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로제검 제1권 책머리에 부쳐 ━━━━━━━━━━━━━━━━━━━━━━━━━━━━━━━━━━━ 피터팬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정신의학상의 용어다. 필자는 십이 년 전 이 작품을 집필할 때 그 희한한 병에 걸려 있 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참으로 행복했었다. 필자의 피터팬은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었으며, 겉치레나 품위따 위에 매달려 번뇌하며 살아가는 자들을 가장 두려워했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 또한 그런 바탕에서 탄생되었다. 일로제검의 주인공은 그 어떤 다른 주인공보다 나이가 어리다. 어쩌면 정통무협에 익숙한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다가 이를 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축구가 4강에 오를 것을 믿는 독자 들만 보아주길 바란다. 십이 년이 흐른 지금..... 약간은 늙어버린 손으로 개작(改作)을 해서 독자제현께 다시 선을 보이게 되었다. 부디 아낌없는 성원을 바라며.... 유청림 一拜. ■ 일로제검 제1권 서장(序章) 1 사모곡(思慕曲) ━━━━━━━━━━━━━━━━━━━━━━━━━━━━━━━━━━━ 대강남북(大江南北) 중원무림(中原武林)에 십팔만 리(十八萬里)에 떠도는 한 영웅의 노래가 있었다. 누군가의 입에서부터 시작된 그 노래를 사람들은 검영가(劍英歌) 라고 일컬었다. 그 노래는 때로 저주와 원한을 담고 울려 퍼졌고, 또한 때로는 지 극한 사랑과 흠모를 담은 채 울려 퍼졌다. 황야의 삭풍에 실렸던 노래.... 무심한 한겨울의 서북풍(西北風)을 뒤흔들었던 노래...... 늦가을의 달빛(月光)을 달랬던 노래..... 장강(長江)의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고독했던 사나이들의 가슴 에 울려 퍼졌던 노래..... 그 모든 시간 속에서 한 구절의 검영가(劍英歌)는 모든 영웅호걸 절세가인들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대변해 주었던 것이다. 검영가(劍英歌). 그것은 한 인간(人間)의 노래였다. 더 이상 완벽해질 수 없었고, 더 이상 위대할 수 없었던 한 절대 신인(絶對神人)을 찬양하는 노래였다. 무황야(武皇爺)..... 당신은 춘삼월의 해와 같소이다. 온누리에 비치는 따뜻한 햇살처럼, 당신의 존재는 우리에게 희망이오. 무황야, 당신은 엄동설한의 달과 같소이다. 백색 설원에 부서지는 차가운 달빛처럼, 만져질 듯이 만질 수 없는 그리움이기 때문이오. 무황야, 당신은 어둠 속의 바람과 같소이다. 만져질 듯 만질 수 없는 바람의 행로(行路)처럼, 당신을 향한 길은 많으나 실상 존재하지 않는구려. 무황야, 당신을 애타게 찾는 것은 내 검(劍)이 친구를 찾기 때문이오. 내 검(劍)의 연모를 받아주시오. 더 이상 지쳐 녹슬기 전에..... 눈쌓인 산골 어느 발자국 하나.... 그 발자국에 속절없이 희망을 걸고, 그 발자국을 그저 따라 밟아. 살 에이는 찬바람을 길잡이 삼아, 나는 오늘도 당신께 향하고 있다오. 무황야(武皇爺)는 마치 형체없는 불가사의한 전설(傳說)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으로 중원을 움켜쥐고 있었다. 중원의 모든 대소사가 그의 손아귀 안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군중 앞에 나 타난 적이 없다. 그러나 천하무림은 그의 말과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전능(全能)의 존재, 만약 그런 무황야를 적 으로 두려는 자가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외로 무모한 자들이 많은 법이다. 놀랍게도 살아있는 신(神), 무황야의 영역을 노리는 인간들은 무 수히 많았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곧 모든 무인(武人)들의 최종 목표인 천하제일인(天下第一 人)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껏 모두가 무황야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허무하 게 피를 뿌리며 죽어갔을 뿐이었다. 한 영웅(英雄)이 길가던 농부에게 물었다. - 무황야를 아시오......? - 모르오. 허나 당신을 죽여야겠소! 농부는 돌연 손에 들었던 호미를 영웅의 심장에 처박았다. 붉은 핏줄기가 튀었다. 한 이름없는 골짜기에서 두 촌로(村老)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한 촌로가 문득 빙그레 웃으며 무심결에 물었다. - 늙은이...... 무황야를 아시오? - 모르겠소. 당신의 대마가 죽었구료. 당신도 죽어 주시오! 번쩍! 손에 쥐어졌던 바둑알이 죽음(死)의 암기가 되어 상대의 두 개골 을 파고 들었다. 뇌수와 피가 튀어올랐다. ......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무황야에 대해 도전하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전혀 예측지 못한 상대에게 소리없이 싸늘한 시체로 변해갔다. 무황야, 그는 적이 많은 것처럼 친구도 많았던 것이다. 수많은 세월이 그렇게 흐른 뒤.... 언제부턴가 아무도 무황야를 찾지 않게 되었다. 이제 그 어떤 자도 무황야에게 도전하지 않는다. 드디어 사람들은 깨달았던 것이다. 무황야-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은 거대한 자연의 순리처럼 거역할 수 없음을...... <무황야! 그는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영원불멸의 신인(神人)이다!> 모두가 그렇게 단정짓고 말았다. 이제 아무도 무황야를 찾으려 하지도, 도전하려 들지도 않는다. 허나 천하가 모두 무황야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한 곳에서 서서히 타오르는 운명(運命)의 불씨가 있었다. 당연히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불씨일 수밖에 없었다. 소년(少年)..... 한 소년의 외로운 운명(運命)의 불씨..... ■ 일로제검 제1권 서장(序章) 2 떨어진 두 개의 별 ━━━━━━━━━━━━━━━━━━━━━━━━━━━━━━━━━━━ 한 칸의 정실(靜室)- 실내에는 은은한 녹향(綠香) 내음과 함께 갖가지 약초냄새가 감돌 고 있었다. 열려진 창문 밖으로는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하게 날리고 있었다. 정실의 중앙, 창문이 마주 보이는 위치에 한 태사의가 놓여져 있었다. 그 태사의에 그림처럼 단아하게 앉아 있는 백의중년인(白衣中年 人)의 모습은 차라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 사나이... 세상의 그 어떤 도도한 여인일지라도 이 사나이를 단 한 번이라도 본다면 상사병에 걸려들지 않고는 못배기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 백의 중년인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특히 그의 손부위는 파란 빛으로 물든 채 연신 경련하고 있었다. "......!" 전신에 흥건한 땀(汗)... 그렇다. 백의인은 죽어가고 있었다. 식어가는 그의 몸은 이제 숨쉬는 것도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휘우웅...... 휘웅......!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리가 가끔 거세어지면, 백의인은 서서히 입가에 창백한 미소를 머금고는 했다. 백의인의 앞에는 세 명의 인물이 깊숙이 부복하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머리를 바닥에 닿듯이 깊이 부복해 있어 용모를 분간 할 수 없었다. 세 인물 모두가 백발(白髮) 노인(老人)들로 전신에 비범한 기도가 서려 있었다. "끄윽...... 끅......!" 가끔 그들의 입에서는 괴이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것은 오열을 삼키는 소리였다. 행여 주군의 마지막 길에 방해가 될까봐 그들은 전신을 경련하며 소리없이 울고 있는 것이다. 이때였다. 스윽! 실내의 입구 휘장이 걷히며 자의(紫衣)의 한 소년(少年)이 나타났다. 아, 이제 겨우 다섯 살 가량쯤 되었을까. 마치 천상(天上)의 선동 (仙童)을 방불케 하는 용모와 기품을 지닌 소년이었다. 헌데, 그러한 소년의 품에는 생후 한 달도 되지 않은 갓난아기가 안겨있지 않은가? "까르르......!" 아기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더없이 맑은 웃음소리, 그것은 실내의 무거운 분위기와 묘한 조화 를 이루며 울려 퍼졌다. 소년은 은은히 물기가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의 품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 보았다. "바보같은 게....." 누가 보아도 그들은 형제(兄弟)였다. 스르륵...... 소년은 침착한 걸음걸이로 백의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소년의 걸음은 너무도 조용하고 안정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기이한 감동마저 느끼게 했다. 순간 백의인의 죽어가던 얼굴에 은은히 온화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 아들...... 왔느냐?" "응. 왔어" 소년은 맑은 눈에 애써 눈물대신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죽는 거야?" "허허...... 그렇단다." 백의인은 미약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소년의 두 손끝 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어둡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으흑흑...... 장주......!" "장주......!" 부복해 있던 삼 인(三人)의 입에서 일제히 통한어린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백의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세 분 유종(儒宗)...... 눈물은 아무때나 흘리는 게 아니오. 눈 물이 내 생명을 소생시켜 주지는 않소...... 본좌는 그대들이 웃 어주기를 바라오. " 백의인은 천천히 소년의 준미한 얼굴에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내 아들처럼......" 과연 소년은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보는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슬픈 것이었다. 오오...... 대체 이 다섯 살 소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소년을 응시하는 백의인의 입가에 따사로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검우(劍雨)야......!" 나직하고 미약한 어조...... 허나 더없이 정감어린 음성이었다. "응. 말해." 소년은 또렷한 어조로 대답했다. 백의인은 순간 두 눈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신광을 발했다. 죽어가 는 자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상치 못한 의외의 질문이었다. 허나 소년은 망설임 없이 두 눈에 총기를 빛내며 대답했다. "백(白), 검(劍), 우(雨)...... 천지제일명(天地第一名), 백검우야......!"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 순간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천하제일의 이름이라고 거 침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의인은 아들에 대답에 만면 가득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네 아버지는 누구냐?" 그는 또 물었다. 소년 백검우는 이번에도 또렷하게 대답했다. "백(白), 장(長), 청(淸)...... 천지제이명(天地第二名) 백장청이야." 실로 기이한 가르침이 아닌가? 자신을 제일(第一)이라 하고, 부친을 제이(第二)라고 하다니! 백의인, 백장청은 창백한 얼굴에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다. 너는 천하제일명 백검우이며, 너의 친부는 천하제이명 백장청임을 잊어선 안 된다." 백장청! 그렇다. 그는 바로 당금 무림(武林)에 검(劍)의 달신(達神)으로 명성을 날 리는 현백검장(玄白劍莊)의 장주(莊主) 백장청이었다. 백장청은 중원의 모든 고수들이 공인하는 전무후무한 검(劍)의 기 재(奇才)였다. 그는 이제 삼십육 세에 불과했으나 이미 천하제일 검(天下第一劍)의 명성을 얻었다. 이제껏 그의 검아래 단 삼초(三招)를 버틴 인물이 없었다는 사실 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영원히 무림에 적수가 없을 것 같던 백장청이 이 순간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었으니...... 대체 어느 누가 백장청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휘우우웅...... 휘웅......! 창 밖으로는 어둠과 함께 눈보라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좋다...... 나의 아들아, 너의 이름은 모든 이름의 위에 군림하 고 현백검장의 이름은 모든 문파의 위에 군림한다." 백장청은 호흡이 힘겨운 듯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이 아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명심하여 듣거라!" "......!" "이 아비는 네게 한 가지 마지막 선물을 남기겠다." 백장청의 입가에 그 순간 희미한 미소가 춘풍(春風)의 아지랑이처 럼 피어올랐다. "그 선물은 너의 유일한 적수가 될 인물의 이름이다. 그 이름 은...... 무황야(武皇爺)라 한다." '무황야......!' 소년, 백검우의 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오오...... 무황야(武皇爺)! 이 무슨 가공할 이름인가? 백장청- 그렇다면 그는 바로 무황야에게 당했단 말인가? 실로 천하(天下)가 벌컥 뒤집어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검우야...... 네 눈에 원한이 이글거리는구나. 아니다. 아니 야...... 그는 원한만으로 상대할 인물이 아니다." "그건...... 왜지?" 소년 백검우는 은은히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백장청은 소리없이 미소했다. "무황야...... 그는 무림인(武林人)으로 태어난 인물로서 가장 완 벽하고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후후...... 나는 그를 존경한다." "......!" "허나...... 그는 중원을 위해 없어져야 할 인물이었다. 그 는...... 엄청난 야망을 지녔다. 아아...... 언젠가 엄청난 대혈 겁이 벌어질 것이다. 그때문에...... 나는 그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휘웅......! 휘우웅......! 눈보라는 점점 더 거세어졌으나 백장청의 귀에는 시간이 갈수록 작게 들려왔다. 그는 점차로 시야가 흐릿해지는 걸 느끼며 약간 초조한 표정이 되었다. "검우야...... 이 아비는 원래 그의 생명을 너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아버지......" "허나 실패했다. 그래서 단지 그 이름만을 네게 선물하는 것이다." "아...... 버지......!" 소년 백검우는 전신을 세차게 경련했다. 그는 안타깝게 죽어가는 부친을 바라보았다. 그는 부친이 행여 못들을세라 크게 소리쳤다. "선물을 고맙게 받겠어! 백장청! 선물을 고맙게 받겠단 말이야!" 그는 부친의 이름을 목메어 부르짖었다. 죽음의 그림자로 덮혀가던 백장청의 얼굴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창백한 미소를 떠올리더니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에서 뭔가를 집어들었다. 고검(古劍)! 그것은 일견하기에 예사롭지 않은 고색 창연한 하나의 장검이었다. "이 검은...... 무황야의 것이다. 그는 이 검을 나의 심장에 박았으나 빼가지는 않았다." "......!" "그때문에...... 나는 이곳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검 우야...... 그의 모든 것을 얻으면...... 이것을 그에게 답례로 주어라......" 백장청의 어조는 이제 알아듣기 힘들만큼 꺼져가고 있었다. 소년 백검우는 맑은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답례해 줄 거야...... 똑같은 방법으로......" "그는......영웅(英雄)이다...... 너는...... 그를 존경해야 한 다...... 그래야 그를 죽일 수 있다." 백장청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죽게 만든 무황야를 칭찬하고 있었다. 그렇다. 백장청- 그는 어쩌면 무황야의 진정한 얼굴을 본 최초의 무림인일 지도 몰랐다. 그런 그의 죽어가는 눈동자를 통해 소년은 무황야의 모습을 얼핏 본 것도 같았다. 그러했다. 이 순간 다섯 살 소년 백검우의 뇌리에는 무황야라는 석자 명호가 뿌리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백장청의 안색은 이제 극도로 창백해져 귀기(鬼氣)를 느낄 정도였다. "검우...... 동생을 이 아비에게......" "아......!" 그 말에 소년 백검우는 급히 안고 있던 갓난아이를 부친의 품에 안겼다. 슥! 넓은 품에 안긴 갓난아이는 방긋방긋 웃었다. 허나, 애석하게도 백장청은 이제 아이를 안을 힘조차 없었다. "검우야...... 네...... 아우...... 검영(劍英)을...... 천지제삼 명(天地第三名)으로...... 만드는 것도...... 잊지 말아라." "물론이야!" 소년 백검우는 오열을 삼키며 힘차게 대답했다. 순간, 백장청의 고개가 서서히 꺾어지기 시작했다. "검우...... 너의...... 이름... 은?"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백장청은 숨을 거두었다. 소년 백검우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경련했다. 그는 핏발선 눈으 로 부친의 시체를 내려다보더니 절규하듯 크게 외쳤다. "백! 검! 우! 천지제일명 백검우!" 거의 동시, 부복해 있던 삼 인(三人)의 인물들에게서 일제히 통곡성이 터져 나왔다. "대장주-!" "장주-!" 연이어 밖에서 실내 안으로 무수한 인물들이 달려 들어오며 부르짖었다. "장주대인(莊主大人)!" "대인......!" 장원(莊院)의 건물을 뒤흔들며 울려 퍼진 통곡성들은 언제까지나 멈춰질 줄을 몰랐다. 무심한 서북풍(西北風)이 간간히 통곡소리에 화답하듯 기승을 부리며 지나갔다. 휘우웅...... 그리고 그 통곡소리와 삭풍소리에는 소년 백검우의 울부짖음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백, 검, 우...... 천지제일명 백검우!" "백, 검, 우, 천지제일명 백검우-!" 소년은 필경 구천으로 영원히 떠나가는 아버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 면 소년은 이 순간까지도 사별(死別)을 부정하고 있는지도 몰랐 다. 이것은 단지 이별(離別)일 뿐이었다. 언젠가 진정으로 천하제 일명(天下第一名)을 얻었을 때 그는 부친과 다시 재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잡초가 무성한 무덤과의 재회일지라도...... 명(明)에 의해 원(元)이 패망한 지도 이 년(二年)이 흘렀다. 금릉은 새로운 도성축조(都城築造)와 각지에서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온통 번잡했다.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생기가 가득했으며 하 루가 다르게 금릉을 변모시켜갔다. 그러나 양지(陽地)의 이면에는 항상 음지(陰地)가 존재하는 법이다. 패망한 원(元)의 유신(遺臣)들과 추종자들은 하루에도 수천 명씩 압송되어 처형되고 있었다. 살겁(殺劫)- 수많은 영웅(英雄)들이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소리없이 사라져갔다. 천추산(天秋山)- 세인(世人)들은 원래 이 산(山)을 금릉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山)이라 했다. 허나 몇 달 전부터 천추산은 죽음의 산(山)이 되었다. 이곳은 바로 원(元)의 유신(遺臣)들이 처형당하는 도형장(屠刑場)이기 때문이다. 후두룩! 툭! 툭! 비(雨). 잿빛 하늘을 가르며 장대같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늦가을의 빗줄기는 이곳 천추산 검단평(劍丹平) 위에도 음울하게 떨어져 내렸다. 꾸르르릉... 번쩍! 뇌전(雷電)과 함께 빗줄기는 폭우로 변해 쏟아진다. "......!" "......" 장내에는 모두 백여 명의 황군(皇軍)들이 둥글게 원진(圓陣)을 형 성한 채 긴장과 침묵을 흘려내고 있었다. 원진의 중앙에는 한 피투성이 노인이 품(品)자 형 말뚝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바로 죽음(死)을 앞에 둔 죄수(罪因)의 모습이다. 그러나 장대한 체구의 노인에게선 죄수에게서 느껴지는 절망과 분 노대신 당당한 위엄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 나있는 무수한 검상(劍傷)과 핏자욱도 그 위엄을 가리지는 못했다. 이 노인(老人)은 대체 누구인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고통스러운 상황 아래서도 노인의 표정은 더 없이 평온하다는 점이었다. "......" 쏴아아아...... 장대같은 빗줄기는 점점 더 기세를 발하고 있었다. 노인은 눈 앞에 다가온 자신의 죽음이 어떻든 관심없다는 표정으 로 조용히 천공(天空)을 응시했다. "늦가을의 비는...... 쓸모가 없지. 벼이삭이 쓰러질 거야" 나직한 독백이었다. 노인은 문득 입가에 더없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횟가루...... 노인이 묶여 있는 주위로는 둥글게 횟가루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노인의 목이 잘려 땅에 떨어질 때 그 횟가루는 뿜어지는 핏물을 흡수하여 사방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리라. 이때 문득 노인의 앞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서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이십오 세 가량의 청아한 용모를 지닌 청년(靑年)이었다. 차림새로 보아 그는 참도형을 집행하는 환궁(還宮)의 감찰관(監察 官)이 분명했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감찰관이 되었다면 그는 틀 림없는 인재(人才)중의 인재이리라. "으음......!" 감찰관은 노인을 바라보며 우울한 탄식을 흘려냈다. "안타까운 일이오. 대장군(大將軍)께서 단 한 번만 뜻을 굽히셨다 면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이오." 그러자 노인은 깊숙한 시선으로 감찰관을 응시했다. "이제보니 자네는 매우 훌륭한 관상을 지녔구먼. 내 이제야 알아 본 것을 용서하게."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엉뚱한 한 마디였다. 젊은 감찰관은 내심 기가 막혔다. "대장군, 나는 내 관상이 아닌 대장군의 죽음을 말하고 있소." "허허...... 중원인(中原人)으로 태어나 변방이족(邊方異族)의 녹 봉을 받은 것도 대죄(大罪)이거늘 어찌 대장부 한 번 섬긴 충절을 꺾겠는가?" 노인의 두 눈에서 처음으로 시퍼런 광채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쏴아아...... 쏴아아아.... 하늘은 더욱 어두워지고 폭우는 온통 천지를 갈랐다. 젊은 감찰관은 한참이나 침묵하더니 이윽고 탄식을 흘러냈다. "지금이라도 때는 늦지 않았소. 대장군(大將軍)......" "......"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강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젊은 감찰관의 눈에 일순 짙은 연민과 고통의 빛이 떠 올랐다. 그 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임무를 마음 속으로 깊이 저주했다. 천광대장군(天光大將軍) 좌태승(佐泰昇), 죽음을 기다리는 눈 앞의 이 노인은 한 마디로 원(元) 역사상 가 장 뛰어난 무공의 달인(達人)으로 알려진 살아있는 무신(武神)이 었다. 그를 아는 관호(官豪)들은 그의 손에 검(劍)이 들려질 때는 하늘조차 빛을 잃고 천기(天機)가 흔들린다고 입모아 말했을 정도 였다. 그렇다. 본래 중원인(中原人)으로 태어난 탓으로 원(元) 출신의 무장들에 게 숱한 배척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장군(大將軍)의 위(位)에 오른 좌태승의 삶 자체가 하나의 신화(神話)인 것이다. 그리고 좌태승의 신화(神話)는 그가 개봉부(開封府)에서 마지막으 로 벌인 혈전(血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좌태승이 당시 거느리고 있던 원병(元兵)의 숫자는 불과 이만(二 萬)을 헤아렸고, 그것은 원(元)제국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무 려 이십오만(二十五萬)의 대군(大軍)을 동원한 명(明)은 한달여 기간 동안 상상조차 못했던 패배를 연이어 당하고 말았다. 무려 삼십여를 헤아리는 명의 장군(將軍)들이 십만대군과 함께 몰 살당하는 괴변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천하(天下)는 좌태승이란 석 자 이름 앞에 공포로 전율했다. 좌태승의 밑에 있던 원(元)의 마지막 정예(精銳)들까지 덩달아 죽 음의 사신(死神)들로 불려졌다. 급기야 명(明) 황제(皇帝) 주원장(朱元 )이 직접 개봉부로 달려 왔다. 주원장은 좌태승의 기적과 같은 항쟁에 모종의 이유가 있으 리라 짐작했다. 주원장은 싸움을 걸기에 앞서 먼저 좌태승에게 대좌(對座)를 요청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졌고, 황제 주원장은 좌태승에게서 호된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대저 나라(國)를 일으키는 자는 덕(德)이 앞서고, 병무(兵務)가 후에 있어야 하거늘 그대는 병무살정(兵務殺政)을 먼저 일으켰으 니 어찌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원(元)은 이미 패망 했다. 그럼에도 본장(本將)이 이곳에서 항변하는 것은 아직 두 가 지 할 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수하 장졸(將卒) 이만(二萬)을 자유로이 놓아주며 원(元)의 황실(皇室)과 그 유신(遺臣)들을 그들의 고향 몽고(蒙古)로 무사 히 돌려보내라. 만약 거절한다면 마지막 한 명까지 싸우다 죽을 것이다> 주원장은 좌태승의 충성심과 기개에 감복한 나머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정중히 함께 명 시대(時代)를 이끌어나갈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좌태승은 오직 패군항장(敗軍降將)인 자신의 처지를 내세 워 죽음(死)을 원할 뿐이었다. 주원장은 어쩔 도리가 없음을 깨닫 고 탄식하며 물러갔다. 그렇다. 중원 황실 역사상 가장 출중했던 무장 좌태승의 검(劍)은 결국 누 구도 아닌 그 자신 스스로에 의해 거두어졌다. 좌태승 휘하의 원 (元) 최후 정예 이만(二萬)과 황실, 유신들은 무사히 몽고로 되돌 아갔다. 자신들을 위해 끝까지 희생한 좌태승을 보고 통곡하면서..... 각설하고, 젊은 감찰관은 좌태승의 마음을 바꾼다는 건 불가능함을 깨닫고 절로 장탄식을 발했다. "이 성난 빗줄기는 마치 원(元)의 고혼(孤魂)들이 대장군을 위해 흘리는 눈물같구려...." "......." "대장군......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소?" "지금 떠오르는 건 한 잔의 술(酒)이라네" 좌태승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술 한 잔. 그것이 그의 인생의 대가인가. 감찰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혼쾌하게 말했다. "좋소. 내 설사 황제의 진노를 사더라도 청을 들어드겠소." 그때 한 옆에서 호송무장인 듯한 중년의 금의무복(金衣武服) 인물이 급히 나섰다. "그것은 안 됩니다! 어찌 황명에 의해 죽음을 기다리는 죄수가 술 을 마실 수 있단 말씀입니까? 그것은 황제폐하에 대한 불경으로...." 금의무복인의 음성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젊은 감찰관의 눈 에서 뿜어지는 서릿발같은 안광을 본 때문이었다. "누구든지 이 일에 참견하면 먼저 그 자의 목을 벨 것이다!" "......!" 금의무복 인물은 어쩔 수 없는 듯 굳은 얼굴로 물러섰다. 젊은 감찰관은 스스로 손수 말뚝에 묶인 좌태승의 쇠사슬을 풀어 냈다. 긴장한 주위의 금군(金軍)들이 일제히 장창과 도검(刀劍)을 좌태승의 몸에 겨누었다. 좌태승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대들은 안심하라. 내 스스로 살려 했다면 어찌 이따위 쇠사슬 을 끊지 못했겠는가" 잠시 후 조촐한 주안상이 좌태승 앞에 놓여졌다. 감찰관은 묵묵히 한 잔의 술을 따라 건넸다. "허허...... 고맙네" 좌태승은 환하게 웃더니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이어 그는 세상근 심 없는 시골노인처럼 기분좋게 게트림을 하며 입가를 닦았다. "커어... 좋구나!" 감찰관은 자신도 모르게 콧날이 시큰하며 두 눈에 눈물이 괴는 것을 느꼈다. "한 잔...... 더 따르겠소이다" "아니, 되었네. 그보다...." 좌태승은 새삼스럽게 젊은 감찰관의 얼굴을 깊숙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게 마지막 술잔을 따라준 자네의 이름을 알고 싶네만..." 젊은 감찰관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명쾌한 어조로 대답했다. "본관(本官)은 하현극(夏賢極)이라는 이름으로 형양대만호(形陽大 萬戶)의 관위(官位)에 있소." "하현극......" 좌태승은 진중한 신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그대에게 한 가지 사적인 부탁을 하여도 되겠는가?" 하현극은 일순 가볍게 표정이 굳어졌으나 이내 서슴없이 대답했다. "사적인 부탁이라고 하셨소이까?" "앞으로 세월이 흐른 후...... 그대가 만난 사람 중 가장 훌륭한 인재(人才)에게 이 물건을 전해주게." 좌태승은 품 안에서 하나의 묵죽모필(墨竹毛筆)을 꺼내었다. 묵죽모필(墨竹毛筆), 그것은 손가락 굵기로 온통 검은 빛이었다. 필신(筆身)에는 성좌(星座)들이 하얗게 음각되어 있어서 매우 기 이한 느낌을 주었다. "이것은....?" 하현극은 은연중에 묵죽모필을 받아들며 당혹성을 발했다. 좌태승은 빙그레 미소했다. "보다시피 평범한 붓이라네." "하지만 내눈에는 평범한 붓으로 보이지 않소이다" "비범한 인재를 만난다면... 비범한 내력이 생길 수도 있겠지" 좌태승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침중한 어조로 대꾸했다. 하현극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좌태승의 말 속에 뼈가 있다는 걸 감지한 때문이었다. 그것은 절대 함부로 물 건을 전하지 말라는 경고의 뜻임이 분명했다. 만약 잘못 전하면 영원히 묵죽모필의 내력이 묻혀버릴 수도 있다는...... "명심하겠소, 대장군!" 하현극은 조심스럽게 묵죽모필을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러자 즉시 주안상이 치워지고 시퍼런 도(刀)를 비껴든 회자수 (會刺手)가 비속에 다가왔다. 회자수- 이들 망나니는 대부분 중죄(重罪)를 지은 무기수(無期囚) 출신들이었다. 회자수들은 같은 죄수(罪囚)의 목을 백 명 이상 자 르면 감형, 또는 방면의 특사(特赦)가 내려지곤 했다. 이 순간 좌태승의 목을 치기 위해 다가온 회자수는 담력을 기르기 위해 술을 거나하게 마신 듯 얼굴이 벌갰으며 두 눈에는 살기(殺 氣)가 번들거렸다. 스룽...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시퍼런 도(刀)가 좌태승을 비웃는 듯 너울 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좌태승이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하현극을 고요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하현극, 자네의 손으로 직접 내 목을 쳐줄 수 없겠는가?" "......!" 하현극의 안색이 일순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좌태승은 신비롭게 미소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내가 너무 무리한 욕심을 부린 모양이군..." "대장군...." 하현극은 순간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는 좌태승의 마음 을 너무나 잘 헤아릴 수 있었다. 죄수(罪囚)의 칼에 자신의 피를 묻힌다는 것은, 적어도 좌태승같은 인물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 인 것이다. 쏴아아아...... 하현극은 갑자기 전신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폭우도 이 순간 그의 끓어오르는 격동을 식히지는 못했다. '대장군......!' 하현극은 천천히 좌태승을 향해 접근해 갔다. 그런 그의 걸음은 천근만근인 양 무거웠다. "도(刀)를 이리 건네라!" 그는 쥐어짜는 듯한 일성을 뱉어냈다. 좌태승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 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마 하현극을 위한 배려였으리라. 이윽고 하현극은 회자수의 손에서 시퍼런 도(刀)를 건네 받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좌태승의 목을 겨눈 채 도(刀)를 높이 쳐들었다. 억겁(億劫)같은 정적이 잠시 흐르고.... 하현극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고 느껴진 순간 시퍼런 도(刀) 가 섬뜩한 파육음(破肉音)을 내며 작렬했다. 피우욱! 툭! 뭔가가 땅 위에 떨어졌다. 떨어지는 것은 또 있었다. 억수같은 비(雨)...... "대장군...... 평안히 가시오" 하현극은 이를 악물고 등을 돌려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허전한 마음. 뭔가 거대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 뜨겁게 하현극의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일백여 금군(禁軍)들은 일제히 일사불란하게 엄숙한 신색으로 하 현극의 뒤를 따랐다. 꾸르릉! 번쩍! 번개와 함께 잿빛 암암한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진동했다. 하현극의 눈가에 소리없이 흐르는 것은 분명 빗물만은 아니었다. 이윽고 하현극을 비롯한 일백여 금군들의 모습은 장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누구도 알지 못했다. 좌태승이 하현극에 남긴 붓 한 자루의 운명(運命). 그것이 장래 중원천하에 가지고 올 엄청난 대풍운을! 무림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英雄)의 신화(神話)는 그렇게 탄생되고 있었다. ...... ■ 일로제검 제1권 제1장 야경(夜景) ━━━━━━━━━━━━━━━━━━━━━━━━━━━━━━━━━━━ ① 세월(歲月)이 유수처럼 흘렀다. 태조 홍무제의 대풍운(大風雲)과 그 뒤 건문제(建文帝)를 거친 정 변(政變)의 회오리는 당금 영락제(永樂帝)의 등극으로 마무리 되었다. 천하(天下)는 평정과 안온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태풍 뒤에 고요함이 찾아들 듯이, 그 고요함 뒤에 항상 또다른 태풍이 도사 리고 있는 법이다. 익양(岳陽)- 천하(天下)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대시집(大市集)인 이곳 악 양거리는 예외없이 오늘도 밤을 맞이했다. 야천(夜天)에 걸린 만 월(滿月)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시다. 그 아래 악양의 밤 또한 오늘따라 더욱 휘황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와......" "으하하...... 좋구나!" "호호호......" 거리거리마다 걸린 오색등(五色燈), 물결처럼 가득한 인파 틈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중추철(仲秋節)- 오늘은 바로 중원의 가장 큰 축제인 중추절이었다. 대낮부터 천지사방팔해(天地四方八海)의 여러 신(神)들에게 올해 의 추수를 감사하는 의식이 벌어졌다. 그것은 어린 소동(小童)들이나 술꾼들에게는 곧 놀이판을 의미했다. 가무(歌舞). 날이 어두워지면서 여기저기에서 산더미같은 장작을 모아 태우는 가운데 남녀노소(男女老少)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으클클클......! 저 할망구, 허리 아프다고 다 죽어가더니 춤만 잘 추는군!" "아하하......!" "절무(絶舞)다!" 중추절의 흥취는 폭죽놀이가 시작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걸음으로 제각기 죽통을 들고 폭죽을 쏘 아 올리기 위해 관부(官府) 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슈우우웅! 번쩍! 촤르르르! 수없이 밤하늘을 가르며 휘황찬란하게 터지는 폭죽들. "와......!" "와와......!" 그야말로 경탄과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 불꽃의 행진은 밤새도록 이어질 것이었다. 동화대로(東華大路)-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거리던 인파들이 모두 광장으로 몰려가고 대로 위는 텅 비어 있었다. 그때 서늘한 야풍(野風)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대로 위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삼 인(三人)- 영준한 미소년(美少年)과 구 척 거구의 청년(靑年), 그리고 중년(中年)의 소부(少婦)였다. 어찌보면 한 가족과 같은 모습. 허나 조금만 자세히 살피면 이들이 가족이 아님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소년(少年)의 특이한 모습으로 인한 것이었다. 소년은 눈(雪)보다 흰 백의유삼을 입고 있었다. 대략 십오륙 세 가량 되었을까, 기이하게도 소년은 머리에 장년의 유생(儒生)들이 쓰는 문사건을 쓰고 있었다. 소년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마치 대리석을 깎아내린 듯 희고 수려했다. 하지만 천하를 뒤지다보면 이처럼 준수한 미소 년은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眼)! 오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 소년의 신비로운 두 눈을 대 한다면 절로 탄성을 발하고 말 것이었다. 별빛처럼 한없이 깊고 맑게 빛나는 두 성안(星眼), 그것은 너무나 심유하여 마치 천하(天下)의 모든 비밀을 흡수하고 만상(萬象)을 단번에 빨아들일 듯했다. 게다가 소년은 나이답지 않게 훤칠한 체구를 지녀서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청년(靑年)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소년은 문득 멀리 광장에 모인 인파와 폭죽이 터지는 장관을 바라 보며 미소띈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아, 그렇군요......" 등 뒤의 청년이 졸린 듯 두 눈을 꿈벅거리며 공손히 대답했다. 청년, 그는 거대한 체구에서 풍기는 위압감과는 반대로 매우 순진 무구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마음씨 좋은 얼굴을 찾으려 한다면 바로 이 청년을 보면 될 것이리라. 그런 청년의 입가에는 항시 습관처럼 약간 바보스런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는 머리를 길게 땋아내려 허리 밑까지 두르고 있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채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모습은 마치 말꼬리가 흐느적거리는 것과 비슷했다. 허나 기이하게도 청년의 손(手)만은 빙결처럼 새하얗고 섬세했다. 매우 크면서도 눈부시리만큼 투명한 손(手). 그것은 청년의 내력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나타내주는 표시였다. "아름답지요...... 물론 그렇고 말고요" 청년은 독백처럼 재차 중얼거렸는데 정작 눈은 엉뚱한 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여인(女人), 바로 동행인 중년의 미소부를 멍청히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소부는 정녕 아름다웠다. 그녀는 몸에 평범한 청의(靑衣)를 걸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이 그녀의 용모를 감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너무나 표정이 담담하여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조각품인 듯 변화가 없었다. 그러한 그녀의 몸에서는 어딘가 범인이 범접치 못할 기이한 위엄이 감돌았다. "......" 그녀는 시종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이 없을 뿐 아니라 그녀는 일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를 응시하던 청년의 눈가에 빠르게 섭섭한 빛이 스쳐갔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던 세 사람은 이윽고 광장에 당도했다. 그때였다. 세 사람의 주위에 있던 몇몇 사람이 중년소부를 보고 일제히 안색 이 대변했다. 그들의 시선은 중년소부의 발아래 고정된 채 엄청난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그림자가 없어!' 이내 그들은 공포에 찬 음성으로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그림자 없는 여인(女人)이다!" "마녀(魔女)다!" 순간 중년소부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때 청년이 헤벌쭉 웃으며 소리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요? 그림자가 없다니?" 순간 미친 듯이 떠들어대던 몇몇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당혹으 로 물들었다. 방금까지도 없었던 중년소부의 그림자가 선명히 나 타났기 때문이었다. "거 이상하군 분명 방금 전에는...." "아... 아무래도 우리가 착각한 모양일세" 일단의 소동은 그렇게 곧 잠잠해졌다. 그러나 만약 이 자리에 무림(武林)의 고수가 있었다면 결코 이 일 을 쉽게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림에는 오래 전부터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한 가지 신비로운 환영술(幻影術)이 있었다. 이체환영술(二體幻影術)! 이 환영술의 특징은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실상 사물에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 일이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이 체환영술이란 바로 실제의 자신을 숨기고 허상(虛想)의 자신을 상 대방에게 보여주는 술법의 일종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눈에 보이는 실체(實體)를 대상으로 칼을 휘둘렀다 면, 그는 곧 그것이 사실은 허상(虛像)이며 진짜 상대방은 엉뚱한 방향에서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각설하고. 가벼운 소동을 일으켰던 문제의 세 사람은 천천히 장내에서 멀어 져가고 있었다. 그 중 선두의 소년은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중년 미부를 응시했으나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단지 약간 나무라 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이때 청년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소년에게 물었다. "장주(莊主)님, 우리도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장주(莊主)라고 불리운 소년은 총기어린 시선을 청년에게 던졌다. "무슨 말이지?" "실은...... 선기당(仙機堂), 노당주(魯堂主)께 부탁하여 쓸만한 폭죽 하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청년은 입가에 천진스런 미소를 짓더니 힘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들이 가진 어떤 폭죽보다도 훌륭한 것입니다." "후후...... 그래?" 소년은 신비롭게 미소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러나 저들이 모르게 쏘아 올려야 한다." "알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청년은 더욱 크게 입을 벌리고 함박웃음을 지었 다. 그는 품 안에서 재빨리 하나의 검은 빛 죽통을 꺼내들더니 주 위를 살피고는 허공을 향해 조준했다. 휘류류류륭! 유난히 큰 파공음을 내며 거대한 백선(白線)이 밤하늘을 가르며 치솟아 올랐다. 아니 치솟아 올랐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폭죽은 휘황하게 불꽃을 토해내고 있었다. 퍼퍼퍼펑! 청(靑), 홍(紅), 백(白), 적(赤)의 불꽃이 동시에 찬란하게 비산 (飛散)하며 거대한 연꽃을 그려내었다. "아아......!" "저, 저......!" 사방에서 경악어린 탄성이 터져 울렸다. 그것은 장내의 인물들이 평생 처음 보는 대장관이었다. 허나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비산되어 떨어져 내리던 수많은 불꽃들이 돌연 다시 한꺼번에 허 공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파아아! 쇄르르르..... 놀랍게도 그 불꽃들은 다시 한 번 화려한 폭발을 일으켰다. 퍼퍼퍼펑! 촤르르- 번- 쩍-! "와......!" "와와...... 저것은 대체 누가 쏜 것이냐?" 흥분과 환호의 도가니...... 그러한 모습을 소년과 청년, 그리고 중년소부는 말없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은 문득 그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미소를 머금 고 중얼거렸다. "후후...... 아직도 다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가 쏘아올린 폭죽의 불꽃들이 또다시 절묘한 조화(造和)를 일으 키기 시작했다. 후류류륭! 오오! 백목련(白木蓮)! 비산하던 불꽃들이 허공에서 살아 꿈틀거리더니 수십 송이의 백목 련(白木蓮)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경이(驚異)! 그리고 신비(神秘)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야공(夜空), 그 가운데 눈부시도록 새하얗게 피 어난 수십 송이의 백목련(白木蓮)- 악양의 모든 인물들이 넋을 잃었다. 이제 아무도 폭죽을 쏘아 올리지 않았다. 그들조차 경이와 탄복의 도를 넘어 완전히 환상과 무아지경 속을 헤매고 있었으므로. '아아......!' '세상에......! 천하(天下)에 이토록 훌륭한 폭죽을 만들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필시 그는 범상한 인물이 아닐 거야!' 그때 군웅들 속에서 누군가가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이제보니 저 백목련은 바로 현백검장(玄白劍莊)의 독문표기다!" "무엇이......?" "아! 그랬었군!" 뒤이어 놀람어린 탄성들이 새어 나왔다. 장내는 곧 벌집을 쑤셔놓은 것과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아마 황 궁(皇宮)의 황제(皇帝)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이런 소란이 벌어지 지는 않으리라. "장주 도련님께서 오셨다!" "드디어 얼굴을 나타내실 모양이다. 찾아라!" "장주님...... 장주님......!" 그들은 마치 죽었던 자신들의 부모가 되살아난 것처럼 기뻐하며 주위를 살폈다. 허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제길, 장주 도련님의 얼굴을 알아야 찾을 것 아닌가!" <얼굴을 알아야 찾을 것 아닌가?> 그렇다. 놀랍게도 그들은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이토록 친근함과 안타까 움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벌써 떠나신 게 아닐까?" "쯧...... 도무지 얼굴을 세상에 나타내시지 않으니...... 대체 언제까지 안개에 가린 신룡(神龍)으로 지내실 터인가!" "아이...... 어떡해......?" 남녀노소(男女老少) 모두가 만면에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 다. 그 중 몇몇 명문대가의 소녀(少女)들은 안타까운 나머지 눈물 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현백검장의 백목련(白木蓮)- 그렇다. 당금 천하에서 조금이라도 칼을 만진 무림인이라면 현백검장의 독 문표기인 백목련을 모를 수는 없었다. 원래 악양의 세문(勢門)인 현백검장은 근래들어 불과 십오 세에 불과한 정체불명의 장주(莊主)로 인해 세인들의 얘기거리에서 빠 지는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백검우(白劍雨)라는 세 글자 이 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나이를 완전히 초월하여 전 중원 (中原)에 널리 알려졌다. 백검우는 부친 현천유운(玄天流雲) 백장청(白長淸)의 돌연한 죽음 (死)으로 장주의 위(位)를 이어 받았다. 실상 백장청의 죽음부터 가 세인들에겐 하나의 신비로운 수수께끼였다. 사람들은 백장청이 어떻게 죽었는지 구구한 억측을 내릴 뿐 누구 도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처음 백장청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현백검장의 몰락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상은 완전히 빗 나가고 말았다. 악양의 전 상권(商權)을 보호하고 있는 현백검장의 힘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막강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분쟁의 소지가 있는 악양의 모든 대소사(大小事)는 모두 현백검장이 해결한다!> 이 한 마디는 악양의 모든 상인(商人)들에게 있어 하나의 불문률 (不文律)이나 다름 없었다. 현백검장은 그야말로 철저히 상인들을 보살폈고, 그때문에 악양은 황도(皇都)인 금릉보다도 더 번창하여 중원최대의 상시(商市)를 이룰 수 있었다. 특히 명(明)의 건국(建國)과 원(元)이 망하는 혼란기에 현백검장 이 보여준 보호의 힘은 가히 결정적이었다. 헌데 참으로 기이한 일은 그러한 현백검장의 위세가 외견상으로는 실로 보잘것 없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현백검장이라는 전각 자체가 하나의 평범한 장원에 불과했다. 다른 유수한 문파들처럼 수천 명의 제자(弟子)들을 거느리지도 않 았으며 눈에 띄는 고수(高手)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을 지닌 현백검장에 괴상한 별명을 붙혀 주었다. <도깨비들이 살림차린 장원> 허나 현백검장의 앞날이 마냥 밝은 것만은 아니었다. 중원의 수많은 세력(勢力)들이 악양을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 회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양을 차지한다는 것은 곧 중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재력(財力)을 차지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백장천의 뒤를 이어 백검우가 장주의 위(位)에 오른 후부터 그러 한 탐욕의 마수는 끝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허나 세인(世人)들이 꿈에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현백검장의 신비(神秘)로운 힘이 바로 당년 십오 세인 장주 백검 우에게서 비롯되고 있음을. ② 화양소원(華陽素院)- 이곳은 한 마디로 혈육이 없는 노인(老人)들이 모여 불우한 여생 을 보내는 곳이었다. 악양의 한적한 외곽 숲에 자리한 화양소원은 평소에도 인적이 뜸했다. 때는 자시(子時) 무렵이었다. 넓은 마당에 어둠이 괴괴하게 깔려 있고 낡은 정자(亭子) 하나에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방이 환히 트인 정자 안. 이십여 명의 노인(老人)들이 마치 석고상인 양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 "......" 침묵. 오늘 바로 중추절이건만 노인들은 멍하니 앉아 서로를 응시 하고 있을 뿐이었다. 쓸쓸한 적막 속에 서로를 바라보는 그 음울한 눈빛들은 마치 이승 이 아닌 저승을 헤매는 듯 느껴졌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죽음에도 그 종류와 차이점은 있는 법이다. 굳이 어느 현자(賢者)의 말이 아닐지라도 이왕이면 당당하게 늙어 서 후회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게 모두의 소망이리라. 그렇다. 이곳 화양소원의 노인들처럼 쓸쓸히 늙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 고, 실제로 왕왕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인들도 있었다. 우수수...... 찌르르! 찡! 찡! 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와 느긋한 풀벌레 소리만이 장내의 정적을 맴돌았다. "휴우......!" 문득 누군가가 긴 한숨을 흘려내었다. 백의장삼에 손에는 염주를 든 육순(六旬)의 노인이었다. 그는 턱에 자란 염소수염을 매만지면서 두 눈에 가득 한탄의 빛을 띠었다. "오늘이 정말 중추절인가?" "......" 모두가 대답이 없다. 아니 시선조차 주는 이가 없었다. "빌어먹을......!" 염소수염의 노인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더니 돌연 히죽 웃었다. "우리 심심한데...... 누가 숨 안쉬고 오래 버티나 내기할까?" "미친 늙은이......" "망령도 한심하게 들었군." 서너 명의 노인이 그제야 염소수염 노인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음 울하게 내뱉았다. 염소수염 노인은 멋적은 듯 헤벌죽 웃어보였다. 그는 바람이 찬 듯 몸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올해는 우백(友白), 그 아이가 안오려나......? 매년 중추절이면 찾아오곤 했는데......" 순간 거짓말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시체처럼 무표정하던 장내 노인들의 얼굴에 거짓말처럼 생기(生 氣)가 물결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백.....!" "맞아! 우리가 왜 그 아이를 잊고 있었지?" "그녀석은 틀림없이 올 걸세! 암 그렇고 말고!" 장내에는 순식간에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그러한 노인들의 돌 연한 변화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허허...... 우백, 그 아이는 부쩍 자랐을 거야." "그러고 보니 우백이 이곳에 오기 시작한 지도 벌써 오 년(五年) 이 흘렀군." "두 달 전에 장삼(長三)이 눈을 감으면서도 그 아이가 보고 싶다 고 한 것 기억나는가?" 앞을 다투어 모두가 어린아이들처럼 입을 열었다. 대체 우백이라는 소년이 누구길래 이들을 이토록 기쁘게 할 수 있 는 것인가? "그 아이는 우리의 작은 등불이지...... 그 아이가 오 년 전 이곳 에 나타났을 때부터 음식과 입을 것은 걱정 않게 됐을 걸......" "그건 현백검장 덕이지. 이 사람아......!" "허허...... 허지만 어쩐지 그 아이가 갖고 온 행운이라고 생각되 는군." 그들은 한도 끝도 없이 우백이란 소년에 대한 얘기를 주고 받았 다. 마치 이들에게 있어 우백이라는 소년의 일을 빼 놓으면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하긴...... 현백검장이나 우백이나 둘 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존 재들이지. 클클......!" 흐르는 시간과 함께 중추절의 밤은 점점 깊어갔고, 노인들의 대화 도 함께 무르익었다. 오 년 전 거지소굴이나 다름없던 이곳 화양소원의 이야기, 우백이 홀연 나타났던 상황, 당시의 귀여웠던 모습, 그러나 이제는 너무 커버려 능글맞아졌다는 이야기 등등...... 그리고 우백이 나타난 직후 재수가 좋아 천하의 현백검장에서 이 곳 화양소원을 보살피게 되었다는 것, 이제 이 화양소원은 중원에 서 가장 훌륭한 노생(老生)들의 안식처라는 이야기...... "허허허......" "헐헐헐......" 그러나 어떤 이야기든 그 끝이 있고 특히 노인들이란 어린 소동 (小童)처럼 변덕이 많은 법이다. 노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말을 잃어갔다. "지금까지도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올해는 오지 않을 모양이야." "......!" "......!" 갑자기 주위는 시무룩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어둠을 휘젓는 바람소리만이 다시 장내를 스산히 맴돌았다. 정문 쪽에서 희미한 세 개의 그림자가 어둠을 가르며 나타난건 바 로 그때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인들은 눈을 크게 뜨고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세 사람의 모습이 가까워지면서 용모가 자세히 드러났다. 문사건을 쓴 영준한 미소년(美少年)과 구 척 거구의 청년, 그리고 아름다운 백의소부(白衣少婦)였다. 그렇다. 이들은 바로 폭죽놀이 장소에 나타났던 삼 인(三人)이 아닌가? "우, 우백!" "우백이 왔어!" 이십여 노인들이 일제히 기쁨에 찬 환호성을 터뜨렸다. 가장 먼저 세 사람에게 달려나간 건 염소수염의 노인이었다. 그러 나 함지박만하게 벌어진 그의 입에선 엉뚱하게도 꾸지람이 튀어나왔다. "고얀놈! 왜 이리 늦었느냐! 볼기짝을 맞고 싶어 안달이 난 게로구나!" "아하하...... 수염할아버지,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소년(少年) 우백은 환하게 웃으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놈!" 염소수염의 노인은 마치 죽었던 손자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 듯 힘 껏 우백을 껴안았다. 동시 노인들의 입에서는 일제히 어린아이같 은 환성이 재차 터져 나왔다. "와......!" "허허... 어서 이리와 앉도록 해라!" 우백이 자리에 앉자마자 질문의 홍수가 쏟아졌다. "그 놈 일 년 사이에 많이도 컸구나! 무슨 영약(靈藥)을 먹은 게 아니냐?" "몸만 크면 무슨 소용이냐? 그래, 그곳도 많이 컸느냐?" "그곳이라니요?" "다리 사이의 그것 말이다. 으헐헐......!" "그게...." 우백이 약간 얼굴이 붉어진 채 머뭇거리자 다시 질문의 홍수가 쏟아진다. "장가 안 가느냐?" "계집은 안아 봤느냐?" "올해는 어느 방면으로 유람을 했느냐?" "너는 나이도 어린데 왜그리 싸돌아 다니느냐?" '맙소사......!' 우백은 입(口)이 하나 뿐이었으므로 그 많은 질문을 한꺼번에 대답할 수 없었다. 노인들은 비단 입 뿐만이 아니라 손도 쉬지 않고 움직여 우백의 전신을 마치 신기한 동물마냥 쓰다듬고, 치고, 어루만졌다. 그야 말로 친근함의 도를 넘어 상대의 얼을 빼놓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이 늙은이들! 조용하지 못하겠느냐!" 염소수염의 노인이 한 차례 무섭게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그제서 야 장내의 소동이 겨우 가라앉았다. 원래 염소수염 노인은 이곳 화양소원의 원주(院主)로 송(宋)이라는 성(姓)을 가졌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편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자신의 과거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송원주는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우백, 올해는 어느 방면을 유람하였느냐?" "천축(天竺)쪽을 가 보았습니다." "천축이라......!" "그렇습니다. 곧 제가 마련한 주채(酒采)가 도착할 것이니 그때 자세히 이야기해 드리지요." 우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정문 쪽에서 십여 명의 장한들이 술항아리와 푸짐한 요리들을 가득 들고 나타났다. 송원주는 그 모습에 호호탕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 네 덕분에 올 중추절에도 기어이 술(酒) 맛을 보는구나." 그때 사위의 정자들 속에서 다시 몇몇 노인들이 몰려나오기 시작 했다. 그들은 모두 근래에 새로 들어온 노인들이었다. 시간이 흐 르면서 주흥은 점점 무르익어갔다. "으하하......!" "헐헐......! 자, 술 받아라!" "따라라!" 시간이 지나 자시(子時)가 지날 무렵이 되자 노인들은 차례로 술 에 만취하여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허나 송원주만은 모두가 잠 이 든 후에도 안색 하나 흔들림이 없었다. "술통이 바닥났군. 이런 애석할데가..." 송원주가 술에 젖은 자신의 수염을 손으로 털며 게트림을 했다. 우백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결국, 올해도 원주님의 주량을 다 채워 드리지 못하는군요." 기실 우백은 내심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송원주는 거의 자신 의 몸무게만큼의 술을 마시고도 전혀 취기가 없었던 것이다. 낌새를 알아차린 송원주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 평생 소원이 술을 취할 때까지 실컷 마셔보는 것이었느니라." "후후... 그렇다면 내년을 한 번 기다려보시지요" 우백의 말에 송원주는 그가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나자빠진 친구들이 아침에 깨어나면 또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네 녀석을 원망하겠군." "후후...... 죄송합니다."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너의 성품을 나는 좋아한다." 송원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배웅하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행은 곧 화양소원의 정문(正門)에 당도했다. 헌데 우백이 막 송원주에게 작별인사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송원 주가 문득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청년과 백의소부를 응시하며 말했다. "우백, 오늘로써 네가 벙어리라는 두 친구를 데리고 이곳을 방문 한 지 오 년째가 되었다." 청년과 백의소부의 표정이 순간 기이하게 흔들렸다. 우백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들은 말수가 적을 뿐 벙어리가 아닙니다" "허허..... 이곳 악양에는 두 명의 신비인(神秘人)이 있지. 우백, 너는 짐작할 수 있느냐?" "모르겠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현백검장의 어린 장주(莊主)인 백검우(白劍雨)이다." "......!" 우백의 눈빛에 순간 기이한 파랑이 일었다. 허나 그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렇군요. 백검우란 이름 석 자는 무림천하(武林天下)에 꽤 알려 진 이름이지요. 또 다른 한 명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송원주는 대뜸 안색을 엄숙하게 굳히며 우백을 무섭게 직시했다. "그 나머지 한 명은 바로 나 송칠만(宋七萬)이다." "......?" 우백은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으나 곧 낭랑하게 웃었다. "핫핫... 그렇지 않아도 평소 수염할아버지의 내력이 심상치 않으 리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우백, 나는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 "천하(天下)의 모든 사람이 다 몰라도 나 송칠만은 너의 정체를 알고 있다" 송칠만은 우백을 깊숙한 눈길로 정시하며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백 네가 바로 현백검장의 장주 백검우라는 것을." 순간 우백의 안색이 돌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거구청년과 백 의소부의 눈가에 살기가 스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들은 약속이 나 한 듯 양손에 내공을 끌어모았다. "웅비(雄飛), 사라(絲羅), 물러서라." 우백은 나직하면서도 위엄 있는 음성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거구 청년과 백의소부는 즉시 살기를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송원주가 온화한 미소를 흘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 송칠만이 노망들어 하는 소리가 아니라 너희 두 사람은 내 적수가 못되느니라!" "......!" 거구청년 웅비는 송칠만의 말에 오히려 순박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는 확실히 어딘가 보통인물과는 별다른 구석이 있었다. 반대로 사라(絲羅)라고 불리운 백의소부의 표정은 더욱 얼음장처 럼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마치 웅비가 뜨거운 불의 기운을 지녔다면 사라는 천년한빙(千年 寒氷)같은 차가운 기운을 지녔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서로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백은 잠시 사이를 두고 가볍게 탄식했다. "원주께서는 제가 잡아뗀다고 해도 절대 믿지 않으시겠군요" "물론이다" "제가 백검우라고 해서 우리의 관계가 달라진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만...." "꼭 그렇지는 않다. 이 송칠만과 너의 관계는 사실 매우 재미있는 것이다. 실상 나는 네가 오 년 전 이곳에 오기 전부터 네 정체를 알고 있었다." 송원주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담담한 말을 이었다. "너는 내가 만약 이 세상이 아닌 별천지(別天地)에서 왔다면 믿을 수 있겠느냐?" "......!" 우백의 안색은 어느새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는 송칠만의 말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 송칠만의 모습에는 전에 없던 기이한 위엄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원주는 갑자기 자신이 술에 취했었다는 것을 상기라도 하려는 듯 게트림을 토했다. "끄윽... 나는 네가 대접한 술에 보답을 해줄 생각이다. 이거야말 로 어쩌면 하늘(天)이 정해준 운명(運命)이라고 할 수 있지." '술 보답이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라고......?' 우백은 약간 어리둥절한 느낌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송원주는 다그치듯 물었다. "어떠냐? 그래도 너는 아직도 자신이 백검우가 아니라고 잡아뗄 테냐?"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우백은 얼굴에 약간의 장난끼까지 떠올린 채 재빨리 말을 이었다. "천하(天下)에 백검우는 단 하나 뿐입니다. 백검우는 바로 저입니 다. 내 앞에서 나를 백검우가 아니라고 하는 놈이 있으면 당장 면 상을 때려주겠습니다. 나는 바로 백검우이니 앞으로 백검우라고 불러 주십시오!" "......!" 시원하게 쏟아지는 우백의 답변에 이번에는 송원주가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너... 지난 오 년동안 백검우가 아니라고 잡아떼놓고는 그렇게 쉽게 털어놔도 괜찮은 거냐?" "후후...전 다만 우백이라고 말했을 뿐으로 백검우가 아니라고 잡 아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송원주는 망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 아서며 손을 흔들었다. "좋다. 어쨌든 오늘은 네놈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다음에 보도록 하자꾸나." "잠깐!" 우백이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송원주는 움찔하며 급히 얼굴을 돌렸다. 우백은 빙그레 소리없이 웃었다. "저는 백검우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너...... 정말 백검우가 맞는 거냐?" 송원주는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우백은 낭랑한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송칠만은 그제서야 자신이 당했다는 걸 깨닫고 짐짓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예끼! 고얀 녀석같으니라고!" 그는 껄껄 대소를 터트리며 이내 화양소원 안으로 사라졌다. 소년 우백은 기이한 눈길로 잠시 송칠만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 더니 몸을 돌렸다. 그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웅비와 사라를 거느린 채 천천히 장내에서 멀어져갔다. 한순간 우백의 음성이 나직하게 어둠을 뒤흔들었다. "웅비, 내가 누구냐?" 그러자 곧 웅비의 단호하면서도 힘있는 음성이 뒤따라 울려 퍼졌다. "그야 천하제일명(天下第一名) 백검우이지요" 천지만물(天地萬物)이 모두 잠든 깊은 밤(夜). 야천(夜天)은 요요로운 고요 속에 천천히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③ 관도(官道) 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달빛(月光)만이 한적하게 길 위를 비추고 있을 뿐이다. 백검우는 달빛 고인 길 위를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는 웅비와 사라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악양 외곽 거리- 사위에는 거대한 장원(莊院)들이 줄을 이어 서 있었다. "송원주가 선수를 칠 줄은 정말 몰랐군." 백검우는 문득 입가에 쓴 미소를 머금었다. "실상 나는 진작부터 그의 정체가 궁금했었다. 헌데 내가 정체를 묻기 전에 선수를 치다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 아닌가?" 뒤따르던 웅비가 공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허나...... 그는 장주님을 너무 작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모든 강호인(江湖人)들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후후......" 백검우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동시에 그의 두 눈에서 번갯불같은 신광(神光)이 형형하게 뻗어나왔다. 삼라만상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그것은 마치 눈빛만으로도 사람의 혼(魂)을 빼앗아 간다는 전설 (傳說)의 천유안(天幽眼)과도 흡사했다. 허나 그것은 찰라간의 변 화였을 뿐 백검우의 눈빛은 곧 원래의 고요함을 회복했다. 이때였다. "그냥 가십니까?" 웅비가 돌연 걸음을 멈추며 한 옆의 거대한 장원(莊院)과 백검우를 번갈아 보았다. 족히 수천 년을 묵은 듯 무성한 대나무 숲(竹林)으로 둘러싸인 그 장원의 정문(正門)에는 희미한 두 개의 유등(油燈)이 걸려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기는 장원의 정문 현판에는 청록장(淸綠莊)이라는 세 글자가 용(龍)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필치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각이다. 선대인(宣萬厚)께서는 이미 주무시고 계실 것이다." 백검우의 말에 웅비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선대인께서는 기다리지 않을지 몰라도 하련(荷蓮) 아 가씨께서는 분명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후후...... 웅비, 너는 혹시 하련에게 부탁을 받은 게 아니냐?" "그게......" 웅비는 머뭇거리더니 얼굴을 약간 붉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이 아니라 협박을 받았습니다." "쯧쯧... 내 그럴 줄 았았다" "안내하겠습니다. 장주님." 웅비는 청록장의 정문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백검우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멈추어라. 하련은 소문난 잠꾸러기인데 어찌 지금껏 무거운 눈을 뜨고 있겠느냐?" "예......?" 웅비는 의아한 눈길로 백검우를 돌아다 보았다. 순간 그는 백검우가 한쪽 눈을 찡긋 해 보이는 것을 보았다. '아......!' 웅비는 퍼뜩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태연하게 돌아섰다.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군요" "어흠, 이런 늦은 시간에 외간남자를 기다리는 계집이 있다면 그 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느냐!" 백검우는 유유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순간 어디선가 싸늘한 소녀의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청 록장의 정문이 활짝 열리며 한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멈춰요!"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듯 아름다운 옥음(玉音)이었다. "흥! 이 하련이 언제 잠꾸러기로 소문났지요? 뻔히 내가 기다리는 걸 알면서 능청스럽게 면전에서 이상한 계집이라고 핀잔을 주다니!" 백검우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무슨 말인가 하려던 그의 표정은 이내 기묘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하련...!' 아아, 방금 구름 속에서 달(月)이 모습을 드러냈는가! 절미화용(絶美花容)이라고나 할까! 소녀(少女)의 용모는 정녕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나이는 대략 십사 세 가량, 엷은 홍라의(紅羅衣)를 알맞게 껴입은 모습이 마치 이슬을 머금은 한 떨기 연화(蓮花)를 연상케 한다. 어디 그뿐인가. 별빛처럼 푸르고 싱그런 한쌍의 눈동자는 새벽의 안개를 머금은 듯 신비롭고, 병적일 정도로 희고 창백한 피부는 백수정(白水晶) 을 방불케 할만큼 빛을 발하고 있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입술은 만 가지 사연을 머금은 듯 고혹적이었고, 채 성숙하지 않은 여린 몸매에서 풍기는 고귀한 기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기이한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음......!" 웅비(雄飛)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흘려냈다. '그사이 더욱 아름다워지셨구나! 정녕 장주님과는 천생연분이야......' 허나 아름다운 꽃(花)은 대개 가시를 품고 있기 마련인가. "흥! 갈테면 가보아요!" 소녀는 매몰찬 코웃음을 흘려내더니 두 손을 허리에 짚고 매섭게 백검우를 노려보았다. "오...... 하련! 아직 잠들지 않았었느냐?" 백검우는 그제서야 짐짓 크게 반색을 지었다. 그러나 하련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제가 잠꾸러기인가요?" "누가 그러더냐?" "제가 이상한 계집인가요?" "무슨 소리! 하련보고 그따위 망발을 하는 자가 있다면 이 오빠가 당장 면상을 패주겠다!" 백검우는 주먹을 불끈 쥐어 흔들어 보였다. 하련은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기가 막혀서......!' "아니, 왜 그리 울상을 짓느냐? 혹시 어디 아픈 게 아니냐?" 하련은 찰라간에 안색이 여러 차례 변하더니 갑자기 낭랑한 교소를 흘려냈다. "호호호...!" 그녀는 입가에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스르르 백검우 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변한 그녀의 모습에 이번엔 백검우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하련은 백검우의 한 팔을 부드럽게 잡으며 물기가 뚝뚝 흐르는 옥음(玉音)을 흘려냈다. "우(雨) 오빠......" "왜...... 왜 그러느냐?" "그렇게 저를 생각해 주시니 고마워요." "하하...... 그 정도야 뭘......" 낭랑하게 웃던 백검우의 표정이 어느 한순간 괴상하게 일그러졌 다. 하련이 온힘을 다해 그의 허리를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급기 야 백검우는 겨자 씹은 듯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하련! 잘못했다!" "흥! 진작 그럴 일이지! 당장 들어가요!" 백검우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하련에게 이끌려 장원 안으로 사라졌다. 웅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알 수 없는 일이야. 저럴 때 장주님의 모습은 전혀 딴분같으니......' 웅비, 그는 누구보다도 백검우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백검우에 대해 가장 자세히 알고 있는 편이었지만 역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어쩌면 난 평생 장주님을 모셔도 저분의 진면목을 다 알지 못할 것이다.' 웅비는 남몰래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실내(室內) 중앙의 천향탁(天香卓)에는 보통사람이 상상도 못할 진귀한 음식과 미주(美酒)가 가득 놓여 있었다. 의자는 세 개. 은은한 향내음이 감도는 가운데 특별하게 마련한 오색(五色) 황촉 불이 아늑한 정취를 자아냈다. "훌륭하구나!" 백검우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련이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 중에 절반은 제가 우오빠를 위해서 직접 만들었어요." "내 당장 먹어보지!" 백검우는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우선 구운 닭다리를 집어들었다. 순간 하련은 눈썹을 곱게 찌푸리며 서둘러 말했다. "아직 안돼요!" "왜?" "오빠는 이 탁자에 놓인 의자가 셋이라는 것을 못보았나요?" "네 말뜻은 하나 남은 의자를 채워야만 이 오빠가 닭다리를 뜯을 수 있다는 것이냐?" 이렇게 묻는 백검우의 자세는 엉거주춤한 상태여서 하련은 절로 웃고 말았다. "호호호...... 그래요." 바로 이때였다. 스르륵...... 실내(室內)의 반대편 휘장이 걷히며 금의장포를 걸친 노인(老人) 이 나타났다. 그는 초로(初老)의 나이에 안색은 소동(小童)처럼 발그레하고 당당한 체구를 지닌 모습이었다. "으핫핫핫...... 현질, 이제 왔는가?" 그는 백검우를 보자마자 만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대소를 터 뜨리며 반겼다. 그러한 노인의 모습은 너무나 유쾌하고 생동어린 것으로 마치 친구를 반기는 것 같았다. "숙부님......" 백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예를 취했다. 금의장포노인의 표정이 문득 엄숙하게 변했다. "내 현질이 이렇게 늦게 온 것을 탓하지는 않겠네. 허나 현질이 이 숙부보다 닭다리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참을 수 없군." "......?" 백검우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손에 닭다리를 들고 있음을 깨닫 고 씁쓸하게 웃었다. "숙부님은 언제나 절 궁지로 몰아 넣으시는군요" "호호호...... 또 우오빠가 당했군요." 하련이 그 모습에 재미있다는 듯 교소를 터뜨렸다. "허허... 내가 세 치 혀를 가지고 천하(天下)를 희롱한 지 이미 오래인데 누가 감히 당하겠느냐?" 금의장포노인의 농담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백검우는 그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청록장주(淸錄莊主) 선만후(宣萬厚). 이 이름은 중원상계(中原商 界)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재신(財神)이 라고 불렀으며, 특히 장사꾼들은 꿈 속에서도 선만후의 수완을 배 우고 싶어했다. 재신이라는 명성답게 선만후의 정확한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선만후의 재력에 대한 하나의 엄청난 소문은 능히 그 규모를 짐작케 해주고 있었다. <중원(中原)은 황제(皇帝)의 것이지만 동시에 선만후의 것일 수도 있다!> 비록 그것이 소문에 불과할지라도 실로 가공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세인(世人)들이 꿈에도 모르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선만후와 백검우의 부친이 본래 의형제(義兄弟)를 맺은 사 이라는 점이었다. 실상 현백검장이 악양상권을 보호하게 된 배경 도 두 사람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포르릉......! 백옥(白玉)보다 고운 하련의 손으로 술(酒)이 술잔에 채워졌다. "현질, 들게나." "고맙습니다 숙부님"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만일 선만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인물이 이 모습을 보았 다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선만후는 평상시 좀체로 얼굴에 미소를 띄우는 법이 없었다.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무섭도록 냉철한 승부를 띄우는 대상(大 商人)이자 냉혈한(冷血漢)인 선만후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실상 대해(大海)처럼 넓고 깊은 심계를 소유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선만후는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터놓고 지낼 상대가 한 명쯤 필요한 법이다. 선만후는 바로 그 상대로 백검우를 선택한 것인지도 몰랐다. 분명한 것은 당금 천하에서 오직 백검우만이 선만후의 미소를 보 며 술을 대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호호호......" "하하......" 화기애애한 실내(室內)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선만후는 얼큰하게 취기를 느낄 무렵 넌즈시 다른 질문을 건넸다. "현질, 요즘 장(莊)의 일은 어떠한가?" "무슨 말씀이시온지?" "이 숙부는 현질의 힘을 알고 있으나 세상이 모르니 문제일세. 심 상치 않은 조짐이 보이니 만사에 신중을 기해야 할 걸세." "......!" 백검우의 눈빛이 가볍게 경직되었다. 선만후의 음성은 더없이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칼날같은 예기가 서려 있었다. "현질은 요사이 장강수로맹(長江水路盟)의 동태에 대해 알고 있는가?" 백검우는 담담하게 미소하며 대답했다. "요즘들어 그들이 이곳 악양(岳陽)에서 출발하는 상선(商船)들을 유난히 까다롭게 괴롭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음......!" "장강수로맹(長江水路盟)의 세력은 제법 강대하나 감히 본 현백검 장을 상대할 용기는 없을 것입니다." "현질의 말뜻은......?" "저는 이미 그들이 모종의 배후세력과 손을 잡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흐르듯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백검우의 대답이었다. 선만후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중하게 물었다. "현질은 이번에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후후...... 그들이 제 뺨을 때리는데 어찌 가만히 구경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내 그들의 처소에 한 번 방문을 하겠습니다. 그동안 준비를 했으 니 이제 일어설 때가 되었습니다." "으하하하......" 선만후는 갑자기 무겁던 안색을 풀고 호방한 대소를 터트렸다. 그 는 흡족한 신색으로 단숨에 술 한 잔을 비우더니 물었다. "장강수로맹이 현질의 첫 제물이 되는 셈인가?" "그렇습니다." "으음.. 이제 현질로 인하여 천하무림(天下武林)에 찬서리가 내리 겠군. 하기는 어느 시대이고 영웅(英雄)은 때를 맞추어 모습을 나타냈었지." 선만후의 말에 하련이 아름다운 봉목(鳳目)에 염려의 빛을 가득 발했다. "우오빠는 이제 겨우 열다섯에 불과한데 영웅(英雄)이란 말은 가 당치 않아요. 도대체 우오빠가 그 무서운 무림에서 무얼 할 수 있겠어요?" 백검우는 짐짓 하련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하련, 너는 이 오빠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어디 한 번 엉덩이를 맞아보겠느냐?" "흥! 누가 오빠를 무서워 하겠어요? 나는 하나도 안 무서워요." 하련은 고운 입술을 샐쭉하더니 문득 백검우의 등 뒤에 서 있는 웅비에게 물었다. "이봐요. 당신 주인은 정말 무서운가요?" 웅비는 느닷없는 하련의 질문에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허나 그는 곧 엄숙한 기색으로 진중히 말했다. "장주님은 천하에서 가장 부드럽고도 가장 강(强)하며, 가장 무섭 고도 가장 따뜻한 분입니다." "뭐라고요?" 하련은 하마터면 소리내어 크게 웃을 뻔했다. 그녀는 웅비가 너무 거창하게 백검우를 미화(美化)시켰다고 느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녀는 감히 웃지 못했다. 웅비의 안색이 너무나 진중하고 엄숙했던 때문이었다. "흥! 바보가 여기 또 하나 있었군!" 하련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난 알아. 우오빠는 주위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거든" 선만후가 짐짓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런, 그 말은 하련 너도 바보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냐?" "그게... 그러니까..." 하련은 당황하여 얼굴이 복숭아처럼 빨개졌다. 선만후와 백검우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련 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곧 까르르 교소를 터트렸다. 역시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少女)에 불과했다. "하련아, 현질의 잠자리를 준비 하도록 해라" "알겠어요. 아버님." 선만후의 분부에 하련은 사슴처럼 날렵하게 실내 밖으로 향했다. 백검우는 그녀의 기척이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갑자기 정색을 지었다. "실은 숙부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장강수로맹의 배후가 바로 삼장이보(三莊二堡)임이 밝혀졌습니다." "무엇이!" 선만후는 일순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분명 삼장이보라고 말했는가?" "그렇습니다" "이럴 수가....." 선만후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삼장이보(三莊二堡)- 이는 당금 무림(武林), 혹은 전대(前代)때부터 강호인들의 이목을 받아온 다섯 신비세력(神秘勢力)을 말했다. 소림사(少林寺)에 소 장된 무림백개문파사록(武林白個門派史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금 무림에는 정파(正派)인지 사파(邪派)인지 모를 신비세력이 있으니 이를 오대신비문(五大神秘門), 혹은 삼장이보라 한다!> <...... 삼장이보는 안개 속에 웅크린 용호(龍虎)와 같으니 가장 무서우면서도 가장 작게 보이려 힘쓰니 세인(世人)들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더라.> <만약 삼장이보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날이면 대강남북 강호무 림은 자연 주검과 피(血)의 혈사(血史)가 일어나리라!> 이 간단하면서도 심상치 않은 내용이 삼장이보에 대한 세인(世人) 들의 지식 전부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어느 정도 활동을 해온 문 파가 하나 있었다. 그 문파는 바로 당금 백검우가 거느리고 있는 현백검장(玄白劍莊)이었다. 현백검장(玄白劍莊)과 더불어 삼장(三莊)으로 불려지는 나머지 두 장원은 천마장(天魔莊)과 유유천장(幽幽天莊)이었다. 이보(二堡)는 혈성보(血星堡)와 인혼보(忍魂堡)를 가르켰는데, 그 중에서도 인혼보는 삼장이보를 모두 통틀어 가장 세력이 방대하고 막강한 집단이었다. <살수지토인혼보(殺手之土忍魂堡)> 인혼보를 한 마디로 표현해 주는 일곱 글자일진대..... 그렇다. 인혼보는 바로 거대한 살수집단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으며 항상 음지(陰地)에서 활동했다. 당금 무림의 대부분 직업 살수들이 바로 인혼보 소속이라는 건 이 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살수들에게 있어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모이고 흩어진다. 만약 죽고 싶은 자가 있거나 반대로 죽이고 싶은 자가 있다면 인 혼보를 찾아가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인혼보라는 세 글자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천하에서 가장 확실한 죽음(死)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과연 정말 인혼보가 삼장이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을까? 그것은 그들이 서로 상잔(相殘)하여 서로의 목에 검날을 들이대기 전에는 누구도 함부로 단정하지 못하리라.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정 큰일일세. 그들은 현질의 나이가 어림을 보고, 또한 현백검장이 세력을 키우기 가장 좋은 이곳 악 양에 위치했다는 점으로 보아 현질을 공격해 올 것이네." 선만후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혀있었다. 그는 가볍게 탄식하더니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현질, 이 숙부는 매년 이렇게 자네와 기쁜 술잔을 마주하고 싶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 들었습니다." 백검우는 나직한 가운데 힘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서는 도저히 십오 세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자신감과 기개가 서려 있었다. 선만후는 새삼 백검우에게 탄복하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하련이 나비처럼 사뿐한 걸음으로 다시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눈부시도록 환하게 미소하며 옥음(玉音)으로 말했다. "우오빠, 잠자리를 준비했으니 이제 그만 일어서세요." "그래, 잠을 자긴 자야겠는데...." 백검우의 표정이 일순 묘하게 변했다. 그는 이대로 하련을 따라 침소에 갔다가는 절대 잠을 잘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정작 백검우를 잠자리에 안내해 놓고는 밤새도록 얘기를 시키기 일쑤였던 것이다. "하련, 먼저 자도록 해라. 이 오빠는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구나." "아직도 더......?" 하련은 눈을 동그랗게 치뜨더니 부친 선만후를 향해 홱 돌아섰다. "아버님! 우오빠가 무슨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줄 아세요?" 난데없는 그녀의 야멸찬 항의에 선만후는 움찔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이 아비는 너의 우오빠를 잡은 적이 없다." "그게 정말이에요?" "글쎄, 그렇다니까..." 선만후는 백검우를 외면한 채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그 는 금지옥엽인 하련을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고 있었는지라 평소 에도 하련에게 완전히 쥐어지내던 처지였다. 결국 하련의 할퀴는 듯한 시선은 백검우에게 박힐 수밖에...... "우오빠! 정말 이러시기예요!" "너무하시는군요 숙부님...." 백검우는 마지못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하련 을 따라 실내를 나서는 그의 모습은 처량하기 이를데 없었다. '오늘밤도 고생깨나 해야겠구나....' 침소는 아늑했다. 열려진 창문 밖으로 아름다운 후원(後園)의 전경이 달빛과 함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백검우와 하련. 침소로 막 들어선 두 사람은 일렁이는 황촉불 아래 서로를 마주보 며 침상가에 걸터 앉았다. 하련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시종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한 가지 묘한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항상 백검우와 단둘이 있을 때에는 그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점이었다. 백옥(白玉)보다 희고 가냘 퍼보이는 손. 허나 그러한 그녀의 손은 백검우에게만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슬이나 다름없었다. '아이고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던 백검우는 벌렁 침상에 드러누웠다. 물론 그의 오른 손은 변함없이 하련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직 한 탄식성이 흘러나왔다. "하련, 대체 이 오빠의 오른 손은 나의 것이냐? 너의 것이냐?" "호호...... 그거야 물론 내것이죠." '으잉......?' "오빠, 내 오늘은 반드시 확답을 듣고 말겠어요." 하련은 가을 호수처럼 깊숙하고 싱그런 눈빛을 빛내며 백검우를 내려다 보았다. 꼬옥...... 잡은 백검우의 손에 힘을 주며. 백검우는 의아하여 물었다. "무엇을 말이냐?" "오빠의 나이가 지금 몇인 줄 아세요?" 예기치 못한 엉뚱한 질문이었다. 백검우는 신비롭게 반짝이는 그녀의 두 눈을 부지중에 외면하며 더듬거렸다. "그.. 그야...... 열다섯이지." "흥! 알긴 아는군요." 하련의 표정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변했다. 백검우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이 여우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련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몰아부치 듯 말했다. "대장부 나이 십오 세면 어엿한 어른이에요. 헌데 오빠는 왜 그리 무관심하죠?" "하련, 이 오빠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구나." "흥! 정말 바보로군요." 하련은 원망스러운 듯 백검우를 흘겨보더니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오빠는...... 왜 십오 세가 되었는데도 혼인(婚姻)할 생각을 하지 않지요?" "혼인......!" 백검우는 내심 앗 뜨거라, 하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 는 멍한 표정으로 하련을 응시하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하련... 방금 혼인이라 하였느냐? "분명히 그랬어요." 하련은 또렷한 어조로 대꾸했다. 백검우는 우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하련, 부탁이니 제발 이 오빠 잠 좀 자게 내버려 다오." "글쎄 이렇다니까......!" 하련은 발끈하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금방이라 도 눈물을 떨굴 듯 슬픈 표정이 되었다. "이 하련은 다 컸단 말이에요. 저는 오빠를 보살필 수도 있고... 그리고...." "......?" "아기도... 낳을 수 있어요." "......!" 백검우는 골머리가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아이고.... 오늘은 잡혀도 아주 단단히 잡혔구나!' 그는 대꾸하면 오히려 더 곤경에 빠질 것임을 알고 아예 입을 꾹 다물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수법에 쉽게 포기할 하련이 아니었다. "흥!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요?" "......" "이 하련은 이제 기다림에 지쳤어요! 오빠의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어요!" '후후...... 내가 언제는 저보고 기다려 달라고 했던가......?' 백검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는 결국 자신이 항복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련, 내게 생각할 여유를 다오." "아......!" 하련은 너무 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희열로 충만한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은 마치 수천 개의 꽃송이가 한꺼번 에 만개(滿開)하는 듯 화사한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호호......!' 그녀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애교가 뚝뚝 묻어나는 어조로 물었다. "오빠,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되지?" "아마 십 년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백검우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십, 십 년 씩이나......!' 하련은 크게 놀랐으나 곧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달았다. "정말 이럴 거예요!" 그녀는 백검우의 팔을 힘껏 꼬집었다. 그러나 정작 백검우는 아픈 표정도 짓지 않고 그녀를 따사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의 하련, 오빠의 말을 들어다오." 봄날의 햇살처럼 부드럽고 따사로운 어조....... 백검우는 하련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뭉클...... 따뜻한 체온, 향긋한 머리내음. 하련은 확실히 어린 소녀만은 아니었다. "오... 오빠...!" 이제까지의 그 당당하던 태도는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하련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진 채 어쩔 줄을 모르며 그의 품 안에서 몸을 가늘게 떨었다. "오빠는 할 일이 많단다. 그래서 오빠는 항상 하련 옆에 있을 수가 없구나."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서린 음성이었다. 하련은 백검우의 품이 매우 넓고 포근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꿈꾸는 듯 몽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빠는 바보예요...... 이 하련은 항상 오빠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 더없이 순수한 고백. 그리고 지극히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백검우는 신비롭게 미소하며 그녀의 치렁치렁한 머리결을 어루만졌다. "오빠는 하련을 좋아한다. 검영(劍英)...... 내 아우를 아끼듯 말이다." '검영......!' 하련은 봉목이 복잡한 빛으로 출렁였다. 검영(劍英)- 그는 백검우의 아우인 동시에 천하유일의 일점 혈육 이었다. 당년 십 세인 검영은 극히 총명절륜하고 활달하여 항상 백검우를 기쁘게 하였다. 허나 세인(世人)들은 백검우에게 아우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오빠......' 하련의 눈가에 쓸쓸한 기운이 스쳤다. 그녀는 항시 검영의 이야기 만 나오면 묘한 열등감을 느끼곤 했다. 그만큼 백검우는 아우인 백검영을 깊이 아끼고 있었다. "후후...... 하련." 백검우는 하련이 풀죽은 모습으로 말이 없자, 춘풍처럼 따스한 어 조로 말을 이었다. "남녀(男女)의 정(情)이란 본시 기약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약 없이도 참고 견디는 것이 가연지정(佳緣之情)이다. 알아 들었느냐?" 아! 천하의 어느 풍류남아(風流男兒)가 이처럼 훌륭한 한 마디를 흘려낼 수 있을 것인가! 하련은 도화빛으로 아름답게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오빠...... 제가 졌어요." 백검우는 미소하며 그녀의 빙결같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하련은 스르르 두 눈을 내리감은 채 소리없이 미소지었다. "오빠, 나 오빠 품에서 잠들고 싶어요." "후후...... 좋다. 오늘 밤만은 특별히 허락하지." 백검우는 그녀의 동체를 가볍게 들어 침상에 눕혔다. 싱그러운 내 음이 일시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그는 그녀 곁에 누운 채 고요 한 눈길로 창 밖을 건너다 보았다. 찌르르...... 찌르르...... 찡! 찡! 풀벌레 소리. 야천(夜天)에 휘영청 걸린 달(月)이 유난히 밝다. 백검우의 성목(星目)에 문득 뜻모를 우수가 어렸다.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천하(天下)를 품에 안을 자신이 있기 전까 지는 여인(女人)을 얻지 말라고......'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막 잠이 든 하련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그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백검우는 하련의 아름다운 옥용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련...... 너는 아직 이 오빠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단다. 천하(天下)가 나의 품에 안기는 날... 너도 나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그때 하련이 잠결에 나지막한 옥음(玉音)을 흘려냈다. "어쩐지...... 오늘 밤이 지나면 오랫동안 오빠를 보지 못할 것 같아...... 오빠는...... 으음......" 그녀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작아 들리지 않았다. 백검우의 두 눈에 그 순간 기이한 빛이 스쳤다.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직한 일성을 흘려냈다. "총명한 여인(女人)은 선천적인 예감을 지니게 마련이지." ...... 하련(荷蓮). 그녀는 백검우의 이 말을 듣지 못했다. 늦가을의 아늑한 잠결....... 그녀는 분명 백검우의 꿈을 꾸고 있으리라. 중추(中秋)의 일야(一夜)는 완전히 적막 속으로 가라 앉았다. 시간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 일로제검 제1권 제2장 영웅일가(英雄一家) ━━━━━━━━━━━━━━━━━━━━━━━━━━━━━━━━━━━ ① 악소산(愕素山)- 악양 동단에 일좌(一座)한 산(山)으로 비록 크지는 않으나 극히 수려한 명산(名山)이다. 허나 악소산이 이름을 떨치는 이유는 정 작 다른데 있었다. 현백검장(玄白劍莊)- 바로 세인(世人)들이 경외하는 현백검장이 이곳에 위치했기 때문 이었다. 그런 연유로 언제부턴가 악소산은 무림인(武林人)들에게 는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금지(禁地)가 되었다. 밝아오는 새벽의 여명(黎明) 속. 현백검장은 아름드리 고송(古松)과 울창한 수림에 싸여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희뿌연 운무(雲霧)가 고루거각(高樓巨閣)을 신비롭게 감돌고 있는 가운데 드러난 현백검장의 위용은 마치 한 폭의 그림같았다. 쌔애앵......! 쌔앵! 한기(寒氣)를 품은 서북풍(西北風)에 실려 간간이 새소리가 들려왔다. 현백검장의 후원(後園). 인공으로 만든 연못을 중심으로 갖가지 기화(奇花)들이 만개(滿 開)해 있었다. 그리고 그 연못의 가장자리엔 등의자에 몸을 파묻 은 채 앉아 있는 백의소년이 있었다. 백의소년은 다름아닌 백검우였다. 그의 시선은 오 장 앞에 선 채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미동(美童)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략 십 세 가량의 미동(美童)은 흑의무복(黑衣武服) 차림에 손에 는 검(劍)을 거머쥔 모습이었다. 어찌보자니 마치 소녀(少女)처럼 아름답고 섬세하게 느껴지는 용모일진대.... 그렇다. 누가 보아도 단번에 백검우와 매우 닮았음을 느낄 수 있는 이 미 동은 바로 일점혈육 그의 아우인 백검영(白劍瑛)이었다. "헉헉...!" 백검영은 온몸과 얼굴에 땀이 흠뻑 흐르는 지친 모습이었다. 휘류륭! 파파팟! 잠시 숨결을 고르던 백검영의 시퍼런 검날이 힘찬 진동을 일으켰 다. 동시에 시야를 어지럽히는 검화(劍花)가 허공 가득 피어올랐 다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후욱...... 훅!" 백검영의 숨결은 더욱 거칠어졌다. 가까스로 막 한 가지 검법(劍 法)을 시전해낸 그는 두려운 눈길로 형 백검우를 바라보았다. 뭔 가 백검우의 분부를 기다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백검우는 천천히 등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영, 너의 이번 검법(劍法)은 전혀 생기(生氣)가 없구나." "형...... 하지만......!" 검영은 움찔하더니 뭔가 말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백검우는 깊숙한 눈길로 검영을 응시했다. "검영, 네 검날 위에 나뭇잎 하나를 올려 놓아라." 냉엄한 음성이었다. '......?' 검영은 의아로운 표정이었으나 곧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자 백검우는 장대 하나를 집어들더니 검영의 발 앞에 수직으로 꽂았다. 푹! "네 검으로 이 장대를 잘라 보아라. 단 나뭇잎이 얹혀 있는 부분으로 잘라야 한다." "아......!" "절대 나뭇잎이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 "시작해라." 백검우의 음성은 조용했으나 단호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검영은 만면에 난색을 지었다. "형... 그건 절대 불가능해...." "검영, 오늘은 말이 많구나." 백검우는 두 눈에 번갯불같은 광채를 뿜어냈다. 이 순간 그들은 형과 아우가 아닌 단지 사부와 제자일 뿐이었다. 검영은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치...... 알았어 형......" 스릉! 그의 손에서 나뭇잎이 얹혀진 검이 서서히 머리 위로 치켜지기 시 작했다. 동시에 검영의 얼굴은 더없이 엄숙하게 변했다. 스스스...... 아, 검기(劍氣)! 놀랍게도 다음 순간 검영의 검에서는 하얀 검기가 피어오르기 시 작했다. 그것은 분명 상승(上乘)의 경지를 이룬 검의 고수만이 뿜 어낼 수 있는 서릿발같은 검기였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가? 이제 겨우 십 세에 불과한 어린 몸으로 이러한 경지를 쌓을 수 있 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휘류류륭! 검기가 더욱 짙어지는가 싶더니 한순간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섬 광(閃光)이 허공에 작렬했다. 번쩍! 후두둑! 투둑! 장대는 순식간에 열여덟 토막이 되어 떨어졌다. 그것은 누가 보아 도 정녕 눈부신 쾌검(快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검영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검날 위에 올려졌던 나뭇잎은 두 토막이 난 채 땅에 떨어져 있었 던 것이다. "아......!" 순간 백검우의 입에서 냉엄한 호통성이 터져 나왔다. "바보같은 놈!" "치......!" 검영은 맥없이 검을 거두고 백검우의 눈치를 보았다. 영기어린 그의 눈동자는 불만에 가득 젖어 있었다. 그 모습에 백검우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서릿발같은 어조로 말했 다. "검영,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똑히 보아라." "......!" 검영은 흠칫하며 백검우의 눈빛을 마주 응시했다. 백검우의 눈은 활화산(活火山)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천하에 멍청한 놈같으니! 너는 처음부터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포기했다!" "혀, 형......!" 검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도저히 더 이상 백검우의 시선을 마주볼 용기가 없었다. '나는 왜 동생으로 태어나 가지고......!' 온갖 복잡한 생각이 그의 뇌리를 어지럽혔다. 백검우는 눈썹을 꿈틀하며 말했다. "놈! 또 딴 생각을 하는구나!" "아...... 아니야!" 검영이 황급히 고개를 들며 대답하자, 백검우는 손을 내밀었다. "검을 이리다오." "......" 검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백검우에게 건넸다. 백검우는 아까와 똑같이 검날 위에 나뭇잎 하나를 올려 놓았다. 후류륭! 그의 손에서 검(劍)은 부러질 듯 진동하며 서서히 허공으로 치켜졌다. 방금 떠오른 햇살을 받은 탓인가. '아......!' 검영은 형 백검우의 모습이 눈부시게 빛난다고 느꼈다. '숨이 막힐 것 같구나!' 검영은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것은 일종의 감동이었다. 검영은 이런 일을 항시 겪어왔다. 백검우가 검을 들었을 때의 신 위(神威)는 항상 눈부신 감동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장대를 꽂아라." 백검우의 입에서 심유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휙! 검영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몸을 움직여 장대 하나를 꽂았다. "형, 됐어...... 아앗......!" 검영은 막 몸을 일으키려다가 비명을 터뜨렸다. 번쩍! 폭풍같은 검류(檢流)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 검영은 장대의 바로 앞에서 얼어붙은 듯 몸을 경련했다. 삼백육십오방위(三白六十五方位)를 일시간에 양단하는 찬란한 검광(劍光)! 그것은 꿈결처럼 시야에서 피었다가 사라졌다. 백검우는 어느새 검을 거둔 채 원래의 평온한 자세대로 돌아와 있었다. 장내의 상황은 아까와 똑같았다. 나뭇잎은 여전히 그의 검날 위에, 장대는 그대로 땅에 꽂혀 있었다. 허나 분명 뭔가 변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검영은 그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온통 경악의 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입에서 이내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형! 정말 놀랍군." "놈." 한 줄기 바람이 서늘하게 장내를 스쳤다. 동시 멀쩡했던 장대는 서른여섯 토막이 난 채 무너져 내렸다. 투두둑! 투둑.... 백검우는 검영에게서 등을 돌린 채 막 동천(東天)에 떠오르는 태 양(太陽)을 바라보았다. "검영, 검을 잡았을 때는 상대와 자신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너 는 상대를 볼 줄 알 뿐 자신을 보지 못했다. 자신의 혼(魂)을 먼 저 검에 실어야 하거늘 너는 그에 앞서 상대를 검(劍)에 넣으려 한 것이다." 백검우의 음성은 극히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검영의 고개는 점점 밑으로 수그러졌다. 그는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발 끝으로 애꿎은 땅만 파고 있었다. "알았어. 형......" 검영의 어조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백검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오늘은 그 벌로 발검(發劍) 삼천 회, 하검(下劍), 중검(中劍), 상검(上劍), 비검(飛劍)을 각기 일천 회 실시해라." "억......!" 검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물었다. "그걸 다하려면 오늘 밤을 꼬박 새워도......" "하룻 밤은 이틀 밤보다 짧다." "그, 그렇군." 검영은 힘없이 대답했다. 백검우는 천천히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만간 출전(出戰)이 있다. 너도 따라가고 싶다면 꾀를 부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 검영은 멀어져 가는 백검우의 등을 망연히 바라보며 탄성을 흘려냈다. "그랬었군. 어쩐지 장원의 고수(高手)들이 바삐 움직이더니......" 곧 그의 준미한 얼굴이 이내 어떤 기대의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백검우를 향해 크게 외쳤다. "형! 나는 꼭 출전할 거야!" "......" 백검우는 돌아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허나 그의 입가에는 그 순간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검영, 너의 검법은 사실 훌륭했다. 허나 이 형은 너를 칭찬할 수 없구나...' 백검우의 깊숙한 눈안에 불현듯 깊숙한 정광이 뿜어졌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상대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것이다. 무황야(武皇爺)...... 그 석 자 이름을!' 백검우는 고개를 들어 막 떠오르는 동천(東天)의 태양을 바라보았 다. 그의 심장은 이 순간 무섭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당금 무림(武林)을 움직이는 무형(武形)의 거대한 손(手)이다. 아니 그는 신(神)의 위엄으로 살아 움직이는 전설(傳說)이다. 그러나 나는 맹세했었다! 십 년 전 천지제일명 백검우를 외치며 아버님의 종말을 지켜보았 을 때 그를 반드시 꺾겠다고..... 피눈물을 삼키면서 말이다...... 쌔애앵! 쌔앵...... 한 줄기 서늘한 추풍(秋風)이 백검우의 옷깃을 휘날리며 무심히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백검우의 입가에도 언제나처럼 잔잔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다. 천하의 어느 누가 과연 그 미소에 담긴 무서운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한편. 홀로 남은 검영(劍英)은 불끈 검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출전(出戰). 이 한 마디는 검영의 조그만 손에 용기와 힘을 불어 넣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이제껏 단 한 번도 장원 밖으로 나가보지 못했 어......! 형은 짐작도 못할 거야. 내 답답한 숨통을...... " 그러나 각오어린 그의 표정은 이내 한숨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도합 구천 회의 검(劍)을 시전해야 하다니 좀 너무했는 걸." 그때 문득 그의 시선에 나비 한 마리가 한가로이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나비야. 네가 부럽구나." ② 태상전(太上殿). 이곳은 백검우의 거소(巨所)인 동시에 현백검장의 모든 대소사(大 小事)가 결정되는 장소였다. "......" 백검우는 정면 상단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의 앞으로는 길게 놓여진 팔선탁자 좌우로 여섯 명의 인물이 앉 아 있었다. 당당한 풍모와 정광(精光)이 갈무리된 눈빛들을 소유 한 범상치 않은 기도의 육로(六老). 그렇다. 이들은 바로 현백검장의 핵심인물들인 현백육공(玄伯六公)이었다. 이들은 또한 장주(莊主)의 위(位) 다음가는 육대부주(六大府主)의 각 부주(府主)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백검장의 서열(序列)에는 한 가지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 었다. 그것은 현백육공의 서열이 오위(五位)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다시말해 백검우 아래로 서열 이(二), 삼(三) 사(四) 의 위가(位)가 공석(空席)으로 비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처음부터 비어있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도 모르는 삼 인(三人)의 실력자가 암중으로 존재하는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 수수께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건 백검우 뿐이었다. 각설하고, 현백검장의 실세들인 현백육공의 면면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 <서열오위(序列五位), 호천부주(護天府主) 적혈룡(赤血龍) 우혁전(右赫全)> 우혁전은 실질적인 현백검장의 제이인자(二人者)였다. 그의 휘하 에는 일천(一千)의 직속 정예고수가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무기가 평범한 한 쌍의 도끼라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는 본래 나무꾼 출신이었고, 무림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에도 무기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싸움을 할 때도 마치 상대방을 고목(古木)으로 착각하는 듯 손에 사정을 두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무심한 쌍도끼를 상대하고도 살아남은 자는 이제 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서열육위(序列六位), 천풍부주(天風府主), 묵검천공(墨劍天公) 종리군(宗里君)> 종리군은 중년(中年)의 매우 청수한 미남자였다. 그는 현백육공 가운데 무림(武林)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끄는 천풍부의 고수들이 모든 강호혈전에서 항 상 선봉의 역할을 해온 덕분이었다. 천풍부의 고수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정확함과 빠름을 생명으로 하 는 필살지도(必殺之道)에 달통해 있었고, 그들을 그렇게 변모시킨 건 바로 종리군이었다.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싸움을 치루어낸 실전(實戰)의 대달인 (大達人)- 그러한 종리군의 휘하에는 팔백기마도검대(八百騎馬刀劍隊)가 있었다. 팔백기마도검대는 항시 검은 묵의(墨衣)를 입고 활동했다. 그러한 연유로 일명(一名), 흑풍부(黑風府) 팔백기마도검대라 불리워졌다. 그렇다. 종리군이 이끄는 팔백기마도검대는 곧 죽음(死)의 검은 바람(黑風)이었다. <서열칠위(序列七位), 밀환살부주(密幻殺府主) 환살마령후(幻殺魔靈候) 도천문(道天問)> 도천문은 한 마디로 천(千)의 얼굴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아침에 노인(老人)이 되었다가 오후에는 어린 소동(小童)으 로 변하고, 저녁때면 난데없이 여인(女人)으로 변해버리곤 했다. 그것은 오직 도천문만이 해낼 수 있는 완벽한 변장술이었다. 그의 변장술은 단지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얼굴에 써서 다른 사람 흉내를 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달랐다. 그는 전신의 뼈마디를 마음대로 이동시키는 변골공(變骨功)의 달 인이었고, 그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신체의 체형은 물론 키 까지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무림인들은 현백육공 가운데 도천문을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어느날 느닷없이 도천문이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변장하여 암습을 해온다면 어찌 막아낼 수 있겠는가? 도천문은 종종 자신의 본래 얼굴을 잊어버린 지 오래라는 말을 농 담처럼 하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말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 른다고 여겼다. 도천문은 휘하에 무영부(無影府)라는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무 명부는 한 마디로 중원전역에 산재해 있는 비밀 연락망이었다. 전 무림의 동태를 샅샅이 파악하여 보고를 올리는 것이 무영부에 주 어진 임무였다. 그러나 도천문에게도 한 가지 확실한 특징은 존재했다. 그는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항상 붉은색 계통의 옷을 걸쳐입었다. 그러한 습관 때문에 그는 혈의사신(血衣死神)이라는 또하나의 별 호를 더 지니고 있었다. <서열팔위(序列八位), 신기부주(神機府主) 신절수(神絶手)> 신절수라는 명호만 있을 뿐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원래 유명한 악인이었던 부모와 의절(義絶)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절수라는 명호만으로 도 그는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너무도 평범한 육순의 노인이었다. 허나 그의 손(手)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손(手)은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암기, 폭약, 병장기 등을 만 들 수 있는 마력의 손이었다. 또한 그의 손은 시신(屍身)조차 살려낸다는 의수(醫手)였고, 때로 는 무서운 장공(掌功)을 펼치는 마수(魔手)로 변하기도 했다. 신절수(神絶手). 그래서 그는 신절수라는 명호를 얻게 되었다. 그가 이끄는 신기부(神器府) 고수들은 단 백 명. 그러나 그들은 한명 한명 모두가 신절수를 빼어닮은 괴인(怪人)들이었다. <서열구위(序列九位), 밀령부주(密令府主) 현림유종(賢林儒宗) 단리승(單里乘)> 단리승은 원래 무림보다 유생문사들에게 더욱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그는 본시 황궁대학사(皇宮大學士)로 세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귀한 신분이었다. 그러한 그가 어느날 갑자기 현백검장에 몸을 의탁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리승은 백검우를 도와 갖가지 묘책과 신계(神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비록 서열은 낮았으나 현백육공 가운데 그 의 영향력은 가장 막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서열십위(序列十位) 호민부주(護民府主) 광유왕(狂幽王) 웅야(熊爺)> 웅야는 엄청난 구척 거구를 지닌 인물로 병기 또한 체구에 걸맞는 거대한 방천화극이었다. 성격이 불같은 웅야는 바로 백검우를 그 림자처럼 따르는 웅비의 형(兄)이었다. 그의 나이는 불과 삼십 세에 불과했는데 뒤끝이 없는 성격때문인 지 여러 계통의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그래서 민생(民生)을 보살 피는 책임을 맡은 호민부(護民府)의 책임자가 되었다. 허나 광유왕이라는 거친 별호가 말해주듯이 그의 방천화극은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말 그대로 미친 광풍(狂風)처럼 가공할 위 력을 발휘했고, 그러한 그의 위용은 유부(幽府)의 미친 왕 (王)이라는 명호조차도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현백육공과 함께 현백검장의 중요회의에 반드시 참석하는 두 사람 이 또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백검우의 호법(護法)인 웅비와 사라였다. 웅비와 사라. 그들은 착석(着席)하지 못하고 회의실의 입구에 서 있었다. 평상 시 그들의 임무는 백검우를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회의가 열릴 경 우엔 외부와의 철저한 차단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에겐 발언권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젊은 나이에 비추어 볼 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예 우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현백검장의 회합은 매달 보름마다 정기적으로 열렸다. 오늘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허나 이 순간 장내에 감도는 긴장감은 여느때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대략 반다경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드디어 백검우가 침묵을 깨트리고 밀령부주 단리승을 응시하며 입을 떼었다. "군사, 시작하시오." 단리승은 백검우에게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 다. 백설처럼 희고 깨끗한 수염을 늘어뜨린 채 깊숙한 눈길로 좌 중을 돌아보는 그의 모습은 어찌보자니 속세를 초월한 무욕(無慾) 의 선인(仙人)이 아닌가 느껴진다. "장강수로맹이 본 현백검장에 칼자루를 겨누었소." 단리승은 시(詩)를 읊조리듯 청아하면서도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 었다. "이것은 곧 무림에서 본 현백검장을 우습게 보고 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오." "으음......" "그놈들이 드디어......!" 좌중에는 이내 무형의 살기(殺氣)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거구에 얼굴이 털로 뒤덮힌 중년인물이 벌떡 자리에서 일 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 웅야(熊爺)가 장주님께 한 마디 하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신다 면 열흘내로 장강수로맹을 쓸어버리겠습니다!" 마치 천둥이 치는 듯 굉렬한 음성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바로 호민부주인 광유왕 웅야였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장주!" "후후......" 백검우는 빙긋 미소지었다. "그들을 다 죽여서 어디에 쓰려는가?" "예......?" 웅야의 안색이 일순 기묘하게 변했다. 단리승이 희미하게 웃으며 거들었다. "매사에는 순서가 있는 법..." "......!" "장주께서는 이미 장강수로맹을 징계하기로 결정하셨소. 허나이 일로 인해 우리의 힘이 외부에 드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장 주님의 뜻이오. 늑대 한 마리 잡으려고 산중의 호랑이들을 모두 깨워놓으면 곤란해질 터...." "빌어먹을!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 수 없소?" 웅야가 참지 못하고 불쑥 한 마디 내뱉었다. 허나 단리승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장주께서는 이미 닷새의 기한으로 수로맹을 점거하려는 계획을 세우셨소." "음......?" "때려부수는 게 아니고 점거한단 말이오?" 이번에는 마치 시골노인처럼 평범하게 생긴 무명옷의 노인이 일어 서며 물었다. 바로 신절수(神絶手)였다. 단리승은 빙그레 웃더니 자신의 수염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내용은 장주께서 직접 분부를 내리실 것이오." 단리승은 백검우에게 재차 포권지례를 취해보이더니 자리에 앉았다. 백검우는 두 눈에 신비로운 광채를 흘려내며 말했다. "이 일은 철저히 비밀리에 행해질 것이오. 장강수로맹의 우두머리 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오. 그 숫자는 대략 백오십이오." 칼로 자르듯 단호한 어조였다. 일순 모두의 안색이 경직되는 가운데 오히려 입가에 희미한 미소 를 떠올리는 한 인물이 있었다. 시뻘건 혈의(血衣)에 중년의 차가운 인상을 풍기는 인물. 바로 밀 환살부주인 도천문이었다. "백오십이라.... 그 중에 절반 정도만 내가 해결하기로 하지..." 나직한 독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싸늘한 냉소를 발하며 그 말을 받았다. "도부주는 얼굴에 분장을 하기도 바쁘실테니 그냥 구경이나 하시 오. 그런 사소한 일은 내가 혼자서 해결해도 무방하오" 시커먼 흑의차림에 여인처럼 긴 흑발을 등 뒤로 늘어뜨린 창백한 안색의 중년미남자- 묵검천공 종리군이었다. "저런, 저런... 연로한 형님들께서 어찌 이런 일에 뼈를 혹사하려 하시오? 이런 일은 이 웅야가 적격이올시다!" 웅야까지 가세하자 장내엔 새로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결정은 백검우가 내리게 되어 있었고, 그 점을 잘 아는 현백육공의 뜨거운 시선은 이내 한곳으로 모아졌다. 허나 정작 백검우의 입에선 그 순간 엉뚱한 한 마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군사, 준비한 밀서(密書)를 나누어 주시오." "알겠습니다." 단리승은 지체없이 품 속에서 다섯 통의 밀서를 꺼내더니 나머지 오 인(五人)에게 차례로 건네주었다. 백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조용히 쓸어보았다. "그 밀서가 나의 명령이오. 그대로 행동하시오." ③ 천지만물(天地萬物)이 모두 깊숙이 잠든 밤. 현백검장에도 여느 때처럼 고요한 어둠이 자리잡았다. 태화거(太華居)- 태상전의 후원에 위치한 백검우의 침소(寢所). 철이른 매화(梅花)가 곳곳에 피어 있는 가운데 풀벌레 소리가 평 온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태화거의 어느 깊숙한 실내(室內). 잘 정돈된 책자(冊子)들이 온통 벽을 메운 이 방은 바닥의 부드러 운 자색(姿色) 융탄자와 평범한 나무 침상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집기도 없는 단촐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백검우는 침상에 걸터앉은 채 여러 통의 봉서(封書)를 차례로 뜯 어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백검장의 비밀 연락망이 중원각지 에서 보내온 밀지들이었다. "......." 헌데 바로 그때였다. 꽈르르! 난데없이 밖에서 허공을 뒤흔드는 파공성이 울려왔다. '음......?' 백검우가 흠칫하며 시선을 드는 순간이었다. 콰지직! 그의 바로 옆 창문이 산산이 박살나며 시커먼 한 그림자가 뛰쳐 들었다. 창졸간에 들이닥친 침입자는 염소수염에 당당한 체구를 지닌 백의노인(白衣老人)이었는데 이미 전신 의복이 갈가리 찢겨 져 있어 낭패를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일순 백검우의 입에서 당혹성이 흘렀나왔다. "아니, 송원주님이 어떻게...?" 뜻밖에도 침입자는 바로 화양소원의 원주 송칠만이었던 것이다. "잘 있었느냐? 허허......" 그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갑자기 네놈이 보고 싶어 찾아왔다. 헌데 이곳에서는 맹수를 기 르느냐?"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내 평생 이런 낭패를 당한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죽을 때가 가 까워진 모양이야." 송칠만은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보며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찢겨져나간 그의 의복 사이로는 여기저기 핏자국마저 내비치고 있 었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쉽게 보아넘길 정도도 아니었다. '......!' 백검우가 두 눈에 기광을 발하며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쿵...! 실내(室內) 밖에서 육중한 발자국 소리가 진동하더니 웅야의 긴장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장주(莊主)님, 주무십니까?" 송칠만의 얼굴에 쓴 웃음이 피어올랐다. "바로 그 거대한 맹수로군!" 일이 이쯤 되면 상황은 불(火)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웅야가 거대한 방천극(方天戟)을 움켜쥔 채 안으로 들어섰 다. 송칠만를 발견한 그의 눈에 이내 불길이 타올랐다. "이 늙은 쥐새끼가 감히 여기까지 기어들었구나!" 쿠우우! 행동이 말보다 훨씬 빠른 게 웅야의 특징이었다. 그의 거대한 방 천극이 무지막지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의 방천극은 수만근의 잠 력이 실렸을 뿐 아니라 섬광(閃光)처럼 빨랐다. "잠, 잠깐!" 송칠만은 기겁하며 황망히 신법을 전개하여 몸을 움직였다. 허나 그는 간발의 차이로 다시 앞가슴의 옷자락이 길게 찢어지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는 입을 딱 벌린 채 노성을 질렀다. "곰같은 놈이 어르신도 몰라보고 이 무슨 무례냐!" "늙은 놈이 입만 살았구나!" 꾸우우웅! 번쩍! 이번에는 처음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공할 일초가 시전되 었다. 실내는 완전히 광란(狂亂)하는 방천극의 강기(剛氣)에 휩싸 였다. 사위가 일시에 암암(暗暗)해지고 벽면이 무너질 듯 진동했다. 고오오...... "어이구!" 송칠만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몸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모 든 방위(方位)가 차단되어 있어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백검우의 입에서 나직한 호통성이 터져 나온 것은. "멈춰라 웅야!" 찰라지간 거대한 웅야의 방천극이 중도에서 거짓말처럼 딱 정지되 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신력(神力)이었다. 아무리 초절정의 고 수일지라도 한 번 발출된 초식을 중도에서 거두기란 여간 힘든 것 이 아니다. 하물며 웅야의 무기는 수백 근이나 나가는 방천극이 아닌가. "아......!" 송칠만은 자신이 처했던 위기도 잊은 채 탄성을 터뜨렸다. 실낱같은 차이로 죽음(死)의 문턱에서 되돌아온 그였지만 웅야를 응시하는 눈길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쓸만한 놈이군. 하지만 성질이 급한 것이 마치 천둥에 놀란 개아 들(犬子)같으니 오래 살기는 틀렸다." "무엇이......?" 웅야의 얼굴 수염과 털이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곧두섰다. 그는 흉흉한 시선을 백검우에게 홱 돌리며 말했다. "장주님! 이 늙은이는 몰래 월장을 한 자로서 적의 염탐꾼이 분명합니다!" "웅야, 이 분은 내 손님이다" "글쎄 손님이고 나발이고 당장 때려잡아야... 가만... 뭐라굽쇼?" 기세등등하던 웅야의 표정이 갑자기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백검우는 씁쓸하게 미소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분부했다. "수고했으니 그만 물러가도록 하라" "......!" 웅야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백검우와 송칠만를 번갈아 보았다. 그 는 어쩔 수 없는 듯 백검우에게 예를 표해 보이고는 문 밖으로 향 했다. 그러나 그는 전음(傳音)으로 송칠만에게 한 마디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당신은 운이 좋았소. 차후로는 목숨 아까운 줄 알기 바라오.) 웅야가 실내에서 나가자, 백검우와 송칠만은 탁자(卓子)를 두고 마주 앉았다. "허허...... 내가 현백검장이 용담호혈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낭패를 당할 줄은 몰랐네." 송칠만의 음성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밝고 생기(生氣)에 차 있었다. 백검우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웅야는 비록 나이는 젊지만 우리 현백검장에서 서열 십위의 고수 입니다. 하지만 그는 송원주께서 사정을 봐주었다는 걸 꿈에도 모 를 겁니다" "......!" 송칠만은 흠칫하더니 기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내 짐작이 맞다면 송원주께선 웅야를 능히 제압할 수 있는 분이 십니다. 전 단지 송원주께서 본 장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연극 을 하신 목적을 듣고 싶을 따름입니다." 백검우의 말은 비록 부드러웠지만 은연중에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실려 있었다. 송칠만의 손끝이 순간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정녕 놀라운 일이군...!' 그는 십오 세의 소년에 불과한 상대방에게서 무림의 늙은 효웅(梟 雄)들에게서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이내 나 직한 탄식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하지 않겠네. 내가 찾아온 건 자네와 한 가지 거래를 하고 싶기 때문이네." "거래라면......?" 백검우의 두 눈에 신비로운 광채가 어렸다. 송칠만은 엄숙한 신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 가지 비밀(秘密)과 한 인물의 목숨을 바꿀 생각이네" "......" 백검우는 잠시 침묵했다. 직감적으로 그는 송칠만이 말하는 거래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느꼈다. "송원주께서는 내가 그 거래를 받아들일 것이라 이미 확신하고 계시는 듯 하군요......" "물론일세" 송칠만은 기이한 시선으로 백검우를 깊이 응시하더니 말했다. "내가 팔고자 하는 비밀은 능히 천하대권(天下大權)을 흔들 수 있는 것이라네." "......!" 백검우의 표정이 일순 돌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는 송칠만 의 말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담담한 신색을 회복한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 다. 거래를 하는데 있어 먼저 서두르는 것은 백해무익임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백검우의 반응을 기다리던 송칠만은 결국 쓴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이 녀석이 무림의 전면에 등장하면 아무도 못당하겠군!' 잠시 사이를 두고 송칠만은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이 비밀은 당금 황제(皇帝)와 그 측근들만이 알고 있는 정도일 세. 하지만 그 이상은 자네가 수락하기 전엔 말할 수 없네" "......." 백검우는 송칠만을 깊숙한 눈길로 정시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수락하겠습니다." "허허...... 그럴 줄 알았네" 송칠만은 흡족한 신색이더니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매우 조용하군." "염려마십시오. 엿들을 자는 없습니다." "음......!" 송칠만은 주위에 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우백, 자네가 구할 인물을 말하겠네. 그는 금릉 순천 부(巡天府) 순검옥(巡劍獄)에 갇혀 있네." "아......!" 백검우의 입에서 순간 신음같은 일성이 흘러나왔다. 순천부(巡天府) 순검옥(巡檢獄)-- 그것은 황궁(皇宮)에서 만든 하 나의 거대한 옥(獄)이었다. 세인(世人)들은 순검옥이란 말만 들어 도 안색이 흑빛으로 변한다. 그곳은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다는 면에서 무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 순검옥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곳에는 암흑과 고통만이 있을 뿐이며 영원히 살아 나올 수 없는 사관(死關)이 설치되어 있었다. 산 자를 위한 무덤! 이미 사백 년(四百年) 전에 황궁에서 극비리 에 만들었다는 순천부 순검옥은 세인들에게 공포의 전설(傳設)이었다. 순검옥에 갇히는 인물들은 모두 황궁의 대역죄인(大逆罪人)들이었 다. 그러나 이제껏 순검옥에 몇 명이 갇혔는지, 어떤 내력의 인물 들이 갇혔는지는 완전히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사백 년 동안 순천부 순검옥에 갇혔던 인물들은 단 한 명도 살아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순천부 순검옥이란 말인가.....!' 백검우는 설마 송칠만의 조건이 이러한 것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순검옥은 황궁 내에서도 입에 담기조차 금기(禁忌)로 하고 있는 곳입니다. 송원주님의 말은 마치 내게 죽은 자를 살려내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네. 어쩌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 허나......" 송칠만은 백검우를 정면으로 직시하며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우백, 자네만은 어떻게든 구해낼 방법을 생각해 내리라 믿네." "......." 백검우는 무겁게 침묵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만면에 결심의 빛을 떠올리며 힘있는 어조로 물었다. "구할 인물이 누구입니까?" "......" 송칠만은 정색을 한 채 잠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서장(西藏), 라마교(喇磨敎)의 대종법장령(大宗法掌令)인 아란대라마(阿蘭大喇磨)일세." "......!" 일순 백검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아란대라마라면...... 원(元), 황실(皇室)의 마지막 대종법장령이 아닙니까?" 신음처럼 흘러나온 그의 질문에 송칠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검우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한 차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아란대라마! 그는 지금까지도 서장에서는 살아있는 신(神)으로 추 앙받고 있을 만큼 신비한 기인이었다. 또한 아란대라마는 천기(天機)를 볼 줄 알고 주문(呪文)만으로도 백 리 밖의 인물을 죽일 수 있다고 했다. 원(元)의 패망을 가장 먼저 예고한 것도 바로 아란대라마였다. "우백, 자넨 아란대라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라마교의 대종법장령으로 원의 황실에 몸을 담았다는 것 정도입니다" 백검우의 침착한 대답에 송칠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뇌까렸 다. "그렇지. 심지어 세인(世人)들은 아란대라마의 이름조차 이미 잊 고 있지...... 모두 죽은 것으로 믿고 있네." "헌데...... 아란대라마와 송원주께서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건 대답할 수 없네." 송칠만의 대답은 간단했다. 백검우는 빙긋 미소했다. "그렇다면...... 이제 제가 해낼 일의 대가를 받아야 할 차례로군요." "그렇군...." 송칠만은 묵직한 침음을 흘려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검우는 과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비밀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 기만 했다. 굳이 천하대권에 영향을 미칠 비밀이라는 말이 아니더 라도, 순검옥에서 아란대라마를 살려내는 일의 대가라면 결코 예 삿 비밀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송칠만은 잠시 여유를 두고 자신의 염소수염을 소중히 쓰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황제(皇帝)의 잠자리가 바뀔 것이네." "......!" 순간 백검우의 두 눈에 번쩍 기광(奇光)이 스쳤다. "그 말씀의 뜻은...... 황궁(皇宮)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렇다네." "음......!" 백검우의 얼굴에 처음으로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황궁천도(皇宮遷都)! 이 일은 단순히 황제의 잠자리를 옮긴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하(天下)의 상권(商權), 이권(利權)을 비롯, 중원무림(中原武 林)의 세력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엄청난 중대지사(重大 之事)인 것이다. 만약 이러한 비밀을 미리 알아내어 안배를 한다면 상권(商權), 무 림(武林)의 세력권 등에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이 일은 백검우에게 있어 실로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운 황도(皇都)가 들어설 곳은 어디입니까?" 백검우는 약간 긴장된 음성으로 물었다. 송칠만은 엄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북경(北京)이네." "북경......!" "우백, 자네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네." "물론입니다." 백검우는 신비로운 미소를 흘렸다. 송칠만은 두 눈에 기이한 광채를 발하며 말했다. "한 가지... 반드시 살아있는 아란대라마를 데려와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기한은 육 개월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으음... 이 물건이 자네에게 도움이 될 것이네." 송칠만이 앙상하게 주름잡힌 손으로 내준 것은 한 통의 붉은 밀지 (密旨)였다. 매우 낡은 밀지를 펼치자 복잡한 도형(圖形)이 시야 를 파고 들었다. 순간 백검우의 얼굴에 경이의 빛이 가득 떠 올랐다. "이건 바로 순천부 순검옥의.....!" "바로 순검옥의 기관매복과 비밀통로들을 그려놓은 기관지형도(機 關地形圖)일세. 이미 사백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천하(天下)에 단 한 장 뿐인 것일세." "......!"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이제 더 이상 자네에게 말해줄 것은 없네." 송칠만은 말을 마치고 마치 다시는 영원히 입을 열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백검우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러나 송원주께선 마지막 제 질문에 대답하셔야 합니다. 만약 아란대라마를 노리는 자가 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송칠만의 안색이 순간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는 이 내 칼로 자르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그런 자를 만난다면 가차없이 죽여버리게! 그것이 무림(武 林)의 혼란을 막는 일일세." 백검우는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요." ■ 일로제검 제1권 제3장 신궁(神弓)과 신비(神秘) ━━━━━━━━━━━━━━━━━━━━━━━━━━━━━━━━━━━ ① 교교한 월광(月光)이 쏟아져내리는 후원(後園). 백검우는 언제부턴가 그 달빛을 밟으며 홀로 그 속을 거닐고 있었다.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 싱그러운 꽃내음....... 백검우는 더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한 차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약간 걸음을 빨리 했다. "......." 한순간 그의 앞에 하나의 아름다운 연못이 나타났다. 연못 위를 무심코 응시하던 백검우의 눈빛이 일순 물결치듯 흔들렸다. "......!" 아! 한 여인(女人)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한 나체(裸體)로 수욕(水浴)을 하고 있었다. 창백하도록 희고 눈부신 얼굴. 물기에 젖어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결. 여인(女人)은 시종 꼼짝도 않은 채 얼굴만 물 위로 내놓고 비스듬 히 누워 있었다. 달빛 아래 투명하게 비치는 젖가슴이 조용한 기 복을 일으키는 모습은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묘한 감흥을 불러 일 으켰다. 백검우는 문득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깊숙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라는 이 차가운 가을밤(秋夜)에도 물 속에서 잠을 자는군.' 그렇다. 연못 속의 나체여인은 바로 웅비와 더불어 항시 백검우를 호위하 던 사라였다. 이것은 실로 기이한 습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항시 물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본래 사라는 이국(異國), 천축(天竺)의 여인으로 중원(中原)에 노 예로 팔려왔던 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불행한 운명의 장난에 빠져 여러 사내들의 노리개 감인 시녀로 팔려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본래 그녀의 심성(心性)은 밝고 선하였으며,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을 간직한 꿈많던 소녀(少女)였다. 허나...... 그 모든 것이 차갑게 식어버리고 세상의 사내들을 저주하는 목녀 (木女)로 변해버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검우는 그런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처럼 나타났다. 그는 그녀를 노예시장에서 건져낸 후 엄청난 무공(武功)을 익히게 하였으며 새로운 삶을 안겨주었다. 그것이 이미 팔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백검우의 나이 불과 일곱 살. 사라는 홍안의 미동(美童)이었던 그에게 구원을 받았던 그날의 감 격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녀의 가 슴은 오직 한 사람, 백검우를 향해서만 열려 있었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는 은하부인(銀河婦人)이라는 명호를 얻게 되었고 웅비와 함께 백검우의 그림자가 되었다. "......." 백검우는 가만히 사라를 지켜보았다. 아직 그녀는 백검우의 기척 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포르릉.....! 가끔씩 그녀가 눈부신 나체를 꿈틀거릴 때마다 연못의 물결이 조 용히 파문을 일으켰다. 물 속에서 잠드는 미녀(美女). 원체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았던 때문일까. 백검우는 그녀의 모습에서 단지 여체의 아름다움을 느꼈을 뿐 다 른 느낌은 받은 적이 없었다. 단지 그는 그녀의 기이한 습관에 대 한 내력을 알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 자신의 과거 신분내력에 대해서는 얘기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백검우가 끝까지 알려고 했다면 그녀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 었으리라. 하지만 백검우는 나름대로 그녀의 입장을 존중해주었 고, 그 덕분에 아직도 그녀의 내력은 대부분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월하(月下)의 수녀(水女)라......" 백검우는 문득 신비로운 미소를 흘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이윽고 백검우가 후원의 담장가에 다다랐을 때였다. 스윽! 한 거송(巨松) 위에서 거구의 순박한 얼굴을 한 청년이 돌연 내려섰다. 바로 웅비였다. "장주님, 어디를 가시렵니까?" 백검우는 담담하게 미소했다. "내일 저녁까지 다녀올 곳이 있다. 아무도 내가 없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라." "그 말씀의 뜻은...... 혼자 떠나시겠다는 것입니까?" 웅비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백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 웅비는 흠칫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형(兄), 웅야와는 반대로 매우 신중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곧 깊숙이 몸을 부복했다.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빕니다" 그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슈우욱! 백검우의 몸이 섬광(閃光)처럼 어둠 속으로 날아올랐다. 마치 흐 르는 유성(流星)의 꼬리처럼 그의 신형은 긴 포물선을 그리며 현 백검장에서 멀어져 갔다. ② 이수애(異水涯)- 악양에서 십 리(十里) 가량 떨어진 험령의 계곡. 이수애의 깊은 골짜기에 격랑하는 물결은 동정호(洞庭湖)로 흐르 는 단류하(旦流河)의 발원지이기도 했다. 울창한 원시림(原始林)...... 이수애의 주변에는 온갖 맹수들이 들끓어 사냥꾼들이 아니면 감히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엽거촌(獵居村)은 오십여 개의 초막(草幕)으로 이루어진 소촌(小 村)이었는데 바로 이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이수애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엽거촌의 모든 인물들은 명성을 떨치는 사냥꾼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예사로운 사냥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원 뿐만이 아니라 대막(大漠), 서장(西藏), 남만(南蠻) 등을 돌며 희귀한 맹수들을 수렵하는 천하제일의 사냥꾼들이었다. 중원의 상인들에게 팔려나가는 갖가지 진귀한 모피, 웅담(熊膽), 청담(淸談), 녹각(鹿角), 야황(野黃=들소의 우황) 등은 거의 엽거 촌에서 흘러나갔다. 그렇다. 엽거촌(獵居村)! 이 이름은 결코 어느 방파(幇派)에 못지 않았다. 맹수를 죽이기 위해서든, 생계를 위해서든 엽거촌의 인물들은 모 두 고강한 무공(武功)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때는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무렵이었다. 엽거촌 입구(入口)에 찬 이슬이 어린 갈대숲을 헤치며 한 백의미 소년(白衣美少年)이 모습을 나타냈다. 스스스...... 흐르는 듯 유유한 걸음걸이의 미소년은 다름아닌 백검우였다. "후후......" 백검우는 심기가 극히 상쾌한 듯 만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우오오-! 크르릉! 맹수들의 굶주린 포효소리가 끊임없이 멀고 가까운 사방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이윽고 백검우의 시야에 그림처럼 오십여 개의 초막이 들어왔다. "여전히 한적한 모습이군." 백검우는 나직하게 뇌까렸다. 바로 그때였다. 한쪽 옆의 숲이 크게 술렁였다. 우수수...... 동시에 한 줄기 스산한 바람을 일으키며 뭔가 시커먼 그림자가 나 타났다. 아! 시퍼런 마화(魔火)처럼 이글거리는 두 개의 눈동자! 놀랍게도 그것은 믿을 수 없으리만큼 거대한 흑표(黑豹)였다. 쿠오오...... 황소의 몸집을 능가하는 몸체, 거칠고 공포스런 헐떡임..... 이 가공할 위용의 흑표범은 웬만한 인물의 넋을 빼앗기에는 부족 함이 없었다. 이쯤되면 맹수가 아닌 하나의 괴물(怪物)이라 해야 옳으리라. 허나 이것은 또 어찌된 영문인가? 정작 흑표를 대하는 백검우의 얼굴에는 반가운 빛이 가득 떠오르 고 있었다. "오! 흑화(黑花), 여전하구나!" 쿠아아아앙-! 흑표는 순간 그 쳐다보기 끔찍한 입을 벌리고 천공(天空)을 향해 포효를 터뜨렸다. 우수수...... 사위의 수림(樹林)이 일시에 그 진동에 못이겨 나뭇잎을 떨구었다. 벼락소리도 이처럼 굉렬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그토록 요란하게 울부짖던 온갖 맹수들의 포효소리가 일시에 뚝 정지된 것이다. 쥐죽은 듯 고요한 정적..... 마치 천지간의 시간이 일시에 정지되어 버린 것 같았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맹수지왕(猛獸之王)- 그렇다. 백검우 앞의 이 거대한 흑표는 이수애에서 무적의 영물(靈物)이 며, 모든 맹수들의 지배자인 것이다. 크으응.... 흑표는 경풍을 일으키며 어슬렁 어슬렁 백검우에게 다가왔다. 흑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백검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백검우는 소리없이 미소지었다. "후후...... 이놈! 그 동안 버릇이 없어졌구나." 스윽...... 그는 다시 걸음을 움직여 엽거촌 안으로 향했다. 그러자 흑표는 팔뚝보다 두꺼운 꼬리를 움직여 백검우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 "......!" 백검우는 눈썹을 꿈틀하며 흑표를 노려보았다. '이놈이...... 일 년 사이에 부쩍 커지더니 호기가 살아 시비를 걸려고 작정했군!' 흑표는 이제 아예 백검우의 코 앞에 이빨을 바싹 대고 으르렁대고 있었다. 순간 백검우의 손이 빛살처럼 빠르게 앞으로 뻗었다. 휘릭! 다음에 벌어진 상황은 실로 기묘했다. 백검우는 손을 흑표의 입 안에다 깊숙이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후후...... 이 건방진 놈! 어디 용기가 있으면 내 팔을 삼켜보아라!" 흑표의 거대한 체구가 일순 거짓말처럼 딱 동작을 멈추었다. 동시 에 흑표는 입을 딱 벌린 채 고통스런 눈빛을 발했다. 백검우의 손 아귀가 흑표의 목젖을 꽉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복이냐?" 쿠우우...... 흑표는 눈을 껌벅거리더니 결국 꼬리를 흔들어 항복의 뜻을 나타 내야만 했다. 백검우는 그제서야 손을 놓아주고는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놈아! 네가 아무리 까불어도 내 눈에는 귀여운 고양 이 새끼로 보일 뿐이다" 그 말에 흑표는 언제 항복했었냐는 듯 다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으르렁댔다. 크아아아! 그렇게 백검우와 흑표는 신경전을 벌이며 나란히 엽거촌 안에 당도했다.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가? 끼이익...... 한 채의 초막 문(門)이 열리며 삼십 전후의 중년인(中年人)이 나타났다. "오! 장주께서 오셨군요!" 중년인은 백검우를 대하자 반갑게 포권의 예를 표했다. 청수한 용모는 마치 문사(文士)같고, 심유한 두 눈에는 맑은 정광 (精光)이 서려있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중년인의 신태는 천인(天人)처럼 단아하여 도저히 이곳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허나 그의 몸에는 호피의(虎皮衣)가 걸쳐져 있어 분명 엽거촌의 인물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하...... 오랜만이오." 백검우는 호방하게 웃었다. 중년인은 깊숙한 두 눈에 이채를 띠우며 미소했다. "근 일 년 만에 뵙습니다. 장주." "그렇소. 철노야(鐵老爺)!" 신궁(神弓) 철우환(鐵于丸). 그는 바로 이곳 엽거촌의 촌장(村長) 이었다. 그는 천하제일의 사냥꾼이었다. 사냥꾼들 사이에 철우환 의 존재는 신(神)과도 같았다. 신궁이라는 명호가 말해주듯 그의 활솜씨는 입신의 경지를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껏 철우환이 활을 쏘는 모습을 본 자는 단 한 명도 없 었다. 심지어 그는 평소에 활(弓)조차도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삼십 년(三十年) 전에 그는 이곳 엽거촌의 촌장이 되었는데 당시도 그는 중년인이었다. 무려 삼십 년이 흘렀는데도 그는 전혀 늙지 않았던 것이다. 그 두 가지만 두고 보더라도 신궁 철우환은 분명 범상한 위인은 아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장주......" 철우환의 태도는 매우 공손한 것이었다. 백검우는 빙긋 미소지었다. "철노야와 함께 한 잔 술(酒)을 마시고 싶어서 왔소." "술(酒)이라......" 철우환은 만면에 웃음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좋은 술이 한 항아리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백검우는 철우환이 술을 무척 즐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철우환도 백검우가 결 코 술을 즐기러 찾아오지는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막 한 채의 초막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슈욱! 슉! 일진의 파공성이 울리며 사방 숲 속에서 다시 십여 명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나타났다. 절묘한 신법(身法)으로 장내에 내려선 그들은 모두 사냥꾼 차림이었으며, 한결같이 부리부리한 눈매에 용맹한 인상을 풍겼다. 그들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며 앞다투어 백검우 에게 예를 표했다. "장주! 오셨습니까?" "장주님......!" 그들의 어깨 위에는 방금 잡아 벗겨낸 듯한 짐승의 가죽들이 서너 개씩 얹혀져 있었다. 백검우는 부드럽게 미소했다. "많이 잡았군요." 그러자 사십대의 시커먼 수염이 무성한 인물이 누런 이를 드러내 어 웃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암호랑이 가죽이고, 이건...... 암여우 가죽, 이것은 암수달피 가죽입니다." "아니, 왜 모두 암컷 뿐이오?" "흐흐...... 그게 수컷들은 나를 영 싫어해서 가까이 접근을 안하는 통에......" "엉?" 백검우는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좌중의 인물들이 일순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낭랑한 대소를 터트렸다. "으핫핫핫......!" "우하하......!" 그리 오래지 않아 초막에는 통쾌한 웃음소리가 진동하는 가운데 술좌석이 벌어졌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산 속에서는 구경 하기 힘든 홍엽귀주(紅葉貴酒)가 술잔마다 따라졌다. 사위는 울창한 수림으로 인해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흑표범 흑화는 백검우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두 눈을 껌벅거리며 누워 있었다. 훈훈한 모닥불의 기운때문인지 흑화는 이내 커다란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해댔다. 타다닥! 타닥......! "좋은 술(酒)이다. 흑화 너도 한 잔 하겠느냐?" 백검우는 한 모금 술을 목젖 안으로 넘기고는 흑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철우환은 그 모습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흑화, 그놈은 나보다 장주를 더 따르는군요." "후후...... 아버님을 따라 네 살때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놈은 갓 태어난 새끼였었소." 백검우는 문득 두 눈에 우수의 빛을 띄웠다. 그는 잔잔한 어조로 독백하듯 말을 이었다. "결국 이 흑화녀석은 나와 함께 성장해 온 셈이지요." "......!" "워낙 정이 들다보니 이놈이 내 형제로 느껴질 때도 있소"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습니까... 과연 세월은 빠르군요." 철우환은 감회어린 어조를 흘려내더니 쭉 한 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백검우는 그런 철우환의 모습을 의미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버님께서 가장 아끼시던 세 명의 수하를 왜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 안배해 두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소." 아! 무슨 뜻인가? 순간 철우환의 눈빛이 기이하게 출렁였다. 그는 한 잔 술을 천천히 음미하더니 말했다. "안주가 떨어졌군요." 모닥불에 굽혀지던 사슴 고기가 동이 난 것이다. 철우환은 힐끗 시선을 흑화에게 던졌다. "장주님께 마른 안주를 드릴 수는 없으니 흑화 네가 수고를 해야 겠다. 가서 싱싱한 안주감을 잡아오너라" 그러나 흑화는 가볍게 으르렁대었을 뿐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철우환은 짐짓 눈을 부릅뜬 채 흑화를 노려보았다. "이놈 봐라...?" 크르르...... 흑화는 고개를 들어올리는 듯 했으나 이내 백검우의 무릎에 턱 올 려 놓고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철우환은 눈썹을 꿈틀하며 흑화의 머리를 손으로 쥐어박았다. 퍽! "이 녀석이 장주님이 계시다고 게으름을 피우는군. 어서 가거라!" 그러자 흑화는 이빨을 사납게 드러내 보이며 위협(?)을 하더니 꼬 리로 되려 철우환을 툭 치는 게 아닌가. 크르르.... "허...... 이놈이?" 철우환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백검우는 신비롭게 미소했다. "후후...... 철노야가 흑화에게 잘못 보인 모양이구료." "흉물스러운 놈이 나이를 먹으면서 꾀만 늘었습니다. 쯧!" 철우환은 끌끌 혀를 찼다. 백검우는 흑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다녀오너라. 흑화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화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어 흑화는 일부러 철우환의 몸에 툭 부딪치며 휙 몸을 날렸다. 슈- 욱- ! 섬광(閃光)! 흑화의 빠르기는 실로 번개같았다. 순식간에 흑화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저놈이!" 철우환은 하마터면 술잔을 놓칠 뻔했다. 백검우는 그의 당혹한 모습에 낭랑한 대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 그의 웃음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이수애의 계곡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③ 악소산(愕素山) 정상(頂上)- 새벽의 눈부신 햇살이 뿌연 안개와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부서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백검우는 정상에 선 채 동천(東天)에 떠오르는 태양(太陽)을 깊숙 이 바라보고 있었다. "......" 쌔애앵! 쌔앵! 서늘한 바람이 그의 머리결과 옷깃을 휘날리며 스쳐갔다. 백검우는 만 하룻만에 이수앵에서 악소산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백검우의 등 뒤. 아직도 물러가지 않은 어둠의 한 조각인가? 흑화(黑花)가 검은 체구를 웅크리고 앉은 채 바싹 붙어 앉아 있었 다. 마화(魔火)처럼 시퍼렇게 이글거리는 흑화의 눈동자는 태양조 차도 태워버릴 듯 강렬했다. 크- 르르......! 그러나 백검우의 두 눈은 이 순간 그러한 흑화의 눈빛조차 무색하 리만큼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항시 이 악소산 정산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웅심(雄心)을 키워왔다. 한순간 백검우는 거대하게 타오르고 있는 태양(太陽)에서 서서히 시선을 밑으로 옮겼다. 끝없이 펼쳐진 중원대륙의 평원(平原)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아아...... 좋구나!" 백검우의 얼굴이 은은하게 상기되었다. "후후...... 이제부터 천하인(天下人)들은 또 하나의 찬연한 태양 을 볼 것이다." 의미심장한 독백이 아닌가? 백검우의 전신에서 한순간 신비로운 서기(瑞氣)가 눈부시게 뻗어나왔다. "이제 나 백검우는 천하(天下)를 안기 위해 팔을 벌릴 것이다" 오오...... 광오하리만치 자신감에 찬 일성일진대....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흑화가 거대한 몸체를 일으키더니 우 뢰같은 포효성을 토해냈다. 쿠르르릉! 우수수......! 일순 사위의 수많은 고목(古木)들이 한꺼번에 지진을 만난 듯 진 동을 일으켰다. 이것이야말로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놀란다는 격이 아닌가? 백검우는 미소하며 흑화의 등을 쓰다듬었다. "흑화, 여기까지 마중나오느라 수고했구나. 이제 너의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 말에 흑화는 울부짖음을 흘려내더니 백검우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맴돌았다. "녀석......!" 백검우는 빙긋 미소하더니 몸을 돌려 신형을 날렸다. 슈욱! 절묘한 신법(身法)! 불과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백검 우의 시야에는 현백검장의 전경이 나타났다. 그 순간에도 흑화는 악소산 정상에서 우뢰같은 포효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크르-- 르르릉--! 크아아-! ④ 검장(劒莊)의 후원(後園). "후읍......!" 밤새도록 검(劒)을 휘두른 듯 녹초가 된 검영이 한 송목(松木) 앞 에 서 있었다. 땀(汗)에 흠뻑 젖은 지친 모습..... 그의 얼굴에는 십 세 소년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강 열한 집념이 서려 있었다. 한순간. "타앗! 멸폭강(滅爆剛)!" 낭랑한 기합성이 터지고 창백한 섬광(閃光)이 허공을 눈부시게 갈랐다. 후류류륭! 번쩍! 창백한 광채가 거짓말처럼 사그러진 순간이었다. 아! 보라! 검영의 앞 거대한 송목(松木)이 품(品)자 형상으로 세 개의 구멍 이 뚫린 채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분명 검의 최고 경지라는 검강(劍剛)이었 다. 더우기 검영은 검강을 발출해냈을 뿐 아니라 중도에서 세 갈래로 나누어 낸 것이다. "아......!" 검영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청한 얼굴로 송목을 바라보 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내 기쁨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아하하하......! 성공이다!" 그는 개구리처럼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맑은 눈물자국이 그렁그렁 고였다. 바로 그때였다. 검영의 등 뒤에서 조용한 일성이 들려왔다. "검영, 드디어 진전을 이루었구나." "아...... 형!" 검영은 다급히 몸을 돌렸다. 백검우가 어느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나타나 있었다. 검영은 짐짓 어깨에 힘을 주며 웃었다. "하하...... 이 정도쯤이야 뭘...... 형에 비하면 약소하지." "물론이다." "음......?" "그 정도는 겨우 네 한 몸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다." 일체의 감정이 실려있지 않은 무심한 음성. 검영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싹 사라지고 말았다. 검영은 내심으로 화가 치밀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여 얼굴이 온통 붉어지고 말았다. 그는 잔뜩 부은 얼굴을 팍 숙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이구! 내가 형으로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힘없이 물었다. "그럼...... 나는 출진(出陣)할 수 없는 거야?" 순간 백검우의 입가에는 뜻모를 미소가 잔잔히 피어올랐다. 그는 천천히 등을 돌리며 말했다. "너에게 성인례(成人禮)를 치룰 수 있게 해 주겠다." "아......! 그렇다면......!" 검영의 얼굴에 일순 희열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현백검장의 성인례(成人禮). 그것은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반드 시 한 번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일단 성인례에 통과하면 자연히 출전자격이 주어지고 당당한 대우를 받는다. 현백검장의 성인례는 매우 특이했다. 무기를 지니지 않은 맨몸으로 산(山)에 들어가 이틀 사이에 대호 (大虎) 한 마리를 산채로 잡아와야 하는 것이다. 더우기 장주의 가족은 두 마리를 잡아와야 하니 잘못하면 죽음(死)을 당하는 수도 있다. "원래 성인례를 치루려면 열네 살이 되어야 하나 너에게만은 특별 히 허락하는 것이니 그리 알아라." 백검우는 걸음을 옮기며 무감동한 어조로 말했다. '형......!' 검영은 손에 쥔 검을 불끈 힘주어 쥐었다. "문제없어...... 형! 두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라도 때려잡을 테야." 기쁨에 찬 다짐이었다. 갑자기 그는 한 옆의 고목(古木)을 부여안고 미친 듯이 좋아라 웃어댔다. "아하하하......!" 백검우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검영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입가에 가득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검영...... 훌륭했다. 너는 내 동생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구나." 나직한 중얼거림...... 바로 그때였다. 후원을 막 나서는 백검우의 앞에 웅비가 조용히 모습을 나타냈다. "장주님, 오셨습니까?" "오! 웅비...." 백검우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그에게 말했다. "삼 일(三日)후에 출정할 것이다. 준비하도록 해라." "......!"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분부 명심하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하는 웅비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검우는 유유히 웅비의 곁을 스쳐 걸음을 옮겼다. "풀벌레들이 조용한 걸 보니 비가 올 모양이군...." 웅비는 한 동안 얼어붙은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는가?' 웅비는 길게 심호흡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편 하늘 저편으로부터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웅비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움직여 사라졌다. 그로부터 채 반다 경도 지나기 전에 축축한 습기를 담은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우우...... 음산한 돌풍이 천지간을 휘감으며 울부짖는가 싶더니 이내 빗줄기가 떨어진다. 툭! 투툭! 빗줄기는 이내 폭우로 변해 잿빛 하늘을 휘저어대기 시작했다. 중추(仲秋)의 비(雨)는 대개가 얌전한 법이다. 그러나 이 빗줄기 는 천둥번개까지 동반한 채 사나운 기세를 더하고 있었다. 번- 쩍-! 꾸르르르-! 쏴아아아......! ⑤ 폭우는 만 하루가 지날 때까지도 멈출 기미가 없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군." 백검우는 정문(正門)이 마주보이는 대전(大殿)의 중앙에 앉아 있었다. 등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그런 백검우의 등 뒤에는 웅비와 사라가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정문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듯,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정오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끼이익...... 덜컹......!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를 뚫고 현백검장의 정문에 한 대 의 마차(馬車)가 나타났다. 한 대의 마차. 그것은 단 한 필의 흑마(黑馬)가 끌고 있었고 마부는 없었다. 없 는 것은 또 있었다. 전체가 시커먼 먹빛으로 칠해진 이 마차엔 창 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마차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관(棺)처럼 느껴졌다. 끼이익...... 덜컹...... 정문을 지키던 다섯 명의 현백검장 호위무사가 재빨리 좌우로 물 러서며 길을 터주었다. 마차는 질펀하게 젖은 땅 위에 아픈 자국을 내며 정원을 지나더니 대전 앞에 당도했다. 이윽고 음산한 마차바퀴 소리가 꺼지듯 정지되었다. ...... 쏴아아아......! 쏴아아......! "왔군." 백검우는 별 표정이 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웅비와 사라를 거느리고 마차 앞으로 다가섰다. "마차의 문(門)을 열어 보아라." "예, 장주." 슥! 웅비는 신속하게 몸을 움직여 마차로 다가갔다. 순식간에 그의 몸은 빗줄기에 흠뻑 젖었다. 끼이익! 마차 문은 음산한 신음을 내며 활짝 열려졌다. "......!" 웅비는 곧 마차 안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붉은 관(棺)이었다. 마차에서는 도합 네 개의 관이 꺼내졌 다. 웅비는 묵묵히 그것들을 백검우의 앞에 옮겨다 놓았다. 백검우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열어라." "예, 장주님." 끼이익......! 웅비는 첫번째 관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비릿한 피냄새가 확 사 위에 진동했다. "있습니다. 장주님." 관 속에 한 시신이 누워 있었다. 비범한 풍모의 반백노인. 죽은 자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것은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살해되었음을 의미했다. 시신의 목 아랫부분은 완전히 짓뭉개져 있어 팔다리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만약 그의 얼굴이 없었다면 고깃덩어리 쯤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시신의 목부위엔 한 장의 혈지(血紙)가 놓여 있었다. "......!" 슥! 웅비는 혈지를 떼어냈다. 웅비는 그것을 백검우에게 공손히 건넸다. 혈지의 내용은 간략했다. <분부하신 장강수로맹 송화채(松華祭) 채주(祭主) 철도객(鐵刀 客) 도부창(道夫昌)의 시신을 보내는 바입니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를 단 한 번밖에 때리지 못했습니다. 빌어먹을...... 철도객이 그렇게 서둘러 나자빠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광유왕 웅야, 호민부주 서(書).> 편지는 매우 서투르고 엉망이었다. 아마 네 살난 아이가 글을 쓴다 해도 이보다는 나으리라. 쏴아아......! 쏴아아아......! 빗줄기는 여전히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끼이익......! 두번째 관이 열렸다. 이번에는 사순의 흉폭하게 생긴 금의장포인의 시신(屍身)이 나타났다. 이 시신은 첫번째와는 반대로 두 눈을 사납게 부릅뜬 채 백검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신의 목 부위는 정확히 반 쯤 가량이 날카롭게 베어져 있었다. 매우 정확하고 예리무비한 솜씨. 예외없이 시신 위에는 한 장의 혈지가 놓여져 있었다. <장강수로맹 만리채주(萬里祭主), 사도양(史道陽)을 보내옵니다. 천풍부주 종리군 서(書)-> 세번째의 시신, 그것은 역시 종리군의 솜씨와 비슷했다. 사목(蛇目)을 지닌 오순 회의장포인의 주검- 심장부위에 열 십(十)자 형상의 가느다란 상흔 외에는 상처가 없었다. 공포(恐怖)...... 아직 눈을 감지 못한 시신의 얼굴에는 죽기 직전의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자는...... 검강으로 인해 심장이 안에서 박살났군." 슥...... 백검우는 나직이 뇌까리며 세번째 혈지를 펼쳐들었다. <장강수로맹 오가재주(五家祭主) 연리외(燕里畏)의 시신을 보냅니 다. 연리외는 삼 년 전 수하와 함께 술 한 잔을 마신 적이 있었습 니다. 그의 시신을 잘 묻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호천부주 적형룡 우혁전 서(書)-> "서로 친분이 있던 사이였던가? 내가 잘못 지시했군." 백검우는 두 눈을 깊숙이 빛내며 웅비에게 눈짓을 했다. 웅비는 알아들었다는 듯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격식을 차려 무덤을 만들겠습니다. 장주님......" 이윽고. 마지막 관(棺)의 뚜껑이 열렸다. 순간 백검우와 웅비의 입에서는 동시에 놀람의 일성이 새어나왔다. "아니......!" "이, 이건......!" 놀랍게도 관 속에는 비단 이불을 덮은 채 한 여인(女人)이 잠자고 있었다. 중년의 색기(色氣)가 자르르 흐르는 요염한 여인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시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단지 수혈(睡穴)이 짚힌 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뿐이었다. 그녀는 얇은 망사의만을 걸치고 있었다. 상황으로 보아 침상에서 잠을 자다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당한 듯했다. "장주님......!" 웅비는 멍한 눈빛으로 백검우를 쳐다보았다. "혈지를 건네라." 혈지(血紙)- 중년미부의 몸 위에 놓인 혈지에는 단 두 마디가 적혀 있었다. <장강수로맹 무화채주(武和祭主) 화미호(花美狐) 채미여(彩美 如)- 귀찮은 물건 보내 죄송합니다.> "과연 골치아픈 물건이군." 웅비는 난색을 지으며 백검우에게 힘없이 말했다. "이런 일은 밀환살부주 도천문 외에는 아무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후후......" 백검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분부했다. "그녀를 잠에서 깨어나게 해라." "예, 장주님." 슈슉! 웅비는 대답과 동시 화미호 채미여의 몇군데 혈도(穴道)를 짚었다. 허나 수혈이 풀렸는데도 그녀는 깨어나기는커녕 비단 이불을 끌어 당기며 잠을 청하는 게 아닌가? "으...... 음...... 아이...... 왜 이리 춥지......?" 말할것도 없이 그것은 잠꼬대일진대.... 웅비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잊었다. '이런 빌어먹을......!' 백검우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조용한 어조로 명령했다. "정신차리게 해줘라." 그러자 웅비는 채미여의 비단 이불을 홱 나꿔챘다. 순간 망사의 사이로 그녀의 가슴, 허리 등의 굴곡이 확 드러났다. 사내들의 넋을 단번에 앗아갈 듯 풍염한 몸매였다. 채미여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듯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웬 놈들이냐! 감히 이 화미호의 침실에 침입하다니!" "침실......?" 웅비는 그녀의 도도한 기세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곧 해벌쭉 웃으며 물었다. "그 관(棺)이 당신 침실이오?" "그게 무슨......?" 채미여는 황급히 반문하다가 주위에 낯설은 광경을 보고는 안색이 대변했다. "아......!" 웅비는 혀를 끌끌 차더니 중얼거렸다. "약간 상한 물건이군." '상, 상한 물건......?' 채미여는 당혹과 놀라움, 그리고 분노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대체...? 나는 분명 침소에서 자고 있었거늘.... 하긴 꿈자리가 좀 뒤숭숭하긴 했어.' 그녀는 대충 혼란한 심정을 정리하고는 일단 기분나쁜 관에서 몸 을 재빨리 빼냈다. 이어 그녀는 두 눈에 무서운 살기(殺氣)를 뿜 어내며 백검우와 웅비를 노려보았다. "이 어린 놈들아! 본 아주머니께서 네놈들의 남근(男根)을 뽑아버 리기 전에 어떠한 사술(邪術)을 펼쳐 이곳으로 끌고 왔는지 어서 말하거라!" 여전히 위엄에 찬 호통성이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노기로 인해 출렁출렁 했다. 백검우는 소리없이 미소하며 그녀를 응시하더니 공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부인, 들으시오." "오냐, 말해라!" "이곳은 현백검장올시다." "혀... 현백검장! 그렇다면 너는......?" "부인이 짐작하는 바로 그 사람이오" 백검우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부인께서는 다시 들어가시는 게 좋겠소." "어, 어디로 말이냐?" "그야 방금 나온 곳이 아니고 어디겠소?" 백검우의 말에 채미여는 안색이 흑빛으로 변한 채 관을 내려다 보았다. "흐윽......!" 원래 그녀는 무서운 악명을 날리던 여마두였지만 이 순간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백검우는 뒷짐을 진 채 몸을 돌리더니 대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웅비, 사라, 예의를 다해 부인을 모셔라." 채미여의 얼굴이 순간 새파란 독기로 물들었다. "안돼! 나는 죽을 수 없다! 네녀석이나 죽어라!" 슈욱! 번쩍! 채미여의 살기어린 일갈이 터지고, 섬(閃)! 그녀는 말그대로 빛살처럼 몸을 날리며 백검우의 등을 향 해 무시무시한 장력을 격발했다. 신쾌무비한 일수(一手)! 허나 그보다 더욱 빠른 것이 있었다. 슉! 언제 어떻게 손을 쓴 것일까? 사라의 손에서 은빛의 가느다란 침(針) 하나가 폭사되어 그대로 채미여의 이마 가운데 박혀버린 것이다. "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이 터졌다. 털썩......! 채미여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그녀는 엄청난 공포 속에서 서서 히 의식을 잃어갔다. '내, 내가 이렇게 허망하게...... 아아......!' 그녀는 발버둥쳤으나 이미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으나 서서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웅비가 자신의 몸을 관 속에 집어넣는 것을 느꼈다. '아...... 아......' 천둥소리와 함께 빗줄기는 한없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죽은 자 (者)의 영혼을 달래주려는 듯. 서서히...... 현백검장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쏴아아......! ■ 일로제검 제1권 제4장 출진(出陣) ━━━━━━━━━━━━━━━━━━━━━━━━━━━━━━━━━━━ 드디어 백검우가 무림(武林)에 출도하는 날이 밝아왔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백검우의 침소인 태화거 앞에는 난데없이 거대한 대호(大虎) 두 마리가 산 채로 묶인 채 놓여 있었다. 대호들은 현백검장이 떠나가라 포효를 토해댔다. 크르르르-! 크아아앙! 현백검장은 일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순식간에 수백 명의 장내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와......!" "잘 생긴 놈들을 잡아오셨군!"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현백검장의 한가운데에는 두 개의 금빛 찬란한 깃발이 꽂혀졌다. 두 개의 금빛 깃발에는 각기 붉은 색의 휘호가 쓰여져 있었다. <경(慶) 성인입례(成人入禮), 현백이장주(玄白二壯主) 좌위(座位).> <축(祝) 성인득제(成人得弟), 현백대장주(玄白大莊主) 태위(太威).> - 성인이 된 이장주를 경하함!- - 성인이 된 아우를 얻은 장주님을 축하함!- "와......!" "이장주 만세......!" 현백검장의 수많은 고수들은 예외없이 검영을 위해 술 한 잔을 마셨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동천(東天)에 태양(太陽)이 환히 떠오를 무렵이었다. 현백검장의 정문을 조용히 빠져나가는 한 대의 마차(馬車)가 있었다. 마차는 겉으로 보기에는 극히 평범하였다. 허나 자세히 살핀다면 견고하기 그지없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부석 위. 웅비와 사라가 초립(草笠)과 면사로 얼굴을 깊숙이 가린 채 앉아 있었다. 두두두-! 두두두두두-! 장원의 정문에서는 두 명의 인물이 엄숙한 신색으로 멀어져가는 마차를 전송하며 서 있었다. "장주......!" "장주, 부디 대업(大業)을 이루시오!" 그들은 바로 현림유종 단리승과 신기부주 신절수였다. 그들의 등 뒤 현백검장의 드넓은 광장 안에선 근 천오백여 장원내 고수들이 정연하게 대오를 이룬 채 멀어져가는 백검우를 향해 부 복해 있었다. 그것은 실로 장엄한 위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천오백여 고수들의 입에서 일제히 웅장한 함성이 엄숙하게 흘러나왔다. "경(敬)-! 출군어중원(出君於中原)-!" 오오...... 그것은 백검우의 출도에 광영(光榮)을 기원하는 현백검장의 외침이었다. 때는 정확히 영락 원년(元年) 구월 십육일이었다. 상안촌(常安村)- 동정호(洞庭湖)의 아름다운 물살을 끼고 있는 어촌(漁村)이다. 허나 대부분 상안촌 인물들은 어선보다 호화로운 유람선이나 상선 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당연히 이곳에는 돈많은 풍류공자(風流公子)들이 흥청거리며 드나들었다. 촤아아...... 한 척의 소선(小船)이 물살을 가르며 아름다운 동정호의 호면을 미끄러지고 있었다. 소선 위. 눈부신 백의(白衣)를 입은 준수한 미소년(美少年)과 어린 미동(美 童), 그리고 거구의 호의청년과 자의소부가 앉아 있었다. "아하하...... 형(兄), 저 고깃배 좀 보아. 잉어를 산더미같이 잡았어." 십 세 정도의 귀티가 흐르는 미동이 마냥 즐거운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백검우 일행이었다. '후후...... 녀석!' 백검우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검영을 바라보았다. 언뜩 그의 두 눈에 연민의 정이 스쳤다. '하기야...... 생전 처음으로 먼곳까지 나왔으니......!' 동정호(洞庭浩). 예로부터 이곳은 중원 천하의 오대절경(五大絶景) 중 하나로 꼽혔 다. 그 장쾌하고도 아름다운 전경은 어린 검영을 탄복시키기에 조 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백검우 역시 한없이 마음이 상쾌해짐을 느끼며 물내음 섞인 바람 에 전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헌데 이때였다. 스스스.... 멀리 갈대숲을 헤치며 조그만 한 척의 어선이 백검우 등에게 다가 왔다. 사공은 죽립(竹笠)을 눌러쓴 사나이였다. 사공은 백검우 앞에 당도하자 포권의 예를 취했다. "살부십오위(殺府十五位), 장주님을 뵙습니다." 섬칫하도록 냉엄한 음성, 그는 바로 도천문의 휘하에 있는 살수 (殺手)였다. 변장, 은신, 침투에 심지어는 독약까지 완벽하게 다 루는 밀환살부의 인물인 것이다. "음...... 왔느냐?" 백검우는 담담한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살부 십오위는 억양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도천문 부주께서 이미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십오위. 밀환살부의 특수한 성격상 명호나 이름이 없었다. 아니 살부 십오위라는 신분이야말로 그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촤아아......! 촤아아아......! 두 척의 배는 곧 동정호의 북쪽 갈대숲 쪽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 다. 끼욱! 끼익욱! 물새들의 울음소리, 바람소리...... 사위의 전경은 점점 더 아름다운 장관을 펼치고 있었다. 검영은 문득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터라 백검우를 의아로운 눈으로 주시했다. "형, 어디로 가지?" "섬(島)이다." "섬......?" "죽음(死)의 섬인 동시에 술(酒), 여인(女人), 도박(賭博)의 섬이라고도 할 수 있지......" 백검우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되물었다. "너는 짐작할 수 있겠느냐?" "혹시...... 장강수로맹의......!" "그렇다. 우린 적진(敵陣)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 검영은 긴장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멀리 하나의 섬이 나타났다. 섬은 별로 크지 않았다. 허나 오색(五色)의 휘황한 등불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걸려 있었 다. 게다가 섬 주위에는 크고 작은 유람선들이 정박하고 있어 호화로움을 더했다. 어느새 서쪽 하늘은 황혼으로 물들고 있었다. 노을 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는 섬의 전경은 보는 이를 기이한 감흥 속으로 몰아 넣었다. 띵! 띠디딩...! 간간이 바람소리에 실려 은은한 비파 소리와 풍류남아들의 호탕한 웃음소리, 간드러진 여인의 교소가 들려왔다. 허나 무슨 까닭일까? 그럼에도 섬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음습한 느낌과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검영은 긴장 속에서도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형, 저 섬의 이름은 뭐지......?" "어미도(魚尾島)." "어미도... 어미도...." 검영은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듯 나직이 뇌까렸다. 원래 어미도(魚尾島)는 동정호 최대의 홍등가(紅燈街)였다. 허나 대부호, 고관대작 등의 귀인(貴人)이 아니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별천지(別天地)였다. 실상 어미도에서 단 하룻밤새 재산을 탕진하는 인물은 부지기수였다. 허나 세인(世人)들이 꿈에도 모르는 내막이 있었으니......! 이 어미도야말로 장강수로맹의 심장과 같은 소굴이며, 보이지 않 는 독랄할 기관매복이 겹겹이 설치된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곳은 따지고 보면 지옥과 같은 사지(死地)이다. 허나 천하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어미도를 동경하는 자들이 있다." "......!" 백검우의 나직한 뇌까림에 검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백검우 일행을 실은 배는 어미도의 포구에 당도했다. 촤아아......! 어둠(暗). 어느새 사위에는 어둠이 소리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백검우는 배에서 내려 포구 위로 발을 옮겼다. 뒤따라 올라선 검영의 입에서 문득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대단하군!" 전면에는 휘황한 연홍등이 수십 개나 걸린 하나의 문루(門樓)가 있었다. 문루 위 현판에는 금빛의 용(龍)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형상으 로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미선유도(魚尾船遊島).> 시끌벅적...... 문루 주위로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헌데 그 중 거의 태반은 꿈 속에서나 한 번 볼까말까한 절색의 여 인들이었다. 더우기 사내들을 진탕시키는 여인들의 옷차림은 거의가 몸의 굴곡 이 은밀하게 비치는 대담한 것이었다. 촉촉히 물기에 젖은 눈동자들...... 퇴폐적인 내음을 풍기는 요염한 자세...... 휘황한 연홍등 불빛 아래 그 모습들은 사내들의 혼(魂)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어미도의 분위기를 단번에 추측케 해주는 광경일진대.... 그렇다. 웬만한 인물들은 눈요기만으로도 취할 것이 분명했다. 그야말로 꿈 속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천계(天界)가 눈 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허나 백검우를 비롯한 일행은 그런 여흥을 즐길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 "......" 일행은 유유히 안쪽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 "으음......!" 사방에서 예의 절색의 여인들이 몽롱한 눈빛으로 백검우에게 몰려오는 게 아닌가? 그녀들은 그린 듯 수려한 백검우의 용모를 넋놓은 채 바라보고 있 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떼처럼 몰려온 것이었다. '음......?' 백검우는 은연중에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물었다. "뭔가?" "......!" "......!" 여인들은 멈칫 접근을 멈추었을 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단지 그녀들은 물기젖은 눈빛에 탄복의 빛과, 기이한 색조를 띤 채 백검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웅비가 묘하게 웃었다. "장주께서 너무 준수하신 것이 그녀들을 놀라게 한 모양입니다." "바보같은 소리." 백검우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곧 은은한 살내음과 교태를 자아내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검영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형, 이곳의 여인들은 어딘가 좀 이상하군." "이상할 것도 없지요. 모두가 세파에 머리가 상해버린 불쌍한 여인들입니다." 웅비가 대신 말을 받았다. 검영은 두 눈에 이채를 빛냈다. "머리가 상해......?" "후후...... 그렇습니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뜻이지요." "그래? 한 번 무게를 달아보고 싶은 걸." 검영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웅비는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하하......!" 생전 미소를 모르던 사라조차도 그 순간에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훗......!" 검영은 눈을 크게 떴다. "와! 사라가 웃으니 정말 아름답군!" 절로 터진 탄성이었다. '......!' 사라의 얼굴이 순간 언뜻 홍조를 띠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백검우를 한 번 쳐다보았다. 마치 커다란 실수라도 저지른 것처럼. 백검우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빠르게 가느다란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검영, 저 녀석이 나도 못한 일을 해내었군.' 바로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거대한 체구에 호화로운 금의(錦衣)를 입은 인물이 다가왔다. 일견하기에 대부호의 모습이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는 등에 고기를 잡는 그물을 걸머메고 있었다. 그 그물은 예사 그물이 아닌 은잠사(銀蠶絲)로 짠 물건이었다. 그 러한 위세는 천상(天上)의 어선(魚仙)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누구나 그가 단지 즐기기 위해 고기를 잡는다는 걸 알 수 있으리라. "험...... 험......!" 헛기침을 하며 다가오는 금의인의 그물에는 이미 서너 마리의 큰 고기가 걸려 있었다. 그때 금의인의 얼굴을 본 검영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커졌다. "저 인물은...!" "쉿!" 웅비가 재빨리 검영의 말을 끊었다. 나타난 금의인은 뜻밖에도 바로 웅야(雄爺)였던 것이다. 백검우가 빙긋 미소하며 웅야에게 말을 건넸다. "천제(天帝)께 드릴 고기는 많이 잡으셨소?" 웅야는 모른 척 하고 태연히 대꾸했다. "흐흐...... 글공부만 하던 백면선생이 이런 곳에는 뭐하러 왔는가?" "고기 잡으러 왔소." "흐흐...... 이불 속에서 헤엄치는 고기 말인가?" "잘 맞추었소." "자네라면 잡을 필요도 없이 고기떼들이 몰려들 걸세." 웅야는 시커멓게 털로 덮인 얼굴을 끄덕이며 호탕하게 말했다. "물고기는...... 많이 잡았소?" "앞으로 한 두루미만 잡으면 이번 어행(魚行)은 그런대로 목적을 달성할 것 같네." 웅야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더니 문득 주위에 몰려든 여인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년들......! 물러가지 못하겠는냐? 이 공자는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니라!" 벼락치는 듯한 호통성이었다. 그 기세가 하도 흉험한지라, 백검우를 따라오던 여인들은 황급히 모두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머낫!" 구경하던 다른 행인들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백검우와 웅야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리석이 깔린 어미 도 입로(入路)를 걷고 있었다. 주위에 다른 자가 없음을 본 백검우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웅야, 그물을 칠 곳은 적당한가?" "물론입니다. 장주님. 살찐 고기들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호...... 그거 반가운 일이군!"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한 채의 호화로운 전각(殿閣) 앞에 당도했다. 전각의 현관에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화헌소향(花軒小香).> 천향목(天香木)으로 만들어진 현판 좌우에 걸린 홍등(紅燈)이 바 람에 여인의 허리처럼 하늘거렸다. 안에서는 간간이 여인의 교소와 기이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호호호...... 아이, 살살......!" "흐흐...... 요것 한 입에 삼키고 싶구나!" "어머나! 이 홍란(紅蘭)이 무슨 먹인가요?" "으음......!" 상황으로 보아 이곳은 은밀하고 깊은 쾌락의 장소가 분명하였다. 웅야는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더니 백검우에게 말했다. "장강수로맹 졸개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런 장소를 택했습니다." "음......!" "후원으로 드십시오. 그곳은 전세를 내었기 때문에 조용합니다." 그 말에 웅비가 특유의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형님, 그곳에서는 감시자가 없다는 뜻이오?" "그렇...." 대답을 하려던 웅야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맞은편에서 불쑥 한 인물이 걸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웅비는 씨익 웃더니 백검우의 어깨를 툭툭치며 건달처럼 말했다. "아우, 이 형님이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가?" 졸지에 아우가 되어버린 백검우는 일시 쓴웃음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후원은 인공연못과 화목(花木)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백검우는 곧 하나의 깊숙한 실내(室內)로 안내되었다. "......!" 스윽! 휘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세 인물이 백검우를 기다리다가 일제히 예를 표했다. "장주, 천위(天位)!"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세 인물은 바로 우혁전, 종리군, 도천문 세 부주(府主)였다. 백검우가 자리를 잡고 앉기가 무섭게 도천문이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입을 떼었다. "보고드립니다 애쓴 보람이 있어 장강수로맹주 수화룡(水華龍) 만 가유(萬加有)가 이 어미도에서 혈성보, 천마장의 인물들을 만나기 위해 당도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도천문은 냉철한 어조로 정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 상황은 전혀 예측치 못한 것으로 군산종채, 만가유의 본거지 는 거의 비어 있는 셈입니다." "후후후...... 잘 되었군." 백검우는 두 눈을 신비롭게 빛냈다. 도천문은 입가에 섬뜩한 살소(殺笑)를 머금었다. "그렇습니다. 군산종채가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만가유, 그 늙은 이는 까마득히 모를 것입니다." "아니오." 백검우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만가유는 자신의 눈으로 그 상황을 보아야 하오." 도천문은 흠칫 당혹성을 흘려냈다. "그...... 그렇다면 장주의 뜻은......?" "먼저 가서 대기하시오. 본 장주는 만가유를 데리고 가겠소." 백검우의 나직한 한 마디가 떨어진 순간 좌중에 놀란 경호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건 위험합니다. 장주!" "장주!" 그 모습에 백검우는 싸늘한 일성을 내뱉았다. "그대들은 본 장주를 믿지 못하는군!" "......!" "......!" 좌중의 누구도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백검우는 도천문에게 깊숙한 시선을 던졌다. "만가유가 있는 장소는......?" "홍...... 륜성입니다 장주......!" 도천문은 신음하듯 대답했다. ■ 일로제검 제1권 제5장 어미도(魚尾島)의 풍운(風雲) ━━━━━━━━━━━━━━━━━━━━━━━━━━━━━━━━━━━ ① <홍륜성(紅輪城).> 하늘 아래 어미도가 세인들이 동경하는 별지(別紙)라면, 홍륜성은 바로 어미도의 별지이다. 오오...... 홍륜성의 호화로움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으랴! 그에 대한 싯귀 한 구절이 있었다.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든 그 싯귀는 홍륜성의 신비로움을 가장 잘 나타냈다. <선녀(仙女)가 요지(遙地)에서 내려와 미주(美酒)를 따르고 월계 (月界)의 옥동(玉童)들이 칠채보등(七彩寶燈)을 밝히네. 선택된 귀인(貴人)은 은하수(銀河水)에서 목욕하고 쾌락을 다스리 니 홍륜성은 천(天), 지(地)의 가운데 있도다!> 홍륜성은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쾌락의 성(城)이다. 홍륜성은 손님을 받지 않는다. 홍륜성은 손님을 선택하는 것이다. 초대받은 자(者)가 아니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홍륜성에 들어갈 수 없었다. 상대가 설사 살아있는 자가 아닌 귀신이라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찌르르...... 찡! 찡! 찌르르...... 교교한 달빛(月光) 아래 갈대숲에서 풀벌레 소리가 아늑했다. 이곳은 어미도의 뒤쪽 까마득한 낭떠러지 앞.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웅장한 성(城)이 밤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성벽은 무려 이십 장 길이의 높이였다. 창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홍륜성문(紅輪城門)! 마치 깊은 굴(窟)의 입구같은 성문이 유일하 게 있을 뿐이었다. 백검우가 웅비와 사라를 거느린 채 홍륜성의 성문에 당도한 것은 밤이 이슥한 자정 무렵이었다. "마치 죄수를 가두는 옥(獄)같군......!" 옹비는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백검우는 유유히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느 한순간. 스윽! 성문 안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백검우를 막아섰다. "그대들은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게 아니오?" 매우 오만한 어조, 그는 화려한 금의(錦衣)에 비대한 몸집을 지닌 사순 인물이었다. 금의인은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얼굴로 백검 우 등을 훑어 보았다. 웅비가 앞으로 나서며 오만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아니, 이 자가......?" "다시 묻겠다. 너는 누구냐!" 웅비는 그가 대꾸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다그쳤다. 동시에 그의 두 눈에서는 돌연 시퍼런 광채가 무시무시하게 뿜어져 나왔다. 마 치 상대의 심장을 도려내는 듯 매서운 눈빛이었다. '흑......!' 금의인은 안색이 대변했다. 웅비의 기세에 압도당한 그는 얼떨결 에 홀린 듯 대답했다. "나...... 는 이곳 홍륜성 총관 철비수(鐵飛手) 두우(頭牛)라 하오만...." "두우라면 소머리란 뜻이 아닌가?" "엉......?" 철비수 두우는 멍청한 표정이더니 곧 안색이 벌겋게 상기된 채 두 눈에 흉광(凶光)을 폭사했다. "달밤에 길잃은 귀신놈이 찾아 들었군! 나 두우가 네놈을 저승으 로 돌려 보내 주겠다!" 그 외침성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어두컴컴한 성문 안에서 이십여 명의 검수(劍手)들이 유령처럼 신형을 날려왔다 스스슥! 스슥! 그들은 한결같이 일신에 비범한 재주를 지닌 듯 몸놀림이 신쾌무 비했는데, 순식간에 무서운 기세로 철비수 두우와 함께 진(陳)을 형성했다. "흐흐흐......!" "웬놈들이 감이 이곳에서 시비를 거느냐? 저승구경을 하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두우는 더욱 기세가 올라 괴소를 흘려내며 물었다. "이번에는 내가 묻겠다. 무엇하는 놈들이냐?" "허......!" 웅비는 입이 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는 곧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힐책하듯 말했다. "이곳 홍륜성에서는 손님을 이토록 무례하게 접대하는가?" "정신나간 놈! 이 홍륜성은 배첩(排帖)이 없는 손님은 받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배첩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천하에서 가장 귀한 배첩이다." 웅비는 담담하게 대답하더니 천천히 두우에게 접근했다. "그러니 눈을 똑똑히 뜨고 배첩을 구경하도록 해라" "......!" 두우는 만면에 당혹의 빛을 띠었다. 웅비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하여 도무지 거짓말같지가 않았기 때문 이었다. 그는 약간 기세가 꺾인 채 두 눈을 음험하게 빛내며 물었다. "누가 보낸 배첩인가?" "장강수로맹 맹주 수화룡 만가유다!" "아니......!" 철비수 두우는 순간 안색이 돌덩이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맹주께서 이곳에 오신 것은 극비(極秘)이거늘...... 그렇다면 사실이란 말인가?' 그의 태도가 이내 믿을 수 없으리만큼 공손하게 변했다. "결례를 용서하시오. 내가 눈이 삐어서 고인들을 몰라뵈었소이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배첩을 보여주시오" "보여주고 말고." 웅비는 빙그레 웃더니 느닷없이 오른손을 번개같이 내뻗었다. 철썩! 난데없이 떡치는(?) 소리가 터져 울렸다. 창졸간에 얼굴을 얻어맞 은 두우의 안색이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이런...... 빌어먹을!" 그가 노기를 참지 못하고 막 발작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웅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원하는 배첩은 그대의 얼굴에 붙어있다." ".....?" 두우는 재차 멍청한 표정이 되더니 황급히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과연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하나의 금빛 명첩(名帖)이 붙어 있었다. '......!' 두우는 흠칫 명첩을 살폈다. <현백대장주(玄白大莊主) 백검우(白劒雨) 친령(親令).> 명첩은 손바닥 크기였다. 음각된 금빛 글자를 백목련(白木蓮)이 감싸고 있는 고아한 형태일진대.... 그것은 너무나 정교한 솜씨여서 오직 현백검장의 신절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이건 현백검장의 장첩......!" "아니......!" "무엇이......!" 철비수 두우와 수하들의 얼굴이 온통 경악과 두려움으로 가득 물들었다. 두우는 그제야 백검우를 자세히 살폈다. 백검우는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를 머금고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두우는 비로소 확연히 깨달았다. '틀림없다! 소문에 듣던 백검우다!' 찰라지간에 두우의 안색이 수십 번이나 변화를 일으켰다. '이 어린 놈이 도대체 제정신이란 말인가? 스스로 범의 소굴로 찾아들다니......!' 백검우는 그제야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수화룡 만가유 노인에게 그 명첩을 전하는 것이 좋겠소." 글을 읽는 듯 담담한 어조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두 명의 인물이 전갈을 위해 성문 안으로 사라져갔다. 동시에 사위는 터질 듯한 긴장의 기운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명의 백의용포를 입은 비범한 신태의 인물이 성문 안에서 나타났다. 나이는 대략 사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번갯불처럼 빛나는 눈빛에 위풍당당한 체구를 지닌 태산(泰山)같 은 풍도의 인물이었다. 그가 나타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은은한 비파(琵琶)소리가 울려 퍼졌다. 띵! 띠링......! 오오... 한 폭의 선녀도(仙女圖)인가? 이십여 명의 백의궁장(白衣宮裝)을 한 절세가인(絶世佳人)들이 비 파(琵琶)를 연주하며 백의용포 사나이를 따르고 있었다. "......!" "......!" 백검우와 웅비의 표정이 기이하게 흔들렸다. 마치 만화(萬花)가 한꺼번에 핀 듯 눈부시고 현란한 광경에 일시 심기가 진탕된 때문이었다. 이윽고 백의용포 인물은 백검우 앞에 당도했다. 시선과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백검우의 눈빛이 언뜻 기이롭게 흔들렸다. '강(强)하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백의용포의 사나이의 눈에 탄복의 빛이 스친 것도 거의 동시였다. 일체 무심하던 백의용포 사나이의 표정이 서서히 눈녹듯 풀리는가 싶더니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본인은 정강수로맹의 부맹주(副盟主)인 산엽무도웅(算葉武道雄) 장추명(張秋明)이오. 감히 현백검장의 대장주를 영접하려 하오." 극히 부드럽고 온화한 어조였다. "백검우요. 홍륜성을 구경하러 왔소" "영광이외다. 장주." 장추명은 흔쾌히 대답하더니 몸을 돌려 안내하였다. 그의 정중한 태도는 마치 자신의 상전을 모시는 것 같았다. '뛰어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겨우 수화룡의 밑에 있다니...... 아까운 일이군......!' 백검우는 조용한 걸음으로 홍륜성의 성문 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웅비는 장추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우뚱 하더니 사라와 함께 힘차게 뒤를 따랐다. "좋은 밤. 즐거운 밤. 냄새나는 밤."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② 홍륜성 내부는 거미줄처럼 복잡한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용(龍), 봉(鳳)을 수놓은 호화극치의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벽면은 천상선녀도(天上仙女圖)가 끝없이 이어져 그려진 모습이었다. 나체(裸體)로 목욕하는 모습...... 비파를 뜯는 모습...... 그 그림은 복도로 깊이 들어갈 수록 점점 낯뜨겁게 변했다. 심지어 남녀가 서로 격렬하고 음란한 정사(情事)를 벌이는 모습까 지 그려져 있었는데 그 자세조차 실로 천차만별이었다. 웅비는 어느새 얼굴이 은은하게 붉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어떤 작자가 그렸는지 생생하게 잘도 그려 놓았군!' 그와는 반대로 사라의 안색은 점차로 창백해졌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차갑고 섬뜩하게 변해 보는 이로 하여금 공 포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허나 누구도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자는 없었다. 오직 한 사람. 백검우의 얼굴만이 티끌만큼의 동요도 없이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추명은 그런 백검우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때였다. 백검우가 문득 의미심장한 어조로 장추명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 백검우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지 않소?" "무림인의 배분은 실력과 신분이오. 장주는 어리지 않소." 장추명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만약 장주께서 어렸다면 나 장추명은 가차없이 장주를 베었을 것이요."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소." "......?" "그대는 수화룡의 수하로 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대 는 수화룡을 좋아하시오?" 백검우의 음성은 그의 걸음걸이 만큼이나 조용하고 차분한 것이었다. 순간 장추명의 두 눈에 기광(奇光)이 번뜩 스쳤다. 그는 곧 원래 의 담담한 표정을 되찾더니 무감동하게 말했다. "과찬이오. 장주." "......" 잠시 침묵하던 백검우가 다시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다 왔소이다. 장주." 장추명은 정중히 포권하며 멈춰섰다. 어느새 전면에는 복도가 막히고 여섯 갈래의 금빛 휘장이 드러워 진 문(門)이 나타나 있었다. 백검우의 눈에 언뜻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문 뒤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나왔기 때문이었다. 촤아아...... 촤아아...... '이 소리는......!' 잘못 들었는가? 백검우는 안에서 물살소리가 들린다고 느꼈다. 스릉! 장추명이 벽면에 붙어 있는 고리를 잡아당기자 문(門)이 매끄럽게 좌우로 열렸다. "들어가시지요" 실내로 들어선 백검우와 웅비는 은연중 탄성을 흘렸다. "아......!" 실내는 온통 수정(水晶)의 벽으로 싸인 장방형이었다. 놀랍게도 바닥은 맑은 물(水)이 잔잔히 고여 있었다. 그 위로 오색(五色)의 보옥(寶玉)으로 단장된 수부상(水浮床)이 눈부시게 떠 있었다. 물살 위에서....... 그 수부상은 천천히 회전을 일으키며 사위에 오색영롱한 광휘(光 輝)를 뿌리고 있었다. 수부상 위에는 천향목(天香木)의 원탁(圓卓)이 놓여져 있었는데 세 인물이 빙 둘러 앉아 있었다. 유유작작 술(酒)을 마시고 있던 삼 인(三人)의 눈길이 일제히 백검우에게 고정되었다. "......" "......" 세 인물 중 누구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백검우는 거침없이 그들에게 걸어가 빈 좌석에 앉았다. "내 오래 살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호화로운 곳은 처음이오." 백검우는 세 인물을 찬찬히 주시하며 유유히 말을 이었다. "세 분의 존대성명을 알고 싶구료." "......!" "......" 삼 인(三人)의 얼굴에 일제히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도대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이란 말인가? 중앙의 인물은 오십대의 초로인(初老人)이었는데 극히 평범한 용 모였다. 허나 그의 눈빛만은 예사롭지가 않아 음울한 회색 광채가 괴기롭게 맴돌고 있었다. "ㅋ......!"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 냉소를 흘리며 백검우를 주시하더니 음산 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과연 세상의 소문은 헛되지 않았군. 얼굴에 젖냄새도 가시지 않 은 소년이 현백검장을 이끌어 나간다더니...... " 그는 술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하더니 비수같은 시선을 백검우에게 꽂았다. "이 늙은이는 수화룡 만가유라 하네. 들어보았는가?" 백검우는 신비롭게 미소했다. "물론이오. 소문대로 꽤 늙으셨구료." "......!" 만가유의 얼굴이 순간 가볍게 경직되었다. '당돌한 놈....' 허나 백검우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만가유의 옆에 앉은 두 인물을 깊숙한 시선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십대의 비범한 인상을 지닌 청년(靑年)들이었다. "두 분은......?" 백검우가 묻자, 오른쪽 백의유삼의 청년이 먼저 호감어린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후후...... 이 몸은 남궁위(南宮威)라 하지. 천마장(天魔莊)의 소장주(少莊主)라네. 백아우......!" 그는 넉살좋게도 대뜸 백검우를 아우로 호칭했다. 마천옥유(魔天玉幽) 남궁위! 그렇다. 그는 바로 오대신비문(五大神秘門) 삼장이보 가운데 천마장의 소 장주인 남궁위였다. 평소에도 그는 항시 미소를 잃지 않는 소면 (笑面)의 사나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웃음이 이세상의 어떤 칼이나 독(毒)보다도 무섭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친구보다는 적에게 미소를 보여왔 고, 그 미소를 본 자들은 대부분 모두 죽었다. 그는 또한 무서운 야심가로 알려져 있었다. 독랄한 무공과 지모를 겸비한 전형적인 효웅(梟雄)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무림인들은 남궁위의 미소를 보는 것을 가장 재수없는 일로 여겼다. 당금 이십육 세. 마천옥유 남궁위라는 이름은 백검우에겐 반드시 넘어야 할 산 (山) 가운데 하나였다. "반갑소 남궁형." 백검우는 담담하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왼쪽의 흑의청년(黑衣靑年)에게 고정되었다. 먹물처럼 검은 흑의(黑衣)와는 정반대로 너무나 희어서 창백해 보 일 정도의 피부를 지닌 미남자(美男子)였다. "당신은 혈성보의 소보주(少堡主) 유성혈뢰도(流星血雷刀) 관청우(官靑雨)이겠군." "......." 흑의의 미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마치 얼굴근육이 모두 죽어 버린 것 같았다. 대리석으로 빚 어내린 듯 핏기없는 창백한 그 얼굴은 알 수 없는 요기(妖氣)를 풍겨내었다. 그 얼굴을 더욱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건 그의 눈빛이었다. 그것은 마치 온 세상을 저주하는 듯 암울하면서도 음침한 눈빛이었다. 그 기분나쁜 눈길로 얼마나 백검우를 응시했을까. "너는......" 문득 그의 입술이 경련하듯 실룩이더니 바람소리처럼 삭막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죽을 것이다. 나 관청우는 너와는 따로 살아야 할 운명이 아니었더냐...." "......!" "네놈은 저승에서 나는 세상에서." "......" 백검우는 보면 볼수록 관청우라는 눈 앞의 사나이가 특이하다고 느꼈다. '소문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군.' 관청우. 그는 마치 어둠(暗)이 잉태한 후예와도 같았다. 그는 거의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그는 남의 앞에 서는 것을 극히 싫어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인물이 있다면 십중 팔구 그의 원수이며 야욕의 제물일 것이다. 세인(世人)들은 관청우가 어쩌면 남궁위보다 더욱 무서운 존재라고 믿었다. 혈뢰도(血雷刀). 그의 무기는 핏빛의 한 자루 도(刀)였다. "과연 그렇소. 허나 나 백검우를 죽이고 싶어하는 분은 비단 당신 뿐이 아니라는 게 문제요." "......!" "당신은 먼저 옆에 있는 두 친구들에게 허락을 받는 게 어떻겠소?" 백검우는 관청우의 살기 서린 얼굴을 온화한 시선으로 받아내었 다. 그러한 그의 눈빛은 마치 관청우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백검우는 천천히 세 인물을 쓸어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느 분이 먼저 술잔 대신 나를 향해 칼을 쥐겠소?" "......!" "으음......" 장내의 삼 인(三人)은 나직한 신음성을 흘려냈다. 실상 그들은 백 검우가 찾아왔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 했었다. 설 마하니 백검우가 스스로 용담호혈에 찾아올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백검우는 그들의 예상을 뒤엎은 채 모습을 나타내었을 뿐 아니라 세 치 혓바닥으로 자신들을 농락하고 있지 않은가. '소문보다 훨씬 무서운 놈이로군.' 수화룡 만가유의 눈에 서릿발같은 살기가 스쳤다. '어린 놈이 이토록 심계(心界)가 대담무쌍하니 오늘 살려 두면 훗 날 아무도 이놈을 죽일 수 없게 될 것이다!' 만가유는 곧 입가에 빙그레 소리없이 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이 홍륜성에 찾아온 것은 본좌의 얼굴을 보고 싶었음이 아니더냐?" "과연 그렇소." 백검우는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가유는 기다렸다는 듯 남궁위에게 눈짓을 보냈다. 남궁위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스윽! "맹주께서 백아우와 담소를 나누고 싶으신 모양이구료. 기꺼이 피해 드리겠소." "흐흐...... 본래 자네는 이곳의 풍류(風流)를 맛보고 싶어했지 않는가?" 만가유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문득 탁자 밑의 단추를 눌렀다. 슥! 순간 귓청을 찌르는 음향이 울려 퍼졌다. 그그긍! 동시에 만가유의 뒤쪽 수정(水晶) 벽면이 양 옆으로 쫙 갈라지는 게 아닌가? 동시에 그곳에서는 기막힌 전경이 전개되었다. 쏴아아......! 쏴아......! 연못(潭). 수정벽의 뒤쪽은 온통 기화(奇花)와 보석(寶石) 등으로 꾸며진 하 나의 연못이었다. 연못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裸體)의 절세소녀(絶世 少女) 이십여 명이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호호호......!" "호호...... 아이 간지러워......!" 풍만한 가슴의 빠알간 유실이 그대로 물기에 젖은 채 드러나고, 눈부신 아랫 배의 능선...... 은밀한 태고(太古)의 비림까지 완전히 내비친다. 백검우는 그제서야 이 방 안에서 물소리가 들리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장난을 치기에 여념이 없던 나녀(裸女)들은 뒤늦게 벽면이 열렸 음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했다. "아앗!" "어마마......!" 그녀들은 일제히 비명을 터뜨리며 자신들의 가슴, 몸의 중요한 부 위를 가렸다. 허나 조금만 자세히 본다면 그녀들의 태도가 오히려 더욱 사내를 자극시키는 교태라는 걸 알 수 있으리라. 연못의 가장자리에는 대나무로 엮은 조각배 하나가 텅 빈 채 주인 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궁위가 껄껄 대소하며 탄성을 발했다. "과연 홍륜성이군!" 그 모습에 만가유는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 저 아이들은 모두가 절묘한 방중술(房中術)을 터득한 특수체질의 몸을 지녔네. 자네는 저곳에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고 싶지 않을 걸세." "오......!" "자네는 저 조각배 위에서 원하는 미녀(美女)를 마음대로 골라 잡 을 수 있네. 그야말로 신선이 즐길만한 낚시가 아니겠나?" 만가유는 거슴츠레한 실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길이 관청우에게서 멈추어졌다. 관청우는 눈썹 하나 흔들림이 없이 무 심한 모습이었다. "자네는......?" "나는 별로 계집을 좋아하지 않소." 관청우는 무감동한 일성을 툭 내뱉았다. 만가유는 빙그레 웃으며 남궁위에게 시선을 보냈다. 남궁위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호방한 대소를 터트렸다. "관형(官兄)께선 이 홍륜성에서 본인과 함께 행동하기로 약속하지 않았소? 자 갑시다!" "......" 관청우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마지 못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윽...... 그는 마치 죽으러 가는 소처럼 마지 못해 어기적 어기적 조각배 위로 올랐다. 이윽고 남궁위와 관청우를 태운 배가 둥실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그긍! 수정(水晶)의 벽면은 굉음을 내며 서서히 원래대로 차단되기 시작했다. "아하하...... 이리들 오너라" "어맛! 어딜 잡으시는 거예요!" "흐흐흐......!" 연못(潭)의 미녀들이 일순 놀란 비단잉어떼처럼 한꺼번에 요동치 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이내 완강하게 닫혀버리는 벽면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쿠웅! 좌중에는 이제 만가유와 백검우만이 남았다. 벽면에는 특수한 안배가 설치되어 있는 듯 개미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흐흐....." 만가유는 백검우를 주시하며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자네는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건가? 내가 짐작 하기에는 호랑이 새끼를 때려 잡자는 방법을 논하려는 것 같은데 말이야" "......!" "흐흐흐......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 때려 죽이는 것, 찔러 죽이는 것, 극독을 먹이는 것, 태워 죽이는 것 등...... 그렇지 않은가?" 만가유의 얼굴에는 점점 짙은 살기(殺氣)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검우는 빙그레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나는 맹주께 중대한 소식을 전하려 할 뿐이오." "중대한 소식이라...?" 만가유의 눈빛이 일순 기이하게 흔들렸다. 백검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맹주 자신의 모든 것이 걸린 일이오." "......!" "다시 말해 장강수로맹의 존망(尊望) 여부가 달린 일이오." "흐흐흐...... 어린 놈이 험악한 협박도 할 줄 아는군." 만가유가 눈 하나 깜박 않고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그는 꿈에도 백검우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백검우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목숨은 나이가 먹는다고 두 개로 변하지 않소. 당신은 조금도 믿으려 하지 않는군." 포르릉......! 백검우는 한 잔 술을 따라 여유롭게 목젖 안으로 넘겼다. 수화룡 만가유는 그제서야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안색이 변했다. "영악한 어린 놈아! 그 말뜻을 분명히 밝혀라!" 콰직!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그대로 탁자 위에 처박았다. 무시식......! 누런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술잔이 탁자를 관통해서 아래로 떨어졌다. 백검우는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오늘부터 장강수로맹은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바이오. 나 백검우에 의해서." "무엇이!" "장강수로맹 따위가 감히 현백검장을 상대로 도전을 한 게 애초에 착오였소. 나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실수였는지 뼈저리게 느끼 도록 해줄 것이오." 백검우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의 깊숙한 성목(星目)에서 형형한 안광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만가유는 일순 미친 듯이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그의 몸이 앉은 자세 그대로 허공에 둥실 떠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네 녀석을 사로잡아 그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겠다!" 파아앗! 만가위의 우수(右手)가 섬광처럼 백검우의 목줄기를 향해 날아들 었다. 그것은 극상승의 금나수법(擒拿手法)이었다. 날아들던 갈쿠 리같은 그의 손이 중도에서 변화를 일으키며 십여 개의 환영(幻 影)을 그려냈다. 허나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백검우는 앉은 채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잡았다!' 만가유는 자신의 손아귀에 백검우의 목이 잡히는 것을 느꼈다. 일 이 너무 간단하게 끝나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는 백검우의 목을 닭모가지처럼 비틀어버릴 작정으로 손에 공력 을 배가시켰다. 헌데 그 순간 백검우의 입가에는 오히려 실낱같은 미소가 번지는 게 아닌가? '음......?' 만가유는 본능적으로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바로 그 순간. 번쩍! 백검우의 전신에서 찬란한 자광(紫光)이 발산되었다. 찰라지간 만가유는 엄청난 반탄력이 손으로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허억!' 경악은 이내 엄청난 고통으로 변해 만가유의 손에서 팔과 전신으로 확산되었다. '이, 이게 어찌된 판국이냐?' 만가유는 황급히 자신의 팔을 내려다 보았다. 분명 그의 손은 백 검우의 목을 잡고 있었다. 허나 놀랍게도 그의 팔은 제멋대로 뒤 틀린 채 완전히 뼈가 탈골되어 살을 비집고 나와 있지 않은가! 곧 선렬한 피가 힘차게 만가유의 파열된 관절부위에서 뿜어지기 시작했다. 만가유의 얼굴은 서서히 공포로 물들었다. '이럴 수가!'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는 일시 고통조차도 망각했다. 그는 그제서 야 비단 자신의 팔을 못쓰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몸 뒤로 쑥 빠져나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하나의 둔탁한 무기가 만가유의 몸을 관통한 것과 다름없었다. "우아아아악!" 급기야 만가유의 입에서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울컥 선혈이 넘쳐나왔다. 백검우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원래 늙으면 팔힘이 떨어지는 법이오." 서서히...... 그는 자신의 손을 들어 만가유의 흐물거리는 팔목을 움켜쥐었다. 이어 그는 이미 죽어버린 그 팔을 앞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덜거덕! 뼈마디가 뒤틀리며 묘한 음향이 진동했다. "끄으윽... 끅....." 그 고통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인가. 만가유는 안색이 허옇게 질린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입에 게거품을 물고 졸도해 버렸다. 쿠웅! 백검우는 그러한 만가유를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무림(武林)의 인물들이 이토록 허약하다면 그동안 나는 너무 애써서 무공을 익힌 셈이군." 그러나 실상 백검우는 잘 알고 있었다. 수화룡 만가유는 결코 이토록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백검우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 전혀 예상 못한 날벼락을 맞은 만가유는 그렇게 백검우의 첫 희생 물이 되고 말았다. "......." 백검우는 만가유의 몸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문(門)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웅비와, 사라, 그리고 장추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장추명은 안색이 대변하고 말았다. 좀체로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 은 이 순간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경직되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 어지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스릉! 장추명은 무서운 기세로 검(劍)을 뽑아 들었다. 그 살벌한 모습에 백검우는 빙긋 미소하며 물었다. "혹시 부맹주께선 내가 맹주의 생명을 쥐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소?" 백검우로서는 부드러운 충고였다. 허나 그것은 누가 들어도 분명한 협박이었다. 장추명은 웅후한 음성으로 대갈했다. "어차피 맹주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대를 없애고 맹주를 죽이겠다!" "......!" "그리고 나 또한 자결하리라!" 번쩍! 휘류류류륭!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추명의 검(劍)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토해냈다. 쾌검(快劍)!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빠르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쾌검이었다. 삼백육십오방위(三百六十五方位)가 일시에 찬란한 검강(劍 )으로 폐쇄되었다. 장추명은 본래부터 죽음(死)을 두려워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무인으로서 당당한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온 그런 인 물이었다.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보았구나!' 백검우는 그에게 천 마디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아하하......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소!" 스스스...... 백검우는 낭랑한 대소와 함께 가볍게 신형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 의 동작은 매우 간단해 보였으나 거짓말처럼 장추명의 공격을 모 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장추명의 눈가에 탄복의 빛이 빠르게 스쳤다. 그 순간 백검우는 빠르게 웅비와 사라에게 전음(電音)을 보냈다. (웅비, 사라, 장대협을 정중히 접대해 드리고 따라오너라. 절대 그를 죽여선 안 된다.) 슈욱-! 행동은 말보다 훨씬 빨랐다. 백검우의 신형은 눈깜짝할 새에 이십여 장 밖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어딜 가느냐!" 장추명이 노갈을 터트리며 백검우를 추격하는 순간 두 그림자가 유령처럼 그 앞을 막아섰다.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응비와 사라였다. "가시려면 먼저 쌍인문(雙人門)을 열어야 하오!" 웅비가 먼저 벼락같은 일장을 쳐내었다. 장추명은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회오리치는 듯한 검류(劍流)를 뿌 려내며 정면으로 돌진해갔다. 꽈르르릉! 번쩍! 이내 경천동지할 대접전이 전개되었다. 한편 그 순간 백검우는 벌떼처럼 몰려드는 적들과 충돌하고 있었다. "맹주께서 당하셨다!" "맹주를 구하라!" "와......!" 거미줄같은 홍륜성의 복도, 그러나 잠시 전만 해도 개미 새끼 하 나 보이지 않았던 복도에서 구름같이 매복고수들이 나타난 것이다. '일이 간단치가 않겠구나!' 끝없이 이어진 도검(刀劍)의 살림(殺林)이었다. 설령 백검우의 몸이 열 개라 해도 도무지 빠져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백검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졸도한 만가유의 혈도를 눌렀다. 슥! 미혈(眉穴)을 격중당한 만가유는 이내 고통 속에서 의식을 회복했다. "으......!" 눈을 뜬 그는 이내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모멸감으로 인 해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채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놈을 당장 죽여라! 내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네 놈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리......끄으윽!" 만가유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백검우가 손으로 그의 목을 갈고리처럼 거머쥐어 버렸기 때문이다. "맹주, 말은 사리에 맞게 하는 것이오. 당장 저들이 덤벼들면 당 신부터 저승으로 달려갈텐데 어찌 저들을 벌 주겠단 말이오?" "끅... 끄으윽..." 만가유는 백검우의 품에서 안간힘을 다해 바둥거렸다. 그러나 이 미 혈도를 제압당한 그는 닭잡을 힘도 없는 평범한 노인에 불과했다. 그 광경에 복도를 새카맣게 에워싼 장강수로맹 심복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맹...... 맹주!" "맹주!" 백검우는 빙긋 미소했다. "맹주가 아니라 맹추다!" 스으윽...... 그는 거침없이 살벌한 도검림(刀劍林)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맹주를 죽이고 싶지 않다면 비켜라." "......!" "......!" 만가유의 수하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멈칫멈칫 뒤로 물러섰다. 백검우는 마치 숲 속을 산책하듯 그들 사이를 유유롭게 통과했다. 만가유는 입술을 뭉턱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내 이제껏 곱게 늙어왔거늘...... 다 늙어서 이 무슨 수모란 말인가?' 그는 뒤늦게 백검우를 가볍게 본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런 그의 눈은 벌겋게 핏발이 서 있어서 금세라도 피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았다. '빌어먹을......!' 허나 이미 엎지러진 물이 아닌가. 만가유는 서서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백검우는 거의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홍륜성을 완전히 빠져나 왔다. 이윽고 한숨을 돌린 그가 홍륜성을 돌아보며 신형을 멈추었 을 무렵이었다. 난데없이 홍륜성 가운데서 시뻘건 화염이 밤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화아악......! "불이다." "화마(火魔)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홍륜성의 고수들은 이제 불을 끄기 위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불(火)은 홍륜성 전체로 번졌다. 그 불더미의 아수라지옥을 보며 백검우는 소리없이 미소했다. "후후....." 그는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웅비와 사라가 불을 질렀음을. 애 초부터 환락(歡樂)과 범죄의 소굴인 홍륜성을 역겹게 보았던 그들이 아니던가. 그리 오래지 않아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맙소사...!" "괴... 굉장하군!" 홍륜성 주위는 때 아닌 불구경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어미도의 풍류를 즐기기 위해 찾아온 인물들이었다. 실상 그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이곳 어미도는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들 대부분은 경악 속에서 한편으로는 아쉽게 한편으로는 속시원 하다는 표정으로 이 장관을 주시했다. "잘 타는구나......!" "킁...... 고기(肉) 타는 냄새도 나는군. 갑자기 허기가 지는 걸." "마누라가 이 광경을 보면 기뻐 춤을 출텐데...." 그 아수라 난장판의 와중에 불타는 홍륜성을 뒤로 하고 날아오는 두 신형이 있었다. 바로 웅비와 사라였다. 백검우의 눈짓에 웅비는 재빨리 만가유의 몸을 받아들었다. 일행 은 지체하지 않고 장내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가장 좋은 구경거리가 불구경이라 했던가. 어느 누구도 백검우 일행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장추명은 어찌 되었느냐?" 백검우가 문득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웅비는 입가에 특유의 순박한 미소를 머금었다. "무사히 빠져나왔을 것입니다. 그 자... 정말 대단한 무공을 지녔더군요." "혹 남궁위와 관청우를 보았느냐?" "글쎄요......" 문득 웅비는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밤하늘의 달(月)을 주시하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마 벌겋게 익었겠지요. 모든 것이 다 붉게 익는 가을(秋)이니까요." 순간 사라의 입에서 쌀쌀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익지 않았으면 책임질 거야?" 웅비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러지 뭐. 큰 솥을 하나 준비해 두어야겠군" 백검우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휘이익! 휘익! 그들의 신형은 이내 장내에서 사라졌다. ③ 호수가의 포구에서는 검영과 웅야 등이 초초한 신색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제법 싸늘한 가을바람이 그들의 옷깃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쌔애앵......! 쌔앵......! "저 불길은 분명 장주님의 솜씨가 분명한데......!" 웅야가 호목(虎目)을 괴기롭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검영은 맑은 두 눈에 염려의 빛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왜 안오지......?" 바로 그때였다. 백검우의 일행이 어둠을 뚫고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모두의 얼굴에 일순 기쁨의 빛이 가득 떠올 랐라. "장주님!" "장주!" 웅비는 품에 안고 있던 만가유를 웅야에게 휙 던졌다. "형님이 들으시오. 늙은이가 꽤 무겁군." "엉......?" 웅야는 엉겁결에 만가유의 몸을 받아 안고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이놈아, 물찬 계집도 안기가 귀찮은 나에게 이따위 늙은 비계살을 주냐?" "물찬 계집이면 왜 형님에게 맡기겠소?" 웅비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이윽고 백검우 일행을 태운 두 척의 배는 포구를 떠나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백검우 일행이 포구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을 무렵이었다. 휘익! 휙! 포구에 두 그림자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들의 몰골은 실로 말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단숨에 그들이 방금 불지옥을 빠져나왔음을 알 수 있으리라. 그들은 무시무시한 흉광(凶光)을 두 눈에 폭사하며 백검우가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여우같은 놈!" "두고 보자. 반드시 죽여주겠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바로 남궁위와 관철우였다 그러나 이미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아닌가. ...... ■ 일로제검 제1권 제6장 형(兄)과 아우(弟) ━━━━━━━━━━━━━━━━━━━━━━━━━━━━━━━━━━━ 백검우 일행이 서늘한 야풍(夜風)을 맞으며 한참 지나 호수 위를 미끄러져 갈 무렵이었다. 멀리서 갑자기 여섯 척의 거대한 범선(帆船)이 나타났다. 콰아아아......! 콰아아......! 여섯 척의 거대한 범선은 모두 칠흑처럼 검은 빛이었다. 규모로 보아 배 한 척에는 적어도 오백여 명 이상은 탔을 것이었다. 이상한 점은 배에서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엄청난 속도로구나!' 검영은 온몸의 근육이 일시에 경직되는 걸 느꼈다. 마치 어둠이 잉태한 거대한 죽음(死)의 그림자처럼 여섯 척의 흑 선(黑船)은 삽시간에 백검우 일행에게 접근해왔다. '저 깃발은!' 어둠 속에 펄럭이는 흑선의 거대한 깃발은 온통 붉은 빛이었다. 거기에는 일곱자의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장강수로맹대혼(長江水路盟隊魂)> "형(兄), 적이야......!" 검영은 만면 가득 긴장의 빛을 띠우고 백검우를 응시했다. 지금껏 절망에 싸여 있던 수화룡 만가유의 얼굴에 희색이 떠오른 건 물론이었다. '흐흐...... 이번에는 아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허나 정작 백검우의 신색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째서 저들이 적이란 말이냐?" "그 무슨 말이지? 저 깃발이 형의 눈에는......!" 검영은 말하다 말고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두 눈 가득 탄복의 빛을 떠올렸다. "그럼 이미 저배는......?" "후후...... 녀석!" 백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저 범선들 안에는 본장의 천오백 정예고수(精銳高手)가 타고 있다." "아......!" "물론 저 범선들에 타고 있던 장강수로맹 인물들은 전멸당했을 것 이다.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완벽한 계획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백검우의 음성은 극히 담담하게 울려 퍼졌다. 허나 그 순간 수화룡 만가유는 뒷통수를 거대한 쇠망치로 얻어 맞 은 듯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 이놈...... 이제보니.... 무림(武林)을 통째로 집어 삼킬 놈이구나!' 무서운 전율이 만가유의 등줄기를 훑어내렸다. 촤아아아..... 백검우 일행의 배는 여섯 척 거대한 범선의 호위를 받으며 유유히 강을 헤쳐나갔다.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시각이 흘러갈 무렵. 백검우의 시야에 끝없이 펼쳐진 갈대 숲과 늪지가 나타났다. "드디어 염묵지(閻墨池)에 당도했군." 백검우의 두 눈에서 기이로운 광채가 스쳤다. 염묵지(閻墨池). 이곳은 태초 이래로 죽음(死)의 사지(死地)였다. 곳곳에 소용돌이와 늪지대가 있어 배들은 감히 들어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죽음의 미로(迷路)를 언제부턴가 지나다닌 자들이 있었 다. 그들로 인해 엽묵지를 통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존재한 다는 게 무림에 알려졌다. 그렇다. 그 길을 찾아낸 건 바로 장강수로맹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염묵지에는 장강수로맹 팔십육채(八十六寀)의 총단(總壇)이 자리잡게 되었다. 무림일문(武林一門) 장강수로맹 총단은 그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로 평판이 나 있었다. 그러나 일반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염묵지는 더욱 죽음(死)의 금지 (禁止)로 탈바꿈했을 뿐이었다. 만가유는 증오의 눈길로 백검우와 염묵지 방향을 번갈아 응시했다. '네놈에게 아무리 귀신을 부리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염묵지를 통과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백검우의 불가사의한 능력을 경험한 만가유는 자꾸 불안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의 불길한 예감은 이내 현실로 드러났다. 백검우의 배는 물론이고 여섯 척의 범선이 거침없이 염묵지 안으 로 돌진하는 게 아닌가! 촤아아아! 촤아아아.... 만가유는 일순 전신에 오한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서...설마...!' 그러나 그의 간절한 염원은 결국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백검우 일행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염묵지의 유일한 생로(生 路)를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가유가 절망으로 고개를 떨구는 순간에 웅비와 검영 등은 절로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염묵지의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터라 바싹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몰론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백검우의 치밀한 계획과 육대부주(六大府主)의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솜씨로 이루어진 것임을. 긴장 속에서 얼마나 더 전진했을까? 문득 검영이 상기된 표정으로 나직성을 흘려내었다. "보인다......!" "......!" 대략 삼십여 장 거리 앞. 멀리 수로맹 총단의 대소전각(大小殿閣)을 위시해 헤아릴 수 없는 선상등(船上燈)의 불빛이 나타나고 있었다. 정박해 있는 범선들은 대략 오십여 척 정도로 보였다. 장강수로맹 의 배임을 알려주는 검은빛의 그 거대한 범선들은 일정한 대오를 형성한 채 어둠 속에서 괴괴한 적막을 뿌리고 있었다. 검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 위용에 질리는 느낌이었다. 백검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전진하라." "......!" "......!" 촤아아......! 바로 그때였다. 범선들 가운데서 한 척의 소선(小船)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소선에는 십여 명의 순찰무사들이 타고 있었다. "누구냐! 신호등도 없이 들어오다니 미친 놈!" 그 가운데 털보장한이 위맹한 기세로 소리쳤다. 그들은 이미 여섯 척의 흑선이 장강수로맹 소속의 범선임을 알아본지라 적이라고는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백검우 일행이 모두 긴장하는 순간이었다. 웅비가 성큼 앞으로 나서더니 오히려 당당하게 호통쳤다. "이런 물에 빠져 죽을 놈!" "......!" "네 녀석은 맹주님의 얼굴도 잊었느냐?" 웅비는 엄숙한 표정으로 혈도가 제압당한 채 반송장으로 앉아 있 는 만가유를 가리켰다. 털보장한은 흠칫 놀랐다. '아니! 맹주께서......!' 그 순간 만가유는 아혈이 막혀 말을 못하는 상태인데다 노화로 인 해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웅비는 내심 실소하면서 다시 두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이놈! 맹주께서 저토록 화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뭔가 깨닫는 게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아......!" 털보장한은 그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과연 그러했다. 그는 이토록 무서운 만가유의 얼굴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허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헌데 당신은 도대체 어디 소속이요? 처음 보는......" "이 노옴!" "아, 알았소." 웅비의 살기(殺氣)어린 호통성에 털보장한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털보장한은 재빨리 배를 돌려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시오." 촤아아...... 백검우 일행은 다시 항진하기 시작했다. 만가유는 그 순간 얼굴이 온통 시뻘개진 채 전신을 부들부들 경했다. 그 모습을 본 털보장한은 아무래도 이상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맹주께서 왜 그런 작은 배를 타고 계시오? 게다가 안색도 이상하시고....." "맹주께선 무려 스무 병의 홍화주를 마시고 하룻밤 새 다섯 명의 미녀와 동침하셨다. 네놈은 감히 상상도 못할 정력을 보여주셨느니라" 웅비는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털보장한의 눈이 순간 휘둥그래졌다. "원 저런, 맹주님도 이제 나이를 생각하셔야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걱정스러운 표정까지 지어보였다. 만가유는 불끈 치솟는 울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저런 머저리가 내 수하중에 있었다니!' 촤아아아! 촤아아..... 백검우 일행을 비롯한 여섯 척의 흑선은 거침없이 장강수로맹 선단(船團)에 접근했다. 한순간 백검우의 입에서 조용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시작하라." "예, 장주님!" 웅비는 공손히 대답하더니 품 속에서 하나의 붉은 깃발을 꺼냈다. 붉은 깃발에는 흰 수실로 백목련(白木蓮)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곧 피(血)와 죽음(死)의 상징인 현백사령(玄白死令)이었다. 슈- 욱! 깃발은 적 선단의 한 흑선에 날아가 그대로 꽂혔다. "억!" "이, 이게 뭐냐?" "혀... 현백검장의 표기다! 비상신호를 올려라!" 적 선단에서는 순간 일대소란이 일어났다. 그들이 미처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이었다. 슈우우욱! 슈슈슉! 슈숙! 도천문, 웅야 등이 지휘하는 여섯 척의 흑선에서 일제히 불화살 (火弓)이 격발되었다. 일시에 사위는 대낮같이 밝아졌다. "으아악!" "적이다......!" 그것은 정녕 눈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십여 척 장강수로맹 선단은 삽시간에 완전히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도천문, 우혁전, 종리군 등이 이끄는 흑선들이 일제 히 적 선단에 충돌해갔다. 콰지지직! 콰콰쾅! "와......!" "와와......!" 천오백여 현백검장 고수들이 일제히 적선 위로 몸을 날렸다. 동시 에 엄청난 숫자의 도(刀)와 검(劍)이 온통 허공을 난무하기 시작했다. 번쩍! 후류륭! "으아악!" "아악!" 솟구치는 피보라...... 이글거리는 화염(火焰)...... 사위는 완전히 아수라지옥(阿修羅地獄)으로 변했다. 백검우는 마치 하늘이 내린 전신(戰神)처럼 태산같은 자세로 우뚝 선 채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검영이 돌연 입술을 굳게 깨물더니 번쩍 적진으로 몸을 날렸다. "뇌강폭(雷剛爆)-!" 검영이 한 차례 허공에서 낭랑한 기합성을 터뜨린 순간, 휘류륭! "으아악!" "끄악!" 한꺼번에 십여 명의 장강수로맹 고수가 짚단 쓰러지듯 우수수 고꾸라졌다. "받아라!" 검영은 수백 명의 적 가운데 내려서며 연신 가공할 살초를 뿌려냈다. 처음에 질겁하여 몸을 피하기에 급급하던 장강수로맹 고수들은 상 대방이 나이어린 소년임을 발견하고는 일제히 흉흉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웬 꼬마놈이!" "이노옴!" 삽시간에 검영의 모습은 장강수로맹 고수들에게 파묻히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웅비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백검우를 응시했다. "장주님, 저대로 두면 이장주는 죽고 맙니다." "놔 두어라. 웅비." "......!" 웅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백검우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검영은 실전(實戰)의 경험이 필요하다. 내 아우라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하, 하지만...... 저러다가 당하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도 하늘의 뜻이다." 백검우는 차가우리만큼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웅비, 웅야와 함께 싸워라. 형의 솜씨보다 나은지를 보겠다." "......!" 웅비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손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공손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촤아아......! 백검우가 주시하는 곳에는 웅야가 거대한 방천극을 미친 듯이 휘 드르며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후우우웅! 꽈지직! "우핫핫핫...... 귀여운 놈들!" 그는 뱃머리를 단 일격으로 박살내더니 얼이 빠진 장강수로맹 고 수들에게 광풍(狂風)같은 공세를 펼쳤다. 퍼버버벅! 한꺼번에 이십여 명이 방천극에 맞아 전신이 파열된 채 퉁겨져 날 아갔다. 그러나 수로맹 고수들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계속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막아라! 저 자는 광유왕 웅야다!" "사형진(蛇形陣)을 펼쳐라!" 그것은 말그대로 경천동지할 광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웅야를 막지 못했다. 웅야의 거대한 방천극은 염왕(閻王)의 저주인 양 오 히려 더욱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우핫핫핫핫......!" 그때 웅비가 몸을 날려 그의 옆에 내려섰다. "젠장, 형님은 좀 보기 좋게 살인할 수 없소?" "응? 무슨 개소리냐?" 웅비의 나무람에 웅야는 멈칫 당혹성을 발했다. 웅비는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번개같이 삼검(三劍)을 뿌려내며 말했다. "이렇게 해보란 말이오!" 사악! 쾌검(快劍)! 한꺼번에 다섯 명의 수로맹 고수가 이마에 좁쌀만한 구멍이 뚫린 채 비명도 못지르고 픽픽 고꾸라졌다. 죽은 자들은 모두 눈을 뜨고 있었으며 자신이 왜 쓰러져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보았소? 진정한 고수라면 솜씨가 이처럼 산뜻해야 하는 법이오" "그 놈 참....." 웅야는 입꼬리를 묘하게 일그러뜨리더니 버럭 대갈성을 터뜨렸다. "네녀석이나 많이 유식해라! 그런 간지러운 짓은 못하겠다!" 꾸우우웅! 번쩍! "우아악!" 피는 피를 부르고 그렇게 적응된 전사(戰士)들은 날이 갈수록 잔 혹해지는 법이다. 죽고 죽이는 장내의 무림인들 중에는 이 믿어지 지 않는 참혹한 살풍경에 치를 떠는 자들도 다수 있었다. 막연히 무림을 동경하고 호화스러운 겉모습만 마음에 담은 채 칼 의 운명을 선택했던 그들은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 석었는가를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그들의 운명은 활시위를 떠난 활과도 같았다. "으아아!" "끄으윽...!" 옆에서 죽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모두가 이성(理性)이 점점 마비된 채 오로지 굶주린 이리떼처럼 칼을 휘두를 뿐이다. 오로지 살아남 기 위해서....... 그렇다. 죽고 죽이는 무림계에서 낭만을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오직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무림의 절대선(絶對善)이며 철칙일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웅야와 호민부의 정예고수들이 일으키는 살풍 (殺風)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허나 웅야와는 정반대로 믿을 수 없을만큼 조용하게 싸우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도천문이었다. 밀환살부를 이끌고 있는 도천문의 솜씨는 항상 새벽의 풀잎에 내 려앉는 이슬처럼 고요했다. 그의 수하들인 밀환살부의 비밀살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대부분의 상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채 푹 푹 고꾸라졌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웅야가 이끄는 호민부보다 두 배 이상의 적을 주살하고 있었다. 도천문은 반드시 상대의 목 부문만을 공격했다. 그것은 가장 확실한 살인지도(殺人之道)였다. 목이 반쯤 잘린 시체가 있다면 거의 예외없이 도천문과 그의 수하 들의 솜씨였다. 전세는 이미 현백검장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서늘한 추 풍(秋風) 속에서 벌어진 죽음의 의식은 점차로 끝을 향해 치달았다. 백검우는 문득 자신도 모를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그는 어린시절 자신의 손을 잡은 채 웃으며 죽어갔던 부친을 생각 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날을 모질게 마음을 다져먹으며 지내왔던가. 현백검장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고뇌하며 견딜 수 없는 중압감과 싸워왔던가. ..... 아버님, 무림(武林)이 이런 곳이었습니까...... 온갖 복잡한 감정이 백검우의 가슴을 사정없이 휘저었다. 그 자신 이 오랫동안 계획을 세우고 벌여놓은 눈 앞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백검우는 마치 한바탕 꿈을 꾸고 있는 심정이었 다. 도저히 자신이 이 엄청난 일을 벌였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쌔애앵!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스쳐 지나갔다. 상념에 빠져있던 백검우는 순간 퍼뜩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것은 겨우 시작일 뿐이다! 나는 더 강해져야만 한다!' 그는 이내 평소의 무심한 신색을 회복하고는 옆의 만가유를 돌아 보았다. "당신은 너무 쉽게 무너졌소. 나에겐 다행한 일이오만...." 백검우는 담담한 한 마디와 함께 만가유의 아혈(啞穴)을 풀어 주었다. 비로소 말을 할 수 있게 된 만가유는 치를 떨며 신음성을 내뱉았다. "악귀같은 놈! 어린 놈이 너무나 잔인하고 무섭구나!" 백검우는 쓴 고소를 지었다. "원래 당신이 먼저 본 현백검장을 이렇게 잡수시려 하지 않았소?" "......!" "후후...... 천하에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소? 물 위에서 무적이 라는 장강수로맹 고수들이...... 그것도 염묵지 안에서 무너지게 될 줄을 말이오." 백검우의 음성은 마치 시(詩)를 읊조리듯 담담했다. 만가유는 전신을 부르르 경련하며 한맺힌 탄식을 흘러냈다. "아아...... 연환대선진(連幻大船陳)을 펼칠 수만 있다면 네놈이 어찌 목숨조차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 "그건 사실이오." 백검우는 진심으로 만가유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연환대선진(連幻大船陳)! 그것은 장강수로맹의 자랑거리였으며 무 림개사(武林開史) 이래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선진(船陳)이었다. 그야말로 장강수로맹의 영화(榮華)가 연환대선진의 위력에 있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나 백검우는 애초에 상대가 연환대선진을 펼칠 기회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툭......! 문득 뭔가가 만가유의 앞에 떨어졌다. 백검우의 손에서 떨어진 한 자루의 소도(小刀)였다. 백검우는 묵묵히 만가유의 상체 혈도를 풀어주었다. 만가유는 짙은 회한이 서린 눈으로 소도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당신에게 주는 내 호의라고 생각하시오." "흐흐흐...... 자결할 기회를 주겠다 이건가...." 만가유는 공허하게 웃더니 백검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백검우 담담한 미소로 그의 눈길을 받았다. 만가유의 얼굴에 비로소 체념의 빛이 떠올랐다. "너는 확실히 강하다." "......" 백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만가유에게서 등을 돌렸다. 만가유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백검우의 등을 주시했다. "너는 죽음을 앞둔 자에게 예언의 능력이 생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 "너의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이 만가유가 예언을 남겨주겠다. 너 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하겠지만 언젠가 여인(女人)의 칼에 당할 날이 있을 것이다." 아, 무슨 뜻인가? 번쩍! 한순간 섬광(閃光)이 일었다. "끄윽-!" 자신의 심장에 소도를 꽂아 넣은 만가유는 부르르 몸을 경련하더 니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이승에 대한 한(恨)을 떨쳐버리지 못한 듯 그는 죽으면서까지 눈을 감지 못했다. 휘이잉! 무심한 바람이 빠르게 식어가는 만가유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호를 풍미했던 거마 만가유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이제 그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쓸모없는 시신(屍身)으로 변 했고 오래지 않아 먼지처럼 이 땅에 흩어져버릴 것이다.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백검우는 막바지에 이른 혈전장을 주시하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한순간 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검영......!" 백검우의 눈길이 머문 곳. 검영이 전신에 무수한 성처를 입은 채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낭자한 선혈....... 검영은 이미 피를 많이 흘렸다. 그는 사력을 다해 몰려드는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백검우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것은 분명 도움을 바라는 눈길이었다. 허나 백검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다만 검영에게 한 차례 미 소를 희미하게 보냈을 뿐이었다. 그 미소를 본 검영의 표정이 비장하게 변했다. 그렇다. 검영은 누구보다도 형 백검우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었다. 시들어가던 검영의 공세가 한순간 다시 힘차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검영은 이제 더 이상 백검우를 바라보지 않았다. '좋아! 나 혼자 해낼 거야! 절대 죽지 않는다! 형의 신뢰를 저버릴 수는 없어!' 번쩍! "으아아악!" "아아악!" 다시 두 명의 장강수로맹 고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 광경을 응시하는 백검우의 손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 어 있었다. 실상 검영은 이제 겨우 십 세에 불과한 어린 소년이었 다. 마음같아선 이 세상의 모든 위험과 차단시킨 채 왕후장상의 아들처럼 보호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무림(武林)에 몸을 담은 처지에서 그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망상인가. '검영... 강해지지 않으면 반드시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는 순간이 온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백검우의 등 뒤에는 어느새 싸움을 끝낸 도천문, 웅야, 웅비 등이 시립해 있었다. 웅비가 망설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장주님, 이 장주를 도와드려야 하겠습니다." "만약 검영을 도운다면 널 죽일 것이다." "......!" "검영은 이 혈전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이것은 검영의 전 생애에 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 "......!" 아무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편 검영은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며 숫자를 세고 있었다. '넷.... 셋.... 둘.....' 한순간 그의 손을 떠난 검이 벼락같은 기세로 전방을 향해 폭사되었다. '하나!' 퍽...... 허공을 비행한 검(劍)은 정확히 상대의 이마에 꽂혔다. 그 상대가 쓰러졌을 때 더 이상 검영의 앞에 서 있는 적은 없었다. "헉...... 허억......!" 검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비틀거리는 신형을 바로잡았다. "해, 해냈어...... 내가 해냈어!" 검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았다. 근 육십여 구에 달하는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검영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아아......!" 검영은 입가에 창백하고 눈부신 미소를 머금었다. 서서히....... 그는 백검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백검우의 입가에도 한 줄기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순간 형제의 모습은 완전히 닮아 있었다. 웅비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감동이었다. "과연...... 형제(兄弟)다." 한순간 현백검장의 일천오백여 고수들이 일제히 천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현백검장 만세-!" ...... 때는 영락 원년(元年) 보름의 이른 새벽이었다. ■ 일로제검 제1권 제7장 석양(夕陽)의 검무(劍舞) ━━━━━━━━━━━━━━━━━━━━━━━━━━━━━━━━━━━ ① 장강수로맹의 선단을 궤멸시킨 백검우는 배에서 내려 장강수로맹 의 총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오백여 고수들도 대부분 백검우의 뒤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포구와 총단 본부의 거리는 불과 백여 장에 불과했다. 백검우는 이내 수많은 대소전각들이 세워져 있는 총단 앞에 당도했다. 총단의 정문 앞에는 이미 오백여 수로맹 본단고수(本壇高手)들이 비장한 신색으로 나와 있었다. "......!" "......!" 그들은 모두 무기를 빼어들고 진세를 구축한 채 밀려드는 현백검 장의 고수들을 바라보았다. 허나 이미 그들 대부분은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들은 현 백검장 고수들이 아닌 자신들의 최후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서로간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절망과 죽 음의 그림자도 점점 짙어져 갔다. 이윽고 백검우는 그들의 앞에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항복하시오. 그리고 다시는 본 현백검장에 음모를 품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오." 백검우의 음성은 매우 나직했다. 허나 그 음성은 모두의 귀에 벼락 소리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면 장강수로맹은 다시 살아날 것이오." 순간 건장한 체구에 검은 수염이 가슴을 뒤덮은 인물이 앞으로 나 서며 웅후하게 소리쳤다. "무인(武人)에게 항복은 곧 죽음과 같다! 그대는 우리를 욕되게 할 참인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그의 뒤에서 두 금의중년인(錦衣中 年人)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 또한 일견하기에 예사롭지 않는 내 력을 느끼게 하는 풍도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최후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다!" "장강수로맹의 위대한 이름을 위하여 모두 칼을 들어라!" 순간 긴장 속에서 침묵하던 오백여 총단 고수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어올리며 미친 듯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장강수로맹 만세!" 백검우의 입에서 순간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대들은...... 부맹주(副盟主) 장추명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의 이 한 마디는 내공을 실어 공령산음(空靈散音)의 수법으로 말한 것이어서 오백여 총단고수들의 귓 속을 선명하게 파고 들었다. 순간 오백여 총단고수들의 엄청난 함성소리가 거짓말처럼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금의중년인이 다시 앞으로 나서며 웅혼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분은 우리 장강수로맹의 수호신이다! 그분은 곧 팔십육채의 고 수들을 이끌고 달려오실 것이다!" 백검우의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대들이 그동안 맹주 만가유보다 부맹주인 장추명을 더 따 라왔음을 잘 알고 있소." "......!" 금의중년인의 안색이 일순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실상 백검우는 단지 직감으로 느낀 만가유와 장추명에 대한 수로 맹고수들의 충성심을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한 마디는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것이었다. 수뇌급으로 보이는 세 인물은 물론이고, 오백여 총단고수들의 표 정에는 당당한 자부심이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백검우는 문득 등 뒤의 도천문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 세 인물을 아는가?" "물론입니다." 도천문은 공손히 몸을 숙여 예를 표하며 억양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검은 수염은 내당주(內堂主)인 비운검(飛雲劍) 상일서(常日徐)입 니다. 좌측의 글선생처럼 생긴 위인은 수호당주(守護堂主) 위지웅 (韋之雄)이고, 우측의 검은 얼굴이 외당당주(外堂堂主)인 화륜쌍 도(火輪雙刀) 사필영(史弼英)입니다." "음......!" 백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천문의 음성은 당사자인 상일서, 위지웅 등의 귀에도 똑똑히 들 렸다. 순간 그들 삼 인(三人)의 얼굴에 일제히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저 자는 누구이길래 우리를 단번에 알아보는 것인가?' 세 사람은 모두 도천문을 자세히 살폈지만 아무리 보아도 초면의 인물이었다. 아니 설령 도천문을 본 적이 있다고 해도 알아보기란 거의 불가능 한 일이었다. 외부에서 활동할 때마다 극고(極高)의 변골공(變骨 功)을 바탕으로 거의 날마다 얼굴을 바꾸며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상대협은 들으시오." 백검우는 비운검 상일서를 정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 백검우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마당에 의미없는 살상을 하고 싶지 않소" "가소로운 소리! 우린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래서 나는 결심했소. 그대들의 부맹주 인 장추명이 팔십육 채 고수들을 이끌고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말이오!" 순간 백검우의 주위에 있던 현백검장의 수뇌들은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단숨에 적을 궤멸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고 오히려 적이 세력 을 규합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니! 현백검장 수뇌들이 놀라는 마당에 당사자들인 상일서, 위지웅등이 당혹감에 빠진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 "......!" 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백검우의 내심을 알 수 없었다. "대체...... 장주의 진정한 속셈이 무엇이오?" 비운검 상일서가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쳐물었다. 백검우는 신비롭게 미소했다. "나는 실질적인 장강수로맹의 일인자(一人子) 장추명과 정당한 대결을 하려는 것이오." "으음......!" 상일서는 자신도 모르게 기이한 신음성을 뱉어내었다. 일이 이렇 게 되고 보자 그는 도대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싸우다 죽겠다고 비장하게 전의를 불태웠지만 백검우의 말 한 마 디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심정은 비단 상일서 뿐 아니라 위지웅과 사필영도 마찬가 지였다. 백검우는 빙그레 미소했다. "장추명이 올 때까지 당신들과 나는 서로 술을 마시며 지루함을 달래는 게 좋겠소" "지금...... 술이라고 했소?" 상일서는 거구를 흠칫하더니 망연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보면 볼 수록 백검우가 예사로운 무림인들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크다......!' 상일서는 백검우의 모습을 통해서 거대한 산(山)을 느낄 수 있었 다. 그는 잠시 눈부신 듯 백검우를 응시하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힘찬 어조로 말했다. "불청객(不請客)을 맞이하겠소!" 백검우는 빙그레 웃으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방금 청함을 받았으니 불청객이 아니올시다." 상일서는 껄껄 대소를 터트리더니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술상을 준비해라!" 총단 고수들의 진영에서 묘한 소동이 일어날 즈음, 현백검장의 수뇌들은 모두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백검우를 바 라보고 있었다. 성격이 급한 웅야가 참지 못하고 가장 먼저 큰 소 리로 물었다. "장주님! 지금이 술마실 때가 맞습니까?" 백검우는 태연자약하게 그를 응시하며 대꾸했다. "맞아." 기나긴 어둠이 지나가고 태양(太陽)이 동천(東天)에서 찬란한 햇 살을 뿌리며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장강수로맹 총단의 정문에는 나란히 두 개의 깃발이 나란히 걸렸다. <현백검장대장주신위(玄白劒莊大莊主神威)!> <장강수로맹총단신위진천하(長江水路盟總壇神威震天下)!> 아침 햇살을 받아 현백검장의 깃발은 바탕에 수놓은 백목련(白木 蓮)과 함께 신비롭게 빛났다. 백검우와 상일서는 서로의 진영 가운데에 주안상을 준비해 놓고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 모습을 구경만 하던 양쪽 진영의 수뇌고수들도 하나둘 술자리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으하핫핫...!" "하하하하...!" 술기운이 거나하게 돌면서 호방한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한 양쪽 진영의 모습은 도저히 격전을 앞둔 상황이라고는 상 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검영이 근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떼었다. "형님은 대체 어쩌시려고 저러지?" 그때 옆에 있던 도천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장주께선 지금 최상의 싸움을 하고 계시오." 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최상의 싸움? 저렇게 술에 취해 있다가 장추명이 들이닥치는 걸 맞이하는 게 최상의 싸움이야?" "최상의 싸움이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뜻하오이다. 장주께선 이미 장추명이란 인물을 꿰뚫어 보았는지라 이런 광경이 벌어지게 된 것이오" "아......!" 검영은 그제서야 퍼뜩 깨닫고는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시간이 흘러 서산 노을이 내려앉는 초저녁 무렵이었다. 콰아아! 콰아아아! 드디어 장추명이 이끄는 팔십육채의 백오십 척 선단이 총단 앞에 위용을 나타냈다. 그러나 총단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목격 한 장추명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 어디 장추명 뿐이겠는가? 백오십 척 선단을 지휘하는 장강수로맹의 수뇌들은 도무지 눈 앞 에 펼쳐진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저게 대체 어찌된 판국이냐?" 그러나 장추명은 이내 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고로 영웅 (英雄)은 영웅의 마음을 알아보는 법이 아니던가. 그의 안색이 일 순간에 수십 차례 복잡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때 그의 등 뒤로 다가선 수하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공격명령을 하달해 주십시요! 지금 공격한다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장추명은 긴 장탄식을 발하더니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싸움은 끝났다." "자... 장주님!" "더 이상 말하지 마라. 하지만 오늘의 패배가 영원히 이어지는 것 은 아니다. 반드시 갚을 기회가 있으리라."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장추명은 몸을 돌렸다. 그렇다. 그는 이 일전(一戰)이 백검우의 승리임을 깨끗이 인정하고 만 것 이었다. 의미없는 살상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기다려준 상대에게 어찌 비겁한 칼날을 들이댈 수 있단 말인가. '백검우..... 누가 그의 나이가 어리다고 감히 경시할 수 있단 말 인가. 설령 죽은 현백검장의 전 장주 백장청이 부활한다 해도 그 를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② 장추명은 총단 뒤의 드넓은 갈대 숲 가운데에서 홀로 서서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거의 무표정했다. 그는 손에 예의 한 자루 대검(大劍)을 들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 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리 오래지 않아 그 인물이 다가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으음......!" 장추명의 두 눈에 미세한 파랑이 일었다. 석양의 핏빛 노을을 뒤로 한 채 다가오는 그림자...... 물흐르듯 조용한 걸음걸이의 인물은 다름아닌 백검우였다. 장추명은 문득 자신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석양의 경관 때문만은 아니었다. 백검우라 는 존재가 그러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 장추명의 안색이 이내 고요한 평정을 회복했다. 동시에 그는 대검 을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이윽고 백검우가 그의 앞에 당도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쌔애앵......! 서늘한 서북풍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들은 마치 두개의 거대한 산(山)인 양 좀체로 움직일 줄을 몰랐 다. 한순간 장추명의 눈가에 불꽃이 타오르듯 광채가 일어나기 시 작했다. 휘우웅....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무형의 살기(殺氣)가 장막을 이루듯 발산되었다. 그렇다. 그 모습이야말로 이제껏 단 한 번의 패배도 모르며 죽음을 지배해 온 장추명의 진정한 면모였다. "고맙네. 이 장추명에게 이토록 빨리 기회를 주리라고는 예상못했네." 장추명의 음성은 냉엄하였으며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어 투가 바뀐 것은 이제 그가 장강수로맹의 총맹주라는 신분이 되었 기 때문이었다. 백검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승자가 모든 생사여탈권(生死與脫權)을 쥐게 될 것이오." "......!" "이처럼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소? 만약 만가유가 장대협처럼 당 당한 무인이었다면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리는 일은 처음부터 없었 을 것이오." "......." 장추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사여탈권! 그 한 마디에는 비단 두 사람만의 운명이 걸린 것이 아니었다. 현백검장과 장강수로맹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이다. 스윽! 장추명은 서서히 검을 뽑아 비스듬히 치켜세웠다. 그의 검은 유백색의 광채를 띤 훌륭한 보검(寶劍)이었다. 장추명의 손에서 그 보검은 엄청난 잠력을 일으키며 진동했다. 우웅......! "정녕 훌륭한 검이오. 마치 장대협의 분신같구려!" 백검우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짐작컨대 귀하는 원래 장강수로맹에서 성장한 인물이 아닐 것이오." "바로 맞추었네." 장추명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은연중 상대에게 호감을 안겨주는 그런 미소였다. 그러나 그 미소 는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이 장추명은 본래 유유검문(幽柔劍門)의 후예라네." "유유검문!" 잔잔하던 백검우의 표정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유유검문(幽柔劍門)은 원래 북해(北海)의 신비검문(神秘劍門)으로 환무검(幻舞劍)의 일맥지문(一脈之門)이었다. 환무검(幻舞劍)! 이는 환상처럼 절묘한 몸놀림의 극유검(極柔劍)을 뜻한다. 마치 춤을 추듯 유연하고 현란한 이 검법은 천하 검법의 으뜸으로 평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진정한 환무검에 대해 아는 중원인(中原人)은 없 었다. 환무검을 구경한 자는 예외없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놀랍소. 그런 귀하가 어찌 장강수로맹에 몸을 담았소?" "장강수로맹이 중원에 있었기 때문일세." 장추명의 대답은 극히 명료했다. 허나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백검우는 두 눈에 형형한 기광(奇光)을 발했다. "귀하는 가슴에 품은 것이 적지 않구려." 스릉! 백검우는 그제서야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평범한 한 자 루 철검(鐵劒)이었다. 허나 그 검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필경 백검우의 손에 들려져 있기 때문이리라. 터질 듯한 침묵이 다시 장내를 내리눌렀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후류류륭! 장추명의 보검이 살아 꿈틀거리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동시에 장 추명의 입가에 창백한 미소가 스쳤다. "수백 년 동안 환무검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네. 애석하지만 장주를 죽여야겠네." 번쩍! 오오... 일섬(一閃)! 시리도록 투명한 회색의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은 도저히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가공할 검강(劒 )의 줄기였다. 쐐르르르! 꾸우우우웅! 줄기는 곧 수십수백으로 나누어지며 수천 송이의 검화(劒花)를 뿌 려냈다. 실로 눈부신 광경이 아닌가! '......!' 절대절명의 순간 백검우의 뇌리에는 지난 중추절의 불꽃놀이가 섬 광처럼 떠올랐다. 그때의 폭죽들도 이처럼 아름답게 허공을 수놓 았었다. 허나 그에겐 감탄만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생로(生路)는 한곳 뿐이다!' 백검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스듬히 눕히며 수중의 검을 내뻗었다. 언뜻 보기에 매우 단순한 일검(一劒)! 허나 그 일초식은 눈깜박할 사이에 최소한 수십 줄기의 검강(劒 )을 우박처럼 쏟아냈다. 꽈르릉! 가공절륜의 두 검세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하며 뇌성을 질렀 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뒤로 두 걸음씩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이건......!' 장추명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경악의 빛이 스쳤다. 허나 그의 검은 진저리쳐지도록 냉정하고 무서웠다. 꾸우우웅! 번쩍! "천단폭(天斷瀑)!" 대기를 찢어발기는 웅혼한 기합성! 오오... 태초 이전의 혼돈(混沌)을 불러내기라도 한 것일까! 그것은 실로 엄청난 검류(劒流)의 폭풍이었다. 삼백육십방위(三百六十方位)가 일시에 차단되는가 싶더니, 장추명 의 검은 도합 칠백이십사변(七百二十四變)을 이루었다. "......!" 백검우의 자세가 찰라지간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승리다!' 장추명은 내심 부르짖었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허나 대부분의 인물들은 긴장했을 때보다도 마음을 놓았을 때 왕 왕 상대에게 당한다. 장추명은 그 미세한순간 백검우의 검(劒)이 오른 손에서 왼손으로 옮겨지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말았다. 꾸르르릉-! 번- 쩍-! 경천동지할 굉음과 폭죽같이 찬란한 섬광이 석양의 갈대 숲을 찬 란하게 명멸(明滅)했다. 사위는 이내 거짓말처럼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 "......."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일까? 백검우와 장추명은 서로 밀착한 채 마주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똑같이 무감동했다. 피(血)...... 장추명의 검은 백검우의 겨드랑이 틈에 꽂힌 채 가느다란 피를 흡수하고 있었다. 일체의 변화가 없던 장추명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뒤이어 그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 이럴 수가....." 장추명의 입에서 흘러나온 절망의 일성이었다. 그의 시선이 서서 히 자신의 목부위로 옮겨졌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목에는 백검 우의 검날이 바싹 대어져 있었다. 그렇다. 만약 백검우가 살심을 품고 조금만 더 손을 뻗었다면 이미 장추명 의 목은 땅 아래로 굴러떨어졌을 것이었다. 툭......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장추명의 목에서 한순간 한 방울의 피(血)가 맺혀 굴러 떨어졌다. 장추명은 입술을 뭉턱 깨물었다. 그의 입술 살점이 떨어져 나가며 주르르 피가 흘렀다. "환무검이... 무너지다니...!" 말할 것도 없이 장추명의 완전한 패배였다. 장추명의 몸이 사시나무 떨 듯 경련을 일으키더니 털썩 무너졌다. "졌네! 날 죽이게!" 장추명은 무릎을 꿇은 채 공허한 음성으로 말했다. 백검우는 천천히 검을 거두더니 깊숙한 눈길로 장추명을 내려다 보았다. "훌륭한 검법이었소." 나직한 한 마디. 그것은 백검우의 진심이었다. 스윽! 백검우는 조용히 장추명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대를 좋아하오. 부디 내 연모의 정을 거절하지 말아주시오." "......!" "장강수로맹을 그대에게 맡기겠소. 그대가 다시 나에게 칼을 겨누 든 아니면 나의 친구가 되든 그것은 그대의 자유요." 백검우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나타날 때처럼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조용한 걸음이었다. "아......!" 장추명은 만감이 교차하는 신색으로 망연자실 할 말을 잊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얼굴을 들어 멀어져 가는 백검우의 등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두 눈에 뭔가 반짝 맺히는 게 있었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만이 헤아릴 수 있는 사나이의 눈물이었다. 쌔앵......! 쌔애앵......! 서늘한 새벽바람이 멀어져가는 백검우의 옷자락을 붙들기 위해 쫓 아가고 있었다. 서천에 물든 아름다운 노을은 백검우의 뒤에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이 백검우는 내일 아침 검장으로 돌아갈 것이오." 백검우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백검우의 모습은 장추명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장추명은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몰랐다. 문득 그의 입에서는 혼을 태우는 듯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하나의 목숨을 잃은 대신 두 개의 목숨을 얻었는가...." 아, 무슨 뜻인가? 장추명은 고개를 들어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보 다 오늘의 석양 노을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는..... 무황야(武皇爺)의 유일한 상대로 성장할 것이다..." 은은히 떨려나오는 격동성이었다. 오오...... 하늘(天)이 알 것인가? 아니면 땅(地)이 알 것인가? 이 순간 장추명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의 엄청난 의미를...... 쏴아아...... 쏴아아아...... 붉은 노을로 물든 갈대숲이 대해(大海)의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 일로제검 제1권 제8장 밤(夜)의 변신(變身) ━━━━━━━━━━━━━━━━━━━━━━━━━━━━━━━━━━━ ① 대강남북(大江南北) 강호무림은 벌컥 뒤집어졌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원인은 바로 백검우의 출현때문이었다. - 얼굴없는 현백검장의 십오 세 장주 백검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 오오...... 장강수로맹이 단 하루만에 백검우의 손에 의해 탈바 꿈하고 만가유는 생포되어 주검으로 변했다! 무림(武林)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다. 불과 단 하룻밤 사이에 백검우에 대한 중원무림의 평가는 새롭게 내려지고 있었다. <무공자(武公子)!> 어느 누구의 입에서 시작되었는가? 백검우에게는 무공자라는 석 자 명호가 붙혀졌다. 무공자 백검우! 이제 십오 세에 불과한 백검우의 명성이 당금 무림의 거두지존(巨 頭至尊)들과 일시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② 이곳은 현백검장의 태화거(太華居). 때는 자시(子時)가 가까워지는 늦은 밤이었다. 한 칸의 깊숙한 실내(室內). "......" 백검우는 등의자에 편히 몸을 기댄 채 책자(冊子)를 읽고 있었다. 열려진 창문 밖으로는 어둠에 물든 후원의 전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우수수......! 후원의 수림(樹林)이 크게 일렁이더니 두 개의 시퍼런 눈동자가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다 싶은 순간 이미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무서운 기세로 실내의 창문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꽈지직! 창문은 졸지에 형체도 없이 박살났다. 백검우는 책을 내려놓으며 빙긋 미소했다. "오, 흑화(黑花)! 왔느냐?" 크- 르- 릉-! 시커먼 그림자는 바로 신궁 철우환과 같이 있어야 할 흑화였다. 흑화는 그 거대한 몸체를 꿈틀거리며 백검우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어지럽다. 이 녀석아......! 그만 앉아라." 크르릉..... 흑화가 막 머리를 백검우의 무릎에 기대고 앉은 순간이었다. 슥! 미세한 파공성과 함께 다시 실내에 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는 바로 엽거촌의 촌장인 신궁 철우환이었다. 철우환은 부서진 창문을 한 차례 씁쓸히 웃으며 바라보더니 백검 우에게 가벼운 예를 표했다. "장주께 인사드리오." "후후...... 예상보다 빨리 오셨구료." 백검우는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철우환은 빙그레 웃었다. "장주께서 분부한 일을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은 어찌 되었소?" 백검우의 질문에 철우환은 진중한 신색으로 대답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 "그것 반가운 말이군." "장주께서 엽거촌을 들른 후 이 몸은 즉시 순검옥을 맡고 있는 창 무대장군(蒼武大將軍) 황보양(惶保洋)에 대한 조사부터 시작했습 니다." 철우환은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자는 기실 순천부 순검옥의 명목상 책임자에 불과합니다. 실 권은 부하인 영무좌장군(英武左將軍) 사공천(史空天)이란 자가 맡 고 있습니다." "그 자의 내력은......?" 백검우는 나직성으로 물었다. 철우환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뛰어난 무장(武將)입니다. 황보양의 총애는 물론 황제(皇帝)의 신임도 얻고 있습니다." 문득 철우환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자는 황제의 삼공주(三公主)인 화운공주(花雲公主)와 혼인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알겠소. 그렇다면 내가 상대할 인물은 바로 그 사공천이 되겠군." 백검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두 눈에 이채를 띄우며 물었다. "나의 분신(分身)이 될 인물은?" "여기 있습니다." 슥! 철우환은 대답과 함께 품에서 하나의 목함(木函)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목함 안에서는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니, 정확 히 말하자면 그것은 얼굴에서 벗겨낸 껍질이었다. 피냄새가 배어 있는 인피면구(人皮面具)인 것이다. 나이는 대략 십팔 세 가량 되었을까. 매우 영준한 생김새로 본래 비범한 청년이었음이 확실했다. 일견 하기에도 날카롭게 뻗은 검미(劒眉)로 보아 성품이 곧고 강맹했음 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자는 ...... 황제(皇帝)의 신임을 받고 있는 문연각대학사(文 延閣大學士) 성화융(成華融)대감의 일점 혈육이었습니다." 철우환의 음성은 극히 잔잔하게 실내에 울려 퍼졌다. "무랑(武郞) 성후준(成厚俊)...... 이 청년의 이름입니다. 성후준 은 뛰어난 청년무장(靑年武將)이었으며 문재(文才)였습니다." "......!" "아깝게도...... 그는 이수애의 사냥터에서 실족하여 죽었습니다." "그게 언제의 일이오?" 백검우는 두 눈에 기이한 광채를 빛내며 물었다. 철우환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 개월 전입니다. 수하 하나가 죽어가는 그를 발견했으나 소생 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불행한 일이군." "그에게는 불행한 일이나...... 이것은 하늘(天)이 적시에 장주께 내린 도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우환은 두 눈에 형형한 안광을 발하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은 성후준의 부친인 성화융대감도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성후준이 때 맞추어 죽어주지 않았다면......" "산 목숨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뜻이군." 백검우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철우환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그렇습니다." 스윽......! 그는 다시 품에서 한 자루 보도(寶刀)와 양피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 보도는 성후준이 아끼는 소지품이었습니다. 양피 두루마리에 는 평소 성후준의 행동, 특이한 버릇과 취향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으음......!" 백검우는 나직한 탄성을 흘려냈다. 이것은 실로 치밀한 안배였다. 철우환은 비단 백검우을 실망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완전히 탄복 시키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자세히 알아 놓았소?" "성후준의 가문내 친속(親族) 백 이십이 명의 용모, 성품 등과 가 까이 지내던 친우(親友) 다섯 명의 모든 것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기도 하군!" 백검우는 골치 아픈 듯 난색을 지었다. 철우환은 빙그레 웃었다. "성후준은 황도(皇都) 금릉에서도 명성 높은 귀공자(貴公子)입니 다.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나...... 정작 장주 께서 상대할 인물은 열 손가락 안에 불과할 것입니다." "음......!" "이 일은 사실 극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장주께선 틀림없이 해내 실 수 있을 겁니다." "후후...... 고맙소." 백검우는 신비롭게 미소했다. 그러자 철우환은 문득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더우기 한 가지 좋은 호사(好事)가 있습니다." "그게 ...... 무엇인고?" "미인(美人)입니다." "미인......?" 백검우는 흠칫했다. 철우환은 소리없이 웃었다. "성후준에게는 절세미인(絶世美人)인 약혼녀가 있습니다. 그녀를 특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음...... 이것 일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군." 백검우는 검미를 가볍게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철우환은 내심 실소하며 신중하게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금약예(金藥藝)입니다. 중추전(中秋展) 대학사(大 學士) 금정수(金精秀)의 금지옥엽입니다. 매우 깊은 관계의 사이 이니...... 미리 여인 다루는 방법도 익혀 두셔야 할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야......!" 백검우는 씁쓸하게 미소했다. 철우환은 빙긋 소리없이 웃었다.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알겠소, 일이 시작되면 철노야도 보이지 않게 나를 따르시오." "물론입니다." "음......!" 스윽...... 백검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는 한 옆의 탁자(卓子) 위에서 한 통의 밀서(密書)를 집 어 들었다. "철노야, 받으시오." "이것은......?" "황궁천도(皇宮遷都)에 대한 극비(極秘)와 한 가지 중대한 나의 안배요." "황궁천도...... 입니까?" 철우환의 얼굴은 순간 놀라움으로 가득 물들었다. 백검우는 신비로운 눈길로 그를 주시하며 나직하나, 위엄 있는 어 조로 분부했다. "이 밀서를 보면 선대인이 모종의 부탁을 할 것이오. 그것을 다른 두 노야(老爺)에게 이행토록 하시오." "음......!" 철우환은 묵직한 침음성을 흘려냈다.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스쳤다. '이제껏 부른 적이 없는 두 아우까지......! 예사로운 일이 아니로구나!' 허나 철우환은 곧 원래의 담담한 표정을 되찾은 채 침착하게 대답했다. "분부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스르르...... 철우환의 신형이 연기처럼 흐릿해지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연기처 럼 실내에서 사라졌다. 백검우는 부드러운 눈길로 흑화를 응시했다. "너도 가야 하지 않겠느냐?" 크르르! 순간 흑화가 벌떡 일어서더니 빛살처럼 철우환의 뒤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백검우는 천천히 창가를 향해 다가섰다. "먼 훗날을 위해 그들을 끝까지 숨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일의 어려움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구나." 짙은 감회가 배인 독백성일진대..... 그렇다. 드디어 현백검장의 보이지 않는 서열 이(二), 삼(三), 사위(四位) 가 한꺼번에 움직일 때가 도래한 것이었다. "송원주와 약속한 일은 이것으로 시작된 셈이군." 슥...... 백검우는 성후준의 보도와 철우환이 남긴 두루마리를 품 안에 갈 무리했다. 이어 그는 가볍게 탄식하며 성후준의 인피(靭皮)를 집어 들었다. "미안하오. 무림을 위해 잠시 그대로 변해야겠소." 백검우는 마지막으로 인피를 펼쳐서 성후준의 얼굴 샘김새를 자세 히 기억해 두었다. 그의 변골공(變骨功)은 도천문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경 지를 이루고 있었다. 한 번 본 얼굴은 완벽하게 똑같이 변장할 수 있는 것이다. 푸시식...... 한순간 인피가 백검우의 손에서 재로 변해 흩어졌다. 고절한 극양공(極陽功)의 수법이었다. 백검우는 이어 실내 입구(入口)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웅비!" "예, 장주님!" 스윽! 웅비가 충직한 대답과 함께 실내로 들어섰다. 백검우는 깊숙이 그를 주시했다. "모두 들었느냐?" "들었습니다." "검영에게 그대로 설명해라. 앞으로 당분간 도천문 부주가 나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이곳을 지킬 것이다." "......!" 웅비는 흠칫 안색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저는......" "후후...... 이 순간부터 당분간은 도천문 부주가 곧 나 백검우 다. 너는 당연히 백검우의 옆에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알겠습니다. 장주님." 웅비는 약간 섭섭한 눈치였으나 도리가 없는 듯 공손히 대답했다. 백검우는 천천히 실내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차를 준비하고 도천문 부주를 불러라." ③ 두두두- 천지 만물(天地萬物)이 잠든 자시(子時)무렵. 한 대의 마차가 조용히 현백검장의 정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각. 백검우의 실내에는 도천문이 등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툭...... 툭둑...... 도천문의 전신에서 뼈마디가 움직이는 소리가 울려나오기 시작하 더니 체구가 서서히 줄어드는 게 아닌가? "후후......!" 문득 그의 입에서는 나직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내 수없이 많은 인물로 변해 보았지만 장주님의 모습으로 변해보기는 처음이군." 오오... 변하고 있었다. 도천문의 체격과 얼굴은 물론이고 음성까지도......! 채 반다경도 지나기 전에 도천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 리에는 또 한 명의 백검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 사람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내 변골공을 능가하는 인물 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천문은 돌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장주님의 변골공(變骨功)을 가르킨 것은 분명 나자신이었다. 헌 데 오히려 장주님이 날 능가하는 일이 벌어져 버리다니...." 도천문은 등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눈을 내리감았다. "어쨌거나 당분간 위세를 좀 떨칠 수 있게 되었군. 나는 현백검장 장주 백검우이니까 말이야...." ....... 소리없이...... 현백검장의 밤(夜)은 그렇게 깊어갔다. ■ 일로제검 제1권 제9장 아무도 몰랐다 ━━━━━━━━━━━━━━━━━━━━━━━━━━━━━━━━━━━ ① 황도(皇都) 금릉(金陵)- 이곳에서 가장 넓은 길은 말할 것도 없이 천문대로(天門大路)였다. 금릉의 번화가를 가로 지르는 이 대로(大路)는 황궁과 곧장 연결되어 있었다. 때는 석양(夕陽)무렵. 두두두두! 한 대의 마차가 행인(行人)들이 즐비한 천문대로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어이구, 피해라!" "어, 어떤 미친 작자냐?" 행인들은 다급성을 터뜨리며 몸을 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차는 명문(名門) 고관대작들이 모여 사는 화화가(花花街)를 향해 곧장 달려갔다. 두두두두.... "제기랄! 저 마차는 보나마나 무랑(武郞)이 탄 것이 틀림없다!" "금릉에서 저토록 마차를 거칠게 모는 인물은 무랑 성후준 밖에 더 있겠나......?" 행인들은 투덜거리며 다시 제 갈길을 재촉했다. 끄그긍.... 마차는 이내 날카로운 차륜(車輪)소리를 울리며 한 채의 거대한 장원(莊院) 앞에 멈추었다. <성화대장(星華大莊).> 장원의 현판에는 용(龍)이 꿈틀거리는 듯한 필치로 넉 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윽고 마차의 문(門)이 열리며 허리에 장검(長劒)과 소도(小刀)를 찬 청년이 내렸다. 스윽...... 더없이 생기에 찬 비범한 얼굴의 청년은 첫눈에 보아도 호감을 느 낄 준수한 모습이었다. 허나 무슨 연유인지 그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청년이 가벼운 걸음으로 막 장원의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도련님, 어쩌자고 연락도 없이......!" 한 명의 노복이 황급히 달려나와 그를 맞이했다. 노복은 연신 초조한 낯빛으로 장원 안을 주시하며 청년에게 말을 이었다. "장원 전체가 벌컥 뒤집어진 지가 벌써 한 달이옵니다. 아 마......이번에는 무사히 넘기시기가 어려우실 것입니다." "후후...... 원래 사냥이라는 것이 좀 늦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청년은 빙그레 미소했다. 허나 그는 역시 염려가 되는 듯 음성을 낮추어 물었다. "아버님의 진노가 어떠하신가?" "말도 마십시요. 종아리를 맞으실 각오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종아리라......" 청년이 얼굴에 난색을 짓는 순간이었다. 장원 안에서 창노한 호통성이 들려왔다. "이놈! 어서 들어오지 못할까!" 청년은 움찔 놀라며 어깨를 사렸다. 그는 노복을 향해 빙긋 미소지었다. "자네 말대로 이번에는 무사히 넘기기는 틀린 것 같군." 저벅저벅...... 청년은 유유히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노복은 혀를 찼다. "쯧쯧...... 언제나 태평하시군. 대감님의 분노를 좀 헤아려 주시면 좋으련만......!" 청년이 안으로 들어가는 사이 다시 주위로 이십여 명의 종속들이 모여들어 뒷모습을 지켜보며 염려의 눈길을 보냈다. "어쨌거나 돌아오셨으니 다행이야." "도련님의 모습이 그사이 더욱 출중해지신 것 같아." "그 훌륭한 문무(文武)의 재주를 왜 사냥에만 썩히시는지......!" 종복들은 한결같이 모두가 청년을 아끼고 따르는 것 같았다. 대체 이 청년은 누구인가? 그렇다. 그는 두 달만에 사냥에서 돌아온 무랑(武郞) 성후준이었다. 또한 이곳은 말할 것도 없이 문연각 대학사 성화용 대감의 장원이었다. 무랑 성후준은 성화융 대감의 유일한 후예로 활달한 성품(性品)의 소유자였다. 문인(文人)의 가문에서는 좀체로 찾아볼 수 없는 무 인(武人)기질의 기재라고나 할까. 이미 이곳 금릉에서는 성후준의 명성이 여러 방면으로 자자했다. 실상 무랑(武郞)이라는 별호도 금릉인들이 붙혀준 것이었다. 허나 그러한 성후준의 성품은 대감의 진노를 사기가 일쑤였다. 이번에도 사냥을 나갔다가 무려 두 달만에 나타난 것이었다. 어찌 성화융 대감의 진노가 하늘을 찌르지 않겠는가? 허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번에 돌아온 성후준은 전연 다른 하나의 변신임을!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바로 백검우였다. 그는 너무도 완벽하게 성후준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성화대장원 안 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가 성후준의 모든 것을 익히는데 걸린 시일은 불과 열흘이었다. 그러나 그 열흘은 또하나의 성후준을 탄생시키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설령 죽은 성후준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 해도 오히려 자신을 의심할 정도였던 것이다. '일이 제대로 될지 의문이군....' 백검우는 사전에 익혀둔 지리를 되새기며 거침없는 걸음으로 후원 의 화림(花林)을 지나 한 채의 고아한 별각(別閣) 앞에 당도했다. 별각 앞에는 이미 한 명의 청수한 학발노인(鶴髮老人)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학발노인은 만면에 노기가 서린 모습이었다. 육순에 접어든 그의 풍모는 마치 천상(天上)의 신선(神仙)이 하강 한 듯 위엄이 넘쳐 흘렀다. 눈처럼 흰 백미(白眉) 아래로 맑게 빛나는 눈빛은 노인의 성품이 매우 강직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살아 돌아오긴 했군. 고얀 놈 같으니라구...' 노인은 진노한 표정 가운데에서도 일말의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노인은 바로 문연각 대학사 성화융이었다. 백검우는 노인의 눈빛을 대하자 진정으로 송구한 심정이 되었다. 더군다나 진짜 성화준은 이미 사고로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상황 이 아닌가. 이 세상에 어버이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것보다 더 큰 불효는 없는 법이다. 백검우는 가능하다면 끝까지 성화준의 모습으로 노인의 곁을 지켜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백검우가 처분만 기다리겠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못하자, 성화융은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이놈! 호랑이 간을 먹고 벙어리가 되었느냐?"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버님......" 백검우는 공손히 대답했다. 불현듯 그의 뇌리에는 자애로웠던 부친의 옛 영상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순간적으로 그의 두 눈에는 짙은 우수(憂愁)가 스쳐갔다. 성화융은 재차 대갈 호통성을 터뜨렸다. "네가 그래도 변명은 할 줄 아느냐! 당장 그 자리에 꿇어 앉으렸다!" '윽......!' 백검우는 황급히 그 자리에 꿇어 앉았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정말 성후준으로 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버님......!" "다시 분부가 있을 때까지 잘못을 반성하거라!" 성화융은 그 말을 남기고 성큼 몸을 돌려 별각 안으로 향했다. 백검우는 깊숙한 시선으로 멀어지는 성화융 대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은 수차례나 복잡하게 변했다. '고생문이 열린 것은 그렇다치고 저런 훌륭한 분을 속여야 한다니.....' 백검우가 생각에 잠겨 있는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아까의 노복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노복의 음성은 매우 밝았다. "음......?" "이것을 어떻게 다 잡으셨습니까? 정녕 놀랍군요!" 노복은 흥분한 신색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탐스런 백호(白虎)의 가죽이었다. 백호피(白虎皮)는 수만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그 만큼 영물(靈物) 백호(白虎)는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백검우가 끌고 온 마차 안에서 백호피를 발견하고는 단숨에 달려온 것이었다. "허허...... 도련님이 늦으신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노복의 음성에는 성후준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역력했다. 백검우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뭐 대단하단 말인가?" "허허......! 금릉바닥에서 백호를 잡을 수 있는 공자님들은 없습 니다. 모두 약해빠져 가지고......!" 노복은 신이 나서 떠벌리기 시작했다. "대감님께서도 이걸 보시면 기뻐하실 게 틀림 없습니다. 암암...... 기뻐하시고 말고요!" 그 말에 백검우는 일말의 기대를 담고 은근히 물었다. "그것을 아버님의 침상에 깔아드리면 진노가 좀 가실 것 같은가?" "그것도 좋지만...... 이럴 때는 금대감댁 아가씨를 오시게 하는 것이 특효약 아닙니까?" "......!" 백검우는 흠칫 안색이 굳어졌다. 노복이 성후준의 약혼녀인 금약예를 말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백검우는 곧 두 눈을 부라렸다. "대장부가 어찌 아녀자의 힘을 빌어 위기를 넘긴단 말인가! 일 없네!" "예......?" 노복은 기괴한 표정을 한 채 입맛을 다셨다. '으이그...... 저 고집은 대감을 꼭 빼 닮으셨단 말이야!' 허나 그는 겉으로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약예아가씨는 도련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 나케 달려 오고 계실 것입니다!" 백검우는 잠시 성후준의 신상을 습득했던 기억을 더듬어 눈 앞의 노복이 누군가를 생각해내었다. "노삼(老三)!" 그는 눈썹을 부라리며 호통쳤다. "또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였구나!" "허허......!" 노삼은 너털웃음으로 자신의 위기를 얼버무렸다. 원래 노삼은 성후준을 어린 시절부터 돌보던 충복이었다. 노삼은 성후준을 자신의 생명 이상으로 아끼고 받들었다. 허나 그러한 노삼조차 백검우의 정체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도련님...... 피곤하신 것 같으니 이 늙은이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스윽! 노삼은 가벼운 걸음으로 몸을 돌리더니 백호피를 어깨에 들쳐메고 별각 안으로 향했다. 백검우는 희미하게 미소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금약예를 만나는 것이 더 피곤하다네. 이 사람아!' 백검우가 두루마리에 적혀있던 금약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순간이었다. 별각 안에서 호탕한 성화융 대감의 웃음소리가 울려왔다. "허허......! 그 놈 참 크기도 하다......!" 더없이 흡족한 음성이었다. 기실 벌써부터 자식에 대한 성화융의 깊은 사랑은 진노를 식혀놓고 있었다. 노삼의 조심스런 음성이 이어 들려왔다. "대감님, 금대감댁에서 금소저가 오시고 있습니다." "그럴테지. 그 아이도 가슴을 졸일대로 졸였으니......" 성화융의 진중한 음성이 천천히 이어졌다. "그러니 자네 말뜻은 저 고얀 녀석의 벌을 그만 중지하라는 뜻인가?" "아니 그게 아니고......!" 노삼의 당황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성화융의 마지못한 음성이 한숨과 함께 들려왔다. "별수없군. 그 아이가 저놈의 꼴을 보면 집안망신이니 목욕이나 시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일이 끝나면 나에게 오도록 녀석에게 일러라!" "분부 받들겠습니다." 노삼의 반가운 음성이 힘있게 들려왔다. ② 별각의 한 고아한 실내(室內). 성화융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가득 띤 채 등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벌써 한 시진 전부터 무릎에 올려 놓은 백호피(白虎 皮)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번 황궁에서 열리는 친전무회(親殿武會)의 장원은 저놈 차지가 분명하겠군." 기대에 찬 독백성이었다. 친전무회(親殿武會). 그것은 황제의 생일(生日)을 축하하는 행사중의 하나였다. 황제가 직접 참관한 가운데에 고관대작들의 자제가 모여 무예(武 藝)를 겨루는 일종의 귀족무예시합인 것이다. 특히 당금 황제 영락제(永樂帝)는 무예를 숭상하여 친전무회에서 장원을 하면 친히 어검(御劒)을 하사하고 장군(將軍)의 위(位)를 제수해왔다. 그것은 실로 지고무상한 광영(光營)이 아닐 수 없었다. 작금에 황제의 총애를 받고 명성을 떨치는 영무좌장군 사공천도 바로 친전무회의 출신이었다. "허허허......!" 성화융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지그시 두 눈을 내리감았다. "근래에 잠자리가 뒤숭숭하여 꿈자리가 사납더니...... 쓸데없는 근심을 한 셈인가...." 바로 그 시각. 백검우는 노복과 함께 성후준의 거소인 소화각(素華閣)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변경해야겠구나. 잘하면 송원주와의 일로 인해서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아, 무슨 뜻인가? 설마하니 그는 이 일에 또다른 복안을 세우고 있었단 말인가? 백검우의 두 눈에는 찰나 기광(奇光)이 번쩍 스쳤다. '성후준..... 그대는 너무 이 몸을 나무라지 마시오. 그대 대신 성화융 어른을 정성껏 모시겠소.' 찌르르...... 찡! 찡! 소화각의 정원에는 늦가을인데도 불구하고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백검우는 문득 어둠에 물드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버님...... 전 이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무황야(武 皇爺)에게 접근할 생각입니다.' 그의 두 눈에는 문득 짙은 우수가 어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의 눈빛은 차가우리만큼 무심하게 변했다. 동시에 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미소가 스쳤다. 쌔애앵......! 서늘한 초저녁 바람이 그의 머리결을 휘날리며 지나갔다. ...... 금릉은 한 소년 영웅(英雄)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도 모르 는 채 서서히 어둠에 잠겨갔다. 멀리 황궁(皇宮) 쪽에서는 대고 (大鼓)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고 있었다. 둥...... 둥...... 둥...... ■ 일로제검 제1권 제10장 꽃은 떨어지고...... ━━━━━━━━━━━━━━━━━━━━━━━━━━━━━━━━━━━ ① 욕실(浴室)이었다. 백검우는 편한 자세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욕조 안에 몸을 기대 고 있었다. "......" 스스스...... 스스...... 물기에 젖은 십팔 세의 단단한 몸이 은은히 혈색을 띠어 보기좋게 빛났다. 또르르 한 방울의 물이 백검우의 이마를 타고 가슴으로 굴러 떨어졌다. 백검우는 더없이 상쾌하고 평안한 느낌 속에 더욱 전신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촤아아...... 바로 그때였다. 욕실 밖에서 비단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스르륵...... 그 소리에 백검우는 얼굴이 굳어졌다. '여인의 발자국소리......! 그렇다면 그녀가 이곳까지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백검우는 금약예를 떠올린 것이다. 허나 그는 곧 침착한 안색을 되찾았다. '들은대로 대단한 사이였군. 성후준으로서의 최대 고비가 들이닥친 셈인가.....' 백검우가 내심 초조함을 달래는 순간이었다. 욕실의 휘장이 걷히며 십칠 세 가량의 미소녀(美小女)가 들어섰다. "준랑(俊郞)...... 저예요." 아! 천상의 선녀(仙女)가 속세에 하강했는가? 전신에 녹색(綠色)의 벽라수를 수놓은 세궁의(細宮衣)를 입은 미 소녀의 눈부신 모습이라니! "......!" 백검우는 일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빛무리를 모아 다듬은 듯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한떨기 백합(百 合)을 연상시키는데..... 그린 듯 섬세하면서도 풍만한 몸의 굴곡은 또 어떤가? 그야말로 헤엄치던 물고기가 놀라 가라앉고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침어낙안의 미태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백검우를 더욱 사로잡는 것은 그녀의 한쌍 눈동자였다. 천하의 모든 신비를 간직한 듯, 영롱하게 물기를 머금은 봉목(鳳目)...... 오오...... 대체 저 눈빛 앞에 심기가 진탕되지 않을 사내가 이 세상에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순간 그녀의 투명하게 빛나는 고혹적인 입술은 기쁨의 미소를 담고 살며시 벌어져 있었다. '음......!' 백검우는 보면 볼수록 눈이 부시다고 느꼈다. 그는 망연히 보석처럼 영롱히 빛나는 그녀의 입술과 치아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건 가장 중요한 관문일 뿐이야!' 백검우는 애써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 수증기 건너편으로 욕조 안의 백검우를 발견한 금약예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준랑......!" 은은히 떨려나오는 옥음(玉音)이었다. 백검우는 그녀를 항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이구...... 내 공주님이 또 우시려고......!" 더없이 활달한 음성이었다. 그것은 평소 성후준이 그녀에게 던졌던 정감어린 음성과 똑같았다. 성후준은 항시 금약예를 나의 공주라고 불렀다. 금약예는 그 애정의 표현에 잠시 눈물이 얼룩진 얼굴에 기쁨의 미 소를 가득 머금었다. 그녀는 몸을 숙여 따사로운 손길로 백검우의 얼굴을 감싸안았다. "나쁜 사람... 당신은 언제나 저를 근심하게 만드시는군요." 뭉...... 클......! 백검우는 순간 그녀의 품에서 풍겨나오는 육향(肉香)으로 인해 재 차 심기가 크게 진탕되었다. '으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체에 현혹된 적이 없었던 백검우였지만 이 순간 그의 의지는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허나 백검우는 곧 본래의 안색을 되찾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한다!' 그는 일의 중대함을 상기하고는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 는 마음을 더욱 편하게 가라앉혔다. 이어 그는 거침없이 팔을 벌 려 금약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들었다. "하하...... 나의 공주님은 그 사이 더욱 아름답게 변했군!" "준랑......!" 금약예의 눈길이 뜨거워졌다. 백검우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탐미했다. 애써 잊어버렸던 죄책감 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미안하오. 소저......!' 그러나 그의 죄책감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금약예의 입술 이 너무나도 달콤했기 때문이었다. 입맞춤은 점차로 격렬해졌다. '아아...... 준랑......!' 금약예는 한없는 행복으로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백검우는 한참만에야 꿈결같은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나의 공주님은 그 사이 입술도 더욱 뜨거워졌군." "몰라요! 갈수록 구렁이같아 지는군요......!" 금약예는 빨갛게 홍조어린 얼굴을 부끄러운 듯 외면했다. 백검우는 깊숙한 눈길로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녕 유순하고 비단결같은 소저로군. 성후준은 행복한 사나이였구나......!' 허나 그는 이내 상념을 떨쳐버리고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는 낭랑하게 웃으며 금약예의 머리결을 어루만졌다. "아하하...... 나는 우리 공주님이 없으면 세상 살 맛이 없었을 거야." 백검우는 싱그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우리 공주님을 위해 훌륭한 것을 구해 왔지!" "아......!" 금약예는 봉목을 반짝 빛내더니 손가락으로 백검우의 입술을 사랑 스럽게 매만지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기쁨에 찬 옥음(玉音). 설령 세상의 모든 근심을 짊어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녀의 음성을 듣는다면 모조리 눈녹듯 사라지고 말리라. 백검우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우선 이곳을 나간 후 보여주겠어." 촤아아......! 백검우는 욕조에서 거침없이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그대로 드러났다. 금약예는 비명을 터뜨리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어멋!" "하하하......!" 백검우는 낭랑한 대소를 터뜨렸다. "나의 공주께선 내 알몸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 "몰라요......!" 금약예는 몸을 돌리더니 달아나듯 욕실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는 백검우의 눈빛이 기이하게 흔들렸다. 금약예의 반응을 보고 어쩌면 성후준과 아직 육체관계를 맺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백검우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욕조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이가 아닌가? 상식적으로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백검우는 옷을 걸친 채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 ② 아늑하게 장식된 침실이었다. 사방 벽면에는 각종 서화(書畵)와 맹수들의 박제가 걸려 있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성후준의 성품을 그대로 말해주는 실내였다. 침상의 가장자리. 금약예가 다소곳이 앉은 채 독수리의 박제를 버릇처럼 어루만지고 있었다. "왠일일까......? 오늘따라 준랑을 대하면서 전보다 더욱 가슴이 두근거리니......" 그녀가 나직이 옥음으로 뇌까릴 때였다. 스르륵.... 백검우가 혈색이 은은히 감도는 밝은 얼굴로 실내에 들어섰다. 수욕(水浴)을 한 탓인가? 그의 입가에는 더없이 상쾌하고 싱그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준랑......!" 금약예는 두 눈이 부시다고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대체...... 저에게 준다고 한 것이 무엇이죠?" "후후...... 내가 좀전에 이곳에 숨겨 놓았지." 백검우는 그녀의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을 바라보며 미소했다. 슥! 그는 곧 손을 뻗어 침상의 밑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홍죽(紅竹)의 가느다란 대나무로 만든 하나의 둥우리였다. 끼이욱! 끼욱! 둥우리 안에서는 기이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나왔다. "후후......" 백검우는 둥우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순간 작은 짐승의 머리가 둥우리 틈새로 쑥 머리를 내밀었다. "어머나...... 귀여워라!" 그것은 눈부신 황금빛 털에 영롱한 눈을 지닌 손바닥 크기의 다람쥐였다. "이놈은 금모섬서(金毛纖鼠)란 녀석으로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정 도로 영성(靈性)이 있지......" "아......!" "몸은 작아도 이미 백 년(百年)을 넘게 산 영물이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백검우는 둥우리를 금약예에게 건넸다. 그 순간 금모섬서는 금약예의 얼굴이 낯설은 듯 빤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원래 이 금모섬서는 엽거촌장 철우환이 백검우에게 특별히 선사한 영물이었다. "아...... 준랑, 당신은 정말......!" 금약예는 입가에 눈부신 미소를 머금고 조심스럽게 금모섬서를 받아들었다. 금모섬서는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끼우욱! 끼욱! 금모섬서는 탐스럽고 작은 꼬리를 흔들어 금약예에게 우호의 몸짓을 보냈다. 금약예는 까르르 교소를 터트렸다. "호호호....." 백검우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이제부터는 공주님이 너의 주인이니 잘 따르도록 하여라!" 그러자 금모섬서는 둥우리에서 냉큼 빠져나오더니 금약예의 어깨 위로 사뿐히 올라 앉는 게 아닌가? "어쩜......!" 금약예는 재차 감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곧 금모섬서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실내에는 그녀의 밝은 교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호호호......!" 그러다 문득 금약예는 금모섬서를 백검우에게 건네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준랑도 한 번 안아보세요!" 그 순간 두 사람의 몸은 저절로 바싹 밀착되었다. '......!' 백검우는 새삼 심기가 진탕됨을 느끼며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섬서보다 공주님이 더 귀여운 걸." "홋......! 정말......?" "그럼......!" 백검우는 한 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금약예는 가슴이 크게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녀는 그러한 자신을 감추듯 백검우의 가슴을 꼬집으려 했다. "아아...... 짓궂기는......!" 허나 그녀의 손목은 중간에서 백검우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백옥(白玉)처럼 희고 여린 옥수(玉手)...... "후후......!" "어머......!" 백검우는 놀라는 그녀를 가볍게 잡아 당겼다. 금약예의 몸은 그대로 백검우의 품에 쓰러졌다. 끼우욱...... 끼욱! 그 모습에 금모섬서는 놀란 듯 기성을 지르며 재빨리 둥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으음......!" "......" 뜨거운 포옹이었다. 실내에는 갑자기 열풍(熱風)이 감돌기 시작했다. "준...... 랑......!" 금약예는 문득 전신을 가늘게 떨더니 모기소리만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 또 제 알몸을 보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음......!" 백검우가 내심 그녀의 말뜻을 헤아리는 순간이었다. 금약예는 교태롭게 그의 품에서 몸을 빼내더니 홍조어린 얼굴로 흘겨보았다. "특별히...... 오늘만은 제 스스로 보여드리겠어요. 하지만......" "약속대로 준랑은 혼인(婚姻) 전까지는 제 몸을 건드리지 않겠다 는 약속을...... 잊어선 안돼요." '엉......?"' 백검우는 내심 기가 막혔다. '그렇다면 금약예는 아직도...... 정조를 간직한 몸이란 말인가?' 그렇다. 금약예의 알송달송한 말은 바로 그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때 금약예가 아름다운 얼굴을 온통 도화빛으로 물들인 채 옷고름에 손을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보고 백검우는 소리내어 대소를 터뜨리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성후준에게 이런 바보같은 취미가 있었다니......' 사르륵......! 드디어 금약예는 은은히 떨리는 손길로 하나하나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실로 대담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금약예로서는 사랑하는 정랑(情郞)을 기쁘게 하기 위한 갸륵한 손길이었다. '아...... 이미 세 번이나 짓궂은 부탁대로 옷을 벗어 보였건 만...... 오늘은 왜 이리 몸이 떨리지?' 금약예는 중간에 몇번이나 다시 옷을 걸치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사르륵...... 사륵...... 이윽고 금약예의 눈부신 나신(裸身)은 타오르는 황촉불 아래 적나 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터질 듯 팽팽한 가슴. 잘록한 세류요(細柳腰)의 허리...... 그 아래 뇌쇄적인 둔부의 곡선...... 오오...... 매끄러운 아랫배의 능선과 그 아래 태고(太古)의 신비(神秘)를 간직한 밀림...... '음......!' 백검우는 터져 나오는 탄성을 겨우 삼켰다. 조물주가 천 년을 두고 조각한다 해도 이처럼 눈부신 여체를 만들 지는 못하리라. 그것은 엄청난 유혹의 덩어리였다. 백검우는 난생 처음으로 단전에서 주체못할 열류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두 눈은 뜨거운 열망을 담은 채 이글거리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몸이야......" "아이......!" 금약예는 큰 기쁨을 느꼈으나 애써 화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만 ...... 옷을 입겠어요." "아니다." "......!" "오늘은 옷을 입을 필요가 없어." 백검우의 그 한 마디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자신조차도 놀랄 지경이었다. 금약예는 순간 목덜미까지 온통 빨갛게 물든 채 나신을 떨었다. "당신...... 변했군요!" "이건 변했다고 하는 게 아니라 발전했다고 하는 거야." 백검우는 환하게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대신 공평하게 나의 알몸을 보여주겠다." 스윽...... 백검우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금약예는 봉목을 동그랗게 뜬 채 비명을 질렀다. "전 보고 싶지 않아요!" "후후......" 백검우는 거침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랜 단련을 통해서 그는 필요할 경우 누구보다도 얼굴이 두꺼워 지는 배포를 키워온 터였다. 만약 그녀가 성후준과 육체관계를 맺은 사이였다면 그는 결코 이 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금약예에게 이미 매료되었고, 그것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뜨거운 감정이었다. 더군다나 스스로 옷을 벗은 그녀 앞에서 욕망을 감출 필요를 그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스르륵.... 백검우는 삽시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이미 그에게서 돌아선 금약예는 어쩔 줄을 모르며 봉목에 눈물을 글썽였다. '준랑... 미워요...!' 두려움......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야릇한 두려움과 흥분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약동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 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백검우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더없이 따사로운 손길로 달아오른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어 루만졌다. 파르르...... 그녀의 입술이 잔떨림을 일으켰다. 그녀는 스르르 눈을 내려 감았다. 백검우는 그녀의 나신을 부드럽게 안아들었다. 금약예는 부지중 놀라 물기젖은 눈을 뜨며 탄성을 흘려냈다. "아......!" 백검우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결에서 나는 단내음을 깊숙이 호흡하며 침상으로 향했다. 스윽...... 눈처럼 흰 모피가 깔린 침상 위에 금약예는 눕혀졌다. "아아... 제발...." 금약예의 눈이 크게 떠지며 도톰한 입에서 격정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백검우는 침착하게, 그러나 완강한 손길로 그녀의 나신을 어루만졌다. 금약예는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듯 긴장으로 수축된 온몸을 애써 이완시켰다. '그래... 어차피 바칠 몸이었어....' 이내 새로운 흥분이 그녀의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가올 감미로운 절정을 연상하며 전신을 가늘게 경련했다. 백검우의 손길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는 신음과 함께 몸 깊은 곳에 서 점점 커져가는 욕망의 덩어리를 느끼며 몸부림쳤다. "하아...." 점차 거칠어지는 숨결...... 그녀는 자꾸만 떨고 있는 자신을 원망하며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 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노력일 뿐이었다. "아아......" 한순간 그녀는 자신의 은밀한 부위에 백검우의 손길을 느끼며 비 맞은 사슴처럼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이제 마지막 불은 당겨진 것이다. 금약예는 뱀처럼 눈부신 나신을 뒤틀며 가볍게 벌린 앵두같은 입 술 사이로 연신 가쁜 숨을 흘려냈다. 그녀는 전신으로 백검우의 육중한 몸을 느끼며 애원했다. "제발...... 더 이상은......." 백검우는 부드럽게,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완강한 힘으로 그녀의 마지막 문을 열었다. "......!" 금약예의 한쌍 봉목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만큼 확대되었다. 그녀는 이내 숨이 멎을 듯 고통스런 신음을 터뜨리며 두 손으로 침상의 보드라운 천을 움켜잡았다. "흐윽!" 그녀의 입에서는 연신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백검우는 완강한 손길로 그녀의 가슴을 잡아쥐며 그녀의 본능적 저항을 억제했다. "아아!" 부드러운 모피로 된 침상은 비명과 함께 일렁이기 시작했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금약예는 서서히 자신의 몸에서 확산되는 기쁨의 소용돌이를 느낄 수 있었다. 어느 한순간 그녀는 참을 수 없으리만큼 거대한 환희의 노도(怒 濤) 속에서 나직한 흐느낌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직 여인만이 지닐 수 있는 지고무순한 눈물의 속삭임이었다. '아아... 준랑... 사랑해요......' 한 방울 영롱한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주체할 수 없는 희열과 기쁨의 옥루(玉淚)...... 밤(夜)은 그처럼 아름답게 깊어져 갔다. 이 밤은 누가 뭐래도 금약예의 밤이었다. ...... ③ 새벽이 여명 속에 신비롭게 밝아왔다. 이곳은 성화융의 침소. "아버님...... 문안드리옵니다." 백검우는 성화융에게 새벽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으음......!" 성화융은 백검우가 잡아온 백호피 위에 위엄있게 좌정해 있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애로운 눈빛으로 백검우를 바라보았다. '뭔가 변했어...... 두 달동안 사냥을 다녀온 후로 전에는 볼 수 없던 기품이 몸에 서려 있으니......!' 아들의 성장한 모습을 대하는 성화융은 내심 기쁘기 그지 없었다. 그가 어찌 눈 앞의 아들이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쩌면 성화융 대감 자신을 위해서 이 일은 다행스러운 것인지도 몰랐다. "오늘은 너에게 한 가지 분부를 내리겠다." 성화융은 엄숙한 신색으로 백검우를 깊숙이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이 아비는 네가 친전무회(親戰武會)에 나가는 것을 네가 어 린 탓으로 만류했으나 올해는 승낙하겠다." "......!" 백검우의 두 눈에 일순 반가운 빛이 역력히 떠올랐다. '일이 뜻대로 풀리는군!' 백검우는 본래부터 친전무회를 자신의 안배 속에 포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이것은 본 가문의 명예는 물론 당금 조정의 문계관(文係官), 모 두의 사기에 영향을 주는 것이니라. 너는 오늘부터 이 일에 전력 을 다하도록 해라." 성화융의 말에 백검우는 힘찬 어조로 대답했다. "심려 놓으십시오. 당금 조정의 문관(文官)들이 무관(武官)들에 눌려 사기가 죽어있음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절대 실망을 안겨드 리지 않을 것입니다." "음......!" "이번 친전무회를 기회로 삼아 문관들의 떨어진 사기를 완전히 회복시켜 놓겠습니다." 백검우의 장담에 성화융은 오히려 불안스런 표정을 지었다. "네 이놈, 너무 큰 소리를 치는 게 아니냐? 군자는 항상 겸손해야 덕을 보는 법이다." "저로서는 최대한 겸손하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놈 참... 허허헛...!" 성화융은 결국 껄껄 대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두두두! 백검우는 성화융의 명으로 노삼과 함께 연궁장(鍊弓場)을 향해 말을 타고 정문을 나섰다 '친전무회는 앞으로 닷새밖에 남지 않았다. 미리 적수들을 보아 두는 것도 좋겠지...... 후후......' 백검우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두 필의 말은 어느새 천문대로의 가운데를 질주하고 있었다. 두두두! "무랑이다! 피해라!" "어이쿠......!" 행인(行人)들은 다시 기겁을 하며 좌우로 물러섰다. 허나 그들은 멀어져가는 백검우의 모습을 찌푸린 얼굴로 보지는 않았다. "연궁장으로 가는 모양이군!" "허허...... 그런 것 같아......" "무랑이 거칠게 말을 모는 버릇만 없었다면 더욱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터인데......" 호감이 가득한 음성들이었다. 본래 성후준은 일반 백성과 고관대작의 자제를 가리지 않고 똑같 이 대우해 주는 호방한 성품이었다. 그것은 성후준이 금릉사람들에게 인심을 얻는 큰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백검우와 성후준이 닮은 점이기도 했다. 두두두두.... 백검우의 모습은 삽시간에 행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④ 소령산(素靈山)은 금릉 서단의 수려한 절산(絶山)으로 요즘에 이 르러서는 금릉세가의 호걸기남들이 무예(武藝)를 연마하는 장소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산(山) 전체가 완만한 구릉처럼 되어 있어 도처에 연무장(練武場) 과 연궁장(練弓場)이 있었는데, 그 방대한 규모는 이곳에 항시 수 천 명의 젊은 청년호걸(靑年豪傑)들이 모이는 것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본래 이 소령산의 광대한 연무장(練武場)과 연궁장(練弓場)은 황 상(皇上)의 숭무책(崇武策)에 의해 건립된 것이었다. "와......! 명중이다!" "와......!" 슈우우-! 피우웅! 연궁장 안은 활시위를 당기는 날카로운 음향과 함성이 요란했다. 거의 백 개에 달하는 과녁에는 쉴새없이 활들이 연달아 꽂히고 있었다. 주위에는 수십 개의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어 연궁을 끝낸 청년, 무반(武班)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젊은 소녀들도 심심치 않게 섞여 있었다. 그녀들은 대부분 명문(名門)의 규수들이었다. 물론 그녀들은 구경 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지만 더러 연심(戀心)을 품고 찾아드 는 규수도 있었다. 남몰래 짝사랑하는 대장부를 공공연하게 거리 낌없이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와......!" "와와......!" 한순간 장내의 뜨거운 함성 속에서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외침소리가 있었다. "금릉제일궁(金陵第一弓), 무랑이다!" 적지 않은 눈길이 일순 일제히 한 곳으로 옮겨졌다. 그들의 시야 는 막 장내에 나타난 두 인마(人馬)에 고정되었다. 두두두! 백검우와 노삼은 그들과 사이를 두고 입구에서 가까운 한 정자 앞 에서 말을 멈추었다.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내던 자들이 소리죽여 수군대었다. "무랑이 올해에는 친전무회에 참가하는 게 아닐까?" "젠장, 그렇다면 나는 포기하는 게 좋겠군!" 그들 중에는 백검우를 친근한 시선으로 주시하는 자들도 있었고, 적의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들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친전무회가 다가왔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이미 성후 준의 무예에 대한 평판이 그들 사이에 자자하게 알려져 있었기 때 문이었다. 백검우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가까운 정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후후......!" 바로 그때였다. 한 흑의(黑衣)의 청년이 백검우를 향해 반가운 신색으로 다가왔다. "무랑형님......!" 대략 십칠 세 가량 되었을까. 그는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을 지닌데다 근골이 장대하여 첫눈에 도 범상치가 않았다. 더우기 그의 피부는 윤기가 흐르는 구릿빛이어서 매우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이자는......?' 백검우는 내심 당황했으나 그리 오래지 않아 상대방의 신분을 파 악하고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호수아(胡水兒)가 아닌가? 그동안 잘 있었나?" "후후...... 물론입니다. 그사이 형님의 눈빛이 더욱 깊숙해진 것 을 보니 무예가 더욱 출중해지셨군요!" 흑의청년은 만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 일로제검 제2권 11장 오후의 태양 아래서...... ━━━━━━━━━━━━━━━━━━━━━━━━━━━━━━━━━━━ 호수아. 그는 본래 금릉에서 대대로 육방(肉房)을 경영하는 집안의 자손이 었다. 고기(肉)를 팔아 장사하는 육방의 자손이라는 신분은 빈천하기 그 지없었으나, 지닌 바 무예만큼은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았다. 호수아는 성후준의 차별없는 호방한 성품에 깊이 매료되어 있던 중에 일 년 전 의형제(義兄弟)의 관계를 맺는 행운을 얻었다. 성후준같은 명문의 자손이 비천한 육방의 자손과 의형제를 맺는다 는 건 실상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호수아는 성후준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성후준의 일 이라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을 정도였다. "올해는 형님이 친전무회에 반드시 나가셔야 합니다. 대감께서 는...... 아직도 반대하십니까?" 호수아는 기대어린 낯으로 물었다. 백검우는 부드럽게 미소했다. "아니네. 다행히 허락을 받았지!" "아......!" 호수아는 순간 기쁨의 탄성을 발했다. 비단 호수아 뿐만이 아니였다. 주위에서 두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 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순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 허나 백검우의 그 한 마디는 그의 경쟁자들에게는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활시위를 당기던 경쟁자들은 안색이 순간 일제히 굳어진 채 더욱 맹렬하게 활을 쏘아댔다. 슈유욱! 피우웅! 장내에 감돌던 살벌한 긴장감은 점점 그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허나 백검우는 아예 연궁(鍊弓)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산책을 나온 듯 호수아와 담소하며 정자 위로 올랐다. 노삼조차도 손에 들고 있던 백검우의 활을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허허...... 이상하단 말이야......! 저토록 활을 열심히 쏘는 공 자님들 보다, 매일 사냥이나 다니시는 도련님의 솜씨가 더 나으니 말이야" 그의 말은 마치 모두 들으라고 자랑하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성후준의 무공은 그만큼 훌륭했던 것이다. 허나 노삼이 어찌 꿈엔들 상상할 수 있으랴? 그러한 성후준이 열 명 있어도 못따라갈 실력을 지닌 백검우가 바 로 성후준으로 탈바꿈해 있음을. 이윽고 백검우와 호수아는 정자 안에 올라 자리를 마주하고 앉았다. "자...... 호수아를 만났으니 술 한 잔을 아니할 수 없지." 백검우는 신비롭게 미소하며 노삼에게 지시했다. "좋은 술과 안주를 부탁하네" "허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노삼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백검우는 호수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헌데...... 어째서 자네만 있고 우백천(盂伯天)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가?" "그는......!" 순간 호수아의 얼굴에는 어두운 빛이 떠올랐다. 그는 가볍게 탄식 하더니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형님이 안계시는 동안 그에게는 약간의 일이 생겼습니다." "음......?" 백검우는 눈썹을 꿈틀했다. 우백천(任伯天)은 호수아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불운한 기재(奇才)였다. 우백천은 한 마디로 천고의 문재(文才)였다. 천하에 그가 깨우치지 못한 학문(學文)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나 신분이 비천한 탓에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때문에 우백천은 세상을 한탄했다. 그는 성후준과 나이가 같은 동갑이었다. 우백천. 그 역시 성후준의 성품에 감복하여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무예(武藝)의 호수아, 학문(學文)의 우백천, 이 두 불운한 영재(英才)들은 어느새 금릉의 귀공자인 성후준을 그림자처럼 따르게 되었다. '철노야도 이 호수아와 우백천을 높이 평가하고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었지......' 백검우는 두루마리의 내용을 되살리며 두 눈을 형형히 빛냈다. "우백천에게 무슨 불길한 일이라도 생겼는가?" "한 달 전이었습니다. 우백천은 이곳에서 활을 당기고 있었지 요...... 헌데 일단의 불한당들이 갑자기 그에게 몰려들어 수모를 주었습니다. " 호수아의 얼굴에 은은히 노기가 번졌다. "이유는 천민의 신분으로 감히 활을 당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백천이 당한 모욕을 형님께서는 짐작도 못하실 것입니다." "......!" "이 호수아는 당장 그들을 베어버리고 싶으나 워낙 후환이 클 것 같아...... 빌어먹을!" 호수아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얼굴이 벌개진 채 고개를 숙였다. 백검우의 신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대체 상대가 누구이길래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후환을 염려했단 말인가?" "영무좌장군(英武左將軍) 사공천의 형과 그 무리들입니다." "사공천의 형이라면......!" 백검우의 두 눈에 기광(奇光)이 번뜩 스쳤다. '바로 순천부 순검옥을 담당한 그자의 형이란 말인가!' 우연이라면 실로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백검우는 곧 입가에 냉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사공천...... 뜻하지 않은 일로 그대가 내 존재를 기억하게 되겠군." "무슨... 뜻입니까?" 호수아는 의아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백검우는 빙긋 미소했다. "아무것도 아니네. 그보다 그 사공천의 형이란 작자는 지금 이곳에 있는가?" "바로 이때쯤이 그가 올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가 좀 늦는 것 같습니다." 그때 노삼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허허......! 어서 드십시오." "수고했네." 백검우는 호수아에게 술잔을 건넸다. "자네가 먼저 받게."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형님." 술잔이 채워지기가 무섭게 단숨에 술을 삼키던 호수아가 돌연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된 채 매서운 광채를 발했다. "그가 왔소!" "음......?" 백검우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연궁장 입구.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이십여 명의 인물들 이 요란하게 떠들며 다가오고 있었는데 절반 가량은 홍의궁장 차 림의 기녀(妓女)들이었다. "으하하...... 조심하거라. 잘못하다간 엉덩이에 불화살을 맞을 수 있느니라!" "호호호...... 여긴 무서운 곳이군요!" 이십오 세 전후의 사내 일행은 모두가 명문(名門)의 귀공자들인 듯 차림새가 화려했다. 호수아는 만면에 노기를 발하며 그들 중의 하나를 가리켰다. "맨 앞의 웅피무복(熊皮武服)을 입은 작자가 사공천의 형인 사공위(史空爲)란 놈입니다." "후후...... 그런가?" 백검우는 빙긋 웃으며 호수아가 가리킨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색 용포에 영웅건(英雄巾)을 머리에 쓴 중년인(中年人)이 었다. 매우 창백한 안색을 지닌 그는 오만한 눈길로 주위를 쓸어 보고 있었다. 백검우는 문득 고개를 끄덕이더니 노삼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삼, 철궁(鐵弓)을 다오" "예......?" "활을 달라고 했다." "아... 알겠습니다!" 노삼은 약간 경직된 표정으로 활을 백검우에게 넘겼다. 호수아가 두 눈에 당혹의 빛을 발하며 황망히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 설마......!" "나의 친구를 건드린 대가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 너무도 자신만만한 백검우의 태도에 호수아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후준형님이라면 설사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별 탈이 없을 것이다.' 웅웅... 팽팽하게 당겨진 백검우의 활시위에서 기이한 음향이 울려나왔다. 호수아는 초조함과 흥분이 뒤섞인 눈길로 백검우의 활끝을 바라보았다. 한편, 사공위의 일행은 막 한 곳에 설치된 차양막사(遮陽幕舍) 안 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밖에서는 전혀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끔 만들어진 막사였다. 사공위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기녀들의 등을 떠밀며 호방하게 웃어젖혔다. "와하하하......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 싫어요...... 활솜씨를 구경시켜 주신다고 하시고선 또 이런 으슥한 곳으로......." "으하하...... 말해서 무엇하느냐? 이 안에서 보여주마! 너의 펑 퍼짐한 둔부를 과녁으로 삼고 말이다!" "어마마......!" "흐흐흐......!" 이윽고 그들 일행은 모두 막사 안으로 사라졌다. 사위의 수많은 인물들은 그 모습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상대는 당대의 영웅 사공천의 형(兄)이다. 간섭은커녕 어느 누구도 근접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자......! 술을 따라라!" "호호호......!" 막사 안에서 막 흥이 무르익는 순간이었다. 슈-- 우욱! 난데없이 날카로운 파공성이 대기(大氣)를 뒤흔들었고 무서운 기 세로 하나의 화살이 차양막사의 진주목을 꿰뚫었다. 파직! 말할 것도 없이 그 화살은 백검우가 쏜 것이었다. 진주목이 화살에 꿰어진 채 날아가는 순간 차양막사는 그대로 풀 석 무너져 내렸다. "아니! 이게 뭐냐?" "억......!" "어맛......!" 연궁장의 모든 인물들이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바라보는 가운데 일 대 소란이 벌어졌다. 사공위 등이 마치 그물에 갇힌 고기떼처럼 쓰러진 막사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가히 가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슈우욱! 재차 날카로운 파공성이 터져 울렸다. 허나 이번에는 보통 화살이 아닌 불화살이었다. 막사는 삽시간에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아악......! 화아아악......! "으아악! 앗뜨뜨......!" "피해라!" 경악성과 기녀들의 비명이 한데 어우러진 채 불붙은 막사는 미친 듯이 출렁거렸다. 그 순간까지도 사람들은 그 화살들이 어디서 날 아온지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수아는 너무도 통쾌한 나머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 눌러 참아야만 했다. 어느새 불붙은 막사 주위로는 놀란 칠백여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돈주고도 못할 희한한 구경거리가 벌어진 것이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사공위를 걱정하거나 나서서 구해주려 하는 자는 없었다. 그때 불붙은 막사 안에서 흐트러진 몸매의 기녀들과 청년공자(靑 年公子)들이 가까스로 뛰쳐나왔다. 그들의 몰골은 실로 가관이었다. 허나 그것보다 더욱 재미있는 것 은 그들의 넋빠진 표정이었다. "어, 어느 놈이냐? 당장 나와라!" "흑흑...... 난 몰라요...... 이 몰골이 되었으니 당장 기루에서 쫓겨나게 될 거예요......!" 기녀들은 불에 그을려 버린 머리채를 만지며 대성통곡을 해댔다. 사공위와 청년무사들은 모두 검을 뽑은 채 살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어느 놈인지 당장 나오지 못하겠느냐!" 그때였다. 장내에 낭랑한 앙천대소가 울려 퍼졌다. "으하하하......! 제 아우의 권세를 믿고 철없이 날뛰는 놈은 나를 보아라!" "이 음성은......!" "무, 무랑!" 그제서야 상대방을 알아본 사공위의 얼굴이 노기로 인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이내 밀납처럼 창백하게 변하고 말았다. 백검우의 활에서 다시 섬광처럼 화살이 날아드는걸 본 때문이었다. '헛!'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화살은 그대로 사공위의 문사건을 꿰뚫었다. "이... 이놈...!"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백검우가 다시 활을 겨누며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사공위는 입을 잘못 놀렸다간 또다시 무슨 망신을 당할까 두려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장내의 다른 인물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백검우가 다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왜 아무 말이 없으시오?" "......!" 사공위의 얼굴은 노화로 시뻘개진 채 백검우의 손에 쥐어진 활을 바라보았다. '문연각 대학사의 아들놈이 지랄같은 성품을 지녔다고 하더니 바로 저놈이었구나!' 사공위는 본래 심기가 깊고 교활한 인물이었다. 그는 분노를 가슴 속에 접어둔 채 애써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가...... 무랑인가?" "하하...... 그렇소. 당신과 한 번도 안면이 없던 무랑이오." 백검우는 호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허나 여전히 그의 활은 사공위의 목에 겨누어져 있었다. 사공위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냉막하게 물었다. "본인에게 어떤 이유로 시비를 거는 건가? 자네는 너무 경솔했다 고 생각되지 않는가?" "하하...... 나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성미라오. 또한 사공형은 나에게 이런 인사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소." "......!" 사공위는 흠칫 안색이 굳어졌다. 백검우는 비수같은 시선으로 사공위를 굽어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오. 하나는 사공형이 나의 친우(親友) 를 모욕했기 때문이고, 하나는 무인(武人)의 도를 벗어나는 행동 을 보였기 때문이오." "음......!" 사공위는 묵직한 침음을 흘려내더니 두 눈을 교활하게 굴리며 물었다. "내가 언제 그대의 친우를 모욕했는가?" "당신은 우백천을 모욕한 일을 부인할 작정이오?" "우백천....?" 사공위는 흠칫하더니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우백천이라면 빈천하기 그지없는 천민이거늘 어찌 그대의 친우란 말인가?" "저런, 금릉 전체가 아는 사실을 어찌 유독 당신만이 몰랐소?" "......!" 사공위는 안면근육을 실룩거리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명문(名門)의 귀공자가 비천한 상민을 친우로 삼는다는 건 황제 폐하에 대한 모독이다. 신분의 질서를 무시한다면 어찌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겠나?" "으하하......!" 백검우는 낭랑하게 대소했다. "그래서 사공형께서는 황제께서 만드신 이 연궁장에서 주루의 비 천한 기녀들을 친우로 삼으셨소?" 서릿발같은 질책이었다. 사공위는 일이 이쯤 되자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발하기 시작했다. "후후후......! 그대가 감히 나를 훈계하려 하느냐?" 그는 사나운 기세로 수중의 검(劍)을 뽑아 들었다. "좋다! 그 활을 당겨보아라! 네놈의 배짱이 얼마나 좋은지 지켜보겠다!" "와하하......!" 백검우는 낭랑하게 웃었다. 그는 그제서야 수중의 철궁을 내려놓았다. "이제보니 사공형께서도 당당한 기개가 있으시구려. 그 기개를 높 이 사는 의미에서 활 장난은 그만두도록 하겠소." 이어 그는 호수아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던졌다. "자네의 검(劍)을 빌려주겠나?" 그 모습에 사공위의 눈가에 득이의 빛이 빠르게 스쳤다. '옳지! 걸려들었구나!' 궁술(弓術)이라면 모르되 검법(劍法)이라면 성후준은 물론이고 어 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사공위였다. 게다가 그는 성후 준이 궁술은 뛰어나지만 검법은 떨어진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와아아...!" 연궁장은 갑자기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결이었다. 또한 이 상황은 전통적인 문관가문(文官家門)과 무관가문(武官家門)의 대결이기도 했다. 대부분 문관가문의 귀공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백검우의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무관가문의 청년무장들은 어느 곳에도 치우치 지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평소 사공위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음을 여실히 나타내주는 상황이었다. 때는 석양(夕陽)....... "......!" "......!" 서로 검(劍)을 쥐고 버티어 선 두 사람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터질 듯한 긴장의 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공위의 얼굴에는 은은히 경악의 빛과 함께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인가......? 이놈의 검술은 보잘 것 없다고 알려졌거늘...!' 사공위는 백검우의 자세를 대한 순간부터 등골이 서늘해지는 전율 과 함께 도저히 초식을 펼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마치 거대한 산(山)을 앞에 둔 느낌이라고나 할까?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은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갔다. '우우......!' 만약 백검우가 조금만 더 그 자세를 유지했다면 사공위는 스스로 주저앉아 버렸을지도 몰랐다. 헌데 일순간 백검우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는가 싶더니 자 세가 미세하게 흐트러지는 게 아닌가? '이때다!' 사공위는 거의 본능적으로 퉁기듯 신형을 폭사했다. 그의 검(劍) 이 보이지도 않게 섬광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의 검세는 눈부시도 록 빠르고 절묘했으며 조금도 헛점이 없었다. 번쩍! 휘류류륭! "아......!" "오오......!" 사방에서 경악어린 탄성이 터져 울렸다. 극상승의 검예(劍藝)! 사공위의 검은 중도에서 더욱 독랄무비한 변화를 일으키며 완전히 백검우를 에워쌌다. 절대절명의 순간, 백검우가 차가운 냉소를 발하며 몸을 가볍게 비 트는가 싶더니 벼락같은 기세로 일검(一劍)을 내뻗었다. 그 일격은 얼핏 보기에 너무나 쉽고 무모해보였다. 헌데 어찌된 판국인지 그 순간 사공위의 검세는 풍비박산이 난 채 흐트러져 버렸다. '허...... 억......!' 사공위의 안색이 창백하게 탈색되었다. 백검우의 검이 마치 춤을 추듯 다시 유연하게 원을 그려냈다. 휘류류륭! 번쩍! 찬란하게 터지는 수천 송이의 검화(劍花)들......! 아아...... 그것은 마치 따스한 봄날, 수많은 만화(萬花)가 한꺼 번에 피어오르는 듯한 환상을 일으켰다. 허나 그것은 환상도 꿈결도 아니다. 죽음(死)을 좌우하는 냉정한 검(劍)! 오직 그것이었다. "우아아앗!" 사공위의 입에서 공포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파앗! 그는 최대한으로 빠르게 몸을 뒤로 빼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이었다. "우우......!" 그는 전신을 세차게 경련하며 넋나간 얼굴로 자신의 목을 내려다 보았다. 피(血)... 그의 목에는 한일(一) 자의 검상(劍傷)이 뚜렷이 그어져 있었다. 싸움은 끝났다. 사공위의 완전한 패배였다. 숨을 죽인 채 구경하고 있던 주위의 인물들은 마치 한바탕 꿈을 꾼듯 탄성을 터트렸다. '오오...!' '정말 놀랍구나! 무랑의 검법이 저렇게 무서울 줄이야!' 그 순간에도 사공위는 공포로 전신을 떨고 있었다. 그의 공포는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백검우의 소름끼치는 검법이 악몽처럼 이 순간에도 그의 뇌리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다시는 백검 우의 검세를 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놈은...... 사람도 아니다!' 사공위는 고개를 떨군 채 넋나간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감히 백검우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그의 귓 속으로 백검우의 싸늘한 일성이 파고 들었다. "당신을 죽이지 않는 것은 후환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조정의 평안을 위해서요." "......!" 사공위는 그제서야 후줄근히 땀으로 젖은 몸을 돌렸다. 그의 걸음 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한시라도 빨리 이 치욕스런 장소를 벗어나 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으리라. 그때 백검우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담담한 일성을 발했다. "사공형, 가기 전에 할 말이 있을 것 같소만...." "......!" 사공위 흠칫하더니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그는 입술을 뭉턱 깨물더니 신음하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으......! 우백천을 모욕한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 "고맙소." 백검우는 신비롭게 미소하며 몸을 돌렸다. 이윽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순간 사방에서 요란한 환호성이 진동했다. "무랑만세!" "와와......!" 수많은 인물들이 백검우의 뒤를 따르며 환호했다. 그러나 가장 기뻐한 인물은 다름아닌 호수아였다. 그는 십 년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듯한 통쾌감에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사공위. 그는 자신의 일행과 함께 연궁장을 벗어나면서 수천번의 맹세를 되뇌이고 있었다. '성후준! 너는 오늘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무섭게 악다문 그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감히 문관가문 출신으로 날 건드리다니! 어리석은 놈!' 초저녁 무렵. 금릉의 천문대로에는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로를 발 디딜 틈없이 메운 백성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움직일 줄을 몰랐다. "허허...... 그 소문이 사실인가?" "우하하...... 말해서 무엇하나? 무랑이 우리와 같은 비천한 신분 의 우백천을 위해 사공위를 때려뉘었다네!" 바로 그때였다. 천문대로의 끝에서 세 필의 인마(人馬)가 나타났다. 바로 백검우와 호수아, 그리고 노삼 일행이었다. 순간 천문대로의 백성들은 열렬히 손을 흔들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무랑...... 만세......!" "무랑...... 무랑......!" 그것은 항시 명문거족에 억눌려 살던 백성들의 뜨거운 성원이었다. 그 인파 속에서 한 사람. 깨끗한 백의(白衣)를 입은 한 준수한 청 년(靑年)이 만감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랑...... 과연 너는 나의 친구다!' 백의청년의 온후한 얼굴에는 감격의 빛이 역력했다. '나 우백천은 이제 너에게 내 일생을 걸기로 작정했다!' 우백천(盂伯天). 이 백의청년이 바로 우백천이었던가? 그는 이내 몸을 돌려 장내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자신의 포목점에서 기쁘게 백검우와 호수아를 맞아 들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와와......!" "와...... 무랑...... 무랑......!" 환호의 물결 속에 백검우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곧장 우 백천의 포목점이 있는 시장거리쪽으로 향했다. 시장거리의 상인들 이 더욱 열렬하게 그를 환영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무랑......!" "와와......!" 금릉의 밤(夜)은 그렇게 깊어갔다. ■ 일로제검 제2권 12장 탄생(誕生)의 서곡(序曲)......! ━━━━━━━━━━━━━━━━━━━━━━━━━━━━━━━━━━━ 시간이 흘러 드디어 친전무회(親殿武會)가 열리는 날이 밝아왔다. 때는 영락 원년(元年) 시월 초하루였다. 황제(皇帝)의 탄일(誕日)인 동시에 친전무회가 열리는 이날. 대명천하(大明天下)의 모든 백성들은 삼 일 동안 모든 일을 멈추 고 관리들과 함께 황제탄일을 축하했다. 죄수사면령(罪囚赦免令)이 내리고 효자충신을 가려 포상이 내려졌다. 변방의 수많은 속국(屬國)에서 예물을 앞세운 사신(使臣)들이 줄 지어 금릉에 입성(入城)했다. 그야말로 중원대륙 전체의 경축절 (慶祝節)이 아닐 수 없었다. "와......!" "와와......!" 세인들의 관심은 대부분 친전무회에 집중되어 있었다. 친전무회는 정오부터 황궁(皇宮)의 내궁대정원(內宮大庭園)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미 내궁대정원에는 특별히 마련된 비무대가 세워져 있었다. 비무(比武)가 끝나면 또 한 명의 장군(將軍)이 중원 하늘에 찬란 한 무명(武名)을 떠올릴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황궁의 성문(城門) 앞에는 친전무회의 출전자 명단이 걸렸다. 근 수만을 헤아리는 인파가 흥분 속에 성문 앞에 운집한 채 명단 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직접 친전무회를 볼 수는 없었다. 허나 친전무회에서 승자와 패자가 판별되는 즉시 이곳 출전자 명 단에는 그 이름이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둥...... 둥...... 둥......! 얼마 후 황궁 안에서 친전무회의 개최를 알리는 북소리가 장엄하 게 울려나왔다. 군중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그 속에는 노삼, 호수아, 우백천도 긴장된 모습으로 끼어 있었다. "무랑이 해내야할텐데......!" 우백천의 말에 호수아가 호방한 웃음을 터트렸다. "염려 마십시오. 무랑형님은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해진 것 같았습니다."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출전자 명단에는 차례로 패자의 이름이 지워져갔다. 그때마다 함성과 안타까운 탄식 소리가 장내를 진동했다. 열기는 점점 고조되어 갔다. 순식간에 시간은 정오가 훨씬 지난 신시(申時) 무렵이 되었다. "아아......!" "호, 호수아......!" 우백천과 호수아는 전신이 땀에 젖은 채 환호성을 터뜨렸다. "보았느냐? 무랑이 십 명 안에 끼었다......! 구십 명이 모두 떨 어진 이 판국에...... 으핫핫핫......!" 그렇다. 친전무회는 정확히 백 인(百人)의 명문(名門) 후예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랑 성후준이라는 이름은 이제 열 명으로 좁혀진 명단 안에서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내궁(內宮)의 재덕원(齋德院) 안. 주옥(珠玉)의 폐진사가 드리워진 웅장한 누대가 동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누대 가운데에는 쌍룡쌍봉(雙龍雙鳳)이 새겨진 옥좌(玉座)가 놓여 있었다. 옥좌에는 칠순의 신선(神仙)같은 풍모의 노인이 만면에 온화한 미 소를 머금고 앉아 있었다. 태산같은 위엄과 깊고 맑은 눈빛을 지닌 선로(仙老)! 그렇다.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그는 바로 당금 천하의 지존 영락황제였다. 누대의 뒤에는 거대한 차양막(遮陽幕)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아래로는 변방속국(邊方屬國)의 사신들이 앉아 있었다. 누대 좌측. 황궁의 대내고관(臺內高官)들이 당당한 기세로 시립해 있었다. 삼공삼고(三公三孤)와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필두, 육부상서 (六部尙書) 한림원(翰林院) 학사! 그야말로 당금 대명국(大明國)을 좌우하는 핵심인물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누대 우측. 그곳의 기세는 더욱 장관이었다. 십만 어령군(御令軍)을 이끄는 장군(將軍)들과 육십만금군(六十萬 金軍)을 지휘하는 대장군(大將軍)들이 당당하게 열위(列位)해 있는 것이었다. 궁정(宮庭) 전면에는 사궁장(射弓場)과 비무대(比武台)가 나란히 모습을 보였다. 이미, 사궁장의 수많은 표적판에는 무수한 화살이 꽂혀져 있었다. 비무대 위에는 여기저기 선명한 핏자국이 얼룩져 있어 치열한 격 전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비무대 아래에는 이 순간 출전자 네 인물이 석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비록 약간 지친 듯 했으나 두 눈은 무섭게 투지를 빛내고 있었다. "......!" "......!" 그들의 앞. 각기 네 개의 깃발이 바닥에 깊숙이 꽂혀져 있었다. <금군우도독(金軍右都督) 단세광(但世光) 삼자(三者), 단우령(但右領).> <영무좌장군 사공천 장형(掌兄) 사공위(史空爲).> <어령군총사(御令軍總師) 대장군(大將軍) 영호진(英弧眞) 이자(二子) 영호건(英弧乾).> <문연각 대학사 성화융 독자(獨子), 무랑 성후준.> 그야말로 하나같이 당금 천하의 내노라 하는 귀공자(貴公子)들이 아닌가? 특히 어령군총사 대장군인 영호진의 둘째 아들로 당금 이십 오 세 인 영호건의 풍모는 장내 인물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영호건. 그는 강(强)과 유(柔)를 겸비한 천고의 기재였다. 윤곽이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단순호치(丹脣皓齒)의 미청년(美靑年). 게다가 그의 전신에는 전형적 무장가문(武將家門)의 후예다운 기 도가 은은히 서려 있었다. 영호건. 그는 이 순간 성후준 모습으로 앉아 있는 백검우와 함께 중인들의 시선을 온통 집중받고 있었다. 허나. 중인들이 백검우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그가 유일한 문관가문의 후예인 탓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백검우의 진정한 면목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모두가 영호건이 새로운 영웅으로 탄생하는 것을 머리속에 그리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오늘의 승부에 예측못한 변수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아는 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사공위였다. 사공위는 비록 최후의 사 인(四人)에 끼였지만 음울한 얼굴이었다. '성후준...... 도대체 그 날 저놈이 사용했던 검법은 무엇이었을가......?' 이 순간에도 그는 나흘 전의 악몽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시종무관들은 황급히 핏자국이 낭자한 비 무대를 깨끗이 치웠다. 그때였다. "황제께서 네 분을 부르고 계시오!" 한 시종무관이 백검우 등에게 다가와 진중하게 말했다. "......!" "음......!" 백검우, 영호건, 사공위, 단우령 네 사람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들은 영락제가 앉아 있는 누대 밑에 깊숙이 부복했다. "허허허...... 참으로 훌륭하도다!" 영락제는 만면에 기쁨의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치하했다. "대명(大明)의 응복이다. 그대들같은 청년무재(靑年武才)야말로 당금천하의 옥석이니라. 허허허......!" "황제폐하......!" "대은(大恩)에 감읍할 뿐입니다." 백검우, 영호건 등은 일제히 장중한 일례를 취했다. 영락제는 크게 흡족하여 앙천대소를 날렸다. "으핫핫핫.... 짐은 친히 그대들에게 한 잔 술을 내려 노고를 치하하겠노라!" 사르륵...... 사르륵...... 황궁에서 내노라 하는 미모를 자랑하는 시녀(侍女) 네 명이 옥배 (玉杯)를 받쳐들고 선녀처럼 나타났다. 영락제는 손수 네 개의 옥배에 술을 채웠다. 네 시녀는 다시 몸을 돌려 백검우 등에게 옥배를 바쳤다. 사르륵...... 백검우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옥배를 내려다 보았다. 감회가 새롭다. '어주(御酒)라......!' 어주(御酒)! 그렇다. 이것은 황제가 직접 따른 술이다. 천하에 황제가 따른 술을 마실 수 있는 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좋군......!' 백검우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허나 그가 옥배를 내려놓았을 때에도 영호건, 사공위, 단우령, 세 사람은 옥배를 입에 가져가지도 못한 채 손을 미미하게 떨고만 있었다. 그 떨리는 손들을 바라보는 백검우의 입가에 무릇 뜻모를 미소가 스쳤다. '후후......! 이들은 나보다도 어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군!' 한편. 중추전 대학사 성화융은 초조한 눈빛으로 백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백검우가 눈깜짝할 사이에 술잔을 비우는 것을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저 바보같은 놈. 어주(御酒)가 무슨 냉수인 줄 아느냐? 술귀신처럼 냉큼 삼켜 버리다니!' 이윽고, 영락황제는 낭랑한 대소와 함께 분부했다. "허허...... 이제 마지막 승자를 가려 짐과 대명(大明)을 기쁘게 하라......!" 둥...... 둥...... 둥...... 빈 옥배를 들고 네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러가고 재차 웅장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명(皇命)을 봉행하라......!" "황명을......!" 시종무관들의 웅장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백검우 등 네 사람에게 각기 붉은 봉서(封書)가 내려졌다. 그것은 상대를 가리는 봉서였다. 백검우가 봉서 안에서 꺼낸 것은 청색(靑色) 어지(御旨)였다. 단우령도 청색 어지였다. 영호건과 사공위는 붉은 색 어지를 꺼내들고 있었다. 이로써 상대는 결정되었다. "와......!" 내궁대정원 안은 흥분의 물결로 소용돌이 쳤다. 영호건과 사공위. 그들은 나란히 비무대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 긴장의 도가니 속에서 백검우는 그제서야 자신의 상대인 단우 령을 자세히 살폈다. '호인(毫人)이군......!' 백검우의 두 눈에서 부드러운 이채가 떠올랐다. 단우령. 그는 팔 척 장신의 거구에 뇌전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을 지닌 위인이었다. 안색은 구릿빛으로 빛나고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눈부셨다. 우연이었을까? 단우령이 마침 백검우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는 곧 입가에 운 무처럼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성후준...... 그대에 관한 이야기를 사공위에게 들었소." "......!" "사공위는 내 부친의 외조카가 되는 사이이오. 그는 내게 그대를 없애달라고 하더군!" "그렇다면 사공형은 그대 단우령이 나를 능가한다고 확실하게 판단한 듯 하구료." 백검우는 빙긋 미소하며 말했다. 단우령은 무슨 연유인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백검우를 깊숙한 눈으로 응시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온유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오. 그는 나 단우령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했소." "......!" "그는 다만 나 단우령에게 한 가지 선물을 했을 뿐이요. 후 후...... 그 선물은 나로서도 정말 뜻밖의 것이었소." 단우령은 갑자기 무섭게 정색하더니 또렷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무형섬독산(無形閃毒散)이오." "무형섬독산!" 백검우는 일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형섬독산. 그것은 일종의 특이하고 극랄한 독(毒)이었다. 무형섬독산이 무서운 점은 상대에게 순간적으로 마비상태를 일으 키게 할 뿐 전혀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천하에 무형섬독산을 필요로 하는 인물은 무수히 많다. 허나 그것은 만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것이며 극비를 요하는 금기(禁忌)였다. 사공위는 필시 무형섬독산을 구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했을 것이 분명했다. "나 단우령은 원래 그대가 나를 능가한다는 사공위의 말을 믿지 않았소! 허나 지금은..." 단우령은 입가에 음울한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을 믿게 되었소." "......!" "그의 부탁대로 무형섬독산을 나의 만붕편(萬崩鞭)에 발라 비무를 하지 않는 한 나는 패배할 것이오." 단우령은 두 눈에 번뜩 기광을 뿜더니 뭔가를 슥 내밀었다. 그것은 검은 빛으로 번들거리는 다섯 자 길이의 채찍이었다. 만붕편(萬崩鞭). 그것은 바로 단우령의 무기인 만붕편이었다. '음......!' 백검우는 이미 만붕편의 위세를 좀전에 구경한 바 있었다. 그가 본 단우령의 상대들은 만붕편에 전신이 수도 없이 갈라진 채 단 십합(十合)도 못넘기고 쓰러지곤 했다. 만붕편은 마치 살아있는 용(龍)처럼 허공에서 괴성을 토하고 독랄 무비한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 자가...... 미리 나에게 이 암산(暗算)을 말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백검우는 굳은 얼굴로 만붕편을 바라보았다. 단우령은 비수처럼 예리한 안광을 발하며 냉엄하게 물었다. "그대가 만약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소?" "내가 그대라면......" 백검우는 입가에 한 줄기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무형섬독산을 사용하겠소." "음......!" 단우령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성을 발했다. 그로서는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의 눈빛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내 만붕편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전신 이 마비되어 패하고 말 것이오." 그 말에 백검우는 쓴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창문으로 뛰어들던, 앞으로 점잖게 들어가던 간에 마누라는 팔을 벌리고 남편을 맞을 것이오." "음......?" 단우령은 움찔하더니 곧 앙천대소를 날렸다. "와하하하......! 그것 참으로 재미있는 비유로군!" 허나 단우령은 통렬하게 웃는 순간에도 내심 피가 무섭게 끓는 것을 느꼈다. '성후준...... 이 자는 영웅(英雄)이다!' 단우령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백검우같은 인물을 처음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곧 한 가지 단호한 결심의 빛이 어렸다. 그는 드디어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는 곧 백검우에게 진중한 전음을 보냈다. (나 단우령은 무형섬독산 뿐만 아니라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대를 상대하겠소!) "......!" (그것은 그대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오!) "......." 백검우는 묵묵히 단우령을 깊은 눈길로 정시했다. 단우령의 마지 막 한 마디는 그의 심부 깊숙한 곳에 와닿았다. 백검우의 입가에 이내 소리없이 한 줄기 부드러운 미소가 스쳤다. 어둠(暗). 어느새 내궁대정원은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수백 개의 횃불이 휘황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아악...... 화아악...... 동시에 급박한 북소리가 내궁대정원을 진동하기 시작했다. 둥! 둥! 둥! 그것은 영호건과 사공위의 비무가 시작되는 신호였다. 사공위와 영호건은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무기를 빼어들었다. 이 어 그들은 서로 태산처럼 버티고 선 채 각기 무기를 상대의 심장 에 겨누었다. "......!" "......!" 그들의 자세는 비슷했지만 무기는 전혀 달랐다. 사공위는 푸른색을 발하는 검(劍). 그리고 영호건은 쌍두은창(雙頭銀槍)이었다. 은창은 어둠 속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터질 듯한 긴장 속에서 영겁처럼 지루한 순간이 흘러갔다. "타앗!" 돌연 어둠을 뒤흔들며 혼(魂)을 토하는 듯한 기합성이 울렸다. 번쩍! 섬광(閃光)! 시퍼런 섬광이 뇌전(雷電)처럼 비무대 위를 작렬했다. 사공위의 일검식(一劍式)이 먼저 전개된 것이었다. "번쾌천(煩快天)-- 단(斷)!" 휘류륭! 파츠츠츳! 눈부신 섬광이 작렬하는가 싶더니 영호건의 신형은 완전히 사공위 의 검세에 갇혀 버렸다. 장내의 인물들은 순간 영호건의 몸이 수십 조각이 나 무너져 내리 는 듯한 환각을 느꼈다. "아......!" "저, 저건... 필살검식(必殺劍式)!" 황제 뒤에 열위해 있던 수십 명의 대장군(大將軍), 영반(領班)들 이 순간 일제히 신음을 터뜨렸다. 필살검식은 곧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극랄한 검식을 의미했다. 일단 시전되면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이다. 무림에서는 철천지 원수가 아닌 이상 필살검식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헌데 사공위는 놀랍게도 영호건을 향해 필살 검식을 전개한 것이다. 절대절명의 순간 영호건의 준수한 얼굴에는 더없이 무거운 빛이 드리워졌다. 동시, "승(乘), 폐공(開空)!" 그의 입에서 묵직한 일성이 터지고, 꾸아아앙! 그의 쌍두은창이 가공할 폭음을 내며 폭풍처럼 회전을 일으켰다. 오오.... 지옥(地獄)이 무너질 때 이러한 음향이 울릴 것인가? 두 경천동지할 공세는 찰나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번-- 쩍! 파츠츠츠츠...... 유성(流星)이 비무대 위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폭죽같은 광채가 사위로 비산하며 명멸(明滅)했다. 이어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한 적막을 되찾았다. "......!" "......!" 장내의 인물들은 숨을 죽인 채 눈 앞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한 명 은 서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쓰러져 있었다. 서 있는 자가 영호건임을 알아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 지 않았다. 그는 원래의 자세로 쌍두은창을 일(一)자로 세운 채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철탑(鐵 塔)인 양 장내를 압도했다. "영호건의 승리다......!" "사, 사공위가 죽었다......!" 요란한 환호와 급박한 경악성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터져 울렸다. 놀란 시종무관들이 우르르 비무대 위로 달려 올라갔다. 휙! 휘익! 사공위는 큰 대(大)자로 비무대 위에 쓰러져 있었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분명 죽었어야 할 사공위의 몸이 꿈틀거리는 게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죽, 죽지 않았다!" 무공(武功)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자들은 그 순간 자신 의 눈을 의심했다. 그때 영호건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내 어찌 황제폐하의 앞에서 불길한 시신을 보이겠소?" 그는 천천히 쌍두은창을 거두고 한 차례 측은한 눈빛으로 사공위 를 주시한 후 몸을 돌렸다. 슥! "아......!" 넋이 빠진듯 영호건을 응시하던 시종무관들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 리고 황급히 사공위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자 사공위가 입은 상처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그의 가슴 은 열 십(十)자로 간신히 죽음을 면할 정도로 베어진 채 피를 쏟 아내고 있었다. "으......!" 그는 납빛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허나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았다. 장내 인물들은 영호건에게 열광의 환호성을 보냈다. "신기(神技)다!" "와와......!" 영호건의 무공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백검우의 두 눈에는 형형한 광채가 스쳤다. '훌륭한 상대를 만나게 되었군.' 그러는 사이 영호건의 승리를 알리는 붉은 깃발이 비무대 서단에 올라갔다. <어령군총사 대장군 영호진 이자(二者), 영호건 승(勝), 좌적번(左赤幡)!> 이윽고 백검우와 단우령의 순서가 되었다. 둥! 둥! 둥! 두 사람은 북소리와 함께 비무대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백검우는 자신을 향해 고정된 뜨거운 시선 하나를 발견했 다. 그 눈길의 주인공은 바로 성화융대감이었다. '......!' 백검우는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뭔가 뭉클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저분 또한 나의 아버님이다!' 백검우는 곧 성화융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보냈다. 그 미소를 대한 성화융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거라! 녀석...... 이 아비는 네가 이만큼 견딘 것만으로도 족하게 여긴다.' 긴장한 것은 성화융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주위에는 어느새 대내문관(大內文官)들이 모여든 채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항시 무관(武官)들에게 눌려 지내야 했던 그들은 설마 하면서도 사상 처음으로 문관(文官)의 후예중에서 장군(將軍)이 탄생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대감...... 참으로 훌륭한 자제분을 두셨소이다." "이런 구경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소이다. 대학사가 진정 부럽소." 문관대신들은 하나같이 성화융에게 칭찬과 탄복의 찬사를 보냈다. 성화융은 본래 학문이 깊으면서도 그 성품이 맑고 순진무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허허...... 고맙소. 허나 기대하지는 마시오. 설마하니 내 아들 놈이 오늘 친전무회의 장군으로야 탄생하겠소?" "허허......." "......"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 또한 오늘의 승리자가 영 호건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둥...... 둥...... 둥...... 백검우와 단우령은 비무대 위에 마주섰다. 각기 무기를 빼어든 채.... 마치 두 개의 거대한 산(山)처럼.... "......" "......." 두 사람은 서로 말도 없이 상대의 시선을 깊숙이 응시했다. 단우령의 얼굴은 점점 무표정하게 굳어져 갔다. 어느새 그의 전신 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공할 잠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추리릭! 만붕편, 지옥의 어둠처럼 검은 묵광을 토하는 채찍은 서서히 악의 를 품고 꿈틀거렸다. "......!" 백검우는 오른손에 평범한 철검(鐵劍)을 쥐고 있었다. 그의 검끝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담담하나 마치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그는 그렇게 서 있었다. 항시 서 있던 자세처럼.... 너무나도 한가롭고 자연스럽지 않은가? 허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장내의 수많은 인물들은 아까의 비무대 보다 더욱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으니...... 장내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쌔애앵......! 쌔앵......! 돌연 한 줄기 무심한 야풍(夜風)이 백검우의 머리결을 휘날리며 지나갔다. 순간, 백검우의 눈빛이 미세한 파랑을 일으켰다. 거의 동시에 단우령의 신형이 환상처럼 잔영을 뿌리며 허공으로 비상(飛上)했다. "흑룡비폭(黑龍飛爆)!" 꾸르르릉! 심장을 저미는 파공성이 허공을 찢어 발겼다. 삼백육십오방위(三百六十五方位)가 일시에 차단되며 흑살류(黑殺流)로 뒤덮였다. 번-- 쩍! 오오! 그것은 마치 수백 마리의 흑룡(黑龍)이 한꺼번에 불을 토하 며 덮쳐내리는 듯한 기세였다. 위기의 순간. 스스스......! 백검우의 신형이 좌우로 흔들하더니 세 개로 늘어났다. "섬(閃) 천단(天斷)!" 번쩍! 한 줄기 창백한 검강 줄기가 백검무의 손에서 천공으로 뻗었다. 암천(暗天)을 일시에 양단하는 지고무상의 검류(劍流)! 그것은 어 느새 완벽하게 단우령의 공격을 차단해가고 있었다. "아......!" "오오......!" 장내 주위의 모든 인물들은 일순간 두 눈을 부릅뜬 채 경탄성을 터뜨렸다. 그것은 꿈 속에서나 상상해볼 수 있었던 환상(幻想)의 검무(劍舞)였다. 꾸르르르! 번-- 쩍! 천붕지괴의 굉음이 비무대를 온통 뒤흔들었다. "으윽......!" 무수한 잔영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가운데 누군가의 묵직한 신음성 이 울려 나왔다. 사위에는 곧 쥐죽은 듯한 적막이 찾아들었다. 장내 인물들은 손에 땀을 쥔 채 비무대 위를 살폈다. "......!" "......!" 백검우와 단우령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의 자세대 로 돌아가 우뚝 서 있었다. 허나 분명 어딘가 처음과는 달랐다. 단우령은 마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백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단우령의 시선은 자신의 손으로 옮겨졌다. 피(血)...... 만붕편을 쥔 그의 손아귀는 끔찍하게 갈라진 채 시뻘건 핏물로 젖어 있었다. 허나 단우령의 눈길은 그 손을 보고 있지 않았다. 만붕편. 그의 만붕편은 손잡이 부근에서 무참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단우령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만붕편은 천하의 명검으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거늘...... 평범한 철검으로.......' 그의 전신이 재차 세차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때 넋을 놓고 있던 그의 귓속을 파고 드는 담담한 음성이 있었다. "단형......" "......!" 단우령은 고개를 들었다. 백검우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부시다!' 단우령은 참으로 눈 앞의 사나이가 눈부시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 도 모르게 신음같은 음성으로 물었다. "성후준... 그대는 대체 누군가?" "......!" 백검우는 내심 흠칫했으나 이내 빙긋 미소지었다. "성후준은 단지 성후준일 뿐이오." "그렇군...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소." 단우령은 창백한 미소를 머금었다. 꽉! 단우령은 천천히 다가서더니 백검우의 손을 힘차게 잡았다. "졌소." 순간 숨을 죽이고 있던 장내의 귀족들은 우뢰와 같은 함성을 발했다. "와......!" "성후준 신위(神威)!" 내궁대정원 안의 열기는 더 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만큼 고조되었다. 성화융은 문관대신들의 축하를 받기에 여념이 없었다. 애초에 승 리하리라고는 눈꼽만치도 기대하지 않았던 성화융은 기쁘다 못해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내 아들이 저 정도의 무공을 연성하고 있었을 줄이야...!' 지난 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성화융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학문을 게을리 하고 무공과 사냥, 그리고 방랑에 빠져있던 아들을 얼마나 나무랐던가. '장하구나. 내 아들...!' 둥둥......!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또 하나의 깃발이 비무대 오른쪽에 올라갔다. <문연각대학사 성화융 독자(獨子), 성후준 승(勝), 우청번(右靑幡)!> "와......!" "와와......!" 환호는 멈추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친전무회의 장군 탄생을 위한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이윽고 최후의 승부를 향한 기대와 흥분 속에서 마지막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백검우와 영호건은 드디어 마주 섰다. 하나는 검(劍)을 들고...... 하나는 쌍두은창(雙頭銀槍)을 든 채...... 사위는 터질 듯한 긴장과 침묵만이 감돌았다. "......!" "......!" 쌔애앵...... 쌔앵...... 어디선가 한 줄기 무심한 서북풍(西北風)이 불어와 두 사람의 옷 자락을 휘날리며 지나갔다. '으음......' 문득 백검우의 두 눈에는 경탄의 빛이 떠올랐다. 영호건의 자세는 극강(極强)과 극유(極柔)를 다 함께 품고 있었다. 그것은 무공(武功)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백검우는 자신도 모르게 진심어린 탄성을 발했다. "영호건, 그대는 정녕 대단한 사람이오." 영호건은 입가에 운무처럼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오. 이 영호건은 그대같은 인물을 만나보지 못했소. 그대는 마치 거대한 산(山)과도 같소." 슥...... 일보(一步), 영호건은 무거운 한 걸음을 내딛었다. 화아아...... 그의 전신에서는 곧 무서운 잠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대를 알게 되어 영광이오." 그것이 영호건의 마지막 말이었다. 두 사람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침묵. 이제 그들에게 있어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숨막힐 듯 거대한 긴장의 회오리가 내궁대정원을 일시에 휘감았다. 푸르르...... 투명한 은광(銀光)에 싸인 채 울부짖는 영호건의 쌍두은창이 드디 어 거친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후우웅...... 스스스! 두 사람은 서서히 신형을 허공에 떠올린 채 미끄러지듯 비무대 위 를 회전했다. 어느 한순간, "타앗!" 영호건의 신형이 섬광(閃光)처럼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번쩍! 휘류류륭! 비무대 허공 위 오십 장 방원이 찰라지간 완전히 은빛 광채로 휩싸였다. "유극(幽極) 겁(劫)!" 허공을 뒤흔드는 웅후한 대갈성이 터지는가 했더니 쌍두은창이 부 러질 듯 휘어지며 수백 줄기의 가공할 은살강(銀殺 )을 폭출했다. 그것은 정녕 신비하다 못해 장엄한 광경이었다. 장내 인물들은 모두 넋을 잃었다. "오오! 세상에 저럴 수가......?" 장내 인물들은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별(星)들이 한꺼번에 지상 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 아찔한 현기증을 맛보았다. 위기의 순간, 백검우는 놀랍게도 몸을 보호하기는커녕 쌍두은창을 향해 신형을 빛살처럼 날렸다. "섬(閃)!" 번쩍! 오오! 이것은 또 무슨 조화(造化)란 말인가! 백검우의 전신에서 자색 빛의 엄청난 서기가 폭발하듯 뻗어나오며 쌍두은창의 은살강을 휘감았다. 동시, 꾸우우우웅! 백검우의 검(劍)은 창백한 빛의 푸르스름한 검기(劍氣)를 꼬리처 럼 그려내며 한 바퀴 회전을 일으켰다. 버언-- 쩍! 파츠츠츠츠---! 천번지복할 굉음이 내궁대정원(內宮大庭園) 전체를 뒤흔들고, 사 위가 일시에 어두워지며 찬란한 빛이 멸멸(明滅)했다. "흐으윽!" "으음......" 섬뜩한 신음성이 뒤이어 장내를 엄청난 긴장 속으로 몰고 갔다. 후두둑! 오오... 보라! 영호건이 휘둘렀던 쌍두은창이 수천수만 조각으로 부스러져 우박 처럼 비무대 위로 쏟아지고 있지 않는가! 투둑! 연이어 뭔가 시뻘건 것이 그 위에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피(血) 에 젖은 옷조각이었다. 휙! 휘릭! 백검우와 영호건은 거의 동시에 허공에서 비무대 위로 내려섰다. 허나 두 사람의 표정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이럴 수가......" 영호건의 얼굴은 온통 불신의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의 쌍두은창은 간 곳이 없고, 대신 그의 가슴에는 시뻘건 반달 모양의 검상(劍傷)이 난 채 옷조각이 베어진 상황이었으니.... 부상의 고통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엄청난 실의와 허무감이 영호건을 엄습하며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 넣었다. '완전한 패배다.......' 허나 영호건은 이내 자세를 단정하게 가다듬고 백검우를 응시했다. 그는 입가에 창백한 미소를 떠올린 채 차분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졌소. 그대의 무공은 마치 꿈결처럼 신비롭고 봄날의 햇살처럼 아름다웠소." "......!" 백검우의 눈빛이 일순 기이한 파랑을 일으켰다. - 그대의 무공은 꿈결처럼 신비롭고 봄날의 햇살처럼 아름다웠소.... 이 얼마나 지극한 격찬인가? 백검우는 영호건의 그러한 모습에서 짙은 감동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영호건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내게 지금 당장 소원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대 영호건 을 친우(親友)로 사귀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소." "......!" 영호건의 얼굴에 순간 기쁨의 미소가 환히 드리워졌다. "이 순간부터 그대 성후준과 나 영호건은 친구요!" 그 순간 엄청난 환호성이 내궁대정원을 뒤흔들었다. "와아아아!" "와아아...!" 그 함성에는 문관과 무관이 따로 없었다. 탄생(誕生)! 친전무회의 새로운 영웅(英雄)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영락황제는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젊은이는 예사로운 인재(人才)가 아니군. 내 평생 저런 인물 은 두번째 만나는 것 같구나.......' 오오... 어느 누가 알 것인가? 이 순간 영락황제가 백검우에게 내린 엄청난 평가가 지니는 의미를......! 둥...... 둥...... 둥...... 둥......! 열광하는 환호 속에 새로운 장군의 탄생을 알리는 북소리는 끝없 이 울려 퍼졌다. <천하제일무반(天下第一武班), 황영(皇榮) 천장성후준(天將成厚俊).> 찬란한 금색 깃발이 비무대 중앙에 높이 걸렸다. "와와......!" "와......!" 문연각 대학사 성화융의 기쁨은 이루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었다. 그는 도무지 이 꿈같은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저 녀석이...... 언제 저러한 무학(武學)을 쌓았단 말인가?' 대내의 대신들이 모두 성화융대감에게 다가와 축하와 기쁨을 말했다. "오오...... 대학사!" "대학사......!" 함성, 그것은 황궁 밖 성문 앞에서도 터져 진동하고 있었다. "와...... 만세!" "무랑...... 무랑......" 모두가 무랑 성후준이란 석 자 이름을 외쳐대며 열광했다. 그 속 에서 감격을 주체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세 사람이 있었다. 호수아와 우백천, 그리고 노삼이었다. "무랑...... 그가 정말 해낼 줄이야!" "무랑 형님...." "설마...... 세상에 도련님이......" 노삼은 아직까지도 넋나간 표정이었다. 인파 가운데에는 그들 이상으로 기뻐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금약예와 엽거촌장 철우환이었다. 철우환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렇다 치더라 도 금약예의 경우는 마치 몸이 허공에 둥둥 뜬 느낌이었다. 그녀는 기쁨의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훔치며 언제까지나 성문위에 걸린 성후준의 깃발을 바라보았다. ...... 내궁대정원의 누대에 이 층의 호화로운 단(壇)이 설치되었다. 단 위에는 네 개의 천자번(天子幡)이 꽂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백검우는 단 위에 오른 후 엄숙하게 부복했다. 그의 앞에는 황제의 명(命)을 전하는 등각대학사(登閣大學士)가 옥쟁반에 금빛 두루마리를 받쳐 들고 서 있었다. 금빛 두루마리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황제의 칙서였다. 이윽고 등각대학사는 영락황제에게 한 차례 깊숙이 예를 취하더니 낭랑한 음성으로 칙서를 읽기 시작했다. "......짐은 하늘(天)과 대명(大明)의 축경(祝慶) 속에 오늘 친전 무회의 패웅(覇雄)을 기쁘게 맞노라." "짐은 성후준을 어령군상장군(御令軍上將軍) 겸 금군선무검사(金 軍宣武劍士)로 제수한다." "이에 짐은 금후 영반 성후준의 보국안민(保國安民), 충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로다. 영락 원년(元年), 영락황제(永樂皇帝) 칙령(則令)...." 칙서의 낭송이 끝나자, 어디선가 은은히 주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띠띠딩...... 띠딩......! 삘리리...... 삘리......! 내궁대정원 안의 모든 인물들은 경탄과 부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백검우를 주시했다. '으음......!' '대단하군...... 저 나이에 상장군(上將軍)의 위(位)에 오르다니......!' 실상 그것은 아무도 예측치 못한 파격적인 예우였다. 더우기 금군선무검사라는 직분은 육십만금군(六十萬金軍)의 동태 를 감시하는 막중한 직위였다. 황제의 신임이 없이는 거의 제수 받기가 불가능한 직위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선무사(宣武司)에서 선무검사의 서열은 사위(四位), 즉 네 번째에 해당된다. 황제의 밀명(密命)을 수행하는 선무사에서 백검우는 엄청난 직위를 확보한 셈이었다. 당금 선무사의 총사(總師)는 어령군 총사대장군 영호진이 맡고 있었다. "......." 백검우는 드디어 영락황제가 직접 하사한 어검(御劍)과 칙서를 받고 단에서 내려왔다. 장내의 모든 인물들이 그에게 다가와 환호와 축하를 보냈다. 허나 정작 백검우보다 더 기뻐한 인물은 바로 성화융이었다. 그는 문관대신들의 축하를 받는 와중에도 백검우에게 다가와 위엄있게 분부했다. "군문례(軍門禮)를 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백검우는 공손히 대답했다. 군문례(軍門禮)는 새로운 장군무반이 삼군총사(三軍總師)에게 인사를 올리는 예칙이었다. 백검우는 맨 처음 자신이 소속된 어령군과 선무사의 총사(總師)인 영호진에게 다가갔다. 스윽...... 서열대로 이루어진 좌석(座席)의 배치로 인해 어렵지 않게 영호진 을 알아본 백검우였다. 영호진을 비롯한 삼군총사는 나란히 맨 앞 좌석에 앉아 있었다. 더군다나 영호진은 바로 영호건의 부친이었다. 부자의 용모는 거 의 판에 박은 듯 닮아있었던 것이다. 상대의 폐부를 뚫어보는 듯한 눈빛과 가슴까지 드리워진 흑염.... 영호진을 보면서 백검우는 내심 절로 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군지장(天軍之將)이 따로 없구나!' 백검우는 영호진에게 정중한 예를 취했다. "무반(武班) 말학(末學), 성후준...... 총사에게 인사드립니다." "허허...... 자네같은 인재를 얻게 되어 기쁘네." 영호진은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검우는 새삼 그가 영호건의 부친이라는 점을 상기했다. "총사의 자제분은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총사께 송구한 심정입니다." "허허...... 내 아들 놈이 부족하여 진 것인데 어찌 그대가 송구한가?" 영호진은 호방한 대소를 날리더니 말을 이었다. "더우기...... 방금 황제폐하께서는 내 아들놈에게도 충열우장군 (忠悅右將軍)이라는 직위를 특별히 내리시겠다고 전해오셨네." "아......!" "허허...... 비록 그대의 위치에는 못미치나 영무좌장군 사공천과 는 거의 비등한 직위일세. 그러니 나는 오히려 축하를 받아야 하네." "매우 잘된 일입니다." 백검우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윽고 백검우는 두번째 인물에게 몸을 돌렸다. '이 분은...... 육십만금군의 총수인 창무대장군(蒼武大將軍) 황보양(黃普陽)이군......!' 창무대장군 황보양은 이미 고희(古稀)에 접어든 흰 눈썹의 인물이었다. 체구가 무려 구 척에 달했고, 눈빛이 지극히 부드럽고 깊어 표면 의 모습으로는 마치 시골 촌로를 연상케 했다. 허나 창무대장군 황보양은 대내 대신들과 영반들이 가장 흠모하면 서도 두려워 하는 존재였다. 평상시 그는 촛불처럼 희미하다가도 일단 중대사가 발생하면 거대 한 산불(山火)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그때는 아무도 황보양의 불길을 막지 못했다. 황보양은 거의 표정이 없는 얼굴로 지그시 백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검우는 정중한 포권지례와 함께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학, 성후준...... 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 "음......!" 황보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더니 독백하듯 말했다. "자네의 눈빛은 성화융 대감과는 너무 다르군." "......!" "자네를 항시 기억하겠네." "감사합니다. 대장군......!" 백검우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허나 그 순간 그의 손에는 식은 땀이 맺히고 있었다. '무서운 노인이군!' 이윽고 백검우는 마지막으로 맨 왼쪽에 앉아 있는 인물에게 몸을 돌렸다. '......!' 그는 특이하게도 장군이면서 갑옷을 걸치지 않은 백룡포의 인물이었다. 대략 오십 세 가량 되었을까. 그는 세 사람 중 가장 젊었으며 준수한 외모가 무장(武將)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학자(學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백검우는 그를 대하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닮았다......!' 그것은 거의 충격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돌아가신 아버님과...... 너무도 흡사한 분이다!' 허나 백검우는 그러한 내심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말학 성후준...... 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 "허허...... 반갑네." 유일하게 백룡포를 입고 앉아 있는 이 인물의 공식 직함은 오군우 도독(五軍右都督), 헌양대장군(軒陽大將軍) 하현극(夏賢極)이었다. 성품이 온후하고 병법(兵法)에는 천하제일이라고 알려진 하현극. 백검우는 이미 하현극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참으로 특이한 분이로구나. 누가 이 분을 삼군총사 가운데 한 명으로 보겠는가....' 백검우는 곧 목례를 취하며 말했다. "많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군문례(軍門禮)를 모두 마친 백검우는 몸을 돌려 성화융과 대내문 관들이 모인 장소로 걸어갔다. 그 순간 지금껏 조용하기만 하던 하현극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군. 저 청년무장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는 너 무나 그 분과 흡사하구나....' 짧은 순간 하현극의 눈빛은 수십 차례나 변화를 일으켰다. '벌써 삼십여 년이 흘렀군...... 그 분을 내손으로 모신 지가......!' 하현극, 그의 두 눈에는 짙은 감회와 우수의 빛이 떠올랐다. '천광대장군 좌태승......!' 오오...... 이 무슨 엄청난 이름인가? 천광대장군 좌태승! 당년 홍무황제의 최대 적수였으며 원(元)의 마지막 대장군-- 바로 원(元)의 찬란한 전설(傳說)을 잉태했던 대 영웅(大英雄)이 아닌가! '묵죽모필...... 그 분이 나에게 한 자루 묵죽모필을 남기고 형장 의 이슬로 사라진 지 벌써 삼십 년이 흘렀다.' 하현극은 문득 긴 장탄식을 발했다. 그렇다. 오군우도독 하현극은 바로 당년 젊은 나이의 감찰관으로 좌태승의 사형을 집행했던 청년이었다. 세월(歲月)....... 실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젊은 감찰관 하현극이 지금 오군우도독 대장군이 되어 있는 것이다. 세인들의 망각 속에 묻힌 운명(運命)의 일월(日月)이 오늘 내궁대 정원에서 서서히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 하현극은 문득 유달리 오늘밤 바람이 차갑다고 느끼며 하늘의 달 (月)을 바라보았다. '초동(初冬)의 명월(明月)이라......' 유시(酉時) 무렵. 친전무회(親展武會)는 완전히 막이 내리고 백검우는 보교(寶轎)에 탄 채 집으로 향했다. 이날 밤, 천문대로의 거리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로 열광하며 백검우를 맞이했다. "와와......! 성후준......! 성후준......!" "천문대로 만세...... 금릉 만세......!" 발 있는 자들은 모두 달려나와 백검우의 교자를 에워싸고, 헤아릴 수 없는 손들이 밤하늘을 향해 물결쳤다. 입(口) 달린 자들은 모두 목이 터져라 성후준이라는 석 자 이름을 외쳐댔다. "와......!" "와와......!" 우백천과 호수아, 그리고 노삼은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백검우에 게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봐야만 했다. 백검우는 교자 안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성화거장이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무황야에게 또 한 걸음 접근한 셈인가......' 백검우가 내심 생각에 잠겨 있는 순간이었다. 문득 그의 귓가에 전음(傳音)이 들려왔다. (장주, 오늘 밤 처소로 찾아뵙겠습니다.) 그것은 마로 엽거촌장 천우환의 전음이었다. '......!' 백검우는 천천히 인파들 틈으로 시선을 던졌다. 멀리 한 그림자가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음......" 성화융 대감은 자신의 서재에서 찾아든 조정의 대신들과 잔치상을 벌려 담소하고 있었다. "하하하......!" "허허......!" 띠디딩...... 띠딩......! 웃음소리, 주악소리가 흥겨운 가운데 밤(夜)은 깊어만 갔다. 바로 그 시각, 성후준의 거소인 소화각(素和閣)의 한 실내에서는 방금 목욕을 끝 낸 백검우가 동경(銅鏡) 앞에 서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문득 그는 동경 속에 비친 성후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씁쓸하게 미소했다. "후후...... 이러다가 내 얼굴을 잊어 버리겠군......!"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변골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투...... 투툭......! 그의 전신에서 이내 뼈마디가 움직이는 음향이 울려나왔다. 거의 동시에 동경에 비친 성후준의 얼굴이 서서히 변하더니 순식 간에 백검우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 얼굴로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단 말이야...." 백검우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어이가 없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헌데 바로 그때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실내의 문(門)이 덜컥 열리며 금약예가 아름다운 얼굴에 환한 미 소를 띠운 채 뛰어든 것이다. "무랑! 당신이 정녕 상장군(上將軍)의 위(位)에...... 아니!"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당신...... 당신은 누구죠?" '......!' 백검우는 내심 아차 싶었으나 이왕 엎질러진 물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 백검우는 입가에 봄날처럼 따사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며, 동시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 "무슨....?" 금약예의 가슴이 일순 알 수 없는 충격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백검우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했으나 절대 나쁜 사람이 아 님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새삼 뚫어지게 백검우를 응시했다. 보면 볼수록 눈이 부신 미청년이었다. 이제껏 성후준보다 더 수려한 인물은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던 신념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 방 안에 있다면 분명 그이와 가까운 사이일텐데...?' 그녀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랑의 친구분이시군요. 내 말이 맞았나요?" "......" 그는 깊숙한 시선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틀렸소." 나직한 음성이었다. 허나 그 한 마디는 금약예의 귓가에 천둥소리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이건 무랑의 음성......!' 예감. 뭔가 알 수 없는 기이한 예감이 그녀의 온몸을 엄습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이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그녀의 눈 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투툭...... 투툭......! 변하고 있었다. 백검우의 얼굴이 다시 성후준의 모습으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아......!' 비틀......! 금약예는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휘청였다. 그녀는 차마 더 이상 백검우를 응시하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이건 꿈이야......!' 그녀는 이것이 꿈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한참 후에야 눈을 떴다. "아...... 무랑......!" 그녀의 얼굴은 순간 기쁨으로 가득 물들었다. 성후준. 거기에는 성후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허나 무엇을 생각했는가? 그녀의 안색은 다시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당신은...... 당신은 무랑이 아니예요! 그래요...... 사냥을 다 녀왔을 때부터 저는 당신이 뭔가 다르다고 느꼈어요...... 당신의 행동, 행적, 모든 것이 무랑과는 전혀 달랐어요! 당신은 무랑이 아니예요......!" 충격과 격동으로 떨려나오는 음성. 허나 그녀는 다시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어느새 그녀의 한 쌍 봉 목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아니예요...... 누가 뭐래도 당신은 무랑이에요...... 제가 잘못 했어요...... 내말이 맞지요? 대답해 주세요. 당신은 무랑이라고......!" "약예...." 백검우는 나직한 탄식을 발하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백검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현기증이 이는 듯 휘청거리더니 백검우의 가슴에 핏기없는 얼굴을 기대었다. "어서...... 대답해 주세요. 당신은 무랑이라고......!" "......" 백검우는 다시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으나 잠시 사이를 두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약예...... 무랑은 사냥을 떠났었다. 그는......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숨을 거두었어...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백검우라고 하지......." 백검우, 그의 두 눈에 언뜻 고뇌와 짙은 우수가 스쳤다. "그는 엄청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몸이야....... 그는 성후준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약예.... 그는 진정으로 성후준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다. 저승의 성후준도...... 그를 이해하리라 믿는다...." "......!" "약예......." 백검우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허나 금약예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실신해버린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 백검우는 긴 장탄식을 발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실신한 그녀를 안아 침상에 눕혔다. "잘 자라. 약예......!" 백검우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언젠가 말하려 했으나...... 이렇게 빨리 시기가 올 줄은 몰랐구나..." 백검우는 천천히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쌔애앵......! 쌔애앵......! 열린 창문 사이로 야풍(夜風)이 서늘하다. 백검우는 애써 무거운 기분을 털어버리려는 듯 길게 심호흡을 했다. 밤하늘의 달을 응시하는 그의 입가에 한순간 더없이 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성후준...... 금약예는 이제 내 사람일세. 자네가 진정 그녀를 사랑한다면 날 도와주게나." 나직하나 힘찬 독백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르륵...... 창문을 통해 한 그림자가 연기처럼 소리없이 나타났다. "장주......!" 그는 바로 엽거촌장 철우환이었다. 그는 나타난 순간 이미 백검우 를 향해 예를 올리고 있었다. 백검우는 미소하며 그를 반겼다. "기다리고 있었소. 무슨 일이오?" "모든 인물들이 친전무회에 신경을 쓰는 사이 순천부 순검옥에 대 한 조사를 쉽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 "사공천 이외의 방해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번 황제 탄일에 서역(西域)의 사신들로 온 자들입니다." 철우환의 음성은 약간 긴장에 젖어 있었다. '음......?' 백검우는 순간 두 눈에 번뜩 기광을 발했다. "그들이 아란대라마를 구하려는 목적은 무엇이오?"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란대라마에게 모종의 엄청난 비밀 이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 "짐작컨대 필시 좋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슥......! 철우환은 말과 함께 품 안에서 한 통의 밀서를 꺼냈다. "이것은 선만후와 두 아우가 장주님의 지시에 대해 답해온 것입니다." "음......!" 백검우는 묵직한 침음을 흘려내며 밀서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철우환은 가벼운 예를 표하며 말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한 가지 이것은 제 지나친 짐작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두 눈에 은은한 신광을 발하며 말을 이었다. "아란대라마의 일이...... 어쩌면 무황야와 관계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 "그럼......!" 스르륵....... 백검우가 흠칫하는 사이 철우환은 연기처럼 실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백검우는 등의자에 더욱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그의 두 눈에는 신비로운 광채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무황야와 아란대라마...... 철노야는 너무 지나친 짐작을 한 것 같군." 백검우는 지그시 눈을 내리 감았다. "한 숨 자고 나면 모든 것이 더욱 분명해지겠지...." 그는 그리 오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밤(夜)은 여명을 향해 소리없이 달리고 있었다. ■ 일로제검 제2권 13장 비밀(秘密)의 문(門)으로...... ━━━━━━━━━━━━━━━━━━━━━━━━━━━━━━━━━━━ 영락 원년 초 사흘, 친전무회가 열린 지도 이틀이 지났다. 때는 이른 새벽. 초겨울의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그 한산한 금릉 천문대로에 문득 한 인물이 나타났다. 초립을 눌러 쓴 평범한 옷차림의 백의인(白衣人). 그는 바로 백검우였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 백검우는 곧장 시전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백검우가 멈추어 선 곳은 한 포목점 앞이었다. 스윽...... 안으로 들어서자, 계산대에서 한 인물이 모습을 나타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후후...... 이런...... 우백천, 날세." 백검우는 고소하며 초립을 벗었다. 우백천은 움찔하더니 만면에 반색을 띠었다. "무랑......!" "무심한 친구같으니. 한 번도 내 거소에 찾아오지 않는군." "미안하네. 생각이야 간절했지만......!" 백검우의 부드러운 나무람에 우백천은 얼굴을 붉히며 말꼬리를 흐 렸다.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자신의 신분 때문에 성화거장을 직접 찾아간 적은 없었던 것이다. 백검우는 힐책하듯 말했다. "자네는 언제까지 자질구레한 신분 따위를 생각할 작정인가." "후후...... 할 말 없네." 우백천은 그저 웃을 수밖에. "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나 우백천은 지금 당장 친우들을 불러모아 성화거장으로 쳐들어가겠네." 백검우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애석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네." "일이 생긴 건가?" "곧 황제폐하를 알현해야 하는 시각이네." "오......!" 우백천은 나직한 탄성을 흘리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벌써 황제께 부름을 받았단 말인가?" "중요한 분부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백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우백천은 두 눈에 긴장의 빛을 띠었다. "중요한 일이라...... 자네가 폐하를 만나는 것은 혹 비밀이 아닌가?" "맞았네. 후후......!" "그러한 비밀을 자네가 나에게 말하는 것은 분명...... 어떤 도움 을 나에게 바라는 뜻이겠군." "또 맞추었네!" 백검우는 새삼 우백천에 대해 감탄하며 밝게 웃었다. 우백천은 신비롭게 미소했다. "그리 추켜주지 않아도 되네. 부탁할 일이 뭔가?" 그는 생기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네의 일이라면 내 목숨이라도 걸 용의가 있네." "후후...... 자네 목숨은 필요하지 않아......" 백검우는 부드럽게 미소했다. 그는 곧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상인(商人)들의 동태를 잘 알 것일세." "알지!" "그렇다면 묻겠네. 이번 황제 탄일을 전후해서 서역(西域)의 상인 (商人)들이 지나치게 많이 오지 않았는가?" "자네가 그걸 어떻게......!" 우백천은 흠칫 놀랐다. 백검우의 예측은 사실이었다. 우백천은 새삼스럽게 백검우를 주시하더니 말했다. "자네는 과연 호수아의 말대로 근래 무섭게 변했군......! 맞았 네. 서역에서 상인들이 평소의 열 갑절 이상 왔네." "후후...... 보기에 어떤가? 그들이 정말 모두 상인같이 보이던가?" "그렇다면......!" 우백천은 두 눈에 번뜩 기광을 발했다. 백검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측대로라면...... 그들은 모두 무림인(武林人)들일세. 나의 부탁은 자네가 그들의 동태를 암암리에 감시해 달라는 것일세." "그런 것은 식은 죽 먹기일세." 우백천은 흔쾌히 승낙했다. 본래 그는 이곳 금릉 시전에서는 터줏대감같은 인물이었다. 백검우는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들이 눈치채게 해서는 아니되네." "여부가 있겠는가......?" 우백천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백검우는 두 눈을 신비롭게 빛냈다. "그럼...... 나는 이만 황궁으로 가 보겠네." 황궁의 깊숙한 밀실(密室). 자색(姿色)의 휘장이 사위에 드리워져 있고, 바닥에는 천축(天竺) 산 융단이 구름처럼 부드럽게 깔려 있었다. 실내 중앙. 자단목탁자(紫丹目卓子)를 중심으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바로 영락황제와 백검우였다. "오늘 그대를 은밀히 부른 것은 한 가지 밀명(密命)이 있기 때문이다." "거행할 따름입니다. 폐하......!" "예로부터 황실의 대역죄인을 감금하는 뇌옥이 있다. 그대도 순천 부 순검옥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을 것이다." "......!" 백검우는 내심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설마 황제의 입에서 순검옥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예상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맡을 밀명이 바로 순검옥에 관련된 일이란 말인가?' 영락황제는 입가에 뜻모를 미소를 운무처럼 머금고 말을 이었다. "근자에 이르러 그곳을 둘러싸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 다. 그곳에 갇힌 한 인물을 둘러싸고 모종의 암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 그같은 일이......!" 백검우는 짐짓 놀람의 표정을 지었다. 황제는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일은 원(元) 황실 대종법장령인 아란대라마와 연관된 것이어서 더욱 심각하다." "대종법장령은 이미 제거된 것으로 알고 있사온데......!" 백검우는 이미 내막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의중을 떠보았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지...... 허나 그것은 항간의 소문일 뿐이 다. 그는 사실 순검옥에 갇힌 채 지금까지 숨을 쉬고 있어....... 질긴 목숨이다. 대부분 순검옥에 갇히면 삼 년을 못넘기고 죽기 마련이거늘." "아......!" 백검우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락황제는 그러한 백검우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우려하는 것은 황실 장군들 중에 이 일에 관련된 자가 있다는 것이다." "......!" "그 자는 아란대라마의 일을 천축에 누설했을 뿐만 아니라, 동조 하여 아란대라마를 구해내려 하고 있다." "그런 불경스런 일이......!" "짐은...... 그때문에 문관출신의 장군이며, 순검옥과 전혀 무관 한 그대를 이 일의 책임자로 맡기기로 결심했다." 영락황제의 노안에는 은은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신뢰의 미소였다. 허나 영락황제가 어찌 꿈엔들 상상하겠는가? 바로 그의 눈 앞에 앉아 있는 백검우야말로 아란대라마를 가장 필 요로 하고 있는 장본인인 것이다. 허나 백검우는 티끌만큼도 그러한 내색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의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 "금번 서역 천축 사신들이 아란대라마의 몸을 짐에게 요구해 왔 네. 허나 짐은 아란대라마를 살려내어 금후 후환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 "그대에게 방법이 없는가?" "폐하......!" 백검우는 두 눈에 은은한 신광을 발하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 일을 매듭짓는 것은 극비리에 아란대라마를 죽이고 서역과 내 통한 자군들을 검출 처단하는 방법 뿐입니다." 영락황제는 입가에 만족의 미소를 띄웠다. "으음......! 바로 짐이 원하던 방법이다." 그는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짐은 그대를 믿는다. 이 일에 전권(全權)을 위임하겠다." "황송할 뿐입니다.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허허허......!" 영락황제는 가볍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검옥의 출입은 동창(東槍)의 태감(太監)이 안배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슥......! 백검우는 영락황제에게 간단한 예를 취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백검우가 밀실 밖으로 나오자, 한 명의 초로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십 세 가량 되었을까. 매우 온후한 인상에 당당한 체구를 지닌 인물이었다. "동창 태감 경운형(庚雲亨)이오. 젊은 장군을 알게 되어 기쁘오." "반갑소." 백검우는 부드럽게 미소하며 경운형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황제께서 인물을 잘 선택했군. 이 경운형은 의부(義父)와 친근한 사이이지......!' 그러했다. 동창태감 경운형은 백검우가 의부(義父)로 섬기기로 결심한 성화 융대감과 두터운 친분을 지닌 사이였다. 본래 동창(東槍)은 황제의 직속 사찰기관이다. 경운형의 소임은 고관대신들의 동태를 감시, 반역을 미리 막는 것이었다. "잘 부탁하오. 동창께서 문사(文士)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백검우가 미소하며 말하자 경운형은 빙그레 웃으며 흔쾌하게 대답했다. "하하...... 오히려 내가 할 말이오. 자...... 그럼 걸으면서 순검옥에 대한 설명을 하겠소." 백검우와 경운형, 그들은 나란히 황궁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백검우는 경운형의 집정소(執政所)에서 순검옥에 수감된 인물들과 책임자들의 명단을 받았다. 그 명단은 송원주가 백검우에게 준 것과 거의 비슷했다. 백검우는 새삼 송원주에 대한 의문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대체...... 그 분은 누구인가?' 초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백검우와 경운형은 나란히 황궁의 후원에 당도했다. 아름다운 연못과 가산(佳山), 기화(奇花)들이 조화를 이룬 후원에 는 꽃사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화원의 소로를 따라 얼마나 더 안으로 들어갔을까? 그들의 앞에 매화림(梅花林)에 둘러싸인 한적한 곳이 나타났다. 스스스...... 스스...... 매화림에는 뿌연 운무(雲霧)와 기이한 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음......?' 백검우의 두 눈에 순간 기광이 번뜩 스쳤다. '이것은...... 멸멸사상만화진(滅滅死相萬花陣)이 아닌가!' 백검우의 표정이 변화를 일으키자, 경운형은 그의 내심을 헤아린 듯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장군은 이미 이곳에 진(陣)이 설치되어 있음을 눈치채신 모양이구료." "그저 좀 이상하다고 느꼈을 뿐이오." 백검우는 굳이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경운형은 내심 탄복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하단 말이야....' 그는 곧 진중한 신색으로 말했다. "장군은 나의 걸음을 따라 들어오시오." 스으윽......! 경운형은 조심스럽게 매화림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좌우로 기이한 행보(行步)를 하기 시작했다. 허나 백검우는 이미 완전히 진법(陣法)을 파악한 터라 마치 산보 하듯 유유히 따라갔다. '으음......!' 경운형은 그러한 백검우의 모습에 재차 기이한 신색이 되었다. 백검우가 담담하게 물었다. "이곳이 어디이기에 이런 진법이 설치되어 있소?" 경운형은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나직이 대답했다. "바로 순검옥(巡檢獄)으로 통하는 길목이요." "......!" "황제폐하와 본인만이 알고 있는 비밀 통로이기도 하오." 경운형의 얼굴에는 은연중 자부심이 떠올랐다. 그 말에 백검우는 의아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순검옥을 사공천 장군 등은 어떻게 출입하고 있소?" "다른 통로가 있소. 바로 대내 중요인물들이 알고 있는 통로라 오....... 그들은 그 통로가 유일한 통로인 줄 알고 있소." "이해가 되는군." 백검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스...... 스스...... 사위의 자욱한 운무는 점점 짙어져 갔다. 한순간 운무 속에서 어렴풋이 불빛이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의 고색창연한 석등(石燈)에서 나는 빛이었다. 경운형은 아무 말없이 석등을 오른쪽으로 잡아 돌렸다. 끼리릭! 쿠구궁......! 굉음과 함께 돌연 눈 앞의 한 지면(地面)이 쩍 갈라졌다. 갈라진 지면 아래로는 계단이 음침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단하군!' 백검우는 곧 경운형의 뒤를 따라 계단으로 내려섰다. 축축한 습기와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백검우가 눈썹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경운형이 갑자기 몸을 멈추며 냉엄한 어조로 말했다. "본인의 임무는 이곳에서 끝났소. 나머지 일은 장군의 재량에 달 려 있소." "음......?" "그럼 이만......!" 백검우가 흠칫하는 사이 경운형은 가볍게 목례를 보내더니 몸을 돌렸다. 스윽! 그는 순식간에 매화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백검우는 잠시 멍한 기분이 되었다. 경운형의 저의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곧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계단 밑을 내려서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지옥(地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군." 암흑(暗黑). 밑으로 내려갈수록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그를 엄습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풍겨나오는 악취를 맡으며 얼마나 전진했 을까. 드디어 계단이 끝나며 평평한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 백검우는 걷고 또 걸었다. 서서히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지독하군! 벌써 삼 리(三里) 가량을 걸었는데도 끝이 나타나지 않다니......' 그제서야 백검우는 순천부 순검옥이 황궁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음을 감지했다. 하나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기 마련이다. 갑자기 통로가 끝나며 음울한 회색빛의 석벽이 가로막아 섰다. '......!' 백검우가 살피니 석벽 중앙에는 하나의 야명주(夜明珠)가 이끼에 싸인 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의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이곳을 지나가지 않았군.......' 백검우는 손으로 야명주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굉음과 함께 석문이 서서히 회전을 일으켰다. 구구궁.... 슥! 백검우는 공간이 나타나는 걸 보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쿠쿵! 석문은 순식간에 다시 굳게 닫혔다. 허나 석문을 여는 열쇠인 야 명주는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실로 정교한 기관이구나!' 백검우는 내심 탄복하며 안을 자세히 살폈다. 의외로 안은 밝았다. 그것은 수십 개의 오색(五色) 야광주가 천장 에 박혀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장내는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었다. 바깥 세계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암암한 공간...... '숨이 막힐 것 같군......!' 백검우는 왠지 모를 무서운 중압감을 느끼며 서서히 장내를 살폈다. 그의 눈이 이내 놀라움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아...!' 수백 개의 동혈(洞血). 지옥의 숨구멍같은 동혈이 양 옆으로 이어 져 있었다. 각 동혈에는 쇠창살이 세 겹으로 박혀 있었다. "흐......윽......!" "흐으으......!" 들린다. 뭔가 살아있는 존재의 헐떡이는 듯 간간이 이어지는 숨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백검우는 자신이 완전히 순천부 순검옥의 심장부 안에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이곳에는 전혀 간수들이 출입한 흔적이 없다. 그렇다면 수인(囚人)들은 무엇을 먹고 목숨을 지탱해 왔단 말인가?' 허나 그의 의문은 곧 쉽게 풀어졌다. '이, 이건......!' 수로(水路). 수인들이 갇힌 동혈뇌옥들의 앞으로는 하나의 수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쏴아아...... 쏴아...... 시커먼 흙탕물이 그 수로를 따라 흘렀다. 그 수로는 건너편의 거대한 철문(鐵門)에서 시작되어 다시 철문으 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간간히 시커먼 흙탕물 속에는 부패한 음식물을 담은 식기가 둥둥 떠내려왔다. 그렇다. 죄수들은 바로 그 흙탕물과 함께 떠내려오는 썩은 음식물을 섭취하며 살아 남았던 것이다. '너무 잔인하구나! 황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는 건너편의 거대한 철문이 바로 순검옥의 다른 통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두께의 철문이었다. '이런 곳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군!' 백검우는 등줄기에 한기가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이때였다. "흐으...... 으...... 흑......" "흐어어......!" 원귀가 헐떡이는 듯한 숨결소리와 함께 몇몇 동혈의 쇠창살 사이 로 앙상한 손들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차마 인간의 손이라 볼 수 없는 밀랍색의 손마디들이었다. 차라리 칡넝쿨도 이보다는 보기가 나으리라. 스으윽...... 스슥...... 그 손들은 절망으로 꿈틀거리면서도 식기들을 하나씩 집고 있었다. '......!' 문득 백검우의 눈가에 기이한 이채가 스쳤다. 그 손들은 결코 두 개의 식기를 잡지 않았던 것이다. 음식의 양이 많은 것이 아님에 도 오직 하나씩의 식기만을 집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놀랍구나...!' 백검우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그것은 지고한 극기와 참을 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녕 이들이 죄인(罪人)들이란 말인가?' 백검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임자없는 식기들은 수로를 따라 떠내려가더니 다시 철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식기의 숫자는 네 개였다. '저런... 저 음식이면 다른 세 명이 배불리 더 먹을 수 있을 것을...!' 백검우가 무심코 마음 속으로 탄식하는 순간이었다. 철문 바로 옆 동혈의 깊숙한 쇠창살 속에서 절망어린 탄식성이 흘러나왔다. "아아...... 오늘은 네 개의 식기가 남았구나...... 또 세 명이 죽었군. 이제...... 열 명만이 남았는가......" 황야에 불어닥치는 삭풍처럼 공허한 음성. 허나 그 음성에는 뭔가 모를 힘과 한(限)이 서려 있었다. 백검우는 순간 번뜩 깨닫는 게 있었다. '이제보니 서로의 생사(生死)를 확인하려고 식기를 하나씩만 들은 것이로구나!' 불현듯 백검우는 그 음성의 주인공이 보고 싶어졌다. '저 음성의 주인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어쩌면 이 죄인들을 이끌 어가고 있는 장본일지도....' 슥! 백검우가 동혈뇌옥을 향해 몸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다시 그 음 성이 공허롭게 울려나왔다. "내가 헤아린 천기(天氣)가 잘못되었는가...... 오늘 중으로 제천 지상(制天之相)의 천장(天將)이 찾아온다고 했거늘......!" 그것은 허허로운 가운데 어떤 확신이 깃든 음성이었다. 백검우는 내심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설마 나의 방문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단 말인가? 헌데 제천지상 이라니...... 무슨 말인가?' 백검우는 의혹과 알 수 없는 흥분을 느끼며 천천히 다가갔다. "흐으......!" "으흐음......!" 그의 귓가에 간간이 힘겹게 음식을 씹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허나 아무도 백검우를 보지 못했다. 거대한 철문이 열리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이 안에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이윽고 백검우는 한 동혈뇌옥 앞에 당도해 우뚝 몸을 멈추었다. '......!' 동혈뇌옥에는 무려 다섯 겹의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안의 죄인이 다른 죄인들보다 엄중하게 취급되고 있음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동혈뇌옥 안은 극히 어두컴컴했다. 허나 백검우는 안력(眼力)을 돋구어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으음......!' 삼면(三面)의 석벽에는 천축(天竺) 라마교의 특이한 환희불(歡喜 佛)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의 사 대수호영신이 살아 꿈틀거리듯 양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歲月)을 두고 고각해 온 흔적이 역력했다. 동혈뇌옥중앙. 금세라도 재로 변해 부스러질 듯 낡은 금색가사를 걸친 노승(老 僧)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아...... 밀납처럼 창백하고 투명한 안색...... 바닥까지 흘러내린 새하얀 은발(銀髮)...... 너무도 말라 마치 백골(白骨) 한 구를 연상케 하는 체구......! 무아(無我)의 상념에 젖어 들었는가. 노승은 지그시 두 눈을 내리 감고 있었다. 그러한 노승의 전신에서는 형용 못할 엄청난 기도가 뻗어나오고 있었다. 백검우는 노승의 모습을 대하는 순간 숨이 탁 막히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혹시 저 인물이 아란대라마...?' 그때였다. 노승의 눈이 매우 서서히 뜨여졌다. 동시 노승의 입가에는 형언할 수 없이 기이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노승이 두 눈을 완전히 떴을 때, 그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 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벽안(碧眼)! 노승의 푸른 두 눈은 벽안이었다. 그 눈에서는 상대의 심장을 조이는 듯 깊숙하고 심유한 광채가 은은히 뻗어나왔다. 노승은 백검우를 보았다. 허나 노승은 말이 없었다. 백검우 역시 무심한 표정으로 노승을 마주볼 뿐이었다. 침묵. "......" "......"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억겁(億劫)처럼 지루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로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으음......!" 침묵을 깨뜨리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노승이었다. "훌륭한 껍질을 쓰고 있군." "......!" 노승은 놀랍게도 단번에 백검우의 변한 얼굴을 파악한 것이다. 허나 백검우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백검우는 심유한 눈빛을 흘려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귀하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소. 귀하가 아란대라마이길 바라오." "내가 아란일세." 아란대라마는 희미하게 미소하더니 이어 물었다. "자네의 직위는......?" "얼굴만 빌렸을 뿐이지 직위까지 빌리지는 않았소. 내가 할 대답 은 그것 뿐이니 더 이상 묻지 마시오. 나도 묻지 않겠소." "음......!" 아란대라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오랜 세월만에 만난 인물이 본 성승(聖僧)의 마음에 꼭 드는 군....... 껍질이 가짜라는 것 외에는......." 아란대라마는 말을 마치자 곧 눈을 다시 감아 버렸다. 성승(聖僧). 그는 스스로를 성스러운 승려라고 칭했다. 허나 그것은 듣는 이에게 거부감은커녕 오히려 신선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백검우는 언뜻 두 눈에 이채를 띄웠다. 그는 곧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귀하는 곧 죽을 것이오. 명심할 건 정확하고 빈틈없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오." "흠...... 재미있군." "열흘 후에...... 귀하를 죽이러 오겠소. 그때까지 살아 있기를 바라오." 스윽! 백검우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순간 그의 귓가에 아란대라마의 심유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귀하가 나의 방문을 예견했듯이 그것 역시 귀하의 예감대로 짐작 하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 만났다는 사실이오." 스으윽...... 백검우는 어느새 비밀통로에 당도했다. 등 뒤에서는 아란대라마의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괴이한 신음 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후...... 나 아란이 다시 하늘(天)을 보는구나...... 나의 업 보(業報)가...... 그 엄청난 업보가...... 나를 부르는 도다." "......!" 백검우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을 멈추었다. 허나 그는 이내 다시 몸을 움직여 비밀통로의 야명주(夜明珠)에 손을 가져갔다. "......" 쿠구궁! 벽면이 굉음을 내면서 열리고, 백검우의 모습은 이내 흔적도 없이 장내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정확히 삼 일 후. 황궁은 한 가지 놀라운 일로 인해 벌컥 뒤집어 졌다. 그것은 영락황제의 특명(特命) 때문이었다. <어령군상장군 겸, 선무검사인 성후준을 충의상장군(忠儀上將軍) 겸, 경위지휘검사(京偉指揮劍士)에 임명하노라. 영락황제(永樂皇帝), 특령(特令)> 대내 고관들과 장군무반들은 크게 술렁였다. 그것은 대명(大明) 건국 이래 초유의 일이었다. - 성후준이 황궁 경비를 지휘하는 대권(大權)을 손에 쥐었다! 그 충격적인 사실은 황궁에서 중원(中原)에 이르기까지 숱한 억측 과 화제를 뿌리며 알려졌다. 경위지휘검사 성후준! 불과 하룻밤 새 그 석자 이름은 대명천하의 새로운 혜성이 되고, 야망을 품은 젊은 인재들이 꿈꾸는 영웅(英雄)의 표상이 되었다. 그 술렁임 속에서도 시간은 소리없이 조용히 흘러갔다. 금릉 외곽의 초성하(硝星河). 황혼(黃昏)....... 아름다운 계곡 사이를 흐르는 물결소리가 절로 보는 이를 흥취에 잠기게 한다. 쏴아아...... 쏴아아...... 흐르는 물살을 태평하게 받아넘기고 있는 한 바위 위. 초성하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 죽립인이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 청의(靑衣)에 단단해 보이는 어깨가 죽립인의 범상치 않은 기도를 은연중 풍겨내는 듯 했다. 한순간, 촤악! 낚싯대가 퉁기듯 허공으로 포물선을 그리면서 올라갔다. "허...... 그놈 참 이쁘기도 하다......!" 죽립인은 낚시에 걸려 파닥거리는 은빛 잉어를 보며 탄성을 발했다. 바로 그때였다. 죽립인의 뒤에서 한 준수한 백의청년(白衣靑年)이 연기처럼 나타났다. "오늘 고기들은 모두 눈이 먼 모양이군. 미끼가 없는 낚시에 걸리다니......!" 백의청년은 다름아닌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백검우였다. 황혼 속의 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죽립인은 흠칫 몸을 돌리더니 공손히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장주!" 그는 바로 철우환이었다. 그는 백검우의 본 모습을 보자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오랫만에 장주님의 본래 얼굴을 뵙는군요. 이러다가 장주님의 본 모습을 잊어버리겠습니다." "후후......!" 백검우는 미소하며 철우환의 옆에 앉았다. "하지만 성후준의 얼굴은 내게 좋은 의부(義父)를 선사했고, 여러 친구와 아름다운 한 여인(女人)을 얻게 했소." "......!" 철우환은 순간 두 눈에 기이한 광채를 흘려냈다. 그는 감복한 듯 말했다. "장주께선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하시는군요." "......" 백검우는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무슨 소식이오?" "삼장이보(三裝二堡)와 무림각파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음...... 주동 세력은?" "천마장과 혈성보입니다. 아무래도 그 피에 주린 작자들이 곧 일 을 저지를 것 같습니다." 철우환은 다시 낚싯대를 물 속에 드리우며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백검우는 잠시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들이 한꺼번에 나를 친 후 노른자위 악양을 나누어 먹을 셈이군....' 짐작대로라면 현백검장은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고 만 상황이었다. "삼장이보에 동조하는 문파들을 알고 있소?" "물론입니다." "지시를 내리겠소." 백검우는 두 눈에 비수같은 신광을 발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들의 행동을 건드리지 마시오. 불길은 한꺼번에 잡아야 하니 말이오." "......!" 철우환은 흠칫하더니 약간 긴장한 어조로 물었다. "장주님의 뜻은......?" "지금 철노야의 밑에 있는 수하가 몇이나 되오?" "구백 명입니다." "나머지 두 분 노야의 수하를 합친다면......?" "이천오백 입니다." 철우환은 낚싯대를 잡은 손에 힘을 불끈 주며 대답했다. 백검우는 흐르는 초성하의 물결을 바라보며 담담히 분부했다. "놈들이 악양성 십리(十里) 밖까지 공격해오면 철노야는 이천 오 백 수하를 동원하여 그들의 본거지를 쓸어버리시오." "음......!" 철우환은 순간 긴장어린 침음성을 묵직하게 흘려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현백검장은......." "그것은 내가 처리하겠소. 철노야는 즉시 검장으로 가 도천문을 만나시오. 미리 대비토록 말이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도천문에게 밀환살부의 수하 가운데 세 명을 선발해 내게 보내도록 하시오." 스윽! 백검우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철우환은 따라 일어서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틀림없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스스스.... 철우환의 모습이 운무에 가려진 듯 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자 리에서 유령처럼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물가쪽을 응시하던 백검우의 시선에 문득 철우환이 잡아놓은 잉어 한 마리가 들어왔다. 슥.... 백검우는 잉어를 주워 들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살찐 놈이군. 너를 내 저녁 안주로 삼을테니 원망마라." 천천히 백검우는 등을 돌려 초성하에서 멀어져 갔다. 핏빛 노을이 조용히 그의 그림자를 따라갔다. 쏴아아...... 쏴아아...... 흐르는 물살은 노을 빛과 시간을 실은 채 힘차게 흘러갔다. ■ 일로제검 제2권 14장 기이한 대면 ━━━━━━━━━━━━━━━━━━━━━━━━━━━━━━━━━━━ 초저녁이다. 금릉의 밤(夜)은 오늘도 예외없이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선양루(仙陽樓)는 금릉 제일의 호화로운 주루였다. 한순간 인파를 헤치고 손에 잉어 한 마리를 든 미청년이 유유히 선양루 앞에 나타났다. 바로 백검우였다. 그는 어느새 다시 성후준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거침없이 주루 안으로 들어서며 계산대에 잉어를 던졌다. 툭! "내 안주다." "예......?" 계산대의 풍성하게 생긴 점소이는 멍청한 표정으로 잉어와 백검우 를 번갈아 보았다. 그 순간 이미 백검우는 주루의 이 층으로 올라 가고 있었다. 이 층 창가가 있는 구석자리에 우백천이 홀로 앉아 있었다. "무랑......!" 뭔가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백검우를 보자 반색하며 손을 들었다. "그들은......?" "바로 이 선양루의 후원을 통째로 빌려 사용하고 있네." 우백천은 주위를 살피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헌데...... 이상한 일이 있네." "이상한 일......?" 백검우는 의아로운 눈빛을 발했다. 우백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영무좌장군 사공천이 은밀히 그들과 만나고 있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사공천!" 백검우의 두 눈에 번뜩 기광(奇光)이 스쳤다. '순검옥을 담당한 장본인인 그가 서역인물들과 내통하고 있다니......!' 우백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독백처럼 말을 이었다. "서역의 말(馬)장사, 양피(羊皮)장사들이 대명의 장군인 사공천과 만나고 있다니......" "후후...... 차차 알게 될 걸세." "역시 자네말대로 그들은 장사꾼이 아닌 게 분명하네." "호수아는...... 왜 안 보이는가?" "후원쪽을 지키고 있네." 우백천은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백검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섰다. 슥...... "백천, 놈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 나는 직접 그들을 만나 보겠네." "그건 위험하네!" 우백천은 흠칫 놀랐다. 백검우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염려말게. 내가 누군가." "하긴...... 자네는 무랑이니까." 우백천은 믿음어린 시선으로 백검우를 바라보았다. 백검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놈들을 만나는 사이 분명 어떤 작자가 밖으로 나갈 것이네. 자네들은 그 자를 미행하게." "음...... 알겠네." 우백천은 나직하나 힘있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스윽! 백검우는 곧 후원 쪽으로 향했다. 후원의 한 별각(別閣)에 위치한 깊숙한 실내(室內). 매우 호화로온 이 방 안에는 오색 유등(油燈)이 걸려 있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삼 인(三人). 안에는 모두 세 사람이 산해진미가 쌓인 주안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이십오 세 가량의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자의청년(紫衣靑年). 그리고 푸른 벽안(碧眼)의 서역 인물과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女人)이었다. 자의청년은 안색이 지나치리만큼 희었으며, 얄팍한 입술에 감정없는 눈빛의 소유자였다. 허나 그의 체구는 마치 쇳덩어리를 연상케 하듯 단단히 균형잡혀 있었다. 그것은 그의 깊은 심기와 일신의 무공이 예사롭지 않음을 말해주었다. 그는 누구인가? 그렇다. 그는 바로 영무좌장군 사공천이었다. 사공천은 대부분의 일을 은밀히 처리했다. 그는 친전무회가 열리는 날에도 황궁에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는 어쩌면 형인 사공위가 패배하리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 었는지도 몰랐다. "후후후...... 서역의 술맛과 비교해서 어떻소?" 사공천은 벽안의 중년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했다. "훌륭하오......!" 벽안 중년인은 약간 서투른 중원 발음으로 나직이 대답했다. 그의 인상은 극히 냉막했다. 허나 그의 손은 마디가 부드럽고 길 어 매우 고귀한 신분(身分)임을 나타냈다. "허나...... 여인(女人)은 역시 서역이나 천축쪽이 더 아름답지...." 사공천은 빙긋 웃더니 문득 시선을 면사 여인에게 던졌다. '내 평생...... 이렇게 완벽한 여인은 못만났다....' 면사여인. 은은한 수색(水色) 궁라의(宮羅衣)를 걸친 그녀의 용모는 불빛 아 래 꿈결처럼 빛나고 있었다. 절묘하게 뻗어내린 몸매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옥수(玉手), 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머리결...... 정녕 중원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환상적인 자태였다. 허나 애석하게도 그녀는 얼굴을 투명한 면사로 가리고 있어 신비 로운 두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볼 수가 없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한쌍 푸른 눈동자의 마력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것인가? 그렇다. 아무리 철혈을 지닌 사내라도 그녀의 눈빛을 대하게 되면 치미는 범죄적 충동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었다. "......" 헌데 왠일인가? 그녀는 시종일관 말이 없었다. 가끔 그 거대한 유혹을 담은 한 쌍의 벽안에 눈웃음을 소리없이 지을 뿐. 슥! "술잔이 비었군." 사공천은 입가에 뭉클 괴이한 미소를 짓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벽안미인은 두 눈에 이채를 띠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빙결같은 손을 들어 사공천의 잔에 술을 따랐다. 포르릉...... 바로 그때였다. 슥! 한 명의 중년검수(中年劍手)가 황급히 실내에 들어왔다. "장군......!" 그는 만면에 긴장의 빛을 띄운 채 사공천의 귀에다 대고 뭔가를 말했다. 사공천의 얼굴이 순간 당혹으로 물들며 돌처럼 굳어졌다. "그 자가......." "무슨 일이오?" 벽안중년인이 흠칫 물었다. 사공천은 두 눈에 번쩍 기광을 발하며 무겁게 말했다. "불청객이 왔습니다. 상장군 성후준이란 인물입니다." "음......?" "......!" 그들이 흠칫 놀라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실내 밖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 불청객이라니 과히 듣기 좋지는 않소." 스윽...... 동시에 백검우가 거침없이 실내에 들어섰다. 그는 대뜸 사공천의 옆자리에 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장군, 우리는 초면이구료. 반갑소. 장군께서도 말(馬)을 사시러 오셨소?" '말(馬)이라고......?' 사공천은 내심 번뜩 스치는 것이 있어 태연히 미소하며 백검우의 손을 잡았다. "후후...... 잘 맞추었소. 여하튼 이렇게 만났으니 우선 술 한 잔 받으시오." 포르릉......! "오! 훌륭한 향기군......." 백검우는 한 모금의 술을 음미하며 벽안중년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좋은 종자의 말이 필요하오. 보여줄 수 있겠소?" "미안하지만 말은 없소." 벽안중년인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백검우는 대뜸 안색을 굳혔다. "말장사가 왜 말이 없단 말이오?" "......!" 백검우의 기세에 중년인은 당혹의 표정을 짓더니 약간 누그러진 기색으로 말했다. "방금 사공천 장군께 모두 매매했소." "오......!" 백검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한 모금의 술을 마시며 말했다. "사장군은 그리 늙지도 않았는데 웬 말이 그리 많이 필요하시오? 말의 발보다는 자신의 발을 자주 이용해야 장수하는 법이오." "......!" 사공천의 얼굴이 순간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 놈이......?' 허나 그는 곧 원래의 냉정한 표정을 되찾은 채 호방하게 웃었다. "하하하...... 오해를 하셨구료. 나는 군문에서 필요한 말을 구입했을 따름이오." 하지만 백검우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벽안미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의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가 떠오르더니 서서히 확산됐다. "호...... 대단하군! 그대에게 술 한 잔 받고 싶은데...... 승낙하겠소?" "......!" 벽안미인은 움찔하더니 두 눈에 뇌쇄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승낙이었다. 그녀는 가득 이채를 띤 시선으로 백검우를 주시하며 술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포르릉......! 그녀는 결코 두 손으로 술을 따르지 않았다. 허나 그것이 오히려 사내로 하여금 기이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음......!" 백검우는 깊숙한 눈길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는 그녀의 옥수(玉手)를 바라보앗다. 그의 입가에는 곧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독백하듯 말했다. "사장군은 말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미인도 아끼는구려. 정말 재 주도 좋소. 서역의 절세미인까지 차지하다니......!" 순간 벽안미인의 손끝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으음......!"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사공천은 살기(殺氣)어린 시선을 백검우의 등에 꽂았다. '광오한 놈! 졸지에 출세를 하더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이번 일 만 끝나면 네놈부터 제거해 버리겠다.' 백검우는 단숨에 벽안미인이 따른 술을 마시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馬)이 없다니 할 수 없지....... 다음에 만날 때는 목숨을 흥정해 보아야 겠군......." 의미심장한 일언(一言)이었다. 순간 사공천을 위시한 장내 인물들의 낯색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스윽! 백검우는 유유히 몸을 돌려 문쪽으로 향했다. 만약 눈빛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었다면 그 순간 백검우의 몸은 수천갈래로 분해되고 말았으리라. '저 놈이 이제보니......!' '이대로 그냥 보내선 안될 놈이로군!' 백검우가 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순간이었다. 벽안중년인은 급히 사공천에게 눈짓을 보내더니 재빨리 백검우의 뒤를 따라왔다. 휙! "장군, 잠깐 기다리시오!" "......" 백검우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입가에 빠르게 의미심장 한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후후... 따라올 줄 알았다.' 그는 담담한 신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혼자...... 오셨습니까?" 어투가 공손하게 싹 바뀌었다. 백검우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밖에는 몇몇 친구가 기다리고 있네." "......!" 벽안중년인은 언뜻 얼굴이 굳어졌다. '이 자는 황궁의 오만(五萬) 경호무사를 지휘하는 신분이다. 혼자 다닐 리가 없지......' 그는 곧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잠깐만 머물러 주십시오. 사공천 장군께 부탁하여 말 (馬)을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 백검우는 짐짓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법 교활한 척 하는 걸......' 그는 내심 냉소했으나 곧 눈 앞의 한 별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소...... 저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그는 유유히 또다른 후원의 한 별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벽안중년인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백검우의 뒷모습을 주시하더니 급히 몸을 돌렸다. 얼마 후 백검우는 한 아늑한 실내의 침상에 편한 자세로 누워 있 었다. 그의 시선은 열린 창가로 어둠에 물든 후원에 고정되어 있었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떨어지는군......" 무슨 소린가? 떨어지다니...... 아! 과연 떨어지고 있었다. 창 밖으로 어둠에 물든 화원에 한 송이, 두 송이 흰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백검우의 입가에 더없이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첫눈을 보자 지난 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 백검우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사르륵...... 사르륵......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아름다운 밤눈 내리는 소린가? 아니 분명 그것만은 아니였다. 백검우의 입에서 재차 나직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오는군......" 백검우는 몸의 근육을 더욱 편하게 이완시켰다. "발자국 소리를 들으니 계집이 분명하고...." 과연 잠시 후에 한 여인(女人)이 조용히 실내에 들어섰다. 그녀는 손에 국화(菊花)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벽안미인(碧眼美人)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국화 위에는 방금 내린 눈송이가 미소처럼 맺혀 있었다. "경위지휘검사께선...... 이몸과 흥정을 하셔야 겠어요." 사내의 심기를 단번에 진탕시키는 옥음(玉音)이었다. 백검우는 처음으로 그녀의 음성을 들었다. "흥정이라......!" 백검우는 천천히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벽안미인은 서서히 백검우의 앞에 다가와 침상가에 걸터 앉았다. 면사 위로 그녀의 한 쌍 벽안이 신비로운 이채를 발했다. "그래요...... 저는 한 고귀한 분의 심부름으로 중원에서 한 가지 임무를 완수해야 할 입장이죠." "고귀한 분이라...... 그 분이 누군가?" "당신이 흥정을 수락해야만 말할 수 있답니다." 벽안미인은 속삭이듯 옥음을 흘려내며 손에 든 국화로 백검우을 가리켰다. "후후......!" 백검우는 싸늘하게 냉소했다. 그는 내뱉 듯 억양없는 일성을 흘려냈다.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계집하고 흥정을 하는 건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 벽안미인은 순간 어깨를 가볍게 움츠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 니 두 눈을 반짝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스르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윽고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본 백검우는 그만 심기가 크게 진탕되고 말았다. '대단하군!' 눈부셨다. 오직 그 한 마디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절세미인이 그의 앞에서 미소짓고 있었다. 아아...... 구름 속에서 태양(太陽)이 방금 나타났는가! 아니면 세상의 모든 만화(萬花)가 한꺼번에 피어 오르는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금발(金髮)....... 현기(玄氣)를 담은 반듯한 이마, 투명한 물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 은 이슬을 머금은 홍련(紅蓮)인 양 청초했다. 완미(完美)! 그 말 외에는 형용이 불가능했다. 도대체 인간(人間)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자체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었다. '아......!' 웃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웃는다. 아니 만화(萬花)가 한꺼번에 웃는 듯하다. '우물(尤物)이군!' 백검우는 내심 신음했다. 나이는 대략 이십 세 가량, 어찌보면 선녀(仙女)처럼 우아하게 보이고, 달리보면 요부(妖婦) 처럼 음탕한 색기(色氣)를 품은 듯 요염했다. 문득 그녀는 눈부신 미소를 베어 물더니 속삭이듯 물었다. "한 가지 사실을 알려 드릴까요?" "뭔가?" "이제껏 내 얼굴을 본 중원인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짙게....... 그녀의 미소는 더욱 짙게 유혹을 풍겼다. "그런가......?" 슥! 백검우는 빙긋 미소하며 그녀의 손에서 국화를 빼어 들었다. "이 국화를 천축에서는 무엇이라 부르지?" "훗......!" 총명한 그녀가 백검우의 말뜻을 모를 리 없었다. "세라화정(細羅花精)...... 제이름은 세라화정이에요." "음......!" 백검우의 두 눈에 순간 기광이 빠르게 스쳤다. '세라화정......!' 그는 그 이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천축제일미(天竺第一美), 공녀(公女) 세라화정! 그녀는 천축에서 모든 인물들에게 여신(女神)처럼 떠받을어지는 신비여인이었다. 라마교의 신도들은 그녀를 환희불의 축복과 정기(精氣)를 받아 태 어난 성녀(聖女)로 믿고 숭상했다. 소문에 의하면 세라화정은 무서운 주술(呪術)을 지녀 천리(千里) 의 인물도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죽일 수 있다고 알려졌다. 천축의 젊은 기남(奇男)들과 영웅(英雄)들이 꿈 속에서도 숭배하 고 연모하는 살아있는 여신이 바로 세라화정이었다. 헌데....... 바로 그 공녀(公女) 세라화정이 중원에 나타난 것이다. 백검우는 내심 놀랐으나 곧 원래의 담담한 심기를 되찾았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럼 이제 흥정이란 것을 들어볼 차례이군." "우선 이것을 받으세요." 스윽....... 세라화정은 품 안에서 하나의 고색창연한 양피 두루마리를 꺼내더 니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냐?" "흥정의 대가예요. 저는 자세히 모르나 이 두루마리는 중원무림 (中原武林)의 판도를 일시에 뒤엎을 수 있는 엄청난 물건이에요." "......!" 백검우는 순간 성목에 기광을 번쩍 폭사했다. "그것 재미있는 말이군. 그렇다면 그 두루마리를 보낸 인물은 중 원천하 쯤은 손하나 까딱 않고 뒤흔들 게 아닌가?" 그것은 조소였다. 허나 세라화정의 대답은 단호했다. "바로 맞추었어요." "......!" 백검우는 흠칫 안색이 굳어졌다. '혹시? 설마 그럴 리가.......' 불길한 하나의 예감이 그의 뇌리를 빠르게 스쳤다. 허나 그는 추 호도 내색치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그 분이 누군가?" "무황야(武皇爺). 마음만 먹으면 당장 황제(皇帝)라도 되실 분이죠." 세라화정의 음성은 경외지심으로 은은히 떨려나오고 있었다. <무황야(武皇爺).> 이 세상에서 그 이름보다 더 백검우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존재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럴 수가!' 백검우는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역시 그자였단 말인가! 철노야의 추측이 그대로 맞아 떨어지다니.......' 백검우는 전신의 피가 일시에 거꾸로 치솟아오르는 심정이었다. '무황야가 왜 대종법장령 아란대라마를 원하는 것인가?' 백검우는 일이 예상보다 더욱 엄청난 상황으로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허나 그는 초인적인 정력을 발휘해 추호도 그러한 내심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냉막성을 흘려냈다. "무황야가 누군가? 그 사람도 말장사인가?" "세상에......." 세라화정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능청을 떠시는군요. 중원인 치고 무황야를 모르는 인물은 없어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지....... 헌데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 세라화정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공천 장군이 순천부 순검옥에서 아란대라마를 빼낼 거예요. 성 장군께서는 이 일을 뒤에서 도와주세요." "아란대라마라고!" 백검우는 짐짓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보니 사공천, 그 자가 감히 황실을 거역하고 있었구나!" "......!" "이 다 낡은 두루마리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너나 가져라!" 백검우는 냉막하게 일갈을 흘려내며 두루마리를 던져버렸다. 세라화정은 고운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도대체...... 장군은 무엇을 원하지요?" "후후...... 내가 원하는 것이 오직 하나 있기는 하지." 백검우는 두 눈에 이글거리는 광채를 담고 세라화정을 정시했다. '너는 꿈에도 그것을 모를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황야다!' 세라화정은 백검우의 눈빛을 대하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무슨 수를 쓰던지 이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 그 분의 명령을 어 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돌연 그녀는 입술을 상큼 깨물더니 교태로운 몸짓으로 백검우에게 다가섰다. "이 두루마리를 받는다면 장군은 엄청난 권세는 물론이고 일인지 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영화(榮華)를 누릴 수 있어요. 그리고 원하신다면...."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는 속삭이는 듯 나직한 옥음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제 몸까지 바치겠어요." "......!" "제 몸은 아직 순결해요. 이십일 년 동안 고이 간직해온 순백지신이죠." 세라화정은 아름다운 두 눈에 촉촉히 물기를 머금었다. 육향(肉香)....... 그녀의 몸에서 은은히 풍겨나오는 육향이 아득하게 백검우를 휘감았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유혹이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화에... 천하제일의 미녀(美女)라...... 이쯤되면 아무도 거절할 바보가 없겠군." 미소...... 백검우의 입가에 순간 소리없이 신비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세라화정은 상큼 입가에 뇌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하아......!" 스르르...... 아! 대담했다. 세라화정은 백검우의 무릎 위에 풍염한 둔부를 얹으며 다소곳이 앉는 게 아닌가? 뭉...... 클...... 기이한 팽만감이 백검우의 전신에 와 닿았다. 아아, 여인(女人)의 향기(香氣)란 이토록 황홀한 것인가. 이내 세라화정의 백사(白蛇)보다 희고 투명한 팔이 백검우의 목을 휘어감았다. 홍시처럼 붉게 물든 요염한 얼굴에 혼(魂)을 태울 듯한 미소가 바 로 백검우의 코 앞에 있었다. "어떤가요......?" "조금 흥미가 동하는군." 백검우는 내심 심기가 크게 진탕되었으나 여전히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만약 천축의 청년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놀라 눈알이 튀어 나왔으리라. "아아...... 당신은 정말 욕심이 많군요." 뜨거운 숨결....... 그녀의 음성은 어쩔 수 없이 미미하게 떨려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옥수를 들어 망사의까지 벗어내리기 시작했다. 스르륵...... 양지유를 바른 듯 눈부신 여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르르...... 차라리 눈이 멀어버릴 듯 황홀한 나신이었다. 만지면 터질 듯 농염하고 매그러운 살결, 뜨거운 정열이 숨쉬는 두 개의 젖가슴....... 절묘한 아랫배의 능선 밑으로 은밀한 비경이 망사의에 걸려 보일 듯 말 듯...... 적나라하게 드러난 우유빛 동체는 그야말로 혼백을 앗아갈 듯 폭 발적인 유혹을 담고 있었다. 백검우는 입술을 기묘하게 씰룩이며 두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상 기된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손은 이내 천천히 아래로 움직이더니 그녀의 부풀어 오른 가슴을 완강하게 움켜쥐었다. '흐윽......!' 세라화정은 파르르 나신을 경련하더니 수치감으로 상기된 얼굴을 한 옆으로 내리숙였다. 백검우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리며 천천히 입술을 소유해 갔다. '아......!' 세라화정은 모든 것을 각오한 듯 두 눈을 사르르 내리감았다. 입맞춤은 황홀했다. 억겁을 흐르던 시간이 일시에 정지해 버린 걸까. '아...... 아......' 세라화정은 아득한 나락의 공간 속으로 던져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녀의 몸은 서서히 깨어나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느새 그녀의 두 팔은 백검우의 등을 부서져라 끌어안고 있었다. 헌데 그때였다. 스르륵...... 뭔가 부자연스런 소리가 세라화정의 귓속을 파고 들었다. '......?' 그녀의 내리감겼던 한 쌍 벽안이 엄청난 당혹의 빛을 담은 채 뜨여졌다. 스르륵! 놀랍게도 그 소리는 흘러내렸던 그녀의 망사의가 백검우의 손에 의해 다시 입혀지는 소리였다. "당신......?" 세라화정은 뜨거워진 몸에 일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기껏 애써서 벗어놓은 옷을 다시 입히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순식간에 백검우는 그녀의 망사의를 완전히 입혀놓은 채 괴이한 미소를 흘렸다. "후후...... 참으로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구...... 구경이라고?" 세라화정의 요염한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비로소 백검우가 자 신을 거부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여인(女人). 특히 세라화정같은 오만한 여인에게 있어 이것은 죽 음보다 더한 수치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그의 몸에서 일어났다. 백검우를 노려보는 그 녀의 눈빛이 무서운 증오로 타올랐다. "감히 당신이......!" 참을 수 없는 수치감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백검우의 입에서 비릿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나는 너에게 옷을 벗으라고 한 적 없다." "......!" 세라화정은 순간 넋을 잃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당했음을 깨달았다. 또르르...... 흘러내리는 것은 눈물이다. 주저앉고 싶다. 마음같아선 주저앉아 저주를 퍼붓고 싶다. 이 사기꾼, 악마! 지옥에나 떨어져라! 허나 그녀는 원래가 총명한 여인이었다. "호호호......!" 의외로 그녀는 자지러지듯 요염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섬뜩한 한기가 실려 있었다. "그렇군요! 내가 이 눈내리는 일야(一夜)에 황당한 꿈을 꾸었군요....... 호호호...." "......!" "오래 사세요. 장군!" 사르륵...... 세라화정은 섬뜩한 교소를 날리며 실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 백검우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는 문득 자신의 목을 불안스럽게 쓰다듬었다. "이곳에 오래 있다가는 길(吉)보다 흉(凶)이 더 많겠는 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설야(雪夜)의 전경이 그의 시선 속으로 달려들었다. 어둠에 잠긴 천지(天地)에는 여전히 목화송이같은 눈송이가 휘날리고 있었다. 파앗! 한순간 백검우의 신형은 섬광(閃光)처럼 밤하늘로 치솟았다. 그야말로 가공할 신법(身法)일진대.... 다음 순간 백검우의 모습은 후원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초설(初雪)의 밤은 한 고비를 넘어 새벽의 문턱을 들어서고 있었다. 백검우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거처인 성화거장의 소화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헌데 막 소화각의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안색이 갑자기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피냄새...?' 그것은 분명 혈향(血香)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불과 오 장의 거리, 숨막히도록 비정(非情)한 기운을 풍기는 한 흑의복면인(黑衣中年 人)이 백검우를 향해 웅크린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한 복면인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향해 덮치기 직전의 검은 고양이와 흡사했다. 이미 그는 한 자루 면도날같이 얇은 기형검(奇形劍)을 우중단(右 中段)의 자세로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한 흑의복면인의 모습에서 빈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 바로 일검필살(一劍必殺)만을 위한 공격자세가 아닌가! 천하의 그 어떤 인물도 저 일검필살의 검세를 피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죽었군." 느닷없이 백검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였다. 그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착각하지는 마라. 죽은 건 그대니까." "크크크... 과연 그럴까?" 흑의복면인의 입에서 순간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 섬칫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너는 불과 오장 거리에 무방비 자세로 서 있고 나는 이미 완벽한 공격자세를 갖추었다. 이 상황에서 내 검을 피할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내 이목을 피해서 이토록 가까 이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말이야." 백검우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흑의복면인이 살수를 전개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너는 믿어야 한다. 내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널 죽일 수 있다는 현실을." "......!" 흑의복면인의 두 눈에 일순 불신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비로소 백검우의 말뜻을 깨달은 것이다. 스스스.... 환영(幻影)처럼 세 인영(人影)이 흑의복면인의 뒤쪽에 나타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흑의복면인의 몸이 순간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진동했다. "이럴 수가...!" 그의 뒤에 나타난 세 인물은 모두 턱 밑까지 내려온 죽립(竹笠)을 쓰고 일신에 청의를 걸친 모습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그저 무심(無心)하다. 그 무심함은 어느 경지를 뛰어넘어 과연 살아있는 인간인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밀환삼위(密幻三位), 장주님을 뵙습니다." 세 죽립인의 입에서 메마른 삭풍같은 음성이 동시에 새어나왔다. 흑의복면인은 순간 짐승같은 울부짖음을 토하며 백검우를 향해 일검을 뻗어왔다. 번쩍! 그러나 그의 일검은 미처 절반도 뻗어나가지 못한 채 중도에서 멈 춰지고 말았다. 밀환삼위가 뻗은 세 자루 검이 그의 심장을 뒤쪽 에서부터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 흑의복면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썩은 고목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백검우는 조용한 눈길로 밀환삼위를 응시했다. "그대들의 이목도 녹슬었구나. 이런 자가 여기까지 칩입하도록 모르고 있었다니...." "죄송합니다.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밀환삼위는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백검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대들이 최선을 다했음을 안다." 백검우는 그제서야 천천히 몸을 숙여 자객의 복면을 벗겨냈다. 그 러자 생소한 푸른 벽안(碧眼)의 얼굴이 드러났다. "흐음... 서역(西域)의 말장수(馬商)가 보낸 자객이로군." 백검우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더니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대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겠다." "......!" "지금부터 그대들은 각기 황궁(皇宮) 혜운공주(慧雲公主)의 처소 와 창부대장군 황보양의 거처, 그리고 영무좌장군 사공천의 거처 에 잠입토록 하라." 만약 누군가가 이 자리에서 그의 말을 들었다면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으리라. 백검우가 지시한 곳은 하나같이 호혈(虎穴)을 일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명!" 허나 명령을 받은 밀환삼위는 추호도 주저함이 없었다. "특히 명심할 것은......" 백검우가 칼로 자르듯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공천이 그들 가운데 누구와 밀접하게 내통하는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스스스......! 밀환삼위는 대답과 함께 자객의 시체를 안은 채 연기처럼 어디론가 꺼져 버렸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던가? 장내에는 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았다. "사공천......" 백검우는 천천히 소화각 안으로 들어섰다. "머지않아 그의 꼬리를 보게 되겠군...." 천단루(天旦樓)는 금릉대성(金陵大城)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성루(城樓)였다. 휘이이잉잉......! 살점을 저밀 듯한 차가운 삭풍이 성루를 휘감아 스쳤다. 언제부터인가? 두 명이 정면으로 차가운 삭풍을 맞고 있었다. 바로 백검우와 한 명의 전포(戰袍)를 입은 노장군(老將軍)이었다. 깊은 두 눈과 골이 깊게 패인 주름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노장군 은 수많은 전쟁터를 누벼온 역전(歷戰)의 노장(老將)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휘이잉.... 거세게 불어오는 삭풍조차 노장군의 허연 수염 앞에 이르러선 그 기세를 잃는 듯 했다. 그렇다. 그는 바로 창부대장군(蒼武大將軍) 황보양(黃輔洋)이었다. "......" "......" 백검우와 창무대장군 황보양의 시선은 눈 앞에 펼쳐진 금릉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늘은 그저 음울한 잿빛(灰色)이다. 그래서였을까? 창무대장군 황보양의 깊은 두 눈이 오늘따라 음울한 기운을 띠고 이었다. "그게 정녕 사실인가?" "안타깝게도 사실입니다." 백검우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사공천은 그 동안 치밀한 심계(心計)로 대장군을 이용하였 고...... 심지어 혜운공주까지도......." "으음......!" 백검우의 말에 황보양은 탄식에 가까운 침음성을 흘렸다. "그놈이 감히......." 부르르......! 삭풍에도 떨리지 않던 그의 흰 수염이 잘게 떨렸다. "나 황보양이 진정으로 아껴주었거늘......." "황제 폐하께옵서도 금명간 이번 일에 대해 용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 "다만...... 소장(小將)은 대장군께 누가 미칠까 염려될 따름입니다." 일순, 백검우의 말을 황보양이 도중에 막았다. "알겠네." 황보양의 눈빛은 모종의 결연함을 보이고 있었다. "모든 일은 장군이 알아서 하시게."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휘이잉......! 잠시 숨죽이고 있던 삭풍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창무대장군 황보양의 심정은 불어오는 삭풍 앞에 메마른 갈대꽃같 이 스산하게 날리고 있었다. 얼마 후 백검우는 자신의 집무처인 황궁의 어위영상장군부(御威領相將軍府)로 돌아왔다. 그는 장군부의 한 정실에 틀어박인 채 오후 내내 움직이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그들이 아란대라마에게 노리는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무황야(武皇爺)까지도 이 일에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가?' 아무리 염두를 굴려도 또렷하게 감이 짚히는 것이 없었다. '아란대라마는 무황야에 대한 것들을 알고 있을까.......' 허나 해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바로 그 시각. 금릉의 한켠에서는 새로운 음모(陰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밀실(密室). 사방이 완전 밀폐된 한 칸 밀실이었다. 방 안에는 세 명의 인물이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사공천과 서역의 말 장수로 위장한 오이야극,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일신에 화복(華服)을 걸친 초로(初老)의 인물이었다. 투명하도록 깊은 눈과 강퍅진 턱이 묘하게 상대의 심사를 뒤틀리 게 하는 인상의 이 화복노인은 누구인가? 만약 친전무회에서 서역의 사신(使臣)들을 살펴보았던 자가 있었 다면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으리라. 그는 바로 서역에서 황제의 탄신사절(誕辰使節)로 온 미오랍이었다. 밀실 안은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문득 사공천은 오이야극을 정시하며 내뱉듯이 말문을 열었다. "성후준은 아직도 버젓이 살아있소. 대체 귀하의 호언장담은 어떻게 된 것이오?" "내가 그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소." 오이야극의 신색이 화강암처럼 견고하게 경직되었다. "그에게 보낸 자객은 내 수하 중에 가장 뛰어난 고수였소. 하지만 염려마시오. 이번엔 그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만들어 놓겠소." 사공천의 눈가에 얼음장같은 냉소가 스쳤다. "대사(大事)가 눈 앞에 닥쳤는데 어느 틈에 그를 죽일 수 있겠소." "그렇다면 벌써...?" 오이야극은 흠칫 안색이 굳어졌다. "그렇소. 나는 이미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끝냈소. 내일 새벽이면 아란대라마는 무사히 황궁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오." "으음......" 탄신사절 미오랍이 습관인 듯 입가 근육을 실룩거리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잘된 일이군...... 성후준이라는 자의 일도 그렇거니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듯 하니 서두를수록 좋소." "염려 마시오." 사공천은 비릿한 냉소를 흘렸다. "설령 성후준이 이 일에 대해 낌새를 알아차린다고 해도 이미 모 든 일이 끝난 후일 것이오. 나는 이 일에 내 일생을 걸었는데 어 찌 헛점이 있을 수 있겠소." 미오랍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이 성공만 한다면...... 그 분께선 약속대로 반드시 장군 을 천하최강(天下最强)의 고수로 만들어 주실 것이오." "후후... 그 분이 살아계신데 어찌 천하최강이 될 수 있겠소?" "당신은 어찌 감히 그 분을 우리와 같은 인간의 범주에 넣으려 하 시오? 그 분은 세외천(世外天)에 존재하시는 살아계신 신(神)이라 는 걸 잊지 마시오." "......!" 사공천의 안색이 일순 무겁게 경직되었다. 그는 미오랍이 결코 과 장된 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내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후후... 인간은 신(神)을 인정할 때 가장 위대해지는 법이지요." 같은 시각. 백검우는 자신의 거처에서 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방문객 은 바로 동창태감(東槍太監) 경운형이었다. 경운형은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엄숙한 신색으로 말 했다. "방금 황제폐하의 밀지(密旨)가 계셨소이다." "기다리고 있었소. 말씀하시오." 백검우의 두 눈이 기이한 신광을 뿜었다. 경운형은 손을 들어 허공에 한 자 글을 그렸다. <사(死).> 황제의 마지막 용단을 전해들은 백검우의 눈빛이 무섭게 불타올랐다. "모두 말이오?" "......!" 경운형은 백검우의 강렬한 시선에 숨이 턱 막힘을 느꼈다. "물론이오. 서역사신은 물론 미오랍까지도......." "......." 백검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운형은 정중히 예를 표하더니 이내 종종걸음으로 물러갔다. 황제의 살생부(殺生簿)를 전해들은 백검우의 신색은 수차례 기이 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 방문 밖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밀환삼위, 보고드립니다." "말하라." "그들이 내일 새벽에 일을 도모할 듯 합니다." "새벽이라......" 백검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오늘 밤 안으로 모든 일을 끝내야겠군." 먹물을 뿌려놓은 듯 캄캄한 밤이었다. 검은 구름은 달을 삼켜버린 채 토해낼 줄을 모르고, 단지 서천(西 天)의 몇몇 성좌(星座)만이 귀광인 양 파르스름한 빛을 희미하게 흩뿌리고 있었다. 이곳은 황궁후원, 바로 순검옥으로 통하는 비밀통로의 입구가 있는 곳이었다. 스물...... 스물....... 사위에는 음습한 밤안개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때. 스스슷...... 바람에 실려왔는가? 미세한 파공성이 일며 오 인(五人)의 인물들이 황궁후원에 나타났다. 바로 백검우와 무장(武將)으로 변장한 도천문 휘하의 세 살수(殺 手),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경운형이었다. 스슥! 그들은 순검옥으로 통하는 비밀통로의 입구에 이르러 신형을 멈추었다. 백검우는 신형을 돌려 세우며 경운형을 바라보았다. "뒤를 부탁하오." "염려마시오." 경운형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백검우의 신형은 그대로 한 줄기 빛살이 되어 순검옥 입구로 쏘아 져 갔다. 세 명의 도천문 휘하 살수들도 즉시 뒤따라 신형을 날렸다. 휘리릭! 경운형은 백검우를 따라 멀어지는 세 명의 무장에게 시선을 고정 한 채 문득 나직한 독백성을 흘려냈다. "이상하군. 저 무장(武將)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나 경운형은 이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그가 고른 부하들이라면 의심할 필요가 없을 터...." 휘이잉.... 한 줄기 스산한 밤바람이 경운형의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다. 백검우는 불과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기 전에 비밀통로를 관 통하여 순검옥 안으로 잠입했다. 내부에는 여전히 칙칙하고 끈적끈적한 습기가 기분 나쁘게 사방을 휘어감고 있었다. 백검우는 곧장 아란대라마의 뇌옥 앞에 다가섰다. 아란대라마는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기척을 느끼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 "......!" 뒤얽히는 시선과 시선, 그들은 잠시간 서로 말이 없었다. 이윽고, 먼저 입을 뗀 것은 백검우였다. "귀하를 죽이러 왔소!" "......" 아란대라마는 묵묵히 백검우를 깊숙한 눈길로 응시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나." 철그렁! 백검우는 뇌옥의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안으로 들어섰다고 여겨지는 순간 그의 오른손은 이미 환상 처럼 섬광(閃光)을 그려내고 있었다. 번쩍! 아란대라마는 가슴에 불덩이가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 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비수(匕首)! 그의 심장부위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한 자루 비수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이내 시뻘건 핏줄기가 살점을 비집고 뭉쿨뭉클 새어나왔다. "으음...." 비로소 아란대라마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성이 토해졌다. 그는 백검우가 자신 앞으로 다가오는 걸 느끼며 서서히 의식을 잃 어갔다. 그러나 아란대라마는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늑골을 꿰뚫고 들어온 검날이 자신의 심장에 이르러 비스듬히 휘 어져 비켜나갔음을! 그것은 강호의 초절정 고수조차 감히 상상하 기 어려운 절묘한 수법이었다. 정확히 심장을 찔렀으되 아란대라마의 맥은 끊어지지 않고 희미하 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정확한 솜씨로군...." 아란대라마는 알아듣기 힘들만큼 나직한 한 마디를 뱉어냈다. 심 장으로부터 전해지는 엄청난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 백검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란대라마의 열여덟 군데 대경락을 번개같이 짚었다. 슉슉......! 순간 아란대라마의 안색이 서서히 밀납처럼 창백해지며 시신(屍 身)의 그것처럼 핏기를 잃어갔다. 이윽고 그의 사지는 힘없이 축 늘어졌다. 생사(生死)의 미로(迷路) 속에서 아란대라마의 몸은 다시 체온을 빼앗긴 채 눈자위가 허옇게 뒤집어 졌다. 그렇다.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시체였다. "......!" 백검우는 아란대라마의 심맥을 짚어 상태를 확인한 후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그를 들어 뒤에 시립해 있는 삼 인(三人)의 살수들에게 건넸다. 스스슥...... 이윽고 백검우 일행은 연기처럼 소리없이 순검옥을 빠져나가기 시 작했다. 정확히 다시 일다경이 지났을 때 일행은 순검옥을 빠져나와 기다 리고 있던 경운형의 앞에 도착했다. "시신을 내려놓아라." 백검우가 명령을 내리자 무장으로 변장한 세 살수가 즉시 경운형 의 앞에 아란대라마를 내려놓았다. 경운형은 날카로운 신색으로 아란대라마를 내려다보았다. 백검우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시신을 확인해 보시겠소?" "......." 경운형은 사실 황제에게서 아란대라마가 확실히 시체로 변했는지 를 확인하라는 명을 받아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심장 가운데를 정확히 관통한 채 꽂혀 있는 비수를 보고 어찌 의심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묵직한 침음성을 흘려내었다. "장군께서 이미 확인하셨을테니 그럴 필요야 없겠지요...." 이어 그는 백검우를 향해 입을 떼었다. "시체를 은밀히 없애 버리면 모든 일은 완료되오. 이제 영무좌장 군 사공천을 제거하는 일만이 장군에게 남았소이다." "......!" 백검우의 눈가에 일순 은은한 신광이 내뻗쳤다. "내일 아침이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오." "믿겠소. 그럼 이만......!" 경운형은 백검우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보낸 뒤 몸을 날려 사라져갔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기가 무섭게 백검우도 수하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가자." 스스슥...... 장내는 곧 먹물같은 어둠과 함께 기괴한 정적만이 남았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 아직은 사위가 어둑어둑한 이른 새벽 무렵. 곧게 뻗은 대로(大路)에는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이 황량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만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을 뿐....... 잠시 후 그 대로(大路) 위로 희뿌연 새벽의 여명이 깔리기 시작할 때였다. 두두두...... 두두두두...... 홀연, 굉량한 말발굽 소리가 일며 일단의 인마(人馬)가 대로상에 나타났다. 삼십여 기를 헤아리는 인마, 그리고 그 뒤에는 끝이 뾰족한 거대한 철주를 실은 수레가 따르고 있었다. 철주(鐵柱). 말이 철주지 그 크기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을 실은 수레의 통나무 바퀴가 여덟 쌍이고 그것을 끄는 말 (馬)의 수가 이십여 필이 넘었다. 그렇다. 거대한 철주는 바로 순검옥의 거대한 철문을 열기 위해 준비된 것 이었다. 인마들의 선두에는 화려한 장군복을 걸친 한 인물이 위풍당당하게 말(馬)을 몰고 있었다. 사공천이었다. 그의 뒤로는 미오랍과 오이야극이 역시 말을 몰고 있었다. "......!" "......!" 모두 긴장된 안색으로 말이 없었다. 두두두! 뿌연 황진을 말아올리며 인마와 수레는 계속 달려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황궁 반대편의 현무대로였다. 또한 그곳은 순 검옥의 입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문득, 달리는 마상(馬上)에서 미오랍이 사공천에게 물었다. "얼마나 남았소?" "곧 당도할 것이오." "나는 설마하니 장군이 이런 방법을 쓸 줄은 상상도 못했소." "후후... 이미 순검옥의 경호무사들은 내 명령에 의해 정문쪽 경 비를 완전히 거의 비워둔 상황이오. 열쇠로 순검옥의 철문을 열려 면 무려 다섯 단계의 과정과 열 명의 부장(副將)들을 거쳐야 하는 터, 한 시진 내에 순검옥의 철문을 열고 아란대라마를 꺼낼 방법 은 이것밖에 없소!" "......!" 미오랍은 안색을 침중히 굳히며 나직이 뇌까렸다. "성후준이라는 자만 아니었어도 시일을 두고 좀더 안전한 방법을 강구할 수 있었을 것을...." 사공천이 두 눈을 무섭게 빛내며 그의 말을 끊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오. 혜운공주에게서 비밀통로를 알아내지 못한 이상 어쩔 수 없소." "혜운공주는...." 미오랍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돌연 눈을 부릅 떴다. 그는 갑 자기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경련하며 전방을 가르켰다. "저 자는 혹시...?" "......!" 사공천의 안색이 일순 화강암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오십여 장 전방, 일기(一騎)의 인마가 마악 솟아오르는 태양의 광휘를 뒤로하고 느 릿하게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사공천은 우수를 치켜들어 행렬을 멈추 게 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인마와 수레는 일제히 굉음을 내며 정지했다. 따가닥...... 따가닥...... 새벽공기 속에 느릿한 말발굽 소리가 고적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마상(馬上)의 인물이 점차 가까워지면서 일목요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에서 태산이라도 짓누를 듯한 초극강의 패도적인 기운이 불길 처럼 용솟음쳐 나오는 모습일진대.... 그렇다. 바로 백검우가 아닌가! 사공천은 도무지 이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저 놈은 대체...?' 그를 더욱 당혹케 하는 점은 백검우가 이 순간 어령군상장군의 정 식복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핏빛의 붉은 전포, 양 옆구리에 한 자루 장검과 장도를 비껴찬 모 습, 또한 그가 타고 있는 말의 앞머리에는 십자(十字)형의 금색 띠가 둘러져 있었다. 이윽고 백검우는 사공천의 삼 장 전면에서 멈춰섰다. "음......!" 사공천의 눈꼬리가 파르르 잔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애써 심중을 추스리며 백검우에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필요없는 질문을 하는군." 백검우는 무감동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공천, 이미 모든 일은 끝났다. 순순히 항복하라." 일순 사공천의 안면근육이 일그러지며 신음성같은 짤막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크흣! 귀하야말로 필요없는 말을 하는군. 우선 귀하를 죽인 후에 생각해보지." 스릉!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장검을 뽑아들며 백검우의 미간을 겨냥 했다. 살기를 머금은 새파란 검기가 그의 검신에서 줄기줄기 뿜어졌다. 백검우는 입가에 한 가닥 냉오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하지만 그대에겐 아무런 선택의 기회도 없다." 동시에 그는 한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다음 순간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두두두-- 두두! 두두두두! "와아아아...!" 천지를 함몰시킬 듯한 굉량한 함성과 말발굽 소리! 동시에 사공천의 행렬 양측으로 뻗은 길에서 백여 기의 군마가 돌 풍처럼 휘몰아쳐오는 게 아닌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바로 백검우 휘하의 황궁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가공스런 기세에 미오랍 등은 혼비백산하여 경악성을 터뜨렸다. "마, 막아라!" "오른 쪽이다!" 허나 그 외침성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번-- 쩍! 파츠츠츠츳! 살기(殺氣)를 품은 백여 가닥의 엄청난 검기가 허공 중에 작렬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끄악!" 처절한 비명성들이 꼬리를 물고 새벽의 정적을 뒤흔들었다. 사방에서 자욱한 피보라가 피어오르고.... 본래의 위치를 이탈한 목과 팔다리들이 놀라 요동치는 말발굽아래 짓밟히기 시작했다. 번-- 쩍! 츠츠츠츳! 사공천과 미오랍의 부하들은 완전히 넋이 나간 채 거의 본능적으 로 반격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이미 기세가 완전히 꺾인 후였다. 백검우의 휘하 황궁고수들의 장검에서 검화가 피어오를 때마다 어 김없이 참담한 비명성과 핏덩이가 튀어올랐다. "흐아악!" "커억!" 그것은 거의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사공천과 미오랍, 그리고 오이야극만이 제 위치를 사수하며 사나운 공세를 펼치고 있을 뿐. '끝장이다!' '이렇게 허망하게 당할 줄이야...!' 미오랍과 오이야극의 얼굴에 절망과 분노의 빛이 드리워졌다. 그 순간 미오랍은 목 뒷부분에 화끈한 충격을 느꼈다. '흐윽!' 더 이상 커질 수 없을만큼 확대된 미오랍의 눈에 자신의 목을 관 통하고 앞으로 빠져나온 칼자루가 보였다. 피우욱! 미오랍의 목이 피분수를 뿌리며 떨어지는 것을 본 오이야극의 얼 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이놈들! 모조리 죽여 버리...." 그의 처절한 외침성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세 자루의 검날이 그 의 등과 옆구리에 한꺼번에 파고든 때문이었다. 미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다시 두 자루 검날이 날아와 그의 목과 오른팔을 동시 에 절단해버렸다. 털썩.... 오이야극이 썩은 고목처럼 마상(馬上)에서 굴러떨어지는 것과 때 를 같이해 주위엔 갑자기 고요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사공천. 그는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멸(全滅)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시체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수하들의 주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짙은 회한(悔恨)과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타오르는 분노로 인해 그의 살이란 살은 모조리 문풍지처럼 떨리고 있었다. "으으......." 사공천은 입술을 악다문 채 서서히 백검우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 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광기(狂氣)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흐흐... 네놈이 끝내 나의 발목을 잡고 마는구나." "......" 백검우는 형형한 안광이 서린 눈길로 사공천을 직시했다. "그대가 왜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알려고 하지 마라...." 사공천의 두 눈은 암천을 가르는 뇌광(雷光)처럼 무섭게 이글거렸다. "그것이 네 꿈자리를 위해 좋을 것이다." "......!" "내 계획을 알고 있었다면 이미 내 가족들도 네놈의 수중에 들어갔겠군." "사공천. 네 가족을 염려한다면 장군답게 스스로 최후를 장식해라." 백검우의 무심한 한 마디. 순간 당장 공격할 자세를 취하던 사공천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무슨 뜻이냐?" "천검수신결(千劍修身決)로서 황제께 사죄할 기회를 주겠다는 뜻 이다. 따른다면 그대의 가족은 내가 책임지고 살려줄 것이다." "천검수신결......!" 사공천의 안색이 일순 수차례 복잡한 변화를 일으켰다. 천검수신결. 그것은 장수가 황제에게 죄를 범했을 경우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자결의 방법이었다. 그 방법은 일천 명의 고수들이 펼친 검진(劍陣)을 오직 방어만 하면서 통과하는 것이었다. 만약 끝까지 통과를 하지 못하고 죽을 경우 면죄부를 얻지 못하고 영원히 대역죄인으로 낙인찍혀서 그 가족까지 모조리 죽임을 당하 게 된다. 그러나 성공한다면 장수로서의 명예로운 죽음을 얻을 수 있었다. 사공천. 그는 한참만에야 깊은 장탄식을 발하더니 수중의 검을 아래로 떨구었다. "내 일생은 야망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서 야 그 야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깨달았다...... 설령 단 칼에 태산을 베는 능력을 얻는다 해도 한 가닥 정(情)을 끊어버리 지 못하는 것을......." "......!" "그대의 호의는 죽어 고혼(孤魂)이 되어서라도 갚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사공천은 말에서 내려 차가운 땅 위에 정좌의 자 세로 앉았다. 이어 그는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열 번의 절을 올린 후 다시 말에 올랐다. 백검우는 깊숙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대의 명복을 빈다." 이어 그는 휘하 황궁 고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백여 기의 군마들은 중앙에 일기의 인마가 빠져나갈 정도 의 틈을 남기고 양측으로 물 갈라지듯 도열했다. 사공천은 잠시동안 백검우를 응시했다. 이어 그는 이를 악물더니 힘있게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이럇!" 두두두...... 사공천을 태운 말은 미친 듯이 양측으로 도열해 있는 군마(群馬) 사이로 질주해 갔다. 도열해 있는 기마대는 그가 진입해 오자 그 자세 그대로 수중의 검을 격발시켰다. 번쩍! 번쩍! 츠츠츠츳! 가공스런 검기의 해일이 사공천의 몸을 수천, 수만으로 잠입해 들 었다. 사공천은 이를 악물며 혼신의 내력을 끌어올려 검을 난무시켰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공격이 아닌 방어일변도의 검세일 뿐이었 다. 만약 잘못하여 단 한 명이라도 살상시킨다면 천검수신결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었다. 카카카-- 카앙! 파파파팟!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무리가 치솟았다. 번-- 쩍! 엄청난 검기(劍氣)의 군(群)이 허공 중에 명멸(明滅)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그 무시무시한 검류가 거짓말처럼 일시에 소멸되었다. '성공이다...!' 사공천은 도열한 군마를 완전히 빠져나온 채 처참한 몰골로 쓰러 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미 그의 말은 죽어 나자빠진 지 오래 였고, 그의 장포는 걸레처럼 갈가리 찢겨져 나간 채 무수한 칼자 국에서 배어나온 피가 대신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혈인(血人)....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일진대.... 그런 사공천의 등 뒤 땅바닥에는 검진을 통과하면서 흘러내린 피 가 긴 그림자처럼 이어져 있었다. 털썩! 사공천은 힘없이 무릎을 꺾었다. "이것이...... 나 사공천의...... 최후인가...." 그는 공허한 시선을 들어 힘겹게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돌연 그의 입에서 처절한 단말마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동시에 그의 장검이 현란한 빛을 뿌렸다. 푸욱! 장검은 정확히 사공천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등 뒤로 삐져나왔다. 피보라가 일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쿵...! 사공천의 몸은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 품어졌던 야망(野望)과 함께.... "......" 백검우는 사공천의 시신을 내려다 보며 탄식했다. "무황야로 인해 또 한 명의 인재가 죽었군." 그는 천천히 말을 돌려 세운 후 도열해 있는 기마대를 향해 우수를 치켜들었다. "철수한다!" 히히히힝! 말울음 소리가 길게 울리고, 두두두.... 두두두두! 백검우를 포함한 백여 기의 군마는 뿌연 황진을 일으키며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 그들이 사라지고 난 장내에는 삼십여 구의 시체들과 비릿한 혈향 (血香)만이 남아 있었다. ■ 일로제검 제2권 15장 세월은 말이 없으나...... ━━━━━━━━━━━━━━━━━━━━━━━━━━━━━━━━━━━ 병영(兵營)에는 깃발(幡)이 있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황궁과 지척거리에 있는 오군영 우도독부(五軍營 右都督 府)라면 금색 수실이 찬란한 깃발이 내걸려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참으로 기이하게도 이곳 우도독부 병영에는 단 하나의 깃 발도 없었다. 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천하병권(天下兵權)의 핵심으로 삼엄한 군기(軍氣)를 뿌려야 할 오군영(五軍營) 중의 우도독부(右都督府)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 났는가? 깃발조차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기치창검(旗治槍劍)의 군위(軍威) 와 군기(軍氣)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있을 리 없었다. 그 대신 우도독부를 가득 채운 것이 있었다. 번쩍이는 기치창검과 군막(軍幕) 대신 잘 조화된 수림과 화원(花 園)이 자리하고 있었고.... 수직군사(守直軍士)들은 예리한 눈빛 대신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 으로 오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오군영 우도독부의 분위기는 여타 다른 군영과는 확연히 다른 면 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오직 한 사람, 이곳 오군영 우도독부의 주인(主人) 때문이었다. 헌양대장군(軒陽大將軍) 하현극(夏賢極). 바로 그였다. <군(軍)은 곧 민(民)이다.> 그것이 헌양대장군 하현극의 치군철학(治軍哲學)이었다. 때문에, 그의 군사는 평화시(平和時)엔 민(民)의 마음(心)으로 민 (民)의 행동(行動)을 하고....... 전쟁시(戰爭時)엔 군(軍)의 마음과 행동으로 일기당천(一騎當千) 의 용병(勇兵)이 되는 것이다. 때는 정오(正午) 무렵. 두두두두......! 한 떼의 기마대(騎馬隊)가 황진을 일으키며 오군영 우도독부를 향해 질주해왔다. 이히힝......! 기마대는 오군영 우도독부 군문(軍門)에 이르러 일제히 질주를 멈 추었다. 그야말로 하나같이 고절한 기마술(騎馬術)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군문 안에서 한 인물이 황급히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사순 정도의 위맹한 모습을 한 장교복색의 무관(武官)이었다. 그를 본 기마대의 선두 인물이 담담한 일성을 발했다. "나는 어령상장군(御令上將軍) 성후준(成厚俊)이다." 마상(馬上)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인물은 다름아닌 백검우였다. 우도독부의 무관은 극히 경건한 신색으로 창황하게 군례(軍禮)를 이루었다. "속하 우도독부 내수별장(內守別將) 금종하(金鍾河)...... 어령상 장군을 배견합니다." 이어 시선을 든 그는 조심스럽게 백검우를 살폈다. '인중지룡(人中之龍)이 따로 없구나!' 내수별장 금종하는 백검우의 뛰어난 풍도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백검우는 넋을 놓고 있는 금종하를 향해 담담한 미소를 던졌다. 일순 금종하는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급히 궁신(弓身)을 했다. "대장군께선...... 진작부터 상장군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라." 백검우는 말에서 내려선 후 금종하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겼 다. 그의 얼굴에 문득 기이한 이채가 빠르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모를 일이군...... 헌양대장군이 나에게 볼일이 있다니.......' 그렇다. 원래 그는 사공천의 일을 끝낸 직후 은밀히 우군대도독 헌양대장 군 하현극의 초청을 받은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아직은 그저 의문일 뿐이었다. 우군도독부의 제일 깊숙한 내지(內地)에 자리한 한 칸 정실, 바로 우군대도독 헌양대장군 하현극의 거처였다. 정실의 분위기는 우군도독부의 전체 분위기와 같이 담백하기만 했다. 별다른 장식은 보이지 않고 유독 정실의 중앙 벽에 걸려 있는 사 방 열 자 크기의 거대한 초상화 한 폭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리고, 탁자를 마주하고 두 개의 태사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노인은 바로 그 태사의 중 하나에 지극히 평온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은빛 평복(平服)을 입고 있는 육순 정도의 신태비범한 이 노인은 말할 것도 없이 바로 헌양대장군 하현극이었다. 이 순간 그의 눈길은 맞은편의 비어있는 태사의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더니 백검우가 금종하의 안 내를 받으며 정실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게. 성장군." 헌양대장군 하현극은 반색을 하며 백검우를 맞이했다. 백검우도 예를 취해 인사에 답했다. "오랜만입니다. 하대장군!" 이어 그들은 수인사(修人事)를 나누며 자리에 좌정했다. 헌데 어인 까닭인가? "아...." 백검우는 하현극이 권하는 태사의에 앉기가 무섭게 나직한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바로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예의 거대한 초상화 때문일진대.... 눈의 착각인지 백검우는 마치 초상화 속의 인물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비단 살아있을 뿐 아니라 자신을 뚫어지게 정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로 대단한 풍모로구나. 저 초상화 속의 노장군은 대체 누구일까?' 그렇다. 초상화에는 한 필의 순백색 백마(白馬)를 탄 백발의 노장군(老將軍)이 그려져 있었다. 백검우는 하현극의 존재도 잊은 채 점점 더 초상화 속으로 빠져들 었다. 그의 뇌리 속에선 그 순간 초상화 속의 노장군이 용맹을 떨 치는 장면이 현실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힘차게 내딛는 백마의 네 말굽은 땅을 박차고....... 지축은 멋대로 뒤흔들린다. 휘류르릉......! 수천수만의 말갈기털이 노장군의 백발과 함께 폭풍같이 휘날리고....... 포효하는 장군의 부릅뜨여진 두 눈에선 대지(大地)를 단숨에 쪼갤 듯한 안광이 뿜어져 나온다. 차라리 그것은 혼돈의 세상을 호령하는 하늘(天)의 질타성인가? 노장군은 그렇게 살아 있었다. 금세라도 화폭을 박차며 십팔만리(十八萬里) 중원천하를 향해 뛰 쳐나올 것과도 같이....... 초상화 속에서 노장군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렇다. 백검우는 초상화를 통해서 일세(一世)의 한 위대한 영웅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하현극은 기이한 신색으로 묵묵히 그런 백검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다. 좌태승(左太乘) 장군의 초상화에 저토록 매료한 인물은.......' 그렇다. 초상화 속의 노장군은 원래 석년 하현극이 사형을 집행했던 당대 의 영웅 좌태승이었던 것이다. "초상화가 마음에 드는가?" 문득 하현극의 입에서 흘러나온 조용한 일성이었다. 백검우가 그제서야 초상화에서 눈을 떼며 하현극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마음에 들다 뿐이겠습니까. 제가 잠시 결례를 한 듯 하군요." "허허... 괜찮네." "소장(少將)을 부르신 무슨 연유라도 있으신지요?" 하현극은 담담한 미소를 보였다. "그저 장군과 흉금없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네." "......" 백검우는 내심 기이한 심정이었으나 담담한 미소로 그에게 화답했다. 하현극은 빙그레 웃으며 예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성장군은 저 초상화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으니 우선 그 이야기부터 나누세." "글쎄요......." 백검우는 다시 초상화에 시선을 가져가며 진심으로 말했다. "저 초상화의 주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말씀을 드리기가 어 렵습니다. 우선 가르침을 내려 주시지요." "그래... 무엇을 알고 싶은가?" "대장군과는 어떤 관계로 맺어진 분입니까?" "......." 하현극의 두 눈으로 얼핏 진한 감회의 그늘이 서렸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라네...." "......." "내가 직접 저 어른을 처형했네." 하현극의 음성에는 무한한 회오(悔悟)의 기운이 역력히 깔려 있었 다. 감회에 젖어 잠시 침묵하던 그는 격동을 추스리며 말을 이었다. "저분은 천광대장군(天光大將軍) 좌태승 어른일세." "아......!" 백검우의 얼굴에 순간 경이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이제보니 바로 원(元) 최후의 대장군이자 대원 역사상 가장 뛰어 난 용장(勇將)이었던 천광대장군이었군요!" 그가 어찌 좌태승의 이름을 모를 리 있겠는가? "......" 하현극은 문득 노안 가득 은은한 신광을 떠올리며 백검우를 똑바로 주시했다. "좌태승 대장군은 최후의 순간 본인에게 한 가지 유품(遺品)을 남기셨네." "......! "그 분은 그 유품을 내 의중(意中)에 든 인물에게 전하라고 유언하셨다네." "그랬었군요......." 백검우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하현극의 두 눈이 은은한 신광을 뿜었다. "나는 성장군에게 그 유품을 전하기로 결심했네." "......!" 일순 백검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장군,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사실 성장군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일을 생각해왔네." 하현극은 신색을 고쳐 잡으며 깊은 눈길을 했다. "그 이유는 성장군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 분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일세." "......!" "거절할 생각은 하지도 말게. 오직 성장군만이 그 분의 유품을 받을 자격이 있네." 하현극의 신색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백검우는 저으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장군, 소생으로선 감당키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하현극은 엄숙하게 신색을 가다듬었다. "그 분은 내 나이가 오십이 지난 후에 유언을 실행해 달라고 당부 했었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자네는 내가 오십 세를 넘어선 지 불과 일주일만에 친전무회에 나타났었지...." "......" "오십이라는 나이는 어느 정도 심안(心眼)을 뜰 수 있는 나이라 네.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안배해 준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현극은 품 속에서 한 개 옥함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바로 이것이 좌태승 대장군의 유품일세."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백검우는 어쩔 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옥함을 받아들고는 조심스럽 게 뚜껑을 열었다. 속에는 한 자루 묵죽모필(墨竹毛筆)이 들어 있었다. 어찌보자니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모필이었다. "......" 백검우는 손을 뻗어 묵죽모필을 집어 들었다. 일순 그는 무엇인가 거대한 무형의 기운이 그의 양 어깨를 누르는 기분을 느꼈다. '아...!' 그것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기이로운 느낌이었다. "나는 이제야 비로서 큰 짐을 덜었네...." 하현극은 만감이 교차하는 신색이었다. "묵죽모필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 예상이 맞 는다면 필시 엄청난 내력이 숨어 있을 것이네." "......!" "성장군은 틀림없이 그 묵죽모필에 담겨진 의미를 알아내리라 믿네." 하현극의 말을 들으며 백검우는 자신도 모르게 묵죽모필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 얼마 후 백검우는 하현극의 우군도독부를 떠났다. 묵죽모필의 의문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그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좌태승과 이어지는 그 운명의 끈이 가져올 엄청난 미래를....... 운명(運命). 그가 묵죽모필을 잡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運命)이었다. 사천성(四川省) 무릉협(武陵峽). 핏빛 석양(夕陽)이 서천(西天)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무릉협은 온통 험준하고 날카로운 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로 이루어진 험지였다. 너무도 황폐하고 메말라 나는 새조차 살지 않는 사지(死地). 허나...... 이곳에도 생명(生命)은 존재했다. 그들은 바로 인간이었다. <혈성보(血星堡)> 그렇다. 당금 천하에 공포적 귀명(鬼名)을 날리는 혈성보가 바로 이곳에 일좌해 있었다 후우우우웅...... 휘우웅...... 삭풍(朔風)! 뼈를 저리는 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무릉협의 석평(石平) 위. 수백 장 넓이의 광대한 석평 위에는 이 순간 거대한 살기(殺氣)가 용트림하고 있었다. "......!" "......!" 수백 대의 시커먼 철갑마차(鐵甲馬車)와 이천여를 헤아리는 기마 대(騎馬隊)의 도검수(刀劍手)들......! 실로 엄청난 위용이 아닌가! 그 선두, 전신에 먹빛 흑의를 걸친 창백한 인상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섬뜩한 기도....... 그것은 장내에 몰아치는 삭풍보다 더 차가웠다. 그는 바로 관청우였다. 관청우. 그의 깊숙한 잿빛 눈동자에는 이 순간 시퍼런 마화(魔火)가 일렁이고 있었다. 돌연. "와핫핫핫...... 나의 혼(魂)들아......." 관청우의 입에서는 발작적인 앙천대소가 섬칫하게 터져 나왔다. "현백검장은 이 관청우가 접수한다....... 내 오늘을 기다리고 참아왔다!" 파앗! 섬영(閃影)이라고나 할까? 관청우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중앙의 한 거대한 철갑마차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동시, 쿠구구궁......! 오오...... 지진이 일어나는가. 거대한 석평이 일시에 진동을 일으키며 비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두!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해일이었다. 수백 철갑마차의 이천여 기마도검대가 일제히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기세로 무릉협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으핫핫핫...... 만고의 진리가 아니던가? 영웅은 소유(所有)함으 로써 강해지고 파괴시키는 것으로 창조를 낳는 법, 으핫핫핫......!" 무릉협을 진동하며 멀어져가는 관청우의 앙천광소. 그렇다. 그것은 평온하던 무림천하(武林天下)를 대혈겁(大血劫) 속으로 몰 고 가는 하나의 불씨였다. 오오....... 그 불씨는 다른 곳에서도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으니....... 청해성(靑海省) 마문평(馬門坪). 바로 천마장(天魔莊)이 위치한 무림금지(武林禁地)였다. 거대한 기련산의 험준절봉을 뒤로 한 천마장의 위용을 대체 어찌 형용할 것인가. 이 순간. 천공(天空)을 뚫고 치솟은 대소전각 천마장의 앞 마문평에는 도검 (刀劍)의 해일이 일렁이고 있었다. 보라! 일천 기(騎)의 기마도검살수대(騎馬刀劍殺手隊)! 오오....... 지옥(地獄)의 유혼(幽魂)들처럼 음울한 잿빛 회의(灰衣)를 걸친 그들이 장엄한 기세로 도열해 있었다. 쿠구구궁....... "......." 철갑기마대 선두에는 한 사람, 천마장의 소장주인 남궁위가 백설(白雪)보다 흰 백마(白馬)에 천 상공자(天上公子)처럼 유유롭게 앉아 있었다. 무서운 심기와 계모로 명성을 떨쳐온 남궁위. 그가 마상에서 일천 기마도검살수대를 굽어보며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점점 짙어지더니 자욱한 살기로 변해 그의 얼굴 전체로 확산되었다. "관청우, 맹물처럼 싱거운 친구에게 현백검장을 빼앗길 수는 없지. 후후후......" 그의 전신에서 무형의 가공할 살류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천마장의 위대한 무혼(武魂)들이여!" 돌연 그의 입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대갈성이 진동했다. "무림(武林)이란 살오른 처녀와도 같은 것이다! 재빨리 잡아먹지 않으면 계집은 한눈을 팔고 마는 법(法)! 가자! 첫 제물은 현백검장의 백검우다!" 순간. "천마장진위천하(天魔莊辰威天下)!" "소장주 만세!" "와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기련산의 천공을 뒤흔들었다. 오오...... 모두가 도검(刀劍)을 하늘 높이 쳐든 채 저주스런 투혼을 불사른다. 두두두두두! 쿠구구구쿵...... 지옥에서 불어온 죽음의 회오리처럼....... 야천(夜天)에서 눈부시게 일선을 그리는 유성(流星)처럼....... 남궁위의 일천기마도검대가 마문평에서 중원의 심장부인 악양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늘(天)도 다가올 혈난을 예측했는가. 후우우웅...... 태양(太陽)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시커먼 구름이 천공을 뒤덮었다. 오오....... 중원무림의 운명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무림(武林)은 벌컥 뒤집어졌다. 장강(長江)의 유유로운 물결처럼 평온하던 무림에 던져진 하나의 엄청난 충격파 때문이었다. - 혈성보(血星堡)와 천마장(天魔莊)이 형체를 드러내고 현백검장 으로 쳐들어 온다! - 십 개 흑도문파가 혈성보와 천마장에 동조했다! 그렇다. 현백검장은 졸지에 바람 앞의 등불격이 되어 버렸다. 허나 무엇 때문인가? 위기의 순간 속에서도 현백검장은 의외로 조용하기만 했다. 마치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 없는 남의 일이라는 듯...... 대체 현백검장, 아니 백검우가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대강남북 천하무림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백검장에 집중되었다. 시간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 금릉은 근래 며칠간 성후준에 대한 화제로 떠들썩했다. 말할것도 없이 그 이유는 영무좌장군 사공천이 성후준에 의해 제 거된 사실 때문이었다. 성후준이라는 석 자 이름은 단연 젊은 무반들 사이에서 태양처럼 떠올랐다. 항간에는 성후준이 곧 상장군에서 대장군(大將軍)으로 부상하리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허나....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무랑 성후준. 그가 바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기에 처한 현백검 장의 대장주 백검우라는 것을. 혈성보와 천마장이 현백검장을 향해 쳐들어가고 있는 그 무렵. 백검우는 성화거장의 소화각에서 한 인물과 마주앉아 있었다. "장주...... 이제 상황은 급박합니다. 현백검장에서는 장주께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엽거촌장 철우환의 얼굴은 황촉불 탓인지 붉은 기운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오." 백검우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철우환은 화강암처럼 완고하게 굳어진 신색으로 말을 이었다. "결국 이번 일로 무림은 현백검장의 힘은 만천하에 공개되고 말 것입니다. 이번 일로 무황야가 장주님을 경계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그 보다 아란대라마는 악양에 당도했소?" "거의 당도했을 것입니다. 송칠만이라는 인물이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습니다." "음......!" 백검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상념에 잠긴 채 침묵하더니 한참만에야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곧 현백검장으로 떠날 것이오. 관청우와 남궁위를 실망시킬수는 없는 일...." "알겠습니다. 속하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철우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예를 취했다. 그의 모습은 이내 한 줄기 연기로 변해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 일로제검 제2권 16장 불타는 대지(大地) ━━━━━━━━━━━━━━━━━━━━━━━━━━━━━━━━━━━ 불(火). 거대한 불덩이가 눈 앞에 떨어지고 있었다. 천마장과 혈성보가 일으킨 가공할 불덩이는 이제 불과 현백검장으 로부터 이백리 거리까지 날아들었다. 악양은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허나 악양성 사람들은 결코 두려워 하거나 동요의 기색이라곤 손 톱만큼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현백검장.> 바로 그 이름을 굳게 믿기 때문이었다. 악양의 살아있는 절대신화(絶代神話)요, 수호신(守護神)인 현백검 장이 무너지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현백검장이 언제 그들의 믿음에 한 번이라도 실망을 안겨준 적이 있었던가? 믿음. 그것은 천하에서 가장 확실한 믿음이었다. 밤(夜). 창백하도록 밝은 달빛이 내리는 그런 겨울밤이었다. 악양의 수호신인 현백검장에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 들었다. 사위는 쥐죽은 듯한 정적만이 깔려 있었다. ...... 도천문. 백검우의 모습으로 변장한 그는 태화거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창 (窓)을 통해 스며드는 야색(夜色)은 점점 더 짙어진다. "음......" 문득 도천문은 나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오늘쯤...... 장주님이 도착하시리란 전갈이 있었는데......." 바로 그때였다. 살랑! 탁자 위의 황촉불이 미미한 움직임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림자 하나가 유령같이 형체를 드러냈다. 스스스....... 순간 도천문은 반색의 탄성을 발하며 급히 깊숙한 예를 취했다. "장주님!" "하하......!" 백검우는 낭랑한 웃음으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도부주, 그동안 수고했소." "이몸은 그저 장주님의 분부를 따랐을 뿐입니다." 이어 도천문은 변골공을 운용하여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백검우는 등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물었다. "그동안 어려운 일은 없었소?" 도천문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없었습니다. 단지 하련 아가씨를 피하느라 고 심하였을 뿐입니다." 담담한 어투의 대답이었다. 허나 백검우는 익히 그동안 있었던 도천문의 곤욕을 짐작할만 했다. '하련......!' 백검우는 내심 고소를 날렸다. "후후...... 하련이 입술이 한 자 정도는 빠져 있겠군......." 도천문은 은근한 어투로 말했다. "그정도가 아닙니다. 장주님께선 단단히 각오하시지 않으면 큰 낭 패를 보게 되실 것입니다." 이어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나직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하하......." 백검우와 도천문은 그동안 지난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다 문득 백검우는 안색을 진중히 하여 물었다. "도부주, 금릉에서 온 손님은 어찌 되었는가?" 아란대라마의 일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도천문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가장 은밀한 곳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에 관한 일은 장(莊)내에서 오직 속하만이 알고 있습니다." "음......!" 백검우는 잠시 무슨 염두인가를 굴린 후 말문을 열었다. "천마장과 혈성보의 동태는?" "앞으로 만 하루 정도면 악양성 십 리 밖까지 밀려들 것입니다." "인원은?" "보고에 의하면 대략 일천오백(一千五百)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천오백이라......." 백검우의 두 눈이 반짝 기광을 뿌렸다. "놈들이 악양성에 도착할 땐...... 적어도 칠, 팔백의 시체를 남기게 되겠지......." 의미심장한 독백성이었다. "......?" 도천문은 의아하여 급히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본 장주는 이미 철노야를 제외한 두 분 노야께 지시를 내려 두었소." "......!" "놈들의 예기(銳氣)가 본장을 향해 있는 사이 두 분 노야가 놈들의 배후를 칠 것이오." 그렇다. 백검우는 이미 매복지계를 펼쳐 두었던 것이다. "아......!" 도천문은 나직한 감탄성을 발했다. 백검우의 두 눈에서 형형한 신광이 폭사되었다. "나는 이번 기회를 빌어 무림대의(武林大義)가 어떤 것인가를 똑똑히 보여줄 것이오." "......!" 도천문은 전신의 피가 일시에 뜨겁게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백검우는 천천히 등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부주! 소림(少林)을 위시한 오파일방(五派一幇)에서는 이번 일을 어떻게 보고 있소?" "그들은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방관이라......." "확실한 것은...... 그들이 본장에 대해 결코 적의(敵意)를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그들의 체면을 세워주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백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일이란 왕왕 예외를 부르는 법. 계속 오파일방의 동태를 예의 주시토록 하시오." 이어 그는 힘있는 어조로 영(令)을 내렸다. "서둘러 천하무림에 본장의 방침을 포고(布告)토록 하시오." 도천문은 흠칫 안색이 굳어졌다. "포고라 하심은?" "내일 새벽을 기해 악양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封鎖)한다고!" "알겠습니다." "또한 본장의 전 제자들은 금후 닥칠 대회전(大會戰)을 위한 만반 의 태세를 갖추도록 이르시오." "즉시 이행하겠습니다." 도천문은 깊숙이 예를 취하더니 이내 문 밖으로 사라졌다. 도천문 이 본래 모습으로 나갔으니 그 다음 일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백검우가 돌아온 것을 안 검영과 웅비, 그리고 사라가 한꺼번에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장주님!" "형(兄)!" 모두가 기쁨에 겨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백검우는 그들의 인사를 차례로 받으며 쓴 미소를 지었다. "후후... 누가 보면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줄 착각하겠구나." 허나 비록 말은 그렇게 했어도 백검우의 마음 속에는 봄날 아지랑 이같은 훈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검영...... 웅비... 사라....' 모두가 백검우의 또 다른 목숨과도 같은 얼굴들이 아니던가. 특히 백검우는 검영을 품에 안으며 내심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 검영은 예전과는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늠연한 대장부의 기개까지 물씬 풍겨주는 것이 아닌가. 검영이 치루었던 한 차례의 혈전(血戰). 그 사건이 검영을 이토록 성숙하게 변모시킨 것이었다. "하하하...!" 방 안에선 백검우와 백검영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 태화거의 밤은 야공(夜空)의 창백한 달빛과 달리 훈훈한 정(情)이 넘치는 가운데 깊어져 갔다. 한 칸 밀실(密室), 은밀하면서도 아늑한 기운이 흐르는 밀실이었다. 방 안의 한 켠에는 깨끗한 천이 깔린 침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침상 위에는 한 사람. 그는 마치 돌부처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약간 초췌한 얼굴에 가슴 부위는 흰 천으로 칭칭 동여매어진 모습일진대.... 깊숙한 두 눈으로 신비롭게 흘러나오는 눈빛이 마치 대해(大海)의 심연(深淵)을 연상케 한다. 그는 바로 아란대라마였다. "......" 아란대라마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문득 밀실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인영 하나가 들어섰다. "......!" 아란대라마는 들어선 인물을 대하며 약간 의외로운 눈빛을 했다. 허나 그는 이내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둔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밀실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백검우였다. "안녕하셨소?" 백검우는 아란대라마를 향해 담담한 인사를 치루었다. 그 음성을 들은 순간 무표정하던 아란대라마의 눈빛이 파랑을 일으켰다. "낯익은 음성이로군. 바로 자네였던가..." 비로소 아란대라마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 백검우를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다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새삼 경이로운 눈길로 백검우를 자세히 응시했다. "상장군 성후준... 자네가 이 현백검장의 장주라고는 미처 짐작못했네." 잠시 사이를 두고 그는 뚫어지게 백검우를 정시하며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묻겠네. 자네가 본 라마를 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 백검우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나직하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입을 떼었다. "대라마께선 송칠만이란 이름을 들어 보신 적이 있소이까?" "송칠만......?" 아란대라마는 기억을 더듬는 듯 몇번 송칠만이라는 이름을 되뇌이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들은 적이 없는 이름일세."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이다." 백검우는 정면으로 아란대라마의 두 눈을 응시했다. "대라마와 무황야는 어떤 관련을 맺고 계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이까?" 백검우는 이 질문은 핵심을 정통으로 찌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순간 아란대라마의 안색이 밀납처럼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 내 본래의 평정을 되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군. 그대의 입에서 무황야의 이름이 나오다니......." 그는 진정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백검우는 재차 다그쳐 물었다. "무황야를 아십니까?" "으음......." 아란대라마는 묵직한 침음을 발하며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있지......."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단지 노납은 무황야, 그의 비밀만을 알고 있을 뿐이니......." '비밀만을 알고 있다고?' 백검우가 재차 무슨 말인가 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란대라마가 다시 눈을 뜨며 탄식성을 발했다. "너무 조급하게 알려고 하지 마시게. 나는 너무 늙어서 피곤하면 기억력이 없어진다네." "......!" 백검우의 표정이 일순 기묘하게 변화를 일으켰다. 아란대라마가 결코 쉽게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걸 감지한 때문이었다. 아란대라마는 담담한 어투로 다시 입을 떼었다. "그대는 언제까지 이 방 안에 날 붙잡아 둘 셈인가?" 백검우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행동하실 수 있소이다. 하지만 그 전에 본인이 대라마의 존체(尊體)에 약간의 무례(無禮)를 범해야 할지도 모르오." 아란대라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여길 떠나시오. 본인은 굳이 대라마를 속 박하고 싶지 않소." "흐음! 그것은 더욱 마음에 드는 말이군." 아란대라마의 눈빛이 기이하게 흔들렸다. 실상 그는 백검우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그 의 몸은 걷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이 상태로 현백검장을 나갈 경우 어떤 위험이 닥칠지는 아란대라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백검우의 말은 스스로 호혈(虎血)에 들어가고 싶으면 마음대 로 하라는 엄포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럼...... 언제든지 본인을 불러 주시오." 백검우는 목례를 남긴 후 유유히 밀실을 떠났다. 홀로 남은 아란대라마는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인물중에 인물이로다! 어쩌면 저 젊은이는 꺾을 수 있을지도...."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독백이 그의 메마른 입술새로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내 짐작이 맞다면 송칠만은 분명 그 인물일 터.... 이 일을 어찌 해야 하는가...." 아란대라마는 다시 두 눈을 내리감은 채 심해처럼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 긴 밤이 지나고 새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이 아침은 분명 다른 날과는 달랐으며 그 변화는 악양성의 모든 외곽 길목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봉쇄(封鎖). 악양성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이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틈도 없이 철저하게 봉쇄된 것이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점점 긴장이 고 조되는 가운데 하나의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 현백검장이 대회전(大會戰)의 모든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전운(戰雲)은 서서히 악양성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일출(日出). 드디어 동천(東天)에서 거대한 일륜(日輪)이 장엄한 모습을 나타냈다. 이곳은 현백검장의 연무장(鍊武場). 막 떠오르는 일륜(日輪)처럼 장엄한 분위기가 중중(重重)으로 소 리없는 외침을 발하고 있었다. 보라! 여기 연무장에 현백검장의 거대한 힘(力)이 있었다. 일천(一千)육백(六百)의 숫자에 달하는 현백검장의 정예 고수들이 구름같이 운집해 있는 것이다. "......!" "......!" 일천육백 고수들은 불타는 시선을 일제히 전면 한 곳에 주고 있었다. 각 부(府)의 부주(府主)들이 태산같이 버티고 서 있는 그곳에는 또 하나의 태양이 있었다. 그 태양은 바로 백검우였다. 그의 등 뒤로는 검영과 웅비, 그리고 사라 등이 맹룡(猛龍)처럼 시립해 있었다. 헌데 대체 누군가? 일신에 흑삼을 걸친 왜소한 체격의 한 노인(老人)이 백검우와 어 깨를 나란히 하고 자리한 것이 아닌가? 분명한 것은 흑삼노인의 신분이 결코 예사롭지 않으리란 추측뿐일진대.... 간혹 그를 응시하는 백검우의 눈빛은 신비로운 이채를 담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아란대라마......!' 아.... 그렇다면 흑삼노인이 바로 아란대라마가 변장한 모습이란 말인가? 모를 일이었다. 그가 왜 현백검장의 중요한 일전(一戰)에 변장을 한 모습으로 모 습을 나타냈단 말인가. 둥! 둥! 둥! 한순간 우렁찬 북소리가 터졌다. 백검우는 형형한 신광을 뿜으며 현백검장의 제자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모두 들어라!" "......!" "우리가 출정(出征)을 마치고 다시 검장(劍莊)으로 돌아올 때 는...... 모두가 중원의 수호영웅(守護英雄)이란 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 순간, "와아아아!" "현백검장 만만세(萬萬世)--!" 일천육백 고수들의 뜨거운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며 터졌다. 그들 의 뜨거운 함성은 하늘(天)을 뚫었다. "형제들이여! 오늘 이후 현백검장과 그대들의 이름은 중원의 태양이 될 것이다!" "와아!" 함성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사기는 태양조차 삼켜버릴 듯 충천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드디어 현백검장의 거대한 힘(力)이 움직임기 시작했다. 동로(東路)-- 호천부(護天府)의 사백(四百) 고수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치달렸다. 서로(西路)-- 천풍부(天風府)의 사백 고수들이 회오리 돌풍같이 질주했다. 남로(南路)-- 밀환살부(密幻殺府)의 사백 고수들이 해일같이 밀어닥쳤다. 그리고, 신기부(神機府)와 밀령부(密令府)는 힘(力)의 심장부인 현백검장 을 수호(守護)하기 위해 남았다. 깃발(幡), 오오... 펄럭이는 저 깃발을 보라! 혈목련(血木蓮)! 피(血)와 죽음을 상징하는 혈목련이 수놓여 있는 혈기(血旗)가 아닌가. 아름답다. 눈부신 햇살 아래 혈기의 혈목련은 기이할 정도로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었다. 악양성 중앙대로(中央大路), 새벽이 터오면서 전 악양성의 가가호호(家家戶戶)에 일제히 두 개의 깃발이 걸렸다. 금빛 바탕에 백목련이 수놓인 깃발과 혈목련이 수놓인 깃발, 그것은 바로 화평의 상징인 백기(白旗)와 혈기(血旗)였다. 그렇다. 그것은 악양성민들이 백검우와 현백검장에게 보내는 승전(勝戰)에 대한 기원의 표시였다. ...... 인파(人波), 악양성의 중앙대로에 아침이 터오며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하나같이 긴장과 기대에 찬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허나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소리 하나 크게 일지 않았다. "온다!" 한순간 누군가의 외침이 터졌다. 동시에, 두두두둑......!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일며 한 떼의 인마(人馬)가 모습을 나타냈다. "장주 도련님이시다!" 장주 도련님이라는 한 마디...! 그것은 바로 백검우에 대한 애칭인 동시에 존경과 믿음이 함축된 호칭이었다. 악양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 이름 이상으로 절대적 인 신뢰의 상징은 존재하지 않았다. 백검우, 그는 눈부신 백마(白馬) 위에 높이 앉아 수하들과 함께 천천히 악양성 중앙대로를 지나고 있었다. "아아, 진정 인중지룡(人中之龍)이시다!" "태양 같으신 분......!" 탄성, 환성, 그리고 갈채! 악양성 전체를 휘감고 있던 긴장은 백검우로 인해 뜨거운 축제 분 위기로 변해버렸다. 백검우는 그들에게 잔잔한 미소를 보내며 유유히 장내를 통과해갔다. 바로 그 순간에도 현백검장의 힘은 악양성 동, 서, 남, 북의 사대 문(四大門) 방위로 철옹성처럼 다져지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각. 악양으로 호호탕탕 진군(進軍)하고 있던 천마장과 혈성보는 생각 지도 않고 있던 복병을 맞이하고 있었다. 바로 철노야를 제외한 두 명의 노야(老爺)에 의해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 바야흐로 백검우가 언급했던 매복지계(埋伏之計)가 시작되고 있었다. <단장애(斷臟崖).> 이곳은 사천성(四川省)과 호북성(湖北省)의 경계지점에 자리한 천애의 절곡(絶谷)이었다. 이 절곡을 통과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그것도 말 한 마리가 겨 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협로(俠路)가 있을 뿐이었다. 협로의 좌우로는 깎아지른 듯한 수백 장 절벽이 병풍같이 둘러져 있었다. 때는 정오 무렵, 구름같은 황진을 일으키며 무수한 인마(人馬)가 단장애 쪽으로 모 습을 나타냈다. 그 선두에는 한 명 화려한 전포의 청년이 오만하 게 버티고 있었다. 그는 바로 혈성보 소보주 관청우(串淸雨)였다. 그들은 악양으로 치달리고 있는 혈성보와 그에 가담한 군소방파의 고수들이었다. "멈춰라!" 단장애 입구에 도달한 관청우는 한 손을 치켜들며 외쳤다. "......!" 그는 신광을 번쩍이며 눈 앞의 단장애를 예리하게 살펴보더니 수하들에게 영을 내렸다. "풀뿌리까지 샅샅이 뒤져라. 매복이 있을지도 모른다!" "존명......!" 몇 명의 고수들이 날렵한 신법으로 단장애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만일 내가 백검우라면 분명 이곳에 매복지계(埋伏之計)를 펼쳐두었을 것이다.' 그렇다. 눈 앞에 펼쳐진 단장애는 조금만 병략(兵略)을 익힌 인물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더할나위없는 매복처였다. 관청우는 첫 눈에 그 점을 파악한 것이다. 반 시진 가량이 흐른 뒤 단장애를 수색했던 그의 수하들이 속속 돌아왔다.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습니다." 관청우의 눈빛이 일순 미미한 기광을 뿌렸다. '이런 곳에 매복이 없다면...?' 그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결국 악양에다 배수진(背水陣)을 치겠다는 뜻인가?'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후후... 현백검장의 최후가 눈에 보이는군.' 한순간 관청우의 손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연이어 벼락같은 일 성이 터져 울렸다. "가자! 악양이 이제 눈 앞에 다가왔다!" 두두두둑......! 관청우 등은 돌풍처럼 단장애의 협로로 치달려 들었다. 바로 그 순간. 단장애의 우측 절벽 위 협로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한 노인이 한 가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초로의 노인. 일신에 마의(魔衣)를 걸치고 허리엔 약초 바구니를 끼고 있는 극 히 평범한 노인이었다. 빠끔...... 빠끔......! 노인은 장죽으로 남초(南草)를 태우고 있었다. 몽글...... 몽글....... 남초연(南草煙)이 버섯 구름같이 한가롭게 피었다. 그저 평범한 모습의 촌로(村老). 문득. "쯧쯧!" 노인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두어 번 혀를 찼다. 절곡 아래로 막 관청우 등이 깊숙이 진입하고 있었다. "저 놈들은 싸움도 할 줄 모르는가. 마치 개미떼들처럼 우르르 달 려들어 물어뜯을 생각만 하고 있으니 원......." 개미떼라고 했는가? 과연 노인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보면 진짜 개미떼들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보였다. "쯧쯧...... 어리석은 놈들......!" 이어 그는 입에 물었던 장죽을 빼내었다. 톡...... 톡......! 노인은 자신이 앉아 있던 바위의 한 곳에 한가로운 자세로 담뱃대 를 털었다. 순간. 푸스스슷......! 무엇인가 타드는 음향이 울리더니 뒤이어 기이한 내음이 풍겼다. 아,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화약(火藥)이 타는 냄새가 아닌가! "어리석은 놈들......." 노인은 다시 한 번 혀를 찬 후 느리게 신형을 일으켰다. "관청우란 놈아. 현백검장의 이노야(二老爺) 어르신이 평생을 기억할 선물을 선사하마." 오오.... 그랬었다. 그는 바로 현백검장의 숨겨진 두번째 서열의 장본인 이노야(二老爺)였던 것이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모조리 가루로 만들 수 있었을텐데......." 두두두! 두두두둑.... 한편 관청우 일행은 마치 거대한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빠르게 단 장애를 관통하고 있었다. 헌데. 협로를 절반쯤 통과했을 순간이었다. 쿠쿠쿵! 꽈과과광--! 돌연 천지가 개벽(開闢)하는 듯한 대폭음이 절벽 위쪽에서 터졌다. "으아아! 절벽이 무너진다!" "피...... 피해라......!" 관청우 등은 혼비백산 하여 급급히 뒤로 물러섰다. 꽈르르르--! 꽈꽈꽈꽈꽝! 오오... 이 무슨 통천경악할 변고란 말인가! 단장애의 수백 장 절벽이 떡가루 부서져 내리듯 무너지고 있었다. 쿠르르르-- 르릉-- "으악!" "크아악!" 아비규환(阿鼻叫喚)! 폭음과 굉음, 그리고 비명이 한데 뒤얽혀 아수라지옥(阿修羅地獄)을 만들어냈다. "다...... 당했다......!" 관청우는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낭패의 신음성을 흘렸다. 그 는 설마하니 백검우가 이런 방법으로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력을 다해 전진하라! 이따위 돌덩이 따위를 피하지 못한다면 혈성보의 제자가 아니다!" 관청우의 웅혼한 외침에 정신을 차린 혈성보 고수들은 사력을 다해 돌진했다. 두두두둑...! 대략 반다경이 지났을 즈음 관청우와 혈성보 고수들은 가까스로 절곡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피해상황을 확인한 관청우는 분노로 심장이 터져 나갈 지 경이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무려 이백 명 가량의 수하들이 떼죽 음을 당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당장 절벽 위를 수색해라!" 그는 분기탱천 하여 수하들을 풀어 뒤늦은 수색을 벌였다. 허나 그가 찾아낸 것은 피우다 만 담뱃재 흔적 뿐이었다. 관청우는 이를 부드득 갈아부쳤다. "백.... 검.... 우...." 먼저 정찰을 했던 몇 명의 고수가 분노한 관청우에 의해 그자리에서 목이 달아났다. 북하(北河). 감숙성에 이르러 황하(黃河)가 하나 뚝 떨어뜨려 만들어낸 듯한 지류(支流)였다. 때는 정오가 약간 지났을 무렵이었다. 두두두둑......! 북하의 강변에 펼쳐진 무성한 갈대 숲을 헤치며 일단의 기마대가 모습을 나타냈다. 겨울의 삭풍에 바싹 말라붙은 갈대숲은 말발굽에 의해 소리내어 부서졌다. 기마대의 선두. 성난 불곰(赤態)같은 기운의 한 인물이 마상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바로 천마장의 소장주인 남궁위였다. 남궁위와 천마장의 고수들이 미친 듯이 갈대숲을 헤치며 질주를 거듭했다. "달려라! 이대로 악양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 북하의 강상(江上). 언제부터인지 이십여 척의 어선(漁船)들이 한가로히 떠 있었다. "엥여라차 그물을 던지자! 엥여라차......! 모여 드는구나......! 고기떼가 모여 드는구나......! 엥여라차......!" 노랫가락이 울려 퍼진다. 촤아아라락......! 그물이 쫙 펼쳐져 수면에 은빛으로 내려앉는다. 누가 보아도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엥여라차... 엥여라차...!" 두두두두--! 남궁위 등은 물론 강상(江上)의 고깃배들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허나 강이면 으례히 고깃배가 떠 있는 법이 아닌가.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대로 질주를 계속했다. "엥여라차......! 그물 안으로 고기들이 모두 모였구나......!" "엥여라차......! 날로 회를 쳐 먹을까......?" "엥여라차......! 어육(魚肉)은 알맞게 구워야 맛이 유별난 법...... 엥여라차......! 구워보자! 그물 속의 고기를 구워보자......!" 순간 갈대의 평원을 질주하던 남궁위의 안색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물 속의 고기? 구워 먹는다......?' 무슨 일인가? 남궁위는 안색을 대변시키고 말았다. '이곳은 갈대밭...! 화, 화공(火功)이다!' 다음 순간 그는 목이 터져라 다급한 외침을 터뜨리고 있었다. "모두 갈대밭 바깥 쪽으로 피해라--!" 허나 이미 때는 한참 늦은 뒤였다. "으핫핫......! 쏴라!" 어선들 쪽에서 호쾌한 외침이 터졌다. 순간 엄청난 숫자의 불화살이 강변 갈대 숲으로 날아들었다. 슈우우욱! 슈슈슈슉! 메마를대로 메말라 있는 갈대밭이었다. 화살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한 건 당연지사였다. 확! 화르르르! 화르르르... 불길은 마치 미친놈 화냥년 만난 듯이 무섭게 번지기 시작했다. "으아아.... 피해라!" "으아앗!" 남궁위가 이끄는 천마장의 고수들은 완전히 불바다에 갇히고 말았다. "크아아아!" 전신에 불이 붙은 고수들은 지랄병에 걸린 것처럼 펄쩍펄쩍 뛰었고....... 이히히히힝......! 불 붙은 말(馬)들은 불더미 속에서 바람난 탕부(蕩婦)의 속곳같이 지글지글 열기에 익어들었다. "다...... 당했다......!" 남궁위. 그는 혈성보 소장주 관청우가 단장애에서 터뜨렸던 외침을 그대로 터뜨리고 있었다. "백-- 검-- 우!" 그 순간 자욱한 화염 저편에서 들려오는 통쾌한 대소성이 있었다. "으하하핫...... 남궁위 어린놈아, 이건 현백검장의 삼노야(三老 爺)어르신께서 주는 선물이다!" 그렇다. 그 통쾌한 대소성의 임자는 다름아닌 삼노야였다. 그의 웃음소리는 한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일로제검 제2권 17장 피로 물든 산하(山河) ━━━━━━━━━━━━━━━━━━━━━━━━━━━━━━━━━━━ 경동천하(驚動天下)! 천마장(天魔莊)과 혈성보(血星堡)가 호북 단장애(斷腸崖)와 감숙 성 북하(北河)에서 기습을 받고 치명타를 입었다는 소문은 삽시간 에 무림전역으로 퍼졌다. 그로인해 이제까지 현백검장에 비관적인 견해를 보였던 천하무림 의 시야는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또한 그 사건은 천마장과 혈성보에 동조하여 자파(自派)의 고수를 파견한 문파들을 초조와 불안에 휩싸이게 했다. 현백검장이 위치한 악양(岳陽). 악양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욱일승천(旭日乘天)이라고나 할까. 현백검장의 기세는 말그대로 솟아오르는 태양(太陽)과도 같았다. 허나, 싸움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불시에 커다란 타격을 입고 주춤 했던 관청우와 남궁위. 그들은 실로 믿기 어려울 정도의 쾌속한 속도로 전열을 재정비 했다. 기습을 받은 지 단 삼 일만에 그들은 폭풍과 같은 위세로 악양성 앞까지 거세게 짓쳐 들어왔다. 허나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의당히 맞서 나올 줄 알았던 백검우는 겨우 악양 정면의 십 리 밖 평원에서 볼품없는 진(陣)을 펼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인원 또한 겨우 일천오백여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미 한차례 호되게 당했던 남궁위와 관청우가 아닌가. 그들은 신중을 기해 서로 합류한 후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윽고 전투태세가 완전히 갖추어지자, 그들은 해일같은 기세로 백검우가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돌진을 시작했다. "진격하라!" 주남평원(州南平原), 악양성에서 불과 십 리 거리에 위치한 이 평원의 동쪽 귀퉁이에는 이십여 개의 거대한 군막(軍幕)이 자리잡고 있었다. 때른 이른 새벽이었다. 밝아오는 여명(黎明) 속에서 백검우는 오백 명에 이르는 현백검장 의 정예를 이끌고 군막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질서정연한 대오, 비록 그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천상지군(天上之 軍)인 듯 위풍당당한 위용이었다. "......" 한순간 백검우는 자신의 백마(白馬) 위에 우뚝 올라 앉았다. "다른 곳의 준비는......?" 그러자, 도천문의 충직한 대답이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완벽합니다. 일격에 대세를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 백검우는 소리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멀리 대평원의 서쪽에서 마치 뭉게구름과 같은 누런 황진이 휘몰 아치며 지축을 울리는 우뢰와 같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두두.... "왔군." 백검우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짧게 뇌까렸다. 드디어 멀리 적세(敵勢)의 모습이 먼지구름과 함께 드러나기 시작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들의 선두엔 남궁위와 관청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일순 백검우의 얼굴에 싸늘한 냉기가 피어올랐다. "제법 잔꾀를 부리는군...... 뒤에 숨어 있다가 나의 본진을 치려 는 계략이다. 후후......" 그는 곧 조용히 뒤쪽을 향해 분부했다. "웅비, 시작해라!" 순간, "예!" 벼락치듯 우렁찬 음성을 터뜨리며 웅비의 손이 허공을 향해 쳐들 렸다. 찰나, 슈우우우! 웅비의 손에서 하나의 불화살이 허공에 찬란한 핏빛의 목련송이를 수놓았다. 거의 동시에 백검우의 시선이 도천문을 향했다. "뒤를 부탁하오!" "염려 마십시오!" 도천문의 대답은 명쾌했다. 백검우의 입에서 벽력과 같은 우렁찬 일갈이 터져 나왔다. "가자!" 그것이 시작이었다. 두두두두! 백검우를 비롯한 오백 명의 인마(人馬)가 한 덩어리가 되어 질풍 처럼 적을 향해 쇄도해갔다. 백검우의 앞과 뒤에는 밀환살부의 인물들이 그림자같이 호위하고 있었고, 바로 뒤에는 백검영과 웅비, 사라가 미친 듯이 앞으로 질 주하고 있었다. 대열은 완전히 하나의 일직선(一直線)을 형성했다. 질풍과 같이 쾌속하게 달리는 일직선의 기마대! 그 후미에는 도천문이 마지막으로 달리고 있었다. 한편, 천마장과 혈성보의 연합진영은 백검우의 이 돌연한 움직임에 크게 술렁였다. 백검우가 상식을 도외시한 적은 병력으로 질주해 왔기 때문이었다. 허나 관청우와 남궁위는 감히 태만하지 못했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진(陣) 중에서 벼락성으로 외쳤다. "학익진(鶴翼陣)을 펼쳐라!" "화살을 준비해라!" 실로 살기등등한 음성이었다. 두두두두! 백검우는 삽시간에 그들의 십여 장 지척에까지 쇄도해 들어왔다. 그는 쩌렁쩌렁한 일갈을 발했다. "중앙을 돌파하라!" 그 외침성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적 진영 중앙의 심 장부를 꿰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번-- 쩍! 파츠츠츳! "크아악!" "아악!" 뒤엉키기 시작하는 인마(人馬)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아침하늘을 갈가리 찢었다. 훗날의 사가(史家)들이 주남대혈전(州南大血戰)이라고 기술한 대 결전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여기 이장주 백검영도 있다!" 백검영. 아직도 치기를 벗어나지 못한 그의 음성이 싸늘하고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파아앗! "크아악!" 백검영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어김없이 상대는 썩은 짚단처럼 쓰 러져갔다. 단말마의 처절한 절규를 토하며 허공으로 튀어오르는 수급들을 보라. 히히히힝! 상처입은 말들의 고통섞인 몸부림과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 차차창! 아! 거대한 죽음의 폭풍이 광활한 대평원을 휘몰아치듯 거칠게 밀어닥쳤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대혼전(大混戰)이었다. 그러나 관청우와 남궁위는 그 순간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실 수를 범했는지를 또 한 차례 깨닫고 있었다. '빌어먹을! 진(陣)을 벌려놓는 게 아니었다!' 과연 그러했다. 백검우의 진영은 불과 오백여 명 정도였지만 마치 거대한 창(槍) 인 양 그들의 연합진영의 가운데를 노도처럼 점령하고 있었다. 죽어가고 있는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백검우의 기습에 허(虛)를 찔린 천마장과 혈성보의 수하들이었다. "크아악!" "켁!" 생의 종지부를 찍는 처참한 비명소리.... 관청우와 남궁위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채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안간힘을 다해 백검우를 추격했지만 상대는 너무 빨랐다. 창천(蒼天)에 뿌려지는 붉은 피보라가 피안개로 변하고 있었다. 자욱이 솟구쳐 오른 흙먼지는 아침의 태양조차 가려버린 지 오래였다. 아아....... 한 폭의 새로운 지옥도(地獄圖)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 지옥도에서 백검우와 함께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바로 도천문이었다. 그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일그러진 주검들만이 즐비할 뿐이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완벽한 살초! 바람처럼 그가 스치고 지나가는 자리에서 적들은 미처 칼을 휘두 를 틈도 없이 쓰러져 갔다. 슈슈슉! "크아악!" "으악!" 그때 관청우의 벼락같은 일성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막지 말고 좌우로 산진(散陣)하라!"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검우의 앞쪽에서부터 적진이 양옆으로 쫘악 갈라졌다. 백검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쳤다. '관청우, 뒤늦게 정신을 차렸구나!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손을 들어 중간 부위에서 뒤를 따르던 도천문에게 신호를 보냈다. 순간 도천문의 입에서 싸늘한 냉갈이 터져 나왔다. "나를 따르라!" 그는 오백 고수 중 절반을 거느린 채 돌연 말머리를 돌려 자신이 지나온 길로 바람같이 되돌아 갔다. 그것은 한 치의 소요도 없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두두두두! 거의 동시에 백검우는 적진의 후미에 거의 당도하고 있었다. 적진의 중앙에서 갈라진 도천문은 다시 합쳐지기 시작하려는 적진 을 그대로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내 앞을 막는 자는 모두 죽는다!" 파츠츠츳! 번-- 쩍! 천마장과 혈성보의 연합진영은 다시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었다. 남궁위와 관청우는 그만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한순간 백검우가 마침내 적진 후미를 완전히 벗어났다. 도천문 역시 때를 맞추어 적진의 선두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 그들의 새로운 형세를 보라! 선두와 후미로 빠져나온 백검우와 도천문의 대열이 거대한 반원을 그려내며 외곽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게 아닌가? 그것은 마치 질풍과 같은 한 줄기 바람처럼 이루어진 순식간의 일이었다. 삽시간에 전열을 다시 하나로 재정비한 백검우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본진을 향해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오늘의 인사는 이정도로 하겠다!" 순간 관청우의 굵은 눈썹이 무섭게 치켜올라갔다. "빌어먹을...... 쫓아라!" 그는 백검우를 향해 바람같이 말을 몰았다. 그 뒤를 혈성보의 기마대가 지축을 울리며 뒤쫓았다. 바로 그때 백검우의 입가에 한 줄기 냉소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미소의 의미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 뿐이었다. 한편 남궁위는 관청우와 달리 움직일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놈이 물러나는 것은 계략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수하를 이끈 채 쇄도해 들어가는 관청우를 초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두두두두.... 두두두둑.... 어느새 백검우와 관청우의 거리가 지척지간으로 좁혀졌다. 그 순간 백검우의 뒤를 따르던 백검영이 갑자기 말머리를 홱 돌렸다. 동시에 그의 검이 관청우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찔러들었다. "이런...... 웬 꼬마 놈이......!" 관청우는 버럭 고함을 터뜨렸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검영의 입에서 사나운 노호가 터져 나왔다. "이 도둑놈아!" 번-- 쩍! 아침 햇살에 번뜩이는 검세가 빛의 그물처럼 화락 퍼지며 관청우를 뒤집어 씌웠다. 흠칫! 백검영이 너무 어린 것에 방심하고 있던 관청우는 내심 다급한 부르짖음을 터뜨렸다. '빠...... 빠르다......!' 관청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그의 옆 구리 쪽에서 촤악 피분수가 솟아 올랐다. "허억...... 벌써......!" 백검영의 칼에서 몸을 빼어내는 순간 그는 중심을 잃고 땅에 떨어 졌다. 애꿎은 그의 말이 검영의 검날에 대신 허리가 잘려 고꾸라졌다.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은 관청우는 내심 서늘한 전율을 느끼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놈이 이제보니 소악마(小惡魔)로구나!" 그가 막 백검영을 향해 발검의 자세를 취하는 순간이었다. 두두두두두! 난데없이 악양 동쪽으로부터 대략 팔백여 명으로 보이는 인마가 거센 폭풍처럼 무서운 속도고 돌진해오는 게 아닌가! 한결같이 검은 흑의(黑衣)를 입고 흑마(黑馬)에 은창(銀槍)을 든 일단의 고수들! 그렇다. 그들은 바로 묵검천공 종리군이 이끄는 현백검장 천풍부 소속의 고수들이었다. 어둠처럼 밀려드는 그들을 응시하는 관청우의 얼굴 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건......!" 그가 주춤하는 사이 백검영은 다시 백검우의 진영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눈 깜짝할 새에 바람같이 달려온 천풍부의 인물들이 그대로 남궁 위와 관청우를 향해 갈라졌다. 관청우. 그는 자신을 향해 질주해오는 종리군을 노려보며 세차게 이를 갈아붙였다.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는다!" 그는 재빨리 수하가 내어주는 말 위에 올라앉아 대오를 정비시켰다. 이윽고 관청우와 종리군의 거리가 십여 장으로 좁혀졌다. "흐흐흐...... 좋다. 오너라!" 관청우는 힘차게 도(刀)를 뽑아들었다. 순간 종리군의 얼굴에 싸늘한 조소가 피어올랐다. "미친 놈아, 너는 대체 언제쯤 철이 들 셈이냐?" "뭐...... 뭣이?" 관청우는 노기로 몸을 부르르 경련했다. 바로 그때였다. "던져랏!" 종리군의 입에서 대갈성이 울려나옴과 동시에 소낙비처럼 엄청난 은창(銀槍)들이 날아든 것은. 고오오.... 휘류류륭!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크아악!" "아악!" 다시 처절한 비명성이 한꺼번에 평원을 진동하며 메아리를 일으켰다. "차... 창전(槍箭)!" 종리군과 한바탕 대결을 원했던 관청우의 뜻은 이번에도 헛물을 켜고 말았다. 그는 억수처럼 쏟아지는 은창들을 피하느라 혼백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의 좌우에서 휘하 부하들이 연달아 창에 꿰 뚫린 채 픽픽 쓰러져갔다. "으아아!" "끄윽...." 지옥도(地獄圖)는 이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말과 사람을 가리지 않은 채 저승으로 보내고 있는 은빛 창들의 향연(饗宴)은 차마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슈슈슈슉! 휘류류륭.... 난무하는 비명가운데 붉은 핏빛 혈우(血雨)가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이... 이럴 수가...!' 관청우는 거의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상황은 남궁위가 이끄는 천마장 쪽도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 면 섣불리 백검우를 추격하지 않은 탓에 무너지는 속도가 좀 느리 다는 것 뿐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남궁위의 얼굴은 온통 당황과 분노로 물들었다. 그때였다. 지니고 있던 은창을 모두 쏘아낸 뒤 종리군의 진영이 바람같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물러서라!" 두두두둑...... 그제서야 관청우와 남궁위는 백검우의 전술을 확연히 깨달았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치고 빠진다.> 가히 신출귀몰(神出鬼沒)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백검우의 용 병술(用兵術)이었다. 그러나 이미 기진맥진 지쳐버린 천마장과 혈 성보의 고수들은 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시간이 흘러 황혼이 깔릴 때까지 백검우의 풍차돌리기 전술은 끊 임없이 이어졌다. 호천부의 고수들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이내 천 풍부의 고수들로 뒤바뀌고....... 사력을 다해 저항하다보면 어느새 상대는 다시 호민부의 고수들로 뒤바뀌어 있었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현백검장의 대승리(大勝利)였다. 드디어 백검우의 명령에 의해 현백검장의 고수들이 완전히 철수했 을 때, 살아 남은 천마장과 혈성보 고수들의 숫자는 모두 합해 삼 백 명도 채 되지 않았다. - 이건 악몽이다......! 남궁위와 관청우는 평원에 새카맣게 널려있는 자신들의 수하 시체 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을 더욱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몰아넣은 건 정작 백검우와는 단 일초식도 교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똑같이 백검우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다가 철저하게 농락을 당한 셈이었다. "......." "......." 저물어가는 어둠 속에서....... 관청우와 남궁위는 천년석상으로 변해버린 듯 언제까지나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하늘도 장내의 처참한 광경에 진저리를 치는 듯 눈발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차가운 대지와 함께 얼어붙은 무수한 시체들 위로 흰 눈이 무심하게 쌓여갔다. ...... ② 이곳은 현백검장의 군막. 백검우와 도천문이 탁자를 사이에 둔 채 마주앉아 있었다. "한 번만 더 공격을 펼치면 놈들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살기가 풀풀 묻어나는 도천문의 음성이었다. 허나 백검우는 담담한 신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대세가 결정난 이상 더 이상 희생은 필요없소." "알겠습니다. 하지만 두 마리의 상처입은 짐승은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하는 도천문의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무형의 살기가 화르륵 피어올랐다. "후후... 도부주가 그들을 처치하고 싶은 모양이군." "장주께 불경한 놈들을 살려둘 이유는 없습니다." 도천문의 말은 냉막할 정도로 고요했다. 백검우는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들은 내게 맡겨두시오." 이어 그는 탁자 위의 세류필을 들어 먹을 먹인 뒤 종이 위에 무엇인가 써내려 갔다. "도부주, 이것을 그들에게 전하시오." "......!" 서찰을 받아든 도천문의 신색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이 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예를 취했다.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헛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터...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스스슥.... 그의 신형은 이내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백검우는 탁자 위에 켜진 아른거리는 촛불의 그림자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오늘 밤에는 하련을 찾아가봐야겠군...." ③ 주남평원의 서쪽 끝에 위치한 관청우와 남궁위의 군막. 두 사람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은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그들은 이미 두 항아리의 독한 화골주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취기가 없었다. 마음 속의 심화(心火)가 술기운을 태워버리고 있는 탓. "......" "......" 말없이 기계적으로 술잔을 비우는 그들의 손이 간간히 경련을 일으켰다. 십중팔구 백검우가 마지막 공격을 해올 것이 뻔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아니 이미 대책을 세울 기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해야 옳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백검우가 다시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다. 이미 결정이 나버린 대세(大勢)를 돌이킬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 하든간에 백검우만큼은 제거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이미 회복불능의 상태에서 그들이 건진 것이라곤 불타오르는 복수 심과 자신들의 명예에 대한 좌절감 뿐이었다. "ㅋㅋ.... 백검우....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나는 당장 죽어도 좋다..." 문득 관청우의 입에서 발작적인 괴소와 함께 새어나온 일성이었다. 허나 남궁위는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관청 우와 달리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놈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패인(敗因)이 되버렸어.......' 그는 자꾸만 초라해지는 자신을 애써 자위했다. '살아있는 동안은 복수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바로 그때였다. 막사 안으로 수하 한 명이 들어서더니 조심스럽게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막사 밖에 화살이 꽂혀있길래 살펴보았더니 이 서찰이 매어져 있었습니다." "......!" 남궁위는 급히 서찰을 받아 펼쳐보았다. 그러자 용필휘지의 글씨가 눈 앞에 펼쳐졌다. <내일 정오, 악양 북단의 초류하(焦流河)에서 기다리겠다. 백검우.> 순간 관청우와 남궁위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허공에서 교차되 었다. 그들의 눈에서 무서운 살광이 뿜어져 나온 것도 거의 동시였다. "광오한 놈!" 남궁위는 백검우의 서찰을 와락 구겨 버렸다. 그들은 또 한차례 백검우에게 의표를 찔린 셈이었다. 마지막 순간 에 보내진 서찰은 뜻밖에도 그들이 가장 원하는 일대일(一對一)의 대결장(對決狀)이었던 것이다. "맹세해도 좋다. 내일이 네놈 제삿날이 될 것이다." ....... 밤(夜). 주위는 암흑으로 짙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초류하의 약속을 품에 안은 채....... ■ 일로제검 제2권 18장 풀리는 신비...... 아름다운 밤(夜)! ━━━━━━━━━━━━━━━━━━━━━━━━━━━━━━━━━━━ 백검우의 진영은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한순간 그 어둠 속을 은밀하게 빠져나가는 한 대의 마차가 있었다. 마부석에는 웅비와 사라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마차 안. 백검우와 아란대라마가 말없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실은 채 각기 상념에 잠겨 있었다. 문득 아란대라마의 입에서 혼잣말같은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대가 무황야를 목표로 한 이상...... 자신을 너무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네......." 순간 백검우 역시 독백성처럼 입을 열었다. "무황야가 스스로 나를 찾도록 만들 것입니다." 아란대라마는 백검우의 말을 들으며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피어 올렸다. "그대는 색다른 말을 하는군. 다른 사람과 달리 무황야가 찾아오게 만든다... 과연......." 그렇다. 백검우의 말은 확실히 일반 무림인들과는 정반대의 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무황야를 찾아 나서고 있는 당금의 정세 속에서 백 검우는 오히려 무황야가 자신을 찾아오게끔 만들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때 다시 백검우의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스스로 찾아올 때면 나의 힘이 그만큼 강해져 있을 것입니다." 아란대라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황야의 힘은 자네가 상상치 못할 정도이네. 어쩌면 그는 이미 그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은 이미 생각하고 있는 일입니다. 내가 그를 알고 있듯 그도 날 알고 있겠지요." 아란대라마의 시선이 기이한 이채를 띠우며 백검우를 지그시 응시했다. 백검우는 조용한 미소를 떠올리며 담담히 음성을 흘렸다. "무황야와 나의 만남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란대라마, 그는 말없이 시선을 허공으로 옮겼다. "무황야...... 그가 원하는 한 가지 일만 이루어지면 그의 적수는 지상에서 영원히 없을 것......." 그의 음성은 웬일인지 전에 없이 기이한 힘을 담고 있었다. 순간 백검우의 눈 속에 의아한 빛이 번뜩 떠올랐다. '으음...... 대라마의 눈빛이 갑자기......?' 아란대라마의 눈에서 일순 엄청난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천성묵번(天星墨幡)...... 오직 마정묵령(魔精墨令)과 천성묵번 이 합쳐져야 그를 막을 수 있거늘......." 아! 무슨 뜻인가? 허나 아란대라마는 이내 원래의 무심한 신색을 회복한 채 아무일 도 없었던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백검우는 전신의 피가 모조리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아란대라마의 말 속에 엄청난 의미가 담겨있다는 걸 깨달은 때문이었다. 그는 손에 식은땀이 맺히는 걸 느끼며 아란대라마의 말을 되뇌이고 있었다. '천성묵번...... 마정묵령......' 아란대라마는 분명 그 두 가지가 합쳐져야 무황야를 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대체 그것들은 무엇인가? <천성묵번(天星墨幡).> <마정묵령(魔精墨令).> 그 두 가지 단어는 백검우의 뇌리 속 깊이 각인되었다. 아란대라마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 심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그사이 마차는 어느새 악양성의 문루를 지나고 있었다. 순간 백검우가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웅비!" "예, 장주님!" "가서 송원주를 모셔오라." "알겠습니다." 마차는 조용히 멈추었다. 웅비는 화양소원 쪽으로 몸을 날렸다. 휘릭! 아란대라마는 그제서야 시선을 들어 마차의 창 밖을 응시했다. "송원주란 인물이 나를 구하려 했다니...... 누군지 궁금하군." 백검우는 아란대라마의 표정을 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마도...... 정체를 숨기고 있을 대라마의 측근일 것입니다. 결 코 적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가?" "그가 대라마의 적이라면 대라마께서 악양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어떤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검우의 음성에는 칼날같은 예기가 서려 있었다. "아무튼 그를 만나면 모든 의문이 풀리겠지." 아란대라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마차 밖에서 미미한 인기척이 들렸다. 이윽고 마차문이 열리며 송원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헌데, 아란대라마와 송원주가 마주 대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똑같이 의아한 표정을 띄우는 것이 아닌가? 송원주는 의혹어린 신색으로 백검우를 돌아보았다. "장주, 대라마는 어디 계신가?" 백검우는 일순 쓴웃음을 떠올렸다. 그는 그제서야 아란대라마가 현재 변장을 한 상태라는 걸 기억한 것이다. 허나 그는 내색치 않은 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바로 눈 앞에 계시지 않소?" 그때 아란대라마의 의아한 음성이 송원주를 향했다. "그대는 누군가?" "......!" 송원주의 몸이 일순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상대방의 음성이 너 무도 귀에 익은 것임을 깨달은 때문이었다. 그는 새삼 아란대라마의 전신을 강렬한 눈으로 훑어보더니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비로소 그의 변장을 눈치 챈 것이었다. "아......!" 송원주는 거의 신음에 가까운 탄성을 지르며 부르짖듯 입을 열었다. "대장령 사숙!" 격정에 가득 찬 외마디 부름이었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르르륵...... 송원주의 전신이 한 겹 껍질을 벗어내듯 순식간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삽시간에 송원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뒤바뀌었다. 오십여 세에 접어든 초로(初老)의 은발벽안인(銀髮碧眼人)이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 백검우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이목으로도 송원주의 변형술을 눈치채지 못했다니.......' 그때였다. 아란대라마의 전신이 세찬 물결에 휩쓸리듯 부르르 격동을 보였다. "너...... 너는 잠령천후......." "그렇습니다. 대장령 사숙......." 송원주는 그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가 허리를 펴는 순간. "와핫핫핫......" 야음을 깨는 우렁찬 대소가 터져 나왔다. 아아...... 웃음 속에서 풍기는 짙은 아픔의 흔적을 어찌 형용할 것인가! "기다렸습니다. 삼십여 년간을...... 오직 이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광소 속에서 흔들리는 송원주의 두 눈, 그 속에서 일렁이는 맑은 이슬 방울이 있었다. "......!" 아란대라마의 눈가에도 뿌우연 이슬이 점점이 일렁거렸다. "이...... 이놈! 네가 이 중원땅에서 나를 기다려 주었다니......." 와락! 벽안의 이국인(異國人) 아란대라마와 송원주는 서로를 굳게 포옹 했다. 실로 머나먼 중원땅에서 감격의 해후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송원주가 감개가 무량한 시선으로 백검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장주, 고맙네." 진정어린 마음이 담긴 음성이었다. 백검우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거래를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오." 그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더할나위없이 부드러운 미소였다. 송원주는 마주 빙그레 웃었다. "오늘은 장주와 함께 마음껏 술을 마시고 싶네." "고마운 말씀이지만 다른 곳에 볼일이 있어서...... 다음으로 기 회를 미루기로 하지요." 그때 옆에서 묵묵히 백검우를 응시하던 아란대라마가 기이하게 눈 빛을 빛냈다. "이제서야 노납은 결심을 굳혔네." "......?" "내가 알고 있는 무황야에 대한 모든 것을 차후에 그대에게 알려주겠네." "......!" 백검우의 얼굴에 일순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고맙네. 허허...... 오늘은 이 녀석과 마음껏 회포를 풀겠네. 장 주는 아무 염려도 하지 말게." "하하...... 이몸 또한 오늘밤 한 당돌한 아가씨와 묻어두었던 회 포를 풀려고 합니다. 좋은 밤이 되시길......." "자네도......." 아란대라마와 백검우. 그들은 극히 우호적인 부드러운 미소를 나누었다. 이윽고 아란대라마와 송원주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백검우는 두 눈에 신비로운 광채를 발하며 멀어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송원주가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은 무황야의 눈을 피하여 아란 대라마를 구출하려는 뜻이었을 터... 어쩌면 아란대라마는 예상밖 으로 거물인지도 모른다." 서서히.... 그동안 가려졌던 의문의 안개가 걷히고 있는 듯했다. 마정묵령과 천성묵번-- 그리고 무황야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그 신비의 껍질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馬車)는 다시 조용히 어둠 속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청록장 후원, 아늑한 전각 안에서 은은한 불빛이 어둠 속으로 흘러나온다. 나무가지와 풀잎에는 초져녁부터 눈꽃이 피어나 은백색의 광채를 요요롭게 뿌리고 있었다. 창가에는 하나의 섬세한 그림자. 조용히 흔들리는 불빛에 아른거리며 서 있는 그녀는 바로 선하련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꽃잎을 베어문 듯 도톰한 입술을 앙증맞게 꼬옥 다문 채. 그녀는 움직임도 없이 화원의 설화(雪花)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헌데 어느 한순간, 그녀의 촉촉히 젖은 빨간 입술이 샐쭉 열렸다. "흥! 검우 오빠는 정말 바보야......." 잔뜩 부아가 치민 토라진 음성. 헌데 그때였다. 시녀가 황급히 실내로 들어서더니 그녀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선하련의 한쌍 봉목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검우 오빠가 왔다고...?' 시녀가 다시 그에게 무슨 말인가를 남기고 실내 밖으로 나갔지만 이미 그녀의 귓 속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 오래지 않아 문이 열리며 백검우가 조용히 들어섰다. 허나 선하련은 일부러 창가쪽으로 돌아선 채 등을 돌리지 않고 서 있었다. 백검우는 일부러 낭랑한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 이것참 하련이 단단히 토라졌는 걸?" 순간 선하련의 입술이 삐죽 내밀어졌다. "치이...... 세 번씩이나 문 밖에서 나를 거절하곤, 이제와서...... 흥!" 백검우는 내심 한 줄기 고소를 머금었다. '후후...... 도부주의 성품으로 보아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은 뒤 다시 말했다. "하련, 오늘은 내가 아주 특별한 것을 가져왔는데......" 허나 일단 토라진 선하련의 마음은 좀체로 돌아설 줄을 몰랐다. "필요 없어! 보기도 싫어...... 흥!"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와중에도 은근 슬쩍 백검우가 무슨 선물을 가져 왔을까 하고 살펴보는 걸 잊지 않았다. 헌데 어이없게도 백검우는 점잖게 뒷짐을 지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선물같은 것이 보일 리가 없었다. '피! 끝까지 나를 약올리고......' 선하련은 미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본래 호기심이라면 누구에게 도지지 않는 그녀였다. 하지만 겨우 선물때문에 그동안 구겨질대 로 구겨진 자존심을 꺾을 수는 없지 않은가. 백검우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어때? 무엇인지 알고 싶지?" "흥이다!" "그러지 말고 눈을 감고 있으면 무엇인지 알게 될 걸?" "피...... 별것도 아닌 게 뻔한데 뭐!" "그래? 그렇다면 그냥 가는 수밖에 없겠는데......." 백검우는 짐짓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러자 선하련의 옥용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항상 써먹는 수법이야.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허전해지는 가슴을 느끼며 빽! 소리쳤다. "잠깐만!" 백검우는 내심 득의의 미소를 떠올렸다. '후후...... 그럼 그렇지.......' 그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허나. 선하련의 아리송한 표정을 보는 순간 그는 일이 별로 기대만큼 되 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이상한걸......?' 그때 선하련의 깜찍한 음성이 그의 귓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빠가 가는 건 좋은데...... 선물은 두고 가!" '엉......?' 백검우는 일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처량하게 말했다. "하련,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지......?" "흥! 그게 다 오빠한테 배운 거야." "내가 언제 그런 걸 가르쳤단 말이냐, 하지만 이 오빠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선물을 주도록 하겠다." 그는 기이한 미소를 떠올리며 성큼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하지만 선물을 받으려면 눈을 꼭 감아야만 한다." "눈을 감아?" 선하련은 저으기 의심 섞인 눈길로 백검우를 응시하더니 코웃음을 날리며 눈을 내리감았다. "날 어린애로 아나? 별걸 다 시키고 그래." 순간, 백검우는 빙긋 웃음을 띄우더니 성큼 선하련의 촉촉한 입술을 자 신의 입술로 덮어버렸다. "아앗!" 선하련은 몽실한 감촉에 깜짝 놀람의 탄성을 터뜨렸다. 반짝!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 구렁이!" "하하핫......" 백검우는 통쾌하게 웃어젖히며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꺾어질 듯 감겨오는 그 섬세한 허리의 선을 감은 채 그는 천천히 침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선하련은 두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아유! 아유...... 보기 싫어 죽겠어!" "정말?" "몰라! 몰라! 오빠는 바보야......." 포옥......! 그녀는 백검우의 가슴에 깊숙이 고개를 파묻었다. "후후후......." 백검우는 나직이 웃음을 흘려냈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상 위에 내려 놓았다. "오늘은 밤새도록 네 투정을 들어주마. 이 오빠는 단단히 각오가 되어 있다." "피이, 내가 뭐 투정만 부리는 사람인가? 난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거야." "아이고, 야단났군. 그럼 어떻게 이 긴 밤을 보내지?" 선하련은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백검우를 올려다 보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야?" "뭘 시킬 건데?" "오늘은 반대로 오빠가 나에게 투정을 부려봐. 아무 얘기라도 좋으니깐...." "내가 너에게 투정을?" 백검우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그는 잠시동안 눈을 껌벅거리 더니 이내 생각나는 대로 휭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옛날에 수정으로 만들어진 어떤 왕궁에 세 공주가 살았는데 말이야... 첫째 공주는 고집센 황소고기만 먹어서 머리 에 뿔이 나고, 둘째공주는 수다스런 달걀만 먹어서 머리가 반들거 리는 대머리가 되고, 셋째공주는 매일 수다스럽게 재잘대는 참새 고기만 먹어서 입이 한 자나 튀어나왔는데 말이야.... 어느날 그 셋째인 하련공주가 강가로 놀러갔다가...." "잠깐! 셋째 공주 이름이 뭐라고?" "응?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몰라! 몰라! 이 엉터리...!" "하하하......" 지금은 밤. 야풍에 하늘거리는 화원이 있고, 아늑한 불빛이 은은히 비치는 침상이 있었고...... 침상 위에는 백검우의 손을 잡은 채 아름다운 꿈나라로 빠져들고 있는 선하련이 있었다. ...... ■ 일로제검 제2권 19장 명예와 죽음의 강(江) ━━━━━━━━━━━━━━━━━━━━━━━━━━━━━━━━━━━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악소산 북편 기슭의 초류하(焦流河). 쏴아아...... 쏴아아......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와 양 옆 모래사장이 평온하기 그지없는 조 화를 이룬 채 여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헌데, 누구의 발자국인가? 모래사장에는 서로 다른 네 줄의 발자국이 아픈 상흔처럼 나 있었다. 그 발자국은 한 곳을 향해 서로 접근해 갔다. 사 인(四人). 그곳에는 모두 네 인물이 서로 대치하고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백검우와 도천문, 그리고 관청우와 남궁위였다. 터질 듯한 침묵이 장내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 "......" 쏴아아...... 쏴아아...... 흐르는 물소리만이 무심하게 그들을 스쳐갔다. 이때였다. 백검우가 침묵을 깨고 초류하의 위에 둥둥 떠내려가는 낙엽을 보 며 입을 열었다. "안타까운 일이나 오늘 누군가의 목숨은 저 낙엽의 운명을 따르겠군." '......!' 그 말에 남궁위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서릿발같은 안광을 빛내며 음침하게 미소했다. "그것 매우 풍류적인 말이군." 그는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풍류를 좋아한다. 허나 자격이 없는 자가 풍류를 즐기다가 는 반드시 패가망신하는 법이지." "후후......" 백검우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검(劍)을 잡는 무인(武人)에게 있어 풍류는 깨끗한 죽음(死)이 아니겠소. 그대 또한 풍류스럽게 죽어보시오." 백검우의 어조는 너무 부드러워 오히려 듣는 이를 섬칫하게 했다. "물론 나는 도울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소." "ㅋ!" 남궁위는 발작적인 괴소를 흘려냈다. 그는 전신에 가공할 살기(殺 氣)를 발산하며 음산하게 말했다. "네놈이나 죽음의 풍류를 많이 즐겨 보아라. 우라질 놈!" 그러자, 백검우는 더욱 부드러운 음성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남궁위, 풍류남아는 욕을 그렇게 해선 안 되오. 내가 시범을 보일테니 잘 들어보시오." "......!" "남궁위와 관청우, 이 염왕(閻王)의 수염을 잡아 당길 작자들아. 네놈은 나에게 너무 많은 선물을 주었구나. 그 덕분에 본인은 무 림에 이름을 굳히게 되었으니 어찌 네놈들의 기특함을 칭찬하지 않 을 수 있겠느냐?" '흑......!' '이, 이놈이......!' 남궁위의 얼굴은 썩은 돼지간 빛으로 완전히 일그러져 버렸다. 그것은 관청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나...... 백검우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부드럽고 신비스런 미소를 띤 채 유유히 말을 이었다. "너희들에게 한 가지 좋은 소식을 알려 주겠다. 지금쯤 혈성보와 천마장에 동조한 무림각파들은 반가운 손님을 맞고 있을 것이다." "......!" "그게 웬 개소리냐?" 남궁위는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물었다. 백검우는 빙긋 웃었다. "그들 십여 문파의 이름은 영원히 무림에서 제명될 것이다. 천마 장과 혈성보의 손님은 차후 고려해서 내가 보내보도록 하겠다." "으......!" "지, 지독한 놈!" 관청우와 남궁위는 노기로 전신을 부르르 경련했다. 스윽! 관청우는 일보(一步) 앞으로 전진하며 무시무시한 살광(殺光)을 두 눈에 폭사했다. "네놈의 목으로 보상을 삼으리라!" "관청우, 그대는 자격이 부족하니 차례를 기다려라. 후후...... 무엇때문인지 아느냐?" 백검우는 깊숙한 눈빛으로 관청우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는 너무 쉽게 흥분하기 때문에 죽음의 풍류를 느끼게 해줄 자신이 없다. 그러니 남궁위부터 나서라." "무엇이......?" "잠깐! 관형, 기다리시오." 남궁위가 재빨리 관청우를 제지하더니 입가에 사이한 잔소를 소리 없이 머금으며 앞으로 나섰다. "소원대로 이 남궁위가 먼저 나서주마. 허나 너는 그 선택을 후회 하게 될 것이다." "안 된다! 나 관청우가 양보할 수는 없다!" 슈욱! 이미 살기가 머리끝까지 꽉 찬 관청우가 무섭게 수중의 혈뢰도(血 雷刀)를 뽑아 들었다. 허나 그는 그 순간 흠칫 동작을 멈추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 또하나의 거대한 압력......! 도천문이 어느새 천천히 관청우에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스으윽...... 도천문은 이 순간 중년(中年)의 병자처럼 핏기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더욱 섬ㅉ하게 변해있는 것이다. 그는 무기를 빼어들지도 않았으며 눈빛은 그저 투명하고 담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청우는 순간 등줄기에 식은 땀이 맺히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 자는 대체 누군가... 마치 악귀처럼 전신이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여 있다.......' 관청우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상대가 살인지도(殺二之道)에 있어서 진저리 쳐지리만큼 뛰어난 초절정 고수임을. 슉! 자신도 모르게 관청우는 시뻘건 도(刀)를 퉁기듯 도천문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멈추어라!" "......!" 도천문은 두 눈에 기이한 광채를 빛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멈추지. 대신 그대는 나와 함께 저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구경이나 하세." "......!" "그대는 아는가? 내 주인께서 그대를 상대하지 않으려는 것은 그 대를 좋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독랄하지만 음흉하지는 않아." "음......!" 관청우의 얼굴이 일순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도천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그가 막아선 이상 백검우를 먼 저 상대하기란 불가능했다. '빌어먹을!' 관청우가 도천문을 앞에 두고 갈등을 일으키는 순간, 백검우와 남궁위는 이미 초류하의 물살을 바로 옆에 끼고 마주 대립해 있었다. 엄청난 살기! 남궁위의 얼굴은 주체할 수 없는 살기로 인해 사악하게 번들거렸다. 스르릉! 그는 천천히 수중의 보검(寶劍)을 뽑아들었다. "백검우...... 너에게 지옥유류백검(地獄幽流魄劍)의 진면목을 보여주마." 지옥유류백검. 그것은 천마장의 독문비전으로 수백 년 동안 무적을 자랑해왔던 비검(秘劍)이었다. 우우웅......! 남궁위의 보검은 살아 꿈틀거리며 검음(劍音)을 울려내기 시작했다. 허나 그 순간에도 백검우는 무기를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그는 빈손이었다. "어서 보여주게." "놈, 왜 무기를 잡지 않느냐?" "염려마라. 남궁위, 내 무기는 항시 어디에도 있고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음......?" 남궁위는 당혹했다. 백검우는 신비롭게 미소했다. "지금은 이 초류하의 맑은 물(水)로 무기를 삼아 그대를 상대하겠다." "......!" 남궁위의 눈꼬리가 순간 무섭게 치켜 올라갔다. '광오한 놈......!' 물(水), 물이라고 했다. 백검우는 한 옆에서 잔잔히 흐르는 초류하의 물결로 무기를 삼은 것이다. ...... 쌔애앵......! 쌔앵......! 혹한의 차가운 서북풍(西北風)이 한차례 무심하게 장내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으윽...... 산(山). 남궁위는 거대한 산이 되어 가공할 잠력을 일으키며 백검우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한순간. "천마혈섬(天魔血閃)!" 남궁위의 입에서 울부짖는 듯한 대갈성이 터져 울렸다. 번쩍! 아 섬광(閃光)! 서른여섯 줄기의 검살류(劍殺流)가 사위의 빛을 일시에 차단하며 눈부시게 작렬했다. '......!' 찰나 백검우의 두 눈에 은은히 놀라움의 빛이 스쳤다. '검기(劍氣)가 모두 제각기 살아 변화하고 있다. 피하면 죽는다. 오직 정면대결만이 생로(生路)일 뿐!' 그것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판단이었다. 허나 그 판단은 이미 반격이 이루어진 후에 이루어졌다. "승(乘) 폭수(爆手)!" 후류류류륭! 콰아아! 순간 믿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백검우의 쌍수(雙修)가 가볍게 반원을 그리는 것과 동시에. 물기둥! 초류하에서 두 줄기 거대한 물기둥이 가공할 기세로 뻗어오르며 남궁위의 검세에 부딪혀 가는 게 아닌가? '흐윽......!' 남궁위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두 물기둥의 기세는 마치 살아 용트림 하는 쌍룡(雙龍)의 위력을 방불케 했다. 허나 남궁위는 더 이상 놀라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최대한으로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리며 검세를 광(廣)에서 중 (重)으로 변화시켰다. 우우우우욱! 꽈르르르.... 천붕지괴(天崩地壞)의 굉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동시에 그들은 서로의 반탄력에 의해뒤로 두 걸음씩 물러섰다. 남궁위는 훌륭하게 백검우의 공세를 막아낸 상황이었다. 허나 그는 애석하게도 다음 순간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촤아아......! 몇 가닥의 물방울이 퉁겨 그의 몸 위로 떨어지자, 본능적으로 자 세가 흐트러진 것이다. '아차!' 남궁위의 안색이 찰나간 잿빛으로 변했다. 고수들의 싸움에 있어 티끌만한 허점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백검우의 손은 털끝만큼도 사정이 없었다. "중수(重水)! 승뇌폭(乘雷爆)!" 무감동한 일성이 터지고, 콰아아아! 쿠르르르릉! 노도같은 물기둥이 유성(流星)처럼 꼬리를 만들며 남궁위를 강타해갔다. '흑......!' 남궁위는 황망히 검을 내리 그었다. 촤아아-- 아! 허나 물기둥은 두 줄기로 나누어졌을 뿐 더욱 무섭게 짖쳐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칼로 물베기였다. "우아아악!" 꾸르르르...... 콰아아......!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비명이 터져 울렸다. 동시에 남궁위의 몸은 그대로 초류하의 물결 위에 날아가 떨어졌다. 철썩! 피(血)......! 시뻘건 핏물이 순식간에 초류하를 붉게 물들였다. 더 볼 것도 없는 즉사였다. 전신이 참혹하게 뭉개진 남궁위의 시신은 거대한 붉은 낙엽처럼 수면 위를 둥둥 떠내려갔다. 한편 상황을 주시하던 관청우의 얼굴 은 온통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놈의 무공이 저토록 고강할 줄이야!' 그렇다. 백검우의 무공은 완전히 그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관청우는 서서히 자신에게로 몸을 돌려 다가오는 백검우를 보며 손에 식은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 이윽고 그의 앞에 선 백검우가 신비롭게 미소하며 물었다. "보았는가?" "......!" "다시 묻겠다. 보았는가?" "보...... 보았다." 관청우는 부지중에 신음처럼 대답했다. 백검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되었다." 스윽...... 아, 무엇때문인가? 백검우는 등을 돌려 장내를 떠나기 시작했다. 도천문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 관청우의 몸이 순간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멈춰라! 적을 두고 등을 보이다니...... 너는 나를 모멸하느냐!" "관청우...... 그대는 내 적이 될 수 없다. 그대는 남궁위처럼 내 등을 기습할 용기도 없고 정면으로 나를 상대할 실력도 없다." 백검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나 벼락처럼 관청우의 귓가를 울렸다. 관청우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 백검우의 음성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대를 기다려 주겠다. 남궁위처럼 음흉해 지거나 나를 능가할 실력을 쌓을 때까지 말이다." 그것이 백검우의 마지막 말이었다. 어느새 백검우와 도천문의 모습은 초류하에서 사라져 버렸다. ...... 관청우. 천년 석탑이 되었는가? 그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 관청우가...... 우우...... 나 관청우가......." 뭉턱....... 그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살점이 갈라지며 핏물이 스물스물 흘렀다. 한순간 그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백검우......! 너는 모른다. 나는 아홉 살때 처음 도(刀)를 쥐면 서 맹세했었다. 단 한 번이라도 패하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말이다!" 스릉! 그의 유성혈뢰도가 공허하게 도음(刀音)을 흘려냈다. 관청우는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놀랍게도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티끌만한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완벽하도록 무심한 얼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수중의 유성혈뢰도를 받쳐들고 공허한 시선으로 태양을 바라 보았다. 그의 유성혈뢰도. 그 핏빛 도신(刀身)에는 선명한 세 글 자가 새겨져 있었다. <관청우(官靑雨).> 아아...... 그 혈뢰도에 죽어간 인물 그 몇이었던가. 태양의 양광(陽光)을 받아 혈뢰도는 눈부시게 빛났다. 갑자기. "우핫핫핫핫......!" 관청우는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거의 동시. 번 쩍! 유성혈뢰도가 섬광(閃光)이 되어 관청우의 심장을 관통했다. 푸욱! 등 뒤로 쑥 빠져나온 도(刀)에 새겨진 관청우라는 세 글자가 뜨거 운 피로 물들어 있었다. "......" 관청우는 그 피로 물든 검날을 내려다보며 고통의 신음대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무너져내렸다. 쿠...... 웅......!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관청우는 자결로써 자신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다. 쏴아아...... 쏴아아아...... 초류하의 물결은 아름답게 반짝이며 무심히 흘러갔다. 두 생명(生命)을 앗아간 채...... 허나 죽음의 행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었다. 중원의 지축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천오백 기마대(騎馬隊)가 있었다. 그것은 남쪽에서부터 폭풍처럼 곧장 악양을 향해 가고 있었다. 두두두두-- 두두두-- 깃발(幡). 기마대의 선두에서 휘날리는 찬란한 금빛 깃발에는 선 명한 일곱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玄白武魂辰天下!> ...... 현백의 무혼(武魂)은 천하를 경동한다...... 깃발은 하나가 아니었다. 다른 한 깃발에 핏빛 바탕에 눈처럼 흰 백목련(白木蓮)이 새겨진 채 천공에 휘날렸다. 오오...... 질주하는 현백검장의 검사(劍士)들.... 그들이 지나가는 통로에 위치한 수많은 군소문파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두두두두...... 두두두... 광동(廣東) 땅에 이르러 드디어 현백검장의 천오백 기마대는 질주를 멈추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혈운(血雲)이 광동의 하늘을 덮으려 하고 있었다. 현백검장의 일천오백 기마대는 가공할 기세로 폭풍처럼 광동의 대 지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불과 단 사흘만에 비천소문(飛天素門)과 열하검문(熱河劍門)을 위 시한 여섯 문파가 폐허로 변해버렸다. 그 여섯 문파는 바로 남궁위, 관청우와 함께 현백검장 공격에 가 담했던 흑도문파(黑道門派)들이었다. 애초부터 그들은 현백검장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뒤늦게 백검우의 엄청난 힘을 알아차린 그들은 후회막급이었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시신(屍身)의 산(山)이 쌓이고, 피(血)의 혈하(血河)가 광동을 적셨다. 두두두두-- 두두두-- "으아악......!" "으아아악!" ...... 혈백검장의 숨겨진 거대한 힘(力)! 그것은 중원의 북단 다른 곳에서도 가공할 기세로 일어섰다. 철우환을 비롯한 삼노야(三老爺)가 일천여 고수들을 이끌고 죽음의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오오...... 단 열흘! 청해(靑海) 성마보(星魔堡)! 섬서(陝西) 구가장(具家莊)! 하남(河南) 마불문(魔佛門)! 천마장 남궁위에 동조했던 세 문파가 주검의 피(血)로 세수되었다. 허나...... 누가 알 것인가? 이 모든 것은 다가올 대풍운(大風雲)의 서막(序幕)에 불과했다. 때는 백설(白雪)이 천지를 온통 뒤덮은 초겨울 무렵이었다. ...... 안개에 싸인 거대한 산(山)처럼 숨겨져 있던 현백검장의 힘(力)은 바야흐로 완전히 만천하에 드러났다. 중원각지에 무수히 산재해 있는 대소문파(大小門派)는 아연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흑도(黑道)를 표방해 온 문파들은 거의 문을 걸어잠그다시피 두문불출 움직임을 멈추었다. 혈성보와 천마장 이천오백 정예의 몰살, 그리고 동조했던 십개문파(十個門派)가 피(血)로 세수된 대사건들....... 그것은 현백검장의 위치를 단숨에 삼장이보의 첫번째로 올려놓았다. 백검우라는 석 자 이름은 이제 신화(神話)가 되어 있었다. 흥분하고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입을 모아 부르짖었다. - 무황야(武皇爺) 이후로 가장 출중한 거목(巨木)이 탄생했다! - 백검우는 무황야와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의미를 내포한 소문이었다. 허나 아직도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완강하게 무황야의 존엄성을 지 키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백검우가 개세불출의 기재(奇才)라 할 지라도 무황야의 상대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아무도....... 악양(岳陽). 악양거리는 의외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것은 애초부터 현백검장의 승리를 당연한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 다. 악양 백성들은 그저 소리없이 만족의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철옹성처럼 굳은 믿음이었다. 이번 사건은 단지 그들에게 백검우에 대한 신뢰를 더욱 공고히 하 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곳은 악양성 북문(北門). 어둠 속에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쌔애앵...... 쌔앵...... 이미 인적이 끊어진 대로 위에는 한 대의 먹빛 마차(馬車)가 눈보 라 속에 서 있었다. 마차의 앞에는 두 사람, 한 미청년(美靑年)과 두 노인이 대화를 나누며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백검우와 아란대라마, 그리고 송원주였다. "본좌가 장주를 만난 것은 천운(天運)이었네. 이렇게 천축(天竺) 으로 돌아가게 될 날이 오다니 실로 감개무량이군. 허허허......" "과찬입니다." 아란대라마의 훈훈한 음성에 백검우는 빙긋 미소하며 대답했다. "장주......." 아란대라마는 백검우를 기이한 시선으로 깊이 응시하더니 품 속에 서 뭔가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받게. 이것이 바로 약속했던 무황야의 비밀 중 일부일세." '음......' 백검우는 순간 기이한 흥분을 느끼며 그것을 주시했다. 빛바랜 하나의 목합(木盒). 아란대라마의 간절한 눈빛에서 그 물건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백검우는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 스윽...... 그는 묵묵히 목합을 받아들었다. 아란대라마는 순간 마치 무거운 짐을 벗기라도 한 듯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장주...... 건승을 비네. 본좌의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무황야 는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네." "......!" "그 목합 속의 물건은 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아란대라마의 두 눈은 형형한 안광을 무섭게 빛났다. 백검우는 순간 눈썹을 꿈틀하며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무황야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나의 운명입니다." "음......" 아란대라마는 그러한 백검우의 모습에 나직한 신음성을 흘려내었다. '참으로 대단한 기도로다. 어린 나이에 벌써 저런 신위(神威)를 지니다니.......' 쌔앵...... 쌔애앵...... 눈보라는 점점 더 거세어져 갔다. "장주, 강자(强者)가 되기를 비네. 강자만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네." "후후.... 어떠한 강자도 언젠가는 꺾이게 마련입니다. 무황야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 아란대라마는 탄복의 눈빛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 심으로 백검우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온갖 감회로 뒤얽 힌 온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백검우는 아란대라마의 그 진심어린 기원(祈願)을 읽을 수 있었다. 문득 백검우는 송원주에게 시선을 보냈다. "아쉽군요. 이제는 화양소원에 가도 송원주님을 못만나게 되겠군요." "허허......." 송원주는 시선을 들어 암천(暗天)에 휘날리는 눈보라를 주시했다. "세월(歲月)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 아닌가? 계집년 엉 덩이도 쭈그러질테고 토실토실한 강아지는 흉물스럽게 커서 고깃 감으로 팔려가는 것이네. 장강(長江)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밀려나 듯...... 이제 무림천하(武林天下)는 우리들의 것이 아닌 자네, 새로운 영웅들의 것이네." 쌔애앵...... 쌔앵...... "이 송칠만은 자네를 내 마음 속에 유일한 친구로 간직하고 있겠네." "저 역시 송원주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백검우는 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송원주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찬축(天竺)에서 자네의 소식을 기다리겠네." 스으윽....... 끄그긍! 마차(魔車), 아란대라마와 송원주를 태운 마차는 눈보라 속을 질주하여 사라져 갔다. 두두두 두두! "......!" 백검우, 그는 홀로 천년석상처럼 눈보라 속에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윽고 그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스으윽...... 바로 그때였다. 그의 귓가에 멀어져 가는 송원주의 전음(傳音)이 울려왔다. (이 늙은이만은 장주가 무황야를 언젠가 꺾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 심치 않네. 그것은 나의 신념일세.......) '......!' (잘있게...... 우백(友白)......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네.......) 전음(傳音)은 거기서 뚝 끊어졌다. 백검우는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스으윽...... 그의 준수한 얼굴에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우백(友白), 바로 화양소원에서 백검우에게 붙혀준 우정어린 애칭이 아니던가. "......" 현백검장의 태화거(太華居)에 있는 한 칸의 정실(靜室). 백검우는 돌아오기가 무섭게 아란대라마에게서 받은 목합을 열고 있었다. "아란대라마는 분명 이 물건이 무황야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흥분한 탓인가? 그의 안색은 은은히 상기되어 있었다. 목합 속의 물건이 안개 속에 가려진 무황야의 정체를 어느 정도 밝혀주리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스윽! 이윽고 목합의 뚜껑이 열려지며 안에서 두 가지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한 통의 밀봉된 서찰과 열 개의 먹빛처럼 검은 광채를 발하는 염주알이었다. "으음......" 백검우는 두 눈에 신비로운 정광(精光)을 흘려내며 먼저 서찰을 뜯었다. 스윽.... 서찰을 펼쳐본 백검우의 얼굴이 일순 놀라움으로 가득 물들었다. "이럴 수가......!" <무황야에 대해 본 아란대라마가 알고 있는 것은 단 두 가지다. 그 중 하나는 무황야가 바로 북해(北海) 천궁(天宮)의 후예라는 것이다.> "무황야가 천궁의 후예였단 말인가?" 백검우의 몸이 충격과 격동으로 인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천궁(天宮). 그곳은 태고적부터 존재해 온 유수 지상문파(地上門派) 가운데 가 장 완벽한 일맥비전(一脈秘傳)의 신비궁이었다. 천궁을 아는 무림인은 극소수였다. 허나 천궁을 아는 자들은 그 상상할 수조차 없는 광대무변의 힘(力)을 알고 있었다. <천궁(天宮)은 일당천하(一當天下)의 신화를 창조해낸 유일문(唯一門)이다!> 천궁의 불가사의한 내력을 그 이상 잘 말해주는 말은 없었다. 천궁의 인물이 몇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허나 분명한 건 천궁의 인물들 중 단 일 인(一人)의 무공만으로도 능히 중원천하(中原天下)를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가공할 전모는 이백 년 전(二百年前) 현실로 나타났다. 이백 년 전, 한 명의 중년인(中年人)이 중원(中原)에 나타났다. 그는 천하를 굽어보며 엄청난 공언을 했다. <나는 천궁에서 왔소..... 나는 천궁의 사대수호대주(四大守護隊主) 중 일인이오. 내 이름은 사마운기(史馬雲奇), 나는 중원천하를 상대로 하여 나의 무예를 시험하겠소!> 오오...... 그것이 그가 중원땅에서 첫번째 흘려낸 말이었다. 그로부터 사마운기는 한 자루 고검(古劍)을 손에 든 채 중원의 최 북단에서 남단까지 횡단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처음에는 사마운기를 미친 광인(狂人)이라고 조소했다. 허나...... 추풍낙엽이란 이를 두고 말함인가? 정사제일신군(正邪第一神君), 천무황(天武皇) 유정천(柳精天)! 흑도패황(黑道覇皇) 마도천군(魔刀天君) 사무승(史武乘)! 무림대종사(武林大宗師) 뇌백(雷白)! 당대의 거두지존들이 차례로 사마운기의 고검 아래 무참히 도륙되었다.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구대문파(九大門派) 장문인들조차 예외없이 저승의 고혼으로 변했다. 그제서야. 중원은 넋을 잃고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거대한 하나의 신화(神話)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공포(恐怖)였다. 그 누구도 사마운기의 검(劍) 아래 단 삼초(三招)를 넘기지 못했 으니 어찌 혼백이 아니 놀라겠는가? 허나...... 중원천하를 밟고 선 사마운기, 그는 오히려 중원 남단의 한 포구에 이르러 장탄식을 흘려냈다. <나 사마운기는 중원(中原)에 대해 실망했다. 중원은 어찌 이리 허약한가? 이제 나 사마운기는 본 천궁(天宮)의 주상인 궁야(宮爺)에게 돌아 가 중원의 허약함을 보고할 것이다.> 오오...... 믿을 수 없게도 그 말은 사마운기가 천궁의 일개 고수에 불과하다 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사마운기가 흘려낸 두번째 일성(一聲)! <들어라......중원이여... 본 천궁은 이백 년 후 고금제일의 완벽한 절대무신(絶對武神)을 탄생시키리라! 그 절대무신은 본 천궁의 육대궁주(六代宮主)가 될 것이며 중원을 영원히 지배하게 되리라. 이백 년(二百年)... 금후 이백 년이 흐를 때까지 천궁에 대항할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 다면 절대무신이 이끄는 영원한 천궁의 시대가 도래하리라!> 사마운기, 그는 그렇게 떠났다. 헌데 정확히 이백 년이 흐른 지금. 백검우의 손에 의해 한 가지 엄청난 사실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사마운기가 탄생을 예고한 육대 천궁궁주인 절대무신이 바로 무황야(武皇爺)였다니.......' 백검우는 머리 속이 무섭게 텅 비어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체 언제 그가 이토록 격동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아버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백검우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났다. "무황야...... 그는 단지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정녕 천하에 그가 두려워 하는 것은 없는가?" 그의 전신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내년이다...... 사마운기가 예고한 대로라면 무황야는 내년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다음 순간 백검우의 표정은 놀라우리만큼 담담하게 가라앉았다. 스윽...... 그는 아란대라마의 서찰을 계속 읽어내렸다. <본 라마는 근 오십여 년 동안 천궁의 불가사의한 무학을 파해하 는데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본 라마의 야망이었다. 허나, 정작 천궁의 무학을 파해할 수 있는 개세절학을 발견했을 때에는 그 야망도 차디차게 식어버렸다. 본 라마는 이제 너무 늙었다. 생명(生命)이 다한 화초에는 다시 꽃이 피지 않는 법.......> 여기까지 읽은 백검우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무황야를 상대할 수 있는 무공이 있었단 말인가!" 아란대라마, 그의 일생(一生)과 혼(魂)이 담긴 서찰은 계속 이어졌다. <천궁의 무학은 단 두 가지 만으로 밖에 대적하지 못한다. 그 하나는 구백 년 전(九百年前) 실전된 밀교(密敎)의 합밀개원천 불공(合密開源天佛功)이다. 또 하나는 천 년 전(千年前)의 신비문인 뇌허제성문(雷虛制星門) 의 뇌허유성결(雷虛流星訣)이다.> "아......!" 백검우는 신음했다. 그는 새삼 천궁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합밀개원천불공(合密開源天佛功)과 뇌허유성결(雷虛流星訣)이라...!' 그것은 백검우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허나. 백검우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구백 년 전의 밀교와 천 년 전의 뇌허제성문은 당대의 천하(天下) 를 합통하여 영화를 누렸던 전설지문(傳設之門)이었음을! "아란대라마는 정녕 그 두 가지 무학을 찾아냈단 말인가?" 백검우는 두 눈에 불같은 신광을 발하며 내용을 읽어갔다. <두 무학은 모두 아득한 세월 전에 실전된 것이다. 허나 본 라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본 라마는 밀교의 신물(信物)인 마정묵령(魔精墨靈)을 찾아냈다. 마정묵령에는 합밀개원천불공이 새겨져 있다. 허나...... 끝내 뇌허제성문의 신물이며 뇌허유성결이 새겨진 천 성묵번(天星墨幡)은 구하지 못했다. ...... 중략(中略) ...... 각고 끝에 본 라마는 천성묵번이 원(元)의 황실(皇室)에 흘러 들 어갔음을 알아내기에 이르렀다. 본 라마는 그때문에 원 황실의 대종법장령이 되어 천성묵번을 수소문하기에 이르렀다.> "아...... 아란대라마에게 이토록 무서운 집념이 있었을 줄이야......." 백검우는 새삼 탄복을 금치 못했다. <드디어 본 라마는 천성묵번이 한 인물의 손에 들어있음을 알아냈다. 허나 통한스럽게도, 그 순간 원(元) 황실은 명(明)에 의해 망하고 본 라마는 명의 암 산으로 순검옥에 갇히게 되었다. 천성묵번을 지닌 인물은 바로 천광대장군 좌태승이었다. 허나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애석 하게도 천성묵번은 영원히 신비로 남게 되었다. 이제. 본 라마는 이 모든 비사와 내 전 생애를 바쳐 얻은 마정묵령을 중 원의 한 젊은 영웅에게 바친다. 백검우.... 그의 이름은 백검우이다.> 서찰은 그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허나 백검우는 서찰에서 언급된 마정묵령보다 천광대장군 좌태승 이란 이름에 더 격동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그는 급히 품 속에서 하현극 오군우도독에게서 받은 묵죽모필을 꺼냈다. "틀림없다! 이것은 바로 천성묵번일 것이다!" 오오.... 묵죽모필이 바로 천성묵번이란 말인가? 어찌 모필이 깃발(幡)이 될 수 있는가? 허나 사실이라면....... 그것은 정녕 너무도 기이한 우연이 분명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백검우는 마정묵령 열 개의 먹빛 염주알과 묵죽모필을 양손에 잡 은 채 격동으로 몸을 떨었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 밤(夜). 어둠과 눈보라에 잠긴 천지(天地)가 서서히 새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휘우우우....... 휘우웅....... ■ 일로제검 제2권 20장 위대한 현신(現身) ━━━━━━━━━━━━━━━━━━━━━━━━━━━━━━━━━━━ 백검우는 두 눈에 형형한 안광을 발하며 묵죽모필을 살피고 있었다. "......." 이미 두 시진이 흘렀다. 허나 묵죽모필은 아무리 보아도 하나의 평범한 붓에 불과했다. 하지만 백검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다시 일다경쯤 흘렀을까? 백검우의 뇌리에 갑자기 섬광처럼 떠오르는 뭔가가 있었다. "바로 그것이다!" 백검우의 입에서 신음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대나무(竹)로 된 것이 아니라, 열유묵철(熱幽墨鐵)이란 희귀한 쇠로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아...... 열유묵철(熱幽墨鐵)이라면 천축에서만 생성된다는 희귀한 쇠가 아닌가?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열유묵철은 무게가 나무보다 가볍고 강 (强)하기는 만년오금철을 능가한다고 했다. 특히, 열유묵철은 불가사의한 성질을 지녀 극강의 열(熱)을 받으 면 거의 두 배로 늘어난다고 했다. 그렇다. 원래 대나무로만 생각했던 묵죽모필의 몸체는 바로 열유묵철이었 던 것이다. "너무도 정교하다...... 이제껏 나무로만 착각했으니...... 와핫핫핫......!" 백검우는 기쁨으로 두 눈에 신광을 폭사하며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지체없이 내공(內功)을 끌어올려 묵죽모필에 극양지기(極陽 之氣)를 주입했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웅웅...... 묵죽모필이 뻘겋게 달구어지며 실내(室內)에 가득 묵광(墨光)을 뿜어내는가 싶더니 거의 두배 가량 부피가 늘어나는 게 아닌가! 정녕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촤아아악! 오오...... 깃발(幡)! 묵죽모필 속에서 찬란한 광휘(光輝)를 뿌리며 하나의 깃발이 솟아 오르는 것이다. "아......!" 백검우는 절로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깃발에는 은색(銀色)의 눈부신 성좌(星座)가 새겨져 있었다. 도합 열여덟 개의 찬란한 별(星)이었다. 깃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서로운 기운은 방 안을 완전히 가득 메워버렸다. 백검우는 실제로 자신이 밤하늘에 찬란히 떠 있는 성좌 가운데 둘 러싸인 듯한 환각을 느꼈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신비롭다. "이건......!" 백검우는 곧 성좌 가운데 새겨진 두 줄기 글씨를 발견해냈다. <천성광명제유혼(天星光明制幽魂), 만병복양묵번하(萬兵伏陽墨幡下).> <일광번천열지(一光煩天熱地), 운중잠뇌필멸(雲中潛雷必滅).> - 천성의 광채가 혼백에 이르니 만병(萬兵)이 묵번 아래 꿇어 엎드린다! - 한 줄기 광채가 하늘을 쪼개고 땅을 찢으니 구름 속의 번개가 모든 것을 멸하리라! 글씨의 내용을 확인한 백검우의 두뇌가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구결은 단순히 천성묵번의 위엄을 상징한 것이나, 두번째 구결은 이 안에 숨겨진 무공을 설명하는 것이 분명하다!" 백검우는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은연중에 천성묵번에 주입하던 극양지기를 거두었다. 그러자. 휘류륭......! 눈깜박 할 사이에 실내를 가득 채웠던 묵광(墨光)이 사라지며 천 성묵번이 원래의 작은 묵죽모필로 되돌아 갔다. "신통하군...... 후후......!" 슥! 그는 그제서야 천성묵번을 놓고 마정묵령 열 개의 염주알을 살폈다. 각 염주알에는 불상(佛象)이 갖가지 형태로 새겨져 있었다. 또한 염주알 속으로는 천축문(天竺文)으로 각기 한 글자가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으음......!" 백검우는 어렵지 않게 그 글자들을 차례로 배열해 냈다. 그것은 백검우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할 재지(才知)였다. <불(佛), 광(光), 열(熱), 번(幡), 천(天), 영(靈), 겁(劫), 유(幽), 유(幽), 아(我)!> "불광열번천, 영겁유유아......! 이것은 언뜻 보기에 밀교(密敎)의 술문(術文)같군......" 백검우, 그는 두 눈에 신비로운 정광(精光)을 뿜어내며 마정묵령을 내려놓았다. 스윽...... "이제 시작이다." 백검우의 입에서 서릿발같은 예기를 담은 채 흘러나온 한 마디. - 이제 시작이다! 오오...... 어느 누가 알 것인가? 그 한 마디는 삼천 년 무림사에 또 하나의 불세출 무공의 지존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백검우, 그는 창가로 다가가 문(門)을 활짝 열었다. 쌔애앵......! 살을 에이는 차가운 한풍과 함께 눈보라가 실내로 짓쳐 들어왔다. "웅비, 거기 있느냐?" 스슥! 이내 눈보라를 뚫고 웅비가 유령처럼 창문가에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새벽이 다가오는데도 아직 안 쉬고 있었느냐?" "장주님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한 이 웅비는 쉬지 않습니다." "음......!" 백검우는 미소했다. 그는 곧 엄숙한 신색으로 분부했다. "오늘부터 석 달간 아무도 나의 거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라." '......?' 웅비의 얼굴에 순간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허나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명심하여 이행하겠습니다." ...... 덜컹! 창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그날부터 백검우의 연공은 시작되었다. 천하의 그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천성묵번과 마정묵령의 신비(神秘)가 서서히 벗겨져 갔다. 백검우와 무황야의 운명적 만남을 예고한 이날, 때는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는 영락 원년 십이월 초 닷새였다. ...... 후우우우웅! 쌔애앵! ② 세월유수(歲月流水)....... 중원은 새해를 맞이했다. 거센 눈보라가 물러가는가 했더니 만화(萬花)가 피고, 새소리 요 란한 춘삼월(春三月)이 찾아왔다. 대강남북 중원천하는 아름답게 채색되었다. 허나...... 그 평온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한 가지 엄청난 소식이 멀리 북해(北海)에서 날아 와 중원을 벌컥 뒤집어놓고 만 것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 바로 무황야에 대한 소식이었다. - 무황야가 천궁(天宮)의 궁주로 밝혀졌다! 오오.... 무황야의 정체가 바로 이백 년 전 사마운기가 예언했던 천궁의 절 대무신이라는 가공할 사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천하무림인들은 전율 속에서 형언 할 수 없는 혼란을 느껴야 했다. - 무황야가 중원(中原)을 영원히 천궁의 이름 아래 두려 한다! 이 엄청난 현실 앞에 천하무림인들은 두 갈래로 양분되었다. 그것은 무황야를 신(神)처럼 떠받드는 친접세력과, 반대로 중원 (中原)을 지키려는 의연한 협사(俠士), 영웅들의 세력이었다. 오오...... 무적 천궁의 신화(神話)를 지닌 구름 속의 절대자 무황야. 그 거대한 발걸음이 중원에 당도했을 때 중원(中原)의 운명은 과 연 어떻게 뒤바뀔 것인가? 흥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시일은 무심히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중원 무림인들은 무황야가 사월사일(四月四日)에 중원에 첫발을 내디딜 것이라는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③ 절강성(浙江省)의 항주(杭州). 이곳은 중원 최대의 항역이다. 평소 수천 척의 크고 작은 범선들이 왕래하는 포구....... 허나 이날 따라 항주의 광대한 포구에는 단 한 척의 배도 보이지 않았다. 때는 이른 새벽.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茫茫大海)에 검푸른 파도가 물결치고 있 었다. 쏴아아아....... 촤아아아아! 헌데....... 오오....... 이 무슨 엄청난 인파인가? 광대한 포구의 모래사장에 근 삼십만을 헤아리는 인물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무림인(武林人)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긴장과 흥분, 그리고 초조함으로 물든 시선을 멀 리 망망대해의 수평선에 고정하고 있었다. 승인(僧人), 도인(道人), 천축인(天竺人), 대막인(大漠人), 속인(俗人). 그야말로 천하 모든 문파(門派)들의 인물들이 다 운집해 있었으니....... 장관! 실로 엄청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그들은 무슨 연유로 이처럼 몰려들었단 말인가? 그렇다. 오늘은 바로 무황야가 중원에 발을 들여놓겠다고 공언한 사월사일(四月四日)이었다. 엄청난 인파는 말할 것도 없이 무황야를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군웅들 가운데는 수많은 세력을 이끌고 온 채 눈길을 끄는 거두지 존(巨頭至尊)들도 상당수 있었다. 소림장문인(少林掌門人) 청려대선사(靑麗大禪師), 무당장문인(武 當掌門人) 옥허도진(玉虛道眞), 화상장문인(華山掌門人) 벽정검무 후(碧精劍武侯) 석무린, 개방 방주(幇主) 취취청개.... 천하인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는 오파일방의 지존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그뿐인가? 신비에 가려있던 삼장이보(三莊二堡)의 지존들 가운데 천마장주 남궁결(南宮訣)을 제외한 삼 인(三人)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유천장주 반혁궁(潘赫宮). 그는 중년의 수려한 용모에 손에는 섭선(攝扇)을 들었는데, 마치 문사(文士)처럼 은은한 기품을 흘려내는 인물이었다. 혈성보주 관형악. 흑의장포를 입은 깡마른 체구를 지닌 그는 얼음장처럼 냉막한 인 상에 눈빛은 진저리쳐지리만큼 무심했다. 그는 단번에 남의 눈에 띄는 풍모였는데 가끔 음침하게 사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듯....... 그렇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혈성보와 천마장에 극심한 타격을 입힌 백검 우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관형악의 모습을 본 무림인들은 너나 할것 없이 섬뜩한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 '제기랄, 지옥에서 뛰쳐나온 악귀도 저보다는 낫겠군!' 허나 가장 특이한 인물은 따로 있었다. 인혼보주 야대혼(夜大魂), 바로 그였다. 살수지문 인혼보는 삼장이보 가운데 가장 거대하면서도 안개 속에 가려진 신비문파였다. 그 인혼보를 이끄는 야대혼이 군웅 앞에 나타난 것이다. 허나 군웅들은 막상 그를 보고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야대혼은 자신의 면모를 숨기기 위해 얼굴에 소면탈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이 부시도록 흰 천축백잠의(天竺白蠶衣)를 입고 있었다. 그에 대해 무림인들이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처럼, 그의 전신에서 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조용히 선 채 소면탈의 웃는 얼굴로 먼 수평선을 묵묵 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문득 몇몇 인물들이 중얼거리는 음성이 야대혼의 귓 속을 파고들었다. "내 평생...... 이처럼 거대한 군웅들이 모인 것은 처음 보네. 정말 가슴이 떨리는군." "그건 그렇다치고...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이 아직 보이지 않는 걸." "누구 말인가?" "현백검장주 백검우 말일세. 그를 보러온 군웅들도 적지 않음을 난 알고 있네." "과연 이제보니 그가 보이지 않는군!" 우연이었을까?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야대혼의 손끝이 일순 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쌔애애앵....... 쌔앵......! 바다내음을 가득 실은 바람은 세상사의 일에는 관심없다는 듯 그 저 무심히 불어닥치고 있었다. "아......!" "일출(日出)이군......!" 어느 순간 삼십만 군웅들이 일제히 탄성을 발하며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태양(太陽). 이글거리는 거대한 태양이 수평선 위로 막 떠오르고 있었다. 거의 날마다 보는 태양이었지만 오늘따라 무림인들은 짙은 감회에 빠져 들었다. 광대한 포구를 메운 군웅들의 얼굴에 일일이 눈부신 햇살 이 반사되었다. 거의 동시였다. "저기 온다!" 누군가가 흥분으로 떨리는 외침을 토해냈다. "오오...... 무황야의 배가 나타났다!" - 무황야의 배가 나타났다! 그 외침성은 마치 하나의 도화선과도 같았다. 광대한 포구는 삽시간에 군웅들의 엄청난 함성으로 온통 뒤덮였다. "와아아아......!" "와와아......!" 그것은 차라리 광란의 물결이었다. <오색범선(五色帆船).> 멀리 수평선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등 뒤에 지고 한 척의 거대한 오색범선이 나타나고 있었다. 오색범선의 웅장하고 화려한 위용은 막 떠오르는 수평선의 태양 빛을 받아 하나의 장관을 이루었다. "오오......" "아......!" 군웅들은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전율로 모두가 전신을 떨었다. 촤아아아아! 오색범선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포구에 다가올수록 그 거대한 위용은 군웅들을 압도했다. 그 크기 가 마치 움직이는 바다의 궁전(宮殿)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서서히 오색범선이 포구에 접안한 순간이었다. "......!" "......!" 삼십만 군웅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적막을 지켰다. 마치 그들은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순간을 지켜보는 듯.... 아니 어쩌면 그들은 천지종말(天地終末)의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 지도 몰랐다. 쿠구궁! 마차(馬車), 거대한 순백색의 십육두마차(十六頭馬車)가 오색범선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마차는 서서히 군웅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눈이 시리도록 화려한 마차는 조용히 군웅들 가운데로 미끄러졌다. 그그긍! 군웅들은 그 위용에 압도당한 듯 양 옆으로 쫘악 갈라서며 순백색 마차의 길을 터놓았다. 마차의 마부석에는 면사로 얼굴을 가린 선녀(仙女)같은 자태의 다 섯 소녀(少女)가 앉아 있었다. 그녀들의 옷차림도 역시 눈부신 순 백색 궁라의(宮羅衣)였다. 쿠구궁...... 이윽고 마차가 멈추어 선 곳은 오파일방 장문지존들의 앞이었다. 삘리리....... 띠디딩...... 띠딩......! 거의 동시에 순백색 마차 안에서 아름다운 주악소리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마차의 문(門)이 서서히 열리며 열두 명의 면사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들은 미끄러지듯 기품어린 동작으로 모래사장의 바닥에 붉은 융단을 깔았다. 스륵....... 스르륵.... 장내의 군웅들은 거의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드디어 그 융단을 밟으며 마차 안에서 한 명의 자의인(紫衣人)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스윽! "......" 그는 한 손에 학익선(鶴翼扇)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는 지극히 안정된 걸음으로 오파일방 장문인들에게 걸어가기 시 작했다. 그러한 그의 전신에서는 형언키 어려운 기도가 풍겨나와 장내를 완전히 압도했다. 군웅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무황야...!' '오오......!' 띠디딩...... 띠딩......! 삘리...... 삘리리....... 주악소리는 여전히 신비롭게 군웅들의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윽고 자의인은 오파일방 장문인들 앞에서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거의 동시에 자의인은 얼굴을 가렸던 학익선을 천천히 내렸다. 순간 삼십 세 가량으로 보이는 화안(和顔)의 신태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더할나위없이 준수하다. 눈이 시리도록 준수한 이목구비에 여인(女人)의 그것보다 희고 부 드러운 살결을 지닌 남순호치의 미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미소....... 그의 입가에는 지극히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삼십 년 전에 내가 중원에 왔을 때도 아름답고 따사로운 봄이었소...... 좋은 날씨로군." 담담한 독백성, 그의 한 마디는 나직했으나 은연중 듣는 이에게 기이한 감동을 주었다. 헌데 삼십 년 전이라고 했는가? 그렇다면 그의 나이는 최소한 오십을 넘어섰다는 뜻이 아닌가.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그는 깊숙한 시선으로 오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 무황야(武皇爺)요." 오오...... - 나 무황야요...... 천하의 어느 누가 이처럼 자신있게 자신의 존재를 밝힐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황야 만세!" "무황야...... 무황야......" 경천동지할 함성이 한곳에서부터 출발하여 광대한 포구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것은 다가올 거대한 대풍운(大風運)을 예고하는 운명의 소리였 다. 삼십만 군웅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무황야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무황야... 무황야......." 열광의 물결은 끝없이 이어졌다. 무황야는 일체의 무심한 신색으로 사위를 조용히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군웅들의 사이를 뚫고 인혼보주 야대혼이 무황야 앞으로 접근해왔 다. 동시에 장내의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인혼보주 야대혼이 놀랍게도 무황야의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고 정중히 부복한 것이다. "무황야...... 천궁백당삼위(天宮白堂三位) 야대혼입니다." 지극히 무감동한 음성....... 무황야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삼십 년만에 널 보는구나." 순간 사위의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저럴 수가......" "인혼보가 천궁의 밑에 귀속된 문파였단 말인가?" 모두가 넋을 잃고 있을 때, 이번에는 백미(白眉)에 자애로운 눈빛 을 지닌 노승(老僧) 한 명이 무황야에게 다가왔다. "아미타불...... 소승은 소림(少林)의 창려이오." 그는 바로 세인(世人)들이 창려대선사라 우러러 부르는 대소림(大少林)의 지존이었다. 창려대선사는 만면에 우려의 빛을 가득 담은 채 무황야에게 물었다. "귀한 존체를 보게 되어 영광이오....... 허나 소승은 묻지 않을 수 없소." "무엇을 물으시겠소? 선사......." 무황야는 부드럽게 반문했다. 창려대선사는 침중하게 말했다. "소승은 중원의 운명에 대해 묻고저 하오. 무황야께선 중원이 누 구의 것이라 생각하오?" "......" "아미타불...... 중원은 중원인(中原人) 모두의 것이오. 어느 한 인물의 아래 중원을 두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대살겁(大殺劫)이 따 르게 되리다!" "대살겁이라......." 무황야는 나직이 뇌까리며 창려대선사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대살겁이라......!" 그는 또 중얼거리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손(手)....... 눈부시리만큼 희고 마디가 고운 손이었다. 무황야의 손(手)....... 무엇을 보았는가? 무황야는 문득 두 눈에 기이한 광채를 흘려내더니 말했다. "선사께서는 아시오, 모르시오? 나는 이 손에 내 스스로 피(血)를 묻혀본 적이 없소." "......!" "선사께서는 귀가 있으니 거목(巨木)은 가만히 있으되 바람(風)이 잔가지를 흔들어 놓는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이오." 미소....... 무황야는 환하게 웃으며 맑은 새벽의 천공(穿孔)을 올려다 보았다. "나 무황야는 가만히 있었소. 허나 운명(運命)이 나를 가만히 놔 두지 않는구료....... 그러니 선사만이라도 나를 가만히 놔두시오." "아미타불...... 그 뜻은......?" "중원의 하늘은 곧 나요. 이것은 이미 이백 년 전에 결정된 운명 이오. 거역하지 마시오. 거역하면 모두 죽으리다." "무, 무황야......!" "이 무황야를 낳은 것은 천궁(天宮)이오. 천궁은 천지합통, 무림 합통 천궁천하를 나에게 요구했소. 나는 승낙했지. 거역하면 이것 은 곧 불효와 같은 것이 아니겠소?" 무황야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하고 그의 음성은 너무도 온화했다. 허나 그의 말 속에 담긴 뜻은 너무나도 무섭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아아..... 대체 불존의 뜻은 무엇인가?' 창려대선사는 충격으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창백한 표정이 가여웠는가? 무황야는 문득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살겁이 일어나든, 중원이 스스로 승복하든 천궁의 신화는 이루어질 것이오. 허나......." "허나 무엇이오니까?" "내 일 년(一年)의 기한을 중원에 주겠소. 그 안에 중원은 본인을 꺾을 수 있는 인물을 보내시오." "아......!" "그것이 내 마지막 배려이오. 만약 내가 패배한다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북해 천궁으로 돌아가리다." 심유무심한 일언(一言)...... 그것은 엄청난 의미를 내포한 한 마디였다. 창려대선사는 단번에 그 말뜻을 깨달았다. '오오...... 적어도 일 년 안에는 대살겁이 일어나지 않겠구나. 허나 과연 누가 이 불세무신 무황야를 상대해낼 수 있단 말인가?' ■ 일로제검 제3권 21장 바람이 흘러가는 곳 ━━━━━━━━━━━━━━━━━━━━━━━━━━━━━━━━━━━ 땀(汗)....... 창려대선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스물스물 맺혔다. 장내에는 터질 듯한 긴장의 회오리가 엄습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가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현백검장의 마차(馬車)가 온다!" "백공(白公)이 왔다.!" 백공(白公)....... 바로 백검우를 가리키는 칭호가 아닌가? 두두두두--! 과연 멀리 군웅들의 사이를 헤치며 한 대의 마차가 질주해 오고 있었다. 마차에는 백목련(白木蓮)의 깃발이 선명하게 나부끼고 있 었다. "와와......!" 군웅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마차는 곧장 무황야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군웅들의 흥분하는 광경 때문이었을까. 무황야의 눈 깊숙한 곳에 빠르게 이채가 스쳤다. 그그긍-- 이윽고 마차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섰다. 웅비. 그가 마부석에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힐끗 무황야를 한 번 쳐다보더니 두 눈을 내리감았다. 거의 동시에 마차문이 열렸다. 사라...... 그녀가 내렸다. 그녀는 백색 궁라의를 입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더 아름답 게 보였다. 허나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갑고 변화가 없었다.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그녀는 마차 안을 향해 공손히 몸 을 숙였다. "장주님...... 당도했습니다." 장내의 중인들은 일제히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눈으로 마차문을 응시했다. 이윽고 백검우가 단아한 백의(白衣) 차림으로 조용히 모습을 나타냈다. 지난 석달 사이 그의 모습은 몰라보리만큼 달라져 있었다. 그는 완전한 청년(靑年)으로 성숙했다고나 할까. 게다가 그의 전신에서 는 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은은한 기도가 후광처럼 서려있었다. '아......!' '실로 대단한 기품이로구나!' 장내 인물들은 한결같이 내심으로 탄성을 흘려냈다. 백검우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무황야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허나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이 순간 그의 가슴은 용암이 끓듯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으니....... 지난 날 부친 백장청이 무황야의 이름을 되뇌이며 죽어갔던 일이 주마등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며 그의 뇌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버님...... 여기 당신의 심장에 칼을 꽂았던... 그리고 당신께 서그토록 칭송했던 무황야가 서 있습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백검우는 무황야를 향해 천천히 접근해갔다. 그의 걸음은 지극히 안정되고 부드러워서 마치 흐르는 물결과도 같았다. 그러한 그의 걸음은 보는 이에게 기이한 감동마저 주었다. 무황야의 두 눈에 문득 기이한 광채가 흘렀다. 언젠가....... 그는 이와 비슷한 걸음걸이를 지닌 인물을 만났었다. 비록 그의 손에 그 인물은 쓰러졌으나, 그 인물은 무황야가 평생 처음으로 감복한 진정한 적수이기도 했다. "백장청......." 그의 입에서 독백처럼 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는 비로소 눈 앞 의 젊은이가 백장청과 너무도 흡사한 용모를 지녔음을 깨달았다. 우연인가...... 백검우의 걸음이 그 순간 딱 멈추어 섰다.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무황야의 얼굴에 한 줄기 감탄의 빛이 스쳤다. "그대는 바로 백장청의 아들이군." "그렇소." "그대는 정녕 훌륭한 눈빛을 지녔군." "고맙소." "그대는...... 나를 죽이러 왔는가?" "......" 백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순간 그의 마음은 스스로도 놀랄만큼 안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의 분노가 식어서도 아니요, 그의 피가 차갑기 때문도 아니다. 태풍에 나뭇가지는 흔들려도 태산은 흔들리지 않는 법, 이유는 단지 그가 강해진 때문이었다. 이윽고 백검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들으시오. 무황야...... 나는 부친과 다르오. 나는 당신에게 먼저 도전하지 않소. 당신이 내게 스스로 도전하도록 만들겠소." "내가 스스로 그대에게?" 무황야의 안색이 처음으로 미미하게 흔들렸다. 백검우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렇소." "......!" "무황야...... 그대는 중원을 가져보시오. 나는 이 순간부터 그대의 목만을 생각하겠소." 스윽...... 백검우는 몸을 돌리더니 유유히 자신의 마차로 향했다. 창려대선사를 비롯한 구파일방의 수뇌들이 경이어린 눈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백검우는 마차에 올랐다. 그를 태운 마차는 천천히 장내에 서 멀어져갔다. 두두두두...! 무황야의 얼굴에 일순 뜻모를 미소가 스쳐갔다. "백검우...... 어쩌면 나는 중원보다 그대를 더 중(重)하게 여기 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의 나직한 독백성이었다. 허나 어느 누구도 그 한 마디를 헤아리지 못했다. 광대한 포구에는 알 수 없는 긴장의 격랑이 파도와 함께 출렁였다. 촤아아-- 아아-- 쏴아아...... "와와......!" "와......!" 항주의 외곽으로 뻗어있는 관도(官道). 인적없는 그 길 위를 백검우의 마차가 조용히 질주하고 있었다. 두두두.... 마차 안, "......" 백검우는 침상에 깊숙이 몸을 맡긴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의 앞에선 사라가 작은 의자에 앉은 채 창 밖으로 망연히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마차의 창 밖으로는 춘월의 아지랭이와 함께 아름다운 기화, 수목 들이 울창히 스쳐갔다. 문득 그녀의 얼굴은 짙은 우수로 물들었다. 그것은 항시 차갑고 무심하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에선 놀라운 변화였다. '음?' 백검우는 무심결에 사라를 주시하고는 의아로운 어조를 흘려냈다. "사라, 무엇을 생각하느냐?" "장주님을...... 생각했어요." 사라는 침착하고 차분한 옥음(玉音)으로 대답했다. 허나 그녀의 손길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음은 왠가? "나를?" "장주님은 지난 석달 사이 또 한 번 크게 변모하셨어요. 그것은 마치 대자연의 변화와 흡사해서 알듯 하면서도 전혀 모르겠군요." "후후......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나?" "지난 차가운 겨울 때...... 저는 장주님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겨울에 잘 어울린다고 믿었어요." "......" "헌데...... 오늘은 저 따사로운 봄(春)의 아지랭이와 기화(奇花) 들이...... 바로 장주님의 몸에 서린 기운으로 다가왔어요. 저 는......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군요." "사라가 알고 싶은 게 무엇이지?" 백검우는 지극히 온유한 음성으로 물었다. 사라는 그의 시선에 가볍게 몸을 떨더니 입가에 실같은 미소를 지었다. "장주님께서는 어떻게 불과 몇 달만에 이처럼 강해질 수 있었죠?" "......." 백검우는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는 전신의 근육을 최대한 이완시키며 독백하듯 입을 열었다. "나는 다만 내 자신이 택한 길에 모든 혼(魂)을 싣고 걸어왔을 뿐이다." "......." 사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힘없는 음성을 흘려냈다. "허나 세상에는 자신의 길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녀는 문득 두 눈에 이채를 발하더니 재차 물었다. "무황야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요.... 역시 자신의 길인가요?" "아니다." 백검우의 얼굴에 무거운 빛이 드리워졌다. 그는 곧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를 잔잔히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무황야는 자신의 길을 지닐 필요가 없다." "......!" "그는 오직 자신을 위해 살고 있지. 그가 걷는 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무한대의 절대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아......!" "천하에 그런 인물은 오직 그 혼자 뿐이다. 당금의 천자인 영락황 제조차 역사와 황궁법도가 닦아 놓은 길을 걸어간다."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사라는 일순 전신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전율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백검우는 희미하게 미소하더니 나직한 한숨을 흘려냈다. "그때문에 무황야는 위대하고 무서운 것이다." "네....." "그리고 그때문에 무황야는 극히 위험한 존재이지." 성광(星光)! 백검우의 두 눈에 일순 가공할 광채가 섬광처럼 뿜어져 나왔다. 두두두두... 마차는 마치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사라는 웬지모를 탄식을 발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왠지 오늘따라 기운이 없어 보였다. 백검우는 처음으로 사라가 여인(女人)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었군.....!' 그는 밝게 미소하며 말했다. "이 장주는 이제서야 사라가 생각하는 것을 깨달았구나." "......!" 사라-- 그녀의 얼굴에 순간 은은한 홍조가 드리워졌다. 놀랍게도 그녀는 수줍어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문득문득 평범한 여인을 동경하게 되었 습니다...... 아이를 낳고 낭군을 기다리는......." "......" "그것이 불가능한 것인지 잘 알면서도...... 허나 부질없는 한순간의 상념이겠지요......." 무엇때문인가....... 그녀의 음성은 갑자기 전처럼 무심하도록 냉정해졌다. 그녀의 얼굴은 곧 얼음장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허나, 백검우는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눈물(淚). 그녀의 눈가에 반짝 이슬이 맺혔다가 사라지는 것을....... 백검우는 스스로 두 눈을 내리감았다. 그의 입가에는 더없이 부드 러운 미소가 봄날의 햇살처럼 스쳐갔다. "사라...... 너는 자신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나는 반드시 네가 아기를 안고 행복하게 웃도록 해주겠다." 아기....... 문득 백검우의 뇌리에는 검영이 커오던 모습이 영상처럼 스쳐갔다. '검영......!' 백검우에게 있어 검영은 곧 행복 자체였다. 백검우가 검영에게 지니는 혈육의 정(情)은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검영이야말로 그가 지난 세월 동안 지닌 유 일한 안위와 행복 자체였다. 그랬다. 어떤 의미에서 백검우는 검영의 형이기 이전에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 두두두.... 마차가 굽이진 관도의 한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끄그긍! 돌연 모퉁이에서 또 한 대의 마차가 나타났다. 전체가 온통 검은 색으로 칠해진 흑색 마차였다. 그 마차는 질풍처럼 백검우의 마차 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웅비는 멈칫 예리한 시선을 돌렸다. '......!' 나타난 흑색마차의 마부석에는 청의(靑衣)에 죽립을 깊게 눌러 쓴 인물이 앉아 있었다. 그는 바로 철우환이었다. 두두두-- "웅비, 어린 놈이 이젠 제법 어른 티가 나는구나!" "와하하! 철노야께선 여전히 젊으시군요!" 웅비는 반색을 하며 그를 반겼다. 철우환은 마차를 몰아 웅비와 나란히 질주하며 미소했다. "네 산돼지같은 형(兄)도 잘 있느냐?" "살이 좀더 쪘을 뿐, 잘 있습니다......!" "오......!" 철우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전음(傳音)을 시전했다. (웅비. 장주님께서는 나의 마차에 옮겨타셨다.) "......!" (너의 마차에는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이 항상 따르고 있다. 그들 의 이목을 피해야 함을 잊지 말아라.) '어느새......!' 옹비는 흠칫했다. 이때. 전면에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철우환은 다시 낭랑하게 대소하며 말했다. "하하...... 잘 가거라." "예. 철노야......!" 두두두두! 두두두-- 두 대의 마차는 각기 다른 길로 질주하며 서로 멀어져 갔다. 철우환은 바람처럼 무심한 얼굴로 마차를 몰고 있었다. 마차 안, 어느새 백검우가 홀로 옮겨 탄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어느새 그 의 얼굴 또한 성후준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 그때였다. 그의 귓가에 철우환의 충직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그 사이 장주님의 기도가 눈부시게 달라졌습니다. 혹시 어떤 기 연(奇緣)이라도 얻으셨습니까?" "무림(武林)에서 이미 팔구백 년 전에 잊혀진 두 가지 무공(武功) 을 익혔소. 후후...... 허나 그 위력은 아직 내 자신도 잘 모르겠소." 백검우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철우환의 기쁨어린 음성이 곧 들려왔다. "축하드립니다. 장주님의 마음에 드시는 무공이라면 결코 범상치가 않을 것입니다." "후후...... 무황야에게서 그러한 소리가 나와야 할 것이오." 백검우의 말에 철우환의 신음성이 들려왔다. "아아...... 무황야를 위한 무공입니까?" "그렇소." 백검우는 조용한 어조로 대답한 후 물었다. "금릉은 별일 없소?" "아무 일 없습니다. 단지 황궁주위에서 심상치 않은 소문이......!" "......!" "신년(新年)에는 황제폐하께서 친히 남만(南蠻) 지역을 토벌하리라는 소문입니다." "그것은...... 사실일 것이오." 백검우의 두 눈에 번뜩 기이한 광채가 스쳐갔다. 그는 심유한 음 성으로 독백하듯 말을 이었다. "남만(南蠻)의 왕(王), 예승량(芮昇粱)은 당년 현 황상(皇上)의 즉위를 극력 반대했던 주동세력이었소. 더우기 예승량의 군사력 (軍事力)은 극히 비대하지." "아......!" "예승량이 역천(逆天)...... 즉, 대역음모를 지녔다는 소문이 암 암리에 나돌았으니 황제께서 좌시할 리가 없지......!" 백검우의 말에 철우환은 긴장어린 어조로 물어왔다. "정벌이 있게 되면 장주님께서도 출정(出征)의 분부를 받으시게 될 것이 아닙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백검우는 입가에 운무처럼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나의 지위가 경위지휘검사, 어령군 상장군이니 유수장군(留帥將 軍)이 될 것이오." "유수장군이라 하옵시면?" "뒤에 남아 본국을 지키는 임무로 모든 국사(國事) 처리의 권한을 지니는 삼사(三思) 중 일 인(一人)이오." "아......!" 철우환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그 말뜻은 황제(皇帝)의 권한을 대행한다는 것입니까?" "그렇소. 허나 병권(兵權)에 한해서이오." 백검우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닌가? 침묵. 철우환은 잠시 놀라움을 가라 앉히듯 침묵을 지켰다. 두두두두-- 마차는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수목이 울창한 관도 위를 달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철우환은 침묵을 깨고 진중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장주님께선...... 무황야가 중원에서 어떤 일을 맨 먼저 시도하리라 예상하십니까?" "세력확장이겠지." "......!" "이미 삼장이보 중 가장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 야대혼의 인혼 보가 무황야의 중원교두보임이 밝혀졌소." "으음......!" "허나 그것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소. 이제...... 숨 어 있던 무황야의 세력이 서서히 탈을 벗고 나타날 것이오." 백검우는 냉엄한 어조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제 철노야가 할 일은 무황야와 손을 잡은 세력들을 모두 색출해 내는 것이오." "그것은 이미 예상했던 임무입니다. 헌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무엇이시오?" "무황야의 세력 중에...... 황궁(皇宮)과 관계된 인물들도 있을 것 같습니까?" "후후...... 철노야도 바보스런 질문을 하는군." 백검우는 신비롭게 미소했다. 그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만약 무황야에 의해 중원무림이 합통되면 그 세력은 황궁에도 결정적 위협이 되오." "그렇다면 역시......!" "문제는 무황야가 중원인(中原人)이 아니라는 데에 있소. 중원인 이라면 감히 대역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터이나...... 그는 북해인(北海人)이오." 천천히...... 백검우의 입에서는 무서운 말이 이어졌다. "무황야의 최대 난제는 황궁의 팔십만 금군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 는 것이오. 그것이...... 무황야와 내가 지닌 가장 큰 열쇠이지......!" "아......!" 철우환. 그는 순간 등줄기에 전율이 흐를 정도로 백검우에게 놀라고 말았다. "그렇다면 장주님은 이미 오늘을 예상하시고 대장군의 신분으로 변신했단 말입니까?" "후후...... 그것도 한 가지 이유에 해당되오." 백검우는 두 눈을 지그시 내려감으며 독백하듯 말을 이었다. "무황야가 황궁에 침투시킨 인물...... 그 인물이 누구인지가 궁금할 뿐이오." "장주님......!" "서서히...... 모든 음모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오." 백검우는 전신의 근육을 편하게 이완시키며 말을 마쳤다. 마차는 계속 질주하고, 철우환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두두두-- "......." 나른한 춘월(春月)의 오후, 철우환은 곧 오수(午睡)에 잠긴 백검우의 고른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문득 철우환의 두 눈에는 기쁨과 흥분의 빛이 가득 어렸다. '장주님, 당금 천하(天下)에 장주님같은 영웅(英雄)은 없습니다. 무황야는 장주님을 두려워 하게 될 것입니다......!' ...... 두두두-- 꽃내음과 수풀내음을 실은 춘풍(春風)이 마차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영락 이 년 사월 보름. 칙서-- 영락황제의 칙서가 팔십만 대명전군(大明全軍)에 내려졌다. <오월(五月)을 기하여 전군영순무대례(全軍營巡武大禮)를 친행(親 行) 하겠노라. 전 수장(首將)은 짐을 기쁘게 하라!> 전군영순무대례. 그것은 황제가 직접 전군(全軍)의 세부를 순시하는 행사이다. 이 대례는 출정이 있기 전에 행해지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각 군영 장군들이 황제에게 자신들의 지휘능력을 인정받는 결정적 기회이기도 했다. 황제에게 인정을 받으면 요직을 천명받 게 될 것이요, 그 반대라면 좌천되고 말리라. 긴장과 흥분 속에서 각 군영 수장들은 연무에 부심하기에 이르렀 다. 이러한 상황은 금릉을 아연 활기에 찬 채 떠들썩 하게 하였다. 무검구(無劍邱). 금릉 서편에 위치한 광대한 구릉이다. 그 둘레가 무려 천오백 리(千五百里). 평소에, 이곳은 대명(大明)의 병사들을 위한 연무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 때는 아침 무렵이었다. 무검구 중앙에 위치한 완만한 봉우리가 마치 여인(女人)의 가슴을 엎어놓은 듯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구릉 아래에서 정상까지는 양 옆으로 나란히 금빛 천자번(天子幡) 이 수백 기가 꽂힌 채 바람에 나부꼈다. 아...... 대략 이만(二萬)을 헤아리는 군사(軍士)들....... 구릉 밑에는 양 옆으로 정연한 대오를 이룬 채 이만의 기마병(騎 馬兵)들이 진(陣)을 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하늘(天)을 찌를 듯한 기세요, 장관이었다. "......!" "......!" 손(手). 그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장봉(杖棒)이 불끈 쥐어져 있었다. 그 장봉의 끝에는 시뻘건 유사(油絲)의 천으로 씌워져 있었다. 이만여 군사들의 시선......! 그것은 구릉의 정상(頂上)에 꽂힌 한 거대한 깃발 아래 고정되어 있었다. 거대한 깃발(幡). 거기에는 용(龍)이 꿈틀대는 듯한 필치로 열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위영충의상장군별위대(御衛領忠義上將軍別威隊).> 그 깃발 아래로 한 그루 풍상에 젖은 노송(老松)이 있고, 다시 그 노송 아래로 단순호치의 미공자(美公子)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대장군 차림의 미공자는 두 눈에 맑은 신광을 흘려내며 태사의에 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로 백검우였다. 그렇다. 구릉 아래 대진(大陣)을 형성한 이만 군사야말로 백검우 휘하의 어령군(御領軍)들이었다. 어느 한순이었다. 따그닥...... 따그닥...... 눈(雪)보다 흰 백마(白馬)가 천천히 다가와 백검우의 앞에 멈춰섰다. "......" 백검우는 일어섰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슥! 그가 가볍게 말 안장 위로 올라탔을 때였다. "대장군......!" 한 장대한 근골의 장수가 백검우에게 다가왔다. 그 역시 말을 타고 있었다. 사십대의 그는 뇌전(雷電)같은 눈빛에 얼굴 전체가 시커먼 털로 덮이고 흑염(黑髥)은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 내려와 있었다. 웬 만한 인물은 그의 당당한 기세만 보고도 질려 버릴 것 같았다. 이때. "속하 부장(富將), 연무결, 준비 마쳤음을 알리옵니다." 그가 마상에서 웅후한 음성으로 백검우에게 말했다. 백검우는 부드럽게 미소했다. "좋소." 그는 우호적인 눈빛으로 이 비범한 장수를 깊숙이 응시했다. 어령부장(御領富將) 흑염공(黑髥空) 연무결. 그는 바로 백검우 직속의 부장이었다. 그는 걸걸한 성격이었으나 충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특기는 한 쌍의 묵 빛 철부(鐵斧)를 귀신같이 다루는 것이었다. 연무결. 백검우가 부임하기 전에는 그가 일만 군사를 맡은 참령(參領)의 직위였다. 백검우가 특령을 내려 그를 부장으로 승진케 하고 가까이 두니 연 무결은 크게 감동했다. 호탕한 연무결은 금세 백검우에게 빠져들 어 더없이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이번에는 좌(左), 중(中), 우군(右軍) 가운데 어느 쪽이 승리할 것 같은가?" 백검우가 나직하게 묻자, 연무결은 뭉클 괴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제 분패한 석참령(石參領)의 중군(中軍)이 우세할 것입니다!" "어제 승리한 좌군(左軍)에게는 약속한 상금을 모두 배분했소?" "헛헛...... 물론입니다." 연무결은 가슴을 활짝 펴보이며 크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백미(白米) 오십 석과 은자 이천 냥을 나누어 주었으니 좌군 군 사들의 마누라 모두가 아마 장군님께 알몸이라도 보이고 싶어할 정도로 감격했을 것입니다......!" "후후...... 연무장의 농담은 갈수록 도를 더하는군." 백검우는 빙긋 웃었다. 연무결은 빙그레 웃었다. "장군님의 봉록을 모두 병사들에게 주다가 정작 장군님은 거지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때는 연무장이 나를 먹여 살리겠지." 백검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연무결은 짐짓 기겁하는 시늉을 했다. "아...... 그것은 아니 되오이다. 저는 딸린 입이 많아서......!" "그런가? 그렇다면 딸린 입이 적은 부장을 물색해 보아야겠군......!" 백검우는 태연히 응수했다. 연무결은 흠칫했으나 곧 헛기침을 흘려내더니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걱정 없습니다. 이 연무결이 밥줄 걱정을 할 것 같습니까?" "음......!" "이미 시전가(市廛街)에 돈많은 계집 하나를 물색해 두었으니 여 차하면 달려가겠습니다. 험험......!" "하하......! 세상에는 눈먼 여인(女人)이 많군. 털로 뒤덮인 당신의 몸을 사모하다니..." 백검우는 낭랑하게 대소했다. 연무결은 뭉클 소리없이 입가에 괴소를 머금었다. "이래도 제 그것 하나는 날선 도끼와 진배 없습니다. 찍어주면 어 느 계집이고 당장 눈에 뿌연 안개가 서리지요...... 흐흐......" "그 도끼 조심하시오." 백검우는 담담하게 미소하며 이어 분부했다. "연군(鍊軍)을 시작하시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연무결은 공손히 대답하더니 한 옆에 꽂힌 거대한 깃발을 번쩍 뽑아 들었다. 푸욱......! 그는 깃발을 좌우로 경풍을 일으키며 흔들었다. 순간 경천동지할 함성이 이만여 어령군에게서 터져 천지를 진동했다. 거의 동시에 이만여 어령군이 세 갈래로 쫙 나누어지며 정상으로 질주해 왔다.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장봉을 휘둘러 상대를 거꾸러 뜨리며 나란히 꽂힌 깃발들을 쟁취하기 시작했다. "타-- 앗--!" "용등비천(龍登飛天)--!" 꾸르르르릉--! 두두두-- 자욱한 흙먼지가 천공을 온통 뒤덮었다. 오오...... 장관이었다. 그것은 실전(實戰)을 방불케 하는 대접전이었다. 본래 어령군 소속의 장졸들은 무예가 출중한 터이라 그 치열한 격 돌은 가히 지축을 갈라 놓을 듯했다. 꾸르르르-- 르르-- 쿠구궁...... 번-- 쩍--! "와와......!" "와......!" 거대한 해일처럼....... 세 갈래로 나누어진 좌(左), 중(中), 우군(右軍)의 이만 어령군은 서서히 정상으로 밀려왔다. 그중 태반은 중도에서 장봉에 맞아 마 상(馬上)에서 뒹굴어 떨어졌다. 두두두두-- "우아앗! 난 떨어지면 안돼!" "미친 놈! 네가 새냐? 떨어져도 된다!" 쿠웅......! 두두두-- 두두--! 함성, 흙먼지, 급박한 신음과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 시간은 서서히 흘러갔다. 천공(天空)의 한가운데 태양이 걸릴 무렵에야 대세는 판가름났다. "와와......!" 연무결의 예상대로였다. 중군(中軍)의 우세......! 정상부근까지 점령해온 군사들은 거의 중군소속이었다. 사태가 다 급해지자, 좌, 우군이 합세하여 중군을 치기 시작했다. 꾸르르--! "와와......!" "막아라......!" 허나 이미 때는 늦었다. 돌연 중군의 가운데에서 오십여 기의 정예 기마대가 폭풍처럼 질 주해 오더니 정상에 꽂힌 거대한 깃발을 뽑아 버렸다. 푸욱! "중군만세......!" "와......!" 요란한 기쁨의 함성이 중군 전체에서 터져 진동했다. 때를 맞추어 중군의 승리를 알리는 굉렬한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군련(軍鍊)은 끝났다. 이만여 어령군은 즉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이루었다. 쿠구궁...... 백검우는 백마를 탄 채 연무결과 함께 천천히 군사들의 앞을 사열하기 시작했다. "......" 다그닥...... 다그닥.... 군사들은 온통 땀에 젖은 모습들이었으며 가벼운 외상(外傷)을 입 은 자들은 부지기수였다. 백검우의 입가에 문득 운무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각군 참령들은 앞으로 나오라." 그의 입에서 나직하나 위엄있는 분부가 떨어지자, 세 인물이 각기 좌, 중, 우군 선두에서 빠져나왔다. 그들 삼 인(三人)은 각기 철 탑같은 거구에 삼십대의 중년인(中年人)들이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무예(武藝)를 위해 태어난 인물들처럼 강인한 인 상을 풍겨 아름답기조차 했다. 허나 이 순간 삼 인(三人)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이마에 혹이 커다랗게 튀어나오고, 한 눈이 시퍼렇게 멍들었는가 하면 다리를 절기조차 했다. 그들은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놈......! 너 육가(陸家)가 감히 내 이마를......!" "이런 염치없는 작자야......! 내 눈을 시퍼렇게 만든 놈은 누구냐?" "사생결판을 내겠다." 그들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좌군참령 육모승, 우군참령 마운량(馬雲凉), 중군참령 석웅(石雄). 이들 삼 인(三人)은 비단 오늘 뿐만이 아니라 항시 서로 티격태격하기 일쑤였다. 허나 그것은 그들이 서로 너무나 친근하기 때문이었다. 세 참령의 우애에는 백검우조차 감탄하고 있었다. "헛헛...... 귀여운 놈들이로다!" 그들을 보며 부장 연무결이 내던진 한 마디였다. 백검우도 빙긋 미소했다. 이윽고 세 참령은 백검우 앞에 정중히 부복하며 함성을 웅후하게 흘려냈다. "대장군의 분부를 기다립니다!" "대장군의 분부를......!" 헌데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 두두--! 구릉 아래에서 돌연 한 떼의 인마(人馬)가 질풍같은 기세로 나타났다. '으음......?' 백검우는 흠칫 시선을 던졌다. 그의 두 눈에 곧 이채로운 정광이 흘렀다. "금군(金軍)의 영호건장군이 아닌가......?" 과연 그러했다. 친전무회에서 최후의 대결을 벌였던 영호건이 오십 기(騎)의 수하 들을 이끌고 찾아온 것이다. 영호건은 이미 백검우와는 각별한 사이가 된 터였다. 백검우는 진심으로 영호건을 좋아하고 있던 터라 내심 반기며 연무결에게 분부했다. "손님을 맞이해야겠소. 군사들을 편히 쉬게 하시오." "염려마십시요. 장군님!" 연무결은 충직스럽게 대답했다. 영호건은 그즈음 약간 속도를 늦춘 채 곧장 백검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반갑소. 영호장군......!" 백검우가 반기자, 영호건은 급히 마상(馬上)에서 내리며 가벼운 예를 취했다. "장군께서는 정녕 대단하십니다." 온화한 미소와 함께 흘려낸 탄성....... 그의 어조는 공손했다. 백검우의 직위가 상장군(上將軍)이어서 영 호건보다 한 단계 위에 있기 때문이다. 백검우는 의아한 눈빛으로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말이오......?" "멀리서 장군의 군사들이 연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오랑캐 가 쳐들어 온 줄 착각할 뻔 했습니다!" "음......?" "와하하..... 그만큼 실전(實戰)을 방불케 했다는 뜻입니다." 영호건의 호방한 대소에 백검우는 빙긋 미소했다. "군사들이 스스로 움직여 준 덕분이오." "허나 이 정도로 연무하는 진영을 이 몸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과찬이오. 헌데 어쩐 일로?" "아, 제가 깜박했군요." 영호건은 순간 정색을 하더니 두 눈에 맑은 광채를 흘려내며 말했다. "병부상서(兵部尙書) 곽정헌(郭貞軒) 대감이 오늘 저녁 각군의 장 군들에게 연회를 베푼다 합니다." "곽정헌이......!" 백검우는 흠칫했다. 병부상서 곽정헌. 그는 육조대감 가운데 유일하게 장군출신이었다. 그의 권한은 전군(全軍)의 배치와 장군들의 승진, 좌천의 상소를 황제에게 올릴 수 있는 막강한 것이었다. 허나 항시 얼굴을 드러 내기를 싫어하여 평소에는 상장군들조차 곽정헌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헌데 그러한 곽정헌이 연회를 베풀어 장군들을 초대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아마 신년(新年)이라 장군들의 사기를 배양시키려는 의도인 듯 합니다만...... 왠지 석연치 않습니다." 영호건의 어조는 냉엄했다. 백검우는 두 눈에 기광을 빛내며 담담하게 물었다. "장소는 어디이오......?" "화화각(花華閣)입니다." "화화각......! 대단하군." 백검우는 나직한 탄성을 흘려냈다. 화화각은 명문 고관대작들만이 모여 사는 금릉에서도 가장 은밀하 고 호화롭기로 잘 알려진 기루였다. 화화각은 천하제일의 술(酒)과 기녀(妓女), 주악이 모인 인간세상 최고의 선주선녀림(仙酒仙女林)인 것이다. 당연히 그 하룻밤 주대는 엄청난 액수로 세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알겠소. 그럼 저녁에 만나도록 합시다." "장군을 기다리겠습니다. 헌데......." 영호건은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한 듯 물었다. "한 가지 장군께 알려드릴 일이......." "말해보시오." "확실치는 않으나 병무대감 곽정헌이 장군을 매우 주목하고 있는 듯 합니다." "어떤 이유로 그러한 짐작을 하게 되었소?" 백검우는 내심 짚이는 것이 있는지라 두 눈에 신광을 발하여 물었다. "그가 내 부친께 장군의 무공, 지난 시기의 행적 등을 자세히 물었다고 합니다." "과연 기이한 일이군." 백검우는 겉으로는 담담히 응수했으나 내심 현기증이 이는 느낌이었다. '바로 그였던가?' 영호건은 백검우에게서 별다른 말을 듣지 못하자, 고개를 갸웃하며 물러갔다. "그럼 먼저 떠나겠습니다. 장군." "여러모로 고맙소." ...... 황혼(黃昏)....... 어느새 서천은 아름다운 노을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백검우는 멀어져 가는 영호건의 행렬을 보며 심유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오늘 밤이 고비로군." 화화각(花華閣), 금릉 한가운데 위치한 이곳은 둘레가 온통 수백 년이 지난 황죽림 (黃竹林)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을 보기가 어려웠다. 허나 오늘따라 황죽림에는 수백 개의 홍등(紅登)이 화려하게 걸린 채 사위를 밝히고 있었다. 은은한 주악소리가 간간히 황죽림 안에서 흘러나왔다. 띠딩...... 띠디딩......! 삘리리...... 화화각 주위는 도검(刀劍)을 든 금군(金軍)들이 엄밀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태승장군(太乘將軍)이시다!" "영호건장군이시다......!" "충열장군(忠列將軍)이시다!" 두두두-- 두두두두-- 낭랑한 외침성이 연이어 터지고, 수하를 대동한 각 부 장군들이 연이어 화화각 안으로 사라졌다. 그 숫자는 대략 오십 명 정도였다. 그야말로 당금 대명의 장군들이 거의 다 모인 셈이었다. 기이한 점은 그들 대부분이 모두 젊은 장군들이였으며 노장군은 거의 없 다는 사실이었다. 화화각 안에는 무려 사십여 채의 누각(樓閣)이 따로따로 세워져 있었다. 일개 기루로써는 실로 방대하고 놀라운 규모가 아닐 수 없었다. 화정별축(花精別築)은 화화각 안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화려한 곳이었다. 한 칸의 실내(室內). "와하하하......!" "호호호......!" 주흥이 무르익은 가운데 호화극치의 방 안에는 이남이녀(二男二 女)가 앉아 있었다. 진귀한 산해진미와 평생 구경하기 힘든 특품의 미주(美酒). 좌중의 풍류는 완전히 연분홍 빛깔이었다. 두 사나이는 바로백검 우와 영호건이었다. 그들의 옆에선 요염미려하기 그지없는 두 소녀 (少女)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녀들은 화화각의 기녀(妓女)였다. 그 용모는 방 금 피어오른 적란(赤蘭) 두 송이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다왔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들은 속살이 비치는 은은한 나의(羅衣)를 입고 있어 거의 알 몸이나 다름없었다. "호호호...... 장군님의 가슴은 마치 동해(東海)의 고래가슴처럼 넓고 단단하군요......!" 영호건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한 기녀가 옥음으로 교태롭게 말했다. 영호건은 낭랑하게 대소하며 거침없이 그녀의 풍염한 둔부곡선을 쓰다듬었다. "핫핫핫...... 장군께선 여인(女人) 다루는 솜씨가 무예보다 떨어 지는 것 같습니다." 그의 손이 어디를 건드렸는가? 소녀는 돌연 자지러지는 듯한 비음을 흘려냈다. "으...... 음......! 아이 짓궂으셔......!" 도화빛 보다 더 붉어진 요염한 얼굴을 영호건의 가슴에 파묻는다. 백검우는 희미하게 말했다. "후후후...... 그것만큼은 영호장군께 양보해야겠소." 백검우는 기녀를 옆에 꿰차지 않았다. 그는 다만 기녀에게 술(酒)을 따르게 했을 뿐이다. 중화연(中花蓮)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기녀는 백검우에게서 근접 치 못할 위엄을 느끼며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평생 처음 대하는 미남자(美男子)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술을 따르는 그녀의 옥수(玉手)가 파르르 잔떨림을 일으켰다. '허나 근접할 용기가 나지 않으니......!' 그녀의 몸은 뜨거워질대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허나 백검우가 은연중에 그녀를 거부하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백검우는 한 잔 술을 음미하며 영호건에게 물었다. "헌데...... 어찌 정작 병부대감 곽정헌의 얼굴은 보이지 않소?" "음......!" 영호건은 안색을 굳히며 진중히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 오십여 장군들을 차례로 대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후후...... 내 예상대로라면 그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오." "......?" 영호건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스르륵......! 옷자락 끌리는 소리와 함께 실내에 홍의궁장의 중년미부가 나타났 다. 중년미부는 손에 옥쟁반을 받쳐들고 있었다. 옥쟁반 위에는 매우 진귀해 보이는 자옥(紫玉) 술항아리가 놓여져 있었다. 향기(香氣)......! 더없이 은은하고 훌륭한 주향이 삽시간에 실내를 감쌌다. 영호건은 탄성을 터뜨렸다. "오......! 내 이처럼 훌륭한 주향은 처음이군. 황홀할 지경이야." "훗......!" 중년미부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고혹적으로 웃더니 감탄한 듯 말했다. "잘 보셨사옵니다. 장군님...... 이것은 본 화화각에서만 만드는 감향청주(甘香淸酒)입니다. 이미 천하에 소문이 자자하게 난 터이지요......!" 스르륵...... 중년미부는 옥쟁반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영호건은 환하게 미소했다. "감향청주의 소문은 익히 들은 터이다." 포르릉......! 포릉......! 옥잔에 술이 가득 따라졌다. 그 옥잔보다 더 고운 손이 백검우와 영호건에게 술잔을 바쳤다. 백검우는 담담히 미소하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의 두 눈에 빠르게 싸늘한 광채가 스쳐갔다. '역시 이물질이 섞였군. 독(毒)은 없으나 색념(色念)을 일으키는 색정유향분(色精幽香紛)이......!' 색정유향분이라면 순간적으로 이성을 마비시키고 여인(女人)에 굶 주린 색광(色狂)으로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음약이 아닌가. "......." 허나 백검우는 거침없이 단숨에 술을 마셔버렸다. 술은 독했다. "크...... 뜨겁기가 꿈결같은 술이야...!" 이미 먼저 잔을 비운 영호건이 벌써 취기에 붉어진 얼굴로 말했 다. 어느새 중년미부는 실내에서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때 기녀 의 부드러운 여체(女體)가 그의 몸을 지그시 압박해 왔다. 뭉클.... '음......!' 영호건은 갑자기 심기가 크게 진탕되었다. '이 계집이 갑자기 왜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지?' 무서운 욕념(慾念)과 함께 강한 취기가 전신을 휩쓸었다. '뭔가...... 뭔가 이상하다!' 동시에 그의 몸이 균형을 잃고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백검우는 두 눈에 이채를 발하며 담담히 말했다. "영호장군께서 취하셨군. 너희들은 그 분을 침상으로 모셔라." "분부를 따르겠어요." 영호건의 품에 안겨있던 소녀는 급히 그를 부축했다. 영호건은 취중에서 갑자기 대소했다. "와핫핫핫...... 내 평생 술마시고 비틀거려 볼 때가 있구나......!" "후후......!" 백검우는 신비롭게 미소하더니 항아리 째 술을 입에 가져가 단숨에 마셔버렸다. 쿵...... 그가 술 항아리를 내려놓자, 두 기녀는 멍한 표정으로 백검우를 주시했다. '세상에......!' 백검우는 짐짓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도 취하는구나......" 밀실(密室)이었다. 사면은 은은한 홍색(紅色)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가운데는 화려극 치의 침상이 놓여 있었다. 사르륵......! "이리로......" 기녀 중화연은 조심스럽게 비틀거리는 백검우의 몸을 침상에 부축해 눕혔다. '아......!' 가슴이 뛴다. 중화연은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에 다가올 미지의 순간을 연상하였다. 뜨거운 숨결을 흘려내며. 그녀는 잠이 든 듯 미동도 않는 백검우의 준수한 용안을 바라보았 다. 빙결같은 그녀의 옥수가 백검우의 얼굴을 황홀하게 어루만졌다. "장군......." 헌데 바로 그때였다. 중화연의 귓가에 난데없이 조용한 전음(傳音)이 들려왔다. (화연..... 그 사람은 네 상대가 아니다.)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위엄있는 여인(女人)의 음성. '아......!' 중화연의 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의 안색은 이내 두려 움으로 가득 물들고 있었다. 그녀는 더없이 애석한 눈빛으로 한참 이나 백검우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힘없이 몸을 돌렸다. 스르륵......! "......." 이윽고 그녀는 실내에서 사라졌다. 한순간 잠든 줄 알았던 백검우의 입가에 실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참으로 뜻밖이다. 병부상서 곽정헌이 무황야의 조종을 받고 있다니......!' 원래 그는 조금도 의식을 잃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였다. 스르륵...... 미세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실내에 한 그림자가 들어섰다. '......!' 그녀는 기녀 중화연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절세미모의 벽안미인 (碧眼美人)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백검우에게 다가왔다. 백검우의 손끝이 순간 미미하게 진동했다. '세라화정!' 아, 그러했다. 그녀는 바로 천축의 신비공녀 세라화정이었던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약간 창백해진 얼굴, 허나 그것은 그녀의 아름다움 을 오히려 더 배가시켰다. 그녀는 백검우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하 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대도 별 수 없구나...." 세라화정은 언뜻 아름다운 두 눈에 복잡한 빛을 띠우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가에 곧 싸늘한 조소가 어렸다. "여인의 살내음에 취해 색정유향분을 거침없이 들이마시다니......." 그녀의 어조에는 서릿발같은 원한이 서려 있었다. 난생 처음 사랑을 느꼈던 사내. 허나 무참히 거부당했던 그녀의 순정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녀 는 그 원한만큼이나 깊이 백검우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문득 세라화정의 아름다운 얼굴에 더없이 섬뜩하고 요염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당신을 소유할 거야...... 그런 다음 당신을 백치로 만들어 평생 내 종으로 삼을 것이다." '......!' 백검우는 내심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백치로 만든다......?' '어떻게......?' 그가 내심 자문하는 순간이었다. 세라화정이 자신의 옷을 한겹 두겹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스르륵....... 스르륵....... 은은한 불빛 아래 혼(魂)을 앗아갈 듯 뇌쇄적인 나체(裸體)가 다 시 백검우 앞에서 껍질을 벗어갔다. 처녀의 상징인 수궁사와 절묘한 세류요의 허리.... 그리고 아랫배의 꿈결같은 능선과 태고(太古)적부터의 신비를 간 직한 수림(樹林)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다. 세라화정은 아직까지도 사내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깨끗한 몸이었다. 사르륵...... 그녀는 넋을 앗아갈 듯한 육향(肉香)을 발하며 백검우에게 다가왔다. 잘못 보았는가......? 눈물(淚), 백검우는 어렴풋이 그녀의 아름다운 한 쌍 벽안에 눈물 이 맺혔다고 느꼈다. 그때였다. 백검우로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슈슉! 세라화정이 번개같이 지력(指力)을 발해 백검우의 사대요혈(四大 要穴)을 공격해 오는 게 아닌가? '아차......!' 백검우는 피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순간 세라화정이 요염한 교소를 날렸다. "호호호...... 당신같은 능구렁이가 색정유향분 따위에 쉽게 속을 리 없지! 허나 이제는 달라! 오호호......!" 그 사이 백검우는 이미 몸을 벌떡 일으켰으나 내력(內力)을 운행할 수 없었다. 뿐인가? 내공의 힘으로 억제하고 있던 색정유향분의 효능이 무서운 기세로 백검우를 휘감아왔다. '이런......!' 백검우는 단전에서 활화산의 불기둥처럼 솟구치는 욕정을 느끼며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는 두 눈을 무섭게 이글거리며 세라화정에 게 천천히 다가섰다. "세라화정, 과연 너는 영리하구나. 좋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너의 수단에 속아주겠다." 와락! 백검우는 완강한 힘으로 세라화정의 나신을 안아 침상 위에 무너뜨렸다. "아......!" 세라화정은 비록 자신이 원한 일이었으나 일순 알 수 없는 두려움 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백검우는 가물거리는 이성(理性)을 혼신의 전력을 다해 바로잡았다. '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 물...... 컹...... 세라화정의 팽팽한 가슴이 백검우의 손에 들어왔다. '미안하구나 세라화정...... 네가 무황야의 수하인 이상 나 백검 우는 너를 가엾게 여길 수가 없다!' 열정(熱情)! 실내에는 뜨거운 열정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뜨거운 남녀(男女)간의 정사였다. 허나 두 사람은 자기 자신들의 목적(目的)을 위해 서로가 한 가닥 이성만은 붙잡아 두어야 했다. '아...... 아......!' 세라화정은 백검우의 완강한 손길에 전신의 힘이 쭉 달아나는 것 같았으나 내심 부르짖었다. '이 사람의 양기(陽氣)를 섭령음양대법(攝靈陰陽大法)으로 탈진시 켜야 한다! 그래야만 무황야와 나의 목적을 이룰 수 있어.......' 오오,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닌가? 섭령음양대법! 그것은 격렬한 정사(情事) 중, 상대의 원기(元氣)를 완전히 흡수, 사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밀교(密敎)의 사술이었다. 일단 섭 령음양대법에 걸리면 완전히 백치가 되어 평생 동안 시술자의 명 령에 따르게 된다. 그렇다. 세라화정은 백검우를 백치로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실로 무서운 여인(女人)의 집념이 아닌가. "아아...... 으음......!" 뜨겁게...... 입술이 포개어졌다. 세라화정은 자신의 입술이 타서 산산이 재로 흩어진다고 느꼈다. 시리도록 눈부신 그녀의 두 팔은 백검우의 목을 백사(白蛇)처럼 휘어감았다. 물결치는 파도처럼...... 여체는 격렬하게 출렁이며 부서져갔다. 세라화정의 눈부신 나체는 활시위처럼 휘어진 채 잔떨림을 일으켰다. "......!" 백검우. 그가 문득 완강한 힘으로 그녀의 포개진 다리를 벌렸다. 이미 태고(太古)의 신비를 간직한 맑은 샘물이 목마른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세라화정은 순간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백검우를 밀어내려 했다. 그 순간 백검우는 부드럽게, 허나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그녀를 향해 진입했다. 태초부터 여인의 새로운 탄생을 알려온 엄 청난 고통이 있었다. "......!" 세라화정은 놀란 사슴처럼 두 눈을 크게 뜬 채 비명을 삼켰다. 그 녀의 아름다운 나신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휘어졌다. 연이어 전해져오는 규칙적인 충격 속에서 그녀는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고 느꼈다. 문득 그녀의 투명하고 고혹적인 입술이 가볍게 벌어진 채 고통의 숨결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아...... 아......' 허나 고통은 잠깐이었다. 광풍이 사라지며 만화(萬花)가 온통 개화(開花)한 신비의 세계가 환상(幻想)처럼 그녀에게 다가왔다. 백검우는 그 화원 가운데서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손짓하여 부르고 있었다. "하아...... 아......!" 세라화정은 달리기 시작했다. 더없이 지극하게...... 힘껏 온 심혼(心魂)을 다하여...... 드디어 세라화정은 백검우의 품에 안겨들었다. 기쁨...... 그리고 희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휘감아 왔다. 그것은 폭죽처럼 찬란하게 명멸(明滅)해갔다. "아...... 아......!" 세라화정은 자신의 몸 한 곳에서 커가는 거대한 기쁨의 덩어리를 소중히 키워갔다. 어느새 그녀의 아름다운 한 쌍 벽안(碧眼)에는 영롱한 눈물이 맺혀 흘렀다. 그것은 희열과 번뇌가 섞인 복잡한 눈물이었다. 침상은 부러질 듯 삐걱거렸다. 여체(女體)는 은빛으로 황홀하게 출렁이며 부서져갔다. 백검우는 문득 그녀의 육체가 더없이 유연하고 포근하다고 느꼈다. 그는 한없이 그녀의 깊숙한 곳으로 빨려들었다. 드디어 정상(頂上)이 나타났다. 백검우와 세라화정은 거의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온 천지(天地)가 찬란한 오색(五色) 빛으로 폭죽처럼 너울거리며 자신을 감싸오는 것을....... "아아......!" "음......!" 인간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빠른 순간이 전율처럼 지나갔다. 헌데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방금 전만 해도 희열의 눈물로 얼룩졌던 세라화정의 얼굴에 비장 한 빛이 스쳐가는가 했더니. 스스스스...... 세라화정의 전신에서는 투명하고 기이한 청색(靑色)의 기류가 뱀 의 형상으로 피어오르는 게 아닌가! 그 기류는 이내 무서운 기세 로 백검우의 몸을 휘감았다. '......!' 백검우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놀라운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쌍한 사람...... 허나 당신을 영원히 내곁에 둘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뿐이야..." 오오... 괴사(怪事)! 세라화정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사이(邪異)한 청록색(靑綠色)의 귀광(鬼光)이 비수처럼 쭉 뻗어나오고 있었다. '이건 차혼이령대법!' 백검우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차혼이령대법(借魂移靈大法)은 상대의 혼(魂)과 심지를 제압하여 비밀을 알아내는 사술(邪術)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배교(拜敎)의 실전무학(失傳武學)으로서 무림(武林)에서 금기(禁忌)시 되고 있 는 소름끼치는 마공(魔功)이기도 했다. 원래 차혼이령대법은 상대의 몸이 지쳐있을수록 그 효력을 배가시킨다. 세라화정은 놀랍게도 이 순간 두 가지 극랄한 사공(邪功)을 백검우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섭령음양대법과 차혼이령대법! 그때 안개가 낀 듯 흐릿하던 백검우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했다. '세라화정, 너는 실로 무서운 마예(魔藝)를 소유했구나!' 그의 입가에 빠르게 희미한 조소가 스쳤다. '허나 너는 시간을 잘못 판단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것은 네가 사 내의 경험이 없었던 탓...... 하늘을 원망하거라!' 싸움. 이것은 또 하나의 무서운 싸움이었다. 허나 이미 싸움은 불(火)을 보듯 자명한 결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백검우는 몸에 침투했던 색정유향분을 완전히 몰아내고 스스로 제 압된 혈도를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몸에 흐르는 내공(內功) 은 원래처럼 거침없이 운행되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스스스......! 세라화정의 두 눈에 서린 귀광(鬼光)이 더욱 강렬해졌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는 지옥(地獄)의 심부에서 울려나온 듯 귀기어린 음 성이 흘러나왔다. "나를...... 보아라...... 나를...... 보아라......!" 그 모습에 백검우는 내심 냉소했으나 생각이 있어 짐짓 넋빠진 표 정을 지었다. 그의 연기 솜씨는 너무나 완벽해서 영락없는 백치를 방불케 했다. "......!" 스물...... 스물...... 스스스...... 청록색 기류는 점점 실내를 메워갔다. 세라화정의 벽안에서 사이한 암청색 광채가 쏟아지며 꽃잎같은 입술이 열렸다. "성후준...... 나는 너의 주인이다......." 귀기(鬼氣) 물씬 풍기는 음성, 그녀의 청신한 아름다움과는 너무 도 어울리지 않는 음성이었다. 백검우는 몽롱한 눈빛으로 억양없는 음성을 흘렸다. "당신은...... 나의 주인...... 이다." "너는 아란대라마란 인물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다." 백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세라화정의 두 눈 암청색 광채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어디에...... 있느냐?" "알고 있다."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백검우가 계속 똑같은 대답을 하자 세라화정은 초조한 듯 외쳤다. 백검우의 입에서 느릿하고 억양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지금...... 극락황천에 있을 것이다." '그가 죽었다고......?' "그럼 그가 지닌 물건은 어디에 있느냐?" "내 의복 속에......" "......!" 세라화정의 옥용에 순간 흥분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그녀의 귀기 서린 음성이 다급하게 울려나왔다. "그 물건의 정체가 무엇이더냐?" 백검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궁금하면 직접 알아봐라." "......?" 세라화정은 일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기이하게도 백검우의 입 가에 홀연 한 줄기 미소가 스치는 것 같지 않은가? '내가 웬 착각을......?' 헌데 그녀가 착각이었다고 단정하는 그 찰나였다. 몽롱하게 풀렸던 백검우의 두 눈에서 돌연 사람의 혼백을 뽑아 놓 을 듯한 암청색 광채가 폭사되는 것이 아닌가? "흐윽!" 세라화정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녀의 교구가 태풍을 만난 듯 부르르 떨리며 암청색 광채를 뿜어 내던 벽안은 삽시간에 하얗게 풀려버렸다. 그 순간 백검우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있었다. "후후후...... 차혼이령대법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주지." "......!" 세라화정은 쉴새없이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백검우의 역습에 여지없이 당한 것이다. 백검우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암청색 광채-- 그것은 그 녀의 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치 십팔층 지옥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악귀(惡鬼)의 호곡성인 듯, 그의 입에서는 더할나위없이 음산한 귀곡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너의 주인이다...... 알겠느냐?" 순간 세라화정의 경련이 멈춰지며 벽안에 몽롱한 빛이 떠올랐다. "예......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야말로 기막힌 주객전도의 상황이 아닌가? 백검우는 계속 사이한 귀기를 풍기며 차혼이령대법을 펼치고 있었다. "세라화정..... 너를 조종하는 인물은 누구냐?" "그는...... 남천수호령군(南天守護領軍)......." "그는 무엇하는 인물이냐?" "그는...... 사대수호령군(四大守護領軍) 중 일 인(一人)...... 그는...... 무...... 무서운...... 인물......." 대답을 하는 세라화정의 옥용에 돌연 공포에 찬 기색이 떠오르며 전신에 세찬 경련이 일어났다. '음...... 남천수호령군이란 인물이 그토록 무서운 존재란 말인가?' 백검우는 내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차혼이령대법은 이지(理智)를 상실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두려움 따위를 느낄 수가 없다. 헌데도 이처럼 대법에 걸린 상태에서 공포를 느낄 정도라면 남천 수호령군이란 인물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백검우는 잠시 생각을 굴린 다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남천수호령군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형산(衡山) 천기산장(天機山莊)에......." "그와 병부상서 곽정헌은 어떤 사이냐?" 세라화정의 입술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두 번 정도 만났다는 사실 외에는......." 순간 암청색 광망이 이글거리는 백검우의 두 눈에 한 가닥 기광이 스쳤다. '곽정헌이 무황야와 손을 잡았다면 굳이 남천수호령군과 직접 만 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곽정헌의 배후에 또다른 인물이 있다는 뜻.......' 결론은 자명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무황야는 단순한 이치로 사람을 조종할 위인이 아니다.' 이어 그는 세라화정에게서 몇 가지 사실을 더 알아낸 후 분부했다. "자...... 나의...... 눈을 보아라......!" 일순 그의 눈에서 더욱 엄청난 귀광이 폭사되어 세라화정의 벽안에 꽂혔다. 세라화정은 전신을 세차게 경련하더니 짧은 신음과 함께 축 늘어져 버렸다. 백검우는 차혼이령대법을 거두며 비릿한 미소를 떠올렸다. "후훗...... 이제 너는 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 옆에 누우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로부터 일다경 쯤 흘렀을까. "음......!" 세라화정은 나직한 비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이미 두 사람의 몸을 감쌌던 기류는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몸을 일으킨 세라화정의 아름다운 옥용에 일시 당황의 빛이 스쳤다. "내가 너무 진력(眞力)을 소모했던 모양이구나. 헌데 내가 이자에 게 무엇을 알아내려 했더라......?" 그녀는 잠든 듯 누워 있는 백검우를 바라보며 열심히 염두를 굴렸다. "아......!" 이내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낮은 탄성이 흘렀다. "아란대라마의 신변에 관한 것이었지....... 헌데......." 그녀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어쩐지 자신이 잠깐 사이에 심기가 몽롱해져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으음......!" 백검우의 몸이 꿈틀 움직였다. 그의 몸 위로 창문을 통해 희뿌연 광채가 비추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벌써 시각이 이렇게......?" 깜짝 놀란 세라화정은 더 이상 기억이고 뭐고 없이 다급히 옷을 차려 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 "후후후......." 백검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영호건부터 찾아봐야겠군......." 그는 느릿하게 옷을 걸쳐 입은 뒤 밖으로 나왔다. 문 밖에는 끝이 없을 정도로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양쪽으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수많은 문(門)이 달려 있었다. "이거야 어느 방에 그가 들었는지 알 수가 있나?" 백검우는 난감한 기분으로 일단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문을 밀치 고 들어섰다. 그가 막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이었다. "어맛!" "헛!" 침상 위에서 여인의 뾰족한 음성과 사내의 다급성이 일시에 터져나오는 게 아닌가? 거의 동시에 백검우의 시야엔 희뿌연 미명에 싸인 침상 위에서 나 체로 뒤엉켜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 화살과 같이 쏘아져 들어왔다. '이크!' 백검우는 불에 덴 듯 황급히 밖으로 되돌아 나왔다. "웬 빌어먹을 자식이......!" 뒤늦게 방 안에서 사내의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검우는 쓴 고소를 지으며 못들은 척 하고 다음 문을 열었다. 헌데 이건 또 뭔가? '으잉?' 그곳은 기막히게도 여인들의 은밀한 욕실이 아닌가? "호호호......" "취언니의 몸매는 제가 봐도 너무 아름다워요." "호호호호......" 짜랑짜랑한 여인들의 고소와 물방울 퉁기는 소리....... 욕실에는 적어도 십여 명쯤 되는 기녀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제각기의 자세를 취한 채 목욕을 하고 있었다. 자욱한 수증기 속으로 보이는 그 모습은 마치 환상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다행하게도 욕실의 여인들은 그 수증기 덕에 불청객을 보지 못했다. 그녀들이 미처 알아볼 틈도 없이 이미 백검우는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이러다간 하루종일 뒤져도 찾아내지 못하겠는 걸."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그때였다. "흑흑흑...!" 어디선가 여인의 울음소리가 가늘게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요망한 것! 취중의 장부(丈夫)를 능욕하다니......." 뒤이어 들려오는 사내의 호통이었다. 순간 백검우는 귀가 번쩍 뜨였다. '영호건!' 그는 서둘러 복도 맨끝에 붙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서던 백검우는 주춤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방 안 가운데 기녀 하나가 발가벗은 채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 아 벌을 서고 있지 않은가? 그 앞에는 영호건이 서슬 시퍼런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 백검우는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 했다. '훗!' 무릎을 꿇고 있는 기녀의 나이는 대략 이십 세 가량, 한 눈에도 쉽게 볼 수 없는 절염한 미모와 몸매를 가진 기녀였다. 그녀는 극 도의 두려움에 휩싸여 애처로울 정도로 전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제발 용서하시와요...!" 그녀는 펑펑 눈물을 쏟으며 빌었다. "천기는 단지 시키는 대로 장군님을 하룻밤 모셨을 뿐이옵니다." "누가 시켰단 말이냐!" "장군님... 께서...." "내가 언제!" 이때 백검우가 쓰게 웃으며 나섰다. "영호장군, 일개 기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소이까? 잘못은 이곳 주인에게 있소이다." "아...... 장군도 이런 경우를 당하셨습니까?" 그제서야 백검우를 본 영호건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백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소." 그러자 영호건은 안색을 차갑게 굳히며 기녀를 향해 노성을 터뜨렸다. "이곳 주인의 거처가 어디냐?" "후...... 후원 수정별각(水晶別閣)에......" "알았다. 너는 잠시 이대로 있어라." 슉! 영호건은 기녀의 혈도를 제압한 뒤 침상에 눕혔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방을 나와 수정별각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약 속이나 한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백검우가 담담한 음성으로 먼저 침묵을 깼다. "장군, 오늘 일은 단순한 것이 아니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 영호건이 흠칫한 듯 반문했다. 백검우는 여전히 시선을 앞으로 둔 채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일이 일개 기루에서 벌어진 일이라 하나...... 그 이면에는 엄청난 배후가 있소." "......?" 영호건은 말없이 의혹어린 눈빛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의 전신에 은은한 긴장의 기운이 깔리고 있었다. 허나 백검우는 가볍게 탄식하며 머리를 저었다. "우선 그쯤만 알고 계시오. 차후 장군께 연락을 드리리다." "음......!" 영호건의 입에서 가벼운 침음성이 흘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이 영호건이 항상 장군의 편에 서 있음을 잊지 말아 주십시요." "고맙소." 백검우는 담담하게 미소했다. 이윽고 그들은 한 채의 화려한 별각에 당도했다. 별각은 전체가 수정으로 지어져 마침 막 떠오르는 조양을 받아 찬 란한 반사광을 주위에 흩뿌리며 기경(奇境)을 연출하고 있었다. 더욱 그 옆에 있는 커다란 연못에 수정전각이 비추이고 있어 마치 선경인 듯 착각이 들었다. 허나, 지금 영호건에게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어흥!" 새롭게 분노가 치받힌 영호건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다짜고짜 별각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나서 채 일각도 지나기 전이었다. "아악...... 나, 나리...... 이 무슨......!"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교성에 뒤이어 삼십대의 한 여인 이 그의 손에 끌려나왔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의 화의미녀(華衣美女), 그녀야말로 바로 이 화화각의 주인인 금릉 야유화(夜遊花) 선우란(鮮于蘭)이 아닌가. 타고난 절염의 미색과 누구든지 단숨에 봄눈 녹이듯 녹여낼 듯한 교태(嬌態)로서 천하제일의 명성을 지닌 여장부였다. 허나 이 순 간 영호건의 사나운 손아귀에 끌려나온 그녀에게선 두려움만이 가 득할 뿐이었다. "나...... 나리...... 천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나 한 번만 용서하여 주세요." 끌려나오면서 그녀는 연신 가련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영호건은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용서......? 네년이 감히 본 장군의 옷을 벗기는 수모를 당하게 했으나 받은대로 돌려주겠다." 그리고 가차없이 금릉야유화 선우란의 옷을 모두 벗기기 시작했 다. 삽시간에 금릉야유화 선우란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변해버렸다. 백검우는 쓴 고소를 지었다. '영호건에게 저런 우직한 면이 있는 줄은 몰랐군.' 금릉야유화 선우란의 나체는 소문보다 더 눈부셨다. 허나 애석하게도 그 아름다운 나신은 곧 발목이 밧줄로 묶인 채 연못가의 매화나무에 거꾸로 매달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녀를 매달으며 영호건이 유유히 내뱉는 말. "이 정도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아...... 아......" 거꾸로 매달린 금릉야유화 선우란은 기절직전이었다. 헌데 그 모습은 기막힐 정도로 고혹적이었으니....... 특히 연못 속에 그녀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비추인 채 파문이 일 때면 기이한 느낌마저 이는 것이다. 영호건은 비로소 기분이 풀린 듯 껄껄 웃었다. "매우 잘 어울리는군. 춘사월 새벽 하늘 아래 매달린 여체라...... 하하하......." 그 옆에서 백검우는 싱긋 소리없는 미소를 피워 물 뿐이었다. '유(柔)한 듯 하면서도 실로 강직(强直)한 성품이라... 훗날 크게 덕망을 얻겠구나....' 이어 거꾸로 매달린 금릉야유화 선우란을 향하는 그의 시선엔 한 줄기 연민 비슷한 감정이 어렸다. '쯧...... 춘사월이라고는 하나 새벽 공기는 한겨울 못지 않게 매 서운데 저 아름다운 육체를 위해서는 몹시 안됐군.' 그는 영호건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장내를 떠나기 시작했다. ....... 이 날.... 화화각주 금릉야유화 선우란이 새벽 찬 공기 속에 자신의 거처 연 못가에서 알몸으로 거꾸로 매달린 채 시퍼렇게 얼어붙은 이 사건 은 그후 금릉에서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었다. ■ 일로제검 제3권 22장 음모와 여인! ━━━━━━━━━━━━━━━━━━━━━━━━━━━━━━━━━━━ 헌우장(軒宇莊). 금릉 북단에 위치한 이 거대한 장원은 바로 당금 명 황실의 막강 한 실력자인 병부상서 곽정헌의 거처였다. 때는 저녁 무렵. 어슴푸레한 관도(官道)를 뚫고 한 대의 마차가 헌우장을 향해 질주해 왔다. 두두두-- 헌데 마부석의 장대한 근골을 지닌 인물은 백검우 휘하의 부장 연무걸이 아닌가? 끄그긍! 마차는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이윽고 마차문이 열리자 백검우가 조용히 뒷짐을 진 채 걸어나왔다. "......" 연무걸과 함께 그는 유유히 헌우장의 정문에 다가갔다. 이미 정문에서는 경비무사들 외에 한 명의 육덕이 좋은 노복이 나 와 있다가 의혹의 눈빛으로 백검우를 맞았다. "어디에서 오신 귀인(貴人)이신지......?" "나 어령상장군이오." 백검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노복은 크게 놀라 전신을 흠칫 떨더니 넙죽 절하며 말했다. "바로 경위지휘검사 성후준 장군이셨군요....... 저희 나리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음......?' 백검우의 두 눈에 빠르게 기광이 스쳤다. '역시...... 예사로운 인물은 아니군. 내 방문을 예측해냈다면 오 늘 별 소득이 없겠는 걸!' 그는 노복의 안내를 받으며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헌데 막 화원 (花園) 사이를 지날 때였다. 문득 백검우의 시야에 비치는 한 대 의 화려한 마차가 있었다. '저 마차는......?' 마차는 첫눈에도 보통의 것과는 크게 달랐다. 마차의 벽면에는 용 (龍), 봉(鳳)의 오색(五色) 수실이 수놓아져 있었다. '황궁 내원(內院)에서만 사용하는 마차가 아닌가?' 황궁내원은 말할 것도 없이 영락황제의 사랑을 받는 황후, 후궁 등이 기거하는 금역(禁域)이었다. '그렇다면......?' 백검우는 노복에게 시선을 던졌으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 다. 노복은 한 거대한 전각(殿閣) 앞에 당도하더니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안으로 드십시요. 상장군......!" 매우 단아한 가운데 우아로운 분위기의 실내였다. 실내 중앙. 천향목(天香木)의 팔선탁(八仙卓)이 놓여 있었다. 그 팔선탁이 내려다보이는 정면의 태사의에는 엄청나게 살이 찐 한 초로인이 앉아 있었다. 백의용포에 문사건을 쓰고 얄팍한 입술을 지닌 괴물같은 체구의 소유자. 아아...... 인간이 이토록 살이 찔 수도 있는 것인가? 허나 그는 특이하게도 전혀 둔한 인상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가느다란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번갯불같은 광채 때문이었다. 슥....... 막 실내로 들어선 백검우는 자신의 얼굴에 꽂히는 그 날카로운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곽정헌...!' 그는 바로 곽정헌이었다. 스윽....... 그는 태사의에서 일어서니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아는 유난히 희어서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어서 오시오. 젊은 무반......!" "불시의 방문으로 결례했습니다." 백검우는 가볍게 목례하며 대답했다. 곽정헌은 크게 박장대소했다. "으핫핫핫...... 그렇지 않소. 결례는 내가 먼저 했던 것 같소." "......" 백검우는 대답대신 신비롭게 미소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백검우는 문득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더니 독백하듯 말했다. "실내에 좋은 향기(香氣)가 나는군요....... 마치 여인(女人)들이 몸에 지니는 사향내음 같습니다." "......!" 곽정헌이 가느다랗게 뜬 눈에 순간 빠르게 이채가 스쳤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 있겠소? 아마 다향(茶香)일 것이오." "그런 가요......?" "허허허......" 곽정헌은 소탈하게 웃었다. 허나 그의 내심으로는 흉소가 울리고 있었다. '이녀석 개코를 지녔지 않은가......? 허나 상관없는 일....' 그때 백검우가 비수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곽정헌을 직시하며 심 유한 음성으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몸은 대감을 좋아하지 않 게 되었습니다." "음......?" "화화각의 한 잔 술은 저를 취하게 한 것이 아니라 대감을 취하게 했습니다." 백검우의 몸에서 은연중 상대를 압도하는 노도같은 기운이 뻗어나왔다. 곽정헌의 눈빛이 순간 극히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예삿놈이 아니군......!' 허나 여전히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허허...... 성장군은 무엇을 이 늙은이에게 따지려 하는가?" "대감께서는 남천수호령군이란 인물을 아실 것이오." 백검우의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나 심장을 섬뜩하게 하는 한의가 서려 있었다. "나는 그가 곧 나의 손아래 죽을 것임을 대감께 미리 알려드리려 하오." "......!" 곽정헌. 처음으로 그의 얼굴 근육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그 바보같은 계집아이가 일을 망쳐 놓았군.' 천천히...... 그의 두 눈이 다시 뜨여졌다. 순간 곽정헌의 두 눈에서는 소름끼 치리만큼 무서운 신광이 줄기줄기 뻗어나왔다. 그는 소리없이 음 침하게 웃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백검우에게 말했다. "내 그대에게 말하지....... 이 일에 손을 떼는 게 좋아......! 그것이 그대와 그대의 가문(家門)이 살아남는 길일세." "......!" 순간 백검우의 입에서 낭랑한 대소가 터져나왔다. "하하하..... 역시 일국의 승상답게 시원시원 하시구료." "고맙네." "허나 대감은 잘못 생각했소. 남천수호령군은 곧 죽을 것이고, 대 감의 배후는 삼일(三日) 안에 밝혀질 것이오......!" "으음...... 대체 그대는 이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곽정헌은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음산하게 미소하더니 물었 다. 백검우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아란대라마가 순검옥에 갇혀 있다는 극비를 대감께서 무황야란 인물에게 알려주었다는 사실 정도이오!" "무엇이......." 곽정헌의 손끝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놈의 정체는 무엇인가......? 예리하기가 마치 전갈같은 놈이다!' 그 사이, 백검우는 정중히 곽정헌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황제폐하께 이 일이 알려져 풍파가 일지 두렵소. 부디 대감께서 는 목숨을 소중히 간직하시오." 스윽...... 천천히...... 백검우는 등을 돌려 실내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곽정헌은 일어서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뜻모를 괴소가 소리없이 스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기개있는 놈이군. 허나 너는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거대한 상대를 건드렸다.' 백검우가 실내 밖으로 막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곽정헌의 입에서 혼자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무감동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잘 가게." 그 음성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돌연 실내의 한쪽 벽면이 양 옆으로 서서히 갈라지는 게 아닌가. 스르릉! 동시에 통로가 나타나며 한 여인(女人)이 들어섰다. 여인(女人)은 극히 호화로운 벽라궁의(碧羅宮衣)를 입고 얼굴은 비단 면사로 가린 모습이었다. 허나 한쌍 봉목(鳳目)만은 면사 위 로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아...... 천하(天下)에 이토록 아름답고 뇌쇄적인 눈빛이 또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가장 선한 선녀(仙女)의 눈빛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가장 요염하고 음탕한 눈빛같기도 했다. 어떠한 철혈(鐵血)의 사내라도 이 여인의 눈빛을 한번만 대하면 혼을 빼앗기고 말 것이리라. 사르륵...... "......" 그녀는 풍염한 몸을 가볍게 비틀며 곽정헌에게 다가왔다. 곽정헌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대부인(大婦人)......!" 대부인...... 대부인이라 했다. 도대체 그녀는 누군가? 당금 황실의 실력자 곽정헌에게 이토록 정중한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여인은......? 이때였다. 사르륵...... 대부인의 걸음이 실내 문을 향해 멈추어졌다. "성후준.... 듣던 대로 대단한 자로군요......." 듣는 이의 심기를 진탕시키는 아름다운 옥음(玉音)....... 극히 나직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깃든 고아한 음성이었다. 곽정헌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장군들 가운데 가장 출중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함부로 다룰 자가 아니지 않은가요......?" "저 자의 부친은 문연각 대학사 성화융 입니다. 게다가 저 자는 직속 상관인 어령군대장군에게도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 "허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황제폐하의 신임이 지나치리 만큼 두텁다는 사실입니다." 대부인은 두 눈에 이채를 발하더니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저 자를 어찌할 생각이신가요?" "대부인의 의향은......?" "되도록 회유책을 써서 적으로 삼지 마세요." "불가능입니다. 대부인......." 곽정헌은 고개를 저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예리한 판단을 의심해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저런 자는 결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습니다. 눈빛을 보니 마치 당년 원(元)의 신장(神莊), 천광대장군 좌태승을 방불케 하는 인물입니다." "그럴까요......?" 대부인의 눈가에 순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이채가 스쳐갔다. "우선 대감께서 알아서 처리하세요. 만약의 경우에는 내가 직접 처리하도록 하겠어요......." "알겠습니다. 대부인......." 곽정헌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로 대답했다. 그는 이어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위엄어린 일성을 발했다. "거기 있느냐?" 순간 실내 입구의 천장에서 유령처럼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거친 황야(荒野)에 휘몰아치는 삭풍처럼 메마른 음성, 그는 짙은 잿빛 회의차림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사이한 귀기 가 서려 있어서 마치 방금 무덤에서 뛰쳐나온 듯했다. "음......!" 곽정헌은 두 눈에 은은히 살광을 발하며 묵직한 침음을 흘려내더 니 분부했다. "방금 성후준이란 자를 보았을 것이다." "......" "너희 주인 인혼보주 야대혼의 이름을 걸고 그를 죽여라. 빠를수록 좋다." "사흘 내로 그를 죽이겠습니다." 복면인은 깊숙이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다음 순간, 파앗! 그의 신형은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다. 좀체로 보기 드문 극고의 신법(身法)이었다. "훌륭하군요......." 대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곽정헌은 입가에 만족의 미소를 띄우며 진중하게 대답했다. "인혼보는 중원제일의 살수지문(殺手之門)입니다. 그는 야대혼에 게 우선 연락할테고 야대혼은 필요한 만큼 칼을 빼어들 것입니다."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허나 그는 그 순간 대부인의 두 눈에 스치는 조소의 빛을 보지 못했다. '허나 내 눈이 틀리지 않는 이상 야대혼은 그 자를 죽이지 못할 거야.......' 헌우장의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연무걸은 백검우가 나타나자 지체 없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이윽고 백검우를 태운 마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순간 헌우장의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은 보지 못했다. 멀 어져가는 마차의 문이 열리고 백검우의 신형이 연기처럼 빠져나오는 것을. 스스스......! 심지어 연무걸조차 백검우가 사라진 것을 알지 못했다. 두두두--! 마차가 완전히 장내에서 사라졌을 즈음. 백검우는 유령처럼 헌우장으로 잠입하고 있었다. 그는 곧장 화원 의 화목(花木) 사이에 가려진 화려한 마차에 신형을 날려 내려섰다. 스슥.... 마침 마차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후......!" 백검우는 나직한 기소를 터뜨리며 빨려들 듯 마차의 안으로 사라졌다. 마차의 안은 한 마디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굳이 보석(寶石)들로 치장을 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세한 구석 까지도 모든 것이 심기를 극히 아늑하게 만들어 주도록 안배 되었 고, 그 재질들은 하나같이 보기 힘든 희귀한 것들이었다. "훌륭하군......!" 백검우는 마차의 안을 살피며 감탄했다. '이 정도면 나의 몸을 숨기기에는 무리가 없겠군. 곽정헌의 배후 가 예상대로 이 마차의 주인이길 바랄 뿐이다. 가만.....?' 문득 백검우는 기이한 눈빛을 빛냈다. 마차를 향하여 다가오는 두 사람의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오는군......!' 백검우는 미리 보아 두었던 안락의자 뒤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의자의 뒤는 생각보다 넓어 행동하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스윽......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 백검우는 문이 열리는 순간 곽정헌의 정실에서 맡았던 사향냄새가 은은히 풍겨 들어옴을 느꼈다. 사라락.... 옷자락이 끌리는 부드러운 음향과 함께 마차 안으로 미세한 그림자가 들어섰다. 여인(女人), 바로 대부인이었다. 백검우는 그녀를 일견하는 순간 형용하기 힘든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범상한 여인이 아니다......' 그그긍! 마차는 육중한 바퀴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장원을 빠져나온 마차는 무서운 속도로 대로를 질주했다. 두두두두! 대부인은 그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끔 면사 사이로 그녀의 눈빛이 광채를 발하곤 하였다. 그녀는 꿈에도 자신이 앉아 있는 안락의자 뒤에 백검우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백검우는 지척지간에서 그녀의 체취까지 호흡할 수 있었다. 두두두...! 약 일다경 동안을 무섭게 질주한 마차는 한 순간 서서히 속력을 줄였다. 백검우는 마차가 어느 저택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끼익.... 마차의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는 잠시 후 완전히 정지했다. 스륵.... 대부인은 몸을 일으키더니 미끄러지듯 옷자락을 끌며 밖으로 향했 다. 막 마차 밖으로 내려서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대부인은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허나 그녀의 시야에는 어둠에 물든 허공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의아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움직이는 것이라곤 자신 뿐이었다. '내가 너무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구나....' 대부인은 실소를 터뜨린 후 정면의 한 웅장한 전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음......!" 어디선가 백검우의 안도성이 흘러나왔다. 마차의 밑이다. 백검우는 어느새 그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저토록 이목이 영민할 줄은 생각치 못했군." 백검우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곳이군......!" 백검우는 대부인이 사라진 전각 안으로 연기처럼 몸을 날렸다. 한 줄기 바람과 함께...... 백검우의 신형은 곧 전각 안으로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내실(內室). 여인의 체향이 배어드는 규방이었다. 모든 기물이 호화의 극치를 보이는 실내, 중앙에는 사면으로 휘장이 둘러진 상아(象牙) 침상이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수정으로 꾸며진 욕실이 있었다. 욕실의 안. 여인이 있었다. 얼굴을 면사로 가린 백라궁의의 여인, 바로 대부인이다. 욕실의 바닥에서는 수증기가 아지랭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내 그녀의 외투가 몸에서 흘러내렸다. 스르륵...... 이어 얼굴을 가렸던 면사가 떨어져 내리며 그녀의 옥용이 드러났다. 오오....... 폐월수화(開月羞花)...... 침어낙안(沈魚落雁)......! 아름다워도 너무 아름다웠다. 우아한 듯 하면서 농염한 색기가 눈 매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묻어나와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녀의 투명하고 고혹적인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었다. 새벽 이슬을 머금은 한 떨기 백란초(白蘭草)가 이러할 텐가......! 또 한겹. 사르륵......! 그녀의 상의(上衣)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건드리면 퉁겨질 듯 탄력있는 우유빛 육봉이 황촉불 아래 기요한 광채를 뿌리며 드러났다. 그 가운데......! 금방이라도 향기로운 액체를 터뜨릴 것 같은 두 개의 탐스런 유두 가 싱그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수줍게 그것은 파르르 잔떨림을 일으킨다. 또 한겹. 더없이 고혹적으로 오므린 배꼽이 살짝 얼굴을 붉힌다. 아지랑이인가......? 하얀 솜털이 가지런히 꿈결처럼 아래로 심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부인은 스스럼없이 하의(下衣)를 벗었다. 대리석보다 희고 탄력있는 두 다리의 물결 사이로 은은히 비치는 신비로운 비림(秘林)....... 그야말로 농염의 극치를 보여주는 여체가 아닐 수 없었다. 대부인(大婦人), 적어도 그녀의 황홀한 육체만은 천하에 두려울 게 없을 것임이 분명했다. "......." 그녀가 미처 욕조 안으로 발을 담그기도 전이었다. 수증기로 인해 맺힌 천장의 물방울 하나가 그녀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 또르르......! 물방울은 잠시 파르르 떨더니 이내 용기를 낸 듯 아래로 흘러내렸다. 얼굴에서 두 개의 계곡을 거쳐 다리 사이로.... 물방울은 만족스런 유영을 끝낸 채 짧은 생명을 마쳤다. 촤아아! 이윽고 대부인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이 화려한 욕조는 좌우와 천장쪽에서 동시에 물이 흘러나오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으음...!" 대부인은 나직한 탄성을 흘려내며 전신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백검우의 신형이 소리없이 실내에 스며든 건 바로 그때였다. 스슥....... 그는 욕실 맞은편의 침상 위에 태연하게 내려 앉았다. 주렴으로 만들어진 욕실의 출입구를 통하여 백검우는 욕실의 정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백검우는 신비롭게 미소했다. '음모의 배후에는 대부분 여인이 있지...... 하지만 저 대부인은 확실히 어딘가 보통여인과는 다른 데가 있군.' 백검우는 어렵지 않게 대부인의 전신을 감상할 수 있었다. 수증기 와 물방울 사이에서 빛나는 여체는 뇌쇄적인 것이었다. 이윽고 대부인은 목욕을 마친 듯 침상 쪽으로 다가왔다. 한순간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예상외로 대부인은 조금도 놀라거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내에게 자신의 알몸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그녀는 오 히려 도도한 미소를 붉은 입술에 머금었다. "그대는......?" "상장군 성후준이오." "바로 당신이었군." 대부인은 백검우의 앞에서 태연히 얇은 겉옷을 걸쳤다. 물기 젖은 여체의 굴곡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특히 물기로 인 하여 의복이 몸에 달라붙어 전신의 굴곡과 융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것은 정녕 폭발적인 유혹이었다. '후후...... 대단하군!' 백검우는 깊숙한 눈길로 그녀의 전신을 스스럼없이 직시했다. "그대가 이토록 빨리 본녀를 방문할 줄은 예상 밖인 걸......!" 대부인은 백검우에게 가까이 얼굴을 내밀며 화사하게 말했다. 백검우는 그녀의 몸에서 매우 신비로운 향기가 풍긴다고 느끼며 말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장의 목을 베고, 음모에서 이기려면 그 배 후를 치라는 말을 본인은 항상 믿고 있소."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 그러자 대부인의 하얀 치아가 눈부시게 반짝 빛났다. "일리 있는 말이에요...... 허나 때로는 자신의 목이 베이기도 하죠......!" 백검우는 미소했다.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음도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오." 대부인은 자신의 머리결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한 올의 머리칼 이 갈 곳을 잃은 채 그녀의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대부분 인물들은 자신의 목이 베어지는 순간에야 스스로의 어리 석음을 깨닫지요......." "오......!" 백검우는 환하게 웃었다. "부인은 매우 뛰어난 두뇌를 지녔으니 이미 모든 것을 깨우쳤을 것이오." 어이없도록 단순한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 목이 베어지는 것은 부인일 것이다.... 대부인의 입술이 일순 활짝 열렸다. "호호홋...... 매우 재미있는 말이군요......!" 백검우는 시선을 옮겨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런 백검우의 눈에 한 줄기 이채가 스친 것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 백검우는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슬쩍 걸음을 옮겨 침상 위에 몸을 누였다. 대부인의 옷자락이 살짝 벌어지며 그 사이로 풍염한 육봉이 반쯤 밖으로 돌출되었다. "이곳은 내 방이니 혹시 결례가 있다 하더라도 이해해주기 바래요." 백검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인은 누워 있어야 아름다운 것이오. 원래 여인은 누워서 하는 일에는 사내보다 능숙하다고 하지 않소?" "훗......." 대부인은 짧은 비음을 흘렸다. 백검우의 시선은 그녀의 가슴 부분에 머물고 있었다. "장군은 매우 무섭고도 재미있는 분이군요......!" "후후......." 순간, 백검우는 한 손을 자연스럽게 대부인의 허벅지 위에 올려 놓았다. "또한 여인에게는 매우 부드럽소. 그러나 가끔씩 거칠어지기도 하오." 백검우의 손이 닿아 있는 대부인의 허벅지 부분에 가벼운 떨림이 전해졌다. "장군처럼 마음을 잡아끄는 사람을 난 아직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한쪽 다리를 슬쩍 세웠다. 스륵... 그때문에 백검우의 손이 허벅지 깊숙한 곳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러나 백검우는 그 손을 치우지 않았다. "이제 부인의 이름을 알려 주실 때가 되지 않았소......?" 극히 부드럽고 온유한 음성, 어찌 들으면 다정한 밀어같기도 하였다. 여인의 눈이 기묘한 광채를 뿌렸다. "이곳은 금무왕가(錦武王家)이며...... 나는 수향(水香)이라 불리고 있어요......!" 백검우의 검미가 일순 꿈틀 치켜 올려졌다. "호...... 부인이 수향대부인(水香大婦人)이었단 말이오?" 백검우는 가벼운 탄성을 발했다. 수향대부인, 이렇게 불려지는 그녀는 과연 어떠한 여인인가? 수향대부인은 원래 현 황상의 아우이며, 감숙(甘肅), 청해(靑海), 양성(兩省)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로 있는 금무왕야(錦武王爺) 의 삼부인(三婦人)이었다. 현 황실에서 금무왕야는 몰라도 수향대부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수향대부인. 그녀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진 여인이었다. 부(富)와 권력(權力), 그리고 신선도 탐낼 아름다움까지....... 어떤 면에서 수향대부인의 이름은 황후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수향대부인이 범부(凡夫)가 생각지도 못할 엄청난 지략과 야망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인물은 거의 없었다. 사내는 그녀의 미색에 정신을 잃고, 여인들은 그녀가 가진 부귀와 권세의 안개에 그녀의 내심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누군가 수향대부인을 완전히 알게 된다면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녀 를 가지려 할 것이다. "본인은 이 순간부터 금무왕야를 흠모하기로 작정했소. 부인처럼 아름다운 아내를 거느리고 있으니 말이오." 백검우는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일순 수향대부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여지껏 나의 이름을 듣고도 이토록 여유있는 자는 만나지 못했다......!' 수향대부인은 처음으로 왠지 알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무엄한 자......!'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고혹적으로 웃고 있었다. "때로 여인도 누구나 가질 수 있음을 아시나요......? 목적이 서로 같을 수 있다면...." 수향대부인의 시선이 그윽하게 백검우의 얼굴을 맴돌았다. 백검우는 빙긋 웃었다. "후후...... 돈을 위해 기녀가 자신의 무엇을 남자에게 제공하듯 말이오?" '으음...!' 수향대부인은 순간 자존심이 와르르 뭉개지는 충격에 내심 비명을 질렀다. '이 자가 감히......!'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내심을 내색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오 히려 정반대로 그녀의 요염한 미소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허나 백검우는 그녀의 시선에 싸늘한 서리가 덮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수향대부인은 옥수를 움직여 허벅지에 놓인 백검우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나는 장군이 필요해요.......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백검우는 수향대부인의 눈을 깊이 직시하였다. 이때 수향대부인의 눈은 천장을 향하고 있었으며, 그녀의 손은 백 검우의 손을 자신의 가슴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 뭉클......! "......!" 백검우는 손 가득히 수향대부인의 풍염한 육봉이 쥐어짐을 느꼈다. 수향대부인은 지그시 그 손에 힘을 주었다. "하아......!" 백검우의 손에 쥐어진 육봉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장군은 나를 가질 수 있어요......." 유혹의 음성이 꿈결같이 나직하게 백검우의 귀를 간지럽혔다. "부인은 아름답고 뜨거운 여인이오. 그리고 무서운 여인이기도 하오." 백검우는 표정없는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천장을 향한 수향대부인의 눈빛이 기이롭게 출렁였다. "당신은 결국 거절하는군요....... 그대는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 之下萬人之上)의 권세가 싫은 가요?" 백검우의 눈은 무심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보다 본인은 눈 앞의 죽음이 싫소." "......!" 찰나, 수향대부인의 눈에 섬뜩한 한기가 피어올랐다. 바로 그 짧은 순간이었다. 번쩍! 난데없이 침상 위 천장에서 빛살같은 검광이 백검우의 정수리를 노리고 작렬했다. "놈!" "어딜......!" 위기의 순간에 백검우의 짧은 경호성이 터져 울렸다. 그의 허리에 서 머리 위로 싸늘한 광채가 반짝였다 사라진 것은 그 이전이었다. "끄으윽!" 백검우의 머리 위에서 극도의 고통이 응어리진 죽음의 신음이 울렸다. 살수(殺手)! 전신을 흑의복면으로 감싼 전형적인 살수였다. 살수의 검(劍)은 백검우의 정수리 한 치 위 정도에서 멈춘 채, 바 르르 죽음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백검우의 장군검은 살수의 입부분을 꿰뚫고 목 뒤까지 길게 나와 있었다. "끄윽..." 검을 입에 박은 채 살수는 마지막 비명을 토하며 생을 마쳤다. 검이 박힌 살수의 입에서 한 방울 두 방울 피가 떨어져 내렸다. "아아......!" 수향대부인은 나직이 공포의 비명을 질렀다. 살수의 시체에서 떨어진 피가 그녀의 이마 가운데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핏방울은 아직 식지 않았고...... 또한 너무도 선명했다. 핏방울은 정확하고 일정하게 그녀의 이마를 두드린다. 수향대부인은 전율했다. 그녀의 전신은 애처로울 정도로 하얗게 탈색되었다. "부인은 본인이 왼손도 자유로이 사용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 소....... 그리고 부인의 눈에 천장의 살수가 비쳐졌음도 몰랐을 것이오." 백검우의 음성은 마치 글을 읽는 듯 담담했다. "음......!" 수향대부인은 비틀거렸다. 그것은 그녀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핏방울은 그저 떨어지고...... 백검우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자는 인혼보 소속의 살수로 곽정헌 대감이 보냈을 것이 오....... 그리고 그 뒤에는 무황야란 인물이 있을 것이고......!" "......!" 수향대부인은 전신을 세차게 경련하였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일이야......!" "무황야...... 부인이 그와 손을 합쳤기에 본인은 용납하지 못하오!" 스릉! 백검우는 살수의 몸에서 검을 뽑았다. 털썩... 순간 살수의 싸늘한 시신이 공교롭게도 수향대부인의 몸 위에 떨어졌다. "아악!" 수향대부인은 그만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혼절해 버렸다. "피를 싫어하시는군." 백검우는 침상에서 몸을 돌렸다. "여인은 여인다워야 좋은 것....... 누워 있기를 좋아한다고 진정한 여인이 아닐터.....!" 백검우는 그 말을 남기고 금무왕가를 떠났다. 백검우는 유유히 어둠에 물든 대로를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이때였다. 두두둑---! 백검우는 전면에서 한 대의 마차가 자신을 향하여 달려오는 것을 보고 몸을 멈추었다. '음......?' 마차는 순식간에 백검우의 옆에 다가와 멈추었다. 마부석에는 중년의 건장한 장한이 전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 백검우가 의혹의 눈길로 마차를 주시하는 순간, 끼익......!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인물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 동창태감이 아니요?" 백검우는 반색했다. "반갑소이다. 장군......!" 나타난 인물은 바로 동창태감 경세휘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마차에 올랐다. "헌데 태감께서 어쩐 일로......?" 경세휘는 백검우에게 몸을 내밀며 응답했다. "이번 일은 본인에게 맡겨 주시오....... 금무왕가에 얽힌 일 말이오......!" 백검우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태감께선 이미 알고 계셨단 말이오?" 경세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폐하의 밀명으로 아란대라마의 사건 직후부터 계속 밀탐을 하고 있었소이다......!" 백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했다. "황궁에 연루된 일을 동창께서 맡는다면 본인은 오히려 환영이 오....... 단지 그 외의 인물에 관계되는 일은 노장에게 맡겨 주시오." 경세휘는 백검우의 시원한 승낙에 반색을 지었다. "여부가 있겠소?" 두 사람은 극히 우호적인 미소를 서로 교환하였다. 두두두-- 두두--! 마차는 계속 질주했다.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는군. 이제 형산의 남천수호령군이란 자를 방문할 차례인가.......' 백검우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창태감, 다음에 만나길 빌겠소." ...... ■ 일로제검 제3권 23장 피(血)의 꽃(花)! ━━━━━━━━━━━━━━━━━━━━━━━━━━━━━━━━━━━ 다음 날이었다. 우두두두두...... 새벽 미명(未明)을 가르며....... 두 필의 말이 질풍처럼 금릉을 벗어나고 있었다. 백검우와 철우환. 바로 그들을 태운 말이었다. 우두두두둑...... "......" "......" 서늘한 새벽의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휘날리며 지나갔다. 백검우는 검(劍)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엔 장군검이 아니라 평범 한 한 자루 철검(鐵劍)이다. 뿐인가? 신궁 철우환, 평소 신(神)의 활(弓), 신궁이라는 명호를 지녔으면서도 정작 활 을 지니고 다니지 않던 그가...... 철궁(鐵弓)! 하나의 거대한 철궁을 등에 메고 있었다. 그의 철궁은 약간 특이했다. 그것은 보통의 것보다 거의 두 배 가량 컸을 뿐 아니라, 줄이 두 개로 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러한 철궁이 인간의 힘으로 휘어질지가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하늘에 잿빛 구름이 가득한 것을 보니 비(雨)가 올 듯 합니다......." 문득 철우환은 깊숙한 신광을 두 눈에 빛내며 나직이 말했다. 그 는 말 등에 한 자루 긴 장창(長槍)까지 메고 있었다. 결연하기 그지없는 신색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가! 마치 지옥의 사신처럼...... 철우환의 전신에서는 무형의 가공할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렇다. 그런 그의 모습은 이번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단 적으로 말해주었다. "철노야......" "예, 장주님." "두 노야는 준비를 마쳤소?" "그렇습니다. 장주님...... 그들은 이미 형산 어디에선가 차분히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보고 싶군....... 그건 그렇고... 무황야의 세력을 어느 정도 파악해 냈소?" "곧 상세히 정리하여 보고 드리겠습니다." "좋소. 헌데 철노야는 아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이제 비로소 우리 앞에 진정한 죽음의 사신들이 나타나고 있는 사실 말이오." "장주님....." "이제 시작이오." "장주님......!" 두두두.... 달린다. 대지를 울리며 아스라이 멀어져가던 두 그림자는 곧 음울한 잿빛 하늘 한 귀퉁이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툭! 툭툭......! 투두둑! 비(雨), 잿빛하늘을 뚫고 장대같은 빗줄기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곧 폭우로 변해 천지를 뒤덮었다. 쏴아아아...... 쏴아아...... 따사로운 사월(四月)의 봄날에는 드문 폭우였다. 형산(刑山)-- 양자강 이남을 동서 일천 리로 가로지르는 산세웅대한 거산(巨山). 그 깊숙한 곳을 들어가노라면 구름조차 쉬어간다는 절곡 하나가 있다. <유운곡(流雲谷)>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골백번 고쳐 죽어도 되살아 나올 수 없다는 천험의 오지. 유운곡은 곧 이승을 방황하는 영혼(靈魂)들만이 돌아다닌다는 사지(死地)였다. 허나 이 죽음의 사지 한가운데는 하나의 거대한 장원(莊院)이 세워져 있었다. 천기산장(天機山莊). 세인(世人)들이 천기산장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패허라는 것 뿐이었다. 쓰러져가는 대전누각들...... 사그러진 기왓장...... 무성한 잡초...... 일년 사시사철 천기산장에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허나 누가 꿈엔들 상상했겠는가? 이곳은 신인(神人)의 땅이다. 천기산장에는 거의 천여 명에 달하는 보이지 않는 절세고수와 그 들을 거느린 한 거대한 신인이 엄연히 살고 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 무황야의 그림자 중 하나인 것이다. 안개 속에 가려진 천기산장 주인(主人)의 명호는 매우 특이했다. 남천수호령군(南天守護領君)--! 그의 이름은 남천수호령군이다. 헌데 바로 오늘. 남천수호령군에게 손님이 찾아 들었다. 잿빛 하늘에 쏟아지는 빗줄기 속을 가르며, 냉혹한 살의(殺意)를 검(劍)에 실은 손님이......! 쏴아아...... 쏴아아아......! 유운곡의 입구, 줄잡아 오백 기(騎)의 인마(人馬)가 어둠의 그림자처럼 음산하게 나타났다. 선두의 사 인(四人)....... 백검우, 그리고 철노야를 위시한 나머지 두 노야(老爺)이다. 현백검장을 대표하는 최강의 삼대신인-- 삼노야(三老爺)! "......" "......" 그들은 각자의 무기에 무거운 침묵을 싣고 백검우를 호위한 채 전 방을 뇌전같은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휘우웅......! 휘이이잉...... 한 줄기 비바람이 불어와 백검우의 귀밑 머리를 거세게 흔들고 지나쳐 갔다. 시종 전면을 응시하던 백검우의 시선이 현백검장의 두 노야에서 옮겨진 바로 그때, "두 분은 우선 졸개들을 맡아 처리하오. 나와 철노야는 잠시 후에 합세할 것이오." 순간 이노야와 삼노야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이어 그들을 선두로 오백여 기의 인마가 서서히 곡구를 향해 다가 가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해서 곡구에 돌연 십여 명의 인물이 유 령처럼 나타나더니 빗 속을 뚫고 다가왔다. 한결같이 은의(銀衣) 차림에 머리에 금색 두건을 두른 그들.......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氣度)로 보아 결코 범상한 고수들은 아닌 듯했다. "그대는 누군가?" 은의 중 수뇌인 듯한 인물이 다가오는 이노야의 얼굴에 시선을 꽂 고 묻자, "나 말인가? 후후...... 글쎄 이런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이노야는 히죽 웃으며 오른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순간, 슈우욱! 처음 입을 열었던 은의인의 얼굴을 향해 콩알만한 크기의 검은 물 체 하나가 빛살처럼 쏘아져 갔다. "흥! 누구에게 이따위 얄팍한 수작을!" 은의인은 차갑게 냉소하며 쏘아오는 물체를 향해 냅다 일장을 내갈겼다. 바로 그것이...... 실수였다. 쿠콰콰쾅!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폭음과 더불어....... "크아악!" "으아악!" "켁!" 비명. 수백의 조각으로 찢겨진 살점과 핏물이 미친 듯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가공할 폭약의 위력이었다. 이노야의 입술을 비집고 한소리 대갈이 터져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쳐라!" 동시, 그의 두 손이 기쾌하게 좌우로 번뜩였다. 슈우욱! 허공을 한꺼번에 쏟아져 나가는 십여 개의 물체! 그것들 역시 하나만으로도 웬만한 성(城)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 린다는 극강한 위력의 폭약이었으니....... 콰콰콰콰-- 콰르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두번째 폭음. 바로 혈전(血戰)의 막(幕)이 올랐음을 알리는 우렁찬 신호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싸움은 시작되었다. "크아아악!" "아악!" "크-- 악!" 춤(舞)! 삼노야는 한 자루 철간(鐵竿)을 움켜쥐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허공을 휩쓰는 붉은 피보라! 삼노야의 철간은 허공을 휩쓸 때마다 어김없이 서너 명의 목덜미 를 짓잡아 뜯어내고 있었다. "적이다! 막아라!" 엄청난 경악과 당혹 속에 경호성이 빗줄기 속을 찢어 발겼다. "동쪽이다! 우아악......!" "크으윽!" 꾸르르-- 르릉--! 파-- 쐐르르르--! 불(火)! 시뻘건 화염이 조각난 팔다리와 함께 빗줄기 속을 미친 듯이 튀어올랐다. 이것은 실로 완벽한 기습이었다. 한틈의 오차도 없이 치밀한 안배에 따른...... 대살풍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편, 백검우는 철우환과 더불어 곡 내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 는 거대한 암반 위에 서 있었다. 곡의 깊숙한 곳, 바로 웅대한 전각들이 들어차 있는 그곳에서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은의인들이 그 무수한 벌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의외로 거대한 세력을 이런 곳에 숨겨놓고 있었군."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백검우의 두 눈 깊숙한 곳에 떠올랐다. "허나 저들은 오늘 모조리 이곳에 뼈를 묻히게 될 것입니다." 철우환은 소리없이 웃었다. 이어, 그는 철궁을 들어 화살 한대를 시위에 먹이더니 먼 곳의 은의인들 을 향해 천천히 겨누었다. "어느 놈이 우두머리인지 모르겠군......!" 순간, 퉁......! 한 대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크악!" 은의인 하나, 복부가 앞뒤로 관통되어 내장이 모조리 뒤쪽으로 쏟아져 나간 그 는 틀림없이 자신이 날락을 맞았다고 생각했다. "저놈은 목이 너무 굵어....... 그게 마음에 안든단 말이야......." 퉁! 또 한 대의 화살이 유성처럼 허공을 갈랐다. "당황하지 마라! 놈들은 불과......" 목이 굵다보니 목청까지 큰 이 사내는....... 느닷없이 목덜미가 불에 지진 듯 화끈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쯤이면 나타날 때도 되었을텐데......." 백검우. 곡내 깊숙한 곳을 응시하던 그의 검미가 가볍게 꿈틀거렸다. 남천수호령군! 백검우는 바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 쌍방간의 싸움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팽팽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의외로 은의인들의 저항은 무섭고 완강했다. 그것은 독랄하기 짝이 없는 반격이었다. 처음에는 두 노야 등의 공세에 우왕좌왕 갈피를 못잡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침착을 되찾으며 일정한 대오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뱀이 꼬리를 뒤트는 듯한 확실한 형세로 대오가 형성되기 시작하 면서 오히려 검장의 정예들이 밀리는 듯한 싸움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저건 전설의 사상마마진(四象魔魔陳)! 방어를 도외시하는 공격만 을 위한 극강(極强)의 살진(殺陳)이다!' 은의인들의 형세를 유심히 관찰하던 백검우의 안색이 어느 순간 돌처럼 굳어졌다. '이대로 나가면 의외의 곤혹을 치를지도 모른다......!' 순간, 번쩍! 유성인가? 그의 신형이 돌연 빛줄기로 화해 섬광처럼 격전장을 향해 폭사되었다. 아니 폭사되었다고 느낀 순간 그는 이미 수십 갈래의 검광(劍光) 을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번쩍! "크아아악!" "으악!" "컥......" 그나마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사람은 행운인 편에 속했고, 검광이 스쳐가는 대부분의 은의인은 무엇이 어찌된 일인지 깨닫기도 전에 자신들의 수급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섬멸폭(閃滅爆)--!" 백검우는 진세의 맥(脈)이라 추정되는 방위를 향해 폭풍처럼 쇄도 해 갔다. "으-- 악!" "크흑......" "크아아악!" 한꺼번에 십여 명의 가슴에서 핏둥지가 뿜어나오고....... 당연히 진세의 파탄이 생겨났다. 그런 틈을 놓칠 검장의 정예들은 절대 아니다. 백검우의 모습을 본 그들은 기세충천한 모습들이었다. "와하하핫...... 이젠 됐구나! 하마터면 분통이 터져 죽을 뻔 했거늘......." "개뼈다귀같은 놈들! 개뼈다귀같은 진(陳) 하나 믿고 개뼈다귀처럼 설쳐대더니......." 쿠쿠쿠쿵...... 파파파팟! "으악!" "크아......." 일단 진세가 무너진 은의인들은 허수아비처럼 어이없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진세들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 철우환은 벌써 일정한 규칙을 두고 삼십번째의 화살을 발사해내고 있었다. 퉁....... "크아아악!" 여기 저승으로 떠나는 또 한 사람....... 철우환은 또 한 대의 화살을 시위에 먹이며 문득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허허허...... 오늘은 제법 사냥이 되는군." 혈전(血戰)은 어느새 종반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아-- 악!" "죽어라!" 사위는 아직도 처참한 비명과 죽음을 부르는 함성이 진동하고 있었다. 현백검장의 피해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우세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상대방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었다. 두 명의 노야가 이끄는 현백검장의 정예는 이백여 명의 목숨이 칼 날 아래 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천기산장 수하들의 피해는 더욱 극심했다. 천여 명에 이르 던 숫자가 이제는 겨우 삼백여 명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백검우는 쉴새없이 검을 휘드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현백검장의 수하들이 죽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듯. 번쩍! 파츠츠츠츳.... 무형의 검류가 노도처럼 천기산장의 수하들을 덮칠 때마다 어김없 이 허공은 피로 수놓아졌다. 백검우는 수많은 적을 상대하면서도 결코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승리! 백검우는 이 순간 오직 그것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혈전의 와중에도 그의 눈은 곡의 안쪽을 빈틈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백검우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곡의 내부로 부터 몇 개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두 삼 인(三人), 그러나 멀리서 보기에도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엄청난 것이었다. "멈춰라!" 그중 한 명이 웅혼한 외침을 발함과 동시에 장내의 혈전은 거짓말처럼 중지되었다. 휘익! 휙! 삼 인은 허공을 단숨에 날아오더니 백검우의 정면에 신형을 세웠다. 백검우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두 명의 인물은 은의를 걸친 중년인이었다. 일견하여 단지 냉엄한 살기밖에는 느낄 수 없는 인물들.... 그러나 중앙의 인물은 그들과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이제 막 머리에 흰 머리결이 드물게 보이는 초로인. 불그레한 혈색이 감도는 수려한 얼굴은 상대로 하여금 어떤 평안 함을 느끼게 하였다. 몸에 걸친 화려한 금의는 오히려 그의 모습에는 결코 화려하지 않 았다. 마치 반대로 금의가 그를 위하여 만들어진 듯한 기분을 주었다. 어찌보자니, 상대의 모든 것을 포용할 듯한 깊고 부드러운 눈매는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한 가문의 따뜻한 가장(家長)과도 같 았다. 그러했다.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것은 결코 무림인의 그것이라 할 수 없었다. '음...... 훌륭한 수양을 쌓은 인물이구나!' 백검우는 내심 감탄했다. 이때 금의인의 눈도 백검우의 전신을 더듬고 있었다. 문득 그의 얼굴에 짙은 경탄의 기색이 피어 올랐다. '뛰어나다.......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의 기도를 지닐 수 있다니 기이한 일이로군.' 서로의 눈길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스윽!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서로 앞으로 나섰다. "남천수호령군이라 하오.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소......." 금의인, 남천수호령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백검우는 밝게 미소했다. "당신을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두 사람의 대화는 얼핏 옛 친구를 만난 듯 부드럽고 화기가 넘쳤다. 그러나, 이것은 냉혹한 승부를 위한 의식에 불과함을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곽정헌 대감으로부터 장군에 대하여 소식을 받았소....... 장군 은 매우 높게 평가했었소." 남천수호령군은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없이 말했다. 이러한 말을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인물은 결코 많지 않았다. 자신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는 인물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남천수호령군은 그 일면만 보더라도 분명 무서운 인물이었다. 백검우는 담담히 웃었다. "과찬이오. 오히려 본인이 그대에게 해야 할 말인 것 같소." 그의 신색이 이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눌 때가 된 듯 하오." 남천수호령군은 옷깃을 바로 하며 정중히 말했다. "기다리던 바이오. 부족한 사정(私情)은 살아남은 쪽이 홀로 메우는 게 좋겠소." 그것이 시작이었다. 슥! 스슥... 두 사람은 각기 서로의 공간을 넓혔다. 장내는 삽시에 긴장으로 얼어 붙었다. 두 사람의 주위는 어느새 십여 장의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스-- 릉! 남천수호령군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자세는 기이했다. 몸과 검이 수직으로 평행하게 검날을 자신의 몸을 향하도록 하고 있었다. '음......!' 백검우는 그의 기이한 자세에 일순 당혹감을 느꼈다. '저런 자세는 어떤 검법을 펼치더라도 불편한 것이다....... 헌데 저자는.......' 스르릉... 백검우의 손에도 검이 들려졌다. 평범한 청강검이었다. 백검우는 왠지 황제가 하사한 장군검이나 자신의 검으로 남천수호 령군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실상 백검우에게 있어서 무기의 존 재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믿음. 오직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철저한 신뢰만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다고 믿는 것이다. 필승(必勝)의 신념(信念). 싸움에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허나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것을 무시한다. 어리석게도 상대와의 무공 수위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런 인물은 결코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없다. 백검우의 자세는 극히 평범했다. 아니 그것은 검을 펼치기 보다는 검을 펼친 후 쉬기 위한 자세라고 해야 말이 된다. '으...... 음......!' 남천수호령군은 내심 당혹을 느꼈다. '저런 자세에서 검세를 펼칠 수 있을까?' 그는 어이없게도 그 순간 백검우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그의 검날은 햇살을 받아 영롱한 검광을 뿌렸다. 스스스... 문득 남천수호령군은 좌측으로 신형을 옮겼다. 그러나 백검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남천수호령군의 눈가 에 가득 이채가 떠올랐다. '놀랍다....... 저런 허술한 자세에서 전혀 빈틈을 발견할 수 없다니.......' 남천수호령군은 충격보다는 차라리 감동을 느꼈다. 허나 상대가 강하다는 건 오히려 그에게 서릿발같은 승부욕을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강하다......!' 백검우는 남천수호령군에게서 오직 그것만을 느꼈다. 두 사람은 이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침묵과 긴장...... 그리고 전신을 조이는 살기, 그 속에서 두 사람의 몸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있었다. 석양(夕陽)...... 핏빛 석양이 어느새 사위를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이었을까. 우우웅...! 남천수호령군의 검이 기이한 소리를 토했다. 검음(劍音)! 검이 울고 있는 것이다. 그 검음은 백검우의 청각을 무섭게 자극했다. 그는 기이한 충격을 느끼며 흠칫 긴장했다. '환검(幻劍)...... 상대의 청각은 물론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경지란 말인가......!' 찰나, 백검우는 급히 자세를 바꾸었다. 이제 그의 검끝은 남천수호령군 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검신에서 찬란한 검의 광 채가 피어올랐다. 휘류류륭! 파스스... 두 사람의 검광과 검음이 허공에서 얽히며 불꽃을 튀겼다. '......!' 남천수호령군은 백검우의 기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순 그 의 자세가 약간 흐트러졌다. 찰라지간 백검우의 검이 무서운 속도로 그의 심장을 향해 짓쳐 들었다. 파아앗! 빛살같은 쾌검(快劍)이었다. "좋은 검세로다!" 남천수호령군은 나직한 탄성을 발하며 홱 신형을 꺾었다. 백검우 의 검이 종이 한장 차이로 그의 어깨를 스쳤다. 그 순간 남천수호 령군의 눈에 써늘한 광채가 번쩍 작렬했다. "멸극무현류!" 꾸-- 르-- 릉! 그의 검이 무섭게 울부짖으며 거대한 살류를 토해냈다. 츠파파팟! 쿠오오! 백검우는 남천수호령군의 가공할 검세에 전율했다. '대단하다!' 생각은 행동보다 휠씬 느렸다. 어느새 그의 검은 꺾어질듯 휘어지 며 대기를 가르고 있었다. 파아앗! 순간 백검우의 전신에 찬란한 자광이 피어올라 남천수호령군의 검세를 덮었다. 고오오오.... 꽈르르릉! 엄청난 굉음과 거센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우욱!' '헉!'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검세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퉁겨졌다. 다음 순간 백검우는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끼며 남천수호령군을 응시했다. 부르르....... 남천수호령군의 머리카락이 빳빳이 곤두서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다....... 나 남천수호령군이 새파란 젊은이에게 밀리다니!' 그는 스스로에 대하여 분노했다. 허나 백검우가 받은 충격은 그 이상이었다. '놀랍다...... 무황야의 일개 수하가 나와 비슷한 경지를 터득하고 있다니......!' 백검우는 진심으로 남천수호령군에 대하여 감탄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내공을 끌어올리며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결코 너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남천수호령군은 자신이 태어난 이래 이토록 긴장해본 적이 없었 다. 그런 그의 자세를 본 백검우의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 '최후의 필살일격을 펼칠 작정이구나!' 백검우는 남천수호령군의 의중을 짐작하고 더욱 경각심을 높였다. 스슥... 남천수호령군은 백검우를 향하여 서서히 다가섰다. 백검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남천수호령군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남천수호령군은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죽음의 미소였다. 한 줄기 한풍이 그의 얼굴을 스칠 때까지 그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서서히, 아주 천천히....... 남천수호령군의 전신에 금황색의 기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금황혈혼강(金黃血魂剛)을 익힌 이후 처음으로 이것을 펼칠 상대를 만났다.......' 아...... 금강혈혼강이라고 했는가? 허나 여지껏 상대를 만나지 못한 그 무공의 정체는 오직 남천수호 령군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 무공은 백검우 를 위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백검우. 그는 이 순간 더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결코 피하지 않는다.......' 백검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장내의 인물들도 그즈음 두 사람이 최후의 일격을 노리고 있음을 확연히 깨닫고 있었다. '남천수호령군이 이길 것이다!' '우리의 장주님이 패할 리가 없다......!' 서로 다른 염원이 간절하게 중인들의 가슴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백검우는 전신의 진력을 극성까지 끌어 올렸다. 그것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순간 그의 몸에서 자색의 기류가 안개처 럼 피어올랐다. 스스스.... 백검우의 자색 기류와 남천수호령군의 금황색 기류가 무섭게 꿈틀거렸다. 우-- 우-- 웅!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닥쳐왔다. "필살(必殺)--!" 남천수호령군의 신형이 백검우를 향하여 그대로 폭사되었다. 빛(光)! 그것은 마치 금황색의 거대한 빛덩이가 폭발하는 듯하였다. "일검체(一劍體)!" 백검우 역시 한덩이 자색의 광채가 되어 남천수호령군의 금황색 광채에 부딪쳐 갔다. 고-- 오-- 오! 쿠-- 콰-- 콰-- 쾅! 자색과 금황색의 기류는 허공에서 부딪쳐 천번지복의 굉음을 울려 냄과 동시에 엄청난 잠력을 사방으로 토해냈다. 그러나 그것은 시 작일 뿐이었다. 번-- 쩍---! 엄청난 섬광(閃光)의 덩어리가 작렬했다. 오오... 하늘의 태양이 갑자기 터져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장내의 인물들은 일제히 눈이 멀어 버릴 듯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토했다. "흐윽!" "우우...!" 두 줄기 가공할 빛의 기류는 허공에서 연이어 굉음과 섬광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자색 기류에 싸인 백검우의 얼굴은 핏기를 잃고 창백하게 변해 있 었다. 그는 선혈을 토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가슴이 답답 함을 느꼈다. '우욱......! 합밀개원천불공이나 뇌허유성결을 펼친다면 저자를 쉽게 물리칠 수 있거늘.......' 백검우는 순간적으로 심한 갈등을 일으켰다. 그것은 무황야를 상 대하기 위하여 익힌 무학이었다. 바로 합밀개원천불공과 뇌허유성결인 것이다. '허나 그럴 수는 없다!' 백검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 사이에도 남천수호령군은 백검우를 무섭게 압박했다. 이것은 어느 한쪽이 죽지 않고는 결코 끝날 수 없는 최후의 결전이었다. 한편 남천수호령군의 상황도 백검우보다 좋은 것이라 말할 수 없었다. 화색이 감돌던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으며 전신에선 비오듯 땀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버텨내야 한다...!' 남천수호령군은 내심 경호성을 지르며 전신의 모든 힘을 집중하여 백검우를 압박해 갔다. 승부의 갈림길은 이제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백검우 역시 정면으로 남천수호령군의 기세에 대항했다. 우-- 르-- 릉! 번-- 쩍! 굉음과 섬광이 다시 한 번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드두둑...! "크-- 억!" 몸의 일부분이 뭉개지는 소리와 처절한 비명이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장내의 인물들은 일제히 눈을 크게 부릅 떴다. 드디어 오고야 말 순간이 도래했음을 안 것이다. 쿠쿵... 육중한 두 개의 물체처럼 그들이 땅 위에 떨어지는 음향이 뒤이어 울려 퍼졌다. 사위에 가득하던 잠력이 거짓말처럼 일시에 모두 사 라졌다. 허나 아직도 두 사람의 모습은 눈부신 광채에 가려져 있었다. "......!" "......!" 정적. 숨막히는 침묵이 장내를 휘감았다. 그 누구도 결전의 승자를 예측하지 못했다. 백검우와 남천수호령 군을 감쌌던 기류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마침내 서로 다른 색 의 기류가 모두 걷히고 결전의 결과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순간, "와-- 아!" "현백검장 만세!" 현백검장의 정예들이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백검우의 청강검은 박살이 난 채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허나 그의 손을 보라! 백검우의 손은 남천수호령군의 심장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 듯 남천수호령군의 얼굴은 엄청난 불신을 떠올린채 잿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털썩.... 이윽고 남천수호령군의 시체가 백검우의 손에서 빠져나와 땅위로 쓰러졌다. 백검우는 힘겹게 몸을 바로 세웠다. 그의 입술에 가느다란 핏줄기 가 선명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주......!" "장주님......!" 신궁 철우환과 두 노야가 급히 백검우를 부축했다. 백검우는 그들을 향해 미소지었다. 그의 가슴은 지금 이 순간 뜨 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해냈다....' 아무도 모른다. 합밀개원천불공과 뇌허유성결을 펼치고 싶은 심정을 억제하기 위 한 백검우 자신과의 싸움을! 한편 천기산장의 제자들은 남천수호령군이 죽고 나자 완전히 전의 를 상실한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남천수호령군은 그동안 살아있는 전능한 신(神)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그 신이 죽어버린 것이다. "우우...!" "......!" 모두가 남천수호령군의 시체를 절망의 눈으로 바라볼 뿐 어느 누 구도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사고기 능이 일시에 정지해 버린 것 같았다. 한편, 백검우는 그리 오래지 않아 예전의 기력을 되찾고 있었다. 신궁 철우환이 백검우에게 물었다. "천기산장의 남은 수하들은 어찌할 것입니까?" 백검우는 시선을 들어 천기산장의 진영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지니고 있던 무기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화석들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백검우는 담담한 음성을 흘려냈다. "그들의 길을 그들 스스로가 선택하도록 놔두시오." 그 한 마디는 천기산장의 제자들의 귀에 똑똑하게 스며들었다. "......!" "......!" 천기산장의 수하들은 감격했다. 그들은 내심으로 백검우에게 경의를 표하며 하나 둘 유운곡을 떠나갔다. 백검우의 약속대로 그들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장내에는 현백검장의 인물들만이 남았다. 문득 백검우는 멀리 사라져 가는 천기산장의 수하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남천수호령군은 훌륭한 수하들을 두었다....... 그들은 결코 비 굴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철우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백검우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들은 항복을 강요하면 필시 대항했을 것이오. 그들의 눈빛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결심하고 있음을 말해 주었소......." 철우환은 흠칫 몸을 추스렸다. "그럼 장주께선......." 백검우는 유운곡 깊숙한 안쪽을 응시했다. "필요없는 살인은 가장 확실한 죄악임을 철노야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철우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백검우는 철우환을 향하여 담담히 웃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따뜻한 정이 깃들어 있음을 철우환은 잘 알고 있었다. 철우환도 얼굴을 마주하고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그렇다. 인간지도(人間之道)를 모르고서야 어찌 진정한 영웅의 길을 걸을 수 있겠는가. 잠시 후. 백검우 일행은 유운곡의 안을 향하여 걷고 있었다. 이제 주인이 바뀐 유운곡의 웅장한 건물들이 어떤 감회를 백검우 에게 알려주는 듯,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 <운중전(雲中殿).> 운치있는 이름을 가진 이곳은 남천수호령군이 의사청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허나 지금은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백검우와 철우환을 비롯한 세 노야가 좌정해 있었다. 백검우의 앞에는 많은 분량의 서찰과 장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에는 무황야와 남천수호령군이 주고 받은 밀서들도 포함되 어 있었으며, 남천수호령군이 거느리고 있던 암중의 세력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적혀진 밀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검우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들을 읽어내렸다. 그런 백검우의 얼굴에 놀라움의 기색이 짙게 어려 있었다. '음...... 남천수호령군이 이토록 막강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줄은 정녕 알지 못했다!' 백검우의 놀라움은 밀서들을 하나씩 읽어내려갈 때마다 커졌다. "사대수호신이 휘하에 이미 이십여 개의 문파를 장악하고 있다 니....... 무황야의 능력은 어디가 한계란 말인가......?" 백검우는 자신이 무황야에 접근해 갈수록 그의 존재가 더욱 거대 하게 부각되고 있음에 경악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백검우의 가슴을 더욱 뜨거운 투지로 불타게 하였다. "서두르지 않는다....... 차츰차츰 무황야의 모든 것을 향하여 검날을 박아 넣으리라--!" 그의 두 눈이 활화산처럼 불타올랐다. 백검우는 마침내 모든 밀서를 살핀 후 시선을 철우환과 두 노야에게 주었다. "철노야와 본인은 내일 금릉으로 돌아가겠소. 두 분 노야는 이곳 에 남아 전열을 가다듬어 주시오." 두 노야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삼일 후 쯤이면 나머지 오백의 정예도 이곳에 모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백의 정예, 삼노야가 거느리고 있던 현백검장의 숨겨진 정예를 말하는 것이었다. 백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두 분 노야께서 바빠질 것이오. 우선 무황야의 수족들인 나머지 삼대수호신을 처치해야 하기 때문이오." 이노야는 소리없이 웃었다. "이몸에게도 기회가 닿기를 바랄 뿐입니다." 삼노야는 말이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소중한 무기인 낚싯대를 귀여운 듯 쓰다듬었을 뿐이다. "세 분 노야가 있으니 든든할 뿐이오." 백검우는 그 말을 남기고 운중전을 나섰다. ...... 이곳은 형산 유운곡의 천기산장이었다. 밖에는 거센 혈전의 상처도 아랑곳 없이 어둠의 옷을 입은 밤(夜) 이 잦아들고 있었다. ■ 일로제검 제3권 24장 아! 타오르는 불꽃이여! ━━━━━━━━━━━━━━━━━━━━━━━━━━━━━━━━━━━ 백검우가 천기산장을 접수한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곳은 악양의 현백검장. 사위는 먹물을 뿌린 듯한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늘따라 야천(夜天)에는 달(月)도 별(星)도 뜨지 않았다. 야심한 시각 현백검장의 여기저기에는 어렴풋이 보초등만이 켜진 채 적막으로 덮혀 있었다. 휘웅......! 휘우웅......! 문득 한 차례 스산한 야풍이 현백검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헌데 대체 뭔가? 오늘따라 현백검장에 감돌고 있는 수상한 기운은......? 무영전(武英殿)-- 바로 검영의 거처이다. 처소에는 아직도 불이 밝혀져 있었다. 아름다운 화원(花園)의 가운데 위치한 전각. 입구에는 두 검사(劍士)가 엄중히 경계를 서고 있었다. "......" "......" 헌데 바로 이때였다. 스스스...... 츠츠츳--! 갑자기 화원에 만개(萬開)한 꽃송이들이 우수수 목이 꺾여 스러져 갔다. 두 검사는 흠칫 놀라 부르짖었다. "아니......!" "저게 어찌된 일이냐?" 거의 동시였다. 슈욱! 슉! 아, 땅 속에서 솟아났는가? 시커먼 세 그림자가 화원에서 일어서더니 엄청난 속도로 두 검사 에게 폭사해 왔다. '헉......!' '으흑......!' 두 검사는 본능적으로 수중의 검(劍)을 번개같이 뽑아갔다. 허나 그들의 검은 채 반도 뽑히기 전에 멈춰지고 말았다. 푸푹! 두 가닥 섬광(閃光)이 두 검사의 목줄기를 관통했다. 그것은 비도(匕刀)였다. 피(血)가 튀는가 싶더니 두 검사는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털썩....... 털썩....... 즉사였다. 두 눈을 부릅 뜬 채....... 두 검사는 채 비명조차 토해내지 못한 것이 원통스러운 듯 밤하늘 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 "......" 나타난 세 그림자! 세상에 이토록 동작이 빠른 인물들이 또 있을 것인가? 눈 깜짝할 사이에 세 그림자는 시신들을 흔적도 없이 감추더니 그 중 이 인(二人)이 유령처럼 전각 안으로 스며 들었다. 슥! 스슥! 바로 그 시각. 무영전 안의 실내(室內)에서는 검영이 밝은 얼굴로 웅비와 담소하고 있었다. "와하하......! 낭군은 사랑하는 여인을 안고 여인은 낭군을 업었 다니 어찌 그게 말이 되오?" "후후...... 이장주님께서는 아직 어리셔서 모르시는 것입니다. 차후에 크시면 그게 말이 되는 것을 깨달으실 것입니다." 웅비가 순박한 얼굴에 기이한 미소를 짓고 말하자 검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낭군은 여인을 안고 여인은 낭군을 업었다......? 그게 어째서 말이 되지......?" 그 모습에 웅비는 내심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가 괜한 것을 가르쳐 드렸군.......' 그는 곧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밤(夜)이 너무 야심했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응." 검영은 여전히 생각에 골몰한 채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후후......!' 웅비는 내심 실소하며 몸을 돌렸다. "편히 주무십시요. 이장주......!" 웅비는 천천히 문(門)을 열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살기!' 그의 예민한 후각을 통해 숨통을 짓이기는 살기가 흘러 들었다. '좌측이다!' 웅비의 신형은 거의 본능적으로 완벽한 방어자세를 취하며 우측으 로 번개처럼 돌려 세워졌다. 암흑(暗黑)과 죽음(死)의 분신인가? 한 명의 검은 흑포로 전신을 감싼 흑의인이 어둠의 그림자처럼 웅 비의 시선을 파고 들고 있었다. "......!" '고도의 훈련을 받은 살수로구나!' 웅비의 뇌리를 직감적으로 파고 든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미 웅비의 새하얀 살기를 날리는 투명한 손은 흑의인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파아앗! 허나 그는 미처 상대를 쓰러뜨리기도 전에 하반신의 힘이 일시에 빠져나감을 깨달았다. 동시에 등 뒤쪽으로부터 앞으로 화끈한 충격이 전혀졌다. 푸욱! "헉...... 암습......." 웅비의 앞가슴에는 새하얀 피(血)의 미소를 띠고 있는 검날이 삐 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나오고 거대한 체구가 믿을 수 없을 정도 로 빠른 속도로 퉁겨진 것은 순간의 일이었다. 놀랍게도 웅비는 등 뒤의 암습자가 검을 회수할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은 채 스스 로 신형을 빼낸 것이었다. 허나 암습자들의 공격은 집요했다. 스슷--! 등 뒤의 암습자가 웅비의 그림자 속으로 떠오르며, 쐐애액! 새파란 섬광을 토하는 한 자루의 비수가 웅비의 등 뒤로 파고 들었다. '제기랄...... 도저히 피...... 할 수가 없어......!' 웅비의 인상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순간, 퍽! 사신(死神)의 미소를 띤 비수는 좌측 심장부위를 여지없이 파고 들었다. '크으...... 화끈하군!' 찰나 어둠의 분신인 듯 조용히 서 있던 눈 앞의 흑의인의 허리춤 에서 백광이 번뜩였다. 어둠을 가르는 하이얀 검날! 그것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웅비의 정수리를 파고 들었다. 일순간이었다. "네놈은...... 반드시 죽인다......!" 웅비의 입에서 대갈이 터지며 그의 신형은 주저앉듯 푹 밑으로 꺼졌다. 동시에 그의 우수가 비쾌하게 움직이며 쇄도하는 면전의 흑의인의 복부를 향하였다. "낙일섬혼비(落日閃魂飛)--!" 웅비의 입에서 터진 사신(死神)의 초혼령(招魂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번-- 쩍--! 새하얀 백광이 침몰하는 태양처럼 흑의인의 복부에서 화려하게 피어 올랐다. 촤아아-- 악--! "으-- 악!" 선렬한 피분수가 흑의인의 복부에서 터지고, 쇄도해 들던 그의 신형이 반쪽난 채 상체만이 웅비를 덮쳐들었다. 그 순간, "지독한...... 놈......!" 싸늘한 냉갈이 웅비의 등 뒤에서 터졌다. 웅비의 손에 들린 한 자루의 피묻은 비수(匕首)! 그것은 바로 자신의 등 뒤에 꽂혔던 비수였으니....... 진정 무서운 투혼(鬪魂)이 아닐 수 없었다. '으응...... 이게 무슨 소리지......?' 검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 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소리를 들은 것이다. "웅비, 무슨 일이냐?" 그는 급히 방문을 열어 젖혔다. 허나 다음 순간, "......!" 검영의 두 눈은 찢어질 듯 크게 확대되고 말았다. 퍼-- 엉--!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파열음이 혈인(血人)이 된 웅비의 등에서 터지고 있었다. "크아-- 악!" 암흑으로 물든 천공을 뜯는 웅비의 비명이 검영의 고막을 사정없 이 후려 갈겼다. 동시에 웅비의 신형은 허공을 가르며 맞은편 담 벼락에 휴지조각처럼 처박히고 말았다. 콰당! "웅비--!" 검영의 신형은 본능적으로 웅비에게 일격을 가한 흑의인에게 폭사되었다. 허나 그가 미처 공격을 펼쳐내기도 전이었다. '......!' 뭔가 눈 앞으로 쇄도해 드는 검은 기류가 있었다. 검영은 반사적 으로 일장을 뻗으며 그 기류를 쓸어내었다. 허나 그것이 실수였을 줄이야! '이 냄새는......!' 검영은 향기를 맡는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야비한 놈! 미...... 미혼향을......" 그는 외치듯 말을 뱉으며 눈 앞에 아른거리는 흑의인에게 덮쳐갔 다. 허나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털썩..... 그의 신형은 허물어지듯 흑의인의 발치에 거꾸러졌다. '아아...... 형(兄)......!' 검영은 삽시간에 의식을 잃어갔다. 완벽한 기습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설령 미리 예측했다 고 막아낼 수 없는 그런 기습이었다. 웅비가 피떡이 되어 담벼락에 처박히고, 검영이 미혼향에 쓰러지 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숨을 서너번 호흡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리냐?" "이장주님의 거처에서 난 소리다!" 사방에서 떠들썩한 외침의 소리가 분분히 터져나온 것은. 일순 만년빙(萬年氷)처럼 차갑게 식어 있던 흑의인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동시에 그의 신형은 검영을 옆구리에 낀 채 무영전을 비쾌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스슥! 웅야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살인무기인 방천극을 여인의 그것을 애무하듯 부드럽게 닦고 있었다. 무인(武人)이 자신의 병기를 닦는 일, 그것은 심신이 가장 안정되 었을 때 그 진가를 나타낸다. 헌데 기이한 일이었다. "......?" '손을...?' 웅야는 방천극의 예리한 날에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이것은 그 의 평생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웅야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였다. "크-- 아악!" 귀에 익은 듯한 비명이 전신 모공을 쭈뼛하게 만들며 커다랗게 들려온 것은. "우......웅비다!" 일순 그의 신형은 빛살처럼 방문을 박차고 있었다. "이장주께서 위험하다!" 그의 다급한 음성이 떨리듯 부서진 방문에 불안하게 깔리고 있었다. 한편 검영을 생포한 두 살수는 이미 그 순간 현백검장의 화원에 내려서고 있었다. 스스스스...... 귀신 머리를 풀어 헤친 듯한 밤안개는 쥐죽은 듯이 적막한 화원을 휘감는다. 문득, 휘이이익--! 동시에 검영을 안은 흑의인의 입에서 나직하고 탁한 음성이 일었다. "가자!" 이어 그의 신형은 한 마리 기러기처럼 암천으로 치솟아 올랐다. 바로 그 순간, "쥐새끼같은 놈들! 가긴 어딜 가느냐?" 어둠이 산산이 깨지는 듯한 엄청난 호통성이 어둠의 화원을 들먹였다. 동시, 파우우우-- 웅--! 대기를 저미는 엄청난 가공의 경력(經力)이 솟구쳐 오르는 흑의인 의 전신을 휘감아 들었다. 단언하건대...... 현백검장 내에서 이런 엄청난 호통성과 경력(經力)을 발할 수 있 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다. 광유왕 웅야, 그의 방천극은 검영을 옆구리에 낀 흑의인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한 기세로 덮쳐들었다. 순간, 흑의인의 허리에서 백광이 번뜩이며 곧장 웅야의 방천극에 맞닥뜨려졌다. 카카카캉! 고막을 찢는 금속 파열음이 터지고, "허엇......!" 흑의인의 다급성이 짤막하게 터져 나왔다. 웅야의 방천극, 그것은 흑의인의 검을 박살내며 머리마저 박살낼 듯한 기세로 짓쳐들고 있지 않은가! 헌데 웅야의 방천극이 흑의인의 머리를 수박 터뜨리듯 요절내려는 바로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쐐애애액! 예리한 파공음이 터지며 새하얀 검날 하나가 웅야의 심장을 노리며 짓쳐든 것이다. "이런 시러배 잡놈들...... 감히 암습을......?" 벽력처럼 덮쳐들던 웅야의 신형이 신쾌하게 뒤로 움직였다. "흐흐흐...... 선불맞은 멧돼지같은 놈! 네놈은 내가 상대해 주지......." 밤안개 만큼이나 칙칙한 음성이 울리는가 했더니 웅야의 면전에 또 하나의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미 두번째 흑의인의 검 은 쾌속하게 웅야의 목덜미를 노리며 새하얀 검망을 뿌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웅야의 입에서 험악한 욕지거리가 터졌다. 파우우우웅--! 아니, 그보다 더욱 빨리 그의 방천극은 허공을 가득 메우며 가르 고 있었다.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는 웅야의 무지막지한 방천극의 초식(招式)! 그것은 마치 해일이 모든 것을 싹 쓸어버리는 듯한 기세였고 위력이었다. '우웃......! 엄청...... 나다......!' 흑의인의 검은 덮쳐드는 방천극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카앙! 흑의인의 손아귀가 찢겨지며 손에 쥐었던 그의 검은 임자없이 허공을 날았다. "크아-- 악!" 흑의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울렸다. 웅야의 솥뚜껑만한 우악스 런 손은 흑의인의 머리를 사과 움켜쥐듯 거칠게 나꿔채고 있었다. 빠지직... 흑의인의 머리통이 잘 익은 수박처럼 갈라졌다. 동시에 허연 뇌수 와 피가 화원에 떨어져 내렸다. 미처 어떻게 손 써볼 수 없는 창졸간의 죽음이었다. 사방에서 현백검장의 고수들이 나타난 건 거의 동시였다. 허나 그때 이미 검영을 옆구리에 끼고 있던 흑의인의 신형은 현백 검장의 담장을 넘고 있었다. "아앗......! 놈이 달아난다......!" "놈...... 놈의 옆구리에 이장주님이 있다!" "이장주께서 납치당했다......!" 현백검장의 수하들이 담을 넘는 흑의인을 보고는 저마다 경악성을 터뜨렸다. 허나 그것은 사후약방문격에 불과했다. 검영을 옆구리에 낀 흑의인은 불가사의(不可思議) 할 정도의 빠른 경공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눈깜짝할 새에 어둠이 자욱한 악소산 깊숙이 사라졌다. "거기 멈추지 못할까!" 웅야는 거구를 날리며 그를 추격했지만 아무리 쫓아가도 흑의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서운 분노와 절망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꽝! 웅야의 방천극이 애꿎은 땅바닥에 거칠게 꽂혀졌다. "이건 악몽이다...!" 그는 연신 고함을 질러대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눈뜨고 멀거니 이장주께서 납치되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된다니......" 쾅! 그는 다시 한 번 방천극을 땅바닥에 메다 꽂았다. 그의 면전(面前), 기식(氣息)이 엄엄한 웅비의 신형과 죽은 두 명의 흑의인이 뉘여져 있었다. 또한 그의 주위에는 도천문을 비롯한 현백검장의 여섯 명의 부주 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불행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웅비는 거의 죽음 직전에 다다를만큼 중상을 입었지만 고비를 넘 긴 채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문득, 도천문이 앞으로 나서며 길게 늘어진 흑의인의 시신을 발끝 으로 툭 걷어차며 입을 열었다. "이놈들은 분명히 인혼보(忍魂堡)의 졸개, 그중에서도 초일류의 살수들인 인혼삼비(忍魂三秘)가 틀림없다......." 인혼삼비(忍魂三秘)! 인혼보가 자랑하는 실패를 모르는 특급의 살수들. 허면 검영을 납치해간 것은 인혼보에서 꾸민 일이었단 말인가? "이것은 인혼보의 살수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신물(神物)......!" 도천문은 손에 들린 해골 모양의 핏빛 영패를 인혼삼비의 두개골 속으로 박아 넣었다. "야대혼......! 그놈이 기어이 명(命)을 재촉하다니......." 허공을 노려보는 그의 두 눈에서는 새파란 살광(殺光)이 불똥을 튀기고 있었다. "이 일은 장주님께 보고한 후 행동을 결정해야 될 문제......" 그는 무거운 시선으로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한결같이 무서운 분노와 침울한 기색이었다. "들으시오....... 장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모든 제자들에게 완전 무장을 하고 대기하라는 명을 내리시오!" "......!" "......!" 일순 좌중에는 결전(決戰)의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생명(生命)을 내건 싸움이 곧 임박했음을 피부로 느낀 것이었다. 도천문, 그는 천천히 좌중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중얼거림이 중인들의 귓가를 무겁게 때리고 있었다. "이번 일을 장주님께 무어라 말씀 드려야 하는 것이 문제...... 무황야를 영웅으로 평가한 내가 어리석었다......." 인혼보가 무황야의 세력 중에 하나임은 이제 모르는 자가 없었다. 도천문이 떠난 뒤 각 부의 부주들은 분노와 긴장이 어린 시선을 교환하며 이구동성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무슨 면목으로 장주님을 뵙는단 말인가....." 현백검장의 정문. 한 필의 준마가 어둠을 깨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두두두! 준마가 가는 방향, 그것은 백검우가 있는 금릉을 향하고 있었다. 검영이 인혼보에 납치된 사건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너무도 창졸지간에 어이없게 당한 일...... 허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일로 말미암은 결과는 실로 예상을 불허하는 엄청난 것이었으니....... 두두두... 대지를 박차는 말발굽 소리는 밤의 적막을 요란하게 깨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 일로제검 제3권 25장 대폭풍(大暴風)! ━━━━━━━━━━━━━━━━━━━━━━━━━━━━━━━━━━━ 영락이년 사월 이십사일. 금릉은 예상치 못한 한 가지 엄청난 사건으로 온통 긴장에 휩싸였 다. 그것은 황실(皇室)에서 불어온 피바람(血風)이었다. 오오....... 밝아오는 새벽 속에 금릉성의 거대한 성루(城樓) 위에 걸린 수급들......! 무려 백여 개의 목이 핏물을 뚝뚝 흘려내며 매달려 있었던 것이 다. 그 중, 세 개의 목은 가장 상단 부위에 회(灰)칠이 된 채 걸 려 있었다. 모두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그것들은 비록 죽은 자(死者)의 눈빛이었으나 보는 이를 섬뜩하게 할 정도로 원독에 차 있었다. 허나 금릉 인물들은 이들의 정체를 알았을 때 더욱 놀라고 말았다. <금무왕.> <병부상서 곽정헌.> <수향대부인.> 이 무슨 엄청난 이름들인가? 당금 영락황제의 둘째 아우인 금무왕과 황가(皇家)에서 미모와 재 지로 명성이 높던 수향대부인, 그리고 당금 황실의 실력자인 곽정 헌이 일시에 주검으로 변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난리냐......?"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아아......!" 금릉인물들은 온통 당혹에 잠겨 이 거대한 액겁의 원인을 알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뿐이었다. 수급들의 밑에 붙어 있는 붉은 혈지(血紙)-- <-- 금무왕은 황제폐하의 아우됨에 헛된 몽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역천모반이다. 그 주모 삼두(三頭)와 연루 구십육 인(九十六人)을 효시하니, 이 는 피(血)와 대의멸친으로써 천하의 평안을 지키려는 황제폐하의 어명이니라. 백성들은 이에 조금도 불안해 하거나 생업(生業)에 흔들림이 없도록 하라. 동창, 황제친위령(皇帝親威令)--!> "역천모반......!" "이, 이런 일이......!" 금릉 성문 아래 구름처럼 모여든 인파들은 경악 속에 사지를 떨었다. 동창(東窓)-- 그렇다. 이 끔찍한 효시의 주동자는 황제의 밀명을 받은 동창태감 경운형이었다. 허나 이 일에 연관된 거대한 음모는 아직 빙산의 일각도 채 드러 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거대한 음모를 풀어내는 열쇠는 바로 백검우가 지니고 있었다. 허나 그 백검우조차 예상못한 일이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검영의 납치사건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오는 전율의 불씨였다. 금릉 외곽에 위치한 어위영상장군부(御威營上將軍府). 한 칸의 실내(室內). 백검우는 성후준의 모습으로 막 현백검장에서 달려온 도천문을 만 나고 있었다. 백검우의 옆에는 철우환이 온통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 채 도천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천문......! 그대가 어찌 장주님께 이런 보고를 드릴 수 있는가?" 섬뜩하리만큼 매서운 질책성이었다. 도천문은 백검우 앞에 오체복지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죄수인 양 침묵을 지켰다. 그의 눈빛은 일순간에도 수십 차례나 파랑을 일으켰다. 그는 땀에 후줄근히 젖은 얼굴을 무겁게 들어 올리더니 비장한 눈 빛으로 백검우를 바라보았다. "장주님...... 이장주께서 납치된 것은 오직 저의 불찰이었습니 다. 기회를 주신다면 이장주님을 구해낸 후 자결로써 이 불충을 씻겠습니다." "도부주......" 백검우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믿을 수 없을만큼 극히 잔잔하고 무감동했다. 허나 도천문은 그것이 진저리 쳐지도록 두려웠다. 도천문은 알고 있었다. 백검우는 극도로 분노했을 때 오히려 전율하리만큼 냉정한 표정을 지닌다는 것을. '장주님...!' 백검우의 음성이 공허한 여운을 싣고 이어졌다. "도부주...... 그대의 잘못은 없소. 무황야 그가 나를 실망시켰을 뿐이오." "장주님......!" "무황야는 나를 시험해 보려 하고 있소. 그러나 무황야는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오." "장주님!" 철우환과 도천문의 얼굴이 그 순간 긴장으로 무섭게 굳어졌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백검우의 명령을......! 이윽고 그 명령은 백검우의 두 눈에 뿜어지는 가공할 광채와 함께 단호히 떨어졌다. "도살(屠殺)!" 오오, 도살이라 했는가? "나는 도살을 시작하겠소. 즉시 야대혼의 인혼보부터 초토화 시킬 것이니 준비하시오." 슥...... 그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백검우는 실내에서 조용히 나가 버렸다. 철우환과 도천문은 잠시 몸이 얼음덩어리로 굳어 버리기라도 한 듯 미동도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인가? 이것이 진정 무황야가 원한 길인가......?' 그들은 전율했다. 천하인들은 몰라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백검우의 이 결단 하나로 얼마나 엄청난 대살겁이 일어날 것인가를....... 허나 철우환과 도천문은 망설이지 않았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분부를......!" 충직한 합성이 울리고. 파앗......! 슈욱! 그들의 신형은 한 순간 한 줄기 빛살로 변해 어위영상장군부에서 사라졌다. 중원무림(中原武林)은 긴장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현백검장에서 일어난 납치사건 때문이 었다. 인혼보의 야대혼이 백검우의 아우인 백검영을 납치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선선포고나 다름없었다. 이미 인혼보의 야대혼이 무황야의 측근이라는 사실은 만천하에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런 야대혼이 백검우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을 벌였으니....... -- 현백검장의 백공(白公)이 분노했다! 백검우가 현백검장의 숨겨진 모든 힘을 동원해 정면으로 무황야에 대항할 것이라는 소문은 삽시간에 무림전역에 퍼져갔다. 이것은 실로 아무도 예상치 못한 불길한 사태였다. 설마하니 다른 인물도 아닌 무황야가 이런 치졸한 방법으로 현백검장을 건드릴 줄이야.... 적지 않은 많은 인물들이 무황야에게 실망감을 금치 못하고 등을 돌렸다. 허나 그 순간에도 무황야를 신처럼 믿어온 추종자들은 이 상황이 무황야의 뜻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 뭔가 잘못되었다! 중원의 대황(大皇)인 그가 이런 비겁한 수단을 쓸 리 없다! 과연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분명한 것은 모두가 양 쪽이 정면 충돌을 일으킬 경우 백검우의 현백검장이 패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점이었다. 긴장과 격동 속에 시간은 흐르고.... 그중에서도 이 일이 무림계의 살겁으로 비화될 것을 염려한 정파 (正派)의 수뇌들은 서둘러 백검우에게 전서(傳書)를 보내왔다. 그 전서의 내용들은 거의 동일한 것들이었다. <백공, 부디 자중하시오. 아직은 때가 아니오. 무황야는 너무 거 대하오. 이제 백공이 참지 못한다면 중원의 희망은 꺾이고 마오.> <무황야는 이미 중원세력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소. 정면대결을 벌 인다면 패배는 불을 보듯 자명하오.> 오오...... 중원의 절반에 달하는 무림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무황야라고 했다. 비록 그 평가가 과장된 것이라 할지라도 현백검장이 전면전 으로 무황야를 무너뜨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백검우는 그런 정파의 수뇌들에게 단호한 답신(答信)을 보내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무황야의 힘은 어쩌면 귀하들이 추측한 것보다 더 거대할지도 모 르오. 허나 귀하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소. 그것은 나의 힘이오. 나는 절대 쓰러지지 않소.> 백검우의 뜻은 이내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무림인들에게 알려졌 다. 그때부터 백검우를 염려하는 천하각지의 수많은 무림인들이 악양으로 운집하기 시작했다. 그 인파는 무황야를 향한 분노의 물결이었다. 악양의 모든 거리는 결전을 상징하는 핏빛 바탕의 깃발(幡)-- 백목련으로 물들어 있었다. 소림(少林), 무당(武當), 화산(華山) 등 오파일방에서 찾아온 사절들....... 그리고 유수한 문파(門派)에서 인물들이 오는 가운데 현백검장 안 은 금세라도 터질 듯한 전운에 싸여 있었다. 현백검장의 의사청(儀史廳). 드넓은 대청 안에는 현백검장의 중요인물들이 모두 엄숙한 신색으 로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중상(重傷)을 입었던 웅비의 모습도 끼어 있었다. 웅비....... 그의 얼굴은 며칠 사이 너무도 초췌하게 말라 있어 보는 이를 안 타깝게 했다. 천하에서 가장 순박해 보였던 그의 얼굴에는 이 순 간 살기의 그림자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아무도 그를 예전의 웅비라 볼 수 없었다. '이장주......!' 웅비는 근 며칠 동안 오직 검영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 사이 단 한 끼도 입에 대지 않았다. 허나 복수의 일념으 로 인해 그의 전신에서는 무한한 힘이 금세라도 폭발할 듯 꿈틀거 리고 있었다. "......" 침묵......! 육대부주(六代府主)를 비롯한 장내 삼십 인(三十人)의 시선은 중 앙의 태사의에 고정된 채 침묵 속의 투혼을 불사르고 있었다. 태사의에는 그들의 하늘이 앉아 있었다. 백검우의 신색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그는 장내의 모든 인물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신뢰의 눈빛이었다. 그러한 백검우의 눈빛은 장내 인물들 에게 무한한 용기와 힘을 가져다 주었다. - 장주님, 분부만 내리십시오! 모두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드디어 백검우의 입에서 더없이 심유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본 장주는 손수 야대혼을 찾아갈 것이오. 도부주와 웅야의 살부, 호민부는 나를 따르시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분부를......!" 도천문과 웅야는 충직하게 대답했다. 그들의 입가에 뱀처럼 차가 운 미소가 스쳤다. '반드시 야대혼의 목을 베고 이장주를 찾아낼 것이다!' 화염(火炎)처럼 이글거리는 살기 속에 백검우의 명령은 이어졌다. "천풍부주, 이 기회에 묵검천공은 천마장(天魔莊)을 초토화 시키도록 하시오." 아, 천마장도 이 살계(殺計)에 포함되었는가? "혈성보 역시 금후 무림(武林)에서 영원히 제명시킬 것이오. 그 지시는 차후 즉시 내리겠소." "......!" "......!" 장내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렇다. 바야흐로 삼장이보, 그 거대한 뿌리들이 통째로 뽑혀지려 하고 있 었다. 오직 강자(强者)만이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아 존재할 것이다. 백검우의 입에서 마지막 단호한 일성이 떨어졌다. "출발은 내일 새벽이오. 이곳 악양은 나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지키고 있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소." 보이지 않는 그림자라면 무엇을 말함인가? 그렇다. 그것은 무려 이만에 달하는 황궁수호군, 어위영장군부의 군사(軍士)들을 뜻했다. 이미 백검우는 어령부장 연무걸에게 분부하여 악양에서 군사를 훈 련하게 하는 교묘한 안배를 깔아놓은 것이다. 허나 아직은 철우환을 비롯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허나 그들은 백검우의 말을 믿었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 '그런 게 있었군! 장주님께서는 항시 우리를 놀라게 했었지......!' 굳은 신뢰와 경외 속에서 장내인물들은 장엄한 합성을 흘려냈다. "장주천위(莊主天威)......!" "천위......!" 칼(刀)은 그렇게 뽑혀졌다. 현백검장에는 밤새도록 수천 개의 횃불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백 대의 철갑마차(鐵甲馬車)가 형체를 드러내 는가 했더니.... 다시 어느 한순간 도검(刀劍)을 움켜쥔 수천 기마대(騎馬隊)가 가 공할 위용을 드러냈다. 오오...... 도검림(刀劍林)...... 타오르는 횃불 아래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도검림이여! 하늘(天)도, 땅(地)도 숨을 죽였다. ...... ■ 일로제검 제3권 26장 멸(滅)...... 인혼보(忍魂堡)! ━━━━━━━━━━━━━━━━━━━━━━━━━━━━━━━━━━━ 하늘 아래 가장 넓은 초원은 어디인가? 만약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사람들은 어느 누구라도 바로 이곳 을 서슴치 않고 입에 떠올릴 것이다. <초혼평(招魂坪).> 화북 대평원의 동단에 끝없이 드넓게 펼쳐진 광대한 초원. 한가로운 양떼와 소떼를 모는 유목민들이 가끔씩 모습을 보일 뿐 수십 리를 가보아도 보이는 것은 광활한 지평선 뿐이었다. 휘이잉... 사사사사...... 초원에 바람이 불 때마다 무성한 잎새들이 파도치듯 넘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하늘에는 아스라한 지평선을 향해 줄달음질 치는 뭉 게구름 하나.... 실로 평화스럽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허나 알만한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이곳이야말로 이 세상의 어떤 곳보다 무서운 죽음의 귀역(鬼域)이 란 것을....... 무림 최대의 살수집단 인혼보(忍魂堡)! 바로 그 거대한 단체가 이곳 초혼평의 광활한 초원 위에 산재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위용은 파오(= 유목민들의 천막집)의 숫자에서부터 시작된 다. 초혼평에 있는 칠백여 개의 크고 작은 파오들! 이곳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초혼평에 있는 그 많은 파오들이 모두 인혼보의 살수들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살수(殺手)들만이 갖는 특유한 기질. 그것으로 인하여 이들은 칠백여 개의 파오에 나뉘어 기거하며 인 혼보라는 거대한 살수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평화스러워 보이는 이곳 초혼평. 지금 이곳엔 활활 타오르는 석양이 붉게 깔리고 있었다. 허나 칼에 생애를 건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피와 죽음을 연 상시키는 빛깔일 뿐....... 그렇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 순간 초혼평의 광활한 초원 위에는 숨통을 콱 막히게 하는 긴장감이 자욱하게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핏빛노을이 더욱 선렬해질 무렵이었다. 구구구구...... 지축이 무너지는가? 초혼평의 지평선을 일제히 함몰시키는 듯한 둔중한 굉음이 무겁게 울렸다. 동시에 자욱한 흙먼지가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더니 이내 초혼평의 잎새들을 삼켜버리기 시작했다. 구구구구... 구오오오.... 굉음과 흙먼지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어느 한순간 초혼평의 지평선 위로 엄청난 인마(人馬)가 길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은 빛 윤기가 흐르는 흑마(黑馬)를 탄 오백여 기의 기마 대였다. "정지하라!" 한순간 웅혼한 일성이 기마대의 선두에서 울려 퍼졌다. 기마대는 일사불란하게 동작을 멈추었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기마대의 선두에 있는 전차(戰車)에 집중되었다. 철갑(鐵甲)으로 무장한 검은빛 야전용 전차(戰車)---- 백검우는 두 명의 고수가 끌고 있는 그 전차에 앉아서 극히 차가 운 신색으로 전면의 초혼평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주위에 도열한 정예고수들에게로 옮겨졌다. 모두가 하나같이 살기와 투혼으로 뭉쳐진 모습들이었다. "......" 휘릭! 한 줄기 육중한 그림자가 백검우의 곁으로 내려섰다. 바로 광유왕 웅야였다. 그의 방천극이 핏빛 석양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이미 놈들은 우리가 도착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장주의 목숨을 인질로 삼아 우릴 농락하려 들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 "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방법으로 인혼보주 야대혼 을 납치해온 후 이공자와 교환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 깡그리 쓸 어버리면...." 웅야는 연신 자신의 방천극을 흔들었다. 허나 백검우는 돌부처로 변한 듯 초혼평을 응시하며 침묵할 뿐이었다. "......?" 웅야와 주위 수뇌들의 얼굴에 의아로운 빛이 스쳤다. 그때 굳게 닫혀있던 백검우의 입술이 느릿하게 떼어졌다. "야대혼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이번 일을 꾸몄을 때에 이미 이런 상황은 예측했을 것이다." "그럼 장주님의 뜻은...?" "야대혼은 내가 협상을 해오리라 예측할 것이다. 허나 협상은 없 다. 먼저 그에게 내가 왔음을 알리고 진격할 것이다." "그, 그럼... 이장주의 목숨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웅야는 당혹성을 터트렸다. 백검우는 무심한 신색으로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말했다. "납치된 순간에 검영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검영을 살리 기 위해 현백검장 전체를 담보로 걸 수는 없는 일...." "......!" "나는 이미 살계(殺戒)를 열기로 결심했다. 야대혼에게 검영이 죽 는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의 말은 나직했으나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 웅비가 앞으로 나서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장주님, 제가 야대혼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제게 그 일을 맡겨주십시요." 웅비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검우는 그가 검영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책감 때문에 그는 아직 부상중임에도 불구 하고 이 싸움에 참가한 것이다. 백검우는 나직이 탄식했다. "웅비, 잘못하면 죽어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기에 제가 가겠다는 것입니다." "......." 백검우는 누구보다도 웅비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내 무거운 신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가거라! 우리는 반 시진 후에 총공격을 할 것이다!" "......!" "그에게 전하라! 이 백검우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해 대항하라고...." "존명!" 웅비의 우렁찬 대답이 현백검장의 모든 고수들에게 들리는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초혼평의 초원 속으로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지 고 있었다. 백검우는 주위 수하들을 돌아보며 서릿발같은 어조로 외쳤다. "인혼보의 살수들에게 인정을 베풀 필요는 없다! 그들 하나를 죽 이는 것은 정파 무림인 열 명을 살리는 일이다!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마라!" 그것은 몰살령(沒殺令)이었다. "허......억!" 무혼검귀 유광(劉炚). 그는 원래 인혼보에서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살수였 다. 그의 특기는 상대가 방심할 때를 끈기있게 기다려 일순간에 암습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제껏 그가 살인지령을 받고서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허나 그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똑같은 방법으로 죽음 의 위기에 처하게 될 줄은. "누... 누구... 끄윽...."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상대의 칼쿠리같은 손아귀가 자신 의 목줄기를 죄어온 탓이었다. 이미 그는 상대에게 혈도를 제압당 해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간밤에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신 게 탈이라면 탈이었다. 뒷간을 세번이나 드나들다보니 그만 순간적으로 방심을 해버린 것이다. 뒷간문을 나서며 미처 바지춤을 추스리기도 전에 뒤에서 상대가 암습을 가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묻겠다! 야대혼이 있는 곳은 어디냐?" "......!" 허나 유광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너무 세게 목을 죄어버린 때문이었다. 그는 이내 눈자위가 허옇게 뒤집어진 채 숨을 거두어 버렸다. "젠장, 이놈의 목이 이렇게 약할 줄을 몰랐는데......." 웅비는 축 늘어진 유광의 시신을 팽개치며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헌데, 바로 그 순간. 파아앗! 실낱같이 미세한 파공성이 일며 두 가닥 백광이 섬전처럼 웅비의 등 뒤로 쏘아져 왔다. "어딜! 나 웅비는 결코 두번씩 네놈들에게 당하지 않는다!" 웅비의 짤막한 호통성이 터짐과 동시, "크윽!" 허파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성이 울렸다. 어느새 웅비의 신형은 좌측으로 삼 장 정도 미끄러져 있었고, 그 의 손은 암습을 가한 두번째 살수의 심장부위를 깊숙이 찔러놓고 있었다. 실로 신기에 가까운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손을 빼내자 상 대는 피분수를 쏟아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웅비는 붉에 번들거리는 손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벼 락같은 호통성을 질렀다. "야대혼! 나와라! 나 현백검장의 웅비가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찾 아왔다!" 웅비의 커다란 외침은 초혼평을 뒤흔들었다. 그 외침성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연기처럼 다른 파오로 스며들었 다. 그렇다. 웅비는 자신의 방식대로 야대혼에게 백검우의 선전포고를 전달하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어느 한 파오 안. 북극의 만년빙이 이곳에 있는가? 후덥지근한 공기와는 상반된 극히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어스름한 어둠에 가려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단지 어느 한곳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그런 단단한 체격의 소유자.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물건을 천천히 집어들었다. 아......! 웃고 있다. 그가 집어든 것은 웃고 있는 투박한 소면탈(笑面脫)이 아닌가! 그렇다. 그는 바로 사상 최대의 살수집단인 인혼보의 보주이자 무림최고의 살수로 알려진 야대혼이었다. 야대혼은 자신의 상징인 소면탈을 얼굴에 고정시키며 나직한 중얼 거림을 토해 내었다. "올 것이...... 왔을 뿐이다......." 올 것이 왔다! 무엇이 왔다는 말인가?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어딘가 그의 어조에는 비감한 기운이 짙게 배어 있었다. "무황야... 그분을 위해 이곳에 있는 칠백여 명의 나의 분신들은 나와 같이 죽어갈 것이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웃도리를 벗었다. 그의 가슴에는 셀 수 없을 만큼의 유엽비도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후회는 없다." 토해내듯 마지막 중얼거림이 흘렀다. 그리고 힘있게 파오의 입구 에 가려진 채양을 걷어내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들이 방금 전투대열을 갖추었습니다!" 어디선가 다급한 음성이 야대혼의 귓가에 울렸다. 허나 야대혼의 행동은 극히 침착했다. "가거라. 그리고 인혼보의 살수답게 그들을 접대해라!" "보주님......!" "이것이 우리에겐 가장 멋있는 최후일 것이다." 야대혼은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 힘있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순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냉소가 스치고 있었다. '백검우! 그대가 협상을 하지 않을 줄은 예상못했다. 허나 나는 그런 그대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석양은 더 이상 시뻘겋게 될 수 없을 정도로 그 절정의 핏빛을 뿜 어대었다. 백검우의 옆 얼굴은 그 핏빛 석양을 받아 붉게 채색되 어 있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마치 지옥(地獄)의 심판자인 염왕(閻王)을 방 불케 했다. 그때 웅야가 약간 초조한 어조로 무겁게 입을 떼었다. "장주, 웅비가 간 지 반시진이 지났습니다." "......" 백검우는 핏빛으로 물든 초혼평을 음울한 눈으로 직시했다. 이어 그는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초혼평을 가리켰다. 그것이 대살륙의 신호였는가? 그의 주위에 도열해 있던 오백여 명의 현백검장의 고수들 입에서 일제히 우렁찬 함성이 터져나왔다. "현백진천하--!" "현백위복웅--!" 동시, 두두두두두두! "와아아아--!" 기마들의 발굽소리와 함성이 천공을 박살내듯 터져 올랐다. 초혼평에 깔린 풀잎들이 짓뭉개지며 그들이 떠난 자리에 흔적처럼 남았다. 순간 지금껏 아무런 반응도 없던 인혼보의 칠백여 파오에서 일제 히 무기를 빼어든 살수들이 번개처럼 빠져나오더니 일사불란하게 진세(陣勢)를 형성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빠르고 일사불란한 것이어서 인혼보의 명성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스스스스... 스스스... 어느 누구도 필요 이상의 동작을 취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입 을 열어 말을 꺼내지 않는다. 칠백여 인혼보 살수들은 한 점 흔들림도 없는 무심한 신색으로 질 주해오는 현백검장의 고수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두두두두! 파츠츠츳! 드디어 양 진영은 한데 어우러져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격전을 벌 이기 시작했다. 현백검장의 고수들 중 가장 빨리 적을 베어넘긴 것은 바로 광유왕 웅야였다. "크핫핫핫...... 이놈들아! 오늘을 기다린 지 오래다!" 그의 방천극은 인혼보의 살수들을 무지막지하게 짓이기고 있었다. 퍼퍼벅! "크아악!" "끄윽!" 두 명의 살수가 한꺼번에 가슴이 짓이겨지며 퉁겨져 날아갔다. "어디 무림 최고의 살수인들이라는 네놈들 실력 좀 보자!" 파우우웅! 퍼퍽! "크아아악!" 또 한 명의 살수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혈의사신 도천문.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의 검은 이번에도 가장 깨끗한 수법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한 자루의 검이 소리없이 허공을 가를 때 마다 상 대는 정확하게 이마에 붉은 혈점(血點)이 뚫린 채 나동그라졌다. 스스슷! 그의 곁에선 마치 흐르던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 했다. 심지어 그의 칼에 당해서 죽어가는 인혼보의 살수들조차 도천문에 게 경이를 금치 못했다. 패배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도천문의 완벽한 검놀림에 넋이 나가버리는 것이다. '우우... 너무 빠르고 깨끗하다....' 혈점을 선사받은 살수들이 죽어가면서 떠올린 공통된 생각이었다. 번쩍! 그의 검이 또 하나의 혈점을 만들기 위해 허공을 누볐다. 웅비.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평소 침착하고 온순한 편이었던 그가 지금은 형인 웅야 이상으로 포효하고 있는 것이다. "ㅋ......! 내가 당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욱 잔혹하게 상대해 줄 것이다!" 파우욱! 그의 오른 손은 이미 얼굴이 형체도 없이 짓뭉개진 채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살수의 턱에 정확하게 꽂혀 들었다. 콰득! "큭......" 턱뼈가 산산조각나는 파열음과 처절한 비명성이 일었다. "ㅋ흐흐...... 아직도 멀었다. 야대혼이란 놈도 이렇게 죽일 것이다......." 태양도 초혼평의 참혹한 광경을 외면하려는 듯 서둘러 서쪽 지평 선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사위는 여전히 붉은 기운으로 충천해 있었다. 칠백여 개의 파오가 대부분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르르.... 화르르.... 도산(刀山)과 검림(劍林)이 죽음과 피의 폭풍으로 넘실거리는 가 운데 언제부턴가 독수리떼들이 하나 둘 날아들기 시작했다. 불과 한 시진도 지나기 전에 독수리떼는 완전히 전장 주위를 새카맣게 에워쌓다. 그것은 이미 장내의 처절한 격전이 마지막 순간을 향해 치닫고 있 음을 의미했다. 이미 가장 자리의 시체들은 독수리들에게 살점이 뜯겨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얼마가 지났을까. 살아 움직이던 지옥도(地獄圖) 한 폭이 거짓말처럼 동작을 멈추었다. "이 정도로... 강했던가...." 야대혼은 문득 깊은 탄식을 발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그의 시야에 살아움직이는 인혼보의 제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멸(全滅)이었다. 그는 공허한 시선을 아래로 내려 피에 물든 자신의 칼을 내려다 보았다. 대략 삼십여 명 가량을 베어넘긴 그 칼은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는 듯 푸르스름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는 자신 을 포위하고 있는 살벌한 기세의 현백검장 고수들을 공허한 눈으 로 둘러보았다. "백검우... 그를 상대해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는가...." 야대혼은 몇 차례나 백검우에게 접근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현백 검장의 고수들에게 저지당했다. 실상 백검우에게 접근하기는커녕 지금까지 버텨낸 것도 힘들었을 지경이었다. "...." 무슨 생각을 했는가? 야대혼은 칼을 거둔 채 그 자리에 꿇어앉고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그렇다. 더 이상 현백검장의 고수 몇 명을 죽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순간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백검우를 불러다오. 그와 이야기하고 싶다." 바로 그 시각, 도천문은 백검우에게 전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야대혼을 제외한 칠백이십오 명의 살수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제거되었음을 보고드립니다." "본장의 피해는......?" 백검우의 물음에 도천문의 신색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적지 않은 피해입니다. 사 할 가량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허나 적의 피해에 비하면...." "그만 하시오." 백검우는 거의 침음에 가까운 어조로 도천문의 말을 막았다.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장으로 데리고 갈 것이오. 살아서든 죽 어서든 모두가 돌아가야만 하오." "알겠습니다. 제자들의 시신을 거두도록 명령하겠습니다." "...." 백검우는 허공을 선회하는 독수리 떼들을 응시하며 무겁게 탄식했다. '왠지...... 가슴이 답답하다.......' 도천문 역시 백검우의 시선을 따라 허공의 독수리 떼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때 두 사람의 귓가에 웅야의 쩌렁쩌렁한 노갈성이 스며들었다. "이런 지독한 놈을 봤나! 깨끗하게 죽고 싶다면 당장 이장주님의 행방을 밝혀라!" 백검우가 돌아보니 광유왕 웅야가 야대혼에게 고문을 가하고 있었 다. 이미 야대혼의 열 손가락은 웅야가 든 칼에 의해 모조리 잘려 나간 상태였다. "좋다 이놈, 언제까지 버티는지 두고 보겠다!" "......." 야대혼은 여전히 두 눈을 내리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 었다. 그의 얼굴에 쓰여있는 귀면탈은 웅야를 비웃는 듯 차갑게 웃고 있었다. 이미 웅야가 다가와 혈도를 제압할 때에도 대항하지 않았던 그였 다. 웅야가 열 손가락을 자를 동안 그가 내뱉은 말은 단 한 마디 뿐이었다. - 백검우를 데려 와라... "네놈이 역골참맥(易骨慘脈)의 고통까지 참아낼 수 있다고는 믿지 못한다!" 웅야는 씨근벌떡거리며 거칠게 야대혼의 상의를 뜯어내었다. 바로 그때 백검우의 나직한 일성이 그의 귓가를 파고 들었다. "웅야, 멈춰라." "......!" 웅야가 멈칫하는 순간 백검우의 신형이 유령처럼 장내에 내려섰다. 야대혼의 눈빛이 처음으로 짧게 흔들렸다. 백검우는 무심한 눈으로 야대혼을 정시하며 말했다. "야대혼,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라." "과연 그대는 사람을 다룰 줄 아는군." 야대혼의 어깨가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날 어떻게 죽이든 상관없다. 대신 내 얼굴에 쓰여진 소면탈을 벗 기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는가?" "허락하겠다." "......." 야대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체의 감정이 깃들어있지 않 은 눈으로 백검우를 정시했다. "나는 무황야의 직속 수하다. 내가 죽으면 무황야는 결코 그대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분을 상대할 자신이 있는가?" "그것은 필요없는 질문이다." "나는 후환이 될 싹은 미리 잘라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대가 나중에 무황야의 상대가 되도록 방관할 수는 없었다. 내 죽음을 계기로 현백검장과 그대가 사라진다면 영원히 그 분에게 칼을 들 이댈 자는 없을 것이다." "무황야가 그토록 치졸한 방법을 생각했다는 사실이 가슴아플 뿐이다." "그 분께선...." 무슨 말을 하려 했는가? 야대혼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백검우는 그 순간에도 일체의 흔들림없이 고요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약속대로 그는 야대혼에게 끝내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 강하다... 짐작했던 것 보다 훨씬 이상으로.... 야대혼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식어내리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절대 입을 열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그의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어쩌면... 당신은 끝까지 이 위기를 넘기고 무황야의 적수가 될지도 모르겠소." 야대혼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그대에게 진심으로 승복했소. 그리고 그대의 호의에 답하는 의미 에서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겠소." "......." "잘 들으시오. 그대의 아우는 북천수호령군에게 가 있소." 야대혼은 그 말을 끝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백검우의 눈빛이 일순 숨길 수 없는 파랑을 일으켰다. 그는 그제 서야 알 수 있었다. 야대혼은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검영을 납치했다는 것을. 그러나 야대혼이 마지막으로 검영이 있는 장소를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일으켰는가를.... "잘가시오. 야대혼." 백검우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그에게서 돌아섰다. 도천문이 검을 빼어들고 야대혼에게 접근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일순 그의 검이 야대혼의 소면탈을 향해 겨누어지는가 했더니 창 백한 섬광(閃光)을 뿜어냈다. 번쩍! 파파팟! 야대혼의 소면탈이 가루처럼 부서지며 터져오름과 동시에 야대혼 의 얼굴은 형체도 남기지 못한 채 수박처럼 터져 날아갔다.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머리를 잃은 야대혼의 몸체는 육중하게 뒤로 넘어졌다. 쿵.... "......." 도천문은 무표정하게 검을 거두었다. 그의 평생 이토록 잔혹한 일검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야대혼 자신이 원한 바가 아닌가. 끝내 그는 소면 탈 속에 감추어진 자신의 얼굴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야대혼의 죽음(死)....... 그것은 무림 최대의 살수 집단인 인혼보가 영원히 세상에서 그 모 습을 감추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백검우. 그는 그 순간 새로운 이름을 나직이 되뇌이고 있었다. "북천수호령군이라 했는가......." 그로부터 한 시진 가량 지났을 무렵. 백검우는 현백검장 제자들의 시신을 모두 거둔 후 장내를 떠났다. 두두두두...... 천마장(天魔莊). 절대의 위명을 떨치던 무림 금역이었던 이곳. 짙은 암흑 속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문득. 암천의 한귀퉁이가 열리며 삐죽이 한 조각 편월(片月)이 그 모습 을 드러내었다. 아...... 헌데....... 더 이상 보기 싫다! 달빛 아래 드러난 천마장의 정경. 과연 이곳에 그 위명을 자랑하던 천마장이 위치했었는가를 의심케 하는 지옥아수라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지 않은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던 수많은 대소전각들은 이미 그 자취를 감 추고, 대신 이미 싸늘하게 식은 처참한 모습들의 시신과 잿더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허...... 억......!" 홀연 어디선가 폐부를 쥐어짜는 헛바람 소리가 일었다. 파랗게 퉁퉁 부운 시신들이 둥둥 떠 있는 연못가. 두 명의 인물이 거의 부둥켜 안다시피 하고 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두 사람의 모습. 바로 천마장의 장주인 남궁결과 현백검장 호천부주인 우혁전이었 다. 이 순간. 남궁결의 등 뒤로는 하얀 죽음의 미소를 띄우고 있는 검날이 삐죽 이 드러나 있었다. 톡...... 검날 끝에 매달려 있던 남궁결의 핏방울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남궁결...... 알고나 죽어라......." 우혁전이 속삭이듯 남궁결의 귓가에 냉막하게 말했다. "네놈이 무황야와 같은 흉심을 지니고 행동을 한 것 때문이라는 것을......." "으으으......" 남궁결은 최후의 안간힘을 쓰는 듯 두 손으로 우혁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허나 우혁전은 개의치 않고 스산한 음성을 이어갔다. "그리고 한 분의 이름을 기억해 두어라....... 그 분의 이름은 백공 백검우......." 일순 남궁결의 안면근육이 제멋대로 뒤틀렸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혁전의 왼손이 벼락같이 짓쳐들었기 때문이었다. 콰쾅! 남궁결의 가슴에서 가죽북 터지는 격타음이 일고, 동시에 그의 신형은 암천을 갈랐다. "크아악!" 남궁결의 처참한 비명은 한참 후에야 터져 울렸다. 끔찍하게도 그 의 신형은 자신의 처소에 달려 있던 용설주의 뾰족한 부분에 꼬치 꿰이듯 꽂혀 버렸다. 휘이잉... 한 줄기 무심한 바람이 남궁결의 시신을 휘감으며 지나갔다. "카악......." 우혁전은 남궁결이 죽는 모습마저 마음에 안든다는 듯 가볍게 가래침을 내뱉았다. "내 검에 저런 쓰레기같은 놈의 피를 묻힌다는 것은 정말 불쾌한 일이야......." 그는 자신의 검에 묻은 피를 주위에 있는 시신들의 옷에 닦으며 신형을 돌려 세웠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긴 휘파람 소리가 일었다. "휘이이-- 이익!" 그의 휘파람 소리를 신호로. 두두두두...... 밤의 대지를 박차는 말발굽소리가 폐허로 변한 천마장을 뒤로 하고 있었다. 천마장의 멸망. 그것은 현백검장의 호천부주 우혁전과 그의 수하들이 만들어낸 피의 걸작들이었다. 편월(片月). 더 이상 참혹상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먹장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 일로제검 제3권 27장 말(言) 없는 말(言)...... 그 뜻은? ━━━━━━━━━━━━━━━━━━━━━━━━━━━━━━━━━━━ 바람(風)! 바람이 분다. 부는 바람은 폭풍(暴風)-- 폭풍은 피비린내 진동하는 죽음의 대혈풍(大血風)이었다. 그 대혈풍의 진원지는 말할 것도 없이 백검우였다. 거칠 것이 없다. 막을 것이 없다. 피의 폭풍은 천하(天下)를 휘몰아 오늘도 그 광란(狂亂)의 기세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대혈풍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중원의 한 일각에서는....... 당금 천하무림에서 가장 위대한 땅은 어느 곳인가. 그곳은 필경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 있는 곳이리라. 그렇다면 지상(地上)에서 가장 뛰어난 절대고수(絶代高手)는 과연 누구인가? 그렇다. 무황야(武皇爺)-- 당금 천하무림에서 그가 가장 위대하다는 것에 이의(異意)를 달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헌데 어느 누가 상상했겠는가? 이 위대한 절대자가 있는 땅에선 바야흐로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칸의 정실. 너무도 평범한 실내장식이 오히려 평범치 않은 그 어떤 신비의 기 운을 보이는 한 칸 정실이었다. 실내에는 두 사람. 두 눈에선 하늘을 담은 듯한 신광이 뿜어지고, 완강한 어깨에선 태산의 기운이 흐르는 화복(華服)의 중년인이 한 노인(老人)을 응 시하며 등의자에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 화복차림의 중년인은 벌써 일 다경 가량이나 눈 앞의 노인을 심해 처럼 깊은 눈길로 응시하고 있었다. 노인은 황색장포 차림에 가슴까지 내려온 검은 수염, 그리고 팔 척 거구를 지닌 당당한 풍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화복중년인의 눈길 앞에서 고개를 떨군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대체 이 화복중년인은 누구인가? 그렇다. 천하에서 이토록 신비무쌍한 기운을 풍길 수 있는 인물은 오직 한 명 뿐이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군...." 무황야의 입에서 드디어 나직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음 성은 천둥보다 더 크게 노인의 귓 속으로 파고 들었다. "무황야...!" 노인이 처음으로 떨구었던 고개를 들고 무황야를 올려다 보았다. 기이하게도 그의 두 눈은 흰자위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검은 동공 (瞳孔) 뿐이었다. 실로 소름끼치는 눈이 아닌가? 웬만한 인물은 그 눈빛만 대하더라도 전신이 오그라들게 분명했 다. 그러나 이 순간 그의 얼굴은 완전히 핏기를 잃은 채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속하는 단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신음처럼 겨우 입을 여는 노인의 이마에서 한 방울 차디찬 식은 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간 무황야의 입에서 은은한 노기가 서린 일성이 흘러나왔다. "북천수호령군, 본좌는 변명을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아! 북천수호령군이라 했는가? 그렇다. 흑안노인(黑眼老人)은 바로 무황야의 그림자들인 사대수호령군 중 일 인(一人)인 북천수호령군이었다. "이번 일은 어리석었다." 무황야의 음성은 다시 본래의 무심함을 되찾고 있었다. 북천수호령군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무서운 경련을 일으켰다. "화...... 황야......!" "백검우...... 그는 영웅(英雄)이다." "......!" "그리고...... 그는 영웅 이전에 혈육을 사랑하는 일문의 주인인 것이다." "황야......." "너는 영웅을 모독하고 혈육의 정을 승부에 이용하는 치졸한 실수를 범했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요!" 북천수호령군은 이마를 바닥에 닿도록 깊숙이 조아리며 신음처럼 말을 이었다. "백검우의 아우에게 손을 쓴 것은...... 검장(劍莊)을 금제(禁制) 하기 위한 속하의 일념(一念)이었을 뿐......." 변명이다. 허나 그의 변명엔 이미 설득력이 조금도 그 힘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무황야는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영웅(英雄)의 분노는 하늘도 말리지 못한다." 영웅의 분노-- "그의 분노로 인해 이미 인혼보와 천마장이 멸망했다." "......!" "그런 결과를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당연히......." "화...... 황야......!" "참으로 어리석구나. 너는 내가 이 일을 계기로 백검우를 직접 상대하리라 여겼느냐?" "속하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북천수호령군은 간신히 치켜 들었던 머리를 다시 떨구었다. 더 이상 무어라 입을 열 수 있겠는가? "부디 속하에게 이 일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요!" "......." 무황야의 신비한 눈길이 꿇고 있는 북천수호령군의 전신을 쓸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뿐이다." "황야, 그 일이란 무엇입니까?" 북천수호령군은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잡은 심정이었다. 무황야는 등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고요한 일성을 흘려냈다. "네 스스로 백검우의 분노를 가라앉혀라." "황야......!" 북천수호령군의 전신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는 무황야의 말뜻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무황야의 두 눈 깊숙한 곳에 은은한 신광이 어렸다. "그러나 너의 복수는 반드시 해줄 것이다." "......." 기이하게도 북천수호령군의 전신에 일고 있던 전율이 뚝 멈추었 다. 동시에, 그의 검은 동공(瞳孔)이 점점 크게 확대되었다. "황야....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북천수호령군은 더 이상 무어라 입을 열지 않고 구배(九拜)의 예 (禮)를 올려 하직을 고(告)했다. 무황야는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채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북천수호령군은 무황야의 모습을 한 번 시야에 담은 후 뒷걸음질로 실내에서 물러갔다. 이윽고 그가 완전히 실내에서 사라졌을 때였다. "천하를 제압한다 한들 그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음이니...." 무황야의 입에서 무심한 독백성이 흘러나왔다. "치졸한 계모로는 오직 치졸한 결과를 얻을 뿐이다. 진정한 계략 이라는 건 천하를 완벽하게 속일 수 있을 때에만 그 가치가 있는 법...."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황야의 입은 굳게 닫힌 채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진 셈이었다. 백검영의 납치사건은 무황야의 계획이 아닌 북천수호령군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소로(小路). 부드러운 잔디가 깔린 오솔길이었다. 길의 양쪽으로 온갖 기화이목(奇花異木)들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 었다. 어느 한순간 그 아름다운 길에 두 그림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 바로 무황야와 백검영이 아닌가? 검영의 안색은 약간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 "......" 두 사람은 말없이 소로를 한참동안 걸었다. 살랑...... 살랑...... 훈훈한 미풍이 사람의 옷깃을 잡았다가 놓으며 달아났다. 문득 침묵을 지키던 무황야의 입술이 열렸다. "검영...... 형(兄)이 보고 싶으냐?" 친손자를 대하는 듯한 매우 인자하고 부드러운 음성이다. 순간, 검영의 입술 꼬리가 살짝 비틀어지며 냉오(冷傲)한 대답이 일었다. "검영이라고......? 흥!" "......?" "나를 검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천하에 오직 한 분, 나의 형 백검우 뿐이오." "......!" 무황야는 가볍게 눈빛을 변화시켰다. '과연......!' 무황야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속이지 못함인가......?' 그는 시선을 들어 천공(天空)에 주었다. 티 한점 없이 맑은 하늘이다. "나는...... 언제나 자부하고 있었다." "......." "천하에 오직 나만이 저 하늘(天)을 닮았고...... 오직 나만이 하 늘(天)을 벗할 수 있다고......." "......!" 백검영의 안색이 일순 기이한 파랑을 일으켰다. 그는 무황야의 그 한 마디에 감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천하에 그 누구 있어 무황야의 그 말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문득 무황야의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허나 그 유일지심(唯一之心)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 "십육 년 전이었던가.... 하늘(天)을 닮은 또 하나의 인물이 날 찾아 왔었다." "......?" "백장청...... 그는 과거 나 무황야의 유일한 적수이던 백장청이 었다. 바로 그가 나의 유일지심에 찬물을 끼얹은 장본인이었지......!" 순간 검영의 얼굴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백장청......! 내 아버지야......!' 아아! 얼마나 수없이 마음 속으로 그리워하며 외쳐불렀던 이름인가! 헌데 지금 무황야가 그 이름을 떠올리며 감회 속에 경외심(敬畏 心)까지 보이고 있는 것이다. "헌데......." 하늘에 박혔던 무황야의 눈길이 검영을 찾았다. "지금 백장청의 두 아들이...... 하늘(天)을 닮아가고 있구나." 그렇다. 지금 무황야는 검영의 모습에서 지난 날 백장청의 모습을 되살리고 있었다. 문득, 검영은 무황야의 눈길을 똑바로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황야! 누가 뭐래도 당신은 하늘(天)이오. 진정한 하늘......!" "......!" "당신이 내 아버지를 높게 평가했다고 해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니 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이 아니겠소?" 너무나 천진스럽고 당당하다. 검영의 지금 모습에서 그 누가 단 한점 속기(俗氣)를 찾을 수 있겠는가? '과연......!' 무황야는 잠시 그 어떤 감회 속에 빠져 들었다. 이윽고, 그는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백검영......!" 그는 더 이상 검영이라 부르지 않았다. "내 수하를 대신해 이번 일을 사과하고 싶다. 받아 주겠는가?" "......!" 검영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숲이 무성하면...... 바람이 없어도 흔들리는 가지가 있는 법이 지요. 무황야의 사과를 기쁘게 받아 들입니다. 허나......." 순간 무황야는 백검영의 다음 말에 대해 간파한 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뿌린 자(者)가 거두는 법. 노부는 자네 형에게 무례를 범한 수하를 보냈다네." "......!" "당연히 노부의 수하는 대가를 치루겠지. 그리고...... 그것은 너 무도 당여한 하늘(天)과 하늘(天)의 신의(信義)가 아니겠는가?" 순간. '하늘과 하늘......!' 검영의 가슴에 돌연 큰 기복이 일었다. 무황야의 입을 통해 쏟아진 하늘이란 말. '형(兄)......!' 그렇다. 바로 그 하늘은 백검우를 일컬음이 아닌가? '아......! 무황야는 형을 하늘만큼 중시하고 있었던가......!' 검영은 가슴이 터질 듯한 격동을 느꼈다. 지상 최대의 절대자인 무황야. 그는 자신의 입을 통해 새로운 한 절대자를 인정한 것이다. '아아! 그 분은 나의 형...... 백검우야......!' 백장청에 이어 백검우가 하늘(天)이 되었다. 그리고 검영은 하늘을 닮아가는 작은 하늘(小天)이었다. ....... "백검영, 너는 돌아갈 것이다." 무황야는 천천히 신형을 돌려 세웠다. "허나...... 백검우는 노부에게서 너무도 많은 피를 요구했다." "......!" "그에게 전하라. 그 피의 대가는 반드시 받아 낸다. 이것은 노부의 약속이다." 순간, 검영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약...... 속......!' 두렵다. 왠지 모를 두려움이 전신을 휘감아 든다. 피의 대가! 그것은 곧 또 다른 피를 의미함이 아닌가? "......!" 검영은 무황야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무황야......!" 그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렀다. 무황야의 뒷 모습. 크다. 그리고 한없이 넓다. 그 하늘은 무황야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이곳은...... 천하에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 바로 무황야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백검우는 분노의 행진(行進)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무릉협(武陵峽)> 사천성(四川省)에 자리한 천험(天險)의 협곡. 그곳에 무서운 한 힘(力)의 뿌리가 내려 있었다. <혈성보(血星堡)!> 바로 혈성보가 무릉협의 한 곳에 독버섯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 "크아아악!" "끄으윽!" 언제부터인가? 혈성보는 엉망진창으로 피박살이 나고 있었다. 피(血)...... 비명...... 죽음(死)...... 죽음(死)......! "검장(劍莊)의 형제들이여! 전진하라!" 혈성보는 지금 분노의 대혈풍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백검우가 이끄는 검장의 일천(一千) 정예고수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혈성보를 생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백검우가 이끌던 일대(一隊)와 호천부주 우혁전, 천풍부주 종리군 등이 인혼보와 천마강을 괴멸시킨 후, 일시에 밀물같이 혈성보를 짓쳐든 것이었다. 혈성보는 사력을 다해 항거했지만 메마른 낙엽이나 다름없는 신세 였다. 팔랑...... 낙엽이 떨어진다. 삽시간에 혈성보의 대전(大殿)이 소리내어 무너졌다. 바스스슷! 낙엽이 먼지 스러지듯 부서진다. 잘 마른 낙엽이다. 불과 반나절 만에 혈성보의 일천오백(一千五百) 생명이 독혈(毒 血)을 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희들에겐 이승보다 저승이 더 어울린다!" 백검우. 그의 검(劍)이 쉴새없이 분기탱천의 엄청난 불꽃을 뿜었다. 파츠츠츳! 무서운 검광이 한 흑의노인의 목을 짓밟고 들었다. 흑의노인은 거세게 이를 갈아 붙이며 폭갈을 터뜨렸다. 그의도 (刀)가 번갯불같은 도광(刀光)을 뿜었다. "백검우! 네놈을 천참만륙......." 허나 흑의인의 혹갈은 결코 끝을 맺을 수 없었다. '내 목......!' 그것을 느꼈을 땐 이미 그의 목은 허공에서 피춤을 추고 있었다. '죽는 건가......?' 그것을 느꼈을 때 그의 앞에는 난생 처음 보는 끝없는 어둠이 펼쳐지고 있었다. 죽은 흑의노인은 바로 혈성보주 관형악이었다. 또한 그의 비명을 끝으로 더 이상 비명은 터지지 않았다. ...... 낙엽. 그것은 잘게 부서져 허공 중에 먼지로 흩어져 버렸다. 혈성보-- 그 독버섯의 뿌리가 완전히 뒤집혀지는 순간이었다. 폭풍(暴風). 죽음의 대폭풍은 계속해 그 기세를 떨쳤다. 인혼보. 천마장. 혈성보. 세 곳이 죽음의 대혈풍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 갔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일천기(一千騎)의 마필(馬匹)은 지축을 울리 며 무섭게 질주하고 있었다. 바로 무릉협 혈성보를 짓밟은 현백검장의 일천고수들이었다. 일천기 마필의 중앙에는 한 대의 팔두마차(八頭馬車). 마차 안에는 백검우가 태사의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헌데 어인 연유인가? 백검우의 눈에는 알 수 없는 복잡한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대체 무엇이 알 수 없단 말인가? "벌써 인혼보와 천마장...... 그리고 혈성보가 괴멸되었다. 하나 같이 무황야의 손발들이거늘...." 그의 눈이 은은한 기광을 뿜었다. "헌데도 무황야는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백검우로선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의 침묵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가능한 모든 예측을 다 떠올려 보았다. 허나, 그는 그 어떤 결론도 얻을 수 없었다. "무황야, 그가 날 사전에 제거할 목적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면 벌 써 반응을 보였어야 했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만약 검영의 신상에 이미 이상이 생겼다면...?" 그는 격동을 주체할 수 없는 듯 태사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파스스슷......! 태사의 손잡이가 가루로 변해 버렸다. 이 태사의는 천하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북해자오목(北海紫午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절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시각, 질주하는 백검우의 팔두마차의 전방으로 한 인물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이 순간 한 인물이 백검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한 덩이 얼어 붙은 만년빙석(萬年氷石)같이 차가운 냉기를 전신에서 뿜어내는 노인(老人)의 두 눈은 검은 먹빛 일색이었다. 그렇다. 노인은 바로 북천수호령군이었다. "드디어 오는가...." 그는 이미 반나절 동안이나 이 길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 다. 그리고 드디어 그 상대가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수하들과 함께 질주해오고 있는 것이다. 두두두두.... 두두두둑! 가장 먼저 북천수호령군을 발견한 것은 광유왕 웅야였다. "웬 빌어 먹을 놈이냐? 당장 썩 비키지 못할까?" "백검우...... 그에게 볼 일이 있다." 얼음 조각이 떨어질듯 무겁고 차가운 북천수호령군의 음성이었다. 웅야가 그 말에 좋은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미친 놈! 당장 비켜서지 않으면 그 돌아버린 대갈통과 미쳐버린 혓바닥을 모조리 뽑아 주겠다." 웅야의 대갈 호통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존귀한 백검우, 감히 그 존귀한 이름을 함부 로 주절거리는 인물을 어찌 용서하겠는가. 허나 북천수호령군의 음성은 반대로 더욱 음울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백검우, 그에게 볼 일이 있다." 일순 웅야는 느낄 수 있었다. 눈 앞의 인물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내력을 지녔음을. 웅야는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잠시 분노를 삭였다. "배포 하나는 알아줄만 하구나! 우선 신분부터 밝혀라!" "나는 북천수호령군이다." 순간 웅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북천수호령군! 이놈이 제발로......?' 그때였다. "웅야! 본좌가 그를 만나 보겠다." 마차 안에서 나직한 음성이 일었다. 백검우는 천천히 마차 안에서 걸어나왔다. 그의 깊숙한 눈에 기광이 스쳐갔다. "그대 혼자로군." 북천수호령군의 대답은 오직 차거울 뿐이다. "그대의 목을 취하기 위해선 부족하다는 뜻인가?" 그 한 마디로 백검우를 찾은 목적은 확실하게 밝힌 셈이었다. 백검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 이어, 그는 나직하게 물었다. "허나 내눈에는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려 하는 것으로 보이는군.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가?" 그렇다. 누가 보아도 북천수호령군은 죽음 속에 뛰어든 불나비와 같은 형국이 아닌가? 허나 북천수호령군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 두고 봐야 할 일... 그 전에 먼저 밝혀둘 일이 있다." "......?" "그대의 아우에게 손을 쓴 것은 나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 "황야 그 분께선 이 일에 대해 전혀 무관하시다. 내 말 믿겠는가?" "......!" 백검우의 안색이 일순 화강암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런 허무맹랑한 일이.......' 그는 비로소 무황야가 아직까지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를 확연 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북천수호령군... 그대는 그대의 주군에게 참으로 큰 누를 끼쳤구나." 북천수호령군의 입가에 창백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 말은 사실이다. 허나 나는 이 순간에도 후회하지 않는다. 결 국 무황야께선 그대가 뿌린 피의 대가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허나 그대의 동생은 무사히 현백검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무황야는 검영이 돌아온 후 움직이겠군." 백검우는 두 눈에 신비로운 광채를 발했다. 북천수호령군은 차갑게 냉소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백검우는 알 수 없는 한기가 등줄기에 스쳐내리는 걸 느꼈다. 비 로소 그는 북천수호령군이 단신으로 자신 앞에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과연 무황야다운 해결책이군. 뿌린 자(者)에게 거두게 한다는 건가.......' 백검우의 머리는 급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이 자를 살려보낸다 해도 무황야는 결코 반격의 불길을 멈추지 않을 터....' 그때 북천수호령군의 살기어린 음성이 그의 귓 속을 파고 들었다. "백검우, 그대가 진정한 영웅이라면 나를 이대로 돌려보내선 안될 것이다." "......." "허나 내가 단지 죽기 위해 그대와 싸우려 한다고는 생각하지 마 라. 본좌가 지금 지닌 힘은 평소보다 최소한 배는 강한 것이다." "......!" 백검우의 안색이 일순 기이하게 흔들렸다. 그는 북천수호령군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그는 동귀어진을 언급한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도외시한 채 상대와 함께 죽겠다고 결심한 자의 공 격을 막아낸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상대는 북천수호령군이 아닌가? 허나 백검우는 추호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 며 서릿발같은 일성을 발했다. "어디 그대의 동귀어진 솜씨를 구경해 보겠다." "흐흐흐...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천수호령군의 검은 동공에 일순 음산한 귀기(鬼氣)가 피어올랐다. 드디어 백검우와 북천수호령군은 삼 장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장내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가공할 살기와 어우러진 채 소용돌 이치기 시작했다. '으음...... 소문보다 더 강한 놈이다......!' 북천수호령군은 전신 피부로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백검우는 조금의 방심도 하지 않았다. 과거 그는 남천수호령군과 한 차례 부딪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힘겹게 남천수호령군을 죽일 수 있었다. 허나, 그 사실을 북천수호령군은 물론 무황야도 모르고 있었으니-- 그것이 북천수호령군으로선 최대의 불행이었다. 백검우는 서서히 전신에 진력을 끌어 올렸다. '남천수호령군은...... 죽지 않기 위해 나를 상대했다!' 죽음보다 삶(生)을 앞세운 혈전. '허나...... 북천수호령군은 지금 죽기 위해 나를 상대하려 하고 있다!' 그때 북천수호령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비릿하게 떠올랐다. "백검우, 나는 적수공권이다. 허나 그대는 원한다면 검을 뽑아도 좋다." "......!" 백검우의 눈에 순간 기광이 스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북천수호령 군이 자신을 함정으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았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북천수호령군의 무공은 병기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이다. "내가 맨손으로는 절대 그대를 이길 수 없다고 자신하는가?" "흐흐.... 솔직히 말해주지. 적수공권으로 본좌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당금천하에 무황야 한 분 뿐이다. 그대는 절대 날 이길 수 없다." 북천수호령군의 그 한 마디는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허나 백검우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린 채 주저없이 대꾸했다. "기꺼이 그대의 뜻에 따라주리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북천수호령군의 양 손에서 푸르스름한 한기가 피어올랐다. 허나 그렇게 느껴진 순간 이미 그 손은 벼락줄기같은 장력을 토해내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 그대의 호승심이 파멸을 부를 것이다!" 꽈르르릉! '......!' 백검우는 직감적으로 그 장력이 한독(寒毒)을 내포하고 있음을 느 끼고는 호신강기를 시전함과 동시에 마주 일 장을 쳐내었다. 꽈과광! 두 줄기 장력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가공할 잠력을 사위로 뿌려댔 다. 동시에 두 사람은 똑같이 뒤로 세 걸음씩 물러났다. 백중지세(伯仲之勢)! 그 일초의 결과는 두 사람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 정도였던가!' '과연!' 그것이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거대한 두 마리 용(龍)이 하 나의 여의주(如意珠)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듯 어마어마한 폭풍을 일으키며 연신 천붕지괴의 장력을 교환했다. 꽈르르릉! 쿠오오오.... 사방 수십 장의 방원이 온통 대혼돈의 수라장을 이루었다. 웅야를 비롯한 장내의 현백검장 수뇌들은 아연 경악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맙소사! 장주님이 오히려 밀리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적수공권으로 상대하시는 게 아니었어...!' 격돌(激突)! 백검우와 북천수호령군의 대격돌은 눈깜짝할 새에 이미 삼십 여 합을 넘어서고 있었다. '과연 사대수호령군답구나!' 백검우는 내심 경탄을 금치 못했다. 죽음을 각오한 북천수호령군의 공세는 실로 치가 떨릴만큼 악랄하고 끈질긴 것이었다. 북천수호령군은 기쾌하게 쌍수(雙手)를 움직이며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핫......! 차가운 북천(北天)은 죽음의 손(手)을 내리리 니...... 이것을 북천빙라수(北天氷羅手)라 일컫는다!" 아아 보라! 치켜든 그의 쌍수(雙手)가 찰나지간에 백색 투명한 얼음(氷)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북천빙라수, 드디어 북천수호령군의 최대 독문절기가 시전되기 시 작한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의 죽음을 각오한 생애 최대의 승부수였다. "빙라취혼(氷羅取魂)--!" 츠스스스스......! 얼어 버린다. 주위 모든 것을 동결시키며 두 가닥 가공할 빙기(氷氣)가 발출되 었다. 비록 그 속도는 느렸지만 위력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 였다. '이런 한빙장(寒氷掌)이 존재했다니!' 백검우는 등줄기에 전율을 느끼며 급속히 쌍장을 거머 쥐었다가 홱 뿌리쳤다. "자살천강(紫煞天剛)--!" 번-- 쩍! 자색의 나뭇결같은 강기들이 벼락치듯 뿜어졌다. 꽈꽈꽝! 고오오오... 백검우는 순간 자신의 공세가 북천수호령군의 쌍수를 제압한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은 정확한 것이었다. "웃!" 북천수호령군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터졌다.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쩍...... 쩍......! 그의 얼음덩어리처럼 창백한 쌍수가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지는 게 아닌가? "쓰러져라!"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검우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기쾌하 게 덮쳐들었다. 허나 어찌된 판국인지 그 순간 북천수호령군의 얼 굴에는 희열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됐다! 걸려 들었다!' 쩡...... 쩡...... 오오... 보라! 갈라졌던 그의 쌍수가 감쪽같이 달라붙으며 기형적으로 변하고 있 었다. 찰라간에 그의 쌍수 모양이 완전히 두 개의 빙검(氷劍)으로 변했다. "크하핫...... 북천빙라검(北天氷羅劍)--!" 번-- 쩍--! 아! 검신합일(劍身合一)! 북천수호령군의 전신이 자신이 만든 기형의 빙수검(氷手劍)으로 스며 들었다. 동시에. "빙(氷)-- 라(羅)-- 검(劍)!" 번-- 쩍--! 가공할 검광(劍光)이 도약하고 있는 백검우를 향해 폭사되었다. '헛!' 백검우는 허공에서 내심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동시에 그의 신형 이 기쾌한 회전을 일으켰다. "태양폭일참(太陽瀑日斬)--!" 아아! 그의 신형이 눈부신 한 덩이 태양으로 변하고 있었다. 꽈꽈꽝--! 연이어 삼산오악(三山五嶽)이 일시에 무너져 버리는 가공무비의 대폭음이 터졌다. 뭐가 어찌 된 것일까? 백검우는 몸의 중심을 잃은 채 뒤로 퉁겨지더니 가까스로 땅에 착 지했다. 웅야를 비롯한 장내의 현백검장 수뇌들은 놀라 경호성을 터트렸다. "장주님!" "저... 저...!" 허나 그들의 경악어린 외침성은 이내 탄성으로 변하고 있었다. 보라! 북천수호령군의 양 팔이 팔꿈치 부분까지 완전히 바스러진 채 형 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게 아닌가? 게다가 그의 온몸은 백검우의 극양진기(極陽眞氣)에 당한 듯 시커멓게 그을려져 있었다. "커억...!" 북천수호령군은 한 덩어리 검은 피를 울컥 토해내더니 쓰러질듯 휘청거리며 백검우를 응시했다. "이럴 수가... 나의 북천빙라수를 맨손으로 막아내다니...." 엄청난 불신과 절망의 빛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다시 세 모금의 피를 연달아 토해내더니 그 자리에 무너지듯 서서히 주저앉았다. "졌다... 완벽하게... 허나 이것은 시작일 뿐...." 무섭게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얼굴에 빠르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대천왕(二大天王)...... 그들은 나 보다...... 열 배로 강하 고...... 백배는 더 잔인하다... 그리고...... 그들이 곧 너를...... 찾을 것...... 이다." '이대천왕......!' 털썩! 북천수호령군의 무릎 부분이 숯덩이로 변해 허공에 흩날렸다. "백검우... 나를 죽인 것은 네가 아니다. 바로 황야......."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북천수호령군의 몸체가 땅 위에 불타버린 고목처럼 앞으로 나뒹굴 었다. 타버린 그의 머리칼이 재로 변해 바람에 흩날렸다. "이대천왕......." 백검우는 천천히 신형을 돌려 세웠다. 휘이잉...... 한 줄기 속절없는 바람이 불었다. "보여줄 것이다. 나 백검우가 지닌 능력의 한계를......!" 그는 천천히 웅야를 비롯한 현백검장의 수뇌들에게 돌아섰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직하면서도 위엄있는 일성이 흘러나왔다. "검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존명(尊命)----!" ■ 일로제검 제3권 28장 대장군(大將軍의 혼(魂) ━━━━━━━━━━━━━━━━━━━━━━━━━━━━━━━━━━━ 중원천하, 그 전역에서 일제히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단 하나의 소문에 의하여...... - 백검우가 현백검장으로 돌아갔다! 그렇다. 마침내 그 피의 행진이 멈춰진 것이다. 허나 이미 무황야를 따르던 인물들에게 백검우란 이름은 무황야 이상의 두려운 존재로 부각된 후였다. - 현백검장의 이장주 백검영! 그는 무황야의 지시로 납치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백검우가 현백검장으로 돌아간 것이다! 강호인들은 단번에 무황야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다. 허나, 그런 중에도 그들의 뇌리엔 백검우가 보여준 그 단호한 행 동에 대한 두려움을 결코 씻을 수 없었다. 여기는 현백검장! 천지가 모색에 잠겨드는 초저녁. 백검우와 혈의사신 도천문은 백검우의 거처에서 대좌하고 있었다. 백검우의 얼굴은 담담한 기색이었다. 한순간 그는 심유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분간 무림은 평온을 유지할 것이오." "......." 백검우는 깊숙한 눈빛을 발하며 무심한 어조로 이었다. "무황야......! 그가 무림의 동태를 살핀 후 모종의 행동을 일으 킬 때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는 것이오." 일순 도천문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장주님 말씀의 뜻은......?" 백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릉에서 나의 신변을 모두 정리하겠소. 그것 역시 무황야와의 결전을 위한 준비라 할 수 있소." "알겠습니다." 도천문은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다시 한 번 이곳을 부탁하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장주님!" 고개를 든 도천문은 백검우의 시선을 응시하며 힘준 어조로 나직 하게 대답했다. 짧은 순간. 깊은 신뢰와 충정이 그들의 시선 속에서 얽혔다. "......!" "......!" 이내 백검우는 신형을 일으켰다. 스윽!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소리없이 실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헌데 도천문은 백검우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바위처럼 그 자리에 서 움직일 줄 몰랐다. 왠지 그의 눈빛이 어둡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그 자신도 알아듣기 힘든 저미한 독백이었다. ...... 창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금릉.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던 금무왕의 역모 사건도 앞으로 있을 한 가지 큰 행사로 인하여 벌써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행사! 그것은 바로 군영순무대례였다. 그 시일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금릉성은 전체가 서서히, 그러나 눈에 띠게 흥분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 정실. 자단목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인물이 대좌하고 있었다. 신태비범하고 두 눈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혜지의 광망이 흐르는 초로의 노인과 준수미려한 용모의 미청년. 바로 문연각 대학사 성화융과 백검우였다. 헌데. 백검우, 그의 수려한 얼굴이 은은히 굳어져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 그의 얼굴을 응시하는 성화융의 눈가에 의혹이 감돌고 있었다. 이윽고. 성화융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나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게 무엇이냐?" 백검우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그를 쳐다봤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려도 놀라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요." 성화융의 불그레한 만면에 자애로운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놈......! 나를 놀라게 할 일은 천하에 단 하나, 너의 안위에 관한 문제 뿐이다." "......." 어찌 들으면 간단한 한 마디. 허나 백검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뭉클할 정도로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눈빛은 결연하게 물들었다. "바로 그것에 관련된 일입니다." "음......?" 백검우는 성화융의 의혹에 찬 얼굴을 직시하며 무겁게 말을 이엇다. "저는...... 성후준이 아닙니다. 소생은... 백검우란 이름의 일개 무림인입니다." 그 한 마디를 뱉어내면서 백검우는 성화융의 어떤 분노도 다 감수 하리라 각오하고 있었다. 허나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성화융의 입에서 그 순간 흘러나온 것은 호통성도, 신음성도 아닌 웃음소리였다. "허허허......" 그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만감이 서린 웃음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허허...... 부모가 어찌 자식이 바뀐 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성화융의 입에서 담담히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무림에서 떨치는 명성도...... 또 네가 그동안 진실되게 행 동하였음도 모두 탐문해 보았다." "......!" "나는 불운하게 아들을 잃었다. 허나......." 성화융은 돌연 뜨거운 시선을 백검우의 얼굴에 고정했다. "또다른 아들을 잃을 수는 없지 않느냐?" "대...... 감......!" "이놈...... 아버님이라 불러라." 벼락같은 호통이었다. 백검우의 눈빛이 일순 감격으로 물들었다. "아버님......!"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실린 한 마디였다. 성화융은 당연하다는 듯 자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이놈, 누가 뭐라해도 너는 내 아들이다." 햇살과 같이...... 그의 만면으로 따뜻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암, 내 아들이고 말고...." 백검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두덩이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하늘이여...... 감사합니다. 이제 천륜을 어긴 양심의 가책을 벗었나이다!' 내심으로 외치는 그의 귓전에 성화융의 호탕한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 오늘은 네녀석과 코가 휘도록 술을 마시고 싶구나." "아버님......!" 문연각 대학사 성화융. 그는 대인(大人)이었다. 백검우는 마치 자신의 부친이 살아 돌아온 듯한 격정을 가슴으로, 머리로, 그리고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르륵.... 옷자락 끌리는 소리와 함께 실내 입구에 금약예가 모습을 나타냈 다. 그녀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으나 오히려 전보다 훨씬 성숙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금약예는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말 도 꺼내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백검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는 걸 느끼며 만면에 따사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약예...!"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 금약예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시야에 는 백검우가 팔을 활짝 벌린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금약예는 한 마리 사슴처럼 품으로 달려와 안겨들었다. 백검우는 그녀의 몸을 포옹한 채 수없이 마음 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약예... 널 이세상의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 밖에는......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영락 이 년(二年) 오월(五月) 초(初)하루-- 둥-- 둥-- 둥-- 북소리. 중원 팔십만 대명(大明) 군영에서 일제히 웅장한 대고성(大鼓聲) 이 울려 나왔다. 오오! 군영순무대례--! 그것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찬란한 조양(朝陽)이 온누리에 퍼져나가는 아침. 황궁(皇宮)의 정문이 있는대로 활짝 열렸다. 그리고, 구구구구웅...... 어가(御架)! 황제의 어가가 그 웅장하고 장엄한 자태를 드러내며 천천히 황궁 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 앞-- 어령군 총사대장군 영호진을 필두로, 오군우도독 헌양대장군 하현극. 육십만 대명금군의 총수(總帥) 창무대장군 황보양...... 등이 마 상에서 백발을 휘날리며 위엄을 보이고 있었고, 그 외에 각국의 대장군들 역시 위풍당당한 자태로 말을 몰고 있었다. 또한. 어가의 뒤로는 삼각(三閣), 일전(一殿), 육조(六曹)의 수반들과 만조백관들이 모두 엄결한 관복을 차려 입고 따랐다. 오오...... 그 웅장한 광경을 어찌 필설로 다 형용하랴. 이것은 한 마디로 대명(大明) 그 자체의 움직임이 아닌가? 구구구궁...... 고오오오...... 창건 이래. 이 어가 행렬에서 뻗쳐나오는 무상의 위엄은 천지가 다함께 복배 (伏拜)할 듯 엄청났다. 그리고. 지축을 진동시키며 천천히 황궁을 벗어난 어가의 행렬은 무검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검구에는 이미 각군의 정예들이 황제의 순무를 받기 위하여 질 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깃발(幡)--! 막 떠오른 태양 아래 무검구 전체가 형형색색의 깃발로 뒤덮여 있 는 것이다. "와아아......" 군병들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다. 그리고 그 함성은 무검구에서 삼 일간이나 조금도 변함없이 계속 되었다. 군병연전(軍兵聯戰), 무병비무(無兵比武)에 승패가 엇갈릴 때마다 함성은 더욱 천지를 진동시키며 터져 나왔다. ...... 삼 일이 흐른 저녁. 서천(西天)을 온통 불태우던 아름다운 노을이 찾아들 무렵, 군영 순무대례-- 그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고 있었다. 무검구에는 팔십만 대명군이 기치창검을 드높게 도열하고 있었다. 그 맨 앞으로 황제의 어령소(御令所 = 황제가 임시로 나와서 국사 를 주관하는 곳)가 그 모습을 보였다. 어령소의 전면(前面)에는 용봉(龍鳳)의 그림이 은은하게 그려진 차양사가 드리워져 있었다. 문득. 둥...... 둥...... 둥...... 웅장한 북소리가 무검구 위에 울려 퍼졌다. 뒤이어 어디선가 웅혼한 일성이 무검구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폐하께서 군영순무대례의 결과를 알리는 칙서를 내리셨다......!" 이어. 어령군 총사대장군 영호진이 금빛 장첩을 공손히 받쳐들고 도열한 군병들 앞에 우뚝 섰다. "......!" "......!" 무검구 전체에는 삽시간에 긴장이 감돌았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듯 군병들은 숨을 죽인 모습이었다. 기실 이 군영순무대례의 결과는 곧 각군의 명예와 직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이윽고 어령군 총사대장군 영호진이 웅후하고 낭랑한 어조로 장첩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 기쁘도다...... 각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매 짐의 마음은 흡족하고도 든든하기 이를 바 없는 바...... 지금까지 고련연병에 힘써 짐을 흡족케 한 상장군 성후준을 선무특령대정공(選武特令大正公)으로 봉하노라...... 순간. 백검우의 삼만 수하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황제 폐하! 만세......!" "상장군 천위(天威)......!" 무검구 전체가 떠내려갈 듯한 함성이었다. 부장 연무걸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가슴을 활짝 펼치며 마음껏 대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구나......!" 백검우는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떠올린 채 연신 손을 들어 삼만 수하들의 환호에 답했다. 선무특령대정공(選武特令大正公)--! 이것은 군영순무대례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에게 부여되는 대명무 장(大明武莊)에 있어 최고의 명예였다. 헌데. 백검우는 그것을 손에 쥔 것이다. 장첩은 계속되었다. - 아울러 짐은 상장군 성후준을 대장군(大將軍)의 위(威)와, 경위 지휘사사(京威指揮司使) 겸 총도병무어사(總都兵武御使)에 책봉 하노라......! 황제의 칙첩은 거기서 끝났다. 순간. 장내는 돌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 버렸다. 모든 인물들의 입이 딱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칙첩! 그것은 고금유사에 전무(全無)한 충격적인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경위지휘사사! 검사(檢師)에서 사사(司師)에의 승위(乘威). 이것은 황도(皇都)와 황궁(皇宮)은 물론, 황제 자신의 신변까지 수호하는 막중한 지위였다. 더우기 총도병무어사라는 직책은 중원 십삼 개 성은 물론, 변방 속국의 모든 군장(軍將)들의 생사까지 일언(一言)에 좌우할 수 있 는, 한 마디로 황제의 직위를 위임받은 중책(重責)이었다. 헌데......! 이 엄청난 두 개의 직책이 단 한 사람에게 모두 부여된 것이다. 유사 이래....... 이토록 파격적인 인사(人事)는 없었다. 더우기 백검우는 약관의 청년장군이 아닌가! 허나 아는 자는 다 알고 있었다. 아란대라마의 일, 그리고 금무왕의 역천대반(逆天大返)의 음모에 보였던 그의 찬연한 활약을....... 그 모든 전력이 바로 황제의 절대적 신임을 불러 일으켰음을......! 하지만 결정적 계기는 다른데 있었다. 백검우를 이토록까지 중용하는 그의 내심에는 후대(後代)의 황태 자까지 적극 보필할 수 있는 권력을 주고자 하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장내는 너무도 엄청난 충격 앞에 한동안 얼이 빠진 듯했다. 허나 그 충격은 이내 폭발하는 기쁨과 환호로 돌변했다. 함성의 거대한 물결이 천지를 진동시키며 터져나온 것이다. "충의대장군 성후준--! 천세--!" "대장군...... 대장군......!" 문연각 대학사 성화융. 그의 노안에서는 감격의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오오오...... 하늘이여......! 저런 아들을 얻게 하여주심을 감사하나이다." 곧이어. 그는 주위에서 몰려든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의 축하에 뒤덮혔다. 눈물자국이 마르지 않은 그의 얼굴에선 연신 호탕한 대소가 터지 고 있었다. "헛헛헛...... 고맙소이다. 노부는 오늘 생애 가장 기쁜 날이외다......!" 한편. 백검우는 자신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이 상황 앞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헌데 어느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그는 문득 하늘을 향하여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 그는 내심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드디어 무황야의 숨통을 움켜 잡았다......!' 찬란한 양광(陽光)이 앙천대소하는 그의 얼굴 위로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때.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만면에 기쁨이 얼룩진 채 그를 향 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영호진....... 부장 영무걸....... 부친 성화융.......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이....... ...... 군영순무대례는 그 화려하고 웅장한 막(幕)을 이렇게 내리고 있었다. ■ 일로제검 제3권 29장 중원(中原)의 하늘(天) 아래......! ━━━━━━━━━━━━━━━━━━━━━━━━━━━━━━━━━━━ 영락 이 년 오월 보름. 친정(親征)-- 드디어 영락황제가 직접 대명군(大明軍)을 거느리고 남만, 안남 (安南) 등을 정벌하는 친정령(親征令)이 내렸다. 쿠구구궁......! 영락황제는 팔십만금군(八十萬金軍) 중 사십오만을 거느리고 황궁 을 떠났다. 동시에 놀라운 황제칙령이 떨어졌다. 그것은 백검우가 이미 예측했던 것이기도 했다. - 삼각육조원수(三閣六曹元首), 수보(守補) 태진승(太眞乘)에게 대내권(大內權)을 맡기노라......! 또한. 대장군(大將軍) 성후준에게 본국(本國)을 수호하는 총도병무어사 (總都兵武御師)에 임명하노라......! <영락황제 칙령--!> 오오...... 황실 역사에 언제 이처럼 한 젊은 인재(人才)에게 대권(大權)을 맡긴 예가 있었던가! 백검우--! 그는 이제 본토(本土)에 남은 삼십오만 대명금군(大明金軍)을 일 성 호령하는 몸이 된 것이다. - 놀랍다......! 천하인(天下人)들이 성후준이란 불세출의 이름 아래 놀라고 있을 때. 그 이름의 주인......! 백검우는 한 장의 포고문을 대장군 총도병무어사의 위엄으로 내렸다. 십팔만리(十八萬里) 중원천하에 붙은 포고문--! - <본장(本將)은 황제폐하께서 세외역(世外域)을 정벌, 환국시까 지 어떠한 분란도 용납하지 않으리라! 이를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구족삼멸(九族三滅)의 대죄(大罪)로 다스릴 것이다!> <경위지휘검사 겸, 총도병 무어사 대장군 성후준 서령(書令)--!> 백검우의 이 포고...... 그것은 모반과 대역 음모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경고였다. 황궁 역사상 이러한 포고는 친정(親征)이 있을 때마다 떨어지곤 했다. 허나...... 세인(世人)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 포고문에 또하나의 의미가 밑에 깔려 있음을......! 바로 그 즈음. 무황야는 드디어 백검우를 향해 거대한 운명의 주사위를 던지고 있었다. 밝은 달(月)이 야천(夜天)에 걸렸다. 이곳은 어디인가...... 쏴아아...... 물결 흐르는 소리. 찌르르...... 찡! 찡! 풀벌레 우는 소리. 아늑하다. 울창한 수림(樹林)이 달빛을 받아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한 그루 고송(古松) 아래. 일 인(一人)! 한 인물이 그림처럼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태산같은 기도와, 지극히 깊숙하고 맑은 눈빛을 지닌. 오오...... 너무도 준수한 중년인(中年人)! "......." 그는 이 순간 전신에 깨끗한 자의(紫衣)를 입은 채 서늘한 밤바람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렇다. 천하에 무황야 외에 그 누구가 이렇듯 도도하고 유유로운 기개를 지닐 수 있겠는가. "좋은 밤이군." 문득 무황야는 입가에 운무처럼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중얼거렸 다. 바로 그때였다. 슥...... 스스슥...... 수림을 헤치며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 인(二人)은 금룡포를 입고 머리에는 찬란한 금관(金冠)을 쓰고 있었다. 오오....... 두 개의 거대한 산(山)이 걸어오는가......! 아늑하던 월하(月下)의 정취가 일시에 음산하게 얼어붙어 버렸다. 무황야....... "왔군......."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두 인물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두 인물의 얼굴이 자세히 드러났다. 사십대의 극히 이목구비가 뚜렷한 냉막한 인상의 두 중년인(中年人)--! 헌데. 기이하게도 그들의 얼굴에는 은색(銀色)의 수염이 치렁치렁 흘러 내려 있었다. 그것이 도저히 그들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했다. 한 뱃 속에서 태어난 형제인가....... 두 인물의 얼굴은 거의 판에 박은 듯 흡사했다. "......." "......." 스스슥...... 스슥...... 이윽고 그들은 무황야의 앞에 당도해 동시에 우뚝 멈추었다. 쌍동이였다. 다만 오른 쪽 인물이 이마에 섬뜩한 칼자국이 길게 나 있을 뿐......! 그들의 전신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그들에게는 뭔가 보는 이를 공포로 몰고 가는 무형의 힘이 서려 있었다. 무표정하게...... 두 금관인(金冠人)은 무황야를 바라보더니 삭막한 어조로 입을 열 었다. "대황(大皇)......!" "방금 천궁(天宮)에서 당도했습니다......." 털썩...... 쿠궁...... 아, 무릎 꿇었다. 이 거대한 산(山)같은 두 인물은 동시에 극히 공손한 자세로 무황야에게 부복했다. 무황야는 가볍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었다. 이대천왕(二大天王)......!" 오오...... 이대천왕(二大天王)! 바로 그들이었던가......! 북천수호령군이 죽어가면서 말했던 천궁의 무신(武神)들! 이대천왕은 각기 두 눈에서 형형한 광망을 번뜩이며 말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대황......!" "분부를 내리십시오......." 무황야는 순간 시선을 야천(夜天) 한가운데 던지며 심유한 어조로 분부했다. "두 인물의 목숨이다. 두 인물 모두 이 무황야의 친구자격이 있지......" 문득, 무황야는 신비로운 미소를 흘리더니 온유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그대들은 알 것이다. 나 무황야는 친구를 가질 수 없는 몸...... 내 친구가 될 수 있는 인물은 모두 죽어야 한다." "대황......!" 이마에 상흔이 있는 오른 쪽의 천황이 전율하리만큼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 두 인물이 누구입니까?" "하나는 백검우 현백검장의 주인이지. 또 하나는......." 무황야는 갑자기 두 눈에서 뇌전같은 신광을 폭사하며 말을 이었다. "영락황제가 황궁을 비운 지금 삼십오만 대명금군을 움직이고 있는 대장군 성후준이다." 오오....... 무황야가 어찌 꿈엔들 알겠는가? 그 두 인물이 실상은 하나라는 가공할 사실을......! 무황야는 밤하늘의 명월(明月)을 한 손을 들어 가리키며 단호한 분부를 내렸다. "내일 밤 저 달(月)이 다시 뜨기 전에 두 목을 가져오너라!" 순간. "존명(尊命)을 받들겠습니다. 대황......!" 오오...... 혼(魂)을 실은 이대천왕의 합성이 터져 울리고. 후우우웅......! 후웅......! 이대천왕의 신형은 두 줄기 형체없는 회오리로 변해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마극(魔極)...... 영유(永幽)...... 나는 그대들을 믿는다." "제기랄......! 하늘(天)이 왜 이리 누렇지......?" 광유왕 웅야. 그는 의사청을 나서다 문득 잿빛구름으로 덮인 하늘을 보며 털로 덮인 얼굴을 찌푸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궁...... 멀리서 아련히 진동음이 들려오고 발밑의 지면이 들썩거렸다. '음......?' 웅야가 흠칫하는 사이, 그 진동음은 굉렬한 말발굽 소리로 변해 장원 밖에서 울려왔다. 두두두두두! 쿠오오오.... 동시에. "아아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허공을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이게 웬 망할 징조냐......? 심상치 않다......!' 웅야는 정문(正門)으로 번쩍 빛살같이 몸을 날렸다. 허나 그가 채 정문에 도착하기도 전, 쿠다당! 정문(正門)을 울리며 네 인영(人影)이 비틀비틀 뛰어 들었다. "끄으윽......!" "으아...... 아......!" 그들은 모두가 핏물을 뒤집어 쓴 채 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현백검장의 경비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웅야를 보자 푹푹 쓰 러지며 부르짖었다. "부...... 주님......! 적, 적입니다......!" "끄르륵......!" 허나 웅야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야에 열려진 정문 사이로 멀리 수천 기(騎)의 기마대가 폭 풍처럼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 저......!' 두두두-- 두두두--! 두두두두--! "와핫핫핫......! 현백의 백검우는 나오라! 천궁의 마극천왕이 그 대를 영원히 잠재워 주리라--!" 기마대의 선두. 금관의 금룡포를 입은 마극천왕이 광소를 터뜨리며 쇄도해 들고 있었다. 기세--! 그것은 실로 너무도 엄청나 태산이라도 갈아 엎을 듯한 기세였다. 호천부주 우혁전. 그는 오늘 밤 현백검장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었다. 당연히 제일 먼저 마극천왕을 맞이하였다. "ㅋ......! 마극천왕인지 마극천졸인지 이곳이 어딘 줄 알고 망나니짓을 하느냐......." 그의 검은 말이 끝나기도 전 어느새 선두에 달려오는 마극천왕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허나. 그는 진정 까맣게 몰랐었다. 마극천왕이 누구라는 것을....... 번-- 쩍--! 우혁전의 검광이 마극천왕의 심장 부위에서 폭발하는 순간. '뭔가...... 잘못 되었다......!' 그것이 호천부주 우혁전이 느낀 생의 마지막 감정이었다. 퍼어엉! 우혁전의 가슴에서 폭발하는 듯한 파열음이 터지고 그의 육신은 처참하게 조각난 채 허공에 흩어졌다. 언제 어느새 마극천왕이 우혁전을 공격했는지 아무도 본 사람은 없다. 심지어 당하는 우혁전 본인마저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마극천왕이 이끄는 기마대. 그들은 폭풍처럼 현백검장을 부수기 시작했다. "크윽--!" "막아라--!" "크핫핫핫--! 한 놈도 살려두지 말아라--!" 처절한 비명성과 고함성이 현백검장의 밤을 완전히 깨뜨리고 있었다. 도천문을 비롯한 현백검장의 각부의 부주들은 안색이 대변했다. 동시에 그들의 신형은 아수라장이 연출되고 있는 곳으로 퉁겨지고 있었다. "크윽!" 신절수. 현백검장의 육대부주 중의 한 명인 그. 평소 그는 자신의 무공이 별로 뒤쳐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다. 허나 마극천왕을 상대하면서 자신의 무공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일장에 전신의 기혈이 역류하는 듯한 고통을 느낀 것이었다. "크핫핫핫......! 현백검장의 조무래기들...... 네놈들은 본 천왕 의 상대가 아니다. 백검우를 불러내어라!" 마극천왕은 우혁전을 제외한 오대부주를 공기돌 굴리듯 갖고 놀았다. '아아...!' 오대부주들은 절망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모조리 죽음을 면치 못한다....... 차라리 내가......' 종리군이 입술을 뭉턱 깨물며 신형을 마극천왕에게 날렸다. 초식도 없는 무모한 공격이었다. "ㅋ흣흣......! 죽고 싶은 놈에게는 죽여주는 것이 좋은 약이지......." 마극천왕의 살기어린 냉소와 함께. 퍼억! 그의 팔이 종리군의 복부를 꿰뚫고 등 뒤로 튀어 나왔다. "크...... 으......! 바보같은...... 뭣들 하고 있소...... 어서...... 놈을......" 종리군은 희미해져 가는 시선을 애써 바로 잡으며 마극천왕을 결 사적으로 끌어 안았다. "이...... 이런 지독한......!" 마극천왕의 당황성이 터지고, 그때를 놓치지 않은 나머지 도천문 등 사대부주의 눈빛에 살광이 폭사됐다. 동시에 도천문 등은 각기 자신들의 최대 절기를 극성으로 전개해 마극천왕의 사혈(死穴)을 가격했다. 꽈르르르릉! 천지개벽의 엄청난 진동이 일고 마극천왕의 주위는 가공할 경력이 사방 수십 장을 휘몰아쳤다. 아......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가? "끄응......!" 문득 경력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으며 답답한 신음성이 흘렀다. 이어, 피투성이가 된 도천문 등 네 명이 비틀거리며 신형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의 발 밑에는 처참한 육편(肉片) 조각으로 변한 종리군과 마 극천왕의 시신이 길게 누워 있었다. "......!" 도천문 등은 비감의 시선을 종리군에게 주었다.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의 생명을 기꺼이 내던진 종리군의 웃는 얼 굴이 눈 앞에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직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 웅야는 주먹으로 눈가를 훔치며 자신의 방천극을 꼬나 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살륙이 계속되고 있는 격전장으로 신형을 날렸다. "아악--!" "크아악!" 죽음의 연속이 계속되는 현백검장에도 달은 떠오르고 있었다. 총도병무어사부의 후원. 백검우는 달을 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헌데 어느 한순간이었다. 그의 동공은 문득 크게 확대되었다. 그의 시선은 떠오른 달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달(月)의 중앙. 서서히 하나의 인영이 확대되며 빠져 나오고 있었다. 금관을 머리게 쓰고 전신에 금빛 화려한 금룡포를 입은 중년인. 아......! 그는 바로 무황야가 수하 중 가장 믿고 있는 이대천왕 중 영유천왕이 아닌가? '대체 누군가......? 홀로 이곳까지 찾아들지 않았을 것이 다....... 나를 죽이려고 무황야가 보낸 고수......!' 백검우는 직감(直感)했다. 이 순간. 영유천왕은 허공을 걷듯 천천히 백검우의 앞으로 내려섰다. 그의 손에는 평범한 청강장검이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부딪혔다. "그대가 이번에 총도병무어사가 된 성후준이겠구료......." 영유천왕의 심유한 음성이 흐른 것은 광휘를 뿌리던 달이 구름 속 으로 몸을 가린 때였다. "그렇소......! 본좌가 성후준이오...... 그대는......?" "영유천왕......!" "본좌를 찾아온 목적은......?" "그대를 죽이기 위해......." 영유천왕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하게 말하며 불쑥 수 중의 검 한 자루를 백검우 앞으로 내밀었다. "똑같은 검......! 이것으로 성후준 그대의 목을 취하겠다." 일순, 백검우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맺혔다 빠르게 사라졌다. "영유천왕......! 그대는 필승의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료......." "자신이 아니다......! 반드시 너를 죽여야 한다...... 무황야 그 분을 위해......." "그렇구료...... 당신은 반드시 본좌를 죽여야만 하겠구료......." 백검우는 영유천왕이 건네주는 청강장검을 받으며 소리없이 하얗게 웃었다. 순간.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르겠다.......' 영유천왕은 불현듯 불길한 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이제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그는 처음으로 깊은 호흡을 내쉬었다. "......!" 두 사람은 서로 팔을 뻗으면 맞닿을 수 있는 거리를 두고 말없이 서 있었다. 허나, 이것은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욱 험난한 것임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단 일초(一招)에 생사(生死)가 결정난다는 것을. 어느 일순간, 파-- 앗--! 영유천왕의 검이 움직였다 싶은 순간, 두 사람의 주위에는 새파란 검광으로 가득 찼다. "크윽!" 영유천왕의 짤막한 비명이 터짐과 동시에 두 사람을 감쌌던 검광이 일시에 사라졌다. 이어, 두 사람의 모습이 월광 아래 확연히 드러났다. "너는... 왜...? 노부의 검을 맞지 않았어도 되었는데......." 영유천왕은 풀려가는 시선을 백검우에게 고정시켰다. 백검우의 어깨에는 뼈가 보일 정도의 적지 않은 검상이 나 있었고 영유천왕의 심장에는 자루만 남긴 채 백검우의 검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본좌는 바쁜 몸이다! 단 일초에 끝내고 싶었다!" "그런......!" 영유천왕은 전신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쿵... 영유천왕의 시체는 백검우의 발치에 길게 늘어졌다. 백검우는 어깨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지혈시켰다. "진정 힘겨운 상대였다......!" 그렇다. 그는 이대천왕의 위력을 실감치 않을 수 없었다. "영유천왕은...... 죽었다. 허나......." 왠지 불안하다. 이유모를 불안감이 전율처럼 등골을 파고 든다. 그 불안의 이유는 확실히 모른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악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으음......!" 그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이어 그는 바람같이 모습을 감추었다. 싸늘히 식어가는 영유천왕의 시신만이 먼지같이 뒹굴고 있었다. 강호천하(江湖天下)는 개천(開天) 이래로 최대의 긴장 속에 빠져 들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 무황야에 의해 악양의 현백검장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 사건이 강호천하에 던진 충격과 긴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다. 무황야가 아니면 그 어느 누가 현백검장의 기왓장 하나라도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천하인들은 무황야에 대해 새로운 공포와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한 것은 그날 현백검장엔 장주 백검우가 없었다는 사실이었 다. 천하인들은 그 사실을 두고 한편으로 의혹치 않을 수 없었다. 백검우는 어디에 있었기에 현백검장의 액변을 방관했단 말인가? 당연한 의문이었다. 허나 그것은 의문으로 남았고....... 천하인들은 숨죽이는 긴장 속에서 곧 불어닥칠 대폭풍을 기다렸다. 한 칸 밀실. 그곳에서부터 대폭풍의 조짐은 시작되었다. 백검우는 한 통의 밀서를 읽고 있었다. 헌데 무슨 일인가? 밀서를 펼쳐든 백검우의 손끝이 무서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 이 아닌가. "이럴 수가......?" <...... 막중 피해...... 두 명의 부주(府主)...... 등이 전 사...... 팔백(八百) 제자들이...... 피해...... (中略)......장 주님...... 대책을...... (하략)...... 도천문 읍서.> 아! 바로 악양 현백검장의 일을 알리는 도천문의 밀서가 아닌가! "무황야......! 드디어 칼을 뽑았구나......!" 백검우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영유천왕을 없애고 난 후 무섭게 엄습해 들던 이유모를 불안감을....... 콱! 백검우는 밀서를 움켜쥐었다. "나 백검우......! 이 순간을 기다렸다!" 파스스슷......! 밀서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무황야......! 시작은 지금부터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서 가공할 신광이 서리서리 뿜어졌다. "그대는 느끼게 될 것이다. 나 백검우의 위력이 얼마나 무섭고 가공한 것인가를......!" 휘이이잉...... 밀실 밖에선 바람이 불고 있었다. 화원(花園). 두 명의 인물이 화원에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바로 백검우와 충렬우장군 영호건이었다. 무슨 연유인지 영호건은 매우 상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 "금무왕 역모사건(逆謀事件)은...... 무림인(武林人)들이 그 열쇠 를 쥐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영호건. 그는 지금 그 일로 인해 흥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금(古今)을 통해 황궁(皇宮)과 무림(武林)은 결코 손바닥을 마주치지 않았다. 불간섭-- 그것은 불문률이었다. 헌데. 무림이 황궁의 일에 끼어들고 게다가 역천의 음모를 획책하고 있었다니......! 어찌 영호건이 흥분치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백검우. 그는 톡! 꽃송이 하나를 꺾어 들었다. "나는 결심했소." "......?" "이번 기회에...... 무림의 썩은 무리들은 뿌리째 뽑아 버리고 말 것이오." "......!" 영호건의 두 눈이 일순 불을 번쩍 뿜었다. "장군! 본인도 장군의 결심에 적극 찬동입니다." "고맙소!" 그들의 시선이 한데 뒤얽혔다. 영호건의 눈길은 백검우의 가슴을 태우고도 남을 만큼 뜨거웠다. "장군! 무슨 영이든 내려 주십시오. 본인은 분골쇄신...... 영을 따르겠습니다." "고...... 맙소......." 백검우는 영호건의 두 손을 뜨겁게 잡았다. 사실, 백검우와 영호건의 지위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허나, 백검우는 영호건을 대함에 있어 우정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호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그들은 다 같이 피가 더운 사내들이었다. 남아(男兒)였다. ...... 그들은 한동안 무엇인가를 숙의했다. 이어, 영호건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군! 영대로 내일 아침 출병하겠습니다." 백검우는 믿음어린 시선을 주며 품 속에서 밀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영호장군! 이것은 장군이 맡아야 할 문파(門派)들이오." "하하핫...... 이것이야말로 최명부이군요......." 영호건은 호방한 대소를 터뜨렸다. 백검우는 영호건과 작별하고 계속 화원을 거닐었다. 그때였다. 한 그림자가 유령같이 백검우의 전면에 솟구쳤다. 바로 철노야가 아닌가? "장주님......." 철노야는 백검우를 향해 깊숙한 예를 올렸다. "철노야...... 준비는 되었소?" 백검우는 철노야의 인사를 받으며 본론부터 꺼냈다. "준비는 완료되었습니다." "......!" "내일...... 형산 유운곡에 집결해 있는 두 아우 휘하의 팔백의 정예고수들이 일제히 움직일 것입니다." "......!" 백검우는 눈빛을 번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소. 철노야...... 그들을 이끌고 장강이남에 산재해 있는 무황야의 모든 수족을 잘라 버리시오." "......!" "뿌리 하나 남기지 마시오." "명을 받듭니다." 철노야는 떠났다. 그의 목표는 장강이남에 도사리고 있는 무황야의 손발들이었다. 똑! 백검우는 또 한 송이 꽃을 꺾어 들었다. 핏빛을 한 이름모를 꽃송이. "한 달...... 한 달 안에 무황야의 모든 손발을 잘라 버린다." 백검우는 수중의 꽃송이를 떨어 뜨렸다. "무황야...... 그대의 모든 영화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결정(決定). 이제 모든 결정은 내려졌다. 남은 것은 행동 뿐이었다. 밤은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아침. 태양이 떠오르며 황도(皇都) 금릉성은 발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금릉성의 삼대문(三大門). 황도 유사 이래 최초로 세 개의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두두두두...... 천지를 진동하는 엄청난 대행진이 그 막(幕)을 올렸다. 막(幕)! 그것은 활짝 열린 삼대문(三大門)을 통해 무려 이십만(二十萬)의 대군(大軍)이 쏟아진 것이다. 아! 바로 이십만 대명황군(大明皇軍)이 아닌가! 북문(北門). 금황색 바탕에 아홉 마리 천룡(天龍)이 수놓여진 영기가 떠오르는 햇살을 받고 눈부신 빛을 뿌린다. <구룡대천기(九龍大天旗).> 그렇다. 바로 경위지휘사사 총도병무어사 충의대장군 성후준, 아니 바로 백검우와 그의 휘하 칠만(七萬)의 황군이었다. 서문(西門)-- 금황색 바탕에 다섯 마리의 익룡(翼龍)이 여의주(如意珠)를 번쩍 이며 수놓여진 깃발이 높이 솟았다. <오룡중천기(五龍中天旗)!> 바로 충열우장군 영호건과 그의 휘하 칠만(七萬) 대군이었다. 동문(東門)-- 붉은 바탕에 비응하는 독수리 세 마리가 수놓인 깃발이 앞장서고 있었다. <삼응혈군기(三應血軍旗)!> 아! 바로 연무걸이 이끄는 육만(六萬)의 별기특전군, 그들이었다. 두두두둑...... 대군(大軍)! 새벽 일출(日出)과 더불어 삼대문(三大門)을 빠져 나가기 시작한 이십만 대군. 오후 늦어서야 마지막 군사의 모습이 삼대문을 빠져 나갔다. ....... 이곳은 형산의 유운곡-- 일출(日出).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한 떼의 인마(人馬)가 천기산장을 떠나고 있었다. 팔백(八百)의 인마, 선두에 철노야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철노야 휘하의 현백검장의 팔백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 바로 장강의 이남 전역이었다. 그리고, 일은 시작되고...... 바람, 바람은 소맷자락을 떨치며 불기 시작했다. 경악! 천하는 경악의 대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었다. 두두두둑...... 중원천하는 온통 이십만 필의 말(馬)이 일으키는 대진동으로 인해 천지개벽을 맞이한 것 같았다. 보이는 것은 눈부시게 펄럭이는 세 개의 깃발과 이십 만 대군이 번쩍이는 기치창검 뿐이었고, 들리는 것은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뿐이었다. 중원천하는 이십만 대군이 일으키는 격탕노도에 휩쓸려 들었다. 그리고...... 천지사방 곳곳에서 전서구들이 화살과 같이 날개가 부러지도록 날 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 곳으로 모여 들었다. ■ 일로제검 제3권 30장 가장 위대한 사나이 ━━━━━━━━━━━━━━━━━━━━━━━━━━━━━━━━━━━ 무황야는 이제 더 이상 여유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 그는 암울한 독백을 흘려냈다. 전면의 탁자, 속속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전서구들이 날아들고 있 었다. 그 급보의 내용을 살피던 무황야는 급기야 전신에 경련까지 일으키기 시작했다. "황군(皇軍)이 나의 수족들을 제거하고 있다니......." 날벼락! 그는 지금 고스란히 날벼락을 맞고 있는 셈이었다. 어찌 꿈엔들 황군이 개입하리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필유곡절이라......." 그의 눈빛이 급변을 일으켰다. "대장군 성후준이란 자가 이번 일의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성후준. 그의 이름이 무황야의 머리 속에 크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음...... 그 자가 남천수호령군을 없앴을 때...... 짐작해야 했었거늘......." 허나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성후준이 바로 백검우의 또 다른 변신임을. "으음......" 무황야는 생애 최초로 거대한 당혹 뿐인 난관에 봉착하고 있는 것 이었다. 그때 또다시 급보를 알리는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두두둑......! 중원천지를 울리는 말발굽소리. 벌써 보름째-- 번-- 쩍--! 이십만 대군의 기치창검이 빛을 뿌린다. 그 빛이 사라지는 순간, 하나의 시산혈해가 생기고 한 문파(門派)가 영원히 사라졌다. 오오! 피의 대폭풍이 죽음의 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보름-- 그 동안 이십만 황군에 의해 북육성(北六省)의 십개 문파가 초토화로 변해 버렸다.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인가? 중원천하는 온통 충격의 대혼란으로 들끓었다. 황궁이 무림의 일에 개입했다! 대체 무슨 연유인가? 또한 그들은 어째서 무황야의 세력만 이잡듯 골라 박살을 내 버린단 말인가? 그러나 충의대장군 성후준, 아니 백검우는 결코 천하에 대해 그 명확한 해명을 던지지 않았다. 다만 오늘도 이십만 대군은 움직이고...... 무황야의 손발은 점점 더 깊이 잘려나갈 뿐이었다. 여기, 피의 폭풍은 또 일고 있었다. 바로 남칠성에 산재해 있는 무황야의 비밀 세력들이 보름만에 추 풍낙엽같이 날아가 버린 것이었으니-- 철노야 휘하 팔백 고수들. 신출귀몰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오직 죽음 뿐인 살풍(殺風)을 일으켰다. 남칠성과 북육성. 솟구치는 단말마의 비명은 천공(天空)을 넘어 구천(九天)에 이르 고, 흐르는 피는 천공으로 피어올라 피구름을 만들었다. 시체는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수미천산에 닿는데....... 그 피비린내를 백 년을 두고 씻은들 씻길 수 있겠는가? 아아......! 아직도 죽음과 피의 폭풍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어찌 이곳을 하늘 아래 인계라 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유사 이래 최고의 대혈란이었다. 헌데,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또 한 차례 엄청난 충격의 벼락이 떨어졌다. - 드디어 무황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천궁(天宮) 이천의 귀신같은 고수들이 무황야와 함께 떠났다! 아아...! 무림세계의 절대자인 무황야. 팔십만(八十萬) 황군의 절대자인 백검우. 하늘(天)과 하늘(天)! 이제 그 두 개의 무서운 하늘이 일으킨 폭풍이 서서히 대격돌의 일보(一步)를 내딛기 시작한 것이었다. 천하는 숨을 죽였다. 과연......? 바람(風). 그것이 가는 방향은 누구도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람이기 때문에...... 허나 당금 무림천하에 불어닥친 대폭풍은 점차 그 기세를 더해 어 느 한 곳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이곳은 유유하(柔幽河). 강변 양쪽으로 펼쳐진 거대한 백사장(白沙場)으로 천하의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다. 허나 오늘 이곳에는 전혀 새로운 엄청난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오오.... 도산검해(刀山劍海)! 유유하의 양쪽 강변을 꽉 메우며 도열하여 있는 전포를 착용한 수 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린 각종 병장기에서 폭출되는 예기는 유유 하의 격랑마저 잠재우고 있었다. 백검우가 이끄는 칠만의 금군. 그리고 무황야가 이끄는 천궁의 이천여 정예고수들이 유유하를 사 이에 두고 서로 대치한 것이었다. 황제의 옥인이 수 놓아진 금빛 구룡대천기. 유유하의 강바람을 받아 펄럭이고 있었다. 한 명의 갑주를 입은 무관이 투구의 수실을 펄럭이며 구룡대천기 가 나부끼는 군막 안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다름아닌 백검우 그가 있는 군막이 아니겠는가? 군막 안으로 급한 발걸음을 들이밀고 있는 무관은 바로 연무걸이 었다. "장군님 속하 연부장이옵니다!" 그는 백검우 앞에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 백검우는 들여다 보고 있던 한 폭의 지형도에서 눈을 들어 연무걸 을 쳐다보았다. 연무걸은 허리를 펴며 품 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백검우에게 받들 어 올렸다. "으음......? 이것은......!" 서찰을 건네 받는 백검우의 검미가 크게 꿈틀거렸다. "장군님...... 그것은 천궁 측에서 장군님께서 친히 읽어 보시라 는 전갈과 함께 보내져 온 것입니다." 연무걸은 편지의 내용이 궁금하다는 듯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백검우는 서찰의 겉봉에 쓰여진 글에서 잠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친전(親殿), 천하유일우(天下唯一友) 백공(白公) 좌하(坐下) 서(書) 무황야(武皇爺)> 보낸 사람은 바로 무황야였다. '천아유일우(天下唯一友)라...... 역시 무황야......!' 백검우는 천천히 무황야가 보낸 서찰을 개봉하였다. <백공...... 늙은 친구와 오랜만에 선상(船上)에서 회포를 푸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기다리고 있겠네...... 헛헛 헛...... 노부가 아끼는 설양담로주(雪陽淡露酒)는 천하 일품의 맛을 자랑한다네.......> 서찰의 내용은 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백검우는 서찰을 접어 넣으며 빙긋 신비한 미소를 머금었다. "무황야......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어......." "장군님...... 무슨 말씀이온지......." 연무걸이 백검우의 중얼거림을 듣고 의아한 기색으로 말했다. 허나. "......!" 백검우는 연무걸의 말을 못들은 듯 잠시 눈을 감고 상념에 빠졌다. 문득 백검우는 형형한 신광을 빛내며 연무걸을 돌아다 보며 입을 열었다. "연부장...... 지금 강물에 배가 떠 있느냐?" "예......! 서찰이 보내져 온 직후 한 척의 배가 강중앙에 떠 있습니다......!" "연부장......! 오랜만에 술 한 잔 해야 될 것 같다...... 조그마한 배를 한 척 준비하라......!" "술......? 배......?" 연무걸은 어리둥절하여 백검우를 바라보았다. 허나. "지금 즉시 준비를 하도록 하라!" 백검우는 연무걸을 아랑곳하지 않고 군막을 나섰다. 연무걸은 아직도 아리송한 시선을 백검우가 나간 자리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대면(對面). 그것은 기억해 둘 만한 두번째의 만남이었다. 사방이 확 트인 선상의 갑판. 두 사람은 향긋한 주향을 음미하는 듯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 채 좌정해 있었다. 만약 그들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틀림없 이 이렇게 말했으리라. - 정말...... 신선놀음이야......! 그러했다. 지금 이 순간의 두 사람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지극히 화평스러운 것이었으니....... 필생의 숙적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지 못할 그런 것이었다. 포르르릉... 무황야는 신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백검우 앞에 놓인 잔에 설양담 로주를 가득 채웠다. "허허허...... 백공......! 미인이 따르지 않은 술잔이라도 그 독특한 맛은 있다네......." "핫하하...... 어찌 감히 불초가 싫어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하에 서 무황야께서 친히 따르신 술잔을 받아 본 사람은 천하유일우인 불초 뿐일 것입니다." 챙! 두 사람은 흔쾌히 앞에 놓인 술을 들이켰다. 화기로운 분위기. 허나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허허헛...... 백공! 그대는 진정 훌륭한 연극을 했어......." 연극......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무황야는 백검우에게 훌륭한 연극을 하였다고 했다. "만족하셨는지요?" "핫핫핫...... 대 만족이었네...... 노부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연극이었네!" "불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백검우와 성후준...... 멋진 안배와 기교였네......." 포르릉... 무황야는 백검우의 잔에 또 다시 술을 가득 채웠다. "그대는 내가 공들여 세운 탑들을 모두 허물어 뜨렸어....... 그 대의 연극에 흠뻑 취해 있는 동안에......." "......" 포릉...! 백검우는 말없이 무황야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일순 두 사람의 시선이 은연중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 연극은 간단한 극본이었습니다....... 무황야께서 장악하시고 자 하셨던 황군(皇軍)의 병권을 불초가 먼저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백검우는 담담하게 무황야의 깊고 현유한 눈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헛허...... 그랬었지......." 담담하던 무황야의 눈빛이 가볍에 자조의 빛을 띄우며 흔들렸다. 이어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술잔을 소리나게 비웠다. "이제 결정 내려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소이다......." 문득 백검우의 말투가 변했다. 그러자 무황야의 태도 역시 일변하였다. 만인을 압도하는 무형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이라...." "무황야, 당신이 이곳에 본인을 불러낸 이유는...... 피차간에 좋 은 해결방법이 있기 때문인 줄로 알고 있소이다." 엄숙하게 말하는 백검우의 전신에서도 무황야에 못지 않는 엄청난 기도가 무섭게 피어올랐다. "흠! 문득 그대가 두려워지는군....... 그대의 부친인 백장청을 대할 때보다 더욱......." "과찬이오. 선친께서는 늘 무황야 당신을 영웅(英雄)이란 말을 들 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하셨소." "고마운 말이군......." 무황야는 씁쓸하게 미소했다. 어딘가 어두운 암영(暗影)이 그의 미간 사이에 슬며시 자리하고 있었다. "노부는 기억하네......." 그는 옛일을 회상하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그대는 말했었지...... 본 대황이 먼저 그대에게 도전하게 될 것이라고......." "......." 일순 백검우의 짙은 검미에 잔경련이 물결치듯 일었다. 그리고, 무황야 역시 심중의 격동을 추스리질 못한다는 듯 전신에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본 대황, 성후준이 아닌 백장청의 아들인 그대 백검우에게 정식으로 도전하겠네......." - 백검우......! 그대에게 정식으로 도전하겠네......! 순간 백검우는 코 끝이 시큰하는 격한 감동을 맛보았다. '대황의 이 말을 듣기 위해...... 바로 이 말을 듣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걸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높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너무도 맑고 깨끗한 하늘...... 진정 마음에 드는 하늘이야.......' 그는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백검우는 타는 듯 이글거리는 시선을 무황야에게 주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대황의 도전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바이오." - 대황의 도전을 받아들인다! 결정! 당금천하 두 거목(巨木)이 내린 결정. 건곤일척(乾坤一擲)으로 천하의 운명을 가늠짓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백공, 장소는 어디로 하겠나?" "이곳 복우산 최고봉인 태일봉(泰日峰)에서 보름 후에 당신을 맞이하겠소." "그럼 그날을 기다리겠네. 백공 부디 좋은 꿈을 꾸게나......." 무황야는 천천히 돌아섰다. "무황야...... 당신도 남은 시일을 가장 보람있게 보내시길......." 그리고 두 사람은 각기 자신들의 진영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들이 내린 결정(決定)! 보름 후의 결전을 위하여....... 풍운만변의 무림세계-- 이 중원천하에 돌연 뜻하지 않은 평온이 찾아들었다. 대장군 성후준과 이십만 금군이 황궁으로 들어가고, 동시에 무황 야도 이천 정예를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아무도 예측치 못했던 이 움직임! 그 이유는 천하에서 단 두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무림천하에 한 가지 소식이 전해졌다. 헌데. 그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무림은 온통 걷잡을 수 없는 격동의 회 오리에 휘말려 버렸으니....... 천하인들은 흥분과 격동 속에서 부르짖었다. - 오...... 오......! - 무황야! 그가 드디어 백공에게 도전했다! - 백공의 예언은 적중했다! 아!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정 엄청난 일이 아닌가? 허나 소문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보름 후, 복우산(伏牛山) 태일봉(泰日峰)에서 백공과 무황야가 최후의 결전(決戰)을 벌일 것이다.> 무림은 삽시간에 무서운 긴장에 빠져들었다. 과연 백검우 그는 중원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무황야 그가 영원히 무림을 지킬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무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은 무심히 다가오고 있었다. 밤이었다. 야천에는 총총한 별무리가 무리지어 흐르고...... 싸늘한 밤의 대기가 현백검장을 감싸며 흐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달을 보고 우짖는 듯한 고독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밤공기 속에 흩어지고 있었다. 헌데 이 시간. 백검우는 자신의 거처인 태화거에서 한 명의 아름다운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방문객은 바로 선하련이었다. "......" "......" 백검우와 선하련은 뜨거운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허나 찻물은 저 혼자 속절없이 식어가고 있었다. 마치 흐르는 시간을 몸부림쳐 아쉬워하듯......! 두 남녀의 시선은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돌려진 적이 없이 서로 의 시선만을 응시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문득 백검우는 싱긋 담담한 미소를 피워올렸다. "많이 아름다워졌구나. 하련......!" "피이......!" 선하련이 앵도같이 붉고 투명한 입술을 귀엽게 삐죽였다. 허나 그녀의 봉목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의 빛이 스쳤다. 헌데. 그런 그녀를 그윽이 응시하는 백검우의 두 눈에 언뜻 의아로운 빛이 스치고 있었다. "하련! 얼굴에 수심이 어려 있군. 무슨 일이......?" 선하련. 그녀의 옥용에 평소 그녀답지 않은 그늘이 어려 있는 것이었다. 문득. 그녀는 백검우의 말에 커다란 두 눈에 가득히 눈물을 글썽 피어올렸다. "오빠......!" 백검우는 당장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것인지를 눈치챘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선하련의 말을 막았다. "하련! 염려마라. 이 오빠는 죽지 않아." 이 말에 선하련은 물기어린 눈빛을 보이며 떨리는 옥음을 흘려냈다. "하지만 두려워! 오빠는 꼭 무황야란 사람을 이겨야 해......?" 그녀는 다짐하듯 백검우를 빤히 응시했다. "......" 백검우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아무도....... 백검우 그 자신도, 무황야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선하련은 일순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사실...... 이 하련은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오빠의 승리를 빌고 싶어......!" 웬가? 그녀의 어조는 비장한 느낌이었다. "응......?" 백검우는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선하련은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하련이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오빠에게 주고 싶어......!" 다음 순간. 그녀는 자리에서 발딱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백검우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빠르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르륵...... 사르륵...... 백검우는 일순 아연 경악의 빛을 떠올렸다. "하...... 하련......!"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허나, 그는 할 말을 목구멍 안으로 꿀꺽 삼켜 버렸다. 옷을 벗고 있는 선하련.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차 라리 엄숙하고 경건하기조차 하지 않은가? 지금...... 그녀는 그녀 생애 최고의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정인을 위하여 마치 기도(棋禱)하는 심정으로 옷을 벗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백검우가 이 순간 그녀에게 어떤 제재를 가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녀의 평생에 잊지 못할 모욕이 되리라. "......" 이윽고, 눈부신 선하련의 청백지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칠 듯 팽팽한 가슴, 잘룩한 세류요의 허리...... 매끄러운 아랫 배와 그 아래의 은밀한 비경(秘境), 일순 선하련의 손놀림이 현저 하게 느려지며 파르르 떨림을 일으켰다. 마지막 속옷, 비록 손바 닥만큼 작은 것이나 그것을 마저 벗기엔 너무도 힘이 들었다. 허나. '칫......! 바보......! 더 이상 망설일 게 있어? 여기까지 오기 전에 이미 망설이는 것은 끝냈잖아!' 툭......! 선하련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마지막 속옷을 벗어 버렸다. 아아! 완벽하다. '음......!' 백검우-- 그는 비록 여인의 나신을 처음 대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내심 터져나오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아름답다......!' 동시에, 그는 단전으로부터 거대한 열류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오빠......!" 그 순간 선하련이 놀란 토끼처럼 그의 품 속으로 뛰어 들었다. "하련!" 백검우는 힘있게 그녀를 안았다. 매끄러운 맨살의 감촉이 싱그럽게 팔 가득히 전해졌다. "오빠...... 오빠......!" 선하련은 신음처럼 그 말만을 되뇌이고 있었다. 어느새, 젊은 두 육체......!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무엇에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열풍(熱風)! 실내에는 뜨거운 열락이 일고 있었다. "아아...... 아아......!" "......" 선하련의 팔은 백검우의 목을 경련 속에 휘감고 있었다. 고통과 열락의 신음성......! 두 젊은 육신은 하나가 되어 거친 파도를 헤쳐나갔다. 더없이 뜨겁고...... 격렬하게! "아아...... 오, 오빠......!" 선하련, 그녀는 소중히 간직해 온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백검우에게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새롭게 하나의 성숙한 여인(女人)으로 변해갔다. 밤(夜)! 뜨거운 밤이었다. 대강남북 중원무림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 속에 잠겼다. 무림 삼천 년 사상 가장 무림인들을 사로잡았던 대영웅 무황야! 그리고 그 이상의 사랑과 경외를 한 몸에 받으며 가히 하늘을 놀 라게 할 정도로 성장해온 백검우....... 오오...... 이 거대한 두 영웅이 복우산(伏牛山) 태일봉(泰日峰)에서 대결하 는 시일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무황야는 중원백대문파(中原百大門派)와, 유수문파 에 한 장의 시문(詩文)을 내렸다. 시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나 무황야는 중원의 아름다움이 좋소. 그 넓음(廣)이 좋소. 나 무황야는 이미 세외무림(塞外武林)인 천축, 대막, 묘강, 북해를 합통한 지 오래요. 허나 사랑하는 여인(女人)에게는 정작 함부로 접근할 수 없듯, 나 는 중원(中原)을 함부로 다룰 수 없었고 완전히 손에 넣지도 못했소. 허나 이제 그날이 다가오고 있소. 나는 기쁘오. 정녕 기쁘오. 대황(大皇)을 아시오? 천궁은 나 무황야가 진정한 천지합통, 천하제일인이 되면 대황이 란 이름을 선사한다 했소. 설령, 본 무황야가 패한다 하더라고 대황은 탄생할 것이오. 오오...... 백검우는 나의 친구. 내가 그를 죽이면 그는 완전한 중원을 내게 선사할 것이고, 그가 나를 죽이면 나는 천궁의 모든 것과 세외사대무림을 그에게 선사 할 것이오. 오오...... 어찌 기쁘지 않겠소? 대황...... 그리고 천하무림을 위해......> "와......!" "와와......!" 무황야의 이 포고문은 대강남북 중원무림을 또 한 차례 감동의 물 결로 몰아 넣었다. "과연 무황야다......!" "무황야...... 무황야......!" 그리고 거의 모두가 무황야의 승리를 믿었다. 그만큼 천궁과 무황야의 거대한 신비는 수백 년 동안 뼈속 깊이 중원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시간이 흘러 운명(運命)의 날은 밝아졌다. 복우산(伏牛山) 태일봉-- 이미 태일봉 주위와 심산계곡에는 수일 전부터 몰려든 군웅들로 엄청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바위(岩) 위에도...... 나무(木) 위에도 태일봉 주위에는 온통 이 대결전을 보러 온 인물들로 덮여 있었다. "와......!" "와와......!" 그 숫자는 무려 백오십여 만, 중원인(中原人), 천축인(天竺人), 묘강인 등등...... 그 광대한 인파의 물결은 그야말로 대해(大海)를 연상케 했다. 정녕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태일봉 정상(頂上)-- 중앙에 암반으로 된 드넓은 공지(空地)가 있고 둘레에는 오파일방 지존을 비롯한 천하 각파의 지존(至尊)들이 긴장한 신색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그 중에는 물론 천축(天竺)이나 대막(大漠)의 문파에서 온 지존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태양(太陽)을 격동한 신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이 막 천공(天空)의 한가운데 걸렸을 때였다. 돌연 태일봉 밑에서 천지가 떠나갈 듯 굉렬한 함성이 터져 울리기 시작했다. "와! 무황야다......!" "무황야...... 무황야...... 무황야......!" 아...... 무황야! 그가 오십여 선녀(仙女)같은 소녀들의 비파(琵琶)와 피리소리에 휩싸여 정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띠디딩...... 띠딩......! 그외 그는 수하들을 단 한 명도 거느리고 오지 않았다. 과연 무황야다운 행동이 아닌가! 그의 얼굴은 맑은 미소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좋은 날씨야......!" "와와......!" 군웅들이 열광하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반대쪽 태일봉 밑에서 경천동지할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백공(白公)이다!" "와! 백공...... 백공...... 중원혼(中原魂) 만세......!" 아, 백검우-- 그가 웅비, 도천문, 웅야 등의 호위를 받으며 검영과 나란히 올라 오고 있었다. 백검우의 준수한 신태는 태양의 양광(陽光)을 받아 실로 눈부시게 빛났다. 단아한 머리결과 눈이 시리도록 흰 백의(白衣)가 바람에 나부끼 고, 빙결처럼 수려한 용안(龍顔), 딱 균형잡혀 하나의 산(山)처럼 거대하게 느껴지는 체구, 정녕 인간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용모였다. "와와......!" "와......!" 군웅들은 백검우의 그러한 모습을 대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이한 감동과 설레임을 보았다. 누가 말했던가. 영웅은 단순한 걸음걸이만으로도 보는 이를 사로 잡는다고....... 대면(對面)! 백검우와 그리고 무황야는 드디어 태일봉 정상에서 다시 대면했다. 태일봉 주위는 일시에 터질 듯한 긴장으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 "......" 무황야-- 그리고 백검우는 한참동안 서로를 깊숙이 응시했다. '무황야...... 나도 어느덧 아버님 이상으로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 같소!' '백검우...... 대체 이 젊은 친구는 어떤 무공을 연공했는 가......? 볼 때마다 그 기도가 놀라우리만큼 달라지니.......' 두 사람은 이 순간 똑같이 상대에게 형용할 수 없는 애착을 느꼈다. 허나 두 사람은 모두 그 말들을 입밖에 흘려내지는 않았다. 슥! 문득 백검우는 수중의 고검(古劍)을 치켜들며 무황야에게 신비로 운 미소를 보냈다. "무황야...... 이 고검이 기억나시오?" "오...... 바로 내가 백장청에게 선사했던 검이군......." "그렇소. 당년 당신께서 내 아버님의 심장에 쑤셔박았던 검이 오....... 나는 이 검으로 당신을 죽이겠소." "......!" "그것도 단 일식(一式)에...... 무황야께선 내가 돌려드리는 선물 을 기꺼이 받아 주시오." 백검우의 전신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무황야는 두 눈에 기이한 광채를 깊숙이 흘려냈다. "단 일식(一式)이라......." 심유한 독백! 그렇다. 일식지도(一式之道)! 입신(入神)에 다다른 무공을 지닌 신인들은 결코 수백 초를 다투지 않는다. 지극한 정성과 혼(魂)을 실어....... 오오...... 혼신의 영력(靈力)을 다한 일식으로 운명의 갈림길은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천궁최절의 무학인 구류정허제천강기(九流精虛制天 氣)를 이 손으로 시전하겠네. 이것은 당년 그대의 부친 백장청도 구경하지 못한 것이네." 무황야는 환하게 미소하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천하에서 오직 자네만이 이 절륜한 구류정허제천강기를 볼 자격이 있네!" 백검우는 깊숙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리고 그는 수중의 고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오오...... 양광(陽光)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검신! 침묵. 이제 두 사람에게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태일봉 주위는 이 순간 숨이 막힐 듯한 긴장으로 거친 숨결만이 유풍(幽風)마냥 헐떡거렸다. 이때였다. 후류류륭! 후웅웅웅웅... 무황야의 얼굴에 갑자기 은은한 자광(紫光)이 서리기 시작함과 동 시에 전신에서 가공할 묵강살류(墨 殺流)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엄청난 기세로 불어나 태일봉을 뒤덮더니 전율의 기세로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오오--! "오오......!" "저럴 수가......!" 군웅들은 넋을 잃었다. 백검우는 어느새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고 전신의 의 복이 찢겨 날아가고 있었다. 허나 그는 추호도 흔들림 없이 수중 의 고검을 무겁게 들어 하늘을 받쳤다. 순간. 꾸우우우웅! 그의 고검에서 번개줄기인 양 창백한 검강(劍 )이 천공으로 뻗어 올랐다. 오오...... 찬란하게 빛나는 백검우의 신검합일기(身劍合一氣)! '환...... 밀...... 개...... 원...... 뇌허유성(雷虛流星)...... 불폭!' 짧은 순간 백검우의 뇌리에 당년 부친이 죽어가던 모습, 검영의 얼굴, 아란대라마의 모습 등이 영상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환밀개원천불공(幻密開元天佛功)과 뇌허유성 결(雷虛流星訣)의 구결이 암송된 직후, "비(飛)-- 천(天)!" 그의 입에서 낭랑한 대갈성이 혼(魂)을 태우듯 울려 터졌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찬란한 광휘를 무지개처럼 뿜어내며 무황야에게 날아올랐다. 무황야는 순간 두 눈에 하늘(天)을 쪼갤 듯 무시무시한 광망을 쭉 발산하더니 역시 백검우를 향해 허공으로 비승했다. "태(太)-- 유(幽)-- 멸천폭(滅天爆)!" 오오...... 그 장엄함을 어찌 형용할 것인가? 두 가공할 빛의 덩어리는 허공 위 삼십 장에서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번-- 쩍--! 오오...... 천지(天地)가 일시에 폭발하는가. 군웅들은 눈이 멀 것 같은 광채에 일시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눈을 감았다. 거의 동시. 꽈과과과-- 과과광--! 세상의 종말(終末)을 고하는 듯한 굉음이 허공을 갈기갈기 찢었다. "아아......!" "오...... 하늘이시여......!" 군웅들이 모두 넋을 잃고 다시 비무대를 바라보는 순간. "우아아아아악......!" 구천지문(九泉之門)을 두드리는 처절한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오오...... 백검우인가...... 아니면 무황야인가? 무서운 전율과 긴장의 순간이 억겁(億劫)처럼 흘렀다. 고오오오...... 허공의 빛덩어리가 일시에 사라지며 회오리 바람과 함께 한 개의 물체가 떨어져 내렸다. 쿠...... 웅......! 오오...... 무황야--! 그것은 무황야의 몸뚱이였다. 그의 심장 부위에는 정확히 고검이 관통한 채 등 뒤로 빠져나와 있었다. 실로 끔찍한 모습......! "끄으윽......!" 무황야는 꿈틀거리며 무서운 정신력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온통 불신(不信)과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허나 그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된 순간, 그의 얼굴에서는 그 모든 표정이 사라지고 대신 허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네...... 눈부시군!" 아...... 백검우! 어느새 백검우는 그의 앞에 우뚝 멈추어 있었다. 백검우는 약간 창백한 안색이었으나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신과 나는 무공이 비슷했소. 다만 하늘(天)이 나를 택했소......!" "아아......!" 쿠...... 웅......! 무황야는 다시 썩은 고목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허나, 그 순간 이미 그의 얼굴에서는 고통의 빛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는 사지를 경련하며 백검우를 손짓했다. "자네...... 이리 다가오게......!" "......!" "내 품 속에...... 끄으윽...... 천궁의 영부가 있네...... 천...... 천궁을 자네에게...... 아니, 천하(天下)를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시뻘건 피가 무황야의 입과 심장에서 스물스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백검우는 무황야에게 다가가 깊은 눈길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무황야......." "고통스럽군...." 짙은 죽음(死)의 그림자가 무섭게 그의 얼굴에 드리워지기 시작했 다. 그때 문득 무황야의 얼굴이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준수한 중년인의 모습이 사라지며 삽시간에 보기 흉한 주름살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어서...... 내 심장에 박힌...... 검을 빼주게. 내 심장이...... 쉬고...... 싶은 모양일세......." "무황야......!" "그리고...... 대황...... 내 얼굴을...... 보이지 않게 덮 어...... 주게......저들에게...... 내 늙은 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무황야......!" 백검우의 음성은 격하게 떨려나왔다. 아, 눈물(淚)인가? 그의 두 눈에 한순간 반짝이는 것은....... 백검우는 무황야의 심장에 박힌 검자루를 잡았다. '잘 가시오...... 무황야......!' 검이 빠진 순간 무황야의 심장에서 분수처럼 핏물이 뿜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