싸인 장원(莊院), 황금의 손 탁일비의 장원은 불에 반쯤 타 있었다. 석양(夕陽)이 기울고 있었다. 장원의 넓은 대청(大廳), 석양이 비스듬히 비쳐드는 대청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장천 린이 우뚝 서 있고 그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장천린은 여전히 백연연을 안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반송을 비롯한 부금진, 단위제, 동방옥, 그리고 운표와 백살대(百殺隊)가 있었다. 운표는 밀림으로 가던 도중 장천린을 만났다. 그의 기쁨은 이 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염려했던 용대인은 물론 모두가 무 사하지 않던가? 그들은 다시 탁일비의 장원으로 돌아왔다. 운표는 장천린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용대인님, 이제 좀 쉬시지요." "괜찮네." 장천린의 담담한 말에 운표는 미소지었다. "용대인께서 무사하신 줄을 알면 대주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 입니다. 그 동안 대주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운표, 자네도 그 동안 수고했네." "황송합니다. 당연한 것인걸요." 이때, 옆에서 부금진에게 상처를 치료받던 단위제가 문득 괴소 를 흘렸다. "흐흐, 운표, 자네 그 동안 바둑의 묘수 좀 생각했는가?" 운표는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저는 바둑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을 회피하렵니다." "흐흐, 하수임을 인정하는가?" 운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인정합니다. 하나, 바둑만 잘 두고 자신의 몸 하나 간수 하지 못하는 것 보다는 제가 오히려 낫지 않습니까?" "뭣이!" 단위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흐읏, 화내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상처가 터질 염려가 있으니 까 말입니다요." "운표, 날 놀리는가?" "놀리긴요? 제가 어찌 고명하신 단도독님을 놀릴 수 있겠읍니 까요?" "......!" 단위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운표는 다시 험상궂은 웃음을 흘렸다. "햇햇, 정 화내고 싶으시다면 수하들을 시켜 상처를 철사줄로 꿰매 드리죠. 아예 상처가 터질 염려가 없게 말입니다." 단위제의 얼굴은 아예 일그러지고 말았다. '요, 요놈의 자식이 나를 갖고 노는 구나.' 하나 단위제는 역시 단위제였다. "헛헛, 자네 많이 발전했군." 짐짓 너그럽게 말했으나 운표 역시 한 술 더 떴다. "모든게 단도독님 덕분이죠." '끙!' 단위제는 내심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상처만 나으면 아예 곤죽을 만들어 주마.' 이때 장천린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한데 그는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 를 돌려보았다. 동방옥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수심으로 덮여 있었다. '음, 원제가 동방사성을 추격한 것을 걱정하고 있구나.' 그는 그녀에게 절로 연민지정이 이는 것을 느끼고 그녀를 불렀 다. "소옥, 부탁이 있다." "......?" "아까 부탁했듯이 오늘 저녁 내 옷을 손질해 주겠느냐?" 동방옥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안색 이 좀 밝아지고 있었다. "하하, 그리고 너도 옷을 갈아입어야 되겠다. 남장도 예쁘지만 아무래도 너 같은 미녀는 예쁜 옷을 입어야 제격이 아니겠느냐?" 동방옥은 홍조를 띄우며 고개를 떨구었다. 또한 장천린이 중인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은근히 기쁘기도 했다. 이때, 한쪽에서 반송이 말했다. "동방소저, 좀 도와주시겠소?" "네, 반대협님." 동방옥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장천린의 품에 있던 백연연이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후훗! 용대인께선 여인의 마음을 풀어주는데 꽤나 능숙하군 요?"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몸은 좀 어떻소?" "무척 좋아졌어요." "하하, 이제 다시는 그때 같은 행동은 하지 마시오." 백연연은 홍조를 띄우며 예쁘게 눈을 흘겼다. "못써요. 용대인님."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이 한쪽을 보며 번 쩍 뜨였다. 한 사나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도(魔刀) 원계묵이었 다. 원계묵은 탁일비의 시신을 안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미처 장천린을 보지 못한 듯했다. 장천린의 두 눈에 기쁨이 어렸다. "원제!" 그 말을 듣는 순간 원계묵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그의 두 눈에 경련이 일어났다. "혀, 형님!" 탁일비의 시체를 바닥에 눕힌 원계묵이 다가왔다. "소진, 백소저를." 그 말에 부금진이 급히 백연연을 안았다. 장천린도 원계묵을 향해 나갔다. 두 사람은 천천히 마주보며 나간다. 이윽고, "원제." "형님!" 두 사나이는 굳게 서로를 포옹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었다. 굳센 포옹 속에서 뜨거운 사나이 의 정이 전류처럼 오고갔다. 원계묵의 두 눈에는 이슬이 고여 있 었다. 장천린 역시 굳게 원계묵을 포옹한 채 감회깊은 표정을 지 우지 못하고 있었다. 단위제는 그 광경에 내심 중얼거렸다. 'ㅉ, 너무도 부러운 사이야. 친형제라도 저 정도로 서로를 아끼 진 못할 거야.' 그는 웬지 질투심에 가까운 부러움을 느꼈다. 그는 슬적 곁에 있는 운표를 바라보며 말했다. "운표, 한 가지 제의가 있네. 우리도 의형제(義兄弟)를 맺는 것 이 어떨까?" 순간 운표는 멍청해졌다. 하나 곧 그는 피식 실소하며 말했다. "차라리 부자지간이라면 어떻겠슴니까?" 이어없다는 그의 반문에 단위제의 얼굴은 그만 똥칠이 되고 말 았다. 운표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원, 영감님이 주착이시지, 나이를 생각해야죠." 순간, 단위제는 이를 갈았다. "운표, 내 맹세하겠다. 상처만 나으면 삼 년 동안 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주겠다!" 하나 운표는 콧구멍을 후비며 웃었다. "헛헛, 좋습니다. 백 년이라도." 단위제와 운표, 잘(?) 어울리는 견원지간이었다. × × × 밀림(密林), 이곳에 아직도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석정일랑(石井一郞), 바로 그였다. 그는 반쯤 넋나간 망연한 표 정이었다. 그는 해남도에 홀로 도착했다. 중간에서 바다 위에 사 백인의 무사들이 불덩이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해남도에 도착한 후 이제까지 반 시진 내내 계속 청산의 명에게 비밀신호를 계속 보냈다. 하나, 그 누구도 그에게 응답해 오지 않았다. 그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 '여기서도 모두 죽었단 말인가?' 그의 눈은 절망의 빛에 싸이고 말았다. '청선의명, 당신까지도?'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서쪽하늘을 응시했다. 핏빛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 다. 섬뜩할 정도로 붉은 노을이....... 그는 다시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손안에는 조그만 풀로 만든 특수한 신호용 호각이 있었다. 그는 다시 석양을 응시했다. 떠오르는 얼굴들, 무수히 떠오르는 얼굴들, 그는 무엇에 쫓기듯이 호각을 입으로 분다. 삐이익! 삐이익! 날카로운 호각소리는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석정일랑은 두 눈 을 감고 계속 호각을 불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오백 인의 무사들이 모두 죽었단 말인가? 수족 같은 그대들이 말인가? 청산의명,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가? 대체 당신은 어디있 소.' 삐이익! 석정일랑은 계속 호각을 불었다. 적막한 석양 속에서 공허하고 구슬픈 느낌이 드는 호각소리가 길게 이어져 갔다. 마치 망자(亡者)의 넋을 달래는 진혼곡인 양. 얼마 후, 석정일랑은 두 눈을 떴다. '가자. 이제 돌아가자. 다시 마을로 돌아가는 수밖에.' 그는 허망했다. 하나 그가 어찌 알 수 있으랴? 그가 돌아갈 마을에서는 이미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 다는 것을. 마을이 불타고 한 명도 남지 않고 검은 바람에 유린 당한 것을 어찌 그가 상상할 수 있으랴? "......!" 문득 돌아서려던 석정일랑은 몸이 굳어졌다. 석양을 등지고 누 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석양만큼이나 피를 뒤집어 쓰고 장도를 지 팡이 삼아 비틀비틀 걸어오는 인물은. 아! 세천상유! 바로 그가 아닌가? "상유(常有)!" 팍! 석정일랑은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그는 세천상유의 쓰러지 려는 몸을 부축했다. 세천상유의 외눈은 희미했다. 이미 초점이 맞지 않은지 오래였 다. 너무나도 끔찍했다. 도저히 그가 산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온통 피로 엉켜 있는 세천상유는 그래도 석정일랑 을 알아보았다. "석정일랑님." "어찌된 일이냐?" "모두 죽었습니다. 의명님도, 모두 다 죽음의 숲에서." "상유!" "하나 저는 죽을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생존자로서 알려야 하 기에." 세천상유는 그 말을 마치고 혼절해 버렸다. "......!" 석정일랑은 망연자실했다. 그는 움직일 줄 몰랐다. 아주 오랫동 안 그는 움직일 줄 몰랐다. 노을은 타다가 아주 붉게 타다가 점차 사위어 가고 있었다 밀 림도 검게 삭아들고 있었다. 第 58 章 琵琶, 美女, 바다 만경창파(萬頃蒼波), 남해의 벽록색 바다 위에 순풍을 타고 항 해하는 한 척의 범선이 있었다. 하늘에는 뭉개구름이 한가롭게 떠 있고 물결은 잔잔하기만 했다. 범선의 뱃머리, 장천린은 뒷짐을 지고 서 가없는 수평선을 바 라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원계묵이 있었다. 범선은 해구(海口)에서 새로이 수입한 것이었다. 장천린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뭏든 이번 해남도의 일은 진정 파란만장 했다." 그의 얼굴에 약간 그늘이 졌다. "안타까운 것은 구룡상선에 충성했던 인부들 육십 명이 죽은 일이다." 원계묵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장천린의 마음을 위로하듯 덧붙였다. "하지만 이곳에 온 목표인 황금을 얻어 불행중 다행이 아닙니 까?" 그렇다. 장천린은 원계묵으로부터 탁일비의 황금이 백사안(白 沙岸)에 묻혀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백살대와 함께 해구(海 口)에서 동쪽으로 백 리 떨어진 백사안으로 갔다. 과연 그곳에서 막대한 양의 황금괴가 묻혀 있었다. 처음 백사 안에 도착했을 때는 넓은 모래밭의 어느 곳에 황금이 뭍혀있을지 몰라 당황했으나 장천린이 그 해답을 생각해 냈다. 그는 긴 대죽(竹)으로 백사안의 모래를 찔렀다. 그러다 마침내 금괴 묻힌 장소를 발견하고 반나절 걸려 금괴를 파냈다. 금괴의 양은 실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장천린은 신뢰가 담뿍 담긴 눈으로 원계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일에 원제의 공이 켰네." 원계묵은 겸손하게 말했다. "그저 탁노야를 우연히 만난 것이 행운이었을 뿐입니다." 이어 그는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탁노야가 황금을 묻어둔 나머지 세 곳을 다 말하지 못하고 죽은 일입니다."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상관 없네. 백사안의 황금만 해도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 으니까." 원계묵은 궁금한 듯 물었다. "어느 정도 입니까?" "은자 오천만 냥을 훨씬 상회하네." 그 말에 원계묵은 혀를 내둘렸으나 곧 한숨을 쉬었다. "만약 탁노야의 황금을 다 얻었더라면 중원 제일의 거부가 되 었을 것을." 장천린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실상 그는 오히려 탁일비의 황 금의 오분지 일만 얻은 것이 더욱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 면 다 얻었더라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중원제일의 거부거상이 되겠다는 애초의 정상에 대한 그 의 열망도 어쩌면 퇴색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원계묵이 그의 그런 심중을 알 리가 없었다. 무인으로서 상인인 장천린을 이해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었다. "동방사성은 황금을 얻었을까요?" 원계묵의 말에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모르지." 이어 빙긋 웃었다. "후후, 그가 얻었다면 중원에 또 다른 거부가 출현하겠지." "하하하!" 원계묵은 웃음을 터뜨렸다. 동방사성에게 증오심을 가지고 있 었으나 곧 장천린 곁에 동방옥이 있음을 알고는 동방사성에 대한 증오를 어느 정도 식힌 것이었다. 문득,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앞으로는 결코 형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해남에서 처럼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말입니다." 장천린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하나 그는 빙긋 웃었다. "이 사람, 나중에 그럼 신방(新房)까지 따라 오겠군?" "핫핫핫, 설마요." 장천린도 따라 웃었다. 하나 잠시 후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 기회를 교훈삼아 나는 앞으로 틈나는 대로 무공(武功)을 더 수련할 셈이네." 원계묵의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는 눈을 번쩍였다. "형님 같으시면 장차 상계(商界)와 무림계(武林界)의 양대 거물 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하하, 농담하지 말게. 원제." 장천린은 가볍게 웃었다. 하나 원계묵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니다. 농담이 아니다. 형님이라면 능히 그렇게 되시고도 남 을만한 분이다. 나 원계묵, 평생 누구에게도 한 사람에게도 이렇 게 빠져보길 처음이다. 형님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단 말이오.' 생각에 잠겨있던 원계묵은 문득 흠칫했다. 갑판 저쪽에 동방옥 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곧 그는 장천린에게 말했다. "형님,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흠, 언제라도 떠나지 않는다면서?" "하하, 하나 그것도 때를 가려야죠." 원계묵은 말을 돌리면서 슬쩍 동방옥이 있는 곁으로 눈을 찡긋 해 보였다. 그제서야 장천린은 동방옥이 서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싱긋 웃었다. 비로소 원계묵의 의도를 눈치챈 것이었다. 그는 동방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옥." 동방옥은 얼굴을 붉히며 다가왔다. "용대인님." 그녀는 아름다왔다. 피바(琵琶)를 옆에 낀 그녀는 마치 딴 사람 이 된 것 같았다. 홍의(紅衣)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불타는 듯한 정열이 넘쳐 보이고 있었다. 마치 한 송이의 홍매화(紅梅花)와 같다고나 할까? 요염함과 정 숙함이 함께 내제되어 있는 듯한 그녀의 자태는 장천린의 마음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흐음! 역시 그렇게 차려 입으니 미인이군." 장천린의 말에 동방옥은 얼굴이 붉게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 녀의 하이얀 목덜미가 유난히 요염해 보였다. 그녀는 잠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해요, 용대인님." "무엇을 말이냐?" "오라버니를 추적치 않고 놓아 주신 것 말이예요." 그녀가 어찌 알랴? 동방사성, 그는 황금더미 위에서 비참한 종 말을 고했다는 것을. 장천린은 담담히 물었다. "보고 싶지 않느냐?" "조금은... 하지만 그 분은 저와 항상 이상이 달랐어요. 어째든 그 분의 소원대로 황금을 얻었으니 저는 마음의 부담이 없어졌어 요. 모두 다 용대인님의 덕분이예요."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그의 곁에는 오랫동안 여인이 없었다. 취옥교와 헤어진 이후 그는 여인에게 한 번도 관심을 둔 적이 없 었다. 한데 해남에서 만난 동방옥은 유난히 그의 마음을 잡아끄는 구 석이 있었다. 장천린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보았다. "......!" 동방옥은 그의시선을 느끼자 온 몸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것 을 느꼈다. 그의 앞에만 서면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진다. 마치 한 마리 새처럼 그녀는 가슴이 뛰기만 했다. 특히 환난을 겪은 이 후 그녀의 인생은 이제 장천린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 도로 그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소옥." 부드럽고 달콤한 장천린의 음성에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 다. "네." 장천린은 문득 타는 듯한 시선으로 물었다. "내가 너와 만난 그 날 한 말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냐?" 순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는 그만 홍당무가 되는 동 방옥이었으나 그녀는 용기를 내어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네." "하하하핫!" 장천린은 낭랑한 대소를 터뜨렸다. 그 바람에 동방옥은 너무나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지만 반면 기쁘기도 했다. 어쨌든 장천린이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은 그녀를 곁에 두겠 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녀는 범선에 오를 때부터 수없이 자신에게 다짐하곤 했었다.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용어른의 곁을 떠나지 않을테야, 영 원히!' 장천린은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창공의 밝은 햇살이 그의 전신을 비추고 있었다. '너무도 아름답고 멋진분.' 동방옥은 눈이 부심을 느꼈다. 그때 장천린의 음성이 들렸다. "소옥, 비파 한곡(曲) 타 주겠느냐?" "네." 동방옥은 다소곳이 대답하고는 그 자리에 앉았다. 이어 비파의 현을 고른 다음 그녀는 조용히 비파를 타기 시작했다. 띵- 띠딩- 띵. 곱디 고운 비파의 선율은 남해의 만경창파를 타고 아름답게 퍼 져 나가기 시작했다. 바다 가득 번지는 비파음(琵琶音) 속에는 사 랑과 존경, 그리고 헌신의 마음이 실려 있었다. 비파(琵琶)와 미녀(美女), 그리고 바다(海)가 음률 속에 춤을 추 고 있었다. - 大尾 (1부끝) - 第 59 章 古拉特城의 浪人市場 대륙(大陸)의 풍운(風雲)은 역사(歷史)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 얼 마나 많은 부침을 거듭하였는가? 대륙의 주인(主人)이 한 번 바뀔 때마다 숱한 피(血)가 황하(黃 河)를 적시었고, 그 사실은 또 다시 세월(歲月)속에 잊혀져 가 고....... 또 다시 대륙의 봄(春)은 타버린 박토 속에 잊혀졌던 뿌리로 일 어서면서 무성한 초록을 떨쳐버리니. 겨율(冬)이 가고 봄(春)이, 다시 여름(夏)을 지나 가을(秋)이 오 는 것은 대자연(大自然)의 섭리이리라. 대원제국(大元帝國)! 한때 천하(天下)를 통일했을 뿐더러 먼 이역(異域)의 영토까지 대장정(大長征)의 힘찬 거보(巨步)로 군림하였던 제국의 역사, 허 나 그것도 한낱 사기(史記)의 한 부분이 된 오늘....... 대원(大元)을 일으켰던 몽고의 후예들은 중원의 북방에서 크게 네 개의 세력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천산북로(天山北路)에 위치한 막서몽고(漠西蒙古)를 위시하여, 청해지방(靑海地方)의 청해몽고(靑海蒙古), 홍안령(興安嶺)일대에 자리잡은 막북몽고(漠北蒙古), 열하(熱河), 찰합이(察哈爾) 일대의 막남몽고(漠南蒙古). 네 곳으로 분할된 대원의 후예들은 제국의 영광을 아득한 과거 의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었을 뿐 오늘 날에는 서로의 내분으로 인해 그 중흥의 기회를 번번히 놓치며 오히려 여진의 강성함에 밀려 쇠태일로의 길을 밟고 있었다. 때는 대명(大明) 만력(萬歷) 사십오년(四十五年). 이제 또 하나의 풍운(風雲)이 북방의 거친 황원(荒原)에서 일어 난다. × × × 고랍특성(古拉特城). 이곳은 막남몽고(漠南蒙古)의 북서(北西)쪽에 위치한다. 중원의 북방에 위치한 이곳은 지리적으로 아주 특이한 곳이다. 중원과는 판이한 풍속을 지니고 있을뿐더러 각계각층의 신분과 계급, 그리고 인종(人種)의 전시장이라 할만큼 타인종의 사람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특히, 이곳이 유명한 것은 이른바 낭인시장(浪人市場)이라 불리 는 특수한 시장이 이곳에서 일년에 네 차례씩 열리기 때문이었다. 낭인시장(浪人市場), 보통의 시장처럼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인간(人間)이 마치 상품처럼 거래되고 있었 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시장은 단연코 아니었다. 낭인시장에서는 한 가지라도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재주를 파는 것이다. 자신의 신상명세서를 적어 성내(城內)의 매매중개업자에게 제 출한다. 매매중개인은 그런 사람들, 즉 낭인(浪人)들의 신상명세서 를 수십 또는 수백 장씩 지니고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서류를 보 여주며 필요한 낭인을 선택케 한다. 즉 인간을 상품으로 놓고 손님과 매매업자가 적당한 가격으로 거래하는 것이다. 일단 팔린 낭인은 자신을 산 사람에게 일정기간 동안 봉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곳 낭인시장에 몰려드는 인종은 부지기수이며 그들은 갖가지 희귀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 허나 그들 중 태반은 낭인무사(浪人武士)들이었다. 즉 자신들의 무예(武藝)를 돈을 받고 파는 것이었다. 낭인시장이 형성된 데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예로부터 중원의 자치구를 벗어난 북방지역에는 비적이 많다. 그 비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거나 또는 대상(隊商)들이 상품 교육을 할 때 운송중에 호송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낭인시장이 형성된 것이었다. 장사를 하는 상인(商人)들이나 각 지방의 호족(豪族)들, 또는 농 사를 짓는 사람들이 비적의 식량수탈에 대응하기 위해 주로 낭인 시장의 주요고객이 되고 있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낭인시장은 번창하였으며 해가 갈 수록 수 많은 낭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차례에 걸쳐 열리는 낭인시장은 그 규 모가 클뿐더러 활기를 띄고 있어다. 낭인들 중에는 개인자격으로 오는 자도 있었고 또는 수십, 수 백 명이 무리를 지어 그들의 수뇌자가 대표로 계약하는 수도 있 었다. 그들은 일단 계약금을 받고 고객의 주문에 응한다. 그리고 나 머지 금액은 봉사기간 동안에 나누어 지급되는 것이다. 이 낭인시장은 신의(信義)를 생명으로 내걸고 있다. 만일 약정 을 위반하게 되면 그 이후에는 낭인시장에서 전혀 거래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면 다음 해의 그 낭인의 몸값은 반드시 뛰게 되어 있었다. 한 가지 모순점이라면 낭인들 중에 과거에 비적에 몸 담았던 자들도 있었다. 허나 낭인시장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철칙이 있다 면 그것은 여하한 경우라도 낭인의 과거는 불문에 부친다는 것이 었다. 고랍특성의 낭인시장, 그곳은 바로 그런 특이한 곳이었다. × × × 성명(姓名) : 담오(覃吾), 나이 : 삼십 칠 세(三十 七 歲), 출신(出身) : 한인(漢人) 부친과 아국(俄國 : 러시아) 모친 사이 에 태어남 경력(經歷) : 살인(殺人) 이십칠회(二十七回), 약탈 십육회(十六回), 방화(防火) 삼회(三回), 금액(金額) : 평생(平生) 계약으로 스스로 은자(銀子) 삼십만냥 (三十萬兩)을 요구하고 있음. 기타(其他) : 시키는 일은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함. "재미있는 자군." 손님이 나직이 웃었다. 낭인점포 만사통방(萬事通房)의 주인인 매매중개인은 손님의 눈치를 보며 두 손을 비볐다. "예, 아주 괴상한 놈이지요. 하지만 너무 위험한 놈이오니 웬만 하시면 다른 놈으로." 전신에 용포(龍袍)를 걸치고 금은보석으로 장식한 손님은 그 말 에 씩 웃었다. 극히 매력적인 미소였다. 고랍특성의 낭인매매중개인의 한 명인 합향거(合香居)라는 이 름을 가진 중개업자는 그 미소에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화려한 복장의 손님, 그는 이 옷차림 이상으로 화려한 용모였다. 나이는 이십을 좀 넘어 보였으나 워낙 침착하고 완숙한 몸가짐으로 인해 훨씬 성숙한 느낌을 주었다. 준수한 용모였다. 비록 자세히 보면 얼굴에 긴 상처의 흔(痕)이 있었으나 오히려 그 점이 더욱 사나이다운 매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차가운 듯한 별빛 같은 두 눈빛은 특히 사람을 은연중 압도하 는 면이 있었다. 이렇게 특이한 분위기의 손님은 합향거는 생전 처음보았다. 손님의 뒤켠, 바짝 붙어 서 있는 사람은 역시 이십대의 청년이 었는데 처음 그를 보는 순간 합향거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얼 어붙는 것을 느꼈다. 마치, 살모사 같은 분위기였다. 그 약간 들어간 째진 눈에서 흘 러나오는 무심한 빛이 마치 비수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었다. 합향거는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이 자는 아무튼 좀 괴이한 놈이지요." 문득 손님은 담담히 말했다. "흠! 이 친구는 이렇듯 많은 살인과 약탈, 방화를 하고도 법(法) 에 걸리지 않았단 말린가?" 합향거는 입술에 침을 축였다. "그 자의 이야기로는 자신이 저지른 일은 본 사람이나 아는 자 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헤헤, 깨끗이 증거인멸을 했다고나 할까요?" 화려한 손님, 즉 장천린은 매우 흥미있는 표정을 지었다. "주인 생각으로는 그 자의 평생 계약금이 은자 삼십만 냥이라 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오?" 합향거는 손을 벌리며 말했다. "터무니없는 액수입죠. 내가 비록 이 장사를 하긴 하지만, 일반 낭인무사 한 명을 고용하는데 일 년 계약으로 많아야 오백 냥에 서 일천 냥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추면 정말 터무니 없는 미친 요구입죠." 합향거는 마치 자신이 매우 양심있는 장삿꾼이라는 것을 설명 하듯 침을 퉁기며 덧붙여 설명했다. "삼일 전에도 부하 이백 명을 데리고 있는 요대서(遙大書)란 인 물도 이 년 계약으로 이백 명 수하 모두와 함께 은자 십만 냥에 계약했지요. 헌데 겨우 일인(一人)의 계약에 삼십만 냥이라는 것 은 터무니 없는 수작입죠." 장천린은 담담히 물었다. "이곳으로 그 자가 온 것은 언제죠?" "일 년 반 정도 됐읍죠. 보시다시피 아직 팔리지 않고 있습니 다." "흠!" "헤헤, 정신이상자가 아니고서야 그 놈을 살 까닭이 있겠습니 까?" 장천린은 히죽 웃었다. "잘못하면 내가 그 정신이상자가 될지도 모르겠군." "예?" 합향거는 멍청해졌다. 허나 장천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계묵!" "예, 형님!" 그의 뒤켠에 살모사같이 생긴 청년은 물론 두 말할 필요도 없 이 원계묵이었다. "반송과 같이 그 자를 찾아보아라. 그 자가 과연 삼십만 냥의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게." 원계묵은 그 말에 미소지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이어 그는 뚜벅뚜벅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합향거 는 정말 아연해짐을 금치 못했다. '정말, 이 사람이 그 놈을 사려고 한단 말인가? 세상에, 그건 말 도 안된다. 말도 안돼.' "주인장!" 장천린의 말에 합향거는 흠칫했다. "예?" "자, 이제 다른 인물의 서류를 좀 봅시다. 어쨌든 내일까지 백 명 정도의 무사를 골라봐야 하니까." "예, 예! 제가 곧 가져오겠습니다." 합향거의 입이 쭉 찢어졌다. '이거, 오늘 횡재수를 만났는걸? 한꺼번에 낭인 백 명이라.' 그는 서류가 있는 벽장쪽으로 신바람이 나 걸어갔다. 그러다 무심코 창 밖을 본 그는 흠칫했다. 자신의 만사통방 주위에 칼을 찬 백의무사(白衣武士)들 수십 명 이 포위하듯 지켜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하나같이 젊었으나 눈빛이 형형했으며 일당천(一當千) 의 용자들임을 그는 간파할 수 있었다. 합향거는 의혹이 강하게 치밀었다. '대체, 저 손님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그가 어찌 알겠는가? 그 백 인의 도객(刀客)들이야말로 그 유명 한 백살대(百殺隊)라는 사실을? 풍운(風雲)이 인다. 고랍특성(古拉特城)의 낭인시장(浪人市場)에 밀어닥친 풍운, 과연? 第 60 章 돈과 사람, 그리고 칼 사내들이 모이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따라 다니는 것이 있다. 주점(酒店)과 여자(女子), 바로 그렇다. 사나이들이 있는 곳에 술이 있고, 술이 있는 곳에 여자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아랑(阿娘), 아랑은 바로 그런 여자였다. 흡사 철새처럼, 부평초처럼 흘러다니는 여자, 아무에게나 술을 따르고 돈만 내면 누구든지 주무를 수 있는 여자. 아랑은 바로 그런 부류의 여인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싸게 취급받는 삼류 윤락화(倫落花)다. 그녀의 출신은 오사장(烏斯藏 : 서장(西藏))이었다. 그런 아랑에게도 한때 젊었을 적에는 아름다왔을 뿐만 아니라 뭇 청년들의 서망의 대상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 삼십(三十)이 넘은 지금, 그녀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녀는 이제 퇴물인생인 것이다. "아, 피곤해." 아랑은 오전 내내 객방(客房)에서 술취한 손님에게 시달리다가 파김치가 되어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방을 나왔다. 객방의 허름한 나무침상에는 장년의 털투성이 장한이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아랑, 비록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얼굴에 윤택은 없었지만 그래 도 아직 과거의 미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특히, 붕새의 눈처럼 큰 두 눈은 서러운 가운데도 아름답고 천 진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마치 유일한 그녀의 과거를 보는 듯.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주점으로 나왔다. 또 다른 손님을 맞기 위해서였다. 한데. "......!" 그녀는 멈칫했다. 그녀의 서러울 정도로 큰 그늘진 눈망울이 구석진 주점의 한 곳에 못박혔다. 그곳에 한 사나이가 술을 마시 고 있었다. 그가 마시는 술은 싸구려이긴 하나 독한 빼갈이었다. 그나마 주둥이에 이가 빠진 술병을 들어 그는 묵묵히 술을 마 시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낡은 옷, 텁수룩한 수염이 웬지 어두운 그늘과 함께 고독과 방황에 찌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나 그의 그늘진 얼굴도 자세히 보면 상당히 뚜렷한 이목구비 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오랜 세파에 찌든 탓인지 잔뜩 피곤과 권태에 젖어 있을 뿐이었다. 그의 나이는 사십 정도 되어 보인다. 탁자 위에 한 자루의 녹이 쓴 칼(刀)이 놓여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랍특성(古拉特城) 내에서 흔히 볼수 있는 영락한 낭인무사임이 틀림없었다. 아랑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중년 낭인무 사에게 다가갔다. 하나 그녀가 바로 앞에 이르러도 중년인은 그녀 를 바라보지도 않고 술만 마셨다. "저......." 아랑은 잠깐 눈치를 보더니 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조심스 럽게 탁자 위에 놓았다. "술에는 안주가 필요해요. 드시고 싶은 것이 계시면 드세요. 모 자라는 것은 제 앞으로." 그 말에 중년인, 즉 담오(覃吾)는 시선을 힐끗 동전으로 향했다. 이어 그는 천천히 동전을 손으로 집었다. "ㅋ!" 그는 자조의 웃음 같은 괴이한 웃음을 입술 사이로 흘리더니 문득 고개를 돌렸다. "주인장! 여기 술 한 병 더!" 칼칼한 음성이었다. 다만 지나친 음주로 인해 약간 쉬고 꼬부 라진 음성이었다. 아랑은 안쓰러운 듯 말했다. "일 년 이상 당신은 술만 드셨어요. 그러다가 몸에 병(病)이라 도 나시면." 그 말에 담오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부담스럽다면 언제든지 나가주마." 아랑은 그 말에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금시 큰 눈에 눈물이 글 썽해졌다.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한데, 이때였다. "이 새끼로군! 아랑의 기둥서방이란 놈이." 문득 술냄새와 함께 거친 목소리가 아랑의 등 뒤에서 들렸다. 그 자는 허리에 대감도(大坎刀)를 찬 건장한 무사였다. 삼십쯤 되어 보였는데 얼굴에 술기운이 잔뜩 올라 있었다. 그 는 담오를 내려보며 시비조로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 할 지랄이 없어 몸파는 계집에 기생 붙어 피를 빨아 먹 소 사느냐? 불알 두쪽 찬 놈이라면 차라리 벽에 대갈통을 박고 뒈질 일이다." 그 말에 아랑의 얼굴에는 당황이 어렸다. "손님! 그만 두세요. 이 분은......." 그러자 무사는 피식 실소했다. "네년은 배알도 없는 계집이로군!" 이어 그는 아랑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내가 계약만 되면 며칠 안으로 다시 한 번 너를 찾으마." 무사는 말을 마치며 문득 탁자 위에 있던 술병을 들었다. 이어 그것을 담오의 머리 위에 거꾸로 쏟아 붓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에 아랑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녀 는 공포스러운 눈으로 담오를 응시했다. "......." 하나 의외로 담오는 술을 뒤집어 썼어도 안색 하나 변함없이 무표정하기만 했다. 무사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 술이 그렇게도 먹고 싶으면 네 얼굴을 핥아라. 너 같은 놈은 그렇게 먹어야 제격이다. 아핫핫핫핫!" 무사는 여전히 그가 말이 없자 대소를 터뜨리며 밖으로 사라져 갔다. 마치 상대할 값어치도 없다는 듯이. 그가 사라지자 아랑은 황망히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것으로 닦으세요." 담오는 손수건을 받아 묵묵히 얼굴에 흐르는 술을 닦았다. 그 러는 순간 그의 두 눈은 점점 더 음울해지더니 마침내 파충류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순간 무엇을 느낀 듯이 아랑의 안색이 더욱 더 창백해졌다. "안돼요, 참으세요. 그분은......." 하나 담오의 입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몸을 한 번 섞었다고 그를 두둔 하는가?" 아랑의 안색은 아예 희다못해 회백색이 되었다. "어찌 그런 말을." "ㅋㅋ!" 담오는 괴소를 흘리며 술병을 들어 남은 술을 모두 들이켰다. 이어 그는 탁자 위의 녹슨 칼을 집어들며 몸을 일으켰다. "안돼요! 참으셔야 해요. 절대로 다시 또......." 아랑이 매달렸으나 담오는 사정없이 그녀를 밀쳤다. "비켜라." 하나 그가 채 두 걸음도 옮겨놓기 전에 아랑은 그의 앞에 무릎 을 굻고 길을 가로 막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 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가 죽일 년입니다. 제가 과거 당신을 믿고 기다렸 으면 되는 것을. 제가 죽일 년입니다. 제발 참으세요. 담상공." 담오의 몸이 흔들렸다. 그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지고 있 었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그 옛날 너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었고 나에게 필요한 것은 칼 이었지." "상공." 담오의 눈은 허공을 더듬었다. "하나 너는 나의 칼을 용납하지 못했고 나는 너에게 필요한 돈 을 용납지 못했다." 아랑의 몸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결국 너는 돈 때문에 내 곁을 떠났고 지금 너는 삼급 기녀가 되었다. 나는 ㅋㅋ, 칼만 믿고 살다가 가난한 떠돌이 낭인이 되었 지." 담오의 파충류 같은 무심하게 가라않은 눈이 깅하게 번들거렸 다. "십년 전 나는 너를 위해 한때 칼을 놓으려 결심을 했었다. 그 리고 약간의 돈을 모아 너에게로 찾아갔으나 너는 내가 약속한 일년의 기다림도 참지 못하고 마을을 떠났지." 가늘게 어깨를 떤다. 아랑의 얼굴은 바닥에 닿을 듯이 숙여져 있었다. "나는 그래도 네가 행복하기를 마음 속으로 바랬다. 그리고 나 는 아무런 미련없이 다시 칼을 잡았다. 하나 십 년이 지난 지금 너와 나 중 아무도 행복해 지거나 성공하지를 못했다." 담오의 입술 꼬리가 이지러졌다. "ㅋ! 과거의 사랑했던 여인이 타인에게 몸을 파는 것을 바라만 보는 나, 그리고 내 앞에서 그 짓을 하면서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 게 생각하도록 변해버린 너. 흐흐, 세상은 모든게 뒤죽박죽이 되 어 버렸어." 아랑이 고개를 들고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은 저와 당신의 행복을 위한 길입니다. 조금만 더 모으면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담오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는 냉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기에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렸어.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 네게 조금의 감정도 느낄 수 없으니 말이야." "......!" 아랑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제가, 몸을 팔았기 때문인가요?" 담오는 지그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파충 류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만약 내가 너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면, 네가 이보다 더한 곳 에 있다해도 나는 그것을 용서했을 것이다." 말과 함께 그는 몸을 돌렸다. "잘 들어둬, 세상은 돈만 갖고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야." 담오는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아랑은 망연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 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더니 마침내 절규를 토해냈다. "나는 가난이 싫었어요! 나는 돈이 필요했던 거예요! 과거 당신 이 나를 사랑했다고 했지만 당신에게 과연 무엇이 있었나요 칼 뿐이었지요, 오직 칼 뿐. 그래서, 그래서 사람들 말에 따라 돈을 벌기 위해 당신을 떠난 것 뿐이예요! 흐흐흑, 이런 내가 잘못인가 요?" 마침내 아랑은 무너지듯 바닥에 엎드리며 오열을 터뜨렸다. 그 녀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 한 번의 실수가 그렇게도 당신에게 한이 맺했던가요? 그렇 게도?' 담오는 객점을 나오면서 눈을 찡그렸다. 태양빛이 너무 강렬했 다. 그는 태양빛에 노출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다는 것을 아프게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반문했다. '너는 아랑을 아직도 사랑하느냐?' 하나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과거만큼 그녀 에게 연연해 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었다. 'ㅋㅋ, 그저 약간의 연민만, 조소만 남아있을 뿐이지' 담오는 언뜻 태양을 노려보았다. '흐흐, 하나 그러는 너는 무엇이 잘났느냐 말이다. 담오.' "ㅋ!" 담오는 괴소를 흘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얼마쯤 갔을까? 문득 그의 눈빛이 한 곳을 향해 번들거렸다. 성 밖으로 통하는 수구문(水口門) 쪽으로 어깨를 편 채 당당한 걸음 으로 걸어가고 있는 무사가 있었다. 바로 방금 전 주점에서 그에게 모욕을 주었던 무사였다. 'ㅋ.' 담오의 입술고리가 기묘하게 이그러졌다. 이어 그는 조용히 무 사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무사는 별로 할 일이 없는 듯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라다 문득 그는 수구문을 통해 성밖으로 향했다. 담오는 내심 중얼거렸다. '잘됐군, 주위의 이목이 없는 곳이라면 오히려 더 낫지. 너의 무덤 장소로는 말이야.' 이윽고, 두 사람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성 밖으로 나갔다. 성밖 은 황토흙으로 된 관도가 뻗어 있었는데 행인은 한낮이라서인지 드문드문했다. 무사는 관도를 따라 쭉 가다가 문득 관도를 벋어나 소로를 택해 걸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쯤 가다가 문득 그는 나무 있는 곳에 이르러 걸음을 뚝 멈추는 것이 아닌가? 이어 그는 몸을 홱 돌리더니 괴 소를 흘리는 것이었다. "후후후, 쥐새끼처럼 따라오지 마라 .이미 성 내에서부터 네놈 이 나를 쫓는 줄 알고 있었다." 담오는 말없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무사는 그가 다가오자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아랑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놈치곤 그래도 배알이 있는 모 양이군?" 담오는 여전히 무표정한 안색으로 그에게 걸어갔다. "흐흐, 계집 앞에서 당한 모욕을 갚고 싶다 그 말인가?" 담오는 그의 앞 일 장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비로소 그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다." 무사는 눈썹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말했다. "좋아, 어차피 너 같은 놈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내가 죽여 주지, 마치 이곳은 아주 조용하니까 말야." 무사는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기왕이면 이름이나 알고 죽어라. 나는 객이객(喀爾喀:막 북몽고)의 추달(酋達)이다." "......!" 담오는 내심 흠칫했다. 그는 추달이라는 인물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막북(漠北)에서 첫손가락을 꼽는 도귀(刀鬼)로서 평소 그는 매 우 잔인할뿐더러 손속이 흉폭하기로 이름나 있었다. 낭인시장에서의 그의 주가도 무척 높아 그는 낭인시장의 큰 상 품(?)이었다. "흐흐흐, 왜 겁나느냐?" 추달은 담오가 흠칫하는 것을 보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 담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추달은 문득 광소를 터 뜨렸다. "으하하하! 너 같은 놈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깝다." 광소가 동시에 추달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공중에서 그는 대감도를 뽑더니 곧장 담오를 향해 내리 덮쳤다. 위이잉! 그가 휘두른 대감도의 도법은 무시무시했으며 자욱한 황진이 도풍에 휘말려 회오리쳤다. "죽어라. 애송이!" 대감도가 곧장 담오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흉폭무비한 도법이 었다. 하나 담오에게서 표정이라고는 한점도 찾아볼 길이 없었다. 하 나 대감도가 그의 정수리에 닿을락 말락하는 어느 한 순간. 절꺽, 들릴 듯 말듯한 음향과 함께 그의 수중에 들려져 있던 녹 슨 칼이 뽑혔다. 언제, 어떤 동작으로 발도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녹슨 칼이 한 바퀴 허공에 호선을 그렸다. 순간.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뜬 추달의 심장부 근에서 피보라가 뿜어졌다. 어느 새 그의 심장이 길게 쪼개져 있 었다. 쿵! 추달은 간신히 중심을 유지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심장 에서는 더운 피가 콸콸 솟구치고 있었다. 추달의 얼굴은 온통 경악과 불신으로 도포되어 있었다. "너... 너는... 누구... 냐?" 그의 음성은 회의에 찬 채 떨려나왔다. 도저히 자신의 입장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은 의혹과 불신으로 휩싸여 있었다. "담오(覃吾)." 그는 귓전에 무심하고 억양이 없는 음성이 스며들었다. 추달은 손가락 끝으로 담오를 가리켰다. "네... 네가 바로... 요북(遼北)의 담오." 그의 음성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곧 머리가 텅비는 것을 느 꼈고 그 순간 고목이 쓰러지듯 벌렁 뒤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대자로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운 피가 순식간에 황토대지를 붉게 물들이며 역한 피비린내를 풍겼 다. 담오는 녹슨 칼 끝을 땅을 향해 내리고 있었다. 칼 끝을 타고 핏방울이 똑똑 흘러내렸다. 그는 칼을 추달의 옷자락에 한두 번 문지르고는 칼집에 집어 넣었다. "원망하지는 마라. 네가 먼저 나를 건드렸으니." 그는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하늘을 응시했다. 북방의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하늘을 보는 그의 눈에 허무 의 기운이 뜬구름처럼 비치고 있었다. 담오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아주 훌륭한 도법(刀法)이다. 친구." 문득 한 가닥 음산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담오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후 나무 뒤켠에서 두 명의 인물이 서서히 걸어나왔다. 한 명 의 장도(長刀)를 어깨에 걸친 살모사 같이 생긴 청년과 역시 칼을 허리춤에 묶은 외팔이의 중년인이었다. 그들은 바로 다름아닌 마도(魔刀) 원계묵과 반송(盤松)이었다. 외팔이가 된 반송은 그 동안 얼굴에 수염을 길러 온통 털투성 이었다. 그로인해 그의 용모가 크게 달라져 마치 딴사람이 된 듯 했다. 반송은 강렬한 눈빛으로 담오를 노려보았다. "그대가 바로 요북의 도신(刀神)이라는 담오인가?" 반송 역시 도(刀)에 일생을 건 도객(刀客)이었다. 담오의 칼쓰는 법을 본 그는 담오에게 무인의 투지를 느끼는 듯했다. 담오는 직감적으로 그들 두 사람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도(刀)를 익힌 사람들만이 갖는 공통적인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의 전 신경이 팽팽히 긴장되고 피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 그대들은 누군가?" 반송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담오의 아래 위를 ㅎ어 보았다. "틀림없군. 요북의 사도(死刀) 담오의 소문은 꽤 들었지만 여기 서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 담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불필요한 대화를 하는 것도,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었다. "나에게 무슨 용모가 있소?" 이때 원계묵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고랍특성의 만사통방(萬事通房)의 매매중개인 합향거(合香居) 를 아시오?" 그 말에 담오는 흠칫했다. 원계묵은 살모사 같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당신은 그에게 꽤나 비싸게 몸값을 불렀더군." 담오는 낮게 깔리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게 너희들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이 말은 반말이었다. 그때 반송이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우리의 주인나리께서는 그대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갖 고 있다. 그래서 시험을 하라고 명을 내리셨다. 그대가 과연 삼십 만냥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말이야." 담오는 천천히 원계묵과 반송을 응시했다. 그의 입술이 잘디잔 메마른 웃음기를 흘렸다. "그래서 나를 시험하기 위해 그대를 둘을 보낸 것인가?" "그런 셈이지." 반송의 말에 담오는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만족할 거야. 그대들의 주인은." "무척 자신있게 말하는군?" 반송의 눈이 타는 듯 달아올랐다. 그러자 담오는 눈을 내리까며 말했다. "막남(漠南)과 막북(漠北)에서 나를 꺾을 자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실로 광오한 말이었다. 반송을 한 걸음 나섰다. "그렇다면 당신의 자존심에 내가 도전해 보지." 반송과 담오의 나이는 비슷했다. 그리고 그들이 쓰는 무기도 같은 도(刀)였다. 또한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야성적(野性的)인 공 통점이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원래부터 같은 종류의 인간인지도 몰랏다. "......." 담오의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그의 눈은 반송의 눈과 부딪쳤 으나 그 어떤 적의도, 경계도, 그렇다고 무시하는 빛도 없었다. 다만 그는 짤막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나의 칼은 잔인하다. 인정(人情)이란 말은 모른다." 반송은 싱긋 웃었다. "안심해라. 내가 죽어도 원망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나 상당히 힘들걸? 나란 놈은 염라대왕도 달가와하지 않으니 말이야." 담오는 귀찮다는 듯이 거두절미하게 말했다. "무기를 뽑아라." 반송은 미소지었다. 털투성이의 얼굴 속에 있는 그의 표정은 과거와 달리 유연해 보였다. 그것은 그가 장천린과 함께 있는 동안에 갖추게 된 또 하나의 인생으로 인한 새로운 변화였다. 반송은 외팔로 칼을 뽑았다. 그의 칼은 약간 괴이했다. 반월형 (半月形)으로 굽어졌으며 길이는 석자 가량 되었으며 칼의 폭은 중간쯤 되었고 두깨는 얇았다. 칼이 뽑히자 대뜸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의 칼의 기운은 흡사 새벽녘 달의 한정(寒精)을 닮아 있었다. 담오의 눈이 파충류의 눈처럼 음울하게 번뜩거렸다. "좋은 칼이다. 하나 내 앞에서 칼을 무기로 삼은 것은 크나큰 실수다." 스슥, 그도 칼을 뽑았다. 시뻘겋게 녹이 슨 칼은 칼집을 벗어날 때 거북한 음향이 들렸 다. 수십 년 간 손질을 안한 데다 썩어 그저 손가락으로 건들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이 형편없는 칼이었다. 하나 녹슨 칼은 중병(重兵)에 해당할 정도로 두껍고 무게가 있 어 보였다. 길이는 넉자 한치 정도로 원계묵의 도보다는 약간 짧 았으나 역시 장도에 속했다. 그나마 녹슨 칼은 몇 군데 이가 빠져 있어 그 칼로는 두부도 못 자를 것 같아 보였다. 하나 누가 알겠느냐? 그 녹슨 칼이 이제껏 얼마나 많은 인간의 육신을 마치 무처럼 베어버렸다는 사실을? 반송과 담오는 서로 대치했다. 도(刀) 대(對) 도(刀), 상대의 칼 끝을 본 순간 그들은 깨달았다. 난생 처음으로 강한 상대를 만났다는 인식이 상대방의 칼 끝으로 뿜어지는 무서운 도기(刀氣)로써 느껴졌던 것이다. 특히, 담오는 자신의 생각에 큰 오차가 있었음을 깨달아야 했 다. 비록 그는 두 사람을 우습게 보지는 않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 밖이었다. 마주 선 반송, 그는 비록 외팔이였으나 비스듬히 칼을 치켜세 운 그의 기도나 자세는 추달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완 벽하고 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득 담오는 강한 의혹을 느꼈다. '천하(天下)에 이 정도의 도법(刀法)을 지닌 능력자는 전 중원을 통틀어 오 명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이 자의 정체는?' 땀,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반송과 담오 똑같이 맞는 현상이었다. 그들의 칼 끝이 흡사 허공 중에 붙들어 맨 듯이 한 점의 흔들 림도 없이 상대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第 61 章 힘 대막(大漠)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흔히 일종의 천막과 비슷한 형태의 가옥을 보게 된다. 그것은 대상(隊商)과 유목민들의 거처로써 그들의 유랑생활에 알맞도록 이동설치가 용이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빠오 라고 부른다. 빠오의 종류는 수십 가지에 이르며 그 규모 또한 천차만별이다. 양(羊)의 가죽을 주로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겉보기보다 훨씬 튼 튼할 뿐더러 매우 실용적이다. 대막 생활에 가장 적합하므로 수백 년 대대로 빠오생활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그들은 마을이라도 해도 빠오의 집단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특히 몽고(蒙古)지역의 빠오는 대원(大元) 때 군막(軍幕)으로 사 용했으며 대상이나 유목민의 빠오보다도 훨씬 규모가 컸다. 놀랄만큼 큰 빠오, 수천 수만 장의 양피가죽을 이어 엮은 그 빠 오는 상당히 훌륭했다. 빠오 안은 백 명이 들어가 있어도 비좁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바닥에는 일견하기에도 호화로운 자주빛 색깔의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빠오의 한가운데에는 십여 명의 무희(舞姬)들이 둥근 원의 형태 를 이루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들은 거의 벌거벗다시피한 반라 (半裸)의 차림새로써 젖가슴과 주요부분만 간신히 가죽끈과 같은 것으로 가리고 있어 매우 육감적이었다. 둥- 둥- 둥! 그 주위에는 악사(樂士)인 듯한 자들이 호각과 북 종류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기이한 주악과 함께 기오한 율동 을 자아내는 무희들의 동작은 격렬하다 할 정도로 노골적이면서 활기에 차 있었다. 빠오의 상단부, 그곳에는 발등이 묻힐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가 여러 겹으로 깔려 있었다. 넓은 상에는 이름도 모를 각종 산해진미가 쌓여 있었다. 더욱 이 놀라운 것은 상 위에 낙타가 통째로 구이가 되어 올려져 있다 는 사실이었다. 상의 전면에는 호피(虎皮)를 씌운 의자가 있었고 두 명이 나란 히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젊은 청년은 바로 장천린이었다. 그는 몽고족(蒙古族) 노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은 고랍특성(古拉特城)에서 북서쪽으로 십여 리(里)정도 떨 어진 곳이었다. 몽고족 노인의 이름은 아랍대(阿拉台), 그는 이 일대에서 첫손 가락을 꼽는 거부(巨富)였다. 그는 수많은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 는 거상이면서 몽고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었다. 특히, 그가 가지고 있는 대초원의 목장에는 말(馬)이 수십만 마 리로 몽고 내에서도 가장 큰 목장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본래 이곳 막남지방이 아니라 막북(漠北) 객이 객 지방의 토사도부(土謝圖部)라는 곳이었다. 툴라강 유역에 그의 목장이 있었다. 그의 조상 대대로 목장을 경영하였으며 대원(大元) 때에는 원조(元祖)에 군마(軍馬)를 납품 해 왔다. 그로인해 엄청난 부(富)를 축적했고 그 부는 대원의 멸망 이후 에도 조금도 쇠퇴할 줄을 몰랐다. 아직도 아랍대는 몽고 제일의 거부였다. 장천린의 뒤에는 운표가 기립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뒤에는 백살대(百殺隊)의 십여 명 도객이 도열해 있었다. 장천린은 중원(中原)에서 말(馬)를 사러온 거상(巨商) 용백군(龍 白君)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가 이 먼 막남지방까지 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 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둥! 문득 북소리가 크게 한 번 울리고 나서 주악이 멈추었다. 무희들의 춤도 끝났다. 그러자 아랍대가 손을 흔들었다. 아랍대는 비대한 체격의 육순 노인이었는데 머리가 약간 큰 그는 나름대로 풍류를 아는 위인이 었다. 그는 시(詩)를 좋아하고 문(文)을 애호하기도 했다. 따라서 중원 의 문화의 문물(文物)을 애호하기도 했다. "하하, 이리 와 인사드려라." 아랍대의 호방한 웃음에 무희들은 춤추듯이 다가와 장천린의 앞에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가 땅에 상반신을 아주 엎드리는 큰 절을 했다. 그것은 종복이 주인에게만 바치는 최대의 경의표시였다. 풍만 한 젖가슴이 거의 온통 계곡을 드러냈다. 그녀들의 체격은 한족여인에 비해 컸으며 몸매 또한 놀랄만큼 풍만하고 육감적이었다. "허허헛! 이제 그만 물러가라." 아랍대의 말에 무희들은 사라졌다. 춤이 끝나자 이번에는 몽고 족 특유의 씨름이 시작되었다. 빠오 한가운데 웃통을 벗어붙인 장 대한 근육질의 장한들이 나와 서로 쓰러뜨리고 내던지는 격렬한 씨름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무기를 가지지 않은 양손을 이용하여 온갖 격기를 동원하여 벌 이는 씨름은 초원족 몽고 특유의 시원스럽고 호방한 면모가 있었 다. 장천린은 처음 보는 몽고씨름을 미소띈 부드러운 얼굴로 바라 보았다. 옆에서 아랍대가 말했다. "허헛, 이번에 용대인과 상담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오! 헛헛, 아무튼 사업은 사업이고 오늘은 마음껏 즐겨 주시오." "감사합니다. 아랍대 대인." 장천린은 손님으로써의 융숭한 몽고특유의 대접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아랍대는 이미 장천린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허허, 이번에 나는 용대인과 이야기하면서 느낀 점이 많소이 다." 장천린은 담담히 웃기만 했다. 아랍대는 그의 준수한 열굴을 지그시 응시하며 물었다. "실례지만 결혼은 하시었소?"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혼자입니다." "허! 거 정말 뜻밖이오." 아랍대는 또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허헛, 하기사 용대인 같은 분의 안목에 들려면 웬만한 여자는 어려울 것이오."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글쎄요." 아랍대의 살집에 파묻힌 듯한 가는 눈이 문득 빛났다. "한데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용대인. 대체 일만(一萬) 마리 의 말을 사서 어디에 쓰시려고 하는 것이오?" 그 말에 장천린은 낭랑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우리 피차간에 곤란한 문제는 묻지 않기로 했지 않습니 까? 그것은 개인적인 사업상의 일입니다." "아! 그렇군." 아랍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입맛을 다시는 것이 듣지 못해 아 쉬운 표정이었다. 하나 곧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데 용대인은 몽고어에 무척 능통하여 본국인인 나보다도 유 창하오. 대체 언제 배운 것이오?" 실상 아랍대는 중원에서 온 용백군이란 젊은 상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워낙 넓고 방대한 중원 지역이라 상인이란 상인을 그가 전부 알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과거에 필요해서 배웠습니다." 장천린은 담담히 대답했다. 하나 실상 그가 배운 몽고어는 반 년쯤 전 부금진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부금진은 어려서부터 그의 부친을 따라 새외의 여러 지방을 돌 아다녔기 때문에 각가지 언어에 통달해 있었다. 이번에는 장천린이 물었다. "한데 아랍대 대인께서는 어찌 성내에 머무르지 않고 굳이 이 벌판에 계시는 것입니까?" 그 말에 아랍대는 코웃음 첬다. "흥, 나는 고랍특성이란 곳이 마음에 들지 않소. 지금 그곳에는 떠돌이 무사 나부랑이 들이 들끓고 있소. 그 자들은 모두가 자신 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려는 우매하고 무식한 자들이오. 그런 천박한 자들과는 같이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아랍대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더우기 인간을 매매하는 중개업자들놈은 더 꼴보기 싫소이다." 그말에 장천린은 내심 고소지었다. '이 자는 상인치고는 매우 고고한 척하는군.' 그렇다. 아랍대는 무지한 것을 싫어했으며 무사(武士)들을 경시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몽고가 망(亡)한 이유를 대원이 지나치 게 무(武) 방면에만 치우쳐 멸망하여 결국 몽고 전체가 쇠퇴한 것 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또한 일개 장사꾼치고는 그의 성격은 호방하였고 풍류를 즐길 줄도 아는 위인이었다. 장천린과 처음 대면했을 당시 그는 중원의 문학(文學)의 조류에 대해 물었으며 스스로 여러 편의 한시를 읊기도 했었다. 그에 답하여 장천린이 시(詩)에 대한 비판과 해설을 하자 그는 매우 즐거워했으며 경탄했었다. 결국 그로 인해 그는 장천린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랍대는 무득 씨름판을 응시했다. 씨름판에는 한창 십여 명의 거한들이 엉켜들어 싸우고 있었다. 아랍대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혀를 찼다. "쯧쯧, 어리석은 놈들, 머리는 쓰지 않고 힘만 쓰려 하다니?" 이어 그는 시원찮다는 듯이 손뼉을 딱딱 쳤다. "율차(律車)를 불러와라." 그 말에 한 명의 몽고인이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사나이가 불려왔다. 그를 본 순간 장천린은 은근히 놀 랐다. 그는 엄청난 거구였던 것이다. 장장 십척(十尺)에 육박할 정도 의 거구의 장한이었다. 피부는 완전히 구릿빛이었으며 두 눈은 화 등잔만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인상의 거한은 대충 보기에도 무한 의 힘을 지닌 역사(力士)인 듯했다. "부르셨습니까?" 거구의 사나이가 무릎을 꿇었다. 하나 무릎을 꿇었어도 보통 사람의 키보다 훨씬 컸다. 아랍대는 장천린에게 자랑스러운 듯이 설명했다. "율차는 내가 가장 아끼는 투사(鬪士)요. 역발산 힘을 지니고 있지요. 게다가 천성적인 타고난 힘을 뒷받침해 주는 지혜까지 지 니고 있는 놈이오." 그는 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헛헛, 만약에 초패왕 항우가 다시 나타난다해도 율차에게는 못 당할 것이오." 장천린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럴 것 같습니다. 훌륭한 투사입니다." 아랍대는 기분이 무척 좋은 듯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 율차. 내 너에게 술 한잔을 내리겠다. 이 술을 먹고 이곳 의 중원에서 오신 귀한 분을 위해 네 힘을 보여다오." 아랍대는 커다란 황금배에 술을 가득 채워 내밀었다. "황공하옵니다." 율차의 음성은 우렁우렁하여 빠오가 가볍게 진동될 정도였다. 그는 황금배를 두 손으로 받아 무릎을 꿇은 자세로 단숨에 마셨 다. 이어 벌떡 일어나 아랍대가 말한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큰 걸음으로 씨름장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그러자 열 명 의 씨름을 벌이던 거한들이 그를 빙 둘러싸는 것이었다. 하나 율 차를 둘러싼 그들은 좀전과는 달리 오히려 소인(小人)으로 보일 뿐이었다. 율차의 거대한 체격에 상대적으로 비견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둥! 고수(鼓手)가 북을 한 번 둔중하게 울리자 즉기 열 명의 장한이 율차를 공격했다. 그들의 주먹이 율차를 가격했다. 하나 율차는 피하지도 않고 그 주먹을 맞았다. 퍽! 펑! 펑! 흡사 가죽북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으나 놀랍게 도 율차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에 아랍대는 특의소를 흘 렸다. "허허, 율차의 뼈와 살은 강철보다 튼튼하오." 이때, 비명이 터졌다. 팔짱을 낀 채로 주먹을 맞고만 있던 율차 가 갑자기 양손을 움직인 것이었다. 그가 양손을 뻗자 열 명의 장한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각 각 허공으로 붕붕 떠 나가 떨어졌다. 언뜻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고 놀라운 힘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명의 장한은 비실비실 뒤로 물러났다. 하 나 율차의 솥뚜껑만한 손이 뻗은 순간 그들은 아차할 겨를도 없 이 허리를 잡혀 붕 떠 올랐다. "으으아!" 그들의 팔다리가 허공에서 허위적거렸다. 율차는 한 손으로 각 각 한 명씩을 움켜쥔 채 허공으로 번쩍 들어올린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신력(神力)이었다. "핫핫핫! 멋지다. 훌륭하다. 율차." 아랍대는 대소를 터뜨렸다. 율차는 두 명의 장한들도 멀리 던져버렸다. 구슬픈 비명과 함 께 날아간 두 장한은 바닥에 떨어지면서 어디가 부러졌는지 데굴 데굴 구르고 있었다. 허나 곧 그들은 다른 몽고인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다. 씨 름장이 정리되자 율차는 이번에는 어른 팔뚝 굵기의 강철 봉을 두손으로 잡았다. "으얍!" 그가 한 번 기합을 지르며 힘을 쓰자 강철봉은 정말 너무나 어 이없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버렸다. "와아!" 빠오 안에 있던 몽고인들은 일제히 박수갈채와 함께 함성을 내 질렀다. 율차는 마치 역발산기개세의 힘을 지닌 천신처럼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정말 훌륭합니다." 장천린의 말에 아랍대는 자랑했다. "율차는 힘만 쓰는 역사는 아니외다. 학문도 어느 정도 익혔을 뿐더러 심팔반 병기도 모두 다루는 문무(文武)를 겸전한 놈이외 다." 그는 자신의 말에 흥이 오른 듯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이야기 했다. "일 년 전에는 찰살극도부(札薩克圖部)에서 한 자루의 목봉(木 棒)만으로 삼십 명의 낭인 무사놈들을 깨끗이 없애버린 적도 있 소이다. 핫핫핫!" 장천린은 짐짓 감탄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때, 밖으로부터 한 명의 백살대 무사가 들어와 장천린 에게 보고했다. "용대인님, 초광형님이 밖에 도착했습니다." 장천린의 입가에 의미모를 미소가 번졌다. "음, 들어오라고 그래라." 무사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빠오 안에 또다른 거인(巨 人)이 들어섰다. 그는 바로 초광(楚光)이었다. 초광은 장천린의 앞에 이르러 절 을 했다. "무슨 일이냐, 초광?" 장천린이 묻자 초광은 갈색눈을 굴리며 말했다. "원어른과 반어른께서 담오와 함께 고랍특성으로 돌아가셨습니 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이 끝난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초광의 음성은 거대한 체구답지 않게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계묵은 뭐라 하더냐?" "분명히 원어른께서는 그가 삼십만 냥의 가치가 있다고 하셨습 니다." 장천린의 눈에 이채게 ㅂ났다. "그래?" 이때, 곁의 호피의자에 묻혀 있던 몽고인 아랍대는 내심 초광 의 존재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초광의 체구는 오히려 율차보다도 큰 듯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짙은 갈색의 피부에 머리카락은 곱슬곱슬했고 눈 색깔도 갈색이었다. 이국적인 생김새의 거대한 초광을 복 아랍대는 물었다. "용대인, 이 분 장사는 누구시오?" 장천인은 미소지었다. "저의 수족입니다. 초광이라 합지요." 아랍대는 턱에 손을 가져가며 수염을 만지작 거렸다. 문득 율 차와 초광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의 눈에서 어떤 빛이 어렸다. 그 는 장천린에게 말했다. "용대인, 한 가지 제의가 있소. 저 초광 장사는 무척 힘을 쓸 것 같소. 이떻소 한 번 율차와 붙여보는 것이 말이오?" 아랍대의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하고자하 는 일을 참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장천린은 그 말에 멈칫하더 니 난색을 지었다. 그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애석하게도 초광은 투사가 아닙니다." "그래요." 아랍대는 못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는 다음 순간 율 차를 향해 무언의 눈짓을 던졌다. 그러자, 마침 초광을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던 율차가 문득 초 광을 향해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덩치는 나보다 큰 놈이 간담은 송사리보다도 못한 것 같군요. 주인어른, 율차도 저런 놈과는 싸우는 것조차 수치로 생 각합니다." 그 말에 초광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는 몽고어에 대해 어느 정 도 알고 있었던 만큼 율차가 자신을 비웃는 것을 알자 과거의 투 지가 불타올랐다. 하나 억지로 눌러참는 듯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그로서는 장천린이 시키지 않은 일을 감히 할 수가 없 었던 것이다. 하나 어쨌든 그가 반응을 보인 것은 확실했다. "하하, 주인님. 저런 비굴한 놈과는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 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율차는 다시 한 번 초광의 비위를 긁어 놓고는 몸을 돌리려 했 다. 이때 초광의 몸이 퉁겨 일어서려다가 급격히 주저않는 것이 중인들 눈길을 끌었다. 타고 있었다. 그의 갈색눈은 모욕을 참기에는 지나치게 순수한 용자의 본능으로 훨훨 타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충직한 신하의 예로써 장천린 앞에서 시키지 않은 행동을 억지로 참고 있다는 것이 누구의눈에도 드러나고 있었다. 第 62 章 두 巨人의 對決 장천린은 한 눈에 아랍대의 의도를 눈치챘을 뿐더러 초광의 반 응도 알아보았다. 그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형 국은 오히려 그가 바라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랍대에게 어떤 일을 부탁할 것이 있었다. 또한 그 일에 부탁하는 데에는 모종의 구실이 필요했다. '적절한 기회야.' 그는 문득 초광을 내려보며 조심스러운 듯한 태도로 물었다. "초광, 한 번 해보겠느냐?" 그 말에 초광의 갈색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주인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하겠습니다." 장천린은 그를 향해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할 일이다. 이건 너의 명예 뿐 아니라 나의 명예 또한 달 린 일이다." 초광의 눈에서는 벌써부터 투혼의 불꽃이 나오고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때 옆에서 아랍대가 대소를 터뜨렸다. "헛헛헛, 염려마시오. 용대인. 율차는 귀빈의 수하를 크게 다치 게 할 정도로 힘을 쓰지 않을 거이오." 장천린은 그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런 것은 관계치 않습니다. 허나 저는 아랍대 어른과 이 시합 을 놓고 그냥 구경하기는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 아랍대는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눈을 굴렸다. 허나 곧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허허헛! 그렇군, 이 좋은 기회를 어찌 그냥 흘려보낼 수 있소? 그럼 내기를 합시다." "흥미있는 일입니다." 장천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랍대는 대뜸 손가락 한 개를 내세 웠다. "은자 일만 냥을 거는 것이 어떻겠소? 용대인!"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그것은 너무 작습니다." "그럼?" "이것이면 어떻습니까?" 그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펴보였다. "오만 냥이라, 헛헛. 좋소, 좋아." 허나 아랍대는 곧 장천린이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았다. "오만 냥이 아니라 오십만 냥입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아랍대 대인께 어울리는 액수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아랍대는 약간 멍청해졌다. '오십만 냥?' 오십만 냥이라면 아무리 몽고제일의 부자인 그에게 있어서도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단순한 오락의 내기로 건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허나 아랍대는 율차를 보는 순간 만면 에 웃음이 퍼졌다. "좋소! 좋아. 핫핫핫, 오십만 냥을 걸겠소." 이어 그는 너털웃음을 덧붙였다. "거기에다 만약 율차가 지면 돈 뿐 아니라 내 첩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타루미로 하여금 용대인을 하룻밤 모시게 하리다." 그것은 대단함 인심이었다. 허나 사실상 아랍대는 율차가 초광 에게 진다는 것은 아예 상상도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기의 액수나 미녀제공도 그저 헛인심이라고 생각하 는 것이었다. 허나 어찌 그가 꿈엔들 상상했으리요? 그가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승부는. 이윽고 씨름장 위에서 희대의 두 거인(巨人)은 마주 섰다. 그들이 대치하자 그 넓은 빠오 안이 비좁다는 느낌이 들 정도 였다. 율차는 화등잔 같은 퉁방울 눈을 부릅뜨며 비웃음을 흘렸 다. "흐흐, 살살 다루어 주마, 애송이!" 초광은 표정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상대방을 갈색 눈으로 마치 사물을 보듯 응시하기만 했다. 두 거인의 대결(對決) 에 중인들의 신경은 집중되었다. 야릇한 기대와 흥분, 그리고 긴장감이 고조되어 그들은 점차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특히 아랍대는 술잔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 태도였다. 이윽고. "간다. 앵송이 놈!" 스스! 율차의 거구가 믿어지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더니 초광의 턱을 오른손으로 갈겼다. 주먹이 날아가는 소리가 날카롭 게 들릴 정도였다. 초광은 말없이 슬쩍 몸을 옆으로 피했다. 율차의 조소가 들렸 다. "흥, 제법!" 그는 빠르게 다가가며 양손으로 공격했다. 윙! 윙!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경풍이 일었다. 그 주먹에 한 대라도 맞는다면 설사 장백산의 호랑이라도 배가 터질 듯한 기세였다. 허나 초광은 침착했다. 그는 몇 차례 주먹을 피해냈다. 느릿 듯 하면서도 간일발의 차이로 주먹이 빗나갔다. 허나 곧 양 다리로 버티더니 그는 손으로 율차의 공격을 막았다. 파앗! 어느 한 순간 그들의 양손이 마주쳤다. 양손이 서로 깍지 낀 상태로 그들은 엉켜붙었다. 율차의 얼굴에 가소롭다는 표정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흐! 네놈이 나와 힘 대결을?' 그렇다. 그것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힘대결이었다. 그들 은 깍지낀 채 힘을 쓰기 시작했다. 율차의 우람한 상반신이 부풀어 오르며 심줄과 근육이 솟았다. 순식간에 체구가 배나 커진 느낌이었다. 그는 힘으로 초광을 밀어 붙일 작정이었다. 허나 어찌된 셈인지 초광은 두 발로 지면을 디 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율차의 두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의 두 손의 힘은 강철봉을 엿가락처럼 휘어버리는 괴력(怪力)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긍지로 여겼으며 자신의 힘이면 못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 고 있었다. 허나 어찌된 일인가? 어무리 힘을 주어 밀어도 마치 상대방은 철탑(鐵塔)이라도 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으으, 이놈이.' 율차의 이마의 관자놀이에 심줄이 끊어질 듯 팽창되었다. 허나 이 때 초광의 얼굴이 그를 향해 웃었다. 아주 자연스런 미소였다. '놈, 네가 아무리, 으윽!' 율차의 얼굴이 보기싫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그는 손가락에 고통을 느낀 것이었다. 동시에 상대의 힘에 팔이 굽어졌다. "끄으." 그는 뒤로 서서히 밀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적어도 아 랍대에게는 그랬다. 마침내 율차는 연달아 오 보나 밀려났다. 완전히 힘(力)의 대결 에 밀린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저럴 수가!' 아랍대는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몇번 깜짝였다. 이때, 그와는 정반대로 장천린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초광이다.' 그도 역시 초광의 순수한 힘에는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때. "찻!" 율차는 돌연 초광의 다리를 공격했다. 그의 육중한 다리가 초 광의 하반신을 걷어찬 것이었다. 허나 초광은 가볍게 피하며 깍지킨 상체로 율차를 그대로 잡아 당겼다. 순간 허리를 뒤로 꺾었다 ㅅ은 짧은 순간 동작에 거구의 율차가 뒤로 날아갔다. 그대로 잡아끌어 던져버린 것이었다. 꽝! 육중한 율차의 몸은 볼상사납게도 오장이나 날아가 떨어졌 다. "컥!" 그는 충격으로 비명을 토했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든지 아랍대를 비롯한 몽고인들은 모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 벌떡 일어난 율차는 돌연 빠오의 구석에 있던 창(槍) 한 자루를 집더니 안면에 살기가 등다해져 달려왔다. "죽인다!" 슈욱! 맨손과 무기는 다르다. 그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율차 의 살기띤 창 공격은 악랄무비했으며 무시무시했다. 그의 엄청난 체구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은 일류고수 이상이었다. 창날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갈기갈기 찢어질 듯 기세는 사납기 그지 없었다. 초광의 얼굴도 다소 굳어졌다. 그는 이리저리 피했으나 여러번 위기를 맞이했다. 이때. "초광형님!" 문득 백살대의 무사 하나가 칼을 그에게 던져 주었다. 초광은 그 칼을 재빨리 움켜쥐더니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칼을 든 채 허공 위로 치켜세웠다. 그리고 왼손은 가슴께로 비슴 듬히 세웠다. 이때 운표는 그 자세를 보고 안색이 굳어졌다. '저 칼잡은 자세는 풍뢰도법(風雷刀法)의 뇌전단홍이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헌데 저 왼손의 자세는.' 그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설마, 초형이 서장 밀종(密宗)의 고미타사(古彌陀寺) 비전무공 인 대수인(大手印)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이때였다. "찻!" 율차가 공격했다. 그 순간 초광의 칼이 움직였다. 그 순간 은은한 뇌성(雷聲)이 울려 중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동시에 초광의 좌수도 움직였다. 그 순간 날카로운 금속음과 비명이 연속적으로 들렸다. 율차의 창이 두 동강이가 나 날아갔다. 어디 그 뿐인가? 초광의 칼이 지나간 자리에 율차의 머리카락 이 잘려 허공에 비산했다. 율차는 그와 함께 가슴을 얻어맞고 허 공에 붕 뜬 채 날아갔다. 실로 비참한 몰골이었다. "율차!" 아랍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안색은 경악으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 율차는 혼절해 버렸다. 그의 벌거벗은 상반신의 가슴에는 은은 한 붉은 색의 장인(掌印)의 흔적이 찍혀 있었다. "저럴수가!" 아랍대는 허탈한 듯이 중얼거리며 털썩 자리에 주저 않았다. 이때 장천린 앞으로 초광이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초광, 다행이 주인님 명예에 욕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수고했다. 초광!" 이어 그는 손수 커다란 황금배에 술을 가득 부었다. 그 황금배 는 바로 아랍대가 율차에게 하사한 잔이었다. "자, 승리의 술이다." 장천린은 황금배를 내리자 초광은 두 손으로 받아 그대로 마셨 다. 이어 그는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는 옆으로 내려 안고 있던 칼을 백살대 무사에게 돌려주었다. "고마왔네. 조충(曺忠)!" 그는 성큼성큼 걸어 빠오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몽고 인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율차도 여러 명의 몽고청년들이 들것에 실어 밖으로 들고 나갔 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랍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졌소, 용대인. 율차의 완패외다. 힘(力)과 기(技), 모두에서 말 이오." 그는 감탄한 듯이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 "용대인은 정말 훌륭한 수족을 두었소." 이어 그는 정중히 말했다. "약속대로 내기에 졌으니 오십만 냥을 드리겠소."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율차도 훌륭한 무사입니다. 허나 그가 진 것은 초광을 너무 얕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어 그는 담담히 말했다. "오십만 냥은 필요없습니다." 아랍대는 흠칫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찰합이부족(察哈爾部族)의 전사(戰士)이자 영웅인 임단한(林丹汗)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 장천린의 말에 아랍대의 안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장천 린이 그런 요구를 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기 때문이엇따. 임단한(林丹汗), 그가 대체 누구이기에? × × × 장천린은 아랍대의 빠오를 떠났다. 그는 운표와 백살대 무사 사십 명이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고랍특성으로 돌아가는 중이었 다. 초광은 먼저 성내로 돌아갔다. 운표는 천천히 장천린의 옆으로 말을 몰면서 입을 열었다. "용대인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초형이 익힌 뇌전단홍은 용대인께서 가르쳐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헌데 초형이 오늘 쓴 무공은 아무래도 일종의 대수인 (大手印) 같던데." "확실하다." "어떻게 초형이 그 무공을 안단 말입니까? 밀종무학은 결코 타 인이 익힐 수 없는 것인데." 장천린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초광은 밀석아국의 노예였다. 동시에 그는 밀석아국의 제일의 투사였지. 허나 단 한 번의 실수로 주인을 다치게 한 죄로 노예시 장에 팔려 서역상인에 의해 중원으로 넘어와서 이년 전 내가 사 들였다. 초광은 서역상인에 의해 천산북로(天山北路)를 넘어오면 서 그 도중에 서장 고미타사(古彌陀寺)의 늙은 라마승이 다 죽어 가는 것을 보았지." 운표는 그 말에 눈을 빛내면서 들었다. 장천린은 말갈기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이야기 했다. "초광은 자신의 처지가 어려우면서도 노예상인에게 부탁하고 애원했다. 결국 그래서 그 늙은 라마승을 치료해 주었다고 했다. 허나 결국 늙은 라마승은 노환과 숙환으로 죽고 말았지, 허나 죽 기 직전 그는 초광의 인간성에 끌려 자신의 무공을 모두 물려주 게 된 것이다." 운표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수인은 밀종의 비전무공(秘傳武功)입니다. 제가 알기로 그 무공을 아는 사람은 고미타사에서도 오직 한 명 뿐입니다." 장천린은 담담한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고미타사의 신비기승 팔사파(八思巴)를 말하는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초광이 치료해 준 노승이 기승 팔사파일세." "아!" 운표는 탄성을 발했다. 그는 새삼 초광이라는 인물에 대해 재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전부터 그는 장천린의 상행(商行) 에 항상 따르는 거인 초광에 대해 죽 관심을 가졌었다. 초광은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현명했다. 그래서 그는 용백군 대인의 일을 항상 절 처리해 주는 재능있는 집사 정 도로만 알았었거늘. 헌데 그 초광이 그렇게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은 운 표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운표는 무엇인가 생각에 골몰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때 멀리서 고랍특성의 전경이 황원 저편으로 나타나기 시작 했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이제 다왔군." 第 63 章 黃金의 哲學 고랍특성(古拉特城)에서 가장 큰 객잔은 융고숙잔(融古宿棧)이 었다. "담오의 무공은 상상외 였습니다. 전력으로 겨루어 보지 않아 서 모르겠읍니다만 저와 거의 동수(同手)였습니다." 반송의 말에 장천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이 시선은 은연 중 원계묵에게 옮겨지고 있었다. 원계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도 반형과 같은 생각입니다. 담오의 도법은 극히 신랄하 고 잔인했습니다. 요북의 사도(死刀)라는 명호가 결코 과장된 것 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내심 염두를 굴렸다. '흠, 반송의 도법은 천월도법(天月刀法)으로서 천하에 적수가 흔치않은 도(刀)의 달인이다. 그런 그와 맞수라면 실로 대단한 실 력이다.' 이때 원계묵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건 단순한 추측입니다만 담오의 도법을 보니 생각나는 도법 이 한가지 있습니다. 흑사도법(黑 刀法) 말입니다." "......!" 장천린은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천하오대도법(天下五大刀法) 중 잔인함과 신랄함에 있어 으뜸 이라는 대막(大漠)의 흑사도법! 장천린은 고개를 돌렸다. "반송,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반송은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도 원소제와 같은 생각입니다. 삽심만 냥이란 엄청난 거액 이긴 하지만 충분히 투자 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단, 성격상 에 있어서 조금 문제는 있습니다." 반송은 수염을 긁듯이 만지며 말했다. "너무 음울합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무척 강합니다. 좀, 건방진 놈입니다." 장천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능력이 있다면 성격은 언제라도 바꿀 수 있어, 설사 바꾸지 못 한다 해도 일에 지장만 없으면 관계할 필요가 없지." 그는 원계묵에게 말했다. "그를 불러오너라, 계묵." 원계묵은 씩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불려와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간단히 칼을 늘어뜨려 예를 대신했을 뿐 음울한 눈으로 장천린을 응시하기만 했다. 솔직이 담오는 궁금하기는 했다. 자신 의 몸값을 삼십만 냥 씩이나 되는 거금을 주고 사려는 인물의 정 체를 그는 알지 못했기에. 그는 처음 장천린을 보는 순간 상당히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방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젊고 준수한 인물이 아 닌가? 하나 그는 상대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 러나 그는 본래부터 돈이 많은 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그것 은 과거 아랑과의 쓰라린 추억의 영향 탓이기도 했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차를 드시오, 담무사." 하나 담오는 무감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그는 다류는 일종의 사치품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평소 차나 마시며 한담하는 종류의 인간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 다. 장천린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처소는 확실히 호화로왔 다. 고랍특성에서도 가장 큰 객점인 융고숙잔 전체를 빌렸고 그 중에서 가장 큰 방이 그의 거소였다. 지금 그는 호피의에 앉아 있었고 탁자는 자단목으로 된 고급이 었고 찻잔 또한 옥자기로 된 최상급이었다. 문 앞에는 원계묵이 장도를 맨 채 우뚝 서 있다. 장천린은 차 한 모금을 마신 후 물었다. "요북이 고향이라고요?" "위록지방입니다." 담오의 말은 간단했다. 장천린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시선은 찻잔에 머물러 있 었다. "부모님은 무엇을 하시던 분들인가요?" 담오는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는 느낌이 들었 기 때문이다. 하나 그는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을지언 정 거짓은 용납않는 것이 담오의 성격이다. "아버님은 농사꾼이고 어머님은 가희(歌姬:노래하는 여인) 였습 니다." "가희라." 장천린의 시선은 여전히 옥자기 찻잔에 머물러 있다. 순간 담오는 가슴 속에서 어떤 불덩이가 불끈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태도가 너무나 안하무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살인은 언제였소?" 장천린의 세 번째 질문에 담오는 두 눈을 번득였다. "아홉 살 때 입니다." "아홉 살?" 비로소 장천린은 그를 응시했다. 무척 흥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대상은? 그리고 이유는 무엇이었소?" 담오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 눌러 참으며 대답했다. "마을의 장한 놈이었습니다. 놈이 어머님을 희롱했기에, 그래서 등 뒤에서 곡괭이로 목을 찍어 죽였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때 마을 떠났소?" "그렇습니다." "그럼 칼을 잡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소?" "열 살 때 입니다." "누구에게 사사받았소?" "......." 담오는 잠시 침묵했다. 이어 날카로운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것도 대답해야 합니까?" 장천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담무사는 평생 계약을 원하지 않았소? 평생 데리고 있을 인물 이라면 그 사람의 신상 정도는 알고 싶은 것이 주인의 심정 아니 겠소?" 담오의 입가에 쓰디쓴 고소가 맺혔다. "요북 흑수령(黑手嶺)의 수좌(首座)였던 사사문(斯斯文) 공(公) 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흑사도법을 말이오?" "......!" 담오의 안색이 굳어졌다. 하나 곧 그는 시인했다. "그렇습니다." 장천린은 다시 찻잔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십 이 년 전쯤 흑수령의 두령 사사문이 늙어 죽 은 이후 흑수령 자체 내의 분열이 일어나 대혈겁(大血劫)이 났었 소. 그때 흑수령 고수들 중 단 몇 명만 제외하고는 수십 명이 도 륙되는 참살사건이 있었소. 그것이 담무사와 어떤 관계라도 있는 지?" "......!" 담오의 두 눈 가장자리가 파르르 잔 경련을 일으켰다. 하나 그 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제가 한 일입니다." "이유는?" "놈들은 사사문 어른의 진전을 이어받은 나를 시기하고 질투했 기에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놈들을 친 것입니 다." "훗훗." 장천린은 나직이 웃었다. 그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담오를 바 라보았다. 곧 그의 표정의 정색에 뒤따라 그의 입에서 엄숙한 말 이 흘러나왔다. "잘 알았소. 한데 그대는 자신의 몸값이 충분히 삼십만 냥이 된 다고 생각하고 있소?" "......!" 순간 담오는 장천린의 차가운 별과 같은 두 눈을 접하자 일시 적인 압도감을 느꼈다. 그는 평생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나 지금 그는 감히 장천린과 두 눈을 마주 대하기가 위축되는 느낌이 들 었다. '평생을 칼과 죽음 속에서 살아온 내가 일개 상인에게 압도되 다니 말도 안된다.' 그의 자존심이 건드려졌다. 그는 장천린을 정시했다. 그의 두 눈은 더욱 음울해졌다. 마치 파충류의 그 속을 알길이 없는 눈알 처럼 기이한 빛을 번득이며 장천린을 직시했다. 그의 입에서 비릿한 말이 흘러나왔다. "만일 내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한낱 삼십만 냥의 돈 따위 에 내 인생을 얽메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 장천린의 안색이 순간 무섭게 굳어졌다. 그런 표정은 뒤쪽에 서 있는 원계묵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장천린은 착 가라앉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잘 들으시오. 담무사. 무사에게 있어 병기는 곧 자신의 생명이 고 도(道)이듯이 또한 자존심인 것이오. 타인의 그것을 모욕하면 무사는 결코 참을 수 없소. 마찬가지로 상인(商人)에게는 돈이 곧 인생(人生)의 도(道)가 될 수 있는 것이오. 그대는 조금 전 삼십만 냥이란 돈을 모독했소. 칼만 아는 그대에게는 어쩌면 돈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일지도 모르오. 하나 당신이 얕보는 삼십만 냥이란 돈 을 이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아시오?" 담오는 상대방의 두 눈에서 무서울 정도의 집념과 확신, 그리 고 이상의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았다. 장천린의 착 가라앉은 음성이 조용한 가운데서 열기를 느끼게 했다. "수천 명의 가난한 백성이 그 돈이면 일생을 걱정없이 풍요롭 게 보낼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의 칼은 스스로에게만 어떤 만족감 을 줄 뿐 타인에게는 그 어떤 도움을 줄 수가 없소. 아니 오히려 해만 끼칠 뿐이오." "......!" 담오의 눈섭이 파르르 떨었다. 그의 눈에는 분노의 광채가 일 어났다. 무사에게 모욕감이란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는 일개 상인이 지나치게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느꼈 다. 그의 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부유한 청년상인을 단칼에 베고 싶어졌다. 이때, 그의 뒤에 우뚝 서 있는 원계묵도 무사의 본능으로 그의 그런 심중을 읽었다. 그는 일보(一步) 옆으로 소리없이 이동했다. 여차 직하면 어깨 위의 장도를 날릴 자세를 취했다. 이때 장천린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담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삼십만 냥의 은자와 그대의 칼 중 어느 것이 더 이 세상(世上)에 필요한 것 같은가?" 그의 말은 이제 하대였다. 담오는 장천린을 노려 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살기가 꽉차 있 었다. '베겠다.' 그의 마음이 서서히 살벌하게 곤두섰다. 그의 파충류 같은 눈 알이 점점 더 이상한 빛을 내며 번들거렸다. 장천린은 그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했다. "돈이란 쓰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하나 누가 뭘하 해도 돈 그 자체는 신성한 것이다. 결코 모욕될 수는 없는 것이 다. 솔직이 현재로는 그대의 몸값이 삼십만 냥의 가치가 될 수 없 다." 그의 말은 칼로 자르듯 명확했으며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 한 것이었다. 키릭!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담오가 굳게 움켜잡은 녹슨 칼이 조금 뽑혀졌다. 일촉즉발, 한시라도 그는 장천린의 목을 날릴 기세였다. 이때 원계묵이 노갈을 터뜨렸다. "담오! 무례하면 그 자리에서 두 동강이를 내버릴 것이다!" 하나 장천린은 담담히 그를 향해 말했다. "계묵, 자네는 참견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이어 그는 불타는 듯한 두 눈으로 담오를 정시하며 말했다. "담오, 그대가 일생을 칼에 걸었다면 어디 이 자리에서 나를 베 어 보아라." "......!" 담오의 두 눈에서 불똥이 퉁겼다. 그눈 장천린의 눈을 노려 보 았다. 장천린의 두 눈은 타는 듯했으나 여전히 그 심부는 별빛같 이 차고 고요하여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담오는 그 눈에 자신이 문득 소리없이 빨려들어 가는 것을 느 겼다. 동시에 그는 눈 앞의 젊은 상인의 모습이 거대하게 확산되 어 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하나의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거산(巨山)처럼. "으." 담오는 칼을 뽑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압도되었다. 칼을 잡은 손마디가 부들부들 떨렸다. '거물이다. 도저히 나 같은 낭인이 상대할 인물이 아니다.' 담오의 얼굴이 변했다. 몇 차례나 그의 안색이 변했으며 그것 은 자신에 대한 수치와 모멸감이었다. 그는 이제껏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는 베고 싶으면 베었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건 행했다. 하나 지금 이 순간, 그는 그 무엇도 스스로 해낼 수 없다는 것 을 굴욕감과 함께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이 사라졌다. 딸깍! 칼은 칼집으로 들어갔고 그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때 장천린의 음성이 들렸다. "그냥 가는가?" "......." 담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문을 향해 걸어갔다. 원계묵은 그를 말리지 않고 순순히 길을 열어 주었다. 담오는 문을 열었다. 하나 그때 은은한 장천린의 음성이 그의 발길을 묶었다. "인간이 일생을 걸고 추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숭고한 것이 다. 담오, 나는 그대의 칼을 인정하겠다. 그대는 나를 위해 한 번 인생을 걸어보지 않겠는가?" 담오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한 참 후 등을 돌린 채 물었다. "돈을 모으시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체시(治世)의 수단이다." '치세!' 그 말에 담오의 내부를 스치는 뜨거운 전율이 있었다. 그는 몸 을 빙글 돌렸다. 장천린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장천린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담오, 나의 수족이 되어다오." 그 말은 무언의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과 진실이 깃들어 있 었다. 담오의 눈빛이 흐려졌다. 순간적으로 담오의 뇌리에 영상이 떠 올랐다. 십수 년 전의 과거, 아름답고 청순하기만 했던 아랑의 모습, 그 러나 그토록 사랑했던 아랑이 돈에 미쳐서 자신의 인생과 고귀한 순결마저 포기하고 더러운 세계에 발을 들어 놓던 광경. 그리고 십수 년이 흐른 지금의 아랑의 모습, 세월이 흘러 지칠 대로 지쳐 추하기만 한 아랑의 모습, 더러운 주점에서 뭇 사내들 의 농과 손장난에 허리를 비틀면서도 사내들이 찔러주는 동전 열 냥만은 손에 움켜쥐며 웃음을 파는 싸구려 창녀. 담오의 눈자위가 경련했다. 그는 장천린의 준수한 얼굴을 보았 다. '이 사람과 아랑, 모두 돈을 모르려 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어떤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이 사람은 아랑과는 다르다. 아니 여타의 상인들과는 틀 린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 돈, 황금(黃金), 평소 돈을 가장 경멸한 담오였다. 하나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은 모순으로 심한 갈 등을 일으키 고 있었다. 그는 알아보고 싶었다. 이제껏 돈에 대한 그의 비뚤어 졌던 판단과 생각을. 자신을 위압하고 있는 눈앞의 젊은 상인을 통해 진정한 돈의 의미를 그는 한 번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을 일으켰다. 찾고 싶 어졌다. 자신을 다시 찾고 싶어졌다. 오직 칼(刀) 한자루 뿐이며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목표를 잃 은 자신의 인생을 되찾고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자신의 앞에 나타난 눈앞의 인물이 어쩌 면 자신이 그 옛날 잃어버린 자신과 인생의 의미를 다시 되찾아 줄 것 만 같다는 생각이 담오의 뇌리를 지배해 들오왔다. 담오의 입술이 움직였다.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굴복한다고 여기지 말자! 아니 굴복이라고 해도 좋다. 내가 사 십 가까이 살아오면서 헤매이듯 살아온 내 인생을 다시 찾고 싶 다. 이 사람, 이 분을 통해서!' 입술이 깨물려졌다. 피, 핏방울이 이빨자국에서 한 방울 솟아 올랐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손에서 한 번도 떠나보내지 않았던 녹슨 애도(愛刀)를 두 손으로 받쳐 장천린에게 올리고 있었다.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약간 수정했다. '무공만 강한 망나니 칼잡이가 아니다. 능히 용이 될 수도 있는 자다.' 그는 칼을 받았다. "환영한다, 담오." 뒤에서 원계묵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히죽 웃는 모습 이 보였다. 비로소 그는 장도를 잡은 손에 힘을 다소 늦추고 있었 다. 담오는 서서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第 64 章 鏤美의 情熱 해남(海南)의 사나이, 남자(男子) 중 남자. 반송(盤松)은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그의 구레나룻이 잔뜩 덮 인 얼굴은 붉게 화색이 감돌고 있었다. 장천린은 처소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그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 어 빙그시 웃었다. "술을 무척 많이 마신 모양이군?" "핫핫, 기분이 유쾌한데 그럼 술을 마셔야 되지 않습니까? 용대 인." "흠, 누구하고 마셨나?" "담오 그 녀석하고 마셨습니다."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그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로군?" "핫핫, 그렇습니다. 멋진 놈입니다. 처음 보았을 때 약간 건방진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어도 좋았는데 같이 일하게 되어 기쁩니 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핫핫, 앞으로 담오와 나 반송을 좋은 짝이 될 겁니다." 장천린은 화제를 돌렸다. "만사통방에서 합향거가 보내온 낭인무사들은 점검해 보았는 가?" "예." "어떻던가?" 반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한 번 보는 것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 모 두 이 고랍특성의 낭인시장에서는 꽤나 알려진 놈들입니다. 모두 일급이니 한 몫씩 해낼 것입니다." "흠, 그럼 내일 아침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등급에 따라 계약 금을 주고 서류를 작성하게." 반송은 히죽 웃었다. "맡겨 주십시오. 실수없이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후후, 믿겠네." "아무렴입쇼.." "그럼 이만 돌아가게." "알겠습니다." 반송은 허리를 숙여 대답하고는 밖을 향해 나갔다. 하나 문득 걸음을 멈춘 그는 돌아서서 장천린을 응시했다. 그는 기이한 표정 을 지으며 말했다. "몇번을 생각해 보았는데 말입니다. 용대인님은 정말 대단하십 니다. 하핫핫핫!" "......." 반송은 유쾌한 대소를 터뜨리며 밖으로 사라졌다. 장천린은 피식 웃었다. '실없는 친구.' 그는 다시 서탁에 앉았다. 그때 문 밖에서부터 반송의 고함소 리가 들려왔다. "야! 조충! 너 당장 애들 데리고 나를 따라와라. 내가 술 한잔 사겠다. 황계(黃界)! 너는 가서 원노제와 그 꼬마놈을 데리고 와 라." 그러자 누군가 뭐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 "야, 임마. 꼬마가 누구긴 누구야. 그 계집애 같은 소진이지. 안 오면 내가 그냥 안둔다고 이야기 해라. 핫핫, 볼기에 불이 나도록 때려 준다고 말이다." 밖에서 왁작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어,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들의 소란스런 소리가 점차 작아 졌다. 방안에서 장천린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다혈질의 사나이야. 처음에는 꽤나 속이 깊다고만 여겼는데 요즘 갈수록 정이 가는 인물이야.' 그는 반송에 대해 여러 가지로 평가를 했고 반송은 해남 이후 로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줄곧 따라 다녔다. 반송은 특히 근래 들어 그를 무척 존경하고 있었다. 더구나 백 살대와도 뜻이 통하는지 분위기가 한층 좋아지고 있었다. '담오하고는 마음이 맞는 모양인데 정말 다행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고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제 내일 쯤에는 고랍특성을 떠나야지. 이곳의 목적은 달성했 으니.' 그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할 일이 없을 때는 늘상 책을 읽는다. 그것은 오랜 습관이었고 몸에 자연스럽게 뺀 생활의 하나였다. 하나 과거와 약간 달라진 것이 있다면 책의 종류였다. 문학 방 면의 책에서 근래 들어서는 천문지리(天文地理)나 잡학(雜學)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를 넓혔다. 특히 그는 병서(兵書) 종류를 탐독했다. 병서를 읽으면서 그는 많은 것을 느꼈으며 또한 관찰력과 판단력, 그리고 특히 사람들 쓰는 방법면에 크다큰 진경이 오는 것을 실제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가 읽고 있는 책은 천병팔법(天兵八法)이라는 기문병서 (奇門兵書)였다. 한참 독서에 몰두하고 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 어온 사람은 바로 원계묵이었다. "형님." "어서 오너라. 계묵." 원계묵은 매우 유쾌한 표정이었다. "하아, 반형이 형님께 와서 뭐라 이야기 했습니까?"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조금 시끄럽더군." 원계묵도 혀를 내둘렀다. "아주 혼났습니다. 밤을 새면서 같이 술 마시자고 잡아 끄는데 빼느라고 진땀 흘렸으니까요."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왜 따라가지 않았나?" 원계묵은 나직이 웃었다. "소진과 운표는 물론 초광도 이미 끌려갔습니다. 안 따라오면 그냥 안 두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야 모두들 어쩔 수 없었으니까 요." "하하하." 장천린은 대소했다. "아주 대단합니다. 요즘 와서는 정말이지 한 두번 놀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진도 술고래지만 반형에게는 쩔쩔매더군요." 원계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북경에 있는 단도독이나 와야 겨우 대작을 할까요?" "자네도 따라가서 한잔 하지 그랬나." 원계묵은 씩 웃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몸이 피곤하여 일찍 쉬고 싶습니다." "음." 원계묵은 문득 생각난 듯 무릎을 쳤다. "참, 형님을 찾아온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아랍대 대인의 부하 가 방금 전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선물?" 장천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원계묵은 도리어 괴이한 웃음 을 지었다. "정말 기막힌 선물이더군요." "......?" "여인이었습니다." "여인?" 장천린은 흠칫 놀랐다. "네, 그것도 아주 대단한 미인 말입니다." 그 말에 장천린은 문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차!' 비로소 그는 그 원인을 깨달았다. '아랍대가 약속대로 내기에 진 것 때문에 첩을 보낸 모양이구 나.' 원계묵은 싱긋 웃었다. "형님, 아랍대 대인의 배려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이곳에서는 그런 것을 거절하면 모욕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더욱이 그 미녀는 대단히 아릅답습니다." 원계묵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영웅은 호색(好色)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님 역시 영웅 이 아닙니까." 장천린은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원계묵은 그런 장천린의 얼굴을 보고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은근이 말했다. "북경의 동방(東方) 소저께는 제가 책임지고 비밀을 엄수할 테 니 걱정 마십시오." 장천린은 헛기침을 했다. "험, 계묵." "네?" 장천린은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아랍대가 보낸 미녀는 나의 얼굴을 모른다. 자네가 내 대신." 하나 그의 말이 마저 끝나기도 전에 원계묵은 급히 손을 흔들 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소제는 대역은 싫습니다. 사나이 대장부가 어찌 치사하게 대역을 할 수 있습니까?" 이어 그는 장천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럼 그 미녀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하하." 장천린은 그만 떫은 감 씹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 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임단한(林丹汗)의 일을 생각하느라고 아 랍대의 말을 깜박 잊었으니.'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창 밖이 어 두워졌음을 깨닫고 잠깐 당황했다. 바로 그때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천린은 흠칫 했으나 담담히 말했다. "들어 오시오." 문이 사르르 열리고 한 명의 미녀가 들어 섰다. 그녀는 의외로 금발벽안(金髮碧眼)의 이국녀(異國女)였다. 중원 여인보다 훨씬 큰 키를 지녔으면서도 전체적을 잘 발달된 가운데 늘씬한 체격이었다. 피부는 희다못해 투명할 지경이었다. 나이는 어림잡아 십 팔구 세쯤 되어 보였다. 장천린은 의외로 나이가 어린 벽안미녀를 대하자 다소 쑥스러 운 느낌이 들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육순의 아랍대의 첩이라면 적 어도 삼십쯤은 되었으리라고 짐작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벽안금발미녀는 그에게 큰절을 올렸다. "타루미가 용대인님을 뵈옵니다." 장천린은 그녀를 자세히 보면 볼수록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 치 못했다. '관연, 이 정도면 아랍대가 대단히 아끼는 애첩일 것이다.' 시원스럽게 큰 눈동자는 차라리 푸르른 초록의 바다(海)였으며 높으면서도 늘씬한 콧날, 그리고 육감적인 붉은 입술은 가히 우물 (尤物)이라 칭할만 했다. '한데도 약속 때문에 애첩을 남에게 선사하다니 아랍대는 실로 괴퍅하구나.' 문득 장천린은 타루미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음을 보고 말했 다. "일어서라." "감사하옵니다." 타루미는 일어섰다. 큰기였으나 균형잡힌 몸매가 가히 일품이 었다. 장천린은 그녀를 직시하며 물었다. "그대는 어디 출신인가?" 타루미는 나즉하게 말했다. "아국(俄國:러시아) 출신이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랍대 대인이 뭐라고 하면서 보내더냐?" 그말에 타루미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번졌다.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수줍은 듯 떠듬떠듬 말했다. "대인께서는, 용대인님을 오늘밤 반드시 정성껏 모시라고 그리 고 돌아와서 보고하라고, 만일 하나라도 실수하거나 받아 들여지 지 않으면 노예로 팔아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끝 말은 두려움으로 떨리기까지 했다. 장천린은 어이가 없었다. '아랍대는 정말 엄청난 위협까지 했구나.' 그는 할 수 없다고 느꼈다. 자신이 거절하면 타루미의 운명은 비참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의 말에 타루미의 얼굴이 밝아졌다. 장천린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비록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날지라도 너를 잊지 않겠다." 그 말에 타루미는 푸른 초록눈을 들어 장천린을 응시했다. 그 제서야 그녀는 장천린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 그녀는 눈이 부신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껏 그녀는 낯선 사내에게 선물로 바쳐진다는 두려움으로 긴장되어 있었다. 하나 상대방은 자신의 생각밖으로 너무나도 젊 고 아름다운 청년이 아닌가? 그녀에게는 미(美)를 추구하는 본능이 있었다. 장천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국 여인 타루미는 난생 처음으로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아, 아름다운 분이시다. 이런 분과의 밤이라면.' 그녀의 육체 깊은 곳으로부터 자발적인 욕망의 불씨가 일어나 기 시작했다. 그녀의 초록의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그녀는 아국에서 태어났으나 불행히도 돈에 팔려 이곳 몽고까 지 흘러들어 오게 되었다. 그리고 몇몇 곳을 거쳐서 아랍대의 첩이 되었다. 그동안 그녀 가 겪은 일은 세상의 사내들이 오직 탐욕만을 추구할뿐더러 자신 의 몸을 오직 순간적인 놀이기구로 취급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진정한 사랑의 기쁨을 잊고 있었다. 허나 지금, 눈앞의 젊고 준수한 청년 앞에서 타루미는 처음으 로 스스로 사랑을 진하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이때, 장천린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가볍게 끌어안았다. "음." 타루미의 입에서 달뜬 신음소리가 달콤한 콧소리와 함께 흘러 나왔다. 벌써 그녀의 피부는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타루미는 남자를 안다. 남자를 알고 있는 본능이 그녀의 의식 에 편승하여 삽시에 뜨거운 욕망의 불꽃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혈관 속 피는 뜨겁게 전신을 치달았다. 유의 속에 숨은 젖가슴이 부풀어 올랐고 그녀의 숨결은 급해졌다. 장천린은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흐음." 타루미는 콧소리를 내면서 스스로 몸을 움직여 그의 손길을 도 왔다. 어느덧 유의가 흘러내리고 탐스럽고 눈부신 그녀의 상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중원여인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몸이었다. 젖가슴은 놀랄만큼 풍만했다. 또한 쳐지지 않았을뿐더러 우뚝 솟아 거대한 느낌마저 들었다. 두 알의 유두는 이미 딱딱하게 머 리를 들고 사나이를 유혹했다. 타루미는 안기듯이 두 눈을 살며시 감고 있었다. 그녀의 긴 속 눈썹 끝이 가늘게 떨었다. 금빛의 가늘고 긴 속눈썹이었다. 장천린의 손길은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흔들렸다. 그도 역시 여인에 대해 익숙한 몸이었으나 타루미 같은 이국녀를 안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을 아래로 내려 마침내 그녀의 치마마저 벗겼다. 이윽고, 눈부신 타루미의 나신(裸身)이 드러났다. 아아, 대리석 조각이랄까? 타루미의 육체는 너무나도 완벽했다. 잘록한 허리와 둔부는 반대롸 동그랗고 퍼지며 크게 호선을 그리 고 있었다. 그 아래로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는 유난히 길었다. 아랫배의 배꼽을 지나 조금도 군살이 배지 않은 능선을 내려오면. '음.' 장천린도 본능이 있다. 아니 특히 강할지도 모른다. 그는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삼켰다. 그의 눈은 타루미의 깊은 비 역으로 가 멎었다. 금빛의 무성한 수림이 우거진 그곳은 그야말로 황금(黃金)의 비 경(秘境)이 아닌가? 은은한 황금빛의 삼각지대는 보일 듯 말 듯 내밀한 계곡을 덮고 있다. 타루미는 사나이의 눈길을 느낀 듯 가볍게 다리를 약간 교차 시키듯 꼬면서 오므렸다. 그 광경은 너무도 고혹적이다 못해 장천린의 피를 급격히 흐르 게 했다. 장천린은 마침내 그녀를 번쩍 안았다. "아." 타루미는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장천 린은 그녀를 안고 침실로 걸어갔다. 그녀를 침상 위에 내려놓자 타루미는 부끄러운 듯 두 손으로 젖가슴과 아래를 살짝 가리며 몸을 옹송거렸다. 장천린은 옷을 벗었다. 비록 겉보기에는 다소 유연한 듯했으나 실제 그의 체격은 훌륭했다. 딱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은 여인을 숱하게 감탄시킨 바 있었다. 이윽고. 장천린도 알몸이 되어 침상 위로 올랐다. "불을." 타루미가 가늘게 말했다. 장천린은 불을 껐다. 그리고 타루미를 안았다. 순간 그는 이미 타루미가 완전히 달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가볍게 끌어안는 순간 놀랄 정도로 그녀는 적극적으 로 그의 몸에 감겨 들었다. 마치 뼈가 없는 듯 나긋나긋한 여체가 뱀처럼 그의 몸을 휘어 감았다. 인어처럼 싱싱하면서 뜨겁게 달아오른 여체였다. '굉장하군. 중원여인에게는 볼수 없는 정열적인 느낌이 든다. 이국의 여인은 불 같다더니.' 장천린은 문득 깜박 놀랐다. 타루미가 자세를 이상하게 바꾸었 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봉사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기술 또한 그지없이 능숙하고 대담했다. "음." 장천린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타루미는 그의 발 끝에서 부터 서서히 그 감미롭고 뜨거운 입 술과 혀를 사용하여 그를 애무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장천린은 완전히 타루미의 정염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것은 끝없는 파도였다. 그것은 불 같은 바람이었다. 그것은 환락의 소용돌이였다. 그것은 완전한 환열의 극치를 향해 자아(自我)까지도 망각된 채 끓어 오르는 뜨거운 용암의 분출이었다. 그것은. 장천린도 악기를 다루는 데는 명인이었다. 그의 남성 또한 받 은 것 만큼 주는 것에 인색지 않았기에 어느 순간에 자세가 바뀌 고. "하음." 타루미는 난생 처음 느끼는 희열에 온몸을 떨면서 벅찬 환희에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정녕 뜨거운...... 밤(夜)! 第 65 章 사나이들 융고숙잔은 주점(酒店)을 겸하고 있다. 융고숙잔의 전면은 이층 의 건물이었고 그곳을 주점으로 사용한다. 밤(夜), 막남지방의 밤은 대체로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이 들지 만 이곳만은 정반대다. 낭인시장이 열리는 기간 동안 고랍특성은 언제나 활기에 차 있 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밤만 되면 열기(熱氣)에 휩싸인다. 그것은 하루하루 몸이 팔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각처에서 모여 든 낭인무사들이 술에 빠져 지내다시피 하였기 때무이다. 이곳 융고숙잔도 예외는 아니였다. 하나 오늘밤만은 좀 더 특 이했다. 그것은. "하하하." "핫핫핫." 주점의 이층은 온통 왁작지껄한 소음과 웃음, 그리고 열기에 가득 차 있었다. 대충 잡아 사십여 명의 무사들이 자리를 메우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반송이 이끌고 온 백살대 및 그 일행이었다. 그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반송의 강짜에 끌려온 부금진을 비롯 하여 담오, 운표, 그리고 초광, 심지어는 백살대의 이인자인 조충, 상위에 속하는 황계도 섞여 있었다. 장내는 시끌벅적했다. 그들은 아예 주점을 통째로 빌려버린 것 이었다. 모두가 실컷 먹고 마셔대어 얼굴이 이미 얼큰학 취해 있 었다. 시간은 이미 자시(子時)가 넘었다. 반송은 술에 얼큰하게 취해서 횡설수설하면서 계속 담오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담오, 평소 음울하고 딱딱하기만 한 그의 안색은 상당히 부드 러워져 있었다. 이미 자신의 전 인생(人生)을 장천린에게 의탁하 기로 결정한 그는 차라리 마음이 편한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상당히 취해 있었다. 그는 연거푸 반송이 술을 내 밀자 마침내 말했다. "반형, 좀 천천히 주게. 이렇게 마시다가는 밤새 마시기는커녕 도중에 그냥 뻗어 버리겠네." 하나 반송은 유들유들했다. "흐흐, 담형.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의 그 도마뱀 같은 눈이 한 바퀴 돌아갈 때까지는 어림도 없어." 그 말에 옆에 있던 부금진이 실소를 하며 참견했다. "반대협, 제가 보기에는 반대협께서 먼저 술잔에 얼굴을 박을 듯싶은데요?" "음?" 반송은 그를 쳐다 보았다. 이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어림도 없다. 소진. 내가 취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이 집의 술 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모두 없어지기 전에는 끄덕도 하지 않을 거다!" 반송은 이어 계속 술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러다가는 술잔을 쓰기가 귀찮은 듯 아예 술병을 입에 박고 부어 댔다. 그 광경에 부금진은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정말 지독한 주량이야. 단도독보다도 셀 듯한데, 아버님과 맞 먹을 정도야.' 이때 문득 그는 반대쪽에 홀로 앉아있는 초광에게로 시선을 던 졌다. 초광은 제일 좌측에 혼자 말없이 앉아 술을 들고 있었다. 그는 혼자서 술을 따라 마셨다. '초형이 술 하는 것은 처음인데.' 부금진은 의아했다. 그는 이제까지 초광이 술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초광이 자신의 고향에서 회교(回敎)를 신봉 했기 때문이었고 전통적으로 회교도는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 이다. 한데 지금 초광은 술드는 속도가 마치 물 마시듯 하는 것이 아 닌가? 더욱이 워낙 체구가 크므로 술잔을 몇 차례 홀짝만 해도 금방 술 한 병이 비워지곤 했다. 하나 초광의 갈색 얼굴은 조금도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를 바라보던 부금진은 문득 초광의 발 아래를 바라보다가 깜 짝 놀랐다. "......!" 탁자 아래, 그곳에 술병이 수십 개나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숫자는 족히 사오십 병이 넘었다. '서... 설마?' 부금진은 경악했다. 그래서 그는 자리를 옮겨 초광의 옆으로 갔다. 그가 옆에 있으니 마치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은 듯 우스운 꼴이었다. 부금진은 초광의 얼굴을 보기위해 발끝을 들며 말했다. "초형, 탁자 아래의 술을 모두 초형이 마신 건가요?" 초광은 그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네." 부금진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 짧은 시간에 그걸 혼자서 모두 마셨단 말인가요?" 초광은 무안한 듯 얼굴을 붉혔다. "술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초광은 곱슬곱슬한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마시는 걸세. 하나 상당히 맛이 좋은걸?" "맙소사." 초광은 다시 술을 마셨다. 역시 물 마시듯 홀짝홀짝 마셨다. 그 러다 문득 그는 술잔을 내려보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술잔이 좀 컸으면 좋을텐데." 부금진은 그만 혀를 내밀었다. '졌다. 진정한 강자는 다른 곳에 있었구나.' 이때 안쪽으로부터 주점 주인이 나와 반송에게 다가갔다. 그는 사순이 넘었는데 반송에게 굽신거리며 말했다. "나으리, 계집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반송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엄, 잘 골랐겠지?" "물론입니다. 성내에서 제일 나은 얘들로만 골라왔습니다." "흐흐, 그럼 들여 보내라." "알겠습니다. 만족하실 겁니다." 주인이 나갔다. 이어 곧 주점 안으로 사십여 명의 여인들이 줄 줄이 들어왔다. 그녀들은 모두 성장을 하고 곱게 화장을 했으며 언뜻 보기에도 대부분 아름다왔다. 비록 절세 미녀는 아니었으나 모두 쓸만한 여 인들이었다. 게다가 특이한 것은 고랍특성의 유녀(遊女)들이기에 인종(人種) 이 각양각색이므로 피부색과 머리칼이 틀린 다양한 종류의 여인 들이었다. 그러므로 더욱 장내의 열기와 부합하여 요염한 분위기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와-아!" "와!" 유녀들이 들어오자 백살대의 도객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본래부터 피가 뜨거운 사나이들이었다. 더욱이 오랫동안의 단체생활로 인해 여인을 접한 지가 오래되 어 유녀들을 보자 모두 아랫 배가 부풀고 침이 입 안에 잔뜩 고 이고 있었다. 반송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녀들을 살펴 보았다. 이어 그는 고 개를 끄덕였다. "아쉬운 대로 쓸만 하군." 그는 품 소겡서 엄지 손가락 보다 조금 큰 금괴 세 개를 꺼내 더니 탁자에 나란히 놓았다. 순금이 불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자 유녀들의 요염한 눈에서는 탐욕의 빛이 흘렀다. 그 작은 금괴 하나면 정말 그녀들이 수년 간 벌은 금액을 능가 할 정도의 거액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진짜 순금이다." 반송이 여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금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설명했다. "이것을 너희들이 갖고 못 갖고는 모두 너희들이 하기에 따라 달렸다." 유녀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껏 단장을 한 유녀들, 백살대의 사나이들의 눈길이 몸을 ㅎ 건만 오히려 야릇하게 둔부를 흔드는 유녀까지도 있었다. "오늘 밤 너희들은 이곳의 손님들을 한 명씩 맡아서 모신다. 단!" 반송은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너희들 중 한명이라도 실수한다든지 잘못 모시면 이 금괴는 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유녀들은 그 말에 교태 어린 미소를 지었다. 모두들 자신 있다 는 표정이었다. 이때, 반송의 눈이 서서히 유녀들을 쓸었다. 그러다 그 중 한 유녀에게 그의 눈길이 멎었다. "너 이리 와라." 그 말에 유녀는 허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네가 제일 쓸만 하구나." 그녀는 머리를 길게 허리까지 드리웠는데 상당한 미모였다. 몸 매도 가냘픈 듯하면서도 탄력이 있어 보였으며 특히 피부가 투명 할 정도로 희였다. 그녀는 이국(異國)과 중원인의 혼혈인 듯했다. 반송은 그녀의 가슴 부분을 내려보며 말했다. "네게 오늘 제일 어려운 임무를 내리겠다." 유녀는 미소 지었다. "어떤 임무를요?" 반송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손가락 끝은 부금진을 가리켰다. "저 꼬마는 내가 가장 아끼는 막내 동생 같은 친구다. 오늘 밤 그를 모실 자신이 있느냐?" 유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부금진이 아주 예쁘게 생긴 소년임에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반송은 껄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좋아, 좋아. 네가 오늘 저 아우를 모신다면 따로 네게 금괴 한 개를 주겠다." 유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녀는 허리를 나붓이 숙이며 절 을 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하나 이때 당사자인 부금진의 안색이 희다 못해 그만 횟빛이 되어 있었다. "반대협!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반송은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소진, 오늘 밤 내가 너의 숫총각 딱지를 떼어주마." ".....!" 부금진은 그만 사색이 되고 말았다. "자, 가보아라." 반송이 그녀의 둔부를 철썩 때리자 유녀는 교태어린 비명을 지 르며 부금진에게로 달려갔다. 이때 다른 유녀들도 제각기 한 명씩의 무사들 곁에 자리를 잡 고 있었다. 백살대 무사들은 희희낙락하며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모 르고 있었다. 이때. "어... 어......." 부금진은 당황하여 쩔쩔매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온 미녀는 다 짜고짜 그의 무릅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것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녀는 섬섬옥수로 그의 뺨을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어머, 정말 아름다우신 도련님이셔! 저보다도 더아름답고 피부 가 고우시네." 그녀는 즐거워 못 견딘다는 듯이 몸을 야릇하게 흔들었다. "호호, 어쩜 남자 피부가 이렇게 부드러울까?" 그녀는 뺨을 부금진의 뺨에 대고 비볐다. 부금진은 당황하다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비... 비켜라." 하나 그것이 닳고닳은 유녀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어머, 그 무슨 말씀이예요." 그녀는 눈을 예쁘게 흩기며 부금진의 가슴에 안겼다. "자, 도련님. 이제 우리끼리 한 번 재미있게 놀아봐요. 네?" 부금진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녀의 말랑말랑한 언덩이가 무릎을 누르고 화장내 나는 몸을 바짝 기대오는 데는 그야말로 질색이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제 빛깔을 잃어 사색이었다. 그 광경에 주변의 사나이들은 모두 대소를 터드렸다. 마침 옆 탁자에 앉아 한 유녀의 젖가슴에 손을 넣어 주무르고 있던 조충 이 껄걸 웃었다. "부공자님, 한 번 오늘 밤 멋지게 즐겨 보시오. 핫핫, 누구든지 처음에는 다 쑥스러운 법입니다. 하나 사나이라면 그 나이에 여자 의 알 것은 다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핫핫핫." 그때 그의 무릎에 걸터앉은 유녀가 콧소리를 냈다. "흐흥! 그러는 당신은 도통했단 말이예요?" "물론!" 조총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치맛속으로 쑥 들어가고 있었다. "어머! 성급하셔." 유녀는 몸을 비틀었다. 무사들은 또 대소를 터뜨렸다. 장내의 분위기는 완전히 무르익고 있었다. 모두들 유녀들과 놀기에 여념 이 없었으며 연발 웃음소리와 유녀들의 교성, 비명(?)이 터졌다. 정말 호쾌한 사나이들의 천국(天國)이었다. 하나 단 한명, 그에게 만은 그야말로 지옥(地獄)이었으니, 두말 할 것도 없이 한참 덤벼드는 유녀의 새빨간 입술 공세에 쫓겨 고 개를 좌우로 피하고 있는 부금진이었다. × × × 열풍(熱風)은 지났다. 그것은 실로 오랜만의 열풍이었고 이색적 인 밤이기도 했다. 이국녀(異國女) 타루미의 정열적인 봉사에 밤 은 지글지글 탓던 것이다. 장천린은 침상에 걸터 앉아 있었다. 이미 그는 옷을 입은 후였 다. 침상에는 타루미가 누워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지나치게 정열을 발산한 탓이었을까? 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은 다소 흐트러지긴 했어도 여전히 아름답고 유혹적이다. 금발이 흩 어져 있었고 젖가슴은 노출되어 잇었다. 비록 불은 꺼져 있었으나 창문 틈으로 달빛이 흘러들어 그녀의 나신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그야말로 선정적인 모습이었다. 장천린은 묵묵히 그녀의 나신을 내려보다 이불로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이어, 그는 밖으로 나왔다. 뜨락에 서니 보름달이 환하게 누리를 비춘다. 북방의 밤은 고 적한 느낌이 든다. 장천린은 천천히 후원을 거닐었다. 잠시 가다가는 그는 걸음을 멈추고 달을 응시했다. 그의 두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갑 자기 감회가 일어나고 있었다. 타루미와의 정열이 지나가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기 때문인 지도 몰랐다. '해남에 갔다 온 지도 벌써 칠 개월이 지났다.' 그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번졌다. '남창(南昌)의 청하원(靑河院)을 떠난 지도 이제 언언 삼 년이 지났다.' 그렇다. 청하원을 신산(神算)에게 빼앗기고 떠나온 지 벌써 삼 개 성상이 지난 것이다. '지난 삼 년 간은 조금의 쉴 틈도 없이 내 혼신의 힘을 기울인 나날들이었다. 또한 추호의 후회도 없는 날이었다. 하나.' 그는 스치는 봄밤의 바람이 문든 서늘함을 느낀다. '과연, 나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잇는가?' 막남지방은 대부분 황량하다. 하나 후원은 신경을 써 제법 많 은 수목을 가꾸어 놓았다. 달빛이 비쳐 땅에 어지러운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장천린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는 그물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장천린은 쓸쓸 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내심 탄식했다. '언제나 바쁜 일이 지나고 혼자가 되면 느껴지는 이 감정, 가슴 한 곳이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허전함, 무엇으로 메울 수 없고 채 워지지 않는 부분이다.' 그는고개를 들어 달을 응시했다. 밤하늘은 맑았다. 초롱초롱한 별빛이 가물거리고 달이 바람에 스친다. 달빛이 이상할 정도로 또 렷하고 명료해 보였다. '그래, 바로 이 모든 것이 옥교, 그녀 때문이다.' 장천린의 가슴은 뭉클한 이상한 아픔으로 흔들렸다. '옥교.' 달 속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달 속에서 그를 내려다 보며 웃는 미녀, 이 세상에서 그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미녀, 가장 화려하였으며 가장 달콤한 음성을 가진 미녀, 그에게는 이 세상 그 자체 이상으로 절실하게 다가왔었던 미녀. 취옥교의 얼굴이 웃고 있다. 그렇다. 그녀는 장천린의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인이 었다. '옥교,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장천린은 그 동안 그녀의 행방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 는 이미 수십 명의 밀정을 북해로 부냈다. 해남에서 돌아오자마자 밀파를 한 것이었다. 밀정들의 소식에 의하면 그녀는 북해(北海)에 없었다. 그녀는 이미 북해의 제왕인 북해사태청의 청주 숙야염의 아들 숙야천릉 과 함께 어딘가로 떠났다는 것이다. '숙야천릉.' 장천린은 그 소식을 듣고 숙야천릉이란 인물에 대해 조사해쑈 다. 그는 북해 제이의 고수(高手)였다. 그는 장차의 북해사태청의 후계자였으며 탁월한 무공은 물론 젊고 준수하며 지극히 매력적 인 기남아(奇男兒)라는 것이었다. 장천린은 한 번도 보지않은 숙야천릉이란 인물에 대해 기이한 감정이 일고 있었다. 그는 달빛을 보며 쓴웃음 지었다. '그 자가 그토록 뛰어나다면 옥교가 그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 장천린의 가슴은 답답해졌다. '더우기 옥교는 내가 매소련에 의해 죽은 줄 알테니.' 장천린은 우울해졌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그녀를 찾고 싶다.' 장천린은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하나, 그럴 수 없는 나의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신(神)은 인간의 완벽한 행복을 용납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 아.' 그는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평소의 강인하고 현명 하며 끗끗한 태도와 너무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도 역시 일개 평범한 사람의 심정을 지니고 있기는 마찬가지 였기에. "형님." 문득 등 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장천린은 이미 그가 누 군지 알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리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계묵,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느냐?" 원계묵은 충직하게 말했다. "형님이 주무시지 않거늘 어찌 제가 먼저 잘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장천린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해남 에서 그가 동방사성의 음모에 말려 죽을 뻔한 경우를 당한 이후 원계묵은 밤낮없이 그의 주위를 살피며 보호해 온 것이다. 그가 잠시 설혹 자리를 비울지라도 그는 언제나 백살대의 수십 명의 도객들로 하여금 장천린을 보호케 배려했다. 그가 오늘 반송을 따라서 술을 마시러 가지않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백살대의 인원이 대폭 줄었으므로 자신이 직접 장 천린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장천린은 환히 알고 있다. 하나 그는 원계묵이 자 신의 고생을 언급하지 않듯이 그도 역시 표시하지 않았다. 이미 서로가 서로를 너무도 잘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들의 서로를 아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뜻이 통 하고 마음과 마음이 유착되고 있었기 때문에. 장천린과 원계묵은 담소를 나누며 후원을 거닐었다. 그 모습은 흡사 다정한 지기(知己)라기 보다도 형제(兄弟) 같았다. "형님, 타루미라는 미녀는 괜찮았습니까?" 원계묵의 짓궂은 질문에 장천린은 그저 고소할 뿐이었다. 그가 말하지 않자 원계묵은 곧 그늘진 표정이 되었다. 그는 장 천린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형님, 그토록 취소저를 사랑하셨습니까?" 장천린은 여전히 말이 없다. 문득 원계묵이 눈썹이 서서히 일 어났다. 그는 약간 강한 음성으로 말했다. "형님, 정녕 그렇다면 소제가 직접 수하를 끌고 북해로 가서 취 소저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계묵." 장천린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 형님." 장천린은 그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고마움의 빛이 부드럽게 흘렀다. "쓸데 없는 짓이다." 장천린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단순히 나의 감정일 뿐이다." 원계묵은 뭐라 얘기하려 입을 열었다. 하나 그 순간 장천린은 문득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쳤다. "계묵, 오늘 밤 나와 술 한 잔 하지 않겠느냐?" 원계묵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 올랐다. "형님과 함께라면 어느 때 어느 곳이라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좋아! 나가자." 장천린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오늘 밤 자네를 술에 취해 쓰러뜨려 보겠다." 원계묵은 파안대소했다. "핫핫핫, 소제의 술 실력은 보통이 넘습니다. 아마 형님의 세 배쯤은 될 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 원제." "핫핫핫, 좋습니다. 형님, 어서 갑시다." "하하하!" 그들 두 사람, 두 사나이, 두 인간(人間), 두 시대적(時代的) 영 웅은 서로의 어깨를 걸쳐 안고 대소를 터뜨리며 달빛을 받으며 주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진정 만인이 부러워할 풍경이리라. 第 66 章 一生을 팔아 건넨 사랑 아침(朝), 북방의 아침 햇살이 황원(荒原)을 쓰다듬 듯 비춘다. 대륙(大陸)은 광대무변하다. 그리고 태양(太陽)은 온누리를 공통적 으로 비춘다. 태양이 대륙을 비추면 인간들은 새로운 의욕에 넘쳐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전일의 독한 피로와 때로는 절망까지도 딛고 일어서면서 새로운 힘(力)을 근육 구석구석 느끼며 힘차게 대지 (大地)를 밟게 되는 것이다. 융고숙잔은 부산해졌다. 장천린은 고랍특성을 떠날 준비를 하 달했다. 백살대의 도객들은 바빠졌다. 그들은 이곳저곳을 바삐 우 가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간밤에 찾아왔던 아국여인(俄國女人) 타루미는 진시(辰時)경에 객잔을 떠났다. 그녀는 떠나면서 장천린에게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했으나 결국은 하지 못하고 떠났다. 장천린은 안다. 그녀의 초록빛 눈 속에 깃든 애톳한 그녀의 정 감을 그는 충분히 보았다. 허나 그는 그것을 내색할 수 없었다. 타루미는 떠났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면서. 정오(正午) 무렵, 융고숙잔의 후원. 제법 넓은 공지에는 백여 명의 갖가지 부류의 인간들이 모여 있다. 약간 높은 듯, 반송9盤松)이 위엄있게 우뚝 선 채 인간들을 내 려보며 턱수염을 만지작 거리면서 엄숙하게(?) 이야기하고 있었 다. 후원 공지를 꽉 메운 백여 명의 인간들, 그들은 실로 각양각색 의 부류였다. 젊은이, 늙은이, 한인(漢人), 몽고인(蒙古人), 서장인(西藏人), 심 지어는 색목인(色目人)까지 섞여 있었다. 복장도, 그들이 소지하고 있는 무기도 각양각색이었다. 허나 대 부분 그들에게는 공통된 점이 있었다. 그것은 한결같이 그들의 분 위기가 메마르고 아주 잔인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마치 들개 같다고나 할까? 그들은 바로 낭인시장(浪人市場)에 스스로의 몸을 내걸은 낭인무사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평범 해 보이는 자들이 아무도 없다. 자신의 생명과 무예를 팔아 살아가는 자들이니만큼 결코 평범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반송은 낭인무사들을 상대로 차가운 어조로 일장 훈시(?)를 하 고 있었다. "내가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들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할 사람이다." 그는 하나뿐인 팔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잘 기억해 둬라. 내 이름은 반송이다. 나는 공적(公的)인 일에 관한한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나의 주인이 너희 들을 고용했고 너희들의 움직임과 신상을 나에게 맡긴 이상 이제 부터 너희들의 모든 생사여탈권은 내가 쥐게 된다." "......." 반송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메마르고 삭막한 공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백쌍의 음산하면서 무시무시한 번들거 리는 야수9野獸)의 눈동자들은 모두 반송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만일 보통의 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예 그들 앞에 서지도 못할뿐더러 입도 못 뗄 살벌한 분위기였다. 일생을 거칠게 몸뚱이 를 던져 살아온 들개나 승냥이 같은 낭인들이었다. 허나 반송을 달랐다. 그는 입가를 씰룩이며 추호도 기세가 밀 리지 않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계약기간은 일 년이다. 모든 숙식은 그 동안 제공한다. 돈도 모두 선불로 준다. 허나 만에 하나 명심해 둘 것이 있다. 만약 계 약 도중에 대열을 이탈하거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놈은 그 자리 에서 베어 버리겠다." 그의 살벌한 말에 낭인들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거렸다. 이때 낭이들 중에서 한 명이 문득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질문이 있소." 한쪽에 대머리의 중년인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몸에 찰싹 달라붙는 검은 가죽옷을 입고 허리에는 날카로운 낫을 껴차 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혐오감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흉악했다. 특히 주먹코에 구멍이 숭숭 ㄷ려있는 것과 반들반들한 대머리 에 시뻘건 독사 수십마리가 꿈틀거리는 문신을 새겨넣은 것은 실 로 섬뜩하기만 했다. "뭐냐?" 반송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머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오?" 반송은 냉엄하게 말했다. "그 질문은 받지 않는다. 너희들은 어떤 것이든 시키는대로 일 년 만 따르면 된다. 그것이 애당초 계약내용이 아니냐?" 대머리는 눈을 가스름하게 만들며 음산하게 말했다. "흐흐, 살인도 그 할 일 중에 끼어 있소?" 반송은 그를 노려보았다. "네 이름이 뭐냐?" "훗훗훗, 막서(漠西) 위로특(危魯特)의 독두사(禿頭蛇) 화로(華 路)라고 하면 좀 알겠소?" "......!" 그러자 낭인무사들 가운데 침묵 속에서 경탄의 빛이 흘러나왔 다. 그의 이름은 낭인시장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모양이었다. 허나 반송은 차갑게 코웃음쳤다. "흥! 화로, 한 번만 더 입을 벌리면 네 대갈통의 껍질을 모조리 벗겨 주겠다." "......!" 그 말에 화로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두 눈에서 살기가 이글 이글거렸다. 일촉즉발의 험한 분위기였다. 화로 같은 인간은 법은 물론 예 의나 형식 따위는 아예 무시하고 자신의 내키는 대로 살인쯤은 식은죽 먹 듯 헤치우는 작자다. "크ㅋ! 좋소. 반나리, 내가 계약을 하고 돈을 받은 이상은 참겠 소. 허나, 계약이 끝난 후 반나리는 어깨 위의 물건을 간수 잘해 야 될거요." 반송도 음산하게 말했다. "좋아, 기다리지. 허나 너는 일 년 안으로 나 반송이 어떤 위인 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화로는 킬킬 괴소를 흘리기만 했다. 이때. "여기 또 질문 있소!" 이번에는 반송의 바로 앞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그 자는 흑의를 입은 안색이 마치 밀랍처럼 창백한 깡마른 청년이었다. 그 의 첫인상에도 몹시 음험하고 악랄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기운이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 다. 그는 등 뒤에 음양검(陰陽劍)을 메고 있었다. "말하라." 반송의 말에 그는 음푹 꺼진 두 눈에 음험한 빛을 띄며 히죽 웃었다. "반나리의 왼팔은 어찌하다 분실했소?" 그 말에 낭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귿어졌다. 음양검을 맨 청년 의 말이야말로 반송의 감정을 무자비하게 긁는 것이 아닌가? 허나 정말 뜻밖의 것은 반송의 반응이었다. "으하하하하!" 그는 갑자기 요란한 대소를 터뜨린 것이다. 이어 웃음을 뚝 그 치더니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간수를 잘못하면 무엇이든지 분실할 수 있는 법이다. 됐나?" 청년은 음험하게 말했다. "됐소, 반나리!" "네 이름은?" 청년은 히죽 웃었다. "오사장(烏斯藏)의 음양검(陰陽劍) 패륵결(貝勒訣)이오." 반송은 미소지었다. "좋다. 패륵걸!" 그는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총고하겠다." 반송으로 손으로 턱수염을 쓱 ㅎ으며 싱긋 웃었다. "앞으로 내 앞에서 함부로 입을 싸돌리면 아래 위 턱을 모조리 뭉게버리겠다." 웃으며 하는 말 치고는 엄청나게 거칠고 무서운 말이었다. 헌 데 그 말이 채 여운을 내기도 전이었다. 문득 그의 허리춤에서 무 엇인가 번쩍 빛났다. "헉!" 패륵걸의 입에서 다급성이 터졌다. 보라! 그의 머리를 묶는 끈이 잘라져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렸 다. 그와 동시에 그는 가슴이 싸늘해져 고개를 숙인 순간 몸이 학 질 걸린 듯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앞가슴의 옷이 온통 수십 가닥의 도(刀)에 베어져 완전히 걸레 쪽이 되어 있지 않은가? 허나 머리끈이 잘려도 머리카락은 한 올 도 잘려지지 않았고, 가슴에도 살갗은 조금의 상흔도 나지 않았 다. 아니, 그보다도 낭인들 중 아무도 반송이 칼을 뽑는 것도 못 보 았고 또 집어넣는 것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왔다. 반송의 발도술(發刀術)이야말로 가히 섬전이었기에. "......!" 패륵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의 모습은 보기 딱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송, 그는 은연중 백 명의 낭인무사들을 휘어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반송은 그 후로도 장장 한 시진이상이나 낭인무사에게 일 장 훈육(?)을 한 뒤에야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미 낭인들은 모두 백치가 된 뒤였기도 했다. × × × 아랑(阿娘), 며칠째 그녀는 우울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는 손님을 받았으나 그녀가 마치 나무토막 처럼 응해주지 않는 바람에 손님은 투덜대고 나가 버렸다. 객점 주인은 그녀에게 야단을 치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손 님 떨어지면 모든 것은 아랑의 책임으로 돌리겠다고 위협까지 했 다. 하나 아랑은 그대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의욕을 상실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삶의 의욕마 저도 상실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누구와도 어울리거나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금 초라하고 더러운 자신의 방에서 동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경의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얼굴, 그녀 자신이 생각해 도 너무나 늙어 있었다. 과거의 탄력있고 생기 넘치는 얼굴은 와전히 사라지고 지금 그 녀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시들고 구겨진 더러운 잡초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담오.' 문득 가슴이 아릴 듯이 아프다. 그녀는 북받쳐 오르는 슬픔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담오가 그녀 곁을 떠난 뒤, 그녀는 마치 가슴이 텅빈 듯 허탈해 져 버린 것이었다. 허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반짝 치켜세웠다. '아랑, 마음을 굳게 먹어. 약해져서는 안돼.' 그녀는 거울 속을 노려보았다. '너는 네 나름대로의 꿈이 있지 않느냐? 거난이 싫어서 그래서 그 꿈을 성취하려고 이렇게 살지 않았느냐?' 아랑은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어차피, 담상공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거울 속을 노려보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믿을 것은 오직 돈 뿐이야.'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돈을, 돈을 버는 거야.' 그녀는 갑자기 생기를 되찾았다. 그녀는 곧 화장을 하기 시작 했다. 화장솜씨는 능수능란했다. 잠깐 사이에 분을 바르고 머리를 빗어넘기자 그녀의 얼굴은 아 름답게 바뀌었다. 완전히 조금 전과 달라져 보이게 되었다. 그녀 는 거울을 향해 자신을 보고 웃었다. '그래, 아직도 나는 예뻐, 찾는 사람은 아직도 있다.' 헌데 그때. '......!'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거울 속, 방문이 열리자 한 사나이 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담오가 아닌가? "담상공!" 그녀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렇다. 담오는 다시 그녀를 찾은 것이었다. 담오는 아랑이 몸 을 일으키며 큰 눈에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을 보면서 입을 열었 다. 무심한 눈이요, 음성이었다. "내 몸이 팔렸다, 아랑!" 막 그에게 다가가려던 아랑의 몸이 흠칫 멈추었다. "이제 다시는 고랍특성에 올 수 없을 것 같다." 담오의 무심한 말에 아랑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결국, 당신은 칼에 인생을 걸기로 한 건가요?" 담오는 손에 든 녹슨 칼을 내려보며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은 칼 뿐이다." 말하면서 그는 품속에서 조그만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는 상 자를 그녀 앞에 던졌다. "이것이 내 몸값이다. 그 동안 네게 마음 속으로 빛진 것에 대 한 보상이다. 이것으로 너만이라도 남은 인새이 행복해지기를 바 란다." 아랑은 망연자실해졌다. "가는 건가요?" 담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는 만날 수 없겠죠?" 담오는 나직이 말했다. "모르지. 인연이란 것은 워낙 무서우니까. 장담을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요, 인연이다. 허나 그러기에는 이 대륙은 너 무 넓다." 아랑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알지 못한다, 나도." 담오는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몸을 서서히 돌렸다. "안녕, 아랑." 아랑은 넋을 잃었다. 그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잡아야 하낟고 생각했지만 웬지 잡을 수가 없었다. "안...녕." 그녀의 입에서는 안녕이란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말은 그녀의 입술에서만 맴돌았을 뿐 담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담오는 완전히 사라졌다. 아주 그는 사라진 것이다. 담오가 나 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아랑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상자를 응시 했다. 그녀의 눈은 허탈함만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아랑은 상자를 들어ㅆ. 그리고 뚜껑을 무심코 열었다. 순간 그 녀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보석(寶石), 상자 속에는 값비싼 보석이 가득 들어있는 것이 아 닌가? "......!" 그녀는 그 엄청난 양의 보석을 대하자 완전히 넋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허나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다음 순 간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날카로운 웃음을 터드렸다. "호호호홋, 호호호홋!" 그것은 극도의 허무한 웃음이었다. 날카롭게 웃는 웃음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눈물은 이제 뺨을 적시고 그녀의 옷자락까지 적시 기 시작했다. 한산한 거리. "왜 삼십만 냥 전부를 그 여인에게 주었나?" 반송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는 담오가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 이다. 담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랑하는가?" 반송의 말에 담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그럼 왜?" 담오는 앞을 보고 걸어가면서 담담히 이야기했다. "내가 과거 정을 준 유일한 여인이다. 그녀와 나의 운명은 실로 모질다 못해 무섭도록 강하게 대치되어 있었지. 어쩌면 내 인생을 팔은 그 돈으로 그녀에 대한 마지막 잔재를 씻어 버리고 싶었는 지도 모르지." 반송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슴이 아픈가?" 담오는 미소지었다. 그것은 보기 드물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였 다. "반형, 자네는 정말 좋은 친구일세. 나는 자네를 만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네." 그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내 걱정은 하지 말게. 나는 이제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과거 의 찌꺼기를 모두 씻은 듯해서 극히 기분이 유쾌하니까 말일세. 하하핫." 그는 대소를 터뜨렸다. 허나 어딘가 모르게 웃음소리는 쓸쓸한 구석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반송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담오는 앞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행복해라, 아랑. 네게 준 삼십 만 냥도 크고 귀중한 것이지만 그것은 나의 전 인생을 포기한 것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다. 너 는 이제 가난을 벗어났다. 내가 생각한 행복을 네가 부정했기에 나는 너를 위해 마지막으로 네가 추구하는 행복을 이루게 해 준 것이다.' 담오의 눈 속에는 알 수 없는 빛이 흐르고 있었다. '네 곁을 떠난다고 생각한 순간에야 네게 대한 내 감정을 알았 다.' 담오, 그는 눈을 얼핏 감았다가 떴다.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아랑. 허나 이제는 잊기로 했다.' 해는 점차 새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안녕, 아랑.' 두 사나이가 긴 그림자를 이끌며 사라지고 있었다. 고랍특성(古拉特城)의 낭인시장에서 만난 두 사나이, 이제 그들 은 다시는 이곳에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第 67 章 大草原이 부른 運命의 遭遇 대황원(大荒原), 끝없이 펼쳐진 황원의 풍경은 황량하다기 보다 는 웅대하다는 느낌을 준다. 간간이 푸르른 대초원이 끝간데 없이 이어지다가는 또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은 푸석푸석 한 황지(荒地)의 사막(沙漠)이 펼쳐지기도 하는 곳. 막남몽고(漠南蒙古) 지방 특유의 건조한 기후로 인해 대부분의 땅은 황지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대초지가 형성되는 지대에서 는 대규모의 육목인의 생활 근거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양떼를 방목하면서 대초원을 누비는 유목인들은 나름대로의 독 특한 생활풍습을 이루고 있었다. 양에서 나온 모든 것이 그들의 생활에 반영된다. 의복에서 빠 오를 만든 것은 양털 및 양가죽이었고 그들의 주요한 식량은 물 론 양고기와 양젖이다. 그러므로 초원에서 양의 존재는 곧 생명 그 자체이기도 했다. 대황원(大荒原)에 흙먼지가 일었다. 풀 한 포기 없는 먼지와 같 은 메마른 황원을 가로지르는 대상이 있었다. 그들은 낙타 수십 마리와 말 수백 마리를 이끌고 황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바로 고랍특성을 떠난 장천린의 대상(隊商)이었다. 대열의 중간 부분에는 낙타가 이끄는 커다란 가마가 있었다. 특히 가마의 양쪽 으로 백살대(百殺隊)의 도객들이 수십 명 호위를 하고 나갔다. 가마에는 바로 장천린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대열의 후미는 낙타의 등에 짐을 잔뜩 실은 행렬이며 맨 뒤에 백인의 낭인시장 에서 고용한 낭인무사들이 만을 타고 행군했다. 무척 규모가 큰 대상이었다. 일찍이 막남이나 막서지방에서 이 런 류의 대상은 흔히 있는 것이긴 했으나 그 규모가 이렇게 크지 는 않았다. 가마 안, 장천린은 부금진과 마주앉아 있었다. 가마 바닥은 부 드러운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제법 널찍하여 편히 드러누울 수도 있었다. 부금진은 장천린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몽고에 관한 이야기였다. 풍습, 지리, 생활양식, 의복에서 심지어는 그들의 전설(傳說)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 세히 이야기 했다. 장천린은 부금진에 대해 감탄할 때가 한부 번이 아니었다. 아 름다운 미소녀를 뺨칠 정도로 아름답게 생긴 미소년의 머리에는 놀라운 학식과 지혜, 그리고 남이 따를 수 없는 경륜까지 갖추어 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줄곧 장천린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막남몽고의 수십 개 부족은 대개가 후금(後金) 왕(王) 누르하 치에게 눌려 거의 굴복한 채 매년 조공을 바치고 있는 형편입니 다." 부금진은 이 지방의 정세(政勢)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하나 막남의 가장 큰 부족인 찰합이부족의 임단한(林丹汗)은 그 세력이 막강합니다. 그는 성격이 거세고 자존심이 강하여 누르 하치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누르하치가 보낸 군 병을 격파하여 누르하치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있지요." 장천린은 이야기를 귀담아 새기고 있었다. 그것은 장차의 그의 행동과 목적에 극히 중요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임단한은 일당천(一當千)의 맹장이예요. 그는 무공이 극고한 대총원의 풍운아(風雲兒)라고 불리웁니다." 부금진은 엄지손가락을 내세워 보냈다. "장차 대초원의 지배자가 될 것이 확실해요." 장천린은 조용히 들으며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몽고까지 들어온 진정한 이유는 바로 막남몽고의 영웅 임단한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사이에 장사를 하는 것도 그의 개인적인 목적에 포함 되어 있었다. 그가 이곳 몽고지방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 다. 그 동안 그는 막북(漠北)과 막서(漠西)를 돌며 엄청난 물량을 거래했다. 그는 중원에서 산해관(山海關)을 넘었을 때 막대한 물품을 가지 고 왔다. 그리고 그것은 대막지방을 돌며 팔아 치웠고 또 대막 특 산의 갖가지 산물도 구입했다. 특히 십여 일 전에는 막남에 들려 고랍특성의 낭인시장에서 백 명의 낭인을 계약하기도 했다. 또 거상 아랍대에게 말(馬) 일만 필을 구입했다. 아랍대에게 접근한 목적은 마필의 구입도 있지만 진정한 이유 는 임단한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그는 해남에서 돌아와 북경의 태진왕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태진왕은 그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다. 임단한을 만나 모종의 일을 추진해 달라고, 그것은 극비의 일 이었다. "......." 장천린은 가마 문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대황야를 바라보았다. 눈 닿는 곳까지 아득한 대황야가 이어져 있고 황야와 하늘의 중 간에는 흙먼지가 뭉게구름일 듯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황야에 스치는 바람(風)이 만든 걸작이었다. 그야말로 웅대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누르하치.' 문득 장천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중원에서 누르하치에 대한 소문을 거의 듣지 못한 그였다. 하나 몽고에 정작 오고 보니 사정 이 엄청나게 달랐다. 누르하치란 존재는 가희공포와 경의의 대상이었다. '여진족 제일의 영웅이라고 했지.' 누르하치, 그는 여진삼부족(女眞三部族)의 하나인 건주여진(建 州女眞)의 출신이다. 그는 조부 규상과 부친 타실이 음모에 걸려 명군(明軍)에 의해 처참하게 죽자 무서운 원한을 가지게 된다. 그 이후 그는 각고한 노력과 불굴의 투혼으로 여진삼부족을 통 일하는데 성공한다. 그때가 만력(萬歷) 사십사년(四十四年), 즉 일 년 전 그는 여진을 통일시키고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칭했다.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한 뒤 그의 야망은 다시 중원으로 돌려 졌다. 대명제국을 정복하는 것이 그의 원대한 야망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호시탐탐 북방에서 명군과 충돌을 일으켰다. 명(明)에 대한 그의 원한은 뿌리가 깊었다. 여진의 절대자 누르하치는 당금 북방에서 무서운 속도로 급팽 창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상념을 계속 이었다. '누르하치에 대해 대명의 황실은 별다른 관심이 없다. 다만 오 직 태진왕만이 극도의 신경을 쓰고 있을 뿐.' 그의 뇌리에 북경을 떠나기 전 태진왕이 한 말들이 떠올랐다. '과거 수십년 전 여진(女眞)이 명(明)의 휘하에 있고 누르하치의 부친 타실이 명 황실에 충성을 바칠 당시 나는 북방순시를 하려 흥경(興京)에 갔다가 타실과 함께 있던 누르하치를 본 적이 있네. 그 당시 누르하치는 이십대의 청년이었다. 그는 호상(虎相)이었 고 처하를 오시하는 듯한 불타는 눈을 갖고 있었다. 제왕(帝王)의 상(相)을 지닌 인물이라고 생각되어서 그를 보는 순간 가슴이 꺼 림칙했었다. 현재 누르하치의 세력은 상상외로 막강하다. 하나 대명황실은 썩을대로 썩어 그의 존재에 대해 아무도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 는 한탄스런 실정이다. 실상 내가 이십만 군병을 양성하려는 이유도 바로 누르하치 때 문이라네. 임단한을 만나게, 임단한은 막남의 영웅으로 누르하치와 항상 적대시하는 인물이다. 그 이유는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실상 막 남과 여진은 바로 접해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기도 하다네. 그는 찰합이부족의 젊은 족장으로 그의 휘하에 있는 군병만도 십만에 이르른다. 내가 자네를 임단한과 만나게 하려는 이유는 임 단한의 영향력으로 누르하치의 본격적인 중원침공을 다소나마 억 제케 하려는 데 있다.' "......?" 부금진은 한참 이야기하고 있다가 멈칫했다. 장천린이 어두운 표정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대인님." 장천린은 듣지 못한 듯했다. "용대인님!" "......!" 그제서야 장천린은 긴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아, 소진. 미안하다,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부금진은 다소 걱정이 되었다. "피곤하신가 봅니다. 이제 그만 할까요?" 장천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다. 계속 이야기 하거라." "아닙니다. 조금 쉬시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 임단한을 만날 때 까지는 며칠 여유가 있으니까요." 장천린은 문득 부금진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너무 정면으로 들어오자 부금진은 그만 얼굴을 붉혔다. 그는 공연히 수 줍움을 탓다. "저, 제 얼굴에 뭐가 붇었나요?"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너의얼굴은 깨끗하고 아릅답다. 그리고 순수하구나." 부금진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나는 너를 대할 때마다 감탄을 하곤 하지. 네 나이에 비해 엄 청나게 놀라운 지식과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기억력 때문이다." "과찬입니다." "하하, 소진. 나는 너를 볼 때마다 어떤 한 인물이 떠오르곤 한 다." 부금진의 얼굴에 궁금증이 어렸다. "바로 무영(無影) 고검령이란 인물이다." "......!" 순간 부금진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동시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나 그 점을 장천린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무영신산 중 무영 고검령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부금진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는 아주 신비한 인물이예요. 그를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나보지 못했다. 하나 들은 바에 의하면 그의 능력은 불가사 의할 정도라고 하더군. 그는 무엇이든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천재적인 두뇌를 지녔다는 것이다. 마치 소진 너처럼 말이 다. 정말 신비한 존재다." "......." 부금진의 두 눈에 복잡미묘한 빛이 어렸다. 비로소 장천린은 그가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소진,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 안색이 좋질 않구나." "아... 아닙니다." 부금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때, 말발굽 소리가 다가오더니 가마 옆으로 원계묵이 다가섰 다. "형님." "음?" 장천린은 주렴을 들추었다. "무슨 일이냐, 계묵?" "형님, 조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상 행렬 앞에서 피투성이 의 극심한 상처를 입은 여인이 발견되었습니다." "여인?" 여인(女人), 아직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여인이었다. 나이는 십 육칠 세쯤 되어 보였는데 대단히 화려한 웃을 입고 있었다. 옷과 머리에는 금은보석의 장식이 달려 있어 신분이 평범치 않음을 말 하고 있었다. 얼굴도 대단한 미색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입술도 말라서 갈라져 있었고 전신은 피로 물들어 있었 다. 가마 안, 여인을 눕힌 후 원계묵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한 상처입니다. 아주 예리한 병기에 당한 것입니다." 그는 여인의 갈라터진 입술을 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게다가 상처입은 상태에서 먼 거리를 걸어와 전신이 탈진상태 입니다." "소진, 상처를 살펴보아라." "네, 용대인님." 부금진은 즉시 피묻은 여인의 옷자락과 상처를 살펴보고 또 맥 을 짚어 보았다. "외상은 그다지 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 니다." "생명에는?" "살릴 수는 있습니다. 하나, 상당기간 치료해야 할 듯싶습니다." "그럼 우선 응급치료부터 하거라." "알겠습니다." 부금진은 곧 품 속에서 여러 가지 약을 꺼내더니 응급치료에 들어갔다. 하나 상처를 치료하려면 옷을 벗겨야 했다. 그러나 부 금진은 여인의 속살 만지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옷자락을 벗기면서도 내키지 않은 듯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데, 팔뚝의 상처를 차료하다가 갑자기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 그의 눈은 크게 떠진 채 여인의 희디흰 겨드랑이 사이에 멎어 있었다. 그 곳! 바늘로 찔러 만든 듯한 아주 정교하고 조그만한 크기의 장미의 문신(紋身)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붉은 혈장미 문신, 그것은 비록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은밀한 부 위에 수놓아 있었으나 시선을 섬뜩하고 강렬하게 잡아 끌었다. 그 혈장미 문신을 보는 순간 부금진의 안색이 극도로 창백하게 변했다. 다만 그는 장천린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그 표정을 들키지 않을 수가 있었다. 이때, 원계묵이 여인을 응시하며 말했다. "형님, 저 여인의 옷차림은 한인의 것도 몽고족의 것도 아닙니 다. 저 여인은 여진족의 옷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장천린은 흠칫했다. 원계묵은 계속 말했다. "저 여인의 분명 누구에겐가 쫓기고 있습니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그것은 추측일 따름이다." "아닙니다. 틀림없습니다. 이곳은 막남의 가장 동(東)쪽입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오십여 리만 가면 바로 여진의 땅입니다."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자네의 생각은?" 원계묵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여인이 깨어나는 대로 약간의 식량과 물, 그리고 말 한 필 을 주고 보내는 것입니다. 굳이 이곳에서 우리가 저 여인으로 인 해 충돌을 빛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때 그 말에 부금진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원형님, 이 여인은 지금 안정이 필요합니다. 이 상태에서 내쫓 으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의 음성은 약간 흥분기를 띄고 있었다. 원계묵은 눈살을 찌푸렸다. "소진, 우리는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수가 없다." 부금진은 벌떡 일어났다. "가마 한 대만 주시면 제가 알아서 치료하겠어요. 길을 떠나면 서 말입니다." 그는 여인을 안았다. 이어 원계묵을 노려보며 말했다. "일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더 귀중한 것입니다. 살모사 형님." 그는 가마에서 내리더니 찬바람이 일도록 몸을 돌려 사라졌다. "......!" 원계묵은 그만 멍청해졌다. 장천린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 계묵. 이번에는 자네가 한 방 얻어 맞았다." 원계묵은 머리를 긁적였다.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소진에게 저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원계묵도 고소지었다. "동감입니다." × × × 저녁이 되자 대상은 초지에 당도하여 짐을 풀었다. 그리고 여 러 개의 빠오를 쳐 야숙 준비를 했다. 백살대는 물론이려니와 특 히 낭인무사들은 이런 생활에 익숙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잠 깐 사이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곳은 황지와 달리 부드러운 풀이 깔려있고 나무도 있었으며 작으나마 연못까지 있었다. 대상의 행렬이 쉬어 가기에는 알맞은 장소랄 수 있었다. 가운데의 가장 큰 빠오 안, 여인은 깨어났다. 대충 만든 침상 위에서 힘없이 그녀는 눈을 떴다. 아름다운 눈은 흐릿했다가 서서 히 초점이 잡혔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낯선 얼굴들에 놀란 듯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과 공포가 떠올랐다. 부금진은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마시오. 이곳은 안전한 곳이오." 그 말에 여인은 주위를 둘러보고 그곳이 아늑한 빠오 안임을 보고 다소 긴장을 푸는 듯했다. "소녀는."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부금진이 급히 만류했다. "움직이지 말아요, 소저는 지금 상처가 심해요." 그 말에 여인은 다시 힘없이 누웠다. 부금진이 몽고어로 말했 는데도 그녀는 몽고어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몽고어를 할 줄 알고 있소?" "조금." 여인의 얼굴에는 수줍음이 어렸다. 의외로 더욱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소녀라고 하는 것이 도욱 어울렸다. 그녀는 잠시 기분이 안정되자 입술을 움직였다. "저어... 소녀는." 한데 이때, 밖에서 반송이 급히 들어왔다. "용대인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장천린은 그를 바라보았다. "수십 기의 기마대가 이곳으로 들이닥쳤습니다." 그 말에 소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장천린은 느끼는 것이 있어 몸을 일으켰다. "나가 보자." 그는 부금진에게 당부했다. "소진, 너는 이 소저를 숨겨라." "네." 장천린은 반송과 원계묵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대초원의 서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 었으나 그것은 잠깐 사이에 어두운 황갈색으로 변했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기의 인마가 초지에 닥쳐들었다. 그들은 모두 털가죽 양피옷을 입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아 니었다. 한결같이 용맹한 기질이 놀라왔다. 두 눈은 이글거렸고 체격도 극히 위맹해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맨 앞, 두 명이 나란히 털빛이 붉은 적토마(赤土馬) 위에 우뚝 앉아 있었다. 우측에는 청년(靑年)이었는데 그는 털가죽 피풍을 둘렀으며 허 리에 짧은 소검(小劍)을 찼다. 네모지게 각(角)진 얼굴에 길게 늘어진 특이한 눈(眼)을 갖고 있었다. 피부는 구릿빛이었고 그의 체격은 당당하여 압도적인 기 풍을 풍기고 있었다. 은연중 그에게서는 사람을 질식케 하고 굴복하게 만드는신비한 능력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의 옆은 노인이었다. 머리칼이 붉은 적발(赤髮)노인으로 약간 마른 체격에 피부도 불그레 했다. 괴이한 것은 그의 두 눈이었다. 백안(白眼), 놀랍게도 검은 동자가 없었다. 희뿌연 눈자위 뿐인 눈에서는 음산무비한 광채가 흘러나와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장천린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담담히 마상의 두 인물을 올려 보며 물었다. "귀하들은 누구시오?" 그러자 네모진 얼굴의 청년이 그를 니려보며 지그시 살핀 후 물었다.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음성이었다. "그대가 이곳 대상의 대표인가?" "그렇습니다." 청년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왔다. 비록 그의 체격은 다소 크긴 했어도 장천린 역시 키가 켰으므 로 별 차이는 없었다. 하나. '......!' 이때 장천린 어떤 위압감을 느꼈다. 그것은 난생 처음으로 타 인에 대해 느낀 감정이었다. 청년은 그의 앞에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본인은 과이심(科爾沁)의 황태극(皇太極)이오. 귀하에게 물어 볼 말이 있어 온 것이오." '황태극.' 순간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부르르 경련하는 것을 느 꼈다. 그 이름은 웬지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도 그에게는 충격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 만남, 삭막한 막남몽고의 대초원 한 귀퉁이에서 만난 이 운 명(運命)의 조우. 장천린과 황태극(皇太極), 어찌 알았으랴! 장차 평생을 두고 싸우게 될 두 영웅과 효웅의 만남. 황태극(皇太極), 훗날 그가 찬란했던 대명제국을 무너뜨리고 중 원에 청(淸)을 세우게 될 역사(歷史)의 주인공인 청태종(淸太宗)이 될 줄이야. 하늘(天)은 알았을까? 또 신(神)은 알고 있었을까? 풍운(風雲)의 이 만남, 대초원에 마침내 깊은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 깔리고 있는 가운데 장천린과 후세의 청황제(淸皇帝)가 될 청년 황태극은 운명의 변수를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첫만남을 장 식하고 있었다. 第 68 章 神秘少女 票霜娥 과이심부(科爾沁部), 임단한(林丹汗)의 찰합이부와 함께 막남지 방에서 가장 큰 부족이다. 찰합이부가 임단한의 영도아래 뭉쳐 누르하치를 적대한다면 과 이심부는 누르하치와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화친하여 누르하치의 후금(後金)에 조공을 바침으로써 전화(戰禍)를 모면하는 부족이었다. 황태극을 마주보며 장천린은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았소이까?" 그의 음성과 태도에 평범하지 않은 무게가 있었다. 항태극은 두 눈에 이채를 띄고 장천린을 응시했다. 그제서야 그는 장천린의 모습을 자세히 살핀 것이었다. 그는 마음이 기이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일개 상인(商人)이 아니다. 보통 비범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곧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본인은 여진(女眞)의 소녀 한 명을 찾는 중이오."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 소녀를 말하는 것이다.' 직감적으로 그렇게 판단했으나 그는 겉으로는 태연을 유지했 다. "여진의 소녀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황태극의 눈썹이 꿈틀했다. 허나 곧 그는 여전히 차분한 음성 으로 말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산혜(珊慧)라고 하오. 과이심부 출신으로 수 년 전 여진의 귀족인 여리표(黎理豹) 대인의 양녀로 입적했었소. 허나 놀랍게도 그 계집은 옛날부터 한족의 간세(間稅:첩자)로써 여진과 과이심부의 비밀을 조사하고 있었소. 며칠 전에는 과이심 부를 방문했던 여리표 대인을 죽이고 탈출했소." 장천린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 계집은 상처가 극심하여 이 근처의 사막지대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는 몸이오. 또한 황원에는 숨을 곳도 없소, 그래서 혹시 귀공의 대상행렬이 그녀를 발견하여 구해준 것이 아닌가 해서 들 린 것이오." 장천린은 황태극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내심 가볍게 놀랐다. '그 소녀가 간세?' 허나 곧 그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없었소이다." 그러자 황태극의 안면은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은은한 노기가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본인의 수하들로 하여금 빠오를 수색케 해도 좋겠소?" 장천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본인이 부인하느데도 굳이 빠오를 수색하겠다는 것은 본인을 불신함이 아니오?" 그 말에 황태극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한족은 거짓말을 잘한다. 나는 귀하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이어 그는 장천린의 말을 듣지도 않고 옆의 적발노인을 향해 말했다. "적리사부(赤狸師父), 수하들을 시켜 빠오를 뒤져 보십시오. 거 부하면 살상해도 좋습니다." 그 말에 적발 노인은 무심하게 말했다. "알았소이다." 이어 그는 기마대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뒤져라!" "넷!" 기마무사들이 몸을 움직였다. 허나 그때, 그들은 그만 멈칫하면 서 잔뜩 긴장되고 말았다. 보라! 주위의 어둠을 뚫고 사위를 포위하는 인물들, 그들은 바 로 백살대와 백 명의 낭인무사들이었다. 이백여 명이 그대로 그들을 포위하니 그 기세는 극히 위태롭고 위압적이었다. 맨 앞에서 반송이 앞으로 나서며 탁한 음성으로 기 마대를 향해 말했다. "한 치라도 그 자리를 뜬다면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 그 말에 황태극은 움찔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들 이 벽여 명이 모두 일급 고수임을 그는 한 눈에 간파한 것이다. '으음, 일개 상인이 이렇게 많은 숫자의 강한 고수들을 거느리 다니.' 그의 시선은 장천린에게로 옮겨졌다. 장천린은 여전히 태연했 다. 그 주위에는 원계묵과 담오가 양쪽에 나누어 시립하고 있었 다. '음, 저 두명은 가히 초일급 고수들이다.' 상황은 기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때, 그는 은밀하게 장천린 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장천린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 황태극을 향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인이 그대들의 수색을 불허하는데 이유가 있소이다. 그것은 이 근처에 비적들이 자주 횡행하기 때문이오. 상인인 나로서는 조 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오." 황태극은 냉소했다. "우리를 그럼 한낱 비적으로 본단 말인가?" 장천린은 여유있게 말했다. "상인은 외지에 나오면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법이오." 황태극은 주위를 둘러보며 위협하듯 말했다. "그대들이 수색을 계속 허용하지 않는다면 이 막남지방을 절대 무난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 말에 장천린은 짐짓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난색을 지으며 약간 캥기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황태극은 약간 어조를 부드럽게 하며 말했다. "그대가 정 못 믿겠다면 우리는 무기를 맡기고 수색하겠다." 그 말에 장천린은 곧 빙그레 웃었다. "정히 그렇다면 귀공을 한 번 믿어보겠소이다." 이어 그는 주위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백살대와 낭인무 사들은 서서히 길을 터주었다. 황태극은 노인을 향해 말했다. "적리사부, 무기를 이곳에 놓고 수색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천 막 밖으로 나가는 자들이 있나도 살펴보시오." "알겠소이다." 이윽고, 기마무사들은 무기를 한 곳에 쌓은 후 빠오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때, 부금진은 장천린의 곁으로 다가와 전음을 전했다. "용대인, 잘 숨겨 두었습니다." 장천린은 나직이 물었다. "확실하게 했느냐?" "걱정마십시오." 부금진은 미소지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은 적발노인에게 갔다. 순간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때 마침 적발노인의 시선도 우연히 부금진과 부딪쳤다. 허나 여전히 무심하기만 했다. 그러나 부금진은 달랐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이 어렸다. 장천린 은 나직이 물었다. "아는 사람이냐?" 부금진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아... 아닙니다. 허나 저 노인의 모습이 워낙 특이해서, 제가 소 문으로만 들은 인물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사존(邪尊), 적리휼(赤狸휼)이란 인물입니다." "적리휼?" 그때 문득 장천린은 황태극이 그 노인을 적리사부라고 불렀다 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는 어떤 인물이냐?" 부금진은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는 여진족 출신으로 여진사상 제일의 고수입니다. 몽고, 아 국, 여진은 물론 오사장과 금천(金川) 일대를 통틀어 무적의 고수 입니다. 오십 년 간 그 자의 손 아래 십초를 넘긴 고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자의 손에 사라져간 일류고수만 해도 헤아릴 수 없 을 정도입니다." 부금진의 눈은 계속 적발노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가 바로 적리휼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북해의 제왕인 숙야염조차도 크게 꺼려하는 무서운 전설의 고 수입니다." '......!' 장천린은 그 말에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때, 빠오를 면밀히 수색한 무사들이 나왔다. 허나 그들은 모 두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산해라는 여인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었다. 그들은 황태극에게 그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황태극은 의외인 듯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그는 깨끗이 단념 을 한 듯 고개를 돌려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담담하고 정중 하게 말했다. "이거 오해를 하여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소, 귀공!"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별 말슴이시오. 오히려 본인이 귀공을 비적으로 모욕하여 죄 송합니다." 황태극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어렸다. 그는 천천히 말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실례지만 묻고 싶소. 귀공의 존함은 어찌되시오?" "용백군(龍白君)이라 하오." "기억해 두리다." 황태극은 말 고삐를 잡았다. "적리사부, 갑시다." 그는 박차를 가했다. 적토마는 두발을 번쩍 치켜들었다가 힘찬 울음 소리를 내더니 곧 앞으로 내달았다. 두두두두! 그 뒤를 이어 기마대들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초 원 저쪽으로 삽시에 모습을 감추었다. 대초원의 짧은 만남, 그것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 장천린은 황태극이 사라진 후에도 한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황태극이란 인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인물이 아니 었다. 아니 이제껏 그가 만난 그 어떤 누구보다도 훨씬 기도가 출 중하지 않던가? '황태극, 제왕의 상(相)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웬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때 원계묵이 권유했다. "형님, 그만 들어가시지요." "음!" 그는 문득 부금진에게 물었다. "소진, 그 소녀는 대체 어디에 숨겨 두었느냐?" 부금진은 씩 웃었다. "안으로 가보시면 알아요." 그 말에 일행은 빠오로 향했다. 모두들 이미 부금진의 재치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안심은 했지만 궁금증이 치밀 었기 때문이었다. 빠오 안,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분명 소녀가 있었으나 일행이 안 으로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부금진은 씩 웃더니 바닥에 깔 린 양털가죽을 들어냈다. "아!" 털가죽이 깔린 땅에 구덩이를 판 후 그 속에 소녀가 있었다. 그 리고 흙을 덮은 후 소녀의 입에 짧은 대롱을 물려 숨만 간신히 쉴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털가죽을 덮었으니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찾 을 수 있겠는가? 실로 놀라운 기지였다. 부금진은 소녀를 끌어냈다. 흙투성이가 된 소녀의 얼굴은 공포 로 인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장천린은 부드러운 말했다. "그들은 돌아갔소. 소저, 안심해도 되오." "아!"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천린은 그녀가 숨을 돌리자 물었다. ":대체 어찌된 일이오? 소저!" 장천린의 음성은 웬지 조금 차가왔다. 그 말에 소녀는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더듬더듬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대충 이러한 것이었다. 본래 그녀의 부친은 한인(漢人)이었다. 허나 어릴 적부터 과이 심부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과이심부의 여인과 결혼을 했고 그때 태어난 것이 바로 산혜(珊慧)였다. 산혜는 어릴 적부터 미모가 출중하고 총명하여 주위의 귀여움 을 독차지했다. 특히 그녀는 여진의 귀족 여리표(黎理豹)의 눈에 들어 심 삼 세 때 그의 양녀로 들어가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그녀는 더욱 더 아름다워졌다. 그러자 여리표는 양부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탐욕을 품게 되었다. 계속 그때부터 여리표는 산혜를 추근대어 산혜는 괴로움이 이 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럴 즈음, 바로 나흘 전 여리표는 그녀를 대 동하고 여진을 떠나 막남의 과이심부를 방문했다. 그리고 과이심 부 부족장의 집에서 그들은 머물게 되었다. 헌데 사건은 그때 터진 것이다. 산혜는 후원을 산책하던 도중 에 우연히 무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마침 후원의 정자에서 황태극과 여리표, 과이심부 족장의 밀담(密談)을 엿듣게 된 것이 었다. 그녀는 그 이야기 중에서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것 은 산혜의 생부(生父)가 바로 한족의 첩자(諜者)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밝혀져 이미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태 극은 산혜를 처결을 여리표에게 위임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산혜는 아찔한 충격을 받았다. 헌데 그와 함께 황 태극이 과이심부 족장에게 비밀지시를 하달하는 것도 들었다. 병 력과 말(馬)을 빌려 줄테니 찰합이부의 임단한을 죽이라는 밀명을 내린 것이었다. 거기까지 듣고 난 산혜는 공포에 질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부친이 한족의 첩자라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을 울었다. 그런데 그 날 밤, 여리표가 찾아왔다. 여리표는 그녀의 방에 들 어오자마자 술냄새를 풍기며 광폭하게 산혜를 덮쳤다. 산혜는 그 순간 엉겁결에 베개 밑에 숨겨두었던 비수로 자신도 모르게 여리 표의 심장을 찔렀다. 여리표는 너무나 쉽게 죽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탈출을 감행했다. 허나 곧 무사들이 쫓아왔 고 그녀는 무수한 상처를 입으면서 도주하다 마침내 장천린의 일 행에게 구함을 받게 된 것이었다. "......." 장천린은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들으면서 그는 안색 이 아까보다 더 차가와졌다. 그는 그녀의 말에서 몇가지 모순점을 느낀 것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일개 소녀가 과연 여리표를 죽이고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고도 황원을 그토록 오래도록 도망갈 수 있었을까? 게다가 피를 많이 흘려 탈진상태가 되었어도 그녀는 끈질긴 생 명을 유지했다. 그것은 보통의 체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공포에 질린 평범한 소녀라면 과연 그 간의 일을 어찌 이 토록 자세히 조리있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산혜, 그녀는 말을 너무 잘했다. 허나, 장천린은 그 의문에 대해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다 만 그는 궁금한 것을 한 가지만 물었다. "소녀는 황태극이란 인물을 알고 있소?" 산혜는 겁먹은 음성으로 말했다. "알고 있어요. 그는 여진의 왕(王)인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 들이예요." "......!" 장천린은 흡사 쇠뭉치로 가슴을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가 누르하치의 아들!' 그는 웬지 운명적인 느낌이 와 닿는 것을 느기며 안색이 딱딱 하게 굳어졌다. '어쩐지,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그의 기도로 보아서는 왕자(王子)로써 만족할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장천린은 기이한 영감이 들었다. 그것은 장차 여진의 패왕이 될 사람은 바로 황태극일 것 같은 생각이었다. 대초원에서의 단 한 번의 만남, 과연 그의 영감은 훗날? × × × 이튼날 아침 대상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러고 이틀째 되는 날 그들은 찰합이부 내로 깊숙이 들어섰다. 그 동안 산혜의 상처는 웬만큼 치료가 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자의로 움직이고 걸어다닐 수 있었다. 그것은 모 두 부금진의 의술 덕분이기도 했다. 객점(客店)의 후원, 산책하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바로 산혜였 다. 지금 이곳은 찰합이성 영토 내의 오노제(烏魯齊)란 작지도 크 지도 않은 현이었다. 장천린의 대상 행렬은 그곳에 여장을 풀고 있었다. 산혜는 많이 회복되었다. 그녀의 현재 모습은 상처를 입었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녀의 미색은 가히 절륜했다. 해맑은 피부는 고귀하면서 청순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후원을 천천히 산책하며 이따금씩 가볍게 한숨을 쉬곤 했다. 문득,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부공자님!" 부금진이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몸은 좀 어떠시오?" "좋아요. 아주, 모두 부공자님 덕분이예요." 부금진은 의젓하게 말했다. "천만에!" 허나 문득 산혜를 바라보던 그의 안색이 괴이하게 변했다. 그 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헌데 소저는 왜 내가 그렇게 소저의 상세를 열심히 치료했는 지 그 이유를 알고 싶소?" "......?" 부금진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산혜를 보며 괴소를 흘렸다. "후후훗, 천하(天下)를 다 속여도 나를 속일 수는 없소. 표상아 (票霜娥) 소저!" 표상아, 그말을 듣는 순간 산혜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해 버 렸다. 왜? 第 69 章 薔 薇 林 산혜(珊慧)의 하얗게 탈색되었던 안색은 차츰 정상을 회복했다. 간신히 진정을 한 듯 그녀는 문득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표상아라니 그 무슨 말슴이예요?" 부금진은 나직이 웃었다. "후후, 변명하지 마라. 나도 처음에는 몰라볼 뻔했지. 하나 그대 의 겨드랑이에 새겨진 붉은 장미 문식을 보고 당신의 정체(正體) 를 파악했지." 산혜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졌다. "장미꽃 문신 속에 네 개의 꽃술 표식은 무엇이지? 그것은 ㄱ 신비의 여인밀문(女人密門)인 장미림(薔薇林)의 서열 사위임을 알 리는 비밀 문신이 아니냐? 그대는 바로 장미림 서령 사위인 백장 미(白薔薇) 표상아가 아닌가?" "......!" 산혜의 안색은 경직되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녀는 돌연 부금 진의 두 눈을 찔렀다. 순가락을 벌리고 번개처럼 눈을 찌르는 그 녀의 공격은 악랄무비했다. 하나 부금진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재빨리 그녀의 손 목을 낚아챘다. 그는 히죽 웃었다. "후훗, 그대는 상처입은 몸이야. 아직 움직이면 좋지 않아." 산혜, 즉 백장미 표상아는 눈썹 끝을 파르르 떨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후후후." 부금진은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이어 손목을 높아 주고는 뒤 로 일보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팔뜩을 걷어 보였다. 아! 그의 희디흰 팔뚝에 표상의 것과 똑같은 붉은 장미문신이 선명히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장미문신 가운데 꽃술은 두 개였다. 그 광경에 표상아는 경악 을 금치 못했다. "당신은?" 부금진은 미소 지었다. "부금진이다. 하나 십여 년 전에는 한때 수영(殊營)이라고도 불 리웠지." "아!" 표상아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나타났다. 그녀는 정녕 깜짝 놀 라면서 극히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내가 기억난 모양이구나." 순간, "수영!" 표상아는 그대로 다가 오더니 부금진을 끌어안고 뺨을 비볐다. 그 동작은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표현하지 못할 반가 움의 표시였다. 하나 부금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아, 함부로 남을 껴안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군." 표상아는 기쁜 듯 말했다. "너무 반가와서야!"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흥분의 빛이 역력했다. 부금진의 얼굴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자세히 응시하더니 그녀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홋! 정말 자세히 보니 과거의 귀여운 모습 그대로야. 하나 차림이 바뀌어서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어." 부금진은 씩 웃었다. 미녀의 웃음 같은 미소였다. "상아의 소문은 가끔 들었다. 사 년전 여진(女眞)에 갔다더니 여리표의 양딸로 있었군." "훗! 나도 많이 변했지?" 부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십 년 전에는 말괄량이었는데 지금은 제법 아름답군. 가슴 도 나오고 말이야!" "어머!" 표상아는 예쁘게 눈을 흘겼다. 부금진이 그녀의 가슴을 손가락 으로 쿡쿡 찔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곧 부금진의 손을 잡고 말았다. "수영, 우리 조금 걸어. 응?" "몸이 좋지 않을 텐데." "괜찮아." 이윽고 두 사람은 객점의 후원을 거닐었다. 그 광경은 마치 사 랑하는 한 쌍의 남녀가 정담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부금진은 서서히 과거의 회상에 잠기고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 그의 곁에는 부친이 없었다. 그는 원래 부친이란 세상에 없는 줄 알고 잘랐다. 그를 키운 것은 모친이었다. 그의 모친은 고귀하 고 아름다운 미인(美人)이었고 대단한 능력과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모친에게는 세 명의 양녀가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육 칠 세의 비슷한 나이여서 부금진, 즉 수영(殊營)과 항상 같이 뛰어 놀았다. 마치 친 혈육같이 뒹굴며 자랐다. 그 중에 한 명이 표상아라는 소녀였다. 하나 수영이 여덟 살이 되던 때 그는 모친의 곁을 떠나 살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하늘에는 석양 노을이 지고 있었다. 표상아는 부금진의 어깨에 기대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장미림은 과거보다 몇 십 배 켜졌어. 또 아름다워지고." 노을에 비친 표상아의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사 년 전까지 나는 거의 장미림에 기거했는데 양모님의 영을 받고 여리표에게 접근하여 양녀로 거짓 입적했어. 그때부터 줄곧 여진에 살았어." 부금진은 듣고만 있었다. "호호, 나의 아버님이 과이심부족의 장로(長老)였기 때문에 일 은 꽤나 쉬웠어." 부금진은 문득 물었다. "왜 여리표에게 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