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絶 對 神 龍 >>>>> ============ <> 지은이 / 임이모 < 絶對神龍 第 1 卷 > 序 章 第 1 章 천고(千古)의 기촌(奇寸) 第 2 章 기재(奇才)의 천성(天性) 第 3 章 무공초연(武功初演) 第 4 章 피를 부르는 금갑(金匣) 第 5 章 한천빙룡(寒泉氷龍) 第 6 章 섭혼채양술(攝魂採陽術) 第 7 章 무림제일궁(武林第一宮) 第 8 章 최혼극음산(催魂極淫散) 第 9 章 마두(魔頭)들의 간계(奸計) 第 10 章 백치미인(白痴美人) ====================================================== 序 章 ====================================================== 가을. 저녁의 황도광(黃道光)이 사라지고 나면 수많은 별들이 저마다 빛 을 발한다. 그 중에서도 황도(黃道)를 따라 특히 찬연(燦然)한 빛을 발하는 열두 개의 성좌(星座)가 있다. 백양(白羊), 금우(金牛), 쌍녀(雙女), 거해(巨蟹), 사자(獅子), 실녀(室女), 천칭(天秤), 천헐(天歇), 인마(人馬), 마갈(摩僿), 보병(寶甁), 쌍어(雙魚)가 그것이다. 이 열두 개의 성좌는 동서(東西)로 긴 대(帶)를 형성하고 있다. 어느 해던가? 돌연 열두 성좌의 한 중앙에 무섭도록 이글거리는 하나의 검붉은 별이 나타났다. 이 별은 마치 열두 성좌를 양쪽에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위엄이 당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보는 이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공포(恐怖)감을 풍겨 주고 있었다. 중원(中原) 대륙이 술렁거렸다. 모두들 천지(天地)의 종말(終末)이 왔다고 아우성이었다. 특히 무림인(武林人)들은 천하를 돌면서 제자를 구하기에 혈안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갑자기 나타난 검붉은 별이 무엇을 뜻하기에 세상이 이토 록 술렁거린단 말인가? 마황성(魔皇星)! 사람들은 그 별을 마황성이라 불렀다. 강호(江湖)에는 언제부턴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전설(傳說) 이 있었다. 마황성이 나타나면 그 정기(精氣)를 받은 대마황(大魔皇)이 태어 난다는, 그 마황은 태어날 때부터 간교(奸巧) 포악(暴惡)하여 부 처님마저도 구제할 수 없는 자라고 했다. 그는 천극마혈맥(天極魔穴脈)이라 부르는 무공(武功)을 익히기에 는 천고(千古)에 둘도 없는 특이한 체질을 타고난다 하였다. 그런데 천극마혈맥을 가진 자는 무공을 익힌 지 십 년 안에 금강 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을 이루고, 이 때부터는 지옥의 아수라파 천황(阿修羅破天皇)을 능가하는 대마황이 되어서 천하의 혈겁을 조장한다 하였다. 마황성이 나타나면 그 좌우에 늘어선 열두 성좌에서도 각기 정기 를 받은 기재(奇才)를 배출한다고 했다. 그 기재들 또한 남자는 태양신맥(太陽神脈), 여자는 태음신맥(太 陰神脈)이라는 무림인들이 꿈에서도 바라는 절세(絶世)의 체질을 타고난다 하였다. 태양신맥과 태음신맥은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영원 히 임독양맥(任督兩脈)이 막히지 않아, 만약 무공을 익힌다면 자 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금강불괴지신을 이룰 수 있는 체질이었 다. 사정이 이러하니, 자기 파(派)와 문(門)이 천하제일(天下第一)의 방파(幇派)가 되기를 바라는 무림인들이 어찌 그 기재를 찾아 나 서지 않겠는가? 무림이 술렁이는 가운데 몇 년이 흘렀다. 언제부터인가 마황성 옆에 하나의 조그만 별이 나타났다. 그 별은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더니, 급기야는 마황성과 그 광도 (光度)를 겨루기에까지 이르렀다. 그것을 본 강호인들은 이제는 술렁이는 정도가 아니라, 미치광이 처럼 날뛰는 자도 있었다. 혹자는 그 별이 필히 마황성을 능가하는 대마황을 배출한다고 했 다. 그러나 몇몇 무림인들은 그 별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저마 다 은거지(隱居地)를 떠나서 은밀히 강호를 돌아다니기 시작하였 다. ====================================================== 第 1 章 천고(千古)의 기촌(奇寸) ====================================================== 은세계(銀世界). 천지(天地)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퉁기면 쨍! 하고 깨질 듯한 벽옥(碧玉)보다도 투명하 고 파아란 하늘에서는 찬란한 태양이 빛을 바라고 있었고, 그 빛 을 받고 있는 대지(大地)의 은세계는 한 폭의 황홀경(慌惚境)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렇게 세외선경(世外仙境)인 듯한 얕으막한 야산(野山)의 오솔길 에 십이 세쯤 되어 보이는 소동(小童)이 나타났다. 그는 무언가 즐거운 일이 있는 듯 깡충깡충 뛰면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백아(白兒)! 너도 오랜만에 집에 가니까, 매우 즐거운 모양이구 나." 낑… 끼잉……! 소동의 발아래는 조그맣고 하얀 동물이 촐랑촐랑 따라가고 있었는 데, 얼핏 보기에도 작은 것이 어른의 큰 주먹 정도 크기였다. 생김새는 작은 체구로 보아서는 고양이 같았지만, 왠지 호랑이 새 끼같이 이목구비가 선명하기도 했다. 소동은 백아라는 동물이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번쩍 안아 들더니 볼을 마구 부벼 댔다. 백아도 그러한 그의 얼굴을 부드러운 혀로 핥아 주었다. "헤헤… 간지러워." 소동이 백아를 얼른 땅에다 내려놓자, 백아는 그의 바지 가랑이를 물고 늘어졌다. 소동은 눈 위에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헤헤……!" 낑… 끼잉……! 소동과 백아는 한참을 눈 위에 뒹굴면서 장난을 쳤다. 그런데 이 조그만 동물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비록 어리다지만 사 람을 넘어뜨릴 만큼 힘이 세단 말인가? 백아의 몸은 잡털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 신 하얀 털로 덮여 있었고, 눈만은 취옥(翠玉)보다도 푸른 광채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벽안백표(碧眼白彪)였다. 벽안백표는 아랍목도(阿拉木圖)의 만년설 산에서만 몇백 년 만에 한 마리씩 태어난다는 희귀한 동물로, 백호(白虎)와 백묘(白描) 사이에서 천지의 조화로 태어나는 영물(靈物)이었다. 이 벽안백표는 만수지왕(萬獸之王)이라는 대호(大虎)도 순식간에 갈가리 찢어 버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지만, 한 번 섬기기로 작정한 주인에게는 목숨을 받쳐 가면서까지 충성심을 보인다고 했 다. 소동과 백아는 한참을 장난하다가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동은 무공 따위는 전혀 익힌 것 같지가 않았는데, 발걸음은 어 느 일류고수보다도 가볍고 상쾌했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소동은 앞에 늙수그레한 인영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급히 그에게로 달려갔다. "할아범! 추운데 왜 밖에 나와 있지?" "도련님, 노복은 날마다 도련님이 오시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 답니다." 노복의 눈에는 마치 오랫만에 헤어졌다가 만난 아들을 보는 것처 럼 정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할아범, 고마워. 자, 빨리 집에 가." "예, 주인님과 마님께서도 도련님이 오늘쯤은 오실 거라고 기다리 고 계십니다." 소동은 노복의 손을 잡더니 경쾌한 걸음으로 산모퉁이를 돌아갔 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은 주복 관계가 아니라 마치 할아버지와 손자 처럼 정겨운 느낌을 주었다. 그들이 산모퉁이를 돌자 한 채의 크지는 않지만 운치 있게 지어진 장원(莊園)이 나타났다. <소운장(素雲莊)> 장문(莊門)의 편액에는 용비봉무(龍飛鳳舞)한 전자체(箋字體)로 소운장이란 장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곳이 바로 당대(當代) 제일의 석학(碩學)인 소운선생(素雲先 生)의 거소(居所)이다. 소운선생 학진숭( 珍崇)은 중원 대륙에 그 학식과 덕망이 널리 알려졌지만, 어쩐 일인지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이 곳 소운장에 서 학문만 연구하고 있었다. 소동과 노복은 장문을 들어서서 장원의 제일 커다란 전각(殿閣)으 로 발을 옮겼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가 돌아왔습니다." "기아(寄兒)가 왔다고?" 방문이 열리면서 청수하게 생긴 오십 대의 백의문사와 사십 대의 중년미부가 반가운 얼굴로 걸어 나왔다. 소동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더니 큰절을 올렸다. "아버님, 어머님! 그간 옥체 만강하셨습니까?" 중년미부가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래, 그 간 우리 기아가 많이 컸구나. 자혜(慈慧) 대사(大師)께 서도 잘 계시고?" "예, 어머님. 대사님께서도 아버님, 어머님께 안부 여쭈라 하셨습 니다." 백의문사, 즉 학진숭이 끼여들었다. "기아야, 네가 배운다던 천축(天竺)의 고문(古文)은 모두 익혔느 냐?" "예, 아버님. 하지만 겨우 문자의 형상을 구별할 정도밖에 안 됩 니다." "허허… 두 달 동안에 그 정도라도 깨우쳤다니 장하구나. 학문이 라는 것은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조급히 서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천천히 익히도록 하여라." "아버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중년미부, 즉 온부인(溫婦人)이 소동을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기아야, 배고프지? 내 네가 오늘쯤 올 줄 알고 네가 좋아하는 열 구자탕을 끓여 놓았다." 소동의 얼굴에 기쁜 빛이 함빡 피어났다. "열구자탕요?" "호호… 우리 기아는 스님이 되기는 틀렸는걸." 온 부인이 학진숭을 곱게 흘겨보았다. "당신도 참, 기아가 스님이 된다면 도대체 독자로 내려오는 학가 ( 家)의 대통은 누가 잇죠?" "허허… 그냥 농담으로 해 본 소리요. 자, 기아야!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네 어머님께서 애써 만들어 놓은 음식이 다 식을라." "예, 아버님." 세 명의 행복이 넘치는 가족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백아도 귀여운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소동의 뒤를 따라 들어 갔다. 천진난만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서려 있는 소동, 그의 이름 은 학운기( 雲寄)였다. 그는 소운선생 학진숭이 사십이 넘어서야 얻은 학가( 家)의 오대 독자였다. 그의 총명함은 이미 삼 세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사상(思想)을 통달할 정도였고, 아버지 학진숭으로부터 육례(六藝)를 비롯하여 모든 학문을 전수받았다. 그의 나이 이제 십이 세지만, 당대 제일의 석학이라는 학진숭도 더 가르칠 게 없다고 두 손을 들 만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학 문에 뛰어났다. 그는 두 달 전에 혹시나 읽지 않은 책이 있나 하고 서고(書庫)를 뒤지다가 양피지로 만들어진 한 권의 고서(古書)를 발견했다. 고서는 책이라기보다는 겨우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종이 뭉치에 불과했다. 그는 처음 보는 고서를 찾아 내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것을 읽으려 했다. 하나 그 고서에는 그가 처음 보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자기 능력으로는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 님께 가져갔다. 그러나 아버지도 그것이 천축의 고문이라는 것만 알 뿐, 해독(解 讀)을 하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온 부인이 소운장에서 십여 리 떨어진 성불사(成 佛寺)로 자혜(慈惠) 대사(大師)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자혜 대사는 천축(天竺)에서 건너 온 고승(高僧)으로서, 인근에서 는 생불(生佛)로 추앙을 받고 있었다. 온 부인은 선조 때부터 성불사에 시주를 해 온 터라, 주지인 자혜 대사와는 잘 알고 있는 터였다. 해서 학운기는 지난 두 달 동안 그로부터 천축의 고문을 배운 것 이다. 생불로 추앙받을 만큼 수양이 깊고 학식이 높던 자혜 대사도 학운 기의 일학지십(一學知十)의 총명에는 거듭 놀라곤 하였다. 보통 사람은 평생을 익혀도 다 못 익힐 천축의 고문을 학운기는 단 두 달만에 모두 익혀 버렸으니, 아무리 고승인들 놀라지 않으 랴? 각설하고, 학운기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신이 거처하는 별처로 향했다. 온 부인은 자꾸만 오랜만에 만난 그를 붙들고는 얘기를 나누려 했 으나 워낙 호기심이 많은 학운기인지라, 천축의 고문을 배운 이상 고서를 읽어 보지 않고서는 못 배겼던 것이다. 그가 별채로 들어서자 아릿다운 십오 세 가량의 소녀가 그를 맞았 다. "도련님, 어서 오시와요." "그래, 아향(娥香)아! 그 동안 잘 있었느냐?" "예, 도련님. 소비는 편안히 있었지만 도련님께서는 그 동안 추운 산사(山寺)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고생은… 다만 아향 네가 끓여 주는 용설차(龍舌茶) 맛을 보지 못해서 약간 재미없었을 뿐이지." 소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요?" "그럼." "도련님, 어서 들어가세요. 소녀가 곧 끓여다 드릴께요." "그래." 학운기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사라져 가는 아향의 뒷모습 을 바라보다가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한쪽 벽면은 책으로 꽉 차 있었고, 다른 벽면에는 몇 점 의 산수화와 시화가 걸려 있었다. 그는 식탁에 앉자마자 식탁 위에 놓인 몇 권의 고서 가운데에서 얄팍한 양피지로 이루어진 고서를 집어들었다. <천하(天下)의 지극히 부드러운(柔) 것은 천하의 지극히 굳은(强) 것을 달리고, 무유(無有)는 무간(無間)에 들어간다. 이로써 무위 (無爲)의 유익함을…….> 고서를 읽어 가던 학운기는 점점 무아경(無我境)으로 빠져 들어갔 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너 번을 계속해서 읽은 그는 책을 탁자 위에 놓아 두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음, 이것은 언젠가 집에 머물렀던 노대사님과 노도인께서도 나의 몸이 약한 것을 보고 익히라던 수심양기(修心養氣)로 호연지기(浩 然之氣)를 기르는 방법하고 비슷하구나.' 그는 한참 동안을 생각하다가 고서에 적힌 방법대로 몸 속에 기 (氣)를 운행시켰다. 사실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현재 그의 체내에서는 결코 무 시 못할 정도의 내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칠 년 전, 한 명의 백미노승(白眉老僧)이 소운장에 찾아왔다. 그는 며칠 동안 학운기를 세밀히 살펴보는 듯하더니 실망한 표정 으로 떠나가면서 학운기에게 몸을 튼튼히 하는 호흡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오 년 전에도 한 명의 노도인이 찾아와서 학운기를 살펴보 다가는 역시 실망한 표정으로 떠나면서 그에게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사 년 전에도 한 명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찾아오더니, 역시 그 렇게 떠나 버렸다. 학운기는 그러한 그들을 이상히 생각했으나, 워낙 호기심이 많은 지라 지금까지 그들이 가르쳐 준 것을 행해 오고 있었다. 그는 처음 노승이 가르쳐 준 것을 익힐 때는 단지 머리가 상쾌해 지고 힘이 부쩍부쩍 생기는 것만을 느꼈는데, 노도인이 가르쳐 준 것을 익히면서부터 왠지 두 가지 방법이 약간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 년 전에 백발노인이 가르쳐 준 것을 익히면서부터 확실 히 세 가지 방법 다 약간 미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것을 알고 나자 세 가지 방법의 장점만을 모아서 한 가지 새로운 것을 창안하려 했으나, 아직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고서에 적힌 방법대로 진기를 운행시키고 난 학운기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서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치 신비로운 광채가 쏟아 져 나왔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深淵)을 보듯, 깨질 듯이 파아란 겨울 하늘을 보듯, 그의 눈은 그토록 맑고 보는 이로 하여금 아득한 나 락(奈落)으로 빠져들게 할 만큼 신비로웠던 것이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사람은 도저히 사심(邪心)을 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낑… 끼잉……! 한쪽 구석에 앉아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백아가 그의 바지 가랑 이를 물어뜯으며 재롱을 부렸다. "하하… 네가 심심했나 보구나?" 그는 백아를 껴안고 방바닥을 뒹굴면서 장난을 쳤다. 이 때 방문이 열리면서 아향이 차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도련님, 차 드시고 노세요." "그래, 벌써 끓여 왔어?" "아휴, 도련님도 그저 책만 보시면… 오늘도 벌써 열 번은 더 끓 였을 거예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아향에게 맨날 미안해서 어떡하지?" 그는 말을 하면서 찻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야, 역시 아향의 솜씨는 최고야." 그녀는 부끄러운 듯 살포시 얼굴을 붉혔다. "마님께서 저녁 준비가 되었다고 건너 오시래요." "벌써?" 그는 별로 어둡지도 않은데 저녁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 이상했다. 하나 그는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 자신은 이미 정순할 정도로 내공을 익혔기 때문에 웬만한 어둠 은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다른 별채와 전각에는 이미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학운기는 저녁을 먹고 나서 고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는 고서에 적힌 방법대로 진기를 운행시키고 나서는 그 동안 세 가지 방법에서 미흡했던 것을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었다. 한 번 무엇에 열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 그인지라, 이번에 도 역시 꼬박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그는 아향이 그를 흔들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응? 아향이냐?" "도련님, 벌써 아침이 되었어요." "그래, 알았어. 밥은 이리로 갖다 줘." 아향은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갸우뚱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학운기는 그 날부터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만을 빼고는 미흡한 것을 보완하고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잊 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디 새로운 무공신법을 창안하는 게 쉬운 일인가? 더구나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이 모두가 상승의 내공심법임에야? 학운기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가 새로운 심법을 연구하는 동안에 그의 무공 원리에 대한 지식은 날로 깊어 갔다. 만약 무림의 고인이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본다면 열 번은 더 까무 라쳤을 것이다. 이렇게 한 달 정도가 흐른 어느 날, 한창 생각에 골몰해 있던 그 가 돌연 박장하며 소리쳤다. "됐다. 그렇게 하면 될 것을 내가 왜 아직까지 깨닫지 못했지?" 그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더니, 진기를 운행시키기 시작 했다. 그가 지금 운행하고 있는 것은 승(僧), 도(道), 속(俗), 그리고 천축 고대의 입법 등 네 가지 심법의 장점과 그가 학문을 익히면 서 깨달았던 천지 우주 만물의 조화를 적절하게 조화(調和)시킨 천고(千古)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절세(絶世)의 심법이었다. 만약 무림인들이 그가 이러한 것을 창안했다는 것을 안다면 놀라 서 황천의 반쯤은 갔다가 되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학운기가 자신이 무공신법을 창안해 냈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혈겁을 일으켜서 그와 그의 가족을 몰살할 것이다. 그 날부터 학운기는 자신이 창안한 것을 익히느라 하루 중 거의 네 시진을 할애할 정도였다. 그의 공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취월장(日就月將) 하고 있었 다. 그가 다른 학문을 더욱 정순히 익히면서 절세의 새로운 심법을 연 마하는 가운데 세월은 흘렀다. 방 안, 학운기가 학진숭과 온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 다. 온 부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고, 학진숭은 학운기를 대견하 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기아, 네가 그러한 생각을 했다니… 무척이나 장하구나. 네 나이 벌써 십오 세이니 넓은 세상에 나가서 견문(見聞)을 넓히는 것도 군자(君子)로서 필히 갖추어야 할 일이지." "아버님, 감사합니다." 학운기는 지금 방 안에 틀어박혀서 책하고만 씨름을 하는 것보다 직접 세상에 나아가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면서 산지식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온 부인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말렸으나, 의외로 학진숭이 흔쾌히 허락하여 준 것이다. 그의 기분은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뻤으나, 가슴 아파하는 어머님 을 보고는 그 기쁨을 밖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온 부인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기아야,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나도 굳이 말리진 않겠다. 하지만 일 년 안에는 꼭 돌아와야 한다." "예, 어머님." 학진숭이 그들 모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기아야! 언제 떠나려느냐?" "예, 내일 떠날까 합니다." 온 부인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뭐라고? 안 된다. 어찌 준비도 없이 그렇게 빨리 떠날 수가 있겠 느냐?" "어머님, 소자는 이미 고생을 하기로 작정을 하였으므로 거창한 준비는 필요치가 않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떠나면 일 년 간은 너를 보지 못할 텐데……." 학진숭이 끼여들었다. "여보, 성인의 말씀에도 이별은 짧을수록 좋다고 하였소. 더 머물 러봤자 당신의 슬픔만 더 할 테니, 그렇게 하도록 하구려." 온 부인은 한사코 반대를 했으나, 학운기의 결심이 이미 굳어진 것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말았다. "기아야, 그 대신 오늘 밤은 이 어미하고 자도록 하자. 설마 그 정도의 부탁은 들어 줄 수 있겠지?" "예, 어머님." "그래, 고맙구나." 온 부인이 그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마치 다시는 못 볼 아들인 것처럼. 다음 날 아침, 학운기는 조반을 마치고는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했다. 그가 소운장을 떠날 때는 어렸을 때부터 그를 보살펴 주던 노복이 십 리 밖까지 전송을 나왔다. "도련님, 강호에 돌아다니시다가 혹시나 령아를 만나거든 꼭 좀 데리고 와 주십시오." 말을 하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하였다. 학운기가 그의 까만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범, 걱정하지 마세요. 내 령 누이를 만나면 잡아 끌고라도 데리고 올 테니.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부모님을 잘 도와 드리 세요. 할아범도 건강하고……." "예, 도련님. 그런 것일랑 걱정 말고 도련님께서도 몸 건강하셔야 합니다." "고마워, 할아범." 그들은 헤어지기 싫은 듯 한참을 손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학운기는 떠나야 할 몸이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바라보는 노복을 위로하고 천천히 발 걸음을 옮겼다.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도 그의 장도를 축하해 주는 듯 그의 머리 위에서 포근하게 비치고 있었다. 안휘(安徽)의 와양(渦陽)에 있는 집을 떠나 온 학운기는 중원제일 의 명승지(名勝地)인 동정호(洞庭湖)로 향하고 있었다. 봄날의 날씨는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따사로움을 더해 주고 있었 다. 학운기는 지금 하남(河南)의 상성(商性)으로 통하는 관도를 걷고 있었다. 벌써 집을 떠나 온 지도 닷새가 넘었다. 그는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행인의 선망과 부러움에 찬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장부의 꿎꿎한 기상(氣像)이 철철 넘치지는 않았지만, 높은 학식과 수양(修養)을 쌓은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 는 기품(氣品)과 위엄(威嚴)은 만인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의 절세준미(絶世俊美)한 용모는 길 가는 소녀들의 방심 을 심하게 흔들어 놓았다. 특히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떠한 사심(邪心)도 품을 수 없게 하는 그의 신비스러운 두 눈은 행인들의 넋을 잃게 하였고, 장난기가 서려 있는 입가의 미소는 고혹감마저 풍겨 주고 있었다. 주위의 풍경들을 신기한 듯이 구경하면서 가는 그의 발걸음은 매 우 가벼웠다. 그의 발 아래에 꼭 붙어서 따라가는 백아도 모처럼만의 바깥 구경 이 즐거운 듯 경쾌하게 짖기도 하고, 그의 바지 가랑이를 물면서 장난도 쳤다. 그가 한창 신이 나서 주위의 경치를 구경하고 있을 때, 돌연 맑고 도 투명(透明)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봐, 책벌레야! 그 하얀 고양이를 나한테 팔지 않겠니?" 십삼사 세쯤 되어 보이는 무척이나 귀엽게 생긴 홍의소녀였다. 학운기는 갑작스러운 말에 그녀를 바라보다가는 내심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허, 뭐 저런 애가 다 있지? 아무리 어리다지만 처음 본 남자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고…….' 그가 그녀의 당돌한 행동에 말을 잃고 있을 때, 그녀가 그에게 바 싹 다가왔다. "자, 이거면 되겠지?" 소녀가 건네 주는 것은 고양이 눈만한 야명주(夜明珠)였다. "낭자! 백아는 내 형제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팔 수가 있겠소?" "이 예쁜 고양이 이름이 백아야? 아휴, 어쩜 이름도 예뻐라. 자… …." 그녀는 갑자기 그의 품속에다 야명주를 쑤셔 넣더니, 백아를 안아 들려고 하였다. 으르릉……! 백아가 하얀 털을 곤두세우며 눈에서는 시퍼런 광망(光芒)을 뿜어 냈다. "어맛!" 소녀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하하… 그것 보시오, 낭자. 백아도 싫다고 하잖소." 학운기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야명주를 다시 소녀에게 건네 주었다. "안 돼, 너는 이미 값을 받았으니… 저 고양이는 내 거야." 소녀는 그의 손을 쳐버리고는 묘한 자세를 취하더니, 백아에게 덮 쳐 갔다. 그녀의 몸놀림은 미처 학운기가 말릴 사이도 없이 빨랐지만, 백아 는 잡을 수가 없었다. 백아는 그녀의 손을 피하더니 빛살보다도 빠르게 그녀의 목줄기로 향해 쏘아 갔다. "백아, 안 돼!" "림아야!" 다급한 음성이 터지며 한 줄기 빛이 번쩍였다. "휴!" 학운기가 안도의 한숨을 뱉어 냈다. 소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백발이 성성한 백의노인(白衣 老人)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백아도 어느 틈에 돌아왔는지 학운기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뭔가 괴로운 듯 낑낑대고 있었다. 학운기가 그러한 백아를 살펴보다가는 깜짝 놀랐다. "앗!" 백아의 목줄기에는 마치 칼에 베인 듯이 털이 잘려져 있었고, 살 가죽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왜 사람을 해치려고 해?" 그는 백아의 목줄기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소녀를 안고 있는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낭자는 어디 다치지 않았는지요?" "괜찮네. 다행히 내가 일찍 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 한데, 그 고양이는……." 노인은 말을 하다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앗! 그것은 벽안백표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할아버지." 이 때 소녀가 정신을 차렸는지 노인의 품에서 빠져 나와 학운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빨리 내놔!" 학운기가 그녀에게 야명주를 건네 주었다. "자, 여기 있소." "그것 말고 저 고양이 말야." 학운기가 어이가 없어져 버렸다. "아니, 그렇게 혼나고도 또……." "어서 내놔. 내 저것을 가만 두나 봐라." 그녀가 다시 손을 들어 학운기의 품에 안겨 있는 백아를 잡아 가 려는 순간, 노인이 그녀를 제지했다. "림아야, 너는 어찌 밖에 나와서까지 억지를 부리는 것이냐?" "할아버지, 난 저것을 샀단 말이에요." "어허, 주인이 팔지 않겠다는데 그토록 고집을 부리느냐? 그리고 저 벽안백표는 한 번 따른 주인 외에는 다른 주인을 섬기지 않는 영물(靈物)이란다." "저게 고양이가 아니고 벽안백표라는 영물이란 말이에요?" "그래." 이어서 노인은 벽안백표에 대해 비교적 많이 알고 있는 듯 소녀에 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소녀는 그의 말을 듣더니 더욱 백아를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정말로 난 저 백아를 샀단 말이에요. 저거 봐요. 제 야명주를 저 소년이 들고 있잖아요?" "허어, 어찌 벽안백표 같은 영물을 저런 야명주 하나로 살 수가 있겠느냐?" "그럼 더 비싸단 말이에요?" "그거야 모르지. 영물(靈物)이란 오직 덕(德)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 소녀가 학운기를 쳐다보더니 입을 삐쭉거렸다. "그렇다면 저 책벌레가 덕이 있단 말이에요?" "림아야! 어찌 말버릇이 갈수록 고약해지느냐? 그래 가지고 시집 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시집이라는 말에 소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몰라요. 할아버지는… 할머니한테 다 이를 거예요." 그녀는 한 마디 내뱉고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허허… 녀석."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공자, 미안하네. 애가 귀여워만 해 주었더니, 워낙 버릇이 없어 가지고……." "괜찮습니다, 할아버지." 노인은 아직도 낑낑대는 백아를 바라보더니, 품속에서 조그만 옥 병을 꺼냈다. 그는 옥병에서 하나의 환약(丸藥)을 꺼내더니, 학운기에게 주었 다. "자, 이것을 저 벽안백표에게 먹이게. 내가 그만 다급해서 지력 (指力)을 사용했더니, 아마도 다친 모양이군." "감사합니다." 학운기는 환약을 받아서 백아에게 먹이려 했으나 백아는 고개만 내두를 뿐, 그것을 먹지 않았다. "자… 백아야, 화를 풀고 이것을 먹어. 그래야 안 아프지." 백아는 그가 한참을 달래서야 환약을 받아 먹었다. 그것을 보고는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 녀석이 나한테 감정이 많은 모양이군. 그런데 공자는 어디로 가는 길인가?" "예, 소생은 견문(見聞)을 넓히기 위해서 강호에 나와 동정호(洞 庭湖)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상성까지는 함께 가겠군." 이 때 저 앞에 가 있던 소녀가 크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뭘 하고 계세요? 빨리 오세요." "허허… 그래, 알았다. 자, 공자! 어서 가세." "예." 학운기는 그들과 함께 길을 가면서 노인에게 의심을 품었던 것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신 거죠? 그리고 또 백 아를 상하게 했던 지력(指力)이라는 것은……." "허허… 공자는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구만. 그것은 무공(武功) 이라는 것이네." "무공이요?" "그래. 무공이라는 것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기(氣)를 길러서 사마(邪魔)의 침입을 막고, 또한 정의(正意)를 행하는 것이라네." "예, 무공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군요." "허허… 꼭 좋다고만 할 수는 없지. 그것을 이용해서 악(惡)을 저 지르는 무리들이 있으니까 말이네." "그러면 할아버지는 무공이 높으시겠군요?" 옆에서 백아만을 쳐다보며 걷던 홍의소녀가 입을 삐쭉거리며 엄지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이거야, 이거. 너 같은 책벌레는 백 년을 배워도 할아버지는 못 쫓아올 거야." "림아야, 또 그 말버릇!" "알았어요. 할아버지는 맨날 나한테만……." 그녀는 말을 하면서 학운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학운기는 그녀가 자신을 계속 무시하는 투로 나오자 부아가 치밀 었으나, 그녀의 태도를 보고는 내심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 었다. '후후… 저 애는 나하고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나? 하지만 매우 귀여운 소녀인데?' 비슷한 또래의 여자라고는 시비인 아향밖에 상대해 보지 않은 그 의 가슴 속에는 차츰 홍의소녀의 모습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는 노인이 계속 들려 주는 무공의 신비함을 듣다가는 문득 자신 도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저도 무공을 배울 수 있을까요?" 소녀가 또 입을 삐죽거리며 끼여들었다. "너같이 책벌레에다 약골이?" "림아야, 또! 공자, 위낙 버릇이 없는 애니까 자네가 이해해 주도 록 하게." "예, 할아버지. 저는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신 군자(君子)의 도리 (道理)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뭐라고?" 소녀가 갑자기 표독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그에게 덮쳐 들려고 했 다. 으르르릉……! 백아가 시퍼런 광망을 뿜으며 그녀에게 으르렁거리자, 소녀는 흠 칫 놀라며 물러서고 말았다. "림아야! 너 자꾸만 버릇없이 굴면 다음부터는 안 데리고 다닌 다." "알았어요, 할아버지. 다음부터는 안 그럴께요." "그래, 그래야 다음에 이 공자처럼 훌륭한 사람에게 시집가지." 학운기와 소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허허허……!" 노인이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는 그의 웃음에 얼굴이 더욱 새빨개지며 저 앞으로 달려가 버 렸다. "그런데 공자의 집은 어딘가?" "예, 소생의 집은 안휘성(安徽省)의 와양(渦陽)에 있습니다." "그래, 좋은 곳에서 사는군." 학운기는 자신의 이름과 집안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었다. 노인도 그의 아버지 소운선생(素雲先生) 학진숭( 珍崇)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학진숭에게 높은 존경의 뜻을 표하면서 자신의 신분도 말해 주었다. 그의 이름은 동방군(東方君)이었고, 무림에서는 그를 중원선협(中 原仙俠)이라 부른다 하였다. 그리고 소녀의 이름은 동방림(東方琳)이라 하였는데, 학운기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들은 얘기를 한참 하다가 다시 무공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동방군이 신중한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음, 이 소년은 머리는 매우 영특하고 무공에도 흥미가 있는 것 같은데… 체질이 무공을 익히기에는 좀…….'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런 것을 학운기에게 말하면 너무 실망 할 것 같아서 다른 사부(師父)를 소개시켜 주기로 하였다. "자네가 정 무공을 배우고 싶다니, 내 한 분의 무림고인(武林高 人)을 소개해 주겠네." 학운기는 혹시 자신은 무공을 배울 수가 없다는 말이 나올까 조마 조마하다가 얼굴이 활짝 펴졌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허허… 고마울 것까지야 뭐 있나? 내 림아하고 어디를 가야 되기 때문에 지금은 안 되고, 이 달 보름에 악양(岳陽)의 악양루(岳陽 樓)에서 만나기로 하세." 학운기는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데 대해 한참 마음이 부풀었다. 그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계속하는 동안에 어느덧 상성에 이르렀 다. "그럼… 학 공자, 우리는 여기서 헤어지기로 하세." "예, 할아버지. 그럼 악양에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낭자도 잘 가도록 하시오." 동방림은 백아를 갖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듯 그의 품속에 잠들 어 있는 백아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혀를 낼름하고는 동방군의 뒤 를 따라가 버렸다. 동방군과 동방림은 숭산(崇山)을 향하여 계속 관도를 따라갔고, 학운기는 그들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상성 안으로 들어 갔다. '후후… 당돌하긴 하지만 매우 귀여운 소녀야.' 그의 입가에는 의미 모를 미소가 살포시 지어졌다. 그는 약간 이르긴 하지만 우선 식사를 하고 객점에 머물기로 했 다. 그가 태원루(太原樓)라는 주루에 들어서자, 점원이 깍듯이 절을 하면서 그를 맞았다. "공자님, 어서 오십시오." 그가 주루 안이 약간 지저분한 듯하여 망설이자, 점원이 다시 허 리를 굽혔다. "공자님, 이층으로 오르십시오. 이층에는 조용하고 아늑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학운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원의 뒤를 따라가서 이층으로 올라갔 다. 이층에는 아직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거의 다 차 있었 다. 자리는 점원 말대로 매우 깨끗하게 보였고, 술과 음식을 먹고 있 는 사람들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학운기는 이층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섬뜩한 살기(殺氣)를 느꼈다. 그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전율을 일으키며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내렸 다. 점원이 그러한 그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그를 부축하였다. "아니, 공자님! 어디가 아프십니까?" "아… 아니, 괜찮네." 주루 안의 사람들이 점원의 말에 놀라서 모두들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 벽을 바라보고 앉은 청의인만은 묵묵히 술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 청의인을 바라보고는 다시 한 차례의 전율을 일으켰 다. 점원이 그러한 그를 부축하면서 얼른 근처의 탁자에다 앉혔다. "공자님, 어디가 편찮으시다면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 됐네. 어서 음식이나 갖다 주게. 술도 조금……." "예, 예. 곧 갖다 드리겠습니다." 점원은 한 번 굽신하더니 아래로 내려갔다. 학운기는 구석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청의인을 다시 한 번 쳐 다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이 때 청의인의 몸도 미세한 전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학운기가 주루 안으로 들어설 때 머리가 쭈뼛함을 느꼈다. 그의 오른손이 학운기를 향해 얼마나 많이 움직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결국 손을 쓰지 못했다. 학운기는 이 때에 자신의 목숨이 황천 근처를 몇십 번이나 오락가 락한지도 모르는지, 점원이 술을 가져오자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 키려고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벌컥벌컥 마셔 댔다. 순간적으로 목구멍이 확 달아올랐다. 독주를 물처럼 마셔 댔으니, 무리가 따른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캑… 캑……!" 그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마구 기침을 해 댔다. "와하하하……!" 주루 안에 한 차례 대소(大笑)가 울려 퍼졌다. 백아가 언제 깨어났는지 그의 옷에 묻은 술을 핥아 주었다. 그는 그래도 다시 한 잔의 술을 따라서 마셨다. 이번에는 조금 괜찮았다. 속이 확 달아올랐다. 마음이 약간은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는 백아에게 몇 점의 고기를 집어 주고는 자신도 한 점을 입으 로 가져갔다. 그러나 맛이 어떤지는 느낄 수도 없었다. 한 번 본 청의인의 뒷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두어 잔의 술이 더 들어가자 몸이 매우 피곤함을 느꼈다.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현상이었다. 그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대강 마치고는 객점을 찾아 들었다. 그 때까지도 그의 마음은 완전히 진정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한 번 본 청의인의 뒷모습이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이제 저녁 무렵인데도 불구하고, 침상에 누워서 아득한 꿈의 세계로 떨어져 갔다. ====================================================== 第 2 章 기재(奇才)의 천성(天性) ====================================================== 다음 날 아침, 학운기는 아침을 먹자마자 마치 무엇에 쫓기듯이 상성(商成)을 빠져 나갔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청의인이 있는 주루에 들어서자마자 왜 그러 한 기분을 느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두근거리는 가슴은 사흘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그는 지금 호북(湖北)의 임상(臨相)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이제 악양(岳陽)까지는 채 백 리도 남지 않았다. 중원 최대의 명승지인 동정호(洞庭湖)를 곧 본다는 기쁨에 그의 기분은 다시 가벼워졌다. 그가 주위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걷고 있을 때, 돌연 하늘에서 옷 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흠칫 놀라면서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앗!" 그의 입에서 놀람의 탄성이 터졌다. 그의 머리 위로 네 줄기의 인영(人影)이 빛살과도 같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 번 바라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네 줄기의 인영은 관도 옆의 숲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아, 세상에!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니…….' 그는 한참 놀라면서 다른 행인들을 바라보았으나 아무도 그러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듯, 모두들 제 갈 길만을 가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날아간 네 줄기의 인영은 강호의 절정고수급의 경 공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경공을 펼치면서 나는 소리는 매우 미약했으나, 이 미 정순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그는 그것을 들은 것이다. 그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떠나려 할 때, 네 줄기의 인영이 사 라져 간 쪽에서 가느다란 폭음이 들려 왔다. 펑－ 펑－! 그는 문득 호기심이 동해서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발길을 옮겼 다. 그가 숲 속으로 이백여 장쯤 들어갔을 때,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폭음이 연속적으로 들려 왔다. 그는 긴장감으로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코끝에 싸한 죽음의 냄새 가 풍겨 오는 듯하였다. 그는 발소리와 숨소리를 죽이며 서서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 가갔다. 한 오십여 장쯤 들어갔을까? 숲 속에서 넓은 공지가 나타나며 네 명이 서로 치열한 격전을 벌 이고 있었다. 그는 수풀 속에 바짝 엎드려 몸을 숨기고는 장내를 주시하였다. 장내에는 운두도(雲頭刀)를 든 두명의 청의노인이 금필(金筆)을 든 금의중년인, 그리고 맨손의 갈포노인(葛布老人)과 한창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운두도를 든 청의노인들은 몸을 매우 유연하게 날리면서 시퍼런 운두도를 휘두르고 있었으나, 어쩐지 금의 중년노인과 갈포노인에 게는 밀리는 것 같았다. 특히 갈포노인은 맨손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싸우는 청의노인을 거의 사경(死境)에까지 몰아넣고 있었다. 펑－ 펑－! 그의 장심(掌心)에서는 희끄무레한 기류(氣流)가 뻗쳐 나와서 청 의노인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땅바닥에 커다란 구 덩이를 만들어 놓곤 하였다. 그들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던 학운기는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 '야, 저것이 무공(武功)이라는 것인가 보구나!' 그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림인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이 다. 그는 오랜 수도(修道)를 쌓은 도인(道人)과 선인(仙人)들은 하늘 을 날아다닌다는 것을 믿었지만, 설마 사람이 이토록 공중을 훨훨 날으면서… 더구나 병기로 치고 박고 하는 것을 보고는 넋을 잃어 버린 것이다. 한동안 그들의 신기한 모습에 넋을 잃고 있던 그는 자신도 그러한 것을 꼭 배우고 싶었다. 그는 그러한 생각이 들자마자 네 명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뇌리에 깊숙이 기억해 두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장내에 갑자기 이십여 명의 황의인들이 나타났다. 학운기는 네 명의 움직임만 눈여겨보고 있던 터라, 그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몰랐다. 황의인들이 나타나자마자 갑자기 싸움판으로 뛰어들더니, 네 명을 한꺼번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네 명의 적수가 아닌 것 같았다. "아악!" "으악!" 네 명은 황의인들의 돌연한 기습에도 곧바로 신형을 안정시키고는 그들에게 맞서 나갔다. 두 명의 황의인이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저 세상으로 가 버린 것이 다. 채앵－ 챙－! "아악!" 다시 한 번 황의인이 머리가 두 쪽 나며 뻗어 버렸다. 이 때였다. "멈춰라!" 위맹한 폭갈이 터지면서 한 명의 남의노인(藍衣老人)과 두 명의 현의노인이 장중으로 떨어져 내렸다. 황의인들은 그들이 나타나자 반색을 하며 모두들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속하들이 호법님과 두 분 당주님을 뵈옵니다." 남의노인과 두 현의노인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처음의 네 명에게로 다가갔다. 남의노인이 청의노인을 싸늘한 살기(殺氣)가 쏟아져 나오는 눈초 리로 쏘아보았다. "마사쌍도(魔邪雙刀)! 네놈들이 감히 처음의 약속을 어기고 보물 (寶物)을 훔쳐서 도망가다니?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은 모양 이구나." 금의중년인과 싸웠던 청의노인이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흑살마장(黑煞魔掌) 양채(楊彩)! 네놈이 경혼방(驚魂幇) 의 호법(護法)이 되더니 보이는 것이 없는가 보구나! 감히 우리를 능멸하려 하다니!" 흑살마장 양채가 음흉스런 웃음을 흘렸다. "흐흐… 남패걸(南伯傑)! 네놈의 입이 아직도 나불거리는 것을 보 니 아직 뜨거운 맛을 덜 본 모양이구나." 그는 싸늘하게 한 소리를 내뱉고는 뒤의 두 현의노인에게 마사쌍 도를 향하여 턱짓을 했다. "예, 알겠습니다." 두 현의노인은 허리를 약간 숙여 보이고는 다짜고짜 마사쌍도에게 덮쳐 갔다. 장내는 다시 처절한 혈투장(血鬪場)으로 변했다. 양채는 그들이 싸우는 것을 한 번 바라보더니, 돌연 부드러운 웃 음을 띄우고는 금의중년인과 갈포노인에게 다가갔다. "허허… 이거 사마 대협과 방학노인(傍學老人)이 아니오? 두 분께 서도 보물에 욕심이 생겨서 오셨소?" 금의 중년노인이 그를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우리가 당신들처럼 남의 물건이나 뺏는 도둑들로 보였소?" "뭐라고?" 양채의 눈꼬리가 무섭게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 더 다급한 일이 있는 듯, 화를 참느라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좋소. 그런 것은 다음에 따지기로 하고, 두 분은 더 이상 볼일이 없으면 가 보도록 하시오." 방학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여기가 당신네 방(幇)도 아닌데, 어찌 가라 마라 하시오? 우리도 마사쌍도와 해결할 일이 있으니, 당신은 당신 볼일이나 보 시오." 삐익－! 어디선가 긴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방학노인과 금의 중년노인은 그 휘파람 소리를 듣자마자 안색이 변하더니 황급히 몸을 날려 다가갔다. 흑살마장 양채가 그들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흐흐… 네놈들이 정파라고 우리를 무시하는데, 언젠가는 피눈물 을 흘리면서 살려 달라고 애걸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며 싸늘한 살기를 쏟아 내더니, 두 현의노인과 마 사쌍도가 싸우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챙－ 창－! 펑－ 퍼어엉－! 두 현의노인은 약간 밀리고는 있었지만 거의 대등하게 싸우고 있 었다. 양채는 남패걸을 한 번 노려 보더니 돌연 그에게 덮쳐 갔다. 남패걸은 약간의 우세를 겨우 점하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덮쳐 오자 손발이 어지러워지더니 쩔쩔매기 시작했다. 찌익－! 비단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남패걸의 앞자락이 쫘악 찢어지더 니, 금갑 하나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앗!" 남패걸은 놀람의 탄성을 토하며 급히 뒤로 물러섰으나 이미 금갑 은 양채의 수중에 들어간 뒤었다. 그는 오늘의 일이 자신들에게 절대 불리함을 깨달았는지 다른 청 의노인을 향하여 외쳤다. "동생! 오늘은 그만 물러가자!" 그는 말을 하면서 황급히 몸을 날렸다. 다른 청의노인도 현의노인에게 일 도(刀)를 휘두르고는 그의 뒤를 따라서 몸을 날렸다. "흐흐… 네녀석들이 감히 내 앞에서 도망을 쳐?" 양채는 금갑을 급히 품속에 집어넣고는 두 현의노인과 함께 마사 쌍도를 쫓아갔다. 이 때 학운기는 숨을 죽이고 장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처절한 혈투를 바라보면서 긴장을 하고 있었을 때는 몰랐었 는데, 싸움이 끝나고 약간 긴장이 풀어지자 세 구의 처참한 시체 를 보고는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누구냐?" 동료의 시체를 치우던 한 황의노인이 학운기가 숨어 있는 곳을 향 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학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황의인들이 자신의 동료의 처참한 시체를 보고도 눈 하나 까 딱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들이 마치 지옥의 악귀(惡鬼)처럼 느 껴지던 터였다. 두 명의 황의인이 방어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그가 숨어 있는 곳 으로 다가왔다. 학운기는 더 숨어 있어 보았자 별수가 없음을 깨닫고는 몸을 일으 켰다. 황의인들은 십오 세 가량의 어린 소년이 나오자, 잠시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았다. "네놈은 누구냐?" "그냥 지나가던 서생(書生)이외다." 물어 본 황의인은 닭 잡을 힘조차 없을 것 같은 어린 소년이 의외 로 당당하게 나오자 부아가 치민 모양이었다. "이 자식이?" 그는 솥뚜껑만한 시커먼 손으로 학운기의 뺨을 후려쳤다. 순간, 학운기는 무의식중에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것은 아마 마사쌍도 등이 싸울 때 눈여겨보아 두었던 신법(身 法)이었다. "어? 이 자식이 피해?" 황의인은 자신의 손이 어이없게 빗나가 버리자, 이번에는 더욱 세 고 빠르게 후려쳐 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흐흐… 네녀석도 아마 무공 쪼가리를 배운 모양이구나." 그는 음산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갑자기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는 학운기에게 덮쳐 왔다. 하나 학운기는 이번에도 미꾸라지처럼 몸을 피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황의인들 중 몇 명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한꺼번 에 덮쳐 들었다. "뭣들 하는 게냐?" 싸늘한 목소리가 들리며 마사쌍도들을 쫓아갔던 양채와 두 현의노 인이 장중으로 내려섰다. "예, 이 녀석이 우리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빨리 처치해 버리지 않고 왜 시끄럽게 질질 끄 느냐?" "예, 예. 그러지 않아도 지금 처치해 버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학운기는 겁이 들기보다는 사람 목숨을 파 리 목숨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그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학운기는 가슴을 쭉 펴면서 양채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시오. 흑살마장 양채라는 양반! 지나가다 싸움 구경 좀 했기 로서니, 그것이 죽을 죄라도 된단 말이오? 만약 죄가 된다면, 관가 로 함께 가서 따지도록 합시다." 양채는 조그만 소년이 이토록 당돌하게 나오자, 한동안 멍하니 있 다가는 실소를 터뜨렸다. "허허… 관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녀석이구나." "내 이름은 학운기요. 자꾸 어린 녀석 어린 녀석 하지 마시오." "허허… 그래. 내 그러한 너의 용기가 가상하여 팔 하나만 자르도 록 하겠다." 그는 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학운기에게 덮쳐 왔다. 순간 학운기는 남패걸이 금의중년인의 금필을 피하는 방법대로 몸 을 돌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 "어?" 양채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자 흠칫 놀라는 듯하였 다. "네놈은 쥐새끼처럼 도망친 마사쌍도와 어떻게 되는 사이냐?" 학운기는 그가 갑자기 그러한 질문을 해 오자 어리둥절했다. "아무 관계도 없소. 난 그들을 오늘 처음 여기서 보았소." "뭐라고? 그렇다면 네놈은 마사쌍도의 독문신법(獨門身法)을 어디 서 배웠느냐?" "신법이 무엇이오?" 양채는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부아가 치밀었 다. "이놈아! 네가 나의 손속을 피하던 것 말이다." 학운기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것이 신법이라는 것이었소? 나는 그들에게서 배웠소." "이놈아, 너는 그들을 여기서 처음 보았다면서?" "그렇소. 난 그들이 사마 대협, 그리고 방학노인이라는 분과 싸우 는 것을 보고 배웠소." "뭐라고?" 양채는 그의 말을 듣고는 넋이 달아났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두 현의노인과 황의인들도 넋을 잃었는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천천히 펼쳐지는 것도 아니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 최대의 공력으로 피하는 신법을 단 한 번 보고 익힐 수 있다니… 더구나 그는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 아닌가? 만약 무림에 그와 같은 자가 몇 명만 더 있더라면, 독문무공(獨文 武功)이라는 말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양채는 그의 말을 듣고는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는 살기 띤 눈 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흐흐… 꼬마 녀석이 감히 어르신에게 거짓말을 하다니……." 그는 말을 하면서 장력(掌力)을 펼쳐 학운기에게 덮쳐 왔다. 그의 장심에서는 거무스름한 기류(氣流)가 뻗쳐 나오고 있었다. 펑－! 양채의 장력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땅바 닥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어! 이 녀석이 피해?" 양채는 또 한 번 자신의 장력이 빗나가자, 악독하게 얼굴을 굳히 며 다시 덮쳐 왔다. 찰나 하늘은 온통 그의 손그림자뿐이었다. 학운기도 이번에는 어찌할 줄을 몰라 당황하면서 간신히 방학노인 이 펼치던 신법으로써 그의 손을 피했다. 이제 양채는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마구 위맹한 장력을 펼치면서 그에게 덮쳐 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현의노인과 황의인들은 감히 협공도 못하고 넋을 잃고 있었다. 그렇게 사오 초가 지났을까? 돌연 피하기만 하던 학운기가 양채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앗!" 놀람의 탄성이 터지며 양채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네… 네놈은 나의 흑살최혼장(黑煞催魂掌)을 어디서 배웠느냐?" 학운기의 입가에는 짖궂은 웃음이 번졌다. "후후… 방금 당신이 가르쳐 주지 않았소?" "뭐라고? 그렇다면 네놈은 정말로……." 양채는 이제 그의 말을 안 믿을 수도 없었다. 그는 마치 요귀(妖鬼)에게라도 홀린 듯이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 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의 얼굴이 점점 섬뜩한 살기(殺氣)로 물 들어 갔다. '음, 저놈을 이대로 몇 년만 놔 두었다가는…….' 그는 학운기를 반드시 죽여야 되겠다고 작정을 하고는 다시 덮쳐 가려다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지금 우리 방에서는 한창 인재(人才)가 필요할 때가 아닌 가?'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는 멍하니 넋을 잃고 학운기만을 바 라보는 두 현의노인을 향해 입을 달싹거렸다. 그런 다음 그는 학운기를 향해 엄청난 장력을 퍼부었다. 이제까지 그가 펼치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맹한 것이었다. 쾅－! 그의 장력은 아슬하게 학운기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 땅바닥에 커 다란 구덩이를 만들었다. 하늘이 온통 흙먼지와 풀들로 졸지에 어두컴컴해져 버렸다. 학운기는 이 때 그의 장력을 피하기는 했지만 너무 엄청난 것이어 서 그 여력(餘力)에 몸을 비틀거렸다. 그 순간을 놓칠 양채가 아니었다. 어느 새 그의 신형이 학운기의 옆으로 날아들었다. 퍽－! 학운기는 등줄기에 둔탁한 느낌을 받으면서 앞으로 폭 고꾸라지고 말았다. "흐흐… 미꾸라지 같은 녀석! 드디어 쓰러졌군. 하지만 너의 천성 (天性)은 노부가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엄청난 것이었다." 양채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더니, 그를 옆구리에 끼고 는 몸을 날렸다. 두 현의노인과 황의인들도 그를 따라서 분분히 몸을 날렸다. 정신을 차린 학운기는 자신이 어느 화려한 방 안에 누워 있는 것 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어? 여기가 어디지?"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방 안을 한창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공자님, 일어나셨나요?" 밖에서 봄날의 시냇물보다도 더욱 맑고도 청아(淸雅)한 소녀의 목 소리가 들리면서 한 백의소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학운기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니…….'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설부화용(雪膚花容), 폐화수월(閉花睡 月), 경국지색(傾國之色) 등 모든 형용사를 다 갖다 붙여도 모자 랄 지경이었다. 거기다 그녀의 탈속(脫俗)한 모습은 천상(天上)의 선녀(仙女)가 그럴까 싶었다. 그가 넋을 잃고 배의소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면서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공자님께서 이토록 빨리 일어나셨다니 소녀도 매우 기쁘옵니다. 소녀는 앞으로 공자님을 뫼실 류선(劉仙)이라 하옵니다." "아니, 나를 모시다니?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요?" "예, 소녀는 방주님으로부터 공자님을 뫼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하오니 공자님께서는 시키실 일이 계시면 소녀를 불러 주십시오." 학운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니? 낭자 같은 분이 시비(侍婢)란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학운기는 다시 한 번 놀라 버렸다. 도대체 이 소녀의 주인은 누구기에, 꿈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를 시비로 부린단 말인가? 학운기는 한동안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데, 방주라니?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오?" "예, 바로 무림 삼방(三幇)의 하나인 경혼방(驚魂幇)의 방주이신 패천마황(覇天魔皇) 소무극(邵武極)이시옵니다." "경혼? 패천마황? 무슨 이름들이 그토록 무시무시하오? 그리고 또 무림 삼방이란 무엇이오?" 류선은 그의 휘둥그레한 모습을 보고는 백옥(白玉)보다도 하얀 섬 섬옥수(纖纖玉手)로 입을 가리며 살포시 웃었다. "예, 무림 삼방이란 하남(河南)의 천마방(天魔幇), 강서(江西)의 성룡방(聖龍幇), 그리고 여기 경혼방을 가리키는 것이옵니다." "아, 그렇소?" 이 때 학운기의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참, 제가 공자님께서 시장하시다는 생각을 잊었군요." 그녀는 학운기의 무안을 덮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 마디를 하 고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학운기는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서 곰곰이 생각을 굴렸다. '흑살마장 양채는 나를 죽일 것 같더니, 왜 이렇게 귀빈 대우를 해 주지?' 그가 한창 생각에 몰두해 있을 때, 류선이 쟁반에다 그릇을 받쳐 든 채 들어왔다. 그릇에서는 구수한 냄새가 풍겨 왔다. "공자님, 어서 드세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한 숟가락을 떠서는 그의 입 속에다 넣어 주 었다. "아, 낭자. 그대로 놔 두시오. 소생이 먹겠소." "예, 공자님." 그녀는 그릇을 그의 옆에다 조용히 놓아 두고는 옆에 서 있었다. 학운기는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매우 거북스러웠으나, 마침 시장기가 돌던 참이라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낭자, 참 맛있는 연와탕(燕窩湯)이었소. 한데, 이것은 누가 만들 었소?" 류선은 얼굴을 살포시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예, 소녀가 만든 것인데… 입에 맞았는지 모르겠군요." "아니오, 내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진미(珍味)였소. 낭자의 아름다 운 모습만큼이나……." "공자님은……." 그녀는 얼굴을 도화빛으로 물들이며 빈 그릇을 들고는 얼른 밖으 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 밖에서 부드러운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공자, 들어가도 되는가?" "누구시오?" "허허… 나는 이 집 주인일세." 너털웃음이 들리면서 화려한 금의(錦衣)를 입은 육십여 세 정도의 노인이 들어왔다. 학운기는 그가 비록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으나, 눈가에 서린 사기(邪氣)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르신네가 패천마황 소무극이라는 분이오?" "허허… 자네는 이미 알고 있었구먼. 한데 이 곳은 마음에 드는 가?" 학운기는 그가 별로 탐탁치 않았으나, 그의 호의에는 감사를 드리 지 않을 수 없었다. "소생 학운기가 어르신네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허허… 감사라니? 난 다만 자네가 편안하다면 그것으로 흡족하 네." "한데 어르신네께서는 어찌 소생을 이 곳에다……." "허허… 그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우리 앉아서 천천히 얘기하 도록 하세." 소무극은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학운기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자네는 매우 고강한 내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누구 에게 무공을 배웠나?" 학운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력이라니요? 소생은 그러한 것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무슨 영과(穎果)나 영물(靈物) 같은 것을 복 용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소무극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가 않자 고개를 갸웃하였다. "흠, 그것 이상한 일이구만. 좋네, 그런 것은 나중에 다시 말하도 록 하고 자네는 혹 무공(武功)을 배울 생각이 없는가?" 학운기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소무극의 뜻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흑살마장 양채 등에게서 좋지 못한 인상을 받은 그인 지라, 비록 자신에게는 부드럽게 대하나 눈가에 은은한 사기(邪 氣)가 비치는 소무극에 대해서도 좋은 인상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군자(君子)의 도리(道理)를 알고 있는 그인지라, 차마 거 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한참을 머뭇거리자, 소무극이 다시 물어 왔다. "자네는 나에게서 무공을 배우지 않겠는가? 만약 자네가 몇 년만 노력을 한다면 곧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고, 그렇게 된다면 천하무림(天下武林)은 자네 손에 들어올 것이네." 학운기는 단지 무공에 대한 호기심만 가지고 있을 뿐이어서, 그의 패도(覇道)적인 생각에 심한 반발심이 느껴졌다. "싫습니다." 그의 단호한 거절에 소무극의 몸이 한 차례 흠칫했다. "정말 싫은가?" "그렇습니다." "음… 내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네. 하지만 자네도 장부(丈夫)라면 천하웅패에 대하여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게나." 그는 한 마디 하고는 다시 한 번 학운기를 바라보고는 밖으로 나 가 버렸다. 학운기는 그의 마지막 눈길에서 섬칫한 살기를 느끼고는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음, 저 자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죽일 것 같구나.' 어떻게 할까 하고 한참 생각을 굴리던 그는 갑자기 백아가 생각이 났다. "어? 애가 어딜 갔지?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는데……." 그는 숲 속에 들어갈 때까지는 분명히 백아가 자신의 곁에 있었음 을 알고 있었다. '그럼 혹시…….' 그는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류선을 불렀다. "낭자! 밖에 있소?" "예." 맑은 목소리가 들리며 류선이 안으로 들어왔다. "낭자, 혹시 백아를 보지 못하였소?" 류선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백아라니요?" "아참, 조그만 백묘(白描)처럼 생긴 동물말이오?" "보지 못했는데요." "아, 그렇다면 애가 어딜 갔지?" 류선이 그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양 호법님께 여쭈어 보고 오겠 습니다." "그래 주시겠소?" "예." 류선은 밖으로 나가더니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은 밝지가 못했다. "낭자, 그들이 보았답디까?" 그녀가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황의인들에게도 물어 보았소?" "예, 그들에게도 물어 보았지만 아무도 본 사람이……." "수고하셨소, 낭자." 학운기는 십여 년 간을 함께 있어 온 백아가 사라졌다는 것을 느 끼자, 못내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날부터 학운기는 감옥과도 같은 방에서 갇혀 지내야만 했다. 소무극은 날마다 그를 찾아와서 미소로써 회유(懷柔) 했으나 한 번 굳어진 마음은 바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소무극은 그를 죽일 마음은 없었는지 계속 끈질기게 설득 을 하였다. 학운기는 탈출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그가 묵고 있는 별채에는 십 여 명의 호위무사들이 지키고 있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 다. 다행히 백합(白合)보다도 청순한 류선이 그의 옆에서 따뜻한 위로 를 해 주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녀마저 없었더라면 그는 어떻게 됐을지 몰랐다. 그녀는 처음에는 방주의 말을 들으라고 그에게 설득을 했으나 그 가 몹시 불쾌한 태도를 보이자, 다음부터는 그런 것에 대해 언급 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동안 류선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의 본래 이름은 애옥지(艾玉芝)였다. 그녀는 원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삼 년 전에 갑자기 집안 이 녹림의 무리들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였다. 뛰어난 기지(機智)로 간신히 살아남은 그녀는 오갈 데 없이 강호 를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건달의 무리들에게 붙들려서 기루(妓樓)로 팔려 가려는 것을 소무극이 보고 구해 주었다. 자식이 없는 소무극인지라 그녀를 양딸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그녀 가 한사코 반대를 하는 바람에 시비로서 곁에 두고 있으나, 마치 딸처럼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 중에 학운기가 잡혀 오자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그녀를 그의 곁에 머물게 한 것이다. 학운기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이상 야릇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전에는 결코 느껴 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그녀도 그러한 것을 느끼고 있는지 그들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얼 굴을 붉게 물들이곤 했다. 그녀는 마치 청초한 백합 같았다. 뿐만 아니라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학식도 매우 높은 경지 에 이르러 있었다. 천고(千古)의 기재(奇才)인 그도 그녀의 깊은 통찰력에는 가끔 놀 라곤 하였다. 그는 소무극의 회유와 설득에 시달리고 나면 그녀와 바둑을 두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도 소무극에게 한 차례 시달림을 받고 나자, 울적한 기분으로 애옥지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오늘따라 더욱 심란한지, 돌을 놓는 자리가 자꾸 헛 갈렸다. '아, 언제까지 이 곳에서 이런 식으로 세월만 보내야 한단 말인 가?' 애옥지가 그러한 그를 처연한 빛으로 바라보았다. "학 상공,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상공께서 원하시는 일 이 이루어질 날이 있을 거예요." "고맙소, 낭자. 만약 낭자의 그러한 따뜻한 위로가 없었다면 나는 진작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것이오." "아니예요, 학 상공. 소녀도 상공이 아니였다면 이토록 즐거운 시 간들을 보내지 못했을 것이에요." "낭자……." 그들의 불꽃 같은 시선이 마주쳤다. 천지만물(天地萬物)이 정지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 천지가 무너진다 해도 그들의 이 순간은 방해할 수가 없을 것 같 았다. 순간 학운기가 그녀의 가녀린 섬섬옥수를 잡았다. "낭자……." "상공……." 짜릿한 전율이 서로의 손을 타고 온몸에 흘렀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그들의 손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정 감은 천 마디의 말보다도 더욱 위력적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학운기가 그녀의 이름을 살며시 불렀다. "옥지, 우리 함께 이 곳을 빠져 나갑시다. 이 곳의 경비가 아무리 철통같다 할지라도 분명히 허점이 있을 것이오." "학 상공, 고마워요. 하지만 소녀는 배덕자(背德者)가 될 수는 없 답니다." "옥지, 당신은 이 곳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오? 아니면 내가 싫어 서……?" 애옥지가 처연한 빛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소녀는 이미 상공에게 저의 마음을 모두… …." 학운기가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두 사람 사이를 흘렀다. "옥지, 그렇다면 왜……?" "상공, 저는 방주님께서 그 동안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아직 도……." "옥지, 그는 사파(邪派)의 대마두요." 그녀의 몸이 한 차례 전율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분은 나에게 친딸 이상으로 잘 대해 주었어요." "옥지, 그것이 바로 그 자의 음흉한 속셈이오. 그 자는 옥지의 미 모를 보고는 옥지를 이용하여……."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그의 품을 빠져 나갔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분은 나에게만은……." 그녀의 마음은 매우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을 엉뚱한 곳만을 쳐다보고 있다가는 그를 다시 바라 보았다. "학 상공, 소녀는 이 곳을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도를 꼭 찾아 내 겠어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옥지……." 그는 그녀의 돌연한 태도에 멍하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옥지, 미안하오. 내가 왜 당신의 마음을 모르겠소?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는 침상에 몸을 눕히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 애옥지와의 즐거웠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 다. 그 날부터 애옥지는 말을 잃었다. 그가 묻는 말에만 간간이 대답을 할 뿐이었다. 학운기가 그녀를 웃기려고 노력을 해 보았지만 그녀는 살포시 미 소만 짓다가는 이내 침울한 표정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그 동안 그녀는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 다. 그 날 밤, 학운기가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하려 할 때 요란한 종 소리가 급촉하게 들려 왔다. 그는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창문 밖이 환하게 밝은 것이 아마도 불이 난 것 같았다. 챙－ 창－! 펑－ 쾅－! "으악!"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폭음이 들리며 간간이 단말마의 비명도 들 려 왔다. 그가 막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애옥지가 다급한 표정으 로 들어왔다. "학 상공, 빨리 나오세요. 지금 방내에 외적이 침입해 와서 이 곳 을 지키던 무사들도 모두 그쪽으로 갔어요." 학운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옥지, 그렇다면 어서 빠져 나가도록 합시다." "예." 그들은 별채를 빠져 나가 화초(花草)가 우거진 한 조그만 동산으 로 들어갔다. 모두들 외적을 막느라 경황이 없었던지 그들을 발견한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그들이 동산으로 들어가 몇 발짝 움직였을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냐?" "저예요." 애옥지가 학운기를 저지시키며 앞으로 나섰다. 어둠 속에서 애옥지의 신형이 번쩍!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윽!" "억!" 두 마디의 묵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상공, 빨리 오세요." 학운기가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갔을 때, 땅바닥에는 두 명의 황의 대한이 쓰러져 있었다. 학운기가 놀라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공, 어서 여길 빠져 나가야 해요." 그녀는 그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은밀히 숨겨진 조그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은 꾸불꾸불한 긴 동굴이었다. 학운기는 그녀가 끄는 대로 따라만 갔다. 얼마쯤 갔을까? 그들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볼 수가 있었다. 애옥지는 동굴 밖으로 나오자 머뭇거렸다. "옥지! 그들이 쫓아올지도 모르니 어서 떠나도록 합시다."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하게 고여 있었다. "상공, 소녀는 떠날 수가 없어요." "옥지, 사악한 소굴에 그토록 미련이 남는단 말이오?"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것이 아니라, 소녀는……." "그럼 나하고 떠나는 것이 싫소?" 돌연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흐흑… 아니예요. 소녀는 상공을 죽도록 사랑해요. 이 마음은 영 원히 변치 않을 거예요." "옥지……." 그가 그녀의 가녀린 몸을 꼬옥 껴안았다. "기랑! 저는 그 동안 기랑과 함께 보낸 수많은 꿈 같은 나날들을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옥지, 그렇다면 함께 떠나는 것이……." "아니예요. 소녀는 그럴 수가 없어요." 학운기는 몇 번을 달래 보았으나 이미 굳어진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히찮은 짐승도 은혜를 알거늘, 어찌 성인(聖人)의 말씀을 배운 소녀가……." 그녀는 계속 그런 식이었다. 그는 그러한 그녀가 더욱 안쓰러웠다. "옥지……." "기랑……." 그들의 입술이 뜨겁게 마주쳤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짜릿한 기분을 그들이 죽 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옥지! 내 꼭 옥지를 찾으러 올 테니, 그 때까지 몸 보중하도록 하시오." "기랑……." 다시 한 차례의 뜨거운 입맞춤이 그들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마침내 길고도 뜨거운 입맞춤이 끝나자, 학운기는 뒤도 안 돌아본 채 앞으로 몸을 달려갔다. 그의 허전한 듯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애옥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랑, 부디 행복하세요. 저는 기랑을 기다릴 수 없는 몸이랍니 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저의 몸은 이미 그 인면수심(人面獸心) 의 마두에게… 하지만 전 기랑을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기랑, 부 디 이 추잡한 계집일랑 잊어버리고 행복하세요."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을 중얼거리다가는 다시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 第 3 章 무공초연(武功初演) ====================================================== 학운기는 계속 달리기만 했다. 목적지도 없었다. 달리는 의미도 없었다. 탈출, 그러한 것은 이미 머릿속에서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는 그 냥 달려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가슴 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풀어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털썩－! 그는 갑자기 무언가에 넘어지고 말았다. "어?" 사람이었다. 그것도 한쪽 팔과 다리가 잘렸고, 몸에는 수많은 상처가 나 있는 여인이었다. 학운기는 머리털이 하늘 끝까지 곤두서는 것 같았다. 캄캄한 밤에, 그것도 인적이 없는 숲 속에서 본 처참한 시체는 지 옥의 악귀(惡鬼)보다도 더 무서워 보였다. 그가 벌떡 일어서서 도망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가느다란 신음이 그의 귓전에 들려 왔다. "으으으……!" 원래 그 여인은 아직 죽지 않고 숨이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마음에 갈등(葛藤)이 일어났다.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시체였다. 그러나 어느 샌가 그의 몸은 다 시 시체를 향하고 있었다. 시신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매우 미세하여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학운기는 얼른 그녀의 가슴에다 귀를 대었다. 삼장의 고동이 곧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으으, 무… 물……!" "아주머니! 아주머니!" "으으, 무… 물……!" 그녀의 입술은 심한 갈증에 허덕이는 듯 바싹 말라 있었다. 학운기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물이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이대로 놔 둘 순 없었다. 그는 거의 한 식경 동안을 숲 속을 뒤져서야 겨우 사발만큼이나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는 즉시 두 손을 모아서는 물을 담아 가지고 여인이 있는 곳으 로 돌아왔다. 여인은 차가운 물이 자신의 입술을 적시자 정신이 드는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리고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이 계속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 으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학운기가 그녀의 입에다 귀를 바싹 갖다 대었다. "으, 금… 금갑을… 찾아야 돼. 으, 수라… 대… 이… 품속을… …." 그녀는 간신히 자신의 품을 가리키는 듯하더니, 고개가 옆으로 툭! 꺾어져 버렸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그가 그녀의 몸을 흔들어 보았으나,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숨을 거둔 것을 알고는 아직도 게슴츠레하게 떠 있는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다. '이분은 누구이기에 이러한 산중에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음을 당 했는지? 한데, 금갑이란 혹시……?' 그는 문득 흑사마장 양채가 마사쌍도에게 갈취한 금갑이 생각났 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귀중한 인명을 해친단 말인가?'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녀를 묻기 위해서 옆의 나뭇가지를 꺾 어 땅을 팠다. 이미 정심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그인지라 땅을 쉽게 팔 수가 있 었다. 그는 그녀를 묻기 위해 시신을 안다가 그녀의 가슴에 딱딱한 것들 이 잔뜩 들어 있음을 느꼈다. 문득 그녀가 죽을 때 자신의 품속을 가리킨 것이 생각났다. 그는 아무리 죽은 시신이라지만 차마 여인의 품속을 더듬어 볼 수 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유언과 그의 호기심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의 품속에서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왔다. 패물(佩物), 십여 가지의 약병들, 그리고 특히 눈에 띈 것은 양피 지로 된 한 권의 두툼한 책자였다. 책의 겉표지에는 현령진경(玄靈眞經)이라 쓰여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품속에다 갈무리한 다음, 그녀를 구덩이에다 조심 스럽게 묻어 주었다. '도대체 무림인들이란 무엇을 추구하기에 이토록 살육(殺戮)을 전 개한단 말인가?' 그는 곰곰이 생각하면서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 시각은 이미 사경에 접해 들었고 컴컴한 숲 속은 으시시한 분위기 를 풍기고 있었지만, 생각에 골몰해 걷는 그에게는 무서움이 없었 다. 그가 인가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환하게 밝은 뒤였다. 그는 주루를 찾아서 식사를 마친 후 객점을 찾아 들었다. 워낙 호기심이 많은 그인지라 여인이 죽어 가면서 그에게 남겨 준 책자를 보지 않고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책을 펼쳐 들고 읽었다. 책은 매우 오래된 듯 많이 낡아 있었으나, 뒷부분만은 새로 붙인 듯하였다. 책은 모두 고대(古代)의 갑골문자(甲骨文字)로 되어 있었고, 가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참을 읽어 가던 그가 갑자기 환호성을 질렀다. "아, 이것은 무공에 대해 서술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무공비급(武功秘 )이었던 것이다. 그는 신기한 무공을 배운다는 기쁨에 책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 다. 처음 몇 장 읽었을 때 갑자기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환희의 전율이었다. '아, 그렇다면 그 동안 내가 익힌 것이 내공(內功)이었단 말인 가?'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그는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비급 안에는 검(劍), 장(掌), 지(指), 보(步), 신법(身法) 등 무 공 전반에 걸쳐서 현묘(玄妙)한 기초(奇招)들이 적혀 있었다. 그 밖에도 전음술(傳音術) 경공술(輕功術)을 비롯하여 잡다한 것 까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새로 붙인 듯한 부분에는 행서(行書)로 앞 부분 중 일부분 의 해석과 역용술(易容術), 신투술(神偸術)에 관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이런 글이 남겨져 있었다. <본녀(本女)의 학식(學識)이 미미(微微)하여 모두 해술(解術)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하노라. 훗날 인연 있는 자가 이것을 얻으면 모두 익히기를 본녀는 진심으로 바라노라. 천면요희(千面妖姬).> 학운기는 죽은 중년여인이 천면요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분은 왜 다른 학문이 높은 사람에게 해석을 부탁하지 않았을까?' 탐욕스러운 무림의 생태를 아직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당연히 드 는 순진한 의문이었다. 그는 현령진경에 적혀 있는 내력운행(內力運行)에 대한 방법대로 내력을 식지(食指)에 운집시켜 보았다. 막강한 진력이 단전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와서는 식지가 터져 버릴 듯한 느낌을 주었다. 퍽－! 그의 손끝을 빠져 나간 진력(眞力)은 여지없이 객방의 벽에 적중 되었다. 순간,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록 흙벽이었지만 반 자는 족히 되는 벽에 구멍이 뻥 하니 뚫린 것이 아닌가? '아, 무공이란 너무나 신기한 것이구나. 이러한 것들을 함부로 사 람에게 펼쳤다가는…….'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그가 읽은 현령진경을 다시 세밀히 연구하 기 시작하였다. 현령진경에는 특히 경공술과 신법, 보법 등의 기초(奇招)들이 많 이 실려 있었다. 그것들은 책의 사분의 삼만큼을 차지할 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뒤에 천면요희가 서술한 부분에는 역용술에 관한 것이 거 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완전히 익혔다고 생각하고 책장을 덮었을 때는 캄 캄한 밤이었다. 방에는 언제 켜져 있었는지 촛불이 은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후후… 또 아향이… 아참, 여기는 객점이지.' 그가 집에 있을 때 가끔 책에 정신이 팔려서 밤이 되는 줄도 모르 면 시비인 아향이 촛불을 켜 주곤 했었던 것이다. 그는 문득 심한 시장기를 느끼고는 점원을 불렀다. "여보게, 점원!" "예, 공자님." 점원은 무척이나 반가운 듯이 달려와서는 놀라운 눈으로 그를 바 라보았다. "소인은 공자님 같은 분은 처음 봅니다요." 학운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자네는 서생(書生)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닙죠? 서생분들은 많이 보아 왔지만 공자님처럼 사흘 동안 꿈 쩍도 안 하시고 책만 들여다보시는 분은 처음 봅니다요." "뭐라고? 그렇다면 내가 사흘 동안이나 이 방에 있었단 말인가?" 점원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아니? 그럼 공자님께서는 그것도 모르셨단 말입니까?" 학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자네가 촛불을 켜 놓은 모양이구먼?" "예, 소인이 몇 번을 불러도 공자님께서 대답도 없으시기에 그냥 촛불만……." "수고했네." 그는 품속에서 한 냥 정도의 금덩어리를 꺼내서 점원에게 주었다. 점원은 그것을 보고는 코가 땅에 닿도록 굽신거렸다. "공자님, 고맙습니다요. 이 은혜는……." "아니네. 은혜랄 것까지는 없고, 지금 몹시 시장하니 식사나 가져 다 주게." "예,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이어서 점원은 술까지 곁들인 푸짐한 저녁상을 들고 왔다. 학운기는 허기에 미처 맛을 음미할 사이도 없이 이것저것 마구 집 어먹었다. 술까지 한 잔 곁들이자 피곤과 포식(飽食)에 의한 졸음이 몰려와 그대로 침상에 눕고 말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中天)에 떠 있을 때였다. 그가 묵고 있는 곳은 악양(岳陽)의 남쪽으로 삼백여 리 떨어진 곳 에 있는 평강(平江)이란 곳이었다. 그는 아침을 먹자 이미 늦어 버린 약속이지만 원래의 목적도 있고 해서 악양으로 가기로 했다. 그가 막 평강성문을 나서려 할 때, 십여 명의 황의인들과 두 명의 현의노인이 성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학운기는 흠칫 놀라면서 고개를 숙였으나 이미 발각된 후였다. "흐흐… 꼬마 놈이 여기 있는 줄을 모르고 사흘 동안 신발이 닳도 록 찾아다녔으니……." 나직하지만 날카로운 음성이 그의 귀를 때렸다. 학운기는 괜히 사람이 많은 이 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서 빠른 걸음으로 그들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난 당신들의 노리개가 아니오. 해결할 일이 있으면 나를 따라오 시오." 현의노인과 황의인들은 그의 당당한 태도에 흠칫 놀라는 것 같았 다. "흐흐… 꼬마 녀석이 그 동안 간덩이가 많이 부었구나." 그들도 행인들이 많은 곳에서는 소란을 피우고 싶지가 않았던지 학운기의 뒤를 따랐다. 학운기는 관도를 얼마쯤 걸어가다가 옆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내심 이들을 상대로 자신이 배운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숲 속으로 오십여 장쯤 들어가자, 낡은 관제묘(關帝廟)가 나타났 다. 학운기는 관제묘 앞의 공터에 떡 버티고 섰다. 그러한 그의 몸에서는 십오 세의 소년답지 않은 기개가 넘쳤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싫다는 나를 찾아다녔소?" 한 명의 현의노인이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허어, 꼬마 녀석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이놈아, 방주님께서 그 토록 정중히 대우를 해 주었으면 보답은 못할망정 방에 혼란한 일 이 일어난 틈을 타서 도망을 가?" "내가 무슨 도망을 쳤단 말이오? 난 단지 그 곳이 싫어서 떠나 왔 을 뿐이오." "흐흐… 꼬마 녀석이 그래도 사내라고 입은 살아 있구나. 이놈아, 나를 따라 갈 테냐? 아니면 여기서 죽음을 당할 테냐?" "후후… 당신에게 그럴 만한 재간이 있소?" "뭐라고? 이 녀석이……." 현의노인은 분노가 치밀어올랐으나 그가 매우 상대하기 곤란하다 는 것을 알고 있는지 우격다짐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흐흐… 네녀석이 남의 무공을 한 번만 보면 익힐 수 있다는 기재 (奇才)라고는 하지만, 공력도 없는 네놈쯤은……." 그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면서 양 손을 가슴 앞에 세운 채 천천히 다가왔다. 학운기도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려서 양 손에 집중시켰다. "받아랏!" 현의노인이 갑자기 위맹한 장력을 펼치며 비호처럼 그에게 덮쳐 왔다. 쾅－!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울리면서 하늘은 순식간에 풀과 흙먼지로 어두컴컴하게 변해 버렸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정경이 환하게 드러났다. 현의노인은 원래의 자리에서 두 걸음 물러나서 도저히 믿을 수 없 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학운기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일 장 쯤 물러나 있었다. 일 장의 교환으로 손해본 쪽은 학운기가 분명했지만, 표정은 정반 대였다. 학운기는 생전 처음으로 펼쳐 본 장력(掌力)이 그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자 매우 자신감에 차 있는 것 같았고, 현의노인은 홀린 듯 이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네… 네놈이 언제 무공을 배웠느냐?" "후후… 방금 배웠소이다." "뭐라고? 이 녀석이 감히 어르신네를 놀려?" 현의노인은 그가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앞뒤 가릴 것도 없 이 그에게 덮쳐 왔다. 펑－! 그러나 그의 장력은 애매한 땅바닥만을 쳤을 뿐, 학운기는 온데간 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가 한창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볼 때, 뒤에서 학운기 의 음성이 들려 왔다. "후후… 나를 찾고 있소?" 현의노인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끼면서 뒤에다 급히 일 장을 퍼 부었다. 그러나 역시 허탕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현의노인과 황의인들은 그것을 보고 있으면 서도 계속 허탕만 치는 현의노인에게 학운기의 위치를 말해 줄 수 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도 학운기의 신형을 미처 분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 다. 학운기는 처음 장력으로 정면 대결을 해 보고는 내력으로는 자신 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현령보법(玄靈步法)을 펼치면서 현의노인의 무공초식을 눈여겨 관찰하고 있었다. 현령보법은 정말 너무나도 현묘(玄妙)했다. 그것은 내력 소모가 극히 적으면서 상대가 전혀 종적을 종잡을 수 도 없을 만치 빨랐다. 현의노인이 한참을 허탕만 치면서 몸만 뱅뱅 돌자, 옆에서 지켜보 던 자들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모두들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학운기는 십여 명의 그들이 뛰어들자 일순간 신형이 흐트러지는 듯하였으나, 곧 나비가 꽃밭을 헤치듯이 유연하게 그들 사이를 헤 집고 다녔다. 현의노인과 황의인들이 펼친 장력은 서로간에 부딪치기도 하고 땅 바닥을 치기도 하였으나, 학운기의 옷자락 근처에도 가지 못하였 다 "후후… 여기요, 여기." 학운기는 그들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뒤로 돌아가서는 그들의 어깨 를 툭툭 치기도 했다. 현의노인들과 황의인들은 있는 재간, 없는 재간을 다 펼치면서 그 를 공격해 보았지만 그의 종적도 제대로 발견치 못하자 등줄기에 서늘한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을 피하기만 하던 학운기는 이젠 가끔씩 공격도 했다. 아, 그런데 그가 펼치는 초식들이 모두 현의노인과 황의인들이 그 를 공격하던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이제 현의노인과 환의인들은 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아예 혼백이 달아나 버린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의 무공초식을 한 번 보고 배워서 써먹는단 말인가? 더구나 그 사람보다 더욱 능숙하고 현묘하게 펼 침에야! 펑－ 펑－! 두 현의노인은 아예 미쳐 버린 듯 집채만한 바위도 박살 낼 듯한 장력들을 펼쳐 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의 초식들을 환하게 알고 있는 학운기가 그러한 장력에 맞을 리 만무했다. "후후… 좀더 색다른 것을 펼쳐 보시오. 그것은 이미 나에게 가르 쳐 주지 않았소이까? 자, 보시오." 그는 여유 있는 웃음을 흘리면서 그들이 방금 펼친 초식대로 공격 해 갔다. "네… 네놈이 노부를 농락하다니!" 현의노인은 간신히 그의 장력을 피하면서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 다. 하지만 자신의 밑천은 이미 바닥나 버렸으니, 마음만 안타까 울 뿐이었다. 학운기는 이제 그들에게서는 더 이상 배울 게 없음을 깨닫자 그만 떠나기로 했다. "후후… 그 동안 독문무공(獨門武功)들을 전수해 주시느라 수고들 하셨으니 이제 편히 쉬도록 하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윽!" "헉!" 털썩－ 털썩－! 황의인들은 묵직한 신음을 터뜨렸고 혼혈(昏穴)이 짚여 하나둘씩 땅바닥으로 쓰러져 갔다.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르자, 이제 두 현의노인밖에 남지 않았다. 학운기가 여유 있는 웃음을 띄우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후후… 자, 당신들도 더 이상의 재간이 없으면 쉬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중에 깨어나서 방에 돌아가면 패천마황이란 분께도 그 동안 호의에 감사하더란 말을 잊지 말고 전해 주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그들에게 덮쳐 갔다. 그들은 황급히 놀라면서 급급히 몸을 피했으나, 이미 혼이 반쯤은 달아난 그들이 그의 손을 피할 수는 없었다. 털썩－ 털썩－! 두 마디의 둔탁한 음이 들리면서 그들도 수하들을 따라서 아득한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다. 학운기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우고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관도 쪽 으로 몸을 옮겼다. 몇 발짝을 옮기던 그는 갑자기 경공술(輕功術)을 시험해 보고 싶 었다. 그는 단전에 기를 모으고는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은 마치 새처럼 십여 장을 떠오르더니 앞으로 쑥 날아갔 다. '아, 내 몸이 하늘을 날 수 있다니…….' 그의 가슴 속은 지금 환희(歡喜)와 격동(激動)으로 가득 차 있었 다. 그는 글로 읽을 때는 별로 못 느꼈던 무공의 신비함을 막상 펼쳐 보면서 그것의 현묘함에 거듭 놀라움과 환희가 물결치는 것이다. 이제까지 학문(學文)만이 인간 최대, 최후의 기쁨으로 알아왔던 그는 막상 무공이라는 것을 접해 보고는 그것의 묘미에 완전히 푹 빠져 버렸다. 그는 무공도 하나의 학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무학(武學)! 과연 그의 무학에 대한 호기심이 앞으로 무림에 어떤 파문(波紋)을 던질지……. 학운기는 경공(輕功)을 펼친 지 한 시진도 못 되어서 악양성 근처 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가 더할 수 없이 상쾌한 기분과 천하를 얻은 듯한 마음으로 몸 을 날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앳된 소녀의 목소리와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는 그냥 지나치려다 그들이 다투는 듯하여 문득 호기심이 발동 하였다. 순간 그의 몸은 이미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당도했을 때 십오륙 세 되어 보이는 청의소녀가 거지노인과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청의소녀는 매우 발랄한 듯하였으나 얼굴에는 순진스러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 '아, 매우 아름다운 소녀구나.' 학운기가 내심 탄성을 금치 못할 만큼 그녀의 미모는 뛰어난 것이 었다. '후후… 저 노인은 태어나서 한 번도 몸을 씻지 않은 것 같구나.' 학운기는 소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거지노인을 보고는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거지노인의 머리는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서 까치가 열 마리는 살 수 있을것 같았고, 옷은 본래의 천이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더 덕더덕 기워져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다 헤어져서 살이 보일 지 경이었다. 그리고 학운기가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은 거지노인의 신발이었다. 한쪽은 빨간 꽃신이었고, 한쪽은 더덕더덕 떨어진 짚신이었다. 거지노인의 표정은 차림새 못지않게 더 우스웠다. 땟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에 하늘을 바라본 코가 씰룩거리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학운기가 거지노인을 바라보면서 내심 요절복통을 하고 있을 때 소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빨리 비키세요. 나는 이미 사부님이 계신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히히… 얘야, 너의 사부가 누군지는 모른다만… 아마 내가 너를 제자로 삼겠다는 것을 안다면 고마워서 매일 쫓아다니며 절을 할 거다." "정말 비키지 않을 거예요?" "히히… 얘야, 너도 아마 내가 누군 줄 알면 잘못했다고 골백번 절을 할 거다." 거지노인은 짐짓 점잖은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 다. "어어험, 어르신네는 바로 주걸신개(酒乞神 ) 맹천의(孟天義)이 시니라." 그러나 소녀는 그러한 별호와 이름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듯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런 시시껄렁한 별호로 괜히 겁주려고 하지 말고 어서 비키세 요." 그녀는 싸늘하게 쏘아붙이고는 주걸신개 맹천의의 옆을 스치고 가 려 했다. 하나 주걸신개는 그녀의 앞을 다시 가로막더니 히죽거렸다. "히히… 얘야, 도대체 너의 사부는 누구이기에 나의 별호도 말해 주지 않더냐?" "우리 사부님은 요진선고(姚晋仙姑)예요." "뭐라고?" 주걸신개는 흠칫 놀라는 듯하였다. 소녀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피어 올랐다. "내가 당신이 불쌍해서 사부님께 이르지는 않을 테니, 어서 비키 세요." 그러나 주걸신개는 다시 히죽거리며 그녀의 앞을 막았다. "히히… 얘야, 너의 사부가 다른 사람은 겁 줄지 몰라도 나에게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단다." 소녀의 아름다운 눈이 무섭게 치켜떠지며 그를 노려보았다. "뭐라고요? 내가 지금 당신이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 줄 아세요? 더러워서 피하려는 거지." 주걸신개는 그녀의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히죽거렸다. "히히… 얘야, 만약 네가 나의 무공을 한 번만 본다면 마음이 달 라질 것이다." 그는 말을 하면서 거의 이천 근은 넘는 듯한 바위를 향해 소맷자 락을 슬쩍 휘둘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바위는 그대로였다. 주걸신개는 그것을 보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 다. "어떠냐? 이만하면 너의 사부 정도는 흉내도 내지 못할 것이다." "호호호… 그래요. 우리 사부님은 그러한 것은 흉내도 못 내요. 호호……!" 고목나무 위에서 지켜보던 학운기도 마침내는 그의 우스운 표정과 억지를 보고는 대소(大笑)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노인어른, 어찌 싫다는 사람을 그토록 붙드는 것이오?" 그는 말을 하면서 그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소녀는 그의 갑작스런 출현에 매우 놀란 듯하였으나 주걸신개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히히… 요 녀석아, 나오려면 좀 빨리 나와야 내가 고생을 덜 하 지." 학운기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소녀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고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 다. "히히… 요것들 봐라. 만나자마자 하나는 넋을 잃고, 하나는 그것 에 맞장구를 치네." 주걸신개의 농에 둘의 얼굴은 더욱 새빨갛게 변해 버렸다. 주걸신개가 다시 히죽거리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히히… 애야, 어떠냐? 네가 나의 제자가 된다면 이토록 멋있는 신랑감도 구해 주겠다." 소녀가 얼굴을 도화빛으로 물들인 채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정말 싫다는 사람을 왜 이러세요?" "요것아, 내가 너를 제자로 삼으려고 며칠을 쫓아다녔는데… 네가 싫다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냐?" 학운기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주걸신개가 무척이나 답답함 을 느꼈다. "어르신네! 세상에는 무공을 배우려는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이 면 꼭 이 낭자만을 제자로 삼으려 하십니까?" 주걸신개가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다. "이 녀석아! 천하에 태음신맥(太陰神脈)을 타고난 사람이 무더기 로 있다더냐?" "태음신맥이라니요?" "허어, 요런 쑥맥 같은 녀석 보게. 무공은 제법 고강한 것 같은데 그런 것도 모르다니." "그럼 배우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이오?" 학운기는 그가 무안을 주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헤, 요런 녀석 좀 보게. 네놈의 사부는 누구이기에 그런 것도 가 르쳐 주지 않더냐?" "나는 사부가 없소. 그리고 내 이름은 학운기지, 녀석이 아니오." "뭐라고? 허어, 요즘 애들은 점점 버릇이 없어진단 말이야." "그럼 노선배께서는 버릇이 좋아서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제자로 삼으려 하시오?" "허어, 요놈이 처음 본 소녀한테 반해서 존장도 몰라보는구나." 그는 말을 하면서 갑자기 학운기의 맥문을 잡아 왔다. '후후… 당신 정도의 무공쯤이야.' 학운기는 내심 고소를 지으면서 여유 있게 그의 손을 피했다. 그러나 분명히 피했다고 생각되는 손이 계속 자신의 맥문을 잡아 오는 것이 아닌가? 학운기는 얼굴에 놀라운 표정을 띄우면서 현령보법(玄靈步法)을 최대로 펼쳤다. 순간 주걸신개가 흠칫 놀라는 듯하였다. "히히… 요놈의 무공은 그런대로 쓸 만하구나." 그는 한 번 히죽거리고 나서는 계속 학운기를 잡아 왔다. 그의 손은 어떻게 된 건지 유령(幽靈)보다도 신묘(神妙)하게 피하 는 학운기를 계속 따라다녔다. 학운기는 자신이 아무리 빨리 현령보법을 펼쳐도 결코 그의 손에 서 완전히 벗어나지를 못하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 이토록 꾀죄죄하고 거지 같은 노인의 무공이 이 정도라니… ….' 그는 겉모습만 보고 상대방을 평가한 자신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 다. 하지만 지금은 주걸신개의 손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소녀는 떠나는 것은 생각도 못한 채 그들의 기묘(奇妙)한 대결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한 식경 정도가 흘렀다. 주걸신개는 학운기의 몸이 곧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자, 속으 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아, 내가 벌써 늙었단 말인가? 요런 어린 녀석 하나를 제대로 붙 잡지 못하다니…….' 그는 갑자기 자신의 무공에 대해 회의(懷疑)를 느꼈다. 그의 손이 약간 느려지는가 싶자, 학운기가 그의 손에서 완전히 빠져 나가 버렸다. 그가 내심 마음을 굳게 다져 먹고 학운기를 다시 덮쳐 가려 할 때 는 학운기가 그의 손을 잡아 오고 있었다. "엇!" 뾰족하고 투박한 두 마디의 비명이 동시에 들리며 주걸신개의 몸 이 위로 십 장이나 퉁겨 나갔다. 그의 얼굴은 마치 소태를 씹은 듯 형용치 못할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너… 너는 나의 추혼금나수법(追魂擒拿手法)을 누구에게서 배웠 느냐?" 학운기는 그의 놀라는 모습이 무척이나 우습게 보였다. "후후… 아까 노선배님께서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까?" "뭐라고? 내가 언제 가르쳐 주었단 말이냐?" "방금 노선배께서 나를 잡으려고 이렇게……." 그는 말을 하면서 주걸신개가 펼치던 것을 그대로 흉내내었다.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주걸신개가 펼치는 것보다도 능숙하게 보 일 정도였다. "아……!" 주걸신개와 소녀는 멍하니 넋을 잃어버렸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주걸신개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렇다면 너는 내가 펼친 것을 보고 배웠단 말이냐?" "그렇소." "그러면 너는 혹시……." 그는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다시 학운기에게 급작스럽게 덮쳐 갔다. "앗!" 학운기는 그의 돌연한 기습에 흠칫 놀라면서 급급히 현령보법을 펼쳤다. 주걸신개의 이번 공격은 처음의 추혼금나수법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현묘(玄妙)한 수법이었다. 학운기는 그의 놀라운 절기(絶技) 앞에 어쩔 줄을 몰라서 겨우겨 우 피하고만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주걸신개가 우뚝 멈춰 서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주걸신개는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표정에서는 조금 전의 장난기는 싹 사라져 버렸고, 어떤 위엄마저 은은히 내비치고 있었다. "너는 방금 내가 펼친 초식들을 펼쳐 보아라." 그의 말에는 거역치 못할 위엄이 있었다. 학운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말대로 행하고 있었다. 학운기의 행동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던 주걸신개가 갑자기 앙천 대소(仰天大笑)를 터뜨렸다. "하하하… 맞았다, 맞았어! 천빈성(天斌星)! 그래, 천빈성이야! 주인님, 드디어 주인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학운기와 소녀는 그의 돌연한 태도에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주걸신개는 한참을 격동에 찬 태도로 서 있다가 학운기에게 다가 왔다. "얘야, 너의 이름이 학운기라고 했지?" 학운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주걸신개는 감격에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는 갑자기 입을 달싹거렸다. 순간 그의 귀에 모기보다 가느다란, 그러나 똑똑한 전음(傳音)이 파고들었다. "얘야, 너는 앞으로 일 년 안에 청해(靑海)의 합랍호(哈拉湖)로 오너라.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천명(天命)이니, 꼭 시행해야 한 다. 청해의 합랍호를 잊지 말아라." 그는 학운기를 다시 한 번 바라보더니 몸을 움찔하는가 싶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 "앗!" 두 마디의 각각 다른 탄성이 터졌다. 과연 당금(當今)의 무림(武林)에 이토록 절륜한 경공을 시전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학운기는 그의 상상도 못할 경공을 보고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아, 그분은 정체를 숨기신 고인(高人)이셨구나. 그것을 몰라봤다 니… 그런데 청해의 합랍호로 오라는 것은…….' 이 때 옆에서 멍하니 넋을 잃고 있던 청의소녀가 제정신이 들었는 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소협, 고마워요." "예? 아, 예.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아니예요. 만약 소협이 아니었다면 오늘 나는 꿈에서도 보기 싫 은 그 늙은 거지에게……." 그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을 오싹 떨었다. '후후… 이 낭자는 그분에게 단단히 혼줄이 난 모양이구나.' 그는 고소를 지으면서 무심코 주걸신개가 가볍게 소맷자락을 휘둘 렀던 바위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위는 이미 그 곳에 없었다. 단지 그것의 가루인 듯한 아주 고운 분말(粉末)이 수북히 쌓여 있을 뿐이었다. '아, 나는 사부님의 무공이 천하제일(天下第一)인 줄 알았는데… ….' 청의소녀는 이 때서야 비로소 그 거지노인이 자신의 사부 못지않 은 무림기인(武林奇人)인 것을 인정했다. 학운기도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하였다. '아, 과연 인간의 힘으로 저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분은 주인이라고 불렀는데, 그 주인이라는 사람은 신(神)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는 무학의 길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깊게 실감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야망(野望)을 부풀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꼭 그러한 무공을 배우고 말 테 다.' 그는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굳은 다짐을 했다. 이 때 소녀의 맑은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소협, 소협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예, 소생은 악양으로 가던 중입니다." 소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 마침 잘됐군요. 소녀도 악양으로 가려던 참인데……." 학운기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였다.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보니, 더욱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소녀도 그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얼굴이 빨갛게 물들여졌다.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그가 주걸신개와 다투고 있을 때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것이 자신을 꼭 묶어 잡아 두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꼭 만나야 될 사람을 만난 것 같은 홀가분 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마치 전생(前生)에 무슨 인연이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그를 영원히 따라야 될 운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처녀가 무슨 망령된 생각이냐고 심하게 반 발해 보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학운기가 그녀에게 한 발 다가섰다. "실례요만, 낭자의 방명(芳名)은? 소생은 학운기라 하오만……." 그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아차 했으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내가 오늘 정말 왜 이러지? 처음 본 소녀의 이름을 다 묻고… ….' 이 때 소녀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 학 소협이셨군요? 소녀는 서문정(西門楨)이라 합니다." "매우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그런데 아까 주걸신개란 분이 낭자더 러 태음신맥이라 하던것 같던데, 무슨……." 서문정이 부끄러운 듯 살포시 웃었다. "예, 그것은 무공을 익히기에 아주 적합한 특이체질을 말합니다." 이어서 그녀는 태음신맥과 태양신맥, 그리고 오음(五陰), 삼음절 맥(三陰絶脈)들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태음신맥이란 태어날 때부터 영원히 임독양맥(任督兩脈)이 막히지 를 않아 무공을 익히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체질이지만 이 태음신맥을 남자가 타고나면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고질(痼疾)이 된다는 것과, 남자라면 의당히 태양신맥(太陽神脈)을 타고나야 한 다는 것을……. 학운기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는 다시 한 번 놀라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그래서 그분이 이 소저를 제자로 삼으려고 그토록 끈질기게 굴었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포기를 하고…….' 서문정이 멍하니 생각을 굴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학 소협, 그만 가야죠?" "아, 예. 갑시다." 그들은 악양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 第 4 章 피를 부르는 금갑(金匣) ====================================================== 동정호(洞庭湖)는 역시 절경(絶景)이었다. 서문정과 함께 악양성에 들어온 학운기는 중원제일(中原第一)의 주루(酒樓)인 악양루(岳陽樓)에 가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동정호의 절경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지금 학운기와 서문정이 앉아 있는 자리는 자리값만 하더라도 황 금 한 냥이어서, 웬만한 사람은 앉아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학운기는 그렇게 사치스럽게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남아 있 는 자리가 그 곳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앉은 것이다. 주루 안에는 이상하게도 거의 대부분이 무림인(武林人)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음식이나 동정호의 경치 같은 것은 관심 밖이라 는 듯이 끼리끼리 고개를 숙이고는 무언가를 숙의하고 있었다. 학운기는 처음 이 곳에 들어와서 동방군이 무슨 서찰이라도 남기 지 않았나 하고 점원에게 물어 봤으나 그러한 것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어긴 약속이지만, 군자의 도리를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짐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가 한 잔의 술을 들이키면서 동정호의 절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그의 귀에 금갑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 천면요희(千面妖姬)의 처참한 시신(屍身) 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즉시 최대의 공력으로 지청술(地聽術)을 전개하였다. 즉시 수만의 웅성거림이 들려 왔지만 멍멍하게 귀를 울릴 뿐,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한 군데에 집중시켜야만…….' 그는 내심 실소(失笑)를 흘리며 흥분하여 입을 놀리는 네 명의 중 년인들에게로 지청술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말이 똑똑하게 들려 왔다. "형님,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밤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글쎄, 우리의 현재 실력으로는 이 많은 고수들을 따돌리고 금갑 을 차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부지리(漁父之利)를……." "그 수밖에 별다른 수가 있겠느냐?" "그렇다면… 형님, 우리는 먼저 가서 은신(隱身)을 해야……." "그렇지. 자, 빨리 나가자." 그들은 급히 서두르더니 곧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니? 그렇다면 금갑이 어디에 곧 나타난단 말인가?' 그는 생각을 한창 굴리다가 또 다른 탁자에 지청술을 집중시켰다. 그 곳에는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과 검은 면사(面紗)를 쓴 여인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 정말로 오늘 밤 삼경에 수라절혼마(修羅切魂馬)라는 마 두가 금갑을 가지고 그 곳에 나타날까요?" "용아야, 원래 무림인들은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 에 그는 틀림없이 그 곳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너는 금갑을 수 중에 넣는 즉시 수풀이나 동굴 속에 숨어서 네가 참을 수 있을 데 까지 참아야 한다. 하루고 이틀이고 간에 무림인들이 완전히 사라 질 때까지 말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매우 굳은 각오가 어려 있었다. "그렇다면 어머니께서는……."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너는 금갑을 얻으면 그것에 있는 대로 찾아가서 무공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 수를 꼭 갚아야 된다. 내 말, 잘 알겠느냐?" "예, 어머니." 소년은 무언가 불길한 것을 예견한 듯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아, 그렇다면 그 금갑이 무슨 무공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가리키 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남의 물건을 갈취할 생각은 없었지만, 호기심을 누를 길이 없어서 오늘 밤 그들이 가는 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앞에 앉은 서문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창 밖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낭자, 그만 일어납시다." "아, 예. 학 상공께서는 어디 갈 데라도……." "아니오. 오늘 밤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우선 휴식을 취할까 해서요." "예? 그럼 학 상공께서도 금갑에 대하여……." "아니? 낭자께서도 알고 있는 일이었소?" "상공께서는 모르시고 계셨던가요? 모든 무림인들이 다 아는 사실 인데……." 그녀는 말을 하다가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히며 얼른 입을 닫아 버렸다. "하하… 괜찮소이다, 낭자. 나야 아직 무림의 무자도 모르는 서생 이 아니오? 그런데 그 금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귀중한 인명까지 앗아 가면서 그것을 탈취하려 하오?" "그것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단지 무공비급이나 무슨 영보(靈寶)가 들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을 듣자 학운기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단지 추측만으로 그 같은……?" "호호… 학 상공께서도 무림인들과 접촉하다 보면 그들의 생리를 이해하실 거예요." "그런데 수라절혼마라는 자는 금갑을 얻었으면 멀리 떠나가지 않 고 왜 다시 군웅들 앞에 나타난다는 거요?" "예, 그것이 그 자의 음흉한 속셈이죠. 이미 강호 전역에 천라지 망(天羅之網)보다도 엄밀한 무림인들의 눈이 깔려 있어서 쉽게 잠 적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하려는 거지요." 학운기는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자는 무림인들의 시선을 집중시켜 놓고 그들을 모두 지치게 한 다음, 그것을 빼돌려서……."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자의 무공이 절정(絶頂)에 이르렀단 말이오?" "예. 사부님의 말씀으로는 그 자는 무림 십대고수(十代高手) 중에 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래요." "아, 그런데 십대고수란 누구를……?" "예, 그들은 무림의 최절정고수(最絶頂高手) 열 명을 가리키는 것 인데……." 이어서 그녀는 무림십대고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무림십대고수 중에는 정파인(正派人)이 다섯 명, 사파인(邪派人) 이 세 명, 그리고 정사(正邪) 중간의 인물이 두 명있다. 정파인은 현 정파무림의 영수(領首) 격인 무림성군(武林聖君) 황 보웅(皇甫雄), 소림 장문인 사숙인 무아신승(無我神僧), 중원선협 (中原仙俠) 동방군(東方君), 그리고 서문정의 사부인 요진선고(姚 晋仙姑)와 성수옥룡(聖手玉龍) 제갈휘(諸葛輝)였다. 사파인은 패천마황 소무극, 무극존마(無極尊魔) 빙대황(氷大皇), 냉면노군(冷面老君) 구천혈(丘天血)이었다. 그리고 정사의 중간 인물은 열화신군(烈火神君) 승검평(承劍平)과 수라절혼마 엄능야였다. 서문정은 이 밖에도 무림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는 일궁(一宮), 이보(二堡), 삼방(三幇)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일궁에 무림제일궁(武林第一宮), 궁주는 무림성군 황보웅이었다. 이보는 한천보(寒天堡)와 열화보(烈火堡)인데, 보주는 각각 냉면 노군 구천혈과 열화신군 승검평이었다. 삼방은 경혼방, 천마방, 성룡방인데… 방주는 패천마황 소무극과 무극존마 빙대황, 그리고 성수옥룡 제갈휘가 맡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림십대고수의 대열에 끼인 현 무림의 최절정고수들 이었다. 학운기는 서문정의 긴 설명을 듣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낭자, 우리도 이만 가서 쉬고 오늘 밤 삼경에 일어나는 일들을 구경이라도 합시다." "예, 학 상공." 그들은 악양루를 나와서 객점에 들어갔다. 객점은 모두 만원이라서 방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몇 군데 를 뒤진 끝에 겨우 방 하나를 구할 수가 있었다. 학운기가 난처한 표정으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을 때 서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학 상공, 소녀는 사부님과 약속한 곳에 가 봐야 하니… 상공께서 들어가 쉬세요. 상공, 오늘 밤 삼경에 뵙겠어요." "낭자……."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객점 밖으 로 나가 버렸다. 떠나가는 그녀의 눈에는 비록 잠시 동안의 헤어짐이지만 서운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학운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방 안으로 들 어갔다. 그는 운기행공을 취한 다음, 오늘 낮에 주걸신개로부터 배운 두 가지 절기(絶技)들을 반복해 해 보았다. 두 가지 절기는 연마하면 할수록 더욱 현묘(玄妙)해지는 것 같았 다. '음, 그분의 무공으로 보면 강호의 어떤 절정고수들보다 높을 것 같은데… 왜 서문 낭자가 그의 별호를 모르고 있었을까?' 그가 한창 의문스러운 점들에 골몰하고 있을 때. 그의 귓전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들이 계속 들려 왔다. '벌써 삼경이 가까워 온 모양이구나.' 그는 일어나서 다시 한 번 행장을 수습한 다음, 조용히 창문을 열 고 밖으로 나갔다. 달도 없는 하늘에는 몸을 날리는 무림인들이 간간이 보였다. 그도 진기를 단전에 모은 다음 힘껏 몸을 날렸다. 몇 명의 인영(人影)이 그의 뒤로 처졌다. 이제 겨우 두 번째 펼치는 경공이었지만, 결코 일류고수들의 그것 에 못지않게 빠르고 유연했다. 한 시각쯤 달렸을까? 돌연 앞서 가던 몇 명의 인영들이 모두들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숲 속에는 커다란 공지가 있었다. 학운기도 즉시 한 고목위로 몸을 숨겼다. 순간 날카로운 두 줄기의 신광(神光)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아 닌가? 그는 흠칫 놀랐으나 다른 나무 위에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는것을 알고는 그냥 한쪽에 몸을 숨겼다. "꼬마야, 너도 보물이 탐나서 온 것이냐?" 날카로운 전음(傳音)이 그의 고막을 울렸다. 그는 꼬마라는 말에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왜? 나는 안 될 것 같소?" 처음 펼치는 전음이라 매우 어색했으나, 상대방에게는 똑똑히 전 달된 것 같았다. "후후… 애송이 녀석이 배포 하나는 크구나." 학운기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자꾸 꼬마니, 애송이니 하는 말은 하지 마시오." "후후… 그래 계속한다면 나를 어쩔 셈이냐?" 학운기는 욕이라도 한바탕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그냥 꾹 눌러 참았다. 상대는 그가 아무 말도 안 하자 계속 전음을 보냈다. "애송아, 너의 사부는 누구냐?" "나는 사부가 없소이다." "그럼 무공을 어디서 배웠느나?" "그냥 배웠소." "그냥?" 상대는 한참을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는 다시 전음을 보냈다. "애송아! 너의 경공을 보건대, 상당히 고절한 무공을 익힌 것 같 더구나. 너는 오늘 밤 나하고 합작할 마음이 없느냐?" "나는 보물에 흥미가 없소이다." "그렇다면 무엇 하러 왔느냐?" "그냥 구경하러 왔소." "후후… 그렇지만은 않을 걸?"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마시오." "뭐라고? 소인?" 상대가 노한 듯 무슨 행동을 취하려 할 때. "와하하하……!" 공중에서 광소(狂笑)가 들리며 화의(華衣)를 입은 노인이 천천히 떨어져 내려왔다. "아……!" 학운기는 그의 놀라운 경공을 보고는 탄성을 질렀다. 이제까지 빠른 경공만을 몇 번 보아 온 그로서는 인간이 공중에서 그토록 천천히 내려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때 전음이 다시 그의 고막을 울렸다. "후후… 꼬마야, 놀랐느냐? 저 자가 바로 수라절혼마 엄능야란다. 만약 네가 나의 제자가 된다면, 저 자보다 몇 배 고강한 경공술을 가르쳐 주겠다." "그렇다면 당신도 십대고수 중에 끼였소?" "후후… 십대고수? 그런 것은 나하고 상관이 없다. 하지만 경공만 은 천하에서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후후… 꼬마야, 너도 섬전신개(閃電神 )라는 별호를 들어 봤겠 지? 내가 바로 섬전신개 육대강(陸大江)이다." "들어 보지 못했소." "뭐라고?" 이 때 다시 광소가 울려 퍼졌다. "와하하… 자신 있는 자들은 모두 이것을 뺏어 가 보아라!" 수라절혼마 엄능야가 금갑을 손에 쥐고는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 다. 모두들 눈치만 보고 있는지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학운기는 엄능야가 아무리 무공이 높다지만 도대체 무엇을 믿고 천여 명은 숨어 있는 이 숲 속에서 큰 소리를 치는지 자못 의아스 러웠다. "와하하… 이 겁보들아! 그렇게 자신이 없으면 무엇 때문에 나의 뒤를 졸졸 따르느냐? 하하… 모두들 썩 꺼져라." 그는 말을 하면서 사방으로 위맹한 장력들을 펼쳤다. 쾅－ 쾅－ 콰르릉－! "아악!" "으윽!" 미처 피하지 못한 자들은 무공이 약한지 두 마디의 단말마가 캄캄 한 밤 하늘에 울려 퍼졌다. 이 때 우렁찬 불호가 들리며 십여 명의 승인이 엄능야 앞으로 떨 어져 내렸다. "아미타불… 엄 시주는 손속을 멈추기 바라오." "흐흐… 백인(白仁), 당신도 이것이 탐이 나서 왔소?" "아미타불… 엄 시주, 노승은 단지 혈겁을 미연에 방지코자……." "흐흐… 그런 입술에 침도 안 바른 소리는 집어치우고… 자, 필요 하면 받으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손에 든 금갑을 미련 없이 백인 대사 앞으로 던 져 버렸다. "앗!" "엇!" 그의 돌연한 태도에 수십 마디의 탄성이 숲 속에 울려 퍼졌다. "아미타불… 엄 시주, 노승의 고충을 이해해 주시니 고맙소. 한 데, 이것은 혹시……." 이 때. "하하… 백인 대사, 그것은 원래 나의 물건이니 돌려주시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인 대사 앞에 금의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패천마황 소무극이었다. 백인 대사는 그의 출현에 흠칫 놀라는 듯하였다. "아미타불… 소 시주, 강호에 떠도는 물건에 어찌 주인이 있겠소? 그리고 이것은 아직 진가(眞假)도 모르는데……." "하하… 대사, 그렇다면 강호에 떠도는 물건이 모두 소림의 것이 란 말이오?" "아미타불… 소 시주, 그런 것이 아니라 강호에 피바람을 일으키 는 마물(魔物)은 당연히 우리 소림에 보관하는 것이……." "와하하… 대사, 어찌 말 못하는 짐승도 배꼽을 잡고 웃을 소리를 하시오?" 백인 대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싸늘하게 굳어졌다. "소 시주,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오." "와하하… 그렇다면 나에게 덤비기라도 하겠단 말이오? 그 알량한 실력으로……?" 순간 백인 대사의 옆에 서 있던 중년승인이 분함을 이기지 못했는 지 그에게 덮쳐 들었다. "시주, 말을 조심하시오!" 쾅－! 커다란 굉음이 들리며 흙먼지와 풀 등이 밤 하늘을 더욱 어둡게 만들어 버렸다. 쾅－ 쾅－! 쉬이익－ 피이융－! 그와 동시에 폭음과 암기가 날으는 소리들이 계속 들려 왔다. "아악!" "으악!" 삽시간에 넓은 공지는 앞을 분간할 수도 없을 만치 흙먼지와 풀 등이 날렸고, 끊임없는 단말마와 굉음들이 계속 들려 왔다.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혼란이었다. 장중을 바라보던 학운기도 사태가 이토록 급작스럽게 변해 버리자 멍청해져 버렸다. 장내에서는 거의 오백여 명의 인영들이 치열한 격투를 벌이고 있 었다. 주위에서 숨어서 지켜보던 인물들이 찰나적인 욕심에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이 때 학운기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한 고목 위에서 음흉한 웃음을 흘리면서 장중의 혼란을 내려다보고 있는 수라절혼마 엄능야를 보 고는 몸을 흠칫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자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혈겁을 일으킨단 말인가?' 그는 또한 저런 금갑 하나가 순식간에 처절한 혈투를 불러 일으키 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한창 엄능야의 의중을 추측하고 있을 때, 돌연 장중이 조용 해졌다. 장중에 흘날리던 먼지들이 가라앉자 처참한 장내가 눈에 들어왔 다. 장내에는 거의 이백여 구의 처참한 시신들이 뒹굴고 있었다. 백인 대사는 가슴을 움켜쥐고 입술 사이에서는 계속 피를 흘리고 있었고, 그와 같이 왔던 십여 명의 승인 중 살아남은 사람은 두 명밖에 없었다. 패천마황 소무극도 한쪽에서 숨을 씩씩거리며 한 곳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처참한 시신들이 뒹굴고 있는 장내의 한 중앙에는 금갑이 별빛을 받아서 어슴푸레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탐욕의 눈으로 그것을 쳐다만 보 고 있을 뿐, 누구 하나 선뜻 주우려 하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와하하하……!" 돌연 광소(狂笑)가 터지며 엄능야가 장중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림동도 여러분! 저 금갑은 이러한 혈겁만을 일으키는 마물이 오. 여러분들 중에 이러한 혈겁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저 금갑을 가져가시오." 엄능야가 조용한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금갑이 있는 데로 걸어가 려 할 때였다. "엄형, 멈추시오." 폭갈이 터지며 소무극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엄능야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소무극을 바라보았다. "흐흐… 소형, 보물 하나 변변히 지키지 못하면서 또 나서겠단 말 이오?" 소무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말이 아니었다. "흐흐… 엄형은 이제 이 소모까지 능멸하려 하는구려." 그는 말을 하면서 위맹한 장력을 펼치며 엄능야를 덮쳐 갔다. 그의 장심에서는 푸르스름한 기류(氣流)가 뻗쳐 나갔다. 엄능야도 대비하고 있었던지 장력을 마주 펼졌다. 그의 장심에서는 불그스름한 기류가 뻗쳐 나왔다. 쾅－ 콰르릉－! 엄청난 폭음이 터지며 두 사람의 중앙에 엄청난 용권풍(龍拳風)이 생겨 회오리쳤다. 찰나, 그 용권풍은 하늘 높이 솟구쳐 버렸다. 이 때 하나의 왜소한 인영이 빛살과도 같이 금갑으로 덮쳐 갔다. 그 인영은 금갑을 잡더니, 서쪽을 향해 번개를 무색케 할 만큼의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쉬익－ 피이잉－!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고는 그 인영의 뒤를 쫓 아갔다. "꼬마야, 빨리 따라와라!" 섬전신개 육대강도 학운기에게 소리치고는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그의 별호대로 번개였다. 학운기는 최대의 공력을 끌어올리고는 몸을 날렸다. 금갑을 채 가지고 몸을 날렸던 왜소한 인영이 추격하는 사람의 암 기(暗器)에 맞았는지 아래로 추락했다. 그 인영은 아래로 추락하면서도 금갑을 한쪽으로 세게 던졌다. 텅－ 쾅－! "으악!" 날카로운 단말마가 들리면서 그 왜소한 인영은 뒤쫓는 사람들의 장력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떡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 금갑이 날아간 쪽에서 어린 소년의 처절한 부르짖음이 들려 왔다. 그러나 소년은 부르짖음을 다 내뱉기도 전에 누군가의 암습을 당 해 처절한 단말마를 토해 내는 것 같았다. × × × 학운기가 비명이 들려 온 곳에 도착했다. 섬전신개 육대강이 두 줄기 인영을 번개가 무색할 속도로 쫓고 있 었고, 그 뒤로 엄능야와 소무극이 바짝 쫓고 있었다. 그 뒤로는 숲 속에 숨어 있던 천 명에 가까운 인영(人影)들이 쫓 아가고 있었다. 학운기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이 우거진 곳에 조그만 인영이 쓰러져 있었다. 학운기가 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역시 악양루(岳陽樓)에서 보았던 용아라는 소년이었다. 학운기가 급히 그의 가슴에 귀를 댔다. 미미한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렸다. 학운기는 즉시 그를 안고 조용한 숲을 찾아서 달려갔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쯤 달렸을때, 다 쓰러져 가는 산신묘(山神廟) 를 발견했다. 그는 산신묘 안으로 들어가서는 소년을 눕혔다. '음, 애를 어떻게 치료하지?'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는 문득 진기(眞氣)를 주입시키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가장 주입하기 쉬운 명문혈(命門穴)로…….' 그는 즉시 소년을 엎어 놓고는 명문혈에다 진기를 주입시키기 시 작했다. 진기는 생각한 것처럼 잘 주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진기는 실낱처럼 가느다랗게 서서히 주입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쯤 흘렀을까? 진기를 주입시키는 그의 얼굴은 불붙은 것처럼 붉어져 있었고, 머 리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소년은 아직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진쯤 지났을까? 그는 정신이 몽롱해 옴을 느꼈다. 하지만 죽어 가는 소년을 살려야 되겠다는 신념은 그의 행동을 멈 추게 하지 않았다. 다시 한 식경쯤 흘렀을까? 급기야는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완전히 탈진(脫盡)이 되어 버 린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인적이 없는 산신묘 안에는 크고 작은 두 소년만이 죽은 듯이 엎 드려 있을 뿐, 가끔 밤 짐승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만이 들려 왔다. 학운기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산신묘 안으로 가느다란 햇살이 들 어와서 그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을 때였다. 옆에는 소년이 아직도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처는 많이 호전된 듯, 고르고 뚜렷한 숨소리가 들 려 왔다. 학운기는 자신의 몸에 맥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는 즉시 운기행 공을 시작했다. 그의 단전에서는 의외로 막강한 진력이 용솟음쳐 올라왔다. 전에 는 느껴 보지 못했던 힘이었다. 그가 운기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는 가을밤의 별보다 영롱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옆에는 소년이 언제 깨어났는지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 다. "너, 일어나 있었구나!" 그의 말을 듣자, 소년은 즉시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는 그에게 큰절을 올렸다. "용아가 구명(求命)의 은인(恩人)께 감사를 드립니다." 학운기가 어색해 하며 그의 몸을 일으켰다. "절은 무슨… 어서 일어나거라." 소년은 지금 그의 신비스러운 눈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의 입가에는 천하의 어떤 미인의 미 소보다도 고혹적인 미소가 피어 올랐다. "얘야, 너의 이름은 무엇이지?" "예, 진금룡(陳金龍)이라고 해요." "그래, 어디 갈 곳은 있느냐?" 금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는 무공을 익혀야 해요. 그래서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 야만 해요." 말을 하는 그의 눈에서는 살기가 줄기줄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음, 아직 어린 나이에 저토록 깊은 원한을 가졌으니… 하긴 자기 어머니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했으니…….' 학운기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는 즉시 부드러운 얼 굴을 했다. "용아야, 내가 너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마. 그리고 네가 원한다 면 내가 알고 있는 무공도 전수해 주도록 하마." 진금룡의 얼굴이 활짝 폈다. "고맙습니다, 형님. 이 은혜를 뭘로……." "하하… 그런 소리 말고 어서 가기나 하자." "예." 이윽고 그들은 산신묘를 떠나서 혈겁의 장소로 갔다. 진금룡은 그 곳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짓뭉 개진 어머니의 시신을 보더니 기절하고 말았다. 학운기는 그러한 진금룡을 옆에다 놔 두고 시신을 수습해서는 양 지바른 곳에다 묻어 주었다. 동정호(洞庭湖)의 남쪽에 위치한 악양(岳陽)으로 통하는 관도에 두 소년이 걷고 있었다. 학운기와 진금룡이었다. 학운기가 깨어나서 어머니가 묻힌 봉분을 붙잡고 울부짖는 진금룡 을 겨우 달래 이 곳까지 온 것이다. 악양에는 진금룡의 이모가 한 분 살고 계시다고 했다. 학운기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진금룡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 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무림의 유명한 협사(俠士)였다. 할아버지는 하남고검(河南孤劍) 진원경(陳元景)이었고, 아버지는 금검의협(金劍義俠) 진무양(陳武揚)이었다. 그들은 하남 무림의 평화에 거대한 공헌을 한 협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일단의 흑의복면인들이 그들의 집안을 습격하 여 진원경과 진무양은 장렬히 싸우다가 최후를 마쳤고… 진금룡만 이 어머니 품에 안겨서 간신히 도주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두 달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흑의복면인들이 노린 것은 물론 진원경 부자(父子)의 목이 아니었 고, 금갑이었다. 그 금갑은 진금룡도 많이 보아 왔던 것인데, 겉에 알 수 없는 이 상한 그림만이 새겨져 있었고… 도저히 열리지 않았다. 진금룡 어머니는 나중에 그것이 무공비급이 숨겨진 위치를 가리키 는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그것을 다시 찾으려고 악양까지 왔다 가는 그만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학운기는 진금룡에게 천면요희에게서 얻은 현령진경을 전해 주었 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기초(奇招)들도 적어서 주었다. 학운기가 어쩐지 힘없이 걷는 진금룡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용아, 힘을 내야지. 그래 가지고 어떻게 원수를 갚을 수 있단 말 이냐?" "죄송합니다, 형님. 용아는 결코 절망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나도 네가 약한 마음을 가졌다면 벌써 실망하고 떠났을 것 이다." 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어느 새 악양의 성문을 들어 서고 있었다. 진금룡의 이모네 집은 만물상(萬物商)을 경영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고서화(古書畵)를 비롯하여 병장기(兵仗器)에 이르기까 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학운기는 진금룡을 데려다 주고 그냥 떠나려고 했으나, 진금룡의 이모가 사정을 하다시피 며칠만 묵어 가라는 바람에 하루 저녁 신 세를 지기로 했다. 그는 저녁을 먹고 나서 별로 할 일이 없어서 가게를 구경하러 나 왔다. 가게에 진열된 산수화(山水畵) 중에는 몇 점의 진품(眞品)도 있었 다. 그리고 고서(古書)들은 그가 전부 읽은 것들이었다. 진금룡의 이모부인 장신민은 그러한 그를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제 열다섯 밖에 안 된 소년이 일반 시중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고서들을 모두 다 읽고 그림까지 진가(眞假)를 구별할 정도니, 어 찌 놀라지 않겠는가? 학운기는 가게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다가 병장기를 진열해 놓은 곳에 발이 머물렀다. 장신민이 그러한 그를 보더니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자네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고르게. 내 달리 용아를 구해 준 데 대하여 보답할 길은 없고, 내 집에 있는 물건으로나 감사를 표 시했으면 하네." 사실 학운기도 내심으로는 검(劍) 하나 정도는 사고 싶었던지라 자세히 살펴보았다. 병장기에는 십팔반(十八班)의 모든 무기가 진열돼 있었다. 그 중에는 제법 명기(名器)의 소리를 들을 만한 것도 있었으나, 학운기의 마음 속에 쏙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장신민이 제일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골라 주었지만 모두 거 절했다. 한참을 뒤적거리던 그의 눈이 돌연 크게 떠졌다. 한쪽 구석에 자루까지 합쳐 보아야 한 자 정도밖에 안 되는 검 (劍)이 눈에 들어왔다. 그 검은 자루와 검집이 모두 칙칙하게 녹이 슬어서 한갖 고철(古 鐵)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학운기는 그 검에 마음이 끌렸다. 그가 그것을 집어들자 장신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왜 자네는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것을 집어드나? 혹시 내 가 돈을 받을까 봐서……." "아닙니다. 왠지 모르게 이것이 나의 마음을 끄는군요." "그래도 그렇지." 장신민은 그에게 시퍼런 광망(光芒)을 발하는 것을 주었지만, 그 는 거절하고는 거무틱틱하게 녹이 슨 단검을 들고는 방으로 들어 왔다. 역시 검신(檢身)에도 칙칙한 녹이 슬어 있었고, 아무리 날을 갈아 도 날카롭게 되지 않을 정도로 뭉툭하였다. 그는 그것을 보고 내심 실망하였으나, 녹을 벗기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조그만 칼로 조심스럽게 녹을 벗겨 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아무리 힘을 써도 녹이 벗겨지지가 않았다. 한참을 애써도 도저히 녹이 벗겨지지가 않자, 그는 그것을 한쪽으 로 던져 버렸다. "어?" 그의 눈이 다시 크게 떠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 종이 한 장 자를 수 없을 것 같던 검이 땅바닥에 깊숙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얼른 달려가서 검을 빼어 들었다. "엇?" 또 한 번 놀라운 탄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검이 꽂혔던 자리에 흔적이 없지 않은가? "놀라운 검이구나." 그는 혹시나 하고 검이 꽂혔던 자리를 만져 보았다. 거기에는 아주 미세한 분말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학운기가 그 곳을 입김으로 훅! 하고 불었다. 방바닥 깊숙이 검신의 형태가 또렷이 나타났다. '세상에! 이토록 놀라운 위력을 가진 검이 있었단 말인가?' 그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검을 들고는 탁자의 모서리를 툭 쳐 봤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동나무로 만든 탁자가 가볍게 잘려졌 다. '역시 명검(名劍)이로구나.' 그의 가슴은 흥분으로 십하게 고동쳤다. 그는 검신에 진기를 주입해 보았다. 위이잉－! 진기가 주입된 검에서 즉각 용틀임 소리가 들리며 검신에 입혀졌 던 녹들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면 되는 것을……." 그는 계속해서 진기를 주입시켜서 녹들을 완전히 벗겨 냈다. 묵검(墨劍)이었다. 그러나 검이라 할 수 없게 날이 뭉툭하기만 했다. 학운기는 같은 방법으로 검집에 있는 녹들도 벗겨 냈다. 검집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線)들이 빽빽하게 그어져 있 었다. 단순한 무늬려니 생각하려 했으나, 절대로 무늬는 아니었다. 검집의 한쪽에는 갑골문자(甲骨文字)로 묵룡검(墨龍劍)이라고 조 그맣게 쓰여져 있었다. '음, 알맞은 이름이군. 그런데 이 복잡한 선들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지? 혹시……?' 그는 문득 그것이 검초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세밀히 연 구하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흘렀을까? 그는 돌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모르겠구나. 평범한 무늬는 아닌 것이 분 명한데…….' 그는 다시 한참을 더 생각하다가는 검을 품속에다 집어넣고는 잠 자리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진금룡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는 동정호변(洞 庭湖邊)을 따라서 절경들을 구경했다. 악양은 동정호변에 위치한 시진 중에서 악양에 버금 갈 만큼 번잡 한 곳이었다. 중원 천지에서 몰려오는 구경꾼들도 많았지만, 산물(産物)이 풍부 하기 때문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학운기는 번잡한 곳을 벗어나서 절경을 따라 점점 한적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얼마쯤 걸었을까? 그는 문득 사위가 너무나도 조용함을 느끼고는 번뜩 제정신이 들 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간간이 물새들의 즐거운 울음소리만 들려 올 뿐이었다. 그는 배가 고픔을 느끼고 다시 돌아가려 할 때, 그의 머리 위로 한 줄기 인영이 날아가면서 그에게 뭔가를 던졌다. "꼬마야, 그것을 가지고 소림이나 개방으로 가거라." 학운기는 그가 던진 것을 바라보다가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것은……?" 금갑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갔지?" 그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들이 귀중한 목숨까지 받쳐 가면서 탈취하려고 했는지, 순간적인 호기심이 발동하여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커다란 실수였을 줄이야! 금갑에는 수많은 그림들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가 한창 금갑을 살펴보고 있을 때, 다시 그의 머리 위로 두 줄 기의 인영이 날아왔다. "엇?" 그 중에 한 인영이 무엇을 보았는지 탄성을 지르며 그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꼬마야, 네가 어떻게 금갑을……." 수라절혼마 엄능야였다. 이 때 그냥 날아가던 한 인영도 되돌아왔다. "엇? 네놈은 학운기! 거기다 금갑까지……." 패천마왕 소무극이었다. 학운기는 흠칫 놀라면서 금갑을 얼른 품속에다 집어넣었다. 엄능야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흐흐… 꼬마야! 그것은 원래 내 물건이니까, 돌려다오." 학운기는 이미 그의 음흉한 속셈을 경험한지라 싸늘하게 노려보았 다. "당신은 어찌 거짓말을 그토록 잘하시오? 당신은 이것을 천면요희 에게서 강탈하지 않았소?" "뭐라고? 네녀석이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는 말을 하면서 학운기의 품을 움켜쥐어 왔다. "엄형, 잠깐만." 소무극이 그를 제지하였다. "왜 그러오? 우리는 먼저 갖는 자가 임자라 하지 않았소?" "아니오, 엄형. 나는 금갑을 포기하겠소. 대신 저 애를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말고 나에게 넘겨 주시오." 엄능야는 그가 갑자기 엉뚱한 제안을 해 오자, 내심 생각을 굴리 는 듯했다. 그는 도대체 저 소년의 무엇이 금갑보다 가치가 있나 하고 학운기 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공도 모를 것 같은 허약한 서생이었다. '음, 이 자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 있기에… 흐흐… 나중에 알 게 되겠지. 그렇다면 우선…….' 소무극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엄형, 어떻소?" "좋소, 좋아." 소무극은 내심 생각을 굴리면서 학운기에게 다가섰다. '흐흐… 이 녀석아, 괜히 선심 쓰는 척하지 마라. 삼 년만 있으면 너는 저 애의 적수가 못 될 테니…….' 그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는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얘야! 그 따위 금갑은 저분에게 주고, 너는 나하고 같이 가자. 내 너의 잘못은 모두 용서해 주고,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든지 들어 주마." 이 때 학운기는 그들이 자신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마치 수중의 물건처럼 생각하자 내심 부아가 끓어올랐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용서를 운운하는 것이오. 그리 고 나는 당신의 제안이 싫다고 몇 번을 말했잖소?" "뭐라고?" 엄능야가 소무극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소형! 내가 버릇을 잘 고쳐서 소형께 돌려드릴 테니, 잠시만 기 다리시오." 소무극도 내심 학운기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어올랐던지라 옆으로 비켜 서 주었다. 학운기는 그와 정면 대결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으므로 급히 현령보법을 펼쳐서 몸을 피했다. "어? 네녀석도 무공을 알고 있었구나." 엄능야는 잠시 놀라는 듯하더니 다시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그에 게 덮쳐 왔다. 하늘에는 온통 시커먼 손그림자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학운기는 잡히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소무극도 매우 놀라운 표정이었다. '저 녀석이 언제 저렇게 현묘한 신법(身法)을 익혔지?" 엄능야는 두 번째도 실패하자, 이번에는 장력까지 펼치며 그에게 덮쳐 왔다. 학운기는 그의 장력을 피하면서 현령진경에 기재되어 있는 장법을 펼쳤다. 펑－ 펑－! "윽!" 엄능야의 장력은 애매한 땅바닥을 쳐서 풀과 먼지를 날렸으며, 학 운기의 장력은 엄능야의 몸에 적중했다. 그러나 학운기는 그의 몸에 은연중에 일어나 있던 호신강기의 반 탄력에 묵직한 신음을 터뜨렸다. 그의 가슴은 심하게 울렁거렸다. '음, 맨손으로는 안 되겠구나. 그렇다면…….' 그는 즉시 품속에서 묵룡검을 꺼내 들었다. 우우웅……! 그가 검신을 빼들자 용틀임이 울렸다. 엄능야는 자신이 그를 잡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록 내상은 입지 않았지만 그에게 일 장을 얻어맞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였다. "네녀석의 무공이 그토록 훌륭하다니 노부도 감탄을 금치 못하겠 다." 그는 싸늘하게 한 마디 던지고는 학운기를 향해 위맹한 장력을 펼 쳤다. 이제는 소무극과 한 약속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떻게 하든지 손상된 자신의 체면을 회복해야만 했다. 쾅－ 콰르릉－! 굉음이 울리며 학운기 뒤에 있던 집채만한 바위가 박살이 나 버렸 다. "앗!" 소무극이 놀라움의 외침을 토했다. 학운기는 어느 새 엄능야의 뒤에 서서 묵룡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 닌가? 엄능야는 등줄기에 싸늘한 살기를 느끼고는 체면 불구하고 몸을 앞으로 날렸다. 찌익－! 그러나 그의 등줄기의 옷이 길게 찢어진 후였다. 그는 이제 허약하게만 보이는 이 어린 소년에게 두려움마저 느꼈 다. ====================================================== 第 5 章 한천빙룡(寒泉氷龍) ====================================================== 엄능야는 한참을 넋을 잃고 학운기를 바라보다가는 내심 악독한 마음을 품으며 다시 그에게 덮쳐 갔다. 펑－ 쾅－ 위이잉－! 장력이 땅바닥 치는 소리와 묵룡검의 용틀임 소리가 어지럽게 들 렸다. 하늘은 온통 흙먼지와 풀 등으로 가려졌고, 주위의 고목들도 엄능 야의 장력에 툭툭 부러져 나갔다. 그렇게 십여 초가 지나갔다. 엄능야는 아무리 공격해도 그의 옷자락도 못 건드리자, 내심 두려 움을 느끼고 있었다. "에잇!" 그는 한 소리 부르짖더니 갑자기 장세를 변화시켰다. 학운기는 이번에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갑자기 생각나는 대로 묵룡검을 휘둘렀다. "앗!" 엄능야는 놀란 탄성을 발하며 몸을 뒤로 날렸다. 그의 얼글은 경악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고, 어깨 위에서는 한 줄 기의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놀란 것은 옆에서 지켜보던 소무극이 더한 것 같았다. 그는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는 학운기에게 두려운 듯한 소리로 물었다. "네… 네녀석은 주걸신개 생천의와 어떻게 되는 사이냐?"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까지 어려 있었다. 학운기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는 도리어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주걸신개가 자신에게 두 번째로 펼쳤던 장법을 검법으로 순 간적으로 변화시켜 펼친 것이었다. '도대체 그분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무림 십대고수인 이들이 놀란 단 말인가?' 그가 막 뭐라고 대꾸하려 할 때. 멀리서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히히… 잡귀들아! 네놈들이 감히 나의 제자를 건드리다니!" 말로만 듣던 천리전음술(千里傳音術)이었다. 순간 엄능야와 소무극의 얼굴이 똥빛으로 변했다. 엄능야는 그 목소리가 최소한 십 리 밖에서 들려 온 것이라고 순 간적으로 판단하고는, 멍청히 서 있는 학운기에게 위맹한 장력을 펼쳤다. 그의 장심에서는 불그스름한 기류(氣流)가 뻗쳐 나오고 있었다. "앗!" 학운기는 놀란 외침을 발하고는 급히 몸을 공중으로 솟구쳤다. 찰나 소무극의 푸르스름한 기류를 동반한 장력이 그의 몸을 덮쳐 왔다. 피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쾅－! "아악!" 학운기의 몸은 아득하게 떠오르더니, 깊은 동정호의 물 속으로 잠 겨 버리고 말았다. "이 잡귀들이 감히 나의 제자를……." 바로 백여 장 밖에서 주걸신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순간 엄능야와 소무극은 똥줄이 빠져라고 도망가 버렸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한 고목 위에서 거지노인이 내려왔다. 섬전신개 육대강이었다. 그는 학운기에게 금갑을 던져 주고 계속 도망가다가 엄능야 등이 따라오지 않자, 문득 일이 잘못됐음을 느끼고는 되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학운기가 엄능야와 한창 격전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그는 무림 십대고수 중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무공을 가진 엄능야와 싸우고 있는 이 어린 소년에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학운기가 위기를 맞았을 때 펼친 검법이 주걸신개의 장법 을 변화시킨 것임을 알자, 육대강이 주걸신개의 흉내를 낸 것이 다. 그가 펼친 것은 천리전음술이 아니라 개방( 幇) 비전(秘傳)의 묘 법(妙法) 중 하나인 회음술(廻音術)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절벽 가로 가서 시퍼런 빛을 띠고 잔잔하게 일렁이는 동정호 의 물을 바라보았다. 학운기가 떨어진 흔적도 없었다. '아, 내가 아까운 인재 하나를 죽였구나. 그런데 그가 어떻게 사 조(師祖)님의 장법을… 그것도 검초로 변화시켜서 알고 있었지?' 사조(師祖)라니? 그렇다면 주걸신개 냉천의가 개방의 인물이었단 말인가? 섬전신개의 옷에 있는 매듭이 일곱 개인 것으로 보아서 그는 개방 의 장로가 분명할진대, 그러한 그가 주걸신개를 사조님이라고 부 르다니? 백 년 전 무림에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열 명의 기인(奇人)들이 나타났다. 무림인들은 그들을 사정(四正), 사사(四邪), 이중(二中)이라 불렀 다. 사정(四正)에는 일승(一僧), 일도(一道), 일속(一俗), 일개(一 ) 가 있었는데……. 일승은 현 무림의 제일 고승(高僧)인 소림의 무아신승의 사부인 혜불선승(慧佛仙僧). 일도는 현 무당 장문인의 사조인 천기자(天機子). 일속은 도저히 심중을 헤아릴 수 없다는 새제갈(塞諸葛) 천기후 (天奇候). 일개는 현 개방 장문인의 사조인 주걸신개 냉천의. 무림인들은 이들 네 명을 우내사존(宇內四尊)이라 부르며 숭앙을 했다. 사사(四邪)는 부처님도 구할 수 없다는 네 명의 악랄한 마존(魔 尊)을 가리킨다. 만독제군(萬毒帝君) 필적혈(弼摘血), 천살마제(天煞魔帝) 편한천(扁寒天), 무림선요(武林仙妖) 공여옥(公如玉), 마심뇌사(魔心腦邪) 가계지(賈界地). 이들이 그들인데, 무림인들은 이들을 우내사마(宇內四魔)라고 불 렀다. 그리고 이중(二中)은 세외괴도(世外怪刀) 탄호빈(彈虎彬)과 천산 섬검(天山閃劍) 개송운(介松 )을 가리켰는데… 무림인들은 이들 을 세외이기(世外二奇)라고 불렀다. 이들 열 명의 무림기인(武林奇人)들은 그 무공의 깊이를 추측할 수가 없었다. 그들보다 먼저 나타난 강호의 절정고수(絶頂高手)들도 그들의 단 삼 초를 받아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마심뇌사 가계지는 단 한 번의 무공도 펼치지 않은 채 그들의 서열에 끼었다. 가계지의 음흉한 간교(奸巧)는 일반인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 는 것들이었다. 그는 단지 세 치 혓바닥과 주먹만한 머리로서 무림천하를 좌지우 지(左之右之)했다. 중원무림이 한창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때 나타난 기인(奇人)이 새제갈 천기후였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가계지의 모든 음모를 논리정연한 추리로서 분 쇄해 버렸다. 그래서 백 년 전에는 정사간에 커다란 혈투 없이 그들 둘의 지략 (知略)과 계교(計巧)의 대결장이었다. 무림에서는 정사를 불문하고 아수라마황(阿修羅魔皇)을 만날지언 정 그들 둘은 만나지 말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으니, 그들의 지략 과 계교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정도였던 것이었다. 이들 중에서 특이한 것은 우내사존 중에는 오직 주걸신개 맹천의 만이 손에 피를 묻혔고, 우내사마 가운데는 마심뇌사 가계지만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주걸신개 맹천의는 사파(邪派) 무림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염라대왕 이었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고, 만약 불의를 행하다 그에게 들 킨 자는 그 자리에서 참살(慘殺)을 면치 못했다. 마심뇌사 가계지는 한때 무림인들의 우상이 된 적도 있었다. 무림인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가 나타나면, 그 무림인은 틀림 없이 그에게 구명(求命)의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구원받은 무림인들은 예외 없이 그의 꼭두각시가 되곤 했다. 새제갈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렇게 해서 그의 꼭두각시가 된 자들 이 천여 명이 넘을 정도였으니, 그의 세 치 혓바닥과 주먹만한 머 리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우내사마 중 무림선요 공여옥은 그야말로 천상의 선녀(仙 女)를 능가하는 절세미녀였었다. 그녀를 한 번 본 남자는 그녀의 발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 었고, 그러한 그들은 예외 없이 그녀의 채양보술(採陽補術)의 재 물이 되어서 뼈가죽만 남은 채 저 세상으로 가곤 했다. 그런데 이토록 무림의 숭앙과 저주를 받던 그들 열 명의 기인(奇 人)들은 팔십여 년 전, 동시에 무림에서 실종되어 버렸다. 무림인들은 그것에 대해 설왕설래(說往說來) 말이 많았지만, 아무 도 그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무림은 그 후 한때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케 하다가 십대고수들의 출현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각설하고, 학운기가 빠진 동정호를 자탄(自歎)과 애석의 빛으로 바라보던 섬전신개 육대강도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숲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정신 없이 도망갔던 엄능야와 소무 극이 다시 돌아왔다. 엄능야가 속은 것을 깨달았는지, 옆에 있는 애꿎은 바위에다 일 장을 퍼부었다. 쾅－ 콰르릉－! 그의 일 장에 집채만한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며 하늘에 분분히 흩 날렸다. "내가 그 쥐새끼 같은 섬전신개 놈에게 속다니… 아, 그러나 그 금갑이 영원히 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으니……." 소무극도 분노와 애석이 엇갈린 표정으로 동정호를 바라보았다. "아, 천고(千古)에 다시 볼 수 없는 기재가 단 한 번의 판단 착오 로 사라지다니……." 이윽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들도 그 자리를 떠났다. 한순간 굉음과 폭갈에 놀라서 도망갔던 물새들도 다시 돌아와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무림의 일 따위는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한편 엄능야의 일 장은 간신히 피했으나, 소무극의 일 장에 가슴 을 얻어맞고 동정호 깊숙한 물 속으로 떨어진 학운기는 한없이 밑 으로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윗도리는 가루로 변해서 날아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고, 가 슴에는 시퍼런 장인(掌印)이 뚜렷이 찍혀 있었다. 얼마쯤 가라앉았을까?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던 그의 몸이 돌연 물고기도 무색할 정도의 속도로 한쪽으로 쏠려 갔다. 호수 밑바닥에 있는 유수(流水)였다. 유수에 실린 그의 몸은 어디론가 게속 흘러갔다. 오직 묵룡검과 검집을 양 손에 꽉 움켜쥔 채. × × × 동굴(洞窟),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동굴이었다. 낑… 끼잉……! 돌연 이토록 캄캄한 동굴 속에서 동물의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 왔 다. 하얗고 조그만 물체가 무언가를 끌고 가고 있었다. 백아(白兒)였다. 그가 끌고 가는 것은 학운기였다. 그런데 백아에게 허리춤이 물려서 끌려가는 학운기의 벌거벗은 상 체가 약간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상체 아래에는 또 한 마리의 벽안백표가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학운기가 임상 근처에서 금필유협 등이 싸우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백아가 돌연 두 마리가 되어 서는 동정호에 빠져서 유수에 휩쓸린 학운기를 끌고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백아가 짝을 찾아간 것이었다. 원래 벽안백표는 짝을 만나서 교미(交尾)를 하려면 반드시 만년한 천(萬年寒泉) 같은 빙동(氷洞)을 찾았다. 그것은 영생(永生)을 하는 영물(靈物)들은 교미할 때 주체할 수 없는 열이 나기 때문이었다. 숫놈인 백아는 싫어하는 짝을 며칠을 쫓아다니면서 꼬여 가지고는 이 동굴 속으로 들어오다가 유수(流水)에 휩싸인 학운기를 발견하 고는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 중이었다. 영물인 백아는 그가 웃옷이 벗겨진 채로 있자, 행여나 그의 몸에 상처가 생길까 암놈에게 그의 상체를 받치라고 하고는 끌고 가고 있었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쉬이익… 쉭… 쉭……! 돌연 앞쪽에서 두 줄기의 한망(寒芒)이 뻗쳐 오면서 괴이한 음향 이 들렸다. 으르릉……! 학운기를 끌고 가던 백아가 털을 곤두세우고는 경계의 빛을 보였 다. 백아의 짝도 학운기의 몸 밑에서 나와서는 시퍼런 광망(光芒)을 쏟으면서 앞쪽을 노려보았다. 앞쪽에는 마치 커다란 구렁이처럼 생긴 동물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것의 머리에는 사슴뿔같이 생긴 한 개의 뿔이 돋아나 있었고, 곧추세운 몸 위쪽에는 두 개의 발이 달려 있었다. 아, 전설(傳說)로만 내려오는 줄 알았던 한천빙룡이 아닌가? 한천빙룡(寒泉氷龍). 이것은 태어나서 만 년이 지나야만 승천(昇天)한다는 영물이었다. 이것은 오직 만년한빙석유(萬年寒氷石乳)에서만 살 수 있다. 그것은 이것의 몸 속에서는 극양(極陽)의 내단(內丹)이 생성되기 때문에, 만약 극음(極陰)의 영천(靈泉)에 몸을 담그고 있지 않으 면 승천할 때 곧바로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천하에서 가장 음기(陰氣)의 영천이 바로 만년한빙석유였 다. 한천빙룡은 아홉 개의 내단을 생성하며, 승천할 때는 꼭 일식(日 蝕) 날이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밝은 태양빛에 의해 그 동안 생성해 놓은 내단이 모두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으르렁거리며 한천빙룡을 노려보고 있던 백아는 호흡조차 끊어진 학운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빛살보다도 빠르게 그것에 덮쳐 갔 다. 으르릉……! 쉬이익……! 쾅－ 콰르릉－! 두 영물 사이에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대사투(大死鬪)가 벌어졌 다. 한천빙룡의 입에서 한 개의 붉은 내단이 나와 백아의 몸을 감돌며 공격하고 있었고, 백아는 빛살보다도 빠르게 그것을 피하며 한천 빙룡의 몸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한천빙룡은 한 개의 내단으로는 그를 해치지 못하자, 푸른색의 또 다른 내단을 뿜어 내 공격하였다. 백아는 두 개의 내단에 갇혀서 제대로 공격을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백아의 짝이 한천빙룡의 목을 물어뜯어 갔다. 순간 한천빙룡은 다시 황색과 녹색의 내단을 뿜어 냈다. 쉬이익……! 으르릉……! 쾅－ 콰르릉－! 내단들은 백아 등을 공격하다 옆으로 빗나가면서 동굴 벽을 마구 부숴 놓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한천빙룡은 점점 초조한 빛을 보이면서 다시 자色(紫), 남색(藍 色), 흑색(黑色), 주색(朱色) 등 네 개의 내단을 뿜어 냈다. 동굴 안은 네 개의 내단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휘황찬란하게 수놓 아졌다. 여덟 개의 내단의 공격을 받고 있는 백아와 그의 짝은 피하기에 급급할 뿐, 공격은 생각조차 못했다. 그렇게 두 시진쯤 지났을까? 웬일인지 그들을 공격하는 내단들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천빙룡은 극심한 한기에 몸체를 떨고 있었다. 거의 만 년 동안 생성해 온 내단들을 일시에 내보내자, 만년한방 석유 속에 있는 한천빙룡은 영천의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 여덟 개의 내단이 다시 한천빙룡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휘이익－! 크아악… 크윽……! 백아와 그의 짝이 한천빙룡의 목을 물어뜯어 버렸다. 쾅－ 콰르릉－! 한천빙룡은 천지가 진동할 정도의 요동을 쳤다. 크으윽… 크아악……! 쾅－ 콰르릉－! 그렇게 처절한 사투가 거의 한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이제 세 마리의 영물들은 모두 지쳐서 헐떡헐떡거리고 있었다. 으르릉……! 돌연 백아가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학운기를 한 번 바라보더니, 한천빙룡의 목을 힘차게 잡아끌었다. 크아악… 크윽……! 처절한 한천빙룡의 비명이 들리며 그것의 몸이 만년한빙석유가 고 여 있는 웅덩이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것의 길이는 거의 십여 장이 넘어 보였다. 그것은 웅덩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쭉 뻗어 버리고 말았다. 찰나, 그것은 이내 아홉 개의 영롱한 빛을 발하는 내단을 남기고 는 한 줌의 재로 화하고 말았다. 아홉 개의 내단. 그것은 황(黃), 주(朱), 홍(紅), 자(紫), 녹(綠), 청(靑), 남 (藍), 흑(黑), 백색(白色) 등 각기 다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굴 안은 그것들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대낮보다도 환하게 변했 다. 백아도 한천빙룡과의 싸움에서 많이 다친 듯했다. 백아의 짝은 그보다 부상이 더욱 심한 듯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백아는 즉시 한천빙룡이 남긴 내단 중 황색의 것을 학운기의 입 속에다 넣어 주고는 그를 만년한빙석유가 고여 있는 웅덩이 속에 다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백아와 그의 짝도 웅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며칠이 흘렀는지 몰랐다. 학운기는 만년한빙석유의 웅덩이 속에서 죽은 듯이 꼼짝도 않고 있었다. 백아와 그의 짝은 부상이 모두 완쾌되었는지, 가끔씩 장난을 치면 서 뛰놀다가도 학운기가 걱정스러운지 가끔씩 그의 곁에 앉아서 한참 동안 들여다보곤 했다. 학운기의 가슴에 뚜렷이 찍혀 있었던 장인은 어느 샌가 사라져 있 었다. 백아는 지금 또 하나의 주색(朱色) 내단을 물어다가 학운기의 입 에다 넣어 주고 있었다. 또다시 며칠이 흐르자 백아는 홍색(紅色) 내단을 그의 입에다 넣 어 주었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아홉 개의 내단이 모두 학운기의 입 속으로 사 라진 지 며칠 후. 돌연, 그의 몸이 조금씩 미동을 보였다. 낑… 끼잉……! 백아가 그러한 그를 보더니, 부드러운 혀로 그의 몸을 핥았다. 얼마쯤 그렇게 하자, 영원히 뜨여지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혔던 그의 눈이 슬며시 떠졌다. "어! 여기가 어디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동굴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어슴푸레하나마 모든 것이 보였다. 그의 동공에 하얗고 조그만 동물이 들어왔다. "앗! 백아야!" 백아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그의 몸을 마구 핥았다. "백아야, 그 동안 어디 가 있었니? 그리고 여기는 어디지?" 낑… 끼잉……! 백아는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그의 짝을 데려왔다. "아, 너는 짝을 찾으러 갔던 모양이구나?" 낑… 끼잉……! 백아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 번 볼까?"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백아의 짝을 안아 들었다. 백아의 짝도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이 몹시 반가운지, 부드러운 혀 로 그의 얼굴을 핥아 주었다. "그래 그래, 잘 왔다. 어디 너의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음… 선 아(仙兒)… 그래, 선아라고 하자." 백아의 짝도 그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매우 좋아하는 표정이 었다. 학운기는 자신이 아직도 웅덩이 속에 있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몸 을 일으켰다. "윽!" 낑… 끼잉……! 몸을 일으킨 그는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간 백아와 선아가 그의 몸을 세게 밀치면서 다시 웅덩이 속 으로 밀어넣어 버렸다. 학운기는 자신의 몸에 전에 없었던 현상이 일어난 것에 대해 도저 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백아야, 그 동안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 낑… 끼잉……! 백아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엇을 먹는 시늉을 했다. "네가 무엇과 싸워서 그것을 나에게 먹였단 말이냐?" 낑… 끼잉……! 백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다 아홉 개의 줄을 그었다. "아홉 개씩이나?" 낑… 끼잉……!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기에 나의 몸이 여기를 벗어나자마자 불에 달군 것처럼 뜨거워지지?" 낑… 끼잉……! 백아와 선아가 무어라고 계속 웅얼거렸으나, 그것은 알아들을 수 가 없었다. 학운기는 아까 자신이 잘못 느끼지 않았나 하고 다시 몸을 일으켜 보았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지?' 한참을 어떻게 할까 생각에 골몰하던 그는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무료한 시간이나 달래려고 운기행공을 했다. 그러자 단전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뜨거운 진력이 솟구쳐 올랐 다. 그가 깜짝 놀라서 다시 진력을 가라앉히려는 순간, 체외에서 한 줄기 싸늘한 기운이 스며 들어오면서 그것을 중화시켜 주었다. 몸이 매우 상쾌했다. 그는 가라앉히려던 진력을 다시 끌어올려서 온몸의 혈도를 따라 운행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돌연 그의 몸에서 황색(黃色) 기류(氣流)가 뻗쳐 나오기 시작했 다. 기류는 은은한 서기(瑞氣)를 발하면서 완전히 그의 몸을 감쌌다. 만약 이 때 무림인들이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보았다면 까무러치고 말았을 것이다. 몸에서 그러한 서기가 뻗어 나오려면 내공이 노화순청(爐火純靑) 의 경지를 넘어서 입신지경(入神之境)에 달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 내공이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경지에 이르면 몸에서 백무(白 霧)가 뿜어져 나온다. 그것이 삼화취정(三花聚頂), 오기조원(五氣朝元)의 경지를 지나서 등봉조극(登峯造極)의 경지에 이르면 담담한 서기(瑞氣)로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몇 년밖에 내공을 익히지 않은 그가 어떻게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것은 한천빙룡의 내단 덕분이었다. 한천빙룡의 내단은 하나가 반 갑자의 내력을 증강시켜 줄 뿐만 아 니라 만독불침(萬毒不侵), 계속 노력하면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 之身)까지 이룩해 주는 것이었다. 얼마쯤 지나자 학운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서기가 서서히 그의 몸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원래부터 신비스러운 그의 눈이었지만 이 때의 눈은 뭐라고 형용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신비한 서기를 쏟아 내고 있었다. '아, 몸이 옛날보다 훨씬 상쾌해지고 가벼워진 것 같구나!' 그는 상쾌한 기분에 무의식중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윽!" 그는 또다시 몸이 타 버릴 듯한 열기를 느끼면서 웅덩이에 주저앉 고 말았다. '아, 이 일을 어떻게 하지? 다행히 살아 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니…….'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이번의 열기가 처음의 열기보다 덜 했던 것이 생각났다. '음, 운기행공을 해서 그런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다시 운기행공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는 곧 황색의 서기가 뻗치더니, 잠시 후에는 그 속에 서 은은한 주색(朱色)의 서기가 뻗어 나왔다. 얼마의 시간이 자났는지 몰랐다. 다시 그의 몸 속으로 서기들이 사라지고 그가 깨어났다. 이번에는 가만히 일어났다. 역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하지만 두 번째보다는 많이 감소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깨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매우 오래 흘렀 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나, 왠지 배고픈 줄을 몰랐다. 백아와 선아는 그가 운기행공을 하는 동안에 무엇이 그리 즐거운 지 동굴의 이 곳 저 곳을 뛰어다니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을 한 번 바라본 학운기는 빙그레 미소를 띄우다가 다 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황색과 주색의 서기 속에 홍색(紅色)의 서기가 뻗어 나 왔다. 그가 이런 식으로 아홉 가지 색의 서기가 모두 뻗어 나올 때까지 운기행공을 반복하고 나자, 그는 자신의 체중을 전혀 느낄 수 없 을 만큼 몸이 가벼워졌을 뿐 아니라 전에는 생각나지 않았던 것조 차 환하게 생각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도 대낮처럼 환하게 볼 수 가 있었다. 그는 일어서도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자, 웅덩이를 빠져 나왔 다. "앗!" 그는 자신이 들어 있었던 웅덩이를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 다. 웅덩이 속에 차 있던 만년한빙석유가 모두 밑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가 자연의 오묘하고 신기한 현상에 한참 넋을 잃고 있을 때. 낑… 끼잉……! 백아와 선아가 깡총깡총 그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바지가랭이를 물고 한쪽으로 끌고 갔다. "백아야, 밖으로 나가자는 것이냐?" 낑… 끼잉……! 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있어 보아라." 그는 문득 자신이 웃통을 벗고 있음을 느끼고는 자신의 품속에 들 었던 것들이 생각나서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주위에는 묵룡검과 검집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음, 섬전신개란 분이 맡긴 금갑은 어디론가 빠져 버린 모양이구 나. 이 일을 어떡한담?' 그는 한참을 고심하다가 다시 백아와 선아가 끄는 대로 동굴을 빠 져 나갔다. 동굴의 길이는 꼬불고불한 게 거의 십 리는 되는 것 같았다. 막다른 곳에 도착했을 때 동굴은 위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백아와 선아를 품에 안고는 위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새털처럼 가볍게, 그러나 번개를 무색케 할 속도로 솟구쳐 올랐다. 한 삼십여 장쯤 올라가자, 동굴은 다시 평탄하게 뚫려 있었으나 매우 좁았다. 한 오십여 장쯤 걸어가자 기어서 나가야 될 정도로 좁아졌다. 그렇게 다시 십여 장쯤 가자 환한 밖이 드러났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에서 살아온 그는 강한 눈부심에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아, 내가 동굴 속에서 거의 팔 개월 이상을 보냈단 말인가? 그런 데 왜 이제껏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지?' 그는 매우 이상함을 느끼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만히 살펴보니 밤이었다. 이미 사 갑자 반의 내공을 가지고 있는 그인지라, 밤에 내리는 눈 의 빛에도 눈부심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라져 갔다. 백아와 선아는 오랜만에 보는 바깥 세상이고, 또한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눈이 오는지라 무척이나 즐거운 듯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 때 차가운 겨울의 한풍(寒風)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자나갔다. 학운기는 그것을 시원한 정도로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웃통을 벗은 채로 돌아다닐 수 없는지라, 인가를 찾아 한 벌을 구해 입기로 했 다. 그러나 그는 문득 자신의 수중에 은자 한 푼 없는 것을 깨닫고는 내심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우선 인가부터 찾고 봐야겠구나.' 그는 백아와 선아를 불러서 옆구리에 끼고는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은 빛살보다도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갔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그의 눈에는 많은 불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들어왔다. 제법 커다란 시진(市鎭)이었다. 그는 시진의 성벽에까지 가서는 어떻게 할까 말까 망설였다. '음, 이 밤에 누구네 집 문을 두드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 로 다닐 수도 없으니…….' 난감한 표정으로 한창 생각에 골몰하던 그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후후… 이 기회에 현령진경에 적힌 신투술(神偸術)을 한 번 시험 해 볼까? 그렇다면 부잣집으로…….' 그는 나중에 사정을 말하고 사과하기로 하고는 우선 옷 한 벌을 훔치기로 했다. 그의 몸이 소리도 없이 성벽을 뛰어넘었다. 그는 지붕을 타고 몸을 날리다가는 한 커다란 장원(蔣院)을 발견 하고는 몸을 멈추었다. '음, 이 정도의 집이면 옷 한 벌쯤 실례한다고 해도…….' 그는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띄우면서 장원의 커다란 전각(殿閣) 과 누각(樓閣)들 중에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한 누각으 로 몸을 날렸다. "엇!" 그의 입에서는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누각 안의 침상에는 한 전라(全裸)의 여인이 누워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솟아오를 데는 솟아오르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그녀 의 나체는 그 누가 보아도 얼이 빠질 만큼 매혹적이었다. 은은한 촛불의 빛을 받아서 약간 상기된 듯한 그녀의 피부는 도저 히 어떤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했다. 학운기는 일순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는 품에 안은 백아와 선아 의 움직임으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웬일인지 호흡은 약간 거칠 어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있다가는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서 황급히 몸을 날렸다. "호호… 공자님께서는 정력(定力)이 대단하시군요." 교소(嬌笑)가 터지며 한 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침상에 누워 있던 전라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전라의 몸 그대로 서 있었다. 하나, 그녀에게서 어떤 음탕(淫蕩)함이나 사악(邪惡)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함박눈을 맞으면서 살포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그 녀의 모습은 순결(純潔)! 바로 그것 같았다. 학운기는 그녀의 갑작스런 출현에 어찌할 바를 몰라 매우 당황스 런 표정을 지었다. "낭자! 소생은 단지 옷을 한 벌 구하러 왔을 뿐, 다른 의도는 없 었소이다." "호호… 소녀도 공자님께서 그런 파렴치한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고 있었어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그에게 바싹 다가왔다. 학운기는 그러한 그녀의 몸에세 눈을 떼려고 했으나, 도저히 떨어 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마음 속으로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으르릉……! 이 때 백아와 선아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털을 곤두세우더니 으르릉거렸다. "호호… 공자님께서는 매우 귀여운 벽안백표를 두 마리씩이나 가 지고 계셨군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손가락을 가볍게 떨쳤다. 순간 학운기는 어떻게 형용할 수조차도 없을 정도로 향긋한 미향 (微香)을 맡았다. 그는 미향을 맡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 오며, 꼭 폭발해야만 할 것 같은 욕구가 솟구쳐 올라옴을 느꼈다. 백아와 선아는 어느 샌가 그의 품에서 곱게 잠들어 있었다. "우야아……!" 그는 한 소리 용소(龍嘯)를 부르짖으며 빛살보다도 빠르게 몸을 날렸다. "엇!" 전라의 여인이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이며 탄성을 토하더니, 그의 뒤를 급히 쫓아갔다. 아, 그녀의 몸은 번개보다도 빠른 속도로 쏘아 가지 않는가? 그녀의 신형은 학운기에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더욱 빠르게 쏘아 가고 있었다. 이미 사 갑자 반의 공력을 가지고 있는 그의 뒤를 그보다 더욱 빠 른 속도로 쫓아가고 있는 그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고, 웃통을 벗은 절세의 미 소년과 경국지색(傾國之色)을 능가하는 미모를 가지고 있는 전라 의 여인은 어느 샌가 이름도 모를 산중을 쏘아 가고 있었다. 뒤를 쫓고 있는 여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을 띄우고 는 죽으라고 뒤쫓고 있었다. '아, 도대체 저 녀석이 누구기에 어린 나이에 이토록 놀라운 경공 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의 정력(定力)은 내가 백여 년 동안 상대해 왔던 수만의 무림고수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굳 건한 것이 아닌가?' 백여 년 동안 무림의 고수들을 상대해 왔다니? 그렇다면 그녀의 나이는 이미 백 살이 넘었단 말인가? 아무리 많이 잡아야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백 살이 넘었다니? 하여튼 그들의 신형은 점점 빠르게 쏘아 가고 있었다. 학운기는 가슴이 곧 터져 버릴 듯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꼭 무언가 욕구를 풀어야만 될 것 같은데,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래서는 안 된다는 자의식이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정신이 점점 혼미해 옴을 느꼈다. 그런 상태로 얼마쯤 계속 달렸다. 전라의 여인은 이제 그의 삼십여 장 뒤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식지(食指)가 앞으로 세게 펼쳐졌다. 피이융－! 털썩－! 날카로운 지력(指力)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는 그 자리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져 있는 그의 몸에서는 혈맥들이 툭툭 불거져 있어서 마치 역 사(力士)처럼 보였다. "휴, 대단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너도 나의… 호호……!" 전라의 여인은 그의 몸을 안아 들고는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한 차례 교소를 터뜨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 第 6 章 섭혼채양술(攝魂採陽術) ====================================================== 화려한 방에 학운기는 죽은 듯이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그의 온몸의 혈관들은 곧 터져 버릴 듯이 팽팽하게 솟아 있었고, 얼굴은 고통에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방의 한쪽에는 욕실이 딸려 있는지 물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잠시 후 전라의 여인이 요염한 웃음을 흘리며 욕실 안에서 걸어 나왔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알몸은 어찌나 황홀한지, 보 는 이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결치듯이 출렁이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둔부는 어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녀는 침상으로 다가가서는 학운기의 알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 다. "아, 내가 백여 년 동안 수많은 남자들을 겪어 보았지만 이토록 준수한 소년은 처음이구나. 더구나 이 소년의 공력은 추측할 수도 없을 만치 높으니, 그것을 내가 얻으면……." 그녀는 지금 격동(激動)과 감격(感激)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에는 황홀한 표정이 가득 피어 있었다. "호호… 얘야, 잠시만 기다려라. 너에게는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천상(天上)의 황홀함을 맛보여 줄 테니……." 그녀는 고통에 잔뜩 찡그린 그의 얼굴에다 요란하게 입을 맞추면 서 그의 몸 위에다 자신의 몸을 실었다. 순간 학운기는 혈도가 풀리면서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자신이 그 토록 갈구하던 뭉클하고도 짜릿한 감각이 전해 오자, 그 물체를 죽으라고 껴안았다. "헉!" 다급한 신음이 가볍게 방 안에 흘렀다. "호호… 애가 급하기는 급했나 보구나. 잠시만 기다려라. 내가 천 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네가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기분을 느 끼게 해 줄 테니……." 그녀는 한 소리 중얼거리더니, 몸 아래서 자신의 목만을 죽으라고 껴안고 있는 그의 몸을 구석구석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헉헉헉……!" 학운기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일시에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욕구 를 발산하려고 발버둥쳤지만, 그 때마다 요녀의 교묘한 수법에 빗 나가면서 점점 더 거친 숨을 내뿜고 있었다. 요녀는 그의 거친 행동을 피하는 듯하면서도 교묘하게 그의 가장 민감한 곳을 애무하여 그가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참을 수 없게 만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요녀도 흥분한 듯 콧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헉헉헉……!" 학운기의 곧 넘어갈 듯한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들의 자세가 역전 이 되었다. 요녀는 이제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저지하던 행동이 사라지고 오히려 자신의 행동에 편 하게 그녀가 자세를 취해 주자, 무서운 기세로 거친 행동을 보였 다. 밖에서는 아직도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었는데, 방 안에서 춘풍(春風)이 요란하게 휘몰아쳤다. 학운기가 무언가 주체할 수 없는 욕구를 풀어 버리려고 거친 행동 을 계속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귓가에 만년빙동(萬年氷洞)에 서 불어 오는 한풍(寒風)보다도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 녀석아! 세상은 지금 마황성(魔皇星)의 저주를 서서히 받기 시작했는데, 도탄에 빠질 무림을 구할 네녀석이 무슨 행동을 하는 지 깨닫고 있느냐?" 순간 학운기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는지, 한순간 멈칫 했다. "이 녀석아! 행동을 멈추면 마녀가 눈치를 채지 않느냐? 빨리 계 속하면서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요녀는 거칠게 행동하던 학운기가 갑자기 멈칫하자 조금 놀랐으 나, 그의 행동이 다시 계속되자 마음놓고 황홀경을 헤맸다. 학운기는 행동을 계속하면서도 정신을 차리려고 처절한 고투(孤 鬪)를 하고 있었다. 싸늘한 전음은 계속 그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잠시 후면 너는 극도의 쾌감을 느끼면서 네 몸속의 진기(眞氣)가 빠져 나감을 느낄 것이다. 그 순간, 너는 단전혈(丹田穴)을 막으 면서 아주 조금씩의 진기만을 배출해야 한다. 그렇게 한참을 하다 가 내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진기를 한꺼번에 기해혈(氣海穴)로 보내고 단전을 텅 비운 다음, 네 순양체(純陽體)를 통하여 마녀의 진기를 흡수해야 한다. 만약 조금의 실수라도 있으면 네 목숨뿐만 이 아니라, 전 무림(武林)이 도탄에 빠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 해야 한다. 그럼 지금부터 그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이어서 그 방법을 알려 주는 싸늘한 전음이 학운기의 귓전에 계속 울려 왔다. 요녀는 이제 절정에 다다른 듯 더욱 심한 요동을 치고 있었다. 학운기의 귓전에 울려 오던 전음이 막 끝나는 순간. 그는 마치 구름을 타고 가는 듯한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찰나 그는 자신의 단전에 고여 있던 진기가 장마에 봇물 터진 것 처럼 쏟아져 나감을 느끼고는 즉시 싸늘한 전음이 일러 준 대로 단전혈을 막으면서 실낱 같은 진기만 흘려 보냈다. 그것은 너무나도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요녀는 막대한 진력이 쏟아져 들어오다가는 갑자기 그것이 실낱처 럼 가느다랗게 변하자, 자신이 펼치고 있는 섭혼채양술(攝魂採陽 術)을 극성까지 끌어올리면서 거세게 요동쳤다. "헉헉헉……!" "으으흥… 흐응……!" 보이지 않는 사투(死鬪)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도 거친 숨소리와 교성(嬌聲)은 끊어질 줄을 몰랐다. 쾌락과 고통이 엇갈린 학운기의 표정은 처절하기까지 했고, 요녀 의 온몸의 혈관이 팽팽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지금이다." 다시 싸늘한 전음이 학운기의 귓전을 울렸다. 학운기는 전음이 들려 오자마자 즉시 단전의 진기를 기해혈(氣海 穴)로 쏟아 보내고는, 전음이 일러 준 방법을 시전하였다. 찰나 그는 자신의 단전으로 막대한 진력이 쏟아져 들어옴을 느끼 고는 그 동안 참고 참았던 게름칙한 것을 배설해 버리고는 축 처 져 버렸다. "헉!" 요녀는 자신의 몸 속에 있던 진기가 졸지에 빠져 나가 버리자, 헛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축 처져 버렸다. 이 때 하나의 인영이 조금 전까지도 춘풍이 거세게 몰아쳤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주걸신개 맹천의였다. 그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요녀의 사혈(死穴)을 찍어 버리고, 학 운기의 몸을 이불로 감싸 가지고는 방 안을 빠져 나갔다. 그런데 사혈이 찍힌 요녀. 그녀의 몸은 삽시간에 쭈글쭈글해지더니 보기에도 처참한 노파로 변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자신의 몸 속에 있던 진기가 삽시간에 빠져 나가 버리자 그 동안 지켜 온 용모라도 보존하려고 겨우 남은 실낱 같은 진기 로 요혈을 폐쇄했는데, 주걸신개가 사혈을 찍어 버리자 본래의 모 습으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다. 하늘에서는 그런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함박눈만 펑펑 쏟아져 내 리고 있었다. 한편 학운기를 안고 몸을 날린 주걸신개는 한참을 달리다가 한 관 제묘(關帝廟)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학운기를 한쪽에다 내려놓더니 그의 요혈을 툭 쳤다. "으음……!" 학운기는 나직한 신음을 내면서 부시시 눈을 떴다.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주걸신개 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노선배님께서 여기는 어떻게……?" "흥, 우선 네녀석의 보기 싫은 알몸뚱이나 가리고 얘기하자." 주걸신개는 말을 하면서 어디서 구했는지 한 벌의 백의를 그에게 주었다. 그는 주걸신개의 말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황급히 옷을 주워 입었다. 그가 옷을 다 입자마자 주걸신개의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네녀석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으면서도 어찌 청해(靑海)의 합랍 호로 오지 않았느냐? 난 또 아주 동정호(洞庭湖)의 물귀신이 되어 버린 줄로 알았지." 그는 학운기를 책망하면서도 얼굴에는 안도와 기대의 표정이 서려 있었다. "그렇다면 그 때 노선배님께서……?" "이 녀석아, 나였다면 그까짓 잡귀들에게서 너 하나 구하지 못했 겠느냐? 그런데 너는 그 동안 어디서 무얼 했느냐?" "예." 이어서 학운기는 그 동안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 었다. 주걸신개는 그의 얘기를 듣다가 그가 아홉 개의 무언가를 먹고 내 력이 급증했다는 말을 듣고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급히 다그쳤 다. "아홉 개? 그렇다면 너는 운기를 한 번 해 보아라." 학운기는 그의 갑작스런 말에 어리둥절했으나, 그가 계속 다그치 는 바람에 운기행공을 실시했다. 잠시 후 그의 몸에서는 아홉 가지 색의 찬란한 서기(瑞氣)가 뻗쳐 나왔다. "앗!" 그의 운기행공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주걸신개의 입에서 경악 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하늘의 뜻이로다, 하늘의 뜻이야. 한천빙룡(寒泉氷龍)의 구 색내단(九色內丹)을 복용하다니……." 그의 얼굴에는 격동(激動)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 식경쯤 흘렀을까? 학운기는 자신의 내력이 전보다 더욱 고강해진 것을 느끼고는 운 기를 마쳤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주걸신개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역시 네녀석은 하늘이 낸 녀석이다. 하늘에서 무림을 구하라고 내려 보낸 천고(千古)의 기재(奇才)란 말이다." "아니? 노선배님께서는 제 몸에서 무슨 특이한 현상이라도 발견하 셨습니까?" "그래, 너는 천고에 한 번 보기도 힘든 한천빙룡의 구색내단을 복 용했단 말이다." 그는 학운기에게 한천빙룡과 그것의 내단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학운기는 그에게 내단의 상상치도 못할 엄청난 효능들을 들으면서 거듭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의 긴 설명이 끝나자, 학운기는 문득 그것들을 자신에게 넣어 준 백아와 선아가 옆에 없음을 깨달았다. "노선배님, 혹시 백아와 선아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백아와 선아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학운기는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물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백아와 선아에 대하여 자세히 말해 주었다. "난 보지 못했는데…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 영물(靈 物)들은 반드시 너를 찾아올 테니……." 학운기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다시 백아와 헤어지자 못 내 섭섭했으나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 어쩔 수가 없었다. "한데 노선배님, 도대체 그 요부가 누굽니까?" 주걸신개는 그가 요녀에 대해 물어 오자, 짓궂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히히… 이 녀석아, 아직도 그 망구에 대해 생각이 있느냐?" "아니? 망구라뇨?" "히히… 이 녀석아, 그 요마는 백오십 세가 넘어서 쭈글쭈글 찌글 어진 할망구란 말이다." "예에? 그 요부는 많아야 이십오륙 세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 는데… 백오십 세라뇨?" "히히… 바로 네녀석처럼 색에 굶주린 녀석들 때문이지. 네녀석이 어떻게 그 요마를 만났는지 모르지만 만약 내가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네녀석은 뼈가죽만 남긴 채로 빼빼 말라 비틀어 져 죽어 버렸을 것이다." 학운기는 그의 말을 듣고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히히… 그것은 네녀석만 탓할 수도 없지. 아직까지 그 요마의 손 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까 말이다. 네녀석 이 그 요마의 최혼섭심술(催魂攝心術)과 미혼최심향(迷魂催心香) 에 당하고도 나의 전음대로 행해 준 것만도 장한 일이지." 그는 최혼섭심술과 미혼최심행에 대해 자세히 설명 해 주었다. 최혼섭심술은 그것을 펼친 사람이 성(聖)스럽게 보이게 하여 상대 의 마음과 넋을 완전히 사로잡는 것인데, 그것에 당한 자가 헤아 릴 수도 없을 만치 많았다. 미혼최심향은 일종의 미약인데, 이것에 중독되면 네 시진 이내에 음양교접(陰陽交接)을 행하지 않으면 온몸의 혈관이 파열해 버리 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음양교접을 해야 할 뿐, 그 밖의 해약은 없는 것이 었다. 주걸신개의 설명을 듣고 있는 학운기는 내심 가슴이 철렁해지며 등줄기에 싸늘한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걸신개는 그의 표정을 짓궂게 바라보면서 그 요녀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요녀는 백 년 전 무림십대기인(武林十代奇人)의 일 인인 무림선요 (武林仙妖) 공여옥(公如玉)과 자매지간인 구지선요(九指仙妖) 공 여혜(公如惠)였다. 요녀는 무림선요보다 실력이 부족해서 십대기인에 못 끼인 것이 아니라, 단지 무림에 나다니는 예가 극히 적어서 끼이지 못한 것 이다. 그러나 무림선요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자를 직접 고르려고 무 림에 뻔질나게 드나들었기 때문에 무림십대기인에 끼일 수 있었 다. 주걸신개의 말을 모두 듣고 난 학운기는 문득 한 가지의 의문이 생겨서 그에게 물어 보았다. "한데, 노선배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그 요부에게 잡힌 것을 알았 습니까?" "히히… 네녀석이 운이 좋은 것이지. 지붕을 타고 달리다가 네녀 석이 요마의 품에 안겨 가는 것을 보았기에 망정이지. 그래서 내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일석이조(一石二鳥)를 노린 것이지." "아니? 일석이조라뇨?" "히히… 네녀석도 살리고, 무림의 잡귀도 한 마리 잡고 말이다." 학운기는 그의 말뜻을 알고는 다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주걸신개는 그러한 그를 짓궂게 바라보다가는 표정을 점점 심각하 게 굳혔다. "자, 이제는 나하고 함께 청해로 가자." "아니, 갑자기 청해는 왜……?" "이 녀석아, 내가 말해 주지 않았더냐? 무림에 곧 일어날 처절한 혈겁을 막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그러자면 너는 무공을, 그것 도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혀야만 할 것이 아니냐?" 그는 마황성(魔皇星)과 천빈성(天斌星), 그리고 열두 개의 성좌에 서 배출한 정기를 받고 태어난 기재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 녀석아, 그러니 너는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라." "노선배님, 저는 부모님과 약속한 일 년의 시간이 다 되어서 집으 로 가 봐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천빈성의 정기를 타고난 기재라 는 확실한……." 주걸신개가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다. "이 녀석아, 천빈성과 마황성의 정기를 타고난 기재 말고 어느 누 가 무공을 한 번 보고 익힌단 말이냐?" "노선배님, 저는……." "시끄럽다. 너는 끝내 책임을 회피하려 하느냐?" 주걸신개는 한 마디 쏘아붙이고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흥분이 가라 앉았는지, 눈을 뜨고는 대혈겁(大血劫) 의 조짐에 대해 하나하나 예를 들어 가면서 자세히 설명을 해 주 었다. 그의 말을 모두 듣고 난 학운기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였 다. "노선배님! 그렇다면 강호를 돌아다니며 혈겁의 씨앗들을 분쇄해 야지, 한가하게 무공이나 익히고 있으란 말입니까?" 주걸신개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빤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허어, 요 녀석 좀 보게. 네가 현 무림십대고수인 패천마황과 수 라절혼마, 이 두 마두와 몇 초 상대했다고 네 알량한 무공에 자부 심을 갖고 있나 본데… 너는 그들이 진정한 실력으로 너를 상대했 다고 보느냐?" "……." "네녀석이 정 못 믿겠다면 나를 상대로 시험해 보아라. 네 공력이 예전보다는 몇십 배나 증가했으니, 어디 나의 삼 초만 받아 보아 라. 네가 만약 삼 초를 받는다면 청해까지 가자는 말은 않겠다. 자, 일어서라." "노선배님……." "어서 일어서지 못할까?" 주걸신개는 혹시나 그의 마음에 자만심이 깃들까봐 노파심에, 이 기회에 아주 그럴 여지를 완전히 없애 놓기로 작정을 했다. 학운기는 그가 계속 재촉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와 대치하고 마주 섰다. "고수들의 싸움에서는 초식의 현묘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내공이다. 너의 현재 공력은 최소한 오 갑자는 될 것 이다. 그리고 나는 삼 갑자의 공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똑같이 최대의 공력으로 삼 장을 교환하기로 하자. 그러면 너는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자, 준비하거라." 학운기는 주걸신개의 말을 듣고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노선배님! 삼 갑자와 오 갑자의 공력을 가진 사람들이 똑 같이 최대의 공력으로 마주친다면……?" "너는 내가 다칠까 봐 걱정하는데, 너나 조심하거라. 자, 하나… …." 주걸신개는 말을 마치더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학운기도 내심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지라 준비를 했 다. "셋!" 주걸신개의 마지막 숫자가 떨어지는 순간. 쾅－ 콰르릉－! 두 장력이 마주치자,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관제묘의 지붕 과 벽돌이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녀석아! 너는 최대의 공력을 쓰라니까, 어찌 십 성의 공력만 으로 마주쳐 왔느냐?" 주걸신개가 떨리는 목소리로 책망을 하면서 학운기가 서 있던 자 리로 쏘아 갔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정경이 환하게 드러났다. 학운기는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내상을 치료하는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주걸신개는 그 뒤에 앉아서 그의 명문혈에다 두 손 을 대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학운기가 요상을 마쳤는지 눈을 떴고, 그와 동시에 주걸신개도 그 의 명문혈에서 손을 떼어 냈다. 주걸신개가 그의 앞으로 와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아! 네가 그럴 것 같아서 십 성의 공력만 썼기에 망정이 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천고의 대마두(大魔頭)가 될 뻔했잖 느냐?" 학운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찌 공력이 높은 제가 오히려 손해를 보았습니까?" "너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렇다면 진기(眞氣)의 운용(運用) 방법 때문에……." 주걸신개가 박장(拍掌)을 했다. "그렇지. 너는 역시 천고의 둘도 없는 기재다. 그러한 것을 단번 에 깨달을 수 있다니 너는 뛰어난 천성으로 다른 사람의 무공을 보고 그 초식을 배울수 있으나, 그에 따른 내력 운용 방법을 모르 기 때문에 그 초식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 고 똑같은 공력으로도 내력 운용 방법에 따라서 그 위력이 천양지 차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삼 갑자의 공력을 가진 나에게 패한 것이다. 그런데 너와 똑같은 천성(天性)을 가진 마두가 지금 고금제일(古今第一)의 마공을 다 익히고 있는데, 너는 그래도 청 해로 가지 않겠느냐?" 학운기는 그의 긴 설명을 듣고 새삼 무공의 한없는 깊이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혈겁의 아수라장으로 변할 무림을 구하기 위 해서는 어떤 마두보다도 고강한 무공을 익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 다. "한데 노선배님, 부모님과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것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개방의 제자들을 통해 소식을 전 해 주도록 할 테니, 넌 오직 무공 연마에만 심혈을 기울여라." 이윽고 그들은 청해(靑海)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계속 내리던 함박눈도 그쳤고, 하늘에는 서서히 구름이 걷히더니 동쪽에서는 붉은 태양이 막 은세계(銀世界)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 다. × × × 석실(石室) 안에는 일소사로(一小四老)가 서로 마주 앉아 있었다. 학운기와 우내사존(宇內四尊)이었다. 학운기는 주걸신개와 곧장 이 곳으로 온 것이다. 이 곳은 청해(靑海)의 합랍호(哈拉湖) 아래에 건축된 수중(水中) 석실이었다. 혜불선승(慧佛仙僧)이 인자한 미소를 띄우고 학운기를 바라보았 다. "너는 도(道)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예, 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느냐?" "어떤 것보다도 커서 만물(萬物)을 다 덮기 때문입니다." 우내사존의 얼굴에 경탄(驚歎)의 기색이 서렸다. 천기자(天機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너는 선(善)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예, 떳떳함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밝음(明)을 이릅니 다." "흠, 그럼 악(惡)이란?" "감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어둠(暗)을 이릅니다." "너는 그러한 것들이 어디에 존재(存在)한다고 믿느냐?" "예, 행(行)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고 봅니다." "흐흠……!" 우내사존은 서로를 바라보고 입을 달싹거리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새제갈(塞諸葛) 천기후(天奇候)가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거의 십 년 정도는 내공을 익힌 것 같은데, 누구에게 배웠 느냐?" "예, 제가 처음……." 학운기는 자신이 내공을 익히게 된 것을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그가 네 가지 내공의 미비한 점을 보완해서 하나의 내공 구결을 창안했다고 하자, 우내사존은 경악의 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새제갈 천기후는 그 중에서도 제일 놀란 듯했다. "너는 그 구결들을 말해 주지 않겠느냐?" "예." 학운기는 자신이 창안한 내공 구결을 외워 나갔다. "아……!" "음……!" 우내사존의 입에서 네 마디의 각기 다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주걸신개는 그가 천빈성(天斌星)의 정기를 타고난 천고의 기재라 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놀라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 는지, 혼자서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 세상에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무공의 단점을 파 악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그 단점을 보완해서 새로운 것을 창안하 다니… 역시 천고의 기재로다, 기재야." 천기자가 놀라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창안한 내공은 노부들도 감히 생각지 못하던 엄청난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은 내력 증진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으나, 호신강 기(護身 氣)를 일으키는 데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을 것 같구 나. 하지만 실망은 말아라. 그것은 네가 무공이라는 것을 모르고 단지 호연지기를 키우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창안한 것이니, 네 가 좀더 고치면 천고에 둘도 없을 훌륭한 내공심법이 될 것이다." 우내사존은 학운기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세히 설 명 해 주었다. 이 석실은 무림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한 기인(奇人)이 지은 것 이었다. 그 기인은 스스로를 무명자(無名子)라 칭했다. 무명자는 천여 년 전에 태어나서 삼백여 년 간이나 오직 무공만을 연구하다가 우화등선(羽化登仙)하였다. 그는 일찍이 천여 년 후에는 무림에 미증류(未曾有)의 대혈겁(大 血劫)이 일어날 것이라는 천기(天機)를 알고는, 그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전무후무한 천고제일(千古第一)의 무공을 창안하여 이 곳 에 남겨 둔 것이다. 우내사존은 우연히 이 석실을 발견하고 석실 안에 엄청난 무공비 급(武功秘 )들이 소장(所藏)되어 있음을 알고는 매우 놀랐다. 그러나 자신들이 이 석실까지 오게 된 경위가 무명자의 치밀한 안 배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는, 그의 놀라운 혜안(慧眼)과 선견지명( 先見之明)에 감복하여 스스로 그의 종(僕)이라 칭하고 모든 준비를 하면서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연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 었다. '아, 세상에 천여 년 후까지 내다보는 기인이 있었다니……!' 우내사존은 이어서 마황성(魔皇星)과 천빈성(天斌星)에 얽힌 천기 (天機)도 얘기해 주었다. 학운기는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문(文)만이 아니라 무(武)로도 천하창생(天下蒼生)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책 임을 통감(痛感)했다. 주걸신개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지금부터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직 무공만을 익히도록 하여 라." 그는 말을 하고는 학운기를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석실 벽의 한 곳을 누르자, 돌연 석실 벽이 양쪽으로 갈라져 서 또 하나의 석실이 나타났다. "자, 너의 무운과 성취를 빌겠다." 학운기는 한 마디씩 무운을 빌어 주는 우내사존에게 예를 취하고 는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석실 벽이 다시 닫혔다. 그와 동시에 그가 들어선 석실의 한쪽 벽이 열리면서 좌선(坐禪) 하고 있는 백의중년인이 나타났다. 이미 우내사존에게 모든 것을 들은 그인지라, 즉시 구배지례(九拜 之禮)를 올리면서 제자의 예를 취했다. "제자, 학운기가 삼가 사부님의 유체(遺體)를 뵈옵니다." 그가 구 배(拜)를 모두 마치자, 그의 앞에 서찰 한 통이 놓여져 있었다. 그는 신묘(神妙)한 기관장치(機關裝置)에 매우 놀라면서 서찰을 읽어 갔다. <제자에게. 먼저 네가 나의 제자가 되었음을 축하한다. 여기에 들어온 너는 틀림없이 천빈성의 정기를 타고난 기재일 것 이다. 만약 네가 천빈성의 기재가 아니라면, 이 곳의 무공은 영원히 익 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여기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네 명은 네가 이후에 강호에서 마황성의 저주를 해소시킬 때 도와 주 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안배해 놓은 기인들이니라. 그들은 네가 무공을 완전히 성취하고 나가는 날 너를 주상으로 모 실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여라. 그럼 꼭 마황성의 저주를 해소하여 무림과 강호에 평화를 안착시 키기 바란다. 무명자(無名子).> 학운기가 서찰을 모두 읽고 다시 삼 배를 올렸다. "제자 학운기는 사부님의 유언을 각골명심(刻骨銘心)하겠습니다." 그가 삼 배를 마치고 나자마자 무명자의 유체가 다시 석벽 속으로 들어가더니, 석벽이 완전히 닫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신묘한 기관장치에 계속 놀라면서 비로소 석실을 자세히 둘 러보았다. 그러나 석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옆쪽의 벽이 스르 르 열렸다. 그 곳에는 새까만 윤이 나는 침상과 하얗고 커다란 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침상 위에는 양피지로 만든 책자가 한 권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석실의 구조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것이었다. 석실은 모두 똑같은 크기의 아홉 개로 이루어 졌다. 그 중 하나는 우내사존이 기거하는 곳이고, 하나는 그가 사부의 유체를 뵈었던 곳, 또 하나는 사부의 유체가 안치된 곳이었고, 나 머지 여섯 군데는 모두 무공을 익힐 사람을 위해서 안배된 것이었 다. 그리고 침상은 만년온옥(萬年溫玉)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자는 중 에도 은연중 내력을 높여 주는 것이었다. 항아리에는 벽곡단(酸穀丹)이 가득 들어 있었고, 그 옆에는 공청 석유(空淸石乳)가 솟아나오는 조그만 샘이 있었다. 학운기는 우선 한 모금의 공청석유와 한 알의 벽곡단으로 배를 채 운 다음, 무공을 익히기 위하여 설레는 가슴을 가지고 다음 석실 로 들어갔다. 세월이 흘렀다. 꽃이 피고 지기를 두 번, 이 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우내사존은 학운기가 하루 빨리 무공을 익히고 나오기를 고대하면 서 가끔 번갈아 몇 달씩 어디를 다녀오는 것 외에는 무공을 수련 하는 것이 일과였다. 한 번 석실 안으로 들어간 학운기는 나올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열릴 것 같지가 않던 석실 벽이 열리면서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띈 학운기가 걸어 나왔다. 이 년 전의 어리던 그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몸에서는 은은한 서기(瑞氣)가 뻗쳐 나와 감히 범접치 못할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특히 그의 신비롭고도 맑은 눈은 더욱 신비로워져 있었다. 세상에 어떤 사악한 자도 그의 눈을 보면 흉심과 악심이 사라질 정도였다. 때마침 모두 모여 있던 우내사존은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보더니, 모두 부복(俯伏)하였다. "노복(老僕)들이 삼가 주상(主上)의 출관(出關)을 앙축하나이다." "그 동안 기다리느라고 수고들 하셨소." 그는 답례를 하고는 가볍게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순간 우내사존의 몸이 일으켜지면서 허리가 쭉 펴졌다. "주상, 이러시면……." 그들은 내력을 돋우어 몸을 다시 숙이려고 애썼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가득 차올랐다. 세상에? 우내사존의 몸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가볍게 일으키다 니? 만약 무림인들이 이러한 소식을 들었다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것은 믿어도, 그것만은 믿지 못할 것이다. 학운기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 네 분은 너무 예의에 구속되지 마시오. 네 분은 나보다 나이 도 몇 갑자나 많고, 또한 무림에서의 신분도 지극히 높은데… 그 러한 행동은 합당치가 않소." 주걸신개가 그의 말에 반박을 했다. "하오나… 주상! 노복들은 이미 주상의 종으로서 하늘에 맹세를 했으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세 명도 그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섰다. "네 분이 정 그렇게 고지식하게 나온다면, 강호에 나 혼자서 나가 겠소." 우내사존이 몇 번이나 안 된다고 간청을 했으나, 한 번 굳어진 학 운기의 마음은 돌려지지가 않았다. 마침내 우내사존도 그에게 승복하고 말았다. 새제갈 천기후가 그를 바라보았다. "하오면… 주상! 우리들끼리 있을 때만이라도 예를 취할 수 있도 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학운기는 그것마저도 거절할 수가 없어서 한 가지 단서를 붙여서 허락했다. 그것은 부복(俯伏)만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한참 동안을 현 무림의 정세에 대하여 토론을 하다가는 석 실을 떠나 강호로 향했다. 무창(武昌). 호북제일(湖北第一)의 시진으로서 옛부터 문물이 발달하고 교역이 성한 커다란 성시였다. 이 무창성에 얼굴이 누리끼리한 백의서생이 들어서고 있었다. 학운기였다. 그는 우내사존 등과 각각 헤어져서 무림의 동정을 살피면서 이 곳 까지 온 것이다. 원래 그는 변장을 하지 않았으나, 너무나 절세적인 용모 때문에 행인들과 주위의 시선이 하도 따가워서 할 수 없이 변장을 한 것 이었다. 그가 마침 출출하던 배를 채우려고 주루(酒樓)를 찾고 있을 때. 한 준수하게 생긴 청의소년이 그를 툭 치고 지나갔다. '호오, 이것 봐라.' 학운기는 내심 고소를 머금으며 슬그머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청의소년은 길을 가면서 계속 사람들과 부딪쳤다. 그러나 워낙 많은 행인들이 다니는지라 부딪친 사람들은 별 상관 을 않고 그대로 갔다. 청의소년은 얼마쯤 그렇게 가다가 한 커다랗고 화려한 주루 안으 로 들어갔다. 학운기도 그의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주루는 한창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청의소년은 다행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학운기가 빈 자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자, 점원이 그에게 다가 왔다. "공자님, 죄송합니다만 빈 자리가 없는뎁쇼. 하지만 공자님께서 괜찮으시다면 합석을……." "그렇게 해 주겠나?" "예, 예. 그러시면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침 빈 자리는 청의소년 앞자리밖에 없었다. 점원이 청의소년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며 뭐라고 하자, 청의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 청의소년의 입가에는 고소가 피어 올랐다가는 이내 사라졌 다. 점원이 학운기에게 다가와서 그를 청의소년이 앉아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형장, 괜찮으시다면 소생이 합석을 해도 되겠소?" "예, 어서 앉으시오." "고맙소." 학운기는 자리에 앉아서 몇 가지 음식과 백홍주(白紅酒)를 한 근 시켰다. 청의소년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장께서는 무공도 모르시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 험악한 강호 를 홀몸으로 돌아다니시오?" "예, 소생은 견문이나 넓히려고 돌아다니는데 그 동안 산적 떼를 만나서 고생도 많이 했소이다." 청의소년은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했구려. 형장도 무공을 배웠으면 그런 고생쯤은 하지 않았을 텐데……." 학운기가 갑자기 그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형장께서는 무공이 매우 높은가 보구려?" "하하… 높다기보다는 내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정도 죠." 이 때 점원이 음식과 술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술자늘 서로 주고받으며 통성명을 하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청의소년의 이름은 제갈소웅(諸葛 雄)이라고 했다. 제갈소웅은 얘기를 하는 도중 학운기의 높은 학식에 탄성을 토했 다. 학운기도 그의 학식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후후… 도둑놈치고는 매우 많은 책을 읽었군. 혹시 그것도 누구 에게 훔친 것……?' 그는 거기까지 생각하자, 대소(大笑)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그의 갑작스런 대소에 제갈소웅은 어리벙벙하여 커다란 두 눈만 꿈쩍거렸다. "아니? 학형! 갑자기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각났소?" "하하… 아니오. 제갈형의 말씀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그만……." 제갈소웅이 그러한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학형은 나의 학식이 얕음을 비웃는 것이오?" "아, 아니오. 제갈형의 말씀은 정말로 재미있었소. 그리고 제갈형 은 처음 만난 사람 같지가 않고 마치 오랫동안 사귀어 온 지기처 럼 느껴지는구려." 제갈소웅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학형은 무림인이 싸우는 것을 구경해 보았소?" "글쎄요.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그리 신통한 것은……." "그렇다면 내 학형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 주겠소." "아니? 좋은 구경이라니요?" "하하… 학형은 소제만 따라오시오. 자, 그만 일어서도록 합시 다." 학운기도 그의 뒤를 따라서 일어섰다. 학운기가 급히 계산대로 다가가면서 계산을 치르려고 하자, 제갈 소웅이 황급히 그를 말렸다. "아니오, 학형. 오늘은 내 학형께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 내가 치 르도록 하겠소." 그는 말을 하면서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앗!" 품을 뒤적이던 그의 얼굴은 똥색이 되어 버렸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를 보고 빙그레 웃어보였다. "제갈형, 소제가 낼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품속에서 하나의 빨간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그것을 바라보는 제갈소웅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 졌다. 학운기가 주머니를 열어 보니 몇 개의 야명주(夜明珠)와 보주(寶 珠)만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품속에다 집어넣고는 다른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제갈소웅은 그것을 보더니 완전히 넋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학운기는 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내어 계산을 치르고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제갈형! 그만 갑시다. 제갈형이 보여 준다던 재미있는 구경 이 몹시 기다려지는구려." "학… 학형이 그것을 어떻게……?" "하하… 세상 일이 다 그런 것이 아니겠소? 자, 어서 갑시다." 제갈소웅은 아직까지도 넋을 잃고 있다가는 갑자기 얼굴을 싸늘하 게 굳히면서 급히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들이 무창성을 빠져 나왔을 때 갑자기 제갈소웅이 학운기를 끌 고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자, 학형!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오?" "하하… 나는 견문을 넓히려고 강호를 유람하는 서생이라고 하지 않았소?" "거짓말하지 마시오. 일개 서생이 어떻게 나의……." "하하… 이것 말이오?" 학운기는 말을 하면서 품속에서 대여섯 개의 주머니를 꺼냈다. "나는 이것을 주루의 탁자 밑에서 주웠는데, 제갈형 것이었소? 하 하… 난 또 임자가 없는 것인 줄 알았지." 그는 짐짓 얼굴을 붉히면서 주머니들을 제갈소웅에게 건네 주었 다. 제갈소웅은 주머니를 낚아채면서 갑자기 학운기의 몇 군데 요혈을 찍어 버렸다. 풀썩－! 학운기는 그 자리에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 이상한데?" 제갈소웅은 돌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학운기의 몇 군데 요혈을 만져 보았다. 그의 고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계속 갸우뚱거리고 있었 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하다가 학운기의 요혈을 풀어 주었다. 학운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부시시 눈을 떴다. "아니, 제갈형! 내가 갑자기 왜 쓰러졌죠?" 제갈소웅은 미안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학형, 미안하오. 소제가 그만 실수를 했나 봅니다." "아니, 실수라뇨?" "아… 아니오. 어서 가기나 합시다." 그는 말을 하면서 무안을 감추려는 듯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 다. 학운기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가에 의미 있는 고소를 띄우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 第 7 章 무림제일궁(武林第一宮) ====================================================== 무림제일궁(武林第一宮). 당금(當今) 무림의 제일고수(第一高手)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 성군(武林聖君) 황보웅(皇甫雄)이 세운 궁이다. 무림성군 황보웅은 현 정파무림의 영수(領首)일 뿐만 아니라, 사 파의 마두들도 그에게는 한 발을 양보하는 그야말로 무림성군이었 다. 지금 무림제일궁 앞에는 수많은 무림인들이 줄을 서서 안으로 들 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젊은 남녀들이 거의 칠팔 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학운기와 제갈소웅도 그들 틈에 끼여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 방명록(芳名錄)의 서명을 맡아 보던 청의중년인이 제갈소웅을 보 더니 깜짝 놀라서 부르짖었다. "아니? 제갈나……." 순간 제갈소웅이 그를 급히 저지시키며 입을 달싹거렸다. 청의중년인은 그의 전음을 듣고는 의미 있는 미소를 띄웠다. 제갈소웅은 방명록에 서명을 하고는 학운기에게 붓을 넘겨 주었 다. 그가 서명을 마치자 위맹하게 생긴 황의대한이 그들을 객방(客房) 으로 안내했다. 무림제일궁은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일견하기에도 십여 채의 전각(殿閣)과 수십 채의 누각(樓閣)들이 눈에 들어왔으나, 그 뒤로 얼마나 많고 화려한 누각과 전각들이 있는지 알 만했다. 학운기는 객방에 들어서자 매우 궁금한 표정으로 제갈소웅을 바라 보았다. "제갈형,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이토록 많은 무림인들이 몰려 드는 것이오?" "아참, 내가 아직 학형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았구려. 내일이 바로 무림제일궁주 황보 대협의 육십오회 생신이오." 그는 황보웅을 매우 존경하는 듯 얼굴에는 엄숙한 기색이 가득 서 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일은 바로 비무대회(比武大會)가 열리는 날이기도 하고요." "아니? 비무대회라뇨?" "무림영재(武林英才)들을 뽑는 대회지요. 이 곳 제일궁에서는 매 년 황보 대협의 생신 일에 열 명의 무림영재를 선출하여 궁의 제 자로 받아들이지요." 학운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래서 유달리 젊은이들이 많았구려? 한데 이토록 많은 사 람들이 온 것을 보면 황보 대협이란 분의 덕망과 무공이 매우 높 은가 보죠?" 제갈소웅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학형은 아무리 무림인이 아니라지만, 무림성군 황보웅 대 협의 성명(聖名)도 못 들어 보았소?" 학운기가 무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그렇다면 내 자세하게 얘기해 주겠소." 이어서 제갈소웅은 황보웅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는 무림제일궁과 황보웅에 대해 매우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존경하는 표정으로 황보웅에 대해 얘기했다. 무림제일궁에는 황보웅을 보좌하는 다섯 명의 절정고수(絶頂高手) 가 있었다. 무림인들은 그들을 무림오룡(武林五龍)이라 불렀다. 그들은 흑룡(黑龍) 염원도(廉元刀), 백룡(白龍) 섭견청(葉堅靑), 청룡(靑龍) 사일천(舍日天), 황룡(黃龍) 영호무(永虎武), 그리고 유일한 여성인 홍룡(紅龍) 호연영(胡娟英)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무공은 한결같이 각대문파의 장문인에 맞먹을 정도 라 했다. 제갈소웅은 황보웅의 두 아들딸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아들은 금검옥룡(金劍玉龍) 황보룡(皇甫龍)인데, 강호의 후기지수 (後起之秀) 중에 제일 빼어난 기재(奇才)라 했다. 딸은 중원제일(中原第一美) 황보설(皇甫雪)인데, 그녀의 미모는 서시(西施)나 달기를 능가한다 했다. 긴 얘기를 마친 제갈소웅은 한참 더 얘기를 주고받다가 자기 방으 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학운기는 제갈소웅을 따라서 비무대회가 열리는 곳 으로 갔다. 비무대(比武臺)는 무림제일궁에서 제일 커다란 전각인 무성전(武 聖殿)의 넓은 뜰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미 수많은 무림인들이 뜰을 꽉 메우고 있었다. 학운기와 제갈소웅은 비무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비무대 안쪽에는 차일이 쳐져 있었고, 그 안에는 이십여 개의 화 려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잠시 후 비무대 한쪽에 설치한 북이 울리면서 무성전 안에서 이십 여 명의 인영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신형은 한결같이 유연하고도 빨라서, 일견에도 강호의 절 정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비무대 안쪽에 있는 차일 속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 다. 가운데에는 청수(淸秀)하게 생긴 육십여 세의 백의노인이 앉았는 데, 제갈소웅이 그가 황보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의자에는 백미노승(白眉老僧)이 앉아 있었는 데, 무림십대고수의 일 인인 무아신승(無我神僧)이라 했다. 무아신승의 옆에는 학운기도 알고 있는 중원선협(中原仙俠) 동방 군(東方君)이 앉아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무림십대고수 중 삼 인이 모인 것이다. 황보웅의 왼쪽에는 하얀 면사(面紗)로 얼굴을 가린 소녀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중원제일미 황보설이라고 하였다. 비록 면사로 얼굴을 가려 용모는 볼 수가 없었으나, 그녀의 몸매 는 그야말로 매혹적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이십삼사 세쯤 되어 보이는 절세준미(絶世俊美)한 청년이 앉아 있었는데, 금검옥룡 황보룡이었다. 그리고 황보웅 뒤에는 무림오룡과 각대문파의 장로급(長老級) 인 사들이 앉아 있었다. 다시 두 번의 북이 울리자 오십여 세쯤 되어 보이는 금의인이 대 위로 올라왔다. 그가 대 위로 올라서자 웅성거리던 군웅들이 조용해졌다. 금의인은 먼저 황보웅 등에게 예를 취했다. "본인은 무림제일궁의 총관인 항마금강(降魔金剛) 경무영(景武營) 이외다. 먼저 본궁 궁주님의 생신에 왕림해 주신 여러 무림동도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비무대회가 끝난 후 에 잔치를 열겠으니, 한 분도 먼저 가시지 말고 끝까지 지켜봐 주 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비무대회도 예년과 마찬가지 로 삼 초의 승부로 판가름을 하겠습니다. 참가하는 소협들은 이 점을 명심하고, 처음부터 전력으로 겨루기 바랍니다. 그러나 살상 은 절대 금하니, 이 점도 함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다시 군웅들에게 가볍게 예를 취하고는 차일 속으로 들어가 앉았다. 잠시 후 한 청의중년인이 올라오더니, 비무대회의 개시를 알리고 는 맨 먼저 겨룰 두 명을 호명했다. 그들은 곧 비무대로 올라와서는 자신들이 가진 최상의 절기로 삼 초를 겨루었다. 그렇게 해서 엇비슷하게 끝난 것은 무아신승과 중원선협 동방군이 판가름을 했다. 비무는 계속 이어졌고, 뜰에 가득 모인 군웅들은 그들의 동작 하 나하나에 열광적인 환호를 울렸다. 비무에 참가한 젊은이들은 거의 삼백여 명이 넘는 것 같았다. 제갈소웅은 학운기의 옆에서 그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을 해 주 었다. "학형, 이러한 비무를 보는 소감이 어떻소?" "글쎄요. 무공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지라, 그저 신기할 뿐이 오." "하하… 지금은 예선이라서 별로지만, 잠시 후 결선 때는 그야말 로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오." 그의 말대로 비무는 갈수록 치열해져 갔다. 비무대회에는 비록 많은 사람이 참가했지만, 삼 초라는 초식의 한 계가 있었기 때문에 미시(未時)에 접어들 무렵에는 열 명의 우승 자를 가리고 끝났다. 열 명의 우승자 중에는 스스로 옥면서생(玉面書生) 방양구라 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말한 별호대로 매우 뛰어난 용모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공도 매우 놀라웠다. 그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가볍게 상대를 누르고 우승을 한 것이 었다. 학운기도 그가 비무를 할 때 그의 놀라운 무공을 보고는 순간적으 로 눈에서 광채를 발했었다. 방양구는 우승이 확정되자 오만한 태도로 황보웅에게 다가갔다. 그는 황보웅에게 단지 가벼운 예만을 취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무림인들과 비무대 아래의 군웅들이 못마땅한 표 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방양구는 황보웅의 옆에 앉아 있는 황보설을 슬쩍 쳐다보고는 다 시 황보웅을 바라보았다. "소생이 궁주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황보웅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무언가?" "예, 오늘 열 명의 우승자들 가운데서 다시 한 명을 선출하여 그 자에게 영애(令愛)를 주십시오." "뭐라고?"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무림고인들과 수많은 군웅들은 그의 느닷없 는 제의에 모두 탄성을 발하며 웅성거렸다. 이 때 군웅들 틈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와아… 그렇게 합시다!" 그 소리가 터져 나오자 군웅들이 하나둘 호응을 하더니, 급기야는 모두들 그렇게 하라고 아우성을 쳤다. 방양구를 제외한 다른 아홉 명의 우승자들도 그게 싫지는 않은 듯, 잔뜩 기대하는 표정들이었다. 군웅들이 하도 시끄럽게 아우성을 치자, 총관인 항마금강 경무영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두들 조용히 하시오. 그러한 것들은 여러분들이 결정할 일이 아니잖소!" 그의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군웅들은 한참 후까지 귀가 멍멍함을 느껴야만 했다. 군웅들이 조용해지자 황보웅이 부드럽게 방양구를 쳐다보았다. "여보게, 어찌 인륜대사(人倫大事)를 한갓 비무로써 결정할 수 있 겠는가? 더구나 당사자의 의견은 들어 보지도 않고 말일세." "궁주님, 황보 낭자의 미모는 옛날 서시를 능가한다고 들었습니 다. 그런 미인의 배필을 어찌 아무 데서나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이렇게 소년 영웅이 많이 모인 데서 선출을 하셔야죠." 그는 이어서 군웅들을 보고 크게 외쳤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소!" 십여 마디의 호응이 있었으나 항마금강 경무영이 그쪽을 싸늘하게 쳐다보자 쏙 들어가고 말았다. 이 때 황보설은 자신을 마치 상품처럼 취급하려는 방양구의 말을 듣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황보룡은 금세라도 그에게 덮쳐 들 기세였으나 황보웅의 제지로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방양구는 십여 마디의 호응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황보웅을 바라 보았다. "궁중님, 보십시오. 군웅들도 모두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태도는 무엇을 믿고 있는지 세 명의 십대고수와 십여 명의 무림고인들 앞에서도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순간 항마금강 경무영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그의 옆으로 다가섰 다. "방소협은 본궁에 시비라도 걸러 왔소?" 방양구가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당신은 나설 데가 아니오." 그는 오만하게 한 마디 던지고는 다시 황보웅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네놈은 진정 시비를 걸려고 왔구나." 경무영은 한 소리 부르짖으며 그에게 덮쳐 갔다. "흥, 당신은 나설 데가 아니라고 했잖소?" 방양구는 콧소리를 뱉으며 가볍게 일 장을 날렸다. 쾅－! 위맹한 굉음이 들리며 덮쳐 들던 경무영의 몸이 삼 장 밖으로 떨 어졌다. "앗!" "경 총관!" 수 마디의 각기 다른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후후… 그러길래 내가 뭐랬소? 당신은 나설 데가 아니라고 했잖 소?" 방양구는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나가떨어진 경무영에게 조소를 보 냈다. 이 때 황보웅의 뒤에 앉아 있던 무림오룡 중 백룡 섭견청과 황룡 영호무가 그의 앞으로 날아왔다. 섭견청이 싸늘한 살기가 쏟아지는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네녀석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행패냐?" "어디긴 어디요? 무림제일궁이지. 그리고 나는 행패를 부리는 것 이 아니라, 지금 궁주님께 정중한 제의를 하고 있던 참이었소!" "뭐라고? 정중한 제의? 이 녀석아, 그러면서 무력을 사용해?" "후후… 그거야 먼저 경고를 했잖소. 그리고 다친 것은 무공이 약 함을 탓해야지 어찌 나에게 시비요?" 오만무도(傲慢無道), 방약무인(傍若無人), 그야말로 안하무인(眼 下無人)의 행동이었다. 섭견청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다면 너도 무공이 약함을 한탄해 보아라." 그는 말을 마치자, 위맹한 장력을 펼치면서 방양구에게 덮쳐 갔 다. 비무대 위가 순식간에 그의 장영(掌影)으로 덮였고, 장력의 여세 가 가까이 지켜보던 군웅들의 옷자락을 흩날렸다. "후후… 당신들 정도의 실력으로는 어렵소." 방양구는 한 마디 비웃음을 던지고는 그의 공세를 가볍게 피하면 서 역습을 했다. 순식간에 비무대 위가 백영(白影)과 청영(靑影)의 어지러운 그림 자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 때 섭견청과 방양구의 싸움을 지켜보던 황보웅과 무아신승, 그 리고 동방군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은 서로 뭔가를 주고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섭견청과 방양구는 한창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십여 초가 지나자 섭견청이 눈에 띄게 밀리더니, 삼사 초가 더 지 나자 방양구의 일 장을 정통으로 가슴에 얻어맞고 말았다. 펑－! "윽!" 그는 입에서 피화살을 뿜어 내면서 뒤로 날아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영호무가 황급히 그를 받아 들고는 옆으로 내려 섰다. "아……!" 군웅들 사이에서는 계속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겨우 이십 세를 넘긴 듯한 방양구가 무림의 절정고수 대열에 끼이는 섭견청을 가볍게 물리쳤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 때 싸움을 초조히 지켜보던 오룡 중 수룡(首龍)인 흑룡(黑龍) 염원도(廉元刀)가 방양구에게 덮쳐 왔다. 방양구는 그의 공격을 피하면서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뜨렸다. "하하… 이제 알고 보니 무림오룡은 차륜전(車輪戰)으로 이름을 떨친 것 같구려. 하지만 상대를 잘못 선택했소이다." 그는 말을 하면서 염원도에게 덮쳐 갔다. "멈춰라!" 갑자기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폭갈이 터지며 중원선협 동 방군이 그들 사이로 내려섰다. 방양구도 군웅들이 보는 앞에서 그가 나설 줄을 몰랐었는지, 흠칫 놀라는 듯했다. "염수룡은 잠깐 들어가 있게." 동방군은 염원도에게 한 마디 하고는 방양구에게 몸을 돌렸다. "소협은 천살마제(天煞魔帝) 편 선배와 어떻게 되는 사인가?" 동방군의 입에서 천살마제란 소리가 나오자, 군웅들의 얼굴이 퍼 렇게 질렸다. 천살마제(天煞魔帝). 그는 백여 년 전 십대기인의 일 인으로서 강호천지에 마명(魔名) 을 떨친, 사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마두였다. 방양구가 오만한 웃음을 흘리며 동방군을 바라보았다. "후후… 그분은 나의 사부님이시오. 동방 선배께서는 나와 황보 낭자의 중매를 서려고 나섰소?" 그 때까지 잔잔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있던 동방군도 안하무인 격인 언행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네녀석이 너무 방자하구나." "후후… 그래서 나의 버릇을 고치겠단 말이오?" "오냐, 내 오늘 네녀석을 따끔하게 훈계 해야겠다." 그는 말을 하면서 신중한 태도로 방양구에게 다가갔다. 장내에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침묵이 흘렀다. "탓－!" 방양구가 한 소리 외침을 토하며 동방군에게 덮쳐 갔다. 쾅－ 콰르르릉－! 그들 사이에 순식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황보웅과 무아신승, 그리고 군웅들은 경 악으로 눈이 점점 크게 떠졌다. 싸움은 누가 우세한지도 모르게 흘렀다. 단지 황보웅과 무아신승만이 동방군이 약간의 우세를 점하고 있다 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 이제 겨우 약관의 소년이 무림십대고수 중의 일 인인 동방군과 거의 대등하게 싸우고 있으니… 지켜보는 군웅들이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순식간에 백여 초가 흘렀다. 그러자 서서히 방양구의 열세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열세에 빠지자 악독한 장력을 쉴새없이 펼쳤으나, 열 세는 쉽사리 회복하지 못하였다. 또다시 백여 초가 흘렀다. 이제 방양구의 패배는 시간 문제인 것 같았다. 그런데 동방군이 막 절초를 펼쳐서 그를 제압하려는 순간. "와하하하……!" 하늘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광소(狂笑)가 울리면서 한 인영이 비무 대 위로 서서히, 아주 서서히 마치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듯한 신 법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 군웅들이 그것을 보고는 혼이 달아나는 듯한 경악의 탄성을 토했 다. 동방군이 그를 알아보았는지 흠칫 놀라며 부르짖었다. "천살마제 편한천……!" "헉!" 군웅들의 입에서 또 한 번의 경악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어린 놈!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비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던 학운기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저 자는 반노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이른 것 같구나.' 이 때 제갈소웅은 뭔가 몹시 두려운 듯 학운기의 팔을 꼭 잡고 있 었다. 천마살제 편한천은 동방군이 대견하다는 듯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 여 보이고는 황보웅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거만한 태도를 바라보고 있던 학운기는 내심 고소를 금치 못 했다. '후후… 방양구 저 자가 왜 오만한가 했더니, 사부의 행동을 빼다 박았었군.' 편한천은 웬일인지 부드러운 표정으로 황보웅을 바라보았다. "황보 군주! 나의 제자 녀석이 자네의 딸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 은데, 둘을 결합시켜 주면 어떻겠나?" 황보웅이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편 선배! 혼례는 인륜대사(人倫大事)인데, 어찌 한쪽의 강요로 이루어질 수 있겠소?" "자네는 딸애의 의향은 물어 보지도 않고 어찌 마음대로 결정하는 가?" "물어 보나마나 마찬가지일 거요." 이 때 황보설이 편한천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세상에 당신 같은 마두의 제자에게 시집갈 여인이 어디 있겠어 요?" "흐흐… 그것, 몸매뿐 아니라 입도 쓸 만하구나." 편한천은 말을 하면서 그녀에게 가볍게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순간 그녀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는가 싶더니, 편한천에게 쏠려 갔 다. "앗!" "설아!" 황보웅 등이 외침을 토하며 그녀를 잡아 갔으나 그녀는 이미 편한 천의 수중에 들어간 뒤였다. 황보웅이 편한천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분노의 외침을 토했다. "편 선배, 어린애한테 그게 무슨 짓이오?" "흐흐… 별것 아니네. 단지 이 애의 근골이 훌륭한 것 같아서 한 번 살펴보려던 것뿐이네." 그는 황보설의 몇 군데 요혈을 만져 보는 듯하더니, 곧 황보웅에 게 그녀를 건네 주었다. 황보웅은 그녀를 받아 들자마자 그녀의 몇 군데 요혈을 쳤다. 편한천은 그러한 그를 능글맞은 미소를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설아!" 황보설은 즉시 깨어나 몸을 일으켰으나 어쩐지 얼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황보웅이 편한천을 살기가 뻗치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편 선배! 당신은 이 애의 몸에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소?" "앗!" 그의 말에 몇 사람이 경악의 탄성을 토하며 황보설에게 다가가 그 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녀가 무슨 수법에 당했는지 알아 내지 못했 다. 황보룡이 멍하니 얼이 빠져서 서 있는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가는 돌연 분노의 외침을 토하며 편한천에게 덮쳐 갔다. "이 노마야! 내 동생에게 무슨 수작을 부려 놨느냐?" "용아야! 안 된다! 네 상대가 아니다!" 펑－! "윽!" 몇 마디 놀람의 외침이 터짐과 동시에, 황보룡은 편한천이 가볍게 휘두른 듯한 일 장에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피화살을 뿜어 내면서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황보웅은 편한천이 거듭 독수(毒手)를 사용하자, 분함을 참지 못 하고 그에게 덮쳐 갔다. 쾅－ 콰르르릉－! 순식간에 그들 사이에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다. 군웅들은 추측할 수 없는 무공을 가진 두 고수의 싸움을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무아신승과 동방군은 황보설의 몸에 펼쳐진 수법을 알아 내려고 애쓰는 것 같았으나, 결코 알아 내지를 못한 것 같았다. 황보웅과 편한천의 싸움은 순식간에 백여 초가 넘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신형을 분간할 수가 있었으나, 이제는 몇 명의 절정고수만 빼놓고는 누가 누군지조차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군웅들 틈에서 지켜보고 있는 학운기는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 었다. '음, 앞으로 이백여 초 정도면 황보 궁주가 패하겠구나.' 좀전까지 그의 옆에 붙어 있던 제갈소웅은 언제 올라갔는지 비무 대 위에서 황보설과 황보룡을 초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황보룡은 흑룡 연원도의 도움으로 운기요상하고 있었다. 싸움은 다시 백여 초가 흘렀다. 이제 황보웅과 편한천의 신형은 굼벵이보다도 느리게 움직이고 있 었다. 고수들은 그것이 더욱 위험한 결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내에 그 많은 사람이 있어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학운기가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위험하군.' 순간 학운기의 몸은 군웅들 틈에서 사라졌고, 장내의 싸움을 누구 보다 가까이에서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던 방양구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앗! 사부님! 뒤에……." 그의 경악의 외침과 동시에 편한천은 누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 는 것을 느끼고는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앗!" "아……!" 군웅들은 이 때서야 편한천 뒤에 한 누리끼리한 소년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경악의 탄성을 토하며 얼이 빠져 버렸다. 편한천은 감히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공포의 전율에 휩싸여 있었다. 아무리 결투 도중이라지만 자신의 뒤까지 와서, 그것도 어깨를 두 들릴 때까지 자신이 알아 내지 못할 정도의 고인이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그의 귀에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친구! 그 나이쯤 됐으면 철이 들 만도 하거늘, 아직도 행패나 부 리고 돌아다니오?" 순간 편한천은 번개같이 몸을 앞으로 퉁기며 몸을 돌렸다. "네놈은 누구냐?" 그는 채 약관도 안 된 소년에게 겁을 먹었던 자신이 어이가 없는 지 실소를 머금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러한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후후… 당신이 그런 것까지는 알 필요 없고, 버릇없는 제자나 데 리고 어서 사라지시오." "네놈이 감히 존장을 몰라보고 함부로 입을 나불거리는구나." 편한천은 분노의 빛을 띠면서 그에게 위맹한 장력을 펼치며 덮쳐 왔다. 그러나 학운기는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하였고, 그의 위맹한 장력은 학운기의 가까이에 이르기 무섭게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리는 것 이었다. "앗!" 편한천은 경악의 외침을 토하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아, 저 어린 놈이 도대체 누구의 제자이기에 적어도 오만 근의 위력을 가진 나의 장력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 버린단 말인가?' 학운기는 여전히 뒷짐을 지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편한천은 일순간 사라졌던 공포가 다시 밀려옴을 느꼈다. 이 때 방양구가 학운기의 뒤로 도둑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가더니 갑자기 악독한 장력을 펼쳤다. "안 돼!" 편한천이 다급하게 외쳤다. 편한천이 그것을 알고 그를 제지하려 했을 때는 이미 그의 몸은 학운기가 펼쳐 놓은 호신강기에 퉁겨 하늘 높이 날아가고 있는 중 이었다. 학운기는 여전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구아야!" 편한천은 하늘 높이 날아가는 방양구를 향해 번개보다 빠르게 몸 을 날려 갔다. "꼬마 놈아! 오늘의 수모는 꼭 갚을 테니, 목을 깨끗이 씻고 기다 려라!" 그는 학운기에게 싸늘하게 한 마디 하면서 방양구를 잡아채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와아……!" 그 때까지 멍하니 넋을 잃고 있던 군웅들이 천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을 질렀다. 황보웅 등이 학운기에게로 다가왔다. "소협, 고맙소이다. 이 늙은의 생명을 구해 주고 마두까지 쫓아 주었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별 말씀을… 단지 소생은 마두의 행동이 거슬려서 나섰던 것뿐이 었소." 순간 그의 거만한 듯한 말투에 옆에서 지켜보던 동방군 등의 눈살 이 약간 찌푸려졌다. 제갈소웅이 감격과 나무람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의 손을 덥석 잡 았다. "학형, 정말 소제를 이토록 속이시깁니까?" "하하… 미안하오. 제갈형을 속이려던 것이 아니라, 적당한 기회 가 없어서 밝히지 못했을 뿐이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황보웅이 제갈소웅을 바라보았다. "연아야, 네가……." 찰나 제갈소웅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황급히 입을 달싹거렸 다. 학운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갈소웅을 바라보았다. "아니? 연아라니요?" "아… 아니오. 백부님께서는 나를 가끔 그런 식으로 불렀소. 자, 학형! 내가 무림의 선배님들을 소개해 주겠소." 제갈소웅은 그가 또 무엇을 물을까 두려운지, 황급히 그를 끌고 군웅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황보웅 등은 이 어린 소년이 비록 거만하긴 하지만 눈동자가 신비 스러울 정도로 맑고 깊은 것을 보고는 그가 결코 사악한 인물은 아니라고 단정지었다. 학운기가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있는 동안 황보웅은 무엇에 크게 놀란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학 소협, 고맙소." 그는 한참 후에야 학운기에게 감사의 말을 하고는 급히 황보설에 게 다가가 그녀의 몇 군데 요혈을 짚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어리둥절해 있다가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놀라운 눈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황보웅은 지금 놀라움으로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저 소년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놀라운 무공을 소유 하고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전음을 펼치려면 최소한 사 갑자 이상의 공력이 필요한데, 저 나이에 설마……?' 이 때 무아신승과 동방군이 아무리 애를 썼어도 고치지 못했던 황 보설의 얼이 빠진 증세가 황보웅의 몇 번의 손길에 깨끗이 고쳐졌 다 "설아야, 몸은 어떻느냐?" "괜찮아요, 아버지. 한데 제가 그 동안 어떻게……." "그런 것은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고, 어서 은인에게 감사를 드려 야지." "은인이라뇨?" 황보웅은 그녀에게 간단히 설명해 주고는 학운기를 가리켰다. 학운기는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려고 전음을 펼쳐서 황보웅에게 그녀의 제압된 혈도를 푸는 방법을 알려 주었는데, 황보웅이 자신 의 체면을 생각지 않고 중인들에게 모든 것을 밝히자… 내심 당황 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황보설이 가벼운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와 예를 올렸다. "학 소협께서 소녀와 아버님의 생명을 구해 주셨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니오, 낭자.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황보설은 그가 비록 준수하지는 않지만 그의 신비스러운 눈을 보 고는 가슴이 설레임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학운기도 그녀의 면사 사이로 은은히 내비치는 아름다운 얼굴에 내심 탄성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역시 중원제일미란 칭호를 들을 만하구나.' 하지만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그에게는 더 이상의 감정은 없 었다. 황보웅이 그에게 다가왔다. "학 소협, 그만 안으로 들어가서 노부의 생일을 축하해 주지 않겠 소?" "예." 황보웅은 이어서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노부의 생일에 멀다 않고 찾아오신 여러분께 불미스러운 일 들을 보여 주어서 대단히 죄송하오. 하지만 이제 노마는 물러갔으 니, 여러분께서는 비록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많이 들어 주시면 고맙겠소." "와아… 무림성군 만세!" "와아… 천하제일인 학운기 소협 만세!" 무성진 넓은 뜰이 군웅들의 노도와 같은 함성과 환호로 들끓었다. 학운기는 군웅들이 자신을 천하제일인이라고 부르자, 내심 낯이 뜨거워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그러한 순진스러운 태도를 바라보는 무아신승과 동방군의 고 개가 끄덕여졌다. 학운기는 황보웅 등의 뒤를 따라서 무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무성전의 넓은 대청에는 이미 풍성한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 사이에 몇 순배의 술잔이 오고 갔다. 학운기가 또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나자 동방군이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학 소협의 사부는 누구인가?" "그것은……." "아, 괜찮네. 누구에게나 말 못할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학 소협을 어디선가 한 번 본 것도 같고, 이름도 노부가 알고 있 는 사람과 같은데… 얼굴이 전혀 딴판이니……." 이 때 학운기는 황보웅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황보 궁주와 동방 대협, 그리고 무아신승을 조용히 만나고 싶은 데마땅한 장소가 있소?" 황보웅은 마치 수하를 대하듯 하는 그의 말투가 약간 불쾌했으나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했다. 이윽고 황보웅은 대청 안에 있는 중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한 조용한 밀실로 들어갔다. 무아신승과 동방군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뒤를 따라왔다. 학운기의 얼굴이 밀실로 들어서는 순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황보웅은 밀실로 들어서서 자리를 권하려고 그를 바라보다 생전 처음 보는 절세준미한 서생이 서 있자 깜짝 놀랐다. "앗! 소협은 누구요?" 뒤따라온 무아신승과 동방군도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앗! 자네는 삼 년 전, 벽안백표를 가지고 있던 소년……." "하하… 미안하오. 내 잠시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변장을 했었 소." 학운기는 말을 하면서 손으로 무언가 복잡한 기호를 그렸다.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에 경악의 빛이 넘실거렸다. "주상!" 황보웅 등은 급히 바닥에 부복(俯伏)을 했다. 황보웅이 감격의 눈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노복들이 미처 주상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한 행동을 하였으니 벌을 내려 주십시오." "하하… 그것이 어찌 죄가 된단 말이오? 자, 그만들 일어나시오." 학운기는 말을 하면서 소맷자락을 가볍게 휘둘렀다. "주상! 아닙니다. 노복들은……." 그러나 그들이 저항을 했어도 그들의 몸은 막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잠력에 의하여 일으켜 세워지고 말았다. "자, 너무 예의에 구속되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예." 그들은 모두 좌정을 하고 현 무림의 정세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 다. 학운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황보웅을 바라보았다. "음, 흑도의 고수들이 갑자기 실종되는 것은 아마도 마황성의 저 주가 시작되려는 것 같구려. 황보 군주는 개방과 긴밀한 협조를 해서 그들이 은신한 장소를 꼭 밝혀 내도록 하시오." "주상의 분부,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황보 군주의 자제는 태양신맥(太陽神脈)을 타고난 것 같 던데, 궁주는 알고 있었소?" "예, 알고 있었습니다." "하면 왜 궁주의 진실된 무공을 그에게 전수하지 않았소?" "예, 새제갈 노선배님이 그 아이는 주상의 은총을 받을 거라고 해 서……." 학운기는 새제갈 천기후의 깊은 통찰력에 내심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알겠소. 그렇다면 자제를 오늘 밤 내 방으로 보내도록 하시오." 황보웅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주상." "자, 그만 나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언행에 주의를 하여 내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시오." 그는 한 마디 당부를 하고는 아까 변장했었던 누리끼리한 소년으 로 다시 변장했다. 그의 역용술(易容術)은 인피면구(人皮面具)나 약품을 이용하는 것 이 아니라, 진기(眞氣)로써 하는 진기역용술(眞氣易容術)이었다. 황보웅 등은 그의 신기한 역용술을 보고는 넋을 잃어버렸다. 이윽고 그들은 다시 대청으로 나가서 술좌석을 계속했다. 대청 안의 중인들은 학운기에 대해 갑자기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황보웅 등을 보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고 물어 보았으나, 흡족한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그 날 밤, 학운기는 자기 방으로 온 황보룡에게 그의 체질에 맞는 몇 가지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 황보룡의 재질은 매우 뛰어나서 그가 한 번만 일러 주면 척척 알 아들었다. 학운기는 그 날 밤을 푹 쉬고는 황보웅에게만 작별의 인사를 하고 는 어디론가 은밀히 떠나갔다. ====================================================== 第 8 章 최혼극음산(催魂極淫散) ====================================================== 무림제일궁을 떠나온 학운기는 호남(湖南)의 장사(長沙)를 향하여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경혼방(驚魂幇)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무림제일궁에서 나와 개방의 분타를 찾아갔었는데, 거기서 며칠 전부터 경혼방으로 사파의 마두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경혼방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인 애옥지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숲 속으로 들어와서는 경공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그의 귀로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 누가 대낮부터 싸우고 야단이지?' 그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몸을 날렸 다. 숲 속의 조그만 공터에서는 한 백의소녀가 사십대의 음탕하게 생 긴 중년인과 한창 치열한 혈투(血鬪)를 벌이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네 구의 처참한 소녀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중년인과 싸우고 있는 백의소녀도 이미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속살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중년인은 소녀를 충분히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도 그녀를 다 치게 하고 싶지 않은지, 그녀의 혈도를 짚을 기회만을 노리고 있 는 것 같았다. 챙－ 창－! 그들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파란 불꽃이 사방으로 퉁겼다. 학운기는 중년인의 음흉한 속셈을 대강 짐작하고는 내심 싸늘한 한기(寒氣)를 머금었다. 순간 그의 몸은 장중으로 뛰어들었고, 중년인은 어느 새 뻣뻣이 굳어 버렸다. 소녀는 그러한 것을 보더니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학운기는 뻣뻣이 굳어 있는 중년인의 아혈(啞穴)을 풀어 주었다. "네놈은 누구냐?" "후후… 친구! 칼자루는 본인이 쥐고 있소이다. 친구의 별호와 이 름은 무엇이오?" "흐흐… 본좌는 호남육옹(湖南六雄)의 첫째인 격상우(激湘雨)란 어르신네다. 너는 보복이 두렵거든 빨리 나를 풀어 주고 이 자리 를 떠나라. 그러면 내 아직 너의 나이가 어린 것을 봐서 오늘 일 만은 따지지 않겠다. 학운기는 어이가 없어서 고소를 금치 못하였다. "후후… 친구가 호남육흉(湖南六兇)의 첫째인 음흉(淫凶) 격상우 였구려? 그렇지 않아도 내 당신들의 흉명을 익히 듣고 한 번 만나 려 했던 참이었소." 격상우는 이 어린 소년이 쉽게 놓아 줄 것 같지가 않자 내심 당황 하는 것 같았다. "네놈은 나를 어떻게 할 셈이냐?" "후후… 당신이 행했던 행동대로 보상을 받아야 되지 않겠소?" 학운기는 말을 하면서 그의 몇 군데 요혈을 끊어서 무공을 전폐시 켜 버렸다. "이놈아,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 악독한 놈아!" 격상우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친구! 이제는 어디 가서 함부로 행패를 부리지 마시오. 만약 내 말을 명심하지 않으면 친구는 제 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오." "이놈아! 언젠가는 오늘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올 것이 다." "후후… 나도 당신이 형제들과 함께 다시 나를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겠소." 격상우는 한 번 더 학운기를 싸늘하게 쏘아보더니, 터덜터덜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학운기는 그가 숲 속으로 사라지자 쓰러진 백의소녀를 살펴보았 다. 그녀의 몸에는 별 상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맥을 짚고 내상이 있나 살펴보다가는 깜짝 놀라서 부 르짖었다. "앗! 이것은 최혼극음산(催魂極淫散)에 중독된 현상이 아닌가?" 그는 즉시 소녀의 맥문을 놓더니 격상우가 사라져 간 방향으로 몸 을 날렸다. 곧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 격상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격상우는 뒤쫓아온 학운기를 보더니 흠칫 놀라는 듯하였다. "네놈은 마음이 달라졌느냐? 죽일 테면 죽여라." "친구! 나는 친구의 더러운 목숨을 취하러 온 게 아니오. 친구는 어서 최혼극음산의 해약을 내놓도록 하시오." 격상우는 그의 입에서 최혼극음산이라는 말이 나오자 깜짝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네… 네놈이 그것을 어떻게……?" "그런 것은 알 필요 없고, 빨리 내놓으시오." "없다." "그래?" 학운기는 고소를 머금으며 그의 몸을 한 번 훑는 시늉을 하였다. 다음 순간, 격상우의 몸에서 십여 가지 물건이 저절로 빠져 나와 학운기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 너무 놀란 격상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을 뿐, 온몸이 굳어 지고 말았다. "이것은……." 학운기가 격상우의 몸 속에서 나온 물건들 중 네 개의 약병을 살 펴보다가 침음을 흘렸다. 그의 눈에서 싸늘한 살기(殺氣)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친구는 이 절혼무형독(絶魂無形毒)을 어떻게 구했소? 만독제군 (萬毒帝君)은 함부로 남에게 자신의 것을 주는 성질이 아닌 것으 로 아는데……." 격상우는 그의 싸늘한 살기가 쏟아져 나오는 눈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 주고 보답으로 받은 것이다." "그 보답이란 게 다섯 달 된 태아(胎兒)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 소?" 격상우는 그의 살기 띤 음성을 듣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뒤로 물러섰다. "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친구는 몇 명이나 해쳤소?" "나… 난 단지 다섯 명밖에… 나머지는 동생들이……." "다섯 명밖에? 친구는 사람 목숨이 무슨 파리 목숨인 줄 알았소? 내 오늘 친구를 죽이지 않기로 작정한지라 목숨은 살려 주겠소. 하지만 한 번 더 내 눈에 뜨일 시에는 가차없이 목이 날아갈 테 니, 명심하고 은밀한 곳에 숨어 사시오. 자, 빨리 꺼지시오." 학운기는 몹시 흥분하고 있는 듯하였다. 도대체 절혼무형독이 무엇이길래 그가 이토록 흥분하는 것인가? 그것은 만독제군의 독문(毒門) 독약인데, 천하제일독(天下第一毒) 이라 할 만하였다. 그 독은 무취, 무미하여 중독된 사람이 언제 어디서 중독된 줄도 몰랐다. 그 독은 중독된 지 한 시진 이내에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악랄 한 독이었다. 그런데 그 독을 만들려면 다섯 달 된 태아 백 명이 필요하였다. 학운기는 그러한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토록 흥분을 한 것이다. '음, 그 작자가 악랄하게 해약을 가지고 다니지 않다니… 어떡한 다?' 그는 한참을 무언가 생각하다가는 소녀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몸 을 날렸다. 그는 우선 처참한 시신으로 변한 네 명의 소녀들을 묻어 주었다. '아직 나이도 어린 소녀들이 무슨 일로 강호에 나왔다가…….' 그는 모든 것을 마치고는 다시 쓰러져 있는 백의소녀를 바라보았 다. 그녀의 미모는 그야말로 천향국색(天香國色)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오똑 솟은 콧날은 그녀가 매우 오만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음, 최혼극음산을 해독하려면 해약이 없이는 천상 음양교합술(陰 陽交合術)밖에 없는데…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는 내심 당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우선 그렇게라도 해야겠군.' 그는 무언가 결정한 듯 그녀를 안아 들고는 몸을 날렸다. 최혼극음산(催魂極淫散). 그것은 여타 음약과는 그 효능이 달랐다. 우선 이 음약에 중독이 되면 몸의 진력이 서서히 탈진된다. 진력이 완전히 탈진되고 난 후가 더 문제다. 만약 탈진된 후 한 시진 이내에 해약을 복용하거나, 하루 이내에 음양교합을 하지 않으면 그 때부터 중독된 자는 천하의 음마가 되 어 버린다. 학운기는 백의소녀를 안고 달리다가 하나의 은밀한 동굴을 발견하 였다.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짐승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깨끗하였 다. 그는 자신의 장삼을 벗어 바닥에 깔고는 그녀를 눕혔다. 그런 다음 그는 한참 동안을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음, 어떡한다? 생전 처음 보는 소녀의 옷을 벗길 수도 없고, 그 렇다고 음녀가 되도록 놔 둘 수도 없으니…….' 한동안 망설이던 그는 마침내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겨 갔다. 옷을 벗기는 그의 손은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남의 옷을 벗기기가 그토록 힘든 줄은 미처 몰랐었다. 마침내 그녀의 옷이 모두 벗겨지고 현란한 나신(裸身)이 나타났 다. "아……!"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여인의 나신. 그것은 그의 가슴을 심하게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더구나 그것이 절색소녀의 나신임에야……. 그녀의 나신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사슴 목처럼 슬프도록 길게 뻗은 목을 내려와서는 급작스럽게 솟 은 두 봉우리가 있었다. 봉우리는 손에 쥐면 딱 들어올 만큼 알맞은 크기였고, 그 위에는 연분홍빛 앵두가 어떤 유혹을 내비치고 있었다. 두 봉우리를 지나서 펼쳐진 하얗고 포근한 대지는 곧 급작스럽게 좁아지더니, 이내 풍만한 둔부로 이어졌다. 신비의 둔덕에는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신비의 밀림 지대 가 있었고, 그 곳을 지나자 꽉 다물어진 다리 사이로 언뜻 비치는 오목한 곳은 정신을 몽롱하게 하였다. 그 아래로는 가늘면서도 길게 뻗은 두 옥교(玉轎)가 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의 현란한 나신을 보고 한순간 넋을 잃고 있던 학운기는 급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지?' 그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급히 품속에서 급갑을 꺼냈다. 그 속에는 머리털보다도 가느다란 금침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즉시 그녀의 몸에다 금침을 꽂기 시작하였다. 화개(華蓋), 자궁(紫宮), 옥당(玉堂)……. 하나씩 꽂혀 가는 금침들은 이내 그녀의 몸을 금빛 찬란한 고슴도 치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학운기는 그녀의 모든 요혈에 금침을 꽂고 나서는 그녀의 맥문을 잡고 진기를 주입시켜 주었다. 그렇게 한 식경쯤 흘렀을까? "으으음……!"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면서 그녀가 부시시 눈을 떴다. "앗!" 그녀는 자신이 알몸으로 누워 있고, 낯선 남자가 자신의 팔뚝을 잡고 있자 깜짝 놀라서 뾰족한 비명을 토해 냈다. "낭자, 잠시만 참으시오. 곧 치료가 끝나오." 그녀는 자신의 몸에 수없이 많은 금침들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 고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눈을 꼬옥 감아 버렸다. 잠시 후 학운기가 그녀의 손을 놓고는 가볍게 소맷자락을 휘두르 자 금침들이 모두 빠져서 금갑 속으로 빨려들 듯이 떨어졌다. 그는 금갑을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몸을 돌렸다. "낭자, 이제 모두 끝났소." 곧 이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소녀의 싸늘한 목소리 가 들려 왔다. "소녀의 목숨을 구해 주어서 고마워요." 학운기는 그녀의 싸늘한 목소리에 어리둥절해졌다. "아직 완전히 구한 것이 아니오. 낭자는 사흘 안에 음양교접을 하 지 않으면 천하의 음녀가 되니, 어서 정혼자나 부모님을 찾아가서 상의하도록 하시오." "뭐라고요? 사흘 안에 안 하면 천하의 음녀가 된다고요?" "그렇소. 낭자는 바로 최혼극음산에 중독된 것이오." "아……!" 소녀의 입에서 절망의 탄식이 터졌다. '아,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정혼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있 다 해도 이미 외간 남자에게 십팔 년 동안 간직해 온 알몸을 속속 들이 보여 버렸으니…….' 그녀는 차라리 남녀교합을 안 하면 죽어 버리는 음약에 중독되지 않은 것이 한이었다. '아, 이대로 음녀가 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참을 수 없는 고뇌가 그녀의 머리를 터뜨려 버릴 것만 같았다. 이 때 학운기가 다시 몸을 돌렸다. 누리끼리한 평범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만은 신비스러운 광채를 쏟아 내고 있었다. 소녀는 그의 모습을 힐끗 한 번 바라보았다. '저 상공께 나의 일생을 맡겨? 그렇지만 생전 처음 본 남자에게 어떻게……?' 학운기는 그녀의 고뇌하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안쓰러워 보였다. "낭자, 사흘이라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니… 빨리 돌아가도록 하시오." "상공께서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인가요?" 그녀는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하나, 싸늘하고도 당돌한 말이었다. "낭자, 무슨 말씀을……." "저는 이미 상공께 모든 것을 보였는데, 어떻게 다른 남자에게 시 집갈 수 있겠어요?" "낭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럼 정혼자도 없는 소녀는 이대로 음녀가 되란 말인가요? 그래 서 매일 이 남자 저 남자를 유혹하면서 강호를 떠돌아다녀야 상공 의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그렇다면 애초에 무엇하러 저를 구하셨 어요? 만약 상공이 구하지 않았다면 소녀는 한 번의 몸을 망치고 죽는 한은 있었을지언정, 음녀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니예 요?" 그녀는 마치 만년빙동에서 나오는 한풍(寒風)처럼 싸늘한 목소리 로 그 말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 버렸다. "낭자, 무림에 몸담은 사람이 어떻게 불의를 보고 지나칠 수 있겠 소? 그리고 나는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소이다." 그의 말도 무둑뚝해져 있었다. "만약 상공이 소녀를 취하지 않겠다면, 소녀는 도저히 음녀가 될 수는 없으니… 이 자리에서 죽는 수밖에 없군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신의 천령개를 쳐갔다. "낭자!" 학운기가 그녀를 다급히 부르며 그녀의 마혈(麻穴)을 순식간에 찍 어 버렸다. 천령개를 내리치던 그녀의 손이 바로 앞에서 멈추어져 있었다. "깔깔… 상공은 소녀가 음녀가 되기를 바라는군요. 날마다 이 남 자 저 남자를 번갈아 가면서 가지고 노는 음녀말이에요!" 그녀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교소(嬌笑)를 터뜨렸다. 학운기는 그녀의 태도에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낭자, 그렇게 자학하지 말고 우리 한 번 좋은 방도를 생각해 봅 시다." "호호… 최혼극음산에 중독된 사람에게도 달리 좋은 방도가 있었 던가요? 호호호… 상공은 괜히 군자인 척하지 말고 어서 떠나세 요, 어서요!" "낭자……." "어서 내 눈앞에서 떠나세요. 이제 남자들은 보기만 하면 구역질 이 나요. 호호호… 흐흐흑……!" 그녀는 미친 듯이 부르짖다가 웃고, 웃다가는 울고, 정말로 실성 해 버린 것 같았다. 학운기는 그녀를 그대로 놔 두었다가는 큰일이 나겠다 싶어서 그 녀의 수혈을 점해 버렸다. 그녀는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곤히 잠든 그녀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는 안쓰러움과 처연함이 가득 피어 있었다. '아,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음, 우선 인가나 찾아가서 생각해 봐야겠군.' 한참을 고심하던 그는 마침내 그녀의 몸을 안아 들고 동굴을 떠나 갔다. 그녀의 몸에서는 뭉클하면서도 따뜻한 감촉이 전해 왔다. 싫지 않은 감촉이었다. 해는 넘어가고 서산(西山)에는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 었다. 객점의 방 안에 학운기가 소녀를 침상에다 눕혀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으음,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그에게 알몸을 보인 소녀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을 갈 수가 없다는 말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에 정해 둔 사람이 있는 내가 어찌 또 다른 여 인을 거둘 수 있겠는가?' 소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는 매우 침중한 표정이었다.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소녀의 얼굴은 천사의 그것처럼 순결(純潔) 함이 가득하였다. '아, 이 소녀가 이대로 음녀가 되도록 놔 두어야 한단 말인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한참 심각한 고뇌에 잠겨 있던 그는 어쩌면 전 무림의 사활(死活) 이 걸린 일일지도 모르는 자신의 임무가 생각났다. '음, 우선 개방의 분타로 가서 그 동안의 소식을 알아봐야겠군.' 그는 잠든 소녀의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밖으로 빠져 나갔 다. 그녀의 표정은 이제 얼마 후면 자신이 음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을 망각했는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학운기는 객점을 나가서 곧장 개방의 분타로 찾아가 그 동안 경혼 방의 동태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다행히 경혼방에서는 아직까지 별다른 사태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 이었다. 그가 다시 객점으로 돌아온 것은 반 시진 후였다. 그는 소녀가 잠들어 있는 객방의 문을 열어 보는 순간 깜짝 놀라 고 말았다. "앗!" 소녀가 없었다. 그는 황급히 점원을 불렀다. "여보게! 점원, 점원!" "예, 예." 점원은 곧바로 달려왔다. "자네, 혹시 이 방에 들어 있던 소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 나?" "모르겠는뎁쇼."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 방에 들어간 적은?" "그것도 없었습니다." "그래, 알겠네." 그는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수혈을 짚어서 잠들어 있던 그녀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 가?" 그는 독문수법으로 수혈을 찍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녀가 음녀가 되도록 놔 둘 수도 없고…….' 한참을 난감히 서 있던 그는 급히 개방의 분타로 가서 그녀를 발 견하면 객점으로 데려다 놓도록 하라 하고, 자신도 몸을 날리면서 부근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번 사라진 소녀의 모습은 어디에고 없었다. 개방 제자로부터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소식이었다. 벌써 하루 반이 지났다. 학운기가 소녀를 만날 때부터 계산하면 이틀 반이 지난 것이다. 그는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자신의 책임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 순결한 소녀 가 이대로 음녀로 변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다시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그가 혹시 무슨 소리라도 들릴까 하고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을 극도로 펼치고 자신이 묵었던 객점의 이백여 리 근방을 뒤지고 있 을 때, 그의 귀에 음탕스런 사내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 왔 다. "흐흐… 요것아, 잠시만 참아라." "흐으응……!" 여인의 흥분한 듯한 콧소리도 동시에 들려 왔다. 학운기의 몸은 벌써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쏘아 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십여 리를 달렸다. 그의 눈에는 다 허물어져 가는 산신묘(山神廟)가 들어왔다. 소리는 그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는 혹시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며시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앗!"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또 다른 음약에 중독이 된 듯 살결이 도화빛으로 물들어져 서 가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한 중년사내가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겨 놓고 막 자신의 옷을 벗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본 학운기는 한순간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대로 놔 두면 그녀는 음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또 한 번 음탕한 사내의 음약에 중독 되어 몸을 망쳤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자살할 것 이 분명하였다. 사내가 옷을 모두 벗고 막 그녀를 덮치려고 하였다. 학운기는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순간 그의 손이 번뜩이는가 싶자, 사내의 고개가 숙여지며 산신묘 한쪽 구석으로 나가떨어졌다. 학운기는 음마(淫魔)들이 무림뿐 아니라 강호에도 커다란 해독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살수(殺手)를 쓴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로 했던 자신이 최초의 살인 을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것에 대하여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급히 소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순간 그는 이상 야릇한 향내를 맡았다. "이것은 춘몽향(春夢香)이 아닌가?" 춘몽향은 인체에 별 해독은 없었으나, 약효가 빠르고 강하기로 정 평이 나 있는 음약이었다. 이 때 부드럽고 뭉클한 물체가 그의 목을 휘감아 오면서 입 속으 로 달콤한 물체가 들어왔다. "흐으음……!" "음……!" 그는 그녀를 밀어 내려고 했지만 이미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욕 정의 불만이 타오르고 있는 그녀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낭자, 이러면……." 그들의 몸이 산신묘 바닥으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춘몽향은 독성분이 전혀 없고 오직 정신만을 흥분시켜 욕정의 불 길을 당기는 음약이라, 이미 만독불침의 금강불괴지신을 이룩한 그도 그녀의 입을 통해서 들어온 춘몽향에 정신이 혼미해 오기 시작하였다. "헉헉……!" 그의 숨소리도 서서히 가빠 오기 시작하였다. '으,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이제 다른 방법은 강구할 시간적 여유도 없는데, 낭자를 이대로 놔 둔다면…….' 그는 강한 정력(定力)으로 한 가닥이지만은 그대로 작용하고 있었 다. "흐으윽……!" 그녀는 마치 그의 옷을 찢어 버릴 듯이 잡아당기기 시작하였다. '할 수 없구나.' 학운기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는 자신의 옷을 벗어 버렸다. "흐으윽……!" 소녀는 단단하면서도 따듯한 남체(男體)가 덮쳐 오자, 고혹적인 신음을 발했다. "헉헉……!" "흐으흠… 으……!" 조그만 산신묘가 춘풍(春風)에 들썩였다. "흐억!" "헉!"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과 다급한 숨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학운기도 이제는 완전히 욕정의 포로가 된 것 같았다. 소녀는 마치 한 마리의 뱀처럼 그의 몸을 계속 조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작은 죽음, 그것이었다.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과 교성, 그리고 다급한 숨소리는 계속 들려 오고 있었다. 학운기는 자신의 몸이 구름에 둥실 떠 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갈수록 격렬해졌다. 소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으면서도 무언가 해소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격렬한 율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춘풍은 거의 한 시진 동안이나 계속 이어졌다. 마침내. "흐어억……!" "헉!" 두 마디의 다급한 신음이 들리더니, 그들의 몸은 한 차례의 진저 리를 치면서 축 늘어져 버리고 말았다. 춘풍에 술렁이던 산신묘 안이 정적을 되찾았다. 캄캄한 밤이 된 지는 이미 오래 전이었다. 밖에서는 가끔 밤새들의 울음소리만이 간간이 들려 오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소녀의 몸 위에 축 늘어져 있던 학운기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황급히 일어나서는 옷을 주워 입었다. 소녀는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장삼으로 그녀의 알몸을 가려 주었다. 그녀의 약간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는 붉은 혈화(血花)가 함초롬히 피어 있었다. '음, 이제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앗!"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소녀의 뾰족한 비명이 들려 왔다. "낭자! 깨어났구려. 어서 옷을 입도록 하시오." 그는 부드럽게 한 마디 하고는 뒤로 몸을 돌렸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그녀는 매우 놀란 듯하였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하였다.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학운기는 이미 육체 관계를 가진 그녀에게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 야 된다고 생각하고 역용술을 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윽!" 그의 뒤에서 소녀의 나직한 신음이 들리더니, 이내 부스럭거리며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 나섰죠? 내가 음녀가 되든, 음마 들에게 몸을 망치든 상관 안 할 것 같던 당신이 말이에요." "낭자,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오. 낭자와 나는 이미 몸을 섞은 부 부나 마찬가지가 아니오?" 그는 말을 하면서 몸을 돌렸다. "흥, 당신은……." 그녀는 싸늘한 콧소리를 내뱉으며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의 절세적 인 용모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당… 당신은 누구죠?" "낭자, 전의 모습은 내가 변장했던 것이었소. 이것이 나의 본래의 모습이오. 그리고 나의 이름은 학운기라 하오." 한참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소녀의 얼굴이 점점 싸늘하게 변해 갔 다. "당신은 그런 절세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어서 나같이 못생긴 것은 상대도 안 했군요!" 만년빙동에서 불어 오는 한풍(寒風)보다도 싸늘한 목소리였다. "낭자, 그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장래를 약속한 여인이 있기 때문 이오. 낭자의 모습은 사실 누구보다도 아름답소." 소녀의 표정이 잠시 풀어지는 듯하다가는 이내 더욱 싸늘하게 굳 어졌다. "흥, 물론 그 여인은 나보다 아름답겠죠?" "낭자, 그것은……." "듣기 싫어요!" 그녀는 한 마디 싸늘하게 내뱉고는 급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 려 하였다. "낭자!" 그가 그녀를 다급히 부르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것 놓지 못해요!" 짝－!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학운기는 갑자기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피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왠지 피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그렇게라도 해서 그녀의 마음이 풀어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이대로 떠나 버리면 자신은 영원히 고뇌의 수렁텅이 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소녀도 막상 그의 뺨을 때리기는 하였지만 매우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낭자, 나는 내가 행한 행동에 대하여 결코 후회를 하지 않소이 다. 그리고 낭자에 대해서도 끝까지 책임을 질 것이오." 소녀의 가슴은 이 때 심하게 설레이고 있었다. 비록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결합이긴 하였지만, 이미 그 에게 평생을 맡기기로 결심을 하지 않았는가? 그의 용모 또한 자신이 처음 보았던 평범한 것이 아니라, 생전 처 음 보는 절세적인 것이 아닌가? 그녀는 망설였다.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서라도 자신의 잘못을 빌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자신의 마음과는 정반대로 되었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나는 당신에게 음마 로부터 구원을 받고 내가 음녀가 되지 않게 해 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겠어요." 그녀는 싸늘하게 한 소리 뱉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낭자, 그렇다면 낭자의 방명(芳名)이라도……." 그녀의 몸이 가느다랗게 떨리면서 멈칫하였다. 학운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낭자가 이대로 가 버린다면 나는 영원히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이오. 나는 낭자가 불행해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소. 왜 냐하면 누가 뭐래도 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녀의 몸이 한 차례 전율을 일으켰다. "상공의 말은 고마우나, 나는 그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저주하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말은 많이 부드러워졌다. "낭자, 절대 그렇지가 않소. 낭자는 아름다운 용모 때문에 음마들 의 해침을 받아 왔으나, 낭자는 누구를 저주할 만큼 그렇게 악독 한 여인이 아니오." "그렇지가 않아요. 나는 사갈보다도 독한 여인이에요. 그러니 상 공께서는 나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상공의 정혼자나 행복하게 해 주도록 하세요." 그녀는 한 마디 하고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 "낭자!" 학운기가 급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눈에는 영롱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낭자, 낭자는 왜 자신의 마음을 속이려 하오?" "……." 말이 없다. 단지 그녀는 발 아래만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녀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살며시 잡았다. "낭자, 이제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도록 합시다. 내 앞으로 낭자에게 불행이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도록 해 주겠소." "상공… 정말 소녀를……." 순간 그들의 몸이 꼭 밀착되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뜨거운 침묵은 백 마디, 아니 천 마디의 말보 다도 더 진한 감정을 전해 주었다. 한참 후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가 않던 그들의 몸이 살며시 떨어 졌다. 하늘에서는 환한 보름달이 그들의 정감을 더욱 뜨겁게 비춰 주고 있었다. 그들은 어깨를 마주하고 풀밭에 앉았다. 그들은 한동안 정담을 주고받았다. 소녀의 이름은 승혜빈(承惠賓)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림십대고수의 일 인인 열화보(烈火堡) 보주 열 화신군(烈火神君) 승검평(承劍平)이었다. 그녀는 여자의 몸인지라 극양(極陽)의 무공을 가진 아버지의 가르 침을 받지 못하여 무공이 별로 높지 못하였다. 그녀의 성격은 괴팍한 아버지의 성격을 받아서인지 약간 쌀쌀한 면이 있었으나, 마음 깊숙이에는 무한한 정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네 명의 시비들과 함께 강호의 명승지를 유람하던 도중, 호남육흉의 첫째인 음흉(淫兇) 격상우에게 발견되어 그 같은 일을 당했다고 했다. 다정히 어깨를 마주 대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들의 사이에서 조 금 전의 어색했던 분위기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정스레 보였다. 학운기는 그녀의 부드럽고도 따뜻한 옥수(玉手)를 꼭 잡고 있었 다. 승혜빈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가득 어려 있었다. "기랑(奇郞)! 바쁜 일이 없으면 저와 함께 아버님을 뵈러 가요." "빈매, 지금 무림에는 커다란 혈겁의 조짐이 엿보이고 있소. 그리 고 나에게는 이 혈겁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오." 그는 자신의 내력과 왜 자신이 무림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가에 대 해서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승혜빈은 그의 입에서 그가 천빈성의 정기를 타고났단 소리를 듣 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기랑께서 천빈성의 정기를 타고났셨단 말씀인가요?" "빈매도 천빈성에 대해서 알고 있었소?" "예, 언젠가 아버님으로부터 천빈성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은 천고 (千古)에 다시 없는 대기재(大奇才)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빈매가 그것에 대하여 알고 있다니, 마황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 을 것이오. 나는 이 마황성의 저주로부터 무림을 구하라는 숙명을 타고났소. 그러니 빈매는 내가 당장 빈매의 아버님을 뵙지 못하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오." "……."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자, 빈매! 그만 가도록 합시다. 밤 이슬을 맞으면 몸에 해롭소."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는 가까운 시진으로 몸을 날렸다. 학운기. 그는 이 날부터 자신의 운명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흐를 것임 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순결한 소녀와 교접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가 먹은 한천빙룡의 아홉 개의 내단 중 홍색의 내단은 양정(陽 情)의 효능을 지닌 내단이었다. 즉, 색단(色丹)이었던 것이다. 이 색단은 복용을 해도 처음에는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복용한 사람이 일단 순결한 처녀와 접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극양(極陽)의 정기(精氣)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솟아 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한두 명의 부인만을 맞이하면 그로 인하여 불행 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천하제일의 용모를 가진 학운기가 그로 인하여 겪을 고초는……? 하늘의 달님은 그러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한 미소만을 비쳐 주고 있었다. ====================================================== 第 9 章 마두(魔頭)들의 간계(奸計) ====================================================== 학운기는 장사(長沙)로 통하는 관도를 걷고 있었다. 그는 승혜빈을 어느 정도 바래다 주고는 개방 제자에게 그녀의 뒤 를 몰래 보살펴 주라고 부탁을 한 다음 경혼방으로 향하고 있었 다. 애옥지와 승혜빈의 얼굴이 동시에 뇌리를 스치는 그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한참 생각에 골몰해 걷던 그는 갑자기 거대한 기둥이 자신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을 알고는 흠칫 놀라며 그것을 살펴보았다. 거인(巨人)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커다란 거인이었다. 키가 구 척(尺)은 되어 보였고, 주먹 하나가 보통 사람의 머리보 다도 컸다. 그를 살펴보던 학운기는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아, 태양신맥(太陽神脈)이 아닌가?' 거한은 아무 말도 없이 떡하니 그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친구는 누군데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오?" "나? 나야 제천대왕(諸天大王)이지, 누구긴 누구야." "제천대왕? 그런데 친구는 뭣 때문에 나를 가로막았소?" "배가 고파서……." "배가 고파서? 그래서 은자를 달라는 것이오?" 제천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자를 벌려면 일을 해야지, 어찌 관도에서 강탈을 하려는 것이 오?" 제천대왕이 화를 벌컥 냈다. "난 강탈을 하려는 것이 아니야. 좀 빌려 달라는 거지." "친구는 이런 식으로 몇 번이나 은자를 빌렸소?" "오늘이 처음이야." "처음? 그렇다면 그 동안은 어떻게 살아왔소?" "집에서 살아왔지, 어떻게 살긴 어떻게 살아?" 관도의 행인들은 거한과 허약하게 생긴 서생의 다툼을 흥미로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학운기는 태양신맥을 가진 이 거한과 자신이 어떤 보이지 않는 끈 으로 매어져 있음을 느꼈다. "집은 어디에 있소?" "산 속에." "그렇다면 집에서 계속 살지 강호에는 뭐하러 나왔소?" 순간 제천대왕의 얼굴이 슬프디 슬픈 표정으로 변하였다. "엄마가 죽었어……."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슬픈 표정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묘 한 기분을 맛보게 하였다. "그렇다면 친구는 며칠이나 굶었소?" "몰라. 한 열흘 되나? 아냐, 한 달도 넘을 거야." "와하하……!"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얼마나 우스웠던지 바라보는 행인들이 대소를 터뜨렸다. 제천대왕이 그러한 행인들을 무섭게 쳐다보았다. 담이 약한 행인들은 그러한 그의 표정을 보고는 슬금슬금 뒷걸음 질치더니 제 갈 길로 가 버렸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행인들은 몇 걸음 물러서 가다가는 다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학운기는 이 거한을 자신의 수하로 삼기로 마음을 굳혔다. "자, 친구! 내가 밥을 사 줄 테니 나하고 함께 갑시다." 제천대왕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 "그렇소." "그럼 빨리 가." 제천대왕은 학운기의 손을 잡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가다가 제천대왕은 그의 발걸음이 느린 것이 갑갑했는지 그를 번쩍 안아 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끄응… 끙……!" 제천대왕은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하여 애를 써 봤으나 그가 꿈쩍도 안 하자, 이상하다는 듯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을 본 행인들도 놀라운 눈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닭 잡을 힘조차 없을 것 같은 허약한 서생이 자신보다 몇 배는 커 다란 거인의 힘에도 꿈쩍도 안 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제천대왕은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돌연 관도 옆의 커다란 나무로 다가갔다. 한아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였다. 그는 나무를 안아 들더니 한 번 용을 썼다. "와아……!"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것을 보며 행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제천대왕은 나무가 뽑히자 흡족한 미소를 띄우며 다시 학운기를 안아 들려 하였다. 그러나 역시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행인들 입에서도 탄성이 터졌다. 제천대왕이 갑자기 그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주인님!" 그의 갑작스런 태도에 학운기는 어리둥절하였다. "친구는 왜 갑자기 나를 주인이라 부르는 거요?" "우리 엄마가 나보다 힘이 센 사람을 주인님이라 부르라 했다." "하하하……!" 다시 행인들의 대소가 터졌다.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 '했다'라 하는 그의 모순적인 어투에 학운 기도 실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렇다면 어서 일어나도록 하여라." "응." "하하하……!" 제천대왕은 벌떡 일어서더니 그의 손을 잡고는 매우 기쁜 듯 껑충 껑충 앞으로 뛰어갔다. 제천대왕이 뛰어가는 속도는 보통 사람의 몇 배나 빨랐으나, 그의 손을 잡고 가는 학운기는 마치 천천히 걷는 듯하였다. 만약 무림고인이 그러한 것을 보았다면 그의 놀라운 신법에 깜짝 놀라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곧 장사성(長沙城) 내로 들어섰다. 그들의 모습은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그들은 객점을 겸하고 있는 한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주루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 쏠렸다. 학운기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제천대왕을 바라보았다. "나? 나는 통돼지." 주문을 받던 점원과 주루 안의 사람들이 놀라움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원래 산물(産物)이 풍부한 호남(湖南)의 돼지는 크기로 유명했는 데, 설마 그가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점원, 통돼지 한 마리 하고 생선 요리 몇 가지만 가져오도록 하 게. 술도 곁들여서." "예, 예. 곧 갖다 올리겠으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학운기는 점원이 물러가자 다시 제천대왕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나야 제천대왕이지, 무엇이긴 무엇이야?" "아니, 그런 별호 말고……." 학운기는 몇 가지 흔한 이름들을 알려 주었다. 제천대왕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나는 그런 것이 없어." 학운기는 그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 보다가 의혹에 사로잡히지 않 을 수 없었다. 도대체 제천대왕의 어머니는 누구기에 그에게 성조차 알려 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제천대왕은 분명히 글을 알고 있었는데, 어투가 엉망이라 는 점이었다. 학운기는 내친 김에 그에게 존댓말이라는 것에 대하여 알려 주었 다. 그가 한참 존댓말에 대하여 배우고 있을 때, 점원이 음식을 들고 왔다. 점원의 뒤에는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네 명의 장한이 얼핏 보기에도 이백 근은 넘을 듯한 거대한 통돼지를 들고 왔다. 학운기는 처음에 그가 살았던 안휘성(安徽省)의 돼지처럼 작을 줄 알았다가 엄청나게 크자, 매우 놀라운 눈으로 제천대왕을 바라보 았다. 제천대왕은 커다란 통돼지를 보더니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그는 네 명의 장한이 낑낑대면서 들고 오는 통돼지를 더 이상 기 다릴 수 없었는지 가서 번쩍 집어다 탁자에 놓고는 걸신들린 마귀 처럼 그것을 뜯어먹기 시작하였다. 주루 안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먹는 것은 잊은 채 호기심 어린 눈 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학운기도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 앞에 놓인 생선 요리를 먹 기 시작하였다. 그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는 제천대왕에게도 한 잔 따라 주었는데 먹는 데 정신이 팔렸는지, 아니면 먹지 못하는지 대꾸도 안 하고 누가 뺏어 먹을세라 통돼지만 뜯고 있었다. "와아……!" 주루 안에서 탄성이 터졌다. 학운기가 생선 요리 한 접시를 비우기도 전에 제천대왕은 그 커다 란 통돼지를 깨끗이 먹어치운 것이다. 그는 그래도 양이 덜 차는지 뼈다귀마저도 아그작 씹어먹고 있었 다. 학운기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양이 덜 차느냐?" 그가 뼈다귀를 씹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더 먹어야 양이 차겠느냐?" "이만큼은 더……." "와아……!" 주루 안에 다시 한 번 탄성이 터졌다. "여기 통돼지 한 마리 더 갖다 주게." 직원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비벼 댔다. "공자님, 죄송합니다만은 잡아 놓은 돼지가 떨어져서……." 학운기는 다시 제천대왕을 바라보았다. "너는 다른 것이라도 먹겠느냐?" "예." "점원, 구운 오리는 있는가?" "예, 예." "그렇다면 그것으로 갖다 주게." "얼마나……?" 제천대왕이 소리를 꽥 질렀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느냐? 있는 대로 가져와라." 점원이 머뭇거리다가 학운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급 히 주방으로 갔다. 이 때 주루 안에는 소문을 듣고 온 사람까지 있어서 학운기가 앉 아 있는 탁자 주위만 빼고는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 있었다. 잠시 후 점원과 아까 통돼지를 들고 왔던 장한들이 거의 이십여 마리의 커다란 구운 오리 고기를 들고 왔다. 그것들의 양은 아까 통돼지보다도 많아 보였다. 제천대왕은 어디에 또 들어갈 구석이 남아 있었던지 그것들을 허 겁지겁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십여 마리까지는 변함없는 속도로 먹었으나 그 다음부터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더니, 마침내 두 마리를 남기고는 더 못 먹 겠는지 트림을 하면서 손을 놓아 버렸다. 그를 지켜 보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왜 마저 다 안 먹지?" 그 소리를 들은 제천대왕이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다. "내가 돼진 줄 아느냐?" "뭐라고?" "와하하……!" 주루 안에 박장대소(拍掌大笑)가 울려 퍼졌다. 학운기도 모처럼만에 유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그래, 배가 찼으면 그만 쉬도록 하자." "예." 학운기는 주루 뒤에 딸린 조그만 별채를 얻어서 들어갔다. 그는 제천대왕이 아직 무공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것을 알고는 우 선 내공심법을 전수하여 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련스럽고 어리숙하게 보이는 제천대왕의 재질 은 학운기도 놀랄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학운기는 그의 맥을 살펴보다가 그가 영약(靈藥)을 복용한 적이 있음을 알아 냈다. 그 날 밤 삼경, 제천대왕은 오랜만의 포식에 몸이 피곤했는지 한 번의 운기를 마치고는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학운기는 그러한 그를 바라보다가는 혹의경장으로 갈아입고는 조 용히 객점을 빠져 나와 경혼방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경혼방은 장사성 서쪽의 삼십여 리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 학운기는 마음놓고 경공을 펼친지라, 차 한 잔 마실 시간밖에 안 되어서 도착할 수가 있었다. 밤에 바라보는 경혼방의 웅장한 건물들은 당당하게 보였다. 그는 삼 장이 넘는 경혼방의 담장 밖에 있는 커다란 고목 위에 몸 을 숨기고는 천리지청술을 펼쳐서 담장 안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삼 장 간격으로 매복자의 숨소리가 들려 왔다. 들키지 않고 담을 넘기에는 매우 힘든 것 같았다. 한참 들어갈 방법에 골몰하던 그의 입가에 신비한 미소가 번졌다. 순간, 그의 몸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거의 수 장이나 솟구쳐 올라간 그의 몸은 아래서 보기에도 조그만 밤새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상태로 경혼방 중심부로 이동을 하더니,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가장 커다랗고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대전의 처마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때마침 달빛은 반대 방향에서 비쳐 주었고 옷자락 흩날리는 소리 까지도 내지 않았는지라, 그가 잠입한 지는 귀신도 모르고 있었 다. 그는 즉시 편복공( 功)을 사용하여 처마 밑에 몸을 착 붙였다. 그의 몸은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더니, 바로 아래서 살펴보아도 모 를 만큼 처마에 붙어 버렸다. 그는 화골신공(化骨神功)과 축골신공(縮骨神功)을 동시에 사용한 것이었다. 창문 틈으로 보이는 대청 안에는 네 명의 노인이 앉아서 심각하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두 명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패천마황 소무극과 엄능야였고, 나 머지 노인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무극과 엄능야가 매우 다정스럽게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후후… 저 자들이 언제 저토록 친해졌지? 전에는 서로가 간계(奸 計)를 부리더니…….' 엄능야의 앞에 앉아 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소방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오?" 소무극이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부의 생각도 동감이외다. 그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편 노 선배님의 일 장을 받아 냈다면, 틀림없이 천빈성의 정기를 타고난 자일 거외다." "엄형의 생각은 어떻소?" "노부도 동감이오." "으음……!" 그들은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무극이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한데 주존(主尊)께서는 언제쯤 출관(出關)을 하실 예정이오?" "이제 보름 후면 대망의 기다리던 날이 올 거요. 흐흐… 주존께서 출관만 하신다면 그깟 정파 조무래기들쯤이야! 흐흐……!" 엄능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빙형은 무언가 좋은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구려?" "흐흐… 그 날은 아마도 정파 놈들의 눈에서 눈물깨나 쏟아질 것 이오." "궁금하게 돌리지만 말고 속시원히 털어놔 보시오?" "흐흐… 그 날, 소림의 빈대머리들을 칠까 계획하고 있소이다." "소림을?" "그렇소." "혼자서 될까요" "흐흐… 그러니까 내가 기밀을 밝히는 것 아니오. 엄형과 소형, 그리고 노형께서 도움을 주셔야죠. 필 노선배님한테는 이미 양해 를 구해 놨소이다." "필 노선배님이 도와 주신다면 굳이 우리들까지야……." 엄능야가 약간 주저하자, 빙형이라는 노인이 고개를 설래설래 저 었다. "아니오. 소림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지 마시오. 요즘 들어와 약간 쇠퇴한 기미가 보이지만, 그래도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고 자처하고 있지 않소이까? 더구나 무아와 어딘가에서 소림을 지켜 보고 있을 혜불이 있는 데야……." 그들은 소림을 침공할 계획을 자세히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학운기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들이 말하는 주존이란 혹시 마황성의? 그렇다면 저들은 이미 거대한 조직을 형성해 놓았다는 얘긴데… 일이 몹시 다급하게 됐 군.' 소무극 등은 한참을 더 숙의하다가는 잠자리에 들려는지 모두들 대청을 나가 버렸다. 몸을 날려 떠나려던 학운기는 문득 의혹이 생겼다. '저들이 나에 대하여 대강 알고 있는 듯한데, 왜 나를 상대할 방 법은 논의하지 않았지? 어쨌든 천(天) 노야(老爺) 등과 상의를 해 봐야겠군.' 그는 소리도 없이 처마 밑을 빠져 나와서는 후원 쪽으로 몸을 날 렸다. 검은 옷을 입고 그늘만을 이용해서 몸을 날리는 그인지라, 가끔 순찰꾼이 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가 대전의 처마 밑에서 빠져 나와 막 후원 쪽으로 사라지자, 대 전에서 여섯 장쯤 떨어진 한 고목 위에서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내려왔다. 노인은 염소수염을 기른 것이 얼핏 보기에도 매우 간사스럽게 보 였다. 그는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학운기가 사라져 간 후원 쪽을 바라보 고 있었다. "흐흐… 네녀석이 천빈성의 정기를 타고난 기재냐? 흐흐… 너 정 도는 지존님이 아니더라도… 흐흐… 한데, 무공만은 괜찮을 것 같 군. 하지만 그것도 지존님에 비하면……." 그는 한참을 나직이 중얼거리다가는 무언가 생각난 듯 학운기가 사라져 간 후원 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 때 대청에서는 소무극을 비롯한 네 명의 노인이 다시 나와 있 었고, 사라져 간 흑의노인에게 무슨 전음을 들었는지 그의 뒤쪽을 향하여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 × × 대전(大殿)의 처마 밑을 빠져 나온 학운기는 몸을 숨겨 가면서 후 원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소리 없이 후원의 담을 넘자, 몸을 숨기고는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음, 옥지가 있는 곳을 알려면 한 놈을 다그쳐야겠군.' 그가 한창 순라꾼이 앞을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때. 마침 한 명의 시비로 보이는 소녀가 어디를 가는지 급히 그의 앞 을 스쳐 지나고 있었다. 학운기는 입가에 고혹적인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손을 한 번 슬쩍 움직였다. 순간 시비는 멍한 표정이 되더니, 그가 숨어 있는 곳으로 쏜살같 이 끌려왔다. 그는 급히 그녀의 몇 군데 혈도를 찌르고는 그녀를 앞에다 앉혔 다. 그런 다음 눈을 감고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눈에 기이한 빛을 내면서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띄운 채 시 비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시비는 그의 기이한 눈빛에 빠져들면서 황홀한 미소를 띄웠다. 학운기가 물었다. "애옥지 낭자가 묵고 있는 곳이 어디지?" "저 곳이에요." 그녀는 마치 꿈 속의 왕자님에게 속삭이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 곳은 겉보기에도 매우 화려해 보이는 별채였다. "그녀는 어느 방에 묵고 있지?" "들어가서 바로 정면의 방에 묵고 있어요." "그녀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나?" "가끔 방주님께서 들르시지만 오늘 밤은 손님이 오셔서 오시지 않 을 거예요. 그리고 그분의 옆방에 두 명의 시비가 묵고 있어요." 학운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몇 군데 혈도를 누르고는 한 손 을 가볍게 휘둘렀다. 순간 시비는 원래 걸어가던 쪽으로 쏠려 가더니, 아무 일도 없었 다는 듯이 다시 급히 제 갈 길로 갔다. 학운기는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살며시 주위의 동정을 살피며 그녀가 가르쳐 준 별채 쪽으로 몸을 날렸 다. 도대체 그가 펼친 수법(手法)이 무엇이기에 당한 사람이 전혀 그 흔적조차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그것은 불혼항마대법(佛魂降魔大法)이라고 부르는 불문(佛門)의 비법(秘法)이었다. 그것은 소림사를 창건한 달마대사가 문인들의 마음 속에 잔재해 있는 마심(魔心)을 완전히 없애기 위하여 창안한 것이었다. 학운기는 그것에다 사파(邪波)의 최심술(催心術)을 약간 응용하여 서 펼친 것이었다. 그것은 당한 사람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단지 먼 옛날에 주었던 행복했던 꿈을 회상했다는 느낌밖에 주지 않는 것이었다. 학운기는 별채의 처마 밑에 몸을 숨기고 안의 동정을 살폈다. 시비가 있다는 방 안에서는 곤한 잠을 자는 고른 숨소리가 들려 왔고, 애옥지가 있다는 방에서는 몸 뒤척이는 소리와 가끔 한숨 소리도 새어나왔다. 그는 즉시 별채 안으로 들어가서 애옥지가 있다는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찰나 침상에 누워 있던 여인이 무심한 태도로 그를 슬쩍 바라보다 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앗! 당신은 누구예요?" 역시 애옥지였다. 학운기가 이미 그것을 예상하고 호신강기로 방을 완전히 봉쇄했기 때문에 그녀의 소리는 방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는 감격에 복받쳐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당신은 누군데, 함부로 여기까지 들어왔어요?" 학운기가 두려운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옥지, 나요." 순간 애옥지의 표정이 급변하였다. 얼마나 애태우며 마음 속으로만 그렸던 님의 목소리인가? "하지만……." "아참!" 학운기는 아직도 자신이 변장한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깨닫고는 즉시 역용술을 풀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 애옥지의 입에서 감격과 놀람으로 범벅이 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에서는 순간적으로 눈물이 비치는 것 같았다. "옥지!" 학운기가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첫사랑의 연인, 그 동안 얼마나 그렸던 여인인가? 순간 애옥지가 그를 거세게 밀어 냈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 새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당신은 무엇하러 여기까지 왔어요? 어서 돌아가세요." 학운기는 그녀의 갑작스런 태도에 멍청해져 버렸다. "옥지, 나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학운기란 말이오." "사랑? 누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어요? 난 당신 같은 사람은 잊 은 지 오래예요." 학운기는 그녀의 앙칼진 말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기만 하였다. "옥지, 당신은 변했구려? 그것도 완전히 말이오. 당신은 이 년 전, 우리가 했던 약속이 생각나지 않소? 영원히 함께 살자던 약속 말이오." "나는 그런 약속 한 적 없어요. 그러니 어서 떠나세요. 당신 같은 사람은 보기도 싫단 말이에요." 학운기는 뭐가 어떻게 돼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단지 텅 빈 머릿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들려 올 뿐이었다. 그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던 애옥지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갈등과 연민의 빛이 복잡하게 얽혔다가는 이내 싸늘한 빛으로 되돌아왔 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학운기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옥지, 당신은 정말로 나를 잊었단 말이오? 이 학운기를 말이오? 아니오.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오. 옥지, 당신에게는 분명히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오. 그것이 무엇이오? 그것을 나에게 말해 주시오. 말해 보란 말이오!"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면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는 세 게 흔들었다. 그러나 애옥지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였다. "나에게 이유는 없어요. 단지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은 두 번 다시 보기 싫을 정도예요. 그러니 어서 이 곳을 떠나세요. 만약 그러지 않으면 사람을 부르겠어요. 어서요!" "옥지! 그러지 말고 다시 나를 사랑한다는 한 마디만 해 주시오, 옥지!" "당신은 정말로 나가지 않을 거예요? 밖에 누구 없느냐?" 학운기가 비탄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옥지, 당신은 정말로……." "그래요. 그러니 어서 나가세요!" 그녀는 꽥 소리치며 베개를 힘차게 던졌다. 퍽－! 베개는 여지없이 그의 안면에 적중되었다. "우와아……!" 학운기는 커다란 광소(狂笑)를 발하며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누구냐?" "앗!" 몇 마디의 외침이 터졌으나 그의 몸은 이미 경혼방에서 멀리 사라 져 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별채에서 이십여 장쯤 떨어진 고목 위에서 한 흑의인영이 내렸다. 이 때 별채 안에서는 인간의 심정을 가지고는 도저히 그냥 들을 수 없는 애옥지의 애절한 오열(嗚咽)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흑의인은 아까 대전에서 학운기의 행동을 지켜 보았던 그 염소 수 염의 노인이었다. 그는 별채에 가까이 다가서서 엿듣고 싶었으나 무언가 두려운 것 이 있는 듯이,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 방 안을 달빛에 의지하며 살펴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안에서 나눈 얘기의 내용을 환히 짐작하는 듯하였다. "흐흐… 네녀석에게도 그러한 면이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일은 훨씬 수월해지겠군. 흐흐……!" 그는 학운기가 사라져 간 방향을 보고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 다. 그의 옆에는 언제 왔는지 소무극을 비롯한 네 명의 노인이 서 있 었다. 그가 소무극에게 뭐라고 지시하는 듯하자, 소무극은 그에게 가볍 게 예를 취해 보이고는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 오고 있는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사랑하는 여인의 변심(變心)에 걷잡을 수 없는 고뇌를 안고 경혼방을 떠나온 학운기는 어디를 달리는지도 모르고 계속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의지를 상실한 것 같았다. "와하하……!" 그의 입에서는 광소(狂笑)가 계속 터져 나오고 있었다. 산짐승들이 그의 광소에 놀라서 마구 날뛰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몰랐다. 쾅－! 그는 갑자기 무엇엔가 부딪쳐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와하하……!" 그는 갑자기 나자빠진 채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광소를 터뜨렸다. 밝은 달이 그를 위로해 주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별들도 총총히 박혀 있었다. "여자가 도대체 무슨 동물이냐? 무엇이기에 그토록 간사하단 말이 냐?" 처절한 절규였다. "옥지, 네가 그토록 변할 줄이야!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네 마음 은 변치 않을 줄 알았단 말이다." 한참을 절규하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아냐, 너는 그럴 리가 없어. 너는 거짓말을 한 거야. 옥지, 제발 거짓말이었다고 말해 줘. 나를 다시 사랑한다고 말이야." 이 때 갑자기 광소가 들리며 폭갈이 터져 나왔다. "와하하… 어떤 놈이 감히 노부의 단잠을 깨우느냐?" 소리가 끝나자마자 학운기 앞에 머리는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지고 몸에는 엉성하게 짠 갈삼(葛衫)을 걸친, 나이를 분간할 수조차도 없는 노인이 나타났다. 학운기는 순간적으로 번쩍 정신이 들면서 몸을 일으켰다. 노인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놈아! 실연(失戀)을 했으면 조용히 미칠 일이지, 왜 노부의 단 잠을 깨우고 야단이냐?" 학운기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광란하던 판에 웬 거지 같은 노인이 나타나 호통을 치자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이 곳이 당신 땅도 아니거늘, 웬 참견이오?" "이놈이 감히 존장에게 버릇없이… 이놈, 네놈의 사부는 누구냐? 내 너의 사부 놈에게 따져야겠다." 순간 학운기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사부 놈? 당신 같은 사람이 감히 나의 사부님을 알현할 자격이나 있소?" "뭐라고? 이놈이……." 노인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갑자기 그에게 덮쳐 갔다. 순식간에 사방이 그의 장영(掌影)으로 캄캄해졌다. 학운기는 흠칫 놀라면서 급히 몸을 피했다. 노인은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어라! 네놈이 제법 한 수 하기는 하는 모양이구나." 노인은 말을 하면서 다시 덮쳐 왔다. 이번 것의 위력은 먼저 번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노인이 자세를 취하는가 싶었을 때, 이미 학운기는 싸늘한 경기 (勁氣)를 느꼈다. 그는 즉시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면서 노인에게 덮쳐 갔다. 그가 주걸신개를 처음 만났을 때 배웠던 장법이었다. 그들의 신형이 어지럽게 얽히는가 싶었을 때. 쾅－! 폭음이 울리면서 그들은 각각 두 걸음을 물러섰다. 그들은 서로 놀라고 있었다. '아, 비록 육 성의 공력이었지만 이것은 맹 노야도 겨우 막을 수 있을 정도인데…….' 학운기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노인의 정체를 생각하고 있 을 때, 노인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이제 보니 네놈은 그 거지의 제자였구나. 하지만 네녀석의 사부 도 감히 내 앞에서는 방자한 행동을 못했느니라." 노인은 말을 하면서 다시 덮쳐 갔다. 학운기는 자신이 이미 강호 각 파의 무공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노인의 무공은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라 호기심을 가지며 노인의 공세를 피했다. '아, 대체 이 노인이 누구란 말인가? 맹 노야를 놈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배분이 그보다 높다는 얘긴데, 도대체 들어 본 적이 없 으니…….' 그들은 거의 한 시진 동안을 승부도 분간할 수 없는 채로 그렇게 싸우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경악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죽박죽 이었다. 이 때 학운기는 여유 있게 그의 장세(掌勢)를 피하면서 그의 장법 을 배우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비록 여유가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계속 놀라움으 로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만약 이 노인이 사악한 마음을 먹고 강호에 나간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싸우는 동안 애옥지로 인해서 심란해져 있던 그의 마음은 점차 가 라앉았다. 그들이 싸우고 있는 주위 백여 장의 나무와 바위들은 어느 새 사 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의 장력이 나무와 바위들을 쳐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지 그대로 가루로 변해 버릴 뿐이었다. 노인은 거의 두 시진 동안을 싸워도 학운기를 어쩌지 못하자, 미 친 들소처럼 날뛰고 있었다. 동녘에선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 노인과 정식으로 싸운다면 천 초 정도면 이길 수 있 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 노인의 무공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인지라, 벌써 삼천여 초가 넘어서고 있었다. 노인은 이제 밑천이 어느 정도 드러났는지 가끔 사용했던 것을 써 먹고 있었다. 학운기의 입에서 고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후후… 이제 밑천이 없소이까?" 그는 고소를 흘리며 노인에게 덮쳐 갔다. "앗!" 노인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터졌다. 학운기는 그러한 것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계속 공세를 퍼부었 다. 그것은 노인의 무공이었다. 이제까지 대등하게 끌어 오던 싸움은 완전히 노인의 열세로 뒤바 꿔 버렸다. 이미 노인의 무공을 환하게 배운 학운기는 그의 퇴로까지 미리 차 단하면서 공세를 퍼부었다. 노인의 신형이 심하게 어지러워지는 순간, 학운기가 갑자기 뒤로 몸을 날렸다. 노인은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후후… 이제 당신은 나의 사부님을 알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소?" 노인은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자신의 옷을 살펴보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앗!" 그의 옷에는 수십 개의 가느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모두 정확한 사혈(死穴)의 위치였다. 노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너… 너는 도대체 누군데, 나의 무공을 알고 있는 것이냐?" "후후… 나는 학운기라 하오. 그리고 무공은 당신이 가르쳐 주지 않았소?" "뭐라고? 그렇다면 너는 내가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고 배웠단 말 이냐? 그… 그렇다면 너는 마황성의 기재……." "나는 마황성이 아니라 천빈성이오." "아……!" 노인은 얼이 빠진 듯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전설로만 내려오는 줄 알았더니 실제로 그러한 일이……." "한데, 노인장은 도대체 누구요" "휴, 너는 천괴(天怪) 호강민(乎强珉)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느 냐?" 학운기는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라고요? 그렇다면 선배님이 백오십 년 전의 그 천괴 노선배님 이란 말씀입니까?" 천괴 호강민이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괴(天怪) 호강민(乎强珉). 그는 백오십 년 전 명실공히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었다. 무림의 최절정고수라고 나불대던 자들도 그의 백 초를 받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너무나도 괴팍하여 무림인들로부터 경원(敬 遠)을 받았다. 그러한 그가 백오십 년 전에 돌연 강호에서 실종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가 적수를 만나지 못하자 외로움을 느끼고 은거했다고 했고, 어떤 고인에게 패하여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여 은거해 버렸 다고도 했다. 그러한 그가 지금 학운기 앞에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학운기가 그에게 정중한 예를 취해 보였다. "후배가 노선배님을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무례를 범한 점, 용서 하시기 바랍니다." 호강민이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다, 내가 어떻게 너의 예를 받을 수 있겠느냐?" 호강민은 멍한 표정으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 백오십 년의 세월이 다 부질없었구나. 도대체 그 동안 내가 무공만을 죽으라고 익혀 왔던 목적이 뭐란 말인가?" 세상이 허무한 듯한 독백이었다.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 멀리서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응! 옥아냐? 할애비 여기 있다." 갈삼을 입고 십육칠 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그들 앞에 나타났 다. "할아버지, 식사를 모두 마련해 놓았는데 여기서 뭘 하세요?" 그녀는 말을 하다가 옆의 학운기를 발견하고는 그를 빤히 바라보 았다. 아무 빛도 없는 순진무구(純眞無垢)한 눈동자였다. 학운기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순진무구하고 신비한 눈동자에 매료된 듯하였다. 학운기는 묘하게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자 모든 근심이 사그리 사 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 세상에 백치미(白痴美)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던 호강민이 조용히 그들 사이에 끼 여들었다. "자네, 배고플 테니 우리 집에 가서 식사나 하고 가게." 학운기도 마음에 작정한 일이 있는지라 그의 제의를 고맙게 받아 들였다. "감사합니다, 노선배님." 이윽고 세 사람은 찬란한 햇살이 비추이는 숲 속으로 사라져 갔 다. ====================================================== 第 10 章 백치미인(白痴美人) ====================================================== 조그만 초옥(草屋)의 방 안에 식사를 마친 호강민과 학운기가 마 주 앉아 있었다. 학운기의 옆에는 백치미의 소녀가 굉장히 즐거운 표정으로 그의 곁에 꼭 붙어 앉아 있었다. 호강민은 그러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고, 학 운기는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도 순진무구하여 차마 뭐라고 할 수 도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호운옥(乎雲玉)이라고 했는데, 어렸을 때 강보에 싸여서 버려져 있는 것을 호강민이 데려다 키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성(姓)도 호강민을 따르고 있었다. 학운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호강민을 바라보았다. "노선배님, 무림에는 곧 마황성(魔皇星)의 피(血)의 저주가 닥쳐 올 듯합니다. 현재 정파의 힘만으로는 그 저주를 해소하기가 매우 힘들 것 같습니다." "자네는 나보고 다시 강호에 나가란 말인가?" "만약 노선배님께서 도와 주신다면 혈겁은 쉽게 종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네. 마황성의 저주가 아무리 무섭다고 하더라도 자네가 있는 이상 무림의 평화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네." "아닙니다, 노선배님. 소생은 아직 나이도 어리고 또 경험도 없습 니다." "아니야, 자네는 충분히 해낼 수 있어.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평생에 꼭 두 번 패했네. 그 중에서 한 번은 사흘 밤낮을 싸우다 가 겨우 반 초 차이로 패했으니까… 아직도 약간의 미련은 남아 있지만 두 번째 자네에게만은 완전히 굴복했네. 백오십 년 동안을 그 반 초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노력해 온 내가 말일세." "……." 학운기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해 온 사람이 반 초 차이로 패하고 그 설욕 을 하기 위해 백오십 년 동안을 노력해 왔는데, 어느 날 손자도 몇 대 아래의 손자뻘이 되는 어린 소년에게 무참히 패했을 때의 기분을 그도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호강민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나는 강호에 못 나가더라도 한 사람을 소개해 주겠네." 학운기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그분이 누굽니까?" 호강민이 호운옥을 바라보았다. "바로 옥아네. 얼핏 보면 잘 모르겠지만, 옥아의 근골을 살펴보 게." 학운기는 이제까지 그녀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만을 바라보느라 미 처 그녀의 근골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펴보지를 못했다. 한동안 그녀의 근골을 살펴보던 학운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태음신맥(太陰神脈)!" 호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 애는 태음신맥을 타고났네. 자네가 천빈성의 정기를 타고났다니, 아마도 그 애는 자네를 따를 운명인가 보네. 그 애는 이미 나의 진전을 모두 이어받았으니, 자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네." 이 때 학운기의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호운옥 이 슬픈 빛을 띠었다. "할아버지는 저를 밖으로 내보내려는 것인가요?" "왜? 너는 저 소협이 싫으냐?" 그녀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하지만 전 할아버지와 헤어지기 싫어요." 호강민이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옥아야, 여자는 성장을 하면 모두 집을 떠나야만 된단다. 그리고 강호에 나가면 네가 갖고 싶은 것도 많고, 사람들도 모두 너한테 잘 대해 줄 것이다. 그리고 저 소협이 너를 잘 보살펴 줄 테니 그 렇게 하도록 하여라." 호운옥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만 살래살래 저었다. "그럼 너는 저 소협과 헤어지고 싶으냐? 저 소협은 곧 여기를 떠 날 텐데?" "싫어요. 할아버지도 함께 떠나요." "옥아야, 나이 많은 내가 어떻게 강호를 돌아다닐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너는 더 이상 고집 부리지 말고 저 소협과 함께 떠나도록 하여라." "싫어요, 싫어요." 그녀는 계속 슬픈 표정으로 고개만을 살래살래 저었다. 학운기가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노선배님, 호 낭자는 노선배님과 헤어지기가 몹시 싫은가 본데…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니네.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자네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네. 하니 자네는 옥아를 데리고 그만 떠나도록 하게." "노선배님께서 정 그러시다면 호 낭자는 노선배님의 시중을……."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나? 자네는 저 애가 이런 산골에서 평생을 보내도 좋단 말인가? 그리고 만약에 마황성의 정기를 타고난 자가 저 애를 발견하면 어떡하겠나? 자네의 무공 정도로 보아서 마황성 의 정기를 타고난 자도 자네 정도는 될 것인데, 만약 그 자가 저 애를 납치해 가면 내가 막을 수 있다고 보는가?" "노선배님……." "더 이상 말하지 않겠네. 자네는 어서 옥아를 데리고 떠나도록 하 게. 그리고 옥아도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간단한 짐이라도 갖고 어서 떠나도록 하여라!" 호강민은 단호하게 한 마디 뱉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할아버지……." 호운옥이 그를 부르며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후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녀를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낭자는 어떻게 하겠소?" "학 상공의 뒤를 따르겠어요." "그럼 어서 갑시다." "예." 호운옥은 보따리에 몇 가지 것을 가지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초옥을 떠나기가 못내 섭섭한 듯, 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 아다보았다. 학운기는 경혼방에서 엿들은 소림사의 침공에 대한 생각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 있었다. "낭자, 경공을 펼쳐서 가도록 합시다." "예." 이윽고 그들의 몸은 번개와 같은 속도로 숲 속을 뚫고 나왔다. 이 때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호강민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옥아야! 부디 행복하거라.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지만, 신(神) 이 주신 생명(生命)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나." 한때는 천하제일인으로서 위세를 떨쳤던 그도 나이만은 어쩔 수가 없는지 매우 공허한 표정이었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발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사라졌다. 학운기가 호운옥과 함께 장사(長沙)의 주루에 다시 돌아온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그는 주루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혹시 제천 대왕이 무슨 일을 저지르지나 않았나 하고 황급히 헤집고 들어갔 다. "아니? 너는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 주루의 문 앞에는 그 큰 몸집의 제천대왕이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는 학운기의 물음에 이상하다는 듯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네 목소리는 주인님과 똑같고, 모습은 영 딴판이니… …." 학운기는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본래의 모습으로 그대로 있는 것을 깨닫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나는 네 주인이 맞다. 그러니 잠깐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많은 중인들 앞에서 진기역용술로 얼굴을 고칠 수도 없는지 라 그를 달래었다. 그러나 주루의 문 앞에 버티고 앉은 제천대왕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싫다. 나는 주인님이 오시기 전에는 꼼짝도 안 할 거다." 학운기는 할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서 모습을 고치고 나오기로 하 였다. 그는 주루의 점원들도 믿지 않을 것 같아서 다른 방을 얻어서 들 어갔다. 호운옥은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라움 을 금치 못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주루 앞으로 갔다. "주인님, 소인은 주인님을 기다리느라 배고파 죽을 뻔하였습니 다." 제천대왕이 그를 보자마자 큰절을 했다. "그래, 수고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식사를 하도록 하자." "예, 그런데 참. 아까 주인님 목소리와 똑같은 녀석이 와서……." 그는 말을 하다가 호운옥을 바라보더니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 렸다. "어! 이 애는 아까 그녀석과 함께 있었는데……." "와하하……!" 중인들도 그것에 대해서는 이상함을 느꼈지만 제천대왕의 우스운 태도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학운기 등이 주루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제천대왕의 모습을 지 켜 보던 사람들도 모두들 따라 들어왔다. 제천대왕은 이번에도 모든 사람이 흥미롭게 지켜 보는 앞에서 통 돼지 한 마리 반을 뜯어먹었다. 호운옥은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학운기는 식사를 마치자 방에 들어가서 백의로 갈아입은 다음 길 을 떠났다. 그는 중간에서 개방의 한 분타에 들러 우내사존에게 무림제일궁으 로 오라는 소식을 전하게 한 다음 제천대왕에게 경공술을 가르쳐 주고 숲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날렸다. 제천대왕은 처음에는 매우 어색하게 몸을 날렸으나 타고난 힘과 어릴 때 복용한 영약(靈藥) 덕분인지 몸의 빠르기는 일류고수와 맞먹을 정도였다. 장사(長沙)에서 무창(武昌)까지는 천 리에 가까운 거리였다. 학운기와 호운옥의 경공으로는 두 시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 리였지만 이제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제천대왕이 끼여 있는지라 그들이 무림제일궁에 도착했을 때는 삼경이 막 넘어서는 무렵이였 다. 궁문(宮門)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호위무사는 학운기의 얼굴을 알고 있는지 즉시 문을 열어 주고 궁주에게 통보를 하였다. 황보웅이 그를 반색하며 반겼다. "어서 오시오, 학소협." 그들은 곧 조용한 밀실로 들어갔다. 밀실에 들어가자 황보웅이 다시 정중한 예를 올렸다. "노복이 주상을 뵈옵니다." "그만 예를 거두고 앉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주상." "한데 천노야 등으로부터는 연락이 있었소?" "예, 방금 전에 내일 저녁 무렵에는 모두들 도착하실거라는 연락 을 받았습니다. "음… 그러면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고 우리가 묵을 방이나 준비해 주시오." 학운기는 황보웅에게 호운옥과 제천대왕을 소개해 주었다. 황보웅은 그들이 모두 태음신맥과 태양신맥을 타고난 기재라는 소 리를 듣고는 매우 놀라며 그에게 축하를 했다. 그들은 시비의 안내에 따라서 후원의 한 조용한 별채로 안내되었 다. 학운기는 어제부터 한숨도 못 잔지라 피곤함을 느끼며 운기행공을 하였다. 그가 운기를 마치고 침상에 막 들려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베게를 가슴에 안은 호운옥이 들어왔다. 학운기가 흠칫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낭자, 자지 않고 이 방에는 왜……?" "저는 혼자 자면 잠이 안 와요. 집에서도 항상 할아버지 품에서 잤는걸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거침없이 침상에 가서 누웠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순진무구하여 도저히 어떤 이상한 빛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학운기는 그녀의 너무나도 순진한 태도에 자신의 마음이 이상 야 릇한 기분이 드는 것을 오히려 자책했다. 호운옥이 멍하니 서 있는 그를 재촉했다. "어서 와요. 아함 졸려……." 학운기는 자신의 정력(定力)에 대해서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성(異性)과 같은 자리에서 잔다는 것이 쉽게 마음 내키지 않았 다. 그가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자 호운옥이 답답했던지 그를 침상으로 끌어들였다. 그도 우선 그녀를 재우고 다른 방도를 취하고자 생각하고는 그녀 의 곁에 누웠다. 호운옥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천사의 미소와도 같은 해맑은 미소였다. 학운기는 괜히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호운옥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그 때마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의 감촉이 짜릿하게 학운기의 몸에 전해져 왔다. "학상공, 오늘 내 마음이 왜 이렇지요? 할아버지와 잘 때는 그렇 지 않았는데 지금은 가슴이 마구 두근거려요. 이것 보세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순간 학운기는 뭉클한 감촉에 짜릿한 기분을 느끼면서 얼른 손을 잡아 뺐다. 그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여졌다. "낭자, 이러면 안 되요." "왜 안 되지요?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짜릿한 기분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자, 다시 한 번 해 봐요." 그녀는 그의 손을 다시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낭자……!" 학운기는 그녀에게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 주어야 좋을지 몰랐 다. 어릴 때부터 사람이라고는 할아버지로 믿고 있는 호강민 밖에 보 지 못했던 그녀인지라 남녀 사이의 정이나 예절에 대해서 알 리가 만무했다. 그는 그녀에게 그러한 것에 대해 알려 주지 않은 호강민이 내심 원망스러웠다. 호운옥은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가서는 꼭 쥐고 있었다. 학운기의 손에도 그녀의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는 것이 전 해져 왔다. 순간 그의 단전에서 갑자기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 랐다. 그 기운은 너무도 거세어 그냥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흠칫 놀라면서 급히 운기를 하여 뜨거운 기운을 억제하려 했 다. 그러나 그 기운은 운기를 해도 사그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거세게 솟구쳐 올랐다.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헉! 헉!" 호운옥은 갑작스럽게 급박해진 그의 숨소리에 놀랐다. "아니 학상공, 어디가 아프세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려는지 그의 몸 위로 자신의 상체를 얹고는 얼굴을 바싹 갖다 대었다. 향긋한 단내가 그의 후각을 간지럽혔다. 찰나 그는 마지막 남은 의지로써 그녀를 세게 밀쳤다. "악!" 그녀는 뾰족한 비명을 토하며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호운옥은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헉! 헉!" 침상 위에서는 학운기가 계속 거친 숨소리를 뱉어 내면서 마침내 는 괴로운지 자신의 귀를 쥐어뜯었다. 호운옥은 그러한 그가 매우 안쓰러워서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 다. 이 때 학운기는 이미 한 가닥 남은 의지마저 상실한 후였다.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려는 순간 그 는 괴로운 숨소리를 내면서 도저히 못 참겠는지 돌연 그녀의 몸을 덮썩 껴안아 버렸다. "헙!" 그녀의 입에서도 다급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낭자……!" "흡!" 이내 그들의 입술이 하나로 합쳐졌다. 짜릿한 전율이 그들의 몸을 타고 서로에게 전해졌다. 호운옥은 생전 처음 맛보는, 구름을 밟는 듯한 짜릿한 기분에 머 리 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것이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는 않았다. 어느 샌가 그들의 위치마저 바뀌어 있었다. 학운기는 그녀의 뜨겁고도 달콤한 입술을 탐하면서 손은 그녀의 품 속을 더듬고 있었다. "으음……!" "으으음……!" 고혹적인 신음이 가볍게 방 안을 울렸다. 학운기가 급히 그녀의 옷을 벗겨 갔다. 그녀는 무의식 중에 반항을 했으나 그의 억센 힘을 당할 수가 없 었다. 아니 그녀의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그의 욕정에 부채질을 하는 격 이 되었다. 찌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면서 그녀의 옷이 쫙 찢어져 버렸다. "헉! 헉!" 학운기는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 그녀의 한 가닥 남은 속옷마저 도 벗겨 내렸다. 현란한, 그러나 성(聖)스럽게까지 보이는 여체의 나신(裸身)이 드 러났다. 백옥(白玉)보다도 하얀 살결은 만지면 터져 버릴 듯이 팽팽했다. "으으음……!" 그녀는 무언가 저지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온몸의 힘이 빠져 나가 버렸는지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녀의 팽팽하게 솟아오른 두 육봉과 약간 상기된 얼굴, 목은 그 렇게도 순진무구하게 보이던 그녀를 도발적으로 보이게까지 했다. "헉! 헉!" 찌이익－! 학운기는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에 걸쳐진 귀찮은 것들을 벗 으려다가 잘 안 되는지 쫙쫙 찢어 버렸다. 곧 여인의 살결보다도 하얀 그의 탄탄한 나신이 드러났다. "헉! 헉!" "으흡!" 그들의 몸이 하나로 포개졌다. 학운기는 입으로는 그녀의 입술과 육봉을 번갈아 탐하면서 손으로 는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의 나신을 누비고 있었다. 호운옥의 입에서도 고혹적인 신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하였다. 학운기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나긋한 허리를 껴안고 한 손으로는 파릇한 초원지대를 헤치고 있었다. 까칠까칠하고 몽실몽실한 감촉이 전해 오자 그의 손은 더욱 깊숙 한 곳으로 내려갔다. "헉!" 호운옥의 입에서 다급한 교성(嬌聲) 터져 나왔다. 그녀의 옥문(玉門)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학운기는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최대의 나락 속으로 떨어져 갔다. "으흑!" 자지러지는 듯한 호운옥의 교성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신음, 교성(嬌聲),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 그리고 거친 숨소리로 이루어진 춘풍(春風)이 방 안에서 거세게 휘몰아쳤다. 달님도 창문 틈으로 살며시 방 안을 엿보다가는 더 이상 못 보겠 는지 살며시 구름으로 얼굴을 가렸다. 뜨겁고도 거세게 휘몰아치는 춘풍은 한 시진을 넘게 계속되고 있 었다. 다시 얼마나 흘렀을까? "헉!" "으헉!" 두 사람은 한 차례 다급한 숨소리와 거센 전율을 일으키더니 그대 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방 안은 아직도 남아 있는 여풍(餘風)에 가볍게 술렁이고 있었고 달님도 가렸던 구름 사이에서 빠져 나와서는 그들의 평화롭게 잠 든 얼굴을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학운기는 왠지 썰렁한 느낌을 받고는 몸을 일으켰 다. 옆에는 호운옥이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고운 옥토 사이에서 붉은 혈화가 흥건이 침상을 적시며 피 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학운기의 얼굴은 고뇌와 회의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음… 도대체 이 일을 어떻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 진무구한 소녀에게 이러한 일을 저질렀으니…….' 그는 이러한 생각에 골몰하면서 그녀의 나신을 더 이상 보기가 민 망했는지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그녀의 몸을 접하자 몸 안에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무슨 미약 같은 것에 중독되었나도 생각해 봤으나 도저히 그 러한 기억은 없었다. '미약에 중독되었더라도 운기로써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는데 어 제 밤에는 그것도 소용이 없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 가?' 고통스러운 의혹은 계속 그의 머리 속에 맴돌았다. 이 때 따끈한 물체가 그의 몸에 접해 왔다. "음!" 호운옥은 무심결에 멍하니 앉아 있는 그의 팔을 잡으려다가 하체 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가벼운 신음을 토해 냈다. 학운기는 신음에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아직도 나신 임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잠시 후 다시 그의 몸에 부드럽고도 따뜻한 물체가 접해 왔다. "학상공, 우리가 어제 밤에 행했던 일이 무엇이기에 아직도 이렇 게 아프죠?" "……." 학운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 주 어야 좋을지 몰랐다. "저는 어제 밤에 꼭 죽는 줄만 알았어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야 릇한 기분에 아프기는 했지만 그렇게 싫지는 않았어요." "낭자……!" 학운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남녀지사(男女之事)에 대하 여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으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학운기는 그녀의 순진무구한 태도에 어색해하는 자신이 괜히 부끄 러워짐을 어쩔 수가 없었다. "옥매, 그만 일어나 옷을 입읍시다." "알았어요, 기오빠." 그들의 호칭은 어느 새 바뀌어져 있었다. 그들은 옷을 입고는 다정스레 밖으로 나갔다. 학운기는 그의 방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는 제천대왕을 보 고는 깜짝 놀랐다. "너는 왜 여기에 앉아 있느냐?" "예, 주인님. 어제 밤에 주인님 방에서 왠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주인님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주인님이 호아가씨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습니 다." "뭐라고……?" 학운기는 실소를 머금었으나 얼굴이 뜨거워짐은 금할 수가 없었 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런 짓은 하지 말아라. 내 말 알아듣겠느 냐?" "예, 주인님." 이 때 황보웅이 그들이 묵고 있는 별채로 들어섰다. "주상, 간밤 잠자리는 편안하셨는지요?" "황보군주 덕분에 편히 잘 수 있었소."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여기서 드시겠습니까?" "아니오. 번거롭게 할 필요가 뭐 있겠소. 황보군주와 함께 들도록 합시다." 둘은 황보웅의 뒤를 따라서 무성전으로 갔다. 무성전의 대청에는 이미 푸짐한 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상에는 제천대왕을 위해서인지 한 곳에 구운 오리고기를 다섯 마 리나 놓아 두었는데 학운기의 생각에도 그것은 제천대왕에게는 너 무나도 부족한 것 같았다. 역시 제천대왕은 식사가 시작되자 학운기 등이 몇 술 뜨기도 전에 그것들을 싸그리 비우고는 뼈다구를 씹고 있었다. 황보웅은 그의 식성에 매우 놀라면서 급히 요리를 더 가져오라고 시켰다. "하하… 앞으로 황보군주와 요리사들이 제천대왕 때문에 고심이 많을 겁니다." "허허… 그렇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궁에도 그 정도의 식량은 있 으니 걱정 말고 많이 들도록 하게." 황보웅이 제천대왕에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제천대왕은 그 에게 넙죽 큰절을 올렸다. "고맙습니다, 황보군주님." "하하하……!" 거대한 체구가 넙죽 절하는 모습은 대청에 유쾌한 웃음꽃이 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황보룡이 폐관수련하고 있는 밀실로 갔다. 이 때 황보룡은 내공을 수련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몸에서는 은은한 백무(白霧)가 뿜어져 나와 그의 몸을 둥그 렇게 감싸고 있었다. 황보웅은 그러한 그를 대견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주상 덕분에 이 애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오. 그게 어디 내 덕이겠소. 다 자제의 재질이 뛰어나서 그 런 것이 아니겠소?" "아닙니다. 아무리 재질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주상의 가르침이 없 었다면 이토록 놀라운 진전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한창 황보룡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황보룡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백무가 서서히 그의 몸 속으로 스며들 어갔다. 잠시 후 황보룡이 운기를 마치고는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서는 칼날보다도 날카로운 신광(神光)이 줄기줄기 쏟아 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앞에 아버지와 학운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즉시 대례 를 올렸다. "소인이 주상을 뵈옵니다." "그 동안 많은 진보가 있는 것 같구려." "모두 주상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하하… 소궁주의 재질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지 어찌 내 가르침 덕분이겠소. 그럼 그 동안 익힌 초식을 한 번 펼쳐 보시오." "예." 황보룡은 학운기와 황보웅에게 가볍게 예를 취해 보이고는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학운기가 보기에도 별로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하게 펼치고 있었 다. '음… 방양구에게 한 번 패하더니 절치부심하며 노력한 모양이구 나.' 그는 황보룡이 초식으로 시전을 모두 마치자 몇 군데 고쳐야 할 곳을 알려 주었다. 황보웅은 옆에서 듣고 있으면서 자신이 전혀 느끼지 못한 면까지 지적을 하자 새삼 학운기의 깊은 무학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학운기는 지적을 마치고는 제천대왕에게도 그의 체질에 알맞는 무 공을 전수해 주었다. 그는 그 날 하루 동안을 황보룡과 제천대왕에게 무공을 전수하면 서 그들의 자세를 시정해 주는 것으로 보냈다.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황보웅과 호운옥도 그것에서 많은 새로운 것들을 배울 수가 있었다. 황보웅은 학운기의 끝이 없는 듯한 무공의 깊이에 내심으론 연신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내가 주상을 따라가려면 백 년은 더 노력해도 모자라겠구 나.' 그 날 저녁 무렵 학운기 등은 제천대왕과 황보룡을 밀실에 남겨 둔 채 밖으로 나왔다. 우내사존은 이경쯤 되어서야 하나씩 나타났다. 학운기는 그들이 모두 나타나자 황보웅과 함께 밀실로 들어갔다. 호운옥은 처음 만난 황보설과 매우 친해져서 그녀와 함께 그녀의 처소로 가고 없었다. 학운기는 밀실에 들어서자마자 경혼방에서 엿들은 얘기를 해 주었 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우내사존과 황보웅은 매우 놀란 빛을 보였 다. 새제갈 천기후가 약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주상께서는 혹시 엿듣는 중에 그들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학운기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점이라뇨?" "예를 들어서 누가 주상을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던지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네 명의 목소리가 밀담을 나누는 것 치고는 약간 컸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글쎄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들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주존이라는 자가 출관을 하면 나를 상대한다는 것 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 소림침공에 대해서만 얘기했다는 것이… …." 천기후는 그의 말을 듣고는 한참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음… 주상께서는 아마도 마심뇌사(魔心腦邪) 가계지(賈界地)에게 속으신 것 같습니다." "아니 마심뇌사에게 속다니요?" "예, 그는 주상께서 천살마제를 가볍게 물리친 것을 보고는 주상 이 천빈성의 기재라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흑도고수들이 경혼방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꾸며서 주상을 그 곳으로 유인한 것 입니다. 그러한 수법은 마심뇌사 가계지가 전에 한 번 써먹었던 수법입니다. 그가 그러한 계책을 쓴 것을 보면 그는 아직 노복이 주상을 보필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학운기는 새제갈 천기후의 논리정연한 추리에 내심 감탄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러한 수법을 사용한 것은 나를 무림에서 활동 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인 것 같구려."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존이라는 자보다 주상께서 먼저 무림에 출 도하시자 그런 계교를 부린 것 같습니다." "음… 그렇다면 주존이라는 자의 출관날이 보름 후가 아니라 몇 달 뒤인 것 같구려." "그렇습니다. 노복의 생각으로는 빨라야 두 달 후인 것 같습니 다." "음… 그들의 소림침공이 계교라면… 그들은 아마도 다른 곳을 칠 것 같구려. 천노야의 생각은 어떻소?" "노복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럼 그들이 노리는 곳이 어디겠소?" "예, 노복의 생각으로는……." 천기후가 말을 하다가는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한참을 마주 보고 있다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보고는 서로가 짐작하고 있는 곳을 안 것 같았다. 한순간의 무거운 침묵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주걸신개 맹천의가 그들이 갑자기 말을 하지 않자 매우 궁금한 표 정으로 천기후를 바라보았다. "천형, 도대체 어딘데 갑자기 말을 않고 있소?" 천기후가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학운기도 그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아마, 이 곳 무림제일궁이 될 것 같구려." "예에?" 밀실 안에서 몇 마디 놀라움의 탄성이 터졌다. 특히 황보웅은 얼마나 놀랐는지 눈에서 살기(殺氣)가 줄기줄기 쏟 아져 나왔다. 학운기는 이어 의아히 생각하고 있는 주걸신개 등에게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여러분의 말을 들으니 내가 경혼방에서 보았던 구가와 빙가라는 자는 한천보주(寒天堡主) 냉면노군(冷面老君) 구천혈(丘天血)과 천마방주(天魔幇主) 빙대황(氷大黃)이 틀림없는 것 같소. 그렇다 면 경혼방을 포함한 그들 세 방파에서 서로 비슷한 거리에 있고 우리가 모여 있을 소림에서도 결코 가깝지만은 않은 이 곳이 가장 적격지가 아니겠소? 그리고 황보군주는 정파무림의 영수 격인 인 물이니 그들이 맨처음 노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않겠소?" 모두들 그의 논리정연한 추리에 감탄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천기후도 자신의 생각과 똑같은 그의 생각에 흡족한 미소를 띄우 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자, 그들은 아마도 만독제군(萬毒帝君) 필적혈(弼摘血)의 도움을 받을 것 같으니 우리도 대책을 세우도록 합시다." 이어서 그들은 마도(魔徒)와 사도(邪徒)들의 침공에 대비하여 세 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숙의는 거의 두 시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숙의가 모두 끝났을 때. 주걸신개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주상께서는 두 명의 태양신맥과 태음신맥을 타고난 기재를 얻으 셨다는데 어디서 그들을 만나셨는지요?" "내가 그들을 만난 것은……." 학운기는 그들을 만난 경위에 대하여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가 제천대왕에 대해 얘기할 때는 모두들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호운옥에 대해 얘기하면서 천괴 호강민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모 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아… 그분께서 아직까지 살아 계셨다니 놀라운 일이군요. 한데 주상께서는 그가 누구에게 패했는가에 대해서는 물어 보지 않으셨 습니까?" 세제갈의 물음에 모두들 궁금한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것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물어 보았으나 그분은 다 부 질없었던 일이라며 입을 열지 않았소." 우내사존은 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 과거의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한참 더 얘기를 나누다가 밀실을 나갔다. 학운기는 자신의 몸에 일어났던 이상한 일에 대해 물어 보려고 전 음(傳音)으로 천기자를 불렀다. "노도께서는 잠시 나하고 얘기 좀 합시다." 천기자는 그가 갑자기 전음으로 말해 오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상,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학운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는 그와 단 둘이서 대청의 탁자에 마주 앉았다. 학운기는 이어서 호운옥의 몸과 접했을 때 일어났던 현상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었다. 천기자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빙그레 미소만 짓고 있었다. "노복이 주상께 말씀드린다는 것을 잊고 있었군요." 천기자는 용서를 빌면서 한천빙룡의 내단 중 홍색내단 즉, 색단 (色丹)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학운기는 그의 설명을 듣고는 난감한 표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해소할 방법은 없소?" "노복이 알기로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 기로써 억누르려고 하면 진기가 서서히 소모되니 주상께서는 앞으 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접을 하고 나면 상대에게는 아 무 피해도 없이 진력이 증강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고맙소, 그럼 노도께서도 피곤할 텐데 편히 쉬도록 하시오." 천기자는 가볍게 예를 취하고는 물러갔다. '음…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앞으로는 될 수 있으면 여자와는 얘기도 말아야 겠군.' 학운기는 한참을 난감한 표정으로 생각에 골몰하다가는 자신의 처 소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이 묵고 있는 별채의 방문을 열다가는 깜짝 놀랐다. "아니, 옥매. 아직까지 자지 않고 뭐하고 있는 게요?" 침상에는 호운옥이 눈을 멍하니 뜬 채로 뒤척이고 있다가는 그를 보고는 반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기오빠. 저는 할아버지와 오빠 품이 아니면 잠이 오지 않는지라 이 곳에 왔는데 오빠도 없고 해서… 자, 빨리 자요. 졸려… 아함 ……." 그녀는 그의 팔을 끌고 침상으로 가면서 매우 졸리운지 하품을 했 다. '허 참, 이것도 큰일이군. 그렇다고 옥매를 잠을 못 자게 할 수도 없고 함께 자면 그놈의 색단이라는 것이 말썽이니…' 그가 한창 고심하고 있을 때 그의 몸은 이미 호운옥에 의해서 눕 혀져 있었다. 순간 학운기는 또 색단의 효력이 발생함을 느꼈다. 그는 급히 그녀에게 그것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그냥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덮었다. 열락(悅樂)의 춘풍(春風)이 조그만 방 안에 거세게 휘몰아쳤다. < 第 1 卷 끝 > < 絶對神龍 第 2 卷 > 第 1 章 혈겁(血劫)의 서막(序幕) 第 2 章 애틋한 짝사랑 第 3 章 비련(悲戀)의 여인 第 4 章 적진(敵陣) 잠입(潛入) 第 5 章 부골흡혈저(腐骨吸血 ) 第 6 章 사랑의 대화(對話) 第 7 章 분노한 기재(奇才) 第 8 章 고귀한 희생 第 9 章 변해 버린 여심(女心) ====================================================== 第 1 章 혈겁(血劫)의 서막(序幕) ====================================================== 며칠 후 무림제일궁(武林第一宮)을 떠나는 일군(一群)의 인마(人 馬)가 있었다. 그들은 학운기와 황보웅 등이었다. 무림제일궁을 나온 그들은 일로 북상(北上)을 하였다. 다음 날 그들은 소림사(少林寺)에 당도하였다. 소림사에는 이미 정파의 군웅들이 상당수 모여 있었고, 십여 명의 제자를 거느린 각대문파의 영수(領首)급 인사들이 속속 당도하고 있었다. 그러한 소림사에서는 불문(佛門)의 성지답지 않게 은은한 살기(殺 氣)마저 뻗쳐 나오고 있었다. 소림사에 당도한 학운기는 소림 장문인 백혜(白慧) 대사 등을 비 롯한 수뇌들과 가끔 밀담을 나누면서 소림사의 주위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이제 사도(邪徒)와 마도(魔徒)들이 침공한다는 날은 이틀밖에 남 지 않았다. 소림사에 모여 있는 정파의 군웅들과 소림승들은 차차 긴장의 빛 을 띠기 시작하였다. × × × 무림제일궁의 지하에 있는 밀실(密室)에 우내사존이 초조한 빛으 로 앉아 있었고, 잠시 후 황보웅과 그 뒤를 이어서 학운기가 들어 섰다. 우내사존이 일어나서 예를 취하였다. "노복들이 주상을 뵈옵니다." "그만 예를 거두시오." 그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학운기가 새제갈을 바라보았다. "한데 밖의 일은 모두 마무리를 지었소?" "예, 노복들이 이미 철저한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수고하셨소." 천기자가 매우 궁금한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주상께서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다행히 성공할 수 있었소." "아……." 우내사존과 황보웅이 가벼운 탄성을 터뜨리며 감탄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 그럼 앞으로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니… 다시 한 번 철저한 점검을 해 보도록 합시다." "예." 그들은 잠시 숙의를 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학운기와 황보웅. 그들은 분명히 소림사에 있었는데 어떻게 이 곳에 또 그들이 있단 말인가? 그들의 말로 미루어 보아서 그들은 아예 무림제일궁을 떠나지도 않은 것 같지 않은가? 그들은 애초에 무림제일궁을 떠나지도 않았다. 소림사에 있는 학운기와 황보웅은 무림제일궁의 제자들이 변장을 한 것이었다. 학운기는 현령비급(玄靈秘 )상에 있는 역용술로 그들을 감쪽같이 변장시켜서 소림사로 보낸 것이었다. 학운기는 적을 철저하게 속이기 위하여 그러한 계책을 사용한 것 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 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학운기는 우내사존을 비롯한 고인(高人)들이 있는 이상, 무공면에 서는 절대로 마도(魔道)와 사도(邪道)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수백 명을 몰살시킬 수 있는 독(毒)의 제왕 만독제군(萬毒帝君)이 있지 않은가? 학운기는 이미 만독제군이 독중지독(毒中之毒)인 절혼무형독(絶魂 無形毒)을 제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동안 그 해약 (解藥)을 만들기 위하여 무림제일궁의 지하에 있는 약실(藥室)에 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던 것이다. 원래 절혼무형독은 해약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천고의 기 재인 그가 드디어 그것을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을 만약 만독제군이 안다면 그는 싸우기도 전에 전의 (戰意)를 상실하고 천 리 밖으로 도망쳐 버렸을 것이다. 각설하고 밀실을 나온 학운기 등은 평범한 모습으로 변장을 한 다 음, 무림제일궁 곳곳을 돌아다보았다. 다시 하루가 지난 아침, 개방의 무창(武昌) 분타주가 매우 다급한 표정으로 무림제일궁을 찾아왔다. 그는 즉시 은밀하게 학운기 등에게 안내되었다. 주걸신개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이토록 다급하게 구느냐?" "사조님, 큰일났습니다. 오늘 아침 사천(四川)과 호북(湖北)의 제 자들로부터 낯선 무리들이 아미(峨嵋)와 청성(靑城), 그리고 무당 (武當)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뭐라고? 그래, 그 수효가 얼마쯤 된다더냐?" "예, 아미와 청성으로 가는 무리는 각기 삼백여 명 정도였고… 무 당으로 가는 무리는 오백여 명이라고 합니다." 새제갈이 끼여들었다. "그럼 그들 중에서 정체를 알 만한 자들은 없다던가?" "예,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체는 알 수 없고… 그들 이 펼치는 경공으로 보아서 대부분이 강호의 일류고수의 대열에 끼일 수 있을 정도라 합니다." "으음……!" 그들 사이에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학운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소?" "예, 모두들 사경 무렵에 야트막한 야산(野山)을 달리는 것을 보 았다 합니다." "야트막한 야산이라… 그렇다면 개방의 방도들은 밤중에도 활동을 하오?" 무창 분타주가 대답하기를 꺼리며 잠시 머뭇거리자 주걸신개가 고 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말하도록 하여라." "예, 저희 개방에서는 평상시에는 각 분타마다 한두 명의 제자만 이 밤에 활동을 합니다. 하지만 오죽령(烏竹令)이 발효되면 밤에 도 낮과 똑같이 활동을 합니다." "오죽령이란 무엇이오?" "예, 방주님의 신물(信物)입니다." 학운기는 무창 분타주의 말을 듣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하 였다. '음, 그렇다면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란 얘긴데…….' 그는 한참을 생각 하다가 주걸신개를 바라보았다. "오죽령이 발효되면 개방이 낮과 다름없이 밤에도 활동한다는 사 실을 강호인들은 알고 있소?" "그렇지 않습니다, 주상. 그것은 개방의 비밀이기 때문에 일반 무 림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심뇌사 가계지 정도의 인물은 알고 있단 말이 되겠구 려?" "아마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학운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새제갈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렇지요?" 새제갈도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주상." 그렇게 말을 하는 새제갈의 눈가에는 새삼 감탄의 빛이 어려 있었 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라서 매우 궁금한 표정으로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학운기가 다시 무창분타주를 바라보았다. "분타주는 은밀히, 그러나 매우 황급한 표정으로 이 곳을 나가서 소림과 개방의 각 분타… 그리고 사천과 호북에 있는 정파인들에 게 전갈을 보내시오." "무슨……?" "그것은 모든 정파인들과 개방의 제자들은 급히 청성과 아미, 그 리고 무당에 모이게 하는 것이오. 그러나 소림에 모여 있는 군웅 들은 약간만 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주의할 점은, 그 낯선 무리들 과 마주치더라도 싸움을 피하도록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무창 분타주는 학운기 등에게 예를 취한 다음 허겁지겁 매우 당황 한 표정으로 무림제일궁을 빠져 나갔다. 그가 나가자 주걸신개가 매우 의아하고 궁금한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주상,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후후… 마심뇌사의 잔꾀요. 그러니 우리는 속아 주는 척해야지 않겠소?" "아……!" 모두들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운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좌중을 향해 말했다. "자, 그럼 내일을 대비해서 편히 쉬도록 합시다." "예." 다음 날 삼경 무렵. 무림제일궁은 정적에 싸여 있었고, 단지 몇 군데의 누각에서만 가 느다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구냐?" "윽!" 몇 마디의 묵직한 신음이 정적을 깨뜨리며 약 칠팔백 명의 흑의인 들이 사방에서 무림제일궁의 담을 뛰어 넘어왔다. "으아악……!" 계속 비명이 터지며 순라를 돌던 무림제일궁의 무인들이 제대로 반항 한 번 못하고 쓰러져 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무림제일궁의 누각과 전각들은 계속 정적에 싸 여 있었다. 흑의인들은 순찰무사들을 처치하자마자 수많은 전각과 누각들로 각기 흩어져 들어갔다. 그들의 대부분이 누각과 전각으로 들어갔을 때 죽어 자빠진 줄로 알았던 순찰무사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순찰무사 중 한 명이 돌연 커다랗게 외쳤다. "쳐라!" 황보웅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들이 파고 있던 함정에 적이 빠져든 것이었다. "아악!" "으헉!" 수십 수백 마디의 처절한 단말마가 흑의인들이 들어간 누각과 전 각에서 터져 나왔다. 펑－ 쾅－! 누각과 전각으로 들어갔던 흑의인들이 창문을 박차며 뛰쳐나왔다. "와하하… 모두들 죽여라, 죽여!" 광소(狂笑)가 들리며 다시 오십여 명의 인영(人影)이 빛살과도 같 은 속도로 무림제일궁 안으로 날아들었다. 쾅－ 콰르릉－! 창－ 창－! "으아악……!" 이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무림제일궁 문인들이 허겁지겁 누각과 전각에서 빠져 나온 흑의인들을 일방적으로 주살(誅殺)하 고 있었다. "와하하……!" "앗!" "아니?" 광소를 터뜨리며 나중에 날아들었던 오십여 명의 무리들이 갑자기 광소를 뚝 그치며 경악의 비명을 토해 냈다. "하하하… 여러분들! 오시느라고 수고하시었소." 청아한 음성이 들려 왔다. 오십여 명의 무리들은 이미 사태를 짐작한 듯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들의 주위는 어느 새 백여 명의 인영들로 물샐틈 없이 포위되어 있었다. 황보웅이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한 걸음 나섰다. "하하… 이거 패천마황 소형이 아니오? 그러고 보니 무극존마 빙 형과 냉면노군 구형, 그리고 수라절혼마 엄형도 오셨구려? 하하… 자, 나에게 다른 분들도 소개해 주겠소?" 이 때 그들 중에서 전신에 금의를 걸친 팔십여 세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흐흐… 어린 녀석이 제법이구나. 하지만 비록 우리들이 계략에서 는 패했지만, 너희들은 오늘 본좌 만독제군의 손 아래 한 명도 살 아남지 못할 것이다. 흐흐……!" 그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황보웅을 향해 가볍게 소맷자락을 펼 쳤다. "황보 군주, 피하시오." 위맹한 폭갈이 들리며 주걸신개가 황보웅을 젖히며 만독제군에게 맞서 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주걸신개와 만독제군은 서로 두 걸음을 뒤로 물러났을 뿐이 었다. 만독제군이 놀라운 눈으로 주걸신개를 바라보다가는 음산한 웃음 을 흘렸다. "크흐흐흐… 노거지가 왔으면 땡중과 말코도사도 왔겠구나. 흐흐 흐… 물론 모사꾼도 왔겠고." "아미타불… 시주는 그 나이에도 혈겁(血劫)을 일으키려 하다니 요?" "무량수불……!" 불호(佛號)와 도호(道號)가 들리며 혜불선승과 천기자가 앞으로 나섰다. "크하하핫… 이런 일은 분명히 모사꾼이 꾸몄을 터인데, 모사꾼은 왜 나오지 않느냐?" "아미타불… 시주, 천 시주는 이미 우화등선(羽化登仙)하시었소." "뭐라고? 땡중도 거짓말을 할 줄 아느냐?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을 누가 꾸몄단 말이냐?" "하하… 필 친구, 소생이 했소이다." 맑은 목소리가 들리며 학운기가 앞으로 나섰다. "친구? 크흐흐흐… 네가 바로 학운기라는 어린아이냐?" "하하… 소생이 바로 학운기외다. 한데 필 친구께서는 일진을 잘 못 택하신 것 같구려." "크하하핫… 그렇지. 일진을 잘못 택했어. 바로 어린 네녀석이 황 천으로 가는 일진을 말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음유(陰柔)한 장력을 펼치며 학운기에게 덮 쳐 왔다. 쾅－ 콰르릉－! 푸우욱－ 창－! 순식간에 무성전의 넓은 뜰이 혈투장(血鬪場)으로 변하고 말았다. 펑－ 쾅－ 창－ 창－! "으악!" "아악!" 이 때 먼저 들어왔던 흑의인들은 무림제일궁의 무인들에 의해서 전멸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학운기는 계속 주위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여유 있게 만독제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호운옥의 무공은 천괴 호강민의 진전을 모두 이어받은 듯 십대기 인 중의 일 인인 천살마제를 옴짝달싹 못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운기와 우내사존, 그리고 호운옥과 황보웅을 제외한 무 림제일궁의 무인들은 만독제군과 함께 온 무리들에 비해서 약간씩 약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쾅－ 콰르릉－! 창－ 창－! 황보웅은 패천마황 소무극과 가장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고, 혜불선승은 냉면노군과 두 명의 청의노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천기자는 무극존마 빙대황과 다른 두 명의 노인을 상대하고 있었 으며, 주걸신개는 수라절혼마와 금의를 입은 한 노인과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은 약간씩 유리한 듯하였으나 일이백 초 내에는 승부 를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쾅－ 콰르릉－! 창－ 창－! "으아아악……!" 학운기는 일이십 초 내에 만독제군을 제압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불리한 사람들을 도와 가면서, 그가 독을 펼치지 못하게 견제를 하였다. "으악!" 그러나 그가 가끔씩 날리는 지력들은 여지없이 악도(惡徒)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있었다. 만독제군은 학운기의 놀라운 무공에 감히 공격은 생각지도 못한 채 몸을 피하기에만 급급하였다. 쾅－ 콰르릉－! 창－ 창－! "으아악……!" 굉음과 폭음, 그리고 지옥에서 들려 오는 듯한 단말마들은 달도 없는 밤을 아수라(阿修羅)의 살육장(殺戮場)처럼 보이게 하였다. 학운기는 만독제군이 가끔 펼치는 독장(毒掌)들을 삼매진화(三昧 眞火)로써 해소하면서 혈투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순간, 그의 동공(瞳孔)에 한 흑의인과 한창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황보설에게 악독한 장력을 펼치며 덮쳐 가는 방양구의 모습 이 들어왔다. "핫－!" 그는 맑은 용소(龍嘯)를 터뜨리며 만독제군을 견제해 놓고는 방양 구에게 덮쳐 갔다. 그러나 방양구는 그 같은 그를 의식하지 못했는지 계속 황보설에 게 덮쳐 갔다. 그의 장심에서는 푸르스름한 기류(氣流)가 덮쳐 나오고 있었다. 펑－! 쾅－! "윽!" "억!" 뾰족하고 묵직한 두 마디의 비명을 토해 내면서 황보설과 방양구 가 피화살을 뿜으며 각기 삼 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학운기는 즉시 황보설에게 가려고 했으나 만독제군의 손이 품속으 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몸을 돌려 만독제군에게 일 지 (指)를 날렸다. 방양구가 황보설에게 덮쳐 가고, 학운기가 만독제군에게 일 초를 날리기까지는 눈 깜짝할 시간보다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학운기의 일 지는 만독제군의 사혈을 약간 벗어났으나 그의 견정 혈 부근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러나 만독제군은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어깨임에도 불구하고 품 속에 집어넣었던 손을 허공에다 확 뿌렸다. "피하시오!" 학운기는 위맹한 폭갈을 터트리며 만독제군에게 일 장을 날려 갔 다. 쾅－! "윽!" 묵직한 신음이 터지며 만독제군의 몸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흐흐… 꼬마야, 다음에 보자. 윽!" 그는 묵직한 신음과 함께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하면서 날아오른 몸 을 돌려 그대로 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와 함께 왔던 마도들도 그것을 보더니 꽁무니가 빠져라고 몸을 날렸다. 이 때 우내사존과 호운옥, 그리고 황보웅만이 서서 독을 몰아내려 는지 운기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픽픽 쓰러져 갔다. 쓰러진 자들의 미간(眉間)에서는 벌써 검은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그것을 본 학운기는 살기를 쏟아 내며 도망가는 마도들을 향해 십 여 지를 날렸다. "아으악……!" "켁!" 십여 마디의 단말마가 들리며 뒤처졌던 십여 명이 그대로 황천으 로 가 버렸다. 학운기는 황급히 품속에서 약병을 꺼내어 독과 싸우고 있는 우내 사존과 호운옥, 그리고 황보웅에게 한 알씩의 환약(丸藥)을 나누 어 주었다. 그가 만든 해약은 독문(毒門)의 해약이 아니라서 미리 먹어서는 효과가 없는 것이었다. 우내사존 등은 약을 받아 먹고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어서 학운기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무림오룡을 비롯한 무 림제일궁의 무인들에게 환약을 먹이고는 그들의 운기요상을 도와 주었다. 매우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그의 신형(身 形)은 매우 유연하면서도 빨랐다. 한 식경쯤 지나자 그는 중독된 사람들을 모두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력이 약한 몇 명은 대라신선일지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 이었다. 그는 새삼 절혼무형독의 악랄한 독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약간의 방심이 이러한 실수를 낳다니…….' 그는 손에 인정을 베풀려다가는 자신이 당한다는 무림의 철칙을 무시한 것이 한스러웠다. 이 때 우내사존은 깨어나서 중독(中毒)되지 않은 무림제일궁의 문 인들과 뒷처리를 하고 있었고, 호운옥은 학운기의 곁에 와 있었 다. 황보웅은 무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황보설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설아야!" 학운기도 그녀가 다쳤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즉시 그녀의 맥을 짚었다. 끊어질 듯 말 듯 아주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황보 궁주, 어서 안으로 옮기시오." "주상……." 황보웅은 그녀를 안아 들고 급히 내당으로 행했다. 학운기와 호운옥이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장내에는 처참히 죽어 나자빠진 흑의인들의 시체에서 나는 피비린 내만이 처참한 혈투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온 학운기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황보설은 조금만 더 지나면 대라신선이 온다 할지라도 살리지 못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자신은 여인의 살결을 만질 수 없으 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황보웅이 황보설을 내려다보더니 초조한 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상, 노복의 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상……." 그는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야 얻은 딸이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보 고는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였다. "음……!" 학운기는 마침내 한 가지 모험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황보 군주는 잠시 나가 계시오. 그리고 옥매는 나를 도와 주어야 겠소." "주상,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황보 군주와 나 사이에 어찌 은혜를 논할 수 있겠소? 그리고 나 로서도 지금은……." "주상, 그렇다면 설아의 상세는……." 학운기가 말을 잘랐다. "황보 낭자는 청강쇄맥장(靑 碎脈掌)에 적중되었소." "예? 그… 그럼 설아는……." "아직은 희망이 있으니 그만 나가 있으시오." "주상……." 황보웅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문을 잇지 못하고 밖으로 나 갔다. 학운기는 황보웅이 나가자, 다급한 표정으로 호운옥을 바라보았 다. "옥매, 어서 황보 낭자의 옷을 벗기고 침상에 반듯이 눕혀 놓으시 오." "기 오빠, 어떻게……." "시간이 촉박하니 나중에 말해 주겠소." 그는 다급히 한 마디 하고는 휘장을 내리고 침상 곁에서 물러났 다. 그의 코에는 은은한 소녀의 체취가 풍겨 왔다. 화려하면서도 속되지 않게 잘 꾸며진 규방(閨房)이었다. 바스락거리며 옷 벗기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지금 자신이 실행하려는 일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가 의심 쩍었다. 조금치의 실수가 있더라도 황보설뿐만이 아니라 시전하는 자신마 저도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강쇄맥장(靑 碎脈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신중해야 한단 말인가? 청강쇄맥장은 심맥(心脈)만을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장법이었다. 그것에 적중되면 한 시진을 넘기지 못하고 치료 방법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여자면 양기(陽氣)로, 남자면 음기(陰氣)로 끊어진 심맥을 이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즉 천지음양교합술(天地陰陽交合術)을 시전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것은 시전하는 사람이 최소한 사 갑자 이상의 공력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되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전하는 사람의 진기(眞氣)는 망망대해로 빠 지듯이, 심맥이 끊겨진 사람의 몸 속으로 스며들고 마는 것이다. 학운기가 자신이 시전할 방법을 다시 한 번 더듬고 있을 때, 호운 옥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 오빠, 설 언니의 옷은 모두 벗겼는데 그 다음은……." "수고했소. 옥매는 힘들겠지만 호신강기(護身 氣)로 방 안을 완 전히 봉쇄해 주시오. 나의 귀에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아야 하오." 호운옥은 그의 심각한 표정에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어요, 오빠." 그녀는 말을 마치자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학운기도 침상을 향하여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품속에서 금갑을 꺼냈다. 비록 그와 침상 사이에는 연분홍색 휘장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황보설의 나신(裸身)이 적나라하게 들어왔다. 얇은 휘장을 통해서 보는 여인의 나신은 더욱 유혹적이었다. 학운기는 심법(心法)을 운행시켜 마음을 진정시키며 금갑에서 금 침을 꺼내 들었다. 그의 손길이 가볍게 떨쳐지자 금침은 황보설의 주영혈(周榮穴)에 정확히 박혔다. 금침을 들은 떨리는 그의 손은 점점 빨라져 가더니, 나중에는 손 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금침들은 휘장을 뚫고 들어가서 정확히, 그것도 일정한 깊이로 그 녀의 혈도에 적중되었다. 흉향(胸鄕), 천지(天地), 좌의(左宜), 유부(兪府)…….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금빛 찬란한 고슴도치가 되어 버렸다. 격공금침술(隔空金針術)! 이것은 별로 놀라운 절기(絶技)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격공금침술을 휘장을 사이에 두고 일 장 반 정도의 거리에 서 시전한다는 것은 신의(神醫)라 할지라도 감히 흉내내지 못하는 절기였다. 학운기는 금침을 모두 시전하고 나자, 즉시 두 손을 앞으로 쭉 뻗 었다. 그의 얼굴에서도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순간 그의 장심(掌心)에서 불그스레한 기류가 뻗쳐 나오더니, 서 서히 황보설의 회음혈(會陰穴)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 기류는 그녀의 회음혈에 닿자마자 솜에 스며드는 물처럼 스며 들기 시작했다. 아, 전설상의 격체행공지법(隔體行功之法)이 아닌가? 하지만 학운기가 지금 펼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격체행공지법보다 몇 배나 오묘(奧妙)한 격공진기요상법 (隔空眞氣療像法)이었다. 이것을 펼칠 때 주위에서 조그마한 잡음이라도 들린다면 시전하는 자가 주화입마에 빠지는 위험한 것이었다. 학운기는 회음혈로 들어간 진기를 점차 위로 올렸다. 그의 막강한 양(陽)의 진기는 정두(亭頭), 태혁(太赫)을 지나더니 … 마침내는 유근(乳根) 유중(乳中)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매우 힘이 드는 듯 이마에서 땀이 샘솟듯이 솟아 나왔으나 그것은 이내 수증기로 변하여 방 안을 자욱하게 하였다. 명문혈(命門穴)이 아닌 최음혈로 진기를, 그것도 일 장 반이나 허 공을 격하고 주입시키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것으로 끊어진 심맥 을 잇는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의 옆에 앉아서 호신강기로 방 안을 봉쇄하고 있는 호운옥도 점 점 피곤한 빛을 띠어 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접하지 않으려는 그의 의 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힘든 것을 참고 있었다. 몇 시진이 흘렀는지 몰랐다. 동이 터 오는 듯 창 밖은 여명에 밝아지기 시작했다. 순간 황보설의 몸에 꽂혔던 금침들이 순식간에 빠지며 학운기가 가볍게 휘두르는 소맷자락에 의해 휘장을 뚫고 나와 빨리듯이 금 갑에 떨어졌다. "휴우!" 그의 입에서 긴 안도의 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호운옥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매우 기진맥진해 있는 것을 보 고는 즉시 전음을 보냈다. "옥매, 이제 끝났으니 운기행공을 하도록 하시오." "기 오빠……." "말하지 마시오. 탈진한 상태에서 말을 하는 것은 매우 해롭소." 그녀는 순진무구(純眞無垢)한 눈빛으로 그를 그윽히 바라보고 나 서는 그가 시키는 대로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그도 그녀가 운기행공을 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즉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황보설은 아직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한참 후 학운기가 먼저 눈을 떴다. 그는 아직도 운기행공을 계속하고 있는 호운옥을 바라보고는 고개 를 끄덕였다. '음, 옥매는 이미 삼화취정(三化聚頂)의 경지를 넘어서 오기조원 (五氣朝元)의 경지에 접어들고 있구나.'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무공은 도대체 얼마나 높단 말인 가? 이 때 호운옥의 주위에 퍼져 있던 은은한 기가 서서히 그녀의 몸 속으로 스며들더니 이내 눈을 번쩍 떴다. "기 오빠, 설 언니의 상세는 모두 치료되었나요?" "다행히 옥매 덕분에 무사히 치료할 수가 있었소." 호운옥이 막 뭐라고 하려 할 때. "앗!" 침상에서 황보설의 뾰족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학운기와 호운옥이 깜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황 급히 이불을 끌어다가는 자신의 알몸을 가렸다. "설 언니!" 호운옥이 반갑게 그녀를 부르며 침상으로 뛰어갔다. 학운기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기 오빠, 왜 나가세요?" 호운옥의 목소리는 어색해하는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될 만큼 순진 무구했다. 그의 발걸음이 자연히 멈춰졌다. 잠시 후 옷 입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는 그의 등 뒤로 가벼운 발자 국 소리가 들려 왔다. "학 상공,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녀는 아직 그녀의 아버지와 학운기의 관계를 알지 못하였다. 학운기가 몸을 돌렸다. "낭자, 은혜랄 게 뭐 있겠소? 나는 단지 알고 있는 의술을 시전했 을 따름이었소." "하오나, 학 상공……." 찰나 그들의 눈빛이 마주치면서 그들의 얼굴이 도화빛으로 물들었 다. 호운옥이 그러한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들 얼굴을 붉히죠?" 순간 그들의 얼굴은 더욱 새빨갛게 물들어졌다. "옥매……." "설 언니, 나는 기 오빠를 쳐다보아도 아무렇치 않은데 왜 언니는 얼굴이 붉어지는 거죠?" 학운기는 황보설이 있는 데서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자리에 더 있을 수도 없고 해서 황급히 밖으로 나와 버렸다. 밖에는 우내사존과 황보웅이 초조한 빛으로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 었다. 황보웅이 황급히 학운기에게 다가왔다. "주상,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행히 성공할 수 있었소." 황보웅이 그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학운기가 소맷자락을 가볍게 휘두르자 황보웅의 몸이 벌떡 일으켜 졌다. "황보 궁주, 어서 일어나시오. 궁주와 나 사이에 은혜를 운운한다 는 것이 나로서는 정말 섭섭하오." "궁주……."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시오." 황보웅은 존경이 가득 서린 눈초리로 그를 한 번 바라보고는 황보 설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방 안으로 사라지자 우내사존이 학운기의 곁으로 다가왔다. "주상,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랄 게 뭐 있겠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한데 어젯밤의 자세한 결과는 어떻소?" "예……." 새제갈이 그의 물음에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마도(魔徒)들은 거의 팔백여 명이 황천으로 갔고, 무림제일궁 측 에서는 단지 이십 명의 사망자와 삼십여 명의 중경상자를 냈을 뿐 이었다. 이것은 무림 역사상 그 유례(類例)를 찾아볼 수 없는 대승리였다. 그 날 이후로 무림제일궁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만 갔 고, 절대신룡(絶對神龍)이라는 외호와 함께 학운기의 명성도 강호 전역에 퍼졌다. 그 날 아침 식사는 승리를 자축(自祝)하는 연회를 겸해서 하였다. 학운기는 식사를 마친 다음 우내사존, 그리고 황보웅과 함께 다음 의 일을 한동안 숙의한 다음 자기 방으로 돌아와 쉬고 있었다. 호운옥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가 다음의 행동에 대해 한창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황보설의 음성이 들려 왔다. "학 상공, 안에 계세요?" "아, 황보 낭자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그가 문을 열어 주자 황보설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안으로 들어왔 다. 사실 그녀로서는 그를 찾아오는 것이 매우 망설여졌다. 그러나 그녀는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순결한 소녀로서 남자에게 알몸을 모두 내보였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친 것 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보는 학운기는 얼굴이 누리끼리하고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신비로운 빛을 띠고 있는 그의 눈빛은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에 충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높은 무공과 인품은 당대제일의 기인(奇人)인 우내사존조차도 존경하고 있지를 않은가? 학운기는 그녀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자 매우 거북스러웠으나 왠 지 모르게 그것이 싫지 않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 낭자, 우선 앉으시오." "고마워요, 학 상공." 그녀는 그를 찾아오기는 했지만 막상 그를 보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학운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낭자, 몸은 좀 어떻소?" "매우 좋아요. 오히려 예전보다도 공력이 증진된 느낌도 들고… …." "다행이구려." "학 상공,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아니오, 낭자.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그들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그녀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문을 열었다. "학 상공께서는 정혼자가 있으시나요?" 학운기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난 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만 있었다. "낭자, 소생은 낭자의 상세를 치료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 황보설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상공, 소녀는 철이 든 이후로는 부모님께조차도 보이지 않은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상공이 소녀를 취하지 않으신 다 해도 상공을 원망치는 않겠어요." 황보설, 그녀는 이제 부끄러움 따위는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았 다. 무림제일의 방파인 무림제일궁의 천금(千金)으로서 모든 사람의 부러움과 선망을 한몸에 받으며 자라 온 그녀의 자존심(自尊心)은 대단한 것이었다. "낭자……." "학 상공, 아무 말씀 마세요. 만약 학 상공께서 소녀를 위로하신 다면 소녀는 더욱 비참해질 뿐이에요." 그녀는 한 마디를 싸늘하게 내뱉고는 몸을 일으켰다. "낭자……." 학운기가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붙잡으려 할 때, 문 이 열리면서 호운옥이 들어왔다. "어! 설 언니, 여기 있었군요? 소매는 그것도 모르고 한참을 찾아 다녔어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방 안의 분위기가 매우 이상함을 느꼈는지 의 아한 표정으로 황보설과 학운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설 언니, 왜 그래요? 혹시 소매가 갑자기 들어와서 화가 났나요?" "아냐, 옥매! 나는 그만 가 봐야겠어." 황보설이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호운옥이 급히 붙잡았다. "설 언니, 가지 마세요. 소매는 기 오빠와 함께 있으면 매우 즐겁 던데, 언니는 그렇지 않아요?" 순간 황보설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학운기는 그녀의 떨리는 몸을 보고는 어떤 충격을 전해 받았다. 황보설은 지금 매우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자신이 이 자리에서 떠나면 그를 영원히 놓칠 것만 같았다. 어려서부터 성인(聖人)의 말씀을 배워 온 그녀로서는 이미 자신의 알몸을 보인 학운기 외에 다른 남자를 생각할 수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존심은 누구에게 머리를 숙이도록 허락하지 않았 다. 차라리 머리를 깎고 불문(佛門)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냐, 옥매. 나는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가 봐야겠어." 그녀는 한 마디를 내뱉고는 또 잡을세라 획 하니 밖으로 나가 버 렸다. 문을 나서는 그녀의 눈에서는 원망과 슬픔이 뒤엉킨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설 언니……." 호운옥이 그녀를 부르며 뒤따라 나가려 하자 학운기가 말렸다. "옥매, 그냥 놔 두시오." "기 오빠, 오빠는 왜 설 언니에게 그렇게 대하는 거예요? 서로 친 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소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옥매, 세상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 종종 있을 수 있는 것이 오." "왜 그렇죠?" "그것은……." 학운기는 그녀에게 남녀 사이의 세세한 감정에 대하여 자세히 설 명을 해 주었다. 그의 말을 모두 듣고 난 그녀가 특유의 순진무구(純眞無垢)한 눈 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설 언니가 불쌍하잖아요. 기 오빠, 우리 설 언니와 함 께 살아요. 네?" "옥매, 그럴 수는 없는 것이오." 학운기는 그것에 대하여 한참을 설명해 준 다음, 그녀에게 한 가 지 부탁을 했다. "그러니 옥매는 여기에 남아서 황보 낭자를 위로해 주도록 하시 오." 그토록 순진무구하기만 하던 그녀의 눈에 순간적으로 슬픈 빛이 서리는 것 같았다. "싫어요. 기 오빠가 없으면 소매는 잠을 잘 수가 없잖아요." "옥매, 옥매는 이제 어른이오. 어른이 됐으면 혼자서 잘 수 있어 야 하는 것이오. 그리고 옥매마저 이 곳을 떠나면 황보 낭자는 더 욱 슬퍼질 것이오." "싫어요, 싫어요." 학운기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만 가로젓는 그녀를 한 시진이 넘도 록 설득해서야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새제갈에게 제천대왕과 황보룡의 무공 수련을 살 펴보라고 하고는 무림제일궁을 떠났다. 그가 이토록 황급히 떠난 것은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은 자신이 혹 시나 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까 두려워서였다. 학운기는 무림의 동정을 살피면서 악양(岳陽)으로 가고 있었다. 사도(邪道)와 마도(魔道)의 무리들은 무림제일궁에서의 대참패에 커다란 충격을 입었는지 강호를 돌아다니는 자가 극히 드물었다. 학운기는 지금 평범한 서생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마도(邪魔道)들이 강호에 퍼져 있는 눈과 귀가 매우 넓고 밝다는 것을 깨닫고는 수시로 변장을 하여 자신을 숨기기로 결심 을 한 터였다. 그가 한창 사마도들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를 생각하면서 걷고 있을 때 그의 귀에 가느다란, 그러나 매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 왔다. "빨리 비키지 못해요?" 학운기는 그 소리를 듣자 누가 봉변을 당하나 싶어 숲 속으로 들 어가서는 즉시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한 오백여 장쯤 몸을 날렸을 때, 그의 눈에 십칠팔 세쯤 되 어 보이는 소녀가 두 명의 음탕하게 생긴 중년인과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학운기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동방림 낭자가 아닌가?' 그녀는 삼 년 전, 그가 강호에 처음 나와서 악양을 향해 갈 때 만 났던 중원선협 동방군의 손녀 동방림이었다. 삼 년 전에도 악양을 가다가 만났는데, 오늘도 악양을 가다가 만 났으니… 인연도 묘한 인연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몰라볼 정도의 한 여인으로서 성장을 했지만, 얼굴 모습은 그대로였다. 두 중년사내가 음탕(淫蕩)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흐흐… 요것아, 우리와 함께 가면 천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는데 왜 마다하는 것이냐?" 동방림이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정말 비키지 못해요! 내가 당신들이 무서워서 이러는 줄 아세요? 당신들은 더럽고 징그러워서 상대하기도 싫으니 어서 비켜요." "흐흐… 고것 참, 맛을 한 번 보면 죽자살자 하고 매달릴 것이 앙 칼지기는……." 이 때 학운기는 두 중년인이 강호의 음적(淫賊)임을 깨닫고는 그 들이 그녀에게 음약을 사용하기 전에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그들에 게 다가갔다. "하하… 낭자! 더러우면 치워 버려야지, 피하기만 하면 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겠소?" 동방림과 중년인들은 삼 장 밖에서 갑자기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오자 깜짝 놀라서 몸을 돌렸다. 중년인들은 그가 삼 장 밖까지 다가오도록 자신들이 몰랐다는 것 에 매우 높은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 고인(高人)인 줄로 알았는데, 의외로 닭 잡을 힘조차 없어 보이는 허약하게 생긴 서생이 서 있 자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너 따위 서생 녀석이 감히 어르신네들의 일에 참견을 해?" 오른쪽에 있던 세모꼴 눈을 가진 자가 그에게 대뜸 장력을 펼쳐 왔다. "앗!" 그것을 바라보던 동방림이 위맹한 장력을 펼치며 세모꼴 눈의 중 년인에게 덮쳐 왔다. 펑－ 펑－! 연속으로 두 번의 폭음이 들려 왔다. 하늘이 순식간에 풀과 먼지로 자욱하게 가려져 버렸다. 잠시 후 먼지가 모두 가라앉자, 장내의 정경이 환하게 드러났다. "앗!" "아니?" 뽀족하고 뭉툭한 두 마디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동방림은 자신의 장력이 빗나감을 느끼고는 죄없는 사람 하나 죽 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학운기가 빙그레 웃음을 띄우며 서 있 는 것이 아닌가? "당… 당신이 어떻게……." 학운기를 공격하던 중년인은 한쪽에 쓰러져서 마치 잠을 자듯이 평안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다른 중년인이 급히 그에게 달려가서 살펴보다가는 악독한 눈빛으 로 학운기를 쏘아보았다. "네놈은 무슨 사술(邪術)을 부렸느냐?" 학운기가 그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후후… 사술? 당신도 그것을 맛보시오." 순간 중년인의 등줄기에서는 공포의 전율과 함께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그는 학운기가 한 걸음씩 다가옴에 따라서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 고 있었다. 그는 허약한 서생이라고 우습게 보았던 학운기가 이제는 염라대왕 보다도 무서워 보였다. 찰나 학운기의 눈가에 살기가 비치는 듯싶으며 그의 소맷자락이 가볍게 떨쳐졌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년인은 마치 잠을 자듯이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는 동료와 함께 영원한 잠에 빠진 것이다. 동방림은 학운기의 믿기지 않는 무공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학운기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장력으로 구덩이를 파서는 두 중년 인의 시체를 흡인신공(吸引神功)으로 끌어다가 넣고 흙을 덮었다. 그가 모든 행동을 끝마칠 때까지 동방림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학운기가 그녀에게 산뜻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낭자, 이제 음적들은 갈 곳으로 갔으니 낭자도 갈 길을 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런 산길로 다니지 말고 행인들이 많 은 관도(官道)로 다니도록 하시오." 그는 그녀에게 한 마디 하고는 몸을 돌렸다. "잠깐, 거기 서요!" 동방림이 뾰족하게 외쳤다. "상공은 도대체 누구죠?" "하하… 오다가다 만난 사람의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려고 그러시 오? 부모님께 걱정 끼쳐 드리지 말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뭐라고요? 당신이 뭔데 감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예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몸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흥! 내가 뭐 그 음적들을 죽이지 못해서 그런 줄 아세요?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기 싫어서 그랬던 거지." "하하… 소생은 낭자가 그들보다 실력이 모자란다는 소리는 안 했 소. 단지 강호의 음적들은 간교(奸巧)한 술책을 자주 쓰기 때문에 낭자 같은 미녀는 조심해야 된다는 말을 하려다 그런 말이 나왔을 뿐이오." "흥! 말을 빙빙 돌리지 말아요. 상공이 좀 고강한 무공을 가졌다 고 보이는 것이 없나 본데, 본 낭자는 그런 시시한 무공 따위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아요." "하하… 그럼 됐소이다. 자, 소생은 갈 길이 바쁜 몸이니 낭자는 길을 좀 비켜 주시겠소?" "본 낭자는 아직 상공께 볼일이 끝나지 않았어요." 학운기는 요즘 들어와서 여자 다루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절실 히 느끼고 있었다. "소생에게 볼일이 있으면 빨리 보시오." "강호에서 상공 같은 무림고인이 있다는 소문은 못 들어 보았는 데, 상공은 도대체 누구예요?" "하하… 시시한 무공 따위를 펼치는 서생이 어떻게 무림고인이라 불리우며, 더구나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겠소?" 동방림의 양쪽 눈꼬리가 무섭게 치켜 올라갔다. "당신은 지금 본 낭자를 놀리려 하나 본데, 어디 맛 좀 보세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갑자기 현묘한 장법(掌法)을 펼치며 그에게 덮쳐 왔다. "하하…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어찌 난처한 일을 해결 해 준 소생에게 이러는 것이오?" 그의 신형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던 것 같은데, 동방림의 손 은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말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면서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덤벼 왔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번을 그렇게 허탕을 친 그녀는 마침내 장력까지 쏟아 내면서 그에게 덮쳐 왔다. 그녀의 장법과 장력은 중원선협 동방군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런지 매우 현묘하고 위맹했다. 그러나 학운기는 그녀의 장력을 마치 나비가 꽃밭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유연하면서도 적절하게 피해 냈다. 그녀의 장력(掌力)은 옆에 있는 애꿎은 나무들만 뚝뚝 부러뜨렸 다. 그녀는 학운기가 자신의 장력에 적중될 듯하면서 이십여 초가 지 나도록 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자, 마침내 울상을 지으며 손을 멈추고 말았다. "하하… 소생은 낭자의 현묘한 장법을 매우 유익하게 견식했소이 다. 자, 그럼 소생은 이만……." 그가 가볍게 포권의 예를 취하고는 막 떠나려 할 때. "흐흐흑……!" 동방림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학운기는 막 몸을 날리려다가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흐흐흑……!" 동방림은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슬프게도 흐느끼고 있었다. ====================================================== 第 2 章 애틋한 짝사랑 ====================================================== 그녀의 가느다랗게 떨리는 가녀린 어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 (憐憫)의 정을 불러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학운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낭자, 소생은 낭자를 놀리려는 것이 아니었소. 소생의 행동이 낭 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하리다." "흐흐흑……!" 그러나 동방림은 계속 흐느끼고만 있었다. "낭자……." 학운기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머뭇거리다가 그녀를 일으키려고 그 녀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어디다 손을 대는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뾰족하게 소리치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기 문(期門)과 장문혈(章門穴)을 동시에 눌러 버렸다. "앗!" 학운기는 흠칫 놀라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하나 그보다 더욱 놀라서 미처 탄성을 발하지도 못한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넋을 잃고 있는 동방림이었으니…….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세상에 마혈(麻穴)을, 그것도 한 군데도 아닌 두 군데를 짚이고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눈물이 흘러서 얼룩진 얼굴로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 그녀는 애처 롭게까지 보였다. "낭자, 이게 무슨 짓이오?" 학운기의 책망하는 듯한 소리에 그녀는 흠칫 놀라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당신은 도대체 사람이에요 귀신이에요?" 그녀의 눈은 아직도 놀라움으로 커다랗게 떠져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어린애처럼 귀엽기도 하고 우습게도 보였 다. "하하… 낭자, 소생은 분명히 사람이오." "그런데 어떻게 마혈을 짚이고도 움직일 수가 있어요?" "하하하… 그것은 한 가지 신묘(神妙)한 무공을 익힌 덕분일 뿐이 오." "무공? 아니, 할아버지께서도 모르시는 무공을 상공이 알고 있어 요?" "하하… 사람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한들 어찌 천하의 모든 무공 을 알 수 있겠소? 한데 낭자의 할아버지는 누구신데……?" "중원선협이란 분이에요." 학운기는 짐짓 놀라는 척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 동방(東方) 노협(老俠)의 손녀였구려?" "그래요." 그녀의 말투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한데 낭자는 어디를 가는데 혼자서 이 험한 강호에……." "악양에 누굴 좀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아, 그랬구려. 소생도 악양까지 가는데 함께 가시겠소?" 동방림이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관도를 나와 악양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가는 그들은 마치 연인(戀人)처럼 다정스럽게까지 보 였다. 그들이 악약성(岳陽城)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막 서산(西山)으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그녀는 악양루(岳陽樓)로 간다고 했다. 학운기도 별로 바쁜 일이 없었는지라 그녀에게 낮의 일을 사과(謝 過)도 할 겸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하기 위해서 함께 악양루로 갔 다. 역시 악양루에서 바라보는 동정호(洞庭湖)의 봄 경치는 그야말로 절경(絶景)이었다. 황혼으로 붉게 물든 동정호의 맑은 물은 선경(仙景)을 무색케 할 정도였다. 학운기와 동방림은 몇 가지 유식과 술 한 병을 시킨 다음, 동정호 의 절경을 구경했다. 그런데 창 밖을 바라보는 동방림의 시선은 왠지 멍하게 한 군데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먼 옛날 일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점원이 술과 음식을 들고 왔다. 동방림은 음식이 나왔어도 왠지 먹기가 싫은 듯 몇 번 집어먹다가 는 말았다. 학운기는 두어 잔의 술을 연거푸 마시고는 그녀에게 한 잔을 권하 였다. "자, 낭자도 한 잔 들겠소?" 동방림은 한동안 멍하니 술잔을 바라보다가는 빼앗듯이 집어 들었 다. "예, 소녀는 오늘 문득 취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녀는 갑자기 학운기의 손에 있던 술병을 빼앗아 들더니 연거푸 서너 잔을 마셨다. 학운기는 멍하니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방 낭자에게 무슨 근심이라도 있나?' 동방림은 상을 찡그리며 다시 몇 잔을 더 마시더니, 술잔을 탁자 에 놓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은 매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어떤 유혹까지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매우 외로워 보였다. "낭자, 혹시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아니예요, 상공. 상공과는 상관 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다시 창 밖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는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상공, 소녀가 옛날 얘기를 하나 해 드릴까요?" 학운기는 그녀가 갑자기 말문을 열자, 고개만을 끄덕였다. "옛날에 한 소녀가 살았어요. 그녀는 매우 당돌하고 버릇이 없는 소녀였지요. 한데 그녀는 어느 날 할아버지와 함께 강호에 나오게 되었어요. 그녀는 관도를 가다가 한 소년을 만났어요. 소년은 백 아(白兒)라고 부르는 고양이처럼 생긴 하얗고 귀여운 동물을 가지 고 있었어요."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는 학운기는 그녀가 자신과의 사이에서 일 어났던 일을 말하자 매우 놀랐다. 하지만 그는 밖으로 내색은 하지 않고 그녀의 얘기에 귀만 기울이 고 있었다. "소녀는 문득 그 백아라는 동물을 가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녀 는 그 백아를 하나의 야명주와 바꾸려 했어요. 그러나 소년이 그 것을 거절하자, 그녀는 억지를 써서 백아를 뺏으려 했어요. 한데 백아는 보통 동물이 아니라 벽안백표(碧眼白彪)라고 불리는 아주 희귀한 동물이었어요. 만약 그 때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소녀는 백아에 의해서 다치고 말았을 거예요." 학운기는 그녀가 백아에 대하여 얘기를 하자, 그 동안 백아에 대 하여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아, 백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동방림의 말은 계속되었다. "소녀는 그것을 인연으로 소년과 알게 되었어요. 그 때 소년이 무 공을 익히고 싶다 하기에, 소녀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한 분의 사 부를 소개시켜 주기로 했어요. 그 때 마침 소녀와 소녀의 할아버 지는 어떤 일을 보러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소년과 이 곳 악양루 에서 만나기로 하였어요. 한데 소녀와 소녀의 할아버지는 약속한 날부터 사흘 동안이나 소년을 기다렸으나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어 요. 그 때 소녀는 단지 섭섭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나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소녀의 뇌리에는 소년의 모습이 더욱 또렷이 떠 올랐어요. 그래서 소녀는 매해 그 때쯤 되면, 그 약속 장소에서 소년을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어요. 처음에는 열흘이던 것이 다음 해는 보름, 그 다음 해는 한 달, 그렇게 소녀는 갈수록 더욱 오래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어요."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던 학운기는 가슴에서 뭉클한 감정이 솟구 쳐 오면서 머리를 뭔가로 세게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낭자, 그 소년의 이름을 소생에게 말해 줄 수 있겠소?" 그의 목소리는 무엇 때문인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학운기라고 해요." "학운기요? 아니, 절대신룡 학운기 말이오?" 동방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예요. 그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일 뿐이에요. 할아버지의 말 씀으로는 그 소년이 강한 무공을 익힐 체질이 되지 못한다 했어 요." "혹시 기연(奇緣)을 얻어서 고강(高强)한 무공을 익힐 수도 있잖 소?" "아니예요.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모습은 소년과는 너무나도 달 라요." 학운기는 내가 바로 그 소년이오, 하고 몇 번이나 말하고 싶었으 나 꾹꾹 눌러 참았다. "낭자, 그 소년은 분명히 이 곳으로 찾아올 것이오." "상공께서 그것을 어떻게 아시죠?" 순간 학운기는 당황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 아니오. 낭자께서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소년은 절대로 약속 을 어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뿐이오. 그리고 그 때 그 소년은 신상의 일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오. 그 소년 은 꼭 낭자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오." "아니예요, 상공. 괜히 소녀를 위로하시려고 그런 말씀은 마세요. 그는 벌써 옛날에 소녀를 잊었을 거예요.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그를 잊을 날이 있겠지요."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의 그녀와는 아주 다른 애처로운 모습 이었다. 학운기는 그녀와 더 이상 있다가는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 뿐만 아 니라, 정의 소용돌이에 깊이 휘말려서 대의(大義)를 그르칠 것만 같아 황급히 일어섰다. "낭자, 소생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이제 그만 가 봐야겠소." 동방림은 그의 돌연한 태도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 와는 별 상관도 없는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학운기는 가볍게 포권의 예를 취해 보이고는 황급히 악양루를 떠 나갔다. 그가 악양루를 떠나는 순간, 동방림의 뇌리에 급히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의 눈… 맞아, 바로 신비스러운 그 소년의 눈이야.' 그녀는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는 밖으로 나갔다. "상공! 상공!" 그러나 그는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길 가는 행인을 붙잡고 몇 마디 물어 보고는 시가(市街)임 에도 불구하고 한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행인들은 갑자기 사람이 공중으로 날아가자 모두들 놀라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동방 낭자, 미안하오. 하지만 그 소년은 언젠가 낭자 앞에 꼭 나 타날 것이오. 꼭…….' 이윽고 그도 행인들에게 휩쓸려서는 어디론가로 떠나갔다. 학운기는 장사(長沙)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몸은 빛살보다도 빠른 속도로 마치 붕(鵬)새처럼 땅 한 번 짚지 않고 날아가고 있었다. 만약 무림고인(武林高人)이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보았다면 까무러 칠 듯이 놀랐을 것이다.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보다도 한 단계 위인 이기어풍술(以氣馭風 術)이란 경공술이었다. 그는 지금 경혼방(驚魂幇)을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악양루에서 동방림과 헤어지고 무림의 동태에 대하여 알아보 려고 개방의 악양분타에 들렸을 때, 그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 어젯밤에 경혼방으로부터 무림제일궁에 서찰(書札)이 한 장 날아 들었는데, 거기에는 애옥지를 살리고 싶으면 학운기에게 단신으로 사흘 이내에 경혼방으로 오라는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찰에는 만약 동조자를 데리고 오거나, 날짜를 어기면 애 옥지의 목숨은 그 순간 끝이라는 협박의 문구(文句)도 적혀 있었 다. 악양의 개방분타주는 학운기에게 우내사존이 무림제일궁에서 초조 히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했지만, 학운기는 자신의 일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가 싫어서 그대로 경혼방으로 몸을 날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마음은 지금 그들의 치사한 간교(奸巧)에 분노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은연중에 최상의 공력을 끌어올려 몸을 날리고 있었 다. 악양(岳陽)에서 장사(長沙)까지는 사백 리(里)가 넘는 거리였다. 경공이 뛰어난 일류고수라 할지라도 두 시진은 걸리는 거리였지만 학운기는 채 반 시진도 못 되어 도착하였다. 그는 절대로 우둔한 인물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경혼방을 통째로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그 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차분히 굴렸다. 높은 고목에서 바라보는 경혼방은 으시시한 느낌마저 풍겨 주고 있었다. 그는 잠자듯이 조용한 경혼방에서 진한 살기(殺氣)가 풍겨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음, 매우 삼엄한 경비로구나. 그렇다면… 후후……!' 그의 입가에는 고혹적으로까지 보이는 살소(殺笑)가 번지고 있었 다. 그는 고목에서 내려와서는 여유 있는 걸음으로 경혼방의 정문으로 걸어갔다. 그가 커다란 방문(幇門)의 십여 장 앞까지 걸어갔을 때, 위맹한 폭갈이 들려 왔다. "책벌레 녀석이 뒈질려고 이 곳에 왔느냐?" 말과 동시에 거구의 장한이 그를 한 주먹에 박살이라도 내버릴 듯 이 덮쳐 왔다. "윽!" 장한은 묵직한 신음을 토하더니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후후… 어서 일어나 방주에게 안내하시오. 본인(本人)은 학운기 요." "뭐… 뭐라고? 당신이 정말 절대신룡 학운기란 말이오?" 장한은 벌떡 일어서더니 두려운 표정으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떨리 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후후… 그렇소. 귀빈이 오셨는데 방문(幇門)을 활짝 열고 맞지 않고 뭐하는 게요?" "예… 예, 소인이 곧 방주님께 아뢰겠습니다." 장한은 절대신룡이라는 위명(威名)에 완전히 얼어 버린 것 같았 다. 이 때 방 내에서 호탕스러운 웃음이 들려 왔다. "하하… 이거 절대신룡 학 소협께서 이렇게 일찍 올 줄 모르고 본 좌가 실례했소이다." 방문(幇門)이 열리더니 짐짓 호탕스럽게 웃고 있는 패천마황 소무 극이 나타났다. 그의 옆에 수라절혼마 엄능야와 염소 수염을 기른 육십여 세 정도 의 노인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오, 소 방주." 학운기는 소무극에게 건성으로 한 마디 하고는 염소 수염의 노인 을 살기 띤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신이 마심뇌사 가계지요?" 염소 수염의 노인은 그의 살기 띤 눈초리와 음성에 흠칫 놀라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순간적인 일인지라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 "후후… 이것은 분명히 당신의 걸작이겠지요?" "그렇다." 마심뇌사는 짧게 한 마디씩만 던질 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이 때 소무극이 호탕스런 웃음을 흘리며 끼여들었다. "하하… 학 소협,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합 시다." "후후… 좋소. 칼자루는 당신들이 쥐고 있으니, 당신들의 말에 따 르도록 하겠소." 그는 고소를 흘리면서 성큼성큼 방문(幇門) 안으로 걸어 들어갔 다. 그러한 그의 뒷모습을 가계지가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흐흐… 이제 네녀석도 오늘로서 끝이다. 흐흐……!' 소무극은 학운기를 커다란 대청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학운기는 가계지 등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자, 어서 애 낭자를 데리고 오도록 하시오." 소무극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학 소협, 뭐 그리 급히 서두를 게 있소? 우리 차나 한 잔 씩 들면서 천천히 얘기하도록 합시다." 그가 안쪽을 향해 손뼉을 두어 번 치자 시비가 차를 들고 나왔다. "자… 학 소협, 어서 드시오. 독 같은 것은 넣지 않았으니 말이 오." 소무극은 한 마디 하고는 증명이라도 하듯이 잔을 들어 마셨다. "후후… 본인도 당신들이 그토록 졸렬한 장난이나 하는 졸장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소." 뼈가 있는 말이었다. 순간 가계지의 한쪽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흐흐… 어린애가 호랑이 굴에 들어와서도 제법 당당하구나." "호랑이 굴? 고양이 굴이겠지요?" "흐흐… 그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가계지는 한 마디 하더니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가져오너라!"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한 명의 시비가 쟁반에다 네 개의 커다란 사발을 들고 와서는 학운기의 앞에다 내려놓았다. "후후… 본인더러 이걸 마시라는 것이오?" "그렇다." "애 낭자는?" "흐흐… 걱정하지 마라." 가계지의 입이 달싹거리자 안에서 애옥지가 걸어 나왔다. 그녀의 뒤에는 흑살마장 양채가 그녀의 천령개에다 손을 얹고 따 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학운기를 보더니 흠칫 놀라는 듯하다가 이내 싸늘한 표정 으로 돌아왔다. 이 때 학운기는 본래의 모습이었다. 그는 애옥지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며 가슴 속 밑바닥에서 뭔가 형 용할 수 없는 것이 거세게 치밀어올랐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는 한 개의 사발을 집어들었다. 순간, 애옥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안 돼요!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잊은 지가 오래예요. 당신을 사 랑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옥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오. 나는 옥지를 사랑 하오. 그래서 옥지를 보호할 책임이 나에게는 있는 것이오." 그는 말을 하고는 한 사발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앗! 마시면 안 돼요. 나는 지금 보호 받을 상태가 아니란 말이에 요." 그녀는 처절한 절규를 계속 토해 냈다. 그러나 학운기는 그러한 자신을 의미 있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바라보는 가계지 등에게 비웃음을 보내며 나머지 사발의 것도 모 두 마셔 버렸다. "후후… 이제 애 낭자를 본인에게 보내시오." 가계지가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양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 녀를 학운기에게로 거세게 밀어 버렸다. 애옥지는 급기야 그의 품에서 참고 참았던 오열(嗚咽)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흐흑… 기랑! 기랑은 그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마셨어요? 흐흐 흑……!" 학운기가 그러한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옥지, 다 알고 있소. 하지만 그것들이 날 어쩌지는 못할 것이 오." 그는 말을 하면서 가계지 등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이미 그들 사이는 한 자가 넘는 수정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후후후… 당신들은 이 따위 무형산공분(無形散功粉)과 절혼무형 독(絶魂無形毒), 그리고 쇄맥절혼독(碎脈切魂毒)과 음양섭혼액(陰 陽攝魂液)으로 본인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수정벽에는 가느다란 몇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말은 주고받을 수 있었다. 가계지 등은 네 사발의 독을 마시고도 아직도 태연한 태도를 보이 는 그를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놀라움은 두려움과 공포, 그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운기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공력이 서서히 사라져 간다는 것을 말이다. 무형산공분과 절혼무형독, 그리고 쇄맥절혼독과 음양섭혹액. 그 중의 세 가지라면… 이미 만독불침과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 身)을 이룩한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나 네 가지의 독이 합쳐져서 내는 효력은 금강불괴지신이 아니 라, 대라신선이라도 어쩔 수 없이 한 줌의 액체로 화해 버리고 마 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체내로 들어가서는 즉시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에 공 력을 한 곳에 모아 둘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애옥지는 그의 품에서 계속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흐흐흑… 기랑! 무엇 때문에 마두(魔頭)들에게 짓밟힐 대로 짓밟 힌 이 천한 계집을 왜 그토록 마음에 두는 것인가요? 흐흐흐흑… …!" "옥지, 사랑은 육체(肉體)가 중요한 것이 아니오. 나는 옥지의 육 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靈魂)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오."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힘이 있고 잔잔했다. 수정벽 밖에서 두려움과 음흉함이 뒤범벅된 표정으로 그의 상태를 지켜 보던 가계지 등은 그러한 그를 보고는 멍하니 넋을 잃고 있 었다. 가계지는 그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수정벽 가까이로 다가왔다. "흐흐… 그럼 그렇지. 대라신선일지라도 별수 없는 독인데, 네녀 석이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지." 순간 학운기의 손이 번뜩 움직였다. "앗!" 가계지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오른쪽 뺨에는 붉은 혈선(血腺)이 그어져 있었고, 오른쪽 귀 는 싹뚝 잘려져 나가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계지는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멍하니 넋을 잃고 있을 뿐 지혈(止 血)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학운기는 한 가닥 남은 진력으로 조그만 구멍을 통하여 지력(指 力)을 날리고 나자 정신이 아득해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다물며 꿋꿋하게 앉아 있었다. 가계지가 다시 제정신이 들었는지 음흉한 웃음을 흘려 냈다. "흐흐… 본좌는 네놈의 놀라운 공력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하 지만 네녀석도 사흘만 지나 보아라." 그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면서 벽 한쪽을 눌렀다. 기관(機關)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학운기는 몸이 깊은 곳으 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 가닥 남은 진기로써 애옥지를 안고 몸을 조절하면서 생각 을 굴렸다. '사흘… 충분하다. 후후… 가계지, 너는 또 하나의 실수를 저질렀 다.' 애옥지는 울음을 그치고는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몸을 꼭 껴안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거의 삼십여 장이나 내려가서야 바닥에 닿았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함정이었다. 학운기는 바닥에 닿자 애옥지를 내려놓고는 품속에서 급히 금갑과 묵룡검을 꺼내 들었다. "옥지,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는 지금부터 독을 몰아 내야 하니까, 옥지는 구석에서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치고 가만 히 누워 있으시오. 절대로 내 몸을 건드리거나, 나의 근처에 와서 도 안 되는 것이오." 애옥지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자, 시간이 없소. 빨리……." 애옥지는 그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는 급히 한쪽 구석으로 가서 귀 식대법을 펼쳤다. 학운기는 만약을 위해서 그녀의 몇 군데 혈도를 더 점해 놓았다. 그런 다음 그는 반대편 구석으로 와서 황급히 옷을 벗었다. 이 때 그의 몸은 간간이 떨리고 있었다. 곧 그의 여인보다도 현란한 나신(裸身)이 드러났다. 그는 옷을 벗자마자 금침을 꺼내어 그의 온몸의 혈도에 꽂아 가기 시작하였다. 금침들은 끝이 보이지도 않게 깊숙이 박혀 갔다. 그는 금침을 모두 찌르고 나자 묵룡검을 검집에서 빼냈다. 이 때 그의 전신은 점점 심하게 떨려 가고 있었다. 그는 꺼내 든 묵룡검으로 돌연 자신의 단전혈(丹田血)을 깊숙이 찔러 갔다. 묵룡검은 검자루만 남기고는 깊숙이 박혀 버렸다. 털썩－! 마침내 그의 몸은 땅바닥에 눕혀지고 말았다. 아, 지금 그는 자살을 하려는 것인가? 그의 맥박은 이내 끊겨 버렸고, 체온마저도 싸늘하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함정 속에서는 두 명의 남녀만이 양쪽 구석에 누워 있을 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숨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호흡과 맥박이 끊기고 체온마저 싸늘하게 식어서 죽은 것만 같던 학운기의 몸에서 기이(奇異)한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의 머리가 풀어 헤쳐지면서 칼날처럼 빳빳하게 서기 시 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맥박은 뛰지 않고 있었다. 체온도 싸늘한 그대로였다. 그러한 그의 형상은 흉칙하게 생긴 지옥의 나찰보다도 더 무서워 보였다. 만약 이 때 담 약한 사람이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본다면, 그대로 황천으로 직행해 버렸을 것이다. 칼날보다도 빳빳하게 섰던 그의 머리칼이 돌연 불타는 것처럼 붉 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쉬이익－!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면서 머리카락이 뽑혀져서는 모두 벽에 박 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순식간에 대머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의 가슴이 미미한 기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기복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는 정상적인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의 맥박과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라신선도 살아날 수 없다는 네 가지 독을 한 사발씩이나 마시고도 드디어 살아난 것이었다. 묵룡검(墨龍劍). 그것은 바로 묵룡검의 신효(神效) 덕분이었다. 그는 원래 묵룡검의 효능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단지 그것이 천고(千古)에 둘도 없는 신검(神劍)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무공을 모두 익히고 강호에 나왔을 때, 한 고서점(古 書店) 앞을 지나게 되었다. 책이라면 밥 먹는 것도 잊는 그인지라, 혹시나 보지 않은 책이 있 나 하고 들어갔다가 병기보(兵器譜)라는 책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고대(古代)로부터 내려오는 신병기들에 대해 자세히 적 혀 있었는데, 묵룡검에 대해서도 나와 있었다. 묵룡검에는 특이한 효능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떠한 독(毒)이라도 해독(解毒)할 수 있는 능력이 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난점이 있었다. 묵룡검으로 독을 제거하려면 자신의 혈도를 모두 막은 후, 그것을 단전에다 깊숙이 박아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자살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강불괴지신을 이룬 사람은 그것이 가능했다. 금강불괴지신을 이룬 사람은 독에 중독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 에 무림고인들이라 할지라도 묵룡검의 특이한 신효에 대해서는 잊 어 왔던 것이다. 학운기도 묵룡검의 그러한 신효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 았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 그의 목숨을 구할 줄이야? 그는 공력이 모두 상실된 터라 진기로써 혈도를 폐쇄할 수가 없었 다. 그래서 금침으로 혈도를 봉쇄한 것이었다. 하여튼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그는 얼마쯤 지나자 눈을 떴다. 그는 즉시 몸을 일으키고는 단전에 깊숙이 박힌 묵룡검을 빼냈다. 순간 그의 단전에서는 악취가 진동하는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그의 단전에서 흘러 나오는 검은 피도 서서히 멈춰 가고 상처도 이내 아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내력이 충만됨을 느끼며 눈을 번쩍 떴다. "됐다. 후후… 마심뇌사! 잠시만 기다려라." 그는 한 소리 중얼거리더니 옷을 주워 입었다. 애옥지는 아직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려다가 문득 머리가 허전함을 느끼며 손으로 만져 보았다. "앗!" 그는 놀라움의 탄성을 토하며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동공으로 한쪽 벽에 깊숙이 박혀 있는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아, 독성을 이기지 못하고 빠져 버린 것 같구나. 그런데 어떻게 청강석에 박혔지?' 그는 즉시 머리카락을 뽑아 들었다. 강철보다도 단단했다. '음, 독들이 모두 이것에 스며든 것 같구나. 그렇다면… 후후… …!' 그는 입가에 고소를 흘리면서 그것들을 소중히 싸서는 품속에 갈 무리했다. 그런 다음 그는 애옥지에게 점했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기랑! 살아나셨군요. 기랑……." 그녀는 그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품에 꼭 안겨 왔다. 뜨거운 체온이 사랑의 감정으로 변하여 그들 사이에 흘렀다. ====================================================== 第 3 章 비련(悲戀)의 여인 ====================================================== 학운기의 두툼한 입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앵두처럼 빨갛고 도툼 한 입술을 덮었다. 순간 학운기의 단전에서는 색단에 의한 양력(陽力)이 무섭게 솟구 쳐 올라왔다. 그가 흠칫 놀라서 그녀를 밀어 냈을 때는 이미 뜨거운 열기가 그 의 전신을 감싼 후였다. 애옥지는 그가 갑자기 자신을 밀어 내자 흠칫 놀라며 서글픈 생각 이 들었으나, 그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앗! 기랑! 어떻게 된 일이에요?" "으으……!" 그러나 학운기는 괴로운 신음만을 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미혼약에 중독된 사람과 흡사했다. '저이는 미혼약에… 아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 보면 혹시 여 독 때문에…….' 그녀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저러다가 저이가 죽으면… 안 돼.'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학운기가 그녀의 몸을 덥썩 껴안아 버렸다. "헉헉……!" 그의 입에서는 거친 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이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헉헉……!" "기랑, 이러시면 안… 흡!" 그녀는 그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으나 그의 억센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술은 이미 그의 입술에 덮여서 숨을 쉬기조차 곤란했다. "으으음……!" "흐읍!" 고혹적인 신음이 사방이 꽉 막힌 조그만 함정 안을 가볍게 울렸 다. 학운기의 손은 거침없이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의 풍만하고도 부드러운 젖가슴이 손에 짜릿한 전율을 전해 주고 있었다. 그녀의 두 육봉은 탄탄해져 가고 있었다. "기랑! 이러… 으흡!" 풀렸던 그녀의 입술은 다시 막혀 버렸고, 학운기의 손은 그녀의 깊숙한 곳까지 더듬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했으나 쉽게 되지가 않았다. 애옥지는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못 보겠는지 그의 손을 도와 주었다. 곧 그녀의 현란하면서도 풍만한 나신이 드러났다. 학운기는 그녀의 알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자신의 몸에 걸쳐 진 것들도 훨훨 벗어 버리고 말았다. "헉헉……!"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급히 그녀의 몸을 껴안고는 바닥으로 굴렀다. 애옥지는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몸이었지만 이미 더럽혀진 자신의 몸을 맡긴다는 것이 그녀를 더욱 슬프게 했던 것이다. "헉헉……!" 학운기의 손과 입은 혼연일체가 되어서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집 요하게 애무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도 서서히, 그러나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고혹적인 비음(鼻音)과 거친 숨소리가 조화를 이루어 춘풍(春風) 이 되더니, 이내 그것은 사지(死地)의 조그만 함정 안에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녀의 백옥(白玉)보다도 하얗고, 솜보다도 부드러운 긴 팔이 어 느 새 그의 목을 죽으라고 껴안고 있었다. 학운기는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최종(最終) 단계에 돌입했다. "으헉!" 숨막히는 듯한 교성(嬌聲)이 함정을 진동시켰다. 비명과 신음, 그리고 거친 숨소리와 교성이 요란스럽게 들리기 시 작하였다. 그들은 구름을 밟는 듯한 쾌감을 만끽하면서 무아지경에서 헤메이 고 있었다. 애옥지의 가녀린 몸은 뱀처럼 그의 몸을 계속 조여 왔다. 애옥지 그녀는 마침내 절정의 오열을 터뜨렸다. "흐흐흑… 흐으흑……!" 만약 모르는 사람이 그녀의 오열만을 듣는다면 그 구슬픈 소리에 상심을 했을 것이다. "헉헉……!" 하지만 거기에는 거친 숨소리도 함께 뒤엉켜 있었다. 들으면 낯 뜨거워질 신음과 교성은 끊어질 줄을 모르고 계속 들려 왔다. 거의 한 시진이 흘렀다. 마침내 그들은 절정(絶頂)에 이른 듯 더욱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애옥지의 온몸은 흥분의 잔잔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헉!" "으헉!" 두 마디의 김 빠지는 듯한 다급한 신음이 들리며 둘은 거센 진저 리를 쳤다. 이 때 갑자기 함정의 한쪽 벽면이 미끄러지듯이 열렸다. "앗!" "엇!" 두 마디의 각기 다른 경악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학운기는 갑자기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자 흠칫 놀라면서 몸을 일 으켰다. 이 때는 열렸던 벽면이 다시 닫히려는 순간이었다. "얏－!" 그는 용소를 발하며 막 도망가려던 두 명의 흑의인에게 위맹한 장 력을 펼쳤다. "아악!" "으악!" 두 마디의 처절한 단말마가 들리면서 흑의인들은 골통이 부서져 황천으로 가 버렸다. "앗!" "엇!" 다시 몇 마디 놀라움의 탄성이 들림과 동시에 열렸던 벽은 한 치 의 틈도 없이 닫혀 버리고 말았다. 학운기는 벽을 부수고 뛰쳐나가려다가 자신이 알몸인 것을 깨닫고 는 황급히 흩어진 옷을 주워 입었다. 애옥지도 뒤로 몸을 돌리고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이 때 그녀의 마음은 무어라 형용할 수조차도 없을 정도였다. 학운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옥지, 시간이 없으니 어서 빠져 나갑시다. 놈들이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 무슨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오." "기랑……." "자세한 얘기는 나가서 합시다." 그는 말을 하면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더니 몸을 솟구쳤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묵룡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의 몸이 천장의 일 장쯤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묵룡검을 잡은 그의 손이 떨쳐졌다. 차창－ 챙－! 날카로운 쇠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위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쳐라!" 쉬이익－ 피이융－! 폭갈과 동시에 암기와 화살이 날으는 소리가 들렸다. 학운기는 즉시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했다. 퍽－ 퍽－! 툭－ 툭－! 날아오던 암기와 화살들은 모두 그의 호신강기에 퉁겨져서 바닥으 로 떨어지고 말았다. 밖에서는 흑살마장 양채가 약 백여 명의 황의인들을 지휘하고 있 었다. 학운기의 입가로 잔인한 살소(殺笑)가 떠올랐다. "참마(斬魔)－!" 그의 입에서 위맹한 폭갈이 터짐과 동시 묵룡검이 손을 떠나갔다. "아악!" "으악!" "윽!" 거의 백여 마디의 처절한 단말마가 들려 오며 또다시 활과 암기를 날리려던 황의인들이 모두 두 동강나고 말았다. 날렸던 묵룡검은 어느 새 그의 손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을 펼친 것이다. 황의인들은 모두 저 세상으로 가 버렸고, 흑살마장 양채만이 한 팔이 잘린 채 지혈도 하지 않고 멍하니 학운기만을 바라보고 있었 다. "후후… 당신도 수하들의 뒤를 따라가시오." 학운기가 고소를 흘리며 가볍게 일 지(指)를 날리자, 그는 비명도 채 못 지르고 풀썩 고꾸라져 버렸다. 학운기는 즉시 대청 밖으로 나갔다. "앗!" 그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경혼방의 그 많은 건물 중에서 제대로 서 있는 것은 얼마 안 되었 다. 한 마디로 위세 당당했던 경혼방의 모습은 사라지고, 전마(戰魔) 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는 의아히 생각하면서 경혼방 내를 둘러보았지만 무공이 고강해 보이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가계지와 소무극 등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즉시 하인 차림을 한 장한을 불렀다. "여기는 언제 이렇게 되었느냐?" "이… 이틀 전에……." "이틀 전? 그럼 방주는 어디로 갔느냐?" "소… 소인은 모릅니다." "이 곳을 침입해 온 사람들은 누구냐?" "저… 정파의 인물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정파?" "예, 예. 소… 소인은… 단지……." "알았으니 그만 가 보아라." 장한은 그의 살기가 쏟아지는 눈을 보고 겁에 질렸다가는 가라는 소리에 꽁무니가 빠져라고 도망가 버렸다. '음, 정파라면 혹시 천 노야 등이…….' 애옥지는 이 때까지 그의 품속에다 얼굴을 꼭 파묻고 있다가는 그 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고개를 쳐들었다. "기랑… 앗! 기랑의 머리……." 학운기는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그녀의 놀라는 음성을 듣고는 흠 칫하며 그녀를 내려놓았다. "아, 옥지. 아마 독을 몰아낼 때 빠진 모양이오. 한데 옥지는 이 곳에 비밀 석실 같은 것이 있는 것을 알고 있소?" "예." "그럼 어서 가 봅시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서 몇 군데의 지하 석실을 뒤져 보았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음, 천 노야 등을 만나 봐야 알 수 있겠구나.' 그는 한참을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문득 옆이 허전함을 느끼고는 옆을 돌아다보았다. "앗! 옥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던 애옥지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옥지! 어디 있소? 옥지!"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가서는 사방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애옥지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경혼방에는 이제 하인들마저도 사라져 버려서 누구를 붙잡고 물어 볼 사람도 없었다. "옥지!" 애타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만이 다시 메아리쳐 올 뿐이었다. 한참을 애타게 부르며 헤매던 그는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하자 허탈 상태에 빠져들었다. "옥지, 당신은 또 어딜 갔단 말이오? 당신은 내 마음을 이토록 몰 라준단 말이오." 그는 멍하니 넋을 잃고 서서는 한참을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이 때 하늘이 갑자기 먹장구름으로 뒤덮이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후두둑－! 빗방울들은 이내 폭우로 변하여 마치 강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쏟 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학운기는 그 때까지도 비를 피할 생각을 않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옥지, 어딜 갔단 말이오? 옥지……." 그의 몸은 이내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흠뻑 젖어 버렸다. "옥지, 나는 반드시 당신을 찾아 내고 말겠소. 반드시……." 석상처럼 굳어져서 움직여지지 않을 것 같던 그의 몸이 서서히 빗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의 몸이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 허물어진 대 전에서 하나의 왜소한 인영이 나타났다. 애옥지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슬픈 눈물이 폭우보다도 더욱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기랑, 사랑해요. 하지만 천한 계집은 기랑을 모실 수가 없어요. 영원히… 영원히 말이에요." 이윽고 한참을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그녀도 휘청거리는 몸 을 이끌며 폭우 속으로 사라져 갔다. 비련(悲戀)의 여인, 그녀는 또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르릉－ 쾅－! 쏴아……! 하늘에서는 그녀의 비통한 심정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천둥과 번개 마저 치면서 억수 같은 폭우를 쏟아 붓고 있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경혼방을 떠난 학운기는 쏟아지는 폭우를 그대로 맞으면서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애련한 애옥지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점차 사도(邪徒)와 마도 (魔徒)에 대한 살심(殺心)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죽인다…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겠다. 세상에 악(惡)의 씨를 뿌 리는 놈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에는 음산한 귀기(鬼氣)가 서려 있었다. 이 때 어디선가 뾰족한 비명이 들려 왔다. "아악! 안 돼요." 학운기의 몸은 이미 그쪽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시야로 한 채의 아담한 모옥이 들어왔다. "아악! 안… 흡!" "흐흐… 요것아, 잠시만 기다려라. 곧 천상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 줄 테니… 흐흐……!" 학운기는 사태를 짐작하고는 문을 박차며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 안에는 다섯 명의 장한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상에는 삼십여 세의 풍만한 몸을 가진 미부(美婦)가 알몸으로 육중한 사내의 몸에 깔려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방 안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쪽 구석에 널려 있는 두 구의 크고 작은 처참한 시체에 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장한들은 갑자기 문이 열리자 흠칫 놀라면서 뒤돌아보다가는 허약 하게 생긴 대머리 미소년임을 알고는 다짜고짜 그에게 장력을 펼 쳐 왔다. "흐흐… 중놈도 색(色)을 밝히려고 들어왔느냐?" 펑－! 그의 장력은 여지없이 학운기의 몸에 적중되었다. "윽!" 그러나 비명을 토하며 물러선 자는 오히려 장력을 날린 장한이었 다. 침상의 사내는 그런 것과는 상관 없다는 듯이 계속 여인만을 짓누 르고 있었다. 학운기는 방 안의 처참한 두 구의 시체와 장한들의 인면수심(人面 獸心)보다도 더한 행동을 보고는 치를 떨고 있다가 장한에게 일 장을 얻어맞고는 살소(殺笑)를 흘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흐흐흐… 네놈들이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사람의 탈을 쓰고 있느 냐?" 장한들은 그가 장력을 정통으로 맞고도 꿈쩍도 안 하고 오히려 장 력을 날린 동료가 비명을 토하며 물러서자, 어리둥절해 있다가는 그의 살소를 보고는 흠칫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흐흐……!" 학운기는 계속 괴소(怪笑)를 흘리며 다가가다가 돌연 손을 몇 번 휘둘렀다. "아악!" "으악!" 다섯 마디의 각기 다른 비명이 들리며 장한들은 얼굴을 감싸쥐고 는 방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그들의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어서 형태를 알아볼 수조차도 없었 다. "흐흐… 네놈들은 사람도 아니야." 이 때 침상에서 여인을 짓누르고 있던 사내가 비명 소리가 많은 것이 이상했던지, 고개를 돌리다가 사태를 알아채고 벌떡 몸을 일 으켰다. 학운기는 그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앗! 네놈은 격상우! 흐흐… 가련해서 목숨만은 살려 주었더니 또 다시 이런 하늘이 공노할 짓을 벌이다니……." 격상우는 잔뜩 공포의 빛에 휩싸였다. "다… 당신은 누구요?" "흐흐… 저승에 가면 알려 줄 것이다." 학운기는 음산한 괴소를 흘리며 그에게 악독한 장력(掌力)을 펼쳤 다. 비명도 없었다. 수천의 부녀자를 울렸던 색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한 줌의 가 루로 변해 버린 것이다. 학운기는 아직도 방바닥에 뒹굴고 있는 장한들에게 똑같은 장력을 날렸다. 온갖 악만을 일삼아 오던 호남육흉(湖南六兇)들은 그들로서는 너 무나도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간 것이다. 학운기는 혼절해 있는 여인에게 지력을 날렸다. "으음… 앗!" 뾰족한 비명이 들리더니 곧이어 여인의 처절한 절규가 들려 왔다. "여보! 욱아야! 흐흐흑……!" 그녀는 자신이 알몸인 것도 잊은 채 두 구의 처참한 시체를 부둥 켜안고는 오열을 터뜨리다가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학운기는 그녀의 몸을 이불로 덮어 주고는 두 구의 시체를 내다가 매장해 주었다. 그가 일을 끝마쳤을 때 혼절해 있던 여인이 깨어나서는 다시 미친 사람처럼 절규를 터뜨리고 있었다. "여보! 욱아야! 흐흐흑……!" 학운기는 그녀를 그대로 놔 두었다가는 그녀마저도 실성해 버릴 것 같아서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그녀의 몇 군데 혈도를 점 했다. 한 식경쯤 흘렀을까? 그녀는 이지를 되찾고는 옷을 입었다. 학운기가 그녀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하려고 할 때 그녀가 갑 자기 무릎을 꿇더니 큰절을 올렸다. "천첩의 목숨을 구해 주신 은공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니오, 부인. 어서 일어나시오. 부인의 부군과 영식에게 소생이 영원한 잠자리를 마련해 드렸소." "은공, 이 은혜를 어떻게……." "아니오, 부인. 이제 악도들도 모두 죽었으니, 부인께서는 성 안 으로 들어가 살도록 하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품속에 있는 은자들을 모두 털어 주었다. 여인은 한참을 거절하다가 그의 정중한 태도에 감복하여 받고 말 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 감사의 말을 하고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침상 밑에서 하나의 목갑을 꺼냈다. "은공, 은공께서는 무림인이신 것 같은데… 이것을 받으세요. 이 것은 천첩의 남편이 옛날에 표국( 國)에서 일할 때 얻은 것인데, 오늘 호남육흉들이 이것을 노리고 왔다가는 이렇게……." 그녀는 말을 맺지 못하고 다시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학운기는 그것을 거절했으나 여인이 애원하다시피 떠맡기는 바람 에 받아서 열어 보았다. "앗!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 그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목갑 안에는 하나의 천년하수오가 이끼에 싸여져 소중하게 보관되 어 있었다. 그는 빠진 머리를 어떻게 할까 하고 고심하던 참이었는지라, 즉시 그것의 반쪽을 떼어 내서는 즙을 내어 머리에 발랐다. 그가 그것을 머리에 바르고 한 식경쯤 운기를 하자, 돌연 그의 대 머리에서 머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옛날처럼 길게 자랐 다. 그의 머리는 옛날보다도 더욱 새까맣고 윤기가 있었다. 여인은 옆에서 그런 신기하고도 놀라운 일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학운기는 운기를 마치고는 그녀에게 반쪽의 하수오를 주었다. "부인, 이것은 영약(靈藥)이니… 혹시 몸이 불편할 때가 있으면 조금씩 떼어 달여 먹으면 금방 나을 것이오." 여인은 한사코 그것을 받지 않으려 했으나 학운기는 그녀에게 떠 맡기다시피 주고 황급히 밖으로 나와 버렸다. "부인, 부디 용기를 잃지 마시오."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그의 목소리만이 은은히 들려 왔다. "아, 저분은 혹시 신선이 아닐까?" 부인은 한참을 넋을 잃고 있다가 두 개의 봉분으로 가서는 흐느끼 기 시작했다. 하늘도 그녀의 처지가 불쌍한지 계속 억수 같은 눈물을 쏟고 있었 다. 무림제일궁의 밀실에 학운기와 우내사존, 그리고 황보웅과 동방군 이 앉아 있었다. 학운기가 새제갈을 바라보았다. "천 노야 등이 경혼방을 공격하였소?" "그렇습니다, 주상. 노복들은 주상께서 혼자 가실 줄 알고는 급히 경혼방으로 갔으나, 주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죽었다는 소문만 이 떠돌기에… 하지만 노복들은 주상께서 꼭 살아 계실 것으로 믿 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수고들 하셨소. 한데 가계지와 소무극 등은 발견하지 못 했소?" "예, 노복들이 그 곳으로 쳐들어갔을 때는 이미 그들은 어디를 갔 는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우리 측의 피해는 얼마 정도요?" "예, 다행히 몇 명의 경상자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음, 그들은 내가 죽은 것도 확인하지 않고 어디로……." 학운기는 한참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새제갈이 그러한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노복의 생각으로는 혹시 주존이라는 자의 신상에 무슨 급한 일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음, 아마도 그런 것 같구려. 한데 요즘 사파들의 행동에 무슨 이 상한 낌새가 없소?" "아직까지는 별로……." 이 때 밖에서 급작스런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문 두드리는 소 리가 들려 왔다. 황보웅이 밖에다 대고 위엄 있게 소리쳤다. "이 곳에는 근접치 말라고 했거늘, 무슨 일인데 소란스럽게 구느 냐?" "예, 소인 개방의 무창 분타주입니다." "들어오시오." 무창 분타주는 매우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주걸신개에게 대 례를 올렸다. "사조님, 큰일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토록 호들갑을 떠느냐?" "예… 간밤에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아미(峨嵋), 청성(靑城), 공 래파( 來派)가 낯선 무리들에 의해 멸망(滅亡)을 했다 합니다." "뭐라고? 좀더 자세히 얘기해 보아라." 밀실 안이 순간적으로 긴장감에 휩싸였다. "예, 간밤 삼경쯤에 각각 이백여 명의 무리들이 침입을 해서 혈겁 을 저지르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합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들 무인들의 말을 빌리면, 악도들의 무공은 모두가 강호의 일류고수 를 능가하고 그 중에는 전대의 마두들도 끼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체는 밝혀 냈느냐?" "그것은 아직… 하지만 계속 그들의 종적을 추적하고 있다 하니, 곧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다. 빨리 가서 또 소식이 들어 오는 대로 연락을 하여라." "예." 무창 분타주는 예를 마치고는 급히 돌아갔다. 학운기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현 무림에서 삼대 문파를 동시에 침공할 수 있는 방파는 주존이 라는 자를 추종하는 무리들일 것이오. 천 노야와 황보 궁주는 여 기에 남아서 사태를 계속 주시하도록 하고, 나머지 분들은 나와 함께 사천으로 갑시다." "예." 학운기는 이어서 새제갈과 황보웅에게 몇 가지를 더 당부하고 주 걸신개 등과 함께 사천으로 몸을 날렸다. 무창(武昌)에서 사천의 아미산까지는 삼천여 리의 먼 길이었다. 무림제일궁을 떠나온 학운기 등은 사천을 향해 최대의 경공을 펼 치고 있었다. 쉬지 않고 달린 그들은 다음 날, 그맘 때쯤에 세 파에서 비슷한 거리가 되는 곳에 이르렀다. 학운기가 몸을 멈추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노도와 맹 노야께서는 청성으로 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선승과 동방 노야께서는 공래로 가시오. 나는 아미로 가겠소. 우리는 단 서를 수집한 다음, 오늘 밤 이경에 성도(成都)에서 가장 큰 주루 (酒樓)에서 만납시다." "예." 주걸신개 등은 모두 그에게 가볍게 예를 취하고는 몸을 날렸다. 학운기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는 아미산을 향해 몸을 날렸 다. 그는 최대의 경공을 펼쳤는지라 반 시진 만에 아미파에 당도할 수 있었다. 아미파는 사천성 서남쪽에 있는 아미산의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데, 무림에서는 소림사 다음으로 불문(佛門)의 성지(聖地)로 여기 는 곳이었다. 아미파는 이미 폐허(廢墟)가 되어 있었다. 웅장하던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한 수많은 건물에선 아직도 하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미파의 넓은 경내에서는 겨우 살아남은 듯한 이십여 명의 승인 들이 부상한 몸을 이끌고는 화장(火葬)을 하려는지 처참하게 죽어 나자빠져 있는 시체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그러한 것을 바라보는 학운기의 눈에서는 살기가 줄기줄기 쏟아져 나왔다. '악독한 자들 같으니라고! 세상에 불문의 성지를 이토록 처참한 피로 물들이다니…….' 학운기는 한참을 바라보다가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노승에게 다가갔다. 그 노승의 승복에도 군데군데 피가 얼룩져 있었고, 한쪽 팔이 잘 려져 있었다. 노승은 삶에 대하여 진한 회의를 느끼고 있는지 학운기를 슬쩍 한 번 쳐다보더니 그냥 가려고 했다. "대사, 소생이 잠깐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소협은 뉘시오?" 학운기가 그에게 가볍게 포권의 예를 취했다. "예, 소생은 학운기라고 합니다." 노승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놀라움의 빛이 서렸다. "아, 절대신룡 학소협이셨구려. 한데 무슨 일로……." "예, 먼저 졸지에 참변을 당한 귀파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 겠습니다." "아미타불… 고맙소이다." "소생은 혹시 악도들의 정체라도 알 수 있을까 하고 왔습니다. 대 사께서는 혹시 짚이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오." "노승도 졸지에 당한 일이라 그들이 누구인지는 미처 알아 내지 못했소. 더구나 그들은 모두 복면까지 쓰고 있어서……." "복면이라고요?" "그렇소." '으음… 그들이 복면을 했다면 필시 강호에 널리 알려진 자들일 텐데…….'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시 노승을 바라보았다. "대사, 소생이 시신을 잠깐 살펴보아도 되겠소?" "그러시구려." "고맙소." 노승은 학운기를 무심히 바라보더니 다시 느린 행동으로 시신을 옮기기 시작했다. 학운기는 그러한 노승의 처연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는 시체들을 모아 둔 곳으로 다가갔다. 시체에서는 이미 부패가 되기 시작했는지 참기 어려운 악취가 풍 겨 오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러한 시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시체는 장력(掌力)에 맞아 죽은 자, 병장기에 찔리고 잘려서 죽은 자, 암기에 맞아 죽은 자 등인데… 한결같이 처참한 형상들을 하 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 시체들에서 별로 특이한 점을 발견 못하고 실망한 표 정을 짓다가는 문득 한쪽에 따로 놓여진 몇 구의 시신들을 발견하 였다. 그들은 모두 노승들이었고, 신분이 높은 것 같았다. 학운기는 그 시신들을 살펴보다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앗! 마영혈인공(魔影血印功)이 아닌가?" 그가 살펴보는 시신의 가슴에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나찰 의 형상이 붉게 찍혀 있었다. '아, 그렇다면 마황비급(魔皇秘 )이 출현했단 말인가?' 도대체 마영혈인공과 마황비급이 무엇이기에 그가 이토록 놀란단 말인가? 마영혈인공(魔影血印功). 그것은 팔백 년 전에 나타났던 미증유(未曾有)의 대마공(大魔功) 이었다. 그것은 익히는 방법이 매우 잔인하고, 펼치려면 삼 갑자 이상의 내력이 뒷받침 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익히려는 사람은 우선 동정(童貞)의 몸이어야 하고, 익힐 때는 각 이백 명씩의 다섯 살 미만의 남녀와 오백 명의 순결한 여 인이 필요했다. 해서 무림인들은 그것을 익힌 자를 무림의 공적으로 대해 왔던 것 이다. 마영혈인공은 펼치면 장심(掌心)에 나찰의 형상이 나타난다. 그 나찰의 형상은 장력의 발출과 동시에 번개보다도 빠른 속도로 상대방에게 격중하는 것이었다. 그것에 격중당한 사람은 그 즉시 내부가 완전히 가루로 변해서 죽 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부에는 오직 붉은 나찰의 형상만이 찍히는 것이었다. 마황비급은 바로 이 마영혈인공이 수록된 비급인데, 거기에는 마 영혈인공을 몇 배나 능가하는 마공들이 수록되어 있다고 했다. 학운기는 다시 한 번 시신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음, 악도는 마공을 구 성 정도 익힌 것 같구나.' 그는 이어서 다른 시신들을 살펴보았으나 별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때 산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명의 무림인 이 나타났다. 아마도 그들은 아미파 혈겁의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정파무 림인들 같았다. 그들은 시신을 모으고 있는 승인들과 안면이 있는 듯 위로의 말을 하면서 인사를 주고받았다. 학운기는 시신들이 거의 다 모이고 자신이 할 일이 없음을 깨닫고 는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아미파에서는 계속 많은 무림인들이 황급히 올라오고 있었다. 학운기는 공래파가 아미에서 성도로 가는 길목에 있으므로 공래파 를 들려서 가기로 하였다. 공래파는 무당파 다음 가는 도가(道家)의 본산이었다. 학운기는 반 시진 정도 경공을 펼쳐 공래파에 도착하였다. 공래파의 상황도 아미파와 조금도 다름없이 처참했다. 공래파는 이미 삼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와서 몇 살아남은 공래파 도인들을 도와서 뒷처리를 하고 있었다. 혜불선승과 동방군은 이미 다녀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학운기는 한 도인에게 혈겁의 상황을 물어 보았으나 아미파에서 들은 것보다 더 자세한 것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주걸신개 등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옴을 알고는 살며시 공래 파를 빠져 나와서 성도(成都)로 몸을 날렸다. 성도는 사천에서 제일 커다란 시진이었다. 거리에는 수많은 등불이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은 빛을 내고 있었 다. 학운기는 행인(行人)들에게 제일 큰 주루를 물어서 그 곳으로 갔 다. 주루는 사천제일루(四川第一樓)란 명칭을 갖고 있었는데, 겉보기 에도 그 명칭에 어울리게 크고 화려했다. 그가 막 주루에 들어서려는 순간, 한 거지가 그의 곁을 스치고 지 나가면서 전음(傳音)을 보냈다. "삼층으로 올라가십시오." 학운기는 순간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하고는 태연하게 주루 안으 로 들어갔다. "공자님, 어서 오십시오." "삼층으로 안내해 주게." 순간 점원이 약간 야릇한 눈빛을 발하며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 "예, 예. 어서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학운기는 점원의 뒤를 따라가면서 주루 안을 슬쩍 살펴보았다. 다른 곳과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가 이층에 이르렀을 때 주걸신개의 전음이 그의 귓전에 울렸다. "주상, 노복들을 의식하지 말고 계속 올라가십시오." 주걸신개 등은 한쪽 탁자에 앉아서 음식과 술을 먹고 있었다. 주걸신개는 술과 안주를 마구 집어먹고 있었는데, 그의 전음은 계 속해서 학운기의 귀에 울려 왔다. "주상, 삼층에 가시면 월향(月香)이라는 기생(妓生)을 청하십시 오. 그녀는 마도(魔徒)들의 끄나풀인 것 같으니 눈치채지 않게 잘 심문해 보시면 뭔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복들의 정체는 발각되었기 때문에 노복들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밤 삼경에 동문(東門) 밖에 있는 허물어진 관제묘(關帝廟)에서 기다 리겠습니다." 전음은 학운기가 삼층에 올라가는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뚝 끊 겼다. '음, 삼층은 기루(妓樓)인 모양이구나.' 점원은 학운기를 안내하고는 그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이 더니 이내 아래로 내려갔다. 곧 안에서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중년여인이 나타났다. "공자님, 어서 오세요." "조용한 곳으로 안내해 주시오." "예, 천첩을 따라오세요." 삼층은 모두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간간이 여인의 간드러지 는 웃음소리와 음탕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호호… 아이, 간지러워요. 호호……!" "요것아, 잠깐만 기다려 보아라. 그렇다면 내가… 호호……!" "아이……." 학운기가 안내된 방은 매우 화려하게 꾸며진 기방이었다. 방에서는 여인의 체취와 분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그가 자리를 잡고 앉자, 중년여인이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공자님, 어떤 등급의 아이를 데려올까요?" "아, 나는 월향의 자태가 하도 뛰어나다 해서 그녀를 만나러 온 것이오." "월향이를요? 그녀는 우리 기루에서 하나밖에 없는 월자(月字) 등 급이라 좀……." 학운기는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는 품속에서 고양이 눈깔만한 보주 (寶珠)를 꺼내 주었다. 중년여인은 보주를 보더니 입이 함지박만해져 가지고 그에게 다시 요염한 추파를 보내더니 밖으로 나갔다. '음, 매우 요염한 여인이구나. 무공도 강호의 일류고수를 능가하 는 것 같고…….' 그가 한창 월향이라는 기녀를 상대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가볍 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상공, 소녀 월향이옵니다." 매우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들어오시오." "예." 문이 열리면서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이십이삼 세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찔한 느낌을 받게 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월향은 들어오더니 그에게 가벼운 예를 취했다. 그러한 그녀의 자태는 어떤 순결한 여인보다도 현숙하게 보였다. '음, 최혼섭심술(催魂攝心術)을 익혔군. 그렇다면 무림선요 공여 옥이나 그의 언니인 공여혜의 제자 중 한 명이겠군.' 그는 심법을 운행하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그녀와 이 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 때 주안상(酒案床)이 들어왔 다. 그들은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월향의 학식은 그가 보기에도 매우 높은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을 얘기하다가 학운기가 보기와는 달리 정력(定力)이 매우 높은 것을 깨달았는지 최혼섭심술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순간 학운기의 눈빛이 약간 흐릿하게 변했다. '호호… 그럼 그렇지. 네녀석이라고 별 수 있으려고…….' 그녀는 내심 고소를 흘리면서 겉으로는 매우 요염한 미소를 띄우 며 그를 바라보았다. "호호… 상공께서는 어디에 사시는지요?" "아, 나는 태호에서 살고 있소." "어머나! 먼 곳에서 오셨군요. 한데 상공은 혹 무공을 배우신 적 이 있으세요?" "어찌 군자(君子)의 도리(道理)를 배우는 사람이 그깟 싸움질을 배우겠소?" "호호호… 상공께서는 매우 유복(裕福)한 가정에서 자라신 것 같 은데……." 학운기가 거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의 아버님은 절강성의 제일 갑부요." "어머, 그러세요? 상공……." 그녀는 요염한 콧소리를 흘려 내면서 살며시 그의 곁으로 바싹 다 가왔다. 찰나 학운기의 눈빛이 돌연 이상하게 변했다. 불혼항마대법(佛魂降魔大法)을 펼친 것이다. 그의 손이 가볍게 흔들림과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흥분된 콧소리 가 흘러 나왔다. "흐으응……!" "헉헉……!" 그의 입에서도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순간 그는 전음복화술(傳音複話術)을 펼쳤다. 이것은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전음을 보낼 수 있는 매우 신묘(神妙)한 절기였다. "월향아, 너는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전음으로 대답해야 한 다." "예." 그녀의 전음이 들려 왔다. 그녀는 완전히 학운기의 불혼항마대법에 심지를 제압당한 것 같았 다. 그녀는 전음을 보낼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고혹적인 콧소리를 내 고 있었다. 학운기의 입에서도 연신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월향아, 너는 누구의 제자지?" "예, 소녀의 사부님은 무림선요의 첫째 제자인 지분요희예요." "너는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예, 무림인들에게서 정보를 얻는 일과 그들을 포섭하는 일이에 요." "너는 그 동안 몇 명이나 포섭했느냐?" "이십 명쯤……." "그 중에서 정파의 인물은?" "예, 당가문(唐家門)의 내당 당주인 금침비협(金針飛俠) 당무계 대협이에요." "그 밖에는?" "모두 사파의 인물이에요." "그렇다면 너는 얻은 정보와 포섭한 무림인을 어디로 보내는지 알 고 있느냐?" "섬서(陝西)로 가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밖에는 몰라요." "음……!" 학운기는 몇 가지를 더 물어 보았으나 그녀가 더 이상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그는 입가로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흡인공(吸引功)으로 그녀를 한 쪽에 있는 침상으로 눕히면서 신공(神功)을 이용하여 그녀의 옷을 벗겼다. "흐으응……!" 그녀는 계속 요염한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학운기가 그녀의 몇 군데 혈도를 짚자. "으흐윽… 으으윽……!" 그녀의 입에서 교성과 신음, 그리고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헉헉……!" 그도 계속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 안에서는 꼭 뜨거운 춘풍이 일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헉!" "으흡!" 방 안에서 두 마디의 다급한 숨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잠시 후 학운기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방을 나오더니, 휘청 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뒤에서 처음 그를 맞았던 중년여인이 득의의 교염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호호… 네녀석은 앞으로 월향이 없이는 못 살 것이다. 그렇다면 너의 집도 재산도 자연히… 호호……!' 그녀는 학운기가 사라진 계단 쪽을 응시하다가는 안으로 사라져 갔다. ====================================================== 第 4 章 적진(敵陣) 잠입(潛入) ====================================================== 학운기가 동문 밖에 있는 관제묘에 도착했을 때 주걸신개가 홀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운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분들은 어딜 갔소?" "안에 있습니다." 주걸신개는 벽으로 가더니 한 곳을 눌렀다. 스르릉－!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며 벽 아래의 마루가 두 쪽으로 갈라 졌다. 마루 아래로는 긴 계단이 놓여 있었다. "여기가 어디요?" "예, 개방의 성도 분타입니다." "한데 제자들은 모두 어딜 갔소?" "아미 등의 혈겁 때문에 모두들 나갔습니다." 그들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이 계단을 모두 내려간 다음 주걸신개가 한 곳을 누르자, 열 렸던 마루가 다시 닫혔다. 지하에는 야명주가 촘촘히 박혀 있어서 매우 밝았다. 학운기는 그 야명주들의 가치를 알고 있는지라 놀라움을 금치 못 하였다. '으음… 저 야명주 하나에 최소한 황금 오천 냥은 나갈 텐데… 그 것을 보면 개방은 거지들의 집단이 아니라, 천하제일 갑부들의 집 단이군.' 그는 곧 한 석실로 안내되었다. 석실은 황제의 거소에 못지않을 정도로 매우 화려하게 꾸며져 있 었다. 그가 석실로 들어섰을 때 혜불선승 등이 일어나서는 그를 맞았다. "자, 앉아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예." 주걸신개가 매우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상, 월향을 만났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섬서의 한천보(寒天堡)가 매우 중요한 일을 한다는 것밖에는 별 로 소득이 없었소. 한데 맹 노야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예, 이 곳 제자의 보고에서 그 곳에 들어갔던 무림인들이 가끔 실종된다는 말이 있어서 기생 중에서 가장 이름난 월향을 찾으라 고 한 것입니다." 학운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한데 공래와 청성에서 무슨 단서를 발견하진 못했소?" 혜불선승이 어두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미타불… 노복 등이 공래에 갔을 때는 이미 시신들도 매장된 뒤라서 특이할 만한 점은 찾아 내지 못하였습니다." 천기자도 침중한 표정이었다. "노복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데, 주상께서는 어떤 단서라도… …." 학운기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는 좌중의 인물들에게 한 시신에서 마영혈인공의 흔적을 발견한 것을 말해 주었다. "옛?" "아미타불……!" "무량수불……!" 모두들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혜불선승과 천기자는 연신 불호와 도호만을 외우고 있었다. "마황비급이 그들의 손에 들어간 것이 거의 확실한 것 같으니, 우 리도 대책을 세우도록 합시다." "예." 그들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학운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혜불선승 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복들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시오." 주걸신개만 남고 모두들 떠나자 학운기도 일어섰다. "맹 노야께서는 그들의 본거지를 찾는 것에 전력을 다해 주기 바 라오." "주상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학운기는 한 마디 하고는 지하를 빠져 나와 섬서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날은 이미 환히 밝아 있었다. × × × 장안(長安). 역대(歷代)의 왕조(王祖)들이 앞을 다투어 도읍지(都邑地)로 삼았 던 커다란 시진(市鎭)이다. 장안성(長安城)에는 모두 열두 개의 성문(城門)이 있는데… 남쪽 에 둘, 북쪽에 넷,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세 개씩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남쪽에 있는 명덕문(明德門)이었는 데, 명덕문에 들어서면 당대(唐代)의 황궁(皇宮)까지 곧게 뻗은 도로가 있다. 그 도로의 넓이는 무려 오십 장이 넘어서 처음 본 사람은 그것의 위용에 넋을 잃곤 하였다. 도로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원(寺院)과 도관(導觀), 그리고 주루와 금은당(金銀堂)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그 도로의 한 군데에 병장기를 소지한 백여 명의 무림인들 이 웅성대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앞에는 한 커다란 장원(莊院)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장원의 대문에는 검은 비단에 황금 수실로 곧 튀어나와서 승천(昇 天)할 듯한 한 마리의 금룡(金龍)이 수놓아져 있었고, 금룡 바로 밑에는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금룡표국(金龍 局)이라는 글이 수놓아져 있었다. 여기가 바로 철담매수(鐵膽梅授) 곽우환(郭于桓)이 국주(局主)로 있는 중원제일의 표국이었다. 웅장한 대문 옆에 있는 벽에는 하나의 방(榜)이 붙어 있었다. <금번 본 표국에서는 표사( 士)들을 모집하니, 뜻 있는 무림동도 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표사를 선출하는 방법과 날짜 등이 적혀 있었 다. 그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잠시 후 웅장한 대문이 열리면서 표사 차림을 한 세 명의 중년인 이 걸어 나왔다. 그 중 가운데의 중년인이 모여 있는 군웅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본인은 금룡표국의 총표두(總 頭)인 일도장천(一刀壯天) 상일범 (尙一帆)이오. 표사를 선출하는 방법은 이미 방(榜)에서 보았을 것이오. 자, 한 분씩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시오." 일도장천 상일범의 옆에 서 있던 중년인이 접수부(接受簿)를 보고 는 한 명씩 호명하기 시작하였다. 표국 앞에 모여 있던 군웅들은 호명하는 대로 한 명씩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이내 다시 나오고 말았다. 표국 앞에 있던 군웅들은 어느 새 삼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선중산(先重山)!" "예." 다시 한 명의 무사가 호명되었다. 선중산이라 불린 자는 이십칠팔 세쯤 되어 보였는데, 일견(一見) 에도 힘깨나 쓸 인물 같았다. 그는 등 뒤에다 평범한 한 자루의 철검(鐵劍)을 메고 있었다. 바로 변장한 학운기였다. 그는 장안성 교외에 있는 한천보에 잠입하려고 고심하던 중 혹시 무슨 방법이 있을까 하고 개방의 분타를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한 가지 미심쩍은 사실을 알아 냈다. 그것은 금룡표국에서 표사를 선출하는 일이 너무 빈번하며, 또한 선출된 표사들도 자주 실종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것에 의심을 품고 변장을 하고는 표사 선출에 응모한 것이었다. 각설하고 호명된 그는 즉시 표국 안으로 들어갔다. 표국의 넓은 뜰에는 용(龍)을 조각한 청동상(靑銅像)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은 일견하기에도 이천 근은 됨직하였다. 청동상 옆에는 금룡이 수놓아진 표사의( 士衣)를 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학운기는 그에게 가벼운 포권의 예를 취해 보이고는 청동상을 안 아 들었다. "얏－!" 그의 입에서 용소(龍嘯)가 터짐과 동시에 청동상은 점점 들어올려 지더니, 마침내는 그의 머리 위까지 올려졌다.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고, 팔과 목에서는 파란 핏줄이 불끈불끈 솟아올라 왔다. "됐소." 지켜 보던 중년인의 입에서 짤막한 합격의 소리가 터져 나오자, 학운기는 그것을 내려놓았다. "휴우!" 그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다음 번으로 가 보시오." "예." 학운기는 그에게 포권을 해 보이고는 두 번째 관문으로 갔다. 그 곳은 무공초식을 시험하는 곳이었다. 그 곳에는 몇 명의 건장한 중년인과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명의 노인이 있었다. 학운기가 그 곳으로 다가가자 노인이 그의 위아래를 유심히 훑어 보았다. "소협의 특기는 무엇인가?" "예, 검입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인 중에서 한 명이 검을 빼들고는 그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친구가 나의 삼십 초를 받아 낸다면 합격이오." "부탁하겠소." 학운기는 등의 검을 뽑아 들고는 평범한 기수식을 취하였다. "얏－!" 우렁찬 소리와 함께 중년인이 사정없이 그에게 덮쳐 왔다. 창－ 창－! 그들 사이에서 실전(實戰)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비무(比武)가 벌 어졌다. 십 초까지는 비슷했다. 그러나 십 초가 넘어서면서부터 큰 소리치던 중년인이 쩔쩔매기 시작하더니, 이십 초가 넘어서자 제대로 손발을 움직이지 못했다. 창－ 창－! 중년인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지켜 보는 노인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멈춰라!" 노인의 입에서 폭갈이 터져 나오자 싸우던 그들은 즉시 손을 멈추 고는 물러섰다. 노인이 매우 놀라는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소협은 누구에게서 검법을 배웠나?" "선친께 배웠습니다." "선친의 별호는 어떻게 되는가?" "선친께서는 평소에 강호 출입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으음, 자네 이름이 선중산이라고 했지? 선이라… 선……." 노인은 선씨(先氏) 성(姓)을 가진 무림고수를 생각해 보았으나 언 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알겠네. 자네는 합격(合格)했으니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 게." "예." 학운기는 그에게 포권의 예를 취해 보이고는 그가 가리키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의 대청에는 다섯 명의 무사들이 차(茶)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 학운기보다 먼저 합격한 자들이었다. 그는 그들과 수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자 시비가 차를 내왔다. 학운기도 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의 뒤로 두 명이 합격되고 표사 선출은 막을 내렸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금룡표국 대전(大殿) 안 수십 개의 등불들이 대낮처럼 밝은 빛을 쏟아 내고 있었고, 넓은 대청에는 푸짐한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 다. 상석에는 국주인 철담매수 곽우환이 앉아 있었고, 그의 옆에는 총 표두인 일도장인 상인범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학운기를 비롯한 오늘 선출된 사람들과 금룡 표국의 수뇌급 인사들이 앉아 있었다. 지금 그들의 화제는 오늘 월등한 실력으로 합격한 학운기에게 쏠 려 있었다. 철담매수 곽우환이 흡족한 미소를 띄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선 표두는 왜 표사가 되려 했는가?" 그는 높은 무공을 인정받아서 이례적(異例的)으로 표두로 임명된 것이었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남들과 같이 쩡쩡거리며 살고 싶습니다." 곽우환의 눈빛이 약간 이상한 빛을 띠었다. "돈을 벌려면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왜 굳이 표사를 택했나?" "강호 경험이 적은 속하인지라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표사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리를 언젠가 선친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지라……." "그럼 자네는 돈을 더 많이 벌 방법이 생기면 이 곳을 떠나겠나?" "물론이죠, 도둑질만 빼놓고 많은 돈을 벌 방법이 있다면 떠나야 죠." 그의 목소리에는 탐욕과 하루살이 같은 영웅심(英雄心)이 가득 서 려 있었다. 곽우환이 침중한 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하지만 자네는 여기에 있는 동안 임무에 충실해 주기 바 라네. 본 국주도 유능한 자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보수에 특별 히 신경을 쓰겠네." "감사합니다, 국주님." 그들은 다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술을 들었다. 특히 학운기는 오직 돈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돈에 대한 얘기만 했 다. 곽우환과 상일범이 그러한 그를 가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 았다. 연회는 삼경쯤 되어서야 끝났다. 학운기는 내심 의미 있는 고소를 흘리면서 한 표사의 뒤를 따라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음, 확실히 이 곳은 마도들과 관련이 있는 것 같구나. 보통 표사 를 모집하려면 탐욕이 있는 자를 제일 싫어하는 법인데, 그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으니…….' 그는 침상에 누워서 생각에 골몰하다가 잠이 들었다. 보름이 흘렀다. 학운기는 그 동안 두 번의 표물을 운송했는데, 그 중의 한 번은 그의 힘으로 녹림의 무리들에게서 표물을 지켰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알아 낸 것이 없자 내심 초조해지기 시작했 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눈초리가 항시 자신을 주시하 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행동에 대하여 각별히 유의 했다. 오직 돈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동료에게 술 한 잔 사지도 않았고, 식사도 꼭 표국 안에서 했다. 그의 수중(手中)으로 한 번 들어온 돈은 다시는 나가지 않았던 것 이다. 그가 이렇게 철저히 위장(僞裝)하고 행동하면서 보름이 흐른 어느 날 삼경 무렵, 그는 침상에 누워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음, 아미 등에서 혈겁을 일으킨 지가 벌써 보름이 넘었는데 아직 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으니… 혹 그들 사이에 무슨… ….' 이 때 밖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곧 그의 방문을 두드리 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선 표두, 자나?" "누구요?" "총표두일세." 학운기는 급히 몸을 일으키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아니? 총표두님께서 무슨 일로 이렇게 늦은 시각에……." "내 자네와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네." 그는 자리에 앉더니 학운기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네는 돈을 버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으음, 그래서 찾아왔는데… 내 자네에게 천금(千金)을 벌 수 있 는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네." 학운기는 바싹 구미가 당기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곳이 어딥니까?" "가면 알게 되네. 그 곳에 가면 돈뿐만이 아니라 여자와 그 밖에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있는 곳이지." 학운기는 이제 안달이 난 표정이 되었다. "총표두님, 제발 저에게 그 곳을 소개해 주십시오. 그럼 내 총표 두님의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 걱정 말게. 그래서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나? 국주님께서 도 자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시니, 내 자네를 그 곳으로 보내겠 네. 자, 나하고 함께 가세." "지금 말입니까?" "하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말이 나온 김에 가면 더 좋지 않겠나?" 그는 학운기의 등을 두어 번 두들기더니 밖으로 나갔다. 학운기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면서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한 은밀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이미 학운기와 안면이 있는 두 명의 표사가 앉아 있었 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고 있게." 상일범은 그들에게 한 마디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곽우환과 상일범, 그리고 나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복면 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복면인이 학운기 등을 쭉 훑어보았다. "이들이오?" "예, 그렇습니다." 곽우환이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음, 이번에는 조금 적군. 하여튼 수고하였소. 본좌는 시간이 없 어서 그만 가 봐야겠으니 계속 수고하도록 하시오." 복면인은 곽우환과 상일범에게 한 마디 하더니 품속에서 검은 복 면을 꺼내어 학운기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 너희들은 이것을 쓰고 나를 따라오너라." 복면인은 학운기 등이 복면을 쓰자 즉시 밖으로 빠져 나갔다. 이 날 따라 밖에는 표국을 순찰하는 사람도 없었다. 복면인은 학운기 등을 이끌고 담을 넘더니 서쪽을 향하여 몸을 날 렸다. 학운기는 복면인의 뒤를 따르면서 생각을 굴렸다. '음, 이 자는 마도들과 한패가 분명한데… 보름 동안이나 잠잠하 게 있다가 이토록 신비하게 이류고수를 능가하는 사람을 모집하는 이유는 뭘까? 아미 등에서 살아남은 자의 말을 들으면… 전번에 침공(侵攻)한 자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가 한창 생각을 하는 동안 복면인은 성 밖 삼십여 리 되는 곳까 지 이르렀다. 곧 그들 앞에 웅장한 장원이 나타났다. 바로 무림이보(武林二堡) 중의 하나인 한천보(寒天堡)였다. 복면인이 안에다 대고 뭐라고 했는지 곧 조그만 옆문이 열렸다. 복면인은 학운기 등을 한 누각으로 데리고 갔다. 누각 안에는 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앉아 있다가 학운기 등을 데리 고 간 복면인이 들어가자 즉시 일어나서는 예(禮)를 취했다. 아마 그들 사이에는 신분을 알아볼 수 있는 은밀한 표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안에 있던 복면인 중 한 명이 벽을 누르자,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 가 들리면서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복면인은 학운기 등을 지하로 데리고 가더니, 그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너는 특기가 무엇이냐?" 학운기 옆의 표사가 대답했다. "예, 장법(掌法)입니다." "너는?" "예, 도법입니다." 이번엔 학운기를 쳐다보았다. "검법입니다." 복면인은 그들을 긴 통로로 데리고 가면서 한 곳을 눌렀다. 순간, 조금치의 틈도 없던 벽이 열렸다. "너, 안으로 들어가라." 장법이 특기라는 표사가 예를 취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복면인은 한참을 가다가 다시 한 곳을 눌렀다. 역시 벽이 열렸다. "너!" 이번엔 학운기였다. 학운기는 복면인에게 포권을 해 보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한 복면인이 나타났다. "검을 빼들고 날 공격해 보아라." 복면인은 맨손이었다. 학운기는 검을 빼들고는 그에게 덮쳐 갔다. 순식간에 십여 초가 흘렀다. 학운기는 검은 복면인의 옷자락 하나 베지 못했다. "됐다." 학운기가 손을 멈추자 복면인이 그를 한 번 쳐다보았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는 학운기를 한 석실로 데리고 갔다. 석실에는 이미 삼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검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학운기를 데리고 온 복면인은 석실에서 검법을 지도하고 있는 복 면인에게 그를 인도하고는 즉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검법을 지도하는 복면인이 학운기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지금부터 너에게 한 가지 고절한 속성검법을 전수하겠다. 너는 이것을 사흘 안에 완전히 숙달하여라." "예." 복면인은 학운기에게 오직 일 초의 검법을 전수(傳授)하여 주었 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쉬운 검법 같았다. 하지만 학운기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음, 정교(精巧)하면서도 악랄(惡辣)한 초식이다. 만약 이들이 이 것을 완전하게 펼친다면, 절정고수들도 쉽게 막을 수 없을 것 같 구나.'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검법을 연마하고 있는 복면인들 틈에 끼 여 검초를 연습하기 시작하였다. 지도하는 복면인은 가끔 틀린 자들을 지적하여 올바르게 잡아 줄 뿐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지하의 석실 안인지라 며칠이 흐르는지도 몰랐다. 학운기의 생각으로는 사흘이 흐른 것 같았다. 그가 온 뒤에도 몇 명의 복면인이 석실 안으로 들어와 검법을 배 웠다.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말도 허용되지가 않았다. 석실 안으로는 가끔 젊은 여인들이 들어와서 욕정에 굶주린 자들 의 욕구를 충족해 주곤 하였다. 그 밖에 그들에게는 잠깐의 잠자는 시간과 식사 시간만을 허용할 뿐, 오직 검법을 연마하라는 독촉(督促)만이 내려왔을 뿐이었다. 지도하는 자는 가끔 힘들어하는 자에게 이번 일만 성공하면 부귀 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다는 말만 할 뿐, 이번 일이 어떤 일인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었다. 학운기는 무림의 동태가 궁금했으나 완전히 차단된 곳에서 감시까 지 받고 있는지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가끔 들어오는 여인들을 통해서 알아보려고 했으나 한 여인에게 댓명의 사내가 붙어 있어서 그것도 불가능했다. '음… 이 곳으로 들어올 때 표식을 남기기는 했지만 개방의 제자 들이 그것을 발견했는지 모르겠군.' 학운기는 복면인을 따라서 한천보 안으로 들어올 때 한 고목에다 개방의 제자들한테만 통하는 표식을 남겨 놓았었다. 학운기가 지하 석실 안으로 들어온 지 나흘 정도가 흘렀다고 생각 이 되던 날, 검법을 배운 자들은 괴이한 검초에 어느 정도 숙달이 되었다. 그들이 한창 배운 검법을 연마하고 있을 때, 비쩍 마른 체구의 복 면인이 안으로 들어와서는 그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오늘 본좌가 너희들의 내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한 알씩의 영단 을 하사하겠다. 이것은 소림의 대환단(大丸丹)보다도 위력이 뛰어 난 것이니, 너희들은 먹는 즉시 운공조식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는 말을 마치더니 품속에서 옥병을 꺼내서는 붉은빛의 환약을 한 알씩 나누어 주었다. 환약을 받아 든 복면인들은 그것을 즉시 복용하고는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학운기도 한 알을 받아 들었다. 순간, 그는 내심으론 깜짝 놀랐으나 내색은 하지 않고 환약을 입 에다 넣고는 한쪽 구석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 이들이 이런 악랄한 수단을 사용하다니… 천인공노(天人共 怒)할 자들 같으니라고! 그래서 아미 등에서 혈겁을 일으킨 후에 한동안 조용했었구나. 그렇다면 이번에도 어디를 공격한다는 얘긴 데…….' 격공실혼단(激功失魂丹). 이미 제조 방법이 실전(失傳)된 지가 오래인 천하제일의 마약(魔 藥)이었다. 그것을 복용한 후 운기행공을 취하고 나면 공력이 몇 배나 증진되 었다. 그러나 복용한 자는 그 순간 실혼인(失魂人)이 되고, 이틀 후면 완전한 폐인(廢人)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격공실혼단을 복용하고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복면인들의 머리에 서 하얀 김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그렇게 반 시진쯤 흘렀을까? 운기를 하던 복면인들이 하나 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은 피맛을 본 이리의 그것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 었고 어딘지 모르게 동공에 초점이 없어 보였다. 그러한 현상은 학운기도 마찬가지였다. 복면인들이 모두 깨어나자 마약을 나누어 준 비쩍 마른 복면인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그들을 훑어보았다. "흐흐… 이제 소림의 대머리와 무당의 말코도사들도 내일이면 사 라지게 되었군. 흐흐… 자, 모두들 나를 따라오너라." 처음에 중얼거린 그의 말소리는 비록 나직했지만 학운기의 귀에는 벽력(霹靂)보다도 크게 들려 왔다. '아, 이들의 목표가 소림과 무당이었구나.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알려야 한단 말인가?' 이 때 복면인들은 비쩍 마른 노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학운기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그들의 틈에 끼여서 그의 뒤 를 따라갔다. 각 석실에서도 복면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도 모두 격공실혼단을 복용(服用)했는지 멍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에는 힘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그들은 곧 지하를 빠져 나가 넓은 뜰에 모였다. 천 명이 넘는 수였다. 이 때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장안성의 은은한 북 소리가 들려 왔 다. 학운기는 모여 있는 복면인들의 엄청난 수효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아아, 이들이 오백여 명씩 무당과 소림으로 나누어 간다 하더라 도 과연 막아 낼 수 있을까? 내가 가는 곳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 른 한 곳은… 더구나 지휘하는 자 중에는 마영혈인공을 사용하는 자들도 있을 텐데…….' 그가 한창 생각하고 있을 때, 앞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복면 인들이 그들을 두 패로 나누기 시작하였다. 모든 일을 마치자 지휘하던 복면인들은 즉시 실성한 복면인들을 이끌고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경공은 모두 강호의 절정고수에 버금 갈 정도였다. 겨우 무림의 이류고수를 능가하는 자들을 절정고수에 버금 갈 정 도로 만들어 놓았으니… 격공실혼단이 천하제일의 마약이라고 불 리우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학운기는 한천보를 빠져 나오자 옆으로 빠질까도 생각해 보았으 나, 주위의 감시의 눈초리가 너무나도 삼엄하여 그럴 수도 없었 다. '음, 이 일을 어쩌지? 소림과 무당 중 하나가 망해야 한단 말인 가?' 그가 한창 고심하며 몸을 날리고 있을 때, 백여 장 밖의 한 고목 위에 탁 달라붙어 있는 흑영이 그의 동공에 들어왔다. 흑영은 너무나도 교묘히 숨어 있는지라,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는 발견할 수 없었다. 학운기는 이 때 혹시 한천보를 감시하는 개방의 제자가 없을까 하 고 은밀히 주위를 살펴보고 있던 터였다. 순간,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하고는 그 흑영을 향해 천리이어전음 술(千里以馭傳音術)을 펼쳤다. "친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겠소. 만약 친구가 무림과 강호를 조 금이라도 걱정한다면, 나의 부탁을 꼭 들어 주시오. 지금 친구가 보고 있는 이 무리들은 무당과 소림을 침공하러 가는 무리들이오. 시간은 내일 밤이오. 친구는 이러한 사실을 즉시 개방의 제자에게 전해 주시오. 부탁하겠소." 그가 천리이어전음술을 모두 마쳤을 때는 흑영을 본 곳으로부터 십여 리나 벗어난 후였다. 천리이어전음술(千里以馭傳音術). 그것은 천고(千古)의 절기(絶技)였다. 일반 천리전음술은 목적하는 곳의 주위 사람에게도 들리지만, 이 것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천리전음술보다도 익히기가 몇 배나 힘들고, 펼치려면 사 갑자 이상의 공력을 소유한 자여야만 되었다. 한천보에서 오십여 리쯤 왔을 때 한 패는 남동쪽으로 향하고, 학 운기가 속한 패는 계속 동쪽으로 갔다. 동쪽으로 가면 바로 숭산의 소림사가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울창한 숲만을 이용해서 달리고 있었다. 오백여 명의 무리가 경공을 펼치고 있는 데도 옷자락 흩날리는 소 리나 풀잎 밟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학운기도 생각에 골몰하면서 계속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음, 제발 그 흑영이 정도(正道)의 인물이어야 할 텐데…….' 그는 이들을 모두 처치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은 무리였다. 절정고수에 버금 가는 공력을 소유한 오백여 명의 실혼인과, 확실 히 무공의 정도를 추측할 수 없는 그들을 지휘하는 삼십여 명의 인물을 그 혼자서 상대하기란 너무나도 벅찬 일이었다. 그것은 무공뿐만이 아니라 실혼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 문에 그것이 더욱 무서운 것이었다. 그들은 오경이 넘어서야 숭산(崇山) 근처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지휘하는 복면인들은 실혼복면인들을 한 커다란 동굴로 데리고 갔 다. 동굴은 어찌나 큰지 오백여 명이 들어가고도 한쪽이 텅 빈 것 같 았다. 지휘하는 복면인들은 진식을 설치해 놓는 것 같았다. 학운기는 천리지청술을 펼쳐서 혹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나 하고 엿들어 보았지만, 그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으음, 철처하게 비밀을 지키는 자들이군. 그런데 이들은 아미에 서 중상을 당해 기동치도 못할 실혼복면인들을 데리고 갔다는데… 곧 폐인이 되어 버릴 자들을 무엇 때문에 데리고 갔을까? 비밀이 샐 것이 두려웠다면, 이들의 악랄성으로 보아 다른 간단한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가 깊은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실혼복면인들은 아무렇게나 누운 채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복면인들은 그들을 조금의 미동도 못하게 하면서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그 날 밤 이경 무렵, 복면인들은 실혼복면인들을 모두 깨웠다. 학운기 등에게 격공실혼단을 먹였던 비쩍 마른 복면인이 그들을 쓱 둘러보았다. "지금 우리들이 가려는 곳은 소림사이다. 너희들은 그 곳에 도착 하는 즉시 복면을 쓰지 않은 자를 무조건 살해하여라. 자, 가자." 그가 앞장을 서서 몸을 날리자, 다른 복면인들도 분분히 몸을 날 렸다. 한 식경쯤 경공을 펼쳤을 때 소림사가 보이는 숭산의 중턱에 도착 하였다. "자, 쳐라!" 비쩍 마른 복면인의 명령이 터짐과 동시에 복면인들은 소림사의 담장을 뛰어 넘어갔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소림사는 마치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사람은 물론이고 불빛이 비치는 곳도 없었다. 비쩍 마른 복면인을 비롯한 보통 복면인들은 매우 당황한 것 같았 다. 그들이 대웅전의 넓은 뜰에 도착했을 때였다. 쉬이익－ 피이융－! "악!" 화살과 암기 나르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실혼복면인들이 묵직한 신음을 토하면서 풀썩풀썩 쓰러져 가기 시작하였다. 순간 학운기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연락이 됐구나.' 그러면서 그는 아무도 모르게 옆의 실혼복면인들을 십여 명이나 저 세상으로 보내 버렸다. "아으윽……!" "모두 피하라!" 비명과 지휘하는 복면인들의 함성이 어지럽게 들려 왔다. 화살이나 암기 등을 사혈(死血)에 정통으로 맞지 않은 실혼복면인 들은 마치 미친 들소처럼 마구 날뛰었다. 신성(神聖)한 불문의 성지(聖地)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복면인들이 대웅전 뜰을 빠져 나가려고 몸을 날렸을 때. 수백 명의 승인과 속인들이 그들을 포위하고는 덮쳐 왔다. 펑－! 쾅－! "아으윽……!" 창－ 창－! "으억!" 악마의 지옥이 아무리 처참(悽慘)하다 한들 이토록 처참하지는 못 할 것이다. 소림 승인들은 그 유명한 나한진(羅漢陣)을 펼치고 있었고, 속인 들의 무공도 거의 대부분이 일류고수급들이었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비쩍 마른 복면인은 고함을 지르면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사방을 헤집고 다녔다. 학운기는 슬쩍슬쩍 복면인들을 해치우면서 승인과 속인들 사이에 서 자신이 아는 인물들을 찾아보았다. 펑－! 쾅－! "아으악……!" 복면인들은 이미 거의 삼백여 명이나 죽어 갔고, 승인과 속인들도 오십여 명이 죽어 갔다. 이 때 학운기의 눈에 비쩍 마른 복면인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혜불선승이 보였다. 복면인의 무공은 절대로 혜불선승의 아래가 아니었다. 학운기는 혜불선승에게 전음을 보내며 복면인에게 무형(無形)의 일 지(指)를 날렸다. "선승, 나 학운기요. 힘을 내시오." 순간 혜불선승은 놀라움과 반가움에 움찔하였고, 복면인은 갑자기 다가온 무형의 지력(指力)에 움찔하고 옆으로 피하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하나 학운기의 일 지는 그의 어깨에 적중하였고, 학운기는 다른 사람들 틈으로 끼여든 후였다. "선승,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혜불선승은 다시 들려 온 그의 전음에 흠칫하며 복면인에게 덮쳐 갔다. 창－ 창－! 펑－! 쾅－ 콰르릉－! "으아악……!" 굉음과 처절한 단말마가 계속 들려 왔다. 어느덧 복면인들의 수효는 백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학운기도 계속 좌충우돌하는 듯하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복 면인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와아……!" 갑자기 밖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리면서 수백 명의 무림인들이 쏟 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맨 앞에서는 주걸신개와 동방군이 신형을 날려 오고 있었 다. 순간 혜불선승과 싸우던 비쩍 마른 복면인이 크게 소리쳤다. "퇴각하라!" 학운기는 즉시 혜불선승에게 전음을 보냈다. "선승, 쫓는 척하면서 놓아 주도록 하시오. 그리고 무당에 들려서 내일까지 한천보로 오도록 하시오." 혜불선승은 그의 말을 듣는 즉시 다른 수뇌급 인물들에게도 전음 을 보냈다. 주걸신개 등 나중에 들이닥친 정파의 고수들은 복면인들이 도망치 자 용기백배하며 덮쳐 들다가는 혜불선승의 전음을 들었는지 함성 만 지르고 있었다. 복면인들은 순식간에 소림사에서 백여 리 떨어진 곳까지 도망쳐 왔다. 팔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도 온전한 자는 몇 되지 않았다. 학운기도 군데군데 옷이 찢어지고 피가 얼룩져 있었다. 순간 비쩍 마른 복면인이 소리쳤다. "모두 멈추어라!" 그는 사전에 비밀이 새어나가서 참담히 패하자, 어이가 없는 모양 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싸늘한 살기(殺氣)가 뻗쳐 나오고 있었다. "모두들 복면을 벗어라!" 실혼복면인들은 서슴없이 복면을 벗었다. 그러나 다른 복면인들은 멈칫하다가 비쩍 마른 복면인의 살기가 쏟아져 나오는 눈을 보고는 흠칫하며 복면을 벗었다. 비쩍 마른 복면인은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세밀하게 살펴보았 다. 그가 학운기 앞으로 지나갈 때 학운기는 내심 긴장감을 느끼지 않 을 수 없었다. "너!" 복면인이 느닷없이 학운기의 얼굴 정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학운기는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멍한 시선으로 복면인을 쳐다보았다. "죽어라!" 다시 복면인의 명령이 떨어졌다. 학운기는 자신의 천령개를 내리쳐 갔다. 찰나 복면인의 손이 번뜩했다. 학운기는 자신의 곡지혈(曲池穴)이 뜨끔함을 느꼈다. 기지를 발휘한 학운기에게 복면인이 속은 것이었다. 복면인은 벌써 그의 앞을 지나쳐서 다른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으음……!" 복면인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복면을 써라!" 모두 복면을 쓰자 다시 비쩍 마른 복면인이 명령을 내렸다. "가자!" 그들은 다시 몸을 날렸다. 그들이 한천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동편 하늘이 훤하게 밝은 뒤 였다. 학운기를 비롯한 실혼복면인들은 다시 지하 석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무당파로 갔었던 듯한 실혼복면인들이 들어왔다. 그들도 처참한 패배를 당한 듯 몸이 말이 아니었다. 수효도 몇 되지 않았다. 학운기는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곰곰이 다음에 해야 할 일 들을 생각했다. '음, 폐인이 된 실혼인들을 어디에 쓸까? 혹 무슨 마공을 연성하 는 데 그들의 시체가…….' 학운기는 그들의 악랄성에 새삼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실혼복면인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쓰러진 그들은 경련만을 일으키고 있었다. 학운기의 몸도 한쪽에 쓰러진 채로 심한 경련(痙攣)을 일으키고 있었다. ====================================================== 第 5 章 부골흡혈저(腐骨吸血 ) ====================================================== 얼마쯤 지났을까?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실혼복면인들의 눈이 희멀겋게 변해 갔다. 그러나 매우 이상한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실혼복면인들이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고 있으면서도 숨소 리만은 매우 평온한 것이었다. 학운기는 내심 마도들의 악랄성에 치를 떨면서도 행동만은 다른 실혼복면인들과 똑같이 취하고 있었다. 이 때 석실 문이 열리면서 나무통을 든 흑의인들이 몇 명 들어왔 다. 그들은 들어와서 나무통에 든 것을 조금씩 실혼복면인들의 입에다 떠 넣어 주었다. 학운기의 입에도 조금 들어왔다. '음, 이들이 실혼복면인들을 죽이지는 않을 작정인가 본데…….' 그것은 약 냄새가 나는 미음이었다. 흑의인들이 석실을 나간 얼마 후, 이번에는 거의 사오십 명의 흑 의인들이 들어오더니 쓰러져 있는 실혼복면인들을 양쪽 옆구리에 끼고는 밖으로 나갔다. 밖은 매우 캄캄했다. 학운기는 문득 별자리를 바라보고는 사경이 가까와 옴을 알았다. 밖에는 십여 대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흑의인들은 실혼복면인들을 마차에 마치 짐짝을 싣듯이 아무렇게 나 던져 넣었다. 그러한 실혼복면인들은 언뜻 보아서 한 백이십여 명 정도 되어 보 였다. 무당에서도 소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참담하게 패한 것이 분명했다. 실혼복면인들이 마차에 모두 실려지자 마차는 출발(出發)했다. 마차 한쪽 구석에 누워 있던 학운기는 내심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선승 등을 내일 이 곳으로 오라 했는데… 그들이 걱정이구 나. 괜히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愚)는 범하지 않아야 될 텐데 … 천 노야가 함께 온다면 괜찮겠지만…….' 그는 한창을 생각 하다가 마차 벽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혹 한천보를 감시하는 개방의 제자를 발견하지나 않을까 해서였 다. 그러나 한천보 주위 십여 리까지는 이미 엄밀한 매복이 펼쳐져 있 었다. 마차의 주위도 수십 명의 일류고수들이 호위(護衛)하고 있었다. 학운기는 마차의 가는 방향을 알아보려고 계속 밖을 내다보고 있 었다. 하나 그것도 오래 계속할 수가 없었다. 몇 명의 흑의인들이 경공을 펼치기가 힘든지 마차에 탔기 때문이 었다. 마차는 이틀 동안을 계속 달렸다. 흑의인들은 가끔 실혼복면인들에게 미음만을 떠 넣어 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는 심하게 흔들리고 계속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학운기는 마차의 목적지를 알아 낼 수가 없었다. 다시 하루가 더 흘렀다. 마차는 말을 바꿀 때만 잠시 멈췄을 뿐,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학운기는 적의 소굴에 들어가서 할 행동에 대해서만 곰곰이 생각 하고 있었다. 이 때 약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면서 마차가 멈춰졌다. 이번에는 말을 바꾸기 위해서 멈춘 것 같지가 않았다. 학운기는 옆에 실혼복면인들밖에 없는지라, 조그맣게 뚫린 구멍으 로 살며시 밖을 내다보았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치는 울창한 숲 속이었다. '음, 목적지에 다 온 모양이군.' 그가 생각을 굴리는 순간. 자신이 타고 있는 마차로 다가오는 가벼운 여러 발자국 소리가 들 려 왔다. 그는 즉시 다른 실혼복면인들과 똑같은 모양으로 몸을 눕혔다. 곧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흑의인들이 실혼복면인들을 옆구리에 끼 고는 몸을 날렸다. 학운기도 한 흑의인의 옆구리에 끼워졌다. '음, 너무나도 울창한 숲 속이라 지리(地理)를 분간할 수가 없구 나.' 흑의인들은 입구가 은밀하게 가려진 컴컴한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의 입구는 겨우 두 명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 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지더니… 백여 장쯤 들어갔을 때는 넓이가 십 장이 넘는 듯했다. 학운기는 동굴 속에서 진한 살기(殺氣)를 느꼈다. '음, 독진(毒陣)을 비롯한 수많은 기관매복(機關埋伏)이 설치되어 있구나.' 동굴은 매우 꼬불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약 백여 장쯤 더 들어갔을 때. 동굴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동굴 천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야명주들이 박혀 있었 다. 실혼복면인들을 끼고 들어온 흑의인들은 동굴 속에 있던 청의인들 에게 그들을 인도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청의인들은 그들을 동굴의 넓은 광장(廣場)에다 똑바로 눕혀 놓았 다. 잠시 후. 학운기의 귀에 음침하면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에는 왜 이렇게 적느냐?" "예, 그것은……." 대답하는 사람은 전음(傳音)으로 말하는지 그 다음부터는 뚝 끊겨 버렸다. 다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음, 백이십삼 명이라… 이건 너무나도 적다. 목적을 달성하려면 최소한 천 명은 필요한데, 전번 것과 합쳐 보아야 칠백 명도 못 되니… 더구나 이 중에서도 쓸모 없는 놈이 몇 명 있을 테니… 너 는 돌아가는 즉시 구 당주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보름 안에 최소한 삼백오십 명 이상을 더 보내라고 하여라. 주존께는 내가 보고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알았다."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동굴 밖으로 사라지자 구레나룻을 덥수룩하 게 기른 오십여 세 정도의 노인이 실혼복면인들 사이를 돌아다니 기 시작하였다. 그 노인의 모습이 똑바로 누워 있는 학운기의 눈에 간신히 비쳐 왔다. '앗! 저 사람은 혹시 만독제군(萬毒帝君) 필적혈(弼摘血)이 아닐 까? 음, 저 자가 만독제군이 확실하다면 이미 반노환동(返老還童) 의 경지에 이르른 것 같구나.' 그렇다. 오십여 세 정도로 보이는 노인은 틀림없이 백 년 전 무림 십대기인 중의 일 인인 만독제군 필적혈이었다. 학운기는 언젠가 주걸신개로부터 전대(前代) 고인(高人)들의 생김 새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기억해 낸 것이다. 만독제군은 실혼복면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그들을 자세히 살 피고 있었다. 한창 살피고 다니던 그가 갑자기 한 실혼복면인을 툭 걷어찼다. "이 녀석은 필요 없다." "예." 그의 옆을 따라다니던 한 청의인이 대답을 하더니 품속에서 조그 만 흑색 병을 꺼내서 그 실혼복면인의 몸 위에다 검은색의 독(毒)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사르르륵……! 그 실혼복면인의 몸은 순식간에 한 줌의 물로 화해 버리고 말았 다. 그러한 것을 옆눈으로 살펴보고 있던 학운기는 내심 치를 떨지 않 을 수 없었다. '악독한 자들 같으니라고! 시신마저도 화골독(化骨毒)으로 녹여 버리다니…….' 만독제군이 학운기의 곁에 오기 전까지 두 명의 실혼복면인이 그 런 식으로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드디어 만독제군의 발이 그의 몸 앞에서 멈춰졌다. "음, 이 놈도 조금……." 만독제군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학운기의 몸을 몇 번 걷어찼 다. "이번에는 숫자가 워낙 적으니 이 정도라도 써야겠군." 그는 다시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다음의 실혼복면인 곁으로 다 가갔다. 학운기는 내심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 내가 너무 힘없는 모습을 했나 보군.' 그의 등줄기는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만독제군은 그 다음으로도 세 명의 실혼복면인을 더 처치해 버렸 다. "자, 모두들 옮기도록 하여라." "예." 만독제군의 명령에 청의인들이 위맹하게 대답을 하더니, 실혼복면 인들을 옆구리에 끼고는 옆으로 뚫린 조그만 동굴 속으로 들어갔 다. 삼십여 장쯤 들어갔을까? 학운기는 도저히 참기 어려운 악취를 맡았다. '이것은 시신(屍身)이 썩는 냄새가 아닌가? 그것도 생살이 썩는 것 같은데… 이들은 도대체 무슨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있단 말인가?' 악취는 갈수록 더 심해졌다. 찰나 확 끼쳐 오는 더운 바람과 함께 더욱 독한 악취가 풍겨 나왔 다. 학운기는 그 악취에 하마터면 구토를 할 뻔했다. 그를 끼고 가던 청의인이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반경이 오십여 장도 넘는 거대한 석실이었다. 석실에는 약 육백 명 정도의 시신이 뒹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시신(屍身)들이 아니라,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었다. 청의인들은 끼고 들어온 실혼복면인들을 줄을 맞춰서 반듯이 눕혀 놓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학운기는 청의인들이 문을 닫고 나가 버리자 즉시 일어나서는 실 혼복면인들을 살펴보았다. 반듯이 누워 있는 실혼복면인들은 잔잔하게 경련을 일으키고는 있 었으나 숨소리만은 매우 평안하게 들려 왔다. '음, 도대체 저들의 몸에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기에 이토록 살 썩는 냄새가 진동하지?'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먼저 놓여 있던 한 실혼복면인의 옷 을 들추어 보았다. "앗! 이… 이것은……." 그의 입에서는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고, 눈은 화등잔만하게 커 졌다. 아, 실혼복면인의 몸에서는 좁쌀만한 하얀 구더기들이 들끓고 있 는 것이 아닌가? 구더기들은 그들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피를 빨면서 뼈를 갉아먹 고 있었다. 그래도 실혼복면인들은 잔잔하게 경련만을 일으키고 있을 뿐, 신 음 소리 하나 내뱉지 않고 있었다. 구더기들은 싱싱한 살 냄새를 맡았는지 방금 들어온 실혼복면인들 에게로 스물스물 기어오고 있었다. 학운기는 지금 그 구더기들의 정체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 후 그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부골흡혈저! 맞아, 바로 그것이야!" 부골흡혈저(腐骨吸血 )!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가 이토록 놀란단 말인가? 그것은 오직 산 사람의 몸에서만 생식(生殖)한다는 독충(毒蟲)이 었다. 그것의 번식력은 엄청나서 한 마리를 사람의 몸에 주입시키면 한 달 후 몇 천 마리로 불어나 사람 하나 정도는 며칠 만에 먹어 치 워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백 일 정도가 지나면 무서운 독공(毒功)을 익히는 데에 이 용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부골흡혈저를 이용해 혈저시골독공(血 屍骨 毒功)을 익힌단 말인가?' 혈저시골독공! 그것은 한 마디로 천하제일독공이라 할 만하였다. 그것에 약간 스치기만 해도 한 줌의 흑수(黑水)로 변해 버리는 것 이었다. 한참을 경악과 분노로 생각을 굴리던 학운기는 품속에서 천으로 조심스럽게 싼 것을 꺼내었다. 그 속에는 경혼방에서 네 가지 절독에 중독되어 그것을 치료할 때 빠진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는 짧게 끊었다. "미안하오. 당신들도 이렇게 처참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한시라 도 빨리 죽는 것을 원할 것이오. 그럼 저승에 가서나마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오." 그는 실혼복면인들에게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짧게 끊은 머리카 락을 그들에게 휙 뿌렸다. 머리카락은 정확히 한 사람에게 하나씩 적중되었다. 순간 그것에 적중된 실혼복면인들의 몸이 거센 경련을 일으키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흑수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부골흡혈저들도 그들과 함께 흑수로 변해 버리는 것을 면치 못하 였다. 학운기는 그 독수(毒水)들이 또 다른 곳에 이용되지 못하도록 삼 매진화로 완전히 태워 버렸다. 석실 안은 매캐한 독연(毒煙)이 한 치 앞도 분간치 못할 정도로 꽉 차 버렸다. 그가 모든 것을 마치고 막 석실 문을 부수려고 공력을 끌어올렸을 때 돌연 석실 문이 열리더니 경악(驚愕)의 탄성이 들려 왔다. "앗!" 석실 바깥에는 십여 명의 청의인들이 나무통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이 석실에서 나오는 독연을 보고 놀라 도망치려는 순간, 학운 기의 손이 번뜩했다. 그들은 모두 인후혈(咽喉血)에서 피화살을 내뿜으며 비명도 지르 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그들이 들고 왔던 나무통에는 실혼복면인들에게 먹이려고 가져온 것인지 미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학운기는 나뒹굴어진 그들의 시체를 한 번 쳐다보고는 즉시 밖으 로 뛰쳐나갔다. 석실에서 빠져 나간 독연이 그가 처음 들어왔던 동굴의 광장에까 지 이르렀는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그가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면서 옆으로 뚫린 동굴에서 막 빠져 나가려 할 때, 삼십여 명의 청의인들이 막 들어오려고 하였다. "멸겁－!" 학운기의 입에서 위맹한 폭갈이 터져 나오며 장심에서는 녹색의 기류(氣流)가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뻗쳐 나갔다. "아악!" "으악!" 삼십여 마디의 처절한 단말마가 무더기로 들리면서 청의인들의 몸 은 가루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적이다! 적이 침입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면서 백여 명의 청의인들이 동굴 속의 광 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학운기는 이미 가슴에서부터 진한 살심(殺心)이 솟아오르고 있었 으므로 지체하지 않고 그들에게로 덮쳐 갔다. "절혼(切魂)－!" 쾅－ 콰르릉－! "으악!" "아악!" 그들은 학운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오직 처절한 단말마만을 터 뜨리며 저승으로 갈 뿐이었다. 순식간에 백여 명의 청의인들이 이십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학운기가 다시 그들에게 덮쳐 가려는 순간. "멈춰라!" 카랑카랑 하면서도 위맹스러운 폭갈이 터지며 만독제군이 나타났 다. 그의 곁에는 십여 명의 현의노인(玄衣老人)들이 서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만독제군이 짙붉은 살기(殺氣)를 이글거리며 그에게 서서히 다가 갔다. "후후… 염라대왕." 청아한 목소리의 짤막한 한 마디.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 그것은 오히려 공포감을 더해 주는 것이 었다. 만독제군도 흠칫 놀라는 듯했다. "흐흐… 어린 녀석이 제법이구나. 하지만 이 곳에 들어온 이상 네 녀석은… 흐흐……!" 그는 음산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연스럽게 오른손으로 턱을 만졌 다. "후후… 그 따위 절혼무형독으로 본인을 어떻게 할 수 있겠소?" 잔뜩 조소가 어린 음성이었다. 순간 만독제군은 흠칫 놀라면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 그렇다면 네녀석은 피독주(避毒珠)를 가지고 있단 말이냐?" "후후후… 본인이 하찮은 보주(寶珠)를 믿고 객기를 부리는 것 같 소?" 만독제군의 얼굴이 더욱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어린 네가 벌써 만독불침(萬毒不浸)의 몸을 이루었단 말이냐?" "후후… 그런 것 같소?" 만독제군의 눈에서 다시 검붉은 살기가 뻗쳐 나왔다. "흐흐… 어린 녀석이 제법이구나. 하지만 네가 본좌에게 걸려든 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그는 말을 하면서 십여 명 현의노인에게 턱짓을 했다. "흐흐… 네녀석은 나의 제자들이 펼치는 쇄혼독진(碎魂毒陣)을 상 대해 보아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확히 열두 명의 현의노인이 학운기의 몸을 빙 둘러쌌다. 찰나 그들의 몸에서 검붉은 연기가 피어 나오는가 싶자, 학운기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즉시 품속에서 몇 올의 머리카락을 꺼내 들었다. '후후… 너희들이 독을 펼친다면 본인도 너희들이 선사한 독으로 상대해 주겠다.' 그는 의미심장한 고소(苦笑)를 흘리면서 천리지청술을 극도로 끌 어올렸다. 순간, 그의 귀에 미세하지만 어떤 질서를 포함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퍽－ 퍽－! 현의노인들이 몇 번의 독장(毒掌)을 펼쳤지만 모두 그의 호신강기 에 퉁겨 나가고 말았다. '후후… 쇄혼독진이라 해서 무서운 것인 줄 알았더니, 단지 사술 (邪術)을 가미한 것이구나. 그렇다면…….' 그의 입가로 고혹적인 미소가 떠오름과 동시에 두 손이 쫙 펼쳐졌 다. "윽!" "억!" 십여 마디의 묵직한 신음이 들려 오며 독연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 렸다. 강철보다도 단단한 머리카락들은 현의노인들의 호신강기를 뚫고 모두 몸에 적중한 것이었다. "앗!" 만독제군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때 현의노인들의 몸은 이미 독수(毒水)로 화하고 있는 중이었 다. "네… 네놈이 독인(毒人)이었을 줄이야……." 학운기가 고소를 흘리며 서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후후… 당신은 내가 독인으로 보이오?" "아니다, 아냐. 독인이 아니라면 쇄혼독진에서 도저히 살아 나올 수 없어. 절대로……." 그는 넋을 잃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학운기의 오른손이 번뜩였다. "후후… 이제 당신도 제자와 부하들의 뒤를 따라가 보시오." 만독제군은 경황 중에서도 무형의 지력(指力)이 뻗쳐 오자 황급히 몸을 피했다. "윽!" 그러나 지력은 사혈(死穴)만을 간신히 벗어났을 뿐, 그의 어깨에 다 구멍을 뚫어 놓고 말았다. "어린 녀석이 보자보자하니까 영 버릇이 없구나." 만독제군이 갑자기 한 소리 호통을 치며 학운기에게 덮쳐 왔다. 쾅－ 콰르릉－! 요란한 굉음이 들리며 동굴 속은 순식간에 독연(毒煙)과 먼지로 자욱하게 뒤덮여 버렸다. "크흐흐흐… 네녀석이 감히 나의 동부(洞府)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만독제군은 계속 중얼거리면서 덮쳐 왔다. 펑－! 쾅－! 그러나 그는 독연과 먼지 때문에 약간의 이득(利得)을 보고 있을 뿐 진실한 무공으로는 학운기의 십초지적(十招之敵)도 되지 않는 상대였다. 십여 초가 지나자 그는 동굴 벽까지 몰려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을 잃고 말았다. "후후… 저승에 가면 좋은 일을 하도록 하시오." 학운기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그에게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일 장을 퍼부었다. 쾅－ 콰르릉－! 동굴에 무너질 듯한 폭음이 울렸다.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앗! 이 자가……." 학운기는 흠칫 놀란 표정을 떠올렸다. 만독제군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약간의 혈흔만이 남아 있을 뿐, 있 어야 할 그의 시체는 간 곳이 없었다. '음, 그 자의 공력으로 보아서 시체는 남겼을 텐데…….' 학운기는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급히 그가 기대었던 벽으로 가 보 았다. "앗! 이 곳에다 비밀 통로를……." 그는 깜짝 놀라면서 급히 동굴 벽의 한쪽을 눌렀다. 소리도 없이 동굴 벽이 열리면서 조그마한 통로(通路)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음, 그 자가 비록 다른 십대기인에 비해서 무공은 약하지만 그의 독술(毒術)은 오히려 무공보다 더 큰 해독(害毒)을 줄 텐데…….' 그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호신강기를 돋우고는 즉시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동굴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고, 미로처럼 여러 군데로 뚫려 있 었다. 학운기는 즉시 천리지청술을 전개했지만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 려 오지 않았다. '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하지만 다음 번에 만나면…….' 그는 이를 악다물면서 만독제군을 추격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다시 먼저의 동굴로 돌아왔다. 동굴의 광장에는 처참하게 나뒹구는 청의인들의 시체만이 있을 뿐, 살아남았던 이십여 명의 청의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음, 이러한 곳은 다시는 사용치 못하도록 부숴 버려야겠구나.'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막강한 장력을 펼쳐 석실과 동굴을 완전히 부 숴 버렸다. 쾅－ 콰르릉－! 동굴은 커다란 굉음을 울리면서 곧 붕괴되기 시작했다. 학운기는 황급히 몸을 날려 동굴을 빠져 나왔다. 동굴 속에 설치된 독진(毒陣)과 기관매복들은 그에게 어떠한 타격 도 주지 못했다. 동녘에서는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학운기는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는 몸을 날렸 다. 정녕(丁寧). 감숙(甘肅)과 섬서(陝西)와의 접경에 있는 꽤나 커다란 시진(市 鎭)이다. 학운기는 지금 정녕성(正寧城)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만독제군의 동부(洞府)가 있는 산인 녕하(寧夏)의 하란산(賀 蘭山)을 떠나서 이 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시간은 이경에 접어들 무렵이었으나 정녕성은 매우 흥청거리고 있 었다. 식사를 하려고 주루(酒樓)를 찾던 학운기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비쳐 왔다. '아니? 제갈형이 아닌가?' 제갈소웅은 한창 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사람들의 몸을 스치면서 학운기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후후… 제갈형은 아직도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했구나.' 이 때 학운기는 귀공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갈소웅이 그의 앞에 오더니 다른 사람에게 밀린 것처럼 그에게 부딪쳐 왔다. "형장, 미안하오." 제갈소웅은 그에게 사과를 하면서 아무도 느끼지 못할 정도의 빠 른 속도로 그의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순간 무엇인가 꺼내 들고 다시 빠져 나오던 제갈소웅의 손이 학운 기의 손에 덥석 잡혀 버렸다. "앗!" "엇!" 두 마디의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오며 학운기는 제갈소웅의 손을 얼른 놓아 버렸다. 제갈소웅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학운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제갈형이 여자였단 말인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저히 여 자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부드러운 손과 나의 단전에서 일어나 려던 현상으로 보아서는…….' 그는 한참 생각을 하다가 빙그레 웃으면서 제갈소웅을 바라보았 다. "후후… 제갈형은 아직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였소?" 제갈소웅은 아직도 그의 품속에서 꺼낸 비단 주머니를 멍하니 들 고 서 있다가는 그의 물음에 흠칫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다… 당신은 누구요?" "하하…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합시다." "좋소." 제갈소웅은 비단 주머니를 그에게 던져 주고는 앞장 서서 걸어갔 다. 학운기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곧 화려한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주루의 이층은 손님들로 꽉 차 있었으나, 주루 같지 않게 매우 조 용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문사(文士) 차림이었다. 학운기는 제갈소웅의 뒤를 따라 층계를 오르면서 얼굴을 제갈소웅 과 처음 만났을 때의 누리끼리한 모습으로 바꾸었다. 제갈소웅은 자리를 찾아 앉으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 랐다. "앗! 학형이 어떻게……." "하하… 제갈형, 아까는 소제가 잠시 변장을 했었소." "아,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순식간에……." 이 때 점원이 그들 옆에 서서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학운기 는 몇 가지 식사를 겸한 안주와 술을 시켰다. "하하… 그런데 제갈형은 이 곳에 어떻게 왔소? 그리고 그 버릇은 왜 버리지 못하고……." 순간 제갈소웅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졌다. "학형, 소제가 그런 짓을 하는 것은……."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학운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학형은 요즘 새로이 나타난 두 명의 신투(神偸)에 대해서 알고 있소?" "제갈형은 의협신투(義俠神偸)와 무영신투(無影神偸)를 말하는 것 이오?" "그렇소, 한데 학형은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글쎄요? 의협신투는 부자의 돈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무영신투는 무공비급(武功秘 )만을 훔쳐본다는 극히 평범 한 것만 알고 있을 뿐…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해 뭐라고 말 할 수가 없군요." "으음……!" 제갈소웅은 한참을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학운기의 뇌리로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제갈형이 혹 그들 중의……." "그렇소." "제갈형은 의협신투겠군요?" 제갈소웅이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마침 점원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학형, 소제는 오늘 마음껏 취해 보고 싶소. 혹 오늘 내가 무슨 실수를 하더라도 이해해 주기 바라오." "하하… 제갈형, 실수라뇨? 소제도 오늘은 취하고 싶으니, 우리 한 번 마음껏 마셔 봅시다." "하하… 역시 학형은 영웅이오." 그들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제갈소웅은 몇 잔 마시지도 않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아름 답게 보이기조차 했다. 학운기가 한 잔의 술을 마시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한데, 제갈형은 무영신투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제갈소웅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소제는 그가 누구인지 꼭 한 번쯤은 만나고 싶소. 그가 비록 남의 무공비급을 흠쳐보았지만, 그에게도 분명히 말 못할 사 정이 있을 것이오." 학운기는 제갈소웅의 자기 변명 같은 소리를 듣고는 문득 호기심 이 생겨났다. "제갈형은 어째서 그런 일을 하게 되었소?" 제갈소웅은 두 잔을 연거푸 들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소제가 무공을 익히고 강호에 처음 나왔을 때, 호남성(湖南省)에 는 극심한 한발(旱魃)이 닥쳤소. 가난한 양민들은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어 갔지요. 그런데 부자라는 작자들은 그런 처참한 상황을 보면서도 매일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서 히히덕거리고 있었 소. 소제는 그것을 보고 결심을 했소. 저 사람들의 돈을 훔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자고 말이오. 그리고 그 결심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오." 그는 말을 마치고는 다시 한 잔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학운기도 그의 말을 듣고는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어서 연거푸 몇 잔을 마셨다. "자… 제갈형, 이제 그만 가서 쉬도록 합시다." "하하… 학형, 무엇이 걱정이오? 절대신룡과 의협신투가 있는데 누가 감히 뭐라고 하겠소?" 제갈소웅은 취한 듯 목소리가 매우 컸다. 그의 입에서 제갈신룡과 의협신투라는 말이 나오자, 주루 안에 있 던 몇몇 무림인들이 놀라운 눈초리로 그들을 주시했다. "하하… 제갈형,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마시면 몸에 해로울까 봐서 그러는 것이오. 자, 어서 갑시다." 학운기는 말을 하면서 제갈소웅을 끌다시피 해 밖으로 나왔다. 정녕성(丁寧城)의 객점(客店)들은 어쩐 일인지 모두가 만원(滿員) 이었다. 그들은 몇 군데를 뒤져서야 겨우 방 하나가 남아 있는 객점을 찾 았다. 제갈소웅이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학운기가 그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제갈형, 왜 그러시오? 혹시 속이 불편해서……." "아… 아니오. 소제는 이제까지 혼자만 자 버릇해서 누구하고 함 께는 못 자는 성미요." "하하… 제갈형은 옥매하고는 정반대군요. 하하……!" 제갈소웅의 눈에 질투의 빛이 순간적으로 비쳤다가는 사라졌다. "아니? 학형, 옥매가 누구요?" 그들은 말을 하면서 어느 새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하하… 소제가 알고 있는 소녀요." 학운기의 말에는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학형은 그녀와 매우 가까운 사인가 보구려?" "그렇소. 소제와는 장래를 약속한 사이요. 언제 제갈형에게 그녀 를 소개해 주겠소." "고맙소." 제갈소웅의 짧은 한 마디는 왠지 무뚝뚝했다. 학운기는 그러한 것을 채 의식하지 못하고는 침상에 벌렁 드러누 웠다. 그는 머뭇머뭇 망설이고 있는 제갈소웅을 바라보았다. "아니? 제갈형, 뭐하시오? 지기(知己)와 한 침상에서 자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소?" 제갈소웅이 침상으로 다가왔다. "학형은 정말 소제를 지기(知己)로 생각하고 있소? 이 하찮은 좀 도둑을 말이오?" "제갈형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럼 소제가 이제까지 제갈형에게 위선으로 대해 왔단 말이오?" "아… 아니오. 소제가 실언을 했나 봅니다." 제갈소웅은 말을 하면서 무안함을 얼버무리기라도 하듯이 침상에 몸을 눕혔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왠지 어색했다. 학운기는 문득 그를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하… 제갈형은 꼭 여자 같구려." 그는 말을 하면서 제갈소웅의 몸을 꼭 껴안아 버렸다. "학형, 이러면 안 돼……." 제갈소웅은 날카롭게 소리치면서 학운기를 거세게 밀쳐 버렸다. 학운기는 그를 껴안는 순간, 뭉클한 감촉을 느끼고는 아차 싶었 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그의 단전에서는 거센 양력(陽力)이 솟 구쳐 오르고 있었다. 순결한 소녀를 접했을 때는 그만큼 색단의 효력이 급작스럽게 발 작하는 것이었다. "으으, 제갈형은 진짜로 여자였구려." 그의 얼굴은 어느 새 붉게 달아올랐고, 눈에서는 정염(情炎)이 이 글거리고 있었다. 제갈소웅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서 그를 밀치고 침상 밖으 로 뛰쳐나갔다가 그의 이상한 표정을 보고는 겁이 덜컥 났다. "학형……." "으으… 제갈 낭자, 어서 나가시오. 여기 있다가는 무슨… 으으… …!"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는 신음만을 토해 냈다. 제갈소웅은 두려운 마음에 밖으로 나가려다가는 그의 괴로운 모습 을 보고는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이상하군. 학형은 꼭 미약에 중독된 것 같은데 나는 아무렇지 않 은…….'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품속에서 옥병을 꺼내더니, 두 알 의 환약을 그의 입 속에다 넣어 주었다. 그러나 학운기의 몸은 오히려 더욱 붉게 물들어 갔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자신의 옷을 북북 찢어 버렸다. 균형 잡힌 그의 나신(裸身)이 드러났다. 제갈소웅은 얼굴을 도화빛으로 물들이며 황급히 뒤로 몸을 돌려 버렸다. "으으……!" 그녀의 등 뒤에서는 계속 처절한 그의 신음이 들려 왔다. 그 신음 소리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제갈소웅은 지금 심한 갈등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 아버님이 제조하신 선령단(仙靈丹)이 효과가 없으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녀는 괴로운 표정으로 학운기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신음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몸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저대로 놔 두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안 되어서 죽을 것 같고… 그렇다고 정혼자가 있 는 사람을…….'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다시 한 번 그를 쳐다보았다. "앗!" 그녀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학운기의 입에서 한 줄기 붉은 선혈이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 가? 이제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그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즉시 온몸의 혈맥이 파열되어서 죽어 버 릴 것이다. 제갈소웅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는 드디어 결심을 한 듯 가볍게 지풍(指風)을 날려 촛불을 껐 다. 그녀의 옷이 한 껍질씩 벗겨졌다. 옷을 벗는 그녀의 손은 간간이 떨리고 있었다. 곧 그녀의 현란한 나신(裸身)이 드러났다. 터져 버릴 듯이 풍만한 몸매였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눈이 부셨다. 사슴을 닮은 듯 애련하게 뻗은 목줄기를 타고 내려와서 급작스럽 게 솟아오른 두 육봉(肉峰)까지의 부드러운 선과 우윳빛 살결은 같은 여인이 보아도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육봉(肉峰)에 달린 연분홍빛 앵두는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 다. 그 아래로 가느다랗게 흐르다가 유연하게 넓어지는 허리와 둔부의 선은 그야말로 혼을 앗아갈 정도였다. 둔부 위의 부드럽고도 하얀 살결은 얼굴을 꼭 파묻고 싶을 정도로 포근한 느낌까지 주고 있었다. 신비 계곡의 방초(芳草)들은 갑작스런 바깥 구경 때문인지 연신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아래로 곧게 쭉 뻗은 두 옥교는 미의 절정(絶頂)을 이루고 있 었다. 몸을 돌린 그녀는 얼굴로 손을 가져가더니 쓱 문질렀다. 순간 어두운 방을 환하게 밝힐 듯한 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원래 그녀는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인피면구는 너무나도 얇고 세밀하게 만들어져서 얼굴 표정까지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묶어진 머리마저 풀어 헤치고는 천천히 침상 위로 올라갔 다. 학운기는 미미한 경련만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그의 입에 흘린 피를 닦아 주는 순간, 그가 어디서 힘이 생겨났는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꼭 껴안아 버렸다. "헉! 안……." 그녀는 순간적으로 놀라면서 그의 몸을 밀치려고 했으나 이미 그 의 억세게 조여진 팔에서 빠져 나오기는 불가능했다. "헉헉……!" 학운기는 순결한 여체를 접하자 생기(生氣)를 찾은 듯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음……!" "으음……!" 그들의 자세는 어느 새 바뀌어 있었고,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 을 꼭 덮고 있었다. "으음……!" "흐음……!" 고혹적인 비음이 방 안을 울렸다. 학운기의 손은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그녀의 전신을 애무하 고 있었다. 그에게 옴짝달싹할 수 없이 몸을 짓눌린 제갈소웅의 눈에서는 눈 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꿈에서조차도 상상치 못했던 변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신비스러운 눈을 보고 방심(芳心) 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 때는 그를 낭군으로서 생각지도 않았었 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떠나고 나자 허전해진 마음을 느끼고는 자신 이 혹시 그를 사랑하지나 않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오늘 또 처음과 똑같이 만나자, 왠지 푸근하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상황에서, 더구나 정혼자가 있다는 그의 말을 듣 고 난 후에 이십 년 동안이나 곱게 지켜 왔던 순결을 바친다는 것 은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지만 참기 어려운 고통인 것만은 분명했 다. "으으음……!" "음……!" 슬픔에 잠겨 눈물만 흐르던 그녀도 마침내는 그의 집요하고도 끈 질긴 애무에 정복을 당했다. 순간 그녀는 하체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자지러질 듯 한 비명을 토해 냈다. "아윽!" "흡!" 학운기는 그녀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이 자신의 할 일만 을 계속하고 있었다. "으흡!" "으윽… 흐으윽……!" 그녀의 입에서는 계속 고통스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듯하던 고통은 서서히 쾌감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마치 구름을 밟고 하늘을 나르는 듯했다. 어느 새 그녀의 백옥보다도 하얀 두 손은 그의 목을 죽으라고 껴 안고 있었다. "으으흡……!" "으흐윽… 흐흐흑……!" 그녀는 이제 슬픔의 눈물이 아닌 환희의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슬며시 들여다보던 해맑은 얼굴의 달님도 부끄러운지 구름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방 안에서는 계속 뜨거운 열풍(熱風)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흐으흑… 흐흐흑……!" 비명과 신음, 그리고 교성(嬌聲)과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메아리 치길 얼마나 했을까? "으음……!" "허억!" 두 사람은 김 빠지는 소리와 함께 거센 전율을 일으키더니 축 늘 어져 버리고 말았다. 순간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세 명의 흑영(黑影)이 고양이 걸 음으로 살며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흐흐……!" 그들의 입에서는 나직한 괴소(怪笑)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 第 6 章 사랑의 대화(對話) ====================================================== 방 안으로 들어온 흑의인들은 음산한 괴소를 흘리면서 축 늘어져 있는 그들에게 지력(指力)을 날려 십여 곳의 요혈을 점해 버렸다. 순간 학운기는 묵직한 통증에 눈을 떴다. 그는 흑의인들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면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 다. "앗!" "엇!" 세 마디의 각기 다른 경악의 탄성이 터지며 흑의인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마치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십여 군데의 요혈을 짚이고도 정신을 차렸을 뿐만 아니라, 몸까지 움직이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학운기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를 울렸다. "친구들은 누구요?" 그는 말을 하면서 급히 운기를 하여 고갈된 진력을 보충했다. "아… 아니오. 우리가 술김에 잘못 찾았나 봅니다." 그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면서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멈추시오!" 학운기의 싸늘한 한 마디에 그들은 미처 발을 떼지도 못하고 제자 리에 꼿꼿이 서 버렸다. "후후… 친구들은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믿겠소?" 이제 그의 진력은 거의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이 때 소란스런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십여 명의 험상궂은 인물 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엇!" 그들은 방 안의 사태가 의외인지 탄성을 토했다. 처음의 세 흑의인은 그 때까지 학운기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 고 자신들의 응원군까지 오자 용기를 얻었는지, 다시 몸을 돌리고 는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흐흐… 하마터면 네녀석의 교묘한 간계(奸計)에 속을 뻔했구나." 밖에 서 있던 자들도 그들의 태도에 안심을 했는지 모두들 방 안 으로 들어왔다. 털썩－ 털썩－! 몇 번의 둔탁한 소리가 들리면서 그들은 모두 땅바닥으로 고꾸라 지고 말았다. 학운기는 무형의 지력(指力)을 날려서 그들의 혼혈(昏穴)을 짚고 는 흡인공을 이용하여 문을 닫았다. 그는 옷을 입으려고 찾다가는 자신의 옷이 이미 갈가리 찢어져 있 는 것을 발견하고는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는 제갈소웅이 혼절해 누워 있었다. '휴,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약간 이불 밖으로 삐져 나와 있는 그녀의 몸을 덮어 주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앗! 이 낭자는 누구……." 언뜻 보기에는 전혀 생소한 얼굴이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제갈 소웅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는 전후 사정을 대강 짐작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할 수 없이 이들의 옷이라도 벗겨 입어야겠군.' 그는 쓰러져 있는 흑의인들 중에서 자신의 체격과 비슷한 자의 옷 을 벗겨 입었다. '음, 이 자들은 도대체 누구기에 갑자기 암습을 해 왔지? 그냥 몰 려다니는 건달들은 아닌 것 같고, 어떤 단체에 소속된 것 같은데 …….' 그는 한참 생각을 굴리다가 그 중에서 한 명의 혈도를 풀어 주었 다. 혈도를 풀린 장한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깜짝 놀랐다. "앗!" "후후… 친구, 놀라는 것은 천천히 하고 우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주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방바닥에다 가볍게 지력을 날렸다. 퍽－! 지력은 둔탁한 음향을 내면서 여지없이 방바닥에다 한 자 깊이의 구멍을 뚫어 놓고 말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장한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후후… 친구, 만약 친구가 순순히 답변을 안 하면 친구의 몸 어 느 곳이 방바닥처럼 될 것이오." 학운기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장한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면 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우선, 친구가 속한 집단의 명칭부터 말해 주시오." "소인은 단지 한천보(寒天堡)의 정녕 분타 일개 수하에 불과합니 다." "그래, 그렇다면 분타주는 누구요?" 장한이 쓰러져 있는 흑의인들 중에서 사십여 세 정도의 중년인을 가리켰다. "친구는 잠시 쉬도록 하시오." 학운기는 장한의 혼혈을 점하고는 분타주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분타주는 정신을 차리고 학운기를 바라보고는 이미 모든 사태를 짐작한 듯 체념한 표정이었다. "친구는 한천보의 정녕 분타주가 맞소?" 학운기의 물음에 분타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친구는 냉면노군(冷面老君)이 무슨 단체의 당주(堂主)인지 알고 있소?" 분타주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가득 떠올랐다. "보주님이 당주라뇨?" "으음……!" 학운기는 그의 표정에 거짓이 없음을 발견하고는 무거운 신음을 뱉어 냈다. "그렇다면 친구는 무엇 때문에 본인을 암습하였소?" 분타주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순순히 털어놓았다. "얼마 전에 총단으로부터 절대신룡의 행적을 찾아 내라는 명령이 내려왔었소. 그런데 마침 수하로부터 절대신룡과 의협신투가 객점 에 투숙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그만 부질없는 공명심 때문에……." "으음……!" 학운기는 한동안 무거운 표정으로 생각에 골몰하다가는 분타주를 비롯한 흑의인들의 무공을 전폐시켜 버렸다. "자, 당신들은 이제 악(惡)의 소굴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삶을 찾 도록 하시오." 분타주를 비롯한 흑의인들은 무공을 폐지당하자 학운기를 원망의 눈초리로 싸늘하게 노려보다가는, 더 있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 음을 깨달았는지 맥 빠진 모습으로 터덜터덜 객점을 빠져 나갔다. 학운기는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제갈소웅의 혈도를 풀어 주고는 침상으로부터 몸을 돌리고 앉았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뾰족한 비명이 들려 왔다. "앗!" 이어서 슬프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흑……!" 학운기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좋을지를 몰라서 머뭇머뭇 하고만 있었다. '음, 도대체 뭐라고 사죄를 해야 한단 말인가?'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는 얼마를 더 그녀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다가는 무겁게 말문 을 열었다. "낭자, 그만 고정하도록 하시오. 낭자가 남장여인인 줄 알았다면 소생이 그런 장난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한천빙룡의 구색 내단 중 색단의 효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 해 주었다. 제갈소웅은 말을 듣고 나서 점차 울음을 그쳐 갔다. "흐흐흑… 하지만 소녀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요? 흐흑……!" "낭자, 소생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오. 그리고 소생은 어렸을 때부터 군자의 도리를 익혀 왔으므로 어떻 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소." "상공……." "자… 낭자, 그만 고정하고 옷을 입도록 하오." 제갈소웅은 자신이 아직도 알몸인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게 물 들였다. 그녀는 옷을 입으려고 급히 몸을 일으키다가는 하체에 찢어질 듯 한 통증을 느끼고는 묵직한 신음을 토해 냈다. "윽!" 학운기가 그녀의 신음에 깜짝 놀라 외쳤다. "낭자, 어디 편찮……." "아… 아니예요.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녀는 급히 몇 마디를 뱉어 내고는 옷을 주워 입었다. 학운기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모두 멈추자 서서히 몸을 돌렸다. 이 때 그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앗!" 제갈소웅이 그의 절세준미(絶世俊美)한 모습을 보고는 놀람의 외 침을 토해 냈다. "낭자, 이것이 소생의 본래 모습이오." "아, 상공께선 전혀 역용(易容)을 한 것 같지가 않던데……." "그것은 소생이 진기로써 역용을 했기 때문이었소." 제갈소웅은 그의 진기역용술에 대한 설명에 자신의 처지도 잊었는 지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녀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한데, 낭자의 본명은 제갈소웅이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소녀의 본래 이름은 제갈소연(諸葛蘇蓮)이라고 해요. 그 리고 이것이 본래의 모습이구요." 그녀는 자신의 내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녀는 무림삼방(武林三幇) 중 하나인 성룡방(聖龍幇) 방주, 성수 옥룡(聖手玉龍) 제갈휘(諸葛輝)의 무남독녀(無男獨女)였다. 성수옥룡 제갈휘는 무림 십대고수 중의 일 인으로서 약왕(藥王)으 로도 불리웠다. 그가 제조(製造)한 신약(神藥)은 어떤 병이라도 치료할 수 있었 고, 그는 그 약들을 아까워하지 않고 병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 었다. 그래서 그의 별호에 영예로운 성자(聖字)가 붙은 것이다. 학운기와 제갈소연은 침상에 걸터앉아서 정담(情談)을 나누고 있 었다. 그들 사이는 어느 새 가까워져서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정도였다. 제갈소연이 그윽한 눈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오빠, 소매는 오빠와 이런 날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린 것처럼 마 음이 설레이면서도 푸근한 느낌이 들어요." "연매, 나도 연매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매우 행복하오." 그들의 호칭은 어느 새 바꿔져 있었다. 제갈소연의 눈빛이 그의 말에 반짝 광채(光彩)를 발했다. "오빠, 그 말씀… 정말이시죠?" 그가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매는 내 말이 거짓말 같소?" 그녀가 머리를 귀엽게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소매는 정말 행복해요. 그리고 언제까지나 오빠와 이 렇게 함께 있고 싶어요." 그녀가 말을 하면서 얼굴을 살며시 그의 품에다 묻었다. 학운기가 그녀의 몸을 꼬옥 껴안았다. "연매, 나도 언제까지나 연매와 함께 이렇게 있고 싶소." 그들의 맞닿은 몸에선 뜨거운 체온이 사랑의 감정으로 승화하여 흐르고 있었다. 색단의 효력은 한 번 발생하면 열두 시진 이내에는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제갈소연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고마와요, 오빠. 소매는 오빠를 영원히… 영원히 사랑할 거예 요." "연매, 나도 연매를 영원히 사랑하겠소. 무림의 일이 모두 끝나면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도록 합시다." "오빠……." 그녀가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조그맣고 도톰한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감겨진 그녀의 눈가에는 행복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학운기의 두툼한 입술이 살며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순간 그들은 따뜻하고 달콤함을 맛보면서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흐름을 느꼈다. 그러한 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의 몸이 살며시 떨어졌다. 제갈소연이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데… 오빠, 오빠와 장래를 약속한 여인은 모두 몇 명이나 되 죠?" 학운기는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에 내심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 다. "연매, 그것은……." 제갈소연이 희고 가녀린 손으로 그의 입을 살짝 막았다. "오빠, 소매는 그녀들과 친하게 지낼 자신이 있으니까 말씀해 주 세요." 학운기는 그녀가 간곡히 부탁하다시피 하는 말에 차마 말을 안 해 줄 수가 없었다. 이어서 그는 애옥지와 호운옥 등과의 관계(關係)를 설명해 주었 다. 그가 애옥지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녀도 애옥지의 애절한 처지 에 슬픔을 느꼈는지, 눈가에 한 방울의 영롱한 이슬이 맺혔다. "그리고는 또 없나요?" "그것은……." 원래 거짓말이라곤 모르고 살아온 학운기였는지라, 그녀의 질문에 당황함을 보이고 말았다. 민감한 여심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오빠, 말씀해 주세요. 벌써 두 명이나 되는데, 몇 명 더 있다 해 서 질투하지는 않을게요." 학운기는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동방림의 애달픈 기다림과 황보설과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소연은 그의 말을 모두 듣고 나서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 라보았다. "오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매도 그녀들과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이예요. 림 동생이 봄이면 울적해 하더니, 이제 보니 오빠 때문이었군요? 그리고 설 동생한테도 잘 대해 주세요. 그녀는 겉 으로는 쌀쌀해도 속마음은 매우 따뜻한 소녀예요." "연매, 그것은……." "오빠, 아무 말씀 마세요. 소매는 절대로 질투하지 않을게요. 그 리고 언젠가 아버님께 들은 말씀으로는, 한천빙룡의 색단을 복용 한 사람은 최소한 다섯 명 이상의 아내를 얻어야만이 변을 면할 수 있대요." 학운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연매, 변이라니? 무슨 말이오?" 제갈소연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몰라요. 오빠는… 지금 소매는 아파 죽겠단 말이에요. 이대로 오 빠하고 열흘만 같이 산다면 아마도 소매는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 거예요." 학운기도 그녀의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 다.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그를 매섭게 쏘 아보았다. "오빠는 또 그 색단의 효력이라는 이유로 다른 소녀들을 농락할 거예요?" 학운기는 그녀의 갑작스런 앙칼진 목소리에 당황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연매, 그것은 지금 내가 한 가지 심법(心法)을 창안하고 있는데 … 그것이 완성되면 그러한 일은 없을 것이오." 제갈소연은 그가 천살마제를 가볍게 물리치는 것을 보고 그가 천 하제일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의 천성(天性)을 확실히 모르고 있는지라 그가 새로운 심법을 창안한다는 것에 대하여 매 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암팡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심법이 언제쯤 완성될 것인데요?" "그것은 늦어도 석 달 후면 완성될 것이오." 그녀는 내심으론 그토록 짧은 시간에 새로운 심법을 창안한다는 데 대하여 매우 놀랐으나 겉으로는 계속 쌀쌀했다. "그렇게나 늦게요? 하여튼 오빠는 그 심법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 다섯 명 중 꼭 한 명을 꼭 데리고 다니세요. 만약 그렇지 않고 또 다른 소녀를 울렸다가는 소매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학운기는 그녀의 다짐에 내심 난감함을 어쩔 수가 없었다. "연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매우 위험해서 연매들을 데리고 다닐 수가……." "그렇다면 또 다른 소녀를 울리겠단 말이에요?" "……." 그들 사이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제갈소연이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그를 바라보다가는 살며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어 왔다. "오빠, 소매의 말에 화가 나셨어요?" 학운기가 그녀의 검고 윤기(潤氣) 있는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 다. "아니오. 내가 어찌 화를 낼 수 있겠소." "오빠, 소매는 단지 오빠를 다른 사람에게 뺏기기 싫어서 그랬어 요. 소매는 이제 오빠가 없이는 한시도 못 살 것 같아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희디흰 가녀린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껴안아 왔다. "연매, 사랑해……." "오빠……." 숨막히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입술이 조금치의 틈도 없이 꽉 밀착 되었다. 그들은 곧 그 자세로 침상 위로 쓰러졌고, 이내 거치장스러운 것 들이 모두 벗겨졌다. 방 안에는 또 한 차례의 거센 춘풍(春風)이 휘몰아쳤다. 이번의 정사(情事)는 조금 전의 어쩔 수 없이 했던 것과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뜨거운 사랑이 확인되고 난 후의 정사는 더욱 거세었다. 제갈소연도 이번에는 기쁜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황홀과 환희의 표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정사는 작은 죽음이기 때문에……. 그러한 표정과 마음은 학운기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밝아 올 무렵에야 그들의 사랑의 행위는 끝났고, 둘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들의 잠든 표정에는 행복감이 가득하였다. 학운기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밝은 태양이 중천(中天)에 떠 있 을 때였다. 옆에서는 제갈소연이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잠든 모습은 천사의 그것처럼 순진무구하게까지 보였다. 학운기는 일어나서 옷을 주워 입고는 이불 사이로 살짝 빠져 나온 그녀의 알몸을 잘 덮어 주었다. 그녀는 몸을 뒤척이는 듯하다가 부시시 눈을 떴다. "오빠, 벌써 일어나셨어요?" 학운기가 밝은 미소를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벌써가 뭐요? 점심 때가 다 되었는데……." "그래요?" 그녀는 매우 놀란 듯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 다. "윽!" 그녀는 하체의 참기 어려운 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이 알몸임 을 깨닫고는 황급히 이불로 몸을 감쌌다. 학운기도 그녀의 알몸을 보고는 얼굴을 붉히는 듯하다가는 슬며시 몸을 돌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제갈소연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 다. "오빠, 배고파요. 어서 식사하러 가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가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학운기가 그녀의 아랫배 쪽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연매, 많이 아프오?" "몰라요." 그녀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고는 앙칼지게 한 마디 내뱉더니 휙 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학운기는 그녀의 태도에 가벼운 미소를 짓다가는 우연히 침상을 한 번 바라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 다. 침상에는 순결을 상징하는 붉은 혈화(血花)가 흥건히 피어 있었 다. 학운기는 식사를 마치고 그 동안의 무림 동태를 알아보려고 개방 분타에 들렸다. 그는 거기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한 가지 충격(衝擊)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로서 천년무림사(千年武林史)를 주도해 온 소림사(小林寺)의 멸망(滅亡)이었다. 학운기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묵직한 쇠뭉치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무엇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소림사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제갈소연을 품에 안고서 무림사 최대의 경공술(輕功術)인 이기어 풍술(以氣馭風術)을 펼치는 그의 신형은 여전히 빛살보다도 빨랐 다. 정녕에서 숭산(崇山)까지는 천삼백여 리(里)가 넘는 먼 거리였다. 미시경(未時頃)에 출발한 그는 이경 무렵에 소림사에 당도했다. 소림사는 한 마디로 처참한 폐허(廢墟)였다. 그 웅장하던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한 모든 건물들은 화마(火魔) 의 제물(祭物)이 되어서 아직도 하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학운기는 소림사의 경내에 들어서면서 진한 피비린내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림사에는 이미 우내사존과 황보웅 등이 와 있었다. 호운옥이 그를 발견하고는 뛰어왔다. "기 오빠!" 그녀는 다른 사람의 눈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의 품으로 뛰어들 었다. 우내사존 등도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모두들 넋을 잃은 표정들이었다. 특히 혜불선승은 매우 침중한 표정으로 연신 불호만을 외우고 있 을 뿐이었다. 학운기가 침통한 표정으로 새제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노복들이 소림사로 일군(一群)의 무리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 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처참한 시신들만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승인은 없소?" "예, 모두들 처참하게… 그런데 백자(白字) 항렬 이상의 고승(高 僧)들은 모두 실종이 되었습니다." "실종이라고요?" "예." "으음……!"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갈소연은 내심 무척 놀라고 있 었다. 그녀는 우내사존은 잘 모르지만 황보웅과 동방군의 태도로 보아 그들의 신분이 매우 높으며, 학운기의 신분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높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침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골몰하던 학운기가 다시 새제갈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주존이라는 자가 폐관을 마치고 저지른 일 같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죽은 승인들의 시신에서 초절정(超 絶頂)의 무공에 당한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 영혈인공에 당한 시신은 여럿 있었습니다." "으음, 주존이라는 자가 폐관 중인데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은… 그 동안의 열세를 만회하려고 그런 것 같군요. 그렇다면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그들은 또 한 번의… 천 노야는 어떻게 생각하시 오?" "노복의 생각도 주상과 같습니다." 학운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노야라면 어디를 치겠소?" "노복이라면 무당이나 무림제일궁을 치겠는데, 마심뇌사의 성격으 로 봐서는 한 번 실패한 무림제일궁일 겁니다." "언제쯤이나 공격할 것 같소?" "납치해 간 소림 고승들을 처리하자면 빨라야 이틀은 걸릴 겁니 다." "으음, 그렇다면 내일 밤쯤 될 것 같군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내사존과 황보웅, 동방군 등은 놀라움은 금치 못했다. 특히 황보웅은 그들이 또다시 자신의 궁에 침범할 거라고 하자, 눈에서 분노의 살염(殺焰)이 뿜어져 나왔다. "천 노야는 어떻게 했으면 하오?" "선발제인지계(先發制人之計)입니다." "좋소. 본인도 동감이오. 그럼 당장 출발합시다." "주상께서는 어디를……." "한천보(寒天堡)요. 그 곳은 그들의 본거지는 아니지만 중요한 역 할을 하는 곳이 틀림없소." 그는 그 동안 겪은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학운기의 얘기를 들은 우내사존 등은 격공실혼단(激功失魂丹)과 부골흡혈저(腐骨吸血 )의 얘기를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 다. "세상에! 그토록 악랄한 자가 있다니……." 주걸신개는 시뻘건 살염을 내뿜으며 분개하였고, 혜불선승과 천기 자는 연신 불호와 도호만을 외우고 있었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들을 보다가는 제갈소연에게 눈길을 돌렸다. "연매는 지금 즉시 무림제일궁으로 가도록 하시오. 가서 경 총관 과 무림오룡에게 무림제일궁 안의 전 무인과 식솔들을 지하로 대 피시키고 그 곳을 폐쇄하도록 이르시오. 이것은 절대로 외부에서 눈치를 못 채도록 하고, 우리들이 그 곳에 갈 때까지 지하에서 꼼 짝 말고 있으라고 이르시오." 제갈소연은 그와 헤어진다는 게 죽기보다도 싫었지만, 그의 얘기 와 심각한 태도로 보아서 보통 다급한 일이 아님을 깨닫고는 고개 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오빠도 몸조심 하세요." 그녀는 한참을 그의 얼굴만 바라보다가는 황보웅 등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날렸다. "자, 그럼 우리도 출발합시다." 학운기는 황보웅을 시켜서 소림 멸망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정파 군웅들에게 소림의 뒷처리를 부탁하고는 몸을 날렸다. 한천보를 향해 몸을 날리는 학운기와 호운옥, 그리고 우내사존과 황보웅, 동방군 등은 최대의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사실 학운기는 개방의 제자를 통하여 무림제일궁에 말을 전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제갈소연의 무공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너무나 떨어지기 때문에 그녀를 떼어 놓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들 여덟 명이 한천보에 도착했을 때는 오경이 막 넘어서는 무렵 이었다. 학운기는 한천보가 바라다보이는 숲 속에 몸을 멈추고는 우내사존 등을 바라보았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손을 쓸 때 절대로 인정을 베풀지 마시오. 우리가 한천보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느냐에 따라서 소림사와 같 은 혈겁이 또 일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졀정되므로… 이 말을 꼭 명심하시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우내사존 등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의 빛이 서려 있었 다. "그들은 아마도 우리가 혈겁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전긍긍하고 있 을 거라고만 생각할 뿐, 설마 선발제인지계를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오. 하니, 여러분은 최대한으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하오." "예." "자, 그럼 갑시다." 순간 그들의 몸은 시위를 떠난 화살보다도 빠르게 한천보를 향하 여 날아갔다. "아악!" "으악!" 그들의 몸이 한천보의 담장을 넘기도 전에 두 명의 매복꾼이 학운 기의 무형 지력(指力)에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누구냐?" 펑－! 쾅－! "악!" "으악!" 밤새도록 경비를 서느라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이 비명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질렀으나, 학운기를 포함한 여덟 명의 최절정고수들에 의 하여 반항 한 번 못하고 죽어 버렸다. 순간 비명 소리를 듣고는 건물 안으로부터 수많은 인영들이 쏟아 져 나왔다. 학운기는 한 손에 묵룡검, 그리고 다른 손에는 독 묻은 머리칼을 짧게 끊어서 들고는 그들에게 덮쳐 갔다. "참마(斬魔)－!" 위맹스런 폭갈과 동시에 묵룡검은 검은 호선을 그리며 그들에게 날아갔고, 수많은 머리칼도 우박처럼 쏟아져 갔다. 찰나. "으악!" "아악!"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삼십여 명의 마도(魔徒)들이 그의 이기어검 술에 두 쪽이 나 버렸으며, 이십여 명의 마도들도 독모(毒毛)에 맞아 그대로 흑수(黑水)로 화해 버렸다. 사마도(邪魔徒)들이라면 씨를 말리겠다고 확정한 그인지라, 계속 쏟아져 나오는 마도들에게 덮쳐 갔다. 우내사존과 황보웅 등도 마도들의 잔인한 행동에 극도의 분노를 느끼고 있는지라, 닥치는 대로 살상을 하고 있었다. 쾅－ 콰르릉－! "으악!" "억!" 굉음과 처절한 단말마가 계속 들려 왔다. 이것은 싸움이 아니라 완전히 살육장(殺戮場)이었다. 특히 혜불선승과 같은 무림 최고의 고승도 소림사의 멸망에 커다 란 충격을 받았는지 살계(殺戒)를 범하고 있었다. 쾅－ 콰르릉－! "헉!" "으윽!" 그 중에서도 호운옥의 활약은 너무나도 눈부셨다. 이미 백오십 년 전 천하제일인이었던 천괴 호강민의 모든 진전을 이어받은 그녀인지라, 그녀가 가볍게 휘두르는 손에도 마도들이 픽픽 쓰러져 갔다. 펑－! 쾅－! "으악!" "아악!" 처절한 단말마와 피비린내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천보의 마도들이 거의 삼백여 명이나 죽어 갔다. "멈춰라!" 건물이 뒤흔들릴 정도의 폭갈과 함께 십여 명의 노인들이 학운기 등을 막아 섰다. 노인들 중에서 만년한굴(萬年寒窟)보다도 싸늘한 얼굴의 노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네놈들이 누구… 앗! 당신들은 우내사존과 무림성군, 그리고 중 원선협까지… 흐흐… 정파라고 자처하는 당신들이 비겁하게 이런 신새벽에 암습(暗襲)을 하다니……." 학운기가 광망(狂妄)과도 같은 살기를 내뿜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 갔다. "후후… 비겁? 당신들은 비겁하지 않아서 아미, 청성, 공래, 소림 등을 예고도 없이 쳐들어가 피로 물들였소?" 냉면 노인, 즉 냉면노군(冷面老君) 구천혈(丘天血)이 비수(匕首) 로 폐부를 찌르는 듯한 그의 살기에 흠칫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섰 다가는 이내 음산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 네놈이 아마도 절대신룡이라는 애송이인가 본데, 마침 잘 만났다." "후후… 본인도 당신을 잘 만났소." "흐흐… 그래? 네놈 때문에 우리의 계획이 차질을 빚은 것을 생각 하면 당장에 요절을 내야겠으나, 네놈의 나이가 어린 것을 생각하 여 노부가 특별히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구천혈은 왠지 싸우려 하지는 않고 무엇을 기다리는지 시간만을 질질 끌려는 눈치였다. 학운기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고소를 흘리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 다. "후후… 당신은 아마도 지연책(遲延策)을 쓰려는 것 같은데, 상대 를 잘못 고른 것 같소."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구천혈을 향하여 덮쳐 갔다. "모두 치시오." 그의 말에 따라 우내사존 등도 노인들에게 덮쳐 갔다. 펑－! 쾅－! 잠시 주춤하던 혈투가 다시 벌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천보의 악도들은 절대신룡과 우내사존의 위명 에 겁을 먹었는지, 그들의 싸움에 끼여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쾅－ 콰르르릉－! "으악!" 제일 먼저 호운옥과 싸우던 노인이 처절한 단말마를 토하며 나가 떨어졌다. 학운기는 구천혈과 다른 두 명의 노인, 이렇게 셋을 상대하고 있 었다. 원래 냉면노군 구천혈 단독으로는 학운기의 오초지적(五招之敵)밖 에 되지 않았다. 두 명의 노인이 끼여서 약간 시간을 끄는 것 같았으나, 역시 십초 지적(十招之敵)도 못 되었다. 그들은 이미 내상을 입은 듯하였다. "멸겁－!" 학운기가 다시 위맹한 장력을 뻗으며 그들에게 덮쳐 갔다. 쾅－ 콰르릉－! "으악!" "억!" 두 마디의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두 명의 노인이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순간 구천혈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그의 장력을 빌려서 도망치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역시 상대를 잘못 만났다. "쇄혼(碎魂)－!" 학운기의 입에서 싸늘한 폭갈이 터지는가 싶었을 때, 구천혈은 이 미 그의 지력(指力)에 명문혈(命門穴)을 관통당하여 피분수와 함 께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일세를 풍미하던 대마두(大魔頭) 구천혈은 그렇게 채 비명도 지를 여유도 없이 죽어 간 것이다. 쾅－ 콰르릉－! "으악!" "아악!" 우내사존 등과 싸우던 노인들도 그와 동시에 단말마를 터뜨리며 죽어 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천보의 마도들은 슬금슬금 뒤로 도망치려 하였 다. "멈춰라!" 학운기가 싸늘한 폭갈을 터뜨렸다. 찰나, 막 몸을 날리려던 그들은 굳은 듯 제자리에 멈칫 서 버렸 다. 그 중에는 벌벌 떠는 자도 있었다. "이 자들의 무공을 폐지시키시오." 학운기가 그들에게 몸을 날리며 명하자, 우내사존 등도 모두 그들 에게 덮쳐 갔다. "아악!" "으악!" 배짱 좋게 몸을 날리던 몇 명의 마도들이 피화살을 토하며 쓰러졌 다. 학운기와 우내사존 등은 약 이백 명 정도의 한천보 마도들 사이를 헤치고 다니며 그들의 무공을 전폐시켜 버렸다. "아악!" 도망치려던 마도들에게 돌아간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학운기 등은 한 식경 정도 지나자 그들의 무공을 모두 폐지시켰 다. 마도들은 무공을 폐지당하자 원망의 눈초리로 학운기 등을 쳐다보 았으나 이미 그들이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는지 라 감히 반항하는 자는 없었다. 학운기는 모든 것을 마치자 즉시 그가 표사로 변장했을 때 들어갔 던 석실로 몸을 날렸다. 석실의 입구가 있는 조그만 누각에는 십여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누구냐?" 쾅－ 콰르릉－! "으악!" "아악!" 학운기 등이 뛰어들어가자 그들은 고함을 질렀으나, 그것이 그들 의 마지막 말이었다. 학운기는 즉시 기관을 작동시켜서 암문(暗門)을 열었다. 순간 그는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를 맡고는 흠칫하였다. '음, 이 악독한 자들이 또 무슨 짓을…….'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그는 즉시 호신강기(護身 氣)로 몸을 보호하면서 안으로 뛰어들 었다. 그가 첫번째 석실의 문을 여는 순간. "앗!" "헛!" 그와 우내사존 등의 입에서 각기 다른 경악과 분노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혜불선승과 천기자의 입에서는 연신 불호와 도호만이 새어나왔다. 학운기는 경악과 분노에 몸을 떨면서 석상이 되어 버린 듯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시뻘건 광염(狂炎)의 살기(殺氣)가 줄기줄기 뻗쳐 나오고 있었다. 만약 무공이 약하거나 고강하더라도 담이 약한 사람이 그러한 그 의 눈을 본다면 그대로 황천행이 될 정도였다. 그러한 경악과 분노는 주걸신개와 새제갈, 그리고 황보웅과 동방 군도 느끼고 있었다. 순진무구하기만 하던 호운옥조차도 눈을 꼭 감고 몸까지 돌려서 석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몸은 경기 들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 석실 안의 광경… 그것은 한 마디로 처참(悽慘)! 그것이었다. 거기에는 실종되었다던 삼십여 명의 소림 승려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의 몸은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로, 온몸이 도검(刀劍) 자국뿐 이었다. 석실 안은 그들의 몸에서 흐른 피로 흥건하였다. 그들의 몸은 난창이 된 채로 무언가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약이 잔뜩 발라져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듯 가슴이 미미한 기복을 보이고 있었다. 새제갈이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 학운기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 가왔다. "주상, 고정하시고 대책을 강구하셔야……." 학운기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서서히 살기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차갑게 굳어 있었다. ====================================================== 第 7 章 분노한 기재(奇才) ====================================================== 학운기가 아직도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 주걸신개를 바라보았다. "맹 노야, 나가서 마차 다섯 대만 구해 오도록 하시오." "예." 주걸신개는 짧게 대답하고는 즉시 밖으로 몸을 날렸다. 학운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는 다시 새제갈에게로 눈을 돌 렸다. "천 노야는 무림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강시(彊屍)를 만드는 자를 알고 있소?" "앗!" 호운옥의 입에서 놀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기 오빠, 강시를 이렇게 만든단 말이에요?" "원래는 그렇지 않소. 그런데 이것은 매우 특이하고도 잔인한 방 법이오. 보통 강시를 만들려면 수십 년이 걸리지만, 이것은 단 삼 개월이면 되는 것이오." 학운기는 그녀에게 간단히 설명을 해 주고는 다시 새제갈을 바라 보았다. "주상, 백이십여 년 전에 이러한 강시가 꼭 한 번 나타난 적이 있 습니다." "그래요? 그 자가 누구요?" "예, 강시를 조종한 자는 흑살시마(黑煞屍魔) 궁유명(弓幽冥)이라 는 자입니다." 이 때 호운옥이 끼여들었다. "흑살시마 궁유명이라고요?" "그렇소." 학운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옥매도 그 자를 알고 있소?" "예, 할아버지께 가끔 들은 것 같아요. 그 자와의 약속 때문에 은 거를 하는 거라고요." "으음, 그렇다면 그 자와의 대결에서……." 호운옥이 할아버지 생각이 나는지 슬픈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학운기는 내심 마두들의 엄청난 세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 자의 강시(彊屍)도 두려운 존재인데, 그 자가 그토록 고강한 무공까지 소유했다니… 큰일이구려." 새제갈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상, 흑살시마가 고강한 무공을 소유했다니요?" "그렇소. 그 자는 천괴 노선배님 정도의 무공을 소유하고 있소." "아……!" "그 자는 무림에서 무공을 펼치지 않았었소?" "예, 그 자는 강시를 조정할 뿐 직접 무공을 펼치지는 않았습니 다. 그리고 그 자가 활동한 시기도 겨우 삼 개월 정도에 불과합니 다." "으음, 그 자까지 가세한 사마도들의 세력이라면……." 연신 불호만을 외우던 혜불선승이 학운기의 곁으로 다가왔다. "주상, 노복의 사질과 사손들은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학운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소. 하지만 회복되더라도 무공을 사 용하기는 좀 무리가 될 거요." "아미타불……!" 혜불선승은 다시 불호만을 외었다. 학운기는 그러한 그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하고는 다른 석실들 을 살펴보았다. 그가 다섯 번째의 석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앗! 이럴 수가?" 그의 경악의 외침을 듣고는 새제갈 등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석 실을 들여다보다가 역시 놀라움의 탄성을 토해 냈다. "아, 악독한 자들 같으니! 선량한 양민들까지 마공(麻功)의 제물 로 상대하려 하다니……." 석실 안에는 약 백여 명의 실혼인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모두들 무공을 모르는 건장하게 생긴 양민(良民)들이었다. 학운기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격공실혼단(激功失魂丹)에 중독이 되면 도저히 해독(解毒)할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이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 그가 한창 고심하고 있을 때 새제갈이 그를 바라보았다. "주상, 이들은 이미 구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설사 이들이 생 명을 유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들 자신이 이러한 삶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들이 사마도들의 손에 넘어간다 면… 또 어떠한 악랄한 곳에 이용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아직 살아 있는 생명들을 어찌 죽일 수가 있겠소? 더 구나 이들은 무공도 모르는 양민들 같은데……." "주상, 예로부터 독하지 못하면 영웅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그러한 삶보다도 편안한 죽음이 훨씬 행복할 것입니 다." "으음……!" 그들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 때 밖으로 나갔던 주걸신개가 이십여 명의 개방제자들을 데리 고 와서는 소림 고승들을 조심스럽게 이불로 싸서 밖으로 옮겼다. 학운기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봤자 실혼인들을 정상적으로 되돌릴 수가 없음을 깨닫고는 새제갈 등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제갈과 황보웅, 그리고 동방군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지풍을 날려서 실혼인들의 사혈을 짚었다. 그들은 모든 일을 마치자 석실 문을 봉쇄하였다. 학운기는 다음에 있는 몇 개의 석실들을 더 살펴보았으나, 아무것 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주걸신개가 제자들을 지휘하여 소림 고승들을 모두 옮긴 것 을 알고는 밖으로 나가서 지하의 입구를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 지하 석실은 졸지에 백여 명의 무덤이 된 것이다. 밖에는 이미 붉은 태양이 찬란하게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한천보는 잡일을 하는 하인들마저도 모두 도망쳐 버렸는지 썰렁하 였다. 웅장한 건물들 사이로 시체들만이 뒹굴고 있는 한천보는 괴기스러 운 분위기를 풍겨 주고 있었다. 학운기는 우내사존에게 마차를 호위해 강서(江西)의 성룡방(聖龍 )으로 가라 이르고는 호운옥과 황보웅, 그리고 동방군과 함께 무림제일궁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그들은 도중에 무당파에 들려서 몇 마디 당부의 말을 하고는 계속 몸을 날렸다. 무당파는 소림의 멸망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음인지 매우 술렁이고 있었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학운기 등은 한시라도 빨리 가기 위하여 지름길인 산길로만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이 내방산(內方山)의 깊숙한 곳에 이르렀을 때, 학운기가 몸 을 멈추며 황보웅 등에게 전음을 보냈다. "모두들 멈추시오." 세 사람이 몸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상, 무슨……." "쉿! 조용히 하고 모두들 숨소리를 내지 마시오." 황보웅 등은 그의 표정에서 긴박함을 느끼고는 즉시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가볍게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곧 그들로부터 약 오십여 장쯤 떨어진 숲 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몸을 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핏 보아도 이백여 명은 넘는 것 같았다. 학운기는 그들 중에서 낯익은 자들을 발견하고는 내심 경악의 탄 성을 질렀다. '앗! 저 자는 천살마제…….' 그들은 바로 천살마제를 비롯한 마심뇌사, 그리고 소무극과 엄능 야 등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학운기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가는 이 내 불길한 표정으로 변했다. '저들은 아마도 무림제일궁 쪽에서 오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 들은 소림 고승들을 한천보로 옳겨 놓고 곧바로… 으음, 그렇다면 연매가 위험…….' 그는 어젯밤에 무림제일궁으로 갔을 제갈소연이 매우 걱정이 되었 다. '무림제일궁도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군. 다행히 개방의 연락망을 이용하긴 했지만, 만약 그것이 저들보다 늦어졌다면…….' 그는 즉시 황보웅에게 전음을 보냈다. "황보 궁주와 동방 노야는 즉시 무림제일궁으로 가시오. 그리고 옥매는 나와 함께 저들의 뒤를 따릅시다." "주상,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황보웅도 무림제일궁의 일이 걱정되는지 그에게 예를 취하고는 즉 시 몸을 날렸다. 학운기도 그들의 뒤를 지켜보다가는 곧 호운옥과 함께 사마도들이 사라진 쪽으로 몸을 날렸다. 사마도들은 그리 빠른 경공을 펼치지 않고 있어서 곧 따라잡을 수 가 있었다. 학운기는 호운옥과 함께 그들의 뒤를 따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내심 고심하였다. 이 때 마심뇌사 가계지가 사마도들을 향하여 가볍게 외쳤다. "모두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식사를 하도록 하라." 사마도들은 그의 명령에 가볍게 대답을 하고는 삼삼오오 짝을 지 어서 준비한 건량(乾糧)으로 식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천살마제와 마심뇌사, 그리고 소무극 등은 한 곳에 모여서 무언가 숙의를 하는 듯하였다. 학운기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그들에게 접근했지만 주위에 는 수많은 사마도들이 앉아 있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천리지청술을 펼쳐 보았으나 역시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음, 어떻게 하지? 이들을 모두 처치한다는 것은 나와 옥매만으론 약간 벅차고… 그렇다고 이들을 미행하자니, 소림 고승들이 걱정 이고…….' 한참을 생각에 골몰하던 그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서 건량을 먹고 있는 사마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의 눈이 어느 한 곳에 이르는 순간. 그는 내심(內心) 무척이나 놀란 듯 두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앗! 저… 저것은 사람 같은데… 혹시…….' 그 곳에는 삼십여 세쯤 되어 보이는 중년인 네 명이 앉아 있었는 데, 그들 옆에는 커다란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보따리에 나타난 굴곡으로 보아서 그것은 사람임에 분명하였다. 학운기는 내심 불길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호운옥에게 전음을 보냈 다. "옥매, 잠시 동안만 이 곳에서 꼼짝 말고 있으시오." 호운옥은 그의 말에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운기는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다가는 서서히 그들에게로 다가갔 다. 그의 손에는 어느 틈에 독모(毒毛)가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마도들은 음침한 곳을 좋아하는 천성을 타고났는지 서 로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학운기의 입가로 고혹적인 살소(殺笑)가 피어났다. '후후… 그럼 저승에 가서나마 다시는 마도에 물들지 마시오.' 순간. 그의 오른손이 번쩍임과 동시에 무형무음(無形無音)의 절세적인 지력 쇄혼지(碎魂指)가 그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사 마도의 천주혈(天柱穴)과 인후혈(咽喉穴)에 관통되었다. 사마도들은 채 비명도 못 지르고 저 세상으로 가 버린 것이다. 곧 그들은 피도 내뿜을 여유 없이 학운기의 독모(毒毛)에 한 줌의 독수(毒水)로 화하고 말았다. 학운기는 최대의 공력과 한 사람에게 서너 개씩의 독모를 날렸으 므로 그와 같은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또한 아무도 눈치를 채 지 못하였다. 그는 마치 유령(幽靈)처럼 울창한 숲으로 몸을 가리면서 소리도 없이 사마도들을 해치우고 다녔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쯤에는 벌써 오십여 명의 사마도 들이 그의 손에 저 세상으로 가 버린 것이다. 그가 또 한 번의 손을 쓰려는 순간. 마심뇌사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자, 모두들 떠나자." 그의 말에 사마도들이 몸을 일으키고는 한 군데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을 때. 마심뇌사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왜들 이토록 꾸물거리느냐?" 그러나 그의 신경질적인 명에도 불구하고 사마도들은 더 이상 모 이지 않았다. 마심뇌사는 무슨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재빠르게 주위를 살펴보 았다. 그러한 그의 눈은 마치 독사(毒蛇)의 그것처럼 번뜩거렸다. "웬 놈이기에 감히 숨어서 암습을 하느냐?" 그의 태도를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학운기의 입가에는 차가운 냉 소만이 흐를 뿐이었다. 마심뇌사는 다시 한 번 소리쳐도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응답을 하지 않자 애매한 부하들에게만 꽥 소리를 쳤다. "빨리 나오지 않는 놈들을 찾아보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예." 사마들은 급히 대답을 하고는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순간. "앗!" 학운기가 주살(誅殺)을 했던 곳으로 갔던 사마도들의 입에서 경악 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 마심뇌사 등은 흠칫 놀라는 듯하면서 즉시 그 곳으로 몸을 날렸 다. "앗! 이것은……?" 그들은 땅바닥에 흘러 있는 독수(毒水)를 보고는 매우 놀라는 것 같았다. 마심뇌사는 천살마제와 전음(傳音)으로 뭔가를 주고받는 것 같았 다. 학운기는 그들이 암살자를 찾으러 뿔뿔이 흩어지기를 고대하면서 숨을 죽이고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염원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마심뇌사는 천살마제와 한참을 숙의하다가는 또 혼자서 깊은 생각 에 빠졌다. '음, 나와 천형이 전혀 눈치도 못 채게 살수를 펼칠 수 있는 자라 면… 그렇지, 정파인 척하는 자들의 약점은…….' 생각에 골몰하던 마심뇌사의 얼굴로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 계집을 데려오도록 하라." "예." 마심뇌사의 말을 들은 학운기는 순간,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다. 한 중년인이 좀 전에 학운기가 보았던 보따리를 가지고 와서는 그 것을 풀었다. '앗! 어쩐지 불길하더니… 역시 연매였구나.' 학운기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으나 쉽게 되지가 않았 다. 보따리 속에는 제갈소연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치열한 격전을 벌인 듯 이미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 고, 군데군데 혈흔마저 묻어 있었다. 마심뇌사는 혈도가 짚여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그녀의 몸을 툭 걷어찼다. 순간 그녀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상황을 대강 짐작한 그녀는 마심뇌사를 향 하여 앙칼지게 소리쳤다. "악도야! 죽이려면 빨리 죽이지, 왜 나를 이런 곳으로 끌고 왔느 냐?" 마심뇌사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흐흐… 고것 참, 잠깐만 기다려라. 죽이더라도 너의 낭군이나 한 번 만나게 해 주고 죽일 테니까." 찰나 제갈소연의 몸이 흠칫하면서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낭… 낭군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흐흐… 설마 절대신룡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뭐… 뭐라고? 그분이 여기 계시단 말이냐?" "흐흐… 역시 틀림없구나." 마심뇌사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갑자기 그녀의 완맥을 잡아챘 다. "앗!" 제갈소연은 그의 유도심문에 넘어간 것이 분하여 그를 째려보다가 는 미처 피할 염두도 굴리지 못하고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에 의해 잔뜩 일그러졌다. 마심뇌사는 그녀의 완맥을 잡고는 자신의 옆쪽을 향하여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 절대신룡! 설마 너의 아름다운 연인을 죽이지는 않겠지?" 학운기는 자신이 있는 곳과는 엉뚱한 곳을 쳐다보고 말하는 마심 뇌사를 보고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마심뇌사, 당신이 아무리 그래 보았자 아직 당신은 멀었 소.' 그러는 순간에도 그는 한편으로 제갈소연을 구할 계책에 골몰하고 있었다. 마심뇌사는 몇 번을 소리쳐도 아무 응답이 없자, 갑자기 제갈소연 의 옷을 확 잡아챘다. 찌이익－! 비단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윗도리가 쫙 찢겨지고 말았다. "아, 이… 이… 음적아!" 제갈소연은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가지고는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 했다. 비록 남장을 하느라고 가슴은 하얀 비단으로 꼭 졸라맸으나 그녀 의 가는 허리와 백옥보다도 하얀 살결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 다. 그것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마도들 중에서 음탕한 자들은 벌써 침 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마심뇌사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절대신룡! 어서 나와라. 만약 열을 셀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면, 너의 아름다운 연인(戀人)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리개가 될 것이 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즉시 숫자를 세기 시작하였다. "하나! 둘……!" 학운기는 그들의 치사한 방법에 치를 떨었으나, 뛰쳐나가면 둘 다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경거망동(輕擧妄動)은 하지 않 았다. 그는 이내 침착을 되찾았다. 그의 몸에서는 만년한굴에서 나오는 한풍(寒風)보다도 차가운 살 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 틈엔가 묵룡검이 굳게 쥐어져 있었 다. 이 때 마심뇌사는 막 아홉을 세고 있었다. "열!" 마침내 마지막 숫자가 세어졌다. "흐흐… 절대신룡! 네가 그토록 냉정한 사람인 줄은 몰랐구나. 하 지만 본좌는 한 번 한 약속은 분명히 지킨다." 그는 이를 악다물면서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는 한 장한에게 제갈 소연을 던져 주었다. "자, 네가 마음껏 가지고 놀아라." 장한이 갑작스런 횡재에 입을 헤 벌리고 그녀를 받으려는 순간. "멈춰라!" "으악!" 폭갈이 터짐과 동시에 한 줄기 백선(白線)이 번뜩하였고, 그와 함 께 처절한 단말마가 들려 왔다. "앗!" "엇!" 수 마디의 각기 다른 경악의 탄성이 들렸을 때는 이미 학운기가 극심한 분노에 정신을 잃고 있는 제갈소연을 품에 꼭 안고 있었 다. 마심뇌사 등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의 경공에 넋을 잃고 있었 다. 학운기가 고혹적인 고소를 흘리며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이미 사방이 포위가 되어서 도저히 뚫고 나갈 수가 없음을 깨닫고는 이들과 결전을 벌이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는 마심뇌사 앞으로 걸어가면서 호운옥에게 전음을 펼쳤다. "옥매, 옥매는 나오지 말고 계속 숨어 있으시오. 그리고 내가 연 매를 던지면 뒤돌아보지도 말고 무림제일궁으로 가시오." 마심뇌사 등은 그의 살기 찬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라는 듯하였으 나,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흐흐… 역시 네녀석이었구나." 학운기는 이 때 마심뇌사가 보지 못했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있 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당신은 본인을 알고 있소?" "흐흐… 본좌는 절대신룡이 대단한 영웅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 제 보니 자신의 정체마저 숨기는 졸장부였구나." "후후… 절대신룡? 그 자가 도대체 누구요? 당신은 그를 매우 두 려워하고 있는 것 같구려." "흐흐… 쥐새끼 같은 녀석." 마심뇌사가 음침한 웃음을 흘리는 순간. "참마－!" 제갈소연을 안고 서 있던 학운기가 갑자기 일 검을 펼쳤다. 그의 묵룡검은 검은 호선을 그리며 마심뇌사 등에게 날아갔다. "앗!" "윽!" 몇 마디 경악의 외침과 묵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옥매! 받으시오." 순간, 제갈소연의 몸은 오십여 장 밖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호운 옥에게 빛살만큼이나 빠르게 날아갔다. 몇 명의 마도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몸을 날렸다. "아악!" "으악!"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학운기가 던진 독모에 곧 한 줌의 흑수로 화 하고 말았다. 묵룡검은 어느 새 학운기의 손으로 돌아와 있었고, 마심뇌사와 천 살마제는 각기 한쪽 귀가 잘려서 미처 지혈할 생각도 못한 채 멍 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소무극은 그들보다도 더욱 비참했다. 그는 이미 한쪽 팔이 잘린 병신이 돼 버린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인지라, 어느 누구도 그 간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제갈소연이 호운옥의 몸에 무사히 들어간 것을 본 학운기는 마치 성난 호랑이처럼 사마도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멸겁(滅劫)－!" 쾅－ 콰르릉－! "으아악……!" "참마－!" "허억!" "윽!" 그의 절세적인 장력과 이기어검술에 사마도들은 제대로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단말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들도 모두 강호의 절정고수를 능가하는 고절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한순간 당황함에 제대로 반항을 못하고 죽어 가던 그들도 차츰 전 열을 정비하고는 학운기에게 대항을 해 왔다. 그들의 수효는 아직도 백오십 명은 되었다. 마심뇌사와 천살마제 등을 비롯한 십여 명의 수뇌 인물들은 싸늘 한 살기가 쏟아지는 눈으로 장내를 주시하고만 있었다. 그러한 그들의 눈에는 학운기의 놀라운 무공에 대한 두려움이 가 득 서려 있었다. "도대체 저 어린 놈이 어떻게 저토록 고강한 무공을 소유할 수가 있지?" "하하… 가형, 너무 걱정 마시오. 이제 열흘 후에 주존께서 출관 하시면 저 정도의 놈은 단 일 장에……." "편형, 그렇지만 저 놈의 무공은……." "하하… 너무 걱정 말고 저 놈이 쓰는 초식이나 잘 기억하도록 하 시오." 마심뇌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장내를 뚫어져라 주시하기 시작 하였다. 학운기는 한 마디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그도 마심뇌사 같은 간사한 자가 지켜보고 있는지라, 자신의 진실 된 무공을 사용하면 후에 주존이라는 자와 싸울 때 커다란 불리함 을 겪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절혼(切魂)－!" 쾅－ 콰르릉－! "으아악……!" 또다시 두 명의 사마도가 죽어 갔다. 학운기는 독모들을 날리다가는 별로 소용이 없음을 알고 그것을 모두 품속에다 집어넣었다. 그것은 사마들도 모두 호신강기를 펼칠 수 있는 공력을 가지고 있 었고, 위맹한 장력들이 난무하기 때문이었다. "참마－ 멸겁－!" 쾅－ 콰르릉－! "으아악……!" 이기어검술과 절세(絶世)의 장법이 동시에 펼쳐지자, 댓명의 사마 도들의 골통이 부서지고 몸이 두 쪽이 나서 땅바닥에 뒹굴었다. 처절한 사투였다. 조용한 산중에서 갑자기 일어난 살겁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멀리멀 리 퍼져 가고 있었다. 아무리 무림사 이래 최대의 공력을 가지고 있고 금강불괴지신을 이룬 학운기였지만, 서서히 지쳐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벌써 혈투가 시작된 지 두 시진이 넘어서고 있었다. 사마도들은 아직도 백여 명이 남아서 계속 악랄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절혼－ 참마－!" 쾅－ 콰르릉－! "아으윽……!" 학운기가 다시 절세의 장력과 이기어검술을 동시에 펼쳐서 몇 명 의 사마도들을 죽이는 순간, 그는 명문혈에 묵직한 충격을 느꼈 다. 그가 급히 뒤로 몸을 돌리는 순간, 하나의 조그만 화살이 그의 발 밑에 떨어졌다. 학운기는 그것을 보고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나의 호신강기를 뚫고…….' 그러나 상황은 그에게 오랜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펑－! 콰르릉－! "으악!" "아악!" "윽!" 굉음과 폭음, 그리고 사마도들의 처절한 단말마 사이로 가끔 학운 기의 묵직한 신음도 터져 나왔다. 그것은 조그만 화살이 그의 호신강기를 뚫고 몸에 격중되었기 때 문이었다. 그 조그만 화살은 그의 금강불괴지신을 이룬 몸 속으로 파고들지 는 못했지만 그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는 계속 절세의 장법과 이기어검술을 펼치면서 주위를 살피며 화살을 쏘는 자를 찾았다. 한 흑의복면인이 고목의 가지에 걸터앉아서 계속 조그만 화살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학운기는 그를 얼핏 바라보고는 내심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 저 자의 무공은 나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구나.' 쾅－ 콰르릉－! 그는 내심 놀라면서도 죽기살기로 덤비는 사마도들을 상대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윽!" 흑의복면인이 던지는 조그만 화살은 계속 그의 명문혈에만 적중하 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 화살을 피하자면 사마도들의 백여 줄기 상상할 수도 없는 장력을 한몸에 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쾅－ 콰르릉－! "으아아악……!" 그러는 중에도 사마도들은 하나둘씩 계속 죽어 갔다. 벌써 황혼이 붉게 물들어 오고 있었다. 학운기의 진력은 거의 삼 성 정도나 소모되었다. 그것은 명문혈에 계속 적중하고 있는 조그만 화살이 그의 진력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학운기도 그러한 것을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날은 어두워졌다. 숲 속으로 찾아든 어둠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쾅－ 콰르릉－! "으악!" "아악!" "윽!" 사투는 계속 벌어졌고, 학운기도 조그만 화살이 자신의 명문혈에 적중될 때마다 묵직한 신음을 토해 냈다. 화살을 날리는 흑의복면인의 손은 갈수록 빨라졌고, 그만큼 학운 기의 진력은 빠르게 고갈되어 갔다. 학운기는 벌써 오백여 대의 화살을 맞은 것이다. 그의 진력은 이제 육 성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음, 할 수 없군.' 그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스치는 순간, 그의 몸은 하늘 높이 솟구 쳐 올랐다. 고수들간의 결투에서, 더구나 일 대 다수의 결투에서 공중으로 몸 을 솟구친다는 것은 곧 자살… 그것이었다. 이제 오십여 명밖에 남지 않은 사마도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이 막 공중을 향하여 장력과 암기 등을 날리려 할 때, 학운기 의 입에서 마치 지옥에서 들려 오는 듯한 음산한 폭갈이 터져 나 왔다. "천멸쇄마(天滅碎魔)－!" 찰나, 그의 몸에서 아홉 가지의 찬란한 빛이 뻗어 나왔다. 그 빛은 극광(極光)보다도 현란하였고, 무지개보다도 아름다웠다. 급기야 그 구색(九色)의 찬란한 빛은 오십여 명의 살아남은 사마 도들을 휩쓸어 갔다. 사마도들이 그것을 피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그 구색 의 찬란한 빛이 자신들을 휘감고 난 후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학운기가 약간 신형을 비틀하면서 그들의 중앙에 내려섰다. 순간 죽은 듯이 꼿꼿이 서 있던 오십여 명의 사마도들이 서서히 무너져 가기 시작하였다. 아, 그들의 몸은 먼지보다도 고운 가루로 변해서 때마침 불어 온 부드러운 바람에 의하여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지켜보던 십여 명의 사마도 수뇌들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두 눈을 빤히 뜬 채로 오십여 명의 부하들이 단 일 장에 한 줌의 가루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설사 그들이 그것을 막을 마음이 있었더라도 그 때는 이미 늦은 후였을 것이다. 천멸쇄마(天滅碎魔). 그것은 일종의 장강(掌 )이었다. 그러나 학운기가 펼친 장강은 일반 무림의 최절정고수가 펼친 그 것과는 또 달랐다. 그것은 그의 체내에 잠재된 한천빙룡(寒泉氷龍) 구색내단(九色內 丹)의 영효(靈效) 때문이었다. 보통의 장강은 매서운 피공음을 동반하지만, 학운기의 천멸쇄마는 단지 찬란한 구색의 빛만을 발할 뿐이었다. 그것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은 완전히 가루로 변해 버렸다. 각설하고, 학운기는 아득해져 오는 정신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서 서히 조그만 화살을 날렸던 흑의복면인을 향하여 걸어갔다. 사실 학운기의 진력이 고갈되지 않고 십이 성 그대로였다면 옆에 서 지켜보던 흑의복면인과 천살마제, 그리고 마심뇌사 등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뻘건 광염(狂炎)의 살기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학운기를 바라보 는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역력하였다. 그들의 간격이 십 장 정도로 좁혀졌다. 이제 학운기가 한 걸음 다가섬에 따라서 그들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그러기를 십여 걸음, 돌연 학운기의 오른손이 번쩍 치켜졌다. 찰나 흑의복면인을 비롯한 십여 명은 꽁무니가 빠져라고 도망쳐 버렸다. 학운기의 손이 서서히 내려졌다. 그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천멸쇄마는 그만큼 내력 소모가 극심한 것이었다. 진력이 충만할 때라도 그것을 연속으로 세 번을 펼치면 진력이 완 전히 고갈되는 것이었다. 학운기는 지금 편안히 앉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럴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마심뇌사 등이 너무나도 간교하여 언제 다시 되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컴컴한 대지에 두 발을 굳게 내리고 서 있는 학운기의 모습은 석 상(石像)… 그것이었다. 주위는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는 백여 구의 시체들에서 풍겨 오는 피비린내 때문에 나무들조차 으시시 몸을 떨고 있었다. 시체들에서 나오는 인광(燐光)은 파아란 도깨비불을 연상케 하였 다. 차라리 독모(毒毛)나 천멸쇄마장에 의해서 죽었다면, 이토록 귀기 스럽고 음산한 분위기는 풍기지 않았을 것이다. 학운기가 아수라의 현장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기를, 차 한 잔 마 실 시간쯤 지났을까? 돌연 그의 등 뒤에서 음침한 괴소가 들려 왔다. "크흐흐흣… 네녀석이 감히 본좌를 속이려 하다니……." 말과 함께 싸늘한 강기( 氣)가 덮쳐 왔다. "후후… 잘 왔소." 학운기는 고소를 흘림과 동시에 강기가 뻗쳐 온 곳으로 몸을 돌리 며 덮쳐 갔다. 옆에서 세 줄기의 눈으로는 도저히 분간할 수조차도 없는 백선이 날아왔다. 쿠앙－ 콰르릉－! "억!"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학운기의 몸은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버렸고, 연이어 몇 번의 폭음이 계속 들려 왔다. 학운기는 엄청난 반탄력에 아득한 심연으로 빠지는 듯한 쾌감 비 슷한 것을 느끼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어 버렸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학운기는 어떤 부드러운 물체가 자신의 몸을 핥는 것을 느끼고는 떠지지 않는 무거운 눈까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낑… 끼잉……! 그의 귀에 낯익은 소리가 들려 왔다. "백아! 백아지?" 그는 천지가 떠나갈 듯한 고함을 질렀으나, 정작 밖으로 새어나온 소리는 모기 소리보다도 가는 소리였다. 그의 눈에 백아의 낯익은 모습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자꾸만 꿈 속처럼 아물거릴 뿐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통증만이 그의 전신을 짓누를 뿐, 손 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낑… 끼잉……! 백아는 계속 안타까운 소리를 내면서 그의 얼굴만을 핥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몸이 알몸인 것을 느낀 것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 한 참 후였다. 그 때서야 자신이 지금 어디에 누워 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가 있었다. 그의 코에 담담한 처녀의 향기가 풍겨 왔다. 그는 지금 한 화려한 규방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얼마가 다시 흐르고 주위의 사물이 그의 동공(瞳孔)에 또렷이 들 어왔을 때, 그는 자신의 몸에 머리털올보다도 가느다란 금침들이 수북히 꽂혀 있음을 발견하였다. "백아, 이 곳이 어디지?" 그의 목소리도 점차 또렷하게 들려 오기 시작하였다. 낑… 끼잉……! 백아는 안쓰러운 소리를 내면서 계속 그의 얼굴을 핥고만 있었다. "알았다. 곧 나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학운기는 백아에게 떠오르지 않는 미소를 억지로 보내며 단전에서 진기를 끌어올렸다. "앗! 아……!" 그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과 절망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망망대해(茫茫大海)였다. 웬일인지 그의 단전(丹田)이 텅 비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아무리 중상을 입었더라도 나의 체질과 익힌 무 공으로 보아서 한 가닥의 진기는 남아 있어야 정상인데……." 그의 뇌리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상이 주마 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안 돼. 내가 무공을 잃으면 누가 주존이라는 자의 혈겁을……." 그는 심하게 거부하면서 다시 진기를 끌어올리려 하였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낑… 끼잉……! 백아는 그의 그러한 마음을 위로라도 해 주려는 듯이 열심히 그의 얼굴을 핥고 있었다. 이 때 그의 얼굴은 내공의 상실로 인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백아, 나를 데리고 온 사람을 좀 데리고 오련?" 낑… 끼잉……! 백아는 그의 말을 듣고는 즉시 침상 아래로 뛰어내려가더니 밖으 로 나갔다. 잠시 후 봄날의 시냇물보다도 더욱 청아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머, 소협! 벌써 깨어나셨군요? 소녀는 사흘 후쯤에나 깨어나실 줄 알았는데……." 학운기는 너무나도 낯익은 그녀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움직여지 지 않는 목을 돌려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호운옥이었다. "아니? 옥매가 어떻게……." 순간 방 안으로 들어오던 소녀의 몸이 흠칫하는 것 같더니 빠르게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소협, 옥매라니요? 소협은 혹 어디서 소녀와 비슷한 사람을 보셨 나요?" "아니? 그럼 낭자는 옥매가 아니란 말이오?" "그래요. 소녀의 이름은 봉란선(鳳蘭善)이라고 해요. 한데 소협께 서는 어디서 소녀와 비슷한 사람을 보신 적이 있는가요? 그 호운 옥이라는 낭자가 소녀와 흡사한가요?" 학운기는 그녀의 태도에서 내심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렇소. 그런데 낭자의 자매 중에서 혹 실종된……." "예. 소녀와 쌍둥이 자매가 돌도 채 지나기 전에 집안의 혈겁 때 문에 그만……." "아, 그럼 옥매가 낭자와 쌍둥이 자매임에 틀림없는 것 같군요. 두 분의 모습은 너무나도 닮아서 잘 모르는 사람은 분간조차 힘들 것이오." "정말 그토록 닮았나요?" "그렇소." 호운옥과 봉란선은 너무나도 똑같았다. 얼굴 뿐만이 아니라 몸매, 심지어는 목소리까지 한 군데도 다른 곳이 없었다. 그러나 학운기는 봉란선에게서 호운옥과 다른 딱 한 가지를 발견 하였다. 그것은 그녀의 눈동자였다. 맑고 깊은 것은 둘 다 똑같았는데, 그녀에게는 호운옥의 순진무구 (純眞無垢)한 백치(白痴)의 눈빛이 없었다. 대신에 그녀에게서는 무한한 재지(才智)와 지혜(智慧)의 빛이 흘 러 나왔다. 학운기는 처음에 그녀들이 너무나도 닮아서 미처 그러한 것을 발 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 때 봉란선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 앵매… 살아 있었구나." 학운기도 홀홀단신으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자신과 천괴 호강민 밖에 없던 호운옥이 친족을 찾은 데 대하여 기쁨을 감출 수가 없 었다. "낭자, 그런데 이 곳은……." 봉란선이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소협께 추태를 보인 것 같군요. 이 곳은 소녀의 거처예요. 한데 소협의 성함은……." "아참, 실례했소이다. 은인께 감사도 못 드리고 소생의 궁금한 것 만 물어 봤으니… 소생은 학운기라 하오." "아, 학 소협이셨군요? 한데 소협은 앵매, 아니 옥매와 가까운 사 이인가요?" "그렇소. 우리는 장래를 약속한 사이요." "아……!" 봉란선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앵매… 너는 훌륭히 컸나 보구나. 이토록 훌륭한 낭군을 만났으 니 말이야…….' 그녀는 사실 학운기를 처음 봤을 때 방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 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자신이 어떤 보이지 않는 끈으로 꽉 매어 있 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학운기도 그녀가 태음신맥을 타고난 기재라는 것을 알았는지라, 천빈성을 타고난 자신과는 어떤 끊어질 수 없는 인연의 줄로 얽매 어 있음을 깨달았다. 학운기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데 낭자, 소생이 어떻게 이 곳에……." "예, 이틀 전에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취아와 녹아가 자꾸만 보채기에 따라갔다가 학 소협이 어떤 흑의복면인과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어요. 그런데 그 흑의복면인이 어쩐 일인지 무엇엔 가 놀라서 내력을 반감하였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소 협께서는 이미……." 학운기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내심 짚이는 것이 있었다. '후후… 그 자가 그 때까지도 내가 내력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는 넋을 잃은 모양이군.' 한참 생각을 굴리던 그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봉 낭자께서는 그를 물리칠 만한 높은 무공을 가지고 있는가 보 구려?" 봉란선이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소협. 그 자는 웬일인지 소녀가 나타나자 도망쳐 버렸 어요." 학운기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더니, 아마 그 자도 그랬나 보군.' 그는 내심 고소를 흘리다가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데 낭자, 소생의 몸에 침은 누가……?" 순간 봉란선의 얼굴이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소협, 죄송해요. 소녀는 단지 소협의 상세가 너무나도 엄중한지 라……." 학운기도 비록 이불로는 덮었으나 알몸으로 누워 있는 자신을 깨 닫고는 얼굴이 붉어짐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한데 봉 낭자, 혹시 소생을 치료할 때 무슨 이상한 기미는 발견 하지 못했소?" "있었어요. 소녀가 소협을 안고 이 곳으로 올 때, 어쩐 일인지 소 협의 몸이 불같이 뜨거워짐을 느꼈어요. 소녀가 소협을 치료하려 고 소협의 몸에 손을 댔을 때, 그 열기(熱氣)는 너무나도 뜨거워 졌어요. 소녀는 너무 놀라서 급히 열을 내리는 영단(靈丹)을 복용 시키고 즉시 회혼금침대법(廻魂金針大法)을 펼쳤어요. 그랬더니 하루가 지나자 열이 서서히 내렸는데… 혹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 "아… 아니오." 학운기는 급히 부정을 했으나 내심으론 아득한 절망에 빠져듬을 느꼈다. '아, 색단의 효력을 풀지 못하여 내력이 모두 고갈된 모양이구 나.' 그는 잃어버린 내력을 회복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떠 오르지가 않았다. 봉란선은 고심(苦心)에 찬 듯한 학운기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 가는 그의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 第 8 章 고귀한 희생 ====================================================== 잠시 후 봉란선이 쟁반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받쳐 들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동안 보이지 않던 백아도 선아와 함께 촐랑촐랑 따라왔다. 그들은 매우 반가운 빛으로 침상에 뛰어오르더니 학운기의 얼굴을 마구 핥았다. "백아, 선아도 함께 왔구나." 낑… 끼잉……! 봉란선이 그러한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학 소협께서는 이들을 알고 계신가요?" "그렇소. 소생은 원래 백아의 주인이오. 한데 어느 날 백아가 사 라지더니 선아와 함께 돌아왔었소." "아, 일이 그렇게 된 거군요? 취아는 소녀와 매우 친했었는데, 이 년여 동안 어딜 갔다가는 몇 달 전에야 소협의 백아와 함께 돌아 왔어요." 학운기는 그 간의 사정을 대강 짐작하였다. '음, 구지선요에 의해서 정신을 잃었다가 나를 찾을 수 없자… 이 곳으로 온 모양이군.' 그들은 한동안 백아와 선아에 대하여 얘기하다가 백아와 선아가 각각 이름이 둘씩인 것을 알고는 처음의 이름대로 부르기로 하였 다. 백아와 취아(翠兒)로……. 이 때, 학운기의 배에서 다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봉란선이 얼굴을 붉히며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아참, 소녀가 음식을 마련해 왔는데… 아직까지……." 붉은 은옥(溫玉)으로 만들어진 그릇 속에 든 음식은 그 때까지 조 금도 식지 않고 있었다. 학운기는 손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지라, 그녀가 떠 주는 것 만 넙죽넙죽 받아 먹었다. 한순간 그들 사이로 행복의 기류(氣流)가 흐르는 것 같았다. 학운기는 나흘 동안을 굶은 탓도 있었지만 봉란선이 만든 음식이 매우 맛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연거푸 두 그릇을 비우고 나서야 배가 부른 것을 느꼈다. "낭자, 이것은 소생이 처음 보는 맛이오." "고마워요, 학 소협. 이것은 이 곳에서만 나는 청선백연(淸仙白 蓮)으로 만든 것이에요." "아, 소생에게 어찌 그 귀한 선련으로 만든 것을……." "아무리 귀하더라도 소협 같은 손님이라면……." 그녀는 말을 하다가 말이 약간 잘못 나온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럼 소협… 편히 쉬세요." 그녀는 얼른 한 마디 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학운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는 다시 깊은 시름에 잠겼 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잃어버린 공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한참 생각에 골몰하던 그는 오랜만에 먹은 음식 때문인지 노곤함 에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옆에서는 백아와 취아가 조용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갔다. 학운기는 다시 깨어나서 자신의 몸이 많이 나은 것을 느꼈다. 약 간의 통증은 있었지만 손발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는 몸에 박힌 금침들을 모두 빼내고는 진기를 끌어올려 보았다. 역시 망망대해, 단전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언제 갖다 놓았는지 옆에 있는 백삼을 주워 입었 다. 한쪽 옆에는 그의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가 그것들을 품속에 넣고 서성거리고 있을 때.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학 소협, 일어나셨어요?" "봉 낭자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방 안으로 들어오던 봉란선은 학운기가 일어나서 걸어다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앗! 학 소협, 어떻게 벌써……." "하하… 모두 봉 낭자의 고절한 침술과 선련 덕분인 것 같소." "아… 아니예요. 소녀도 의술은 약간 알고 있는데,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에요." 학운기는 그녀가 의술을 알고 있다는 데 대하여 혹시나 하는 생각 이 들었다. '그렇지, 내가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는 왠지 설레이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기대에 찬 시선으로 그녀 를 바라보았다. "봉 낭자, 이 곳에 혹시 고의서(古醫書) 같은 것은 없소?" 봉란선은 그의 갑작스런 물음에 막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요. 한데 그것은……." "무례(無禮)인 줄은 알지만, 소생에게 그것들을 보여 줄 수 없소?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예요. 하지만……." 학운기는 그녀의 망설임에 자신의 부탁이 너무 무리라는 것을 깨 달았다. "아니오, 낭자. 다른 사람의 비급을 본다는 것이 무림의 금기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만……." "아니예요, 학 소협. 소녀의 말뜻은 그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대 부분이 고문(古文)으로 되어 있어서 해독(解讀)을 미처 못한지라 ……." "낭자, 소생은 어렸을 적에 그것들에 대하여 배운 적이 있는지라 그 내용을……." 봉란선의 얼굴에 밝은 빛이 떠올랐다. "아, 그러세요? 소녀도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았는데, 고문을 미처 배우지 못한지라……." 그녀는 말을 하다가는 그를 안내하였다. 학운기는 방을 나서서야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이 지하인 것을 깨 달았다. 지하의 석실은 무척이나 넓었다. 그 곳은 자연에다 인공을 가미한 것이었는데… 한가운데에는 방원 이십여 장의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석실의 가장자리에는 십여 개 의 석실이 있었다. 학운기가 봉란선을 따라 들어간 곳은 한쪽 벽면은 책으로 꽉 차 있었고, 한쪽은 수많은 약병들로 꽉 차 있는 의실(醫室)이었다. 벽에 꽂힌 책들은 모두 의서였다. 그 중에는 학운기가 청해(靑海)의 합랍호(哈拉湖)에 있는 석실에 서도 보지 못한 의서들이 이십여 권이나 있었다. 봉란선은 그 곳의 의서들을 거의 대부분 익히고 있었다. 단지 고대의 어려운 갑골문자(甲骨文字)나 천축의 고문(古文)으로 이루어진 약 사십여 권의 책만 못 읽고 있을 뿐이었다. 벽에 꽂힌 의서들이 거의 천여 권은 되었으니까, 그녀의 의학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있었다. 학운기는 그 날부터 의실에서 꼼짝도 안 하고 의서만을 읽고 있었 다. 그러기를 며칠, 그는 마침내 한천빙룡의 구색내단에 대하여 자세 히 설명한 천축의 고문으로 된 의서를 발견하였다. 이 때처럼 기쁜 적은 그의 기억엔 없었다. 그는 또한 천축의 고문을 가르쳐 준 자혜 대사에 대하여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그 의서에 적힌 내단은 각기 다른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황색(黃色)은 피한(避寒)의 효력, 주색(朱色)은 피뢰(避雷)의 효력, 홍색(紅色)은 욕정(欲情)의 효력, 자색(紫色)은 피사(避邪)의 효력, 녹색(綠色)은 피수(避水)의 효력, 청색(靑色)은 피화(避火)의 효력, 남색(藍色)은 피서(避暑)의 효력, 흑색(黑色)은 피독(避毒)의 효력, 그리고 마지막 백색(白色)은 회공(回功)의 효력이 있었다. 구색내단 중 다른 것들과 효력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홍색과 백색 내단이었다. 하나 그것들을 모두 읽고 난 학운기는 다시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공력을 잃은 사람은 무향실혼단(無香失魂丹)을 복용하고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고, 순결한 이성이 천지음양대법(天地陰陽 大法)을 펼쳐야 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그의 도움으로 다른 의서들을 읽고 있던 봉란선이 그의 난 감한 표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 오빠, 그 책에도 쓰여 있지 않아요?" "아니오, 선매." 그들의 칭호는 요 며칠 가까워진 만큼이나 달라져 있었다. "기 오빠,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아직도 읽지 않은 몇 권이 남 아 있잖아요." "선매, 고맙소. 자, 밖으로 나갑시다." "예, 기 오빠. 소매가 맛있는 것을 만들어 드릴게요." 봉란선은 짐짓 즐거운 표정으로 그의 팔을 끌었다. 학운기도 그녀의 태도에 웃음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심 무거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우선 밖으로 나가서 황보설이나 동방림에게 부탁을 해 볼까도 생 각해 보았다. 그러나 차라리 그럴려면 여기 있는 봉란선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나은 것 같았다. 그 동안 그녀의 태도로 보아 절대로 거절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원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학운기로서는 두 가지 방법을 모두 할 수가 없었다. 황보설과 동방림은 자신이 거절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녀들에 게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지가 않았다. 자신의 양심으로서는 말이다. 그리고 봉란선은 너무나도 재치 있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러한 그녀에게 네 명의 여인이 딸린 자신을 위해서 희생해 달라 고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빠진 무림을 보고도 나 몰 라라 할 수는 더욱더 없었다. 그는 봉란선이 만들어 준 음식을 그녀가 실망하지 않도록 억지로 비우다시피 하고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는 일찍 잠자리 에 들었다. 한편 민감한 예지력을 지닌 여인이 학운기의 그러한 태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천성을 타고난 여 인이었다. 학운기에게는 그러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겉으로는 웃었지만, 내심으론 그녀도 마음이 무거워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가끔 밖에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곳 석실에서만 살아온 그녀였지만, 그러한 마음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학운기가 잠자리에 들어서 숨을 쉴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의실(醫室)로 들어갔다. 그녀가 식사를 마치고 의실로 들어가기까지는 서너 시진이 걸린 것으로 보아서 학운기의 고심(苦心)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 다. 그녀는 의실로 들어가서 학운기가 보던 책을 꺼냈다. 이제 고대의 갑골문자를 조금씩 익히기 시작한 그녀가 천축의 고 문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여인의 집념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녀는 지필묵(紙筆墨)을 준비해 와서는 그것을 그대로 베끼기 시 작하였다. 처음 보는 글씨, 더구나 책 한 권을 베끼기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졸리운 눈을 치켜뜨면서 마침내 그것을 다 베끼고 야 말았다. 그 때는 학운기가 깨어날 때쯤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기 오빠, 소매는 며칠 간 폐관을 하고 신공을 해야겠으니… 불편 하더라도 며칠만 참으세요." "아니오, 선매. 그 때쯤이면 나도 나머지 의서들을 모두 읽을 수 있을 것이오. 선매가 폐관을 하고 나오면 나는 다시 강호에 나가 보아야 되겠소." "기 오빠, 그 때는 소매도 데리고 나가시는 거죠?" "하하… 선매는 내가 이런 곳에 선매를 놔 두고 갈까 봐 걱정했 소?" 봉란선은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 다. "그래요, 기 오빠. 소매는 오빠가 떼어 놓고 갈까 봐 얼마나 걱정 을 했다고요." "하하… 선매, 그런 걱정은 말고 어서 원하는 신공이나 수련하도 록 하시오." "그럼… 오빠……." 그녀는 한동안 그를 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바라보다가는 한 석실 로 들어갔다. 그 석실은 문만 빼놓고는 사방이 온통 책들로 꽉 들어 차 있었다. 그녀는 그 중에서 매우 두꺼운 책을 한 권 꺼냈다. 그 책은 얼핏 보아도 두께가 한 자 반은 넘는 듯하였다. 그녀는 품속에서 의서를 베낀 종이 뭉치를 꺼내 책을 펼쳤다. 그 책에는 수많은 종류의 글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뒤져서야 자신이 베낀 글과 유사(類似)한 글씨를 찾아 내고는 그것과 똑같은 글자를 하나하나씩 찾기 시작하였다. 전혀 모르는 글자를 하나씩 찾아서 그 주석(註釋)을 베낀다는 것 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끈기로써 버티면서 그것을 해 나갔다. 자신이 왜 이러한 집념을 보이는지 그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 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그 동안 그녀의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해졌고 눈이 휑하니 들어간 것으로 보아서, 매우 오랜 고심의 시간이 흐른 것은 분명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그것의 완전한 뜻은 알 수 없었어도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모든 해석을 마쳤다. 그것을 마치고 나자 그녀는 너무 어려워 평소에는 도저히 엄두조 차도 못 내던 책을 읽었다는 뿌듯함보다는 왠지 착잡한 기분이 드 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뇌리에 학운기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만나 보지도 못한 자신과 꼭 닮았다는 쌍둥이 동생의 얼굴도 어렴풋이나마 떠올랐다. 그 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얼굴도 떠올랐다. '어머니, 선아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양아, 이 언니는 어떻게 해 야 하지?' 마음 속으로 물어 본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사실 그녀는 학운기애 대하여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 감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 비하면 왠지 자신이 너무나도 부족한 것 같아 서 감히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쌍둥이 동생인 호운옥의 낭군이 될 사람이 아 닌가? 그녀는 한참을 고심하다가 석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학운기는 며칠 동안 그녀가 없어 매우 허전함을 느꼈는지라, 반갑 게 그녀를 맞았다. "선매, 신공 수련은 성공하셨소?" "예, 오빠의 염려 덕분에 성공할 수가 있었어요." 학운기는 그녀가 비록 밝은 웃음을 지으려 애쓰지만 그녀의 수척 해진 얼굴을 보고는 흠칫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선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아니예요, 오빠. 무공 수련에만 너무 몰두하다 보니 조금 마른 것 같아요. 어때요? 저의 이 날씬한 모습이 더 보기 좋지 않으세 요?" 봉란선이 그에게 씽긋 웃어 보였다. "오빠가 날씬한 것이 싫다면 소매는 살이 쪄야겠군요. 잠시만 기 다리세요. 소매가 맛있는 것을 만들어 올게요." 학운기는 짐짓 경쾌한 발걸음으로 음식을 만드는 석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마음이 무거워짐은 어쩔 수가 없었 다. 봉란선은 음식을 만들면서도 내심 갈등으로 고심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학운기가 보지 않 는 틈을 타서 살짝 의실에 들어갔다 나왔다. 왠지 들뜬 듯한 자신의 기분을 그녀 스스로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다행인지 불행인지, 만들어져 있던 무향실혼단을 학운기의 음식에다 살짝 섞었다. 무향실혼단은 원래가 무미(無味) 무취(無臭)하고, 또한 정신을 잃 게 할 뿐 몸에는 아무 해독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음식을 들고 와서는 학운기에게 권했다. 학운기는 그 동안 자신이 만든 맛없는 음식만 먹다가 오랜만에 그 녀가 만든 음식을 보자, 체면 안 가리고 맛있게 먹었다. 그가 음식을 다 먹고 차를 들려는 순간, 그는 머리가 멍해 옴을 느끼고는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찰나 봉란선은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퍼뜩 제정신이 드는 것 을 느꼈다. '내가… 내가… 이러한 일을…….' 그녀는 다시 갈등으로 몸부림을 쳤다. 그가 나의 행동을 안다면 이해해 줄까? 아니면 더러운 계집이라고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을까? 그러나 그녀는 또다시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그를 안고는 석실 로 들어갔다.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천빈성과 십이성좌의 전설을 설명한다면 몰라도……. 그녀는 그를 침상에 눕히고는 옷을 하나씩 벗겨 갔다. 처음 그를 치료하기 위해서 벗길 때는 망설임과 함께 손끝이 매우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었다. 오직 그녀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의 공력 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는 일념(一念)뿐이었다. 학운기의 균형 잡힌 나신이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의 옷도 하나씩 벗어 가기 시작하였다. 성숙할 대로 성숙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처녀의 약간 덜 자란 듯한 눈부신 나신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를 반듯이 눕혀 놓고는 그의 중극혈(中極穴)을 비롯한 몇 군데의 양혈(陽穴)을 짚었다. 순간 그의 순양체(純陽體)가 불끈 솟아올랐다. 아무리 정신 없이 행하고 있다고 해도 순결한 처녀인 그녀가 그것 을 보고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는 그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실었 다. 짜릿한 전율이 그녀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찰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조그맣고 어여쁜 입술을 그의 두 툼한 입술 위에 얹었다. 따뜻하고도 달콤한 그 무엇이 그녀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녀의 아랫도리는 묘한 자극에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점점 호흡이 가빠 옴을 느꼈다. 누워 있는 학운기는 목석, 바로 그것이었다. 심지어는 그의 표정에서조차도 아무런 빛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옥문(玉門)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순간 그녀는 이를 악다물면서 그의 것을 자신의 것에다 삽입시켰 다. "으헉!" 그녀의 입에서 숨막히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갈수록 심해져 가던 고통은 얼마가 흐르자 점점 쾌감으로 변해 갔 다. 마치 구름을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허리로 뿌듯한 감촉도 전해져 왔다. "으으흑… 으으윽……!" 그녀의 행동이 점차 빨라져 가기 시작하였다. 언제부턴가 침상으로 붉은 선혈(鮮血)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 다. 그녀는 이제 마치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흐으윽… 흐흑……!" 그녀의 눈에서도 영롱한 이슬이 흐르고 있었다. 정신은 이미 몽롱한 상태였다. 단지 뭔가를 열심히 갈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교성(嬌聲)과 비명이, 그리고 신음이 외롭게 석실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옆에서 소리만 듣는다면 그녀가 무슨 슬픈 일로 오열(嗚咽) 을 터뜨리고 있을 뿐, 지금 그녀의 행동은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외롭게 들리던 그녀의 구슬픈 듯한 오열도 점차 사그라져 갔다. "으으음… 으음……!"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때는 약하게 들리던 그녀의 신음마저 도 끊기고 정적을 되찾았다. 그녀는 온몸이 뻐근함을 느끼면서 그의 몸 위로 쓰러져서 깊은 잠 에 빠져들었다. 백아와 취아도 그들의 그러한 행동을 예감했는지 석실에는 따라 들어오지도 않고 연못가에서 장난만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장난도 왠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을 풍겼다. × × × 학운기가 깨어났을 때 봉란선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학운기는 그녀와 자신의 알몸을 보고는 전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묵직한 쇠망치로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 선매가 나를 위해서… 내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자신을 희생 하다니…….' 그는 그녀의 따뜻하고 사려 깊은 행동에 코끝이 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까지 감격(感激)하여 넋을 잃고 있을 수만도 없 었다. 그녀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즉시 운기행공을 해 야만 했다. 지금 그의 단전(丹田)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진기가 꿈틀거리고 있 었다. 그는 즉시 옷을 주워 입고는 침상을 내려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 다. 단전에서는 실낱 같은 진기(眞氣)가 서서히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 진기는 너무나도 미약하였지만 그 동안 망망대해만 같던 그의 단전에서는 가뭄의 비보다도 더욱 반가운 것이었다. 그는 지금 너무 무리를 한다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전에서 미약하게 올라온 진기는 기해(氣海)를 지나면서 점점 약 해지기 시작, 그는 여기서 운기행공을 멈춘다면 모든 것이 끝이라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폭우처럼 쏟아져 나왔다. 어금니는 꽉 악다물어져 있었고, 입술은 바삭바싹 타 들어갔다. 기해를 지난 진기가 건리(建里), 거궐(巨闕)을 지나면서부터는 약 간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학운기는 그것을 백회(百會)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백회를 지나서 저 발바닥 끝에 있는 용천(湧泉)까지 끌어올리는 데는 그것을 끌어올릴 때보다도 더욱 어려웠다. 그러다 그것이 다시 단전으로 흘러 들어가서 다시 기해(氣海)를 지날 때는 점점 강맹해지기 시작하였다. 일주천(一週天), 이주천, 삼주천……. 이렇게 거듭할수록 진기는 막강해져만 갔다. 이런 식으로 몇 번만 더 계속한다면 원래의 진력을 되찾을 수 있 을 것 같았다. 그의 몸에서 서서히 구색(九色)의 현란한 빛이 뻗쳐 나오기 시작 하였다. 이 때 봉란선은 이미 깨어나서 그의 운기하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무공이 등봉조극(登峯造極)의 경지(境地)에 이 르면 오색(五色)의 운무(雲霧)를 뿜어 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학운기의 몸에서는 구색(九色)의 현란한 빛이 뻗쳐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운무가 아니라 서기(瑞氣)로써 말이다. 구색의 서기는 점점 강력한 빛을 발하더니, 봉란선처럼 고강한 무 공을 소유한 자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한 식경쯤 흘렀을까? 강력하던 구색의 서기는 점차 그 빛을 잃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것은 마침내 투명하고도 담담한 서기(瑞氣)로 변하였 다. 드디어 학운기는 본래의 공력을 되찾은 것이다. 다시 한 식경쯤 흐르자,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신비로운 눈. 그의 운기하는 모습을 보고 넋을 잃었던 봉란선은 이번에는 그의 신비로운 눈을 보고 넋을 잃어버렸다. 가을 하늘처럼 맑고 깊다는 식의 속된 형용은 오히려 그의 신비로 운 눈에 모욕이 될 것 같았다. 학운기는 운기를 마치고 봉란선을 바라보다가는 얼굴을 붉히며 황 급히 몸을 돌려 버렸다. 봉란선도 그의 돌연한 태도에 의아해하다가는 자신이 아직도 알몸 인 것을 깨닫고 황급히 옷을 주워 입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하체에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그녀는 이를 악다물며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학운기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멈추자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에는 무한한 감격과 회한 등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선매, 어쩌자고 이런 일을……." 봉란선은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자 왈칵 울음이 솟구쳐 올라 왔지만 억지로 참았다. "기 오빠, 이것은 소매가 원한 일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 요. 소매는 오빠가 앞으로 소매를 거들떠보지 않아도 절대로 슬퍼 하지 않을 거예요. 소매는 단지 오빠를 위해서 한 가지 일을 했다 는 것만으로도 기뻐요." 학운기는 그녀의 너무나도 어른스러운 말에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 었다. 그가 그녀의 따뜻하고도 하얀 섬섬옥수(纖纖玉手)를 살며시 쥐었 다. "선매, 내가 어찌 그토록 매정할 수가 있겠소? 선매는 걱정 마시 오. 나는 선매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으니까 말이오." "오빠……." 그녀가 그의 품으로 왈칵 쓰러졌다. "선매……." 학운기가 그녀의 몸을 꼭 껴안았다. 부드럽고도 따뜻한 그녀의 몸이었다. 봉란선은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자, 왠지 모르게 눈물이 솟 아나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매우 편안하였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도 같았다. "오빠, 소매는 지금 너무나도 행복해요. 이대로 영원히… 그냥 아 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영원히 오빠와 같이 있으면 싶어요. 하 지만 오빠와 소매는……." 학운기가 그녀의 부드러운 등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선매, 걱정하지 마시오. 지금 당장은 우리들에게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러한 날이 꼭 올 것이오." "오빠, 고마워요." 사랑스러웠다. 세상의 그 어떤 여인보다도……. "선매……." "흐읍!" 그들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합쳐지면서 고혹적인 신음이 동시에 들 려 왔다. 그들에게는 지금 서로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꼭 껴안은 그들의 몸에서 뜨거운 감정이 봇물 터진 것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은 언제까지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때 백아와 취아가 각기 그들의 바지 가랭이와 치맛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낑… 끼잉……! 학운기와 봉란선은 한창 몰아의 경지에 빠져 있다가는 흠칫하면서 급히 떨어졌다. 그들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학운기가 백아와 취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하하… 너희들이 바깥 구경을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낑… 끼잉……! 백아와 취아가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운기가 미소 띤 얼굴로 봉란선을 바라보았다. "자… 선매, 채비를 하고 그만 떠나도록 합시다." "예." 봉란선은 서서히 간단한 것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십칠 년 동안이나 정들었던 석실을 막상 떠나자니, 섭섭한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학운기도 비록 짧은 날이었지만 그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줄지 도 모를 석실에서의 생활을 회고(回顧)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그 동안에 이 곳에 있는 석실에 모두 들어가 보았다. 어떤 석실에는 엄청난 보물들이, 어떤 석실에는 수많은 무공비급 들이……. 하지만 그것들은 학운기에게 별로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동안 무공을 회복했을 때를 대비해서 색단의 효력 을 제어할 수 있는 심법도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가 한창 회상에 잠겨서 석실들을 돌아보고 있을 때. 봉란선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 오빠, 다 됐어요." "아, 그럼 어서 나갑시다." 학운기는 막상 떠날 때가 되자 그 동안 무림 정세가 어떻게 변했 는지 매우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새제갈의 계교(計巧)와 우내사존, 그리고 호운옥의 무공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천괴를 반 초(招) 차이로 이겼던 흑살시마와 만약에 주존 이라는 자가 출관을 했다면… 일은 보통 다급한 것이 아니었다. 지하의 석실은 내방산(內方山) 깊숙한 골짜기의 지하 오십여 장 깊이에 마련되어 있었다. 봉란선은 입구를 나서서 다시 한 번 이슬이 맺힌 눈으로 석실 쪽 을 바라보았다. 바로 부모와 자신의 한이 맺힌 곳이었다. 봉란선의 아버지는 인의유협(仁義儒俠)이라고 불리워진 강호의 절 정고수였다. 그는 어느 날, 바로 이 석실의 위치가 그려진 한 장의 양피지를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비극의 씨앗이 될 줄이야……. 어느 날 갑자기 이백여 명의 복면인들이 그의 집으로 쳐들어온 것 이다. 단 한 장의 양피지 때문에 평화스럽던 집안이 졸지에 혈겁을 당한 것이다. 봉란선의 어머니와 한 명의 시비는 각각 한 명씩의 쌍둥이 자매를 안고는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다. 도망을 치던 그녀들은 도중에 서로 헤어졌다. 봉란선을 안고 도망친 어머니는 다행히도 나중에 인의유협을 만나 서 석실을 찾아왔지만, 다른 어린애를 안고 간 시녀의 행적은 찾 을 수가 없었다. 인의유협은 필사의 탈출을 하면서 입은 너무나도 심한 부상 때문 에 채 이 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봉란선의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 딸을 놔 두고 인의유협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다. 그 때부터 봉란선의 외로운 삶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여인과 어딘가는 다른 데가 있었다. 보통의 여인 같으면 외롭게 혼자 살면 성격이 차갑게 변하기 마련 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가 않았다. 항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품과 기억에는 거의 없었지만 아버지의 인자한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부드럽고도 현숙(賢 淑)한 여인으로 자라 온 것이다. 각설하고, 학운기가 슬픈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다독거려 주었다. "자… 선매, 그만 가도록 합시다. 지하에 계신 부모님들도 선매가 하루 빨리 동생을 만나서 원수를 갚고 돌아올 것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오." "고마워요, 오빠. 자, 가요." 그녀는 한 마디 하고는 더 이상 있다가는 영원히 못 떠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 황급히 몸을 날렸다. 학운기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는 즉시 뒤를 따랐다. 백아와 취아도 뒤질세라 그들의 뒤를 쫓았다. 네 줄기의 크고 작은 백선들은 빛살보다도 빠른 속도로 동쪽을 향 하여 날아갔다. 학운기는 경공을 펼치면서 내심 봉란선의 높은 경공에 감탄을 금 할 수가 없었다. '음, 선매의 무공은 옥매와 버금 갈 것 같구나.' 그들은 지금 무창의 무림제일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내방산에서 무창까지는 오백여 리의 먼 길이었지만 초절한 무공을 소유한 그들의 경공으로는 두 시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학운기는 무림제일궁에 도착해서는 멍하니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폐허(廢墟)였다. 그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던 수많은 전각과 누각들은 씻은 듯이 사 라져 버렸고, 단지 타다 남은 기왓장과 나뭇조각만이 썰렁함을 더 해 주고 있었다. 학운기는 썰렁한 잿더미를 헤치고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찾았다. 그는 제발 지하 석실에서 그리운 사람들을 모두 만나길 기원하였 다. 하지만 그의 기원(祈願)에도 보람 없이 지하에는 역시 아무도 없 었다. 단지 혈흔만이 군데군데 묻어 있어서 이 곳에서의 치열한 혈투를 증명해 줄 뿐이었다. '음, 이들이 표식을 남겨 놓을 틈도 없이 다급했단 말인가? 그렇 다면 그들은 이미…….' 그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면서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썼 다. '주존이라는 자가 출관을 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천 노야가 있는데, 이토록 철저히 당할 리가 없을 텐데…….' 그는 한참 생각을 굴리다가는 즉시 개방의 무창 분타를 향하여 몸 을 날렸다. 개방의 무창분타도 역시 무림제일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학운기는 사태(事態)가 보통 다급하게 변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 다. '음, 그렇다면…….' 그는 황급히 진기용역술(眞氣易容術)을 펼쳐서 평범한 서생으로 변장을 하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봉란선은 그의 갑작스런 변화에 매우 놀랐으나, 그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는 사태를 어느 정도 짐작하였다. "선매, 선매도 빨리 변장을 하시오. 선매는 옥매와 너무나도 똑같 기 때문에 적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소." 그녀는 그의 말에 따라 즉시 보따리에서 몇 가지 약병을 꺼내어 변장을 하였다. 그녀의 역용술도 매우 고절(高絶)하여 웬만한 절정고수 정도는 알 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학운기는 우선 무림의 정세(政勢)를 살피기 위하여 주루를 찾았 다. 무창에는 중원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크고 화려한 주루 (酒樓)가 있었다. 그것이 악양루(岳陽樓)와 버금 가는 황학루(黃鶴樓)였다. 황학루는 무창성(武昌城)의 서쪽 끝 양자강안(揚子江岸)에 위치하 고 있었다. 그 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는, 당대(唐代)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시를 지으려다… 이것보다 나은 것이 될 수 없다고 붓을 던진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학루는 오늘도 역시 시인묵객(詩人墨客)들과 수많은 무림인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학운기와 봉란선은 비록 얼굴은 별로였지만, 비싼 듯한 백색 비단 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점원으로부터 최상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 었다. 그들은 점원의 안내로 삼층으로 올라갔다. 삼층은 일이층과는 다르게 별로 붐비지 않았다. 학운기가 굳이 조용하고 비싼 곳을 찾은 것은 좀더 굵직한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다. 삼층에도 약 삼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두서너 명씩 자리를 잡고 앉 아서 조용하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태양혈(太陽穴)이 불쑥 솟아오른 것으로 보아서 일류 의 내공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학운기는 몇 가지 요리와 한 병의 술을 시키고는 봉란선과 얘기를 주고받는 척하면서 천리지청술을 펼쳐 무림인들의 얘기에 귀를 기 울였다. 그들의 얘기는 한결같이 놀라운 소식들뿐이었다. 학운기는 그들 중에서 문득 낯익은 한 명의 중년인과 한 명의 노 인을 발견하고는 그들의 얘기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바로 학운기가 처음 강호에 나왔을 때 그에게 무공의 신비 함을 알게 해 주었던 방학노인(傍鶴老人)과 금필유협(金筆儒俠) 사마위(司馬偉)였다. 그는 나중에 금의중년인의 별호와 이름을 알았었다. 사마위의 침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방학 선배님, 아무래도 무림에 수습치 못할 혈풍(血風)이 불어 올 것 같습니다." "노부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 동안 위세를 떨쳤던 칠파일방(七派 一幇) 중 아미(峨嵋), 청성(靑城), 공래( 來)가 멸망하더니… 이 번에는 소림(小林)이 멸망하고, 무당(武當), 화산(華山) 공동(控洞 )과 개방( 幇)이 봉문(封門)을 해 버렸으니 말이오. 더구나 현 정파무림의 영수 격인 무림제일궁이 잿더미만 남았고, 어떠한 혈 겁에도 은밀히 행동하던 개방의 제자들마저 한 명도 보이지 않으 니… 아마도 무림사 이래로 최대의 혈풍이 몰아닥칠 모양이오." "방학 노선배님께선 이 혈겁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 까?" "글쎄… 아마도 마황성(魔皇星)의 전설이 맞긴 맞는 모양이오. 그 런데 정파무림을 영도(領導)할 만한 고인(高人)들이 갑자기 실종 이 되었으니……." 방학노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후배는 이 곳에 오면서 무당에 들려 왔습니다. 한데 그 곳은 문 이 굳게 닫혀 있을 뿐만 아니라, 왠지 음산한 느낌마저 들어서 후 배는 무림의 금기(禁忌)임을 알면서도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후배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 다." "그것이 무엇이오?" "예, 보통 봉문을 하면 수신(修身)에 전념을 하는 것이 상례가 아 니겠습니까? 한데 무당파 내에는 도인은커녕 돌아다니는 쥐 한 마 리도 없었습니다." 방학노인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들른 화산과 공동도 마찬가지였소. 노부는 그들이 혹 독 살을 당하지 않았나 싶어 세밀히 조사를 해 봤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소. 사마 대협이 들른 무당은 어떠했소?" "후배도 그 점에 의심을 가지고 조사를 해 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데 사마 대협은 무황성(武皇城)이라는 신비문파의 개파대전(開 派大典)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보았소?" "예. 그런데 후배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혹시 마황성(魔皇星)의 전 설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매우 걱정이 됩니다." "노부도 그것이 걱정이오. 정파의 영수들이 모두 의문의 실종을 한 지금, 사파인지 정파인지도 모르는 거대한 문파가 탄생을 하는 것이 과연 무림에 복이 될지, 아니면 화가 될지……." "방학 노선배님도 초청장을 받으셨습니까?" "그렇소. 노부는 이 달 보름에 열리는 무황성(武皇城)의 개파대전 에 참석하여 그들의 의도를 알아볼 셈이오." "그렇다면 후배와 함께……." 그 다음부터 그들은 얘기를 전음으로 주고받았으므로 들을 수가 없었다. 학운기는 다른 무림인들에게 청력(聽力)을 집중시켜 보았으나 그 들의 화제도 모두 칠파일방과 무림제일궁, 그리고 한천보와 경혼 방의 멸망, 봉문에 대한 이야기와 이 달 보름에 있을 무황성의 개 파대전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러한 것에 대한 얘기는 모두가 학운기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 '음, 삼파일방이 봉문을 하고 모두 실종됐다면 어디로 갔단 말인 가? 혹시, 소림의 고승들처럼 그들도…….'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내심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림의 고승들은 성룡방에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군. 그들이 성룡방에만 도착을 했다면 제갈 노야의 실력으로 보아서 최소한 증세를 악화시키지는 않았을 텐데…….' 그가 한창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쿵쾅거리며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다섯 명의 청의인 이 삼층으로 올라섰다. 그들의 가슴에는 모두 금색 수실로 무황(武皇)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학운기는 그들을 보고는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 앉혔다. 청의인들의 태도는 위세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들 것 같았다. 그들 중에서 무황이라는 두 글자가 약간 크게 새겨진 자가 주루 안에 앉아 있는 무림인들에게 가볍게 포권의 예(禮)를 취하였다. "본인은 무황성(武皇城)의 무창 분타주인 전소백이라 하오. 본인 이 이 곳에 온 것은 이 달 보름날 개파대전 일에 여러분을 초청하 기 위함이오." 그는 비록 예를 취하는 척하였지만 거만스러운 목소리와 태도는 주루 안의 무림인들을 모두 수하 대하듯 하였다. 그가 옆의 청의인들에게 턱짓을 하자 그들은 무림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별호를 확인한 다음, 한 장의 검붉은 청첩장을 내주었다. 그 중의 한 청의인이 학운기와 봉란선을 한 번 바라보다가는 도저 히 무림인 같지가 않은지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그들이 청첩장을 모두 돌리고 나자, 전소백이 다시 주루 안의 무 림인들을 훑어보았다. "먼저 청첩장을 받으신 여러분께 축하를 드리오. 만약 청첩을 다 른 곳에서 받고 여기서 또 받은 분이 계시거나, 받은 분이 참석을 안 하신다면 아마도 주존님의 노하심을 받으실 것이오. 여러분들 은 행운아들이오. 왜냐하면 본궁의 개파대전 일에 천신(天神)보다 도 더욱 고귀하신 본궁의 정사지존(正邪之尊)이신 주존님의 성체 (聖體)를 뵈올 것이기 때문이오." 말을 하는 그의 음성은 매우 들떠 있었다. 그것은 은근한 협박이었다. 지켜보던 무림인들은 웬일인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전소백은 무림인들을 쭉 훑어보더니 자신의 옆의 탁자를 손으로 가볍게 문지르는 듯하면서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앗!" "아……!" 십여 마디의 놀라운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전소백이 가볍게 문지른 탁자, 그의 손길이 스친 곳은 이미 부석 부석한 가루로 변해 있었다. 학운기는 봉란선에게 눈짓을 보내면서 즉시 전소백의 뒤를 따라갔 다. ====================================================== 第 9 章 변해 버린 여심(女心) ====================================================== 전소백과 청의인들은 무창성의 몇 군데 화려한 주루와 객점들을 들르면서 똑같은 방법으로 청첩장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성의 서문(西門)을 통하여 성을 벗어났다. 학운기는 현령진경(玄靈眞經)에서 익힌 교묘한 미행술(尾行術)을 사용하여 귀신도 모르게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성을 빠져 나와 관도를 벗어나 옆으로 나 있는 샛길로 들 어섰다. 때마침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던 학운기의 오른손이 가볍게 움직이는가 싶자, 그들은 모두 석상처럼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학운기는 그들 중에서 전소백의 몇 군데 혈도를 더 누른 다음, 불 혼항마대법(佛魂降魔大法)을 시전하였다. 전소백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황홀한 표정으로 학운기의 신비로 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학운기의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가 피어 올랐다. "너는 누구냐?" "무황성의 무창분타주인 전소백입니다." "무창분타주는 어디에 있느냐?" "무창성 밖 서쪽 오십 리쯤 떨어진 곳에 새로 지어진 장원이옵니 다." "너의 수하는 모두 몇 명이냐?' "예, 지금은 삼십 명이지만 개파대전이 끝나면 오백 명이 넘을 것 입니다." "본성(本城)은 어디에 있느냐?" "악양성 북쪽 약 오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성주(城主)는 누구냐?" "주존님이시옵니다." 전소백은 비록 불혼항마대법에 걸려 있었지만 주존이라는 말을 할 때는 매우 존경스런 태도를 보였다. "주존은 누구냐?" "……." 전소백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뭐라고 대답을 못하였다. 학운기가 불혼항마대법을 더욱 높이 끌어올렸지만 역시 대답은 못 하고 괴로운 표정만을 지었다. "그럼 우내사마(宇內四魔)는 무황성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느냐?" "호법(護法)님이옵니다." "패천마황과 수라절혼마는……?" "당주(堂主)님이시옵니다." "흑살시마는?" "……." 전소백은 멍한 표정만을 지었다. "그럼 무당, 화산, 공동을 봉문시켜 놓고 납치한 무인들은 모두 어떻게 했느냐?" "무당, 화산, 공동? 소인도 지금 그들을 찾고 있습니다." "으음……!" 학운기는 그의 말을 듣고는 내심 깊은 생각에 빠졌다. '마황성에서 그들을 납치하지 않았다면 그들 스스로… 아니면 천 노야의…….' 한참 생각을 하던 그는 다시 전소백을 바라보았다. "개파대전 일에 초청된 군웅들은 모두 어떻게 되느냐?" "그들은 모두 주존님의 충실한 수하가 될 것이옵니다." "어떻게?" "……." "만약 참석을 않는 자는 어떻게 되느냐?" "죽음… 주존님을 거역(拒逆)하는 자는 오직 죽음밖에 없습니다." 전소백은 그 말을 하면서 눈에서 시뻘건 광염(狂炎)의 살기(殺氣) 를 줄기줄기 뻗어 냈다. '으음, 어떤 방법으로 이 자들을 가르쳤기에 이토록 철저하게… ….' 학운기는 그들의 독랄한 생각에 치를 떨면서 몇 가지를 더 물어 보았다. 그러나 전소백이 알고 있는 것은 매우 한정(限定)된 것밖에 없었 다. 학운기는 그에게 더 이상 물어 볼 것이 없음을 깨닫고는 불혼항마 대법을 푼 다음, 그들을 소로(小路)에다 데려다 놓고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들은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는 저 멀리 보이는 장 원 쪽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학운기와 봉란선은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숲에서 나와서는 남쪽으 로 몸을 날렸다. 학운기는 아직 마황성의 개파대전 일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고 해 서, 우선 강서(江西)의 성룡방(聖龍幇)에 들려 보기로 하였다. 그는 몸을 날리면서도 제발 성룡방만은 무사하고, 또 거기에 우내 사존 등이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들이 구궁상(九宮山) 근처를 지날 때. "아아악……!" 약 십여 리 밖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학운기의 몸은 벌써 빛살보다도 빠른 속도로 그쪽으로 향하고 있 었다. 봉란선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의 신형이 그녀의 시야에 서 사라져 버리고 난 후였다. 학운기가 비명이 들려 온 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거기서 한 낯익 은 여인이 이십여 명의 청의인들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바로 서문정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삼 년 전 학운기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 전히 몰라볼 정도로 성숙되어 있었다. 그 때는 아직도 앳된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풍만한 몸매를 지닌 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녀를 포위 공격하고 있는 청의인들의 가슴에 무황이라는 두 글 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 무황성의 마도들이었다. 무림 십대고수 중의 일 인인 도요선고(桃瑤仙姑)의 의발전인인 서 문정의 무공은 대단하였다. 하지만 그녀를 공격하고 있는 청의인들의 무공도 강호의 일류고수 를 능가하는 것이었고, 더구나 수적으로 절대적 우세를 점하고 있 는지라 협공에 매우 여유가 있었다. 그녀의 몸에 걸친 옷들은 이미 여러 군데가 찢어져서 희끗희끗 속 살이 내비치고 있었다. 청의인들은 그러한 그녀를 음탕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죽일 기회가 있는데도 슬슬 위협만 하고 있었다. 학운기는 청의인들의 뜻을 대강 짐작하고는 분노의 외침을 발하며 그들에게 덮쳐 갔다. "멸겁(滅劫)－!" 쾅－ 콰르릉－! "아악!" "으악!"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음과 처절한 단말마들이 들리면서 십여 명 청의인들의 골통과 육신이 박살나 버렸다. "앗!" "네놈은 누구냐?" "절혼(切魂)－!" 쾅－ 콰르릉－! 청의인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소리를 질렀으나 그들도 역시 단말마를 뱉으면서 동료들의 뒤를 따라가 버렸다. 살아남은 서너 명이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쇄혼(碎魂)－!" "아악!" "으악!" 그들도 역시 학운기의 무형무음의 지력(智力)에 의하여 천주혈(天 柱穴)이 관통당하며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마지막 단말마가 사라짐과 동시에 봉란선이 백아, 취아와 함께 장 내에 도착하였다. 서문정은 학운기의 고절한 무공에 넋을 잃고 있다가는 퍼뜩 정신 을 차리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소녀가 은공께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큰절을 올리려 하였다. 학운기는 그녀의 태도에 매우 당황하면서 급히 그녀의 몸을 일으 켜 세웠다. "낭자! 이러지 마시오." 서문정은 그가 단지 소매를 슬쩍 움직이는 것만 봤는데, 꿇어앉으 려던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우자 깜짝 놀랐다. '맞아! 이분이야. 그의 혈겁(血劫)을 막을 고인은 이분이 틀림없 어.' 그녀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는 다시 학운기를 바라보 았다. "은공! 소녀는 서문정이라고 하옵니다. 혹시 은공의 존명을 알 수 있을런지요." 학운기가 고혹적인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낭자! 소생은 학운기라 하오. 낭자와 소생은 초면이 아니라 구면 이오." 서문정은 그의 말에 매우 놀란 듯하였다. "아, 상공이 바로 절대신룡 학 대협이시군요. 그런데 소녀를 구면 이라 하심은……." 학운기는 고개를 슬쩍 돌려 진기용역술을 풀고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앗!" 서문정은 그의 갑작스런 변화에 탄성을 토해 냈다. "아, 상공은 언젠가 악양 교외에서 만났던……." "그렇소." 서문정은 깊은 감회가 서린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한 그녀의 눈에서는 언제부턴가 영롱한 눈물이 한 방울씩 흘 러내리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녀의 돌연한 태도에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 다. "낭자, 그런데 어떻게 악도들에게 쫓기게 되었소?" 서문정의 눈에서는 더욱 많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더니, 마 침내는 서러운 오열로 변하고 말았다. "흐흐흑……!" 학운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녀와 봉란선을 번갈아 쳐다볼 뿐 이었다. "흐흐흑… 사부님! 흐흐흑……!" 그녀는 이제 사부를 부르면서 흐느꼈다. 학운기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낭자, 그만 고정하고 그 간의 사정을 말씀해 보시오. 낭자의 사 부님께서는 혹 어떻게 되시었소?" "흐흐흑… 사부님께서는 소녀 때문에 그만… 흐흐흑……!" 그녀는 울음 때문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 학운기가 한참을 더 달래서야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그 간의 사정 을 자세히 말하였다. "소녀는 삼 년 전 동정호 부근에서 금갑이 출현했을 때 상공과 헤 어져서 사부님을 만나러 갔어요. 그러나 사부님과 약속한 장소에 는 사부님 대신에 웬 낯선 젊은 청년이 서 있었어요." 길게 이어지는 그녀의 애절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그녀와 젊은 청년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짜릿한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 그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학운기를 만났을 때도 그 비슷한 것을 느끼기는 하였지만 이토록 강렬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젊은 청년의 이름은 독고풍(獨孤風)이라 하였다. 그들의 마주친 눈길은 떨어질 줄을 몰랐고, 어느 새 그들은 어깨 를 나란히 하여 걷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오랫동안 사귀어 온 연인들처럼 매우 자연스럽고 다정해 보였다. 그들은 곧 인적이 끊긴 숲 속으로 들어섰고, 무엇인가 오랫동안 갈구해 오던 것들을 마음껏 풀었다. 서문정으로서는 평소에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 날부터 그들은 단 한시라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금갑을 가지고 한 달여 동안 씨름하더니… 서문정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서문정은 도저히 그의 영상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와 헤어진 곳에 서 떠날 줄을 모르고 그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몇 달, 독고풍이 보낸 사람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녀가 간 곳은 어느 깊은 산골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무슨 무공인가를 익히고 있던 독고풍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잔인하고 악랄하고 음탕한 대마두로 변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녀는 그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의 곁에는 그녀 외에도 몇 명의 여인이 더 있음에도 불구하고… …. 그녀도 그를 만나고서부터 점차 성격이 변한 것이다. 음탕하고 쾌락(快樂)을 추구하는 여인으로 그렇게 이 년여가 흘렀 다. 그런데 며칠 전 그녀는 독고풍이 모든 무공을 익히고 나자, 그를 따라서 무황성에 왔다. 독고풍이 바로 무황성의 성주이자 주존이라는 자였다. 그와 삼 년 동안 살을 맞대고 살아온 그녀로서는 그의 높은 지위 와 무공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한창 그런 식으로 들뜬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그녀에게 청천벽력 보다도 더한 충격이 안겨진 것이었다. 그녀의 사부 도요선고는 육십이 넘은 노파였다. 그러나 어렸을 때 우연히 복용한 주안과(駐顔果) 때문에 아직도 이십대의 여인으로 보였다. 그러한 그녀가 바로 며칠 전 무황성에 침입하였다가 붙들린 것이 다. 화용월태보다도 더한 미모를 간직하고 있던 그녀를 본 독고풍이 절대로 그냥 놔 둘 리가 없었다. 서문정 등이 보는 앞에서 겁간을 한 것이다. 전에도 몇 번 서문정 앞에서 다른 여인과 정사를 벌인 적이 있었 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비록 평소의 이지를 상실하고 있다곤 하여도 사부조차 못 알아볼 그녀가 아니었다. 독고풍에게 짓눌린 사부의 처절한 절규가 그녀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 버리는 듯하였다. 그녀는 눈이 뒤집혀 독고풍에게 달려들었지만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그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독고풍의 무공은 이미 그녀가 암살(暗殺)할 정도는 아닌 것이었 다. 그녀는 정신을 차렸을 때 또 한 번의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을 감 수해야만 했다. 이미 인간의 심성이 아닌 독고풍이 그녀를 부하들에게 노리개감으 로 주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야수(野獸)보다도 더한 그들에게 몸이 더럽혀지면서 다행 인지 본래의 이지를 찾았다. 당장 죽고만 싶었다. 그러나 삼 년 동안 독고풍과 살을 맞대고 살아온 그녀는 독고풍의 모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야망과 그의 성격, 그 동안 그가 계획해 온 것으로 봐서는 강호에 도저히 막지 못할 피바람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였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강호무림을 위해서 뭔가 한 가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침내 그녀는 어젯밤에 탈출을 감행하고 마황성의 마도들에게 추 격을 당하여 이 곳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학운기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독고풍의 악랄성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봉란선도 그녀의 애절한 과거 이야기에 눈물을 찔끔거렸다. "낭자는 어디로 가려던 중이었소?" "그냥 아무나 만나서 소녀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전해 주려고만 했 어요." 그녀는 마황성의 독계(毒計)를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학운기는 그녀의 얘기를 모두 듣고 나서 그들의 엄청난 음모에 대 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문정은 얘기를 모두 마치고는 학운기를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보 았다. "소녀는 학 상공께서 독고풍의 악랄한 음모를 꼭 분쇄하리라고 믿 어요. 그럼 소녀는 이만……." 그녀는 그에게 가벼운 예를 취하고는 몸을 날렸다. "낭자……." 학운기가 그녀를 불렀을 때는 이미 그녀의 신형이 숲 속으로 사라 지고 난 후였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봉란선이 이상한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 보았다. "오빠, 그녀의 행동이 조금……." 학운기의 전음이 그녀의 고막을 때렸다. "선매, 아무 말 마시오." 그는 짧게 한 마디 하고는 봉란선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그만 갑시다." 그들이 몸을 날려 사라지고 난 후, 아까 사라졌던 서문정이 숲 속 에서 살그머니 걸어 나왔다. 그녀의 착잡 미묘한 표정은 도저히 그녀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 지를 추측할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한참 학운기 등이 사라진 방향을 그렇게 바라보던 그녀도 이윽고 몸을 날려서 그 자리를 떠났다. 한편 학운기는 몸을 날리면서도 머리가 매우 복잡하였다. '으음, 정파의 영수 격인 도요선고의 제자인 그녀가 왜 그러한 행 동을…….' 그는 그녀의 태도에서 여러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었다. 우선 그녀의 눈빛이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가 하는 얘기는 대부분이 그가 수긍할 수 있는 것들 이었다. 특히 마황성의 독랄한 음모들은 그가 생각해도 교묘한 음모들이었 다. 그들이 그러한 것까지 알려 주면서 역으로 이용하려 했다면, 학운 기의 행적(行蹟) 하나하나는 이미 그들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 는 얘기가 된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매우 다급한 생각이 들었다. "선매, 빨리 갑시다." 그들의 신형은 다시 빛살과도 같이 빨라졌다. 남창(南昌). 강서(江西)의 파양호( 陽湖)변에 위치한 강서 제일의 시진이다. 그 남차의 북동쪽으로 십여 리쯤 떨어진 곳에 웅장한 장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곳이 바로 무림삼방(武林三幇) 중의 하나이고, 약왕(藥王) 성 수옥룡(聖手玉龍) 제갈휘(諸葛輝)의 거처인 성룡방(聖龍幇)이다. 그러나 지금 그 곳은 군데군데 타다 남은 기둥들만 있을 뿐, 완전 히 폐허로 변해 있었다. 시끄러울 정도로 지저귀며 놀던 새들조차도 지금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학운기는 비록 처음 와 보는 곳이기는 했지만 잘못 찾을 리는 없 었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고는 멍하니 넋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그렇다면 천 노야 등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무황성 의 태도로 보아서 그들이 잡힌 것 같지는 않은데…….' 한참을 생각에 골몰하며 혹시 무슨 단서라도 찾을 수 없을까 하고 주위를 살피던 그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한 곳을 뚫어져라 쏘아보 았다. "친구, 이제 그만 나오시지." 순간 잿더미 속에서 몇 줄기의 인영이 솟구쳐 나왔다. 그들은 급히 학운기 앞으로 다가오더니 부복을 하였다. "주상, 무사하셨군요." "천 노야, 맹 노야가 아니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자, 그만 일어나시오.' "예." 그들은 새제갈과 주걸신개, 그리고 동방군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왜 이토록 철저하게 당하였소?" 새제갈이 안심과 감격이 뒤범벅된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주상,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죠." "아니, 안이라뇨?" "예, 모든 사람들이 주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가볍게 예를 취해 보이며 학운기와 봉란선을 그들이 솟구쳐 나왔던 잿더미 속으로 인도하였다. 그가 주위에 널브러진 기둥 중에서 몇 군데를 만지자, 기관이 작 동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아래로 통하는 조그만 통로가 나타났다. 그들이 통로로 모두 들어서자, 암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통로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야명주가 박혀 있어서 매우 밝은 편이 었다. 학운기는 지하에 이러한 시설이 있는 것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통로는 계속 아래로 경사지게 뚫려 있었다. '음, 이만큼 왔으면 위는 호수란 말인데… 호수 아래에 이토록 거 창한 지하 통로를 만들어 놓다니…….' 통로는 갈수록 넓어졌고, 백여 장쯤 들어갔을 때는 넓이가 오 장 은 넘어 보였다. 통로의 천장에서는 가끔 물방울이 떨어졌으나, 옆에 난 조그만 도 랑을 통하여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오십여 장쯤 들어갔을 때 학운기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아……!" 봉란선도 매우 놀란 듯 넋을 잃고 있었다. 지하 궁전이었다. 웬만한 지상의 장원들도 감히 견주지 못할 정도의 커다란 전각과 누각이 수십 채 들어서 있었다. 학운기와 봉란선은 곧 한 커다랗고 화려한 전각으로 안내되었다. 그가 막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십여 명의 인영들이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오빠!" "주상!" 호운옥과 제갈소연, 그리고 황보웅 등이었다. 호운옥은 그를 보자마자 품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순간 학운기의 전음이 그녀의 귀를 때렸다. "옥매, 색단의 효력을 잊었소?" 호운옥은 그의 전음을 듣는 순간, 멈칫 제자리에 서 버리고 말았 다. "내 옥매에게 매우 귀중한 분을 소개해 드리겠소." 그는 말을 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호운옥을 바라보고 있 는 봉란선을 쳐다보았다. "선매, 그만 역용을 지우도록 하시오." "예." 봉란선은 흐느끼면서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 바른 역용약을 지워 나갔다. 그녀가 모든 것을 마치고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앗!" "아……!"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너무나도 똑같은 그녀들의 모습에 탄성 을 토해 냈다. 호운옥도 봉란선의 모습을 보고는 매우 놀란 듯하였다. 그녀로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봉란선이 그녀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네가 앵아란 말이냐? 진정……." 학운기가 그녀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옥매, 선매 방에 들어가서 당신들의 가슴에 나 있는 문신을 보면 당신들이 친자매간인 것이 확실해질 것이오." 그녀들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청 옆의 방 안으로 들어 갔다. 학운기가 다시 새제갈 등을 바라보면서 그 간의 사정을 물으려 할 때. 제갈소연의 앙칼진 음성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오빠는 어디서 또 여인을 데리고 왔어요? 순 바람둥이 같으니라 구. 잠시 후에 저한테 혼날 줄 아세요."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매섭게 쏘아본 후 대청 밖으로 나가 버렸 다. 이 때 육십여 세 정도의 매우 청수하게 생긴 노인이 다급한 표정 으로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새제갈이 그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성수옥룡 제갈휘입니다." 학운기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제갈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노복이 주상을 뵈옵니다." "그만 일어나시오." 제갈휘는 그대로 몸을 굽히고 있으려 했으나 학운기의 부드러운 잠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자, 그만 자리에 앉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제갈휘가 가볍게 예를 취하며 자리에 앉았을 때. 방 안에서 봉란선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학운기는 방 쪽을 슬쩍 쳐다보다가는 다시 새제갈을 바라보았다. "한데, 선승과 노도는 어디에 갔소?" "예, 연무장에서 정파의 고수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으음, 이 곳에는 모두 몇 명이나 있소?" "무당, 화산, 공동의 일류급 제자들까지 합하면 삼천 명은 될 것 입니다." 학운기가 매우 놀라운 표정이 되었다. "그들도 모두 여기에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삼 파와 개방의 정예고수들, 그리고 뜻 있는 정파의 일류급 고수들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황보 소궁주와 제천대왕은 어떻게 하고 있소?" "예, 노복이 특별히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 낭자께서도 많 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으음……!" 학운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에 골몰하다가는 제갈휘를 바라 보았다. "제갈 노야께서는 소림 고승들을 살펴보셨소?" "예, 하지만 노복의 실력으로는 그들을 완전히 치유할 수가 없었 습니다." "그래, 지금은 어느 정도요?" "더 이상 악화(惡化)되지 않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 다." 학운기는 그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는 다시 새제갈 을 바라보았다. "천 노야는 무황성의 개파대전에 대하여 알고 있소?" "예, 강호에 은밀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개방의 제자들로부터 계속 소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 그들이 개파대전 일에 무슨 일을 꾸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그건 아직… 하지만 마심뇌사가 일을 꾸민다면 대처할 자신은 있 습니다." "이젠 마심뇌사가 아니라, 무황성의 주존이라는 독고풍이오." "예? 그럼 그 자가 바로 마황성의……." "그럴 것이오." 학운기는 이 곳에 오면서 만난 서문정과의 일에 대하여 자세히 설 명을 해 주었다. 새제갈이 조용히 그의 얘기를 듣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주상께서는 혹 그녀가 정신이상이 되지 않았나에 대해서도 생각 해 보셨습니까?"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해 보았소. 하지만 그녀의 얘기가 논 리정연한 것을 보고는 절대 정신이상은 아니라고 확정을 지었소." "그렇다면 혹 정신적 갈등 때문에……." "글쎄요. 한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내가 그 곳을 지날 것인지를 알았나 하는 것이오." "주상께서는 혹 그들이 알고 있는 모습으로 변장을 하셨던 적이 없었습니까?" "글쎄요. 무림제일궁에 들를 때까지는 본래의 모습이었소. 하지만 그 때 주위에서 누가 엿보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소." "주상께서는 노복이 몇 장 정도 접근을 하면 알아채실 수 있습니 까?" "천 노야 정도면 약 오십 장……."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갈휘는 아직껏 그의 무공을 견식해 보지 못했 는지라, 그 말을 듣고는 매우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 젊은 나이에 그토록 고강한 공력을 소유할 수가 있다니… 한 데 주상과 연아는 보통 관계가 아닌… 하여튼 일이 잘 돼야…….' 제갈휘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학운기와 새제갈은 진지한 토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새제갈이 심각한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주상께서는 혹시 다르게 생각하신 것은 없습니까?" "글쎄요? 서문정이 아무 정파 인물이라도 목표를 정했다면, 그토 록 많은 수의 무황성도(武皇星徒)들을 파견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들이 그것을 목표를 했다면 최소한 천 노야 등 우내사존이나 동 방노야 등 십대고수 안에 드는 고인을 목표로 했을 텐데……." "으음, 서문정의 행동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군요. 하여튼 다각도에서 대책을 세워 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럼 천 노야께서 수고를 해 주시오. 그들이 개파대전 일에 초청 된 수천 명의 군웅들에게 간계를 부릴 것은 분명하니, 우리도 사 전에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할 거요. 그리고 맹 노야는 하루 빨리 무황성의 모든 분타의 소재지를 정확히 파악하도록 하시오." "예." 새제갈과 주걸신개가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학운기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제갈휘를 바라보았다. "제갈 노야는 나와 함께 소림 고승들에게로 가 봅시다." "예." 제갈휘가 학운기를 인도한 곳은 약 냄새가 물씬물씬 풍겨 나오는 조용한 전각이었다. 전각에는 십여 개의 커다란 방이 있었는데, 방에는 모두 정신을 잃고 있는 소림 고승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의 몸은 모두 하얀 천으로 감겨져 있었고, 겨우 코와 입만이 보일 뿐이었다. 학운기는 방에 들어서서 한 승인의 맥을 짚어 보았다. 한참을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휘 를 바라보았다. "그 동안 제갈 노야의 노고가 매우 컸겠구려." "아닙니다. 노복은 단지……." "아니오. 노야께서는 겸손의 말은 하지 마시오. 그럼 금침(金針) 과 뜨거운 물을 준비해 주겠소?" "예." 제갈휘는 곧 시녀들을 시켜서 뜨거운 물을 가져오게 하였다. 학운기는 그녀들이 물을 가져오자 제갈휘, 동방군, 황보웅과 함께 손수 소림고수들의 몸에 감긴 천을 풀고는 그들의 몸을 깨끗이 씻 었다. 제갈휘는 한사코 수하들을 시켜서 해도 될 일이라고 했지만 학운 기의 거절로 그들이 스스로 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몸을 씻겨 주면서 혈도를 정확히 주물러 주어야 하 므로, 고강한 무공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매우 위험한 사태까지 발생되기 때문이었다. 제갈휘는 이제까지 자신의 의술(醫術)이 결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었다. 그러나 학운기의 의술을 보고는 의학(醫學)에의 길이 끝이 없음을 새삼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운기도 소림 고승들의 몸을 씻으면서 제갈휘의 높은 의술에 감 탄을 하였다. 그토록 난자하게 갈라졌던 소림 고승들의 몸이 깨끗하게 아물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일부러 몸에 상 처를 내서 독문 비약(秘躍)을 발라 강시( 屍)로 만들려던 사람의 상처는 일반 의술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학운기는 그들의 몸을 모두 씻자 즉시 금침술(金針術)을 펼쳤다. 일반적으로 금침의 대가(大家) 정도면 사람의 몸에 삼백육십 개의 금침을 꽂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기혈(氣血)이 역행되므로 보 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학운기는 지금 한 사람에게 거의 천여 개씩의 금침을 꽂고 있었다. 그것도 모두가 한 치 이상의 깊이로 꽂았다. 침술(鍼術)은 정확한 혈도의 위치를 모르면 시전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것은 장소와 시간에 따라서 매우 커다란 변화를 보이므 로 쉽게 익힐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미 의술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제갈휘나 무학에 일가견(一家 見)을 가지고 있는 동방군, 황보웅 등도 학운기가 시술(施術)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 동안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깨달을 수가 있 었다. 학운기는 한 시진이 넘어서야 삼십여 명의 소림 고승들에게 모두 시술을 할 수가 있었다. 무림의 절대종사(絶代宗師) 격인 그의 이마에 수많은 땀방울들이 맺혀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시술을 했는가를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시술을 모두 마치고 나서 제갈휘에게 몇 가지 약초를 준비해 올 것을 지시하였다. 약왕(藥王)이라 불리우는 성수옥룡의 비밀 거처였으므로 약초는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 학운기는 즉시 그 약초들로 한 가지 환약을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소림 고승들에게 한 알씩 먹이고는 나머지는 만약을 위해서 제갈휘에게 보관토록 하였다. 그가 모든 것을 끝마쳤을 때 우내사존과 무당, 화산, 공동, 개방 의 현 장문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당 장문인 청허자(靑虛者)의 사조(師祖)인 천기자가 학 운기와 주종 관계에 있었고, 개방장문인 환영개(幻影 ) 어무운 (魚武韻)의 사조인 주걸신개가 학운기와 주종 관계였므로 그들의 관계도 자연적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학운기는 이미 정파무림의 대종사(大宗師) 격이 되어 있었던 것이 다. 화산 장문인은 탈명쾌검(奪命快劍) 석검량(昔劍良)이었고, 공동 장문인은 원광자(元光子)였다. 그들은 모두 무황성에 의해서 멸망 일 보 직전의 위기를 새제갈의 기지로 잘 넘기고 일류급 고수들만을 이끌고 이 곳으로 온 것이었 다.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들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무림이 화평을 되찾 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쓸데없는 희생을 막기 위한 새제갈의 배려였다. 학운기는 그들과 거의 두 시진 동안을 그 동안의 일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하여 숙의하였다. 그런 다음, 학운기는 앞으로 무황성과의 대결전에 대비해서 군웅 들에게 몇 가지 무공과 진(陣)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단시일 내에 무황성도(武皇城徒)들과 비슷한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그가 고심해서 창안한 무공과 진이었다. 그는 군웅들을 혜불선승과 천기자, 그리고 황보웅과 동방군에게 부탁하고 새제갈과 함께 황보룡과 제천대왕이 무공을 익히고 있는 곳으로 갔다. 황보룡과 제천대왕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그를 감격의 눈물까 지 흘리면서 맞았다. "주인님, 소인 놈은 그 동안 정말로 주인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제천대왕은 그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허리를 굽신굽신하면서 연신 절만을 해 댔다. "자, 그만 고정하거라. 네가 하루 빨리 무공을 모두 익혀야 나와 함께 강호를 주유할 것이 아니겠느냐?" "예, 주인님. 소인 놈은 이제 주인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모두 익혔습니다." 학운기가 놀라운 눈으로 새제갈을 바라보았다. 새제갈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주상. 이들은 그 동안 잠도 하루에 한 시진 정도만 자 가면서 오직 무공 증진에만 힘써 왔습니다." "으음, 그 동안 천 노야의 노고가 컸겠구려." 그는 황보룡과 제천대왕을 바라보았다. "그럼 둘이서 그 동안 익힌 것들을 가지고 대련을 해 보시오." "예." 그들은 즉시 학운기와 새제갈에게 포권의 예를 취해 보이고는 대 련을 시작하였다. 학운기는 그들의 대련을 바라보면서 내심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 다. '음, 매우 놀라운 성취로구나. 이제 내공만 더욱 증진되고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인다면, 곧 천 노야 등을 능가하겠구나.' 황보룡과 제천대왕은 이미 오랫동안 함께 무공을 익혀 왔으므로 서로의 장단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들이 대련을 모두 마치자 몇 군데 틀린 곳을 지적해 주고는 몇 가지 새로운 무공들을 전수해 주었다. "이제 이것만 모두 익히면 나와 함께 강호로 나갈 것이니, 지금의 성취에 만족하지 말고 계속 노력하시오." "예, 주상." "알겠습니다, 주인님." 학운기는 그 곳을 나와서는 제갈휘에게 특별히 공력을 증진할 수 있는 몇 가지 선단(仙丹)을 그들에게 주도록 하였다. 그가 처음 들렸던 대전에 돌아왔을 때, 봉란선 자매와 제갈소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갈소연은 그와 자신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알았는지 매우 시무룩 한 표정이었다. 봉란선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오빠, 시장하실 텐데 어서 식사하세요. 옥매와 연 언니가 특별히 오빠를 위해서 연와탕(燕窩湯)과 열구자탕(悅口子湯)을 만들어 놓 았어요." "고맙소." 그가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제갈소연은 묵묵히 그를 지켜보고 있 었다. 학운기의 마음도 그녀의 태도에 의해서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 다. < 第 2 卷 끝 > < 絶對神龍 第 3 卷 > 第 1 章 여인들의 마음 第 2 章 불혼귀마음(佛魂鬼魔音) 第 3 章 마심여심(魔心女心) 第 4 章 거성(巨星)의 탄생 第 5 章 위대한 희생(犧牲) 第 6 章 정사종사(正邪宗師)의 대면(對面) 第 7 章 사랑스런 여인들 第 8 章 천고제일신공(千古第一神功) 第 9 章 정사대전(正邪大戰) ====================================================== 第 1 章 여인들의 마음 ====================================================== 학운기가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나자 제갈소연이 침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 소매는 앞으로 어땋게 되는 거죠? 오빠와 아버님의 관계가 그러한데……." "연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 마시오. 제갈방주와 나는 단 지 무림의 배분상 그렇게 칭할 뿐, 연매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구 속 관계도 없는 것이오.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나는 영원히 무 림을 떠날 것이니까, 곧 그 관계도 필요가 없게 될 것이오." "오빠……." "연매, 어서 식사나 하도록 하시오. 괜한 일에 신경 쓰다가 식사 를 안 하면 몸을 망치게 되오." "알았어요." 그녀는 무언가 께림칙한 것을 깨끗하게 털어 버린 듯 즐겁게 식사 를 했다. 그녀와 봉란선 자매는 이미 매우 친숙해 있는 것 같았다. 호운옥의 본래 이름은 봉란앵이었지만, 그녀가 할아버지 호강민이 지어 준 이름을 버릴 수가 없다고 하여 부모의 성(姓)만을 따서 봉운옥으로 부르기로 했다. 봉란선과 봉운옥. 이 두 사람은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에, 자라 온 환경도 서로 비슷 했지만 풍기는 느낌과 성격은 판이했다. 비록 얼마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라서 근본적인 성격은 어쩔 수가 없이 닮은 것 같았지만, 웬일인지 얘기를 해 보면 너무나도 판이 한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봉란선은 매우 뛰어난 재지(才智)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알아채고서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모든 것을 처리했다. 그러나 봉은옥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는 쉽게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눈빛은 순진무구하여 전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가를 알려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와 함께 있으면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을 수가 있었 다. 그녀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바라보노라면 자신도 무아의 경지에 빠져드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학운기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믿었다. 학운기는 곧 그녀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로 판이한 성격을 가진 그녀들이었지만 꼭 한 가지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비단보다도 더욱 부드러운 마음이었다. 학운기는 그녀들과 함께 있으면 모든 복잡한 일들을 잊을 수가 있 었다. 제갈소연이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나자, 그들은 차를 들면서 정담을 나누었다. 학운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갈소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황보 낭자와 동방 낭자는 이 지하 궁전에 없소?" 제갈소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그녀들이 보고 싶으세요?" 학운기는 매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오, 나는 단지 그녀들이 안전하게 있나를 물어 보려고 했을 뿐이오." "호호… 그 말이 그 말이지 뭐예요?" 그리고 제갈소연은 무어가 그리 우스운지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었 다. 봉운옥도 그녀가 왜 웃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지 빙그레 미소를 띄 우고 있었다. "아니? 연매, 옥매! 무엇이 그토록 즐거운 일이기에……." "허허… 글쎄 말이에요. 그녀들이… 호호……!" 제갈소연은 무어가 그리 우수운지 제대로 말을 잊지 못하고 깔깔 거렸다. 학운기가 매우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를 다그쳤다. "연매, 제발 웃지만 말고 속시원히 털어놔 보시오. 그녀들이 어떻 게 됐단 말이오?" "호호호… 림매와 설매가 말이에요 주상이란 분이 오신다니까, 그 분이 무슨 늙고 무섭게 생긴 분인 줄 알고 숨어서 나오지를 않잖 아요. 호호홋… 만약 그녀들이 오빠가 주상이란 분인 줄 안다면 그 표정이……." 그녀는 계속 깔깔대고 웃어 댔다. 학운기도 그녀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났을 때 지을 표정을 생각 하고는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띄웠다. 황보설,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한 그녀는 그 동안 자신이 모욕을 당해 왔다고 느끼고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를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학운기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그녀는 분을 참지 못할 것이다. 동방림, 겉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하고 쌀쌀할 것 같으 면서도 한 번 본 소년을 못 잊고 아직까지 애를 태우고 있는 너무 나도 내성적인 여인. 밖으로는 활달한 척 행동을 해도 그녀의 마음 속은 언제나 그늘이 져 있는 여인이다. 학운기는 지금 그녀들을 만나면 사태가 매우 복잡하게 변할 것 같 아서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 즐겁게 얘기를 하던 제갈소연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 더니 밖으로 나갔다. 학운기가 그녀의 뜻을 대강 짐작하고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을 때 는 이미 전각들 사이로 그녀의 몸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학운기가 한창을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 왔다. "학 상공, 소녀를 알아보시겠어요?" 동방림이었다. 봉란선과 봉운옥, 그리고 제갈소연은 사전에 무슨 약속이 있었는 지 모두들 자리를 비키고 없었다. "동방 낭자, 그 동안 잘 있었소?" "예." 동방림, 그녀는 지금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던 사람 앞에 서 있었 다. 비록 어렸을 때 단 한 번 보았던 사람이었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 속에는 다른 사람의 영상이 파고들 여지가 조금치도 없을 정도로 그의 영상으로만 꽉 차 있었다. 그를 만나면은 할 얘기가 태산보다도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그 의 앞에 서고 보니 단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간단한 인사말과 대답 한 마디 하기가 그토록 힘든 줄 예 전엔 미처 몰랐었다. 그녀는 두 달 전 악양에서 만났을 때보다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 다.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는 학운기는 그것이 자신의 책임 같아서 가 슴이 매우 아렸다. 동방림은 그와 악양에서 재회했을 때 그가 말없이 떠나 버리고 나 서야 비로소 그인 줄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후였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모욕감을 느꼈을 터이지만, 그와의 일에 있어 서는 그런 것이 하등의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매우 복잡한, 정이 가득 담긴 것도 같고 감회가 어린 것도 같은 눈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상공, 두 달 전에 악양에서 만난 분이 바로 상공……?" 학운기가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낭자, 그 때는 소생에게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늦게나마 사 과를 드리겠소." "괜찮아요, 상공. 상공처럼 신분이 높고 또한 절세적 용모를 갖추 고 계신 분이 소녀처럼 천한 계집을 상대하려 했겠어요?" 힘없이 자조(自嘲)적으로 뱉은 음성이었지만 그것은 학운기의 가 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낭자, 소생은 용모나 신분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그런 졸장부가 아니오. 그리고 나의 현재 신분은 강호의 혈겁이 종식되는 날 모 두 사라질 것이오." "상공……." 동방림이 그를 쳐다보는 듯하다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흐흐흑……!" "낭자……." 이 때 제갈소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오빠, 림매가 오빠 생각만 하느라고 밥을 못 먹고 있기에 오빠더 러 달래라고 보냈더니… 더욱 커다란 상처만 주어서 보내요?" "연매, 나는 단지……." "듣기 싫어요. 어서 가서 림매를 달래지 않고 뭘하고 계세요? 설 매도 지금 이불을 뒤집어쓰고 죽는다고 누워 있는데……." 학운기는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봉란선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빠, 그래요. 얼른 가서 림 언니를 달래세요." 봉운옥도 그녀를 거들었다. "그래요, 오빠. 어서 림 언니와 설 언니에게 사과를 하세요. 소매 는 그 동안 설 언니 품에서 잠을 잘 수가 있었단 말이에요." "알겠소." 그는 막상 대답은 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제갈소연이 급히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 때 학운기는 색단의 효력을 제어할 수 있는 심법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었으므로 웬만한 접촉은 곤란한 일을 발생시키지 못하였다. 동방림이 거처하는 곳은 바로 옆 전각이었다. 지하인지라 밤과 낮을 구분할 수가 없었으나, 지금이 잠자는 시각 인지 사방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학운기가 동방림의 방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침상에 얼굴을 파묻 고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흐흐흑……!" 지난 삼 년 동안 오직 그만을 생각해 왔었다. 그와 만나서 다정하고도 달콤한 말들을 하고 싶었다. 헌데 막상 그를 만나서 그의 무뚝뚝한 태도를 대하고 보니, 그 동 안 간직해 왔던 분홍빛 꿈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 이었다. 자신의 존재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오직 그 무엇만이 외 롭게 허공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흐흐흑……!" 학운기는 서럽게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는 살며시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낭자, 그만 고정하시오. 소생이 잘못을 사과하리다." "흐흐흑……!" 그러나 그녀는 어쩐 일인지 더욱 서럽게 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모든 것을 잊고 그의 품속으 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옛날에 그를 마음 속으로만 생각할 때는 그를 만나면 그 어떠한 말도, 그 어떠한 행동도 모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알량한 자존심인지 뭔지가 그녀의 행동을 막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울고 있는 것은 학운기의 무뚝뚝한 태도에 의해서라 기보다도 자신의 우유부단한 행동에 분노 같은 것을 느껴서인지도 몰랐다. 학운기는 몇 번을 더 달래어도 그녀가 계속 흐느끼고만 있자, 어 찌할 바를 모르고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이 때 제갈소연의 날카로운 전음이 그의 귀를 때렸다. "오빠, 도대체 뭐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그렇게 멍청히 서 있기만 하겠어요? 소매는 지금 설매한테 가 봐야 하니까 알아서 하세요." 학운기는 그녀의 갑작스런 전음에 흠칫했다. 동방림도 그녀로부터 무슨 전음을 받았는지 갑자기 울음을 그치고 는 매우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 학운기는 그녀가 울음을 그치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 도대체 여자란 이해할 수가 없으니…….' 동방림은 울음을 그쳤지만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아직도 어깨를 약간씩 들썩이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해서 그녀를 달래기는 달래야겠 는데, 무슨 말을 해야 될지를 몰라 망설이고만 있었다. 동방림이 눈물을 닦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어느 새 퉁퉁 부어 있었다. 그것을 본 학운기는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동방림이 야릇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다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 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녀는 무언가 해야 될 것을 몹시도 망설이는 태도였다. "상공, 소녀의 추태를 용서해 주시겠어요?" "낭자, 잘못은 오히려 소생이……." "아니예요, 상공. 소녀가 그만 너무 철없이 굴었어요." 학운기는 그녀의 돌연한 태도 변화에 내심 당황스러움을 금할 수 가 없었다. "낭자, 소생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시는 것 같아서 소생 도 마음이 매우 홀가분하오." 동방림이 그윽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퉁퉁 부은 눈까풀 속에서 빛나는 정열이 담긴 두 눈동자는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학운기의 가슴에 말로는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이상 야릇한 기분이 전해져 왔다. "상공, 소녀가 두 달 전 악양에서 했던 이야기 기억나세요?" 학운기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그 때 상공이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상공임을 깨달았어 요." "낭자, 그 때는 정말……." "아니예요, 상공. 소녀는 지금 상공을 원망하려고 이 이야기를 꺼 낸 것이 아니예요." 그들 사이에 점차 거북스러운 분위기는 사라져 갔다. 동방림은 지금 무언가에 들뜬 듯한 표정으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녀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평소엔 겉으로는 활달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언제나 우수에 잠겨 있었다. 이토록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들뜬 듯한 행동은 처음이었던 것이 다. 사실 그녀는 지금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영원 히 그러한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또한 제갈소연이 전음으로 보낸 은근한 협박이기도 했다. 사랑이란 장사치의 계산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면 될 뿐 그로 인하여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 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그러한 사랑에 알량한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가 개입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아마도 그것은 어떠한 순간적인 욕구의 발로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사랑은 그 순간의 열정이 발산되고 나면 싸늘한 공허밖에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동방림의 마음은 뜨거워졌다.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다른 여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말들을 내뱉게 했다. "상공께서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계세요?" 그녀의 눈은 먼 회상의 세계로 향하고 있었고, 입가에는 행복스런 미소가 피어 올랐다. "아마도 그 때 상공께서는 소녀가 무척이나 미웠을 거예요." "아니오, 낭자. 소생은 그 때 낭자의 행동이 매우 귀엽다고 느꼈 었소." 그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는 듯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 다. "고마워요. 그 때 소녀는 백아가 탐이 나기도 했지만 왠지 상공을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것이 결국 이렇게……." "낭자……." "하여튼 소녀는 그 날 이후로 상공의 영상이 뇌리에서 영 떠나가 지를 않았어요." "낭자, 소생도 지금 그 때 귀여웠던 낭자의 모습이 남아 있소." 동방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정말이세요?" "그렇소." "그럼 지금은 어때요?" "매우 아름답소. 단지 그 동안 너무 수척해져서 안쓰러운 감을 풍 기는 것 외에는……." "그것이 누구 때문인 줄 아세요?" "미안하오." 그들의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의 눈 속으로 아득히 빨려 가는 것을 느꼈다. "상공……." "낭자……." 학운기가 그녀의 가녀린 손을 꼭 쥐었다. "림매, 내가 이렇게 불러도 되겠소?" "오빠, 소매는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몰라요." "림매……." "오빠……." 그들의 몸이 하나로 꼭 합쳐졌다. 학운기는 단전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의 실태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동방림의 몸을 밀어내려 했을 때.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소매는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소매는 오 늘 밤에 모든 것을 오빠에게 바치고 싶어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더욱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림매, 이러면……." "오빠, 소매의 태도가 당돌하다고 욕해도 좋아요. 하지만 소매는 사랑하는 오빠를 다른 사람에게만 맡길 수는 없어요. 소매도 오빠 를 차지하고 싶단 말이에요. 소매는 누구처럼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지는 못해요." 그녀는 마치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마구 중얼거렸다. "림매……." 학운기도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열기를 느끼고 있었 다. "오빠, 사랑해요. 소매는 영원히 영원히 오빠만을 사랑할 거예요. 설사 오빠가 소매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림매, 어찌 그런 말을……." "오빠……." "림매, 사랑해……." 그들의 몸은 어느 새 포개진 채로 침상에 눕혀져 있었다. 곧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벗겨지고 은은한 빛을 발하던 촛불도 꺼 져 버렸다. 방 안에서 한참 동안 열락의 춘풍이 술렁이다가는 이내 잠잠해지 고 잔잔한 말소리만 들려 왔다. "오빠, 소매는 정말 행복해요. 하지만 왠지 이 행복이 그리 오래 갈 것 같지가……." "림매, 무슨 불길한 생각을… 누가 우리의 행복을 파괴한단 말이 오?" "몰라요, 하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오빠, 그렇지만 소매 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직 오빠만을 생각할 뿐이에요." "림매, 그런 걱정일랑 말고… 자, 편히 누워 잠이나 잡시다." "예." 동방림은 대답을 하고 나서 그의 팔을 베고는 그의 넓은 가슴에 머리를 푹 파묻었다. "오빠, 소매는 이것이 제일 편안해요." "림매!" 학운기도 그녀의 몸을 꼭 껴안으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한 그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학운기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동방림은 그의 품에 꼭 안겨서는 깊 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지금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듯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 피어 있었다. 그가 그녀를 살며시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을 때, 그녀도 몇 번 뒤 척이는 듯하다가는 눈을 번쩍 떴다. "오빠, 벌써 일어나셨어요?" "림매는 더 자도록 하시오." "아니예요. 소매도 그만… 윽!"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다가는 묵직한 신음을 토하며 얼굴을 찡그렸 다. 학운기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지라, 황급 히 고개를 돌리고는 흩어진 옷을 주워 입었다. 그들이 옷을 모두 입었을 때 제갈소연과 봉란선, 봉운옥 자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갈소연이 매우 짓궂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오빠, 잘 주무셨어요? 림매도 잘 잤고?" 순간 학운기와 동방림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보다도 더욱 새빨갛 게 물들었다. 그들은 그녀들의 갑작스런 들이닥침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연매, 어떻게 이토록 일찍……." "흥! 오빠는 밤새 희희덕거리고 단잠을 다 자 놓고는 한잠도 못 잔 우리들더러 일찍 일어났다구요?" "연매, 그… 그것은……." 동방림이 얼굴을 붉히며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언니, 죄송해요. 소매가 그만 언니 생각을 못하고……." 그녀의 표정은 마치 죄인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제갈소연이 그러한 그녀를 보고는 즐거운 듯한 교소(嬌笑)를 터뜨 렸다. "호호… 림매가 오빠하고 하룻밤을 같이 자고 나더니 현모양처가 다 된 것 같구나." "연매……." "언니, 몰라요." 동방림은 몹시도 부끄러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몸을 돌 려 버렸다. "호호호……!" 그녀의 태도에 봉란선과 봉운옥도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연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흥! 오빠, 이제 림매하고 친하다고 저희는 보기도 싫다는 말인가 요?" "연매, 그… 그것이 아니라……." "흥, 그것이 아니라면 뭐란 말이에요?" 학운기는 그녀의 계속적인 짓궂은 질문에 내심 그녀를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아니라 단지……." 그는 말을 하면서 그녀를 갑자기 껴안아 버렸다. "앗!" 제갈소연이 뾰족한 비명을 터뜨리며 그의 품을 빠져 나가려는 순 간. "흡!" 학운기의 두툼한 입술이 그녀의 앙칼진 입을 덮어 버렸다. "흐으읍! 이… 것 치워요. 선매와 림매가 놀린단 말이에요." "하하… 연매는 다른 사람을 놀리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연매를 놀리는 것은 싫어하는구려?" "몰라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그의 품을 벗어나 버렸다. 학운기의 입술이 효력이 있었던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만 서 있 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봉운옥이 학운기 곁으로 다가왔다. "오빠, 소매도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단 말이에요." "옥매……." "오빠……." 그들의 입술도 하나로 합쳐졌다. 봉운옥은 매우 행복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녀와 떨어져서는 한쪽에 부끄러운 듯이 서 있는 봉란 선에게 다가갔다. "선매도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소?" 봉란선은 그의 말뜻을 대강은 짐작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어느 새 학운기의 품에 안겨 있었고, 입술 또 한 그의 입술에 덮여 있었다. "흐읍!" 학운기는 그녀들에게 모두 사랑의 입맞춤을 해 주고 나서는 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연매, 그리고 선매와 옥매도 잠을 못 잔 피로가 모두 풀렸소?" 제갈소연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몰라요, 순 바람둥이 같으니라구! 저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설 매는 앞으로 어떡할 거예요?" 학운기는 그녀가 이번에는 황보설의 이야기를 들고 나오자, 당혹 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봉운옥이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오빠, 설 언니와도 함께 살아요. 설 언니는 매우 좋은 사람이에 요. 오빠가 없을 때 소매의 잠도 재워 주고……." 봉란선과 동방림도 긍정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그것은… 나는 당신들도 제대로 주체를 못하는데, 어찌 또 다른 여인을… 더구나 그녀의 의사도 모르면서……." 제갈소연이 짐짓 앙칼지게 그를 쏘아보았다. "우리들도 주체를 못한다고요? 그러면서 오빠는 승 낭자와 애 낭 자를…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빠와 함께 자고 나면 며칠을 움 직이기가 힘이 드는데……." 그녀는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는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봉운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요. 오빠와 자고 나면 기분은 괜찮은 것 같은데 몹시도 아파 요." "옥매……." 학운기는 그녀들의 말에 뭐라고 대꾸도 못하고 쥐구멍만 찾고 있 었다. 봉란선이 동생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끼여들었다. "그래요, 오빠. 오빠는 한천빙룡의 색단을 복용하셨으므로 아마 우리들만 오빠를 모신다면 몇 달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는 모두 죽 고 말 거예요." "당신들은 정말로……." 제갈소연이 애원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세요, 오빠. 모두 괜찮다고 하잖아요. 만약 오빠가 지 금 설매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몰 라요. 오빠……." "하지만 연매, 그녀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것은 걱정 마세요. 사실 겉으로는 그렇게 쌀쌀해도 속으로는 오빠 생각에 제대로 잠을 못 이루는 그녀이니까요." 학운기는 해야 될 일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이 곳 지하 궁전을 떠 나야 했지만, 그녀들이 애원하다시피 끌어다가 황보설의 방에 들 여보내는 바람에 난감한 표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녀는 오랫동안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연히 나 있었다. 학운기가 그녀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침상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는 그의 방문이 의외라는 듯 놀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 았다. "상공께서 여기는 어떻게……." 학운기는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를 몰라서 그냥 난감한 표정으 로 서 있었다. 그러한 그를 바라보는 황보설의 표정은 어느 새 싸늘해져 있었다. 학운기가 내심 마음을 다져 먹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낭자, 무슨 상심되는 일이라도 있기에 그토록……." "상공께서는 상관하실 것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말을 붙일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매몰찼다. "하지만 낭자, 소생은 낭자가 그러는 것이 꼭 소생의 책임만 같아 서……." "소녀가 이러는 것이 어째서 상공 책임이에요?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상공께서는 상관 말고 그만 나가 주세요." 학운기가 어쩐지 쓸쓸한 듯한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다가는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제갈소연의 싸늘한 전음이 그의 귓전에 울렸다. "오빠, 뭐하시려는 거예요? 만약 오빠가 지금 밖으로 나와 버린다 면 설매는 분함과 모욕감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몰라요." 학운기가 그녀의 전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다시 제갈소연의 전음이 들려 왔다. "오빠, 빨리 그녀를 위로해 주지 않고 뭘하시는 거예요?" 학운기는 침상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황보설을 바라보다가는 천천 히 발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낭자, 소생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를 빌 테니… 제발 화를 풀도록 하시오." 그의 말에 황보설의 어깨가 약간 움찔하는 것 같더니, 다시 처음 의 그대로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마음 속으로 매우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의 부드러운 말에 그 동안의 괴로웠던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 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천성적인 자존심은 일시에 모든 것을 바꾸도록 하 지 않았다. 학운기가 살며시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쓰다듬었다. "낭자, 소생이 용서를 빌 테니 화를 풀도록 하시오. 그 동안 낭자 의 용태가 너무 수척해진 것 같소." 황보설의 몸이 세차게 떨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손을 치우세요. 아버지와 상공이 그러한 관계라고 소녀까지 상공 의 종복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커다란 잘못이에요!" 앙칼졌다. 학운기는 그녀의 태도에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황보설의 얼굴이 약간 핼쓱해지는 것 같았다. 전혀 마음에도 없었던 소리였다. 왜 자신은 다른 여인처럼 하지 못하는지 그렇게 자신이 미울 수가 없었다. 그 동안 학운기와 애옥지가 정답게 지내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러 워했던가? 그러한 그녀가 막상 마음에도 없는 말로 그를 대하고 보니, 너무 나도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며 정신까지 아득해 오는 것 같았다. "흐흐흑……!" 마침내 그녀는 힘없이 침상으로 쓰러지면서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 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모든 행복을 놓쳐 버린 것 같아서 자신 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다. 학운기는 그녀의 서러운 오열에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어깨가 심한 기복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를 그대로 놔 두고 그냥 밖으로 나갈 수는 도저히 없 었다. 그녀가 우는 것으로 보아서 그대로 방치한다면 기력이 탈진되어 주화입마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낭자……." 그는 그 말만을 입 밖으로 내놓고 섣불리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흐흐흑……!" 황보설의 오열은 점점 거세어져 갔다. "낭자, 그만 고정하시오. 소생이 그만 실수를 했었소." 그가 한참을 달래어 보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오열을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두 손만 비벼 대고 있었다. 이 때 제갈소연의 전음이 다시 그의 고막을 울렸다. "오빠, 그런 식으로 해서 그녀가 울음을 그치겠어요?" 학운기는 그녀가 숨어서 지켜볼 만한 곳을 향하여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빠, 이제까지 그런 것도 모르고 계셨어요? 어서 설매! 하면서 그녀의 몸을 꼬옥 껴안아 보세요. 그럼 그녀는 틀림없이 울음을 그칠 거예요." 학운기는 그녀의 짓궂은 말에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흐흐흑……!" 황보설은 계속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처음 그가 자신의 어깨를 만졌을 때, 왜 그의 품속으 로 뛰어들지를 못했는지 매우 서러웠다.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텅텅 비어 가기 시작하였다. 온갖 상념들이 뒤엉켜져서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이었다. 의술에 정통한 학운기가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그것을 깨닫 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제갈소연의 전음이 다시 들려 왔다. "오빠, 뭐하세요? 정말로 그녀가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계실 거예 요? 빨리 소매가 알으켜 준 대로 하세요." 이제 황보설의 오열은 점점 그쳐 갔다. 그것은 그녀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기력이 거의 다 탈진된 것이었 다. 학운기도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매우 다급함을 느꼈다. "오빠, 빨리요." 제갈소연의 다급한 전음은 계속 들려 왔다. 학운기는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설매, 그만 고정하고 정신을 차리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그녀의 몸을 꼬옥 껴안았다. 황보설에게는 이미 자존심도, 그를 거부할 만한 힘도, 눈물과 함 께 모두 사라져 버린 뒤였다. "설매,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자학적인 행동은 하지 마시오." 황보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 "설매, 말은 나중에 하고 우선 편히 쉬도록 하시오. 자, 내가 도 와 주겠소." 그는 말을 하면서 그녀의 명문혈(命門穴)에다 진기를 넣어 주려 하였다. 황보설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학운기가 그녀의 입에다 귀를 바싹 갖다 댔다. "아니예요, 오빠! 소매는 이대로가 좋아요. 오빠! 얼마나 불러 보 고 싶은 말이었는지 몰라요. 그리고 설매라고 불러 주는 오빠의 목소리도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몰라요." "설매……." 학운기가 그녀의 몸을 꼬옥 안았다. "오빠, 사랑해요." 그들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마주쳤다. "흐읍!" "으음……!" 황보설은 이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동안 그로 인해 괴로워했던 것도, 수많은 밤을 잠 못 이루었던 것도……. 그녀는 지금 어릴 때 엄마 품에서 잠자다가 문득 깨어나 엄마가 없어서 울고 있을 때, 엄마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그녀를 꼬옥 껴 안아 주었을 때 느꼈던 편안하고도 매우 행복한 기분을 느끼고 있 었다. 한 번 마주 닿은 그들의 입술은 도저히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괴로움들이 뒤따라야 했던가? 그토록 어렵게 얻은 순간이기에 그들은 영원히 놓치고 싶지 않았 던 것이다. 황보설은 어디서 그러한 힘이 솟아났는지 그의 목을 꼭 껴안고 있 었다. 학운기는 그녀에게서 다른 여인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어떤 짜 릿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 교환되는 달콤한 액체는 그들을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사이 로 만들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꼭 붙어 있던 그들의 입술이 떨어졌다. 아마 싫증이 났다기보다는 숨쉬기가 곤란해서 그랬으리라. 그들의 불 같은 정열을 담은 눈이 마주쳤다. 두 쌍의 마주친 눈에서는 정염(情炎)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정염은 욕정(欲情)의 불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동안 마음 속으로 깊이 쌓고 쌓아 둔 감정의 발로(發 路)였다. "오빠, 사랑해요." "설매, 사랑해."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던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마주쳤 다. "흐흠……!" 고혹적인 신음이 잔잔하게 방 안을 울렸다. 그들은 마치 구름을 타고 선경을 구경하는 듯한 편안하고도 아찔 한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옆에서 화산이 폭발한다 할지라도 모를 정도로 그들은 지금 무아 의 경지에 빠져 있었다. 황보설은 세상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된 것 같은 풍족한 마음을 느 끼고 있었다. 그 누가 무슨 대가를 준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과는 바꿀 수가 없 었다. 한참 후 그들의 입술은 다시 떨어지고, 황보설은 얼굴을 보기 좋 게 물들인 채 행복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학운기가 고혹적이고도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보았 다. "설매, 이제 그만 편히 자도록 하시오. 지금 설매의 몰골은 말이 아니오." "예, 오빠." 그녀는 이제 조금 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한 마리의 순한 양처럼 매우 고분고분했다. 학운기가 그녀의 몸을 침상 위에 반듯이 눕혀 주었다. 황보설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빠, 소매가 자는 동안에 어디 가시면 안 돼요." "설매, 그런 걱정 말고 푹 자도록 하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황보설은 어린애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는 잠 속으로 빠 져들었다. 학운기는 그러한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는 슬그머니 밖으 로 나왔다.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제갈소연 등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오빠, 어때요? 소매가 가르쳐 드린 방법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지 요?" 학운기는 제갈소연의 짓궂은 질문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연매……." 그가 나무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짐짓 앙칼진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오빠, 그렇다고 또 다른 여인에게 그런 방법을 사용하면 이 손톱 이……." 그녀는 예쁘게 기른 손톱을 세우면서 그의 얼굴을 할퀴는 듯한 자 세를 취했다. 학운기가 짐짓 장난스런 표정으로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알았소. 하지만……." "하지만 뭐예요? 어서 말하세요." 이제는 동방림과 봉란선도 그녀를 거들고 나섰다. "옥매, 저들을 좀 막아 주시오." 봉운옥은 그의 품에 몸을 기대고 그의 팔을 꼭 잡고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언니들, 이제는 그만 두세요. 오빠는 지금 매우 피곤할 거예요." 동방림이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옥매, 너는 오빠가 또 다른 소녀를 울린다는 데도 가만히 있을 거니?" 봉운옥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예요. 오빠는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요, 오빠?" 학운기가 그녀의 몸을 꼭 껴안았다. "그렇소. 이렇게 사랑스러운 옥매가 있는데 내 어찌 다른 여인을 쳐다보겠소?" 제갈소연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오빠는 옥매만 사랑스럽고, 우리는 모두 밉단 말인가요?" "아… 아니오. 내가 어찌……." 그는 이 자리에 더 있다가는 어떤 곤욕을 치를지 모를 것 같아서 황급히 전각 밖으로 몸을 날렸다. "연매, 림매… 그리고 선매! 나는 당신들도 똑같이 사랑하오. 나 는 천 노야와 상의할 일이 있으니, 당신들은 설매가 깨어나면 잘 좀 말해 주시오." 제갈소연 등이 그를 붙잡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의 몸이 사라지 고 난 후였다. 그녀들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쳐다보다가는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재잘거리면서 황보설이 잠들어 있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 第 2 章 불혼귀마음(佛魂鬼魔音) ====================================================== 학운기는 새제갈 등과 무황성의 개파대전 일에 그들의 간계(奸計) 를 막을 몇 가지 계책을 상의한 다음 지하 궁전을 빠져 나왔다. 그는 또다시 제갈소연 등과 만나면 그녀들에게 한없이 붙들려 있 을 것만 같아서 작별의 인사도 없이 아무도 몰래 빠져 나온 것이 다. 무황성의 개파대전 까지는 아직 며칠이 남았고, 또 대낮인지라 그 는 관도를 통해 서서히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매우 느린 것 같고 유람을 하듯이 여유가 있었으나, 실지로는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걷고 있 는 중이었다. 파양호면( 陽湖邊)의 남창(南昌)에서 동정호변(洞庭湖邊)의 악양 (岳陽)에 이르는 주변에는 옛부터 문물이 풍성하고 문화가 발달해 왔다. 그래서 그 근방에 위치한 무림의 군소파들도 꽤나 많았다. 그가 봉신(奉新)에서 저녁을 먹고 숲 속으로 들어가서 약 한 식경 정도 몸을 날렸을 때, 어디선가 장력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학운기는 그 소리가 절정고수들이 싸울 때 나는 소리임을 느끼고 는 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약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몸을 날렸을 때, 그는 십오륙 세 정도의 소년이 가슴에 무황이라는 글자가 아로새겨진 십여 명 의 청의인들과 치열한 혈투(血鬪)를 벌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 다. '응? 저 애는…….' 그는 무황성도(武皇城徒)들과 싸우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매우 눈 에 익은 것을 느끼고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 저 소년은 진금룡(陳金龍)이 아닌가? 저 애가 벌써 무공을 모두 익히고…….' 청의인들과 한창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는 소년은 학운기가 삼 년 전에 목숨을 구해 주고 현령진경까지 주었던 진금룡이었다. 진금의 무공은 학운기가 보아도 매우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고 강했다. 십여 명의 무항성도들도 모두 강호의 일류고수 축에 들 정도였는 데, 진금룡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무황성도들이 가끔 밀릴 정도였다. 고강한 무공을 갖춘 채 성장한 진금룡을 바라보는 학운기는 감회 가 새로웠다. '저 애가 벌써 저토록 훌륭하게 자랐다니…….' 펑－ 쾅－! "으윽!" 학운기가 한창 회상에 잠겨 있을 때. 한 명의 무황성도가 진금룡의 일 장을 얻어맞고는 뒤로 나가떨어 졌다. "흐흐흐… 무영신투, 네놈이 이제는 본좌의 수하를 상하게 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약간 커다란 글씨가 새겨진 무황성도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더 욱 세차게 그를 몰아쳤다. 숲 속에서 지켜보던 학운기는 무황성도의 말에 흠칫 놀랐다. '저 애가 무영신투였단 말인가?' 그는 매우 놀라운 표정으로 다시 진금룡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진금룡이 사용하는 무공들은 어떤 일정한 틀이 없고, 천하 각 파 의 것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음, 무영신투가 무공만을 훔쳐 배운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군. 하지만 저런 식으로 무공을 익힌다면, 나중에는 오히려 자체의 혼 란으로 인하여 진보를 할 수 없을 텐데…….' 펑－ 쾅－! "윽!" 요란스런 괴음과 묵직한 신음이 동시에 들려 왔다. 진금룡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내상을 입은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학운기는 나서려다가 진금룡이 아직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좀 더 두고 보기로 하였다.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백 초를 넘기기가 힘들 것 같군.' 그의 예상대로 진금룡은 차츰 수세로 몰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군.' 학운기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는 진금룡에게 전음을 보냈다. "신원헌과(神猿獻果), 경도열안(驚濤裂岸), 상진하허(上眞下虛)… …." 학운기의 초식 명칭은 계속되었고, 진금룡은 그의 전음대로 초식 을 펼치고 있었다. 전세는 곧 역전되었다. 무황성도들은 진금룡을 곧 제압하려는 순간에 그가 갑자기 적절묘 묘한 수법으로 대항해 오자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학운기도 초식 명칭을 불러 주면서 매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음, 그 동안 뼈를 깎는 고통으로 무공을 익힌 모양이구나.' 비록 학운기가 불러 주는 초식들이 강호에 널리 알려진 것들이라 고는 하지만, 그것을 싸움하는 도중에 전음으로 듣고 즉시 펼친다 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펑－ 쾅－! "으악!" 한 명의 무황성도가 진금룡의 위맹한 장력에 머리가 박살나면서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학운기가 불러 주는 초식들은 매우 쉬운 것들이었지만 그 때마다 의 상황에 너무나도 적절한 것이었다. 쾅－ 콰르릉－! "으악!" "아악!" 다시 두 명의 무황성도가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무황성도들은 진금룡이 별로 희한한 초식을 사용한 것 같지가 않 았는데, 자신들의 동료가 하나둘씩 죽어 가자 매우 당황하는 것 같았다. 싸움에서의 당황, 그것은 바로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다. 펑－ 쾅－! "으악!" "아악!" 두 명이 다시 동료의 뒤를 황급히 따라갔다. 이제 무황성도들은 서서히 공포에 질리는 듯했다. 펑－! "아악!" 다시 한 명의 무황성도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신호로 살아남았 던 세 명의 무황성도가 꽁무니가 빠져라고 도망쳤다. 그러나 그들은 채 오십여 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풀 썩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넘어진 그들의 천주혈(天柱穴)에는 파아란 솔잎이 한 잎씩 꽂혀 있었다. 진금룡이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숲 속을 바라보았다. "은공께서는 모습을 나타내시어 소생의 감사를 받으시오." "하하……!" 숲 속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절세의 백의미장부가 걸어 나왔다. 진금룡은 자신을 도와 주던 사람이 의외로 젊고 절세적인 용모를 가진 것에 매우 놀라다가 그가 누군 줄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그에 게 달려갔다. "사부님! 학 사부님이 맞지요? 제자 룡아가 사부님을 뵙습니다." 진금룡은 학운기가 어리둥절하여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털썩 무릎 을 꿇고는 큰절을 올렸다. "그 동안 잘 있었느냐?" "예." "한데 사부라니, 갑자기 무슨 말이냐?" "사부님께서 제자의 목숨을 구해 줬을 뿐만 아니라 제자에게 비급 (秘 )을 주시어 무공을 익히게 하셨으니 사부님이잖습니까?" 학운기는 내심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너와 나는 나이도 별로 차이가 없는데, 어찌 사제지간이 될 수가 있겠느냐? 그러지 말고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라." "아닙니다. 제자도 사람의 얼굴을 타고났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 겠습니까? 만약 사부님께서 저를 제자로 인정치 않으신다면 제자 는 이 곳에서 자결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돌연 자신의 천령개를 쳐갔다. "멈추어라!" 학운기가 위엄 있게 호통을 치면서 그의 곡지혈(曲地穴)을 찍어 버렸다. "너는 어찌하여 멋대로 행동하려 하느냐?" 그러나 진금룡의 태도는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사부님으로부터 인정도 받지 못하는 제자가 살아서 무엇하겠습니 까?" "너는 부모님의 원수도 갚지 않고 그만한 일로 세상을 외면하려고 하느냐?" 학운기의 그 말은 진금룡에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부님, 어찌 제자의 그만한 소원도 못 들어 주십니까?" 진금룡은 약간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계속 고집을 피웠다. 학운기는 계속 타이르기도 하고 호통도 쳐보았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한동안을 옥신각신하던 학운기는 마침내 그의 황소 같은 고집에 굴복을 하고 말았다. "좋다, 네가 나를 사부로 부르는 것은 허락해 주겠다. 하지만 거 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진금룡이 감격과 기쁨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만 하십시오, 설사 사부님께서 제자더러 불 속에 뛰어들라 하여도 제자는 서슴지 않겠습니다." 진금룡은 즉시 일어서서는 그에게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렸다. 학운기는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 저 애도 태양신맥(太陽神脈)을 타고났구나!' 그가 기쁨과 놀라움으로 진금룡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진금룡은 구 배를 모두 마치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 다. 학운기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 동안 너는 어떻게 지냈느냐?" "예, 제자는 이모님 댁에서 현령진경상에 있는 무공을 모두 익히 고는 강호에 원수를 찾으러 나왔습니다. 하지만 원수를 찾기도 전 에 제자는 여러 번의 패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무공비급 들을 훔쳐보기 시작했습니다." "으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학운기는 그가 아직도 무공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 기회에 그것을 깨우 쳐 주기로 하였다. "너는 현령진경에 있는 무공이 약해서 다른 사람에게 패했다고 생 각하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너의 무공이 매우 진보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예." "좋다, 그럼 나하고 대련을 한 번 해 보자." "제자가 어떻게 사부님하고……." "아니다. 너는 나하고 대련을 해 보면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만약 네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나의 제자가 될 자격 이 없다." "사부님……." "어서 일어나거라, 너와 나의 공력 차이를 감안해서 나는 삼 성의 진력만을 사용하겠다. 하지만 너는 전력을 다해야 될 것이다." 진금룡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었 고, 또 학운기의 무공 정도도 알고 싶었기에 그와 대치하고 섰다. "자, 간다." 학운기가 먼저 그에게 덮쳐 들어갔다. 펑－ 펑－! 그들의 대련은 실전보다도 더욱 치열해 보였다. 진금룡은 처음 학운기가 삼 성의 진력만을 사용한다고 하자, 자신 도 약 팔 성의 진력만을 사용했다. 그러나 막상 학운기와 일 장을 마주쳐 보고는 자신의 생각이 크게 잘못됨을 깨달았다. '아, 사부님의 공력은 어느 정도나 되기에 나의 팔 성 공력이 이 토록 허무하게…….' 그의 팔 성 공력이면 최소한 오천 근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 이었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학운기는 이 때 삼 성의 공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금룡이 필히 전력으로 마주쳐 오지 않을 것을 알고는 약 이 성 정도의 진력만을 사용했던 것이다. 진금룡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그의 간이 아무리 크더라도 멍 하니 넋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하여튼 학운기가 지금 원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자신의 공력이 높 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학운기는 지금 그에게 초식의 현묘함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려는 것이었다. 진금룡은 완전히 수세에 몰려 허덕이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현묘한 수법을 다 사용해 보아도 학운 기의 공세를 제대로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학운기가 지금 펼치고 있는 초식들이 자신이 생전 처음 보는 기기묘묘(奇奇妙妙)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학운기가 펼치는 것은 자신이 펼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진금룡은 지금 학운기가 만약 적이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됐을까 하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순간 학운기의 손이 그의 몇 군데 혈도를 점해 버렸다. "아……!" 진금룡이 탄성을 질렀을 때는 이미 그의 혈도가 다시 풀린 뒤였 다. 학운기가 준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돌연 진금룡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사부님, 제자는 지금까지 무공을 헛 배워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 니다." "그래, 어디 자세히 말해 보아라." "예, 제자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무공을 가지고 있는 자가 고강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해서 제자는 여러 가지 무공을 배울 생각만 했지, 한 가지를 깊이 파고들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자는 그것이 커다란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 맞았다. 바로 그것이다." 학운기는 내심으론 자신의 오류를 금세 깨닫는 진금룡의 총명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사용한 초식은 너도 잘 알고 있는 현령진경 안에 있는 것들 이었다. 하지만 너는 그것을 알고 있으되,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 였다. 그래서 네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초식에 패하고 만 것이 다. 결국 너는 현령진경을 하나도 깨우치지 못했다는 것과 같은 거지." "사부님, 제발 우매한 제자에게 현명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 오." "하하… 그것은 네가 하기에 달렸지,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되 는 것이 아니다." "사부님, 그렇지만 제자는 이제까지 너무나 모르고 자라 와서… …." "그것은 걱정 말고 앞으로는 내가 일러 주는 대로 잘 행하도록 하 여라. 알겠느냐?" "예?" "그리고 너는 조금 전 대련 중에 한 가지 커다란 잘못을 범했는 데, 깨닫고 있느냐?" 진금룡은 그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했는지 매우 의아한 표정이었 다. "잘 생각해 보아라, 네가 어느 때에 나에게 혈도를 짚였는지… …." 진금룡은 한참 생각하는 듯하다가는 가벼운 탄성을 토해 냈다. "아……!" "깨달았느냐?" "예, 제자는 대련 중에 잠깐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사부님 께서……." "그래, 바로 그것이다. 남과 싸우는 도중에 정신을 다른 곳에다 쏟는다는 것은 곧 자살 행위지. 특히 고수들간의 대결에서 말이 다. 절대로 상대방의 무공에 놀라서도 안 된다. 오직 상대방의 무 공을 파해할 방법을 생각하면서 그를 어떻게 제압해야 되는가만 생각해야 한다." "사부님의 금옥양언(金玉良言) 각골(刻骨) 명심(銘心)하겠습니 다." 학운기는 그에게 무공 수련에 대해 몇 가지 충고를 더 해 주고, 조금 전 무황성도들과의 결투에 대해 물어 보았다. "너는 어떻게 하다 그들과 싸우게 되었느냐?" "예, 제자가 이틀 전에 무황성에 잠입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진금룡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혹시 무공비급을 훔쳐볼 수 있을까 해서……." "그럼 자세히 얘기해 보아라." "예, 제자는 무황성에 무사히 잠입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경비가 그토록 허술하단 말이냐?" "아닙니다. 경비는 철통 같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그 곳에 천연 적인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비밀 통로?" "예, 제자가 몇 달 전에 다 죽어 가던 한 명의 노인을 구해 준 적 이 있습니다. 그 노인은 자신은 가진 것이 없으므로 달리 보답할 길은 없고, 무림의 한 가지 비밀을 알려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 비밀이 바로 통로의 위치란 말이냐?" "예, 그 노인은 토목건축과 기관매복(機關埋伏)에 일가견을 가지 고 있는 기인(奇人)이었습니다. 그래서 무황성을 건축하는 데 납 치되다시피 끌려 왔다고 했습니다. 한데 무황성이 모두 건축되면 자신들이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그 기인은 탈출할 통로를 발견했 다 합니다." "으음, 혹시 그 기인의 이름은 모르느냐?" "그것은……." 학운기는 어떤 서광이 비치는 듯하다가 다시 사그러지는 것을 느 꼈다. '으음, 만약 그 기인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일은 훨씬 수월하게 될 텐데…….' 그는 한참을 생각에 골몰하다가는 다시 진금룡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들어가 본 무황성은 어떻더냐?" "예, 밖의 건물들도 매우 웅장하고 훌륭했지만 지하는 더욱……." "뭐라고? 그렇다면 무황성의 본성은 지하에 있단 말이냐?" "예. 지상보다 몇 배나 웅장한 건축이었습니다." 학운기는 내심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엄청난 공사를 하면서도 소문이 없었구나.' 진금룡이 그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제자는 무사히 지하에까지는 들어갔으나 곧 발각이 되고 말았습 니다. 그래서 간신히 그 비밀 통로를 통하여……."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비밀 통로를 발견했을 것 아니냐?" "아닙니다. 그 통로가 너무나도 교묘하여 설명을 자세히 듣지 않 은 사람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학운기는 내심 안도의 숨을 토해 냈다. "그래? 그렇다면 그 통로의 위치를 자세히 말해 보도록 하여라." "예." 진금룡은 자신이 한 번 들어갔던 통로의 위치를 자세히 말해 주었 다. 학운기는 그의 말을 모두 듣고 나서는 그에게 서신을 한 통 적어 주었다. "자, 이것을 가지고 남창으로 가거라." "사부님, 무슨……." "너는 가 보면 안다. 너의 무공은 아직 적들과 대적할 정도가 아 니니, 더욱 열심히 연마를 해야 될 것이다." "사부님께 무공을 익히지 않고 누구에게……." "너는 나의 말을 들으면 된다." 그는 진금룡에게 성룡방의 지하 궁전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가 보면 너와 함께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의협신투를 만나게 될 것 이다." "예에?" "하하… 그리고 주걸신개에게 그 기관매복에 정통한 기인을 빠른 시일 안에 꼭 찾으라는 말도 전해라." "그 기인 노선배님도 계신단 말씀입니까?" "하하… 그러니 어서 가 보도록 하여라." "예. 그럼 사부님, 다시 뵐 때까지 옥체 보중하십시오." 진금룡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그에게 삼 배를 올리더니 몸을 날려 떠나갔다. 학운기는 그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고 바라보다가는 이윽고 몸을 날려서 떠나갔다. 사실 그는 진금룡을 오래 붙들어 두면 자신을 따라간다고 할 것 같아서 진금룡에게 호기심을 불어넣어 얼른 떠나게 한 것이었다. 진금룡의 고집은 이미 그가 겪어 본 터였으므로……. × × × 무황성(武皇城). 악양성에서 북쪽으로 오십여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그 리 크지 않은 장원(莊院)이었다. 무림인들은 그렇게 크지도 않은 이 장원이 당금 무림을 휘어잡고 있는 무황성이라는 것에 대하여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칠파일방(七派一幇), 그리고 일궁이보삼방(一宮二堡三幇)이 거의 멸망하거나 봉문한 당금 무림이었지만… 무황성의 위세는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삼경 무렵, 이틀 후면 만월(滿月)이 될 달은 꽤나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무황성은 그 규모에 비해서는 매우 엄밀한 매복과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학운기는 지금 간편한 경장 차림을 하고 무황성에서 약 이백여 장 쯤 떨어진 곳에서 무황성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음, 매우 엄밀한 감시망이구나. 저 정도의 규모도 경혼방의 반은 되는 것 같은데, 지하에는 저것보다 몇 배나 웅장한 건물들이 들 어서 있다니… 매우 놀라운 일이구나.' 그는 또한 그토록 웅장한 건축물을 짓고는 죽어 갔을 수많은 장인 (匠人)들을 생각하고는 무황성의 악랄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치 를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선 잠입을 해야겠구나.'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동정호변(洞庭湖邊)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옷도 어두운 색깔을 입고 있었고, 몸의 빠르기 또한 빛살을 능가 하는지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많은 일류고수들이 매복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들을 살펴보고 간 줄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약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달렸을까? 철썩거리는 물 소리와 함께 동정호의 아름다운 정경이 나타났다. 마치 바다처럼 넓은 호면이 바라보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줄 정도였다. 학운기는 주위를 한 번 살펴보다가는 호면을 향하여 몸을 던졌다. 차가운 물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였고, 그것은 곧 어떤 쾌감으로 변하여 짜릿하게 전신(全身)으로 흘렀다. 약 사 장쯤 잠수(潛水)해 들어가자 어슴푸레 비쳐 들던 달빛도 끊 겨서 완전한 암흑으로 변하였다. 학운기는 서서히 공력을 운집시켜서 똑바로 앞을 주시했다. 그는 지금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깊은 물 속에서도 대낮과 다름 없이 보고 있는 중이었다. 약 십여 장쯤 들어갔을 때 돌연 커다란 동굴이 무섭게 아가리를 벌리고 나타났다. 학운기는 그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서 어떤 것을 생각하고는 놀라 움을 금치 못했다. '음, 그 탈출했다던 기인의 무공도 매우 높았나 보군. 일반인이었 다면 이 정도의 깊이면 수압(水壓)을 이기지 못하고 혈맥이 파열 되었을 텐데…….' 동굴은 계속 이어졌다. 학운기가 헤엄쳐 감에 따라서 동굴 속에서 잠을 자던 물고기들이 놀라서 후다닥 꼬리를 치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는 약 한 식경 정도를 헤엄쳐서야 뭍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종유석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천연의 동굴이었다. '음, 이러한 곳에 이토록 커다란 동굴이 있었다니… 후후… 만약 무황성에서 아직까지 이런 것들을 모르고 있다면 일은 매우 수월 하게 풀릴 수 있을 텐데…….' 한동안 골몰히 생각하던 그는 동굴 안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약 차 한 잔 마실 시간쯤 달렸을 때, 조그만 연못이 나타남과 동 시에 동굴이 딱 막혀 버렸다. 학운기는 지체하지 않고 연못 속으로 몸을 날렸다. 연못은 생각보다는 꽤나 깊었다. 약 오십 장쯤 잠수했을 때 앞으로 뚫려 있는, 어른 둘 정도가 한 꺼번에 통과할 정도의 조그마한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은 약 오십여 장쯤 들어가자 양쪽으로 갈라졌다. '으음, 이 곳이군.' 학운기는 그 중에서 왼쪽 동굴로 들어갔다. 곧 커다란 바위로 막혀 있는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그는 바위를 살며시 밀었다. 바위는 의외로 쉽게 움직였다. 그는 동굴을 나와서는 다시 그 바위를 원상태로 해 놓으면서 내심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랬기에 무황성도들이 이 곳을 발견하지 못했구나.' 바위의 위쪽 부분은 완전히 수초(水草)들로 뒤덮여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더라도 그것들의 뒤에 바위가 동굴을 막고 있다는 것은 생 각하기 어려웠다. 그는 입가에 고혹적인 회심의 미소를 띄우면서 서서히 수면으로 몸을 올렸다. 이 때 그는 천리지청술을 전개하여 혹시 밖에 사람이 있나를 철저 히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도 숨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수면으로 떠오른 학운기는 내심 감탄을 토해 냈다. '아, 지하에다 이토록 웅장한 건축을 할 수가 있다니…….' 그가 떠오른 곳은 한 조그만 연못이었다. 주위에는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숲이 우거져 있었고, 기화요초(琪 花瑤草)들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숲 사이로 은은히 비치는 웅장한 건물들의 위세는 얼핏 보아도 무 림제일궁의 지상 건물들을 훨씬 능가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지하의 자금성(紫禁城)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군.' 그는 내심 감탄을 하면서 몸을 뽑아 올려서 우거진 나무 위로 몸 을 숨겼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물 속을 헤엄쳐 온 그의 못에 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만약 무림인이 그러한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면 그의 초절한 공력에 혼이 나가 버렸을 것이다. 학운기는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주위를 살펴보면서 내심 흠칫하 였다. '음, 이것은 여인의 방향(芳香)이 아닌가?' 그것은 여인의 짙은 방향이었다. 그는 즉시 천리지청술을 전개하여 주위를 살폈다. '앗! 거의 이백여 명이나 되는 여인이 한 곳에 모여서 도대체 무 슨 일을…….' 그는 주위 삼십여 장 내에서 거의 이백여 명의 여인들의 숨소리를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의술에 정통한 그는 혹시 남자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나 하고 살펴 보았지만, 주위 삼십여 장 내에서는 단 한 명의 남자 숨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학운기는 풍겨 오는 방향이 매우 고급스러운 향수(香水)의 냄새임 을 깨닫고는 이 곳의 여인들이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무리 적이지만 차마 여인들만의 규방을 들여다볼 수가 없 어서 다른 곳으로 몸을 날렸다. 지하의 경비는 완전한 비밀 보장에 안심을 하고 있는지 매우 허술 한 편이었다. 그는 몸을 날리다가 문득 한 누각(樓閣)에서 새어 나오는 땅이 꺼 질 듯한 한숨을 듣고는 멈칫하였다. 호기심을 느낀 그는 그 누각 처마에 편복공( 功)을 사용하여 가볍게 매달렸다. 안에서는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듯한 소리와 한숨 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휴, 내가 어쩌자고 이 곳에……." 학운기는 한숨을 쉬는 노인이 평범한 초부인 것을 깨달았다. '무공도 모르는 노인이 어떻게 이러한 곳에… 하인의 신분은 아닌 것 같은데…….' 누각은 매우 화려한 편이었다. 학운기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는 무형무음의 지력을 날려서 창 문에다 조그마한 구멍을 뚫었다. 안의 노인은 그러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학운기는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다가는 내심 흠칫했다. 노인의 모습이 매우 눈에 익었던 것이다. 그는 내심 설레이는 마음으로 구멍에다 눈을 바싹 갖다 대었다. '앗! 할아범이 아닌가?' 그는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할아범이 이 곳에는 어떻게…….' 그 노인은 바로 소운장에서 자신을 손자나 아들처럼 보살펴 주었 던 할아범이었다. '아, 부모님께서는 지금 어떻게 계시는지…….' 그는 할아범을 보자 부모님을 만난 것처럼 반가움을 금할 수가 없 었고, 또한 부모님의 생각이 물밀듯이 솟구쳐 올라왔다. '한데 무공도 모르고 특별한 독문기예(獨門技藝)도 없는 할아범이 용담호혈(龍潭虎穴)보다도 무서운 이 곳에는 어떻게…….' 그는 한동안을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생각에 골몰하다가는 살며시 창문을 열었다. 그가 만약을 대비해서 호신강기로 방 안을 봉쇄하면서 안으로 뛰 어들었을 때, 할아범의 놀라운 외침이 터졌다. "누… 누구요?" 학운기가 손가락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하면서 침상 곁으로 다가 갔다. "쉿! 조용히 하시오." 할아범, 즉 옥 노인은 갑작스런 침범자에 매우 놀란 모양이었다. "당…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학운기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다음, 화 섭자로 촛불을 켰다. "앗!" 옥 노인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할아범, 나를 알아보겠소?" 옥 노인은 매우 심한 격정에 사로잡힌 듯하였다. 그는 즉시 침상에서 내려와서 학운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도…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도련님이 맞지요?" 학운기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할아범, 나요." "도련님, 노복의 절을 받으십시오." 옥 노인은 그에게 즉시 삼 배(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할아범, 그만 일어나시오." "예." 학운기가 감회가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데, 할아범은 여기를 어떻게……." 옥 노인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는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몇 달 전이었습니다. 갑자기 소운장으로 몇 명의 장한들이 찾아 와서는 영아가 노복을 데리고 오란다고 했습니다. 해서, 노복은 영아를 만난다는 기쁨에 이 곳까지 따라왔는데……." 학운기는 그의 말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영아라니요? 혜령 누이가 이 곳에 있단 말이오?" "예, 이 곳에서 꽤나 높은 지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소운 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도 전혀 들어 주지를 않으니……." 학운기는 그의 말을 듣고 섬칫한 느낌을 받았다. "혹시 소운장에는 무슨 일이 없었소?" "예, 두 분 마님 모두 잘 계십니다. 하지만 두 분 마님께서는 도 련님 생각 때문에 매우 수척해지셨습니다." 학운기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히도 무황성에서는 내가 소운장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하지만 부모님께서 나 때문에 그토록 수척해지셨 다니…….' 옥 노인이 어두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데, 도련님께서는 이 곳에 어떻게……." 학운기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고 그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했다. 옥노인은 학운기의 얘기를 듣는 동안 매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학운기가 얘기를 모두 마치고 나자 옥노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를 바라보았다. "노복도 이 곳이 결코 좋지 못한 곳이라고 깨닫고 있었습니다. 다 행히 노복이 거처하는 곳은 다른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곳이 니, 도련님께서 며칠 동안 숨어 계시기에는 알맞은 곳일 겁니다." "고맙소, 할아범. 한데 할아범께서는 이 곳의 지리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있소?" 옥 노인이 매우 안타까우면서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노복은 별로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았고, 또 은밀히 감시하는 자들이 있어서 돌아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해서 이 곳의 지리에 대해서는……." "아니오, 할아범. 그것이 어찌 할아범의 잘못이겠소? 그럼 할아 범, 내가 갔다가 한 시진쯤 후에 오겠소." "예. 도련님, 꼭 오셔야 합니다. 노복은 한시라도 빨리 이 곳에서 벗어나서 소운장으로 가고 싶습니다." "영 누이가 할아범한테 잘못 대해 주고 있소?" "아닙니다, 그 애는 많이 변했습니다. 여기도 며칠 만에 한 번씩 들를 뿐, 모든 일을 시비들에게만 떠맡기고는 그럽니다요. 원 도 대체 뭐가 그리 바쁜지……." "으음, 그럼 잠시 후에 얘기합시다." 학운기는 옥 노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창문 을 빠져 나갔다. 그는 우선 제일 큼직한 전각(殿閣)으로 몸을 날렸다. 가끔씩 순라를 돌고 있는 황의(黃依)무사들이 있었지만 안심을 하 고 있는 탓인지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 곳이 용담호혈보다도 더욱 무서운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그가 커다란 전각의 처마 밑에 화골신공(化骨神功)과 축골신공(縮 骨神功), 그리고 편복공( 功)을 혼합하여 귀신도 알아보기 힘 들 정도로 몸을 숨겼을 때. 안에서 몇 마디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 곳에 침입했던 놈을 쫓아갔던 애들한테서는 소식이 없느냐?" 매우 음침하면서 쇠를 깎는 듯한 목소리가 듣기도 몹시 거북했다. "예, 아직은……." "음, 큰일이군. 이제 하루만 조금 더 지나면 개파대전을 해야 될 텐데… 이 곳이 만약 적들에게 알려진다면 큰일이 아니냐?" "예, 그래서 경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한데 그 놈이 도대체 어디로 침입을 했는지는 알아 냈느냐?" "그… 그것이 아직은……." "그런 것 하나 아직까지 알아 내지 못하면 어떻게한단 말이냐? 그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또 다른 놈이 침입을 해 올 수도 있지 않느 냐?" "예, 그래서 철저히 수색을 했습니다만 이 곳은 원래 동굴이었고 … 또 수많은 동굴들이 사방으로 뚫려 있는지라… 혹시나 아직까 지 발견치 못한 동굴이 있나 하고 수색을 해 봤습니다만은 전혀 그러한 흔적은……." "으음,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동굴로 침입한 흔적은 없더냐?" "예, 그 곳에는 이미 귀신도 살아 나올 수 없을 정도의 기관이 매 복되어 있어서… 더구나 기관이 작동했던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필 전주와 공 전주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더냐?" "예,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개파대전 일만을 기다리고 있습니 다." "그래, 알았다. 그만 물러가도록 하여라. 그리고 침입했던 놈은 꼭 잡아야 된다. 절대로 그의 입에서 이 곳에 지하 궁전이 있다는 소리가 빠져 나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속하는 이만……." 학운기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저 자들이 용아를 찾고 있나 본데, 그는 이미… 후후… 한데, 그를 놓치지 않고 꼭 잡으려던 그들이 어째서 단지 십여 명 의 수하들만을 파견했지?' 그는 한참을 의아히 생각하다가는 그들의 말에서 필 전주와 공 전 주가 준비를 했다는 말을 상기하고는 내심 섬칫한 마음을 금할 수 가 없었다. '음, 우내사마(宇內四魔)가 전주라고 했으니까 필 전주는 만독제 군(萬毒帝君)을 말했을 테고… 공 전주는 무림선요(武林仙妖)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들의 준비라면 독과 섭혼술(攝魂術)을? 그 렇다면 서문정의 얘기는 맞는데……." 그는 무황성의 간계가 확실히 잡힐 듯하면서도 오리무중에 빠진 것처럼 선연히 떠오르지 않자, 매우 당황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이 때 매우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부궁주님, 큰일났습니다." "뭔데 이리 소란이냐?" "예, 이 곳을 침입했던 자를 쫓아간 수하들이 봉신(奉新) 근처에 서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뭐라고? 그 놈의 무공이 그토록 높더란 말이냐?" "아닙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은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무슨?" "예, 그 중 세 명의 수하들의 천극혈에서 솔잎을 하나씩 발견했다 합니다." "음, 그렇다면 침입했던 놈이 도와 준 자에게 이 곳 지하에 대해 서 말했을 가능성이 많잖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이 곳 지하에도 철저한 경비를 하도록 하여라. 본 좌는 주존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고 대책을 강구하겠다." "예." 학운기는 이 곳의 경비가 철저해지면 자신이 활동하는 데 곤란한 점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내심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 었다. '음, 시체를 완전히 처리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구나. 저들은 아마 도 수하들의 무공 실력을 믿고 십여 명만 보낸 것 같은데… 하여 튼 할아범의 방에 돌아가서 다음의 일을 생각해 봐야겠군.' 그가 다시 몸을 숨기면서 옥 노인의 누각 근처에 왔을 때.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수많은 황의인들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창문을 통해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옥 노인은 그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 고 있었다. "도련님, 어서 오십시오." "아니, 할아범은 아직까지 자지 않았소?" "도련님께서 안 오셨는데 노복이 어찌……." 학운기는 그의 충심에 내심 가슴이 뭉클했다. "할아범은 어찌 아직까지도 내생각만 하오? 앞으로는 영 누이도 만났으니 편히 지낼 생각을 하시오!" "도련님, 노복은 이 곳이 정말로 싫습니다. 영아가 비록 노복의 딸이기는 하지만, 요즘은 왠지 멀어지는 느낌이 듭니다요." "으음, 그것은 아마도 너무나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만나서 그럴 것이오. 차츰 옛날의 정이 다시 살아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 오." "도련님……." "자, 할아범. 밤마다 뜬눈으로 지샌 것 같은데 그만 푹 자도록 하 시오. 그렇게 무리를 하다가는 귀여운 손주도 못 안아 보고 세상 을 뜨겠소." 옥 노인이 그의 따뜻한 말에 감격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도련님. 자, 노복이 만약을 위해서 도련님께서 안심 하고 쉬실 곳을 마련했습니다." 옥 노인은 말을 하면서 벽장 문을 열었다. 그 곳에는 깨끗한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어서 어느 화려한 방보다 도 오히려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도련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시비들도 웬만해서는 노복의 방에 들어오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 "고맙소, 할아범. 나에게는 이것도 매우 좋으니,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그럼 도련님, 불편하더라도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할아범도 편히 쉬도록 하시오." "예." 학운기는 벽장 문을 닫았다가 옥 노인이 아직도 잠을 못 이루는 것을 보고는 살며시 문을 열고 그의 수혈(睡穴)을 짚었다. 그런 다음 그는 벽장 문을 닫고는 운기행공을 취하기 시작했다. ====================================================== 第 3 章 마심여심(魔心女心) ====================================================== 학운기가 운기행공을 마쳤을 때 이미 지하 무황성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활동을 시작했는지 매우 부산한 소리들이 들려 왔다. 학운기는 옥 노인이 아직도 잠들어 있나 살며시 문틈으로 방 안을 내다보았다. '어, 할아범이 어딜 갔지?' 그가 한창 의아해 하고 있을 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옥 노인 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옥 노인은 오랜만에 수면을 취한 탓인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 다. 그는 벽장 곁으로 살며시 다가오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도련님, 깨어나셨습니까?" "일어났소, 할아범." "도련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음식이 올 테니, 그 때 노 복이 도련님을 부르겠습니다." "고맙소." "도련님, 다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노복이 매우 섭섭합니다 요." 학운기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감사의 표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시비가 푸짐한 밥상을 들고 왔다. 그 중에 귀엽게 생긴 십칠팔 세 정도의 소녀가 애교 띤 태도로 옥 노인을 바라보았다. "어르신네께서 오늘은 어인 일로 직접 방 안에서 드시려고 하세 요? 전에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허허… 왠지 오늘은 이 곳에서 조용히 들고 싶구나. 하니까 내가 식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는 이 근처에 절대로 얼씬 말아라. 알겠 느냐?" 옥 노인이 위엄스런 표정으로 얘기하자 시비들은 약간 겁먹은 듯 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고는 물러났다. 그러한 것을 본 학운기는 내심 옥 노인의 딸인 옥혜령(玉惠令)의 신분에 대하여 의혹이 솟구쳐 올랐다. '대체 영 누이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제법 고강한 무공을 가진 시 비들이 무공도 모르는 옥 노인의 말에 저토록 두려워한단 말인 가?' 그가 한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옥 노인이 가볍게 벽장 문을 열었 다. "도련님, 그만 나오셔서 식사를 하십시오." "할아범, 그러다가 누가 갑자기 들이닥치면……." "그런 염려는 마십시오, 시비들은 노복의 말이라면 꼼짝을 못합니 다. 그리고 영아도 어제 아침에 들렸으니까, 아마 사흘 후에나 다 시 들릴 것입니다." 학운기는 약간 걱정스런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자신의 무공에 자 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방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식사는 비록 한 사람의 몫이지만 매우 푸짐하게 차려져 있어서 둘 이 먹기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옥 노인은 학운기가 먹는 것을 정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 기만 할 뿐 자신은 들려 하지를 않았다." "할아범, 어서 함께 들어요." "예, 도련님께서는 걱정 마시고 어서 드십시오. 노복은 천천히 들 겠습니다요." 이 때 학운기는 문 밖에서 매우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고는 즉시 벽장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몸놀림은 그야말로 빨랐고, 또한 소리도 없었기에 다른 사람 은 도저히 느낄 수가 없었다. 옥 노인도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는 직감적으로 사태를 느꼈는 지 황급히 학운기가 먹던 젓가락을 집어들고 음식을 먹는 척했다. "누구냐?" 그가 제법 냉랭한 목소리로 밖에다 대고 호통을 쳤다. "아버님, 저 영아예요."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들리면서 곧 이십여 세쯤 되어 보이는 절세 적인 용모의 소녀가 들어왔다. 바로 옥혜령이었다. 옥 노인이 그녀가 학운기의 존재를 발견치 못했다는 것을 느끼고 는 다행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 "예,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그녀는 말을 하다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말을 끊고는 급히 주위 를 둘러보았다. 옥 노인은 생전 해 보지 못했던 연극인지라 자연히 당황스런 태도 를 보였다. 옥혜령이 어떤 확신을 가진 듯한 표정으로 그러한 그를 바라보았 다. "아버님, 이 곳에 누가 들어왔었죠?" "아니다, 누가 들어오긴……." "아니예요, 틀림없이 이 곳에 누가 들어왔어요. 그것도 방금… 그 자는 소녀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는 급히 숨었지만, 소녀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요."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고는 방어 자세로 서서히 벽장 쪽 으로 다가왔다. 학운기는 내심 그녀의 직감에 감탄을 하며 급히 생각을 굴렸다. '음, 신공을 이용해서 숨을까? 아냐, 영 누이는 본래 착한 소녀였 으니 이 기회에 설득을 해서…….' 그는 내심 마음을 굳히고는 벽장 문을 열었다. "영 누이, 나요. 학운기요." 옥혜령이 흠칫 놀라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 당신은……." 옥 노인도 매우 놀란 듯이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숨어 계시지 않고 어찌……." "아니오. 내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것이 이미 발각되었고 또한 영 누이와 할 얘기도 있고 해서……." "……!" 옥혜령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옥 노인이 급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영아야! 어서 인사를 올리지 않고 무얼 하느냐? 소운장의 학 도 련님을 잊었단 말이냐?" 옥혜령이 정신을 수습하고 어떤 형용치 못할 교활하면서도 의미심 장한 미소로 학운기를 슬쩍 쳐다보고는 옥 노인을 향하여 날카롭 게 소리쳤다. "아버지는 이제 하인이 아니란 말이에요. 자꾸 도련님, 도련님, 하지 마세요." "아니, 영아야. 네가 감히 도련님 앞에서 무슨 망발이냐?" "아버지, 아버지는 이제 중원(中原)을 한 손아귀에 넣을 사람의 장인이란 말이에요. 이제는 옛날하고 틀려요. 오히려 소운장의 사 람들이 우리들더러 마님이라고 불러야 할 때가 왔다구요." "영아야, 네… 네가 정말……." 옥 노인은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학운기가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할아범, 그만 고정하시오." 그는 옥 노인에게 한 마디 한 다음 옥혜령을 바라보았다. "영 누이, 그 동안 많이 변한 것 같구려." 학운기는 그 말을 하면서도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순간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 태음신맥(太陰神脈)…….' 그녀는 태음신맥을 타고났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미모는 학운기가 여태껏 보아 오지 못했던 것 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여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꼽는다 면 그는 서슴지 않고 애옥지를 꼽을 것이다. 한데 옥혜령… 그녀는 애옥지보다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결코 못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옥혜령이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흥! 왜 너만 항상 위에서 놀고, 나는 밑에서 머리만 굽히는 사람 으로 있어야 한단 말이냐?" "아니오, 나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영 누이의 성격이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는 말이오." "영 누이? 본녀가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기에 자꾸만 영 누이, 하 는 것이냐?" 학운기는 그녀의 너무나도 쌀쌀한 태도에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이 때 옥 노인이 그녀를 매몰차게 나무랐다. "영아, 네… 네가 그토록 은혜도 모르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계 집이었단 말이냐?" "아버지, 우리가 도대체 소운장으로부터 무슨 은혜를 입었단 말이 에요? 우리는 공짜로 밥을 얻어먹은 것이 아니잖아요?" 옥 노인은 이제 얼마나 노했는지 눈에서 귀화(鬼火)마저 뿜어 냈 다. "네 이년! 네가 감히 아비의 말을 거역하고 끝까지 고집을 부릴 테냐?" "아버지……." 옥혜령이 옥 노인의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 매우 두려운 표정 을 짓고 있었다. 학운기가 옥 노인을 달래었다. "할아범, 나와 영 누이와 조용히 할 얘기가 있으니 잠깐 옆으로 가 있으시오." "도련님, 그것은……." "나는 별일 없을 테니, 어서 나가서 잠시만 기다렸다가 들어오시 오." 옥 노인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는 옥혜령을 한 번 노려보더니 밖 으로 나갔다. 이 때 학운기는 만약을 대비해서 강기( 氣)로써 방을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방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지만 새어 나가지 않고 있었다. 옥혜령도 옥 노인이 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 다. 학운기가 옥 노인이 나가고 나자 막 옥혜령에게 뭐라고 하려 할 때였다. 그녀가 무엇을 느꼈는지 흠칫하면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학운기… 그래, 네 이름이 학운기였지. 그렇다면 네가 바로 절대 신룡……." "그렇소, 바로 내가 절대신룡 학운기요." 옥혜령이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는 돌연 커다 란 교소(嬌笑)를 터뜨렸다. "호호… 풍랑(風郞)께서 그토록 너를 찾았는데, 네가 제 발로 걸 어 들어오다니… 모르면은 귀신도 찾지 못할 이 곳을 어떻게 들어 왔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잘 왔다." "풍랑? 그렇다면 영 누이와 독고풍은 이미……." "호호… 그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제법이구나." 학운기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그 녀를 보고는 내심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음, 너무나도 변했구나. 이대로 그냥 놔 둔다면 내가 위험할 것 같고, 우선 제압해 놓고 보아야겠군!' 그가 내심 결심을 굳히면서 그녀의 혈도를 찍으려는 순간. "헉!" 그는 얼마나 놀랐는지 헛바람까지 토해 냈다. "최… 최혼섭심술(催魂攝心術)! 그렇다면 옥매는 무림선요 공려옥 의 제자……." "호호… 너는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그녀는 간드러지는 듯한 교소를 흘리면서 서서히 그에게 다가왔 다. 그녀의 최혼섭심술은 이미 극상(極上)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는지 정력(定力)에는 자신이 있는 그의 마음도 심하게 진탕을 시켰다. 순간 그는 사태가 매우 위험함을 느끼고는 급히 색단의 효력을 억 제시키기 위해 새로 창안한 심법(心法)을 운행했다. 아직 이름은 붙이지 않았지만 역시 그 심법은 그의 예상대로 최혼 섭심술 같은 극상의 마공(魔功)에도 효력이 있었다. 옥혜령은 자신이 최혼섭심술을 펼치자 그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내심 쾌재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막 손을 쓰려는 순간, 그의 눈빛이 다시 맑은 정기 를 내쏟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라면서 몸을 멈추어 버렸다. '앗! 나의 섭혼술이 이토록 맥없이 꺾이다니…….' 그녀는 이를 악다물면서 교태롭게 몸을 흔들면서 최혼섭심술을 십 이 성 끌어올렸다. 찰나 학운기는 묘한 향내를 맡으면서 황급히 숨을 멈추어 버렸다. 언젠가 한 번 맡은 적이 있는 향기였다. '앗! 미혼섭심향(迷魂攝心香)! 영 누이가 이렇게까지 악랄하게까 지 나오다니…….' 그는 정신이 약간 흐려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이 약간 흐려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심법을 완전히 완성치 못한 것이 한이구나.' 그는 내심 탄식을 하면서 방도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그가 지금 일 장을 펼치면 옥혜령을 죽이거나, 부상시킬 수가 있 었다. 하지만 옥 노인을 보아서도 그녀에게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의 눈빛이 점점 욕정으로 불타올랐다. "호호… 네가 아무리 절세의 신공을 터득했다 하더라도, 나의 섭 혼술과 섭심향을 피할 수는 없지." 그러나 그녀는 그의 앞에서 계속 교태로운 몸짓만을 계속할 뿐 섣 불리 그에게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학운기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호호… 드디어 풍랑의 근심거리가 사리지게 되는구나." 그녀는 교활한 웃음을 흘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옥수(玉手)가 번쩍이는가 싶자 학운기의 몸은 완전히 굳어 버렸고, 그의 혈관은 팽팽히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호호… 절대신룡 같은 귀한 손님을 그냥 내버 려둘 수야 없지." 그녀가 막 다시 득의의 교소를 흘려 내려 할 때. "어?" 그녀는 놀라움의 탄성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몸이 굳는 것을 느 껴야만 했다. "네… 네가 어떻게……?" 학운기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하하… 그렇다면 본인이 그토록 쉽게 당할 줄 알았소? 그럴 정도 였다면 애초에 이 곳으로 잠입하지도 않았을 것이요. 하하… 당신 은 처음에는 매우 영리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더니, 이제 보 니 자신의 실력만 너무 과신하는 어리석은 여인이었구려." 그는 그녀의 행동이 몹시도 괘씸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싸늘한 조 소를 띄우며 몇 마디 쏘아 주었다. 그녀는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네… 네가 어떻게 혈도를 짚이고도… 더구나 미혼섭심향을 맡은 상태에서……." "하하… 본인은 이미 미혼섭심향과 최혼섭심술을 음미해 본 바가 있었소. 비록 늙은 노파가 꾸민 일이었지만……." 옥혜령이 그의 말을 듣고는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다면 네가 사백님을 그렇게……." "하하… 그녀처럼 악한 일만 하다가 그토록 편안히 죽은 것도 얼 마나 다행한 일이오?" 옥혜령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색마(色魔)! 감히 너의 할머니도 몇 대 할머니뻘이 되는 분의 정기(精氣)를 모두 흡수하고 살인까지 하다니……." 학운기는 자신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에 낯이 뜨 거워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하하… 그렇다면 그 사람이 몇 대 손자뻘 되는 본인의 정기를 흡 수하고 본인의 목숨을 취하는 것은 괜찮단 말이오?" "시끄럽다! 네가 감히 나까지 능멸하려 하다니……." "후후… 옥 낭자께서 십여 년 못 보는 사이에 많이도 변했구려. 하지만 지금은 본인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당신은 아마도 절대신룡이 사마도(邪魔徒)들에게 어떻게 대했나를 잘 알 것이오. 당신도 그렇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오." "하지만 이 곳에 한 번 들어온 이상 절대 빠져 나가지는 못할 것 이다." "후후…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시오. 본인에게 불가능이란 절대 없으니까 말이오." 학운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침상에다 똑바로 앉혔다. "자, 이제부터는 본인의 말에 대답을 해 주기를 바라겠소." 옥혜령이 그러한 그를 조소(嘲笑)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호호… 너는 아직도 본녀를 하인의 딸로 생각하나 본데……." "후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소. 그것은 당신의 자 격지심일 뿐이오. 하여튼 당신은 지금 본인의 수중에 있으니, 몇 마디 묻는 말에 대답을 해 주기 바라오." 그는 잠깐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본인이 벽장에 숨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아 냈소?" "호호… 그런 것이라면 본녀가 우둔한 너를 위해서 가르침을 베풀 어 주겠다. 너는 저 밥상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그리고 아버지가 앉았던 위치도. 만약 네가 그래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대는 너만을 탓할 수는 없겠지." 학운기는 그녀의 약간은 모욕적인 언사에 분노를 느꼈으나 그런 것에 대해서까지 그녀와 왈가왈부할 수가 없어서 밥상을 바라보았 다. "아……!" 그의 입에서 감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밥상을 바라보고 그녀의 총명함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밥상, 벽장 쪽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몰려 있었으며 그쪽의 음식이 많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옥 노인은 그 반대편에 앉아서 젓가락을 들고 먹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은 너무나도 상식에 벗어난 것이었다. 옥혜령은 방 안에 들어서서 밥상을 보는 순간 그러한 것을 느꼈으 니, 그녀의 총명한 재지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학운기가 내심 감탄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둔한 본인을 깨우쳐 주어서 고맙소. 그럼 다시 한 가지를 깨우 쳐 주기를 부탁하겠소. 독고풍이 거처하는 곳이 어디요?" 그녀는 독고풍의 무공 등에 절대적으로 신뢰를 하고 있는 듯 쾌히 그의 거처를 말해 주었다. 그녀의 너무 순순한 답변에 도리어 학운기가 어리둥절해졌다. "고맙소, 그럼 당신은 안 됐지만 무공을 폐지시키겠소." 그의 돌연한 말에 그녀는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날카롭게 소리를 질러 댔다. "네… 네가 감히 본녀에게… 집에서 기르는 짐승도 그렇게는 못하 거늘, 하물며 본녀의 부모님께서 평생을 너의 집안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쳐 왔는데……." 학운기는 그녀의 말에 매우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본인도 그것이 몹시도 고통스럽소. 하지만 본인이 보기에 당신은 영원히 회개할 수 없을 정도로 악의 수렁에 깊숙이 빠진 것 같소. 그리고 당신이 익힌 무공은 세상에 해만 끼칠 뿐, 전혀 이득이 되 는 것들이 아니오. 아마도 당신의 부모님들께서도 무공이 없는 평 범한 당신을 더욱 바라고 계실 것이오. 옆방에 있는 할아범이나, 지하에 누워 있는 당신의 어머니도……." 학운기는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는 듯 중얼거리면서 이를 악다물고 그녀의 무공을 폐지시켜 버렸다. "아악! 안 돼!"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발악을 했으나 이미 모든 무공이 폐지된 후 였다. 학운기는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초리가 두려운 듯 황급히 그 녀의 혼혈(昏穴)을 짚어 버렸다. 그의 얼굴을 심적인 고통에 의해 몹시도 일그러져 있었다. '과연 내가 한 일이 잘된 것인지 모르겠군.' 한동안을 고심하는 듯하던 그가 머리를 세차게 한 번 흔들더니 전 음으로 옆방의 옥 노인을 불렀다. 옥 노인은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매우 놀라운 표정으로, 고통스런 표정으로 서 있는 학운기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옥혜령을 번 갈아 쳐다보았다. "도련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요?" "할아범, 영 누이는 괜찮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는 그 간의 일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옥 노인은 그의 말을 듣고는 도저히 추측할 수도 없는 표정으로 눈물을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야지요, 노복은 영아가 그토록 못된 것을 익힌 줄도 모르고 이 애가 잘됐다고 좋아만 했으니… 하여튼 도련님께서 이 애의 몸 에 익힌 귀신을 쫓아 주었다니, 노복이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학운기는 그의 눈물을 보고는 어떤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짐은 어 쩔 수가 없었다. 한참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옥 노인을 바라보던 학운기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할아범,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소." "도련님, 아닙니다. 옛부터 호강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두 분 마님을 모시고 도련님과 이 애가 자라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살려고 했는데… 이 애가 그만……." "할아범, 악의 소굴에서 부귀를 누리는 것보다는 밖에서 마음 편 히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한 일일 것이오." "그러믄입죠." "할아범은 영 누이가 깨어나면 즉시 이 곳을 떠나 소운장으로 가 도록 하시오." 옥 노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도련님께선……." "나는 잠깐 어디 좀 들렸다가 가겠소. 하니 부모님께 안부를 전하 고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부모님을 영원히 모시겠다는 말을 전해 주시오." "예, 도련님. 그럼 부디 옥체 보중하셔야 합니다." "내 걱정은 마시오." 학운기는 그에게 고혹적인 미소를 띄우면서 진기용역술(眞氣易容 術)을 펼쳐 옥혜령의 모습으로 변장 하였다. "앗!" 옥 노인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도… 도련님,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쉿! 할아범, 조용히 하시오." 학운기는 그녀의 모습으로 완전히 변장을 하고 나서는 그녀의 옷 을 벗겨 입었다. 비록 남녀간의 범절 때문에 약간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보다 더 큰일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옥 노인은 멍하니 넋을 잃은 채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학운기는 모든 것을 마치고 나자 옥 노인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할아범, 어때요?" "아……!" 옥 노인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고개만을 끄덕였다. 학운기의 목소리, 그것은 완전히 옥혜령의 것이었다. 처음 해 보는 여자로의 변장인지라 어색하기는 했지만, 웬만한 인 물 정도면 꿈에서도 상상치 못할 변장이었다. 학운기는 옥 노인에게 몇 마디 당부의 말을 더 하고는 밖으로 나 갔다. 그의 걸음걸이조차도 옥혜령의 매우 매혹적인 그것이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옥 노인의 분부로 아예 누각 밖에 서 있던 두 명의 시비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무후(武后)께서 돌아가시나이까?" "오냐, 아버님 방에는 당분간 들어가지 말고 이 곳에서 아무도 안 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도록 하여라." "예." 시비들은 다시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학운기는 거만한 태도로 그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옥혜령이 가 르쳐 준 주존이 있다는 전각으로 발을 옮겼다. 그가 가는 동안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멀찍이 물러서서 모두들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는 그들의 태도에서 옥혜령의 위세가 어떠한가를 깨닫고는 놀라 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주존 독고풍의 전각은 의외로 중앙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의 전각은 다른 것들보다도 작고 소탈하게 보였다. 그리고 전각의 주위에는 화초(花草)는 단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 었고, 커다란 나무들만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학운기는 그러한 것을 보고 독고풍의 성격이 자신이 생각해 왔던 것과는 판이하다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음, 의외로 상대하기 곤란한 인물인 것 같구나.' 그는 그 곳에 다가갈수록 어떤 형용치 못할 살기(殺氣)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한 번 느꼈었던 그런 기분이었다. 전각 주위에는 많은 매복이 있는 것 같았지만 누구 하나 그를 막 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옥혜령이 가르쳐 준 대로 전각 안으로 들어가서는 한 방문 앞에 섰다. 마중 나오는 시비도 없었다. 언뜻 보았던 전각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매우 음산한 느낌을 풍겨 주고 있었다. 학운기가 방문 앞에 섰을 때 이제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심 한 살기를 느끼고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안정시키고는 조용히 방문을 두드렸 다. "풍랑, 저예요." "들어오시오."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왠지 긴장된 목소리였다. 학운기는 애써 긴장감을 감추며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그는 무척이나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내심 흠칫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앗! 저 자는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의 뇌리에는 순간적으로 수많은 영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맞아, 저 자는 삼 년 전 상성(商城)의 태원루(太原樓)에서 뒷모 습만 얼핏 보았던 그 자가 틀림없어. 저 몸에서 풍기는 살기(殺 氣)와 마기(魔氣)는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것이지.' 그가 독고풍을 알아보고 마음 속으로 어떠한 생각을 굳히기까지는 너무나도 찰나적인 것이어서, 그 누구도 그가 다른 생각을 했었다 는 것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황성(魔皇星)의 정기를 타고난 기재 중의 기재인 독고풍 은 그것을 약간 감지한 것 같았다. 그는 학운기가 들어서는 순간 흠칫 놀라면서 두 걸음 물러섰다. 한순간 그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빛을 띠었다가는 이내 살기를 번뜩이는 그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빛을 쏟아 냈다. 그러나 그것도 금방 사라지고 이내 담담한 빛을 띠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감히 거역치 못할 눈빛이었다. 학운기는 그의 변화하는 눈빛을 너무나도 똑똑히 알아채고는 등줄 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의식해야만 했다. '음, 매우 추측하기 힘든 인물이구나. 마심뇌사도 이 자에 비하면 어른과 갓난애 정도밖에 안 되겠군.' 그가 찰나적으로 생각을 굴릴 때, 독고풍이 입가에 형용치 못할 이상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한 걸음 다가왔다. "당신은 누구요?" 학운기는 그의 미소와 제법 점잖은 말에서 진한 살기를 느꼈다. 학운기가 짐짓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풍랑,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후후… 당신은 무척이나 담이 큰 여인이구려. 감히 내 여자로 변 장을 하다니……." "아니? 풍랑, 도대체 그게 무슨……." "후후… 당신은 완벽한 변장을 했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너무나 도 커다란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소." 학운기가 짐짓 교태로운 몸짓으로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호호… 그게 도대체 뭐죠?" 사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정체가 너무나도 빨리 발각당 한 것에 대해 매우 놀라고 있었다. 독고풍이 여유 있는 미소를 띄우며 응답하였다. "후후… 그것은 당신이 본좌를 보았을 때의 행동이었소, 혜령은 본좌를 보면 언제나 본좌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이 인사였소." "호호… 소녀가 너무나도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군요, 그럼 또 한 가지는 뭐죠?" "후후… 그것은 관찰력이 세심한 자라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이오." 그는 말을 하다가는 학운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학운기도 이 때는 자신의 실수를 모두 깨닫고 있었다. 독고풍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눈이오. 혜령은 특이한 무공을 연마하여 언 뜻 보면 눈빛이 매우 맑고 성(聖)스러운 것처럼 보이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 속에 한 가지 유혹의 빛이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소. 그러나 당신의 눈빛은 바로 그 유혹의 눈빛이 없 소. 너무나도 신비로우리만치 맑고 깊단 말이오." "호호… 당신의 관찰력은 매우 고명하시군요." "과찬이오, 그런데 당신은 언젠가 한 번 꼭 만난 느낌이 드니 매 우 이상한 일이오. 본좌의 기억력도 별로 나쁜 편은 아닌데 전혀 생각나지 않으니……." 학운기는 그의 날카로운 직감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호호… 당신은 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셨죠?" 독고풍이 짐짓 호탕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것은 당신이 문 밖에 섰을 때 이미 느꼈었소. 그 때 본 좌는 매우 심한 살기를 느꼈었소. 심지어는 공포까지 말이오." "공포? 당신 같은 사람도 그러한 것을 느끼나요?" "하하… 본좌라고 어찌 그러한 것이 없겠소? 그것은 본좌가 평생 에 꼭 두 번째 느낀 것이었소. 그 때는 한 어린 소년에게서 그것 을 느꼈는데, 이번에는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그것을 느 끼다니… 매우 이상한 일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공포를 느끼게 한 그 어린 소년과 소녀에게 손을 쓰지 않죠?" "하하…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구려." 학운기는 그의 일면에서 매우 호탕스러움을 발견하고 더 이상 변 장을 하고 있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호호… 당신은 소녀가 여자라고 생각하시나요?" "뭐라고?" 독고풍이 그의 말에 매우 놀라며 두어 걸음 물러섰을 때. 학운기가 진기역용술을 풀며 호탕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독고형, 매우 오랜만이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속여서 대 단히 죄송하오." 독고풍은 그의 갑작스런 변화에 매우 놀란 듯하였다. 사실, 독고풍은 지금 다시 한 번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눈이 멀었다 해도 남자가 여자로 변장한 것을 못 알아볼 그가 아니었다. 한데 그는 지금까지 학운기가 남자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 지 않았는가? 만약에 학운기가 살심(殺心)을 품었다면 자신은 방어하기가 불가 능했을는지도 몰랐다.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허… 매우 고명한 역용술이오. 본좌도 그러한 역용술이 이론적 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정말로 감탄 을 금치 못하겠소." "하하… 과찬이오. 한데 당신은 본인이 누군 줄 알겠소?" "물론 절대신룡 학운기, 학 대협이시겠지요." "그렇소, 삼 년 전 상성의 태원루에서 보고 두 번째 보는구려." "하하… 학 대협께서도 그것을 느끼고 계셨구려. 아마도 우리는 숙명적으로 피하지 못할 적인 것 같구려." 순간 그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마주쳤다. 눈빛이 마주친 곳에서는 쇠라도 순식간에 녹일 듯한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찰나 그들은 서로가 상대방이 너무나도 강한 적수라는 것을 느꼈 다. 날카로운 눈빛은 곧 사라졌다. 비록 짧은 시간의 마주침이었지만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무공 정 도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학운기가 짐짓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 독고형께서는 손님에게 자리를 권하지도 않소?" "하하… 이거 죄송하오. 자, 어서 앉으시오." 독고풍은 밖에다 대고 뭐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매우 아름답게 생긴 시비가 차를 들고 왔다. 학운기는 별 의심 없이 차를 마셨다. 독고풍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학형께서는 혹시 차에다 농간을 부렸을까 염려하지 않소?" "하하… 독고형이 그토록 졸장부였다면 소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 곳까지 잠입하지 않았을 것이오." 독고풍의 표정이 찰나적으로 여러 번 바뀌었다. "하하… 학형께선 스스로의 무공을 매우 자신하고 있는 것 같구 려. 하지만 본좌는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라 도 사용하는 사람이오." "하하… 독고형이 비록 그렇게 말씀하시더라도 소제는 독고형의 인품을 믿소이다." 독고풍이 감탄의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학형답구려. 만약 우리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매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깝구려." "독고형, 아직도 우리는 평생의 지기(知己)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소." 독고풍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어렵소, 어려워." "아니오, 독고형. 독고형이 모든 혈겁(血劫)을 종식시키고 조용한 곳에 은거를 한다면, 소제도 독고형과 함께 은거를 하겠소." "학형,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걸머지고 태어나는 것 이오, 본좌도 그것은 마찬가지요." "그것이 혈겁을 일으키라는 것은 아니잖소. 독고형,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시오." "아니오, 본좌는 그 점에 대해 너무나도 오랫동안 생각해 왔소. 그리고 본좌의 생각이 조금도 잘못이 없다는 것을 지금도 확신하 고 있소." 학운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독고형, 세상에 피를 뿌리는 것이 잘못이 아니란 말이오?" "허허… 학형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구려. 본좌는 피를 뿌린 적이 없소. 그리고 약간의 피를 뿌리는 것은 그 과정에서 어 쩔 수 없이 일어나는 조그마한 일에 불과하오. 만약에 그 조그마 한 피마저 뿌리지 않는다면 걷잡을 수도 없는 커다란 혈풍(血風) 이 휘몰아칠 것이오. 일이 그러하건대, 그것을 보고 어찌 피를 뿌 린다고 하겠소?" 학운기의 표정이 점점 싸늘해져 갔다. "독고형은 무언가 커다랗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려. 세상 의 사람들은 생긴 모습도 가지가지이듯이 그 해야 할 일이나 하는 일이 너무나도 다르오. 그것은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의도 적으로 만든 것이라, 하찮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거역 할수 없소. 한데 독고형은 지금 그것에 정면으로 거부하려는 것이 오. 물론 신(神)에 도전하는 것은 인간의 숭고(崇高)한 정신이오. 한데 독고형은 바로 거기서 커다란 모순을 범하고 있소. 독고형은 오직 자신만을 숭고하게 생각했지, 다른 사람의 생명은 숭고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오. 그것이 비록 하찮은 하인이라 할지라도 마 찬가지요." "후후… 그렇다면 학형은 세상을 이대로 놔 두면 혈겁이 자연히 종식될 거라고 생각하오?" "그렇소, 물론 조그마한 분쟁이야 끊임없이 일어나겠지만, 그것도 인간의 이지(理智)가 발달함에 따라서 없어질 것이오." "그렇다면 학형은 그 조그마한 분쟁이 몇백, 아니 몇천 년 간 지 속되면서 혈겁이… 비록 그것이 조그맣더라도 끊이지 않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한 번의 커다란 혈겁이 일어난 후에 영원히 혈겁 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겠소?" "물론 후자지요, 하지만 그것은 한갓 몽상에 불과하오." 독고풍의 얼굴이 갑자기 싸늘하게 굳어 갔다. "몽상?" "그렇소, 한 번 커다란 혈겁이 일어나고 나면 거기에서 파생된 조 그마한 혈겁들이 오히려 그냥 놔 두는 것보다도 더욱 빈번히, 그 리고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오." "학형은 그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소?" "그렇소." 학운기의 표정은 단호했고 목소리에도 단단한 결의가 가득 서려 있었다. 독고풍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본좌도 본좌의 생각이 절대 틀리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소. 해서 본좌는 본좌의 생각대로 밀고 나가겠소. 만약 본좌의 뜻에 거부하 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뿐일 것이오." 학운기도 마주 쏘아보았다. "본인도 마찬가지요, 본인도 끝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자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줄 것이오. 비록 이 두 손에 피를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순간 그들의 살기 띤 눈들이 다시 마주쳤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몇 배나 강렬한 눈빛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노려보고만 있을 뿐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 다. 한 번의 실수가 바로 죽음이고,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독고풍이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학형, 당신은 이 곳으로 들어온 것이 커다란 실수라는 것 을 느끼지 않소?" 학운기의 입에서도 싸늘한 냉소가 터져 나왔다. "후후… 본인은 독고형이 자신의 소굴에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 는 적수를 상대하는 어리석은 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으음……!" 독고풍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한동안 그들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독고풍이 한 가지를 결심한 듯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좋소, 오늘은 내 학형을 곱게 보내 주겠소. 하지만 한 가지 조건 이 있소." 학운기가 반문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독고풍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학형이 내일 개파대전에 나타나지 말라는 것이오." 학운기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그럴 수 없소. 본인은 수많은 일류급 고수들이 악의 수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신비스런 미소를 띄우고 독고풍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본인은 충분히 이 곳을 빠져 나갈 수 있소.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본인은 용담호혈(龍潭虎穴)보다도 무서운 이 곳에 이처 럼 버젓이 들어오지는 못했을 것이오." 독고풍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조소(嘲笑)가 떠올랐다. "어디 학형의 고명한 수단을 견식해 볼까요?" 학운기는 자신의 발밑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바로 이것이오." 독고풍이 그의 돌연한 행동에 엉겁결에 그의 발밑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도 오히려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학운기에게는 그 순간이면 충분했다. 콰쾅－! 문짝이 박살나면서 그의 몸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독고풍은 그것을 바라보고는 뒤쫓을 생각도 안 하면서 비웃음을 띤 얼굴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마도 밖에 있는 수하들에게 전음으로 무슨 지시를 하는 것 같았 다. "으아악……!" 밖에서 몇 마디의 단말마가 들려 옴과 동시에 독고풍은 자신이 한 가지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음, 그 자의 역용술… 내가 그것을 깜박하다니……." 한편 학운기는 문 밖으로 뛰쳐나가면서 자신을 가로막는 서너 명 의 무황성도들을 처치하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수많은 전각들 사이에는 이미 천여 명의 무황성도들이 쏟아져 나 왔다. 학운기는 그것을 보고는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띄웠다. 으슥한 곳에 있던 한 명의 무황성도는 어느 새 저 세상으로 떠났 고, 학운기는 그의 모습으로 변장해서는 무황성도들 틈에 끼여 있 었다. 그의 모습은 어느 새 여인으로 변해 있었고, 무황성도들이 우왕좌 왕하는 사이에 그는 이미 예의 연못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말로 귀신도 곡할 신묘한 수법이었다. 그는 현령진경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 × × 무황성(武皇城)의 개파대전(開派大典) 일. 이 날은 마치 무림의 커다란 잔칫날 같았다. 수천 명의 무림인들이 무황성으로 몰려들었다. 평소에 원한이 있는 사람들끼리 마주쳐도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이 었다. 지상 무황성에는 웅장한 건물은 별로 없었지만, 파아란 청강석(靑 剛石)이 깔린 뜰은 수천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을 만치 넓었 다. 그 뜰의 한쪽에는 화려하면서도 커다란 대(臺)가 마련되어 있었 다. 초청장을 가진 일류급 고수들은 그냥 통과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무림인들은 정문에서 간단한 시험을 치뤄서 합격된 자들만 들여보 내고 있었다. 학운기는 주걸신개가 구해 준 한 인물의 초청장을 가지고 쉽게 입 장할 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변장한 사람과 친분이 있는 사람과 만나면 매우 곤란 한 일들이 발생할 것 같아서 들어가는 즉시 아무도 몰래 또 다른 모습으로 바꾸었다. 사시(巳時)쯤 되었을까? 대 옆에 설치된 커다란 북이 몇 번 울렸다. 둥－ 둥－ 둥－! 이미 뜰에는 수천 명의 무림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무림인들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기대감, 그리고 어떤 두려운 설레 임이 가득 어려 있었다. 북 소리가 울리자 약간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마지막 북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의젓하고 위엄 있게 생긴 육십여 세의 노인이 대 위로 올라왔다. 패천마황(覇天魔皇) 소무극(邵武極)이었다. 그의 오른쪽 가슴에는 무황이라는 두 글자가 황금 수실로 또렷하 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가 대 위로 오르자 군웅들 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 다. 북을 쳤던 청의인이 군웅을 향하여 날카롭게 소리쳤다. "모두들 조용히 하시오." 그의 싸늘하고 공력이 실린 목소리에 장내가 일시에 조용해졌다. 소무극이 제법 거드름을 피우며 장내를 둘러보았다. "흐흠, 본인은 무황성의 빈객당주(賓客堂主) 패천마황 소무극이 오." 군웅들 사이에 다시 한 차례의 소란이 일어났다. 무림 십대고수 중의 일 인(人)이고, 경혼방의 방주인 그가 겨우 일개 당주라니? 군웅들은 새삼 무황성의 엄청난 위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무극이 그러한 군웅들을 매우 거만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아, 모두들 조용히 하시오." 그의 말은 제법 점잖고 나직한 말이었으나 절정의 공력이 실려 있 는지라, 군웅들의 귀에는 천둥 소리보다도 크게 들렸다. 소무극은 군웅들이 조용해지자 계속 이어 갔다. "오늘 본성의 개파대전에 이토록 성황을 이루어 주어서 본인은 대 단히 흡족히 생각하오. 뿐만 아니라 주존님께서도 매우 기쁘게 생 각하실 것이오." 마치 군웅들이 무황성의 개파대전에 참석해서 자신의 얼굴을 본 것이 커다란 영광이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군웅들 중에서 몇 명의 성깔 있는 사람들이 그의 오만 무례한 언 행에 대하여 투덜거리다가는 주위에 늘어선 무황성도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의식하고는 곧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개파대전은 형식적으로 계속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그것은 군웅들에게는 하나의 위협이었다. 얼마쯤 진행됐을까? 둥－ 둥－ 둥－! 다시 열두 번의 북 소리가 울렸다. 이 때 대의 뒤쪽으로부터 꾀꼬리 같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 다. "주존님 납시오!" 비록 아름답고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모든 군웅들의 귀에 똑똑히 들리는 것으로 보아서 그녀의 공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곧 이어서 이십여 명의 금의무사들이 두 줄로 걸어 나왔고, 그 뒤 를 이어서 십여 명의 남녀노소가 독고풍을 호위하고 나왔다. 그들의 뒤에는 약 이십여 명의 꽃다운 소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걸어 나올 때 어디선가 천상의 선율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 운 풍악 소리가 울려 왔다. 주위에 있던 무황성도들이 독고풍을 보고는 모두 땅바닥에 부복했 다. 군웅들은 어리둥절해 서 있다가는 땅바닥에 엎드린 무황성도들의 다그침에 하나씩 무릎을 꿇기 시작하더니, 종내에는 모두가 부복 을 했다. 독고풍의 위세는 천신(天神)을 능가할 정도였다. "모두들 일어서라!" "주존님!" 독고풍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무황성도들이 감격의 소리를 뱉어 냈다. 그리고 대 위에 있는 무황성도부터 하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군웅들은 숨막히고 긴장된 분위기 때문에 숨소리도 크게 내쉬지 못하고 있었다. 독고풍이 화려한 태사의에 앉아서 군웅들을 쓸어 보았다. "오늘 본성의 개파대전에 참석한 무림동도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 를 드리오. 본인이 무황성을 세우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림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혈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요."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군웅들은 그가 태사의에 앉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주존이라는 인물임을 깨달았다. 군웅들은 주존이라는 인물의 나이가 최소한 백 세는 넘었을 거라 고 상상해 왔다. 그러나 막상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이십오륙 세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을 보고는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웅들은 그것을 매우 신비하게 생각했다. 신비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존경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의 부드러운 말투와 무황성도의 몸에서 풍기는 위엄 같은 것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것은 또한 군웅들로 하여금 그를 마치 천신처럼 생각하게 하기 에 충분했다. 그의 말이 모두 끝나자, 군웅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터 져 나왔다. "와아… 무황성 만세!" "와아… 주존님 만세!" 처음 무황성도들의 행동에 매우 불만을 표시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독고풍에게 완전히 반해 버린 것 같았다. 군웅들 틈에 끼여서 그러한 것들을 지켜보던 학운기는 내심 놀라 움을 금치 못했다. '으음, 매우 철저한 계획이구나.' 처음에는 막강한 위세로 위협을 하는 척하다가 나중에 주존이라는 자가 마치 흉허물 없는 듯이 얘기하자 군웅들이 빨려든 것이다. 개파대전은 계속 진행되어 갔다. 마지막으로 무황성의 중요 인물을 소개할 때는 군웅들의 놀라움이 극대로 커졌다. 전대의 마두들까지 총망라되어 있으니, 어찌 군웅들이 놀라지 않 겠는가? 그것을 지켜보는 학운기는 내심 골몰한 생각에 잠겼다. '음, 저들이 몇 명의 중요 인물들을 소개하지 않는 것은…….' 그가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동안에 당주급 인물까지 모두 소개가 끝났다. 소무극이 독고풍 등 상석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예를 취해 보이고 는 대 중앙으로 나왔다. "무림동도 여러분! 본성에서는 오늘을 축하하기 위하여 많은 음식 을 준비하였으니 많이들 들기 바라겠소." "와아… 무황성 만세!" 다시 우렁찬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시간은 오시(午時)를 넘어서고 있었다. 수백 명의 아리따운 소녀들이 넓은 뜰에다 주안상을 마련하였다. 그녀들은 음식을 나르면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둔부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음탕한 자들은 벌써 침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학운기는 그들이 날라 온 음식에 혹시 독이 들었나 살펴보았지만 그러한 흔적은 없었다. '으음, 그렇다면 그들이 만독제군에게 준비시킨 것은 도대체 무엇 이란 말인가?' 군웅들은 안면 있는 사람들끼리 군데군데 모여서 술과 음식을 들 고 있었다. 군웅들은 처음에 무황성도들이 초청장을 나누어 줄 때부터 위협적 으로 나오자, 오늘의 일이 매우 좋지 않을 거라고 긴장을 하고 있 었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갈수록 그들이 부드럽게 나오자, 그 긴장도 차츰 풀어져 갔다. ====================================================== 第 4 章 거성(巨星)의 탄생 ====================================================== 혹시 음식이나 술에 독이 들어 있지 않을까 해서 먹지 않던 자들 도 다른 사람들이 먹고도 아무 이상이 없자 마시고 먹기 시작했 다. 술 또한 향기가 좋은 것이 매우 훌륭한 것 같았다. 학운기는 술을 한 잔 따라 마시다가는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것을 자세히 음미해 보았다. '으음, 분명히 정상적인 술은 아닌 것 같은데… 도저히 알아 낼 수가 없으니…….' 약 반 시진쯤 지나자 술이 취한 자들의 큰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 다. 특히 음탕한 자들은 둔부를 살랑거리며 군웅들 사이를 헤집고 다 니는 시비들을 충혈된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들을 보고는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지. 술 속에다 무형최혼산(無形催魂散) 같은 무형약을 탄 다 음, 섭혼무(攝魂舞) 같은 것을 펼치면 군웅들은 모두…….' 그는 내심 다급해짐을 느꼈다. '맹 노야 등은 무사히 들어갔는지 모르겠군.' 그는 이 곳에 오기 전에 주걸신개 등과 계획한 한 가지 계교가 제 대로 진행되는지도 매우 궁금하였다. 어떻게 할까 하고 한참을 골몰히 생각하던 그는 우선 군웅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려서 경각심을 높여 주기로 했다. 마침 어리숙하고 성질이 급하게 생긴 중년인이 그의 눈에 들어왔 다. 중년인은 술까지 약간 취해 있어서 적격이었다. 학운기의 전음이 그의 귀를 울렸다. "술 속에 미혼약이 들어 있소. 빨리 다른 군웅들에게도 알리시 오." 순간 전음을 받은 중년인은 약간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 리번거리다가는 학운기의 재차 다그침에 커다랗게 소리를 쳤다. "큰일났다. 술 속에 미혼약이 들어 있다." "뭐라고?" 와장창－ 챙－! 삽시간에 소란이 일어났다. 대 위에서 술과 음식을 들면서 자축하고 있던 독고풍 등이 갑작스 런 소란에 약간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소무극이 눈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모두들 조용히 하라!" 그러나 한 번 흥분한 군웅들의 소란은 점점 거세어져 갔다. 조금 전 소무극 등에게 불만을 품은 것까지 한꺼번에 터뜨리는 것 같았다. 군웅들의 기세가 점점 험악해지자, 독고풍이 안 되겠다 싶었던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림동도 여러분! 잠시만 조용히 해 주시오." 역시 그의 말에는 사람을 위압시키는 어떤 힘이 깃들여 있었다. 한참 소란을 피우던 군웅들이 점점 잠잠해져 갔다. 몇몇 혈기왕성한 자들이 소리를 지르려다가 독고풍의 싸늘하면서 도 위엄 있는 눈초리에 기(氣)가 꺾여서는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독고풍이 그러한 군웅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본좌가 어찌 그런 미혼약이나 타는 시시한 장난을 하겠소?" 그는 말을 하면서 약 백여 장 밖에 서 있는 고목을 향하여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앗!" "아……!" 군웅들의 입에서 수천 마디의 경악에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백여 장 밖에 서 있던, 적어도 두 아름은 됨직한 커다란 고목이 마치 칼로 자른 듯 위에서 아래로 반듯하게 갈라져 있는 것이 아 닌가? 학운기는 처음 보는 그의 신공(神功)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군웅들은 이제 환호를 지를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독고풍이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 군웅들에게 계속 말을 이어 갔 다. "본좌는 이 한 쌍의 육장(肉掌)만으로도 여러분을 모두 상대할 수 있소. 그런데 본좌가 무엇 때문에 그런 구차한 계교를 부리겠소? 여러분께서 정 못 믿겠다면 한 번 운기(運氣)를 해 보시오. 미혼 약에 중독되어 운기를 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여러분께서 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군웅들은 그의 말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운기를 하는 것 같았 다. 보통 미혼약에 중독되어 운기를 하면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 구쳐 올라오는 것이 상례였다. 군웅들은 모두 운기를 해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 다. 학운기가 내심 답답함을 금치 못하여 군웅들에게 자세한 것을 말 해 주려고 할 때, 독고풍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맨 처음 미혼약을 탔다고 소리친 사람은 일어서 보시오." 하지만 일어설 리가 만무하였다. 독고풍이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띄웠다 "그것은 아마도 절대신룡 등이 무림동도 여러분과 본좌를 이간시 키려는 농간이었을 것이오." 군웅들 중에서 흑도의 무리들이 그렇다고 아우성을 쳤다. 조금 전 학운기가 전음(傳音)을 보냈던 중년인이 갑자기 벌떡 일 어섰다. "맞소. 제일 처음 미혼약을 탔다고 말한 사람은 나였소. 나는 누 구에게선가 전음을 듣고 나도 모르게 지껄인 것이오. 주존님께 누 를 끼친 점, 사과 하겠소." "와아……!" 영웅심을 앞세우는 하찮을 무리들이 그러한 중년인이 용기 있게 보였던지 환호를 질러 댔다. 그러한 것을 지켜보던 학운기는 자신의 처지가 매우 나쁘게 흐름 을 느끼고는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이 일은 대체…….' 이 때, 독고풍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여러분들께서는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아셨을 것이오. 본좌는 우연히 일어난 이런 불미스러운 일들을 모두 잊게 하기 위하여 여 러분께 본좌의 수하들이 펼치는 매혹적인 천상무(天上舞)를 보여 드리겠소." "와아… 주존님 만세!" "무황성 만세!"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군웅들의 함성이 무황성에 울려 퍼졌다. 그러한 것을 본 학운기는 내심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정신을 황홀하게 하는 환상적(幻想的)인 풍악이 들림과 동시 에, 대 위에 이백여 명의 절세미녀들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꽃 같은 미모와 도발적인 몸매를 하고 있었다. 군웅들은 벌써부터 몸이 흐물흐물해지고 눈빛이 바뀌기 시작했다. 학운기는 대 위로 올라온 여인들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앗! 저들은 모두 최혼섭심술을 익힌 여인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술 속에 탄 미혼약이 무형최혼산임에 틀림없겠군. 아, 이 많은 군 웅들을 어떻게…….' 무형최혼산(無形催魂散). 그것은 아무리 많이 복용해도 어떠한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직접 여체를 접하거나 섭혼무(攝魂舞) 같은 사무(邪舞)를 보면 단순한 생각밖에 못하는 하등 동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나중에 약효가 떨어졌어도 그 수법에 한 번 당한 자는 영원히 꿈 같은 그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조금만 이용하면 절대로 변 심이 없는 충실한 수하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각설하고, 학운기가 대처할 방도를 골몰히 하고 있을 때 이백여 명의 미녀들은 섭혼무를 추면서 옷을 하나씩 벗어 갔다. 곧 그녀들의 백옥보다도 미끄러운 나신(裸身)이 드러났다. 군웅들 중에서 공력이 약하거나 음탕한 자들은 거친 숨을 내뿜으 며 옆에 섞여 있던 무림의 여인들을 서로 차지하려는 쟁탈전을 벌 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쟁탈전도 나녀들이 그들 사이로 헤집고 다니자 멈추어 졌다. 나녀들은 매우 도발적인 자세로 군웅들의 품에 안길 듯 말 듯하면 서 꽃밭을 누비는 나비처럼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녀들의 무공은 한결같이 고강하고 보법(步法) 또한 매우 현묘하 여 이미 넋을 잃기 시작한 군웅들이 그녀들을 잡기란 불가능했다. 군웅들은 이제 옷을 입고 있는 무림여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 다. 하기야 옷을 모두 벗고 있는 절세미녀들이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 니는 데야. 대 위에 앉아 있는 독고풍 등은 득의의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학운기는 조금만 더 지나면 군웅들을 영원히 구제할 수 없다는 것 을 알고는 내심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지금쯤이면 맹 노야 등이 행동을 개시했어야 할 텐데… ….' 그러나 별다른 기미는 느낄 수 없었고, 군웅들은 점점 더 나녀들 의 섭혼술과 섭혼무에 현혹되어 갔다. '으음, 이래서는 안 되겠군.' 그의 얼굴에 굳은 결의의 표정이 떠오르는 순간. "아아… 우우……!" 돌연 그가 하늘을 향하여 커다란 장소(長嘯)를 발했다. 그 장소는 마치 천상에서 들려 오는 선음 같기도 하였고, 지옥에 서 들려 오는 귀음(鬼音) 같기도 하였다. 찰나 섭혼무를 펼치던 나녀들의 행동이 갑자기 무너졌고, 거의 대 부분의 군웅들이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앗!" 대 위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독고풍 등이 경악의 탄성을 토하며 학 운기에게 막 덮쳐 가려는 순간. 대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면서 몇 명의 황의인들이 뛰어 나와서는 독고풍 등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뭐라고?" 독고풍 등은 매우 분노한 듯했다. 그러한 것을 슬쩍 쳐다본 학운기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 다. '후후… 맹 노야 등이 드디어 행동을 개시했나 보군.' 그는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즉시 군웅들을 향하여 커다랗게 소리쳤다. "모두들 이 곳을 떠나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마황성의 정기를 타 고난 악마의 함정에 빠져 있소." 순간 군웅들은 모두 마황성이라는 말에 기겁을 하고는 무황성 밖 으로 몸을 날렸다. 쾅－ 콰르릉－ 창－ 창－! "으악!" "아악!" 순식간에 주위에 늘어서 있던 무황성도들과 군웅들간에 혈투가 벌 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나녀들에게 넋을 잃고 있는 약 오백여 명의 음탕한 무리들이 있었다. 대 위에 있던 독고풍 등은 내외로 맞은 적들 때문에 적잖이 당황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독고풍의 옆에 있던 십여 명의 노소들은 지하 궁전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학운기는 군웅들 앞에서 무황성도들을 처치하면서 혈로(血路)를 뚫었다. "와아……!" 쾅－ 콰르릉－ 창－ 창－! "으아악……!"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또 수적으로도 군웅들이 절 대적인 우세인지라, 무황성도들은 제대로 그들의 길을 막지 못했 다. 무황성의 넓은 뜰은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고, 그 많던 군웅들 중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오직 오백여 명의 넋 잃은 음탕한 무리들과 천여 명의 무황성도들 이 멍하니 서 있을 뿐. 대 위에 홀로 서 있는 독고풍은 자신이 미처 어떠한 조치를 취하 기도 전에 군웅들이 거의 사라져 버리자 어안이 벙벙한 것 같았 다. "그… 그 자가 설마 불혼귀마음(佛魂鬼魔音)을 펼칠 줄 알다니… …." 불혼귀마음(佛魂鬼魔音)! 학운기가 조금 전에 펼친 것이 전설적으로 이름만 전해 오는 그 불혼귀마음이었단 말인가? 불혼귀마음은 모든 사술(邪術)을 극복하는 데 특이한 효력이 있었 다. 뿐만 아니라 사공(邪功)이나 마공(魔功)을 익힌 자들은 순간적으 로 제정신을 잃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고풍 같은 절세마존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재빠른 대책 을 보이지 못하고, 무공 면에서 군웅들보다 더욱 고강한 무황성도 들이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던 것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군웅들이 떠난 무황성의 넓은 뜰에는 약 백여 구의 시체만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었다. 무황성을 빠져 나온 학운기는 군웅들을 한 곳으로 유도하였다. 이미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있었는지, 약 이백여 명의 장한들이 학운기를 따라온 군웅들을 한 은밀한 동굴로 안내하였다. 처음 무황성을 빠져 나온 군웅들은 약 삼천여 명 정도였으나, 끝 까지 학운기를 따라온 군웅들은 약 천오백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 았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무황성에서 백여 리 정도 떨어진 매우 커 다란 동굴 속이었다. 학운기는 군웅들이 자신의 불혼귀마음에 제정신을 차리기는 했지 만, 무형최혼산에 중독되어 섭혼무에 홀렸던 군웅들인지라 완전히 치유되지가 않았다. 그는 우선 군웅들에게 운기행공을 하도록 하였다. 군웅들이 운기행공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무언가를 매우 초조 히 기다리는 듯했다. 약 반 시진쯤 지났을까? 동굴 속으로 약 백여 명의 인영이 들어왔다. 찌푸려졌던 학운기의 얼굴이 그들을 보고는 환하게 펴졌다. "어서 오시오." 그들은 바로 주걸신개 등을 비롯한 우내사존과 황보웅 등이었다. 새제갈이 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주상, 군웅들의 수효가 조금 적은 것 같은데……." 학운기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독(毒)을 사용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그들은 무형최혼산과 섭혼무를 사용하였소." "예? 아니, 그렇다면 나머지는 모두……." "아니오. 그 곳에 남아 있던 자들은 약 오백여 명밖에 안 되었소. 나머지 천오백여 명은 오는 도중에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오. 한 데 그쪽의 일은 어떻게 되었소?" 새제갈 등의 얼굴은 매우 밝은 편이어서 학운기는 그들의 일이 성 공을 거두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대성공입니다. 우리 측은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완벽하게 처 리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부서진 건물들을 보수하려면 최소한 두 달은 걸릴 것입니다." "혹시 기관 같은 것이 작동하는 것은 보지 못했소?" "예, 그들이 너무 안심을 했는지 그러한 것이 작동한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학운기는 그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 다. "으음, 비록 그들의 인명 피해는 적었지만 이번 일로 충격이 컸을 것이오. 오늘 개파대전 일에 우리들이 대거 잠입할 줄 알고 서문 정을 시켜서 그러한 계교를 부린 것 같은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 자 매우 당황해서 더욱 피해가 컸던 것 같소. 우리는 이 기회에 그들의 분타를 모두……." 그는 말을 하다가는 주걸신개를 바라보았다. "맹 노야는 그들의 분타를 모두 알아 내었소?" "예, 약 이십여 군데의 분타의 위치와 대략적인 분타도들의 수효 를 알아 냈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품속에서 대로 만든 듯한 얄팍한 책자를 꺼내어 학운기에게 주었다. "수고하였소." 학운기는 그 책자를 펼쳐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 그는 무엇을 결심하였는지 결의가 서린 표정으로 새제갈 등에게 무언가를 지시하였다. "주상, 잘 알겠습니다." "늦어도 열흘 후까지는 남창에 도착해야 하오." "예." "그렇다면 이 곳에 있는 군웅들 중에서도 자원자를 받도록 합시 다." 이 때 군웅들은 하나둘씩 운기행공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성수옥룡 제갈휘가 그들에게 선령단을 한 알씩 나누어 주어서는 무형최혼산의 여독을 완전하게 없애 주었다. 군웅들은 운기에서 깨어나서 동굴 속에 현 정파무림의 영도자라 할 만한 무림성군 황보웅뿐만이 아니라 전대(前代)의 기인인 우내 사존까지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황보웅이 그들에게 그 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 무황성 도들을 무찌를 일에 참가할 사람들의 자원을 받았다. 군웅들 중에서 약 천여 명이 정파의 고수들이거나, 정사지간 중에 서 마음이 비교적 정대한 사람들이라 모두들 황보웅의 말에 적극 적인 태도를 보였다. 약 오백여 명의 사파의 무리들 중에서도 약 백여 명이 자원을 하 고 나섰다. 그러나 약 사백여 명의 무리들은 왠지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황보웅이 그 나머지 인물들을 훑어보았다. "좋소, 본 궁주는 여러분에게 굳이 강요는 하지 않겠소. 하지만 여러분들은 우리들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불편하더라도 열흘 동안만 이 곳에 머물러 주시오." 그들 중에서 몇 명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반발을 했다. 황보웅은 그러한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동방군들과 함께 그들의 혈도를 모조리 폐쇄해 버렸다. "여러분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지금 여러분들은 열흘 간만 공력이 폐쇄된 상태이고, 활동을 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 이오. 이 곳에는 본인의 수하들이 여러분들을 감시할 것이니, 다 른 생각은 말고 푹 쉬도록 하시오. 그리고 다음에 여러분들이 사 악한 일을 하다가 본인 등에게 발각되면 그 때는 아마도 여러분들 의 목이 허전할 것이오." 사백여 명의 사파 무리들은 황보웅의 위엄 있는 말에 감히 대꾸도 못하고 듣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우내사존 등 너무나도 많은 기인들이 자신들을 노 려보고 있는 것에 감히 대꾸할 자신감을 상실했을 것이다. 학운기는 황보웅의 말이 모두 끝나자, 즉시 군웅들을 몇몇의 무리 로 나누었다. 그런 다음 우내사존과 황보웅 등은 그들의 한 무리씩을 이끌고는 급히 동굴을 떠났다. 학운기는 그들이 모두 떠나는 것을 본 다음, 약 오십여 명의 인영 들을 이끌고는 역시 동굴을 떠났다. 동굴에는 약 오십여 명의 무림제일궁 수하들이 남아서 사백여 명 의 사파 무리들을 지키고 있었다. 학운기가 맡은 곳은 귀주(貴州)와 운남(雲南), 그리고 광서(廣西) 와 광동(廣東) 등 남쪽 사 개 성(省)이었다. 그와 오십여 명의 정의지사들이 귀주의 귀양(貴陽)에 도착했을 때 는 그 날 밤 삼경 무렵이었다. 그들이 귀양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미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십여 명의 개방제자들이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개방제자들은 모두가 거지 차림이 아니라 깨끗한 옷들을 입고 있 었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에서는 전혀 거지라는 인상을 눈을 씻고도 찾 아볼 수가 없었다. 학운기는 그들을 보고는 내심 개방제자들의 처세에 감탄을 했다. '음, 저토록 감쪽 같으니 무황성에서 눈에 불을 켜고 저들을 찾으 려 했지만 결국 찾지를 못했구나.' 개방제자들은 학운기 등을 즉시 무황성의 귀양 분타로 안내 했다. 무황성의 귀양 분타에서는 이미 본성에서의 사고 소식을 알고 있 는지, 매우 철저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학운기는 결의가 서린 표정으로 정의지사들에게 다시 한 번 다짐 을 주었다. "절대로 손에 인정을 베풀지 마시오. 하지만 무공을 모르는 부녀 자나 어린애들은 상하게 하지 말고 모두 혼혈을 찌르시오. 자, 그 럼 갑시다." "와아……!" 개방제자들까지 포함된 육십여 명의 인영들은 우렁찬 함성을 지르 면서 무황성의 귀양 분타로 몸을 날렸다. "앗!" "누구냐?" 경악에 찬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쾅－ 콰르릉－! "으악!" "아악!" 하지만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그들은 다시는 소리를 지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챙－ 창－ 쾅－ 펑－! "으악!" "아악!" 무황성도들은 비록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갑작스런 기습이 었는지 제대로 손을 써 보지도 못하고 죽어 갔다. 그 곳에는 약 오십여 명의 무황성도들이 있었는데, 한 식경쯤 지 나자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군웅들이 너무나도 쉽게 그들을 쳐부수자 오히려 어리둥절하는 것 같았다. 학운기가 그들을 다그쳤다. "자, 다음은 운남이오. 비록 힘은 들겠지만 이러한 소식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면 모두들 몸을 숨겨 버릴 것이 뻔하니, 한시라도 빨 리 다음 분타로 가야 할 것이오." 그는 몸을 날리려다가 문득 승혜빈의 생각이 났다. '음, 그녀가 잘 있는지 모르겠군. 여기까지 왔으니 잠깐 들렸다 가야겠구나.' 그는 군웅들에게 먼저 운남의 곤명(昆明)으로 떠나라고 하고는 개 방제자에게 열화보(烈火堡)의 위치를 물어 보았다. 개방제자는 그의 물음에 매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 폐허에 뭐하러 가시려고……?" 학운기는 폐허라는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라고요? 그렇다면 열화보가 이미 망했단 말이오?" "예,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아……!" 학운기는 내심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이것은 틀림없이 무황성도들이…….' 잠시 분노로 몸을 떨던 그는 우선 그 곳에 들려라도 보고 싶었다. "하여튼 그 곳의 위치나 말해 주시오." "예." 이어서 개방제자들로부터 열화보의 위치를 전해 들은 학운기는 즉 시 그 곳으로 몸을 날렸다. 열화보에 도착한 그는 너무나도 철저히 파괴된 열화보의 처절한 모습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열화보는 주위에 있는 나무들까지도 모두가 새까맣게 타서 앙상하 게 기둥처럼 한두 개가 서 있을 뿐이었다. 그가 혹시 무슨 단서라도 찾을까 해서 잿더미를 세밀히 살피고 있 을 때. 그는 한 줄기의 강맹한 강기( 氣)가 등줄기로 거세게 밀려옴을 느끼고는 황급히 몸을 피했다. "어?" 그를 덮쳐 오던 자는 그의 절묘한 신법(身法)에 놀라움의 탄성을 토하더니, 강맹한 장력을 펼치며 덮쳐 왔다. "잠깐! 손을 멈추시오." "앗!" 학운기는 이미 그 자의 뒤로 가 있었다. 그 자는 마혈(麻穴)이 짚였는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 자를 제압하고는 그 자를 자세히 살펴보다가는 깜짝 놀랐다. "앗!" 괴인(怪人)이었다. 얼굴은 흉터인지, 아니면 화상(火傷)을 입었는지 본래의 진면목을 짐작할 수조차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칼도 모두 빠져 버렸는지, 아니면 타 버렸는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친구는 도대체 누군데 갑자기 암습을 하는 것이오?" 괴인은 눈에서 귀화(鬼火)를 이글이글 피워 내며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 악도야, 어서 죽여라! 본좌가 비록 네놈들한테 철저하게 당하 기는 했지만, 결코 네놈들에게 굴복하지 않겠다!" 학운기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가 육십여 세 정도의 노인이 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장은 도대체 누구요? 혹시 이 곳 열화보의 사람이 아니오?" 이 때 괴인도 그가 결코 나쁜 마음을 품고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을 깨달은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은 무황성의 악도가 아니란 말이오?" "소생은 학운기라 하오". 괴인이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뭐라고? 당신이 절대신룡 학 소협이란 말이오?" "그렇소." 괴인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다가는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 다. "네놈은 누구냐? 감히 절대신룡을 사칭하고 다니다니… 절대신룡 이 네놈처럼 못생겼단 말이냐?" "아하!" 학운기는 자신이 아직도 무황성에 들어갈 때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즉시 진기역용술을 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앗!" 괴인은 그의 얼굴이 갑자기 바뀌자 매우 놀란 듯하였다. "노인장, 이제 믿겠소이까?" "자네가 정말 학 소협인가?" "그렇습니다." "휴, 우선 이 마혈 좀 풀어 주게." "아참!" 학운기는 실소를 지으며 즉시 괴인의 마혈을 풀어 주었다. "자네는 노부가 누군 줄 알겠는가?" 학운기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혹시 승 보주님……." 괴인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내가 바로 열화신군일세. 자네의 얘기는 빈아를 통해 많 이 들었네." "아……!" 그는 즉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는 정중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소생이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무례를 범한 점, 용서 바랍니다." "휴, 용서는 무슨… 누가 이런 나를 보고 열화보의 보주라고 꿈에 서나 생각인들 하겠나? 한데 자네는 이 곳에 어인 일로……." 그는 그에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 다. 열화신군은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죽여야 돼, 그렇게 악랄한 놈들은 씨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 학운기가 분노에 치를 떨고 있는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한데 빈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화신군이 갑자기 눈에서 슬픈 눈물을 흘려내렸다. "휴, 어미도 없이 홀로 키운 녀석인데… 살기는 살았네만 과연 자 네가 만나야 좋을지, 아니면 그냥 떠나는 것이 좋을지 노부도 갈 피를 잡을 수 없구만……." 학운기는 그의 말에 내심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빈매에게 혹시… 보주님, 빈매가 어떤 상태입니까? 소생이 다행 히도 의술을 알고 있으니, 빈매가 상처를 입었다면 빨리 치료를 해야지요?" 그러나 열화신군은 묵묵히 그의 얘기를 듣고는 어떤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학운기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몇 번을 물어서야 열화신군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정녕 빈아를 만나고 싶나?" "그럼 만나야죠." "자네는 그 애가 어떠한 상태에 있더라도 놀라지 않고, 또한 그애 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예." "만약 자네가 격동을 주체 못하고 그 애의 마음 속에 어떤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면 만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네." "아닙니다. 소생은 빈매에게 그 어떤 마음의 상처도 주지 않을 자 신이 있습니다." 열화신군은 그의 얼굴에 굳은 결의의 표정이 떠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게." "예." 열화신군은 근처의 잿더미를 헤치더니 두꺼운 청강석(靑剛石) 판 을 들어 냈다. 그는 그것을 보고는 내심 감탄을 했다. '아, 역시 이 곳에도 이러한 비밀 지하 석실이 있었구나. 이런 곳 에서 갑작스럽게 나와서 저분을 쉽게 발견치 못한 것 같군.' 그는 열하신군의 뒤를 따라서 즉시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 통로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꼬불꼬 불하였다. 열화신군은 지하에 들어가서는 한 개의 야명주를 꺼내 들고 길을 밝혔다. 약 백여 장쯤 들어갔을까? 앞쪽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 왔다. "보주님, 오십니까?" "그렇네. 별다른 일은 없었지?" "예." 동굴은 갑자기 넓어져서 커다란 석실을 이루고 있었고, 주위에 몇 개의 석실이 더 있는 것 같았다. 입구에 지켜 서 있는 노인도 열화신군과 별 다름 없이 얼굴에 심 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노인은 학운기를 보더니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주님, 이 소협은……." "절대신룡 학 소협이네." "아……!" 노인의 입에서도 놀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열화신군이 학운기에게 그 노인을 소개시켜 주었다. "학 소협, 본보의 총관이네. 이제는 무공뿐만 아니라 옛 모습마저 모두 잃어버렸다네. 이 못난 나를 위해서……." 그는 그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는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악독한 자들 같으니…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총관이 그에게 바싹 다가왔다. "학 소협, 잘 오셨소. 빈아가 꿈에서도 학 소협을 찾더니 천신께 서 감화를 하신 모양이구려." 총관은 그의 손을 꼭 잡고 그를 찬찬히 뜯어보면서 고개를 끄덕였 다. "자, 노부가 빈아의 방으로 안내를 하겠소. 아마 빈아는 지금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이오." "부탁합니다." 총관이 그를 한 조그만 석실로 안내를 했다. 열화신군이 그의 뒷모습을 슬픈 듯한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 다. 학운기는 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 침상이 놓여 있었고, 거기에 한 가냘픈 인영이 누워 있었다. 도저히 잊혀질 수 없는 모습이었다. "빈매!" 학운기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침상 곁으로 다가가다가는 얼은 듯이 굳어 버렸다. "빈매! 설마… 설마 했더니……." 그는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만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승혜빈의 얼굴. 그녀의 얼굴도 역시 아버지나 총관의 그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 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학운기의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 피어 올랐다. "빈매… 내가 진작에 찾아왔어야 했을 텐데… 빈매가 이렇게 되도 록……." 그의 마음 속에는 승혜빈이 그렇게 된 것이 꼭 자신의 잘못 같은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침상 곁으로 바싹 다가갔다. "빈매……." 다행히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는 그리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기… 기랑! 어서 와 주세요. 소첩은 기랑이 보고 싶어 죽겠어요. 기랑……." 잠꼬대였다. 그는 그녀의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수척해진 몸을 바라보다가 그러한 잠꼬대까지 듣자, 코끝이 찡해 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 다. "빈매……."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을 때. "누… 누구세요?" 그녀가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빈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기랑, 기랑이 틀림없죠?" "그렇소, 빈매. 나 학운기요." "기랑! 흐흐흑……!"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으로 왈칵 쓰러졌다. "빈매……." 학운기도 달리 할 말을 잊고는 그녀의 가녀린 등만을 쓰다듬어 주 었다. 그녀의 몸은 얼마나 말랐는지 뼈에다 가죽만 입혀 놓은 것 같았 다. ====================================================== 第 5 章 위대한 희생(犧牲) ====================================================== "흐흐흑… 기랑, 소첩은… 소첩은……." 승혜빈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고만 있었다. "빈매, 이제 내가 왔으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그만 고정하시 오." "흐흐흑… 기랑, 고마워요." 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그치는 것 같더니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표정은 웬일인지 싸늘해져 있었다. "이제 됐어요. 기랑은 그만 가 보세요. 소첩은 이제 더 이상 기랑 을 모실 수 없는 몸이에요." 학운기는 그녀의 돌연한 태도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빈매, 그것이 무슨 말이오?" "그렇다면 기랑은 소첩의 이 흉칙한 몰골이 보기 좋단 말인가요?" "빈매, 빈매가 나를 그토록 졸장부로 생각해 왔다니… 물론 빈매 의 그 얼굴이 보기 좋은 것은 아니오. 하지만 결코 역겹지도 않 소. 나는 빈매의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해 왔던 것이 아니라, 그 순결한 마음을 사랑해 왔던 것이오. 그런데 빈매가 나를 그렇게밖 에 생각하지 않았다니……." "기랑, 소첩은 그런 것이 아니라… 흐흑……!" 그녀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기랑은 저 말고도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을 텐데, 무엇 때문에 굳 이……." 학운기가 그녀의 가녀린 몸을 꼬옥 껴안았다. "빈매, 사랑은 얼굴로 하는 것이 아니오. 뜨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오." "흐흐흑… 기랑! 흐흑……!" 그녀는 얼마를 더 흐느끼다가는 그의 계속된 달램에서 서서히 울 음을 그쳤다. 학운기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빈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내가 알고 있는 의술로도 빈매의 상처는 틀림없이 치료할 수가 있소." "아니예요, 기랑. 소첩은 아무래도 괜찮아요. 소첩은 기랑께서 위 로를 하지 않더라도 꿋꿋이 살아 갈 수 있어요." "고맙소, 빈매. 그래야 하고 말고. 빈매를 이렇게 만든 악도들은 곧 나에 의해서 처단을 받을 것이오." "기랑……." "빈매……." 그녀가 가녀린 팔로 그의 몸을 꼬옥 껴안았다. 그녀는 그 동안 학운기가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거들떠보지 도 않고 떠나까봐 얼마나 고뇌에 몸부림쳤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그녀는 지금 그의 포근하고도 따뜻한 품에 안겨 있는 것이다. 믿음직한 그의 품에 안겨 있자니 그 동안의 심신의 피로가 모두 풀린 것 같았다. 학운기가 뜨거운 입술로 그녀의 바싹 탄 입술을 살며시 덮었다. "흐읍!" 승혜빈으로서는 사랑을 확인하는 너무나도 고마운 입맞춤이었다. 잠시 후 뜨거운 재회의 입맞춤이 끝나고, 승혜빈이 학운기의 얼굴 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기랑, 정말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소첩이 이렇게 됐다는 것을 기랑께는 알리고 싶지가 않았어요. 차라리 악독한 마공(魔功)이라 도 익혀서 원수를 갚으려 했는데… 그것이… 그것이……." 그녀는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그것을 쉽게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빈매, 그런 것은 아무래도 괜찮소. 빈매는 이제 나를 만났으니 모든 것을 잊고 하루 빨리 몸을 회복하도록 노력하시오. 빈매의 그 마른 모습을 보기가 정말로 안타깝소."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듯하다가는 살며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기랑, 소첩이 한 가지 얘기를 해도 놀라지 마세요." 학운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빈매가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테니… …." "소… 소첩은 기랑의… 애기를……."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는 고개를 푹 수그려 버렸다. 학운기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묵직한 쇠망치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기쁨인지 뭔지 제대로 종잡을 수도 없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덥썩 끌어 잡았다. 그의 얼굴은 심한 격동에 물들어 있었다. "빈매, 그것이 정말이오?" "기랑, 소첩은 이 애가 소첩의 이 흉칙한 몰골을 닮을까 봐서 낳 지 않으려고 했는데, 소첩은… 소첩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 요. 흐흐흑……!" 그녀는 다시 슬픈 오열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학운기가 그녀의 앙상하게 마른 몸을 꼬옥 껴안았다. "빈매, 그것이 무슨 말이오? 우리들의 사랑의 결실인데 잘생기면 어떻고, 또 못생기면 어떻소? 그리고 아기는 엄마의 본래 모습을 닮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기랑! 흐흐흑… 정말 고마워요. 소첩은 정말로 흐흑……!" "자, 빈매. 그만 고정하시오. 빈매가 울면 뱃속의 애도 놀라잖 소." "예, 알았어요." 승혜빈은 울음을 그치고는 부끄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비록 얼굴은 흉칙하게 일그러졌지만 그녀의 두 눈만은 너무나도 맑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고는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랫배를 봤을 때, 그는 또 한 번의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이세가 지금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매우 뿌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 부모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원래가 손이 귀한 집안인지라 부모님의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도 없을 만치 클 것 같아 그 동안 저질러 온 불효에 어느 정도 보답 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약간은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이 만난 것이 지난 이른 봄이었으니까, 벌써 다섯 달이 넘었 다. 그녀의 아랫배는 제법 불룩해 있었는데, 학운기는 그녀를 만난 감 격과 그녀의 애처러운 모습 때문에 그러한 것을 미처 발견치 못했 던 것이다. 학운기가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안으면서 그녀의 불룩한 아랫 배에다가 가만히 손을 얹어 보았다. 손끝에 태아가 가볍게 요동치는 것이 전해져 왔다. 학운기가 고혹적인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빈매, 이 애는 매우 개구쟁이일 것 같구려. 벌써부터 이렇게 요 동을 치니 말이오." 승혜빈이 부끄러운 듯 곱게 그를 흘겨보았다. "기랑도 참……." 학운기는 그녀와 얘기를 하다가는 급히 곤명(昆明)으로 가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매, 내 지금 급히 가 봐야 할 데가 있어서……." "예에? 아니? 기랑, 오시자마자 떠나시다니요." 그녀는 매우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학운기는 그녀에게 그 간의 사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었 다. "그러니 빈매는 내가 올 때까지 우리들의 애기를 생각해서라도 몸 보중하시오."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고개만을 끄덕였다. "빈매, 우리는 곧 만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빈매 는 아버님과 함께 내일 남창으로 가시오." "그녀들이 소첩을 미워하지 않을까요?"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시오. 그녀들도 모두 착한 여인들이니, 아 마 빈매에게도 잘 대해 줄 것이오." "예, 알았어요. 그럼 기랑께서도 몸조심 하셔야 해요?" "알았소. 그럼 빈매, 남창에서 보도록 합시다." "예." 학운기는 그녀의 이마에다 가볍게 입을 맞추어 주고는 밖으로 나 왔다. 밖에서는 열화신군과 총관이 초조한 모습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열화신군이 급히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학 소협, 빈아는 괜찮겠던가? 그 애가 하도 자네를 한 번이라도 만나 보고 죽겠다는 소리를 해 놓아서……." "예, 빈매는 이제 괜찮을 겁니다." 학운기는 그에게 남창 성룡보의 지하 궁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 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럼 그 곳에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 학운기는 그에게 포권의 예를 취해 보이고는 급히 지하를 빠져 나 왔다. 그는 시간이 많이 지체됐음을 깨닫고는 이기어풍술(以氣馭風術)을 펼쳐 곤명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리고 있는 그의 마음은 매우 명쾌하고 가벼운 것 같으면서 도 무거웠다. 이제 몇 달 후면 자신도 아버지가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였 다. 그러나 승혜빈 일가(一家)의 처참한 몰락과 그들의 처절한 몰골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곤명에 도착했을 때는 인시(寅時)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오십여 명의 정의지사들과 육칠 명의 개방제자들이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운기는 우선 곤명의 무황성 분타의 상황부터 물어 보았다. 개방의 분타주라는 자가 그에게 가벼운 예를 취하며 대답했다. "예, 그들은 본 성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눈치였 지만 귀양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 니다." 학운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휴식은 취하였소?" "예." 그들은 비록 거듭된 혈투와 먼 거리를 달려온 피곤 때문에 몸은 약간 무거워 보였지만, 두 눈들만은 투지에 불타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러한 그들을 바라보고는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음, 이들이 비록 피곤해 보이지만 지금 공격하는 것이 귀양 등의 일이 알려진 다음보다 오히려 안전하고 효과도 클 것이다.' 결심을 굳힌 그는 굳은 결의의 표정으로 중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 즉시 공격하기로 합시다. 그들도 본 성의 소식을 듣고 밤새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을 것이오." "좋소, 빨리 갑시다." 중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 있었다. 학운기는 그러한 그들을 한 번 바라보고는 앞서 몸을 날렸다. 무황성의 분타는 그들이 있던 곳으로부터 채 십 리도 떨어지지 않 았다. "칩시다!" "와아……!" "누구냐?" 쾅－! "으악!" 최초의 단말마를 신호로 연속적으로 폭음과 굉음, 그리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처절한 단말마가 계속 들려 왔다. 그 곳에는 약 삼십여 명의 무황성도가 있었는데, 막 잠에서 깨어 난 그들은 제대로 반항 한 번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펑－ 쾅－! 창－ 창－! "으악!" "아악!" 특히 승혜빈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더욱 분노한 학운기는 무황성 도로 보이는 자는 닥치는 대로 살상을 했다. 이번 역시 너무나도 간단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파의 중인들 중에서도 몇 명이 부상을 당했다. 학운기는 모든 일을 마치자 즉시 또 다른 곳으로 가기란 무리란 것을 깨달았다. 중인들은 그만큼 지쳐 있었던 것이다. '으음, 우선 이들을 쉬게 하고 혼자서 처리해야겠군.' 그는 개방제자들에게 중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라 고 부탁을 했다. 그런 다음 그는 피로해 하는 중인들을 바라보았다. "여러분은 여기 개방의 문인들을 따라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 오. 그런 다음, 사흘 후에 복건(福建)의 복주(福州)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중인들은 떠나오기 전에 황보웅으로부터 무조건 학운기의 말에 따 르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은 지금 앞에 서 있는 약관도 채 안 된 소년이 절대신룡 학운기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들에게 몇 마디 더 부탁을 한 다음, 즉시 광서(廣西) 의 계주(桂州)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지금 매우 피곤했다. 그도 피와 살로써 이루어진 사람인데, 하룻밤 사이에 수천 리를 달리고 또 혈투를 벌이고도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극심한 분노와 사명감은 몸이 피곤한 것을 훨씬 능가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극도의 진기 소모를 가져오는 이기어풍술을 펼치지 않 고 평범한 분광약영(分光掠影)을 펼치고 있었다. 비록 평범한 경공술이었지만 그의 몸에서 펼쳐지는 것은 그 어떤 절기라 부르는 경공술보다도 뛰어나 보였다. 한데 놀라운 것은 그가 경공을 펼치면서 운기행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지만 또한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경공을 펼치면서 운기행공을 하다가 어떤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나면 제대로 대항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학운기도 이런 위험한 수법은 될 수 있는 한 펼치지 않으려고 했 으나, 우선 시간을 절약하자니 별수 없었다. 다행히도 그가 계주에 거의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우선 계주성(桂州城) 안에 들어가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루의 점원에게 물어서 한 장원을 찾아갔다. 그 장원은 성안에 자리잡고 있었고, 매우 화려해서 성내의 사람들 은 모두 그 장원을 알고 있었다. 장주는 낙향한 벼슬아치로 왕 대인이라 알려진 사람이었다. 학운기는 그 장원으로 찾아가서 커다란 대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누구요?" 곧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리면서 약 육십여 세의 노인이 대문을 빠 끔히 열고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생은 개봉(開封)에서 왔는데, 왕 장주를 만나러 왔소." 개봉이라는 말에 노인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서렸다. "어서 오십시오, 장주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고맙소." 노인은 곧 학운기를 한 화려하게 꾸며진 전각으로 안내했다. 전각의 대청에서는 약 사십여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인이 무언 가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 곳까지 가면서 장원의 화려함에 내심 감탄 했다. '음, 역시 개방의 부(富)는 대단하구나.' 그럼 이 곳이 개방 분타란 말인가? 개방은 원래 거지들을 망라한 집단이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뜻밖 의 비밀 처소를 곳곳에 마련해 두고 있었다. 학운기가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중년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학운기를 안내한 노인이 그에게 귀띔을 해 주었다. "저분이 왕 장주입니다." 그리고는 노인은 아무 말도 없이 왕 장주에게 가볍게 포권의 예를 취해 보이고는 나가 버렸다. 노인이 나가자 왕 장주가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공자는 뉘시오?" 학운기는 그의 말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면서 손으로 복 잡한 기호를 그려 보였다. 순간 왕 장주가 즉시 그의 앞에 부복을 했다. "제자가 소사존님을 배알합니다." "그만 일어나시오." 학운기의 가벼운 손짓에 왕 장주의 몸은 다시 꼿꼿이 펴지고 말았 다. 그의 얼굴에 놀라운 빛이 떠올랐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소생은 개방의 사존이 아니오." 왕 장주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 그렇다면 그 기호는 어떻게……?" "주걸신개 노선배로부터 배웠을 뿐이오." "그… 그렇다면 소협이 바로 절대신룡 학운기 소협……." "그렇소." "한데 이 곳에 오신다는 연락은 받지 못했는데……." "혼자서 행동하다 보니 그렇게 됐소. 그건 그렇고, 이 곳의 무황 성 분타는 지금 어떻소?" 왕 장주의 얼굴에 매우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그것이 좀……." 그의 머뭇거림에 학운기가 답답함을 느끼고 다그쳤다. "어서 얘기해 보시오." "예, 무황성도들이 오늘 오후쯤에 돌연 어디론가 몰려갔습니다." "그 곳이 어디요?" "제자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갔으나 아직 연락이 없는 것이 좀… …." 그의 표정은 매우 불안한 듯했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를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분타에는 한 명도 없이 모두 몰려갔단 말이오?" "아닙니다. 하인들과 부녀자들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자들이 간 곳을 물어 보았소?" "아직 일이 어떻게 될 줄을 몰라서……." "으음……!" 학운기는 그들이 어째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나에 대해 골몰히 생 각을 했다. '으음, 그들이 귀양과 곤명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미 알았단 말인 가? 연락을 취할 만한 사람은 그대로 놔 두지 않았는데…….' 그는 시비가 가져온 차를 들면서 개방제자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삼경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옆에 있는 왕 장주도 매우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학운기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개방의 장원을 빠져 나와 무황성의 분타로 몸을 날렸다. 무황성의 분타에는 아녀자들과 하인들밖에 없었다. 학운기는 그들에게 무황성도들의 행방에 대해 물어 보았지만 아무 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는 내심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이들이 우리들의 행동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구나. 그 들의 분타에서는 그러한 것을 알릴 만한 자가 남지 않았을 텐데… 혹 다른 곳에서 실수를? 아니면 첩자가? 으음… 하여튼 광주(廣 州)로 가 봐야겠군.' 한참을 골몰히 생각하던 그는 광동(廣東)의 광주(廣州)로 몸을 날 렸다. 하지만 광주의 무황성 분타에도 무황성도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복건(福建)의 복주(福州)로 가서 오십여 명의 정의지사들이 오기를 기다릴까 하다가는 어떤 생각을 하고는 개방제자에게 그들 을 안내하라고 부탁을 한 다음, 무창으로 몸을 날렸다. 학운기가 무창의 성룡방 지하 궁전에 당도했을 때는 삼경 무렵이 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강서(江西)와 절강(浙江)의 무황성 분타 를 맡은 새제갈이 이미 돌아와 있었다. 그는 무슨 곤란한 일이 있는 듯 표정이 매우 어두워져 있었다. "주상, 어찌 이토록 빨리 오셨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 학운기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간의 일에 대하여 자 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한데 천 노야도 결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노복도 주상과 다름없었습니다." "으음, 그럼 천 노야와 함께 간 군협들은 어떻게 되었소?" "모두들 이 곳에 와 있습니다." 학운기는 한참을 골몰히 생각 하다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우선 그들 중 누구도 밖으 로 내보내서는 안 될 것 같소." 그는 그것에 대하여 새제갈과 자세한 숙의를 했다. 한데 학운기는 숙의를 하면서도 새제갈의 표정이 계속 어두운 것 을 보고는 내심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천 노야, 혹 이 곳에 무슨 일이 있었소?"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천 노야의 안색이 그토록 어둡소? 전에는 결코 그러 한 일이 없었는데……." "그것이……." 새제갈은 그에게 무슨 말인가 할 듯하면서도 계속 망설였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를 계속 재촉했다. "천 노야, 무슨 일이 있으면 어서 말해 보시오. 그래야 빨리 대책 을 세우지 않겠소?" 새제갈이 그러한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상, 노복의 말씀을 듣고 절대 놀라지 마십시오." 학운기는 가슴이 덜컹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고 어서 얘기해 보시오." "예, 오늘 정오 무렵에 개방제자로부터 한 가지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것은 주상의 부모님께서 납치되셨다는……." "뭐라고요? 부모님이 납치되셨다고? 그 자들이 도대체 누구요?" 학운기는 마치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머릿속은 텅 비어서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눈에서는 시뻘건 광염(狂炎)의 살기가 줄기줄기 뻗쳐 나오고 있었다. "어서 말하시오, 어서!" 그는 새제갈의 손을 움켜쥐고 마구 흔들어 대고 있었다. "주상, 고정하십시오. 이렇게 흥분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 다, 주상!" 새제갈의 커다란 외침에 그가 점점 냉정을 되찾아 갔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서는 여전히 비수보다도 예리한 살기가 뻗쳐 나오고 있었다. "역시 무황성의 독계(毒計)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무황성에서 무슨 협박 같은 것은 없었소?" "아직은……." 그렇다면 소운장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소?" 새제갈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모두 살겁을……." "뭐라고요?" 학운기는 살기를 뿜어 내면서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다. "악랄한 자들 같으니라구! 무공도 모르는 사람들을 해치고 무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분들을 납치해 가다니……." 그는 분노로 떨던 몸을 서서히 진정시키면서 냉정을 되찾았다. '으음, 이 일을 어떻게 한다지? 한데 그들이 소운장을 어떻게 알 아 냈지? 혹시 옥혜령이……?'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다시 무서운 살기를 뿜어 냈다. '틀림없어. 악랄한 계집 같으니라구.' 학운기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새제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상, 이 일을 절대로 감정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냉정하 게 처리하지 않으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고맙소. 내 천 노야의 충고 가슴 깊이 새겨 두겠소." 그들은 그 일에 대해 한참을 더 숙의했다. 학운기가 굳은 결의의 표정으로 새제갈을 바라보았다. "하니, 천 노야께서는 이 곳의 일을 조금도 실수 없이 처리해 주 기 바라겠소. 만약에 이 곳의 위치가 적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우 리는 또 한 번의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오." "주상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노복의 일은 염려 마시고 주상께 서도 몸조심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주상께서 무슨 일이라도 당한 다면, 강호무림은 그 날로서 암흑 천지가 될 것입니다." "고맙소." 학운기는 새제갈에게 몇 가지를 더 부탁한 다음, 황급히 지하 궁 전을 빠져 나갔다. 제갈소연을 비롯한 여인 등에게는 자신이 온 것을 알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들을 만나면 또 쉽게 빠져 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떠났다. 하늘에서는 만월이 약간 넘은 달이 교교한 빛을 뿌려 주고 있었 다. 학운기는 답답한 마음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이 길게 휘파람을 불 면서 몸을 날렸다. 그는 지금 무황성(武皇城)으로 가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는지라 펼치는 경공은 번개도 깜 짝 놀랄 정도였다. 남창에서 악양까지는 칠백여 리의 먼 거리였다. 사경에 접어들 무렵 남창을 출발한 그는 오경이 약간 넘어 섰을 때 멀리 무황성이 바라보이는 곳까지 도착 했다. 한 시진 반도 채 걸리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한 것은 그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지 금 그의 뇌리에는 그러한 것을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는 비밀 통로로 들어가기 위하여 동정호(洞庭湖)에 몸을 날렸 다. 그가 막 수중(水中) 통로를 벗어나려 할 때 그는 물 밖이 왠지 밝 은 것을 느끼고는 살며시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말소리와 함께 땅 파는 소리가 들려 왔다. '으음, 이 통로가 이미 발각이 된 모양이구나.' 한참 생각을 하던 그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동굴 안에는 횃불이 밝혀 있었고, 약 십여 명의 무황성도들이 무 슨 일엔가 열중해 있었다. 그는 진한 화약 냄새를 맡았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뻗쳐 나왔다. '후후… 적당한 때에 들어온 것 같군.' 그의 입가에 살소가 번짐과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번쩍 했다. 털썩－ 털썩－! 짚단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무황성도들은 목줄기에서 피화살을 내뿜으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학운기는 가볍게 몸을 솟구쳐 물 속을 빠져 나왔다. 무황성도들이 쓰러진 자리에는 수백 근의 화약과 장치하다 만 기 관장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학운기는 내심 고소를 흘리면서 천리지청술을 전개하여 안쪽을 살 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 왔다. '음, 약 백여 명 정도 되겠군. 그 중에서 최절정급 고수가 두세 명 정도라…….' 한참 생각을 굴리던 그는 소리 없이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 새 독모(毒毛)가 쥐어져 있었다. 입가에 살소(殺笑)를 띄우고 컴컴한 동굴을 가는 그의 모습은 흉 칙한 악귀나찰(惡鬼羅刹)보다도 몇 배나 더 섬뜩하게 보였다. 약 십여 장쯤 들어가자 다시 밝은 빛이 비쳐 왔다. 그 곳에도 역시 십여 명의 무황성도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털썩－ 털썩－! 그들도 역시 학운기의 무형무음의 지력(指力)에 인후혈(咽喉血)을 관통당하여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무황성도들은 매 십 장 간격으로 기관매복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학운기에 의해서 영문도 모른 채 죽어 갔다. 학운기가 다섯 번째의 무황성도들과 마주쳤을 때 앞쪽에서 두런거 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안쪽에는 모두 준비를 마쳤는지 모르겠군요." "지재전주(智才殿主)님께서 오늘 안으로 모든 것을 끝마치라고 하 시니, 좀 힘들더라도 어서 끝내도록 합시다." "한데, 성을 건축할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이 동굴을 어떻게 발견 했는지 모르겠소?" "글쎄, 주존님께서 직접 발견하셨다는 소문도 있고… 하여튼 우리 들의 일이나 어서 끝마치도록 합시다." 학운기는 말을 하면서 다가오는 자들이 두 명이라는 것을 느끼고 는 커다란 종유석 뒤로 몸을 숨겼다. 두 명의 황의인이 그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학운기는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그들의 아혈과 마혈을 동시에 점 해 버렸다. 그는 즉시 그들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그는 그들의 몇 군데 혈도를 더 누르면서 불혼항마대법(佛魂降魔 大法)을 펼쳤다. 학운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누구냐?" "예, 소인들은 신기당(神機堂) 소속의 향주들입니다." "신기당주는 누구냐?" "예, 현기수사(玄機秀士) 강범(康范)입니다." "너희들은 누구의 지시로 이 곳에다 기관을 설치하느냐?" "지재전주님께서 분부하신 일입니다." "지재전주는 누구냐?" "마심뇌사 가 노선배님이십니다." "으음, 지금 이 동굴 속에 있는 자 중 가장 높은 자는 누구냐?" "예, 신기당주님이십니다." "너희들은 강호의 대학자이신 소운 선생께서 어느 곳에 계신지 알 고 있느냐?" "모릅니다." "음, 그렇다면 신기당주의 생김새를 자세히 말하라." "예." 황의인들은 신기당주인 현기수사 강범의 생김새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학운기는 그들에게 더 이상 알아 낼 것이 없음을 깨닫고는 그들의 아혈을 찌름과 동시에 사혈을 찍어 버렸다. 황의인들은 불혼항마대법에 이지를 상실한 채로 조용히 눈을 감았 다. 학운기는 그들을 처리하고는 계속 안으로 들어가면서 무황성도들 을 처치하였다. 동굴 안에 있는 무황성도들은 기관매복이 전문인지 무공 면에서는 다른 무황성도들보다 약했다. 그가 다시 삼십여 장쯤 들어갔을 때, 앞쪽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 왔다. "안쪽으로 일의 진척을 알아보러 간 향주들은 왜 아직껏 오지 않 느냐?" "속하가 즉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이 부당주가 직접 가서 진척을 알아보고 오시 오. 지재전주님께서 오늘까지 모든 것을 마치라고 했는데… 이것 들이 아마도 다른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소." "예, 그럼 속하가 다녀오겠습니다." 부당주라는 자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학운기는 그가 자신의 앞을 스치고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으음, 저 자는 처치해 버리고 당주를 다그쳐 봐야겠군. 한데 저 자의 발소리로 보아서 절정고수를 능가하는 공력을 소유한 것 같 구나.' 그는 오른손에다 공력을 집중시키고 부당주가 앞을 스쳐 지나기를 기다렸다. 부당주는 당주의 처사가 매우 기분 나쁜지 신경질적인 걸음이었 다. 그가 학운기의 앞을 스치는 순간. "누……." 그가 이상한 예감을 느꼈는지 뭐라고 소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것이 그의 마지 막 말이었다. 학운기는 그의 몇 군데 사혈을 더 점하고는 한쪽 구석에다 처박아 버렸다. 그런 다음 그는 살며시 앞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십여 장 밖에는 지하 무황성으로 통하는 연못이 있는 곳이었 다. 그 곳에는 역시 십여 명의 무황성도들이 기관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옆에서 황의인들이 말해 준 모양의 신기당주가 바위 에 걸터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학운기는 그의 모습을 얼핏 보고는 그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님 을 깨달았다. '음, 저 자의 무공은 어쩌면 소무극 등을 능가하겠군. 한데 저 자 는 별로 사악한 기(氣)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이러한 악의 소 굴에…….' 학운기는 앞쪽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소리 없이 한꺼번에 처치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음, 현기수사를 제압하려면 최소한 오륙 초는 걸릴 것 같으니 그 부터 몰래 제압을 해야겠군.' 이 때 마침 마도들은 현기수사의 눈치를 보는지, 아니면 그들의 원래 성격이 그러는지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학운기는 종유석에 몸을 숨기면서 최대한으로 현기수사에게 가까 이 다가갔다. 현기수사는 뭔가 못마땅한 일이 있는 듯 계속 술만 마시고 있었 다. 그가 막 또 한 병의 술호로병을 입에 갖다 대고 한 모금 마시는 순간, 학운기의 무형무음(無形無音)의 십 지(指)가 그의 요혈에 적중했다. "윽!" 그가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신음을 터뜨리며 옆으로 넘어지는 순간 이었다. 와장창－! 호로병이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기관을 설치하고 있던 십여 명의 무황성도들 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누……." "윽!" "억!" 십여 마디의 묵직한 신음과 함께 그들은 모두 짚단이 쓰러지듯 땅 바닥에 고꾸라졌다. '음, 밖으로 소리를 전하는 기관장치를 해 놓았다면 큰일인데… ….' 그는 급히 걱정스런 마음으로 근방을 세밀히 살펴보았다.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휴, 다행이군.'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쓰러져 있는 현기수사 곁으로 다가갔 다. '이 자는 공력이 매우 높으니, 불혼항마대법을 십 성 정도는 펼쳐 야겠군.' 그는 내심 생각을 굴리면서 현기수사의 몇 군데 요혈을 점하면서 불혼항마대법을 펼쳤다. 현기수사의 눈빛이 점점 변해져 갔다. 학운기는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며 그러한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냐?" "신기당주 현기수사 강범이오." "너는 강호의 대학자이신 소운 선생을 알고 있느냐?" "그분은 본인이 존경하는 분이라 소문은 많이 들었소."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냐?" "안휘의 소운장에 계실 것이오." "너는 그분들이 무황성에 납치되어 오신 줄 모르느냐?" "모르오." "으음……!" 학운기는 그 일을 당주라는 작자도 모르자, 내심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요 이삼 일 사이에 사오십 세 정도의 부부가 잡혀 온 적이 있느냐?" "그렇소." "그분들은 어느 곳에 계시냐?" "빈화루(賓華樓)에 계시오." "그 곳의 위치는?" "예." 강범은 빈화루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 곳에는 어떤 기관장치들이 되어 있느냐?" "그 곳에는……." 강범은 그 곳에 설치된 기관들에 대하여 학운기에게 세밀히 설명 을 해 주었다. 학운기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으음, 매우 신묘한 기관장치로구나.' 그는 내친 김에 지하 무황성 내에 설치된 기관들에 대해 모두 물 어 보았다. 강범은 그것들에 대하여 막힘 없이 술술술 대답했다. 학운기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음, 전번에 들어왔을 때 모든 기관들이 작동했더라면 매우 위험 한 순간을 맞을 뻔했구나.'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는 감탄의 눈초리로 강범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네가 설계를 했느냐?" "아니오. 사부님과 함께 했소." "너의 사부는 누구냐?" "본인의 사부님은 이름도 별호도 없는 분이오. 그냥 무명노인(無 名老人)이라고 부르곤 했소." "너의 사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지를 상실한 강범의 눈에도 괴로운 빛이 떠올랐다. "아마도 죽었을 것이오." "왜?"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너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살았느냐?" "그렇소." "어떤 말을?" "처음 사부님과 이 곳에 올 때는 오직 생명의 위협 때문이었소. 하지만 평소에 고강한 무공을 배우고 싶었던 본인은 여자와 무공 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소. 해서 사부님을 배반하고 모든 기묘한 기관장치들을 설치한 것이오. 사부님께서는 고문과 위협 때문에 할 수 없이 말을 듣다가는 아마도 지하 무황성이 모두 완성된 후 에 다른 장인들과 함께……." "음, 그렇다면 지하 무황성 내의 모든 기관장치들을 알고 있는 사 람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되느냐?" "주존님과 부성주님, 그리고 네 분 전주님과 본인뿐이오." "너는 지금도 무황성이 좋으냐?" "아니오, 내가 지금까지 이 곳에 있는 것은 무황성이 좋아서가 아 니라 주존님을 존경해서요. 그분은 너무나도 성스러우신 분이오." "그렇다면 너는 아직도 너의 사부를 죽인 그들을 도와 주겠단 말 이냐?" "본인은 사부님보다 주존님을 더 존경하기 때문에 어… 어쩔 수가 없소." "으음……!" 학운기는 그에게 몇 마디 더 물어 보고는 더 이상 그를 살려 두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음, 이 자의 사부는 용아가 만났던 노인 같은데… 맹 노야가 그 의 거처를 알아 냈는지 모르겠군.' 그는 비록 지하 무황성 내의 기관장치는 모두 알았지만 그 노인이 무황성에 대해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혹 비밀리에 그 기관들을 모두 파괴할 수 있는 비밀 기관을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 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생각을 굴리던 그는 불혼항마대법에 걸려서 이지를 상실하고 있는 강범의 몇 군데 사혈을 눌러 버렸다. "사부를 배반한 자는 마땅히 죽어야지." 그는 강범을 비롯한 시체들을 한 군데에 모아 놓고 독모(毒毛)를 날려서 그들의 시체를 처리해 버렸다. 그런 다음 그는 다른 시체들도 모두 독모로 처리해 버리고 화약을 연못 근처로 모았다. 그것들은 모두 오천 근이 넘었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폭파를 한다면 아마도 그가 서 있는 동굴쯤은 힘없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한 그는 등줄기에 싸늘한 냉기를 느꼈다. "으음……!" 그는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다 연못 속으로 몸을 날리려다가는 문 득 자신이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나의 단순한 분노 때문에 실수를……." 그러나 그것은 이미 모두 끝난 일이었다. 그의 실수, 그것은 그가 동굴에서 무황성도들을 모두 죽여 버린 데 있었다. 만약에 그가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그는 그들이 설치한 기관들 을 역이용했을 것이다. 그것은 기관을 설치해 놓고 안심하고 있을 적들의 허점을 정확히 찌르는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강호의 평화는 좀더 일찍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었 다. '으음,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부모님이나 안전하게 구해야겠군. 한데 빈화루에 계신 분들이 꼭 부모님이어야 할 텐데…….'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마침내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 第 6 章 정사종사(正邪宗師)의 대면(對面) ====================================================== 연못 속은 전번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학운기는 두 갈래로 갈라진 동굴의 입구에서 몸을 멈추었 다. 강범으로부터 그 곳에는 이미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들었 기 때문이었다. '음, 매우 신묘한 수법이구나.' 그는 감탄을 하면서 동굴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후후… 어디 너희들이 놓은 덫에 걸리는 맛을 한 번 보아라.'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면서 몇 군데에다 손을 썼다. 모든 것을 마친 그는 고소를 머금으면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막혀 있던 바위는 옆으로 치워져 있었다. 그는 무엇을 하는지 거의 한 식경 동안을 물 속에서 무슨 일인가 를 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군.' 그는 한참 후에야 서서히 위로 떠올랐다. 이 때 그의 모습은 어느 새 강범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천리지청술을 펼쳐서 연못 밖의 상황을 대략 살폈다. '음, 십여 명 정도 되는군.' 그가 연못 위로 올라가자 여인들의 탄성 소리가 들려 왔다. "어머!" "앗! 신기당주님께서 연못 속엔 무슨 일로……." 연못가에는 십여 명의 소녀들이 노닥거리고 있다가는 그가 갑자기 물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란 듯한 눈치였다. 학운기는 냉막한 얼굴로 그녀들을 한 번 바라보고는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으음, 동굴에다 기관장치를 설치하는 것은 비밀인 모양이군.' 그가 말없이 그냥 스치고 지나가 버리자, 소녀들이 뭐라고 종알대 는 것 같았다. '후후… 강범, 그 작자는 저들에게 인기가 좋았나 보군. 저들도 모두 최혼섭심술을 익힌 것 같은데…….' 그는 의미심장한 고소를 흘리면서 빈화루로 향했다. 도중에 많은 무황성도들을 만났지만 아무도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황성도들은 막 잠에서 깨어나서 활동할 시간인지, 매우 부산하 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빈화루에 당도했을 때 위맹하게 생긴 두 명의 황의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오?" "가 전주님의 명으로 기관장치들을 확인하러 왔다." 황의인들은 그를 한참 쳐다보더니 길을 비켜 주었다. 학운기는 짐짓 거만한 태도로 그들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빈화루는 매우 화려하게 지어진 누각이었다. 주위에는 기화요초들이 만발해 있었고, 새들의 울음소리도 들려 왔다. '음, 이들이 무슨 이유로 부모님들을 이렇게 좋은 곳에…….' 학운기는 내심 의아히 생각하면서 한 걸음씩 천천히 떼어 놓았다. 그는 이 곳이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평안한 곳처럼 보이지만, 사실 은 무서운 기관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어서 한 걸음만 잘못 옮기면 극도의 위험에 처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매우 신중을 기 하고 있었다. 비록 빈화루의 입구에서 빈화루까지의 거리는 가까웠지만 학운기 가 거기까지 가는 시간은 답답할 만큼 오래 걸렸다. 그가 빈화루에 들어서자 두 명의 시비가 그를 막았다. "신기당주님께서 이 곳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음, 한 가지 살펴볼 게 있어서 왔다." 학운기는 말을 하면서 천리지청술을 펼쳐서 주위를 살폈다. '음, 다행히 무공을 익힌 자는 없는 것 같군.' 그는 생각을 굴리면서 자연스럽게 오른손으로 머리칼을 만지는 시 늉을 했다. 찰나 시비들은 혼혈이 짚여서 바닥에 쓰러지려고 했다. 학운기는 그녀들을 재빨리 안아서 한쪽 구석으로 옮겼다. '음, 저 곳인 것 같군.' 그는 무공을 모르는 듯한 두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 온 방문 앞에 섰다. 그의 가슴은 삼 년여 만에 부모님의 얼굴을 뵌다는 생각에 매우 설레이고 있었다. '아, 부모님들께서는 건강하신지…….' 그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는 문 옆의 한 군데를 누르고는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그 곳에도 기관장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구요?" 방 안에서 중년사내의 놀란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아……!" 학운기는 허탈의 탄성을 발하며 멍하니 굳어 버렸다. 방 안에는 사십대의 중년 부부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부모가 아니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학운기가 실망에 찬 목소리로 그들에게 물었다. 중년 부부는 매우 의아한 표정이었다. "나는 근랑운(斤良雲)이라는 사람이고, 이 사람이 나의 내자요. 한데 당신은 누구요?" "그건 나중에 말해 주겠소. 한데 당신들은 잡혀 온 것이오? 아니 면 초청되어 온 것이오?" 근랑운이 긴 한숨을 토해 냈다. "휴, 우리가 뭣 때문에 자진해서 이 숨막히는 지하로 들어오겠 소?" "그렇다면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근랑운은 학운기를 한동안 바라보다가는 그의 눈빛이 매우 맑고 광명정대한 것을 느꼈는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 우리 자식 때문이었소. 그 애는 어렸을 적 에 무공을 익힌다고 집을 나갔는데, 며칠 전에 낯선 사람들이 그 애가 보냈다고 찾아와서는……." "그러면 아드님을 만나셨소?" 근랑운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의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휴, 우리가 속았지요. 우리는 이 곳에 와서야 그들이 우리의 자 식을 유인하기 위해 우리를 데려왔다는 것을 깨달았소." '음, 강호에서 근씨 성의 무림고수는 들어 보지 못했는데… 하여 튼 이분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내심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근랑운이 그의 손을 붙들었다. "대협, 대협께서는 무림인 같은데 제발 우리 부부를 이 곳에서 탈 출시켜 주시오. 우리 부부는 한시도 이 곳에서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소." "으음……!" 학운기는 그의 간절한 부탁에 내심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한다? 한데 부모님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그는 한참을 생각 하면서 내심 분노가 치밀기 시작하였다. '한데 이 작자들은 계속 치사한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는 한동안을 곰곰이 생각하다가는 갑자기 빈화루 내부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음, 강범의 사부가 이들의 일에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틀림 없이 귀빈을 접대하는 이 곳에다 어떤 탈출구를 몰래 만들어 놓았 을 것이다.' 근랑운 부부는 그의 행동을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근 반 시진 동안을 세밀히 살피던 학운기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그렇지. 역시 강범의 사부는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었군.' 그는 살며시 침상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냥 평범한 방바닥이 나타났다. 그는 구석의 갈포 벽지를 살며시 뜯어 낸 다음, 그 곳을 살며시 눌렀다. 순간, 가벼운 기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침상 밑의 바닥이 약간 벌어졌다. 사람 하나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학운기는 품속에서 하나의 야명주를 꺼낸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는 아래로 삼 장쯤 내려가다가 앞으로 뚫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아, 이 곳은 단지 잠시 숨어 있을 곳이었구나.' 난감한 표정으로 골몰히 생각하던 그는 마침내 한 가지 결정을 굳 혔다. 그는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와서는 근랑운 부부를 바라보았다. "소생은 지금 중요한 일이 있어서 두 분과 함께 탈출할 수가 없 소. 하지만 두 분께서 이 곳에서 열흘만 계신다면 반드시 탈출을 시켜 드리겠소." 근랑운은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갑시다." 학운기는 야명주를 비추면서 먼저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이 무슨 걱정스러운 것이 생각났는지 멈칫거렸다. "그렇다면 그 동안 먹을 음식은……." "그런 것은 걱정 마시오. 소생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소." 근랑운 부부는 내심 의아히 생각하면서도 그의 뒤를 따랐다. 학운기는 석실에 도착하자 갑자기 그들의 혼혈을 찍어 버렸다. "미안하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소."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넘어지는 그들을 안아서 조심스럽게 바닥에다 눕혔다. 그는 품속에서 금침이 든 금갑을 꺼냈다. '아마 당신들에게는 이것이 훨씬 편할 것이오.' 그는 내심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 그들의 몸에다 꽂아 가기 시작했 다. 학운기가 지금 펼치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오래 전에 실전(失 傳)된 것으로 알려진 금침귀령대법(金針龜靈大法)이었다. 그 대법을 펼치면 모든 숨과 맥이 끊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다. 최소한 백 일 동안은 그 상태로 살아 있는 것이었다. 학운기는 금침귀령대법을 모두 펼치고는 즉시 밖으로 나왔다. 침상 등을 감쪽같이 원상태로 해 놓은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빈화 루를 빠져 나갔다. '음, 이 작자들이 부모님을 어디에다 감금해 놓았지?' 그렇다고 해서 혼자만 밖으로 빠져 나갈 수는 도저히 없었다. 자신에게 그토록 따뜻하게 해 주었던 수십 명의 소운장 영령들이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았다. '좋다. 그렇다면…….' 그는 한 가지 굳은 결심을 하고는 독고풍의 거처로 발길을 옮겼 다. 땡－ 땡－ 땡－! 급작스런 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 비밀 동굴 속의 일이 발각된 모양이구나.' 그는 내심 긴장을 하면서 발길을 더욱 빨리했다. 그가 독고풍의 거처 입구에 도착했을 때 십여 명의 현의(玄衣) 노 인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신기당주가 여기는 웬일이오? 성의 규칙을 모른단 말이오?" "너무나도 급한 일이라… 빨리 주존님을 뵙게 해 주시오." 우두머리인 듯한 현의노인이 표정을 싸늘히 굳히면서 한 걸음 앞 으로 나섰다. "당신은 정말로 성의 규칙을 무시할 셈이오?" 학운기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음, 이 곳에서 이 자들과 왈가왈부하다가는 정말로 천추의 한을 남기겠구나.' 그는 양 손에다 십이 성의 공력을 집중시켰다. "멸겁－!" 쾅－ 콰르릉－! "으악!" "으악!" 다섯 명의 현의노인이 졸지의 급습에 머리가 박살나 버렸다. "너……." 나머지 현의노인들이 재빨리 반격을 하려 할 때. "참마－!" 학운기는 어느 새 묵룡검을 빼들고 이기어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아악!" "으악!" 처참한 단말마와 함께 나머지 현의노인들도 모두 몸이 두 쪽이 나 버렸다. 이 때 전각 안으로부터 한 줄기 푸른빛이 쏟아져 나왔다. 독고풍이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아수라의 화신처럼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너는 누구냐?" 학운기는 더 이상 변장하고 있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가 진기역용술을 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독고풍이 매 우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네가 또다시… 음, 저번에는 운좋게 살아갔지만 이번에는 본좌가 직접 처리하겠다." "후후… 본인의 생각도 마찬가지요. 오늘 이 자리에서 둘 중의 하 나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할 것이오." "좋다, 아예 만난 김에 너를 처단하겠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천천히 묘한 자세를 취했다. 학운기도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는 최대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음, 이 자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제압 해야만이…….' 주위에는 이미 수많은 무황성도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두 사람의 대결에 감히 끼여들지를 못했다. 그들 중에서 한 쌍의 묘한 감정을 띤 눈동자가 학운기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학운기와 독고풍의 사이에는 마치 공기도 동결시켜 버릴 듯한 싸 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학운기는 비록 적진에서 적들에 둘러싸인 채 적의 영수와 대치하 고 있었지만, 하나도 꿀림이 없었다. 그는 마치 일대종사처럼 늠름한 모습이었다. 학운기와 독고풍은 서로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과 같이 초절정(超絶頂)의 고수들간의 싸움에서는 단 한 치의 실수가 바로 목숨과 연결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 이었다. 그러한 대치가 거의 한 식경 동안이나 흘렀다. "천멸쇄지－!" "마황현신(魔皇現身)－!" 약속이나 한 듯이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폭갈이 터져 나왔다. 찰나 학운기의 몸에서는 구색(九色)의 현란한 빛줄기가 쏟아져 나 왔고, 독고풍의 몸에서는 검고 붉은 마치 지옥의 불길 같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급기야 그 빛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더니 황홀한 광경을 연출해 냈 다. "아……!" "윽!" "억!" 주위에서 지켜보던 무황성도들은 그 극광보다도 황홀한 광경에 넋 을 잃고 있다가는 공력이 약한 십여 명은 이미 입으로 피화살을 토하면서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돌연 황홀한 광경을 연출하던 빛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학운기와 독고풍, 두 사람은 제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이미 걸레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서로간의 무공에 놀랐는지 경악의 빛이 가득 서려 있었다. "훌륭한 무공이오. 하지만 당신의 무공은 너무나도 극악한 것이 오." 학운기는 진정으로 감탄한 듯 독고풍에게 한 마디 던졌다. "너의 무공도 놀라운 것이었다." 독고풍도 진심으로 한 마디 했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는 똑같이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 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무기가 잡혀 있었다. 학운기는 서서히 묵룡검을 검집에서 빼냈다. 독고풍이 가지고 있는 것은 판관필같이 생긴 묘한 병기였다. 학운기는 지금껏 강호에 나와서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너무나도 무서운 한 가지 검법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묵룡검의 검집에 그려져 있는 문양 같기도 하고, 선 같기 도 한 것에서 터득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이기어검강((以氣馭劍 )이었다. 무림 사상 그 어떤 검법의 달인도 감히 상상치 못했던 자연의 섭 리를 완전히 초월한 검법이었다. 각설하고, 대치하고 있는 학운기와 독고풍은 서로 묘한 자세를 취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이번에 펼칠 무공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 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무황성도들도 아까보다 더욱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학운기와 독고풍의 병기에서 서서히 강기( 氣)가 뻗치기 시작했 다. 그것은 거의 사오 장 정도나 뻗쳐 나왔다.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엄청난 신공들이었다. 학운기의 묵룡검에서 뻗쳐 나온 검은 강기와 독고풍의 병기에서 뻗쳐 나온 붉은 강기가 서로 마주치려는 찰나. "우주무허(宇宙無虛)－!" "마황필살(魔皇必殺)－!" 학운기와 독고풍의 입에서 동시에 폭갈이 터져 나왔다. 파르르릉－! 피리리링－! 천상의 신음 같기도 하고, 지옥의 아수라 울음 같기도 한 묘한 음 향이 울려 퍼졌다. "으악!" "아악!" 거의 백여 마디의 처절한 단말마들이 동시에 들려 왔다. 그와 동시에 검고 붉은 강기들은 사라졌다. 처참했다. 학운기와 독고풍은 피차간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무황성도들 중 공력이 약한 백여 명은 이미 핏물 로 변해 있었다. 학운기가 억지로 신형을 고정시키는 순간, 독고풍은 심하게 비틀 거리더니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앗!" 경악에 찬 수십 마디의 탄성이 들리며 십여 명의 인영이 학운기에 게 덮쳐 오려는 찰나. "모두들 제자리에 멈추어라!" 독고풍의 입에서 염라대왕의 목소리보다도 싸늘한 호통이 터졌다. 학운기가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독고풍! 어서 본인의 부모님을 모셔 오너라. 본인은 그래도 네가 마황이지만, 한 가닥의 줏대는 있는 줄 알았다. 한데 네가 그토록 치졸한 방법을 사용하다니……." 독고풍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무슨 헛소리냐? 네가 감히 본좌를 능욕하려 하다니……." "뭐라고? 너는 소운장의 오십여 명 식솔들을 해치고 본인의 부모 님을 납치한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려 하느냐?" 독고풍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갑자기 무황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지재전주! 이리 오너라!" "예!" 나직한 대답과 함께 마심뇌사가 얼굴 가득 두려운 빛을 띠면서 다 가갔다. 독고풍이 그를 살기 띤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의 짓이냐?" "속… 속하는 단지……."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말하도록 하라." 독고풍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살기 띤 눈초리와 어울려 더욱 섬뜩한 분위기를 풍겨 주고 있었다. 마심뇌사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예, 예. 속하는 단지 무후(武后)님의 명을 듣고……." 독고풍은 분노로 내상이 악화됐는지 더욱 많은 피를 흘려 내고 있 었다. "너는 본좌를 한갖 졸장부 효웅으로 만들 셈이었느냐?" "……." "빨리 가서 데려오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예, 예!" 마심뇌사는 허리를 굽신굽신하면서 황급히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독고풍이 그러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는 학운기를 쳐다보았 다. "절대신룡, 비록 수하가 저지른 일이었지만 사과를 하겠다. 그런 뜻으로 오늘 너와 너의 부모를 곱게 보내 주겠다. 지금 겉모습은 본좌가 더욱 처참하게 보이지만, 너도 결코 본좌 못지않은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학운기는 지금 거의 탈진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자신이 지금 조금만 흔들리는 빛을 보인다면 자신 뿐만 아니라 부모님까지도 영원히 이승을 하직한다는 것을 너무나 도 잘 알고 있기에 억지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말없이 우뚝 서서 독고풍을 노려보기만 했다. 독고풍이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본좌를 죽이려 하면 아마도 너는 본좌의 수하들에 의하여 더욱 빠른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학운기는 언뜻 그에게서 어떤 위풍 같은 것을 느꼈다. 이 때의 그의 모습은 사마도(邪魔道)의 대종사답게 위엄이 있었 다. "좋소. 본인은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겠소." "잘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계속 이렇게 아웅다웅할 필 요가 없이 단 한 번의 정사간(正邪間) 대결투로 결말을 내도록 하 자! 너의 생각은 어떠냐?" "본인도 바라는 바였다." "그렇다면 다음 달 보름이 어떻겠느냐? 장소는 구령산(九嶺山) 귀 령봉(鬼靈峯)으로 하고." "좋소." 이 때 마심뇌사가 중년부부를 데리고 왔다. 학운기의 부모님이었다. 학운기는 그들을 보고는 말문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이 곳은 적들이 호시탐탐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용담호혈 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발견했는지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달려왔 다. "기아야! 기야가 맞지?" 그녀는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예, 어머님." 학진숭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기아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아버님, 그리고 어머님. 두 분을 뵙고도 예를 올리지 못하는 불 효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곳은 용담호혈보다도 더욱 무서운 곳입니다. 어서 이 곳을 빠져 나가야 합니다." 그는 부모에게 전음을 보내면서 독고풍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럼 그 때 만나도록 합시다." 독고풍이 핏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독고풍의 명령이 있었는지라 학운기가 지나가자 마황성도들 이 길을 비켜 주었다. 한 명의 황의중년인이 그와 그의 부모를 안내했다. 지하를 벗어나자 지상 무황성의 커다란 대전 안이었다. 무황성도들의 제지는 없었다. 학운기는 밖에 나오자 아버지와 어머니를 양쪽에 끼고는 즉시 몸 을 날렸다. 그는 지금 최후로 남은 진력을 억지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비록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고, 두 사람을 양쪽에 끼웠지만 그 의 몸은 여전히 빛살과도 같이 빨랐다. 그의 정신은 점점 아득해져 오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목숨까지 달린 일인지라 도저히 멈출 수는 없었 다. '으음, 아무래도 백여 리 이상은 못 갈 것 같구나.' 그는 몸을 날리면서도 계속 안전하게 운기행공을 취할 장소를 찾 고 있었다. 학진숭과 그의 부인은 아들이 이토록 천신처럼 하늘을 훨훨 날으 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무황성에서 약 칠팔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학운기가 갑자기 몸을 멈추었다. 매우 은밀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부모님을 내려놓고는 동굴 입구에다 진식을 설치했다. 동굴에서는 짐승들의 노린내가 풍기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깨끗했 다. 학운기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는 부모님의 얼굴을 괴로운 표정으 로 바라보았다. "아버님, 어머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소자가 잠시 후에 모든 것을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온 부인이 그의 핏기 없고 괴로운 표정을 보고는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기아야, 어디가 아프느냐? 응?" "어머님, 너무… 우엑!" 그는 말을 하다가는 지금까지 참고 참아 왔던 선혈을 왈칵 토해 냈다. 학진숭과 온 부인이 그보다 더욱 새하얀 얼굴로 그의 곁으로 다가 왔다. "기아야! 기아야!" 학운기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머님, 아버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소자는 곧 회복될 것입니 다. 하니 괴롭더라도 잠시만 앉아 계십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품속에서 금침이 든 금갑과 약병을 하나 꺼냈 다. 그가 약병 뚜껑을 열자 상쾌한 향기가 동굴을 진동시켰다. 그는 즉시 두 개의 환약을 꺼내 먹고는 금침을 꺼내어 자신의 몇 군데 요혈에다 찔러 갔다. 그런 다음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그는 지금 한 가지 모험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황성도들이 뒤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침대법으로 세맥 (細脈) 속에 잠재해 있는 약간의 진력들을 격발시키려는 것이었 다. 그렇게 한다면 비록 짧은 시간에 원래의 공력을 회복할 수는 있지 만,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를 이루었던 몸이 이 때만은 효력 이 없어졌다. 해서 외부에서 약간의 충격만 주어도 그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가 이러한 모험을 하는 것은 절대로 독고풍을 못 믿어서가 아니 었다. 독고풍은 비록 피를 좋아하는 대마황(大魔皇)이었지만 사마도(邪 魔道)의 종사답게 신의를 지킬 줄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황성에서 독고풍 모르게 행해지는 일들도 상당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각설하고, 운기행공을 시작한 학운기의 몸은 급격스런 변화를 보 이고 있었다. 파리하던 얼굴이 점차 붉어지더니 이내 경련을 일으켰다. 학진숭 부부가 깜짝 놀라서 그의 곁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몸에서 구색(九色)의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눈이 부실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학진숭 부부는 아들의 몸에서 계속 상상치 못할 일들이 벌어지자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학운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구색의 빛은 얼마쯤 지나자 곧 담 담한 서기(瑞氣)로 변해 갔다. 본래의 공력을 되찾은 것이다. 담담한 서기도 사라지면서 그가 눈을 번쩍 떴다. 그제서야 학진숭 부부는 제정신을 차리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왔 다. "기아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예, 어머님. 이것이 바로 무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담담한 미소를 띄우고 말을 하면서 몸에 박힌 금침을 빼냈 다. "아버님, 어머님, 우선 불효자식의 절부터 받으십시오." 온 부인이 급히 그를 만류했다. "아니다. 절은 무슨… 더구나 맨 바닥에서……." "아닙니다, 어머님. 그 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만도 죄스러운 일인 데, 어찌 절마저 올리지 않겠습니까?" 학진숭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여보.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기아가 저토록 장성해서 하 는 절은 처음이잖소." 온 부인이 곱게 눈을 흘기면서 그의 옆에 섰다. 학운기는 그들을 한 번 바라보고는 대례를 올렸다. 온 부인이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기아야, 어서 일어나거라. 어디 너의 얼굴이나 한 번 자세히 살 펴보자." 그녀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학운기도 초췌해진 부모의 얼굴을 보고는 내심 코끝이 찡해짐을 느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소자 때문에 이토록 고초를 겪으시다니… …." 학진숭이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그들의 한 손을 꼬옥 잡았다. "아니다, 기아야. 개방의 제자라는 사람을 통해서 너의 소식은 계 속 듣고 있었다. 나와 네 어머니는 그토록 훌륭한 일을 하는 너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단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온 부인이 그윽한 정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데 기아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예, 어머님." 그는 그 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학진숭 부부가 매우 놀라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기아야, 옥 노인이 그 곳에 있었단 말이냐?" "예. 어머님께서는 그들 부녀를 만나 보지 못하셨습니까?" "전혀……." 학진숭이 끼여들었다. "혜령이도 그 곳에 있단 말이냐?" "예, 바로 그 곳의 성주인 주존이란 자의 부인이었습니다. 한데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납치된 것은 그녀의 농간 같습니다." "아, 그 애가 그럴 줄이야? 그토록 착하고 어여쁜 소녀였던 그 애 가 그토록 타락을 했다니… 놀라운 일이구나." 학운기의 눈에서는 섬뜩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온부인이 그러한 그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기아야, 네 눈빛이……." "아참!" 학운기는 자신의 실태에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살기를 거두어들였 다. 온 부인이 그의 한 손을 꼬옥 잡았다. "기아야, 그렇다고 해서 절대 그 애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어미 도 없이 자라다가 곧 남에게 납치되었던 그 애가 자신의 아버지를 잊지 않은 것만도 고마운 일이 아니냐?" "예, 어머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범의 얼굴을 봐서도 그녀 는 해치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아버님, 어머님, 그럼 소자가 묵고 있는 곳으로 가시죠." 학운기는 학진숭 부부를 양쪽 옆에 끼웠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참으십시오." "우리 걱정은 말아라." "그럼……." 학운기는 동굴을 빠져 나와서는 즉시 남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몸을 날리면서도 무황성도가 뒤쫓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내 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기어풍술을 펼치는 그의 몸은 마치 붕새처럼 날으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몸은 거의 천여 장마다 한 번씩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짚을 따름이었다. 학진숭 부부는 조금 전보다도 더욱 빨라진 아들의 몸을 보고는 놀 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의 생애에서 하루 동안에 이토록 놀라 보기는 아마도 이 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늘에서는 밝고도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이고 있었지만 아무도 학 운기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설사 발견했다 손치더라도 한 마리 붕새겠거니 했을 것이다. 그들이 성룡방의 지하 궁전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가 약간 지난 무 렵이었다. 그 곳에는 이미 무황의 분타를 치러 갔던 우내사존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와 있었다. 그리고 승혜빈도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와 있었다. 학운기와 그의 부모가 왔다는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대전으로 모여들었다. 학운기는 부모에게 모든 사람들을 일일이 소개시켜 주었다. 한참 소란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학운기와 학진숭 부부, 그리고 제 갈소연을 비롯한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승혜빈은 웬일인지 참석치 않았다. 학진숭 부부는 만면에 가득 미소를 띄우고는 장차 며느리가 될 다 섯 명의 여인들로 일일이 대례를 받았다. 온 부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기아야, 언제 이토록 어여쁜 소녀들을… 더구나 한두 명도 아닌 다섯 명씩이나 사귀었느냐?" "……." 학운기는 단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학진숭이 그러한 그를 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녀석도, 그렇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녀석이 어떻게 이 많은 소녀들을 사귀었느냐? 한데, 너는 이 많은 소녀들을 모두 거 느릴 자신이 있느냐?" 학운기는 그의 말에 얼굴을 더욱 새빨갛게 물들였다. 봉운옥을 제외한 여인들도 모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수그려 버 렸다. 학진숭이 흡족한 미소를 띄우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허허… 녀석들도 참." 그는 한참 동안을 고개를 끄덕이며 다섯 명의 여인들을 찬찬히 뜯 어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엄숙한 얼굴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기아야, 너는 이 소녀들을 취하는 데에만 급급해서는 아니 되느 니라. 물론 옛날부터 영웅은 삼처사첩(三妻四妾)을 거느린다는 말 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인격과 도량을 완전히 닦은 후의 이야기니라. 네 나이 아직 어리니, 잘 느낄지 모르겠지만 절 대로 이 애들 눈에서 슬픈 눈물을 흘러 나오게 해서는 안 될 것이 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소자, 아버님의 금옥양언(金玉良言)을 각골명심(刻骨銘心)하 겠습니다." "그래, 나도 너를 믿는다." 온 부인은 여인들과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특히 봉운옥의 순진무구한 눈동자와 봉운옥 자매의 애절한 사연을 듣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봉운옥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 다. 한동안 얘기를 나눈 후, 학진숭 부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너희들끼리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도록 하여라. 우리는 이만 물러가서 쉬어야겠다." "예, 아버님. 한데……." 학운기는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매우 망설였으나, 제대로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괜찮으니 어서 말해 보도록 하여라." "예. 또 한 명 제 처가 될 사람이 이 곳에 있는데 그녀도 만나 봄 이……." 학진숭 부부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너는 도대체 몇 명의 아내를 얻어야 만족하겠느냐? 장부 가 여름 날에 소낙비 오듯이 아무 곳에다 정을 흘리고 다니면 되 느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하지만 그녀는 지금……." "허허… 이런 꽃 같은 다섯 명의 며느리도 과분한데, 또 한 명이 더 있다니… 그래, 그녀는 어디에 있느냐?" "예, 지금 몸이 편찮아서 병석에 누워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한 번 만나 보기로 하자." "예." 학운기는 제갈소연 등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전음을 보내고는 승혜 빈의 방으로 부모를 안내하였다. 그는 그 곳까지 가는 도중 부모에게 그녀와의 모든 관계를 솔직하 게 말하였다. "아버님, 어머님, 그녀는 지금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보시기에도 섬뜩할 정도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습니다." 학진숭 부부는 매우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느냐?" "예……." 학운기는 그녀의 집안이 혈겁을 당하여 멸망하게 된 이야기를 간 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쯧쯧쯧… 그러한 일이 그 애에게서 발생하다니……." 그의 말을 들은 학진숭 부부는 매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학운기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그녀는 아까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 고 또 그녀는 지금 심신이 무척이나 피로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 래서 말씀인데, 소자가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다." "허허… 그래, 무엇이냐?" "예,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그녀를 만나실 때 그녀의 모습이 아무 리 흉칙하더라도 언짢은 표정은 짓지 말아 주시라는 것입니다." 학진숭이 흐뭇한 미소를 띄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허허… 그래, 너는 우리가 그 정도의 일도 모를까 봐서 다짐을 두는 것이냐?" 학운기가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닙니다, 소자의 괜한 기우였나 봅니다." "허허… 괜찮다. 한데 너는 그 애의 얼굴이 그토록 험악하다는 데 평생을 함께 할 자신이 있느냐?" 학운기의 얼굴에 진의가 흘러넘쳤다. "소자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시던 아버님의 말씀 을 아직도 가슴 속에 깊이 새겨 두고 있습니다." 학진숭이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거려 주었다. "허허… 네가 정말로 믿음직스럽게 자랐구나. 그래, 그래야지." 학운기는 한참 동안 말을 끊었다가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님, 어머님… 아마도 그녀는 아버님과 어머님께 매우 기쁜 소식을 전해 줄 것입니다." 그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기쁜 소식이라니?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예, 그녀는 지금 소자의 애를 갖고 있습니다." "뭐라고?" 학진숭이 매우 놀라운 외침을 발했다. 온 부인도 매우 놀란 듯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기아야, 그 말이 정말이냐?" 그녀의 목소리는 놀람과 기쁨, 그리고 어떤 기대감으로 가늘게 떨 리고 있었다. "예, 어머님." "아, 네가 벌써 아버지가 되다니……." 그녀는 학운기를 한동안 바라보다가는 감격한 눈으로 학진숭을 바 라보았다. "여보……." 학진숭이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래, 나도 매우 기쁘오. 저 애가 벌써 애 아버지가 되다니… …." 그도 매우 격동에 찬 음성이었다. "여보, 우리 어서 가 보도록 합시다." "그럽시다." 온 부인이 학운기를 재촉했다. "자, 기아야. 어서 가 보자꾸나." "예, 어머님." 그들의 발걸음은 매우 빨라졌다. 승혜빈은 학운기 등이 머물고 있는 곳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 고 있었다. ====================================================== 第 7 章 사랑스런 여인들 ====================================================== 학운기는 그녀의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빈매, 안에 있소?" 안에서 승혜빈의 반가운, 그러나 어쩐지 힘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기랑, 어서 들어오세요." 학운기와 그의 부모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매우 놀란 듯한 표 정이었다. 그녀도 그의 부모가 이 곳에 온 줄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매우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학진숭 부부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상상 외로 그녀의 모습이 흉악하게 일그러진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란 듯하였으나, 이내 그 표정을 감추었다. 온 부인이 급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얘야, 괜찮으니 그냥 누워 있거라." 그녀는 몇 번 거절하다가는 온 부인이 억지로 눕히는 바람에 침상 에 도로 누웠다. "아버님, 어머님… 죄, 죄송해요. 처음부터 이런 모습으로 뵙게 되다니……."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하나 가득 고여 있었다. 온 부인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주었 다. "얘야, 우리는 괜찮으니 부담 갖지 말고 편안히 누워서 얘기하자. 더구나 너는 홀몸이 아니잖느냐?" "어머님……." 그녀는 온 부인의 따뜻한 말에 마치 친어머니를 만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학진숭이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얘야, 네가 그런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생활하 다니… 매우 대견스럽구나." "아버님……." "아니다. 홀몸도 아닌 네 몸이 매우 말이 아닌 것 같구나.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 너는 듣기만 하여라." 그는 여러 가지 고사(古事)를 들려 주면서 그녀가 용기를 잃지 않 도록 위로를 해 주었다. "얘야, 그러니 너도 꿋꿋하게 살아야 한다. 내 말, 알겠느냐?" "예, 아버님." 온 부인도 그녀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해 주었다. 승혜빈은 그들 부부를 오늘 처음 만나는 데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 다. 마치 친부모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들은 한동안 따뜻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한참 후 학진숭이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기아야, 내가 듣기로는 너의 의술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고 있 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아닙니다, 아버님. 소자는 단지 약간의 의술만을……." "아니다. 겸손할 것 없다. 한데 너는 저 애의 얼굴을 원상태로 돌 릴 수 있겠느냐?" "예, 아버님. 가능한 일입니다." "음, 저 애가 그것 때문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하루 빨리 고쳐 주도록 하여라." "아버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이 때 온 부인과 승혜빈은 마치 모녀간처럼 여러 가지 얘기를 나 누고 있었다. 온 부인는 가끔 흐믓한 미소를 띄우고는 그녀의 아랫배를 만져 보 았다. 그렇게 얼마쯤 지나고 학진숭 부부가 일어섰다. "우리들은 그만 가 보겠으니, 너희들은 할 얘기를 마저 하도록 하 여라." "아버님, 소자가 처소까지 모시겠습니다." "아니다. 우리는 괜찮으니 너는 저 애와 더 얘기를 나누도록 하여 라." "예, 아버님." 학진숭이 아쉬운 눈빛을 가지고 승혜빈을 바라보는 온 부인을 재 촉했다. "자, 여보. 저 애들도 할 얘기가 많을 테니 우리는 그만 가도록 합시다." "예." 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승혜빈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럼 얘야, 아무 생각 말고 편히 쉬도록 하여라." "어머님, 정말 죄송해요." "아니다. 너무 예를 차릴 것은 없다. 그럼 내일 또 얘기하도록 하 자." "예, 어머님." 학진숭 부부는 시비의 뒤를 따라서 거처로 돌아갔다. 학운기는 단 둘이 남게 되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서는 그녀의 손 을 꼬옥 잡았다. "빈매, 정말 잘 왔소. 이제 이 곳에서는 아무 생각도 말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도록 하시오." 그녀의 눈에는 감격과 뜨거운 정(精)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기랑, 고마워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살며시 그의 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빈매……." 학운기가 그녀의 가녀린 몸을 꼬옥 껴안았다. "기랑, 사랑해요." "빈매……." 학운기가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입을 맞추었다. "흐읍!" 승혜빈은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토록 자존심 강하던 그녀의 성격이 이제는 얼굴 모습이 변한 것 만큼이나 많이 변한 것이다. 그들의 마주친 뜨거운 입술에서는 수없이 많은 말없는 정담이 오 고 가고 있었다. 그들이 한창 사랑의 도취에 빠져 있을 때, 밖에서 여인들의 소란 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학운기와 승혜빈은 황급히 입술을 떼면서 얼굴을 붉혔다. 이 때 밖에서 제갈소연의 짓궂은 음성이 들려 왔다. "오빠, 소매들인데 들어가도 돼요?" 학운기가 방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들 오시오." 밖에서 다섯 명의 여인들이 모두 와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한 번 바라보고는 안으 로 들어왔다. 제갈소연이 짓궂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 빈매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얼굴을 붉히고 계시죠?" 학운기는 얼굴을 더욱 새빨갛게 붉혔다. "연매, 일은 무슨 일을……." 제갈소연이 그의 순진스런 태도가 우스웠던지 까르르 교소(嬌笑) 를 터뜨렸다. "호호… 오빠를 놀리려고 한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더듬거리지 않아도 돼요." 봉운옥 등은 승혜빈과 이미 알고 있는 듯 매우 정답게 얘기를 나 누고 있었다. 특히 봉운옥은 승혜빈의 부른 배가 매우 신기한 듯 계속 만져 보 고 있었다. 그녀가 매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승혜빈을 바라보았다. "언니, 어떡하면 소매도 언니처럼 애기를 갖죠?" 승혜빈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 그것은 기랑에게 물어 봐요." "오빠에게요?" 승혜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운옥이 그러한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학운기 곁으로 다가갔 다. "오빠, 소매도 빈 언니처럼 애를 갖고 싶어요." 학운기는 모두 자신과 관계가 있는 여인들과 있는 자리였지만 얼 굴이 붉어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옥매, 그것은……." "우엑!" 학운기의 팔을 붙잡고 있던 봉운옥이 갑자기 헛구역질을 했다. "옥매!" 학운기 등이 모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갈소연 등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부러움이 잔뜩 떠올라 있었다. 학운기도 그녀의 헛구역질을 보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매우 설레이고 있었다. 그는 급히 그녀의 완맥을 잡고는 맥을 살펴보았다. 봉란선도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와서는 그녀의 한 손을 붙잡고는 진맥을 하고 있었다. 순간 학운기와 봉란선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흘렀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봉란선이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옥아, 축하한다. 너도… 너도 드디어 오빠의 애기를 가졌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격동에 찬 흥분으로 인해서 가볍게 떨리고 있었 다. 봉운옥이 매우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니, 소매가 오빠의 애기를 갖다니요?" "틀림없다, 정 못 믿겠으면 오빠에게 들어 보렴." "오빠, 그 말이 정말이에요?" 학운기도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흥분으로 약간 들떠 있다가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틀림없는 사실이오." "아, 오빠!" 그녀가 돌연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녀도 자기 자신이 매우 대견스러운 모양이었다. 제갈소연 등이 그녀 곁으로 다가와서는 축하의 말을 했다. "옥매, 축하한다." "고마워요, 언니." 제갈소연 등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축하의 말을 하고 있었지만, 얼 굴에는 약간의 질투가 섞인 부러움의 표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사실 그녀들은 승혜빈이 임신을 해 가지고 이 곳으로 찾아왔을 때 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지만, 절대로 질투심 같은 것은 솟아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녀들에게 한 가닥의 위 안을 주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봉운옥은 달랐다. 그녀는 얼굴도 그 누구 못지않게 아름답지만, 학운기와는 제일 허 물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그러한 그녀가 이제 그의 애기까지 갖고 보니, 그녀가 그의 사랑 을 독차지할 것만 같았다. 제갈소연 등의 질투가 어린 표정에는 한 줄기 불안감도 어리는 것 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학운기가 그녀들에게 그러한 것은 걱정 말라는 듯이 가볍게 미소 를 지어 보였다. 그가 짐짓 짓궂은 표정으로 제갈소연을 바라보았다. "자, 연매도 이리 와 보시오. 혹시 모르니 한 번 진맥을 해 봅시 다." "몰라요." 그녀는 짐짓 그를 흘겨보는 듯하였으나 못 이기는 척 그에게 손을 맡겼다. 그녀의 손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학운기의 기쁨에 찬 한 마디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 다. 학운기가 진맥을 하는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마치 몇 년이 흐른 듯한 느낌이었다. 학운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 왔다. "연매는 아직 아닌 것 같은데… 하하… 연매, 그렇다고 너무 실망 할 것까지는 없소. 앞으로 나를 귀찮게 하면 그 일은 자연히 해결 될 테니……." 그녀는 그의 짓궂은 농담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학운기는 다른 여인들도 진맥을 해 보았지만 아무런 이상을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여섯 명의 꽃 같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는 매우 평안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아직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 남아 있는 그였지만, 이 때만은 모든 고심 같은 것을 잊을 수가 있었다. 여섯 명의 여인들은 마치 친자매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어서 그의 밑가슴에 있던 약간의 우려를 깨끗이 씻어 주었다. 그녀들 중에서 황보설만이 그와 부부지연(夫婦之緣)을 맺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그들의 대화에서 가끔 진한 농담이 흘러 나올 때가 제일 부끄러웠다. 그녀가 계속 그러한 태도를 보이자, 봉운옥이 매우 의아한 듯이 바라보았다. "설 언니, 언니는 왜 그렇게 자주 얼굴을 붉히죠?" 황보설의 얼굴이 다시 빨개지는 순간. 제갈소연이 매우 짓궂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호… 옥매, 그것은 설매가 아직 오빠의 사랑을 다 받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황보설은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고개를 푹 수그려 버렸 다. "오빠, 왜 설 언니에게만 사랑을 빼놓고 주었지요?" 학운기도 그녀의 말에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호호……!" 제갈소연 등의 짓궂은 교소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언니는……." 황보설은 홍시보다도 더욱 새빨간 얼굴로 제갈소연 등을 흘겨보면 서 때려 주는 시늉을 하였다. 제갈소연이 그녀의 손을 피하면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오빠, 설매 좀 말려 주세요. 아마 설매는 오빠의 말 이외 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거예요." "호호……!" 황보설은 제갈소연과 동방림 등의 계속된 놀림에 두 손으로 얼굴 을 감싸쥐고 앉아 버렸다. "흐흐흑……!" 그녀는 마침내 무어가 그리 슬픈지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갈소연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 곁 으로 다가갔다. "설매, 미안해.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러나 그녀는 한참을 달래어도 울음을 그치기는커녕 더욱 서럽게 울었다. "흐흐흑……!" 학운기는 그러한 것을 보고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동 방림과 봉란선 자매 등도 달래어 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갈소연 등이 도움을 청하는 눈초리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학운기는 내심 주저하다가는 그녀가 서럽게 우는지라 살며시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설매, 설매가 계속 울면 저들이 다음에 또 놀릴 테니까… 그만 그치도록 하시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를 하면서 그녀의 등을 다독거려 주 는 순간. "오빠." 그녀가 갑자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로서는 너무나도 돌연적이고 의외의 행동이었다. 제갈소연과 동방림은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지라, 매우 놀라 운 표정을 지었다. 학운기의 믿음직한 품에 안긴 그녀는 어느 새 울음을 그치고 있었 다. 제갈소연이 막 그녀에게 뭐라고 하려는데 그녀가 제갈소연 등을 바라보면서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혀를 불쑥 내밀었다. "조것이 이제 보니까 오빠 품에 안기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구나." 제갈소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녀를 때리려고 하자, 그녀는 학운기의 품에 더욱 꼭 파고들었다. "오빠, 연 언니가 또 때리려고 해요." "하하하……!" "호호호……!" 유쾌한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학운기가 황보설을 감싸면서 짐짓 제갈소연을 나무라는 듯하였다. "하하… 연매, 이제 그만해 두구려." "흥, 오빠는 이제 설매 편만 드는군요?" "하하… 내가 어찌 설매 편만 들겠소? 다같이 사랑스러운 당신들 인데 말이오." 그는 말을 하면서 제갈소연을 붙잡아 꼭 껴안아 버렸다. "호호……!" 다시 한 차례의 유쾌한 교소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들 일곱 명의 정다운 연인들은 한참을 더 그렇게 즐겁게 보내다 가는 각기 자신들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 날 밤 학운기가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 리가 들려 왔다. "오빠, 소매예요." "아니, 설매가 밤 늦게 이 곳은 어떻게……." 학운기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새색시처럼 곱게 단장한 황보설이 수줍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설매, 어서 들어오시오." "오빠, 고마워요." "무슨 그런 말을……." 그들은 방 안에 들어와서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들 사이에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사실 황보설로서는 이 곳까지 찾아오는 데에 너무나도 커다란 용 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낮에 제갈소연 등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왠지 자신만이 소 외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녀는 오직 자신만이 그와 부 부지연을 맺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굳센 마음을 먹고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그의 침실까지 찾 아온 것이었다. 한때는 자신 내부의 갈등 때문에 그에게 북풍한설(北風寒雪)보다 도 차갑게 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를 놓치고는 단 한시도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림제일궁주의 외동딸로서 그 누구보다도 귀엽게 자라 온 그녀인 지라, 욕심 또한 그 누구보다도 많았다. 자신이 학운기 같은 절세기재를 독차지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남에게 뒤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나직하게 말문을 열었다. "오빠, 소매가 이렇게 찾아와서 추한 여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설매, 그게 무슨 말이오?" "오빠, 고마워요." 그녀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어깨에다 살며시 머리를 기 댔다. "설매……." 학운기가 그녀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어깨를 살며시 감싸쥐었다. 황보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들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마주쳤다. "흐음!" "흐흡!" 고혹적인 비음이 가볍게 방 안에 메아리쳤다. 황보설은 학운기에게 자신의 혀를 빨리면서 마치 구름을 타고 허 공을 날으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학운기의 손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팔에 그녀의 탄력 있고 가느다란 허리가 꼭 쥐어졌다. "흐으음……!" 고혹적인 비음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서 그들 두 사람의 몸도 뜨거 워져 갔다. 색단의 효력을 제어할 수 있는 심법(心法)을 창안했다 하더라도 아직 완전하게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학운기의 몸은 더욱 빨 리 달아올랐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서는 옛날과 같이 걷잡을 수 없는 현상은 일어 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손은 어느 새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흐윽!" 그가 그녀의 물컹한 육봉을 감싸쥐었을 때. 그녀의 입에서 한 차례 짧은 비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손길이 닿은 그녀의 육봉은 점점 탄탄하게 굳어져 갔고, 그 위에 달린 조그만 꼭지는 발끈히 성을 내고 있었다. 가슴에 이른 그의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곧 웃으면 빠진다는 곳을 지나서 부드러운 초원 지대에 이르렀다. "으윽!" "으업!" 그의 손에 몽실하면서도 까칠한 감촉이 전해지는 순간, 두 마디의 숨막히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막 더욱 깊숙한 곳으로 손을 전진시키려는 순간. "안……." 황보설이 처녀의 본능에 의해서 세차게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하나 그것은 오히려 그의 육정에 불을 붙이는 결과밖에 되지 않았 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가장 민감한 곳에 이르는 순간. "흐억!"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보설은 이제 그의 집요한 애무에 혼까지 달아날 지경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허물은 한 껍질씩 벗겨지기 시작하였고, 이 내 그들의 몸은 침상 위로 쓰러졌다. "으헉!" "으음……!" 이제 그들은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조물주가 오직 인간 에게만 준 특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악!" 어느 순간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이 들리면서 신음과 교성, 그리고 거친 숨소리와 숨 넘어가는 듯한 비명이 더욱 세차게 방 안을 울 렸다. 방 안은 거센 춘풍(春風)에 휩싸였고, 침상마저도 괴로운 신음 소 리를 내고 있었다. 황보설은 처음에는 도저히 참기 힘든 듯한 고통에 몸을 비틀다가 는, 이제 그 무슨 절정의 것을 갈구하면서 뱀처럼 그의 몸을 휘감 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으억!" "헉!" 헛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몸이 거센 진동을 일으키더니 춘풍은 서서히 잦아져 갔다. 그리고 다시 얼마쯤 흐르자 곤하게 자는 듯한 고른 숨소리가 들려 왔다. 다음 날 아침 학운기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황보설은 그의 품에 꼭 안겨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가 옷을 입으려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으음, 오빠! 벌써 일어나세요?" 그녀가 허전한 감을 느꼈는지 부시시 눈을 떴다. "설매, 피로할 텐데 더 자도록 하시오." "아니예요. 소매도 그만… 윽!"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하체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설매, 많이 아프오?" 황보설이 그에게 곱게 눈을 흘렸다. "몰라요." "하하……!" 그가 그녀의 행동이 귀엽다는 듯이 그녀의 가녀린 몸을 꼬옥 껴안 았다. "설매……." "오빠……." 그들의 입술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시 마주 쳤다. 뜨겁고도 긴 포옹이었다. "설매, 사랑해." "오빠, 소매는 이제 오빠가 곁에 안 계시면 한시도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설매……." "오빠……." 그들이 한창 뜨거운 체온을 교환하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때 밖에서 제갈소연의 짓궂은 음성이 들려 왔다. "오빠, 어서 일어나서 식사하세요. 그리고 설매도……." 그녀는 이미 그와 황보설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환히 알고 있는 듯하였다. "원, 긴 밤에는 무엇하고 이제서야 야단들이람?" 그녀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와 황보설은 목덜미까지 붉 게 물들이며 얼른 일어나서 황급히 옷을 주워 입었다. 그들이 옷을 다 입고 밖으로 나갔을 때. 제갈소연이 황보설의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짓궂게 바라보다가 는 고개를 획 하니 학운기에게로 돌렸다. "오빠, 다음부터는 좀 살살 대하세요. 설매가 아파서 걸음도 제대 로 못 걷잖아요?" 순간 학운기는 매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고, 황보설은 울상을 지 으면서 그녀를 때리려고 하였다. "언니……." "호호……!" 그러나 제갈소연은 짓궂은 교소를 터뜨리면서 얼른 앞으로 달려가 버렸다. 학운기도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다가는 황보설과 함께 그 녀의 뒤를 따라갔다. 대전 안. 학운기와 우내사존, 그리고 황보웅과 제갈휘, 동방군, 무당 장문 인과 청허자, 화산 장문인 탈명쾌검, 공동 장문인 원광자, 개방 장문인 환영개 등이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토론하고 있었다. 소림의 무아신승과 장문인 백혜 대사의 모습은 아직 몸이 완쾌되 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학운기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하니, 우리 정파 측에서도 다음 달 보름까지는 모든 준비를 완료 해야 할 것이오." 새제갈이 그를 바라보았다. "주상, 그렇다면 우리 측에서도 군웅대회를 열어서 좀더 많은 정 의지사들을 모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학운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본인도 그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소?" 그것에 대하여 별다른 이의는 없었다. 그들은 곧 군웅대회를 개최할 자세한 계획을 숙의하였다. 학운기가 다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럼 군웅대회는 열흘 후에 열도록 합시다." 그는 환영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환 장문인께서도 강호 구석구석까지 소문을 퍼뜨리는 일 을 맡아 주시오." "예." 다음, 그는 우내사존을 바라보았다. "사존께서는 짧은 시간이지만 현재 이 곳에 모여 있는 군웅들의 무공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것을 맡아 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군웅대회는 무림제일궁의 옛 자리에서 열도록 하겠소. 그 것이 군웅들에게 무황성에 대한 분개심을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오." 군웅대회의 준비는 화산 장문인 탈명쾌검과 무당 장문인 청허자가 맡기로 하였다. 학운기는 완전한 계획을 수립한 다음, 다시 좌중을 둘러보았다. "본인은 그 동안 한 가지 무공을 창안해야 되겠소. 본인이 독고풍 과 맞서 본 결과, 둘의 무공은 동패구상(同敗俱傷)할 정도였소. 그럼 여러분들의 수고를 부탁하오." 환영개를 비롯한 사파(四派)의 장문인들은 그가 그토록 짧은 시간 에 절세의 신공을 창안한다는 것을 도저히 믿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내사존 등은 이미 그의 절세적인 천성을 잘 알고 있는지 라, 그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학운기는 숙의를 끝낸 다음 곧 밀실로 들어가서 신공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가 아무리 천고제일의 기재일지라도 그토록 짧은 시간에 절세의 신공을 창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부터 한 가지 무공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오고 있 던 터라 자신이 있었다. 밀실에 들어간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좌선한 채로 있었다. 그 동안 그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오직 생각에만 열중하였 다. 하나 곧 떠오를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그가 생각하 고 있는 무공은 머릿속에서 뱅뱅 돌기만 하였다. 그렇게 구 일이 지났을 때, 무표정한 얼굴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 던 그의 얼굴에 격동과 환희의 미소가 피어 올랐다. "됐다." 그의 입에서 자신에 찬 짧은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이제 이것을 완벽하게 익히기만 하면 된다.' 드디어 그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절세신공 을 창안해 낸 것이다. 그러는 그도 감히 자만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독고풍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독고풍이 그들의 대결을 다음 달 보름으로 미룬 것은 어쩌면 그가 터득치 못했던 고금절후의 절세마공을 그 때가 되면 터득할 자신 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만약에 그러한 자신이 없었다면 절세마황인 그가 그러한 약속을 하고 학운기를 순순히 보내 줄 리가 만무했을 것이다. 그것은 고양이가 쥐를 놀리는 심정이랄까? 하지만 그가 쥐라고 생각했던 자가 어느 새 호랑이로 변해 있을지 도 모를 일이었다. 각설하고, 학운기가 밀실에서 나왔을 때 우내사존 등이 밖에 서 있다가는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학운기의 자신에 찬 표정을 보고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 었다. "주상, 축하합니다." "고맙소." 저마다 그에게 축하의 인사를 하였다. 학운기가 새제갈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 별일은 없었소?" "예. 무림도 겉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이 곳에도 별 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으음, 군웅대회의 준비는 어떻게 되었소?"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황보 궁주 등은 이미 그 곳으로 떠났고, 지금 이 곳에는 노복들과 제갈 방주만이 있습니다." "수고하셨소. 그럼 이 곳은 제갈 방주께서 수고하도록 하고, 우리 도 이만 무창으로 갑시다." 주걸신개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상께서는 그 동안 식사도 못하셨는데……." "하하… 아직은 버틸 만하오. 하니 거기에 가서 들도록 합시다." "예." 학운기는 제갈휘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하고는 지하 궁전을 빠 져 나갔다. 밖은 황혼 무렵이었다. 서녘 하늘은 마치 피에 물들은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학운기는 그러한 황혼의 성스럽기조차 한 광경을 황홀한 듯이 바 라보았다. '아, 제발 저 황혼이 피로 물들지 않고 그냥 저대로 아름다운 모 습을 유지해야 할 텐데…….' 새제갈이 미동도 없이 황혼을 바라보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 다. "주상, 그만 떠나시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이윽고 그들 다섯 명의 인영은 무창을 향하여 빛살과도 같은 속도 로 몸을 날렸다. 무림제일궁. 불타 버리고 난 잿더미와 혈혼만이 군데군데 모여 있는 무림제일 궁에 수많은 무림인들이 모여들었다. 폐허와도 같던 무림제일궁의 넓은 터에는 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대 위에는 차일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대 아래에는 거의 오천여 명의 군웅들로 발 디딜 틈도 없 이 꽉 차 있었다. 대 위의 차일 속에는 학운기를 비롯하여 우내사존 등 정파의 영수 (領袖)급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이 때 시간은 사시(巳時)에 접어들고 있었다. 학운기가 황보웅을 향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웅이 그와 우내사존 등에게 가볍게 예를 취해 보이고는 대 앞 으로 나섰다. 군웅들이 그를 알아봤는지 웅성거렸다. 황보웅이 군웅들에게 가볍게 예를 취하면서 그들을 한 번 둘러보 았다. "본인은 무림제일궁주 황보웅이라 하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서 있 는 이 자리는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웅장한 건물들이 즐비하 게 늘어서 있던 무림제일궁의 자리요. 본인은 평생 동안 무림에 해가 되는 일은 한 가지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고 있소. 한데 지 금 본인의 무림제일궁은 잿더미만 쌓여 있는 한갓 폐허에 지나지 않소. 그 누가 무림에 조그만 해도 끼친 적이 없는 본인의 무림제 일궁을 이토록 폐허로 만들었습니까?" 그의 절규하는 듯한 연설을 듣는 군웅들은 숙연해져서 바늘 떨어 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침묵이 흘렀다. 황보웅은 그러한 군웅들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계속 말을 이어 갔 다. "무림제일궁을 이토록 폐허로 만든 악적(惡敵)들은 바로 무황성이 라는 사마도(邪魔徒)의 집단입니다." 순간 군웅들이 분노의 함성을 토해 냈다. "와아… 그들을 모두 멸종시키자!" "와아… 당장 사마도들을 무림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자!"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분노의 함성은 한참 동안을 계속 메아리 쳤다. 황보웅은 그러한 군웅들을 바라보다가는 공력을 실은 목소리로 커 다랗게 소리쳤다. "무림동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이렇게 흥분만 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고정하시고 본인의 말을 계속 들어 보기 바랍니다." 그의 목소리는 한동안 폐허의 무림제일궁 내를 웅웅거리게 하였 다. 분노로 들끓던 군웅들이 조용해졌다. 황보웅이 잠잠해진 군웅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무황성에 의하여 혈겁을 당한 방파는 비단 무림제일궁 뿐만이 아 닙니다. 그것은 무림의 태두(泰斗)인 소림사를 비롯한 칠파일방 (七派一幇)을 위시하여 강서의 성룡방, 그리고 수많은 군소 문파 들이 똑같은 멸겁(滅劫)의 혈난(血亂)을 당하였습니다." 황보웅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는 계속 이어 갔다. "그리고 그 다음은 바로 아직도 협의(俠義)를 행하고 있는 여러분 들의 차례입니다." 군웅들이 약간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더니, 그것은 이내 그치고 팽 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황보웅이 그러한 침묵을 깨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바로 그 혈겁을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고자 오늘 이 군웅 대회를 연 것입니다." 황보웅이 학운기와 우내사존 등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군웅들 을 둘러보았다. "해서 무림의 대종사(大宗師) 격인 절대신룡과 우내사존 노선배님 께서는 오는 보름 날, 무황성과 일전을 겨루어 모든 혈겁을 종식 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황성의 수뇌와 이미 합의 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번의 그의 말 속에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군웅들은 한동안을 계속 술렁거렸다. 그것은 바로 무황성과 단 한 번의 정사 대결을 통하여 모든 혈겁 을 종식시킨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군웅들이 그것보다 더욱 놀란 사실은, 채 약관도 되지 않 은 절대신룡을 황보웅 같은 무림고인이 대종사라 칭한 점이었다. 군웅들은 처음에 한 젊은이가 우내사존보다 더욱 상석에 앉아 있 자, 매우 의아히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가 바로 절대신룡이고, 황보웅이 그를 대종사라 칭하자 서로 자세히 얼굴이라도 보려고 고개를 삐쭉삐쭉 내밀었다. 새제갈이 공손한 자세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주상, 이제는 주상께서 나설 때입니다." "알았소." 학운기는 간단히 대답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앞으로 나서자 군웅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학운기가 여유 있는 미소를 띄우며 군웅들에게 가볍게 포권의 예 를 취해 보였다. "본인이 절대신룡 학운기요." 그의 태도는 일대종사의 위엄을 능가하는 면모를 보였고, 목소리 는 비록 나직하였지만 군웅들의 귀에는 한 자도 빠뜨림이 없이 똑 똑히 들렸다. "조금 전 황보 궁주께서 말한 대로 무황성의 극악한 행동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아마 이대로 몇 달만 더 지난다 면 강호에서 공공연히 협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 아도 거의 없을 겁니다. 해서 이번 보름 날에 무림 사상 전무한 정사의 대결을 벌이기로 하였습니다. 무림동도 여러분! 여러분의 피 한 방울이 수백, 아니 수천 수만 명의 선량한 생명들을 구한다 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번 대결에 참여를 해 주시오." "와아… 나도 가겠다." "나도… 와아……!" 모든 군웅들이 흔쾌히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섰다. 학운기가 손을 흔들어 그들을 제지한 다음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여러분 모두가 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막대한 희 생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해서 본인은 우내사존 등과 합의를 해 서 강호의 일류급 고수들만 선발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황보웅이 선발 방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곧 이어서 선발이 시작되었다. 학운기는 우내사존 등과 함께 앉아서 그러한 것을 지켜보았다. 사실 그가 오늘 그 동안 다른 사람에게 밝히지 않던 자신의 신분 을 밝힌 것은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확실한 구심점(求心點)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물론 우내사존에게 대신 시켜도 무난하였지만, 그것보다는 우내사 존이 주상으로 모시고 있는 자신이 구심점이 된다면 더욱 커다란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신비(神秘)감과 무림인들의 호기심을 이용하려는 그의 생각은 그 대로 적중되었다. 지금 군웅들의 마음 속에서는 그를 방금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 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웅들의 선발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선발의 진행을 도와 주던 무림오룡(武林五龍) 중 흑룡 염원도가 급히 대 위로 올라왔다. "주상께 아룁니다. 천산(天山)에서 왔다는 매우 나이가 들어 보이 는 노인이 꼭 주상을 뵙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리 모셔 오시오." "예." 염원도는 아래로 내려가더니 매우 꾀죄죄하게 생긴, 나이를 추측 할 수조차도 없는 한 명의 노인을 데리고 왔다. 노인을 바라보는 우내사존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학운기의 귀에 새제갈의 다급한 전음이 들려 왔다. "주상, 노복들과 동배인 천산섬검(天山閃劍) 개송운(介松韻)입니 다." 학운기도 그 꾀죄죄한 노인이 천하제일의 쾌검수(快劍手)인 천산 섬검이라고 하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산섬검은 자신이 괴팍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대변이라도 하 려는 듯이 우내사존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학운기가 그에게 공손한 포권의 예를 취하였다. "개 노선배님, 어서 오십시오." 천산섬검이 무표정한 얼굴로 학운기를 쭉 훑어보았다. "소협이 절대신룡 학운기인가?" "그렇습니다." "자네의 무공이 우내사존 등을 하인으로 거느릴 만큼 높은가?" 학운기는 머뭇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 어떻게 한다? 이 많은 군웅들 앞에서 사존의 체면을 깎을 수 도 없고…….' 그가 순간적으로 고심하고 있을 때 새제갈의 다급한 전음이 그의 귀를 울렸다. "주상, 어서 그렇다고 대답하십시오." 학운기는 천산섬검의 성격을 완전히 알고 있지 못한지라, 새제갈 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가 여유 있는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산섬검을 바 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찰나 한 줄기의 번개보다도 빠른 섬광(閃光)이 번쩍였다. 그 섬광은 어찌나 순식간에 일어났는지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대 위에 앉아 있는 최절정 고수들밖에 없었다. 이 때 천산섬검이 갑자기 학운기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주상, 노복도 주상의 휘하로 받아 주십시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황보웅 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내사존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실 학운기와 천산섬검은 단지 섬광이 번쩍 하는 순간에 일 초씩 을 교환했던 것이다. 학운기는 천산섬검의 상상을 초월한 쾌검법(快劍法)에 내심 놀라 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천산섬검은 그 순간에 혼이 달아나 버릴 정도로 놀랐었다. 그는 분명히 검으로 학운기의 목을 베었다고 느꼈었다. 그리고 학운기는 제자리에서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 였다. 그런데 자신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까무라칠 정도로 놀랐던 것이 다. 아직까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자신의 쾌검이 한갓 약관도 채 못 된 소년에게 실패를 하자, 그는 너무나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 다. 그러나 그는 무림의 앞날도 생각할 줄 아는 기인(奇人)이었다. 우내사존 등이 학운기를 괜히 주상으로 모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학운기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소맷자락을 가볍게 휘둘렀다. 순간 무릎을 꿇고 있던 천산섬검의 몸이 꼿꼿하게 세워졌다. 천산섬검은 몸을 굽히려고 하였으나 그것은 자신의 의지뿐이었다. 그는 학운기에게 두 번째로 놀랐다. 그가 놀라운 눈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을 때, 학운기도 고혹적인 미소를 띄우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소,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그것은 무황성이 멸망 할 때까지요." "주상, 감사합니다." 학운기는 천하에 괴팍한 자로 소문난 천산섬검의 영입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우내사존 등도 그와 똑같은 마음이었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천하제일의 쾌검수를 동지로 받아들였는데,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학운기는 천산섬검에게도 자리를 권하고 계속 군웅들의 선발을 지 켜보았다. ====================================================== 第 8 章 천고제일신공(千古第一神功) ====================================================== 군웅들의 선발이 모두 끝났을 때는 황혼 무렵이었다. 선발된 인원은 모두 천오백여 명이었다. 학운기는 그들을 한 번 살펴보고는 우내사존 등을 바라보았다. "음, 저 정도면 충분할 것 같소. 지금 남창에 삼천여 명이 있으니 까 사천오백여 명 정도면 이제는 수적으로도 무황성에 비해서 결 코 꿀리지는 않을 것이오." 새제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주상. 한데 저들은 어떻게 처리를……." 학운기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황보웅을 바라보았다. "우선 나머지 사람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황보웅은 대답을 하고 나서 끝까지 무황성도들과 결전을 벌이겠다 는 선발에서 탈락된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학운기는 그것을 바라보다가는 혜불선승에게 전음을 보냈다. "선승께선 남창에 돌아가거든, 선발된 인원 중에 혹시 무황성의 첩자가 없나 철저히 살피시오. 꼭 불혼항마대법을 사용해서……." "알겠습니다." 학운기는 새제갈에게 전음을 보냈다. "천 노야께서는 선발된 인원을 남창으로 데리고 가서 결전의 날에 대비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한데 주상께선 어디 들르실 곳이 계십니까?" "음, 나는 그 동안 창안한 무공을 수련해야 되겠소. 성룡방의 지 하 궁전에는 마땅한 장소가 없으니,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익힐 생각이오. 결전 이틀 전까지는 반드시 남창에 도착할 테니, 걱정 마시오." "알겠습니다. 주상께서는 주상의 몸이 주상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는 사실을 항상 생각하시면서 옥체 보존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소." 학운기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각기 전음으로 당부의 말을 하였다. 모든 것을 마친 그는 선발되지 않은 사람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떠 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신들의 마음만은 가슴 깊이 새겨 두리라. 당신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무림의 평화는 빨리 올 것 이오. 단지 여러분의 애매한 희생을 막고자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니, 이해해 주기 바라겠소.' 그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새제갈이 옆으로 다가왔다. "주상, 모두 끝났습니다." "으음, 그럼 출발하도록 하시오." "예." 우내사존과 군웅들 중에서 선발된 사람들도 출발을 하였다. 학운기는 그들이 모두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는 어디로 갈 것인가 에 대하여 생각을 하였다. '음, 아무래도 무산(巫山)이 가장 적격이겠구나. 깊은 계곡도 많 고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니…….' 마침내 그도 무산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무창에서 무산까지의 거리는 천여 리가 약간 넘었다. 무산은 사천(四川)의 호북(湖北) 접경 지대에 있는 명산(名山)이 었다. 그 곳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 울창한 원시림과 끝이 없는 계곡, 절벽이 사방에 널려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무산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단지 이름난 곳만 구경하고 갈 뿐, 산중 깊숙이까지는 들어가 볼 엄두조차도 내지 못하는 산 이었다. 학운기가 무산에 당도했을 때는 막 삼경이 넘어서는 무렵이었다. 그는 우선 출출함을 느껴 그의 출현에 의해서 놀라 달아나는 산비 둘기 한 마리를 잡았다. 그런 다음 그는 시냇가로 가서 진흙을 개어 산비둘기의 몸에다 발 랐다. 그것을 모닥불을 피운 다음 굽기 시작하였다. 얼마쯤 지나자 고소한 냄새가 풍겨 왔다. 그는 거의 익었음을 깨닫고는 불 속에서 그것을 꺼내었다. 불에 달궈진 진흙은 이미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그 진흙을 천천히 벗겨 내기 시작하였다. 진흙으로 털과 껍질이 묻어 나와서 고기는 매우 깨끗하게 구워져 있었다. 그는 군침을 삼키면서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가 이러한 방법으로 산(山)고기를 구워 먹는 것을 배운 것은 주 걸신개로부터였다. 그는 이것이 의외로 맛있자 주걸신개에게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왔 다. 식사를 마친 다음 며칠 동안 묵을 동굴 같은 곳을 찾아다녔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숲이 매우 우거져 있을 뿐만 아니라, 깊은 계곡이어서 매우 캄캄하였다. 하늘의 별들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한참을 헤매어서야 조그만 동굴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 곳은 원래 짐승의 잠자리인지 진한 노린내가 풍겨 왔다. '할 수 없군. 이 밤중에 적당한 곳을 못 찾아 한데서 자는 것보다 는 낫겠지.' 그는 내심 실소를 머금으면서 동굴 안을 깨끗하게 치운 다음, 짐 승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밖에다 진식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자신이 창안한 무공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골몰한 생각에서 깨어났을 때는 동굴 밖이 밝아진 후였다. 그는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푼 다음 산과일들을 따서 배를 채웠다. 인적이 없는 산 속의 아침은 매우 상쾌한 기분을 풍겨 주었다. 지저귀는 새 소리가 한층 평화로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그가 묵검룡을 꺼내 들고는 묘한 자세를 취하였다. "얏－!" 그의 입에서 우렁찬 용틀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휘리리릭－! 묘한 음향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숲 속이 완전히 구색(九色)의 현 란한 빛으로 뒤덮였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현란한 빛들도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가 서 있는 숲 속의 주위를 보라! 완전한 평지였다. 그의 주위 오십여 장 반경은 마치 수많은 장인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서야 완성할 만한 거울처럼 미끄러운 평지가 되어 있었다. 처음 빽빽이 들어찼던 수백 그루의 아름드리 나무들과 집채만한 바위들은 어디로 갔는지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창안해서 처음 펼치는 무공이 이 정도인데, 만약 십이 성 숙달이 되면 얼마나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학운기는 한동안 굳은 듯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음, 이것을 완성하자면 피나는 고련이 있어야 되겠구나. 그럼 이 번에는 다음 초식을 한 번 펼쳐 볼까?' 한동안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그는 천천히 백여 장 정도 떨어진 절 벽 곁으로 갔다. '음, 알맞게도 청강석(靑剛石)으로 이루어졌구나.'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금 전과는 또 다른 묘한 기수식을 취했다. 이번에는 손에 묵룡검이 쥐어져 있지 않았다. "얏－!" 다시 한 차례의 용소(龍嘯)가 터졌다. 순간 그의 장심에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빛줄기가 절벽을 향 해 쏘아져 갔다. 그 빛은 백색 같기도 하고 흑색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홍색, 청색같이 보였다. 빛줄기는 여지없이 절벽에 적중되었으나 아무런 이상도 발생하지 는 않았다. 학운기는 그러한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것도 역시 많은 고련이 필요하겠구나.' 그가 내심 생각을 굴리면서 몸을 돌렸을 때. 아까 빛이 부딪쳤던 절벽에서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절벽, 그 곳에는 때마침 불어 온 바람에 의해서 먼지가 흩날리며 두 개의 뚜렷한 장인(掌印)이 나타났다. 한데 놀라운 것은 그것이 장인이 아니라 장인이 절벽 속으로 찍힌 깊이였다. 그것은 언뜻 보아도 일 장은 충분히 되어 보였다. 돌(石)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청강석에다, 그것도 약 십여 장 밖 에서 일 장을 날려 일 장 깊이로 장인을 만들어 놓았다면 아마도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운기는 그것에 만족을 못하다니……. 도대체 그의 신공이 완성되면 얼마나 개세적(蓋世的)인 위력을 보 일 것인가? 하여튼 학운기는 그 곳에서 산짐승을 잡아먹고 산과일을 따 먹으 면서 신공 수련에 피눈물 나는 고련을 하였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두 가지 신공을 연속해서 펼치고 난 학운기가 돌연 앙천대소(仰天 大笑)를 터뜨렸다. "와하하… 드디어 성공이다, 성공." 그가 며칠 동안 묵었던 계곡은 이미 완전한 평지로 변해 버렸다. 나무 뿐만이 아니라 바위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고, 바닥은 마치 거울처럼 반듯하게 깎여져 있었다. 그리고 청강석으로 된 절벽에는 수없이 많은 장인들이 찍혀 있었 다. 한데 놀라운 것은 그 중에서 가장 깊이 찍힌 것은 거의 삼 장 가 까이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학운기는 이 절세의 두 가지 신공을 연마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어 그 동안 완전하게 완성치 못했던 색단의 효력을 제어할 수 있는 심법을 완성하였다. 한동안을 격동으로 웃던 그는 단지 며칠 동안이었지만 정이 들었 던 계곡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음, 이제 천 노야와 약속한 날도 다 되었으니… 이 곳을 떠나야 겠구나.' 이 때는 삼경 무렵이었고, 하늘에서는 서서히 배가 불러 오는 달 이 교교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학운기는 계곡을 한 번 훑어보고 나서 즉시 몸을 날렸다. 그가 막 계곡에서 십여 리쯤 벗어났을 때, 어디선가 구슬픈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그 피리 소리가 보통이 아님을 깨닫고는 그쪽으로 눈길을 돌 렸다. 한 높다란 봉우리 위에 한 인영이 앉아 있는 것이 동공(瞳孔)에 들어왔다. 그는 그 피리 소리가 너무나로 구슬프고 또한 음률에 공력까지 은 은히 실려 있는 것을 깨닫고는 잔뜩 호기심이 부풀어올랐다. 그의 몸은 이미 그 산봉우리를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피리를 불고 있는 사람은 이십이삼 세 정도의 준미하게 생긴 청년 이었다. 청년은 무슨 슬픈 일이 있는 듯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 다. 학운기는 그 피리 소리에 도취되어서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피리 소리가 멈추고 매우 놀란 듯한 외침이 들려 왔다. "앗! 형장은 뉘시오?" 학운기는 부드럽게 미소를 띄우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소생은 학운기라 하오. 한데 형장께서는 무슨 상심된 일이 있기 에 그토록 구슬픈 음률을 연주하고 있었소?" 청년이 학운기의 말에 매우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 형장께서 바로 절대신룡이라 불리우는 학운기 학 대협이셨구 려. 소생은 근위욱(斤偉旭)이라 하오." 학운기는 그 때서야 근위욱을 자세히 살피다가는 내심 깜짝 놀라 고 말았다. '아, 태양신맥(太陽神脈)! 이러한 곳에서 기재를 만나다니…….' 그가 매우 놀란 듯한 눈초리로 근위욱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근위욱이 계속 말을 이었다. "소생은 그 동안 학 대협을 꼭 한 번 뵙고 싶었소이다. 그런데 이 런 곳에서 우연찮게 만나게 되니, 매우 기쁜 마음 금할 길이 없 소." 학운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소생을 보고 싶었다 함은?" "학 대협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는 소문이 자자해서 소생의 옥적 (玉笛)과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었소이다." "음률과 말이오?" "그렇소." 학운기도 내심 호기심이 당겼다. "좋소." 그들은 서로를 한 번 바라본 다음, 십 장의 거리를 둔 채 마주 보 고 앉았다. 근위욱이 심각한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학 대협, 먼저 소생의 현천삼음(玄天三音) 중 환음(幻音)을 들어 보시오." 학운기가 공력을 끌어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욱이 그러한 그를 바라보면서 옥적을 천천히 입에다 대었다. 순간, 옥적에서는 천상의 선음 같은 음률이 흘러 나왔다. 삘리리……! 학운기는 처음 무심코 음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눈앞으로 온갖 환상이 나타나는 것을 느꼈다. 옥적의 음률은 더욱더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하였다. "옥지……." 학운기는 애옥지의 환상을 보고 그녀를 안으려고 하였다. 순간 그는 애옥지가 수많은 마두들에게 겁탈을 당하는 장면을 목 격하고는 눈에서 시뻘건 광염의 살기를 쏟아 냈다. 이 때. 위이잉－! 그의 품속에 들었던 묵룡검이 용틀임을 발했다. '앗!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 거지?' 학운기는 흠칫 놀라면서 찰나적으로 제정신을 차렸다. '음, 내가 너무 방심을 했구나.'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서히 심법을 운행하여 옥적 소리에 대 항해 갔다. 그의 표정은 마치 입적한 고승처럼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근위욱은 처음 학운기가 너무도 쉽게 자신의 음률 속으로 휘말려 드는 것을 보고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원상태로 돌아오자 내심 당황함을 금치 못했 다. 그는 즉시 공력을 십이 성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제 학운기의 표정에서는 일말의 동요도 나타나지 않았 다. "제이곡(第二曲)－ 살(殺)－!" 근위욱의 입에서 날카로운 폭갈이 터지면서 옥적의 소리는 갑자기 변하였다. 마치 날카로운 비수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하였다. 학운기도 심맥이 격탕됨을 느끼며 공력을 일 성 더 끌어올렸다. 근위욱이 제일곡 환(幻)을 펼쳤을 때 주위로 수백 마리의 동물들 이 모여들었었다. 한데 제이곡 살(殺)이 펼쳐지자, 그것들은 갑자기 입에서 피화살 을 토하면서 퍽퍽 쓰러져 갔다. 근위욱의 이마에는 점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운기의 표정은 처음 그대로였다. 근위욱의 입에서 다시 폭갈이 터져 나왔다. "제삼곡(第三曲)－ 멸(滅)－!" 옥적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주위 반경 오십 장 내에서는 놀라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초목(草木)과 바위들이 서서히 가루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운기의 표정에서도 순간적으로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가는 사라 졌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계속 입적한 고승처럼 평안한 모습을 유지하 고 있었다. 옥적을 불고 있는 근위욱의 입에서 한 줄기 붉은 선혈이 흘러 나 오기 시작하였다. 옥적을 연주하는 그의 두 손이 마치 사시나무 떨리 듯이 떨리고 있었다. 털썩－!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근위욱이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주위의 반경 오십 장 내는 이미 처절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학운기는 몸을 일으키면서 그러한 것을 살펴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 음률로써 사람을 상하게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 록 놀라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근위욱의 곁으로 다가갔다. '음, 내력을 너무 급작스럽고 과다하게 끌어올려 내상을 입었구 나.' 그는 즉시 품속에서 옥병을 꺼내 두 개의 환약을 근위욱의 입에다 넣어 주었다. 그는 근위욱의 요혈을 주무르면서 체내로 진기를 불어넣어 주었 다. 근위욱의 얼굴은 완전히 백짓장처럼 파리해 있었는데, 그의 치료 로 인하여 점차 원상태로 돌아왔다. 잠시 후 근위욱은 일어나서 혼자 운기요상을 하였다. 학운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음, 무슨 기연을 만난 모양이구나. 내공이 거의 백 년 수위는 되 는 것 같은데…….' 그가 한창 골몰히 생각하고 있을 때 근위욱의 감격에 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학 대협, 소생을 용서해 주시오." 그는 학운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소생이 조그만 실력을 믿고 학 대협 같은 고인과 감히 겨루려고 했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학운기가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근형, 왜 이러시는 거요? 어서 일어나시오." "아닙니다, 학 대협. 소인은 학 대협께서 무림의 대종사이시고, 또한 고금제일의 고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조그만 마음 속에 있는 자존심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꼭 학 대협을 만나서 겨루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는 소인의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학 대협, 제발 소인을 학 대협의 휘하로 받아들여서 무황성을 무 찌르는 데 일익을 담당하도록 해 주십시오." 학운기도 그가 자신을 도와 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던 터라 쾌히 승낙을 하였다. "좋소. 근형이 본인을 도와 준다면 아마도 무황성을 무찌르는 데 너무나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오." "고맙습니다, 주상." 그들은 간단히 군신의 예를 치루었다. 학운기가 매우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데 무슨 상심된 일이 있었기에 이 밤중에 산중에서 옥적을 불 고 있었소?" 근위욱의 얼굴이 다시 슬픈 표정으로 변하였다.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인은 어렸을 때부터 집을 나가 선사로 부터 무공을 익혔습니다. 한데 소인이 무공을 모두 익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반겨 주실 줄만 알았던 부모님께서 이미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분들이 돌아가셨단 말이오?" "아닙니다. 소인의 부모는 무황성의 악도를에게 납치를 당하셨습 니다." "그분들도 무림인이었소?" 근위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분들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분들이셨습니다. 한데 그들이 소 인이 무공을 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소인을 유인하기 위하여 납치해 간 것이었습니다." 학운기는 내심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왜 무황성으로 가지 않고 이 곳에서 옥적만 불고 있었 소?" 근위욱의 얼굴이 매우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소인은 선사로부터 무공을 익힐 때 절대로 악을 위해서는 사용하 지 말라는 말씀을 누누이 들어 왔습니다. 한데 어찌 무림에 출도 하자마자 그러한 악도의 무리에 끼여들겠습니까? 소인의 부모님께 서도 비록 악도의 무리에 의해 돌아가시더라도 소인의 행동을 결 코 나무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을 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굳은 각오의 결의가 피어 있었다. 학운기가 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홀륭하오, 훌륭해." 학운기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히 행하려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을 근위욱이 해냈다는 것을 알고는 감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부모와 자식간의 정은 천신도 끊을 수가 없는 것인데, 근위욱은 무림 정의를 위해서 눈물을 머금었던 것이다. 학운기는 지금 그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운기의 뇌리로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내심 기대감을 갖고는 근위욱을 바라보았다. "혹시 아버님의 성함이 근랑운이 아니오?" 근위욱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에? 주상께서 그걸 어떻게……." "됐소. 이제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마시오." 학운기는 자신이 지하 무황성에 잠입해서 그들 부부를 만난 일에 대하여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근위욱은 그의 얘기를 듣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주상,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자, 그것에 대해서는 그만 얘기하시오. 근형이 자꾸 그러면 나의 낯이 뜨거워지지 않소. 하하……!" 학운기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한데, 그들이 왜 근형의 부모를 납치하면서까지 근형을 끌어들이 려고 했는지 알고 있으시오?" "소인도 그것이 매우 궁금했습니다. 소인이 강호로 출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또 무공을 펼친 적도 없는데……." "으음……!" 학운기는 그것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때 그의 뇌리로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가 근위욱을 바라보았다. "혹시 근형의 옥적이 강시( 屍)들에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소?" 근위욱이 학운기의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그렇습니다. 소인은 선사로부터 소인이 배운 음률이 강시나 동물 에게 특이한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근위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에게 무황성에 있는 흑살시마 궁유명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그 작자들이……." 근위욱도 그의 얘기를 듣고는 다시 분개했던 마음이 솟아나는지 살기를 줄기줄기 쏟아 냈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그만 갑시다." "예." 그들은 몸을 날려서 무산을 떠났다. 학운기와 근위욱이 성룡방의 지하 궁전에 당도했을 때 우내사존 등은 이미 결전의 준비를 모두 갖추고 초조한 표정으로 학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천대왕과 황보룡, 그리고 진금룡도 무공을 모두 익히고 출관해 있었다. 그가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주상을 뵈옵니다." 특히 제천대왕과 진금룡은 그에게 대례를 올렸다. "주인님을 뵈옵니다." "용아가 사부님을 뵈옵니다." "허허… 그래, 어서들 일어나거라. 너희들의 표정을 보니 아주 만 족할 만한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새제갈이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끼여들었다. "그렇습니다, 주상. 저들은 이제 노복들도 당해 내기가 힘들 정도 입니다." "수고하셨소. 다 천 노야 등이 심혈을 기울인 덕분이오." "아닙니다. 노복들은 단지 지켜만 보았을 뿐입니다. 저들의 성취 는 주상의 적절한 가르침과 저들의 뛰어난 재질 덕분입니다." "하하… 천 노야는 너무 겸손하시는구려. 자, 그럼 모레 있을 결 전에 대하여 토의하도록 합시다." "예." 대천은 다시 긴장 때문인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굳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학운기가 새제갈을 바라보았다. "지금 구령산 귀령봉의 상황은 어떻소?" "예, 노복이 사흘 전에 무림오룡과 섬전신개 등 이십여 명을 먼저 보내 혹시 무황성에서 무슨 농간을 부리는가를 살펴보라고 했으나 아직까지는 평온하다는 보고입니다." "음……!" 학운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혜불선승을 바라보았다. "선승께서는 군웅대회에서 선발한 사람들을 모두 살펴보았소?" "예, 노복이 불혼항마대법을 펼쳐서 알아본 결과 열두 명의 첩자 를 색출해 냈습니다." "음, 그들은 누가 보낸 자들이었소." "예, 아마도 마심뇌사가 단독으로 보낸 것 같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하였소?" "모두 처리했습니다." 학운기는 이어서 주걸신개와 천기자를 바라보았다. "두 분은 진(陣)을 숙달시켜 놓았소?" "예. 하지만 나중에 선발된 천오백 명은 아직 완전하지가 못합니 다." "그렇다면 그들은 외곽에 배치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참, 여러분들께 이 사람을 소개시키는 것을 잊었군요." 그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근위욱을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 었다. 우내사존 등은 근위욱이 흑살시마의 강시들을 처치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한 가지 커다란 시름을 덜어 놓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모레 있을 결전에 대한 자세한 계획을 짜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한창 숙의에 열중일 때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성룡방의 무인 한 명이 급한 표정으로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제갈휘가 냉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이토록 다급하게 서두르는 것이냐?" "예, 애옥지라고 하는데… 이미 가능성이……." 학운기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애옥지라고요? 지금 어디에 있소?" "예, 입구에 있습니다." 학운기가 그의 말을 듣고는 급히 통로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옥지가 여길 어떻게 알고…….' 그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입구에 도착했을 때. 피투성이가 된 한 왜소한 인영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주위에는 성룡방의 무인들이 몇 명 서 있었다. 학운기가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옥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다. 학운기가 싸늘한 표정으로 성룡방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이 이렇게 만들었소?" "아닙니다. 그녀는 이 곳에 오자마자 쓰러졌습니다." "으음……!" 그는 급히 그녀의 상세를 세밀히 살피기 시작하였다. "아……!" 그의 입에서 절망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애옥지의 상세는 이미 대라신선도 어쩔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있 었던 것이다. 그녀의 상세로 이 곳까지 온 것만도 기적이었다. "옥지,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오?" "……." 애옥지는 한 마디의 대답도 없었다. 학운기는 급히 품속에서 금침을 꺼내어 그녀의 몸에다 꽂기 시작 하였다. 그는 금침을 시술하면서 제발 목숨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수없이 빌고 또 빌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서 급히 자신의 처소로 몸을 날렸다. 그녀를 침상에 눕히고 추궁과혈을 사용하였지만 그녀는 전혀 깨어 날 기미가 없었다. 학운기는 다시 그녀의 세맥(細脈)에까지도 금침을 시술한 다음, 그녀의 체내로 진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한 시진쯤 지났을까? 애옥지의 몸이 약간씩 꿈틀거리더니 무겁게 눈을 떴다. "기랑… 기랑……." 그녀는 깨어나더니 학운기의 이름만을 불렀다. "옥지, 나 여기 있소. 제발 정신 차리시오." "기랑……." 학운기가 다시 그녀의 몇 군데 혈도를 치자, 그녀의 얼굴이 빨간 혈색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것은 죽어 가는 자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회광반조(廻光 返照)의 현상에 불과했다. "기랑……." 애옥지가 학운기를 알아보았는지 그를 부르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옥지, 그대로 누워 있으시오." "기랑, 드디어 만났군요. 소첩은 다신 기랑을 만나지 못할 줄 알 았는데……." "옥지……." 학운기가 그녀의 빰에다 자신의 얼굴을 비벼 댔다. "기랑, 시간이 없어요. 소첩은 곧 죽을 것이에요. 이미 소첩의 심 맥은 산산이 부서졌으니……." "아니오, 옥지. 옥지는 살아날 수 있소. 내가 있잖소?" 애옥지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기랑, 소첩은 기랑의 품에서 죽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요." "옥지, 자꾸 죽는다는 얘기는 하지 마시오. 옥지는 살아날 수 있 단 말이오." "아니예요, 기랑. 기랑께서 소첩에게 이토록 대해 주신 것만으로 도 소첩은 너무나 행복해요. 그리고 소첩이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 나 하겠어요. 기랑, 들어 주시겠죠?" 학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옥지, 말하시오. 내 뭐든지 다 들어 주겠소." 애옥지는 벌써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마와요, 기랑." "옥지, 어서 말하시오." "예, 기랑. 모레 구령산의 귀령봉엔 가지 마세요. 그 곳에는 무서 운……." 애옥지는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급작스럽게 온몸이 싸늘해져 버렸 다. "옥지!" 학운기가 급히 그녀의 체내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기… 랑, 애쓰지… 마세요. 귀령봉에는 무… 무서운… 진식(陣 式)이… 설치……." 애옥지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옥지… 옥지……." 학운기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몸을 흔들었다. 애절한 부르짖음이었다. 하지만 애옥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옥지… 옥지! 당신이 나를 위해서 그토록 위험한 모험을 하다니 … 옥지, 당신은 바보요. 바보란 말이오! 흐흐흑……!" 학운기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가는 오열을 터뜨려 버 렸다. "옥지! 흐흐흑……!" 첫사랑의 여인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던 여인이었다. 너무나도 기구한 운명과 처절한 과거를 지닌 여인이기도 했다. 채 꽃봉오리를 터뜨리기도 전에 아름답다는 한 가지 죄 때문에 능 욕을 당해야만 했던 여인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진정으로 사랑할 만한 남자를 만난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를 떳떳이 사랑할 수 없는 몸이었다. "흐흐흑… 옥지! 바보요, 바보!" 학운기는 그녀가 정말로 바보로 보였다. 왜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았는가? 왜 그러한 일로 그의 곁을 떠났는가? "흐흐흑……!" 철이 들고 나서는 처음으로 울어 보는 것이었다. 한참을 울던 그가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와하하… 죽인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이 악마들아! 도대체 이 여인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제는 생명까지 앗아 간단 말이냐? 와하하……!" 눈물이 흐르는 그의 눈에서는 광염의 시뻘건 살기가 무섭게 쏟아 져 나오고 있었다. "와하하……!" 광소를 터뜨리던 그의 입에서도 한 줄기 선혈이 흘러 나오기 시작 하였다. "앗! 주상!" 문 밖에서 경악의 외침이 들리며 새제갈이 뛰어들어오더니 급히 그의 혼혈을 짚어 버렸다. 털썩－! 학운기는 애옥지의 몸 위로 풀썩 쓰러져 버렸다. 새제갈이 그러한 그의 모습을 안쓰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휴,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방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학진숭 부부와 제갈소연을 비롯한 여인들, 그리고 우내사존 등이 었다. 온 부인은 침상으로 다가가서 아직도 학운기를 바라보고 있는 애 옥지의 눈을 살며시 감겨 주었다. 그녀의 눈에도 영롱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제갈휘가 학운기의 몸을 살펴보았다. 우내사존 등이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약간의 내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제갈휘는 우내사존 등에게 안심하라는 듯 말을 하고는 한 알의 환 약을 학운기의 입 속에다 넣어 주었다. '휴, 다행이군.' 새제갈이 내심 안도의 숨을 쉬면서 학운기의 혼혈을 풀어 주었다. 학운기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애옥지를 붙들고 눈 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리 없는 눈물이었다. 새제갈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상, 어서 운기행공을 하여 내상을 치료하십시오. 그대로 오래 놔 두면 큰일납니다. 주상의 몸은 주상 혼자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학진숭도 끼여들었다. "기아야, 사람이란 누구나 가야 할 길이 있지 않느냐? 저 애는 다 만 다른 사람보다 조금 빨리 간 것뿐이다. 저 애도 지금 저승에서 너의 이러한 행동을 보면 결코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님, 하지만 옥지는 너무나도 처절한 삶을……." 학진숭이 가만히 그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안다. 그러나 저 애가 목숨까지 바쳐 가면서 이 곳까지 온 이유 를 생각해 보아야지." "알겠습니다, 아버님." 학운기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극심한 상심으로 인해 생긴 내상 을 치료하였다. 제갈휘가 넣어 준 환약은 영약(靈藥)인지 금세 내상을 치료할 수 가 있었다. 제갈소연이 하얀 비단 천을 가지고 와서 애옥지의 몸을 덮어 주었 다. "옥지, 내 옥지를 이렇게 만든 자들을 씨도 없이 처치하고 다시 오겠소. 그런 다음에 옥지를 편안한 곳으로 데리고 가겠소." 그는 한참을 더 애옥지 곁에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가 대전으로 가자 모두들 숙연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자, 다시 계속 토의합시다." 그들은 애옥지가 알려 준 소식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다. 황보웅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주상, 그것은 혹 우리들을 혼란시키려는 적들의 농간이 아닐까 요?" "글쎄,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옥지는 매우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여인이라서, 쉽게 적의 농간 따위에는 빠지지 않았을 것이 오." 새제갈이 끼여들었다. "노복이 알기로는 무림오룡과 섬전신개 등도 진법에 있어 전혀 문 외한(門外漢)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전혀 몰 라볼 정도로 진법이 설치됐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팔괘천환 음양진(八卦千幻陰陽陣)이라는 전혀 눈치챌 수 없는 진법이 있기 는 하지만, 그 진을 설치하려면 최소한 오 년의 세월은 걸립니다. 한데 대결을 약속한 것은 한 달도 채 못 되는데, 그 진을 설치할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더구나 무림오룡 등으로부터 그 곳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연락이 온 지금에는 더욱 믿을 수 없는 일 입니다." "으음……!" 학운기는 그의 말에 골똘한 생각에 빠졌다. '옥지가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기적적으로 이 곳까지 온 것을 보면 분명히 적들의 농간은 아닐 것이다. 음, 그렇다면 우선 나부터 그 곳에 가 봐야겠구나.' 그는 우내사존 등에게 그러한 얘기를 하였다. 새제갈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상, 적들이 바로 그것을 노리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그것을 노렸다면 주상이 안 계신 이 곳도 매우 위험합니다. 다행히 이 곳 에는 수많은 기관이 설치되어 있어서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주상께서는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을 경우 즉시 돌아오셔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겠소. 만약 내가 이상을 발견하면 즉시 연락을 하겠소. 천 노 야는 내 연락을 받고 나서 행동을 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학운기는 그들과 결전에 대비한 몇 가지 일을 더 토의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진금룡과 제천대왕이 그의 곁으로 다가 왔다. "사부님, 제자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학운기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쾌히 응낙을 하였다. "좋다. 나와 함께 가도록 하자." "고맙습니다." 진금룡은 마치 뛸 듯이 기뻐하였다. 제천대왕도 그것을 보고는 학운기 앞에 넙죽 엎드렸다. "주인님, 이제 소인도 무공을 모두 익혔으니 주인님을 모실 수 있 도록 해 주십시오." "좋다. 너도 함께 가도록 하자." "고맙습니다, 주인님." 제천대왕은 그 큰 몸집으로 껑충껑충 뛰면서 좋아하였다. "하하……!" 그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던지 모두들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학운기는 황보룡과 근위욱도 따라가겠다는 것을 새제갈 등과 함께 오도록 하라고는 대전을 나섰다. 그는 어쩌면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인지라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 학진숭 부부도 이미 그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는지라, 다만 잘 싸우라는 말만을 하였다. 온 부인은 그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눈 안에 눈물이 글썽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학운기는 그러한 부모를 안심시켜 놓고는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제갈소연 등의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승혜빈도 건강을 많이 회복하고는 함께 있었다. 학운기가 그녀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연매와 설매, 그리고 림매와 빈매는 귀령봉으로 오지 마시오. 당 신들의 무공은 아직 적들과 상대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오. 그리 고 옥매와 선매는 천 노야 등과 함께 오도록 하시오." 제갈소연이 앞으로 나섰다. "오빠, 소매들도 가고 싶어요. 해서 혹시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 기면 소매들도……." "연매, 나는 자신 있으니 걱정 마시오. 그리고 연매 등이 있으면 오히려 나의 정신이 흐트러져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여 기서도 할 일이 많을 테니까 그 동안 부모님을 위로해 드리면서 있으시오." 학운기가 한참을 더 설득해서야 그녀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학운기는 그녀들에게 모두 가벼운 입맞춤을 해 주고는 애옥지의 시신이 있는 자신의 거처로 갔다. 그는 애옥지의 시신 앞에 숙연한 표정으로 섰다. '옥지, 나는 이제 옥지를 해친 자들을 멸하러 가오. 하니, 옥지는 아무 걱정 말고 편안히 눈을 감구려.' 그는 한참을 더 그렇게 서 있다가는 밖으로 나왔다. 진금룡과 제천대왕은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자, 가자." "예." 이윽고 그들은 성룡방의 지하 궁전을 빠져 나와서는 구령산으로 몸을 날렸다. ====================================================== 第 9 章 정사대전(正邪大戰) ====================================================== 학운기와 제천대왕, 그리고 진금룡이 구령산의 귀령봉에 도착했을 때는 이경 무렵이었다. 구령산 주위의 모든 객점들은 이미 구경하러 온 무림인들로 초만 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의 얼굴에도 모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섬전신개와 무림오룡 등이 학운기가 먼저 온다는 연락을 미리 받 았는지 은신해 있다가는 그를 보고 즉시 마중을 나왔다. 학운기가 섬전신개를 바라보았다. "무황성의 동태는 어떻소?" "가끔 십여 명으로 짝을 이룬 무리들이 나타나 주위를 둘러보곤 한 것밖에 없습니다." "알겠소. 그럼 계속 은신해 있으시오." "예." 학운기는 그들이 물러나자 귀령봉의 정상으로 올라가 지세(地勢) 를 세밀하게 살폈다. '음, 매우 커다란 봉우리구나.' 귀령봉은 멀리서 보면 꼭 귀신의 형상 같았다. 하지만 막상 봉 위로 올라와서 보면 반경 약 백 장 정도의 평지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봉우리 위에는 단지 두 자 안팎의 잡목들과 잡석들만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학운기는 그 곳을 천천히 거닐면서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거의 한 식경 동안을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발견하 지 못하였다. 그는 가장자리로 와서 숲이 우거진 봉우리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 았다. 그 곳도 경사가 완만하여 무황성도와 대결을 할 때는 거의 대부분 의 사람들이 그 곳에서 싸워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학운기와 독고풍이 대결을 벌인다면 최소한 반경 오십 장 이내는 최절정 고수들이라 할지라도 쉽게 접근할 수가 없기 때문 이었다. 학운기는 봉우리 아래의 나무들을 하나씩 살펴보다가는 흠칫 놀라 움을 금치 못하였다. '역시 진이 설치되어 있구나.' 그의 표정을 보고 진금룡이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사부님,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렇다. 이 봉우리 아래에는 팔괘천환음양진이 설치되어 있다." 진금룡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게는 아무 흔적도 보이지 않는데요?" "아마 그럴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켜 가면서 진금룡에게 하나씩 설명을 해 주었다. "저 진은 평소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천 여 명 정도의 사람이 저 속에서 적절한 배치를 한다면, 저것은 천 고제일의 무서운 사진(死陣)이 되는 것이다." 진금룡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자, 그럼 아래로 내려가서 살펴보도록 하자." "예." 학운기는 봉우리 아래로 내려가서 나무들을 하나씩 살펴보다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아,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심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이 곳에다 준비를 해 왔단 말인가? 음… 무서운 자들이군!' 그는 한참 골몰히 생각하다가는 진금룡을 바라보았다. "용아야, 즉시 섬전신개에게 가서 남창으로 팔괘천환음양진을 발 견했다는 연락을 취하라고 해라." "예." 학운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음, 이 진을 우리가 이용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 같고… 할 수 없이 파괴를 해야겠구나. 아주 흔적도 없이 파괴를 해서 적 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 좋겠군.' 그는 생각을 굳히고는 다시 봉우리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진금룡이 소식을 전하고는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전했느냐?" "예." "그럼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다. 매우 중대한 일이니 조금치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래로 내려가서 내가 지적하는 나무에 표시를 하여라. 나무 사이로 몸을 날릴 때는 봉 아래서 너의 몸이 보이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진금룡은 대답을 마치고는 봉우리 아래로 내려갔다. 이 때, 제천대왕이 학운기의 곁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소인은 할 일이 없습니까?" "음, 너는 앉아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여라." 제천대왕은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자 매우 못마땅한 듯하 였으나, 그의 말에 군소리 없이 한쪽으로 가서 바닥에 털퍼덕 주 저앉았다. 학운기는 봉우리 가장자리로 가서는 팔괘천환음양진을 세밀히 살 펴보면서 전음으로 진금룡에게 하나씩 지적해 주었다. 학운기와 진금룡이 그 일을 모두 마쳤을 때는 삼경이 넘어섰을 때 였다. 진금룡이 표식을 마치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수고했다." 학운기는 그에게 한 마디 하고는 봉우리 아래로 내려갔다. "음, 이것이군." 진금룡은 매우 알아보기 쉽게 표식을 해 놓았다. 그 나무는 언뜻 보아도 한아름은 되어 보였다. "음……!" 학운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나무를 바라보다가는 돌연 그 나무 를 향하여 일 장을 날렸다. 순간 그 나무는 아무 소리도 없이 한 줌의 가루로 변하고 말았다. 놀라운 신공(神功)이었다. 하지만 옆의 나무들에는 하등의 흔적도 없었다. 학운기는 나무 밑둥치 부분을 조심스럽게 흙으로 덮고는 그 위에 다 썩은 낙엽을 덮어 버렸다. 감쪽같았다. 학운기는 그런 식으로 다른 나무들도 없애 갔다. 진금룡과 제천대왕은 학운기가 오랫동안 올라오지 않자 궁금함을 느꼈는지 내려와서는 그러한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천대왕이 학운기를 바라보았다. "주인님, 그러한 일은 소인에게 맡겨 두시지 않고 어찌 손수 하시 는 것입니까?" "하하… 너는 아직 이러한 장법을 펼칠 수가 없지 않느냐?" "하지만 소인은 뽑을 자신이 있습니다." "흔적을 남기면 안 되는데도?" 제천대왕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학운기가 그러한 제천대왕과 진금룡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정 나를 돕고 싶다면, 내가 나무를 없애면 밑둥치 부분 을 흔적 없이 덮도록 하여라." 제천대왕의 입이 기쁨으로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니,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알 겠느냐?" "예." 학운기는 장법으로 나무를 없애고 제천대왕과 진금룡은 그 밑둥치 부분을 흔적 없이 덮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없앤 나무는 약 오백여 그루였다. 학운기는 모든 것을 마치고 다시 봉우리 위로 올라가서는 아래를 살펴보았다. 감쪽같았다. 진의 대가가 아니라면 나무가 없어진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을 정 도였다. '후후… 자신들이 파 놓은 함정을 믿다가 당하는 맛도 괜찮을 것 이다.' 학운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제천대왕, 그리고 진금룡과 함 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늘에서는 거의 만월이 다 된 달이 교교한 빛을 뿌려 주고 있었 다. × × × 구령산 귀령봉의 정사간(正邪間) 대결투. 지금 무림인들은 무림 사상 유례 없었던 결투를 보기 위하여 귀령 봉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림의 이삼류 인물들이었지만 이번의 결투가 자신들 의 앞날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얼굴에도 모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 사이에는 정과 사의 인물들이 서로 뒤섞여 있었지만, 전혀 분쟁은 없었다. 심지어는 평소에 원수를 진 일이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도 이 때는 아무 말 없이 노려보기만 할 뿐, 싸움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 시점에서 자신들의 싸움은 너무나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결전 일. 이 날은 아침부터 귀령봉 주위가 들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봉 위로 오르려는 사람은 없었다. 황혼 무렵에 동쪽으로부터 수천 명의 인영들이 나타나더니 귀령봉 위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서쪽으로부터도 수천 명의 인영들이 나타나더니 귀령 봉 위로 올라갔다. 바로 정파의 군웅들과 사파의 무리들이었다. 귀령봉 정상에는 각각 백여 명의 최절정 고수들만이 올라오고 봉 우리 아래에 나머지 인물이 대치하고 있었다. 정파의 군웅들 중에는 학운기와 제천대왕, 그리고 진금룡의 모습 이 보이지 않았다. 마심뇌사가 정파군웅들 앞으로 몇 걸음 나섰다. "천형! 절대신룡이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된 일이오?" 사실 이 때 우내사존 등도 학운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내심 걱 정하던 터였다. 새제갈이 웃음을 띄우며 몇 걸음 나섰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시오. 주상께서는 제 시간에 오실 것이오. 헌데 어느 분이 주존이라는 분인지 본인 등에게도 소개 좀 시켜 주시겠소?" 이 때 매우 우렁찬, 그러나 마음을 섬뜩하게 하는 웃음소리가 들 리면서 독고풍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하… 본인이오. 그 동안 우리 가 전주의 애를 먹이던 인물이 누구인가 했더니 바로 당신이였구려? 하지만 이제 당신의 그 머리 도 흙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온 것 같소. 본좌는 절대신룡이 없더라도 공격을 할 수밖에 없소." 그의 말에는 섬칫한 분위기와 은근한 위협이 포함되어 있었다. 새제갈 등은 내심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약속한 결투의 시간은 이경이었다. 이제 이경은 차 한 잔 마실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우우……!" 멀리서 용소(龍嘯)가 들려 왔다. 독고풍의 얼굴이 약간 변하는 듯하였고 우내사존 등은 안도의 숨 을 내쉬었다. 멀리서 네 줄기의 인영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날아오는 것이 보 였다. 그 인영들은 곧 귀령봉 위에 도착했다. "할아버지!" 봉운옥이 그 중에서 한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천괴 호강민이었다. 학운기는 그 동안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자, 호강민한테 다녀오는 길이었다. 호강민도 자신이 죽을 날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마지막으로 무림을 위해서 한 가지 좋은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학 운기를 따라온 것이었다. 호강민과 봉운옥은 뜨거운 해후를 하고 있었다. 학운기가 그러한 그를 바라보고는 우내사존 등에게로 다가갔다. "호 노선배님을 모시고 오느라고 약간 늦어진 것 같소." "아닙니다. 제때에 잘 오셨습니다." 학운기는 전음으로 우내사존 등에게 자신이 팔괘천환음양진을 파 괴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니 천 노야는 다른 군웅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 주시오." "알겠습니다." 새제갈은 즉시 전음으로 옆사람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 그러한 것은 계속 이어져 모든 정의파 군웅들에게 알려졌다. 그것에 힘입었는지 정파군웅들의 사기가 갑자기 높아졌다. 학운기가 사파무리들에게로 몇 걸음 다가섰다. 독고풍도 몇 걸음 걸어 나왔다. "자, 이제 이경이 다 된 것 같은데 시작합시다." 누군가의 입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쳐라!" "와아……!" 쾅－ 콰르릉－! 창－ 차창－! 순식간에 봉우리 아래에서 대치하고 있던 정파의 군웅들과 사파의 무리들간에 치열한 혈투(血鬪)가 벌어졌다. 봉우리 위에 있던 최절정 고수들도 저마다 짝을 찾아서 대결을 벌 이기 시작했다. 천괴 호강민은 자신의 최대 적수인 흑살시마 궁유명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치열한 결투를 하고 있었고, 새제갈은 마심뇌사와 그리고 혜불선승은 공여옥과 대결을 하고 있었다. 새제갈과 마심뇌사는 무림에서 무공을 펼친 적이 매우 드물었다. 해서 무림인들은 그들의 무학 실력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막상 대결을 시작하자 그것은 바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대접전이었다. 쾅－ 콰르릉－! 그들의 장풍이 부딪치는 곳에는 커다란 구덩이들이 생겨나고 있었 다. 혜불선승은 역시 무림 최고의 고승다웠다. 그 누가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이 울렁거릴 무림선요 공여옥과 대 결을 함에 있어서도 전혀 동요의 빛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쾅－ 콰르릉－! "으아악……!" 창－ 창－ 창－ 창－! "크아악!" "컥!" 이미 봉우리 아래에서는 처절한 단말마들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부분 무황성도들의 것이었다. 무황성들은 팔괘천환음양진을 이용하여 싸우려다가 오히려 맥없이 무너져 갔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었다. 다만 최혼섭혼술을 익힌 여인들만이 정파군웅들 틈에서 가끔 날뛰 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섭혼술도 정파군웅들이 워낙 분노하여 있던 터 라,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령봉 위와 아래 두 곳은 순식간에 흙먼지와 돌, 그리고 풀과 나 무들이 날려서 암흑 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쿠앙－ 콰르르릉－! "아아악……!" "아악!" "으윽!" 창－ 창－ 차앙－! "크아아악……!" 갖가지 다른 단말마들이 계속 들려 왔다. 그토록 치열한 혈투 중에서도 특히 태양심맥과 태음심맥을 지닌 기재들의 싸움은 더욱 치열하였다. 황보룡은 청강쇄맥장(靑 碎脈掌)을 사용하는 방양구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결하고 있었고, 제천대왕은 마영혈인공(魔影血印 功)을 사용하는 한 명의 거한과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봉운옥과 봉란선 자매는 키가 채 네 자도 못 되는 쌍둥이 난쟁이와 싸우고 있었다. 난쟁이들의 무공은 결코 봉운옥과 봉란선 자매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근위욱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지금 흑살시마의 강시들이 나타날 때를 대비하여 몸을 숨기 고 있는 중이었다. 쾅－ 콰르릉－ 퍼엉－! "크허억……!" 갖가지의 처절한 단말마들.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피를 흘려야만 하는가?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가는 길이 너무나도 다랐기 때문에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싸움!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고 도 또한 가장 힘든 방법이었다. 평생을 핏속에서 살아야 하는 무림인들이였에 그들은 지금 이런 방법을 택하고 있는 중이었다. "으아악……!" "어머니!" 죽어 가는 자들 중에는 어머니를 부르는 자, 자식과 아내의 이름 을 부르는 자도 있었다. 봉우리 위와 아래, 그 처절한 혈투 속에서도 가장 커다란 활약을 하고 있는 자는 진금룡이었다. 그는 봉우리 위에서 자신의 적수를 찾지 않고 아래에서 싸우고 있 었다. 한편 학운기와 독고풍은 그 때까지도 대치만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무아의 경지에 접어든 듯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처절한 혈투에도 일말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단 한순간의 실수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수천의 수하 들 목숨까지 빼앗는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주위 오십 장 반경에는 가히 먼지 한 톨 날아들지 않았다. 옆에서 싸우는 사람들도 감히 그쪽으로는 다가서려고 하지도 않았 다. 쾅－ 콰르릉－! "으악!" "허억!" 챙－ 챙－ 창－ 창－ 창－! "크흑!" "으윽!" 폭음과 굉음, 그리고 갖가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단말마들도 끊임없이 들려 오고 있었다. 학운기의 손에는 어느 새 묵룡검이 들려 있었다. 독고풍의 손에도 판관필(判官筆)처럼 생긴 이상스런 병기가 들려 있었다. 처음 삼십여 장쯤 떨어졌던 그들의 거리가 이제는 십여 장쯤으로 좁혀져 있었다. 그들은 지금 서로가 모험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 같은 초절정 고수들이 십 장 안에서 싸운다면 이긴 사람도 별 소득이 없었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싸울수록 승부는 빨리 난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상대방을 처치하면 그만큼 자신들 편의 사 람들의 희생이 적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학운기는 귀에 익은 비명 소리를 들었다. 봉선란의 목소리 같았다. 학운기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으나 눈에는 약간 동요하는 빛이 보였다. 그 순간을 놓칠 독고풍이 아니었다. "마황제천(魔皇制天)－!" 위맹한 폭갈과 함께 그의 병기가 붉고 검은, 그리고 푸른 기류(氣 流)를 동반한 채 학운기에게로 덮쳐 왔다. 순간적으로 학운기는 그 마공 속에 극악한 독이 스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쇄마멸사(碎魔滅邪)－!" 학운기의 입에서도 폭갈이 터짐과 동시에 새로 창안한 천고(千古) 의 신공이 펼쳐졌다. 피리릭－! 학운기의 묵룡검도 구색(九色)의 현란한 빛을 동반한 채 독고풍에 게 쏘아져 갔다. 다른 사람이 그들의 대결을 보았다면 그들이 동시에 신공을 펼쳤 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학운기가 현격하게 늦게 펼쳤다. 그것은 그들 같은 초절정 고수에게는 너무나도 커다란 불리함이었 다. 서로 쏘아 가던 두 줄기의 각기 다른 기류와 빛은 학운기 쪽에서 더욱 가까운 곳에서 부딪쳤다. 휘리릭－! 푸우우웅－! 제대로 형용하기조차도 어려운 이상스런 음향이 들려 왔다. "윽!" 묵직한 신음과 함께 학운기가 두 걸음 물러섰다. 독고풍도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의 입가로 득의의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들의 병기는 이미 가루가 되어 버렸는지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 았다. 독고풍이 쌍장을 가슴에 댄 채 서서히 학운기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단 일 장에 학운기를 박살내 버릴 기세였다. 학운기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이 때 봉우리 위에서 싸우던 사람들은 모두 싸움을 멈추고 그러한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황성도들의 얼굴에는 득의의 미소가, 정파군웅들의 얼굴에는 불 안과 초조가 깃든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봉운옥은 금시라도 독고풍에게 달려들 기세였으나, 호강민에게 제 지당해 있었다. 독고풍과 학운기의 간격이 점점 좁혀졌다. 팔 장, 칠 장, 육 장, 오 장……. 학운기의 입에서 폭갈이 터져 나왔다. "천신재현(天神再現)－!" 동시에 독고풍의 입에서도 폭갈이 터져 나왔다. "마황독존(魔皇獨尊)－!" 순간 두 사람의 장심(掌心)에서 형용키 어려운 빛과 기류가 쏟아 져 나왔다. 그러나 빛과 기류(氣流)가 부딪쳤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 았다. "욱!" 학운기가 묵직한 신음을 토하면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는 한 사발이나 되는 검붉은 선혈이 꾸역꾸역 넘어오 고 있었다. "주상!" "오빠!" 수 마디의 경악에 찬 외침이 들렸다. 바로 그 순간. 털썩－! 묵직한 소리와 함께 독고풍이 썩은 고목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커다란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고, 넘어짐과 동시에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그러나 피는 나오지 않았다. "주존님!" 몇 마디 경악의 외침과 함께 우내사마 등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 다. "와아… 주상 만세!" 정파군웅들은 우렁찬 함성과 함께 일제히 무황성도들에게 덮쳐 갔 다. 제갈휘가 학운기 곁에 다가와서 그의 상세를 살펴보았다. "괜찮소. 어서 다른 사람이나 돌보도록 하시오." 학운기는 그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 때 학운기는 어떤 허탈감마저도 느끼고 있었다. 현 강호무림에 오직 한 명뿐이던 적수인 독고풍의 죽음은 학운기 그 자신이 한 일이었지만 외로움을 느끼게 하였다. "와아……!" 쾅－ 콰르르릉－! "크으윽……!" "으으악……!" 챙－ 챙－ 창－ 창－ 창－! "허억!" "크억!" "흑!"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처절한 단말마는 계속 들려 왔다.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정파군웅들과 떨어질 대로 떨어진 무황성 도들간의 싸움은 불을 보는 듯이 뻔하였다. 무황성의 제이인자인 흑살시마도 독고풍의 죽음과 자신의 강시들 이 근위욱의 옥적에 꼼짝을 못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손발이 흐트러지다가는 끝내 호강민의 백여 년 간 갈아온 일 장에 머리가 수박처럼 빠개져 버렸다. 호강민도 그를 처치하고 나서는 어떤 허탈감을 느꼈는지 멍하니 서 있었다. 무림선요 공여옥도 혜불선승의 지력에 마혈(魔血)이 찍혀서 석상 처럼 굳어져 있다가 옆에서 싸우던 만독제군 필적혈의 독장에 핏 물이 되어 버렸다. 그 만독제군도 열화신군 승검평의 장력(掌力)에 새까만 숯이 되어 버렸다. 사실 만독제군은 용독(用毒)에는 별호처럼 제군이었지만, 무공 면 에서는 그리 강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독의 상극인 극양(極陽)의 무공을 사용하는 승검평에게 걸 린 그는 독도 제대로 사용해 보지 못하고 죽어 버린 것이다. 마심뇌사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독고풍의 죽음에 제일 커다란 충격을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독고풍의 죽음을 보고는 손발이 어지러워질 대로 어지러워 졌다가 새제갈의 일 장에 한 많은 세상을 마쳤다. 표주박만한 머리와 세 치 혓바닥만으로 무림을 휘어잡으려던 그도 마침내는 영원히 무림을 떠나고 만 것이다. 학운기가 독고풍을 처치한 지 한 식경 정도가 지나자, 봉우리 위 의 무황성도들은 거의 다 죽어 갔다. 제갈휘는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부상당한 군웅들을 치료해 주고 있 었다. 학운기가 독고풍과 대결할 때 비명을 토해 냈던 봉란선은 비록 중 상은 입었지만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두 명의 난쟁이 쌍둥이는 봉운옥의 손에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봉우리 위에서는 오직 황보룡과 방양구만이 아직까지 싸우고 있었 다. 다른 사람이 황보룡을 도우려고 했으나 황보웅이 제지하는 바람에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자식을 강하게 키우려는 아버지의 배려였다. 방양구는 다른 사람은 모두 죽고 오직 자기 혼자만이 살아 있는 것을 깨닫고는 죽자사자 하며 더욱 극랄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와신상담하면서 무공을 익혀 온 황보룡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가 우세를 점하였다. 그것은 황보웅이 그가 어렸을 때부터 무공의 기초인 내공을 탄탄 하게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쾅－ 콰르릉－! "아악!" 마침내 방양구도 피화살을 토하면서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봉우리 아래에서 싸우던 무황성도들도 이미 사태를 깨닫고는 무기 를 버리고 항복해 왔다. 정파의 군웅들은 그러한 그들의 공력을 모두 폐지시키고 다시는 무공을 익히지 못하도록 중요한 혈도를 끊어 버린 다음, 자신들의 갈 길로 보내 주었다. "와아… 정파무림 만세!" "무림대종사 절대신룡 만세!" 드디어 귀령봉이 떠나갈 듯한 정파군웅들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들은 모두 길고 오랜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들처럼 기쁜 표정이 었다. 무림 사상 유례가 없는 대결투였고, 또한 무림 사상 유례가 없는 정파의 대승리였다. 정파군웅들은 단지 오백여 명이 사망하고, 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 을 뿐이었다. 그것은 거의 삼천오백 명이 죽고 천오백 명이 무공을 폐지당한 채 어디론가 떠나간 무황성도, 즉 사파 무리에 비하면 엄청난 대승리 였다. 사실 학운기도 정파가 이토록 일방적인 승리를 거둘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한데 막상 승리를 얻고 보니 왠지 허전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봉우리의 가장자리로 가서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아,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왜 이토록 처절한 싸움을 해야 만 했지?'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의 시선은 처절하게 죽어 나자빠진 수천의 시신들을 외면하고 서서히 밝아 오는 동녘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정파군웅들의 함성은 계속 들려 왔다. 하지만 학운기는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우내사존 등이 그러한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지 가만히 그의 뒤에 서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동녘 하늘만을 응시하던 학운기가 갑자기 몸을 날 렸다. 빛살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우내사존 등이 그의 뒤를 따르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학운기의 천리전음이 들려 왔다. "그 동안 모두들 수고하셨소. 그리고 그 동안 본인과 주종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지금부터 모든 것이 파기되었으니, 나름대로의 길 을 가시오. 본인은 이제 영원히 강호무림을 은퇴하겠소." "사부님!" "주인님!" 크고 작은 두 인영이 학운기를 부르면서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 을 날리고 있었다. 제천대왕과 진금룡이었다. 봉운옥도 그의 뒤를 쫓아가고 싶었으나 봉란선이 부상당해 있고, 또 호강민이 어디로 갈지를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고 정오 무렵이 되자, 남아 있던 군웅들도 모두 귀령 봉을 떠나갔다. 정파군웅들의 시체는 모두 친지나 동료에 의해서 고향으로 옮겨졌 으나, 무황성도들의 시체는 커다란 구덩이를 수십 개 파서 합장을 하였다. 조종하는 사람을 잃고 석상처럼 굳어져 있던 강시들도 이번엔 진 짜 시체가 되어 땅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놀라서 떠나갔던 새들이 다시 돌아와서 우짖을 무렵. 한 명의 가냘픈 인영이 힘겹게 귀령봉을 오르고 있었다. 옥혜령이었다. 그녀는 무공을 상실하고는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 있었다. 귀령봉에 올라온 그녀는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학운기가 특별히 손수 묻어 주고 비까지 세워 주었던 독고풍의 무 덤이었다. 그녀는 무덤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풍랑, 어찌 소첩을 남겨 두고 혼자 가셨나요? 풍랑……." 그녀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개미 기어가는 소리보다 작게 계속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뒤에서 한 젊은 여승이 나직하게 염불을 외 우고 있었다. 서문정이었다. 두 명의 여인은 언제까지고 일어설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옆으로 쓰러졌다. 후일 무림 사상 최대의 격전지를 구경하러 왔던 사람들이 그들 두 여인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독고풍의 양 옆에다 묻어 주었다. 귀령봉의 대결투가 있고 한 달이 흘렀다. 무당, 화산, 공동의 개문(開門)을 선두로 멸망했던 소림을 비롯한 아미, 공래, 청성파도 살아남은 문인(門人)들로 문파의 재건(再 建)에 힘썼다. 무림은 평화를 되찾은 가운데 차츰 활기를 띄워 갔다. 무림인들 뇌리에는 아직도 절대신룡 학운기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 아 있었다. 하지만 학운기의 모습은 귀령봉 대혈전 이후 본 사람이 아무도 없 었다. 그래서 그런지 무림인들의 마음 속에는 점점 그가 불가사의한 인 물로 굳어져 갔다. 무림의 대종사로, 천고제일의 기인으로……. 귀령봉의 혈투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손자손녀를 앉혀 놓고 얘기하리라! 그분은 위대했었다고, 그분은 성웅(聖雄)이었다고. 몇 년이 흘렀다. 무산(巫山)의 이름 모를 깊은 계곡에는 언제부터인가 아담한 장원 이 하나 들어섰다. 그 장원은 바로 무림에서 은퇴한 학운기와 그의 꽃 같은 여섯 명 의 부인들이 아들딸들의 재롱을 받으면서 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 는 곳이었다. 그 곳에는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 大 尾 >